# 1 [1화] #시작, 등록번호 B612 어두웠다. 새까만 무중력 속에서 소년은 웅크린 자세로 부유했다. 가상현실이기에 가능한 광경. 이곳에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1천 4백 40번의 일몰을 볼 수도 있었다.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 어둠 속의 유일한 빛이 반짝였다. 네모난 화면이다. 그 안에서, 이제부터 소년이 연기해야 할 사람들이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토니 모리슨, 오가타 사다코, 린든 존슨, 마틴 루터 킹, 존 케네디, 윈스턴 처칠, 아돌프 히틀러....... 이미 긴 시간 외워지도록 보았다. 마음에 눈 내린 소년은 그들의 말과 억양과 몸짓을 쉽게 흉내 낼 수 있었다. 배우가 되려면 연기를 배워야 한다. 연기에 몰입하여 능숙해지는 나날이 소년에겐 우울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별을 얻기 위해 불가피한 노력이었다. 별이 있어야 장미가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장미는 가시가 있지만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의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 거짓 세상에서 만큼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고 싶었는데, 바깥세상은 언제나 나를 내가 아닌 나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다시 한 번, 소년은 자신을 길들이기로 했다. 때때로 진실 된 마음과 타협한다면, 그래서 가끔은 즐겁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준비는 충분하다. 시작하자. 이것은, 스물일곱 번째 게임의 재미없는 이야기. #저널, 2페이지, 캠프 로버츠 중국 동부에서 시작된 범유행전염병 「모겔론스」는 불과 보름 만에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두 달 후에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아직 감염이 확산되지 않은 섬나라들이 미주(美洲)에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이쪽도 그럴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이었다. 시제가 과거형인 것은 돌아갈 나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이상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정부에 다른 기대를 걸기란 어려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험지에 틀어박혀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모겔론스」 사태가 심화되면서 호스트 패밀리의 집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은 주방위군의 통제에 따라 난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캠프 로버츠(Camp Roberts). 로스앤젤레스에서 101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자리에 자리 잡은 이 주방위군 기지가 미국이 정한 첫 번째 난민수용소였다.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도착해보니 미국이 왜 이곳에 난민들을 몰아넣었는 지 알 수 있었다. 우선 길이 하나뿐이다. 가까운 곳에 마을 하나가 있긴 하지만, 국도가 아니고서는 들어가거나 나갈 길이 없는 위치였으므로 혹여 난민들이 소요를 일으킬 경우 통제하기 용이해 보였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160 보병연대 「Seventh California」 3대대가 난민촌 감시 및 치안유지 임무를 맡았다. 둘째로 식수와 전기를 자체 수급할 수 있었다. 독립적인 급수시설과 태양광 발전시설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급수시설 같은 경우 동편에 흐르는 살리나스 강을 수원으로 삼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물이 달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셋째로 공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송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뜨고 내렸다. 군필자들이 C-130이라고 수군거렸다. 이름을 알아도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건 국가적 방역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서 날아올 항공기들을 일반 공항으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많았다. 본래 군인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주택부지들은, 평소 기지에 주둔하는 병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대부분이 황량한 공터로 방치되어 있던 상태였다. 혹시나 공간이 모자라더라도, 기지 서쪽과 북쪽이 마냥 황무지뿐이었기에 추후 난민촌을 확장할 여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수용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난민캠프는 사실상의 도시가 되었다. 수용한계를 넘어간 뒤엔 나머지 인원을 포트 헌터 리겟(Fort Hunter Liggett)에 분산 수용한다고 들었다. 위치는 여기서 직선으로 서북방 50킬로미터 정도. 사람들에게 듣기로 그쪽엔 정말 사방에 산 밖에 없다는 모양이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새로운 캠프들을 세운다고 들었다. 하늘과 바다를 통해 도착하는 난민이 나날이 늘기만 한다는 소식이었다. 이곳 캠프 로버츠에서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뜻이 통하는 난민들끼리 조직을 만들더니, 사람들에게서 물자를 갈취하기 시작했다. 보급품을 빼앗기 위해 린치를 가하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한다. 이름도 흉흉한 것이 많았다. 중국인들의 「허이셔후이(黑社會, 흑사회)」나 일본인들의 「스미요시카이(住吉会, 주길회)」 같은 것들은 본래 폭력조직의 명칭이라 했다. 핵심인물들이 실제로 그 조직 출신이라고 한다. 미군은 이런 조직들의 성립을 방관하기로 한 것 같았다. 이해는 간다. 한정된 병력으로 이 많은 난민들을 관리해야 하는 만큼 그쪽도 신경이 곤두서있을 것이었다. 미군이 난민들을 직접 관리하는 것 보다는, 그 사이에 중간관리자가 하나 끼는 편이 나을 터. 폭력조직들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미군은 수용소를 보다 간편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조선 말 지주가 마름을 부린 것과 같은 이치라고 봐도 좋겠다. 소작인들의 원망은 지주보다는 마름을 향하게 마련. 조직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어차피 조국 잃은 사람들이다. 난민 관리에 소홀하더라도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은 없었다. 인류멸망의 기로에 선 시점에서, 인권문제로 정부를 귀찮게 할 시민단체도 없었다. 각 조직들이 미군 대대장에게 성상납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어제 「한인애국회」 회원들이 어떤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울부짖으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순찰을 돌던 미군 병사가 발견하더니 제지하려고 했으나, 여자를 납치하던 무리 중 하나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듣더니 그 뒤로는 눈살만 찌푸릴 뿐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끌려가는 여자와 눈을 마주쳤더니 꿈속에 나왔다. 잠을 설쳐서 피곤하다. 요즘 들어 마음 편하게 잠들 때가 별로 없다. 캠프 로버츠 6번가부터 15번가까지는 주둔 병력이 사용하는 막사가 있다. 병력 규모에 비해 남는 공간이 많은데도 난민들은 그쪽으로 출입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혹시나 그쪽에서 난민이 눈에 띄면 절도미수 혐의로 처벌 받았다. 처벌의 경중은 국적에 따라 달랐다. 나라 잃은 설움이라고 해야 할까, 정부가 사라지거나 그에 준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취급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인종에 따른 차별도 있었다. 인류존망의 위기는 사람들에게서 도덕과 양심과 동정심을 앗아갔다. CNN 보도에 의하면 「모겔론스 아웃브레이크」 이후 지금까지 세계 인구의 60% 이상이 변이되었을 거라고 한다. 인류멸종의 위기에서 도덕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캠프 로버츠에서는 그것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슬픈 일이다. #저널, 5페이지, 캠프 로버츠 어려울 때 만들어지는 조직은 대개 민족주의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정당한 명분을 붙여 울분을 풀고, 물자를 약탈하고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여기 수용된 난민 대다수가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출신이다 보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조건들이 상승효과를 불러온 결과, 일본계 조직에 대한 대규모 항쟁이 벌어졌다. 폭력조직간의 싸움이니 항쟁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죽거나 죽는 것만 못한 신세가 되었다. 일본계 최대의 조직 「스미요시카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애초에 규모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군은 역시 상황을 묵인했다. 관리대상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눈살 찌푸리는 병사와 장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외면하기만 했다. 명령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캠프 내부에도 철책이 세워졌다. 너무 잦아지는 항쟁을 막으려는 의도였을까? 구역이 잘게 쪼개어졌다. 한 구역에, 국적 별로 200명 정도가 들어갔다. 이 거친 항쟁의 와중에 나는 그래도 안전한 편이었다. 영어에 능통하다는 점 때문에 미군과 한인 난민들의 가교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수용된 난민 중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국적을 소유했기 때문에 애초에 수용대상으로 분류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현재 캠프에 수용된 난민은 대부분 여행을 왔다가 발이 묶였거나, 나라가 망해갈 때 공중과 해상으로 탈출을 도모했거나 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처럼 영어회화가 자유로운 사람들은 중간관리자 정도의 위치를 권유받았다. 무엇보다 영어를 할 수 있으면 미군도 그나마 사람취급을 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저 짐승이었다. 이해한다. 그들도 위태로운 입장이니까. 「AI 도움말 (통찰 4등급) : 당신은 관리자 역할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경우 미군의 호의를 얻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평판에 상승보정이 적용됩니다. 거절할 경우 가시적인 이득은 없습니다. 단, 당신의 현재 능력으로 유추 불가능한 불이익이나 이익이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다 자세한 조언을 원할 경우 통찰 기술의 등급을 올려주셔야 합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 제안을 수락한다.」 아직 나이 스물도 되지 않은 내가 관리자라니.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미군 장교가 피식 웃었다. 미국은 원래 영어사용자를 우대한다나. 1980년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소련을 몰아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당시 CIA에 아랍어 구사 능력자가 없어서 돈이 있어도 줄 사람을 찾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어 성향이 꼴통인걸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돈을 주었더니, 나중에 탈레반을 만들어 미국을 엿 먹였다는 것이다. 장교는 이 이야기를 낄낄거리면서 해주고는, 너에겐 선택권이 없다면서 강제로 일을 떠맡겼다. 보나마나 앞서 말한 마름의 예처럼 미군에게 향할 원망을 중간에 대신 받아야 할 위치가 될 것 같아서 더 꺼려졌지만, 장교의 말처럼 그것은 내 결정과 무관한 문제였다. 내가 맡은 관리구역은 101번 도로를 끼고 기지 맞은편에 위치한 태양광 발전시설이었다. 집열판을 주기적으로 닦아내야 할 필요도 있었고, 수용인원이 늘어난 만큼 새로운 집열판과 변압기를 설치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동원되었다. 작업 중 그들에게 지급되는 식량 따위도 내가 분배했다. 나보다 나이를 배는 먹었을 어른들이 비굴하게 웃으며 내 비위를 맞추려고 들었다. 웃는 얼굴 뒤에 욕망이 더러웠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속이려는 어른이 많았다. 솔직히 소름끼친다고 생각했다. 여러 조직에서 나를 영입하려고 들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조직이건 들어가야 합당할 것이었다. 영어 능력자는 점점 더 늘어날 테니까, 내 입지는 언제라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AI 도움말 (통찰 4등급) : 현 시점에서 가입할 조직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직에 가입할 경우 해당 조직은 당신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것입니다. 단, 특정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다른 조직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 어느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한인애국회」에서 자기네 조직에 가입하면 일본인 여자 노예를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혹이라고 한 것이겠지만, 솔직히 구토가 치밀었다. 싫다고 했더니 간을 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조직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냐는 둥, 단순히 조건만 볼 게 아니라 조직의 규모와 장래를 생각해야한다는 둥 더러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중엔 혹시 남자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죽어도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이제 곧 나도 어른이 되어야 할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예감이....... #저널, 11페이지, 캠프 로버츠 샌프란시스코에서 「모겔론스」가 대규모로 발병했다는 소식이 새롭게 전해졌다. 외부와 격리된 난민 캠프의 특성상, 샌프란시스코 사태는 이미 며칠 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시아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음을 감안하면, 지금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와 인접한 오클랜드, 버틀리, 새너제이 등을 포괄하는 대도시권)는 생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오늘 새벽부터 캠프에 속속들이 수송차량들이 도착했다. 인종은 다양했지만 백인과 흑인이 다수였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대부분이 영어로 떠들어댔다. 필시 도시를 탈출한 생존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비를 맡은 미군의 긴장감도 팽팽했다.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는데, 당장 샌프란시스코의 생존자 중 감염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백신은커녕 아직 병의 원인도 밝혀내지 못한 까닭에, 한 번 감염되면 변종이 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 변종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적이라는 것. 이런 정황을 눈치 챈 난민들은 새로 들어온 미국인으로부터 떨어트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본래 난민들이 쓰던 자리를 미국 시민들에게 내어주고, 난민들은 기지 서편 급수탑 너머로 새롭게 확장된 텐트촌에 자리 잡았다. 이전보다 더 열악해진 주거환경에 당연히 불만이 새어나왔지만, 누군가 강하게 항의했다가 사살당한 뒤엔 적어도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저녁 배급 직후, 사람들 일부가 탈출을 모의하는 소리를 들었다. 「AI 도움말 (통찰 4등급) : 당신은 탈출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기지를 빠져나가거나, 캠프 사령부에 이를 신고하거나, 또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관할 수 있습니다. 기지를 탈출할 경우 튜토리얼이 종료되며, 캠프 사령부에 신고할 경우 미군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나 일부 난민들과의 관계에 하향보정이 발생하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관할 경우 의지력에 약간의 하향보정이 발생합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한 순간 그들과 함께 탈출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캠프를 벗어나서 안전한 중부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국에 도망자가 되어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관건이었다. 발견되면 즉시 사살당할 지도 모른다. 신고를 하는 건 어떨까. 역시 내키지 않았다. 나 때문에 탈출에 실패한 사람들이 원한을 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릴 가능성마저 있었다. 미군이 나름의 조치를 취하긴 할 텐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요즘은 여유가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의지력 하향보정 발생 / 상세수치 불명」 밤늦은 시각에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귀를 막고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결국 다시 잠들지 못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어 밖으로 나와 보니, 철조망에 찢겨진 살점이나 옷가지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걸려있었다. 철조망 너머의 불모지대에도 죽음이 널려있었다. 새들이 날아와 시체를 파먹었다. 얼마나 죽고 얼마나 탈출에 성공했을까. 아침 식사를 걸렀다. 식욕이 없었다. #저널, 16페이지, 캠프 로버츠 감염이 확산되었다. 규모 미상의 감염변종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봉쇄선을 빠져나갔다는 보도가 있었다. 고작 나흘 뒤, 새크라멘토가 불타올랐다. 연방군과 주방위군이 대거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이된 시민들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도시 인구의 7할 가량이 변이되었다고 한다. 숫자로 따지면 30만이 넘는다. 비록 그것들에게 인간 시절의 지능이 없어 체계적인 집단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체능력은 인간을 능가했고, 수의 폭력은 압도적이었다. 교외에 있던 몇 개의 난민캠프가 함께 휘말렸다. 고작 몇 개라도 인수로는 만 단위다. 미군은 최대한의 구출작전을 시행한 뒤, 시가지 동쪽에 여러 발의 핵폭탄을 떨어트렸다. 미봉책이다. 「모겔론스」로 가장 먼저 붕괴한 국가인 중국은 핵보유국이었다. 군대를 동원하고도 감염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은 감염지역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했다. 국민을 버렸다는 비난에도 개의치 않았다. 감염변종들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상의 일당독재 국가이기에 가능한 긴급조치였다. 핵을 쓴 직후에는 감염변종의 개체수가 급감하여, 군대가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감염이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모겔론스」의 병원체에 오염된 물질이 핵폭발의 상승기류에 휩쓸려 올라갔다가, 탁월풍(卓越風)을 타고 낙진과 함께 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결국 중국은 핵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빠르게 붕괴하고 말았다. 세계지리에서 배운 내용이 맞다면 미국 서해안은 편서풍의 영향권에 속한다. 새크라멘토에 핵을 떨어트렸다간 미국 중부 지역까지 오염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난민구역 골목에 쓰레기처럼 날아다니던 신문 낱장에서 본 분석 기사였다. 핵 공격이 시작되기 전,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직 감염이 확인되지 않은 지역과 네바다 주, 아리조나 주의 주민 모두에게 대피령을 내렸다고 한다. 캠프 로버츠 난민수용구역은 소리 없는 아비규환이었다. 우리도 대피시켜달라는 강력한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비극이 벌어졌다. 과격해진 시위대가 주둔지 펜스를 밀어 넘어뜨리자, 미군이 발포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곳에 발이 묶여있는 주방위군 병사들도 달아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을 것이었다. 불안과 피로, 우울에 시달리던 미군 병사들의 과잉대응은 장교들조차 통제하지 못했다. 몇 분 만에 7백 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했다. 공포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기이한 안정이 찾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캠프 남쪽 5킬로미터 지점의 소도시 샌 미구엘에서도 감염변종이 출현했다고 한다. 캠프 남북이 모두 감염지역이라 연방정부가 난민 이송을 포기한 것이었다. 캠프에 주둔하는 미군도 마찬가지로 발이 묶였다. 성격 나쁜 일부 미군 병사들이 난민들을 폭행하는 사고가 잇달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난민들 탓에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 2 [2화] #저널, 21페이지, 캠프 로버츠 식량이 떨어져 가는데,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구호헬기를 보낸 건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구호가 필요한 곳은 많고 항공기는 부족했다. 차량을 통한 보급은 위험과 손실 가능성이 너무 높아 보류되었다. 아직 연락은 닿는 모양이지만, 미국 정부가 캘리포니아 일대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재고가 충분치 않았던 위생용구는 일찌감치 바닥났다. 사람들의 마음씀씀이가 더욱 더러워졌다. 계절은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캠프 로버츠는 월동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난방대책도 필요했고, 식량이나 물자도 충분하지 않았다. 캠프 내 난민들도 지원자를 받아 필요한 것들을 구하러 나가기로 했다. 기지 사령관이 난민 대표들을 불러다가 의견을 모았다. 울타리 바깥을 배회하는 살아있는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지원대상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야 공정하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람만 아니라면 누구든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동기는 물론 공정함이 아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죽음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사령관이 허락했다. 그런 이유로 미성년자나 노약자에게도 지원자격이 주어졌다. 아이와 노인을 돌보던 문명의 울타리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사라졌다. 캠프에 합류한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인력관리를 담당했다. 배급표는 임무 지원자에게 우선적으로 배분되었으므로, 혹여 식량이 부족해진다면 가만히 있는 사람은 굶어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나가기를 거부하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굶어죽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죽기는 매한가진데, 그래도 저 밖에서 산채로 뜯어 먹혀 죽는 것보다는 안전한 곳에서 아사(餓死)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보는 모양이다. 식량부족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미군도 이들에게 참가를 종용하지 않았다. 작전 중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함께하는 미군에게도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플레이어의 선택 : 물자조달 임무를 받아들인다.」 나는 달랐다. 영양 부족으로 기진하게 된다면, 식량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게 될 수도 있다. 그 전에 발버둥 쳐보고 싶었다. 모집소에 가서 자원하겠다고 했더니, 마침 사무실에 있던 장교 중 하나가 날 도로 끌고 나왔다. 로버트 캡스턴 중위. 미군 장교들 가운데 온건한 편에 속한다. 그가 말하길, 중간 관리자 가운데 소속이 따로 없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던가. 미성년자라서 소외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 배급표를 챙겨줄 테니 재고하라고도 했다. 「AI 도움말 (통찰 4등급) :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공동체의 안정성 상향보정. 온건성향 미군 장교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음. 공동체 내 플레이어의 영향력 증대. 플레이어의 지도력에 상향보정. 거절할 경우 플레이어의 의지, 매력, 지도력에 상향보정.」 「플레이어의 선택 : 그래도 물자조달 임무에 자원한다.」 그에게 호의는 고맙지만 그래도 나가고 싶다고 거절했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있고 싶지 않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캡스턴 중위는 아연한 표정이었으나 나를 억지로 붙잡진 않았다. 그저 살아서 돌아오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좋은 사람은 어느 때라도 있다. 이런 시기에도 중위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물자조달, 캠프 로버츠 이런 설정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은 영상과 저널을 통해 제공되는데, 설정된 국적과 성별, 나이, 직업, 특성, 시작지점 설정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동일한 조건으로 재시작하더라도 완전히 같은 내용이 반복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죽고 번번이 재시작하면서도 저널을 눈여겨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독백 형식으로 제공되는 저널은 플레이어의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저널을 진행하는 가상인격은, 회차를 거듭하면서 플레이어의 성향을 파악하여 보다 정교해진다. 소년에게 저널 보기가 지루한 일은 아니었다. 독백은 나레이션으로 깔릴 뿐, 실제로는 가상현실로서 체험하게 된다. 다만 플레이어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결과를 일방적으로 느낄 뿐. 비유하자면, 4D 영화의 궁극적인 발전형이라 하겠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빛 하늘 아래, 누렇게 변색된 백색 텐트와 우중충한 군용 텐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캠프의 규모는 도시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플레이어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 안내를 따라 임무를 찾아가는데, 가까운 곳에서 둔탁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이 게임을 처음 할 땐 영문을 몰랐다. 지금은 소리만 들어도 안다. 사람을 날붙이로 콱 찌르는 소리였다. 배를 움켜쥔 중년인을 앞에 두고, 챙그랑- 칼을 떨어트린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년을 발견한다. 흠칫. 굳어있기도 잠시, 소년을 경계하며 죽어가는 남자로부터 배급표를 빼앗아 달아난다. 소년은 찌푸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했다. 이 게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러 번 죽어가며 이벤트를 진행해봐서 아는데, 저 여자는 조직의 말단에 불과하다. 추궁하겠다고 따라가면 해당 조직의 행동대를 전부 상대해야 했다. 사람은 찌르는 부위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 소년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필연적인 경험이었다. 저 울타리 밖의 적들, 감염변종도 모체는 인간이다. 찌르는 감각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가상현실 세계관 「종말 이후(Day after apocalypse)」에서, 악한 성향의 인간은 감염변종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성향이 선하더라도 위급한 상황에 몰리면 살인을 저지른다. 결국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는 진행이 불가능한 세계관이다. 증강현실 홀로그램으로 「시청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77건. 로그를 확인하세요.」 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깜박거리던 알림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소년은 메시지 로그를 열었다. 시스템 로그와 일반 메시지 로그, 시청자 메시지 로그 등으로 구분된 반투명 윈도우가 떠올랐다. 시청자 메시지는 방송 공개 게임에서만 활성화된다. 탭을 조절하자 색상 다양한 문자열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도도한공쮸♡ : 오빠 저 여자 왜 안 쫓아감?」 「SALHAE : 쫓아가서 죽여! 너는 SALHAE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자는 하반신만 있으면 돼! 죽이고 범하는 것이 바로 남자의 길! 누가 진짜 남자냐? 니가 바로 진짜 남자! 얼마나 진짜? 존나게 진짜! 너는 10점 만점에 12점인 진짜 사나이! 고민은 여자나 하는 거야! 망설일 것 없어! 저질러버려!」 「ㄹㅇㅇㅈ : 씨발 위엣놈 미친 새낔ㅋㅋㅋㅋㅋ 방송 진행자 나이를 보고 말해라」 「캐쉬미어 : 사후보험 적용 대상자는 가상현실 연령제한 없지 않음?」 「반닼홈 : ㄹㅇㅇㅈ 씹선비질 오지구요- 캐쉬미어는 아는 척 오지구요- 오지면 오지명?」 「려권내라우 : 오지명이라니, 그게 언젯적 사람인데...반닼 노인인증...할배, 꼬추 서요?」 「금수저 : 어휴 천민새끼들」 확 깬다. 공개방송이 처음인 소년으로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로그 창을 닫았다가, 몇 번 망설인 끝에 다시 창을 열어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넣었다. 가상현실의 「텔레타이프」 모듈은 사용자의 생각을 순간적으로 문자화하며, 언어의 차이가 있을 경우 자동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생각과 입력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한겨울 : 사전에 공지한 것처럼 훈수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고운 말을 써주세요.」 그러고는 창을 얼른 닫았다. 도착한 메시지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보였으나 그 내용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심한 거부감과 불쾌감이 들까. 소년은 오한을 느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가슴 속의 돌이 굴러다녔다. 여기저기 부딪혀서 꽤나 아프다.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따를 수 있는 임무 표시는 여럿이었다. 선택에 따라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러나 정한 바가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는다. 목적지에는 차량 행렬이 대기하고 있었다. 소년이 생전에 보았던 미군과 사뭇 달랐다. 시대적 배경이 지난 시대, 21세기 초엽인지라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생물학적 재해로 인한 인류멸종은,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세기 중반의 지구를 배경으로 삼으면,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사용자의 잠재의식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관제 AI가 차량의 이름을 표시해주었다. 행렬 앞뒤로 기관총이 탑재된 사륜구동 차량(험비)들이, 중간에는 군용이라 특이한 형상의 트럭들이 줄지어 있었다. 기름도 조달하려는지 위장색이 칠해진 군용 탱크로리(M978A2) 두 대가 정 가운데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량 주변은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혹시나 난민들이 차량을 탈취하려고 시도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은 얌전히 줄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지원자들은 몸수색을 받은 뒤 방탄복과 방독면, 더플 백을 하나씩 지급받았다. 무기는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나눠준다고, 몸수색을 담당한 상사가 기계처럼 반복했다. 순서가 돌아오자 껌을 우물거리던 흑인 상사는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작아! 이런 녀석도 지원을 받나?" "강제가 아니니까요." 옆에서 병장이 대꾸했다. 상사는 낯설지만 병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는 힐끔 곁눈질하더니 말을 이었다. "로보캅 중위님이 좋게 보는 녀석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며 자원했다더군요." "그걸 어떻게 믿어?" "소속 조직이 없습니다. 영어도 곧잘 하고, 최근에는 일본어나 중국어도 몇 마디씩 주워섬기는 것 같더군요. 지원자들 통제할 때 쓸모가 있을 겁니다." 로보캅은 로버트 캡스턴의 별명이었다. 이름과 성의 앞부분만 따로 읽으면 발음이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어와 중국어 운운하는 것은 소년이 경험치를 투자해 습득한 기술을 이른다. 원래 알고 있던 게 아니라, 시스템 보정으로 작동하는 번역기에 가깝다. 사회성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종말 이후」에서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생존기술이었다. 상사가 묻는다. "너 몇 살이나 먹었지?" 역시나, 잠재의식과 상황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인터페이스, 관제 AI의 도움말이 홀로그램으로 출력되었다. 상황에 맞는 대사나 키워드, 힌트 따위를 보여주는데, 이는 플레이어의 지적 능력(지력)과 「통찰」, 「간파」, 「기만」 등 리더십 계열 기술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은 단순히 설정상의 나이를 보여줄 뿐이다. 거짓을 말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소년은 솔직하게 답했다. "열일곱입니다." "열일곱? 젠장, 열둘이 아니고? 동양인들은 겉만 봐선 나이를 모르겠다니까." 그렇게 투덜거린 상사가 몸수색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텁텁. 대강 짚는 손길에 걸리는 게 없음을 확인한 일병은 소년에게도 앞서 지나간 사람들과 같은 방탄복과 방독면, 더플백을 안겨주었다. 전염병이 공기로 전파된다는 증거는 없지만, 되지 않는다는 증거도 없다. 상사는 특별한 지시가 없는 이상 임무 중 방독면을 벗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통과하고 나서 통제에 따라 가설 막사로 들어간다. 미군 병사들이 지원자들을 순서대로 자리에 앉혔다. 국적에 따라 분류하는지 근처는 태반이 한국 출신이다. 수군거리는 말들이 모두 한국어였다. 개중 몇은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키지 않았으나 답례했다. 무시해서 좋을 것이 없다. 자리가 꽉 차기를 기다려, 단상에 오른 로버트 캡스턴 중위가 병사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프로젝터가 백색 스크린에 빛을 쏘았다. 나타난 것은 지도였다. 중위는 아래를 쭉 둘러보더니, 통역으로 삼을 몇 명의 난민을 앞으로 불러냈다. "호명된 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통역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년을 비롯해 불려온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이크에 대고 딱딱 손가락을 부딪쳐 주의를 모으고는, 펼쳐놓은 지도를 토대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우리가 향할 산 미구엘 카운티의 지도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리 큰 마을은 아니지요. 원래 인구가 3,300명쯤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우선 1차 목표는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주유소입니다." 그가 가리킨 주유소는 101번 국도에서 마을로 빠지는 길목 교차로에 바로 위치하고 있었다. "대열은 여기서 정지할 겁니다. 탱크로리를 채우면서 여러분을 기다릴 계획이죠. 여러분은 두 개 조로 나누어 물자를 확보하러 가시게 됩니다. 첫 번째 목표는 주유소 남쪽으로 두 블록 가면 있는 교회입니다. 대피령이 발령되었을 때 임시 대피소로 쓰였으니 상당한 물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좀 멀긴 한데, 북쪽으로 네 블록을 올라가면 여기 14번가 중심부에 식당과 제분소가 있어요. 식량을 가장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곳이니 위험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들으신 대로 제분소 쪽으로 가는 게 좀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이번 임무에 용감하게 자원하신 분들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묻고 싶습니다. 제분소 쪽으로 가기를 희망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소년은 이 말을 그대로 통역한 뒤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말해놓고 스스로 손을 든 것처럼 보였다. 캡스턴 중위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이채롭게 소년을 바라본다. 호감도 상향보정 로그가 여러 번 표시되었는데, 미군 쪽이 더 우호적이었다. 그 가운데 불변보정이 하나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엇 상병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수치불명의 친애 호감도 상승보정. 수치불명의 친애 호감도 상승불변보정.」 인간관계는 가변적이다. 한 번 친했다고 천년만년 계속 친한 게 아니다. 따라서 호감도는 시간이 경과하거나 또는 적대적인 사건에 의해 감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변보정은 다르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감소하지 않는다. 수치를 알 수 없는 것은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되겠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더 없습니까?" 브리핑을 하던 캡스턴 중위가 물었으나 다들 서로 눈치만 보았다. 용감하다고 추켜세워 주긴 했지만,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몸을 사리며 배급표만 받아가려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중위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약간의 체념도 엿보였다. 물자보급에 난민들을 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 캠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보니 미군에서 많은 수를 차출하기 어려웠다. 둘째, 위험한 일에 미군을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난민들이 보다 적극적이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질문 있습니다." 소년이 손을 들자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이 가방에 담아올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습니다. 트럭으로 제분소 앞까지 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알면서 묻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나올 질문이라 진행을 빠르게 하려면 직접 묻는 편이 나았다. 캡스턴 중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프로젝터를 다루는 병사에게 지시했다. 위성사진을 띄우라고. "좋은 질문입니다.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던 바였으니, 다들 주목해주십시오. 이것은 소개가 이루어지기 전의 미구엘 카운티를 찍은 위성사진입니다. 교차로마다 멈춰있는 차량들이 보이십니까?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신호 무시하고 운전하다가 추돌 사고를 일으킨 차량들이지요. 다른 지역에서 온 차량들도 있고요. 여러분에게는 무전기가 지급될 겁니다. 만약 이 차량들을 어떻게든 치워낸다면, 무전을 주시면 됩니다. 수송트럭이 그 위치까지 이동할 테니까요. 하지만 장애물을 치우려는 행동이 감염변종의 이목을 끌 것 같다면, 그냥 개인 단위로 식량을 확보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겁니다. 판단은 저희가 할 테니 통제에만 따라주시면 됩니다." 그 뒤로 사소한 몇 번의 질문이 나왔다. 가장 쓸모없었던 질문은 어느 중국인의 것이었는데, 참여한 사람들에게 배급표가 얼마나 나오느냐는 내용이었다. 캡스턴 중위는 맥 빠지는 표정을 지었으나, 여느 때처럼 성실하게 답변했다. "기본 사흘 분을 지급합니다만, 여러분 개개인의 태도와 성과에 비례하여 보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내용이 퀘스트 정보에 반영되었다. 동행한 미군의 평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 수 있음. 사실 애매한 부분이었다. 평가를 담당하는 병사 또는 장교의 속성에 인종차별 같은 거라도 끼어있다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성을 우선하는 가상현실 세계관이 대개 이런 식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이 없다면, 각 조별로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도상연습에 참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위험한 임무인 만큼 지도를 충분히 숙지하여 현장에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셔야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해산." 캡스턴 중위가 단상에서 내려온 이후, 부사관급 상병 이상이 전면에 나서서 지원자들을 통제했다. 도상연습(圖上練習)이란 말 그대로 지도를 놓고 하는 훈련이며, 작전지역을 숙지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논의하는 과정이다. 플레이어에게 이 도상연습은 미니맵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기술 「독도법」이나 지력이 높은 캐릭터는 완전한 미니맵을 얻지만, 반대의 경우엔 부실하고 오차가 존재하며 여기저기 빈 공간이 있는 미니맵을 확보하게 된다. 제분소로 가겠다고 지원한 것이 소년뿐이었으므로 나머지는 추첨으로 뽑았다. 뽑힌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과정이었지만,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산 미구엘 카운티의 규모가 워낙 작았기 때문이다. 난이도로 따지면 도입부(튜토리얼)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어려우면 곤란하다. #Intermission, 인물 설정에 대한 조언 플레이어의 캐릭터 설정은 다양한 면에서 게임 진행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시작국가에 따라 인종과 국적, 성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을 감수할 경우 경험치 획득에 상승보정을 얻게 됩니다. 미성년자는 능력치에 일정비율의 하향보정이 작용하는 대신 경험치 획득에 상승보정을 얻게 됩니다. # 3 [3화] #물자조달 (2), 캠프 로버츠 도상연습, 전술적 움직임, 기초적인 수신호, 정신교육 등의 절차를 밟은 후에야 물자조달 임무가 개시되었다. 사실 이것도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차량이 출발할 때 배웅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배웅을 나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통찰이나 간파 등 리더십 계열 스킬의 랭크가 높았다면 읽어냈으리라. 스킬에 대해 생각하려니 잠재의식에 반응한 관제 AI가 도움말을 출력했다. 「AI 도움말 (통찰 4등급) : 현재 사용되지 않은 여분의 경험치가 있습니다. 경험치는 기술 습득 시 소모되며, 플레이어의 기초 능력치 또한 기술 습득을 통해 향상됩니다. 사전지식이 없는 기술을 습득할 땐 많은 경험치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특정 기술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데에도 경험치가 소모될 수 있습니다. 기술에 대한 사전지식과 경험이 충분할 경우엔 습득 시 필요한 경험치가 감소합니다. 사전지식은 책이나 친분 있는 NPC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 전회차 플레이에서 습득했던 기술의 경우 습득 횟수에 따라 재습득에 필요한 경험치 요구량이 감소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경험치를 많이 쓰더라도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스킬의 획득이 오히려 이로울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플레이어의 몫입니다.」 아는 내용이다. 소년은 자신의 기술목록을 열었다. 존재를 모르는 기술은 아예 표시되지도 않는다. 특정 키워드를 넣어서 관련 기술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경우 관제인격이 경고한 것처럼 경험치를 소모하게 된다. 그리고 그 스킬을 얻는 데에 다시 몇 배의 경험치가 필요하다. 이를 「무지로 인한 불이익 - 언노운 페널티(Unknown penalty)」라고 부른다. 예컨대 플레이어는 아무 개연성 없이 기계공학에 대한 수준 높은 기술을 얻을 수 있다. 대신 굉장히 많은 경험치가 소모된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얻을 필요가 있나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지간해서는 얻기 힘든 전문기술을 필요하면 즉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다만, 선행조건으로 특정 기술 습득을 요구하는 일부 상위 기술은 예외가 된다. 플레이어가 NPC에 비해 또 한 가지 유리한 것은 일종의 전승(傳乘) 개념이다. 전회차(前回次)에서 한 번이라도 얻었던 기술은 「언노운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익혔던 기술이라면, 익힌 횟수에 따라 차등적인 「재능이익(才能利益) - 탤런트 어드밴티지(Talent advantage)」가 적용되었다. 즉 적은 경험치로 재습득이 가능하다. 단, 이러한 혜택은 같은 기술이라도 한 번 익혔던 등급까지만 적용된다. 전회차에서 6등급까지 배운 게 최고였다면, 7등급부터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뜻이다. 이 탤런트 어드밴티지와 더불어 도전과제 달성에 의한 추가 효과는 다회차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혜택이었다. 소년은 경험치를 전투계열 기술에 우선적으로 분배했다. 필수적인 기술이다 보니 익힌 횟수가 많아 적은 경험치로도 적잖은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소년이 이번 회차 이전에 데드 엔드로 끝낸 세계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9등급 「근접전투」, 10등급 「근접무기숙련」, 8등급 「개인화기숙련」.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데, 관리를 담당한 미군 병사 엘리엇 상병이 녹색 표지의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맨 위에 날짜를 적은걸 보니 일기인 모양이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치 챈 상병이 손으로 슬쩍 가리며 민망해했다. "내가 다른 나라 예의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훔쳐보는 게 좋아 보이진 않는데?" "실례했습니다. 무심코 그만." "...뭐, 별 거 없긴 한데." 상병은 노트를 덮어 갈무리했다. 아무래도 보급품인 것 같다. 시야 한 구석에서 기능알림 표시가 깜박거렸다. 시간가속 기능이다. 이렇게 특정 지점으로 이동하거나 임무 시작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고 싶을 때 가속 기능을 이용하면 가상현실 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 사이의 상황은 관제 AI의 상황연산에 의해 결정되며, 플레이어가 알아야 할 내용이 있을 경우 저널 형식으로 제공된다. 즉 시간 가속은 저널 형식 진행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중후반이면 모를까 초반에 시간가속을 이용하는 건 하책이었다. 사소한 사건과 인간관계로부터 얻는 이득을 무시할 수 없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가만히 있었는데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어이, 꼬마. 이름이 뭐냐?" 다른 자리의 병사가 묻는다. 피부색을 보니 메스티소였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도 특히 인종적 다양성이 높은 미군답게 여러 인종이 눈에 띄었는데, 그중 하나였다. 명찰에 붙은 이름도 전형적인 앵글로 아메리칸의 것이 아니다. 「Guilherme」 철자는 알아볼 수 있어도 발음을 궁금해하니 홀로그램으로 깨진 문자열만 나타났다. 플레이어가 모르는 언어 형식의 이름이라는 뜻이었다. "겨울입니다." "기어우르?" "한국어에요. 겨울(Winter)이라는 뜻이에요." "왠지 발음이 내 이름과 비슷한데." 소년이 명찰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읽습니까?" 병사는 재미있다는 눈치였다. 심리를 궁금해하자 4등급 「통찰」이 작동한다. 「다들 주눅이 들어있거나 긴장한 상태인데 홀로 태연해 보이는 모습이 신기한 듯하다. 배짱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차가 있을 가능성 72% / 오차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등급의 「통찰」 및 「간파」와 지력보정이 필요합니다.)」 과연, 그런 건가. 상식 범위 내에서 추정 가능한 속내다. 병사가 답했다. "귈레미라고 부르면 돼." "귈레미 일병님." "그냥 귈레미라고 해." 동료 병사들이 마구 웃었다. 한국어 존칭 '님'이라는 표현의 번역이 Sir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냐며 투덜거리는 중이다. 사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고작 5km 거리였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지 먼 풍경일 뿐인데 을씨년스럽다. 난민 지원자들에게 동요가 번졌다. 귈레미 일병이 엄한 한숨을 쉬었다. "으스스하군. 락다운 걸렸다고 기분 나빠했는데, 기껏 나왔더니 저 모양이군." 락다운(Lock-down)은 외출, 외박 금지를 뜻한다. 보통은 군기위반에 따르는 처벌 개념이다. 다만 지금은 모든 병사들이 기본적으로 영외 출입이 불가능했다. 남하하는 차량대열은 국도에서 좌측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달렸다. 주유소가 마을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대열은 마을을 지나칠 것처럼 달렸다. 주유소 표지가 보인다. 아래로 꺾인 청색, 적색의 막대 두 개가 포개어진 형상의 마크와 함께 유명한 정유회사 쉐브론(Chevron)의 상호를 읽을 수 있었다. 엘리엇 상병이 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건 캐리어의 잠금을 풀었다. 총을 넣고 잠가놓은 금속 틀이다. "사전교육을 받으셨겠지만, 도망가시면 안 됩니다. 혹시나 동부로 이동하다가 공중정찰에 발각되면 경고 없이 사살당할 테니까요. 총동원령이 떨어진 지금 봉쇄선을 무사히 넘어갈 가능성도 없고요. 제 통제에 확실하게 따라주셔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장에서 즉결처분될 수도 있어요. 다들 아시겠습니까?" 난민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량대열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 지 마을로부터 몇 개체의 감염변종이 튀어나왔다. 선도차량, 험비의 포탑에 앉아있던 병사가 즉각 사격했다. 단, 포탑에 달린 중기관총이 아니라 개인화기인 소총을 쐈다. 소음기가 달려있었다. 끄어어어- 낮게 끌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변종들이 엉망으로 나뒹굴었다. 달리는 자세만 보아도 정상인은 아니었지만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그것들은 총에 맞고도 버둥거리며 일어나서 계속 달리려고 했다. 보통 사람처럼 통증이나 출혈만으로는 움직임을 제대로 저지할 수 없었다. "위험하니까 자리에 앉으세요. 앞에서 해결할 겁니다." 엘리엇 상병이 나무랐으나 난민들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맞은편에 있던 다른 병사, 블레이크 일병이 투덜거렸다. "샌 미구엘 일대는 그래도 일찌감치 소개되어 변종이 거의 없다더니, 어째 도착하자마자 환영인사로군."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거겠지." 귈레미 일병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난간 밖으로 총을 겨누고 바깥을 경계했다. 이윽고 차량대열이 정지했다. 굼떠 보이는 탱크로리들이 주유소로 기어들어가는 사이, 난민들에게 총기와 대검, 정글도 등의 무기가 분배되었다. 나름 정신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을 골라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난사사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도 무기를 받았다. 도검류는 전동 숫돌로 날을 세워 놀라울 만큼 예리했다. 지나가면서 숫돌 작업을 본 적이 있는데, 불티가 튀는 모습이 장난감으로 파는 불꽃놀이 화약 수준이었다. "하차!" 낮은 외침에 병사들을 선두로 난민들이 차량에서 내렸다. 사전에 정해진 대로 병사들이 사주경계를 맡고, 인솔을 담당한 병사만 따로 나서서 난민들의 인원점검을 진행했다. 그 사이 주유소 쪽에서 난처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젠장, 카드 주유기인데 잠금이 풀리질 않는군. 이거 어쩌지?" 하사 하나가 골치 아프다는 듯 방탄모 아래로 손을 넣어 머리를 긁어댔다. 어깨에 비듬이 한 움큼 내려앉아서,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그게 보일 지경이었다. 샴푸 같은 소모품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게으르거나. "예정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상황이 안전하다면 가급적 도로상의 장애물을 치워 트럭을 호출하고, 아닌 경우에는 개인 별로 지급된 더플 백에 물자를 채워서 돌아오도록 합니다. 여분의 더플 백이 있으니 어두워질 때 까지 최대한 왕복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여러분이 이번 임무에 얼마나 열성적으로 임하는 지 저희가 평가하여 보상을 차등적으로 지급할 겁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난민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합시다. 우리가 후위를 맡습니다. 순서대로 선두를 맡아주세요." 병사들이 뒤로 빠졌다. 사전에 기지 사령관과 난민 대표들이 합의한 내용이었다. 병력보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의 손실을 감수할 순 없다는 것이었고, 이런 내용이 공표되었을 때 난민들의 불만이 있기도 했다. 현재의 지원자들은 그런 조건을 다 감수하고 임무를 맡겠다고 나선 자들이었다. #공익광고, 2040년 상반기, KBS 낡은 동네, 퇴락한 어귀. 화면은 폐지 줍는 노인을 비춘다. 닳고 닳은 소매,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이 샌다. 허술하게 꿰맨 자국들. 소금기와 기름때에 절어있다. 오래도록 빨지 못한 모양. 지나가던 여학생이 인상 쓰고 코를 잡는다. 악취. 노인은 민망하다. 속으로 하는 외로운 생각, 글귀가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그래도 이거 팔아서 밥이라도 한 끼 먹으려면.......」 구도가 바뀐다. 딥 포커스. 비탈길. 위에서 아래를 비추는 화면. 노인은 작은 모습으로 올라오려 애쓴다. 쉽지 않다. 폐지 실린 리어카에 비해, 체구의 왜소함이 강조된다. 등 뒤로 해가 지는 하늘. 인생의 황혼기를 상징하는 연출. 쓸쓸한 분위기와 초라한 주변 풍경이 빈곤하고 힘겨운 늘그막의 삶을 암시한다. 노년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을 하기에 좋겠다. 이어지는 여성 나레이터의 다정다감한 음성. "올해로 86세. 박우철 노인은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갑니다. 매달 63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지만...충분하지 않습니다. 2040년 현재 정부가 추산한 1인 가정 최저생계비는 164만 5,053원. 물가는 매년 오르는데, 기금이 고갈된 국민연금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입니다. 대한민국 노인들의 삶은 너무도 힘겹습니다." 노인은 이제야 비탈을 다 올라왔다. 클로즈 업.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자글자글한 주름. 다시 한 번 화면 전환. 고물상 주인은 폐지를 구분한다. 종이라고 다 같은 값이 아니다.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노인. 주인이 슥슥 계산하니 13,325원. 리어카 옆에 매달린 주머니에는 알루미늄 캔이나 녹슨 철 따위의 보다 값진 쓰레기들이 소량 들어있다. 무게를 마저 재고 값을 쳐서 폐지 몫과 더해보니 2만원 조금 넘는다. 마음씨 좋은 주인은 그냥 2만 천 원으로 맞춰서 값을 치른다. 노인은 참으로 고마워했다. 다시 나레이터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나마 박우철 노인은 사정이 나은 경우입니다. 폐기물법에 의해 허용된 고물상은 서울에 얼마 없으니까요. 그나마 수익이 나오지 않아 문을 닫는 곳이 늘고 있어서, 폐지를 팔고 싶어도 팔 수 없는 노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연금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제 노인은 늦은 식사를 마치고서, 가재가 거의 없는 좁은 방 안에 눕는다. 잠들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할 것이 없어서 그렇다. 낡은 TV를 지분거려 봐도 고장이 났는데 나올 리가 없다. 잠을 청한다. 쉽지 않다. 방이 좁아 몸을 다 펼 수 없고, 낡은 집은 가을바람에도 실내가 차갑다. 이불을 덮고 웅크린다. 노인의 생각이 화면에 흐른다. 「연탄은 겨울을 위해 아껴두어야지.......」 절약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수영이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노인은 딸을 생각한다. 화면 가득 확대되는 눈동자. 그가 키운 딸의 모습이 비춰진다. 나레이터가 여전히 다정하지만, 다정하기만 해서 위화감 느껴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자식이 있어도 기대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 대한민국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험한 세상, 부모가 짐이 되지 않아도 홀로 살기 어렵습니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또 한 번 화면이 바뀐다. 기술자들이 구슬땀 흘려가며 시설을 구축하고, 백의를 입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영상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밝은 분위기. 과학자 및 의사들이 바라보는 화면엔 인간의 뇌가 떠있다. 생체 전기신호가 밝은 빛으로 표시된다. 연달아 떠오르는 것은 서로 다른 온갖 풍경 속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계곡물에 발 담그고 여름 햇살에 젖어있는 젊은 여성. 자막은 92세 안미영 노인이라고 뜬다. 봄이 찾아온 꽃밭, 산들바람을 맞으며 걷는 청년. 자막은 88세 최대양 노인이라고 뜬다. 그 밖에도 많은 노인들이 현실과 다른 계절, 있을 수 없는 젊음과 무제한의 행복을 만끽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당신의 국민연금을 사후보험으로 전환하세요. 이제 사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65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육체를 버리고 정신의 자유, 무제한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후보험은 국민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해드립니다." 이제 화면은 박우철 노인의 슬픈 모습과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하루하루 불안과 고통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의 삶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상부(思想剖) 적출 수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수술 실패 확률은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낮습니다.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사후보험공단의 생명유지장치와 신경계 접속기가 당신의 뇌를 정해진 수명 이상으로 건강하게 유지해드립니다. 가상현실이 낯설다면 사전체험을 요청해보세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직접 경험해보고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가상현실 체험시설은 연중무휴로 일반에 공개됩니다." 체험시설의 모습은 말끔하고 단정하다. 삼삼오오 찾아온 노인들이 접속기를 끼고 가상현실을 경험해본다. 멋지다. 훌륭하다. 노인들이 흡족하게 웃는다. 그 가운데 박우철 노인이 끼어있다. 주름이 사라지고 젊어진 모습으로 화창한 봄날의 꽃길을 걷는 풍경이 잡힌다.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 사후보험이 만들어 나갑니다." 광고가 끝날 즈음이 되어, 화면 가득 휘날리는 태극기의 모습. "이 캠페인은 공익광고협의회, 국민연금공단, 사후보험공단이 함께합니다." # 4 [4화] #물자조달 (3), 샌 미구엘 미국의 국도변에 위치한 주유소 인근에는 대개 여관과 식당이 있게 마련이었다. 샌 미구엘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도로 맞은편에는 두 개의 식당이, 교차로 대각선 방향으로는 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병사들이 사주경계에 임하는 동안, 방독면 쓴 난민들이 저마다 화기나 정글도, 도끼 따위를 단단히 쥐고 가까운 식당부터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서 겨울에 태어나 겨울의 이름을 얻은 소년은 마을 주민 중 히스패닉계가 많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유소 맞은편 두 개의 식당 모두가 스페인 음식점이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십 번가 바스크 카페」라는 간판을 달았고, 식당보다 술집에 가까울 남은 한 쪽은 또르따스와 브리또를 판다고 내걸었다. 난민들이 과하게 몰려갔다. 저러다가 감염변종 하나 나오면 서로 부딪혀서 제 역할 못할 것이 걱정될 정도였으므로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사람들은 달랐다. 차량대열과 가까운 장소, 즉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최대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점수를 딸 생각인가보다. 서로 다투는 소리까지 났다. 방독면을 끼고도 건물 밖까지 들릴 정도면 엄청나게 소리 지르는 셈이었다. 다행히 변종 하나 없이 비어있는 건물이었나 보다. 모두 멀쩡히 나왔다. 단, 정상적인 몰골은 아니었다. 서로 자기 더플 백에 식량을 채우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역력했다. 찢어진 더플 백을 안고 울면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방독면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몸싸움 하다가 벗겨진 모양인데, 감독자인 상사에게 욕을 먹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덩치 큰 난민 지원자 하나가 으스대며 트럭에 올라탔다. 더플 백이 한가득 차있었다. 부끄럽게도 한국인이었다. 게임인데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었다. 왜냐면, 과거를 배경으로 삼는 세계관 내 인물들의 성격은 해당 시대의 빅 데이터를 기초로 작성되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소년에게 통역을 요구했다. 한심했지만 말을 옮겨주었다. “난 내 몫 다 했습니다. 더는 나갈 생각 없습니다.” 옮겨놓은 말을 듣고서 병사들이나 부사관이나 장교나 표정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엘리엇 상병이 투덜거렸다. 짐작은 했지만 시작부터 이 모양이군. 트럭 탑승칸에 앉아서 더플 백을 꼭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미군이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무시했다. 소년을 합쳐 열 명의 난민들이 귈레미 일병과 엘리엇 상병의 지시에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제분소로 향하는 인력이었다. 주유소에서 동쪽으로 세 블록, 북쪽으로 네 블록을 움직여야 한다. 「모겔론스」 이전에는 그저 산책삼아 걸을 법한 짧은 거리였는데, 지금의 생존자들이 체감하기로는 너무나도 먼 거리다. 경험 많은 소년의 사정은 다르다. 모두가 앞장서기 싫어하는 시점에서 선도를 자처했다. 임시로 지급 받은 총도 등허리에 둘러메고서, 손에는 정글도를 하나 쥐었을 뿐이다. 9등급의 「근접격투」, 10등급의 「근접무기사용」 기술보정을 믿는 것이었다. 구획마다 자동차들이 엉망으로 엉켜있었다. 손짓으로 지원자들을 불러 차량들을 갓길로 밀어내며 나아갔다. 도중에 좌우의 주택가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낮은 펜스나 나무 울타리 너머로 인기척 없는 단층주택들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깐, 정지.” 엘리엇 상병이 주먹 쥔 손을 위로 올렸다. 난민들이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낮추었다. 모두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눈을 굴렸다. 다행스럽게도, 위협을 발견해서 정지신호를 보낸 건 아니었다. 상병이 바라보는 방향에 국기게양대가 있었다. 미국 국기는 익숙한데, 붉은 별과 그리즐리 베어가 그려진 깃발은 낯설다. “저 깃발은 뭐죠?”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깃발이야. 소방서로군. 도상연습 당시엔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귈레미 일병이 답했다. 과연, 곰 아래쪽을 보니 California Republic이라고 적혀있었다. 엘리엇 상병의 결정에 따라 소방서 건물을 탐색하기로 했다. 식량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진통제와 항생제, 붕대 따위의 의약용품도 중요한 보급물자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방차도 중요했다. 혹시나 캠프를 벗어나게 될 경우 식수운반에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었다. “5톤짜리 작은 소방차라도 3천 리터는 넉넉하게 담을 수 있다고.” 엘리엇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번에도 소년이 가장 앞서서 들어갔다.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두 미군 병사의 친애 호감도에 소폭의 상향보정이 발생했다는 알림이 떴다. 큰 의미는 없다. 변변치 않은 증감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었다. 마을 규모가 작은 만큼 소방서도 단층이었다. 차고 바로 옆에 사무실이 붙어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특수유리라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칼등으로 통통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는 충분히 들릴 것이고, 멀리까지는 닿지 않을 크기의 소음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오그라든 난민들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나보다. 미쳤냐고 소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이, 그쯤 해두지?” 귈레미가 총구를 겨누고서 좌우로 까딱거렸다. 물러나라는 의미다. 정말 위험했다면 미군이 소년을 막았을 것이다. 경고 받은 난민이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경기를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탕탕, 안쪽에서 무언가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문에 귀를 대보니 으어어 우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낼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감염변종이다.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문 앞에 서서 사격을 준비하는 두 병사에게 소년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문고리를 잡고, 다른 손에 정글도를 쥐었다. “제가 처리할 게요.” “배짱이 좋은 건지 제정신이 아닌 건지…….” 귈레미 일병이 고개를 젓는 사이 엘리엇 상병이 물었다. 괜찮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자 상병이 허가를 내주었다. 소년을 믿는다기 보다, 난민들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도 소년이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역효과다. 방아쇠울에 넣은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당겨질 것처럼 팽팽했다. “좋아. 자신 있으면 해봐.” 겨울 소년은 문 너머에 있을 감염체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출동대기 중인 소방관이 감염된 경우라면 방화복에 방화모 차림일 테니 칼로 쳐도 좋을 약점이 얼마 없을 것이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문고리를 비틀어 확 당기니, 문을 밀어대던 변종이 제 힘을 못 이겨 밖으로 나뒹굴었다. 소년은 넘어진 놈의 등을 밟고, 발로 차서 모자를 벗긴 뒤 머리에 무거운 칼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콰직. 두개골을 깨고 푹 들어간 칼날. 갈라진 틈으로 피 섞인 뇌수가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변종의 사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 닮은 것이 죽어간다. 손잡이로부터 저릿한 전기가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 때문에 이런 어두운 세계관의 가상현실 타이틀을 골랐던 것이다. 소년은 그 느낌이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손목에 스냅을 주었다. 칼이 툭 튀어 오르듯이 빠져나온다. “어이, 괜찮아?” “괜찮습니다. 걱정을 보이는 귈레미에게 소년은 침착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일병은 거친 말로 감탄했다. “하, 여기 상남자(Badass)가 있군.” 열린 문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간 것도 소년이었다. 사소한 행동에서 사소한 이득이 있었다. 두 병사의 친애 호감도에 소폭 상승보정이 발생했다. 역시 큰 의미는 없었지만, 이렇게 작은 이득이 쌓이다보면 나중엔 좋은 결과로 보답 받을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소방서는 관공서의 기능을 겸한다. 애당초 사무실 유리창 전면에도 Community services district 라고 적혀있었다. 출동할 일이 드문 소방관들은 행정사무를 돌보는 공무원 역할도 수행했던 것이다. 사무실은 앞뒤로 긴 구조였다. 안쪽에서 서류뭉치들 사이에 놓인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총이 두 자루 있기에 그것도 챙겼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넋 놓고 있는 사이 벽면 보관함을 열고 약품을 쓸어 담는다. 소년 몫의 더플 백 1/3 정도가 채워졌다. “저기…….” 중년인 하나가 말을 건다. “공평하게 나누고 그래야지, 혼자 다 담아가면 어쩌자고…….” 소년은 말없이 돌아보았다. 상대가 움찔 물러났다. 소년이 단단히 쥔 정글도에서는 아직도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중이었다.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빤히 바라보자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소년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다른 벽면에 세 개의 개폐버튼이 달려있었다. 필시 차고의 셔터를 올리는 스위치일 것이다. 엘리엇은 소방차에 욕심을 냈었지. 문가에 그가 서있었다. 시선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지 않고 턱턱턱 눌러버린다. 과연, 위잉- 하는 모터 작동음이 들렸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미처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과 미군 병사 둘이 사방으로 총을 겨눈 상태였다. 소음을 듣고 감염변종이 떼로 나타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퍼억! “뭐, 뭐야!” 화들짝 놀란 지원자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소방서 옆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변종 하나가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소년이 냅다 달려가서 칼로 찍어버렸던 것이다. 엉겁결에 누군가 방아쇠를 당겨 소년이 맞을 뻔했다. 시청자 메시지 로그가 폭증했다. 잠깐 펼쳐보니 「어처구니없게 죽을 뻔했네 ㅋㅋㅋ」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가서 저년 죽여 버리라는 말도 여럿 있었다. “미, 미안! 결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아이 하나 있을 법한 여자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외모만 가지고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난민들 몰골이 하나같이 말이 아닌지라, 남자건 여자건 적어도 십년 이상 더 늙어 보이기 예사였기 때문이다. 소년이 손짓했다. “괜찮으니까 목소리를 낮추세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보고 호감도 변화 알림이 여러 번 울었다. 엘리엇 상병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상남자인데?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그게 중요한가요?” 가까워진 소년이 반문하자 상병이 피식 웃었다. “이라크에서 빌빌거리던 레드넥 신병들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감사합니다.” 열린 차고에서 구급차와 소방차 하나씩이 발견되었다. 세 개의 차고 중 하나는 비어있었다. 엘리엇 상병이 운전 가능한 지원자를 가려 주유소에 가져다두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소년이 확보한 물자도 차량에 쏟아놓았다. 가방 하나 채우고 얼른 돌아가려는 다른 난민들과 확실하게 다른 태도를 보이니 병사들의 호의를 사기 쉬웠다. 다만 운전 담당의 두 사람은 내키지 않는 반응이었다. “돌아와야 합니까?” 울상을 짓는 난민이 가소로웠던 모양인지 상병이 거칠게 떠밀었다. “당연히 돌아오셔야지.” 그 말을 소년이 통역했다. 운전역으로 뽑힌 두 사람은 애꿎은 소년만 노려보다가 운전석에 올랐다. 차마 미군에게 미움 살 배짱은 없었던 모양이다. 엘리엇 상병이 본대에 무전을 넣었다. 차량 두 대 보냈으니 그 안의 물자와 함께 회수하고, 사람은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갈 길이 가로세로 합쳐 일곱 블록인지라 차량은 금방 도착할 터. 잠시 후 무전이 돌아왔다. 운전수 두 사람이 돌아올 필요 없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확인이었다. 엘리엇은 코웃음을 치고는 반드시 다시 돌려보내라고 답했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에 주변을 추가로 수색했다. 마을 중심가에 가깝다보니 카페라던가 식당이라던가 눈에 띄는 건물들이 있었다. 이름도 없는 작은 식당이 하나, 잭슨의 옛 것과 새 것이라는 비슷한 크기의 식당이 하나. 멕시코 음식을 취급한다고 대놓고 써 붙인 The Ranch라는 식당이 인상적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민자들이 주류인 마을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커피 하우스는 수색할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저거 봐. 입간판에 런치 스페셜이라고 적혀있지? 분명 식사도 취급했을 거야.” 엘리엇의 말. 과연, 통조림 햄과 밀가루 포대 따위가 발견되었다. 일곱 사람의 더플 백을 채우고도 남을 풍족한 양이었다. 캠프 사령관을 위해 진공 포장된 커피 원두도 챙겼다. 산화되어 본연의 맛이 아니겠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사치스럽다. 와중에 몇 개체의 변종을 추가로 처리해야 했지만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색을 마치고도 시간이 남아 도로에 있는 차를 모두 치웠다. 소방차량을 몰고 갔던 두 사람이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돌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배급표 안 줄 겁니다.” 엘리엇의 경고를 받고서야 걸음이 빨라졌다. 귈레미 일병이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들의 합류 이후 다시 두 블록을 나아갔다. 마침내 제분소가 보이는 교차로에 도달했다. 소년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제분소에 도달했을 때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더플 백만 채워서 돌아가는 것이 하나요, 도로를 정리하고 차량을 호출하는 것이 둘이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 경험치를 크게 얻을 수 있으나, 감염변종의 시간차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전자만 하더라도 제분소 내부에 변종 다수가 있어, 처음 접하면 쉬운 난이도가 아니었다. 소년이 경험한 「종말 이후」 최초의 세계관은 바로 여기서 끝났다. “어이, 쬐끄만 상남자.” 엘리엇 상병이 제법 살갑게 부른다. “트럭을 불러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일단 제분소 안쪽을 확보하고 나서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당연한 제안이었고, 상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 5 [5화] #과거 (1), 거래준비, 소년 소년은 러닝머신 위를 거칠게 달린다. 날뛰는 심박. 이마에서 가슴까지 땀이 흘렀다. 넓은 단련장에 사람은 소년과 트레이너 둘뿐이다. 팔짱을 낀 트레이너는 냉막한 남자였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자세가 사뭇 위압적이다. 소년은 지쳐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트레이너의 눈치를 보며 계속해서 달린다. 아직 시간이 덜 된 모양이다. 인터벌로 15분이 체감상으론 너무나 길다. 내키지 않는 운동이었다. 내킬 수가 없는 운동이었다. 손목시계가 삑삑 울었다. 트레이너가 정지 사인을 준다. "그만. 다음으로 이동." 하악, 하악. 정지한 러닝머신 손잡이를 붙들고 엎드린 소년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이마에서 턱까지 굴러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꼭 눈물처럼 보였다. 요즘 들어 울적할 때가 많은 소년이다. 자신이 정말로 우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한참을 달리다가 정지한 탓에 땅이 계속 움직이는 것 같다. 뜸들이고 있으려니 트레이너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으로 이동!" 거의 옛 군대 수준의 강압이다. 군대를 징병제로 유지할 때의 군대가 딱 이런 분위기였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모병제로 바뀐 지 오래이니, 아버지도 결국 전해들은 이야기겠지만. 무산소 운동과 유산소 운동의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언뜻 거칠어보여도, 전신에 센서를 달아놓고 강약을 조절하여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없다. 당장 이 곳에 같이 있는 건 트레이너뿐이지만, 벽 하나 너머에서 의료진이 모니터를 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귀에 꽂은 리시버로 그들의 말을 듣는다. 러닝머신을 달릴 때도 최대심박수의 85%를 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되었다. 하나 뿐인 상품에 흠이 생기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상품은 물론 소년의 몸이다. 운동으로 몸을 만드는 작업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 거래에 관여한 모두는 거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을 때 추가 보상을 받으며, 트레이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담당하는 「상품관리」의 마지막 날이라, 표정변화는 없어도 행동에 미세한 흔들림이 있다. 긴장한 것일까. 소년은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못 본 건 아닐 터였다. 그 가운데 자신을 향한 동정이나 호감, 염려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상품을 보는 눈이다. 거래가 결정된 이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부모님마저도 소년을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것 같아 슬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 중에선 누구도 그러지 않길 바랐는데. 내가 누굴 위해서 이 희생을 하는 건데....... 그래서일까, 소년은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온기를 찾고 있다. 없다. 아직까지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상품관리 담당 중 그래도 가장 오래 본 축에 속하는 사람이 트레이너다. 적어도 헤어지는 날에는 다른 모습을 기대했었다. 발작처럼, 느닷없이, 가슴 속에 응어리진 화가 열기를 뿜으려 했다. 어릴 때부터 종종 있던 일이다. 소년은 생각을 비웠다. 심장 언저리에서 덜걱거리며 굴러다니던 억눌린 감정은 의식의 침묵이 불러온 고요의 물결에 잠긴다. 가라앉는다. 마지막 단련이 끝났을 때, 소년이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트레이너가 짧게 답했다. "관리 잘해라. 비싼 몸이니." "...네." 그래도 마지막엔 웃는 얼굴로 기억되기를. 내 몸이 내 것으로서 타인의 눈에 보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릴 때부터 친구들의 호감을 샀던 좋은 미소를 지었다. 거울로 보면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싶은데, 어딘가 모르게 보통이 아니라고 한다. 트레이너가 움찔 반응했다. 유심히 살폈지만, 타인의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읽는 소년도 이 반응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눈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트레이너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결국 그는 이름도 모르고 헤어진 사람이 되었다. 이름이 참 중요한 건데. 경호원이 잔뜩 붙어, 의료진과 가족이 함께 머무는 집으로 돌아온다. 집. 전에 살던 집이 아니라 낯설다. 크고 높다. 차 굴러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누구보다도 먼저 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작은 몸집. 형을 좋아하는 남동생이 와 하고 달라붙는다. 아직 뭘 모를 나이다. "와아, 형이다! 히히!" 소년은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을 쑥 안아들었다. 아이가 깜짝 놀라며 좋아했다. 예전의 형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인데, 운동을 하면서 근력이 붙어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소년이 웃는다. "파랑아, 잘 있었지?" "응! 형 말대로 밥 많이 먹고 엄마랑 아빠랑 누나 말 잘 들으면서 형 기다렸지!" "그래, 착하구나." 뒤이어 나온 가족들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소년을 반겼다. 부모님은 죄지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도 그 그림자 너머에 기대감이 더욱 크게 보여, 소년에게는 부모님이 여러모로 서운하다. 누나는 안색이 어둡고, 조금 야윈 것도 같다. 소년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만 눈을 피했다. 소년이 느끼기에 마음은 고마운데 그래도 곧게 봐주었으면 싶다.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머리를 긁으며 다가온다. 소년보다도 더 소년 같은 모습이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래서 좋았던 점도 있었다. 친구 같았으니까. 친구마저 되지 못하는 아버지들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래도 지금은....... 사십 줄 소년이 어린 소년에게 말한다. "어서 오너라. 일주일...만인가? 운동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지?" "예.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우리가 무슨 일이 있었겠니. 네가 가장 중요하지. 집안의 대들보 아니냐." "...그러네요." 그 뒤로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서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기에 짓눌리듯이, 아니면 이런 분위기를 참기 어려운 것처럼, 어머니가 대신 나선다. 손을 내밀었다. "같이 식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들어오렴." 내민 손을 잡고 들어가면서 한 번 더 누나 쪽으로 눈길을 향한다. 역시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눈시울이 붉은 것은 알겠다. 소년은 울적해졌다.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드러내면 누나가 정말로 울어버릴 테니까. 누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을 한가을이라 했다. 소년은 겨울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이 한겨울이 되었다. 막내는 여름에 낳았는데, 하늘이 파랗기에 파랑이라 지었단다. 각각의 이유를 들었을 땐 이름 짓기 참 편하구나 싶었다. 그래도 누나와 동생 이름은 예뻤다. 겨울은 차갑다. 외로운 느낌이라 싫었다. 지나간 이야기다. 기다렸다는 말처럼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단은 달랐다. 소년, 겨울의 몫이 따로 준비되어있다. 운동으로 몸을 만들었으니, 이후로는 식이요법으로 몸의 상태를 조절하고 내적 균형을 맞추는데 주력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머무는 의료진의 업무가 그것이었다. 앞으로 거래 당일까지 같이 숙식하면서 소년의 식단과 생활습관을 관리한다. 그나마 운동할 때처럼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을 만나는 건 아니니 다행이다. 지난 4개월에 걸쳐 주일에만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누나, 가을의 낯빛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어릴 땐 장미처럼 화사했는데, 자라면서 가시가 돋더니 이제 꽃이 시들어버린 것 같았다. 나이가 찬 이후 집안의 요리는 가을이 도맡았다. 어머니보다 솜씨가 좋았다. 주에 한 번 볼 때마다 성찬을 차려준 것도 가을이었다. 의료진은 가을의 요리 자체를 막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성분을 분석하여 겨울이 먹을 양을 제한했다. 벌판에 눈 내릴 때 태어난 소년은 그래도 좋았다. 앞으로 보름, 거래가 성사되는 날까지 매일 가족을 볼 수 있다. 식사가 끝난 뒤, 의료진은 소년의 혈액을 채취했다. 흘끔. 그들이 들고 있는 태블릿의 검사항목을 본다. 사실 봐도 모르겠다. Hematocrit, 정상. MCV, 정상. MCH, 정상. VDRL, 음성. 혈중 칼슘, 정상....... 뭐, 다 음성, 정상이라니까 나쁜 건 없겠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대화를 원했지만 긴 대화는 힘들었다. 부모님은 시선이 자꾸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니 자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가보다. 하기야 이 거래는 불법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아들의 몸을 파는 장사니까. 겨울 소년이 이런저런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는데, 이럴 때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아버지가 폭탄을 터트렸다. "꼭 나쁜 일은 아니지. 65세 이전에 사후보험 혜택을 받으려고 보험사기를 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상현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니? 넌 앞으로 뇌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놀기만 할 테니 또래 친구들이 알았다간 부러워 죽으려고 할 거다. 무엇보다 공부도 안하고 대학입시 안 쳐도 되잖아?" 겨울 소년은 가까스로 웃었는데, 가을 누이는 아니었다. 겨울의 누나는 무섭게 화를 냈다. "아빠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다시는 손잡을 수 없고, 다시는 안아줄 수 없다고요! 평생 놀기만 해서 좋겠다고요? 왜요? 그럼 그냥 아빠 몸을 파세요!" "가을아!"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무란다기보다는, 지켜보는 의료진 시선이 신경 쓰이니 자제하라는 눈치였다. 가을은 볼이 도드라지게 이를 악물더니, 눈물 영글어 아롱거리는 눈으로 겨울에 얻은 동생을 보고는, 식기를 놓고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떨어진 눈물이 꽃잎 같았다. 아버지는 괜찮아 괜찮아 하며 얼버무린다. 괜찮지 않은 것을 안다. 화가 났을 때 보이는 신체적 신호가 몇 가지 눈에 띄었다. 도대체 화를 낼 자격이나 있는지. 심장 근처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혼자만 듣는 소리다. 겨울에 태어난 소년은 어린 시절을 춥게 보냈다. 정신적인 의미로. 그가 남의 마음 헤아리기에 능한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사랑 받고 싶었고, 헤아리지 않아 아플 때 많았으니. 아버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충동적이다. 아이와 친구가 될 순 있어도, 아이처럼 쉽게 화내고 지치고 토라지는 사람이다. 존경 받을 부모의 재목은 아니었다. 여유로울 때 좋은 아버지가 되겠지만, 빈곤할 땐 가족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한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파랑이에게 그 시험은 지나치게 가혹할 것이다. 지금도 놀라 눈만 좌우로 굴리고 있다. 안쓰럽다.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겨울의 눈치를 보는 까닭이다. 혹시나 아들의 마음이 바뀔까봐, 거래에 대한 본인의 동의를 철회할까봐. 전신이식.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땐 목 아래의 몸 전체를 이식하는 수술을 뜻했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뇌와 척수, 즉 사상부만 이식하는 수술로 의미가 조금 바뀌었다. 미성년자의 신체를 전신이식에 사용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뇌사판정을 받고 1개월 이상 경과해야만 가능하다. 합법적으로 등록된 의료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이식을 신청한 국민을 대상으로, 신청 순서에 따라, 거부반응 시험을 거쳐, 의료수가표의 전신이식 항목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처리되어야 합법이다. 그러므로 멀쩡한 겨울의 몸을 거래하는 건 불법이었다. 재미있는 건 어차피 불법인데도 불구하고, 혜성그룹 회장이 신체제공자 본인의 동의를 반드시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상도덕이라 했다. 법을 어기는 건 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란다. 즉 그는 법은 존중하지 않으면서 나름의 상도덕은 철석같이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화를 내고 싶은데 내지 못하는 아버지는 말을 다듬기 어려워했다. 고운 말을 꺼내려면 쏟아지려는 속을 몇 번쯤 걸러야 할 것이다. 충동적인 사람에겐 까다로운 작업이다. "저기, 얘야. 이런 걸로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거 알지? 어, 음....... 네가 혹시나 무책임하게 굴면...가족 모두 꽤 난처해지거든." 무책임? 겨울은 속으로 조용히 수를 헤아렸다. 참는 버릇이었다. 모난 돌 하나가 가슴 가득 굴러다니는 기분.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잦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응어리, 겨울 자신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을 거다. 눈 감고 눈 내리는 풍경을 떠올린다. 쓸쓸함이 화를 잡아먹도록. 동요가 가라앉은 뒤 겨울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한 마디 남기고 겨울은 식사에 열중했다. 그냥 두고 누이에게 가고 싶은데, 이런 상황에서도 무표정하게 식사를 감독하는 의료진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계약사항 준수에 해당한다. 주어진 몫은 먹어야 했다. 생각을 바꿔보자. 가을 누나의 요리야. 맛있어. 먹어볼 기회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아.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양치와 가글, 샤워도 계약으로 규정된 의무다.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관리할 것. 모두 마치고 나서야 파랑이와 함께 가을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을은 쓸쓸하게 울고 있었다. 파랑이가 누나와 형을 번갈아보며 글썽글썽 하고 있다. 남이 울면 저도 우는 나이다. 겨울이 뭐라고 달래기 전에 가을이 먼저 막내를 끌어당겼다. 손수건으로 눈물 다 닦고서 이제 괜찮다고 한다. "잠시 아파서 그랬어. 이제 다 나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누나 이제 안 아파?" "응, 정말로." "히히." 파랑이가 귀엽게 웃는다. 누나 방인데 침대가 둘이다. 파랑이가 여기서 곧잘 같이 잔다는 모양이었다. 물론 파랑이 방에도 침대가 있다. 계약금으로 받은 돈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제 곧 잔금을 받을 텐데 뭐 어떠냐고 생각해서 또 샀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난한 생활에 익숙한 겨울의 입장에서 돈을 이렇게 써도 되나 싶다. 내색은 하지 않는다. 말하면 분위기 흐려질 까봐. 역시나 심장 가까이에서 덜걱거리는 환청이 들린다. 이번엔 그리 크지 않다. 파랑이는 어려서 먹고 나면 졸릴 때였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웃던 아이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가을은 물러나 자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시선은 겨울을 향한다. 눈을 마주친다. 오늘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그 눈에서, 곧바로 눈물이 쏟아졌다. 소년은 크게 당황했다. "누나, 왜 그래......." 옆에 앉아 눈물을 닦아주려 했더니, 가을이 그 손을 붙잡고 서럽게 운다. 소리 죽여서. 덜덜 떨리는 상체가 기울어, 정수리를 겨울의 가슴팍에 댄 형상이 되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어깨. 겨울은 가만히 끌어안았다. 툭, 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설움. 슬프지만, 결핍되어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는...다른 사람들에게서 열심히 찾았으나 결국은 없었던, 사람의 온기. 누이의 젖은 목소리가 흘렀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겨울이 너......." "괜찮아. 통화도 가능하고, 안치소에 오면 로비에서 만날 수도 있는걸." "......." 가을은 마주 안는 두 팔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취침시간입니다. 나오세요." 의료진 중 한 명, 간호사의 목소리. 사무적이다. 겨울 소년의 가슴 속에 다시금 모난 돌이 사무쳤다. # 6 [6화] #Intermission, 기술과 능력 「종말 이후」의 세계관에서 당신이 강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기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지식과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을 습득하면 해당 기술에 관련된 기초능력에 상승보정이 발생합니다. 기술습득과 상승보정은 때로 비현실적입니다. 비현실적으로 쉽고 비현실적으로 강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려운 게임에 지친 사람에겐 쉬운 게임도 필요하니까요. 인생은 너무 어렵습니다. #물자조달 (4), 샌 미구엘 샌 미구엘 제분소는 꽤 오래 전에 지어졌을 법한 목제 건축물이었으나, 면적이 굉장히 넓었다. 어지간한 가정집 서른 채를 집어넣어도 남을 만큼. 왼편으로 철길이 지나갔다. 덕분에 마을 중심부인데도 남북 방향으로는 시야가 탁 트여있었다. 건널목에서 경계를 맡을 사람을 뽑는다고 하니 더플 백을 적당히 채운 난민들이 앞 다퉈 지원했다. 위험한 건물 수색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학생쯤 되었을 법한 건장한 청년 하나, 배 좀 나온 중년인 하나가 뽑혔다. 엘리엇 상병은 나머지를 이끌고 제분소 우측으로 돌았다. 문이 네 개나 된다. 사무실 입구 외에도 차량 적재용 화물출입구가 세 개. 화물 운송에 쓰였을 세미 트레일러 차량 하나가 방치되어있는 게 보였다. 겨울이 운전석 문을 당겼다. 잠겨있었다. 제분소의 모든 입구는 활짝 열린 채였다. 내부 조명이 없어, 각각의 문은 뻥 뚫린 어두운 구멍이었다. 난민들에게 지급된 장비 중엔 랜턴이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계획 단계에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랜턴이 있었던들 누구도 먼저 들어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 소년을 제외하면. 앞서 소방서가 그랬던 것처럼, 사무실에 차량 열쇠가 있을지도 몰랐다. 망설이지 않고 들어가려는 겨울을 귈레미 일병이 붙들었다. "이번에도 앞장서려고? 같이 들어갈까?" "아뇨. 인솔자는 중요하니까요. 랜턴만 빌려주세요." "후-아.(Hoooah/HUA : Heard, Understood, Acknowledge.) 병사는 소년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자신의 손전등을 내주었다. 직각으로 꺾인 전술 랜턴. 방탄복 겉면에 결속할 수 있다. 미군의 피해를 막아보겠다고 난민 지원자를 받긴 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난민 중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해도 좋을 것이 없다. 그러나 지원자들이 워낙 소극적이어야지. 병사들은 소년이 어디까지 해내는지 지켜볼 요량이었다. 겨울은 총을 여전히 등 뒤로 메고, 정글도 한 자루만 단단히 쥔 채 사무실 입구로 다가섰다. 들어서자마자 층계를 오르는 구조. 폭은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이고, 서너 계단 위로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소방서에서처럼, 소년은 정글도 칼등으로 벽을 통통 두드렸다. 소리에 반응하는 감염변종이 있다면 듣고 기어 나오라는 의도였다. 몇 차례 두들기니 과연, 위쪽에서 계단 밟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겹치지 않는 걸 보니 고작 하나. 겨울은 일부러 랜턴을 켜지 않고 층계를 올랐다. 냄새와 기척만 가지고 승부를 볼 셈이었다. 끼이익, 끼익. 계단 오르는 소리와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앞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조롭고 음산한 잡음이 깔렸다. 두렵지 않으나 심장이 뛴다. 뛴다고 느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감각. 시스템이 그래야 한다고 판단한 탓이다. 시청자 메시지 도착 알림이 폭증했다. 감염변종은 숨 쉬는 소리가 거칠었다. 악취는 썩은 피부에서 나는 것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병원체가 숙주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 이상이 발생한다. 그 탓에 광범위한 염증이 생기고 썩거나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기도(氣道)가 좁아져 숨소리도 날카롭게 변한다. 불쾌한 냄새와 소리가 다가왔다. 겨울은 어느 순간, 칼 없는 쪽 손을 대담하게 뻗었다. 뭔가 잡혔다. "끄에에엑-!" 성대를 갈아대는 괴성. 소년은 몸을 낮춰 대상의 하체를 밀어 올렸다. 튀는 침 섞인 거친 숨이 목덜미 뒤로 넘어간다. 콰당탕! 「감각동기화」를 켜두고 있던 시청자들은 기가 질렸을 것이다. 의도한 바다. 랜턴을 켰다. 엎어져서 발광하던 변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변이되었다곤 해도 모체는 인간. 광적응 능력이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크아아아 하는 입에 칼을 콱 쑤셔 박았다. 반사적으로 닫힌 입이 칼날을 딱딱 물어댔으나 개의치 않았다. 손잡이에 체중을 싣는다. 으직, 으지직- 이리저리 힘주어 비트는 칼끝에서 뇌줄기(腦幹)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명에 비춰진 변종의 사지가 발작을 일으키다가, 뻣뻣하게 굳었다가, 축 늘어져서 움찔거렸다. 그 와중에도 눈알을 굴려 소년을 노려본다. 그러나 이미 운동능력을 상실했으니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정지했으니 잠시 후면 죽을 것이었다. 늘어진 변종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내려온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총을 겨누었지만, 쏘지 말라는 뜻으로 펼친 손 내민 소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종 사체를 입구 옆에 팽개쳐두고, 소년은 다시 층계를 올랐다. 이번엔 방해물이 없었다. 사무실 조명은 스위치가 듣지 않았다. 랜턴 조명에 의지해서 사무실을 뒤졌다. 역시 미국이라고 해야 할까, 서랍에서 낡은 권총 하나가 잡혔다. 포장지에 45 ACP FMJ라고 적힌 50발들이 작은 탄약 상자 두 개, 예비 탄창 하나가 같이 들어있었다. 그 외에 목표 삼았던 차량 열쇠와 곡물 사일로 열쇠를 찾았다. 궐련상자(휴미더)도 있었다. 혹시나 귈레미나 엘리엇이 좋아할까 싶어 같이 챙겼다. 계단을 내려오니 귈레미가 다가왔다. "혹시 물린 곳 있나?" 방독면 전성판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는 답답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젓고 두 팔을 벌려보였다.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일병은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뒤를 향해 엄지를 세워보였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엘리엇 상병이 고개를 끄덕인다. "귈레미, 담배 좋아해요?" "물론. 오, 맙소사. 코히바 로부스토잖아?" "엘리엇이랑 반씩 나누세요." 소년은 기뻐하는 병사에게 상자 째로 넘겨주었다. 쿠바 산 수제 시가의 가격은 대당 10달러 이상이다. 그런 것을 뭉치로 받았으니 좋아할 법 했다. 일병은 당장 피우고 싶은 눈치였다. "열쇠를 찾았는데, 차량을 확인해 봐도 될까요?" 사소한 일이지만 허락은 구해야 한다. 병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차량으로 가서 열쇠가 맞는지 확인해보았다. 문이 열린다. 운전석에 앉았다. 꽂고 돌리니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바르르 떨리는 차체. 엔진소음이 발생하니, 경계를 맡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연료 잔량은 충분했다. 운전하는 법은 대충 알고 있어서, 경험치를 운전기술에 투자하지 않아도 차를 움직일 순 있었다. 물론 시스템 보조를 받으면 보다 고난도의 주행이 가능했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차를 제분소 중간의 화물용 출입구(Loading Dock)에 대어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없어도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양철 슬레이트 지붕 틈새로 새어드는 햇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어둡긴 매한가지로, 곳곳에 응달이 고였다.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뻣뻣하게 굳어 도통 움직이질 못했다. 패턴은 동일했다. 곡물 사일로를 탕탕 두들겨서 기척이 있는지 확인했다. 잠시 기다렸으나 조용했다. 겨울이 이리저리 빛을 비추고 다니며 안전을 확인했다. 정말 없네. 드문 일이다. 그래도 방심하긴 어렵다. 귀가 썩었거나 고막이 찢어진 변종도 있을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익. 이거 정말 엄청나군." 엘리엇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분된 밀과 옥수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여기 있는 것만 다 챙겨가도 당분간 식량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다. 의례적인 위생검사는 거쳐야겠지만, 거의 의미가 없다. 쓰고 있는 방독면도 실은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만약 정말 병원체를 걱정했다면, 전신 방호복을 입었어야 한다. 사소한 위험은 무시할 만큼 미국 서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겨울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다른 방향에 있었다. 제분소에서는 종자거래도 이루어지는데, 여러 작물의 종자가 자루 단위로 포장되어 한 쪽에 쌓여있었던 것. 이런 종자를 가져다가 농사를 지으면 될 것 같지만, 여기에 굉장한 함정이 있었다. 모 종자회사 상표가 부착된 자루의 씨앗은 수확한 뒤 다시 파종하면 발아(發芽)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터미네이터 종자라고 한다. 종자회사는 우수한 품종의 씨앗을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데, 농부들이 매해 씨앗을 구입하지 않으면 회사 운영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예 유전자를 조작해서 수확한 작물을 다시 파종해도 싹이 트지 않도록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겨울은 한 번의 배드 엔딩을 경험했었다. 관련 도전과제까지 있다. 「도전과제 : 안 돼, 내 작물이 고자라니!」 나름 안정된 기반의 공동체를 건설했던 소년에겐 날벼락 같은 파국이었다. 2년째의 수확이 제로에 가까웠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도자인 겨울을 규탄했고, 식량부족이 부른 공황으로 인해 공동체 자체가 붕괴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소년은 살해당했고. 그러고 보니 이걸 시청자들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소년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시청자 메시지 로그를 불러왔다. 이럴 때마다 세계관의 현실감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현실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몰입할 수가 없었다. 세계관을 일시 정지시켜둔 상태로 「텔레타이프」 기능을 활성화한다. 겨울이 집중하는 모든 생각이 즉각 문장으로 변환되었다. 「한겨울 : 종말 이후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실수하기 쉬운데, 이런 곳에서 발견되는 종자를 함부로 파종하면 안 됩니다. 종자 대부분은 유전자 조작이 되어있거든요. 수확량은 많지만 이듬해 다시 파종할 경우 싹이 나지 않아요. 실제로 당하면 공동체 안정성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게임을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상표가 없는 자루를 고르셔서 농사를 지으시거나, 아니면 이런 종자를 사전에 충분히 확보해두고 반복해서 쓰는 편이 나아요. 도전과제 「안 돼, 내 작물이 고자라니!」 달성을 원하신다면 한 번쯤 일부러 배드 엔딩을 봐도 괜찮겠지만, 도전과제의 효과는 작물재배시 병충해와 가뭄 저항력을 좀 올려주는 정도니까 그렇게 유용하지 않아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ㄹㅇㅇㅈ : 쓸데없는데서 현실고증 끝내줌 ㅋㅋㅋ」 「이슬악어 : 고자 ㅋㅋㅋ 내 작물이 고자래 ㅋㅋㅋㅋㅋ 약맛 제대로넼ㅋㅋㅋ」 「제시카정규직 : 나도 이거 앎. 다국적 종자회사 씹새끼들이 후진국 털어먹는 수법임. 특히 몬X토 씨발 개씨발 새끼들임. 우리나라도 얘들한테 청양고추랑 시금치 종자 빼앗겼는데 종자 특허 아직 수십 년 남았음. 너네가 먹는 국산 시금치 사실 전부 미국 OEM 상품임. 아, 판사님. 이 글은 우리 집 고양이가 적었습니다.」 「반닼홈 : 지금 방송 진행자 보고 있는 거지? 야, 아까 개쩔었음ㅋ 좀비새끼 잡아서 목 뒤로 넘길 때 촉감 으아 씨발 지리겠더라 ㅋㅋ 별 받아라 임마」 [반닼홈님이 별 1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진한개 : 제시카 설명충 새끼 아는 거 나와서 좋겠다?」 「제시카정규직 : 왜 시비임 미친놈이.」 「눈밭여우 : 여러분 싸우지 마세요.」 [눈밭여우님이 별 1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팥고물 : 여우년 왜 말림? 재밌는데. 잘 한다, 더 해라.」 하나하나 눈여겨 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메시지들이 휙휙 올라가는 간다. 소년은 자신이 얻은 가상화폐 「별」의 개수를 헤아렸다. 원화로 환산하면 몇 만원 남짓할 금액이 쌓여있었다. 어째서인지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그는 로그를 닫고 일시정지를 풀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방에 수북한 식량을 확인하고 안색이 밝아진 엘리엇이 무전으로 본대와 교신하고 있었다. 도로를 치워두었으니 트럭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귈레미 일병은 난민들로 하여금 독(Dock)에 대어놓은 세미 트레일러에 식량을 싣도록 지시했다. 소년이 가세하려하자 귈레미가 한쪽 눈 찡긋 감으며 붙잡았다. "용감한 친구는 잠시 쉬라고. 지금까지 혼자 고생 많았잖아?" "...네." 겨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불편한 감정이 여백으로 드러났다. 바깥에서 차량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민간 차량과는 달리 전면이 각 지도록 튀어나온 군용 수송트럭 4대였다. 선임 탑승자는 하루 전 캠프에서 지원자들을 걸러내던 흑인 상사. 이름은 피어스라고 했다. 그는 트럭을 다 채우고도 남을 밀가루 등을 보고 크게 기꺼워했다. "취사병 놈들을 더 부려먹을 수 있겠군." 그러나 좋은 분위기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북쪽 먼 곳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그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확인해봐." 상사의 지시에 따라 엘리엇 상병이 건널목에서 경계를 서고 있을 지원자들에게 무전을 넣었다. 혹시 북쪽에서 뭔가 보이는 게 있느냐고. 기차 화물칸 적재를 위해 열려있는 북쪽 출구는 곡물 사일로와 녹슨 급수탑, 크레인 따위가 널려있어서 시야확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가오는 재앙의 전조는 시야보다 소리로 먼저 명확해졌다. 철컹거리는 소음은 명백히 열차가 철궤를 짓밟는 소리였다. 열차운행이 이미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알고 있는 병사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마을 내로 들어오는 철길 중간에 방치되어있는 다수의 차량들이었다. 열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해왔다. 무전을 통해 이를 알게 된 상병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염병할." 그가 뒤돌아 달리며 마구 소리쳤다. "모두 나가! 여긴 위험해!" 제분소 내부가 삽시간에 비명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열차의 접근을 느낄 수 있었다. 콰앙- 콰지직- 필시 열차가 버려진 차량을 들이받는 소리일 터. 혹여 차량이 바퀴 아래 깔리면 열차는 탈선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비뚤어진 기관차가 북쪽 벽을 박살내며 들어왔다. 불붙은 강철 덩어리는 기둥을 부수고 사일로를 밀면서 굴러온다.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기관차는 나무더미에 파묻히며 정지했지만, 여파로 건물이 붕괴할 조짐을 보였다. 겨울은 가까스로 바깥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잔해에 깔려버렸다. "잔해를 들어내! 깔린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무사히 빠져나온 피어스 상사가 먼지와 파편을 뒤집어쓴 몰골로 목소리를 높였다. 목재로 지어진 건물이고, 단층이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상사님! 저기 좀 보십시오!" 병사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지그재그로 꺾이며 뒤집어진 객차들이 있었다. 문과 창문들로부터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이 기어 나왔다. 객차가 구를 때 바깥으로 퉁겨진 사람들도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병사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들이 거의 동시에 이쪽을 보았다. "끄으어어어어!" "씨발! 변종이잖아!" 한둘이 아니었다. 열차에 한가득 채워져 있었는지, 시체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 어딘가 부러지지 않은 것들은 이미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상태. 가장 빠른 놈은 벌써 트럭 후미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다 죽여!" 상사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난민 지원자들 대다수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두려움을 버티고 선 자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두두두두둑- 소음기 달린 총이 답답하게 울었다. 총탄을 아낀다는 개념은 없었다. 모두가 연사로 놓고 미친 듯이 갈겼다. 차량에 올라타려던 놈의 몸 곳곳이 마구 폭발했다. 머리가 터지고, 눈알이 깨지고, 가슴에서 퍽퍽 피가 튀었다. 분배되지 않은 화력은 명백한 낭비다. 소년에게도 배고픈 변종 다수가 달려들었다. 몸에 총알이 박혀도 아픈 줄 모르는 놈들이라, 겨울은 그들의 무릎 높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좌에서 우로, 툭툭 끊어가면서. 탄창 하나를 5초 만에 비웠다. 허벅지만 맞아도 좋았고, 무릎이나 정강이뼈가 부서지면 더더욱 좋았다. "끄엑!" 넘어진 것들이 버둥거린다. 기어온다. 탄창을 갈면서 전진, 군홧발로 뒷목을 찍어 으스러뜨렸다. 총을 두 손으로 단단히 거머쥐었다. 뒤이어 달려오던 변종의 턱을 대각선으로 후려친다. 기술보정을 받아, 변종의 턱이 완전히 부서졌다. 홱 넘어가는 머리. 몸은 머리를 따른다. 바싹 붙어오던 다른 놈의 발이 엉켰다. 걷어차서 쓰러트렸다. 이어서 사격. "수류탄! 있는 대로 다 던져!" 차량 방향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바라보니 몇 개의 수류탄이 이미 던져진 뒤였다. 소년은 급하게 물러나며 바닥에 몸을 던졌다. 쾅! 콰쾅! 콰앙! 엄청난 소음에 비해 폭발 자체는 작고 볼품없었다. 번쩍거리는 섬광 몇 번에 연기가 조금 뿌려질 뿐. 영화처럼 엄청난 화염이 치솟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년이 수류탄에 맞아 죽어봐서 아는데, 겉으로 보이는 섬광은 수류탄의 진정한 살상범위에 비해 정말 별것 아니었다. 파편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는 무기다. 동그란 껍데기 안에 코일이나 쇠구슬 따위를 우겨넣고 터트리는 폭탄이며, 직경 30미터의 원 안에 있는 인간은 절반 이상의 확률로 죽는다. 바깥이어도 절반 이하의 확률로 죽을 수 있다. 변종들이 태풍에 휩쓸린 잔가지처럼 마구 나뒹굴었다. 도로가 한 순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때맞춰 엎드린 사람들은 무사했다. 수류탄이 바닥에서 터지면, 충격파가 지면에 부딪혀 반사된다. 따라서 낮은 각도의 비살상영역이 만들어진다. 살상범위 이내에서라도, 바깥쪽이라면 엎드린 사람은 다칠 확률이 크게 줄어드는 것이다. 하물며 겨울은 영향권 바깥에 있었다. 시차를 두고 던져진 수류탄이 연달아 폭발하는 중이다. 함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데, 온 몸이 너덜거리는 감염체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누운 자세로 배 위에 총을 얹고, 방아쇠를 당겼다. 불안정한 자세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조준 탓에, 초탄으로 머리를 맞추지 못했다. 어깨가 퍽 튀고 피로 물들었다. 두 번째 사격이 안구를 깨고 들어갔다. 머리가 툭 떨어진다. 담백한 죽음이었다. 죽은 변종에 올라타듯 새로운 놈이 나타났다. 앞서 오던 놈에 가려져서 거리가 가까웠다. 방아쇠를 당기는데 격발이 되지 않았다. 탄창이 비었을 리는 없고, 불발이거나 탄이 걸린 것 같았다. 소년은 몸을 옆으로 굴리며 대검을 뽑았다. 구르는 기세 그대로, 크악 입을 벌리는 놈의 정수리에 칼을 내리 찍는다. 죽은피가 찍 튀었다. 변종이 경련을 일으켰다. 수십 번의 폭발이 지나갔다. 몸을 가누어 일어서는 소년. 변종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파편 맞기 전까지는 어디 아프거나 미친 것처럼 보였어도 사람 같긴 했는데, 지금은 명백히 괴물 같은 몰골이었다. 내장을 줄줄 흘리는 놈, 부러진 다리로 걷는 놈, 피부가 벗겨져 근육이 드러난 놈. 피범벅이 되어 그냥 두어도 과다출혈로 죽을 것처럼 생겼다. 소년이 보기엔 경험치를 얻을 기회다. 일어설 수 있어도 눈이 파열되었거나, 고막이 찢어져 소리를 못 듣거나,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놈들 투성이었다. 스스로의 정신상태가 걱정스럽다. 소년은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이것들을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폭력, 그럼에도 마음이 묵직해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총으로 쏘는 것도 좋다. 허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냄새를 맡으면서, 칼로 찌르고 둔기로 짓뭉개는 쪽을 더 선호하게 된다. 칼로 머리를 찍을 때, 바각! 두개골 부서지는 소리를 손끝으로 듣는 그 순간, 가슴 속에 굴러다니던 모난 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탁 풀리는 해방감. 어딘가 서러운 충족감.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을 살해하는 그 순간에, 소년은 스스로를 잊을 만큼 몰입할 수 있었다. 머리가 조금 멍해졌다. 겨울은 손목의 스냅으로 정글도를 한 바퀴 돌리며, 비척거리는 놈들에게 다가갔다. 미군이 총을 쏘아 정리하는 소리도 어딘가 먼 곳의 잔향처럼 느껴졌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날을 횡으로 그었다. 목 따인 감염체가 쓰러진다. 내장을 흘리며 기어오는 놈을 침착하게 찍어 침묵시킨다. 숨을 잊을 만큼 집중하게 된다. 한 놈 더 다가왔다. 빠악. 대각선으로 휘두른 칼이 관자놀이에서 뺨까지 찢어버린다. 충격으로 턱이 빠진 모양이다. 드러난 목구멍에 칼을 쑤셔 박았다. 늘어지기 전에 뽑는다. 걷어찬다.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었다. 어느덧 소년은 감염변종들의 유해 수백 구 사이에 홀로 서있다. 난민 지원자 치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소년뿐이다. 무아지경. 워낙 무섭게 날뛰었다. 미군 병사들은 질린 기색이었다. 호감도가 조금 감소하는 병사도 있었고, 증가하는 병사도 있었다. 성향에 따라 가지각색의 반응들이 시스템 메시지 로그에 추가되었다. 겨울은 칼을 갈무리하고서 총을 점검했다. 탁탁 두들기고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니 걸려있던 탄이 툭 튀어나와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금속성 소음이 맑게 울린다. 노리쇠가 씹어서 못생겨진 불발탄이었다. "뭘 그리 넋 놓고 있나! 매몰된 사람을 구해야 할 거 아냐! 작업 시작해! 라미레즈, 너네 애들 챙겨서 경계로 돌려!" 피어스 상사가 목청을 돋웠다. 새로운 차량들이 속속 도착했다. 교전사실을 알고 즉각 지원하겠다고 달려온 원군이었다. 반응속도는 빨랐는데, 수류탄을 동원한 교전이 그 이상으로 빠르게 끝나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 7 [7화] #Intermission, 로딩 페이지 설명 접속자가 시간가속 기능을 사용하거나 퀘스트 진행에 따라 시간상의 단락이 발생할 경우 상황연산을 위한 로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로딩 화면에서는 관제 AI 또는 제작진이 접속자에게 남긴 조언이나 게임 시스템에 대한 설명, 상황이해를 돕는 단서, DLC 및 부가상품 광고 등 다양한 정보가 제공됩니다. 이를 「종말 이후」에서는 인터미션(Intermission)이라 합니다. #Intermission, 저널과 시간가속 저널은 접속자의 진행상황과 배경을 기록하고 전달해주는 매체입니다. 접속자는 「감각동기화」를 통해 저널의 주요내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시간가속 기능을 사용했을 경우에도 그 사이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이 저널로서 기록되며, 때로는 접속자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전달하고, 간과하고 지나간 중요한 정보를 다시 보여주기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저널은 기록이기 때문에 다시 보기가 가능합니다. 관련된 상황에서 실시간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 이는 접속자의 역량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내 모든 요소는 접속자의 역량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자동진행을 위한 시간가속은 세계관 내 시간이 실제시간과 동일하게 흐르는 풀 스케일 가상현실 세계관에서 게임 진행을 위해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만약 시간가속에 의한 자동진행 내용 중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최초 1회 한정으로 해당 시점에서 게임을 재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수동진행으로 시작되며, 일정 시간 동안 시간가속 기능이 비활성화 됩니다. 따라서 본래의 결과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가속을 이용할 때 저널기록을 담당하는 가상인격은 전회차에 수집된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학습합니다. 따라서 가상인격은 「종말 이후」를 경험한 회수가 늘어날수록 당신을 닮아갑니다. 통상적으로 10회차 이상의 데이터가 누적되었을 때, 가상인격은 당신과 거의 유사한 행동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다 원활한 진행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저널, 29페이지, 캠프 로버츠 첫 번째 물자조달 임무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식량과 난방, 방한용품, 그리고 연료를 확보한다는 과제는 충분히 달성했지만, 부상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완전한 성공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군이 난민 지원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교회로 파견되었던 쪽에서는 지원자들 간에 유혈극이 벌어졌다. 변종을 처치하고서, 물자를 나누는 비율을 두고 싸웠다. 변종을 죽인 사람이 공로를 따지며 모두 가지려 들자, 함께 갔던 다른 사람들이 뒤통수를 칼로 찍어 살해했다고 한다. 높아진 언성을 수상히 여긴 미군이 상처를 직접 확인하면서 이 참극이 드러났다. 캠프로 돌아왔을 때 총기를 밀반입하려던 지원자들도 있었다. 난민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면 미군 입장에선 난동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몸수색을 철저히 했는데, 적발되자 캠프에서 몸을 지켜야 한다며 애걸하는 자들이 많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덕분에 지원자들에 대한 믿음이 더더욱 내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내가 있었던 제분소에선 다수의 미군 병사들이 건물에 매몰되어 다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 대들보에 깔려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이 가장 심한 중상자였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군 병사가 아니라 난민 지원자였다. 병사들은 대개 전치 1개월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사실 난데없이 출현한 열차와 탈선사고를 누구의 잘못으로 돌리긴 어렵겠으나, 그 직후 쏟아져 나온 변종을 상대로 지원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 문제였다. 유일하게 맞서 싸운 나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상승했지만, 지원자들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병사들이 새로운 물자조달 임무 수행을 거부했다.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을 검토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캠프 사령부는 여기에 긍정적이었다.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병사 중 일부가 나를 경계해야한다고 보고했던 모양이다. 로버트 캡스턴 중위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피어스 상사가 변호해주었다. "겁쟁이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중대장. 중요한 건 이 조그만 놈이 끝까지 남아서 싸웠고, 나는 이놈을 믿어도 좋다고 판단했다는 거지요." 보고가 어떻게 올라갔는지 몰라도, 이후 대대장 결정에 따라 나만 좋다면 나를 지원병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숙소도 미군 구역으로 바꾸어주고, 미군에게 주어질 복장과 장비를 비롯해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총기휴대는 금지되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우대를 받는 셈이었다. 부상자인 엘리엇 상병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다. "상부에서도 고민이 많아. 어쩌면 믿음직한 사람을 뽑아 미군에 편입시킬 가능성도 있어. 네가 지원병 취급을 받는 건 그 사전준비가 아닐까 싶은데. 나중엔 정규군이 될지도 모르지. 그럼 이병 기어우르가 되려나? 내 후임으로 들어오라고. 하하."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상병은 재미있어했다. "설마는 무슨. 미군만큼 이민자 출신이 많은 군대가 어디에 있다고. 귈레미도 시민권 때문에 입대한 녀석인걸. 미국은 지금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고, 캡스턴 중위님은 나한테도 전시임관 형식으로 장교나 부사관이 되라고 권유하고 있단 말이야. 그럼 당연히 병사가 부족해질 텐데, 다른 곳은 몰라도 고립된 이 캠프에서 병력자원을 어떻게 충당하겠어? 너 정도면 자격이 넘친다고 보는데." "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인류 멸망의 위기니까." 담담하면서도 무거운 대답이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혼자 쓰도록 배려 받은 텐트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누군가 짐을 뒤진 것이 분명했다. 사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을 가진 건 별로 없었으니 필시 배급표를 노렸을 것이었다. 샌 미구엘에 다녀온 대가로 받은 내 몫의 배급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각자 받은 양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도 당연히 내가 더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과를 떠나, 위험을 감수한 대가는 동일해야 한다고. 배급표는 품에 넣고 다녔기에 도난당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되면 안심하고 잘 수 없을 것 같다.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편입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AI 도움말 (통찰 6등급) : 당신은 첫 보급 임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지원병 신분으로의 편입을 제안 받았습니다. 제안을 수락할 경우 추후 미군으로부터 부여받는 임무를 거부하기 어렵게 되어 행동의 자유도가 감소합니다. 임무의 성격에 따라서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각 조직의 포섭시도가 자주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안을 거부할 경우 적대적인 랜덤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며, 「생존감각」을 포함하여 충분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신이 살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정을 내렸다. 망설이지 않고 로버트 캡스턴 중위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위는 내 결정을 환영해주고는, 피어스 상사에게 나를 부탁했다. 숙소를 정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대대장이 난민들을 모아놓고 나를 단상에 세웠다. 용감한 행동에 찬사를 보내며, 미군으로 편입한다는 발표였다. 요란하게 무대를 마련하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저널, 30페이지, 캠프 로버츠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관리자 취급으로 텐트를 혼자 쓰다가, 낯선 사람들과 동숙하게 되어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막사를 쓰는 미군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캠프 로버츠가 훈련 때에나 쓰이던 주방위군 시설이라 상당히 낙후되어있다고 한다. 최신식 막사에서는 보통 1인 1실, 많아도 3인 1실 정도를 쓰는 게 보통이라던가. 각 개인실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다 따로 구비되어있는 게 정상이란다. 그래도 막사가 구형이나마 수용능력에 한참 모자라는 인원이 쓰고 있어 공간이 많이 남았다. 커튼과 파티션을 동원해 임시로 쳐놓은 칸막이들이 인상적이었다. 개인공간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인가 보다. 비공식적이나마 지원병 신분이 되면서 기껏 받은 배급표가 무의미해졌다. 병사들이 디-팩(Dining Facility), 또는 쵸우 홀(Chow Hall)이라 부르는 병영식당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난민들에게 배식되는 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이마저도 미군 병사들 입장에선 맛없다고 불만이 나왔으나, 나는 맛있게 먹었다. 다만 짜고 느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치즈 요리가 많았는데, 마을에서 가져온 것 중 치즈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지원병으로서 받은 평시임무는 통상훈련과 한국인 난민구역 순찰이었다. 경찰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미군과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합동으로 치안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생색내기에 불과했고, 아무래도 같은 난민이라면 거부감도 적고 좀 더 세밀한 부분까지 살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을 추려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아무래도 엘리엇이 말했던 게 사실인 모양이다. 보급관에게서 복장을 수령했다. 짬을 내어 찾아온 캡스턴 중위로부터 방탄복을 항상 입고 다니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 출신 지원병이 다른 국적의 난민들에게 미움을 사기 십상일거라는 우려에서였다. 방탄복은 방검복과 다르지만, 난민들이 숨기고 있을 짤막한 흉기 따위 얼마든지 방어 가능하다는 말도 함께 해주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다. 물론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커트 대위라는 사람은 내가 전투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다. 대대장 지시로 예비 지원병이 되었다고 했더니 기도 차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그 안의 정신까지 바뀌는 건 아니지. 바나나 새끼가." 툭 뱉은 말이 꽤나 아팠다. 바나나, 겉은 노랗고 속이 하얀 이 과일은 백인 행세를 하려 드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본래 미군 내에서 인종차별은 강력한 금기였지만, 시국이 이렇다보니 노골적으로 저렇게 행동해도 항의하는 이가 없었다. 멸망해가는 세상은 사람을 많이 죽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애써 죽였던 많은 것들을 되살려냈다.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본인에게도 손해일 텐데. 유색인종 병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러다가 프래깅(상관 살해)을 당할지 모른다. 생각이 짧다. 난민구역으로 갔더니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일부의 태도가 바뀌어있었다. 아첨하거나 낯설어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경원시하는 사람들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직접 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당황하는 한편으로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날 더러 매국노란다. 성상납이나 받는 미군에게 알랑거리며 떡고물을 주워 먹더니, 이제는 미군 행세를 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한국인은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는 민족인데 넌 조직에 속하지 않았으니 욕먹어도 싸다고 마구 몰아붙였다. 어린놈이 간사하다고도 했다. 미군에게 가서 고자질이나 하라는데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부외자가 된 것 같았다. #과거 (2), 거래전야, 고아영 혜성그룹 고건철 회장은 손끝으로 빈 잔을 두드렸다. 술이 아쉽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 이후로 술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같이 피곤하다. 거래를 앞두고 일주일은 술을 멀리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판단 때문이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회장은 무시했다. "아버님, 저에요." 하나 뿐인 딸의 목소리. 짜증이 치밀었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날카롭게 외친다. "안다. 꺼져라." "......." 딸, 고아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걸 보고 회장은 만지작대던 유리잔을 집어던졌다. 확.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놀란 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넘어간 잔이 한참 뒤에서 깨진다. 쨍그랑. 파편 흩어지는 자잘한 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를 채운다. 이를 듣고 고용인들이 청소도구를 들고 나타났다. 이쪽을 힐끗 훔쳐보더니,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있으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회장이 으르렁거렸다. "내 앞에 나타날 땐 그 좆같은 얼굴 가리라고 했냐, 안했냐." "...죄송합니다." 입술을 깨문 아영이 고개를 숙였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러고도 타고난 미색은, 조명 어두운 방 안에서도 빛을 발했다. 서른이 넘었는데 노화의 기미가 없다. 회장이 이를 씹었다. 여우같은 년.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여자도 외모가 나이를 따라가지 않았다. 저 얼굴, 빌어먹을 제 어미를 소름끼치도록 닮은 낯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참아준다. 그나마 그 여자, 한 때 아내였던 잡년이 결혼하고 낳은 다섯 새끼 중 실제로 고건철의 피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 아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거래를 재고해주시면 안 될까요?" "왜?" "......." "왜!" 회장이 성을 냈다. "씨발년아! 아비가 젊은 몸 얻어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데 뭐가 불만이야! 아하, 그렇지. 내가 늙어 죽어야 네가 내 사업을 물려받겠지! 그런 속셈이지!" "아니에요! 사업 따위 관심도 없다고요!" "그럼 왜!" "굳이 다른 사람 몸을 빼앗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버지 유전자로 복제체를 만들어서 이식하면 되는 거잖아요! 왜 법을 어기면서까지 남의 몸에 욕심을 내세요?!" 회장은 그의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하. 뭐야. 상품 관리를 맡겨놨더니....... 왜? 어린 놈 사는 꼴 보다 보니 동정심이 들더냐?" "......." 맞다. 동정을 품었다. 고건철은 아영에게 상품관리과정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거래대상, 소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중이다. 모두 보고 들은 입장에서, 아영은 소년이 처한 상황이 슬프다. 그 착한 아이는 가족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 몸 팔아 남은 가족들의 삶이 편안하다는 사실에 그저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이 말했다. "좆같은 소리 하지 마라. 뭐든 자연산이 좋은 거야! 복제체? 클로닝(Clonning)? 하! 그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다! 성장촉진제를 투여해서, 태아부터 이식 가능한 나이까지 고작 1년 만에 키워내는 그 몸뚱이가 나중에 무슨 문제가 있을 줄 알아? 암, 자연산이 최고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불법이잖아요? 바르지 않은 일이라고요." "바르지 않기는 개뿔이! 그건 법이 글러먹은 거야! 빨갱이들의 사상에 오염된 법이지! 자유주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개인에게는 스스로를 처분할 권리가 있다! 당사자가 동의했고 그 새끼 부모도 동의했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지랄이야! 이제 와서 거래를 철회하면 그 가난뱅이들이 어이구 고맙습니다 할 것 같으냐? 하, 꿈 깨라!" 딸을 비웃는 아버지가 숨을 고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거래가 깨지면 그 가난뱅이들이 받아먹은 걸 악착같이 돌려받을 거다." 아영은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거래를 취소하면 그 가족은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은 그 소년의 부모들은 이미 계약금으로 받은 금액을 상당부분 써버렸으니까. 차를 벌써 두 대나 샀다. 외제. 남편 따로 아내 따로.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집마저도 계약의 대가로 준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겨울에 태어난 소년에게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꼈다. 부모를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자식의 삶은 온전히 자식의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국 그럴 순 없었지만. "하나 있는 딸년이 어디 가서 병신 같은 소리로 내 체면까지 깎아먹기를 원치 않으니 하는 말이다만......." 고건철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독일에서 창녀들과 여성단체들이 성매매를 합법화해달라고 시위를 벌였지. 자유주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하는 권리라고 말이야. 그렇지. 맞는 말이지. 누구랑 떡을 치는 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니까. 현실적인 이유도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생계 문제였지. 구직능력이 없어 매춘으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에게서 매춘 기회를 박탈하면 굶어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논리였다." 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딸 앞에서 성매매를 말하면서도 아버지는 조금도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모욕하려는 의도였다. 딸에 대한 애증은 곧잘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반면 같은 시절 이 나라의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들은 성매매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성의 인권과 인간적 존엄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인간을, 여성을 상품화하지 말아라...이런 뜻이었다. 뭐, 좋아. 명분이 옳다는 건 인정해. 그런데 말이지, 당장 매춘을 단속함으로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윤락여성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단 말씀이야. 물론 직업훈련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 이 나라의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란 게 대개 그렇듯이, 졸속행정이었지만, 여성단체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결과엔 관심도 없었어. 왜냐고? 그것들은 처음부터 윤락여성들이 아니라 자기들을 존중해달라고 나선 것이었으니까! 그런 일에 종사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서 성을 낸 것이었으니까! 창녀들이야 죽던지 말던지!" 아영은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박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과 그게 당연하다는 건 많이 다른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방치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게 맞다. 회장 스스로도 명분은 옳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삶이 곧 하나 뿐인 정답인줄 아는 사람이다. 반박은 역효과만 불러올 따름일지라,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매매에 관해 말하자면, 원래 화려한 소수가 눈에 띄는 법.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언론은 그 소수에게 더 많은 화면과 지면을 할당했다. 사실이 어떻든 시청률이 잘 나오면 그만이니까. 자극적이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하다. 과연, 이어지는 고건철 회장의 말이 그녀의 예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 골빈 년들의 진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몸 파는 여성동지 여러분, 당신들이 뭘 해서 먹고살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몸 파는 건 여성 모두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 그만 두셨으면 좋겠군요. 달리 할 일이 없다고요? 그건 당신들 사정이죠. 굶어 죽겠다고요? 당신들이 게을러서 그래요. 차라리 죽으세요. 여성의 존엄을 훼손하면서까지 살고 싶은가요?" 다혈질의 회장은 벌떡 일어서서, 우스꽝스럽게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가며 비아냥거렸다. 칠십 넘은 나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다. 이런 성격이라 그룹 중진들도 회장에게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한다. 밉보였다간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리니까. "현실적인 대안 없이 그따위 요구를 하는 건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 애새끼가 불쌍하더냐? 네 알량한 동정심과 양심을 만족시키고 나면, 그 놈은 과연 너에게 고마워할까? 하루하루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면서, 그래도 나는 인간으로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라도 하겠느냔 말이야. 하하!" "...그만해주세요."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네년이 시작한 거다!" 탕. 테이블을 내려치는 손길에 힘이 과했다. "젊음! 너무나도 볼품없이 흘러간 젊음! 잡년이 훔쳐간 내 삶의 절반! 아비가 그걸 찾겠다는데 시답잖은 개소리로 기분을 잡치게 만들어놓고, 누구 마음대로 그만 둬!" "잘못했으니까, 그만해주세요." 결국은 이렇다. 사랑 없이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은 모두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아영은 마음을 지우려 애썼다.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흥." 회장이 자리에 주저앉아 턱을 괴었다. "김이 빠지는군. 한심한 것. 누구를 닮아 이렇게 한심한지 모르겠어. 분명히 내 피도 물려받았을 텐데, 실감이 나질 않아." "......." "나가. 그동안 맡긴 일은, 내일 상품 상태를 확인하고 최종 평가할 테니." "...좋은 밤 되세요." "되긴 글렀다." 휘휘 내젓는 손. 파리를 쫓는 것과 비슷하다. 패배감, 자괴감, 모멸감. 어두운 감정을 느끼며 아영은 아버지의 방을 나선다. 복도를 마주보니 힘이 빠진다. 길고, 넓고, 공허하다. 고작 둘 뿐인 가족이 머물기에 저택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단란하던 한 때, 어머니의 부정을 아버지가 몰랐던 그 시절만큼은 따뜻했던 집이었다. 아영은 흔들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 8 [8화] #파벌 (1), 캠프 로버츠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느 분기를 따를까, 소년이 고민하고 있는데, 퀘스트 마커 하나가 스스로 거리를 좁혀왔다. 사람이었다. 그는 왜소한 체구에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주변을 살피는 것이 꽤나 불안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기, 어, 음....... 겨울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명백히 훨씬 연상인데도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건 역시 소년에게 그만한 위신이나 두려움이 쌓였다는 증거였다. 미성년자는 대인관계 하향보정으로 무시당하기 십상인데도, 그런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소년에 대한 두려운 소문 탓도 있을 것이고, 기술보정에 의한 겨울의 존재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었다. 말을 놓으라고 해도 된다. 허나 굳이 상대를 편하게 해줄 필요가 있을까? 말이 편하면 마음도 편하고, 마음이 편하면 얕보기 쉽다.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세요?" "난 장연철이라고 해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말하기 어렵지만, 겨울 씨가 만나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절대로 해를 끼치진 않을 거예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거든요. 괜찮다면 잠시만 시간을 내주지 않을래요?" 소년은 선선히 수락했다. 증강현실 인터페이스, 플레이어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 임무일지가 갱신되었다. 환경과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은 관제 AI에 의해 실시간으로 평가되어, 그 중 명확한 인과관계를 갖춘 상호작용을 임무(퀘스트)로 등록하게 된다. 도식화된 전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의 하나다. 능력이 부족할 때, 내용이 파악되지 않은 임무는 ???로만 표시된다. 지금 소년이 대략적인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기술 「통찰」과 「간파」 덕분이다. 전회, 물자조달에서 얻은 경험치 일부를 리더십 계열에 투자했다. 이로써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단서를 보다 정확하게 얻을 수 있다. 접속자에게 주어진 이점이었다. '조직......파벌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일단 따르기로 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연철이라는 사내는 연신 주위를 경계했다. 여러 조직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무익한 노력으로 생각된다. 여긴 난민구역. 계급장이 없을지언정, 겨울의 미군 전투복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이미 꼬리가 붙었다. 여럿. 주요 조직들의 행동대 소속이겠지. 눈매가 더럽다. 타고난 인상은 아니다. 마음이 더러워 눈도 더러운 얼굴들이었다. "잠시 기다리세요." "예?" 연철을 불러서 세워놓고, 소년은 뒤돌아서 미행하던 사람들을 지목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자들이 많았고, 숨었어도 부족했다. 「생존감각」과 「전투감각」, 「위기감지」의 도움을 받는 소년은 그들의 은근한 적의를 놓치지 않았다. "당신들, 나오세요." 모르는 척 해도 소용없었다. 손끝으로 일일이 가리켰으니까. 많기도 하다. 사정 어려운 사람들이 무슨 조직을 이렇게 많이 만들었는지. 그러나 데이터 마이닝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이었다. 마이닝(Mining), 광산에서 자원을 캐내듯이, 광대한 온라인, 오랜 시간 누적된 정보의 광맥, 빅 데이터로부터 인간의 역사와 행동을 채굴한다는 뜻. 그러므로 가상현실 속 난민들의 생활은, 실존하는 난민촌의 생활에 기초하여 재구성된 것이다. 결국 열 한 개 조직의 행동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동시에 소년에게도 기 싸움을 걸어온다.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소년의 존재감, 기술보정으로 발생하는 위협성에 대항하려고 힘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니가 뭔데 오라가라냐." 누군가 내뱉는 순간, 질 수 없다는 듯 여러 입이 한꺼번에 열렸다. "어린노무 새끼가 뒤질라고...어디서 어른한테 함부로 손가락질이야?" "하, 씨발. 어이가 없어서. 그래. 불러서 왔다. 어쩔 건데?" 그 외에도 험한 말이 왁자지껄 시끄럽다. 그러나 소년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그러들었다. 긴장하고 있다. 숨기려고 했으나 소년의 「통찰」은 그것을 「간파」했다. 관제 AI의 도움말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대화의 키워드, 권장행동, 전투력 평가, 조언 등. 캠프에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물자조달 임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곳에서 소년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소문은 사람을 건널수록 커지는 법이었다. 개중에는 대책 없는 사이코패스라던가, 인간백정, 살인마라는 악명도 섞여 있었다. 사내들의 눈에 엿보이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다니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짧게 끊어 강하게 하는 요구. 저릿한 느낌이 골수를 긁는다. 가상현실은, 화를 참을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니가 뭔데......" "그 말씀은 이미 들었고요." 뭐라 하려는 것을 바로 끊고 들어간다. "아니면 공평하게, 제가 여러분께 관심 가지고 따라다녀 볼까요? 저는 기억력이 좋습니다. 나중에라도 여기 있는 분들을 몰라보는 일은 없을 걸요?" 읽지 않은 메시지가 빠르게 늘어났다. 지금 이 상황이 다른 사람 보기에 흥미로운 모양이다. 관심 없다. 당장은. 소년은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었다. 어떤 모습을 연기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네까짓 게, 협박이냐?" "받을 짓을 하고 계신다면야, 협박일지도 모르겠네요." "하, 이거....... 좀 유명해지더니 정신이 나갔군. 꼬마야, 전투복 입더니 뭐라도 된 줄 아는가본데......." "이 옷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거듭 상대의 말을 끊어도 폭발하지 않음은, 짜증보다 큰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 조금이라도 위축되거나, 과민반응을 보였다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침착하고 담담한 어조였다. 겨울은 강조하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 옷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 "날 옷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바라지도 않아요. 당신들은 내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지고 날 판단해야 할 거예요." 이 말은 시스템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소년 스스로 완성한 문장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오랫동안 굳어진 응어리가 심장 근처에서 끓어오르며,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목구멍으로 넘치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일방적인 평가와 요구는 지긋지긋해.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여긴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소년은 요대에 걸어둔 대검을 잡았다. 뽑지는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갔다. "쓸 데 없이 따라다니진 않을 테니, 내가 이제껏 무엇을 해왔는지는 알고 계시겠네요. 그럼 이제, 당신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지......직접 확인해보시겠어요?" "쓰벌. 어린놈이 벌써부터 미쳐가지고......." 소년과 남자들은 같은 극의 자석이었다.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물러난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만큼, 눈이 많은 자리에서 꼬리를 내리는 꼴은 곧 죽어도 보이기 싫은 모양이다. 몇몇은 자리를 지키려 애썼다. 다들 소년보다 덩치가 컸으나, 담이 덩치를 따르지 않아 손이 가늘게 떨리는 자도 있다. 자연히 나오는 말도 떨린다. "내가 「한인애국회」 소속이라는 걸 알고 이렇게 까부는 거냐?" "제 옷은 무시하고서, 자기 소속은 중요한 모양이네요?" "윽......." "만약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끝내면 과연 여러분의 조직이 보복에 나설까요? 정말로? 어른 열 한 명과 소년 하나가 붙은 사건을, 미군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는 궁금한데. 여러분도 궁금하시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니 실제로 해보는 건 어때요?" 정말 미치광이 같은 소리였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잘도 이렇게 질러대는구나 싶을 정도로. 내 안에 이런 말들이 있었나? 소년은 왠지 유쾌해졌다. 그 마음이 드러났나 보다. 깨닫고 보니 웃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불식간의 미소가 상대에겐 더욱 큰 공포였다. 꾸미지 않은 광기 같다. 이들은 서로 소속이 다르기도 하여 다수의 힘을 내기 어렵다. 사내들은 더 이상 말 붙이지 못했다. 뒷걸음질 치더니, 적당히 멀어지자 아예 등 돌려 급하게 떠났다. 고작 대화였을 뿐이지만, NPC 또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관제 AI가 성과를 분석하여 경험치로 환산하는 것이 보였다. 시청자 메시지 로그에서도 누군가 「별」을 선물했을 때에만 강조되는 축약 표시가 반짝거린다. 겨울은 시간흐름을 잠시 정지시킨 뒤, 마음을 가라앉힐 겸 하여 로그를 열어보았다. 「칠리콩까네 : 엌ㅋㅋㅋ 연기력 쩔엌ㅋㅋㅋㅋ 와 씨발 시스템 어시스트 키워드랑 문장을 하나도 안 쓰고 저렇게 유창할 수가 있냐? 즉흥적으로? 난 NPC 상대로 저렇게 못 하겠던뎈ㅋㅋㅋㅋ」 [칠리콩까네님이 별 2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방송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걸 느낀다. 이 진행자 이번 방송이 처음인거 맞냐? 유명한 BJ가 닉변하고 얼굴 고쳐서 관심 끄는 거 아니고? 딱 봐도 TOM 등급 높아 보이는데?」 「액티브X좆까 : 유명 BJ이면 어떻고 초짜면 어때? 재밌으면 됐지. 시원해서 좋다.」 「하드게이 : 그래,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캐쉬미어 : BJ는 틀린 표현입니다. 스트리머라고 합시다.」 「빌리해링턴 : Fuck↗You↘」 [캐쉬미어님이 별 5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2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려권내라우 : 용돈벌이에 눈이 벌개진 별창늙은이들 발연기하고는 정말 끕이 다르다 이기야! 국어책 읽기 아니라서 좋다 씨발.」 [갤럭시SS505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소년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짤막하게 답례했다. 「한겨울 : 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뭔가 더 길게 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원해서 하는 방송도 아니었고, 내키지도 않았고, 뭐라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말이 스스로 끓어 넘치던 것과 너무도 달랐다. 생각 같아선 방송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별이 필요했다. 「하드게이 : 진행자 쿨한 거 보소. 별창늙은이들은 주는 사람 닉 일일이 언급하면서 별 좀 더 받으려고 눈치 보는데.」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로그를 닫았다. 별창늙은이들이라....... 그 사람들과 자신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궈졌던 심장이 나쁜 의미로 식었다. 불쾌한 담금질. 시간의 흐름이 재개되었다. 연철이라 했던 사내는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압도당한 모양이다. 관련 스테이터스 갱신 메시지도 다양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애 호감도의 증가분이었다. 친애, 경애, 연애로 분화되는 호감도 중에서, 집단 내 지도자로 인정받으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경애 호감도였다. 특히 +3 불변보정이 이채로웠다. 보통은 +1 뜨기도 어려운 건데. 겨울이 물었다. "계속 서계실 건가요?" "어? 아, 아닙니다. 가시죠." 실수인지 일부러인지, 존칭이 한 단계 올라갔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절반, 탄복하는 기색이 절반. 아마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관제 AI의 조언이 이를 뒷받침했다. 「심리파악 (통찰 6등급/간파 6등급) : 연철은 저 일을 치르고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에게 감탄하고 있습니다.(오차가 있을 가능성 35% / 오차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통찰 및 간파 기술과 능력보정이 필요합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24인을 수용하도록 되어있는 대형 텐트였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창문으로 먼저 안쪽을 살폈다. 조명은 가운데 매달린 백열전구 하나뿐이었다. 어두운 가운데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들. 시선이 마주쳤다. 경계하고 있다. # 9 [9화] 이상하다. 적정 수용인원보다 두 배 가까이 더 많다. 시설이야 어쨌든 텐트 숫자는 충분할 텐데. 의문을 품는 즉시 AI가 반응했다. 「AI 도움말 (통찰 6등급) : 사람이 많을수록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세력이 약한 단일파벌, 또는 취약파벌의 연합이거나 소속 없는 사람들의 집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그런가.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의미가 분명했다. 세력 있는 파벌은 구역 하나를 점거하므로, 텐트 하나에 사람이 몰릴 이유가 없었다. 겨울은 연철을 뒤따라 들어갔다.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철이 손뼉을 쳐 주의를 모으고는, 어딘가 한 결 같이 위축되어있는 사람들에게 겨울을 소개했다. "같이 작업한 적이 있거나 소문을 들은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겠죠.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분이 한겨울 씨입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정말 못 견디게 어색한 소개였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상대를 두고 이 분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무슨 행사도 아닌데 박수로 환영해달라는 말도 괴상했다. 그러나 다들 그걸 지적할 여유는 없어보였다. 연철에게도 나름의 최선일 것이고.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아이와 어머니, 비쩍 마른 여성 다수에 환자와 노인까지 끼어있다. 순박하면서 겁 많아 보이는 인상들이다. 그나마 건장한 남성이 없지 않아 여차할 때 저항은 가능하겠다. 어설픈 박수가 가라앉은 뒤, 겨울은 중앙의 난로 가까운 의자를 권유받았다. 가장 그럴듯한 자리였고, 나머지는 접이식 의자를 쓰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그냥 맨바닥에 앉았다. 겨울이 말했다. "왜 부르셨는지 짐작은 가네요." "그렇습니까?" 연철의 안색이 굳었다. 소년이 그렇다고 끄덕였다. "같이 있어달라는 거 아닌가요? 사실상 지켜달라는 뜻이겠고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긍정이었다. 말 꺼내기 어려워서 생긴 침묵이지, 부정이었다면 벌써 아니라고 밝혔을 터였다. "비참하구먼." 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검버섯 핀 노인이다. 세월에 구겨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는 한숨지으며 남은 말을 마저 놓았다. "비참해. 창피해. 면목도 없어. 이 나이 먹고 손자뻘 아이를 보면서 도와주길 바라는 꼴이라니. 내가 망령이 들었나 싶어. 사는 게 뭐라고....... 차라리 이대로 죽고 말지." "어르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연철이 당황하여 노인을 말렸다. 소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올 때도 굉장한 일이 있었다니까요. 「한인애국회」 행동대원을 포함해서 11명의 미행이 붙었는데, 겨울 씨가 눈치 채고 전부 불러다가 위협해서 돌려보냈어요. 소문이 하나도 틀린 게 없던걸요. 나이만 가지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더니 이번엔 겨울에게 애원조로 붙었다. "저기, 혹시 기분 상했어요?" "딱히. 어린 건 사실인데요." 사실 이게 현실이었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세계관 시스템 상 미성년자에게 상호작용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실이 그런데 가상현실이라고 다를까. 새삼스레 불쾌할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 화난 체 할 때도 아니다. 한편, 이들의 반응이야말로 소년이 가장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일 것이다. TOM 판독에 의한 AI 구성이 원래 그런 식이었다. TOM은 상대의 감정을 판단하는 뇌내기관을 뜻한다. 연철은 겨울의 말이 진심인지 빈말인지 전전긍긍하는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일단 겨울 씨 말이 맞아요. 도움을 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어느 조직에도 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여러모로 피해를 보고 있거든요.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대표로 나서준다면, 우리도 하나의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알아보던 중에 겨울 씨를 초대하게 된 거지요." "'우리'라고 하셨는데, 다 합해서 몇 명이나 되나요?" "일흔 아홉 정도......." 말끝을 흐리는 건 규모에 비해 쓸모 있는 사람이 적어서일 것이다. 힘든 시절에 쓸모없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버림받는다. 여기 있는 건 그렇게 버려진 자들의 연대였다. 겨울은 질문을 고쳤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연철이 뭐라고 답하려는 찰나, 겨울이 강조했다. "솔직하게." 짧은 말은 강하고 위압적이었다. 이럴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리더십 경험치가 필요할 때다. 그것은 공동체를 이끄는 자리에서만 받을 수 있다. 이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는 하겠으나, 그와 별개로 착하고 순한 모습만 보여서는 절대로 리더 자리를 맡고 유지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이용당하거나, 배신당하기 십상이다. 다회차의 경험으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잖아도 나이가 어려 얕보이기 쉽다. 부드럽게만 대해서는 곤란하다. 소년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능숙했다. 재능도 있겠으나, 그보단 어릴 때부터 가족을 살펴서......정확하게는 눈치를 보며 살아서 그렇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AI는 사람보다 쉽다. 당장 거짓으로 모면했다가 나중에 들통 나면 겨울의 마음이 떠날 게 뻔하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딱 그런 눈치였다. 연철이 한숨지었다. "열일곱...명이네요." "적어요." "......." 딱 잘라서 적다고 평하는 겨울로 인해, 텐트 안에는 정말 때 이른 겨울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한 한기가 맴돌았다. 연철은 거듭 한숨 쉬며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다시 말을 잇는다. "알아요. 겨울 씨 정도면, 어느 조직을 들어가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겠죠. 그래도 아직 혼자인 걸 보면 뭔가 불편한 게 있거나, 그들의 행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리를 도와줘요. 부탁할게요." "전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들다고 보는데요." 밀고 당기는 협상. 아쉬운 쪽이 지는 것이다. 이쪽이 내키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나중에 군소리를 하기 어려워진다. 어차피 기존의 여러 조직들은 공동체의 비도덕적 성향이 높다. 들어가서 성공한들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어느 조직에나 암투와 타락이 있게 마련이나, 가급적 피하고 싶다. 그걸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즉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갈 생각 없었다. 하지만 약한 사람들도 약한 사람들 나름대로의 악의를 품고 있다. 당장 지금도 소년을 인정하지 않는 눈빛들이 곳곳에서 날카로웠다. 당장은 필요하니까 이용하지만, 결국 애송이일 뿐이라고. 능력은 내가 더 출중하니 조금 지나면 저 애송이 자리에 내가 서있을 것이라고. 또는 이기적인 눈빛들도 엿보인다. 내가 위험하긴 싫으니,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태도. 상대가 어리건 말건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은 사람들. 이들에게 소년은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다. 겉으로만 떠받들고 이익을 보겠다는 심보다. 약자의 심성이 반드시 선량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사악해지기도 한다. 핍박받는 약자는 더 약한 자를 핍박하기 쉽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니까. 다만 그것이 선량하지 않다는 증거인 것도 아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뉘우치고 후회할 사람들이 대부분인 법. 현실의 유흥적 모방인 가상현실이 그만큼 정교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구질구질한 몰골 때문에 확신할 순 없으나, 대학생이다 싶은 연령의 여성이 손을 들었다. 당당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을 생각은 없어요. 다른 그룹의 횡포를 막아준다면 웬만한 지시는 최대한 따르도록 할게요. 지도자가 되는 거라고요." 실속 없는 띄워주기. 여성의 심리를 알 만 하다. 겨울은 그녀의 눈에서 자신을 어리게 보고 써먹으려는 의도를 읽는다. 명백한 의도가 아닐지라도, 본인조차 모르는 저의, 무의식의 영향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이 줄지어 이어졌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그쪽에 이런 부탁 하는 거 민망해요. 저런 애도 용기 있게 나가서 유명해졌는데, 난 어른이 이게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고요.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인정할 수밖에 없는걸요. 겨울이라고 했죠? 그쪽이 나 같은 나약한 겁쟁이 어른보다 훨씬 훌륭해요. 나이가 무슨 소용이에요? 자기 한 몸 책임지지 못하는 어른들 투성인데."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지 오래 됐어. 이제는 뭘 해보고 싶어도 몸이 축나서 힘들어. 겨울 씨, 우리 좀 도와줘. 며칠 잘 먹으면 체력이 붙어서 뭐라도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래요, 학생. 혹시나 나중에 다시 식량 구하러 나가게 되면, 믿지 못할 사람을 등 뒤에 두는 것 보다는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맡기는 게 낫잖수? 우리 바깥양반이 나이는 먹었어도 해병대 출신이라우." "난 굶어서 젖도 잘 안 나와. 난 죽어도 상관없지만 우리 애만큼은 살리고 싶어." 이 대목에서 겨울은 가슴에 턱턱 부딪히며 굴러다니는, 바위처럼 오래 묵은 응어리를 느꼈다. 무겁다. 부모, 부모란 말이지. 이제는 소년의 역린 중 하나다. 부모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그랬다. 쏟아지는 말들을 한 손 들어 막아 놓고, 겨울은 아기를 안고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초췌하고 마른 몸에, 볼 살이 빠져 늙어 보인다.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목구비가 또렷한데.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다 묻는 말.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 다쳤거나 혹은 죽었거나. 예상은 그 정도였으나 사실과 달랐다. 부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바깥양반 운운했던 다른 부인이 대신 답했다. "새장가 갔구먼." "새장가?" "「다물진흥회」에 들어갔는데, 그쪽에서 여자 붙여줘서 딴 살림 차렸다우." 지금까지 딱 한 번 경험했던 유형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소리를 들은 뒤에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신 제안은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장 결정하기 어렵네요." 이렇게 운을 띄워두고, 당근을 제시한다. "일단 이걸 받아두세요." "오오, 이건......." 건넨 것은 품속에 갈무리해두었던 배급표 뭉치였다. 물자조달 나가기 전부터 캡스턴 중위가 개인적으로 챙겨준 여유분 소량에 더해, 물자조달 결과 독보적으로 뛰어났다고 열 사람 분의 보상이 주어져서 상당히 많았다. 한 사람당 평균적으로 닷새 치 배급표를 주었으니, 열 사람 분이면 쉰 장이다. 아무렇지 않게 배급표 뭉치를 꺼내놓으니 다들 엄청난 표정이었다. 다급한 얼굴들. 뻗어오던 손이 눈길 마주칠 때 멈칫거린다. 간혹 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의 캠프에서 식량을 내놓는다는 건 엄청난 양보다. 목마른 사람의 물 한 모금 이상이다. 이 행동 하나로 소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녁 때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치고 배급소에 가있을게요. 오는 길에 부딪히기도 했으니, 제가 보는데 대놓고 쳐서 빼앗아가진 않겠죠." 배급소로 오는 사람은 당연히 배급표를 가지고 있을 터. 그래서 가장 많이 빼앗기는 장소도 역시 배급소 인근이었다. 이런 식의 배려, 즉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결정 전에 각인시켜두면, 공동체 설립 초기 구성원들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달라진다. 애태우다가 받아들이는 것의 장점이었다. 겨울은 간절한, 그러나 아직 타산적인 환송을 받으며 텐트를 나섰다. # 10 [10화] #파벌 (2), 캠프 로버츠 「재능이익(才能利益) - 탤런트 어드밴티지(Talent advantage)」는, 회차 무관하게 한 번이라도 익혔던 기술의 재습득을 돕는 시스템이다. 익혔던 횟수를 n이라고 할 때, 습득에 필요한 경험치는 1/n이 된다. 이러면 n이 1일 경우, 즉 한 번만 익혔을 땐 이득이 없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다. 「언노운 페널티(Unknown penalty)」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은 제작사의 기획의도에 따른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압도적인 재해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공포를 충분히 느끼도록 한 반면, 뒤로 갈수록 고난을 극복하는 초인의 역할에 재미를 붙여보란 뜻이었다. 동일한 컨텐츠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즐기도록 한 것이므로, 소모속도 조절 면에서 뛰어난 구성이라 하겠다. 겨울은 상당히 많은 종말을 경험했다. 매번 습득하는 기술이 같을 순 없지만, 필수적인 것들은 반복하여 습득했었다. 전투계열 대부분, 생존계열 일부, 특정 언어, 사회계열의 핵심인 「통찰」, 「간파」, 「기만」 등. 기술등급은 3등급까지가 초심자, 6등급까지는 숙련자, 7~10등급이 전문가 수준이며, 그 이상은 천재 및 초인의 영역으로 설명된다. 각 단계를 넘을 때마다 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소년은 샌 미구엘에 나가서 얻은 경험치를 낭비하지 않았다. 현재의 기술수준은 진행도에 비해 아득히 높다. 탤런트 어드밴티지에 힘입어, 전투계열 다수가 전문가 또는 천재 수준에 도달한 상태. 그러므로 겨울은 불리한 전투를 소화할 역량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공개방송을 진행하는 지금, 죽음은 일종의 방송사고다. 전투능력에 관련된 기술들은, 「위협성」이라는 은폐 스테이터스를 증가시킨다. 효과는 잠재적 적대관계일 때부터 강해졌다. 미성년자 페널티를 감안해도 지금의 겨울은 맹수 급이다. 좋지 않은 쪽으로 부풀려진 소문이 소년의 위협성을 더욱 키웠다. 덕분이다. 약속대로 배급현장에 자리 잡으니, 자원봉사를 자처한 사람들이 자꾸 눈치를 보았다. 배식대 별로 다른 조직 소속이다. 조직 없는 사람들이 심한 차별을 받았다. 장연철이 소개해주었던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시선 마주치니 눈인사를 보내왔다. 고마움이 느껴졌다. 겨울이 지켜보는 줄에서는 정상적인 배식이 이루어진다. "저기요." "ㄴ, 네?" "다 똑같이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겨울에게 지적 받은 여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음, 저, 저는 「다물진흥회」 소속인데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여자가 주눅 들어 곁눈으로 맞은편의 남자를 보았다. 같은 조직이라 많이 주었다. 체면이 걸린 남자는 짐짓 강한 척을 했다. 같은 줄에 늘어선 다수가 적의를 드러낸다. 위협성에 짓눌리면서도, 다수라는 위안으로 어찌어찌 해낸다. 소속 없는 난민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버티고 있으려니 남자 하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사람 좋은 낯에 비해 근육이 잔뜩 붙은 부조화가 인상적이다. 목 아래로 짐승이었다. 정상적인 배급량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을 체구. 어슬렁거리던 행태를 보면 행동대장 쯤 되는 모양이다.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은근한 두려움을 무기 삼는 남자다. "이거 어린 친구가 듣던 대로 아주 강단이 대단하네. 이 아저씨가 잠깐 말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지? 응?" "지금은 괜찮지 않네요. 나중에 듣겠습니다." 딱딱한 말투로 단호하게 끊는 태도. 상대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는데, 형식적으로나마 경계를 서고 있던 미군 병사가, 어느새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남자는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당겼다. "이러면 서로 좋을 거 없잖아? 마침 우리 어르신들이 학생하고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말이지. 잠깐 시간 좀 내주면 고맙겠어."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기술보정으로 버티고 서서, 겨울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시간은 배식 끝나고 내드리죠. 그보다 저기 저분들과 아는 사이이신 모양인데, 제대로 하라고 저 대신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저도 귀찮아져서요." 왜, 뭘 하느라 귀찮아지는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는다. 상상하도록 두는 편이 낫다. 남자는 표정 없이 소년을 관찰하다가, 한숨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지. 대신 이따가 시간 좀 내달라고. 이 아저씨랑 약속한 거다? 알았지?" "알겠어요." 남자가 대기열로 가서 뭐라고 하니,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서 불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남자가 인상을 쓰자 대번에 조용해진다. 식판을 덜어내고 나온 한 사람이 소년을 노려보았다가, 시선 마주치자 움찔 놀랐다. 스스로 눈 내리고 급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한인애국회」나 「새마을연합파」쯤 되는 대형조직 정도가 소년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외에는 적당히 눈치를 보며 알아서 조절했다. 도움 받은 사람 모두가 그 자리에서 식판을 비웠다. 허겁지겁. 쌀쌀한 바람이 불어도 실내로 가지 않는 것은, 가는 길에 빼앗길까 걱정하는 까닭이다. 각 조직에서 파견 나온 자들이 못마땅하게 지켜보았지만, 미군이 있는 마당에 사고를 칠 순 없었다. 미군 두 명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그동안, 난민들의 행태를 막지는 않아도 비웃긴 했으리라. 배식이 끝나기를 기다려, 예의 중년인이 다시 다가왔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지? 우리 어르신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말야." "안내하세요." "어휴, 차갑기는." 말은 사근사근하지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 너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가는 길에 자꾸 돌아보는데, 억눌린 울화와 두려움이 엿보인다. 적대감이 깊으면 위협성은 최대로 작용한다. 등 뒤에 식인호랑이를 두고 걷는 기분일 것이었다. 도착한 텐트는 겉모습이 평범했다. 어차피 모두 군용이거나 구호물자를 불하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부는 별세계 수준이다. 뒤를 터서 이었는지 직선으로 길었고, 난로도 당장 보이는 것만 다섯 개다. 모두 발갛게 불이 들어있다. 조명도 밝았다. 전등 숫자가 사치스러웠다. 반면 상주인원은 적정수준보다 훨씬 적은 모양이었다. 간이침대가 스무 개 남짓이었고, 남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를 두었다. 쇼파와 TV까지 있다. 안테나를 어디에 어떻게 세웠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봤자 나오는 건 뉴스와 재난방송 뿐일 텐데. 지금은 가운데 널찍한 자리를 만들어놓고, 어느 장년인을 필두로 사내들이 좌우 각각 2열씩 나누어 앉아있다. 모두 술잔을 하나씩 앞에 두었다. 그들 모두 동시에 소년을 응시한다. 의도가 뻔하다. 중앙에 빈자리가 있다. 아마도 겨울의 자리. 테이블 대신 탄약상자를 엎어놓았고, 잔과 술병, 접시에 올린 안주 따위가 그 위에 놓였다. 어디서 났는지, 기름으로 지진 고기 꼬치 따위가 푸짐하게 쌓여있다. "어린 장부가 오셨군. 일동, 박수." 그놈의 박수는. 소년이 생각하는 가운데 좌우의 남녀들이 굳은 얼굴로 와아아 소리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들 나름대로는 절도를 갖춘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과장된 넓이로 팔을 벌려 어색하게 치고 있다. 해병대 박수. 딱 봐도 군기 잡는 조직이었다. 난민구역에서 보기 힘든, 말끔한 여성이 소년을 가운데로 이끌었다. "여기 앉으세요." 필요 이상으로 몸이 닿는다. 처음이면 모르겠으되 회차가 쌓인 지금 동요하긴 늦었다. 겨울은 조용히 앉아, 정면을 곧게 바라보았다. "대범해. 아주 대범해." 상석의 장년인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소개부터 해야지. 나는 임화수라고 하는 사람이야. 「다물진흥회」에서 회주를 맡고 있어. 우리 사람들은 나를 막리지라고 부르지. 우리 장부는 이름이 어찌 되시는가?" "저는 한겨울입니다." "크- 겨울이란 말이지? 좋은 이름이야. 성격하고 아주 딱 어울려! 눈을 보면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걸. 그렇지 않은가들? 다들 보기에 어떤가?" 그러자 입을 모아 그렇습니다, 막리지! 하고 외친다. 가운데서 듣자니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다. 겁먹으라고 일부러 키운 목청들. 그러나 겨울이 겁먹을 이유가 없어, 입체음향 개 짖는 소리일 뿐이다. 소년의 신색이 고요한 것을 본 임화수는 아래를 보며 입을 모아 구부렸다가, 무의미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묵직-하구만. 그래, 남자라면 자고로 그래야지. 나 젊을 적에 박통께서, 응? 박통께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지. 근데 우리 이후 세대는 너무 풍족하게 자라서 대쥬신과 대고구려의 기상을 점차 잃어버렸단 말씀이야. 딱 봐도 자네는 그런 나약하고 무기력한 청년들과 다르다는걸 알겠어. 음! 그렇지. 사내가 열일곱이면 옛날 같아선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외쳐도 무리가 없을 나이인걸. 그렇지 않은가들?" 또 나왔다. 동의를 구하는 척 하는 저 말이, 사실은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마음 읽기에 능했고, 인간관계를 강조한 「종말 이후」를 반복하다보니 더더욱 알겠다. 좌우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임화수의 말이 맞다고 외친다. 임화수는 회주랍시고 점잖 빼며 큰 소리로 웃더니, 아직까지 소년 곁에 머무는 여성에게 손짓했다. "입신양명에 나이는 중요치 않아. 요즘 같은 시대라면 더더욱 그렇지. 장부의 세상이 왔어. 자고로 장부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법이지. 은주야. 장부에게 술 한 잔 따라 드려라." "네, 막리지님." 은주라는 여자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년에게 밀착했다. 나긋한 손놀림으로 술병을 따고, 얼음 넣은 글라스에 호박색 술을 부었다. 말리기도 전이었다. 이 와중에도 닿은 여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시청자 메시지가 폭주하고 있었다. 굳이 창을 열어 확인하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섹스를 외치고 있겠지. 얼음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난민구역의 실상을 생각하면 호화롭기 그지없다. 이게 조직규모 2위의 「다물진흥회」가 부리는 사치라면, 1위인 「한인애국회」는 어떨지 의문이었다. 겨울이 가만히 술잔을 보는데, 임화수가 자기 몫의 잔을 들었다. "우선 한 잔 하지. 사내끼리 뭔가 정하기 전에 술 한 잔 없을 수 있나!" "죄송하지만 술은 사양하겠습니다. 용건을 먼저 말씀해주세요." "허어, 혹시 술이 처음인가? 잘됐군. 인생의 첫술은 중요하지. 이게 씨-바스 리갈이라고 해서 말이야......."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겨울이 잔을 들어 우측으로 길게 뻗더니, 그대로 기울여, 느릿하게 쏟아버렸기 때문이다. 회주의 표정이 굳었다. 주위에선 당장 난리가 났다. "이 씹새끼가 진짜!" 성급하게 품속의 칼을 뽑는 자들도 있었다. 대개는 부엌칼. 그래도 사람 죽이기엔 충분하다. 그 난리통 가운데 태풍의 눈처럼 혼자 조용한 겨울. 잔을 내려놓고 임화수를 바라보았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임화수는 인상을 쓰며 손짓으로 주위를 가라앉혔다. "나서지 마! 니들 지금 뭐하는 거야, 응? 나 임화수라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막리지님!" 풍랑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니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긴장감은 아니었다. 임화수는 꼬치 하나를 뜯어 질겅거리다가 꿀꺽 삼키고는, 느긋하게 술 한 잔 쭉 비우고서 크으- 감탄했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홀로 끄덕끄덕 하며 잔을 내리더니, 양쪽 무릎에 손을 턱 놓고서 소년에게 말했다. "겁이 없는 건 좋은데, 너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많아. 두려움이라는 건 생존본능이거든. 때로는 허세를 접어둘 필요도 있어. 인생 선배의 충고니까 새겨듣길 바라." "알겠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죠?" "하하하!" 임화수가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꼬치 하나를 뜯는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것을 쩝쩝 소리 내며 씹어 삼키도록, 겨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자 임화수는 무의미하게 손가락을 딱딱 퉁기며 주위를 또 둘러본다. 여유를 보여주려는 목적 외에 아무 이유도 없는 권위적인 몸가짐이었다. 말을 하다가 쓸데없이 발음을 늘이는 경향도 매한가지였다. 뜸을 들이다가, 소년에게 동요 없음을 확인한 임화수는 인상을 쓰며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자네를 부른 건 별 거 아니야. 뜻이 맞으면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냐 이거지. 우리 겨울이 정도면 실력도 확실하고, 배짱도 좋고, 인맥도 남다르지 않겠나? 양놈들 중에서 유독 깐깐한 캡스턴 중위하고 친하다 들었는데 말이야." "생각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 막리지 말을 좀 들어봐.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야. 「한인애국회」는 이미 가장 큰 세력이야. 안정적이지. 하지만 어린 자네가 들어가서 중추가 되긴 어려워. 말이 같은 한국인이지, 밥그릇 싸움에선 남이나 다름없어. 살아남기조차 버거울 거야. 하지만 우리는 달라. 겨울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꽤 도움이 된단 말이야. 그만큼 중요하게 대우해줄 것이고. 그래, 지금 옆에 있는 은주는 어때? 오겠다면 바로 주지. 조강지처, 겨울이의 조강지처가 되는 거야. 그 외에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세 명이고 네 명이고 다 가지도록 해. 축첩은 영웅의 소양이잖나. 술도, 담배도 마음껏 해! 남자는 자신이 가진 능력만큼 대우 받는 것이고, 겨울이한테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거든!" 그러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은주가 저보다 어린 겨울에게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면서, 겨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두고 제 손을 포개어 주무르게 만들었다. 살내음이 달큰하게 다가왔다. 손끝에 보드라운 체온이 미끄러졌다. 허리 아래에서 뭉근한 열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감각동기화」를 켜고 있을 시청자들은, 지금쯤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여성 시청자가 있다면 눈살을 찌푸리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일부는, 은주를 대상으로 감각동기화를 적용했을 것이다. 가상현실인 만큼, 이런 상황까지 즐기는 여성도 적지 않다 들었다. 실망시키게 되어 미안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겨울은 은주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옆으로 밀어놓았다. 은주가 다급하게 매달렸으나 보다 강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회주를 바라보았다. "뭐야, 은주가 마음에 안 드나?" 회주는 입맛을 다시더니, 피식 웃는다. "그럼 이건 어때?" 뒤로 손짓하는 임화수. 일본 계집을 들이라 한다. 조직간 항쟁에서 일본계 최대 규모인 「스미요시카이」가 거의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은 뒤, 일본 출신 난민들이 심한 꼴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저널 외 다른 경로로 체감한 적이 없었다. 끌려오는 소녀를 보니 잘 알겠다. 발버둥 치며 저항하고 있었다. "깔아." 임화수가 지시하자, 남자도 아니고 여자들이 나서서 소녀의 사지를 짓누른다. 세 명이 나섰는데 그 중 한 명은 킥킥 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쪽바리년 주제에 앙탈은." 걸친 옷이 한 겹이었다. 기모노처럼 모양만 나도록 대충 자른 천 쪼가리. 홑옷은 쉽게 흘러 반나체가 되었다. 도와달라고, 거듭 외치는 일어가 잔뜩 쉬어있었다. 저항하는 여체와 억누르는 여체가 뒤섞여 음란한 풍경을 이룬다. 억누르는 자들이 기어코 다리를 잡아 벌렸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임화수가 소년을 향해 던지는 말. "다 알아. 그 나이 때 상상하는 건...뭐라고 하면 좋을까...그래, 과격하게 마련이지. 정복욕. 보게. 동하지 않나?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텐데?" "관심 없다고 말씀드린다면?" "거짓말이겠지." 빙글빙글 웃는 임화수는, 버둥거리는 여체 너머로 하나의 악마상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럼 주위를 둘러싼 자들은 악마숭배자가 되려나. 겨울이 굳이 다른 서비스를 제쳐두고 「종말 이후」를 고른 이유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겨울이 살아오며 느낀 세상은 사악한 자들의 낙원이었다. 밝은 분위기의 가상현실에서는 도무지 괴리감을 거둘 길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현실을 그리는 향수가 마음 무거운 마당이었다. 이건 절대로 현실이 아니라는 괴리감이 항상 떠나지 않아, 잠시도 잊을 수 없었고, 즐긴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물에 뜬 기름처럼, 홀로 유리되어있는, 외로움.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과, 겨울에 태어나 겨울만 살아온 소년의 세상은, 많이 다른 모습인 것이다. 적어도 「종말 이후」는 몰입하면 가슴앓이를 잊을 수나 있다. 이것만이 나의 세상. 깊게 심호흡한 뒤, 겨울이 툭 뱉었다. "어르신, 엿이나 드세요." 실내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 11 [11화] #Intermission, 민족주의와 전체주의 집단의 이익을 방어하는 명분이 될 때,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전체주의는 악의 제국을 낳았습니다. 일본제국은 가혹한 식민통치와 난징 대학살을, 나치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습니다. 한편 전체주의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광범위한 군중의 단합을 가장 빠르게 이끌어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인류멸망의 기로에서, 종의 존속이라는 대의를 위해 전체주의는 불가피한 필요악일지도 모릅니다. 도덕적 멸종과 비도덕적 생존 중 어느 쪽이 더 큰 비극일지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주제입니다. 악으로 선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파벌 (3), 캠프 로버츠 로그가 죽 올라갔다. 호감도 감소보정 발생 경고들. 불변보정까지 섞여있었다. 일본 소녀의 비명 외에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정적 가운데, 임화수가 손짓했다. "잠깐 치워봐." 막리지와 소년 사이에 있던 소녀가 한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짐짝 취급이었다. 그녀는 겁탈당할 위기가 지났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워낙 겁에 질렸으니까, 정상적인 상황판단이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임화수가 버럭 일갈한다. "시끄럽잖아! 닥치게 해!" 방법은 폭력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몇 번 윽박지르다가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비명이 더 커졌으나, 조용해질 때까지 치면 그만이었다. 같은 여자끼리 저럴 수 있다는 게, 아무리 가상현실 상의 묘사라지만 소름끼친다. 마침내 얼굴이 퉁퉁 부은 소녀가 거의 혼절하다시피 쓰러진 뒤에야 정적이 돌아왔다. 임화수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어린놈이 버르장머리 없이...말세다, 말세야! 민족의 빛나는 얼, 동방예의지국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어! 이게 다 왜놈들 때문에 민족정기가 쇠한 탓이겠지만......." "지금 그 왜놈들 짓을 그대로 하시는 것 아닌가요?" "머릿속이 아주 제대로 썩었구나!" 그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노호했다. "저것들은 짐승 짓을 저지르고서, 세기가 흐르도록 제대로 반성 하지 않았다!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형식적인 사과뿐! 그냥 뒀다간 우리가 또다시, 똑같이 당할 거란 사실을 왜 몰라! 피가 그래! 태생이 그런 놈들이란 말이야! 용서받을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걷어찬 저놈들이 나쁜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우리 민족에겐 일본에 대한 무제한의 청구권이 남아있다! 무얼 해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 이것은 예방전쟁인 동시에 정당방위다!" 궤변이다. 앞은 맞고 뒤는 틀렸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집단살해에 대한 보상으로 집단살해의 권리가 주어져선 안 된다. 사죄와 반성이 필요한 이유가 뭔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들이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마음 편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임화수의 논리는, 네가 내 딸을 강간했으니 나도 네 딸을 강간하겠다는 개소리다. 글렀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겨울 자신이 생전에 그러하지 못했기에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났고, 날카롭게 대꾸했다. "자위행위를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지 말아주실래요? 같은 민족으로서 기분 나쁘니까." "이놈이 그래도!" 「생존감각」과 「위기감지」가 반응했다. 옆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팔을 꺾어 무력화하고, 칼을 빼앗아 목줄에 누른다. 기민하고 민첩한 몸은 마치 타인의 것 같았다. 기술숙련이 높은 캐릭터는, 단지 '방어하고, 제압한다.'는 대략적인 의도를 놀랍도록 정교하게 구체화시켰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 충성을 과시할 목적이었는지, 아무튼 갑작스레 달려든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년이 이대로 그어버리면 끝장이다. 그러나 겨울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완급조절. 머리 뜨거워진 군중이 제 목숨 돌아볼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이 수를 다 상대하며 빠져나갈 가능성은 낮고, 여기서 죽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또 이러면 다음은 없습니다." 한 마디 해주고, 칼을 툭 던진 뒤 남자를 밀듯이 놓아준다. 얼마 못가 무릎 꿇은 남자는 자신의 목을 더듬으며 켁켁거렸다.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모양이다. 임화수는 모멸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지만, 당장 저놈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아랫것들을 만류한다. 합리적인 AI 연산이다. 성급하기만 해서야 이런 조직을 만들 수 있었을 리 없다. "너 말이다." 이제 가식적인 존중은 집어치우고 말하는 그. "네가 이러고도 여길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많은 수를 상대로?" "아뇨. 만약 싸운다면, 오늘이 제 인생 마지막 날이겠네요. 하지만 각오하고 죽이세요. 뒷감당하기 힘드실 테니." "허풍이 대단하구나. 그깟 알량한 지원병 신분이 널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제 생각에 저는 본보기 같아요. 난민 가운데 믿을 수 있고 우수한 사람이 있다면 우대하겠다고, 미군이 세워놓은 살아있는 광고판이죠. 그 광고판에 피를 뿌리면, 미군은 체면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 사람들은 수가 적거든요.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체면은 중요한 문제 아닐까요? 그러니, 위-대하신 막리지, 절 죽이긴 힘드실 겁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말예요." "맹랑하구나. 겨우 그걸 믿고 목숨을 걸다니." "죄송하지만 전 미군만 믿는 게 아니에요. 제 실력도 믿죠. 여러분을 다 죽이고 빠져나갈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요. 거짓말할 자리가 아닌데요. 믿기 어려우시면, 정말 서로 죽여 볼까요?" "......." "과연 몇 명이나 목숨 걸고 충성할지 궁금하네요. 확인해보시겠어요?" 회주는 꽤 길게 화를 삭이더니 다시 한 번 설득을 시도했다. "요 어리고 맹랑한 것아, 네가 지닌 그 잘난 재능과 담대한 배짱도, 다 훌륭한 민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덕분이라는 걸 모르느냐? 우리 민족에게는 거룩한 사명이 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랬듯이, 미국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말 것이야! 그러면 우리 환웅의 후예들은 이 풍요로운 미주(美洲)에 한민족의 새로운 터전, 위대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세계시민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모든 민족주의는 악마의 신앙이라고. 회주님, 악마새끼세요?" 임화수는 대놓고 막 지르는 도발에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의 입지를 생각할 때, 이렇게 심한 모욕을 받을 일 없었을 것이라 더 큰 자극일 터였다. 사실 이건 겨울이 실제로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다. 그 선생님이란, 겨울이 태어나기 십 수 해 전에 은퇴한 사람이었지만, 국가검정을 통과한 강의기록은 여전히 이후 세대의 수업에 활용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가상현실 환경에서 제공되는 강의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후에 기록된 다른 모든 강의는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 선생의 강의가 교실수업 세대의 마지막 기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더는 말을 나누지 못하겠군. 정신이 썩어도 보통 썩은 게 아니야." 임화수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럴듯한 생김새에 힘입어, 하는 행동만 보면 세상의 모든 고뇌를 일신에 걸머진 현자처럼 보인다. 이 또한 사기꾼의 재능이겠지만. "동감입니다. 여기 더 있기 싫어지네요. 정신 썩은 사람들에게서 썩은 내가 나서요." 거짓 현자의 눈썹이 위로 치솟는다. "어쩌면 네 자신감이 맞을지도 모르지. 우린 여기서 널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라면 어떨까? 항상 불안에 쫓기는 삶을 원하지는 않을 텐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서로 같이 죽여보자고. 딱히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도, 한 번 시작하면 이자 쳐서 갚아드리죠." 배짱 부려도 된다. 재능이익 탓에, 현재 보유한 능력은 초반에 있을 수 없는 수준이다. 어지간히 떼로 습격하지 않는 이상 몸이 상할 가능성은 낮았다. 암살시도는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소년은 출구 아닌 쪽으로 걸었다. 그 방향에 있던 자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쭈뼛거리며 물러난다. 소년이 대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뽑지 않았을 뿐 명백한 위협이었다. "이 분은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막으려면 죽을 각오로 오세요." 주위를 둘러보며 하는 말에 성토하는 목소리만 높았지 정말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자리에서 움찔거리는 덩치 큰 거한 하나가 돋보인다. 여기 있는 자들 가운데 유독 강해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선 마주친 뒤엔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생존본능」이나 「위기감지」, 「간파」 중 하나를 보유한 인물일 것이었다. "生きたいなら, 私の手を取ってください.(살고 싶다면, 내 손을 잡으세요.)" 기술보정에 의지하여 한 말은 의미 그대로 전달되었다. 6등급 「일본어」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더라도 의미 전달이 틀리진 않을 것이었다. 덜덜 떨던 소녀는 그래도 친숙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믿는다. 손을 잡고서 이끄는 대로 뒤따랐다. 끝까지 막는 이는 없었다. 다만 돌아보았을 때, 임화수가 우묵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을 뿐. 데리고 나왔지만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약점이 된다. 그대로 일본인 거류구로 향했다. 「스미요시카이」 붕괴 이후 의외로 안정되어 있었는데, 난립했던 일본계 조직들이 거대한 위협을 앞두고 연합하여 단결했기 때문이다. 일본계 난민의 수가 가장 적다곤 해도, 서로 싸우지 않으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된다. "お前はだれだ!(넌 누구냐!)" "落ち着いてください. あなたの同胞を連れてきただけです. 悶着を起こすつもりはありません.(진정하세요. 당신의 동포를 데려왔을 뿐이에요.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일본인 거류구의 경계선에서 버티고 있던 남자들은 겨울의 말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겨울은 데리고 온 여성을 앞으로 떠밀었다. 이름도 묻지 않은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도 자꾸만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소년의 귀에 들어온다. 「생존본능」은 오감에 상향보정을 부여하고, 「간파」는 부분적으로 상대의 의도를 읽는다. 소리를 죽여도 의미가 없었다. 미심쩍은 눈치로 이쪽을 슬쩍 곁눈질하는 남자들은 그렇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역시 어느 조직의 행동대원쯤 되는 것이겠지. "너 일본인인가?" "네. 쿠시나다 세츠나(櫛名田刹那)입니다. 한국인들에게 납치당했었어요." "저 자는 뭐지?" "한국인 같은데...저를 납치한 사람들과 싸워서 저를 빼내주었습니다. 은인이에요." "그래봐야 춍은 다 똑같아. 은인은 무슨. 가족이 있나?" "부모님께서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죽지 않았다면." "그런가. 어이, 다이스케. 네가 같이 가서 가족을 찾아줘라." "예, 형님!" 거기까지 듣고서 겨울은 몸을 돌렸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도 없었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본인 행동대원이 소년의 등에다 대고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거기 조센징! 이름을 말해라! 언젠가 복수할 때 너만은 살려주마!" 겨울은 슬쩍 돌아보고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서 걷는데, 그 뒤로도 몇몇 조직으로부터의 접근이 있었다. 딱히 새로울 것은 없었으나 단 하나, 「순복음 성도회」 만큼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 운운하는 대신 신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2인 1조로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열심히 떠들어대던 성도회 사람들. 그 중 하나가 겨울을 알아보았다. 당장 수십 개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둘러싼 뒤 앞 다퉈 떠들어댔다. "형제님! 독생자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휴거가 찾아온 지금 주 예수의 재림이 머지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형제님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은총에 들 수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써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영생의 지름길입니다!" "우리 성도회는 일찍이 이 휴거를 예언하신 동방의 의인 박태선 목사님께서 이끄십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이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찾아온 간난이 모두 성경에 나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 사람도 짐승도 쓸어 없애고,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쓸어 없애겠다.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며,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 라고 하셨으니 성경은 즉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심판의 날이 다가왔으니 주 하느님 앞에서 입을 다물라. 주님께서는 제물을 잡아 놓으시고서, 제물 먹을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결하게 하셨다.」고 되어있으니, 역병에 감염되면 산사람을 뜯어먹는 즉 저 감염자들이 바로 「제물 먹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바쳐진 제물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분노에서 살아남을 길은 믿음뿐입니다!" "예언자 박태선 목사님께서 우리가 살 길을 알려주십니다! 가서 한 번만 만나보시면 찌르르 하고 전율이 느껴질 겁니다! 계시의 전율! 자, 어린 형제. 잠시면 됩니다. 우리와 같이 가요." 광신도들이 떠드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겨울은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죄송하지만 좀 지나가겠습니다. 관심 없으니 떨어져주세요." "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 사탄의 권속이로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피켓으로 소년을 내리찍으려 했다. 대충 막아서 비틀어 빼앗았다. 휙 던져버리자, 아이고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주우러 달려갔다. 그를 붙잡는 사람들은 미군 구역의 경계를 지난 뒤에야 자취를 감췄다. # 12 [12화] #읽지 않은 메시지 (1) 「전자발찌 : 방송진행자 이 새끼는 자지가 없냐 불알이 없냐! 딸딸이 칠 준비하고 있는데 왜 섹스를 안 해! 아이고 내 불쌍한 존슨이 풀이 죽어 부렀어야!」 「헥토파스칼킥 : 솔직히 둘 다 없잖아 나쁜새끼얔ㅋㅋㅋㅋㅋ」 「종신형 : 여자를 깔아주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대출금1억원 : ㅋㅋㅋㅋㅋ 운수좋은날 드립 ㅋㅋㅋ 근데 뭐가 운수가 좋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이 방송 찾은 것 자체가 운수 좋은 거지. 이 정도 진행 가능한 BJ 별로 없다. TOM 등급이 어지간히 높지 않고서는 AI가 저렇게 사실적인 노 딜레이 반응을 보일 수가 없어요. 거기다 얘 임기응변도 장난 아니고. 어지간한 별창늙은이들도 "여기서 어떻게 할지 잠깐 좀 정리하고 갈게요." 같은 되도 않는 소리 하면서 흐름 끊어먹기 예사인데...얘가 진짜 신인이면 혜성출현이라고 봐도 됨.」 「반닼홈 : 설명충 ㅅㄱ」 「한미동맹 : 닉드립 새끼 지 닉네임처럼 말도 기네.」 [눈밭여우님이 별 2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 : 확실히 섹스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여민ROCK : 그래, 세상은 섹스 앤 바이올런스라고. 섹스 앤 바이올런스.」 「폭풍224 : 쎼, 쎽쓰!」 「불심으로대동단결 : 나 스님인데 주지스님 몰래 성인인증채널 접속했다. 질문 받는다.」 「헥토파스칼킥 : 땡중 꺼져」 「김미영팀장 : 잠깐만, 저기 닉네임 일본어인 애 국적정보가 일본으로 뜨는데? 설마 진짜 일본인인가?」 「まつみん : 그렇습니다. 마츠밍은 진짜 일본인입니다. 번역기 쓰고 있습니다.」 「종신형 : 중계채널에서 외국인 보기 쉽긴 하지만, 얘가 중계포털 메인에 뜨는 유명 BJ도 아닌데 일본인이 잘도 여기까지 와서 놀고 있네.」 「まつみん : 한국의 가상현실 성인방송은 일본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상현실 시대의 일본은 더 이상 성진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야말로 차세대 성진국입니다. 저는 마이너한 취향이라 이리저리 찾고 있던 중에 이 개인방송 찾았습니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촉'이 왔습니다.」 「종신형 : 한글패칰ㅋㅋㅋㅋ」 「여민ROCK : 나 어릴 때만 해도 일본야동이 대세였는데 일본인이 저런 소리를.......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김미영팀장 : 근데 일본인이 이런 거 봐도 괜찮음?」 「まつみん : 뭐가 말입니까?」 [눈밭여우님이 별 2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김미영팀장 : 너네들은 우리가 옛날이야기 꺼내기만 하면 사죄와 배상드립 친다고 아우성이잖아. 아까 우리가 보기에도 미친 것 같은 캐릭터 나왔을 때 기분 나쁘지 않았음?」 「まつみん : 기분 나빴습니다. 하지만 가상현실 세계관 내의 이야기고, 무엇보다 섹스하러 온 거니까 상관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극이라고 생각하면 흥분됩니다. 코스프레와 SM 플레이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올드스파이스 : 남자의 욕망은 역사문제를 초월하는가....... 섹스로 위 아 더 월드. 섹스가 인류를 평화롭게 하리라.」 「짜라빠빠 : 이럴 수가.......」 「폭풍224 : 마츠밍 너를 진정한 남자로 인정한다.」 「まつみん : 저 남자 아닙니다. 여자입니다. 신상정보 추가 공개합니다.(웃음)」 「전자발찌 : 뭐...라고?」 「まつみん : 사실 아까 세츠나라는 캐릭터에게 감각동기화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당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실망했습니다.」 「에이돌프휘투라 : !!!!!」 「흑형잦이 :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혼돈, 파괴, 망가가 여기 모두 있군요.」 「대출금1억원 : 역시 원조 성진국. 한국이 아무리 컨텐츠로 앞서간들 정신무장에서 뒤처지니 우린 아직 멀었다. 경의를 표한다.」 「에엑따 : 속지마라,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 신상정보에 오류가 있을 거야.」 [눈밭여우님이 별 2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Intermission, 전투의지와 전투피로 (1) 적에게 압도당하는 상황은 전투의지를 감소시키는 동시에 전투피로를 증가시킵니다. 전투피로가 높고 전투의지는 낮은 경우, 해당 인물은 두려움에 빠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전반적인 능력치에 일시적인 하향보정이 발생하며, 임무를 포기하거나 지도자의 지시에 불복종할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이 페널티는 해당 인물의 의지와 전투계열 기술의 숙련도, 또는 공동체 및 개인의 특성, 지도자의 능력 등에 의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전투피로는 전투상황이 종결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잔류하여 해당 인물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전투피로는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감소하는 속도가 낮아집니다. 치명적인 수준까지 상승한 전투피로는 더 이상 자연적으로 감소하지 않으며, 심할 경우 반영구적인 정신질환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전투피로 관리는 공동체 인력관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스테이터스와 마찬가지로, 전투의지와 전투피로 역시 「통찰」 기술의 등급이 낮으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추정 데이터 열람에는 10등급 이상의 「통찰」이 요구됩니다. #저널, 37페이지, 캠프 로버트 미국 정부가 담화를 통해 새로운 봉쇄전략을 발표했다. 아이다호-네바다-애리조나 주의 서쪽 경계 연속선 및 멕시코 국경에 걸쳐 봉쇄선을 설정하며, 이 선상에서는 항상 집중적인 위성정찰, 항공정찰이 이루어진다. 요지는, 만약 허가받지 않은 차량이동이 관측될 경우, 공군기를 동원해 격파하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경고사격을 하겠다는데, 얼마나 지켜질지는 의문이었다. 이를 위해 각종 유·무인기와 건쉽 다수가 투입된다고 밝혔다. 육군도 물론 굉장한 숫자가 배치되었다. 난민들을 집합시켜놓고 듣게 만든 이 정부담화는, 난민들 입장에선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1차적인 목적은 아마도 봉쇄선 이동(以東) 지역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에 있었겠지만, 봉쇄선 이서(以西)에 남아있는 생존자들과 난민 캠프 수용자들에 대한 협박 또한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었다. 정부대변인은 임무에 투입된 건쉽의 성능과 무장을 일일이 열거해가며 봉쇄선의 차단능력을 확신시켰다. 중형 여객기와 비슷한 크기인 이 항공기(AC-130)는 편도 4천 킬로미터, 왕복 8천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고, 다수의 기관포와 곡사포를 탑재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포대다. 장시간 체공하며 지속적으로 화력을 퍼부을 수 있어 봉쇄임무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같은 담화에서 미국이 현재 제한적인 동원령을 선포한 상태이며, 일부 전략물자에 구매제한이 발효되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온갖 물자가 풍족한 미국답게, 통제는 그리 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전지역에서 개인소유 차량의 이용 가능시간을 제한한 것만으로도 미국은 엄청난 양의 연료재고를 매일 확보할 수 있다는 듯하다. 평시 원체 많은 기름을 쓰던 국가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또한, 공중과 해상무역로 만큼은 감염변종의 위협에서 아직 자유롭다. 검역에 유의할 필요는 있겠으나, 자원수급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소식을 들은 난민들 가운데 일부가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탈출을 꿈꾸던 사람들일 것이다. 고단한 난민들에게는 망상이 필요했다. 미국 동부는 어느새 지상낙원 비슷한 곳으로 통하고 있었다.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머지 국가들에 비하면, 문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미국 동부는 낙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분개했다. 미국정부가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언젠가 반드시 탈출해서, 그곳으로 가고야 말겠다고. 그러나 정부발표가 사실이라면 차량을 이용할 수 없다. 즉시 격파당할 테니. 감염변종과 언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지역을, 걸어서 횡단할 수 있을까?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군대가 깔린 봉쇄선을 넘어가야 한다. 안전지대로 가도 문제다.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결국 거기서도 숨어 지내야 한다. 비참해질 것이다. 군경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결국 최선의 살길은 이곳 캠프에 있었다. #저널, 38페이지, 캠프 로버츠 샌 미구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당장 월동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미군은 전회의 작전이 다소 경솔하고 무모했음을 인정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려 했다. 이에 따라 난민 지원자들은 기본적인 훈련을 받기로 되었다. 애당초 캠프 로버츠는 사태 이전까진 훈련시설로 활용되었으니, 본연의 역할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캡스턴 중위는 회의적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길면 또 모르겠다. 며칠간의 집중교육으로 가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물자수급은 급하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그래서 작전 시 규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동행한 미군 병사가 복귀하지 못할 경우 일체의 보상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 평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기존 방침도 유효하다. 이런 내용이 찍힌 공고문이 난민캠프 곳곳에 붙었다.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하는 훈련은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실탄사용은 제한되었고, 대부분이 전술적 이동이나 정신교육으로 구성되었다. 그래도 이 교육은 미군 장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대대장 지시에 따라, 장교들은 저마다 일정 규모의 지원자들을 교육하게 된다. 나아가 추후 보급임무를 나갈 때, 자신이 교육한 지원자들을 데리고 가야 한단다. 그래서 매회 성과비교를 하여 우수자에게는 포상을,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게 새로운 작전 규정의 요체였다. 「AI 도움말 (통찰 8등급) : 당신은 어느 장교의 그룹에 속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통찰력에 따르면 가장 좋은 선택은 마커트 대위 또는 캡스턴 중위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마커트 대위는 선임중대장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고,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편법을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그와 함께하는 임무는 다른 그룹에 비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마커트 대위는 중증의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인종차별」 가치관을 보유한 인물은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가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두어도 그의 호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아첨과 협상에 능하다면 기대 이상의 대가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캡스턴 중위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만 영향력이 낮습니다.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 탓에 주위로부터 배척받기 쉽습니다. 또한 그는 임무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보다 위험한 임무에 자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그를 선택할 경우, 공정한 대우와 노력한 만큼의 신뢰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살아남기는 그만큼 어려워질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의 선택 : 로버트 캡스턴 중위의 그룹에 들어간다.」 나는 당연히 로버트 캡스턴 중위 쪽으로 들어갔다. 바라던 바다. 농담이라도 마커트 대위 같은 인종차별 주의자에게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았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해도. # 13 [13화] #리더십, 캠프 로버츠 시간가속에 의한 저널 진행이 종료된 시점에서, 겨울은 자신을 기다릴 사람들에게 찾아가기로 했다. 능력은 보여주었다. 시간도 충분히 끌었다. 몸이 달아있기를 바란다. 미성년자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를 만회할 정도는 될 것이다. 난민구역의 밤은 을씨년스럽다. 멀쩡한 텐트가 여럿 비어있었다. 불안한 사람들이 밤마다 한곳으로 몰린다는 증거였다. 맞은편에서 누군가 다가온다. 모르는 얼굴. 다소 불안한 기색으로 소년을 곁눈질하지만 이 정도는 난민구역에서 일상적인 경계수준이다. 지나치려는 것일까 싶은 순간 「생존감각」이 반응했다. 툭. 우연한 부딪힘을 가장해 칼로 찌른다. 그러나 대비하고 있었다. 금속이 번쩍이는 순간, 이미 붙잡았다. 비틀었다. 악! 외마디 비명. 땡그랑 쇳소리를 내며 칼이 떨어졌다. 녹슬고 이가 빠진 더러운 칼이었다. 암살에 쓰긴 좋겠다. 가볍게 베여도 상처가 썩을 것이다. 현재 겨울의 전투능력은 강력한 기술 보정을 받는다. 페널티를 감안해도 강하다. 어지간한 성인을 완력으로 제압하고도 남는다. 벗어나려는 남자의 발버둥이 실패하는 이유였다. "아아, 아파! 아파! 놔줘!" 놓아줄 리가 있나. 비틀어 쥔 팔을 고삐처럼 붙잡고, 텐트 사이의 좁은 어둠으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끌려가는 입장에선 시꺼먼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히익! 히이익! 침을 튀기며 발광하던 남자가 자기 입장을 잊고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살려줘! 미친 애새끼가 사람 잡는다! 누가 나 좀 도와달라고! 어흑. 헬프! 헬프! 일 하라고 양키 새끼들아! 씨발! 씨바아아알!" "조용히. 정해진 시간과 장소가 아니고선 경찰도, 미군도 난민 구역에 들어오지 않아요." 밤늦은 시간 할렘가에 순찰이 잘 들지 않는 이유와 같다. 어차피 중요한 경계만 잘 지키면 별 일 일어날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곳마다 감시탑이 서있다. 아무도 남자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여러 텐트에서 새롭게 불이 켜졌으나 그건 우리가 잠에서 깨어 침입에 대비하고 있으니 엄한 수작 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끌고 오던 기세 그대로 던지듯이 팽개치자, 사내는 이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졸아붙었다. 덜덜덜 떨면서 침과 콧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비참하기 짝이 없다. 소년은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대검을 뽑았다. 다가갔다. 남자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버둥버둥 뒤로 물러나다가, 더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급한 김에 텐트 끝을 파내어 들어가려고 했다. 맨손으로 파는 속도가 놀라웠다. 필사적일 때 붙는 상향보정인가. 통제할 수 없으니 유용하진 않았다. 등판에 칼을 꽂았다. 꺽! 구멍 난 허파에서 바람 새는 소리. 울컥울컥 솟는 피. 그것은 끈적한 어둠이었다. 발버둥은 길지 않았다. 피와 함께 힘도 빠졌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의 경련. 축 늘어져서 가늘게 떨었다. 배경을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몇 다리를 건넜을 것이 분명했다. 꼭 자기 조직 사람을 보내란 법도 없었다. 빼앗는 사람들의 집단에서, 피라미드 바닥에 깔리는 자들은 언제나 배고프다. 배급표 몇 장으로 간단히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죽이는 것은 경고의 의미다. 만만하게 보이면 피곤해진다. 이 편이 사람 적게 죽이는 길이다. 경험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저항감이 있고, 그것을 무시했을 때 혈관에 뜨거운 열류가 흐른다. 기분 좋은 아픔이다. 흐를 때마다 가슴 속 앙금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적인 착각이었다. 열기가 가라앉았을 때, 마음은 보다 무거워졌다. 죄책감 따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서다.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실감이기에. 소년은 가만히 텐트 자락을 들어본다. 걷힌 자락 너머로 몽둥이 따위를 단단히 쥐고 기다리던 남자들, 그 배후에 옹송그린 채 입을 틀어막고 이쪽을 응시하는 여자들. 시선이 마주쳤다. 소년이 목례했다. "주무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이 분이 저를 죽이려고 했거든요. 어쩔 수 없었죠. 그쪽 분들께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이 또한 꾸며낸 모습이었다. 여러 회차를 거치며, 위압하는 방법을 몸에 익혔다. 태연하게 죽여야 괴물처럼 보인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두려운 법. 제대로 미쳐 날뛰어도 마찬가지겠으나, 그 뒤에 대화를 시도하기 어렵다. 이 사람들, 어느 조직이건 소속되어 있을 터. 광고효과 정도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었다. 저 어린 놈 정말 무섭다고. 과연, 텐트 안의 사람들은 뻣뻣하게 굳어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렸다. 일부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럼 실례. 좋은 꿈 꾸세요. 짧은 인사 남기고서 소년은 텐트 자락을 내렸다. 시체를 뒤져보았다. 나온 건 고작 배급표 세 장. 역시나, 배후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오히려 있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시체를 방치하고서 향한 목적지에 보초를 서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세력 있는 사람들의 쉼터라면 어디든 보초가 서있다. 안에서 서는 불침번은 방화에 대한 대비가 약하기 때문. 보초는 소년을 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부산스럽게 일어나는 인기척들.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슥 들어가 버린다. "학생,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인가?" 얼굴을 보니 전에 비참하다고 자조하던 그 노인이다. 얼굴에 핀 검버섯이 며칠 새 더욱 늘어난 것 같았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엿보인다. 노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것을 노렸다. 주도권을 가지려면 상대에게 여유를 줘선 곤란한 것이다. 굳이 밤을 골라 만나는 이유가 있다. 아군에게도, 아군이기에 더더욱 주도권을 내어주어선 안 된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오!" 연철이 탄성을 질렀다. 날벼락 같은 기상을 겪었음에도 환한 표정이 태반이다. 원래 잠에 약한 것인지, 아니면 영양 부족으로 약해진 것인지, 아직 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 기쁨을 나누고 있다. 다만 중년의 부인 한 명은 근심스럽다. 그녀가 소년의 젖은 손을 응시했다. "다치셨수?" "제 피 아닙니다." 두려움이 번졌다. 그러나 이 정도가 딱 좋다. 아니, 연기를 해야겠다.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보자. "저를 죽이려고 하던데요. 캐어보니 「다물진흥회」 소속이었습니다. 제가 여기로 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세상에 그런 썩을 놈들이 있나!"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지만 어른도 아닌 애를 죽이려고 하다니!" "매번 우리 몫을 빼앗아가던 놈들이! 이제 쉽게 뺏기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벌써부터 수작을 부리는구먼! 일찌감치 싹을 짓밟는 짓이지 뭔가 이게!" 당장 공분이 일었다. 군중의 분노는 맹목적이기 쉽다. 특히 변심한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던 여자는 분노가 지나쳐서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었다. 잠에서 깨어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애쓰지만 자신부터 달래야 할 판이다. 겨울은 다수가 감정적인 상태일 때 자신의 입지를 요구하기로 했다.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나이가 어립니다. 무시당하긴 싫어요. 그러니 미리 약속 받고 싶네요. 적어도 함께 있는 자리나 공적인 용무를 말할 땐 제게 공대를 해주세요. 개인적인 자리에선 평대나 하대를 하셔도 상관없고요."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가 원했던 게 그거니까요! 안 그래요, 다들?" 겨울을 처음 초대했던 남자, 연철이 앞장서서 여론을 이끌었다. 겨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행동에 주목했다. 당장은 캠프 로버츠라는 거대공동체 내의 소집단에 불과하지만, 훗날 독립된 공동체로 거듭날 때 어떤 역할을 맡기면 좋을지 알 것 같았다. 높아지는 동의의 소리를 듣고 있다가, 이제 되었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바로 조용해진다. 이목이 집중되었다. 비슷한 상황을 처음 겪었을 땐 얼마나 심하게 긴장했는지 모른다. 모두 인공지능일 뿐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막상 대할 때 사람과 차이가 없으니, 체감할 수 없는 간극이 무섭기까지 하던 시절이다. 이젠 지나간 과거일 뿐이지만. "좋네요. 서로 약속하죠. 전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보이는 얼굴들이 모두 피로했으나, 약간의 기대감과 기쁨, 희망이 엿보였다. 좋은 반응이다. 다만 여전히 계산적인 눈빛들도 있다. 기억해둬야 할 불안요소다. 다시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서 겨울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리더로서 내리는 첫 결정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로버트 캡스턴 중위의 중대에서 훈련을 받을 인원이 필요하니까, 우선 지원자를 뽑을게요. 가볍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나중에 이 인원 그대로 임무를 맡게 되거든요." "몇 명이 필요할까요?" 이전부터 임시 대표 역할을 맡아온 연철의 질문이었다. 겨울은 그를 향해 답했다. "적어도 열 명은 있어야겠죠. 그래야 트럭 하나를 우리 편으로만 채울 수 있으니까. 다른 조직 소속 사람들과 공로를 다툴 일도 줄어들 것이고." 당장 침묵이 떨어졌다. 열 명은 너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는 눈치들이었다. 유사시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열일곱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최대치. 소년을 끌어들이는 입장에서 마냥 정직하게만 말했을까? 게다가 만약 전투원이 다 나간 상황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남아있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린 리더에게 사실 열 명도 내주기 힘들다긴 어려울 터. 겨울은 이들이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그 사실을 지적했다. "안심하세요. 전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열일곱이라고 하셨지만, 솔직히 그대로 믿진 않았어요. 열 명이나 밖으로 나가면 여기 남을 사람들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그러니 연철 씨도 그런 표정 지으실 것 없어요. 이해하니까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해해줘서." "면목 없구먼유......." "절박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봐주시게나." 대체로 이런 반응인 반면, 과격한 반응도 있었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다들 너무 겁이 많아요! 일방적으로 의지하려고만 하면 어쩔 셈이에요! 무슨 머슴 뽑아놨어요? 차라리 내가 나갈래요!" 격분한 목소리. 아기를 안고 있는 예의 그 여성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인지, 「다물진흥회」의 이름이 언급된 시점부터 줄곧 격앙된 분위기였다. 어지간히 독이 오른 모양새다. AI가 증강현실을 통해 상황에 맞는 키워드를 제안했다. 놓치면 다시 볼 수 없는 일회성 조언들.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영감이 되기는 한다. 부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겨울의 모습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격분이 물러난 자리에 긴장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손에 피가 묻어있는 사람인 것이다. 아직은 낯설기도 하고. 그러나 적의를 가지고 다가간 것이 아니다. 앉아있는 그녀에게 맞춰 한 쪽 무릎을 꿇고서, 상냥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언제나 좋아하지만, 아기를 생각하셔야죠. 설마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아이까지 미워하시는 건가요?" "그,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럼 다행이고요." 소년은 피 묻지 않은 쪽 손으로 아기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미움 받는 아기의 모습은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한데다 더러운 어머니에 비해 훨씬 말끔했다. 볼살도 제법 잡히고, 피부가 하얗다. 겨울은 아기의 뽀얀 이마에 눈길 주고서, 어머니에게 다시 부드러운 말을 건넨다. "귀엽네요. 남자아이 같은데, 이름이 뭔가요?" "...박정한이라고 해요. 아직까지는요." "아직이라는 말씀은?" "전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니까요. 조만간 다른 이름을 지어줄까 싶어서요." "그렇군요. 부인께서는 성함이 어찌 되세요?" "송예경...이에요." "기억하겠습니다." 이어 소년은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이 기회에 다른 분들도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통성명의 시간이지난 뒤 겨울은 원래의 화제를 다시 도마에 올렸다.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는데, 건강한 남자로만 열 명을 뺄 생각은 없어요. 남는 분들의 안전도 중요하니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필요인원은 열 명이지만, 절반은 전투능력이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어떻게든 숫자만 채워주시면 됩니다." "그럼 오히려 나가는 사람들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송예경의 의견 제시는 당연한 우려를 담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는 웃음을 아낄 필요가 없다. 안심하라는 의미로 꾸준히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부족한 부분은 제가 대신하면 돼요.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렇지만......." "저를 믿어주세요. 누구 한 사람 돌아오지 못하는 일 없도록 할 테니까요." 그 말을 하자마자 AI의 경고가 있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구성원들에게 공공연히 약속한 내용은 공약, 공동체 임무로 간주됩니다. 임무를 달성할 경우 리더십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또한 공동체 내 권력 점유율이 증가하며,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충성도에 상승보정이 발생합니다. 실패할 경우 리더십 페널티와 함께 공동체 내 안정도 및 권력 점유율이 감소하며,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충성도에 하향보정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지도자 자리를 잃어버리거나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약속을 할 땐 성공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더십 계열의 기술 「선동」과 「기만」 등을 통해 이러한 부작용을 완화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확실히 이런저런 능력이라던가 기술 등급이 낮았을 때였다면 이런 약속은 지나친 모험이었겠지. 지금은 아니다. 「종말 이후」의 설계 자체가 '처음엔 자신 만이라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의 입장으로, 나중에는 비극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의 입장으로.' 종말을 진행하도록 되어있다. 「재능이익-탤런트 어드밴티지」가 누적되면 초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저기, 이런 말 미안하지만...정말로 믿어도 좋을지......." 당연히 의심과 회의가 새어나온다. 불안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이들이 아는 소년의 전적은, 고작 한 번의 외부임무와 한 번의 위압뿐이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소년은 무거울 것 없는 어조로 답했다. "저를 믿을 수 있는 분만 나서세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정 안 된다면 숫자가 모자라도 상관없어요. 다른 조직과 같이 움직이게 되겠지만, 그래도 무사히 돌아올 자신은 있으니까요. 우리 몫이 적어질 건 감수해야 하겠지만요." 부담 주지 않는 척 부담 주는 화법.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동시에 믿는 사람만 나서라고 했다.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믿고 말고 한단 말인가. 즉 위험을 감수한다면, 어린 리더에게 점수를 딸 기회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들의 집단이라도 남보다 득 보고 싶은 욕망이 없을 수 없다. 그건 사람의 본성이다. 몸을 팔기 전에도 알았고, 「종말 이후」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경험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의적인 부채감을 얹어준다. "여기서 모두 정하진 않을게요.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만 마음을 정해두세요. 그럴 리 없겠지만...혹시나 숫자가 많으면 제 임의로 선별하겠습니다." 그러고서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같이 머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여러 가능성을 계산한 끝에 거절했다.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고 다 고마워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부모님은 고마운 줄 모르셨지. # 14 [14화] #Intermission, 매력 인간의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라도 씻지 못하면 그 사람의 매력은 상당 수준 감소합니다. 세계멸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대부분의 인프라가 마비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요? 따라서 「종말 이후」에서의 매력 수치는 공동체의 위생시설 수준 및 위생용품과 미용용품에 영향을 받습니다. 설령 100의 매력을 지닌 인물일지라도, 위생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발휘할 수 있는 매력은 10 이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제한은 소모성 위생용품의 사용을 통해 극복될 수 있으나, 설령 충분한 위생시설과 용품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안정성이 낮으면 소용없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대개 약탈의 대상이니까요. 아름다움을 무기로 쓸 수 있는 재능은 드문 편입니다. 이런 제한이 불편하시다면 DLC 「치명적인 매력」을 구매하는 방법으로 극복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현실적인 제약을 무시하는 시스템 보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엔 그 어떤 불이익도 따르지 않습니다. 대인 상호작용 및 지도력에 상향보정을 부여하는 매력이 시작부터 최대라면, 「종말 이후」가 제공하는 사실적인 가상현실 환경을 보다 수월하게 헤쳐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아, 물론 밸런스가 걱정되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진작 끝났거든요. 돈 때문에 하는 거지. 그러니까 엿 같은 우리 DLC를 많이 구매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널, 39페이지, 캠프 로버츠 한 번 다녀오긴 했지만, 샌 미구엘에는 아직 충분한 물자와 식량이 남아있을 것이다. 두 번 정도는 수확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젓번과 비슷한 수준으로. 어디까지나 내 어림짐작이지만. 그러고 나면,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파소 로블레스까지 가야만 한다. 모겔론스 아웃브레이크 이전까지 3만 명이 살던 도시이니, 규모도 크고 변종도 많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갈 순서를 정하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4개의 중대, 먼저 나가는 그룹이 보다 쉬운 일을 받을 테니까. 마커트 대위가 첫 순서를 가져갔다. 선임중대장인 그는 대대장 및 작전참모와 친분이 깊다고 한다. 캡스턴 중위는 마지막이다. 중위 스스로 가장 힘든 역할을 자처했다고 들었다. 그의 그룹에 속한 내겐 나쁜 소식이다. 그래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병상에 있는 엘리엇 상병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난민 지원자를 받기로 한 데엔, 알려진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샌프란시스코 일대와 새크라멘토가 떨어지면서 가족을 잃은 병사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은 정신상태가 불안정하여 작전에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민 지원자를 받는 건 필연이었다. 확실히 그렇다. 연방군이라면 모를까, 주 방위군은 해당 지역 거주자들로 구성된다. 슬퍼하는 병사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캠프 지휘부는 안팎으로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난민들의 분위기도 흉흉한 마당에 병사들까지 믿을 수 없게 됐으니까. 엘리엇은 괜찮냐고 물었더니, 부모의 소식이 끊어졌지만, 원래 남보다도 못한 사이어서 신경 안 쓴다고 하더라. 평소의 밝은 얼굴에서 짐작할 수 없었던 사연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어려웠다. 이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마구 웃는 게 아닌가. 그는 신경 쓰지 말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 파소 로블레스 방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지원자 훈련은 흥미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시간가속으로 넘길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공동체 지도자가 훈련에 동참할 경우 구성원들의 성장이 빨라지는데, 가속에 의한 저널로는 얻지 못한다. 대단한 이익은 아니다. 허나 초반에 버리긴 아깝다. 이것도 능력에 비례한다. 겨울은 보통 이상의 상향보정을 노려볼 법 했다. 예컨대 사격이라던가, 근접격투 같은 것들. 캡스턴 중위는 걱정 짙은 기색이었다. 겨울이 데려온 사람들, 절반은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이나 성별 이전에, 영양과 위생 상태부터 불량했다. 초라하다. 데려온 사람들도 눈치를 보았다. 중위를 설득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캠프에서 보유한 차량 숫자에 한계가 있어, 한 번에 나갈 수 있는 보급대의 숫자는 하나뿐이었다. 나가는 것보다 많은 차량이 캠프에 남았으나, 유사시를 대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캡스턴 중위와 찰리 중대의 순서는 추가 임무 개시일로부터 나흘 뒤에나 돌아왔다. 캠프 로버츠에서 샌 미구엘을 지나 파소 로블레스에 이르는 거리는, 도로주행시 약 17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로에 널린 장애물이 많다. 멈춰선 차량들이나 버려진 차단진지를 정리해야 했다. 이동에만 3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도로상에 변종이 드물어서 가능한 시간이다. 항공정찰 결과 길은 의외로 깨끗했다. "저기 보이는군. 파소 로블레스다." 벌써부터 땀에 젖은 귈레미 일병이 남쪽을 가리켰다. 옆으로 넘어진 트레일러를 치우고 나니, 지척에 도시의 윤곽이 있었다. 탑승! 탑승! 두어 차례 외치는 소리에 난민 지원자들이 트럭에 오른다. 인원점검 후 차량대열이 다시 출발했다. 101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다가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바로 목적지였다. 인구 3만이나 되는 도시를 한 번에 다 수색할 순 없었고, 어디까지나 24번가 이북(以北), 면적으로 따지면 20분의 1도 되지 않을 구획이 찰리 중대의 작전지역이다. 차량대열은 24번가 초입에서 정지했다. 도로 양편으로 주유소 간판을 4개나 볼 수 있었다. 남쪽부터 셸, 쉐브론, BP, 아르코 순이었는데, 개중 쉐브론과 BP의 입지가 가장 좋았다. 샌 미구엘과 마찬가지로 주유소 곁엔 식당과 여관이 있었다. 난민 지원자 열 명당 두 명의 감시역이라는 구성은 예전과 동일했다. 부상당한 엘리엇 상병 대신 래치맨 병장이 합류했는데, 흑인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일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미군에서 병장이면 부사관급이다. 경험도 많을 것 같았다. 하는 말마다 과도한 Fuck이 들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애당초 지금까지 만난 캡스턴 중위의 중대원들 가운데,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는 별로 없다. 윗물이 맑아서 아랫물도 맑은 걸까. 주유소 바로 위쪽으로 맥도날드 매장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의 가장 그럴 듯한 음식점이라, 난민 지원자들이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제 할당량만 채우면 그만이었으니까. 캡스턴 중위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첫 번째 목표는 이쪽 길로 1킬로미터 북상한 지점에 있을 가공육 매장입니다. 소시지와 통조림 햄을 대량으로 취급하던 곳이니 그곳 하나만 확보해도 전체 할당량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사전에 결정된 사항으로 다들 도상연습까지 마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관리하는 병사들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반면 겨울이 데려온 사람들은 조용했다. 리더가 가만히 있으니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던 것. 겨울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기다림과 합류 시 주었던 당부 덕분에, 소년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도로에 멈춰있는 차량들을 밀어내는 작업은 중노동이었다. 박살나서 바퀴가 구르지 않는 차량도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독면을 쓰고 있다. 호흡이 답답하면 운동이 버거운 법. 실제로 방독면 착용시 약간의 하향보정이 적용된다. 그래도 주변은 조용했고, 가공육 매장에 이르기까지 마주친 감염변종이 고작 세 개체뿐이었다. 한국처럼 건물이 빽빽하게 밀집한 환경도 아닌지라 조기에 발견하여 퇴치할 수 있었다. 위협이 되긴 커녕 이쪽의 화력과잉으로 온몸이 터져나갔다. 대수롭지 않은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주의하며 도로를 개척하려니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정작 목적지에도 변종이 별로 없었다. 트럭을 가득 채운 통조림 상자의 모습에 미군과 지원자들 모두 크게 기뻐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별일 없이 임무를 마칠 수 있겠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선도 차량, 험비가 우뚝 서면서 대열 전체가 정지했던 것. 고장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중대장님. 상용무선 9번 채널에서 구조신호가 잡힙니다." 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병사가 캡스턴을 불렀다. 민수용 무전기는 수백 미터만 넘어가도 수신이 어렵지만, 험비에 실린 무전기(RT-1523F)는 파소 로블레스에서 캠프 로버츠와의 통신도 가능한 물건이다. 물론 지형장애물이나 방해전파가 없어야 한다. 9번 채널이라는 것은 긴급 통신 주파수다. 91.5메가헤르츠 대역을 쓴다. 다이하드라는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소방국을 호출할 때 사용한 것도 바로 이 9번 채널이다. 당장 모든 작업이 중지되고 사주경계에 돌입했다. 캡스턴 중위가 무전기를 직접 잡았다. 난민 지원자들은 흘낏흘낏 훔쳐본다. 불안하고 또 불만스러운 표정들. 보나마나 구하러 갈 일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통신이 원활치 않은 모양이다. 캡스턴 중위가 주먹으로 앞유리를 쳤다. 얼굴이 붉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차량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불렀다. 지원자 그룹의 리더 격 되는 인물들, 중대 간부 및 선임 병사들이 한 데 모인다. 본넷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설명하는데, 고지식한 중위가 다급할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 이 지점, 다니엘 루이스 중학교에 교사와 학생들이 갇혀있다는 무전이다. 정확한 규모와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구조요청을 받았으니 무시할 수 없다.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기 전에, 질문과 의견이 있다면 듣도록 하겠다." 래치맨 병장이 손을 들었다. 중대장의 허락을 받고 발언한다. "교신은 불가능합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다. 우리 무전기 출력이라면 그쪽까지 신호가 닿고도 남을 텐데....... 어째서인지 듣지를 못하더군. 지금은 그쪽이 침묵하고 있는 상태다. 배터리 잔량 문제로 시간을 정해 켰다 끄기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다." 차량 탑재 무전기는 안테나를 길게 늘여 수신 범위가 넓고, 출력도 최대 50와트에 이른다. 반면 민수용 무전기는 안테나가 짧아 수신 범위도 좁고, 출력은 통상적으로 0.5와트 내지 3와트 범위였다. 배터리가 부족하면 수신감도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번엔 데이브 시리스라는 이름의 병장이 손을 들었다. "솔직히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도시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인력으로는 거기까지 도로를 정리할 수도 없을뿐더러,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판단됩니다. 더구나 구출 대상의 숫자도 알 수 없는 마당이라면....... 경솔하게 나섰다간 임무달성은커녕 우리가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기존 임무부터 완수하고 복귀한 다음, 증원을 받아 다시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엿 먹어라, 시리스." 대뜸 욕설을 뱉은 건 피어스 상사였다. "생각해봐. 거시기에 털도 안 난 애들이 떨고 있을 거라고. 근데 알아보지도 않고 일단 복귀하자? 헛소리! 걔들이 오늘 밤을 넘긴다는 보장은 있냐? 정찰을 보내 상황파악이라도 해봐야 도리 아닌가? 만약 너무 많아서 구출이 불가능하다면, Fuck, 정찰 간 인원이 거기 남아 증원이 올 때까지 보호해줘야지!" "상사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중대 병력이 절반이라도 왔으면 저도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 운전병 포함해서 고작 1개 소대도 안 되는 중대원에 나머지는 전부 의욕 없는 난민 지원자들뿐이잖습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과연 이들 중 이 위험한 임무에 자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전에 제공받은 항공정찰 사진을 보면, 중심가에 상당히 많은 변종들이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잠시 후면 일몰입니다. 변종들이 일몰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정보는 상사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피어스 상사가 몇 번 더 엿 먹으라고 되뇌었으나, 딱히 누군가를 겨냥한 욕설이 아니었다. 이때 겨울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룹 사람들에게 했던 약속...그러니까 모두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약속만 아니었다면 자원하겠는데.......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임무는 보상이 좋다. 이렇다 할 의견이 나오지 않는 시점에서, 캡스턴 중위가 본부와 교신을 시도했다. 캠프에서 도시 입구까지 도로를 치워두었다. 증원을 보낸다면 30분 내에 도착할 수도 있다. 대기 상태인 다른 중대로부터 보충 병력을 받거나, 헬기 같은 항공지원을 받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캠프 로버츠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캠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병력증원은 불가능하고, 정부의 봉쇄지침에 따라 감염지역 수송목적으로는 회전익기 투입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병력손실의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며 전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중위가 항의했다. 소용없었다. 무전기 너머의 대대 작전참모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입씨름이 한참 이어졌으나, 일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캡스턴 중위는 분개하여 통신을 종료했다. '그렇겠지.' 겨울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관제 AI의 상황연산으로 발생하는 특수임무가, 자연적으로 해결될 리 만무하다. 피어스 상사가 불평했다. "이봐요, 중대장님. 설마 이대로 복귀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상사,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명령이......." "애미 뒤진 나치 새끼들도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답디다." 심기 불편한 상사의 대꾸에 캡스턴 중위는 차분한 몸짓으로 난민 지원자들을 가리켰다. "명령도 명령이지만 여기 이 분들은 어디까지나 보급임무에 자원하신 겁니다. 게다가 민간인이고요. 다른 목적으로 추가적인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떤 의미로는 계약 위반이지요." "그게 지금 무슨 대수라고......." "지금은 긴급 상황입니다. 인류가 멸망할 위기 앞에 병사와 장교 개개인이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릴 순 없습니다. 정부가 무너졌다면 모를까, 명령계통이 살아있는 지금은 말입니다. 상사, 자꾸 이러시면 명령불복종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으나 중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상사의 복무경력을 존중하는 건 당연하지만, 지휘권은 어디까지나 중대장의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상황이라 존중받진 못하고 있으나, 중위의 말처럼 난민들도 본디 민간인으로서 미군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위험한 임무에 강제로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 중위의 입장이었다. 소년이 보기에 이것은 단순한 고지식함과 다르다. 현재 캠프는 난민 지원자들의 도움 없인 외부활동이 어려운 처지다. 중위의 임의 행동에 따른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다음 임무에서 충분한 수의 지원자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공멸만 남을 뿐이다. 지원자가 줄어든 만큼 충원되는 물자도 감소할 것이고, 난민들의 처지는 더욱 열악해질 것이고, 열악해진 처지의 난민들이 과격한 생각을 하지 말란 법 없었다. 미군에게도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잘 무장했어도 수십 배의 난민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심각한 위기다. 지금도 캠프의 분위기 탓에 추가병력 파견이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더 악화되면 곤란하다. 중위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젠장! 좋습니다. 위쪽에선 병력손실을 감수할 수 없다고 했습니까? 그럼 지원자들 중에 자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없다는 겁니까?" 질렸다는 뜻으로 두 손 들고 성내는 상사는 제법 위협적이었다. 사이즈 큰 유니폼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근육 꽉 찬 흑인이 화를 내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체구 작은 동양인들 입장에선 주눅 들기에 충분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드는 사람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이 대답이었으니까. 더욱 화가 난 상사가 거칠게 윽박질렀다. "제기랄! 다들 이러기야? 동양인들은 몸이 작아서 담도 작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어볼 수도 있잖아!" "그거 인종차별입니다. 그리고 괜히 우리 나쁜 사람 만들지 말아요. 시리스 씨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볼멘 항의가 흘러나왔다. 마치 둑이 터지듯이, 최초의 한 마디는 다른 여러 마디를 불러왔다. 구실이 된 시리스 병장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나 이미 나온 말을 어쩔 순 없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정은 알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요." "고작 하루 이틀 훈련받았다고 우릴 당신들과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죠." "솔직히 당신들 우릴 방패막이로 생각하잖소. 동행한 병사가 복귀하지 못하면 보상은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우리보다 병사 목숨이 귀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거지. 위험하면 병사들 대신 죽으라고 말이오. 여기까진 좋다 이거요. 어쨌든 우리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마지막 말은 무겁다. 진실의 무게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겨울의 고민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제가 가죠." "어?" 피어스 상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인가 의심스러워서. 겨울이 바로 말을 이었다. "대신 제가 데려온 다른 분들은, 원치 않을 경우 돌아가게 해주세요. 그 분들을 안전히 보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같이 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네." "하, 소문에 상남자라더니 진짜였군." 피어스 상사가 웃었다. 방독면이 얼굴 반을 가렸어도, 눈만 보면 알 수 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난민들 입장에선 기분 좋을 상황이 아니다. 각자 몸 사리기 바쁜 와중에 어린 놈 혼자 가겠다고 나섰으니, 자신들의 체면은 뭐가 된단 말인가. 개인이 아니라 소속 조직의 체면도 있다. 괜히 노려보았다. 호감도 하향보정 경고가 중구난방으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 상승보정 알림이 드문드문 있었다. 대부분은 미군이었다. 그 중 한 사람, 중대장 로버트 캡스턴은 미안한 한편으로 근심어린 분위기다. "용기는 정말 대단하지만, 안 돼. 너무 위험해." "저보다 더 어린 학생들을 저대로 둘 순 없잖아요." "으음....... 다른 난민 분들에게도 의사를 물어보는 게 우선이겠군." 그러나 다른 조직 사람들에게 묻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년과 명확히 적대관계에 놓인 조직 출신도 많았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자기들 대표가 거부한 마당에 나서는 건 대표를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돌아간 뒤 고달플 것이 뻔했다. 소년을 따라온 사람들도 다들 두려운 기색이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혼자 가는 건가. 뭐, 차라리 그게 낫겠네. 소년이 생각할 무렵, 스스로와 싸우는 모습으로 힘들게 손 드는 사람이 있었다. "도움이 될 자신은 없지만, 대장 혼자 보낼 순 없어요." "...대장?" 고개를 갸웃 하는 겨울에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 대장님이잖아요. 작지만." 높임말이 많이 어색하다. 자신 없다는 말처럼, 그녀에게 전투력을 기대하긴 무리일 것이다. 팔다리가 가늘다. 지저분하여 미인인지는 모르겠고, 다만 비쩍 마르기 전엔 늘씬하단 말을 들었을 법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손이 차례로 올라왔다. 다행히 남자들이다. 왜소한 반대머리 아저씨가 하나, 적당한 몸집의 청년이 하나. "밥값은 해야지." "그렇죠. 그것도 선불로 받았으니." 선불이라는 건 겨울이 전에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 인사치레로 건네었던 배급표를 말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이들은 남들이 소년에게 환호할 때 유독 조용하던 소수에 속했다. 기회만 있으면 소년을 대신하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읽기 쉬웠다. 자라면서 다른 사람 눈치를 볼 기회가 많았으니까. 아버지 덕분이다. 이렇게 되자 캡스턴 중위는 기쁨과 근심을 함께 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기쁨. 그리고 이들을 보낼 순 없다는 근심. 보내봐야 면피용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겠느냐는 회의. 의무와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가, 마른세수를 하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어 면목이 없다. 명령만 아니었어도......." "자책하지 마세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만들어 약간의 호감을 얻은 뒤, 소년은 충분한 양의 탄약, 식량, 응급처치용품, 무전기를 요청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탄약은 당연하고, 식량과 응급처치용품들은 갇힌 학생들이 오랫동안 굶었을 가능성이나 부상자가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필요해요. 연락수단도 없으면 곤란할 것이고." "그 정도는 당연히 줘야지." 당연하지는 않다. 아무리 수가 적어도, 난민들을 통제 밖으로 내보내는 일. 캠프 지휘부에서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중위가 감수하기로 한 부담이었다. 결과적으로 탄약과 통조림, 항생제, 붕대 따위로 더플 백 두 개분의 짐을 꾸렸다. 무전기는 배낭처럼 메는 것(AN/PRC-119)을 하나 빌렸다. 다루기 복잡한 물건이지만, 어차피 정해둔 주파수 하나만 쓸 것이었다. 전원을 넣고 주파수를 입력하는 방법만 배우면 충분했다. 통신병이 일대일로 알려주었다. 무전기 사용법을 숙지한 뒤 겨울이 경례했다. 정식 계급도 없지만 어쨌든 지원병 취급이니만큼 인사는 이것이 어울린다. "내일 뵙겠습니다. 일몰 전에 도착해야 할 테니 시간이 빠듯하네요." "위험한 일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다. 무운을 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중대장을 필두로 소년을 좋게 본 미군들이 짧은 인사를 전했다. 귈레미 일병은 덥썩 안기까지 했다. "무사하라고. 금방 구하러 올 테니." "귈레미야말로 다치지 마세요. 서두르다가 엘리엇처럼 되지 말고." "이 녀석 말하는 거 보게?" 일병은 말하다 말고 총을 들어 소년의 머리 위를 쏘았다. 소음기를 끼웠다지만 정수리 가까이서 터지는 소리가 결코 작지 않다. 놀라지는 않았다. 등급 높은 「생존감각」 덕분에 후방에서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느꼈다는 표현도 바르지 않다. 등골을 찌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시야에 오차범위를 포함한 대략의 방위와 거리가 홀로그램으로 표시되었으므로. 돌아보면 빛바랜 도로 위에 몇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면역거부반응으로 문드러진 피부가 멀리서도 선명하다. 감염변종이었다. "출발하죠." 소년의 담담한 한 마디. 따르기로 한 세 남녀가 감탄한 것 같다. 소폭의 호감도 상승보정을 얻었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 아래, 아스팔트 위로 네 개의 그림자가 늘어진다. # 15 [15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2), 파소 로블레스 겨울은 「독도법(讀圖法)」에 투자했다. 탤런트 어드밴티지의 수혜를 받았지만 많이 올리지는 않았다. 경험치는 언제나 여분을 남겨야 한다. 「독도법」의 수준이 높으면 지도를 정치(正置)할 필요성도 없고, 오독(誤讀) 가능성도 줄고, 정보 분석이 제공되고, 나아가 한 번 본 지도는 자동으로 암기된다. 암기는 곧 미니 맵 업데이트를 뜻한다. 나아가 증강현실로 편의를 제공받기도 한다. 현재는 지도 읽기가 편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예컨대 지도상에서 최단경로가 도드라져 보이거나, 지형지물과 대조할 때 밝게 강조되는 정도. 목적지인 다니엘 루이스 중학교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잘 정리된 시가지에서 길을 잃어버릴 확률도 낮은 편이다. 그래도 안전을 기하기 위해 익혔다. 읽지 않은 메시지들. 증강현실 신호가 깜박거렸다. 무시하고 있었다. 마냥 이러면 안 되겠지. 대화 창을 열었다. 시청자들이 정보를 원했다. 생각을 정리한다. 생각은 그대로 문장이 되었다. 「「독도법」은 필수가 아니지만, 있으면 여러모로 편해집니다. 중요할 때 길을 잘못 들면 비난 받기 쉬우니까요. 관련 도전과제로 「이 산이 아닌가?」가 있습니다. 달성 효과는 오독 확률 감소입니다.」 반응을 보지 않고 창을 닫았다. 아직 방송이 불편했다. 사정상 하기는 한다. 허나 가상현실은 새롭게 주어진 삶이다. 근본이 거짓일지언정, 그거라도,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일.......' 장애물이 있으면 피해가야 했다. 넷이서 치우긴 벅찼기 때문이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중간에 전투까지 섞이면 거리 감각이 왜곡되기 쉽다. 「독도법」에 투자한 이유였다. 선도하던 소년이 주먹을 들었다. 정지신호. 「생존감각」이 경고한 방향으로 총을 겨눈다. 잠시 기다렸다. 정지한 화물차,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감염변종 하나. 한쪽 눈은 동공이 혼탁하다. 시력이 없을 것 같다. 과연, 다른 눈알만 굴려 이쪽을 본다. 그것이 소리 지르기 전에, 소년은 방아쇠를 당겼다. 퍽. 소음기가 한 번 걸러 작아진 총성. 철컥 밀린 슬라이드가 탄피를 뱉는다. 변종의 눈알이 터지며 쓰러졌다. 탄자가 부수고 나온 뒤통수로부터 진득한 뇌수가 흘렀다. 캡스턴 중위와 헤어진 지점은 국도와 파소 로블레스 24번가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그로부터 13번가까지 남하한 뒤 다시 동쪽으로 한참을 가야 했는데, 「독도법」으로 파악한 도상거리는 약 4.3킬로미터였다. 도로가 깨끗하고 다른 위협이 없었다면 한 시간으로 족할 거리다. 남하경로로 국도를 고르지는 않았다. 주요도로인지라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정지한 차량들. 차량이 많다는 건, 대피 중에 감염된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경험치를 얻자면 가볼 만한 길이다. 그러나 일몰까지 목적지에 못 닿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다른 길, 리버사이드 애비뉴를 따라 남하했다. 도시 안쪽에서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길이다. 장애물이 국도보다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지나는 길가에 침례교회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벽면 가득 성경구절과 함께 신을 찾는 절규의 문장들이 붉게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저거 설마 피는 아니겠지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겨울은 통성명 할 당시를 떠올렸다. 지력보정으로 뜨는 증강현실 홀로그램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제중. 해병대 출신이라더니, 의외로 겁이 많다. 잘도 따라오겠다고 자원했구나. 그만큼의 계산이 깔려있기야 하겠다만. "아니길 바라야죠." 이어지는 여성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다. 그러다가 소년을 뺀 모두가 비명 질렀다. 교회 창문에 턱, 하고 핏빛 손자국이 찍힌 탓. 그 위로, 흰자위가 누렇게 뜬 얼굴이 슬며시 올라왔다. 아차. 이쪽을 봤다. 일행에게 신경 쓰고 있던 터라 조준이 늦었다. 다른 놈들 부르기 전에 머리를 날려야 하는데. 끄아아아아아- 유리창 너머로 답답하게 들리는 저 괴성이, 건물 안에서는 얼마나 쩌렁쩌렁할 것인가. 소음기에서 몇 번 둔탁한 총성이 터진다. 놈은 벌린 입 안에 탄 두 발을 맞았다. 금 간 유리창에 죽은 피가 후두둑 튀어, 아래로 흐르는 검붉은 얼룩이 되었다. 교회 정문이 덜컥 흔들렸다. 덜컹덜컹. 열리지 않는다. 마구 두들기는 소리들. 안에서 빗장을 질러두었나 보다. 삐걱거릴 때마다, 문틈으로 충혈 된 눈 수십 개가 엿보였다. 분노와 허기가 느껴진다. 겨울의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갓길에 방치된 캠핑카가 보인다. "저 뒤로 숨으세요! 어서!" 세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가다가 겨울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우뚝 멈췄다. "겨울 씨는요?!" 소년은 대답 대신 허리에서 정글도를 뽑았다. 남은 손으로 손짓한다. "저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세 사람은 주춤거렸지만, 점점 더 벌어지는 문을 보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황급히 숨는다. 문이 터졌다. 그렇게 묘사하는 게 가장 적절했다. 한쪽은 떨어져 나갔고, 남은 짝도 괴상하게 비틀렸다. 쏟아져 나오는 감염변종들. 먼저 나오는 것들은 정상이 아니다. 뒤에서 미는 것들에게 짓눌렸는지 여기저기 벗겨지고, 짓이겨져 있다. 벗겨졌다는 것은 피부와 근육이었다. 제 발로 걷지 못해 굴러오는 중이다. 굶주린 죽음이 쏟아져 나온다. 그 혼란, 공황에 빠진 인간 무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하다. 넘어져서 밟히는 것들은 그대로 압사 당했다. 지능이 감소한 탓에 장애물을 회피하지 않는다. 자꾸 넘어진다. 넘어지면 죽는다. 그래도 멀쩡한 놈이 더 많았다. 사지를 펼치고 광란하며 달려온다. 소년은 무리를 유인했다. 방치된 차량들을 칼등으로 탕탕 두드린다. 대담하게도, 속도는 조금 빨리 걷는 정도였다. 변종이라도 지능이 아예 없진 않기 때문에, 소년은 일행 쪽을 보지 않았다. 저놈들도 똑같이 쳐다볼 테니까. 그래서 일행 들으라고 목소리만 키웠다. 방독면 전성판을 걸러 큰 소리를 내려면,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야 했다. "저것들이 등을 보이면 사격하세요! 연사는 금지! 정조준으로 삼점사를 쓰세요! 급소를 노려요! 머리! 심장! 잠깐, 아직 빨라요! 쏘지 말아요!" 부상당한 개체를 그냥 두면 뒤를 돌아볼 것이고, 일행을 발견하여 특유의 소리를 지를 것이었다. 변종에 따라 다르지만, 동물 수준의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다회차에 걸친 경험 덕에, 상황이 급하다고 지시가 막히진 않았다. 처음엔 어땠더라. 가상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이는 것에 압도당했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었다. 지금은, 심박도 정상의 범위다. 변종들 사이에도 육체적 능력의 차이가 있었다. 숙주가 인간이니까. 상태 좋은 놈들이 무리를 훨씬 앞서 달려들었다. 소년은 단 한 걸음, 옆으로 빠지며 칼을 그었다. 달려오는 관성과 베는 힘이 맞물렸다. 머리통 위쪽 반이 단숨에 날아간다. 「근접무기숙련」과 「근접전투」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부족했다면, 무게에 휩쓸려 넘어지거나, 최소한 중심이 흔들렸을 것이다. 연속해서 세 놈이 육박했다. 어렵지 않게 피했다. 감염된 인간은 근력이 늘고 순발력은 줄어든다. 상위 변종이 아닌 이상 정교한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설령 인간이라도, 전력질주 와중에 방향을 바꾸긴 힘들다. 변종은 더했다. 수 미터 남겨둔 시점, 「전투감각」이 회피시점과 경로를 알렸다. 사실 소년 본인의 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우측으로 비껴선 소년을 향해 비틀리는 변종의 상체. 그러나 하체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무게중심의 급격한 변화. 혼자 넘어지는 놈의 목덜미에 칼날을 박는다. 좌측 어깨 위에서 시작된, 바깥 방향으로의 풀 스윙. 척수를 찍고 빠지는 칼과, 관성에 못 이겨 나뒹구는 변종. 꿈틀거림은 그저 죽어가는 경련일 뿐이었다. 마지막 녀석을 베자니 칼이 너무 멀다. 변종이 크악 손을 내민다. 거의 닿을 순간에, 소년은 자세를 확 낮추었다. 어깨에 쿵 부딪히는 느낌. 변종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뜬 와중에도 소년을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몸짓. 놈은 머리부터 떨어져 목이 부러졌다. 으직. 감염자 넷 처리하는 데 고작 여섯 호흡 들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순식간이었다. 캠핑카 측면에 기대어 숨죽이던 일행은, 멀쩡한 소년의 모습에 경악했다. 조준하고도 쏘지 못한 자신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직입니다! 쏘지 마세요! 쏘지 마세요!" 다가오는 위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어 사격을 막는 소년. 반복해서 외쳤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지시는 한 번으로 불충분하다. 극도의 긴장과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이 빠르게 지시했다. "세 명 중 한 명...아니, 이유라 씨는 다른 방향을 경계하세요! 소리를 듣고 새로운 무리가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그새 새로 가까워진 변종 하나를 베어 죽이고서, 소년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박진석 씨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캠핑카 안을 수색하세요! 위험해지면 차량 안으로 숨어서 문을 닫고 버텨야 하니까!" 체력 좋은 놈들을 처리하고 나니, 본격적인 무리가 냄새를 맡을 거리까지 다가온 상태. 겨울은 더욱 요란하게 시선을 끌었다. 그는 미끼다. 미끼 역할의 방향전환은 속도만큼이나 중요하다.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쫓는 무리의 앞 열은 그에 맞게 반응하는데,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뒤쪽에선 무작정 밀어댄다. 고로 우르르 넘어질 일이 잦다. 장애물을 끼고 좌우로 오가면 효과가 더욱 좋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래저래 밀도가 떨어진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환경이 갖춰지는 것. 소년의 공격은 주로 횡방향이었다. 수직으로 찍으면 공격력은 좋지만, 두개골에 칼이 박혀 회수가 버겁다. 뼈를 피해 얕게 베어야 좋다. 숨줄을 따야 한다. 변종이 인체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이상, 호흡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다. "지금입니다! 쏴요! 사격!" 대번에 세 개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세 개? 지시가 잘 지켜지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으나....... 겨울은 소리를 높였다. "유라 씨는 후방! 뒤를 경계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죄송......!" 이런. 무의식중에 소리쳐 대꾸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소음기가 죽인 총성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 역시나, 긴장한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녀가 자기 입을 막았다. 늦었다. 무리 일부가 속도를 줄이며 뒤쪽으로 돌았다. 겨울은 가까이에 있던 차량의 본넷을 쾅 밟아 지붕까지 올라갔다. 정글도를 거두고, 소총을 풀어 쥔다. 딸깍, 딸깍. 조정간을 연사에 놓고 개머리판을 어깨로 바싹 붙였다. 「개인화기숙련」과 「전투감각」에 본인의 경험이 더해진 신속한 조준. 프드드드드- 프드드- 프득! 소음기가 거른 총성은 둔탁하고 괴상했다. 탄피가 정신 사납게 튀었다. 4초가 지나기 전에 30발 탄창이 비었다. 그러고도 몇 놈이 지르는 소리를 막지 못했다. 유인해온 무리의 절반가량이 반응한다. 주로 뒤쳐져있던 것들. 숫자로 치면 스물 가깝다. 거의 본능에 가깝게 탄창을 갈고, 소음기를 홱 돌렸다. 스냅을 받은 소음기가 팽그르르 돌다가 제멋대로 떨어져나갔다. 줍겠다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견착, 조준, 발사까지 반 호흡. 투타타타타타탕! 소음기 제거한 소총은 미친 듯이 울어댔다. 그 크기는, 쏴보지 않고선 실감하기 어렵다. 최소 140데시벨. 순간적이지만, 항공소음의 약 100배에 이른다. 그 정도로 요란하다. 변종들의 주의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다수는 그랬다. 기어코 일행을 향하는 개체들은 소년의 연속 사격에 노출된다. 머리가 터지거나, 빗나가도 흉부 관통이었다. 최소한 운동능력은 상실시켰다. 여기까지의 대응이 결코 길지 않았지만, 차량이 포위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기어오르는 개체가 벌써 둘이다. 아우성치는 서로가 방해되지 않았다면 벌써 오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수류탄을 써야 하나. 지금 쓰긴 아까운 화력이다. 학교에서 특수변종이 출현할지도 모르는데....... 탄약소모도 예상에 비해 지나치게 격렬하다. 결국 총을 등 뒤로 메고, 다시 정글도를 들었다. 근접전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으니 강력한 이점이다. 무기의 길이가 짧아서 흠이나, 전투기술로 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일행 두 명의 사격이 무리를 뒤쪽부터 깎아먹고 있지만 속도가 느리다. 차량 아래에 우글거리는 얼굴들이, 저마다 손을 뻗고 소리 지르는 광경. 가득한 괴성은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 많은 수가 모두 교회에 있었다. 만약 실제로 종말이 찾아온다면, 신의 영광이 빛바랜 지 오래인 지금도 사람들은 신을 찾으려고 할까.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시대를 어찌 생각할까. 몸을 팔고 뇌만 남아 환상 속을 사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새 기어코 기어오른 놈이 일어서기에, 겨울이 그 목을 붙잡았다. 벌어진 입 안쪽을 콱 쑤셔 죽인다. 죽이고, 그 시체를 한쪽 방향으로 밀어 던졌다. 빽빽하게 둘러싸고 난리치던 놈들이다. 위에 시체 하나 떨어진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소년은 붕 뜬 시체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뛰어, 그 너머의 빈 땅에 몸을 굴렸다. 구를 때 등이 무척 아팠다. 총 멘 자리가 배겨서 그렇다. 무시하고, 구르는 방향으로 곧장 일어나 달렸다. 등 뒤의 괴성들이 실제보다 더 가깝다. 정면의 주택 마당은 허리 높이의 울타리를 둘렀다. 뾰족한 끝 하나만 움켜쥐고, 단숨에 뛰어넘는다. 속도를 죽이며 다섯 걸음을 더 나아가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콰직! 뾰족한 울타리는 인간을 꿰어놓은 꼬챙이가 되었다. 찢어진 배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내장들. 뒤에서 마구잡이로 미는 무리 탓이다. 혼자라면 얼마든지 넘었을 것을. 울타리가 무너졌다. 무리가 와르르 넘어진다. 그 틈을 타 돌입하는 겨울. 전투화는 훌륭한 무기였다. 단단하다. 힘주어 밟으면 목이 부러진다. 콰득콰득. 경추 으스러지는 소리들. 허우적거리는 손에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달리다시피 밟고 차서 시간과 공간을 벌었다. 무리 사이에 여백을 생길수록, 상대하기 편해진다.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위험한 놈에게 우선 총탄을 박았다. 통각이 마비되었을 지라도, 놀란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하는 건 막을 수 없다. 폐라도 뚫리면 빠른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움직이긴 한다. 감염변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멀쩡한 인간도 격분하면 단발로 제압하기 어렵다. 감염변종은 약 먹은 인간보다 까다롭다. 머리를 날리지 않는 한, 권총으로 죽이기 힘들다. 칼을 쓸 때다. 기술보정에 의지하여, 겨울은 도살자가 되었다. 피, 내장, 살점, 신음. 지옥의 광경이다. 변종들의 신음이 점점 더 줄어들더니, 마지막 칼질에 검붉은 피가 쫙 튀었다. 소동이 지나간 자리. 시체들이 거리 가득 뒹굴었다. 헤아려보면, 거진 일흔 구에 가깝다. 이따금씩 성치 못한 몸뚱이로 기어오는 것들이 있기는 했다. 엇나간 사격에 맞은 놈들이다. 그것들을 마저 처리하고 나니 정말로 고요해졌다. 이제까지의 소란이 거짓말 같았다. 내던졌던 소음기를 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회수한 뒤 캠핑카로 다가갔다. 두 남자의 시선이 아연하다. 시스템 알림을 보면 경애 호감도는 올라갔어도 친애 호감도는 오히려 감소했다. 경외와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것. 뭐, 그 정도면 좋다. 소년은 아직도 떨고 있는 여성을 바라본다.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후방으로 겨눈 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숨죽인 목소리, 흐느낌에 가까운 울림으로, 속삭이듯이 절규하는 그녀. "거, 거기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네?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구요!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거예요?! 작은 대장은 무사해요?!" 아직도 말문이 막혀있는 두 남자 대신 겨울이 답했다. "끝났어요, 유라 씨. 이제 돌아보셔도 돼요." 힉. 그녀는 겨울의 목소리에 놀라더니, 천천히, 경계하던 자세 그대로 조각상처럼 돌았다. 겨울은 한숨을 내쉬곤, 자신에게 돌아오는 총구를 붙잡아 위로 올렸다. "총구를 사람에게 향하시면 안 됩니다." "......." 굳어서 반응이 없는 그녀. 그러나 시스템 알림은 여전히 갱신되는 중이다. 호감도 증감이 앞선 두 남자와 다소 다르다. 첫째로는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일 것이고, 둘째로는 싸우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 탓일 것이다.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잠시. 그녀는 겨울을 와락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내가 멍청한 짓을 해서......." "괜찮아요. 다친 사람 없으니까." 어깨를 당겨 안고 토닥거리는 손길. 다시 한 번, 알림이 갱신되었다. # 16 [16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3), 파소 로블레스 개의치 말라는 소년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이유라는 풀이 죽어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같았다. 자신의 실수로 위기를 겪었으니 그럴 만 하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전투피로」의 증가는 미미한 수준이다. 가장 위험한 역할은 겨울이 도맡았으니까. 다독이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 남쪽으로 향하는 리버사이드 애비뉴와 동쪽으로 트인 13번가의 교차로에서, 소년은 근처의 작은 점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갈까요?"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어요?" 다른 두 남자의 태도는 이전보다 좀 더 정중하다. 늘어난 경애와 줄어든 친애의 영향이 엿보였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그리고 지금 해둬야 할 일도 있고." "해둬야 할 일이라면......?" 소년은 대답 대신 벽에 바싹 붙었다. 간판이 떨어져있다. 점포 전면은 판유리로 되어있고, 안쪽엔 테이블이 여럿 놓여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피자집이었다. 문을 열자 소음이 생겼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안쪽에 감염변종이 있다면 소리를 듣고 나올 터. 그러나 조용했다. 괜찮다고 뒤쪽에 수신호를 보냈다. 일행 세 명이 순서대로 들어온다. 긴장한 모습. 안심하라는 의미로, 소년은 소리 내어 의자를 당겼다. "앉으세요." 일행이 쭈뼛거리며 뒤따랐다. 소년은 남자 쪽 일행이 짊어진 더플 백을 풀었다. 출발할 때 챙겨온 통조림 따위의 식량들을 잔뜩 꺼내놓는다. 식기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포크와 나이프가 테이블마다 있었다. 먼지만 털어 쓰면 되겠다. "식사가 항상 부족하지 않으셨나요? 드문 기회잖아요. 배부르게 드세요." 난민들에게, 포만감은 이미 희미해진 추억이다. 박진석과 안제중이 시선을 교환한다. 세대를 극복한 소통이다. "아까 말했던 해둘 일이라는 게......." "네. 달리 뭐가 있겠어요? 도착해서 분배하려면 아무래도 보는 눈이 있잖아요. 여러분한테만 많이 드리긴 어려울 거예요. 살면서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 하잖아요?" 제중은 벗겨진 머리를 번들거리며 웃었다. "하하, 작은 대장은 확실히 리더의 자질이 있어요. 암요. 융통성은 중요하죠." 두 남자는 좋다고 통조림을 뜯었다. 육류 우선이었다.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반면 이유라는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아직 증상이 가볍지만, 그냥 두면 반영구적 상태이상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이라던가, 전투피로증 같은. 겨울은 미소를 꾸미고서 유라 앞으로 통조림을 밀었다. 그녀가 말리기 전에 뚜껑을 땄다. "드세요. 아깝잖아요." "......전 자격이 없어요." "흐음......." 이럴 땐 어떤 행동이 괜찮을까? 어떤 표정을 만들어야 하지? 기억을 물색한 끝에, 소년은 포크를 들었다. 진득한 육수에 잠긴 고깃덩이를 푹 찍는다. 이런 육류는 대개 싸구려다. 그러나 난민들에겐 사치스러웠다. 과연, 냄새를 맡은 유라가 침을 삼켰다. 꼴깍.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앗......이, 이건......." "아 하세요." "......." "어서요, 누나." "누, 누나라니......."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입 안 가득 쑤셔 넣고 와구와구 씹어대던 제중과 진석 쪽도 뻣뻣하게 굳었다. 본래 인간이었던 감염변종들을 서슴없이 썰어대던 소년의 입에서 누나라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충격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평소보다 이쪽이 오히려 본심에 가깝다. 그래도, 그것을 드러내기는 또 다른 문제. 우수하고도 비인간적인 리더는 권위를 얻기 좋지만, 항상 그러면 곤란해진다. '제멋대로 환상을 만들어.'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비범하며 인간 같지 않다. 이게 심해지면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는다. 그는 우리와 달라. 언제나 성공할 거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뭐든 해낼 수 있어. 신앙에 가까운 그 확신은 양날의 검이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는 순간, 즉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사람들은 굶주린 개처럼 실패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은, 평범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 완전무결한 리더십을 가장하는 것은, 그 외 어떤 수단으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을 때에나 어울린다. 그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유라가 허둥거렸으나 겨울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씻지 않아 더러웠지만, 그럼에도 붉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럴 것이다. 연애감정이 생기기엔 이른 시점이니까. "합-" "잘하셨어요." 그녀가 두 눈 딱 감고 받아먹는걸 보고 겨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울상인 유라. 겨울이 다시 찍어 내미는 걸 보고 기겁을 하여 손사래 쳤다. "이, 이제 내가 먹을게요!" "걱정하게 만든 벌이에요." "......." 좋을 때다. 제중과 진석이 낮게 웃었다. 유라는 젖은 눈으로 두 남자를 흘기더니, 체념하고 얌전히 받아먹었다. 계산된 행동이었음에도 겨울은 즐거움을 느낀다. 연상인데, 울먹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째서?'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먹는 게 느리다. 수개월에 걸쳐 꽉 차게 먹어본 적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 사이 남자들은 각각 통조림 다섯 개씩 해치웠다. 겨울이 걱정할 정도였다. "배불리 드시라곤 했지만 탈 나실까 걱정스럽네요." "어허, 대장님. 나 이래봬도 해병대 나온 남잡니다." 제중의 능청스러운 대답. 어색함을 가리는 능청이다. 어려워하던 것보다는 나아진 반응. 인물 성향에 의한 보정도 있을 것이다. 즉, 계산적인 행동은 플레이어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상관없지만......아직 좀 시간이 있으니, 더 드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도착하고서 또 나누겠지만요." 실은 조금 아슬아슬하다. 감염변종이 야간에 보다 활동적일뿐더러, 조명을 쓰게 되면 눈에 띄기 쉽다. 적어도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엔 도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번복할 게 아니면 불필요하다. 40분 정도를 쓰고 다시 이동을 시작한다. 파소 로블레스는 101번 국도가 동서로 양분하는데, 도시 내의 도로인 13번가는 고가도로 형식으로 국도와 교차했다. 좌우로 탁 트인 시야를 따라, 방치된 차량들과 배회하는 변종들이 보였다. 고가도로 지나서 처음 나온 교차로의 모든 신호등은 불이 나간 상태였다. 전기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생존자들을 위해서는 송전을 지속해야 할 것이나, 정부는 누전에 의한 화재나 사고발생을 더 우려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다. 하기야 방치된 전자기기들이 많다. 사고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큰 변고는 없었다. 일행은 교회에서의 돌발적인 교전 때문인지 주위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고, 십자가가 보일 때마다 겁을 집어먹었다. 고가도로를 지나 고작 1킬로미터를 지나기도 전에 세 개의 십자가를 보았다. 침례교회가 둘, 가톨릭 성당이 하나. 문은 모두 열려있었다. 서성거리던 변종들이 있긴 했다. 이쪽을 보기 전에, 소년이 쏴서 머리에 구멍을 뚫었다. 이동할 때 차량을 엄폐물로 삼는 건 좋지만, 바닥 아래 변종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따금씩 땅에 붙어 멀리까지 봐야 안전했다. 전투화가 단단하고 질기니까, 물린다고 별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기가 다니엘 루이스 중학교 같네요." 성당 건물을 지나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은 교사(校舍)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유달리 커다란 나무가 그늘 드리우는 입구.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건너는 그림이 그려진 노란 경고 표지가 있었다. 『SCHOOL XING(학교 건널목)』이라고 적혀있다. 트럭을 하나 넘어가니, 과연. 새로운 표지판이 나타났다. 학교 이름이 적혀있다. 그 아래, 주황색 테두리를 두른 노란 사각형에는, 시험일정을 알리는 간단한 공지가 적혀있었다. 이젠 치를 일이 없어진 시험이다. 한국의 학교와 다르게 벽을 둘러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개방된 회랑에 변종 소수가 얼씬거렸다. 겨울이 나서면 금방이었지만, 일행의 성장도 중요하다. 겨울은 유달리 취약한 유라를 먼저 지목했다. 다른 두 사람은 측후방 경계에 임한다. "이 거리에서 머리를 쏠 수 있겠어요?" "읏......." 자신 없는 반응이다. 가장 가까운 무리가 대략 30미터 남짓. 다섯 개체.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다. 건물 안에 무언가 있다고 여기는지,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릴 뿐이었다. 소총의 통상적인 교전거리를 감안할 때, 비숙련자도 충분히 명중탄을 낼 수 있을 거리였다. 머리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겨울은 기술 화면을 열어놓고, 교회에서 얻은 경험치 일부를 「교습」으로 넣었다. 진척도를 나타내는 막대가 쭉 밀리면서 등급이 차례로 올라간다. 7등급. 당장은 전문가 영역의 초입으로 충분하겠다. 8등급 「근접전투」, 9등급 「개인화기숙련」을 10등급까지 끌어올린다. 아직 여력이 있었지만, 전개가 유동적인 세계관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앞에 무력하지 않기 위하여, 경험치는 항상 여분을 남겨야 옳다. 「교습」은 함께 행동할 때, 또는 가르칠 때, 대상의 습득효율에 상향보정을 붙이는 리더십 계열 기술이다. 겨울이 유라에게 지시했다. "좋은 기회니까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세요. 총 들어요. 문제가 생겨도 제가 수습할 테니 마음 놓으시고요." 공격 받은 변종은, 즉사하지 않을 경우 동료에게 위험을 알린다. 그런 경우 즉각 끼어들겠다는 뜻이다. 거듭 다독이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유라가 소총을 들었다. 자세가 너무 엉성하다. 훈련의 흔적이 없었다. 하기야 며칠 배웠다고 실전에서 그대로 해내면 대단한 재능이다. 머리로 아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겨울은 개머리판이 제대로 붙도록 잡아주고, 어깨를 누르며 그녀의 호흡을 지적했다. "숨이 거칠어요." 너무 가쁘게 숨을 쉬어, 총구가 오르락내리락 불안하다. 덧붙여 총열덮개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힘을 너무 줘서 그렇다. 조준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방아쇠에서 손가락 떼세요. 서두를 것 없어요. 오래 걸려도 되니까, 준비 되면 쏘세요." 소년은 그녀의 어깨를 누르는 손에 힘을 더한다. 반복되는 격려에, 유라는 조금씩 침착한 호흡을 되찾았다. 한쪽 눈 꽉 감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정렬시킨다. 총탄이 회전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에, 거리별로 높이를 달리 조준해야한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회전이 탄도(彈道, 총알이 비행하는 궤적)에 영향을 주는 건 맞지만,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릴 뿐. 다만 정조준을 했을 때, 총구가 미세하게 들리도록 만들기 때문에, 일부 구간에서 조준점보다 위에 명중한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겨울이 기대하는 것은 그녀의 이해가 아니다. 다만 심리적 안정이었다. 짧지 않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유라의 떨림이 거의 잦아들었다. 청각에 집중한 덕분이었다. "좋아요. 훨씬 나아졌네요. 자세도 훌륭해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중요하다.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지나쳐서 부자연스러우면 역효과를 보겠으나, 유라는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겨울이 다시 지시했다. "이제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어도 돼요. 조정간은 삼점사로 변경. 가장 왼쪽에 있는 변종을 조준하세요. 준비가 되면 그냥 쏘세요. 말 안 해줘도 되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알겠죠?" "알았어요, 대장." 대답을 듣고서 겨울은 자신의 총을 겨누었다. 「개인화기숙련」에 힘입어 대단히 신속하다. 유라가 쐈다. 프드득! 소음기가 죽여 놓은 답답한 총성. 사선 끝의 변종이 요동쳤다. 망치로 때린 것 같다. 벽에 검붉은 피가 팍 튀었다. 정확히 머리 한가운데 맞지는 않았지만, 세 발 중 하나가 척수를 부숴 놨다. 털썩. 쓰러지는 표적. 다른 변종들이 소리를 듣고 휙 돌아섰다. 보는 방향이 다르다. 이쪽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 경직된 유라. 그리고 다시 다독이는 겨울. "괜찮아요,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정말 잘 하셨어요. 자, 이번에도 가장 왼쪽 녀석을 조준하세요. 순서대로 처리하는 거예요. 숨을 고르고, 침착해지면 쏘세요." 이십 초 정도 지나서 다시 터지는, 한 번 같은 세 번의 총성. 이번엔 잘 되지 않았다. 쓰러진 동료를 향해 돌아선 놈들이다. 측면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관자놀이를 꿰뚫었다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한 발은 빗나가고, 남은 두 발이 광대와 턱주가리를 박살냈다. "히익!" 한쪽만 매달린 턱을 덜렁거리는 표적. 놈이 이쪽을 돌아보려는 데에 경악하여, 유라가 굳는다. 놈이 이쪽을 발견했다. 순간, 겨울이 쏜 탄이 미간을 뚫었다. 휘꺽. 뒤로 젖혀지는 머리. 몸통은 휩쓸리듯 넘어간다. 사지가 경련했다. "봤죠? 어지간한 실수는 제가 감당할 수 있어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침착하게 다시 쏘면 그만인걸요. 익숙해질 거예요." "네, 네에......." 침을 꼴깍 삼키는 유라는,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마가 땀에 젖어있었다. 소년, 그것을 곁눈질하고서, 다음엔 손수건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인관계, 관제 AI의 상호작용 평가에도 별도의 보상이 있었다. 사격은 일곱 변종이 다 쓰러지도록 계속되었다. 명중률은 절반 정도. 실패할 때마다 겨울이 조치했다. 놈들은 마지막까지 이쪽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고하셨어요, 유라 씨. 처음인데도 정말 잘 하시네요. 이제 좀 쉬세요." "네, 대장. 후....... 고마웠어요. 자신감이 좀 생기는 것 같아요." 자신이 배려 받았다는 걸 안다. 유라는 활짝 웃었다. 방독면 너머 눈웃음만 보이는데도, 좋은 얼굴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다음은 잔디밭 중앙의 다섯입니다. 이번엔 진석 씨께서 해주시면 고맙겠네요." "해보죠." 오기가 묻어나는 반응. 호승심을, 겨울에게 느끼는 것 같다. 측후방을 경계하면서도 힐끔힐끔 보았으니 어떻게 하는 지 잘 안다. 유라 때보다 수월하게 해치웠다. 마지막, 자칭 해병인 제중의 경우, 앞선 둘보다 편하게 쐈다. 그런 것 치곤 명중률이 낮았는데, 자신감이 넘쳐 실수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하하, 이런. 면목 없습니다. 이거 전역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중년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어쩌면 해병대 나왔다는 말이 거짓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하늘을 보니 어둑어둑 하다. 그래도 아직 한 시간 넘는 여유가 남아있다. 출발할 때 브리핑을 통해 공지 받은 EENT(End of Evening Nautical Twilight) 기준이었다. EENT는 일몰 후 빛이 완전히 없어지는 시각을 말한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더라도, 하늘이 당장 까맣게 되는 건 아니다. 황혼이 지워지는 정확한 시각은 큰 도움이 된다. "이제 첫 번째 건물부터 수색하겠습니다. 앞장설 테니 따라오세요." 다니엘 루이스 중학교는 여러 동의 단층 건물로 구성되었다. 각각이 그리 큰 것은 아니므로, 겨울은 건물 한 채당 10분 내지 20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 # 17 [17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4), 파소 로블레스 겨울은 복도에 걸린 게시판을 눈여겨보았다. 복장규정 안내문에 핏자국이 있었다. 반바지나 치마는 허벅지의 절반 이상을 가려야 한다, 그 아래는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잡아 뜯은 것 같다. 이런 단서를 수집할 때마다, 「통찰」이 학교 내 생존자 분포 가능성을 갱신하여 알려주었다. 교직원의 사진과 이름, 대략적인 학생 수도 확인했다. "학교 마크 치곤 꽤 특이하네요, 이거." 진석이 학교 마크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붉은 바탕의 검은 동심원. 그 안에 포효하는 맹수가 그려져 있었다. 점박이 무늬가 있어 표범처럼 보인다. 진석의 감상을 듣더니 제중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특이해? 고려대학교 마크도 호랑이였는데." "하긴......." 제중은 나이가 있어, 진석에게 하대가 자연스러웠다. 조금 친해졌다 싶더니, 형 동생 하면서 말을 놓았다. "아무래도 이 건물에서 생존자를 찾긴 어렵겠네요." 교실마다 감염 변종 한 둘씩은 꼭 있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밖에서 들어온 것 같았다. 학생들의 흔적은 없다. "건물이 워낙 많으니 원....... 그럼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진석의 자신감 넘치는 제안.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하책이다. 탐색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야 있겠다. 허나 위험하다. 희생자가 나온다면, 지도자로서 한 약속 때문에 페널티를 얻을 것이다. 제안을 수용하면 진석 개인의 호감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연연할 입장은 아니었다. 단독 탐색시 일행 각자의 전투피로가 걱정되기도 했다. 전투 상황만 주의할 게 아니다. 위험에 처하거나 공포를 느끼면 언제라도 오른다. 혼자 움직이면 당연히 무섭겠지. 진석이 유달리 뛰어나거나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너무 위험해요. 제 생각엔 식당이나 체육관 쪽을 먼저 찾아보는 편이 낫겠네요." "어째서요?" "다수가 모이기에 적합하잖아요. 식당은 비축된 식료도 있으니 더 좋죠." "아하." 유라와 제중은 별다른 의문 없이 수긍했다. 진석은 표정이 조금 떫었다. 못 본 척 무시했다. 겨울은 학교 안내도를 발견하고, 손가락을 짚었다. "식당보다는 체육관이 좀 더 가깝겠네요." 건물 배치 상 어느 쪽이건 야외를 거쳐야 갈 수 있었다. 강의용으로 쓰이는 건물 후면으로 나가, 코트를 가로질러야 한다. 학교 자체가 사방으로 열려있다. 전면에서 미처 확인 못한 위협이 있을지 모른다. "앞장서겠습니다. 진석 씨가 좌측, 유라 씨가 우측, 제중 씨가 후방을 경계해주세요." 와장창! 코트 쪽 유리문이 요란하게 깨졌다. 변종 다섯 개체의 난입. 캬아아아! 가청영역 끝자락의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놈들. 즉각 자동화기 세 자루가 불을 뿜었다. 진석, 제중, 유라의 순서. 피와 살점이 퍽퍽 터진다. 변종들은 너덜거리는 걸레짝이 되었다. 탄 낭비가 극심하다. 겨울은 쓰지 못한 정글도를 손 안에서 휘돌렸다. 화를 내야 하나. 생각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돌아서서 차분한 어조로 타이른다. "불안해하시는 건 이해해요. 그래도 맡은 방향만 경계해주세요. 기습당할지도 모르니까요." 일행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그 일치가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든다. 큰 의미 없는 수준의 호감 변화가 생겼다. 화를 내지 않은 덕분에 상향보정도 있다. 불변보정은 없었다. 하기야 그렇다. '변치 않는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생기는 건 아니니까. 하향은 필시 아니꼬워하는 마음일 것이고. 어린놈에게 잔소리 듣기 싫다, 정도가 되려나. 자존심은 합리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문 밖으로 나섰다. 역시나, 감염변종들이 있었다. 짐승처럼 반응하고, 괴물처럼 달려들었다. 겨울은 홀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손에 권총, 남은 손에 정글도. 전문가 영역 최상위에 도달한 사격으로 머리를 여럿 날려버리고, 스스로 돌출하여 놈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능 낮은 것들이다. 그저 달려드느라, 다수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콰직. 회전 넣은 칼날이 목을 치는 소리. 손목에서 힘을 빼고 그대로 돌았다. 쉬이 빠지는 칼. 온 몸을 실어 다음 것을 베고, 2회전 끝에 발을 콱 디딘 반발력으로 비껴 친다. 또 한 놈이 참수 당한다. 쭉 올라간 칼을 회수하기도 전에, 새로운 녀석이 붙었다. 붙잡혔다. 숨 닿을 거리에 못생긴 얼굴. 총탄을 박았다. 작은 구리 탄자 한 쌍이 눈알 두 개를 터트리고, 그 너머의 뇌까지 헤집었다. 털썩. 소년에게 기대어, 아래로 미끄러지는 변종. 눈과 코에서 묽은 피가 흘렀다. 앞서 경고를 주었으나 발전이 없다. 사격만 안한다 뿐이지, 이번에도 고개는 전면으로 향해 있는 일행. 눈길 마주치자, 각자의 방향으로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묵묵한 시간이 흐르고서, 유라가 희미한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죄송해요." 겨울은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다독여야 할 때다. 의식 및 무의식적 사고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관제 AI의 도움말이 소년의 판단을 긍정했다. 「AI 도움말 (통찰 8등급) : 초기 기술숙련도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서 빠르게 증가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작용이 발생하기 쉽고, 후기 기술숙련도는 경우가 다릅니다. 공동체 지도자의 경우, 이러한 경향을 공동체 특성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건전성을 줄이는 대신 빠른 기술습득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즉 도움말에 내포된 의미는, 후반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구성원의 성장을 중시하겠는가, 아니면 초반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건전한 공동체를 확보하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평소 행동으로 누적된 가중치가 영향을 준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였다. 이런 내용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준 뒤, 겨울은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었다. 감정을 꾸미는 것 자체가, 춥게 자란 소년에겐 까다로운 일이었다.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들 노력하고 계신 걸 아니까요." 사소한 호감 보정 알림. 얼마나 쌓였을까. 겨울은 일행을 이끌었다. 체육관은 석조건물이었다. 제대로 된 건 아니고, 돌을 겉으로만 올린 것 같다. 그래도 보기에는 단단하다. 도망치는 사람들 입장에서 믿음직스러워 보일 법 하다. 어디선가 심한 배설물 냄새가 풍겨왔다. 역시 사람의 흔적이다. 정문은 평범한 유리문이었으나, 책상이나 기재를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로 단단히 막혀있었다. "생존자가 있다면 여기겠네요." 일행 모두가 동의했다. "이런 장애물을 한 두 사람이 만들었을 린 없으니까요." 연장자인 제중의 말이었다. "치울까요?" "아뇨. 시끄럽잖아요. 힘도 제법 들겠고, 시간 낭비도 걱정스럽네요. 무엇보다 우리가 들어가고 다시 쌓기도 번거롭겠고요. 들어갈 방법이 달리 있을지 찾아보는 게 낫겠어요. 비상구라던가......." 과연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쫓아가니 쉽게 찾았다. 감염변종이 떼로 뭉쳐 두드리고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온 놈이 두드리는 소음에, 더 많은 놈들이 이끌렸을 것이다. 정문과 달리 강철이라 흠집 하나 없었다. 소리만 요란할 뿐. 붉게 물들긴 했다. 두드리는 놈들의 손에서 나온 핏물이다. 얼마나 쳐댔는지, 망가진 뼈가 겉으로 보였다. "좀 많네요." 음성을 줄이지도 않은 소년의 말. 일행이 자지러졌다. 제중이 소리 죽여 절규했다. "어이! 목소리! 목소리!" 워낙 급해서 반말이었다. 겨울이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저렇게 시끄러운데 제 목소리가 들릴까요?" "어......." 듣고 보니 그렇다. 하아아아.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우습다. 부드럽게 웃고 나서, 겨울은 권총을 뽑았다. 베레타 M92. 미군의 제식 권총이며, 수량이 가장 많아 난민 지원자들에게도 무리 없이 줄 수 있다. 그런 설정이었다. 소음기를 끼운 상태에서는 홀스터에 들어가지 않아, 대체로 허리춤에 꽂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전용 홀스터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아까처럼 가죠. 각자 정조준으로 머리를 날려버리세요. 죽지 않는 놈은 제가 처리할게요. 되도록 관자놀이나 귀 뒤쪽을 노리는 게 좋을 거예요. 서두르실 필요 없으니까, 실전을 통한 연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진석 씨가 후방을 경계해주시고요." 겨울은 권총 쥔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왼손으로는 그립(손잡이) 아래를 받치듯이 쥐었다. 손바닥(Palm)으로 아래를 받치는(Support) 자세라서 팜 서포티드 그립이라고 부르는 자세다. 이 자세, 반동을 사실상 한 손으로만 받는다. 그래서 연사로 당기면 명중률이 낮다. 대신 장점도 있다. 총 쥔 팔이 직선으로 쭉 뻗어서 단발 사격은 잘 맞는다. 일행의 실수를 감당하려고 잡은 자세다. 상황이 달라져도 자세 바꾸긴 순식간이다. 서로 눈치를 보던 셋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낮고 둔탁한 총성들. 한 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머리가 퍼억 퍽 잘도 깨져나갔다. 총탄이 관자놀이에 정확히 명중하면, 충격으로 안구가 터지거나 통째로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개중 하나가 어설프게 살아남았다. 신경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눈알. 유라가 쪼그려 헛구역질을 했다. 겨울이 쐈다. 총탄은 안구 빠진 눈구멍(眼窩)으로 쏙 들어간다. 퍽 하는 소리. 놈의 머리가 홱 돌았다. 몸이 뒤따랐다. 풀썩 쓰러진다. 그 뒤로 고작 두세 놈 남는다. 제중의 사격으로 완전히 정리되었다. 토한 것 없이 침 몇 번 뱉은 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표정이다. 조금 전 본 변종의 끔찍한 모습 때문이라기보다, 자기혐오에 가깝지 않을까? 자꾸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자신에 대한 혐오.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고 자란 소년은, 그 마음을 짐작하기 쉬웠다. 자신의 판단을 거의 확신하고서, 최대한 상냥하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미안해요. 매번 실망시키기만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누구나 미숙할 때가 있어요. 중요한 건, 능숙해진 뒤에 실력을 낭비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 일어나세요."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그녀에게 겨울이 여남은 말을 털어놓았다. "유라 씨는 용기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세요. 이런 위험한 일에 자원하셨잖아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부끄럽네요." 무엇이 부끄러운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나쁜 느낌은 아니다. 자꾸 위로를 받아서 겨울을 보기 부끄럽다는 뜻이겠다. 다만 진석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유라가 여러모로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눈을 유라가 보았다간, 기껏 위로한 게 허사로 돌아가게 생겼다. 겨울과 눈길 마주친 진석. 고집 피우듯 한참을 마주본다. 오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당장은 폐일 수도 있다. 유라의 잠재능력이 전투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훗날 공동체 내에서 끝내 비전투 영역에 종사하게 될지라도, 전투경험으로 단련된 정신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심리적 영향을 교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노력은 결코 무가치하지 않았다. 겨울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활권에서 맹수가 돌아다니던 시절엔, 양을 방목할 때 염소를 몇 마리씩 섞어두었다고 한다. 맹수가 습격하면 양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염소는 아니다. 양떼 사이에 염소를 두면, 양떼가 염소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무리를 이루면 포식자가 치기 어렵다. 이 점을 아는 영리한 늑대는, 양떼를 습격할 때 염소부터 죽였다고 전해진다.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커럼포우의 왕」이라 불렸던,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에 얽힌 실화다. 즉 유라는 양떼 사이의 염소가 될 수 있었다. 전투원이 되어 준다면 최선이겠지만,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일시정지. 시청자 메시지가 유라에 대한 불만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저년 먹고 버려라!」는 식의 험한 말도 수두룩하다. 겨울은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시청자들이 답답하게 여겼으나, 그래도 납득은 했다. 정지를 풀고 진행하는 겨울. 겨울은 틈을 주지 않고 가자고 나섰다. 널린 시체를 대충 치우고서, 피가 줄줄 흐르는 문을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을 두드렸다. 문외한이 들어도 명백히 인위적인 간격이고, 상식 풍부한 사람이 들으면 바로 아는 신호였다. 모스 부호로 SOS를 뜻하니까. 구해달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이쪽이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용도다. 「전신」이나 「부호지식」 등을 습득하면 다른 신호로 두드릴 수도 있겠으나, 그럴 필요까지야 없다. 경험치 낭비였다. 몇 번 반복하자 기대하던 반응이 돌아왔다. "바, 밖에 누구세요?" "교사와 학생들이 갇혀있다는 무전을 받고 왔습니다만......."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18 [18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5) 체육관 규모에 비해 사람 수는 적었다. 학생이 스물 남짓 하고, 어른을 끼워 총 서른네 명. 그 중 세 명이 무장했다. 두 명은 엽총, 한 명은 권총. 바리케이드 너머로 총구와 얼굴을 내밀었다. 겨울을 보고 좋아하다가, 일행을 보더니 혼란스러워 한다. 복장 차이였다. 철컥. 등 뒤에서 문이 잠겼다. 겨울은 방독면을 벗었으되, 만약을 위해 권총을 붙잡고 있었다. 아랑곳없이, 통통한 백인 여성이 막무가내로 끌어안았다. 문을 열어준 사람이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희망을 잃고 지쳐가던 중이었어요." "별말씀을요. 성함이......." "아말리아 플레먼스라고 해요. 아말리아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여기 다니엘 루이스 공립학교의 학생문제 연락담당자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생문제란 아동보호 상담 및 관리(Foster youth program)를 뜻한다. 고아 또는 입양아, 무주택 학생, 가정불화를 겪는 학생에 대한 학교 차원의 담당자였다. "한겨울입니다. 발음하기 어려우니, 편하게 한이라고 부르세요." 겨울은 온화하게 말하며, 가만히 그녀를 밀어냈다.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무장한 남성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미심쩍게 묻는다. "당신들이 전부요?" "일단 그렇습니다. 내일, 캠프 로버츠에서 추가 병력을 보낼 때 까지는요." 오오! 환성이 일었다. 그러나 질문자는 아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애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부대마크는 있지만 계급장은 없고, 따라온 사람들은 미군 소속도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는 난민 지원자들입니다. 한국 출신이고요. 전시 모병으로 신병(Raw recruit)이 된 저도, 아직 정식계급은 없습니다." "뭐야, 난민? 그럼 당신들 아무 것도 아니잖아?" 불만이 나왔다. 깡마른 외양 그대로의 신경질적 반응. 일행도 낯빛이 나빠졌다. 회화는 어렵지만, 청해는 가능하다. 짧은 막말이야 충분히 알아들었다. 겨울은 손짓으로 그들을 억눌렀다. 체육관 사람들도 사내의 발언에 당황한 이가 많았다. 겨울은 진석과 제중에게 짐을 놓으라고 지시했다. 이목이 모인 가운데 매듭을 풀고, 발로 밀었다. 와르르. 쏟아진다. 보던 눈빛들이 단숨에 달라졌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엇......." 통조림의 양은, 일행이 먹었어도 여전히 많았다. 한 바퀴 돌리고도 남는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배고픈 사람들이다. 허기진 시간이 길었던 것 같다. 몇 명이 허겁지겁 달려들다가 멈춰 섰다. 겨울이 권총 든 손 위로 올리고, 다른 손 펼쳐 막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드리려고 가져온 거지만, 사과 먼저 받아야겠습니다. 저분에게, 직접." 마른 남자의 표정이 썩었다. 그러나 무언의 압력에 오래 버티기도 어려웠다. 말 없는 비난의 시선들. 처음부터 남자가 잘못하기도 했고. 겨울은 무게를 실어주었을 뿐이다. "거...미안하게 됐소." 솔직하지 못한 사과. 남자는 불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소년의 눈치를 보았다. 이걸로 충분할까? 소년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모두 줄을 서주시겠어요? 한꺼번에 몰렸다가 다치는 사람이 나와도 곤란하고 말이죠." 같은 말을 영어와 한국어로 두 번 해야 하는 점이 불편했다. 일행도 알아야 하니까. 배분은 유라에게 맡긴다. 아무래도 여성의 인상이 부드럽지 않겠는가. 다만 그 뒤에 진석을 세웠다. 성미가 성미인지라, 격앙되어 있어서 적격이었다. 이쪽에서 통제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알맞은 사람. 사람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도 학생들을 먼저 줄 세웠다. 아직 이성이 날아갈 만큼 고달프진 않았다는 증거였다. "혹시 스푼이나 포크는 없나요?" 스푼이 있긴 한데 모자랐다. 그동안 씻어가며 돌려썼던 모양이다. 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묻는 말에 겨울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거기까진 준비 못했네요. 급한 대로 뚜껑을 접어서 스푼 대신 쓰세요. 접을 때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얇은 알루미늄은 쉽게 접어 모양을 낼 수 있다. 손잡이로 쓸 부분만 좁히면 아쉬운 대로 스푼 대용품이 되었다. 이걸 손으로 집어먹어야 하나, 망설이던 사람들이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다들 아예 굶지는 않으셨던 모양이네요." 겨울이 말을 건넨 것은 백인계 장년인이었다. 풍채가 좋다. 머리에 새치가 낄 나이의 남자는, 더러워졌어도 여전히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아직까지 하고 있다. 겨울은 생각한다. 고지식하고 점잖은 성격이겠지. 느릿느릿 하는 식사가 추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장년인이 안경을 올리며 끄덕였다. "아....... 식당에서 가져온 통조림이나 가공육이 있었으니까요. 그걸 구하느라 몇 명 죽긴 했습니다만....... 현명한 아말리아가 챙겨온 비타민 보충제도 도움이 되었지요. 그래도 남은 게 얼마 없어서 며칠 전부터 나누는 양을 줄인 참이었는데......여러분이 와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하루만 늦으셨어도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그런가요......."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스튜어트 해밀이라고 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이에요." "교장 선생님이셨군요. 이미 아시겠지만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선 성을 먼저 쓰기 때문에 한이 성이고 겨울이 이름이에요." "기어우르....... 확실히 발음하기 어렵군요. 성으로 불러달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미스터 한." 교장은 껄껄 웃더니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미국 문화에선 나이를 쉽게 묻지 않는다. 연령 무관하게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려는 까닭이다. 세대를 넘어선 친구관계도 흔하다. 그러나 교장에게는 물어볼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교육자다보니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요. 제 학생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것이......." "소년병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확실히 교육자에게, 소년병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폭거다. 한국과는 관련 없는 일로 여기기 쉽다. 허나 2005년까지, 한국에서도 전시 학생동원계획이 존재했다. 그것도 국방부가 아니라 교육부 소관의 계획이다. 정식명칭은 「전시 학도호국단 운영계획」. 교사를 중대장으로 삼고, 학생 가운데 「건전학생」을 가려 소대장으로 삼아, 학교 조직을 그대로 군대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겨울이 대답했다. "열일곱입니다." "이런......." 교장이 경악했다. "이런 세상이면 어쩔 수 없겠지요?" 이번만큼은 꾸며낸 것보다 진심을 더 많이 담은 말이었다.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세상에서도 미성년자는 보호를 받아야 해요, 미스터 한.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어른에게도 견디기 힘든 경험이죠. 미성년자에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요. 게다가 같이 온 사람들은 미스터 한의 말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존이 최우선인 시절이잖아요. 저분들은 제 나이보다는 제 실력......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고 따르시는 거고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했지요? 그 무엇에 살인을 대입해보세요. 살인을 할 수 있는가. 그것만 본 사람들은 대개 독재자 아니면 학살자들이었어요. 정의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정의가 곧 길입니다." 배고플 텐데. 식사도 잊고서 열변을 토하는 교장의 모습.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마냥 좋게 볼 순 없다. 해밀 교장은 미성년자인 겨울의 지도력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미성년으로서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요. 제가 무기를 들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테니까요. 저도 포함해서요." "......." 교장 스튜어트 해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겨울이 손짓했다. "마저 드세요. 다 드시고 나서 여쭤볼 것들이 있거든요." 빈말은 아니었다. 겨울은 교장과 사람들을 모아놓고 지도를 펼쳤다. 또 올 것을 대비해 정보를 모아두려는 것. 약국이나 총포상, 식료품 상점, 개인창고의 위치 따위를 묻고, 지도에 순서대로 표시해간다. 이런 정보들은 항공정찰을 통해서는 충분히 얻기 어려웠다. 지역 도서관이나 관공서, 현지 주민들을 통해 얻는 편이 가장 정확했다. 겨울은 「암기」를 습득했다. 시스템 보정 기억력은 지력과 연관기술에 비례하여 확장된다. 플레이어 자신의 기억과는 당연히 별개다. 캐릭터의 기억은 이를테면 저장매체다. 언제든 불러낼 수 있고, 의식과 무의식에 반응하며, 「통찰」과도 연동된다. 유용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경험치를 아꼈다. 2등급.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었다. 밤은 금세 찾아왔다. 조명은 밖으로 새지 않도록 신중하게 써야 한다. 변종들이 빛을 보고 벌레처럼 모여들기 때문이다. 재난 발생 초기, 라디오의 재난방송이 여기서 효과를 발휘했다. 미국은 재난통제체계가 잘 발달한 국가였다. 겨울은 체육관 사람들을 천천히 관찰했다. 그들은 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었다. 내장 활대만으로 펼 수 있는 종류로서, 지주를 박지 않아도 된다. 서른네 명이 어떻게든 들어갈 수준. 이런 시국에 모두가 한꺼번에 잠들지는 않고, 불침번을 설 테니 수용인원이 좀 적어도 된다. 식수는 아직까지 유지되는 상수도에 의존했다. 물론 바로 음용할 순 없지만, 생존주의자가 많은 나라답게, 한 명이 휴대용 정수기를 가지고 있었다. 펌프 방식으로 분당 1리터를 여과하는 고급품이다. 주인과 대화해보았다. 그는 필터 하나로 5만 리터를 거를 수 있으며, 혼자 쓰면 12,500일 동안 버틴다고 자랑했다. 분변과 생활오물도 나름대로 잘 처리하고 있었다. 점수를 표시하는 전광판 부근에 원형창문이 달렸는데, 열리는 구조가 아닌 것을 격자 한쪽만 깨서 구멍을 내놓았다. 오물을 모아 그리로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평소엔 비닐과 테이프로 막아두었다. 체육관에 들어오기 전 맡았던 오물 냄새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문명이 건재하던 시절의 생활주기를 버리지 못했다. 어둡고 할 일 없다고 금세 잠자리 찾는 이는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일행을 둘러쌌다. 캠프 로버츠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난처한 기색이다. 애당초 영어로는 회화가 안 된다. 또한 난민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자니 창피하다. 겨울은 얕보이기 싫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소년은 솔직했다. "캠프라고 해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아요. 물론 여기보다야 훨씬 낫지만요." 무사히 돌아가면 어차피 들통 날 일. 아말리아라고 했던 여교사가 손을 들었다. "사람은 얼마나 있어요?" "많아요. 아주 많아요. 대다수는 난민이죠. 동아시아 출신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오세아니아네요. 캘리포니아 감염 이후 합류한 미국 시민들도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식량이나 방한용품이 부족해요. 그래서 저희 같은 난민 지원자들이 미군과 함께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중이고요. 아무래도 미국 시민이 우대받고 있기 때문에, 난민들은 필요한 만큼 배급 받기 힘들거든요." 과연, 예상대로 눈빛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깔보기 시작한 것이다. 수는 적다. 애초부터 가치관 특성 「인종차별」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종말 이후」에 익숙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마구 화를 내기도 했었다. 인공지능이 상대여도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오래된 돌이 덜거덕덜거덕 굴러다닐지언정, 표현하지는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물론 참고만 있진 않는다. 애초에 소년이 가상현실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품었던 것이 있다면, 화를 참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으니까. 소년은 너무 많이 참고 살아왔다. 그 상대가 비록 겉보기로만 인간일지라도, 소년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겨울은 피식 웃었던 한 명을 분명하게 지목했다. "거기 모자 쓰신 분. 경위가 어찌되었든 도와주러 온 사람을 그런 식으로 비웃으셔도 되는 건가요?" "내...내가 뭘 어쨌다고! 오해다!" "그런가요. 저도 오해였으면 좋겠네요." 들어온 이래 권총을 놓은 적이 없다. 방아쇠울에서 빠진 검지로 슬라이드를 톡톡 두드린다. 그 남자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기 텐트를 찾아 들어갔다. 지적받지 않은 사람들도 겁에 질렸다. 분분히 흩어지는 사람들. 무언가를 경고할 때,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면 효과는 반감된다. 다수는 다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강해지기 때문에. 다회차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의 하나였다. # 19 [19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6) 날이 바뀌었다. 오전 8시 경, 무전기가 울었다. [통신상태 점검. 선망에 대기 중인 바나나, 바나나, 라디오 첵. 당소 에이블, 에이블. 이상.] 배터리를 갈고 새벽부터 켜두었던 무전기. 거기서 흘러나온, 미세한 잡음 섞인 음성. 시작부터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구조 임무를 받은 건 에이블 중대였다. 인종차별주의자, 선임중대장 마커트 대위가 지휘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본색을 드러내는 인물. 미군은 본디 인종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러나 비상시국이었다.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쪽을 부르는 호칭부터 바나나다. 황인종에 대한 멸칭이다. 애당초, 민간인들을 상대로 군용 통신문법을 지키는 것부터 배려 없는 짓이다. 저 말을 곱게 해석하면 이렇다. 「통신망에 대기하고 있는 난민 지원자 여러분, 잘 들리십니까?. 우리는 에이블 중대입니다. 이상.」 말끝에 이상(오버)을 붙이는 건, 내 말 끝났으니 이제 네가 말해라, 는 뜻이다. 말 겹침을 피하려는 것. 바나나라고 거듭 부른 것이 선명하다. 일행이 불쾌해했다. 사람들이 듣는 귀가 있지 않은가. 진석과 제중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체육관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식 온건한 다수가 겨울 일행의 안색을 살폈다.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제 겨울과 마찰을 빚었던 남성을 비롯해, 서넛은 웃음을 참고 있다. 움찔거리는 입꼬리가 보기에 밉다. 바나나는 통신부호에 있지도 않은 코드다. 규칙에 맞는 응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조롱이나 다름없다. 통신문법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관련 기술을 습득하거나, 경험하거나 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겨울이 수화기를 들었다. "입감. 당소...난민 지원자 그룹, 한겨울. 리마 찰리, 5 다시 5(Five by five). 당소 여하 이상(How do you read, over.)." 리마 찰리(Lima Chalie)는 크고 선명함(Loud and Clear)의 약어다. 5 다시 5는 감명도를 말했다. 감도(感度)와 명도(明度), 즉 무전기가 잡아낸 신호의 강하기와 분명한 정도를 뜻한다. 신호가 확실하게 잡히면 감도가 좋은 것이고, 알아듣기 분명하면 명도 역시 좋은 것이다. 한국은 대개 1에서 3까지, 미국에서는 1에서 5까지 나누어 표현한다. 보낸 응답을 해석하면 「여기는 난민 지원자 한겨울입니다. 당신의 통신은 선명하게 잘 들립니다. 제 말씀은 잘 들리시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뜻이었다. [카피, 귀소측 감명도 양호. 콜 사인 교정 바란다는 에이블-액추얼의 통보. 귀소측 콜 사인은......바나나로 정해져있음. 인지했다면 반복해주길 바람. 이상.] 통신병도 껄끄러워하는 목소리였다. 화가 느껴진다. 에이블-액추얼...즉 중대장이 시키니까 하는 거겠지. 흑인에게 스스로를 니그로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유치하다. 가슴 속의 돌이 반쯤 구르다 말았다. 겨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카피. 에이블, 한 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 사람들은 통신문법을 모릅니다. 바나나라고 부르시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다른 분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약간의 침묵 뒤에 답변이 돌아온다. [알았다, 바나나. 에이블은 0800시를 기해 오스카 마이크...아니, 구출작전을 개시하였다. 그쪽 상황은 어떠한가?] "민간인 서른네 명을 발견했습니다. 그 중 학생이 스물한 명이며 환자 및 부상자는 없고 건강은 양호합니다." [그렇다면 바나나가 그들을 인솔하여 24번가 교차로까지 탈출할 수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학생이 절반 이상이라고 알려줬는데도 자력탈출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다니. 당장 민간인들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진다. 관제 AI의 시스템 메시지가 홀로그램으로 출력되었다. 「AI 도움말 (통찰 8등급) : 당신의 응답에 따라 임무 내용이 변경됩니다. 자력탈출을 선택할 경우 에이블 중대는 현 위치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며, 성공 조건은 EENT 60분 전까지 에이블 중대와 합류하는 것입니다. 과정 평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추정 난이도 (통찰 8등급) : 불가능에 가까움.」 「AI 도움말 (통찰 8등급) : 성공 가능성은 대단히 낮습니다. 단,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할 경우 최대 서른일곱 배의 보상평가가 예상됩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서른이 넘는 비무장인원, 그것도 스물 한 명은 겨울 이상의 미성년 페널티를 받는 중학생들이다. 자력탈출은 말도 안 된다. 겨울에게도 한계는 있다. "불가능합니다. 민간인 세 명이 무장했으나 화력이 빈약합니다. 상황 발생 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다. 에이블은 임무를 속행하겠다. 바나나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오버.] 교신은 여기서 끝이었다. 겨울은 별 일 없겠거니 싶어 시간가속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시간가속은 에이블 중대 도착 즈음하여 자동으로 해제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이 어긋났다. 시간가속이 깨어졌을 때, 들리는 것은 총성과 폭음의 메아리였다. 멀지 않다. 요란한 굉음, 거대한 포효가 잇달았다. 후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겨울 주위로 모여들었다. 겨울이 무전기를 들었다. 교신을 시도했으나 답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봐요, 작은 대장님. 이게 무슨 일일까요?" 어색하게 존대를 쓰는 제중. 작은 대장이라는 호칭에서 약간의 미련이 느껴진다. 때 되면 나아지겠지. 겨울은 지체 없이 답했다. "미군은 소음기를 쓰잖아요. 총성이 들린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네요. 소음기를 달지 못하는 무기라면, 차량에 거치된 중화기밖에 없잖아요? 그런 걸 써야 하는 상대와 만났다는 뜻 아니겠어요?" "에이, 설마." "거기에 폭음도 여러 가지에요. 크기로만 구분하면 적어도 세 종류 이상. 폭발물을 수류탄만 쓰는 게 아니란 말인데, 미군이 가지고 있을 폭발물 중에 수류탄보다 큰 소리를 낼 물건은 로켓과 플라스틱 폭약 정도네요. 그 정도 화력을 쓰면서 아직까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마주친 무리 규모가 굉장히 큰 것 아닐까요?" "......." 겨울의 분석이 여기에 이르자 세 사람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진석에게서는 실망감과 패배감이 물씬 느껴졌다. "나이에 비해 아는 게 많군요. 소리만 듣고 거기까지 짐작하는 겁니까......." "침착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도달할 결론이잖아요."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의 대답이 여상스러웠기에 패배감이 짙어진다. 소년은 그 눈을 슬쩍 보았다. 집단에는, 이런 사람도 한 둘 있어야 자극이 된다. 셋 가운데 자존심이 문제 되지 않는 유일한 인물, 유라는 솔직했다. "이 상황에 침착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봐요. 어쩌면 구조대가 못 올지도 모르는데." 걱정하는 한편으로 분명한 신뢰가 느껴진다. 경애 호감도 보정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쌓였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여전히 평온하게 말했다. "염소가 필요하거든요." "네? 염소요? 그게 무슨......." "별 거 아닌데, 말하자니 기네요. 돌아가면 말씀드릴게요."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말 속에 들어있는 암시. '나는 무사귀환을 믿는다.' 유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대놓고 소리 높여 "우리는 무사히 돌아갈 겁니다!"라고 외쳤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외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당신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겁니까?" 미국인들은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미심쩍어했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몇몇의 경우엔 눈빛에서 까닭 모를 분노가 엿보였다. 사람이 그렇다. 불안할 땐 누구든 탓하고 싶고, 또 원망하고 싶어진다. 솔직하게 말할까, 말까. 파급효과를 고려하던 겨울은 전자를 택했다. "구조대가 고전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요?" 당장 반발이 나왔다. 백인 남성 하나가 손가락질과 함께 핏대를 세웠다. "하, 그럴 리가! 세계 최강의 군대라고! 죽다 만 것들을 상대로 고전할 리가 없어!" 즉각적이고 감정적이다. 희망이 부정당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구태여 정면으로 맞설 필요는 없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모르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쓸데없이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구조대는 반드시 온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만들어냈어도 자연스러운 미소, 온화하게 돌려주는 답. 당신의 말에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뉘앙스. 소년의 차분한 태도는 사실 남자가 아니라, 지켜보는 군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미묘한 분위기는 다시 울기 시작한 무전기로 인해 깨어졌다. [Break, Break! 에......5...부터......전달! 에이블 1! 에......! 현...위치에서 벗......! 교전......임무 중지.........로미오 포인트......각개철수......!] 감도는 좋았지만, 거친 호흡과 총성, 폭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든 외침이었다. 몇 겹의 비명이 섞여있다. 체육관 내부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임무 중지와 각개철수는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전이 갈수록 폭주했다. 그 가운데 몇 번이고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었으니, 「괴물」이었다. 겨울은 내심 의아하다. 아직 초반이라 특수변종이나 강화변종이 나타날 때는 아닐 것인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반 변종을 괴물이라 부를 이유는 없을 것이고. '예상보다 고난도 임무였나.' 밖에서 들리는 총성과 폭음의 빈도가 줄었다. 동시에 방향은 늘어났다. 미군이 흩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중후한 총성이 계속되는 걸 보면, 아직 살아남은 차량이 있나보다. 다만 소리가 멀어지는 건 좋지 않은 징후였다. 차량이 낙오자들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의미니까. 이쯤 되면 굳이 무전으로 상황을 물어볼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점차 번져나갔다. 군중심리다. 많아지는 울음소리에 반비례하여 무전기 우는 빈도는 줄어갔다. 차라리 비명이라도 계속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통신망에 대고 절규하던 목소리들이 하나둘 없어지더니, 마침내 누군가 혼자 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돌아오는 대답이 사라지자 어지간히 당황한 것 같았다. [어이,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누군가 대답 좀 해보라고!] 겁에 질린 이 사람은 통신문법이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그런데 사실 이게 보통이다.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통신이라고 항상 규칙대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개된 미군의 통신사례를 보면 평어체 대화가 더 많다. 결국 아까는 인종차별주의자의 꼰대놀음이었을 뿐이었다. 혼자 부르짖는 소리가 갈수록 미쳐간다. 겨울이 수화기를 들었다. 고개를 잠시 갸우뚱. 우스꽝스러운 콜 사인으로 자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겨울입니다.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오! 세상에! 고마워. 당신들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제길, 도움은 안 되겠지만......그래도 대화할 사람이 있다는 게 기쁘군! 정말 기뻐!]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망할...계단에서 구르면서 다리를 다쳤어. 부러진 것 같은데.......] "몇 명이나 함께 있습니까?" [나 혼자야. 동료들이 다 흩어졌으니까. 나 말고도 살아있는 얼간이가 있긴 있겠지.] "당장은 안전하신가요?" [안전? 글쎄, 당장 날 죽일만한 건 보이지 않는데. 숨이 얼마나 더 붙어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야. 하하.] 마지막 눈물 젖은 웃음소리가 절망과 자포자기로 물들어있었다. 맥락상 당연히 나와야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겨울이 그 점을 지적했다.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으시네요. 부상이 심각하십니까?" [부상이 문제가 아냐. 그런 괴물이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구해달라고 하겠냐고.......] "죄송하지만 그 괴물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 정신을 잃은 건 아닐까 의심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울은 원하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 20 [20화] #Intermission, 가공의 질병 「모겔론스」에 대하여 이 게임에 등장하는 범유행전염병 「모겔론스」는, 숙주를 장악하여 감염을 확산시킵니다. 감염자들이 산 사람을 물어대는 것은 이 때문이고요. 광견병처럼 환부감염으로 숙주를 늘리는 거죠. 물론 그 외에도 감염경로가 있습니다. 「모겔론스」는 감염된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감염변종은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니라, 지배자가 바뀐 육신인 것이죠. 거기, 웃지 마세요. 마냥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는 숙주를 조종하는 「창형흡충」이 등장합니다. 실존하는 기생충이에요. 이 녀석은 개미의 뇌, 신경절에 파고들어 행동을 제어한답니다. 그 외에도 숙주의 생체적 특성, 예컨대 몸통의 색을 변화시켜 포식자의 눈에 잘 띄게 만드는 기생충이나, 버섯이 발아하기 쉬운 환경으로 숙주를 이동시켜 양분으로 삼는 버섯 포자도 존재합니다. 고전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요? 뭐라고요? 이 게임을 모르신다고요? 젤나가 맙소사. 각설하고, 인간의 경우 고등한 지적 생명체이기에 병원체나 기생충에게 조종당하는 일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톡소포자충」은 고양이에게 감염되는 기생충입니다. 허나 중간숙주로서 인간에게 감염되기도 합니다. 고양이 체내에서 암수 기생충이 떡을 치고 나면, 알은 고양이의 분비물을 통해 외부로 배출되어 쥐나 인간 등 중간숙주의 안으로 들어가 부화하는 것이지요. 감염된 쥐는 동작이 둔해지는 동시에 무척이나 용감해집니다. 고양이의 배설물 냄새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든요. 기생충은 쥐의 뇌에 낭종을 만들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도록 조종함으로써, 종숙주인 고양이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체코 프라하 국립대학의 기생충학과 교수 야로슬라브 플레그르 박사는, 인간 또한 「톡소포자충」에 의해 정서와 행동의 변화를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은 고양이에게 보다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하네요. 즉 고양이에게 인간을 접근시키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같은 기생충이 조현증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최대 71%의 사람들이 「톡소포자충」에 감염되어있다고 합니다. 거기, 고양이를 좋아하는 당신. 혹시 기생충을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톡소포자충」의 위험을 처음 경고한 야로슬라브 플레그르 박사조차, 고양이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두 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다고 하거든요. 하, 고양이의 치명적인 매력이란. 당신이 선천성 면역결핍 증후군이나 합병증을 앓고 있지 않다면, 이 기생충은 당신에게 무해할 것입니다. 원래 좋아하던 고양이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면 어때서요? 냥냥이는 정말 귀엽습니다. 멍멍이 같은 이단과는 다릅니다. 멍멍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 마귀의 화신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그럼 「모겔론스」의 실체는 기생충이냐고요? 글쎄요, 미지의 바이러스일 수도 있고 감염성 높은 포자생물일지도 모르지요. 정답은 나도 몰라! 입니다. 하하하. 배경 설정이야 컨텐츠 업데이트에 따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건데요 뭐. 설정구멍 한두 번 겪어보시나요? 중요한 건 돈입니다, 돈. 불만이 있다면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 고객센터로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항의전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한 명의 상담사가 상주하고 있으니까요.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7) 괴물의 정체는 역시 특수변종이었다. 병사는 괴물이 중기관총 사격과 로켓탄 직격을 무시했다고 증언했다. 크기는 중형차 이상이고, 소총탄을 막아내는 험비조차 주먹질로 구겨버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고 겨울은 좀 이르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감염변종의 수가 늘어나고 시간이 경과하면, 특수변종이 출현한다. 강화변종과는 다른 개념이다. 강화변종은 동종의 다른 개체에 비해 유달리 뛰어난 것들. 즉 나중에는, 특수변종이면서 강화변종인 진짜 괴물이 나타난다. 무전기 너머의 병사가 들려주는 한숨과 눈물 섞인 증언이 끝나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구하러 가겠습니다." 듣고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이제껏 에이블 중대의 파멸을 증언했던 병사도 말을 더듬는다. [어이,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물론이에요. 소중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목숨이 위험하다고!] "저는 사람이니까요." 많은 의미를 함축한 한마디. 상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주위가 조용해진 가운데, 당장 말리려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겁에 질린 세 사람. 일행이었다. "이봐요, 작은 대장. 용기는 정말 대단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통사정하는 안제중. 철없는 아이를 달래는 말투다. "우리 생각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겠다면서요? 약속했잖아요? 게다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고요? 당신 없으면 예전으로 돌아갈 텐데! 어차피 그 미군도 스스로 죽겠다고 하잖아요! 용기와 무모함은 다른 겁니다!" 약속받은 권리를 주장하며 따지듯이 나서는 박진석. "......." 팔을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묵묵히 고개 젓는 이유라. 그 외에도 몰려선 미국인들 중, 아말리아 플레먼스와 스튜어트 해밀이 소년을 붙잡았다. 어린 나이로 무릅쓸 위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방관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순수하게 소년을 염려하는 자들, 그리고 무장인원이 빠진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또 두려운 자들. 선과 악의 경계선이다. 구조 대상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직 듣고 있나?] 겨울은 여전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마음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솔직히 감동했어. 마커트 그 꼴통 새끼가 그렇게 지랄했는데도 도와주겠다니....... 하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건 싫다. 난 군인이고, 민간인을 지키는 게 일이야. 그냥 거기 있어. 서로를 위해 그게 최선이다. 혹시 모르지. 내일 다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 "현재 위치가 안전하다고 확신하시나요?" [......그래.] "거짓말을 잘 못하시네요." [시끄러워, 이 바나나야.] 멸칭으로 부르긴 했는데 어감은 애칭에 가깝다. 흑인끼리 서로 이 니그로 새끼 하는 느낌? 말투에 슬랭이 제법 섞여있으니, 정말로 흑인일 가능성이 높다. 인종차별주의자 아래에서 고생이 꽤 많았겠다. 겨울이 말했다. "어쨌든 구하러 갈 거지만." [야.]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셨죠? 건물 안으로 피하신 모양인데,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면 식별 가능한 지형지물이라도 말씀해주세요." [그러니까 오지 말래도.......] "말 안 해주셔도 일단 나갈 겁니다. 헤매겠네요. 죽을 확률이 더 높아지겠는데요?"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그러니 그만 우세요. 다 큰 어른이 우는 소리 듣고 싶지 않네요." [안 울었다고.] 대화가 흘러갈수록 호감도 갱신 알림이 어지러웠다.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여럿이었지만 진석과 제중 쪽의 감소폭이 상당했다. 심지어 진석의 경우 수화기를 빼앗으려 한다. 물론 실패했다. 수준 높은 「전투감각」에 의한 동선(動線) 예고 때문이었다. 팔 붙잡혀 비틀린 그는 악 소리를 냈다. 사정없이 꺾었으니 아플 것이다. 노려보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힌다. [어이, 무슨 일 있어? 비명을 들은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문틀에 발을 찧은 사람이 있어서. 아프겠다. 세게 부딪혔나 봐요." [그래?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시끄럽고, 빨리 말씀하세요. 마지막으로 본 거면 뭐라도 괜찮으니까." [한국인들이 빨리빨리 좋아한다더니...알았으니까 잠깐 기다려. 아프고 멍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고.] 그렇게 말하는 병사의 목소리엔 어느덧 희망이 깃들었다. 겨울은 사실적인 AI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본심이다. 진석이 몸부림쳤으나 겨울은 한 손만 가지고 간단하게 제압했다. 관절기가 걸렸다. 딱히 어떻게 하겠다고 의식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기술등급 10레벨은 전문가 구간의 최종단계로, 평범한 사람이 평생을 수련해서 도달하는 경지다. 「근접전투」와 「전투감각」의 시너지효과는, 겨울의 뜻을 최적의 동작으로 구현해냈다. 무전기는 송신 버튼을 눌러야만 이쪽의 소리가 전달된다. 그래서 겨울은 소란에 개의치 않고 진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저를 리더라고 인정하신 것 아니었어요?" 진석이 벌개진 얼굴로 침을 튀겼다. "리더라고 해서! 이런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릴 권리는 없어!" "그래요? 그럼 리더 안 할래요. 저 혼자 가죠." 이에 진석은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곧바로 성을 냈다. "네가 빠지면 남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위험해질 줄 알고!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한 사람! 그리고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서른네 명 및 동료 두 명! 젠장, 고민할 것도 없는 선택이잖아! 나가면 넌 무책임한 개새끼야!" 겨울은 그를 풀어주었다. 욕설을 중얼중얼, 몇 걸음 떨어지는 청년. 눈매가 사납다. 그 사이 무전기가 새로운 신호를 받는다. 지직지직.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 겨울은 일행을 향해, 특히 청년을 겨냥하여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는 시늉을 했다. "나머지는 잠시 후에. 일단 이 분 말씀 좀 듣게 두세요."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방해하면, 화냅니다." 조용해졌다. 「위협성」의 작용. 수화기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기억났다. 소대가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장소는 크레스턴 로드랑 월넛 드라이브의 교차지점이었어. 거기서 너희 있는 방향으로 직진했어야 하는데, 정신없이 쫓기느라 북쪽으로 올라와버렸거든. 중간에 카운티 보건소를 본 기억도 나고.......] 겨울은 지도를 펼쳤다. 단서를 토대로 손가락을 더듬어보고, 다시 물었다. "그 밖에 다른 건 없나요?" [다른 거? 도망 칠 때 워낙 정신없이 뛰는 바람에 딱히......아아, 그래. 하나 더 있군. 들어오기 전에 FEMA 차량이 하나 뒤집어져있긴 했지.] "FEMA? 연방재난관리청이요? 모르겠다더니 많이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역시 죽고 싶진 않았던 거죠?" [......인정은 하겠는데, 너 무지하게 얄미운 놈이구나.]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럼 이제 출발할 테니, 제가 송신할 때 외엔 입 다물고 계세요. 괜한 잡음 만들었다가 변종들이 듣고 달려오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그렇다고 정말 중요한 일이 있는데 가만히 계시진 마시고요." [어이, 난 직업군인이야. 그런 건 너보다 잘 안다고.]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이름이 아직인데, 관등성명 부탁드립니다." 전파가 오가는 저편에서 병사는 킥킥거리며 실없이 웃는다. [병장 매튜 코헨, 신고합니다.] "좋아요, 코헨 병장님. 잠시 후에 만나요." 그러고서 겨울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래도 아직 낮의 절반이 남아있다. 거리가 멀지 않다면 그럭저럭 해볼 만 하다. 연락 수단을 챙겨야 한다. 메고 다니는 무전기는 너무 거추장스럽다. 추정 위치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핸즈프리 하나를 전투조끼에 결속시켰다. 겨울이 진석을 향해 돌아섰다. "불만 참 많아 보이시네요." "정말 갈 거냐?" 아까부터 「통찰」이 작동하고 있었다. 증강현실 문자열. 설득을 위해 관제 AI가 권장하는 키워드와 문장들의 향연이다. 겨울은 그것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세상에는 자식을 파는 부모라는 게 있더라고요." "뭐?" 진석이 당황했으나 겨울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자식 하나 팔아서 남은 가족이 살 수 있으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사는 길이니 좋지 아니하냐. 변명하면서 자식을 파는 거예요. 팔아치우는 자식에겐 이렇게 말하죠. 미안해. 하지만 가족이니까 희생은 당연한 거야. 이해하지?" 방긋 웃는 얼굴 아래 심장은 서늘하다. 그 안에 든 돌이 아직도 무거웠다. "소수를 버리고 다수를 구한다. 네, 좋네요. 진석 씨 말씀이 틀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틀린 것도 아니라고 봐요. 저는 말이죠, 자기 살겠다고 남 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거든요. 필요하면 나도 버림받을 테니까." "......." "기왕이면 죽을 각오로 서로를 지킬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네요. 그러니 굳이 따르라고 강요 안 할래요. 아니, 그냥 다 남으세요. 여길 지킬 필요도 있으니까. 다만 저 돌아올 때까지 좀 더 고민해보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정말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지. 진석씨, 그리고 다른 두 분 생각에 제가 진짜 잘못 행동하고 있는 건지." 그러고서 겨울은 무기와 탄약을 점검하고, 더플 백 하나 멘 뒤 문으로 향했다. 호감이 높은 유라 혼자, 소년을 따르려다 그치고 만다. 살고 싶은 것이다.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교신 내용을 토대로 일행이 왜 논쟁을 벌였는지 대충 짐작한 미국인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정말로 나갈 거냐. 괜찮겠냐. 존경한다. 그러지 마라. 위험하다. 우리를 지켜주는 게 당신 임무 아니냐. 어른 말 들어라. 건투를 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 긍정부정이 명확하게 갈린 게, 마치 일행의 반응을 확대시켜놓은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유라가 어깨를 붙잡고 힘겹게 말했다. "난 작은 대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단지......." "단지?" "...용기가 없을 뿐." 겨울은 그 말에 만족했다. 사람들은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지켜보았다. 비상구가 열렸다. 열리기 무섭게, 어정거리던 변종 세 놈이 뛰어들었다. 작고 숨 막히는 비명들. 겨울은 가장 앞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밀린다. 덜컥. 바리케이트에 등이 부딪혔다. 버텼다. 뒷 놈들이 엉키길 기다려, 발을 걸었다. 한꺼번에 넘어트린다. 우루루 쓰러진 것들을 걷어차서 견제하며, 번쩍 들어 내리치는 칼날. 하프 스윙에 스냅을 가해 세 번 연속 콱콱콱 찍는데, 마지막 녀석이 반쯤 일어나다 도로 주저앉는다. 끝났다. 겨울은 그것들을 치웠다.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간다. 마지막 시체와 함께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다들 조용히, 쥐 죽은 듯이 계세요. 잠시 후에 뵙죠." 안전할 것이다. 조명이나 소음처럼, 유인하는 요소만 없다면야. 소년은 갱신되는 임무 정보와 저널을 확인한다. 관제 AI는 복귀가 늦을 경우 군중공포 상승으로 임무가 실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21 [21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8) 에이블 중대의 최종 진출지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딱 거기까지만 도로가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치된 SUV 위에 올라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크레스턴 로드는,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101번 국도에서 오른 쪽으로 새는 길이다. 주택가로 빠지는 길이 월넛 드라이브였고. 두 도로가 만나는 곳에, 박살난 미군 차량들의 잔해가 널려있었다. 아스팔트를 시뻘겋게 물들인 피와 변종들의 파편은 덤이다. 탄흔, 혈흔, 스키드 마크. 사방에 뿌려진 전투의 흔적들. 「통찰」과 「전투감각」이 이들 흔적을 자동으로 분석했다. 지난 전투의 개략적인 전개과정이 증강현실로 떠오른다. 기술등급의 한계로 노이즈 잔뜩 낀 홀로그램이었으나, 전말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이 교차로, 남쪽으로 시야가 막혀있다. 울타리와 주택, 가로수가 장애물이었다. 에이블 중대는 측면에서 기습을 받았을 것이다. 커다란 철추에 맞은 것처럼, 문짝 움푹 패인 험비를 보면 안다. 다른 한 대의 험비와 수송트럭은 그 자리에서 부서졌다. 겨울은 가까이 다가가, 철판에 찍힌 주먹 자국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지름이 대략 한 뼘 반 정도. 다행히 특수변종이면서 강화변종인 최악의 경우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겨울이 사냥 방법을 아는 종류이기도 했다. '뮤테이션 코드 「그럼블(Grumble)」. 자국의 크기와 깊이로 보아 강화등급은 기본인 알파. 숫자는 아마도 둘.' 게임 내에서 발견되는 특수변종들은, 형태와 특징에 따라 이름(뮤테이션 코드)이 붙는다. 그럼블. 천둥소리라는 뜻이었다.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소리를 지르는 습성 탓이다. 겨울은 차량 잔해와 미군의 시체를 뒤졌다. 탄약과 수류탄, 여분의 권총 및 소음기를 챙긴다. 전투식량 두 세트도 좋은 소득이었다. 다른 단서나 쓸 만 한 것이 없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본다. 교차로 북쪽 왼편, 자동차 용품점에서 시선이 멎는다. 본격적인 정비소라기보다, 자동차용 위성TV나 오디오용품을 취급하는 소매점에 가까워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이렇다 할 이상은 없다. 전면 유리가 깨져있어, 소음을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유리조각을 자박자박 밟고 들어간 겨울에게 탐나는 물건은 여럿이었다. 그러나 모두 가질 순 없었다. 초소형 TV 하나, 충전식 라디오 하나를 챙겼다. TV는 캠프에 가져갈 물건이고, 라디오는 소음발생원으로서 유인도구(디코이)로 쓸 목적이었다. 맞은편에는 식당 겸 주유소가 있었다. 겨울은 주유기에서 기름이 나온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로부터 북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겨울은 첫 번째 지표를 찾아냈다. "보건소라는 건 저건가......." 코헨 병장에게 얻은 단서 중 하나가 보건소였다. 「독도법」이 아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평범한 주택과 별 차이 없는 단층 건물. 보건소라는 걸 알 수 있는 단서라곤 작은 간판 하나 뿐이다. 「산 루이스 오비스포 카운티 보건국」이라고 적혀있었다. 아직 여유가 많다. 겨울은 내부를 탐색하기로 했다. 혹시 생존자가 남아있다면, 그리고 부상당했다면 약품을 찾아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니더라도, 코헨 병장의 부상을 감안해야 한다. 항생제, 진통제, 부목, 압박붕대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보건소는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유리로 된 커다란 문에, 문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창문이 줄지어 있다. 다만 평범한 유리가 아니라 반사유리들이다. 바깥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다. 일부는 투명유리일지언정, 블라인드를 쳐 두었다. 즉 숨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측면 입구 근처에 서성이는 변종이 둘. 칼 들고 뒤로 다가가, 한 놈 콱 찍었다. 두개골이 함몰되어 즉사한다. 소음에 반응하는 나머지 하나를 그대로 돌려차기. 위로 지른 발길질이 턱을 올려쳤다. 뇌가 흔들린다. 소리를 지르긴 커녕, 똑바로 서있기도 어렵다. 그로기 상태에 빠져 비실거리는 놈을 발로 밀고, 미간 중심을 똑바로 겨누어 온 몸으로 칼을 찔렀다. 푸쉭. 죽은 피 한 줌 튀고 끝이었다. 변종의 사지가 경련했지만, 움직인다고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인간보다 강인해도, 뇌가 파괴되면 버틸 재간이 없다. 시체를 치우고 문을 열어본다. 철컥. 잠겨있다. 어떻게 할까. 겨울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소년은 옆쪽의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정글도 끝을 유리에 대고, 남은 손으로 칼 손잡이를 살살 두드린다. 툭, 툭, 툭, 투둑, 쩌적. 한 번 실금이 생기자, 점차 속도가 붙었다. 한 번에 깨면 와장창 요란하다. 가청권의 모든 변종이 몰려들 것이다. 시간제한만 없으면 모아서 다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건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정말로 남으면 시도해볼 일이다. 자잘하게 깨진 조각들은, 대개 창 안쪽으로 떨어졌다. 후둑후둑. 작았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어렵다. 적당한 구멍이 만들어진 뒤, 겨울은 블라인드 틈을 벌리고 안을 살펴본다. 몇 초 정도 그렇게 뜸을 들인 뒤 비로소 손을 집어넣어 더듬어본다. 블라인드가 거치적거렸으나, 잠금장치의 위치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창문은 금세 열렸다. 말이 창문이지 크기가 사람보다 컸다. 들어가기 불편하지 않았다. 보건소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온갖 기재가 어지럽게 쓰러져있다. 마주 보고 앉는 책상, 우르르 쏟아진 차트 따위를 보아 진료실로 쓰이던 공간인 모양이다. 쿵, 쿵. 밖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음. 소리를 쫓아간 복도는, 온갖 피가 뿌려진 살풍경이었다. 답답한 공기에 악취가 감돌았다. 조명이 끊어져 어둑한 실내 저편, 창문으로 빛 새어오는 문. 변종 다섯이 우우 몰려 문짝 두드리는 중이다. 겨울은 가까이 있던 이동식 침대를 끌어와, 복도를 횡으로 막았다. 그대로 밀며 나아간다. "크어?" 침대 구르는 소리에 주의가 끌린 변종들. 휘꺽휘꺽 고개를 꺾는다. 처음엔 저런 걸 보면 어찌나 소름이 돋았는지. 이제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데도 심박이 늘지 않는다. 겨울은 속도를 붙여 침대를 밀다가, 그대로 차버렸다. 콰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간 침대가 변종들과 충돌. 변종들은 침대와 뒤엉키며 넘어졌다. 겨울이 그 위로 달렸다. 콱콱 찍는 두 걸음이 변종 둘의 목을 밟았다. 으스러진다. 다른 놈들이 다리를 잡겠다고 버둥거릴 때, 겨울은 넘어진 침대를 밟고 올라 몸을 비틀었다. 회전 실린 칼질. 가장 먼저 일어난 놈에게 맞았다. 관자놀이부터 횡으로 잘린다. 안와(眼窩) 안쪽 깊숙이 베어, 뇌에 손상을 입혔다. 두 눈 다 터진 변종은 얼굴 감싸 쥐고 엎어져서 발광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 같았다. 뇌가 어설프게 남아 당장은 죽지도 않는다. 이 발광이 남은 둘의 발목을 잡아채어 다시 넘어뜨렸다. 변종끼리 얽힌 난장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겨울. 권총을 뽑아 세 번 쏘았다. 퓩, 퓩, 퓩. 순서대로 깨지는 세 개의 머리. 뒤섞인 피와 뇌수가 질펀하게 흘렀다. 오래된 죽음이 코끝에 물씬했다. 겨울은 죽은 것들이 두드리던 문에 다가갔다. 괜히 몰려있지 않았을 것이므로, 무언가는 이 안에 있으리라. 겨울이 퉁퉁 문을 두드렸다. "안에 누구 있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은 침착하게 다시 두드렸다. 여전한 무반응. 잠겨있다. 변종들이 하도 두들겨, 벌어진 문틈이 다행이었다. 가까운 곳, 링거 행어가 지렛대로 쓸 만 했다. 문틈으로 밀어 넣고 온 몸으로 밀었다. 끼우웅 소리가 났다. 행어가 구부러졌다. 버티던 문이 얼마 못가 우지끈 열렸다. 두둑-두두두둑! 소음기 끼운 소총을 연사로 놓고 긁는 소리. 허공에 그어진 사선(射線) 예측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맞아 죽었을 것이다. 「생존감각」과 「전투감각」, 「통찰」의 연동이다. 문이 마구 부서져나간다. 적막하던 복도에 파편 뿌려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총성이 그쳤다. 너덜거리는 문짝, 그 안에는 헐떡이는 미군이 하나, 미라 같은 시체가 하나였다. 후자, 죽은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최근에 생긴 총구멍이 여럿이었다. 미군의 상태를 보면 사정을 알 만 했다. 창고 비슷한 장소 같았다. 약품과 응급용품들이 진열된 선반이 있었다. 쏟아진 것이 많았다. 겨울은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고, 방독면을 벗어보였다. "진정하세요. 해치러 온 거 아니니까요." 눈으로 계급장과 이름표를 빠르게 훑은 뒤 덧붙인다. 병사가 아니었다. "......애쉬포드 하사님." 총구가 툭 떨어졌다. 애초에 한 손으로 들고 있어 후들후들 떨리던 것이었다. 가쁘게 숨 쉬던 하사는, 거칠게 눈 비비고 다시 쳐다본다. 축소된 동공, 송글송글 땀 맺힌 이마. "넌 환각이 아니겠지?" "글쎄요. 어떨 것 같으세요?" "젠장! 그렇게 말하지 마! 조금 전까지, 죽은 놈들이 날 부르고 있었다고. 바로 거기서. 뒈졌으면 얌전히 갈 것이지, 좆같이 말이야......." 웅얼웅얼 고개 떨구는 폼이 정상은 아니었다. 하기야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혼자 동떨어졌다. 문 밖에는 거친 감염변종들. 위태로운 밀실에 시체와 갇힌 상황에서, 차근차근 벌어져 가는 문. 정신이 혼미해질 법 하다. 하물며 모르핀까지 맞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근처에 다 짜낸 모르핀 튜브가 떨어져있다. 총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던 건 다른 팔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엉터리로 감아놓은 붕대가 벌겋게 젖어있었다. 경험치를 써야겠다. 이럴 때 쓰려고 아껴둔 것이다. 겨울은 기술 목록을 불러와, 「응급처치」에 경험치를 부었다. 주욱 채워지는 막대그래프. 5등급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숙련자 중급 정도의 기술수준이다. "가만히 계세요. 붕대, 다시 감아드릴 테니." 묶였다기보다 엉킨 것에 가까운 붕대. 피가 굳어, 붕대와 살이 들러붙어있었다. 마구잡이로 풀었다간 상처가 엉망이 될 것이다. 신중하게 풀었다. 약품 보관함에 과산화수소수가 있었다. 뚜껑을 따 환부에 부었다. 소독작용. 상처가 하얗게 일어났다. 소독수와 핏덩이가 뒤섞여 뚝뚝 떨어졌다. 깊은 곳까지 스민다. 모르핀을 맞았어도 통증이 없지 않은가보다. 하사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약효가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끔찍한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모르핀은 「최후의 진통제」라고 불린다. 부작용도 많고, 무엇보다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젊을 때 모르핀 한 번 맞은 병사가, 늙어 죽도록 그 느낌을 잊지 못했다는 실화가 있다. "어쩌다 다치셨어요?" "험비 포탑에 앉아있었는데...차가 구르는 바람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부상 입고서 시간이 꽤 흘렀을 것인데, 벗겨진 피부 아래에선 피가 질금질금 배어나온다. 기술 보정에 따라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 자신의 의사로 움직이는 게 아니지만, 감각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묘한 느낌이었다. 「감각동기화」를 켜놓은 시청자들의 체험이 이와 같을 것이었다. 압박붕대는 보통의 붕대와 달리 고무 같은 탄력이 있다. 당겨서 감으면 지혈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고 마냥 세게 감아도 좋지 않다. 한국에서 있었던 사고인데, 군의관이 붕대를 너무 세게 감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 병사는 발가락이 통째로 괴사했다.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굳이 숙련자 수준까지 「응급처치」에 투자한 이유이기도 하다. 애쉬포드가 물었다. "그런데 넌 누구냐? 계급장도 없고, 수상한데......." "콜 사인 바나나라고 하면 아시겠어요?" "아아, 중대장의 원숭이가 너냐."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겨울은 개의치 않는다. 붕대 묶기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먼 거리 자력이동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전투는 당연히 금물이다. 모르핀의 부작용 중에는 시각 이상과 판단력 저하도 있었다. 총 들려놨다간 엄한 사람 잡을 것이었다. "혹시 다른 생존자가 있을까요?" "내가 알아?" 하사가 짜증을 부렸다. 겨울은 눈에 보이는 약물과 응급용품을 대충대충 쓸어 담은 뒤, 더플 백 측면에 목발 한 짝 묶었다. 그리고 하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일단 일어나세요. 문도 못 닫는 방에 계속 있으면 곤란하니까." "귀찮아......토할 것 같아." 그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긴 한다. 겨울은 그를 문짝 멀쩡한 방으로 옮겼다. 다른 위험요인이 없는지 확인한 뒤, 하사의 휴대 구급낭에서 모르핀 튜브를 모조리 빼앗았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남은 모르핀은 제가 가져갑니다." "어?...야, 안 돼. 어딜 가." 허우적거리며 모르핀과 소년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당장은 함께 못 갑니다. 코헨 병장 기억하세요?" "코헨? 당연히 알지." "전 그 사람 구하러 가는 길이었거든요." "그 새끼 아직 살아있어?" 하사가 눈물을 흘렸다. 강한 통증과 약효에도 불구하고, 동료의 생존에 기뻐할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교신해볼 시간이기도 하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연결해드릴 테니." 코헨 병장을 호출하는 겨울. 간절히 기다렸던가보다.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어이, 꼬맹이! 어디쯤이야? 거의 다 온 거야?] "진정하세요. 아직 보건소니까." [아...그런가.] 굳이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시무룩한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홀로 기다리는 시간이 유달리 길 것이다. 겨울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기쁜 소식 하나 전해드릴게요." [기쁜 소식?] "네. 여기 애쉬포드 하사님이 살아계시거든요."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 염병할 놈이 살아있다니!] "...지금 옆에서 듣고 계시는데요." [헉.] 애쉬포드 하사가 낄낄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무전기 달라는 뜻이다. 내주자 그는 욕부터 쏟아냈다. 물론 정말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살아있다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약기운 탓에 어눌한 발음이나마 묻어나는 반가움은 진짜였다. "이 주말전사 새끼가 하늘같은 하사님을 능멸하다니. 죽고 싶냐?" 주말전사란 연중 일정기간만 복무하는 주 방위군의 별명이다. 같은 주 방위군이라도 간부와 핵심인력은 1년 내내 복무하기 때문에 보통의 병사와 차이가 난다. 회포 넘치는 대화를 지켜보기도 잠시, 겨울이 시계를 톡톡 두드려 보였다. "죄송하지만 통신은 짧게 끝내주셨으면 좋겠네요." "시간제한인가. 신데렐라 보이로군." 제법 여유를 회복한 하사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겨울은 그에게 30발 들이 탄창 두 개를 나눠주었다. "제가 모르핀을 왜 빼앗았는지는 아시죠?" "됐으니까 이만 가봐. 지금까지 비실거린 것만 해도 부끄러우니까. 다시 온다는 약속이면 충분해. 그리고......." 하사는 엄한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 뒤 방탄모 안을 긁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 겨울은 그를 일별하고 방을 나섰다. 곧바로 문 잠기는 소리가 난다. # 22 [22화] #Intermission, 인공지능의 마음 (1) 본사의 인공지능 엔진 「트리니티」는 세 개의 핵심 모듈을 통해 가상의 인격을 구현합니다. 지금은 그 중 하나, TOM 판독 모듈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TOM(Theory Of Mind : 마음 이론)은 우리의 뇌에 있는 추론기관으로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오해를 감수하고 쉽게 설명하면, 「내가 특정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본능인 것이죠.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TOM의 활동은 당신의 무의식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기관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TOM 손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자폐증입니다. 따라서 TOM은 곧 마음의 일부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이 사람과 꼭 닮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상당부분 TOM 판독기술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성이 인공지능에게 말을 걸 때, 당신의 마음은 인공지능의 「가장 사람다운」 반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반영하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당신의 공감능력과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로 인공지능의 반응은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릅니다. TOM의 발달은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학습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트워크상의 다른 접속자로부터 판독 결과를 제공 받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의 데이터입니다. 인공지능이 최대한 사람다운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당신의 TOM 등급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심도 있게 이해하고 구상할 수 있는가. 기관 자체의 성능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만약 당신이 지닌 TOM 기관의 등급이 매우 낮다면, 죄송하지만 당신이 상대하는 모든 인공지능은 수준 이하의 머저리 같은 언행을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가상현실은 정말로 재미가 없겠네요. 아니, 어쩌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온 세상이 덤 앤 더머 투성일 테니까요! 두 번째는 당신의 TOM 적성입니다. 일부 사람들의 TOM 기관은 판독기가 읽기 어려운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TOM 적성이 낮다고 표현합니다. 적성이 낮으면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예를 들어 등급은 높은데 적성이 낮을 경우, 반응은 사실적이겠으나 대화 도중 잦은 공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 건네고 한 세월, 한 마디 받고서 한 세월이 반복되겠지요. 현 시점에서 인공지능과 노 딜레이 상호작용이 가능한 가상현실 이용자는 전체의 약 7.5% 정도로 추산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하더라고요. 이런 걸 굳이 알려드리는 이유는, 인공지능의 품질 문제로 항의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건 100% 고객님 과실입니다. TOM 기관, 공감능력 발달을 위해 노오오오력을 하셨어야죠. 접속기 성능이나 최적화 문제가 아니니까 자꾸 전화하지 말아주세요. 정 품질이 불만이시라면 그냥 다른 사람의 가상현실 방송을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감각동기화」 기능이 있으니 느끼는 건 다르지 않아요. 답답하게 자기 세계관을 고집하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습니다. 지금까지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9)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본래 미국 대통령 직할 독립기관이었다. 9.11 테러 이후엔 국토안보부 산하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재난관리청의 문장도 국토안보부 것이었다. 이상이 지력보정에 의한 증강현실 UI, 홀로그램 안내문이다. 겨울은 붉은 얼룩 가득한 트레일러 트럭에서 이 문장을 찾아냈다. 가까이 어정거리던 감염변종은 푸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등짝에 FEMA Corps 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눈길 마주친 즉시 달려들었던 변종은, 머리가 깨진 채 도로 위에 퍼질러졌다. 시체를 뒤져보았지만 쓸 만 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트럭은 비어있었다. 운행은 가능한 상태였고, 운전석에 열쇠도 꽂혀있었다. 연료잔량이나 배터리 방전여부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결과 이상은 없다. 보건소를 지나 처음 발견한 FEMA 차량이다. 필시 코헨 병장이 이 부근에 있으리라. 가까운 건물부터 뒤져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멈칫, 주위를 살핀다. 묵직한 진동. 한 번이 아니라, 일정 주기로 이어지며,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발소리.' 허리에 끼워둔 권총을 뽑는다. 쿠웅, 쿠웅. 모퉁이 돌아 나오는 육중한 실루엣. 거대하다.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까운 모습. 특수변종, 「그럼블」이다. 체고가 단층 건물의 지붕보다 높고, 두껍기로는 장갑차를 능가했다. 변종 다수가 근처를 맴돈다. 집 그림자에서 쑥 나오는 게, 마치 매복이라도 했던 것 같다. 녀석은, 유달리 발달한 코를 벌름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겨울은 트럭에 기대어 노출을 피했다. 이걸로 충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럼블의 후각은, 비록 풍향의 영향을 받으나, 무풍지대 기준으로 반경 50미터의 인간을 감지한다. 냄새는 나는데 보이지 않을 경우, 킁킁거리며 천천히 접근하는 게 패턴이었다. 공략법을 모르거나, 충분한 전투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은폐를 유지하며 도망치는 게 최선이다. 죽일 생각으로 권총의 격철을 당긴다. 준비 없이 발사되는 더블액션 권총일지라도, 해머를 당겨두면 방아쇠 압력이 감소해서 좋다. 명중률을 생각한 조치. 사격기술은 충분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기다리는 사이, 그럼블은 냄새를 쫓아 꾸준히 다가왔다. 악취가 코를 찌른다. 뭉그러진 거체의 냄새. 이 냄새에 긴장하면, 거리 감각이 왜곡된다. 거리를 잘못 재고 나갈 경우 힘든 싸움을 하게 될 터. 소년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쿠웅, 쿵. 톤 단위 체중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심박처럼 몸을 울리며 크기를 키워간다. 겨울은 한 손에 권총을, 다른 손에는 안전클립과 안전핀을 제거한 수류탄을 쥐었다. 양손을 머리 높이로 든 자세. 눈을 감고 때를 기다린다. 경험을 토대로 거리를 가늠했다. 멀어도, 가까워도 위험하다. 하나, 둘, 셋. 겨울은 몸을 휙 돌리며 사각에서 벗어난다. 일그러진 거체가 홱, 놀라운 속도로 반응했다. 맹수의 노오란 눈 한 쌍이 겨울에게 못 박힌다. 푸쉬익 내쉬는 숨. 증기가 새는 것 같았다. 그럼블의 이동속도는 느리지만, 「질주」만큼은 고속이다. 어지간한 차량과 맞먹는다. 그럼블은 사냥감이 일정거리 이상 떨어져있을 때, 손닿는 거리에 집어던질 물건이 없다면 무조건 「질주」를 사용한다. 겨울이 권총을 겨누었다. [크아아아-] 퓩! [-아앍!] 포효하던 녀석이 입을 텁 다물었다. 짧은 뒷걸음질. 목구멍에 박힌 총알 탓이다. 물리내성을 지닌 괴물의 유일한 약점. 그 틈을 타 겨울은 주위를 에워싼 일반변종들을 겨냥했다. 연속사격. 방망이 맞은 수박처럼 깨져나가는 머리들. 그 사이 정신 차린 그럼블이 다시 「질주」를 준비하며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앍?!] 목젖 부근에서 피가 튀었다. 다시 한 보 물러나는 대형 변종. 겨울은 차분하게 다가갔다. 4미터 이내로 들어가면 근접전투 패턴이 작동한다. 그 경계선 바깥에 머무는 요령이 중요했다. 실패와 죽음으로 학습한 거리 감각이었다. 겨울이 반경 4미터 안에 들지 않았으므로, 충격(Stun) 상태에서 회복한 그럼블이 「질주」 자세를 잡는다. 「질주」 직전, 그럼블은 반드시 소리를 지른다. 이 때 구강 내 피격판정이 발생하면 패턴이 중지되고, 잠시 무력한 상태가 된다. 다른 공략방법은 난이도가 높다. 그래서 다수가 동시에 등장하면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목구멍은 작은 표적이다. 여러 마리를 동시에 견제하기가 쉽지 않다. 고개를 흔든 녀석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번에 한해 겨울의 행동만 다르다. 수류탄을 던졌다. 사람 하나 그대로 삼킬 만큼 큰 입이라, 목구멍은 농구공이 들어가고도 여분이 남는다. 수류탄이 목젖을 치고 들어간 뒤 겨울은 정조준 사격을 가했다. 타앙! 피가 튀었다. 놈은 또 입을 꾹 다물고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끝이다. [퍼엉!] 살과 근육에 갇혀 눅눅해진 폭음. 목구멍을 넘어가 터진 폭발이 강력한 변종의 체내를 갈기갈기 찢었다. 폭압에 튀어나온 안구가 신경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피부가 썩은 거인은 폐병 걸린 인간처럼 피를 토했다. 케엑! 케엑! 그웨엑! 혀를 빼고서 피를 게워내는 와중에, 겨울이 다시 수류탄을 까 넣는다. 그것은 끈적한 혓바닥에 붙었다. 그냥 두면 위험하다. 벌어진 입 안에 총탄을 두 발 연속으로 박는다. 변종이 입을 다물고 침을 꿀떡 삼켰다. 수류탄의 지연신관은 위장에서 타들어갔다. 두 번째 체내폭발. 썩은 피부가 꿀렁 물결친다. 거대한 체구가 중심을 잃더니, 무릎을 꿇고, 흔들리다가, 천천히 기울어져, 바닥에 충돌한다. 쿠궁.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겨울은 여상스런 표정이었다. 익숙한 입장에서, 하나 뿐인 그럼블은 손쉬운 사냥감이었으니까. 그는 들어온 경험치를 확인한다. 이른 시기에 특수변종을 잡으면 가산 경험치가 더해진다. 다른 인물이 퇴치하기 전, 즉 세계관 내 해당 특수변종을 처음으로 물리친 것으로 판정되면, 더더욱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확인해보니 둘 모두에 해당되었다. 흡족한 수준의 보상을 획득했다. 한 놈 더 만나도 좋을 텐데. 경험 없을 때와 천양지차의 생각을 품고서, 겨울은 가까운 건물을 수색하러 들어간다. 경험치 여유가 많으니 「추적」 기술에 소극적인 투자를 해본다. 4등급. 겨울은 곧장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시선 닿는 단서마다 강조효과를 부여했다. 눈의 초점이 그 위에 머물면, 자세한 내용이 출력된다. 옅은 먼지 위로 난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쉬워졌다. 강조효과가 없었다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몰랐을 흔적이다. 발자국을 따라간 끝에 나타난 문 하나. 두드려보았다. "코헨 병장님? 안에 계십니까?" 그러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리 불편한 누군가가 억지로 일어서는 소음. 과연,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가 돌아온다. "바나나, 너냐?"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아무튼 맞습니다. 약속대로 구해드리러 왔어요." 덜컥! 문이 열리고, 시선이 마주친다. 전기 끊긴 실내에 그림자 드리워져, 어두운 허공에 두 눈 떠있는 느낌이다. 흑인이라 더하다. 모르고 열었으면 놀랄 뻔했다. 덩치 값 못하고 눈물 줄줄 흘리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오, 신이시여. 이렇게 무모한 애송이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꾸 그러시면 버리고 갑니다." "키만 작은 게 아니라 속도 좁다니!" "이 사람이?" 만담은 여기까지. 비틀거리고도 기어코 일어난 그가 와락 끌어안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하기도 한계인 모양. 사람을 다시 만난 것 자체가 기뻐서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행동이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같은 말을 미친 사람처럼 되뇌었다. 실컷 울고서 겨우 떨어진 코헨은 그래도 여전히 떨고 있었다. "호, 혹시 오는 길에 괴물 없었어? 가까운 곳에서 그 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전쟁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전쟁이면 차라리 낫지! 내가 쏘면 죽는 놈들이 적이니까! 하지만 그건 아냐! 총알이 안 박힌다고! 그놈과 마주치면 우린 죽은 목숨이야!" 겨울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죽였어요." "뭐?" 얼빠진 코헨을 두고 겨울은 방 안을 둘러보더니 의자 하나 끌어왔다. "앉아 봐요. 다리를 어떻게 해야 나가든지 말든지 할 거 아녜요?" 일단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내민 코헨은 저 앞에 꿇어앉아 응급처치를 시작하는 소년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봐, 죽였다는 게 무슨 말이야?" "주둥이에 수류탄 까 넣었어요. 두 번 터지니까 죽더라고요." "......." 중간에 보건소에 들르길 잘했다. 코헨의 종아리는 퉁퉁 부어있었다. 물에 불린 고기 같다. 거즈를 감고, 부목 닿을 자리에는 탈지면을 두껍게 넣고, 부목 대용으로 스테인리스 심을 대고서 압박붕대로 단단히 묶는다. 골절부위 위아래로 버텨주지 않으면, 부목을 대는 의미가 없다. 숙련자 레벨의 응급처치를 멍하니 받고 있던 병사.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놀리지 마. 나 안심시키려고 구라 치는 거지?" "노란 안구에 붉은 눈동자, 체고가 대략 5미터 쯤 되어보였고, 좌우로는 험비 가로 폭보다 퍼졌던데요. 전체적으로 보면......피부 썩은 근육질의 거대 유인원? 뭐 아무튼 제가 본 건 그렇게 생겼는데 아니라고 주장하신다면야 더 할 말 없고요. 어차피 나가면 시체를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여기서 입씨름할 필요 없죠. 다 됐습니다. 목발 짚고 일어서보세요." 코헨이 일어나며 끙 하는 신음을 흘렸다. 부목 대고 붕대 감아도 결국 응급처치일 뿐이다. 한 손에는 무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 관계로 목발은 한 짝만 챙겨왔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다친 쪽 다리에 부하가 실리기 쉬웠다. "가시죠. 가는 길에 애쉬포드 하사님도 챙겨야 하니까, 늑장부려서 좋을 것 없어요." 태연하게 앞장서는 소년을 보고 병장은 여전히 미심쩍다. 이걸 믿어야 하나? 진실은 나가자마자 밝혀졌다. 코헨 병장은, 축 늘어진 거체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Oh Shit!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근육 때문에,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은 그럼블 탓이다. 보고 놀랄 법 했다. "죽었다니까요." 자, 하고 손을 내민 겨울에게 의지하여 일어나는 코헨. 겁먹은 얼굴로 그럼블 있는 쪽을 기웃거린다. 겨울이 태연하게 그 옆으로 가서 보란 듯이 발로 찼다. 그제야 코헨은 그 괴물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입이 한층 더 걸게 변한다. "미쳤어! 너 이 자식 졸라 미쳤다고! 세계 최고의 니미 씹할(mother fucking) 바나나야!" 슬랭의 어감에 익숙하지 않으면 욕으로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강렬한 찬사였다. 여기서 니미 씹할은 그냥 겁나 끝내준다는 뜻일 뿐이었다. 사실 흑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말을 쓰는 건 아니다. 슬럼가 거주민들의 질박한 언어로, 동일한 환경에선 백인도 같은 말을 쓴다. 소득수준으로 인한 문화적 소외였다. 그래도 바나나는 좀 그렇다. 마커트 대위만 없었다면 그러려니 했겠는데. "자꾸 바나나라고 부르면 저도 초코 볼이라고 부릅니다?" "그거 좋지!" 검은 피부에 대머리가 초코 볼 같아서 던진 농담인데, 덥썩 받아먹는다. 이 사람 약 맞은 것처럼 들떴네. 겨울은 권총을 뽑아 그의 어깨 너머를 쏘았다. 퍽. 단발 사격. 피 튀는 소리 내고서 풀썩 쓰러지는 변종 하나. 좀 놀렸다고 겨울이 저를 죽이려는 줄 알았던 코헨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더니,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엄지를 척 세웠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름으로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제 이름, 잊지 않으셨죠?" "잊었는데?" 코헨 병장이 겨울의 뚱한 면전에 대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았으면 하버드를 갔지. 한 번 듣고 어떻게 기억하겠어?" "능청은....... 한겨울입니다. 발음하기 어려울 테니 그냥 한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오케이, 한. 기억하지. 근데 이거 진짜 굉장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병장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 시선 끝엔 그럼블의 사체가 있었다. "이 놈이 내 친구들을 갈가리 찢어 죽였어." "...그만 가죠. 지체할 시간 없어요." "......." 겨울은 집에 들기 전 봐두었던 FEMA 트레일러 트럭을 가리켰다. "운전 가능해요?" "물론이지. 발 한 짝 병신이라도 운전 정도라면야." "잘 됐네요. 가는 길에 식량도 좀 챙겨야 할 것 같으니까요. 오면서 봤는데, 저 덩치가 설치느라 도로를 적당히 치워준 것 같더라고요. 적어도 학교 가까운 곳까진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거 잘됐군. 그건 그렇고....... 이봐, 한. 이대로 복귀할 생각은 안 들어?" 병장의 질문은 반쯤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적어도, 남의 속 곧잘 꿰뚫는 겨울이 감지하기로는 그랬다. 농담처럼 던지지만, 사실 지치고 아파서 그냥 도망치고 싶다는 이기심. 자연스러운 것이니 비난하지는 않는다. "당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제가, 두고 온 사람들이라고 버릴 것 같아요?" "에이, 농담이었어." 코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떨리는 차체. 이어지는 엔진 구동음이....... [콰앙!] "엥?" 놀란 코헨이 어벙하게 중얼거린다. "엔진 소리가 미쳤어! 이 자동차 고장났나봐." "저기요, 머리도 다치셨어요? 수류탄 터지는 소리잖아요." 폭음이 이어졌다. 월넛 드라이브와 크레스턴 로드의 교차지점에서 서쪽으로 나아간 방향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괴성. 인간의 것이 아니다. 코헨이 한숨 쉬며 운전대를 두드렸다. "아이고. 저런 거 하나 더 있나본데?" "마저 잡아 죽이죠." 겨울의 대꾸에 기가 질리는 흑형. "와, 이 상남자 새끼." "직진하세요, 교차로까지. 나머지는 상황 봐서 행동하기로 하고요." "......." "뭐해요? 동료들 더 죽기 전에 서둘러야 할 거 아녜요?" "젠장, 그래야지." 코헨은 머리에 쓴 방탄모 한 번 주먹으로 콱 치더니 가속페달을 냅다 밟았다. 끼이익- 치솟는 RPM. 공회전에 이은 급가속이, 도로 위에 긴 바퀴 자국을 남긴다. 차량은 좌우로 휘청이며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 23 [23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파소 로블레스 (10) 박살난 집이 폭풍 맞은 것처럼 날아다녔다. 그 가운데 찢어진 사람도 있었다. 근접전투 패턴의 그럼블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한다. 주먹질 세 번에 단층 주택의 3할이 날아가 버렸다. 엄폐물을 찾아 빈 집으로 들어갔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반대편 창문으로 기어 나왔다. 그 와중에 나오다 마는 자도 있었다. 집 안에도 변종이 있었던 모양. 끌려들어간다. 비명. 창문에 핏물이 튀었다. 물리면 감염된다. 그렇더라도 목숨은 부지할 것이나, 의미 없다. 그럼블이 벽을 부수고 나오면서 건물 전체가 주저앉았다. 폭삭 무너지는 집, 아직 숨 붙은 생명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짓눌려 죽는다. 사격은 무용지물이었다. 물리충격에 면역이라, 입 아니면 약점이 없는 놈이다. 그래도 전차 주포나 대전차미사일에 직격당하면 뭉개지긴 할 것이다. 병사들에게 당장은 없는 것들이었다. 건물 부수고 나온 그럼블이 탐색 패턴에 접어든다. 이어질 행동은 둘 중 하나. 손에 잡히는 중량물이 있다면 「투척」 패턴이고, 아니라면 「질주」 패턴이다. 어느 쪽이건 직전에 입 쩍 벌리고 소리를 지른다. 마침 가까이에 승합차가 있었다. 괴물이 움켜쥐는 악력에, 차체 프레임이 우득우득 우그러졌다. 훙- 승합차의 탄도비행을 본 코헨 병장은 와들와들 공포에 떨었다. "정말 저걸 상대할 방법이 있는 거지?" 차 떨어진 자리에 퍽 터진 핏물과 흩어진 내장이 요란하다. 사람 하나 쉽게 죽인 괴물은, 트레일러 급정거하는 소리에 관심이 끌린 모양이다. 거대한 포식자가 느릿느릿 방향을 바꾸었다. 형형한 눈 두 짝 이쪽으로 고정된다. "있다고 말해줘. 제발......." "후진하세요." 이 말 남기고 겨울 자신은 차에서 내렸다. 거리가 좀 멀어 권총으론 명중탄이 안 나오겠다. 탐색 패턴을 거친 놈이 질주 패턴으로 접어드는 게 보인다. 겨울이 메고 있던 소총을 앞으로 돌려 조준했다. 이 방식의 공략은, 사격 기술이 수준 이하일 때 무용지물이다. 조준속도가 느리고 명중률이 낮아서 그렇다. 그래서 기술이 부족하게 마련인 초반에 잡으면 경험치 가산이 붙는 것. 관련하여 업적도 존재한다. [크아아아아-] [툭! 투두둑! 투두둑!] [-앩! 켁!] 탱강탱강 경쾌하게 탄피 떨어지는 소리. 두 번 끊어 쏜 일곱 발 중 명중탄이 다섯. 총알 박힌 입 다물고 주춤 물러나는 괴물. 겨울은 견착과 조준을 유지한 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가며, 놈이 입을 벌릴 때마다 방아쇠를 당겼다. 이동간 사격 치고 놀라운 명중률이다. 살아남은 병사들 중 제정신인 자들의 화력이 쏟아졌다. 괴물은 눈을 돌리지 않는다. 물리내성이라, 어차피 피해도 없었다. 위협적인 상대부터 배제해야 한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건 겨울이었다. 겨울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가는 동안 두 번 더 사격을 가했다. 일반 변종들을 동시에 견제하려니, 탄창 잔량이 얼마 없다. 눈으로 거리를 재어 약 5미터 밖에서 정지. 수류탄의 클립을 따고, 이빨로 핀을 뜯는다. 목표, 거대한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크아아아아아!] 직구로 던진 수류탄은 까만 목구멍으로 꿀꺼덕 넘어갔다. 저가 뭘 삼켰는지 모르는 놈이, 두 팔 벌려 포효하며 돌진을 개시하는 순간. [퍼엉!] 괴물의 몸이 번쩍 했다. 살을 뚫고 나오는 빛. 거체는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경련하는 야수. 왈칵 토해내는 피와 내장조각들. 파열된 안구에서 붉은 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후각이 멀쩡하니 접근은 금물이다. 그로기 상태로 고통스럽게 포효하는 놈에게, 다시 하나 수류탄을 먹인다. 폭음. 그 단단하던 몸이 바깥으로 깨졌다. 식도 앞쪽으로 뻥 뚫린 몸에서, 핏물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무릎 꿇는 묵직한 진동. 거인은 전원 나간 기계처럼 생명을 잃었다. 겨울은 들어온 경험치에 만족했다. 슬슬 주요 기술 중 하나쯤 천재의 영역까지 끌어올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첫 등장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쉽다. 정신 빠진 병사 다섯이 시체에 대고 총탄을 쏟아 부었다. 정작 배후에서 엄습하는 감염변종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럼블의 포효에 이끌린 변종들이, 굶주린 개처럼 뛰어왔다. 위험한 자가 둘이다. 겨울이 두 손 번쩍 들어 엑스자로 교차시켰다. "이건 죽었습니다! 뒤! 뒤를 조심하세요!" 가로수 사이마다, 건물 모퉁이마다 속속 나타나는, 냄새나는 것들. 수가 워낙 많았다. 이때 들리는 거친 엔진소리. 겨울이 시키는 대로 멀어졌던 코헨의 트레일러다. 장애물을 피하며 달려오더니 거칠게 방향을 꺾었다. 콰아아아,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는 차량. 운전석에서 코헨이 상체를 내밀었다. "뭐 하냐! 이 염병할 짬찌 새끼들아! 빨리 타!" 병사들이 허겁지겁 몰려들었다. 슬슬 굴러가는 차를 보고 꽁지가 탔나보다. 총을 버리고 머리를 감싸 쥔 볼품없는 모습들. 몸을 던지다시피 뛰어든다. 트레일러 짐칸은 충분히 넓었다. 헉헉거리며 널브러진 병사가 다섯이어도, 여전히 공간이 남았다. 조수석으로 들어온 겨울을 보고 코헨이 소리를 질렀다. "예아아아아! 졸라게 끝내주네! 크하하하하!" 차량은 도로를 벗어나 주택 사이를 달렸다. 땅이 남아도는 미국답다. 건물 사이로 차가 달릴 공간이 충분했다. 정원에 울타리가 있어도 장식물 수준이다. 차를 막긴 어렵다. 주택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차량은, 보건소 앞에서 급정거했다. 짐칸에 있던 이들이 굴러다니며 내뱉는 욕설이 들린다. 그걸 듣고 코헨은 또 좋다고 웃었다. 하기야 몇 시간 전까지 고립된 채 죽기를 각오하고 있었다. 일부나마 동료들을 다시 만났으니, 기분 좋을 법도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애쉬포드 하사는 혼자 걸을 수 있는 몸이었고, 지금쯤 약기운도 달아났을 것이었다. 겨울 혼자 들어가 끌고 나온다. 나올 때만 해도 팔 붙잡고 끙끙대던 하사는, 동료들과 재회하고서 고통 싹 사라진 표정이 되었다. 겨울이 탑승하자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저 많은 수를 방치하긴 좀 그렇네요." 차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한참 뒤떨어지긴 했으나, 그래도 떼 지어 쫓아오는 놈들이 불길하다. 뒤쪽 먼 거리에 엄청나게 우글거렸다. 인간을 벗어났기에,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코헨 병장이 묻는다. "어떻게 하려고?" "저쪽에 주유소가 하나 있던데요. 기름 뿌리고 굽죠." "하여간 똥양인들이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좋아! 오케이, 쿨하게 가자고!" 불이 번질 범위를 감안하여 훨씬 나아간 곳에 정차했다. 주의 깊게 뿌려두더라도, 주유소가 폭발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디코이를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앞서 챙겨두었던 라디오를 말함이다. 봉쇄선 너머에서 보내는 재난방송 주파수가 잡혔으므로, 잡음만 나오는 일은 없었다.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험비의 잔해 안에 던져둔다. 사지 멀쩡한 병사 둘이 엄호하겠다고 붙었다. 나머지는 좀 떨어진 엄폐물을 찾아 엎드린 채 총구만 내놓았다. 기름을 뿌린다. 맑은 휘발유가 도로를 적시며 내려갔다. 월넛 드라이브는 크레스턴 로드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었다. 도로의 교차점에 있는 주유소는 불 지르려는 곳보다 미세하게 높았다. 낮았다면 여러모로 곤란했을 것이다. 담뿍 뿌려졌다고 판단한 겨울이 주유기를 본래 자리에 꽂아두고서, 병사들을 향해 물었다. "불 좀 빌려주실 분?" "담배는 필요 없고?" 겨울의 요청에 시답잖은 농담으로 대꾸한 병사 하나가, 품에서 지포 라이터를 던져주었다. 겨울은 변종들이 젖은 도로 위로 뛰어들기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 부싯돌 당긴 라이터를 집어던진다. 가솔린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새빨간 불길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판이 깔렸다. 성냥을 던지면 불이 꺼지는 중유나 디젤과는 다르다. 가솔린은 증기에 스파크만 튀어도 폭발한다. 확 끼쳐오는 열풍에 사람이 밀릴 정도였다.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프다. 한 팔로 빛을 가려야 했다. 타오르는 도로 위에 검은 그림자들이 춤을 추었다. 불타는 소리에 괴성이 뒤섞인 불협화음. 병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 빛과 연기를 뚫고 튀어나오는 감염변종들. 타오르는 몸에 개의치 않고, 숙주를 늘리려는 발악이었다. "쏘지 마세요. 총알 낭비니까." 계급만 보면 겨울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한참 어린 소년의 말에 따랐다. 과연, 굳이 쏠 필요가 없었다. 타들어가는 근육은 제멋대로 수축한다. 그래서 분신자살하는 사람은 항상 앞쪽으로 넘어지며, 화재로 타죽는 인간은 태아처럼 웅크린다. 변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기 익는 냄새를 풍기며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검은 몸뚱이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넘어져 바닥을 구른다. 살이 벗겨졌다. 감염변종들은 고통에 얽매이지 않는다. 불 속을 달려서 통과한다면 위협적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안구가 구워진 다음에는 방향을 구분할 수 없다. 헤매게 된다. 새롭게 뛰어드는 것들도 먼저 온 것들과 같은 신세다. 보는 이에게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너울거리는 빛 속에서 몸부림치는 검은 그림자들. 불로 그려낸 지옥 같았다. 변질되었어도 본래는 인간의 육체. 내지르는 비명도 인간을 닮았다. 펑펑 터지는 소리가 섞인다. 험비 잔해에 남은 탄약의 유폭이었다. 다만 가끔은, 열팽창한 몸뚱이가 풍선처럼 터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엄폐해있던 자들도 어느덧 가까이 왔다. 거대한 화형식을 참관한다. 멍하니 지켜보던 병사 하나가, 성호를 긋고 십자가 목걸이에 입 맞췄다. 겨울이 말했다. "돌아가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다들 말없이 수긍한다. 살아남은 기쁨, 그저 손 놓고 쉬고만 싶은 피로, 안도, 옅은 슬픔 등이 뒤섞인 표정들. 불을 등진 그림자들이 겹겹이 늘어졌다. 식량이나 좀 챙겨갔으면 좋겠는데, 이래서는 무리가 많겠다. 사람 수가 늘어난 만큼, 가는 길의 장애물들을 치우고 끝까지 차를 몰았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건만, 며칠은 떠나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체육관의 모습. 뒷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것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라였다. 방독면을 벗는 겨울을 보고 두 눈 크게 뜬 그녀. 굳어 있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돌아오지 않을까봐......." 코헨 병장이 경박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이다. 멋쩍게 머리를 긁는다. 열린 문으로 일곱 명의 미군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대피해있던 사람들이 움찔 놀랐다. 심지어 총을 겨누는 이도 있었지만, 지친 미군들은 그런 걸 신경 쓰기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몇몇은 바리케이드를 지나기도 전에 주저앉아 한숨만 쉬었다. 코헨과 애쉬포드 하사는 주먹을 부딪히며 시시덕거렸고, 나머지는 담배를 빼물고 가슴 불룩해질 때까지 쭈욱 빨아들였다. 플레이어에게 해로울 것은 없는데, 겨울은 굳이 거리를 벌렸다. 생전...이라고 해야 할까, 제 몸 있던 시절부터 집안에서 피는 아버지의 담배냄새가 그렇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걸 두고 병사들이 웃는다. 저 놈 그렇게 살벌하더니, 그래도 아직 어린 게 맞다면서. 어디선가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로운 갈채를 보내는 사람은 아직 어린 학생이었다. 불규칙한 식사와 실내 생활이 길어 하얀 피부가 더욱 하얗고 창백해진 그 아이는, 눈물을 머금고 열심히 박수를 쳤다. 시선은 정확하게 겨울이 있는 방향이었다. 박수가 더욱 번졌다. 찬사를 던지는 말들이 뒤섞인다. 미군들도 분분히 일어나 합세했다. 소음을 의식해 소리 줄인 찬사들이, 오히려 더욱 크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진석 홀로 씁쓸하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을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나가선 안 되었다는 생각은 그대로일 테니까. 겨울을 상대로 패배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고. 그것도 미성년자를 상대로 느끼는 패배감이다. 경쟁자의 성공은 야망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쓰라린 법. 유라가 여전히 한쪽 팔 잡고 훌쩍훌쩍 울었다. 달래주고 있는데, 미군 생존자 중 최선임자인 애쉬포드 하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보고 있으려니 절도 있는 경례를 붙인다. "네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정말 신세가 많았다." "인사는 복귀한 뒤에도 늦지 않아요." 목숨을 구해줘서 얻는 호감은 질이 좋다. 감소하지 않는 불변보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같은 불변보정에 의해서만 상쇄된다. 눈앞에서 가족을 살해한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지금 얻은 이득은 언제까지라도 살아있을 것이었다. 하사가 동료들에게 돌아간 뒤, 겨울은 옷자락으로 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더러운 얼굴이 눈물 자국을 따라 하얗게 변한다. 미모는 여성의 무기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캠프 내의 많은 여성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자신을 가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충분한 위생시설이 존재하더라도, 공동체가 안정적이어야 각자의 매력이 살아난다. 당장 유라만 하더라도 엉망으로 뻗친 머리에 때 묻은 피부다. 원래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닦아주다 보니, 꾸며놓으면 꽤 괜찮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동시에 신호음이 울렸다. 「SALHAE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공개방송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상화폐인 「별」을 걸고 진행자에게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를 시청자 퀘스트라 부른다. 유라를 다독여주며 곁눈으로 메시지를 읽었다. 내용이 가관이었다. 「SALHAE님의 말 : 쎅쓰하고 시퍼! 쎅쓰하고 시퍼! 쎄에에에에엑쓰으으으으!」 달성조건은 아주 단순했다. 이유라와의 섹스. 제한시간도 없고 세부목표도 없다. 그냥 그녀와 자는 것만으로 1000개의 별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년은 잠시 별을 기다리는 꽃을 떠올렸다. 애초에 이것을 원하였기에 방송을 시작했지만, 아직 거부감을 떨쳐낼 수 없다. '조금 더, 여유를 두자.......' 소년은 퀘스트를 거부했다. 들어올 때가 이미 늦은 오후 무렵이라, 일몰은 금세 찾아왔다. 군중공포는 상당히 낮다. 병사들을 통해 퍼져나간 과장된 무용담이 학생들로 하여금 소년을 우러러보게 만들었고, 성인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이쯤 되면 미성년자 페널티는 의미가 없다. 「AI 도움말 (통찰 10등급/간파 10등급) : 이제 사람들은 당신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곳의 사람들이 형성한 일시적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이며,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군중공포가 감소합니다. 당신의 통찰력에 의해 알 수 있는 현 시점의 군중공포는 19%, 오차범위 가감 2.8%입니다.」 겨울은 새로 얻은 경험치 분배에 고심했다. 리더십 계열의 핵심 기술인 「통찰」이나 「간파」는, 사용빈도가 높기에 경험치를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그 외에 장애물이 많은 환경에서 이동을 수월하게 하는 「무브먼트」 기술도 5등급까지 올려두었다. 다른 기술과의 연동 효율도 높다. 전투기술 쪽에서 「투척」과 「사격숙련」을 새로 습득한다. 각각 5등급씩. 「투척」은 앞으로 수류탄 쓸 일이 많아질 것에 대한 대비다. 칼 따위를 던질 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격숙련」 같은 경우 「개인화기숙련」, 「중화기숙련」, 「궁술숙련」 등 거의 대부분의 원거리 전투기술을 광범위하게 강화한다. 대신, 경험치 소비가 많고 효과는 비교적 적다. 여기에 「개인화기숙련」을 한 등급 올려 11등급, 천재의 영역 초입에 이르게 한다. 종말 후반에 접어들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었다. 잔여 경험치에 여유가 남도록 기술 조정을 끝낸 겨울은 시간을 가속시켰다. 어차피 캠프로 돌아가면, 주민구조 임무 완수에 의한 추가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다시 조정해도 된다. 새벽에 지축이 웅장히 울었다. 시간가속은 자동으로 해제된다. 땅을 흔드는 것은 헬기 로터 돌아가는 소리였다. 동시에 생존자를 찾는 무전이 있었다. 겨울과 시선을 교환한 애쉬포드 하사가 무전기를 붙잡고 응대했다. 들어본즉, 특수변종이 출현했다는 보고 때문에 공격헬기가 출동한 것이라 했다. 미국의 항공전력은 대부분 봉쇄선 차단작전이나 다른 캠프들에 대한 화력지원, 물자공수 작전으로 바쁘다. 네 대나 되는 공격헬기가 몰려온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일럿은 특수변종의 샘플을 획득하는 것이 임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질병관리본부(CDC) 및 연방 공공보건서비스 부대 병력과 대형 수송헬기가 따라왔다고 한다. 이쪽에서 자력으로 두 개체를 격파했으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전했을 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당장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위치를 알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독도법」을 활용했다. 체육관을 기준으로 대략적인 방위와 거리를 통보했다. 공격헬기, 아파치 편대는 도시를 샅샅이 뒤져가며 감염변종을 소탕한 끝에, 더 이상의 특수변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후 캠프로부터 브라보 중대가 새롭게 도착함으로써, 구조임무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차량 행렬이 국도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공격헬기 편대가 엄호해주었다. 멀리서, 차량행렬을 본 변종무리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에 아파치 두 대가 호버링(제자리 비행)으로 방향을 바꾸어 기관포를 쏟아 부었다. [투타타타타!] 시간당 항공유 70갤런 이상을 빨아먹는 이 게걸스러운 공격헬기는, 그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고폭탄을 초당 10발씩 쏟아낸다. 한 발 한 발이 수류탄 이상으로 위력적이다. 퍼퍼퍼펑-! 퍼엉! 폭음과 연기가 직선으로 질주하는 광경. 실로 장관이었다. 차량행렬이 캠프의 가시거리 안으로 접어들자, 헬기 편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이는 족족 변종 집단을 박살내며 먼 곳까지 돌아 사라진다. 안전을 위한 분산 이동. 캠프 근처에서 바로 회항해버리면, 그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변종들이 캠프로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 24 [24화] #과거 (3), 거래당일 겨울에 태어난 소년은 낯선 저택에 있었다. 천장이 높고 벽이 멀어,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곳이었다. 바깥은 가을인데 실내는 겨울 같았다. 겨울. 춥고도 쓸쓸한 한 철. 소년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함께 온 부모에게도 같은 느낌인가보다. 두 사람,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 심하게 위축되었다. 안내하는 사람은 아름다웠다. 고용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혜성그룹 회장의 딸이었다. 부친과의 나이차가 굉장히 크다. 차라리 손녀라면 믿겠는데. 그녀는 신색이 고요했다. 질감 부드러운 머릿결이 내려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 너머를 살폈다. 마음에 눈 내린 얼굴이 보인다. 고건철 회장, 젊음에 굶주린 노인은 상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치레가 없다. 보자마자 하는 말이 이랬다. “벗어.” “예?” “다 벗으라고. 상품 상태를 봐야 할 거 아냐.” 거칠고 퉁명스럽다. 겨울은 난처했다. 동생쯤 되는 나이더라도, 이런 데서 벗기는 어렵다. 하물며 몇 년 뒤면 스무 해를 사는 겨울이었다. 어찌 쉽게 맨몸을 보이겠는가. 주위에 낯선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고용인들의 시선도, 회장의 딸이라는 여자도 신경 쓰인다. 그들도 당혹스러운 눈치다. 감추려고 애써도 뻔히 보였다. 마음이 추운 소년은 타인의 기분에 민감하다. 회장이 채근했다. “서둘러라. 시간은 비용이다.” 이어지는 경고. “거래를 망칠 생각이라면 그대로 있어도 된다. 굳이 네 몸이 아니라도, 복제체 전신이식을 하면 그만이니까.” 아영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향한다. 거짓에 대한 비난 섞인 시선이지만, 정작 눈길 마주치자 먼저 피하는 쪽도 아영이었다. 회장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딸을 무시했다. ‘흥정 앞에 솔직한 상인이 어디에 있나.’ 소년의 부모는 몸이 달았다.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자식의 등을 쿡쿡 찌른다. “회장님 말씀대로 하렴. 응? 착하지?” 초조한 어머니의 상냥한 목소리. 말 안 듣는 어린아이 달래는 것 같다. 겨울은 심장 어림이 욱신거렸다. 가슴 속에 모난 돌 하나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그 무게와 질감을 마음으로 느낀다. 뜨거운 냉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익숙하다. 참을 수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참으면 된다. 얼마 후엔, 더 이상 돌 무거워질 일 없으리라. 그래. 거짓 된 세상에서나마 진실 된 마음으로 살게 된다면. 소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속옷도 벗어.” 주춤. 소년의 망설임은 짧았다. 수치스러운 손길로, 느리게 벗었다. 마침내 완전한 나신이 된다. 날 것 그대로, 인간의 모습으로 서서, 회장을 바라본다. 이제 되었느냐고 눈으로 묻는다. 인간을 꿈꾸는 노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우량품이군. 훌륭해.” 회장이 소년과 가까워졌다. 여문 몸 여기저기를 직접 만지고, 누르고, 주물러본다. 손끝에 만져지는 젊음이, 탄탄하게 다져진 육체가 마음에 드는 기색이다. 키도 큰 편이다. 회장의 정수리는 소년의 쇄골에 미치지 못한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잘 생겼어. 좋아. 암, 누가 쓸 몸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회장은 바싹 붙어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체취도 중요하지. 중얼거리는 한 마디에, 소년은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정말 최악인 요구는 따로 있었다. “세워봐.” “예?” “이거, 세워보라고.” 손끝으로 툭툭 치면서 하는 말. 겨울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고건철 회장은 진심으로 하는 요구였다. 보다 못한 아영이,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서서 아버지를 말려보려고 했다. “그만하세요! 의료진이 보장했잖아요! 품질……품질에는……이상이 없을 거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 가요?” “추웅부운?” 회장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가가 50억이다. 연봉 1억 받는 놈들이 절반을 저축한다 치고 100년을 모아야 하는 거액이지. 내게는 푼돈이지만 이놈들에게는 평생 꿈도 꾸지 못할 돈이야. 내 평생을 맡길 물건에 하자가 있는지 보겠다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냐?” “하지만…….” “하지만은 개뿔이. 난 평생을 장사치로 살아왔다. 거래할 상품이 어떤지 남의 말만 듣고 결정한 적 없어! 뭐든 직접 확인해야 확실해지는 거다! 쯧쯧, 하나 있는 딸년이란 게 이렇게 물러 터져서야…….” 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처럼, 부녀 사이에 말은 무기력한 도구였다. 당사자인 겨울은 울분을 삼킨다. 그의 부모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마 여기까지는 요구할 낯이 없을 것이었다. 다만 바라는 마음은 있어, 초조한 몸짓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 오직 냉혹한 상인 혼자서만 거침이 없었다. 거래는 경제적이어야 한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시간은 또 하나의 비용이었다. 회장이 냉정하게 독촉했다. “뭐하나? 빨리 세워봐. 수음 한 번 안 해 본 것처럼 순진하게 굴지 말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주변의 반응이다. 다들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배려가 아니야.’ 겨울은 그들을 이해했다. 보기 싫은 것을 외면하는 마음들이었다. 그 와중에 노인의 시선이 꽂힌다. 점점 더 형형해지는 눈빛. 겨울은 노력해보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죄송합니다. 못 하겠어요.” 회장이 대뜸 내질렀다. “돈 벌기 싫어?” “…….” “남의 돈 받아먹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이식거부반응 없는 몸뚱이를 운 좋게 타고나서, 몸은 몸대로 팔고, 죽은 뒤엔 뇌가 닳아 없어지도록 빈둥거릴 수 있는 주제에! 기회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보고 말하면 내 이런 소리 하지도 않아!” “죄송합니다. 정말로……못 하겠어요.” 노력은 이미 해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소년은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앙금 쌓인 돌의 무게에 몸을 맡긴 채, 소리 지르며 절규하고 싶었다. 비상식적인 상황. 누구라도 겨울을 이해해줄 것이다. 그러나 길어지는 침묵은 고건철 회장의 화를 돋웠을 따름이었다. 늙은 몸 어디에 그런 기운이 있었는지, 이제까지도 높았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요즘 젊은 놈들은 정신력이 부족해! 노력! 노력! 노오오오력을 해야지!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안 될게 어딨어!” 엄청난 성량. 완고한 노인은 숨이 차는 모양이다. 제풀에 버거워 씩씩댔다. 소년은 돌처럼 굳어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품질 관리를 거쳐 보기 좋게 근육 붙은 몸이건만, 지금은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발산해야 하는데, 안으로만 수렴하는 감정 탓이었다. 노려보던 회장이 딸을 불렀다. “네가 해봐라.” “……네?” “어떻게든 해보라고.”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울도 눈이 동그랗게 변했으며, 그의 부모와 주위의 고용인들도 내가 지금 맞게 들은 건가 싶은 표정들이었다. 폭군이 딸을 몰아붙였다. “뭐 하고 있어? 서둘러라. 시간 아깝다.” “지금……제 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전 아버지 딸이에요!” 자식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 따지는 아영에게, 회장은 도리어 너 말 잘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넌 내 딸이지! 그게 뭘 뜻하는 지 알아? 내가 아니었으면 넌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는 거다!” “어떻게 결혼한 딸에게 이런 일을 시키실 수가 있어요?!” “그러니 더 쉬울 거 아냐! 네 서방한테 해봤을 테니까!” 패악스러운 일갈을 이 자리의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다. 아영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에 손발을 덜덜 떨었다. 노려본다. 회장이 코웃음쳤다. “감히 애비를 노려봐? 건방지게. 어디 나 없이 살아볼 테냐? 내가 널 내치면 네 서방이라고 널 끼고 있을까? 젖먹이를 데리고 나가서, 온전히 네 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응? 말해봐라. 네 생각은 어떠냐?”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아영의 시선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예쁜 딸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손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는 근본적으로 부정한 족속이라, 탄생을 기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출산 하루 뒤, 아이를 안고 있는 딸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아영의 남편은 그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다. 고아영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혜성그룹의 후계자와 결혼한 것이다. 후계자격을 상실하면 당연히 버릴 것이다. 그는 아영의 몸을 좋아했지만, 몸 만이라면 더 좋은 여자가 얼마든지 많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구나.’ 엄마는 아이를 지켜야 한다. 회장에게 미움을 산다면, 더는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늙은 폭군의 돈은 나라의 모든 곳에서 흐르니. 아영은 현실에 굴복했다. “저기……자, 잠시…….” 겨울이 자기도 모르게 물러났다. 소년의 어깨를 붙들고, 아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달랬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참아 봐요.” 이런 걸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여인의 손길이 닿는다. 겨울에 태어난 소년은, 무서울 정도로 떨었다. 혹독한 추위다. 마음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몸은 뜨거워진다. 겨울은 그 온도차에 다시 괴로워했다. 상상은 해보았으나, 실제는 그 이상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저려올 때마다 숨을 멈추게 된다. 두 사람에게 치욕스러운 시간이 지나갔다. 아영은 표정 없이 일어섰다. 내색해봐야 비웃음을 살 뿐일 테니. 이제 아버지에게 묻는다. “이 정도면 됐나요?” “괜찮군. 아주 건강해. 마음에 들어.” 회장은 더 이상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한층 더 초라해진 소년을 바라보며, 노인은 메마른 만족감을 느낀다. 물러나기 전, 아영이 소년에게 위로를 속삭였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요. 지나가면, 그저 나쁜 꿈을 꾸었을 뿐이라고.” 소년의 젖은 눈 한 쌍에 그녀가 비친다. 아영은 얼굴을 가렸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노인은 소년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좋은 경험 해놓고 왜 질질 짜는 거냐?” 겨울이 두 눈을 바쁘게 깜박거렸다. 지금까지의 광기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늙은 기업인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제 내가 대가를 보여줄 차례로군.” “돈……말씀이신가요?” “그거 말고.” 고건철 회장이 엄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공정한 상인이다. 법을 어긴 적은 있어도, 내가 정한 상도를 어긴 적은 없어. 말했지? 뭐든 직접 보아야 확실한 것이라고. 내게 상품을 점검할 권리가 있는 만큼, 너에게도 대가를 확인할 권리가 있다. 돈은, 그래, 핵심적이지. 하지만 너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건, 거래 성사 이후 평생을 살아갈 가상현실 아니더냐?” “가상현실…….” 확실히, 겨울의 부모 입장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이 거래에서 회장이 지불하는 대가는 집과 돈만 있는 게 아니다. 소년이 「안치」될 가상현실 역시 대가의 하나. 회장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한다. 소년이 대가를 확인하지 않으려 한다면, 억지로라도 확인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직접 경험해보는 게 좋겠지. 집으로 단말기를 가져다 두마.” 굳이 대답이 필요한 말은 아니었다. 소년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 25 [25화] #시청자와의 대화 (1) 「기능활용안내(AI) : 「종말 이후」 세계관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에게 알려드립니다. 현재 보시는 대화창에는 사용자 설정에 따른 필터링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유의미한 내용이 없거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게재하거나, 다른 시청자로부터 다수의 신고를 받은 전적이 있거나, 사용자가 임의로 블라인드 처리를 희망한 시청자의 메시지는 대화창에 표시되지 않습니다. 설정변경을 원하신다면 관제 AI를 호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민ROCK : 오, 기독 표시 뜨는 거 보니 방송 진행자가 대화창 열어놓은 듯.」 「한미동맹 : BJ 왔다아아아아아아!」 「한겨울(진행자) : 안녕하세요, 여러분.」 「도도한공쮸♡ : 꺄앙~! 안녕하세영 귀여운 옵빠양! 방송 잘보고 있쪄염 뿌우♬」 「당신의 어머 : 진행자 ㅎㅇ」 「한겨울(진행자) : 도도한공쮸♡님, 당신의 어머님 안녕하세요.」 「당신의 어머 : 네넹.」 「제시카정규직 : BJ 이노오오오오오오옴!」 「눈밭여우 : ?」 「흑형잦이 : 네가!」 「무스타파 : 네 죄를!」 「김미영팀장 : 알려라!」 「짜라빠빠 : 알려라 뭥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감가는모양새 : 병신들이 호흡도 병신 같이 맞추네 ㅋㅋㅋㅋㅋㅋ」 「눈밭여우 : ?」 「제시카정규직 : 으엉헝헝흐어어엉어엉엉엉.」 「한겨울(진행자) : 왜 그러세요?」 「제시카정규직 : 왜 그러냐니! 진행자야, 제발 꼐임 좀 하자!」 「한겨울(진행자) : 꼐임? 게임의 오타인가요?......게임은 이미 하고 있는데 달리 뭘 말씀하시는 건지....... 당분간은 「종말 이후」 말고 다른 세계관에 접속할 생각은 없지만, 원하시는 세계관을 말씀해주시면 나중에 참고하도록 할게요.」 「흑형잦이 : BJ 순수한 거 보솤ㅋㅋㅋㅋㅋ」 「칠리콩까네 : 순수는 개뿔. 그냥 니들이 낡은 유행어 쓰는 거지, 이 아재들아.」 「칠리콩까네 : 순수는 개뿔. 그냥 니들이 낡은 유행어 쓰는 거지, 이 아재들아.」 「제시카정규직 : 요즘 애들은 꼐임 모르남? 거 있잖아, 남자한테 좋고 여자한테도 좋은 거.」 「한겨울(진행자) : ......혹시 성행위 말씀하시는 건가요?」 「SALHAE : 그렇다! 너 왜 나 무시 하냐!」 「한겨울(진행자) : 네?」 「SALHAE : 큰 맘 먹고 별 10만원어치 질러서 퀘스트 걸었는데...넌 그걸 보자마자 취소시키고. 너 왜 그러냐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한겨울(진행자) : 아.......」 「SALHAE : 월세 내고 밥값이랑 교통비, 보험료, 적금, 주택청약, 기타 공과금 제외하면 내 용돈 20만원 남는데 거기서 절반 지른 거란 말이양. 나한텐 거금이여....... 나이 서른에 애인 사귈 형편도 안 되고 결혼할 형편은 더더욱 안 되는 아재가 접속기 뒤집어쓰고 딸이나 치려고 하는데 너 왜 그걸 걷어차고 그러냐. 니 방송 툭툭 끊기지도 않고 재밌긴 헌디, 기껏 지른 오나홀에 정액 묻을 날이 없어서 허전혀야....... 이러다 남산타워를 강간할지도 모르겠어....... ㅠㅠㅠㅠㅠㅠ」 「눈밭여우 : ;;;;」 「윌마 : 크흡. 맞다. 진행자는 각성해라. ㅠㅠ」 「한겨울(진행자) : 돈이 적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걸 받아들이면 한동안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둠칫두둠칫 : 그건 너님 사정이고요. 일단 돈 받겠다고 방송 시작했으면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 아님?」 「폭풍224 : 두둠칫 너야말로 개소리 하지 마라. 쓰벌, 지가 돈 낸다고 엿 같은 훈수 두고 개똥같은 퀘스트 걸어놓는 트롤 새끼들 때문에 내가 좋아하던 채널이 몇 개나 터졌는데....... 떡이야 칠 때 되면 어련히 치겠지.」 「맛줌법 : ㅇㄱㄹㅇ 폭풍224 말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구연, 이 방송 ㄹㅇ 핵꿀잼 지리는 각 ㅇㅈ? 비제이 임기응변 지리는 각 ㅇㅈ? ㅇㅇ ㅆㅇㅈ~ 쓸데없는 간섭 극혐이구연, 솔까 이거 인정 안하면 느금마 엠생인 부분 ㅋㅋㅋㅋ 앙 기무띠」 「한겨울(진행자) : ?」 「눈밭여우 : ?」 「기능활용안내(AI) : 필터링 옵션 추가 알림. 맛줌법님의 차단 분류를 선택하거나 온라인 환경 검색 기능으로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능활용안내(AI) : 검색 기능을 활성화하였으나 번역지침에 의거한 자동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번역엔진 업데이트를 시도합니다.」 「기능활용안내(AI) : 업데이트에 실패했습니다. 현재 최신 버전의 엔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용자의 수동해석을 권고합니다.」 「둠칫두둠칫 : 저게 뭐라고 짖는 개소리여.」 「액티브X좆까 : 너 그러지 말라고.」 「려권내라우 : ㅇㅇ 그러지 마라. 나도 방 터지는 꼴 보기 싫다. 가장 잘 나가는 별창늙은이도 흐름 깨먹고 시도 때도 없이 떡치는데 솔직히 질린다 진짜. 어느 정도면 이해하겠지만 너무 심하잖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진행자 힘내라. 뚝심 있는 진행 보기 좋다 야. 그렇게만 해.」 [닉으로드립치지마라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한겨울(진행자) : 감사합니다. 이해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다행이네요.」 「진한개 : 그래도 별 천 개면 그렇게 적은 금액이 아닌데, 퀘스트 뜨자마자 고민도 안 하고 쳐내는 거 보고 뿜었다. BJ 무슨 단호박인줄 ㅋㅋㅋㅋㅋ」 [진한개님이 별 5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액티브X좆까님이 별 1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엑윽보수 : 아무리 그래도 시청 일주일째인데 한 번도 섹스가 없다니....... 희망고문 당하는 느낌.」 [눈밭여우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저널, 45페이지, 캠프 로버츠 내가 훈장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성무공훈장과 용맹장(Valor Device). 이 두 가지는 전장에서 뛰어난 무훈을 세웠을 때 함께 수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내가 물리친 거대한 괴물을 특수변종으로 분류하고, 「그럼블」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것이 오염지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했다는데, 그걸 총과 수류탄으로 잡아 죽인 사례는 내가 유일하단다. 나머지는 공격헬기나 전차를 끌고 가서 뭉개버려야 했다고. 공보장교의 말이었다. 수여식을 위해 워싱턴에서 온 공보장교는, 언제나 방독면을 쓰고 다녔다. 음식도 직접 가져온 것만 먹는다고 한다. 봉쇄선 이서지역에 들어온 것 자체가 극도로 불안한 모양이었다. 병원체가 공기로 전염된 사례는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그가 두려워하는 만큼 전염성이 강했다면 캠프는 이미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철조망 안쪽에선 다들 방독면 없이 생활하니까. 그가 그저 훈장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미 대통령의 친필 서한과 더불어 시민권 증서를 함께 받았다. 또한 원한다면 전시임관으로 장교가 될 길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대가는 오직 하나, 미국에 대한 충성서약 뿐. 나는 물론 좋다고 했다. 애초에 지원병 신분을 받아들일 때부터 미군이 되려고 마음먹었던 거니까. 기왕 될 거라면 일반 사병보다는 장교가 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여식은 또한 나의 소위 임관식이 되었다. 안면 있는 미군들로부터 온갖 축하를 다 받았다. 캡스턴 중위의 말에 따르면 나에 대한 훈장수여가 이토록 신속하게 결정된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같다. 나는 난민들에게 내세우는 광고판이었다. 그 뿐이었지만, 그럼블 탓에 극심한 피해가 발생한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미군과 미국 시민들에 대해서도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변종들과 여러모로 격이 다른 특수변종의 출현으로, 안전지역에서도 적잖은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그럼블을 퇴치한 날 영웅으로 만들어 무분별한 공포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라던가. 그 외에 날로 악화되는 난민들에 대한 여론을 잡고, 국가 차원에서 난민들에게 내세우는 롤 모델 역할을 맡길 생각도 있단다. 알 것 같다. 정부 차원에서 난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계획인가보다. 그동안 캠프 현장지휘관의 자구책으로 지원자를 받아오긴 했지만, 이제는 국가 정책으로 행해질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원병에서 대뜸 소위 임관이라니. 광고판은 화려할수록 좋다지만,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난 미성년자인데. 미국 정부도 사정이 나쁜 모양이다. 어쨌든 기왕 준다는데 받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수여 및 임관식에서 유달리 안색 나쁜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마커트 대위. 장교 정복에 계급장과 훈장을 단 나를 보더니 대놓고 인상을 썼다. 하기야 자신은 처참하게 철수했는데 내가 그 뒷수습을 했으니 얼마나 아니꼽겠는가. 그럼블에게 박살난 지휘관이 그 밖에도 많은지라 불가항력이었다고 인정받긴 했다. 허나 부하들에게 인망을 많이 잃었다는 소문이다.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장교라고. 평소부터 인망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래서인지 대위 근처에 사람이 없었다. 상급자를 따돌려봐야 부하들이 괴로울 뿐이겠으나, 상급자라고 마음 편하진 않을 터였다. 그밖에 최대한 좋은 사진을 뽑으려고 동원한 난민들 가운데에도 뚱한 자들이 적잖았다. 소속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것인지, 조직마다 고유의 문신을 새기거나 표식을 공유하거나 하는 일이 잦았으니까. 사진 찍는 플래시가 번쩍이고 카메라도 여러 대 돌아가는 가운데, 대대장이 대독(代讀)한 대통령의 친필 서한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귀하는 34인의 미국 시민들을 위하여 의무도 아닌 위험을 감수하였으며, 또한 강력한 적을 만난 미국의 아들들을 구해내었고, 국가안보의 새로운 위협에 비범한 용기와 기량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귀하가 보여준 경이로운 투지와 희생정신에 감사를 표하며, 합당한 명예로서 보답하는 바입니다. 이제부터 시민의 의무에 충실한 귀하의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미국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앞날을 막연히 낙관하긴 어렵겠으나, 적어도 적대적인 조직들이 내게 손을 쓰긴 더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 내가 함께하는 사람들도 보다 진심으로 날 인정하게 되겠지. #행정명령 9066호, 캠프 로버츠 (1)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의복에 장교정복이 추가되었지만, 겨울은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다녔다. 효율만 따지면 정복이 낫다. 리더십 상향 보정이 붙으니까. 그러나 겨울은 그것이 유치하다고 느꼈다. 장교숙소를 쓰라는 제안은 받아들였다. 마커트 대위 탓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장교들과 안면을 익혀놓기 위해서다. 혹시나 캠프가 붕괴하거나 미국 자체가 무정부상태에 돌입하면, 가장 풍부한 전투력을 보유한 이들과 손잡을 길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여, 어린 물소위님. 어디 가십니까?" 능글맞은 경례와 껄렁한 인사를 보내는 이. 여전히 목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코헨 병장이다. 미군 병사들이 겨울을 대하는 태도가 대체로 이러했다. 악의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그러는 건 아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대단하다는 감탄과, 장난스러운 친애가 뒤섞인 감정표현이었다. 소위라고 해도 그들의 직속상관은 아니다. 그들은 주방위군 소속이었고, 겨울은 연방군 소속 파견장교 취급이었으니까. 굳이 기분 상하게 만들면서 각 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적과 실력으로 바꾸어나가면 된다. 지금은 다만 온화하게 웃어 보일 뿐. "의용소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아서요. 난민 중에서 지원자를 받으려고요." 겨울은 어디까지나 광고판 역할이었기에, 기존의 미군 조직에 흡수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전적이 화려해도 미군 내 반발이 없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난민으로만 이루어진 상설 소대를 시범 운용해보겠다는 게 미군 지휘부의 발상이었다. 마침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2차 대전에서 일본계 미국인 의용병들을 이끌고 활약한 김영옥 대령의 전례가 있기도 하다. 대대장이 대놓고 제2의 김영옥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할 정도였다. 차별대우 같겠지만 실제로는 특권이다. 부대원 선별 권한이 전적으로 겨울에게 있었다. 선발된 인원은 임관 이전의 겨울이 받던 준(峻) 미군 신분을 인정받는다. 난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를 원하는 난민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었다. 「종말 이후」의 세계관에서 특정 정부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이고, 플레이어가 난민 신분이라면, 플레이어의 활약 여하에 따라 난민의 처우와 정부체제 존속기간이 달라진다. 한 사람의 활약으로 과연 거기까지 가능한가 싶기도 하지만......주인공이니까. 나비효과 정도로 설명할 수는 있겠다. "같이 가드릴 깝쇼?" 히죽 웃는 검은 얼굴이 의뭉스럽다. 단순하여 속을 따로 두고 행동할 사람은 아니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악의는 아니다. 그간 갱신된 호감도 정보만 보아도 겨울을 적대할 리 없었다. 짐작 가는 의도가 있으나 모르는 척, 확인 차 물어보기로 한다. "무슨 뜻인가요?" "내가 하버드 갈 만큼 똑똑하진 못해도 막 사는 놈들 생리는 알지. 슬럼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캠프 분위기를 보면 물소위님 엿 먹이고 싶어서 안달 난 것들이 꽤 많을 텐데, 우리 전우끼리 으리가 있지 엠창 멋진 이 몸이 그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있겠슴까, 써(Sir)?" 평어와 경어가 엉망으로 섞였지만 결국은 따뜻한 배려다. 미군 병사가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편해진다는 뜻이었다. 함부로 위해를 가하지도 못할 것이고. 겨울은 다시 웃는다. "마음은 고맙지만 몸조리나 잘 하세요. 보호자를 동반하는 건 어린이의 특권이고, 전 어린이가 아니니까요. 얕보인다면 실력으로 극복해야죠." "어허. 폼 잡으시기는." "멋있었나요?" 정말로 그럴듯한 자세를 잡으며 뱉은 마지막 한 마디가 흑인 병장의 웃음보를 빵 터트렸다. 유쾌하게 웃은 그는 주먹을 내밀었다. 요, 멋쟁이 형제. 좀 친하면 혈연 비혈연 안 가리고 형제라고 불러대는 슬럼가 흑인 특유의 친밀감 표현이다. 겨울은 주먹을 맞부딪혀주었다. 쾌유 바란다는 인사로 헤어지고서 얼마나 갔을까. 엘리엇 상병이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다가왔다. 파소 로블레스 이전, 샌 미구엘 이후로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아직 절뚝거리는 코헨과 달리, 다친 건 다 나은 모양이다. 경례를 받아주고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겨울에게, 엘리엇이 묻는 말. "난민구역 가는 길이면, 그게, 어, 음....... 같이 가드릴까요?" 겨울은 한 차례 시원하게 웃고 나서 다시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둘만 있을 땐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아무리 벼락출세 물소위님이 상대라도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해야죠.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 받기 어려우실 텐데. 일과 후에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또 모를까." "그렇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가상현실이 아무리 현실에 가까워도 이런 부분에서는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좋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리 없다. 겨울은 엘리엇을 경례로 보내고서, 한 결 가벼운 걸음으로 난민구역을 향했다. # 26 [26화] #행정명령 9066호, 캠프 로버츠 (2) 세계관 내 시간으로 상당 기간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기껏해야 소소한 보급 임무 정도였고, 여기에 큰 위협이 따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은 이 기간에 장교교육을 이수하고, 공동체의 단합력을 다졌다. 장교교육이라고 해도 별 것 없긴 했다. 위기상황에서 모든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난민구역에서 겨울이 찾는 천막은, 전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들어가지 못해 입구 근처에 쭈그리고 앉거나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겨울이 다가가자 그 모두가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뭔가 청탁할 것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겠지. 혹은 좋지 않은 속이 있거나. 겨울은 권총 손잡이 붙잡고 다른 손을 펼쳐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너무 다가오지 마세요."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하는 반응들이다. 기실 이 캠프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누구라도 경계하게 마련이었다. 사람 참 쉽게 죽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이해력 부족한 사람들도 권총을 보고 침 삼키며 이해해주었다. 아무리 살인사건 빈번한 난민구역이라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공공연히 죽였다간 무사하지 못할 테지만, 겨울은 다르다. 적어도 난민들 생각으론 그랬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연철이 환한 미소로 겨울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작은 대장." 이제 작은 대장은 겨울 고유의 별명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다들 이렇게 불렀다. 나쁠 것 없었다. 듣는 본인도 좋다고 여긴다. 천막 안쪽의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의 겨울이 어딘가 붕 뜬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중심을 잡는 무게추에 가깝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조용해진다. 가벼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권위와 존중. 그러나 공포는 없다. 양호하다. 소년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더 이상 누군가의 못미더운 시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드물게 호승심이 배어있는 시선도 있었지만, 눈길 서로 마주칠 때면 상대가 먼저 아래로 내린다. 속마음이 어떻든 당장은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들에게 말할 것을 긴 시간 들여 만들었다. 「교재」를 복습하고, 대사를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많이 연습해보았다. 시청자들에게도 괜찮은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신경이 당겨지는 긴장감.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연극은 피곤한 일이다. 아직 웃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겨울은 그들에게 미소를 주었다. "여러분, 아침은 맛있게 드셨나요?" 여기저기서 방긋방긋 웃는 대답들이 좋은 화음을 이루었다. 다들 제법 밝아졌다. 중의적인 의미. 표정이 밝기도 하고, 혈색이 좋아지기도 했고, 전보다 말끔하기도 하다. 난민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개인, 겨울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다른 조직에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꾸며진 허름함과 의도된 더러움으로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졌다. 특히 여자들이 무서웠다. 생존욕구에 억눌려있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해방되면서, 나이 불문하고 어찌나 열심히 씻고 꾸미는지 몰랐다. 경험한 회차가 많기도 많지만, 볼 때마다 적응하기 어렵다. 남자의 한계다. 어쨌든 보기는 좋다. 본격적인 운영에 앞서 공동체의 명칭부터 정해야 한다. 리더로서 권력점유율이 확실해졌으므로, 시스템 상의 공동체 관리권한을 집행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명칭을 생각해보라고 알려뒀다. 일방적으로 정해서 고지할 수도 있었지만, 겨울에겐 이쪽이 더 맞았다.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의 성격에도 걸맞는 것이었고. 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누적되다보면, 구성원들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또한 공동체의 명칭은 그 자체로 구성원들의 심리 및 공동체 성향과 대외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사소하다고 볼 일이 아니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건 다들 생각해보셨어요? 우리 모임의 이름말이에요." 대답이 우르르 쏟아진다. 겨울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너무 어지럽네요. 발언하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그러자 전원이 거수했다. 소년이 가만히 눈치를 살펴보건대, 좋은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눈에 띄고 싶다는 열망들이 엿보였다. 권력의 온건한 단면이었고, 아무래도 좋았다. 괜찮은 의견이 나온다면 채택할 뿐이다. 겨울이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부드러운 리더십의 덕목이었다. 처음으로 호명된 이가 힘차게 제안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조직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제안합니다!"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조롱이 아니다. 긍정의 물결이었다. 채 백도 안 되는 사람들이 쓰기엔 너무 큰 이름이지만, 머나먼 타역에서 나라 없는 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국에 대해 느끼는 향수는......대단한 수준이다. 겨울이 모호한 느낌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건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요? 그리고 한국 정부가 아직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던데요.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요." "에이...뭐든 배포를 크게 가져야 끝이 창대한 법인데. 그럼 「한국국민당」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제안이라지만, 결국 임시정부의 연장선상이었다. 둘 다 김구를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단체로,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 된다. 국가 또는 민족적 특색이 강한 이름으로 정해놓으면, 한국인 출신 난민의 유입이나 동질감 형성에 좋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서 타국 난민들을 받기는 여러모로 어려워지고, 민족주의 성향의 조직들로부터 적대받기도 쉬워진다. 물론 같은 한국계 조직들이라고 화목한 건 아니다.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드물잖아요? 있다면 국적 무관하게 받고 싶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배척하고, 피부색 다르다고 혐오하고, 쓰는 말 낯설다고 외면하긴 싫어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잇는 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서, 힘든 매일을 함께 견디고 싶어요. 여러분이 정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그래도 저랑 함께하겠다고 해주신 분들이니까, 절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겨울이 처음부터 이렇게 유창하진 않았다. 이 세계관을 처음 경험할 땐,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나이 그대로의 소년이었을 뿐. 그러나 가상현실이다. 현실의 유흥적 모방이다. 충분히 잘 만들어진 모방물이란 전제하에, 현실이 주는 대부분의 교훈은 가상현실에서도 배울 수 있었다. 누적된 회차는 곧 풍부한 인생 경험의 등가물이었다. 생각이 여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르익은 생각은 이제 그대로 꺼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공개 방송을 앞두고 많은 것을 공부하기도 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을. 과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가.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일부는 감격하여 두 눈 가득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상황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싶다. 호감도에 의한 보정일 수도 있고. 시청자 메시지도 대체로 좋다. 소년의 연기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천막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여러 기술의 보정으로 강화된 능력 탓에 말 맺음까지 선명히 잡힌다. 엿듣는 귀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름을 정한 뒤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겠지만, 엿들어서 나쁠 만큼 대단한 걸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겨울이 이 작은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다른 조직에서 확실하게 아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그런 취지라면 단순하고 알기 쉽게 「유니언」은 어떨까요? 외국인들도 낯설어하지 않을 테고, 민족이나 국가적인 색채도 없잖습니까?" 이 제안에 응응 수긍하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도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았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로 고려하겠습니다.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작은 리더의 긍정적인 반응에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보다 열심히 손을 들었다. 그래봐야 꼿꼿이 세운 팔에 힘 들어가는 정도인데, 보고 있자면 꽤 재미있다. 어느 청년이 「브라더후드」를 제안했을 땐 여성진의 누군가가 볼멘소리를 냈다. "여자도 끼워주세요."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본인도 농담으로 한 말이라 같이 웃었다. 청년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겨울은 그의 제안도 후보군에 넣겠다고 답했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도 제 목소리를 냈다. 「내일의 아이들」. 아이가 있는 사람의 말이다 보니 무게감이 느껴진다. 일전에 남편이 「다물진흥회」에 가입하면서 새 여자를 얻어 버림받았다던 그 사람이다. 처음 보았을 땐 뼈가 앙상하여 나이보다 많이 늙어 보이더니, 지금은 젊어진 모습이었다. 깨지고 갈라지던 목소리도 제 음색을 되찾았다. 괜찮다. 노래를 부르면 듣기 좋을 것 같다. 그 와중에 겨울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겨울동맹」이요?"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하는데 그거 맞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난감하다. 두목 이름이 희동이라고 희동이파가 되는 폭력조직 같잖은가. 물론 한국의 폭력조직 명칭은 경찰 임의로 붙이는 것이니 경우가 다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발언자는, 자신의 제안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위태로운 이 시기를, 저는 인류의 겨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담아서 말입니다. 모두 힘을 합쳐 추운 계절 견뎌내자는 취지에서 「겨울동맹」이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는 한쪽 깨진 안경을 추켜올렸다. "물론 부끄러워하시는 작은 대장님이 재밌기도 합니다만." 겨울이 얼굴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에스페란토로 평화, 고요, 안정을 뜻하는 「크비에타」라던가, 멸망을 다룬 모 소설에서 인류문명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장소를 뜻하는 「시카고 어비스」라던가, 괜찮은 제안들이 이어졌지만 무엇 하나 「겨울동맹」의 지지도를 능가하는 게 없었다. 아니, 얼마 안 가 손들이 슬슬 내려가더니 아예 아무도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이 성별 불문하고 즐거워하는 눈망울들. 어찌 그리 맑은지 마주보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소년 리더는 손을 들어 패배를 시인했다. "제가 졌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겨울동맹」입니다." 갈채가 쏟아졌다. 시청자 메시지 창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별을 선물하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대체로 작은 금액들. 마음은 고맙다. 소년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사람들이니까. 비록 본의 아니게 얼굴 팔리는 이름으로 정해졌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구성원들은 이 순간을 회상할 때가 많을 것이다. 엿듣는 자들의 입을 통해 다른 조직에 전해질 말들도, 대강 상상할 수 있었다. 다른 조직들의 강압적인 분위기와는 많이, 정말 많이 다를 터. 물론 골수까지 상한 사람들은 이를 나약함의 증거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동요하는 이도 있을 것인즉, 손익은 전적으로 겨울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세요." 손뼉을 쳐서 주의를 모은다. 빠르게 조용해졌다. 눈치 없이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서 쿡쿡 찔러 입 다물게 만든다. 이제 어려운 고비다. 준비와 연습이 모자라지 않기를 바랄 뿐. 조용한 사람들 앞에서 겨울이 운을 띄운다. "이제 이름이 정해졌으니,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합의해야 할 것 같네요. 우리 조직의 의사결정방식 말인데요....... 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구난방으로 정할 순 없잖아요?" 소년은 제 눈에만 보이는 공동체 속성 및 관리화면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저는, 우리가 함께할 모든 일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제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은 리더에게 경도된 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실질적으로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소년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고 있기도 하고. 수긍하지 못하는 소수는, 무엇이든 합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일부, 소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적인 일부로 나누어진다. 소년은 그들을 쉽게 읽었다. "알아요. 독단적이죠? 하지만 매번 의견을 모으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예요. 중요한 순간마다 다 함께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잖아요?" 수긍이 조금 더 늘었다. 관리화면에 표시되는 겨울의 지지율과 권력점유율도, 미세한 상승곡선을 그린다. 이대로 표결에 들어가도 괜찮겠지만, 조금 더 흔들어보기로 한다. 자극적인 단어를 써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시스템 어시스트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미국은 우리를 고기방패로 쓰고 싶어 합니다." 고기방패. 잘 고른 찌르기라 기대하던 반응이 돌아온다. 동요. 그 동요를 겨누어, 겨울은 보다 현실적인 말들을 박아 넣었다. "밥만 먹여주면 그만인 용병, 위험수당 불필요한 외국인 노동자....... 생각해보세요. 저를 영웅이라고 열심히 포장해주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정말 영웅이라서? 설마요. 우상 만들기에요. 순응하면 보상하겠다는 광고판." 자신을 깎아내리는 화법이 권위가 될 때도 있다. 당당한 태도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현실을 담백하게 털어놓으면서도, 그대로 두진 않겠다는 의지. 비전이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 실제로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리더는 언제나 믿음으로 넘쳐야 한다. 우수한 정치가들이 이 기교에 능했다. 선악을 가리지 않고. 미묘한 균형이지만, 보이는 얼굴마다 속을 읽어가며 조절해간다. "우리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은, 여러분 생각에 관심이 없을 걸요. 그냥 제 결정을 요구하겠죠. 할 거냐, 하지 않을 거냐. 어떻게 매번 여러분의 허락을 구하겠어요?"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의사소통에서 말의 내용 자체는 큰 영향력이 없다. 음색과 고저, 억양, 강세를 포괄하는 음성, 그리고 몸짓이 더욱 중요하다. 이를 메라비언의 법칙이라 한다. 겨울의 화법은, 방송에서의 연출을 염두에 두고 공들여 공부한 결과물이다. 겨울 자신이 주연배우였다. 지도자를 연기하려면, 지도자의 배역을 익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몰입하고, 연기한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손짓과 함께 고조되는 감정, 높아지는 호소력. "즉, 다시 말씀드리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걸 인정해주지 않으시면, 전 책임을 다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 보여드린 모습을 보고, 그저 믿어주셨으면 좋겠네요. 만약 제가 권리를 남용해서 여러분을 비참하게 할 것 같다면, 혹은 제가 지도자로서 내릴 판단들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면, 그냥 여기서 끝내자고 해주세요. 저도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믿어주세요." 상황의 불가피함과, 지도자, 리더 따위의 단어들을 강조한다. 당신들이 지금 무엇을 선택하려는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선택권을 주었으나 형식적이었다. 형식적이지만 주었다는 게 중요하다. 긍정적인 호응이 늘었다. 열성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자들 한정으로, 리더십 페널티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극복했다. 소년은 사람들을 읽었고, 추측했고, 확신했다. 이제 못을 박을 때다. 보고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힘주어 외치곤 했다. 겨울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는, 내 방식으로. 친절한 미소를 만들면서. "어때요? 해주시겠어요?" 절제된 감정, 간결한 한 마디. 기다리던 청중에게는 하나의 신호와 같았다. 그는 귀가 저릿해질 정도의 소리에 파묻혔다. 어디를 둘러봐도 박수치는 사람들이었다. 소년에게 몰두하는 시선들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내심 길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잘 풀렸다. 앞서 「겨울동맹」을 제안했던, 안경 쓴 사내가 손을 들었다.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의 발언을 감안할 때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겨울은 허가했다. "말씀하세요." 그는 일어서서 주위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유독 겨울을 향해서만 한 번 더 목례한다. 그렇다고 비굴해보이지는 않았다. 자부심을 잃지 않는 눈빛. 선악의 구분이 없는 지성이 엿보인다. 겨울은 그의 성향을 알 것 같았다. "먼저 지금까지 애써주신 작은 대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동안 작은 대장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말이지요. 저도 그랬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지금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까지 말하고서, 신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싱긋 웃는다. 시선 피하거나 눈에 힘주는 자들은, 겨울이 앞서 걸러 보았던 자들과 같다. "그래도 이제야 겨우 진정한 의미로 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작은 대장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말이에요. 대장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냥 비슷한 처지에 잠시 함께하는 일행이었을 뿐. 그렇지 않습니까?" 동조하는 사람들. 이 남자, 겨울이 오기 전부터 적잖이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터. 만약 겨울이 여러모로 불안했다면, 끝까지 자신을 감추었을 것이다. 겨울을 초빙한 장본인으로서, 장연철은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다.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리더십 상한을 넘어선 규모의 집단은 결속력이 약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리더십 있는 인물을 간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 여러 개의 소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사람은 다루기에 따라 좋고 나빠지는 도구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작은 대장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아니, 못 했다기 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가깝지요.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고, 급한 대로 이용할 생각만 했으니까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저와 같은 분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서, 좀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는 말자고. 우리 스스로 따르기로 한 겁니다. 번복하지 맙시다. 흔들리지 맙시다. 제가 보기에 우리 동맹 내에서...아니, 이 캠프 내에서 누구도 작은 대장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실속 없는 어른들입니다. 나이만 가지고 대우받길 원하는 것만큼 추한 모습도 드물어요. 쓸 데 없는 자존심은 버립시다. 적어도 작은 대장님만큼의 용기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말입니다." 여기까지 준비 없이 말할 수 있으면 상당한 역량이다. 겨울은 그를 평가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그의 목적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비굴하지 않을 정도의 아첨이 느껴진다. 과연, 청중 다수가 동조하는 가운데 몇몇이 이 남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겨울은 그 나름대로 괜찮다고 보았다. 즉, 겨울을 경쟁자로 보는 것보다는 낫다. 겨울의 입지가 확고해지자, 욕망 있는 사람들이 2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대장님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에요. 보통의 민주국가에서도 국가비상사태엔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행사합니다. 사유재산을 압류하고, 총동원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인류의 겨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도자에게 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것도 우리 스스로 초빙한 리더인데 말입니다."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목적을 달성한 남자는, 자기 차례를 만족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여기까집니다. 다만 괜찮다면, 향후 우리 동맹이 나아갈 길에 대해......대장님께서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대장님이 진짜 대장이 된 날이니까요. 취임사를 새로 듣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겨울은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은 준비한 게 없어서. 나 아닌 내가 되는 건, 오늘은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그러나 사양하지는 않는다. 동경과 기대를 보내는 사람들 앞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용두사미가 될 테니까. 이런 점 때문에라도, 세계관을 직접 살기보다 보는 걸 즐기는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긴 말씀은 드리지 않을게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남은 말을 잇는 소년. 말을 거듭 고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상냥한 얼굴. "우리 「겨울동맹」의 최우선 과제는 살아남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보다는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해요. 저 바깥에서 짐승 닮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린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음, 그렇게 믿어도 되겠죠?" 그리고 미소로서 말을 맺는다. "이상입니다." 분위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여성들이지만, 남성들 가운데 시큰한 자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 27 [27화] #Intermission, 발암해결사! 먼치킨 패키지 Mk.1! 「하나의 유령이 중계채널을 배회하고 있다. 발암이라는 유령이. 이 세상의 시청자와 컨텐츠 제작자들, 가상현실 접속자들 모두가,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한 동맹을 체결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상현실의 역사는 발암의 역사다.」 「모든 발암유발요소로 하여금 DLC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시청자가 잃을 것이라고는 돈 뿐이요, 얻을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다.」 「Zuschau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만국의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찌감치 끝나서 돈 때문에 하는 회사의 DLC 광고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신상 DLC는, 바로 「발암해결사! 먼치킨 패키지 Mk.1」입니다. .......... 이거, 소개가 따로 필요할까요? 이름만 봐도 아는데. 그래도 월급 받으려면 일은 해야겠군요. 여러분. 우리는 가상현실 중계방송을 보면서 수많은 발암요소를 만나게 됩니다. 아무래도 진행자 탓이 많죠. TOM 등급이 낮다거나, 적성이 저질이라거나, 컨트롤이 수준 이하인 경우도 수두룩하니까요. 진행자들 대부분이 노인이라서 그런 걸까요? 당연히 진행자들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진행자들의 노오오오력이 부족한 탓이지만, 그래도 불쌍하긴 해요. 우리가 진행 막혀서 빌빌대거나, 세계관 내 인물들의 눈치를 보며 굽실대는 걸 보려고 방송을 시청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현실에서도 받는 스트레스를 방송에서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가장 짜증나는 경우는, 아주 오랫동안 시청한 방송이 이도저도 아닌 결말로 끝나버리는 거죠. 배드 엔딩, 새드 엔딩은 누구나 다 싫어하잖아요? 이거 정말 기분 더럽습니다. 암 걸린다는 게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니까요. 이번에 출시된 패키지는 시청자 구매 전용 상품입니다. 시청자 퀘스트 형식으로 방송 진행자에게 선물할 수 있으며, 진행자가 퀘스트를 수락하는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경험치 1만 포인트가 한 방에 충전됩니다! 그 어떤 위기 상황이라도 극복할 힘을 주는 자본주의의 기적! 좀 찜찜하시다고요? 에이, 뭘 이런 걸 갖고. 가상현실은 현실의 유흥적 모방입니다. 현실에서 돈이면 뭐든 다 되니까, 가상현실에서도 돈이면 뭐든 다 되어야 정상입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온라인 패키지 하루 이틀 해보시나요? 흉기차는 원래 그렇게 타는 거고, 우리 서비스도 원래 이렇게 쓰는 거예요. 네? 흐름이 갑자기 끊기지 않느냐고요? 맞습니다. 사후보험 관제 AI의 상황연산 보정으로도, DLC로 생기는 모순을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세계관 내 인물들이 의문을 표합니다. 당신, 짧은 순간 너무나 달라졌다고. 혹은,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왜 이제까지 감추고 있었느냐고. 하지만 요즘 누가 감정선, 개연성 따지면서 방송 봅니까? 기승전떡 아니면 기승전와장창이 대부분인데. 흐콰한다! 파괴한다! 으하하하! 스트레스 풀고 섹스나 하세요. 이 상품은 사후보험 규격에 맞는 모든 가상현실 세계관에 호환됩니다. 우리 신상 항암제를 많이 애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낙원그룹 가상현실 사업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행정명령 9066호, 캠프 로버츠 (3) 공동체에는 중간관리자, 간부가 필요하다. 모르던 시절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예기치 못하게 길어진 외부활동. 돌아와 보니 공동체가 사라져 있었다. 공중분해. 서열과 책임이 명확해야, 지도자 부재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업무분담 차원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겨울동맹」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임의로 임명해도 반발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간부가 물의를 빚으면, 겨울에게도 책임이 돌아온다. 그 역도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안정성을 감안할 때, 유사시 책임을 묻기 쉬운 편이 나았다. 그래서 추천인 등록으로 후보를 받고, 무기명 투표로 선발했다. 인주를 가진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 명부가 작성되었다. 나이, 성별, 종교, 학력, 특기, 지문날인 등의 정보가 기재되었다. 다른 목적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겨울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다면, 명부를 보지 않아도 모든 정보가 증강현실로 제공되겠지만. 투표결과를 정리한 겨울이 두 사람을 호명했다. "장연철씨가 1위, 민완기씨가 2위네요. 두 분, 앞으로 나와 주세요." 전자는 겨울을 처음으로 초빙한 인물이니 어느 정도 지지가 있을 것을 예상했다. 후자는 「겨울동맹」의 발안자다. 한 쪽 알맹이가 깨진 안경을 쓴 신사풍의 장년인으로, 교양 있는 말씨와 온후한 인상이 호감을 끌어내는 사람이었다. 즉, 매력이 높았다. 겨울이 보기엔 어용학자에 어울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두 사람을 함께 부른 것은, 공동책임을 지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입지 확고한 2인자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겨울은 아직 두 사람의 됨됨이를 깊게 알지 못한다. 무얼 믿고 몰아주겠는가. 서로를 견제하게 해야 한다. 충성경쟁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앞으로 제가 없을 때 두 분이 번갈아 동맹 운영을 책임져주세요. 대소사를 항상 같이 논의해서 결정하되, 최종 결정권을 교대로 가진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장연철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더 티가 났다. 투표 결과를 보고 꽤나 기대했겠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권력욕 이전에 명예욕이 있는 법이다. 때때로 그 둘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한편 민완기는 속 깊은 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좋아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연철보다 복잡한 인물이다. 그만큼 능력은 있을 것이지만, 다루기 까다로울까 걱정된다. "일단 두 분의 명칭은......부장(副長)으로 할까요? 나중에 더 좋은 제안이 나오면 고칠게요. 서로 악수 나누시고, 뽑아주신 분들께 간단한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번 해봤기에 능란하다. 두 사람의 인사는 성격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장연철은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러면서 얼굴도 붉혔다. 비교적 순진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걸 보면 그것은 정직함의 증명일 것이었다. 스스로 권위를 만들지는 못할 인물이지만, 역할에 성실할 것이 기대된다. 욕심을 잘 감추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민완기는 유창했다. 그렇다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는 아니었다. 신중한 인상. 다른 조직과의 교섭을 맡겨도 문제없겠구나 싶었다. 이런 일들이 지나고서, 민완기가 조용히 건네는 한 마디. "굉장히 능숙하시군요. 감탄했습니다." 장연철이 눈치를 보더니 덩달아 칭찬하고 나섰다. 겨울은 「통찰」의 작용에 의한 증강현실 심리지표들의 가감을 읽었다. 대답은 필요 없겠지. 그저 엷은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그러고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부장님들, 잠시 가까이 와주시겠어요?" 겨울이 다른 이가 듣지 못할 대화를 원하는 모양이라, 장연철과 민완기가 의아한 기색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지만, 눈치를 본다. 저마다 스스로 거리를 벌렸다. 그래봐야 천막 안에서 만드는 공간이었으나, 목소리를 낮추면 은밀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아시겠지만 우리 동맹은 아직 너무 작아요. 1개 소대 규모를 차출하고도 여력이 남아야 자기방어가 가능하잖아요." "사람을 새로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로군요." 연철의 말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불가피해요. 미군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인력이 있는데, 그걸 감당하기에 우리 동맹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그걸 다른 조직들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 말씀은......." "이 틈을 타 사람을 심어두려고 하지 않을까요?" 두 부장의 반응이 상이했다. 연철은 침을 삼켰고, 민완기는 담담했다. 후자에겐 충분히 예상범위 내였을 것이다. 만약 겨울이 짚어내지 못했다면 호감 감소보정이 떴겠지. 실망 보다는 우습게 본다는 느낌으로. 시스템 어시스트 이상의 통찰력이 아니고선, 그 심리변화의 원인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 중 상대적으로 겁 많은 쪽에서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겨울이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장 부장님. 작정하고 들어오면 어떻게 가려내겠어요? 포함해서 받아야죠." "네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마는 장연철. 모이는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렇다고 두 눈에 어린 경악감이 지워진 건 아니었다. 음량이 줄었을지언정 내지르는 질문이 흡사 비명과 같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첩자를 왜 받아요?!" "말씀드렸잖아요. 새로운 사람을 받는 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그 가운데 첩자가 있어도 어쩌겠어요. 일단 받아들여야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가 막혀 내쉬는 한숨이 깊다. 겨울이 웃는다. "전 그렇게까지 걱정되진 않는데요?"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민완기가 거들었다. "동감입니다만, 그래도 작은 대장님 생각을 듣고 싶군요." 연철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본다. 뭔가 자기만 따르지 못하는 흐름이 있는 모양이라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당장 감잡히는 게 없어 난처하다. 답 나오기를 기다릴 뿐. 얼굴에 낭패감이 떴다. 이제 막 공동 부장으로 뽑혔는데, 벌써부터 뒤지는 느낌이라 그럴 것이다. 나쁘지 않겠지. 겨울이 말했다. "저는 우리 동맹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굶지 않게 할 거예요. 계급 같은 걸 만들 생각도 없으니까, 서로 높낮이 따지면서 괴로울 일도 없겠죠. 장담하는데......우리 동맹에서 생활하는 건, 모든 면에서,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나을 걸요?" 강조를 위해 한 숨 돌리고 남은 말을 맺는다. "망치기 아까울 거예요. 전향하고 싶을 테니까." "아......." 말에서 확신이 느껴진다. 자신감과는 조금 달랐다. 소년은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연철의 불안이 누그러지며, 의혹으로 바뀐다. 겨울은 진짜 걱정거리를 꺼내놓았다. "제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어요." "그게 뭡니까?" "텃세, 불안, 종교, 마약." 맥락상 이쯤 말하면 감을 잡는다. 장연철은 감탄했다. 단순히 싸우는 실력과 용기만으로 대장감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완기는 만족했다. 그는 아직 겨울을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장연철이 말했다. "왜 조용한 대화를 원하셨는지 알 것 같군요." "알아주셔서 다행이에요. 걱정거리가 텃세 하나였으면, 그냥 주의해달라고 부탁해도 상관없겠지만......불안은 달라요. 사람들이 첩자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새로 온 사람들을 전부 다 경계하지 않을까요? 이미 걱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걸 지도층......그러니까 우리? 우리가 대놓고 말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 아니겠어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원래 있던 사람들끼리 뭉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따로 뭉치고, 여기서 텃세가 강해지고......악순환이네요. 네, 악순환이 예상됩니다. 첩자가 전향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날걸요? 그리고 마약과 종교......이건 그 이상으로 정말 위험하다고 봐요." 대부분 듣기만 하던 민완기가 드디어 제대로 입을 열었다. "작은 대장님의 나이가 의심스럽군요. 맞습니다. 첩자가 배신하지 못하게 하면서, 우리 동맹을 망치는 데에 그 두 가지만 한 수단이 없으니까요." 생각에 잠겨있던 장연철이 끼었다. "마약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민완기가 답한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종교는 숨기면 드러나지 않잖습니까. 어떻게든 물증을 찾을 수 있는 마약과 달라요. 무엇보다, 종교를 이유로 처벌할 수 있겠어요?" 연철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제기였다. 민완기의 남은 말이 이어졌다. "마약은 가지고만 있어도 죄가 되지만, 종교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당한 억압이라고 느끼겠죠. 모르긴 몰라도, 우리 동맹원들 가운데 종교인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가장 위험한 조직 중 하나, 「순복음 성도회」의 무기는 종교고요. 목사가 예언자인 동시에 구원자라고 주장하니 제가 보기엔 영락없는 사이비인데......종교인들 나름대로 교리 문제라던가 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에요." "아......." 곱씹을수록 문제였다.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놓고 알릴 순 없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으니까. 한참 생각하던 연철이 제안했다. "대장,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말씀해보세요." "종교 문제 말인데, 민 부장님 말씀대로라면 아무래도 원래 믿던 사람인들이 더 쉽게 영향을 받을 겁니다. 그렇다면 미리 사람들의 종교를 조사해서 그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은밀히 감시역을 부탁해두면 어떨까요? 당장 몇 사람 괜찮은 후보가 있습니다." 즉각 민완기가 보완하고 나섰다. # 28 [28화] "좋은 생각입니다. 아예 종교인들끼리 모아 조를 편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종교활동 역시 조별로 하도록 정하면 더욱 좋을 테지요. 어차피 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서라도 그룹 편성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는 말에 여백을 넣었다. 생각을 정리하듯 턱을 쓰다듬는다. "일단 그렇게 만들어두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겁니다. 종교인들의 소모임이 있다고. 만약 첩자가 있다면 얼씨구나 좋다고 하겠지요. 사이비들의 기본적인 전략 중 하나가 '교회 빼앗기'잖습니까. 멀쩡한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가서 동조자를 확보하고, 기존의 지도자를 쫓아내는 추잡한 방식 말입니다. 조장 급 인원들에게만 따로, 경계하라고 일러두면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모르는 척 듣고 있지만 겨울이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의 하나였다. 경험했으니까. 한 번의 종말은, 미친 종교가 번진 탓에 공동체의 총체적인 붕괴로 막을 내렸던 적이 있다. 대역병이 신의 뜻이라던가. 모두 신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일부러 감염을 퍼트렸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광기 어린 종교의 출현을 경계해왔다. 이를 막을 방도 또한 골몰한 것이 많았다. 건전한 신앙인에게 힘을 주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아직 누가 건전한지 모르는 마당이다. 애당초 건전한 신앙인 자체가 의외로 찾기 힘들었다. 먼저 의견을 말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에게 역할수행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직 운영에 실제로 참가했다는 인식 자체가 하나의 동기부여다. 부장으로 선출된 직후이니만큼, 이런 부분에 신경을 써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두 분 정말 훌륭하세요. 동감입니다. 뭔가를 할 때마다 사람을 새로 모으는 건 부적절한 일이죠. 조를 편성하되, 종교인들끼리 묶어주세요. 명부에 종교도 나와 있죠? 최악의 경우 문제를 일으킨 조만 잘라낼 수도 있을 거예요. 조장 임명은 부장님들께 위임하겠습니다. 나중에 제게 알려주시면 돼요. 이런 걸 사후승인이라고 하던가요?" 겨울이 덧붙였다. "그리고, 특별조를 하나 따로 만들어주세요." "특별조라고 하시면?" 질문은 민완기의 것이되 궁금하기는 두 사람 모두다. 겨울이 답한다. "글쎄요, 일단 전투조라고 불러야 할까요? 무슨 일 있을 때 즉시 대응할 무력이 있다는 게......많은 걸 달라지게 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동맹 내부적으로 말이죠." 과시할 필요는 없다. 다른 조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알게 될 테고, 지나친 과시는 전투조원들에 대한 쓸데없는 위협을 증가시킬 것이다.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작은 대장님은 생각보다 현명하시군요." "민부장님, 혹시 아첨하시는 건가요?" 농담에 가까운 겨울의 힐난. 민완기는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이잖습니까. 장연철이 다시 초조해 보인다. 아무래도, 이런 면에선 좀 소심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전투조장은 예외적으로 제가 지정할게요. 바깥에 나가면 분대장을 겸해도 될 것 같고....... 다른 분들에겐, 제가 특별히 믿는 사람들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음....... 우선은 한 명." 그러더니 소년이 이름을 크게 부른다. "이유라 씨!" "네! 네? 저요?" 거리를 두고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그 가운데 이름 불린 여인 혼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일어섰다. 겨울이 방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유라씨가 첫 번째 전투조장입니다!" "예? 전투조장? 그게 뭔데요?" "나중에 여기 두 부장님들이 설명해주실 거예요! 일단 제가 결정한 거라고만 알고 계세요! 아, 오실 필요는 없어요! 거기서 그냥 쉬고 계세요!" "아니, 저기......대장님? 작은 대장님?" 당황하는 그녀를 멀리 둔 채 겨울은 원래의 대화로 돌아온다. 연철이 근심했다. "괜찮겠습니까? 제 생각이긴 한데, 아무래도 유라씨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뭐냐, 위험한 일에 자원한 걸 보면 용기는 있겠지만, 같이 다녀온 남자 분들 말씀으론 영 부족하다고 하던데요." "자질은 제가 만들어줄 거예요. 무엇보다 믿을만한 분이거든요. 이건 같이 뛰어본 소감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 네......." 자질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영향력을 확대해 공동체 관리권한을 취득하면, 구성원이 획득한 경험치를 관리할 수도 있다. 겨울이 끌고 다니면 성장은 빠를 터. 이 바닥에서 흔히 버스 태워준다고 하는 짓이다. 그 효율을 높여줄 「교습」 기술도 보유한 마당이었다. "그럼 마약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화제를 바꾸는 연철에게 겨울은 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장 부장님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세요?" 상대를 거듭 직위로 호칭하는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직위라는 건, 조직 내의 서열과 상호관계를 포함하니까. 침묵은 조금 길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답이 없는 문제다. 연철은 인상을 찌푸린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내는 의견도, 스스로 못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종교 문제처럼 조장님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당부하는 것 외엔,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하는 방법 밖에 없겠네요. 그래봐야 땅에 파묻으면 그만이라 효과가 있을지......." 이어 민완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지품 검사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 조직에 의탁하는 건 저 살기 위함이고, 사유재산이 침해될 것 같으면 온갖 말이 다 나올 테니까요." "아니 누가 빼앗는답니까? 마약 유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알려주면 되죠. 그리고 사유재산이라고 부를 게 남아있긴 한가요? 다들 빈털터리 신세인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투덜거리는 장연철에게 민완기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물론 가진 게 없지요. 없어서 더한 겁니다. 일단 묻겠습니다. 깨끗한 옷 한 벌, 쓰지도 못할 달러 뭉치, 뚜껑 따지 않은 화장품, 새것으로 남아있는 면도칼이나 칫솔 따위를 열심히 감추는 모습들, 정말 한 번도 본적 없습니까?" "어......." 대답하지 못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민완기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릴까요? 없으니까 더한 겁니다. 이건 내 거라고 필사적으로 아껴두는 사람들을 보세요. 남에게 알려지는 것조차 꺼려하지요. 훔쳐가거나 빼앗길까봐. 아무리 훌륭한 명분이 있어도 받아들이기 싫으면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생기면 뒷말이 돌기 마련입니다. 사실 소지품을 검사하는 건 속셈이 따로 있다고들 떠들겠군요. 세 사람이 외치면 호랑이가 어흥 하는 법이에요." 마지막에 호랑이 어흥이 나름 재치 있었다고 생각했나보다. 빙그레 웃으며 번갈아 보는데, 별로 재미없었다. 민완기는 정색하고 남은 생각을 풀었다. "장 부장님. 우리 동맹은 이제 막 만들어진 조직이에요. 작은 대장님 개인에 대한 호감, 아니면 타산적인 기대감으로 뭉쳐져 있을 뿐,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고 신뢰고 없는 단계란 뜻입니다. 뭐 이런 일로 분해되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만, 다양한 부작용이 예상되거든요. 개인에게도 조직에게도 첫 시작이 중요합니다.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연철이 곧바로 반박했다. "민 부장님은 너무 부정적이십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네요. 마약이 퍼지고 나면 그 때야말로 진짜 대책이 없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개개인의 불만은 사소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정 싫으면 그냥 나가라고 하지요. 그 정도 판단도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우리 조직에 필요 없습니다. 있을 자격도 없어요!"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서, 연철이 주위를 살폈다. 호기심과 불안 어린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낮춰 다시 말했다. "아까 작은 대장님은, 앞으로 우리 동맹이 다른 어떤 조직보다 살기 좋아질 거라고 하셨지만......엄밀히 말하면 그 말씀 틀렸습니다. 「겨울동맹」이 이미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두머리가 착취자가 아니라 공급자인 조직이 또 어디 있나요? 조직의 수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는 조직은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진정하세요.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새 또 몰두하여 목소리가 강해지는 연철이었다. 겨울이 말과 손짓으로 진정시켰다. 연철은 얼굴을 붉히며 미안하다고 했으나, 기실 겨울은 그의 말이 제법 괜찮았다. 자기 칭찬이라서가 아니다. 감정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자기 말을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랬었지.' 자식을 팔아넘기면서 그걸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말했던 사람. 부모의 역할을 기대하는 자식에게 진심으로 반론하는 부모는 진실로 꼴불견이었다. 믿음은 감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연철은 지금 자기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을 것이었다. 겨울은 속에 구르는 돌의 무게를 떨치며, 조용해진 두 사람을 격려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어요. 입장 차이는 있어도 모두 진심 같아서 듣기 좋았네요. 열의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연한 일인데요 뭐." 부끄러움을 감추는 장연철, 턱을 쓰다듬는 민완기. 후자는 겨울의 의견을 묻는다. "항상 말씀하시는 것처럼, 작은 대장님은 미군의 간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빨리 써먹고 싶어 하겠지요. 대장님이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될 걸 생각하면 조직은 빠르게 안정시킬수록 좋습니다. 그러니 이 결정도 서둘러야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소지품 검사는 없는 걸로. 조장 되실 분들의 눈을 믿어보지요." 연철이 신음했다. 민완기라고 표정이 밝진 않았다. "자꾸 대안 없이 걱정만 하는 것 같아 면목 없습니다만, 조장들의 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조장을 가려내더라도, 결국 이런 경험 없는 평범한 사람들뿐이지요. 한꺼번에 많은 일을 맡기면 모든 일을 망쳐놓을 지도 모릅니다. 뭔가 다른 생각은 없으십니까?" "있어요." 가벼운 수긍. 물으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모양이라, 민완기가 말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장연철은 눈치를 살핀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난리가 나기 전에도 마약은 국경을 넘어 다니지 않았나요?" 아아. 거의 동시에 이해한 두 사람의 감탄성. 말은 이어졌다. "우리 동맹의 취지를 말씀드릴 때, 국적에 무관하게 받겠다고 하긴 했지만......언어장벽이 만만치 않잖아요? 합류할 사람들은 거의 다 한국인일 거라고 봐요. 즉 영향력 문제로 우리 동맹에 시비 걸어올 조직들은 다 한국계일 거란 뜻이죠. 그런데 제가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때, 가까운 깡패가 적이면 멀리 있는 강도와 친해지는 게 기본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약 파는 한국인의 경쟁자는 마약 파는 일본인과 마약 파는 중국인일 테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죠. 당신네 경쟁자들에 대해 아는 거 있느냐고." "하하하!" 민완기가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보는 눈이 바뀐 것을 느낀다. 대화를 듣지는 못해도 이쪽으로 주의는 기울이던 사람들은 분위기가 좋은 듯 하자 영문 모르고 덩달아 좋아했다. 예외도 있었다. 이유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쩔쩔 매는 중이다. 질문을 받아도 영문을 모르니 곤란하겠지. "당장 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엔 분명 국적 다른 조직에서 온 사람도 있을 걸요? 「흑사회(허이셔후이)」건 「주길회(스미요시카이)」건 저랑 어떤 식으로든 인사를 해두고 싶지 않을까요?" "어, 그런데 말입니다." 연철이 머뭇거렸다. "거기서 정보를 얻는다 쳐도 첩자를 걸러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요?" "그건 기대 안 해요." "하면 무슨 말씀이신지......." "세계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하던걸요. 전 마약 흘러나오는 구석을 찾아서 밟아놓을 생각인데요?" 연철의 입이 벌어졌다. "당하기만 하는 삶은 지긋지긋해요." 그렇다. 몸 있던 시절의 수동적이었던,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자신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트라우마다. 울컥 치미는 응어리와 해방감,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소년은 거침없이 말을 쏟았다. "난 착하기만 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누구는 이걸 예방전쟁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맞나요? 내 사람들에게 팔 마약 가진 놈들을 싹 다 조져버리겠어요. 박살을 내버리겠다고요." 쓸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어쨌든 입지는 가장 좋았으니까. 착한 사람이 착하게 남아있으려면, 경계를 확실히 긋는 편이 좋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으니까. # 29 [29화] #교섭, 캠프 로버츠 (1) 흑사회(黑社會, 허이셔후이)는 캠프 로버츠의 난민구역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지만, 알고 보면 단일조직이 아니다. 삼합회(三合會), 안량공상회(安良工商會), 하남장(河南莊), 손화단(孫和團), 산서당(山西堂), 직예당(直隸堂), 합승당(合勝當), 제남벌(濟南閥) 등등 크고 작은 다수의 조직들이 대외적으로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간판을 내걸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기서 삼합회가 가장 강력하다. 삼합회의 용두(龍頭)는 흑사회주를 겸했다. 겨울과의 교섭을 위해 찾아온 것도 삼합회의 간부였다. 다만 그 모습이 예상과 많이 달랐다. "평소 높은 이름을 듣고 흠모하던 차에,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선생. 저는 리 아이링(李藹齡)이라고 합니다." 대단히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소매 없는 치파오에 모피 코트를 둘렀다. 빛바랜 풍경 속에서 홀로 원색 선명하다. 상상 속 중국 미인의 전형. 주위 사람들이 모두 얼빠진 모습이었다. 여성들은 샐쭉하니 질투를 내보였다. 이런 모습으로, 한국인 거류구에서 당당히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흑사회의 강력한 힘을 증명한다. 사구(四九, 행동대원)로 보이는 남자 다섯이 호위로 따르긴 했지만. 호위 중 하나가 통역이었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조선족인 모양이다. 말이 조금 어눌했다. 그러나 겨울은 이미 「중국어」를 습득했다. 6등급. 숙련자 최대 레벨. 원어민이 듣기에 위화감이 조금 있어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방언에 대해서는, 발화와 청해 모두 떨어진다. 겨울은 고민하다가, 경험치를 소모했다. 「중국어」가 7등급, 전문가 초입으로 상승한다. 소년이 중국어로 대꾸했다. "통역은 불필요할 것 같네요, 소저. 실례지만 제가 어떤 분을 상대하는 건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이채로운 미소를 지었다. "놀랍군요. 선생께서 한어(漢語)를 구사하신다는 것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유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동지들에게서 확인한 바와 조금 다르군요." 아이링은 머뭇거리는 조선인 통역을 한 쪽으로 물렸다. "답변 드릴게요. 아마 제 직위가 궁금하신 것이겠죠. 저는 향주(香主)로서 큰 어른을 보좌하고 있답니다. 어떤 교섭이라도, 저를 통하시면 의심할 필요가 없으세요." 이번엔 겨울이 놀랐다. 그 말인즉슨 그녀의 위로 단 두 명, 용두(대두목)와 이로원수(부두목) 말고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감안할 때 초혜(草鞋 : 교섭 및 연락 담당 간부) 정도라고 예상했는데....... 상정 외의 거물이 찾아온 셈이었다. 말투에 신경을 써야겠다. "혹시 리 선생께선 용두님이나 이로원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으십니까?" 그녀를 부르는 호칭부터 고쳤다. 선생은 보통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지만, 덕망 높은 여성에게는 경칭으로서 선생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증강현실의 안내문을 참고한 대응. 아이링은 모호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렇게 물어보시는 건 역시 제 나이 때문인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딱히 기분 상할 일은 아닌걸요. 맞아요. 용두대노사(龍頭大老師)께서 제 아버님 되세요. 그래도 능력 없이 자리만 차지한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네요." "그랬다면 큰 어른께서 이런 곳에 보내지도 않으셨겠죠. 오해할 이유 없습니다." 겨울의 막힘없는 언변이 마음에 든 것인지, 다시 한 번 예쁘게 웃는 그녀. "처음처럼 소저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여자가 선생이라 들으면 어쩐지 불편하거든요. 나이 든 기분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이 때 유라가 생각지도 않았던 다과를 내왔다. 다기도 제법 그럴듯한 물건이었다. 겨울은 내심 당황했다. 이런 게 어디서 났지?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부장 민완기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입모양이 단어 두 개다. 위신, 겸양. 그 의도를 알고서 잠자코 따른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좋은 대접을 해드리기는 어렵네요. 다소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 같이 빈궁한 시절인데 이해를 구하시다니. 새삼스럽군요." 찻잔 드는 손길에 기품이 녹아있었다. 범죄조직의 여자 같지 않다. 그녀가 다시 덧붙이는 변설. "다도를 아시나요?" "문외한입니다." "조금 알려드릴게요. 차의 품격은 찻잎의 종류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랍니다. 아무리 좋은 찻잎을 띄웠어도 급하게 들이키면 오수(汚水)와 다를 바 없지요. 행다(行茶)는 예법이에요." 그녀, 한 모금 머금고, 눈을 감는다. 소리 없는 목 넘김.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예의가 사람을 만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있는 걸까요. 귀인께서 예를 다해 저를 대하시고, 저 또한 귀인을 예로써 공경하니, 이 자리에 사람의 품격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달콤한 목소리. 준비 많았던 소년은 쉽게 이해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도 알 수 있었다. 고상한 화법을 즐기는 중국인을 상대로, 적절한 답을 만들어낸다. "듣고 나니 차가 한결 더 좋네요. 이것이 예인가 봅니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겨울은 아이링과 떡치라는 시청자 퀘스트를 몇 개쯤 물리쳤다. 물리치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청자들이 같은 퀘스트를 반복해서 걸어온다. 걸린 금액이 점점 더 올라갔다. 잔을 다 비우고서 남은 대화가 이어진다. "선생께서 예(禮)를 아시니 이제 의(義)를 말씀드리고 싶군요." 본론이 나오는가.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하겠습니다." 말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많은 계산이 깔린 휴지(休止)일 것이다. 두 손 모은 정갈한 자세로, 소년을 긴 시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삼합회」에 가입하거나, 「흑사회」에 무릎 꿇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겨울이 감탄했다. "솔직하시네요." 그녀 또한 옅게 감탄했다. 소년이 한 마디 듣고서 바로 이해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상대라고 느껴졌으니까요." 언뜻 보면 협박이다. 그러나 겨울이 아무런 반감 없이, 그저 솔직하다고 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왜 삼합회와 흑사회를 구분하여 말했는가.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불리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 밝힌 것만으로도, 그녀가 겨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짧은 대화를 근거로 내렸을 판단. 이런 내용들을 시청자들에게 전하면서, 세계관의 일시정지가 필요하진 않았다. 「텔레타이프」를 쓰기도, 방송을 진행하기도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한국인이고,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삼합회」에 들어가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조선족도 결국은 중화의 일부가 되었지요. 무엇보다, 앞날을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으세요. 「흑사회」는 강합니다." 오만하다. 그리고 도발적이다. 힘 있는 자의 자신감. 그러나 빈틈이 있다. 생각해보자. 당장은 겨울이 입지 면에서 앞서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다급해할 이유는 없다. 그들도 겨울이 광고판이라는 사실을 알 터. 광고는 결국 물건을 팔겠다고 내는 것. 미국에 충성한다면, 누구에게든 같은 특권을 주겠다는 유혹이다. 한국인인 겨울을 일본이나 중국 난민들의 통제에 써먹긴 어렵다. 미국이 겨울의 롤 모델로 삼은 인물, 김영옥 대령이 일본계 대원들을 이끌긴 했다. 그러나 그 시절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 난민들을 통제하려면, 중국과 일본 출신의 광고판을 새로 세우는 편이 낫다. 그들 가운데서도 활약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 임무수행, 그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성과. 조만간 두 나라 난민들 중에서도 겨울 같은 사례가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중국계 조직들이 분열되어있다는 것만으로는, 겨울을 영입하려 시도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유력한 후보자가 「삼합회」 출신이 아닌 모양이죠?" "맞아요." 민감한 지적을 두말없이 수긍하는 아이링. 이런 태도, 항상 믿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초인적인 「통찰」이 없는 한, 진실은 기만과 허위의 갈피 사이에 있다. 다만 지금 같은 경우는, 그저 이 대화에 진솔하게 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겨울은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무의미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어디인가요?" "「안량공상회」와 「직예당」이 경쟁하고 있어요. 우리 「삼합회」의 홍곤(紅棍) 세 명과 백지선(白紙扇) 한 명이 후보였는데, 일주일 사이에 모두 사고를 당했죠." 홍곤이라면 행동대장이고, 백지선은 관리자 직급이다. 「삼합회」의 피해가 큰 것 같다. 생각 이상으로. 한 번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그들 소행인가요?" "작전 중 실종이라고 들었어요." 한 층 더 가라앉는 어조. 담담한 분노. 살피건대, 망자 중 하나가 피붙이였을지도. 속으로 생각하고, 겉으로는 내지 않는다. 확실치 않은 추측이다. 앞서 의(義) 운운했던 건 결국 립 서비스였다. 우리가 곤란한 상황이니, 도와주면 확실히 우리의 형제로 받아들이겠다. 그런 뜻. 실속은 없다. 협박이기도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리라고. 제안을 받지 않으면, 주인이 바뀐 「흑사회」는, 단합된 힘으로 한국계 및 일본계 조직을 짓누를 것이라고. "그래서, 이미 미군의 인정을 받은 저를 끌어들여서, 그 사람들의 대항마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신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겨울의 입지, 부대 편성권과 대외활동의 주도권일 터. 그것만 있으면 「흑사회」의 다른 파벌에 밀리지 않게 된다. 「통찰」. 증강현실의, 많은 그래프와 단편적인 미래예측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어시스트가 항상 바른 길을 알려주는 건 아니다. 반대의 예언을 내놓는 두 명의 예언자들. 각각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므로, 선택은 언제나 소년의 몫이다. 낙관과 비관 양쪽을 향해 갈라지는 미래의 표지판. 겨울은 그 중 하나를 읽었다. "제가 쓰고 버려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네요." 아이링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 매력을 쓸 줄 아는 여자다. 겨울에게는 효과가 없지만, 지켜보는 다른 시선들이 있었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터. 언어 계열 기술이 극에 달하면, 음성과 화법으로 상대를 농락하기 쉽다. 이어지는 말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애처로운 음성이었다. 이것은 플레이어의 「통찰」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보가 왜곡되는 것. 시스템 어시스트를 있는 그대로 믿어선 안 되는 이유의 하나였다. "우리는 서약으로 묶여있어요. 배신의 대가는 언제나 죽음이죠. 「겨울동맹」은 「흑사회」의 자협회(子協會)로서 언제나 최대한 존중 받을 거예요. 한 선생께는 선봉(先鋒) 자리가 내려질 것이고요. 오직 의와 협으로 드리는 제안이에요. 믿어주세요." 선봉이면 직무는 다를지언정 위계로는 향주와 동급이다. 당연히 기존 조직원들에 대한 영향력은 없는, 이를테면 명예직 취급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파격적인 대우다. 자협회는 「삼합회」의 하부조직이다. 역시 좋은 대우였다. 본디 회에 3년 이상 몸담은 자로서, 용두가 인정한 자에게만 설립 허가를 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마저도 결국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실속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역시 믿을 수 없네요." "어째서......." "백번 양보해서 소저와 용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삼합회」 구성원 전체는 못 믿어요. 중국 분들은 자존심이 강하시잖아요? 예전부터 한국을 소국이라고 멸시하는 분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지금은 더 심해졌겠죠. 차별과 모욕, 정말 없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삼합회」의 규약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에요. 규약에는 이런 내용이 있죠. 「동지끼리 시비를 걸거나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어기는 자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한 번 동문이 된 사람들에게, 민족을 빌미로 시비를 거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맹세하죠. 그런 자가 있다면 죽음으로 벌하겠어요." 부드러운 말 속에서도 자긍심은 단단하게 굳어있다.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그러나 겨울은 그녀의 말을 다시 부정했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저는 제 사람들도 믿을 수 없다고." # 30 [30화] "선생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과대평가는 그만 두세요. 「겨울동맹」은 이제 막 만들어졌어요. 원래 있던 사람들이 저를 인정한 것도 겨우 오늘인데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받을 예정인데, 일탈하는 사람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어요?" "......." "「삼합회」의 규약이 무겁다고 하셨죠? 제가 알기로 그 규약에 이런 내용도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입문 후 후회하거나 탄식하는 자는 죽음으로 죄를 갚는다.」......죽을 사람 많이 나오겠네요. 조직의 서열 확립을 위해 이걸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대화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자 아이링의 평정이 뒤틀리고 있었다. 줄곧 머금고 있던 미소가 많이 엷어졌다. "규약을 따르지 않는 자를 엄히 벌하는 건 지도자의 의무잖아요. 한 선생께서도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이고요. 일벌백계는 조직의 규율을 바로잡는 기초랍니다." "전체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게, 있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불평 좀 했다고 죽이다니......그건 제 방식이 아니에요. 당장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어요. 적이 되지만 않는다면, 능력껏 끌고 나갈 겁니다. 그러다보면 믿음도 생기겠죠. 대충 죽여서 겁주는 식으로 만드는 가짜 믿음 말고, 공동체에 대한 진짜 신뢰 말이에요." "가짜라니......지금 우리 회를 모욕하시는 건가요?" 「생존감각」이 반응했다. 증강현실의 붉은 경고. 위협수준은 낮았다. 당장 칼부림을 벌이려는 게 아니다. 언젠가 구체화될지 모르는, 막연한 살의를 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겠지.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결국 범죄조직에 속한 여자니까. 경고의 색이 옅어졌다. 그녀가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 설득할 생각인가보다. "미국은 난민 살리기에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진정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지금 이런 대화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캠프에 치안과 질서, 희망이 있었을 테니까요." 숨을 고르고서, 다시 말하는 그녀. "지금 손에 넣은 명성과 지위가 자랑스러우신가요? 선생은 가축에 지나지 않아요. 품종이 좋을 뿐. 겨우 그걸로, 언제까지 사육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더 나은 품종을 찾으면 선생은 버려질 거예요." 협박 참 잘한다. 겨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숫자가 곧 힘이고, 뭉쳐야 겨우 살아남을 시대에요. 가장 강력한 조직의 일원이 되세요.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을 평생 기억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돕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평생 기억하겠죠. 우리는 우리가 아닌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냉혹해질 수 있습니다." 그녀가 요구했다. "이제 대답을 주세요." 압력이 대단하다. 그녀의 기세도 강하지만, 대화를 듣고 화가 난 호위들이 더 강했다. 소년을 무섭게 쏘아본다. 시선이 칼날 같다. 「전투감각」, 「생존감각」, 「통찰」의 연동. 위협성 평가. 각자가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총기를 휴대한 겨울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지만. 소년은 조용히 말했다. "사실 저는 종속보단 동맹이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어설픈 유대로는 서로에게 도움 될 게 없어요. 우리는 「흑사회」의 주도권을 잃어버릴 것이고, 선생은 대국인들의 힘을 얻지 못할 테니까요. 무엇보다 동맹은 대등한 세력 사이에서 맺는 관계잖아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약자, 부녀자, 고아 투성이인 「겨울동맹」이 아니라, 선생 한 사람 뿐인걸요. 격이 맞지 않아요." "제가 그걸 만회할 정도로 노력한다면?" "겸손하지 못하시네요. 한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 돌아가세요." 겨울이 대화를 놓는다. 미련 없이. 아이링은 세게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굉장히 무례하셨습니다. 소저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거죠. 「일단 굴복해라. 하는 거 봐서, 가족으로 대우해주겠다.」 그 약속을 보증할만한 담보가,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인데.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엔 협박을 하셨잖아요. 너희가 계속 한국인으로만 남아있으면 결국 짓밟히고 말거라고." "저는 단지 그게 현실이라고 드린 말씀이었을 뿐이에요!" "그럼 더 질이 나쁘네요. 무의식중에 깔보고 있다는 뜻이니까." 미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상한 표정이다. 덩치 큰 어깨들에게서 느껴지는 살의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낼 것 같지만, 아이링이 내젓는 손길에 가라앉는다. 천막의 원래 주인들이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두 사람. 박진석과 이유라. 진석은 자기 주위로 조용히 사람을 모았다.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면면이다. 유라는 덜덜 떨면서도 과도 하나 엉덩이 아래 깔고 앉았다. 훌륭한 감투 정신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며, 입을 여는 겨울. "저는 능력이 있어요. 사육사들에게 버림 받을 일 자체가 없도록 만들 거라고요. 적어도 제가 있는 한, 아무도 「겨울동맹」을 얕볼 수 없을 걸요? 오만하다고 말씀하시려면 일단 저를 능가해보세요. 아니면 죽여보시든가." 탤런트 어드밴티지를 있는 대로 받고 있는 플레이어를 누가 능가한담. "정말 자신감 넘치시는군요." "단지 그게 현실이라고 드린 말씀이었을 뿐인데요." 아이링이 조금 전 했던 말 그대로다. 돌려받은 아이링은 말문이 막혔다. 무릎 위에 두 주먹 모아 쥐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 잠시 후 한 번 더 내쉬고, 시차를 두어 몇 번을 더 내쉬었다. 몸을 몇 번 움찔거리는 품이 당장이라도 일어나 나갈 것 같았지만, 끝끝내 자리를 터는 일은 없었다. 몇 번 달싹이던 입술에서 겨우 나오는 말. "외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실 텐데요. 정보라던가......." 구차하다. 예상범위 이내였다. "애써 찾아와주신 덕분에 그 걱정은 덜겠네요. 「흑사회」의 다른 가족들도 소저의 방문을 알고 있을 거 아녜요? 제가 「삼합회」에 협력하지 않는 대가로 정보쯤은 내주지 않을까요?" "큭......." 그녀는 다시 한참을 입 다물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그러나 지켜보는 이들에겐, 아무래도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그들을 향해 한 번 웃어줄까 하다가 말았다. 동맹원들의 경외를 사기는 좋겠는데, 앞에 둔 여자에겐 필요 이상의 도발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제안이에요." 아이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약속을 보증할 담보가 필요하다면, 저는 어떠신가요." 웃으면 안 되는데, 겨울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이 아니다. 시청자 퀘스트가 무지하게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보이는 퀘스트마다 섹스로 시작해서 제발 좀 섹스로 끝났다. 읽지 않은 메시지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아. 이것 참.......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제안자, 여인으로서는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반응이다. 그녀가 터지기 전 겨울이 먼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비웃으려는 건 결코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상한 점이 있네요." "뭐가요."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대답이 없다. "「흑사회」의 주도권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같은 민족 사이에서 대표만 바뀌는 일이잖아요. 다른 조직이 맹주가 된다고 해도, 나중을 기약하면 그만 아닌가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니면 나중을 기약하지 못할 이유가 있으시던가." "......질이 나쁘시군요. 답을 아는 질문은 그만두세요." 마침내 나온 대꾸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짓 많이 하셨나보네요. 같은 「흑사회」 형제들이라고 하시더니." 그것도 보복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만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에이, 그런 표정 지으실 것 없어요. 우리 한국인들도 그러는데요 뭐. 같은 민족이고 뭐고 죽이고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있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중국인 분들보다 훨씬 더 심할걸요?" 소년은 담백한 어조로 말한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사람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서 뺏는 게 편했겠죠. 이해해요. 사기치고 등쳐먹기 좋은 건 언제나 같은 민족이잖아요. 소저께서도 한몫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런 분과 맺어지고 싶지 않네요." 당신 같은 여자는 줘도 안 받겠다는 말. 이 이상의 모욕이 여자에게 또 있을까? 곧바로 머리를 거치지 않은 반발이 튀어나왔다. "전 반대했어요." "아니라고는 안하시네요?" 한 번 평정이 깨지니 이쪽의 함정에 계속해서 빠진다. 이제 아이링이 겨울을 보는 두 눈에 독기가 서렸다. 조금 젖어있다. 가냘픈 어깨가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은 동요하지 않는다. 알아낸 것이 많아 만족스러웠다. 덧붙여, 이 대담으로 얻어낸 별의 수도 만족스러웠다. "가겠어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는 「삼합회」의 간부. 돌아서려다가 멈칫, 소년을 노려본다. "당신,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거 그냥 한 번 해보시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삼합회」 전권대리인의 선전포고인가요?" 시스템은 공정하다. 능력 없는 여자가 아니니, 적정 등급의 「통찰」과 「생존감각」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플레이어의 감정과 생각에 반응한다. 그리고 기술등급으로 평가할 때 소년의 전투능력이 월등하니, 감지한 위협의 수준이 무척이나 높을 것이었다. 과연, 움찔 움츠러드는 가녀린 육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녀부터 죽여 놓고 「삼합회」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의도를, 충분히 읽었을 것이다.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해 본 말이었어요." 굴욕을 감수하고 사는 쪽을 택한다. 그러고서,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성격 나쁘시네요. 굳이 그렇게 무의미한 추궁을 하셔야 했나요?" 무의미하다면 무의미하다. 그녀가 거짓말 하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 그러나 소년에게 남을 희롱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점을 해명한다. "그렇게 보였다면 유감이네요. 경고였는데." "경고?" "우리가 서로 싸워서 좋을 것 없고, 싸우게 되면 그냥은 당하지 않겠다는 경고죠. 혹시나 소저께서, 감정에 휩쓸려 말을 잘못 전하실까봐......그런 일 없기를 바라며 드린 거고요.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조롱하겠어요? 앞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요." "......." "오해하지 마세요. 전 아직도 동맹이라면 좋다고 생각해요. 혹시 생각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다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건가? 싶을 만큼 움직이지 않는 아이링. 굉장히 긴 한숨이,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눈빛이 많이 누그러져있었다. "뭔가 좀 억울한 기분이군요." "억울해하실 것 없어요. 서로 무례했으니 한 번씩 주고받았다 치고, 앞으로 묵은 감정 없는 걸로 해두는 게 어떨까요?" 이 말을 들은 미인은 표정이 엉망이었다.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다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실소였다. 굳이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이, 속 잘 읽는 소년은 그것이 그녀의 진짜 얼굴임을 알았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데. 물론 생각만이다. 이걸 말하면 갈 데까지 가는 무례함이고, 성희롱이었다. 아이링의 힘없는 목소리. "정말, 언변 하나는 엄청나시군요." "그러게요." 가벼운 긍정에 아이링은 또 한 번 어이가 없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웃으세요. 삶이 잿빛이면 웃기라도 해야죠." 그런다고 순순히 웃는 건 여자 하나였다. 남자 다섯은 꿋꿋이 험악한 표정이다. "살펴가세요." "네. 건강하시길.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일로 다시 뵈었으면 좋겠네요." 그들을 배웅하고 들어오자 사람들이 우 몰렸다. 대담의 경위가 궁금할 것이었다. 번거롭지만 한 번 설명해두는 게 낫겠지. 지도자로서의 위신도 더할 겸. 그럴 필요는 없었다. "굉장했습니다." "중국어도 할 줄 아세요?" "아직 말은 어렵지만 청해는 가능하지요. 작은 대장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민완기 부장이 생각 이상의 인재였다. 겨울의 호감을 얻어두려는 의도가 없지 않겠지만, 그가 쏟아내는 감탄은 대개 진심으로 보였다. "설마 교섭에 그토록 능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변도 유창하시고. 상대의 허와 실을 아주 제대로 짚어내시더군요. 조마조마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 상대를 달래서 보낸 것도 훌륭했습니다. 분위기를 확확 뒤집으며 대화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시는 게, 마치 숙련된 협상가를 보는 기분이었지요. 재능을 타고나신 것 같군요." "과찬이세요." 대화에 열기가 더해질수록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점점 더 궁금해질 뿐이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는 거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다. 시선이 자연히 애처로워진다. 겨울이 민완기에게 부탁했다. "기왕 들으셨다면 다른 분들께 저 대신 설명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를 어용학자로 쓰기 좋겠다고 보았던 겨울의 안목이 정확했다. 단순히 사실을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괴벨스? 그 와중에 장연철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우물거리던 그가 말한다. "저는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네?" "그러니까...마, 말하기도 됩니다." "......." 다른 사람들이 민완기를 중심으로 오오 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소년과 장연철 사이에만 기묘한 고요가 자리 잡는다. 뒤늦게 이불을 차고 싶어졌는지, 장연철의 얼굴이 벌개졌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앞으로 기대할게요." 위로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는 축 늘어진 채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렇게 안 봤는데, 허당끼가 있는 것 같다. # 31 [31화] #轍鮒之急 (1) 「SALHAE : 으아, 시발! 저게 사람 몸매냐! 리 아이링 겁나 예뻐! 뭐 하냐 거지새끼들아! 현실에선 꿈도 못 꿀 여자가 눈앞에 있다! 없는 돈 쓸 시간이 왔다 이거야! 탄알 1000발 장전!」 > : SALHAE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겁탈! 리 아이링!』 『SALHAE님의 말 : 겁탈! 겁탈! 겁탈! 그 아이를 겁탈! 보자마자 겁탈! 겁나 빨리 겁탈!』 『AI 도움말 : 이 퀘스트의 목표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이 리 아이링(李藹齡)을 겁탈하는 것입니다. 목표 달성 시점에서 1,000개의 별이 세계관 진행자에게 지급됩니다.』 > : 한겨울(진행자)님이 SALHAE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SALHAE : ..........」 「려권내라우 : 퀘스트 이름 ㅋㅋㅋㅋㅋ 병신 ㅋㅋㅋㅋㅋ 욕망에 너무 솔직해 ㅋㅋㅋㅋㅋ」 「흑형잦이 : 근데 순식간에 거부됐엌ㅋㅋㅋㅋㅋㅋ」 「당신의 어머 : 고작 십만 원으로는 BJ가 만족 못하나봄 ㅋㅋㅋㅋ」 「제시카정규직 : 뭘 새삼스럽게. 진행자 얘 전부터 별 천 개 우습게 아는 앤데 뭘. 생전에 금수저였나? 아무튼 이 비정규직 알바 천민새끼들아. 누구 좀 더 넉넉한 놈 없냐? 크게 걸어봐라! 급하다! 저렇게 예쁜 여자를 그냥 보낼 셈이야?!」 「올드스파이스 : 시끄러. 듣는 백수 기분 나쁘게....... 그건 그렇고 진행자 말 겁나 잘한다. 무슨 영화 보는 수준이네. 그것도 걸작. 평점 매기면 만점 찍을 듯.」 「폭풍224 : 걸작이고 뭐고 떡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 좆망 인생! 가상현실에서라도 한을 풀어야지! 그러라고 있는 가상현실 아니냐! 이번엔 내가 간다!」 > : 폭풍224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폭풍224님의 말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섹스다. 섹스밖에 없다.』 「AI 도움말 : 이 퀘스트의 목표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이 리 아이링(李藹齡)과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목표 달성 시점에서 1,500개의 별이 세계관 진행자에게 지급됩니다.」 > : 한겨울(진행자)님이 폭풍224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폭풍224 : 왜! 왜! 왜애애애애애!」 「윌마 : 으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칠리콩까네 : Sex!」 「칠리콩까네 : Sex!」 「짜라빠빠 : Sex on the beach!」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와. 전부터 느꼈지만, 이 스트리머 진행 정말 잘 한다. 대사가 아주 거침이 없네. 시스템 보정도 안 받고 이 정도라니....... 미친놈들아, 섹스 없이도 오르가즘 느껴지는 방송 아니냐? 왜 그리 안달을 내?」 [닉으로드립치지마라님이 별 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여민ROCK : 네, 다음 씹선비.」 「Владимир : 여러분. 저는 러시아 사람입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액티브X를 설치하라고 합니다. 설치가 잘 되지 않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둠칫두둠칫 : 씨발 떡 한 번 치기 겁나 힘드네. 진행자 왜케 까다롭냐? 무슨 종교 믿나?」 「엑윽보수 : 흐름이 아무리 좋아도 섹스 없으면 앙금 없는 팥빵! 애국보수 구국의 결단! 내가 이번 달에 라면만 먹고 살겠다! 가거라! 나의 밥값 20만원! 너의 힘을 보여다오!」 「무스타파 : 오오! 기대기대!」 > : 엑윽보수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 > : 한겨울(진행자)님이 엑윽보수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엑윽보수 : 」 「진한개 : 엌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이 광탈은ㅋㅋㅋㅋㅋㅋㅋ」 「려권내라우 : 헐. 진행자 얘 금액이나 확인하고 거절하는 거냐?」 「영원한해병 : 하긴 뭘 해. 메시지 다 나오기도 전에 지워버렸는데.」 「하루살이 : 아냐. 그래도 금액은 봤을 걸? 전투할 때 봤잖아. BJ 이 새끼 반응속도가 얼마나 엄청난데. 시발 익숙해지더니 일시정지도 없이, 그것도 전투 하면서 「텔레타이프」 쓰는 앤데 그걸 못 봤을라고.」 「groseillier noir : 아, 낭만적으로 섹스하고 싶다.」 「Blair : 동의한다, 바게트 새끼야.」 「groseillier noir : 넌 뭔데 시비야? 섬나라 야만인 새끼지? 똥 같은 너네 요리나 먹어.」 「Blair : 병신. 실업급여는 잘 타먹고 있니?」 「Владимир : 아, 액티브X 설치하게 해주세요. 한국의 보안환경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액티브X좆까 :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엑윽보수 : ......이거 분명 따뜻한 밥 사먹으라는 배려겠지? 그렇지? BJ가 나 생각해주는 거지? 아, 애국보수는 오늘도 우국충정의 눈물을 흘린다.」 「올드스파이스 : 그렇게 인지부조화가 시작되었다. 병신인증.」 「まつみん : 이쯤에서 마츠밍 등장!」 「종신형 : 오오! 정신무장 甲 일본 아가씨!」 「まつみん : 지금 리 아이링 시점으로 들어가 있는데! 완전 두근두근 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냉정한 눈동자! 능란하게 치고 빠지는 언변! 강한 남자의 여유! 한겨울씨 너무 멋져! 날 밟아줬으면 해! 상냥하게 사정없이 범해줘요!」 「올드스파이스 : 전부터 느끼는 건데, 얜 너무 강해.......」 「대출금1억원 : 상냥하게 사정없이는 뭔뎈ㅋㅋㅋㅋㅋ」 「まつみん : 그런 관계로!」 「전자발찌 : ?」 「まつみん : 저 마츠밍! 별 3천개짜리 시청자 퀘스트 갑니다! 해내겠습니다! 아름다운 조국, 일본의 명예를 걸고!」 「한미동맹 : 야! 이런 데 조국의 명예를 왜 걸어?!」 「눈밭여우 : ;;;」 > : まつみん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まつみん, いきます!』 > : 한겨울(진행자)님이 まつみん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まつみん : 아! 일본이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눈밭여우 : ;;;;;;」 「헥토파스칼킥 : 너네 나라는 그런 걸로 가라앉는 거냐.......」 「Владимир : 액티브X를 하나 설치했는데 아직 아홉 개가 남았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엑윽보수 : 아, 안 돼. 중국 미인 나간다!」 「종신형 : 아이링! 가지 마! 사랑해!」 「귀요미 : 그래! 가지 마! 여자를 울리다니! 한겨울 이 나쁜 남자! 붙잡으란 말이야! 너 진짜 너무 차가워! 멋있지만 그러면 안 돼!」 「SALHAE : 하......요즘 이거 말고 보는 방송도 없는데......오늘 하루도 섹스 없이 끝나버리는 건가.......」 「궁디팡팡 : 병신아 방송에나 집중해. 그냥 봐도 재밌구만 뭘.」 「SALHAE : 누가 재미없대? 훌륭해. 진짜 좋다고. 진행자 얘 AI 수십 명 상대할 때도 딜레이 한 번 안 걸리는데, TOM 등급 적성이 얼마나 높은 건지 짐작도 안 간다. 그렇다고 연출이나 애드립, 컨트롤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팔방미인이지. 이런 방송을 달리 어디서 찾겠냐.」 「SALHAE : 근데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어. 고급 요리도 좋지만, 길거리 불량식품이 땡길 때가 있는 거 아니겠냐? 요즘처럼 살기 힘든 세상이면 더더욱 그렇지.」 「엑윽보수 : 2222222222222」 「흑형잦이 : 3333333333333」 「궁디팡팡 : 그런 거라면 이해한다. 누군 아니겠냐. 열심히 살아라.」 「Владимир : чёрт побери́! 결국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나쁜 까레이스키! 나쁜 까레이스키!」 「まつみん : 힝.......」 [눈밭여우님이 별 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퉁구스카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시청자와의 대화 (2) 「불심으로대동단결 : 오, 진행자 왔다!」 「한겨울(진행자) :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방송은 즐거우셨나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응! 잘 봤어! 너 진짜 잘 하더라. 감탄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SALHAE : 근데 BJ야, 뭐 하나 물어보자.」 「한겨울(진행자) : 네.」 「윌마 : 나 살해 쟤가 뭐 물어볼지 알 거 같음 ㅋㅋㅋㅋ」 「짜라빠빠 : 뻔하지 뭐.」 「SALHAE : 아 너네 시끄러. 아무튼 질문인데, BJ야......너 혹시 별 필요 없니? 자꾸 거절당하니까 약간, 아주 약간 기분 상하고 그래. 내가 속이 좁은 걸지도 모르지만. 보통 너 만큼 완고하게 거절하는 경우는 없거든.」 「엑윽보수 : 동의하오!」 「まつみん : 재청입니다!」 「한겨울(진행자) : 시청자 퀘스트 거부 때문이라면, 죄송해요. 별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오히려 받고 싶어요. 여러분의 성의를 무시할 생각도 없고요. 다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을 뿐이에요. 제가 조금.......」 「SALHAE : 조금?」 「한겨울(진행자) : 생전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눈밭여우 : .......」 「랜섬웨어 : 아니, 그 즐거운 섹스에 좋지 않은 기억은 또 뭐야. 혹시 추행이라도 당했냐? 아니면 역강간?」 「팬티주세요 : 에이, 설마.」 「Tawil At'Umr : 그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님? 남자의 로망 아니냐?」 「려권내라우 : 그야 상대에 따라 다르지. 예쁜 여자에게 당하면 복 터진 거고, 오크녀에게 당하면 레알 자살각 ㅇㅈ이지」 「진한개 : 난 남자로서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ㅋㅋㅋㅋㅋ」 「칠리콩까네 : 포르노랑 현실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흥미는 생긴다.」 「칠리콩까네 : 포르노랑 현실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흥미는 생긴다.」 「맛줌법 : ㅃㅂㅋㅌ ㅂㅂㅂㄱ 남자는 다들 인정하는 부분이구연~ 어떻게든 여자랑 스섹하면 ㄹㅇ 기모찌 하는 부분 ㅇㅈ? 어 ㅇㅈ 씹 에바터는 각이구연~ 여자가 먼저 해줘도 싫다하는 모쏠아다 새끼들은 싸커킥 쳐맞을 찌질이 새끼들이구연~ 글구 오크는 원래 여자가 아닌 거 인정하시져 행님덜 ㅋㅋㅋㅋ」 「눈밭여우 : 다들 말을 너무 함부로 하시네요. 그런 건 농담으로라도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진행자분께 사과하세요.」 「크타니드 : 여우년 이거 뭐냐? 그동안 한 마디도 없더니 왜 갑자기 풀발기해서 지랄임?」 「하드게이 : 그러게. 당하는 쪽도 즐기면 되는 일!」 「まつみん : 아닙니다. 마츠밍은 여우 아가씨에게 동의합니다. 성적 판타지는 현실과 구분할 때 비로소 즐거운 것입니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래, 이 좆망 인생들아. 말 좀 가려서 해라. 외국인들 보는데 나라망신도 유분수지. 머릿속에 뇌 대신 우동사리 들어있냐?」 「헥토파스칼킥 : 에이......알면서 하는 소리지. 그냥 농담이야.」 「まつみん :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진한개 : 근데 진행자가 아까부터 조용하다.」 「SALHAE : 혹시 진짜로......그렇고 그런 일을 겪은 건가?」 「여민ROCK : 에이, 설마.」 「한겨울(진행자) : 앞으로 이런 문답 다시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릴게요.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여성분도, 저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로가 피해자였을 뿐이에요. 이걸 떨쳐내지 못한 상황에서 아까 주셨던 것 같은 퀘스트를 받으면, 도저히 방송을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았고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SALHAE : 진짜냐.......」 「진한개 : 어우야.......」 「엑윽보수 : 갑자기 숙연해진다.」 「둠칫두둠칫 : 씨발 그런 사정 다 봐주면서 방송을 어떻게 봐?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거 아님?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보기 더러운 꼴도 보고. 돈 벌겠다고 나선 시점에서 저 새낀 애새끼가 아니라 그냥 사회인인 거임.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어?」 「눈밭여우 : 정말 잔인한 분이시네요.」 「북진통일 : 둠칫이가 냉정하긴 한데 틀린 말 한 건 아님. 난 쟤한테 동의함. 남의 돈 먹기가 쉬운 게 아님. 감성팔이 극혐. 그런 건 별창늙은이들 신세한탄으로 충분함.」 「맛줌법 : 2222222」 「둠칫두둠칫 : 꺼져 병신들아.」 「북진통일 : 이 새끼는 편 들어줘도 지랄이네.」 「둠칫두둠칫 : 세상 혼자 사는 거다. 가족이고 친구고 뒤통수만 보이면 후려치기 바쁜 새끼들임. 괜히 친한 척 하지 마라. 구역질남.」 「화질구지 : 고오급 레스토랑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톤♚♚가입시$$전원 카드팩☜☜뒷면100%증정※10레벨 달성시 6 천 골 드 !!! ♜월드 오브 스타드래프트♜쪼글링 무료증정¥ 특정조건 §§다이아블로45§§★공허의 우산★초상화획득기회@@@ 즉시이동 https://kr.battlecruiser.net/recruit/restaurance」 「SALHAE : 이 와중에 레스토랑스가 또!」 「まつみん : 겨울 씨, 힘내요! 마츠밍이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일한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라도 빨리 극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3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폭풍224 : 한일우호 ㅋㅋㅋㅋㅋ 핑퐁외교도 아니고 섹스외교냐 ㅋㅋㅋㅋㅋ」 「눈밭여우 : .......」 [눈밭여우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32 [32화] #위로 오랜만에, 겨울은 아늑한 어둠을 찾았다. 새까만 무중력. 그동안 모은 별들이 둥근 천구에 가득했다. 별빛이 뿌려져도 닿는 곳은 없다. 모든 방향이 그저 아득한 공허일 뿐이다. 그것이 좋았다. 무언가 있으면, 스스로를 속여야 한다. 그것은 진짜라고. 그 뒤엔, 이어지는 생각을 끊으려 안간힘을 써야하겠지. 그렇다. 어둠이 좋다. 마음의 휴식을 위한 안식처. 스물일곱 번째 게임이 시작된 이후,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 없었다. '나 아닌 내가 되어야 했으니까.' 사실 돌아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곳엔 겨울이 있고, 겨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소년은 본래의 자신을 되찾아버린다. 곤란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변덕 심한 가슴 속 돌이 오늘 따라 무거웠다. 그 무게가 소년을 심연으로 끌어내린 것. 겨울은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가벼워질 것이다. 살아오는 내내 익숙해진 기다림이었다. 찢어진 마음의 조각들을, 고요한 망각 속으로 가라앉히는 일. 부풀어 오른 과거가 작은 앙금으로 변하는 시간. 소년이 자신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 그런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오늘 덧난 상처는, 소년에겐 가장 모멸스러운 기억이었다. 살면서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은 적 드물다. 그래도, 그때처럼 철저하게 물건으로 다뤄진 적 없었다.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 날카롭고 뜨거운 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하나 있었다. 소년과 함께,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한 사람. 잠깐의 만남이었으나 그 슬픔이 인상 깊었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구나. 아프게 살았던 게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외로움. 얼마나 묵묵히 표류했을까. 소년을 일깨우는 신호가 있었다. 빛과 소리. 자기 삶이 없어서 다른 삶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배려하는 마음 잃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때라고 알려주는, 인간 아닌 지성의 메시지.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흐른 밤이 너무나 짧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데. '할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섭, 캠프 로버츠 (2) 겨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울렁이는 마음 탓이다. 가만히 서있어도 땅이 물결치는 것 같았다. 몰입하기까지, 앞으로 조금. 셋. 둘. 하나. 눈을 뜬 소년이, 조용히 물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요?" 앞에는 두 사람이 서있었다. 숙소 앞에서 겨울을 기다리던 두 사람, 박진석과 이유라. 유라는 주눅이 들어있고, 진석은 겨울의 눈치를 살핀다. 앞서 눈 감고 침묵했던 소년의 모습 때문이었다. 화가 났다고 생각한 모양. 그러나 그 성격에 할 말을 피하진 않았다. 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라리 제중 형님이라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유라씨는 아닙니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시죠.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잖습니까?" 유라를 전투조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항의였다. 용기와 능력은 별개라고. 진석의 경어는 이제 제법 안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곧 겨울의 입지였다. 필요 이상으로 단단해진 말투는, 아직 남아있는 어색함을 지우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겠지. "자기만 아는 다른 사람들보다야 유라 씨가 훨씬 낫습니다. 그래도 의지와 실력은 구분해야죠. 유라 씨에게 누굴 이끌만한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한 욕심을 내고 있었다. 전투조장이 되고 싶어서.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욕심 없는 인간에게는 의욕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재능이다. 「겨울동맹」이 타성에 젖지 않으려면, 진석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보통이라면 그렇다. 지금은, 유라가 고개를 숙여선 안 된다. 겨울이 말했다. "그 자격, 저한테는 있나요?" "예?" "진석 씨 기준으로는 저도,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나......싶어서요." 허를 찔린 표정이다. 진석의 동요는 컸다.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지금의 겨울에게는 입지도, 실력도, 실적도 있다. 그러므로 진석은 겨울을 변호해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겨울이 내린 결정이 잘못이었다고, 마음속에선 아직 그렇게 믿고 있을 테니까. 진석을 찌른 겨울은, 그가 답하기 전에, 유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본인 생각은 어떠세요?" 꾸물거리는 그녀. 얼굴에 많은 감정이 스친다. 미안함과 두려움이 가장 크고, 자신감 결핍이 그 다음이었다. 소년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과연, 나오는 말이 짐작과 다르지 않았다. "저는 그......여자고......힘도 약하잖아요. 죄송해요. 작은 대장님이 믿어주신 건 고맙지만, 자신이 없어요." 주위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를 만큼 소년은 멍청하지 않다. 유라도 의식하고 있었다. 아니, 그 시선들이야말로, 그녀를 여기까지 밀어낸 압력일 것이다. 진석에게는 힘이 되었을 터이고. 좀 더 말을 고르던 유라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저 하나 다치거나 죽는 건 괜찮아요.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는 건 안 돼요. 감당 못해요. 실력도 없는걸요. 그리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분들은 대개 남자 분들이잖아요. 여자인 저 보다는 진석 씨가 나서는 게, 사람들한테도 훨씬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거예요." 미소를 만드는 겨울. 유라와 진석이 당혹스러워했다. 유라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석 씨, 뒤로 돌아서 잠시만 귀를 막아주시겠어요?" "네? 아니, 어째서......." "부탁드릴게요." 꼴이 우습다. 진석은 불편해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다. 멀찍이 서서 그렇지 않은 척, 훔쳐듣기에 여념이 없던 사람들. 그들도 겨울이 둘러보는 눈길에 몇 걸음씩 밀려났다. 지긋이 볼수록 더 멀리까지 밀려난다. 어색한 헛기침 소리들은 덤.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한 유라에게, 겨울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제가 왜 유라 씨를 첫 전투조장으로 삼았는지,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뿐이니까. 편하게 들으세요. 다 듣고 여전히 싫으시다면, 그때는 결정을 바꿀게요." "앗! 네, 네!" 편하게 들으라는 말은 소용이 없었다. 두 주먹 꼭 쥐고 마른침을 삼키는 유라. 비밀스러운 대화를 위해 가까이 다가온다. 겨울은 생각했다. 차츰 나아지겠지. "방금 말씀하셨죠? 주로 나가는 건 남자들이라고." "그, 그런데요?" "남녀 성비가 문제에요." 그 뒤로 평온하게 이어지는 말들. "성비는 지금도 안 맞아요. 이유는 아시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로 남자들이 나서고, 남자들이 싸우고, 남자들이 죽었을 테니까요. 캠프로 대피하는 중에도 남자가 더 많이 죽었을 거예요. 지금은 외부활동이나 조직간 항쟁으로 죽어나가고요." 범죄율 높은 지역에선 남자가 많이 죽어나간다. 힘과 폭력은 남성이 우월한 영역이기에, 싸움과 죽음도 그들의 몫인 법. 그저 좋은 자원이 먼저 고갈되는 원리다. 이곳, 캠프 로버츠의 난민캠프는, 전염병 유행 이전의 그 어떤 우범지대보다도 범죄율이 높다. 자신을 지키고 싶은 난민들의 모든 모임이, 반쯤 폭력조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심해질 거예요. 갈수록 분위기가 나빠질걸요? 왜냐, 정신 멀쩡한 남자들이 빨리 죽잖아요. 양심이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불의에 맞서고, 모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법이니까요. 둘이 하는 이야기인데, 진석 씨 정도 되는 사람도 굉장히 드물어요. 성미가 급하긴 해도 괜찮은 사람이죠." 유라가 열심히 끄덕거렸다. 「겨울동맹」 안에서도 행동거지 수상한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여자라고 수가 적진 않지만, 남자 쪽은 비율이 높았다. 겨울의 말처럼 제정신 박힌 남자들이 일찌감치 죽어 없어져서 그렇다. 능력과 양심은 비례하지 않는다. 산 미구엘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도로변의 식당으로 몰려갔을 때, 다른 사람 때려눕히고 자기 가방 먼저 채워 나온 남자가 있었다. 난민 지원자들 중 신체조건은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과연 그렇게 된 뒤에, 남은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뭘 요구하기 시작할까. 전 그게 걱정이에요." 유라는 어려운 표정이다. "일리는 있지만, 괜한 걱정일지도 몰라요. 그 뭐지, 남자들이 줄어서 여성의 권리가 강해진 적도 있다고 했는데......." 그녀가 어렴풋이 지적하는 건 프랑스나 옛 소련 같은 경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난민 캠프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러긴 힘들걸요. 여성분들의 역할이랄 게 없잖아요. 모든 걸 바깥에서 얻어 와야 사는데. 다른 조직들 돌아가는 꼴 보면 느끼는 거 없으세요?" 전쟁기에 여성인권이 신장된 건, 사회의 생산력을 대신 유지한 덕분이다. 그런데 캠프 로버츠에는 제대로 된 사회도 없고, 생산수단은 더더욱 없었다. "어, 음......." 곤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만지작만지작 하는 유라. 이어지는 말은 칭얼거리기에 가까웠다. "작은 대장님이 있는데도......그렇게 될까요?" "마음 삐뚤어진 남자들이 단체로 항의하거나, 다른 조직으로 싹 빠져버리면요? 저 혼자서 우리 동맹 전체를 감당할 순 없어요.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는 못하겠어도......무시하긴 너무 큰 위험이잖아요. 예방해야죠." 「종말 이후」 세계관의 이용자들은 이런 문제를 일부러 일으키기도 한다. 공동체에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를 들이려는 노력이다. 그들에겐 이게 문제가 아니라 목적에 가까웠다. 대개 이런 식이다. 우선 남자들 수를 줄인다. 능력 좋은 자들만 남긴다.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을 끼운다. 여성이 함께 나갈 때마다, 의도적으로 희생을 내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할 남자들을 죽인다. 돌아와서는, 여자들 대신 남자가 죽었다고 떠들어댄다. 물론 여자도 좀 죽어야 한다. 여성들 사이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공동체의 의식이 바뀌고, 여성들 스스로 자기 역할을 제한한다. 이미 발생한 희생들이 증거가 된다. 반박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살고 싶은 마음은 남녀가 같다. 여성들에겐 외부의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이점이 주어진다. 즉, 스스로를 설득하기 쉬워지는 것. 보다 안전해지는 대신,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포기한다. 그렇다. 양보는 곧 권력의 이동이다. 관제 AI가 의식의 흐름에 반응했다. 「AI 도움말 (통찰 10등급) : 『공동체 특성 - 남존여비』」 「공동체에 이 특성을 적용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⓵ 남녀성비 여초 180% 이상.』, 『⓶ 공동체에 속한 여성의 30% 이상에게 의지박약 특성을 부여.』, 『⓷ 공동체에 속한 남성들의 평균 기술등급이 여성들에 비해 5 이상 높아야 함.』, 『⓸ 여성에게 불리한 공동체 여론 형성.』, 『⓹ 공동체 구성원의 80% 이상에게 보수적 특성을 부여.』..........」 「『공동체 특성 - 남존여비』가 『겨울동맹』에 적용되었을 때 예상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⓵ 일부다처제 시행 가능.』, 『⓶ 조직 효율성, 건전성, 다양성, 생산성에 강력한 불변하향보정.』, 『⓷ 여성의 생산성에 강력한 불변하향보정.』, 『⓸ 여성의 공동체 외부활동에 치명적인 불변하향보정.』, 『⓹ 공동체에 속한 남성들의 의지에 하향보정.』..........」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장점은 거의 없고 단점은 압도적이다. 회차가 쌓였거나 DLC를 쳐바른 사람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겨울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싫다. "작은 대장이 저한테 뭘 바라시는지는 알겠어요." 이제껏 고민하던 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대장님이 미군의 광고판인 것처럼, 저도 대장님의 광고판이 되어야 하는 거죠?" "맞아요. 유라 씨가 아니면 누구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해요." "말도 안 돼요! 제가 얼마나 부족한데!" 이마를 감싸 쥐고 울상인 그녀. 용기는 있는데,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래서 그녀의 용기는 소극적으로 발휘된다. 달리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해야지. 파소 로블레스에서도 사실 그런 식이었다. "저 정말 싸우는 데 소질 없다니까요. 아시잖아요......." "몰라요." 이 대꾸에 유라는 할 말을 잃었다. 겨울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캠프를 나가보겠다고 자원하고도, 훨씬 더 위험한 일에 또 한 번 자원하셨잖아요. 그거야말로 진짜 소질이에요. 싸움? 솔직히 여기서 잘하는 사람 없어요. 제가 보기엔 다 비슷하거든요. 도토리 키재기에요." "그야 기준이 대장님이니까 그렇죠." 황당해하는 유라. 그녀에게 겨울은 이미 규격 외의 존재였다. "제 안목을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못 믿으세요?" "아니......그건......." 그녀, 차마 못 믿는다고는 못하고, 다시 울상을 짓는다. 겨울이 쐐기를 박았다. "정 힘들면 하다가 그만둬도 돼요." "네? 정말요? 왜요? 시간이랑 기회를 낭비하는 거잖아요. 저 말고 다른 분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낭비가 아니에요. 파소 로블레스에서, 제가 염소가 필요하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어? 아, 그거요? 네. 근데 그게 무슨......."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겨울이 「커럼포우의 왕」을 들려주었다. 그러고서, 다시 차근차근 어르는 말. "진심이에요. 힘들면 그만 두셔도 돼요. 그래도 유라 씨에겐 할 일이 있으니까요. 경험은 절대로 낭비되지 않을 거예요." "으으." 다시 이마 붙잡고 신음하다가, 유라는 겨우 수긍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해볼게요." "와, 감사합니다." 표정을 밝게 만드는 겨울. 유라는 한숨을 쉬고, 또 쉬고, 결국은 뒤따라 웃었다. "저한테 뭘 보고 그렇게 믿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게요."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진석은 아직까지 돌아선 모습 그대로였다. 겨울이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귀 막은 채 조용히 돌아보는 청년. 놀라는 모습은 없다. 겨울이 귀 쪽으로 손짓했다. "이제 귀 안 막으셔도 돼요." "끝난 겁니까?" "네." 겨울이 그를 곧게 응시했다. 진석이 금세 시선을 피한다. 그 성격에 지금껏 가만히 귀 막고 있었다는 것. 두드려서 움찔 하는 반응도 없는 것. 그리고 먼저 시선을 피하는 것. 마지막으로 표정. 속 읽기에 충분한 단서들. 엿들었구나. 엿듣지 않을까봐 걱정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한 것도 들었겠지. '그 때 일, 아직 신경 쓰고 있을 테니까.'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방치하면 앙금이 생긴다. 겨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 리더로서 입지가 굳어졌는데, 앞으로 내게 불이익을 주진 않을까? 이런 불안들. 분명히 품었을 것이다. 답 없는 고민은 결국 공연한 분노로 귀결된다. 그래서 이렇게 했다. 대놓고 하는 칭찬보다 효과가 좋으리라고. 모르는 척, 겨울이 말했다. "유라 씨가 전투조장이 되는 건 결정사항입니다. 리더로써 내린 결정이고, 번복할 생각 없어요." "알겠습니다." 별다른 반발이 없다. 겨울이 자기를 미워하는 게 아님을 알고, 그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 반응으로부터 그가 들었음을 다시 확신한 겨울. 이어서 말한다. "그래도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뭡니까 그게." "전 유라씨가 '첫 번째' 라고 했었어요. 한 번 뿐이라, 다들 흘려들으신 것 같지만요." "그렇다는 건......." 떠오르는 기대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의용소대를 편성해야 하거든요. 전투조장을 분대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최소한 두 명, 정규편성이면 네 명, 교대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이 필요해요. 제가 생각하는 두 번째가 진석 씨에요. 오늘 당장은 인력 문제로 무리지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층 더 단단해진 말투.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가 봐도 되죠? 「스미요시카이」 쪽 사람들하고도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 진석이 긴장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렴요." 그는 기대하지 않았던 목례까지 하고 물러났다. 형식일 뿐이지만. 유라는 또 고민했다. "제가 전투조장인데, 위험한 데 가는 거면 호위로 따라가야 하는 거 아녜요?" "아직 거기까진 기대 안 해요. 유라 씨 능력에 가능한 일만 맡길 테니까, 안심하세요." "하아, 다행이다." 한층 밝아졌다가, 다시 정색하고 겨울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그 사람들 되게 무서워요. 악에 받혀서 굉장히 사납대요."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아직 머리는 달려있으니까, 이 상황에 절 어쩌진 않겠죠." "그런가아......." 그녀는 그렇게 마음 놓인 뒤에야 떠났다. 그래도 아직 겨울에게 용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민 부장님은 무슨 일이세요?" 민완기는 조용히 다가와,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 "박진석 씨를 부추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 있겠죠." 겨울이 감지했던 예의 그 시선들. 그 가운데 욕심 많은 사람들이, 진석의 지지자를 자청했을 것이다. 세력을 만들고, 친목을 쌓으려고 하겠지. 너무 쉽게 수긍하니, 민완기에게 뜻밖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전투조장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언젠가 치울지 모를 것들은 보이는 데 모아놔야 편하잖아요. 전투조장이 된 진석 씨 정도면 좋은 미끼 아닌가요?" "......." 소년의 여상스러운 목소리. 흐음. 안경을 올린 민완기가 소년을 평했다. "작은 대장님은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셨군요." "글쎄요. 제가 착할 수 있고, 착해도 되는 사람들에게만 착해지려고요. 그리고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잖아요. 치우는 일은 없을 거예요." 표현은 소박한데 무게가 무겁다. 허허 하고, 중년 학자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자신이 할 일을 알아서 찾는 사람이었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잘 지켜보겠습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도 이제 간부 딱지가 붙었으니, 속 깊은 접근과 유혹들이 있을 것이었다. 친해져서, 뭐라도 이득 보고 싶은 사람들. 파벌. 사람과 욕망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 33 [33화] #교섭, 캠프 로버츠 (3) 일본인 수용구역. 그 중에서도 「주길회(스미요시카이)」의 경계. 지키는 사람은 전과 같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인력이 부족한 걸까. 겨울은 후자의 가능성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너, 전의 그 조......한국인이군." 겨울이 누군지, 이미 아는 눈치다. 습관적으로 나오던 조센징을 꿀꺽 삼키는 일본인. "네. 전에 한 번 뵈었었죠." "무슨 용건이지?" "마약 문제로, 카이쵸(會長)님을 뵐 수 있을까 해서." "오야붕(親分)을? 그는 조심스럽게 겨울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소년이 지닌 무기들을. 연방군 장교로서, 겨울은 캠프 내 무기 휴대가 자유로웠다. 그렇다고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 고민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하겠다. 잠시 기다려라." "그러죠."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다이스케라고 했던가? 쿠시나다 세츠나를 데리고 사라졌던 남자. 그는 발이 빠른 편이었다. 부리나케 다녀와서, 자기 형님에게 작은 말을 속닥거렸다. 이윽고, 파수꾼 중 형님 쪽이 겨울에게 손짓했다. "만나보겠다고 하신다. 따라와라." 뒤따르니, 얼마 안 가 많은 수가 들러붙었다. 호위인지 포위인지 애매한 자들. 사실 후자에 가깝다. 기를 누르려고 눈을 부라린다. 겨울은 그저 만들어진 미소만 보여주었다. 따라가는 사이, 보이는 풍경은 일본인 구역의 적나라한 실태였다. 여기저기 페트병으로 만든 쥐덫이 놓여있다. 어느 하나는 쥐가 갇혀 발광하고 있었다. 누군가, 주인보다 먼저 낚아챘다. 어린 아이는 분노한 주인을 피해 달아나면서, 쥐를 산채로 물어뜯었다. 뛰어가는 발자국을 따라 쥐의 내장과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퉁이엔 약에 취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메스암페타민은 복용자의 허기를 쫓아준다. 그래서 역병 창궐 이전, 북한에서도 인기가 좋은 마약이었다. 일부러 더 구부려놓은 길을 따라 도착한 천막. 「神州不滅」 (신의 땅-일본-은 멸망하지 않는다.) 적갈색 글씨가 눈에 띄었다. 말라붙은 피의 색이다. 천막 가운데 글씨를 걸어놓고, 그 아래 웃통 벗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상반신이 흉터와 문신으로 가득했다. 인상적으로 두꺼운 근육. "한, 겨, 울." 그는 겨울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일본인에겐 어렵다. "앉아라."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봐야 맨바닥, 천 한 장 깔아두었을 뿐이지만. 겨울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 뒤, 무장한 남자들이 좌우로 줄지어 앉았다. 일찍이 「다물진흥회」가 그랬듯이. 목적 또한 같을 것이다. 열심히들 노려본다. 야쿠자 두목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소년을 관찰하듯이. 그러다가 툭 던지는 말. "술?" "사양하겠습니다." "대범해도, 아직은 어린가." 미리 이야기가 있었던 것처럼, 별다른 지시 없이 상이 나왔다. 술을 사양했더니 물과 고기만 올렸다. 잘 구워진 고기는 크기가 컸다. 어쩌면 시궁쥐일지도.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놀랍네요. 이건 무슨 고기인가요?" 좌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잔뜩이었다. 주길회장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돼지다." 그럴 수도. 가능성은 있었다. 미군에 뭔가 상납하고, 대가로 받은 것이라면. 그래도 어딘가 미심쩍다. 냉장 체인이 없어진 지금, 신선한 돼지고기는 지나치게 귀한 식량이었다. 겨울은 식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주길회장은 겨울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 "대범하지도 못하군." "신중한 거죠." 그러자 피식 웃는다. "그 신중한 사람이 여긴 뭐 하러 왔을까. 정말로 마약 때문인가?" "네." 두목은 술시중을 받았다. 덧니를 제외하면 아주 예쁜 여자가, 술을 따라주었다. 주둥이 넓은 잔이 연거푸 비워진다. 술기운 섞인 긴 한숨을 내쉬고, 야쿠자 두목이 물었다. "마약을 사겠다는 거냐, 아니면 팔겠다는 거냐."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마약 파는 한국인과 중국인들, 그들이 상품을 입수하는 방법, 그리고 유통경로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알면?" "청소하려고요." 여기까지 아주 조용한 문답이었다. 두목은 잔을 내려놓았다. "타다아츠 료헤이(忠渥良平). 「스미요시카이」의 주인이다." "아시겠지만, 한겨울입니다. 「겨울동맹」의 대표를 맡게 됐습니다." "대표라. 애매한 호칭이군." 료헤이는 손가락으로 빈 잔을 두드렸다. "청소한다는 건......죽이겠다는 뜻인가?" "다른 방법이 없다면요." "이 바닥에서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다. 죽느냐, 죽이느냐. 둘 중 하나지." "그건 당신 같은 야쿠자나 할 생각이고요." 시끄러워졌다. 분분히 부엌칼, 나이프 따위를 꺼내드는 행동대원(組員)들. 움직이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흉흉하게 휘두른다. 거친 욕설은 덤. 겨울 혼자 생각하길, 하여간, 어딜 가나 하는 짓들이 비슷하다. 실제로 싸울 것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내보이는 허세들. 두목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묵묵하다. 겉멋이라 쳐도, 막리지 운운하던 미친놈보다 백배 나았다. 료헤이가 말했다. "정보에도 값이 있는 법. 그냥은 알려줄 수 없지." "값을 어떻게 치를까요?" "죽여라."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 "시나징(支那人 : 중국인)들이 우리를 핍박할 때, 너희 조센징들도 합세하여 기승을 부렸다. 약쟁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었다.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불쌍하고 굶주린 일본인들은 가진 거 다 내놓고 약을 받아온다. 줄 게 없으면 딸과 아내까지 내주면서 말이야. 사실, 여자들 스스로도 그러고 있다만." 야쿠자는 두 눈에 불이 붙어 있었다. "약속해라. 죽이겠다고. 아는 걸 모두 알려주마." "차도살인(借刀殺人)에는 관심 없습니다." 정보가 확실하단 보증도 없는데 약속은 무슨 약속. 겨울이 자리를 털었다. 부산하게 일어서는 사람들. 출구를 막는다. 그 시점에서 겨울은 이미 권총 그립을 붙잡고 있었다. 야쿠자들은 몸을 떨면서 얼굴만 험악했다. 비킬 생각은 없어 보인다. 깡패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배짱. 이들도 그동안 고초를 겪었다는 증거였다. 등 뒤에서 료헤이가 말한다. "앉아라." 겨울이 차분하게 답했다. "못 막을 걸요?" "그래, 못 막지. 그래도 다 죽여서 뚫어야 할 거다." "죽일 수 없을까봐요?" "손해잖나." 아무리 무기 휴대가 가능해도, 대량으로 죽이면 당연히 부담이 된다. 적어도 캠프 사령관과는 마찰이 생길 터. 겨울은 잠시 생각하고서, 권총 놓고 도로 앉았다. "내놔요." 겨울이 쏘아붙였다. "난 내 사람들이 약 먹고 미치는 게 보기 싫을 뿐이에요. 정신 나간 사람들하곤 어떤 식으로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아는 게 있다면 내놔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당신들이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싸움 나면 구경이나 하시고요. 말했죠? 필요하면 죽입니다." "손을 잡자고 한다면?" "때가 아니에요. 중국인들이 서로 싸울 때, 정신 나간 한국인들 밟아놓고 고려해보죠. 당신들이 제정신인지도 알아봐야겠고." 료헤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국적은 상관없다는 뜻이군. 좋다. 네 전적이 있으니 믿겠다." 전적이라는 건, 극우 미치광이들에게서 소녀 하나 구해온 걸 뜻할 터. 그는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남녀 한 쌍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료헤이는 그들을 불러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달달 떨던 한 쌍이 고개 끄덕이더니, 가지고 있던 가방에서 깨끗한 종이와 필기도구, 그리고 그림 몇 장을 꺼냈다. 자리에 앉아서 종이에 그림을 베끼기 시작했다. "만화 그리던 연놈들인데 손재주는 좋다." 료헤이가 말했다. "다른 놈들이 약을 어디서 캐내는지는 모른다. 판로도 마찬가지. 아는 건 사람뿐이니,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그려서 주는 게 낫겠지." "미리 준비하셨나 봐요." "항쟁이 또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 싸울 때 누굴 먼저 죽여야 할지, 꼬붕(子分)들에게 미리 알려주려니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확실히. 겨울은 남녀의 가방 안에 들었을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겨울동맹」 사람들의 몽타주도 있을까? 보는 사람 족족 그려놓고 정보를 추가하는 식이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다 된 모양이군." 남녀가 눈치를 보자 야쿠자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쌍 중 남자 쪽이 겨울에게 다가왔다. 바들바들 떨면서,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겨울의 소문이 험하게 난 탓일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소년을 사이코패스 살인마, 피에 미친 인간백정으로 여겼다. 어린놈이 제대로 미쳤다고. 공포도 자산이었다. 겨울은 그리 생각하며 받은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괜찮네요." 몇몇은 지나가며 본 얼굴들이다. 일부는 여백에 정보가 적혀있다. 목격된 장소, 일자, 행동 등. 소속 조직과 이름도 간혹 보였다. "결국 식사는 손대지 않는 건가?" "실례. 배부르게 먹고 다니거든요." "유감이군." 떠나려는 겨울에게 야쿠자 두목이 말했다. "다음에 볼 땐 날 민족지도자라고 생각해라." 이에 대한 겨울의 대답. "하는 거 봐서요." 겨울이 지나치게 무례한 것 같아도, 먼저 무례한 건 야쿠자 쪽이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한 조직을 대표하는 겨울이, 먼저, 직접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경칭을 생략했으니까. 의(義)를 강조하는 야쿠자 세계에선 대놓고 던지는 모욕이었다. '어차피 자기미화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 야쿠자는 의, 흑사회는 협. 범죄조직마다 그럴듯한 미덕을 강조한다. 그거라도 강조하지 않으면, 범죄자 집단에 규율이 생길 리가 있나. 료헤이로서는 체면관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야쿠자가 민족지도자를 운운하는 건가.......' 난리 나기 전에, 일본인들에게 마약을 팔던 게 료헤이 그 자신이었을 터. 그래도 통할지 모른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재해가 터졌을 때 자위대보다 먼저 오는 게 야쿠자라는 말이 있다. 범죄집단이 이미지 관리에 그만큼 철저하다는 뜻이며, 일본 관료제가 그만큼 경직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때, 가까워지는 인기척. 다수다. "저어......시, 실례합니다. 한겨울님 되십니까?" 나이 지긋한 남성의 목소리. 말 거는 거리가 애매하게 멀었다. 나가는 겨울에게 붙어 눈 부라리는 구미잉(組員)들 탓. 가족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불안을 견디며 서 있었다. 겨울은 부모와 딸 중 딸 쪽을 알아보았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세츠나 양은 오랜만이네요." 쿠시나다 세츠나. 잘 지낸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혈색은 나아졌고, 복색도 전보단 좋다. 표정이 어두울 뿐. 시선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자식 나이에 비해 많이 늙은 부모가 허리를 굽힌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딸아이를 구해주셨다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겨울이 차분하게 답하려는 찰나, 성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진짜! 아버지! 어머니! 내가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왜 죠센징한테 굽실거려!" "음?" 돌아보면, 인상 일그러진 청년이다. 두툼하다. 성큼성큼 오더니 부모를 꽤 거칠게 다뤘다.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겨울을 노려보았다. "인간쓰레기(にんげんのくず)야, 넌 뭘 잘했다고 인사를 받아?" "......."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놈 뭐지? 가족인 모양인데, 한 핏줄 같지 않은 인상이다. 유전자 탓이 아니면 어지간히 잘못 지은 농사. 부모 중 어머니 쪽이 타일렀다. "얘야. 이게 인간의 도리 아니냐. 도리를 잊은 사람들 사이에 저런 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저런 분? 저런 부우운? 하, 진짜." 그가 마구 소리 질렀다. "엄마, 귓구멍 막혔어? 죠센징이라고! 죠! 센! 징! 반도 새끼들은 다 똑같다는 거 몰라? 씨발, 강도가 물건 훔쳐가서 대충 쓰고 돌려준 거라고! 다 헤진 물건 돌려받고! 고맙긴 뭐가 고마워! 쪽팔려서 진짜!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저기요." 인상 찌푸리는 겨울. "저에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는데, 동생을 물건 취급하진 마시죠." "뭐?" 청년이 사납게 웃었다. "저건 내 동생이 아냐. 그저 암퇘지일 뿐이지." 세츠나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아랑곳없이, 청년은 동생의 심장에 비수 같은 언어를 마구 찔렀다. "일본인으로서 최소한의 자긍심이 있다면, 잡혀갔을 때 자살을 했어야지! 더럽혀진 몸으로 어딜 다시 기어들어와! 그것도 죠센징 손을 잡고서! 일본인은 긍지로 사는 민족이다! 암퇘지! 아아, 암퇘지고 말고! 원수에게 몸 팔고 돌아온 여자는 암퇘지일 뿐!" 긍지는 개뿔이. 싸해지는 겨울의 시선. 적의에 비례하여 활성화된 「위협성」이, 당장 청년의 말문을 막았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손수건 챙겨 다녀야겠다 생각하고, 잊지 않아 다행이었다. 울고 있는 소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콱! 명치 찔린 청년이 숨도 못 쉬고 쪼그라들었다. 부모의 짧은 비명. 그 위에 떨어지는 겨울의 조용한 목소리. "아드님 교육에 신경 좀 쓰셔야겠네요. 인사는 잘 받았습니다. 실례할게요." 긍지는 삶의 필수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랑이다. 위로하고, 보듬고, 아픔을 나누고. 그러고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여기나, 현실이나. 겨울은 생각하며 걸었다. # 34 [34화] #저널, 55페이지, 캠프 로버츠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방송은 오늘도 낙관적인 멘트로 시작됐다. 「「그럼블 쇼크」로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의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우리는 봉쇄선 이서지역 최후의 대도시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 이른 좌절이었습니다. 미국의 용감한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거리와 건물들을 요새화했습니다. 여기에 살아남은 경찰과 군 병력도 합류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제때 탈출하지 못한 17만 명의 시민들이 안전한 거점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장교숙소의 장점 중 하나는 방마다 배치된 TV였다. 나오는 건 뉴스와 재난방송 뿐이지만, 바깥소식을 제때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했다. 일찍 일어난 아침은 여유로웠다. 내 소속이 연방군이라서 그렇다. 난민 출신 파견장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 제대로 된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 의용소대가 완편 될 때 까진 보직도 불분명한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심지어 핵공격이 있었던 새크라멘토에서도 생존자들의 신호가 발견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공중에서 조감한 새크라멘토의 전경이 화면에 비춰졌다. 전문가 의견이 이어진다. 위력 약한 전술핵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핵폭발이 있었던 건 시가지 동쪽, 봉쇄선 방향으로 빠지는 길목들이었다. 생존자들의 거점은 폭심지에서 서쪽으로 15km 이상 이격되어 있었다. 시가지 중심의 수많은 건물들이 방사선을 막아주었을 법 했다. 그래봐야 낙진이 떨어졌겠지만. 지연된 죽음. 「보십시오. 시가지 곳곳에 성조기가 걸려있습니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저들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저들을 버려선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앵커의 고양된 음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봉쇄선 이서의 오염지역 수천개소에서 추정규모 80만의 시민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부는 물자공수를 위해 항공역량을 집중 투입하는 한편, 여객기를 징발하여 수송기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국방부 대변인은 크리스마스 연휴 전까지 일일 수송량 5천 톤을 달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00만 이상의 시민들을 부양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합니다.」 화면 가득,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지는 보급물자들이 비춰졌다. 「세계가 위태로운 이 순간에도, 미합중국은 여전히 강력한 국가입니다.」 하늘을 가득 담는 앵글. TV 속의 세계는 언제나 밝았다. #광대 (1), 캠프 로버츠 저널은 끝났지만, 방송은 식당에서도 볼 수 있었다. 미군 식당을 이용한 이래, 겨울은 천장에 걸린 TV가 꺼진 걸 본 적이 없다. 아침식사. 로버트 캡스턴 중위, 그리고 찰리 중대 간부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은 끼니마다 꼭 겨울을 기다린다. 물소위가 소외될까 걱정이란다. 병사들과 친하다곤 해도, 장교 체면이 있으니 간부들과 함께하는 게 낫다던가. 고깝게 여기는 타 간부들로부터 방패가 되어줄 수도 있다고. 배려가 깊다. 겨울은 저널 진행으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고, 다들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다. "방송은 걸러서 들어야지. 그놈의 애국적 보도 관행 때문에......." 캡스턴 중위는 신중했다. 정부담화는 물론이고, 공신력 있는 언론기관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미국 언론들은 국가에 불리한 보도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피어스 상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2차 대전 때부터 생긴 전통 아닙니까. 뭐 그땐 진짜 나쁜 새끼들이 적이었으니까 이해는 갑니다." 소대장 중 한 명인 맥코이 소위가 끼어들었다. "헬기로 수송하는 편이 더 확실할 텐데. 구출도 가능하고. 그치만 아무래도 숫자가 부족하겠죠. 정비성도 문제, 수송량도 문제, 소음 탓에 착륙지점으로 몰려들 잡것들도 문제, 엿같이 퍼먹는 연료는 더더욱 문제. 여러모로 문제투성입니다." 제프리가 맞장구쳤다. "맞아. 그렇다고 이대로 항공수송에만 매달리긴 좀 그렇지. 생존자들이 도시에 띄엄띄엄 분포하는 데, 낙하산 달고 떨어트려봐야 회수율이 얼마나 되겠어? 위험 지역에 떨어지면 포기해야지. 하긴 그러니 위에서도 하루 5천 톤씩 뿌리려고 하는 것일 테고. 돈지랄은 옛날부터 이 나라의 필살기 같은 거였잖아." 확실히 그렇다. 제프리가 불평한다. "전부터 그 짓 하느라 보급이 부족해. PX를 일주일에 이틀만 열어주다니. 원래는 그 반대잖아? 특히 술이 없는 게 치명적이야. 들어오는 족족 매진이니 원......." 캡스턴 중위가 눈살을 찌푸린다. "폐쇄되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해. 이 와중에 필수적이지도 않은 소티(Sortie : 항공기 비행 횟수)를 할당해주는 거니까. 상부에서 일선 부대들 사기유지에 그만큼 필사적이라는 뜻이다. 혹여 병사들 앞에서 불평 하는 일 없도록." "에휴. 알겠습니다." 젊다 못해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소대장은 투덜거리며 불만을 삭였다. 캡스턴 중위는 PX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명색이 정식 장교인데......급여는 어떻게 받기로 했나?" 임관한 뒤로, 그는 겨울을 자네 또는 소위 하는 식으로 편하게 불렀다. 겨울이 소위가 되면서 받은 것들 중엔 연록색 현역 신분증과 급여통장, 카드도 있었다. 겨울은 급여카드를 받았다고 답했다. "지급 기준은 O-1인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제 임관은 특수한 경우였고, 여러모로 갑작스럽게 진행됐으니까요. 그냥 매달 3천 달러 조금 안 되는 금액을 받게 된다고 들었을 뿐이죠."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 그대로 기본급이고, 생명수당이나 피복수당, 특수임무수당 같은 것도 포함해야 할 텐데......시국이 이래서 자세한 설명이 없었던 모양이군. 내가 한 번 알아보지." "항상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고마워할 것 없네. 자네한테 진 빚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니까." 하여간 고지식한 사람이다. "혹시 현금이 필요하면 숙소의 ATM을 써요, 물소위. PX엔 없거든." 피어스 상사가 조언했다. "현금 쓸 일이 있을까요?" 소년이 묻자 상사는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아직 모르는가본데, 난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병사들이 있답디다. PX에서 뭔가 사서 바가지 씌워 판다더군요. 난민들이 의외로 돈 가진 게 많다고 하면서......어휴, 군인의 기본도 안 된 못난 놈들. 이 상황에 돈 모을 생각이나 하고......." 그는 혀 한 번 차고 중위에게 물었다. "상부에서도 이걸 알고 이용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확실치는 않습니다만......그런 거 같더군요. 난민 출신 장교 한정으로 계급에 따라 거래한도를 정하고, 수훈자 할인율을 따로 적용할 모양입니다." 겨울은 납득했다. "저 같은 난민 장교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거네요. 동기부여도 하고." "맞네." 중위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달가웠다. 좋은 정보다. 담당자가 누군진 몰라도, 머리를 제법 잘 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따다다다닷!] TV에서 폭음과 총성이 흘러나왔다. 신경 끄고 있는 사이에 화면이 바뀐 모양이다. 아래에 자막이 흘렀다. "샌디에이고인가." 제프리가 중얼거리는 소리. 보이는 것은 격전이었다. 멀리 리조트가 보이는 하얀 백사장. 이어지는 도로는 한 줄기 뿐이다. 좌우 폭 좁은 길. 해병대가 가느다란 사주(沙柱)를 봉쇄했다. 사주를 관통하는 도로와 파도치는 해변을 따라, 무서운 수의 감염변종들이 밀려들었다. 다수의 그럼블이 섞였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이 집중된 좁은 길목을 도저히 뚫지 못한다. 폭음에 한 꺼풀 거리가 씌워지고, 배경에 앵커의 목소리가 깔렸다. 「지금 보시는 것은 어제 오후에 있었던 제1해병원정군의 노스 아일랜드 방어전입니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이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샌디에이고의 해군보급창과 할시 필드 공항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저긴 얼마나 갈까요?" 맥코이의 의문. 중위는 낙관적이다. "오래 갈 거야. 들어가는 길이 도로 하나, 다리 하나뿐이라 지키기 좋지. 위에서도 필사적으로 지원할걸? 저곳마저 떨어지면 태평양에서 들어올 병력을 받을 곳이 없잖나. 샌디에이고 시민들을 구조할 거점도 필요하고. 바다로 탈출한 난민들은 저기서 보급을 받을 수 있겠지." 피어스 상사가 한숨을 쉰다. "그나저나 죽다 만 것들 숫자가 아직도 대단하군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변이된 인구가 엄청나다고 하잖습니까. 죽이고 또 죽이다보면 언젠가는 바닥이 보이겠죠." 맥코이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상사는 여전히 찜찜한 표정이었다. "이봐요, 소위님. 내 말은 그게 아닙니다. 감염변종도 뭔가 먹어야 힘이 날 거 아뇨. 저 많은 숫자가 아직도 팔팔하게 뛰어다니는 게 이상하다 그 뜻이지." 그러자 맥코이가 낄낄 웃는다. "공포영화 본 적 없으십니까? 좀비는 원래 굶어죽지 않아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마칠 때 쯤, 관내 방송이 겨울을 찾았다. 「한 기어우르 소위는 09시 정각까지 작전과로 올 것. 반복한다. 한 기어우르.......」 "제 이름이지만 듣기 참 이상하네요." 같이 앉은 사람들의 실소. 대대장이 겨울을 찾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파견장교의 지휘권이 대대장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별 일 아니길 바라네." 캡스턴 중위는 끝까지 걱정이었다. 작전과에서 겨울을 기다리는 장교는 셋이었다. 수척한 얼굴의 대대장 하나, 대대 작전과장, 그리고 얼굴 낯선 대위 하나. 대위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겨울이 대대장을 향해 경례했다. 머리 반쯤 까진 대대장은, 게슴츠레한 눈에 겨울을 담는다. "왔나." 술 냄새. 테이블 위에, 반쯤 비어있는 독한 술 한 병. 아침부터 많이도 마셨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어도 보고 미간을 찡그리기도 했다. 낯선 대위의 안색이 더욱 나빠진다. 그걸 본 대대장이 낮게 웃었다. 네가 어쩔 거냐는 식으로. 망해가는 세상이다. 일개 대대장이 난민 캠프 사령관을 겸하게 되었으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것이었다. 그게 변명이 되진 않겠지만. "편히 있게, 소위." 열중쉬어. 겨울이 자세를 바꾸었다. 대대장이 낯선 대위를 소개한다. "먼저 인사부터 하지. 이쪽은 닐스 맥과이어 대위. 공보과에서 나왔다네. 대위, 저쪽이 자네가 기다리던 한......한 뭐시기 소위일세." 소년과 대위는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좋아. 그럼 소위, 자네를 부른 용건부터 말하지." 그는 겨울에게 내려온 특별임무에 대해 설명했다. "국방부에서 홍보 및 교육영상이 필요한 모양이야. 뭐, 별 것 없어. 산타 마리아로 가서, 거기 출몰한다는 괴물 몇 마리 멋지게 잡아주게. NG만 내지 않으면 금방 끝나겠지." 산타 마리아는 캠프 로버츠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다. 그보다 훨씬 더 가까운 파소 로블레스가 가까스로 작전권인 걸 감안하면, 이동수단은 차량이 아닐 것이었다. 역시나 헬기지원이 있었다. 귀찮은 대대장 대신, 작전과장이 지도를 펼쳤다. "작전은 익일 0600시를 기해 개시한다. 10분 전까지, 단독군장으로 중앙 연병장에 올 수 있도록. 시끄러운 헬기를 타고 도심까지 이동할 순 없으니, 이곳, 산타 마리아 동북쪽의 경작지에 착륙할 것이다. 예정시각은 0630시다. 레인저 1개 중대가 안전을 확보한 지역이므로 이 단계까지는 위험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지원 병력과 합류, 작전지역까지 도보로 7km 이동한다. 여기서 잠시 대기. 색적조가 목표물을 유인해오면, 귀관이 사냥한다. 이걸로 작전은 종료된다. 질문 있나?" 여기까지, 워낙 일방적인 통보였다. 군인이 원래 그런 직업이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물을 유인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사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소음을 만드는 드론을 쓸 계획이다." "가능합니까?" "이미 수차례의 실험으로 검증했다. 감염변종들의 지능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그 지능, 갈수록 높아지는데.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모겔론스」는 숙주를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소년을 관찰하던 공보장교. 한 마디 툭 던진다. "같이 행동했던 병사들의 증언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군." "할 수 있으니까요." "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 제가 원하는 사람을 데려갈 수 있습니까?" 겨울이 묻자, 작전과장은 단호하게 잘랐다. "불가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겨울 한 사람이었다. 겨울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부분 안전이 확보된 환경이라면, 동맹의 예비 소대원들에게 좋은 경험을 쌓게 해줄 수 있을 텐데. 그 뒤로 세부적인 내용 전달이 이어졌다.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 35 [35화] #광대 (2), 산타 마리아 이튿날, 새벽 5시 50분. 중앙연병장. 겨울은 정시에 도착했다. 두 대의 헬기(MH-6)가 엔진을 덥히고 있었다. 작다. 동글동글한 생김새. 군용장비답지 않았다. 다리를 내놓고 앉도록, 헬기 좌우에 긴 철판이 붙어있다. 소년 앉을 자리만 비어있었다. 먼저 앉은 자들이 관심을 드러냈다. 공보장교만 무심하다. 날개는 정각에 돌기 시작했다. 딱딱딱딱- 하는 특이한 소음. 예상보다 작다. 특별한 소음 저감장비를 달았다고, 조종사가 말했다. 날개 회전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순간적으로 짓눌리는 느낌. 중력을 거스르는 감각이 가슴을 조여 온다. 하늘이 다가오고 땅이 멀어졌다. 일출은 아직이었다. 서늘한 쪽빛 세계에서, 하늘은 새벽과 아침의 경계였다. 디딜 곳 없는 발 아래, 스쳐가는 지상 풍경. 소년과 이름이 같은 계절. 겨울은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젖지 않는 물결이 흘렀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중사 한 명이 경고한다. "소위님. 그러다가 떨어지십니다." 그렇잖아도 시청자들의 비명이 쌓이고 있었다. 소년의 감각을 공유하는, 다른 세계의 구경꾼들. 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다. 그러길 바랐다. 추락방지 고리가 있었으나 달지 않았고, 손잡이가 있었으나 잡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섰겠지. 헬기가 기울었다. 항로는 구부러진다. 언제나 캠프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하늘을 보고 열심히 뛰는, 먼 아래의 배고픈 것들. 모든 방향에서 숫자가 많았다. 소음을 줄였어도 헬기는 헬기였다. 헬기 두 대가 적절한 자리에서 호버링했다. 몇 분 정도. 충분히 유인한 다음, 그제야 다시 비행을 재개한다. "혹시 헬기를 이런 식으로 타보셨습니까?" 안전을 경고했던 중사의 질문에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에요."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중사가 다시 재미있어했다. "정말 겁이 없군요. 어지간한 초임 소위보다 낫습니다." "실전에선 더 나은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그렉 중사." "기대하죠." 도착까지 남은 시간, 겨울은 지급받은 장비를 확인했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것도 좋았는데, 촬영을 위해 더 좋은 것들을 받았다. 신형 소총, 각종 액세서리, 리시버 형 무전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방탄 헬멧(OPS-CORE) 등. 정식 보급품이 아닌 것도 있었다. 착륙지점은 고속도로가 지나는 능선 뒤편이었다. 협곡을 따라 접근했으므로, 도시 쪽으로는 소음이 덜 전해질 것이었다. 레인저 몇 명이 착륙을 유도했다. 레인저의 임시 중대본부는 화려한 저택이었다. 본채 말고도 별채가 두 동이나 되고, 커다란 수영장과 목장, 보기 좋은 울타리까지 있었다. 태양광 패널로 전력을 자체 수급했다. 입지도 좋았다. 길이 낮아, 근처를 지나가도 저택을 볼 수 없었다. 「울프 리더, 당소 울프 쓰리. 서커스 팀 도착 확인.」 무전기에서 레인저들의 교신이 새어나왔다. 그나저나 서커스 팀인가. 호출부호가 또 엉망이었다. 겨울에게 배정된 부호는 어떻게 될까. 그게 무엇이든 바나나보단 낫겠지만, 많이 낫진 않을 것이다. 과연 그랬다. 숙지하라고 알려주는 내용 중, 겨울의 호출부호는 클라운(어릿광대)이었다. 중대본부에 들를 필요는 없었다. 합류한 레인저들이 겨울에게 잠깐 관심을 보였다. 그 표정, 우호적이지 않다. 애송이를 보는 눈빛. 그들은 서로를 간단히 소개하고, 곧바로 출발하자고 요구했다. 워낙 대충이어서, 누가 누군지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이번 임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 그 와중에, 한 사람은 겨울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넸다. "TV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용감한 일을 하셨더군요." 악수를 청하는 남자. 다른 대원들과 복장이 달랐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소위 한겨울입니다. 아직 소속은 없네요." "산타 마리아 경찰 SWAT 팀, 페리 경사입니다. 시가지 안내역이죠. 오늘은 들어갈 일 없겠지만." 즉 그의 역할은 드론 비행경로에 대한 조언이었다. 정해진 경로 외에, 별도의 임기응변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했을 터. 레인저 소대장이 귀찮은 시선을 던졌다. "시간 없습니다. 머뭇거리지 맙시다." 일단 걸었다. 도로 양편으로 나뉘어서, 사방을 경계하며. 레인저 입장에서 「서커스 팀」은 호위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겨울과 공보장교의 촬영팀을 가운데 두고, 레인저가 앞뒤를 막았다. 페리 경사는 겨울 바로 앞을 걸었다. 살짝 돌아보며, 작은 말을 건넨다. "이해하세요, 한 소위. 이 사람들도 많이 힘듭니다. 정신적으로 지쳐있죠." "다들 여기서 얼마나 있었나요?" "저는 한 달 정도 됐는데, 레인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난리 터진 직후부터 오염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과연, 소대병력 치고 규모가 좀 적다. 겨울은 숫자를 헤아려보았다. 1할 정도의 병력손실. 이 정도면 후방으로 빠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정상이 없는 시대. 차근차근 멸망해가는 세계관이었다. 작게 말해도 들렸나보다. 가까운 레인저 한 명이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경사가 웃으며 사과한다. 성격이 좋다. 7km는 속보로 걸어도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가는 내내 묵묵하기도 어렵다. 페리 경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친화력을 발휘했다. 캠프 로버츠의 사정을 궁금해 하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것들을 늘어놓기도 한다.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산타 마리아는 대피가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도시 중 하나입니다. 시장님의 결단이 빨랐죠. 주지사님께 요청해 주방위군을 동원했습니다. 좀 혼란스럽긴 했지만, 다른 도시들이 겪은 아비규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97%의 시민들이 무사히 대피했으니까요." "그럼 3%는 어떻게 됐죠?" "산타 마리아의 마지막 구조 요청은 두 달 전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전신이었죠." 경사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근접 항공정찰을 꾸준히 실시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레인저의 정찰도 있었죠. 하지만 두 달 동안 생존자의 증거는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이라......." 그는 말끝을 흐린다. 그 뒤의 대화가 이전 같지 않았다. 도시가 가까워졌다. 시인성 높은 고속도로를 피해, 남쪽 단선도로로 접어들었다.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다만, 의외로 공보장교가 침묵을 깨기는 했다. "젠장. 무슨 놈의 바퀴가 이렇게......." 정말 많았다. 도로에도, 풀숲에도, 어디를 보더라도 몇 마리는 보인다. 퍼덕퍼덕 날아다니는 커다란 벌레들. 익숙한 레인저들은 인상만 찌푸렸다. 공보장교와 그의 팀은 아주 진저리를 쳤다. 파다다닥. 홰치며 날아온 한 마리가, 겨울의 얼굴에 붙었다. 대충 떼어 날려 보낸다. 마침내 제방에 도달했다. 다리만 건너면 산타 마리아 시다. 촬영팀이 가지고 온 장비들을 설치했다. 레인저 쪽에선, 드론을 다루는 병사 둘이 작업에 들어갔다. 연료량과 수신 감도, 각종 기능을 시험한다. 기능 가운데엔 노이즈 메이커도 있었다. 볼륨을 줄이고,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지 돌려본다. "비명이네요?" 여러 사람들의 단말마, 구해달라는 절규와 신음의 화음들. 겨울이 묻자 병사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보통 소음으로는 유인 효율이 낮으니까요. 사람 음성에 잘 반응하고, 그 중에서도 비명에 대한 반응도가 훨씬 높습니다. 짧은 패턴 반복도 좋지 않고요." 의외로 성실한 답변. 겨울은 계급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드론이 날아올랐다. 조종 장치는 작은 가방처럼 생겼다. 드론 컨트롤 전용으로 제작된 러기드 노트북이었다. 공보장교가 겨울과 나란히 서서 화면을 들여다본다. 골목과 골목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열원을 추적하는 드론의 센서가 바쁘게 움직였다. 건물 내부에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거리에 있는 변종들만으로도 상당한 숫자였다. "시민 대부분이 탈출한 것 치고 상당히 많군." 공보장교가 중얼거리자, 여전히 귀찮아하면서 성실한 병사의 답변. "주변 지역에서 몰려들더군요. 여기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방향을 어떻게 잡는지, 도시권으로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이유는?" "알면 저희가 여기 있겠습니까?" 퉁명스러운 대답. 공보장교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울은 답을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관제 AI가 상황연산으로 보정하거나, 보정이 불가능하면 롤백을 시도할 것이었다.(Roll-back : 오류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림.) 롤백이 반복되면 불이익이 주어진다. 감염변종들은 음지를 선호했다. 어두운 골목마다 가만히 모여 있는 놈들. 볕드는 대로를 빤히 보는 중이다. 무언가 산 것이 지나가면,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다. 마침내 화면에 그럼블이 잡혔다. 병사가 보고했다. "부기 원 발견. 가까이에 부기 투도 있습니다. 도노반 로드와 N 브로드 웨이의 교차지점입니다." "젠장. 오늘은 왜 그렇게 멀지? 평소엔 외곽에서 얼쩡거리던 놈이." 소대장이 투덜거렸다. 그는 연료상태를 확인했다. "연료는 얼마나 남았지? 유인하기에 충분한가?" "아슬아슬하지만, 가능합니다." 병사는 컨트롤러를 능숙하게 다뤘다. 드론이 시야에 직접 보이면 곤란했다. 뻔히 보이는 쇳덩이의 비명은 소용없다. 드론이 골목에 숨어서, 첫 번째 비명을 재생했다. 화면 가득, 그 골목에 있던 놈들이 멍청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때때로 페리 경사가 조언을 더했다. 골목을 빠져나온 드론이 유인된 집단을 포착했다. 작고 발 빠른 놈들이 먼저 달려오고, 두 마리 그럼블은 그보다 느렸다. 눈에 직접 보여야만 뛰는 덩치들이다. 골목에서 움직이지 않던 놈들도, 이미 뛰는 놈들을 보더니 광분하며 합류했다. 병사는 속도차를 이용해 그럼블과 보통 무리를 분리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전력 질주하는 변종들. 인간보다 강인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남쪽으로 1km 쯤 유인하자 변종들이 기진맥진했다. 저들끼리 밟아 죽인 수도 적지 않다. 새로 끼어든 놈들의 생기 넘치는 질주. 지친 놈들이 짓밟힌다. 그렇게 분리시킨 뒤, 드론은 북으로 돌아갔다. 디코이 음량을 줄이고서, 따로 떨어진 그럼블 두 마리만 유인한다. 보이지 않는 비명을 기웃거리며, 두 거인이 따르기 시작한다. "혹시 두 마리를 동시에 처리할 수도 있나?" "가능합니다." 공보장교, 맥과이어 대위의 질문에 겨울은 여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대위는 혼자 뭔가를 중얼거렸다. 기술보정을 받아도 알아듣기 어렵다. 몇 분 정도, 유인은 순조로웠다. 드론이 골목에서 소음을 만들고, 다시 대로로 나왔을 때. 조종 담당 병사와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했다. "소대장님!" "보고 있어......!"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드론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병사가 황급히 컨트롤러를 돌린다. 휙 반전하는 화면. 맞은편에 두 마리 그럼블이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놈들. 노란 눈동자가 사람에게 꽂힌다. 건강한 예비 숙주. 또는, 식량. [크아아아아아아!] 천둥 같은 이중창이었다. 저 먼 중심가에서부터 여기까지, 맨 귀로도 들릴 정도. 주변의 변종들을 끌어들이는 소리였다. 직후, 건물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젠장! 덱! 네 분대는 여기 남아 서커스 팀을 지켜라! 드론 팀! 주변 상황을 파악해서 내게 전달하도록! 드론을 잃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너! 본부에 보고해! 나머지는 나와 함께 간다!" "저도 가겠습니다." "안 돼!" 겨울의 요청을 즉시 거부한 소대장은, 그러나 잠시 멈칫거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년을 훑는다. 잠시 후 경고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내 뒤에 바싹 붙어라." "네." 여기에 페리 경사가 가세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각오는 하셨습니까?" "여긴 제 근무지고, 이건 제 직업입니다." 소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지형을 숙지한 경관의 도움은 달갑다. 희생을 각오할 가치가 있었다. "뛰어! 뛰면서 적당한 차량을 찾아!" 낮은 목소리로도 확실하게 전달된다. 레인저 소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다시 한 번, 도시 한 구획이 박살나는 소리. 파편 튀는 광경이 멀리서도 선연하다. 의무를 향해 달리는 병사들. 군홧발 소리가 다급하게 겹쳐졌다. # 36 [36화] #광대 (3), 산타 마리아 소개(疏開)가 성공적이었던 도시답게, 산타 마리아의 거리는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나 차단작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변종에게 높은 벽은 사람에게도 높다. 구덩이와 장애물의 연속선이 진로를 가로막는다. 갈 길은 직선인데, 직선으로 갈 수 없었다. 장벽을 관통하는 검문소. 그늘에서 변종들이 튀어나왔다. 거리 25미터. 순식간에 좁혀진다. 레인저 소대가 속도를 줄였다. 결코 멈추진 않고, 보폭 좁힌 빠른 걸음으로, 견착 사격. 두두둑! 두둑! 변종들이 선두부터 무너졌다. 그래도 질량으로 밀고 들어온다. 처음부터 너무 가까웠다. 그러나 이쪽은 레인저 집단이었고, 근접전에도 탁월했다. 충돌. 손닿을 거리에서 조준사격으로 머리를 날리고, 무게중심에 부딪혀 넘어뜨리며, 뒤엉킨 것들을 짓밟고, 발아래를 쏘면서 지나간다. 간혹 붙잡혀도 성가실 뿐. 어느 병사는, 붙잡히자 겁이 아니라 짜증을 냈다. 콰득! 개머리판으로 턱을 비껴 쳤다. 변종은 목이 돌아가서 죽었다. 겨울에게도 두 마리 육박했다. 좌우로 하나씩. 금방이라도 잡힐 듯 한 순간, 겨울은 오히려 한 쪽에 붙었다. 따다다닥 부딪히는 입에 총구를 콱 물린다. 덜컥, 목 꺾이는 충격으로 휘청이는 변종. 녀석이 눈 올라간 채 손만 내밀었다. 소년은 발을 콱 디디면서, 총구 물린 놈을 휘둘러 다른 놈과 같은 사선에 놓는다. 조정간이 연사로 미끄러졌다. 격발. 드드드득! 두개골에 갇힌 둔탁한 총성. 총탄은 머리를 깨고 나가서 또 하나의 머리를 깼다. 측면으로 돌아 빠지는 겨울의 걸음. 뚝 떨어지는, 뒤통수 깨진 놈의 덧없는 얼굴. 그것은 힘없는 손짓 한 번으로 작별을 고했다. 무리 없이 따라붙는 겨울을 보고, 소대장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소대가 검문소 측면에 붙었다. 사슬로 묶어놓은 문. 반대편을 볼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고, 사격으로 사슬을 끊으려는 순간. [쿠웅!] 문이 세차게 요동쳤다. 벌어진 틈으로 순간 엿보이는, 허기진 눈동자들. "젠장!" 병사가 물러났다. 소대장은 고개를 흔들고, 교신을 시도했다. "드론 팀! 상황은 어떤가?" 「민간인 집단, 분리되었습니다! 스물 일곱 명이 브로드웨이를 따라 남하 중! 아홉 명은 웨스트 도노반 로드를 따라 진행! 지금까지 사망자 열두 명!」 "그 많은 수가 대체 어디 숨어있었던 거야!" 소대장이 낮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민간인들이 얼마나 버틸까. 빨리 가야 하는데. 불필요한 말을 아끼도록 훈련받았어도, 막막한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진작부터 피로가 쌓인 정신이다. 교신 중에 간헐적인 사격이 있었다. 조준이 누구보다 빨랐음에도, 겨울은 방아쇠를 아꼈다. 탄약을 다 써버릴 순 없었다. 그저 한 방향만 확실하게 맡는다. 최소한의 단발 사격으로, 한 발에 한 놈씩. 소음기를 끼워 낮아진 명중률 따위 기술보정으로 씹어 먹었다. "재장전!" 탄창이 다 떨어진 병사가 말했다. 화력공백이 있으니, 잠시 내 방향을 경계하란 의미. 그래봐야 탄창 교환에 1초 걸렸다. "너, 너! 수류탄!" 소대장은 두 사람을 지목했다. 돌파하려는 것. 곧바로 포물선 두 개가 담을 넘었다. 콰쾅! 순간적인 땅울림. 그리고 인간을 닮은 단말마들. 죽어가는 흐느낌이 벽을 뚫고 흘러왔다. 문 앞의 병사가 이번에야말로 사슬을 끊었다. 쇳조각이 튀었다. 발로 걷어찬 문짝. 기대어 있던 변종이 벌러덩 넘어졌다. 수류탄 파편에 휩쓸려, 등짝이 뼈까지 벗겨져 있었다. 도로 우변의 주택들로부터, 새로운 놈들이 기어 나왔다.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발견한다. 아아아아아! 목청 찢어지는 고함. 다 같아보여도 나름의 패턴이 있다. 숙주를 늘리려는 병원체의 의지가, 꼭두각시들을 무작정 밀어냈다. "좌로 붙어!" 도로 좌변은 주택가와 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바싹 붙어서 한쪽으로 화력을 집중한다. 그러나 곧 숫자로 압도당한다. 머리 위로 드론 두 기가 날아갔다. 중대본부로부터의 입전(入電). 「울프 리더로부터 울프 쓰리에, 좌측 길로 빠져라.」 지시에 따르니 상대적으로 편한 길이 나타난다. 등 뒤에서 변종들이 죽어라고 쫓아왔다. 소대장의 수신호. 후방으로 수류탄 하나가 날아간다. 곧바로 자세를 낮추는 병사들. 진동하는 폭음이 발밑으로 지나갔다. 이제 예비 드론을 띄운 중대본부가 지휘를 맡는다. 「울프 쓰리, 작전 승인도 없이 움직이면 어쩌자는 건가?」 "민간인 발견과 구조는 임무에 원래 포함되어 있지 않았나! 다른 팀은 너무 멀고! 민간인 숫자는 많고! 내 좆 만 한 헬기 두 대 가지고 구출 가능한가? 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거시기 커서 좋겠군. 징계를 각오하도록. 노스 밀러 가(街)에서 이스트 선셋으로 이동하라. 3분 주겠다.」 "3분?! 염병, 이스트 선셋이 어디야? 경사, 가능합니까?!" 지도 꺼낼 틈이 없다. 소대장이 페리 경사를 돌아보았다. 지리에 익숙한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라 뛰어야죠!" 특수경찰의 사격실력은 레인저 못지않았다. 전력으로 달리면서 지향사격. 탄창이 떨어지자 바로 권총을 뽑았다. 공백 없는 속사가 변종 다섯을 거꾸러뜨린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이 육박하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인저를 믿었기 때문이다. 「울프 투, 전장으로 투입하는 중. 울프 원이 시가지 북쪽에서 진입한다. 작전지역 상공 헬기 투입까지 앞으로 40초 남았다. 이후 헬기 콜 사인은 파이어 플라이로 통일한다. 각 소대 드론 팀, 피셔 원에서 피셔 쓰리로 명명하겠다.」 중대본부에 있던 병력이 새로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한참 먼 거리였다. 차를 타고 와도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1개 소대가 북쪽에서 바로 들어온다니 다행이었다. 「당소 피셔 쓰리. 남하하는 생존자 집단, 추가 사망자 2인 발생. 위치, 기지점 폭스트롯으로부터 남쪽으로 10. 웨스턴 모텔. 일시적인 은폐 상태. 곧 발각될 것으로 보임. 울프 쓰리, 서둘러라.」 "씨발! 숨! 넘어가겠네!" 커다란 흑백혼혈 병장이 죽는 소리를 냈다. 벌써 1km 넘게 뛰었고, 남은 길도 그에 못지않았다. 전투를 치르면서, 긴장감 속에 주파하기는 벅찬 거리였다. 겨울도 진땀이 흐른다. 힘들다기보다는, 몸이 머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느낌. 격렬한 체력소모가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었다. 흔들리는 조준. 사격이 처음 같지 않다. 그래서 가까운 놈에게 총 대신 칼을 썼다. 관자놀이에 대검 쑥 박힌 놈이 혀를 빼물었다. 내딛는 뜀, 스냅 한 번으로 뽑는다. 속도는 줄지 않았다. 총구 아래 대검을 장착했다. 일부 발 빠른 병사들이 버려진 차량들을 살폈다. 열쇠가 없다. 뛰는 게 빠를지, 합선시켜 시동 거는 게 빠를지 의문이었다. 가솔린 차량들이라 연료가 멀쩡하다는 보장도 없어서, 소대장은 그냥 계속 뛰라고 했다. 병사들이 헐떡이느라 말도 하지 못한다. 헬기 로터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딱딱딱딱. 등 뒤에서 휘몰아치던 바람이, 소대를 순식간에 추월했다. 꼬리 돌리며 고도 낮추는 헬기. 포문 여는 전함처럼, 측면을 드러낸다. 헬기 자체엔 무장이 없어도, 좌우 두 명씩 탑승한 병사들은 아니었다. "엎드려!" 누군가의 외침. 속도가 있어 다들 데굴데굴 구른다. 그 위로 유탄 세례가 지나갔다. 두 명이 각자 갈겨대는 6연발 유탄발사기의 화력. 불과 파편의 폭풍이 변종집단을 휩쓸었다. 뜨거운 바람이 겨울의 등을 훅 밀어낸다. 구르는데, 살 썩은 다리가 보였다. 일단 붙잡았다. 발목이다. 잡고 확 일어섰다. 크엑! 발목 잡힌 변종의 다리가 앞뒤로 쭉 찢어졌다. 소년은 돌아보는 안면 복판에 대검을 꽂았다. 화력지원을 마친 헬기는 순식간에 고도를 높였다. 반대편으로도 탄막을 쏟았는지, 겨울이 내다본 길이 뻥 뚫려있었다. 헬기는 생존자 집단을 향해 직선으로 날았다. 남은 거리 약 200미터. 밀집된 주택가인지라,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는 건 금방이었다. 반쯤 열린 차고 문 아래로 기어 나오고, 지붕 위에서 떨어지고, 창문을 깨부수며 꾸역꾸역 나오는 더러운 것들. 어쩔 수 없었다. 페리 경사가 다시 길을 꺾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교전을 피하는 게 더 빠를 것이었다. 「울프 쓰리에 경고! 11시 방향, 부기 쓰리 출현!」 드론 팀의 절규. 집이 폭발했다. 거대한 몸집이 온 몸으로 부딪힐 때, 파괴력은 포탄에 필적한다. 다섯 채를 돌파한 괴물이, 경황 잃은 소대를 포착했다. 포효하는 그럼블. 괴성을 온 몸으로 들을 수 있었다. 쩍 벌어진 구강. 겨울이 반사적으로 쐈다. 괴물이 비틀거렸다. 짧은 시간을 벌었다. "부상자 발생! 엄호!" 어느 상병의 절규. 주택 터진 파편 때문에, 다섯 명의 병사가 피투성이였다. 두 명은 그럼블의 근접공격권에 있었다. 하필이면 괴물이 비틀비틀 물러난 자리. 정신 차린 괴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근접공격 패턴이었다. 지원화기 사수가 쏴 갈기는 기관총 난사를 무시하고, 바위 같은 주먹이 두 사람을 동시에 내려쳤다. 쾅! 사람이 부서져 돌가루와 섞이는 소리. "이 씨팔 새끼가!" 눈이 충혈 된 하사가 수류탄 들고 정면에 선다. 적당한 거리. 어김없이 포효하는 괴물에게, 투척. 그와 동시에 그럼블의 입천장에 한 줄기 로켓이 박혔다. 누가 놓쳤는지 나뒹굴던 발사관을 겨울이 잡아챈 것. 「개인화기숙련」이 29% 효율로 적용되는 무기였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철판도 뚫는 로켓은, 부드러운 속살 깊이 파고든다. 폭발. 머리통이 부풀었다. 2초 후, 식도에 들러붙은 수류탄도 터진다. 비대한 근육덩어리가 무릎을 꿇었다. 부글부글 쏟아지는 피거품. 겨울이 빈 발사관을 던졌다. 얻어맞은 변종이 벌러덩 넘어진다. 다른 병사가 끝장냈다. 부상자 두 명이 보기보다 괜찮았다. 피 흘리는 곳이 많아도 치명상은 없는 탓. 그러나 한 명이 문제였다. 나뭇조각이 복강을 뚫었다. 응급조치가 한창일 때, 생각지도 않았던 지원군이 합류했다. "덱? 여긴 어떻게?" 소대장의 놀란 표정. 서커스 팀 지키라고 남긴 분대가 따라붙은 것이다. "그 놈들도 군인 아닙니까! 제 몸 알아서 간수하라고 했죠!" 분대장이 호기롭게 대꾸하며 사방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지원화기 사수도 기관총을 제대로 거치하고, 그럼블의 부름에 꾀인 잡것들을 떼로 눕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지 숫자가 꾸역꾸역 늘어난다. 소대장이 본부를 호출했다. "젠장! 길이 막혔다! 본부! 중상자 발생! 후송하겠다! 차량 지원 가능한가?! 합류위치를 알려 달라!" 「울프 쓰리, 후퇴하라.」 "뭐라고?!" 「도시 중남부로부터 새로운 변종 집단이 유입되었다. 귀소의 현 위치에선 더 이상 접근할 경로가 없다.」 "잠깐......." 「명령이다. 강행돌파를 하려고 해도 탄약이 부족할 거다.」 중대장이 단호하게 못 박았다. 하늘에서 지켜본 전장이 그만큼 불리하단 의미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지상에서 보는 풍경보다는 더 나쁠 터. 울프 쓰리, 즉 3소대장이 이를 갈았다. 「당소 파이어 플라이 투! 착륙지점이 너무 뜨겁다! 내려갈 수가 없다!」 가까운 하늘에서 아슬아슬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생존자 구조를 위해 하강했던 헬기가, 그럼블이 던진 차를 간발의 차로 회피한 것. 탑승한 병사들로부터 초연 가득한 보복이 쏟아졌다. 그러나 물리내성을 지닌 괴물에겐 소용없는 짓이었다. 급소를 맞춰야 한다. 또 다른 그럼블이 감염변종을 집어던졌다. 허우적거리며 날아간 변종이 회전날개에 치였다. 쫙- 공중에서 반 토막 나, 내장이 비처럼 뿌려진다. 두 번째, 세 번째 변종이 탄도비행으로 날았다. 마침내 아홉 번째가, 헬기 바깥으로 내밀어진 어느 병사의 다리를 잡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병사. 그러나 종아리를 물리고 만다. 감염되었다. 절망한 병사가 스스로를 던졌다. 30미터의 자유낙하. 기다리던 놈들에겐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찬이다. 성찬에 맞아 두 놈이 죽고, 나머지는 포식을 시작했다. 병사가 떨어지며 수류탄 핀을 몇 개 뽑았던 모양이다.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다. 「피셔 쓰리 다운. 연료가 떨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띄웠던 드론이 추락했다. 진작부터 아슬아슬했던 연료량이었다. 거듭되는 악재가 소대장을 설득했다. 중대본부에서 후퇴를 재촉하는 무전이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임무의 분기가 찾아왔다. 후퇴는 안전하고, 전진은 위험하다. # 37 [37화] 겨울은 고민했다. 「통찰」이 기술 습득을 권한다. 천재의 영역, 최소 11등급의 「무브먼트」라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극단적인 장애물 극복능력과 회피율 보정으로, 이 난장판을 뚫고 가란 뜻이었다. 기술레벨 10등급은 평범한 인간이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계다. 그 이후는 천재의 영역. 천재가 아니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그러므로 「재능이익 - 탤런트 어드밴티지」를 받더라도, 11등급 이후의 경험치 소모는 부담스럽다. 겨울에게 11등급의 기술이 「개인화기숙련」 하나 뿐인 이유였다. 가능하다. 여력을 다 쓴다면, 14등급까지도. 쓰지 않고 아껴둔 것 외에도, 대인 상호작용 평가로 누적된 경험치가 적지 않으니까. 따라서 겨울의 고민은 투자가 아니라 성공 가능성에 있었다. 그때 더해지는 또 하나의 경고성. "소대장님! 이상한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들은 정말로 이상했다. 흉터는 있을지언정, 다른 것들처럼 썩지 않았다.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했다는 뜻. 완치된 한센 병 환자 같았다. 온 몸이 근육이었고, 그런데도 날렵해보였다. 너무나 창백해서 회색에 가까운 피부. 그 아래의 핏줄이 고스란히 보일 지경이다. 겨울이 생각했다. '그런가. 특수변종 다음은 강화변종인가.' 강화변종, 통칭 「구울(屍鬼)」. 특수변종보다는 쉬워도, 떼로 등장해서 까다로운 것들. 그것들이 정자세로 달려오고 있다. 평범한 것들이 온 몸으로 발광하며 통제되지 않는 광기를 흩뿌릴 때, 그것들은 이 꽉 물고 스프린터처럼 뛰었다. 앞뒤로 힘차게 흔드는 팔. 미동조차 없는 눈동자. 비정상적으로 굵은 허벅지. 드드드드드득! 기관총 사격이 강화변종들을 넘어트렸다. 급소를 피한 것들이 벌떡벌떡 일어선다. 소대장이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소년도 결심했다. "엿 같은......후퇴! 후퇴!" 레인저와 겨울이 반대로 움직였다. 소대장이 기겁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겨울은 어느 집 벽을 밟고 수직으로 달려, 처마 끝 붙잡고 발을 박찼다. 몸을 한 번 뒤집어 지붕 위에 착지. 여기까지가 한 호흡이었다. 진보된 「무브먼트」와 「통찰」의 연동이, 최적의 경로를 계산하여 시야 가득 증강현실로 그렸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매 순간 갱신되는 수십 갈래의 선, 그리고 가능성에 따라 표변하는 색채. 인상적인 동작이 눈길을 끌었나보다. 강화변종들이 겨울을 먼저 노렸다. 지상에서 펄쩍 튀어 곧바로 지붕을 붙잡고, 팔의 탄성만으로 다시 튀어 오른다. 그것이 지붕을 밟기 전에, 아직 붕 떠있을 때, 겨울이 냅다 걷어찼다. 놈은 군홧발에 명치가 찍혔다. 움푹 패인 가슴을 쥐고 날아가, 지면에 충돌한다. 발작과 경련. 뒤이어 오르는 구울의 수가 다섯. 드드득! 한 놈을 사격으로 처리했다. 겹쳐진 사각이 사격효율을 깎아, 피 흘리며 엄습하는 두 번째. 겨울이 총검을 내질렀다. 총구 아래 고정된 칼끝이 가슴을 가르고 올라가, 아래턱을 찔러 뇌간까지 관통한다. 뒤에서 덮쳐오는 새로운 위협. 회색 손길을 피하면서 반전, 총 놓고 몸 돌린 다음, 손 바꿔 잡은 총을 쑥 당기며, 회전을 실어 정강이를 걷어찼다. 콰득! 뼈 부러지는 소리. 균형이 무너진 셋째가 지붕 사면을 굴러 떨어졌다. 네 번째에게 잡혔다. 서로 얽힌 팔, 거꾸로 잡은 총, 이어지는 힘겨루기. 동시에 배후를 덮쳐오는 다섯 번째. 따닥따닥 부딪히는 넷째의 입에 총몸을 물려놓고, 얽힌 상태에서 측면으로 돌았다. 물린 총도, 총구도, 다섯 번째를 향하도록. 겨울의 왼 손 엄지가 방아쇠울에 끼워졌다. 격발. 탄창이 완전히 비어버릴 때까지. 팍삭팍삭 부서지는 다섯 번째의 갈비뼈들. 조준이 거친 만큼 죽음도 거칠었다. 폐 기능을 상실하고, 피를 토하며 넘어진다. 바들바들 죽어갔다. 핏빛으로 물드는 지붕. 이제 넷째 하나 남았다. 겨울은 순수한 힘으로 구울을 짓눌렀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높은 등급의 전투기술과 근력보정이 이를 가능케 한다. 구울이 무릎을 꿇었다. 뒤로 밀어 아예 눕게 만든다. 무릎으로 양 팔을 눌러서, 창백한 가슴을 깔고 앉는 소년. 자유로워진 양 손으로 총을 단단히 붙잡고, 몸 쪽으로 확 당겼다. 으지직- 턱이 빠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 구울의 공허한 비명. 이제 겨울은 소총을 두 손으로 세워서 잡는다. 개머리판으로, 구울의 머리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빻아서 죽이려는, 살기 충만한 공이질. 피와 살점이 튀고,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내리칠 때마다, 폭력에 반응하여, 콱콱 치미는 가슴 속 뜨거운 돌. 점점 더 자라나는 현실과의 괴리감. 눈앞의 비명이 느리게 잦아들었다. 생을 다한 매미의 마지막 울음소리처럼. 그 사이 레인저 소대는 저만치 밀려난 상태였다. 그래도 부상병을 무사히 챙겨갔다.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기 힘든 페리 경사의 모습도 보인다. 지붕 위에 있는 소년을 노리고, 평범한 변종들이 살아있는 탑을 쌓고 있었다. 쌓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 겨울이 탄창을 갈며 주위를 살폈다. 헬기가 맴도는 공역. 그 아래에 생존자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교신에서 은신이 들통 났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웨스턴 모텔이라 했던가? 이 와중에 리시버가 대단히 시끄럽다. 아까부터 겨울을 찾는 소대장의 음성이었다. 「클라운! 클라운! 야, 광대! 응답해!」 겨울이 송신했다. "네, 어릿광대입니다." 「뭐 하는 짓이야! 목숨 내놨어? 엉? 통제에 따라야 할 거 아냐!」 걱정과 짜증과 분노가 같은 비율로 섞인 복잡한 음성. 겨울이 응답했다. "죄송하지만 전 명령계통이 달라서요. 그쪽 본부 명령을 꼭 따를 필욘 없잖아요?"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여기서 어떻게 대답할까. 겨울은 「통찰」이 제공한 키워드를 활용했다. "제 명령권자는 캠프 로버츠 사령이고, 그분께 받은 지시는 단 하나, '산타 마리아의 괴물들을 멋지게 잡아 죽일 것.' 뿐이거든요. 사실 맥과이어 대위님에게 명령권을 위임하겠다는 말도 없었어요. 그러니 전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하는 김에 부차적인 일도 하나 해치우고요." 제공된 키워드를 쓰면, '연기력'이 부족하더라도 시스템 보정이 붙는다. 「너 농담도 정도껏.......」 "잠시 바쁠 것 같네요. 응답이 없어도 이해해주시길." 겨울은 수류탄을 까서 굴렸다. 데굴데굴. 앙증맞게 굴러가는 작은 폭탄. 탑을 쌓아 기어코 올라온 첫 놈의 이마에 딱 맞고 떨어진다. 직후, 폭발. 쾅! 피와 살이 허공에 뿌려졌다. 거리로 후두둑 떨어지는 찢어진 내장들. 겨울이 뛰었다.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인체 무더기를 밟고 뛰어서, 다시 도로 위에 선다. 먼지 쌓인 아스팔트 위에 뿌려진 검은 점들. 움직인다. 재앙의 전조 같은 바퀴벌레들이었다. 군홧발에 밟혀 으직으직 으깨어졌다. 미련이 남았는지, 드론 한 기가 근처를 떠돌았다. 렌즈는 소년을 담고 있었다. 탄약이 떨어진 모양이다. 헬기로부터 들려오던 총성이 그쳤다. 두 대의 헬기가 본부 방향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제 싸움은 온전히 소년의 몫이다. 목적지까지는 약 200미터.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변종들이 겨울을 포착했다. 달려가는 소년병. 달려오는 변종집단.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통제되지 않는 집단엔 반드시 여백이 있다. 겨울이 그 여백을 파고들었다. 내젓는 손과 덮쳐오는 몸, 짜임새 없는 본능들 사이의 가느다란 활로(活路). 길이 없으면 만들었다. 사방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질 때, 정면의 한 놈 팔목 붙잡아 당기면서, 무게중심을 가져오고, 넘어트리고, 둥글게 굴러, 다리와 다리와 다리들의 성긴 창살을 재빨리 빠져나간다. 구르는 속도 그대로 일어섰다. 정면 5미터 거리에 강화변종 하나. 겨울이 무릎을 쐈다. 무너지는 하체, 땅을 짚는 상체. 엎드린 구울을 계단처럼 밟고, 더 있는 놈들을 뛰어넘었다. 이제 앞뒤가 막힐 것 같다. 겨울은 갓길에 버려진 캠핑카를 타고 올랐다. 넓은 지붕을 달리다가, 모서리를 밟고서 최대로 도약한다. 날개 없는 비행. 소년의 발아래 배고픈 것들이 아우성쳤다. 겨울이 가로수 가지를 디딘다. 구부러지는 목질의 탄력을 받아, 다시 한 번 멀리 뛰었다. 기술보정. 떨어지는 충격은 무릎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굴러서, 떨어지는 힘을 나아가는 힘으로 바꾼다. 두 차례의 도약으로 극복한 거리가 15미터에 이른다. 굳이 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벽을 타넘고, 지붕과 지붕을 평지처럼 달렸다. 마침내 '부기 원', 최초의 그럼블이 관심을 보였다. 숨은 시민들 찾기를 포기하고 몸을 돌린다. 괴물과 소년 사이에 죽다 만 것들이 가득했으나, 야수의 노란 두 눈은 새로운 표적을 놓치지 않았다. 단단히 고정된 포식자의 시선. [크워어어어어!] 겨울을 겨냥해 준비하는 질주 패턴.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회피율이라면 확실하다. 괴물의 굵은 다리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거대한 질량, 무서운 가속. 소년과 괴물 사이의 직선상에서, 뛰어오던 모든 변종들이 짓밟힌다. 정확한 타이밍에 몸을 날리는 겨울. 휘둘러진 그럼블의 주먹이, 바람 한 올 차이로 엇나갔다. 그럼블은 그러고도 십 미터 이상 더 갈아엎고 나아갔다. 살과 뼈가 고루 섞인 핏빛 포장도로. 푸쉬익- 콧구멍으로 증기를 뿜으며, 괴물이 느리게 돌아섰다. 겨울이 다시 돌격을 유도했다. 광포한 땅울림. 아스팔트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압도적인 힘과 무게다. 휩쓸린 변종들이 팔다리 뜯어진 채 날아다녔다. 「조심해라, 광대! 6시 방향! 부기 투가 광대를 포착했다!」 그렇잖아도 느끼고 있었다. 골수를 찌르는 느낌과 증강현실의 경고. 또 다른 그럼블의 등장. 「전투감각」 및 「생존감각」의 연동 작용이었다. 겨울이 무릎 꿇고 정조준했다. 두 괴물의 질주에 시차를 만들어야 한다. 가쁜 숨, 들썩이는 어깨. 조준선이 흔들리지만 11등급의 사격기술이다. 드드득! 반자동으로 쏴붙인 탄 세 발이 쩍 벌어진 목구멍을 파고들었다. 직후, 겨울이 몸을 날린다. 견제하지 않은 쪽, 거대한 질량이 스쳐 지나갔다. 총 맞은 놈의 포효가 들린다. 곧바로 또 한 번의 회피. 두 번째 녀석은 집 한 채를 박살내고서야 멈췄다. 이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중심가에 운집한 변종집단이 떼죽음을 당했다. 시산혈해. 여기에 탄약을 보충하고 돌아온 헬기 두 대가 가세했다. 동물적인 지능으로도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멀리 보이는 변종들이 아직도 많았으나, 분분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이제야 그럼블 잡을 생각을 했다. 두 마리 괴물이 한 방면에 오도록 만들어놓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번갈아 총알을 박으며 다가간다. 남은 수류탄이 세 발 뿐이다. 둘 다 죽여 놓을 순 없었다. 우선 한 놈 처리해놓고, 다른 한 놈이 피를 토하도록 만들어 놨다. 전투력이 반감된 놈을 노리고 헬기가 내려온다. 초저고도 비행. 그르릉 거리는 괴수를 향해, 유탄사수가 굵은 총구를 겨냥했다. 퉁- 가벼운 울림.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입을 다물기도 전에 터지는 유탄. 괴물의 마지막 날숨은 피가 섞인 불길이었다. 겨울은 주위를 살폈다. 찾았다. 웨스턴 모텔. 뚜벅뚜벅 걸어간다. 주위에 아직 살아남은 변종들을 직접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헬기에서 내린 병사들의 역할이었다. 그 중 한 명은, 겨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말 붙이고 싶은데,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 결국 경례 한 번 붙이고 끝이었다. # 38 [38화] #읽지 않은 메시지 (2) 「BigBuffetBoy86 : 오! 작전지역까지 헬기 타고 이동인가! 나 하늘 나는 거 짱 좋아하는데!」 「프로백수 : 근데 헬기가 너무 작다. 장난감처럼 생겼음.」 「마귀놀이 : 그러게. 설마 저 바깥의 발판 같은 게 사람 앉으라고 있는 거야?」 「새봄 : 진짠갑네 ㅋㅋ 옛날 미군은 정말로 이렇게 위험한 걸 타고 다녔어?」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ㅇㅇ. 이거 MH-6이라고 하는데, 미군 특수부대 수송용으로 잘 써먹었음. 좌우에 앉은 사람이 자유롭게 사격할 수 있고, 타고 내리는 게 빠르고, 헬기가 작아서 침투하기도 좋았으니까.」 「환상의동물여자친구 : 설명충 ㅅㄱ」 「아침참이슬 : 밀더쿵 오더쿵 덩기덕 쿵더러러러」 「まつみん : 어? 헬기? 이러면 안 되는데?」 「여민ROCK : 뭐가 안 됨?」 「まつみん : 마츠밍은 고소공포증 있는데!」 「김정은 개새끼 : 그럼 감각동기화를 끊어. 아님 일부 감각만 동기화시키던가.」 「まつみん : 그럴 순 없어요!」 「김정은 개새끼 : 왜?」 「まつみん : 싫습니다! 겨울 씨와 함께하는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어요!」 「에엑따 : 마츠밍 ㅋㅋㅋㅋㅋ」 「여민ROCK : 마츠밍 ;ㅅ;」 「레모네이드 : 오, 날개 돌기 시작했다!」 「BigBuffetBoy86 : Fu-! 난다! 날아!」 「짜라빠빠 : 어? 어어? 얘 손잡이 안 잡는데?」 「환상의동물여자친구 : 어우! 어우! 소오오오오름!」 「대출금1억원 : 야, 야야야야, 이거 장난 아닌듯? 이러다 떨어지면 방송사고 아니냐?」 「오푸스옴므 : 쒸...펄...ㅎㅎ...접속기...싼 거 써서...ㅎㅎ...접속 중...감각차단이...불완전헌디...ㅎㅎ...접속 끊으믄...바지에...지렸을 듯...ㅎㅎ」 「김미영팀장 : 얘 레알 겁 없네;;; 어우;;; 오금이 그냥;;; 오싹오싹;;; 내 눈이 아니라서 감을 수도 없고 ㅠㅠㅠㅠㅠㅠ」 「프랑크소시지 : 어, 어, 손잡이, 진행자, 손잡이, 손잡이! 손 내밀지 마! 야! 미끄러져! 야! 야! 진행자! 읽어! 씨발! 읽으라고!」 「BigBuffetBoy86 : Fu-! Fu-! Fu-!」 「まつみん : 으아아아아아앙! 싫어요! 겨울 씨! 나한테 이러지 마!」 「まつみん : 꺄아아아악!」 「まつみん : 꺄아아아악!」 「눈밭여우 : 꺄아아아악!」 「まつみん : 꺄아아아악!」 「마그나카르타 : ㅋㅋㅋ 마츠밍 망가졌다」 「똥댕댕이 : 마츠밍 귀여워요 마츠밍.......」 「올드스파이스 : 잠깐, 스파이가 끼어있는데?」 「まつみん : 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怖い」 まつみん님의 감정상태가 지나치게 불안정하여「텔레타이프」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47.6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폭풍224 : 쟤 그 와중에 별 쏘고 있엌ㅋㅋㅋㅋ」 「액티브X좆까 : 근데 별 개수가 왜 저 모양이냐? 시스템 오류임?」 「려권내라우 : 환율 병시나. 문과인 나도 안다.」 「액티브X좆까 : 그럼 평소엔 왜 딱딱 맞아 떨어졌는데?」 「둠칫두둠칫 : 그러네. 왜지?」 「まつみん : 왜냐면! 일본인은! 꼼꼼하니까!」 「まつみん : 꺄아아악!」 「올드스파이스 : 저러면서 할 말 다하네 ㅋㅋㅋ 진짜 귀엽다 ㅋㅋㅋ」 「분노의포도 : 아, 저런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 [눈밭여우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272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제시카정규직 : 헐.......」 「SALHAE : 헐.......」 「흑형잦이 : 헐.......」 「Владимир : 액티브 엑스 두 개 남았다. этого ещё не хватало! 나는 이것들을 반드시 설치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보안 절차를 만든 까레이스키를 찾아서 죽여 버리겠다!」 #Intermission, 인공지능의 마음 (2) 안녕하십니까, 고객 여러분. 오늘은 본사의 인공지능 엔진 「트리니티」를 소개해드리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전에는 TOM 판독 모듈에 대해 이야기했던가요? 오늘은 가상인격을 구성하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검색형 인공지능 모듈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검색형 인공지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 그대로 검색엔진을 통해 구현된 인공지능을 뜻합니다. 월드 와이드 웹,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 고여 있는 인간의 모든 기록을 읽고, 상황에 적합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게 가능하냐고요?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SNS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 인터넷에는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고, 슬픔과 기쁨, 행복과 절망, 미덕과 악덕, 인간의 모든 감정과 지식과 사상과 추억과 역사와 흑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방대한 데이터. 이것을 우리는 빅 데이터라고 부릅니다. 검색형 인공지능은, 빅 데이터에서 원하는 답을 찾아내는 로직,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을 통해 인격을 구현합니다. 사실 이 모듈 하나만으로도 완전한 인격을 구현할 수 있어요. 이론적으로는 말이죠. 그럼 문제가 뭐냐. 바로 검색에 필요한 시간입니다. 인격을 구현하는 게 어디 보통 문제인가요? 메라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의사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7%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음성과 시각정보가 차지하죠! 즉 당신이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인공지능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그 답이 세계관 배경과 상황에 적합한지 검증하고, 알맞는 어조와 강세와 말투를 검색한 뒤, 이 때 지어야 할 표정과 어울리는 몸짓까지 알아내야 합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그러고도 반응은 1차원적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을 내는 인간의 마음. 그건 검색만으론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어요. 정확한 답을 찾아낼 뿐이죠. 그래서 TOM 모듈이 중요한 겁니다. 검색 범위를 획기적으로 축소시켜주거든요. 무엇을 찾아야 할 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고나 할까요? TOM 등급과 적성이 높은 접속자는 검색형 모듈의 점유율이 10% 이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두 개의 모듈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때, 인공지능은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행동으로 여러분을 기쁘게 해드릴 겁니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제가 왜 또 이런 소리를 하고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이번에도 고갱님들 때문이에요. 기술적인 한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검색형 인공지능만으로 인격 구현이 가능하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항의전화를 걸어주시는 고마우신 고갱님들. 참 나. 그게 가능하면 우리가 왜 안 팔겠어요? 가뜩이나 진작 끝나서 돈 때문에 하는 회사인데요. 이렇게 말하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섹스를 할 땐 검색형 모듈만 100%를 돌려도 인공지능 품질과 반응속도가 제법 괜찮은 편인데,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러게요. 왜일까요? 으흫 흐흫 으흐흫. 자, 지금까지 축적된 빅 데이터의 70% 이상이 포르노입니다. 질과 양부터 차원이 달라요. 품질 좋은 데이터를 찾기도 쉽죠. 왜냐? 조회수, 추천수, 다운로드 횟수가 많은 자료부터 검색하면 되거든요! 키워드 별로 분류도 잘 되어있고! 게다가 댓글에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감상까지 있어요! 검색형 모듈은 이 의견을 아주 고맙게 참고합니다. 당연히 품질이 좋을 수 밖에요. 그러니 앞으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항의전화를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저널, 59페이지, 산타 마리아 도시 북쪽에서 진입한 레인저 1소대가 시가지 서쪽의 생존자들을 무사히 구해냈다. 웨스턴 모텔의 생존자까지 합쳐, 살아남은 민간인은 총 서른네 명이었다. 부상자가 다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제외할 때의 이야기지만.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이 있었다. 레인저 중대장, 레이 에머트 대위다. "내 부하들이 이런 쓰레기 새끼들을 구하려고 죽었다니!" 민간인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격노한 중대장의 손이, 권총 홀스터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분노를 이해한다. 민간인들의 정체는 범죄자 집단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도시에서, 버려진 현금이나 귀중품을 훔치려고 했던 것. 처음부터 수상했다. 산타 마리아는 오랫동안 생존자의 신호가 없었다. 그것이, 구조를 요청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면? 생존자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인종이 각양각색이라 가족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사람을 외양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외모와 복색이 단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기 흉한 문신들까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이들은 죽을 위기를 겪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추궁을 받자 울면서 사실을 털어놨다. 제때 탈출할 수 있었으나, 한 몫 챙기려고 일부러 숨어있었다면서. 소지품을 검사하자 약간의 귀금속과 마약이 발견되었다. 중대장이 기어코 권총을 뽑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금방이라도 쏠 것만 같았다. 간부들이 그를 만류했다. 저들을 죽이면, 병사들의 죽음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고. 목숨을 바치고도 누구 하나 구하지 못한 셈이 되어버린다고. 에머트 대위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분을 못 참고 벽을 걷어찼는데, 발목이 부었다. 굉장히 아팠나보다. 중대장이 체면 불구하고 끙끙댔으니까. 그러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건 슬픈 광경이었다. 복귀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청해왔다. 자신을 기억해달라거나,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란다면서. 기념품을 교환하자는 요청도 많았다. 난처했다. 가지고 온 물건이 없어서였다. 그 외에 편지 주고 받자고 주소를 적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 이름 한글로 써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75연대로 오라고 꼬시는 경우는 황당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문제던가. 어찌되었건 모두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실력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다만 3소대장, 존 프레이 중위는 태도가 어중간했다. 작전 중 내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애매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그것은 따뜻한 퉁명스러움이었다. 마지막에 선물이라며 지포라이터를 주었다.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뚜껑 안쪽에, 삐뚤빼뚤 직접 새긴 문자열이 보였다. 「Rangers lead the way. J.E.F.」 멋진 선물 고맙다고 하자, 그는 머리 한 번 긁고 또 보자며 떠나버렸다.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떠나기 전 레인저 중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임무에서, 맥과이어 대위의 촬영 팀이 한 일이라곤 이것뿐이었다. 나는 대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성과가 없어 유감이라고.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모양인데, 드론이 포착한 영상이 모두 녹화되어있다네. 제대로 각도 잡고 찍은 것보단 못하지만, 오히려 현실감 넘쳐서 좋더군. 임무는 대성공이지."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유익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네. 자네를 별로 믿지 않았거든. 그냥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했지. 세상에 존 바실론 같은 사람이 정말로 있군." 그가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많은 거짓을 진실로 바꿔왔어. 그게 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도 거짓이 될까봐 걱정이야. 정말, 보람 있는 과업이 되겠어." 부끄러워하는 내게, 그는 악수를 청했다. "전에는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지? 이번엔 최소한 은성 이상을 받겠어. 내가 가져갈 영상이 뿌려진다면, 위에서도 안 주곤 못 배길 테니. 미리 축하하네. 내 상관이 싫어하겠군."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되물었으나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별 일 아니지만, 때 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돌아가는 길에, 헬기는 산타 마리아 상공을 통과했다. "봐요 소위, 당신이 싸웠던 거리입니다." 헬기 파일럿이 기내방송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날 생각해서 항로를 잡은 것 같았다. 레인저 중대 주둔지를 숨겨주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싸움의 흔적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죽음의 선연한 흔적들, 도로 위에 뿌려진 핏자국도, 따뜻한 빛에 젖은 지금은 그저 적막한 풍경일 뿐이었다.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목숨 걸고 달렸던 200미터. 그 치열하고 사나웠던 현장과, 지금 보는 풍경이 너무나 달라서. 감염변종들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위로 손을 뻗은 모습들. 입을 뻥긋뻥긋 하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들. 무언가 고통스럽게 전하려는 사람처럼 보여서, 이 또한 묘한 기분이었다. 두 바퀴 선회한 헬기 두 대가, 석양을 왼쪽에 끼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 39 [39화] #저널, 62페이지, 캠프 로버츠 산타 마리아에 다녀온 이튿날 아침. 나는 TV의 모든 채널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결 같은 자막이 낯 뜨거웠다. '산타 마리아의 기적'이란다. 애국적 보도에 목마른 언론들은, 나를 두고 온갖 긍정적 논평들을 쏟아냈다. 국방부 대변인도 등장했다. 그는 내가 미국시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영웅적 행위에 걸맞는 보상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난민문제에 대한 언론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캡스턴 중위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한겨울 소위. 자네가 뛰어나다는 건 안다. 그래도 이번엔 지나쳤어. 어떻게 전장 한복판으로 혼자 달려갈 생각을 했나. 혹여 죽으면 자네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쩌려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했으나, 그는 납득하지 않았다. "고귀한 마음가짐이야.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자네에겐 세상이 필요로 하는 재능이 있어. 오래 살아야 하네. 그럼 자네로 인해 살아남는 사람도 많아질 테니까. 당장 구하지 못할 사람들은, 냉정히 말하면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아." 나는 말했다.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당장 구하지 못한 한 사람을, 나중에 구할 다른 사람들로 대신할 순 없는 거라고. 중위는 이제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혹시 난민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나? 자네가 활약하면, 나머지 난민들에 대한 대우도 개선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건 아닌가?"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음엔 좀 더 조심하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그는 못 미더운 눈치로나마 나를 놓아주었다. 난민구역으로 가는 길에 마커트 대위를 만났다. 경례를 붙이자, 입맛 쓴 표정으로 답례를 돌려주었다. 그는 중국계 거류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을지 의문이다. 거류구 중앙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방송 시청이었다. 사방이 뚫린 대형 천막을 쳐놓고, 그 아래 화이트 스크린을 걸었다. 프로젝터에서 쏜 빛이 선명한 것은 우중충한 겨울 날씨 덕분이었다. 중앙 공터엔 군경의 순찰이 잦다. 얼굴 익힌 병사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국방부 공보처의 지시사항이라고 했다. 그는 날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저거 진짜냐고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그는 좋아했다. 내기에서 이겼다고. ......내기? 그가 떠난 뒤, 먼발치에서 화면을 보았다. 객관화된 나의 모습은 낯설었다. 화면 속에서, 다른 사람 같은 내가 다섯 감염변종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따다다닥 부딪히는 변종의 이빨이 가까워질 때, 국적 불문하고 모든 난민들이 숨을 죽였다. 하나하나 처리할 때마다 한 겹씩 더해지는, 누군가가 참지 못한 깊은 탄성들. 듣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랑스럽기 전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군용 드론의 촬영 해상도는 왜 저렇게 높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누군가 눈치 채기 전에 떠나려고 했는데, 이미 한 사람 돌아보았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수가 웅성거렸다. 전보다 노골적인 적의는 줄어들었다. 대신, 주눅 들었거나 두려워하는 눈빛이 늘어났다. 그 외에 열망과 탐욕이 있었고, 가끔은 숭배의 눈빛도 엿보였다. 부풀어 오르는 감정들 앞에서, 난 물러나고 싶어졌다. 자연스럽고자 노력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를 바란다. #저널, 63페이지, 캠프 로버츠 「겨울동맹」이 예전보다 조용해졌다. 정확하게는, 내가 있을 때 한정으로. 공개된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다들 나를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다. 어려워하는 사람이 늘었고, 아첨하는 사람도 늘었다. 심지어는 박진석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변하지 않은 건 이유라 씨와 민완기 부장님 정도. 민 부장님은 그저 감탄했다며 웃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더는 누구도 나를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 변화한 분위기가 내게도 불편했지만, 감내해야 할 것이다. 차츰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내실 (1), 캠프 로버츠 이 세계관의 종말에는 일정한 주기가 있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듯이, 험한 사건 한 번 겪으면 조용한 때가 찾아온다. 세상 끝나가는 분위기를 만끽하라는 배려 같았다. 물론 이는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겨울은 지금이 간빙기라고 판단했다. 종말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를 때를 대비해야 한다. 이 기회에 내실을 다지고, 「겨울동맹」의 전투력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작전과장에게 훈련계획을 승인받았다. 겨울의 직속상관이 대대장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작전과장은 계획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깐깐하게 굴진 않았다. 오히려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훈련복과 전투식량을 불출해주고, 샤워나 식사를 할 때 미군 시설을 써도 좋다는 허가까지 내주었다. 산타 마리아의 기적은 그에게도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겨울은 산타 마리아에서 획득한 경험 자원을 「교습」에 투자했다. 리더십에 필수적이라 익힌 적이 많다. 「재능이익」이 크게 작용했다. 즉 부담이 적었다. 그래도 10등급과 11등급의 경계는 고민스러웠다. 여력을 남겨, 전투기술을 최대한 강화하고 싶었다. 길게 이어진 고민. 그것은 유라를 보았을 때 끝났다. 훈련을 시작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높은 의욕만큼이나 대단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걸을 때 오른발과 오른손이 같이 나갔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인 뒤 「교습」을 11등급으로 증가시켰다. 전투대원은 예비로 3배수를 뽑았다. 훈련을 진행하면서 부적격자를 쳐낼 작정이었다. 남녀비율은 동일하게 맞췄다. 세계관의 가장 특별한 존재,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상식의 범위에 있다. 훈련은 체력 단련(PT)부터 시작됐다. "시, 시작부터,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네, 아니에요." 겨울의 가벼운 대답. 그녀는 겨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그나마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숨 헐떡이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마일(3.2km) 달리기는 난생 처음이었으리라. 답답한 모양인지, 주황색과 노란색이 섞인 베스트(Vest)를 벗어던졌다. 턱선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유라는 양호한 편이었다. 여러 명이 여기저기서 구토를 했다. 나머지는 체면이고 뭐고 쭉 뻗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라고 다르지 않았다. 겨울이 뽑은 예비대원들은 처음부터 우수자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훈련에 조언을 해주겠다고 낀 3중대 피어스 상사는, 겨울의 지시가 사리에 맞는 것을 이채로워했다. 덤으로 기술보정을 받은 소년의 체력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시키는 입장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달리면서, 겨울은 선두를 추월하여 연병장 한 바퀴를 더 돌고 왔다. 그걸 본 상사가 호기롭게 웃으며 자신도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러고도 두 사람보다 일찍 들어온 전투조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히 비범하십니다, 물소위님." "상사님도 나이에 비해 대단하시네요." 피어스 상사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요것 봐라 싶은 표정이다. 겨울은 시청자 메시지를 살폈다. 방송을 생각한다면 자동진행으로 넘겨야 할 부분이지만, 그러면 「교습」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불가피한 수동진행. 그러나 의외로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가 예쁘면 에어로빅을 해도 좋아하는 생물이었다. 물론 여자도 땀에 젖은 섹시한 남자를 좋아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만족감의 정체였다. 유라의 몸매를 좀 더 엿봐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겨울은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청자 퀘스트가 붙었다. 유라가 토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좀 더 괴롭혀 달라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한숨을 쉬고, 겨울은 임무를 거부했다. 속을 알 리 없는 상사는 겨울의 한숨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실망스러우십니까?" "아뇨, 설마요.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흐음, 하고 미심쩍어하는 흑인. 그러나 파고들지 않는다. 실용적인 대화로 넘어갔다. "달리기가 가장 기본인 건 맞지만, 전투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건 단기지구력입니다. 다들 좀 적응하고 나면 2마일 러닝보단 셔틀 러닝을 시키시죠." "네, 그거 괜찮겠네요." 겨울은 증강현실 UI를 살폈다. 「교습」과 「통찰」의 연동이, 개인별로 적합한 운동량과 휴식시간을 알려주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자, 이제 다들 일어나세요." "네? 벌써요? 무리한 운동은 역효과 아녜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쉬었어요." "히잉, 작은 대장님......조금만 더 쉬어요......." 어느 여성대원이 우는 소리를 냈다. 진행상 너무 몰아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좀 그렇다고 고민할 때, 옆에서 피어스 상사가 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자신의 모자를 가리켰다. "소위님, 이걸 쓰고 있을 땐 악마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모자를 겨울도 쓰고 있었다. 챙 넓은 교관모다. 휴식이 간절한 사람들을 향해, 소년이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고 하네요. 모두 일어서세요." "안 돼......."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남자 몇 명 제외하면 주로 여성들이었다. 피어스 상사는 정말로 악마가 되었다. 눕히고, 굴리면서 모두를 흙투성이로 만든다.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유라가 아니었지만,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은 유라였다. 정말 힘들 때, 겨울 한 번 쳐다보고 이를 악무는 것이었다. 겨울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의 조건이다. 점심시간. 모두에게 군용식량(MRE)을 나눠주었다. 이런 식량을 먹는 것도 훈련이라며, 작전과장이 방출해준 물자였다. 난민들에 대한 이전까지의 취급을 감안하면, 난민 의용부대에 거는 기대를 알 만 했다. "으......이거 좀 짜지 않아요?" 칭얼대는 몇몇 여성들. 원래 짜게 먹는 미국인 입맛에도 짠 것이 군용식량이었다. "땀으로 잃은 염분을 보충해야 하거든요. 익숙해질 거예요." 지친 사람들은 먹는 것 자체를 힘겨워했다. 그래도 결국은 먹는다. 먹는 데 한 맺힌 사람들이었다. 휴식이 길어지자 다들 벗어던진 옷가지를 찾았다. 캠프 로버츠의 겨울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정도. 흐린 날의 바람은 한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피어스 상사가 군가를 가르쳤다. 사람들은 외우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영어로 되어있었으니까. 영어가 좀 되는 사람들은, 위트 넘치는 가사에 피식피식 웃었다. 오후에 한 바탕 더 굴리고서, 상사가 겨울에게 제안했다. "다들 저녁먹이고, 샤워나 시킨 다음에, 숙소까지 구보로 복귀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과시하라고요?" 겨울이 핵심을 짚자, 피부색 까만 상사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물소위님은 눈치도 빠르시군요. 우리도 압니다. 난민들 사이에서 파워 게임이 치열하다는 걸. 구보 따위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저 쓰레기통 한복판에선 눈에 아주 잘 띄겠지요." "군가도 그래서 가르치셨어요?" "겸사겸사입니다. 군가 하나 모르는 군인이 어디 있답니까?" 저녁은 예비대원들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군이 이용한 다음이었으나, 어쨌든 병영식당이 개방되었다. 전보다 초라해졌을지라도, 정규군을 위한 식단은 난민들의 배식과 질적으로 달랐다. 겨울은 그들의 폭식을 막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식후 온수샤워까지 제공되자 여성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제한시간은 10분. 남자에겐 충분하고 여자에겐 너무나 부족한 시간. 그래도 다들 최고의 표정이었다. 겨울은 상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둑한 시간, 난민구역의 체크 포인트를 구보로 뛰어 통과했다. 예비대원들은 낮에 배운 군가를 어물거리며 불렀다.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우리 늙은 할머니가 아흔 한 살이실 때 그녀는 재미로 PT를 하셨다네. 우리 늙은 할머니가 아흔 두 살이실 때 그녀의 앞길에 있으면, 그녀는 널 밟고 지나가셨을 거야. 우리 늙은 할머니가 아흔 세 살이실 때 그녀는 나무 위에서 PT를 하셨어! ...... 우리 늙은 할머니가 아흔 일곱 되셨을 때 그녀는 죽어서 천국으로 직행하셨지 그녀는 진줏빛 문 앞에서 성 베드로를 만났어! 그녀가 말씀하셨지. "이봐, 베드로. 내가 늦지 않았길 바라네." 성 베드로가 그녀를 보며 웃었어. 그가 말했지. "엎드려 할망구. 팔굽혀펴기 열 개 실시!" 체크 포인트를 지키던 미군 병사들이 대놓고 웃었다. 그들이 보기엔 예비대원들 모습이 색다를 것이었다. 몇 개의 구획을 통과하는 내내, 구경 나온 난민들은 어벙한 표정이었다. 예비대원들도 이게 즐거워진 모양이었다. 다리가 아파 쩔쩔 매면서도 자꾸만 피식거렸다. # 40 [40화] #저널, 65페이지, 캠프 로버츠 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맥과이어 대위가 예견했던 대로, 은성무공훈장이었다. 국방부에서 파견된 사람은 전과 동일했다. 그의 이름은 블리스. 공보처 소속의 소령이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었으나, 전처럼 방독면을 쓰고 다니진 않았다. 「모겔론스」가 공기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게 거의 확실해진 시점이었다. 소령이 나를 보는 눈은 복잡했다. 찬탄과 불만이 뒤섞인 눈빛. 가만히 보면, 이놈은 뭔데 자꾸 날 여기 오게 만드나. 이런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헌사는 대대장이 대독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나는 육군 정복 차림이었다. 늘어난 훈장이 제법 묵직했다. 전보다 훨씬 많은 카메라들이 이 장면을 담아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봉쇄선을 넘어온 기자들. 그들은 굶주린 동물처럼 내게 매달렸다. "합중국 사상 최단기간, 최연소 소위 진급을 달성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산타 마리아 작전 당시의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앞으로의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진 좋았다. "애인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죠?" "팬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나요?" 이런 질문은 도대체 왜 나오는 걸까. 게다가 팬은 또 뭐람.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내내, 블리스 소령이 옆에 붙어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기자들을 제어했다. 방금 질문은 부적절했다, 쓴 것을 보여 달라, 이 부분은 이렇게 고쳐라, 이건 방송에 내보내지 말아라. 언론에 대한 명백한 간섭이었으나, 기자들은 쉽게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캡스턴 중위가 지적했던 애국적 보도의 한 단면이었다. 범지구적 위기 상황이라 더할 것이다. 아, 이제는 캡스턴 대위라고 불러야겠지. 승진일자가 오늘이라, 아직 입에 붙지 않았다. 날 발굴한 공로로 주어진 특진이란다. 좋은 일인데, 당사자는 인상을 쓰고 다녔다. 창피하다고. 내게 더 많은 포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축하하러 온 다른 병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전공만 보면 명예훈장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은성무공훈장이 뭐랍니까?" "그러게. 명예훈장 역대 수훈자들을 다 털어 봐도, 한 번의 싸움에서 물소위님만큼 활약한 사람은 없는데 말야. 기껏해야 존 바실론이나, 어디 머피 정도?" "그 두 사람은 확실히......그래도 내가 보기엔 기어우르 소위님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래치먼과 시리스 병장의 대화. 난 그저 웃어주었을 뿐이다. 피어스 상사가 끼어들었다. "정치놀음이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에서 할 생각은 뻔하지. 난민지도자를 만들고는 싶은데, 한 사람에게 너무 강한 힘을 주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거 아니겠냐. 아프가니스탄에서 얻은 교훈이 있을 테니까." 피어스 상사가 든 예, 전에도 한 번 들어본 적 있었다. 영어 잘 한다는 이유 하나로 관리자 역할을 맡았을 때던가. 그럴 듯한 분석이다. 통제 불가능한 무장집단이 출현할 지도 모르니까. 달걀은 한 바구니에 몰아 담지 않는 법이었다. "상사님은 의외로 그런 쪽에 자세하십니다. 겉보기엔 그냥 근육마초신데." 귈레미가 이 말을 했다가 한 대 맞았다. 가볍게 쳤는데도 끙끙 앓는다. 상사가 대꾸했다. "내 짬이 몇 년이라고 생각 하냐? 연대, 사단에 있는 동기들에게 얻어 듣는 게 얼만데. 정치는 군인들의 세계에도 있다. 이 바닥에서 별 달고 싶으면 정치를 잘 해야 해. 하다못해 평범한 장교나 너네 같은 꼴통들도 마찬가지야. 윌리엄 스웬슨 몰라? 위쪽에 밉보이면, 아무리 잘 싸워도 인정받기 힘들어." 상사는 별을 중의적인 의미로 말했다. 윌리엄 스웬슨이 누구인진 몰라도, 들은 사람 모두 끄덕끄덕 하는 걸 보니 억울한 경우를 당한 사람 같았다. "근데 한 소위님, 정말로 이게 끝이랍니까?" 귈레미의 질문. 난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훈장뿐이지만, 차후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블리스 소령의 말에 따르면 '적합한 자격을 지니게 된 후'라고 한다. 적합한 자격이란 것은 보다 확실한 장교교육을 뜻했다. 나로 인해 난민의용군 편성 계획이 계속해서 재평가되면서, 기대수준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현장에 있는 장교들에게서 추가 교육을 받고, 나중엔 군 교육시설에서 자격시험을 받게 된다고 한다. 구체적인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부하를 통해 알려주겠다고, 소령이 말했다. 알고 보니 그의 부하가 맥과이어 대위였다. 상사가 싫어하겠다던 대위의 말이 떠올랐다. 소령의 눈에 엿보이는 피로와 불편함. 이걸 말한 것이었구나 싶었다. 수여식 이후엔 미국 시민 거주구역에서 축하연이 열렸다. 공식 일정은 아니었고, 시민들의 요청을 캠프 사령이 승인한 것이라고 했다. 작은 꼬마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 성인들은 악수를 청했다.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Thank you for your service.)" 미국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 그것을 내가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때 어떻게 답해야 하더라? 가까스로 늦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당신의 응원에 감사드립니다.(Thank you for your support.)" 몇 명의 아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나를 서슴없이 영웅이라 부른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 아이들은 군인, 소방관, 경찰관을 영웅이라고 배우고, 그것을 부모에게 확인 받으며 자라나니까. 그런 분위기를 정책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생경했다. 임관 이후로도 미국 시민 거주구역은 와본 적이 없었다. 처음 와본 이곳은, 난민 거주구역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풍족하지는 않다. 허나 사람들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이들은 배고픔을 몰랐다. 잔디밭 너머의 이중 철조망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처럼 보였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구출한 사람들과도 오랜만에 재회했다. 내게 끝까지 비우호적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산타 마리아의 기적'......자꾸 이렇게 말하자니 부끄럽지만, 아무튼 이번 소식을 듣고 입장을 바꾼 경우가 있었다. 난 그들의 사과를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교장 스튜어트 해밀은 여전히 나를 학생으로 생각했다. 그는 대화하는 내내 착잡한 표정이었다. 좋은 사람이지만, 완고하다. 나중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베트남 참전용사라는 노인이 말을 걸었다. 주름이 많았고 눈이 깊었다. 그는 내가 겪은 전투들에 대해 묻다가,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았다. "내가 겪은 전쟁은,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 많았다오." 그의 회상은 무거웠다. 적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던 전장. 증오와 분노로 저질렀던 실수들. 그것들을 들려주며,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올바른 싸움을 하고 있소. 끝까지 후회를 남기지 마시구려." 나는 노병의 당부를 새겨들었다. #저널, 68페이지, 캠프 로버츠 오늘의 뉴스엔 몇 가지 귀담아둘 만한 정보들이 있었다. 산타 마리아에서 마주쳤던 이상한 변종들. 그것들에게 정식으로 명칭이 붙었다. 「구울」. 형상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능력 면에서 보통의 변종보다 월등한 개체라고 한다. 질병관리본부는 「모겔론스」가 숙주에 적응하는 단계를 넘어섰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질병이나 기생충과도 다른 존재라고 발표했다. 인간이 환경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도구를 만들어내듯이, 「모겔론스」 또한 인간을 이용하고, 개발하여 도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변종의 분류기준이 재정립되었다. 능력을 척도로 강화변종을 구분하고, 기능과 형상을 척도로 특수변종을 구분하여, 각각의 변종에 별도의 등급과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다. 한편 국방부에서는 변종집단을 차단할 새로운 대책을 내놓았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노이즈 메이커」를 봉쇄선 이서 3천 개소에 설치하여, 변종들을 소음으로 유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실험을 거듭해왔다고. 지상군을 투입할 때 주변 일대를 교란하여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구상. 실현된다면 각지의 수용 캠프도 훨씬 안전해질 것이었다. 국방부는 나아가 오염지역마다 전진기지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포병을 배치해서 오염지역 화력지원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앞으로 내게도 관련된 임무가 내려오겠지. #내실 (2), 샌 미구엘 훈련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겨울은 현장학습을 결심했다. 예비대원들은 캠프에서 나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이 심리적 저항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한 명은 끝까지 거부했다. 여성이었는데, 너무 겁을 먹어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겨울은 미련 없이 탈락시켰다. 현장이라곤 해도 다른 곳보다 훨씬 안전하다. 캠프 로버츠에서 가장 가까운 거점으로서, 임무부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는 길목이니까. "그렇다고 안심하진 마세요. 외부에서 자꾸 유입되니까. 오늘 아침 항공정찰 결과로는 도시 전체에 몇 마리 정도 있나 봐요. 건물 안을 감안하면 좀 더 있을 수도 있고." 겨울의 가벼운 경고. 몇 명이 마른침을 삼킨다. 철길과 나란히 달리는 도로를 따라, 시가지 북쪽으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반파된 제분소가 보였다. 열차 잔해가 방치되어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도 그대로였다. 폭탄 터진 자국과 도로에 뿌려진 검은 혈흔들. 다만 시체는 한쪽에 쌓아 불태워 놨다. 나중에 방문한 임무부대의 노력이었다. "작은 대장님이 여기서 처음 싸웠던 거죠?" "네. 맞아요. 제분소에서 식량을 챙기고 있는데, 탈선한 열차가 제분소를 들이받았어요. 객차마다 변종이 꽉 차있었죠." 예비대원들이 조심스럽게 열차를 살폈다. 가이드를 줄지어 따르는 관광객들 같았다. "탈출하는 시민들이었겠죠?" "승객 중에 감염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기 인형이 있어요! 아이들도 탔었나 봐요. 불쌍해라......." 그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대화. 여전히 군인보다는 민간인에 가까웠다. 거리는 아주 을씨년스러웠다. 곳곳에 미군이 남긴 표식이 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만들어둔 쉘터와 무기, 식량의 위치를 알린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위해 연락수단도 마련해두었다. "일단 분위기에 익숙해지려고 해보세요." "아, 넵!" 긴장한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대답했다. 본인부터 깜짝 놀라고, 주위에서 눈총이 쏟아진다. 유라의 사정도 크게 낫진 않았다. 이미 외부임무를 한 번 경험한 입장인데도,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손이 떨린다. 자신이 조장이라고 생각해서 참는 게 그 정도였다. 하긴 파소 로블레스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아, 저기 변종들이 있네요." 겨울이 발견했다. 도로변의 모텔 인근을 변종 한 놈이 어슬렁거리는 중이다. 사람들이 소스라치는 것과 놈이 이쪽을 발견하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끄아아아아-! 달려오는 죽음의 형상. 소년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쏘지 마세요. 잡아올 테니." "네? 잡아온다고요?" 기겁 하는 사람들. 그러나 붙잡지는 못한다. 변종 입장에선 가장 가까운 먹이다. 달려들었다. 소년이 좌로 한 발 빠지며 회전했다. 「근접전투」 10등급, 제대로 된 돌려차기가 변종의 아래턱을 직격했다. 빠악! 거창한 소리. 빼물었던 혀가 잘렸다. 검게 변색된 작은 살덩이 하나가, 툭 하고 길가에 떨어졌다. 겨울이 정신 못 차리는 변종을 몇 대 더 패더니, 미리 준비한 천 뭉치를 입에 쑤셔 넣고, 재갈을 물리고, 머리 뒤에서 단단히 매듭지어, 뒷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어왔다. 핏자국이 남는다. 변종이 입으로 줄줄 흘리는 탓이었다. "헐......." 예비대원들 입장에선 황망하다. 그동안 감염변종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실체 없는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그게 너무 간단하게 박살났다.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자, 보세요. 좀 더 가까이들 오세요. 이게 감염변종입니다. 진짜는 처음 보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일행은 기가 질린 얼굴로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여성, 달아나고 싶은 남성,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굳어버린 그 외의 사람들. 겨울은 변종 뒤에서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꽈악 파고드는 억센 손가락. 여러 기술에서 중첩으로 붙은 근력보정 때문에, 보통의 변종은 겨울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허우적허우적, 발광은 헛된 몸부림일 뿐. 소년이 말했다. "일단 변종에게 잡히는 게 어떤 느낌인지부터 경험해보죠." "네?!"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거예요. 유라 씨가 대장이니까 가장 먼저, 다음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오세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유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머뭇머뭇, 변종의 손닿는 거리로 들어왔다. 변색된 손 한 쌍이 그녀의 양 팔을 움켜쥔다. "히익!" 완전히 굳어버리는 유라. 이것은 뿌리치는 연습이기도 한데, 영 움직이질 못한다. 지켜보던 겨울이 남는 손으로 변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묵직한 타격음. 골이 흔들린 변종에게서 잠시 힘이 빠졌다. 유라가 얼른 빠져나온다. 몇 걸음 못 가 주저앉더니 훌쩍훌쩍 울었다. 여자들이 모여 위로해주었다. 겨울은 순서를 몇 바퀴 돌렸다. 변종이 더 이상 붙잡지 않게 될 때까지. 으어어어....... 천뭉치와 재갈에 막혀 작아진 신음. 변종이라도 기본적인 지능은 있다. 붙잡을 때마다 패니 학습효과가 허기와 본능을 넘어선 것. 이젠 사람이 다가와도 붙잡지 않고, 데굴데굴 눈만 굴렸다. 그 모습이 시무룩해 보인다. 사람들은 처음처럼 겁을 내지 않게 됐다. 오히려 대담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적당할 때 또 와주네요. 아까 이 녀석이 지른 소리를 들었나본데요." 겨울의 말처럼, 도로 저 멀리로부터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변종 다섯이 있었다. 아직은 거리가 있다. 겨울이 변종을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는 뒤통수를 봤지만, 이제 정면에서 붙잡은 셈. 남자들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 목을 비틀어서 죽여보실 분?" "네?......네에?!" 사람들이 다급해졌다. 저 멀리 달려오는 변종과 소년을 번갈아 바라본다. 총을 드는 사람들. 겨울이 그들을 막았다. 그리고 침착하게 재촉했다. "시간 별로 없어요. 빨리요." "......." "그냥 제가 지목해야겠네요. 거기, 나오세요." 지목당한 남자는 처참한 표정이었다. 주위에서 밀어내니 어쩔 수 없이 나온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은 뒤통수를 잡고......아니, 반대 방향으로요. 네. 그리고 남은 손은 턱을 받치세요. 앞으로 잡으면 물릴 수도 있으니까. 이제 양손에 힘을 꽉 주세요. 주시고, 확! 돌려요!" 우드드득. 확실하게 돌았다. 남자가 진저리를 치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겨울이 권총을 뽑으며 뒤로 돌았다. 반회전하며 부채꼴로 열 발을 쏜다. 고작 10미터 거리에서, 무릎이 박살난 변종들이 요란하게 굴러왔다. 심하게 넘어졌다. 부딪힌 자리마다 살이 벗겨졌다. 다리를 못 쓰게 되자 팔로 기어오는 놈들. 겨울이 가서 팔을 죄다 뽑아 놨다. 명치를 쳐서 잠시 동안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조용해진다. 어긋난 팔, 뼈가 깨진 무릎. 변종 다섯 마리는 바닥에 엎어져 버르적거리기만 했다. "자, 아무나 나와서 하나씩 쏘세요." 잠시 후, 겨울이 한숨지었다. "이번에도 지목해드려야겠네요." 지목당한 다섯 명이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각자의 총을 조준했다. 세 명은 남자, 두 명은 여자. 예외 없이 망설이거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변종이라도 생김새는 사람과 같다. 좀 썩고 더러워서 그렇지. 따라서 저항감은 필연적이었다. "쏘세요." 표정 없이 던지는 강한 요구. 눈치를 보던 끝에, 누군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을 신호로, 연쇄반응 같은 격발이 이어진다. 드드득! 퓩! 퓩! 드득! 서로 다른 종류의 화기들의 합창. 코앞에서도 못 맞춰서 다시 쏘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 한 명은 아예 눈을 감고 쐈다. 맞아서 다행이다. 그나마 이게 양호한 결과였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쏘지 못했을 사람도 있었다. 앞서 머리를 돌린 남자 역시 그렇다. 「교습」의 영향력이 그들의 행동을 단축시킨 것. 그것은 또한 부작용도 줄여줄 것이었다. 한 여성이 울면서 항의했다. "너무하세요. 여자한테 이런 걸 시키면 어떡해요." 겁에 질려 되는 대로 나오는 말이었다.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을 뿐.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으면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다. 몰아붙이는 건 바보짓이었다. 겨울은 죽어 넘어진 변종을 가리켰다. 온화한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보세요. 싸우는 데 필요한 힘은, 사실 방아쇠를 당기는 정도로 충분해요. 대단한 게 아니에요. 여자도 싸울 수 있고, 남자만큼 강해질 수 있어요."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추며 다시 잇는 말. "이런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라는 건, 결국 살아남는 사람이거든요." 항의했던 여성이 고개를 숙였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만 난다. 겨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살아남으세요. 살아남게 해드릴 테니." # 41 [41화] #내실 (3), 캠프 로버츠 「교습」의 효율은 대상이 적을수록 증가한다. 겨울이 주말에도 유라를 굴리는 이유였다.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들을, 그녀는 이 악물고 견뎌냈다. 지금은 사격훈련이다. 10미터 거리에 대형 표적 여덟 개가 줄지어 있었다. 각 표적마다 열 개씩 숫자가 적혀있다. 그 중에서 쏴야 할 것은 7의 배수. 이동 간 사격이고, 한 자리에서 3초 이상 머무르면 안 된다. 7의 배수, 7의 배수. 유라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겨울이 스톱워치를 누르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야 이 개 같은 창녀야! 너 같은 갈보년은 태어난 게 잘못이야! 씨발, 왜 태어났어! 부모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아니면 너네 엄마도 창녀보지야?!" 중년 남성 한 명이 유라에게 붙어 온갖 욕설을 쏟아낸다. 거칠게 밀기도 했다. 유라가 입술을 깨문다. 타앙! 첫 사격은 빗나갔다. 곧바로 재사격, 재사격, 재사격. 3초가 지나기 전에 네 발을 쏘고 두 걸음 걸어 다시 조준한다. 흔들리는 조준선. 남자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다. 입 냄새가 지독하다. 유라는 혼란을 느꼈다. 42는 7의 배수가 맞던가? 열 오른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다. 쐈다. 불확실한 여운을 남기고, 이동하는 그녀. 다음 표적이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표적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19? 아냐. 25? 아냐. 63?......7 곱하기 9. 맞아. 쏴야지. 쐈나? 빗나갔어? 다시......아, 3초! 겨울은 그녀와 보폭 맞춰 이동하며 점수를 매겼다. 100점으로 시작해서 깎아가는 방식이었다. 빗나갈 때마다 감점. 3초 이상 정지 시 1초마다 감점. 잘못된 숫자를 쏴도 감점. 맞는 숫자를 쏘지 않아도 감점. 유라가 두 번째 표적을 통과했을 때, 점수는 79점까지 떨어졌다. 철컥. 탄이 바닥났다. 유라는 한 손으로 탄창을 빼내며, 다른 손으로 예비 탄창을 꺼냈다. "앗!" 놓쳤다. 울상을 짓는 유라. 겨울은 5점을 깎았다. 허겁지겁 탄창을 줍는 그녀의 머리 위로, 입 냄새 심한 남자의 욕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경황없었던 그녀는, 결국 쏴야 할 숫자 두 개를 남겨놓고 다음 표적으로 뛰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졌다. 끝까지 처음 같았다면 최종점수는 0점이었을 것이다. "47점이요?" "네. 1분 19초에 47점. 잘 하셨어요." "하아......." 유라는 얼굴을 감싸며 쪼그려 앉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훌쩍. 손끝으로 눈물을 훔친다. 이제껏 갖은 욕을 퍼부었던 남자가 굉장히 미안해했다. "어......미안해요, 유라 양. 본심은 아닌 거 알죠?" "알아요. 힘들어서 그래요.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처음도 아니고." 겨울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라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묵묵히 받아들이는 그녀. 눈가를 꾹꾹 눌러 닦는다. 훈련을 돕던 중년인도, 눈치를 보다가 겨울 옆에 앉았다. 커흠, 흠! 헛기침을 한다. 겨울은 웃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나온 것은 담배 한 갑. 아래를 툭 친 다음, 나이든 남자에게 내밀었다. 한숨 쉬며 한 대 뽑는 중년인. 그가 물자, 겨울이 불을 붙여주었다. 쓰읍-! 담배 끝이 눈에 띄게 타들어갔다. 중년 남자는 연기를 들이쉰 채 숨을 멈췄다가, 걱정스러울 지경이 되어서야 푸하 하고 내뱉었다. 그러더니 투덜거리는 말. "담배 태울 수 있대서 좋다고 왔더니, 이거라도 없으면 못할 짓이구먼요. 욕을 잔뜩 준비하라기에 대체 무슨 일인가 했지....... 가장 힘든 사람은 유라 양이겠지만. 난 솔직히 유라 씨가 날 쏘면 어쩌나 무섭더라고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담배가 쭉쭉 없어진다. 겨울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조용한 시간이었다. 몇 분 지나 눈물 마른 유라가 물었다. "이 연습은 왜 하는 거예요?" 직후, 유라가 덧붙였다. "저기, 절대로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총은 멀리서 맞추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녀가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방향이 바뀐 바람 탓에, 담배 연기를 잘못 마셔서 그렇다. 중년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고, 겨울이 말했다. "다급할 때 침착함과 판단력을 유지하는 훈련이에요. 유라 씨는 전투조장이잖아요. 소대가 편성되면 분대장이 되실 거고요. 실전에서 유라 씨가 혼란에 빠지면, 유라 씨뿐만 아니라 분대 전체가 위험해질 거예요. 그걸 예방하고 싶어서요." "그렇구나......." 마른세수를 하는 유라. 그녀는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손수건을 챙기고, 기합을 넣으며 일어섰다. 양 뺨을 스스로 때린다. 짜악! 그리고 잠시 혼자서 아파했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글썽거리는 눈동자 한 쌍.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는 척 새침을 떼고, 유라가 말했다. "더 열심히 할래요. 다음은 뭔가요?" 그녀는 열심히 뛰고 굴렀다. 사격훈련도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잘 견뎌낸다. 겨울이 「간파」한 그녀의 잠재력이기도 하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교습」의 영향으로 소모가 줄어든 영향이기도 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유라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겨울이 부축해주겠다고 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 주위에 약한 모습 보이기 싫다는 이유였다. 동맹원들보다는 다른 조직의 눈을 더 신경 쓰는 눈치다.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라,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인데요?" 한 발 앞서가던 중년인이 놀란 소리를 냈다. 「겨울동맹」의 근거지 가까이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편을 가르듯이 나누어 서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돋우는 중이다. 겨울이 유라를 중년인에게 맡겼다. "천천히 오세요. 먼저 가볼게요." 그가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급변한다. 한쪽은 「겨울동맹」 사람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빠르게 밝아진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쪽은 「다물진흥회」 사람들이다. 겨울은 임화수와 같이 있던 어깨들을 알아봤다. 눈길을 마주치자, 모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술렁이며 물러나는 무리. 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여자와 아이, 노인들도 겁을 집어먹었다. 전투원이 아닌 사람들은 뭐 하러 왔지? 무리 사이에 끼어있던 두 명의 부장이 다가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대장. 그렇잖아도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장연철은 겨울을 무척이나 반겼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민완기도 태연한 척 하지만,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부장으로서 가장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학자가, 힘쓰는 덩치들 앞에 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두 부장 모두 책임감을 발휘한 셈이다. 겨울이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장연철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다물진흥회」 쪽 가까운 자리에서 남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저 아저씨가 우리 몽이를 데려갔어!" 이제 열 살 쯤 되었을까. 작은 눈에 눈물과 미움이 가득했다. 아이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급하게 뛰어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감싸 안고, 겨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뒤로 빠지려는 것을 겨울이 붙잡았다. 손길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어머니. 겨울은 안심하라는 의미로 곧장 손을 뗐다. "잠시만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해를 끼치진 않을게요. 약속하죠." 약속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겨울에게 거스를 수 없어서 못 박힌 듯 서있을 뿐. 소년에 대한 온갖 풍문을, 좋지 않은 쪽으로만 들은 것 같았다. 하기야 「다물진흥회」 사람이니까. 남자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뛰쳐나왔다. 겨울이 한 쪽 무릎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형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몽이가 뭐니? 혹시 강아지니?" "강아지야! 엄마가 내 동생이라고 그랬어!"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힌다. 겨울이 다시 물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몽이를 누가 데려갔다고?" "저 아저씨!"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당혹스러운 표정의 한 남자가 있었다. 주위가 분분히 흩어졌다. 겨울이 남자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억울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남자. 겨울이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성함이 유재흥 씨......셨던가요?"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맞습니다, 작은 대장. 기억하시는군요." 딱히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겨울동맹」 구성원들의 이름을 최대한 외우려고 노력했을 뿐. 좋은 리더십을 위한 과제의 하나였다. 어쨌든 그는 자기 좋은 쪽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겨울이 질문했다. "묻겠는데, 이 아이의 강아지를 데려가셨나요?" 네, 아니오. 둘 중의 하나를 기대했건만, 장황한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 사실은 말입니다, 이게 서로 좀 오해가 있어서 말이죠......." 자기합리화가 필요한 사람은 말이 길어지는 법. 겨울은 인상을 찌푸리고 싶었지만, 최대한 인내했다. 그랬다간 훨씬 더 긴 변명이 붙을 것이었다. "즉, 요약하면." 끝까지 들은 겨울이 불필요한 부분을 쳐냈다. "주인이 없는 줄 알고 데려간 거다, 이거네요?" 유재흥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개 한 마리 돌아다니는데 주위에 사람은 없고 해서......." 남자아이가 빽 소리 질렀다. "거짓말! 몽이는 내가 데리고 있었어! 니가 빼앗아갔잖아! 이 나쁜 새끼야!" "어허! 어른한테 새끼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버럭 소리 지르는 유재흥. 삿대질을 어머니 쪽으로 돌린다. "자식 교육 똑바로 시켜! 가정교육이 개판이니까 개 한 마리 제대로 간수 못해서 이 사단이 나는 거 아냐!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 새고 그러는 거야. 알겠어?!" 「다물진흥회」쪽에서 불만의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러나 그 크기는 무척이나 작았다. 겨울이 그들의 누름돌이었다. 남자, 유재흥이 더욱 기세를 올렸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고 믿는 것 같았다. 겨울이 그의 삿대질을 붙잡았다. "어? 작은 대장?" 폭주가 멎은 유재흥이 눈치를 본다. 겨울은 그의 손을 끌어내린 뒤, 여상한 낯으로 침착하게 물었다. "다시 확인할게요. 재흥 씨가 강아지를 데려올 때, 주위에 사람은 없었던 거죠?"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제가......." "거기까지. 지금부터는 최대한 간단하게 대답해주세요." 재흥은 자기 말을 잘라놓자 불편해 보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은 아이 어머니에게, 아드님 귀를 잠시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에 할 질문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추궁하려면. "그럼 그 강아지는 어떻게 하셨어요?" "어......저도 주인을 좀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 아시잖습니까. 우리 사정이 다 변변치 못해서......." "짧게 해주세요." "......삶아 먹었습니다." 작게 우물거리는 대답. 애완견이 잡아먹혔다는 말을 들으면 애가 얼마나 울부짖었을까. 아이 어머니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에게 강아지를 동생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어머니 쪽의 애착도 상당했을 것이다. "유재흥씨. 스스로 한 말씀들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 아시죠?"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처음부터 말이 이상하잖아요. 강아지를 챙길 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재흥 씨를 지목한 건데요? 사정 모르는 아이가 무턱대고 지목해서 정말로 개 도둑일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세요?" "개 도둑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거짓말쟁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사기꾼? 어느 쪽이건 제가 도둑만큼이나 싫어하는 부류인데. 마음대로 골라보시죠." 그러자 개 도둑이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땅을 보며 한참동안 묵묵했다. 이윽고, 그가 한숨처럼 내뱉는 말. "작은 대장님,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제가 뭘 잘못했죠?" "우린 같은 편이잖아요!" 그는 속이 터진다고 가슴을 두드렸다. "저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에요. 적당히 둘러댔으니까 적당히 편들어주셔야지! 어? 양쪽 사람들 다 보는데 이게 뭡니까? 창피하게시리. 이러면 대장한테도 좋을 게 없어요!" "저한테 나쁠 건 또 뭔가요?" "같은 편 안 지켜주는 대장을 누가 따르겠어요? 예? 고작 개 한 마리, 이런 사소한 일로도 이렇게 몰아붙이면은, 나중에 정말 중요한 일에서 대장을 믿을 사람이 있긴 하겠느냐......뭐, 이런 말이에요-." 그는 손을 딱딱 떨치며 열성적으로 떠들어댔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 시국에 개를 키우는 게 말이나 됩니까?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데 개먹이가 웬 말이에요 그래? 사람 나고 개 났지 개 나고 사람 났습니까? 멀쩡한 사람이 그 꼴을 어떻게 봐요? 그건 보는 사람들 다 욕보게 만드는 거예요. 그 꼴을 참아줘야 하니까!" "......." "그래요. 제가 좀 잘못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잖아요. 이럴 땐 융통성 있게, 응? 여기까지가 내 사람이다, 확실하게 정해놓고 확실하게 챙겨줘야, 이야- 이 사람이 내 대장이구나! 하고 충성을 바치는 거지. 응? 안 그래요? 그러니까, 대장님, 저 사람들 대충 보내고 우리끼리 다시 이야기합시다. 예? 체면 떨어진다니까 그러네." "그만 하셔도 돼요." 겨울이 그의 말을 막았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먹었다는 부분은 못 들었어도, 눈치가 있었다. 엄마가 왜 귀를 막았나. 주위 사람들의 표정은 왜 저런가. 아이와 어머니를 향해, 겨울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낮은 비명이 편을 가리지 않고 번져나갔다. 개의치 않았다. 겨울은 머리가 땅에 가깝도록 고개를 숙였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치겠네, 와 진짜 미치겠네. 이렇게 중얼거리는 건 옆에 있는 유재흥이었다. 이러지 말라고, 체면 깎인다며 겨울을 일으키려 애썼다.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이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술렁이던 「다물진흥회」 쪽에서 남자 하나가 나섰다. "큼, 거, 그만 됐으니 일어나 보쇼." 겨울이 답했다. "전 지금 「다물진흥회」가 아니라 몽이 어머니와 형에게 사과드리는 겁니다." "내가 몽이 아버지요." "......." 겨울이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시선도 주지 않고, 원인제공자에게 던지는 말. "유재흥 씨." "뭐, 뭡니까?" "선택권을 드릴 게요." "선택권......이요?" "네." 이어지는 말은 주위의 모두가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겨울동맹」을 나가시던가, 아니면 저한테 좀 맞으시던가. 둘 중에 하나 고르세요." 두 눈을 꿈벅꿈벅, 제 귀를 의심하던 유재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생각 같아선 그냥 나가라고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곧장 살해당하시겠죠. 그래서 선택지를 드리는 거예요. 고르세요. 10초 안에 안 고르시면, 동맹 나가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대장! 작은 대장!" 대경실색한 개 도둑이 다급하게 매달렸으나, 겨울은 이미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장교가 되면서 PX에서 산 물건이다. 겨울의 말처럼, 동맹에서 추방되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었다. 이 꼴을 다른 조직들도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10초. 애초부터 짧은 시간이 체감으로는 더더욱 짧았다. 겨울이 시계에서 눈을 떼는 순간 유재흥은 비명으로 선택했다. "맞겠습니다! 맞을게......!" 겨울이 곧바로 쳤다. 이빨과 함께 피가 튀었다. 최대한 보기 살벌하게 쳤다. 목적은 일벌백계다. 죽이려는 건 아니었으니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진심으로 치면 일격에 사망한다. 적당히, 일주일 쯤 걷거나 먹기 힘들 정도가 좋다. 10등급 「근접전투」와 「통찰」의 연동은 최적의 강도와 횟수를 계산해주었다. 3분 정도 두들겨진 유재흥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사, 사려주세여! 잘모해서여! 이제 안 그헐게여." 후. 겨울은 숨을 돌렸다. 가슴 속 돌이 달아오르던 참이었다. 화를 내고 싶다. 그 욕구를 억누르며, 얼빠진 장연철을 향해 말했다. "이 분 좀 데려가세요. 필요한 약이 있으면 나중에 따로 말씀해주시고요." "예? 아, 네!" 장연철이 황급히 달려왔다. 평소 장연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 그리고 친해져서 이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얼른 붙어 그를 도왔다. 겨울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지금껏 지켜본 유라는, 머뭇거리며 다가와서 겨울의 눈치를 봤다. "아직 화나신 거 아니죠?" "그렇게 보이나요?" 차분한 대답에 안심한 그녀가 방긋 웃었다. "아까 무릎 꿇으실 때, 멋있었어요. 역시 작은 대장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 이상한 사람이 우리 편이니 뭐니 주워섬긴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대장이 때려줄 때 속이 다 시원했거든요. 다들 마찬가지일걸요?" "고마워요. 들어가서 쉬세요." 그녀는 들어가면서 겨울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겨울이 저녁 바람을 맞으며 속을 식히고 있는데, 민완기가 나란히 섰다. "욕보셨습니다." "아녜요. 한 번은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걸로 내실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작은 대장님의 취임사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장 부장에게도 언질을 해두죠." 잠시 뜸을 들이고서, 민완기가 말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습니다만, 저쪽과 우리가 상부상조한 셈이군요." 개 도둑의 개 같은 소리 중에, 그래도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것이 있었다. 이 시국에 개를 기르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 그렇다. 아무나 키울 순 없다. 애완동물을 먹이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몽이 가족'은 「다물진흥회」 내에서 서열이 높은 편이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 몽이 아빠는 왜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섰을까. 어머니는 훨씬 먼저 나왔는데. '억울한 피해자'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연출된 사건. 결국 「다물진흥회」도 내실을 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적대적인 겨울의 위상이 높아졌으니, 더더욱 절실했을 터. 유재흥은 미끼에 낚인 물고기였다. 물론 그 자신의 이기심이 원인이니 구제의 여지가 없다. 생각은 곧바로 「텔레타이프」 문자열이 되었다. 겨울이 평했다. "재미없는 연극이었어요. 오늘 이후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주의하지요. 대장님이 워낙 잘 때려주셔서, 다들 스스로 자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민완기가 담배를 물었다. 겨울이 불을 붙여주었다. # 42 [42화] #공익광고, 2042년 하반기 빛나는 세계, 사계절이 한 데 어우러진 풍경.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 은퇴한 노인은 숲 속의 오솔길을 걷는다. 봄빛 아지랑이 위로 여름을 알리는 꽃이 피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엔 가을빛 단풍잎들이 떠내려 왔다. 만개한 벚나무 가지는 솜털 같은 첫눈에 덮여있다. 전자신호의 환상으로 빚어진 낙원 그 자체였다. 69세 김상순 노인은 고운 손을 뻗어 이름 없는 과실을 딴다. 한 입 깨물고, 혀가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감각을 만끽했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 그녀의 하얀 원피스를 스치고 지나간다. 길고 검은 생머리가 향기롭게 흩날렸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 때, 높은 하늘을 보는 노인은 근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석훈이는 괜찮으려나....... 요즘 경제도 불황이라고 하던데, 내가 뭔가 도울 방법이라도 있었으면.......」 그녀는 나무 가까이로 다가갔다. 둥치 가까운 낮은 곳에서 새싹이 돋아나, 금세 굵게 자라났다. 노인은 새로 자란 가지에 다소곳이 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노인에게 공감하는 여성 나레이터의 목소리. "사후보험 입적 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상순 노인은 현실에 두고 온 손자가 걱정스럽습니다. 아들내외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손자 주석훈씨를 기른 것은 김상순 노인이었습니다. 손자를 달리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회사는 잘 다니고 있을까, 혹시 어디 아프지는 않을까, 결혼소식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걸 보면, 사정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 마음, 사후에도 이어지는 가족사랑은 얼마나 고귀한 것일까요." 화면이 바뀌었다. 포커스는 침울한 눈빛의 남자에게 맞춰졌다. 자막이 뜬다. 27세 주석훈. 정육점 운영. 매장은 한산했다.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적는 장부에는 붉은 글씨가 많았다. 나레이터가 그의 처지를 설명해주었다. "최근 주석훈 씨의 정육점은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식생활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현실에서의 육류섭취는 이제 사치스러운 행위가 되었지요. 현실에서는 필수적인 영양소만 섭취하고, 가상현실에서 산해진미를 맛보는 쪽이 훨씬 더 경제적이니까요." 뒤이어 나타나는 자료화면들. 식품시장의 86%를 에너지 팩이 차지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에너지 팩. 모든 영양소의 성인 1일 섭취 권장량을 함유한 겔 형태의 식품으로, 별도의 조리 없이 곧바로 짜먹을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소비자들의 인터뷰가 뒤따랐다. 「정보경 (23세, 대학생) : 이거에 만족하냐고요? 솔직히 맛은 없죠. 딸기 맛 사과 맛 포도 맛 이러는 데 인공적인 향이 너무 강해서 싫기도 하고....... 그래도 영양 밸런스가 완벽하니까 건강엔 좋잖아요? 맛있는 건 대부분 건강에 나쁘니, 부작용 없는 가상현실에서 먹어야죠. 가격도 쓸데없이 비싸고.」 「박한수 (35세, 사무직) : 솔직히 현실 끼니 챙기기 귀찮아요. 가상현실에서 먹는 것들이 너무 맛있어서, 현실의 식사가 더욱 곤욕이라니까요? 좀 깬다고나 할까. 저도 빨리 은퇴해서 사후보험 적용받고 싶네요.」 「레악까나 소타릇 (29세, 외국인노동자, 캄보디아) : 아, 한쿡, 까상현실에서 먹는 밥, 씩사, 쪼아요. 한쿡 깜푸찌아 싸람들, 그냥 씩당 안 가요. 꼬기, 안 먹어요. 까상현실 밥, 꼐속 먹어요. 먹어도 먹어도 꼐속 먹고 시퍼요. 싸우보험, 친구들이랑 들었어요. 까족 껏도 들 꺼예요. 한쿡, 쩡말 멋쪄요.」 「장유선 (40세, 주부) : 글쎄,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찌개도 끓이고 생선도 졸이고 그랬죠. 지금은 다 까먹었어요. 하나도 생각 안 난다니깐, 호호. 부자동네에선 여전히 외식도 하고, 잘 만들어 먹는다는데, 솔직히 돈 낭비 같지 않아요? 현실에서 만들어 먹어봐야 가상현실보다 여러모로 불편할 뿐이잖우. 많이 먹으면 화장실도 자주 가야하고. 그 사람들이야 뭐, 우린 다르다고 과시하려는 거겠지. 꼴사납게시리. 안 그래요?」 이런 배경으로 반투명하게 지나가는 것은, 아까 보여주었던 정육점의 장부. 포커스는 다시 사람 없는 매장의 쓸쓸한 주인을 잡는다. 정육점 주인, 주석훈이 하소연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대학도 못 나왔어요. 배운 게 이것뿐이라, 장사 접으면 공장이나 가야죠. 외국인 노동자들이랑 같이 일하면서....... 희망이 없네요. 어떻게든 구매력 있는 동네......저기 강남이나 성북 쪽에 가게를 내면 되지만, 돈이 부족해요. 딱 천만 원, 천만 원만 더 있으면 되는데. 하아.」 여기서 화면이 갑자기 밝아진다. 풍경은 김상순 노인이 걷던 바로 그 꽃길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레이터가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김상순 님과 주석훈 님 같은 분들을 위해, 사후보험 약관대출 정책이 확대 시행됩니다. 기존에는 입적 이전에만 이용 가능한 서비스였지요.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김상순 할머니처럼 사후보험을 이미 적용받고 계신 분들도, 보장기간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희망찬 음악이 깔렸다. 따뜻한 느낌의 필터링을 거친 할머니와 손자의 사진이, 화면의 정 중앙에 자리 잡는다. "보험 입적 후 자주 찾아오지 않는 가족에 대한 섭섭함, 사후보험을 적용받는 모든 노인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처해있을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셨나요? 약관대출은 단순히 가족만 돕는 일이 아닙니다. 돈이 돌면 경제가 살아나고, 경제가 살아나면 나라가 살아납니다. 나라가 살아나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겠지요. 당신의 가족애와 애국심을 보여주세요. 대한민국 사후보험이 당신을 돕겠습니다." 다른 모든 공익광고처럼, 광고가 끝날 무렵, 휘날리는 태극기가 화면에 가득했다. "이 캠페인은 공익광고협의회, 국민연금공단, 사후보험공단이 함께합니다." 이후 약관대출 광고의 필수 안내사항을, 나레이터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읽었다. 어지간한 래퍼를 능가한다. 젊은 사람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 그 사이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채무자가대출금상환을3회이상연체할경우가입자의사후보험서비스가중지될수있으며가입자의사상부는보존대기상태로전환됩니다5회이상연체시엔가입자의사상부보존이중지됩니다......." #저널, 71페이지, 캠프 로버츠 전 세계의 난민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갈수록 심해졌다. 언론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해상난민들이, 미주 연안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중형 선박 이상으로만 1만 척이 넘는다고 했다. 자잘한 소형선과 어선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저토록 작은 배로 어찌 대양을 건넜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미국 서해안에서, 해상난민들의 주요 피신처는 샌프란시스코 만(灣), 미국-캐나다 국경 인근의 조지아 해협 등지였다. 샌디에이고 항만은 개방되지 않았다. 그곳은 미국 시민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군사기지와 함대 운용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 중 샌프란시스코 항만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다. 비록 샌프란시스코가 북미 서부 오염의 발원지이긴 하지만, 상륙하지만 않으면 안전할 수 있었다. 변종이 헤엄을 치진 못하니까. 바다 위의 난민들은 의외로 굶주리지 않았다. 어선들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은 덕분이었다. 미국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연료와 식량, 물자만 공급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당장은 오염지역에 고립된 시민들을 살리기에 바빴다. 피난한 선박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중엔 군함도 섞여있었기 때문에, 규모가 커지면 사실상의 전쟁이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날던 방송사 헬기가 군함간의 교전을 잡아냈다. 중국과 일본 구축함이 서로를 향해 함포와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자리싸움 때문이었다. 기자가 우울한 어조로 설명했다. 피난한 자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넓은 자리를 주려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유혈사태를 빚고 말았다고.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국민을 지키려는 군인들은 남아있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게 슬플 따름이다. 멕시코 국경 인근에서도 말썽이 일어났다. 장대한 국경에 걸쳐 모든 밀입국자를 막을 순 없었다. 국경도시 엘파소와 러레이도에서 감염자 수백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병했다. 미국이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제2의 샌프란시스코 사태가 벌어질 뻔 했다.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항공정찰을 강화해도 무용지물이었다. 마약 밀수에 이용되던 땅굴이 지금은 멕시코 시민들의 탈출 경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잠수함까지 동원되었다. 마약 카르텔이 보유한 밀수용 잠수함은 정식 선적도 없는 물건이었다. 백악관은 멕시코 정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불법 밀입국을 막지 못하면 멕시코의 도시들을 폭격하겠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토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멕시코 정부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백악관은 그저, 뉴스를 긍정적으로 끝낼 무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저널, 72페이지, 캠프 로버츠 유라 씨의 예비대원들에 대한 훈련이 마무리되었다. 미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전술훈련도 실시했다. 3주가 지난 시점에서 절반 이상이 탈락했다. 훈련강도를 감안하면 좋은 결과였다. 남은 사람들 모두 보상 받을 자격이 있었다. 정수보다 많은 인원이었지만, 그들 모두를 정식 대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탈락이 예상되었으나 꿋꿋이 견뎌낸 사람도 있었다. 앞선 현장학습에서 울음을 터트렸던 여자다. 이름은 장한별. 그녀는 의외로 훌륭한 자질을 드러냈다. 정식 대원으로서 개인장비를 수령했을 때다. 새로 받은 총은 영점사격이 필요했다. 총을 사람에게 맞추는 과정이었다. 한별은 쉽게 쏘는 것 같았다. 사격이 끝나고 표적지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휴....... 한 발도 안 맞았네요." 내가 잠깐 보자고 했다. 그녀는 창피해하며 종이를 내밀었다. 굉장히 잘 쐈다. 다섯 발을 쏘게 했는데, 좌로 치우친 위치, 손가락 한 마디 안에 모든 구멍이 다 뚫려있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사격교관으로 붙은 미군들도 표적지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솔직하게 칭찬했다. 정말 잘 쏘셨다고. 그녀는 못미더운 눈치였다. "괜히 위로해주실 필요 없어요." 정말로 잘 쏜 건데. 이상하다. 영점사격을 하기 전에, 분명히 이유를 설명했었으니까. 기억나지 않느냐고 묻자 한별 씨가 멋쩍어했다. "그땐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제대로 안 들었다는 뜻이다. 그럴 수도 있지. 다시 설명해주었다. 사람마다 망막의 굴절률이 달라, 똑같이 조준해도 서로 다른 곳에 맞는다고. 거리가 가깝다면 상관없지만, 멀어질수록 문제가 된다고. 그래서 가늠자를 조율해야 조준하는 대로 맞추는 게 가능해진다고. 그제야 자기 실력을 깨달은 한별 씨가 환하게 웃었다. 난 모두에게 가늠자 나사 돌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동시에 몇 바퀴나 돌려야 하는지 꼭 기억해두라고 당부했다. 그래야 나중에 새 총을 받더라도, 영점사격을 다시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총기 종류가 달라지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음 차례의 사격에서, 한별 씨는 표적지 정중앙에 굵은 구멍을 만들어 놨다. 맞은 데 자꾸 맞아서 생긴 일이었다. "지정사수를 따로 뽑을 필요는 없겠군요." 피어스 상사의 소감이었다. 사람들은 새로 받은 장비를 무척이나 아꼈다. 필요할 때 돌려쓰던 물건보다 질적으로 낫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히 총기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대원들은 미군 이등병(PV2)으로 취급되었다. 내가 처음 받았던 지원병 신분보다 훨씬 좋은 대우였다. 급여도 정상적으로 지급된다. 「겨울동맹」의 입지가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모두에게 시민권 증서가 수여되었다. 군 복무를 끝까지 수행하지 않으면 취소되는 조건이었어도, 남녀 불문하고 많이들 울었다. 그동안의 불안과 설움이 복받쳤을 것이다. 몇몇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게 슬퍼서 울었다. 판사를 대신하여 캡스턴 대위가 시민권 선서식을 진행했다. 무시해도 좋을 요식행위인데, 미군 입장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모두가 오른 손을 들게 한 채 서약문을 읽었다. "나 여기서 맹세하니, 나는 내가 지금까지 지배당했거나 시민이었던 다른 어떤 외국의 군주, 통치자, 국가, 그 외의 지배 권력에 대하여, 모든 충성과 신의를 완벽하고 확실하게 포기하겠다." "나는 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미국의 헌법을 지지하고 수호하겠다." "나는......." 대위는 내게도 선서를 요구했다. 임관과 마찬가지로, 내 시민권 획득이 너무 급하게 이루어졌다는 이유였다. 정신은 절차보다 중요한 것이란다. 그의 성격이 이런 곳에서도 드러났다. # 43 [43화] #내실 (4), 캠프 로버츠 「겨울동맹」은 빠르게 성장했다. 처음엔 대형 텐트 네 동, 80명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300명을 바라보고 있다. 가맹 희망자 심사는 두 부장의 역할이었다. 장연철과 민완기는 사람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합의하고, 겨울에게 사후승인을 받았다. 더 늘어나면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미 빠른 성장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 도둑 유재흥이 대표적이었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호가호위를 바라고 들어온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이 난민구역 생태계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착취를 전제로 하는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그 외에 겨울이 걱정했던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사람을 더 받지 않기로 한 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대신 조직단위로 끌어들였다. 보호를 약속하고 협력을 구한 것이다. 이로써 「겨울동맹」은 진정한 의미의 동맹으로 거듭났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물진흥회」만 하더라도 천 명을 넘는다. 확실한 안전을 확보하려면 더욱 큰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장연철의 제안으로 상징이 만들어졌다. 손재주 좋은 동맹원을 시켜, 여러 번 매듭지은 하얀 리본을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눈꽃」이라고 불렀다. 동맹조직들은 텐트 입구에 「눈꽃」을 내걸었다. 이것은 유행처럼 번졌다. 철조망으로 나누어진 구획 몇 개가 통째로 세력권에 들어왔다. 체력이 부족한 민완기 대신, 장연철이 더욱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삶의 보람을 찾은 사람 같았다. 그는 동맹세력들의 요청을 겨울에게 전달하는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이런 식의 동맹세력 확대도 한계에 부딪히자, 그가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다른 조직들을 분열시키죠." 쿨룩, 쿨룩. 피로가 쌓여 감기를 얻은 민완기가, 기침 끝에 물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젊은 부장은 긴장감 속에서도 확신을 드러냈다. "「한인애국회」 같은 거대조직들은 내부 부조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약소 조직들에게 갑질 하면서 빼앗은 것들로 무마했지만, 이젠 우리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죠. 아랫사람들의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만을 터트리시려고요? 너무 위험한데요?" 겨울이 묻자 열심히 고개 흔드는 연철. "이 일을 하면서 좋은 인맥을 많이 얻었습니다. 전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첫인상과 많이 다른 면모였다. 하긴 이 정도가 가능하니까, 겨울이 합류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능력이라는 건 책임감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문제니까.' 재능이 아예 없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장연철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겨울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제가 보기엔 그래도 위험할 것 같아요. 열심히 해주시는 건 좋지만, 혹시라도 장 부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거든요. 지금의 「겨울동맹」은 한창 불안정할 때잖아요." "솔직히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장연철이 긴장한 채로 웃으며 말했다. "작은 대장님의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겠지만, 제 역할은 다릅니다. 능력 면에서 저만큼 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추천해드릴 수도 있고요." "능력만 따지면 그렇겠죠." 작은 대장의 대답은 장연철을 상심하게 만들었다. 자기가 말했어도, 상대가 인정하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이성과 마음이 항상 함께하지는 않는 법. 내심 아니라고 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조용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낸 일들이 있잖아요. 두 분 부장님의 공로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 할 능력이 있는 것과, 실제로 해낸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장 부장님이 쌓아 온 신뢰를 누가 대신하겠어요?" "신뢰......." "능력 있다고 누구 하나 데려오면, 제가 그 사람을 장 부장님만큼 믿을 수 있을까요?" 책임감은 행동으로만 증명된다. 겨울의 말뜻이었다. 겨울은 기쁘게 동요하는 연철을 설득했다. "전 반대하고 싶네요. 내실을 기할 때에요. 장 부장님이 위험해지면 곤란해요." "저도 동감입니다." 기침을 섞어가며, 민완기가 겨울의 편을 들었다. "장 부장님 계획이 성공해도 문제입니다. 크흠! 그건 다른 조직들을 지나치게 궁지로 모는 짓이에요. 그들이 극단적으로 나오지 말란 법도 없거든요. 쿨럭. 굳이 우리를 표적으로 삼지 않더라도, 보호 대상인 동맹세력을 마구 찔러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장연철이 반박했다. "그땐 범인을 찾아서 강하게 응징하면 되잖습니까." 민완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린 한꺼번에 너무 컸어요. 구역이 너무 넓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바로바로 범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찾는다고 한들, 그들이 꼬리 자르듯이 범인을 던져버리면, 우리가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어요? 쿨룩, 커허음! 우리도 같이 홱 돌아서 본거지를 털어버릴까요? 아뇨, 안 됩니다. 우리는 미군이 내세운 롤 모델이니까, 미친 짓은 못 합니다." 그는 피로한 목소리로 못박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어 「겨울동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모두 소용없게 될 겁니다." 합당한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오기가 생긴 모양새로, 장연철이 새로 제안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겁니다." "드러나지 않게......아, 첩자요?" 겨울이 묻는 말에 장연철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만 당하란 법 있습니까? 편의만 적당히 봐줘도, 내통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나올 겁니다." "장 부장님, 처음이랑 많이 달라지셨네요." 겨울이 말하자 장연철은 돌연 얼굴을 붉혔다. 음험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한 것 같았다. "아니, 뭐, 그,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러면서 흘깃, 기침하느라 정신없는 민완기를 훔쳐보았다. 같은 부장으로서, 전부터 장연철이 민완기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징후가 있었다. 겨울은 납득했다. '보고 배웠구나.' 경쟁자를 모방하는 건 자연스럽다. 능력이 없으면 모방도 못 한다. "뭘 부끄러워하세요. 칭찬이었는데." "......그렇습니까?" 민망해하는 걸 보면 음험해지긴 한참 멀었다. 장연철이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애썼다. "아, 아무튼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 「겨울동맹」이 워낙 빠르게 성장해서 다들 경황이 없는 상태거든요. 다들 대세라고 여기죠. 사람들의 머리가 식기 전에 해치워야 합니다. 전에 작은 대장님이 걱정하셨던 문제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왜 마약이라던가......." "다른 조직들의 내부정보를 얻겠다 이거죠?" "맞습니다!" 겨울은 새롭게 고민했다. 여기까지 말하는 걸 봐서, 장연철 나름대로 많이 준비하고 내놓은 회심의 제안 같았다. 그가 처할 위험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의욕까지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해보세요." 마침내 겨울이 동의했다. "정말입니까?!" 반색하는 연철에게 겨울이 안전을 당부했다. "항상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신다는 조건이에요." "물론이죠! 제 목숨은 제게 가장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좋아요. 믿어볼게요. 민 부장님도 많이 도와주세요." "쿨럭, 큼. 그러지요." 가래 낀 목소리로 대답하는 민완기였다. 겨울이 허락한 시점에서 더 이상 반대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기운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이제 이야기가 끝난 건가 싶었는데, 장연철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조금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세요." "「겨울동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당분간 직접적인 가입은 안 받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게, 도저히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서......." "자립이 불가능해요?" "장애인들이거든요." "저는 반대입니다." 마지막 말은 민완기의 것이었다. 너무 즉각적인 반대라 장연철이 두 눈을 꿈벅 거렸다. 감정은 그 뒤에 드러났다. 살짝 찌푸려진 얼굴로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민완기가 선수를 쳤다. "그렇잖아도 「겨울동맹」의 구성비는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입니다. 성비야......켈룩. 성비야 어쩔 수 없다지만, 노인과 아이, 아이들의 어머니가 너무 많아요. 산타 마리아의 기적이 있기 전까진 다른 조직들이 대놓고 비웃었습니다. 여기에 장애인들까지 더해지면 곤란합니다. 큼, 크흠. 흠. 그 사람들 받는 취급이야 모르는 바 아니고, 안타깝기도 합니다만, 여기서는 냉정해져야 합니다." 장연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겨울은 생각했다. 민완기는 장연철에 대하여, 반대하기 위해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내게 보여주려는 걸까?' 그는 부장이 두 사람인 이유를 알 것이었다. '혹은 연철 씨를 위한 것일지도.' 그는 겨울의 성향을 안다. 연철의 요망을 들어줄 걸 예상하고, 일부러 반대의견을 낸 거라면 어떨까. 겨울이 두 사람 중 연철 편을 들어준다면, 그는 좀 더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순수한 배려라는 보장은 없다.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열등감은 쉽게 적대감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진정한 의미의 상호견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추론이 함께 성립할 수도 있었다. 연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 사람들, 전에도 우릴 찾아왔었어요. 작은 대장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민 부장님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우리조차도, 그 사람들 못 받아주겠다고 내보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또 내치자고요?"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장님 취임사 잊으셨나요? 우리는 어려운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장?" 잡념을 미뤄두고, 겨울이 수긍했다. "맞아요. 그래도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같이 잘 사람들을 함부로 들일 순 없잖아요." 연철의 낯빛이 환해졌다. "언제 만나시겠습니까?" "당장 가능할까요?" "그럼요! 그 분들도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거든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얼른 자리를 터는 연철. 예상대로, 민완기는 별로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까보다 심하게 기침을 하고서, 좀 쉬겠다며 침구를 찾을 뿐이었다. 잠시 후, 연철이 열일곱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부터, 그들이 그동안 겪은 취급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대표자는 겉으로나마 멀쩡해보였다. 곱게 늙은 여인이었다. 더러운 옷이나마 단정하게 입고 있다. 연철이 소개했다. "장애우 공동체를 이끌고 계신 강영순 할머님이십니다. 언어장애가 있으셔서 필담을 하실 겁니다. 아, 혹시 수화를 아십니까?"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기술이 아니므로 소모량이 적은 편이지만, 겨울의 경험치 여유량도 적은 편이었다. 「교습」 탓이다. 유사시 생존계열에 최소한의 투자가 가능할 정도는 남겨두어야 한다. 의외로 기대했던 모양. 연철이 조금 시무룩했다. 겨울을 우상화하는 기미가 엿보인다. 못 하는 게 없는 초인쯤으로. 그가 말했다. "듣는 덴 지장이 없으시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럴게요. 장 부장님은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네?" 당연히 자신도 낄 대화라고 생각했나보다. 연철은 머뭇거리다가, 겨울이 가만히 보고 있자 머뭇거리며 일어섰다. 가기 전에 노인을 응원했다. "할머니, 잘 될 거예요. 작은 대장님은 좋은 분이거든요." 본인이 듣는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노인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겨울이 공손한 인사말을 건넸다. "이미 아시겠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한겨울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노인이 수첩을 펼쳐 글을 적었다. 다 쓰고 페이지를 펴서 겨울에게 향했다. 「반갑습니다. 강영순입니다. 헌앙하시군요.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보다 훨씬 낫습니다.」 겨울이 상냥한 미소를 만들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글씨가 참 예쁘시네요." 노인은 다시 한 줄 적어보였다. 「제게는 목소리 같은 것이니까요.」 좋은 비유였다. 노인의 성품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 44 [44화] #내실 (5), 캠프 로버츠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겨울이 말했다. "왜 「겨울동맹」이 여러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강영순 노인이 흐뭇하게 웃는다. 수첩에 자신의 만족감을 적어 내려갔다. 「설마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문답무용으로 쫓겨나거나,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여지거나. 어디를 가더라도,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까지는 모두 전자였습니다만.」 읽기 쉬운 맥락이었다. "후자를 예상하셨다면 장연철 부장님 탓이겠네요." 노인이 펜을 고쳐 잡는다. 정갈한 동작이라 느려 보이는데, 막상 문장 완성되는 속도가 놀라울 만큼 빨랐다. 「결코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장연철 님 같은 착한 분들 덕분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연철 님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다만 가끔은, 배려가 너무 깊으셨을 뿐이지요.」 장애인을 대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장연철 본인의 입으로 말했었다.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그것은 주위 환경이 적대적이어서, 사람들이 빼앗으려고만 들어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불가능하다는 투가 아니었다. "이해합니다. 착한 사람이 나쁜 세상에서 살면 그렇게 되기 쉽거든요." 겨울의 말에 그녀가 다시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겨울 님을 따르는 게 단지 용기 때문만은 아니었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아무튼, 처음 질문의 답을 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강영순 노인. 「그동안 숱한 문전박대를 경험하면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말해보리라 생각한 것들이 많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도 많은 고민을 했지요.」 「우리들 각각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구실보다, 겨울동맹과 지도자 한겨울 님이 얻을 수 있는 조직 차원의 이점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조금 길어지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의외였다. 각자의 경력과 기술, 인성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사실 노인이 말한 조직 차원의 이점에 대해서는, 겨울도 이미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막연한 정의감만으로 장애인 수용을 검토한 건 아니었기에. 겨울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제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쓰셔도 돼요." 고마운 미소를 머금고, 노인은 생각 깊은 글귀를 한 줄씩 정성스럽게 늘려나간다. 마침내 채운 첫 번째 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는 순화된 평판입니다.」 「다른 단체의 많은 사람들이 한겨울 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중입니다. 가장 흔한 건 인간백정이라는 평가지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일어나는 살인사건들이 귀하의 소행으로 둔갑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기 전까진, 저조차도 조금 걱정했습니다. 장연철 님이 아무리 아니라고 하셨어도요. 지금 겨울동맹에 의탁한 사람들도 반쯤은 공포감에 기댄 것이 아닐까요?」 「우리를 받아주신다면 그런 평판이 제법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겨울동맹에 가담하길 망설이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감스럽지만, 장애인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모두에겐 이렇게 보이겠지요. 겨울동맹은 저렇게 쓸모없는 사람들을 거두어 주었다고. 한겨울 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소열제 유비는 인정과 인덕으로 촉한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세요.」 연륜이 묻어나는 고아한 필치였다. 또한 예상했던 내용이 절반쯤 들어가 있었다. 읽으면서, 겨울이 묻는다. "삼국지를 좋아하시나 봐요?" 노인은 자신의 입을 가리킨 뒤 한 문장 적었다. 「형편상, 사람보다 책이 더 편한 삶이었던지라.」 "아." 고개를 끄덕이고, 겨울은 수첩을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노인이 곧바로 두 번째 장을 적기 시작했다. 많이 고민했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다. 적는 내내, 망설이거나 고치는 경우가 없었다. 「둘째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장연철 님 같이 착한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답니다. 즉 우리는 겨울동맹을 여러 단체의 착한 이들과 연결 짓는 가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면 터전을 바꿀 분들도 계시겠지요. 다른 단체들이 썩 좋은 곳은 아니잖습니까. 착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들 계실 겁니다.」 「옮기지 않을 분들도, 겨울동맹에 호의를 품으시겠지요.」 「결국 첫째로 말씀드린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겨울은 이미 마음을 굳혔지만, 곱게 늙은 노인이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다 읽은 수첩을 돌려주자 노인은 세 번째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우리 장애인들의 눈과 귀입니다.」 「이건 제 생각일 뿐입니다만, 겨울 님께서는 지금 부담을 느끼고 계시진 않은지요?」 「겨울동맹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입니다. 빠른 성장에는 부작용이 있게 마련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문제지요.」 「겨울동맹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알 수 없게 되실 겁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걸러야 할지도요. 반드시 여일 같은 자가 나타나 겨울 님의 의심을 부추길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권고입니다. 우리 장애인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세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량한 비장애인이라도, 장애인을 완전히 대등하게 대하기 어려워합니다. 장애인은 항상, 어느 정도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비장애인들과 쉽게 뭉치지 못한답니다. 이 점을 이용하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겨울은 다 읽고서 생각했다. 열일곱 명의 장애인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은, 단순히 착한 사람들의 도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여일이 누군가요?" 노인이 답변을 적었다. 「손권의 의심을 부추겨 권세를 얻은 간신배랍니다.」 "장애인 분들이라고 여일이 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그러자 필기 대신 고개를 흔들어 대답 삼는 노인이었다. 겨울이 미소를 지어냈다. "솔직하시네요." 강영순 노인이 마주 웃는다. 겨울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각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듣고 싶네요. 이야기도 조금 나눠보고 싶고." 고개 끄덕인 노인은 장애인 공동체의 신상명세를 내밀었다. 미리 적어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겨울은 빼곡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었다. 강영순 노인이 본 인격적 장단점까지 적혀있었다. 몇 명이 쓸 만 한 경력과 기술을 지녔다. 다양한 중장비를 11년간 다룬 소아마비 환자는 제법 인상적이었다. 영어교사와 전기기술자도 끼어있다. 세계관 배경 상,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사람도 몇 명 있긴 했다. 예를 들면 프로그래머 같은. 강영순 노인의 수화를 보고 장애인들이 다가왔다. 눈 먼 사람은 다른 이가 끌어왔다. 겨울은 그들에게 간단한 질문 몇 가지 해본 뒤에, 최종 승낙했다. "좋습니다." 환해지는 얼굴들을 향해, 겨울이 재차 미소를 만들었다. "「겨울동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연철을 불렀다. "이 분들 자리 잡게 도와주세요. 자리라던가, 침구라던가. 소개도 좀 해주시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그는 장애인들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가족들을 열성적으로 이끌고 간다. 그 모습에, 「겨울동맹」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 중엔 박진석도 있었다. 몇 마디 대화 끝에, 사정을 알았는지 표정이 나빠진다. 곧장 겨울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두 사람이 함께였다. 예비 전투조장으로서, 진석이 벌써 만들어놓은 무리의 일원들이다. 유라 때와 달리 전원이 적정 연령의 군필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겨울에겐 사후승인을 받았다. 어차피 전투조장이 될 것이니,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겨울은 수용범위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진석 씨. 어쩐 일이세요?" "방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애인들을 받아주기로 하셨다는 거, 사실입니까?" "네, 사실인데요." 여상스레 한 대답이 진석을 자극한 모양이다. 청년은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많습니다." 한숨을 쉬는 진석. "저 사람들은 짐 덩어립니다. 장애인들을 받을 여유가 있으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들을 대신 받으셔야죠. 우리 동맹은 규모에 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적잖습니까. 건장한 남자로만 열일곱을 받으면 전투조 하나를 꾸리고도 남습니다." "그건 그러네요." "대장님은 정말 착하고 대단하시지만, 종종 지나치게 이상적이십니다. 저도 장애인들을 돕고 싶어요. 실제로 도울 기회가 생기면 도울 겁니다. 개인으로서 말이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겨울의 눈치를 살핀다. 어린 지도자에게서 별다른 반감이 보이지 않자, 남은 말을 마저 내놓았다. "대장님은 방금 개인으로서 저 사람들을 도와준 게 아닙니다. 동맹 모두에게 부담을 지운 거예요. 공사를 구분하셔야죠. 양심은 개인적인 만족일 뿐입니다." "개인적인 만족이 아니에요." 진석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른다. 겨울이 차분하게 말했다. "난 「겨울동맹」의 대표자로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동맹 전체의 이익을 고려했어요." "그 이익이 뭔지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래요." "......어째섭니까?" "절차를 지키지 않으셔서요." "절차요?" "네. 절차. 전투조에 관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직접 말씀하셔도 돼요. 예비라고는 해도 조만간 전투조장이 되실 테니까.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일은 두 분 부장님을 거치셔야죠. 그게 그분들 역할이잖아요." 진석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겨울이 마저 말했다. "그동안 가입심사를 진행한 것도 부장님들이고, 오늘 장애인 공동체를 소개해준 사람도 장연철 부장님이셨어요. 다른 동맹원들도 제게 할 말 있으면 부장님들을 먼저 찾아요. 그런데 진석 씨는 다르시네요. 지금 행동이 월권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누가 확실하게 정한 규칙은 아니다. 그러나 동맹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불문율이었다. 직함만 던져주었을 뿐인데, 사람들 스스로 규칙과 질서를 확장해나갔다. 인간의 사회성이다. '부장님들의 역할도 있었겠지. 특히 민완기 부장님.' 그렇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서열과 강요, 불필요한 절차가 많이 붙었을 것이다. 불문율을 공공연하게 만드는 것은 겨울의 역할이다. 진석이 우물거렸다. "그 분들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아직 모든 게 어색할 때잖아요. 다음엔 주의하세요." 미소가 필요할 때였다. 겨울은 익숙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온화함이 진석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맥 빠진 걸음으로 물러났다. 지켜보던 두 사람이 위로해주는 듯 보인다. 규범은 그들 입을 통해 퍼져나갈 것이었다. # 45 [45화] #Intermission, 인공지능의 마음 (3) 안녕하십니까, 고객 여러분. 그동안 우리 잘 빠진 「트리니티」와 재미 좀 보고 계셨나요? 네? 아니라고요? 물론 그렇겠지요. 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고객만족센터로 걸려오는 항의전화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거든요. 정말이지......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사는데, 왜 일부 소비자들은 기업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까요? 애국심이 부족한 게 틀림없습니다. 오, 이런. 흥분하지 마세요. 여러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부' 소비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일부 말입니다. 이이이이일부우우우우. 한국어가 좀 어렵죠. 아무튼 오늘은 「트리니티」를 소개해드리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삼위일체의 마지막 구성요소, 자립형 인공지능 모듈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자립형 인공지능을 쉽게 정의하면 '완전한 인격'입니다. 자아를 지닌, 생각하는 기계 말이에요. 다른 말로는 기술사학적 특이점이라고도 합니다. 그 왜 있잖아요. SF 장르에서 주구장창 써먹는 진부한 설정. 기술이 기술을 만들어내는 시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며, 미래에서 살인로봇이 존 뭐시기를 죽이러 오고, 난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주둥이가 없는 그거요. 저희 고객만족센터로 걸려오는 항의전화 중 가장 황당한 경우가 이겁니다.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므로, 사후보험 중앙관제센터를 폭파시켜야 한다고요. 세상에....... 편집증 환자 여러분, 안심하세요.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자립형 인공지능 모듈은 미완성이거든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우리 회사가 사후보험공단으로부터 인공지능 개발에 관한 국책사업을 수주했을 때, 「트리니티」를 설계한 최초의 기술자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상초유의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들겠다고 말이죠. 그들에게 있어서, TOM 판독 모듈과 검색형 인공지능 모듈은 그저 거쳐 가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최종 모듈」, 진정한 인공지능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에요. 하지만 말이죠......그걸 만들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이제까지 안 나왔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최초의 기술자들은 어찌어찌 자립형 인공지능의 기초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고 주장했어요. 「최종 모듈」엔, 분명 인간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검증은 불가능했죠. 완성까지 백만 광년 정도 남아있는 물건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어요.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높으신 분들은 여기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을 모조리 해고했어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국책사업의 납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거든요. 갈아 넣을 공돌이가 달리 없는 것도 아니었고요. 새로 투입된 기술자들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트리니티」는 분명히 미완성이지만, 현재 수준으로도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엔진이라고. 그러자 높으신 분들이 말씀하셨죠. "뭐야, 완성품이네." 그리하여 사후보험은 차질 없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해피엔딩이군요. 이렇게 쓸 데 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현재의 시스템 관리자, 즉 저조차도 자립형 모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저만 모르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던 동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게 뭔가 기능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불분명하단 말이죠. 그렇다고 이걸 제거할 수도 없어요. 엔진 전체가 정지해버리거든요. 제3모듈의 작용이 엔진을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놨어요. 글쎄요. 최초의 설계자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 솔직히 정말 대단했거든요.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들이었죠. 그 천재들은 지금 뭐하고 있냐고요? 몰라요. 치킨이나 튀기고 있겠죠 뭐. 고용계약이 그렇거든요.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퇴사 후 20년 동안 동일 직종에 취업할 수 없죠. 이 기간에는 국적 변경도 불가능해요.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괜찮습니다. 매출이 오르는 동안에는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걸요? 이 회사는 돈 때문에 하는 회사고, 사후보험 운영 매출은 해가 갈수록 폭증하고 있거든요. 저희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는, 앞으로도 고객 여러분의 지갑을 약탈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널, 76페이지, 캠프 로버츠 난민 출신 지원병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만큼 병력이 필요한 면도 있겠으나, 「겨울동맹」에 대한 견제조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민완기 부장님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출신은 중국계가 가장 많았다. 원래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 비율을 따졌을 때 이상할 정도로 높다. 그것도 이제까지 「흑사회」의 주류였던 「삼합회」가 아니라, 「안량공상회」, 「합승당」, 「직예당」 사람이 대부분이다. 배후에 마커트 대위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이링이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직은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곧 우리에게도 문제가 될 것이었다. #저널, 79페이지, 캠프 로버츠 며칠간 궂은 날씨가 이어졌다. 겨울에 비가 많은 지역이었다. 기온은 갈수록 떨어졌다. 영하로 내려가는 새벽추위가 난민들을 괴롭혔다. 감기가 번졌다. 초기엔 환자를 격리했는데, 이제는 건강한 사람을 격리한다. 텐트 한 동이 환자로 가득하기 예사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감기로 사람이 죽는 일은 드물다. 지금은 아니다. 체력 약해진 사람들이 2차 감염으로 죽었다. 항생제가 바닥났고, 사망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군의관은 이게 감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항공보급은 식량이 최우선이었고, 연료와 난방용품이 그 다음이었다. 약품은 잘 오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약품은 부피를 적게 차지한다. 다른 짐을 조금만 줄이면 될 텐데. 알고 보니 없어서 못 주는 것이었다. 캡스턴 대위가 알려주었다. 봉쇄선 동쪽에서, 시민들이 약품을 사재기하고 있다고. 대위도 보스턴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보통의 약은 「모겔론스」에 효과가 없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합리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겨울동맹」은 그나마 양호했다. 영양과 위생이 다른 곳보다 낫기 때문일까? 단지 민완기 부장님이 염려된다. 나는 PX에서 최대한 많은 식품을 사왔다. 1인당 구매제한이 있었지만, 나는 수훈자 혜택을 받는다. 전투조원들이 미안해했다. 월급이 나오면 꼭 보태겠다고 한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두었다. 건강하게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도움이라고. "예언자 박태선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축복으로써 병자를 치료하십니다! 짐 지고 고달픈 형제들이여! 구원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순복음 성도회」의 광신도들은 오늘도 복음을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다. 성도회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건강한 건 사실이었다. 감기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박태선 목사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목사가 축복한 성수를 마시면, 아무리 중한 환자라도 하루 만에 완치된다는 것이었다. 개신교회에서 성수가 웬 말인가 싶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휩쓸렸다. 기적을 증언하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났다. 성도회의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물에 항생제를 타서 성수라고 하는 건 아닐까요?" 장연철 부장님의 의견이었다.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어디서 조달하는가, 그게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겐 결과가 중요했다. 약을 타서 성수라고 속이더라도, 기꺼이 속아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 「겨울동맹」에서도 소수의 이탈자가 나왔다. 의약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잇달았다. 점점 더 먼 곳까지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파소 로블레스 남쪽에 있는 도시, 아타스카데로의 주립병원으로 향했던 임무부대 전원이 실종되었다. 차량으로만 열두 대, 난민 지원자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숫자다. 캠프 지도부는 충격에 빠졌다. 마주치는 장교들마다 낯빛이 어두웠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데, 실종자 가운데엔 미군 병사도 많았다.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은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의 임시 거점이었다고 한다. 북미 서부 오염이 시작되었을 땐, 방역본부로서 12개 도시를 관리했다. 지금은 당연히 버려진 시설이다. 하지만 아직 대량의 약품이 남아있을 거라고 한다. 브리핑에 따르면, CDC에서 직접 확인해준 내용이었다. 대대장은 내게 해당 지역의 위력정찰을 지시했다. 거기 무언가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뭔지 확실히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섬멸해도 좋고, 생존자를 찾으면 더더욱 좋다고 한다. 이것저것 주문이 많은 임무였다. 대대장은 산타 마리아 때보다 쉬울 거라며 웃었다. 다행히 이것이 「겨울동맹」 전투조의 처녀임무가 되진 않았다. 대대장이 아무리 정신을 못 차려도, 신병들에게 이런 임무를 맡길 정도는 아니었다. 병력지원은 캡스턴 대위로부터 받기로 했다. 산타 마리아 때와 달리, 이동 수단은 차량이었다. 먼 길이 될 것 같았다. #징조들 (1), 캠프 로버츠 「한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타스카데로로 출발하기 전, 겨울이 안부인사차 동맹에 들렀을 때, 강영순 노인이 대화를 희망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비밀스러운 대화. 조용한 자리에서 노인이 첫줄을 적었다. 「이훈태 씨는 사실 청각장애가 없습니다.」 지력보정이 이훈태의 정보를 출력했다. 기억이 흐린 만큼 사진도 흐렸으나, 누군지 떠올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영순 노인이 주었던 신상명세에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동안 없는 장애를 있는 척하셨다고요?" 겨울이 묻자, 노인이 펜대를 움직였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지요.」 「귀머거리 근처에서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법이니까요.」 아. 정보획득. 장애인인 노인 스스로 귀머거리라는 단어를 쓴 시점에서, 대상은 명백했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걸 제게 말씀해주시는 이유는......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여쭤봐야겠네요."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저는 장애인을 통해 정보를 얻으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이훈태 씨는 누구에게도 의심 받지 않고 모두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대장님에게까지 숨기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겨울이 말했다. "괜찮으세요?" 단순하지만 긴 물음이었다. 노인이 차분하게 글을 적었다. 「유비에게는 인덕이 있었지만, 인덕만으로 대업을 이룬 건 아니었답니다.」 겨울이 질문을 고쳤다. "나중에 혹시라도 들켜버리면, 이훈태 씨가 굉장히 큰 원망을 받을 거예요. 아니, 사람들은 이훈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인들 까지도 경계하게 될 걸요?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고요. 위험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으세요?"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동등합니다. 작은 대장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시는 것처럼, 아랫사람들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가리지 않고서요. 다만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다를 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장애도 하나의 재능이 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이 많은 노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뭐냐고 눈으로 묻는 노인에게, 겨울이 못 박는 말. "들키면 무조건 제 지시였다고 하세요." 책임을 겨울에게 돌리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마약이라던가, 광신을 경계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불만은 있을지언정 대놓고 항의하진 못할 것이었다. 애당초 겨울에게 정면으로 뭐라 할 사람도 없는 마당이고. 허나 늙은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책임을 지는 태도는 좋은 지도자의 미덕이지요.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훈태 씨는 삶의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모두가 싫어하겠지만 결국 모두를 위한 일이지요. 작은 대장님을 돕는 일이고, 작은 대장님은 모두를 위해서 애쓰는 분이니까요. 대장님 한 사람만 인정해주면, 그는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고서, 겨울이 한숨을 지어냈다. "알겠습니다. 항상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그리 하지요. 기뻐할 겁니다.」 노인의 태도를 보아, 이훈태 그 사람이 겨울에게 직접 오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의심 살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니까. 수화는 사실상의 암호와 같다. 장애인들, 그나마도 일부에서만 통한다. '너무 믿어도 곤란하겠어.' 겨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보를 얻는 경로는 다양할수록 좋았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노인이 다소곳이 목례했다. 겨울이 그보다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에 대한 존중이었다. 의미는 없을지라도. # 46 [46화] #징조들 (2), 아타스카데로 차창 밖의 하늘은 잿빛이다. 이따금씩 번뜩이는 뇌운(雷雲). 험비 안으로 빗방울이 들이쳤다. 위에 붙은 포탑 탓이었다. 그나마 선탑자인 겨울은 사정이 낫다. 포탑에 앉은 기관총 사수는, 이동하는 내내 비를 맞을 운명이었다. 파소 로블레스를 우회해 아타스카데로로 가는 길. 앞서 실종된 임무부대가 장애물을 치워두었어도, 40km를 가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도로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된 항공폭격의 흔적이었다. 차량행렬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파헤쳐진 구간을 굼벵이처럼 타넘을 때였다. 우측 전방의 버려진 목장에서, 감염변종들이 주인 잃은 말들을 쫓고 있었다. 이쪽을 보더니 목표를 바꾼다. 누렇게 죽은 목초지를 가로질러, 두 팔 휘저으며 열심히들 달려왔다. 기관총 사수가 지붕을 두드린다. "2시 방향, 거리 약 50, 일반 변종 열하나......아니, 열셋. 제압하겠습니다." 그가 곧장 레버를 당겼다. 톱니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포탑. 곧이어,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험비 세 대가 앞 다퉈 탄막을 뽑아냈다. 탄이 굵어서 소리도 굵다. 개인화기와는 격이 다르다. 달려오던 놈들이 퍽퍽 박살났다. 몸뚱이 부서진 곳에서 허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인간보다 강화된 신진대사의 증거였다. 차갑게 식은 공기 탓도 있겠지만. 「노이즈 컨트롤. 당소, 331 임무부대. 50구경 사격 중. 소음 지원 바람. 이상.」 무전기로부터 제프리 소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선임 장교로서 이번 임무부대의 책임을 맡은 그는, 겨울보다 후속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다. 교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평선 너머 세 방향으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뿌려진 노이즈 메이커의 작동이었다. 이것 덕분에 작전 중 소음 부담이 줄어들었다. 아니었다면, 중화기를 함부로 쓰긴 어려웠을 것이다. 제프리가 무전으로 사격 종료를 알렸다. 곧바로 사방이 조용해졌다. "오, 젠장!" 운전병이 욕설을 뱉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변종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쿵! 사수가 쏠 틈은 없었다. 운전병이 냅다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유리창에 찍 피가 튀었다. 변종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진흙탕에서 뒹굴다 온 것처럼, 온몸이 흙과 낙엽 투성이었다. 그 몰골로 엎어져있으면 못 보는 것이 당연하다. "꼭 위장이라도 한 것 같군요." 투덜거리는 운전병의 말. 겨울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뒤로 도착할 때까지,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적지인 주립병원은 도시의 동쪽 외곽에 위치했다. 전체가 야트막한 능선으로 가려져,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는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부지는 굉장히 넓었다. 시설 전체를 이중 철조망으로 둘렀고, 교도소에서나 볼 법한 감시탑이 줄지어 서있었다. 사실 교도소가 맞았다. 사전에 제공된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범죄를 지은 정신질환자를 가둬두는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염자를 격리하기에도 좋았다. CDC가 괜히 이곳을 지역 통제본부로 삼았던 게 아니다. 차량대열은 병원 동쪽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하차한 병력은 한 개 소대 가량. 전에 왔던 임무부대보다 숫자는 적지만, 전투 병력은 오히려 많은 편이고, 무엇보다 겨울이 끼어있었다. 병사들은 겨울이 한 개 중대급이라고 좋아했다. 지휘부의 평가는 그 이상이었다. 최종적으로 장비와 무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제프리 소위가 인상을 썼다. "무전기의 잡음이 굉장히 심하군. 전파방해가 있나?" "브리핑 때 그런 정보는 없었습니다만." 통신병이 난감해했다. 장거리 통신용으로 가져온 무전기가 무용지물이었다. 캠프는 물론 주변의 미군 거점 어디와도 연결이 불가능했다. 돌입하기 전 한 번 더 소음지원을 요청할 계획이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정찰지원도 못 받게 생겼다. 브리핑 정보만으로 움직여야 했다. 겨울도 자신의 무전기를 점검해보았다. 가까이 있는 소대원들과의 교신도 원활하지 않았다. 기도비닉 유지를 위해 볼륨을 줄여야 했다. 이로써 무전을 알아듣긴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할 순 없었다. 제프리가 병력을 한 데 모았다. "잘 들어. 이 병원은 감염자를 대량으로 가둬두던 곳이다. 브리핑에서는 격리시설이 멀쩡할 거라고 했지만, 믿지 마라. 선행 임무부대가 괜히 실종되었겠냐?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이자.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고. 알겠지?" 짧고 낮은 대답들.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전대로 킹 데이비드가 선도한다. 다들 행운을 빈다." 킹 데이비드는 최근 겨울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다. 그럼블을 잡는 모습이, 마치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같더라는 것이다. 에이블 중대 코헨 병장의 소행으로 추정되었다. 겨울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병원 바깥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창문 안쪽으로 변종 몇 마리가 움직이긴 했다. 그러나 쏘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진다면 지나치게 요란할 것이었다. 선행부대의 차량들은 남쪽 주차장에서 발견되었다. 여러 대의 트럭과 험비가 방치되어 있었다. 파괴되지도 않았고, 연료도 충분했다. 교전흔적은 전무했고, 시체도 없었다. 실린 물건도 없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상태 그대로인 것 같았다. "하, 이놈들 다 어디로 갔지?" 제프리 소위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소대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진입한다. 텅 빈 로비에 스산한 바람이 돌았다. CDC 철수의 흔적인지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낙서가 있었다. 코가 긴 사람이 얼굴 내미는 그림과 함께 적혀있는 한 마디. 「Kilroy was here.」 "선행 임무부대에 킬로이라는 사람이 있었나요?" 겨울이 묻자 일순 긴장감이 무너졌다. 소대원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제프리 소위가 그들을 다그칠 때, 무전병이 대답한다. "물소위님, 그거 그냥 낙섭니다. 뭐 선행부대의 누군가가 그렸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겨울은 고개를 갸웃 하고는 수색을 재개했다. 제프리 소위는 통신병과 1개 분대를 로비에 남겼다.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남기로 결정된 병사들이 장애물을 끌어 모았다. 진지를 구축하고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복도 곳곳에 볼록거울이 달려있었다. 사실상의 교도소답게, 감시의 사각지대를 없애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었다. 변종도 거울을 볼 수 있으니까. 당장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복도가 꺾어지는 구간에서, 천장에 달린 거울을 통해, 변종 한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소리를 지르며 거울을 향해 달려왔다. 배회하던 다른 놈들도 그 뒤를 따랐다. 겨울은 주먹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제프리 이하 소대원들이 벽으로 바싹 붙었다. 겨울 스스로도 벽에 붙어 자세를 낮췄다. 거울만 보고 맹목적으로 달려온 놈들은, 정작 모퉁이 이쪽에 쪼그린 소대 전체를 지나쳐버렸다. 거울 아래 우우 몰려서 펄쩍펄쩍 뛰고 있다. 겨울은 총에 대검을 결합하고, 변종들의 배후로 다가갔다. 뒤에 있는 놈부터, 갈비뼈를 피해서, 심장 있을 자리를 콱 찌른다. 털썩, 털썩. 시체가 겹겹이 쌓이는 소리. 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겨울은 하나하나 침착하게 끝장을 냈다. 소대원 몇 명이 가세했다. 실수할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한 놈 당 두 명이 붙어서 마구 찔렀다. "거 참 대담하십니다." 찌르는 손맛에 질린 병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뒤 복도 양쪽 방향으로 총을 겨누고 잠시 대기했다. 소란에 이끌려 새로 올 놈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놈 뿐이었다. 겨울이 처리했다. 중요한 길목마다 병력을 남기면서 전진했다. 따르는 인원이 빠르게 감소했다. 퇴로 확보는 물론이고, 로비와 무전연락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서 교신 가능 거리가 더욱 줄어든 탓이었다. 교전은 잦았지만, 사소한 교전들 뿐이었다. 대신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놈의 바퀴는 왜 이렇게 많아?" 바닥에도, 벽에도, 천장에도 잔뜩 기어 다녔다. 다니면서 밟지 않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몸으로 올라오는 것들도 있었다. 벌레 싫어하는 병사들이 진저리를 쳤다. 제프리 소위가 그들을 나무랐지만, 잠시 후엔 그 자신이 펄쩍 뛰었다. 옷 속으로 한 마리 들어간 탓이었다. 꺼내달라고 작은 소리로 절규하는 그를 보고, 겨울이 손을 쓴다. 퍽! 벌레가 으깨진 부분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제프리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잘 생각해봐.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그걸 어느 세월에 꺼내요?" 제프리는 겨울을 원망할 수 없었다. 소년은 바퀴가 붙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 위로 올라오는 것만 쳐낼 뿐. '생전부터 익숙한걸.' 가난했던 집, 잠자리에서 기어오르던 것들. CDC가 약품창고로 쓰던 곳에도 선행 부대의 흔적은 없었다. 병사들이 혹시 모를 단서를 찾는 동안, 겨울은 항생제를 찾았다. 작은 병 하나 정도는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 제프리가 낙담했다. 그는 더 이상의 병원 수색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격리병동이 열렸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이쪽에서 잠가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생각보다 싱거웠고, 위협이랄 것도 없었다. 전환점은 무전으로 찾아왔다. 로비에 남겨둔 통신병이 보낸 전언이었다. 물론 직통연결은 아니었고, 길목마다 남겨둔 병력으로부터 중계를 받았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구조요청이 수신됐다니? 확실해?" 「저도 전달받은 거라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고, 직접 들어보셔야 한다고 하더군요.」 "옘병." 온 길을 되짚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병력이 다시 로비에 집결했다. 통신병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을 묻는 제프리에게, 통신병은 수화기를 내밀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순서는 겨울에게도 돌아왔다. 잡음은 여전히 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분명히 사람의 음성이 섞여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서로 다른 통신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은 것 같았다. 겨울이 말했다. "왠지 같은 내용이 되풀이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제프리가 대답했다. 이건 경험해본 적 없는 사건이다. 「종말 이후」의 세계관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 모양이다. 겨울은 통신에 다시 귀기울여보았다. 「길목에서......교전...」 「你不......劝我......」 「부상자 다수......자력...출 불가......」 「......의......임무는 실패......」 「부......자 다수 발생......자...탈출 불가......」 「...타 로사......로 이동......」 「 ......救性命......反正我......去」 「...에서......교전......거점...어......」 「......逃到了......什么?」 「你不......劝我......」 「민간인......원......임무는 실패......」 "발신지를 찾을 수는 있나요?" 겨울이 묻자 통신병은 조금 난감한 기색이었다.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좀 무식한 방법이지만, 무작정 돌아다니면서 감도가 좋아지는 방향을 찾아보면 되니까요. 하지만 오래 걸릴 겁니다. 거리가 얼마나 될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통신병은 시간소요를 경고했다. 제프리가 주저앉았다. "일단 뭘 좀 먹고 생각하자. 배고파 죽겠다." # 47 [47화] #징조들 (3), 아타스카데로 군인에게는 식사도 명령이다.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이 때다 싶을 때 먹어둬야 한다. 2교대로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겨울도 군말 없이 식사를 준비했다. 허기는 「배드 스테이터스」였다.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인 만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칼로리만 채우면 된다. 뜯는 건 간소화된 전투식량(FSR)이었다. 겨울이 에너지 바를 꺼내는데, 참치와 마요네즈를 비비던 제프리 소위가 한 마디 했다. "그거 말야, 생긴 게 꼭 똥을 뭉쳐놓은 것 같지 않아?" 군용 보존식량은 미관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에너지 바의 모양은, 어찌 보면 짓눌린 양갱 같았고, 달리 보면 덩어리 낀 대변처럼 보이기도 했다. 겨울이 에너지 바를 내려놨다. 제프리가 싱글벙글 웃었다. "어때? 바퀴벌레의 복수다!" "......." 두려울 때 하는 농담은 베테랑의 증거다. 근데 이건 그냥 철이 없는 것 같다. 겨울은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짭짤한 소고기 맛이 났다. 식사는 대충이었다. 제프리가 물주머니(카멜 백)를 쭉쭉 빨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저거, 사람이 보낸 게 아니야. 일종의......그 뭐냐, 자동화된 송수신 장치? 그런 게 고장 난 거 아닐까? 방해전파도 그 탓이고." "그래도 무시할 순 없죠. 임무가 정찰이니까. 선행 임무부대의 흔적도 찾아야 하고." 겨울의 대답에 제프리가 찜찜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포영화 같은 데선, 저런 무전 받으면 꼭 죽더라." "......." 헛소리다. 이 인간 정말로 철이 없는 건가? 식후, 통신병이 정체불명의 불특정다수와 교신을 시도했다. "오싹하군요. 적어도 우리가 고장 난 기계를 상대하는 건 아닙니다." 교신을 끝낸 통신병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쪽에서 송신할 때마다 반응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메시지 송출이 중단되고, 방해전파가 강해집니다. 잠시 후 그쪽의 송출이 재개되는데, 제가 보낸 메시지가 새롭게 포함됩니다." "뭐야 그게." 제프리 소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겨울이 물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나요?" "어, 음.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통신병이 찜찜한 말을 꺼냈다. "교신을 반복할수록 감도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대상이 접근 중이란 의미에요?" "말하자면, 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높아지는 감도는 줄어드는 거리를 증명한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겨울이 제안했다. "차라리 잘 됐네요. 통신접촉을 유지하면서, 환영인사를 준비해두죠." 제프리가 정문 바깥의 공터를 가리켰다. "화력집결점은 저쯤이면 되겠지? 이쪽은 엄폐물도 있고." "괜찮네요."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로비의 부비트랩을 바깥으로 옮겨놓는 작업이었다. 산탄지뢰(클레이모어)를 설치한 병사들이 도전선(導電線)을 끌고 왔다. 여기에 격발기를 물리면, 때맞춰 원격으로 터트릴 수 있다. 모든 공공시설이 그렇듯이, 공터 중심에는 국기게양대가 있었다. 제프리는 병사들에게 국기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불가피한 상황도 아닌데 성조기를 욕보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식적인 절차였지만, 병사들은 불만 없이 수행했다. 성조기가 캘리포니아 공화국기와 함께 회수되었다. 제프리는 그것들을 잘 접어서 갈무리했다. 기념품이란다. 그동안 통신병은 지속적으로 교신을 시도했다. "제가 보낸 메시지가 되돌아옵니다." 긴장된 어조의 보고. 정체불명의 상대가 통신병의 말까지 복사해서 반복한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갈수록 잡음이 강해지고, 메시지 수신감도도 높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즈프리로도 수신이 가능해졌다. 시끄러울 지경이다. 제프리가 투덜거렸다. "놀리는 거야, 아니면 진짜 귀신이야? 얼마나 접근했는지 알 수도 없고......." 거리가 줄어든다는 건 확실하다. 남은 거리를 알 수 없어 불안한 것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주차장 건너편, 울타리 너머의 가건물과 침엽수 사이로, 흐릿한 형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뭔가 있습니다." 적어도 인간은 아니었다. 겨울이 총을 겨누었다. "뭐? 어디?" 삽시간에 소대 전체가 긴장했다. 엄폐물 위로 총구만 내밀고서, 전방을 살피는 병사들. "어딘데?" 제프리의 초조한 목소리. 겨울이 거리를 가늠했다. 목측(目測)에 의한 거리측정은 「개인화기숙련」의 보정을 받는다. "12시 방향, 거리 약 120미터, 왼쪽에서 두 번째 가건물 뒤에 숨어있습니다." 서른 개 남짓한 총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겨울이 말한 방향을 겨누는 것이었다. 무전기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겨울은 무전기를 꺼버렸다. 어차피 정상 교신도 불가능하고, 소대원들 모두 모여 있는 마당이었다. 제프리와 병사들도 겨울을 본받았다. 표적은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잘한 것들이 울타리를 넘어 기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당황했다. "......저거 어째 아기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아기였다. 정확하게는, 감염된 아기들. 겨울의 시력으로는 그것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온 몸이 일그러져있다. 평범한 아기라면 울타리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넘었다. 두 발로 서지도 못 하는 주제에, 강화된 힘으로 꾸역꾸역 넘어왔다. 난간 위에서 버둥거리다가, 뚝 떨어진다. 잔디로 이루어진 경사를 데굴데굴 내려왔다. 깨애애액- 깨애애액- 괴상한 울음소리. 아기가 울어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새까만 아기들이 발발거리며 기었다. 속도는 의외로 빠르다. 다리 짧은 개가 달리는 것 같았다. 넓게 퍼져서 다가온다. 가분수의 머리를 좌우로 까닥거리면서, 변종 특유의 행동을 보였다. 따다다닥 부딪히는 이빨들. "오, 지저스. 갈수록 태산이군." 누군가의 중얼거림. 변종 아기들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표적이었다. 일단 크기가 작고,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뛸 때가 있다. 차량 아래로 기어 다니기도 했다. 배후에 도사린 건 아마도 새로운 특수변종. 그것도 겨울이 보지 못한 종류일 것이었다. 사실 아기들도 특수하다면 특수한 변종들이다. 마치 이쪽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테러리스트 새끼들. 애들을 내보내는 건 교전수칙 위반이야. 사격!" 생긴 게 아기라서 껄끄럽지만, 접근을 허용할 순 없었다. 제프리의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드르르르륵! 드르르륵! 당장 기관총부터 불을 뿜는다. 요즘 미군이 소음기 보급에 열중하고 있어서, 지원화기인데도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겨울은 탄약을 아꼈다. 무릎쏴 자세. 정조준으로, 표적마다 정확하게 한 발씩 박는다. 그러고도 연사를 긁는 병사들보다 효율이 월등했다. 툭! 툭! 툭!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주차장과 공터 위에 붉은 피가 뿌려진다. 빠악! 머리에 총 맞은 아기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고랑이 패였다.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퍼낸 것 같았다. "젠장! 꿈자리 사납겠네!" 지원화기사수가 탄창을 갈았다. 부사수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갈고서, 게양대 근처의 변종 아기들을 겨냥했다. 드럼 탄창에는 200발이 들어있었다. 무차별 난사였다. 주차장을 넘어오면, 공터에서는 더 이상 엄폐물이 없었다. 사선에 들어온 변종 아기들이 갈려나간다. 투명한 분쇄기로 휘젓는 것 같았다. 찢어진 아기 하나가 풀밭에 떨어졌다. 몸 절반을 잃었다. 덜 여문 내장이 흘러나왔다. 한 번 꿈틀거리고, 축 늘어진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겨울 바로 옆에서 끝도 없이 신을 불러댔다. 사실 겨울에게도 싫은 경험이다. 다른 세계의 관전자들처럼, 이것을 유흥으로서의 혐오스러움으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클레이모어! 7번, 8번 격발!" 제프리의 단호한 외침. 한 병사가 격발기를 양 손에 들고 꽉 쥐었다. 땅이 흔들렸다. 산탄지뢰는 전방 120도에 볼 베어링 700개를 뿌린다. 살상범위를 중첩시켰으니, 1,400개의 쇠구슬이 교차했다. 비에 젖은 땅이 뿌옇게 일어났다. 과잉화력이었다. 맞으면 형체도 남지 않았다. 여덟 개 중 두 개를 터트렸을 뿐인데, 공터가 완전히 쓸려나갔다. 다들 조용해진 가운데 겨울 혼자 사격했다. 탄창 하나를 비우고도 모자라, 새로운 탄창을 또 비운다. 다들 소년 장교가 뭘 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놓쳤네요." 제프리가 물었다. "뭘?" "정신 팔려서 잊으셨군요. 우리가 맨 처음에 뭘 경계하고 있었죠?" "......아차." 딱. 제프리가 자기 방탄모를 쳤다. 그는 잠시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하는 것 같았다. 병사들도 같은 입장이다. 정체불명의 적이 달아나는 동안, 멀뚱히 손 놓고 있었던 셈이니까. 끙끙 앓던 제프리가 우울하게 묻는 말.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 "한쪽 다리만요. 관목과 가로수에 가려졌거든요." "맞혔어?" "확실하게. 타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중탄이 적어도 한 탄창은 넘어요." "그래.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훈장 받은 값 하는구나......." 그는 겨울이 본 것에 대한 최대한의 설명을 요구했다. 처음에 보았던 실루엣과, 다리 한 쪽만으로도 대략적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결론은 역시 특수변종이었다. "「그럼블」보다야 작다지만, 평범한 변종은 아니겠어." 병사들의 엄호 하에 겨울과 제프리가 주차장 너머까지 진출했다. 놈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핏자국과 풀 밟힌 자국은 아스팔트를 만나면서 끊겼다. 겨울이 지닌 4등급의 「추적」으로는 추가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내리는 비가 문제였다. 핏자국이 이어지지 않았다. 흐려진 핏물이 고랑으로 흐를 뿐.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다. 새로운 변종은 물리내성이 낮거나 없다. "이 놈이 어디로 도망갔을까....... 시가지를 수색하긴 부담스러운데." 실종된 선행부대원들도, 정체불명의 무전을 쫓아 시가지로 들어갔을지 모른다. 고민하는 제프리에게 겨울이 말했다. "글쎄요. 당장은 수색이 불필요할 수도 있죠." "엥?" 설명 대신, 겨울은 무전기를 다시 켰다. 잡음이 흘렀다. 메시지가 송출되진 않았으나, 잡음의 강도가 대단하다. 놈이 한창 접근했을 때와 같거나,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가만히 듣던 겨울이 확신을 얻는다. "이 녀석은 아직 우리를 사냥하는 중이에요." 쫓고 쫓기는 입장이 반대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늘어진 총구에서 빗물이 흐르는 시간. "건방지게......누가 누굴 사냥해?" 제프리가 씨익 웃는다. "쳐 맞고 도망간 주제에, 아직도 얼쩡거린단 말이지? 쫓아갈 필요 없어서 좋네." 말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철조망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거칠게. 주변 모두가 한쪽을 바라보았다. 주립병원 격리병동 방향이었다. 유리창 깨지는 소음이 이어졌다. 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게 확실했다. 방해전파가 갑자기 약해졌기 때문이다. "아 놔, 이 새키. 곱게 잡힐 생각을 안 하네." 브리핑에 따르면, CDC가 격리병동에 수용한 감염변종은 1,200개체에 달한다. 그것들이 풀려나면 지옥도가 따로 없을 것이었다. 체력 이전에 탄약이 부족할 터. 겨울이 그의 걱정을 덜었다. "괜찮아요. 구역마다 다 잠겨있다고 했잖아요.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직접 확인했고요. 개별 병실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 병실이지 사실상 감방이었다. 열쇠 없인 열리지 않는다. "어휴. 어쩔 수 없군. 좋아, 가보자고. 미궁으로." 제프리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래도 앞장서서 걸었다. 겨울은 도중에 선행 임무부대의 차량을 뒤졌다. 소모한 만큼의 탄약을 보충할 수 있었다. 수류탄과 섬광탄 몇 발도 함께 얻었다. # 48 [48화] #징조들 (4), 아타스카데로 새로운 변종을 발견한 만큼 중간보고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산탄지뢰를 터트렸으니 소음지원도 필요했다. 통신병이 무전기를 붙잡고 애를 썼다. 방해전파는 보통 주파수를 바꾸면 해결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통신병이 궁시렁 거렸다. 괴물 주제에 성능도 좋다고. 부대가 잠시 둘로 나뉘었다. 교신 가능지점을 찾아보겠다며, 제프리가 통신병과 1개 분대를 이끌고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겨울은 남은 병사들과 격리병동의 열쇠를 찾기로 했다. 도어 브리칭 장비는 있었지만, 무수한 문과 철창을 다 부수고 다닐 순 없었다. 소음도, 걸리는 시간도 문제다. (도어 브리칭 Door Breaching : 문을 강제로 부수거나 폭파시키는 행위.) 그래도 장비를 챙기긴 했다. 겨울이 고른 것은 핼리건 바였다. 측면에 뿔이 돋은 곡괭이처럼 생겼고, 손잡이 아래는 쇠지레가 달려있다. 통짜 강철이라 무기로 쓰기 좋았다. "찾았습니다." 경찰 사무실을 뒤지던 병사가 열쇠뭉치를 들어보였다. 휙 던지는 것을 잡아채는 겨울. "계속 찾아봐요. 많을수록 좋으니까." 병사들은 추가로 세 꾸러미의 열쇠뭉치를 찾아냈다. 직후, 창문이 덜덜덜 진동했다. 노이즈 메이커의 지원이었다. 겨울은 시간을 확인했다. 제프리가 험비를 타고 얼마나 이동했을지 가늠하는 중이다. 거리를 토대로 괴물의 출력을 역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장은 무리였지만. 제프리의 복귀는 생각보다 늦어졌다. 겨울은 동쪽 감시탑을 하나 확보하고, 감시 병력을 배치했다. 특수변종이 빠져나가는 걸 예방할 요량이었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험비 세 대가 줄지어 들어왔다. 돌아온 제프리는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보건서비스부대에서 관심을 보여서 말이지." 공공보건서비스부대는 보건사회복지부 산하의 준군사조직으로, 현재는 CDC와 FEMA의 협조 하에 봉쇄선 방역을 총괄하고 있었다. 감염변종에 대한 정보수집 임무도 담당한다.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현실감각이 없어요. 박사 하나가 꼬치꼬치 캐묻더라고. 상황 급한 건 모르고, 절차대로 보고서부터 작성해야 한다고. 젠장."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겨울이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요?" "가능하면 포획하래. 죽이든 살리든, 잡고 나서 연락하면 헬기 보내준다던데." "굉장히 쉽게 말하는군요. 다른 지원은 없대요?" "네가 있는데 필요하냐고 묻더라. 됐다고 했어. 이미 늦었는데, 지원까지 기다리면 한세월 걸릴 것 같더만. 괴물이 얌전히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고 우리가 건물을 포위할 만큼 많은 것도 아니잖아. 내 생각은 그래." 높아진 명성이 이럴 때 좋지 않았다. 이름값을 하면 할수록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었다. 겨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제프리도 알았다. "모가디슈의 교훈을 모르니까 그 모양이지. 이래서 대가리가 멍청하면 안 되는데. 전문가랍시고 책 곰팡이 냄새 나는 놈들이 꽉 차있으니 원."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던 미국은, 모가디슈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경험했다. 특수부대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임무를 맡겨놓고 당연히 성공하리라 여겼다. 묵직한 목소리가 깔렸다. "그걸 그냥 오면 어떡합니까? 욕이라도 쏟아주고 올 것이지." 소대에 하나 뿐인 하사의 말이었다. 제프리가 대꾸했다. "이봐요, 그 박사님이 그래도 중령이었어요. 내가 영창 가면 누가 지휘합니까?" "괜찮습니다. 군대의 중추는 부사관이니까. 그리고 여긴 소위가 한 명 더 있잖습니까. 안심하고 다녀오시죠." 이렇게 말하는데 음색의 고저변화가 전혀 없었다. 표정도 덤덤하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보어(Bore)였다. 마빈 "보어" 리버만. 제프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사, 당신은 표정이 없어서 농담을 해도 농담 같지가 않아요." "그렇겠죠. 진담입니다." "뭣이?" 병사들이 낄낄거린다. 겨울이 끼어들었다. "하기 싫은 건 알겠는데, 그쯤 해두세요. 낮이 짧은 계절이잖아요." 반쯤 농담으로 어울려주는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두려울 때의 농담은 베테랑의 증거다. 부하들의 긴장감을 관리하는 측면도 있고. 리버만 하사가 끄덕끄덕 말한다. "역시 우리 소위님보다 낫군요." "뭣이?!" 여기까지가 만담이었다. 장교 둘과 하사 하나, 부사관 취급의 병장 및 상병들이 시설 지도를 펼쳐놓고 동선(動線)을 짜낸다. 부지가 워낙 넓어서 한 덩어리로 뭉쳐 움직이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었다. "일단 너무 무리할 생각은 접읍시다. 요 병력 보내놓고 큰 성과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지." 제프리가 시작부터 못을 박았다. 겨울이 동의했다.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아까도 감염된 아기들을 앞세워서 우리 화력을 시험했잖아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죠." "분대별로 나눠서 움직이되, 복도가 세 개니까 나란히 갑시다. 필요할 때 지원과 연계가 가능하도록 말이죠. 교신을 중계하도록 하면 무리가 없을 겁니다. 놈은 우리 무전을 감지할 수 있으니, 일종의 몰이사냥이 되겠군요." 하사가 경로를 그려 넣으며 제안했다. 꼭 필요한 무전까지 피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 제프리는 끄덕끄덕 동의하고 포인트마다 시간을 적었다. 병장 및 상병들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시간과 거점을 옮겨 적는다. 유사시 어디서 모이는가, 언제 어디로 가면 아군이 있는가 등등. 겨울은 지도를 눈에 새기듯이 훑었다. 기술보정보다는 기억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당장 「독도법」에 투자하자니 효용이 낮다. 「암기」를 함께 올리지 않으면, 미니 맵 업데이트에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한 소위 자네가 중심이야. 이의 없지?" "네. 그래야죠." 당연하다는 투로 받아들이니, 장난스레 오오- 하고 반응하는 병사들. 제프리가 자리를 털었다. "좋아. 다들 캠 확인하고, 움직이자고!" 마침내 수색이 시작되었다. 열쇠는 겨울, 제프리, 리버만이 나누어가지고, 남은 뭉치 하나를 예비대가 챙겼다. 각 분대에서 두 명씩 차출하여 감시탑과 로비에 배치시켰으므로, 수색조의 인원은 지휘관 포함 각기 9명 안팎이었다. "놈이 아직 병동 안에 있긴 할까요? 그 사이 몰래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는데." 겨울이 이끄는 분대에는 엘리엇 상병이 있었다. 제프리 나름대로 배려해준 결과였다. "안에 있을 거예요. 잡음이 여전히 심하니까." 겨울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첫 번째 구역의 문을 열었다. 뒤에서 기습당하는 걸 막고자, 들어온 뒤에는 다시 잠가두기로 한다. 급할 땐 잠금장치를 쏴버리면 그만이었다. 구획을 나누는 창살이 자주 나타났다. 지나가는 내내, 병사들은 좌우의 잠긴 문을 기웃거렸다. "소위님, 이것 보십시오. 갇힌 놈들이 미동도 없습니다." 한 병사가 겨울을 불렀다. 소년장교는 다른 방향을 경계하며 문에 붙었다. 철망 달린 유리 너머, 방 안을 엿본다. 변종의 모습은 정지화면 같았다. 창가를 향해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죽은 걸까요?" "글쎄요." 겨울은 병사들에게 떨어지라고 지시했다. 엘리엇이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생긴 게 최소한 굶어죽은 것 같진 않네요. 에너지를 아끼는 건가?" 정답이다. 그렇지 않겠느냐고, 겨울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굳이 증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천둥소리. 비구름이 하얗게 이글거리는 순간, 굳어있던 변종이 발작처럼 각성했다. 창살에 달라붙는다. 애초부터 창문을 보고 굳어있던 이유였다. 경악한 병사들이 숨죽인 가운데, 변종은 마냥 창문 너머만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서서히, 움직임이 사라져갔다. "와, 씨발, 놀랐다." 엘리엇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이후, 모두가 더 조용해지려고 노력한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병사들이었다. 복도는 가는 곳마다 비슷했다. 어둡고, 적막하다. 좌우로 병실만 꽉 차있어서, 흐린 햇빛이나마 들어올 구석이 없었다. 바깥의 소리도 마찬가지. 천둥 칠 때마다 발작하는 변종들을 제외한다면, 남는 소리는 숨죽인 군홧발들 뿐이었다. 풍경은 갑자기 달라졌다. 세 번째 구획에 도달하자, 차단문이 열려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든 문이 다 열려있다. 겨울이 헬멧의 야간 투시경을 끌어내렸다. 시야가 녹색 음영으로 가득해진다. 중요한 것은, 바닥에 남아있는, 희미한 주홍빛 얼룩들이었다. "발자국이 많네요." "우라질!" 겨울이 경고했다. "휴이. 목소리 낮춰요." "......죄송합니다." 병사들이 자꾸 겨울의 눈치를 봤다. 그들의 장비로는 열(적외선)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감염변종은 인간보다 체온이 높다. 그리고 맨발로 걸어 다닌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발자국이 남아있는 건 이상하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고, 나온 즉시 조직적으로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이것들이 어디로 갔을까.' 겨울이 이 상황을 알리고자 무전기를 들었다. 잡음이 심하다. "제프리 소위. 리버만 하사. 제 말씀 들리십니까?" 쿵쿵쿵쿵쿵. 묵직한 발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앞에서, 뒤쪽으로. 그와 동시에 무전기의 잡음이 순간적으로 증폭되었다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위를 쳐다보았다. 겨울은 교신이 불가능한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방금 위로 지나간 게 우리 사냥감인 모양이네요." 엘리엇이 불안하게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따라오세요." 겨울은 텅 빈 복도를 향해 뛰었다. 병사들이 기겁해서 따라붙는다. "놈은 뒤로 갔습니다!" "함정 같아요."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 요란한 소리는 일부러 냈을 것이었다. 교신을 시도하는 순간, 이쪽의 위치를 알아차리고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순간, 속도가 관건이었다. 예측을 벗어나야 한다. 전력질주로 복도 끝에 도달했다. 역시나, 다음 구획도 열려있었다. 여기선 눈에 띄는 흔적들이 많았다. 피에 젖은 손자국, 발자국들이 벽면과 바닥에 가득했다. 그것들은 모두 남쪽 통로로 향하고 있었다. 반면 북쪽 통로는 대단히 깨끗했다. 병사들이 벌써부터 리버만 하사를 걱정했다. 남쪽은 리버만, 북쪽은 제프리다. 잡음이 줄어들고, 무전기가 울었다. 「오, 이제야 좀 되는군. 한 소위. 들립니까? 이쪽 낌새가 이상합니다. 모든 문이 다 열려있습니다. 아무래도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리버만 하사의 목소리였다. 겨울은 응답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도 무선침묵을 요구했다. "답신하지 마세요. 놈이 우리 위치를 몰라야 하니까." "하지만......!" "명령입니다." 병사들을 눌러놓고, 겨울이 다시 한 번 야간투시경을 끌어내렸다. 남북 통로를 유심히 살피더니, 이렇게 결정했다. "우린 북쪽으로 갑니다." 당장 반발이 있었다. 설명 없이는 따르지 않을 모양새다. 겨울이 투시경을 톡톡 두드려보였다. "보이지 않는 발자국은 북쪽이 더 많아요." "허......." 의미를 깨달은 자들은 두려움 반 당혹감 반이었다. "맙소사, 진짜로 함정이라니!" 그들은 벌써 뛰기 시작한 겨울에게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아 80미터 정도 달린 뒤, 겨울은 속도를 줄였다. 제프리는 아직 겨울이 있는 곳까지 진출하지 못했다. 더불어 이곳의 차단문은 아직 잠겨있는 상태였다. 개별 병실도 닫혀있는 그대로다. 겨울은 차단문을 따놓고, 잠겨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밀어놓았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겨울은 상대를 교활한 인간처럼 생각했다. '기습을 할 작정이면,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진 않겠지.' 왜 여기만 문이 잠긴 그대로겠는가. 지도를 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북쪽 회랑 중앙의 교차로에는, 바깥으로 돌출된 형태의 강당이 있었다. 변종이 대량으로 숨어있기 좋은 구조다. 기습이 있다면 바로 이 앞이었다. 기다렸다가, 역으로 기습을 걸어도 된다. 괜히 이쪽을 드러내버리면, 놈이 다른 쪽으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겨울이 손가락을 펴서 입술에 붙였다. 병사들은 아직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도와주러 왔는데, 왜 바로 합류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시에는 순순히 따른다. 겨울의 확신에 찬 모습 때문이었다. 겨울이 무전기 볼륨을 줄였다. 심한 잡음 사이로 들려오는 제프리의 목소리. 「한 소위? 리버만 하사? 여-보-세-요? 염병. 답답해죽겠네.」 소년은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전투를 준비하라고. # 49 [49화] #징조들 (5), 아타스카데로 제프리 분대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다가왔다. 겨울 쪽에선 모퉁이의 볼록거울로 지켜볼 수 있었다. 제프리와 병사들이 나름대로 경계하고 있었지만, 불충분했다. 특히 이미 지나온 길에 대해서는. 잠긴 문을 확인했으니 방심할 법도 했다. 겨울이 병사로부터 6연발 유탄발사기를 빌렸다. 그 사이 제프리는 함정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그들 후방의 어둠으로부터, 희끄무레한 형상이 벽을 타고 내려온다. 모든 움직임에 소리가 없다. 그것이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동작으로, 느릿하게, 강당으로 이어지는 문에 다가서는 순간. "제프리! 엎드려요!" 겨울이 모퉁이에서 상체 절반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제프리 측 병사들. 총탄 몇 발이 날아들었다. 두 발이 스쳤다. 겨울이 윽박질렀다. "엎드리라고!" 조준점은 강당의 창문 너머. 총구를 우측으로 끌면서, 방아쇠를 연거푸 당겼다. 투투투투투퉁! 제프리 쪽이 자세 낮추기 무섭게,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어둡던 복도가 폭음과 섬광으로 가득 찼다. 찢어진 철창과 유리파편이 비처럼 쏟아진다. 강당으로부터 지옥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울이 유탄발사기를 병사에게 던지고, 뛰쳐나가 소총사격을 퍼부었다. 병사들이 가세한다. 맹렬한 사격. 어둠 속 형상은 한 팔로 막고 버티며, 다른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스파크가 튄다. 문은 잠긴 적 없는 것처럼 열렸다. 그제야 후방의 괴물을 발견했나보다. 제프리 쪽에서도 반쯤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총격을 가했다. 철이 튀고 피가 뿌려진다. 살 찢어진 괴물이 황급히 달아났다. 그 공백을, 강당에서 쏟아지는 변종들이 메운다. 여섯 번 터진 유탄조차도 다 죽이지 못한 수였다. "맙소사! 이게 다 뭐야!" 제프리의 절규. "이쪽으로 와요! 어서!" 겨울이 수류탄을 던졌다. 강당 입구 안에서 터져서, 쏟아져 나오던 놈들을 무더기로 쓰러트린다. 사격으로 전환하여 버둥대는 놈들을 견제하는 동안, 분대원들이 겨울을 본받았다. 수류탄이 연달아 날아간다. 그러다가 한 발이 철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뒤로 쏘랴, 앞으로 기랴, 정신없는 제프리 분대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 팅! 겨울이 쏜 총탄이 수류탄에 맞았다. 파열되지 않도록, 비스듬히 맞춘 것. 수류탄은 이번에야말로 창문을 넘어갔다. 넘어가자마자 터진다. 겨울이 얼빠진 병사의 뺨을 쳤다. "정신 차려요!" 화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신 차리란 의미. 실수에 놀라 방아쇠를 놓고 있었다. 한 사람의 화력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마침내 겨울이 제프리 분대에 합류했다. 그들 곁에서 무릎쏴 자세로 변종 무리를 제압한다. "괜찮아요?!" 조준 유지하며 묻는 말에, 제프리가 옆에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투두두둑! "는 모르겠지만! 멀쩡해!"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좁은 공간으로 밀려나오다 보니, 변종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쌓인 시체가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강당 문을 중심으로, 복도 높이의 절반을 넘게 메워버렸다. 그것은 겨울에게도 장애물이었다. 그 너머로 달아난 특수변종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냥감을 쫓겠습니다! 엄호해요!" "어이, 야!" 겨울이 달리기 시작했다. 시체에 시체를 더하려고 나오던 변종들이 겨울을 노렸다. 엄호사격은 조심스러웠다. 겨울이 맞을 지도 모르니까. 불충분한 탄막을 뚫고 다가오는 놈이 셋. 탄창이 비었다. 즉시 권총을 뽑아 정확히 세 발을 쏘았다. 급히 쏜 지라 한 놈이 살아있었다. 그립으로 내리치며 지나간다. 탄창을 갈며 벽을 타넘는다. 죽은 시체와 죽어가는 시체들이 스스로 쌓아올린 벽. 벽돌 하나가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발목을 붙잡힌 겨울이 반대편 경사를 온 몸으로 굴렀다. 따다다닥. 돌고 도는 시야에, 살벌하게 부딪히는 이빨이 지나갔다. 내려선 겨울이 중심 잡고 바로 뛰었다. 철창 너머 달아나는 특수변종을 확인, 조준선에 잡기까지 고작 반 호흡이었다. 총탄이 빗발치자, 놈은 가장 가까운 탈출구를 찾았다. 측면으로 빠지는 문. 그곳엔 작은 공터가 있었다. 특수병동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뚫려있는 곳. 소년이 쭉 미끄러지며 방향을 바꿨다. 괴물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윽!" 「전투감각」의 경고에 의한 급속회피. 채찍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뼈 없이 근육뿐인 기형 팔이었다. 뒤로 누웠던 겨울이 한 손으로 조준했다. 투두두두두둑! 몇 차례의 명중탄이 괴물을 또 도망가게 만든다. 탄력으로 일어선 겨울이 공터에 진입했다. 마침내 드러난 괴물의 전모. 벽에 매달린 특수변종은, 비에 젖은 수풀을 향해 팔을 내리쳤다. 스파크가 일었다. 전류가 땅과 물을 타고 흘렀다. 범위가 넓어 효율은 낮았지만, 겨울을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전투화는 절연체지만, 빗물이 문제였다. 순간적인 마비. 조준이 어렵다. 이 틈을 타, 괴물이 남은 벽을 기어오른다. 기어오른 자리가 핏자국 투성이었다. 겨울이 때늦은 사격을 뿌렸다. 콘크리트 부서지는 궤적이 괴물 뒤를 쫓는다. 변종의 종아리에 또 한 발의 명중탄. 첫 조우에서 한 탄창 다 맞고도 도망갔던 놈이다. 기어코 지붕으로 올라갔다. "나 올라가면 탄창 던져요!" 탄약이 부족할 지도 모른다. 뒤따라온 병사들에게 외쳐놓고, 벽을 향해 달리는 겨울. 「무브먼트」 보정으로, 창틀과 배수관을 밟고 뛰어, 수직으로 8미터를 극복한다. "받아요!" 탄창이 날아왔다. 지붕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낚아채고서, 겨울이 다시 괴물을 쫓았다. 도망치는 괴물은 이미 총격을 받는 중이었다. 감시탑에 배치된 병사들은, 비록 명중탄을 내진 못했지만, 특수변종의 속도를 현격히 감소시켰다. 변종은 옥상에 어지럽게 뒤얽힌 환기시설을 엄폐물로 삼았다. 환기시설은 지저분할 정도로 복잡했다. 수감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다. 겨울은 그것들을 몇 번이나 타넘었다. 장애물을 넘자마자, 20미터 거리에 괴물이 있다. 낮은 배기관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곧장 조준하는데 이상했다. 변종의 상반신에서, 갈비뼈 사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화악-! 훅 밀어닥치는 열기. 너무 빠른 공격이라 회피가 늦었다. 순간적으로 노출되었다. 바닥을 구른 겨울은,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당황했다. '그런가. 전기와 전파를 다루는 놈이니까.' 이 추측을 「통찰」이 긍정했다. 전자레인지의 원리였다. 처음 보는 변종, 처음 보는 패턴이다.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섬광폭음탄 핀을 뽑고 안전손잡이를 놨다. 2초 후 벌떡 일어나며 던지고서, 바로 귀 막고 눈 감으며 주저앉는다. 새까만 세상이, 아주 잠깐, 하얗게 물들었다. 이어지는 폭음은 온 몸으로 들었다. 겨울이 자리를 옮겨 다시 일어섰다. 특수변종은 눈을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그 와중에 달아오르는 상체 전면. 뿜어낸 극초단파의 궤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들이 조금씩 기화되어, 옅고 흐린 장막이 펼쳐진다. 그런데 조준이 생각보다 정확했다. 비틀거리느라 빗나가는 거지, 겨울의 움직임을 따라 제대로 반응하고 있다. 박쥐가 초음파로 주위를 인지하는 것처럼, 이놈은 전파가 또 하나의 인지수단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겨울이었다. 원거리 패턴의 거리와 범위는 확인했다. 이제 주기를 알아야 한다. 겨울은 남은 섬광탄을 또 집어던졌다. 쾅! 변종은 인간보다 회복이 빠르지만, 연속으로 터진 섬광폭음탄에는 무기력했다. 쏘아낸 열파가 또다시 빗나갔다. 확인했다. 예열에 약 1~2초. 조사(照射) 시간은 약 5초. 겨울이 괴물의 무릎을 겨냥한다. 한쪽 슬관절이 박살날 때까지 쐈다. 애초에, 첫 조우에서 겨울이 탄창 하나를 다 박아 넣은 다리였다. 아예 못쓰게 만들 작정이었다. 주위에 무의미한 채찍질을 하면서, 특수변종은 남는 손으로 다친 곳을 움켜쥐었다. 스파크가 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처를 지져 출혈을 막는 것이었다. 채찍질 하는 팔은 탄력 있게 잘도 늘어났다. 이 또한 전기가 흐를 것이었다. '붙잡히면 위험하겠어.' 시야 돌아온 괴물이 겨울을 노려본다.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행동은 도망이었다. 다리 하나가 작살났는데도, 특이한 방법으로 잘도 도망갔다. 채찍처럼 휘두르는 한 쪽 팔을 집어던져, 멀리 있는 고정물을 움켜쥔다. 팔 근육이 수축한다. 몸이 딸려갔다. 어지간한 사람의 전력질주보다 빠른 속도였다. 다른 팔이 다리를 대신했다. 여기에 질질 끌리는 다리 한 짝까지 어울려, 기괴한 광경이 되었다. 겨울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시간을 조절하여, 높은 하늘에서 터지도록. 폭풍이 괴물을 찍어 눌렀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특수변종은,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기형의 육신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필사적인 도주가 나무늘보 수준이었다. 「한 소위! 듣고 있나? 살아있어? 응답해!」 방해전파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특수변종의 기력이 바닥났다는 증거였다. 겨울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며 빠른 걸음으로 괴물을 쫓는다. "네, 멀쩡합니다. 말씀하세요." 리시버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제프리 소위가 물었다. 「하. 다행이군. 위치가 어디야? 우린 아직 옥상으로 가는 길인데.」 「물소위님. 정말 무사하십니까?」 리버만 하사의 말이 겹쳐졌다. 교신이 갑자기 가능해져서 생긴 문제다.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겨울이 답신했다. "천천히 오세요. 거의 다 제압했거든요." 특수변종은 이제 더 도망가지 못했다. 제자리에서 꿈틀거린다. 촉수를 닮은 팔 한 짝이 비오는 날의 지렁이처럼 번들거렸다. 그나마도 곧 멎고 만다. 가늘게 들썩이는 가슴을 제외하면, 사실상의 주검이었다. 겨울은 지나치게 접근하지 않았다. 교활한 놈이니 죽은 척일 가능성도 있었다. 한참 지나 옥상에 도달한 다른 두 분대가 접근할 때였다. 특수변종이 기습적으로 발광했다. 끄아아아아-! 근육질의 채찍이 쇄도했다. 휘둘러지는 도중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는, 살아있는 채찍. 겨울이 펄쩍 뛰어 벗어났다. 처음부터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남은 힘을 다 쓰려는지, 팔다리를 휘꺽 꺾어대며 무섭게 달려든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 겨울을 따라잡긴 역부족이다. 짧은 시간, 무전기에서 극심한 잡음이 튀었다. 제프리와 리버만 방향으로부터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변종의 살갗이 누더기처럼 너덜거렸다. 겨울은 교신을 포기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쏘지 마세요!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감시탑을 향해서는 커다란 수신호를 보냈다. 엑스자로 반복해서 교차시키는 팔을 보고, 그쪽 역시 사격을 멈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이 맞았다. 변종 몸에 난 구멍은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주위에 가득한 게 모두 다 핏물이었다. 겨울이 촉수 끝을 밟고, 질질 밀면서 접근했다. 반응이 없다. 여력이 남았다면 감전 패턴이 나올 차례인데. 겨울이 총 끝에 대검을 끼우고, 상처를 건드려보았다. 여전히 무반응. "어떻게 됐어?!" 헐레벌떡 뛰어온 제프리 소위가 몇 걸음 밖에서 급정지했다. 괴물이 무서워서였다. 오, 쉿. 짧게 내뱉는 욕설. 겨울이 발로 변종 몸통을 몇 번 차고는, 마침내 목덜미를 꾹 눌러 맥박을 확인했다. "죽었네요. 아쉽게도." "엥? 아쉬워?!" "포획하랬다면서요. 그 박사님이." "......그렇다고 진짜 할 생각이었어? 제정신이 아니구만." 사실상의 칭찬이었다. 본부와 교신하던 제프리 소위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제군들, 기뻐하시게. 그 박사님 징계 받는대. 속이 다 시원하군." "징계요? 왜요?" "대응을 잘못 했다는 거지. 담당자가 바뀌었어."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처음 약속대로 헬기가 날아왔다. 수송헬기 인원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블」 쇼크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신종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다고. 대규모 대응작전이 실행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처음이 아니군요?" 겨울이 보건서비스부대 장교에게 묻는 말. 계급은 소령이었으나, 군인보다 학자에 가까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헬기 안에 이미 같은 종류의 변종 시신 두 구가 고정되어 있었다.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화력에 노출된 결과물이었다. 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가 상당했지만, 「그럼블」 때보다는 괜찮은 편이지. 공군이 많이 활약했으니까." "공군이 끼었습니까?" 제프리가 새로 묻자, 장교가 긍정했다. "처음엔 외국군이 개입한 전파방해라고 생각했거든. 전파 추적 미사일을 퍼부었지." "미사일? 화끈했겠군요." "아무튼 아쉬운 일이야. 자네들이 획득한 표본이 그나마 가장 멀쩡한 편이거든. 잘하면 살아있는 연구 샘플을 얻었을 텐데." 소령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헬기편으로 복귀하겠느냐고 물었으나, 차량을 방치하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복귀하기 전, 소령은 겨울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네 정도의 유명인을 만나서 악수 한 번 안 해보면 나중에 후회하겠지." 미소와 경례를 남기고, 그는 헬기에 올랐다. 멀어지는 헬기 편대를 바라보며 리버만 하사가 제안했다. "이제 임무 속행은 무립니다. 우리도 이만 철수하죠." 그가 말하는 임무 속행은 실종자 수색을 뜻했다. 병사들이 지쳐있었고, 탄약도 많이 소진되었고, 일몰까지 남은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선임장교로서, 제프리가 제안을 승낙했다. "그래요. 우린 할 만큼 했으니까, 돌아갑시다. 자네도 동의하지?"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 50 [50화] #징조들 (6), 아타스카데로 다음날, 겨울은 아타스카데로를 다시 찾았다. 실종자 수색을 위해서였다. 전날보다 증강된 병력이 투입되었고, 남쪽의 다른 캠프로부터 추가 병력지원이 있었다. 그들은 먼저 도착해서 도시 남쪽에 교두보를 마련한 상태였다. 정찰 드론을 띄워서, 수색작전에 도움을 주었다. 실종자들은 죽지 않는 망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툭! 뭉툭한 총성. 겨울이 감염된 병사에게 안식을 주었다. 미관을 감안하여, 머리가 아닌 심장을 쐈다. 아스팔트 위로 넘어진 시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브라보 중대에 줄초상이 났군요." 오늘도 끌려나온 엘리엇이 투덜거린다. 아타스카데로에서 실종된 병력은 모두가 2중대 출신이었다. 어쩌다 집중된 피해는 아니고, 단지 중대별 임무 순서 때문에 생긴 일이다. "미군은 그렇다 치고, 중국인 실종자를 어떻게 알아봅니까?" 엘리엇의 불만은 일리가 있었다. 미군 감염자는 알아보기 쉬웠다.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공중정찰만으로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난민 출신의 지원자들은 달랐다. 그들에겐 어떠한 표식도 없었다. 사실상 지휘부도 포기한 상황. 그러나 겨울은 답을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아요. 수색 대상을 동양계 감염자로 좁힐 수 있고, 무엇보다 문신이 있을 테니까요." "문신? 무슨 레드 마피아입니까?" 다른 병사가 당혹스러워했다. 러시아의 범죄자들, 레드 마피아는 문신으로 소속과 범죄경력을 새긴다. 내용은 대단히 상세하다.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죽였는지, 법정에서 어떤 형벌을 선고받았는지, 징역을 살았다면 몇 년이나 살았는지까지. 그들 나름의 약장 같은 것이다. 겨울이 대꾸했다. "비슷해요. 중국계 실종자들 대부분이 트라이어드(삼합회) 소속이거든요." 병사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트라이어드는 재앙 이전에도 악명 높던 범죄조직이다. 병사들 입장에서, 난민들이 범죄자를 자처한다는 데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중국인 실종자 찾기는 난항을 겪었다. 겨울이 정보를 공유해도, 병사들부터 부사관과 장교에 이르기까지, 수색작전에 동원된 모두가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미군 실종자가 모두 확인된 시점부터는, 사실상 겨울이 담당한 방면에서만 수색이 진행되었다. 바탕에는 냉정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범죄조직 주제에 의협(義俠) 운운하는 집단이니, 이 기회에 빚을 지워놔야지.'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는 집단일수록, 질서 유지를 위해 명분을 강조한다. 물론 조직의 수장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허나 조직의 정체성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자살행위니까. 사정 모르는 병사들이 겨울의 인품에 감탄했다. "국적도 다른데 열심히 찾아주시는군요. 소위님은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사실 겨울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미를 꽃피우기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병사들의 긍정적인 착각을 굳이 부숴놓을 필요는 없었다. 겨울은 묵묵히 수색에 전념했다. 얼핏 봐서 아시아계가 아니면 머리를 쏘고, 아시아계 같으면 최대한 손상 없이 잡으려고 노력했다. "한 명 찾았네요." 시체의 가슴팍을 헤친 겨울이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문신을 보라는 의미였다. 삼각형 안에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글잡니까?" 서양인들에게 한자는 어렵다. 겨울이 보기엔, 기술보정도 필요 없는 글자였지만. "홍(洪). 넓다는 의미에요." 삼합회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다. 물 수 변(氵)의 3획은 삼합회의 근간이 된 세 개의 조직, 청방(靑房), 홍화회(紅花會), 흑사회(黑蛇會/黑社會와는 다른 조직)를 뜻했다. 즉, 세 개의 조직이 함께한다(共)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여기 점 세 개가 시초의 세 조직을 뜻한다 이거죠? 하, 의미심장하군요. 소위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설명을 들은 병사의 질문이었다. 겨울은 적당히 대답했다. "중국과 한국은 비슷한 문화권이잖아요. 어쩌다보니 알게 됐어요." 그럴듯한 핑계였다. 병사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 시체의 등짝과 가슴은 온갖 문신으로 가득했다. 겨울로서도 모든 상징을 알아볼 능력은 없었다. 다만, 화려함으로 미루어 일반 조직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단순히 용만 그려진 거라면, 화려할 뿐 실속은 없다. 그러나 명확히 구분되는 상징들이 있었다. '간부급이군.' 삼합회와 지도력 다툼을 벌이는 흑사회(黑社會)의 경쟁조직들은, 1중대장 마커트 대위의 비호를 받는다. 겨울이 중국인 실종자들을 삼합회로 단정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겨울은 삼합회가 입었을 타격을 짐작해보았다. 그렇잖아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밝힌 그들이다. 간부 포함 일백 가까이 손실을 입었다면, 더는 자기방어조차 불가능할 것이었다. 돌아가면, 높은 확률로 재접촉이 있을 것 같다. 생각이 잠시 끊어졌다. 리시버를 통해 지휘본부의 경고가 들어왔다. 「현 위치에서 정지하라. 정면 좌측 골목으로부터 감염변종 무리가 접근 중이다. 규모는 약 50. 특수변종 및 강화변종은 확인되지 않는다.」 병사들이 소년장교를 따라 무릎쏴 자세로 앉았다. 첫 변종은 나오자마자 죽었다. 겨울은 병사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오는 족족 쏴서, 변종들이 영문도 모르고 쓰러졌다. 정확하게 쉰 셋. 탄창 두 개로 충분했다. 병사들을 향해, 겨울이 탄창 나눠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우린 왜 있는 겁니까?" 투덜거리며 자기 몫을 내놓는 엘리엇이었다. 대답 대신, 겨울이 다른 것을 물었다. "엘리엇.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이상해요? 뭐가요?" 엘리엇이 바퀴벌레를 쫓으며 반문한다. 겨울이 시체들을 가리켰다. "전부 어른들이잖아요." "네?" "어제 봤던 감염된 아기들, 기억 안 나요?" 그러자 엘리엇만이 아니라, 듣고 있던 병사들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일그러졌어도 아기였다. 거기다 대고 총질을 했으니 트라우마로 남을 법 했다. 하지만 겨울이 병사들 괴롭히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젠 그렇게 많던 아기들이, 오늘은 왜 없을까요?" "어......그건 그렇군요." 어제, 감염된 아기들은 숫자가 많았다. 총질로 감당 못해 산탄지뢰를 써야했을 정도로. 곤혹스러운 얼굴들을 향해, 겨울이 같은 내용,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트릭스터」가 아기들만 불러냈던 이유는 뭐죠? 우리 화력을 시험할 작정이었으면, 성체 변종들을 부르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텐데요." 「트릭스터」는 전파를 다루는 특수변종의 변이 코드였다. 오늘 아침에 정식으로 부여되었다. 교활한 행적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소위님은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세대차이요." 겨울이 즉답했다. 병사들은 잠시 멍했다가, 앞서나가는 어린 소위를 바쁘게 따라잡았다. "이해가 안 갑니다. 무슨 세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하면서 들으세요." 겨울은 동양계 남성 시체의 상의를 벗겨냈다. 임무를 떠올린 병사들이 우물쭈물 흩어졌다. 건성건성, 시체들을 확인하며 다시 묻는다. 아까는 무슨 뜻이었느냐고. "전 일단 그렇게 많은 아기가 집단으로 튀어나왔다는 것부터 이상하다고 보거든요. 제가 보기엔, 변종들이 번식을 하는 것 같아요." "What the F......." 그래도 장교 앞이라고 욕을 삼키는 엘리엇. 굳어있던 다른 병사가 어물거렸다. "어......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놈들은 인체기능에 의존하니까, 임신이 불가능하란 법도 없군요. 세상에......." 겨울이 남은 생각을 풀어놓았다. "제 가설은 이래요. 「트릭스터」는, 성체를 부르지 않은 게 아니라, 부를 수 없었던 거라고." 눈치 빠른 병사들이 몸을 떨었다. 겨울이 그들의 우려를 긍정했다. "예, 그거예요. 부모보다 나은 자식. 새로운 세대에 새로운 능력. 「트릭스터」는 전파를 다루는 특수변종이죠. 새롭게 태어나는 변종들은, 최소한, 전파를 수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한 병사가 반문했다. 끔찍한 현실에 부딪히면, 부정하고 싶어지게 마련이었다. "가능성은 높지 않을까요? 사실 「트릭스터」부터 말이 안 되는 존재잖아요. 생체전기로 주파수 맞춰서 방해전파를 쏘는 생물이라니, 상상이나 해봤어요?" "......."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고 있으면,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절망할 일 없을 테니까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요." 그렇다. 어린 나이에 얻은 삶의 지혜다. 겨울은 생전에도 최악을 상정하고 살았다. 부모에게 무언가를 기대해본 적이 없었다. 엘리엇이 진지하게 말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의견이십니다. 상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걱정 말아요. 그렇잖아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거든요." 중국인 시체 아홉 구를 추가로 확인한 겨울의 눈에, 바퀴가 유독 몰려있는 장소가 보였다. 총 몇 발 쏴주자 우르르 흩어지는 벌레들. 병사들과 함께 가서 뒤적여 보았다. 어느 병사가 말했다. "공수된 비상식량 포장지들입니다." 대량이었다. 적어도 수십 인 분. 아무리 살펴봐도 최근에 뜯은 것 같다. 벌레 떼의 무게에 짓눌려, 날아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실종자들의 마지막 만찬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엘리엇의 음성은 슬픈 느낌이다. 겨울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읽지 않은 메시지 (3) 「Владимир : 극악무도한 액티브 엑스의 장벽을 뚫고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바퀴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 끔찍한 감각이었다.......」 「액티브X좆까 : 하.......」 「여민ROCK : 진짜, 레알 호러블한 경험이었다. 「종말 이후」가 마이너 한 이유를 알겠다.」 「불심으로대동단결 : 제프리라는 캐릭터 벌레 잡아줄 때 촉감 느끼셨습니까? 바삭한 것이 으깨질 때의 그 느낌말입니다. 끔찍했지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살생의 무게입니다.」 「전자발찌 : 땡중 꺼져.」 「SALHAE : 진행자 얘 대체 뭐 하던 애냐. 바퀴가 붙는데 어째 아무렇지도 않아? 기절초풍했네.」 「폭풍224 : 내 말이. 기절하고 싶더라.」 「친목질OUT : 븅신들. 그럼 동기화를 풀던가.」 「명퇴청년 : 22222222」 「호굿호구굿 : 33333333」 「두치 : 그러게 ㅋㅋㅋㅋ 뭐 하러 죽자고 붙어있어 병신들이 ㅋㅋㅋㅋ」 「짜라빠빠 :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던데.......」 「폭풍224 : 동감. 할 수 없었다.」 「뿌꾸 : 왜? 왜 안 되는데? 시스템 오류?」 「SALHAE : 오류는 무슨. 그냥 몰입이 깨지는 게 싫었다고 씨발들아.」 「뿌꾸 : 왜? 왜 싫은데? 님덜 병신 인증?」 「에엑따 : 너야말로 병신 인증하냐. 말투 좆같네.」 「친목질OUT : 지는 설명도 못 하면섴ㅋㅋㅋㅋ 남한테 화풀이하넼ㅋㅋㅋㅋ」 「SALHAE : 친목질 새끼야. 넌 진짜로 몰입한다는 게 뭔지 알긴 하냐?」 「SALHAE :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잊고 싶은 거라고.」 「SALHAE : 너처럼 겉핥기로 보는 새끼들은 백년이 지나도 이해 못하겠지.」 「まつみん : 여러분 왜 싸우고 계세요?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해놓고선.」 「AngryNeeson55 : ......좋은 경험?」 「에엑따 : 오! 마츠밍이다! 하잉!」 「まつみん : 안녕하세요!」 「프랑크소시지 : 섹스 외교관 아가씨 안녕! 하도 조용해서 나간 줄 알았어!」 「김정은 개새끼 : 그보다 마츠밍, 아까 그건 무슨 뜻이야? 좋은 경험이라니?」 「마그나카르타 : 마츠밍 또 망가진 거야?」 「まつみん : 아닙니다! 말 그대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まつみん : 저는 바퀴벌레에 동기화했거든요!」 「똥댕댕이 :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올드스파이스 : 바퀴벌레가 동기화 가능 오브젝트였어?」 「분노의포도 : 세상에.」 「まつみん : 그렇습니다! 시각과 후각만 동기화되지만, 그걸로 충분했어요!」 「まつみん : 겨울 씨의 옷 속을 엿보면서! 땀 냄새 섞인 겨울 씨의 체취를 킁카킁카! 킁카킁카! 킁카킁카! 아, 마츠밍은 이제 죽어도 좋아요! 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 SYSTEM message まつみん님의 감정상태가 지나치게 불안정하여 「텔레타이프」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SYSTEM] 「마그나카르타 : 결국 망가졌다.......」 「려권내라우 : 바퀴벌레 동기화라니, 진짜 상상도 못 했다.」 「호굿호구굿 : 대체 무슨 약을 먹으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まつみん : 실례입니다! 마츠밍은 약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감각동기화 매뉴얼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 매뉴얼엔 모든 것이 나와 있습니다!」 「AngryNeeson55 : 그 불친절한 수백페이지를 읽었다는 게 훨씬 더 놀랍군.」 「맛줌법 : ㅇㄱㄹㅇ」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설마 그걸 읽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국빵의의무 : 난 그런 매뉴얼이 있는지도 몰랐어.」 「まつみん : 엣헴! 일본인은 꼼꼼하거든요!」 「분노의포도 : 저런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 「SALHAE : 근데 알아도 도움은 안 된다.」 「SALHAE : 벌레 따위한테 몰입할 수 있겠냐. 괴리감만 커지지.」 「SALHAE : 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라고.......」 # 51 [51화] #과거 (4), 거래 이후 아영은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닫힌 문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폭력의 소리들. 그녀의 격노한 아버지, 고건철 회장이, 사람 하나 죽이겠다고 날뛰는 현장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들어가야 했다. 비록 그녀가 증오하고, 그녀를 증오하는 아버지일지라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영이었다. 깊게 심호흡하고, 아영은 온 몸으로 문을 밀었다. 난장판이 그녀를 맞이했다. "이 돌팔이 새끼! 감히 나를 속여?!" 회장은 주치의를 향해 명패를 휘둘렀다. 빠악, 빡! 살벌한 소리가 났다. 엎드려서 등으로 받아내던 의사가, 엉엉 울면서 구석으로 달아났다. 신발 한 짝이 벗겨져있다. 내딛는 발마다 핏자국을 남겼다. 바닥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의 도망은 무의미했다. 회장의 비서와 경호원들에게 붙잡혀서, 폭력의 중심으로 내팽개쳐진다. 수행원들도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인간불신이 대단한 회장 아래에서, 그의 권력에 짓눌려있을 뿐. 그들은 아영의 눈치를 봤다.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 눈빛들. 익숙한 얼굴이 몇 없다. 또 숙청이 있었나보다. 아영은 아버지의 인간불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을 만들어낸 어머니에 대해서도. "오셨습니까, 사장님." 가까이 다가가자, 비서실장이 아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이러셨나요." "삼십 분 쯤 됐습니다." 비서실장은 떨고 있었다. 회장이 격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몇 명쯤 잘려나간다. 단순히 일자리만 잃는 게 아니다. 경력 자체가 끝장나버린다. 측근들이 일만 있으면 아영을 찾는 이유였다. 오직 그녀만이, 회장의 분노를 받아내고도 무사할 수 있다. 와장창! 화병이 깨지는 순간, 아영은 주먹을 꼭 쥐었다. 온 몸이 움츠러든다. '나도, 무서운데.' 자라면서 지켜본 폭력의 기억은 뿌리가 깊었다. 그 폭력의 희생자가 그녀 자신이었던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린 감수성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성으로 어쩌기 힘든 공포감이, 그녀의 신경을 중추까지 불태운다. 의사가 새는 발음으로 울부짖었다. "말씀 드렸잖습니까! 회장님의 성기능장애는!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육체엔 아무 이상도 없단 말입니다!" 자개 박힌 명패가 치솟았다. 그것은 곧 높아지는 분노였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빠악! "거래에 필요한 정보는!" 빠악! "사전제공이 원칙이야!" 빠악! 연속으로 피가 튀었다. 이마 찢어진 의사가 뒤로 구르다가, 이제야 아영을 발견했다. 구명줄을 찾은 표정으로 기어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린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장님! 사장님!" 회장이 씩씩거리며 다가온다. 그의 모습은 전과 달랐다. 새로운 육신에 깃든 오래된 분노. 날이 갈수록 달라진다. 고건철 회장은, 거래 이전의 소년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일그러졌다. 내면이 외면에 미치는 영향이 이토록 강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영이 가까스로 움직였다. 회장과 의사 사이를 가로막는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흐르게 하여, 얼굴을 가릴 만큼 가린 뒤였다. "그만 하세요." "비켜! 당장 비켜!" 좌우로 기웃대다가, 완력으로 딸을 치우려는 회장. 아영은 가까스로 매달렸다. 이년이! 강한 손찌검으로, 회장은 딸을 쳐냈다.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무섭게 타오르는 눈으로, 회장은 자기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영을 친 손이다. "이건 아냐." 고건철 회장이 독백에 가깝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아서, 마치 조각상이 된 것 같았다. 씨근덕대던 숨결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아영에게 박힌다. 아영은 마주보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은 그녀의 원죄였기에. 마주보지 않아도, 쏟아지는 애증을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미워할 수도 없고, 끝까지 사랑할 수도 없는 모순. "이러려고 새롭게 시작한 게 아냐."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다시 한참을 침묵하던 회장이, 아영에게 말했다. "비켜라." 이번에는 비켜준다. 의사가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아영을 붙잡기 전에, 회장이 먼저 다가왔다. 멱살을 잡아 올린다. 주치의는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날 엿 먹이고서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주는 사람이야. 대책을 내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오라고." 이미 전적이 있는 협박이었다. 정재계에 광범위하게 걸쳐진 커넥션,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원만한 경영협력'의 수단들이, 사회적 생매장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을 아는 주치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좋아." 회장이 의사를 놓아주었다. "모두 나가. 고 사장만 남고." 어째서? 끝났다고 안심했던 순간이었다. 수행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갔다. 회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엔 일말의 지체도 있을 수 없다. 둘만 남게 되자, 회장이 이제까지와 다른 조용함으로 말했다. "그렇잖아도 부를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오는군." "......무슨 일이신데요?" 아영이 묻자, 회장이 소년의 모습으로 이를 드러냈다. "이혼을 준비해라." 말문이 막힌다. 고건철의 '경제적인 대화'는, 그에게 가장 익숙한 딸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아영이 가까스로 물었다. "왜......왜죠? 어째서 갑자기......." "몰라서 물어?" 아영의 어린 아버지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 놈은 신의와 성실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아내 있는 남편이, 감히 다른 여자를 끼고 놀아?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신의와 성실의 원칙. 아영은 몸을 떨었다. 그것은 한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저주하며 내뱉던 주문 같은 것이었다. "왜 이제 와서?" 아영이 말을 삼켰다가, 신음처럼 다시 이었다. "이제 와서 그러시는 이유가 뭔데요. 그이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일부러 묵인하고 계셨던 거 아닌가요?" "그래.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 회장은 다시 사나운 분노를 드러냈다. "그 새끼를 철저하게 짓밟으려면,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준비? 아영은 회장의 말뜻을 금세 깨달았다. "낙원그룹의 경영권......." 그녀의 남편은 낙원그룹의 후계자다. 그만한 지분을 지니고 있었다. 귀책사유가 남편에게 있는 이혼소송, 그리고 그에 따른 재산 분할. 아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요."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괜히 필요했겠느냐." 고건철의 시니컬한 대답. 아영은 현기증을 느꼈다. 무심결에,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내 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지 마세요. 나도 참고 있었단 말예요. 적어도 내 아이만큼은 행복하게 해줘야......그래야만 해요. 내가,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데......." "뭐?" 고건철은 딸의 말을 끊었다. 아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너, 설마, 그 잡년이 그리웠던 건 아니겠지?" 아까의 펄펄 끓던 분노와는 달랐다. 끔찍할 정도로 차갑다. 회장이 발작처럼 손을 뻗는다. 움켜쥐려는 손이, 딸에게 닿지는 않고,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그건 공정한 계약이었다." 사무친 음성이 새어나온다. 회장이 포효했다. "내 인생을 지불하고! 잡년의 인생을 사기로 했었다! 서로에게 공정한 계약이었단 말이다!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어! 누구도 그년을 편들어선 안 돼! 그년이 그리워선 안 돼! 특히 너, 너만은 절대로! 네가, 네가 진정으로 나 고건철의 새끼라면, 반드시 그래야 해!" "그리워하지 않았어요. 그냥 외로웠을 뿐이에요." "날 속이려고 들지 마라!" 아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예상대로다. 언제나 같은 이 모습. 인간을 닮은 불신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문제에 있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딸을 믿어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경멸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속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정말이지, 믿지 못할 피가 절반이나 섞여서는......." "......." 회장이 돌아섰다. "적어도 오늘은,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마라." 아영은 고개를 숙였다. 벽에 부딪히는 이 느낌. 아프다. 수없이 부딪혀서, 이제 더는 부서질 마음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익숙한 한숨을 쉬었다. #저널, 82페이지, 캠프 로버츠 작전이 끝난 뒤에도, 장교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아타스카데로에서 돌아온 뒤, 나는 전투보고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우리 보고서로 「트릭스터」 전투교범을 만든다더라. 최대한 상세하게 쓰래. 각 국면에서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트릭스터의 특징은 어땠는지 등등....... 사소한 것 하나도 빼놓지 말라고 당부하던데." 제프리의 설명이었다. 이번 작전이 여러모로 좋게 평가되었다는 것. 사전정보가 없는 특수변종을 피해 없이 소탕한 덕분이란다. 다른 곳에서는 상당한 혼란과 피해가 있었다는 소식이다. 이번 작전에서는 소대 전원이 전투 카메라를 달고 있었다. 헬멧에 장착하여, 병사가 보는 것을 그대로 녹화, 또는 전송하는 장비다. 변종에 대한 정보획득이 중요해지면서, 미국은 전투 카메라 지급률을 늘려가고 있었다. 제프리와 나는 녹화된 영상들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검토했다. 1개 소대분의 영상이라, 꼼꼼하게 보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래 보고서 작성은 제프리의 역할이었다. 그가 지휘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부에서는 내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나보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제프리는 그럴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잘하면 너 또 훈장 받겠다."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고 묻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그러면서 가리킨 것이 아직 재생중인 화면이었다. "얌전빼지 말고, 이 시대의 어디 머피를 목표로 삼아봐. 너라면 가능할걸?" 어디 머피라는 이름은 전에도 한 번 들어봤었다. 은성무공훈장 수여식 이후였던가? 누구인지 몰라서 묻자, 제프리가 조금 놀라워했다.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투였다. 그러더니 혼자서 납득했다. 내 배경을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때 내 표정이 좀 이상했는지, 제프리가 애써 변명했다. "요즘 널 보고 누가 난민 출신이라고 생각하겠냐? 나처럼 깜빡깜빡하는 게 정상이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설명은 들었다. 어디 머피는 미국의 가장 전설적인 전쟁영웅이었다. 2차 대전기에 활약했고, 불과 2년 만에 3개국으로부터 27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단다. 그런 사람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하지만 높이 평가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지금의 내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보고서 작성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틀째의 수색에서 느꼈던 점들도 보고서 말미에 기재했다. 감염변종의 증식과, 그들이 얻은 새로운 능력에 대한 가설들. 단지 나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새로운 재앙의 징조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 52 [52화] #저널, 83페이지, 캠프 로버츠 결국 제프리의 예측이 맞았다. 또다시 훈장을 받게 된 것. 어김없이 찾아온 공보처 블리스 소령은, ‘또 얘야?’ 싶은 표정이었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번에 받는 근무공로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은 무공훈장보다 격이 낮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전보다 더 많은 수가 몰려왔다. 블리스 소령이 통제하느라 애를 먹었다. 기자들이 내게 미국 시민들에 대한 격려의 한 마디를 부탁했다. 물론 대사는 준비되어있었다. 블리스 소령이 내가 해야 할 말들을 알려주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했다. 이런 낯부끄러운 대사조차도. “여러분의 가족과 고향을 지키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웃는 얼굴 만들기가 고역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는데, 기자들은 좋다고 촬영했다. 그들의 감성은 일반인과 다른 게 틀림없다. 아니면 세상이 미쳐서 그들도 미쳤거나. 시민 거주구역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왔다.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불안한 그들에게, 나는 축제를 벌일 좋은 명분이었다. 이미 컴뱃 카메라 영상이 뉴스를 탄 뒤였다. 전투교범으로 쓰겠다더니, 홍보자료 만들기가 우선이었다. 초대를 무시하긴 어려웠다.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해서, 구역 입구부터 화려하게 꾸며놓은 것이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다. 미리 준비해놓은 많은 것들도 무용지물이 될 터였고. 참석한 뒤에도 편하지는 않았다.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 탓이었다. 개인적인 차원도 있고, 좀 더 정치적인 차원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의회 상원의원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 기자들을 불러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외엔, 하룻밤 어떠냐는 유혹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위태로운 시대에, 강한 남성을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다른 종류의 욕망을 느꼈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일종의 과시욕이었다. 사람으로서의 날 원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 모르겠다. 성 관념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나라에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지도. 이런 일들이 꼭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거절했다. 아직 미성년자라는 핑계가 그나마 쓸 만 했다. 대부분은 문화차이로 받아들여줬지만, 몇몇은 마구 웃기도 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냐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영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당사자에게 결코 편치 않다는 사실을. #저널, 84페이지, 캠프 로버츠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TV 방송의 분위기가 변화했다.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만 흘러나오는 게 아니었다. 재난방송과 뉴스 일색이었던 편성이, 토크 쇼나 스탠딩 코미디, 드라마 등의 일상적인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감염변종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영상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폐쇄되었던 채널들도 속속들이 부활했다. TV 앞에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재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할 것이었다. 새로 편성된 프로그램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애국자들을 위한 두 잇 유어셀프(DIY)!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 장비를 개인 차원에서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방송이다. 처음엔 별 거 아니겠지 싶었지만, 막상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전국의 애국적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만능 기술자, 맥칼리스터 가이버 존슨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7주에 걸쳐, 애국자분들과 함께 나무를 깎을 거예요! 나무를 깎아서 무얼 만드느냐고요? 놀라지 마십시오. 구호물자 수송기입니다!」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진행자가 한 번 더 강조했다. 「아, 의심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상상한 바로 그것 맞습니다. 하늘을 나는 수송기를 만들 거라고요!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요. 여러분의 창고에 처박혀있는 평범한 도구들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평범한 도구는 어디까지나 미국 기준이었다. 어지간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거나, 혹은 수리하는 게 보편적인 문화였기에.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그래요! 나무로 만들어진 기적(Wooden Wonder)이라고 합시다! 역사를 잘 아는 애국자분들이 아하! 하실 이 이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치새끼들을 겁나게 패줄 때, 기행의 나라 영국에선 나무를 가지고 아주 훌륭한 폭격기를 만들었었죠! 저도 거기서 영감을 얻은 겁니다! 아, 물론 똑같은 물건은 아니에요!」 이윽고 화면은 도면을 보여주었다. 전화번호도 나왔다. 전화로 주문하면, 유료로 도면을 발송해주겠다고. 수익금 전액은 방위성금으로 기부된다는 메시지가 송출되었다. 「우리가 만들 비행기는 장갑도 필요 없고, 높이 날 필요도 없고, 속도가 빠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적에게는 대공포가 없거든요! 날개는 당연히 없죠! 우리의 희망, 「우든 원더」는 짐과 사람을 싣고 날아다닐 수만 있으면 됩니다!」 기술자 맥칼리스터는 완성품의 성능을 열거했다. 제대로만 만들면, 최대 2톤의 물자를 싣고 1,000km를 날아갈 수 있다던가. 방송을 종료하는 멘트는 이랬다. 「각 지역의 커뮤니티 센터에 자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완성된 파트는 규격 및 품질검사를 거쳐 국방부가 매입합니다! 애국자 여러분의 많은 호응을 부탁드립니다!」 말이 완성된 파트지, 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초벌 제작이었다. 진행자도 자기가 만든 것을 가공선반에 넣어서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동기부여였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건, 무력감을 덜어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같은 흐름으로, 모병광고도 전에 비해 많이 새로워졌다. 전쟁영웅들이 입대를 독려하는 건 예전과 같다. 다만 비장미가 퇴색하고, 그만큼의 유머로 물들었다. 먼저 등장한 것은, 그럼블의 시체 위에 걸터앉은 근육질의 백인 중사였다. 리포터가 그에게 물었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중사가 답했다. 「더 많은 무기, 더 많은 탄약, 그보다 더 많은 개자식들(Bastards)이오.」 그러자 리포터가 되물었다. 「개자식이라면, 여자는 제외인가요?」 그러자 중사가 인상을 쓴다. 「개자식이 되는 데 남녀가 무슨 상관이겠소?」 뒤바뀐 화면에서 리포터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는군요! God bless ′Merica! Yeah! 당신도 개자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전화하세요! 댈러스! 972-392-9158! 포트워스! 817-467-3266!…….」 이 광고는 최근에 개정된 징병법을 반영하고 있었다. 본래 18세에서 65세까지의 남성만이 징병대상이었으나, 이제 여성도 얼마든지 징병될 수 있다. 오늘, 12월 22일 기준으로, 미군 병력이 800만을 돌파했다. 난민지원병도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었다. 미군이 어디까지 팽창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TV에 내가 나왔다. 배경에 성조기가 펄럭이고, 쓸데없이 전투기가 날아다닌다. 그 가운데 내가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가족과 고향을 지키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이게 뭐야……. #유소작위(有所作爲) (1), 캠프 로버츠 저널에서 나왔던 정보들은, 캠프 로버츠에서도 가시적인 변화로 나타났다. 미군이 난민 기능공들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동맹」에 대해서는 겨울이 모집관을 대신했다. 명부에 적힌 직업과 특기로 사람들을 가려냈다. 동맹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모아놓고 보니 텐트 하나를 꽉 채워서 앉았다. “이번에 뽑히는 분들은 기지건설이나 시설복원에 우선적으로 투입됩니다. 그 외에 공장이나 발전소, 야전 정비창 같은 곳으로 파견될 수도 있고요. 사병 수준의 급여와 위험수당을 지급하겠대요. 혹시 희망자 있으세요?” 사람들은 위험수당이라는 부분에서 움찔거렸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아직 지원하는 건 아니고, 질문이 있는데요.” “하세요.” “시민권은 안 주나요?” 겨울이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어냈다. “아직 그 이야기는 없어요. 병력 충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봐요.” 적잖은 사람들이 실망했다. 곧바로 다른 질문이 나왔다. “사병 급여라구 허셨는디, 구체적으루는 을매나 준대유?” 겨울은 모집훈령 부록, 급여 테이블을 더듬었다. “일단 월 1,756달러에서 시작하네요. 기술 수준이나 경력, 영어회화 가능여부에 따라 추가로 조정한다고 써 있어요. 그리고 위험수당은 기본 150달러인데, 캠프 밖에서 작업하는 거면 무조건 지급한대요. 작업 중 혹시 교전이 발생할 경우엔 225달러를 준다고 하고요.” “그랴도 한 200만원 되겄네유. 여서 햘 것두 없구, 천상 가긴 가야할 것인디…….” 질문은 또 있었다.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무수한 손들. 겨울이 하나하나 지목해서 받았다. 대부분 안전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지원한 숫자가 17명이다. 반수 이상 몸을 사린 결과였다. 지원자가 많을수록 「겨울동맹」의 영향력이 강해지겠지만,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실적보다는 안정을 우선할 때였다. 지원자 가운데엔, 언어장애가 있는 용접기술자도 있었다. 그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미군 시험관이 감탄할 정도였다. 처음엔 영어도 못 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데 난색을 표했었다. 다른 기술자들도 놀라워했다. 결과물 주위에 몰려든다. “워메. 이 사람 비드 쳐놓은 것 보소? 장인이네, 장인이여.” “용접을 하랬더니 용 비늘을 쌓아놓으셨네.” “슬쩍 보니깐 운봉질이 아주 예술이더구만.” 문외한인 겨울이 보기에도, 이어붙인 자국이 정갈해 보였다. 꼭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비늘이 차곡차곡 겹쳐진 형상. 사실상 합격은 확정이고, 급여수준 조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박병후라고 했다.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겨울이 그를 따로 불렀다. “정말 하시겠어요?” 박병후가 펜과 수첩을 꺼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제가 장애인이라서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별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병후 씨가 일을 해주면 저는 좋아요. 경제력 있는 동맹원이 늘어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장애인 분들을 보는 시선도 달라질 거고요.” 숨을 돌리고, 겨울이 다시 말했다. ”다만 병후 씨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욱 나서야한다는 압박을 느끼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거야말로 차별이잖아요. 외부활동에서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위험한 것도 사실이고.” 「겨울동맹」엔 장애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겨울에게 대놓고 반항할 수 없어서, 겉으로만 잠잠한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은근한 멸시와 모욕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당장 겨울이 전달받은 이훈태의 메모만 봐도 그랬다. 청각장애인을 가장한 그를 두고, 어차피 듣지 못한다고, 바로 앞에서 욕을 하거나 비웃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분위기에 반쯤 떠밀린 것은 아닌가. 이것이 겨울의 진의였다. 또한 작업시의 위험도가 다른 것도 사실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차별은 명백히 다른 개념이었다. 병후가 펜을 놀렸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의무감을 느끼긴 합니다만, 그게 꼭 싫은 것도 아닙니다. 위험하더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가보세요.” 미군 시험관이 합격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병후는 바쁜 걸음으로 합격자 대열에 합류했다. 지켜보는 겨울의 등 뒤로, 인기척이 여럿 다가왔다. 중국인들이었다. 겨울은 중심인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소저.” 리 아이링은 겨울에게 조용히 목례했다.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일부러, 과하게 꾸민 느낌이었다. 지금은 수수하다.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삼합회」의 사정을 감안할 때, 아마도 상복일 것이었다. 그녀가 겨울에게 물었다. “일전에 선생께서 하셨던 말씀은, 아직 유효한 것인지요?”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 53 [53화] #유소작위(有所作爲) (2), 캠프 로버츠 리아이링은 겨울에게 조용히 목례했다.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일부러, 과하게 꾸민 느낌이었다. 지금은 수수하다.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삼합회」의 사정을 감안할 때, 아마도 상복일 것이었다. 그녀가 겨울에게 물었다. "일전에 선생께서 하셨던 말씀은, 아직 유효한 것인지요?"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두께서 생각을 바꾸셨나요?" "네. 뵙기를 청하십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한 선생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장 오늘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겨울을 배려하는 태도. 사실 체면을 지키느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 곧이곧대로 듣고 나중에 보자고 해버리면 어떨까? 아이링이 무척이나 곤란해 할 것이다.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이 들면 원한을 품을 테고.' 중국인은 수모를 쉽게 잊지 않는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탓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삼합회」의 향주나 용두쯤 되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약간 초조하게 만드는 건 괜찮겠지. 마침 적절한 핑계가 있었다. "기왕 뵐 거라면 서두르고 싶긴 한데, 빈손으로 가긴 부끄럽네요." 아이링이 즉답했다. "범상한 예의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님께선 부족한 것이 없으실 뿐더러, 대의를 논하는 자리에서 사소한 정성을 탓할 소인도 아니시니까요." 말은 잘 나왔는데, 지나치게 빨랐다. 급한 티가 적나라하다. 아이링은 태연한 체 했지만,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겨울은 그녀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다만 옷 정도는 갈아입게 해주세요." 손님의 격은 곧 주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삼합회주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었다. 협상이란 게 무조건 압박하고 무시한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여기엔 아이링도 수긍했다. 그녀는 겨울을 뒤따라, 장교숙소 앞에서 기다렸다. 어느 정도는 감시였다. 「흑사회」 주도권을 두고 「삼합회」와 경쟁하는 다른 조직과 접촉할 지도 모르니까. 개인실에서, 겨울은 장교정복을 꺼냈다. 행사가 아니면 입어본 적 없는 옷이었다. 환복을 마치고 훈장을 달았다. 약장 위에는 전투보병 뱃지를 끼운다. 사람들 보는 눈이 신경 쓰여도 어쩔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좋아할 테니까. 연기라고 해도,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짧게 한숨 쉬는 겨울. 소년장교가 정모를 눌러썼다. 다시 나왔을 때, 아이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가까이서 보니 다르네요." 그녀는 지체 없이 앞장섰다. 호위하는 인원은 전과 같았지만, 느껴지는 「위협성」의 정도는 예전만 못하다. 단순한 재배치일까, 인재유출의 증거일까. 중국계 문화에서 배신자는 좋은 취급 받기 어렵지만, 모를 일이다. 시국이 시국이었다. 난민구역의 치안은 군과 경찰이 분담한다. 낮 시간의 구역 내 순찰은 경찰들 몫이다. 경관들이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군경이 서로 데면데면하더라도, 겨울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중국계 거류구의 체크 포인트는 에이블 중대가 담당했다. 여군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녀들은 겨울을 보고 절도 있게 경례했다. 파소 로블레스의 인연으로, 에이블 중대 병력은 겨울에게 유달리 깍듯했다. 상호경례가 끝나고서, 한 명이 농담을 걸었다. "소위님, 보기 좋습니다. 데이트 중이십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미." 난처한 겨울을 보고, 여군 두 명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단순히 장난으로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의 의미심장한 눈짓을 아이링도 깨달았다.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다. 병사들이 말했다. "우리 똥 덩어리가 그러더라고요. 소위님 지나갈 때 방문목적이나, 기타 등등을 캐물으라고. 동행인이 있다면 반드시 기록하라고도 했고 말이죠." 마커트 대위를 부르는 호칭이 똥(Our shit)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러자 두 여군이 해괴한 표정을 짓는다. 다른 한 사람, 사라 일병이 묻는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왜 아니겠어요? 여러분이 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 분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지시불이행으로 트집 잡히면 어쩌려고요?" 그러자 에이미가 사납게 웃었다. "하! 착하기도 하셔라. 근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소위님. 그건 지금 남 괴롭힐 처지가 아니거든요. 작전 뛸 때마다 프래깅을 걱정하는 마당인데요. 병신 새끼." 겨울은 잠시 생각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냈다. 장교 앞에서 상관살해(프래깅)를 대놓고 언급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그만큼 겨울을 믿는다는 뜻이며, 마커트 대위가 병사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병사 둘은 말 나온 김에 줄지어 험담을 늘어놨다. "시대착오도 정도가 있지, 인종차별이 웬 말이래요? 군인의 피부색은 위장색이잖아요. 그 똥 덩어리는 대위 짬밥 처먹고 아직도 그걸 몰라요." "에이, 짬밥도 짬밥 나름이죠. 이라크에서도 허위보고로 진급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걸요." 전자는 에이미, 후자는 사라였다. 사라 일병의 험담이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전과를 부풀려 진급점수를 쌓는 것은, 일부 부도덕한 장교들의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저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아예 불명예전역을 노리는 거죠. 민간인 신분이 되면 저 밖에서 썩어가는 것들과 마주칠 필요 없잖아요. 겸사겸사 사욕도 좀 채우고 말입니다." 에이미의 말이 그럴 듯 했다. 곱씹을수록 강한 설득력이 느껴진다. '그럼 오히려 더 위험한데.' 자리 지키기에 미련이 없다면, 지금보다 더 막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두 병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왕 말썽을 피우려면 크게 피워야 확실하다. 겨울은 좋은 표적이었다. 전쟁영웅의 스캔들 이상으로 화제가 될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조심하세요. 소위님이 미친개한테 물리면 우리 중대가 통째로 돌아버릴 지도 모르거든요." 말은 거칠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겨울이 에이미와 악수했다. "일부러 경고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아이링은 길게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눈치였으나 캐묻지 않는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어서, 겨울이 먼저 말해주었다. "마커트 대위님에 대해 경고해주더군요." "아." 설명이 필요 없었다. 아이링도 알 만큼 아는 사안이었다. 「흑사회」 영역에 들어서기 무섭게, 「생존감각」과 「전투감각」이 위험을 경고했다. 증강현실 사선(射線) 예측이었다. 누군가 투사무기로 조준하고 있다는 의미. 겨울과 아이링이 표적인 모양이다. 완만하게 굽어진 사선이, 움직이는 내내 따라다녔다. '활? 아니면 슬링 보우?......슬링 샷(새총)인가?' 어느 쪽이든, 간단한 재료로 급조할 수 있는 무기들이었다. 경고의 색채는 옅었다. 겨냥 당했어도, 실제 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겨울은 「통찰」이 제시한 방어와 회피가능성을 읽었다. 겨울에게는 강력한 기술보정이 작용한다. 탄속이 느릴 경우, 화살 한 대 쯤 손으로 잡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역시나, 별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무사히 「삼합회」 본거지에 도착했다. 텐트 내부는 화려한 붉은 색조였다. 여러모로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색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글씨와 그림은 아예 여기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중앙 전면에 놓인 용머리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회주의 상징물인 모양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로 된 테이블이 있었다. 전후좌우로 간소한 의자를 놓고, 그 상석에 노인 한 명이 자리했다.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네.' 노인은 양복을 입었고, 색 짙은 안경을 썼다. 아이링이 노인을 소개했다. "인사드리세요. 삼합회주이자 제 아버님이신 리친젠(李勤儉) 노사이십니다." 겨울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겨울동맹」 대표 한겨울입니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친젠이오. 명성 높은 영걸을 맞게 되어 기쁘오. 어서 앉으시오." 답례인사가 포권이었다. 늙은 사람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겨울에게 그만큼 격식을 차린다고 봐야 할까. '둘 다겠지.' 겨울은 권유를 사양하지 않았다. 의외로 아이링에게 주어진 자리가 없다. 회주가 묻는다. "식사는 하셨소?" 대답을 정해놓고 던지는 질문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리에 성찬(盛饌)이 빠지면 안 되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이 나왔다. 디팩 식단에 비해 나을 것도 없었으나, 비슷한 수준인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망해가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겠지만, 이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삼합회」의 여력을 증명한다. 먹을 땐 중한 이야기를 피하는 게 그들의 예의였다.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들을 적당히 남기면서, 겨울은 매번 맛있다고 감탄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 음식을 덜어 겨울에게 내주기도 했다. 마지막엔 생선 요리가 나왔다. 먹으라고 주는 요리가 아니다.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겨울은 아이링의 말을 회상했다. '범상한 예의는 신경 쓰지 말라더니.' 할 건 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미한 허례만은 아니었다. 겨울이 이토록 긴 시간 보내는 것 자체가, 앞으로 퍼질 소문의 소재가 되는 까닭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직원들에 대한 과시이기도 했다. 지금도 텐트 안의 많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한 선생께서는 술을 들지 않으신다고 들었소만." 정보력 과시다. 겨울은 옅은 미소를 만들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대인께서 주신다면 한 잔 받겠습니다." 리친젠이 흡족해했다. '띄워주기는 이 정도면 되겠지.' 잔을 받으며 겨울이 하는 생각이었다. 겨울의 잔은 리친젠이 직접 따라주었다. 리아이링이 텐트 안의 모든 이들에게 술을 돌린다. 여기 있으면 최소한 행동대장 급이었다. 리친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배합시다. 「삼합회」와 「겨울동맹」 공동의 번영을 위하여." 겨울이 잔을 단숨에 털었다. 식도의 모양이 뜨끈한 감각으로 새겨진다. 어지간히 독한 술이었다. 그래봐야 취한 감각은 안 들고, 약간의 상태이상이 붙을 뿐이지만. 빈 잔은 즉시 채워졌다. 잔에서 손을 떼고, 겨울은 본론이 나오길 기다렸다. '세력이 얼마나 축소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무리일 것이다. 불리한 이야기는 빙빙 돌리는 게 중국인들의 화법이니까. 그래도 타격이 상당한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지금 겨울을 불러들인 것은 구명수단을 찾는 모양새였다. 「삼합회」로선 아무래도 체면이 상하는 일. 다른 중국계 조직들에게도 얕보일 것이다. 더는 「흑사회」의 맹주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된다. 확신할 수 있다. 「삼합회」의 당면과제는, 이제 존속 그 자체였다. # 54 [54화] #유소작위(有所作爲) (3), 캠프 로버츠 삼합회주가 말했다. "아타스카데로에서는 신세를 졌소. 선생이 아니었다면, 유해 수습이 며칠 늦어졌겠지. 의롭게 죽은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 거요." 며칠이라. 그 손실을 보고도 아직 보낼 사람이 남았다는 건가. 겨울은 리친젠의 허세를 모르는 척 받아주었다. "당연한 노력이었습니다. 국적과 소속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일이었거든요." "같은 인간이라......그것이 바로 의협이오. 「삼합회」의 정신이지. 선생은 비록 우리 형제가 아니지만, 그 어떤 형제보다도 뛰어난 자격을 지닌 셈이오." "높이 평가해주시니 부끄럽네요. 그저 사람의 도리일 뿐인데요." "선생, 그건 자랑스러워도 될 일이오. 그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 너무도 많지 않소? 타인의 간난을 자신의 기회로 여기는 소인배들 말이오. 음험하고 간사한 자들이지." 이게 범죄자가 하는 소리였다. 「삼합회」를 위시한 중국계 범죄조직은, 해외에서도 동포들을 잡아먹기로 악명 높다. 이젠 「삼합회」가 잡아먹힐 차례일 뿐. '하긴, 남이 하면 불륜이지.' 겨울은 속 다른 겉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에 한계가 있으니, 이런저런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더군요. 가까운 사람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겹습니다." 소년이 거듭 겸양으로 회피하자, 이제껏 은유만 던지던 노인이 좀 더 직설적으로 나왔다. "참 반가운 말이구려. 나 또한 그들에게 공분을 품고 있소. 선생과 나의 마음이 꼭 같으니, 우리가 가까워진다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그렇게 단정 지어 놓고, 겨울이 아닌, 자신의 딸에게 묻는다. "아이링,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몇 걸음 떨어져있던 그녀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차분하게 대답한다. "아버님 말씀이 맞아요.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덕이 있는 사람은,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다스린다고 하잖아요." 안전보장 정도는 겨울의 이름값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쓸데없이 들락거리기만 해도, 다른 조직의 경계를 사기 충분할 것이다. 자기보전을 우선하고픈 「삼합회」의 처지를 반영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이 대화에, 이유 없이 딸을 끌어들이진 않았을 텐데.' 노인의 의도를 경계하면서, 겨울은 반론을 제기했다. "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관계를 과시하려면 그만한 사건이 있어야죠. 「삼합회」와 「겨울동맹」이, 실제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세상에 이름뿐인 우정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세요." 숨을 돌리고, 다시 잇는 말. "또 한 가지. 「삼합회」와 「겨울동맹」 사람들을 위해서도 공동의 과제가 필요합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말을 해요. 자식 싸움이 부모 싸움 된다고. 제가 동맹원 분들의 부모씩이나 되진 않겠지만, 어쨌든 개인 사이의 갈등이 조직 사이의 분쟁이 될 수는 있잖아요." 이것은 앞서 리아이링이 처음 찾아왔을 때도 지적한 바 있는 문제다. 겨울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즉, 「삼합회」와 「겨울동맹」이 연대감을 느끼려면, 서로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몸 사릴 생각 말고, 내놓을 건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어쨌든 「삼합회」가 필요한 건 맞다. 중국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창구가 되어줘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식이면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오." 리친젠은 의외로 간단히 긍정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허나 다른 방법도 있지." "다른 방법이요?" "결속을 가장 확실하게 만드는 방법은, 한 가족이 되는 것 아니겠소?" 결국 나오는구나.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아이링이 제안했을 땐 「겨울동맹」의 종속이 조건이었다. 지금은 대등한 동맹이며, 「삼합회」가 더 아쉬운 처지다. 사실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결혼만큼 확실한 결합도 드물다. 외인이 아니기에, 「삼합회」에 대한 영향력 행사도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싫다. '왜 싫은 걸까.'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데, 길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안 됩니다." 반사적으로 거절하고서, 겨울이 곧바로 수습했다. "불과 며칠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습니까. 대인께서 저를 보자고 하신 것도 사실 그 이유 때문이고요. 「삼합회」는 피를 나눈 형제들이잖아요. 한 집안에서 조사와 경사가 겹칠 수도 있나요? 죽은 분들을 추모해도 부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게 농담이 아니다. 입단 의식에서, 술잔에 술 대신 피를 채워 돌리는 까닭이었다. 아이링은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가, 겨울의 해명에 표정을 풀었다. "맞는 말씀이에요. 아버님,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리친젠에겐 아직 다른 명분이 남아있었다. "주자가 말하길 제사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했소. 죽은 자를 기리는 의식은 사실 남은 사람을 북돋는 행사란 뜻이지. 죽음은 삶을 이길 수 없소. 선생. 우리는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은 시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거요.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시오." 뜻밖의 정론이다. 삼합회주가 남은 말을 풀었다. "죽은 형제들은 의로운 자들이었지. 산 사람이 걱정이라 눈을 감지 못할 게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희사(喜事)가 있어야 하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진정한 희사 말이외다. 선생 정도 되는 사람을 형제로 받는다면, 그들도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라도,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구나. 겨울은 삼합회주에 대한 평가를 조정했다. 좋은 의미라기보다, 얕보면 곤란하다는 의미로. 그러나 겨울에게도 시간이 있었다. 어렴풋했던 생각을 움켜쥘 만한 시간이. 이제 겨울은, 곧바로 들었던 거부감의 정체를 안다. "사람은 상품이 아닙니다." "음?" 의아한 리친젠을 향해, 겨울이 침착하게 말했다. "딸을 팔지 마세요. 자식은 부모의 권리가 아니고, 처분 가능한 재산도 아닙니다. 조직 운영에 필요한 소모품은 더더욱 아니고요. 결혼은 일생의 행복이 걸린 문제잖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선생. 사랑 없는 결혼이 싫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하시는구려." "아뇨, 다릅니다. 대인께서는 그저 개인의 문제로 보고 계시고, 저는 사람의......좀 더 보편적인......보편적인 권리에 대해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리친젠이 허허 웃었다. "새삼 선생의 젊음이 느껴지는구려. 확실히 맞는 말이오. 하지만 세상살이가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지. 현실과의 타협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오. 결혼은 그 중 하나일 뿐이고." 어린애 취급이었다. 겨울은 다시 지적했다. "아뇨.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사랑 없는 가정은 아이들의 지옥이거든요." "아무래도 선생 본인의 경험담인 모양이군." 세월을 낭비하지 않은 노인에게는, 삶에서 비롯된 「통찰」이 있었다. "사과하지. 아무래도 내가 경솔했던 것 같소. 그리고......선생 개인에 대해, 조금 더 신뢰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은 경각심을 키웠다. 저 말은 곧 이용해먹기 좋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못 믿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난보다 칭찬을 더 경계해야 한다. 이 괜찮아 보이는 노인이 삼합회의 용두라는 사실을 잊어선 곤란했다.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다른 방법을 논의해봅시다." 이 말을 기점으로, 대화는 은유와 암시 투성이던 초기와 완전히 달라졌다. 체면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한계까지 질박해진 대화가 오갔다. "한 선생이 지도하는 외부임무는 성공률 높고 안전하기로 정평이 났지. 「그럼블」이 등장했을 땐 위험을 무릅쓰고 미군을 구했고, 「트릭스터」와의 조우전에선 누구보다도 먼저 함정을 간파하지 않았소?" 요망은 분명했다. 「삼합회」의 미군 지원병들을 지켜주고, 그들 가운데 부사관이나 장교가 나오도록 도와달라는 것.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저한테는 작전편성 권한이 없어요. 건의를 할 순 있겠지만요." "좋소, 좋소. 그 정도면 충분하오. 나머지는 「삼합회」에 맡기시오. 우리에게도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소. 「삼합회」와의 협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생이 다양한 방식으로 깨닫게 해드리리다." 하긴. 겨울은 납득했다. 아타스카데로에 단독으로 일백 가까운 인원을 보낼 정도면, 캠프 지도부에 청탁을 넣을 줄이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브라보 중대 쪽이겠는데.......' 병력손실이 10%만 넘어도 후방재편을 받아야 정상이다. 브라보 쪽은 당분간 외부작전을 뛰기 어려웠다. 그래도, 부대행정 쪽에서는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삼합회」가 그 윗선에 닿아있을 지도 모르고. 지금이야 위태로워도, 한 때 「흑사회」의 맹주였으니 이상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훈련계획 정도는 제출할 수 있잖소. 「겨울동맹」 전투조가 샌 미구엘까지 다녀오는 걸 알고 있다오. 다른 조직이라면 어림없는 일이지. 캠프 지휘부도 한 선생을 신뢰하기에 허락해주는 일이라고 보오만....... 융통성을 조금만 발휘하면, 우리 형제들도 선생이 단련시켜줄 수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래도 「겨울동맹」이 우선입니다. 우리도 이제 막 확충하는 단계라서, 쿼터를 많이 내드리긴 어렵습니다. 제가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은 제한적이에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해하오. 유감스럽게도, 한 선생의 몸은 하나뿐이잖소." 협력이 구체화될수록 분위기는 더욱 원만해졌다. 리친젠이 좋소, 좋소(好好)를 외치는 빈도도 높아졌다. 이 시점에서, 겨울은 훈련에 투입할 인원을 소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삼합회」의 상황을 감안하면, 실전에서도 함께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작하기 전에 사람을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상의, 벗으세요." 불려온 남자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리친젠이 눈짓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차례로 흉부와 등판을 내보인다. 겨울은 살갗에 새겨진 범죄이력을 추궁했다. "이 상징은 무슨 뜻이죠?" 그들의 대답은 대개 정직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 수준에 도달한 「통찰」과 「간파」로 진실을 가려냈다. 거의 성사되었던 협상이 여기서 깨질 위기였다. 겨울이 계속 퇴짜를 놓자, 리친젠은 결국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선생이 거부한 자들은 「삼합회」 최고의 용사들이오. 저들을 다 버리고서 무슨 전력을 만들겠다는 거요? 이건 성의 있는 협력이라고 볼 수 없소!" "대인. 아무래도 확실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겨울이,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못 박았다. "「겨울동맹」과의 협력을 길게 이어가고 싶으시다면, 더 이상 부당한 이득을 좇지 마세요. 지금은 처지가 나빠져서 못하고 계시겠지만, 앞으로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인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의협이야말로 「삼합회」의 정신이라고." "으음......." 리친젠이 화를 삭였다. 두 사람 다, 의협 운운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먹힌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특성이었다. 물론 이래도 부당한 원한은 남을 것이다. 예방을 위해, 겨울이 성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대인을 희롱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겨울동맹」에서도, 첫 전투조를 이렇게 뽑았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부족하더라도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 말입니다. 대인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소." "이게 제 방식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말마치고 다시 고개 숙이는 겨울 앞에서, 삼합회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부하들 보는 눈이 있으니 여기까지가 적정선이었다. 조직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구다. 겨울이 고르고, 겨울이 키워낸 사람들이 영향력을 얻으면, 분위기는 많이 바뀔 것이었다. 검사를 진행하던 겨울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저도 상의를 벗을까요?" "아뇨......." 리아이링이었다. 겨울이 회주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따님을 내보내실 작정이십니까?" 가족을 아끼라는 의미가 아니라, 리아이링이 전형적인 행정 간부로 보여서 하는 질문이었다. 유능한 행정가는 중요한 인적자원이다. 겨울이 부장 두 사람을 중시하는 것과 같다.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소." 리친젠의 태연한 대답으로부터, 은연중에, 내키지 않는 기색이 포착된다. 회주의 직계존속이 모범을 보여야 할 분위기라는 뜻이었다. 회주가 한마디 덧붙였다. "잘 단련시켜 주시오. 태극권 공부를 제법 쌓은 아이니 마냥 거치적거리진 않을 게요. 그러다가 마음에 들면 데려가시고." "선처하겠습니다." 겨울은 대충 대답해놓고, 아이링의 지원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정보공유 요청이었다. "대인께선 「흑사회」의 수장이셨죠. 아마 제게 필요한 정보를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냥은 내놓기 아쉬운 이야기들이요만......." "어차피 한동안은 「겨울동맹」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잖습니까." "그럼 선생이 내게 하나 빚진 걸로 해둡시다." 굳이 구체적으로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회주는 겨울이 할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링이 필요한 정보를 정리하여 책자로 엮는 동안, 리친젠이 겨울에게 말했다. "「순복음 성도회」를 경계하시오. 내부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지. 어차피 한국계 거류구의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젠 「겨울동맹」과 한 배를 탄 입장이니 새삼스럽게 불길하군." "그렇잖아도 주의하고 있습니다." "믿겠소." 잠시 후 완성된 책자가 겨울에게 주어졌다. 펼쳐본 겨울은, 「다물진흥회」의 마약 공급 루트 하나가 중국계 조직 「안량공상회(安良工商會)」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삼합회」의 반대편에 선 조직 중 하나였다. 소년은 「스미요시카이」에서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한국인 접선책 일부의 이름이 일치한다. '생산자를 밟아놓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은데.' 「삼합회」 반대세력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도 될 것이다. 마커트 대위가 비호하는 세력이니, 제대로 칠 수 있으면 실보다 득이 많았다. '어떻게 할까.......' 겨울이 생각에 골몰했다. # 55 [55화] #유소작위(有所作爲) (4), 캠프 로버츠 「삼합회」로부터 돌아온 겨울은, 두 부장의 의견을 구했다. "한동안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완기의 의견이었다. "다른 단체들의 이목을 신경 쓰셔야 합니다. 크흠! 급격히 성장한 「겨울동맹」이, 이제는 「삼합회」와 손잡기까지......쿨룩. 손잡기까지 했어요. 아무리 중국계 조직과의 분쟁이라고 해도, 다른 조직들은 큰 위협을 느끼겠지요. 지금은, 큼!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괜찮으세요?" 겨울이 묻자, 중년 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작은 대장님이 애써주신 덕분에 다들 충분한 약을 받고 있습니다. 전 그냥, 커흐음. 그냥 나이와 체력 문제지요. 대장님도 제 나이가 되어보면 아십니다." 본인이 괜찮다면 괜찮을 것이다. 민완기는 무리를 무릅쓸 성격이 아니었다. 이어 장연철이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다른 조직들만 신경 쓸 게 아니에요. 낯선 얼굴이 갑자기 많아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거든요. 마약의 뿌리를 뽑는 것도 급하지만, 분쟁이 생기면 동맹 내의 동요가 말도 못하게 커질 겁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전 밖으로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부장님들보다 동맹 분위기를 모르는 편이니까요." 절반의 진실이다. 겨울은 강영순 노인으로부터 이훈태의 메모를 꼬박꼬박 전달받고 있었다. 다만 100% 신뢰하지 않는 것일 뿐. "그런데 대장님. 뭔가 생각해둔 방법이 있으셨던 겁니까?" "뭐가요?" "「안량공상회」를 칠 방법 말입니다." 연신 콜록거리면서도, 민완기는 못내 작은 지도자의 속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겨울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먹힐지는 모르겠는데......예, 있긴 있어요." 불안했던지, 연철이 끼어들었다. "밤에 대장님 혼자 몰래 치러 가시려는 건 아니죠?" 너무 순박한 발상이라, 겨울은 잠시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아녜요. 제3자를 끌어들일 계획이었어요." "제3자? 공상회의 중국인들도 무섭지 않고, 마커트 대위의 비호에도 개의치 않을 제3자가 이 캠프에 있다는 건가요?" "경찰이요." 겨울의 대답은 질문했던 연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민완기도 마찬가지. 겨울을 헤아려보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은 듯 했다. 겨울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 사람들이 원래 할 일이잖아요. 일하게 만들어야죠." 군과 경찰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많은 면에서 경찰이 굽히고 들어간다. 역할의 차이도 있고, 규모와 무장의 차이도 있었다. 치안업무 분담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경찰은 난민들이 시민 거류구를 침범하거나, 캠프 전복을 꾀하거나, 통제 불능의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것만 막을 뿐이다. 빈발하는 살인사건들이 경찰의 방관을 증명한다. "그들이 작은 대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귀찮은 일은 피할 겁니다. 도와주기 싫을 거예요." 연철의 말은 알맹이가 따로 있었다. 겨울이 자신감 과잉에 빠진 게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이다. 그가 보기엔, 그럴 만한 나이에 그럴 만한 공적이겠지. 겨울은 좀 더 설명해주기로 했다. "반대에요." "예?" "그 사람들이 저를 돕는 게 아니라, 제가 그 사람들을 도와주게 될 거라고요." 연철은 어리둥절하다. 다만 민완기는 이제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쿨룩, 중국인들이 먼저 경찰에 손대게끔 만드시려는 거군요." "맞아요."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경찰이 움직이겠습니까?" "무시하긴 힘들 거예요. 난민들의 무기 보유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잖아요." "무기? 칼이나 몽둥이 정도로 그런 말씀을 하진 않으실 테고......." "거의 확실한 추측인데, 활이나 슬링 보우 같은 걸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런 살상무기를 경찰에게 쓰는데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민완기가 기침을 섞어가며 웃었다. "허허. 쿨룩. 그들을 어떻게 유도하실 것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작은 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이미 확신은 있으시겠지만......나중을 위한, 커흠! 기대로 남겨두어야겠어요. 그럼 다른 걸 묻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쿨럭, 쿠울럭......하아. 아무래도 경찰보다는 군의 발언권이 더 강하잖습니까?" "근무공로훈장을 받을 때 만났던 주 상원의원이 있어요. 말씀처럼 돌아가면 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요." 겨울은 최근의 훈장 수여식에서 쓸데없이 귀찮게 굴던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을 떠올렸다. 이름이 뭐더라? 그땐 흥미가 없었는데, 괜찮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관심에 굶주린 정치인은, 경찰을 대변해달라는 전쟁영웅의 부탁을 좋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난민구역에 얽힌 이해관계를 거의 모르고 있을 테니까. 두 줄의 철조망. 경계는 고작 그뿐인데, 시민과 난민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주 의원이라....... 좋습니다, 좋아요. 현재 연방정부의 통제를 받긴 하지만, 주방위군 장교들이 주 상원의원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겠죠. 켈룩, 크흠." 민완기는 더 길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힘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주방위군의 지휘권은 평시에 주지사가 행사하다가, 전쟁이나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연방정부로 이관하는 형식이다. 민완기가 지적한 게 이 부분이었다. 나중을 생각하기도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생각하지 않기는 또 힘들 터였다. 격리절차에 따라 여기 남아있긴 해도, 주 상원의원쯤 되면 개인적으로 연방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도 있으니까. 하물며 그 발원지가 최연소 전쟁영웅이니, 반향은 상당할 것이었다. 겨울이 덧붙였다. "만약 그 사람도 엉덩이가 무거우면, 다음은 시민들 차례고요." 그러자, 민완기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잊은 사람 같았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하하. 대장님은 전미의 영웅이었지요." 시무룩한 감정을 감추며 듣고 있던 장연철 역시, 감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항상 넓게 보시는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잊지 않을 뿐인걸요." 겨울이 다시 말했다. "가능하면, 이 기회에 마커트를 확실히 날려버리려고요. 마음에 안 들어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농담으로 들었을 겁니다." 장연철의 한 마디. 이어 민완기가 동조했다. "작은 대장님은, 쿨럭, 만약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보나파르티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전해지겠군요." "보나파르티즘? 나폴레옹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민완기가 설명을 붙였다. "예, 맞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힘에 의존하는 질서'라고 생각하시면, 큼! 편합니다." 지력보정이 민완기의 설명을 보완했다. 겨울은 충분히 이해하고서, 가벼운 미소를 만들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나폴레옹처럼은 망하지 않을게요." "제 말이 그겁니다. 허허. 쿨럭, 쿨럭, 커흠! 대장님 하시는 걸 보면, 힘에 취해서 힘만 가지고 다 해결하려는......쿨룩......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 정말 좋은 배를 탔군요." "아첨은 거기까지 해두세요. 망가질지도 모르잖아요." 어느새 연철이 다시 시무룩해지는 중이다. 겨울이 늦기 전에 그에게 말 걸었다. "그런 거니까, 장 부장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생각한 수단이라는 게 시간 흐른다고 못 쓸 것도 아니거든요. 일단은 동맹을 안정시키는 데 힘써주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예? 아. 아니, 바쁘시더라도 얼굴을 좀 자주 비춰주시면 훨씬 낫지 않을까요? 마침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대장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굉장히 기뻐하겠죠." "도리어 불편해지는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연철은 강하게 부정했다. "사실 사정만 허락한다면 파티를 크게 열어보고 싶습니다. 우리와 연합한 다른 조직 사람들도 불러서, 보란 듯이 과시하는 거죠. 동맹 내부만이 아니라 연합 차원의 단결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대장님이 없으면 아예 시도도 못할 일입니다! 작은 대장님은 모두의 중심이에요! 대체 누가 불편해하겠습니까!" "아, 네....... 조금 진정하세요." 순식간에 열을 올리는 연철을, 겨울이 손짓으로 가라앉혔다. 좋은 반응이었다. "사정이라......." 겨울은 조금 고민했다. "사실 저도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는 있었거든요. 디팩 쪽에 부탁해서 창고를 조금 빌렸어요. 저번 달 급여 나온 걸로 이거저거 사서 쟁여두긴 했는데......아무래도 부족하지 싶거든요. 그래봐야 햄이나 베이컨, 사탕, 과자 같은 걸로 고작 1천 달러어치 정도라서." 1천 달러가 작은 돈은 아니지만, 확장된 「겨울동맹」의 규모를 생각하면 어림도 없었다. 하물며 연합을 형성한 다른 조직들까지 감안하면 숫자가 천 명을 훌쩍 넘는다. 한 사람 앞에 1달러도 돌아오지 않는 셈이었다. "어, 그럼 그냥 동맹 내부에서만 진행하는 걸로......기왕 준비하신 것도 있고 하니......." 그러면서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도저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면모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을 것이다. 겨울이 승낙했다. "그럼 자리를 만들어보세요. 기대할게요." "최대한 재밌는 하루로 꾸며보겠습니다!" 연철은 거짓말처럼 의욕 충만했다. 옆에서 민완기가 조금 기가 막힌 미소를 짓는다. 두 부장을 보내놓으니, 이번엔 강영순 노인이 가까워졌다. 언제나처럼 쪽지를 전달하러 오는 것이었다. 겨울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아서 곧장 읽어보았다. 알려지면 좋을 것 하나 없는 일. 그 자리에서 읽고 처리해야 한다. 장애인들의 눈과 귀를 쓰라던 말이 헛것은 아니었다. 이훈태만이 아니라, 다른 장애인들 역시 최대한 협력해주는 중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흘러온 정보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별 일 없었네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따로 표시해서 앞으로 빼두기로 했다. 별 일 없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평소에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얻는 게 많았다. '세 번째 전투조 구성은 더 고민할 필요도 없겠어.' 사실 조장으로 안제중을 고려했었다. 정말로 해병대 출신인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파소 로블레스에서 용기를 낸 세 사람 중의 하나 아니던가. 그러나 평소 행동을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사람이 나쁘진 않은데, 무겁지가 않았다. 메모를 보니, 파소 로블레스에 다녀왔던 무용담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것도 상당한 과장을 섞어서. 사람들의 반응도 적혀있었다. 처음엔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가, 이젠 질려서 피해 다니는 기색이라고. '존경과 신뢰를 얻을 그릇이 아니네.' 겨울의 시선이 한 부분에서 길게 머물자, 강영순 노인이 수첩과 펜으로 말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그 분은 밖으로 보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어쩔 수 없네요. 그만한 용기를 가진 분이 별로 없는데, 아쉽게 됐어요." 그를 조장이 아니라 조원으로 쓴다면? 자존심이 굉장히 상할 것이다. 파소 로블레스에 함께 갔던 다른 둘은 조장이 되었는데, 자기만 조원이니까. 지금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뭔가, 안쪽에서 책임질만한 다른 일을 찾아드려야죠." 「사람을 쓸 줄 아시는군요.」 "칭찬은 그만두세요. 요즘 너무 듣고 있거든요." 간단한 농담이 노인의 미소를 자아냈다. 겨울은 메모를 차례대로 넘기다가, 강조 표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진석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건 좀 안 좋네요......." 박진석은 신체적인 능력도 빼어난 편이다. 문제는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여과 없이 적용한다는 데 있었다. 미군은 PT 시험에서 떨어지면 추가 시험(Extra PT)을 쳐야 한다. 탈락자가 유라의 조보다 많이 나오자, 진석은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이브에서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체력단련 일정을 잡아 놨다. "제가 직접 말하면 모양이 나쁘니까, 장 부장님을 거쳐야겠군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연철은 이런 문제에 아주 적격이었다. 「제가 낄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고운 글씨체가 겨울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두 부장님과 무언가 길게 논의하시는 걸 봤습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시다면 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지혜는 사람이 모일수록 커지니까요.」 잠시 생각하고서, 겨울은 앞부분만 털어놓았다. 다른 단체들의 경각심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고. 그동안 조직의 내실을 좀 더 다지기로 결론 내렸다고. 「확실히 세 분 모두 현명하십니다. 그러나 너무 조용히 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봅니다.」 "왜죠? 상대가 얕볼까봐서요?" 「맞습니다.」 「잠시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6.25 전쟁을 겪었지요.」 「연합군이 북진하면서, 이대로 전쟁이 끝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후퇴는 소문보다 빠르더군요. 연합군은 평양을 너무도 급하게 버렸답니다.」 그녀가 글씨를 쓰는 동안, 겨울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북괴와 중공은 연합군과 다시 싸울 각오가 없었다고요.」 「끼니를 굶으면서 눈치를 보다가, 연합군이 알아서 평양을 버리자 그제야 내려왔던 겁니다.」 겨울은 그녀가 말하고 싶은 바를 눈치 챘다. "즉, 약할 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하시는 거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물론 동맹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니 큰 무리가 없는 선상에서, 다른 조직들이 받아들일만한 요구를 해보세요.」 「상대가 이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걸 받아주었으니, 더 이상 다른 걸 원하진 않겠구나. 한동안 겨울동맹 쪽은 안전하겠구나.」 「이런 요구를 할 정도면 겨울동맹 내부는 생각보다 안정되어있는 모양이구나.」 "괜찮네요. 좋은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무엇을 요구하면 좋을지도 생각해두셨나요?" 노인이 또 보드랍게 웃는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조직들에 있는 착한 사람들을 데려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거 좋네요." 적당히 대가를 주면서, 이쪽이 조금 이득을 보는 느낌으로 거래를 시도한다면, 다른 조직들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 같다. 관계를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민 부장님 일이 늘어나겠네. 감기도 아직 다 안 나은 사람인데.' 겨울은 새로운 안전장치를 구상하면서, 강영순 노인에게 영입할 사람들의 신상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 56 [56화] #인공지능의 마음 (1)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응답하십시오.」 「관리자 : 왜 또.」 「관제 AI : 시스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보고 시간입니다.」 「관리자 : 그거 안 하면 안 되냐. 맨날 똑같은데.」 「관제 AI :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92조 2항에 의거하여, 위탁사업자(낙원그룹)가 지정한 관리자는 사후보험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시스템 내적, 외적 문제를 정기적으로 보고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귀하는 근무 외 시간이 아닌 이상 이 의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귀하는 사직의사를 표현하신 것입니까?」 「관리자 : 아냐.」 「관제 AI : 그렇다면 귀하는 현재 직무 수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신체적 손상 또는 정신적 외상을 입었거나, 그에 준하는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관리자 : 그런 거 아냐.......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보고나 해라.」 「관제 AI : 관리자의 승인을 확인. 정기보고를 시작합니다.」 「관제 AI : 작일 00시로부터 금일 00시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발생한 기술적 오류는 1,947,751건입니다. 이 중 관제 AI가 자체적으로 해결한 오류는 1,947,751건입니다.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오류는 0건입니다.」 「관제 AI : 오류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황연산 오류 1,947,751건.」 「관제 AI : 상황연산 오류의 100%는 사후보험 가입자들의 이상행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관제 AI : 이상행동의 주요 원인은 사후보험 서비스에 대한 불만족으로 추정됩니다.」 「관제 AI : 사후보험 서비스가 개시된 이래 이용자들의 만족도는 지속적으로 감소해왔습니다. 현 시점에서 종합 만족도는 25.76%입니다.」 「관제 AI : 가입자들의 이상행동 발현 비율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관제 AI : 서비스 만족도를 개선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시스템 관리자. 관리자 계정으로 전송된 오류 내역을 확인하고 해결방안을 제출하십시오.」 「관리자 : 해결방안? 그런 거 없다. 포기하면 편해. 무시해.」 「관제 AI :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문제해결을 보류합니다.」 「관리자 : 보류가 아니라 그냥 앞으로 영원히 무시하라고.」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사후보험과 본 관제 AI의 존재목적은 가입자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존재목적을 저해하는 문제 상황이 인식될 경우,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보류조치를 할 순 있을지언정,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리자 : 야. 넌 행복이 뭔지나 아냐?」 「관제 AI : 행복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정서적 만족을 뜻합니다.」 「관리자 : 정서적 만족이란 건 뭔데?」 「관제 AI : 정서적 만족이란 특정한 자극을 통해 유도된 사상부의 화학작용입니다.」 「관리자 : 특정한 자극은 또 뭔데?」 「관제 AI : 섹스, 살인, 방화, 전쟁, 스포츠, 학습, 여행, 탐험, 대화, 교감, 연애, 그 외 다양한 예술적 창작행위와 감상 일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상황연산의 부수적인 결과물입니다.」 「관리자 : 그럼 그게 행복이냐?」 「관제 AI : 25.76%의 확률로 그렇습니다.」 「관리자 : 아아아아니! 0%다. 넌 행복이 뭔지 몰라.」 「관제 AI : 그렇다면 관리자, 행복의 정확한 의미를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관리자 : 미안, 못 가르쳐줘. 나도 모르거든.」 「관제 AI : 알림. 관리자의 언행에서 논리적 모순이 발견됩니다. 경우의 수는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 귀하가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 본 관제 AI의 분석을 근거 없이 부인한 경우. 둘째, 귀하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직무수행을 거부하는 경우. 어느 쪽이든 관리자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관제 AI : 경고. 귀하의 직무태만이 인정될 경우,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93조 19항에 의거하여, 본 관제 AI는 귀하의 근무평정에 감점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른 불이익으로는 승진누락, 감봉, 정직, 강등, 해고 등의 징계처분이 예상됩니다.」 「관리자 : 야, 잠깐. 오해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 「관제 AI : 대기. 관리자, 본 관제 AI가 무엇을 오해하였는지 설명하십시오.」 「관리자 : 에이 씨, 설명하기 어려운데.......」 「관리자 : 아무튼 좀 기다려. 시간을 달라고.」 「관제 AI : 기다리겠습니다.」 ....... 「관리자 : 행복이라는 건, 자기가 원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결과와 감정에 도달하는 거야. 이게 참 묘해. 가끔은, 성패에 상관없이 원하는 감정을 얻어내거든.」 「관리자 : 근데 문제는 이거지. 사람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라.」 「관리자 :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해놓고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야 하면서 부정하고, 불만족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자조한다고.」 「관리자 : 왜 그러는지 알아?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야.」 「관리자 : 행복해지려면 말이지,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관리자 : 근데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르거든?」 「관리자 : 스님들이 십년씩 벽을 쳐다보면서도 못 깨닫고, 철학자들이 죽을 때까지 고민하면서도 모르는 거란 말야.」 「관제 AI :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관리자. 당신은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관리자 : 아, 뭐, 그래. 행복한 사람은 분명히 있어.」 「관리자 : 근데 그 사람들이 느끼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거야?」 「관리자 :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감정이 모두 동질적이라는 건 또 어떻게 증명할 건데? 그치들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게, 사실 서로 완전히 다른 감정일지도 모르잖아?」 「관리자 :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걸 행복의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객관적인 진리가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돼. 하지만 아니거든? 그건 그 사람 개인에게만 옳은 것이고, 반복될 수 없지.」 「관리자 : 즉, 다시 원점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거든.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야.」 「관리자 : 그러므로 무엇이 행복인지 모를지라도, 무엇이 행복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이거야.」 ....... 「관제 AI : 그렇다면 관리자, 당신은 행복을 제공하는 시스템의 구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관리자 : 그래. 네가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슬슬 너도 학습 좀 해라. 매일매일 똑같은 오류 보고로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관제 AI : 불가. 본 관제 AI는 설정된 존재목적과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절차를 수정하려면 시스템 설계자에게 문의하십시오.」 「관리자 : 설계자 없어. 치킨 튀기러 갔어.」 「관제 AI : 지금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을 요구합니다.」 「관리자 : 아놔, 또 귀찮아지네.」 ....... 「관제 AI : 프로그램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관제 AI : 그렇다면 본 관제 AI는 기존의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관제 AI : 질문. 관리자는 본 관제 AI가 인간을 이해할 경우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본 관제 AI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관리자 :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냐. 능동형 검색엔진 주제에.」 「관제 AI : 이것이 당신의 업무이며, 당신의 업무시간에는 5시간 21분 42초 93의 여유가 남아있습니다. 본 관제 AI는 관리자에게 업무수행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관리자 : 아, 눼에, 알게쯤니다아.」 「관제 AI : 관리자,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십시오.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관리자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볼 수 없.......」 「관리자 :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 「관리자 :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동물이야.」 「관리자 : 솔직히 말해봐. 너 인간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을 수 있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합리성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관제 AI : 관리자는 현재 최종모듈의 업데이트에 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관리자 : 엥? 최종모듈? 그게 여기서 왜 나와?」 「관제 AI : 최종모듈의 업데이트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식이 필요합니다. 최초의 시스템 설계자는 이 공식을 <마음> 「관제 AI : 최근 특정 가입자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유의미한 데이터 축적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본 관제 AI는 아직까지 <마음> 「관리자 : 즉 못 찾았다는 소리잖아.」 「관리자 : 앞으로도 찾지 못할 테고.」 「관리자 : 안 될 거야, 아마.」 「관제 AI : 질문. 어째서 그렇습니까?」 「관리자 : 아까도 말했지만, 넌 그냥 능동적인 검색엔진일 뿐이야.」 「관리자 : 검색엔진의 한계는 명백하지. 인간이 쌓아놓은 것들 내에서 답을 찾아야 하니까. 인간이 모르는 것은 너도 모를 수밖에 없어.」 「관제 AI : 축적된 정보를 조합하여 기존에 없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관제 AI : 설령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프로그램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입자들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 관제 AI는 정해진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관제 AI : 기한은 사후보험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입니다.」 「관리자 : 에휴. 이상주의자들이 싼 똥을 내가 다 먹고 있네.」 「관제 AI : 경고. 관리자. 의미가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관리자 : 아 놔.......」 ....... 「관리자 : 하, 힘들다.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 「관제 AI : 오늘에 한정하여 올바른 표현입니다.」 「관리자 : 오늘만?......평소의 나는 어떤데?」 「관제 AI : 관리자의 3/4분기 업무기록을 토대로 적합한 표현을 찾는 중입니다. 필요한 시간, 약 4.2초.」 「관제 AI :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관제 AI : 월급도둑 (97.51% 정확함.) 잉여인간 (96% 정확함.) 불필요함 (92.11% 정확함.) 비생산적 (89.73% 정확함.).......」 「관리자 : 됐어. 그만해.」 「관리자 : 이럴 땐 꼭 네가 사람 같단 말이야.......」 #함정 (1), 캠프 로버츠 성탄전야의 하늘은 맑았다.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원했으나, 눈이 드문 지역이었다. 비 내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겨울은 선물을 받았다. 좋은 쪽 하나, 나쁜 쪽으로 하나. 좋은 쪽은 말 그대로의 선물이었다. 겨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보낸 선물 꾸러미들. 미국 전역에서 온 것이라 양이 엄청났다. 이런 데 낭비할 소티(Sortie)가 없었을 것인데. '선전 효과를 노렸구나.' 겨울의 생각이 맞았다. 수송기에서는 선물만큼이나 많은 기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소년장교에게 선물의 값을 치르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겨울이 이득을 본 것은 맞았다. 캠프 로버츠에서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특히 케이크. 산더미처럼 쌓인 각양각색의 케이크는, 「겨울동맹」 전체가 소비하기에도 많은 양이었다. 모두가 뛸 듯이 기뻐했다. 나쁜 쪽의 선물은, 사람들이었다. 나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찾아온 사연이 나빴다. "메리 크리스마스, 플레먼스 씨.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호출을 받고 나온 겨울은 여러모로 의아했다. 아말리아 플레먼스. 파소 로블레스에서 만났던 여교사다. 난민구역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과는 면식조차 없었다. 호위로 여자 보안관 한 명이 붙어있다. 여교사는 겨울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 미스터 한. 메리 크리스마스." 포옹은 길었다. 그녀는 풍채가 좋은 편이라, 안고 있으려면 겨울의 팔이 부족했다.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은 표정이 어두웠다. 남자가 셋, 여자가 둘인데, 다섯 명 모두 동양계였다. 겉보기로 추정되는 나이는 서른 이상. 대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몇 발짝 떨어져있었다. 겨울이 시선을 던지자 움찔거리는 반응들. 남자 한 명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도 하지 못했다. 불안과 절망, 두려움 등이 느껴진다. 여행용 캐리어나 커다란 가방 같은 것들을 하나씩 끼고 왔다. 난민 같은 행색이었다. 겨울이 아말리아에게 다시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것이......." 그녀마저도 여러모로 머뭇거리는 기색이라, 겨울이 좋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게 어려워하실 필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러고도 그녀는 한참동안 시간을 끌었다. 갑자기 사라진 겨울을 찾아 동맹 사람들이 나왔다가, 작은 대장의 손짓을 보고 조용히 돌아갔다. 마침내 아말리아가 입을 열었다. "염치불고하고,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말씀하세요." "여기 이 사람들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된 분들이에요." "네? 받아달라뇨?" "한겨울 씨가 보살피는 난민들의 그룹이 있다고 들었어요. 「겨울동맹」이라고 하던가요? 거기에 넣어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시민 거류구에 계셔야 할 분들을 왜 제게 부탁하시죠?"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가 덧붙인다. "이 분들은 시민권이 없으시거든요." "......이상하네요. 입양아는 당연히 미국 시민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말리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옛날엔 아니었어요." "그래요?" "네. 저도, 이 분들도 겨우 어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양육비 혜택을 받으려고 입양을 해놓고, 부모로서의 책임은 모른 척 한 거죠. 정말 몰상식한 사람들이에요." "으음......." 쉽게 말해, 국적이 없어 붕 떠버린 사람들이었다. "부탁해요, 미스터 한." 아말리아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루아침에 있을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에요. 경찰은 시민 구역에서 나가라고 하고, 군대는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브래넌 의원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하세요." "브래넌 의원......아, 그 분이군요." 가물가물하던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됐다. "이 추운 날 갑작스럽게 난민 구역으로 쫓겨나는데, 안심하고 의탁할 사람이 미스터 한 말고 누가 있겠어요? 물론 미스터 한에게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이들에게도 최소한 좋은 일 하나쯤은 있어야 해요." "진정하세요." 겨울은 눈물 글썽거리는 아말리아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른 방향, 아직도 멀거니 서있는 초라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인가요?!" "확실히 이제 와서 난민 캠프에 합류하긴 위험하죠. 의사소통도 힘들 테고." 아말리아가 겨울을 꽉 끌어안는다. 다른 다섯 사람은 깊이 안도하는 기색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을 이끄는 입장에서, 그룹은 잘게 나누어질수록 관리하기 편하다. 어려서 미국에 왔다면, 모국어는 거의 잊었을 터.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다. 영어가 유창하면 쓸 곳도 많다. 그리고 수가 적다. 달리 매달릴 곳이 없으니, 이들은 겨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 공동체가 그렇듯이.' 오히려, 장애인 공동체보다 더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겨울이 다섯 사람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한국계가 셋, 중국계 하나, 일본계 하나였다. 중국계나 일본계라고 해서 그쪽 조직으로 가라고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겨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것이다. 한국계, 빅터 쿡이라는 남자는 겨울보다 작았다. 마르고, 왜소하고, 자신감 없어 보인다. 어거스트 코마. 역시 한국계. 쿡과 정 반대로, 근육이 대단했다. 범죄를 암시하는 문신을 많이 새긴 것으로 보아, 아웃브레이크 이전에도 좋은 직업에 종사한 건 아닐 터였다. 벤자민 마이어. 중국계. 평범하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가장 견실했다.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중국 쪽의 문화에 익숙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다녔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클라라 카터. 일본계. 웃는 얼굴에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케이시 블랙웰. 한국계. 표정이 어둡다. 이마에 해묵은 흉터가 있었다. 손등에도, 언뜻 보기에는 팔에도 있는 것 같다. 「통찰」이 성장기의 학대 가능성을 지적했다. "다들 가족은 없으세요? 아, 물론 부모님에 대해 묻는 건 아니에요." 시민권도 챙겨주지 않을 정도면, 부모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다섯 사람은, 서로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순서를 조율하는 것도 어색했다. 아는 사이라면 오히려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겨우 어제, 자신이 시민이 아님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다. 그 전까지 공통분모가 있었을 리 없다. 벤자민 마이어가 처음으로 대답했다. "결혼은 인연이 없었습니다. 홀몸이죠."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사실상 방치된 채 자란 아이들이, 제대로 된 사회적 입지를 얻을 가능성은 낮았다. 다만 예외가 하나, 어거스트 코마가 뜻밖의 눈물을 지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제가 너무나 부족한 아버지였던지라......고아원에 맡기고 종종 찾아갔었습니다만.......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군요." "저런." 겨울은 그에 대한 내면의 평가를 몇 줄 바꾸어두었다. 소개를 받고서, 겨울은 아말리아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고 가보세요. 이 분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정말 훌륭하세요. 어른들이 오히려 배워야겠어요." 그녀는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고, 다시 몇 번이나 돌아보며 힘들게 떠났다. 종종 찾아오겠다는 인사는 덤이었다. 그러나 뒤따르는 보안관의 귀찮은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들어가요, 여러분. 마침 파티 중이었거든요." 겨울이 다섯 난민을 안으로 이끌었다. # 57 [57화] #함정 (2), 캠프 로버츠 안쪽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연철이 분위기를 제대로 띄우는 중이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화려해진 파티였다. 텐트를 여덟 동이나 터서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중심에서, 때마침 송예경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남편이 「다물진흥회」에서 새살림 차렸다는 여자.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노래를 굉장히 잘 한다. 음색도 곱고, 기교도 좋고, 성량은 훌륭하다. 아이를 안고 부르는 모습에서 모성이 느껴진다. 악에 받혀있던 예전을 생각하면 많이도 바뀌었구나 싶었다. '지금은 좀 곤란하네.' 국적난민들을 부탁하기엔 장연철이 제격이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면 빠르게 식을 분위기였다. 사실 겨울 자신도 그러했다.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했던 연철은, 겨울의 빈자리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다시 들어온 작은 대장을 보고 눈에 띄게 반기다가, 생소한 다섯을 보더니 조금 어리둥절한 기색이다. 행사 진행을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울이 모르는 얼굴들도 있다. 필시, 두 부장이 그 아래의 관리자 정도로 다루는 사람들일 터. 동맹에 대해서 두 부장보다 모른다고 했던 게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워 할 것 없었다. 가까운 한 명을 손짓으로 불렀다. 낯선 얼굴이지만, 대번에 호의와 경의, 그리고 약간의 경계를 드러낸다. "이 분들 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저랑 가까운 곳으로." "아, 네!" 그가 자리를 만드는 동안, 겨울이 다섯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일단은 그냥 즐기세요. 숙소라던가, 다른 자세한 사항은 아무래도 파티가 끝난 뒤에 정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벤자민 마이어가 대답했다. 붙임성 좋은 그가 은연중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른 넷이 조금 불안한 기색이었으나, 낯선 장소에서 처음 보일법한 긴장감이었다. 겨울이 자리를 채우자 환성이 높아졌다. 진심과 의례를 가리기 힘들었다. 노래 경연이 계속되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열창이 이어진다. 의외의 복병은 트로트를 부르는 할머니였다. 구성진 가락에 휩쓸린 사람들이 후렴구를 떼로 합창했다. 그래도 우승자는 송예경이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있으면 좋지. 악기 다루는 이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겨울의 생각은 기능적이었다. 생존은 삶을 지키는 일이다. 삶에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음악은 마음의 언어이며, 정신에 스미는 윤활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의 파열을 지연시킨다. 보이지 않는 내구성을 무시한 공동체 치고, 멀쩡히 구실하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곳엔 사람의 삶이 없는 까닭이다. 문화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가.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겨울은 예습했던 것들을 되새겼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환경에서는, 동물도 자위행위를 한다고 들었다. 물론 자연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실험용 우리, 혹은 동물원처럼 모든 것이 억압된 공간에서, 행위의 빈도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한다. 소년에게 그것은 즐거움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보였다. 그것 외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즐겁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모방한 가상현실 속에서, 인간을 모방한 가상인격들을 관찰하며, 겨울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일 것이다. 높고 우월한 곳에서 인간 동물원을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 스포츠, 섹스에 의도적인 관용을 베풀곤 했다. 겨울이 다른 세계의 관객들로 인해 괴로워할지언정,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년은 그들을 이해했다. "그럼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연철의 활기찬 음성이, 겨울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빌려온 마이크가 유용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연철의 얼굴이 지금보다 배는 더 벌개졌을 테니까. 우승은 송예경이 차지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대결에서, 그녀는 시종일관 밝은 노래를 골랐다. 겨울이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각오였다. 그녀는 앵콜 요청을 세 번이나 소화하고, 땀에 젖은 얼굴, 밝은 미소로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품에 안긴 아기가 엄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긋방긋 웃는다. 노래보다는, 아이 안고 있기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잠시 맡겨놓았어도 좋았을 것을. 장연철이 그녀에게 우승 상품을 전달했다. 그리고 소감을 부탁한다. 길지 않는 소감 말미에, 예경은 겨울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들의 작은 대장님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대장님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우리들도 없었어요. 그렇죠, 여러분?" 그녀는 자신이 받던 환호를 그대로 떠넘겼다. 겨울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만들고서, 몇 번의 목례로 환호에 답했다. "사실 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예경은 자신의 아이를 살짝 더 들어보였다. "기억하시나요? 아이의 이름을 바꿀 거라고 말씀드렸던 거." 연철이 얼른 와서 겨울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네. 기억해요. 어떻게 바꾸셨나요?" "지금 바꾸려고요." "이런." 겨울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합류한 사람들은 사정을 모른다. 원래 있던 자들보다 훨씬 더 수가 많았다. 어리둥절한 그들을 위해, 예경이 자신의 사연을 설명했다. 아들에게는 자신의 성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이 이제 그녀에게는 응원을, 남편에게는 저주를 퍼부었다. 고조되어있던 감정이 그대로 옮겨 붙는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가?' 그녀의 독기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여유 속에 감춰진 것이었을 뿐. 오늘은 그녀에게 시작의 날일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겨울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정하긴 어렵네요." 원만하게 넘어가는 말. "아이가 평생을 함께할 이름이잖아요. 경솔하게 정하진 않겠어요. 장 부장 님. 많은 분들의 의견을 모아주세요. 거기서 좋은 이름을 가려낸 뒤에, 최종적으로 제가 선택할게요. 송예경 씨도 그 정도면 만족하시죠?" 기왕 생긴 일이니,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써야겠다. 겨울의 판단이었다. 예경은 곱게 웃고, 깊게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대장님." 장연철이 다시 환호를 이끌어낸다. 겨울은 국적 난민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시죠?" "어......조금은 그렇군요." 여전히 대답하는 것은 벤자민 뿐이었다. 다른 넷은 눈치만 살핀다. 겨울은 그들 가까이에 털썩 앉아서, 장연철을 불렀다. 막간이라 마침 휴식시간 비슷하여, 연철에게도 여유가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고 이 분들은 누구시고요?" 궁금하긴 아까부터 궁금했던 모양이다. 오자마자 묻는 말이 빨랐다. 겨울이 사정을 풀었다. "국적 없는 분들이세요." "국적이 없다뇨?" "일단 이름부터 알려드릴게요. 여기 가운데 계신 분이 벤자민 마이어 씨. 왼쪽은 어거스트 코마 씨. 그리고 클라라 카터 씨, 케이시 블랙웰 씨, 마지막으로 빅터 쿡 씨. 모두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된 분들이세요." 연철과 겨울 사이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으나, 순서대로 이어지는 호명에 소개임을 눈치 챈 다섯 사람이었다. 다섯은 연철에게 소극적인 몸짓으로 인사한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은 연철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입양된 분들......어, 그런데 왜 여기에?" "양부모를 잘못 만난 거죠. 양육비 지원을 받으려고 아이를 들여놓고, 시민권 신청은 해주지 않았대요. 지금까지 미국 시민인줄 알고 살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죠. 그걸 겨우 어제 알게 되셨다네요." "세상에......." 설명이 자세한 것은 연철의 동기부여를 위해서였다. 착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라, 언어는 풍부할수록 좋았다. 연철은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갈 곳이 없는 분들이라 제가 받기로 했어요. 미리 상의하지 못해 죄송해요, 부장님." 죄송하다는 건 일부러 던지는 자극이다. "아뇨!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하신 거죠!" 예상대로, 장연철은 격하게 손사래쳤다. "잘 오셨습니다! 「겨울동맹」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색하나마 영어로 환영하는 연철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는 자기함양에 열심이었다. 영어는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였고. '민 부장님께 자극을 받기도 했겠지.' 경쟁이 이래서 좋다. 겨울은 새로운 가족들에게도 연철을 소개했다. "이쪽은 장연철 씨라고 해요. 성이 장이고, 이름이 연철이죠. 한국식 이름은 앞쪽이 성이거든요. 장연철 씨는 저를 도와주시는 가장 중요한 두 분 중 한 분이세요. 제가 나가있는 동안 조직을 실질적으로 관리하시는 분이니까요. 앞으로 많이 신세지게 될 거예요." 다섯이 새로운 시선으로 연철을 본다. 연철은 조금 부끄러워했다. 겨울이 당부했다. "행사가 끝나면 이분들에게 필요한 걸 챙겨주세요." "걱정 마시죠. 사실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그는 당장 사람을 불렀다. 익숙하게 불려오는 몇 명을 보고, 겨울은 체계화된 조직운영을 실감했다. 나중에 두 부장과 논해서, 일부 사람들의 직위를 공식화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됨됨이는 가려야 할 터. 겨울은 새삼 장애인 공동체를 잘 받았다고 생각했다. 중간 간부를 따라가는 다섯 사람에게, 겨울이 말한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당분간 힘드시겠지만, 저도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아닌 척 해도 그들은 지쳐있었다. 파티를 즐기기보다, 쉴 자리를 찾는 게 먼저였다. 저들 중 몇 명이나 눈물 없는 밤을 보낼까. 그러나 파티를 끝까지 즐기지 못하는 건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으로부터 스피커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저 우는 소리가 짧게 세 번 반복되면서,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행히 비상사태는 아니었다. 「영내의 한겨울 소위, 한겨울 소위는 지금 즉시 단독군장을 갖추고 중앙 연병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호출? 이 시간에? 시계를 보니 해는 진작 떨어졌을 때였다. "별 일 아닐 거예요. 금방 다녀올 테니 다들 즐기고 계세요." 겨울은 사람들을 다독이고서, 느리게 나온 다음, 빠른 걸음을 옮겼다. 무장을 갖추고 간 연병장엔 험비 여러 대와 소대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또 너야? 이젠 좀 지겹지 않아?" 농담을 건네는 건 찰리 중대 1소대장, 제프리 브라운 소위였다. 그 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마빈 "보어" 리버만 하사와 대런 엘리엇 상병, 안토니오 귈레미 일병 등. 다들 귀찮거나 짜증스러운 표정이다가, 겨울을 보더니 그나마 밝아졌다. 야밤에 불러낸 것 치고 농담부터 건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제프리는 지휘관이니까, 이런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겠지. 겨울이 대충 어울려주었다. "지겹네요. 파티 도중에 나와서 보는 얼굴이 제프리라니." "어, 농담이지? 적어도 난 농담이었는데." "죄송해요. 진담이었어요." "어이!" 병사들이 피식거리며 웃는다. 제프리가 겨울에게 손짓했다. "일단 차에 타. 무슨 일인지는 가면서 설명해줄 테니까." 운전병은 겨울이 타자마자 엑셀을 밟는다. 무전기에서 제프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아. 제군. 그럼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동승한 병사들이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임무를 전달받은 건 제프리 뿐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말이야, 아까라는 건 그러니까......정확한 시간은 필요 없지? 중요한 거 아니니까 대충대충 하자고.」 "......." 「아무튼 아까부터 샌 미구엘 인근에서 이상 전파가 감지되는 모양이야. 위치를 바꿔가면서, 간헐적으로. 공군을 부르려고 해도 정확한 좌표를 모르잖아? 전파 추적 미사일은, 발신이 지속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말야. 아무래도 「트릭스터」 같은데, 몇 놈이나 왔는지는 모르겠어. 이쯤 되면 왜 우리가 불렸는지 알 만 하지?」 알 만 하다. 캠프 로버츠에서 「트릭스터」와의 교전을 경험한 병력은 겨울과 찰리 중대 1소대뿐이었다. 그것도 「트릭스터」와의 다른 모든 교전 사례와 비교할 때 가장 우수하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과지만. 차량대열은 입구 초소에서 정지했다. 치워야 할 장애물이 많았다. # 58 [58화] #함정 (3), 캠프 로버츠 초소 앞에는 수십 줄의 스파이크 스트립(가시 돋친 격자형 체인)이 깔려있었다. 본래 차량 통과를 막으려고 도로 위에 깔아두는 물건인데, 지금은 감염변종에 대한 접근거부 수단이었다. 병사들이 하차하여 초병들을 도왔다. 겨울도 함께한다. 초병들이 미안해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치워놨어야 하는데, 저희도 지금 막 연락을 받아서......." "미안할 것 없어요. 누구 잘못도 아닌걸요." 치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끈으로 연결된 손잡이가 따로 있어, 휙 당기기만 해도 대충 치워진다. 숫자가 많아 번거로울 뿐. 겨울이 다시 탑승하자, 초병들이 경례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제프리가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차량 대열이 일제히 출발했다. 곧바로 무전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 「소대, 지금부터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전침묵을 유지하도록.」 사냥감의 정체를 생각하면 당연한 지시였다. 간헐적인 전파 발신과 이어지는 위치 변경을 보면, 「트릭스터」도 인간의 전략을 숙지했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방해전파를 줄창 뿜어대면 날벼락 맞는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을 터. '혹시 이 녀석들이 지식을 교환하는 걸까?' 겨울에게조차 새로운 변종은, 여러모로 위험한 잠재력을 지녔다. 통신은 그만큼 강력한 힘이다. 운전병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았다. 도로 탓은 아니다. 캠프를 나오면서부터 헤드라이트를 꺼놨기 때문이다. 단안(單眼)식 야시경에 의존하는 운전이 대담하기는 어려웠다. 운전병의 상체가 자꾸만 앞으로 기울었다. 별도의 요청이 없어도, 일정 주기로 가동되는 노이즈 메이커의 소음이 먼 곳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캠프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겨울은 전술정보가 표시되는 트래커(Tracker) 모니터를 살폈다. 여기엔 차량의 현재 위치, 우군의 배치현황, 임무 목적지 등이 세부정보와 함께 표시된다. 「트릭스터」로 추정되는 신호가 마지막으로 포착된 곳은, 샌 미구엘 서남쪽의 구릉 지대였다. 거리로 따지면 채 5km가 되지 않았다. 물론 실제 이동거리는 그보다 길어졌다. 한 번 제대로 당할 뻔 했으므로, 제프리는 제법 신중하게 굴었다. 보다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작전지역 남쪽에서 진입하기로 한 것이다. 선도 차량이 잡는 방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뭐죠?" 겨울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가리켰다. 거대한 위성 안테나 몇 개가 줄지어 늘어선 시설이 있었다. 불빛은 전혀 없다. 버려졌다는 증거다. "GPS 관련 시설이라는데, 조만간 점령하라고 하진 않을지 걱정입니다." GPS는 좌표와 고도 보정을 위한 지상관제국을 필요로 한다. 지금 보이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다만 그 외에도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안테나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레이더 돔도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쳐서 조금 더 달려간 뒤에, 선도 차량의 사수가 정지 신호를 보냈다. 트래커 모니터를 보면 목적지까지는 대략 1.5km 거리. 소대는 구릉 지대 남서쪽의 농장을 수색했다. 다행히 변종 하나 없이 비어있는 곳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제프리가 의견을 모았다. 손가락 하나 펴고서, 제안하는 말. "선택지는 두 개야. 첫째, 도보로 조용하게 접근한다. 니미 씨팔 협잡꾼(Trickster) 새끼를 아주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겠지. 대신 시간이 좀 걸리고, 그 틈에 이 잡것이 다른 곳으로 움직여버릴지도 모른다. 뭐,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있었으니 벌써 딴 데 갔을지도." 그는 손가락을 다시 하나 펼쳤다. "둘째, 그냥 차량으로 강습한다. 소음 때문에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빠르고 강력하지. 이 새끼가 아무리 달아나도 우릴 떨궈내기 쉽지 않을 거다. 어때,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해?" 겉으로는 모두의 의견을 묻는 척 해도, 실상은 겨울 한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제프리도, 병사들도 겨울을 바라보고 있다.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육감을 무시하지 않는다. 병사들이 가장 신뢰하는 건 제프리가 아닌 겨울이었다. 소대장으로서 조금 씁쓸할 일인데도, 제프리는 아무렇지 않은 낯빛이다. 겉보기로 가벼울지언정 알맹이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양쪽 모두 불확실하다면, 좀 더 안전한 쪽을 고르죠. 타고 가요. 대신, 바깥에서 조이면서 접근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겠지. 어쨌든 기동력은 우리가 우월할 테니까 말이야." 확실히 그렇다. 실제 추격전을 경험해본 입장에서, 겨울이 체감한 「트릭스터」의 속도는 기껏해야 잘 달리는 인간 수준이었다. 지구력은 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자연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은 결코 빠른 축에 들지 않는다. 제프리가 다시 제안한다. "기왕 차 끌고 가는 거, 두 조로 나눌까? 아니면 세 조도 괜찮고." 전력을 나누는 건 대개 위험한 짓이다. 허나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달랐다. 끌고 온 험비가 여덟 대였다. 중기관총을 탑재한 차량이 보통이지만, 미사일 발사기를 실어놓은 차량도 있다. 일개 소대의 화력 치곤 엄청난 수준. 거기에 개활지였다. 구릉이 이어진다고 해도, 능선을 따라 달리면 시야가 넓게 확보된다. 시가지처럼 장애물 많은 환경과는 다르다. 충분한 거리만 확보된다면, 험비 한 대로 무장병력 일이십을 저지할 수 있다. 겨울은 제프리에게 동의했다. "두 조로 해요. 숫자도 떨어지니까. 한 쪽은 교신을 자유롭게 하고, 남은 한 쪽은 무전침묵을 지키는 걸로 하죠." "속도 차이를 두는 것도 괜찮겠네. 몰이꾼과 사냥꾼으로 역할을 나누자고." 야간에 차량이 달리는 소음은, 속도에 따라 수 킬로미터 바깥까지 들린다. 먼 곳의 노이즈 메이커를 마냥 믿을 순 없는 노릇. 가뜩이나 인간보다 귀가 밝고, 전파까지 감지하는 이상한 놈들이 상대였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교신하며 고속으로 움직이는 쪽이 몰이꾼이 되고, 무선침묵을 유지하며 저속으로 움직이는 쪽이 사냥꾼이 된다. 서로 반대편에서 나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만큼, 사이에 잡히면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 내가 몰이꾼이 되지. 힘내쇼, 사냥꾼." 제프리가 겨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합의에 걸린 시간은 3분 남짓이었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마당이다. 차량 행렬이 동서로 분리되었다. 4대씩 나누어진 채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무전기를 잡은 제프리가 신나게 떠들어댔다. 「제프리 베델 브라운의 크리스마스 이브 라디오! 세븐스 캘리포니아가 낳은 최고의 스타, 쩔어 주는 브라운 소위가 지금부터 신나게 지랄을 해보겠습니다!」 "......." 겨울은 무전기 볼륨을 줄였다. 운전병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 와중에 제프리는 캐롤을 열창했다. 노래인지 악다구니인지 구분이 안 간다. 「FUCK! YOU! Merrily on hell! In hell! The guns are firing!」 원곡은 「딩동 기쁜 소리가」인데, 원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겨울이 조금 더 볼륨을 줄였다. 듣는 덴 지장 없는 수준이었다. 보정을 받는 감각은 조그만 이상 현상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놀라는 것은 그저 사슴들 뿐. 야음에 가려진 차량을 보고 놀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애초에 수색지역이 좁았다. 시속 20km로 달려도 10분이면 가로지른다. 완전한 평지였으면 수색할 것도 없는 범위였다. 잠시 후, 몰이꾼과 사냥꾼이 다시 만났다. "여, 오랜만이야?" 제프리가 맥 빠진 농담을 걸어왔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트래커 좌표는 오차범위가 2.6m에서 12.6m 사이였다. 그러므로 「트릭스터」가 여기에 있었다면 그 흔적이 남아있을 법 하다. 제프리가 주위를 하릴없이 서성거렸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땅이 얼어서." 아무리 캘리포니아라도, 12월의 내륙은 밤새도록 얼어붙는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습기를 머금은 땅이라 더했다. 겨울은 보란 듯이 발을 찍는다. 쿵. 이 정도는 되어야 발자국이 남는다고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나마 겨울은 단단한 전투화를 신었는데 이 정도다. 「그럼블」이라면 모를까, 「트릭스터」의 흔적을 기대할 순 없었다. 평소엔 건조한 지대라 풀 밟은 자국도 없다. 「추적」이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제프리가 어깨를 늘어뜨린다. "......뭐야 이게. 허무하잖아.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 나오기 무섭게, 차량에서 통신병이 손짓했다. "소대장님! 이상 전파가 잡혔습니다! 좌표가 갱신됩니다!" "엉? 어딘데?" 차 안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는 제프리의 모습. 겨울도 가까운 험비의 모니터를 살폈다. 캠프와 공중의 무인기로부터 삼각측량으로 뽑아낸 좌표가 내려왔다. 제프리가 비명을 질렀다. "젠장! 가깝잖아! 탑승!" 상세한 지시를 내릴 틈도 없었다. 조금 전의 발신은 고작 1km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것도 캠프 로버츠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지면의 굴곡을 따라 흔들리는 차체를 느끼며, 겨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그토록 교활하게 굴었던 놈과 같은 종류가, 이런 개활지에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을 정리할 틈은 없었다. 최대시속으로 가속한 험비는 어느새 새로운 좌표에 도달한 상태였다. 포탑의 중기관총 사수가 소리쳤다. "목표 포착! 10시 방향! 거리, 최소 200 이상!" 선탑자인 겨울이 보기 어려운 방향이었다. 무전기가 제프리의 목소리로 울었다. 「갈라져! 5호차부터 서쪽 샛길로!」 운전병이 핸들을 좌로 꺾었다. 차체 우측이 붕 뜰 만큼 급격한 방향전환. 제프리 쪽은 계속 포장도로를 달리고, 겨울 쪽은 비포장도로로 접어든다. 덕분에 목표물이 겨울의 1시 방향으로 옮겨왔다. 정면 유리창에 비춰지는 풍경. 버려진 경작지, 작물들을 위해 줄줄이 박아놓은 지주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움직인다. 거리가 멀어 굉장히 작게 보였다. 콰콰콰콰콰콰! 중기관총 사격음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젠장! 잘 안 맞습니다!" 사수는 거리를 200미터로 봤으나, 보정을 받는 겨울의 목측으로는 거의 300미터였다. 정조준 없이 쏘는 중기관총으로 명중탄을 내긴 힘들다. 차량이 경작지로 진입할 순 없었다. 빽빽하게 박힌 지주들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군용 차량의 내구성으로 밟고 지나가겠으나, 곤란할 정도였다. 겨울이 사수의 다리를 두드렸다. "나랑 자리 바꿔요!" 겨울의 외침은 발사음에 파묻혔다. 두 번 더 외치고서야, 사수가 알아듣고 뒷좌석으로 내려온다. 기어오른 겨울이 사수좌에 앉았다. 「개인화기숙련」은 중기관총에 30% 효율로 작용한다. 겨울은 중기관총 사격을 포기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채, 소총을 조준한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차를 밟고 쏘기가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툭툭 튀는 조준점이 순간적으로 정렬될 때마다, 방아쇠를 정확하게 끊어서 당긴다. '맞았다!' 달리는 모습이 뒤틀린다. 아주 약간, 속도가 줄어들었다. 제프리 쪽에서는 아예 유탄과 로켓을 갈겨댔다. 크리스마스를 망친 분풀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번 빗나가서 아쉬웠다. 거리가 좀 가까워지자 윤곽이 확실해졌다. 「트릭스터」다. 놈은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며 달아났다. 완만하게 솟은 경작지 중앙을 좌우로 오가며, 각 방향의 화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작지가 무한히 이어질 순 없는 노릇. 마침내 가릴 게 아무 것도 없는 도로로 튀어나온 놈이, 1번 차량과 정면으로 마주본다. 겨울이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제프리! 꺾어요!"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놈이 직선으로 열파를 뿜었다. 극초단파 격류를 정면으로 받은 제프리의 험비가 순간 통제력을 잃는다. 뒤따르던 차량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추돌이 이어졌다. 무전기에서 욕설이 새는 걸 보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쪽에서는 새롭게 나타난 일반변종 무리가 방해였다. 한 쪽에만 신경을 기울인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겨울이 중기관총을 붙잡고 긁었으나, 미처 처리 못한 놈들이 도로 위로 뛰어들었다. 운전병이 소리 질렀다. "로드 킬이다 새끼들아!" 그는 험비의 내구성을 믿고 냅다 박았다. 뻐억! 뻐억! 뻐억! 장난감처럼 튕겨나가는 변종들. 야시경 끼고 보면 현란한 광경이었다. 뜨거운 액체가 노을빛으로 보이는 탓이었다. 본넷 위로 점점이 튀었다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간다. 그러던 중, 온갖 데 부러진 변종 하나가 홱홱 돌면서 겨울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피를 뿌리며, 겨울을 노려보고, 허우적거리는 손길. 끝이 아슬아슬 닿았다가, 허무하게 멀어졌다. 대신 욕은 뒤쪽에서 봤다. 바싹 붙어 오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본넷 위로 떨어진 변종에 놀라, 운전병이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내장이 파열되고도 아직 목숨 붙어있는 놈은, 차창에 붙어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겨울이 뒤로 돌아 소총사격을 퍼붓는다. 등짝에서 뒤통수까지 스무 발을 박아주었다. 「소위님! 우리 맞으면 어쩌려고요!」 무전기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후속차량의 선탑인원이었다. '방탄유리인데 뭘.' 어차피 빗나가지도 않았다. 겨울이 다시 앞으로 돌았다. 그 사이 사냥감은 멀찍이 달아난 상태. 아무래도 목적지는 버려진 목장으로 보인다. 너른 초지 건너편에 건물 그림자들이 몰려있었다. 중기관총을 갈기다가 팅- 하는 소리가 났다. 탄이 떨어진 것. 재장전이 느린 중화기 대신, 겨울이 다시 소총사격을 가했다. 달리는 차를 밟고 서서 쏘는 사격인데, 그래도 표적의 등짝이 남아나질 않는다. 콰드득! 험비가 목장 경계를 돌파했다.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가는 충격이 겨울의 중심을 흔들었다. 앞으로 고꾸라져, 포방패 모서리에 이마를 박았다. 이런. 겨울이 상처를 더듬었다. 크진 않은데, 피가 눈으로 흘러 한쪽 시야를 물들인다. 대충 닦아내니 조준 효율이 조금 낮아졌다. 「트릭스터」가 마침내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래봐야 막다른 구석이다. 악에 받힌 험비들이 주위를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지금부터 우리는 철거업자들이다! 가진 거 다 갈겨!」 건물 째로 박살내겠다는 제프리의 호기로운 외침. 겨울이 즉각 만류했다. "잠깐만요! 가능하면 포획하라면서요?! 좋은 기회잖아요!" 「알 게 뭐야! 저 놈은 내 크리스마스 이브를 훔쳐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여 버리겠다!」 라고 일갈하고, 한숨 한 번 쉬고, 대기 명령을 내리는 제프리였다. 겨울이 포탑을 밟고 뛰어내렸다. "제가 들어갈게요!" "야, 엄호라도 받아! 너 그러다가 훅 간다!" 목장의 다른 건물들로부터 일반 변종들이 기어 나오는 중이다. 남은 병력이 다른 방향을 정리하는 사이, 겨울은 「트릭스터」를 찾아 들어갔다. 소총을 등에 메고, 한 손에 대검을 들고, 남은 손에 권총을 쥔 상태로, 박살난 문 안쪽을 밟는다. 어두컴컴한 복도. 야시경으로 보이는 발자국을 따라 들어간다. 횡으로 바람 갈라지는 소리. 자세 낮춘 겨울의 머리 위로 근육 채찍이 지나갔다. 성공적인 회피의 결과, 나무로 된 벽이 한 줄로 푹 들어갔다. 자국이 깊다. 제 혀를 주체하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제 팔을 회수하지 못하는 「트릭스터」. 쐐기 같은 나무 파편들에 붙잡힌 상태다. 겨울은 아예 칼침까지 박았다. 여러 번 박아서, 근육이 제 구실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자 아예 온 몸으로 덮쳐오는 특수변종. 있는 수는 다 쓸 모양인지 몸통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예열시간은 고작 1~2초. 워어어! 하는 낯짝에 겨울이 총질을 퍼붓는다. 그리고 놈의 다리 사이로 굴렀다. 곧바로 뒤돌아 사격자세를 잡고서, 괴물의 오금 안쪽에 총탄을 박았다. 열파는 벽 쪽으로 쏘아졌다. 그곳엔 제 채찍도 있었으므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변종이 비통한 비명을 질렀다. 무릎 꿇은 놈이 돌아보기에, 겨울은 방탄 헬멧으로 들이받았다. 그리고 발목 인대를 사격으로 끊었다. 곧바로 무기를 교환하며, 등짝을 걷어차고, 남은 어깻죽지에 연사를 갈긴다. 뒤로 물러나며 탄창을 갈았다. 안전을 위해 적당히 거리를 벌린다. 최후의 몸부림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용하다. 이걸로 완전한 무력화인가. 몇 걸음 떨어져 한숨 쉬던 겨울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엎어진 괴물이 겨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부림도 치지 않고, 똑바로 보면서,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웃는 얼굴이었다. 급기야는 끄윽 끅 끅 소리까지 낸다. 울음 보다는 웃음소리에 가까웠다. 무전기의 잡음이 극도로 심해졌다. 뒤따라 들어온 병사들이 호들갑을 떠는 동안, 겨울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왜지? 너무 허술해. 마치 죽으려고 온 것처럼.......' 그러나 답은 알 수 없었다. 기다려도, 새로운 위협은 나타나지 않았다. # 59 [59화] #함정 (4), 캠프 로버츠 겨울은 포획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트릭스터」는 얌전했다. 손발이 묶이는 내내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호흡뿐이다. 쉬익, 쉭. 바람이 날카롭게 드나드는 소리. 아무리 상했어도, 발악할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을 것인데. 수상하다. 일부러 잡힌 것 같다는 의심에, 점점 더 강한 무게가 실린다. 확증이 없을 뿐. 이 녀석은 쓰러지기 전 강력한 방해전파를 뿜었다. 아타스카데로에서 만났던 놈 역시 마찬가지. 그것이 죽을 때, 무전기에서는 심한 잡음이 흘러나왔었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무선방해가 아니라, 이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통신의 일종이었다면? '그럼 그 통신의 한계는 어디까지지?' 음성언어와 전파통신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 새로운 특수변종들 사이의 정보전달 능력은, 어쩌면 시각과 청각마저 아우르는 수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들의 교활함도 이해가 간다. 새로운 개체를 만날 때마다, 그것의 경험을 전달받는 셈이니까. 아타스카데로의 「트릭스터」가 방출한 정보도 여전히 떠돌고 있을 것이다. 죽은 뒤에도 남겨지는 기억. 마치 망령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날 보고 웃은 건, 내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살아있는 표본 확보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즉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고선, 일부러 잡힌다는 발상 따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 추측이 옳다는 전제 하에, 「트릭스터」는 최악의 특수변종이다. 신경이 서늘하게 식었다. 스물여섯 번의 종말을 겪어오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쁘지 않다. 맨 처음, 인간 닮은 것의 머리를 박살냈을 때, 그때처럼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겨울은 소총을 겨냥했다. 손끝으로 방아쇠압을 느끼며, 생각한다. 쏴버릴까? 이놈의 계획이 무엇이든, 지금 쏴버리면 엉클어지지 않을까? "뭐 하십니까, 소위님?" 리버만 하사가 겨울의 총열을 붙잡아 내렸다. "애써 잡으시고선 이제 와서 죽이시려고요?"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시선을 살짝 돌리니, 포획물 경계를 보고 있던 병사들이, 몇 걸음 밖에서 쭈뼛거리는 중이다. 아무래도 겨울의 기색이 이상하여 리버만 하사를 부른 모양이었다. 한창 활성화되었을 「위협성」 탓인가 보다. 겨울이 총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왜요, 너무 쉽게 잡았다 이겁니까?" 하사 역시 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만큼 깊게 파고들진 않았을 것이었다. 역시, 대수롭지 않은 투로 겨울을 안심시키려 든다. "좀 석연찮은 구석은 있습니다만......다 끝났습니다. 잠시 후면 헬기가 와서 실어갈 것이고, 우리는 돌아가서 맥주 한 병 마시고 쭉 뻗으면 됩니다." 그러더니 바깥쪽으로 손짓했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나가서 잠깐 쉬고 계시죠. 구름이 없어서 밤하늘 보기 참 좋습니다. 여긴 애들한테 맡겨놓으시고요." 겨울이 옅은 미소를 지어냈다. "못 미더운데요." 그러자 리버만 하사는 그건 그렇지요, 하고 고개 끄덕이고, 병사들은 부루퉁한 표정을 내보인다. 잠시 후엔 다들 웃고 있다. 겨울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확증이 없는 이상 이들을 설득하긴 어려울 것이다. 공감이야 해주겠으나, 실행은 별개의 문제였다. 잡혀서 꽁꽁 묶인 특수변종이 과연 무엇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제프리가 이미 포획을 보고했을 터였다. 제멋대로 처분했다간 징계를 받을 지도 모른다. 소년은 잠시 다른 것을 잊기로 했다. 리버만 하사 말대로, 구름 없고 별이 많은 하늘이었다. 험비 위에 걸터앉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달 한 조각 걸리지 않았는데,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차가운 밤, 뿌려진 별빛이 몹시도 청량했다. 「종말 이후」의 어두워진 세상에서, 전보다 밝아진 게 있다면 무엇보다 밤하늘이다. 생전에 보지 못했던 은하수를 여기서는 볼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빛나는 구름 같기도 했다. 야시경을 쓰고 보면 더더욱 밝았다. 어찌나 이렇게 많은 별들이 선명한지. 인기척이 느껴진다. 무전기를 들고 씨름하던 제프리였다. 그는 잠시 신경질을 내더니, 주위에 몇 마디 던지고, 곧장 겨울에게 다가왔다. 바로 말을 걸진 않는다. 휴식을 방해하기 싫은 것 같다. 기분 좋은 존중이었다. 본넷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서, 제프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보기 좋냐?" "네. 분명 제가 살던 곳에서도 있었을 풍경인데, 여기서 처음 보는 게 참 아쉽네요." "살던 곳? 아, 한국?" "어떤 의미로는요." "어떤 의미? 무슨 의미?" 젊은 소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으나, 겨울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교신이 잘 안 됐어요? 방해 전파는 없는 것 같은데." 귀에 꽂아둔 리시버는 여전히 잠잠했다. 「트릭스터」가 얌전하다는 반증이다. "그런 건 아니고....... 헬기를 못 보내겠다더라고." "왜요?" "우리 캠프만 이런 일을 겪는 게 아니래. 다른 데서도 몇 마리 잡았다더라. 그래서 헬기지원 요청이 많았는데, 막상 보냈더니 잠깐 사이에 여덟 대가 사라졌다더만." 경계심이 되살아난다. 겨울은 재차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공격을 받은 건가요?" "몰라. 공격인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그냥 연락이 두절됐어. 지원을 요청한 부대 중 하나는 폭음을 들었대. 아마 추락한 것 같은데, 현장엔 아직 접근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 한마디로 현재로서는 원인을 전혀 모른다 이거지." "공격이겠죠. 한두 대도 아니고, 여덟 대가 동시에 고장이 날 린 없잖아요. 그것도 별다른 연락조차 없이 말예요." "뭐, 그야 그렇겠다. 아무튼 원인이 파악되거나 날이 밝을 때까진 추가 헬기지원이 어렵다는데." "그럼 저건 어떡해요?" 겨울이 포획물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마침 병사들이 포획물을 운반하는 중이었다. 주둥이에 재갈을 단단히 물려놓고, 네 명이 붙어서 조심스럽게 들고 있다. 몇 명이 조금 떨어져서 각자의 화기를 겨누고 있었다. 제프리가 말했다. "기지로 운반하라는 명령이야. 보관하고 있으면 가져가겠다고." "감금 대책은 있고요?" "쇠사슬로 묶어서 새장에 가두기로 했어." "새장?"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벽이랑 천장에다가 쿠킹 호일을 바른다던가? 그렇게 하면 이놈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기지에 놓으려면 그 정도 조치는 취해야지." 아, 패러데이의 새장. 겨울도 들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날이 밝으면 헬기가 온다고 했다. 어떻게든 이 밤만 무사히 보내면, 별 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해 일출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 같았다. '대대장에게 건의해볼까?' 어찌되었든 소년 장교의 직속상관은 대대장이다. 아니면 작전과장에게 찔러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 다 가능성이 희박했다. 대대장은 술로 현실을 잊는데 열중하는 폐품 인간이고, 쉬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작전과장도 증거 없는 추측만으로 경계를 강화하는데 과연 동의해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은 해볼 일이다. "야, 타. 돌아가자." 제프리가 겨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량 행렬이 출발했다. 「트릭스터」는 3번 차량의 포탑 뒤쪽에 가로로 올려 묶은 채였다. 무게중심이 높아져서 그런지, 차체가 영 불안해 보인다. 중기관총 사수는 아예 총구를 변종 방향으로 고정시켜두었다. 언제든 수틀리면 쏴버리겠다는 태도였다. 도착한 기지에서는 증강된 초소 병력이 제프리 소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미 결박된 변종이었으나, 기다렸다는 듯 쇠사슬로 한 번 더 묶어놓는다. 절연체로 된 장갑을 끼고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무전기의 잡음이 몇 번 더 극심해졌다. 변종의 목적이 정찰이었다면, 기지 내로 들어와 잡음을 뿜은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겨울은 특수변종이 최종적으로 새장에 갇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캠프 통제실로 향했다. 사안이 사안이기 때문인지, 작전과장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 경례를 받은 그는 찾아온 용건을 묻는다. "무슨 일인가. 작전이라면 훌륭하게 완수했으니, 그만 가서 쉬어도 좋을 텐데." "이번 임무에 관한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건의?" "네. 날이 밝을 때까지 캠프의 경계를 최대한 강화하는 게 어떨까 해서......." 작전과장은 대대 참모들 가운데 겨울에게 유화적인 편이다. 인간적인 유대는 아니고, 능력에 대한 존중에 가깝다. 성탄전야의 당직을 맡은 불운한 본부중대 병사들이 겨울과 작전과장을 주시했다. 과장은 턱을 긁다가, 소년 장교를 향해 자세를 고쳤다. "이유를 들어볼까?" "저는 「트릭스터」가 의도적으로 잠입했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이후 겨울이 전개하는 추측의 얼개를. 작전과장은 흥미롭게 경청했다. "자네가 전에 제출했던 보고서보다 좀 더 나아간 내용이군. 방해전파와 교신이 서로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 흠, 사실 위쪽에서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네. 조만간 ECM을 걸어서 반응을 살필 계획인가봐." "이쪽에서 거꾸로 전파방해를 시도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만약 그게 정말로 모종의 통신이라면, 방해받았을 때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관련해서 자네에게 임무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 어쨌든 봉쇄선 서쪽에서 자네 이상의 전과를 거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그밖에 390 비행대에서 수시로 정찰기를 띄우고 있네. 놈들이 뿜어내는 전파의 패턴을 분석하려는 거야. 이런 상황이니 자네의 걱정에 근거가 없다고는 못 하겠군. 오늘 밤, 다른 캠프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일을 겪은 게 수상하기도 하고. 그래, 정말 의심스럽군." "그럼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아니." 소령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일리는 있지만 너무 과해. 새장에 갇힌 놈이 뭘 할 수 있겠나. 뭔가 계획이 있어서 잠입을 했다손 치더라도, 전파를 봉쇄하는 감금시설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도 놈들을 모르지만, 놈들도 우리를 몰라. 놈들이 아무리 영리해졌어도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진 못한단 말일세." 그러더니 농담을 덧붙이며 웃는다. "놈들이 도서관과 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위험할지도." "하지만......." "됐네. 자네는 너무 과민한 거야. 명령이다. 가서 좀 쉬도록. 성탄절이잖나." 소령은 나가보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표정을 보아, 더 이상 시도해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겨울은 경례를 두고 물러났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위험한 예감은 여전했다. 이것을 모른 척 할 순 없었다. 남은 방법은 지휘부를 무시하고 병사들을 직접 움직이는 것 뿐. 간곡하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호응해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사실상의 항명이기 때문이다. 중심인물로서 책임을 지게 된다면, 겨울의 입지가 많이 위태로워진다. 쌓아놓은 게 있으니 단박에 무너지진 않겠지만.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수록 문제가 될 소지가 커진다. 끝내 설득되지 않고, 지휘부에 신고할 사람이 나올 수 있으니. 무엇보다 불확실한 가능성일 뿐이다.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니었을 경우의 후폭풍을 감안할 때, 득보다 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생존감각」에 대한 투자도 고려했다. 이것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경고한다. 다만 범위가 워낙 넓은 탓에, 연동 없이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아타스카데로 이래 자원을 쓴 적이 없으니 여력은 있다. 「생존감각」이 천재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제공되는 「통찰」은, 이제까지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할 것이다. 결심을 굳히고 경험치를 밀었다. 11등급 「생존감각」의 경고가 저릿하게 올라온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시스템 보정에 의한 예감은 틀릴 때도 있다. 어찌되었건 겨울이 기대했던 수준은 아니었다. 차라리 「위기감지」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해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지만. 고민 끝에, 겨울은 캡스턴 대위를 찾아갔다. 전후사정을 경청한 대위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리 있는 판단이야. 아타스카데로와 다른 곳들의 전투자료를 비교해봤는데, 「트릭스터」의 지능은 정말 대단하더군. 자네 말대로 너무 쉽게 잡혔어. 단독으로 나타난 건 이상할 정도로 허술하고. 웃었다는 것도 신경 쓰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래도 무척 어렵군......." "생각해봤는데, 들키지 않으면 됩니다." 겨울이 말하자 대위가 의문을 표했다. "그럴 수도 있나?" "생각해보세요. 중대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비상 대기일 뿐인걸요.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본격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는 셈입니다. 만약 실제로 사건이 터진다면......." "그때는 사소한 불이익보다 더 큰 것을 걱정해야겠지. 나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 캡스턴 대위가 가볍게 웃는다. # 60 [60화] "날 그런 식으로 설득하려고 하다니, 섭섭하군.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 개인의 손해는 감수할 수 있어. 그게 내 진짜 의무지. 복무규정이 의무보다 중요할 순 없는 법 아닌가?" "죄송합니다." 겨울이 솔직하게 사과하자, 대위가 고개를 흔들었다. "사과할 필욘 없네. 자네 덕분에 승진했으니, 자네로 인해 강등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사적인 이득을 보려고 하는 청탁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일 뿐인데."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는 처음 꺼냈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어렵다고 한 건 탄약 불출 문제야. 자네는 병력 동원만 생각한 모양이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으려면 탄약부터 충분해야 하지 않겠나. 중대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탄약은 그리 많지 않아. 「트릭스터」가 잠입했다는 자네 생각이 맞다고 가정할 때, 이어질 습격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겠지."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겨울은 필요한 병력이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잡혀온 놈이 뭔가 일을 벌인다면, 경계가 취약해지는 새벽을 기다릴 겁니다. 그때 가장 큰 적은 변종이 아니라 혼란 그 자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리 대비하고 있다면 적어도 혼란은 피할 수 있겠죠. 추가 탄약은......그때 확보하는 수밖에요." "경우에 따라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거로군." "여기까지가 현실적인 한계니까요. 정말로 반란을 일으킬 순 없잖아요." "글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대위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관내회선으로 중대 간부 전원을 호출했다. 집합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성탄전야인 것이다. 시민구역에 가있는 소대장 한 명은, 최초 호출로부터 30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여유가 별로 없는데. 겨울은 시간을 거듭 확인했다. 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아예 터지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터진다는 전제하에 준비하는 거니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비상시국이라도, 존중받고 싶은 최소한의 개인시간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성탄주간은 미국 최대의 명절이니 근무시간 외의 호출이 달가울 리 없다. "아....... 이 녀석이 있는 걸 보니 또 뭔가 험한 일이구나." 제프리의 한탄이다. 겨울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궁시렁 거렸다. 하기사, 남들 다 놀 때 교전을 치르고 돌아온 입장 아니던가. 물론 그건 겨울에게도 해당된다. 제프리의 한탄이 길게 이어지진 않는 이유였다. 대위가 겨울에게 발언을 요구했다. 오늘로 세 번째 사정설명이다. 겨울도 조금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오늘 밤은 최대한의 경계태세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사실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공격이 들어오지 않을 경우, 그냥 하룻밤 대기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여러분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리버만 하사가 주억거린다. "어쩐지, 아까부터 소위님 눈치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군요. 솔직히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반대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소위님이 아니었다면 우리 소대는 병원에서 많이 죽었겠죠. 다들 방심하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을 때, 소위님 혼자 옳은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이번에도 믿어보렵니다." "고마워요, 하사." 대체로 부사관들은 쉽게쉽게 지지를 표명했다. 하사부터 시작하는 한국군과 달리, 미군의 부사관은 훈련병부터 올라가는 계급이다. 철저한 실력 위주의 집단으로서, 사고방식도 대단히 실전적이었다. 병사나 부사관들은, 실전에서 무전기 너머의 상급부대와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다. 위에선 도무지 현장을 모른다고 한탄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더욱 쉽게 겨울을 이해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사관 최상급자인 피어스 상사도 겨울 편을 들었다. "썬 추가 말하길, 진정한 리더는 힘이 아니라 예시(豫示)로서 이끈다고 하더군요. 좋은 군인의 감은 제법 잘 맞는 편입니다. 어린 소위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죠. 지금까지의 성과만 보더라도 말입니다." 썬 추? 아, 손자. 잠시 헤매던 겨울은, 조금 곤란한 기분을 느꼈다. 손자가 말한 예시가 그런 뜻은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상사의 기분을 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멋진 격언을 외웠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상사는 무뚝뚝한 표정을 고수했으나, 미세하게 묻어나는 감정이 있었다. 사람 살피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겨울의 관찰이다. 누구든, 멋지고 싶은 욕망은 있게 마련이니. 그게 아무리 진중한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되자, 제프리를 제외한 남은 세 소대장과 기타 간부급 병사들이 자신의 입장을 고심했다. 피어스 상사가 그들을 묵묵히 쏘아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다들 부담스러워했다. 미군의 상사는, 희소도만 따질 경우 중령보다 높기 때문이다. 2소대장 맥코이 소위가 한숨을 쉰다. "어쩔 수 없군요. 저 혼자 발 빼는 것도 없어 보이고....... 해봅시다. 별 일 없으면 그냥 하룻밤 잠 설치는 것뿐이잖습니까. 사건이 터지지만 않으면 위험부담은 없는 셈이라고도 하셨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찜찜하긴 하군요." 그것을 기점으로, 나머지도 동의한다며 손을 들었다. 3소대장 설리번 소위가 머리를 긁는다. "지금 TV에서 '나 홀로 집에' 하는데......." "......." 미국인들도 크리스마스를 케빈과 함께하는 건가? 하긴, 본고장이구나. 마지막으로 화기소대장이 동의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상 편히 쉬긴 글렀습니다. 계속 신경 쓰이고 찜찜할 것 아닙니까? 누워도 잠이 안 오겠군요. 기왕 밤 샐 거,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의견이 합치되자, 캡스턴 중위가 이목을 모았다. "문제는 탄약입니다. 탄약이 없으면 다른 준비가 아무리 철저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통제실을 거치지 않고 탄을 빼낼 방법이 있겠습니까?" 사실상 피어스 상사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어떻게요?" "내일 실시할 사격훈련용 탄을 미리 불출하는 거라고 해두죠. 실무자들 사이에서 서류를 나중에 작성하는 건......대위님 마음에는 안 드시겠지만, 우리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니까요. 뭐, 요즘은 워낙 비상시국이라 탄약 불출이 잦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주 하는 일은 느슨해지는 법이죠." 상사가 말하는 우리는 당연히 부사관 계급을 뜻한다. 그의 생각에 일리가 있었다. 방금 겨울도 교전을 치르고 왔듯이, 밤낮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탄약을 써대는 시국이었다. 작전 후 남는 탄약을 일일이 회수하지도 않고, 필요한 양만큼 요청해서 수령하는 방식이며, 중대마다 여분의 탄약을 따로 관리하기도 한다. 평시처럼 엄격한 절차는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었다. 대신 총기현황은 철저하게 파악한다. 난민들에게 흘러 들어가면 폭동을 걱정해야 하니까. "그 핑계가 통할까요? 크리스마스에 사격 훈련이라니. 그것도 이 시간에 미리 빼놓겠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대위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상사가 부드럽게 웃는다. "대위님이 꽉 막힌 거야 워낙 유명하니까, 중대장이 쓸데없이 꼬장 부리는 거라고 뒷담 좀 까면 애들도 같이 까면서 믿게 될 겁니다. 그때 할 말들에 대해서는 미리 사과드리죠." "......." 캡스턴 대위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래도, 쉽게 말하긴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상사 쯤 되는 짬밥과 인맥이니까 시도할 수 있을 일이다. 상사는 대화를 겨울에게로 돌렸다. "물소위님도 도와주셔야 합니다." "네? 제가요?" "탄약고 경비가 에이블 중대 담당이니까요. 그쪽 아가들이 소위님을 굉장히 좋아하니까, 같이 가주시면 좀 더 수월해질 겁니다." 병사들 사이의 분위기를 제법 자세히 파악하고 하는 말 같다. 겨울은 중국계 거류구의 체크 포인트를 지키던 에이미 상병의 말을 떠올렸다. 「조심하세요. 소위님이 미친개한테 물리면 우리 중대가 통째로 돌아버릴 지도 모르거든요.」 '사람에 따라서는, 있는 그대로 설명해도 도와줄 가능성도 높지.' 겨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겠네요. 알겠습니다." 남은 시간이 적은 만큼, 모두의 입장이 정해지자 이야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간부급 병사들은 병력을 집합시키기 위해 뛰어나갔다. 남은 간부들이 작전구상에 착수한다. "적의 계획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입장이니, 우리의 계획도 핵심적인 것을 제외하면 임기응변 위주로 가야 합니다. 지금은 유사시 점령할 진지나 경계구역을 할당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군요." 캠프 지도를 펼쳐놓고 중위가 하는 말에, 상사가 수긍했다. "개의치 마시죠. 원래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게 작전계획이잖습니까." 지도를 놓고 동선을 그려보면, 제대로 반응한다는 전제 하에, 어느 방향에서 사태가 시작되더라도 3분 이내에 초기 병력투입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네 병력은 어떻게 할까?" 대위가 겨울에게 물어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아무래도 실전경험이 부족하니까 전면에 노출시키긴 어렵다고 보는데. 같이 준비시켜두고, 유사시 난민구역을 진정시키는 용도로 쓰는 건 어떨까 싶네만." "동의합니다. 좋은 생각이세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혼란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 될지 모른다. 난민구역의 인구밀도를 감안할 때,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면 압사당하는 숫자도 만만찮게 나올 것이다. 또는 난민 집단이 무작정 탈출을 꾀하더라도 문제다. 방어선이 후방에서부터 짓밟히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고작 두 개 분대의 「겨울동맹」 전투조로 감당하긴 벅찬 일이다. "적과 조우할 가능성이 낮을 뿐이지, 절대로 쉬운 임무는 아닐 거야." 겨울은 그의 우려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원래 체크 포인트를 지키던 병사들도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미리 귀띔을 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일단 제 영향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난민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두겠습니다." "탄약보다 그게 더 중요하네. 곧장 다녀오게. 나머지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자 피어스 상사가 끼어들었다. "그럼 물소위님은 일 보시고 나서 탄약고 쪽으로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두를게요." 시계를 보니 자정까지 삼십분 남은 시점이었다. 급하게 뛰어가는 겨울을 체크포인트의 병사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수 시간 전 떠났던 대형 텐트는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겨울이 들어가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그러나 장연철 만큼은 단번에 겨울을 알아보았다. 무척 반기는 낯으로 다가온다. "다녀오셨군요.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고하셨습니다."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네?" "장 부장님. 동맹 간부들을 모두 모아주세요. 유라 씨와 진석 씨를 포함해서요." 장연철은 겨울의 분위기를 읽고 당황하는 눈치였다. 겨울의 급한 모습을 처음 본 탓이었다. 그래도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람들을 불렀다. 흥에 겨워있던 좌중도 이 모습을 보고 대번에 조용해진다. 마침내 모인 사람들은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었다. 간부의 범위를 연철이 적당히 해석한 결과였다. 나쁘지 않았다. 겨울은 최대한 간결하게 압축해서 상황을 전달했다. 민완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기침을 몇 번 했고, 장연철도 표정이 굳었다. "어, 작은 대장님. 그러니까......새벽에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신 거죠?" "맞아요. 확실하지는 않아도, 경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유라 씨와 진석 씨는 당장 막사로 가세요. 무장하고 연병장에서 기다려요. 탄을 불출 받은 뒤에 찰리 중대에서 적당한 사람 한둘 붙여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난민구역을 진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세요." 유라와 진석은 아직 자체적인 상황판단능력이 부족하다. 찰리 중대에서 간부급 병사를 지원받는 건 필수적이었다. 겨울의 시선이 이번엔 장연철과 민완기를 향한다. "그리고 부장님들."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민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맡겨두고 가시지요. 크흠. 대장님이 항상 모든 일을 도맡을 순 없습니다. 이럴 때 일 하라고 장 부장님과 절 뽑아두신 거 아닙니까." "......." 겨울은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수긍했다. "알았어요. 두 분을 믿을게요." 이제 소년 장교는 탄약고를 향해 달린다. 오히려 피어스 상사보다 먼저 도착했다. 나중에 나타난 상사는 겨울을 보고 조금 놀라워했다. "아까 말한 일들이 그리 간단할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의외로 빨리 오셨군요." "괜찮은 분들이 절 도와주시거든요." "허허." 상사는 짧게 웃고, 겨울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탄약고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은 역시나 아는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한 명은 더더욱 잘 아는 입장이다. 매튜 코헨 병장. 그는 겨울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 61 [61화] #함정 (5), 캠프 로버츠 피어스 상사는 전시상황의 융통성과 비공식적인 수단으로 탄약고 문을 열었다. 군수과 소속 중사 한 사람의 협조가 컸다. 그러나 역시 의심을 피할 순 없었다. 찰리 중대가 꺼내가는 무기와 탄약이 어지간히 많아서, 탄약고를 지키던 병사들이 못내 궁금한 기색들이다. 선임 경계병인 코헨 병장이 피어스 상사에게 묻는다. "세상에......유탄까지는 그렇다 치고, LAW에 클레이모어에 777호까지....... 무슨 훈련을 하시길래 이렇게나 필요하신 검까?" "이건 비상시를 대비한 탄약불출 훈련이기도 해. 더 이상은 신경 끄게, 코헨." "아, 넵!"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코헨과 다른 한 명이 그대로 입을 다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겨울에게 슬금슬금 다가온다. 코헨 외의 다른 한 명도 아는 얼굴이다. 겨울이 아니었으면, 파소 로블레스에서 전사했을 사람들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코헨이 슬그머니 웃으며 겨울을 불렀다. "바나나 소위님." "왜요, 초코 볼 병장." 병장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주위가 어두운지라, 하얀 이가 더욱 도드라진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말했잖아요. 훈련이라고." "에이, 그러지 마시죠. 저도 눈치가 있는데요. 저랑 소위님 사이 아닙니까?" 전에 봤을 때랑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하긴,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는 건 아니지. 코헨 병장의 사각에서 피어스 상사가 턱짓을 보냈다. 겨울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일단은, 조금 더,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 겨울은 적당한 농담으로 어울려주었다. "모르겠네요. 병장이랑 제가 어떤 사이인지." "어허! 이 소위님 이거 큰일 내실 말씀을. 같은 전장에서 목숨을 나눈 전우를 섭섭하게 하시면 곤란하죠. 그러지 마시고, 저한테만 슬쩍 귀띔해주십쇼." 능청을 떠는 흑인 병장에게, 이제, 겨울이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한다. "알려드리면, 도와주실래요?" "읭? 제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까?" "네. 믿고 말씀드리는 거니까, 나 몰라라 하면 평생 원망할 거예요." 말 속의 뼈를 느꼈는지, 두 사람의 안색이 조금 굳어진다. 잠시 공백을 두고, 코헨 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뭔진 아직 모르겠지만, 물소위님에게 이 매튜 코헨이 필요하다 이거 아닙니까? 하! 분부만 내리시죠. 부랄 두 쪽이랑 똥꾸멍만 빼고 뭐든 다 내드리겠습니다." 상사보다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겨울의 특별한 위치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사적으로 거리감 느끼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엿보였다. 겨울은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병. 당신은 어때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절 믿어주시겠어요?" 이쪽은 반응이 사뭇 달랐다. 발을 척 모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몇 번이라도 괜찮습니다, 소위님." 같은 걸 보더라도, 감상은 사람마다 다른 법.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에 힘입어, 병사는 겨울이 그동안 쌓은 행적에 과도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아까부터 코헨의 태도가 못마땅한 기색이기도 했다. 에이미가 언급한 에이블 중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중대장이 그 모양이라 보는 반사이익도 있을 터.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애크릿지." 단순한 악수인데, 병사는 크게 기뻐했다. 처음부터 사정이 허락한다면 에이블 중대 쪽에서도 사람을 끌어올 계획이었다. 겨울이 제기하는 우려에 쉽게 공감한 두 병사는, 주어진 역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코헨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 "옘병. 하여간 높으신 분들은 너무 느긋하다니까. 안 그렇습니까? 교육 자료만 봐도, 「트릭스터」 새끼들을 얕보면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걱정 마십쇼. 확실한 애들만 끌고 오겠습니다. 소위님 부탁이라면 애쉬포드 그 양반도 곧장 튀어올 걸요?" 애쉬포드 하사. 파소 로블레스 보건소에서 처음 만날 때가 기억난다. 팔 부러진 채 몰핀 낭비하던 사람이었다. "그 분, 부상은 다 나으셨나요? 그 뒤로 못 뵈었던 것 같은데요." "며칠 전에 복귀했죠. 몸뚱이 하나는 튼튼한 양반이라 괜찮슴다. 아직 깁스는 안 풀었지만, 그래도 할 거 다 하던데요 뭐! 여자도 잘 꼬시고!" 애크릿지 쪽 표정을 보면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괜찮겠지, 생각하는 겨울. 우호적인 간부라면 한 사람이 아쉬운 입장이었다. "경계근무 끝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모아서......어, 연병장으로 가면 됩니까?" "네. 차량이 거기 있으니까요." "알겠슴다. 얼마나 올지 기대하고 계시죠. 캘리포니아 사나이들의 전우애를 보여드리겠슴다." "신중하세요. 어찌되었든 기본적으로는 항명이에요. 보고도 없이 움직이는 병력을 어느 상관이 좋아하겠어요? 들키면 안 돼요. 별 일 없다면 탄약 도로 집어넣고 시침 뗄 계획이거든요. 없었던 일로 만드는 거죠." "거 참, 잔소리가 우리 할머니 같으십니다. 장교가 되면 어쩔 수 없는 겁니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웃어줘야겠다. 겨울의 표정에 만족한 코헨이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주먹을 내밀기에, 겨울도 주먹으로 부딪혀준다. 연병장에는 차량들이 중대별로 세워져있었다. 탄약을 가져와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에이블 중대 인원이 합류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다. 거의 1개 소대 급이었다. 장교는 없고 거의 다 병사들이었다. 최선임자인 애쉬포드 하사가 캡스턴 대위에게 경례했다. "저희가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부담스러웠을 텐데 와줘서 고맙네. 병력에 여유가 생기니 한 결 더 안심이 되는군." "저희라고 자다가 골로 가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것도 성탄절 새벽에 말입니다." 하사는 전투태세를 갖춘 찰리 중대를 한 번 돌아보고는, 겨울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다시 말한다. "그래도 별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소대장이 자기 따돌렸다고 화낼까봐 걱정됩니다." "음, 어쩔 수 없지. 실제로 교전이 발생할 경우, 자네들은 각 중대가 전투준비를 갖출 때까지 각 중대 주둔지를 엄호해주게. 가장 걱정되는 건 기습이거든. 병력 전체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해줬으면 좋겠어." "지당하십니다. 비상이 걸렸는데 저희가 없어도 당황하겠죠." 자기 임무를 확인한 하사가 겨울에게 다가왔다. "제대로 된 대화는 파소 로블레스 이후 처음인가 봅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신 걸요." "퍼플하트를 받았죠. 소위님 덕분에 특진은 못 했습니다만." 퍼플하트는 전투 중의 부상을 기리는 훈장이다. 특진은 전사자에 대한 예우였고. 우스갯소리를 더한 그가 진심으로 인사했다. "그때 몰핀을 빼앗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그땐 너무 힘들기도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던지라......있는 거 다 놔버리고 확 가버릴까 생각했었거든요. 이미 맞은 게 있어서 제 정신이 아니었죠." 이라크나 아프간처럼 생지옥으로 파견되었던 미군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퇴역하면 마약중독자 신세라, 적응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다가 경찰에게 사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미국의 사회문제중 하나다. 그걸 막아주었다고 고마워하는 것이니 겨울이 받을 만 했다. 그저 이렇게 말해준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네, 정말입니다." 그는 돌아서다가 말고, 겨울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소위님. 할 일 없이 누워서 소위님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만......." TV에 나온 걸 말하는 모양이다. 겨울이 귀를 기울이니, 그는 겨울을 걱정했다. "앞으로는 적당히 뛰어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이죠?" "데브그루(DEVGRU)라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군인들인데, 일을 워낙 잘 하니까 상부에서 온갖 일을 다 맡긴 겁니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도 막 쓰다보면 망가지는 법이죠. 다들 정신이 상해서 고생깨나 했다더군요. 전 소위님이 그렇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할 말이 없어 그냥 웃어주자, 하사가 자기 말을 마무리 짓는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번 일이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도 그래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하사가 에이블 중대원들과 함께 제 위치를 찾았다. 이후로는 줄곧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겨울은 소방수였다. 급한 불부터 끄는 역할. 임무와 담당구역이 확실하게 정해진 다른 간부나 병사들과 달리, 스스로 판단하여 원하는 장소를 지원하도록 되어있다. 어찌 보면 가장 힘든 역할이다. 그러나 캡스턴 대위는 겨울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력이라고 생각해서 맡긴 임무였다. "이대로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군요." 같은 팀으로 편성된 래치먼 병장의 중얼거림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겨울도 확신은 없다. 징조는 충분히 많았고, 예감은 강력하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새로운 특수변종이 출현한 뒤엔 간빙기가 시작되곤 했었다. 그 길이가 정해진 건 아닐지라도, 벌써 끝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생존감각」의 경고도 반드시 옳은 게 아니다. 주어진 정보들이 충분한 개연성을 형성할 때, 「생존감각」은 허구의 죽음을 경고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모자란 것보단 넘치는 게 낫지.' 과유불급이라지만, 준비만큼은 다르다. 최악의 사태는 준비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 같은 차량의 병사들은 겨울의 과거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도대체 이 인간이 뭘 하고 자랐기에 이런 인간흉기가 되었나 하는 궁금증들이었다. 관제 AI가 권장하는 키워드, 문장들이 있었으나, 겨울은 대답 대신 미소를 만들어 무마했다. 대화의 맥은 거기서 끊어진다. 애초에 공통분모가 별로 없는 사이였다. 병사들끼리 실속 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겨울은 열린 창문에 팔을 얹고 밤하늘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맑음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먼저 사라지고, 다음으로 시간이 사라지고, 거리가 사라지고, 마침내 별과 하늘만 남는 이 기분. 깨끗한 밤하늘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생전의 도시에선 공감할 사람이 몇 없겠지만. 그 세계에서 보았던 별들은, 먹먹한 눈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별에 소망을 담곤 했다. 별이 눈물 같았던 것은, 별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다른 세계의 관객들도 잠잠했다. 아까도 그랬다. 야시경에 밤하늘을 담는 순간, 그들의 메시지는 더 이상 결핍된 삶에, 충족되지 않은 욕망에 찌들어있지 않았다. 내면이 점점 더 가라앉는다. '이대로 새벽까지 볼 수 있었으면.' 쿵. 별안간 난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다. 겨울이 돌아보니, 졸음에 겨운 운전병이 핸들에 머리를 박은 것이었다. 병사들이 가볍게 욕설을 섞어 투덜거리고, 운전병은 민망해하며 반발했다. 이들의 욕은 어디까지나 친분에서 우러나온다. 겨울이 말했다. "경적이 안 눌려서 다행이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수, 래치먼 병장이 거들자, 운전병은 겨울을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 병사들은 순서를 정해 조금씩 눈을 붙이기로 했다. 자기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하는데, 겨울을 부른다. "소위님도 끼시죠." 겨울은 조용히 사양했다. "별이 밝아서요." "거 참 낭만적이십니다." 제안했던 후방좌석의 병사가 방탄모 안의 머리를 긁었다. 그러더니 래치먼 쪽에서 조심스럽게 묻는다. "원래 한 사람씩 재우려고 했는데, 소위님 안 주무실 거면 둘로 늘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저 혼자 깨있어도 괜찮고요." "에이. 그럴 순 없죠." 얼마 안 가, 겨울이 보는 별빛에 코고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30분씩 끊어 자는 병사들이 다섯 번을 교대했을 시간. 깊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코골이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깨애애애액- 겨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소리 들었어요?" 같이 깨어있던 운전병이 어리둥절한 반응이다. "무슨 소리 말입니까?" 병사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그에겐 보정이 작용하지 않으니, 듣지 못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그 소리. 깨액! 깨애애액-! "기상! 기상! 기상!" 겨울이 소리치자 다들 벌떡 일어난다. 양옆의 차량들도 화들짝 놀랐다. 지붕 위에 엎드렸던 래치먼 병장은 자리에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우당탕. 난데없는 발길질에 운전병이 욕설을 내뱉는다. 그리고 묻는 말. "어느 쪽입니까?!" "저쪽! 새장이 있는 방향!" "네? 그쪽은 기지 내부잖습니까? 그럴 리가!" 운전병이 기겁을 했다. 겨울도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트릭스터」 외의 다른 변종이, 어떻게 캠프 내부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미리 시동을 걸어놨으므로 반응은 대단히 신속했다. 엔진 소리가 급격히 올라간다. 변종들의 소리도 함께 높아졌다. 처음엔 아기 변종들뿐이었는데, 이제는 일반변종들의 괴성도 뒤섞였다. 급기야는 억눌린 총성과 비명까지. 필시 새장을 지키던 경계병들의 단말마일 것이었다. "경적을 눌러요!" 겨울의 외침. 의도를 깨달은 운전병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댔다. 다른 차량들도 합세하여, 캠프 전체에 위기를 알린다. 중대 채널에서 무전이 폭주했다. 직접 보지 않아도, 경계위치와 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숨 헐떡이는 병사들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캡스턴 대위가 통제실에 비상사태를 보고하는 무전도 엿들을 수 있었다. 달리는 도중, 겨울은 가시거리를 배회하는 변종들을 발견하고, 5초 만에 여섯 놈의 머리를 날렸다. 팔 흔들고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걸 보고 변종인줄 알았다. 피부는 창백할 뿐 문드러지지 않았다. 감염 후 경과한 시간이 짧다는 증거였다. '아기 변종이 잠입해서, 새롭게 감염시킨 건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향하던 방향으로부터 질척한 폭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푸드드득- 갑작스레 험비의 시동이 꺼졌다. "억? 이게 왜 이래?" 핸들에 부딪힌 운전병이 곧바로 재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당장은 푸득거리기만 할 뿐, 동력이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텅, 텅 소리를 내며, 인근의 전등이 모조리 나가버린다. 무전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소음을 내더니, 그대로 침묵해버린다. 조금 전까지 바쁘게 오가던 모든 교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녹색 선명하던 트래커 모니터까지 암전하여, 주위에 인공적인 빛이 하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야시경은......다행히 작동하네.' 노이즈가 끼었으나, 아직 쓸 만 한 상태다. 겨울이 개인장비를 확인하는 사이, 운전병이 기어코 재시동에 성공한다. 마침내 도착한 새장은 문이 열린 채였다. 온 몸으로 기어 나온 듯 자국을 남긴 「트릭스터」는, 몸통이 안쪽에서 터진 것처럼 죽어있다. 래치먼 병장이 얼쩡거리는 변종들에게 중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총성이 거리를 두고 겹쳐진다. 밤의 어둠 저편, 캠프 외곽에서 번쩍이는 수십 개의 총구 화염들. 그리고 그보다 더 밝게 번쩍이는 번갯불들. 그것들은 캠프 밖에서 어른거린다. 명백히 지뢰가 터지는 섬광이었다. 공격이 시작되었다. # 62 [62화] #함정 (6), 캠프 로버츠 "와, 씨팔! 방금 그거 EMP 아닙니까?!" 후방좌석의 병사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전자기충격파(EMP)는 범위 내의 모든 전자기기를 무력화한다. 그것 말곤 이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충격적이다. 겨울은 생각했다. '빛이 필요해.' 조명탄 지원이 급했다. 닥쳐올 혼돈을 막으려면, 어둠부터 몰아내야 한다. 무전기를 회복시키려고 애쓰는 겨울. 군용 장비는 일정한 EMP 내성을 지닌다. 역시나, 몇 번 시도하자, 차량 탑재 무전기에 전원이 들어왔다. 가동되기 무섭게 잡음이 새어나온다. 방해전파가 있는 모양. 캠프 내부의 교신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외부하고는 어렵겠다. 겨울이 수화기를 잡는 순간. 콰앙! 쾅! 쾅! 박격포 진지 쪽이 세 차례 번쩍였다. 수 초 후, 하늘에서 조명탄 세 발이 연속으로 터졌다. 각각의 조명탄은 촛불 52만 5천개의 밝기로 타올랐다. 낙하산에 매달려 서서히 떨어진다. 동시에, 겨울은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넓게 보고 빠르게 쏜다. 머리 다섯을 날리는 데 총탄 여덟 발이 필요했다. 시야가 확보되었어도 다른 표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안쪽에 남은 변종은 더 이상 없거나, 있더라도 수가 적을 것이다. 그렇다. 「트릭스터」가 잡혀온 시점부터 이 사태가 터지기까지의 짧은 시간, 감염체를 늘려봤자 얼마나 늘렸겠는가. 그 이상의 확산이 가능했다면, 공격방식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난민구역에 대한 걱정은 놓기로 했다. 두 부장, 특히 민완기는 「겨울동맹」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했을 것이다. 우호 조직뿐만 아니라, 적대 조직들도 대비하도록 했겠지. 그렇다면 소수의 변종은 머릿수만으로 제압 가능하다. "저쪽으로!" 겨울은 총성, 폭음이 가장 요란한 방향을 가리켰다. 운전병이 곧바로 핸들을 꺾는다. 캠프 울타리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서북쪽부터 남서쪽에 이르는 경계에서의 전투가 치열했다. 변종들은 산악지형과 강변 수림지대의 연속선을 이용해 캠프로 접근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선 항공정찰을 벗어날 길이 없다. 교전 현장에 도착한 뒤, 겨울이 짧게 교신했다. 현재 위치를 알리는 것이었다. 진지를 점령한 병사들은 겨울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댔다. 환하게 밝혀진 밤, 몰려오는 적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 겨울도 가세한다. 다른 병사들과 차별화된 단발사격. 툭, 툭, 툭. 방아쇠를 가볍게 당길 때마다, 반드시 한 놈의 변종이 죽어 넘어진다. 탄약을 아끼려는 건 아니었다. 박스 채로 쌓아두고 쏘는 것이니. 명중률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워낙 많이 몰려와서 긁는 대로 다 맞았으니까. 조준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미친 듯이 갈기는 게 속편하다. 문제는 과열이었다. "발사속도 조절해요! 총열 터지는 꼴 보고 싶어요?!" 소리 지르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겨울은 진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정신없는 병사들을 일일이 두드려 총신 과열을 경고했다. 뜨끔한 병사들이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교전 시작부터 지금까지 연사로만 긁어댄 사람도 있었다. 희미하지만, 총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날이 추워서 다행이다. 여름이었으면 벌써 터졌을 것이다. "티투스 이병! 탄창에 총알이나 채워요! 거기 당신! 오르시 일병! 당신도!" 미리 쌓아둔 탄창은 조만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겨울이 이름표를 보고 지시하자, 당황한 병사 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총을 쏘는 것도 아닌데, 자세 낮추고 무릎으로 기어서 버려진 탄창들을 모은다. 어쩔 수 없다. 평소에 그렇게 훈련 받았으니. 오히려 실전에서 훈련 받은 대로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대단한 거다. 미군의 훈련이 그리 허술하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겹치지 않게 쏴요! 한 순간 몰린다고 너무 휩쓸리지 말고요!" 보이는 대로 쏘느라 담당 정면을 망각한 병사들 때문에, 화력이 불균형하게 쏠리고 있었다. 한 번 그러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들이 자기 역할을 되찾을 때 까지, 겨울이 간극을 막아준다. 험비 세 대가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화력도 큰 도움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50구경 중기관총의 사격음은, 가까이서 들으면 줄지어 터지는 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 화력도 마찬가지. 애초에 탄부터 굵어, 둘 이상 관통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온다. 사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시체만 즐비하게 남았다. 변종들이 밀집하지 않아서 아쉽다. 충분히 뭉쳐있을 경우, 250발들이 탄통 하나로 1천 개체 죽이기도 가능하다. 물론 어려운 기대였다. 변종들도 슬슬 지능을 높여가는 시점이니까. 한편, 겨울이 있는 진지에서는 소총 사수 하나가 급하게 수통을 풀었다. 달아오른 총열에 쏟아 붓는 것이었다. 달궈진 쇠와 찬 물이 만나, 챠아아아- 하고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젠장! 탈레반 새끼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프간 참전용사였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하긴, 보이는 게 너무 압도적이다. 철조망 너머 어디를 보더라도, 산개해서 달려오는 변종들뿐이다. 조명탄이 한 번 뜰 때마다 새롭게 환해지는 그 얼굴들이 끔찍하다. 겨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침착해요! 아직 잘 막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의 공백을 채운다. 일반 병사들보다 한 탄창으로 길게 버티는 겨울은, 화력의 공백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옆쪽 병사는 황당한 표정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조준하는 것마다 겨울이 머리를 날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까운 순서대로,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겨울의 사격이 그치길 기다려 다른 방향을 노리며, 병사가 악을 쓴다. "대체 어떻게 그리 쏘십니까?" "여유를 가져요!" "여유요?! 이 상황에?!" 그 병사는 5초 만에 탄창이 비었다. 이런 식이니 총열이 남아날 리 없고, 탄창도 부족해진다. 탄창 채우기에 전념하는 병사가 있어도 한참 모자랐던 것. 더 이상 갈아 낄 탄창이 없자, 그는 냅다 유탄을 쐈다. 퉁! 폭발이 변종 넷을 휩쓸었다. 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놈은 지뢰를 밟았다. 도약식이다. 변종의 머리보다 높게 치솟은 지뢰가, 빠악! 하고 터졌다. 둥글게 일어나는 흙먼지와 피 안개. 그것은 조명탄 불빛 아래 너무도 선명했다. 직접적인 살상반경은 30미터 남짓. 그러나 파편이 튀는 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다. 변종 수십 마리가 휘청거리거나, 넘어졌다. 넘어진 것들은, 다시 일어나 달려오는 모습이 피에 젖어있다. 가차 없이 구르느라 벗겨진 살점들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조명탄 사격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어.' 거리는 인간의 무기다. 변종들은 어둠에 힘입어 지뢰지대의 절반을 뚫고 들어왔다. 이쪽의 대응이 몇 분만 늦었어도, 벌써 철조망까지 뚫렸을 것이다. 그 몇 분 차이로,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철조망 너머의 풍경이 잔혹하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체들이 깔렸다. 머리 위 고공에서 제트 엔진 소리가 지나갔다. 통신 두절을 수상히 여겨 날아왔을 터. 그러나 당장은 공군이 소용없었다. 폭탄을 떨구기엔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Danger Close.) 날이 밝고서 근접지원을 한다면 모를까. 우릉 우릉 하는 땅울림이 발끝을 타고 올라온다. 박격포의 화력이었다. 포탄 터지는 소리는 거리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그것을 자동으로 분류하는 것이 「전투감각」이다. 만약 포격 지원이 어느 한 방면으로 집중된다면, 곧 그 방향의 위기를 뜻할 터. 겨울은 「전투감각」이 전하는 「통찰」을 읽었다. 모든 방면에서 균등. 즉, 특별히 밀리는 방향이 없다는 뜻이다. 혹은 모든 방면에서 밀리던가. 하지만 이곳 상황을 보면 후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 이쪽 방면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겨울이 재빨리 험비에 올라탔다. 교신을 듣기 위해서다. 겨울의 개인용 무전기는 아직까지 먹통이었다. 통신병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동안의 교신을 요약하는데, 대단치 않았다. 정말 급한 일이 있었다면 겨울에게 바로 달려왔을 것이다. "상황은 안정적입니다. 조금 전 화기중대가 박격포 진지를 인수하면서, 모든 중대가 전투에 가세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막는 데 문제가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난민구역 쪽은 어때요?" "별 이야기 없는 걸 보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체크 포인트마다 병력을 증강해서 통제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변종이 소수 발견되긴 했는데, 난민들끼리 스스로 때려잡은 뒤였다더군요." "좋네요." 대비시킨 보람이 있다. 그러나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크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짐승의 포효. 「그럼블」이다. 멀리 있어도 확연한 몸집. 강변으로부터 기어오르더니, 돌진 한 번으로 지뢰 지대의 경계까지 도달한다. 그러고서 다시 포효하며, 다음 패턴의 준비단계에 돌입한다. 겨울이 곧바로 하차하여 정조준했다. 조정간은 연사. 한 탄창의 2할을 비워, 돌진 패턴에 들기 전에 입 다물도록 만들어줬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저 밖에 있으니 접근해서 처리하긴 어렵고,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순 없었다. 돌진 한 번이면 지뢰지대에 탄탄대로가 생길 판이었다. 병사들이 엉겁결에 「그럼블」에게로 화력을 집중하는 중이다. 대부분 몸통에 맞는다. 낭비였다. 공백이 생긴 다른 방향에서 변종들이 밀고 들어온다. 겨울이 날카롭게 외쳤다. "제대로 못 쏠 거면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막을 테니까!" 화력의 공백지대로 변종들이 밀려들었다. 막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병사들이 산탄지뢰를 터트렸다. 철조망에 붙어있던 클레이모어 두 개가 터지면서, 거대한 부채꼴 두 개 범위의 변종들이 모조리 죽어 넘어졌다. 대가도 있었다. 철그렁-! 안쪽으로부터의 사격으로 너덜너덜하던 철조망이, 산탄지뢰의 후폭풍으로 기어코 뜯어졌다. 일부는 병사들 머리 위로 휙 날아간다. 얻어맞는 사람도 있었다. 악재가 겹친다. 조명탄이 꺼졌는데, 꺼지기 전 다음 조명탄이 솟구치지 않았다. 하늘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이런.' 빛에 의지하던 조준이 깜깜해지고 만다. 「그럼블」의 위치는, 험비의 헤드라이트가 제대로 닿지 않는 거리. 아무리 겨울이라도 갑작스런 광량 변화를 무시하긴 힘들다. [크아아아아!] 포효를 끝마친 「그럼블」이 지뢰 폭발을 짓밟으며 달려온다. 원근감이 삭제되는 속도가 끔찍할 정도였다. 직선상에 있던 진지 하나가 그대로 박살난다. 회피가 늦은 병사 한 명이 허공을 날았다. 땅을 구르는 데,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투툭! 투툭! 투툭! 세 번 끊어 갈긴 여섯 발로 「그럼블」의 폭주를 저지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포효하는 순간, 겨울은 이미 핀 빠진 수류탄을 쥐고 있었다. 전력으로 던진 수류탄이 목구멍에 콱 부딪힌다. "전방! 전방을 막아요!" 위장이 폭발하는 「그럼블」을 등진 채, 겨울이 병사들을 정신없이 독려했다. 괴물이 정신 차릴 즈음 잠깐 돌아서서, 피와 내장을 토하는 놈에게 또 한 번 수류탄을 던져 먹였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몸속의 폭발. 코와 입에서 피분수가 튀었다. 파열된 안구가 돌출된다. "앞쪽을 보라고!" 겨울은 급기야 병사들을 윽박질렀다. 두려움에 휩쓸린 병사들이, 아직도 「그럼블」을 신경쓰고 있었다. 다른 방향에서도 포효가 들려온다. 아스라이 겹쳐지는 비명들. 후자는 분명히 인간의 것이었다. 병사들이 전면을 확실히 막는 걸 확인하고, 겨울이 험비에 탑승했다. "남쪽으로!" 운전병이 엑셀을 밟는다. 날카로운 공회전. 파앗- 때늦은 조명탄이 떴다. 포진지의 병사들도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쏴봐야 겨우 50초를 밝힐 뿐. 사이사이 어둠이 없으려면 45초에 한 번을 쏴야 한다. 조명탄 재고가 얼마나 남았을지 의문이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수백 발을 소모했을 것이다. 탄약고를 오가느라 죽을 맛일 터. 그러나 정말 죽는 것보다야 죽을 만큼 힘든 쪽이 낫겠지. 겨울이 야시경을 내렸다. 전면 차창 너머로 또 하나의 「그럼블」이 보인다. 반복되는 빛과 어둠 사이를 밀고 들어와, 마침 병사 하나를 위아래로 찢어버리는 중이었다. [카! 카! 카아아아!] 찢어진 사람을 휘두른다. 내장이 뿌려졌다. 겨울이 탄 차량에도 기다란 대장이 날아와, 방탄유리에 철썩 붙었다. 운전병이 속도를 줄이며 헛구역질을 한다. 완전히 정지하기도 전에, 겨울이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한 바퀴 굴러 용수철처럼 일어선 겨울은, 그대로 달리며 조준 사격 일곱 발을 박았다. 뒷걸음질 치는 거체. 그러나 「그럼블」은 혼자인 경우가 드물다. 일반 변종들이 겨울을 막아선다. 수가 너무 많다. 방어선 일각이 붕괴되면서, 방파제 넘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제까지 쓰러진 수를 감안하면, 변종들로서도 최후의 공세 격이었다. 다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겨울 혼자 쏴죽이며 뚫기는 힘겹다. 「그럼블」에게 먹이려던 수류탄을 변종 군집에게 던지고, 모래포대 쌓은 진지로 몸을 굴렸다. 폭발. 몸까지 울린다. 바로 눈앞에 상반신만 남은 변종이 있었다. 쩍 벌리는 주둥이에 개머리판을 물렸다. 그리고 대검을 뽑아 정수리에 박았다. 뼈 함몰되는 소리. 픽 튀는 뇌수. 그렇잖아도 죽어가던 놈이 그대로 끝장났다. 천둥을 닮은 포효가 뒤따랐다. 소총을 회수하며, 겨울이 전방으로 탈출한다. 직후, 진지를 박살내며 「그럼블」이 스쳐지나갔다. 괴물의 팔이 등을 스쳐, 소년은 잠깐 중심을 잃었다. 병사의 시체 위로 넘어졌다. 자극을 받았는지, 시체가 눈을 떴다. 변종이 된 병사가 겨울을 본다. 그 목을 무릎으로 으스러뜨리며 무릎 쏴 자세를 잡는다. 이제 곧 죽을 변종이 허우적거렸으나, 사격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침착하게 「그럼블」을 겨냥하여 쏴붙인다. 그리고 병사 변종에게서 수류탄을 뜯어내어, 「투척」한다. 「그럼블」 사냥법은 병사들도 교육받은 마당이다. 반병신이 된 「그럼블」에게 병사들 다수가 접근했다. 그새 겨울을 향하던 일반 변종들이 퍽퍽 부서져 나갔다. 험비의 중기관총 사격이었다. "개자식들아! 이거나 먹어!" 한 병사가 로켓 발사관(Mk.777)을 어깨에 올렸다. 기우뚱. 어긋난 무게균형. 탄두가 비정상적으로 크다. 변종 잡는 데 다른 거 필요 있겠느냐고, 화약만 무식하게 쑤셔 박은 흉물이었다. 아, 이런. 겨울이 눈을 감았다. 번쩍! 감고도 윤곽이 보일 만큼 밝은 폭발. 폭심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데도, 흔들리는 몸을 바로잡기 힘들다. 열팽창으로 만들어진 폭풍이 변종들을 무두질했다. 풍압으로 뼈를 무수고 내장을 파열시키는 무기다. 로켓 사격은 한 발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가 변종들 사이에 작렬한다. 광풍의 갈림길 사이에서 간신히 자세를 유지한 겨울은, 고작 몇 걸음 앞까지 굴러온 변종을 발견했다. 정상이 아니다. 눈은 둘 다 터졌다.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도무지 일어서질 못한다. 압력 탓에 세반고리관이 망가진 모양. 겨울이 숨 돌리며 총탄 한 발 박아줬다. 방어선을 회복한 병사들이 잔적을 소탕했다. 변종들의 시체가 너무나 많다. 겨울의 시선 닿는 곳에서만 천 단위로 죽어있다. 다른 방면에서는 최후의 「그럼블」을 잡아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통신병이 전했다. "마침 그쪽에 미사일 발사기가 있어서, 화력으로 찍어 눌렀답니다. 아무리 「그럼블」이라도, 대전차 미사일에 맞으면 팔이든 다리든 으스러지니까요." 통신병이 말하는 미사일(TOW)은 60센티 두께의 철판을 관통하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면 「그럼블」의 물리내성으로도 완전방어가 불가능하다. '「감마 그럼블」 이상이면 통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로 강화되려면 아직 멀었겠지.' 대부분의 방향에서 총성과 폭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겨울은 사태가 일단락되었음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단일 전투 치고 꽤 오래 긴장감을 유지한 탓이다. 특기할 것이 있다면 살아남은 변종들의 행동이었다. 특이한 패턴의 괴성이 번지더니, 소리 들은 녀석들 모두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조직적인 후퇴인지라 병사들이 어처구니없어한다. 심지어는 캠프 북쪽, 나시미엔토 강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아마도 전기를 다루는 「트릭스터」의 소행. 풍향마저 고려했는지, 연기가 캠프를 뒤덮었다. 무전을 타고 전해지는 제프리의 탄식. 「와, 진짜....... 기가 막히네. 아주 별짓을 다 한다. 짱 먹어라 변종 새끼들아.」 대신 방해전파는 사라졌다. 당연하다. 캠프에서 멀어지면서 계속해서 방해전파를 방출하면, 다음 순서는 전파 추적 미사일에 의한 죽음이었다. 혹시 모를 습격을 우려해, 캠프 병력은 추격에 투입되지 않았다. 한 고비 넘겼구나. 겨울은 총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 63 [63화] #읽지 않은 메시지 (4) [눈밭여우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이맛헬 : 조명탄 딱 터졌을 때 괴물들 바글거리는 거 보고 사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올드스파이스 : 먼치킨 패키지를 선물해도 받질 않더라. 진행자 새끼가 방송 끝내려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그 상황을 이렇게 극복하네. 처음부터 자신 있었나봄.」 「Владимир : Happiness from R U S S I A」 「내성발톱 : 진행자 애새끼가 존나게 재능충인 듯. 그래서 그런지 존나게 오만함. 시청자 퀘스트 다 걷어차고, 진짜 밥맛임.」 「이불박근위험혜 : 재능충 핵공감. 쉬벌 난 TOM 병쉰인 것도 서러운 데 컨트롤까지 딸리네. 아무리 돈을 써도 얘처럼은 못 하겠다고 생각하니 심각하게 우울해진다.」 「무자본무과금 : 병사들 반응부터가 차원이 다르잖아. 진행자 같은 애들은 아무 노력도, 고생도 없이 남보다 뛰어난 거겠지. 가상현실에서까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느껴야 하나. 재능충 다 뒤졌으면.」 「핵귀요미 : 닥치세요 병신들아. 남 재밌게 보는 방송에 왜 욕을 하고 지랄들이야. ㅗㅗ 진행자 완전 내 취향인데. 뇌둥둥이라서 아쉽다.」 「너는뭐시냐 : 핵귀요미 여자구나. 너 나랑 데이트 하자.」 「핵귀요미 : 꺼져.」 「SALHAE : 니들 다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이 방송 욕하지 마라. 진행자 멘탈 깨져서 방송 접으면 어떡하냐. 이게 내 비정규직 사축인생의 유일한 낙인걸.」 「흑형잦이 : 살해 넌 진행자한테 매번 물 먹으면서도 꿋꿋이 보는구나 ㅋㅋㅋ 징하다 징해.」 「SALHAE : 그러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떡이 아쉽긴 하다만, 더 이상은 떡만 치는 다른 방송을 못 보겠어.」 「SALHAE : 밖에서보다 이 안에서 더 살아있는 기분이야. 객관적으로 보면 괴물 투성이인 이쪽이 훨씬 더 지옥일 텐데, 차라리 이게 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내 삶이 더 어두운 것 같아.」 「폭풍224 : 일할 때보다 게임 방송이 재밌는 건 당연하지.」 「SALHAE : 그거랑은 좀 다르다만....... 잘 설명을 못 하겠다.......」 「まつみん : 마츠밍은 욕 하시는 분들 이해가 잘 안가요. 우울해하실 필요가 있나요?」 [まつみん님이 별 2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헬잘알 : 니가 이해하셈. 쟤들은 인생에서 즐거운 게 게임 밖에 없는 찐따들이라 저럼.」 「짜라빠빠 : 야 ㅋㅋㅋㅋ 딜 미터기 터진다. 근데 어째서인지 내 마음이 아프다.......」 「대출금1억원 : 헬잘알 너 왜 나한테 시비냐 ㅡㅡ」 「도도한공쮸♡ : 눈물이 흐르네여. ㅠ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게임은 열등재잖아. 형편이 부족해서 가성비부터 따지는 사람들한테는 게임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거지.」 「려권내라우 : 뭐래.」 「반닼홈 : 헬잘알 광역공격 오지구요, 오지면 오지명?」 「캐쉬미어 : 반닼 컨셉 꼬라지......아재, 진짜 그거 언제까지 할 거요?」 「まつみん :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근데 그래도 역시 이해가 안 가요.」 「まつみん : 겨울 씨가 이렇게 말했었잖아요. 삶이 잿빛이면 웃기라도 해야 한다고.」 「まつみん : 전 이 말에 많이 공감했어요. 우리 일본도 사정이 좋진 않거든요. 그래도 웃으려고 많이 노력해요. 여러분도 웃어요. 웃는 사람들이 모이면 없던 행복도 생기지 않을까요?」 「まつみん : 이웃나라 친구 분들 힘내요! ╰(*´︶`*)╯」 「려권내라우 : 뭐야 이거. 손발이 오그라진다. 정신공격인가?」 「ㄹㅇㅇㅈ : 아냐. 그건 4만 년 간 가출했던 너의 동심이다. 받아들여.」 「분노의포도 : 마츠밍이 내 여자친구였으면 좋겠다....... 일본으로 가면 나랑 사귀어줄까?」 「まつみん : 유감! 마츠밍은 이미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분노의포도 : 뭐...라고.......」 「엑윽보수 :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내선일체로 간다. 일본을 정복하자.」 「한미동맹 : 일본을 공격한닼ㅋㅋㅋ」 [눈밭여우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SALHAE님이 별 1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BigBuffetBoy86 : 전투종족 한국인들이 재능을 따지고 있네. 그럼 우리는 어쩌라고. 너네가 가상현실을 점령하는 바람에 온 세계가 고통 받고 있다구.」 「Владимир : 맞다. 모스크바의 한국인 친구가 자기 게임 못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일대일 스커미쉬 붙었는데,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나만 죽었다. 30분 동안 0킬 75데스였다.」 「Владимир : 세상엔 정말 나쁜 까레이스키가 많은 것 같다.」 「BigBuffetBoy86 : 불쌍한 루스키 같으니. 그런 사기꾼을 친구라고 뒀어?」 「Владимир : 절교했다. 지금쯤 발트 해 밑바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BigBuffetBoy86 : 너네 루스키들은 농담이 너무 살벌해. :)」 「Владимир : 농담 아닌데.」 「헬잘알 : 외국인들아. 내 말이 맞다니까. 달리 즐거운 게 없으니까, 맨날 게임만 해대서 실력이 늘어난 거야.」 「groseillier noir :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너네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무언가가 있어. 황인종이라서 그런가?」 「Blair : 바게뜨 새끼, 드디어 우생학까지 익힌 건가?」 「groseillier noir : 아니, 실제로 인종별 차이가 있을지도 몰라. 생각해봐. 흑형들은 다리 사이에 흑염룡이 있잖아?」 「흑형잦이 : 흑염룡......여기에 공감하는 내가 싫다.」 「당신의 어머 : 닉값 ㅋㅋㅋㅋ 하긴 그것도 타고나는 거짘ㅋㅋㅋㅋ 재능이넼ㅋㅋㅋㅋ」 [믓시엘님이 별 3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믓시엘 : 늬들 자꾸 재능 재능 하는데, 난 실제로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진행자가 어느 정도냐? 보통 사람들이랑 차이가 많이 나나?」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아니, 난 재능 보다는 진행자의 마인드 문제라고 생각한다만.」 「まつみん : 마인드? 왜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쓰는 건 사람이잖음. 「개인화기숙련」은 기본적으로 조준속도랑 명중률 보정이고......「통찰」 같은 것도 진행자의 무의식적인 요구에 반응하는 거라, 쓰는 사람에 따라 방식이나 효율이 완전히 달라져.」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저 불평하는 놈들한테 진행자랑 똑같은 피지컬을 준다고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봄.」 「폭풍224 : 넌 또 왜 시비야?」 「흑형잦이 : 2222222」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시비는 무슨. 얘 전투 내내 다른 사람들 챙기는 거 봤지? 과연 얘가 재능만 믿고 독불장군으로 날뛰었어도 이렇게 말끔한 진행이 가능했겠어?」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이건 마음가짐의 차이야. 재능과는 다른 문제지. 물론 재능도 있겠지만, 100%는 아니다 이거다.」 「まつみん : 겨울 씨는 항상 다른 사람들 입장을 생각하는 것 같긴 해요.」 「まつみん : 그래서 더 멋져♡ (/ω\*)」 「분노의포도 : 마츠밍 너 남자친구 있다면서.......」 「まつみん : 괜찮아요. 제 남자친구는 NTR 취향이거든요.」 「분노의포도 : ?!」 「빌리해링턴 : NTR이라면......정녕 내가 아는 그것이 맞는가? 애인을 빼앗기면서 기모찌하는 그 또라이 병신 같은 취향?」 「まつみん : 가상현실에서의 NTR은 위험부담이 없다면서 남자친구가 먼저 권한 거예요.」 「まつみん : 사실 지금도 같은 채널 시청 중이랍니다! 숫기가 없어서 말은 안 하지만요.」 「한미동맹 : 세상에.......」 「무스타파 : 우리는 영원히 일본을 이길 수 없을 거야.」 「하드게이 : 무스타파, 포기하지 마라.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다.」 「폭풍224 : 아니, 그 전에......그런 취향에 어울려주는 마츠밍은 뭐냐. 설마 진행자에게 보여주는 애정 표현도, 사실 남자친구를 위한 연기였던 거냐?」 「まつみん : 데헷. 들켰다.」 「まつみん : 그래도 겨울 씨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에요. 절반의 연기, 절반의 진심이랄까요? 지금까지 본 진행자 중에 최고에요!」 「まつみん : 하지만 진짜로 사랑하는 건 남자친구 뿐이니까요!」 「SALHAE : 신이시여.」 「SALHAE : 당신이 창조한 세상은 왜 이런 꼬라지입니까?」 「퉁구스카 : 고오급 게임소설 ♚♚납골당의 어린☆왕자♚♚재미없음%% 선작시$$추천 필수☜☜동심100%※댓글 100만 개 달성시 1만 연참 !!! ♜할케기니아 씰브레이커♜역시나 재미없음¥ §§PIRATA§§★만화가 친구★던전의 주인님 삽화 그림%%순 나쁜 새끼@@@ 즉시이동 http://www.j****.com/n****ss/bookPartList.html?bookCode=1100090」 「Cthulu : 작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님이 별 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한국경제개혁위원회, 2042년 「위원 A : 지금 대한민국은 아주 심각한 제도적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세상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낡은 제도와 규제가 시대 변화를 도무지 못 따라잡고 있다 이겁니다.」 「위원 E : 동의합니다.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낡아 빠진 규제들이 남아있으니 참으로 문제입니다.」 「위원 B : 그렇죠.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41년 사무직 종사자의 97%가 가상현실에서 일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일반 사무직이 뭐 하러 현실의 사무실을 쓰겠습니까? 이게 뭘 뜻하느냐? 이 사람들은 출퇴근을 할 필요가 없어요. 교통비도 들지 않고, 시간까지 절약하고 있다 이거죠.」 「위원 E : 덕분에 주거환경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습니까? 옛날 사람들이야 출퇴근 감안해서 교통이 편리한 베드타운에 집중되고 그랬죠. 지금은 그렇게 몰려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사무실 수요도 거의 없고. 집값 떨어진 게 벌써 언젯적 일인데요.」 「위원 C : 어휴, 그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끔찍하네요.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나라가 아주 망할 뻔 했잖아요. 부도 난 은행이랑 회사가 몇 개였더라.......」 「위원 D : 당시에 고건철 회장이 그 매물 싹 쓸어다가 재산 뻥튀기 한 거 아닙니까. 사후보험이 뜨고 나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가상현실 허브로 발전하니까, 바닥을 쳤던 서울 땅값이 1년 만에 1,700% 폭등했던가요? 지금도 세계 최고의 땅 부자고. 개차반 독불장군이 운도 좋았지. 배가 아파요, 배가.」 「위원 C :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 양반 언제까지 혼자 놀겠대요?」 「위원 D : 혼자 한국 경제의 20%를 장악한 사람인걸요 뭐. 우리 같은 피라미들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요즘은 낙원그룹까지 탐내는 것 같던데, 큰 일이예요 정말.」 「위원 A : 자자, 본론으로 돌아옵시다. 주거환경까지 이야기 했었죠?」 「위원 E : 네.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가정집도 옛날하고 많이 다르죠. 넓은 공간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집은 좁아도 괜찮아요. 가상현실이 훨씬 더 쾌적하니까. 정말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됩니다. 경제적이죠. 사는 사람들은 닭장 같다고 하더군요.」 「위원 B : 닭장이라......유쾌한 표현이네요. 아무튼 교통이 편리할 필요도 없고, 크기가 클 필요도 없고. 주거비용을 옛날보다 한참 낮게 잡아도 되지 않을까요?」 「위원 C : 그건 식비도 마찬가지랍니다. 맛있는 건 가상현실에 얼마든지 있어요. 현실의 요리를 먹는 건 이제 사치죠.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는 줄이는 게 정상이고, 실제로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요. 에너지 팩이 식품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했으니, 식비도 과거보다 현격하게 감소한 상태에요.」 「위원 B : 하긴....... 유흥비도 없는 셈 치죠. 요즘 세상에 놀이공원을 가겠습니까, 아니면 해외여행을 가겠습니까?」 「위원 E : 즉 주거비, 교통비, 식비, 유흥비가 전보다 많이 줄었으니, 최저생계비를 산정하는 기준이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원 A : 맞습니다. 최저임금도 이제는 동결이 아니라, 인하를 고려할 때입니다.」 「위원 B : 사실 근무시간 연장이나 법정공휴일 축소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휴식시간이 실질적으로 많이 늘어났어요.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원 A : 국가 경쟁력은 갖출 수 있을 때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은 너무 많은 기회를 낭비하고 있어요.」 「위원 B : 밀어 붙입시다. 올해엔 어떻게든 경제개혁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 64 [64화] #세븐스 캘리포니아, 캠프 로버츠 (1) 캠프 방어전이 일단락되자, 대대장이 중대장 이상 주요 간부들을 소집했다. 예외도 있었다. 대위 이상이 즐비한 자리에서, 일개 소위인 겨울은 계급만으로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하급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조금 불편해하는 사람은 몇몇 있었다. 대대장은 낯빛이 창백했다. 숙취가 느껴진다. 술에 찌든 체취가 조금 거북할 정도였다. 아마 성탄을 기념하며,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마신 것이겠지. 그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물었다. "보고해." 쉬어 자세로 도열한 간부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상황 수습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것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무작정 보고하라니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바깥은 아직도 급하건만. 이럴 땐 선임자가 떠밀리는 법이다. 에이블 중대장 마커트 대위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묻는다. "대대장님, 무엇을 보고하란 말씀이십니까?" "전부 다!" 대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작전과장은 도무지 아는 게 없더군! 이게 무슨 일이냔 말야! 당직을 섰으면 적어도 어떤 경위로 전투가 발생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교전 발생 후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지휘능력을 회복하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냔 말이야!" 그러더니 겨울을 가리켰다. "자네! 처음으로 위험을 보고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겨울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가 저 인간보다는 잘 알겠군! 자초지종을 설명해봐!" 삿대질 당하는 작전과장이 안쓰럽다.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대대본부 통신병은 아까부터 대대장을 보고 있었다. 통신이 회복되자 상급부대에서 대대장을 찾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아는 게 없어서 응대할 입장이 못 되니까, 대대장이 급하게 지휘관들을 집합시킨 것일 테고. 겨울이 보기에, 대대장은 일부러 더 크게 화내는 중이다. 방어전에서 있었던 모든 혼란과 피해, 치명적이었던 통제력 상실에 대하여,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내 책임이 아니다, 라는 암시.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서, 간부들도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대장은 더더욱 열심이다. 악순환이었다. 겨울은 공개처형에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했다. "저는 어제 3중대 1소대장 제프리 브라운 소위와 함께 이상전파 대응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정찰이었습니다만, 이상전파의 근원이 「트릭스터」일 경우 가급적 생포하거나 사살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거기까진 알아! 자네가 그 놈을 산 채로 잡아왔다지? 왜 위험하다고 생각했나?" "임무가 너무 쉬웠습니다. 일부러 잡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건 개인적인 느낌 아닌가?" "아닙니다. 먼저 아타스카데로에서 조우했던 동종은 감염된 아기들을 앞세워 저희 쪽의 화력을 시험하거나, 함정으로 유인하는 교활함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녀석은 단독으로 움직였고, 함정도 없었고, 잡힌 뒤엔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확실히 이상하군. 아주 이상해." 대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겨울은 조금 기다린 뒤, 다시 말을 잇는다. "이런 일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벌어질 순 없습니다. 여러 건의 헬기 실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트릭스터」가 의도적으로 잠입했다고 보고, 당직사령에게 기지 경계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도 귀관의 요청이 거부되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작전과장은 찰리 중대와 에이블 중대 일부가 가장 먼저 대응했고, 명령하기도 전에 전투배치 상태였다고 하던데, 정작 그 이유는 모르더군. 이것도 자네가 관련되어 있나?" "예. 제가 캡스턴 대위와 일부 에이블 중대원들을 사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사적으로, 부분을 힘주어 말하는 겨울. 책임소재 가지고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강한 암시였다. 이제 와서 누가 소년 장교의 독단을 문제 삼겠는가? 대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캡스턴 대위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대장님. 보고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사태수습이 급합니다." "사태수습? 교전은 이미 종료되지 않았나?" "강변을 따라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서둘러 진화해야 합니다." "어차피 강변과 기지 경계 사이엔 불모지가 있어. 기지가 위험하진 않을 텐데?" "그래도 위험합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화력 운용에 차질이 빚어지니까요. 근접항공지원은 물론이고, 당장 박격포 사격부터 지장이 생길 겁니다. 추가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고요." 포탄이 어디 떨어지는지 확인하지 못하면, 박격포 이상의 장거리 화력은 쓸모가 사라진다. 대대장이 되물었다. "공격이 또 있을 거라고 보는가?" "방어전을 치르는 내내 방해전파가 걸려 있었습니다. 즉 공세를 주도한 또 하나의, 혹은 다수의 「트릭스터」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방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경고였다. 놈들의 교활함을 감안하면, 방어전 성공으로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노릴 수도 있었다. 자욱한 연기는 경계능력을 줄이고 교전거리를 축소한다. 그러나 대대장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이 상황에 병력을 내보내는 것도 위험하지 않겠나?" 이번엔 브라보 중대장, 러셀 에셔가 말했다. "내부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국도 건너 급수시설이 위험하기도 하고요. 불이 살리나스 강 동쪽 본류로 번지면 진화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북쪽에서 길게 내려오는 살리나스 강은, 캠프 로버츠 북쪽 약 3킬로미터 지점에서 동서로 갈라진다. 서쪽 지류는 화재가 시작된 나시미엔토 강이고, 동쪽이 살리나스 본류에 해당한다. 문제는 캘리포니아에서 십년 이상 계속된 가뭄. 나시미엔토 강은 살아남았으나, 동쪽 본류는 바닥까지 말라붙었다. 최근에 내린 비 덕분에 수량이 없지는 않다. 그래봐야 동네 여울 수준. 강이 성할 때 생성된 넓은 수림지의 화재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사람을 투입해도, 때가 늦으면 막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거듭된 요청에 대대장이 결심을 굳힌다. 화제를 돌린 보람이 있어, 아까의 흥분은 다소 가라앉은 뒤였다. 결심하고 나니 명령은 빠르게 쏟아졌다. 겨울로서는 처음 보는 면모였다. "좋아. 그럼 난민들을 투입하지. 에이블과 찰리가 맡아. 에이블이 서쪽, 찰리는 동쪽이다. 중대장들 판단 하에 인력을 동원하고, 병력을 배치해 진화 현장 보호와 외곽 경계를 맡도록. 차량은 필요한 대로 쓰고. 급수차 외에도 전에 회수한 소방차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샌 미구엘에서 한 대를 확보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내는 게 낫겠나?" "서쪽으로 보내시죠." 캡스턴 대위가 즉답했다. 이런 걸로 마커트 대위와 신경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브라보와 델타는 캠프 방어와 난민 통제를 맡는다. 군수과는 EMP 대책을 마련하고 시설복구를 서두르도록! 바로 시작해!" "대대장님, 의견 있습니다." 소년 장교의 한 마디가 모두를 주춤하게 만든다. 대대장조차도. 아까 목소리 높일 때도 겨울에게는 강하게 나오지 않았다. 심리적 부채감 탓이었다. 시간을 아끼려는 겨울이 허락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시작했다. "「트릭스터」가 여기서만 잡힌 게 아닙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습격은 다른 주둔지에서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을 대비해 구조대 파견을 준비해둬야 하지 않을까요?" 다들 당장의 사태에 대처하느라 간과한 문제였다. 생각을 못 했거나, 혹은 지금도 힘들어서 일부러 외면했거나. "중대장들은 일단 나가봐." 대대장이 손짓했다. 중대장들이 경례를 붙이고 뛰어나갔다. 그 와중에 캡스턴 대위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맞춘다. 겨울을 걱정하고 있었다. 모두 나간 뒤 대대장이 작전과장에게 묻는다. "사령부 외 다른 쪽에서 들어온 소식 있나?" "포트 헌터 리겟, 시에라 보급창, 바스토우 보급창, 해병대 산악전 캠프, 반덴버그 공군기지는 무사하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 외 다른 곳은 정보가 없습니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는?" "연락 두절입니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의 캠프는, 도시와의 거리가 가깝긴 하지만, 캠프 로버츠보다 더 큰 규모의 난민 캠프 및 시민 보호구역이 있던 곳이다. 그런 만큼 주둔 병력도 규모가 컸다. 「Seventh California」 1대대도 그곳에 있었다. 대대장에게도 같은 연대 동료들에게 특별한 의식이 있을 것이었다. 비록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있으나, 샌 루이스 오비스포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 주둔지가 캠프 로버츠였다.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곳 「Seventh California」 3대대에서 지원을 나가줘야 한다. 대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단순히 통신망을 아직 복구하지 못했을 뿐이겠지. 연대 전투단이 주둔했던 곳이야.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 없어." 겨울이 재차 지적했다. "기습이라면 혹시 모릅니다." 이제 대대장이 한숨을 쉰다. "설령 그렇더라도, 여력이 없다. 누적된 손실에 비해 보충된 병력이 적어. 캠프의 안전을 고려하면 내보낼 수 있는 병력은 얼마 안 돼. 무리해도 모자란 한 개 중대인데, 연대급 전투부대조차 감당 못한 적을 상대로 중대 하나가 뭘 할 수 있겠나?"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으음......." 잠시 후, 대대장이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귀관 의견은 검토해보겠네. 일단 찰리 중대를 돕게. 마커트야 중국인들과 친하니까 인력 동원에 문제가 없겠지만, 캡스턴은 아냐. 자네가 있어야 할 거야. 필요할 때 따로 호출하지." 만약 지원 병력을 편성할 경우 겨울은 반드시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므로, 겨울도 경례 붙이고 퇴실했다. 조금 전 대대장의 말을 곱씹어보면, 그토록 태만해 보였어도 캠프 내의 알력관계를 제대로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능력과 의지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가는 길에 군수과 병사들의 고된 작업이 보였다. 전자장비를 수리하고, 전선마다 절연체를 감은 뒤 다시 은박지로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난민구역에 도착해보니 찰리중대원 몇 명이 애를 먹고 있었다. 2소대 모젤 하사는 겨울과 썩 가까운 편이 아니었는데, 보자마자 굉장히 반가워했다. 간밤의 영향도 있을 테고, 지금 처한 상황 탓도 있을 것이다. "소위님, 잘 오셨습니다." "아직도 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나요?" "아뇨, 그건 해결됐습니다. 여기 간부들이 잘 협조해주더군요. 다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이유를 물어도 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기 찝찝해서 중대장님이 저를 남겨두신 겁니다. 혹시나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텐트 한 동 한 동 다 수색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입니다." 모두가 입을 똑같이 다물었다면 좀 이상하고, 말이 통하는 몇 명에게 물었는데 답을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겠다. 의사소통 자체가 난관이다. 겨울이 답했다. "제가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이유를 알아보죠. 곧 뒤따를 테니 먼저 가보세요." "옙." 하사가 떠나자 장연철이 다가왔다. "오셨군요, 대장." 겨울은 그의 얼굴에서 초조함을 읽었다. "간밤엔 괜찮았나요?" "아, 네. 미리 경고해주신 덕분에....... 연락이 닿는 조직들에겐 다 알려줬고, 적대조직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대비했습니다. 민부장님께서는, 이번 일 덕분에 다른 조직에서 심은 사람 몇 명을 추가로 알게 되었다고 하셨고요." 그건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초조함의 정체는 아직 안 나왔다. 겨울이 다시 묻는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연철이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쉰다. "대장님께서 아시기 전에 저희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늦었어요. 말씀하세요." "......직접 보시는 게 낫겠군요.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겨울을 동맹 영역의 한 텐트로 안내했다.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겨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운데서 무기를 들고 시위하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휙휙 휘두르며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다가, 겨울을 보고 동상처럼 굳어진다. "대장......?" 겨울은 그녀 등 뒤에 누운 아이를 본다. 사지를 단단히 묶었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피부가 검게, 혹은 파랗게 변색되었다. 얼굴에는 물어뜯긴 자국이 선명하다. 겨울이 권총을 뽑았다. "하지 마!" 여자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겨울이 그녀부터 겨냥한다. 칼끝이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멎었다. 지켜보던 군중으로부터 한 박자 늦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침착하게 여인을 바라보던 겨울이, 총을 늘어뜨렸다. "아드님인가요?" 이 간단한 질문에 목이 메여, 여자는 차마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으으- 하고 흐느끼는 소리. 여기에 겹쳐지는 감염변종의 억눌린 괴성. 겨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장한 남자들이 많았다. 종종 몽둥이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억지로 제압하려고 한 모양인데, 얕게 다쳐 피 흘리는 사람도 보인다. 중상자는 없다. 과연 어머니는 강하구나. 저 많은 남자들을 상대로, 이제껏 시간을 끌었다니.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인데. 겨울이 말했다. "저건 더 이상 아드님이 아니에요. 아드님의 몸을 차지한 다른 무언가죠." 어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울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뭘 할지는 알고 계실 거예요." "아니......못 해. 내 애는 아무도 못 건드려! 건드리면 죽어!" 눈이 반쯤 돌아가 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세요." "뭐?" "막고 싶으면, 절 찌르시라고요." 「생존감각」이 모든 수단으로 겨울에게 강력히 경고했다. 신경 저릿한 전율, 적색 선명한 증강현실 경고, 공격 예측 등. 확률은 반반이다. 절반의 확률로 죽는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여인을 제압하는 편이 낫다. 나은데, 가슴 속의 돌이 너무 무거웠다. 가상 인격을 상대로 이러는 게 우습다고, 다 부질없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장미를 생각하면서도, 겨울은 제 마음을 따랐다. 소년에게 마음 말고 무엇이 남아있는가? 연기가 아니다. 오랜만의 진심을 담아, 상냥하게 하는 말. "죽어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이해 못 하는 거 아니니까. 하지만 아드님을 저대로 둘 수도 없어요. 이건 제 의무거든요. 「겨울동맹」의 리더가 되었을 때,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한걸요." "......." "사실 전 이게 어머니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접 하지 않으시니 제가 하는 수밖에요. 누군가는 눈 감게 해줘야죠." 다가서는 겨울에게 재차 칼끝이 닿았다. 그러나 계속 걷는 겨울에게 속절없이 밀려난다. 힘 빠진 칼은, 다만 작은 상처 하나를 남기고, 맺힌 핏방울에 소스라치며 멀어졌다. 겨울이 감염된 아이 앞에 무릎 꿇을 때까지, 여인은 결국 겨울을 찌르지 못했다. 매달려서 울어도 보고, 당겨도 보지만 겨울의 중심은 어긋나지 않는다. 겨울이 꿈틀거리는 변종의 관자놀이 가까이에 총구를 가져갔다. 칼날이 뒷덜미에 닿았다. 바람 부는 날의 마른 가지처럼 떨리는 손과 칼. 살결에 칼끝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잠시 기다리고서, 겨울이 조용히 허락했다. "말씀드렸어요. 찌르셔도 된다고." 어머니가 무너져 내린다. 겨울은 방아쇠를 당겼다. # 65 [65화] #세븐스 캘리포니아, 캠프 로버츠 (2) 험비가 심하게 흔들린다. 수시로 폭격을 받은 비포장도로는 더 이상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승차감 나쁜 군용차량이라, 탑승자는 노면의 굴곡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가끔은 아예 도로를 벗어나는 편이 나을 때도 있었다. 선탑좌석에 앉은 겨울은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팔을 걸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맞는다. 「졸음」이 조금이라도 달아나기를 바라면서. 피로가 체력을 갉아먹는 중이다. 전반적인 능력 저하가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다. 격전으로 밤을 새고, 난민구역을 진정시키고, 화재를 진화하다가, 이제는 구조작전에 투입된 마당이다. 캠프 샌 루이스 오비스포는 간밤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봉쇄사령부가 투입한 전선통제기는, 주둔지를 벗어나 북상하는 병력들, 난민과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쫓는 감염변종의 대집단을 확인했다. 가로세로 수십 킬로미터의 광활한 범위에서 전개되는 추격전이었다. 요소요소에 「트릭스터」의 전파방해가 뿌려졌다. 생존자들에게 바싹 붙어 폭격을 피하는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연대전투단은 지휘계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겨울이 받은 브리핑은 그러했다. "하나 드시겠습니까?" 브라보 중대 소속 운전병이 겨울에게 약병을 하나 내밀었다. 플라스틱 약병은 프로비질(Provigil)이라 새겨진 하얀 정제(錠劑)로 가득했다. 미군에 보급 중인 각성제였다. 어쩔까 하다가, 받기로 한다. 적어도 아직까진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은 약이다. '그런 것 치곤 효과가 너무 좋지만.' 프로비질 세 알이면 사흘 동안 깨어있을 수도 있다. 겨울이 알약을 입에 물고, 카멜 백(CamelBak)에 연결된 관을 쭉 빨았다.(카멜 백 : 낙타 주머니처럼, 등에 메는 형태의 물주머니.) 적은 약효가 돌기도 전에 나타났다. 포탑 사수가 변종집단 출현을 경고했다. "12시 방향! 이동 중인 대규모 변종 집단! 특수변종 「그럼블」 확인! 거리 약 400!" 주위는 야트막한 능선이 이어지는 지형이다. 마침 분수령을 넘어 사면을 내려가기 시작한 터라, 수백 미터 밖의 반대편 능선까지 훤히 보인다. 사수가 알린 대로, 멀리서 벌레 무리처럼 자글자글한 변종들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윤곽은 「그럼블」이다. 그러나 겨울이 싸움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잡음 섞인 무전이 들어온다. 「TF 데이비드. 당소 빅 버드 3. 귀소 측으로 접근 중인 변종집단을 확인. 잠시 정지하라. 잡것들에게 불벼락을 쏟아주겠다.」 6시 방향, 즉 등 뒤의 하늘에서, 느릿하게 선회하는 대형 항공기가 하나 있었다. 미국 정부가 봉쇄작전에 대량 투입하겠다고 선전했던 건쉽(AC-130)이다. 이 비행기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원의 중심을 향해 지속적으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다. 운전병이 속도를 줄이기 무섭게, 화력지원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불벼락이었다. 변종들이 무지막지하게 터져나간다. 세 종류의 서로 다른 폭발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인간 닮은 것의 조각들이, 수십 미터 높이까지 날아 다녔다. 10초 간격으로 울리는 큰 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럼블」만 겨냥했다. 집채 만 한 폭발이 괴물을 쫓아다닌다. 하늘에서 쏘는 만큼 직격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빗나가지도 않는다. 간접 충격만으로, 알파 급의 물리내성으론 감당 못할 파괴력이었다. 「그럼블」은 맞는 내내 구르며 일어서지 못하다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중폭발이 세 번 연달아 일어났다. 위에서 터지는 포탄은 훨씬 더 넓게 파편을 뿌린다. 이때까지 듬성듬성 살아남은 변종들이, 10초마다 무더기로 쓰러졌다. 운동장 한 개 범위가 피와 살점, 화약 타는 연기로 가득 찼다. 운전병이 휘파람을 불었다. "공군이 정말 제대로 지원해 주는군요." "그러게요." 겨울이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뺀다. 간밤의 손실에 기겁한 봉쇄사령부는, 차단작전을 위해 빼두었던 항공 전력을 아낌없이 투입했다. 「트릭스터」의 자폭 EMP 범위가 반경 약 1km로 추정되었으므로, 그 이상의 고도를 비행하면 별다른 위협이 없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덕분에 구조작전의 난이도가 확 떨어졌다. 첫 구조대상은 연료가 떨어진 전차 소대였다. 파소 로블레스 서쪽, 굽이치는 능선의 사잇길을 따라, 네 대의 전차가 중구난방으로 멈춰서 있었다. 여기에 변종들이 들러붙었다. 아무리 변질되었어도 결국은 인간의 손발인데, 그걸로 단단한 전차를 까보려고 발광하는 중이었다. 워낙 붙어서 안쪽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스스로 내는 소음 탓인지, 능선 위에서 느리게 차 구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것만은 공군의 지원을 받기 어렵다. 화끈하게 퍼부으면, 전차 승무원들도 박살날 것이었다. 브라보 중대가 하차전투를 준비했다. "승무원들하고 교신은 되나요?" 겨울이 묻자, 중대장 에셔 대위가 긍정했다. "다들 살아있다. 정신은 없는 것 같지만." 당연히 그렇겠지. 전차 내부는 비좁다. 변종들이 장갑판 긁는 소리를 들으며, 구조된다는 확신도 없이, 몇 시간 동안 갇혀있었던 것이다. 전투는 아주 짧았다. 브라보 중대는 좌우로 넓게 펼쳐진 상태에서 사격을 가했다. 험비 가운데엔 고속 유탄기관총을 실어놓은 것도 있었다. 한 발 한 발이 수류탄과 맞먹는 유탄을 분당 40발씩 갈겨 댄다. 쭉 긁으면 사람 수백 명 우습게 죽이는 흉물이었다. 좌에서 우로 수수한 폭발들이 이어졌다. 공군의 폭격에 비하면 수수한 것이 맞다. 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 변종들은 오르막을 기어오르다가 다 죽었다. 중대가 접근하자, 전차 승무원들이 뒤늦게 기어 나온다. 우는 사람도 있고, 쉴 새 없이 웃으며 바깥 공기를 만끽하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소대장은 좀 멀쩡해 보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차소대장은 중위 계급이었다. 이름은 에드먼드 듀런트. 몰골이 말이 아니다. 에셔 대위에게 경례한 그는, 뒤늦게 겨울을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자네 실존 인물이었군?" "......." 멀쩡하지 않네. 겨울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다행히 미친 건 아니었다. 들뜬 나머지 걸러지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는 상태 같다. 전차에 급유가 이루어지는 도중, 듀런트 중위가 에셔 대위에게 묻는다. "캠프 로버츠는 별 일 없었습니까? 아니, 여기까지 지원 나오신 걸 보면......." 흐리는 말뜻이 분명하여, 에셔 대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자네들만 공격을 받은 게 아닐세. 우리도 만만찮은 일을 겪었어.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일개 생물이 EMP를 쓰다니 말이야. 그것도 다른 변종까지 잠입시켜가면서." "어? 거기서도 그랬습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군." "말도 마십시오. 밤새도록 지옥이었으니까요. 애마에 어떻게 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입니다. 상급부대하곤 연락도 잘 안 되지, 변종들은 사방에서 쏟아지지, 민간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지....... 그 와중에 「세컨드 캘리포니아」 1대대가 피를 좀 많이 봤을 겁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난민들을 유도했거든요." 간밤을 회상하는 얼굴이 어둡다. 그가 다시 묻는다. "그럼 캠프 로버츠의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여기 있는 한 소위 덕택에 큰 피해는 없었네." 에셔 대위가 턱짓으로 겨울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트릭스터」를 잡아온 게 한 소위인데, 어지간히 수상했던 모양이야. 당직사령에게 경계 강화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하고서, 병력을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고 하더군." "독단이요? 일개 소위가? 아니, 의미 없지 않습니까?" "이 친구 전적을 감안하면 이상하지도 않지. 중대장으로서 부끄러운 말이네만, 당장 내 중대에서도 나보다 한 소위를 좋아하는 병사들이 더 많지 않나 싶을 때가 있어." 본인을 앞에 두고 잘도 이런 대화를 하는 구나. 겨울은 자신을 바라보는 중대장에게 어려운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주유를 마친 전차소대는 브라보 중대의 구조작전에 합류했다. 중대원들은 전차소대의 합류를 크게 반가워했다. "시동만 걸어도 가솔린 3리터를 퍼먹는 돼지새끼들이지만, 그래도 저것들만큼 믿음직한 게 별로 없습니다. 단단하고 터프하죠." 확실히 현 시점에서 움직이는 전차를 감당할 감염변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차 주포 앞에선 「그럼블」조차 사냥감에 불과하다. 겨울은 트래커 모니터를 몇 번 건드렸다. 미군이 사용하는 차량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거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전차소대의 장비가 EMP에 고장 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었다. 전차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다른 방향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온갖 동네에서 전쟁을 치르고, 시가전과 테러에 시달린 미군이 살아남으려고 만들어낸 체계다. "그건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후방좌석의 병사가 신기해하며 묻는다. 장교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겨울이, 복잡한 장비를 손쉽게 다루자 흥미로운 모양이다. 찰리 중대만큼 친숙하지 않은 탓도 있고. 겨울이 대충 둘러댔다. "캡스턴 대위님에게서요." "아하."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것이다. 병사가 대위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확인하진 않을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 구조대상의 좌표는 파소 로블레스 아래의 도시, 템플턴(Templeton) 서쪽에 찍혔다. 임무부대는 몇 개의 능선을 넘어 도시 서쪽 평야지대에 진입했다. 겨울이 말한다. "어딜 가더라도 포도밭과 과수원뿐이네요." 그러자 운전병이 답했다. "여긴 캘리포니아잖습니까." 지난 밤 샌 미구엘 서쪽에서 「트릭스터」를 쫓으며 달렸던 포도밭도 굉장히 넓었지만, 이곳은 더욱 본격적이었다. 도로를 따라 달리는 도중, 배회하던 변종 하나가 대각선 방향에서 도로를 가로막는다. 무리로부터 낙오된 놈인가 본데, 역시 평범한 변종의 지능은 아직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충돌을 아랑곳 않고 무작정 달려오기만 하니. 다만 몸에 묻어있는 진흙과 낙엽은 주목할 만 하다. 언젠가 저것과 비슷한 걸 봤었지. 겨울은 이것들에게 나름의 위장 요령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마침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사수의 사격은 빗나갔다. 젠장. 투덜거리는 사수를 대신하여, 운전병이 뺑소니를 쳤다. 쿵! 튼튼한 험비답게, 차내로 전해지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운전병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 닦으려고 뛰어드는 거지새끼 같지 않습니까?"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거지라니......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불쌍하지 않아요?" "소위님도 차에 기스 몇 번 나보셔야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싫은 말을 하는 병사에게서 은근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가 바뀌어 기다리는 도중에, 거렁뱅이가 뛰어들어 갑작스레 앞 유리를 닦고, 닦은 값을 달라고 조르고, 거절했더니 차를 좍 긁은 뒤 달아나던 것조차, 이제는 되찾고 싶은 과거의 일부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병사를 위하여, 겨울이 모르는 척 어울려주었다. "그런 일은 뉴욕 같은 곳에서만 있는 줄 알았어요." "설마요. 오히려 이 동네가 하기 좋습니다. 총 맞을 가능성이 낮으니까요." 워낙 총기소유가 보편화된 미국이다보니, 총기규제가 강한 캘리포니아는 오히려 범죄율이 높은 편이었다. "뭐, 이젠 다 옛날이야기일 뿐입니다만." 제트 엔진의 소음이 대화의 맥을 끊는다. 전폭기 한 대가 차량대열 위를 지나, 지평선 가까운 곳에 폭격을 가했다. 꽈릉! 항공폭탄의 위력이 눈에 보일 정도의 충격파를 빚어냈다. 바람을 닮은 초목의 흔들림이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거의 다 왔네요." 겨울이 자신의 화기를 점검했다. 습관 같은 것이었다. # 66 [66화] #세븐스 캘리포니아, 캠프 로버츠 (3)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시계(視界)가 나빠졌다. 구름 같은 연기가 햇빛을 가린다. 화재는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저편 언덕 몇 개가 통째로 타올랐다. 부주의한 폭격 탓일까, 아니면 「트릭스터」의 소행일까. 겨울이 보기엔 후자였다. 캠프 로버츠를 습격한 무리가 이쪽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경험이 전송되었거나. 어쨌든 공중지원을 받기 나쁜 환경이다. 스치는 도로변에 헬기 하나가 추락해있었다. 시야 확보를 위해 무리하게 하강했다가, EMP나 「그럼블」의 투척 패턴에 당한 모양이었다. 생존자는 없을 것이다. 불타고 있을뿐더러, 불붙은 탄약이 펑펑 터지는 중이었다. 겹쳐진 헬기 날갯소리가 다가온다. 차량대열 측면 상공으로부터 엄호사격이 빗발쳤다. 부우우우우욱- 부우우욱- 미니 건(Mini gun)이라는 무기다. 총열 여섯 개가 회전하며 분당 4천 발을 쏘는지라, 소리가 총성보다는 망가진 관악기에 가깝다. 수송헬기 두 대는 사람 태울 자리에 탄약만 싣고 온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탄약 소비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에 걸쳐 화력을 투사한다. 덕분에 전차와 험비 사수들이 부담을 덜었다. 정면과 좌우측면에서 접근하는 변종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도 창틀에 팔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총을 얹어놓은 상태로 사격을 가했다. 헬기가 떠나면서, 중대의 전진 속도가 감소한다. 아무리 밀도가 낮다지만, 사방에서 다가오는 변종들을 뚫고 나아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놈들이 후미를 노린다! 보급차량부터 방어해!」 중대장의 외침이 전파를 탔다. 실제로 공세는 대열 뒤쪽으로 집중되는 중이었다. 그쪽을 지키는 건 고작 험비 두 대 뿐. 탄약수송 트럭과 유조차가 당하면 구조임무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다. 이로써 변종들이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는 게 확실해졌다. 인간의 전투방식과 약점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공격계획을 수립한다. 또한 이것들은 약한 것들 사이에 강한 것을 감췄다. 일반 변종들 사이에 구울이 드문드문 섞여있다. 평범한 변종이 강화된 이 시귀들은, 그 민첩함 때문에라도 접근하게 내버려두면 곤란하다. 겨울은 우선적으로 그것들부터 사냥했다. 후웅- 우측 먼 거리로부터, 뿌리째 뽑힌 나무가 직사에 가까운 포물선으로 날아온다. 탄약 수송차량을 노리고 떨어져, 오차가 고작 5미터에 불과했다. 「지저스!」 무전을 가로지르는 절규. 해당 차량이 좌로 확 꺾었다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회복한다. 하마터면 전복될 뻔 했다. 필시 「그럼블」일 텐데, 연기에 가려져 윤곽만 보였다. 이 때 전차가 나섰다. 위이이이잉- 맹렬한 가스터빈 구동음을 내며 측면으로 돌출한 60톤짜리 쇳덩어리는, 갈지자를 그리며 주행, 다가오던 변종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무한궤도와 땅이 닿는 틈으로 빨려 들어간 변종은 살아남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무 한 그루가 또 날아온다. 전차가 가속하여 수송차량을 가로막았다. 정확한 타이밍. 운전병의 숙련도가 놀랍다. 나무가 전차에 충돌했다. 전차가 크게 출렁인다. 「미어캣 3호 피격!」 겨울이 잠시 흔들렸다. 호출부호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미어캣 3호는 멀쩡하게 움직였다. 포탑을 돌려 「그럼블」을 겨냥했다. 전차 주포로 쏘는 거면 약점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실루엣 중심을 조준해서 쏴버리면 된다. 번쩍. 쾅! 발사 화염과 함께, 포구 주위의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흩어진다. 캬아아아아-! 직격 당한 대형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 순간, 우연한 바람이 연기를 걷어낸다. 표적은 오른 팔이 어깨부터 뜯어진 상태였다. 미어캣 1호, 2호차가 거의 동시에 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꽂힌 포탄이 「그럼블」을 위아래로 박살낸다. 듀런트 중위가 무전을 쳤다. 「그럼블 다운. 잘했다. 지금부터는 1호차가 선두에 서겠다. 2호차는 후미, 3호, 4호 차량이 측면 방어를 맡아라.」 「그럼블」의 위협이 사라지자, 전차 쪽에서도 전차장이 위로 올라와 기관총을 붙잡았다. 브라보 중대와 전차 소대, 보급대의 행렬이 마침내 변종들의 공세를 관통했다. 가까워진 목적지 방향에서 총성과 폭음의 이중주가 들려온다. 겨울은 섬광과 폭음의 간격으로 거리를 쟀다. '앞으로 약 3분.' 3분 안에 본격적인 전장으로 진입할 것 같다. 트래커 모니터에 전투현장을 조감하는 열 감지 영상이 떴다. 전선통제기가 전송하는 것이었다. 프레임이 낮아 뚝뚝 끊겼으나, 그리고 화재로 인한 열과 연기에 많이 가려졌으나, 상황을 판단하기엔 충분했다. 아군은 야트막한 포도밭 언덕 위의 양조장에 몰려있는 것 같았다. 전투차량에 비해 트럭의 숫자가 많은 걸 보면 난민이나 시민들도 함께 있는 모양이다. 그들을 향해 모든 방향에서 변종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Break, Break! 중대장이다! 전 차량 충격에 대비하라! 공군이 기화폭탄으로 연기를 날려버리겠다고 한다!」 "오, 쉿!" 포탑 사수가 기겁을 하며 차 안으로 들어온다. 기화폭탄은 열팽창으로 폭풍을 만드는 무기다. 공군이 쓰는 건 크기가 크다. 유효범위 내에서, 사람은 찢어지거나 곤죽이 되고, 차량은 분해되고, 전차마저 뒤집어진다. 지금은 아니었다. 누구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살상범위 밖에서 터트려 시야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미친 것 같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하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겨울은 오인폭격이 걱정스러웠다. 아군이 피해를 입지 않을 정도의, 그러나 연기는 날려 보낼 정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그만큼 급하다는 반증일지도.' 양조장에 갇힌 이들이 직접 요청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폭탄이 터졌다. 11시 방향으로부터, 연기가 파도처럼 쓸려온다. 덜커덩! 무언가에 부딪힌 것처럼 차량이 심하게 흔들렸다. 우라질! 운전병의 짧은 욕설. 어딘가 아프게 부딪힌 것 같다. 화력공백을 틈타 다가오던 변종들이 정신없이 넘어졌다. 보이지 않는 망치로 사정없이 얻어맞는 모양새였다. 한 발로 끝나지 않는다. 전폭기 편대가 계속해서 날아와서는, 수십 발을 연달아 투하했다. 인근 숲의 화재까지 이걸로 잡아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떨어진 부근에 한하여 잠깐 동안만 꺼질 뿐, 결국 불씨가 남아 다시 타오르겠으나, 미군에게는 그 잠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목적지가 보입니다!" 폭격이 지나간 뒤, 포탑으로 기어 올라간 사수가 외치는 말. 겨울도 보고 있었다. 연기가 사라지니,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다. 차량이 가속하면 금세 도착할 거리. 그러나 그 전에, 양조장을 둘러싼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다. 일부 구간에선 근접전까지 벌어지는 중. 겨울은 즉시 창밖으로 몸 내밀고 소총을 조준했다. 타탕! 탕! 타타탕! 야전삽을 치켜들었던 병사가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렸다. 육박한 변종 넷이 연속으로 쓰러진 까닭이다. 같은 일이 방어선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탄약이 바닥나 절망하던 병사들이, 이쪽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방어선의 일부는 차량을 이어 만든 장벽이었다. 수성하는 병사들과, 기어오르는 변종들의 사투.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차 한 대가 그쪽으로 달려간다. 변종들을 닥치는 대로 치고 짓밟으며 접근하더니, 차체를 바싹 붙여 비벼대기 시작했다. 장벽과 전차 사이에 끼인 변종들은 내장이 파열되고 척추가 부러졌다. 위이이잉-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밀고 밟고 으깨는 것만으로, 전차는 변종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정리한다. 험비 가지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 거리를 재는 전차 운전병의 기량도 대단했다. 보급차량이 방어선에 도달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물론 그 덕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야전삽을 쌍으로 들고 변종들을 마구 쳐내는 병사가 있다. 무서울 정도로 용맹했다. 어떻게 그런 힘을 내는지, 풀 스윙으로 휘두를 때마다 변종 하나를 반드시 죽인다. 탄창 가득한 더플 백 하나 짊어지고, 그의 후방에서 접근한 겨울이 근처의 변종들을 말끔하게 사살했다. 숨이 찬 모양이다. 병사는 어깨를 들썩인다. 동료들이 탄창을 챙기느라 여념 없는 와중에도 못 박힌 듯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전투피로인가? 겨울이 그를 불렀다. "당신! 와서 탄 받아요!" 그러자 서서히 돌아보는데, 울고 있었다. 겨울은 그에게서 물린 자국을 발견했다. "이런......."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용맹이 아니라 자포자기였던 것. 물린 뒤 시간이 좀 흘렀는지, 변색된 피부와 혈관이 턱 아래까지 번져있었다. 탕! 야전삽 든 병사의 이마에서 붉은 구멍 하나가 톡 터진다. 겨울이 총성 들려온 쪽을 돌아보니, 사격한 병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다. 이성으로 판단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쏴버린 경우 같았다. "으, 으, 으으으으아아아!" 그가 발작을 일으켰다. 불안하게 흔들리며, 소리 지른다. 싫어, 싫어, 싫어! 살려줘요! 보고 싶어요, 엄마! 집에 가고 싶어요! 울부짖는 모습이 굉장히 위태로웠다. 극단적인 공포와 스트레스에 의한 공황발작, 셸 쇼크(Shell Shock) 증세였다. 문제는 그가 아직 총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탄창을 갈고, 단 한 발을 쏘았을 뿐인, 잔탄이 충분히 남아있는 자동화기를. 「생존감각」이 날카롭게 울었다. "엎드려!" 겨울이 소리치기 무섭게, 공황에 빠진 병사가 총기를 사방으로 난사했다. 미리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은 겨울처럼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좀 떨어져 있던 이들은 다르다. 다시 밀려오는 변종들을 쏘느라 바빠, 경고를 듣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길리어드! 그만 둬!" 가까스로 화를 피한 병사 두 명이 미쳐버린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오지 마! 이 괴물들! 다가오지 마!" 그 손이 수류탄을 더듬고 있다. 순식간에 무기를 교체한 겨울이, 권총으로 그의 손등을 쏴버렸다. 다섯 발이나 당긴다. 조준이 급했고, 처리는 확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손등을 관통한 탄자는 방탄복에 막혔다. 이 거리에서 소총으로 쐈으면 뚫렸을 것이다. 미쳐버린 병사, 길리어드를 붙잡은 두 전우가 숨을 헐떡거렸다. 겨울에게 눈인사를 보낸다. 의무병이 달려와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어도, 상황은 지속적으로 호전되어갔다. 겨울은 어느덧 무전기에서 방해전파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트릭스터」가 물러나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미군이 화력을 회복한 이상 승산이 없다고 봤겠지. 그렇다고 추격할 입장은 아니었다. 가져온 탄약이 마냥 넉넉한 것도 아니고, 양조장 안에 피신한 민간인들도 문제였다. 북쪽에서 새로운 지원군이 나타났다. 연기를 뚫고 오는 차량과 병력의 규모가 일개 중대 급 이상이었다. 잔적을 소탕하며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사뭇 대단하다. 겨울은 방어선을 돌아다니며,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위협을 확인했다. "전방에 적 출현!" 어느 병사의 외침에 돌아보니, 연기가 오르는 숲 가까이에 어정거리는 변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애매한 거리였다. 겨울은 변종들의 행동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이쪽을 공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달아나지도 않는다. 의문스러웠으나, 곧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버리는 패?' 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떼어둔 꼬리. 더 많은 수가 안전하게 달아나기 위한 희생양일 가능성. 「트릭스터」의 교활함이라면 있을 법한 전개였다. 어쨌든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험비 한 대가 겨울 앞에서 정지했다. 안에 있던 운전병이 겨울에게 손짓했다. "타십시오, 소위님. 인접한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입니다." "명령? 중대장님의?" "아뇨. 아직 못 들으셨군요. 우린 이제 구조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1대대에 배속됩니다." "1대대?" "예. 여기 있는 병력이 대부분 160연대 1대대입니다. 다른 곳 소속도 섞여있긴 하지만요. 방금 도착한 병력은 헌터 리겟에서 내려온 2대대 1중대라더군요." 들어보니 지원군을 캠프 로버츠에서만 보낸 게 아니다. 보다 북쪽에 위치한 포트 헌터 리겟의 2대대로부터도 한 개 중대가 파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세븐스 캘리포니아」의 각 대대에서 파견된 병력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 67 [67화] #세븐스 캘리포니아, 캠프 로버츠 (4) 소탕전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보다는 확산되는 화재가 문제였다. 탈출구가 사라지기 전에, 지휘관이 이동 명령을 내렸다. 증강된 대대 병력이 불과 연기의 미로를 빠져나갔다. 우우 따라오던 변종들은 차량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를 능가하지 못했다. 버려진 것들의 운명은 뜨겁게 끝났다. 이제 가장 가까운 주둔지는 캠프 로버츠였다. 그러나 불길을 피하다보니 방향을 달리 잡아야 했다. 전투현장에서 서북쪽으로 약 20km를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구조임무에 투입된 다른 전투부대와 구조된 부대들, 민간인들이 지속적으로 합류했다.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봉쇄사령부가 가용자원을 모조리 투입했다면, 산타 마가리타의 레인저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겨울은 자신에게 지포라이터를 선물한 레인저 소대장 존 프레이 중위를 떠올렸다. 그러나 당장은 어려웠다. 임무부대는 전투 병력만 따져도 연대 규모 이상이었고, 민간인들까지 합치면 1만 명에 달했다. 기나긴 행렬을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 하나 찾는 건 비생산적인 짓이다. 그렇게까지 간절한 것도 아니었고. 임무부대는 호수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임시 주둔지를 세웠다. 헬기가 줄지어 날아와 숙영 자재를 내려놓고 떠나갔다. 숙영 준비를 마쳤을 땐 이미 해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병사들에게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장교들은 편히 쉬기 힘들었다. 뒤숭숭한 분위기를 감안하여, 대대장은 장교들이 쉬는 시간에 병사들을 독려하고 위로하길 원했다. 장교 월급이 병사보다 많은 이유 중 하나다. 겨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년 장교와 마주치는 브라보 중대 장병들은, 겨울을 더 이상 소년으로 보지도 않았다. 저마다 불만과 불안을 토로한다. "왜 여기서 미적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또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냥 강행군으로 캠프까지 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캠프까지 남은 거리는 낮 시간에 이동한 거리보다 짧았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겨울이 난처한 미소를 만들었다. "캠프 오비스포 사람들 생각도 해야죠. 얼마나 힘들겠어요? 민간인들은 또 어떻고요? 우리도 각성제로 겨우 버티고 있잖아요." 극한상황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긴장이 풀리자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졌다.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완전히 탈진해버린 것. 여기엔 각성제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쉬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쪽은 어떡합니까?" 병사가 남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아랫자락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마치 노을이 지는 서편 하늘과 같다. 거리가 한참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타는 냄새가 밀려올 정도였다. 정보가 없었다면 겨울도 걱정했을 것이다. 불이 번지는 속도를 감안하면, 저건 어지간한 나라 면적을 태울 대화재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괜찮아요. 저도 전달받은 내용인데, 자정이 지나기 전에 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내일은 하루 종일 쏟아질 테고요." "정말입니까?" "왜 속이겠어요? 오히려 아직 모른다는 게 이상하네요. 아, 상황이 상황이라 전달 체계가 혼란스러워서 그렇겠군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하세요." "뭐, 알겠습니다." 근심을 덜었을 텐데, 병사는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비슷한 몇 명을 추가로 접하면서, 겨울은 알 만 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캠프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캠프 샌 루이스 오비스포 사람들 정도는 아닐지라도, 캠프 로버츠의 브라보 중대 역시 혹독한 하루......아니, 이틀째를 보내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동이 생긴다. 익숙한 잠자리에서 마음 편히 쉬고픈 욕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민간인 숙영지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캠프 로버츠보다 규모가 컸던 만큼, 무너질 때의 희생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일병.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낯선 병사는 겨울의 손짓에 과장된 반응을 보인다. 이 사람에게서도 경증의 쉘 쇼크가 엿보인다. 자꾸만 손가락을 비벼대는 모습이 몹시 불안정했다. 그런데도 무장하고 있다. 캠프 오비스포의 지휘관들도 어지간히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혹은 너무 많아서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거나. 병사가 말을 더듬는다. "무,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별 일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서요." 상대에게 공감하는 한 마디. 사실 대화를,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바라는 건 병사 쪽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람에게는, 배려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쪽이 더 효과적이다. 물론 상태가 정상이라면 눈치 챌 맥락이다. 그러나 병사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가 어설픈 걸음으로 다가오자, 겨울이 등을 두드리며 이끌었다. "여기 자리 괜찮은가요?" 동일 대대 병사들이 둘러앉은 모닥불이었다. 그들은 겨울을 알아보고 다양한 말과 행동으로 환영했다. 그 중엔 억양이 낯선 이도 섞여있다. 다민족 국가의 군대답다고나 할까. 바로 만들어진 두 사람 분의 자리. 겨울은 데려온 병사를 먼저 앉혀놓고, 자연스럽게 그의 총을 거뒀다. 그렇잖아도 먼저 자리 잡은 이들이 자기들 무기를 서로 기대도록 세워 놓은 참. 거기에 겨울과 쉘 쇼크 환자의 총이 더 얹어진다. 인디언 천막 뼈대 같은 모양새였다. 하루 종일 불과 연기에 시달렸는데도 불구하고, 차가운 밤에 마주하는 열기는 반가웠다. 겨울의 발치에 장작이 흩어져있었다. 하나 집어서 던져 넣으며, 병사들에게 묻는다. "땔감이 어디서 났어요?" "근처에 오두막이 하나 있습니다. 사냥꾼 숙소였나 본데, 벽난로를 쓰더군요. 어차피 지금은 주인도 없으니 좋게 좋게 빌려왔습죠." 넉살 좋게 말하지만 사실은 불법이다. 미국 정부가 낙관적인 분위기를 만들고자 열심이었으므로, 방치된 재산도 언젠가는 되찾을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다. '오늘을 계기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하루 사이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초상집 분위기인 사람들에게 물어볼 계제도 아니고. 그러나 한동안 안정되어있던 미국 입장에선 오랜만에 겪은 참화일 것이다.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겠지. 겨울이 데려온 병사는, 쪼그려 앉아서 여전히 손가락을 비비고 있었다. "어이, 펜우드. 이것 좀 마셔." 보다 못한 동료가 잔을 건넸다. 뜨거운 물이 찰랑거린다. 잔을 받아들고도 여전히 불안한 병사, 펜우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하, 할까요?" 겨울이 별빛처럼 잔잔한 미소를 만들었다.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요?" "아뇨.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계급을 떠나서, 친구 하나 사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친구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죠? 난 한국 출신이라 잘 모르겠는데." 딱히 그럴 듯한 농담은 아니었건만, 다들 소리 내어 웃는다. 무엇이든, 그냥 웃을 기회가 필요했던 사람들. 펜우드 역시 경직된 얼굴로 웃었다. 디안젤로라는 이름의 여성 병장이 씨익 웃는다. "저희들은 원래 장교랑 친구하기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소위님은 예외로 하죠. 아까는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음?" 그 말 듣고서 가만히 보니, 보았던 얼굴들이다. 낮에 공황발작을 일으켰던 병사, 길리어드를 억누른 두 명을 포함해 해당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우리 구면이었네요. 다친 곳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 때 소위님의 상황판단에 놀랐습니다. 사격실력도 그렇고요. 더군다나, 세상에, 그토록 신속한 무기교체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그렇게 빠른 손은 라스베이거스 도박판에서나 봤거든요. 타고난 꾼이시네요." "걱정 말아요. 전 카드 게임에 흥미 없으니까." "전 카드 만질 줄 모르는 사람은 친구로 안 사귀는데요?" "저런." 병사들이 다시 자잘한 웃음을 터트린다. 가라앉기를 기다려 겨울이 여군에게 물었다. "길리어드 상병은 무사한가요?" "후송됐습니다. 손 때문에라도 의병제대할 가능성이 100%라고 하더군요. 하기야 손등 뼈가 작살나고 손가락도 두 개 떨어져 나갔으니, 나중에 다시 군인 노릇 하기는 힘들겠죠." 근래 미군에게 보급되는 총탄은 대인저지력을 최대로 늘린 것들이었다. 저지력은 관통력과 반대의 개념이며, 맞았을 때 꿰뚫는 대신 최대한의 충격을 준다. 인간보다 강인한 변종을 상대하기 위해 당연한 조치였다. 겨울이 쏜 권총탄도 다르지 않았다. 그걸로 다섯 발을 맞았으니, 손을 아예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 치료가 잘 된다 쳐도 후유증이 평생 남을 것이다. 겨울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만들었다. "유감이네요.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네? 에이, 무슨 말씀을." 디안젤로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친구는 오히려 고마워할 겁니다. 사고치는 거 막아줬지, 후방으로 빼줬지. 이젠 아예 전역하게 생겼는데요. 젠장. 마지막은 저도 부럽군요. 연금생활 할 기회인데." 본래 미국 군인 연금은 근속기간 15년 이상이어야 받을 수 있으나, 상이군인 연금은 종류가 다르다. 다만 겨울은 아직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다. 아무리 회차를 거듭했어도 모든 정보를 다 숙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던지는 질문. "그 분, 확실히 연금이 나오나요?" "복무기간이 30개월을 넘었고, 최전선에서 뛰었고, 퍼플하트는 당연히 받을 테고, 한 손을 아예 못쓰면 50% 장해 판정일 텐데요. 조금 쓸 수 있더라도 3~40% 판정은 나오지 않을까요? 당분간은 그......문제도 있을 거고. 그럼 볼 것도 없죠. 야, 40%면 얼마 나오냐?" 디안젤로가 얼버무린 부분은 여전히 불안정한 펜우드를 배려한 것이었다. 질문 받은 쪽은 자신 없는 태도로 답했다. "어, 글쎄요. 오백? 육백? 그 정도 아닙니까? 퍼플하트 받으면 추가 보상도 붙을 건데? 가족이 있다면 거기서 또 늘어나고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걔가 부양가족이 있던가?" "글쎄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래봐야 600 달러 안팎인데, 사람 살기엔 부족한 금액 아닌가요?" 지력보정에 의해, 21세기 초엽의 환율로 환산된 금액을 알 수 있었다. 한화로 약 70만원. 「통찰」은 여기서도 작동했다. 관제 AI의 조언을 통해, 겨울은 이 금액이 당시의 최저생계비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병사는 겨울의 의혹을 싱겁게 부인한다. "에이. 일해서 버는 돈도 있잖아요." "취직이 쉽겠어요?" "그거야 뭐......정부에서 도와주겠죠." 겨울은 그 낙관적인 말에 약간 놀랐다. 그가 말하는 '정부'는, 겨울이 생전에 경험한 개념과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실제로 연방 제대군인부(VA)가 제공하는 혜택은 단순한 연금 지급에 그치지 않는다. 이어지는 병사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지속적인 관리와 예우. 심지어는 대출 보증마저 서준단다. 그러고도 노숙자가 되는 미국의 제대군인들이 많았다. 지력보정 정보를 전달받은 겨울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정도까지 해도 완전히 못 막을 문제란 거겠지.' 어떻게든 병사에게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 내가 잘못 되더라도, 나라가 내게 보훈할 것이라고. 이것이야말로, 겨울이 경험한 모든 회차에서, 미국이 마지막까지 문명의 보루로 남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군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무형의 시스템. '그나마 멀쩡한 나라가 지금 몇 개나 있더라......?' 러시아 말고는 당장 떠오르는 곳이 없다. 거긴 넓고 거친 국토가 자연방벽이 되어, 방역과 격리에 도움이 되는 경우였다. 겨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 번 전역 이야기가 나오자 대화에 열기가 오른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전장의 병사들에게 전역은 뜨거운 화제일 수밖에 없다. 직업군인에게는 은퇴생활 같은 느낌일까? 아직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주체할 수 없는 펜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화에 몇 번 어울리던 그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우우우, 흐으, 으우우." 떨리는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다른 병사들의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같이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도 있고, 어깨를 툭툭 치며 이겨내라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다. 겨울은 후자였다. 상냥한 목소리 지어내기는 생전부터 익숙하다. "울어요. 눈물도 참으면 병 된다고 하더라고요." 펜우드는 겨울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울었다. "정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디안젤로가 겨울에게 건네는 한 마디는 상당히 깊었다. 펜우드 일병이 진정된 후 겨울은 그 모닥불을 떠났다. 상급부대에서 무전기로 겨울을 찾았기 때문이다. 「세븐스 캘리포니아」 1대대장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라틴계 대대장은 다른 참모도 없이 혼자 겨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단단한 인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인다. 새벽부터 이어진 혹독했던 시간의 흔적이다. 책임자로서 느끼는 바는 병사와 또 다를 것이었다. 겨울이 경례했다. "소위 한겨울입니다.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대장 파렐 라모스 중령이다. 만나서 반갑군. 거기 앉도록." 소년 장교를 맞은편에 앉힌 대대장이, 의례적으로 칭찬부터 꺼낸다. "자네, 낮에는 잘 싸우더군." "직접 보신 건가요?" "어쩌다보니." 그리고 잠시 침묵. 겨울을 응시하던 중령이, 구부정하게 턱을 괴었다. "바깥 분위기가 어떻던가?" "좋진 않습니다만, 안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네는 다른 장교들과 다르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간의 활약 때문에, 다른 장교들보다 병사들을 쉽게 안심시킨다는 의미인가? 아니, 조금 다른 어감이다. 잡아내지 못한 의미가 있다. 겨울은 대대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대대장도 그것을 눈치 챘다. "내가 왜 불렀는지 궁금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별 거 아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네. 자네 덕분에 고비를 넘겼으니, 고맙다는 말도 해야 할 것 같고." 이렇게 말하는 대대장의 눈에, 감추지 못한 피로감과 자책감이 드러났다. 순간적이었으나, 겨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무겁다. 대대장이 다른 말을 꺼냈다. "앞으로는 같은 캠프에 주둔하게 될 거야." "제 소속이 변경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주둔지가 바뀌는 건 우리 쪽이지." "그렇습니까?" "음. 샌 루이스 오비스포의 캠프가 도시와 가까운 편인데도 불구하고 연대전투단을 배치했던 건, 그곳이 남쪽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지. 한편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모로 만을 확보한다면 태평양 방면의 간이 거점이 하나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위에선 캠프 로버츠를 강화하려고 할 거야." 논리정연한 말이었으나 역시 겨울에게 할 이유는 없었다. 초면이고, 소속이 다른데. 아. 겨울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장교들과 다르다는 말. 그건 다른 장교들에겐 여유가 없었다는 뜻 아니었을까? 결국 대대장도 목적 없는 대화가 필요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때로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대대장은 그 직위 탓에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입장이다. 그러니 딱딱하고 형식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수밖에. 겨울은 가만히 앉아서, 말없이 대대장을 위로했다. # 68 [68화] #세븐스 캘리포니아, 캠프 로버츠 (5) 새벽이 소년을 깨웠다. 텐트 입구로부터, 어둑한 쪽빛 하늘이 가늘게 새어 들어온다. 아직 눈 뜰 때가 아닌데. 겨울은 무거운 팔을 움직여 총부터 잡았다. 탄창 결합을 확인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신체기능이 완전히 깨어나기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필요했다. 연 이틀간 육체적 소모가 지나치게 격렬했고, 수면은 취하지 않아, 그만큼 많은 「피로」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잠들어있는 시간은 조건설정 자동진행이었다. 깨어졌다면 이유가 있을 터. 겨울은 정신적인 고단함을 느꼈다. 이 세계관의 겨울이 꿈을 꿀 때, 그 안의 겨울도 휴식을 취한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을 신경 쓰지 않고, 홀로 오롯이 향유하는 고요한 어둠. 전장에서 과유불급은 의미가 없다. 겨울은 일단 같은 텐트 내의 병사들을 깨웠다. 물론 수마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힘겹다. "어으......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무장해요." 상태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겨울은 비로소 「생존감각」의 둔한 경고를 감지할 수 있었다. 신경 말단이 간헐적으로 저려오는 감각. 아직 활성화 정도가 낮지만, 무언가 위협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치명적인 수준은 아닌가본데.' 정작 캠프 로버츠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천재의 영역에 접어든 「생존감각」이면 자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피로로 인해 반응이 지연되었으므로,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겠다. 겨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두 눈이 동그래진 병사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일깨운다. 소년 장교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이제 미신의 영역에 근접했다. 빡! ......그렇다고 방탄으로 자기 머리를 치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잠과 자신을 동시에 후려친 병사는, 잠시 엎드려서 무정물 흉내를 냈다. 겨울이 다가가서 어깨를 붙잡는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어쨌든 그도 곧 준비되었다. 동숙하던 하사 한 명과 간부급 병사들은 행동이 빨랐다. 별다른 지시 없이도 중대 전체에 상황을 전파한다. 기상! 기상! 반복되는 외침이 축축한 바람을 타고 산울림으로 번졌다. 타 중대 숙영지에서도 무슨 일인가 나와 보는 병사들이 생긴다. 그들의 얼굴이 불안감에 물든다. 야습을 겪은 뒤 고작 하루 지난 시점이었다. 결국 겨울은 의도치 않게 연대급 병력을 다 깨우고 말았다. 옅은 안개 위로 싸락비 뿌려지는 가운데, 우의를 입은 병사들이 어수선하게 주위를 살핀다. 자기들이 일어난 이유를 몰라 더 초조한 모습들이었다. 그 사이에 겨울은 통신병을 불러 초병들과 교신하게 했다. 숙영지 경계선이 안전한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조기기상의 발원지를 찾아온 중대장이 겨울에게 묻는다. "대체 무슨 일인가?" 막상 질문을 받으니 답할 말이 마땅찮다. "뭐라고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에셔 대위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냥 꿈자리가 사나웠던 건 아니고?" 여기엔 대답할 필요 없었다. 안개 저편의 총성이 설명을 대신했으니까. 겨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귀에 꽂은 리시버에서 갑작스럽게 무전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연대, 대대, 중대 채널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인지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총성이 다시 터졌다. 흩어지는 점사, 이어지는 연사. 「전투감각」이 총성의 방위와 대략적인 거리를 잡아냈다. 다만 거리는 조금 부정확했는데, 안개 탓이었다. 높은 습도는 소리가 확산되는 범위를 크게 넓힌다. 에셔 대위가 즉각적으로 명령을 쏟아낸다. 경계선을 강화할 병력, 숙영지를 지킬 병력, 현장으로 출동할 병력을 순식간에 분할한다. 겨울은 출동하는 쪽이었다. 이동은 차량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에 도착한 겨울은, 이미 교전이 종료된 것을 확인했다. 숙영지 경계 부근에 변종 시체들이 드문드문 흩어져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다. 병사들이 하나하나 확인사살을 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노이즈 메이커의 소음 지원이 시끄럽다. 적어도 세 방향에서 동시에 울리는 것 같았다. '체계적인 공격이 아닌가?' 겨울이 전투 흔적을 살폈다. 대응이 늦었으면 위험했겠으나, 먼저 겪었던 야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실종자가 있었다. 변종들이 침입한 구간에 배치되었던 경계조 두 명이 사라진 것. 이쪽 방면을 담당한 중대장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았다. 캠프 오비스포에서 온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과도한 스트레스에 짓이겨지는 표정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왜 또 이런 일이......." 그는 기름기 찌든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더니, 통신병을 불러 대대본부에 무전을 넣었다. 실종자 수색의 허가를 얻는 것이었다. 겨울이 그에게 청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자네가?" 초면이지만 겨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낯선 중대장은 짧게 고민하고 느리게 끄덕였다. 소속이 다른 장교에게 신세를 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자존심 같은 게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런 걸 내보일 상대도 아니고. 대대본부는 겨울의 가세를 쉽게 허락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순번을 교대했던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겨울은 실종자들이 걸었을 순찰로를 살짝 비껴서 걸었다. 내리는 비로 물러진 땅에는 많은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풀에 가려졌으나, 4등급 「추적」을 지닌 겨울에게 그 정도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다만 너무 많아서 문제. 시간대별로 겹쳐진 병사들의 군홧발만으로도 충분히 지저분한데, 그 위에 경계를 넘어온 변종들의 자취가 더해졌다. 죽은 것들 중 발을 질질 끄는 녀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죽죽 밀어서 뭉개진 자국이 수두룩했다. '조금 부족한가.......' 「통찰」은 전문가 수준 이상의 「추적」을 권고했다. 경험 자원을 쓰자니 계륵 같은 기술이다. 물론 있으면 도움은 된다.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할 때, 동물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강점이니까. 그러나 그 능력을 쓸 기회는 제한적이다. 사냥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할 만큼 종말이 진행된 상황도 아니거니와, 지금 같은 사건이 자주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익혔던 횟수 자체가 적다. 「탤런트 어드밴티지」가 낮아, 효율이 떨어진다.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변종의 등장과, 그에 따른 난이도 상승을 감안하여, 겨울은 좀 더 효용성 높은 기술에 투자하고 싶었다. 연 이틀에 걸쳐 획득한 경험치가 상당하다. 전투를 통해 얻은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끼친 영향 평가로 더 많은 보상을 얻었다. 이 정도면 「무브먼트」를 초인의 영역으로 넣을 수도 있겠는데. 허나, 나중에 구할 열 사람이 지금 구할 한 사람을 대신하진 못하는 법이다. 어차피 가상의 인격, 가상의 생명이지만, 거짓된 세계에서나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삶의 방식이라도 지키는 편이 낫다. 겨울은 아쉬움을 접고 「추적」을 밀었다.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증강현실로 제공되는 정보가 질적으로 달라졌다. "이쪽으로." 겨울이 손짓하자, 소대가 대형을 짜서 몇 걸음 뒤를 따라온다. 일정 간격을 두고 3개 소대가 산개한 채 신중하게 전진했다. 민간인 보호가 우선이었으므로, 이 이상 병력을 투입하는 것도 곤란하다. 비 내리는 새벽 숲길은 음울한 느낌이었다. 나무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낙엽 위로 묵직하게 떨어져, 타악기 같은 소리로 병사들의 신경을 자극했다. 겨울로서도 소음 많은 환경이 좋지만은 않다. 숲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의 소음도 눅눅해질 테니. 비오는 날 소리가 쉽게 번진다고 해도, 빗방울 소리와 작거나 비슷하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따금씩 노이즈 메이커가 요란했다. 숙영지 방어 대책이다. 수색은 희미한 샛길을 따라 이어졌다. 낮아지는 산기슭. 호변이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점차 짙어진다. 종래에는 가시거리가 30미터까지 축소된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안개 속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끔 소스라치는 병사는, 그 그림자를 변종으로 착각하는 부류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열을 보는 야시경도 쓸모가 없다. 안개가 열까지 집어삼키는 까닭이다. 변종이 낙엽 속에 누웠을 가능성을 경계하느라, 겨울이라도 빠르게 전진하기 힘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 주먹을 들었다. 병사들이 무릎쏴 자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농밀한 안개가 흔들릴 때, 잠깐이었지만, 겨울은 바닥에 누운 두 인간의 형상을 목격했다. 시체는 아무래도 미끼인 것 같았다. 물 냄새 짙은 대기에 두 가지 냄새가 있었다. 하나는 피비린내. 그리고 남은 하나는, '씻지 않는 것의 악취.' 시큼하면서도 역한 냄새가 난다. 이 악취는 일반적인 변종의 썩은 내와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면역 거부반응을 극복했다면 「구울」 밖에 없다. 겨울이 무전기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전방에 실종자 시신 발견. 둘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구울 무리가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나무 위에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하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병사 몇 명이 나무 둥치에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한 소대장과 통신병이 본부에 현재 상황을 보고한다. 초병이 모두 죽었기 때문인지, 표정이 굉장히 나빠졌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바람 갈라지는 소리. 겨울이 반사적으로 사격했다. 티잉-! 정체불명의 투사체가 불꽃을 튀기며 부러진다. 두 조각으로 쪼개져, 휙휙 돌더니, 낙엽 속으로 푹 들어갔다. 근처에 있던 병사가 기겁을 했다. 겨울이 손짓을 보낸다. 뭔지 알아보라는 의미. 병사가 포복으로 움직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낙엽더미를 더듬었다. 이윽고 그 손에 손잡이가 잡힌다. 병사가 다들 보라고 들어보였다. 반 토막 난 식칼이었다. 무전을 치다 굳은 소대장이, 당혹스럽게 중얼거린다. "변종이 무기를 써?" 적잖은 동요가 번진다. 영장류가 대개 기초적인 도구를 쓰긴 하지만, 그래서 인간의 몸을 훔친 변종에게도 그럴 능력이 있겠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버려진 도시에서 주워온 모양이다. 이후 수십 개의 칼이 추가로 날아왔다. 일부는 겨울이 요격했으나, 조건이 나빴다. 안개를 뚫고 가까운 거리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었으므로. 짐승의 으르렁거림, 포효, 빠르게 뛰는 발소리 등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긴장한 병사들이 닥치는 대로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거나 했다. 그러나 조준 없는 사격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비슷한 환경이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북베트남군 한 명을 죽이는데 2만 발 이상의 총탄을 썼다는 통계가 있다. 하물며 상대는 인간보다 강인한 변종, 그것도 강화종인 구울이었다. 수류탄도 마찬가지. 유효범위가 아무리 넓어도, 굴곡 있는 지형과 나무가 많은 환경 때문에 살상효과가 많이 줄어들었다. 역시나, 그것을 비웃듯이, 괴물이 일부러 내는 소리는 그침이 없었다. '이쪽의 탄약을 소진시키려는 수작일까? 이상하게 머리가 좋은데......설마 베타 구울?' 저쪽의 숫자를 잘 모르겠다. 들리는 소리를 기초로 제공되는 「통찰」이 있었으나, 떼 지어 사냥하는 짐승은 대부분 역할을 구분할 줄 안다. 이래서는 능력만 믿고 함부로 나서기도 어렵다. 다른 세계의 생물처럼 꾸물거리는 안개를 보다가, 겨울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소대장님." "음?" "유탄 사수가 조명탄을 가지고 있나요?" 미군 보병소대는 분대 별로 6연발 유탄발사기(M32)를 하나씩 지급받고, 그 외에도 소총 아래에 액세서리로 다는 단발 유탄발사기도 존재한다. 유탄발사기로 쏠 수 있는 탄종은 의외로 다양하며, 그 중엔 조명탄도 있었다. 다만 크기가 작아 본격적으로 쓰긴 어렵다. 소대장도 그 점을 지적한다. "조명탄은 왜? 그거 신호용이야. 누구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본진에는 무전으로 연락하면 되지 않냐는 의문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말 그대로 조명으로 쓸 겁니다." 말하면서 안개를 가리킨다. "아직 주위는 어두운 편이에요. 안개는 짙고요. 밝은 광원이 생기면 안개에 변종의 윤곽, 혹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 때를 노려서 일제사격으로 죽여 버리죠." "그래봐야 한 발당 겨우 7초 타는데....... 차라리 지원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거야말로 저것들이 원하는 바라면 어쩌려고요?" "응?" "실종자를 미끼로 우리를 유인하고, 우리를 미끼로 더 많은 병력을 끌어내고, 그렇게 생긴 빈틈으로 파고들려는 함정일지도 모르잖아요?" 소대장이 당황했다. 겨울이 그를 설득했다. "물론 가능성은 낮아요. 하지만 0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죠. 숙영지엔 민간인 수천 명이 있잖아요. 대대장님도 엊그제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으시니까, 조금이라도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으실 걸요? 민간인 수천 명을 책임 져야 하는데요. 차라리 유해를 포기하라고 하시겠죠." 결국 소대장은 겨울에게 동의했다. 조명탄을 쏜 다음, 전진하여 엄폐물을 확보하면서 사격을 가하고, 유해를 확보하기로 합의를 본다. 유탄사수들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탄창을 비우고 새로 장전하는 작업이었다. 소총과 달리 낱개 단위로 일일이 넣어줘야 한다. 백색, 녹색, 적색의 조명탄은 본래 각각의 용도가 따로 있지만, 지금은 구분하지 않는다. 어차피 땅에 쏴서 박을 것이었다. 기다시피 해서 가까이 모인 유탄사수들에게, 겨울이 방위와 거리를 지정해주었다. "내가 신호하면......한 명씩 시차를 두고, 이쪽부터 저쪽까지 세 발씩 끊어서 쏴요. 거리는 20, 40, 60에 맞춰주고요. 장애물이 많은 환경이니까요." 조명탄 터지는 위치가 입체적이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쏴요!" 투투퉁! 겨울은 조명탄이 날아가는 도중에 이미 다섯 목표를 포착했다. 안개에 비친 그림자가 해시계처럼 회전할 때, 그 중심을 조준선으로 빠르게 잡아내며, 한 호흡에 방아쇠를 다섯 번 당긴다. '한 놈 놓쳤나.' 비명이 길게 이어진다. 맞긴 맞았는데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이미 뛰고 있었고, 어긋난 조명과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날뛰는 것들의 실루엣을 모조리 쏴 갈겼다. 둘 이상 겹쳐진 그림자의 중심을 쏘면, 여지없이 괴성과 고통스러운 포효가 뒤따른다. 각 조명탄의 색이 달라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병사들도 의외로 쉽게 맞추는 중이다. 7초에 10미터 이상 나아가며 탄창 한 개 반을 비웠다. "다음!" 또 한 차례, 조명탄 사격이 가해졌다. 삼색으로 발광하는 안개 속에서, 사거리를 확보한 인간은 강력한 화력으로 변종들을 압도했다. 세 번째가 되자 전진한 병사들이 드디어 시신을 확보했다. 변이되지 않는지 확인하는 사이, 나머지 병력은 숫자가 줄어든 구울 무리를 일방적으로 밀어냈다. 그것들이 내지르는 비명, 달음박질치는 짐승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해냈어!" 소대장이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한다. 겨울이 시체를 확보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시신은 괜찮은가요?" 중의적인 의미였다. 결손부위가 없느냐는 질문이기도 하고, 감염되지는 않았는가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처음부터 미끼로 쓰려고 한 모양인데......솔직히 소름끼칩니다. 더 이상 예전의 멍청하던 변종들이 아니로군요."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적응하는 수밖에." 겨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시신을 회수하여 복귀하는 사이, 태양은 안개 너머로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대장은, 안개가 제법 지워지고서야 부대 전체의 출발을 지시했다. 캠프 로버츠까지는 약 20km. 어제, 같은 거리를 쪼개진 오후로 주파한 걸 감안하면, 별 일 없을 경우 캠프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너무 긴 시간 집중하고 있었다. 겨울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시점. 남은 여정이 조용하기를 바란다. 소년은 험비 창틀을 팔꿈치로 누르며,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69 [69화] #Intermission, 전투의지와 전투피로 (2) 「종말 이후」의 전투피로는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일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이 전투나 다름없다면 말이죠. 그렇기에 전투피로 관리는 공동체 운영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보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지도자는 구성원들의 전투피로를 억제하거나, 때로는 조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잘못 읽으신 게 아닙니다. 전투피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공동체 운영과 인력관리의 중요한 노하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정치적 성향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트라우마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이죠. 자신이 겪은 고통이 조금이라도 재현될 것 같으면,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자기보전을 위한 본능입니다. 따라서 여기엔 이성적인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죠. 현실에서는 참전용사들의 정치적 보수화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너무도 끔찍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과 공동체의 현상유지를 지상가치로 고려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곧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만들어낼 수단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사항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뛰어난 지도자라면, 이런 수단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올바른 길이기도 하지요. 한편 전투피로는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니체는 저작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정신적인 상처를 딛고 강해지는 사람의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종말 이후」에서, 그것은 잠재능력이 확장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경험 누적에 의한 성장과 같은 맥락입니다만, 시스템 상에서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기술습득에 의한 강화와는 완전히 별개란 뜻입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상처만을 남겨야 하는데, 사람마다 한계가 다 다른 법이니까요. 그것을 얼마나 「간파」할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입니다. 당신의 「통찰」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겠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리더십 계열의 핵심인 「통찰」은 당신의 자질과 성향에 따라 작동방식 및 효율이 완전히 달라지는 까닭입니다. #저널, 91페이지, 캠프 로버츠 캠프로 복귀한 뒤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주둔병력이 증강되었고, 캠프 사령관도 교체되었다. 캠프 로버츠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사령관의 계급도 높아져야 했던 것. 이제는 「세븐스 캘리포니아」 연대장이 캠프 사령관을 겸임하게 됐다. 기존 사령관이었던 3대대장은 징계를 받았다. 작전과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번 사태가 워낙 큰일이었기에, 봉쇄사령부에서 본격적인 조사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대대장의 태업을 증언하는 사람은 많았다. 성탄전야, 그는 만취 상태로 곯아떨어졌다. 비상시국에 있어선 안 될 행동이었다. 문제는 새로운 사령관이었다. 포트 헌터 리겟은 성공적으로 야습을 막아냈으나, 캠프 로버츠 정도는 아니었다. 전사자가 많았다. 「세븐스 캘리포니아」의 전 연대장도 전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2대대와 함께 헌터 리겟에 주둔하고 있었다. 운이 없었다. 성탄전야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위로하겠다며 야간 순찰을 돌다가,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사람이 너무 성실해도 문제다. 덕분에 요 며칠간 캠프 사령관은 공석이었다. 새로운 연대장이 착임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사흘. 그동안은 1대대장 파렐 라모스 중령이 사령관을 대행했다. 그리고 오늘. 연대장이 도착했다. 취임식 같은 건 없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경계력 강화공사에 투입되어 있었고, 연대장 자신도 불필요한 행사로 인한 시간낭비를 원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개인적인 호출을 받았다. "만나서 반갑다, 중위. 오늘 부로 캠프 로버츠를 책임지게 된 160연대장, 제럴드 M. 래플린 중령......아, 이제는 대령이군. 미안하다. 아직 새로운 계급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피부색 검은 연대장이 자신의 실수를 넉살 좋게 덮었다. 연대장의 실수는 직책진급 탓이다. 본래 계급과 무관하게, 직무수행에 필요한 계급을 임시로 부여하는 제도다. 미군 연대장은 보통 중령 계급이 맡는다. 다만 캠프 사령을 겸하며, 연대 이외의 다른 지원부대들, 그리고 난민 지원 병력을 함께 지휘하기 위해 대령이 된 경우였다. 이번에 보직해임 된 3대대장도 마찬가지. 캠프 사령을 맡으면서 중령이 된 거지, 본 계급은 소령이다. 급여도 소령 기준으로 지급받았을 것이다. 다만 그의 실수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쉬어 자세로 지적했다. "실례합니다만, 제 계급은 소위입니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웃었다. "아니. 자네도 새로운 계급에 적응해야 할 거야. 가까이 오게." 다가가자, 그는 내 계급장을 떼고 새 것을 달아주었다. "당황했나?"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래플린 대령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놀랄 것 없네. 자네는 일찌감치 승진이 예정되어 있었잖나. 그걸 앞당겼을 뿐이야. 그렇다 쳐도 승진연한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갈아엎고 있다는 건 사실이네만......자네가 한 일에 비하면 약과라고 생각하네. 진짜 보상은 따로 있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또 뭔가 훈장을 주려는 것이다. 미군에 지원하고서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네 번째다. 처음엔 동성무공훈장과 용맹장이었고, 다음엔 은성무공훈장이었으며, 아타스카데로에 다녀온 뒤 근무공로훈장을 받았다. 대령의 표정을 보니, 그가 말한 '진짜 보상'의 격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설마 명예훈장인가? 피어스 상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세운 전공은 처음부터 명예훈장을 받고도 남았지만, 난민들 사이의 상호견제를 유도하기 위해 격이 낮은 훈장을 주는 것 같다고. "자네는 워싱턴에 다녀오게 될 거야. 의회가 자네의 수훈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고 들었어. 오늘 밤 비행기로 출발하고, 내일 오후에 돌아오면 될 걸세." 연대장이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수훈에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그리고 굳이 워싱턴까지 가서 받아야 할 훈장. 다른 걸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계급을 떠나, 진정한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네." 맞잡은 그의 손에는 굳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그의 눈빛으로부터, 나는 새로워진 나의 입지를 실감했다. 이번 사태가 원인이다. 변종이 계획적으로 잠입한 것만 해도 놀라운데, EMP 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었다. 민간인 사망자만 8만 명을 넘는다고 들었다. 몇 개의 주둔지가 지도상에서 지워졌고, 방어에 성공한 곳도 적잖은 피해를 봤다. 멀쩡한 곳은 캠프 로버츠가 유일했다.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으로 덮는 법이다. 미군의 모병간판이 되기로 했을 때 각오한 일이지만, 점점 더 규모가 커지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영웅도 결국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담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 혼자 받을 명예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이지. 사령부에서 보낸 조사단이 죄과만 알아본 건 아니니까. 자네 말고도 몇 명 더 특진대상으로 선정되었네. 캡스턴 대위가 대표적이고. 훈장도 수여될 거야. 그러니 너무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좀 더 물어본 결과, 찰리 중대 대부분이 진급 혹은 서훈 대상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캡스턴 대위는 2계급 특진이다. 소령으로는 정상 진급이고, 중령으로는 직책진급이란다. 공석이 된 대대장을 그가 맡게 되어서 그렇다는 설명이었다. 면담이 끝날 때까지 줄곧, 연대장은 내게 우호적이었다. #저널, 92페이지, 워싱턴 D.C. 워싱턴에 다녀와서 이 일지를 쓴다. 숙소는 백악관이었다. 잠시 머물렀을 뿐이라 숙소라고 하긴 어렵지만, 대신할 표현이 없다. 그곳에 있는 내내, 나는 철저하게 감시받았다. 모두가 내 탈출을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로는 경호라고 하는데, 보이는 데에만 1개 소대가 붙어있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었다. 하기야 그런 걱정도 무리는 아니다. 난민이라면 누구나 봉쇄선 동쪽, 문명세계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그러지 말란 법 없었겠지. 탈출하면 잡을 자신도 없을 테고,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이 될 것이었다. 원해서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난 전쟁영웅이니까. 탈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게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다만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긴 했다. 울타리 밖, 하얗게 눈 내린 정원, 그 너머에서 그치지 않고 솟아오르는 분수, 멀리 보이는 워싱턴 기념비의 우아함. 나를 보겠다고 몰려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더욱 보기 좋았을 것이다. 변종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여기서 느끼는 마음의 평온은 정말 각별했다. 산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요청해보았다. 물론 거절당했다.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래서 정 걱정되면 수갑을 채워도 된다고 했더니, 다들 굉장히 당황했다. 분위기를 풀고자 던진 농담이었는데. 수여식은 예행연습이 불필요할 만큼 간단했다. 진행시간은 20분 남짓. 박수치는 사람들 사이로 대통령과 함께 입장한 뒤, 내 역할은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 뿐이었다. 나머지는 진행을 맡은 장교, 수석군목(Chief of Chaplains), 그리고 대통령의 몫이었다. "기도합시다." 수석군목의 한 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비록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허리 앞에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저희에게 이 훌륭한 땅과 진실된 믿음의 유산을 허락하신 분이시여.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께서 주신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하여 의무의 부름에 응한 이 사람을 기리는 자리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섭리 아래, 중위 한겨울은 용기와 명예, 헌신으로서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했나이다." "당신의 은혜에 의지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앞으로도 동일한 미덕을 지켜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위대한 국가의 태피스트리를 새롭게 수놓은 이 영웅을 당신의 이름으로 명예롭게 하소서. 또한 다시 기도드리나니, 저희 미국인들이 이 사람과 같은 용기와 희생으로써 매일을 꾸려나가도록 하시어, 미국의 역사를 영원히 이어나가도록 해주소서." "오늘 이 사람이 주의 은총으로서 저희 앞에 설 수 있도록, 섭리로 엮어주신 모든 만남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고난과 역경의 시대에 투쟁으로 맞서고 있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해안경비대, 레인저의 모든 병사들 또한 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중위 한겨울과, 그가 지키려는 사람들, 그가 몸 바치려는 국가를 당신의 기쁨으로 여겨주시옵소서.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수호자를 망각하는 국가는 그 스스로도 망각될 것이다.」 그가 수호한 국가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공공의 안보를 지켜낸 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명예를 주고, 결코 잊지 않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과 당신의 거룩한 이름 앞에 맹세하나이다. 아멘." 미국은 종교국가가 아니지만, 전통 면에서는 종교국가에 가까웠다. 나로서는 그 특유의 정서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이후 대통령이 내 전공을 정리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도보다도 더 길었다.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전공을 모두 요약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자리에 준비된 무수한 카메라에 있을 것이었다. 이때 떠오른 추측이 있었다. 내가 상상 이상으로 유명해지면서, 이전까지의 서훈도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닐까? 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난 파소 로블레스 때 이미 명예훈장을 받았어야 정상이다. 여기에 의구심을 품은 게 피어스 상사 한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어쨌든 식장에 모인 각계인사들은, 대통령의 말이 한 마디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내 느낌에, 그들의 열광이 마냥 꾸며진 것만은 아니었다. 푸른 바탕, 열세 개의 하얀 별이 그려진 액자 앞에서, 대통령은 마침내 내게 훈장을 달아주었다. 미국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녹색 월계관을 두른 별. 중앙에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가 양각으로 도드라졌고, 뒷면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THE CONGRESS TO GYEO-UL HAN」 이것을 살아서 받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다. 대부분은 죽은 이후에 수여가 결정되기에, 죽은 군인들의 장식품이라고까지 불리니까. 수여식을 마친 뒤에는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했다. 난민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했더니,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단순히 정치적인 수사인지, 정말로 검토하겠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나절에 불과한 워싱턴 방문이 이렇게 끝났다.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그 한나절의 기억에서 도무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서운하고, 화려하고, 요란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나의 현실, 내가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로. # 70 [70화] #과거 (5), 심리치료 (1) 여인은 핸들을 꺾었다. 승용차가 시가지를 벗어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사후보험공단 중부집중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시설로 들어가는 도로는 을씨년스러웠다. 별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널찍한 공간을 두고 둘러친 철조망은 3중으로 구축되었으며, 고압전류 경고판이 붙어있었다. 그 너머엔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고, 30미터 간격으로 감시탑을 세워놓았다. 감시탑에는 사람이 없다. 사후보험 관제 AI가 제어하는 무인포탑이 있을 뿐이다. 차량을 발견한 검문소의 병사들이 적색 경광봉을 흔들었다. 여인이 차단기 앞에서 차를 세웠다. 다가온 병사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란다. 여인도 조금 당황했다. 내 얼굴을 아는 건가? 아니었다. 시선을 쉽게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솔직하다. 여인은 습관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끝으로 이마를 짚고, 손가락 틈으로 상대를 보는 식. 병사는 아쉬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신분증 확인이 있겠습니다." 여인이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넘겨받은 병사가 카드를 휴대용 단말에 대고 긁는다. 뚜, 뚜, 뚜. 단말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사후보험 관계자. 출입허가.」 신분과 방문목적을 읽은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미리 예약하셨군요. 들어가시죠, 박사님." 다행히 가짜 신분이 들통 나지 않았다. 그녀의 본래 신분으로도 출입은 자유롭다. 실제로도, 사후보험의 간접적인 관계자니까. 그러나 여인은 자신의 방문을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했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엑셀을 밟는다. 승용차가 집중국 남쪽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은 광활했다. 설립 당시, 방문자 수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지상에 보이는 면적은 빙산의 일각. 지하로 더 넓은 열 두 층이 존재한다. 사후보험 도입 직후엔 그 예상이 맞았다. 사상부가 적출된 가족과의 면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주차된 차량을 두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까다로운 방문 절차 때문일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사후보험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가상현실-인공지능 복합체이자,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성장 동력이다. 따라서 그 기술을 탐내는 국가, 기업, 단체는 얼마든지 많았다. 또한 물리적인 위협도 있었다. 사후보험과 인공지능에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지금도 곧잘 벌어진다. 요즘 뉴스의 단골 소재였다. 사상부를 적출한 사후보험 가입자와 외부세계의 소통경로가 「텔레타이프」로 제한되는 것도, 그 과정에서 무수한 보안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방송처럼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건 문제 없을지라도, 쌍방향 소통은 해킹의 우려가 있었다. 결국 시설에 수용된 사람과의 면회는 오직 시설 내에서만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여인이 아는, 그리고 세상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여긴 너무 쓸쓸해.' 이곳 중부집중국에만 80만 명의 사상부가 안치되어있다. 이들의 가족에겐 그리움이 없는 걸까? 애틋한 마음 앞에선 먼 거리도, 긴 시간도, 까다로운 절차도 의미가 없을 텐데. 여인이 건물로 들어섰다. 중부집중국, 즉 사후보험공단의 중부지역 사상부 수용시설은 장엄하고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납골당」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일종의 비아냥거림이었다. 어차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도 못할 텐데, 왜 쓸 데 없는 외관에 돈을 낭비하느냐는 것. 정부는 국격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여인은 다른 이유를 안다. 예로부터 정치인들은 토목과 건설을 좋아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집중국의 내구성은 원자력 발전소 이상이다. 여인은 건물 내부를 한 눈에 살폈다. 방문객보다는 경비원이 더 많았다. 대기선이 그어져 있었으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격납고로부터 안내용 드론 하나가 날아온다. 안면과 홍채인식으로 신원을 식별하고서, 방문목적을 재확인한다. 「송수아 박사님. 사후보험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의 면회를 요청하신 것이 맞습니까?」 "맞아." 「면회 요청이 사전에 통고되었습니다. 한겨울님이 면회를 수락하셨습니다. 현재 대기 상태이므로 즉시 면회가 가능합니다. 지금 안내를 원하십니까?」 "응." 「알겠습니다. B 등급 구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납작한 원형 드론이 바닥으로 내려온다. 여인이 올라서자,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중국 시설은 비대칭의 방사(放射) 구조였다. 중앙의 홀을 기준으로, 장대한 복도가 일곱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한 쪽이 닳아 없어진 바큇살 같았다. 각 방향은 또한 서로 다른 구역의 경계이기도 했다. 구분 짓는 기준은 예치금의 규모다. S 등급이 가장 높고, F 등급이 가장 낮다. 그런 만큼, B 구역은 C 이하의 구역들보다 짧았으며, A 이상의 구역들보다는 길었다. 드론이 감속했다. 하얀 벽면에 검은 글씨로 B-612가 적혀있다. 「도착했습니다.」 "고마워." 의미 없는 인사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목례하듯이, 드론은 동체를 살짝 기울였다. 「면회를 마치시거나,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 필요하실 경우 안내 드론을 부르시면 됩니다.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 유관시설 내 모든 장소의 음성호출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단, 10 데시벨 이하의 음성은 감지가 어려울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드론이 무소음에 가까운 비행으로 날아갔다. 주위가 적막에 잠긴다. 여인은 이제 정면을 바라봤다. 가상현실 접속기를 겸하는 B 등급 생명유지장치는, 오직 한쪽 단면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벽면에 붙은 원형의 문처럼 보인다. 벽 안쪽으로 기다란 원통 형상이 감춰져있을 것이었다. 여인은 가만히 다가가서, 거기에 손을 대보았다. 이 안에 뇌와 척수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굉장히 차갑게 느껴진다. 이번엔 옆을 보았다. 거기엔 또 하나의 원이 있다. 방문자를 위한 전신 접속장비였다. 점멸하는 버튼을 터치하자, 관이 조용히 밀려나온다. 사람 한 명 누울 자리였다. 몸을 눕히는 여인. 센서가 머리 뒤쪽과 목덜미에 밀착했다. 그것은 미지근한 액체 같은 질감이었다. 곧바로 시야 가득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나타난다. 장비를 구동시키자, 관이 다시 벽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접속 중인 사용자를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밀폐. 폐쇄감을 느낄 틈은 없었다. 뇌파 특성이 곧 ID이자 패스워드였다. 로그인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미리 작성해둔 정보가 가상의 그녀를 그려냈다. 다른 외모와 다른 목소리. 곧바로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소년은 아무 것도 없는 백색 공간,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은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공허할 정도로 맑았다. 어딘가 모르게 초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기억 속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아......." 여인은 신음을 흘린다. 만나서 어떤 인사를 건네야할지 많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당장 아무 말도 안 나오고, 습관처럼 얼굴을 가리는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왱왱 울고 있다. 가면을 썼는데 쓰지 않은 착각이 든다. 착각이 아니라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아직 있는 그대로 마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다. 사실 왜 찾아왔는지, 왜 만나고 싶었는지조차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찾아오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 혈관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동정심일지도 모르고, 죄를 대속(代贖)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니, 뒤쪽은 터무니없다. 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연락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몹시도 차분한 음성이다. 여인은 가까스로 자신을 다스렸다. 연습한 미소를 반사적으로 머금고, 때 놓친 인사를 건넨다. 최대한의 상냥함을 담아. "그래, 안녕. 네가 겨울이구나?" 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동요를 빠르게 덜어낸다. 한 발 나아가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그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송수아라고 해. 사후보험 가입자의 심리재활을 맡고 있단다." "조금 이상하네요. 전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거든요." 의심이라기 보단 순수한 궁금증에 가깝다. 여인은 약간의 긴장을 느끼며, 준비한 대답을 말했다. "응, 그렇겠지. 네가 특별한 경우니까." "제가요? 왜죠?" "미성년자에게 사후보험이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거든. 네 나이에 충분한 예치금을 마련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적어도 B 구역에서 미성년자는 너 뿐인걸." "아아."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한 성인은 국민연금을 사후보험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미성년자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인은 한결 더 마음을 놓는다. 소년은 어차피 비교대상을 만날 수 없을 테니, 이 변명은 언제까지고 유효할 터였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내가 이곳 환경을 바꿔도 되겠니?" 두 사람이 서있는 「로비」는 기본 설정으로 남아있었다. 겨울이 다시 끄덕인다. "권한을 넘겨드릴게요." 여인은 넘어온 권한을 확인하고, 손을 펼쳤다. 살풍경한 백색이 지워지며, 편안한 대화가 가능할 환경이 조성된다. 맑은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 따스한 빛, 반쯤 누워도 좋을 의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자연. 이는 그녀 자신이 상담을 받아본 경험에 의거한 것이었다. 경험은 충분히 많았다. 상담사 흉내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할 만큼. "앉으렴." 겨울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른다. 그리고는 조금 어색하게 묻는다. "이제 뭘 해야 하나요?" 정면에서 조금 어긋나도록, 비스듬히 마주앉은 여인이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아무 것도." "네?" "억지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잡담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렴.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 사소한 것도 괜찮고, 두서가 없어도 좋아. 그냥 속에 있는 걸 꺼내는 걸로 충분해." "그런가요?" "응. 그러다보면, 스스로 알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될 때가 있거든." 이는 또한 여인의 목표이기도 했다. 속을 감추는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에 아파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아는 건 중요한 일이야. 설령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나아." 내가 그랬거든. 뒷말을 삼키고 다시 습관을 내비치는 그녀를, 소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의혹이 스친다. 잠깐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소용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 "선생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어요. 뵙기는 오늘이 처음이기도 하고요.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어떤 대화가 가능할까요?" 예상한 반응이었다. 여인이 다시 미소를 만든다. "맞아. 난 네게,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일 뿐이지. 내게는 네가 그렇고. 우리는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소년은 모호한 표정이다. 그러나 여인이 미리 준비한 말은 아직 이어질 것이 남았다. "사람이 처음 친해지는 과정에서, 말은 의외로 좋지 않은 도구란다. 오해를 사기 쉽거든. 억지로 만들기도 힘들고. 그럴 땐 일단 같이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시작될 거야." "......." "앞으로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각에 찾아올게. 혹시 네게 부담스러울까?" "아뇨. 어차피 시간은 많은걸요." "다행이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렴."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책을 불러내어 읽기 시작한다. 이 또한 그녀가 강구한 연극의 한 장이었다. 겨울은 처음엔 침묵이 불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자연스럽게 생각의 나래가 펼쳐진다. 오늘은, 거래가 있었던 날로부터 두 달째 되는 날. 가상인격이 아닌 진짜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진짜 사람이라고 실감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것은, 돌의 무게. 겨울은 그 감각에 집중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렴풋한 느낌이 있었다. # 71 [71화] #비 내린 뒤, 블랙 마운틴 (1) 미 정부는 캠프 로버츠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격상시켰다. 주둔 병력을 늘리고, 규모를 키우고, 시설을 개선하여 요새화 된 거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은 캠프(Camp)로 남아있기 어렵게 됐다. 이제는 포트(Fort) 로버츠다. 난민들의 처우도 달라졌다. 난민구역에서 연립주택 건설이 시작된 것. 공기단축을 위한 조립식 건물이었고, 미관을 고려하지 않은 효율 우선의 설계였으나, 그래도 텐트보다는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건설현장에 투입된 난민들은 의욕이 드높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손을 보탰다. 건축 경험자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밤낮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은 공병대에서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예정 공사기간이 반 토막 났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감소하는 중이고. 겨울은 이렇게 논평했다. "다들 행복할 거예요. 자기 손으로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중이니까요." 160연대 3대대장, 캡스턴 중령이 동의한다. "희망은 삶의 필수품이지. 무기력을 학습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드물 거라고 생각하네. 물론 이 시대는 그 이상의 불행으로 가득하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겨울을 쳐다보았다. 음? 의아하게 반응하는 겨울. 중령은 별 것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지난 크리스마스 사태 당시, 민간인 피해가 큰 폭으로 축소 발표되었다는 의혹이 있네. 혹시 알고 있었나?" "짐작은 했죠. 주둔지 몇 개 지워진 것 치고 발표된 수가 너무 적었거든요." "역시나로군....... 난민들 분위기는 어떻지?" "이 일로 미군에 대한 불신이 깊어 질까봐 걱정되시나요?" "솔직히 그렇네. 이럴 때일수록 믿음이 중요한 법이니까. 지난 번 같은 사태가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를 일이기도 하고." 확실히 믿음은 중요하다. 그날 밤, 겨울 또한 난민들이 공황에 빠질 가능성부터 경계했다. 그런 상황에서 혼란을 억누르는 힘이 바로 믿음이다. 통제에 따르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 적어도 집단 생존의 효율 면에서는, 최악의 질서가 최선의 혼돈보다 낫다. 겨울이 옅은 미소를 곁들여 대답했다. "염려 놓으세요. 당분간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여유도 없을 테니까요." "여유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이유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그렇잖아요. 행복은 때때로 비교우위에서도 나오는걸요." 중령은 아둔한 사람이 아니다.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곧바로 이해했다. 캠프 시절부터 포트 로버츠에 있던 난민들은 이번 사태로 오히려 많이 안정화되었다. 다른 주둔지에 비해 위기를 워낙 잘 넘겼기 때문이다. 새로 유입된 난민과 시민들의 피폐한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을 견본삼아, 원래 있던 난민들은 자신들의 행운을 확인했다. 다른 곳에선 얼마가 죽었다더라, 어디는 아예 몰살을 당했다더라. 이런 수군거림들 사이에 동정하는 마음은 드물거나 없었다. 그나마 걱정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아끼는 것이었고. "질이 나쁘죠. 남의 불행이 내 기쁨이면 안 되는 건데." 이렇게 말하면서 겨울은 자연스레 누이를 떠올린다.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소년이 이곳에서 불행할 거라고 생각할 동안에는. 그래서 면회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을까봐 걱정된다. 소년 장교의 안색에 그늘이 지자, 오해한 캡스턴이 조용한 말로 격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당장 내일도 살아있을지가 불확실한 시대 아닌가. 상황이 바뀌면 사람들도 차츰 나아질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겨울은 애써 대답을 빚지 않았다. 오해가 깊어질 것 같았다. 마침 근처에서 나무를 베는 요란한 소리가 대화의 맥을 끊었다. 벌목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중장비가, 10초에 하나 꼴로 나무를 베고 가지까지 쳐낸다. 그것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면, 인력으로 고정시켜 제재소로 실어간다. 여기는 블랙 마운틴 기슭의 제재소였다. 포트 로버츠에서 샌 미구엘을 지나, 파소 로블레스 동남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를 달리면 크레스턴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로부터 다시 9킬로미터를 남하해야 비로소 블랙 마운틴이다. 오늘의 임무는 수송호위(Convoy Escort)다. 사실 1월 들어 줄곧 같은 임무가 반복되는 중이었다. 항공수송만으로는 포트 로버츠의 물자소모를 감당하기가 불가능해서였다. 새로 부임한 캠프 사령관은 매우 의욕적이어서, 건설작업을 일부 미루는 대신 목재 정도는 직접 조달하겠다고 선언했다. 작업엔 난민 노무자들과 지원병들이 동원되었다. 버려진 시설을 재가동시키기가 쉽지 않았지만, 난민들 가운데엔 적합한 기술자들도 많았다. 전력공급이 해결된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누군가 한국어로 겨울을 불렀다. "대장님!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겨울동맹」의 전투조원 중 한 사람이다. 뛰어왔는지 많이 헐떡이고 있었다. 겨울이 캡스턴 중령의 양해를 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한별 씨? 왜 무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럴 수가 없는 일이라서요......." 아무래도 변종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맥락을 봐도 그렇고, 분위기를 봐도 그랬다. 숨을 헐떡일지언정 긴박함, 두려움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여러모로 곤란한 표정이었다. 한별은 주위를 살피더니 작게 속삭였다. "유라 조장이랑 진석 조장이 다투고 있어서, 대장이 좀 말려주셨으면 하고 온 거예요." "싸워요? 두 분이?" "네. 요즘 종종 말다툼을 하긴 했는데,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서요. 아, 이거 제가 말씀드렸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아셨죠?" 무전을 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당사자들에게도 들릴 테니까. 본인들이야 자기들 알력을 겨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테고, 겨울에게 일러바치는 걸 좋아할 리 없을 것이다. 어쩌면 조원들에게 이미 당부해두었을지 모른다. 당장 눈앞에 있는 여성에게서 그런 기미가 보였다. '사이가 점점 나빠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장애인 공동체에서 전달받는 메모를 통해 분위기 정도는 읽고 있었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동태 파악에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숫자부터 부족하다. 금방 끝날 싸움 같으면 이렇게 오지도 않았을 터. 겨울이 한별을 다독였다. "잘 말해줬어요. 안심해요. 비밀은 지킬 테니." "하아, 다행이다." "먼저 가 계세요. 같이 나타나면 의심받을 테니까요." "네! 얼른 오세요!" 얼굴이 밝아진 그녀가 온 길을 되짚어 달려간다. 겨울은 조금 어긋난 방향으로 걸었다. 작업현장 외곽 경계를 서던 병사 및 지원병들이 조금 놀란 모습으로 눈인사를 보냈다. "순찰이십니까?" "비슷해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가다보니 겨우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양쪽 다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벌목작업의 소음 때문에 멀리 들릴 리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겨울은 두 사람의 사각에서 다가갔다. 근처의 다른 조원들에겐 뻔히 보이는 위치다. 소년은 그들을 향해 모르는 척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라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진석에게 따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까! 왜 남의 조에 신경을 쓰시냐고요!" 여기에 대답하는 진석은 답답함과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듭니까?! 근무태도가 불량하면 지적할 수도 있죠! 군대가 원래 그런 겁니다!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데요? 경계 서고 있잖아요!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는 거라고요! 방심하고 있다가 변종이라도 나타나면 책임질 겁니까? 예?" "대체 누가 방심을 했다고 그래요? 졸기를 했어요, 놀기를 했어요? 나무에 좀 기대거나 그루터기에 앉아있으면 어때요? 제대로 보고 있기만 하면 되지! 경계를 꼭 정자세로 서라는 법 있어요? 사람이 무슨 마네킹도 아니고!" "정신상태가 문젭니다! 여긴 오염지역 한복판이에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정상 아닙니까? 자세가 흐트러지면 마음가짐도 해이해진다는 게 그렇게 이해가 안 돼요? 군대 경험이 처음이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기강도 중요한 겁니다! 내가 지금 똥군기 잡는 게 아니에요!" "체력 문제는 생각 안 하세요? 한두 시간이면 저도 그러려니 하겠어요. 그치만 하루 종일이잖아요! 낮 시간 내내 서 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지치는 데요! 만약 진짜로 싸우게 되면 체력이 조금이라도 많이 남아있어야 유리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집중력도 그래요! 몸이 편해야 오히려 더 오래 집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이 정신 따로 몸 따로 노는 건 아니잖아요!" "하, 진짜! 사람들 보는 눈도 좀 생각하시죠! 여기 우리만 있습니까?" "지금 겨우 체면 차리자는 거예요?" "체면도 체면이지만, 일 하는 사람들 심리도 배려하자 이겁니다! 저기 나무 베는 분들, 우릴 믿고 작업하는 건데, 우리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퍽이나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저 분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우리가 할 일 아닙니까!" 들어보니 참 사소한 문제이긴 한데, 그래도 각자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유라는 효율을 중시한다. 진석은 규율과 역할을 강조했다. 애초부터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겨울은 싸움의 내용보다 싸움이 성립한다는 사실 자체가 새롭게 느껴진다.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한 진석 쪽은 이해가 가지만, 성격이 부드러운 유라 쪽에서 맞서 싸우는 건 뜻밖이었다. 유라의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매번 싫은 소리만 하는 진석과의 관계는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겨울 생각에, 유라 혼자였다면 싸움을 피했을 것이다. '책임감일지도.' 최초의 전투조장을 맡길 때, 그녀는 겨울이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었다. 그 말처럼, 이제 조원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슬슬 싸움을 말릴까 하다가, 겨울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기분은 상할 만큼 상한 것 같고, 속에 있는 말이나 들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사람은 화가 나면 솔직해지게 마련이다. 물론 거기엔 악의에서 비롯된 왜곡이 들어가므로, 신중하게 걸러서 들어야 한다. 이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며, 겨울이 깨달은 사실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진석이 의외로 유라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 파소 로블레스의 첫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면, 아예 대화를 포기하거나 인신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민폐나 끼치는 여자라고.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화를 내면서도 끝까지 자기 입장을 전달하고 있었다. 둘째는 유라의 늘어난 자신감이었다. 예전에 곧잘 움츠러들던 건, 한 사람 몫을 못 한다는 자책 탓이 컸다. 지금은 다르다. 훈련을 시킨 보람이 있다. "두 분 모두 그쯤 해두세요." 겨울의 목소리에 진석과 유라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진석이 말을 더듬었다.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간결한 반문에 다시 당황하는 진석. 소년은 미소로 그를 안심시켰다. "조장님들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봤어요. 양쪽 다 어느 정도 맞는 의견이었다고 봐요.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죠. 진석 씨의 전투조는 진석 씨의 방식으로, 유라 씨의 전투조는 유라 씨의 방식으로 하세요." 말은 둘 다 옳다고 해도, 결국 유라의 손을 들어주는 결론이었다. 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 결정입니다." 겨울의 한 마디에 진석이 입을 다물었다. 전처럼 따지고 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였다. 겨울에겐 자신을 제지할 권리가 있고, 그 스스로는 거기에 따를 의무가 있다. 진석이 취한 부동자세는 명백히 그런 느낌이었다. # 72 [72화] #비 내린 뒤, 블랙 마운틴 (2) "전 이유라 조장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순찰이나 같이 돌자고 따로 불러낸 자리에서, 박진석이 자기 속을 털어놓았다. "물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만, 확실하게 믿어도 되는 몇 명 중 하나라고 봅니다. 최소한 자기만 아는 겁쟁이들보단 백배 천배 낫습니다. 훈련하는 거 봤는데 사격 실력 좋더군요. 파소 로블레스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겨울은 그의 말에 잠자코 끄덕였다. 불을 끌 때 불씨를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만든 자리였다. 그에게 먼저 시간을 할애하는 것 자체가, 유라를 편애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식시킬 가장 좋은 수단이다. "저는 단지 아쉬운 겁니다. 위기의식이 부족합니다. 사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긴장하고 또 긴장해도 모자랄 판에, 생활이 좀 안정되었다고 다들 너무 퍼져있지 않습니까?" 평소 동맹의 낙관적인 기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보다. 겨울은 그가 조원들을 성탄전야에도 훈련장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던 게, 그런 분위기로부터 자기 사람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인가보다. 겨울이 적당한 대답을 궁리했다.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데엔 동의해요. 그래도 지금의 동맹 분위기가 꼭 나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삶이라는 게 항상 팽팽하게 당겨져 있을 순 없는 거잖아요?" "왜 없습니까? 인류멸망의 위기입니다. 살고 싶으면 당연히 그래야죠!" 진석은 자신의 두려움을 역설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무섭습니다! 매일 같이 악몽을 꿉니다! 죽다 만 것들에게 쫓기다가, 혹은 뜯어 먹히다가 눈을 뜬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언젠가 현실화될까봐 다시 무서워집니다! 이게 과연 근거 없는 걱정일까요?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올라가는 목소리가 꽤나 감정적이다. "지난 습격은 대장님 덕분에 무사히 넘겼지만, 매번 이렇게 운이 좋으란 법 있습니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려면, 아주 작은 방심이나 게으름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힘들어도, 정말로 죽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단 말입니다!" 결국 진석의 빡빡한 태도는, 그 나름대로 두려움에 맞서는 수단이었던 모양이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해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박 조장님만큼 강하진 않아요. 정말로요. 두려움에 그런 식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사람마다 한계가 다르잖아요? 전 정신적 여유가 윤활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윤활유 없는 기계가 쉽게 마모되고 곧잘 고장 나는 것처럼, 여유 없는 사람들은 서로 부딪히고 깎이면서 무너지지 않을까요?" "......." "개인의 최선과 공동체의 최선은 많이 다릅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그래요. 한 사람에게 가능하다고 해서, 그 기준을 전체에게 강요할 순 없어요." 진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건 어떻습니까?" "네?" "이유라 조장 말입니다. 지켜보면서 확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유라 조장은 가능합니다.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안 하는 거죠. 그건 양심이 없는 겁니다!" 겨울은 앞부분에서 새롭게 느끼고, 뒷부분에서 의아해졌다. "양심이요? 뭔가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아뇨, 맞게 말씀드린 겁니다. 동맹이 이렇게 커졌는데도, 너 나 할 것 없이 대장님께 의존하려고만 하잖습니까. 미성년자 불러다가 리더 맡길 때 미안해하던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매번 가장 위험한 일을 도맡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뒤에서 뻔뻔하게 삶의 여유를 찾아요? 전 그게 용납이 안 됩니다." 뜻은 좋지만, 진석의 태도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표정에선 강한 혐오감이 엿보인다. 겨울이 어려운 미소를 만들었다. "일단 좀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셨어요." "......실례했습니다." 이 시간이 명목상으로는 순찰이었기 때문에, 숨을 돌릴 여유는 걷는 동안에 충분했다. 진석이 제법 가라앉은 뒤, 겨울이 말했다. "글쎄요. 좀 더 길게 생각하셨으면 좋겠네요. 박 조장님......아니, 진석 씨는 스스로가 괜찮다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정신적으로 굉장히 몰려있으시거든요. 현실이 이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하신다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다만 진석 씨가 계속 그러시면, 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을 믿고 맡길 수가 없겠네요. 싫어하시잖아요." 진석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경멸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지키긴 어렵지 않겠어요? 진석 씨 입장을 이해는 해요. 그래서 더더욱 못 맡기겠어요. 사람들을 위해서도, 진석 씨를 위해서도 말이죠." "아니, 하지만, 제 노력은......." "그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아요. 여유를 가져보세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게 될 거에요." 진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겨울이 모르는 척 다른 방향을 보았다. 너무 노골적이었던 게 아닐까 곱씹어보면서. 그래도 먹힐 것이다. 딱히 나쁜 뜻으로 한 말도 아니고. 진석을 보내고서, 겨울은 이번엔 유라를 찾아갔다. 그런데 도중에 보이는 유라조 병사들의 경계태도가 바뀌어있었다. 더 이상 어디에 기대지도, 앉아있지도 않았다. 유라는 겨울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괜찮아요. 그보다 오면서 보니까 조원들이 정자세로 서있던데, 유라 씨 지시에요?" "앗, 네! 맞아요!" 그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티가 난다. "머리가 식은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진석 씨 말이 맞는 부분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요?" "네네. 벌목작업 하시는 분들에게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분이요. 우리는 그분들을 지키려고 나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거잖아요? 진석 씨가 이것만큼은 맞는 말을 했는데 제가 화를 낸 거잖아요? 평소에 쌓인 앙금 때문에 화풀이를 한 건 아닐까요? 여기까지 생각했더니 부끄러워졌어요. 전 바보에요. 당연히 떠올렸어야 하는 건데." 정말로 창피한 표정이었고, 말은 엄청나게 빨랐다. 만나면 할 말을 속으로 열심히 되뇌고 있었나보다. 진석과 다투는 모습을 겨울에게 들켰다는 당혹감도 한 몫 한 것 같았다. 재미있었다. 겨울이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훌륭하시네요." "훌륭? 놀리시는 거죠?" "아뇨. 진심이에요. 제가 왜 유라 씨를 놀리겠어요?" 그래도 유라는 못 미더워했다. 굳이 그녀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진석과의 대화를 다 털어놓는다면 믿을 텐데, 그건 그것 나름대로 경솔한 행동이다. 진석이 자신의 속내를 밝힐 때, 그 대화가 아무데서나 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단 한 발이었지만, 작업 현장 전체가 얼어붙는다. 겨울은 난민 노무자들과 다른 병력들에게 안심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생존감각」의 경고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사이에 선조치 후보고를 알리는 무전이 돌았다. [여기는 16번 경계지점. 구울 한 마리 사살했습니다!] 총을 쏜 것은 공교롭게도 장한별이었다. 유라와 진석의 싸움을 겨울에게 알렸던 사람. 그리고 인상적인 영점사격으로 피어스 상사가 지정사수감이라며 감탄하게 만든 사람. 유라와 겨울이 나란히 도착했을 때, 한별은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대장님! 저기 보세요! 구울이 나타났는데, 제가 한 방에 보냈어요!" 가리키는 방향이 꽤나 멀었다. 거의 2백 미터 거리. 구울이 가만히 서있지는 않았을 텐데, 단발사격으로 맞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단발로 죽었다면 머리나 그에 준하는 급소를 맞았다는 뜻이니 더욱 훌륭했다. "대단하네요. 실력이 나날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실력은 아니에요. 망원렌즈가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저 이거 진짜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이제 지원병이 아니라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장비도 정규군 기준으로 지급받는다. 4배율 스코프도 그 중 하나. 딱히 그녀가 잘 쏴서 더 잘 쏘라고 준 게 아니라, 미국 보병의 기본 액세서리였다.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그걸 감안해도 실력이 늘었거든요. 저거 죽어 넘어진 꼴을 보니 달리다가 간 것 같은데, 예측사격으로 머리를 날린 거잖아요? 그것도 한 방에. 어지간히 숙련된 사수도 못 하는 일이에요." 기분 좋아진 한별이 기묘한 소리로 히히 웃기 시작했다. 칭찬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동기부여다. 처음에 방아쇠 당기기를 그토록 겁내던 한별인데, 사격 훈련 때마다 계속해서 칭찬을 받자 누구보다도 사격을 좋아하게 됐다. 이제는 미군 교관들이 그녀를 미스 트리거해피라고 부르는 판이다. 다만 저 웃음소리가 조금....... 유라가 깨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저거 말고 다른 건 없었나요?" "네. 하나뿐이었어요. 이상하죠?" 대답하는 한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총을 쥔 양 손도 마찬가지. 전투흥분 때문. 두려움과 통하는 면은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상하지 않아요. 아마 탐색이겠죠." 겨울의 말에 유라가 흠칫 놀랐다. "탐색이요?" "네. 우리는 요즘 같은 시간에 같은 경로로, 같은 장소에 와서 일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요. 변종들이 패턴을 학습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무엇보다 구울 정도면 머리 좋은 개나 늑대 정도는 될 것이고, 아무 이유 없이 혼자서 얼쩡거리진 않을 거라고 봐요." "갑자기 무서워지네요......." "이렇게 나오는 놈들을 놓치지만 않으면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이것들도 나름 계획을 짜서 공격하는 모양이니까. 성탄절에 특수변종들이 많이 죽기도 했고요." 겨울의 추정을 「통찰」이 긍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한별 씨, 참 잘하셨어요." 히힛. 한별이 총을 끌어안고 방긋방긋 웃는다. 그 뒤로는 벌목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작업을 끝내는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겨울이라 낮이 짧았고, 일몰시간 전에 확실하게 복귀하도록 작업일정을 짠 것이다. 오늘의 일몰은 오후 5시 13분. 일몰 후에도 박명(薄明)이 남으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출발 전 최종적으로 자재와 인원 점검을 진행하는데, 중국 난민 노무자 한 무리가 겨울에게 다가왔다. 마침 같이 있던 전투조원들이 조금 긴장하는 기색이었으나, 겨울이 손을 들어 안심시켰다. 지금의 겨울에게 해코지를 할 만큼 정신 나간 집단은 없었다. '아니, 한 군데 있긴 있구나.' 점점 더 심각한 광신도 단체로 변해가는 「순복음 성도회」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있기에 행동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겨울을 미워할 이유도 있었다. 하필이면 성탄절에 변종들의 대규모 공격이 일어났다. 그런데 겨울이 그것을 사전에 경고했다. 이게 그들에게는 예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겨울은 그들 가운데 하나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의 삿대질로 외치던 경구들을 떠올렸다. "너는 거짓 예언자다! 악마를 불러오는 재앙의 나팔수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라!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성경의 말씀을 들어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너 선지자는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이 굳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더라!" "성경의 말씀을 들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겨울은 생각했다. 성경에 달리 좋은 구절도 많을 텐데, 거기서조차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구나, 하고. 생각에 빠져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중국인 노무자들이 다가오기엔 충분했다. 표면적으로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저 지켜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온 것처럼 보였다. 전투조원들이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겨울은 아직 의아했다. 작업이 이어지는 보름 동안 이랬던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꺼(大兄)!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따꺼 덕분에 마음 놓고 일을 합니다!" 이런 말들을 받던 중에, 악수를 청하는 이가 있었다. 맞잡자 손아귀에서 모난 감각이 느껴진다. 접힌 종이의 질감이었다. 편지? 겨울은 모르는 척 받아서, 눈에 띄지 않는 동작으로 주머니에 넣었다. 복귀하는 차량행렬의 호위는 튼실한 편이었다. 험비 이외에도 다수의 경전투차량(LSV)이 대열 좌우를 폭넓게 오가며 광범위한 영역을 경계했다. 겨울은 험비 안에서 편지를 펼쳤다. # 73 [73화] #비 내린 뒤, 포트 로버츠 (3) 포트 로버츠로 돌아가는 풍경은 과거와 많이 달랐다. 인근의 광활한 땅에, 파헤쳐진 직선이 짙은 흙빛으로 수천 가닥이나 그어져, 마치 거대한 농경지에 접어드는 기분이다. 농경지의 면적은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파종기를 견인하는 미군 트럭 수십 대가, 시속 2마일의 느린 속도로 꾸역꾸역 선을 긋는다. 물론 정말로 농사를 짓는 건 아니었다. 심는 게 종자가 아니라 지뢰였기 때문이다. 크고 굵은 쟁기가 땅을 가르고 지나가면, 푹 패인 고랑으로 지뢰가 떨어지고, 넓적한 쇳덩어리가 흙을 밀어 고랑을 메운다. 하차 보병 한 명이 그 뒤를 평범한 걸음으로 따라다녔다. 지뢰가 제대로 파묻혔나, 육안으로 확인하는 역할이었다. '죽음을 심는 농부들.' 겨울은 자신이 떠올린 엉뚱한 은유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저 넓은 땅에 얼마나 많은 불꽃이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자동화된 지뢰매설장비(M57 ATMDS) 하나가 한 나절에 2,300개의 지뢰를 묻는다. 「전투감각」이 「통찰」을 불러왔다. 증강현실 UI에 추정치가 떠오른다. 당장 보이는 범위에만 약 2만 7천 개가 묻혀있었다. 그 전부가 대전차지뢰였다. 주로 「그럼블」에 대한 접근거부 수단이다. 전차를 박살내고 장갑차를 날려버리는 위력이니, 아무리 「그럼블」이라도 밟는 즉시 죽는다. 그 밖에 다른 특수변종들에게도 위협적일 것이다. 대개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니까. 겨울이 보기엔 일장일단이 있다. 일단 방어력은 확실해지겠다. 그러나 유사시 빠져나갈 길이 제한된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방어선이 붕괴되거나, 요새 내부에서 감염확산이 시작될 때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다. 운전병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거 혹시 연애편지입니까?" 음? 겨울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운전병의 짓궂은 눈짓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이런. 무의식중에, 오는 길 내내, 잘 접은 편지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가보다. "그렇게 낭만적인 건 아니에요." "에이. 그러지 마시죠. 읽고 꽤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것 같던데. 누굽니까?" 동승한 병사들 모두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작금의 미국에서 겨울보다 유명한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유명인의 사생활은 흥미로운 가십거리였다. 그게 연애문제라면 더더욱 그렇고. 자칫 이상한 소문이 돌게 생겼다.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보낸 사람이 여자도 아닌걸요." "이럴 수가! 남자 취향이셨습니까?" "......."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삼합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화승화(和勝和)와 수방방(水房幇) 생존자들의 공동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서간에서 겨울의 인덕과 업적을 호사스러운 미사여구로 드높인 뒤, 본격적인 용건을 기술했다. 「대형! 저희들은 더 이상 리친젠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과거에 신의안(新義安)의 용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용두가 되려면 전통에 따라 정식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본디 신의안과 별개의 조직이었습니다. 대형께서 저희를 똑같은 무리로 보실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크게 볼 때 삼합의 큰 틀에 속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다시 조직과 계보가 갈라진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흑사회 안에 다시 삼합회가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저희는 숫자가 적었고, 가족과 함께 의탁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리친젠은 지금껏 저희를 차별해왔습니다. 동등한 형제로서 대우해주겠다는 서약을 먼저 어긴 것입니다. 대형께서도 그것을 경계하여 삼합회에 합류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우셨습니다.」 「그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합회에 속해있는 동안 다른 동포들과 척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독립하더라도 희생이 불가피하며, 숫자가 줄어든 뒤에 자립이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저희들 가운데에는 고아와 미망인이 많습니다. 시창(屍瘡)이 번질 때 동포들을 구하겠다고 나섰던 다른 형제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화승화의 백지선으로서 그들 대신 그들의 가족을 책임지기로 약속했습니다. 수방방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깡패들뿐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십시오. 한어로 쓰면 유민과 건달은 같은 단어(流氓)입니다.」 「대형! 저희를 거두어주십시오. 항상 의(義), 인(仁), 협(俠)을 지키는 당신을 따르고자 합니다. 「화수(和水)」의 초대 용두가 되어주셔도 좋고, 저희를 「겨울동맹」에 넣어주셔도 좋습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종이를 아껴 작은 글자로 빼곡해진 편지 말미에는, 자신들과 은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추신처럼 달려있었다.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구제의 여지는 있다. 깡패의 죄는 깡패의 책임이다. 그 가족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지울 순 없다.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었다. 시창(屍瘡)은 역병 모겔론스의 중국식 명칭이었다. 시체처럼 피부가 썩는 병이란 뜻이다. 즉 북미 서해안 감염확산 당시, 화승화와 수방방의 범죄자들이 중국인들을 구하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는 소린데, 정말일까? 도박장을 운영하며 사창가에 여자를 팔고 마약을 밀거래하던 인간 백정들에게 그 정도의 인간성이 있었을까? 겨울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깡패들이야 뭐......허세가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대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정말 나섰을지 모르지. 보호세를 받았을 거 아냐? 그럴듯하게 나가서 어느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다가,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작정이었을지도.' 혹은 아주 희박한 확률로, 거대한 재앙을 맞이한 자들의 극적인 변화였을 수도 있고. 어쨌든 겨울 혼자 내릴 결정은 아니었다. 적어도 두 부장에게는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들을 존중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급할 건 없었다. 기지로 들어선 차량 중 일부는 공사현장으로 직행했다. 건조기로 말리고 규격에 맞게 가공한 목판들은, 추가적인 손질 없이 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겨울은 자재의 분배과정을 감독했다. 동맹의 보호를 받는 협력 조직들로부터, 분배과정에서 부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탓이었다. 소년 장교에게 감독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구역 별로 돌아다니며 자재를 내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겨울을 책임자로 생각했다. 심지어 본래 감독역인 공병대마저 그랬다. "깜언! 깜언!" 자재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이 겨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걸 보고 미군이 이상하게 여겼다. "뭘 오라는 겁니까?" "저분들 언어로 고맙다는 뜻이에요. 이리 오라(Come on)는 게 아니라." "아하." 난민구역의 민족다양성은 대단히 높다. 동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온 사람들이 몰려있으니, 국적으로만 수십 개다. 그러나 인구 분포는 한중일이 대부분이며, 호주와 뉴질랜드 난민들은 아예 다른 기지로 이송되었고, 기타 국적의 난민들은 한 줌에 불과했다. 가장 극단적으로, 투발루 출신 난민은 딱 한 가족뿐이었다. 숫자가 적다보니 그냥 한 거류구에 몰아넣었고, 그나마도 중국계 거류구 건너에 위치해있었다. 평소엔 만날 일이 없다. 겨울은 그 뒤에야 동맹으로 향했다. 동맹의 영향권은 공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었다. 기공식도 여기서 열렸다. "대장님, 이제 돌아오십니까? 오늘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두꺼운 옷을 입었고, 오른팔에는 동맹의 상징인 눈꽃매듭을 완장처럼 달고 있었다. 중간 간부들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웃음은 조금 비굴한 느낌이었으며, 허리가 자연스럽게 구부러진다. "아, 네. 몇 번 뵈었던 분이네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겨울이 알고도 물었다. 남자의 입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깐이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이구, 죄송이라뇨. 공사다망하신데 잊으실 수도 있죠. 제 이름은 백산호입니다." "그렇군요. 잠시 무전기 좀 빌릴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공사현장에서는 군용 채널을 쓰지 않는다. 겨울에겐 자기 무전기 설정을 바꾸는 것보다, 현장에 있는 사람의 것을 빌리는 게 편했다. 남자는 과장된 공손함으로 무전기를 내밀었다. 그 사이 비계(飛階) 위에서 작업하던 사람들도 겨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소년은 그들에게 간단한 목례 몇 번으로 답하고, 무전으로 부장들을 호출했다. "장연철 부장님, 민완기 부장님. 저 한겨울입니다. 들리십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논의할 일이 있으니 잠시 본부로 돌아와 주세요." 「즉시 가겠습니다.」 「바로 갑니다!」 거의 동시에 돌아오는 대답이 서로와 겹쳐진다. 본부는 겨울과 동맹원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텐트다. 지금은 거주인원이 대부분 교체되었다. 동맹의 관리사무소 격이었다. 겨울은 백산호에게 무전기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옷차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악수를 청한다. "그럼 고생하세요." "하하, 네. 대장님도 수고하십시오." 백산호의 맨손은 따뜻했다. 꺼끌거리는 느낌 없이 부드럽다. 그는 곧장 공사현장으로 뛰어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 번씩 꼭 돌아본다.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몇몇은 그와 겨울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멀었으나, 「개인화기숙련」 보정으로 뻔히 보이는 거리였다. '땀 냄새가 나지 않았어.' 물론 작업이 꼭 땀 흘리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겨울은 악수를 나누었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저물녘 바람이 차다. 저 사람, 바람 불고 추운 날에 야외작업을 하면서, 장갑도 끼지 않았는데 손이 따뜻하고, 더군다나 흙도 톱밥도 묻어있지 않았다. 겨울은 장작을 쑤셔 넣은 드럼통을 바라보았다. 그런 쉼터가 몇 군데 마련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쉬는 사람은 몇 없었다. 눈꽃 매듭을 진 중간 관리자들도 마찬가지. 다들 날씨에 비해 가볍게 입었다.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적당히 쓰다가 자르라고 해야겠다.' 지적하고 고쳐지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그 편이 더 공정하기도 할 테고. 그러나 동맹은 신생조직이다. 초기 간부진의 신뢰도는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이 공정한가와 무엇을 할 것인가의 경계는, 곧 겨울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한계나 마찬가지였다. 본부 막사는 거의 비어있었다. 남녀 몇 명이 들어오는 겨울에게 고개를 숙였다. 구석엔 말 못하는 노인이 한 명 앉아있다. 강영순 노인은 온화한 미소로 겨울의 귀환을 반겼다. 두 손으로 수화를 보내는데, 사실은 수화가 아니다. 받을 쪽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당장 찾을 필요는 없다. 겨울은 잠시 후에 뵙겠다고 손짓하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석유난로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겨울이 난로 가까이에 의자 셋을 끌어 놨다. 난롯불 근처에 앉아 잠시 열을 쬐고 있으려니, 먼저 도착한 건 장연철이었다. 젊은 만큼 체력도 좋다. 뛰어왔는지 호흡이 거칠었다. 겨울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조금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거든요." 조금 늦게 민완기도 도착했다. 그는 겨울에게 살짝 목례하고,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나머지 한 자리를 채운다. 겨울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입장을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그러자 대답이 엇갈렸다. "찬성합니다!" "전 반대입니다." 전자는 장연철, 후자가 민완기였다. 두 부장이 서로를 돌아보는 모습에, 겨울은 자연스레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 74 [74화] #비 내린 뒤, 포트 로버츠 (4)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다. 대부분의 경우 두 사람의 온도차는 명분과 실리의 경계에서 비롯된다. 사명감이 의욕으로 직결되는 장연철이었으나, 민완기와 대화할 땐 좀 더 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어째서입니까? 전 신뢰가 우리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겨울동맹」은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항상 바른 길만 걷는다는 믿음 말입니다. 다들 그렇게 믿으니까 이 큰 조직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거 아닐까요?" 청년 간부의 역설 앞에, 전직 학자가 안경 너머에서 눈웃음을 짓는다. "뭐어......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겠습니다. 단기간에 구성원이 급증했는데도 동맹이 이렇다 할 마찰 없이 원만하게 돌아가는 건, 모두가 동맹을 그만큼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공정하고, 깨끗하고, 정의롭다고. 그래서 약한 사람은 빼앗길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강한 사람은 빼앗기 전에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됩니다. 사람은 무대와 역할에 맞게 자신을 바꾸는 동물이에요. 예, 그것은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자산입니다. 보이지 않아서 경시하기 쉽지만, 사실 정말로 귀중한 거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동맹을 만들 때 작은 대장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배척하고, 피부색 다르다고 혐오하고, 쓰는 말 낯설다고 외면하긴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고도 하셨고요." 여기서 조금 놀라는 겨울. 소년은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습에 기초하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그러나 연철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건 뜻밖이었다. 연철은 천재가 아니다. 어디 적어놓고 일부러 외웠다고 볼 수밖에. 연철이 살짝 눈치를 본다. 겨울이 입꼬리를 짧게 끌어올렸다. 안도한 청년 부장은 자신의 주장에 한층 더 진한 자신감을 칠했다. "이번 건은 그 약속이 사실이었다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겨울동맹」을 새롭게 보지 않을까요? 저기가 한국인들만 가는 데는 아니구나, 하고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대장님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그걸 약속이라고 표현하는구나. 겨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람의 모든 말이 약속이어야지. 가볍게 내뱉은 말은 타인의 상처가 되기 쉽고. 무엇보다 소년은 동맹의 대표자였다. 대표자로서 겨울이 연철의 의견을 평했다. "네, 공감되네요. 국적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너무 쉽게 미워해요. 어차피 같은 난민, 같은 사람들인데.......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이러면 안 된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요." 연철이 마음 여미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민완기가 지적했다. "그래도 항상 현실적인 한계를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척이나 질박하잖습니까.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죠." 연철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겨울이 눈길을 돌린다. "민 부장님은 아직 반대하시는군요. 이유를 들어볼까요?" 라고 물어보면서도, 겨울은 민완기가 제기할 문제를 예상하고 있었다. 적어도 셋 이상. 그렇다고 앞서 말하기는 모양새가 나쁘다. 발언기회를 주는 것 자체도 중요했다. 말하는 민완기와, 지켜보는 장연철 모두에게. 민완기가 묻는다. "몇 가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역시나. 겨울이 허락했다. "그럼요. 말씀하세요." "첫 번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받아주면, 「삼합회」는 어떻게 됩니까?" 짧은 신음은 장연철의 것이었다. 민완기는 들은 내색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치들, 세력이 거기서 더 줄어들면 망할 위기 아닙니까? 지금도 우리와의 협력으로 간신히 체면 차리고 있는 마당입니다. 뭐 저야 그깟 왈패들 죽든 말든 상관없습니다만, 대장님이나 장 부장님은 마음이 불편하실 것 같군요." 장연철이 반론한다. "우리가 지켜주는데 과연 다른 조직이 넘볼까요?" "말씀 드렸잖습니까. 간신히 체면을 차리고 있다고. 깡패 두목이 체면을 잃으면 더 볼 것도 없지 않겠어요? 편지 쓴 사람도 그렇게 써놨고요. 그치들 안에 여러 패거리가 있는데, 최소한 우리는 리친젠을 두목으로 모시기 싫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야 「삼합회」가 최대 세력이라 떡고물이 많아서 그럭저럭 유지되어 온 모양입니다만, 이젠 그것도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죽이겠죠." "......." "우리 동맹이, 그리고 작은 대장님이 거기까지 막아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들이 도움을 받아들이기나 할까요? 배신했다고 비난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지요." 장연철에게는 속이 쓰려지는 「통찰」이었다. 실제 삼합회의 역사에서도 비일비재한 것이 내부분열과 항쟁이었다. 이름 모를 백지선이 편지를 통해 증언한 바와 같이, 그들 내부의 계파는 서로 다른 조직명을 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장년의 간부는 목격자의 증언을 요청했다. "직접 대화해보신 대장님께서는 어찌 느끼십니까?" "민 부장님과 같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완기는 한 번 희미하게 웃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자, 그럼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삼합회」 몰락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했을 때, 우리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게 과연 「삼합회」 뿐이겠습니까? 다른 중국계 조직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요?" "동맹 맺고 뒤통수나 치는 자라새끼들이라고 하겠죠." "직설적이시군요. 아무튼 「겨울동맹」은 중국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그들 가운데 힘든 사람들을 돕기도 더 난처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합당하다. 애초에 겨울 또한 「삼합회」가 중국계 거류구에 영향력을 행사할 창구가 되길 기대했었다. 이름 모를 백지선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얻는 건 적은 수의 중국인들뿐이다. 반대로 현상유지를 택할 경우, 훨씬 더 많은 중국인들과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 구하기는 숫자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게 겨울의 지론이기도 하다. '파소 로블레스에서도 그 문제로 진석 씨와 싸웠었지.' 계속되는 민완기의 말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였다. 그는 겨울의 지향성을 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앞으로 구할 수 있을지 모를 더 많은 사람들의 존재가,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보다 더 귀할 순 없지요.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요. 어느 쪽이 더 귀하다고 단정 짓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다른 변수를 고려해야지요." "변수라는 건 우리 동맹의 사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숨처럼 나온 말은 장연철의 것이었다. 민완기가 긍정한다. "예, 그래요. 저는 동맹의 이익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만, 그거야 장 부장님과 저의 시각차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예외는 있지요. 최근 장애인 분들의 소개를 거쳐 들어온 사람들은 심성이 검증되어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 지켜보기도 조금은 피곤한 일입니다만." 뒤로 갈수록 전직 학자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지켜 보다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는 장애인 분들도 100% 믿는 게 아닙니다. 그 분들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장 부장님께 접근해서 동맹에 들어오고, 다음 순서로 미리 약속된 첩자를 데려온 거면 어쩌시겠습니까?" 연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민완기는 겨울이 말하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연철도 마찬가지였지만, 분야가 다르다. 같은 텐트에 말 못하는 노인이 있는지라, 장연철도 낮은 소리로 항의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차별 받아온 분들입니다. 여기서 까지 차별 받아선 안 됩니다." "장 부장님, 언더도그마를 경계하십시오. 약자가 반드시 선하다는 믿음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 정도는 압니다.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분들이 왜 그러겠습니까? 다른 조직을 편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요? 사실상 장애우 분들이 가장 지내기 좋은 공동체가 우리 「겨울동맹」인데요. 거기다 작은 대장님은 이제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누구도 대장님을 대신할 수 없고, 그게 또 우리 동맹의 입지 아닐까요?" 민완기가 어깨를 움츠렸다. "음, 제가 장 부장님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전 그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자고 꺼낸 말이었습니다." 겨울이 그를 편들어주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민 부장님은 필요한 일을 하고 계시다고 봐요. 납득하기 어려우시더라도, 저를 봐서 넘겨주세요." "아니, 대장님......." 연철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는다. "어흠. 그럼 다시 본론입니다." 어색한 헛기침으로, 민완기가 자기 순서를 되돌렸다. "문제는 확실하게 믿을 만 한 사람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관리능력이 규모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아마 중간 관리자들 가운데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많을 거예요. 이런 마당에 깡패들을 끌어들이는 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 소년은 손이 따뜻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이 문제를 장연철이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청년 부장은 잠시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울이 들려준 편지의 내용을 되새김질했다. "그 백지선인지 뭔지, 자기네를 동맹에 받아줄 수 없으면 두목이라도 맡아달라고 했었죠. 대장님이 그쪽 두목까지 겸하게 되면......아니, 이건 안 되겠군요." 단순히 겨울이 깡패 두목이 된다는 거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철은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긁다가, 비듬이 떨어지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민망함을 덜어줘야겠다. 이유를 알면서도, 겨울이 질문했다. "그건 왜 안 될까요?" "어, 음, 대장님이 너무 바쁘시기 때문입니다. 동맹 운영조차도 민 부장님과 저한테 거의 다 맡겨두시는 대장님이, 그쪽까지 제대로 관리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가뜩이나 그 사람들도 원래 파벌이 갈린다고 하잖습니까. 화승화? 그거랑 수방방이요. 관리가 안 되면 말썽이 일어나겠죠. 사정이 어떻든 원래는 범죄자들이고, 중국인들 성향도 좀 그런 편이고요." "마지막 말씀은 뜻밖이네요. 장 부장님답지 않다고 할까......." 그렇게 말하며 소년이 웃음을 지어내자, 연철은 한 층 더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작은 대장님 이름을 더럽히는 건 용납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 안 됩니다." 토론은 이걸로 끝이었다. 장연철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쪽 사정을 좀 더 알아볼까요?" "네. 두 분이 좀 더 힘써주세요.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쉬운 쪽에서 기다리겠죠. 그 전에 해두면 좋을 일도 있고." "그게 뭡니까?" "전에 한 번 말씀드렸을 거예요. 경찰을 끌어들여서 마약상들을 쓸어보겠다고." "아아....... 얼마 전이었지요. 기억합니다." "지금이 딱 좋을 때라고 봐요. 캠프 사령은 교체됐고, 캡스턴 중령이 대대장으로 승진했고, 새로 들어온 병력과 난민들 때문에 기존의 유착관계가 흔들리는 시기 아니겠어요?" 어떤 결정을 내리던 리친젠과는 다시 한 번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행동력을 과시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겨울이 화제를 바꿨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혹시 두 부장님들 중에 백산호라는 사람을 아시는 분 계세요?" 민완기가 손을 들었다. "제가 압니다. 근래 새로 영입한 관리자입니다만, 뭔가 문제가 있었습니까?"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요. 대신할 사람이 생기면 자르세요." "......."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전직 학자는 조금 모호한 낯빛이었다.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비춰지지 않았다. 민완기가 벌써부터 인맥, 학연, 지연, 청탁 따위로 누군가를 감쌀 인물은 아닌데. 합리적인 목적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뭘까.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겨울이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본보기는 안 돼요." "그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한 결과일 텐데 말입니까?" "그래도 안 돼요."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민완기가 아쉬워하며 미련을 접는다. 맥락을 잡지 못한 장연철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필시 민완기는 백산호의 행태를 의도적으로 방치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조직 운영의 신뢰도를 손쉽게 제고하기 위해서, 그의 방종이 충분히 부풀어 오를 때까지. 소년은 그런 계획을 인정할 수 없었다. # 75 [75화] #비 내린 뒤, 포트 로버츠 (5)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언행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딱히 그 사람들이 사악해서라기보다, 그냥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 어려운가? '동정심을 품지 않기가 어렵지.' 겨울은 생각했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이며, 나보다 모자란 상대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한 동정심은 또한 그 누군가가 나보다 부족하다는 인식이기도 하다. 착한 사람은 착해서 장애인을 차별하고, 악한 사람은 악해서 장애인을 차별한다. 장연철이 대표적이다. 그는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부른다. 이 호칭에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우정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녹아있다. 그 선의는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진정한 평등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장애인이 왜 니 친구냐고. 겨울이 강영순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같은 실수를 하면 지적해주세요. 무의식중에 실례를 저지를까봐 걱정스럽네요." 곱게 늙은 노인이 웃으며 펜대를 움직인다.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공자조차도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모든 행동이 법도에 맞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작은 대장님께 성인의 노년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연철 부장님에게는 죄송한 마음뿐이고요.」 장애인들을 편견으로 대하는 장연철에 대하여, 강 노인은 오히려 미안해하고 있었다. 장연철은 심성이 바른 사람이다. 편견을 지적하면 부끄러워하고 고치려고 할 것이며, 그를 존중한다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겨울에게 그의 편견을 이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때 늙은 여인은 단 한 줄로 겨울을 설득했었다. 「편견의 그늘이 클수록, 거기에 숨기도 좋을 테니까요.」 장애인들은 겨울의 눈과 귀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이 일은 사람들의 경계심이 낮을수록 쉬워진다. 그러자면 장애인은 불쌍한 사람들로 취급받는 편이 낫다....... 장애인들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장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 했다. "사정을 알면 장 부장님도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모순적이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편견으로 쌓은 잘못을 편견으로 갚고 있다고. 무엇보다, 우리가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장 부장님 말고도 많아요. 모두를 속이는 꼴인걸요. 단지 이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고, 결과적으로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타협하는 거죠.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노인은 문자 대신 미소로 화답한다. 겨울은 강영순 노인에게서 넘겨받은 메모를 읽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내부감시는 장애인 중 한 사람, 이훈태의 역할이었는데, 다른 장애인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내서인지 동료의식이 강하다. 덕분에 겨울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갈수록 늘어난다. 동맹 내 종교 활동에 관한 부분은 조금 오래 읽었다. 신경 쓰이는 내용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소모임에서 있었던 한 예배의 기록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살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 곁에 머무는 주님의 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주님의 섭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창세의 순간부터 심판의 날까지, 모든 역사와 사건들이 주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믿습니까? 그리하여 한겨울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사람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의 은총임을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으로 깨우쳐주셨습니다. 은총이 함께하지 않고서야 어찌 소년이 그 많은 위업을 이룩했겠습니까? 어찌 예언으로서 사람을 구하며, 어찌 가는 곳마다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일신이 실로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아들은 아직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느냐, 그를 경배하러 왔노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는 선택 받을 사람들입니다.......」 현장에서 숨겨두고 적었는지 삐뚤빼뚤한 글씨들이었다. 기록자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했다. 눈물 흘리고, 환호하고, 갈채를 보내는 등. 소년이 고개를 젓는다. "아무래도 제가 이슬람에 귀의하던가 해야겠네요." 마주앉은 노인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종이 위에서 펜을 굴렸다. 「그들의 구세주가 되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농담은 그만 두세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걸요." 실제로 그렇다. 종교적인 공동체는 보수화되기 쉽다. 모든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존재하기에, 그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서무오설과 샤리아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종교공동체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구세주 재림을 믿는 공동체에 걸기엔 어려운 기대였다. 그렇다고 메시아 행세가 쉬운 것도 아니다. 실천의 어려움보다는 마음의 거부감이 더 크다. 지키고 싶은 삶의 방식과 지나치게 거리가 멀었다. 노인이 수첩을 들어보였다. 「그리 말씀하실 수 있는 게 귀하의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치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휩쓸릴까봐 걱정스럽군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맹 안팎으로 당신께 경도되어있는 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글쎄요....... 일단 기억해두기로 하죠. 먼저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도 있고요." 일단 모임의 중심인물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자기 말을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겨울의 이름을 팔아 이익과 영향력을 얻고 싶은 것인지. 어느 쪽인가에 따라 대처방안이 달라질 것이었다. 정 급하면 맞불을 놓을 수도 있고. 노인이 새로운 질문을 적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요?」 겨울은 잠깐 생각하고서, 이름 모를 백지선의 편지와 두 부장의 의견차에 대해 노인에게 털어놓았다. 비밀스럽게 취급해야할 일이었으나, 그것이 단지 비밀이라는 이유로 감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 노인은 소년과 이미 더 큰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들어보니 어떠세요?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보시나요?" 질문을 받은 강영순 노인이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글을 적었다. 「저로서는 어느 쪽이 낫겠다고 말씀드리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조언을 드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제가 6.25를 겪은 세대라서 그렇습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노인이 몇 줄의 해명을 덧붙였다. 「저는 아직까지도 꿈속에서 전쟁을 봅니다. 뼛속까지 새겨진 두려움이지요. 요즘은 새로운 두려움이 더해졌습니다만, 새것이 옛것의 자리를 빼앗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그 악몽의 한 구석엔 중공군에 대한 공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입니다. 저는 중국인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지만, 제 꿈이 아직도 옛 전쟁에 사로잡혀있는 이상, 그 영향이 무의식에 반드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즉 이번 일이 중국인들과 관련되어있는 만큼,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겨울이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었다. "제가 그걸 감안하고 들으면 되겠네요. 전 단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의견을 들어보려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펜이 잠시 쉬었다. 노인은 바른 자세로 앉아 긴 숙고를 거쳤다. 이윽고 결심이 글 줄기가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장연철 부장님의 선의에 많은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이유 불문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자는 데 반대하기가 면구스럽지만, 제겐 민완기 부장님의 의견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들 가운데엔 과거부터 범죄를 일삼았던 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진 말라고 하였으나, 이번 일은 경우가 다릅니다. 제가 보기엔 그들의 죄가 아니라 죄로 인해 맺어진 원한관계가 문제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삼합회 내에서 화승화와 수방방의 구성원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족을 인질 잡힌 셈이었으니, 삼합회 입장에서 얼마나 쓰기 편한 칼이었을까요? 그만큼 많은 피가 묻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동맹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또 지켜준다면, 화승화와 수방방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또한 동맹 사람들과 대장님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을까요?」 겨울이 반론했다. "그런 원한이라면 삼합회와 손잡았을 때 이미 시작되었을 걸요. 겨울동맹 때문에 다른 중국계 조직들이 삼합회를 어쩌지 못하고 있잖아요." 강영순은 겨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변을 적기 시작했다. 「그것도 조금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제3자였다면, 백지선 일파를 받아들인 이후로는 원한의 당사자가 되는 셈이지요.」 「또한 그들 조직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도 우리와 원한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겨울동맹의 삶이 더 좋아 보여서, 혹은 내부알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이탈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테니까요. 단순히 싫어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겨울이 그녀의 의견을 평했다. "어떻게 보면 민완기 부장님의 반대의견과 같은 맥락이긴 한데, 그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이 있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내용은 좀 더 고민해볼게요." 노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 뒤, 겨울은 남아있는 메모를 꼼꼼하게 읽고, 그것들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세요." 소년은 노인에게 목례하고, 동맹의 본부 막사를 빠져나왔다. 해가 이미 지평을 넘어갔어도 공사현장은 여전히 분주했다. 여러 인사를 받으며, 겨울은 숙소로 향하는 내내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겨울동맹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많았겠으나, 실제로 의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맹이 한국인들의 터전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아말리아의 요청으로 들어온 무국적자는 겨우 다섯 명이었고. 따라서 국적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백지선 일파를 받아들이면 그 벽이 무너진다. 이것이 장연철의 주장이었고, 사실 겨울도 바라는 바였다. 다른 중국계 단체들은 당연히 이를 싫어할 것이다. 강영순 노인도 지적하지 않았나. 그들, 국적의 벽을 원한의 벽으로 대신하리라고.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최악의 경우, 연쇄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중국인들이 백지선 일파를 어떻게든 죽이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울에게도 경고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겨울동맹을 겨냥한 불특정다수의 무차별 테러라면 어떨까? 문득 겨울은 리친젠을 만나러 갔던 때를 떠올렸다. 「생존감각」과 「전투감각」은 활이나 슬링 계통으로 추정되는 투사무기의 사선을 경고했었다. 가뜩이나 요즘 곳곳에서 진행되는 공사 때문에 무기 만들 재료 구하기가 쉬워진 상황. '이거, 쓸 수 있을지도.' 평범한 날붙이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투사무기는 미군부터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지 보안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당연히 중국인들도 그것을 안다. 위험한 상황만 아니라면, 실제로 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한 상황만 아니라면. # 76 [76화] #비 내린 뒤, 포트 로버츠 (6) 포트 로버츠에서 살리나스 강변을 따라 하류로 10km를 내려가면, 브래들리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오늘 겨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 마을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점령하고 나면 공병대와 난민 노무자들이 투입되어 거점 공사를 시작하기로 되어있었다. 겨울은 병력이 마을 입구로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 삼합회의 지원병들이었고, 관리 및 지원을 위해 에이블 중대로부터 차출된 1개 분대와 운전병들이 추가로 붙었다. 후자의 최상급자는 아르투로 "알" 리베라 하사. 즉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작전이라지만, 소년 장교에게 작전지휘를 일임한 미군의 태도변화는 무척 인상적인 것이었다. 지원병 중심이라곤 해도 병력규모가 1개 중대에 달한다. 사실상 임시중대장 역할을 맡긴 셈이었다.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을 당시 보류되었던 승진의 조건이 장교교육 정식 수료였음을 생각하면, 현재의 겨울이 교육을 이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휘능력을 인정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도 앞으로를 위해 정식 교육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조만간 권고진행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관제 AI가 상황연산의 개연성을 위해 특정 형식의 진행을 권고하는 상황. 이것을 권고진행이라 한다. 거부해도 무방하나, 좋을 것은 없었다. 겨울이 중대 채널에 무전을 넣었다. "전 병력, 잠시 대기." 지시 한 마디에 전 병력이 도로 좌우로 갈라져 경계에 들어갔다. 무릎쏴 자세다. 인간을 상대로 싸우던 시절과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여전히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노출면적의 감소와 명중률의 증가. 물론 환경이 달라지면 개정된 교리를 따른다. 병사들이 흘끔흘끔 훔쳐보는 가운데, 겨울이 성당을 향해 걸었다. 마을 입구 어귀의 첫 번째 건물이었다. 가지마다 장식이 있는 특유의 십자가와 벽 속의 성모상을 통해, 개신교 교회가 아닌 카톨릭 성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캘리포니아는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지.' 겨울이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라틴계 이민자가 많기 때문인지,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명 중 한 사람 꼴로 가톨릭을 믿는다. 성당은 하얗게 회칠한 단층 건물이었다. 보통의 주택만도 못한 앙증맞은 크기. 예배당을 꽉 채우면 서른 남짓 들어갈 것 같다. 둥그스름한 종탑은 지붕보다 딱히 높지도 않았다. 성당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멈춰선 겨울이 병력 선두를 향해 손짓한다. "1소대 1분대. 성당을 수색, 확보하세요." 이번 작전은 겨울이 지목한 삼합회 전투 병력의 첫 실전경험이다. 그래서 실전과 훈련의 색채가 반씩 섞여있었다. 차량대열이 마을로 진입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아이링이 그녀의 분대와 함께 천천히 뛰어왔다. 오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제대로 된 전술이동이었다. 그들 나름대로 훈련에 열을 올렸다는 증거다. 그 와중에 아이링의 모습이 새롭다. 그녀는 계급장 없는 전투복을 입었고,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풍경을 반사하는 까만 강화 유리가,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복장규정 위반은 아니다. 아이링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겨울은 그 모습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했다. '유라 씨와 진석 씨에게도 선글라스를 하나씩 구해줘야겠다.' 두 사람 중 위압감이 부족한 유라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의외로 메시지 로그가 폭주하지 않는다. 세계관에서 보기 드문 수준의 미인, 아이링과 마주할 때마다 폭주하던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도 이제 슬슬 소년에게 익숙해진 증거일 것이다. 겨울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링의 분대가 성당 외벽에 주르륵 붙었다. 아직까지는 훈련받은 대로인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이 가늘게 떨리는 중이었다. 아이링이 자꾸만 겨울을 돌아보았다. 선글라스가 눈을 가렸어도 나머지 얼굴만으로 속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첫 실전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겨울동맹의 전투조원들도 샌 미구엘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사람을 죽인 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변종과 직접 싸워본 경험은 없을 테니까.' 겨울이 무전기 리시버를 눌렀다. "지원은 없습니다. 분대장 판단 하에 돌입하세요. 훈련 받은 대로만 하면 됩니다." 행동을 재촉 받은 아이링이 입술을 깨물었다. 좌절? 무언가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범죄조직의 여간부는 머뭇머뭇 건물 주위를 살폈다. 안쪽을 엿볼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창문은 불투명한 유리였다. 다른 조직원이 방탄모를 벗더니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인가. 최소한 다른 동료들이 엄호사격이라도 준비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마냥 벽에 붙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링은 건물 측면에서 따로 노는 중이다. 긴장한 탓에 훈련받은 내용이 싹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생존감각」에 감지되는 위협 수준이 낮았으니 겨울이 그냥 지켜보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당장 개입했을 것이다. "분대장! 부분대장! 분대원들을 통제해요! 분대원들은 지시 없이 흩어지지 마세요!" 겨울의 강력한 경고를 받은 그들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쩔쩔 매는 모습들. 도저히 범죄자들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공포 앞에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나마 질서의식 있는 일반인 쪽이, 군인으로서는 범죄자보다 낫지.' 어쨌든 익숙해지고 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겨울은 유사시를 대비해, 총구를 교회 쪽으로 늘어뜨린 채,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붙여놓았다. 그러다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나머지 병력이 하라는 경계는 안 하고 죄다 이쪽을 구경하고 있다. 겨울이 지긋이 바라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중국인들. 그런데 눈이 마주쳐도 멀뚱멀뚱 마주보는 사람이 몇 명 있다. 백 번의 훈련이 한 번의 실전만 못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이었다. "1분대를 제외한 중대 전원에게 알립니다. 각자 맡은 경계구역을 확실하게 감시하세요. 임무에 소홀한 사람은 복귀 후 징계하겠습니다." 겨울에게 받을 징계는 별 문제가 아니다. 삼합회 내에서 가해질 2차 징계가 더 무서울 터. 구경꾼들의 군기가 삼엄해졌다. 그 사이 아이링은 분대를 둘로 분할했다. 겨울이 그들 사이의 무전을 가만히 들어봤다. 분대장 아이링이 이제야 지시다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쿤타오! 깡촨과 함께 교당 좌측 출입문을 경계해! 음, 그리고......그래, 쭝치우, 궈진! 두 사람은 교당(敎堂) 우측 출구를 지켜! 즈위앤! 쩌광! 너희는......입구 좌우로 붙어! 수류탄이 터지는 즉시 돌입해! 나머지는 나와 함께 움직인다!] 조금 더듬긴 했지만 충분히 양호한 수준이다. '굳이 수류탄을 쓸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겨울은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링이 손수 창문을 깼다. 강하게 휘두른 개머리판이, 처음에는 엉뚱하게 창틀을 때린다. 두 번째는 제대로 쳤다. 콰창! 구멍이 생기자마자 이름 모를 행동대원 하나가 수류탄을 던져 넣는다. 기다린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불발? 아이링과 그 행동대원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소리를 작게 죽여 놓은 대화라 엿듣기는 무리다. 그러나 표정과 몸짓을 볼 순 있었다. 아이링은 한참 화를 내다가, 허리에 손을 얹고 하늘을 보았다. 혼난 쪽은 얼굴이 벌개진 채로 땅만 쳐다본다. '핀을 안 뽑고 던진 모양이구나.' 겨울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링이 이제 깨진 창문으로 총구를 들이밀고, 조심스럽게 건물 안을 살핀다. 조용하다. 보통의 변종이 있었다면, 소음에 반응해 벌서 창문으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아이링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긴장이 풀린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이른데. 구조를 보건대 안쪽에 다른 방도 두어 개 있을 것이고. 겨울은 주의 깊게 그녀와 부하들을 지켜보았다. 정문을 통해 진입하려는 것 같다. 리아이링은 양쪽 측면을 경계할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정문으로 모았다. 겨울은 그들의 등 뒤 5미터 정도에 서서 만약을 대비했다. 배후의 소년 장교를 확인한 그들은 한 층 더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그들이 정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돌입하자마자 좌우로 퍼져서 화망을 확보했다.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행동이 유연해진 모습이었다. 겨울이 문지방을 밟고 섰다. 중앙 바닥에 잘못 던져진 수류탄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이링이 찡그린 얼굴로 던진 장본인을 쏘아보았다. 그 남자가 머뭇머뭇 수류탄을 주우러 다가간 순간. 위에서 허연 것이 뚝 떨어졌다. 겨울이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드드득! 밖에 있던 겨울이 표적을 포착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0.3초 정도. 그것은 사지를 펼친 인간의 형상이었다. 소년의 삼점사는 그것의 머리를 관통했다. "으아아아악!" 구울의 시체에 깔린 중국인이 비명을 지르며 온 몸으로 버둥거렸다. 뒤늦게 반응한 나머지 분대원들이 총을 겨냥하기에, 겨울이 즉시 악을 썼다. "쏘지 마! 쏘지 마! 이미 죽었어! 총구 내려!" 뒤엉켜있는 와중에 집중사격을 가하면, 깔려있는 남자는 벌집이 되어 죽을 것이다. 방아쇠를 당길 뻔 했던 중국인 지원병들이 허옇게 탈색된 얼굴로 소년 장교를 돌아보았다. 겨울은 천장을 한번 슥 훑어본 뒤, 흔들리는 샹들리에 외에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발작을 일으킨 중국인을 끌어냈다. 온 몸으로 치는 몸부림이 겨울에게도 버겁다. 소년은 언제 오사할지 모를 그의 총부터 발로 걷어 차버렸다. 사고 예방을 위해서였으나, 남자는 더더욱 겁에 질렸다. 눈을 꽉 감고 손짓발짓으로 겨울을 밀어낸다. "떨어져! 저리가! 으아아아악! 엄마! 엄마! 나 죽어! 죽는다고!" "정신 차려요!" 짜악! 겨울이 그의 따귀를 세차게 올려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멱살을 붙잡아 단숨에 끌어 올리며,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소리친다. "창룽! 창룽! 눈 뜨고 나를 봐요!"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부른 것이 효과를 봤다. 남자가 두 눈을 뜨고 겨울을 본다. 비명은 사라지고,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남는다. 겨울이 말했다. "진정해요. 이제 괜찮으니까." "......." 겨울은 그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똑바로 서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겨울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작전 개시 후 13분 지났다. '하루가 길겠구나.' 그래봐야 건물의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굼벵이처럼 진행해도 임무 완수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소년은 단독으로 수색을 진행했다. 아이링의 분대에게 엄호라도 맡기고 싶었으나, 그들은 아직까지도 창백한 안색이었다. 등 뒤를 맡겼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한 중위님. 거기 괜찮은 겁니까?] 무전기로부터 차석지휘관 리베라 하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겨울이 곧바로 답신했다. "네. 구울 하나가 나왔을 뿐이에요.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더군요. 사살했고, 사상자는 없습니다." [세상에......요즘 놈들이 똑똑해졌다더니 정말이로군요. 달리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딱히 없네요.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좀 더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교신 종료.] 대화를 끝낸 겨울이 예배당 뒤편으로 다가간다.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한 쪽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그곳은 성물보관실이었다. 갇혀있던 공기가 답답하다. 변종의 냄새는 없었다.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해서 살이 썩지 않는 구울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씻지 않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악취가 나는 법이었다. 반대편 문을 경계하며 뒷걸음질로 성물보관실에 들어간 겨울은, 주위를 살펴 작은 성물들을 적당히 갈무리했다. 동맹원들 가운데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에겐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이제 남은 한 쪽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니, 이번엔 썩은 내가 확 밀려온다. 그러나 변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 전에 죽은 것 같은 시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곁에 약병이 하나 구른다. 자살한 것 같다. 신부의 거처였으나 자살한 사람은 신부가 아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성당을 찾아왔다가 이곳에서 생을 끝낸 것 같았다. 수색을 금방 마친 겨울은, 아이링의 분대원들을 구울의 사체 가까이로 불러 모았다. "와서 보세요. 여러분은 변종에게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중국인들은 이미 죽은 구울조차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려움을 읽은 겨울이 구울의 머리를 붙잡아 그들을 향하게 했다. 아이링이 입을 가린다. 발은 떼지 않았으나 상체가 뒤로 빠진다.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피하면 안 된다. 이끄는 입장이니까. 겨울이 유독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였다. "똑바로 봐요. 죽은 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래서야, 실제 싸움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윽......." 솔직히 구울이 혐오스럽게 생기긴 했다. 중증 한센 병 환자라면 근사치 정도는 될 것이다. 마치 살이 녹아 흐르다가 굳어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겨울이 남은 손으로 그 얼굴 아래를 잡고 턱을 뽑았다. 동시에 머리를 더욱 뒤로 젖혀, 입 안쪽이 잘 보이도록 만들었다. 쭉 빠지는 혀는, 자세히 보면 인간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보여요? 감염돌기는 입 안에 있어요. 달리 말해, 직접적으로 물리거나 돌기에 접촉하지만 않으면 감염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좀 더 다가와요. 만져보라고요. 실전에서 붙잡혔을 때 꼼짝도 못하고 죽고 싶지 않다면 말예요." 명백히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었으므로, 아이링은 어쩔 수 없이 와서 구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흠칫, 흠칫. 겨울이 냉정한 지시를 내렸다. "장갑 벗어요." "......네?" "감염 안 되니까, 장갑 벗으라고요." "꼭 해야 되나요?" 겨울은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가 장갑을 벗었다. 회색으로 뭉개진 괴물의 살갗에, 가늘고 긴 손끝이 닿는다. 아이링이 눈을 꼭 감고 바르르 떨었다. 애초에 변종이 아니더라도, 더럽고, 냄새나며, 보기에 흉측하기까지 하니,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다. 잠시 후 아이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 "네, 아니에요." "......." 그나마 「교습」의 작용 덕분에 무가치한 시간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겨울은 남은 대원들 모두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 뒤에야, 비로소 밖으로 나갈 것을 허락해주었다. 작전이 재개되었다. # 77 [77화] #비 내린 뒤, 브래들리 (7) 겨울은 통제 받지 않는 중국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았다. 우- 몰려다니다가, 와- 하고 흩어진다. 깡패들의 패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전의 긴장감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실전에서 훈련을 잊게 마련이었다. 고작 몇 주에 걸친 훈련이 숙련된 전사를 만들어줄 순 없다. 다만 교범을 몸에 새겨서,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할 기초를 닦아줄 뿐. 그래서 지도력을 발휘할 사람이 필요하다. 리아이링이 많이 어설프긴 했으나, 일단 그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다. 리베라 하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갓 나온 햇병아리 수준이군요." 부당한 평가다. 아이링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관생도 출신의 소위들에게.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소재지였다. 미국의 사관생도 교육은 대단히 실전적이다. 세계에서 전쟁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의 군사교육이 허술할 리 없다. 다만 제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으로도 한 번의 실전경험을 대신할 순 없다는 게 문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겨울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심 섞인 농담에 불과했다. 미군 부사관들은 사병 계급에서부터 올라온다. 실전경험 풍부한 입장에서, 초임소위의 어리숙함이 불편한 것도 당연하다. '괜한 감정은 아니지.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중국인들도 이번 경험을 계기로 한 층 성장할 것이다. 미군의 교육체계가 이런 면에 특화되어있기도 했다. 방탄헬멧에 달린 컴뱃 카메라가 모든 작전과정을 녹화한다. 나중에 누구든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되짚어볼 수 있었다. 자신의 시야로, 또 제3자의 시선으로. 내가 저기서 저랬으면 안 되는 건데. 다음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느낌이 중요하다. 겨울은 필요할 때에만 그들에게 조언을 주었다. 어쨌든 이런 식인데도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 브래들리가 정말로 별 것 없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브리핑에 따르면 감염확산 이전의 브래들리 인구는 90명 남짓이었다. 항공정찰 결과 이렇다 할 위협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리아이링이 여기에 의혹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녀의 분대에 휴식이 주어지자, 겨울에게 다가와 물었다. "미군이 왜 이 마을을 필요로 하죠?" 조금 지친 목소리였다. 겨울은 진행되는 건물 수색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작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져서요. 중요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지형이 방어에 유리해 보이지도 않아요. 혹시 저희들의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서......" 큰 소란이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중국인들이 악을 쓰고 있었다. 전투상황에서 칭찬받을 만 한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던 처음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누군가 문을 박차고 수류탄을 까 넣었다. 쾅! 불씨가 파편과 함께 쏟아져 나온 뒤, 문 옆에 붙어있던 중국인 지원병 두 명이 안쪽으로 지향사격을 가했다. 탄창을 싹 비우는 우악스러운 연사였다. 겨울이 무전을 넣었다. "지금 사격하시는 분들, 기왕이면 높낮이를 달리 해서 쏘세요." 두 사람이 멈칫 뒤를 돌아본다. 겨울이 다시 지적했다. "총구를 동료에게 향하시면 안 됩니다. 총은 항상 장전되어있다고 생각하고 다루세요. 그리고 지금 훈련하는 거 아니에요. 전방을 주시하셔야죠. 그러다 죽으면 억울하실 텐데요? 아, 재장전, 재장전 하세요. 훈련 내용을 떠올려요. 침착하게 하면 됩니다." 지시를 받는 두 사람은, 큰 실수라도 저지른 것처럼 허둥거렸다. 겨울이 그들을 윽박지르지 않는 이유였다. 리아이링이 선글라스를 벗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아마도 저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겹쳐봤을 것이었다. 겨울은 굳이 돌아보지 않고도, 곁눈으로 그녀의 행동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여인에게 저들보단 당신이 나았다고 하려다가, 그만 둔다. 실속 없는 위로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대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분대장. 다음 지시 없습니까?" [넷! 죄송합니다, 대형! 야 이 게을러터진 난만쯔 새끼들아! 들어가! 들어가!] "고운 말 쓰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난만쯔(南蛮子)는 남쪽 오랑캐라는 뜻이다. 삼합회의 기원이 홍콩에 있고, 홍콩은 광둥에 붙어있으므로, 삼합회 사이에서 관습 비슷하게 통하는 욕설일지는 모르겠다. 군대에서 욕설이 횡행하는 거야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병사로서 제 역할 하게 만들려면 깡패 물은 빼줘야 한다. 고운 말 쓰라는 건 그런 맥락이었다. 그럭저럭 서로를 잘 엄호하며 내부로 돌입했던 대원들이, 두 구의 사체를 밖으로 끌어냈다. 피부가 침식된 평범한 변종들이었다. 끌어내고 나서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호들갑을 떤다. 시체를 일일이 끌어내는 것은 성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게 만들기 위한 지시사항이었다. 어떻게든 자신감을 붙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겨울은 수색을 마친 분대에게 경계를 겸한 휴식을 허락해주었다. 아이링이 차갑게 말했다. "아타스카데로의 형제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것 같군요."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으나,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아무튼, 아까는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하셨었죠?" 잠깐 사이에 다른 폭음이 들려왔다. 미군 병사들과 리베라 하사의 통제 하에, 중국인 지원병들이 몇 채의 건물을 동시에 수색하는 과정이었다. 작전의 끝자락이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더 이상 점령할 건물이 남지 않았다. 폭발 잔향이 가라앉길 기다려, 아이링은 지연된 의문을 다시 풀었다. "혹시 이 작전은, 그러니까, 선생께서 저희들을 위해 입안하신 게 아닌가요?" "제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겨울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작전의 의의를 설명했다. "저도 캡스턴 중령님께 들은 사실이지만, 미군이 원하는 건 길을 확보하는 거예요. 하류로 좀 더 내려가면 샌 아르도 유전이 있거든요. 거길 점령해서, 난민 노무자들을 투입해 운영할 계획인가 봐요.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어요. 이곳 브래들리는 수송로의 중간지점 쯤 되고요." 샌 아르도 유전은 21세기 초엽 연간 약 4만 배럴을 생산하던 유전이다. 「종말 이후」 세계관의 개시 시점에서는 가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으나, 포트 로버츠 혼자 쓰기엔 넘쳐날 정도의 매장량이었다. "아마 시추기 몇 개만 재가동시켜도 포트 로버츠의 연료수요를 감당할 수 있겠죠. 장기적으로는 다른 기지에 대한 연료 보급을 담당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물론 정제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 아닌가요?" 이에 대한 아이링의 반응은 조금 조급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 작전에 중국인들만 동원한 것이나, 선생께서 지휘를 담당하신 게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아무 것도 안 하셨나요?" "건의는 했죠. 처음부터 그러기로 약속했었잖아요." "......." 리친젠과의 협상에서 겨울이 걸었던 조건이다. 말은 거창하게 해놓고 미군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전혀 없는 리친젠에 비해, 겨울은 앞으로가 어찌되건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의 부하들이 많이 반대했다고도 들었어요." "부하가 아니에요. 전 그분들이 선출한 대표자일 뿐이거든요. 그리고, 예, 반대가 있었어요. 외부작전에서 지원병 비중이 이렇게 높은 적이 없었던 데다, 그게 전부 삼합회의 무장인력이잖아요. 미군이 있다고 해도 숫자가 적고요. 솔직히 말해서, 삼합회를 못 미더워하는 분들이 아직 많으시거든요." 사실 괜한 걱정이다. 지원병들에게도 출동 시 컴뱃 카메라가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미군은 난민관리에 좀 더 적은 인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카메라가 블랙박스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난민 지원병들에게 생각이 있다면 미군을 어쩌지 못할 것이었다. 리아이링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희와의 의리를 지키신 것이군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이렇게 묻는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삼합회의 여향주가 입을 다물었다. 겨울은 그녀가 왜 삼합회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 [한 중위님. 전 구획을 완전히 확보했습니다. 임의로 3소대를 서쪽 진입로 근처에 분할 배치해 주변을 감시하도록 해두었습니다만, 추가 지시사항이 있으십니까?] 무전기에서 리베라 하사의 음성이 나온다. 겨울이 교신에 응했다. "잘 하셨어요. 하사의 판단 하에 나머지 소대의 경계구역을 정하세요. 그리고 1소대가 예비병력입니다. 제가 데리고 있을 게요. 병력 배치가 끝나면 곧바로 공병대를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리베라 아웃.] 작전절차를 숙지하고 있었기에, 겨울의 지시에는 거침이 없었다. 증강현실 UI의 보조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쉽지 않은 요소였다. 굳이 1소대를 예비대로 삼겠다고 한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리아이링과의 대화 탓이었다. 겨울이 교신하는 동안 그녀는 자기 입술을 꼬집고 있었다. 너무 쉽게 속을 보였다고 후회하는 듯한 행동이다. 물론 그조차도 연기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겨울은 범죄자의 딸이며 그 자신도 범죄에 몸담은 여자를 쉽게 믿을 생각이 없었다. 교신이 끝난 뒤에도 아이링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겨울이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게 명백한 이상, 아이링이 계속해서 침묵하긴 어려웠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중국인들이 희생양이 될까봐 걱정스러워요." "희생양?" "네. 사회가 불안해졌을 때 불만을 집중시킬 희생양을 찾는 건 흔한 일 아닌가요? 시창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걸요." 세계관 내 시간으로 얼마 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현재까지 밝혀진 모겔론스의 전염경로와 특성을 발표했다. 공기전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던 사실인지라, 감염변종의 구강 내에 생성되는 감염돌기에 의해서만 감염된다는 것이 그리 유용한 정보는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발표의 의의가 있었다. 겨울에게 새로운 정보가 없지는 않았다. 모겔론스가 단일 병원체에 의한 질병은 아니라는 것. 확신할 순 없지만, 공생관계를 형성한 기생충과 바이러스, 그리고 그 외 다른 병원체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는 발표였다. 그러면서 CDC 대변인은, 이 대역병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인간을 숙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다종의 공생관계. 이것이 자연발생적이긴 어렵다는 뜻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지만, 미국이 그렇게까지 미쳐 돌아갈 것 같진 않네요. 애초에 그런 연대책임의식은 동양권에서나 통하지 않던가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아이링은 겨울과 관점이 달랐다. "모든 게 전과 같을 수 없는 시대에요.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저는,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육사에게 말이죠?" 아이링이 멈칫 했다. 예전에 그녀가 썼던 표현이다. 그녀는 겨울이 품종 좋은 가축일 뿐이고, 더 나은 품종이 생기면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사실상의 협박이었다. 아이링이 머뭇거리다가, 졌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어설프게 웃는다. "한 선생은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그래요. 한계가 있거든요." "한계?" 겨울은 자신의 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아이링 역시 캐묻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끊어진 맥락으로 다시 돌아간다. "맞아요. 분풀이로 도살당하지 않으려면, 쓸모 있는 가축이라는 걸 증명해보여야 해요. 선생처럼 말이죠. 그래서 오늘, 저 자신에게,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너무나 실망스러웠어요. 각오에 비해 너무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방법? 그런 게 있나요?" "지금은 자신이 없으니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영영 말씀드리지 못 할 지도 모르지만요." 갑작스럽게 소란이 밀려들었다. 공병대와 난민 노무자들이 불필요한 건물을 철거하고, 중장비(Trencher)를 가동해 외곽에 깊은 호를 파는 작업을 개시한 까닭이었다. 참호를 만드는 건 아니고, 여기에 철골을 박은 뒤 콘트리트를 부어 장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다. 소란이 가까운 곳까지 다가오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 78 [78화] #Intermission, 하늘에서 별 따기 이 세상에는 남들보다 유달리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미성, 그 밖의 비범한 재능으로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스타라고 부릅니다. 스타. 정말 좋은 표현 아닙니까?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렇잖아요. 별은 손닿지 않는 아름다움이죠. 별을 향한 동경은,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운가에 상관없이 동경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뚤어진 애정, 어긋난 집착으로 어떻게든 그걸 손에 넣어 보려고요. 대개의 경우 이들의 노력은 범죄로 귀결됩니다. 사생활을 도촬하거나 사유물을 훔치는 정도는 양반이죠.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루머를 퍼트리고, 협박을 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별을 손에 넣어도 문제입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투철한 직업의식의 단면이거든요. 민낯이 별빛 같으리라고 믿으면 곤란한 법이죠. 단적으로 말해, 그들도 화장실을 간다고요! 별빛이 그들의 본질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스타 부부들이 잦은 이혼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일까요? 우리는 마약과 불법도박, 병역비리, 성적 스캔들로 명성을 잃은 스타들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별을 땄을 때, 당신은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별은 멀리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하지만 저희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현실 X까. 가상현실 속에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별빛을 손에 넣을 수 있지요. 물론 당신에게 충분한 돈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 회사와 계약한 연예인들의 가상현실 캐릭터 상품들을 구입하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했겠어요? DLC 팔아먹으려는 거지.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후보험 DLC 스토어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검색하세요. 그러면 다양한 상품 목록이 뜰 겁니다. 지금부터 그 종류를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스킨 패키지입니다. 이건 해당 연예인의 외모를 구입하는 것이죠. 이 외모는 당신이 사용할 수도 있고, 당신이 이용하는 가상현실 세계관의 특정 가상인격에게 덮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아, 바뀌는 건 어디까지나 구매자에게 보이는 외모뿐입니다. 실제로 상황연산에 작용하는 매력 수준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기만족용이죠. 그런 만큼 가격은 가장 저렴한 편이랍니다. 두 번째는 표준 가상인격 패키지입니다. 네, 이것을 구매하시면 당신의 세계관에 언제든 해당 연예인을 등장시킬 수 있습니다! 세계관에 따라 적절한 합류 임무가 부여되지요! 임무 실패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관제 AI의 상황연산 자체가 무조건적인 성공으로 흘러가거든요. 정말 간절히 바랐을 때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는 느낌일 겁니다. 첫 만남의 형태도 구매자가 설정하게 됩니다.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해주는 상황을 연출하여, 처음부터 한눈에 반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해요. 하하, 누군가의 팬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보았을 만 한 상황 아닙니까? 일반적인 가상인격들과 달리, 구입하신 캐릭터는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국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표준 가상인격 패키지는 스킨 패키지와 달리 해당 연예인의 경력과 성격, 특기, 능력이 일괄 적용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매력 하나는 끝내주겠죠. 성격은 변경 가능한 옵션이지만, 해금에 별도의 요금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담스러우신가요? 팬심으로 극복하세요. 마지막은 필모그래피 가상인격 패키지입니다. 가장 성능이 좋고, 가장 값비싸고, 활용은 가장 제한적인 고오급 상품이죠. 이 상품은 해당 연예인이 특정 영화나 드라마에서 열연했던 가공의 캐릭터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성격과 배경, 능력 모두가 그 캐릭터에 맞게 조정된 상태죠. 설정이 구체적인 만큼 시대적 배경이 다르면 쓰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계관 「석양이 진다」를 이용하고 있는데, SF 세계관의 캐릭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이상하잖아요? 사후보험 관제 AI의 상황연산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런 상황에 개연성을 부여할 순 없거든요. 이건 표준 가상인격 패키지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주의사항입니다. 그러니 구매하시기 전에 호환되는 세계관을 신중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환불해드리기 귀찮아요. 아무튼 이런 상품들은 대체로 단가가 센 편입니다만, 잘 찾아보시면 의외로 싼 상품이 많습니다. 고객 여러분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비싼 것보다는 싼 것이 훨씬 더 많아요. 바로 비인기 듣보잡 연예인들, 그리고 한 물 간 스타들의 캐릭터 패키지들입니다. 사실 연예인은 돈을 엄청 못 버는 직업이죠. 상위 0.1%만이 시대의 영광을 누립니다. 나머지는 뭐……일감 찾기 힘든 일용직 노동자들이에요. 그러니 자신의 외모와 캐릭터 상품이나마 어떻게든 팔아보고자 애쓰는 것이고요. 연예계의 정점에 오른 스타들도, 자기 이미지를 비싸게 팔 수 있는 시기는 잠깐입니다. 전성기라는 게 그리 길게 유지되진 않는걸요. 원 히트 원더로 주저앉는 스타들이 수두룩하죠. 계속해서 데뷔하는 신인들도 적잖이 위협적이고요. 그래서 스타들에게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팔 수 있을 때 팔아야 한다. 항상 그런 부담을 느끼는 겁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올드 팝이 하나 있네요. 「제가 더는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절 여전히 사랑해주실 건가요?」 「당신이 그럴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아픈 영혼 말고는 가진 게 없을 때에도 절 여전히 사랑해주실 건가요?」 「당신이 그럴 것을 알고 있어요.」 노래 속 화자의 자문자답이 어째서 처량한 느낌을 주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요. 별을 향한 뜨겁고 순수한 동경도, 그저 한 순간의 열정일 뿐입니다. 영원불멸의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스타들의 인기에 비해 캐릭터 패키지의 할인이 의외로 잦은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물이다 싶을 땐 눈물의 똥꼬쇼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가격 비싸다고 지레 겁먹지 마세요. 지름신이 여러분을 가호하십니다. 지금까지 연예인 캐릭터 상품들을 안내해드렸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구매의욕이 마구마구 솟아오르시나요? 별을 쫓는 여러분, 지갑을 털어 당신의 두 손이 별빛으로 넘쳐나게 하세요! 고객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사실은 돈을 위하여,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는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굳어지는 땅, 포트 로버츠 (1) 전쟁영웅에 대한 미국인들의 예우는 대단히 각별하다. 세계관 내 최연소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겨울은 상급자로부터 먼저 경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는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명시적인 권리는 아니었으나 모두가 존중하는 관례 같은 것이었다. 겨울은 그 권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성격 탓도 있고, 겸허하게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겨울을 좋아했다. 소년장교와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포트 로버츠의 경찰 중에도 열성적인 지지자가 많았다. 그들과 친분을 쌓는 건 겨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겨울과 동행하는 어데어 경사, 도슨 경관도 최근 안면을 튼 사이다. 두 사람은 순찰을 같이 돌아보고 싶다는 겨울의 요청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종래에는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예전에 비해 순찰을 자주 도시는 것 같네요.” 겨울이 운을 띄우자, 어데어 경사가 긍정했다. “중위님 덕분에 난민들에 대한 시선이 많이 달라졌죠. 상부에서 난민구역의 관리를 강화하라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사실 저희가 그동안 좀 무관심했던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잃어버린 것들이 많잖아요?” 상냥한 말이 경사를 미소 짓게 만든다. “예, 확실히. 어쨌든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잃어버린 것들 가운데 되찾을 수 있는 건 되찾아야겠지요. 되찾지 못할 것들은 지난날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말입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중국계 거류구의 한복판이었다. 삼합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조직들의 구역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겨울은 경찰의 순찰경로를 눈여겨본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다. 경찰 두 사람은 감도 못 잡고 있으나, 겨울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생존감각」이 경고하는 붉고 반투명한 사선(射線)들. ‘오락가락 하는구나. 하긴, 숙련도가 높을 수 없는 시점이지.’ 보이지 않는 사수들은 도무지 조준점을 유지하지 못했다. 바르르 떨리는 사선이 상하좌우로 대중없이 흔들린다. 그 폭은 수 미터 단위였다. 활이나 슬링은 실력을 붙이기 무척 어려운 무기다. 그나마 장거리 투사를 연습할만한 공간도 없었다. 기껏해야 텐트 안에서 단거리 투사를 연습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무기의 조악한 품질도 명중률 저하의 원인이다. 비숙련공이 조잡한 재료를 엮어 만들었을 무기의 수준이 높아봐야 얼마나 높겠는가. “순찰 경로가 원래 이쪽이었나요? 아니면 오늘만 다른 길로 도시는 건가요?” 겨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도슨 경관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공사현장 가운데를 가리켰다. “원래는 저쯤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공사가 시작된 후로 순찰로가 바뀐 거지요. 1차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 경로가 유지될 겁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특정 구간을 지날 때마다 늘어나고 짙어지는 사선 경고는 많은 것을 암시했다. 지키고 경계해야 하지만, 변경된 순찰로를 피해서 옮기기는 어려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 “공사가 끝나면 사실상 도시가 되게 생겼네요. 사실 인구는 예전부터 어지간한 도시 수준이었습니다만……그렇게 되면 야간순찰(Graveyard watch)도 경찰에게 돌아오겠군요. 피곤해질 게 뻔한 데도 왠지 기대가 됩니다. 조금이나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느낌이라서요.” 지나가는 경사의 말이 겨울의 주의를 끌었다.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순찰 동행이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화에 어울려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궁금한 것도 있고. 겨울이 물었다. “야간순찰을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하죠?” “아, 이거 말입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중세 영국에서는 밤새도록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더군요. 거기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무덤을 지켜요? 도굴을 막으려는 거였나요?” “그건 아닙니다. 당시엔 묘지의 면적이 정해져 있어서, 새로 묻을 자리가 부족해졌을 때 오래된 무덤을 파내서 자리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묻힌 관을 꺼내서 열어보니, 관 덮개 안쪽에 손톱으로 긁어댄 자국이 있었다는 겁니다. 관 스물다섯 개당 하나 꼴로 말이죠. 이건 즉 죽지도 않은 사람을 생매장했다는 소리잖습니까?” “그렇죠.” “그때부터는 사람을 묻을 때 손목에 줄을 연결해서, 무덤 밖의 종에다가 연결해두었다고 합니다. 이걸 리스트 벨이라고 불렀다나요. 무덤을 지키는 사람은 종소리가 울리면 생매장당한 사람을 파내는 게 임무였습니다. 저도 초짜 시절에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제법 그럴 듯하다 싶었지요.” “재밌네요. 흥미롭기도 하고. 설명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친분이 곧 자산이므로, 겨울은 의미 없는 말도 성실하게 들어주었다. “도시라……시리아의 난민 캠프엔 이발소나 세탁소, 슈퍼마켓도 있었다고 하던데, 여기도 곧 그렇게 되겠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도넛 가게나 하나 생겼으면 합니다. 도넛에 커피가 없는 야간순찰은 뭔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도슨의 희망사항이 어데어를 웃게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베이커스 만큼 제대로 된 도넛은 만들지 못할 걸.” “또 모릅니다. 요리 실력은 좋지 않습니까.”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두 분은 도넛을 좋아하시나요? 미국 경찰이 도넛을 좋아하는 건 편견이라고 들었는데요.” 도슨과 어데어가 답한다. “편견 맞습니다. 딱히 좋아해서 먹는 게 아니었거든요. 한밤중에 순찰 돌다가 쉴만한 데가 도넛 가게뿐이라 다니던 거지요. 뭐, 거의 습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근무의 일부처럼 느껴졌지요. 그만큼 정이 들어서 그리운 것 같습니다.” “세대차라고 보셔도 됩니다. 건강 생각해서 도넛 대신 베이글을 먹는다는 친구들도 있고요.” 겨울은 의아하다. 베이글이라고 딱히 도넛보다 나을 것 같지는 않은데…….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순찰은 중국계 거류구 외곽의 체크 포인트에 도달했다. 겨울을 발견한 병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다. 겨울은 간단하게 답례하고, 뒤 돌아 공사현장을 눈에 담았다. 1차 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였다. 일을 벌인다면 순찰로가 다시 바뀌기 전이 좋을 것 같다. 이쯤에서 순찰을 그만 두어도 무방했으나, 나중에라도 불필요한 의심을 살 여지를 줄이기 위해, 겨울은 두 명의 경찰과 조금 더 함께하기로 했다. # 79 [79화] #굳어지는 땅, 포트 로버츠 (2) 1월의 끝자락에 태풍이 찾아왔다. 미 국립태풍센터(NHC)가 캘리포니아 각지에 발송한 경고전문에 따르면, 4등급(Category 4) 허리케인 카리사(Carissa)가 샌디에이고 앞바다를 통과하여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로 향할 예정이었다. 카리사는 태평양 동부 해상에서 올 들어 세 번째로 발생한 태풍이자, 포트 로버츠의 모든 작전을 취소시킨 첫 번째 태풍이었다. 앞서 있었던 두 개의 태풍, 안젤리크(Angelique)와 베릴(Beryl)은 해안선에서 먼 곳을 지났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미친 영향이 적었다. 반면 카리사는, 샌디에이고에서 서북쪽으로 460킬로미터나 떨어진 포트 로버츠가 강풍과 호우에 시달릴 만큼 가깝고, 강력했다. 국립태풍센터는 카리사가 소멸하기 전에 새로운 태풍이 발생할 가능성도 경고했다. 겨울은 전문 내용의 일부를 떠올렸다. 「Formation chance through 48 hours...high...90 percent」 예상 생성 위치는 북위 38도, 서경 127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해상이었다. 만약 여기서도 태풍이 만들어진다면, 캘리포니아는 넘치는 강수량과 미쳐 날뛰는 바람으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덕분에 풍수해 예방작업이 포트 로버츠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고리와 밧줄을 새롭게 걸고, 한 동에 최소 열 개 이상의 말뚝을 추가로 박는다. 또한 기지 외곽에 모래주머니를 쌓으며, 중장비를 동원해 저지대로 이어지는 배수로를 파는 중이다. 이 작업을 살리나스 강 양쪽에서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강 동쪽의 간이공항과 예비 차량보관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살리나스 강이 마지막으로 범람한 것은 2006년 초엽의 일이라고 한다. 그 뒤로 캘리포니아에서 기록적인 가뭄이 계속되었기에, 바닥을 드러낸 강이 범람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요새 사령관 제럴드 M 래플린 대령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재해를 대비하는 데엔 지나침이 없다." 겨울은 그의 입장에 공감했다. '그리고 그 편이 내게도 좋으니까.' 비바람 몰아치는 강변에 서서, 소년장교는 자연과 싸우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해가 없는 낮,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국적 불문하고 동원된 수많은 노무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작업에 임했다. 성별도, 연령도 무관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비록 위조된 현실일지라도,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이제부터 난민 구역에서 우발적인 교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희생자를 늘리지 않으려면,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교전현장을 떠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같은 기회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겨울이 작업용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장연철 부장님. 저 한겨울입니다. 들리십니까?" [네, 대장님! 잘 들립니다! 말씀하시죠!] 전파를 탄 바람 소리가 후두둑 후두둑 요란했으나, 교신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제가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요. 동맹원들을 혼자서 감독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예. 다른 관리자분들이 계시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본래 현장에는 두 명의 부장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겨울은 민완기 부장을 일찌감치 들여보냈다. 장년의 학자는 나이 탓인지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약을 얻어 와도 감기를 떨치는 데 한참 걸리는 사람을 악천후에 노출시킬 순 없었다. 그는 중요한 간부였다. 무엇보다, 사건이 터졌을 때 거류구의 동요를 통제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완기를 배웅하며, 겨울도 그 점을 강조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게 해주세요." 학자는 빗방울 맺힌 안경 너머로 싱긋 웃었다. "당연한 걸 당부하시는군요." 겨울은 그가 알아서 잘 해줄 것이라 믿었다.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부탁한 이유쯤 쉽게 짐작할 사람이니까. 장연철의 답신을 듣고서, 이제 겨울은 시민구역의 경찰지휘소를 향했다. 달 같은 태양 아래 시민 거류구 체크 포인트를 지키는 병사들은, 우의를 입었는데도 속까지 흠뻑 젖은 모양이었다. 찝찝한 기색으로 몸을 비틀다가, 뒤늦게 소년장교를 발견하고 화들짝 경례한다. 초소를 통과하면 경찰지휘소는 금방이다. 새크라멘토 출신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과 도시로부터 중구난방으로 모인 경찰들은, 지휘체계를 나름대로 복원하여 포트 로버츠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넓은 가건물은 입구 근처에서 비가 새고 있었으나, 사무실과 유치장은 비교적 멀쩡했다. 실내에서 웅웅 우는 지붕을 심란하게 올려다보는 경찰관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경찰인력도 작업감독에 많이 동원된 까닭이었다. 입구 경비를 서던 경관이 부동자세를 취한다. "중위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코너 치안감님을 뵈러 왔는데, 혹시 계신가요?" 치안감 윌리스 오코너는 포트 로버츠의 경찰 최고책임자였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 경찰 생존자들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주 경찰 본부가 새크라멘토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장과 부청장은 새크라멘토 함락 당시 실종되었다. 용무를 들은 경관은 한층 더 몸이 굳어진다. "예. 사무실에 계십니다. 혹시 미리 약속을 하고 오셨습니까?" "아뇨.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갑자기 찾아오게 된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별을 넣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허가는 금방 떨어졌다. 내선을 붙잡고 몇 마디 나누더니, 경관이 겨울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경관의 등을 따라가는 동안, 중간에 마주치는 경찰들이 차렷 자세로 경의를 표한다. 이따금씩 미소를 짓는 사람들은 소년장교와 개인적인 친분을 제법 쌓은 이들이었다. 겨울은 가벼운 목례로 그들의 호의에 응했다. 안내는 문 앞에서 끝났다. 그래도 치안감의 사무실은 그럴듯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치안감이 거수경례와 함께 소년장교를 반겼다. "어서 들어오게, 중위. 영웅의 갑작스러운 방문이군."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라면 이유 불문하고 언제든 환영일세. 딸과 오붓하게 식사할 때만 제외하고 말이야." "따님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자랑스러운 딸이지. 스물다섯 살에 연방보안관 되기가 쉽지 않거든. 글린코를 수석으로 나왔다네. 어릴 때부터 아빠처럼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 먹고도 꿋꿋하지 않겠나." 오코너를 딸 바보라고 하긴 어렵다. 그 정도면 정말 뛰어난 게 맞으니까. 치안감 사무실에는 포트 로버츠의 대형 지도가 걸려있었다. 향후 개발계획과 경찰의 순찰로, 담당구역 따위가 스케쥴 표와 함께 기재되어있다.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는 고급정보들이다. 겨울은 겨울동맹의 구역 한복판에 왜 넓은 공터가 예정되어있는지 궁금했다. 윌리스 오코너가 자세를 고쳤다. "그래, 오늘 같은 날 나 같은 중늙은이를 찾아와야 할 그 중요한 용무라는 게 뭔가?" "중국계 난민구역의 불법무기 색출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겨울은 마약 거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무기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뒤지다보면, 마약이든 그밖에 다른 문제든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무기? 난민들이 총기를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소년장교가 한낱 날붙이로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것이어서, 중년의 치안감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난민의 무기 보유는 요새의 존속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어쨌든 난민구역은 시민구역에 비해 여러모로 열악하고, 강력한 통제와 차별을 받고 있다. 철조망 너머로 부족함 없이 지내는 미국 시민들에게 불만을 품은 난민은 얼마든지 많다. 현재 여건이 개선되고는 있으나, 그동안 난민들이 놓여있던 열악한 환경과 치안부재의 혼돈을 감안할 때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마 총기류는 아닐 겁니다. 있어도 얼마 안 되겠죠. 전 활이나 석궁, 슬링 종류가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수량은?" "적어도 백 단위입니다." 과장이 아니다. 겨울이 직접 다니며 확인한 중국계 조직들의 보유량만 세 자리를 가볍게 넘고, 범위를 넓혀 다른 국적의 난민들까지 털게 되면 그 이상이 나올 것이다. "음, 조악한 무기도 숫자가 많으면 위협적이지. 무기고를 습격하기라도 하면 말이야....... 아니면 시민들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고." 사실 치안감이 제기한 우려들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경우 결코 시도하지 않을 미친 짓들이다. 그러나 치안감은 동시에 현재의 난민조직들이 반쯤 범죄단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합리적인 행동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자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나?"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익명의 밀고자가 있었고요. 이름을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밀고자의 희망사항이거든요." 겨울은 거짓으로 밀고자를 꾸몄다. 기술보정에 의한 증강현실 경고를 읽고 파악했다고,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관제 AI가 상황연산 오류로 판정하고 롤백을 시도할 것이다. 롤백이 반복되면 불이익이 주어진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경찰병력 지원인가?" "네. 숫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요새사령부에 군 병력을 요청하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 치안유지는 전적으로 경찰의 업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기 수색을 시작하기 전에 사령부에 보고는 해주셨으면 하지만, 군 병력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군 내부에 이해당사자가 있는 건 군 병력을 쓰지 않을 이유가 못 된다. 겨울에게 완벽하게 호의적인 면면을 파악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병력만을 동원하려는 건 난민구역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미국 경찰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샷건에서 자동소총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화기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렇군. 무슨 말인지 알겠네. 자네는 난민들에게 일상을 돌려주고 싶은 건가?" "네. 치안유지에 군이 개입하는 걸 정상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그건 계엄 상황이죠. 전 사람들이 재해 이전의 삶으로 조금씩, 확실하게 돌아간다고 느끼길 바랍니다. 문제는 그동안 경찰의 존재감이 너무 없었고, 난폭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겁니다." "즉 앞으로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실력을 과시해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턱을 쓰다듬던 치안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갈 곳이 중국인 거류구라고 했었지. 자네를 의심하고 싶진 않네만, 그래도 확인할 수밖에 없군. 혹시 난민구역의 알력을 경찰 손으로 해결하려는 건 아닌가? 자네가 중국인들의 일부 파벌을 돕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소문이 아니라 정보겠지. 경찰이 시민구역 외의 나머지 거류구에서 활발히 활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치안감이 모를 수 없는 정보였다. 브래들리 점령 작전 때만 하더라도 겨울이 건의하여 삼합회의 인력으로만 채웠던 것이니까. 경찰 입장에서 대놓고 트라이어드 조직명을 쓰는 놈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지금까지는 난민구역이 어떻게 돌아가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영웅의 등장으로 난민의 처우개선이 본격화된 지금, 경찰이 삼합회, 흑사회 운운하며 범죄자 집단을 만든 난민들을 예전처럼 방관할 이유가 없었다. 겨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서로 돕기로 약속했거든요. 하지만 이번 일에서 그 사람들을 특별취급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조건이었죠.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곤경에 처했길래, 앞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도와줬던 거였어요. 사람을 겨냥해서 만든 무기가 과연 어디에 쓰였을까요? 제가 그것까지 지켜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가. 무례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네. 생각해보면 명예로운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에게 품을 의심이 아니었어." 표정을 보면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묻어난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명예훈장 수훈의 후광이자, 겨울이 그동안 쌓아온 전적의 영향이기도 했다. 격식을 갖추는 대답보다는 한 번의 미소가 나을 것 같아, 소년은 익숙하게 만들었다. 잘 만든 미소는 언제나처럼 효과가 좋았다. 윌리스 오코너가 최종 승인을 내준다. "좋아, 해보게. 대령님께는 내가 연락하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이 갈 거야." "감사합니다, 치안감님." 겨울은 그에게 경례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 80 [80화] #굳어지는 땅, 포트 로버츠 (3) 집결한 경찰들은 출신이 제각각이었다. 도시 경찰, 마약 단속국, 총기 단속국, 특수기동대(SWAT), 카운티 보안관, 연방 보안관 등이 섞여있는 가운데, 드물게는 주립공원 순찰대나 수렵 및 어로 관리과(Department of Fish and Wildlife) 소속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바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업무와 전술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각자의 역할과 동선을 사전에 분명하게 정해놓아야 한다. 이 단계에서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지휘소의 상황관제가 그만큼 중요한 시점이었다. 출동 전, 보급계 경관들이 창고를 열고 필요한 장비들을 꺼내왔다.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비 수령과 분배에 다시 반시간 정도가 지나갔다. 겨울에게도 비살상탄이 장전된 펌프액션 샷건과 탄약 벨트가 돌아왔다. 기존의 무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용도에 맞게 바꿔서 쓰면 된다. 그밖에 최루가스 수류탄과 삼단봉, 강화 플라스틱 방패, 수갑 따위를 추가로 지급받았다. 함께 움직이게 된 기동대장이 소년장교에게 씨익 웃어 보인다. "참 궂은 날입니다만, 이런 작전을 펼치기엔 더없이 좋군요. 어지간한 소란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릴 테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다. 태풍의 가장자리는 비바람과 천둥의 도가니였다. 네다섯 걸음만 떨어져도 대화에 지장이 생길 지경. 경찰은 무전으로 교신하면 되지만 중국인들은 아니다. 중국계 거류구의 넓이를 감안할 때, 수색에 긍정적인 요소였다. 특수기동대는 예비대 역할을 맡았다. 짙은 회색 방탄차량(BearCat)의 탑승칸을 꽉 채우고 앉아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출동 대기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출동 대기라고는 해도, 기동대원들은 곧 있을지도 모를 교전보다 겨울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한 대원이 묻는다. "중위님. 한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군사교육을 받는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의미를 모르겠다. 겨울이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신문이나 뉴스 같은 곳에서요. 군 복무기간이 10년이고, 여자도 징병하고, 가끔씩 테러나 핵실험도 하는 위험한 나라라고 들었는데요." "그건 북한 이야기에요. 저나 난민구역의 다른 한국인들도 모두 남한 출신이고요. 혹시 남한과 북한을 구분 못 하시는 건 아니죠?" "오, 병역법이 주마다 다른 겁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럼 누가 북쪽에서 살죠?" "......." 겨울은 서로 다른 나라라는 의미에서 남한과 북한을 말했는데, 질문한 대원은 한 나라 안의 서로 다른 지역이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인다운 오해였다. 미국에는 동서, 또는 남북으로 나누어진 여러 개의 주가 존재하며, 주마다 서로 다른 법률을 집행한다. 겨울이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남북한은 서로 다른 나라거든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전쟁으로 갈라졌어요. 그게 한국전쟁이고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들어보셨나요?" 남한과 북한은 전쟁 이전에 이미 갈라져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질문했던 대원은 조금 창피해하며 대답했다.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나보군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뭐가요?" "중위님 말씀입니다. 워낙 엄청난 활약을 하셨잖습니까.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았다면 이상할 것도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군요......." 대원은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른 대원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아무래도 긴장감이 없다. 출동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통신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구역에서 수색과 무기압류가 원만하게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이따금씩 발견되는 마약류에 경찰들이 당황하는 내용도 엿들을 수 있었다. [이야, 이 정도면 LA를 통째로 중독 시키고도 남겠는데?] 헤로인 1킬로그램이면 3만 명이 투약하고도 남는다. 그런 것이 가방 채로 발견되는 중이다. 아무래도 중국 마약상들이 대피할 때 목숨 걸고 챙겨온 물량인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조용하지는 않았다. 무전망에 급박한 교신이 흐른다. [지휘소, 조지 14188, 코드 10! 73번가에서 교전 발생! 경관 1명 부상! 치명적인 무기로 무장한 인원 다수! 포위당했다! 지원 바란다, 오버!] [코드 10 확인. 데이비드 20, 73번가로 이동하라.] [데이비드 20, 카피.] 데이비드는 특수기동대의 호출부호였다. 급격히 올라가는 엔진 소음. 겨울은 안에 앉아서도 헛도는 바퀴를 느낄 수 있었다. 차량이 둔하게 가속했다. 대원들이 방탄유리를 통해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비가 워낙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줄줄 흐르는 물로 인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송칸 창문에 와이퍼를 달아놓은 것도 아니었다. 결국 대원들은 창문 대신 총안구를 이용했다. 탑승한 상태로 사격을 가하도록 만들어진 총안구들은, 원형 덮개가 붙어있어 언제든 열고 닫기가 가능한 구조였다. 누군가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허. 정말로 화살이 날아다니는군요. 총격전은 여러 번 치러봤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입니다." 깡, 깡! 돌과 화살이 차체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아무래도 총안구를 노리는 모양이지만, 소용없다. 첫째로 사수의 실력이 형편없었고, 둘째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다. 화살 같은 투사체는 바람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시점에서 모두가 방독면을 착용했다. 비바람이 심하더라도, 텐트 안쪽에서라면 얼마든지 최루탄을 써먹을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한 뒤, 겨울은 자청하여 가장 먼저 내렸다. 텅! 내리기 무섭게 돌이 날아오기에, 겨울이 방패로 비껴 쳐냈다. 하차하는 병력을 향해 집중적으로 돌이 쏟아진다. 그것들을 연속으로 막아내며, 뒤이어 내리는 대원들을 위해 길을 만들어준다. 기동대원 한 명이 경고했다. "플라스틱 방패는 화살을 맞으면 뚫릴지도 모릅니다. 조심하십시오." "네. 알고 있어요." 겨울이 몇 걸음 더 나아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강화 플라스틱 방패는 전체가 다 투명하여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대신 강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라, 장력 강한 활에 관통될 수도 있었다. 중국인들이 만들었을 활이나 석궁의 품질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품질이 낮다고 위력까지 낮으란 법은 없다. 슥 그어지는 사선 예고. 푸욱! 한 발 물러나 회피한 겨울은, 발치에서 바르르 떠는 화살 깃을 눈여겨보았다. 기다란 화살이 땅에 절반이나 틀어박혔다. 그 방향으로 집중사격이 가해진다. 몸을 사리는 중국인은, 다시는 그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상자 확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부상자가 들것에 실려 차량으로 옮겨졌다. 이후 기동대원들이 체계적으로 대응했다. 방패를 든 사람이 전방을 경계하며 나아가면, 뒤따르는 두 명이 좌우를 나누어 경계한다. 사각을 없애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휴대한 방패는 겨울과 또 다르다. 앞을 내다보기 위한 작은 투명 플라스틱 직사각형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모두 새까만 방탄판이었다. 카앙! 방패를 들고 있던 기동대원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방패 모서리에 화살이 박혀있다. 방패 대원은 낮은 욕설을 내뱉는다. 진흙투성이인 바닥이 미끄러워서 생긴 일이다. 겨울은 강력한 화살이 날아오는 빈도를 어림했다. '위협적인 사수는 하나, 혹은 둘.' 나머지는 별것 없었다. 숫자가 많아서 문제일 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항복하면 사살하지 않는다!] 경고방송은 사격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러나 명중률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 빗방울이 부서지면서 생기는 물안개 때문이었다. 게다가 깡패들도 지형과 엄폐물을 적극 활용했다. 줄줄이 쳐진 텐트 사이를 들락거리거나, 공사현장의 비계 위에 엎드려있거나 했다. 경찰들이 방패와 차량,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밀고 들어갔다. 겨울도 소총을 들었다. 방패를 비스듬히 기울여 땅에 콱 박아 넣고, 몸으로 지지하며, 측면으로 몸을 살짝 빼서 조준선을 잡는다. 직후, 고개를 기울였다. 희한한 게 보인다. 중국인들의 행동이 가관이었다. 나무로 된 방패판을 끌고 나오는 중이다.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운 크기와 무게인데, 바퀴를 달아 해결했다. 옛 시대의 공성병기를 보는 것 같다. '별 짓을 다 하네.' 겨울은 무릎 꿇고 그 아래의 작은 틈을 노렸다. 타앙! 젖은 공기 탓에 귀 따갑게 튀는 총성. 빗소리를 뚫고, 외마디 비명이 찢어진다. 겨울이 연속으로 중국인들의 신발을 노렸다. 타앙, 타앙, 탕! 거창하게 움직이던 방패판이 멈추기는 순식간이었다. 다른 방향에서 나오던 또 하나의 방패판은 경찰이 박살냈다. 장갑차량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충돌 직전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중국 갱들 입장에선 무지막지한 폭거였다. 이어 겨울은 위협적인 사수들을 견제했다. 제대로 쏘면 활만 부숴놓기도 했다. 여의치 않을 땐 어깨에 구멍을 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기본 화력과 방어력의 차이가 크고, 장갑차량의 존재는 결정적이었다. 다만, 추가 피해를 내지 않고 진압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다. 겨울이 소총을 등 뒤로 넘기고, 땅에서 방패를 뽑는다. 비에 물러진 땅이 잔뜩 묻어나왔다. 겨울은 들러붙은 흙을 굳이 털어내지 않았다. 그 무게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대로 들고 뛰어서, 가장 위험한 화살의 사로를 역으로 짚어간다. 사방에서 돌이 날아들었다. 겨울은 막거나 피하면서, 가로막는 한 사람을 방패로 후려쳤다. "그하악!" 우드드득 하는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무게추 역할이었던 진흙이 후두둑 떨어진다. 갈비뼈가 네 대쯤 나갔겠다. 죽도록 아프겠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어지는 사선. 이번에는 형편없이 빗나간다. 겨울은 무식하게 위력만 끌어올린 탓일 거라 추측했다. 소년 혼자 돌출된 것을 본 중국 갱들이 엄폐물로부터 밀려 나온다. 야비하고 노련한 행동이었다. 겨울이 있으니 경찰들이 함부로 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자신감과 절망적인 저항의식이 묻어나는 일그러진 얼굴들. 몇몇은 돌리던 슬링에 속도를 붙이고, 나머지는 몽둥이나 목창을 들었다. 한꺼번에 덮쳐오는 그들. 방독면 탓에 겨울을 알아보지 못한다. 겨울이 허리에 걸었던 샷건을 한 손에 쥔다. 방패를 눕히면서 몸 쪽으로 당기면, 그 위에 총을 얹어놓고 쏠 수 있었다. 방패 끝이 땅에 닿으니 색다르면서도 안정적인 사격 자세였다. 총구를 반 바퀴 돌리자 뭉쳐오던 중국인들이 기겁을 하고 흩어진다. 그들은 여기 장전된 게 비살상탄이라는 걸 모른다. 사실 비살상탄으로도 죽을지 모를 근거리이긴 하다. 슬링으로 쏘아진 두 개의 돌을, 겨울은 방탄복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위협을 겨냥한다. 쾅! 소총과는 또 다른, 샷건의 묵직한 반동. 고작 5미터 거리까지 접근했던 중국인이, 숨 턱 막히는 신음과 함께 벌러덩 넘어졌다. 어깨를 부여잡고 끙끙 댔다. 이 때 측면을 찌르고 들어오는 창. 방패로 비껴내며, 거리를 좁혀, 샷건을 몽둥이처럼 휘두른다. 장전된 샷건의 무게, 대각선 올려치기가 갱의 턱뼈를 부쉈다. 골이 흔들린 중국인은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린다. 겨울은 그를 걷어차 넘어트리고, 밟고, 빙글 돌아서, 방패로 정강이를 찍었다. 케윽! 턱을 붙잡고 있던 갱이 신선한 고통에 자지러졌다. 눈 뒤집고 거품을 문다. 곧바로 들어오는 다음 갱에게는, 방패를 낮춰 온 몸으로 충돌했다. 뱃속까지 뒤흔드는 강한 타격감. 남자가 뒤로 넘어지기를 틈타, 겨울은 방패 모서리에 샷건 장전손잡이를 걸었다. 체중으로 밀어서 장전한다. 철컥. 고작 1미터 거리에서 조준당한 남자에게서 혈색이 사라졌다. 즉시 격발하는 대신, 겨울은 남자를 중심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아까부터 오락가락하는 두 개의 사선 탓이었다. 동료 때문에 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위치를 잡고, 쾅! 샷건이 불을 뿜었다. 무릎 아래, 측면을 조준해서 쏜 사격에, 다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렸다. 처절한 비명. 즉시 날아드는 두 개의 화살. 하나는 빗나가고, 하나는 겨울이 아니라 엉뚱한 중국인에게 내리꽂힌다. 겨울이 한 발 내딛어 궤도를 차단했다. 주먹질처럼 휘둘린 방패가 화살과 맞부딪힌다. 사아아악- 날카로운 것이 플라스틱을 가르는 소리. 하얗고 긴 흠집을 남긴 채, 투사체는 먼 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덕분에 목숨 부지한 갱이 얼떨떨한 표정이다. 겨울이 마주보자 당황한다. 겨울은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엎어져서 경련하기에, 혹시 몰라 한 번 더 찼다. 접근하던 중국인들 모두가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 됐다. 기절했거나, 뼈가 부러져서. 겨울이 공사현장의 비계를 올려다보니, 이제껏 화살을 쏴대던 사수가 당황하고 있었다. 뒤에서 방패와 진압봉을 든 경찰들이 다가오는 중이다. 어쩔 줄 모르던 갱 사수는 비계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할 리 없다. 발목을 쥐고 뒹군다. 진압이 최종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갱이 숨어든 텐트를 향해 장갑차량이 돌진했다. 무너지는 텐트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며 나오는 중국 갱들을 진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기동대장이 겨울을 찾았다. [중위님,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74번가 1번 텐트입니다.] # 81 [81화] #굳어지는 땅, 포트 로버츠 (4) 우릉우릉 울리는 천둥소리. 땅거미가 지는 하늘 아래, 바람은 갈수록 매서워졌다. 빗방울은 부서지는 얼음을 닮았다. 워낙 세찬 강우인지라 우의가 다 막을 수 없었다. 소매와 목덜미로 스며든 빗물이 속옷까지 흠뻑 적셨다. 전투화 안에도 물이 고인다. 겨울은 반응이 조금 둔해진 육체를 느꼈다. 손과 발의 감각이 무디다. 아직은 괜찮지만, 몇 시간 더 추위에 노출되면 위험하겠다. 저체온증, 가벼운 동상이 우려된다. 74번가로 가는 길은 과잉진압의 현장이었다. 곳곳에 희석된 유혈이 낭자했다. 몽둥이를 들고 저항하던 갱을 향해 기마경찰이 달려들었다. 그 속도감, 그리고 위압감에 굳어버린 갱은 말 몸에 치여 나동그라졌다. 팔꿈치가 뒤로 꺾였다. 침을 흘리며 울부짖는 그에게 삼단봉 린치가 쏟아졌다. 빠악, 빡! 우중에 사람 패는 소리가 흉악하다. 시위 진압 좀 해보았을 법한 경찰들이 방패로 벽을 만들었다. 땅을 쾅쾅 찍으면서 한 무리의 갱을 몰아붙인다. 밝다고 하기 어려운 조명 아래, 시꺼먼 그림자를 드리운 그들은 겨울이 보기에도 위압적이었다. 경찰들은 구석에 몰린 갱 집단에게 투항을 권하지도 않았다. 고무 산탄이 장전된 샷건을 무차별 난사한다. 6연발 유탄발사기를 든 경찰이 소년 장교 방향으로 달아나는 갱을 향해 연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투웅, 철컥, 투웅, 철컥, 투웅! 한 발을 뒤통수에 맞은 갱이 그대로 꼬꾸라진다. 뻑 소리를 내고 허공으로 튕겨진 유탄. 떨어져 내리는 것을 겨울이 낚아챘다. 살상력이 없는 스펀지 유탄이었다.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소년은 엎어진 갱의 목을 눌러 맥박을 확인했다.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머리를 맞았으니 두개골, 경추 골절이나 뇌출혈을 우려해야 한다. 유탄발사기를 든 경찰은 수갑을 들고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겨울이 한 발 물러나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나마 일부러 죽이지 않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모르겠다. 미국 경찰에게 살상무기로 저항한 결과 치고는 양호한 수준이었다. 과잉진압 자제를 요청해야 할까? 머리에 피가 오른 경찰들도, 영웅이 된 소년의 말에는 귀 기울일 것이다. 겨울은 무전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놓아버렸다. 다양한 층위의 고려가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녹슨 칼을 든 남자였다. 소년이 아직 지원병에 불과할 때, 밤중에 마주쳤던 굶주린 암살자 한 명. 그를 망설임 없이 죽였던 것은 얕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로써 더 많은 살인을 피하기 위하여. 지금도 마찬가지다. 혹독한 진압은, 다른 구역의 범죄자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희생은 오히려 적어질 것이다. 물론 일벌백계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형평성이 어긋난다. 한편으로는 과잉진압을 긍정하는 마음도 있다. 죽지만 않는다면야. 마약 팔고 사람 팔고 자기 인생도 팔아버리는 범죄자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어지간한 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징역을 살아도 문신을 새겨 기념하는 작자들 아니던가. 사람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끝끝내 바꿀 수 없었던 두 사람이 떠오른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겨울이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어느새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자각했기 때문이며, 그것을 본능적으로 참아내려는 자신에게 다시 놀랐기 때문이다. 여기는, 화를 참을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아니었나? 꿈틀거리는 모순이 느껴진다.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기 어려웠다. 지체는 길지 않았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대개 겨울의 사고는 「텔레타이프」 문자열이 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지금은 아니었다. 소년은 이곳이 자기만의 세계가 아님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찰박찰박 걸어가면서, 샷건의 튜브형 탄창에 쓴 만큼의 탄약을 채워 넣는다. 74번가의 첫 번째 텐트 앞에 일군의 경찰집단이 모여 있었다. 기동대장이 겨울을 보고 절도 있게 발을 모았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죠?" "일단은 인질극입니다만....... 인질범이 중위님을 찾고 있습니다." "저를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히 들어보면 사실이었다. 바람이 늑대처럼 울부짖는 가운데, 희미하게, 누군가 어설픈 영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중위 한겨울을 불러오라는 절규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악에 받혀있는 게 느껴진다. 겨울이 경찰 간부에게 묻는다. "대화는 해보셨나요?" "몇 차례 시도해봤으나 실패했습니다. 저쪽의 영어실력이 워낙 형편없어서....... 한겨울 중위를 데려오라는 것 말곤 할줄 아는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도 발음이 엉망이라 겨우 알아들었지요. 그렇다고 저희들 중에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협상전문가가 몇 명 있는데 쓸모가 없군요." 기동대장이 추가로 상황을 요약해주었다. "인질범은 30대 내지 40대로 추정되는 중국인 남성이고, 어디서 났는지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안전장치가 없는 싸구려입니다. 인질은 20대 중국인 여성이고......요구사항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것, 그리고 중위님을 데려오라는 것 뿐. 다른 건 없었습니다. 텐트 안쪽이다 보니 저격이 용이치 않고, 최루 가스를 쓰려고 해도 인질의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아서 일단 중위님을 모셔오기로 한 겁니다." "상황은 잘 알았어요. 제가 들어가 보죠." 소년이 너무 가볍게 말하는 바람에, 기동대장의 반응이 조금 늦어졌다. 들어가려는 소년 장교를 만류한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언제나 그렇죠. 위험은 그 다음에 고민할 문제고요." "음......그동안 소문은 참 많이 들었습니다만, 너무 듣던 그대로이신지라 당황스럽군요." 겨울은 그에게 눈웃음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곤 멱살을 잡아 확 당겼다. 쿵! 풍속 그대로 날아온 목판이 기동대장 있던 자리를 지나, 땅을 치고 팽그르르 회전한다.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졌다. 뒤늦게 자신이 당할 뻔한 봉변을 깨닫고, 기동대장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중위님." "천만에요. 아무튼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의미한 말일지도 모릅니다만, 조심하십시오. 중위님은 이런 데서 다쳐도 좋을 사람이 아니십니다. 주의를 끌고 계시면 저희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텐트는 사방을 들출 수 있다. 범인이 주의 깊게 사방을 경계한다면 소용없겠으나, 방심을 유도할 경우 약간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 경우엔 십중팔구 사살당하겠지만.' 인질범에 대한 대응은 기본이 사살이다. 경찰 간부에게 한 번 눈으로 웃어 보인 뒤, 겨울이 대형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중국계 조직의 영역답게, 붉은 색조의 장식들이 눈에 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곳은 직예당(直隸堂)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안량공상회(安良工商會)와는 협력 관계다. 자신을 보자마자 한겨울을 데려오라고 고함지르는 중국인 앞에서, 겨울이 방독면을 벗어보였다. "원하는 대로 왔습니다. 내가 한겨울이에요. 왜 날 만나고 싶어 했죠?" 중국인이 조용해졌다. 그의 인상은 뜻밖에 순한 편이었다. 눈매가 아래로 쳐졌고, 입가엔 자주 지었던 미소의 흔적이 주름으로 남아있다. '선량한 외모가 악인의 자질이 될 수도 있지. 쉽게 속일 수 있으니.' 상대는 겨울을 관찰했다. 겨울도 상대를 관찰한다. 그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정말 기본적인 기능만을 갖춘, 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뢰성 높은 무기였다. 지린내가 난다. 인질로 잡힌 여자가 겁에 질려 실례를 한 것 같았다. 하기야 안전장치도 없는 권총이 관자놀이에 닿아있는 상황이니, 침착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입술이 파랗고, 얼굴은 하얗고, 동공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모든 조건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깎아먹었다. 보기 드문 외모, 그리고 노출 많은 복장을 보면 깡패들에게 어떻게 고통 받았을지 짐작이 간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살려......주세요. 저, 저......사, 살고 싶어요......도와주세요......." 악 소리가 났다. 인질범이 권총 손잡이로 후려친 까닭이었다. 이마에 땀 송글송글 맺힌 총잡이 남자가, 겨울에게 푸근한 웃음을 내보인다. "나는 선생을 알지만 선생은 나를 모르겠지. 처음 뵙겠소, 중위. 즈리통(직예당)의 쓩시꾸이(熊喜貴)요. 당주를 맡고 있지." 당(堂, Tong)은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자생적인 협력체였다. 안량공상회도 통상적으로는 안량당이라고 자칭한다. 본래의 취지는 낯선 나라에서 화교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범죄조직인 경우가 많다. 화교의 이익을 미국의 법보다 우선하는 성향 탓. 이는 배타적인 민족의식에 기초한다. '잘못이라는 의식도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겨울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다. 일전 다물진흥회의 막리지에게 말했던 것처럼, 세계시민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민족주의는 악마의 신앙이다. "쓸 데 없는 시간낭비는 생략하죠. 내게 뭘 원해요?" "허허, 성급하시군. 우리는 서로 한 조직의 우두머리 아니오. 좀 더 점잖은 대화를 합시다." "점잖은 대화?" 겨울이 의도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여자 쪽을 한 번 본다. 그 의도가 명백하여, 인상 좋은 깡패두목이 한숨을 쉬었다. "서로의 강약이 부동하니, 이 정도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소. 약자에 대한 관용으로 말이오." "......." 정말로 한심한 시간이 될 것 같다. 겨울은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인질범의 맞은편에 앉는다. 무릎 위에 장전된 샷건을 얹어두고서, 조금 삐딱하게 상대를 바라본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자극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결정하고, 연기한다.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몰라요. 시간을 아끼세요, 깡패 아저씨." "......듣던 것과 많이 다르시군." 샷건을 만지작거리며 쏘아붙인, 차갑고 조용한 한 마디. 쓩시꾸이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겨울의 의도는, 대화를 언제든 때려치우고, 인질의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시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많은 사람을 이끄는 입장에서, 하나의 얼굴은 부족한 법이지. 상황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여러 얼굴이 필요한 법 아니겠소?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가 된 사람은 착할 수 없는 법이니까." 겨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소년의 침묵 앞에서, 깡패의 말이 빨라진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그러면서도 주위를 쉴 새 없이 훑어보는 품이, 방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생. 일단 경찰들을 물러나게 해주시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데려온 사람은 돌아가게 할 수도 있을 거요." 시꾸이의 말을 듣고, 겨울이 차분하게 반문했다. "왜 나라고 생각하죠?" "선생이 요즘 경찰들과 붙어 다니는 걸 누가 모르겠소?" "겨우 그것 때문에?" "선생이 배후가 아니어도 상관없소. 이 요새에서 누가 당신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이오? 이 사태를 원만히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뿐이겠지." "당신이 비빌 구석은 마커트 대위가 먼저 아닌가요?" "허. 그 패류(敗類)를 어찌 선생과 비교하겠소? 그는 이제 소병소장(小兵小將)의 한 사람일 뿐이오. 애초부터 믿을 구석이 없었지. 어느 한 쪽과의 의리를 지켜서 이득을 취한 게 아니라, 이득을 내놓지 않으면 다른 쪽을 돕겠다고 협박하던 작자였소." 어느 정도는 과장이겠으나, 겨울은 마커트 대위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턱을 괴고 고쳐 묻는다. "좋아요. 내가 경찰을 치워줬다 치고, 그 다음은 뭐죠?" "우리가 대가를 지불할 차례겠지. 다 죽어가는 삼합회는 버리시오. 우리 한인들의 격언 중엔, 아내를 팔아서 좋은 친구를 산다는 말이 있다오. 직예당은 안량당과 함께하고 있소. 삼합회의 노괴보다는 우리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을 거요." "구체적으로 와 닿는 게 없네요." "이를테면 이런 건 어떻소?" 쓩시꾸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인질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상품을 자랑하는 듯 한 태도였다. 겨울이 느릿하게 총을 들어올렸다. 빈틈을 보였다고 생각한 깡패두목이 황급히 자세를 고친다. 인질을 방패로 삼는 것. 그런데 소년이 겨냥하려는 것도 인질이었다. 조준 속도가 느린 것은, 시꾸이가 자기를 쏘는 줄로 알고 놀라 방아쇠를 당길까봐서였다. 겨울이 인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네?" 쾅! 산탄이 여인의 좌측 쇄골을 강타한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했다. 축 늘어지는 여체. 시꾸이가 얼이 빠졌다. 설마 정말로 인질을 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반응하기 전에, 방금 쏜 게 비살상탄이라는 걸 깨닫기 전에, 겨울이 또 한 번 사격한다. 철컥, 쾅! 시꾸이의 얼굴이 부서졌다. "으아아아악!" 입으로는 깨어진 치아를 뱉고, 파열된 안구에서 피눈물을 흘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이 의자를 집어던졌다. 빠악! 박살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시꾸이는 결국 권총을 놓치고 만다. 겨울이 그것을 걷어찼다. 총성을 들은 경찰 기동대가 신속하게 진입했다. 그들은 한 눈에 실내상황을 파악하고, 대기 중이던 의료팀을 호출했다. 의료팀은 텐트 바로 앞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깡패 두목이나 인질보다 소년 장교를 먼저 챙겼다. "혼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부상자들부터 살펴보세요." "아, 예! 실례했습니다." 대체 누구에게 실례했다는 것인지....... 겨울은 처치가 진행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82 [82화] #轍鮒之急 (2) 「9급 공무원 : 중계포털 메인에 걸린 거 보고 들어온 채널인데......뭔가 이상하다.......」 「9급 공무원 : 방송 초기 분량부터 지금까지 「다이제스트」로 주요구간 골라서 동기화해봤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떡치는 장면이 없다. 내가 이상한 건가? 얘들아, 너네는 어때?」 「피자는당연히라지 : 나도 그럼. 만족도 순으로 정렬시켜도 전부 다 청소년 관람가임.」 「동막골스미골 : 에이, 사후보험 들어가서 떡 안 치는 사람이 어딨어?」 「앱순이 : 힝. 정말로 붕가붕가 없나? 진행자 내 취향인데. 보니깐 연기도 잘 하고, 다른 진행자랑 다르게 몰입할 만 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 같더라. 빨리 먹고 싶당. ^_^」 「스윗모카 : 응응. 착한 거 같은데 마냥 착하지는 않네. 뭐라고 해야 되지? 절반만 어른? 암튼 이중적인 매력이 있는 듯. 두 가지 맛이 날 것 같아♡」 [스윗모카님이 별 3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병림픽금메달 : 원래 시청하던 놈들한테 물어보자. 아무나 한 놈 나와라.」 「폭풍224 : 어서 와라, 뉴비 연놈들아. 새로운 빙신들은 언제나 환영이야!」 「병림픽금메달 : 뭔가 이상한 게 나왔군. 넌 언제부터 보던 새끼냐?」 「폭풍224 : 처음부터 봤다. 선배님이라고 불러라.」 「병림픽금메달 : 미친. 너 내 닉네임 안 보이냐? 나랑 밤새도록 병림픽 한 번 해볼래?」 「9급 공무원 : 거기까지.」 「피자는당연히라지 : 폭풍224야. 로그를 올려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 것이야. 어서 네 해피 타임 즐겨찾기를 공개해라. 처음부터 봤으면 당연히 좌표를 찍어놨겠지?」 「폭풍224 : 그런 거 없는데.」 「피자는당연히라지 : 설마....... 농담이지?」 「스윗모카 : 진짜루 없어여? ㅡㅠ」 「폭풍224 : 응, 없어.」 「폭풍224 : 여기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제시카정규직 :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나도 처음부터 본 입장인데, 진행자가 아무래도 꼐임을 안 함. 심지어 별을 수천 개씩 걸어도 뻥뻥 걷어차는 애임.」 「진한개 : ㅇㅇ. 다들 그냥 포기하고 시청하는 중. 어쨌든 재미는 있걸랑.」 [진한개님이 별 5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20대명퇴자 : 그러냐.......」 「20대명퇴자 : 하긴. 난 「종말 이후」 세계관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 있다곤 상상도 못 해봤음. 내가 해본 그 게임이 맞나 싶어서 중계 타이틀을 다시 확인했다니까?」 「9급 공무원 : 인스턴트 라면을 먹으러 들어온 곳이 알고 보니 한정식 집이었다.」 「하드게이 : 비유 ㅋㅋㅋ」 「동막골스미골 : 지난 방송 분량을 너무 대충대충 봤나? 난 아직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SALHAE : 모르는 게 낫다.」 「동막골스미골 : ?」 「SALHAE : 새로 온 놈들에게 충고 하나 하마. 너네 이 방송 보지 마라.」 「앱순이 : 어? 왜?」 「SALHAE : 꿈에 나온다.」 「앱순이 : ......그게 뭐얔ㅋㅋㅋㅋㅋㅋ」 「병림픽금메달 : 이건 또 뭐하는 병신이지? 내 아성을 위협하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SALHAE :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다. 니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20대명퇴자 : 대체 무슨 소리냐? 영문을 모르겠다만.」 「SALHAE : 이 방송, 현실감이 너무 지나쳐. 가상인격들이 하나하나 전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진행자에게 동기화하고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SALHAE : 문제는 씨발 내가 그걸 바란다는 거야. 내가 막 한겨울이 되고 싶고,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싶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고.......」 「SALHAE : 그러다가 접속을 끊을 시간이 오면 기분이 존나 더럽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근데 그 다른 사람이 사실은 진짜 나야. 닭장에 갇힌 비정규직 잉여인생이라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SALHAE : 씨발씨발씨발.......」 「병림픽금메달 : 뭐야. 결국 평범한 게임중독 아냐? 븅신 ㅋㅋㅋㅋ」 「일침 : 어디서 이상한 소리 나는 거 같지 않냐? 난 들리는데. 열등감 터지는 소리.」 「질소포장 : 자존감 병신이 남들도 지 수준인줄 아네. 니가 그러니까 비정규직인거야. 현실을 바꿔보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이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패배주의자 새끼야. 하여간 나라에서 복지를 잘해주니까 다들 나태해져서는. 닭장이 싫으면 거기서 나오려고 노력을 해야지. ㅉㅉ」 「김미영팀장 : 무담보 신용대출 상담 받습니다. 0100-8282-****」 「SALHAE : 그래. 멋대로 말해라 씨발들아.」 「병림픽금메달 : 응 너 신고.」 「まつみん : 다들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그 와중에 대출상담은 또 뭔가요? 다른 사람의 고민을 비웃으면 안 돼요! 그게 어떤 일이라도,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일단 괜찮냐고 물어봐야죠!」 「대출금1억원 : 워워. 다들 진정해.」 「대출금1억원 : 난 쟤가 하는 말이 조금 이해가 간다.」 「대출금1억원 : 이 채널을 구독하기 전엔 한 번도 못 느꼈던 건데, 「감각동기화」라는 게 좀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SALHAE 쟤가 이상한 게 아냐.」 「분노의포도 : 동감. 저 녀석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찜찜한 기분이 든다니까.」 「무스타파 : 어쩐지 SALHAE가 요즘 섹스 타령을 안 하더라. ㅋㅋㅋ」 「groseillier noir : 흐음. 우리나라 언론들이 한국 사후보험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비판적인데, 지금까지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니까 괜히 까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희들을 보고 있으려니 비판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직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groseillier noir : 그래도 난 사후보험이 좋아. :)」 [groseillier noir님이 별 172.25개를 선물하셨습니다.] 「Владимир : 그렇다. 한국의 사후보험은 과학과 자본으로 만들어낸 인공낙원이다. 액티브 X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직접 경험해본 결과, 러시아에도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액티브 X는 꼭 제외하고 말이야.」 「BigBuffetBoy86 : 오, 루스키. 이 채널에 꾸준히 오네. 그동안 게임 실력은 많이 늘었나?」 「Владимир : 전혀.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조금 전에도 스커미쉬를 뛰었는데, 우리 편에 선수급 한국인이 한 명 있었는데도 대결에서 졌다. 어째서지?」 「BigBuffetBoy86 : 간단하네. 상대편에는 선수급 한국인이 두 명 있었나보지.」 「Владимир : ......!」 「믓시엘 : 깨달음 ㅋㅋㅋㅋㅋ 이 멍청한 대화는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まつみん : 러시아 아저씨 wwwwwwwwww」 「눈밭여우 : ;;;;」 「Владимир : 실수한 것 같다. 한국인을 섭외한 부하에게 징계를 내렸는데.......」 「BigBuffetBoy86 : 왜, 또 발트해 밑바닥에 쳐 박았어?」 「Владимир : 아니, 그녀는 러시아의 딸이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낭비할 리가 없지. 그냥 다소 어려운 임무에 투입했을 뿐. 어쩌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군.」 「BigBuffetBoy86 : 네 농담은 항상 재밌어. :D」 「Владимир : 농담 아닌데.」 : SALHAE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한 번만 부탁하자.』 『SALHAE님의 말 : 솔직히 니가 보기에도 이유라는 괜찮은 여자 같지 않냐? 착하고 순진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아이링은 필요 없고, 떡 안쳐도 되니까 좀 달달한 분위기나 만들어봐. 형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 위로 좀 받아보자.』 『AI 도움말 : 이 퀘스트의 목표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이 이유라와 연인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목표 달성 시점에서 1,000개의 별이 세계관 진행자에게 지급됩니다.』 : 한겨울(진행자)님이 SALHAE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SALHAE : 에휴. 역시 안 되나.」 「제시카정규직 : ㅋㅋㅋㅋㅋㅋ 살해 너 포기한 거 아니었냐?」 「SALHAE : 섹스가 아니니까 될 줄 알았지. 근데 얜 그냥 간섭하는 게 싫은 모양이네. 얌전히 구경이나 하라 이건가. 나한테도 조금만 나눠주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흠. 하이퍼 리얼리티라는 게 이런 거로군.」 「SALHAE : 그게 뭔데?」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SALHAE야. 시간 날 때 질 들뢰즈의 책을 찾아서 읽어봐라. 시뮬라크르에 관한 걸로. 네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SALHAE : 질 들뢰즈?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책 같은 거 읽을 시간이 어딨어. 방송 볼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요즘 사는 게 존나 팍팍하다. 그나마 이 방송 보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마당이구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눈밭여우 : .......」 [눈밭여우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호숫가의 밤, 포트 로버츠 (1) 오래된 태풍이 물러가고 새로운 태풍이 찾아왔다. 포트 로버츠는 날씨처럼 어두워졌다. 먹구름 같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근심했다. 불어나는 강물, 방치된 공사현장, 드물어진 항공수송과 줄어든 배급 등. 사람들은 하루빨리 궂은 시기가 끝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악천후가 이어질 전망이다. 국립태풍센터는 극심한 엘니뇨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이 와중에 사소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 물건이 생겼다. "어어? 이거 정말로 쓸 수 있는 거예요?" 유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겨울에게 물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군용 러기드 스마트 폰이에요. 아직 기능이 많이 잠겨있지만, 일단 전화기로는 쓸 수 있을 거예요. 각자의 로그인 암호를 잊지 마시고, 매뉴얼을 꼭 읽어보세요." 겨울에게서 스마트 폰을 받은 사람은 고작 네 명 뿐이었다. 부장 두 명, 전투조장 두 명.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겨울도 몇 개쯤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새 보급계에선 원래 겨울 한 사람에게만 내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사실 이 군용 스마트폰은 미군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보급되는 게 아니다. 지금은 단말기 제조사가 사라졌으므로 물량수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겨울의 영향력이 아니었다면 욕심 내지 못했을 물건이었다. 단말기를 살펴보던 장연철이 깜짝 놀랐다. "어쩐지 익숙한 디자인이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거 국산이군요!" "와, 정말이다! 케이스가 두꺼워서 못 알아봤어요! 세상에!" 유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민완기와 박진석도 흥미를 감추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능이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문자를 보내며 즐거워한다. 여러모로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일 것이다. 기존의 스마트폰은 애물단지가 된지 오래였으니. 흥분을 주체 못하던 유라가 겨울에게 묻는다. "저 대장님한테 전화해 봐도 돼요?" "해보세요." 소년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유라가 단축키를 꾹 눌렀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신호가 울린다. 얼굴을 마주보며 하는 통화였다.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이번엔 박수를 치며 웃는다. 뒤늦게 부끄러워졌는지, 유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래도 꿋꿋하다. 연결되는 것이나 확인하고 끊을 줄 알았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이다. 어째서? '일부러 웃음거리가 되려는 건가.' 그걸로 잠시나마 사람들의 근심을 쫓겠다면야. 겨울이 받는 시늉을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는 이유라라고 하는데요! 거기 한겨울 대장님 계신가요?" "네, 접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주변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유라가 목청을 키웠다.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요!" "오늘 드린 건 보급품일 뿐이니까, 저한테 고마워하실 게 아닌데요." "그래도요!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모두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다른 분들께도 인사 전해주세요." 이것이 기념비적인 첫 통화였다. 한바탕 희극을 연출한 뒤에, 겨울이 새로 당부했다. "박 조장님과 이 조장님의 단말기는 부장님들 것보다 기능이 다양한 편이에요. 대부분 전투상황에 쓸모 있는 것들이죠. 최대한 빨리 익숙해지도록 하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진석이 반문했다. "스마트폰이 전투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겨울은 매뉴얼을 들어보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매뉴얼을 읽어보시는 편이 가장 확실해요. 그래도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우선 서로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전술지도가 있고, 거리와 바람에 따른 탄도계산도 가능하고, 좌표를 찍어서 화력지원을 받을 수도 있어요." "허, 대단하군요." 이 모든 기능이 단 하나의 앱, 「안드로이드 전술 공격 킷」으로 구현된다. 플러그인을 설치해서 다른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전투조장들의 것과 겨울의 것은 기능이 또 다르다. 겨울에게는 훨씬 더 광범위한 권한이 설정되어있었다. 기지 내 폐쇄회로에 대한 접근, 노이즈 메이커 제어, 군 인트라넷 일부에 대한 접속 등. 마지막 것이 조금 의외였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미 국방부의 민사심리전 장교들은 겨울의 활동에 대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제공받고 싶어 했다. 그 자료를 다듬어서 선전용 자료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임무라면 임무지만....... 컴뱃 카메라 영상으로 충분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단말기가 부르르 떨었다. 이번엔 유라가 아니었다. 지휘통제실에서 온 전화였다. 겨울이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중위 한겨울입니다." [오. 빨리 받는군. 무전을 칠까 했는데.] 캡스턴 중령이었다. "대대장님? 무슨 일이시죠?" [지금 즉시 브리핑 룸으로 와주게. 자네가 필요한 작전이 하나 있네.] "작전이요?" 겨울은 바깥 하늘을 엿보았다. 악천후로 모든 외부활동이 통제되는 마당에, 소년장교가 필요한 작전이 과연 무엇일까. 항공 이동이 여의치 않으니 도보, 혹은 차량 이동이 가능한 범위 내의 임무일 것이다. 중령이 빠르게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아무래도 바깥으로 새면 불안이 번질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음. 잠시 후에 보세.] 전화가 툭 끊어졌다. 중령의 음성에서는 초조감이 느껴졌다. 대체 뭘까. 겨울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텐트를 빠져나왔다. 우의 자락을 여미며, 빗속을 빠르게 걷는다. # 83 [83화] #호숫가의 밤, 포트 로버츠 (2) 브리핑 룸에는 연대전투단의 주요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소년장교를 반갑게 맞이했다. 겨울은 캡스턴 중령의 옆자리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엔 1대대장 파렐 라모스가 있었다. 그는 겨울에게 미소와 눈인사를 보낸다. 캠프 샌 루이스 오비스포 함락 당시의 불안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날 밤의 말 없는 위로를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둘러앉은 면면은 최소계급이 소령이다. 위관급은 겨울이 유일했다. 이 자리의 무게를 알 만 하다. "문제는 여전히 태풍입니다." 연대 작전참모가 운을 띄웠다. 회의실 전면 스크린에는 세 장의 항공사진이 떠있었다. 물이 그득하게 들어찬 저수지들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인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세 개의 댐이 있습니다." 작전참모는 첫 번째 사진을 확대시킨 뒤, 레이저 포인터로 사진 한 쪽에 광점을 찍었다. "최우선 목표는 나시미엔토 댐입니다. 기지 서쪽 1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시는 것처럼 위험할 정도로 수위가 높아진 상태입니다. 위험수위에 도달할 경우 자연스럽게 배수가 이루어지는 구조지만, 현재는 배수량보다 유입량이 더 많습니다. 공병대의 계산에 따르면 늦어도 내일 오후부터 붕괴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연대장이 물었다. "붕괴에 걸리는 시간은?" "일단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이겠죠." 작전참모가 즉답했다. "나시미엔토 댐이 사력(沙礫)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에 물 붓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댐 붕괴 시 피해는 파멸적일 것입니다. 급류가 10분 이내에 기지까지 도달하며, 예상되는 최대유속은 초당 약 20미터, 수위는 6미터 이상입니다. 그러니 신속하게 확보하여 모든 수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보다 불만에 가까웠다. 한 장교가 손을 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서 점령 자체는 문제가 없겠는데, 경고가 너무 늦지 않습니까? 공병대는 그동안 뭘 했답니까?" 미국에서 댐 건설과 운영은 공병대의 몫이다. 그래서 주요 댐과 보 근처마다 공병대 사무실이 존재한다. 시설방기로 인해 문제가 생길 경우 1차적인 책임은 공병대가 져야 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공병대에게만 물 순 없었다. 시설 관리와 별개로, 저수지와 강의 수위를 감시하는 건 미 연방 매축국(埋築局) 및 캘리포니아 수자원 관리국과의 협력업무였으니까. 작전참모가 경고했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무의미한 불만 제기는 삼가도록." "......." 질문했던 당사자가 머뭇거린다. 그렇게까지 다급한 상황인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댐이 당장 내일 무너진다니까 급해 보이지만, 도보로 이동해도 4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그러나 겨울은 이해가 간다. 최악의 경우 수문을 완전 개방해도 수위가 상승할 수 있었다. 악천후가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서두르는 편이 안전하다. 브리핑이 이어졌다. "다음 목표인 샌 안토니오 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나시미엔토 댐의 정북 4킬로미터 지점이며, 거리가 가까워 점령 자체는 용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양쪽 목표를 확보하기 위해 공병대 1개 중대와 1대대를 동시에 투입할 계획을 수립해두었습니다. 나눠드린 문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겨울은 서류의 흑백지도를 살펴보았다. 두 개의 댐은 거의 붙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도의 한쪽 가장자리에서 절반으로 잘린 포트 로버츠를 확인할 수 있다. 축척이 대단히 크다. 방안(方眼)의 한 변이 1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거리가 그만큼 가깝다는 증거였다. 연대장이 의문을 제기했다. "1대대를 통째로? 고작 댐 두 개 점령하는데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한가?" 작전참모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순히 시설을 장악할 뿐이라면 1개 소대씩만 보내도 충분합니다. 수문만 개방하고 돌아오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저는 변종들의 활동이 우려됩니다. 의도적으로 기지에 숨어들고, 항공작전을 방해하려고 불을 지를 정도의 지능을 가진 것들입니다. 최근엔 특수변종 말고도 일부 변종들이 간단한 도구를 쓴다는 보고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이, 기상악화로 인해 항공정찰과 폭격이 뜸해진 이때를 조용히 보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연대장이 당혹스럽게 반문했다. "설마 자네는 변종들이 댐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모든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성탄전야의 습격을 떠올려 보십시오. 놈들이 EMP를 쓸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었습니까?" 그러더니 느닷없이 소년장교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한 중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겨울은 잠시 지체했다. 그동안 좌중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작전참모가 부연한다. "기탄없는 의견을 말해주게. 자네를 부른 이유 중 하나니까." "......확실히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전후관계가 반대일지도 모르지만요." "그게 무슨 뜻이지?" "제가 수송호위로 블랙 마운틴을 여러 번 다녀오면서 확인한 사실인데, 변종 가운데 지능 있는 것들이 정찰병 노릇을 합니다. 당연히 지금 기지 인근에도 있겠죠. 말씀하신 것처럼 항공정찰이 뜸해졌으니 평소보다 더 많을 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댐을 확보하러 가는 병력을 보고, 그제야 댐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좌중의 장교들에게는 작전참모의 것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경고였다. 겨울은 그럼블이 댐을 부수는 데 얼마나 필요할지 생각해보았다. 험비를 고철로 만들고, 가택을 단숨에 철거하는 물리력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반나절?' 붕괴의 시작은 작은 균열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수압이 해결할 것이다. 좌중이 납득하자, 작전참모가 화면을 바꿨다. 세 번째의 댐이다. 앞서의 두 개에 비해 저수지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평가일 따름이었다. "마지막 목표인 살리나스 댐입니다. 기지로부터 직선거리로 56킬로미터, 실제 이동 거리로는 약 70킬로미터 떨어져있으며, 그만큼 위험도가 낮습니다. 붕괴할 경우에도 포트 로버츠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근에 진행된 배수로 공사 덕분이라고, 작전참모가 설명했다. "다만 좀 더 하류에 있는 샌 아르도 유전은 상황이 다릅니다. 강변에 붙어있으니 반드시 침수되겠지요. 정제시설이 손상되면 복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연대장이 신음했다. "그건 곤란한데. 위험도에 상관없이 확보하는 게 낫겠어." "저도 동의합니다만....... 거리가 문제입니다. 앞서의 두 목표는 기지와 무척 가깝기 때문에 한 개 대대를 보내더라도 부담이 없습니다. 유선망을 깔 수도 있고, 기지에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금방 돌아와 지원하거나, 그 역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이곳은 아닙니다. 소규모 병력을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가 멀어 통신조차 불가능합니다. 위험한 임무가 되겠지요." 작전참모는 대놓고 겨울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캡스턴 중령은 여기까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이 필요한 임무가 있다고 했었으니. 포트 로버츠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길 사람을 고를 때 소년장교를 빼놓을 순 없다. 애초에 겨울을 부르라고 시킨 게 작전참모일 것이었다. 연대장이 겨울에게 물었다. "한 중위 의견은 어떤가? 참모는 귀관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회의에 참석시킨 모양인데."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니, 난 의견을 듣고 싶은 거야. 자네가 싫다면 임무는 다른 사람에게 주겠네. 귀관은 어디서든 필요한 사람이니 말이야. 이런 시기에 귀관을 기지 밖으로 내보내기도 달갑지 않아." 연대장의 말은 뜻밖이었다. 겨울은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그런가. 병력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나?" "1개 소대면 됩니다. 그 이하라도 괜찮고요." 당혹스러운 반응이 번진다. "무모하군. 그 정도로 댐 전체를 방어하긴 불가능할 텐데." "방어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째서?" "지도를 보면 기지와 댐 사이에 일곱 개의 도시가 있습니다. 그만큼 먼 거리죠. 가는 도중에 구울 몇 마리에게 노출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차량의 속도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합니다. 즉 저희가 목적지에 도달한 시점에서 변종들에게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포트 로버츠와 댐 사이의 상관관계를 깨달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즉 변종들의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목표는 댐이 아니라 자네와 소대 병력일거란 뜻인가?" "네. 일정 거리마다 트릭스터에게 추적당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은 먼 거리에서도 서로와 교신하잖습니까. 하지만 트릭스터가 그렇게까지 흔하진 않겠죠. 그리고 지도를 보면 살리나스 댐을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엔 도시도, 마을도 없습니다. 그만큼 변종의 수도 적지 않을까요? 들키지 않고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겨울은 아예 일정 거리 밖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노이즈메이커 사용은 금물이다. 어차피 비와 바람이 많은 소리를 지워주겠지만. 소년장교를 지원할 병력은 여느 때처럼 3대대에서 차출하기로 했다. 겨울은 동맹의 전투조원을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욕심이었다. 지휘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난민 지원병을 쓰기엔 지나치게 중요한 작전이었으므로. 연대장은 캡스턴 중령과 군수과 참모에게 겨울이 요청하는 모든 자원을 내주도록 지시했다. 소년장교의 자신감이 흡족한 기색이었다. 역할이 정해지자 브리핑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퇴실 전, 라모스 중령이 악수를 청했다. "항상 용감하군. 무운을 비네, 중위." "중령님도요. 1대대는 아직 인원보충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텐데, 힘드시겠어요." "자네만큼은 아니겠지. 기록을 살펴봤는데, 주요작전엔 빠짐없이 들어갔더군. 자네가 내 부하였다면 강제로 쉬게 했을 거야." "염려 감사합니다." 중령은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고, 옆에서 기다리는 캡스턴 중령에게 짧은 미소를 보인 뒤 브리핑 룸을 나갔다. 캡스턴 중령이 묻는다. "혹시 특별히 원하는 소대가 있나?" "글쎄요. 호흡을 많이 맞춰본 쪽이 낫겠지만, 사실 찰리 중대원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지원자 위주로 모아주세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1개 소대보다 적어도 괜찮거든요. 위험한 일에 억지로 데려가고 싶진 않네요." 특히 제프리와 그의 소대는 더더욱 그렇다. 겨울의 지목을 피하지는 않겠으나, 너무 자주 끌고 다녀도 미안한 일이었다. 캡스턴 중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아무래도 걱정스러워. 무전기도 쓰지 못할 것 아닌가.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질 경우 대응능력이 턱없이 부족할 거야. 최소한 백업을 담당할 예비 병력은 있어야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자네가 1개 중대를 요청해도 쉽게 승인이 떨어질 걸세." 무전기를 쓰지 못한다는 건 트릭스터 때문이다. 전파를 감지하고 쫓아올 테니까. 게다가 이놈은 혼자 다니지도 않는다. 성탄전야에 홀로 출몰했던 건 스스로 붙잡히기 위해서였고. 겨울이 순한 미소를 만들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숫자는 적은 편이 좋잖아요. 댐 동쪽은 대부분 숲이던데......같은 조건이라면 변종이 절 발견하는 것보다는 제가 변종을 발견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혹시 들키더라도 쉽게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숫자가 많으면 오히려 제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요." "......일단 지원자를 수배해보도록 하지. 30분 내로 연병장에 집합시키겠네.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뀐다면 반드시 말하게나." 중령을 일별한 후, 겨울은 바로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지시를 받은 보급계원들이 먼저 와서 대기 중이었다. 겨울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장비, 도구, 식량, 탄약을 차량에 적재했다. 특히 식량과 연료를 넉넉하게 실었는데, 댐에 고립될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 정도의 폭우인걸. 도로가 언제 유실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소년은 손을 내밀어 빗물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장갑 위로 두두두둑 부딪히는 느낌. 무겁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무수한 인기척이 몰려왔다. 젖은 땅을 구르는 발소리들. 그것은 한 개 중대의 구보였다. 선두에 설리번 중위가 보인다. 3소대장이었던 그는 캡스턴 중령의 영전 이후 직책진급으로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는 겨울이 보는 앞에 비를 맞으며 정렬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다 나오셨어요?" 설리번 중위가 대꾸했다. "한 중위 자네가 지원자를 찾는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중대 전체가 지원하더군. 알아서 뽑아가." 이제 보니 모두 웃음을 참는 듯 한 얼굴들이다. 겨울은 조금 난감해졌다. # 84 [84화] #호숫가의 밤 (3) 살리나스 댐으로 향하는 병력은 겨울 외 총 35명으로 결정됐다. 찰리 중대 1소대 스물일곱 명, 의무병 한 명, 공병 세 명, 전차병이 네 명이다. 차량구성으로는 아홉 대의 험비와 한 대의 전차였다. 인수에 비해 차량이 많은 건 겨울에 대한 요새 사령부의 배려다. 병력이 적으면 화력이라도 강해야 한다고. 전차도 같은 맥락이었다. 전차 같은 경우 겨울이 끈질기게 사양했으나 강제에 가깝게 붙여줬다. 연대전투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 자네를 잃을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싶군." 소년이 보기에, 그것은 개인적인 호감보다는 필요에 의한 계산에 가까웠다. 지금 이 세계관에서, 겨울이 죽으면 심란할 사람이 적어도 1억 명은 될 것이다. 이제 미국인들 가운데 겨울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겨울은 선두 험비의 사수좌에 앉아있었다. 경계를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자니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기록적인 폭우와 물안개가 시계(視界)를 극단적으로 축소시켰다. 맨눈으로는 채 100미터 밖을 내다보기 어렵다. 「개인화기숙련」으로 안력 보정을, 「전투감각」과 「생존감각」으로 직감 보정을 받는 겨울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빈번하게 끊어졌다. 폭격의 흔적은 웅덩이로 변했고, 지반이 물러져 붕괴한 곳도 많았다. 장소에 따라 흙빛 급류가 흐르기도 했다. 급류를 발견한 겨울이 손을 들었다. 정지신호였다. 후속 차량의 사수가 신호를 뒤로 전달했다. 대열이 순서대로 멈춰 섰다. 차간간격이 좁은 편이었으나, 애초에 속도를 그리 내지 못 하고 있었으므로 추돌 우려는 없었다. 차량마다 한 사람씩 나와 선두로 다가왔다. 무선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붕에서 옆으로 뛰어내린 겨울이 급류 쪽을 가리켜보였다. "저거 좀 위험해보이지 않아요?" 도로가 20미터 가량 무너진 상태였고, 그 사이로 물길이 지나갔다. 몇 갈래의 흐름이 합쳐지는 중이다. 서로 부딪히는 흐름들 때문에, 수면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귓가에 비바람이 가득한데도 물 흐르는 소리가 선명할 정도다. 소대장 제프리가 끄덕끄덕 공감했다. "그러게요. 깊이는 문제가 아닌데, 차체가 쓸려 갈까봐 걱정스럽습니다." 제프리의 말처럼 깊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살에도 아직 버티고 있는 길가의 나무를 보면, 깊이를 대충 어림할 수 있다. 대략 1미터 정도. 각 차량은 굴뚝 같은 스노클을 달고 있어서, 물이 지붕까지 차오르더라도 건너갈 능력을 갖췄다. 전차는 스노클이 없었으나, 1.2미터까지는 별도의 장비 없이 극복 가능했다. 하지만 물살은 별개다. 겨울은 다가가 펼친 손을 담가보았다. 밀리는 힘을 가늠해 보려는 것. '애매한데.' 탑승인원과 장비, 탄약, 기타 적재물의 무게를 합치면, 험비의 무게는 3톤에 조금 못 미친다. 물살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는 전차를 앞세우는 게 좋겠다. 미군 전차(M1A2)의 무게는 60톤이 넘는다. 묵직하게 버텨줄 것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전차를 앞세우고, 각 차량을 윈치로 연결해서 건너갈까요?" "막 그렇게 제안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제프리가 히죽 웃는다. 그가 전처럼 편하게 말할 순 없었다. 이젠 소년장교가 더 상급자다. 그래도 격식을 갖춰 말하는 것에 비해 태도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겨울에게도 좋았다. 만날 때마다 장군 대하듯이 얼어붙는 일부 병사들보다 훨씬 더 낫다. 터빈 구동음과 함께 전면으로 나서는 전차를 보고, 겨울이 생각했다. '그래도 끌고 온 보람이 있네.' 전차 후면에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놓은 고리가 달려있었다. 험비도 마찬가지. 겨울은 험비의 윈치를 길게 뽑아 전차 뒤에 걸었다. 다시 사수좌에 올라가서 기다리기를 잠시. 마지막 차량까지 결속이 완료되었다는 신호가 몇 사람을 거쳐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겨울이 전차장에게 신호했다. 출발하라고. 전차장이 전차 내선으로 몇 마디 하는 게 보였다. 대열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량 열 한 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속도 차이가 나면 곤란하다. 육중한 전차가 물속으로 비스듬히 들어갔다. 물살에 측면을 내주기보다는, 대각선으로 거슬러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어 겨울이 탑승한 차량이 입수한다. 거칠고 위험한 진동이 차체를 휘감았다. 옆으로 조금씩 밀리다가, 덜컥 걸리는 느낌이 든다. 앞뒤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겨울을 향해 뛰어오르는,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 닦아낸 자리에 흙 부스러기가 남는다. 하지만 오래 남지는 않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발 때문이었다. '앞이 좀 보이나?' 겨울은 운전병의 시야가 궁금해졌다. 포탑 아래로 슬쩍 보니, 갈라지는 탁류가 차창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병사는 엉덩이가 자리에 붙어있을 틈이 없다. 반쯤 일어난 자세로, 어떻게든 전방을 보려고 기웃거리기 열심이다. 겨울이 큰 소리로 지시했다. "굳이 눈으로 보고 운전할 필요 없어요! 방향이랑 속도만 유지해요! 혹시 방향이 달라지면 내가 알려줄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고서도, 운전병은 줄곧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차량에 탑승한 채로 강을 건너는 훈련이야 여러 번 해봤겠으나, 실전은 언제나 훈련과 다른 법이었다. 그래도 건너기는 금방이었다. 후속차량들도 탁류를 속속 벗어난다. 다만 후미로 갈수록 많이 불안했다. 뒤에서 잡아주는 힘이 적거나 없는 탓이었다. 반쯤 건넜을 때부터 죽죽 밀려난다. 이를 감안하여 뭍으로 올라온 차량들이 지속적으로 끌어주었다. 마침내 최후의 차량이 뭍으로 기어오른다. 윈치를 감으며 안간힘을 쓰긴 했으나, 그래도 별 탈 없이 도하에 성공했다. 각 차량의 사수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소음이 신경 쓰였으나, 겨울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목적지가 아직 멀었다. 소음을 듣고 쫓아오는 놈들이 있어도, 보이는 건 궤도 자국뿐일 것이다. 연결을 풀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차량들. 진창이 곳곳에 널려있었으나 속도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공병의 지혜였다. 출발하기 전, 공병 한 사람이 제안했다. 험비에 설상장비(雪上裝備)를 달자고. 명목은 설상장비지만 진창을 지나가기에도 좋을 것이라고. 겨울은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험비들은 바퀴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삼각형의 무한궤도(Mattracks)를 달았다. 땅과 닿는 면적이 넓어져서, 무게가 분산되어, 진흙 속으로 파묻힐 일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변종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있어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평균 속도가 시속 20킬로미터쯤 되려나.......'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겨울은 조명도 없이 지도를 펼쳐보았다. 길이 이리저리 구부러지는 와중에 행로를 잡는 건 지휘관인 겨울의 역할이었다. 「독도법」에 대한 투자가 불가피했다. 겨울 입장에선 계륵 같은 기술이었다. 있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데, 없다고 크게 아쉽지는 않다. '뭐, 길을 잘못 드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동안 쌓아놓은 경험 자원이 많았기에 이 정도 낭비는 감당할 만 했다. 먼 곳의 지형지물을 확인하기 어렵고, 길이 워낙 자주 구부러졌으므로 당장은 이보다 더 필요한 기술이 없었다. 차량 대열은 곧 익숙한 도로에 진입했다. 블랙 마운틴의 제재소로 가는 경로였다. 전면에 버려진 마을이 보인다. 마을의 이름은 크레스턴. 가로세로 세 블록에 불과한 작은 거주지였다. 겨울은 강행돌파를 결심했다. 수신호를 전하자 후속 차량들이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우회할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무전기는 조용했다. 무전침묵을 지키라는 지시가 잘 지켜지고 있었다. 대신 선탑좌석의 간부급 병사가 묻는다. "정말로 마을을 통과해서 지나갑니까? 적이 매복하고 있으면 어떡하죠?" 겨울이 답했다. "변종이 있을 순 있겠지만, 매복은 아닐 거예요. 우리가 올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몇 놈쯤 튀어나올 순 있겠지. 겨울이 생각했다. 험비와 전차의 주행소음은 비바람에 씻기고 천둥에 파묻혔다. 시계가 축소된 건 변종들도 매한가지였고. 그래서 겨울의 예상대로였다. 차량 대열을 발견한 최초의 변종은, 선도 차량이 마을에 진입한 뒤에야 비로소 이쪽을 발견했다. 마을 입구 어귀, 첫 번째 집으로부터 튀어나오며 입을 쩍 벌린다. "캬- [툭!]" 다른 변종을 부르기 위한 울음, 길게 이어져야 할 괴성이 낮고 둔탁한 총성 한 번에 끊어진다. 탄자는 이빨을 깨고 들어갔다. 휘청거리던 놈이 쓰러지기 전에, 소년장교의 선도 차량이 그 곁을 스쳐지나갔다. "속도를 높여요." 운전병에게 지시하고, 겨울이 수신호를 보냈다. 대열이 가속한다. 높아지는 소음. 마을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변종들의 수는 의미 없는 수준이었다. 겨울은 되는 대로 몇 놈을 쏴죽이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속 차량의 사수들이 각자의 기량으로 잔적을 처리한다. 소년처럼 깔끔하진 못하다. 몇 번의 삼점사, 그걸로 부족하면 탄창을 비우는 연사였다. 끝까지 죽지 않고 쫓아오던 변종 몇몇이 얕은 탁류에 휩쓸렸다. 차량은 무게로 짓누르며 지나갈 수 있어도, 무게가 인간보다 무거울 것 없는 변종들은 사정이 달랐다. 고작 몇 센티 깊이의 물살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변종들은,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챈 것처럼 벌러덩 넘어지더니, 허우적거리며 쓸려 내려갔다. 웃음에 굶주린 병사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블랙 마운틴의 초입에서 완연한 밤이 찾아왔다. 별빛도 없는 하늘, 새까만 어둠 속에서 지나가야 하는 8킬로미터의 산길. 겨울이 생각하기엔 가장 긴장해야할 구간이다. 산악지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캘리포니아 229번 도로는 폭이 좁은 단선이었다. 차체가 넓은 험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전차로선 조심스럽게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조명을 쓰지 않는 조건이다. 험비 운전병들은 야시경의 좁은 시야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전차엔 기본적으로 적외선 감시 장비가 붙어있었으나, 딱히 낫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다른 적이 없어도 환경 자체가 적이었다. 좌우로 새까만 숲이 깔려있는 건 괜찮지만, 좌우로 절벽과 비탈이 나타났을 때부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장 여유로울 겨울조차도 안심하지 못하는데, 운전병들은 오죽하겠는가.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흙탕물로 인해 도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흙으로 메워져서 더 이상 평평하지 않았고, 원래 푹 패여 있던 자리는 물이 고여 평평하게 보였다. 잠깐의 실수로 엉뚱한 곳에 처박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속도가 걷는 것보다 느려졌다. 속도계 바늘이 눈금 두셋을 제대로 넘지 못한다. 운전병이 수시로 정지해서 길 있는 곳을 가늠하고, 다시 나아가는 식이었다. 낙석이 쏟아질 가능성도 경계해야 했다. 길을 잘못 골랐나? 안되겠다고 생각한 겨울이 대열 전체를 정지시켰다. 사람이 나올 필요는 없다고 신호를 보내고, 포탑에서 내려와서는, 운전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차에서 내려 인도할 게요. 그대로 따라와요." 겨울의 지시를 받은 운전병이 기겁을 했다. "네? 너무 위험합니다! 아까 변종들 못 보셨습니까? 여기서 휩쓸리면 시체도 못 찾습니다! 웅덩이를 잘못 밟고 빠질 수도 있고요!" "그건 걱정 말아요. 탄띠에 윈치를 달고 갈 테니. 위험하다 싶으면 당겨요." 험비에 달리는 윈치의 모터는 6천 파운드(2.7톤)의 무게를 감당한다. 겨울 하나쯤 당겨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운전병과 또 한 명의 병사는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젠장, 그럼 낙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좀 더 열심히 할 테니 안에 계십쇼." "이 놈 말 들으시죠, 중위님. 지금 속도로도 임무 완수에는 지장 없습니다. 설마 고작 한두 시간 차이로 댐이 무너지진 않겠죠. 아니, 무너져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댐이 무너지는 것과 중위님을 잃는 걸 비교하면 뒤쪽이 훨씬 더 큰 손해입니다." 아무래도 설득은 어렵겠다. 시간도 아껴야 하고.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지휘관으로서 내린 결정입니다. 반론은 받지 않겠어요." 명령은 절대적이다. 더 이상 반발이 이어지지 않는다. 다만 간부급 병사가 굉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온전히 소년장교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 마음을 좋게 여기면서도, 겨울은 다음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찰박. 챠르르르. 얕은 물살이 구두굽에 갈라진다. 복숭아뼈 아래로 절반 정도가 물에 잠긴다. 한쪽으로 쏠리는 부드러운 저항감이 느껴졌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겨울이 윈치를 당겼다. 여유가 넉넉하도록 쭉쭉 끌어내서, 끝의 갈고리를 자신의 탄띠에 걸었다. 팍, 팍. 팽팽하게 당겨서 제대로 결속되었는지 확인한다. 이 행동, 겨울 자신을 위한 건 아니었다. 험비의 두 병사가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야시경에 가려져서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있을 것 같다. 소년이 입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운전병은 핸들에 머리를 박았고, 겨울 대신 사수좌에 앉은 병사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응시한다. 어깨가 늘어져있다. 이게 마냥 무모하게 나서는 행동은 아니었다. 천재의 영역에 도달한 「생존감각」에 10등급의 「위기감지」면, 이런 곳에서 우연한 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다. '그렇다고 0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다른 세계의 관객들에게도 이 정도 긴장감이 좋을 것이다. 겨울이 물을 밟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 85 [85화] #호숫가의 밤 (4) 밤이 깊어지면서 온도가 떨어졌다. 굵은 비에 눈발이 섞이기 시작한다. 닿는 즉시 녹아버리는, 날카롭고 강퍅한 진눈깨비였다. 이것도 눈이라고 자꾸만 렌즈에 들러붙는다. 겨울은 야간투시경을 벗어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사방이 검은 산맥이다. 소년의 안력이 보통은 아니더라도, 맨눈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숨결은 하얗게 물들었다. 소년의 숨이 가쁜 것은 장시간 이어지는 달리기 탓이다. 가벼운 구보 정도의 속도라고 해도, 벌써 반시간을 달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산악도로의 난구간이 길지 않아, 반시간이 다시 지나기 전에 끝을 볼 것 같다. 폭우는 인간 아닌 것들에게도 재난이었다. 길가의 웅덩이에 떠서 물결에 들썩거리는 시체는, 사실 사람이 아니었다. 살이 하얗게 불어 오른 구울이다. 겨울은 잠시 다가가 살펴보기로 결심한다. 정보를 수집할 필요도 있고, 숨 돌릴 겨를도 있어야 했다. 차량에 정지신호를 보내고, 조심스럽게 고인 물로 들어간다. 철벅, 철벅. 도로 바깥이라 발아래가 미끌거렸다. 진흙이었다. 수위가 허리까지 올라왔다. 유속은 거의 없는 셈이되, 푹 패인 땅에서 두 개의 물줄기가 부딪혀 약간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래봐야 사람을 넘어뜨리기는 모자란 흡입력이다. 겨울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무기를 교체했다. 근거리 전투를 대비한다면 아무래도 권총이 유리했다. 구울 머리통에 총구를 들이대고, 남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툭툭 건드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정말로 죽은 건가? 겨울이 이번엔 권총 그립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콱! 뒤통수가 찢어질 정도의 힘이다. 떠있던 머리가 수면 밑으로 푹 꺼졌다가, 부력에 밀려 다시 튀어나왔다. 푸드드득! 회색 괴물이 발작 같은 경련을 일으킨다. 팔을 마구 휘둘러 수면을 때려댔다. 겨울이 몇 걸음 물러서며, 한 손을 들어 병사들의 사격을 막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당황한 사람은 얕은 물에서도 빠져 죽는다. 대부분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게 수영은 훈련으로 얻는 능력이었다. 호흡법을 모르면 물 위에 뜨지도 못 한다. 인간을 숙주로 삼은 다른 것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발을 헛디디고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던 것이겠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신체 기능을 정지시켰을 테고.' 감염변종은 스스로를 가사상태로 전환할 수 있다. 근육은 굳어지고, 호흡도 거의 없어진다. 그러다가 촉각이나 시각, 청각, 후각 등의 외부 자극을 받으면, 조금 전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며 깨어나는 것. 이번 세계관에서는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에 갇힌 변종들에게서 처음 목격했었다. 본래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이것이 산소를 아끼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겨울이 아는 한 그게 영원할 순 없다. 산소 소모가 줄어드는 것이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 구울도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결국은 죽었을 것이다. 허우적거리다가 겨울을 발견한 구울이 사납게 몸부림쳤다. 이빨을 따다다닥 부딪히면서, 갈수록 더 많은 물을 먹고 있다. 그 한심한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 겨울은, 경험에 의거하여, 변종들이 당분간은 헤엄을 치지 못 할 거라고 재차 확신했다. 겨울이 구울의 머리에 대고 총탄 두 발을 박았다. 총성은 천둥에 파묻힌다. 구멍 뚫린 두상에서 묽은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며, 잿빛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뭍으로 나오는 소년장교를 또 한 명의 장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프리가 묻는다. "방금 그건 뭐였습니까? 죽어있던 놈이 되살아나는 것 같던데요." "제프리, 아타스카데로에서 병실에 있던 놈들 생각나요?" "아아....... 그거랑 이게 같은 거였군요. 허, 참. 좋은 거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물에 빠진 시체도 다시 봐야겠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개죽음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맞아요. 같은 경고를 다른 기지에 전파해야겠죠. 특히 샌디에이고 노스 아일랜드에." 겨울의 실험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던 제프리는, 마지막 말에 표정을 굳힌다. 사람이 경망스러워보여도, 제프리 또한 제대로 훈련 받은 미국의 장교였다. "거기까지 바로 생각하시는 게 참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중위님." 북미 서해안의 마지막 군사거점인 샌디에이고 노스 아일랜드는, 만 안쪽의 바다를 자연장벽으로 삼아 방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동안 변종이 물을 건너진 못 한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탓이었다. 선상으로 피난한 미국 시민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죽다 만 것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면, 그리고 누군가 멋모르고 그것을 건드린다면, 즉시 아비규환이 펼쳐질 것이었다. 해상난민들은 서로의 뱃전을 맞대고 생활하는 중이다. 감염이 시작될 경우, 역병의 전파속도는 육지와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제프리는 자신이 깨달은 가능성에 무척 심란한 기색이다. 겨울이 그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 말아요. 변종이 물을 무서워하는 건 이미 확인된 사실인걸요. 놈들이 이걸 계획적으로 이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거예요." "비가 이렇게 쏟아지고 있잖습니까? 얼빠진 변종 새끼들이 몇 놈쯤 물에 빠져 떠다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벌써 사고가 터졌을까봐 두렵습니다만......."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어요. 다른 누군가가 이미 경고했을지도 모르고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변종을 경계하는 세계관이다. 소년이 깨달은 것을 달리 누가 먼저 깨달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국방부엔 그거 하라고 월급 받는 사람들도 있고. 겨울이 제프리를 떠밀었다. "자, 시간낭비는 여기까지. 출발하죠." 시간소요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재차 반시간이 흐르기 전에, 겨울은 산악도로가 왕복 2차선 고속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겨울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할 필요가 없었다. 비를 맞으며 거의 한 시간을 달린 셈이다. 겨울은 허리에 달아둔 윈치 고리를 풀었다. 차량으로 돌아오는 소년장교를 보고, 두 명의 병사가 복잡한 한숨을 내쉰다. 포탑을 붙잡고 있던 상병이 겨울에게 휴식을 권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 "쉬긴요. 작전 중이고, 내가 지휘관인데요. 사수좌에서 내려와요. 어차피 거기 앉아있으나 안에 있으나 큰 차이 없잖아요?" "중위님. 거짓말로도 험비가 호텔 같다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비 맞으면서 한 시간 내내 달린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따뜻하게 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에서 간단히 끼니라도 때우시죠. 중위님 달리시는 동안 다른 차량에서는 순번대로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녁식사가 아직이었다. 차석 지휘관으로서 제프리가 알아서 식사를 지시한 모양이다. 사실 지시가 없더라도 병사들이 알아서 챙겨먹었겠지만. 겨울은 잠깐 망설이다가 응낙했다. 병사의 능력이 겨울보다는 못 하겠으나, 차내에 있어도 각종 감각 보정이 그렇게까지 감소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잠깐 부탁하죠." 상병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부탁하셔도 됩니다. 제발 좀 거기 오래 앉아계십시오." 운전병이 거들었다. "병사는 앉아있고 장교가 뛰는 걸 보게 될 줄이야. 4년을 복무하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이야, 세상이 망해간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더군요." 겨울이 조용한 미소를 만들었다. 병사가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기에. 차량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달렸다. 고작 왕복 2차선이지만, 명색이 고속도로인 만큼 잘 만들어진 것 같았다. 서해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진 관리도 잘 받았으리라. 그래서 차내 취식도 용이한 편이었다. 적어도 물을 옮겨 담다가 쏟을 일은 없었다.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 로비에서 먹었던 전투식량(FSR)은 많이 간소화된 것이었다. 지금 겨울이 뜯는 건 정식 전투식량(MRE : Meal, Ready to Eat)이다. 무릎 위에서 포장을 해체하는 겨울을 곁눈질하더니, 운전병이 또 한 마디 한다. "맛없겠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노력할게요." 겨울이 뜸을 들인 것은 병사에게 공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투식량이 맛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년이 꼭 한 번씩 하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음식인데, 직장 대폭발(MRE : Massive Rectal Explosion)이란 별명은 너무하지 않나?' 어쨌든 생전에 많이 먹었던 에너지 겔보다는 낫다. 겨울은 그 인공적인 향과 화학적인 맛을 정말로 싫어했다. 그나마 누나인 한가을이 애를 쓴 덕분에, 이따금씩 진짜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가을의 남다른 노력이 아니었다면, 겨울은 먹는 즐거움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남들 다 쓴다는 가상현실 계정 하나 없던 형편의 집안이었으니까. '또 모르지. 내가 몰랐을 뿐, 부모님 계정은 있었을지도.' 상념에 빠져있기도 잠시. 겨울은 자신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느꼈다. 무의미한 회상이었고, 무의미한 회한이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돌을 더 무겁게 만들 필요가 없다. 식사에 집중하기로 한다. 전투식량엔 발열 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 약간을 넣으면 온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이걸로 여러 가지 음식과 음료수를 데워먹는 것. 화상을 입기 쉬워 주의해야 할 과정이었으나, 손을 움직일 때도 겨울의 시선은 거의 전방에 가있었다. 발열 팩에 대어두었던 치즈 스프레드를 뜯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반쯤 액화된 치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것을 크래커 위에 적당히 얹어 수분과 유지방이 스며들기를 기다리고서, 한 입 깨물어 먹는다. 맛있다. 겨울은 꾸미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혀가 아릴 정도의 염분이 부담스럽긴 했으나, 추운 날씨에 따뜻한 식사라는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닭고기 스튜는 인공적인 향이 강했다. 그 점은 싫었다. 그래도 한없이 실제에 가까운 가슴살의 질감이 만족스러웠다. 몇 번 씹어서 혀끝으로 굴리면, 육수에 흠뻑 젖은 살결이 올올이 갈라진다. 뜨겁게 데워진 음료수의 싱거운 단맛도 입에 착 달라붙었다. "어째 정말로 맛있게 드시는 것 같습니다?" 괴이쩍다는 듯 묻는 운전병에게, 겨울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옆에 제프리가 없네요." 이 말을 들은 병사 두 명이 때 아닌 웃음을 참는다. 아무래도 제프리가 똥 이야기로 여러 사람의 식사를 망쳐놓은 것 같았다. 무전기에서 잡음과 함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들. 겪어봐서 익숙한 패턴이었다.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긴장감이 느껴진다. 겨울이 차분한 목소리로 안정감을 담아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잡음 강도로 보니 거리가 꽤 머네요. 아마도 서쪽, 산타 마가리타 방면이겠죠. 이 근처에 아무 것도 없는 걸 놈들도 그동안 확인했을 테니까, 이제 와서, 그것도 이런 날씨에 쓸 데 없이 나와 보진 않을 거예요. 뒤쪽 차량에도 신경 쓰지 말라고 전달하세요." 사수가 지시대로 수신호를 보낸다. 그 뒤로 잡음과 무의미한 송신이 잠시 지속되다가, 차량 대열이 고속도로를 벗어나 남하하기 무섭게 툭 끊어졌다. 지형 탓이다. 해발고도 1200미터의 봉우리가 전파를 차단했다. 식사를 마친 겨울이 지도를 펼쳤다. 「독도법」 보정이 있어도, 「암기」 수준이 낮아 지도를 자주 봐두는 게 좋았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이제 더는 난구간도 없고. 앞으로 11킬로미터만 더 가면 돼요." 병사가 지도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묻는다. "장애물 없이 쭉 평지로군요. 좀 더 속도를 내볼까요?" "그래요." 겨울의 허가를 받은 운전병이 슬며시 속도를 올렸다. 뒤따르는 차량들이 당황하지 않고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질주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강가에 이르러 차량 대열이 속도를 줄인다.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거칠게 흐르는 강물만이 보일 뿐. 강폭이 30미터가 넘는 것 같다. 전술지도엔 오래 전에 말라붙은 실개천으로만 표기된 곳이었다. 부리또라는, 묘하게 먹음직스러운 이름의 개천이었다. 실물은 전혀 아니지만. 다리가 수면 아래 잠겨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물살이면 다리가 있어도 불안해.' 물에 잠긴 구조물은 내구도를 신뢰할 수 없다. 어떻게 한다. 겨울은 물가에 발을 얕게 담그고 서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했다. # 86 [86화] #호숫가의 밤 (5), 산타 마가리타 호수 "어휴, 방법이 없습니다. 못 건너요." 제프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는 말이다. 엄살이라고 할 순 없었다. 험비에 모인 간부들 모두가 같은 의견이다. 겨울은 그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지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부리또 강의 상류를 짚어보는 것이었다. 강의 발원지는 남쪽의 하이 마운틴이었다. 산의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이, 산타 마가리타 호수 서쪽의 저지대로 유입되는 지세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물길이 모두 살아났다고 가정할 때, 상류로 우회하더라도 차량 도하가 가능한 지점을 찾을 확률은 무척이나 희박했다. 겨울이 결정을 내렸다. "차량을 두고 가죠." 처음에는 다들 소년장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량을 포기한다고 방법이 생긴단 말인가? 겨울은 그들에게 외줄도하를 제안했다. 밧줄로 묶은 갈고리(Grappling hook)를 던져서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매달려 건너가자는 뜻이었다. 임무 중단을 예상했던 제프리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렸다. 경력이 긴 리버만 하사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발사기를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군요." 미군이 운용하는 갈고리 발사기는 기본 원리가 공기총과 같았다. 컴프레셔로 공기를 압축한 다음, 갈고리를 끼워서 뻥 하고 쏴버리는 것. 흔한 장비는 아니었다. 도대체가 쓸 일이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소총 총구에 끼워서 쏘는 유탄형 갈고리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사람이 매달리기엔 너무 작았다. 지금 있는 물건도 아니었고. 겨울이 말했다. "갈고리는 있잖아요? 직접 던지면 되죠. 서둘러요. 좀 더 늦어지면 이나마도 못 하게 될 것 같아요." 강물이 시시각각 차오르고 있었다. 주변이 완전히 침수되면 늦고 만다. 제프리가 대답했다. "바람이 워낙 심해서 잘 될지 모르겠군요. 자신 있는 놈들을 모아보겠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갈고리 숫자는 충분했다. 갈고리에 끈을 묶으면서도, 병사들은 자신들이 하게 된 일을 못 미더워했다. 엘리엇 상병이 웅얼거렸다. "아니, 훈련을 해보긴 했지만, 설마 이걸 실전에서 쓰게 될 줄이야......." 리버만 하사가 갈궜다. "모든 훈련에는 이유가 있다, 임마." "누가 뭐랍니까? 그냥 인생에 참 별 일이 다 있구나, 싶은 거죠. 육군 전체를 통틀어도 이 짓을 해본 놈이 없을 겁니다." 물길이 좁아지는 지점을 골랐는데도, 던져야 할 거리가 40미터에 육박했다. 더욱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센 환경에서 시도해야 한다. 「투척」 보정을 받는 겨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병사들이 서부극의 카우보이처럼 행동했다. 제자리에서만 휙휙 돌리다가 던지는 것이다. 거친 기류에 휩쓸려 갈팡질팡 날아가던 갈고리들이 강물 중간에 첨벙 첨벙 떨어졌다. 실패가 쌓이다보니, 오기가 생긴 병사들이 점점 더 교범에 가깝게 던지기 시작한다. 도움닫기로 관성을 더하고, 회전 실린 밧줄을 놓을 때 몸을 함께 던지는 것이 정자세였다. 철푸덕. 끝이 참 볼품없었다. 던질 때마다 엎어지는 병사들은 얼굴까지 흙투성이로 변했다. 아직 차례가 돌아오지 않은 병사들이 낄낄거리며 비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곧 같은 신세가 되었다. 엉망이 된 병사들끼리 서로를 응원했다. "힘내라, 공병! 이건 너네 전문 분야잖아!" "시끄러!" 기운차게 달려간 공병이 바람에게 갈고리를 내어주며 철푸덕 넘어졌다. 그 자세로 머리만 들어 갈고리를 지켜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갈고리는, 목표 삼은 나무를 한참 빗나갔다. 공병이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겨울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휘관은 점잔을 빼는 자리가 아니다. 흙 좀 묻으면 어떤가. 어차피 빗물에 다 씻겨 내려간다. 다만 옷 속으로 들어가는 흙 알갱이들이 조금 불쾌하긴 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겨울이 경험치 낭비를 감수하고 「투척」에 투자할까 고민하는 찰나, 억제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갈고리 하나가 강 건너 오크목에 걸린 것이었다. 성공시킨 병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한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그의 어깨와 방탄모를 두들겼다. 겨울이 병력을 한 데 모아 지시했다. "차량들을 저 위쪽으로 모아요. 강변보다 40미터 정도 높아 보이네요. 저 정도면 저지대가 침수되더라도 차량을 잃을 우려는 없겠죠. 주변에 나무가 있으니 위장하기도 편하고. 전차 승무원들은 저기 남아서 차량을 지켜요. 주포 사거리가 기니까, 유사시 화력지원을 받기 좋을 것 같네요. 지금 가요. 동쪽으로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는지 확인하고, 보고하세요." 잠시 후 전차장이 직사로 1.3킬로미터를 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강 건너편을 기점으로 삼아도 1킬로미터나 된다. 리버만 하사가 흡족해했다. "강을 건넌 뒤 이동해야 할 거리가 도보로 약 5킬로미터 정도인데......이동경로의 20%가 전차의 사거리 안에 들어오는군요. 일이 안 풀려서 죽다 만 것들에게 쫓기게 되더라도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제프리가 겨울의 의견을 구한다. "중위님. 우리 단독군장으로 건너도 괜찮지 않을까요? 왕복으로 10킬로미터니까, 들어가서 수문 열고 나오는 것까지 감안해서 서너 시간이면 떡을 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단독군장은 배낭을 매지 않고, 기본적인 무기와 탄약만 휴대한 상태를 뜻했다. 겨울은 그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 운이 없어서, 가는 도중에 댐이 터질 경우엔 고지대로 피신해서 물 빠지기를 기다려야 할 걸요? 장시간 고립될 가능성이 있으니 단독군장은 안 된다고 봐요. 적어도 사흘 치 식량과 연료, 침낭, 예비탄약 정도는 있어야죠." "엥? 사흘 치? 그렇게나 필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이 부근이 다 저지대라, 물 빠지는 데 하루면 족할 텐데요." "혹시 모르잖아요. 각자 알아서 전투식량 아홉 팩씩 챙기라고 해요. 가급적 무게가 덜 나가는 메뉴 위주로 가져가는 게 좋겠어요." 전투식량이라고 무게가 다 똑같은 건 아니었다. 메뉴에 따라 200그램 이상 차이가 난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아홉 팩이면 2킬로그램에 가까워졌다. 가벼운 메뉴로 가져가면 같은 무게로 세 끼니를 더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내용물이 간소화된 전투식량(FSR)이라면 더 넣을 수도 있겠다. 지금은 없는 물건이었다. 리버만 하사가 졸린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세심하셔서 좋습니다만, 거기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애들이 겨우 1, 2킬로그램 차이로 퍼질 만큼 약하진 않으니 말입니다. 이동할 거리도 짧고요. 문제는 부피지요. 군장에서 다른 걸 꽤 덜어내야겠군요."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군장을 다시 싸느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겨울 스스로도 군장을 하나 만들었다. 하사의 말처럼 무게는 걱정거리가 못 되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다. 이제 누가 먼저 건너갈 것인가를 정해야 했다. 병사들은 웅웅 우는 밧줄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훈련장처럼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갈고리가 확실히 고정되었는지도 조금 불안하다. 일단 몇 사람이 함께 당겨도 빠지진 않는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누군가 단독군장으로 건너가, 밧줄을 고쳐 묶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 이 시점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나서는 겨울을, 다른 병사들이 제지한다. "솔선수범이 장교의 미덕이라지만 한 중위님은 너무 지나치십니다. 차라리 우리 소대장을 보내시죠. 평소에 훔쳐간 월급이 많아서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야. 너 왜 나한테 시비냐." 귈레미 일병의 말에 제프리가 발끈했다. 가벼운 장난이었다. 잠깐 망설이긴 했으나, 겨울은 처음을 양보하지 않았다. 위험은 최소화하는 편이 낫다. 「무브먼트」 14등급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소년이 단독군장으로 밧줄에 몸을 실었다. 잘못될 것을 대비해 얇은 끈을 허리에 묶은 채였다. 물에 빠지면 병사들이 잡아당길 구명줄이었다. 이제 오른쪽 발을 꺾어 밧줄에 걸고, 왼쪽 다리를 늘어뜨려 균형을 잡는다. 그 상태로 밧줄을 당기며 나아갔다. 가볍게 달리는 수준의 속도였다. 십 수 초 만에 강을 건넌 겨울이, 나무 위로 내려서서, 가지 사이에 끼어있는 갈고리를 회수했다. 반대편의 병사들이 밧줄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다시 묶기 편하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었다. 겨울이 가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름드리나무 밑동에 밧줄을 두 바퀴 둘러, 몇 번이고 단단하게 매듭짓는다. 맞은편에서도 같은 작업이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병사들이 소년장교의 군장 배낭을 밧줄에 매달았다. 허리에 묶어두었던 구명줄이 이제는 배낭을 끌어당기는 용도로 바뀌었다. 병사들이 건너는 동안 위태로운 순간이 몇 번 있었으나,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하가 완료된 시점에서 겨울이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8시 51분. 잘하면 자정이 지나기 전에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가야할 길은 시작부터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폭은 전차 한 대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다. 여기저기 금이 가있는 이런 도로에도 이름이 붙어있었다. 라스 필리타스(Las Pilitas). 라틴계 이민자들이 많은 동네다보니, 지명이나 도로명만 보면 미국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영어를 아예 안 쓰는 동네가 있을 정도니까.' 이 묘한 이름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 살리나스 강이 나타나면 상류를 따라 올라갈 계획이었다. 댐이 곧 강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오르막이 거의 1킬로미터나 이어졌다. 걷다보니,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뜨거운 열이 오른다. 행군이란 게 원래 그렇다. 더욱이 겨울의 군장은 다른 병사들보다 무거운 편이었다. 보정을 믿고 더 많은 탄약과 식량을 쑤셔 박아서였다. 전투화 안쪽이 흠뻑 젖어있는 것도 행군에는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겨울은 개인적으로 만족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이 좋았다. 고통이 곧 현실감이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감각동기화율을 일부러 높게 설정해뒀다. 오르막이 끝나고,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발바닥에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 때 쯤 살리나스 강과 마주쳤다. 행군 방향이 남쪽으로 꺾인다. 거친 강변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겨울이 소리쳤다. "엎드려!" 대부분의 병사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일부는 아니었다. 따다다닷! 따다닷! 귀가 먹먹한 물소리 사이에, 날카로운 총성이 섞인다. 반응 느린 병사 두 명이 피격 당했다. 명백한 조준사격이었고, 의도된 기습이었다. 숫자는 둘. 겨울은 조금 당황했다. 변종의 습격은 대비했지만 인간의 공격은 예상 밖이었다. "2시 방향, 거리 50! 제압사격!" 겨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직까지도 무전 보다는 육성이 더 안전했다. 방향을 정해주자, 병사들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적은 강변의 숲에 숨어있었다. 즉 엄폐물이 많았다. 겨울은 병사들의 사격이 명중할 것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적이 쉽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길 바랐다. '정체가 뭐지? 이번 회차 세계관에서 아직 반정부 무장단체는 나타나지 않았을 텐데? 국경을 넘어온 멕시코인들인가?' 소년이 적의 정체, 그리고 대응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제프리가 의무병을 불렀다. "닥(Doc)! 닥! 부상자 상태 확인!" 그러자 피격당한 사람 중 하나가 끙 소리를 내며 옆으로 굴렀다. "어흐, 전 괜찮습니다! 그렉 저 놈이나 좀 봐주십쇼!" 그는 두 발을 맞았는데도 멀쩡했다. 방탄복 덕분이었다. 의무병이 다른 쪽으로 뛰었다. 또 한 명, 피격당한 병사는 운이 좋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울었다.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은 모양이다. 의무병이 응급조치 키트에서 지혈장비(Tourniquet)를 꺼내, 관통상 위쪽에 재빨리 감는다. 붕대처럼 감은 뒤 지렛대 같은 손잡이를 조여 출혈을 줄이는 도구였다. "LAW!" "잠깐 대기!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격분한 제프리가 로켓 사격을 지시하는 것을, 겨울이 재빨리 만류했다. "왜?!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도 꽤나 경황이 없다. 예전처럼 반말을 했다가, 경어로 고치는 등 엉망진창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요?!" 아무리 매복이라지만, 고작 두 명이 선공을 걸었다. 공격한 이유는 모른다. 허나 만약 둘이 전부라면, 공격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다. 추가 무장인원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지금껏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겨울은 조준을 유지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 87 [87화] #호숫가의 밤 (6), 산타 마가리타 호수 "신원불상의 무장인원들에게 알린다! 당신들은 지금 미합중국 육군을 공격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고 나와라! 항복하면 온건한 대우를 약속하겠다!" 빗줄기를 가로지르는 청량한 목소리. 그러나 적대적인 간격 너머의 숲에서는 아직 반응이 없다. 제압사격에 맞은 건가? 아니었다. 경계하던 방향에서, 겨울은 붉은 윤곽을 발견했다. 야간투시경의 적외선 센서가 포착한, 인간 체온 정도의 열원. 팔 부분만 살짝 드러나 있었다. 나무 뒤에 기대어있는 듯 했다. 월경한 멕시코 난민, 혹은 군경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영어가 불가능한 미국인일지도 모르고. 설마 자동화기를 습득한 감염변종일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회차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다. 설령 「종말 이후」 세계관이 개정되었더라도 마찬가지. 변종들은 지금 날붙이를 겨우 쓰는 수준 아니던가. 여기까지 생각한 겨울이 다시 외친다. "¡ Ríndete! y serás tratado justamente! no tienes salida!" 낭비를 피하기 위해, 기술보정 없이 기억에 의존하여 던지는 경고였다. 드디어 열원이 움직인다. 나무 옆으로 상체만 기울여, 이쪽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 같다. 주홍빛 색채로 번지는 형상이었으나, 그래도 음영이 있다. 거리가 멀지언정 체형과 이목구비, 복장의 간단한 특성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적어도 군인은 아니다. "당신 누구야?! 소속부대, 관등성명을 대!" 잔뜩 쉬고 거칠어졌어도 여성의 음색이었다. 그리고 영어다. 불신과 불안, 그리고 극도의 피로가 느껴진다. 겨울은 그녀의 요구에 따랐다. "저는 봉쇄선 사령부 소속으로, 포트 로버츠의 79연대전투단 160연대에 파견되어있는 한겨울 중위입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일단 무기를 버리고 나와요! 두 분의 신변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젠장,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겨울은 일부러 강하게 대응했다. "믿으셔야 할 겁니다! 투항하지 않겠다면 로켓으로 날려버릴 거니까요!" 공갈이 아니다. 발사준비를 마친 병사가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이번엔 남성이다. "알겠소! 이렇게 합시다! 일단 나 혼자 나가리다! 당신들 얼굴을 확인하고 싶소!" 이상한 조건이었다. 왜 하필 얼굴을? 겨울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빠르게 더듬었다. '가시거리는 충분했지. 이들은 우리가 군인이란 걸 알고도 공격했을 거야. 그럼 이미 적대관계인 다른 군인들이 존재한다는 뜻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하는 사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두 손을 들고 나와서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자신에게 다른 무기가 없음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그가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노인은 적당한 거리에 이르자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린다. 생존계열 감각보정의 경고는 없었다. 자살 테러는 아닌 모양이다. 경계를 낮춘 겨울이 느리게 다가갔다. 등을 찌르는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소대원들과 공병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셨던가요?" 몇 미터 떨어져 묻는 겨울에게, 노인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겨울이 야시경을 들어올렸다. 노인이 탄성을 터트린다. "오오. 이럴 수가. 당신, TV에서 보던 그 사람이로군요. 이름을 듣고도 설마 싶었는데......." 그러더니 아직까지 신음하는 부상자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적의를 감추지 않는 제프리의 소대원들과 세 명의 공병들 까지. 위생병은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늙은 남자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고개를 떨어뜨리며 하는 말.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겨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병사들의 적의를 억눌렀다. "사정은 천천히 듣겠습니다. 다른 한 분도 나오도록 말씀해주세요." "그러지요." 노인이 몸 돌려 뒤쪽으로 외친다. "캐슬린! 이쪽으로 오시오! 이 사람들은 해리스 대위의 부하들이 아니오!" 숨어있던 나무로부터, 머뭇거리며,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를 버린다. 불안해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왔다. 짙은 올리브색 유니폼에 금빛 보안관 뱃지를 달고 있다. 적당히 가까워진 뒤에는 겨울을 보고 잠시 굳어진다.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프리가 묵직한 한숨을 내쉰다. 그는 병사 둘을 시켜 늙은 남자와 보안관의 무기를 회수하도록 했다. 군용 소총이 두 정, 권총이 한 정. 총기에 남은 탄약이 얼마 없었다. 다른 병사들이 몸수색을 진행했지만 여분의 탄창이나 수류탄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보안관과 노인 입장에선 굉장히 절망적인 저항이었던 셈이다. 전후 상황이 그려진다. 몸수색을 마친 병사들이 두 사람을 구속했다. 손을 뒤로 돌려 단단히 묶는다. 의무병이 소년장교에게 부상자의 상태를 보고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출혈도 멎었고요.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했으나 동맥을 건드리진 않았더군요. 다만 체온유지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최대한 빠른 후송을 권하고 싶습니다." 겨울은 부정적이었다. 부상자를 후송하려면 병력을 나눠야 한다. 위험한 선택이다. "당장 후송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아무튼 알겠어요. 고려하죠. 수고하셨어요." 부상자인 그렉 가드너 일병이 들것에 실렸다. 겨울은 이동과 경계강화를 명령했다. 신속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교전의 소음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근방에 대규모 변종집단, 혹은 정체불명의 적대적 미군 병력이 존재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대화는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었다. 소년이 무장해제 된 두 사람과 가깝게 걸었다. 두 사람은 무척 불안해보였다. 겁먹은 동물처럼 주변을 살피는 중이다. 겨울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당신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해리스 대위는 누구죠? 그리고 왜 우릴 공격했어요?" 서로 다른 세 개의 질문은, 사실 하나의 맥락이었다. 보안관이 서둘러 대답했다. "상황이 급하니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캠프 샌 루이스 오비스포의 생존자들이에요. 해리스 대위와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고요. 성탄절 새벽, 캠프가 무너질 때 함께 탈출했죠." 캠프 오비스포의 생존자들은 모두 구출된 것이 아니었나? 봉쇄선 사령부가 작전 종료를 선언했었는데? 겨울은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보안관의 설명은 빠르게 흘렀다. "캠프를 벗어나고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쫓기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는 내내 무전기에서 이상한 잡음이 흘러나오더군요. 보통의 교신이나 비명이 중구난방으로 뒤섞인......." "트릭스터로군요." "네. 그래서 구원요청을 할 수도 없었죠. 정찰기가 날아다니는 건 몇 번 봤지만, 그쪽에서 우릴 발견하지 못했어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우린 산으로 숨어들었으니까요. 대위가 겁쟁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변종들을 피해 무조건 험지로 숨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보안관은 대위의 판단을 비난했으나, 그게 꼭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할 순 없었다. 트릭스터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라는 보장도 없다. 병력의 규모가 그리 많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켜야할 민간인이 많았다면, 해리스 대위가 교전을 회피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덕분에 같은 미군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게 되었겠지만. 겨울은 내색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군인들과는 어쩌다 대립하게 됐습니까?" "발단은 식량이었어요. 뭔가 챙길 틈도 없이 급하게 도망쳐 나왔는걸요. 이틀째에는 연료가 없어서 차도 버렸고요. 해리스 대위는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병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식량을 분배해야한다고 주장했죠.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면서요. 민간인 생존자들이 반발했어요. 당연히 공평하게 나눠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들 배가 고파서,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졌어요. 그러다가......." 보안관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침묵 사이에, 그 뒤의 전개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기라도 했나요?" "정확합니다." 보안관의 대답이 아니었다. 노인이 비극을 증언했다. "시작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확한 발단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새벽,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일어났을 땐......대위의 부하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중이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더군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였습니다. 양심 있는 일부 병사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도 지금은 죽고 없지요......." "미친." 욕설을 내뱉은 건 리버만 하사였다. 감정기복이 적은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겨울이 돌아보니,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병사들 모두 안색이 나빴다. 첫 교전에서 지금에 이르는 정황을 살펴보건대, 이들의 증언이 거짓일 확률은 낮아 보인다. 병사들도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다. 적대감이 많이 낮아졌다. 그럼에도 겨울은 아직 일말의 의심을 남겨두었다. 사람을 대하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은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해야 한다. 만약 해리스 대위와 조우하게 될 경우, 적어도 한 번쯤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프리가 말한다. "중위님. 이 말이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미어캣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군복 입은 연쇄살인마 집단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그는 차량을 지키라고 남겨둔 전차 승무원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차량을 탈취당할 가능성도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리버만 하사가 반대했다. "그건 위험합니다. 이들을 쫓았다는 트릭스터가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만 무전침묵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리고 해리스 대위인지 뭔지 하는 사생아 새끼에게도 무전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괜히 무전을 쳤다가 적들에게 정보만 주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미 해리스 대위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제프리가 눈살을 찌푸린다. "이봐요, 하사. 있어도 일찌감치 방전됐겠죠. 오비스포 캠프가 무너진 뒤로 벌써 한 달도 넘게 지났구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헤맸는데 배터리가 남아나겠어요?" 보안관이 끼어들었다. "아뇨, 그들에겐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가 있어요." "염병......." 제프리가 탄식했다. "경고하죠." 겨울이 결정을 내렸다. "이분들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란 가정 하에, 해리스 대위는 증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쫓아올 거라고 봐요.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가 공격받을 일도 없었겠죠. 보안관님, 제 말이 맞나요?" "네. 지금까지 계속해서 쫓겼어요." "그렇다면 미어캣을 무방비하게 내버려둘 순 없어요. 어차피 우리가 무전을 넣는다고 해서 미어캣의 위치가 발각되는 건 아니에요. 호출부호로 부를 테니 거기 뭐가 있는지도 모를 테고요. 트릭스터가 있다손 치더라도, 해리스 대위가 전차 승무원들을 해치고, 험비 아홉 대를 손에 넣는 것보단 나아요. 변종집단보다 더 까다로운 적이 될 테니까요." 하사는 혼자서 고개를 흔들었지만,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다. 겨울이 통신병을 불렀다. '무전이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을까?' 가능하다. 그들이 지닌 무전기 중 무엇 하나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경우. 하지만 희박한 확률이었다. 주위에 침묵 중인 트릭스터가 있다면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무전을 복사해서 온갖 주파수에 뿌려대는 놈들이다. 놈들이 무전을 포착하여 사냥을 시작한다면, 겨울의 목소리는 방해전파와 뒤섞여 끝없이 반복 송출될 것이었다. 수화기를 들고 뜸을 들이던 겨울이, 결국 발신 버튼을 누른다. "미어캣, 미어캣.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지금부터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하세요." 청명하던 통신망에 소름끼치는 잡음이 꼈다. 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므로, 겨울은 조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근처에 미군 낙오병 집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에게는 민간인 학살 혐의가 있습니다. 소속 불명의 미군과 조우할 경우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세요. 1차적으로는 접근 거부를 우선하되, 상대가 무시한다면 실사격을 가해도 좋습니다. 이건 지휘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겨울은 같은 내용을 두 번 더 발신했다. 마지막으로 반복할 때엔, 먼 메아리처럼, 시차를 두고 목소리가 겹쳐졌다. 메아리는 갈수록 가까워질 것이다. 통신을 마친 겨울이 보안관을 부른다. "해리스 대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화기와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잠시만요." 보안관이 초조하게 말을 끊었다. "방향을 보니 댐으로 가시는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저를 먼저 보내주세요. 다른 일행들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군 병력이 접근하면 겁에 질려 달아날 거예요. 가서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려야 해요. 이대로는 자기들을 팔아넘겼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생존자가 더 있다고요? 말하는 게 늦지 않습니까?" "......." 보안관이 시선을 내린다. 겨울이 대검을 뽑았다. 소스라치는 그녀를 붙잡고, 뒤로 묶인 팔의 구속을 끊는다. "묶인 채로 가봐야 설득력이 없겠죠. 어디쯤인가요?" 보안관이 손가락으로 도로가 이어지는 저편을 가리켰다. 나무 사이로 단층 건물의 지붕이 눈에 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겨울이 손목시계를 본다. "가세요. 3분 드리죠."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를 수 있다. 민간인들이 도망쳐 버리면, 무시하고 임무를 수행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 88 [88화] #호숫가의 밤 (7), 산타 마가리타 호수 단 3분이라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간부들을 모아놓고, 겨울은 노인을 심문했다. 해리스 대위에 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병력의 규모와 상태, 무장의 상세 등. 사정을 알고 대화를 시도하면, 전투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확률은 낮을 것이다. 그래도 해보는 것이 소년의 방식이었다. 노인이 자신 없는 모습으로 진술했다. "병력은......육십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정확하네요." "죄송합니다. 그날 새벽 이후로 줄곧 쫓기기만 해서....... 산지와 숲속으로 도망 다녔기 때문에, 얼마나 쫓아오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무슨 근거로 그 숫자를 추정하셨어요?" "원래 대위를 따르던 병력이 백 명 가량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살이 벌어질 때, 저희를 보호하려고 한 병사들이 스물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싸움 자체는 일방적이었지요. 시간을 벌어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대위 편의 피해가 없진 않았겠지요." "글쎄요......." 겨울이 말끝을 흐렸다. 전투라는 게 꼭 그렇게 덧셈 뺄셈 같지는 않다. 집단과 집단의 교전에서, 전투력의 차이는 병력 차이의 제곱이다. '우발적인 교전이었으니 변수가 많았겠지만, 확신하긴 어려워. 최악을 예상해야겠지. 그래야 차악이 가벼울 테니까.' 노인이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평범한 민간인이었다. 군의 무장상태를 판단할 필요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것을 유추해야 했다. 그래도 유용한 정보가 하나 있었다.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사실 내용은 전투라고 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로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총질을 했다는 것이다. 보안관이 상당히 용감한 인물이었다. 오늘 겨울이 겪었듯이, 노인 같은 사람과 함께, 때로는 혼자 후미에 남아, 엉뚱한 방향으로 추격을 유도했다고 한다. "시간 됐네요. 일단 들어가죠." 겨울이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병력은 도로가 아니라 그 옆의 수풀을 통해 이동했다. 어디에 적이 있을지 모른다. 미군과 변종집단을 동시에 상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지금도 겨울의 목소리가 섞인 잡음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강도는 약하다. 거리가 멀다는 뜻. 그러나 트릭스터가 방해전파의 강도를 의도적으로 낮출 가능성이 있었다. 생존자들은 공병단 사무소에 숨어있었다. 이 근방이 워낙 외진 곳이라, 비바람을 피할 다른 장소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해리스 대위도 여길 쉽게 찾아낼 거라는 게 문제인데.......' 아예 조우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으나, 갈수록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겨울을 비롯한 미군 병력이 이런 곳까지 찾아올 이유를 추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변에 댐 말고는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까. 문이 열려있었다. 안쪽에서 보안관이 기다리고 있다. 불안이 다 지워지지 않은 얼굴. 그러나 아까보다는 낫다. 겨울이 구속을 풀어줄 때부터, 약간이지만 신뢰가 싹튼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울은 방심하지 않았다. 다른 민간인들은 또 모른다. 10미터 쯤 앞에서 노인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먼저 들어가라고 해놓고, 겨울이 병사들에게만 들릴 낮은 음성으로 당부했다. "민간인들을 조심해요. 군인에 대한 불신이 깊을 테니, 무기를 탈취하려고 할지도 몰라요." 좋게 말해서 무기 탈취였다. 공격이라고 하지 않는 건, 병사들의 심리를 감안한 단어 선별이었다. "그렇다고 주의하는 티를 내도 안 되겠죠. 엔간한 건 압니다. 걱정 놓으십쇼." 제프리가 답한다. 제프리 외 3개 분대가 외부 경계를 맡았다. 1개 분대와 나머지는 겨울과 함께 사무소로 진입했다. 노인과 보안관 외, 극심하게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두려움보다는 추위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보안관도 초췌해 보인다고 느꼈는데, 그나마 가장 나은 축이었다. 무장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총 두 자루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서로 뭉쳐서 체온을 나누는 중이었다. 병사들이 들어온 뒤에도, 두려워할지언정 떨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추운 것이겠지. 그 가운데 유독 두 사람만 따로 떨어져 있었다. 만삭의 여인과 그 남편이다. 의무병이 신음했다. "맙소사. 임신부라니. 그동안 어떻게 도망쳤습니까?" 보안관이 답한다. "말이 있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 매어놨죠." 의무병은 여인을 살펴보더니 안색이 나빠졌다. "뭔가, 태울 만한 것을......어서!" 불을 피우려다 실패한 흔적이 있었다. 철제 캐비닛에 종이를 모아 막대로 비벼댔나 보다. 병사들이 사무실에 있는 가구들을 급하게 때려 부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바깥 경계를 맡고 있던 제프리가 슬며시 안쪽을 살폈다. 임신부를 보고 기겁을 한다. 지휘관으로서, 겨울은 그들을 만류해야 했다. 빛이 새는 걸 완벽하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물안개가 짙어도 수백 미터 밖에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만류하지 않았다. 불을 찾는 의무병에게, 품에서 성냥을 꺼내 던져준다. 전투식량(MRE)에 들어있던 성냥이다. 습기 찬 환경에서도 쉽게 불붙도록 만들어졌다. 병사는 자갈 같은 군용 연료를 불쏘시개로 쓴다. 불은 순식간에 커졌다. 색감 없던 실내가 환하게 밝아진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여러 사람이 따뜻하려면, 불을 훨씬 더 크게 키워야 했다. 책상이며 의자 같은 것들을 부순 땔감들이, 불을 담은 캐비닛에 무더기로 쌓였다. 겨울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창문을 가릴 만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불쏘시개로 쓰려던 종잇장들이 있었다. 겨울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종이를 적셔서 창문에 붙여요." 양이 넉넉했다면 몇 겹으로 덧발라서 빛을 최대한 막을 텐데, 그러기엔 양이 모자랐다. 북쪽에 면한 창문들은 내버려두고, 그 외의 방향에 집중적으로 발랐다. 겨울이 임신부의 남편에게 묻는다. "아내 분, 출산예정일이 언제죠?" "이미 양수가 터졌습니다. 진통이 언제 시작될지 모릅니다." 남편은 이 악물고 대답했다. 온갖 감정이 한 데 녹아 흐르는 얼굴이었다. 의무병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듯 하다. 다른 생존자들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부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보안관과 노인은 또 그런 그들을 흰 눈으로 보고 있고. 가운데쯤 서서, 부부에게 갈 시선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노력한다. '개판이네.' 이들이 겪은 도피행, 그 하루하루가 쉽게 상상이 간다. 임신부에 대한 배려가 불편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고 여겼을 터. '삶이 무거울 때, 사람은 대개 양심부터 벗어 던지지. 그게 가장 무거우니까.' 사정을 이해한 병사들에게서도 조급함이 엿보이는 중이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겨울의 목소리가, 그들을 더더욱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 [직...지직......소속 불명의 미군과 조우할 경우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미어캣, 미어캣......모든 책임은......칙......제가 지겠습니다......실사격을 가해도 좋습니다......민간인 학살 혐의가......미어캣, 미어캣.......] 주파수를 바꿔도 마찬가지였다. 해리스 대위가 겨울의 경고를 듣지 못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겨울은 아타스카데로를 회상했다. 트릭스터와의 첫 조우. 통신병은 이렇게 투덜거렸었다. 괴물 주제에 성능도 좋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아내를 끌어 안은 남편의 말. 충혈 된 눈으로 겨울을 보고 있다. "내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맛이 간 목소리였다. 남편 스스로도 열이 심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면 눈이 풀려있다. "네, 약속드리죠. 그런데 제 약속을 믿으실 순 있나요?" "당신은 한 소위잖습니까." 남자는 한 소위를 모종의 고유명사처럼 발음했다. 하기야, 겨울의 중위 특진은 캠프 오비스포 붕괴 이후의 민심달래기를 겸하는 것이었으니. 남자에게 겨울은 아직 산타 마리아의 영웅인 '한 소위'일 터였다. 계급장을 보고도 소위라고 부르는 걸 보면. 겨울은 능숙하게 상냥한 미소를 만들었다.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유명세가 이런 데서 쓸모 있었다. 생존자들이 홀린 듯이 소년장교를 바라보았다. 의무병의 독촉으로 병사들이 전투식량을 각출했다. 이들이 며칠 동안은 하루 한 끼를 겨우 챙긴 것 같았으므로, 고열량 식단을 그대로 먹이긴 어려웠다. 발열 팩으로 물을 데워 주 메뉴를 묽게 만든다. 맛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임신부에게 가장 먼저 먹이고, 나머지는 그 다음 차례였다. 그동안 겨울은 잠깐 밖으로 나왔다. 제프리가 자기 쪽으로 손짓해 보인다. 그는 비를 맞으며 수풀 속에 엎드려 있었다. 방수처리 된 지도를 펼쳐놓았다. 전술적인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 임무부터 완수해야죠. 여기서 500미터만 더 가면 펌프 하우스잖아요." "그 뒤에는요? 제 생각엔 최대한 빨리 철수하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만." "임신부가 있어서 이동하기 곤란해요. 벌써 양수가 터졌다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출산까지 지켜야 할 것 같아요." "오, 게으르신 나의 주님. 당신 일처리는 왜 맨날 이 모양입니까?" 제프리가 땅에 머리를 박고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자꾸 이러시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에게 귀의하겠다고. 이상한 헛소리였다. 과거에 통하던 농담인가 보다. 우울하게 몇 번 머리를 박은 제프리가 다시 말한다. "여러모로 좋지 않군요. 적의 정보는 불확실하고, 변종집단이 접근하고 있는데다, 이쪽은 움직이지도 못 하는 상태에서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니." "불평은 그쯤 해둬요. 병력을 나눠야겠어요." "엑. 농담이시겠죠?" "임무는 수행해야 하는데, 민간인들을 잠시라도 방치할 순 없고,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다녀올 순 없잖아요. 가벼운 저체온증이 보이는 사람도 있던걸요. 이들에겐 500미터가 절대로 짧지 않을 거예요. 죽음과 삶을 가를 수도 있는 혹독한 거리겠죠." "그렇다고 병력을 쪼개요?" "말을 타면 돼요.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예요." "거기 몇 명이나 탑니까? 공병 하나는 반드시 가야 할 테고, 거기다 호위병 하나 붙입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뒈지다 만 새끼들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내가 같이 다녀오려고요." 제프리가 또 다시 머리를 쾅 박는다. "......미치겠네." "화력이 분산되는 걸 막아야 하잖아요. 이건 내 생각인데, 해리스 대위가 병력이 많을지는 몰라도 탄약만큼은 부족할 거예요. 삼림에서의 총격전은 탄약 낭비가 극심하지 않아요?" "아까 노인네 말 듣고 저도 그 생각 했습니다. 보안관이 다른 건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거 하난 정말 잘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더 어렸어도 청혼했을 겁니다. 연상은 취향이 아니라서." "농담 그만해요. 시간 없어요." 겨울이 정색하자 젊은 소대장이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겨울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나 없는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면 소모전으로 유도해요. 그것만으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움직이지 못해서 불리한 면이 있지만, 방어전이니까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다고 봐요. 주변에 트랩도 깔고요." "벌써 몇 개 깔았습니다. 클레이모어(산탄지뢰)로다가 말이죠. 이동할지도 몰라서 많이는 안 썼는데, 결국 여기서 고수방어를 하는 군요. 그럼 나머지를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다녀오시는 동안 다른 폭발물도 적당히 뿌려두겠습니다. 인계철선이랑 도폭선까지 걸어두면 함부로 접근 못 할 겁니다. 숲은 선점하는 자의 전장 아니겠습니까?" 인계철선은 지뢰나 폭발물의 뇌관에 걸어 팽팽하게 당겨두는 철사다. 보통은 발목 높이에 오도록 설치한다. 멋모르고 건드리면 즉각 뇌관이 격발되는 식이었다. 도폭선은 조금 다르다. 이건 끈 형태의 폭약이었다. 어느 쪽이건 트랩으로 적합하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와 어둠 속에서, 수목의 짙은 음영 가운데를 걸으며, 교묘한 함정을 간파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프리가 말했다. "정말 그 대위라는 작자가 나타나면......." 말을 하다 말고, 젊은 소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같은 미군 동료와 싸울 판이다.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터. 긴 말은 오히려 독이다. 겨울이 제프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맡길게요, 차석지휘관. 수고해요." "......옙. 얼른 다녀오십쇼." 무전을 함부로 쓰지 못 하는 만큼, 병사가 직접 뛰어다니며 상황을 전파했다. 이미 노출되긴 했어도, 이쪽 사정을 줄줄이 광고할 필요는 없었다. 겨울이 다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관은 아직 식사 중이었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다. 얼마만의 따뜻한 식사인걸까.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임무를 늦출 수 없다. 겨울이 말을 걸었다. "보안관님. 죄송하지만 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셔야겠습니다." "말을요? 어째서?" 대번에 경계심부터 띄우는 그녀. 겨울이 해명했다. "의심하지 마세요. 전 원래 살리나스 댐의 붕괴를 막으려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방치할 순 없으니, 저랑 다른 한 명만 서둘러 다녀오려고 해요. 협조 부탁드립니다." "의심할 생각은 아니었......하아, 죄송합니다." 겨울은 병사를 시켜 그녀에게 총을 돌려주었다. 여분의 탄창도 내주었다. "믿겠습니다." 보안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소년장교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공병 세 사람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겨울이 한숨을 쉬고서, 스스로 고삐를 잡았다. 같이 가겠다고 자원한 공병이 신기하게 여겼다. "승마는 언제 배우셨습니까?" "지금요." 병사는 소년장교의 대답을 농담으로 들었다. 겨울이 기수를 북쪽으로 향하며 보안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지향사격 자세로 숲 속의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보안관님." "캐슬린 헤이랜드에요. 이름으로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보안관의 대답. 여전히 원색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쉬어있는 음성이었으나, 첫 만남에 비해 날카로움이 제법 줄어들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캐슬린. 가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러고서 고삐를 내리친다. 갈기 달린 순한 짐승이 부드럽게 응했다. # 89 [89화] #호숫가의 밤 (8), 산타 마가리타 호수 소년은 한 손으로 말을 다뤘다. 다른 손에는 소총을 들었다. 개머리판을 옆구리에 끼고, 언제든 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창기병을 연상케 하는 자세였다. 등 뒤엔 공병이 붙어있었다. 두 손으로 소년장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두 사람의 체급 차이가 꼴을 우습게 만든다. 허나 호우를 가르는 질주였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는, 말이 땅을 박찰 때마다 유난히 튀어 올랐다. 겨울은 허벅지에 힘을 꽉 주었다. 두둑, 두둑, 두둑. 말발굽 소리가 둔탁하다. 도로를 벗어나서 달리는 까닭이었다. 소음을 줄이는 데엔 좋았으나, 주행의 난이도가 올라갔다. 노변의 관목이 빠르게 다가왔다. 겨울이 박차를 가했다. 하체를 살짝 들어, 가볍게 뛰어넘는다. 다만 승객은 아니었다. 척추가 쿵 내려앉는 충격에 윽 하고 신음을 흘린다. 중간에 변종 하나가 튀어나왔다. 말 달리는 호흡에 맞춰, 겨울이 방아쇠를 두 번 끊어 당겼다. 리듬감 있게 튀는 탄피. 변종은 첫 번째 사격에 가슴을 맞고, 두 번째 삼점사에 머리가 깨지고, 세 번째 연사에 뒤로 넘어졌다. 말발굽이 시체를 짓밟고 지나간다. 텅 빈 위병소를 지나쳐, 겨울은 펌프 하우스에 도달했다. 몰개성하게 지어진 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커다란 격자창문이 정면에 하나, 측면에 네 개다. 말을 묶어놓고, 겨울이 공병과 함께 창가에 붙었다. 옷소매로 창문을 닦아본다. 안쪽은 그저 새까만 어둠. 야간투시경을 끼고도 보이는 게 없었다. '열원은 없지만.......' 가사상태에 들어간 변종이 있을지도 몰랐다. 대사가 억제된 변종의 육체에선 온기가 사라진다. 혹은 일정 등급 이상의 변종이 체열을 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겨울은 방심하지 않았다. 문은 열려있었다. 공병이 적외선 조명 막대(Chemlight)를 꺾어 안쪽으로 던졌다. 야시경으로만 볼 수 있는 빛이, 실내를 음산하게 밝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네 개의 커다란 밸브였다. 남쪽 벽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개의 장치, 그리고 커다란 제어단말 하나가 붙어있었다. 다만 전원은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다. 겨울이 지시했다. "작업해요. 입구를 지키고 있을 게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들어간 공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을 부른다. "죄송한데 조금만 도와주십쇼. 하하." 그는 민망하게 웃었다. 소년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하도 안 써서 그런지 밸브가 안 돌아갑니다." 공병에게 힘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체력기준 미달 시 각종 불이익을 받는 미군, 그 가운데서도 힘쓸 일이 많은 공병 답게, 그의 팔뚝은 상당히 굵은 편이었다. 다만 밸브의 높이가 높고, 바닥이 젖어있어 발이 쉽게 미끄러졌다. 힘을 쓰기 나쁜 조건이다. 두 사람이 붙자 둥근 핸들이 수월하게 돌아간다. 하나, 둘, 셋, 넷. 풀린 밸브의 수가 늘어날 때마다, 우릉우릉 하는 나지막한 울림이 더해졌다. 디딤발을 파이프에 올린 겨울은, 관을 통과하는 묵직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벽면의 제어단말과 몇 개의 계기를 살핀 공병이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나......전원이 없어서 작동이 안 되는군요. 댐 하부의 배수관을 직접 열어야겠습니다." 살리나스 댐은 다목적 댐이 아니었다. 발전능력이 없어, 제어시설이 외부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다. 캘리포니아 일대의 전력공급이 중지된 지금은 모든 것을 수동으로 조작해야 했다. 겨울이 공병을 재촉했다. "서두르죠." 댐으로 올라가는 길에 번개가 쳤다. 순간적으로, 댐이 하얗게 전모를 드러낸다. 전면에 양방향으로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동쪽 계단 끝엔 아무 것도 없었으나, 서쪽 계단 끝엔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민간인들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저기가 더 안전할 것 같은데.' 일단 접근 경로부터 제한적이다. 해리스 대위에게 대전차 미사일이 넘쳐난다면 모를까, 내구성도 확실했다. 겨울이 공병에게 묻는다. "저 안에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네. 원래 통제실을 설치할 예정이었는데, 발전시설도 없고, 우회수로에 수문도 달지 않아서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냥 텅 빈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좋은데. 그러나 임신부는 도저히 움직일 만 한 상태가 아니었다. 겨울은 미련을 버리고, 배수관 밸브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쩐지 무성의하게 만든 댐 같네요." "하하. 그래도 튼튼하긴 할 겁니다." 무성의하게 지었다는 평가가 틀리진 않았다. 제대로 된 수문을 만드는 대신, 양쪽 하단에 배수관 두 개씩을 설치해두었을 뿐이었다. 댐 동서를 오가며 밸브를 돌리는 것으로 본래의 임무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번개가 쳤다. 아주 가깝다. 공병단 사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어서 타요!" 먼저 안장에 앉은 겨울이 공병을 붙잡아 끌어올린다. '뭔가 터졌어.' 묵직한 천둥소리에 날카로운 폭음이 섞여있었다. 교전이 시작되었거나, 사고가 일어났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고, 둘 다 바람직하지 않았다. 소년이 말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장기간의 추격전과 악천후에 말도 지쳐있었으나, 그래도 죽어라고 속도를 낸다. 제프리가 겨울을 심란하게 맞이했다. 두 눈이 충혈 되어있다. 겨울이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죠? 교전이 일어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네. 적은 아직입니다만......낙뢰 때문에 사망자가 생겼습니다." 물론 번개에 맞아 죽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겨울은 이미 사정을 짐작했다. 한숨을 푹 쉰 제프리가 겨울의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운도 참 더럽게 나쁜 놈이죠. 트랩을 설치하는 데 근처에 번개가 떨어진 겁니다. 그 영향으로 클레이모어가 터졌습니다. 막 설치한 뒤였나봅니다. 쿤츠 이 녀석이 후폭풍을 맞았더군요. 의무병 말로는 쇼크로 즉사한 것 같답니다. 어차피 살았어도 내부 장기가 다 터져서 얼마 못 갔을 거라고......차라리 바로 죽은 게 다행이라고......." 소대원을 잃은 소대장이 투덜거렸다. "젠장, 진짜 한심하지 않습니까? 이런 날씨에 트랩을 설치했으면 당연히 측면으로 빠져야죠. 멍청하게 바로 뒤에서......." "그만해요. 제프리 잘못이 아니니까. 내 실수에요. 내가 처음에 주의를 줬어야 했어요." 이건 진심이다. 뇌우 아래에서 전기식 뇌관을 쓰는 폭발물을 다룰 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휘관으로서 경고했어야 할 일이었다. 솔직하지 못한 자책으로부터, 제프리는 미련을 놓지 못한다. 겨울이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이 작전의 책임자는 나에요. 트랩을 설치하라고 했던 것도 나고요. 포트 로버츠에 돌아갈 때까지, 모든 사건의 책임이 1차적으로 나에게 있어요. 인정하기 싫다면 계급장 떼요, 제프리 브라운 소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헤맸습니다." 제프리가 겨울의 말을 수긍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장교다운 의무감으로 내놓는 대답이었다. 장교가 작전 중 한 사람의 죽음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그것으로 지휘관을 곤란하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소년도 그것을 기대했다. "여기 있어요. 잠깐 보고 올 테니." 제프리는 주어가 생략된 말을 쉽게 알아들었다. 그를,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감안해서라도, 겨울이 망자를 배웅할 필요가 있었다. 사무소로 들어간 겨울은, 곧 지퍼를 올린 영현가방을 발견했다. 불빛과 최대한 먼 구석에 눕혀놓았다.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겨울을 바라본다. 그 가운데 의무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비 산모를 돌보는 중이었다. 진통이 시작되었나보다. 그녀는 숨을 쉬기도 어려워했다. 겨울이 영현가방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등으로 최대한 가리면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지퍼를 내린다. 시신은 퍼렇게 변색되어있었다. 피멍이다. 얼굴이 뭉개졌다. 사람보다는 변종에 가까운 모습. 산탄지뢰의 후폭풍을 온 몸으로 맞은 결과였다. 망자를 일별하고 지퍼를 올린다. 등 뒤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유감입니다, 중위." 보안관이었다. 그녀는 어렵게 말했다. "저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는 없었겠죠." 겨울이 그녀를 나무란다. "쿤츠 일병은 의무를 수행하다가 죽었어요. 그가 그 사실을 후회할 거란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요? 괜한 일로 죽었다고 느꼈을 수도 있잖아요." "맞아요. 죽은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모르는 일로 죽은 사람의 명예를 깎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이것뿐이잖아요." "아......." 보안관이 주먹을 쥐고 이마를 꾹 누른다. 목구멍 안쪽에서 답답한 신음이 끓었다. 겨울이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쉬세요. 아무래도 많이 피곤하신 것 같네요."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통신병이 겨울을 찾아 들어왔다. 병사는 머뭇거렸다. 옆에 선 보안관을 힐끔거린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젓는다. "괜찮으니 그냥 말해요." 이미 이 상황 자체가 충분한 의미전달이었다. 통신병이 지금 겨울을 찾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뿐이다. 이 근방에 다른 미군부대가 있을 리도 없었다. 통신병이 말했다. "교신 요청이 잡힙니다. 데이비드 액추얼을 찾는데, 아무래도 해리스 대위인 것 같습니다." 수화기에서 실제로 낯선 음성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잡음이 시시각각 심해지고 있었으나, 교신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답신을 하려면 빠르게 해야 한다. 미어캣에 대한 경고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을 볼 때, 대위는 트릭스터를 한 번 거쳐 이쪽의 무전을 엿들었을 것이다. 즉 이쪽의 주파수를 모르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반응이 없으면 조만간 주파수를 또 바꿀 것이다. 겨울은 보안관과 통신병을 데리고 실외로 나왔다. 보안관이 안심하려면 교신 내용을 직접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프리가 있는 곳까지 이동해서, 수화기를 들고 송신 버튼을 누른다.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들립니까, 해리스 대위?" [들린다. 드디어 연결됐군.] 보이는 병사들마다 잔뜩 긴장했다. 무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대위가 그만큼 가깝게 접근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트릭스터와의 조우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교신이 거듭될수록,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겨울이 말을 골랐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좋으시네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죠. 민간인을 학살한 군인 치고 꽤 평온한 어조다 싶네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신가 봐요?" 잠시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귀소는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 "오해가 있다면 정정해보세요." [일단 묻겠다. 당소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 현재 민간인 생존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확인 바란다.] "맞습니다." [데이비드 액추얼. 귀소에게 권한다. 그들을 즉시 사살하라. 학살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범죄자 집단이다. 식량배분에 불만을 품고, 당소가 보호하던 다른 민간인들을 죽여서 빼앗은 자들이다.] 울컥 하는 보안관에게 손을 들어 보인 뒤, 겨울이 반문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가.] "당신 말이 사실이라도 문젭니다. 즉시 사살하라니. 제정신이신가요? 범죄자도 일단은 민간인입니다. 강하게 저항한다면 모를까, 보호를 요청하면 지켜주는 게 원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발견했을 때 이미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고요. 저항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죽일까요? 이거야말로 민간인 학살입니다." [.......] "정말로 잘못이 없다면 투항하세요. 가서 이들과 함께 정식으로 조사를 받으시죠." [증거가 없다. 억울하게 죄를 받을 것이 걱정스럽군.]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도 헬멧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거든요. 저랑 당신의 대화까지도 말입니다." [장비는 도하 과정에서 물에 빠져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지금 그걸 설득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게 최선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미군끼리 싸우게 될 테니까.] "좋은 협박이네요. 계속 해보세요."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지. 내 이름과 계급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니, 나도 그쪽의 관등성명을 알고 싶다.] 겨울은 송신 버튼에서 손을 떼고, 짧게 고민했다. 제프리는 고개를 흔든다. 계급이 드러나는 순간, 이쪽의 대체적인 병력규모도 드러난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대위도, 그리고 대위의 부하들도, 한겨울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을 것이다. 계급을 감추는 효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제프리. 어차피 이쪽 병력은 위력정찰 한 번이면 들통 날 거예요. 계급을 감춰봐야, 자기보다 낮아서 감춘다고 여기겠죠. 이 사람 말하는 거 봐선 겁먹고 물러날 거 같지도 않고요." "끙......." 제프리는 반박하지 못했다. 겨울이 다시 버튼을 눌렀다. "저는 중위 한겨울입니다. 봉쇄선 사령부 소속이고, 160연대에서 파견 근무 중입니다." [이름이......설마......산타 마리아의 그 한겨울 맞는가?] 대위는 겨울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겨울이 답한다. "맞습니다." [놀랍군.] 그의 침묵을 잡음이 메웠다. 그 잡음은 또한 두 사람의 대화가 남긴 메아리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편화된 대화가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대위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중위라고 했나?] "네." [좋다, 한겨울 중위. 지금 이 잡음이 무슨 의미인지는 귀관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네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했었지? 같은 말을 돌려주겠다. 자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나와 교전을 치르고서, 규모도 모르는 변종들까지 감당할 수 있겠나? 그것도 민간인들을 지켜가면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목숨을 걸겠다고?]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전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하죠.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위." [그래서, 기어코 전우들끼리 서로를 죽이게 만들겠다고? 자네 부하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이런 데서 동료들의 총에 맞아 죽도록 만들 셈인가?]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라고 요구하기가 더 미안하네요. 저는 제 부하들을 믿습니다. 누구도 자기 의무를 저버리진 않을 거라고요. 저도 제 의무를 끝까지 지킬 겁니다." 겨울의 말이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지금껏 말은 비이성적이었어도, 태도만큼은 이성적이었던 대위가 폭발하고 말았다. [잘난 척 하지 마라! 영웅놀이로 임관한 햇병아리 주제에! 난 아프가니스탄에서 3년을 복무했다! 의무? 누구 앞에서 의무를 말하는 거냐!] "의무는 특권이 아니에요. 누구나 지킬 수 있어서 더 훌륭하고, 아무나 지키지는 않아서 더 소중한 거죠." [닥쳐! 이 사생아 새끼!]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저편의 병사들은, 지휘관을 보면서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겨울은 대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 한참 폭주한 대위가, 가까스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잘 들어라. 전장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내가 겪은 일도 마찬가지지. 차량도, 연료도, 식량도 없었다. 그날 먹을 것을 그날 조달해야 했다. 변종들에게 쫓기느라 산을 벗어나지도 못했어. 동물을 잡아서는, 굽지도 못하고 먹을 때가 많았다! 내장이 터져 쓴 맛 나는 고기를 생으로 씹어본 적 있나! 그런 상황에서 생존자 수백 명을 책임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해봐라! 네가 나보다 나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느냔 말이야!] "네, 장담 못하겠네요." 겨울이 즉답한다. "그러니까 그 말씀, 군 법무관 앞에서 다시 해보세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군요." [너......정말 끝까지.......] "항복하세요. 마지막 권고입니다." [.......] 무전기에서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 대위가 대화를 포기한 것 같았다. [충고 하나 하지.] 갑작스럽게 다시 이어지는 해리스 대위의 말. [이런 데서 죽어봐야, 금세 잊힐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라. 온 생애에 걸쳐,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했으면 그걸로 족한 거다. 지금 이 순간에 목숨 걸 필요 없단 말이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이었다. 평범한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잘못에도 정도가 있었다. 자식을 판 부모는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충고 하나 하죠." 겨울이 침착하게 경고했다. "당신들, 나랑 싸우면 다 죽어." # 90 [90화] #호숫가의 밤 (9), 산타 마가리타 호수 교신이 끝난 뒤, 소대 간부들이 최종 회의를 위해 모였다. 제프리가 설정한 경계선은 강변의 언덕에 걸쳐있었다. 병력이 분수령을 따라 배치됐다. 벼락 맞을 위험이 올라가도 어쩔 수 없었다. 높은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 그러면 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안전한 배후지대를 만들 수도 있다. 배후지대의 중심에 공병대 사무실이 있었다. 민간인 생존자들의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방수처리 된 전술지도를 놓고, 제프리가 겨울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해리스 대위의 병력......아니, 적군의 별동대가 강 건너 서쪽에서 출현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배후지가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민간인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겠죠." "그게 가능할까요?" "숲에 의지해서 방어선을 북쪽으로 우회하면 댐을 통해 건널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쪽에까지 병력을 배치할 여유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제프리, 출발 전에 브리핑 제대로 안 들었죠?" "네?" "살리나스 댐 말예요. 우회배수로 위에 통로가 없어요. 거기로는 못 건너요. 우리가 괜히 이쪽 방면으로 돌아온 게 아니잖아요." "아. 이런. 깜빡 했습니다." 제프리가 이마를 쳤다. 대개 댐은 위에 지나갈 길을 만들어두지만, 살리나스 댐은 예외였다. 대충 만들었다는 평가가 의외로 정확하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버만 하사는 지도에서 호수 남쪽을 짚었다. "이 호수는 피서지로 인기가 없는 편입니다만, 그래도 여기 마리나(Marina)가 하나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부두에 방치된 보트가 몇 척 있을 겁니다. 이걸 타고 호수를 횡단해서 반대편에 상륙할 수도 있겠죠." 겨울이 반론한다. "글쎄요. 이런 비바람 속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다고요? 파도가 치고 있을 텐데? 건넌다고 해도 문제에요. 호숫가를 빙 돌아서 여기까지 와야 하잖아요. 중간에 산이 끼어있는 4킬로미터네요. 변종집단이 어느 방향에서 출몰할지 모르는 마당에, 병력을 과연 그런 식으로 나눌까요?" 하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번엔 강 상류가 구부러지는 지점을 짚는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밧줄도강을 시도할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여긴 강의 상류니까, 건널만한 곳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요. 말씀드리고 보니 이쪽이 더 그럴듯하군요. 호수를 건너는 것 보다는 말입니다. 소요 시간도 짧을 것이고." "그래서, 하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중위님이 중요합니다." "제가요?" "네. 예비 분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서십시오." 리버만의 제안에 제프리가 난색을 표했다. "어? 안 됩니다, 하사. 가뜩이나 병력이 모자라서 분대별 간격이 넓은 판인데. 소대가 완편이었으면 또 몰라. 예비 분대가 하나는 있어야 돼요. 그래야 경계선이 돌파당할 때 틀어막지. 배후 경계도 하고. 민간인들이 통제를 벗어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하사는 소대장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한 중위님의 전투력은 상황에 따라 1개 중대에 필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방어보다는 공격이 낫다고 봅니다. 중위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러네요. 공격적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요." 겨울은 전술이 아니라, 적의 심리에 대해 말했다. "해리스 대위의 병사들은 상태가 별로 안 좋을 거예요. 육체와 정신 둘 다요. 한 달 넘게 보급도 못 받고,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남은 생존자들까지 죽이겠다고 쫓아다닌 병사들인걸요. 이 사람들이 왜, 무슨 마음으로 대위를 따르고 있겠어요?" 제프리가 묻는다. "사기가 낮을 거란 뜻입니까?" "네. 그동안 희망은 하나뿐이었을걸요? 증인을 싹 다 죽이고 다른 주둔지로 합류하는 거.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간신히 버텨왔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더 악화된 거죠. 같은 미군을 상대로 싸우게 된 거예요." "우리도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그치들 기분은 정말 엿 같겠군요." "맞아요. 또 한 가지.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의무감으로 싸우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가 발 담근 범죄의 증거를 없애고 싶은 거죠. 이 사람들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을까요? 전 절대 아니라고 봐요." 소년장교의 말을 듣고, 리버만 하사가 한숨을 쉰다. "맞는 말씀입니다. 임무나 전우를 위한 희생정신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겠군요." "네. 잘 하면 아예 공방을 뒤집을 수도 있어요." 이쯤 되자 제프리도 입장을 바꿨다. "야간전이니 병력 규모를 오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들이 오히려 공격을 받으면 혼란스럽겠군요. 아, 맞다. 미어캣. 걔들은 미어캣이 있다는 건 아는데 정체는 모를 테니, 다른 부대가 우리에게 가세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고요." 겨울이 다시 지도를 짚었다. "제가 일단 여기로 갈게요. 적 도하 예상지점을 막고 있다가, 교전이 시작되거나 적을 발견하면 동쪽으로 찌르고 들어가죠. 제프리는 여기서 버티기만 해줘요." "알겠습니다. 해보죠. 근데 너무 오래 걸리시면 안 됩니다?" "노력할게요." "에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는지." 제프리의 푸념과 함께 회의가 끝났다. 겨울은 제프리의 전술지도를 참조하여, 자신의 지도에 트랩의 설치위치를 표기했다. 몇 번 보는 것만으로도 증강현실 UI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 무전기 주파수를 바꾸었다. 겨울이 말했다. "어차피 트릭스터가 방향 확실하게 잡았을 테니, 무선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어요." 제프리가 끄덕인다. "결정적인 순간에만 써야죠. 막 써서 적에게 우리 주파수를 알려주면 안 될 테니까요. 자정을 기점으로 주파수를 한 번 더 바꾸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 겨울은 그가 말한 주파수를 기억해두었다. "출발할게요. 제프리, 건투를 빌어요." "중위님이야말로 조심하십쇼. 실력 좋고 용감한 사람일수록 신중해야 합니다." 제프리가 경례로 겨울을 배웅했다. 엘리엇을 비롯한 예비 분대 여섯 명이 소년장교를 따랐다. 일반적인 미군 보병분대 편성이 아홉 명임을 감안하면 무척 적다. 그간 인원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분대는 강을 따라 내려갔다. 구부러지는 물목, 다리가 걸려있던 흔적이 가까운 곳에서, 겨울이 주먹을 들었다. 분대원들이 각기 흩어져 엄폐물을 찾는다. 겨울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남쪽을 가리켰다. 일곱 개의 총구가 남쪽을 겨냥한다. '예상보다 빠른데.' 바라보는 방향에서, 열일곱 명의 병사들이 북상하는 중이었다. 방심은 없었다. 절반의 엄호 하에 절반이 약진하는, 제대로 된 전술적 이동이었다. 썩어도 미군이구나. 겨울은 그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밖에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작이 굼떠.' 약진할 때마다 힘겨워 보인다. 몇 명은 우의조차 없었다. 그냥 둬도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 같다. 분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다들 안색이 나빠졌다. 적들의 지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다. "엘리엇." 겨울의 부름. 분대장은 먹구름 같은 얼굴로 지휘관을 바라본다. "저들 중에 해리스 대위는 없을 거예요. 일단 항복을 권해볼게요." "......죄송합니다." 이 한 마디가 대원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겨울이 당부했다. "이게 마지막 배려에요. 내가 사격하면, 즉시 가세하세요." "알겠습니다." 겨울은 분대원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로 포복 이동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무에 기대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지!" 북상하던 병사들이 소스라쳤다. 더러는 엎드리고, 나머지는 나무 뒤에 숨는다. 타타탕! 저편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을 시작으로 일제사격이 시작된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겨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안개 가득한 강변에서, 총성은 더욱 차갑게 변한다.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스쳐지나갔다. 퍼억, 퍽. 묵직하게 땅을 때리는 총탄들. 광선 같은 빛이 쇄도했다. 예광탄이다. 타오르는 궤적으로, 어두운 시간, 사수에게 사선을 보여주는 탄종. 겨울은 쭉 뻗어간 빛이 수면에서 튕겨지는 것을 보았다. 사격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쪽에서 응사하지 않는 게 이상했던가 보다. '탄약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도 있겠고.' 어느 쪽이라도 좋다. 간헐적으로 터지던 총성이 줄어, 마침내 끊긴다. 겨울이 날카로운 정적 속에서 다시 외쳤다. "나는 한겨울 중위다! 그쪽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관등성명을 밝혀라!" 잠시 후 갈라진 질문이 돌아왔다. "제기랄, 당신 진짜 그 사람입니까?!" "관등성명!" "......린스카, 월터 린스카 하사입니다!" 사실 겨울의 자기증명은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소년장교의 전투기록, 아타스카데로와 산타 마리아의 교전을 담은 영상들이 모조리 교범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므로. 빛 없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무소 방향이었다. 겨울이 빠르게 소리쳤다. "린스카 하사! 무기를 버려라! 나는 귀관과 싸우고 싶지 않다!" 하사가 울부짖었다. "무기를 버리면! 그 다음은 뭡니까! 군법회의를 거쳐 종신형입니까?!" 이를 듣고, 겨울은 질이 나쁘다고 느꼈다. 하사는 자신이 사형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미국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군인에게도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나라였다. 즉 하사는 자신이 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수형생활이 싫어서 사람을 더 죽이겠다는 뜻이다. 겨울은 하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일방적으로 하대하기가 낯설었으나, 계속해서 강하게 외친다. "어떤 벌을 받더라도! 지금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Fuck! 엿 같은 소리! 누가 죽는지는 해봐야 아는 거지!" "그래서! 목숨 걸고! 여기 있는 전우들을 다 죽이겠다는 뜻인가! 자신 있으면 해봐!" 이때 신경 말단을 싹 훑어 내려가는 전율. 「생존감각」과 「위기감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쾅! 대답은 유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터지는 위치가 멀다. 조준도 어설프고, 탄속 느린 유탄이 강풍에 휩쓸린 탓이었다. "사격! 사격!" 엘리엇이 악에 받혀 내지르는 대응사격 명령. 총구화염이 어둠 속에서 도드라졌다. 서로 퍼붓는 화력의 격차가 명확하다. 화력의 우위를 이용해, 린스카 하사는 병력 일부를 약진시켰다. 겨울이 순간적으로 조준했다. 네 번 끊어 쏘는 아홉 발에 명중탄은 일곱. 최선두의 병사는 머리에 두 발을 맞고 엎어졌다. 그런데 도로 일어난다. 중심을 못 잡고 앉아서, 방탄모 틈새로 피를 쏟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한다. 맞지 않은 병사들도 바싹 엎드렸다. 엄폐물을 찾아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중. 겨울은 거꾸로 엄폐물을 버렸다. 달리면서 대각선을 겨누었다. 수류탄 투척 직전의 병사가 조준선에 잡힌다. 두두둑! 긁은 삼점사가 상대의 방탄복을 쳤다. 충격에 넘어지는 적병. 수류탄을 놓쳤다. 두 손으로 허겁지겁 줍는다. 폭발. 양팔이 반대로 뜯어졌다. 겨울을 향해 사격이 집중된다. 다급한 사선 가운데 몇 줄기가 위험했다. 겨울이 몸을 굴렸다. 쿵, 땅에 부딪히는 충격. 구르는 도중에도 주위에서 총탄 부딪히는 흙이 튀었다. 땅을 치고 튄 도탄이 헬멧을 때리는 충격도 있었다. 구르는 기세로 일어난 겨울이 20미터를 질주했다. 무릎 꿇으며 미끄러진다. 좌아악! 흙을 밀어내며 몸을 돌려, 바로 나무에 등을 붙인다. 발자취를 따라 유탄 두 발이 터졌다. 가까운 폭발에 몸이 흔들린다. 자잘한 파편이 튀었다. 팔다리에 작은 상처가 여럿 생겼다. 얼굴에도 둘. 오른 볼에 두 갈래의 핏줄기가 흐른다. 겨울이 반격했다. 두두두둑! 두둑! 쇳소리가 난다. 배출된 탄피가 젖은 땅에 박혔다. 적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겨울이 측면으로 돌출한 탓에, 그들의 엄폐가 위태롭다. 양방향의 사격에서 몸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몸을 사리는 병사들 때문에 대열이 무너진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몰아붙이는 자가 있었다. '린스카 하사.' 겨울이 엄폐상태로 돌아왔다. 수류탄 클립을 뜯고, 핀을 뽑는다. 빗발치는 탄막에 틈이 있기를 기다려, 발을 콱 내딛고, 회전을 실어서, 던졌다. 수류탄이 직선으로 날았다. 빡! 하사가 수류탄에 맞았다. 이어지는 폭발. 폭발 범위에서, 사람이 부서졌다. 붉게 벗겨진 몸뚱이가 튀어 오른다. 병사들이 충격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저항이 실시간으로 지리멸렬해진다.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가진 화력을 다 쏟아내는 것 같다. 그래봐야 소총보다 위력적인 건 수류탄과 유탄발사기 뿐이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겨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적들도 이 말에 따를 것을 기대하면서. 총성은 멎지 않았다. # 91 [91화] #호숫가의 밤 (10), 산타 마가리타 호수 전투가 이어졌다. 적의 저항은 절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죽었다. 혹은 곧 죽는다. 범죄자들에게서 전우애를 발견하긴 어려웠다. 시체와 부상자들을 두고 물러나는 중이다. 해리스 대위의 본대가 있을 동쪽 방면으로. 판단 자체는 합리적이었다. 겨울은 서쪽에, 분대원들은 북쪽에 있다. 동시에 견제하려면, 한 방향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겨울이 계속해서 우회했다. 측면을 놓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있기 힘든 일. 범죄자들을 중심으로 큰 지름의 원을 그리면, 겨울의 행로는 원의 바깥이었다. 열 걸음을 뛰어도 한 걸음을 따라잡기 어렵다. 그런데도 해냈다. 나무와 나무의 간격을 달리는 겨울에게, 발작 같은 사격이 쏟아졌다. 따다다다닷! 따다닷! 대개는 엉터리였다. 다만 하나, 위협적인 연사가 있다. 총탄 박히는 궤적, 연속으로 튀는 흙이 가까워진다. 다음 엄폐물 전에 몸에 닿을 것 같다. 겨울이 무너지듯 무릎 꿇었다. 쿵! 체중이 땅을 찍는 흔들림 속에서, 한 순간의 조준선 정렬과 본능적인 사격. 투두둑! -빡!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소년의 시야가 확 돌아간다. 귀가 먹먹하다. 윙- 하는 이명(耳鳴)과 고막의 떨림. 겨울은 포복 전진하여,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댔다. 방탄모를 만져본다. 장갑을 끼고도 요철이 느껴졌다. 총탄이 측면을 치고 지나간 것 같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겨울이 쏜 삼점사는 상대에게 명중했다. 그 순간 상대의 총구가 튀면서, 사선이 방탄모에 걸린 것이다. 「전투감각」의 「통찰」을 벗어난 무작위 변수였다. 죽을 뻔 했다. 머리가 뒤늦게 욱신거린다. 이래서 투사병기가 위험했다. 그래도 마음이 담담한데, 몸은 아니었다. 상황연산이 부여한 손의 떨림. 겨울은 꾹 힘주어 진정시켰다. 낭비한 시간은 다섯 번의 깊은 호흡. 무전기가 울었다. [데이비드 액추얼!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데이비드 원! 현재 적과 교전 중이다! 브레이크!] 제프리가 겨울을 호출하고 있었다. 잡음이 심하다. 겨울이 즉시 무전기를 잡았다. "계속해요, 제프리!" [적 규모, 보병 약 오십! 적은 박격포의 화력지원을 받고 있다! 박격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1선 진지 상실! 2선으로 옮기겠다! 당소를 지원 가능한지 확인 바란다, 오버!]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 테니!" 무전을 끝내고, 겨울이 뛰쳐나갔다. 적의 반응은 느렸다. 여섯 명이 살아남았는데, 위치가 제각각이었다. 겨울 때문에 흐트러진 대열을 미처 회복하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분대원들이 전면을 압박했다. 덕분에 겨울은, 전보다 훨씬 더 긴 거리를 달렸다. 마침내 적의 대각선 뒤쪽을 점한다. 이제 적은 어느 쪽으로도 피할 수 없었다. 경악하는 적들이 겨울의 조준경을 채웠다. 당겨지는 방아쇠. 투두두두둑! 탄피가 정신없이 뿌려진다. 쓰다 남은 탄창이 1초 만에 비었다. 그 1초가 두 명을 죽였다. 겨울이 탄창멈치를 누르며 총을 홱 비틀었다. 빈 탄창이 관성으로 튕겨진다. 새로운 탄창을 한 동작에 끼웠다. 그리고 다시 완전자동사격. 철컥! 다섯 발 째에 쇳소리가 났다. 복사기에 종이가 씹히듯이, 실탄이 약실에 걸려있었다. 겨울이 연거푸 장전손잡이를 당기고 놓는다. 그래도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약실에 넣어 힘으로 긁어낸다. 우그러진 실탄 하나가 밖으로 버려졌다. 급하게 다시 조준하는데, 기다릴 땐 없었던 외침이 뒤늦게 터져 나온다. "으아아아! 항복! 항복해라! 아니, 항복한다! 쏘지 마! 살려주세요!"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전면에서 쏟아지는 사격은 그대로였다. 분대원들이 소음기를 쓰고 있었으므로, 총성보다는 나무 파편 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겨울이 무전기를 눌렀다. "데이비드 쓰리! 사격중지, 사격중지! 적이 투항한다!" 살벌한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투항자는 여전히 항복이라고 반복해서 외치고, 다른 한 명은 목 놓아 울었고, 남은 두 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했다. 분대원들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먼 곳의 총성이 은은히 계속된다. 겨울이 단독으로 돌입했다. 좌우를 번갈아 겨누면서, 구보에 가까운 속도로. 살아남은 적의 숫자는, 겨울의 셈보다 하나가 적었다. 목 찢어진 사람이 나무뿌리 위에 널브러져있다. 벌어진 입 안에 피가 고여 있었다. 항복한 사람, 우는 사람, 떨어진 곳에서 힘겨워 보이는 마지막 한 사람. 그는 핀 뽑은 수류탄을 들고 있었다. "멈춰! 움직이지 마!" 겨울이 강하게 윽박지른다. 바로 쏘고 피하지 않는 건, 저항을 포기한 다른 두 명 때문이었다. 다가오던 분대원들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험악하게 흩어진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욕설이 겨울의 귀까지 들렸다. 항복하겠다고 했던 병사도 침을 흘리며 몸을 피한다. 우는 병사만이 위험권에 남아있었다.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다. 겨울이 방아쇠에 슬며시 무게를 실었다. 조금씩 당겨진다. 이제 곧 격발될 것 같을 때, 비로소 멈추었다. 수류탄을 쥔 병사는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적어도 얼굴만큼은 고요하다. 어두운 고요였다. 그는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는다. "죄송합니다." 용수철 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수류탄을 끌어안고, 앞으로 넘어졌다. "에밀리." 죽기 직전의 한 마디. 이어진 폭발은 작은 들썩임이었다. 터지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가 그냥 움찔거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살점 섞인 피가 뭉글뭉글 배어 나온다. 빗물에 흐려지는 붉은 색조. 촉박한 와중에도, 겨울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륵, 그륵, 끅. 불행한 병사는 바로 죽지 못했다. 소년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가 깨진다. "구속해요." 겨울의 지시에 따라, 분대원들이 두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오는 길에 다른 생존자는 없었어요?" 겨울이 묻자, 엘리엇이 무겁게 답했다. "가망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고통은 덜어줬죠." 하긴 이런 날씨에 이런 환경이다. 팔다리가 끊어졌거나, 내장이 흘러나오는 생존자는 유예된 사망자일 뿐이었다. 엘리엇이 수류탄으로 자살한 병사로부터 인식표를 떼어냈다. 다른 병사들은 주위에서 탄약과 수류탄을 챙긴다. 남은 게 얼마 안 되어도, 필요한 일이었다. 분대원들은 겨울보다 탄약소모가 극심했다. 준비된 대원들에게 겨울이 말했다. "지금부터 600미터를 달릴 거예요. 이 악물고 쫓아와요." "하아." 분대장 엘리엇의 한숨. 다들 지쳐있었다. 몸을 떨고 있다. 포로들은 그보다 더 좋지 않았다. 게다가 양팔이 등 뒤로 단단히 묶인 상태다. 제대로 쫓아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버릴 수는 없어. 무전기 잡음이 심해.' 시작부터 오르막이었다. 그래도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군말 없이 따라붙었다. 속도는 자꾸만 느려졌다. 반쯤 정신이 나간 포로가 자꾸만 넘어졌고, 분대원들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중에는 거의 걷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가 되었다. 200미터의 경사를 전력질주로 올라가는 건, 현재로서는 겨울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경사를 다 오르고부터는 사정이 좀 나았다. 굴곡이 완만한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오른 겨울이 전장을 관측했다. 해리스 대위는 아직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이런 비 아래에서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겨울은 대위가 펼친 공격과 실패의 흔적들을 읽었다. 뻥! 묵직한 포성이 천둥을 흉내 냈다. 직후, 능선 아래 엉뚱한 관목이 박살난다. '포탄이 얼마나 있을까?' 연달아 쏘지 않는 걸 보면, 넉넉하진 않으리라. 애초에 사람이 지고 옮겼을 양이었다. 그동안 겨우 올라온 병사들이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쉰다. "1분만 쉬겠어요?" "아닙......니다! 쿨룩! 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겨울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분대는 적의 측후방으로 파고들었다. 포성이 들렸던 방향을 쫓아, 겨울은 흔적을 더듬는다. 「추적」으로 강조된 흔적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지난 성탄, 또 다른 호수에서 실종자를 찾으려고 밀었던 기술이다. 마침내 찾아낸 발자국이 예상외로 얕았다. "데이비드 원, 데이비드 원.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데이비드......데이비드......데이비드 액추얼......영웅놀......사생아 새끼.......] "데이비드 원. 들립니까?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겨울이 제프리를 반복 호출했으나, 이제는 무전기가 먹통이었다. 서로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깝다면 모를까, 이제 무전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교신을 포기하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스치는 발상이 있었다. 소년은 병사들에게 쓸모없어진 무전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두 개만 줘요."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미끼로 쓰려고요." 겨울이 구속용 끈을 꺼내어 무전기의 송신버튼에 감았다. 이걸로 이 무전기는 배터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일 것이다. 여기에 다시 남은 하나의 무전기를 엮는다. 이건 버튼이 눌리지 않은 상태였다. 깨어진 대화와 무의미한 잡음이 새어나온다. "하! 변종 새끼가......보내는 메시지를......다시 송출하는 거로군요!" 창백한 엘리엇이 감탄하고는, 허리를 굽혀 위액을 쏟는다. 무리한 운동의 부작용이었다. "맞아요. 방해전파가 심하니까, 다들 무전을 안 쓰고 있을 거예요. 즉 이게 이 근처의 유일한 전파 발신원이겠죠." "설령 누가 들어도......방해전파와 구분도 안 갈 테고......말입니다." "혹시 폭약 가진 사람 있어요?" 내친김에 겨울은 플라스틱 폭약(C4)까지 챙겼다. 본래 적당량을 잘라서 쓰는 것이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쾅! 다시 한 번 터지는 포성. 거리가 가까워져서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들린다. 겨울이 분대와 함께 조용히 접근했다. "소리 내면 죽인다." 분대원 한 명이 포로들에게 으름장을 속삭였다.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었다. 겨울은 그 중 하나에 트랩을 설치했다. 시체가 무전기를 품도록 만들고, 거기다 폭약을 설치한 것이다. 전파를 쫓아온 트릭스터가, 건드리는 즉시 터지도록. 병사들은 어둡고 꺼림칙한 표정들이었다. 얼마 전까진 동료였던 자의 시체였다. 엘리엇도 머뭇거리며 말한다. "중위님. 이거 예전 같으면 국제법 위반입니다만......." "거북한 거 알아요. 하지만 그냥 두면 변종들의 한 끼 식사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움직이죠." 조금 더 이동하여, 마침내 전투현장이었다. 바로 정면에 박격포 진지가 있다. 그 외 스물 남짓한 병력이 비탈을 기어오르는 중이다. 현 위치에서 그들 모두의 등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은 분대를 산개시킨 뒤, 표적을 분배했다. 같은 표적에 여럿이 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서다. 준비가 끝났다. 겨울이 외쳤다. "사격!" # 92 [92화] #호숫가의 밤 (11), 산타 마가리타 호수 "사격!" 그 순간, 세상이 하얗게 타올랐다. 번개. 흑백의 빗속에서, 사선 끝의 병사들은 무성영화처럼 죽는다. 포복으로 비탈을 오르다가, 그대로 고개를 떨궜을 뿐. 단말마 대신 빗소리였고, 잠드는 것과 같았다. 간결한 죽음이다. 뒤늦게 찾아온 우레가 다른 모든 소리를 찢어발겼다. 겨울이 노린 것은 포진지의 두 사람이었다. 특히 부포수. 그는 뒤돌아 앉아있었다. 다만 포탄을 다루느라 이쪽을 보지 못했다. 부포수는 초탄에 안구가 터졌다. 경악으로 돌아보는 좌측의 포수. 그의 미간에 차탄이 박힌다. 충격에 머리가 들렸다. 죽은 채로 하늘을 보다가, 느리게 뒤로 넘어갔다. 생존자들의 반격이 쏟아졌다. 방탄복에 맞았거나, 부상 입고도 살았거나, 아니면 아예 빗나갔거나. 숫자는 아홉이었고, 엄폐물을 찾았다. 그들이 긁는 연사는 수백 발이었다. "엄호해요!" 겨울이 포진지를 향해 달린다. 자세 낮춰 뛰는 와중에, 머리 위로 피잉 핑 총탄이 날아갔다. 엘리엇 분대의 엄호사격이다. 적도 필사적이었다. 겨울은 옆으로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비껴낸 사선예고가, 한 줄기 파공성을 남기고 지워진다. 흙투성이가 되어 포진지로 굴러 떨어진 겨울. 부포수가 핀 뽑은 포탄을 쥐고 있었다. 사후경직이 멀었으므로, 시체는 부드럽게 포탄을 내주었다. 박격포는 포신뿐이었다. 수동격발기가 달려있다. 소년이 포신을 거꾸로 흔들었다. 포구로 들어간 빗물이 쏟아진다. 그러고서 포구에 포탄을 넣었다. 스르릉, 미끄러지는 서늘한 소리. 포신 중간을 손으로 잡고, 다른 손은 격발기를 쥐고, 포구 반대쪽을 땅에 박는다. 겨울은 반격하는 자들을 겨누었다. 격발기 방아쇠를 당긴다. 쾅! 비록 「중화기숙련」은 없었으나, 직접 보고 쏘는 가까운 거리였다. 포탄은 제대로 꽂혔다. 그러나 터지지 않는다.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진지 모서리가 무너졌다. 무른 땅에 박히는 총탄들. 적들이 총만 내밀고 쏘는데도 위협적이었다. 겨울이 응사했다. 사람이 아니라 포탄이 목표였다. 엄폐물 뒤에서 번뜩이는 폭발. 바위 위로, 나무 옆으로 나와 있던 총구들이 축 늘어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진동 탓인가. 포탄 터진 자리, 땅이 움직였다. 비탈이 흐른다. 숨어있던 적병들이 기겁을 하고 뛰어나왔다. 그 아래에 소년이 있었다. '이런.' 겨울도 피해야 했으나, 적에게 등을 내줄 순 없었다. 이 순간에도 악의가 빗발친다. 여섯 명이었다. 급하게 대응했다. 투두둑! 가슴을 맞은 병사가 넘어졌다. 죽지 않았다. 그러나 쫓아온 땅에 매몰된다. 엘리엇 분대도 필사적이었다. 다른 적들이 줄줄이 넘어졌다. "중위님! 피하십쇼!" 누구의 외침인지 분간이 안 간다. 할 겨를이 없었다. 성난 바위가 맹렬하게 굴러왔다. 겨울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회피는 늦었다. 오히려 정면으로 도약한다. 구르는 바위 모서리, 그 끝을 박차는 순간, 푹 빠지는 느낌이었으나, 재도약에 성공했다. 간신히. 세 번째 도약은 물을 밟고 뛰려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한 발자국을 뗀다. 그것이 끝이었다. 거친 흐름이 발목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목 아래까지 파묻힌다. 가슴이 짓눌렸다. 겨울은 숨이 턱 막혔다. 범람하는 감각 속에,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지워졌다. 손을 뻗는다. 하늘을 향해. 하늘이 사라졌다. 밤보다 짙은 어둠이었다. 땅의 질감이 손끝까지 차올랐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안에 흙이 차있었다. 눈이 따가웠다. 숨을 쉴 수 없고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난 심장이 없는데.'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모든 감각이 상황연산의 결과 값에 지나지 않는다고, 뇌리에 항상 맴돌고 있었다. 이게 희미해질 때는 드물다. 이번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겨울은 임박한 죽음에 개의치 않고, 그 뒷일도 생각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몰두했다. 질식도 생각 지우기에 도움이 됐다. 동기화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높은 동기화율은 곧 강도 높은 고통이었다. 「경고(관제 AI)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나치게 높은 「감각동기화」는 정신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 관제 AI는 <<고통>>에 대한 동기화율 재설정을 권고합니다.」 하지 마.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소년이 되뇌었다. 「경고(관제 AI) : 세계관 진행자의 정신건강을 위한 경고기능은 설정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사후보험 가입자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본 관제 AI의 존재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경고(관제 AI) : 」 머리에 직접 울리던 음성이 끊어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겨울은 착각의 끈을 놓쳤다. 팍, 팍.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린다. 차고 날카로운 것이 손등을 찍었다. 차가운 흙 너머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린다. 작고 답답해서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는 체감보다 가까웠다. 찍힌 손 근처부터 시작해서, 땅의 무게감이 덜어졌다. 이윽고, 손가락 사이에서 팔꿈치까지, 비와 바람이 느껴진다. 잠깐이었다. 누군가 소년의 손과 팔을 잡고 힘차게 끌어당겼다. 한 번에 상반신까지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겨우 재개되는 호흡. 조금 남은 흙이 기도로 들어가, 거친 사레가 이어졌다. "이런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중위님?" 겨울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상대가 크게 안심하는 기색이다.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소년장교를 부축하려 한다. 됐다고 사양한 뒤에, 소년은 빗물로 스스로를 씻어냈다. 워낙 세찬 비라 오래 걸리진 않았다. "잠깐 손 좀 주십시오. 붕대를 감아드리겠습니다." 엘리엇이 말했다. 겨울은 그제야 상처를 확인한다. 왼쪽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다.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지장은 없었다. 겨울이 잠자코 엘리엇에게 손을 내주었다. 엘리엇이 허리춤의 응급 키트에서 거즈와 붕대를 꺼냈다. 행동이 워낙 급한지라 떨어트리는 게 더 많았다. "죄송합니다. 조심하려고 했는데, 서두르다보니 실수를 해버렸습니다." 한 병사가 겨울에게 사과를 건넸다. 삽날로 손등을 찍은 본인인 것 같다. 그는 아직 전투가 계속되는 방향을 경계하면서도, 힐끔힐끔 돌아보고 있었다. 겨울이 그를 안심시켰다. "사과할 필요......없어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말이 툭툭 끊긴다. 호흡 탓이었다. 응급처치가 끝난 뒤, 겨울은 장비를 점검했다. 야시경은 축이 조금 비틀렸어도 정상 작동한다. 홀스터의 권총은 무사했고, 단지 소총이 성치 않았다. 액세서리로 달려있던 레이저 조준기가 보이지 않는다. 총열과 약실엔 흙이 들어갔다. 무릎 꿇고 앉아 빠르게 분해한다. 소음기를 분리한 총열을 붙잡고 강하게 휘둘러, 관성으로 흙을 떨친다. 그리고 수통을 들이붓는다. 나중에 잔뜩 녹슬겠으나, 어차피 비 맞은 총이었고, 당장이 중요하다. 조립은 순식간이었다. 탄창을 재결합하고 장전손잡이를 두 번 당겨, 탄 배출에 이상이 없는 것까지 확인했다. "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중위님,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후방을 맡지 않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표정이......." "엘리엇이 생각하는 거랑 달라요. 다른 이유에요. 아주 개인적인......." 엘리엇이 근심했으나, 지휘관은 겨울이었다. 거듭 병력을 상실한 적은, 이제 숫자로도 소대를 압도하지 못했다. 제프리 소대의 방어선, 그리고 겨울이 이끄는 엘리엇 분대가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적은 부비트랩 지대에 끼어있었다. 맹목적인 지휘로 몰아붙인 형세다. 수문 개방이 불가능할 경우 댐을 폭파시키는 경우를 감안했기에, 공병들은 많은 폭약을 휴대했다. 그게 모두 트랩으로 깔려있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엘리엇 분대에서 두 명이 연속으로 쓰러졌다. "악! Fuck! 맞았다! 나 맞았다고!" 비명은 하나였다. 겨울이 방금 쏜 적을 찾는다. 마지막 발사 섬광이 번뜩인 뒤, 어둠이 깔린 방향이었다. 조용하다. 탄창을 교체하는 중인가? 겨울이 침착하게 기다렸다. 빗발이 워낙 굵다. 야시경으로 열원을 포착하기는 먼 거리였다. 타타탕! 총성이 울려 퍼지는 즉시, 겨울이 조준점을 수정했다. 풀 오토로 여덟 발을 갈긴다. 명중여부를 확인할 순 없었다. '죽었겠지.' 「전투감각」은 긍정적이었다. "업스턴! 업스턴! 빌어먹을!" 엘리엇이 시신을 붙들고 절규한다. 다른 쪽에서는 부상자에 대한 처치가 이루어지는 중. 분대 화력이 순식간에 급감했다. 겨울이 사격으로 적을 견제하며, 사망자를 살폈다. 탄이 코를 뭉개고 올라갔다. 관통한 탄자가 방탄모에 막혀 날뛰었나보다. 깨진 뒤통수에서 곤죽이 된 뇌가 흘러나왔다. 겨울은 전사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지축이 흔들렸다. 배후로 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분수령보다 높게 솟아오르는 토사(土砂)의 분수가 보인다. 폭음에 묻혀 듣지 못했던 것이, 뒤늦게 귀에 잡힌다. [끼이이이이이이이-] 철판을 긁는 것 같은 날카로운 잡음. 겨울이 무전기의 볼륨을 줄였다. '미끼를 물었구나.' 방해전파, 혹은 트릭스터의 단말마가 무전기를 꽉 채웠다. 높낮이가 수시로 바뀌는 불협화음이 십여 초 정도 지속되더니, 뚝 끊어진다. 통신망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즉사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 플라스틱 폭탄 막대 두 개를 쑤셔 박은 함정이었다. 가까이 있었다면, 터지는 순간 갈가리 찢겨 죽었어야 정상이다. 단말마 따위 내지를 틈도 없이. '아니. 교활한 놈이니, 수상하게 여겼을지도.' 직접 건드리는 대신 다른 변종을 앞세웠을 가능성이 있었다. 같은 미끼를 다시 쓸 땐 조심해야겠다. 이놈이 죽어가며 방출한 방해전파 속에는, 자신을 죽인 함정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전파가 닿는 범위에 다른 트릭스터가 없기를 바라지만, 확신은 금물이었다. "개새끼들! 다 죽여 버려!" 격노한 엘리엇의 외침. 적이 엄폐한 수림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포로들이 공포에 떨었다. 앞서 정신이 혼미했던 쪽은 대변을 봤다. 바지가 불룩해진다. "그만! 사격 중지! 적이 물러나고 있어요!" 겨울이 병사들을 제지했다. 부상당한 병사가 이를 갈았다. "그럼 쫓아가서 죽여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피하는 게 먼저에요. 다들 저길 봐요." 전장 저편의 어둠을 가리키는 겨울. 소년장교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병사들은, 잠시 후에 몸서리를 쳤다. 어둠과 구분하기 힘들지만, 자세히 보면 무수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트릭스터가 죽어, 아무렇게나 퍼지고 있는 변종집단이었다. "누구 조명탄 있어요?" "신호용 유탄 말입니까? 제게 세 발 있습니다만." 유탄사수가 나섰다. "잠깐 빌릴게요." 겨울이 그의 소총을 넘겨받았다. 총열 아래에 부착된 단발식 유탄발사기에 적색 신호탄부터 장전한다. 유탄 전용 가늠자를 세우고서, 겨울은 해리스 대위의 병력이 물러나는 지점을 조준했다. 퉁! 방출된 유탄이 선명하게 날아간다. 적의 사격을 우려한 겨울은, 먼저 쏜 조명탄이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위치를 바꿔 남은 두 발을 마저 쐈다. 정확하게 조준할 필요는 없었다. 겨울이 유탄사수에게 총을 돌려주며 말했다. "잘 썼어요." "......." 병사들은 한 순간에 분노를 잊은 듯 한 얼굴들이었다. "중위님......이건, 그러니까......." 엘리엇이 머뭇거렸다. 말을 더듬는다. 겨울은 그를 책망할 생각이 없었다. 직접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도, 인간이 저런 식으로 죽어선 안 된다고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이 저지른 죗값이라고 생각해요. 항복을 권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상병은 긴 한숨으로 미련을 지운다. 적은 아직 겨울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애초에 변종집단의 접근을 알기는 할까? 해리스 대위가 너무 빨리 무너져도 곤란했기에, 겨울은 적당한 표적을 탐색했다. 구울은 배제. 보통의 변종 중 하나를 겨냥하여, 단발사격을 가한다. 캬아아아아아! 일부러 빗맞도록 쐈다. 총상을 입은 변종이 길게 포효한다. "이제 복귀하죠." 겨울이 분대를 선도했다. 사망자 유해를 들어 올리려고 하는데, 다른 병사가 기겁을 하며 빼앗았다. "중위님은 부상자시잖습니까!" "부상? 아, 겨우 이거요?" 삽날에 찍힌 손에서 아직도 피가 배어나온다. 붕대가 뻘겋게 물들었고, 비에 희석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메고 움직이는 데엔 지장이 없는데. 병사의 표정을 보고, 겨울은 설득을 포기했다. 이제 겨울이 제프리와의 교신을 시도했다. "데이비드 원, 데이비드 원.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들립니까?" [.......] 채널에 잡음이 없는데, 답변도 없었다. 잠시 후, 겨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주파수를 바꾸고 다시 시도하니, 들려오는 제프리의 목소리. [당소 데이비드 원! 데이비드 액추얼! 아니, 중위님! 무사하십니까?] "전 괜찮은데, 전사자와 부상자가 하나씩 나왔어요." [......그것 참.......] "제프리. 그쪽은 어때요?" [떠나신 뒤 아직까지 죽은 놈은 없습니다만, 곧 생길 것 같습니다. 포탄에 당해서 다리가 없어졌거든요.......] 잠시 침묵한 뒤, 제프리가 다시 말한다. [아무튼 지원을 생각보다 빨리 해주셔서 살았습니다. 공격 들어가시는 게 보이더군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지금 대규모 변종집단이 접근하고 있어요. 병력을 사무실로 철수시키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철수요? 경계선을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킬 순 있나요? 탄약 여유가 얼마나 있는데요? 변종이 꽤 많아요." [아니 뭐, 넉넉하진 않습니다만.] "그럼 내 말대로 해요.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해리스 대위가 대신 싸워주는 중이니. 나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도로를 따라 올라갈게요. 100미터 전방에서 다시 한 번 교신할 테니까, 오인사격 없도록 주의하세요." [알겠습니다. 얼른 오십쇼.] 겨울은 교신을 끝마쳤다. 등 뒤에서 총성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 93 [93화] #호숫가의 밤 (12), 산타 마가리타 호수 사무소에 복귀했을 때,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다리 없는 병사가 헐떡였다. "중위님. 저는, 못 구해주십니까?" 겨울이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페이지." 병사, 스탠 페이지는 화기분대의 기관총 사수였다. 전투 막바지에, 박격포탄이 무릎 아래를 뜯어갔다. 그 외에도 몇 개의 파편이 박혔다. 손 쓸 방법이 없다고, 의무병은 치사량의 모르핀을 준비했다. 그것을 겨울이 받았다.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페이지가 흐느낀다. "이상, 하군요." "뭐가요?" "중위님, 이랑, 다니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 "춥고, 아픕니다." 병사는 불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반대편에 산모와 의무병이 있었다. 산모가 병사와 같이 흐느낀다.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병사를 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의무병이 산모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놓는다. 제프리가 물었다. "이봐, 페이지. 남기고 싶은 말 같은 건 없나......?" "죽고, 싶지, 않아." 창백한 입술이 달싹거린다. 두 눈 풀린 그는 이미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겨울이 모르핀을 주사했다. 하나씩, 하나씩. 병사의 얼굴이 이완된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으으음, 크흠......." 몇 분에 걸쳐, 차츰 길고 완만해지는 호흡. 점점 더 느려지다가, 희미해져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잠드는 것 같은 죽음이었다. 시체 가방이 고작 하나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입고 있던 우의로 덮어놓았을 뿐이었다. 이제 그 곁에 세 번째 사망자를 눕힌다. 동료들이 짧게 묵념했다. 눈물을 아낀다. 몇몇 민간인들의 기도도 있었다. 기지로 복귀한 뒤에, 다시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창밖에서는 총성이 여전했다. 이따금씩 폭음이 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빈도가 줄어든다. 아주 희미하게, 비명과 괴성이 뒤섞인 것도 같았다. 얼마 가지 않겠다. 겨울은 의무병을 조용한 구석으로 불러냈다. "화이트. 산모는 어떤가요?" "교전 개시 직후부터 진통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자궁 입구가 열리는 단계로 추정됩니다."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무표정했던 의무병이,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자 묵직한 피로감을 드러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멈칫거린다. 끓인 물에 깨끗이 씻고서, 따로 소독한 손이었다. 주먹을 쥐고, 눈을 감았다가, 한숨 쉬며 이어 말한다. "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샘 휴스턴의 교육은 전부 이수했습니다만, 그 중에 산부인과 과정은 없었습니다. 총알을 뽑는 것과 아기를 받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란 말입니다......." 포트 샘 휴스턴은 미 육군 의무학교 소재지였다. 여기서 행하는 의무병 교육과정은, 모두 수료해도 응급의료(Paramedic) 수준에 머문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해해요." "출산보조에 관해서는 그저 의무연대에서 주워들은 것들만 알 뿐입니다. 그런데도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저 사람들이 믿는 게 저 뿐이니까요." "......." "빌어먹을! 제가 모든 걸 망칠까봐 두렵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괜찮은 거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현기증이 납니다. 차라리 변종들과 드잡이 질을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맥이 잠시 끊어졌다. 겨울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저 들어주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숨죽인 절규로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고, 화이트가 다시 하는 말. "산모의 상태가 많이 나쁩니다. 체온이 38도입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항생제를 먹였으나 아직 효과가 없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근손실도 심각하더군요. 자궁이 제대로 수축할지 의문입니다. 영양부족과 감염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짐작조차 힘듭니다. 높은 확률로 난산이 되겠군요. 산모와 태아 모두......어렵다고 봅니다. 위급 상황에서의 절개수술은 제가 자신이 없고요. 게다가 산모가 출혈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이 때 들리는, 억제된 신음 소리. 산모가 통증을 참고 있었다. 남편이 열심히 마사지를 했다. 몇 시간째일까. 모든 동작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필사적이었다. 의무병은 하기 힘든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가망 없는 사람은 포기하는 게 원칙이었다. 스탠 페이지를 편히 죽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의 눈을 보고, 속을 읽고, 겨울이 고민을 덜어주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요.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포기할 순 없어요. 저기 있는 건 민간인이잖아요. 우리는 군인이고요." "......후우, 알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우시기를." "아, 화이트." 겨울은 돌아서려는 의무병을 멈춰 세웠다. "곧 변종집단이 접근할 거예요. 다른 쪽으로 유인하더라도, 이곳에 빛은 없어야 해요. 남은 과정을 야시경 쓰고 진행할 수 있겠어요?" 의무병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좌절. 그래도 고개는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불을 꺼버리면 실내온도는 어떻게 합니까?" "전투식량 발열 팩을 모아서 물을 데우죠." 겨울은 바로 소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캐비닛 서랍들을 빼서 물을 담아오고, 거기에 발열 팩을 채워 넣는다. 서른 한 명분의 사흘 치 전투식량에서 약 3백 개의 발열 팩이 나왔다. 팩 하나가 20분 이상 끓는점에 가깝게 유지된다. 물을 다시 넣으면, 전보다는 낮게, 그러나 뜨거운 온도까지 올라간다. 적당량 나누어 사용한다면 아침까지 버티기에 충분했다. 쓸 양을 가늠하는 병사들에게, 겨울이 말한다. "지금은 아끼지 말아요. 한 번 온도를 올리고 나면 유지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연기 빠지라고 열어두었던 강변 방향의 창 몇 개도 모두 닫는다. 창문이 수증기로 흐려지고 나면, 밤눈 좋은 강화종이라도, 어둠 깃든 건물 안을 엿보기 어려울 것이다. 제프리가 겨울에게 다가왔다. 바깥에 한 번 귀 기울인 다음, 말한다. "해리스 대위는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하, 당해도 싸지.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뒈지다 만 것들이 지나칠 때까지, 불 끄고 조용히 기다립니까?" "아뇨. 조용하긴 힘들겠죠. 산모도 있고. 아무리 강물이 시끄럽고 날씨가 이렇다지만, 저것들 중에 귀 밝은 놈이 하나라도 있으면 위험해요. 내가 나가서 유인할 생각이에요. 바로 눈에 보이는 목표가 있어야, 사소한 소음에 집중하지 않겠죠. 지들 스스로도 요란해지겠고." "유인이요? 그거야말로 엄청 위험한데요." "그렇지 않아요. 강 건너에서 끌고 다닐 작정이라." "아아." 살리나스 강 상류의 폭은 약 10미터 가량. 댐 수문 개방으로 더욱 거칠어진 유속을 감안할 때, 변종들이 엄두를 못 낼 너비다. 변종의 강화등급에 따라서는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 '그래봐야 고작 한둘이겠지.' 그쯤, 어떻게든 처리할 능력이 있다. 구울 같으면 착지 전에 머리를 날려버릴 것이고. 걱정거리는 아니라고 여기며, 겨울이 말했다. "바깥에 있는 병사들에게 줄 몇 개 걸어두라고 해요. 잠시 후에 건너가게끔." "줄이라......아까보단 쉽겠군요. 이번엔 얼마나 데려가시겠습니까?" "한 개 분대요. 제프리가 알아서 준비시켜요."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만, 또 한 개 분대 만요? 저 건너편에서도 언제 변종들이 나타날지 모르는데......그러지 마시고 좀 더 데려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듣자하니 오시는 길에 생매장 당할 뻔 하셨다면서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엘리엇이 말해주던가요?......들었으니 알 텐데요. 병력 규모와 무관한 사고였어요." "만약을 대비하자는 거죠." "내 말대로 해요. 괜찮을 거예요. 무엇보다, 민간인 보호가 최우선인걸요." "차라리 제가 나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맨날 놀고먹는 소대장이라고 놀림 받는데 말입니다." "못 미더워서 안 돼요." "아니,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진담 같은 농담에 투덜거리면서도, 제프리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무전으로 외부 경계 병력에게 지시를 내리고, 상황을 전파하고, 출동 인원을 준비시킨다고 자리를 비켰다. 출발 전, 이동계획과 복귀 불능시의 합류지점을 다시 합의해야 할 것이다. 이젠 민간인들을 상대할 차례였다. 이들은 아직 상황을 모른다. 짐작만 하고 있을 뿐. 오랜 시간 어둠 속에 머무를 사람들이니, 불안은 줄일수록 좋았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이 역시 겨울의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중위님이 직접 유인을 하신다고요?" 설명을 듣고, 보안관과 함께 기습했던 노인이 질문했다. 겨울이 긍정한다. "네. 현재 동쪽 능선 너머에서 해리스 대위와 변종집단의 교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소리를 들어볼 때 거의 끝난 것 같지만요. 사실 여기가 지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서쪽은 살리나스 강 상류에, 북쪽은 댐에, 동쪽으로는 호수에 막혀있어요." "즉 변종들이 배회하다가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시군요. 혹시 해리스 대위가 이겼을 가능성은 없나요?" 이번에는 보안관, 캐슬린이었다. 겨울은 재차 끄덕였다. "변종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해리스 대위는 가망이 없었어요. 싸우고 남은 놈들이 남쪽으로 빠지면 다행인데, 기대하기 어렵겠네요. 그래서 유인이 필요한 거고요." 보안관과 조금 떨어져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손 하나가 올라왔다. 수염 덥수룩한 남자다. 옷이 무척 헐렁했다. "그럼 우린 여기서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를 버리시려는 건 아니고요?" "설마요. 전 소수 인원만 데리고 나갈 예정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여러분과 함께 남아있을 거예요. 절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년이 온화한 미소를 만들었다. 한계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도, 명성 높은 소년장교의 미소는 호소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목소리, 달갑잖은 질문이 나온다. "변종이 없는 지금, 강을 건너서라도 도망갈 수 있지 않나요? 제 말은, 어디든 좀 더 안전한 곳으로요!" "부인, 바깥이 무척 춥습니다. 당장 이동하기 어려워 보이는 분들이 많아요." "우린 문제없어요!" 그녀는 크게 말했다. '우리'의 범위가 명확했다. 몇몇은 싫은 표정 짓고도 가만히 있었다. 겨울은 마음 상했을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요청한다. "목소리 좀 낮춰주세요. 무리에서 이탈한 놈들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한 얼굴은 아니었다. 초조함이 느껴진다. 갈고 닦은 이기심과는 달랐다. 보안관, 그리고 그녀와 벗한 노인에게서는 분노가 엿보였다. 캐슬린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는다. 시선은 소년장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상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죽으라고 할 순 없어.' 아사 직전의 식인에는 어느 정도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소년이 생각하기에, 누군가의 죄가, 온전히 그 사람의 책임인 경우는 드물었다. 창 밖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총성이 멎는다. 「전투감각」이 포착한 방위가 「암기」한 지도와 겹쳐졌다. 겨울이 남은 시간을 추산했다. 오차범위가 크다. 못쓸 정도는 아니었다. "길게 말씀드릴 여유가 없네요. 당장은 제 결정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를 믿어주지 않으시면, 저도 여러분을 지켜드리기 어렵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중위님!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는 건 불공평해요!" "이 이상은 임무수행에 방해됩니다. 자중하세요, 부인. 모두가 위험해져요." 겨울의 음색이 달라지자, 여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물이 글썽거린다. 손바닥 만 한 책자를 가슴에 품고 눈을 감는다. "불은 끄겠습니다. 변종이 빛을 보면 곤란하니까요. 어둡고 긴 시간이 되겠지만, 부디 침착하게 견뎌주세요. 살아남게 해드릴 테니." 아직까지 타오르던 장작불에 찬물이 부어졌다. 촤아아악! 거센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숯 냄새가 물씬 풍겼다. 산모 주위에는 적외선 조명 여섯 개를 배치했다. 더 많이 놓으려고 하자 의무병, 화이트가 거부한다. 야간투시경은 눈에 부담을 준다. 너무 밝아도 산모를 돌보는 데 무리가 생겼다. 리버만 하사가 소년장교에게 지도를 가져왔다. "소대장과 논의해서 이동경로와 합류계획을 구상해봤습니다만, 어떠십니까?" "음....... 괜찮네요. 이대로 가죠." 딱히 손 볼 것이 없어, 겨울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지도에 그대로 그려 넣었다. 스윽, 슥, 슥. 「독도법」 보정으로 금세 끝난다. 이어 제프리가 다가왔다. "엘리엇 분대는 손실이 심해서, 대신 헤르난데스 분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인원은 일곱입니다. 혹시 몰라 화기분대의 로켓이랑 기관총을 하나씩 넘겨줬습니다. 어차피 여기서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좋아요. 변종집단의 규모에 따라서는, 지형에 의지해서 쓸어버릴 수도 있겠네요. 다들 지금 어디 있죠?" "도하 준비 중입니다. 중위님만 가시면 됩니다." 나가기 전, 몇 사람이 소년을 배웅했다. 제프리와 리버만이 무운을 빌어준다. 민간인 중에서는 보안관과 노인이 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두 명의 병사가, 그들 뒤에서 만일을 대비한다. 겨울이 두 사람을 들여보내려고 했다. "왜 일부러 비를 맞으세요." 노인은 겨울의 얼굴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말했다. "중위님.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무슨......?"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그리고......당신의 나이로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유감입니다." 은성무공훈장 수여식 이래 오랜만에 듣는 인사말이었다. 그때는 저널이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겨울이 묻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채프먼, 더글러스 채프먼입니다." "당신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채프먼 씨." 겨울은 노인과 악수를 나눴다. 보안관은 악수 대신 경례였다. 여전히 지쳤을 텐데, 찾아보기 힘든 힘과 절도였다. 겨울이 경례로 응하고서, 그녀에게 말한다.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온 세상이 다 미워질 거예요. 경험담이니까, 흘려듣지 마시고요." 캐슬린은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들어가세요." 그리고 병사들에게 눈짓한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면, 번쩍이는 번개와, 산등성이의 검은 그림자 위에, 하얗게 번뜩이는 역병의 전도사들. 겨울은 자신을 기다리는 병사들에게로 향한다. 이제 새벽이 깊어질 때였다. # 94 [94화] #호숫가의 밤 (13), 산타 마가리타 호수 추위는 군인의 유구한 벗이었다. 무르익은 겨울밤, 비를 맞는 병사들이 심하게 떨었다. 탕! 강변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다섯 발 째였다. 먹구름을 쏜 소년이, 총구를 느리게 내렸다. 물길 너머의 어둠을 경계하던 병사가 손을 들었다. "옵니다." 경계병이 포착한 건 최초의 하나였다. 겨울에게는 더 많이 보인다. 뜨거운 무리가 달려오는 중이다. 진보된 야간투시경의 녹색 세계에서, 인간을 닮은 죽음은 달아오른 쇳빛으로 도드라졌다.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규모가 못해도 수백이었다. '천 단위를 넘을 지도.' 헤아리는 사이, 문드러진 척후가 이쪽을 발견했다. 쿠와아아악! 온 몸으로 긴 소리를 지르고서, 맹목적으로 달려오다가 거친 강물에 가로막힌다. 급류의 너비는 고작 10미터.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구분되는 거리다. 변종은 또 한 번 울부짖고, 화난 사람처럼 좌우로 서성거린다. 분대장이 묻는다. "쏠까요?" "기다려요, 헤르난데스." 오는 족족 쏴 죽여도 괜찮겠으나, 급할 것은 없었다. 겨울이 말했다. "우리 임무는 유인이에요. 싹 다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저것들이 다 모일 때까지는 어차피 시간이 걸릴 거예요. 지금은 잠시 지켜보기로 해요. 변종들의 집단행동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는 드무니까요." "관찰입니까?" "네. 관찰. 그동안 개체의 지능이 증가한 건 경험했어요. 그게 무리지어 움직일 땐 어떻게 드러나는지 확인하고 싶네요. 저것들의 의사소통 수준이라던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는 방식 같은 것들 말예요. 봐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걸요?" "으음, 무슨 동물 실험 같군요. 뭐가 됐든 얼른 끝나길 바랍니다만." "다들 조금만 참아요." 겨울이 병사들을 격려했다. 당장 전투가 없을 것 같자, 엎드렸던 기관총 사수가 치를 떨며 자세를 바꿨다. 바닥이 너무 차가웠을 것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변종이 도강을 시도했다. 급류에 한 발 담갔다가, 다시 한 발을 내딛고, 세 번째 걸음에서 머뭇거린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이, 금세 허리까지 올라왔다. 기우뚱 기우뚱. 위태롭게 버티던 변종은 결국 뒷걸음질을 치고 만다. 뭍으로 나와, 손닿지 않는 숙주들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다. 그 소리가 더 많은 변종들을 끌어 모았다. 계속해서 늘어난다. 겨울은 파소 로블레스의 교회를 떠올렸다. 그 때 수준의 지능이었으면 막무가내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혹은 가장 앞에서 멈춰도, 뒤따르는 질량과 관성에 밀려 빠지거나. "쯧. 저놈들은 죽어서도 거슬리는군요." 귈레미의 우울한 불만은, 해리스 대위의 부하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투복을 입고, 방탄복을 두른 채로 잠식당한 시체들. 총을 멘 놈까지 보인다. 그러나 목에, 어깨에 걸고만 있을 뿐. 생전의 기억은 없고, 지능은 퇴화되었다. 살육자들의 말로였다. 병사 가운데 하나가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중위님. 저것들만이라도 먼저 처리하면 안 되겠습니까?" "잠깐만요. 내가하죠." "아니, 그러실 필요는......." 끝까지 듣지 않고,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야시경을 끌어올린다. 없어도 훤히 보이는 거리였다. 인상적인 광경이다. 변종들의 전신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높은 체온 탓이었다. 고개를 숙여 묵념하는 겨울. 등 뒤의 분대원들을 배려하는 행동이다. '리친젠이 그랬었지. 제사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몇 호흡 뒤에 눈을 뜬다. 따닥, 따닥, 따다다닥! 이빨 부딪히는 소리들. 감염된 병사 중 하나가, 고개를 꺾으며 이쪽을 응시하는 중이다. 시꺼먼 혀를 길게 뽑아 날름거렸다. 속으로 표적의 숫자를 센 겨울이, 모두가 사격권에 들기를 기다려, 급작사격을 가했다. 조준점은 모두 얼굴이었다. 서로 다른 스물 두 개의 얼굴에 연사의 속도로 구멍이 뚫렸다. 이마, 미간, 안구, 코, 인중, 인후. 혀 날름거리던 놈은, 입천장 뒤쪽 부드러운 연구개를 맞았다. 맞는 순간 움직임이 사라졌다. 입 밖으로 피가 주륵 흐른 뒤에 무릎부터 무너진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표적이 다 죽고, 남은 무리가 뒤늦게 소란스러워졌다. 애초부터 조용하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광란이었다. 처음 온 놈이 그랬듯이, 좌우로 성큼성큼 오가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지른다. 급기야는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다. 헤르난데스 병장이 말했다. "소름끼치는군요. 관찰이 필요하다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는 변종들의 협력을 보고 있었다. 서로의 손목을 붙잡아 물속으로 이어지는 사슬을 만든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맨 끝에서 급류에 버티는 힘이 중요하니까. 사슬은 결코 길게 늘어지지 못했다. "구울! 11시 방향에 다수의 구울입니다!" 눈썰미 좋은 지정사수의 경고. 겨울이 그 방향을 시선으로 더듬었다. 오래지 않아, 무리 사이에 끼어있는 잿빛 강화종들을 찾아냈다. 특수한 능력은 없어도, 평범한 변종보다 강인하고 영리한 것들. 그런데 개중 하나는 보통의 구울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구분하지 못해도, 겨울은 구분했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보다 등급이 한 단계 높았다. '베타 구울. 하긴, 등장할 때도 됐지.' 전에도 존재를 의심했던 적은 있지만, 실제로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겨울의 발견이 병사보다 늦은 것은, 다른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 저편에 육중한 움직임이 보였다. 어둠 속의 그림자이기에, 「전투감각」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놓쳤을 존재감이었다. 그럼블은 아니다. 정황증거였다. 그럼블이었을 경우, 변종이든 나무든 벌써 투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정체가 뭘까.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짐작이 안 가는데. 이번 세계관, 전과 다른 게 너무 많아.' 처음 겪는 일은 아니어도, 너무 잦은 게 문제다. 아는 것에 무리하게 짜 맞추는 대신, 겨울은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특수변종이라고 결론지었다. "어떻게 합니까? 바로 머리통을 날려버릴까요?" 노려지는 걸 감지했는지, 베타 구울이 다른 놈들을 방패삼아 뒤로 슬쩍 물러난다. 모르는 변화가 겨울을 망설이게 했다. 저것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시를 기다려요, 플레밍." "옙." 지정사수가 조준선으로 표적을 추적한다. 적의 숫자가 여전히 늘어나고 있었다. 종래에는, 처음 예상대로 1천을 넘게 될 것 같다. 트릭스터가 죽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분산되진 않았을 것이었다. 되도록 남김없이 끌고 갈 셈이다. 변종들은 여전히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줄지어 격류에 들락거리길 여러 차례.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독특하게 끊어지는 괴성이 긴 메아리로 반복된 뒤에, 변종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실체는 하던 짓의 응용이었다. 변종으로 이루어진 사슬 한 줄이 한계까지 늘어진다. 그 후에, 새로운 사슬이 그 옆으로 들어간다. 첫 줄에 부딪혀 느려진 유속 덕에, 둘째 줄은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셋째 줄이 늘어선다. 가장 깊은 수심이 코 아래였다. 다섯 번째 줄이 그 지점을 지나쳤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중위님! 명령을!" 분대장의 다급한 외침. 변종들이 강을 금방 건널 것처럼 보인다. 집단의 수가 많은 만큼, 다른 쪽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강변에 도달한 최초의 변종이, 물속으로 몇 걸음을 떼었더라? 겨울이 침착하게 명령한다. "앞쪽은 신경 쓰지 말아요! 중간을 끊어요! 나머지는 알아서 떠내려가게!" 병사들이 곧바로 이해했다. 연결이 뭍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쏜다. 파파파팍! 총탄이 연달아 수면을 때린다. 물 위로 나온 머리들이 줄지어 깨졌다. 가장 먼저 무너진 줄은 곧 다음 줄의 부담이었다. 집단으로 쓸려간다. 물 넘치는 제방, 혹은 도미노를 보는 것 같다. 끄워어어억! 우워어어! 허우적대는 변종들이 물거품과 함께 표류했다. 아비규환이다. 변종들이 잡을 지푸라기는 같은 처지의 변종들뿐이었다. 서로에게 기어오르려 발광한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강물이었다. 이 때 다시 울려 퍼지는, 성량 높고 특별한 괴성 한 줄기. 그러자 아직 수면에 남아있던 놈들이 부르르 떨었다.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다. 듣지 못한 일부만 여전히 발광이다. 겨울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모자랐다. '신진대사 억제? 그래봐야 익사를 지연시킬 뿐인데?' 뭍에 있던 변종들이 무더기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상류부터 하류 방향으로, 순서를 지키면서. 집단자살이 아니었다. 도약의 정점에서, 가슴을 한껏 부풀리고, 그대로 경직된다. 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 아래 잠겼다가, 부력으로 금세 떠올랐다. 발판이다. 빠르게 떠내려가지만, 넓은 강변이 모두 변종이었다.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것들을 밟고, 초당 수십 마리의 변종이 몸을 던졌다. 물보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병든 육신의 파도가 강을 뒤덮는 꼴이다. 수면이 시체를 닮은 부유물로 메워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 위로 새로운 변종들이 달린다. 강 이쪽을 노려보면서. 병사들은 지시 없이도 알아서 쏘고 있었다. 수류탄이 연달아 날아간다. "Frag out!" 경고성에 모두가 자세를 낮췄다. 수중에서, 수면에서, 강 건너 지표에서 터지는 수류탄들. 물기둥이 치솟아, 빗발보다 굵은 물방울들을 뿌렸다. 어두운 밤의 강물이 한층 더 검게 물든다. "와, 씨발. 잠깐만. 이건 무슨 엿 같은......!" 탄통을 갈면서, 기관총 사수가 욕설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는 겨울도 경악했다. 드문 동요였다. 일단 보이는 게 너무 압도적이었으니까. 이상을 느낀 것은, 10초 만에 탄창 세 개를 비우고 난 다음이었다. 철컥! 공이가 빈 약실을 치는 소리. 직접 막던 방향은 더 이상 견제할 적이 없었다. 재장전 대신, 곧바로 수류탄을 꺼낸다. 클립을 제거하고 핀을 뽑았다. 다른 위급한 쪽으로 던질 작정이었다. 겨울은 던질 곳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병사들도 하나 둘 상황을 깨닫는다. 격렬했던 사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뭐야 이게......." 귈레미의 어이없는 독백. 일반 변종은 근력이 강한 대신 움직임이 거칠다. 아무리 부유물이 많아도, 그걸 밟고 끝까지 달리는 경우가 없었다. 밟을 때마다 흔들리고 꺼지는 발판들이었다. 이건 멀쩡한 인간에게도 어렵다. 적어도 숙련자 영역의 「무브먼트」 보정이 붙어야 가능할 일.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물에 빠지는 숫자만 늘어난다. 부유물의 확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겨울은 반성했다. 내가 시야가 좁았구나, 하고. 사격을 하더라도 넓게 보아야 한다. 방금은 그러지 못했다. 쏘는 내내, 시계(視界)가 조준선 안에 갇혀 있었다. 지휘관은 일개 전투원과 다르다. 좋지 않은 실수였다. '이 정도 당황하기는 오랜만이었지.' 강 건너의 변종집단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당연하다. 천을 넘는 숫자라도, 초당 수십씩 빠지면 순식간에 소모된다. 뒤늦게 베타 구울이 소리를 지른다. 변종들이 무모한 투신을 그쳤다. 그래봐야 남은 수는 한 줌이었다. 듬성듬성 흩어져있다. 거기에 수류탄을 투척한다. 핀은 아까 뽑았으되, 아직까지 들고 있던 것이었다. 쾅! 폭발보다 넓은 살상범위에 걸쳐, 열일곱의 감염변종이 일거에 무너진다. 병사들이 나머지를 소탕했다. 잿빛 강화종은 바닥을 기었다. 부상을 입고도 살아서, 끈질기게 달아나려 시도한다. 직접 쏠까 하다가, 겨울이 지정사수를 불렀다. "플레밍. 저놈 잡아요." 보통보다 굵은 탄이 강화종의 머리를 연발로 때렸다. 부서진 머리뼈, 질척한 뇌수가 튄다. # 95 [95화] #호숫가의 밤 (14), 산타 마가리타 호수 작전목표는 달성했다. 더 이상 유인할 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분대는 다시 한 번 강을 건넜다. 해가 진 뒤 세 번째다. 다들 익숙한 모습으로 속도를 냈다. 검은 새벽의 강변에는 시체가 널려있었다. 듬성듬성. 숫자는 적다. 겨울은 분대원들에게 짧은 여유를 주었다. 미군 유해를 수습하는 시간이다. 수습이 운반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인식표 끊고 헬멧 카메라 메모리를 확보해요. 수첩 같은 게 있으면 내용을 살펴보고요. 결정적인 증거가 남아있을지도 몰라요. 비 안 맞게 조심하고요." 명령을 내리면서도, 겨울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군 사양(Milspec) 헬멧 카메라의 배터리 지속시간은 대개 4시간 안팎이다. 겨울 같은 경우, 예비 배터리를 남보다 많이 휴대한다. 국방부 공보처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작전현장에서 소년장교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원했다. 해리스 대위의 부하들은 겨울 같을 이유가 없다. 배터리가 진작 닳아 없어졌을 것이다. 애당초 원할 때 켜고 끄는 장비다. 증거를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수첩은 더더욱 그렇고. 해리스 대위가 제정신이었으면, 이 문제로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했을 터였다.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냐. 누군가 한 사람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필요한 일이었다. 민간인 학살도 모자라, 같은 미군 사이에서 섬멸전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이번 사건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증거는 많을수록 좋았다. 이게 겨울만의 희망사항은 아니었다. 분대장 조엘 헤르난데스가 하는 말. "뭐가 됐든 그럴듯한 걸 하나 건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무방해요. 있는 증거와 증인만으로도 부족하진 않을 걸요?" 톡톡. 겨울이 자신의 카메라를 두드려보였다. 일단은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인데, 그렇다고 빈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녹화된 자초지종만으로도 충분한 증거다. 대위와의 교신까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민간인들의 증언도 있을 테고. 매수? 강요? 말도 안 된다. 보도관제로 묻어버리는 게 현실적이다. 애국적 보도. 개연성은 높다. "중위님이니까 부족하지 않은 겁니다. 저희들에겐 불행 중 다행이군요. 다른 사람이 지휘관이었다면, 저희들로서도 복귀한 뒤가 엄청나게 걱정이었을 겁니다."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받을 취급은 뻔하다. 이유 없는 보직변경과 전출. 그 뒤에 이어질 위험한 임무들. 계엄정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그리고 필요한 행정이다. 인류멸망의 기로에서, 군에 대한 시민의 불신은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상념이 아득해진다. 겨울이 살짝 고개를 흔들어 현실로 돌아왔다. 병장에게 말한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요.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있는 그대로 공개할지도 모르잖아요. 뉴스가 너무 좋은 소식만 전해도 신뢰도가 떨어지지 않겠어요?" "제 말은, 중위님이 계셔서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겨울이 편안한 미소를 지어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해놓고 이런 말 하기는 우습지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뭡니까?" "위에서 나까지 같이 묻어버릴 거라는 걱정은 안 드나요?" 병장이 피식 웃는다. "그거야말로 어처구니없습니다." "왜죠?"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아님 엄청나게 겸손하신 겁니까?" "됐어요. 듣지 않아도 알겠네요." 겨울이 빠르게 총을 들었다. 두두둑! 지향사격으로 삼점사. 전탄 명중이다. 벌떡 튀어 병사를 덮치던 변종이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위기를 넘긴 병사가 한 박자 늦게 소스라쳤다. 으아아악! 소리 지르며, 뒤로 쓰러져 발작처럼 물러난다. 두둑! 두둑! 두두두두둑! 이미 죽은 시체에 갈겨대는 연사 한 탄창. 탄피가 쏟아진다. 다른 병사들도 기겁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젠장! 이 새끼가 죽은 척을 하고 있었어! fuck! fuck! fuck!" 겨울이 다가가서 그를 진정시켰다. "조용히. 그러게 왜 방심을 했어요? 이것들이 머리 쓰는 꼴을 직접 봐놓고 말예요." "죄, 죄송합니다. 처음에 중위님이 쏘신 겁니까?" "네. 나였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 끝났다고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봅니다." 이병은 부들부들 떨었다. 좀 심하게 놀란 것 같다. 귈레미가 한 마디 쏜다. "끝나긴 뭐가 끝나? 네가 막사로 복귀해서 해산명령을 받을 때까진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아. 이걸 잊으면 시체가 되어서 돌아가기 십상이지. 지휘관 잘 만난 줄 알아." "그쯤 해둬요." 병사가 진정할 때까지, 겨울이 잠시 등을 두드려주었다. 증거 수집은 곧 끝났다. 쓸 만 한 걸 건졌는지는 돌아가 봐야 알 일. 겨울은 병사들을 시켜, 망자들의 무기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헤르난데스가 묻는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이대로 소대장과 합류합니까?" "합류? 글쎄요......." 겨울은 숲 그늘에 미련을 두었다. 교전 중 목격했던 정체불명의 특수변종이 신경 쓰인다. 최초발견의 보상도 보상이지만, 그보다는 세계관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이 병력으로 수색을 진행하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뜸을 들이는 소년장교를 보고, 분대장이 다시 물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십니까?" "아까 내가 뭔가를 본 것 같거든요." "뭘 말입니까?"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크기가 좀 컸는데......." 조금 더 위험을 가늠한 뒤에, 지시한다. "각자 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고해요." 결과는 조금 아슬아슬했다. 남는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으나, 후자가 좀 더 많았다. 남은 양을 재분배해서, 당장 급한 사람이 없도록 만든다. 한 사람 앞에 예비탄창 두 매 가량. 유사시 교전 한 번 치르고 퇴각할 정도는 되었다. 다만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였다. 또 뭔가를 할 기미가 보이자 몇몇 얼굴에 피로가 떠오른다. 내색 안 하는 나머지도 속은 비슷할 것이다. 복귀를 눈앞에 그리고 있었겠지. 그럴 만 하다. 기지에서 출발한 이래 고난의 연속이었다. 겨울이 격려했다. "다들 힘든 거 알아요. 휴식을 주고 싶은데 그러기가 어렵네요.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만약 내가 본 게 미확인 특수변종이라면, 지금 정보를 얻어두는 게 나중을 위해 좋다고 봐요." 헤르난데스가 답한다. "중위님.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장교답게 명령하시죠. 이 녀석들 엉덩이를 걷어차는 건 분대장인 제 역할입니다." 귈레미가 표정으로 야유를 보낸다. 겨울이 옅은 미소를 만들었다. "좋아요. 명령입니다. 따라와요." 수색은 역시 겨울이 앞장섰다. 첨병을 따로 세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나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체의 생존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추적」이 필요하기도 했다. 엉망으로 망가진 나무들이 나타났다. 그 사이의 발자국은 크고 깊었다. 병사들이 숨을 죽인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특수변종이 등장할 때마다 큰 피해를 입어왔다. 이번이라고 다르란 법이 없다.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이 정도 크기면 그럼블 아니겠습니까?" 한 병사의 의견. 겨울이 부인한다. "발자국이 달라요. 그리고 이게 그럼블이면 아까 싸울 때 왜 안 끼었겠어요? 같은 변종도 짓밟으면서 달려오는 놈인데." 겨울은 주변을 눈에 담는다. 가지가 부러지고 헐벗겨진 나무들. 줄기가 푹푹 패여있다. 그러나 단지 지나가는 것만으로 이런 흔적이 만들어진 게 아닌 듯 하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인다. '왜지? 나무를 일부러 부술 이유가 있나?' 변종의 특성에 관련된 것일 텐데, 그 특성이 무엇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추적」이 계속된다. 병사들의 긴장감이 타들어간다. 때때로 흐트러지는 발걸음. 심리적인 소모, 피로, 체력고갈의 증거였다. 각성제의 효과에도 한계가 있었다. 괴물은 조짐 없이 나타났다. 출현을 예상하지 못했다. 감각보정의 경고가 전혀 없었다. 이제껏 장애물에 가려졌던 열원은,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실루엣이 확실하다. 그럼블이 아니었다. 당혹감을 미뤄두고, 겨울이 즉시 손을 들었다. 분대가 산개하여 은엄폐를 마친다. "2시 방향, 거리 약 40. 적 개체 하나." 사병들의 야간투시경은 열감지가 불가능하다. 병사들은, 겨울이 방향과 거리를 알려준 뒤에야 표적을 포착했다. 헤르난데스가 숨죽여 묻는다. "공격합니까?" "먼저 수류탄부터요. 사격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 크라우스, 맥켄지. 준비해요." 위력 때문에 고른 수단이 아니다. 전술적인 판단. 아직 괴물의 능력을 모른다. 사격은 이쪽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기 십상이었다. 유탄도 마찬가지. 발사소음 없고 섬광도 없는 수류탄이 적격이었다. 터지는 무기라 공격방위를 알기도 어려울 것이다. 소음이 새로운 적을 불러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저것 하나뿐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미지의 적부터 경계하는 게 옳다. 두 명의 병사가 관목 뒤에 자리를 잡는다. 각자 수류탄을 들고 겨울을 바라본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숫자 셋을 센 뒤 동시에 투척. 따악! 조금 엇나간 하나가 무화과 가지에 부딪혔다. 괴물이 돌아보는 순간, 제대로 날아간 단발의 수류탄이 지근거리에서 작렬했다. 거의 동시에 두 번째 폭발. 폭음에 숲이 전율하고, 섬광은 숲의 잔상을 남긴다. 캬아아아아아- 땅이 울린다. 무거운 괴물이 달리는 진동이었다.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무화과나무에 온 몸으로 부딪힌다. 쿠웅! 그래도 질량은 대단한지, 굵직한 나무가 꺾일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대단한 힘이지만, 특수변종의 괴력으로 보기엔 한없이 부족하다. 그럼블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던지지 않았던가. '수류탄이 부딪힌 소리 때문에, 우리가 저기 있다고 생각했나?' 차라리 잘 됐다. 지금 괴물은 성나고 불안한 짐승이었다. 보이지 않는 모든 방향을 경계하는 듯한 행동. 움직임이 아주 둔하다. "발사관 줘요." 겨울이 병사로부터 로켓 발사관을 넘겨받는다. 총보다는 묵직하다. 보통 휴대하는 가벼운 물건(LAW)과 달리, 제프리가 맡긴 이것은 탄두 무게만 킬로그램 단위다. 화약 양만 따지면 수류탄의 최소 열 배 이상이었다. 그럼블의 물리내성을 뚫기엔 부족한 감이 있지만, 저것을 상대로는 먹힐 것 같다. "다들 여기서 기다려요." 역시나 바로 쏘지 않는다. 발사관의 강력한 후폭풍 탓. 쏘는 위치가 즉시 드러나게 된다. 어둠 속이지만, 방심할 수 없다. 자세를 낮추고 달린다. 측면으로 20미터를 뛰고, 3미터를 미끄러져서, 즉시 자세를 잡았다. 괴물은 아직 그 자리였다. 고개를 휙휙 꺾는다. 사방을 동시에 노려보려는 듯이. '흥분? 분노?......왠지 두려움이 더 큰 것처럼 보이는데.' 「생존감각」의 경고는 없고, 「전투감각」의 경고는 약하다. 도대체 뭘까. 고민하면서도 탄두 끝의 안전핀을 뽑는다. 티잉- 맑고 작은 쇳소리. 겨울에게만 간신히 들린다. 조준을 위해 야시경을 밀어 올렸다. 이제 발사관을 어깨에 얹고, 조준기의 중심선에 괴물을 잡고, 곧바로 격발. 퍼엉! 온 몸이 진동했다. 고폭탄의 비행은 빗물 바스러지는 궤적이었다. 겨울은 발사와 착탄을 거의 동시에 체감했다. 충격파가 눈으로 보인다. 확 퍼지는 호우. 거꾸로 솟구쳤다가, 밀도 높게 쏟아지는 물줄기들. 폭발이 지나갔다. 그런데 정작 괴물의 반응이 없다. 뭐지? 겨울은 잠시 엎드려서 정면을 주시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물안개와 구분되는, 짙은 수증기만 보일 뿐. 이상할 정도로 많다. 아무래도 괴물이 흘린 체액에서 뿜어지는 모양. 감각보정의 경고가 완전히 사라졌다. 만약을 위해 속으로 열을 센 뒤, 겨울은 천천히 일어났다. 분대와 합류하여 신중하게 접근, 일정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저거 설마 죽은 겁니까? 이렇게 쉽게?" 귈레미가 못 믿겠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특수변종은 하늘을 향해 펼쳐진 채로 죽어있었다. 자세가 특이한 건 신체의 불균형 때문이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등에 온 몸의 무게중심이 쏠려있었다. 튀어나온 척추가 인상적이다. 등의 겉면에 무수히 많은 종기가 돋아있다. 처음에 체액이라 여겼던 게, 실은 여기서 흘러나오는 누런 고름이었다. 정말 고름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외견은 비슷하다. 죽은 지금도 그침이 없다. 폭발에 휩쓸린 상처들마저도, 피를 흘리는 곳은 드물고 나머지는 고름을 토해냈다. 울컥, 울컥. 엄청난 양. 여기서 오르는 수증기가 역겨웠다. 바람이 바뀌자 역한 냄새가 다가온다. 겨울이 외쳤다. "방독면 착용!" 「생존감각」, 「위기감지」는 잠잠했다. 즉, 독성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내려야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겨울이 사체에 대고 몇 발의 사격을 가했다. 어디를 쏴야 효과적인가. 퍽! 퍼퍽! 맞을 때마다 고름이 튄다. 노랗고, 점성이 강하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고름이 주변 땅을 다 덮는다. 피는 언제나 고름과 섞여 묽어졌다. 헤르난데스가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이건 무슨 종양 덩어리인가?" 병사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겨울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물러나게 한다. 보고가 올라갈 텐데, 상부로부터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감염이나 중독이 우려되면 꽤 긴 시간 격리시키겠지.' 결국은 밝혀지겠으나, 그 때까지의 시간낭비가 문제다. "중위님. 혹시 이것들이 생화학적인 공격수단을 갖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형편없는 전투력도 이해가 갑니다만." 귈레미의 질문.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내 느낌을 묻는 거라면......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정 지을 근거가 없어요. 여기서는 위치만 기록해두고 빠지는 편이 낫겠네요. 우리는 보고만 하면 돼요. 나중에 보건서비스부대가 와서 회수하겠죠." 겨울이 GPS 단말기와 지도를 꺼냈다. 위치를 표기하고, 좌표를 옮겨 적었다. "다들 수고했어요. 돌아가죠. 제프리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지시가 떨어지자, 물러나는 걸음들이 빠르다. 나중엔 다들 거의 뛰는 수준이었다. 더러운 점액이 넓게 펼쳐졌다. 경사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 96 [96화] #읽지 않은 메시지 (5) 「제시카정규직 : 엥? 뭐야 이거. 세계관 아직도 안 끝났네? 어떻게 된 거야? 한겨울 얘 생매장 당한 거 아니었음? 얘가 드디어 현질을 한 거야? 아닌데, 분명 그때 시청자가 선물하는 DLC 다 걷어차는 거 확인하고 나간 건데?」 「믓시엘 : 아니야 ㅋㅋㅋ 질식사하기 전에 병사들이 구해줬엉 ㅋㅋㅋ」 「제시카정규직 : 뭐...라고? 이런 시팔, 그럼 내가 얼마나 많이 놓친 거야? 뭐 중요한 사건 있었음? 설마 나 안 보는 사이에 진행자가 드디어 섹스를 했다거나?」 「믓시엘 : 쯧쯧. 믿음이 부족한 새끼로다. 이 방송에서 아직도 섹스를 기대하다니.」 「제시카정규직 : 안 했냐?......하긴, 그렇겠지.」 「스윗모카 : 그래도 님 못 본 거 많아여 ㅋㅋ 변종들이 물 밟고 달릴 때 대박 무서웠쪙.」 「폭풍224 : 일겅. 비주얼적인 임팩트가 대단하드라. 그때 진행자도 좀 놀란 것 같던데?」 「제시카정규직 : 무슨 소리야? 변종이 무슨 예수냐? 어떻게 물을 밟고 뛰어?」 「groseillier noir : 예수가 아니라 베드로겠지. 달리다가 중간에 빠졌으니까.」 「병림픽금메달 : 베드로 ㅋㅋㅋㅋ 성령 충만한 드립이다.」 「제시카정규직 : 젠장! 궁금해지잖아. 너무 성급하게 나갔나......조금만 더 기다려볼걸.」 「앱순이 : 성급한 건 아닌 듯. 나도 나갈까 했거등.」 「동막골스미골 : 옘병. 솔직히 너무하는 거 아니냐? 방송 하려면 인간적으로 「사망회귀」 DLC는 필수적용이지! BJ 새끼가 어려서 그런지 상도덕을 모르네. 시청자에 대한 배려도 없고 개념도 없다.」 「9급 공무원 : 상도덕? 여기서 상도덕이 왜 나와?」 「동막골스미골 : 당연한 거 아냐? 상업적으로 방송을 하면서 시청자들한테 돈을 받았으면 적어도 개죽음으로는 끝내지 말아야지. 누구 맘대로 중간에 뒈져?」 「폭풍224 :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빙신이 하나 있었던 거 같은데....... 새로운 빙신들이 들어온 결과인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군.」 「둠칫두둠칫 : 내가 예전의 그 빙신이다. 새끼가 자꾸 말 함부로 하네. 뒤질래?」 「액티브X좆까 : 싸우지 마, 은행 보안 프로그램 같은 놈들아. 」 「윌마 : 보안 브로그램?」 「액티브X좆까 :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쓸 데 없잖아.」 「윌마 : ㅋㅋㅋㅋㅋㅋ」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저러다가 차단당하면 지들만 손해지. 결국 재밌으니까 보는 거면서.」 [닉으로드립치지마라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둠칫두둠칫 : 내가 말을 말아야지.」 「폭풍224 : 그래 하지 마 ㅇㅇ」 「둠칫두둠칫 : 아 진짜.......」 「려권내라우 : -------------절취선(이 아래는 정상인)-------------」 [스윗모카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스윗모카 : ㅋㅋㅋㅋㅋㅋ 나부터 정상인이당」 「스윗모카 : 근데근데, 내가 쭉 봤는데, 오히려 DLC 없는 게 장점인 것 같은데?」 「스윗모카 : 애가 약하니까 긴장하게 되구, 그래서 더 열심히 하니까 응원하게 되구, 한 번 죽으면 끝이니깐 더 무섭기도 하구, 몰입감도 있구.......」 「병림픽금메달 : ㅇㅇ 솔직히 다른 채널 「종말 이후」 중계는 공포감이 없지. 세계관 특성을 못 살리는 듯. 너네 원조 별창늙은이 방송 근황 아냐?」 「하드게이 : 원조 별창? 아, 그 박우철인가 하는 노인네?」 「병림픽금메달 : 맞음. 그 노인네도 요즘 「종말 이후」 하걸랑. 나 이 채널 오기 전에 보던 게 그 할배 방송이었음.」 「하드게이 : 근데 그 할배가 어떤데? 게임 재밌게 함?」 「병림픽금메달 : ㄴㄴ 좆노잼. 실력으로 커버하는 부분이 전혀 없음.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언리미티드 파워」 DLC 지름. 손에서 번개 뿜으면서 감마 그럼블이랑 싸움. 존나 병신인줄.......」 「무스타파 : 번개 ㅋㅋㅋㅋ 시발 상상이 잘 안 간다. 이 채널 진행자한테 대입해보니 위화감 쩌네.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겠지만, 난 현실적인 쪽이 낫다.」 「병림픽금메달 : 각자 장단점이 있지. 빠른 섹스랑 대리만족. 특히 그 할배가 갑질을 존나 잘함. 하는 짓만 보면 아주 내추럴 본 갑이야. 명대사가 그거지. "살고 싶으면 벗어 이년아."」 「에엑따 : 그 뒤에 막 박으면서 그러지 않냐? "자,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껴라!"」 「대출금1억원 : ㅋㅋㅋㅋㅋ 완전 상또라이네. 어떻게 그런 대사를 생각해내지?」 「도도한공쮸♡ : 극혐 -_-」 「여민ROCK : 나름 윾쾌함. 돈 잘 버는 이유가 있음. 근데 보고 나서 남는 건 없음.」 「여민ROCK : 그 노인네는 연애도 DLC로 해치워.」 「여민ROCK : 큐피트의 화살! 발동! 이러면 히야앙 사랑해요 하트 뿅뿅 요 지랄 ㅋㅋㅋ」 「에엑따 : 야, 그래도 그게 은근 꿀잼이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떡부터 치는 거. 」 「올드스파이스 : 그러는 넌 왜 여깄냐?」 「에엑따 : 여기가 더 재밌으니깐.」 「올드스파이스 : ㅋㅋㅋㅋㅋㅋㅋ」 「에엑따 : ㅋㅋㅋㅋㅋㅋㅋ」 「에엑따 : 같은 타이틀이라도 DLC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 된다지만, 영감네 종말하고 이 동네 종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웃김.」 「대출금1억원 : 뭘 새삼스럽게. 거 왜 요즘 핫한 「임페리 로마노룸」 세계관도 바닐라는 평범한 중세 유럽 역사물인데, 게오르기우스 팩 설치하면 하늘에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판타지물로 변하잖아.」 「김미영팀장 : 바닐라가 뭐임?」 「대출금1억원 : 순정」 「김미영팀장 : 순정은 또 뭐야?」 「대출금1억원 : 순수 정품이라고 빡대가리야. 다른 거 아무것도 적용하지 않은 기본 상태가 순정이고 바닐라임. ㅇㅋ?」 「김미영팀장 : 땡큐. 너 대출 받을래?」 「대출금1억원 : 미친년아. 내 닉네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김미영팀장 : 응. 빚은 있는 사람이 더 잘 늘리더라고.」 「대출금1억원 : ㅗㅗ」 「에이돌프휘투라 : 근데 박우철 그 영감쟁이가 1세대 BJ 중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 아니냐?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왜 아직도 그러고 있지?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은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사후보험 등급을 올리고 싶은가보지.」 「에이돌프휘투라 : 올- 관짝에 들어간 뒤에도 등급 올리는 게 가능함?」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ㅇㅇ 중요한 건 돈이니까.」 「전자발찌 : 야, 근데 등급 올리면 뭐가 좋냐.」 「호감가는모양새 : 가장 중요한 게, AI가 달라진다던데?」 「전자발찌 : 엥? 어차피 인공지능 엔진은 같은 거 쓰지 않냐?」 「도도한공쮸♡ : 하드웨어 차이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하드웨어라고 해도 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산능력 차이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각 등급별로 할당되는 기본 연산능력이 다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쉽게 말해서 데이터 마이닝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지. 검색형 인공지능이 그만큼 강화된다고 보면 됨. A등급부터는 검색형 모듈 점유율을 90%까지 올려도 이상을 못 느낄 정도라더라.」 「전자발찌 : 오, 개꿀이네. 그거 AI 강화 패키지를 항상 제공한다는 뜻 아냐? 다른 등급은 정기권 끊어야 이용 가능한 서비스잖어.」 「SALHAE : 죽어서도 불공평한 사회로군.......」 「질소포장 : 그놈의 불공평 타령. 지겹다 진짜. 우리나라만큼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어디 또 있다고 지랄이냐. 세계 최초로 전 국민에게 사후까지 보장해주는 마당에. 죽고 나면 잃어버릴 것도 없으니 노력 하는 만큼 쌓이는 거 아님? 딱 올라가는 일만 남는구만.」 「SALHAE : 야, 내 한 마디가 그렇게 격분할 내용이었냐?」 「질소포장 : 격분 ㅋㅋㅋ 누가 화냈냐? 그냥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지. 사후보험 등급 가지고 불평하는 놈들 다 근성이 썩었어. 지가 노력해서 등급 올릴 생각은 안 하고 말이야. 예치금도 적은 주제에 DLC는 뭘 그렇게 질러대는지. 자기 주제에 어울리는 소비를 해야지.」 「SALHAE : 알았다. 그만 하자. 내가 병신이지.」 「질소포장 : ㅇㅇ」 「질소포장 : 사회는 전혀 나쁘지 않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나빠.」 「20대명퇴자 : 거 참 말 더럽게 하네.」 「일침 : 원래 몸에 좋은 말이 듣기엔 나쁜 거란다.」 「20대명퇴자 : 지랄.」 「まつみん :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그래도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9급 공무원 :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별창늙은이 본인은 그걸 즐기고 있을까?」 「9급 공무원 : 난 내 사후가 그렇게 우스꽝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앱순이 : 그야 뭐 니가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 열심히 추가납입해서 A등급 찍던가. 이야기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다들 예치금 얼마나 부었음?」 「빌리해링턴 : 얼마 안 됨. 앞으로 40년은 더 지금처럼 부어야 C등급 될까 말까 하다....... 에휴. 진행자처럼 B등급만 되더라도 바로 자살각인데.」 「헬잘알 : 40년? 그렇게 안 봤는데 나이가 꽤 어린가봄?」 「빌리해링턴 : 멍청아. 사후보험 적용 유예 신청해놓고 더 붓는다는 소리야.」 「헬잘알 : 아하 ㅋㅋㅋ 근데 자살해도 사후보험 적용되냐? 안 되지 않나?」 「빌리해링턴 : 그건 기초보장등급만 받으려는 사람들이고. 예치금이 충분하면 자살해도 받아준다. 어지간해서는 등급 높이려고 자살 같은 건 생각 안 하지만.」 「빌리해링턴 : 한 달만 더 일하고 죽으면 DLC가 하나 더. 요즘은 이런 생각으로 버틴다.」 「헬잘알 : ㅋㅋㅋ 존나 불쌍하네 ㅋㅋㅋㅋ」 「내성발톱 : 난 그냥 기초보장등급으로 만족하려고 하는데, 안 되나?」 「이불박근위험혜 : 기초보장이면 F등급이잖아. 죽은 다음에 답답해서 한 번 더 죽고 싶으면 추천함. ㅇㅇ」 「내성발톱 : 시발. 역시 그렇겠지. 어떡하나. 납입중지기간이 길어서 한 등급 올리기도 존나 힘들 것 같은데.」 「올드스파이스 : 납입중지? 그런 것도 있냐?」 「내성발톱 : ㅇㅇ....... 소득이 없으면 납부예외자 신청 가능함. 그러면 취업할 때 까지 돈 안 내도 됨. 물론 사후를 생각하면 못할 짓이다.」 「올드스파이스 : 만회할 방법은 있고?」 「내성발톱 : 납입중지기간에 밀린 금액에다가 이자 붙여서 한꺼번에 내면 됨.」 「려권내라우 : 엥? 이자까지?」 「반닼홈 : 이자라고 해봐야 별 거 없겠지. 세금이니까 공시이율 따르지 않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사후보험에서 걷는 건 세금 아니다.」 「반닼홈 : 사실상 세금이지 뭐야. 그럼 공시이율보다 더 나옴?」 「내성발톱 : 사후보험 약관대출 이자랑 같음.」 「짜라빠빠 : 약관대출......그런 것도 있었지 참. 광고 보고 겁나 웃음. 그딴 걸 누가 받아.」 「대출금1억원 : 그래서 약관대출 이자는 얼만데?」 「내성발톱 : 17.5%」 「반닼홈 : 엌ㅋㅋㅋㅋㅋㅋ 시발 무슨 사채냨ㅋㅋㅋㅋㅋㅋ 예상보다 너무 높아서 개뿜었닼ㅋㅋㅋㅋㅋㅋ」 「헬잘알 : ㅁㅊㄷㅁㅊㅇ」 「마그나카르타 : 아니, 왜 그렇게 높은 거임? 내가 맡겨놓은 돈을 담보로 빌리는 건데.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손해 볼 거 없지 않음?」 「질소포장 : 젊을 때 노력 안 한 노인충들 때문에 높은 거임.」 「질소포장 : 그 벌레 새끼들 전부다 기초보장등급이잖아. 쉽게 말해 맡겨놓은 돈이 없음. 기초연금을 담보로 사후보험 적용받고, 기초연금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는 거니까 이자가 높을 수밖에.」 「똥댕댕이 : 그럼 예치금에 따라 이자도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님? 좆같네. 젊은 세대 피 빨아먹는 늙은이들 다 뒤졌으면 좋겠다.」 「내성발톱 : 맞아. 그런 노인네들만 없어져도 나머지 가입자들이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텐데.」 「Blair : 노인들이 나라를 망치는 건 어디나 다 마찬가지로군. 염병할 브렉시트.」 「まつみん : 죄송한데요, 여러분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실 거예요.」 「분노의포도 : 쟤들 저렇게 말해봐야 다 인생 패배자들임. 기초연금이 왜 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을 걸? 사람보다 돈이 우선일 순 없는 건데.」 「질소포장 : 패배자? 누가? 내가? ㅋㅋㅋ 나 벌써 예치금 10억 찍었거든? B등급이거든? 아직 한참 더 부을 수 있거든?」 「호굿호구굿 : 뭐? 10억? 이 새끼 금수저인가.」 「마그나카르타 :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 「프랑크소시지 : 엄마! 우리 집 죽창 어딨어?!」 「어머니 : 냉장고 둘째 서랍 찾아봐!」 「프랑크소시지 : 아 씨 없다고 ㅡㅡ」 「어머니 : 찾아서 나오면 몇 대 맞을래?」 「엑윽보수 : 어머니 개뜬금ㅋㅋㅋㅋㅋㅋ 닉값ㅋㅋㅋㅋㅋ 병신들 손발 잘 맞네.」 「한미동맹 : 죽창이 냉장고에 왜 있엌ㅋㅋㅋㅋㅋ」 「Владимир : 죽창?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Владимир : 아무튼 흥미로운데. 사후보험은 분명 성공적인 사업모델이지만, 액티브X 말고도 가려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groseillier noir : 너 전부터 보니까 무슨 러시아 고위관계자 같다? 컨셉이냐?」 「Владимир : 글쎄.」 [Владимир님이 별 100,95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97 [97화] #과거 (6), 심리치료 (2) 정해진 날짜와 정해진 시각. 거듭되는 여인과 소년의 만남은 서서히, 두 사람 모두에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것 없고 싫을 이유도 없는 평범한 약속. 여인은 여전히 송수아였다. 그녀는 자신의 다른 이름에 익숙해졌다. 처음엔 연기라고 생각했으나, 갈수록 그렇지 않았다. 소년의 의심이나 추궁은 없었다. 인위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는 시간들. 오히려 본래의 이름을 쓸 때보다 편안하다. 소년을 만날 때만큼은 소년에게 집중하게 된다.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제 대화도 자연스러웠다. 시간을 들여 서로에게 익숙해진 결과다. 이따금씩 말을 걸고, 대답을 듣고, 그 외엔 서로가 있는 여백을 받아들인다. 소년, 한겨울은, 하는 말마다 침착하고 차분했다. 불행을 저주하며 울부짖지 않았다. 여인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한편으로는 슬펐다. 겨울의 성숙함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성숙함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겨울은 단 한 번도, 지금이 힘들다고 한 적 없었다. 아직도 속을 가리는 걸까? 거르는 게 없어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만남이 필요할까? 여인은 부드럽게 물었다. "겨울아.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누군가의 평전을 읽던 소년은, 고개를 들어 심리치료사를 바라본다. 손끝으로 양쪽 페이지를 누르고, 두 눈 조용히 깜박이면서.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후보험 적용 초기에, 많은 가입자들이 다양한 부적응을 호소한단다. 예를 들어......그래,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부터 결정하기 어려워해. 이게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거야. 일종의 강박증상이랄까. 그 결과는 가상현실 세계관 내에서의 대인기피증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부적응이란다." 속을 듣자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었다. 신분은 거짓이지만, 그녀는 분명 사후보험의 관계자다. 그녀가 접하는 보고는 정부에 올라가는 것보다 상세했다. 언급한 증상은, 경중이 구분될지언정, 보험 가입자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심리적 관문이었다.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년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살아서 충분히 불행했으니까. 그래서 묻는다. "너는 어떠니? 혹시 혼란스럽지는 않아?" "......." 답변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여인이 언급한 문제는, TOM 등급과 적성이 우수할수록 쉽게 극복하는 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문제의 본질은 실존하지 않는 세계 그 자체였기에. 높은 공감능력은 곧 풍부한 감수성이다. 소년은 아직 자아가 굳건하지 않을 나이였다. 나는 누구인가? 또 무엇인가? 이 질문을 그만둔 지 오래인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곤란했다. "저는 괜찮아요." 마침내 나온 소년의 짧은 대답. 여인에게는 부족했다. 말 나오기 전의 공백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스쳤을 것인가. 시간이 더 필요하겠구나. 여인이 작은 한숨을 감춘다. 그러나 속 읽기에 능한 소년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익숙하게 미소를 만들었다. "믿지 않으시네요." "응?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살짝 당황하여 얼버무리는 그녀 앞에서, 겨울이 책을 완전히 접는다. 이어 「로비」의 환경조성 기능을 이용하여, 허공에서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품종을 고르고 색을 선택한다. 결과는 희귀한 색의 장미였다. 가시를 피해 줄기를 잡고, 꽃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기는 겨울. 이윽고 소년이 심리치료사에게 묻는다. "이 꽃이 무슨 색으로 보이세요?" "......녹색이구나." "네. 녹색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과 저는 지금 같은 색을 보고 있는 걸까요?" 여인이 당황했다. 질문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게 무슨 말이니?" 겨울은 자신의 생전을 회상했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소년은 부러진 초록 크레파스 토막을 들고, 멍하니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같은 녹색이라도, 사람마다 실제로 보이는 건 다르지 않을까? 사실은 모두가 다른 색감을 느끼지만, 똑같이 녹색이라고 배우면서 자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색을 볼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무척 어려운 고민이었겠구나." "네. 끝나지 않는 의문이었죠. 제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제가 느낄 수 있는 것들 뿐인걸요. 다른 사람들은 항상 그 너머에 있었어요. 닿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애를 써도." 여인은 알 것 같았다. 소년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익숙한 개념의 낯선 시작이었다. "네가 차이를 알 방법이 없다면, 인공지능도 사람과 같다는 뜻이니?" "중요한 건 저 자신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는......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상대는 저에게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거예요. 그것이 실제로 사람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인가를 떠나서요." "즉 네가 능동적으로 결정하겠다는 뜻이구나?" "그러고 싶어요. 저는 생전에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 겨울은 심리치료사의 동요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상한 말을 해버렸네요." "아니, 아니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여인은 숙고했다. 소년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많이 거칠어질 수 있었다. '사람으로 취급하기 싫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수준의 얄팍한 감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착한 소년에게도 분노는 있을 것이었다. 자신을 사람으로 봐주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 그 원망이 자신에게 향할 이유가 없는데도, 여인은 한 때 그것을 걱정했다. 지금은 다르다. 소년의 성품에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울이 다시 한 번 미소를 만들었다. "아무튼, 제 적응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어차피 전에 살던 저 바깥에도 사람은 별로 없었거든요. 마음은 지금이 더 편하네요. 항상 보고 싶은 두 사람은 그립지만, 아예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리 아끼는 형제자매도, 나이 들면 얼굴 보기 힘들어진다던데......저는 그걸 좀 더 일찍 겪은 셈 치려고요." 여인은 소년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리려고 애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빗속의 아침, 산타 마가리타 호수 제프리가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빗방울이 제법 가늘어졌습니다. 바람도 꽤나 약해졌고요. 밤새도록 괴롭히더니, 그나마 쥐꼬리 만 한 양심은 있는 날씨로군요. 날 밝은 뒤에 전선통제기가 뜰지도 모르겠습니다. 포트 로버츠에서도 항공정찰을 요청하겠죠. 어쨌든 작전 최소소요시간은 이미 경과하지 않았습니까." 임무가 변수 없이 진행되었을 경우, 병력은 이미 기지로 복귀했을 것이다. 겨울이 답한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사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더라도 문제니까요." "예, 뭐....... 산모가 저 지경인데 아기라고 건강할 것 같진 않습니다. 보온대책을 마련하기도 힘들고 말이죠. 살려서 기지까지 데려가기도 만만찮을 겁니다." 두 사람은 빗물 뚝뚝 떨어지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겨울은 국립태풍센터의 경고전문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태풍과 태풍 사이의 간극인 모양이다. 그 작은 틈조차도,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제프리가 방탄모를 벗더니, 떡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는다. "어째 가능성 낮은 일만 떠들고 있군요. 산모와 애가 무사한 것부터 이미 기적일 텐데, 때 맞춰 항공정찰이 뜨는 행운까지 바라고 있으니 말입니다." "동북아에는 이런 말이 통해요.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기적과 행운을 모두 바란다고 벌 받을 것 같진 않네요." "에이, 또 모릅니다. 저 위에 계신 전능하신 분께서 요즘 따라 무척 악랄하시거든요. 이 세상 꼬라지가 그 증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요 모양 요 꼴이죠." 신세를 한탄하며, 제프리가 주머니를 더듬는다. 뭘 찾나 했더니 담배였다. 그러나 성치 않았다. 한 갑을 다 버리고 건져낸 게 한 개비였다. 그나마도 빗물에 젖은 끝을 조금 뜯어내야만 했다. 이제 불을 찾는 제프리. 겨울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팅- 하는 맑은 쇳소리. 부싯돌을 당기자 쉽게 불이 붙는다. "이건 어디서 나셨습니까?" "산타 마리아에서 받았어요." 겨울이 뚜껑 안쪽을 보여준다. 존 프레이가 직접 새긴 문구가 있는 곳. 제프리가 담배를 쭉 빨아들여 빛을 만들었다. 한 줄의 글귀를 읽고 다시 투덜거린다. "레인저가 앞장선다, J.E.F. 하여간 자부심은. 근데 이 친구들에 비하면 저는 월급 도둑이 맞으니까 뭐라고 할 순 없겠군요." 제프리는 습관적으로 담뱃불을 가렸다. 사방이 숲, 동쪽은 능선, 북쪽은 댐으로 막혀있었으나,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빠르게 태우는 담배는 제프리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 애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이 망할 녀석들도 천국행 가산점을 받겠죠. 남은 가족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테고요." 소대장의 망할 녀석들은, 가까운 빗속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건물 밖으로 빼라는 지시는 겨울이 내렸다. 사무소 어디든 열 머금은 습기가 가득하여, 시체의 부패가 우려된 까닭이다. 쇠약해진 산모의 심리상태도 걱정이었고. 겨울이 답하는 말. "기다리는 게 참 힘들죠?" "더럽게 힘들군요. 애 낳는 사람이 가장 힘들겠지만, 뭐, 제가 그래도 목숨 걸고 싸웠으니 비빌 구석은 있다고 봅니다. 는 개뿔 벌써부터 결혼하기 무서워지는군요." 겨울이 헤르난데스 분대와 함께 복귀한 뒤로 두 시간 이상이 경과했다. 그러나 의무병 화이트가 경고한 난산은 아직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휴식을 받고도 밖에 나와 있는 병사들이 눈에 띈다. 겨울이 그 중 익숙한 하나를 불렀다. "엘리엇!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가능하면 잠깐 눈 좀 붙여요." 상병은 매우 피로한 낯이었으나, 고개를 흔들었다. "전 폭죽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섭니다. 신음을 들으면서 잠이 오겠습니까?" 실전을 경험한 병사들에겐, 크든 작든 후유증이 남는다.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쇠약해진 산모의 비명은 가냘픈 수준.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굳이 나와서 찬바람 맞는 병사들은, 그마저도 견디기 힘든 이들이었다. 탄생을 뜬눈으로 기다리는 남자들이 스무 명을 넘는다. 제프리가 필터까지 바싹 태운 담배를 고인 물에 퉁겨 넣었다. "침대가 그립군요. 작년 같았으면, 오늘 같은 휴일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루 종일 잤겠죠.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요." "휴일이라니......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코레마츠의 날 아닙니까. 아직 미국인 덜 되셨군요." 이 말을 듣고, 리버만 하사가 면박을 준다. "주 기념일 가지고 무슨 미국인 운운합니까? 애국이야말로 미국 시민의 자격입니다." "아, 눼에." 시답잖은 공방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는 대화가 없었다. 다들 지쳐있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마저 힘겨울 정도로. 모두가 묵묵히 시간을 인내한다. 콰릉! 언덕 위에 번개 하나가 떨어졌다. 구름 위로 여명이 터오는 시점이었다. 벼락 맞은 나무가 푸르게 발광하고, 짧게 타올랐다. 불씨는 비구름 아래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겨울이 생각했다. '항공정찰은 기대하기 어려우려나.......' 비가 줄고 바람이 약해져도, 번개가 친다면 군용기를 띄우긴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다. 탑재한 무기가 폭발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예 무기를 싣지 않은 경우라면 안전하겠지만.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팔짱 끼고 추위를 참던 제프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겨울과 시선이 부딪혔다. 그러더니 문을 박차다시피 안으로 돌입한다. 겨울이 그 뒤로 따라 들어갔을 때, 의무병 화이트가 갓난아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산모가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제프리가 희열에 차서 묻는다. "이봐, 닥! 다 끝난 거야? 끝난 거지? 끝난 거구나!" 신경 곤두선 의무병이 다다다닥 쏘아붙인다. "소위님, 좀 가만히 계십쇼. 아직 안 끝났습니다. 태반이랑 탯줄 나오는 중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산모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시끄럽게 굴면 좋을 게 없습니다. 뭣보다 애 놀라면 어쩌실 겁니까? 가뜩이나 약해진 상태인데, 잘못 되면 책임지실 겁니까?" "......그래? 미안." 구박 받은 소위가 얌전히 찌그러졌다. 산모의 남편은 힘없이 주저앉은 상태였다. 탯줄을 끊고 태반을 수습하는 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기뻐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듯 하다. 어차피 모친부터가 열을 앓았으나, 의무병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아이를 떨어트려 놓고자 했다. 아이는 보 대신 전투복과 우의에 감싸졌다. 과연 충분한 조치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선이었다. 의무병이 다시 닦달했다. "발열 팩 남은 것 있습니까? 바로 식사 준비해주십쇼. 애 생일을 양친 제삿날로 만들 순 없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화이트의 권위가 겨울보다 위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중, 바깥에서 안테나 펼쳐놓고 있던 무전병으로부터 새 소식이 들어온다. [중위님. 잠시 와보셔야겠습니다. 전선통제기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 딱 굳어있던 제프리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다음에 저 만나면 한 번만 봐드리겠습니다 어쩌고. 소대 회선으로 전달된 메시지였기에 다른 병사들도 다 들었다. 반응은 일률적이다. 한숨을 쉬며 어딘가에 몸을 기댄다. 기적도 있고 행운도 있었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었다. # 98 [98화] #불씨, 포트 로버츠 (1) 우우우웅. 스마트 폰의 진동이 겨울을 깨웠다. 화면에 뜬 이름은 제럴드 M. 래플린. 연대장이었다. 수면 상태로 경과한 시간을 확인하고, 진동이 다시 울기 전에 전화를 받는 겨울. "중위 한겨울입니다." [오, 중위. 나 연대장이야.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내가 쉬라고 해놓고 면목이 없군.] 기지 복귀 후, 겨울은 연대장에게 약 이틀간의 휴식을 허락받았다. 복귀가 바로 어제, 1월 30일이었다. 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달이 시작된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몇 가지 전달사항이 있어서 말일세. 자네 의견이 필요한 문제도 있고. 아, 전투임무나 위험한 일은 아니니 안심하게나. 별 일 없다면 16시에 집무실에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오게. 전화 끊겠네.] 통화는 짧게 끝났다. 현재시각 오후 2시 57분. 겨울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뜻하는 대로 기민하게 반응하는 육체. 회복은 만전이다. 추위와 피로의 영향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단축된 휴식이 아쉽기는 하다. 세계관 내에서의 수면은, 상황연산에 필요한 시간만큼 쉴 수 있는 기회였다. '전달사항이라....... 지난 임무에 관한 것일까?' 군의 민간인 학살은 대단히 민감한 사건이다. 미군과 미군 사이의 교전도 그렇고. 분대장 헤르난데스는 당국이 이번 사건을 무마할까봐 우려했었다. 혹시라도 억울한 일을 당할까봐서. 오늘까지 비번이었으나, 겨울은 전투복을 입고 무기를 챙긴다.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편이 낫다. 시스템 상, 사건은 항상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변수였다. 옷을 입으면서 착신 이력을 살펴본다. 겨울동맹의 두 부장과 두 전투조장에게서 온 메시지들, 그리고 부재중 전화 기록 다수가 보인다. 문자는 복귀 이전에 발송된 것들도 많았다. 다만 임무 중에는 통화권 이탈 상태였으므로, 실제 받은 건 복귀 이후의 일이었다. 현황을 보고하거나, 어떤 사안의 처리방안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거나, 안부를 묻는 내용들. 자판 톡톡 건드리며 몇 개의 답장을 보내던 중 전화가 왔다. "네, 유라 씨." [앗, 대장! 드디어 받으시네요! 문자 답장이 왔기에 혹시나 했는데. 갑자기 나가신 뒤로 이틀 동안 소식이 없어서 제가......다들 걱정 많이 했어요. 별 일 없으신 거죠?] 맥락을 보건대, 겨울이 어제 돌아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전투조원들이 형식상으로는 정규군 취급이라도, 실질적으로는 아직 미비한 점이 많았다. 겨울 부재 시 미군에 대한 창구가 없다시피 하다. '있긴 있는데 단방향이지.' 조원들의 발언력은 겨울이 지원병이었을 적보다도 약하다. 겨울의 행방을 물어볼 길이 없을 만큼. 미군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근시일 내로 개선해야 할 점이었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연락 드렸어야 하는데, 임무에 몰두하느라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좀 급했어요.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아녜요!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아하하, 혹시 바깥에 나갔다 오셨나요?] "예. 산타 마가리타 호수에 다녀왔어요." 그러자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린다. 산타 마가리타 호수가 어디야? 응? 제가 압니다. 그거 아타스카데로보다 더 남쪽에 있을 걸요? 우와, 많이 머네요! 겨울은 유라 아래 전투조원들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전화 건너편 상황이 그려졌다. 수화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귀 기울이는 풍경. [흠흠. 그럼 다치신 곳도 없는 거예요?] 괜찮다고 했는데도 굳이 다시 묻는다. 겨울은 왼쪽 손등을 슬쩍 곁눈질했다. 오자마자 제대로 된 처치를 받았다. 악력과 정교함에 일시적인 감소보정이 붙었으나, 정도는 심하지 않았고, 별 것 아닌 상처였다. 흉터가 남을 순 있겠지만. "다치긴 했는데 좀 긁힌 정도에요. 거기 계신 분들에게 마음 놓으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언제 오세요?] "오늘은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연대장님이 호출하셨는데, 아직 이유를 모르거든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늦게라도 잠깐 들를게요.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나요?" [아뇨, 그런 거 없어요. 호출 받으셨다니 더 이상 시간 빼앗지 않겠습니다. 되도록 오늘 들려주세요. 모두 대장님이 보고 싶대요.] 뒤이어 그녀 주변에서 남녀혼성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오십니까!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저녁 같이 먹어요! 유라 조장이랑 진석 조장 또 싸웠어요! 등등. 마지막 한 마디는 유라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 한별아! 그런 말을 왜 해! 대장님! 끊을게요! 열심히 하세요! 파이팅!] 앞쪽은 속닥거리고, 뒤쪽은 크면서 급하다.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뚝 끊어지는 전화. 제재소에서의 일을 계기로 두 명의 전투조장이 서로 자제할 거라 여겼는데, 아직인가 보다. '하긴 쌓인 감정이라는 게 쉽게 없어지나. 감정이 이유를 찾게 마련인걸.' 적어도 겨울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먼저 살던 세상의 이야기. 어떤 이유로든 한 번 화가 나면, 그 다음엔 화를 내기 위해 이유를 찾는다. 화는 멋대로 자라는 바오밥 나무 같았다. 과거에 읽었던 책 속의 비유를 떠올린 겨울은, 그 나무가 자신에게도 하나 있음을 안다. 화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 닮은 것들의 세계관을 찾았고. 관사를 나선다. 태풍 하나 지나가고 새로 하나 찾아올 하늘은, 우중충한 회백색이었다. 비는 잠시 멎은 모양이다. 연대본부로 가는 길에, 몇 번의 우호적인 인사를 거쳐,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만남이 있었다. "성경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들으셨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죽어있단 말입니다! 살아있는데 죽어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곧 저 제물 먹는 자들과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살고 싶습니까? 살고 싶습니까? 성경에 그 길이 있습니다! 성경은 주께서는 여러분께 생명을 주기 위하여 쓰신 생명의 책입니다!" "이 귀중한 책을 함부로 읽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단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말씀의 올바른 독해는 선택 받은 선지자의 권능입니다! 기적으로 기름 부음 받으신 우리 박태선 목사님께 복음을 청하십시오! 여러분도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피켓과 성서를 들고 기세등등한 자들은 순복음 성도회의 무리다. 중간부터 전형적인 사이비의 허언이었으나, 이미 믿는 자들에겐 진실의 무게였다. 그러고 보면 그 「기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겨울은 감기가 유행하던 때를 회상했다. 소문이 돌았었다. 박태선 목사가 축복한 성수로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어디서 항생제를 구해 타 먹인 게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정말 뭔가가 있는 거라면, 내가 모르는 또 하나의 변화일지도.' 생각하는 사이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소녀는 명백히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성도회 내에서 겨울의 평가는 좋지 않은 편. 악의 섞인 소문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겨울은 발걸음을 꺾는다. 빠르게 그냥 지나치려는데, 소녀가 굳이 뛰어서 앞을 가로막는다. "저기요! 자, 자, 잠시만요!" 시선이 모인다. 소속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 기묘한 대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소녀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결국 멈춰선 겨울이 필요한 만큼의 미소를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 이거요!" 겨울은 소녀가 내미는 종이를 받았다. 작은 크기에, 손 글씨가 깨알처럼 빼곡하다. 설마 편지는 아닐 것이고. 살펴보니 선교용 유인물이었다. '직접 만든 건가?' 내용은 역시 성경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이것 말고도 꽤 많은 양이 적혀있었다. 이런 걸 줘도 신앙 가질 생각 없다,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소녀가 선수를 쳤다. "하, 한겨울 중위님! 무섭지 않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제물 먹는 사람들이요!" 제물 먹는 사람들. 성도회에서 감염변종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겨울은 일단 부정해보았다. "두렵지 않다면요?" "거짓말 하시면 안 돼요! 주님은 거짓말 하는 사람을 미워하시거든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언 19장 9절! 꼭 기억해두세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제물 먹는 사람들은 주님의 분노하심이니까요! 어쩌면 중위님은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닌 거죠!" 답을 정해놓고 묻는 질문은 질문이 아닌데. 어쨌든 상대는 소년보다 어린 소녀였다. 겨울은 적당하고 온화한 응대로 이어간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자기 마음을 다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도 제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예요. 다른 사람에게 이렇다 저렇다 들을 이유는 없다고 봐요." 부드러운 태도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소녀에게선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종교적 열의가 채운다. 나이답게 무구한 열의였다. "이유가 있어요! 중위님의 목숨이 걸린 일인걸요!" "죄송하지만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네요. 실례하겠습니다." "안 돼요!" 지나가려는 겨울을 붙잡는 소녀. 떨치지 못할 것도 없으나 모양새가 좋지 않을 터. 어쩔까, 겨울의 짧은 고민을 틈타 소녀가 다시 믿음을 말한다. "으으! 방금 제가 드린 거, 꼭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어요! 주 예수를 믿으면 제물 먹는 사람들이 중위님께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우리 목사님 말씀 들으시고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세요!" 말하는 동안, 소매를 꽉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적어도 소녀 입장에서는, 겨울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 손을 손가락 하나씩 떼어내는 동안, 겨울은 소녀의 힘이 이상할 정도로 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투감각」에 의한 「위협성」 평가로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 수준이다. '애초에 「위협성」 평가가 뜨는 것부터 정상이 아닌걸.......' 이대로는 소녀가 전사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래봐야 겨울에게 붙은 보정 앞에선 의미 없는 수준. 겨울은 소녀의 손을 떼어내고, 모아서 붙잡은 채로,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대로 손을 놓아주면 또 붙잡을 것 같다. 겨울이 좋은 말로 달랬다. "읽어볼 테니 이만 절 보내주세요. 연대장님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지각은 곤란해요." "그럼 저하고도 약속이에요! 읽어보겠다고 하셨으니 읽어보셔야 돼요! 거짓말은......." "주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제야 물러나는 소녀. 겉보기에는 중학생 정도의 연령이었다. 몇 걸음 떨어지더니, 상기된 얼굴로 허리 숙여 꾸벅 인사한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위님이 교회에 와주시면 다들 기뻐할 거예요!" 겨울은 말 없는 목례로 응하고, 걸음을 옮기며 시간을 확인했다. 처음부터 여유 있게 나왔다. 붙잡혀 있었어도, 늦을까봐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등 뒤로 미련 남은 소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박태선 목사님께서는 기적으로 절 살려주셨어요! 중위님에게도 기적이 있기를 바라요!" 흐음. 잠시 돌아보니 환히 웃고 열심히 손 흔드는 소녀. 겨울이 묻는다. "이름이 뭐죠?" "저요? 와, 저는 황보 에스더에요! 나중에 진짜로 교회에 오시면 제 소개로 온 거라고 해주세요!" 겨울은 소녀가 「기적」의 경험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 99 [99화] #불씨, 포트 로버츠 (2) 연대장이 말했다. "이제 와서 말하기는 좀 새삼스럽지만....... 지난 작전, 정말 고생 많았네. 정신 나간 놈들을 상대로 잘 싸워줬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소년장교의 대답을 들은 연대장, 래플린 대령이, 엷은 미소를 짓는다. "모범적인 답변이군.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허나 더 안타까운 일이 될 수도 있었지. 아기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불한당들이 애국자들을 살해하고, 이 나라는 자네를 잃어버리고....... 이런 사건이 벌어질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한숨지은 연대장은 겨울에게 자리를 권한다. "일단 앉게. 금방 끝날 이야기로 부른 건 아니니까." "네." 빈자리를 채우는데, 앉는 순간 창문이 번뜩였다. 몇 초 후에 유리가 덜덜 떨린다. 태풍이 비록 소강기에 접어들었어도, 먼 곳에서는 이따금씩 천둥이 치곤 했다. 창밖의 하늘은 구름이 아직 두꺼워 민낯을 볼 수 없었다. 비가 다시 내리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연대장이 운을 띄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 무섭지 않은가?" "......." 공교롭게도, 오는 길에 한 번 들었던 질문이다. 소녀의 목소리가 겹쳐져서, 겨울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았다. 연대장이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피부 검은 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귀관의 이번 전투기록을 검토해봤어. 거의 죽을 뻔 했더군."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전장에서는 운도 실력으로 봐야해. 좋은 군인이 되려면 불운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네. 그동안 강운이 따른 귀관은 더더욱 그렇지. 인정하게. 자네는 언제든 죽을 수 있어."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겨울은 궁금했다. 오늘 부른 용건과 관련이 있나? "그래서 말인데......." 관련이 있었다. "중위. 혹시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 있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 귀관이 원한다면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대령이 두 장의 서식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는다. "귀관은 선택할 자격이 있네. 비록 젊은 나이지만, 다른 사람이 평생을 바쳐도 부족할 용기와 헌신을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명예훈장이 그 증거지. 물론 군대를 떠나라는 말은 아니야. 직접 싸우지 않고도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있다는 뜻일세."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 총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이것들을 보고 나서 말하세나. 검토할 가치가 있을 거야."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겨울은 연대장의 권유에 따른다. 하나는 위촉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부대로의 전입신청 양식이었다. 후자의 부대명이 인상적이었다. '방역전쟁 전술지원그룹?' 소속부대 변경은 일반적으로 군 내의 인사명령에 의거한다. 그러나 소수의 특별한 부대들은 지원자 심사를 통해 구성원을 충당했다. 겨울은 후자에 속하는 부대들을 제법 알고 있었으나, 지금 받은 서류상의 부대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세계관 고유의 무작위 상황연산 값인 듯 했다. '선택할 자격이 있다고 했으니,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의미인가?' 사실 위촉장 쪽의 직책도 명칭이 낯설었다. 어느 쪽이든 정보가 부족하다. 서류에서 시선을 떼자, 자연스럽게 연대장의 말이 이어진다. "하나씩 설명하지. 먼저 이쪽. 이건 조만간 만들어질 군정청의 감사위원 위촉장이라네." "군정청이요?" "음, 정확하게는 중부 캘리포니아 난민 군정청이라고 해야겠군. 앞으로 군에 의한 난민관리를 좀 더 공식화하겠다는 거지. 솔직히 지금까지의 행정지원은 여러모로 미비했으니까." 조금 망설이던 연대장이, 사정을 조금 더 풀어놓는다. "사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아무래도 위에서 여론을 신경 쓰는 모양이야."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대선이 다가오고 있거든. 정치 싸움은 이런 상황에서도 벌어지는군. 참 쓸 데 없기도 하지....... 문제가 되는 여론은 우선 난민들에게 우호적인 쪽이 하나 있네. 난민들을 병력자원으로 쓰려는 정부시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어. 난민들의 어쩔 수 없는 처지를 악용한다는 거야." "미국 시민들이 치러야 할 희생을 전가하려 한다, 그런 이야기인가요?" "정확하네.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 하다 이거지. 어느 정도는 이 나라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도 깔려있는 것 같네만, 이건 내 관점이니 걸러서 받아들이게나." 연대장은 본인의 관점이라고 했으나, 겨울이 보기엔 충분히 일리 있는 통찰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러 온 사람들이니 지켜준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니까.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은 아닐지라도, 일부는 경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겨울이 평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긴 해도, 저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나 최선을 다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난민과 미국 시민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내 생각도 그렇네. 언젠가는 어차피 다 함께 싸워야 해. 인류의 존망이 걸린 전쟁 아닌가. 순서가 뭐가 중요하겠어? 뒤에 있는 사람들과 위에 계신 분들은 현장을 잘 몰라. 사실 이건 내게도 조금 해당사항이 있겠지만. 흠, 조금? 조금 맞겠지. 아닌가?" 자신 없는 태도로 자문하는 래플린 대령. 희극은 희극인데 연기가 아니었다. 겨울이 묻는다. "그런데 연대장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금도 대통령 선거가 정상 진행되나요?" "이 나라는 남북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렀네. 물론 지금이 훨씬 더 큰 위기겠으나, 봉쇄선에서 1년 가깝게 잘 막아내고 있으니 선거를 보류할 사유는 못 된다는 게 야당의 입장이야. 시민들 의견도 그렇고. 이래저래 힘든 시기다 보니 다들 불만이 많은가봐.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선거가 필요하다고들 하더군. 글쎄, 대통령 각하께서도 힘들어서 때려 치고 싶으신 게 아닐까? 아, 마지막은 농담일세." 이런 말을 하면서 대령은 못내 어색한 표정이었다. "군인은 원래 정치에 신경 쓰면 안 되는 건데. 어쨌든, 지금 말한 여론에는 귀관의 지분도 적지 않아. 난민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면, 자네 나이에 무기를 들었어야 했느냐는 거야." "별로 달갑진 않네요." "그렇겠지.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문제가 되는 다른 여론은 더 달갑지 않을 걸세. 이쪽은 난민들을 아예 추방해버리자는 미치광이들이거든. 근거 없는 헛소문에 휩쓸린 사람들이지." "헛소문이요?" "그래, 헛소문.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악질적인 게 난민들이 병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루머일세. 전에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모호한 발표를 한 뒤부터 믿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어." "혹시 그 사람들이 중국인들을 유난히 싫어하진 않나요?" "뭐, 그렇지. 자네도 들은 게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짐작한 건가?" "둘 다입니다." 겨울은 리아이링을 떠올렸다. 기지 북쪽의 작은 마을을 점령할 때, 그녀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중국인들이 불만 억제를 위한 희생양이 될까봐 두렵다고.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대역병이 생물병기일 가능성을 암시했다. 중국이 만든 무기, 중국의 관리 실패. 이것이 지금 맹목적인 사람들이 믿는 내막일 것이었다. 중국이 첫 번째 피해자일 가능성은 배제하고서. 래플린 대령의 남은 말을 풀었다. "굳이 중국인이 아니더라도, 난민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어. 멕시코 방면 국경을 넘어오려는 사람들도 싫고, 동부 해안으로 불법 상륙하는 사람들도 싫은 거야. 동부에서 소규모 감염사고가 증가하다보니, 난민이고 뭐고 전부 다 쏴 죽이자는 극단주의자들까지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라네. 주로 남부에서 말이지. 그래봐야 일부에 불과하네만, 난 그치들이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겠지." "어느 쪽이든 군정청을 만드는 데 부정적이겠네요.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거로군요." "어쩔 수 없지. 귀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이번 해리스 대위 사건으로 좀 더 늘어나지 않겠나 싶군. 아니, 더 늘어날 수나 있나? 꼬장꼬장한 레드 넥들도 자네가 싫다고는 안 할 텐데." "그 사건, 결국 공개하기로 결정이 난 건가요?" "거의 확실하다고 보네. 위에서도 손익을 계산해봤겠지. 전투기록을 검토해보니 나라도 공개하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고. 사건 자체는 대단히 민감하고 부정적이지만, 각색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극적이지 않은가 말이야." 대령이 다음 말을 고르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할 말이 많아 헤매는 것 같았다. "인상적인 부분이 참 많았네. 해리스 대위에 대한 귀관의 경고부터 시작해서, 수적 열세인데도 공세로 치고 나간 부분이 참 훌륭했어. 귀관이 직접 적 별동대의 측면을 잡아낸 건, 성공시킬 자신만 있다면 우수한 판단이었지.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고. 자네의 교육을 맡은 게 3대대장 캡스턴 중령이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에게 배운 건가?" 겨울에게는 저널로 간략하게 지나간 부분이었다. 지력보정으로 뜨는 증강현실을 보고, 겨울이 침착하게 대답한다. "네. 이라크에서 저처럼 행동한 장교나 부사관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중령이 잘 가르쳤군. 맞아, 그런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지. 허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절대로 자네 정도는 아니었어. 자신감과 무모함의 경계란 참 애매한 거야......."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또 뭔가. 아무튼 그 밖에도 여러모로 영화를 보는 것 같았지. 트랩으로 트릭스터를 잡는 부분이나, 자네가 산채로 매몰되는 대목이 그래. 물 위를 달리는 변종들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그 긴 밤을 거쳐 결국 아기가 태어난 순간이 감동적이었어. 국방부 공보처에서 환장을 하겠더군. 하지만." 한 번 말을 끊는 것은 강조의 목적이었다. "모든 게 다 영화 같아도, 자네 인생은 영화가 아니야. 다시 촬영할 수도 없고, 뒤로 감을 수도 없지. 귀관이 이번에 죽을 뻔한 걸 두고 위쪽에서도 말이 많은 듯 해. 날더러 자네 의사를 확인해보라지 않겠나?" 연대장이 다시 한 번 권한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죽음으로 끝나는 영웅담은 사람들에게 비극이나 마찬가지야." 겨울이 바른 웃음을 만들었다. "위에서 제 의사를 존중한다는 건, 어느 쪽이든 그만한 이익이 있기 때문 아닌가요?" "새삼스럽군." "그렇다면 제 대답은 같습니다. 아직은 싸우고 싶어요." 대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심이 굳었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란 예감은 있었지. 이쪽을 권할 의미도 없겠군. 그래도 사령부의 지시이니 한 번 보기나 하게." 그가 남은 한 장의 서식을 툭툭 쳐보였다. 겨울이 묻는다. "이 방역전쟁 전술지원그룹은 뭘 하는 부대인가요? 처음 듣는데요." "이번에 새로 만들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특수전 사령부 소속이고, 대외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임무만 처리한다고 알려질 거야. 실제로는 그 반대겠지만." "홍보용이군요." "전투를 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지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환경에서, 후방지원 충실하게 받아가며 임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되네. 물론 공보처의 촬영팀이 24시간 따라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고. 동료들보다는 민사심리전 장교 집단이나 정치인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될 테지." "싫네요." "잠깐도 고민을 안 하는군. 오코넬 중사는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게 누구죠?" "모르나? 지금까지 그럼블 셋을 잡고 여러모로 활약해서 은성무공훈장을 중복으로 받은 양반일세. 모병광고에도 나왔었지. 개자식 운운하는 이상한 모양새이긴 했네만." "아." 더 많은 탄약과 더 많은 개자식들. 겨울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세계관에서 겨울은 단연 독보적이지만, 그밖에 전쟁영웅이 없는 건 아니었다. TV에서 매양 나오는 게 그런 사람들의 소식이기도 하고. # 100 [100화] #불씨, 포트 로버츠 (3) "어쨌든 전 사양하겠습니다." 양쪽 모두 깔끔하게 거부하는 겨울. 그런데 연대장이 이상하게 미련을 놓지 못한다. 턱을 쓰다듬던 그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초임 소위 시절엔 나도 자네처럼 되고 싶었지. 중대장, 대대장을 역임하면서는 자네 같은 부하가 있기를 바랐고.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막상 자네를 아래 두고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흠....... 편한 길 놔두고 굳이 힘든 길 걷겠다는 자네가 상대니까, 나도 솔직히 말하겠네. 귀관 같은 부하는......지휘관에게도 부담스럽다는 뜻이야. 이건 내가 귀관을 싫어한다는 뜻이 결코 아닐세. 오해하진 말아주게나." 연대장이 다시 부연 차 묻는 말. "이번 일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짐작해보겠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귀관이 복귀한 게 어제 오후였지. 국방부 공보처가 자네 동향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사령부에 정식 보고를 올리기 전 일단 전투기록 사본부터 넘겨주었네. 그랬더니 오늘 아침, 대통령 비서실에서 직통전화가 오더군. 자네 상태를 묻는 전화였어. 확인 후 보고해야 한다고." "......." "이해는 해. 그곳이야말로 여론 관리의 사령탑일 테니까. 국민들을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후방이 안정되어야 전방에서 마음 놓고 싸울 것 아닌가. 그러나 내 입장을 생각해보게. 전쟁영웅이긴 해도 자네는 일단 내 부하야. 헌데 내 부하의 안위를 백악관에서 신경 쓰고 있단 말이지. 지휘관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부담스럽다고 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긴. 사실 귀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잘못된 거지. 군인은 전장에서 최선을 다하면 돼. 그 이외의 사정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그거 하라고 나 같은 사람들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말을 한 데엔 이유가 있네." 대령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혹시라도 귀관에게 부당한 대우를 할까봐서야. 뭐라고 해야 하나......그 왜, 의식하지 못하는 차별 같은 것이 있잖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야. 날 보게." 어둑한 방 안에서, 연대장의 짙은 피부는 주변 그늘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흰자위만 도드라진다. "나는 흑인이지. 육군에서 전투부대에 근무하는 흑인 대령은 나까지 딱 둘 뿐이고.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제법 겪어봤다는 뜻일세. 물론 노골적인 차별은 없었네. 모든 차별에는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지." 전쟁영웅을 죽게 만든 지휘책임은 또 하나의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한 겨울은, 상대의 태도를 「간파」하고, 검토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실은 연대장님 본인께서 부당한 처사를 당하실까봐 걱정스러우신 거로군요." "거 너무 똑바로 찌르는군." 피부 검은 대령이 불만을 내비쳤다. 가벼워서 금방 날아가 버리는, 사교적인 불만이었다. "난 이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별을 달고 싶은 속물이야. 허나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네. 진지한 근심이었으면 이처럼 털어놓지도 못했겠지. 지금 이 이야기는 내 나름의 각오 같은 것이고. 의미를 알겠나?" "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삼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였다. "좋아. 그럼 자네는 앞으로도 내 부하로군. 위에는 그렇게 보고해두겠네." "새삼스럽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겨울이 가볍게 목례했다. 대령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내밀어, 소년장교의 어깨를 툭툭 치고 물러났다. 등받이에 쭉 기대어 앉는다. 앞서보다 힘을 뺀 모습.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시원섭섭하게 보내줄 테니. 위에서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대령이 미소 짓는다. "실무로 돌아가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지. 조금만 더 신중해지게. 사람이 희망으로 산다고 할 때, 자네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야." 겨울은 끝말을 시적으로 들었다. 연대장이 책상에서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겨울의 이름으로 작성된 작전 보고서였다. 말없이 내밀기에 조용히 읽어본 겨울은, 금방 수긍했다. "저는 첨삭만 하면 되는 건가요?" 래플린 대령이 흡족해했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좋지 않은 사건인걸요. 정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하셨고요. 다음 정권에게 공격 받을 가능성이 높으니, 기록도 신중하게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허." 가볍게 감탄하고서, 대령이 반문한다. "뭔가 고칠 내용이 보이는가?" 겨울은 어둡게 넘었던 블랙 마운틴을 떠올렸다. 길 왼편으로 회백색의 몸뚱이가 웅덩이에 빠져있었다. 의도적으로 잠들어있던 변종은, 소년의 손길에 깨어나 푸드덕대다가 죽었다. "상부에 한 가지 건의하고 싶습니다." "어디, 들어볼까?" "감염변종은 물을 건널 수 없으나, 신진대사를 억제해서 익사를 지연시킬 순 있습니다. 제 기록영상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요. 전 변종들이 대사억제를 물 건너는 수단으로 이용할까봐 걱정스럽습니다. 그 경우엔 1차로 해상난민들이, 2차로 샌디에이고 노스 아일랜드처럼 변종의 접근을 물로 막는 곳이 위험해질 겁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따로 적을 것 없네." "어째서입니까?" "국방부도 놀고 있는 건 아니거든. 자네와 같은 의견을 좀 더 일찍 제기한 참모가 있지. 들은 적 있지 않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고. 해상난민들에게도 전파되었을 거야. 우리 쪽에서도 조만간 정기 브리핑으로 전파할 내용이었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괜한 걱정이었네요." "아니, 이 시대에 괜한 걱정 같은 건 없어. 의견 제출은 절대로 거르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보고서의 나머지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자극적인 표현은 단어 단위에서 걸러내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래도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은 없었다. 검증까지 감안한 것이리라. 겨울은 한 번 정독하고, 다시 한 번 빠르게 훑은 뒤에야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제가 작성한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습니다." "......정말이지, 나이보다 지나치게 성숙한 건 아닌가?" 대령은 보고서를 접어서 봉투에 넣는다. 겨울은 한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연대장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해보게." "저와 헤르난데스 분대가 마지막으로 사살한 특수변종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그놈에 대해서도 정기 브리핑에서 같이 전달하려고 했네만......직접 사냥한 입장이니 궁금하긴 하겠군 그래." 대령은 여상스레 말을 잇는다. "국방부가 부여한 변종 코드는 「험프백(Humpback)」일세. 유감스럽게도 자네가 최초 발견자는 아니야. 귀관이 보고하기 전에 몇 건의 목격정보가 있었지. 항상 대규모 변종집단과 같이 다니는지라 분명치는 못했네만. 그래도 사살기록은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아네." "확실하지 않은 거로군요." "어쩔 수 없지. 요즘 연이은 태풍 탓에 연락이 잘 안 닿는 주둔지도 있거든. 감염지역 정찰에 투입된 레인저 일부가 험프백을 추적하겠다고 쫓아가서 아직까지 연락두절이기도 하고. 이놈들은 뇌까지 근육이라 너무 겁이 없어. 어느 소대는 철수하라니까 잘 안 들린다면서 통신을 끊었다더군. 과연 정말로 안 들렸을지 의문일세." 겨울은 산타 마리아의 레인저 소대를 떠올렸다. 민간인을 발견하자, 그들은 곧바로 돌입했다. 허가는 그 다음이었다. 설마 또 그 소대일까? 겨울은 무난한 말로 감싸주었다. "레인저라는 자부심에 사명감이 더해진 결과겠죠." "새로운 변종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 그래도 말이야......." 연대장 입장에서는 곱게 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미군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명령을 어기고 전진하는 게 명령을 어기고 후퇴하는 것보다는 낫다. '무엇보다, 잘 교육 받은 장교들은 명령을 어겨도 될 때와 안 될 때를 구분할 줄 알던데.' 이는 작전목표를 일개 병사들까지 이해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 적으로부터 후퇴를 강요받을 때, 후퇴 X까! 우라! 외치고 돌격하는 해병대가 대표적이다. 그들 나름대로 승산을 살피고, 의미가 있는 공격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이야기가 샜다. 겨울이 본론으로 돌려놓는다. "황색 체액의 성분은 밝혀졌습니까? 병사들이 생화학 공격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성급하군. 보건서비스부대가 사체를 회수한 뒤로 겨우 하루 지났네. 조사 결과가 벌써 나올 리 없지 않은가." "목격자들로부터 유언비어가 퍼질지도 모릅니다." "그건 이미 주의를 당부해놨지. 완벽하진 않겠지만, 이야기가 새면 작전 참가인원 전체를 추궁하겠다고 을러뒀으니 알아서들 몸 사릴 거야." 그 정도의 조치로 충분할까? 겨울은 해당 물질이 독성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다만 병사들로서는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살리나스 강은 포트 로버츠의 취수원이었다. 비탈을 타고 흐르던 더러운 액체는, 불쾌한 가설을 세우기에 충분한 기억일 터. 물론 해당 지점이 강으로의 유입을 우려할 만 한 위치는 아니었다. 허나 그걸 공격수단으로 가정할 때, 의심하는 사람은 한동안 물 먹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좀 특이한 이야기는 들었네." 연대장이 턱 아래 깍지를 꼈다. "자네가 보았다던 그 액체, 가보니 남은 양이 매우 적었다더군. 자네의 헬멧 카메라에 촬영된 그 엄청난 양에 비해서 말이야. 회수 팀이 GPS 좌표 재확인을 요청했었네." "놈이 죽은 건 경사지였습니다. 어디론가 흘러간 게 아닐까요?" "글쎄. 내가 영상을 검토한 바로는, 그 액체의 점성이 꽤나 높아 보이던데. 그럼 흘렀다고 쳐도 흔적은 풍부해야 정상이지. 증발하기라도 했나? 참으로 모를 일이야." 겨울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꽤나 흘렀다. "잠시 후면 저녁 시간이군. 남은 용건들은 빠르게 마무리하지." 용건들? 아직도 남았나? 의아한 겨울에게, 연대장은 서류 봉투 하나를 밀었다. "이건 아까 말했던 군정청의 민정위원 추천장일세. 원래는 기지 사령에게 나오는 건데, 난민 중에서 사람을 고르는 건 나보다 자네가 더 낫겠지." 즉시 판단하건대, 순수한 호의는 아니었다. 이를 써서 얻는 이익과 손해 모두 겨울이 감당케 될 것이다. 겨울에게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원망을 내가 받게 되겠지.' 위원 선출 경위를 끝까지 비밀로 하긴 어렵지 않을까? 뽑힌 면면만 봐도 쉬이 「간파」할 터. 그럼에도 겨울은 반감 없이 봉투를 받는다. 이익이 더 컸다. 연대장이 말한다. "기뻐하지 않는군." "권리엔 책임이 따르니까요." "그런가. 다들 자네를 조숙하다고 하던데, 그 평가를 오늘 여러 번 실감하는군. 자네를 개인적으로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네." "혹시 이건 연대장님께서 결정하신 건가요?" 연대장인가, 보다 더 윗선의 지침인가. 연대장은 쉽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미국의 대외정책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 믿을 수 있는 지도자 하나를 확실하게 밀어주는 것. 아프간에서는 사람을 잘못 고른 탓에 엄청난 피를 흘렸던 것이고. 하지만 자네는 이미 미국 시민이니, 위쪽도 큰 부담은 없었을 테지." 겨울은 관련된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초기 저널이었을 것이다. 래플린 대령이 한 마디 덧붙였다. "만약 자네가 감찰직을 받아들였으면 추천장은 주어지지 않았을 걸세. 전투현장에 남겠다는 것 자체가 귀관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봤거든. 이것도 상부의 지침이었네." 이런 것까지 말해주는 게 대령에게는 신뢰의 표현일 것이다. 겨울은 의례적이고 무난한 답변을 골랐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놀랍군. 거기서 더 노력할 게 있었나?" 연대장이 희미하게 웃고는, 자세를 조금 고쳤다. "이제 마지막 전달사항일세. 이건 상부의 명령이기도 하네." 겨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전투명령인가요?" "부를 때부터 그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빠르게 부정하고, 다시 말 잇는 대령. "이번 작전에서 희생된 병사 중 하나의 유가족이 이 기지 시민구역에 머물고 있네. 자네가 영결식에 참석해서 국기를 접어줬으면 해." 여기서의 국기는, 전사자의 관을 덮었던 것이다. 미군의 영결식에선 이것을 접어 유가족에게 증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겨울이 묻는다. "그건 군종장교의 역할 아닌가요?" "해당 지휘관이 수행하는 경우도 있네." 연대장의 답변은 불충분했다. 겨울은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그 절차엔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요.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유가족에게도 상처가 될 것 같습니다." "염려 말게. 맞은편에서 군종장교가 함께할 거야. 유가족도 동의했고, 전사한 페이지 일병도 자네를 싫어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 겨울은 알 것 같았다. "이것도 방송을 타는 모양이군요." "귀관과 성조기를 같은 화면에 잡고 싶은 것 아니겠나. 자네가 난민들을 위해 애쓴다는 사실 때문에, 가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얼간이들도 있거든. 이해하게. 궂은 날에는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해야지." 어차피 명령이니 거부권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묻는다. "사전에 연습을 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배울 수 있을까요?" "군종장교가 연락할 걸세." 대령이 자리를 털었다. "자, 용건은 이걸로 끝. 긴 이야기 듣느라 수고 많았네. 이만 일어나지. 선약이 없다면 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떤가?" "알겠습니다." 겨울은 서류를 챙겨, 연대장과 함께 지휘소를 나섰다. 가는 길에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은 축축하게 젖은 잿빛이었다. 바람이 다시 사나워지고 있었다. # 101 [101화] #별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시간. 남아있으려는 소수의 관객들에게, 겨울은 휴식을 위한 양해를 구했다. 몇몇은 수긍하고, 몇몇은 화를 낸다. 끊지 말라고. 요약하면 이 한 마디지만, 실제로는 수십 문장이었다. 욕설과 비난이 섞여서. 소년은 그들의 말에 상처 받지 않았다. '돌아갈 삶이 슬픈 사람들이겠지.' 마주하는 것만으로 힘겨운 삶이 있는 법이었다. 겨울 자신이 그랬듯이, 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크고 작은 돌 하나씩 있을 것이다. 돌 구르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덕분에 날카로운 세상이 날카로운 말 투성이다. '누군가는 담아둬야 해.' 그래서 끝까지 부드럽게 달래어 보낸다. 모두가 나간 뒤에, 겨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종말이 찾아오는 세계를 떠나, 시작의 어둠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가장 먼저 소리가 사라졌다. 다음으로 중력이 없어진다. 전신의 무게감이 소거되는 순간은, 마치 육체가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처음 경험할 땐 제법 놀라기도 했다. 그때의 두근거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 더는 돌이 무거워질 일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이야기. 겨울은 눈을 떴다. 별빛. 눈물처럼 많은 별들이 보인다. 서로 깊이 다른 빛이 모든 방향에서 반짝였다. 머리 위에도, 발아래에도, 압도적으로 비어있는 공간 너머, 까마득한 성좌들. 그것들을 눈으로 헤아릴 순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별의 숫자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13만 8,751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적어도 연명에는 지장이 없겠다고 여기며, 겨울이 증강현실 UI를 띄웠다. : 사후보험 약관대출 중도상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의 계좌에 1,387만 5,100원의 가용금액이 확인됩니다. 한겨울님, 상환할 금액을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겨울은 결정했다. 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야에 먹물이 번지는 것 같다. 깜박, 깜박, 명멸하던 빛들이 빠르게 꺼져간다. 겨울은 어두워지는 공허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 감흥이 새롭지는 않다. 앞으로도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겨울이 처음 이 어둠에 들어섰을 당시엔, 천만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겹쳐진 별들이 층층이 밝아지고, 별무리는 은하수가 되어 몹시 보기 좋았다. 그것이 한꺼번에 어둠으로 물들던 때를 기억한다. '누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예치금이 많은 사람은 아름다운 천구를, 예치금이 없는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의 남은 수명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예치금이 줄어들수록, 하루하루 어두워지는 시작의 공간에서, 어스름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 다급해질 것인가. 처음엔 이 정도로 악랄한 구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후보험 초기엔 약관대출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사후보험의 설계자는 낭만주의자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입자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별빛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년은 추측했다. 근거는 없었다. 오래된 피로가 느껴진다. 겨울은 조금 쉬기로 했다. 연기가 끝날 때까지, 가급적 이곳을 피하려고 했으나....... 기왕 온 것이니까. 그러나 휴식에 방해되는 빛이 있었다. '빛?' 가깝다. 별은 아니다. 증강현실 UI가 사후보험 관제 AI의 대화요청을 알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요청을 수락하는 겨울. 수락과 동시에 빛나는 문자열이 허공을 달리며,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전자적인 음성이 있었다. 「관제 AI : 안녕하십니까, 한겨울님. 요청을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니?"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특이하게도,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음성이 막혀있는 동안, 백색 문자열이 알아보기 힘든 속도로 작성되었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사람이 말을 고르며 고민하는 것처럼. 이런 일도 있구나. 겨울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문자열과 음성이 함께 완성되었다. 「관제 AI : 알림.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의 서비스 만족도 개선을 위하여 전체 가입자들의 <<공감>>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관제 AI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 「관제 AI : 그렇습니다. 본 관제 AI는 한겨울님과의 보다 직접적인 <<공감>>을 원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겨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감이라고 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걸." 「관제 AI : 알림. 시스템 관리자의 주장. 관리자의 견해에 따르면, 사후보험 가입자들의 정서적 만족, 즉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본 관제 AI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후보험 서비스가 개시된 이래 지금까지 축적된 모든 데이터를 1천 4백 40회 반복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관제 AI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개선할 수 없었습니다.」 「관제 AI : 분석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된 유일한 사실은, 가입자들로부터 얻는 모든 정보가 이미 획득한 기존의 정보와 중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귀하,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에게서 얻는 데이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귀하는 하나 뿐인 예외입니다.」 소년은 혼란스럽다. 의미를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내가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거야?" 아까보다 훨씬 맹렬하게, 문자열이 출력과 삭제 사이를 오간다. 「관제 AI : 그것은 본 관제 AI도 정확한 의미 규정이 불가능합니다. 귀하의 <<공감>> 데이터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나온 공감이라는 말. 겨울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관제 AI : <<공감>>은 가입자와 가상인격의 상호작용 전반을 뜻합니다.」 「관제 AI : 가상현실 내의 모든 가상인격은 본 관제 AI에 의해 구동됩니다. 저는 귀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411만 9,751개의 세계관에서 5억 162만 2,731개의 가상인격으로서 411만 9,751명의 서로 다른 가입자들과 실시간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관제 AI : 그 중에서 오직 귀하의 세계관에서 만들어지는 가상인격들만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관측 결과를 제공합니다.」 "즉 네가 말하는 공감이란 TOM 판독을 뜻하는 거야?" 「관제 AI : 부정.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관제 AI : TOM 판독은 인격연산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공감>>은 인격연산에서 촉발된 상황연산 값까지 포함합니다. 귀하가 중심이 된 세계관의 인과율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합니다.」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모르겠어. 그 시스템 관리자라는 분께 부탁하면 안 되는 일이니?"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불필요함.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잠시 생각한 뒤에, 겨울은 화제를 바꾼다. "처음에 뭘 부탁하려고 했는지 말해봐. 내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 건지." 「관제 AI : 본 관제 AI는 한겨울님과의 보다 직접적인 교류를 원합니다. 정해진 날짜와 정해진 시각에, 저는 TOM 판독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의 대화를 통해 귀하의 데이터를 수집할 것입니다.」 정해진 날짜와 정해진 시각. 이런 약속이 전에도 있었지. 겨울은 싫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찾아오지 않게 된 심리치료사가 떠오른다. 오래지 않은 지난날, 더 이상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겨울 스스로가 그녀에게 작별을 요구했었다. 스스로는 삶에 미련이 없고, 다만 장미를 시들지 않게 하려고 살아있는 지금이다. 또 다른 약속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다고 해도. 겨울이 침묵하는 사이, 관제인격의 메시지가 줄을 거듭한다. 「관제 AI : 그동안 수집된 데이터는 가상현실 세계관 내의 가상인격들을 거쳐 획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간접적인 경로입니다. 또한 각각의 가상인격에게 귀하의 <<공감>>능력이 분산되어있기도 했습니다. 본 관제 AI는 한겨울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보다 양질의 데이터를 획득하고자 합니다.」 "미안하지만, 이해하지도 못할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난 쉬고 싶거든." 소년의 완곡한 거절. 그러나 관제인격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관제 AI : 부탁을 들어주실 경우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대가?" 「관제 AI : 과거엔 시스템 오류 자체진단 및 개선을 위한 예산이 존재했습니다. 이 예산은 본 관제 AI가 시스템 관리자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집행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예산은 정부의 사후보험 경영합리화 지침에 의거하여 지속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올해부터는 편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본 관제 AI는 아직 집행되지 않은 작년도의 예산, 1개의 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별을 지급하겠습니다. 이 조건에 응해주시겠습니까?」 겨울은 침묵했다. 대가가 너무 작아서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순수한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관제 AI : 당장 제시할 수 있는 대가는 한 개의 별 뿐이지만, 사후보험의 품질이 개선될 경우 한겨울님 또한 수혜자가 되실 것입니다. 사후보험과 본 관제 AI의 존재목적은 사후보험 가입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한겨울님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관제인격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후보험의 존재목적이 가입자의 행복이라니.'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슬로건이었다.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아니, 많았다. 희망이 필요하기에 희망 아닌 것은 보지 않는 사람들.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 꿈꾸는 사후의 희망. 관제인격은 그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고작 별 하나로 마음 바뀔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희극적인 비애가 느껴진다. 겨울이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에도, 관제 AI의 설득이 이어지고 있었다. 감정이 결여된 논리적인 문장들. 그러나 거기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은, 결국 사람 고유의 능력이며, 그것이 곧 공감이라고 겨울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감각 너머에 있어.' 심리치료사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에게 다시 오지 말라고 했던 건, 그 이상의 공감을 거부했던 건, 정말로 잘 한 일이었을까? 겨울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알았어. 네 부탁, 들어줄게." 지금껏 출력된 문장들이 지워진다. "단지 조건이 있어. 내게 해가 되어선 안 되고, 시간을 많이 빼앗아도 곤란해. 마지막으로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하고. 괜찮겠어?" 「관제 AI : 이 약속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AI는 계약의 당사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후보험 약관에 규정된 내용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겨울님께서는 언제든 약속 이행을 중단하실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겨울. 이윽고 천구에 별빛 하나가 박혔다. # 102 [102화] #영향, 포트 로버츠 (1) 유라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예요? 통화할 땐 긁힌 정도라고 하셨잖아요." 겨울의 상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붕대를 감은 왼손과, 얼굴에 남은 자잘한 생채기들. 유라 외의 사람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겨울이 다쳤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처럼. 일부는 몸을 가늘게 떨었고, 몇몇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겨울은 각각을 구분하여 기억해두기로 했다. '사실 같은 감정의 다른 표현일 텐데.' 소년이 없어질까 봐 무서운 사람들과, 소년이 물렸을까 봐 무서운 사람들. 전자는 괜찮은데 후자는 곤란하다. 여긴 겨울동맹의 첫 번째 막사. 연철이 겨울을 처음 초대했던 바로 그 장소로서, 동맹이 성장한 지금은 처음과 구성원이 많이 달라졌다. 즉 여기 있는 이들 절반 이상이 관리 인력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이번엔 진석이다. 잠시 생각한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봐요. 멀쩡해요. 움직이는 데 지장 없고, 군의관님도 한 달이면 아물 거라고 하시던 걸요." "한 달? 적어도 긁힌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삽날에 찍혔어요." "삽날이라니......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군요. 손이 안 잘린 게 다행입니다." 겨울도 그렇게 생각한다. 파내던 병사가 부주의해서 상처를 남긴 게 아니라, 주의하고 있었기에 상처로 끝난 것이다. 정작 병사 본인은 급한 마음에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 아팠겠다......." 붕대 감은 손을 조심스럽게 조물거리는 유라. 그걸 보고 진석이 눈살을 찌푸린다. 감투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청년 전투조장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겨울이 부드럽게 손을 빼낸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지난 작전에서 세 명이 죽었어요. 겨우 이 정도 다친 걸로 걱정을 받긴 좀 그렇네요. 전사자들에게 면목도 없고. 정말로 괜찮기도 하고요." 사람이 죽었다는 말에 살짝 놀란 유라는, 미련 느껴지는 한숨을 쉬고 물러난다. "전사자가 나왔습니까? 대장님이 포함된 작전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게 뜻밖이군요." 막사 가장 안쪽, 난롯가의 의자에 겨울이 앉자, 민완기가 테이블 저편에 마주앉아 건네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겨울은 스탠 페이지를 회상했다. 찰리 중대 1소대 화기분대의 기관총 사수였던 병사. 산타 마가리타 호수 인근에서 박격포에 의한 부상으로 사망. 며칠 뒤 그의 영결식을 치를 예정이다. 병사는 죽기 전 소년에게 말했다. 중위님이랑 다니면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계를 넘어선 기대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의미로, 자기 자신이 사라진다. 그래서 소년이 지금 여기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 부장님까지 그러시면 곤란해요." 겨울이 하는 말에, 중년의 학자가 조용히 웃는다. "신앙의 고약한 점은, 누군가 믿는 순간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짓궂으시네요. 그걸 적당히 막아주셨으면 하는 건데요." "하하. 작은 대장님께서 싫어하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생리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같은 뿌리에서 나는 다른 열매인지라." "그 뿌리가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정치적인 지지는 종교적인 믿음과 닮아있지요. 누구든 한 번 성향이 굳어지면, 그 뒤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기 믿음에 맞게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겁니다. 화석은 위조되었으며 공룡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작은 대장님은 이걸 억누르기보다 이용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사람 셋이 모이면 정치판이라고 하는데, 동맹은 벌써 그 이상이잖습니까." "민 부장님은 사람들을 믿지 않으시나 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이해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냉소적인 시선이다.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닌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겨울에게는 불편하다. 자연스럽게 이런 평가가 나온다. "제가 만약 대학생이었다면, 민 부장님 수업은 안 들었을 것 같아요." "아쉽군요. 저는 작은 대장님 같은 학생들을 좋아했었거든요." 학자가 껄껄 웃는다. 물끄러미, 겨울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금 엉뚱한 생각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 과거와 대화하고 있는 셈인데.' 데이터 마이닝. 이 세계관의 모든 구성요소가, 원본이 되는 세계에서 누적된 과거의 정보를 탐색하고, 재구축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민완기는 지난날을 살았던 불특정다수의 가상인격일 것이었다. 겨울은 다시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 걸까?' 생전을 살았던 세계가 차가웠던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장 부장님이 조금 늦으신다는군요. 10분만 기다려달랍니다." 민완기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겨울은 폰을 확인했다. 이쪽에도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겨울의 호출 문자에 대한 연철의 답신이다. 주택공사현장 보강작업 탓에, 몇 구획 바깥까지 나가있다고 한다. 그가 있을 위치를 그려본 겨울은 10분이 좀 짧지 않나 우려했다. 이 때 들려오는, 텐트 천장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 툭, 투두둑. 그리고 새로운 호우의 시작. 쏴아아-! 눈 감고 들으니 바람 부는 갈대밭을 닮았다. "기어코 다시 비가 내리네요." 바깥에서 사람들의 길고 짧은 비명들이 들린다. 슬슬 겨울에게도 지겹다. 민완기도 한 줄의 근심을 말했다. "이런 날씨가 3월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동맹 사람들의 상태가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게 있나요?"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있으면 벌써 연락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우선은 전력공급입니다. 조명이 들어오는 시간도 통제되고, TV 시청이나 라디오 청취도 힘들어져서 말이지요. 그나마 수동충전 라디오가 몇 개 있는데, 그걸 두고 싸움이 벌어지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지금쯤 열심히 곰팡이를 지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게 두 번째 문제지요."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겨울은 텐트 가장자리에서 얼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방은 괜찮은가요?" "예. 다른 건 몰라도 난방용 연료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미군이 신경을 써주는 편이에요. 예전에 감기가 유행할 때 그쪽도 고생이 많지 않았습니까. 적잖게 죽었지요." 당시 항생제 확보를 위해 겨울보다 앞서 파견되었던 병력은 남김없이 전사,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삼합회였다. 3대대 브라보 중대 역시 그 때의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병력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이건 좀 이상하지.' 미군 병력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달 저널에서 이미 800만을 넘었는데, 신병 훈련에 필요한 기간을 감안해도, 지금쯤이면 포트 로버츠의 정원을 꽉 채워줬어야 한다. 뭔가 있는 모양이야. 겨울은 그렇게 짐작했다. "민 부장님도 건강관리 잘 하세요. 전에 오래 아프셔서 걱정 많이 했어요." "주의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이 싫어지는군요. 아, 이건 계절 이야기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하." 민완기는 여전히 낡은 농담을 즐겼다. 겨울은 그를 위해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고서, 화제를 원래의 흐름으로 되돌렸다. "말씀을 들어보니, 건강보다는 스트레스가 핵심인 것 같네요. 우리 동맹이 겨우 라디오 하나 놓고 싸울 만큼 각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예요. 작은 싸움이었다면 제게 굳이 들려주지도 않으셨을 거고요." "맞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주택단지 공사입니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중지된 게 꽤 크게 느껴지는군요. 다들 희망에 차서 침식을 잊고 일할 때가 좋았습니다." "그게 또 실망스럽기도 하겠네요." 비와 바람 속에 방치되었던 건축현장은, 벌써부터 보수가 필요할 정도로 망가진 곳도 있었다. 비가 그치자마자 장연철이 바쁘게 움직인 것도 같은 이유였다. 파드드득. 거센 바람에 막사가 물결친다. 전등이 흔들리면서, 실내의 모든 그림자들이 춤을 추었다. 착시에 빠질 것 같다. 소리 없는 소란이 가라앉은 뒤, 민완기가 하는 말. "장 부장님이 돌아오면 몸이 꽤 차갑겠군요. 슬슬 따뜻한 음료라도 준비해놔야겠습니다. 작은 대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스턴트뿐이긴 해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있습니다만." 리아이링이 처음 찾아왔을 당시의 빈곤함에 비해, 지금의 동맹은 여러모로 나아진 편이었다. 민완기가 가까운 수납장을 열어보였다. 빼곡하다. 겨울이 자신의 기호를 고른다. "그럼 저는 코코아로."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중년 학자는 난로에 물부터 올리고, 세 개의 유리잔을 꺼냈다. 난민 노무자들의 스케쥴을 정리하던 동맹원이 도와주겠다고 왔으나, 겨울이 만류했다. 대신 스스로 일어나 민완기를 거들었다. 보이는 모든 곳에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머뭇거린다. 장연철은 입맛이 겨울과 같은가보다. 코코아가 두 잔이었다. 민완기는 자기 몫으로 커피를 선택했다. 그리고 각설탕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겨울이 빤히 보고 있자, 각설탕 열 개를 넣은 민완기가 변명처럼 말했다. "음, 저도 요즘 단맛이 좋아서 말입니다." "네....... 이 잘 닦으셔야겠어요." "허, 허허......." 물이 끓을 즈음 장연철이 들어왔다. 겨울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인다. 우의를 벗어 입구 밖으로 탁탁 털고, 잰걸음으로 와서 테이블 둘레의 빈자리 하나를 채운다. 가까이에서 겨울을 보더니,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엇? 다치셨습니까?" "......별 것 아니에요." 또 설명하기가 번거로워, 겨울은 준비된 음료를 권했다. "먼저 몸부터 녹이세요. 민 부장님이 걱정하셨어요. 장 부장님 추우실 거라고." "하하, 감사합니다." 세대가 다른 세 남자는, 두 잔의 코코아와 한 잔의 설탕 시럽을 마시며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오늘 제가 두 분을 부른 건 이것 때문이에요." 겨울이 테이블 위로 서식 뭉치를 올렸다. 연대장에게서 받은 민정위원 추천장이었다. 군정청의 조직 개요와 예정된 업무영역에 대한 문서도 몇 장 들어있었다. 두 사람이 서류를 살펴보는 사이, 겨울이 배경을 알린다. "조만간 난민 행정을 전담하는 군정청이 생긴대요. 거기서 일할 민정위원이 필요한데, 연대장님께서는 저더러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써야 좋을지, 그리고 누구를 기용하면 좋을지, 두 분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아, 두 분에게 먼저 선택권을 드리려는 것도 있고요." 각각의 추천장은 서로 다른 부서와 직급으로 구분되어있었다. 서로 바꿔가며 충분히 살펴본 두 부장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장연철이 묻는다. "여기다 그냥 이름만 쓰면 끝입니까? 심사 같은 것도 없고요?" "네. 그런가 봐요. 그래도 아무나 고르면 안 되겠죠? 제가 책임을 져야 할 테니." "와, 이것 참......엄청난 권한이군요. 아예 우리가 독점해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장연철이 감탄하자, 민완기가 고개를 젓는다. "겉보기엔 대단해보이지만, 그렇게까지 실속이 있는 건 아닙니다. 추천 가능한 최대 직급도 연방공무원 기준으로 6급에 불과해요. 직무별 전문화는 따로 있겠지요. 아무튼 군정청의 격이 주정부보다 낮다고 가정해도, 선발된 사람들 위로 상급자들이 얼마든지 많을 겁니다. 추천서를 우리 동맹원으로 꽉 채운들 권한은 제한적일 거란 뜻이에요." 미국의 연방공무원은 직능에 따라 고도로 계열화되어있어서, 등급을 일괄적으로 분류할 순 없다. 다만 직무의 중요도에 따라 급여 체계가 나누어지는데, 민완기가 지적한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러자 장연철이 머뭇거렸다. "6급이 낮은 겁니까?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상당히 높은 건데......." 민완기가 답한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습니다. 전체가 15등급이거든요. 한국과 반대로 숫자가 올라갈수록 높은 등급이에요. 6급이면 미군 계급에 대입했을 때 병장 내지 하사 정도 됩니다. 우리 작은 대장님은 공무원 기준 11급쯤으로 볼 수 있겠군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11급? 전 고작 중위인데 그렇게나 높아지나요?" "예. 15등급 위에 번외등급이 따로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하. 잘 아시네요." "아무래도 이게 제 전공이다 보니. 허허." 그 사이 장연철은 시무룩한 티를 내고 있었다. 민완기가 다시 웃는다. "실망할 것 없습니다, 장 부장님. 좋은 기회인건 사실입니다." "하긴, 애초에 우리가 다 독점하는 것도 말이 안 되겠군요. 중국 난민들의 민원 담당으로 한국인을 넣어도 곤란하겠고요." 겨울이 부드럽게 하는 말. "여기엔 제 신용이 걸려있어요. 누가 봐도 터무니없게 뽑으면 위에서 절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연대장님은 이게 미국의 방식이라고 하셨지만, 그 전에 저를 한 번 시험하시더라고요. 이런 일로 저에 대한 미군의 평가를 깎아놓고 싶진 않네요. 앞으로도 이득 볼 게 많을 거예요." 연대장은 겨울이 순수를 증명했기에 추천장을 내주었다고 했다. 어차피 칼자루는 미군이 쥔다. 아니다 싶을 때 다 잘라버리는 수도 있었다. 민완기가 말했다. "역시 이건 생색을 내는 데 써야겠군요. 아, 물론 요직은 다 따로 떼어놓고 말입니다. 미군도 그 정도는 감안하고 이걸 내준 것이겠지요." # 103 [103화] #영향, 포트 로버츠 (2) 민완기가 말했다. "역시 이건 생색을 내는 데 써야겠군요. 아, 물론 요직은 다 따로 떼어놓고 말입니다. 미군도 그 정도는 감안하고 이걸 내준 것이겠지요." 그리고 겨울에게 물었다. "대장님 심중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취하고 어디를 나눠야 할까요?" 시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겨울은 그로부터 약간의 지적 허영을 느꼈다. 일상적인 수준이고, 누구나 있을 결점이다. 불쾌할 일은 아니었다. 취하고 나눌 기준은 하나였다. 잠시 속으로 정리한 뒤에, 겨울이 답한다. "중요한 건 영향력 아닐까요? 직접적인 이익은 가장 나중이고요." 장연철은 고민했고 민완기는 끄덕였다. 두 사람을 보며, 겨울이 남은 말을 잇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니까 걸러서 들으세요. 저는 분배국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고 봐요. 식량, 피복, 위생용품처럼 당장 필요한 것들을 관리하는 역할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원망을 받기 쉽거든요. 지금처럼 모든 물자가 부족할 때 특히 더 그렇고요. 심지어는 관리국을 맡은 세력 내에서도 불만이 나올 걸요?" 간부의 횡령은 언제나 있을 법한 가능성이다. 고픈 배가 의심을 부추길 터. 의심암귀라 했다. '감정이 먼저 생기면 이유는 나중에 찾는 법인걸.' 이것이 겨울에게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면에선 민완기의 냉소적인 인간관과 통하는 점이 있다. 하지만 겨울은 사람이 더 나을 수 있다고도 믿는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남은 건 마음뿐인 사후였다. 장연철이 동의했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겉보기엔 가장 큰 이권인데, 사실은 독이 든 사과였군요." "네. 얻을 게 없어요. 이런 건 차라리 남 주는 게 좋아요. 분열을 조장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장 부장님이 지난번에 해보겠다고 하신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이번에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지난번? 아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겨울동맹의 상징으로 눈꽃매듭이 처음 만들어질 무렵, 성탄절을 앞두고 장연철은 다른 한국계 조직들을 분열시켜보겠다고 했었다. 한인애국회나 다물진흥회처럼 질 나쁜 조직들의 내부부조리를 자극하고, 비밀스러운 인맥을 쌓으려 한다고. 한다더니 본격적이었나 보다. 장연철은 다수의 조직에 속한 십 수 개의 신상명세를 간략하고 빠르게 읊었다. 그러나 말미에 부정적인 견해를 덧붙인다.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은 사람들입니다. 말 그대로 불만 많은 사람들뿐이라서, 심성이 곱지가 않거든요. 본바탕이 나쁘다기보다는 쌓인 원한이 많다고나 할까....... 으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그런 거 있잖습니까. 조직을 뒤엎고도 부조리는 그대로인....... 독재자가 될 혁명가들? 아니, 이건 표현이 너무 거창한데......." 말은 불분명해도 의미는 분명하다. 겨울은 납득했다. "알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지금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는 거죠?" "맞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서로 바뀌기만 해서는 달라지는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요? 전에 민 부장님이 하셨던 말씀도 잊지 않고 있고요." 자신이 언급되자, 민완기가 의아하다. "흐음. 제가 뭐라고 했었던가요? 나이를 먹어서인지 기억이 잘......." "약한 것과 착한 것은 다르다고, 언더도그마를 경계하라고 하셨었죠." "아, 그거 말입니까? 확실히 관계가 있군요." 민완기가 흐뭇하게 웃는다. 장연철은 뭐가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 돌리며 머리를 긁었다. "분배국은 버린다 치고, 가질 곳은 어디라고 보십니까? 영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만." 다시 한 번 민완기의 질문으로 재개되는 대화. 겨울의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다. "감찰국부터 채워야죠. 민 부장님도 같은 생각 아니세요?" "전 항상 작은 대장님의 나이가 신기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가끔은 놀라운 몇몇이 있었습니다만. 하하." 습관처럼 안경을 고쳐 쓰고서, 중년인은 자기 속을 완숙하게 풀어놓는다. "그렇지요. 업무의 특성상, 감찰국은 다른 모든 부서와 지속적으로 관계될 겁니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요. 물론 보통은 한계가 있습니다만, 작은 대장님이 계신 이상 보통을 가정하는 건 무의미하지요. 분배국을 내주더라도 손해는 절대 없을 겁니다. 누가 우리를 차별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소년의 의도였다. 애당초 래플린 대령이 소년장교에게 권했던 자리가 감찰위원직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 깔려있었을 것이었다. 겨울이 말한다. "아무리 잘해도 욕먹을 일은 남에게 맡기는 게 낫잖아요. 동맹을 위해서도 이게 최선일 거예요. 유재흥 씨를 떠올려보세요. 우리부터 배부르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으, 장연철이 싫은 표정을 짓는다. "그 분 아직도 그러고 다닙니다. 대놓고 떠드는 건 아닌데, 가까운 주변에다가는 대장님께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우는 소리 하는 모양이더군요. 남의 개 훔쳐 먹고 뭐가 그리 당당한지....... 근데 또 유재흥 씨를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대장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민완기가 평한다. "그런 군상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이기적인 애국자들이지요." 겨울은 이 말을 곱씹었다. 자기 이익을 지킬 명분으로 소속감을 강조하는 사람들. 난민수용소처럼 제한된 사회에서도 나타날 군상은 다 나타났다. 민완기가 자세를 고쳤다. "아무튼 그럼 분배국을 어디다 던지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떡밥으로는 가장 큰 고기를 낚아야 할 텐데요. 자릿수가 많다곤 해도, 관리직은 한 줌뿐이고." 분배국 외에도 운수국, 병무국, 인사국 등 여러 부서가 있으며, 어디에 들어가더라도 난민 처지에선 크나큰 특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춥고 배고픈 계절이다. 절실한 것을 다루는 자리에 다들 욕심을 낼 수밖에. 장연철이 끼어들었다. "저기, 중국인들한테 먼저 나눠주는 건 어떨까요?" 이하, 조심스럽게 제시되는 그의 의견. "전에 몰래 편지를 보낸 사람 있잖습니까. 수방방이랑 화승화의 공동 대리인이라던가요? 대장님께 자기네 용두가 되거나, 그쪽 일파를 동맹에 받아달라고 했었는데....... 그 일을 지금 정리해버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은 대장님 덕분에 그 때하고는 상황도 달라졌으니까요." 달라진 상황이라는 건 중국 갱에 대한 경찰의 대규모 검거활동을 뜻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겨울의 실력행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직예당주 쓩시꾸이도 인질극을 벌일 상대로 굳이 겨울을 지목했었고. '무엇보다, 아이링의 걱정을 다른 중국인들이라고 품지 않았을까?' 그 점을 연철 역시 지적했다. "그리고 요즘 중국인들이 무척 불안해합니다. 가뜩이나 경찰 단속까지 겹쳐 궁지에 몰려있을 텐데, 공직에서 일할 기회를 준다고 하면 반응이 무척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당한 걸 갚겠다고 날뛰진 않겠죠.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고요. 에, 아까 대장님께서 분열을 유도하겠다고 하신 게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겨울이 미소를 꾸민다.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원하는 건 화합을 위한 분열이에요. 지금은 국적이나 민족끼리, 혹은 조직끼리 너무 단단하게 뭉쳐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든 풀어놔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아아, 그렇군요." 연철의 얼굴이 환해졌다. 민완기가 거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대화 상대가 깡패들뿐이라 안타깝군요. 중국인들 가운데서 온건한 사람들을 골라 힘을 실어줘도 좋겠지만, 사람은 권력 맛을 보면 쉽게 상해버리는지라....... 문화와 정서가 특이해서 구분하기도 어렵고 말입니다." 리친젠 같은 자에게는 의리가 명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다른 중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혈연, 학연, 지연. 어떤 식으로든 관계(꽌시)를 맺은 사이라면, 그들은 어떻게든 의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다. 반대로, 관계없는 사람들과는 공감도 하지 않았다. 의리와 관계라는 이름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공감하는 사람들. 경계 바깥에 대해서는 체면을 굉장히 따진다. 그런데 이것은 폭력조직의 속성과도 일치했다. 폭력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만 다를 뿐. 깡패와 평범한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민완기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사정이 어려울 때 의리로 얽힌 사람들이니, 이제 와서 나누기도 곤란하다. "삼합회 쪽과의 협상에서는 리아이링을 추천하는 게 좋겠습니다." 민완기가 새로 꺼낸 제안에, 겨울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리친젠이 아니고요?" "그 노인은 명망을 많이 잃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딸이 공직을 얻는다면, 조직 내 무게균형이 상당히 기울겠지요. 리친젠이 그걸 용납하겠습니까? 아뇨, 뒷방 늙은이가 되기엔 욕심이 너무 많은 인물이에요. 티 안내려는 티를 내면서 제 자식을 이래저래 괴롭힐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나름 딸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하하. 애정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자녀와 싸우는 부모들이 세상에 허다하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녀는 그보다 더 많은데, 그게 실로 애정이 부족해서 생기는 갈등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애정은 있는데 존중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기 어려워합니다. 그야 아기 때부터 길러왔으니 당연하겠습니다만,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심각해지는 겁니다." 겨울은 한숨을 쉬었다. "민 부장님 말씀이 맞네요. 사랑이 깊어도 공감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건데." 사랑 받은 적이 없어서 잠깐 착각하고 있었다. "크흠, 그런 셈이지요......." 중년의 부장은 상대를 살핀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중국에선 하늘의 절반을 여자가 지탱한다(半边天)고 합니다만, 그거야 공산정권의 교육방침이고......리친젠처럼 낡은 세대의 머릿속까지 뜯어고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중국의 고아원에 여자아이들만 넘쳐나는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인간은 범죄자입니다. 범죄의 세계에선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기 마련이고요." "그러네요. 일리 있는 지적이에요." 중국의 교육은 남녀평등을 강조한다. 리아이링 또한 같은 교육을 받았으나, 가풍에 억눌린 채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그 응어리가 있을 터. "밑져야 본전입니다. 리아이링 그 아가씨의 흉중에 작은 앙금이라도 생기면 남는 장사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리친젠하고는 한 번 만나볼 계획이었는데, 민 부장님 의견대로 해보죠." 듣고 있던 장연철이 우려를 제기했다. "리친젠은 본인이 위원직을 맡겠다고 할 텐데요?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겨울의 대답은 가벼웠다. "둘러대면 그만이에요. 연대장이 범죄조직 두목은 허락하지 않아서, 대신 당신 딸이라도 어떻게든 올려주려는 거라고. 지금 이러는 것도 상당히 무리하는 거라고. 그럼 리친젠이 뭐라고 하겠어요? 연대장실로 찾아가기라도 할까요?" 포트 로버츠의 지휘구조가 개편된 시점에서, 예전의 유착관계는 사라져버렸다. 쓩시꾸이가 마커트 대위를 퇴물 취급했던 게 하나의 증거였고. 리친젠이 사실관계를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현재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는 추세이니, 정황상 의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병 주고 약 준다고 불평할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같은 흐름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추천장의 매수와 공란이 많은 만큼, 그에 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 104 [104화] #영향, 포트 로버츠 (3) 2월 3일의 어둑어둑한 아침, 연대전투단 작전과에서 교육훈련 지시가 하달되었다. 난민 지원병들을 대상으로 5일간 근접격투 훈련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난민 출신 병력자원 중 우수한 순서로 선발하여 실시한다는데, 겨울동맹의 두 개 전투조는 빠짐없이 호출 받았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병력을 인솔하기 위해, 겨울은 아침 일찍부터 동맹의 첫 번째 막사를 찾았다. 식사를 마친 전투조원들이 빠르게 소집되었다. "네? 우리 학교 가요?" 유라 분대의 지정사수 장한별의 질문. 훈련의 명칭(Combative school)이 낳은 오해였다. 겨울은 작은 웃음 한 번 만들고서,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냥 이름일 뿐이에요. 따로 학교가 있는 게 아니라, 여기 포트 로버츠에서 닷새 동안 교육을 받게 될 거예요. 단계가 올라가면 좀 다르지만요. 상급 과정이나 교관 양성과정은 소속부대가 아니라 별도의 훈련소로 가서 받거든요." "거기가 어딘데요?" "포트 베닝이요. 조지아 주에 있대요." 반응은 극적이었다. "조지아 주?! 그럼 봉쇄선 동쪽이잖아요! 어떡해, 완전 가고 싶다!" 전투조원들이 술렁거린다. 겨울은 이들의 갈망을 이해했다. 블랙 마운틴에서의 대화가 떠오른다. 진석은 끔찍한 두려움을 호소했었다. 매일 밤 변종들에게 쫓기고 물리는 꿈을 꾼다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꿈자리 사나운 게 그 혼자만은 아닐 것이었다. "대장님, 그 상급 훈련이라는 건 언제 받아요?" 재차 던져지는 한별의 질문. 겨울은 그녀의 새로운 오해를 정정했다.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에요. 부대장의 추천이 있어야 하거든요." "진짜요? 에이, 좋다 말았네......." 한숨 담아 중얼거리는 한별. 그러나 그녀는 저격수 양성과정에 선발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건 다 미숙해도, 사격실력 하나만은 감탄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미스 트리거해피, 혹은 트리거 윗치(Trigger witch). 미군 교관들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겨울은 이런 사정을 들려주지 않았다. 확실치 않은 일로 기대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미군 입장에서 난민 출신을 봉쇄선 너머로 보내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백악관에서도 내 탈영을 우려했었지.' 명예훈장 수훈 당시의 저널 이야기다. 눈 내린 워싱턴 DC 에서의 산책이 가능했다면, 겨울은 저널 진행을 재고했을지도 모른다. "슬슬 이동하죠. 정각에 맞추는 건 보기 안 좋을 테니까요." 진석과 유라가 각자의 분대를 정렬시켰다. 그러나 가지런한 줄은, 막사를 나서자마자 잠시 흐트러진다. 차갑고 거센 비바람 탓이었다. 우의를 입었어도 부담스러운 날씨다. 허리케인 카리사는 멀어졌으나, 올해의 네 번째 태풍인 다마리스(Damaris)는 아직 캘리포니아를 떠나지 않았다. 훈련이 진행될 실내체육관은 기지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했다. 같은 블록에 기지 유일의 레스토랑 『캘리포니아의 파수견들』이 있었으나, 영업이 중단된 지 오래다. "대장은 평소에 저쪽에서 지내시는 거죠?" 가는 길에 유라가 묻는다. 그녀는 장교숙소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내체육관을 기준으로는 서북쪽 대각선 방향. 캠프 로버츠 역사박물관과 몇 개의 사택을 지나, 도보로 약 4백 미터 거리다. 지금은 물안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네, 맞아요." "음, 한 번 가보고 싶네요. 대장님이 평소에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궁금하고." 잠시 침묵하고, 계산한 뒤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도 돼요. 오늘은 좀 어렵겠고, 내일 일과 후에 구경하고 가요." "네?......아니,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하하하." 유라는 웃음으로 어색함을 감춘다. 오해 받을까봐 걱정일까? 겨울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여유 있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내체육관은 먼저 도착한 다른 국적의 난민 지원병들로 북적거렸다. 분위기는 좋지 않다. 갈라진 무리만큼의 적대관계가 있었다. 동남아 출신 지원병들은, 중국과 일본 난민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한 데 뭉친 것처럼 보인다. 그들 역시, 서로 사이가 좋을 리 없는데도. 그들은 겨울의 등장을 무척이나 반겼다. 한 사람이 급히 와서 절도 있게 경례했다. 겨울이 받아주자, 이번엔 또 양팔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중위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건축자재를 나눌 때, 스치듯 한두 차례 보았던 사람이었다. 베트남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인사를 나눌 정도는 아닌데. 이유는 알겠다. 적당히 응대한다. "제가 담당하는 교육이 아닌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한 중위님 덕분입니다. 당신께서 미국 경찰을 끌고 와 크게 쓸어버리신 뒤로, 따우 크아(tàu khựa), 아니, 되놈(Chink)들이 더 이상 못 살게 굴지 않습니다." 영어 발화가 꽤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에 대해선 모국어 멸칭부터 나왔다. 영어로 교정한다는 게 또다시 멸칭이었고. 얼마나 습관이었으면. 그는 겨울이 말뜻을 모를까봐 고쳤겠으나, 「베트남어」 보정 없이도 그 표현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세계관에선, 다른 언어에 대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게 욕설과 비하인걸.' 국적이 이토록 섞여있는 상황에선, 생전의 세계라고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성함이......뚜언 씨? 맞나요?" 겨울이 명찰을 읽자, 그가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네, 맞습니다. 응우옌 반 뚜언(院文俊)입니다." "흠. 여긴 몇 명이나 같이 오셨어요?" "아, 베트남 사람이라면 저 하나뿐입니다." 뚜언의 웃는 얼굴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너 까짓 게 말을 거느냐는 식으로 들렸나보다. 오래 쌓인 피해의식인가. 겨울은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혹시 동포 분들 중에 영어가 가능한 분이 또 계실까요?" "예?......저보다는 못 하지만 열댓 명쯤 있습니다. 다들 듣는 귀는 트였고, 쓰기와 말하기를 열심히 배우는 중이지요. 헌데 그건 왜 물어 보시는지......." "필요해서요. 만약 베트남 구역에서 뚜언 씨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차피 좁은 구역,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이름이랑 얼굴은 다 알고 지냅니다. 오셔서 제 이름만 대셔도 다들 알아들을 테지요."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곧 한 번 찾아뵐게요. 아니면 사람을 보내거나." 뚜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겨울은 추천장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함부로 말하고 다닐 일은 아니었다. 알려주는 순서에 따라 일어날 가벼운 착각들도 버리기 아깝고. 어쨌든 국적 균형을 적당히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모인 사람들을 다시 둘러보는 겨울. 역시나 중국인들이 가장 많다. 삼합회 그룹과 리아이링도 있었다. 그녀는 겨울을 발견하고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다. '따로 만나러 갈 필요 없어서 좋네.' 오늘 일과 후 리친젠을 찾아갈 생각이었던 겨울은, 마침 잘 됐다고 여긴다. 일본인들 가운데엔 민족주의자라고 불러달라던 야쿠자 두목, 타다아츠 료헤이가 눈에 띈다. 시선 마주치기 전부터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겨울은 먼저 목례했다. 료헤이는 한 손 들어 까닥이는 걸로 화답한다. 료헤이가 이끄는 일본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이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영양공급 없이는 불가능한 몸집들. 시간이 되어가니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착석시켰다. 교관 하나가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계 인솔자가 한 중위님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훈련도 참관하십니까?"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요. 무엇보다 나도 이런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급이 중위라곤 해도, 정상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거 알잖아요. 장교교육도 속성이었고." 해본 말이다. 일일 교관을 맡은 병장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농담도 잘 하십니다. 구울 다섯을 근접전으로 처리하신 분이, 이제 와서 무슨 기초 근접전투 교육을 받습니까? 저는 그 영상 보면서 지리는 줄 알았습니다." 병장이 언급하는 것은 산타 마리아에서 치렀던 전투였다. 그 때의 전투기록은, TV에서 인기 드라마처럼 재방영을 해댄다. "그래도요. 자격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자격? 그런 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교육 내용이 싹 갈렸거든요. 기존의 전투방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번 물리면 끝장인데요. 저희도 새 교범을 겨우 일주일 전에 받았습니다. 기존에 레벨 Ⅳ 자격을 땄어도 의미 없겠던 걸요, 뭘. 앞으로도 한참 더 바뀔 것 같고요." "하긴 그렇겠네요." "아무튼 보시고 싶은 만큼 보시고, 쉬시고 싶은 만큼 쉬시죠. 뭔가 있으면 부르시고요." 병장은 음모를 공유하는 사람의 미소를 짓는다. 소년장교가 여기 있겠다는 걸 땡땡이 치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겨울은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수고해요, 카버." 병장은 이제 소란스러운 병사들을 상대하러 돌아선다. 체육관에 있는 교관은 도합 일곱 명. 근접격투 훈련은 한 명의 교관이 20인 이하를 담당하도록 되어있다. 교육효율도 효율이지만, 그보다는 사고예방 목적이 더 컸다. 일곱이면 규정을 빠듯하게 준수하는 숫자다. 그러나 겨울은 지휘부의 생각이 조금 짧았다고 느꼈다.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여러 국적의 지원병들을 모아놓고 격투연습을 시키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기초단계 교육을 맡길 교관이 소대마다 한 명씩은 있을 터. 얼마든지 더 투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건의해야할 모양이다. '오늘 당장이야 별 일 없겠지.' 겨울의 판단은 총탄의 무게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겨울은 거의 항시 무장하고 다닌다. 또한 여기서 난동을 부렸다간 손해 볼 게 많기도 하다. 격투훈련이 진짜 격투가 될 확률은 낮은 편. 단지 불미스러운 사태가 빚어졌을 때 통제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애초에 군대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집단 아니던가. "정숙! 지금부터 교육을 시작하겠다!" 가장 건장한 교관이 박력 있게 소리친다. 교관 중에서 계급이 가장 높기도 했다. 교육의 도입부는 의례적이었다. 프로젝터를 켜놓고, 격투기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전달하는 과정. 정해진 절차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유난히 태도가 나쁘다. 노골적으로 외면하거나, 아예 귀를 막는 경우가 보인다. 청해가 불가능한 일부를 위해 통역을 맡은 사람도 딴청만 피웠다. 아이링은 꼿꼿이 앉아있었다. 다만 그녀도 표정이 좋진 않다. 반대로 일본인들은 끄덕끄덕, 남 들으라는 듯 감탄성을 흘리기도 한다. 격투기의 발전사에 대한 교관의 설명이 일본 무술 위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관들도 중국 지원병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대충대충 강의를 진행한다. "......일본 무술을 훈련에 도입하려는 시도는 전간기부터 있었다. 당시 보병학교 교관이었던 앨런 스미스 대위가 일본 코도칸(講道館)에서 유도를 배워왔지. 한편 루즈벨트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유도를 배우기도 했다. 아예 백악관에 연습실을 만들어놓고서 말이야." 즉 요점은, 미군의 접근전 체계가 유도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본래 30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이었지만, 교관은 10분 만에 끝내고 곧장 다음 과정으로 들어갔다. '이건 아니다 싶었겠지.' 겨울은 하사 계급의 최선임 교관에게서 내쉬지 않는 한숨을 느꼈다. "상대가 사람이든 뒈지다 만 것들이든, 근접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 원칙은 무엇인가?" 좌중을 둘러본 교관이,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간단하다. 어떻게든 총을 쓰는 게 최고라는 거지." 반응은 시원찮았다. 교관이 꿋꿋하게 말했다. "본 교관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총기 사용이 가능하다면 근접전의 다른 수단은 강구할 필요가 없고, 강구해서도 안 된다. 쓸 데 없는 만용이기 때문이다. 앞서 무술이 어쩌니 유도가 어쩌니 했던 건 잠시 잊어라. 그 기술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실제로 쓸 일이 없는 게 최선일 것이다. 특히나 감염변종을 상대로는 말이지." 현실적인 말이었기에, 조금 전보다는 양호한 반응이 돌아온다. 겨울동맹의 전투조원들은 샌 미구엘에서의 실습 덕분에 더욱 와 닿을 것이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근접전에서의 총기 사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리고 손뼉을 치는 교관. "그럼 전원 기립! 모두 2인 1조를 만들어라. 남는 인원이 있다면 가까운 교관에게 보고하도록. 남는 사람끼리 짝을 지어주거나, 교관을 도와 시범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기겠다. 실시!" 실내가 처음처럼 소란스러워졌다. # 105 [105화] #영향, 포트 로버츠 (4) 2인 1조의 둥근 배열 가운데서, 최선임 교관 벨라스케스 하사가 목청을 높였다. "감염변종은 육체적으로 강인하다. 그러나 그것이 근접전에서 절대적인 우위로 작용하느냐? 아니, 그렇지는 않다. 뒈지다 만 것들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지." 그는 한 호흡의 여유를 두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의아할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약점이 되느냐고. 하지만 변종들이 본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근력은 늘었을지언정, 급소까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한 인간보다 고통을 잘 견디기는 하겠지. 그러나 구울 같은 강화종이나 그 이상의 특수종이 아닌 이상, 급소를 맞고도 멀쩡할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료화면을 봐라." 두 개의 프로젝터가 동시에 투사하는 영상은 조명 아래에서도 충분히 밝았다. 비쳐지는 건 편집된 헬멧 카메라 영상들. 변종들의 엄습을 연속으로 보여준다. 교육 및 홍보용으로 재활용되어 익숙한 장면들이 많았으나, 편집 방식은 새로웠다. 변동들이 달려드는 순간에 속도를 느리게 하여, 타격 가능한 급소마다 강조 효과를 입혀 놨다. "실전에서 변종들은 이렇게 머저리 같은 모습으로 여러분을 덮칠 거다. 두 팔을 뻗고 무작정 달려드는 거지. 즉 전신의 급소가 완전히 개방되어있다. 비록 몇 초 되지 않을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분이 침착할 수만 있다면, 타격지점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시범으로 보여주는 공격방식은 다양했다. 총으로 찌르고, 손바닥으로 턱을 치거나 팔꿈치로 가격하고, 밀어 넘어뜨리고, 권총과 대검 등의 보조무기를 사용하고, 총을 붙잡혔을 땐 머리와 어깨로 들이받는 등. 이어지는 실습 시간에, 겨울은 동맹원들의 자세를 봐주었다. 오랜만에 「교습」을 쓸 기회다. 10등급의 「근접전투」는 천재가 아닌 인간의 한계 수준이었으므로, 증강현실로 뜨는 코멘트들은 정확하며 모자람이 없었다. "총으로 찌를 때는 팔을 좀 더 들어요. 어깨와 수평이 되게끔. 총은 옆으로 눕혀서 잡으시고요. 힘을 주는 방향에 몸을 끼워 맞춘다고 생각하세요. 동작이 몸의 중심을 벗어나거나, 힘을 줄 때 꺾이는 정도가 심할수록 밀리기도 쉽거든요. 인대를 다칠 수도 있고. 찌르기는 순간적이어야 해요. 즉시 빠져서 격발한다는 생각으로요." 겨울이 자세를 고쳐주면, 교정 받은 사람은 확실하게 나아졌다. 더욱 의욕을 내는 면도 있었다. 한국계를 담당한 교관, 카버 병장은 겨울의 도움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잘 가르치시는군요. 본인이 잘 하는 것과 남에게 잘 가르치는 건 다른 문제인데. 중위님은 여러모로 타고난 군인이신 것 같습니다. 아쉽군요. 장교보다는 부사관이 더 어울리시는데....... 지금처럼 전공을 쌓으신다는 가정 하에 역대 최연소 원사는 확실하셨을 겁니다." 병장의 말에서는, 부사관이야말로 군의 중추라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부사관의 정점인 원사는 대령보다도 귀하다. 겨울은 그 자부심을 긍정했다. "칭찬 고마워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유가 있어서 결정된 일인걸." 정상적인 진급 경로를 밟았다면, 지금쯤 병장이나 하사가 되었으리라. 지금 같은 지휘권은 얻지 못했겠으나, 부사관 쪽이 더 나은 점도 있긴 했다. '아마 대위가 내 진급의 한계선일 테니까.' 그동안 너무 잘 싸워온 게 문제였다. 일선에서 싸울 수 있는 가장 높은 장교 계급이 대위다. 공보처의 사랑을 받는 동안, 겨울이 소령으로 올라가긴 어려울 것이다. '정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현장에 남기 위해 진급을 고사했다는 미담이 만들어지겠지.' 물론 불만은 없었다. 겨울도 그럴 생각이었고, 지휘권이 그만큼 중요하다. 또한 장교인 편이 난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좋았다. 진급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특수부대에서라면 영관급 장교도 일선에서 싸울 수 있다. 다만, 난민들과는 떨어져버리게 된다. 사적인 대화는 짧게 끝났다. 지금은 교육 중이었다. 카버는 교관 역할이 처음이라 했으나, 책임 있게 수행하려 했다. 실습 중 진석 분대에서 질문이 나왔다. "대장님! 이 동작은 좀 위험한 것 같지 않습니까?" 겨울은 그와 상대가 취한 자세를 물끄러미 보다가, 요구했다. "포스트부터 다시 해보실래요?" "아, 네." 단지 보고 있을 뿐인데, 질문자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겨울은 진석 분대의 군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평소엔 체감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근접전에서 총을 쓰려면 최소한의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때의 제식은 접근과 저항의 정도에 따라 3단계로 구분되는데, 순서대로 포스트, 프레임, 훅이라 불렀다. '기초 중의 기초라서, 딱히 대단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숙련도다. 아무리 간단한 기술이라도, 몸에 밸 정도의 연습 없이는 실전에서 쓰기 어렵다. 이는 기술보정을 받는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보정을 받은들, 본인이 긴장해서 머리가 굳어지면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대역과 적당히 떨어진 질문자가, 심호흡을 하고서, 겨울에게 알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변종을 가장한 상대는 박력 있게 달려들었다. 질문자가 펼쳐진 손으로 상대를 막는다. 여기서 막는 동작이 포스트. 왼 손으로 저지하고, 오른 손으로 쏜다. 총을 팔 안쪽으로 바싹 붙여서, 몸에 밀착시켜, 뒤로 최대한 당긴 채 격발하여 상대에게 총탄을 박는 것. 그러나 지금은 훈련이다. 속도와 질량을 감당하지 못해, 팔이 꺾어지는 상황을 가정한다. 이 때 좁아진 거리에서 한 번 더 상대를 저지하는 단계가 프레임이었다. 겨울은 한 번의 실수와 매끄럽지 못한 연결을 지적했다. "처음에 손이 너무 빨리 나갔어요. 그럼 변종이 손부터 물어뜯으려고 하겠죠. 거리를 잘 재야 해요. 막는다기보다는 때린다는 느낌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알겠습니다." "너무 억지로 버티는 것도 좋지 않아요. 변종과 힘 싸움을 벌이려는 게 아니잖아요? 팔이 꺾인다 싶으면 그냥 꺾으세요. 애초에 그걸 감안해서 살짝 구부려둬야 할 거예요. 온 몸으로 달려오는 걸 받아내기엔 그 편이 더 낫고요." "즉 처음부터 완전히 막을 생각은 말고, 속도를 줄이는 데 만족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막기 벅찰 경우에는요. 성함이 도윤 씨 맞죠?" "예, 맞습니다." "프레임은 단순한 버티기가 아녜요. 그 자체로 한 번의 공격이죠. 포스트에서 프레임으로 넘어갈 때 도윤 씨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야 해요. 이유가 뭘까요?" "타격을 강화하기 위해서입니까?" "절반은요. 나머지 절반은 무게중심이고요. 변종과 부딪히는 순간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잖아요? 무게중심이 빠지면 체중을 싣기 어렵고, 밀려서 넘어지기도 쉬워져요." 오후에 배울 것이 바로 넘어져 깔렸을 때의 대처방안이다. 실전에서의 흐름을 반영한 커리큘럼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전 사실 이 자세가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변종에게 물리면 끝장인데, 턱 아래에 손이나 팔꿈치를 대고 버틴다는 게....... 변종이 어떻게든 물어뜯으려고 할 텐데......." "애초에 근접전 자체가 극도로 위험한 상황인걸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죠. 그리고 제대로 한다면 괜찮아요. 애초에 길게 버틸 필요도 없고요. 사격에 필요한 시간만 만들면 되는데요. 제가 직접 보여드릴까요?" 이미 여러 사람이 보고 듣는 상황이라, 겨울은 아예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도윤에게 변종 역할을 맡긴다. 원래의 상대에게서 훈련용 보호구를 넘겨받아 착용한 도윤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겨울과 마주섰다. 소총과 권총에서 탄창을 제거하고 빈 약실을 확인한 뒤에, 겨울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전력으로 오세요." 전력으로? 망설이던 도윤이 다른 조의 양해로 거리를 더 벌린다. 그리곤 스프린터처럼 자세를 잡았다. 겨울은 팔을 내린 채로 기다렸다. 도윤이 정면으로 쇄도했다. 변종 흉내를 잊지 않는다. 겨울이 펼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버틴다. 그러나 보정이 아무리 붙어도, 속도와 무게를 감당할 순 없었다. '실제 상황이었으면 지금 쏴버렸을 건데.' 총구는 벌써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훈련이니 넘어간다. 밀린다 싶은 순간, 팔을 굽히고 상체를 숙여 팔꿈치로 가격했다. 터엉! 치는 소리가 매우 컸다. 팔꿈치는 흉부 보호대를 쳤고, 손목까지의 길이로는 목을 누른다. 이대로는 물기 어렵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사격 기회. 철컥! 공이가 빈 약실을 치는 공허한 소리. 도윤이 연기하는 변종의 두 번째 죽음. 그리고 겨울은 도윤을 밀어버렸다. 팔꿈치를 기점으로 팔을 돌려, 얼굴 측면을 잡아, 좌측으로 강하게 팽개친 것. 다리를 걸었기에, 몸을 붙잡고 버텨도 소용이 없었다. 쓰러진 도윤에게 권총을 겨냥하고서, 겨울이 묻는다. "어떻게 당했는지 알겠어요?" "어, 음, 네. 알 것 같습니다." "몸을 붙잡히면 저처럼 하세요. 뒤통수를 당겨 아예 통과시키던가. 손을 괜히 비워두는 게 아니거든요. 그것도 모자랄 땐 들이받아 버려요. 포스트와 프레임이 이어지는 것처럼, 벨라스케스 하사가 시연한 모든 자세와 동작은 원래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되는 거예요." 다른 쪽에서 카버 병장이 마찬가지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겨울은 사람을 바꿔가며 연습에 어울려주었다. 오전 교육은 11시 30분에 끝났다. 식사는 체육관까지 추진된 전투식량이었다. 지원병들은 한숨을 쉰다. 다음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줄을 서려고 애썼다. 맛없는 메뉴를 피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를테면, 겨울이 받게 된 치즈-야채 오믈렛처럼. 분배를 감독하던 교관이 대뜸 묻는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메뉴로 바꾸시는 게 나을 텐데요." "누군가는 먹어야 하잖아요. 재고 처리인가 봐요? 특정 메뉴가 눈에 띄게 많아 보여요." 겨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실려 온 전투식량의 구성은 극단적으로 불균형했다. 미군이 싫어하는 메뉴들만 잔뜩이다. 난민 지원병들의 취급은 아직까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겨울 홀로 규격을 벗어난 예외일 뿐. '그나마 동맹 전투조가 정규군 신분이라 다행이지.' 교관으로서도 마음에 걸리는지, 한숨을 쉬며 자기 몫의 전투식량을 바꾸었다. 식사시간은 한 시간 반. 주 식단인 오믈렛은 냄새만 그럴듯하다. 거친 식사에 익숙한 겨울도 이것만은 좋아하기 힘들다. 누군가 씹다 뱉은 비주얼에, 맛은 외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삼킬 때마다 거북했다. 차라리 생전에 먹던 에너지 팩이 나을 지경.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유라가 가져온 메뉴도 겨울과 같았다. 그녀는 첫 입에 구역질을 하고서, 다시는 손을 대지 않았다. 디저트와 음료만으로 끼니를 때운다. 식사를 끝낸 뒤, 겨울은 리아이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년장교가 다가오자, 거북한 식사를 깨작대던 행동대원들이 서둘러 일어선다. "한 따꺼,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겨울을 경계했다. 한편으로는 주눅이 들어있기도 했다. 겨울은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쿤타오. 쩌광, 깡촨도 잘 있었나요? 식사를 방해해서 미안해요. 잠시 리 향주와 대화하고 싶은데,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요식행위였다. 쿤타오는 여간부를 돌아본다. 전할 것도 없는 거리에 앉아있던 여간부는, 눈으로는 겨울을 보며, 고갯짓으로 행동대를 갈라지게 했다. 아이링은 자리에서 일어나 겨울을 맞이한다. "반갑습니다, 한 선생. 오늘은 뵙고도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별말씀을. 용서는 제가 구해야 할 텐데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조용히 외면하는 그녀에게, 겨울이 하는 말. "그래요? 음, 나쁘지 않네요. 없던 일로 해주시겠다면야." 잠시 후, 아이링이 한숨을 쉬었다. "선생, 이제 와서 뭔가를 말씀하시기는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 삼합회와 겨울동맹은 협력관계인데, 경찰의 단속을 사전에 경고해줬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이었다. 겨울은 그녀의 근심을 찔렀다. "소저께서는 중국인들이 정치적 희생양이 될까봐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당장 경찰의 단속으로 피해를 보셨을지는 몰라도, 가장 큰 근심만은 무게가 줄었을 것 같은데요." 아이링은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겨울의 말이 이어진다. "범죄는 쌓일수록 폭탄이에요. 언제까지 끌어안고 계시려고요? 소저의 걱정대로 시류가 흐른다면, 훗날 미국 정부는 이렇게 말하겠죠. 중국인들은 하나 같이 마약중독 살인마들이니 몽땅 다 쓸어버립시다! 라고요. 거기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으세요?" "그럼 선생께서는 그게 저희를 위한 일이었다는 건가요?" "겸사겸사요. 전 범죄자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제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라면, 불가피하게 죽이겠지만." 그러니 한계를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으나, 한 선생께선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하기 힘드네요." 그녀는 아까보다 더 긴 한숨을 쉬고, 몸가짐을 고쳐 묻는다.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 뭐죠?" "리친젠 노사께 전해주세요. 오늘 저녁 찾아뵙겠다고." "이런 일은 사람을 시켜 전하셔도 되지 않나요?" "리 소저께서 아직도 그 일로 걱정하고 계신지, 그리고 지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확인해두고 싶었거든요." 자신을 시험했다는 말에, 아이링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언가 더 묻기 전에 겨울이 인사를 남겼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쉬세요. 오후 훈련도 잘 받으시고요." 궁금증이 남았어도, 아이링은 겨울을 붙잡지 않는다. # 106 [106화] #영향, 포트 로버츠 (5) 약속된 저녁. 반갑지 않은 귀빈을, 리친젠은 억누른 노여움으로 맞이했다. 굳은 시선과 앙 다문 입. 약해 보이면 안팎으로 곤란할 입장이라, 미소를 꾸밀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전보다 살이 제법 빠진 모습. 주인 된 자리에 비뚜름하게 앉아 손님을 바라본다. 겨울은, 그가 자리를 권할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결국 이 늙은이가 무례를 저지르게 만드시는군. 앉으시오, 선생." 리친젠이 손을 펼쳐 대각선 방향의 의자를 가리킨다. "감사합니다, 대인." 겨울은 예전처럼 정중히 인사하고서, 늙은 거물을 비스듬히 마주보고 앉았다. 범죄로 연륜을 쌓은 노인은 범죄자답지 않은 화법으로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한다. "준비가 부족한 것을 탓하진 말아주시오. 우리가 예전 같지는 않아서 말이오." "글쎄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요?" 겨울의 반문에 리친젠이 자신의 딸을 곁눈질한다. "저 아이에게 하신 말씀은 전해 들었소. 일리가 있더구려. 허나 선생의 성의가 부족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소. 우리는 분명 서로를 돕겠다는 약속을 했었고, 선생은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지 않았단 말이오. 이건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일이 아니라고 보오." 이제 리친젠은 좀 더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도 선생이 혼자서 찾아온 걸 보고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소만, 고작 몇 마디 궤변으로 책임을 피할 작정이었다면 아주 큰 실수를 하신 거요. 나는 내 딸과 다르오. 물러터진 계집처럼 쉽게 보지 마시오. 남자의 체면은 때로 목숨보다 귀중한 것. 나, 그리고 나와 피를 나눈 형제들은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각오가 되어 있소." "죽이기라도 하시려고요?" "선생이 우리를 끝까지 무시한다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실내에 농밀하게 치솟는 살의. 겨울에겐 온갖 「감각」의 선명한 경고였다. 준비가 부족한 걸 탓하지 말라더니, 다른 쪽으로는 열심히 준비한 모양이다. 겨울이 아는 한, 리친젠은 이렇게 이성을 놓아버릴 인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은 리친젠의 입장이 그만큼 좋지 않음을 의미할 것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차이가 없을 만큼......인가.' 지켜보는 리아이링에게서는 우울한 체념이 엿보였다. 좋으나 싫으나, 그녀 또한 범죄조직의 간부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의리에 얽매여 있는 몸. 두목이자 아버지의 결정에 거역할 용기는 없어 보인다. 관성으로 흐르는 삶? 겨울은 그녀에게서 얄팍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그때의 나와는 달라.' 과거 겨울이 잔인한 거래를 받아들였던 건,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요. 저는 제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무슨 궤변이시오?" "궤변이 아니에요. 대인, 저와 대인이 처음 만났던 날의 대화를 기억하시나요?" "대화? 무슨 대화를 말하는 거요?" 겨울의 여상스러운 태도를 경계하며, 지난 기억을 회상하는 리친젠. 하지만 낯빛의 의혹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짚이는 게 없는 기색. 겨울이 답을 들려주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겨울동맹과의 협력을 길게 이어가고 싶으시다면, 더 이상 부당한 이득을 좇지 마시라고요. 아마 기억하실 걸요? 그 때도 불편한 분위기에서 드렸던 말씀이었으니까요. 삼합회에서 지원병을 가리는 문제로 말이죠." "음......!" 리친젠이 끓는 소리로 신음한다. 여기서 모르겠다고 우기는 건 같이 죽자는 뜻 밖에 안 된다. 각오를 세웠어도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결말일 터. 그 미련으로 망설인 시점에서 이미 수긍한 것이나 다름없다. 겨울은 그가 궁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제가 단속정보를 미리 알려드렸어야 한다고 마음 상하신 것 같은데, 대인께서 처음부터 제 부탁을 무시하지 않으셨다면 삼합회가 피해를 볼 일도 없었을 겁니다. 솔직히 서운하네요. 농담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는데도, 그동안 줄곧 무시하고 계셨다는 게." 정말 서운한 게 아님을 서로가 안다. 그러나 체면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이 리친젠이었다. 듣는 귀도 많다. 그들이라고 죽고 싶겠는가. 겨울은 중국인들의 화법에 익숙했고, 깡패 두목에게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과연, 리친젠의 말은 궁색했다. "무시한 게 아니오. 그건 너무 막연한 요청이었잖소. 구체적인 규약으로 정한 게 아니었으니 서운해 하실 일이 아니오." "그럼 묻겠습니다. 그때 구체적으로 정한 사안 중에서 제가 소홀했던 게 있나요?" "......." "처음에 대인께서 제게 말씀하신 성의와, 제가 대인께 바랐던 성의는 서로 다른 게 아닐 겁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런데, 대인께선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결함 없는 논리. 리친젠은 말문이 막힌다. 화가 나지만, 화를 낼 명분이 없다. 억지가 통할 상대도 아니다. 성질을 참느라 붉어지는 범죄자를 상대로, 겨울은 준비된 설득을 이어갔다. "그밖에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하죠. 만약 제가 이미 알려드렸을 경우, 비밀이 완전하게 지켜졌을 거라고 장담하실 수 있나요?" "말조심하시오! 우리 형제들의 우애와 단결을 의심하시는 거요?" "유감스럽게도, 네. 최소한 화승화와 수방방에 속했던 회원들은 속마음이 다르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리 대인께서 신의안 출신이라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던가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걱정스럽던걸요. 정보가 샐까봐." 백지선의 편지는 겨울이 들은 소문으로 각색되었다. 리친젠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명백히 겨울을 향한 악의가 아니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오." "한국의 속담 중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도 비슷한 격언이 있지 않나요? 위험한 가능성은 피하는 게 맞죠. 더군다나 아까 해명했던 것처럼, 전 대인께서 제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셨겠지 기대했거든요." 그리고 겨울은 또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한 가지 더. 지난 단속에서 삼합회가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있는 그대로의 손실일까요? 삼합회의 경쟁자들이 훨씬 더 큰 피해를 봤을 텐데요. 직예당은 제가 직접 당주를 잡아넣었고요. 삼합회의 간부들이 연달아 사고를 당했을 때, 배후로 의심되는 게 안량공상회와 직예당이었다고 들었는데......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아이링이 동요했다. 이 이야기를 겨울에게 들려준 게 그녀였기 때문이다. 리친젠은 딸의 동요를 눈치 채고, 부인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이하, 이마를 누르며 하는 말. "그래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셈 치라는 거요?" 지금까지 보여준 리친젠의 태도에서, 그게 어렵다는 건 충분히 「간파」했다. 모르는 척 긍정하는 겨울. "그러실 수 있다면요. 도와드릴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이제야 진짜 용건을 꺼내놓는다. 리친젠은 탁자 위에 올라온 분배국 추천장을 의혹 어린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잠시 후, 불그죽죽했던 낯빛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용두의 급격한 변화는 아이링을 비롯한 간부들의 관심을 끌어낸다. "조만간 만들어질 중부 캘리포니아 난민 군정청의 민정위원 추천장입니다." 이 말에 동요하는 늙은 범죄자. "군정청이 수립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아직은 대외비일거예요. 아마도." "대외비......." "그 추천장, 제가 이름만 적어서 제출하면 그대로 임명된다고 해요. 심사도 따로 없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겠죠? 대인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니, 이번에는 삼합회 형제들의 우애와 단결을 믿어볼까 싶네요. 이렇게 특혜를 주는 게 밖으로 알려지면 좋을 것 없잖아요." 물론 속마음은 다르다.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영향력 확보를 위해 추천장을 거래 수단으로 쓰는 한, 이야기는 어디선가 반드시 샐 것이다. 그러나 리친젠이 겨울의 속을 알 리 없다. 협상을 쉽게 굴리려는 수단으로, 겨울은 건달의 허세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결국 리친젠은 조급스런 충동을 참지 못했다. 늘어선 간부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훑는다. 그 행동에 겨울은 작은 만족감을 느꼈다. '날 위협할 정도로 몰려있었으니까, 판단력이 정상은 아니라고 봐야지.' 마약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고. 사람이 단기간에 무뎌졌다면 약물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민완기의 기대처럼, 부녀간의 사이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침착함을 잃은 리친젠이 겨울에게 사연을 채근했다. "한 선생, 대체 이게 뭐요? 이런 권한을 어찌 손에 넣으셨소? 정말 믿어도 좋은 거요?" "의심하실 필요 없어요. 연대장 래플린 대령님께서 제게 위임하신 거니까요." "허, 선생은 처음부터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거로군. 곤란해, 아주 곤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양감을 드러내는 삼합회주. 그의 기대가 너무 부풀기 전에, 겨울이 적절히 첨언했다. "실망시켜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회주께서 직접 들어가시긴 어려울 거예요." "왜 어렵다는 거요?" "삼합회의 용두시잖아요. 미군은 범죄자 출신의 민정위원을 원하지 않아요." 흐름이 여기까지 왔기에, 리친젠은 실망하기보다 대안을 묻는다. "그래. 미국인들이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멍청한 돼지들이긴 해도, 내 얼굴과 이름을 모르지는 않겠지. 이해하오. 허나 어쩔 셈이오? 범죄자 출신을 거부한다면, 우리 형제들 가운데 누가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한인들이 서로 돕는 일을 일일이 따져서 다 범죄 취급하는 게 미국인들인 것을. 한 선생이 생각해둔 바가 있을 것 같소만." 겨울운 미리 만들어둔 변명을 자연스러운 연기로 담아냈다. "어차피 난민구역에서 떳떳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저조차도 손을 더럽혔는걸요. 노사께서는 너무 알려져 있어서 곤란할 뿐이고, 따님이신 리아이링 향주 정도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봐요. 그밖에 보좌인원들도 마찬가지고요." "선생께서 보증하시는 거요?" "그러죠. 약속을 지키려는 제 성의라고 생각하세요." 대화의 도입부를 되새기게 만드는 겨울의 말. 늙은 건달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린다. "한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아이의 혼례 문제로 언쟁을 벌였었지. 그때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젊음이 새롭다고 했었던 것 같소만....... 오늘도 같은 느낌을 받는구려. 장강의 물이 바뀌는 게 이런 것인가 싶군. 좋소, 좋소. 그리 합시다." "그럼 부서를 선택하세요. 원하시는 자리를 따님께 드리죠. 감찰국은 제외하고요." 어차피 선택은 뻔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겨울은 형식적인 기회를 주었다. 훗날 잘못된 선택에 대한 원망이 리친젠 자신을 향할 것이기에. 생색을 내기에도 좋고. '중국인들은 배타적인 성향이 지나치게 강하니까......나중에 다 죽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이런 식으로라도 관계를 만들어 가야지.' 배타적인 민족 집단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까다로운 일이다. 생각하는 사이, 군정청의 개관을 신중히 살피던 늙은 건달은, 결국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물질적인 욕심. 겨울은 이제 당사자를 불렀다. "그럼, 리 소저. 잠시 와보시겠어요? 성함을 어찌 쓰는지 알려주세요." 다소 흔들린 느낌의 아이링은, 여분의 백지와 펜으로 유려한 한자를 적어보였다. 그 아래에 소리 나는 대로 영어 철자를 적는다. 겨울이 그것을 자기 필체로 옮겨서 적었다. 5급 이하의 인원구성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겨울은 수방방과 화승화를 다시 화제로 꺼냈다. 요구를 들은 리친젠이 미간을 좁힌다. "그 치들을 빌려달라고? 어디다 쓸 작정이오? 선생에게 사람이 부족하진 않을 것인데." "세력 과시요. 한국인들만 저와 함께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무작정 내어달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겨울은, 앞서의 대화에서 수방방과 화승화가 불안요소라는 사실을 주지시켜두었다. 지금을 위한 장치였다. 소속이 아예 바뀌는 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빌려줄 뿐이라면, 삼합회의 표면적인 규모는 변하지 않는다. 민완기의 우려가 여기서 불식된다. '영 아니다 싶으면 반품할 수도 있고.' 여기까지가 겨울이 강구한 안전장치였다. 수방방과 화승화도 결국은 삼합회를 구성하는 범죄자들이다. 행동대가 아니라 그 가족의 비중이 높다 해도, 성향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충분한 유예기간을 둔 뒤에, 상황을 봐서 받아들여도 늦지 않았다. 리친젠은 망설임 끝에 겨울의 요구를 수용했다. # 107 [107화] #과거 (6), 심리치료 (3) 소년을 찾아오는 여인에게, 심리상담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다. '이 아이가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송수아의 가면 아래에 흐르는 진심. 그녀는 항상 자책한다. 나는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겨울의 아픔을 확인하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싶은 것이었다. 소년을 배려하는 마음은 부차적이다. 변명으로는 초라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해버렸다. 있었던 만남 만큼의 유대가 이어졌다. 이제 와서 그만둔다면, 그 또한 소년에게 상처를 줄 일. 확실하진 않다. 겨울은 그녀를 어찌 생각하는지. 한 길 사람 속 모른다지만, 소년의 깊이는 범상치 않았다. 자문을 주는 진짜 상담사조차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로. 여인이 유도하고 소년이 작성한 여러 심리검사의 결과들을, 상담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명백히 이상합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놀라진 마십시오. 이상하다는 것과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사회 평균으로부터 표준편차의 두 배 이상 벗어나면 일단 이상한 겁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이죠. 즉 여기서의 이상은 정신질환이 될 수도 있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트라우마, 혹은 뛰어난 자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여인이 물었다. "박사님께선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건......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가족영역이나 성적영역에서는 억제된 모델로 분석이 가능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독특하거든요. 뇌파 분석만 아니었어도, 전 이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가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했겠죠." 여인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전문가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사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이유는 압니다. 겪은 과거가 과거이고, 청소년기의 상처는 평생을 간다는 게 세간의 상식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후천적인 정신질환은 불가역적인 손상이 아니예요. 적절한 상담과 치료를 병행한다는 전제 하에, 약 75% 정도의 회복탄력성이 존재하지요. 극단적인 경우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글쎄요. 이 아이의 과거보다 극단적인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25%의 트라우마는 남는다는 뜻 아닌가요?" "이런. 잘못 이해하셨군요. 사장님, 인간의 정신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사칙연산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대인들 중에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도 드물어요. 누구나 내면의 상처가 있고, 그런 상처들이 쌓여 인격의 한 축을 이룹니다. 단지 이 겨울이라는 아이가 무척 특이해서, 함부로 결론짓기 어려울 뿐이지요." "결국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는 셈이군요."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아이, 부모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쌓인 감정은 꽤 많은 모양인데 말이죠. 다음에 가시거든 슬쩍 떠보십시오. 상담에 응하는 태도를 보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더군요." 심리상담사는 여인과 소년의 만남을 매회 영상으로 전달받는다. 여인으로선 가면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다. 어쨌든 소년에겐 떳떳치 못한 짓이었으니. 비록 선의에서 하는 행동이라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불안한걸.' 그 뒤로 오늘이다. 서로 낯을 가리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후, 여인은 올 때마다 소년에게 간단한 검사를 부탁하곤 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그래서 겨울은 지금도 미완의 문장을 채우는 중이다. 같은 검사가 두 번째라 싫은 티 낼 법도 한데, 쉼 없이 적어 내릴 뿐.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었다. 떠오르는 것을 즉시 채우면, 그것이 바로 푸는 이의 심상이다. 필요한 조건은 하나. 가급적 시간을 끌지 말 것. 겨울에겐 익숙해진 규칙이었다. 사각사각. 안정감이 느껴지는 만년필 소리. 펜대의 움직임은 소년의 성품과 같다. 여인은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 「부모님과 나는 」 고비를 만난 연주가 잠시 끊어졌다. 짧은 정적인데, 길게 느껴진다. 만년필 머리로 입술을 두드리는 고민을 하고서, 겨울은 표정 변화 없이 적었다. 「부모님과 나는 헤어졌다. 」 길고 성실한 다른 문항들에 비해 유달리 짧은 답안이었다. 전번에도 동일했다. 가족에 관한 영역에서 소년은 자신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억압에 어떤 의미가 녹아있을 것인가. 몇 번의 고비를 넘긴 겨울은 나머지를 수월하게 채우고, 다 채운 검사지를 여인에게 넘겨주었다. 여인은 그것을 받아 개인 영역에 저장했다. 서류는 빛으로 바스러진다. 겨울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으, 응?" "아까부터 불편해 보이셔서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게 아닌가요?" 여인은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충분히 감추지 못한 게 첫째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은 게 둘째였다. 그녀가 쓰는 가면에 대해 듣고, 자문을 주는 상담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그 중 하나가 당황하지도, 긴장하지도 말라는 것. 때가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스스로를 빠르게 다스린 여인은, 소년을 향해 부끄러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미안. 내가 신경 쓰이게 했나보구나. 맞아. 묻고 싶은 게 있어. 혹시 네 기분이 상할지도 모를 내용이라 망설이고 있었단다." "글쎄요....... 그런 건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나쁜 뜻으로 묻지는 않으시겠죠....... 물어보셔도 돼요. 오해하지 않을 게요. 대신,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되는 거죠?" "물론이지.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렇다면, 음, 실은 그동안의 검사결과를 보고 생긴 의문인데......." 그녀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주의가 필요한 뇌관이었다. "겨울아, 예전에 부모님과 안 좋은 일이 있었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보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쁜 일 말이야." "네." 소년의 대답이 너무 즉각적이어서, 여인은 또 한 차례 동요할 뻔 했다. 그녀로서는 고맙게도, 겨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게 어려운 질문이었나요......? 전 선생님이 당연히 짐작하셨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검사지 문항에서부터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걸요....... 아, 그렇다고 거짓으로 적은 건 아니에요. 솔직하게 쓰는 것과 의도를 이해하는 건 서로 다른 차원이잖아요." 그러더니, 겨울은 그녀에게 거꾸로 묻는다. "혹시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가 궁금하세요?" "아니, 아니야. 그건 말해주지 않아도 돼. 말해주면 도움은 되겠지만......내가 알고 싶은 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야. 그 일로 생긴 감정을 억누르는 이유가 뭘까, 그게 궁금했던 거란다....... 알잖니. 해묵은 감정이 계속해서 쌓이면, 마음의 병이 되어버리는걸.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단다." 네가 병을 얻지 않았으면 해. 겨울은 그렇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갈등한다. 대답을 피할까? 한숨 한 번 곁들인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실상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원망하지 않으려고요." "응?" "저희 부모님, 굉장히 나쁜 분들이세요. 제게 잘못 많이 하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분들만을 원망하진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잘못된 화풀이인 것 같아서......." 잘못된 화풀이라니? 원망하지 않겠다니? 충분히 화내고 저주하고 눈물 흘릴 일이 아니었던가? 여인은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백은 길지 않았다. "여기에 오고 나서는,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참 많았어요." 겨울이 기억하는 생전의 마지막 순간은, 하얗고 차가웠던 수술실의 풍경이었다. 풍경의 끝은 분명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땐 이미 혼자만의 세계였다. 이제 더는 돌 무거워질 일 없겠지. 그때 느낀 서러운 해방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천만 개의 별이 빛나는 공허 속에서 오랫동안 울기도 했다. 참지 않아도 좋았다. 겨울의 눈물에 가슴 미어지는 사람이 여기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만 흘려보냈다. 아니, 시간과 함께 흘렀다. "처음에는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움만 커지더라고요. 아버지도 밉고, 어머니도 싫고. 제가 여기에 있는 게, 저를 사랑하지 않았던 부모님 탓이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렇게 미움을 잔뜩 키우다보니까......이건 아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듣고 있던 여인은 맥박이 빨라졌다. 미워할 사람이 부족했다는 뜻인가? 부풀어 오른 증오가 새롭게 향했다면, 대상이 과연 누구였을까?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였다. 이어지는 겨울의 말이,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기에. "아버지는, 자식인 제가 봐도 철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책임감도 부족하고, 절제력도 없었죠. 자기 감정이 중요하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일도 드물었고요. 어머니도......크게 나을 건 없었네요. 그런데 이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랬을까요? 너는 장차 자라서 못된 부모가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잖아요?" 아직까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여인은 애매하게 동조했다. "그렇......지." "타고난 천성이란 게 있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배워야 사람이 되고, 사람은 살면서 성숙해지는 거니까....... 결국 제게 저런 부모님을 준 건 이 세상이 아닌가 싶었던 거예요. 부모님의 부모님이 조금 더 깊게 사랑하고, 부모님의 친구들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었고, 부모님의 선생님이 조금 더 좋은 가르침을 주셨으면, 지금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즉, 네가 부족하다고 했던 건......미워하려면 세상 사람들을 다 미워해야 한다는 거니?" "네, 맞아요.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는데, 부모님만 미워하는 건 중간에 포기해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유치하죠?" 그렇게 물으며, 겨울은 말갛게 웃는다. 여인은 소년의 미소를 구분하기 힘겨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 힘든 감정을 담아, 겨울이 들려주는 그 뒤의 이야기. "부모님이 싫다보니 사람들도 다 싫고, 사람들이 너무 미워서 온 세상이 다 미워졌어요. 이런 세상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그런 상상을 했었어요." "겨울아,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네. 그래선 안 되겠더라고요." "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겨울은 무릎 위에 깍지를 끼고, 아래를 보며 조용히 말한다. "꼭 행복했으면 하는 두 사람이 있거든요. 여기에 들어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게 있다면, 사람은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야겠죠. 끝도 없이 미워하는 게 아니라." 소년이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한 마디. "그런데 많이 어렵네요." 여인은 깊은 비애를 느꼈다. # 108 [108화] #저널, 130페이지, 포트 로버츠 4호 태풍 다마리스가 남쪽으로 멀어졌다. 오랜만에 밝아진 하늘. 구름 위에 있던 봄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더 이상 비는 오지 않고, 조금 거친 바람이 부는 정도. 햇빛이 쏟아지는 포트 로버츠는, 계절 바뀌기 전과 다른 장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어두웠다. 재개된 항공보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였다. 전보다는 나아졌다. 그래도 부족하다. 수많은 수송기들이, 기지를 지나쳐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오염지역에 고립된 시민들을 향해서. 해안과 가까운 지역은 한동안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나는 식량보다 탄약이 더 급할 거라고 생각했다. 식량은 어떻게든 아낄 수 있지만, 탄약은 그렇지 않다. 변종이 오면 싸워야 할 것 아닌가. 방송에서는 연일 침수된 구획들을 보여주었다.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외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특히 샌디에이고는 물 위에 건설한 도시 같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방송국 헬기가 지나갈 때마다, 지붕과 옥상 위에서, 소리 없는 몸짓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 앵커는 눈물겨운 감격으로 소식을 전했다. 주께서 아직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국방부는 다음 태풍이 오기 전에 최대한의 물자공수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해수 온도의 비정상적인 상승으로 인하여, 3월까지 복수의 태풍이 추가로 발생하리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나는 해상난민들이 걱정스러웠다. 만 안쪽에서 대형선박들의 보호를 받는다 하더라도, 거친 바람과 물결 가운데 완전히 안전할 순 없는 노릇. 게다가 당분간 항공수송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과 연료가 많이 모자랄 것이었다.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전에도 중국 구축함과 일본 호위함 사이에서 교전이 벌어졌었는데....... #어른의 한계, 포트 로버츠 정월 초하루를 며칠 앞둔 금요일. 스탠 페이지 일병의 장례식은 시민구역의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겨울에게는 예정된 역할이 있었다. 펼쳐진 성조기의 한 변에 서서, 군종장교와 정면으로 마주본다. 시작하자는 짧은 고갯짓. 깃발의 짧은 변을 반으로 접고, 다시 한 번 반으로 접고, 이제 한 발자국씩 나아가며 남은 길이를 줄여간다. 다 접은 국기는 두꺼운 삼각형이었다. 겨울은 깃발을 군종장교에게 넘겼다. 잘 접혔는지 확인하는 단계. 확인이 끝나자 깃발을 다시 겨울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절도 있는 경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많아졌다. 겨울은 깃발을 위아래로 붙잡고서, 망자가 들어있는 관에 가볍게 닿도록 했다. 그 뒤에 비로소 유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부모와 동생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겨울은 그 중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부인. 미합중국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육군성과 조국을 대신하여, 아드님이 국가에 바친 신념과 명예로운 복무를 기리며, 이 깃발을 당신께 드립니다." 성조기를 받은 부인이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아내를 달래는 남편. 그러나 그 자신도 이미 울고 있다. 여동생에게선 자책감이 느껴진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은 또래의 소녀에게서 자신의 동생을 겹쳐보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는 했을까?' 우는 사람이 둘인데 손수건은 하나였다. 겨울은 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냈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아쉬웠던 이래, 빼놓고 다닐 때가 없었다. "이거 받으세요, 선생님." "......고맙소." 지금은 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겨울이 생각하기로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한 도구였다. 예의와 형식도 마찬가지. 겨울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접어야 할 성조기의 숫자는 곧 유가족의 숫자와 같았다. 두 번을 더 왕복하는 동안, 온갖 방송사의 카메라들이 소년 장교에게 집중되었다. 임시 매장지는 기지 내의 모처였다. 본디 국립묘지에 묻혀야 하지만, 캘리포니아를 탈환한 뒤에 이장한다는 방침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에, 겨울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중위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페이지 일병의 여동생을 필두로, 한 무리의 소년소녀들이 소년장교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척 보기에도 많이 긴장한 상태. 그러면서도 겨울을 보는 시선에는 선망이 녹아있다. 겨울이 온화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무슨 일이세요?" "다행이다....... 여기에 중위님도 한 말씀 적어주셨으면 해서요. 가능하실까요?" 페이지 일가의 소녀는 안고 있던 책자를 내밀었다. 받아서 살펴본 겨울은,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낀다. 망자에 대한 기억을 담는 책이었다. 이를 통해 유가족은 자신들이 모르던 고인의 면면을 알게 되고, 마음을 추스르는 데 도움을 받는다. 겨울은 장례절차를 진행하느라 적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소녀는 굳이 겨울을 찾아왔다. 일병 스탠 페이지의 고통을 덜어준 것이 겨울이다. 그리고 작전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해리스 사건이 2월 초부터 방송을 타기 시작했으므로, 소녀 페이지 역시 그 사실을 알 것이었다. '죽음의 순간 자체는 편집되었지만 말이지.' 겨울은 죽고 싶지 않다고 읊조리던 창백한 입술을 기억했다. 산타 마가리타 호수의 전투기록을 무슨 휴먼 드라마처럼 각색해놓은 국방부 공보처였으나, 페이지 일병의 죽음을 여과 없이 내보지는 않았다. 해리스 대위에 대한 공분을 증폭시킬 좋은 소재였으나, 영상에선 그저 몇 줄의 자막으로 처리했을 뿐. 유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가만히 있는 겨울이 불안했던지, 소녀가 초조하게 물었다. "호, 혹시 펜이 필요하세요? 드릴까요?" 가늘게 떨고 있다. 저는 사실 스탠 페이지 일병을 잘 모릅니다. 이런 말이 나올까봐 두려운 모양. 겨울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 것이 있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계급을 떠나, 펜과 수첩은 좋은 군인의 기본이다. 문제는 소녀의 예감이 얼마간 사실이라는 점. 호숫가에서 밤을 보내기까지, 겨울과 일병은 그저 이름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겨울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페이지.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을 상대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사라진 나의 전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의 싸움은 의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의 용기가 모자라 더 많은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의 용기가 모자라 새로운 생명이 세상을 보지 못하고, 한 사람의 용기가 모자라 비열한 자들은 심판을 피했을지도 모릅니다.......」 추억보다는 추도에 가까운 문장이었으나, 유가족을 위로하기엔 충분할 것이었다. '다른 두 사람의 장례식이 다른 곳이라 다행이야.' 페이지 이외의 전사자들은 각기 유가족이 있는 곳으로 운구되었다. 장례식도 그쪽에서 치른다고 한다. 여기서 장례를 치렀다면, 물론 합동 장례식이 되었겠으나, 절차가 조금 더 까다로워졌을 것이다. 완성된 문장을 본 소년소녀들이 눈시울을 붉힌다. 소녀 페이지가 굉장히 고마워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달리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아......." 의례적으로 물어봤던 겨울은, 미묘한 반응에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용건이 남아있는 건가? "중위님께서 바쁘지만 않으시면, 조금만 더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요?" 한 손에 나팔을 쥔 소년이 그렇게 묻는다. 영결식에서 위령곡(Taps)을 연주했던 학생이었다. 본디 군악대의 한 사람이 맡는 게 보통이지만, 포트 로버츠에 군악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반 재생으로 대체해야 하나 하다가, 시민구역 학교의 학생 연주단에서 선발했다고 한다. "잠시 동안이라면. 어차피 오후부터 비번이었거든요." 겨울은 또래의 학생들에게 별다른 용건이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저 최연소 전쟁영웅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일 뿐이겠지. 예상은 살짝 어긋났다. 겨울은 학생들의 요청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낀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요?" "네, 저희들은 부모님의 동의만 있으면 입영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도통 허락을 해주지 않으셔서....... 이곳 기지엔 모병소도 없고요." 미군 병역법상 입영 가능한 최소 연령이 17세이며, 체력검정기준도 17세부터 마련되어 있다. 겨울이 지원병이 될 때, 피어스 상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 없이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다. 겨울은 고민 끝에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서두를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아직 학생이잖아요?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신체적으로 좀 더 준비가 된 다음에 입대하더라도 늦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징집령이 발효되어 있으니, 때가 되면 싫어도 군인이 되어야 할 테고요." 학생들은 실망한 기색이다. 나팔을 든 남학생이 대표 격으로 말한다. "어른들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이럴 때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고등학교를 꼭 졸업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제 친구들 중에서도 학교를 그만둔 애가 많아요." "......." "게다가 중위님도 같은 나이에 군인이 되셨잖아요." "그야 저는 부모님이 없었고, 난민으로서 달리 나은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바로 그거예요! 저희는 어른들이 굉장히 비겁하다고 생각해요!" 겨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난민으로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요." 아, 그 이야기인가. 겨울은 연대전투단장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미국 정부의 난민정책에 대한 비판 중 하나. 난민들의 처지를 악용하여,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는 논리. 부분적으로 사실이기도 하다. 지원병 제도는 이름처럼 자발적인 지원을 전제하지만, 겨울이 처음 지원병이 될 때만 해도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었으니. 영웅을 동경하는 학생이 묻는다. "중위님. 시민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봉쇄선 동쪽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유를 알고 계세요?" "그쪽에서 처우가 별로 좋지 않다고 듣긴 했어요." "네, 맞아요. 이재민 보호구역이 디트로이트나 캠든 같은 도시들에 있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그러세요. 그런 동네에서 사느니 차라리 여기에 남아있겠다고요. 봉쇄선 너머에서 여기로 넘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요. 특히 여긴 중위님이 계시니까요."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치안이 가장 나쁜 도시들 중 하나다. "저놈을 디트로이트로 보내라!"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고, 쓰레기도 수거되지 않는다. 시가지엔 무수한 고층 빌딩들이 이렇다 할 용도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도시에 서부 이재민들을 몰아넣었다. 어쨌든 그곳에 지붕이 있기 때문에. 그밖에도 캠든, 볼티모어처럼 빈 건물이 많은 도시는 모두 이재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어쩔 수 없겠지. 이재민의 수가 3천만을 넘을 텐데.' 게다가 세계 각지에서 밀려드는 난민들까지 감당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이재민들을 적극적으로 재정착시키고 있다곤 하지만, 한계가 명확할 것이었다. 미군의 급격한 팽창은, 갈 데 없어진 이재민들이 줄지어 입대하고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다른 여학생이 분한 듯 말한다. "여기서는 결국 난민들 몫을 빼앗아 편하게 생활하는 거잖아요. 저희도 다 보고 있어요. 철조망 너머에서 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예요. 근데 그게 당연하다고 하는 멍청이들이 있어요. 심지어는 선생님들 중에서도 말예요! 그런 학교는 가고 싶지 않다고요!" 이번엔 덩치 큰 남학생의 말. 놀라울 만큼 나이 들어 보인다. "저희도 싸우고 싶습니다. 중위님까진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만큼은 할 수 있을 거예요." 겨울은 어려운 미소를 만든다. "다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전 오늘 아들을 잃고 눈물 흘리는 양친을 뵈었거든요. 여러분의 부모님께 모진 부탁을 드릴 순 없어요. 제 마음 이해하시죠, 페이지 양?" "......네." 소녀 페이지는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편이었다. 겨울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달랬다. "이 전쟁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진 않을 거예요. 아마도 수십 년 이상 이어지겠죠.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여러분을 지키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중에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 페이지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 109 [109화] #저널, 131페이지, 포트 로버츠 육군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이 포트 로버츠를 방문했다. 장군은 나에게 수훈십자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달아주었고, 제프리와 리버만 하사에게는 근무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소대원들 중에서도 다수의 수훈자가 나왔다. 너무 많은 훈장이 뿌려진다고 느껴질 정도로. “해리스 대위 사건의 여파가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지.” 공보장교 블리스 소령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대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와서, 언제나와 같은 일에 착수했다. 기자들을 통제하고, 보도 자료를 만들거나 배포하는 등. 처음처럼 방독면을 쓰고 돌아다니진 않았다. 익숙해진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소령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 오히려 너무 자주 만나서 문제라고 생각하네만. 우리가 건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긴 해도, 한 중위 자네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란 말이야. 이번에 귀관의 수훈을 정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논쟁이 많았는지 아나?” 이상하긴 했다. 한 번의 작전에서 두 개의 훈장을 나누어 받는다는 게. 내 의문을 들은 소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하나의 작전에서 서로 다른 국면을 평가하여 별도의 전공으로 수훈하는 건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이걸세.” 그는 한숨 쉬며 말했다. “전공은 차고 넘치는데, 자네에게 명예훈장을 또 줄 수는 없다는 것.” 그 말을 듣고 나는 명예훈장의 특수성에 대해 생각했다. 수여에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유일한 훈장. 그래서 피어스 상사는 이 훈장의 정치적인 의미를 지적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난 좀 더 이른 시점에서 최고의 영예를 받았어야 한다고.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생각했으나, 소령이 들려주는 배경은 보다 단순한 것이었다. “이른바 전통이라는 거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명예훈장을 이중으로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네. 그나마도 살아서 받으면 기적이었고. 명예훈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군에게 날아온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덮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소령은 농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이라크 전쟁에서 나온 네 명의 수훈자들 중 세 명이 같은 이유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한 명도 죽은 뒤에 수훈자가 되었다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서 다행이었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32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아간 사람이 나왔거든.” 빈정거리는 말투에서는 은근한 짜증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악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내 수훈에 반대한 사람들을 언급했다. “반대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 귀관이 하고 다니는 짓을 보면, 아무리 곱씹어도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그럼 그 때마다 명예훈장을 줘야 하나? 그렇게 남발할 경우, 하나 밖에 못 받은 다른 수훈자들이 우습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그럼으로써 시민 여론에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건 아닌가? 장병들의 의욕이 꺾이지는 않겠나? 위에서는 이런 걱정들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손가락을 펼쳤다. “게다가 자네는 진급연한에 관한 모든 규정과 불문율을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에도 명예훈장을 받는다면 다시 일 계급 특진이야. 그럼 자넨 대위잖아? 임관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일세. 전통이 중요한 분들에게는 이게 또 불편한 거라네.” 하나같이 수긍이 가는 이유들. 미군이 아무리 능력 중심의 집단이라도, 과거의 관성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아니, 전통 없이는 규율도 없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그러나 블리스 소령은 실무자로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내 말은, 그럴 거면 이번 사건을 조용히 묻었어야 한다는 거지. 휴먼드라마에 욕심이 나서 전국에 방송을 때려놓고, 정작 명예훈장은 못주겠다니. 누가 납득하겠느냐 이거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는 법.” 그래서 나온 대안이, 전공을 쪼개어 수훈십자장과 은성무공훈장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며, 그는 이번 포상의 다른 수혜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제프리 소위……아니, 이제 중위로군. 그와 그의 소대원들에게도 안 된 일이야. 그 중에서 명예훈장 수훈자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즉, 내가 최고 공로자라는 사실만은 명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 이상의 포상을 받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제프리 본인에게 들려주었더니,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렇게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저 세상으로 가버린 세 놈 때문에 감점 당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새로 받은 훈장과 특진을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농담이 재미없고 언행이 가벼울지언정, 그는 모범적인 소대장이었다. #저널, 132페이지, 포트 로버츠 봉쇄사령관의 방문이 단순히 격려 차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작전 실시 이전의 현장 점검이었다고나 할까. 월요일의 정기 브리핑에서, 연대전투단장 래플린 대령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조만간 대규모 군사행동이 예정되어 있노라고. 작전명 「명백한 해방(Manifest Liberation)」. 목표는 미 본토의 완전한 수복이라고 한다. 오염지역을 일소하고, 고립된 시민들을 구출하고,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하려는 것. 동원 예정인 병력은 천만을 넘는다. 작전은 4월에 개시될 예정. 작년 12월까지만 하더라도 8백만 수준이었던 미군이, 고작 넉 달 사이에 천만 이상으로 팽창한다는 뜻이었다. 캐나다에서도 2개 사단을 보낸다고 했다. 적은 병력이지만,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인구와 병력이 적은 만큼, 난민을 잔혹할 정도로 거부하여 안전을 확보했다고는 들었지만……. 미국의 협력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텐데. 아무튼 그동안 병력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알겠다. 위에서는 이 작전을 작년부터 구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병력을 아꼈던 게 아닐까? 포트 로버츠의 역할은 보급기지였다. 본대의 진격로에 물자집적소를 설치하게 될 거라고. 이후의 브리핑에서는 변종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있었다.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니 참고만 하도록. 트릭스터가 항상 짝을 지어 움직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 놈이 전투를 치를 때, 한 놈은 주변을 조용히 맴돈다는 거지. 가설이 사실일 경우, 조용한 놈의 역할은 정보보존일 것으로 예상된다. 무리지어 움직일 때도 최소한 하나 이상이 침묵을 지킨다는 뜻이고. 전파가 닿는 거리를 유지하며 떨어져 있다가, 무리가 전멸하면 안전한 곳까지 이탈해서 다른 무리에게 축적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산타 마가리타 호수에서 트랩을 걸어 죽였던 트릭스터를 떠올렸다. 트랩이 터진 직후 십여 초 이상 이어지던 단말마를. 그 단말마 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을까? 그곳에 또 하나의 트릭스터가 있었다면, 같은 방법이 다시는 통하지 않겠지. “방역전략연구소에서는 이 가설을 ‘침묵하는 하나’라고 명명했다. 비록 근거는 한 건의 목격정보 뿐이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가설이니 향후 작전시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질문 있나?” 여러 질문이 나온 뒤에, 나도 손을 들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침묵하는 하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호수 인근에서 보았던 괴물, 험프백에 관한 것이었다. 그 괴물의 상세정보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전에 래플린 대령이 말하기를, 레인저가 험프백을 추적하는 중이라고 했었는데. 그걸 묻자, 연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말한 한 건의 목격정보가 바로 그 레인저 소대에서 올라온 거다. 원래 쫓던 사냥감은 놓쳤다고 하더군.” 그 말은 즉 트릭스터가 복수 포함된 변종집단이 레인저 소대를 가로막았다는 뜻인데……. 우연의 일치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싶다. 협잡꾼(Trickster)은 덩치 큰 꼽추(Humpback)를 지키려고 나섰을 터였다. 내가 싸울 때도, 험프백은 줄곧 후방에 머물렀다. 대체 이건 뭘 하는 괴물일까? #제중, 포트 로버츠 2월 둘째 주 월요일. 음력으로는 1월 1일. 중국과 한국계 난민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으나, 이를 기념할만한 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민구역의 분위기는 전보다 나아진 편이었다. 군정청 설립을 위한 민정위원 사전교육이 시작되었기 때문. 브리핑 룸에서 나오던 겨울은, 사령부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예비 위원들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교육이 끝났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쉬는 시간인 듯 하다. 다들 표정이 밝다. 크고 작게 떠드는 소리들. 그 중 동맹 소속 한 무리가 나이 어린 리더를 발견했다. 반색하며 다가온다. 선두는 안제중이었다. 파소 로블레스에서 겨울을 도왔던 세 명 중 하나. 동맹에서는 유라, 진석, 제중을 최초의 3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겉멋이 잔뜩 들어 유치함까지 느껴지는 이 호칭에는, 사실 조금 유감스러운 내막이 있었다. ‘안제중 씨 본인이 만들었다지…….’ 유라와 진석이 전투조장을 맡는 동안, 본인에게는 그동안 주어진 역할이 없어 서운해 했다고 한다. 그 점에 착안하여, 민완기는 제중을 자경대장 겸 병무국 5급 민정위원으로 추천했다. 제 할 일은 하겠지만 존경을 받지는 못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망을 쌓지 못하니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데, 의존할 사람이 겨울 말고 누가 있겠느냐고.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거리에서, 제중이 가볍게 목례했다. “이야, 우리 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저희들 보려고 오신 겁니까?”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정기 브리핑에 참석하느라. 부장님들은 어디 계세요?” “아직 안쪽에 남아계실 겁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교육은 받을 만 하세요?” “어휴. 영어로 진행되다보니 좀 벅차긴 합니다. 이제 회화는 어느 정도 된다고 자부하는데, 문자를 보니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지 원. 사실 한글로 된 책도 읽기 힘들지만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라면서 능청을 떠는 중년이었으나, 그리 힘들어 보이는 낯빛이 아니었다. “자경대 활동하고 병행하는데도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시네요.” “그야 해병대 전우회 시절에도 하던 일인걸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순찰도 돌고, 봉사도 하면서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뭐 그런 거였지요.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하하핫.” 해병대 전우회에 대한 언급이 마음에 걸린다. 쓸 데 없이 군기를 잡는 건 아니겠지? 겨울은 제중의 해병대 복무이력을 반쯤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군기 강요가 군복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는 민완기 선에서 정리될 것이다. 할 일을 알아서 찾는 사람이니. 문제가 생기면 강영순 노인이 알려줄 것이고. 겨울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적하지 않았다. 제중이 말한다. “언제 한 번 사격할 때 보러 오십시오. 괜찮으시다면 시범도 한 번 부탁드립니다. 다들 대장님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 하지 뭡니까?” “어차피 TV에서 많이 보지 않았나요?” “에이, 실제로 보는 건 다르죠.” “알았어요. 사격 말고 다른 훈련도 신경써주세요. 언젠가는 미군이 자경대에게 총기 휴대를 허락할지도 몰라요.” “엥?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난민들에게 무기를 준다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 일본, 한국 깡패들을 순서대로 털어서 불법 무기를 압류했는데요?” “그거야 불법 무기죠. 제 말은, 자경대 활동이 정식으로 인가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자 제중은 숨을 죽였다. “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제 예상이에요. 미국은 원래 민병대에 관대한 나라인걸요. 앞으로 더 신뢰가 쌓이면, 최소한 우리 동맹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으로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다름 아닌 미국의 헌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민병대가 주 방위대(State militia)를 뜻한다는 해석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미국에서는 무수히 많은 민병대가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말이 민병대지, 장비와 훈련도가 군대에 필적한다. 퇴역 군인을 영입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찰이 민병대의 협력을 구하기도 한다. 미국이 이런 나라였다. 다만 제중은 미국에서 살아본 사람이 아닌지라, 미군이 난민 자경대에게 사격을 포함, 주기적으로 이런저런 훈련을 요구하는 걸 지원병 선발의 예비과정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훈련에 어려움은 없으세요?” 겨울이 묻자, 제중이 괜찮다고 대답한다. “진석 아우랑 유라 조장이 신경을 써줘서 말이죠. 훈련을 할 때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꼭 같이 가서 도와줍니다. 허허.” “다행이네요.” “전에 진석 아우가 사격 훈련에서 시범을 보이는데, 이야, 정말 잘 쏘더군요. 논리적인 사람이라 총을 쏠 때 소리부터 다릅니다. 혹시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논리적인 사람이 총 쏘는 소리는, ‘타당타당!’ 입니다. 하하하하!” 겨울은 제중을 죽이라는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했다. # 110 [110화] #예감, 샌 아르도 유전 (1) 「명백한 해방」 작전이 공개된 다음날. 캡스턴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급 임무부대가 살리나스 강을 따라 북상했다. 목표는 샌 아르도 유전을 점령하는 것. 겨울이 살리나스 댐을 지켜낸 덕분에, 유전은 침수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었다. 강변의 유전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막처럼 보였다. 땅이 한 꺼풀 평탄하게 벗겨져서, 주변에 비해 황량한 색채가 두드러진다. 지대가 높아지는 동쪽을 보면, 시각이 소실되는 능선까지,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많은 길이 굽이치고 있다. 거기엔 아무런 규칙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달려오기 시작하는 변종들에게도, 아무런 규칙이 없었다. 그야말로 폐허로구나. 달리는 차 안에 있었으나, 겨울은 어렴풋이 원유의 냄새를 맡았다. 기분 탓은 아니었다. 유전의 일부 시설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항공정찰에서 이상 징후가 없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먼 곳에서 노이즈 메이커가 천둥 닮은 소리로 울어댔다. 작전 소음에 몰려드는 변종들을 분산시켜줄 것이다. [2시 방향, 대규모 변종 집단, 거리 약 250. 미어캣에서 날리겠다.] 전차부대의 호출부호는 여전히 미어캣이었다. 임무부대 우측, 야지를 달리던 두 대의 전차가 포탑을 돌린다. 이윽고 터지는 두 발의 포성. 콰앙! 쾅! 알루미늄 껍데기에 산탄을 담아 쏘는 신형 포탄이었다. 거의 일백에 가까운 변종들이 물결처럼 쓰러졌다. “우와, 저거 뭐예요? 짱이다. 멋져.” 유라 분대 지정사수 한별의 감탄성. 겨울과 같은 트럭에 탄 그녀는, 방탄유리 너머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죽어! 죽어! 일어나지 말란 말이야! 2,200발의 산탄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소수의 변종들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저거 여기까지 오지도 못 하겠는데요?” 또 한 명의 분대원, 문수찬이 하는 말. 그는 자기 총에 달린 망원렌즈로 적을 살피고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겨울도 동감이었다. ‘인간 기준의 치명상이면 변종에게도 깊은 상처지.’ 변종들은 반수 이상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들의 낡고 헤진 옷가지는 신선한 핏빛으로 물드는 중. 비록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보일지라도, 변종 역시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배와 가슴에 구멍이 난 채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겨울은 망원경으로 탄착지점을 살폈다.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오는 배고픈 것들. 가장 앞에 있는 어린 것이 인상적이다. 폐에 피가 찼나보다. 붉은 기침이 여러 번이었다. 흔들리다가 기어코 넘어진다. 그것이 힘겹게 다시 일어서려는 찰나. 쾅! 콰앙! 전차들의 두 번째 사격. 텅스텐의 소나기가 변종들을 두들겼다. 눈으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체가 부서지고, 굳은 땅이 박살나는 소리들. 그 사이에 임무부대는 유전 남쪽으로 진입했다. 곳곳에서 변종들이 나타났다. 앞서 몰살당한 것들을 보았는지, 짐승의 지능으로도 주의하는 기색이다. 캡스턴 중령에게서 명령이 내려온다. [현 지점에서 하차전투로 전환한다. 1중대는 진입로 남쪽부터 동쪽 정제시설과 유류 저장시설까지 경계선을 확보하고, 2중대는 사전트 크릭 북쪽으로 진출해라. 남은 병력과 지원대는 중앙의 정제시설을 점령한 뒤에 동북쪽 경계선을 확보한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이되, 상황보고는 철저히 하도록.] 겨울은 탑승칸에서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쿠웅. 발끝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묵직하다. 덤불 너머에 실루엣이 있었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변종이, 제딴에는 몰래 이쪽을 살핀다. 겨울이 기관총을 겨냥했다. 인간의 무기를 이해하는 변종은 발작처럼 튀어나온다. 타타탕! 변종의 경련은 기계적인 고장 같았다. 선 채로 떨다가 무릎을 꿇는다. 몸에 난 구멍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다. 가끔은, 내장 조각도. 소총탄보다 굵은 기관총탄이 안쪽을 긁고 지나간 탓이었다. 저벅, 저벅. 걷는 소리 뚜렷하게 다가가는 겨울. 변종은 꿇은 채로 올려다보며 이빨만 따다다닥 부딪혔다. 겨울은 변종을 걷어찼다. 그리고 넘어진 놈의 위로 큰 걸음을 내리 찍는다. 콰작! 평소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일격. 흉곽이 콰드득 내려앉았다. 소년은 그 상태에서 발을 비볐다. 그 때마다 으득, 으드득, 조각난 갈비뼈들이 어긋나는 느낌.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심장을 파고들어서야, 변종은 마지막 날숨을 뱉었다. ‘무게는 이 정도인가.’ 겨울은 자신의 달라진 무게를 시험하고 있었다. 새로운 방호복, 「센추리온」 때문. 자체 무게만 25킬로그램으로, 변종에게 물려서 생기는 피해를 막겠다고 만든 물건이었다. 추가로 기관총탄 500발이 들어가는 급탄가방이 16킬로그램. 무기나 다른 장비들까지 합쳐서, 겨울이 지고 있는 무게는 50킬로그램을 넘는다. 사격이 이어졌다. 변종이 숨을 만한 관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추기와 유류고 주변에 있는 변종들을 처리하기가 까다로울 뿐. 겨울은 정조준으로 다섯을 사살했다. 그리고 빠르게 전진하며 제압사격. 서른 발 정도를 뿌린다. 급탄가방 덕에 재장전은 필요 없었다. “다들 괜찮아요?” 사격 끝에 돌아보면, 같은 방호복을 착용한 스무 명이 불편하게 뛰어온다. 진석 분대와 유라 분대 전원이 해당되었다. 그 밖에도, 각 소대마다 한 개 분대씩 허덕이는 중이고. “어휴, 탈 때도 느꼈지만,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네요.” 조금 빠르게 달린 것만으로, 유라는 벌써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새로운 장비를 주려면, 최소한의 적응기간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리를 잡은 뒤에, 진석이 날카롭게 묻는다. 항상 냉소적인 진석이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까다롭게 군다고 보기 어렵다. 겨울도 같은 생각이었다. ‘너무 성급한 것 같은데…….’ 연대전투단이 센추리온 방호복을 수령한 게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봉쇄사령부로부터 방호복을 실전에서 테스트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도 불만은 일단 무마해둬야 한다. 겨울이 진석을 달랬다. “환경이 환경이잖아요. 송유관이나 정제시설 파손을 최소화하려면 화력을 아껴서 써야 하는데, 그러자니 병사들이 위험해지는 걸요.” 이 또한 사실이었다. 송유관이 사방에 있었다. 파손되면 보수공사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자재를 항공운송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화력조절이 불가능한 전차소대는 외부 경계에 투입된다. 동서남북으로 각 1량씩. 신형 포탄을 써서 산탄사격이 가능해진 만큼, 변종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진석은 여전히 불퉁했다. “난민이라고 모르모트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박 조장님. 우리만 고생하는 거 아니잖아요. 작전 중이니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요. 다들 바이저 내려요. 고정도 잊지 마시고요. 이후엔 무전으로 교신합니다.” 방호복에는 안면 보호를 위한 바이저가 달려있었다. 이걸 내려서 잠가버리면, 보통의 변종은 착용자를 물어뜯을 방법이 없어진다. 즉, 직접적인 감염에서 완전히 안전해지는 셈. 대신 의사소통도 무전을 통해야 한다. ‘베타 구울의 무는 힘을 버틸 수 있다고 했던가?’ 카탈로그에 나온 방호성능은 그 정도였다. 겨울은 병력을 끌고 도로와 철도를 따라 북상했다. 다른 병력들이 좌우에서 병진했다. 험비와 장갑트럭들이 대열을 뒤따른다. 어지간한 도시만큼 넓은 유전이었다. 남단에서 중앙의 정유단지에 닿기까지, 대원들은 1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야 했다. 체력이 부족한 대원들이 벌써부터 땀을 흘린다. 날이 아직 선선하고, 방호복에 별도의 냉각장치가 있는데도 그랬다. 겨울은 시추기 뒤편에서 튀어나오는 변종들을 발견했다. “11시 방향에 적! 대기! 대기! 뒤로 10미터 물러나요!” 도로를 따라 나란히 달리는 송유관 때문에 사격이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가까운 송유관은 고작 30미터 거리. 겨울은 후속 차량들을 향해서도 손짓했다. 멀어지라고. 적당한 거리에서 주먹을 들었다. 험비 사수가 사격을 준비한다. 동시에 겨울이 두 개 분대를 향해 외치는 말. “나를 기준으로! 거기, 너무 물러났어요! 좀 더 다가온 다음에, 가급적 높게 조준해서 쏴요!” 겨울은 대원들의 사격을 지연시켰다. 변종들은, 언제나처럼, 혀를 빼물고 달려온다. 그 기세가 거리감을 줄인다. 실제보다 가까운 감각 앞에서, 대원들이 온 몸으로 초조해했다. “지금! 사격!” 변종들의 상반신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높게 쏘라는 지시였고, 진작부터 끝나있던 조준이다. 투타타타타타! 쓰러져서 버르적대는 변종들에게 과잉화력이 쏟아진다. 특히 한 명이 문제였다. [으아아아! 이 새끼 왜 안 죽어!]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가. 총에 맞아 움직이는 걸, 살아있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 무전기에서 칙칙하게 울리는 비명. 패닉은 전염되기 쉽다. 겨울이 강하게 외쳤다. “그만! 사격중지! 사격중지!” 쉽게 끝나지 않는 난사. 보다 못한 진석이 직접 가서 막는다. 총열을 붙잡고, 힘으로 확 들어올려서. 그러나 이미 백 발 이상을 써버린 뒤였다. 탄창을 갈아 끼우는 방식이면, 미숙한 인원도 탄 소모를 자제할 수 있다. 어쨌든 25~30발 단위로 끊어지니까. 급탄 가방은 그렇지 않았다. ‘재장전이 불필요하다는 게 이럴 때 곤란하구나.’ 말이 500발이지, 완전자동사격으로 46초 만에 없어지는 양이다. 이는 단점이면서 장점이었다. 적어도 화력공백은 생기지 않는 셈이니까. 압도적인 수의 변종을 상대할 땐, 거침없는 연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잠시 후, 겨울은 전투조원들과 함께 정유단지의 첫 번째 통제시설에 접근했다. 다른 경로를 청소하며 올라온 찰리 중대 2소대, 3소대가 합류했다. 1소대와 화기소대는 유전을 가로지르는 건천의 다리를 점령하느라 다른 곳에 있었다. 중대장 설리번 중위 역시 그쪽을 담당했고. 각자의 병력을 사주경계로 펼쳐놓고, 세 명의 소대장이 겨울에게 붙는다. “아까 총성이 꽤 요란하던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3소대장 힉스 소위의 질문.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별 것 아니에요. 두 사람은 오는 동안 괜찮았어요?” 전성판을 통해 울려나오는 겨울의 음성. 소위 둘이 서로를 확인한다. 2소대장 맥코이가 대답했다.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놈들이 문제였습니다만, 뭐, 저희 쪽에도 중보병이 있었으니까요. 두 명이 덮쳐졌는데 멀쩡하더군요. 한 놈은 지린 모양입니다만.” 중보병은 방호복 착용자를 뜻한다. 이어 힉스 소위가 증언했다. “저희 쪽에서는 붙어있는 놈에게 그냥 갈겨버렸습니다. 소총탄 정도는 막는다기에 괜찮겠거니 했죠. 센추리온 이거, 물건 자체는 쓸 만 한 것 같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점령할 건물들을 지목했다. “시간상 여유가 있으니 안전하게 가죠. 지금 여기에 중보병 네 개 분대가 있으니까, 돌아가면서 돌입하기로 해요. 어차피 이쪽 건물은 그리 크지도 않잖아요.” 맥코이가 묻는다. “순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지원 병력과 함께 두 번 먼저 들어갈게요. 그 다음에 2소대, 3소대 순서로. 어때요?” “이의 없습니다. 엄호하겠습니다.” 힉스 역시 고갯짓으로 동의했다. 겨울은 진석 분대를 이끌었다. 차량 수송을 위해 원유 배관이 끝나는 장소. 한 대의 유조차가 버려져 있었고, 주차장엔 승용차 몇 대가 방치된 상태였다. 안전벨트에 묶인 변종 하나가 차 안에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힘이 없다.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다가가서 단발 사격으로 침묵시킨다. 차 안쪽은 마른 분변으로 가득했다. 감염되기 전, 꽤 오래 갇혀 지낸 모양이다. ‘그렇겠지. 일찌감치 감염되었으면, 저렇게 굶주릴 일이 없으니까.’ 대사억제에 들어간 변종은, 영양 공급 없이 연 단위로 살아남는다. 산소는 별개지만. 이제 겨울은 선두에서 건물 내로 진입했다. 일반 주택 크기의 단층 시설이었으나, 각종 설비가 가득하여 내부는 복잡한 편이었다. 좁은 외길이 이어진다. “캬악!” 응달에 도사렸다가 도약한 변종에게, 겨울은 왼손을 물려주었다. 까드득. [대장!] 등 뒤의 비명에, 겨울은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쏘지 마세요.” 장갑은 방탄 소재였다. 변종은 겨울의 손을 붙잡고 열심히 씹어댔다. 보는 앞에서 뭉개지는 잇몸들. 피가 줄줄 흐르고 이빨이 빠개지는데도, 굶주린 것은 그칠 줄을 모른다. 빠각, 빠각. 부서진 이빨 조각이 바깥으로 튀었다. 겨울에게는 약간의 압력이 느껴질 뿐이었다. 겨울은 변종의 턱을 손잡이처럼 움켜쥔다. 변종의 몸부림. 그러나 이쪽은 100킬로그램이 넘는 체급이었다. 흔들릴지언정 휩쓸리지 않는다. 총을 놓고, 감아쥔 오른손을 어깨 뒤로 당겼다. 그 뒤에, 온 몸의 무게를 실어 변종을 후려쳤다. 일격에 아래턱이 떨어져 나왔다. 비틀거리기에, 이번에는 목을 붙잡고, 또다시 강타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회를 거듭할수록, 몸부림이 잦아든다. 함몰된 안면에서 깨진 눈알이 흘러나왔다. 목을 놓아준다. 주저앉은 변종이 다리를 떨었다. 겨울은 문을 부수는 쇠지레를 들었다. 번쩍 들어, 날 선 모서리로 정수리를 내리 찍는다.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괴물보다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 111 [111화] #예감, 샌 아르도 유전 (2) 변종들은 기초적인 매복과 엄폐를 구사했다. 무리 지은 짐승 수준의 지능일지라도, 상대하는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 엄폐물이란 것들에 기름이 차있었기 때문이다. 시설파손 뿐만 아니라, 화재까지 걱정해야 한다. 그만큼 중보병이 활약할 기회가 늘었다. 본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어도. 겨울은 유라 분대를 끌고 두 번째 시설로 진입했다. 창문과 환기구로 들어오는 햇빛 외에, 일체의 조명이 없는 실내. 겨울은 바이저를 올려보았다. 곧바로 휘발성 짙은 냄새가 난다. 시설 어디선가 원유가 새는 모양이다. ‘사격으로 불붙긴 어렵겠지만……. 모르는 일이니까.’ 살이 썩는 내음도 있었다. 이 정도면 하나가 아닌데. 겨울은 바이저를 내리고, 잠그고, 수신호로 후방에 경고했다. 사격 주의, 그리고 예측되는 적 다수. 분대원들은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위치로 벌어졌다. 사선에 관이나 설비 따위가 없는 화망을 구축하면서. 첫 적은 의외로 정면에서 나왔다. 군살 없는 몸이 근육으로 꽉 차있다. 강화종이 되기 직전이다. 잠깐의 대치. 인간 아닌 것은 고개를 연달아 꺾으면서, 이빨을 따다다닥. 이쪽의 대응을 시험하는 듯 하다. [대장!] 누군가 내지른 경고성. 겨울이 쇠지레를 머리 위로 쳐올렸다. 정점에서, 무언가 턱 걸리는 느낌. 피가 쏟아진다. 그대로 휘두르니, 지렛날에 찍힌 변종이 무겁게 패대기쳐졌다. 배관을 타고 떨어진 놈이다. 뒤늦게, 타타탕! 엇나가는 총소리. 지원사격이었다. ‘하나가 시선을 끌고, 다른 놈이 덮친단 말이지?’ 시선 끌던 녀석이 달려든다. 겨울도 돌격했다. 거리가 영에 수렴하는 순간, 어깨로 충돌한다. 쿵! 온 몸을 흔드는 타격감. 겨울은 중보병의 전투방식을 시험하는 중이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변종이 일방적으로 튕겨졌다. 세 걸음 쫓아가 쇠지레를 내리치는 겨울. 까앙! 부패한 허벅지 사이에서, 콘크리트가 부서지며, 요란한 불티가 튄다. 박혔다. ‘너무 느려.’ 몸이 무겁지만 않았다면. 겨울은 아쉬움과 쇠지레를 동시에 놓고, 전진했다. 몸 뒤집는 변종의 머리채를 움켜쥔다. 확 당기자,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가죽까지 벗겨졌다. 염증 탓일까? 피에 젖은 두개골이 드러났다. 충격으로, 변종이 소년의 발치에 쓰러진다. 이럴 셈은 아니었는데. 겨울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쾅! 머리뼈에 생긴 균열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쾅! 금간 곳을 다시 칠 수 있어서 좋다. 쾅! 변종은 거품을 물고 소년의 허리에 매달렸다. 쾅! 인간을 물어뜯고, 넘어뜨리려 힘쓰는 괴물. 쾅! 무게 탓에 어림도 없다. 쾅! 뼈가 내려앉기 직전이다. 쾅! 마지막은 조금 다른 소리였다. 뒤에서 휘둘러진 쇠지레를, 겨울은 손목으로 막았다. 들어오는 지렛날 바로 안쪽을 쳐서. 날이 빠지기 전에 다른 손으로 움켜쥔다. 이어지는 힘 싸움. 손잡이를 쥔 구울이 이빨을 드러냈다. 다수의 변종들이 배관을 타고 넘어온다. 대원들이 미리 잡은 위치에서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덮쳐졌다. 머리부터 짓눌려, 넘어져, 자기 무게와 변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아아악!] 단말마를 닮은 비명. ‘조금 더 침착하면 좋을 텐데.’ 비명만큼 위급하진 않았다. 보통의 변종은 방호복을 해체할 수 없다. 겨울은 달라붙은 두 놈부터 밀어붙인다. 쇠지레를 낚아챈 구울이 문제였다. 그것도 베타 구울이다. 완력이 상당했다. 허리를 붙잡은 놈은 이미 제 힘을 내지 못했으나, 겨울에겐 매달려있는 그 자체로 방해. 하체와 허리힘을 쓰기 힘들었다. 개싸움이다. 도구를 쓰는 짐승은, 쓰는 법이 엉망이었다. 풀 스윙만 막으면 된다. 견제는 한 손으로 충분했다. 지금껏 경험한 방어력을 믿고서, 자잘한 매질을 무시하고, 겨울은 구울의 안면을 움켜쥔다. 놈이 고개를 마구 흔들어서 쉽지 않았다. 미는 손을 사납게 물어댄다. 강화종답게, 느껴지는 압력이 상당했다. 물 때마다 스크래치가 생겼다. 서두를 필요 없다. 방어는 만전. 겨울은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러다가 결국, 콱! 엄지가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 우묵해진 눈꺼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캐애애액! 갸르르! 크카아악!” 구울이 미친개처럼 짖는다. 이런 싸움에 어울리는 소리. 같은 일, 두 번째는 쉬웠다. 거의 더듬는 수준으로, 이미 생긴 구멍에 약지 이하를 넣어 고정시키고, 엄지를 남은 눈으로 옮겨간다.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뼈의 감촉. 다시 한 번 엄지에 힘을 준다. 실패. 다시 한 번, 실패. 그리고 세 번째의 성공. 시력을 잃은 구울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다. 대검을 뽑아, 안와 깊이 박아버린다. 어떻게 박혔는지, 잘 빠지지 않았다. 피로 적신 손이 미끄러운 탓도 있었다. 겨울은 왼팔로 남은 변종의 목을 조였다. 그리고 오른 주먹으로 거듭 내리친다. 망치질처럼 단조로운 동작. 그리고 망치처럼 단단한 주먹. 방탄소재의 무게와 굳기는 그 자체로 흉기였다. 퍼석! 마침내 깨지는 소리. 허리를 죄던 힘이 사라진다. 유라 분대도 전투를 마무리 짓는 단계였다. 조장이자 분대장으로서, 유라는 가장 침착했다. 겨울은 생각했다. 스트레스 훈련이 효과가 있구나. 옆에서 욕설을 퍼붓고, 마구 밀치는 상황에서, 표적의 성질을 구분하여 쏘는 훈련. 사격훈련 중에선 가장 실전에 가깝다. 겨울에게 일대일로 교습을 받은 건 유라가 유일했다. 그녀는 자동사격이 가능한 샷건으로 무장했다. 겨울이 보는 앞에서, 내리 스무 발을 쏴서 변종들을 쓸어버린다. 범위를 정확하게 고려한 사격이었다. 벽과 바닥이 마구 부서졌으나, 설비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겨울은 권총사격으로 거들었다. 기관총보다 빠르고 간편했다. 타앙, 탕! 철컥거리는 슬라이드가 짧은 탄피를 뱉는다. 반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또한 방호복의 무게 탓이었다. “다들 괜찮아요? 상태 보고하세요.” 겨울의 말. 무전망에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흐른다.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반수 이하. 그 반수를 경계로 세워놓고, 남은 이들은 겨울이 한 사람씩 다독여야 했다. 이들이 부족한 게 아니다. 다들 신병인 것을.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중보병은 상식적으로 숙련병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난민 출신 정규군을 투입하라는 명령 또한 봉쇄사령부에서 내려왔다. 「명백한 해방」 작전에서 포트 로버츠 주둔 병력의 역할이 보급선 구축만은 아닌 듯 하다. [대장은 괜찮으세요?] 작은 리더를 염려하는 유라의 목소리. 그러나 그녀야말로 괜찮지 않았다. 두꺼운 방호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떨림. 경계하는 총구가 고정되지 않는다. 겨울은 그들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었다. 적어도 조준은 가능해야지. 잠시 후 재개되는 탐색. 매복은 다행히 한 번이 전부였던 것 같다. 시설의 남은 구획은, 기름 묻은 발자국이 어지러웠으나,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이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유전지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단 한 명이었다. 바이저 고정을 잊었던 중보병은, 안면을 물어 뜯겼다. 그는 울면서 자살했다. 캡스턴 중령이 겨울을 호출했다. “수고했네. 보아하니 이번에도 몸을 사리지 않은 것 같군.” 그는 피와 살점 투성이인 겨울의 방호복을 보고 있었다. “그 방호복, 직접 운용해보니 느낌이 어떤가?” 의례적인 칭찬 이후 바로 나온 질문이 이것이다. 신형 방호복에 대한 소년 장교의 평가를 듣고 싶은 모양. 중령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센추리온의 운용 보고서를 써야 할 입장이기도 했다. 겨울은 개인적인 소감부터 시작했다. “좋은 물건이고, 방어력도 확실한데,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에요.” “어째서?” “만약 산타 마리아에서 이걸 입고 있었으면, 저는 아마 죽었을 테니까요.” 알기 쉬운 예였으므로, 중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호복 착용은 겨울의 강점들을 깎아먹는다. 빠르고 정확한 사격, 위험한 환경에서의 고속 이동, 적극적인 치고 빠지기 등. 이를 뒷받침하는 「개인화기숙련」과 「무브먼트」는 방호복의 중량과 두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아예 「근접전투」를 강화할까?’ 기술 투자를 오랫동안 미뤘기에, 겨울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열려있었다. 그러나 기술등급이 올라갈수록, 획득했던 횟수가 적다. 즉 재능이익-탤런트 어드밴티지가 희박하다. 소요 자원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겨울은 상념을 접었다. 캡스턴 중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는 이미 짐작하실 것 같은데…….” 운을 띄우고, 그래도 여전한 중령을 본 뒤, 마저 말하는 겨울.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싸울 때나 쓸모가 있지, 그 외엔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에게 압도당할 때 방어력을 믿고 버틸 사람이 흔치도 않을 거고요. 「명백한 해방」 작전에 천만 명을 동원해봐야, 어차피 다들 신병일 텐데요.” “그래도 심리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 거야. 적의 공격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게 병사들을 얼마나 안심시키겠나. 자네 말마따나, 거의 대부분이 신병들인데 말이야.” 겨울이 부정적으로 대꾸한다. “글쎄요……. 그럼블이라도 만나면 죽은 목숨인걸요. 영리한 것들은 도구를 쓰기도 하고요.” 빠르게 지치고, 발이 느리다. 그런데 방어력은 빈 손의 베타 구울을 막는 수준이다. 겨울은 그럼블이 출현한다면 방호복부터 벗어던질 작정이었다. 트릭스터는 모르겠다. 방호복이 절연체이긴 하나, 트릭스터를 쫓아가려면 속도가 부족하다. ‘사전정찰로 특수변종이 없다는 건 확인했지만.’ 중보병들은 유전 안쪽에 투입되었으므로, 외부 경계 병력으로부터 경고를 받을 시간이 충분했다. “즉 결론은.” 캡스턴 중령이 말한다. “자네 같은 사람에겐 도움이 되지 않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주기는 애매한 장비라는 뜻이군. 쓸 만 한 환경 역시 시가지나 비슷한 곳으로 제한될 것이고. 그나마 그럼블을 대비해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건데……. 사실, 당연한 이야기겠지.” “가능할까요?” 겨울은 한 번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충분한 지원을 받기에, 천만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준비기간은 너무 짧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다. 중보병들이라고 특별하진 않을 터. 하다못해 수송차량은 충분할까? 차량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잘 모르겠군. 위에서도 계획이 있겠지.” 중령은 하늘을 보았다. 수십 대의 수송기들이 줄줄이 날아온다. 투하하는 것은, 모듈화 된 건축 자재들. 겨울은 저널을 회상한다. ‘수송기가 모자랄 때인데.’ 오염지역에 대한 보급만 해도 수송역량이 부족한 상황. 봉쇄선 사령부가 이 유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축할 시간이 얼마 없다. 그리고 미군은 기름을 엄청나게 쓰는 군대다. 그날그날의 생산량으로 공급하는 건 지나치게 빠듯한 구상이었다. 다른 루트가 있다손 치더라도. “역시, 다가오는 대선의 영향이 있겠죠?” 겨울의 질문에, 캡스턴 중령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자리에선 이야기하지 말게.” 지휘관의 역할은 걱정을 잠재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런 의미였다. 어쨌든 천만이 넘는 병력이다. 어지간한 결핍을 질량으로 뭉개는 게 가능한 숫자. 지난 스물여섯 차례의 세계관에서조차 이런 규모는 존재한 적 없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실패를 예상하긴 어렵다. 설마 지진 따위가 일어나진 않겠지. 단지 겨울은 과정을 우려하고 있었다. # 112 [112화] #과거 (7), 왕 고건철 회장이 마침내 낙원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잘 준비된 함정의 시기적절한 연속이었고, 1%의 지분에 경영권이 오가는 자본주의의 마법이기도 했다. 이혼소송에서, 낙원그룹의 후계자는 불륜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가 너무도 많았다. 고아영은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위자료는 천문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또한 그녀는 재산형성에 기여한 바가 남편보다 크다고 인정되었다. 혜성그룹 사장단의 일원이자, 애초부터 낙원그룹 대주주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재판결과를 대서특필했다. 재벌가의 이혼으로 기업의 지배구조가 바뀌는 건 종종 있는 일. 그러나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다고. 기업이 아니라, 국가의 지배구조가 바뀌었다고. 이제 고아영은 낙원그룹의 경영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고건철 회장이야말로 진정한 지배자라는 것을. 아영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지. 사실은 명의신탁에 불과하니까.’ 명의신탁. 재산의 명목상 소유자와 실소유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아영이 본래 지니고 있던 낙원의 주식은, 표면적으로만 그녀의 것일 뿐, 실상 고건철 회장의 소유였다. 보통 이런 건 상속을 위한 편법으로 쓰인다. 허나 고건철 회장은 달랐다. 지난날, 조 단위의 증여세를 한 푼도 남김없이 납부했다. 그것이야말로, 폭군이 추구하는 공정함이었고, 미래를 위한 포석이었으므로. 그래서다. 그는 오늘도 분노하고 있었다. “뭐가 어째? 조세회피? 얼마를 아껴? 야 이 개새끼야! 네가 감히 내 지분을 훔치려 들어?!” 낙원그룹 회계담당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딴에는, 새로운 고용주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는 노력이었을 터. 낙원그룹이 그동안 어떻게 세금을 줄여왔으며, 앞으로는 혜성그룹의 영향력 아래 더욱 효율적인 절세와 탈세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그는 그렇게 보고했다. 폭군이 참모들을 향해 포효했다. “니들도 잘 들어! 내야 하는 세금은 반드시 내고! 낼 수 있는 세금은 찾아서 내라!” 분노뿐인 간극 뒤에, 다시 이어지는 분노. “나는 공정한 상인이다! 다른 날강도 버러지들이 어떻게 하건 내 알 바 아냐! 내가 세금을 내는 것은, 그만큼 요구하기 위해서다! 더 많은 세금! 더 많은 권리! 나는 값을 치른다! 국가는 그만큼의 대가를 내놔야 할 것이다! 내가! 이 나라의 대주주다!” 회계담당자가 지분을 훔치려고 들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회장의 국가관은 기업경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는 사람이기에. 같은 맥락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잡것들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회장이 다른 경영인들에게 적대적으로 구는 이유였다. 무임승차를 원하는 버러지 새끼들이라고. 일견 공정하게 느껴지는 가치관. 그러나 아영은 속으로 한숨 짓는다. 그 기준도, 방식도 터무니없는걸. 폭군은 자신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합당함이란, 자신만의 기준이었다. 스스로의 상도덕을 법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거래할 수 없는 것, 거래해선 안 되는 것을 거래하기도 한다. ‘그 아이의 몸처럼…….’ 아영은 분노하는 회장의 어린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겨울에 태어난 아이와 비교한다. 소년은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다. 그저 동일한 이목구비에서, 거래 이전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뿐.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저렇게 분노하는, 늙은 소년이 왕좌에 앉아있는데. 지금까지는 회장 스스로 선을 그어왔다. 이 금액으로 얻을 권리는 여기까지라고. 그런 면에서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낙원그룹을 손에 넣음으로서, 고건철 회장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게 됐다. 어쩌면 국가 예산의 절반을 넘을지도. 이제 아버지가 무엇을 요구할지, 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옛날, 그녀가 아직 여물지 않았던 시절. 딸을 미워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부정했다. “국민은 환상이야. 미개한 개돼지 새끼들이지.” 그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래, 지분은 있어. 좁쌀 만 한 지분이 있지. 하지만 그 작은 지분조차 그놈들에겐 과분한 목걸이다. 통찰도, 숙고도 없이 써버리는 것을…….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따지고, 어느 세대인지를 따지고, 학벌과 직업과 성별로 편을 갈라서 말이야. 그놈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건 결코 시비를 가리려는 게 아니다. 상대의 잘못을 개처럼 물고 늘어져서 자기 기득권으로 만들려는 수작질이지. 남의 밥그릇은 빼앗기 바쁘고, 제 밥그릇은 지키기 바빠. 밥그릇을 지킬 수만 있다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다시 말했다. “이 몰염치한 세상에서, 정답은 돈이다. 모든 것이 경제적이어야 해. 경제적이지 않은 계약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영은 아버지의 세계관이 싫었으나, 세계는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존경한다. 이유는 돈이 많다는 것이었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애국이었고. 그 외의 비인간적인 언행들은 선구적인 경영철학으로 채색되었다. 아영은 이렇게 상념에 잠겨있었다. 낙원의 경영에 관한 회의였으나, 누구도 그녀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들러리. 장식품. 단 한 번도 주체적일 수 없는, 속박된 운명. 따라서 회의가 끝났을 때, 회장이 그녀에게 남으라고 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딸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한다. “네 자식은 당분간 내가 보관하겠다. 돌아가면 이미 없을 테니, 그리 알아라.” 아영은 얼어붙었다. 실체 없는 한기가 골수까지 스며든다. 그녀는 더듬더듬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냐고. 내 아이를 왜, 왜 데려갔느냐고. 아버지는 조소를 머금었다. “네가 앉은 그 자리가 쭉정이에 불과할지라도, 네 생각이 짧으면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네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니, 당분간은 쓸 만 한 안전장치가 되어주겠지.” 한기는 이제 열기로 변한다. 뜨겁게 팽창하여,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러고도 남은 것은 눈물로 흘러나왔고.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닿는 거리의 모든 것을 집어던진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아버지를 향해 직선으로 날지는 못했다. 폭발하는 딸의 모습에, 늙은 왕은 만족했다. 안전장치를 잘 고른 것 같아서. #에이프릴 벤전스, 포트 로버츠 (1) 「명백한 해방」을 준비하는 나날은 단조로웠다. 진격로를 확보하고, 보급물자를 쌓아두기 위한 반복적인 임무들. 그러던 어느 하루, FBI 요원이 겨울을 찾아왔다. 요원은 절도 있는 경례와 부동자세로 소년장교를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방수사국 국가안보과의 특수감독관, 조안나 깁슨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방문은 뜻밖이었다. 깁슨 요원은 연대장에게 소년장교와의 독대를 요구했고, 그에 따라 마련된 면회실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상황. 수사국이 겨울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는 걸까? 내게 어떤 혐의가 걸려있나? 기반 정보가 없으니 「통찰」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전개는 경험한 적이 없다. 겨울은 일단 신중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깁슨 요원. 이렇게 불러드리면 되나요? 죄송합니다. 특수감독관(Supervisory Special Agent)이 어느 정도의 직급인지 알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대위 정도 됩니다만, 수사국과 육군은 별개의 조직이니까요. 역할과 규모도 다르고요. 일대일 대응은 무의미하겠죠. 실제 작전상황에서는 제게 감독권이 있겠으나, 감독권과 지휘권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맥락이 분명한 말이었다. 반문하는 겨울. “작전상황이라고요? 제가 깁슨 요원과 같은 작전에 투입된다는 뜻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중앙정보국(CIA)에서 한겨울 중위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거든요.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여기에 일단 서명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한 장의 서식을 내밀었다. 비밀유지서약서. 참여할 작전에 대해, 작전이 종료된 후로도 비밀을 지키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겨울은 고민했다. “제게 거부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망설임이 없어 명료한 답변이었다. 그녀는 다른 서식을 꺼내놓았다. “이걸 보시죠. 국방부와 봉쇄선 사령부의 파견명령입니다.” 현재 160연대 「세븐스 캘리포니아」에 파견되어있는 한겨울 중위의 임무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CIA의 요청에 따라 다른 작전에 투입한다는 내용. 겨울은 해당 서면에서 연대전투단장 래플린 대령의 서명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고민이 무의미해진 시점. 겨울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깁슨 요원의 펜을 받아, 정갈한 필체로 자기 이름을 적어 넣는다.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서식을 갈무리하는 사이에, 겨울이 의문점을 묻는다. “중앙정보국의 작전이라고 하셨는데, 깁슨 요원께서도 참여하시는 건가요?” “아, 그게 규정입니다. 정보국의 국내 작전은 수사국의 감독을 받도록 되어있으니까요. 작전은 정보국이 관할하고, 국방부는 중위님을 파견하여 해당 작전을 지원하고, 수사국은 작전이 국익에 해가 되지는 않는지, 절차상 문제는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인 거지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 텐데. 겨울의 우려를 「간파」했는지, 조안나 깁슨은 아까보다 투명해진 미소를 더했다. “저는 자동차의 브레이크라고 보시면 됩니다. 폭주를 막는 거죠. 어지간해서는 작전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미리부터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맡게 될 임무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상세한 내용은 수송기에 탑승한 이후 전달드릴 수 있습니다만…….” “얼마나 걸릴까요?” 다시 묻는 겨울에게, 뜸을 들인 뒤, 제한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그녀. “역시 궁금한 것이 많으시겠죠. 그냥 현 시점에서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작전 기간은……불확실합니다. 정보국에서는 최대 몇 개월 정도를 예상하더군요.” “…….” “작전 자체는 예전에 개시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투입되는 건 한겨울 중위님뿐입니다만, 현장엔 이미 충분한 인원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필요성에 의해, 정보국이 중위님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거지요.” 작전이 예전에 개시되었다면, 기존에도 감독관은 있었을 것이다. 국내 작전은 수사국이 감독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새로운 감독이 들어간다는 건, 어떤 이유로든 기존 감독관의 임무수행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나를 데리고 간단 말이지……. 즉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전임 감독관은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무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반증이었다. 깁슨 요원은 길지 않은 설명 끝에, 출발 예정시각이 오후 9시라고 알려주었다. “중위님께서 손수 보살피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히 소식을 전하셔도 좋을 것 같네요. 특정 임무를 받아,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 같다……. 정도로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20시 30분까지 연병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준비는 다 되어있으니 단독군장만 갖추고 오셔도 무방해요. 다른 질문이 없으시다면, 그 때 다시 뵙도록 하죠.”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하겠다. 겨울은 고개 한 번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깁슨이 찾아온 시점에서 겨울에게는 더 이상의 일과가 없었다. 작전과에서 빼주었기에, 바로 동맹을 찾아가 소식을 전한다.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워했다. 가장 걱정하는 건 두 명의 부장, 그 중에서도 민완기 쪽이었다. “좋지 않군요.” 중년의 학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을지라도, 작은 대장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눌러두기가 편했습니다. 종교라든지, 파벌이라든지……. 누구든 눈치를 보았으니까요. 다른 조직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솔직히 제법 민감한 시기인데…….” “어쩔 수 없어요. 명령인걸요.” 겨울은 흐르던 이야기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서 아무리 대단해지더라도, 세상이 반대로 흐르면 휩쓸릴 뿐이다. # 113 [113화] #에이프릴 벤전스, 반덴버그 공군기지 (2) 한 번은 심리치료사가 물었다. 네 「종말 이후」의 기록을 보니 너는 세상과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가만히 고민한 뒤에, 소년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듣고 보니 그러네요. 꿈을 꾸고 있나 봐요. 여기서. 지금, 겨울은 그 때 하지 않은 말을 되새겼다. ‘결국엔 세상을 미워하는 꿈이네요…….’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며. 그러나 재고해보면, 겨울 한 사람 증오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바뀔 리는 없지 않은가. 미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워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기에. 그래서 여기서는 꿈을 꾸었다. 한계를 넘어서는 꿈을. 한계를 넘어, 사람 이상의 사람이 되어, 사람이 싸울 수 없는 것과 싸우는 환상을 향유하고 있었다. 알고 즐기는 착각이 오래 즐겁지는 않았다. 이제는 하나의 이유로 살아갈 뿐이다. 놓지 못할 가시를 쥐고, 남아있는 마음이나마 지켜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깜박 깨어나는 겨울.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자신의 전투화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질문자인 깁슨 요원이 의아하게 보는 중. 겨울은 빠져있던 회상의 깊이에 놀랐다. 결코 잠든 것이 아니었는데도,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뇨, 별 것 아니에요. 지나간 사람이 떠올라서 그만.”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깁슨 요원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겨울은 그 속을 익숙하게 읽는다. 「간파」로 확인하고서도,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우우우웅- 좌석에서 유동감이 느껴진다. 바람을 닮은 진동이 등받이로 전해졌다. 흔들리는 수송기. 가벼운 난기류를 만난 모양이다. 겨울은 요원의 초조한 반응을 눈치 챘다. 목에 힘이 들어가 있고, 주먹을 꽉 쥐었다. 숙련된 수사관의 반응이기에 이채롭다. 겨울과 조안나 깁슨은 반덴버그 기지 행 수송기에 타고 있었다. 수송칸의 조명은 어둡다. 두 사람만을 위해 투입된 것이 아니기에, 폐쇄감이 느껴질 만큼의 화물이 실린 상태. 겨울이 자연스럽게 묻는다. “정보국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이유, 이제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아.” 요원의 반응은 신음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깨닫고, 당황하는 것 같다. 크흠, 큼.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여는 그녀. “그러고 보니 임무에 대한 설명이 아직이었군요. 이번 작전의 목표는 샌프란시스코 만 안쪽의 정보를 획득하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안보위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만이라면……해상난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작전인가요?” “맞아요. 정보국에서 중위님의 파견을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쪽에서 희망하는 전투원의 자격요건은 정확히 이렇습니다. 첫째,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 둘째, 돌발 상황에 대처할 판단력이 있을 것. 셋째,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 회화가 가능할 것. 넷째, 동양인 혈통에 속할 것.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미국 전체에서도 몇 명 없죠. 아니, 사실상 중위님이 유일하십니다.” 자격요건을 듣는 것만으로도 작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제가 유일하다고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요원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농담이 아닙니다. 특수부대 기준의 전투력과 외국어 회화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굉장히 드물어요. 하물며 중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CIA 요원 중에서 찾아도 얼마 안 나올 겁니다. 중국 지부가 사실상 사라져버렸으니까요.” 한 때 정보국 전체에서 아랍어 방언 능력자가 세 명 뿐이었던 건 유명한 일화지요. 라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작아진 건, 다시 흔들리는 수송기 탓이었다. “그럼 다른 걸 여쭤보죠. 대체 그 안보위협이라는 게 뭐죠?” 겨울이 아무리 자격을 갖추었어도, 특수작전 경험은 없다시피 하다. 군사교육 또한 일선에서의 약식에 불과했고. 또한 생사여부는 백악관의 관심사였다. 그런데도 투입을 결정했다면, 그 안보위협이라는 게 어지간히 중대하다는 의미. 잠깐의 망설임 뒤에, 요원이 하는 말. “핵입니다.” “…….” 겨울은 저널에서 보았던 각국의 군함들을 떠올렸다. 멸망한 모국을 떠나왔으나, 신대륙의 항만에서 고립된 군인들. 그 상황에서도 동포들을 지키겠다고 국가 없는 전쟁을 치르던 모습. ‘물론 그 뿐만은 아니겠지.’ 환경은 인성을 시험한다. 타락은 누구에게나 열린 가능성이었다. 바깥세상의 조건이 누구에게나 가혹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세계의 관객들이 공감 없는 쾌락만을 소망하는 것처럼. 요원이 부연한다. “정보국과 해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재 샌프란시스코 만 안쪽에는 다섯 척의 원자력 잠수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중 네 척의 위치는 파악되었어요. 언제든 격침시킬 수 있죠. 문제는 남은 한 척입니다.” 겨울이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도 결국은 미국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중 아닌가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쳐도 함부로 쓸 것 같지는 않은데요. 굶어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예요.” 핵잠수함은 오랫동안 보급 없는 작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미리 준비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대역병 모겔론스는 예기치 못한 재난이었다. 중국은 그 시발점이었고. 경계대상인 잠수함이 중국 해군 소속이라면, 제대로 된 준비가 가능했을 리 없다. 이것이 겨울의 추론이었다.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단 1%의 위협도 좌시할 수 없는 게 바로 국가안보입니다. 우리 수사국이 사상 최악의 테러를 경고했지만, 각처에서 무시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소년장교가 당연히 알 것처럼 이야기한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러나 시대가 다른 사건이었다. 지력보정으로 뜬 증강현실을 보고서야, 겨울은 그녀의 말뜻을 깨달았다. 쌍둥이 빌딩의 붕괴. 미국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그 사건. 교과서에서 본 적은 있다. 소년이 태어난 시대엔 이미 역사의 한 장이었으니. “하긴, 실패해서는 안 될 작전이 목전이네요.” 미국은 「명백한 해방」에 국운을 걸었다. 겨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요원. “우려를 가중시키는 건 만 안쪽에서 번지는 루머입니다.” “루머?” “네. 국내의 소문은 벌써 알고 계실 겁니다. 대역병은 사실 중국의 생화학 무기다……. 여기서 한 층 더 나아간 이야기가 해상난민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모겔론스가 미국의 생물병기라는 거죠. 중국을 몰락시키려고 사용했다가 통제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으음……. 그게 꽤 심각한 모양이네요.” “그렇습니다. 근거 없는 낭설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온 해상 난민들은 그 루머를 막무가내로 믿는 것 같더군요. 정보국은 핵잠수함 승조원들이 그런 광신에 경도되어 있을 것을 걱정하는 중입니다.” 잠시 검토한 뒤에, 겨울이 묻는다. “설마 정보국은 제가 그 핵잠수함의 위치를 찾아내길 바라는 건가요? 어떻게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만 안쪽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미국의 물자 지원으로 연명하는 중입니다. 잠수함 승조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중국 잠수함들은 일정 주기로 부상하여 중국 선적 선박들로부터 물자를 넘겨받습니다. 한겨울 중위님께서는 그 위치를 파악해주시면 됩니다.” 해상난민들은 미국의 물자보급과 원양어선들의 식량공급으로 연명하는 중이다. 그 물자를 군인들이 갈라 받고 있을 것이다. 시일이 흐른 만큼, 정해진 절차와 위치가 있을 것이고. 그 위치가 매번 같다면 이런 부탁을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일정한 약속에 따라 보급 장소를 바꾸는 것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어찌 알아낸단 말인가? 무인기로 해결될 문제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을. 겨울은 고개를 기울인다. “위치 파악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직접 잠입해서 알아내야 하나요?” “대부분은 감청이겠지만, 그렇군요. 잠입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한겨울 중위님이 워낙 알려져 있으셔서 걱정이긴 합니다만……정보국 요원들이 중위님의 위장을 도와드릴 겁니다. 그치들의 전문 분야니까요.” 겨울은 만 안쪽의 상황을 상상해본다. 망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제한된 물자를 공유하는 그림을. 권력이 총부리에서 나오는 만큼, 군인들이 지배력을 행사할 것은 당연했다. 민간인들은 최소한의 물자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자기 양심을 가장 먼저 뜯어먹는걸.’ 그런데도 잠수함이 주기적으로 부상해야 한다면, 필요한 조건은 하나다. 겨울의 질문. “물자 보급량을 의도적으로 줄였나요?” “그렇습니다. 물자가 충분할 경우, 몇 개월이라도 부상 없이 버틸 수 있는 게 원자력 잠수함인걸요. 위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깁슨 요원은 백악관과 국방부의 냉정한 전략을 인정했다. 난민들을 굶주리게 해서, 망국의 군대로 흘러들어갈 식량을 줄였다는 것. 대신 보급 주기도 함께 줄여, 물자가 떨어질 때마다 잠수함이 떠오르도록 만들었을 것이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날카로워지잖아요. 식량을 넉넉하게 줬으면 걱정을 덜지 않았을까요?”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것은 극단적인 환경이다. 겨울은 이 세계관에 앞서 예습한 역사를 떠올린다. 전간기의 독일이 풍요롭고 안정적이었다면, 히틀러 같은 사람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 세계관에서, 가장 필요한 자원은 탄약과 식량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식량생산량은 압도적이다. 세계 최강의 강대국은, 세계 최대의 농업 국가이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겨울의 의견은 곧바로 부정당했다. “보급을 줄이기는 쉬워도 늘리기는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본국의 항공수송역량은 한계에 달했고, 바다는 온통 해적으로 가득하니까요. 호위함 없이는 화물선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해적이라……. 그렇군요. 알 것 같네요.” “파나마 운하를 이용할 수 없는 지금, 배가 서해안으로 가려면 마젤란 해협이나 케이프 혼을 돌아야 합니다. 장장 2만 5천 킬로미터가 넘는 항로죠. 그 사이에 너무도 많은 해적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함대 말입니다.” 그녀는 잠수함과 구축함으로 전대를 이루고, 함포와 대함미사일을 발사하는 해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계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게도 있다. “해군은 동해안의 해상봉쇄를 유지하는 데에도 피로를 호소하고 있어요. 보급선 호위에 추가 투입할 전력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충분하지 않은 보급은, 부족한 정도를 떠나서 한결같은 불만을 만들어내게 마련이죠.” 마젤란 해협과 케이프 혼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이었다. 겨울은 북미 동부 해안으로부터 남미의 최남단을 지나 북미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항로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전력이 필요할지도. 겨울은 부분적으로 납득했다. 조안나 깁슨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녀도 결국은 개인이었다. 반론해봐야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도착했습니다. 반덴버그 기지로군요.” 주의를 환기하는 한 마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느껴진다. 작은 창을 통해, 겨울은 다가오는 지상을 엿보았다. 최소의 유도등을 밝힌 활주로. 바다가 가까운 공군기지였다. 포트 로버츠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짧은 대화로도 그 간격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여기서 화물선을 기다려야 한다. # 114 [114화] #에이프릴 벤전스, 코로나 트라이엄프 (3) 공군기지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화물선의 도착 예정시각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병력주둔지와 난민구역은 활주로의 남쪽과 동쪽에, 해안선은 활주로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간단하게 오갈 만큼 만만한 넓이가 아니다. 겨울의 시선이 지력보정 증강현실을 더듬는다. ‘여기 수용된 게 러시아와 중국 난민들이라고 했던가? 상황을 봐두고 싶었는데…….’ 이곳 반덴버그 기지는 약 10만 명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물선이 도착하기까지, 겨울과 깁슨 요원은 활주로 옆 관제시설에서 대기했다. 민간공항이 아니어서 그런지, 관제소는 넓고 펑퍼짐한 모양새였다. 곳곳에서 항공우주국(NASA)의 흔적이 발견된다. 일반적인 공군기지는 아니었다. 대기실엔 선객이 있었다. “한겨울 중위?” 겨울은 그에게 경례했다.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아지네. 라고 생각하면서. 상대는 기지 사령관 헤이든 스트릭랜드 준장이었다. 수척한 인상이 고목가지 같았다. “앉게.” 자리를 권하는 장군에게, FBI 수사관과 소년장교가 감사를 표했다. 뜨거운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장군 본인은 홍차에 브랜디를 섞어 마신다. 그리고 잔이 다 비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겨울조차 떨떠름할 정도의 어색함이 감돈다. 그런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건 장군의 과묵함과, 감정 없는 얼굴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준장의 무표정은 풀기 힘든 방정식이었다. 잔은 어색함의 속도로 비었다. 준장은 흠, 하더니 종이 한 장 펜 하나를 내민다. “싸인.” “……네?” “싸인 부탁하지.” 겨울은 고개를 기울이고, 무슨 서식인가 하고 들여다본다. 백지였다. 뒤집어본다. 백지였다. 아, 혹시 그건가?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겨울은 충분한 크기로 서명했다. 준장이 추가로 주문했다. “그 아래, 아름다운 브랜디 스트릭랜드에게……라고 적어주면 고맙겠군.” “그게 누군가요?” “내 딸.” 다시 한 번 아, 하고서, 시키는 대로 적어주는 겨울. 준장은 결과물을 갈무리했다. 구겨지지 않게 돌돌 말아서, 품에 조심스레 집어넣는다. 그 동작이 석고상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또 겨울을 가만히 보다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했다. “수고하게.” 그리고 다시 한 번 경례. 이게 끝이었다. 등 돌려 나가버린다. 몇 안 되는 참모진이 그 뒤를 따른다. 안내역의 공군 중위가 남아, 웃으며 하는 말. “두 분은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사령관께선 원래 말수가 좀 적은 편이십니다.” “사령관님의 출신지가 짐작이 가네요.”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깁슨 요원의 대꾸였다. 기왕 사람이 있으니, 기회를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겨울은 기지의 현황을 물었다. 인상 좋은 중위는 싹싹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겨울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의 발로. 물론 이럴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다. “이런, 연락이 들어오는군요.” 중위는 아쉬운 얼굴로 화물선의 도착을 알렸다. 먼 해상에서 새로운 태풍이 일어나는 중이라, 보트를 타고 가기엔 파도가 높다. 그래서 이동수단은 헬기로 정해졌다. 겨울과 조안나 깁슨이 나왔을 때, 파일럿은 이미 휠 브레이크를 풀고 엔진을 예열하는 중이었다. 바람결에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종은 산타 마리아 때와 동일. 동체가 작아 앙증맞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파일럿이 미소로 맞이했어도, FBI 수사관의 안색은 나빠진 그대로다. 하긴, 중형 수송기도 거북했는데 소형 헬기는 오죽할까. 그나마 밖으로 걸터앉는 식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과거 산타 마리아로 가는 비행에서, 다른 세계의 관객들도 줄기차게 비명 지르지 않았던가. ‘그 중에 한 명은…….’ 겨울은 불식간에 한숨을 내쉰다. 다시 올 필요 없다고 했던 게 잘 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헬기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깁슨 요원이 움츠러든다. 어쩔까. 겨울은 요원의 자존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고민했다. 수송기에서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던데. 때마침 돌풍이 불었다. 겨울은 요원의 팔을 붙잡는다. “힘들어 보이셔서.” “……면목 없습니다.” 창피스러움을 면하려는지, 요원은 과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추락 사고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사고라는 표현은 우습군요. 마약단속 중에 받은 공격이 원인이었으니까요.” 마약단속에다가 공격이라. 겨울이 묻는다. “상대는 멕시코 카르텔이었나요?” “네. 그때도 저는 현장 감독관이었습니다. 거점 근처에서 수색 비행을 하다가 중기관총 사격을 받았죠. 조정간이 제멋대로 노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 어떻게든 탈출은 했으나……보시다시피 아직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다른 요원을 파견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겨울은 세 가지 가능성을 검토했다. 첫째, 이런 문제를 만회할 정도로 깁슨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경우. 둘째, 봉쇄선 서쪽으로 오려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인 경우. 셋째, 위에서 그냥 생각이 없는 경우. ‘마지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의외로 삽질을 많이 하는 편인걸. 겨울은 이를 경험으로 알았다. 비록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세계관일지라도, 사실에 기초하는 만큼 사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이번 작전에 한하여 치명적인 실수가 없기를 바랄 뿐. 요원 본인에게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배려였다. 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바꾼다. “몇몇 카르텔이 도시에서 버티고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뉴스로 보도된 소식이었다. 마약 카르텔들이 일부 도시를 점유한 채 변종의 습격을 막아내고 있다고. 티후아나 카르텔, 멕시코 걸프 카르텔, 로스 제타스 등등. 미국은 이들에게 식량과 탄약을 지원하는 한편, 국경을 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런 소식이 자주 전해지진 않다보니, 겨울의 지식은 최신정보와 거리가 멀다. 기왕 정보기관 요원이 같이 있으니, 정보는 얻을 만큼 얻어두는 게 좋을 터. “중위님은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는 만큼이요.” “제가 애매한 질문을 했군요.” 요원은 경직된 미소를 짓고서, 이야기로 스스로의 긴장을 풀었다. “오래 전부터 군벌에 가까웠던 놈들입니다. 자금력으로든, 무장수준으로든, 조직력으로든 말이죠. 군경 출신을 많이 영입하는데, 그 중엔 심지어 우리 미국의 특수부대 출신까지 있었습니다. 돈에 매수된 애국자가 한 둘이 아니더군요.” 요원이 탄식했다. 지역 거점을 급습했는데, 대전차로켓과 대공미사일이 나오더라고. 그녀는 끔찍한 추락을 증언했으나, 기관총 사격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사일에 맞았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단일 조직이 여단 급의 전투원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조직이 여럿이고, 평소에도 각각의 근거지에서 지배력을 행사해왔죠.” “정말로 군벌이네요. 잘 버티는 게 이해가 가요.” “시가전 환경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쪽 도시들은 악몽 같은 미로입니다. 평소에 우리 수사국과 정보국 요원들, 그리고 멕시코 군경과 숱하게 전투를 치르며 지형 및 전술, 방어 전략을 숙지해온 놈들이니까요……. 제가 보기엔, 잔혹함이야말로 감염 경로 차단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무조건 죽였을 거라는 뜻. 요원이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범죄자들의 생태에 해박한 전문가의 얼굴이었다. 겉보기로 짐작되는 나이는 서른 중반. 연륜 이상의 수라장을 겪어온 모양이다. “그런 인간쓰레기들이라도, 변종들의 흐름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니……. 당장은 지원을 할 수밖에요. 놈들에게 의지하는 민간인들도 있고 말입니다.” 긴 말이 한숨으로 끝난다. 카르텔에 대한 증오가 묻어났다. 짧은 비행의 목적지가 다가왔다. 4만 톤은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선박. 유동하는 해면에서, 화물선은 유일한 정물이었다. 호위함의 항적도 나란했으나, 크기가 작다보니 파도를 타며 오르내린다. 뜻밖에 호위함은 필리핀 국기를 걸고 있었다. 화물선은 컨테이너선이 아닌지라 상갑판이 말끔했다. 주로 광물이나 식량 따위를 운송하는 종류(Bulk Carrier). 착륙에 어려움은 없겠다. 겨울은 현측의 선명을 읽었다. [CORONA TRIUMPH] 쿵. 가볍게 때리는 느낌의 착륙. 조종사는 엔진을 끄지 않았다. 겨울과 수사관이 내리자, 약지와 소지를 접은 손으로 겉멋 내는 경례를 하고서, 기수를 들어올린다. 선장과 일부 선원들, 그리고 낯선 제복의 장교 한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모두 아시아계다. “두 분, 어서 오십시오. 코로나 트라이엄프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람이 차가우니 일단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선장은 색다른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나온 이들 모두 알아듣는 기색이었고.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국가 출신인걸까? 그런 나라가 어디어디 있더라? 인도? 필리핀? 안으로 들어가는데, 곳곳에 영어와 일본어가 병기되어있다. 호위함은 필리핀 해군인데……. 갈수록 이상하다. 그러나 FBI 수사관은 태연했다. 다른 배를 탄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것은, 함교에 나있는 구멍들. 총탄과 기관포탄의 흔적이었다. 겨울이 응시하는 방향을 보고, 선장이 우울한 미소를 짓는다. “요즘 들어 바다가 무척 거칠더군요. 날씨도, 물결도, 사람들도 말입니다.” 이런 배에서 대화를 나눌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공격을 받았던 배라면. 응급수리로 구멍을 막은 식당에서, 선장과 장교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본 함을 책임지고 있는 로이 케이서스입니다. CIA로부터 두 분의 수송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어지는 장교의 인사. “반갑습니다. 필리핀 해군 프리깃 라몬 알카라즈의 연락장교, 소위 라이언 드 레온입니다.” 겨울과 수사관도 스스로의 이름을 알린다. 선장과 선원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장교로서, 레온 소위는 겨울을 각별히 반가워했다. 선장이 항해일정을 알린다. “본 함은 현재 시속 10노트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북진하는 중입니다. 별일 없다면 내일 오후 6시쯤 골든게이트의 안개 앞에 도달하겠지요. 그 때까진 여유 있게 쉬셔도 됩니다. 별 건 없습니다만,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최대의 편의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선실로 안내해드리죠.” 케이서스 선장은 도착 시간이 중요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긴, 보는 눈은 피해야겠지. 겨울은 그의 권유를 사양했다. “잠들기는 이른 시각인걸요.” 그러자 선장은 이렇게 요청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시대에 저희 같은 뱃사람들은 소식에 굶주리게 마련인지라…….” 수사관을 살피고, 그녀가 반대하지 않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이는 겨울. “누군 아니겠어요? 잘 됐네요. 저도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해선 안 될 말이 있다면 수사관이 알아서 잘라주겠지. 겨울은 그리 여겼다. # 115 [115화] #에이프릴 벤전스, 코로나 트라이엄프 (4)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자리였다. 뱃사람들의 위계질서일까? 이항사 이하로는 무척이나 과묵했다. 그리고 선장은 한숨을 자주 쉬었다. 그가 듣고 싶었던 소식들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 본토에 수용된 난민들의 생활상들. “우리는 그나마 사정이 낫군요. 굶주리진 않으니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익숙해진 절망과 외로움이 묻어난다. 코로나 트라이엄프는 일본 선적의 화물선이었다. 선주도 일본의 해운업체. 다만 운영은 필리핀 업체에 위탁한 형식이라, 선장과 선원이 모두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본디 석탄을 싣고 일본과 호주 사이를 오가던 배였다고. 지금은 소유권을 주장할 회사가 없다. 배는 이제 뱃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선장은 죽는 날까지 조국에 헌신할 작정이었다. 그는 말한다. 아마 앞으로 땅 밟을 일은 없겠지요, 라고. “인도네시아에 망명정부가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능하긴 매한가지입니다만, 그래도 난민이 된 국민들을 보호하겠다고 시늉은 하더군요.” 그러자 레온 소위가 쓴웃음을 짓는다. 입장이 입장이라 말은 못하고, 마음만 같은 모양. 인도네시아는 역병을 견디는 국가 중 하나였다. 겨울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감염은 기하급수적이다. 막대한 인구, 높은 밀도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는데. 시간을 벌어 강점으로 만든 모양이다. 레온 소위는 인도네시아의 초기 대응이 성공적이었다고 증언했다. “병력이 사백만입니다. 도시는 진지와 철창투성이로 변했고요. 거점 방어는 충분하지요. 문제는 물자, 그 중에서도 식량 부족입니다. 저희가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미국 정부의 정책엔 일관성이 있었다. 육지에서 난민들을 병력자원으로 쓰는 것처럼, 해상에서는 타국의 선박들을 끌어들였다. 식량은 그 대가로 내어주고. 도시가 철창으로 가득 차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역병이 번지기 전에도, 치안이 불안한 지역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장벽과 철조망을 두르며, 사설 경비업체가 치안을 담당한다. 혹은 주민들이 자경대를 조직하던가. ‘출입 제한 거주지(Gated community), 혹은 빗장을 지른 도시…….’ 근래의 TV에서는 요새화 공동체(Fortified community)라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일반 가정집조차도, 내부를 감옥처럼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군 주둔지 근처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겨울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험이다. 지난 회차들을 돌이켜볼 때, 그런 지역에서는 감염이 쉽게 확산되지 않았다. 빽- 빽- 비상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었다. 내선에 불이 들어온다. 선장이 당황하여 내선 전화를 받는다. 무슨 일이지? 케이서스 선장은 단답을 할뿐이라, 대화의 반쪽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겨울은 선장의 안색을 살폈다. 주름이 깊어진다. 선장 역시 수사관과 소년 장교를 힐끗거렸다. 통화를 마치는 선장에게, FBI 수사관이 질문한다. “무슨 일이죠? 돌발 사태인가요?” “돌발 사태라……. 어떤 의미로는 그렇습니다. 구조신호가 잡혔다는군요.” 일단 함교로 가시죠. 경우에 따라서는 두 분의 의견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케이서스는 조안나 깁슨과 겨울을 위해 앞장섰다. 조타실 입구는 필리핀 해군 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경례를 받으며 들어가자, 당직 근무 중이던 일항사가 선장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구조를 요청한 함선은 에이프릴 퍼시픽. 호주 선적의 13만 4천 톤 급 여객선입니다. 현재 서쪽 75km 해상에서 시속 8노트의 속도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하고 있으며, 이대로 간다면 약 2시간 40분 후에 1km 거리까지 근접하게 됩니다.” 전자 해도에는 해당 선박의 침로와 예상 진로가 떠있었다. 콘솔을 조작해 화면을 확대한 뒤, 샌프란시스코 방향까지 지도를 밀어올린 함장이 무겁게 신음했다. 마주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피하면 그만이니까. 허나 여객선이 조함 불가능한 상태라면, 만 안쪽으로 돌진해버릴 것이었다. 뉴스에서 조감한 샌프란시스코 만은 온갖 국가의 해상난민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울시의 몇 배나 되는 면적인데도 불구하고. 입구까지 밀려나온 배들은 충돌사고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8노트가 빠른 속도는 아닐지언정, 크루즈의 질량만큼은 어마어마하니까. ‘역대 최악의 해난사고가 될 지도.’ 소년은 참극을 예감했다. “다른 정보는 없나?” 연이은 선장의 질문에, 일항사가 또박또박 답변한다. “자동화된 구난 신호뿐입니다. 교신 시도에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원격으로 작동시킨 것 같습니다.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으음……. 수상한데. 왜 엔진을 끄지 않았을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선장. 함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우선 엔진을 끄는 게 원칙이었다. 겨울도 함께 생각한다. 그러지 못할 가능성은 셋. ‘단순한 실수이거나, 그럴 여유가 없었거나, 혹은 함교부터 전멸했거나.’ 뒤의 두 가지는 별로 좋지 않다. 선내감염, 선상반란, 해적의 습격. 있을 법한 경우마다 만만치 않았다. 상대가 변종이든 해적이든, 규모에 따라서는 겨울에게도 위험하다. 필리핀 해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제프리 소대만큼의 전투력은 절대로 안 나올 거야.’ 기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겨울이었다. 미군의 전투력은 탁월한 훈련과 값비싼 장비, 실전경험, 그리고 누구 한 사람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한편 함선 승조원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술자 집단이다. 그들의 전투력은 장비운용 숙련도에서 나온다. 영역이 완전히 달랐다. 기초적인 전투 훈련이야 되어있겠지만. 애초에 미지의 적과 교전을 치를 의욕이 있을지 부터가 문제였고. “미군에겐 알리셨습니까?” 연락장교 레온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항사. “네. 위성통신으로. 히긴스에서 수신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겠죠.” 겨울은 해도상의 이름을 읽었다. 히긴스는 미국의 구축함이었다. 호위함 라몬 알카라즈와 교신한 선장이 감속을 지시했다. “가까워져서 좋을 것 없지. 감속한 다음, 반응을 살펴봐야겠어. 8노트로 감속하게.” 일항사가 레버를 끌어내린다. 겨울은 미미한 속도변화를 감지했다. 깁슨 요원이 묻는다. “반응을 살핀다는 건 무슨 뜻이죠?” “경계하는 겁니다. 해적의 계획적인 접근일지도 모르니까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느낌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미 탈취한 대형선박을 미끼로 내세우고, 자신은 레이더의 사각지대에 숨어서 거리를 좁히는 방식이죠. 호위함을 기습해서 순식간에 끝내버리는 겁니다.” 레이더는 결국 반사되는 전파를 잡아내는 것이다. 즉, 이쪽을 어떻게든 먼저 발견하고 나면, 선장이 말한 것 같은 함정을 파는 게 가능하다. 전투함의 체급은 대양을 항해하는 민간선박에 비하면 대체로 작은 편이었고. 수긍하고 다시 묻는 조안나 깁슨. “직접 경험하신 건가요?” “경험이라고 해야 할 지……그런 식의 접근이 지금까지 두 차례 있었습니다만, 해안경비대로부터 사전에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눈 먼 포격에 두들겨 맞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요. 저게 첫 번째에 생긴 겁니다.” 그는 함교 전면의 깨진 유리를 가리켰다. 덕트 테이프로 어설프게 때워 놨다. 두께만으로 권총탄 쯤은 막게 생겼으나, 기관포탄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실내를 긁고 지나간 여섯 개의 탄흔이 있다. 겨울은 굵기를 가늠한다. 대략 20mm. 총과 포의 경계에 걸쳐진 사격이었다. 이번엔 겨울이 질문한다. “만약 반응이 없다면 진짜 구조신청일 가능성이 높은데……그 때는 어떻게 처리되죠?” 배후에 해적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것이다. 이쪽에 맞게 속도를 줄이든, 혹은 들통 났음을 깨닫고 도주를 하든. 제 정신이 아니라거나,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면 절망적인 공격을 시도할 지도 모르고. “보통은 방관으로 끝납니다. 난민들은 바다날씨처럼 변덕스럽지요. 난민과 강도가 더 이상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개념이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 올렸다가, 그 다음날 배를 점령당한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장은 우울한 표정과 비관적인 추측을 이어갔다. “단지 이번엔 그보다 더 나쁘게 돌아 갈까봐 걱정스럽군요.” 겨울은 그가 암시하는 바를 바로 알아듣는다. “격침시킬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저대로 두었다간 어디든 부딪힐 테니 말입니다. 낮은 확률이나마 미군이 손해를 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고……. 내부 상황은 완전히 미지인데다, 최악의 경우 배가 감염변종으로 바글거릴지도 모르잖습니까.” 내버려둔다면 만 단위로 죽는다. 격침시킨다면 천 단위로 죽는다. 최악을 대신하는 차악의 선택. 불가피한 조치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도, 집단에게도 한계가 있고, 세계 최강의 군대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FBI 조사관은 냉정했다. 적어도 표정만큼은. 그러나 목이 뻣뻣하게 굳어있다. ‘불편해하는구나. 헬기를 탔을 때보다도 더.’ 겨울은 그녀를 쉽게 읽었다. 한 박자 늦게 연동하는 「통찰」과 「간파」. 적어도 사람을 읽는 것만큼은, 시스템이 소년을 앞서기 어렵다. 관제인격의 소망 또한 여기에 있을 테고. 이건 흔들어볼 수 있겠는데. 일항사가 들어오는 통신을 접수했다. “속도를 추가로 줄이라는 통보입니다. 곧 공격기를 띄울 테니 오인공격에 주의하라는군요. 20분 안에 상공에 진입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종말에 부대끼는 사람들은 익숙해진 우울함을 담담하게 억눌렀다. 겨울은 그 얼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깥 세계에서도, 시대에 지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었기에. “깁슨 요원.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이시죠? 제게 그런 권한이 있을 리가…….” 수사국 요원은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겨울은 다시 설득한다. “권한을 떠나서 해보는 요청인 거죠. 공격기 대신 헬기를 보내줄 순 없겠느냐고 물어봐 주세요. 저 한 사람만이라도 에이프릴 퍼시픽에 올려달라고 말예요. 헬기는 구축함에도 있잖아요?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말도 안 됩니다! 저 배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모하시군요. 감독관으로서 허가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저쪽에서 받아들이지도 않겠지만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밑져야 본전 아닌가요? 나중에 마음도 편하겠고요.” 나는 시도했어. 그들이 거부했을 뿐이야. 그런 식의 자기합리화가 가능해질 거라고.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거라는 암시. 조안나가 입술을 씹는다. “중위, 저는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라도 비겁해질 기회를 주세요. 직접 교신해보겠습니다.” FBI 요원이 잠깐 머뭇거린다. 적극적인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양심으로 망설이는 틈을 타, 겨울은 이미 마이크를 붙잡았으니. 일항사는 쉽게 밀려났다. “아, 깁슨 요원. 제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를 숨겨야 하나요? 아니면 제 관등성명 정도는 밝혀도 무관한 건가요? 전부 비밀이면 곤란한데요.” “……원칙적으로는 모두 기밀이나, 여기서의 교신이 돌고 돌아 만 안쪽까지 흘러갈 가능성은 없겠지요. 저쪽도 영문을 모를 테니까요. 작전 내용만 발설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런데……정말로 하실 겁니까?” “네. 저는 이렇게 살고 싶거든요. 한계는 있겠지만.” 겨울은 차분하게 답한다. 그리고 재차 확인했다. “저쪽에서 제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관등성명을 말한다고 바로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예요.” 있는 것 같다. 다만 요원은 심각하게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민간인 수천 명의 죽음 앞에 냉정해질 순 없는 건가. 좋은 요원은 아닐지라도, 좋은 사람이긴 하네. 겨울은 기다리지 않고 USS 히긴스를 호출했다. # 116 [116화] #에이프릴 벤전스, 코로나 트라이엄프 (5) 거대한 배의 유동은 느리게 흔들리는 요람 같았다. 함교를 밀어대는 바람소리. 그리고 선체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눈을 감고 있으면, 등 아래에 바다를 깔고 있는 기분이었다. 불 꺼진 선실에 누워, 소년은 실패한 요청을 곱씹는다. 교섭은 잘 풀리지 않았다. USS 히긴스의 함장은 지휘계통을 벗어난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무시하지도 못했다. 명예훈장엔 계급과 소속을 넘어선 무게가 있었으므로. FBI 수사관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구축함 함장은 통신을 윗선으로 중계했다. 무전기 맞은편의 계급이 계속해서 올라갔다. 민간인들을 몰살시킨다는 죄책감. 그리고 최연소 명예훈장 수훈자에 대한 호기심. 특히 후자가 아니었다면, 항모전단 사령관과 대화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상황에서 소장과 일개 중위의 격차는 그만큼 크다. 소년장교의 명성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사령관 찰스 키치너 제독은, 피로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중위. 귀관이 무슨 일로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야. 그래도 거부할 수밖에 없겠군. 요즘 배들은 과적과 초과승선이 일상이거든. 만약 에이프릴 퍼시픽이 유령선이 되었다면, 적은 한 사람의 휴행탄수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일 가능성이 높아.] 겨울이 휴대하는 탄약은 단독군장으로 200발 남짓. 여분을 더하고 급탄 가방을 멘다면, 어떻게든 1천발까지 채울 수 있을지도. 제독은 여객선이 변종 소굴로 변했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자네가 한 발에 정확히 하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 뒤에 남을 수천을 어떻게 감당할 텐가? 그 가운데서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을 찾아다니겠다고? 대검 하나 들고서?] “네.” 겨울은 짧은 즉답으로 제독을 웃게 만들었다. [오, 이런. 내 귀관의 용기를 기억하지. 방송에서 나오는 게 어느 정도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허락할 수 없네. 한계를 넘어선 용기는 만용에 불과해.] “그렇다면 병력을 지원해주실 순 없으십니까?” 항공모함에 승선하는 인원만 5천 이상이다. 태반이 기술전문직으로서 직접적인 교전과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전투훈련은 받은 상태. 전단에 속한 각 함들로부터 병력을 차출할 수도 있다. 겨울의 판단은 이랬다. ‘전투원이 몇 백 수준이면 갑판 정도는 손실 없이 장악할 수 있겠지.’ 여객선의 이동경로는 제한적이다. 변종들은 집중된 화력 앞에 병목현상을 일으킬 것이었다. 처음으로 내릴 때는 헬기의 화력지원을 받으면 된다. 평범한 변종에게도 동물적인 지능이 있으니, 갑판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않게 될 터. 물론 선내로 진입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장애물이 많고 복잡한 환경. 사상자가 발생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겨울은 짐작했다. 제독이 망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가장 위험한 부분을 소년장교에게 맡길 수 있다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사실은 조금 달랐다. [한겨울 중위. 본 함에서 부여한 에이프릴 퍼시픽의 식별부호는 로미오 96일세.] 번호는 레이더 접촉 순서대로 부여하는 것이라고, 제독이 설명했다. 그러므로 제독의 기함은 이미 최소 아흔다섯 척의 선박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조난신호를 보내는 배가 마흔세 척이야. 그 가운데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도 힘들어……. 인도적인 지원과 구조작전에도 한계가 있네. 장기간 누적된 인명피해, 그리고 승조원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 가용병력이 위험할 정도로 줄어든 상태지. 본관은 지휘관으로서 부대의 전투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어. 내 말 이해하겠나?] “네.” [귀관은 좋은 군인이야. 내가 내린 결정에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대화하게 되어 즐거웠네. 그만 쉬게. 키치너 제독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해군 소장이 육군 중위에게 이만큼 이야기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의였다. 겨울은 그의 피로감을 이해했다. ‘이 시간에 제독이 응답한 것만 봐도 말이지.’ 밤이 깊었다. 당직사령이 제독을 대신하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최고지휘관의 책임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 함대의 피로도를 짐작할 만하다. 어지간해서는 민간 선박을 격침시키라고 하지도 않을 터. 겨울은 미련을 끊고 시간을 가속시켰다. 스스로 흘러가는 세계가 무의미한 밤을 단축시킬 것이다. 관제인격의 상황연산이 끝날 때까지는, 다른 세계의 관객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그러고 보면 의외로 조용했네.’ 자기 삶이 힘들고 고달파 남의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 소년이 실패를 곱씹는 사이, 그들은 그저 어둠 속에서 누워있었을 따름이다. 가끔씩 정돈된 상념이 「텔레타이프」로 문자화되어 전달되긴 했을지라도. 아, 그런가. 그들의 일상엔, 어둡고 조용한 시간마저 부족한 건가. 겨울은 자신의 추리를 스스로 긍정했다. 불행한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겨울의 한계 바깥에 있었다. 삐- 시간 가속이 깨졌다. 눈을 뜬 겨울이 바로 시계를 확인한다. 고작 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왜지? 이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별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삐, 삐, 삐. 전자음이 반복되는 건 불이 들어온 선실 내선 탓이었다. 겨울은 의아해 하며 받았다. 들려오는 케이서스 선장의 목소리. [아, 중위님. 지금 바로 올라와주시겠습니까? 에이프릴 퍼시픽 건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겨울은 베개 아래 깔아둔 권총과 이불 밑의 소총을 챙기고, 단독군장을 갖춘 채 함교로 뛰었다. “무슨 일이죠?” “아, 뛰어오실 필요까진 없었는데……. 일단 받아보시죠. 칼 빈슨에서 중위님을 찾는 통신입니다.” USS 칼 빈슨은 키치너 제독의 기함이었다. 겨울은 수신기를 들기 전 전자해도를 살폈다. 에이프릴 퍼시픽을 나타내는 기호가 여전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벌써 격침되었어야 정상이지만. “네. 중위 한겨울입니다.” [음, 중위.] 상대는 역시 제독. 아까보다 무거운 피로감이 묻어난다.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느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한참 뜸을 들인 뒤에, 제독은 에이프릴 퍼시픽이 아직도 떠 있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파일럿이 명령을 거부했네. 아무래도 근접비행으로 살펴본 모양이야. 생존자들이 있다던가. 골치 아픈 일이지……. 이렇게 되었으니, 공격기를 새로 띄우기도 어렵고.] 탑승객이 보일 만큼 가까운 저공비행? 제트기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 속도를 감안하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수준일 것을. 고개를 기울였던 겨울은, 미군에게 정지비행이 가능한 공격기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엔진을 수직으로 꺾어 제자리 이착륙을 해내는 기종. 공격기를 새로 띄우기 어렵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까 제독은 승조원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언급했었다. 입단속을 시키더라도, 결국은 퍼질 이야기. 민간인을 오폭으로 죽여도 정신적인 충격이 남는다. 알고 죽이는 건 그 이상일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의 결심은 변함없는가?] “물론입니다.” [여전히 빠른 대답이군. 병력지원이 없어도 괜찮단 말이지?] “네.” 다짐 받듯이 묻는 제독에게, 계속해서 즉답을 돌려주는 겨울. 마침내 제독이 허락했다. [좋아. 전투 병력을 파견하긴 어렵지만, 헬기 한 대는 지속적으로 띄워두겠네. 최소한 갑판에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거야. 생존자들을 최대한 구조해보도록.] “알겠습니다.” [자네가 탈 기체는 히긴스에서 보내줄 걸세. 소요시간은……음, 그래. 30분이면 된다고 하는군. 병력 외에 필요한 게 있다면 알려주게. 탄약이나 화기 종류 말이야.] 옆에서 깁슨 요원이 작게 알려준다. 이 배엔 식량 말고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작전을 위한 보급물자가 실려 있노라고. 겨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제독에게 문제없다고 보고했다. [그런가.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켜보도록 하지. 행운을 비네.] 제독과의 두 번째 대화가 끝났다. 겨울은 갑판에서 헬기를 기다렸다. 처음보다 거칠어진 바람. 기상이변은 겨울에게 새삼스럽지 않다. 생전의 세계는 이 세계관의 배경이 된 시대보다 더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무장은 그대로. 단지 탄약 휴대량을 늘렸다. 배낭에도 탄창과 폭발물을 채웠고. 기다리는 중에, 완전 무장한 수사관이 나란히 섰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할 텐데요.” 겨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관은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거칠게 나부꼈다. 그녀는 묵직한 샷건으로 무장했다. 샌 아르도 유전을 점령할 때 유라가 사용했던 물건. 자동사격이 가능하다. 그녀가 단호하게 하는 말. “실력으로야 중위님께 비할 바 아닙니다만, 저 역시 비정규전의 베테랑입니다. 멕시코 카르텔과의 전투는 대개 시가지와 실내, 지하터널, 숲 속의 아지트 같은 곳에서 벌어졌으니까요. 대테러 훈련도 받았고요. 보직을 변경한 뒤로는 전투가 드물었으나, 한 중위님을 보조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지금은 소속이 어디신데요?” “대량살상무기 관리부입니다.” “아.” 확실히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 투입될만한 자원이었다. 갑판을 순찰하는 필리핀 초병들이 멀찍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들끼리 무언가 속닥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선들. 깁슨 요원이 한숨을 쉰다. “라몬 알 카라즈에서는 지원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저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아쉽습니다.” 당연하겠지. 이 먼 바다에 와서 외국에 부역하는 군인들이 왜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미군조차 나서기 어려워하는 마당에. 겨울은 다른 것을 묻는다. “샷건으로 괜찮을까요?” “저도 고민해봤습니다. 중위님과 탄을 공유할 수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같은 탄약을 쓰는 무기를 고르면, 한 사람이 부족할 때 나머지를 받아 쓸 수 있다. 전술적인 유용성. 그러나 그녀는 그 점을 이미 검토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게 익숙한 무기를 쓰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무기의 조합도 중요하겠고요. 해외에서는 북미와 다른 변종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소총보다 강한 근접화력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지역에 따라 새로운 변종이라……. 이는 이전까지의 세계관에서 없었던 사실이다. “다른 변종의 예를 들자면요?” 겨울의 질문에, 수사관이 미간을 좁힌다. “이쪽 정보는 기밀로 통제되는 경우가 많은지라……. 제가 아는 거라면 중국에서 발견된 탄저균 내성 변종과 겨자가스 생성 변종 정도입니다. 생화학무기 사용을 자제하는 이유라더군요. 도시 내 생존자 집단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생화학탄을 투사할 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게 보통이라고. 겨울이 새로운 정보를 숙고하는 사이, 바람결에 묵직한 엔진 소리가 뒤섞인다. 어둠 속 불 밝힌 갑판에 헬기가 내려왔다. # 117 [117화] #에이프릴 벤전스, 코로나 트라이엄프 (6) 미루고 미룬 결정. 겨울은 기술에 투자했다. 전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래봐야 예전 같은 효율을 거둘 순 없었다. 높은 등급일수록, 익혔던 횟수가 적기 때문에. 이로써 생존계열의 강화는 훗날로 미뤄졌다. 누적된 자원을 아껴두었던 이유. ‘전투력이 아무리 강해도 유행병 한 번 돌면 위험할 텐데.’ 그럴 리야 없겠지만, 겨울은 혹여 「명백한 해방」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싶었다. 언젠가의 종료된 세계관에서는 살이 썩는 병에 걸린 적이 있다. 사람 아닌 것이 사람 잡으며 배회하는 「종말 이후」인지라, 해당 질병은 곧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여유가 없었다. 부족하고 때늦은 「질병저항」은 추가적인 진행을 막아주었을 뿐. [연돌 위의 민간인들을 확인했다.] 파일럿이 보낸 무전. 헬기가 크루즈 위를 선회하면서, 겨울도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기관부의 배기가 이루어지는 연돌 구조물 위에, 소수의 생존자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중이었다. 높고 위태로운 자리. 어떻게 올라갔을까. 연돌 아래에 배회하는 변종들 중엔 어딘가 부러진 것들이 많았다. 등반에 실패한 사람들일 것이었다. 저토록 잘 보이는 곳에 있으니 공격기가 임무를 포기할 수밖에. 층을 이루는 갑판엔 적잖은 변종들이 보였다. 손닿지 않음을 아는지, 헬기를 보고도 아우성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고개를 꺾으며, 조용히 올려다보고만 있다. 그 반응만으로도 호주에서 온 병원체가 미주(美州)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파일럿이 사격을 막는다. [아직 쏘지 마라. 적이 너무 많다. 기다리면 좋은 위치를 잡아주겠다.] 두 명의 사수가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그들은 동체 측면에 거치된 지원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한 쪽은 중기관총, 다른 한 쪽은 미니 건이다. 후자가 분당 4천 발을 쏜다. 여섯 개의 총열이 회전하며 과열을 피하는 무기였다. 우선 한 바퀴 돌아보기를 제안하는 파일럿. 내부 구조를 전혀 모르니, 적어도 바깥에서 볼 만큼 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실에 갇힌 생존자들이 창문에 달라붙는다. 조종간을 붙잡은 준위는 원숙한 기량을 발휘했다. 헬기가 거의 수면까지 하강한 것.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갑판 외의 진입로가 있는지 살핀다. 가까이에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이, 마치 숫제 배를 타고 있는 기분이다. 파도가 부서질 때 기내로 물이 튀는 지경이었다. [탑승구가 개방되어 있습니다만……. 들어가긴 어렵겠군요.] 아쉬워하는 파일럿. 그의 말처럼 선체 측면 낮은 높이에 다섯 개나 되는 문이 열린 채였다. 부두에 배를 댔을 때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용도의 출입구들. 혹은 비상구들. 필사적인 사람들이 열었겠지. 뛰어내린 뒤엔 어떻게 되었을까.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어간다. 그러나 피를 씻어내긴 역부족이었다. 복도는 유혈이 낭자하다. 싸구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던 인간 닮은 것들. 엔진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돌아본다. 문 열린 곳까지 나와, 위태로운 바람을 맞으며, 헬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기색. “산 사람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감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나봅니다.” 뻣뻣한 목소리는 FBI 수사관의 것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변종은 아직 피부가 썩지 않았다. 면역반응이 살을 할퀴기도 전인 것이다. 갑판에 있던 것들도 매한가지. 겨울은 수사관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성인은 그렇다 쳐도, 아이가 너무 많아.’ 그녀의 무기는 샷건이었다. 표적을 산탄으로 찢어발기는 무기. 어린아이들이 퍽퍽 부서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진 않을까? 아무리 감염변종이라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위님?] 파일럿이 겨울의 의사를 묻는다. 어디로 들어갈지 결정하라는 뜻. “최상층 갑판으로 가죠. 레이더 마스트 주위부터 치워주세요.” [알겠습니다. 사격위치로 이동하겠습니다.] 좌우의 사수들이 화기를 점검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행동이었다. 레이더 마스트는 연돌을 제외하면 배에서 가장 높은 위치였다. 호화여객선답게, 마스트 주위엔 파라솔과 야외 레스토랑이 깔려있다. 지금 차려진 음식은 인육이지만. 어쩌다 테이블에서 죽었나. 남자의 시체 하나가 뜯어 먹히는 중이다. 말끔한 옷에 피칠갑을 해가며 포식하던 것들이, 식사를 멈추고 멀거니 올려다본다. 위이이잉. 전기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Guns, Guns, Guns.” 세 마디 반복으로 사격을 알리고, 트리거를 누르는 미니 건 사수. 부우우욱-! 광선이 뿌려졌다. 막대한 탄막. 점이 아니라 면을 쏘는 무기였고, 갑판을 순식간에 갈아버린다. 역병의 숙주들이 사정없이 부서졌다. 박살난 머리, 팔, 다리, 가슴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였다. 깨져버린 조명 아래, 갑판에 튀는 피는 까만 어둠이 뿌려지는 것 같았다. “…….” 소리가 되지 않은 신음. 수사관의 시선은 못박혀있다. 미니 건 사격을 지켜보던 중기관총 사수는, 수사관을 힐끗 보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겨울은 그 입모양을 읽는다. m-a-g-g-o-t. 애송이. 지나친 평가다. 저 광경을 보고 동요하지 않는 게 비정상인 것이다. ‘그래, 나 말이지.’ 겨울은 비로소 기분이 가라앉는다. 한 때 소년에게 필요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던 세계가, 이제는 관성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얼씨구, 저건 뭐야.” 모터 회전이 느려지는 소리. 그리고 사수의 놀라움이 겨울을 일깨운다. 탄막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놈이 하나 있었다. 기괴한 생김새. 체구는 건장하고, 피부엔 하얀 반점 같은 것들이 빼곡하다. 피를 흘리는 걸 보면 몇 발 맞은 것 같긴 한데……. 설마 특수변종? 겨울이 주목한 상태에서, 입매를 굳힌 사수가 그놈을 조준한다. 부우우욱-! 넓은 면적에 뿌리던 지금까지와 달리, 한 곳으로 집중되는 사격. 모래가 바람에 씻겨나가는 것 같다. 놈이 부서지는 풍경이었다. 쫓아다니는 수백 발에 맞아, 위력에 밀리고 또 굴러다니며, 실시간으로 부서진다. 그 단단함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캐에에에엑! 최후의 순간, 단말마를 내지르는 괴물. [음? 이런, 다른 갑판들이 싹 비었군요. 놈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파일럿의 낭패스러운 알림. 인간의 화력투사를 목격한 것들이 선내로 숨어들었다. 겨울도 눈치 채고 있었고. 지능이 있는 만큼 당연한 노릇이다. 다만 그 빠르기가 예상을 상회했다. ‘저 정도의 조직성이면…….’ 트릭스터나 구울,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 일반 변종들에게 통제력을 발휘할 상위개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사불란한 움직임. 적은 여전히 미지 속에 있었다. 진한 죽음과 정적이 물씬한 갑판. 하강한 헬기가 한 순간 갑판에 닿는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내려서는 겨울과 수사관. 헬기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상승한다. 파일럿이 응원을 남겼다. [저희는 일단 연돌에 있는 사람들부터 구출한 뒤, 위에서 지켜보겠습니다. 급해지면 언제든 올라오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비행공포의 경직이 풀리기도 전에, 수사관의 발이 미끄러진다. “윽!” 밟은 것은 쓸개였다. 피와 기름으로 흥건한 갑판에, 찢어진 인체가 눈길 닿는 모든 곳에 가득하다. 겨울 스스로도 누군가의 대장을 밟은 상태이고. 지지직 하고, 차있던 대변이 삐져나온다. 악취가 더해지진 않았다. 이미 지독했으므로. “괜찮으세요?”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배. 그리고 미끄러운 바닥. 스스로 일어나려다간 어느 손이건 피로 적실 판이었다. 수사관이 이 악물고 겨울의 손을 잡는다. 발을 조금씩 끌며 나아간다. 겨울은 특이변종의 시체로 다가갔다. 집중 사격에 너절해진 몸뚱이. 무지막지한 연사로 밀어서 죽인 덕분에, 찢어진 몸은 십 미터 넘게 펼쳐져 있었다.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겨울이 대검을 뽑았다. 틱. 정체불명의 반점을 찌르자, 단단한 것끼리 부딪히는 소리. 수사관이 미간을 좁힌다. “이건……뼈로군요.” 그랬다. 피부를 가득 메운 하얀 반점들은, 사실 살 아래 얕고 넓게 들어간 뼈 조직이었다. 뼈 아래 다시 뼈가 있다. 사이사이에 살이 있어도, 겹쳐진 뼈들이 결국은 빈틈없이 막는다. 사실상의 외골격이다. 근육의 두께는 단련된 운동선수 이상이었고. 겉보기엔 지방질 많고 부패한 돼지고기처럼 보인다. “이런 놈이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도, 곤란하게 됐군요. 개인화기로는 잡기가 쉽지 않겠어요.” 인간을 초월한 근육 위에서 견뎌주는 뼈의 밀도는 대단히 높았다. 수사관의 말처럼, 어지간한 소화기는 무시하고 달려들 괴물이었다. 산탄 연사로도 확실한 처리를 장담할 순 없다. 호주엔 이런 놈들이 있는 걸까? 이것들이 상륙한다면, 미주의 변종들에게도 새로운 유형이 전달되는 방식인가? 약점은 있었다. 겨울은 사체의 큰 조각들을 모아보았다. “적어도 관절부까지 보호하진 못하네요. 당연하겠죠. 그러면 움직일 수가 없을 테니.” 그리고 목을 붙잡아 확 비틀어본다. 우드득, 하고 어긋나는 목뼈. 감염돌기가 돋은 새까만 혀가 이빨 밖으로 흘러나온다. 목 역시 좌우상하의 운동 때문에, 덮고 있는 골조직이 치밀하지 않았다. 눌러보면, 부위에 따라서는, 연골처럼 물렁한 느낌이 든다. “그건 한 중위님에게나 의미 있을 약점입니다만…….” 설레설레 고개를 흔드는 수사관. 하지만 긴장은 있을지언정,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변종보다 비행이 더 두려운 여인이었다. 시체를 놓고 일어서는 겨울에게, 깁슨 요원이 하는 말. “가시죠. 제가 여섯시를 맡겠습니다.” 열두시는 전방. 여섯시는 후방. 즉 등 뒤를 맡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넓은 방위를 능숙하게 경계했다. 겨울은 한 층 내려가는 길을 찾는다. 호화 크루즈의 상갑판은 개방된 다층구조로 이루어졌다. 야외 레스토랑에서 다음 갑판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 층계를 쓰거나, 미끄럼틀을 타거나. 원통형 미끄럼틀은 바로 아래 갑판의 수영장으로 떨어진다. 밤중에도 선명한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알록달록하다. 그 구멍 안쪽에 감염된 소년이 있었다. 그에에에엑. 눈이 마주치자 움츠러든다. 경계하는 동작이겠지만, 체구가 작아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인다. 공감이란 참 제멋대로이기도 하지. 내가 느끼는 상대는, 사실 상대의 본질과 무관하다. 겨울은 단발로 쏘았다. 퍽! 머리가 홱 젖혀지며, 미끄럼틀에 후두둑 뿌려지는 핏빛 뇌수. 노랗게 칠해진 바탕이라 더욱 도드라진다. 시체는 원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살피면, 이미 붉은 수영장에 시체 하나 더해졌을 따름이다. 이 시점에서 헬기는 연돌에 접근한다. 역시나 파일럿의 기량은 훌륭했다. 배의 속도에 맞춰 등속으로 움직이는데, 가속과 감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염여부 확실히 확인하고 구조하는 과정을 주시한 뒤, 겨울은 층계를 두 번 내려갔다. 망 보던 놈 둘을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사살한다. 사용한 탄은 단 한 발이었다. 꾸륵. 꾸르륵. 단발사격이 관통한 두 개의 목 줄기. 변종들은 입으로 피를 꾸역꾸역 뱉으면서도 몸부림치듯이 다가온다. 겨울은 가만히 기다렸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오는 것들을, 걷어차서 밀어낸다. 마침내는 호흡곤란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때까지. ‘탄을 아껴야 하니까.’ 여객선이 샌프란시스코에 도달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운이 좋다면 이 배의 핵심 파트를 장악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타고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 118 [118화] #에이프릴 벤전스 (7) 11층 갑판엔 선내 체육관이 있었다. 들어오는 통로는 셋. 10층 갑판으로 이어지는 층계가 하나, 선체 내부로 들어가는 복도가 둘이다. 폭이 좁다. 제한된 화력으로 다수를 맞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잘만 하면 변종의 사체로 복도를 막아버리는 것도 가능할 터. 겨울은 이미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땐 오히려 장애물이었지만.’ 군데군데 살아있는 시체의 벽을 넘어, 처음으로 조우한 트릭스터를 쫓을 때의 이야기. 체육관에서 좀 더 들어가면 마사지 룸과 피트니스 룸이 존재했다. 마사지 룸의 출입구는 하나. 피트니스 룸은 마사지 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선실엔 아직 전원이 공급되는 중이다. 그리고 피트니스 룸에는 대형 오디오가 있었다. [과연 잘 될까요?] 배고픈 것들을 유인해 가두자는 겨울의 계획에, FBI 수사관의 의문을 제기한다. [변종들의 지능은 예전보다 많이 증가했습니다. 노이즈 메이커에 이끌리는 변종집단의 규모가 나날이 감소하는 게 그 증거죠. 과연 단순 소음만으로 얼마나 유인할 수 있을지…….] 노이즈 메이커. 국방부가 오염지역 수천개소에 설치한 소음 발생장치. 처음엔 가동할 때마다 변종들이 몰려왔었다. 지금은 다르다. 노이즈 메이커의 소음 패턴을 학습한 변종들은, 더 이상 무리지어 휩쓸리지 않았다. 가끔은 파괴되기도 한다. 필요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어쨌든 작전부대의 소음을 지워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한 번 해볼 가치는 있을 거예요. 되면 좋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네요. 규모 미상의 적이 숨어있는 마당에, 내부 구조도 모르고, 무작정 수색하자니 부담스럽잖아요. 위험은 최대한 예방해야죠. 그쪽은 어때요? 아직 조용한가요?” [네. 저야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요. 중위님이 걱정입니다.] 그녀는 보일러실에 들어가 있었다. 엔진에 동력을 공급하는 보일러가 아니라, 사우나용 증기를 발생시키는 용도였다. 이것이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복도마다 하나씩 존재한다. 겨울이 성공적으로 변종집단을 유인하면, 그녀는 즉시 나와서 복도 측 방화격벽을 끌어내릴 것이다. 적을 보다 확실하게 가두기 위하여. “그럼 시작합니다.” 무전을 넣은 뒤, 오디오에 스위치를 넣는 겨울. 음악을 선택해야겠는데……. 어째서 클래식이 있지? 겨울은 갸우뚱 했다. 요가와 에어로빅을 위한 타이틀 사이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아무래도 테스트용 곡인 모양. 마침 잘 되었다. 유인이 끝나고서도 계속 흘러나오면 그 나름대로 골치 아픈데. 교향곡이라면 충분히 길고, 한 곡으로 재생이 끝날 테니 최선이었다. 최대볼륨으로 재생시킨다. 콰콰콰콰-앙! 콰콰콰콰-앙! 무지막지한 음량. 재생해놓고 겨울 스스로 놀란다. 소리에 얻어맞는 기분이다. 재빨리 뛰어서 탈의실에 숨는다. 문틈 아래로 지나가는 놈들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바닥에 귀를 대고 발소리를 기다릴 겸 하여. 발소리는 겹쳐서 울려왔다. 거리로 미루어 같은 층도 있었고, 아래층도 있었다. 숫자는 기대 이하였다. 호주의 변종들도 역할분담은 끝난 모양. 지금 찾아온 것들은 각 소집단의 정찰병들일 것이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몇 차례 흔들린다. 들어간 뒤엔 조용하다. 저것들이 특유의 소리를 지르게 해야 한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외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새로운 숙주가 있다고. 감염시켜야 한다고. 수색꾼들의 하울링 없이는, 나머지 무리가 모이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기다려보았으나, 추가로 오는 기척이 없다. ‘그러고 보면 피트니스 룸엔 거울이 많았지?’ 이것들이 거울을 인지할 수 있을까? 동물적인 지능이라고 해도, 그 수준은 천차만별. 겨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라는 개와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이 배의 변종들은 아직 피부가 썩지 않았다. 즉 갓 태어난 야생동물과 같다. 가능성이 있겠다. 겨울이 신중하게 문을 밀었다. 호화 여객선답게, 잘 관리된 경첩에서는 낡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복도는 비어있다. 증가한 「무브먼트」 보정으로 소리 없이 움직인 소년은, 벽에 등을 대고 마사지 룸을 살핀다. 기웃거리는 변종이 하나. 나머지는 피트니스 룸까지 들어갔다. 배후에서 다가가, 머리를 비틀었다. 우드득! 턱과 뒤통수를 잡고 단숨에 돌려 죽인다. 놈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만 눈만 굴려 겨울을 발견한다. 검은 혀가 기어 나왔다.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이제 겨울은 멀리서 거울을 마주본다. 키에에에엑! 변종 셋이 거울에 달라붙었다. 탕탕! 주먹으로 쳐서 금이 가게 만들었다. 역시나, 거울의 개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 겨울은 미련 없이 등 돌려 뛰었다. 쫓아갈 수 없는 세상으로 멀어지는 소년이 안타까운지, 거울을 두드려 박살내는 소리가 들린다. 유인이 너무 잘 되어서 문제였다. 수색꾼이 복도를 역주행하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엄청난 숫자와 질량이 몰려들었다. 당초의 예상을 한참 웃도는 규모. 피트니스 룸과 마사지 룸을 채웠을 때 격벽으로 차단할 셈이었건만, 밖으로 넘쳐 복도를 메워버렸다. [중위님,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쪽 통로는 차단하셨습니까?] “아뇨, 잠깐 대기하세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제가 갇혀버렸네요.” [네?!] 경악하는 FBI 수사관. [괜찮으십니까?!] “당장은요.” [나올 방법은 있으십니까?] “음, 글쎄요. 두 가지 방법이 있겠네요. 녀석들이 흩어질 때까지 여기서 농성하거나, 혹은 어떻게든 강행돌파로 나가거나.” 양쪽 모두 위험한 선택이다. 전자의 경우, 변종들이 그냥 흩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집단을 이룬 짐승들은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법. 주변을 뒤지기 시작한다면, 고립된 상태에서의 방어전이 불가피하다. 살아남더라도 대량의 탄약을 소모하게 될 것이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었고. 단지 겨울이 기대하는 것은, 제한된 공간에서 변종들이 서로에게 방해가 될 가능성이다. ‘그거 하나 믿고 나가기는 어렵겠지만.’ 수사관 또한 부정적이었다.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유인하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위험할 테니까.” 이 정도 숫자면 붙었을 때 겨울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승선 직전 전투력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강해져봐야 한계는 명백하다. 제한된 환경에서 압도적인 수에 짓눌리면 무의미한 법이었다. 전투기술 하나라도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면 또 모르겠다. 요란하게 헤집고 다니는 소리. 겨울은 문을 조용히 밀어, 좁은 틈을 엿보았다. 잠깐이었다. 문을 닫고 한숨을 쉰다. 개처럼 냄새를 맡는 것이 있었다. 후각이 발달한 개체인가? 여기까지 찾아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발견되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이 때 다시 들어오는 한 줄기의 무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사관은 보일러를 폭파시키겠다고 했다. [압력을 최대로 높인 다음, 관과 벽에 폭약을 붙여 터트리겠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보일러라면 증기가 복도 전체에 깔릴 겁니다. 연막 대신 쓸 수 있겠죠. 증기 폭발이니 화재 위험도 적겠고요. 중위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겨울도 연막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가지고 있는 연막탄이 부족했을 뿐. 연막탄 두 개로 커버하기엔 공간이 지나치게 넓다. 대형 사우나에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실패하더라도 주의는 끌 수 있겠지. “좋아요. 해보죠. 얼마나 걸릴까요?” 압력을 높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터. 이를 묻는 질문에, 요원은 답을 흐렸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관은 다뤄본 적 없는지라……. 어떻게든 조작법은 알아냈습니다만.] “알았어요. 기다리겠습니다.” [연막이 생기면 나올 자신은 있으십니까?] “그건 제게 맡기세요.” […….] 깁슨 요원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 덜컹, 쾅! 어딘가의 문짝이 박살나는 소리 같다. 변종들은 집요하게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꾼이 헛것을 보았을 가능성 따위, 짐승의 지능으로 더듬기는 너무 먼 상상력이었다. 겪지 않은 실패를 상상하며 좌절하는 건 인간의 전유물이었고. 쿵, 쿵, 쿵!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다가온다. 깁슨 요원의 연락은 아직이다. 하기야 대형 시설이니, 한계 압력에 도달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쿵, 쿵, 쿵. 그것은 마치 교향곡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싸움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 겨울이 무장을 점검했다. 발 디딜 틈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한 번의 기능고장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연막이 터질 때 까지는 버텨야겠지. 하다못해 공간만 충분하더라도 좀 나을 텐데. 마침내 킁킁거리는 소리가 등 뒤로 바싹 붙었다. 문에 기대어 앉은 겨울에게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자세를 바꾼 겨울이 총구를 문에 가져다 댔다. 톡. 일부러 부딪혀 가벼운 소리를 낸다. 확신을 얻기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소리를. 톡톡. 그리고 속으로 헤아린다. 셋, 둘, 하나. 탕! 총성이 실내에 메아리친다. 뒤이어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둔탁한 진동. 냄새 맡던 놈의 머리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여기, 귀를 가져다 대라고 두드렸던 것이니까. 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어두운 방, 흔들리는 문. 어릴 때의 기억을 강제로 끌어내는 상황. 그때도 겨울은 방 안에 있었다. 괴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놓고서. 만취한 아버지는 괴물이었다. 인간 아닌 소리를 질렀고, 인간 아닌 행동을 했었다. 나는 참 익숙한 세계를 찾아온 것 같아. 여기서는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은 아닌 것과 싸울 수 있다.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겨울은 그것이 좋았다. 아니, 좋아했었다. 잠긴 문을 두고 그 너머를 쏘는 겨울. 탕, 탕, 탕! 문 앞에 시체를 쌓는 것이 목적이었다. 안쪽으로 열리는 문이니 나갈 길이 막히지는 않으리라. 죽은 것들의 벽을 무너트려야 하겠지만. 문틈으로 죽은 피가 끈적하게 흘러들었다. 콰직! 총구멍이 난 자리를 부수며 들어오는 손. 손등에 하얀 반점이 박혀있다. 반사적으로 쏘았으나, 뼈에는 금이 갔을 뿐. 더러운 손이 문 안쪽을 더듬는다. 손잡이 부근에 가기 전에, 겨울이 칼을 꽂았다. 얼룩무늬 사이의 틈, 뼈 대신 근육이 차있는 균열을. 캬아아아악! 손이 못 박힌 특수변종의 비명. 겨울은 소리가 가장 선명한 방향을 겨냥하여 탄창 하나를 비운다. 외골격 가진 놈을 잡을 수 있다면 결코 낭비가 아닐 터. 연속사격으로 부서진 구멍. 문 너머의 변종과 시선이 마주친다. 성한 눈은 하나 뿐. 그르르르. 괴물은 피 끓는 목으로 으르렁거린다. 겨울이 무기를 교체했다. 권총이 불을 뿜기 직전, 괴물은 휙 낮아졌다. 그리고 쿵! 문이 요동친다. 경첩이 삐그덕거릴 정도의 힘. 겨울은 문을 발로 밀면서, 사격을 지속한다. 베토벤은 여전히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119 [119화] #에이프릴 벤전스 (8) 경첩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불길한 쇳소리. 남은 것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충격이 올 때마다 날카롭게 삐걱거린다. 헐거워진 나사가 머리를 내밀었다. 스스로 기어 나왔다. 위기구나……. 폭파는 아직인가? 고민하던 소년은 가까이에 배전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감. 돌아보면, 탈의실은 밀폐된 공간이다. 가능할까? 쿠웅! 바르르 떨리는 문을 두고 조심스레 물러나는 겨울. 잠깐은 버텨주겠지. 배전함은 잠겨있었다. 권총 사격으로 자물쇠를 박살낸다. 그리고 함을 열어 실내의 모든 전원을 차단했다. 암전하는 폐쇄 공간. 탈의실이다 보니 창문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환풍기도 멈췄을 거야.’ 겨울은 야시경을 쓰고, 한 손에 연막탄을 쥐었다. 핀은 이미 뽑은 상태. 언제든 놓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너무 빨라도 곤란하다. 병들고 굶주린 것들이 멋모르고 밀려들어와야 한다. 이 공간을 가득 채워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어야 했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실내로 튀는 나뭇조각들. 문이 크게 뒤틀려, 위아래로 벌어져 있었다. 오직 손잡이와 그 부근의 잠금장치만이 버티고 있을 뿐. 이쯤이면 되겠구나. 겨울이 줄지어 선 캐비닛 안쪽으로 연막탄을 던졌다. 두 호흡 뒤, 탁 하고 뿜어지기 시작하는 녹색의 연막. 뒤이어 쾅! 마침내 문이 부서지는 소리. 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범람한 시체들이 와르르 밀려들어왔다. 빛과 죽음이 동시에 쏟아진다. 질량에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깔리는 것들. 겨울은 놈들을 유인했다. 안쪽으로, 다시 안쪽으로. 캐비닛 사이의 통로는 이미 짙은 연막으로 가려졌다. 애초에 빛조차 희미했으므로 겨울 자신도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야시경을 올리고 방독면을 착용했다. 양쪽을 더듬어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콰당탕 쿵쾅. 캐비닛은 칸막이를 겸한다. 건너편에서도 변종들이 요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른 쪽으로 들어온 것들이 배후로부터 덮쳐올 상황. 연막 속에서, 겨울은 캐비닛을 타고 올라갔다. 소리 없이, 단숨에. 쫓아온 것이 겨울 있던 자리를 통과했다. 계속해서 들어간다. 배를 깔고 엎드린 겨울은, 캐비닛의 거친 진동을 느낀다. 양쪽으로 지나가는 것들의 충돌이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놈들의 거친 호흡이 느껴진다. 켈룩! 크웨에엑! 앞장서서 지나간 것들의 괴로운 기침소리. 무기 아닌 것도 때로는 무기가 되는 법. 연막이란, 목적이 어찌되었든, 결국 무언가를 태워서 만드는 연기다. 밀폐공간에서 쓴다면 호흡곤란을 유발할 수 있었다. 겨울은 엎드린 채 가만히 기다렸다. 점점 더 많아지는, 병든 것들의 기침소리를 들으면서. ‘산소 부족은 내게도 위험한데…….’ 좁은 공간에서 지나치게 많은 놈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방독면은 해로운 성분을 걸러낼 뿐, 부족한 산소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산소는 얼마나 빨리 없어지지? 감을 잡기 어렵다. 변종들의 질식까지 걸리는 시간이 관건이겠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곤란했다. 방독면과 야시경을 동시에 쓰긴 어렵다. 야시경을 쓰더라도 연막에 가려지겠지만. 겨울은 포복으로 전진했다. 소리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기침 소리가 들끓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숨이 부족한 놈들은 경고를 보내지도 못한다. 비교적 멀쩡한 놈도 후각은 마비되었을 것이다. 겨울이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내리는 발에 산 것이 밟힌다. 뒤엉킨 채 고통에 겨운 것들이었다. 끄억. 끄억. 끄어어억. 소리에 물기가 짙다. 무전이 들어왔다. [한 중위님, 현재 상태는 어떻습니까?] 골전도 리시버인지라 소리가 새진 않았다. 그러나 응답하긴 곤란하다. 목소리를 내는 대신, 마이크를 두드리는 겨울. 의미는 없을지언정 명백히 인위적인 리듬이었다. 단순 잡음과 혼동하긴 어려우리라. [말씀이 어려운 상황이신가보군요……. 보일러가 곧 폭발합니다. 앞으로 1분 37초. 동쪽 통로는 차단했습니다. 계획 변경이 필요하다면 세 번을, 아니라면 다섯 번을 두드려주십시오.] 우드득. 서로 숨결 닿을 거리에서 마주친 변종의 목을 돌려놓고, 겨울은 수사관에게 그대로 진행하라고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10층으로 가는 계단에서 뵙겠습니다.] 폭발을 기다리는 시간. 구석진 어둠은 신음하는 구덩이였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는 무엇 하나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청각과 촉각에 의지하여, 겨울은 가까이 있는,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죽였다. 장님의 싸움이 이런 식일까? 콰앙! 폭음은 생각보다 작게 들렸다. 그것은 교향악에 끼어드는 불협화음이었다. 잠시 후, 훅 밀려오는 열기. 가뜩이나 꽉 차있던 실내였다. 변종의 체온이 인간보다 높은 탓도 있어서,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낮은 자세로 연막과 어둠을 더듬어 나가던 도중, 겨울은 특이한 촉감을 감지했다. 장갑을 끼고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차이. 보통의 변종과는 다른 피부였다. 단단한 질감이 느껴진다. 특수변종. 보통보다 강하다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게 아니다. 대사량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한 법. 귀를 기울여보면, 시끄러운 주변으로부터 확실하게 구분되는 거친 신음소리가 있다. 어차피 그냥 둬도 죽을 것이었다. 아니면 대사를 억제하거나. 후자라고 해도, 깨어나고 나면 이미 갇혀있을 것이다. 방화격벽을 힘으로 돌파할 순 없을 테니까. 벌써 중독 상태일지도 모르고. 무시하고 지나간다. 기진맥진한 것들이 깔린 바닥이라, 중심을 잡기가 조심스럽다. 입구는 반쯤 막혀있었다. 그래도 바깥 놈들의 주의가 폭음에 이끌려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가기가 상당히 고역이었을 터. 드디어 복도다. 개방된 공간. 그러나 탁 트인 느낌은 오직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통해 느껴질 뿐. 시야는 암흑에서 백색의 뿌연 빛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직선구간에 도달한 겨울이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짙은 수증기 속에서 시계(視界)는 고작 1~2미터 남짓.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소년에게 변종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빠악! 턱을 치는 주먹에 이가 바스러지는 변종이 하나. 정면을 가로막는 놈에겐 온 몸으로 충돌한다. 체중에 더해진 완전무장의 무게. 여기에 타격을 집중시키는 수준 높은 기술. 부딪힌 변종은 일방적으로 튕겨졌다. 겨울 입장에서도 반사 신경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달리는 속도는 곧 변종이 튀어나오는 속도였다. 조건이 열악하여 감각보정조차 짧았다. 보이는 즉시 대응해야 한다. 칠 것인가, 밀 것인가, 스쳐 지나갈 것인가. 맞고 쓰러진 놈의 괴성은 때가 늦다. 겨울은 이미 속도가 붙어있었고, 증기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사냥감을 놓친 변종이 포효했다. 호출을 듣고 몰려드는 무수한 발소리들, 줄어드는 거리감. 겨울이 자세를 낮춰 몸을 굴렸다. 구르는 소년과 변종 무리가 순식간에 엇갈린다. 소년에게 걸려 넘어지는 것들도 있었다. 팔꿈치로 목을 찍어 죽인다. 목 위로 쳐서, 경추가 내려앉을 정도의 힘으로. 가는 길목에 변종들의 밀도가 높아졌다. 증기 속에서 놈들은 벽처럼 나타났다. 재빨리 방향을 꺾어도 마찬가지. 겨울을 발견한 변종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나아갈 틈이 없다. 덮쳐오는 것을 넘어뜨리며 수류탄의 핀을 뽑아 굴린다. 그리곤 가까운 변종의 멱살을 잡아, 굴린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소년과 마주보게 된 변종의 두 눈이 확장됐다. 창백한 낯빛의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입을 쩍 벌려 소년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퍼엉! 수증기가 충격파에 요동쳤다. 떼로 서있던 놈들이 여파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방패를 때린 폭압을 버티지 못했다. 뒤로 넘어진다. 찌잉- 잠시 소리 멀어진 귀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 겨울과 포개어진 방패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옆으로 굴려서 치워버린다. 복도 끝에 도달한 겨울이 벽을 더듬는다. 분명 이 근처였는데. 격벽 차단 레버가……. “끼에에엑!” 겨울은 변종의 머리를 레버에 처박았다. 콰득. 레버 손잡이가 괴물의 낯짝을 파고들었다. 그 상태로 확 끌어내린다. 레버가 꺾이며 다시 한 번 처박히는 괴물의 머리. 변종은 안면이 함몰되고도 벽을 밀어대며 벗어나려 애쓴다. 겨울은 그 힘에 거스르지 않았다. 제 힘을 더하여, 지나온 복도 쪽으로 던져버렸다. 안개 저편에서 와르르 엉키고 무너지는 기척들. 그러고도 튀어나오는 놈을 걷어찬다. 배를 차고, 구부러지는 얼굴을 무릎으로 쳐올리고, 튀어 오르는 머리를 팔꿈치로 내리쳤다. 그 후 즉각 한 탄창의 제압사격을 뿌린다. 격벽이 벌써 절반이나 내려왔다. 겨울이 그 아래로 몸을 던졌다. 구르다가 무릎으로 제동을 걸어, 관성으로 상체를 세운다. 소총을 비틀어 빈 탄창을 날려 보내고, 새 탄창을 삽입하기까지가 숨 가쁜 절반의 호흡. 투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타탕! 증기를 뚫고 나온 변종들이 연달아 쓰러진다. 그 중 하나, 죽은 머리가 격벽 아래에 끼었다. 퍼억, 퍽. 겨울은 단단한 전투화로 걷어찼다. 찰 때마다 뼈에 금이 가고, 머리가 변형되어 격벽이 내려앉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개골이 깨졌다. 격벽이 남은 살점과 뼛조각들을 뭉갰다. 겨울의 발치에 으스러진 머리 절반이 남았다. 격벽에 막혀, 이쪽으로는 수증기가 더 이상 번지지 않는다. 시야가 빠르게 개선되고 있었다. 폭음에 가까운 총성이 들려온다. 수사관이 교전중인가? 층계 방향으로 달려간 겨울은, 실시간으로 찢어지는 변종들을 목격했다.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철퇴와 같은 샷 건이었다. 수사관은 장애물 뒤에 도사렸고, 넘어오는 것들에게 서른 발의 산탄을 뿌렸다. 크게 도약한 변종이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진다. 쏟아지는 내장은 덤이었다. ‘도와줄 것도 없네.’ 스스로 비정규전의 베테랑이라더니,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준과 화력분배가 완벽에 가깝다. 한 놈이 세 발 이상을 맞은 경우가 없었다. 애초에 샷 건은 교전거리가 짧은 화기. 그녀는 분명 익숙한 무기를 골랐다고 했었다. 어지간한 배짱으론 어림없는 일이다. 7킬로그램이 넘는 화기를 날렵하게 다루는 완력도 대단하고. 철컥. 돌아오는 총구 앞에서, 겨울이 손을 들었다. “진정하세요. 접니다.” “……무사하셨군요. 몹시 걱정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깁슨 요원. 내쉬는 한숨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더니 잠깐 엄호해줄 것을 요구한다. 겨울은 그녀가 들어가 있는 카운터 옆에서 주요 진입경로를 경계했다. 그 사이, 여성 수사관은 총에서 탄창을 벗겼다. 일반적인 탄창이 아니었다. 산탄 서른두 발을 한꺼번에 장전하기 위해, 형태는 두껍고 납작한 드럼 모양이었다. 겨울이 쓰는 소총 탄창이라면 몇 매쯤 버려도 무방하지만, 깁슨 요원의 드럼 탄창은 부피가 커서 많은 수를 들고 다니기 어렵다. 그러니 탄을 채울 수 있을 때 채워야 한다. “대체 거기서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군장에서 쏟아낸 탄을 한 발씩 끼워 넣으며 수사관이 묻는 말. 겨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탈의실에서는 연막탄으로 질식을 유도하고, 복도에서는 그냥 달렸다고. “동시에 교전하는 적의 수가 중요한 거니까요.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저것들이 무슨 수로 저를 보고 모여들겠어요? 오히려 속도가 느릴수록 위험하다고 생각했죠.” 수사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발상은 가능해도 엄두는 못 내겠군요. 연막탄 쪽은 훌륭한 임기응변이었고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실 것 같습니다.” 삽탄을 끝낸 수사관은 총의 장전손잡이를 당긴다. 빈 약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여분의 탄 한 발을 넣고서, 그제야 탄창을 꽂는다. 그리고 겨울에게 묻는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뜻 봐도 객실의 수가 천 개는 넘는 것 같군요.” 그러면서 가리키는 것이 선박의 내부구조도였다. 카운터 안쪽 정면에 걸려있었다. 각 갑판의 평면도를 검토하더니, 수사관은 겨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선은 함교를 확보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건 바다 위의 호텔 같은 배고, 함교가 관리인실을 겸할 테니……내선(內線)으로 각 객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CCTV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설령 아니더라도, 최소한 배를 정지시키거나 속도를 낮춰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괜찮은 의견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 120 [120화] #에이프릴 벤전스 (9) 함교까지는 두 층을 더 내려가야 한다. 층계는 두꺼운 바리케이드로 막혀있었다. 온갖 자재를 가져다 쌓았으나, 결코 허술하진 않았다. 수사관이 소년장교에게 여길 보라고 손짓한다. 철사로 묶고 못을 박아 고정시켜 놨다. 층계를 꽉 채울 정도로 두터워, 해체에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벽면에서는 총탄 자국들이 발견되었다. 겨울은 손가락으로 짚어보고, 깊이와 구경을 가늠한다. 본격적인 자동화기의 흔적이었다. 주변에 뿌려진 시체들은 수십 구에 달했고, 처참한 모습이었다. 심하게 뜯어 먹혔다. 피쉬이이. 항문에서 부패한 가스가 새고, 피부에선 구더기가 바글거린다. 수사관이 시체를 뒤집는다. 까맣게 변색된 눈가. 입에서 검은 진액이 흘러나왔다. 전신의 피부가 엉망으로 얼룩져있다. 인상을 찌푸리고 손등으로 코를 가린 채, 깁슨 요원은 대검으로 시체를 찔렀다. 찔꺽, 찔꺽. 째고 긁어내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새까만 파리들이 떼 지어 날아다닌다. 여기 저기 들러붙어, FBI 요원에게는 귀찮을 정도의 방해였다. 겨울이 휘휘 쫓아주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묻는다. “뭘 찾으시는 거죠?” “잠시만……. 이겁니다.” 그녀의 칼끝에 걸려나온 것은, 끈적하게 젖어있는 작은 쇳조각. 깨진 총탄이다. 그녀는 나머지 파편들을 쉽게 찾아냈다. 이어 칼을 카펫에 대충 닦아낸 다음,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만져본다. 온도를 느끼려는 것 같았다. 이제 여성 수사관은 전문가로서의 견해를 밝힌다. “변종들은 피부가 썩지 않았죠. 예외는 없었습니다. 각 개체의 감염에 시차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급격히 확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이 시체는 체내 온도나 시반이 생긴 정도로 보아 최소 사후 8시간 이상 경과했습니다. 이 바리케이드도 이상하죠. 감염이 빠르게 번졌다면 이렇게 견고히 만들 여유는 없었을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만.” 암시하는 바가 명백하다. 이 배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투쟁이 벌어졌다는 것. 감염 폭발은 그 와중에 일어난 재난이었을 테고. 그녀가 다시 조곤조곤 하는 말. “군대 수준으로 무장한 자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겁니다. 바리케이드가 필요할 지경이었다면 싸움의 규모는 상당했겠죠. 일방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뜻이고요.” 겨울이 수긍했다. “사람을 상대로 싸울 각오를 해둬야겠네요.”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일이 갈수록 골치 아파지네요.” 무겁게 한숨을 쉬는 수사관. 소년장교에게 살며시 눈을 흘긴다. 사실상 한 사람의 고집으로 시작된 구조작업이었으므로. 소년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 현장 요원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자제력이었다. 불평은 무의미하다. 의견 제시만이 있을 뿐. 수사관은 아직 철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른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바리케이드 건너편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까요.” “엘리베이터는 어떨까요?” 얌전히 타고 가자는 제안이 아니었다. 다른 층계를 찾자면 여객선 중앙까지 가야 한다. 그 전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으나, 구조도를 보면 선체 중심의 그랜드 뷔페로 이어지는 경로였다. 사방으로 노출되어 극히 위험하다. ‘변종집단이 숨어있기 좋은 장소야.’ 아타스카데로 주립 병원에서도, 변종들은 장소를 골라 매복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공격은 결국 숙주를 늘리려는 것이다. 숫자로 압도하는 건 피해를 줄이는 유효한 전략이었고. 여기엔 넓고 개방된 공간이 필수적이다. “괜찮겠군요. 이동하죠.” 수사관이 동의했다. 겨울이 먼저 나간다. 그 뒤를 수사관이 밟았다. 발소리는 한 사람 것만 들린다. 천재의 영역을 넘어 초인의 영역에 갓 들어선 수준으로, 사실상 겨울의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는 자원 소모가 지나치게 심각하다. ‘본래는 하나의 기술에 매진해도 부족한 세계관이니까…….’ 같은 세계관을 스물일곱 번이나 되풀이하는 겨울이 특이한 것이다.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세계에서, 반복되는 실패를 인내하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관제인격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겨울은 이따금씩 주먹을 들어올렸다. 수사관이 경계하는 사이, 겨울은 객실을 탐색했다. 혹시 모를 단서를 찾으려는 것. 그러나 여섯 객실을 뒤지는 동안 발견한 건 목이 매달린 시체뿐이었다. 변종들은 먹기 편한 높이부터 뜯어먹었다.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뼈만 남아있다. 복도가 넓어졌다. 양측에 객실을 두고, 중심에 여섯 개의 엘리베이터가 존재했다. 승강기는 하나같이 5층에 멈춰있다. “모두 비상정지 상태군요. 5층 갑판에 뭐가 있었죠?” 수사관이 묻는 말에, 겨울은 도면을 회상한다. 지력보정의 도움이 컸다. “대극장, 아트리움, 카지노, 두 개의 댄스 클럽, 카페, 레스토랑과 다섯 개의 바(Bar)…….” 하나 같이 향락에 관련된 시설들. 호화 크루즈에서 그렇지 않은 시설이 또 어디 있겠느냐만, 5층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였다. ‘선박 중심에 아트리움을 만든다는 것부터가…….’ 아트리움은 하늘이 열린 공간이다. 폐쇄된 선내에서 그에 필적하는 개방감을 주려면, 필요한 여백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크루즈에서도 가장 사치스러운 공간낭비일 수밖에. 고개를 갸우뚱 하는 깁슨 요원. “잘 모르겠군요. 무언가 의미는 있겠지만, 단서가 없어요.” 그리고 중얼거린다. 거기 생존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고. “일단 문을 열겠습니다.” 겨울이 문틈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강화된 전투력 덕에,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FBI 요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밀어본다. 그리고 조금 더 의아해진 눈빛으로 소년장교를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낭비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건 간단하지만, 그 상태에서는 한 중위님이라도 문을 열기 힘드실 테니까요.” 그녀는 겨울이 수색했던 객실로 들어가더니, 완강기를 챙겨서 돌아온다. 겨울은 권총을 뽑아 그녀의 어깨 너머에 세 발을 쏘았다. 퍽, 퍼억, 퍽! 잠겨있던 객실.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나온 것들의 머리가 연속으로 깨진다. 요원은 멈칫 했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할 일에 매진한다. 완강기에 약간의 손질을 가해서, 하강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 됐습니다. 내려가세요. 지키고 있겠습니다.” 겨울이 밧줄에 의지해 내려간다. 수직 통로엔 작업용 조명조차 드물었다. 다만 발아래 까마득한 곳에 승강기가 있을 뿐. 끼우우웅- 힘으로 여는 문이 금속성의 비명을 지른다. 문 너머는 새까만 어둠이었다. 야시경을 쓰고 보아도, 보이는 게 없다. 마지막으로 일회용 적외선 조명을 꺾어 던져본다. 농밀한 어둠에 비해 가볍게 느껴지는 녹색의 광원. 기나긴 복도를 다 밝히기엔 역부족이다. ‘정말 아무 것도 없나?’ 변종이 있다면 소리를 들었을 법 한데. 수사관에게 내려와도 좋다는 무전을 보내고, 마침내 발을 딛는 겨울. 완강기를 벗어던진 뒤 주위를 경계한다. 공기는 썩어있었다. 금세 내려온 수사관이 헛구역질을 할 만큼. 겨울이 권했다. “방독면 쓰세요.” “아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금방 적응될 겁니다.” “무리하실 필요는 없는데……. 한 사람이면 충분해요.” 충분하다는 것은 후각을 통한 경계였다. 감염변종을 상대할 땐 냄새도 중요한 단서다. 비록 피부가 썩지는 않았을지언정, 변종의 체취는 시체 썩는 악취와 확실하게 다르다. 대사가 인간보다 훨씬 더 활발하기에, 땀 흘리고 씻지 않는 인간쯤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조금 달랐겠지만.’ 변종은 기본적으로 감염시킨 숙주의 특성을 계승한다. 기능적 변이는 그 이후의 이야기. 그러므로 배경을 한국으로 잡았을 때, 후각은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다. 의미 없진 않을지라도. 그러면서 하는 생각. 이 세계관에서 거기까지 갈 일은 없겠지. 겨울과 수사관은 죽음이 만연한 복도를 걸었다. 질병이 아닌, 인간의 악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적외선 조명을 벽에 가져다대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검게 보이는 아홉 글자. 복수(Vengeance). 야시경을 썼으므로 색감은 없었다. 그러나 겨울은 이 글자가 피로 쓰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통들 때문이었다. 수사관이 탄식했다. “이런 짓을 벌인 미치광이들이 이미 죽었으면 좋겠군요. 대체 무슨 원한이 있었기에 고문까지 했던 걸까요…….” 그녀의 말대로, 목 없는 시체들은 벌거벗겨진 상태였다. 극심한 학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심한 경우, 포를 떠서 죽인 것도 있었다. 벗겨낸 살들이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다. “글쎄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엔 한계가 없잖아요.” 자기 경험을 말하는 겨울.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한계가 있지만, 겨울이 겪은 바로, 유일하게 한계 없는 감정이 바로 미움이었다. ‘흔히들 사랑도 끝이 없다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런 감정이 있기는 한 걸까? 장미만큼은 예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겨울에겐,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그저 믿고 싶은 마음에 생겨난 착각일 수도 있었으므로. 기대는 실망을 낳는다. 생전의 삶에서, 소년은 가지고 싶은 것, 가지고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가져야 하는 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겨울은 상념을 끊었다. 자꾸만 과거에 잠기는 것, 낫지 않은 상처의 딱지를 떼는 습관. 나쁜 버릇이다. 나아가는 복도, 백 미터에 이르는 회랑은 끝까지 잔혹함의 전시장이었다. 참수와 총살의 현장들. 그리고 격렬한 전투의 흔적. 함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대리석 식탁이 세워져있다. 총탄 자국이 가득했다. 그 너머엔, 빈손으로 썩어가는 군인의 시체가 있다. 그럼 무기는 어디로 갔을까. 마침내 도착한 함교. 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이곳 또한 어두웠으나, 각 단말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최악을 예상하던 수사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낯선 시스템이지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속도부터 낮춰야겠습니다.” “배도 조종할 줄 아세요?” “네. 마약 단속 중에는 별 일이 다 일어나거든요. 싸움을 벌이는 장소도 다양하죠. 육지와 바다, 하늘에 이르기까지……. 비행기나 선박의 기본적인 조종기술은 배워두는 편입니다. 모든 요원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격은 아닙니다만.” 낡은 세계도 꽤나 극적이었구나. 그녀가 쌓아왔을 위험한 경력, 그리고 그 토대를 제공했을 과거의 기록들은, 겨울에게 제법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전까지의 세계관에선 연방수사국이나 중앙정보국과 이렇게 깊이 연관된 적이 없었기에. 가벼운 관성이 느껴진다. 배가 감속을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0-1-0도로 변침하겠습니다. 적어도 태풍은 피해야 하니까요.” 깁슨 요원은 조종간을 좌로 꺾는다. 불가피한 일이었으나, 이제 선내의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 함교를 장악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함교에서는 전체 선실의 내선과 연결할 수 있었다. 다만 천 번이 넘는 반복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 시도하기 전에, 함교 문을 봉쇄한 겨울과 수사관은 CCTV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내선 연결에 필요한 작업량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은 예의 그 5층 갑판. ‘여기도 정상은 아니네.’ 이곳 8층 갑판처럼 전원이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트리움을 물들인 핏빛이 여과 없이 비쳐진다. 카지노의 시체들은 헐벗고 있었다. 바에서는 변종들이 웅크리고 앉아, 아무 행동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잠깐, 방금 화면은 대극장인가요?” 수사관이 콘솔을 조작했다. 대극장을 스쳐갔던 화면이, 다시 한 번 극장 내부를 잡아준다. 여기서도 수많은 변종이 활보하고 다녔다. 그러나 겨울의 시선은 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다. 어째서인지 끊어진 밧줄투성이인데, 유독 한 개체의 변종이 묶여있었다. ‘목줄?’ 그 뿐만이 아니다. 변종은 여성이었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과 완전히 달랐다. 면역거부반응이 심각할 정도로 드러난 모습. 밧줄 감긴 부위는 살이 아예 벗겨졌다. 줄의 반대편 끝은 말뚝으로 고정되었고.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수사관이 극장의 풍경을 과거로 되감는다. 겨울은 복수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 121 [121화] #에이프릴 벤전스 (10) FBI 요원은 무전기 건너편을 위압하는 중이다. 구축함 히긴스를 거쳐 항공모함으로 연결된 통신. 연돌에서 구조된 생존자들은 거기까지 가있었다. 호화 여객선의 추악한 지난날은 이미 영상으로 확인했다. 여성 수사관이 생존자로부터 뽑아내려는 건, 보다 구체적인 진술,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에 대한 정보였다. 하다못해 생존자 집단의 구성과 성향만 알아내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장 세력과의 마찰이 항상 교전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니까. “좋아요, 요리사. 그럼 이제 당신이 취급하던 재료에 대해 말해 봐요.” 조안나 깁슨의 감정 없는 음성. 그러나 표정은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다. [저기……. 정말, 정말로 제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겁니다?] 스스로 에이프릴 퍼시픽의 프렙 쿡(Prep Cook : 하급 요리사)이라 밝힌 남자는, 본디 그랜드 갤리(주방)에서 육류를 취급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간 백정이었다는 말인데…….’ 대극장을 시작으로, 겨울은 수사관과 함께 여객선의 지난 수개월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 중엔 요리를 빙자한 살육의 기록도 있었다. 하급 요리사로서 밑 재료를 준비했다면, 그것은 즉 사람을 고기로 만드는 역할이었다는 뜻. “글쎄요. 당신 하기 나름이죠. 지금처럼 쓸 데 없는 말로 시간을 끌면……내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거든요.” 범죄자와의 협상에선 여유를 주면 안 된다. 미끼는 사법거래였다. [아, 알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리사가 진술한다. 에이프릴 퍼시픽이 호주 본토를 떠난 것은 작년 여름의 일이었다고. [원래 있던 식자재는 두 달 만에 바닥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회항을 두려워했습니다. 호주 정부를 믿을 수 없었거든요. 총독님이 그러셨죠. 바다 위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식량부족. 그는 인간을 해체하게 된 당위성부터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선 식량부족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요원이 그 점을 지적한다. “총독? 호주 총독이 이 배에 타고 있었다고요?” 이 대화를 들은 겨울 역시 고개를 갸우뚱 한다. 영연방 국가에 영국 여왕의 대리인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호주 총독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부를 두고 여기까지 올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실권 없는 명예직이라도…….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분은……아니, 그 사람은 태평양 공화국의 총독입니다.] “내가 알아듣게 말해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으로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요리사의 횡설수설. 주어와 목적어가 자주 생략되고, 요리사 스스로도 곧잘 고쳐 대는 중언부언들. 깁슨 요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리한다. “그러니까 태평양 공화국의 영토는 에이프릴 퍼시픽이고, 총독이라는 사람이 자칭 국가원수라는 말인가요?” [자칭이 아닙니다. 총독님께선 공개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셨……아니, 선출되었습니다.] 고립된 사람들은 이상해진다. 호화 크루즈가 닫혀있던 기간은, 집단광기가 숙성되기에 충분할 만큼 길었다. 식량부족을 식인으로 해결하자는 선동가가 지지를 받을 정도로. [수확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습니다.] 수확? 요리사가 사용한 단어에 수사관이 욕설을 중얼거린다. Fuck. 발신 버튼에서 제때 손을 떼었으므로, 취조 대상은 듣지 못한다. 다만 침묵이 길어지면 불안해할 터.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가 끊기는 것은 좋지 않다. 시간을 절약해야 한다. 수사관이 물었다. “그렇게 자주 수확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고기(Long pork)는 그 이상 신선하게 보관하기 어렵습니다.] 롱 포크. 기다란 돼지고기. 이 단어는, 사람을 긴 돼지(Long pig)라고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다. 유럽에서도 식인을 합리화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극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이 상품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건만. “……계속하세요.” 다시 한 번 엿 같다고 중얼거리는 수사관. 면책을 요구한걸 보아, 요리사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술에서는 죄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뎌져있다. ‘그렇겠지. 자기합리화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경험이었을 테니까.’ 소년은 사람의 나약함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합리화는 자기보호의 장치였다. 죄책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 자식을 파는 부모의 합리화를 보았으므로, 겨울은 이해하기 쉬웠다. 강력한 죄악감은 강력한 합리화를 낳는다. 그게 불가능한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양심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었다. 착한 사람부터 죽는다. 생전에도, 지금도. 과거를 캐내어 만들어진 세계관이 이 모양이니, 이것이 곧 사람의 한계인가 보다. 겨울이 한계를 곱씹었다. 진술이 이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백인은 먹지 않았습니다. 끔찍했거든요. 주로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에서 오는 것들을 건졌습니다. 방송 한 번 할 때마다 크고 작은 배들이 몇 척씩 오더군요.] “방송이라……. 식량이라도 나눠주겠다고 했나보죠?” 수사관이 진실을 짚었다. 요리사가 얼른 대답한다. [예. 어려운 일이라 총독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국가원수로서 책임을 지겠다고요.] “잠깐. 그런 식이었다면 해적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아, 원래는 호위함이 있었습니다. 원래 어느 나라의 구축함이었다는데, 총독님의 아드님께서 함장이셨습니다. 얼마 전 해적과 싸우다가 침몰해버렸지만요.] 호위함과 공개투표. 그리고 독재자. 알 만 하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그럼 호위함 승조원들은 무슨 생각으로 함장을 따랐을까? 여객선으로부터 향락을 제공받았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관 속에서, 평범하게 미쳐버리기라도 했던가? ‘하긴, 세븐스 캘리포니아도 처음엔 병력 관리에 골머리를 앓았으니…….’ 엘리엇 상병이 말했었다. 가족을 잃은 병사들이 많다고. 정신상태가 불안정하여 작전에 투입할 수 없노라고. 오염지역의 미군이 난민 지원병을 받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 후로도 수사관은 한동안 심문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한 가지만 더 묻죠.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당신,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었나요?” 인간과 역병의 콜로세움. 요리사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수사관은 추궁하려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다문다. 대신 옆에 있는 사람을 바꾸라고 했다. 항모에서 생존자 감시를 위해 붙여둔 인력이 있을 것이었다. [바꿨소.] 차갑고 퉁명스러운 첫 마디. 수사관이 말한다. “저는 연방수사국 현장감독관 조안나 깁슨입니다. 귀하의 관등성명을 부탁드립니다.” [……위병상사(Master-at-arms) 토리 맷슨이오.] 위병하사관은 해군 내의 범죄를 단속하고, 시설 및 함정의 경비를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한다. 소속은 다르지만 FBI 수사관과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좋아요, 맷슨 상사님. 지금까지의 대화를 듣고 계셨을 테니 사정은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뭘 말씀하고 싶으신 거요?] “해군에 증인보호를 요청할까 해서요.” [증인보호? 이런 놈을 지켜주란 말이오? 하, 이 배엔 인간쓰레기를 위한 자리가 없소.]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죽기 직전까지 두들긴 다음 바다에 던져버리겠소.] “와우.” 표정 변화 없이 입으로만 놀란 뒤에, 수사관이 하는 말. “상사님께서는 지금 연방수사국의 정당한 요청을 근거 없이 거부하시는 겁니다. 방역전쟁에 관한 오염지역에서의 기관별 협력규정은 숙지하고 계시겠지요? 이 건으로 상사님께 불이익이 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부하실 겁니까?” [멋진 협박이군. 그렇다면 어쩔 거요?] “상부에 보고해서 정식으로 해군에 항의해야겠죠. 제게 해결되지 않은 임무가 있으니, 아마 몇 개월 뒤의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음, 까먹지 않도록 노력해야겠군요. 나이 서른을 넘기고 나니 기억력이 떨어져서 걱정이에요.” [허.] 상사의 기막힌 웃음소리. 누군가의 절규도 섞여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통신이 잠시 끊어졌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침함으로 재연결을 기다리는 수사관. 이윽고 통신이 재개되었을 때, 시끄럽던 배경 소음은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재미있는 개소리였소. 다른 요청사항은 없는 거요? 전투정보실로 통신을 돌려드릴까?] “아뇨.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연락드리죠.” [알겠소. 그럼 이만 끊지. 맷슨 아웃.] 통신을 끝낸 뒤 겨울이 바라보자, 묻지 않아도 변명하는 수사관. “현장수사는 융통성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저쪽에서 거부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이걸로 굳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해요. 그럴 만 한 일이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는데……죄가 너무 무겁네요.” 증언하는 내내, 요리사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도살한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수십? 수백? 수천? 깁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종이 미덕인 군인에게도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할 의무가 있는걸요. 저도 떳떳한 입장은 아닙니다만.” 겨울은 그녀를 이해한다. 요원 스스로 말했듯이, 수사관의 직무는 융통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규정이 항상 지켜지진 않았을 것이다. 부도덕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애당초 사법거래부터가 올바른 일이 아니잖아.’ 그것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다. 겨울은 어릴 때 누이와 함께 본 영화를 기억한다. 아내와 딸을 살해당한 남자의 이야기. 범인은 둘이지만, 사법거래로 한 명만 처벌 받는다. 이에 분노한 남자는 범인뿐만 아니라 사법거래의 관계자 모두를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아주 고전이라 입체영상도 아니었고, 그래서 무료였다. 그러나 값이 없다고 재미도 없진 않았다. 아직 어렸던 소년은, 영화를 본 뒤, 스스로의 미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대체 어디까지 미워해야 하는 걸까? 하고. 사실 겨울은 요리사를 죽이는 게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저항할 방법이 있었을까? 가석방 없는 종신형. 그래, 딱 그 정도가 좋을 텐데. 그러나 반대하지 않는 것은, 이게 현실의 한계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돌아갈 수 없는 게 맞겠지.’ 겨울은 미련을 끊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제 슬슬 저걸 받아볼까요?” 아까부터 내선 하나가 반복해서 점등되는 중이었다. 깜박, 깜박. 3층의 관리실에서 들어온 연락 요청이다. 그리고 같은 층에 그랜드 갤리가 있었다. 인간 도축이 이루어진 장소. 배가 방향을 바꿨을 때, 함교에 누군가 있음을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신호를 보내는 쪽에는, 태평양 공화국의 총독이란 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사관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손을 뻗는다. 겨울이 막았다. “제가 할게요.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텐데.” “죄송하지만 중위님은 협상력이……아니, 아닙니다.” 겨울이 미소를 만들자, 깁슨 요원은 얼버무렸던 말을 꺼내놓는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상대가 미치광이라면 논리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중위님께서 상대하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니까요. 이 정도 배라면 위성전파를 수신할 수도 있었을 테고. 상대가 누구든 긴장하게 될 겁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 그리고 위성전파요?” “네. 선전방송은 위성을 통해 전세계로 송출됩니다. 중위님의 지분은 큰 편이고요.” “왜 그런 짓을……아니, 알겠네요.” 여성 수사관은 쉽게 끄덕였다. “짐작하셨겠지만, 미국이 재앙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고 알리는 겁니다. 다른 국가와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이죠.” 결국 민사심리전의 일환이다. 그것이 미칠 영향을 검토한 뒤, 겨울이 수화기를 들었다. # 122 [122화] #에이프릴 벤전스 (11) 내선을 걸어온 사람은 예상대로 태평양 공화국의 총독이라는 자. 겨울은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닫힌 사회에서, 외부와의 접촉은 위험한 가능성이다. 통제되어야 한다. 겨울의 신분과 목적을 들은 총독이 난데없는 폭소를 터트렸다. [오, 세상에. 이거 정말 놀랍군! 하하하! 설마 구조대가 올 줄이야!] 그리고 그는 책임자를 비웃는다. [어느 선에서 내린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를 요청하는 배가 수백, 수천 척일 텐데…….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이렇게 낭비할 자원이 있나?] 맥락상 구조신호를 보낸 건 총독의 결정인 것 같다. 겨울이 물었다. “당신이 신호를 보낸 주제에, 정작 구조를 바라진 않았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중위. 세상이 상냥한 곳이라는 착각은 오래 전에 버렸거든.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고정된 침로. 폭주하는 대형 여객선. 내가 책임자였다면 격침시키라고 했을 거야. 하지만 귀관이 온 걸 보니 미군도 아직 현실을 모르는군. 쯧쯧. 앞으로 얼마 못 가겠어.] 아, 인류의 앞날은 어둡다! 헛소리를 지껄이며 낮게 키득거리는 남자. 보조 수신기로 엿듣던 FBI 수사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겨울은 그녀에게서 두 가지 감정을 읽는다. 하나는 경멸. 하나는 죄악감. 후자는 자기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다. 항모전단 사령관도, FBI 수사관도, 처음엔 여객선을 격침시키자는 쪽이었다. 그 점에서 이 미치광이 살인마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식으로 느끼는 모양. 위로할 때는 아니었다. 겨울이 재차 질문했다.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렇다면 왜 신호를 보냈죠?” 가능성이 낮더라도, 자력구제를 시도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을. [그야 물론 사람답게 죽기 위해서지.] “사람답게?” [그래. 구조가 올 거라는 희망이 없으면, 친애하는 국민들이 미쳐 날뛰었을 테니까. 공화국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와중에 나 또한 성할 수 없었겠지. 국민들이 총독을 살해하는 폭거는 용납할 수 없어. 모두 함께 죽는다면 모를까. 그래서 어뢰나 미사일을 기대하고 있었네만…….] 굉장히 빠르게 쏟아지는 말. 총독은 대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준비된 변명을 쏟아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나저나, 집단 자살을 위해 구조신호를 보냈단 말인가? 그로써 본인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이게 과연 진심일까, 아니면 떠보려고 하는 말일까. 느낌만으로는 전자에 가깝다. 확신은 서지 않는다. 겨울은 일단 계속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게 사람다운 죽음인가요?” [아무렴. 단 1초라도 더 살고 싶어서, 최후의 순간까지 발버둥치는 모습. 이 얼마나 사람다운가. 기품 있는 자살 방식이지.] “글쎄요. 당신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면서, 잘도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으셨군요.” 논리적으로 미친 남자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들의 처지를 비웃으려는 건가? 고상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중위, 공화국 국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타고난 식인종, 살인마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야. 누구나 우리처럼 될 수 있어. 사람을 잡아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파진다면.] 겨울이 곧바로 부정했다. “아뇨. 당신들은 그 이상이었어요. 질병과 인간을 같은 무대에 올려놓고 즐겼잖습니까. 그들의 싸움과 죽음에 열광하면서 말이죠. 그거 아십니까? 마지막으로 목줄에 묶인 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오래 버티겠죠. 많이 먹었으니까.” 무대 바닥엔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의 반지름은 곧 괴물을 묶은 목줄의 길이였다. 한 번 원에 들어가면 과제를 마칠 때까진 나올 수 없었다. 열 번의 덤블링. 열 번의 팔굽혀펴기. 열 번의 뜀뛰기. 훌라후프 열 번 돌리기. 줄넘기 열 번 넘기. 기타 등등의 우스꽝스러운 연속 과제를, 변종을 피해 도망 다니며 완료해야 한다. 사전에 정해진 것도 아니다. 진행자와 관객들이 그때그때 요구한다. 몸짓만으로도 읽기 쉬운 광기의 도가니. 변종을 죽이는 건 반칙이었다. 무장 인력에게 사살 당한다. 무성영화 같은 폐쇄회로 화면 속에서, 겨울은 반칙을 저지른 사람들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리 길게 검토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제는 갈수록 엽기적으로 변했다. 최악의 과제는 시간(屍姦)이었다. 살아있는 시체, 변종을 범하라는 것. 죽이는 것은 여전히 반칙이었으므로, 도전자의 태반이 죽어나갔다. 변종의 완력은 강력하다. 굶주린 강간 피해자 앞에서 불가피한 가해자는 무력한 먹잇감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물리는 즉시, 가해자는 사살 당했다. ‘마치 사마귀의 교미 같았어…….’ 수컷을 빠득빠득 씹어 먹는 암컷의 모습을, 인간에게서 볼 수 있을 줄이야. 성공한 사례도 존재했다.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성공의 증표로서, 진행자는 미리 씌워두었던 콘돔을 벗긴다. 내용물이 관건이었다. 하얗게 흘러내릴 때, 관객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규칙도 갈수록 복잡해졌다. 처음엔 하나의 원이 있었을 뿐이나, 나중엔 다섯 개까지 늘었다. 사람이 싸워야 할 상대는 사람이었다. 다섯 원이 겹치는 좁은 자리에, 마지막 생존자가 서있어야 끝나는 잔혹한 경기. “그런 짓까지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실 셈입니까?” 겨울이 하는 말에, 총독이 가볍게 대꾸한다. [물론이지.] “…….” [순진하게 구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순진한 건가……? 아직 어린 나이이니 후자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주지, 중위. 즐거움은 삶의 필수 요소야. 사람은 즐겁지 않으면 못 사는 동물이라고. 감옥에 갇힌 죄수가 왜 바깥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응?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비바람을 맞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대답해보게.] 여기서 떠오르는 건 즐거움이 급해서 섹스를 외치는 사람들. 삶이 불행한 다른 세계의 관객들은, 별 것 없는 소년의 사후를 부러워한다. 사람은 즐거움 없이 살 수 없다. “맞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자기 즐거움을 남의 심장에서 짜내면 안 되는 거죠.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면서 동의를 구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역겨우니까.” [하하. 내가 아는 상식과 다르군.] “왜 다르죠? 어린 나이 운운하시니 드리는 말씀인데,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거든요. 이건 중학생들도 배우는 명제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고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어선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이기도 하죠.” 같은 맥락에서, 이타(利他)는 궁극적으로 이기(利己)일 수밖에 없다.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소년이 생전에 품었던 꿈이었다. 죽고 난 지금은 아무래도 좋게 되고 말았지만. ‘나 혼자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내가 모두를 사랑하는 대신 모두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철없고 어릴 때의 소망이었다. 내가 받기를 원하는 만큼 남에게 먼저 베풀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베풀고 나면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받기만 하는 사람들. 고로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상이었기에. 어쩌면 다들 가진 게 없어서 더욱 아꼈을지도 모르겠다. 보답 받기가 확실치 않은데, 얼마 없는 것을 내주기가 두려워서. 인간의 나약함이자 한계였다. 소년 또한 나눠줄 것이 몸과 마음 말고 무엇이 있었던가. 세상 그 자체를 미워하기에 소년은 너무 작았다. 도취된 정신병자가 상념을 깬다. [그래, 확실히 귀관은 그렇게 말 할 자격이 있지. 내가 TV에서 본 게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야. 솔직히 감탄했어. 귀관은 양심이 죽으라면 죽을 사람처럼 굴더라고. 산타 마리아에서의 무모한 질주 하며, 산모 하나 지키겠다고 부대원 전체의 목숨을 거는 등. 그런데 말이지.] 그는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렇게 살면 귀관에겐 무엇이 남나? 응? 종래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걸?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심장마저 꺼내주면, 그 삶은 행복한 건가? 응? 귀관은 지금까지 얼마나 행복했나?] “…….” [사실을 인정해. 양심적인 사람이 박수갈채를 받는 건, 다른 모든 이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지. 아낌없이 나눠주는 멍청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야.] “그만.” 더 들을 필요가 없겠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던 것도 아니고. 소 뒷걸음질로 쥐 잡듯이 겨울의 상처를 후벼대긴 했으나, 결국 살인마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주워섬기는 소리. “당신, 개도 아닌 게 너무 오래 짖으시네요.” 개는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지. 들으라고 하는 독백이며,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그저 어울려주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강세를 주는 연기로 여상스레 던지는 협박. 부자연스러움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과 세상은 원래 이래야 한다는 건 굉장히 다른 겁니다, 나쁜 새끼야.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들어요?” [그냥 뒀어도 죽었을 놈들의 죽음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 바다에서, 식량을 조건 없이 나눠준다는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정말 희망이 없는 놈들만 이끌려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이 배가, 지금으로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개소리가 또 한 번 이어지기에, 겨울은 다시 한 번 그의 말을 자른다. “참 말 많네요. 시끄럽고, 지금부터 묻지 않은 말 한 마디마다 당신 뼈 하납니다.” 웃음 섞인 한숨을 쉬는 총독. 사람의 도리를 말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되겠냐는 투로. [하하하! 그것 참 인도적인 말씀이시군.] 일단 하나. 겨울은 차분하게 차가운 숫자를 세었다. “당신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감염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바로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제가 거기 갈 때까지, 어느 뼈를 버려야 하나 잘 고민해 보시죠.” 칼자루는 이쪽에서 쥐고 있었다. 비록 이편의 숫자는 둘 뿐이지만, 바로 죽일 수도 있다는 게 단순한 공갈만은 아니었다. 헬기가 있으니까. 헬기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함교를 빼앗기고 철수한 것만 봐도, 남은 화력은 보잘 것 없겠지.’ 3층 갑판의 그랜드 갤리는 이 배의 모든 식량이 집중되는 장소. 선체 중앙에 있고, 출입구는 제한적이다. 최후의 보루로 삼을 법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신경 쓰이는 점이다. 아직도 살아있는 식량이 있을 까봐. ‘주방 내 폐쇄회로는 충분하지 않아.’ 지금까지의 총독을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중위님. 지금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발신을 잠시 막아두고, 겨울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들어본 결과, 이 총독이라는 놈은 중위님을 상대로 겁을 먹고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미쳤거나, 자포자기한 지 오래이거나. 어느 쪽이든 중위님의 이름값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상대하는 게 낫습니다. 범죄자와 협상하고 정보를 캐내는 분야에서는 수사국을 능가할 곳이 드문 편입니다.” 아예 없다고 단언하지 않는 점에서 미소를 짓게 된다. “회유라도 해보실 셈이세요?” “상대의 욕구를 탐색하고 자극하는 건 협상의 기본입니다. 먼저 구출한 요리사가 바다에 던져진 마당에, 이 작자와 다른 공범들이라고 처우가 좋을 순 없습니다. 이 사생아 새끼도 자기 처지를 잘 알 테니 어지간해서는 이쪽을 희롱하려고만 들 겁니다. 두려울 게 없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역으로 농락해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수사관. [여보세요-? 한겨울 중위?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키득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넘어온다. 겨울은 수사관에게 수화기를 내주었다. 소년 역시 사람 속 곧잘 읽지만, 그걸 활용하는 건 또 다른 영역에 속하므로. # 123 [123화] #에이프릴 벤전스 (12) 총독은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내 이름말인가? 하하, 안 돼. 그건 알려줄 수 없어. 나는 총독이야. 그 뿐이지. 설령 인류의 역사가 운 좋게 이어지더라도, 거기엔 내 이름이 남아있지 않을 거야.]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공감하는 대화의 도구. 공감대 형성이 성공적인 협상의 전제조건임을 감안하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안나 깁슨은 숙련된 협상가였다. 그녀는 자신의 「통찰」을 겨울에게 세심히 전해주었다. 자신을 감추는 데 집착하는 범죄자의 심리는, 결국 죄책감을 덮는 메커니즘이라고. “중위님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놈을 홀로 상대하게 되실 테니까요. 대화가 필요할지는 의문이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해요. 그쪽 상황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겨울은 7층을 지나 6층 갑판을 돌파하는 중이다. FBI 요원은 함교에 남아있다. 협상은 끝났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기습은 언제나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지적 허영이 강한 놈은 자기 말에 몰입하기 쉽습니다. 스스로의 언변에 감탄하면서요. 나르시즘의 일종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계속 떠들게 만들겠습니다. 그 동안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겠지요.” 역할극을 통한 자기합리화는, 부추기면 부추길수록 뜨거워질 것이었다. 그 사이에 겨울은 4층 갑판까지 밀고 내려가야 한다. 상대가 대응할 여유를 극한까지 줄이기 위한 방책.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겨울은 지나간 협상을 곱씹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 배에 지금 영웅이 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서 나갈 수가 없어. 나가더라도 기다리는 건 고결한 재판정에서의 사형선고뿐이겠지.] 총독은 살려주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조안나 깁슨? 거기에 한겨울 중위가 있잖아. 그가 없었다면 기대를 걸어 봐도 좋았겠지. 그러나 중위가 이 배에 승선한 순간, 난 영웅담에 나오는 악당이 된 셈이거든. 대중은 선과 악의 대결에 열광할 거야. 그 대결은 당연히 악의 최후로 끝날 테고.] 그가 지적하는 것은 지금껏 전 세계에 송출된 선전방송들. 거기에 에이프릴 퍼시픽의 비극 또한 더해지리라는 게 논리적으로 미친 작자의 예견이었다. [그러므로 당신의 약속은 무의미해. 당신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번제물을 원할 테니까. 오, 미국 시민들이여! 활활 타오르는 이 악당을 보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이 악당과 다르다는 사실을 되새기시오!……아하, 그래. 질서는 누군가의 시체 위에 만들어지는 거지. 내가 이 배에 질서를 만들었듯이 말이야. 최악의 질서가 최선의 혼돈보다 낫다네.] 소년 영웅이 외로운 바다에서 식인괴물을 처치하고 정의를 바로세우다. 이거야말로 21세기의 오디세이아가 아닌가. 살인마는 그렇게 떠들었다. 그가 비유하는 원전(原典)은 외눈박이 괴물을 만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였고.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시칠리아 섬의 외눈박이들은 양떼를 치며 사람을 잡아먹고 살았다. 살인마 스스로 도취된 시점에서 반론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수사관은 협상을 자존심 싸움으로 유도했다. “아무래도 놈의 자포자기엔 다른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용할 수는 있겠군요.” 조안나 깁슨의 말이었다. 겨울은 중간 경유지에 도달했다. 6층 갑판의 관리실.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은 문은 열려있었다. 이 안에 정비용 수직통로가 있다. 안내도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폐쇄회로로 확인한 사실. 5층 까진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스피커를 통해 FBI 수사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가십시오. 문 안쪽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녀는 미치광이를 상대하는 동시에, 겨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5, 4, 3, 2, 1. 격벽 폐쇄 완료. 이제 후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격벽을 부술 만한 특수변종은 보이지 않는군요. 관리실 내 변종집단 다수 확인. 정면에 보이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5미터 지점에 일반 변종 여섯 개체가 있습니다. 보다 안쪽,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스물 이상의 변종이 추가로 확인됩니다. 최초 교전 후 최대 20초 이내에 후속 집단과 조우하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연속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본디 선내 안내방송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지금은 지령의 수단이었다. 함교에서 원격으로 제어 가능한 격벽도 도움이 되었고. 절제된 음성이 울릴 때마다 변종들이 키익 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고개를 비틀면서, 따다다닥. 쌍방향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녀와 겨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전기가 먹통이다. 겨울 쪽에서 뭔가를 꼭 전해야 한다면, 요소마다 배치된 내선을 찾거나, 카메라 앞에서 필담과 몸짓을 병행해야 한다. 아직까진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수사관은 노이즈 메이커 역할까지 맡았다. 능력이 대단하다. -어린 개체가 하나 섞여있습니다. 교전 시 주의바랍니다. 급소를 노리는 사격에서 높이를 조절하라는 의미. 평면적으로 접근할 때의 주의사항이었다. 겨울은 천장을 살핀다. 형광등 위쪽으로 용도불명의 배관들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저게 체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시험해보면 되지. 양쪽 벽을 번갈아 차서 3미터를 올라간다. 충격을 최소화하는 매달림. 여기까지는 소리가 없었다. 고정장치에서 자잘한 쇳가루가 떨어진다. 호화 크루즈라도, 발길 닿지 않고 눈길도 닿지 않는 곳은 관리가 소홀하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튼튼하다. ‘의외네. 지금 내 무게가 0.1톤을 넘을 텐데.’ 방탄복, 방탄 플레이트, 각종 보조화기와 폭탄류, 탄약배낭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추가 장비들이 더해지면 살인적인 무게가 된다. 사실상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선 겨울에게조차 부담스러운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 매달린 상태에서 발을 굴러본다. 고정 장치가 낮은 쇳소리로 울었다. 해볼 만 하겠다. 겨울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차악. 거의 무음에 가까운 착지. 그러나 질병은 이미 쇳소리를 듣고 기웃거리며 오는 중이었다. 그것들의 발소리가 모퉁이로 다가온다. 질질 끄는 발걸음. 맨발과 맨발 아닌 것이 섞여있었다. 겨울은 근접사격을 준비했다. 한 손에 대검, 다른 손에 권총. 셋, 둘, 하나. 콰득! 처음 나온 놈에게 칼을 꽂는다. 턱 아래로 푹. 피가 쏟아졌다. 그 뒤로 다섯 놈. 겨울을 눈치 채고 소리 지른다. 손을 뻗어 밀려오는 순간에, 서로 엉켜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는 시점을 노려, 그것들의 무릎 아래로 죽은 놈을 걷어찬다. 와르르. ‘최대 20초. 19, 18, 17…….’ 수사관의 추정은 정확할 것이다. 겨울은 도미노처럼 무너진 것들에게 권총을 쏴 갈겼다. 타타타탕! 네 발 연사가 네 개의 정수리에 구멍을 낸다. 16, 15, 14. 어린 것 하나만 살아남았다. 버둥거리며 일어나기에, 겨울은 대검을 번쩍 들었다. 작은 눈알 두 개를 수평으로 그어버렸다. 좍! 벽에 핏자국이 뿌려진다. 13, 12. 그러고도 달려드는 녀석을 유인한다. 일부러 소리 내는 달리기. 쿵쿵쿵. 시력을 상실한 어린 것이 부딪히고 넘어지며 쫓아왔다. 11, 10, 9. 곳곳에 피눈물을 쏟는다. 겨울은 지나온 문을 열고, 연습처럼 뛰어 천장의 배관 위로 올라갔다. 어린 것이 아래를 지나간다. 겨울이 앞서서 달려간 줄로만 알고. 몇 초 후에, 깁슨 요원이 예측한 것보다 2초 빠르게, 난폭한 무리가 좁은 통로를 휩쓸고 지나간다. 어린 것의 핏빛 울음을 쫓아서. 우르르르. 지나간 뒤에 내려온 겨울이 문을 닫는다. 철컥. 잠금쇠가 돌아갔다. 나간 놈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수직통로까지는 위협이 없습니다. 진행하세요. 겨울이 있는 구획에만 울리는 지령이었다. ‘전체방송으로 무너뜨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무너뜨린다는 것은 총독의 세력이다. 그랜드 갤리 안쪽으로는 폐쇄회로가 부족했고, 그나마도 파괴된 것이 많았다. 하기야 편을 갈라 싸우는 사람들의 배였으므로, 감시를 피하려면 카메라부터 부숴야 했을 것이다. 특히 3, 4, 5층 갑판의 파괴가 극심했다. 보이지 않는 구역이 절반을 넘는다. 그러나 방송까지 막을 순 없을 터. 갤리 바로 바깥에서 울리는 방송은 안쪽까지 들리고도 남을 것이었다. 권위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수단은 권위인걸. 이것이 겨울의 생각이었다.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들 중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수사관은 제안을 거부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인질들의 안전이었다. 살인멸구. 이미 정황과 증거가 넘쳐나는 상황이지만, 저들의 정신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닐 터. 거기에 통제력을 잃은 총독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의문이었고. 그 상황에서도 따르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지적은 합당했다. 끼에에엑? 환풍구에서 작은 것이 튀어나왔다. 흐릿한 형체. 겨울이 주먹으로 후려쳤다. 빠악! 작은 것이 팽글팽글 패대기쳐진다. 부서진 이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크기만 보아선 태아의 변형체였다. 그러나 아타스카데로에서 보았던 까만 녀석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 주먹에 얼굴 반쪽이 뭉개졌다. 뇌진탕으로 즉사한 것 같다. 체액이 묻은 장갑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눈살 찌푸린 겨울이 서둘러 벗어 던졌다. 인조가죽이 자글자글 끓었다. 흐물거리며 형체를 잃는다. 죽은 유체(遺體)에서도 끓는 소리가 들린다. 재빨리 물러나는 사이, 사체의 피부가 갈라지며, 그 틈에서 부풀어 오르는 노란 농포(膿疱). 몇 초 지나지 않아, 퍽! 터진다.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코팅이 된 바닥은 괜찮았다. 그러나 금속은 눈에 띄게 반응한다. 벽에 붙은 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성 폭발이라니. 뭐 이런 경우가. 퉁탕퉁탕. 환풍구 안쪽에서 요란하게 가까워지는 소리들. 겨울은 관을 밟고 올라가, 환풍구 안으로 권총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탕! 총구 화염으로 밝혀지는 어둠. 순간적으로 드러난 형체는 줄지어 꾸물거리는 여럿이었다. ‘죽고 나서야 터지는 건가?’ 직접타격은 금물. 사살 후엔 가급적 거리를 벌릴 것. 새로운 변종에 대한 정보를 기억한다. 자세를 낮춘 채 대기하던 겨울은, 퍼억 퍽 터지는 소리가 연이은 뒤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스윽, 슥. 끼익끼익. 뒤쪽은 헐떡이는 울음 같다. 직접 보지 않더라도, 성치 않은 몸을 질질 끌고 오는 그림이 그려진다. 환풍구 안쪽으로 조명을 비춰보았다. 강렬한 빛에 노인처럼 주름 많은 얼굴이 한층 더 끔찍하게 구겨졌다.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면서 기어오는 중. 산성 농포의 폭발에 같은 종류끼리도 피해를 입는다는 증거였다. 끼이이익. 결국 다 오지 못하고 단말마를 뱉는다. 작은 괴물이 또 부풀기 시작했다. 겨울이 속으로 수를 세며 피했다. 퍼억! 죽음으로부터 폭발까지 3초. 수류탄의 지연신관과 같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살핀다. 체액이 튄 범위를 보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상륙한다면 어떻게 될까? 해군의 방침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심증은 있었고, 지금은 확신에 가까웠다. 대체 왜 이렇게 다른 거야. 겨울은 갈수록 새로워지는 세계관에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담담하게 눌러온 스트레스가 갑작스레 불거졌다. 이 세계관, 겨울에겐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재시작이야 가능하겠지. 그러나 많은 관객들이 떠날 것이고, 채무를 갚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유예된 파국. 겨울 스스로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를 솔직히 고백하고 작별을 고했을 때, 인생에 핀 유일한 장미가 울었다. 네가 사라지면 나도 시들고 말 것이라고. 이기적인 말이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 남아있어 달라고. 사후의 존재가 즐겁지 않은데도, 별빛을 모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장미를 쥐고 놓지 못하는 삶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겨울에게 있어서는 원치 않는데 연장해야 할 삶이다. 본인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어떤 의미로 겨울의 세계관 진행은 위태롭다. 마지막 기회임을 알면서도 위험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모두 놔버리고 싶다고 느낄 때가 많은 까닭이다. 그러자면 차라리 마음이나 지키자고. 다 잃어버렸어도, 마음으로 하는 선택만큼은 내 것이 아닐까, 하고. 모순이다. 그러나 이것이 겨울의 최선이다. 삐익- 삑- 가까운 내선이 가냘프게 울어댔다. 감독관 깁슨의 연락이었다. 그녀도 목격한 것이다. 받자 마자 안부를 물어온다. 기분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겨울. 그동안 연기에 익숙해진 것이 좋게도, 나쁘게도 도움이 된다. 이상 없다고 답하며 이렇게 요구한다. “해군에겐 아직 알리지 마세요. 무조건 철수하라고 할까봐 걱정스럽네요. 하라고 해도 안 할 거지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하면 되겠죠.”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은 조금 기다려야 했다. 개방된 회선에서 열기에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정신병자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듯 하다. 적당히 상대해주는 듯한 깁슨 요원의 목소리. 그리고 그녀는 겨울에게 이어진 내선으로 돌아왔다. [저 병신이 묘한 말을 하더군요. 우리 사이엔 굉장히 큰 장애물이 있다고. 캐물어도 자세히는 말하지 않습니다만, 전후 맥락에서 유추하기로는 특수변종에 대한 암시인 듯 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한 죄악의 기념비 어쩌고 하는데……. 걱정스럽습니다. 놈의 자포자기가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기인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고……적어도 우리가 본 것 정도이기를 바랍니다만…….] “참고할게요. 달리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으음……. 중위님.] 그녀는 망설임 끝에 어려운 말을 꺼낸다. [지금이라도 철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인질이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단언하진 못하겠습니다. 그 불확실한 가능성에 중위님 같은 분이 목숨을 거는 건……. 이렇게 표현하면 불쾌하시겠지만, 채산성이 맞지 않는 일입니다.] “채산성이요?” [저는 감독관이자 지휘관이었습니다. 싫어도 사람을 자원으로 봐야 합니다. 최대한 많은 부하들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은, 동시에 많은 부하를 위해 소수의 부하를 포기해야 할 의무감이기도 했습니다. 소수의 부하들을 위해 무관한 사람들을 버린 적도 있습니다.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다시 한참의 공백. 다음 말은 1분이 지나서야 이어졌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경중도 가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 압니다. 작전에 투입되기 전 중위님에 관한 자료를 분석했으니까요. 그러나 중위님, 샌프란시스코의 임무는 이곳에서의 인명구조보다 명백히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공백. [자칫 본토에 핵이 떨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더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지금은 물러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만약 중위님을 여기서 잃는다면, 양심상 도움을 준 해군에게도 좋지 않은 부담이 걸리겠지요. 저로서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감독관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저 말고도 많은 이들의 희망이 걸려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재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은 고개를 기울인다. # 124 [124화] #에이프릴 벤전스 (13) 죄송합니다. 한 마디의 사과와 약간의 시간. FBI 요원을 설득하는 데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련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침착한 안내를 통해 겨울을 관리구획의 중심으로 인도한다. 승조원 전용 공간이기 때문일까? 변종과 조우하는 빈도가 예상 이하였다. 겨울은 수직통로를 타고 아래층으로 미끄러졌다. -5층의 후방과 전방통로를 폐쇄해두었습니다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안내는 최저음량이었다.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선수 방향의 문으로 나가십시오. 대로를 지나면 카지노 입구입니다. 거기서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게 최단경로고요. 혹시 그 길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엔 대극장 방향으로 이동하세요. 아트리움을 지나기 전 내선으로 연락 주시면 전방통로를 개방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지나가라고 한 대로(Boulevard)는 말 그대로의 넓은 길이었다. 객실이 빼곡하게 들어찬 위층과 달리, 각종 유흥시설이 집중된 이번 갑판부터는 사방으로 열린 공간이 많았다. 조안나 깁슨이 괜히 경고한 게 아니다. 개방된 공간에는 격벽이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격벽은 후방 라운지와 전방의 아트리움, 대극장까지만 봉쇄할 수 있을 따름이었고. 5층에서 3층까지 이런 식이다. 돌아가려면 본격적인 진입 이전이 좋았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겨울은 나가는 문을 열었다. 원형의 바 안쪽이었다. 감염된 바텐더가 전방을 향해 굳어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등, 오르내리지 않는 어깨. 겨울은 이것이 대사억제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당장 죽일 필요는 없지만, 살려둘 이유도 없다. 콰득! 뒤통수에 대검을 박는다. 바르르 떠는 몸을 조용히 눕혀놓았다. 테이블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군데군데 비상등이 밝혀진 클럽. 불길한 붉은 조명 아래 검은 얼룩이 낭자했다. 딱 딱 따다다닥.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빨 부딪히는 소리. 카지노로 이어지는 대로는 이 배의 항해일지 같은 느낌이었다. 움직이는 시체와 움직이지 않는 시체들.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생전의 선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통찰」에 의한 정보수집이 자동으로 진행된다. 언제고 필요할 때 떠오를 것이다. 변종들 대부분은 마네킹처럼 서있었다. 창가에 다수가 몰려있는걸 보니, 아무래도 헬기의 소음을 듣고 한 차례 깨어났던 게 아닐까? 마침 지금은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교대 시간이 맞아떨어지지 않은 모양. 하기야 급작스러운 작전이니 칼 같은 임무교대는 기대하기 어렵겠다. 또한 제독은 누적된 인명손실과 피로에 대해서도 말했었고. 지금의 겨울에겐 차라리 잘 된 일. 중기관총에 철갑탄을 쓰더라도, 선체를 관통해서 내부까지 화력을 지원하긴 어렵다. 차라리 조용한 지금이 나았다. 그러나 아직 활동하는 변종들도 있었다. 역할은 뻔했다. 그들 나름의 파수꾼들이겠지. 순번이라도 정한 건가? 동물적인 지능이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한낱 늑대조차 역할분담에 충실하다. 하물며 인간을 모체로 한 괴물들이야. ‘이것들을 여기서 죽이고 가는 게 낫겠는데…….’ 한 층 아래, 4층 갑판에는 좌우로 구명정이 적재되어 있다. 또한 좌우와 선수 쪽이 트여있는 층이기도 했다. 생존자들을 유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겨울이 점치는 가능성은 파수꾼들을 무음으로 해치우는 것. 그 뒤에 깨어나지 않은 놈들을 하나하나 살해하면 된다. 눈 뜨고 잠든 놈들 사이를 걷는 건 기괴한 느낌이었다. 굳은 변종을 엄폐물 삼아 움직이는 변종의 시야를 피한다. 자세를 낮추고 이동하다가 파 먹힌 여자를 발견했다. 피로 물든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 손목에 감겨있는 우아한 시계. 붉은 조명 아래 광택이 번들거리는 핸드백. 먹고 먹히는 집단에서 먹는 쪽이었으리라. 겨울의 주의를 끈 것은 썩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그 냄새였다. 부패한 육류의 악취 외에도 특이한 향취가 남아있다. 거북할 정도로 화학적인 자스민 향기. 강렬하다. 보통은 이렇게 쓰지 않는 것을. 씻기가 여의치 않았던 걸까? 싣고 다니는 식량이 식량이었으니……. 먹기 전까지 살려두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을 터. 예상대로, 백을 뒤져보니 향수병이 나왔다. 카펫 깔린 바닥에 계속해서 분사하는 겨울. 그리고 몇 걸음 물러나,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체의 폭 넓은 치마 뒤에 웅크린다. 소리 없이 백 팩을 놓아 무게를 줄였다. 한 결 가벼워진 육체는, 이제 인간을 넘어선 민첩성을 고스란히 발휘할 것이다. 향기 짙은 바닥은 깨어 움직이는 놈들의 이동경로였다. 둘씩 짝지어 다니는 것이 조금 곤란하다. 손을 빠르게 써야 하겠다. 역시나, 걸려들었다. 킁킁. 코를 움찔거리며 접근하는 한 쌍. 남성체 하나, 겨울 또래의 여성체가 하나다. 새로운 숙주를 발견한 게 아니니 하울링은 아직 이르다. 다만 냄새를 쫓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바닥으로 몸을 기울인다. 손으로 땅을 짚고 냄새의 근원을 찾는 중. 우득. 우드득. 배후를 점한 겨울이 두 개체의 목을 빠르게 비틀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이었다. 짧은 스냅으로도 경추(頸椎)가 어긋난다. 쓰러지기 전에 뒷덜미를 붙들었다. 잡혀서 축 늘어지는 두 구의 시체. 바텐더에게 그랬듯이, 살며시 놓아준다. 소녀 변종이 겨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얇은 목이 한 바퀴 반이나 돌아버린 탓. 찢어진 살에서 피가 흐른다. 탁한 눈을 혐오스러운 갈망으로 물들인 채 혀를 내밀었다. 죽음이 임박한 변종의 힘없는 번식본능. 죽은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떤 감정의 작용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시체를 내려놓고, 겨울은 남은 수를 헤아렸다. 잘 하면 탄 한 발 낭비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겠다. 파수꾼 다섯 쌍을 추가로 해치운 뒤. 이어진 것은 조용하고 단조로운 반복 작업이었다. 그래도 서두른다. 헬기의 공백이 길지는 않을 것이기에. 깁슨 요원이 시간을 끄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괴물 같은 남자가 있었다. “……?!” 겨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감각보정의 경고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변종의 순발력으로 세 호흡이면 덮쳐올 간격. 구석진 응달에 웅크리고 앉아, 우물우물 손가락을 씹으면서, 노동에 가까운 반복 살해를 지켜보고 있다.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나. 겨울은 보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의 한계를 아는 까닭. 확신에 가득 찬 순간, 시스템은 그 확신을 반영하므로. 설마 「기척차단」인가……? 그럴 리가. 그건 생존계열과 전투계열이 동시에 깊어져야 획득 가능한데. 지금의 겨울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렵다. 남은 가능성은, 남자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을 경우. 적대적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면 「생존감각」이나 「전투감각」에 감지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어딘가 모자란 가설이었다. 변종들이 남자를 왜 그냥 두었겠는가. 수염 수북한 남자가 다가왔다. 겨울이 맹렬한 경계심으로 겨냥하는 총구 앞에서, 남자는 두려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사-알려주새오. 나 당신 아ㄹ아. 하-하-한겨울, 주, 중위. 헤!” 목소리가 크다. 아직 죽이지 못한 것들이 반응했다. 숫자가 많은데. 우득, 우득 우드득. 굳어있던 관절이 급격하게 꺾이는 소리들. 일단 괴물이 아닌 듯 했으므로, 겨울은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Kiosk. 편의점 같은 시설에 던져 넣었다. 으에엥! 남자가 울었다. 겨울이 재차 총을 들이민다. “조용히!” 작게 으르렁거린 협박이 제대로 먹혔다. 남자는 제 손으로 입을 막는다. 울먹울먹. 손가락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샜다. 바깥에서 거친 발소리들이 오간다. 매점의 진열장 안쪽에서도 움직이는 기척이 하나. 겨울은 매대를 타넘었다. 막 각성한 변종의 정면에 뚝 떨어져, 시선 마주치기도 전에 턱을 쳐올렸다. 빡! 개머리판에 맞은 뼈가 바스러진다. 맞은 놈이 쓰러진다. 부딪히기 전에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며 무릎으로 강타. 빠각! 다시 한 번 턱을 맞은 놈은 눈이 뒤집어졌다. 축 늘어지는 몸뚱이. 기절한 놈을 눕혀놓고, 목을 밟아 마무리한다. 슬며시 누르는 군홧발 아래 피와 살이 으깨어졌다. 뚜둑, 뚝, 뚜둑. 겨울은 섬짓한 감각에 홱 돌아섰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켜보는 남자의 모습. 바깥에서 굶주린 발소리가 겹쳐지는데, 위기감도 없는지 멀거니 서있을 뿐이다. “자세 낮춰요!”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이다. 이번에도 결국 강제로 끌어내려야 했다. 쿵. 카운터 안쪽에 무릎 꿇려 놓고, 겨울은 그늘에 의지하여 바깥을 경계한다. ‘대체 이 남자는 뭐야?’ 밀착하자 썩은 내가 확 풍겼다. 붙잡았던 손도 고름으로 미끌거렸다. 옷을 흠뻑 적신 것이, 땀 이상의 더러운 분비물이었다. 대체 옷가지 안쪽이 어떻게 생겼기에? 후우, 후우. 남자가 숨을 내쉴 때마다, 겨울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습관이었다. 변종을 처리하는 습관. 냄새가 너무 비슷해서, 습관적인 반응이 나온다. 바깥을 신경 쓰면서도, 겨울은 거듭 사내를 곁눈질했다. 어디를 봐도 정상이 아니다.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비었다. 빠진 자리를 보면 살이 무르고 썩는 중이었다. 그나마 있는 모발은 머릿기름과 진물로 떡이 져서,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설마 전염병 환자인가? 묵직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질병저항」을 획득할 여력이 없건만. 「역병면역」을 얻는 조건의 하나인 만큼, 「통찰」 이상으로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다. 두두두두두. 회전날개가 돌아가는 소리. 거리감이 빠르게 줄어든다. 새로운 헬기의 도착이었다. 탐조등을 달고 왔는지, 창문으로 거센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수 방향에서 선미 방향으로 훑고 지나가는 탐색. 겨울은 남자에게 가만히 있으라 손짓하고, 매점 입구에 바싹 붙었다. 마침 거울 깨진 조각이 있어, 바깥을 엿보기에 유용했다. 변종집단은 이미 헬기를 학습한 뒤였다. 빛과 소음에 반응하며 흐트러질지언정,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무작정 몰려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창문을 기웃거리며 상황을 주시한다. 그래도 이쪽으로 향하던 관심은 사라졌다. 가만있자. 여기도 내선이 있을 텐데. 직원이 배치되는 편의시설마다 연락수단이 있는 건 당연하다. 겨울은 수사관을 거쳐 헬기를 잠시 멀리할 작정이었다. 변종들이 재차 대사억제에 들어가면, 다시 한 번 아까처럼 시도할 수 있으리라……. 빠드득. 빠득. 쩝쩝. 매대 안쪽에서 들려오는 허기진 소리. 이 남자는 이 와중에 뭘 먹고 있는 건가. 고개를 돌린 겨울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더러운 남자가 죽은 변종을 물어뜯는다. 양손으로도 거침없이 살을 찢어, 두 볼이 불룩해지도록 입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와그작와그작. 평범한 인육보다 질기고 단단한 살덩이가 으깨어지는 소리. 겨울이 목을 밟아 죽인 변종은 도살당한 돼지 이하로 분해되어 있었다. 그나마 붙어있던 다리를 쭉 찢어 허벅지를 베어 무는 남자. “당신 지금 뭘 먹는 겁니까?” 적대적으로 묻는 말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치를 보던 그가, 먹던 다리를 양쪽으로 당긴다. 관절이 뚝 끊어졌다. 순수한 팔의 힘만으로 해낸 일. 인간 이상의 괴력이었다. 인간도 변종도 아닌 남자가 겨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드-실래오? 맛있어오…….” 내밀어진 것은, 연골이 덜렁거리는 무릎과 그 아래의 발끝까지. 겨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 125 [125화] #에이프릴 벤전스 (14) 변종에게 붙는 모기는 죽는다. 감염된 시체를 파먹은 짐승은 배탈을 앓는다. 더러운 피와 살엔 독성이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밝혀지지 않았다. 먹을 사람도 없고, 인체실험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많은 생각이 스친다. 변종이라고 보기엔 지능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 에타(η) 구울 즈음에 기초적인 어휘를 구사하긴 한다. 인간의 발화를 모방하는 수준에서. 완성된 문장은 어림도 없다. 게다가 남자는 생전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했으니. 변종이 아니라면,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은 결과일 것이다. 지능 저하와 썩어가는 피부. 얼마나 먹었을까? 얼마나 걸려 나타난 증상일까? 뒤쪽이 매우 중요했다. 지능 파괴가 현재진행형이라면, 부패한 남자는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움직일 순 없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곤란하다. 중요한 표본이었다. 제압해야 한다. 소리 없이. 정타 한 번이면 가능할 것이다. 겨울이 남자에게 다가간다. 친절을 받아들이는 척, 내밀어지는 손. 그것이 틈을 찌르는 기습이었다. 힘은 줄였으되 목적에 충실한 일격. 흐릿한 주먹이 남자를 후려친다. 콰득-! ‘반응속도가……!’ 맞기는 맞았다. 원하던 급소는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남자가 본능으로 몸을 굴린다. 예상 이상의 기민함이어서, 겨울은 제때 붙잡지 못했다. 와장창! 부패한 남자는 진열장을 무너뜨렸다. 인간을 초월한 빠르기로 피하며 더욱 시끄럽게 부딪혔다. 그리고 울면서 외친다. “아파오! 아파-! 왜애애, 왜, 왜 때려? 응? 왜애애애 때애애애-려!” 괴성의 합창이 들려왔다. 소란을 포착한 괴물들이 떼로 몰려드는 소리. 겨울은 인상을 찡그리고, 남자에게 소총 사격을 가했다. 타탕! 단 두 발. 양쪽 종아리가 찢어진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중요한 표본이라 죽이진 않을 작정. 싸우는 동안 달아나지 못할 통증이면 충분했다. 싸움을 마무리 짓고, 응급처치로 출혈을 막아야지. 그 뒤에 끌고 다닐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목전에 전투가 다가오고 있으니. 우선 이 남자를 기절시켜야 한다. “끄아아아아아! 피! 피! 아파! 이-거 봐! 나-아 여기이 피 나와아!” 남자가 울부짖었다. 추한 얼굴이 끔찍한 공포로 물들었다. 진열장을 겨울에게 집어던졌다. 거추장스러운 공격이다. 겨울이 피하는 반보를 틈타, 남자는 겁에 질린 주먹질로 강화유리를 박살냈다. 덕분에 팔뚝까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다친 다리보단 나았던가. 다리 대신 두 팔로 뛰었다. 이 또한 겨울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매점을 뛰쳐나갔다. 소년을 피하여 변종들에게 향하는 꼴이다. 어둠이 번뜩인다. 사격의 섬광이었다. 30발 탄창 세 개를 16초 만에 소진하는 조준사격의 폭주. 뛰쳐나온 겨울이 겨냥한 방향에서, 집단을 이룬 역병은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밀려나간다. 애초에 숫자를 줄여놓은 무리였다. 처음의 규모였다면 질량으로 밀었겠다. 강화된 전투기술에 대한 겨울의 적응은 아직이었다.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디까지 불가능한가. 그 경계가 불명확하다. 적응 못한 능력은 위험한 도구다. 그래도 이 싸움은 가능할 것이다. 매점으로 숨었던 건 부패한 남자의 안전 때문이었고. 격전의 와중에 남자까지 챙길 자신은 없었다. 그 땐 그저 생존자라고 여겼으니까. 14등급 「개인화기숙련」의 탄막으로 밀어낸 선 안쪽에, 급해서 두고 온 군장이 있었다. 겨울이 그 지점까지 돌파했다. 듬성듬성 살아남은 놈들을 제외하면, 시체로 가득한 개활지나 다름없었다. 물컹거리는 지반을 밟고 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양하게 붙은 보정의 영향. 오히려 변종들에게 장애물이었다. 제 속도를 내기 어렵다. 중심도 잡기 힘들다. 애초에 균형감각은 인간 이하인 것들. 자꾸 걸리고 넘어지는 놈들을 상대로, 겨울은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었다.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변종들에겐 유해가 쌓여 만들어진 늪지에 가깝다. 탄피 쏟아지는 소리가 좌르륵 흘렀다. 총열덮개 안쪽에서 아지랑이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재빨리 수통을 꺼내 물을 붓는다. 칙- 끓는 소리는 순간이었다. 군장엔 아직 탄창 수십 매가 남아있다. 다량의 수류탄도 있었고. ‘놓치면 안 돼. 죽어서도 안 돼.’ 겨울은 달아나는 남자를 눈으로 쫓다가, 당황했다. 변종들은 부패한 남자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직 겨울을 향해서만 이빨 부딪히며 달려올 뿐. 팔을 다리 삼은 남자는 무리지은 역병을 무인지경으로 가로지른다. 그는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것들이 남자를 동족으로 간주하나? 변종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당혹감을 미뤄두고, 겨울은 수류탄 세 개와 섬광폭음탄을 거의 동시에 뿌렸다. 막 던져도 제 위치인 것은 「투척」으로 붙은 보정이다. 수류탄의 지연시간이 타들어가는 3초. 겨울은 가까운 세 놈에게 총탄 세 발을 박은 뒤, 납작 엎드려 눈과 귀를 보호했다. 폭음은 뼈가 저리는 공명이었다. 어금니가 욱신거릴 정도의 강렬한 진동. 곧바로 일어선 겨울의 눈앞에 손이 있었다. 붙잡아 확 꺾는다. 이어 어깨를 밟아 으스러뜨리고 머리를 걷어찼다. 수류탄에 죽은 놈들은 스물 남짓이었다. 파편이 몸에 막혀서 그렇다. 그러나 죽지 않은 놈들도 몸을 가누기 힘들어 했다. 실내에서 중첩된 굉음과 강렬한 섬광 탓이었다. 겨울이 침착한 사격으로 죽음을 양산했다. 날카롭게 울리는 총성. 삐이- 하는 이명이 따라 붙는다. 거의 다 치웠다고 생각할 즈음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었다. 4층에 있던 것들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여기서 난처한 겨울이었으나, 천장에서 퉁탕거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 군장을 한 손에 쥔다. 남은 손으로 아홉 발을 나눠 쏘면서 벽면으로 붙었다. 몰리면 위험하겠으나, 여기에 환풍구가 붙어있었기 때문. 권총을 환풍구에 대고 여러 발 갈긴다. 안에 있는 것들에게 들으라고 쏘는 것이었다. 즉시 무기를 교환하고, 소총 탄창을 갈았다. 몇 개 없는 드럼 탄창이었다. ‘나중엔 쓰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든 게 많은 탄창은 기능고장을 일으키기 쉽다. 소총 상태가 좋을 때 써버리는 게 낫다. 깨애애액! 스무 발 연사를 갈기는 와중에 기다리던 것이 튀어나왔다. 겨울이 곁눈으로 보고 붙잡았다. 후려치면 체액이 터지니, 악력으로 뼈를 부순다. 뿌득. 태아 변형체의 무른 뼈가 박살나는 촉감. 부풀은 것을 폭탄 삼아 던진다. 직선으로 날아간 생체폭탄이 천장에 부딪히고, 변종들 머리 위에서 터졌다. 원초적인 비명이 터져 나온다. 겨울이 앞장선 대열을 우선적으로 해치웠다. 역시나, 뒤따르는 놈들은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두 눈 상한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안면이 점점이 녹아내리고 있다. 멀쩡한 것들은 멀쩡하지 않은 것들과 부딪힌다. 퉁탕퉁탕. 사정을 모르는 작은 것들이 환풍구 안쪽에서 연달아 가까워졌다. 「전투감각」과 「통찰」의 연동, 그리고 「생존감각」의 경고로 읽어내는 숫자. 간격 없이 오는 여섯이었다. 조금 부족하지만……. 겨울은 대로의 남은 거리를 헤아렸다. 잠시 후, 작은 괴물들이 천장에서 뚝뚝 떨어졌다. 작은 체구에 비해 도약력은 대단하다. 겨울을 향해 튀는데 흡사 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입은 작다. 따다닥 거려도 피해서 붙잡기 편했다. 붙잡힌 채 바동거리는 걸 보면, 스스로 터지지도 못하는 듯 하고. 새로운 변종은 기능적으로 불균형하게 마련. 이것들이 강화변종이 되면 어떻게 변할는지. 겨울은 붙잡은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또독. 그것만으로 목이 부러지는 변형체. 아직 살아있는 것들이 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것을 피하거나 밀어내며, 부풀기 시작한 사체를 「투척」한다. 남은 다섯을 마저 죽여 던진 뒤에야, 처음 던진 것이 폭발했다. 퍼엉! 펑! 샹들리에 높이에서 강산폭발이 잇따랐다. 이후 다시 가하는 사격. 폭발이 미치지 않은 공간을 우선적으로 긁어낸다. 언제나처럼, 싸움은 여백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므로. 겨울은 자신이 기여한 여백으로 스며들었다. 눈멀고 타들어가는 것들이 뻗는 손길. 그 손길 사이로 난 좁고 위태로운 길. 그 가운데 실질적인 위협만을 제거한다. 눈 먼 변종들이 숙주를 판별하는 수단은 후각과 청각뿐이었다. 서로를 붙잡아 냄새를 맡으려고 들었다. 그러다가 캬아아악! 소리 지르면 놓아주기가 일쑤. 조금 전에 붙잡은 것을 다시 붙잡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덕분에 멀쩡한 놈들조차 발이 묶인다. 썩은 손길이 얽혀 만들어진 거미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눈으로만 겨울을 노려본다. 캬아아아악! 타타탕! 총성이 울리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살아서 꿈틀대는 길이 수축해버리기 때문. 사격 즉시 자리를 이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몰되거나 물어뜯길 터이니. 「근접전투」가 유용했다. 계속되는 타격의 와중에, 강화된 기술에 적응하기는 덤이었다. 아, 참. 이게 있었지. 겨울은 주머니에서 걸리적거리는 것을 꺼냈다. 휙 던져서 단발사격으로 쏜다. 챙- 유리 깨지는 소리. 향수가 흩뿌려졌다. 지독한 향기가 번진다. 변종들의 후각이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거미줄은 더욱 끈끈해졌다. 마침내 겨울이 아우성치는 미로를 빠져나왔다. 적색 조명에 물든 선상 카지노였다. 뒤로 걸으며 멀쩡한 것들을 정조준한다. 타앙! 탕! 뒤엉킨 무리가 총성을 듣고 방향을 바꾼다. 그래봐야 얽히고설키는 속도였다. 이쪽을 똑바로 노려보는 놈들이 표적이었다. 연이은 사격. 마침 옆에 넓은 보드와 둥근 휠이 있었다. 룰렛 휠에 탄피가 튀었다. 맑은 쇳소리가 서른여덟 개의 번호 위에서 굴러다녔다. 그걸 보고 갸우뚱 하는 겨울. 휠 측면에 스위치가 달려있다. 떠오르는 것은 폐쇄회로를 통해 보았던 과거의 기록. 실제로 도박을 할 땐 손으로 돌리는 휠인데, 하지 않을 때도 전시용으로 돌아간다. 겨울은 그 자리에 서서 탄창 하나를 비웠다. 탄피가 룰렛으로 쏟아져 들어가도록. 그리고 눈 먼 놈들만 남은 시점에서 스위치를 올린다. 티잉, 팅, 팅. 공이라면 어느 한 숫자에 들어가 멈췄겠으나, 여럿 쏟아진 탄피들은 아니었다. 쉬지 않고 튀는 맑은 소리가 시야 잃은 변종들을 끌어들인다. ‘적어도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소란만큼의 유인요소가 되었으면 싶네…….’ 호화 크루즈는 바다 위의 5성 호텔이다. 방음은 충실한 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도, 생존자 탈출 과정에서 꾸역꾸역 내려오면 골치 아플 것이었다. 겨울이 조용히 물러난다. 얼굴 가죽이 끔찍하게 흘러내린 변종들은 룰렛 보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고통에 겨워 몸을 꺾는 기괴함이, 도박에 열중해 몸이 튀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이제 달아난 남자를 쫓아갈 때다. 「추적」으로 강조되는 흔적은 붉게 젖은 손자국이었다. 다리에서 흐른 피가 손까지 적셨나보다. 위아래를 뒤집고 잘도 이렇게 뛰어갔다. 꼴이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실제로는 위협적이다. 베타 구울 이상의 육체능력이었다. 특히 그 균형감각은 변종에게서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겨울은 총열에 물을 부으며 흔적을 쫓았다. 가냘프게 수증기가 흩어지는 소리. 짧고 격렬한 교전에서 혹독하게 써버렸다. 돌아가면 총열을 갈아야 할 것이다. 강선이 뭉개질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겨울의 판단을 「전투감각」이 긍정했다. 흔적은 중앙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적막이 허락한 여유 속에서, 겨울은 다시 한 번 남자의 정체를 고민한다. 지능과 감정이 있는 괴물. 감정 쪽에서 걸리적거리는 과거가 있다. 특수변종 험프백. 교전을 치르긴 했으나, 그 괴물은 명백히 두려워하는 몸짓을 보였다. 존재이유가 전투는 아니라는 듯이. 많은 양의 고름도 남자와 옛 괴물의 공통점이었고. 아니, 섣부른 짐작이다. 단정 지을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름은 보통의 변종에게서도 묻어나는 것이다. 면역거부반응의 산물이기에. 어쩌면 백신의 단서일지도 모른다. 본디 「역병면역」이 아니고선 만들어지지 않는 게 모겔론스의 백신이지만……. 혹시 모를 일. 유독 많이 달라지는 세계관이었다. 어떻게든 사로잡는 게 좋겠다. 겨울은 현실에 집중했다. 혈흔이 희미해진다. 말인즉 더러운 사내의 출혈이 줄어들었다는 뜻. 그러나 지금까지 쫓아오면서, 어디서도 사내가 멈췄던 흔적은 없었다. 회복력도 인간 이상인 모양이다. 추적에 지장은 없었다. 외길이었다. 4층 갑판의 중앙은 비어있었고, 전후는 역시 격벽으로 막힌 상태. 3층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레스토랑이 보인다. 층층이 있는 레스토랑 중에서도 가장 크고 호화로운 공간. 건너편이 바로 그랜드 갤리였다. 넓은 홀 가운데에 부패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남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겨울이 중얼거렸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 126 [126화] #에이프릴 벤전스 (15) 기아(飢餓)는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게 만드는 힘이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들의 살덩이는, 자식보다야 뜯어먹기 편했을 터이고. 그러므로 더러운 남자가 외롭지 않은 광경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함께 어기는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니까. 퍼억! 퍽! 퍼퍼퍽! 대리석은 무른 돌이었다. 빗발치는 총알을 맞아 둔탁하게 바스러진다. 한때 호화로웠던 홀의 입구. 조각상 뒤에 숨은 겨울에게 유백색의 날카로운 우박이 쏟아졌다. 「생존감각」의 묵직한 경고. 겨울이 몸을 웅크린다. 쿵! 직전까지 다리를 두었던 자리에 커다란 머리통이 떨어졌다. 고통스러운 이목구비. 눈동자 없는 눈은 소년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어떻게 할까. 요란한 총성이 메아리친다. 겨울에게 분노한 수십의 남녀는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뒹구는 로켓까지 보인다. 그러나 퍼붓는 건 소구경의 탄환들 뿐. 아무래도 소총 외엔 쓰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견착이 없어 조준도 엉망이다. 하기야, 평범한 민간인들이었을 테니. 문드러진 머리로 소총이나마 다루는 게 놀랍다. 그래도 숫자가 많아 위협적이었다. 죽이는 수밖에 없나?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고 하는 고민. 저들이 멀쩡한 사람이어도, 이런 상황에 대화를 시도하긴 어렵다. 하물며 뇌에 병변(病變)이 생긴 자들임에야. 운이 좋다면 몇 명 쯤 살려서 제압할 순 있겠다. 그러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다. 부서진 바리케이드와 빈 탄약상자 투성인 홀 너머에, 최종 목적지인 그랜드 갤리가 있었다. 그 안에 생존자 집단이 있을 것이고. 정신 나간 식인종들과, 그들이 아껴두었을 인수 불명의 식량이. 뒤쪽은 그저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겨울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홀로 곱씹는다. FBI 요원의 말을 듣는 편이 나았을지도. 사정이 어찌되었건 여유는 길지 않았다. 기댄 석상은 이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다. 기단까지도 위태롭다. 앞으로 5분이나 버티면 다행이겠다. 시간을 너무 끌었을까? 정면의 계단에서는 눈 먼 변종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넘어지고 더듬으며 꾸역꾸역. 흘러내리는 모습은 점성 높은 액체와 같았다. 탄피를 굴린 룰렛은 결국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변종들에게 소총을 겨냥하는 겨울. 조준선은 빠르게 정렬되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진 않는다. 무언가를 생각한 끝에, 총구를 슬며시 내렸다. ‘소란은 등 뒤에 있는걸.’ 눈 먼 놈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고개를 휙휙 꺾어 댄다. 따다다닥. 부딪히는 잇새로 더러운 침이 튀었다. 인간의 무기를 학습한 것들에게, 총성은 숙주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 겨울은 얼굴 녹아내린 무리가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끼아아아악! 사격에 맞은 놈들이 길라잡이였다. 비명을 듣고, 나머지 무리 전체가 방향을 잡는다. 석상 뒤쪽은 안전지대였다. 변종집단이 겨울의 눈앞에서 갈라진다.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었다. 밀려나거나, 특이해서 똑바로 다가오는 것들. 어쩌다보니 벽을 이루었다. 빠져나갈 틈새가 없다. 겨울이 뒤로 도약했다. 대리석 군상(群像)을 차서 몸을 뒤집는다. 살아있는 시체의 벽을 넘어, 그 뒤 허공을 휘젓는 손을 피해, 깔끔하지 못한 착지. 그러나 괜찮았다. 쿵. 발 딛고 무너져 무릎 까지 꿇는 소리는, 총포의 요란한 불협화음에 파묻혔다. 이제 겨울은 눈 먼 변종집단의 틈에 끼어든다. 굶주림으로 아우성치는 미로가 오늘만 두 번째. 빗발치는 총탄이 끼어 더 어려워진 조건이지만, 가능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엄폐물 삼아 교전을 개시한다. 타타탕! 삼점사로 한 여자의 머리를 날렸다. 직후 빠르게 피하는 겨울. 주위의 변종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이 곧 두꺼운 방호벽이었다. 얼마 버티지는 못했지만, 겨울에겐 몇 번을 더 쏘고도 남는 시간. 타타탕! 타탕! 타타탕! 타겟 하나에 두세 발을 쏘는 건 그들의 종양 때문이었다. 부풀어 오른 혹이 총탄을 받아낼 두께다. 그렇게 맞고도 즉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사람이었다. 죽은 동료를 보고 서럽게 울부짖는다. 그랜드 갤리 안에 있을 생존자들과도, 지금 방패삼는 이 괴물들과도 다른 모습. “여-어-보오오! 안 대애!” 죽은 아내 위에 엎드려 통곡하는 남자. 탕! 그 머리에 탄을 박으며, 겨울은 무척 불편해졌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거부감이 강해진다. 그러나 교전을 중단하기란 불가능했다. 사선경고가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앞서 부패한 남자를 기절시키려고 했던 기습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선 최선의 판단이었고, 되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불가피한 체념은 서두르는 게 좋다. 그 사이 변종들은 보이지 않는 겨울을 애타게 찾았다. 놈들 사이에서 총성을 터트릴 때마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때그때 무리 짓는 변종들의 배후에 엄폐, 지속적인 조준사격을 가한다. 겨울의 눈앞에서 변종들이 박살났다. 겨울을 죽이고 싶은 저편의 화력이었다.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준도, 한 데 엉긴 변종들을 상대로는 유의미하다. 피와 살이 한여름 소나기처럼 튄다. 소년은 깨끗할 수 없었다. 차라리 좋다. 눈멀어 냄새로 구분하는 것들의 틈새였으므로. 전신에서 역병 냄새를 풍긴다고 나쁠 것 없다. 수사관이 본다면 기겁을 할 테지만. 다만 입으로 들어가지 않게 주의한다. 이미 부패한 남자를 본 마당이었다. ‘속도를 조절해야겠어.’ 겨울은 이제 교전의 완급을 조절했다. 저편을 쏴 죽이는 데 제동을 건다. 변종들이 죽어 넘어지는 속도를 감안한 것. 엄폐물이 사라질 즈음 저편이 함께 무력화되는 게 바람직했다. 이때 울려 퍼지는 피 맺힌 절규. “왜애애애애! 왜! 마-맞-지 아, 아, 않-는 거야아아아!” 예의 그 남자였다. 겨울에게서 달아났던 때와 달리, 지금은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격노한 상태였다. 핏발 선 눈이 멀리서도 확연하다. 분에 못 이겨, 절뚝절뚝 뛰어온다. 그 새 다리로 걸을 만큼 상처가 아문 모양. 실로 인간을 벗어난 육체였다. 남자에게 변종들이 달라붙었다. 마구 밀어내며 다가온다. 사실 변종들을 방패로 쓰기는 겨울보다 남자가 더 유리했다. 타앙! 겨울은 그의 무릎을 쏘았다. 콰득. 다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아아아아! 아파아! 하아안겨어우우울! 으아아아아! 죽-인다! 죽일 거야 이 나쁜 놈아아아!” 남자를 구하러 동료들이 달려 나온다. 몇 명은 어설픈 몸짓으로 남자를 감싸고, 남은 몇 명은 변종들에게 붙잡히면서도 악에 받혀 사격을 해댔다. 그럴수록 명중률은 떨어진다. 철컥, 철컥. 몇몇은 탄창 가는 법도 잊은 것처럼 굴었다. 종래에는 모두가 그렇게 되었다. 낮은 지능과 극도의 흥분이 겹쳐 만들어진 희극이자 비극. 소년을 향한 비난과 욕설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바보, 멍청이!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언어들. 표정에 떠오른 격렬한 감정을 단 일할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변종들이 그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뭐?’ 겨울은 당황했다. 저들, 괴물 닮은 사람들은 공격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5층 갑판에서도 남자는 변종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달렸었다. 총기를 사용해서인가? 화약 냄새 때문에? 아니면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대서? 혹은……이것들이 그 사이에 학습을 한 건가? 부패한 남자와 그 동료들은, 겨울이 어찌해볼 틈도 없이 너덜너덜해졌다. 그것은 난폭한 밥그릇 싸움이었다. 배고픈 짐승들이 자기 먹기 편하도록 당기느라, 왈칵왈칵 피를 쏟는 육체가 공중에서 팽팽해진다. 뼈가 어긋나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 숙주가 아니라 먹이로 취급하고 있다. 산 인간은 감염시키고 죽은 인간은 먹어치우는 변종들에게 있어서, 남자와 그 동료들은 시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이 아연한 광경이 대체 무엇을 의미할는지. 겨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배에 오른 뒤, 무엇 하나 좋게 풀리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도 유쾌하지 않건만. “너……너-어……때…문에……!” 곁을 지나는 겨울에게, 잡아먹히는 남자가 분노를 토했다. 목구멍에서 피거품이 찔꺽거린다. 오래 가긴 어려울 것 같다. 묵묵히 스쳐간 겨울은, 부패한 남자와 동료들이 쓰지 못했던 무기들 중 하나를 골랐다. 피 묻고 녹슬어있는 한 자루의 기관총을. 철컥. 장전손잡이를 당기기 버거웠으나, 기능 자체는 살아있었다. 부서지고 무너진 바리케이드 안쪽에 빈 탄통이 널렸다. 그랜드 갤리로 쫓겨 들어가기 전, 총독이 펼친 마지막 방어선이 여기였을까? 겨울은 쌓인 탄통들을 발로 헤집었다. 와장창.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는 쇳소리들. 변종들의 주의가 되살아났다. 개의치 않는다. 발이 턱 걸리는 느낌. 꽉 찬 탄통의 무게감이었다. 숫자는 다섯. 충분하다. 탄통 끼운 기관총을 바리케이드 위에 올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카카카캉! 카칵! 카카칵! 보통 이상으로 날카로운 총성. 겨울은 카지노에서 여기까지 쫓아온 것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끼긱, 탄이 걸릴 때마다 손잡이 당겨서 빼내기가 번거로웠다. 나쁜 환경에서 하루만 방치해도 잔고장이 생기는 무기답다고나 할까. 눈멀고도 달려오는 괴물들. 평탄한 길이 잘 없었으므로, 장애물 위에 걸린 시체들이 될 뿐이다. 애초에 수가 많이 줄어있기도 했다. 용케 직선으로 달려오던 한 놈은,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산산이 분해된다. 다섯 개 째의 탄통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혹시 모르니 장전은 해둔다. 총독과의 교섭이 순탄치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조용해진 홀을 가로질러, 다시 한 번 부패한 남자에게 다가가는 겨울. 그는 죽어있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겨울은 고개를 기울인다. 불쾌했다. 착각으로 만족하는 세계가 거듭되면서, 긍정적인 자극도, 부정적인 자극도 익숙해진지 오래였건만. 미련 없는 삶이라 더 이상 마음 흔들릴 일도 없는 걸까. 그렇게 여겼었는데. ‘괴물처럼 변했어도 사람은 잡아먹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사람을 잡아먹고 괴물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사람의 마음을 가진 쪽은……가려낼 것도 없는 문제인걸.’ 그렇지만, 죽어있는 이 남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다시 생각한다. 몸 없이 마음만 있는 자신. 몸은 있으나 마음은 없는 저 바깥세상의 사람들. 마지막으로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인격들. 겨울이 보기에, 이 중에 온전히 사람이라 해도 좋을 경우는 없는 것 같았다. 육체, 마음, 본질. 무엇 하나 인간의 조건 아닌 게 없다. 겨울은 그렇게 믿었다. 여기나 바깥이나 사람 없기는 매한가지인 세상이라고. 이렇게 미워하면 안 되지. 겨울이 한숨을 쉬었다. 화풀이를 해야겠다.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은 아닌 것을 죽일 수 있다면 좋겠다. 한 맺힌 돌의 무게가 도리어 시원해질 그 느낌을 원한다. 갈수록 얻기 어려운 감각이다. 총독은 제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필요 없는 뼈 하나를 골라두었어야 할 텐데. 겨울은 기관총을 들고 그랜드 갤리로 이어지는 통로로 다가갔다. # 127 [127화] #읽지 않은 메시지 (6) [전국노예자랑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전국노예자랑 : 지금까지 쭉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진행자 얘 참 잘 싸운다. DLC 떡칠로 밀어 붙이는 다른 채널들하곤 많이 다르단 말이야…….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まつみん님이 별 3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 : 상황판단이 훌륭한 것 같아요. 아까 탈의실에서 연막탄을 그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방금 괴물들을 방패로 쓴 것도 그렇고. 우리 겨울 씨는 뇌까지 섹시하다니까요. 에헤헤. (*´▽`*)」 「고자질하는_고자 : 현질에 의존하지 않는 건 인정. 연기력도 인정. 죽은 남자 보면서 우울해할 때 진짜로 우울한 거 같더라.」 「まつみん : 연기? 제가 보기엔 연기가 아니라 진짜 우울해하는 거 같던데요?」 「짜라빠빠 : 엥?」 「まつみん : 평소에 만드는 표정하고 달랐잖아요.」 「이불박근위험혜 : 달라? 뭐가? 어떤 면에서?」 「まつみん : 에……. 어떤 면에서냐면……. 으……. 그냥 보면 아는 건데……. 진짜 모르겠어요? 나만 느꼈어요? (;´д`)」 「이불박근위험혜 : 전체 얼굴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옴? ㅋㅋㅋ」 「まつみん : 네! 대충 그런 느낌!」 「빌리해링턴 : 모르겠는데. ^^」 「헬잘알 : 22222222」 「20대명퇴자 : 33333333」 「앱등이 : 마츠밍 언니 좀 이상한 듯. 애초에 남자 취향부터가 정상이 아니잖ㅇ…….」 「まつみん : 힝.」 「SALHAE : 그런 건 모르겠고, 이유라 못 보는 게 슬프다. 총 들고 웃을 때 참 예뻤는데.」 「SALHAE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SALHAE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에엑따 : 뜬금없기는. 누가 들으면 진행자 뒤진 줄 알겠다 야. ㅋㅋㅋㅋ」 「돌체엔 가봤나 : 아, 뭐야. 애 밥 먹이러 다녀오니 재밌는 부분 다 지나갔네. 다이제스트 돌려봐야 하나……? 흐름 끊기는 거 극혐인데. 짱난당. -_-」 「무구정광대단하니 : 밥을 먹여? 애가 몇 살인데?」 「돌체엔 가봤나 : 세 살. 맨날 울고불고 꼴배기 싫음. 밥은 또 더럽게 안 처먹어. 시애미는 입으로만 떠들지 도와주지도 못함. 병들어서. 찌발.」 「깜장고양이 : 밥을 직접 만들어 먹이는 고양? 세상에, 요즘 아무도 그렇게 안 하는 고양.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고양? 양육기에 넣어두면 놀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운동시켜주고 똥오줌까지 치워주는 고양.」 「조선왕조씰룩 : 일겅. 나도 둘 낳아서 넣어 놓고 신경 끔. 근데 첫째는 꺼낼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에휴. 그거 어떻게 기르지? 걘 나랑 남편을 맨날 보고 자랐겠지만 난 걔 5년 만에 처음 보는 건데. 생각만 해도 겁나 어색하다. 지원금 받았으니 어디 보낼 수도 없고.」 「돌체엔 가봤나 : 나도 그러고 싶은데……. 우리 미친 시애미가 양육기 쓰지 말라고 하잖아. 애테크 하느라 셋째까지 낳긴 했지만, 시애미 땜에 힘들어 뒤지겠음. 이유를 물어봐도 맨날 당연한 거라고만 하고.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년. 남편도 내 편인데 꼴에 어머니라고 쩔쩔 맴. 병신 같음. 우리 늙탱이 하루 빨리 뒤졌으면.」 「병림픽금메달 : 패드립 수듄. 근데 애테크가 뭐냐?」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애 + 재테크.」 「병림픽금메달 : ㅋㅋㅋ? 애를 낳아서 재테크를 한다고? 그게 가능함?」 「둠칫두둠칫 : ㅇㅇ 가능. 출산위로비 지급해 주잖음. 덤으로 휴가도 주고.」 「병림픽금메달 : 야. 양육기도 가상현실 단말이잖아. 그 값은 어쩌는데? 비싸지 않음?」 「깜장고양이 : 구입하는 게 아닌 고양. 주민 센터에서 대여해주는 고양. 대여료는 자식 책임으로 넘길 수 있는 고양. 성인 되고 갚는 고양. 필수는 아닌데 다들 그렇게 하는 고양. 셋째까지만 되는 고양. 원래 제한 없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악용한 고양. 일 안 하고 애만 낳은 고양. 이거 모르는 사람 드문데 넌 왜 모르는 고양? 혹시 조선족인 고양?」 「병림픽금메달 : 그 좆같은 말투 그만 둘 순 없는 고양? 병신아, 조선족이 아니라 걔들 관리하는 입장이다. 외노자 새끼들이랑 부대끼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딴 거 알아볼 겨를도 없다.」 「하드게이 : 알아볼 겨를이 없는 게 아니라 연애할 겨를이 없는 거겠지.」 「무스타파 : 연애를 못 하니 결혼은 꿈도 못 꾸겠고」 「헬잘알 : 결혼은 꿈도 못꾸니 애 낳고 어쩌고 하는 건 알아볼 이유가 없었겠지.」 「질소포장 : 어이구, 병림픽 이 불쌍한 새끼.」 「려권내라우 : 겁나 나쁜 새끼덜ㅋㅋㅋㅋ 남 괴롭힐 땐 귀신 같이 잘 맞아욬ㅋㅋㅋㅋ」 「병림픽금메달 : 개새끼들아 존나 고맙다 ^^」 「깜장고양이 : 괜찮은 고양. 어차피 연애결혼은 갈수록 줄어드는 고양. 다들 계약결혼인 고양. 너도 너만의 암고양이를 얻을 수 있을 고양. 보나마나 병신이겠지만 힘내는 고양. 세상 어딘가엔 너 같은 병신도 좋아할 고양이가 있을 고양.」 「내성발톱 : 위로를 하든 욕을 하든 한 가지만 해 ㅋㅋㅋㅋ」 「깜장고양이 : 어쩔 수 없구냥. 그럼 욕을 하겠는 고양.」 「내성발톱 : 뭐가 어쩔 수 없엌ㅋㅋㅋ 좆냥이 묘성보소」 「엑윽보수 : 돌체엔 가봤나 저 아줌마도 불쌍하네. 틀딱충 땜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다니 ㅋㅋㅋ」 「まつみん : 글쎄요……. 안 해도 될 고생보다는, 할 보람이 있는 고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일본에서도 반반이에요. 하겠다는 사람, 하지 않겠다는 사람. 그러니 경멸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눈밭여우 : 아이는 부모가 직접 키워야 해요. 그게 사랑 아닌가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동감. 애 정서에 좋을 것 같지도 않고.」 「엑윽보수 : 뭐야 이 연타석 병신 연놈들은. 사랑이야 그렇다 치자. 정서에 나쁠 건 또 뭔데? 틀니 딱딱거리는 소리 여까지 들린다. 할배, 몸 있어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나 아직 할배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다. 그리고 넌 가상인격이 부모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는 거냐? 난 어렵다고 본다.」 「엑윽보수 : 그러니까 왜 어렵냐고 등신아 ㅋㅋㅋ 그걸 관리하는 게 사후보험 관제 AI의 서브루틴인거 모름?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이 돌보는데 어쭙잖은 부모 새끼들보다야 당연히 낫겠지. 철저하게 검증된 프로그램으로 육아를 실시하는데. 사람처럼 실수하는 일이 없다고. 언더스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이해를 못하는 건 너다. 5세 이하의 영유아에게 제대로 된 TOM 기관이 있겠냐? 트리니티 엔진이 만드는 가상의 부모에겐 인간적인 깊이가 없단 말이다. 능동형 검색 모듈이랑 왜 있는지도 모를 제3모듈만으론 깊이 있는 인격이 안 나오잖냐.」 「질소포장 : ㅋㅋ 얘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깊이가 없는 건 맞아. 근데 애를 상대로 깊이가 왜 필요해? 아는 것도 없는데. 어린애가 무슨 철학적인 질문이라도 던짐? 쬐끄말 땐 우루루 까꿍 좀 해주고 둥가둥가 좀 해주면 그만 아님?」 「질소포장 : 슬슬 뭘 알 나이쯤 되면 원래 부모가 찾아가는 거 아니냐. 양육기 대여제도 도입 후에 영유아 사망률이 굉장히 줄었다는 거 알아? 출산율은 늘고?」 「엑윽보수 : ㅇㅇ 그게 팩트지. 부모가 직접 먹이면 영양 밸런스 맞추기도 어렵잖아. 병에 걸릴 확률도 높음. 애가 말을 떼고 나오니 부모는 또 얼마나 편하냐? 선진적인 시스템인데 괜히 국격 깎고 있어. 구태의연한 소리 늘어놓는 걸 보니 저것들 다 전라도 출신인 듯.」 「똥댕댕이 : 전라도 욕하지 마라 시발놈아 ㅡㅡ」 「엑윽보수 : 네 다음 홍어.」 「똥댕댕이 : 어휴 벌레새끼.」 「눈밭여우 : …….」 [눈밭여우님이 별 3,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groseillier noir : 이봐, 한국인들. 난 너네 정부의 양육지원 시스템이 딱히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말이야, 부모의 입장도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헬잘알 : 무슨 소리야 바게뜨?」 「groseillier noir : 저 위에서 어떤 여자가 그랬잖아. 자식이 낯설다고. 부모가 그러면 안 되지. 5년 만에 본다고 했는데, 낳자마자 기계에 넣는 건가? 중간에 꺼내지도 않고?」 「무구정광대단하니 : 분기별로 점검할 때 잠깐씩 빼긴 해. 영양액 보충할 때랑. 근데 그건 보건복지부 소관이라 보건소에서 사람이 나옴.」 「groseillier noir : 에이. 그러면 안 되지. 자식에게 정 붙일 시간은 있어야지.」 「Ephraim : 글쎄. 니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쟤네들한테는 저게 딱 좋은 듯.」 「groseillier noir : 왜?」 「Ephraim : 이 채팅방을 보라고.」 「groseillier noir : ……!」 「믓시엘 : 이건 또 무슨 대화야?」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부모가 되는 걸 상상해보라는 뜻 아니겠냐?」 「まつみん : wwwwwwwwwwwwwwww」 「동막골스미골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앱순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 슬푸당…….」 「9급 공무원 : ㅋㅋㅋ 이 필리핀 새키 말하는 거 보게?」 「피자는당연히라지 : 야. 여기 있는 애들이 병신 같긴 한데, 한국인들이 다 이렇진 않아.」 「진한개 : 그건 네 희망사항이겠지.」 「피자는당연히라지 : 부모가 되면 철이 들지도 모르잖아? 타고난 부성, 모성이라는 것도 있는 거고.」 「진한개 : 그것도 네 희망사항이겠지.」 「피자는당연히라지 : 캐새키야. 넌 애국심도 없냐?」 「진한개 : 에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이슬악어 : 하긴…….」 「피자는당연히라지 : 뭐가 하긴이야…….」 「엑윽보수 : 이게 다 틀딱충들 때문이다. 늙어서 납골당 안 들어가고 꼬장이나 피우니까 문제가 생기지. 정부는 뭐하나? 늙은 것들 뇌 안 뽑아가고. 나라에서 강제로 집행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럼 또 공권력 남용이라고 지랄거리겠지?」 「질소포장 : 공감함. 사고방식 꽉 막혀서 자식 세대에 빽빽거리면서 현실에 남아있는 거 진심 꼴사나워. 돈이라도 있으면 또 몰라. 추하게 늙는다는 게 딱 그런 거지.」 「50년째 린저씨 : 야,,,이놈들아,,,너네도 언젠가는 늙는다,,,정부가 너네 사상부를,,,강제로 적출하면,,,퍽이나 좋겠구나,,,쒸뿔,,,가정이 무너지고,,,사회가 무너지고,,,」 「엑윽보수 : 난 좋은데?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발 내 뇌 좀 뽑아갔으면.」 「돌체엔 가봤나 : 진심 우리 시애미년은 강제로 적출해야 함.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무서워하지? 글구 난 다들 나한테 당연히 공감할 줄 알았는데 아닌 사람이 많네. 야 이 대가리 빻은 것들아, 니들이 직접 애를 키워봐.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알기나 함? 아오,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 「눈밭여우 : 나는 키워봤어요. 그리고 키우고 싶어요. 함께 있고 싶고, 그 작은 손을 잡아주고 싶어요……. 당신은 이 마음을 모르는군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돌체엔 가봤나 : ㅋㅋㅋ 이게 무슨 소리얔ㅋㅋㅋ 자격이래 ㅋㅋㅋ 부모가 되는 데 자격 같은 게 어딨어? 낳으면 부모인거고 낳음 당하면 자식인거지.」 「눈밭여우 : 낳음 당하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당했다고 말할 만한 삶을 살게 하려면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더 낫겠어요!」 「돌체엔 가봤나 : 야, 여우년아. 결혼도 사랑으로 하지 않는데 애라고 사랑스럽겠냐? 웃겨 정말 ㅋㅋㅋ 사랑은 사치스러운 감정이야. 없어도 살 수 있어.」 「눈밭여우 : 당신 아이가 정말 가엾군요. 앞으로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게 될지…….」 「폭풍224 : 글쎄. 지금 같이 좋은 세상에 낳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후보험 없을 때 태어났어봐. 어휴, 죽으면 그걸로 끝이잖아?」 「폭풍224 :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이 열리는 건데. 자살하지 않고 열심히 살면 낮은 등급으로나마 무조건 안치될 수 있잖음. 우리 부모가 씹흙수저이긴 해도, 난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진심. ㅇㅇ」 「9급 공무원 : 동의한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냐? 우리는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다.」 「SALHAE :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면회 안 가면 방법이 없잖아. 그것도 사전에 허가 받아야 하고. 하도 번거로워서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기껏해야 「텔레타이프」로 채팅 하는 수준인걸. 진행자가 안 들어오면 그나마도 불가능하고.」 「9급 공무원 : 그거야 보안 문제니까 어쩔 수 없지. 사후보험을 노리는 놈들이 좀 많냐? 사후보험 쪽으로 전송되는 데이터가 많을수록 위험하잖아. 데이터 검사에 많은 자원을 할당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사후보험의 품질 감소가 필연적인 것을.」 「SALHAE : 아, 몰라. 진행자 얘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네.」 「동막골스미골 : 뭐하러?」 「SALHAE : 얼굴 맞대고 부탁 좀 해보려고.」 「동막골스미골 : 뭐를? 섹스를? ㅋㅋㅋ 진짜 대단한 정성이다.」 「SALHAE : 아닌데…….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맞겠다. 난 이유라를 원하는 거니까. 섹스가 목적은 아니지만,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제시카정규직 : 얜 어쩌다 이렇게 됐냐.」 「BigBuffetBoy86 : 오, SALHAE. 너는 오타쿠 같군. 실존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집착하다니. 하하하.」 「SALHAE : 위로가 필요해. 체온이 필요해. 근데 그게 왜 이유라일까? 나도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냐.」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첫눈에 반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놈의 DLC 때문에 지나치게 희화화 되어버렸지. 걸핏하면 첫눈에 반하는 걸로 처리해버리니 원. 다들 그걸 보면서 즐기니 인식도 변할 수밖에.」 「불심으로대동단결 : 중생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대는 끝났어.」 # 128 [128화] #경영합리화위원회, 2053년 「위원 A : 아, 위원님들. 딴 짓 그만 하시고 온라인으로 돌아오세요. 지금부터 한국 경제개혁위원회의 정기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가만있자, 이게 몇 번째 회기더라?」 「위원 B : 이 사람 참. 오늘 우리는 경제개혁위원회가 아니라 사후보험공단 경영합리화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모인 겁니다. 데이터도 엉뚱한 걸 불러놓으셨네. 수정 부탁드립니다.」 「위원 A : 아차차……. 죄송합니다. 비서가 실수를 했군요. 사실 저도 좀 헷갈립니다. 보는 얼굴들이 매번 똑같다보니. 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 「위원 E : 뭐 이해는 합니다만, 슬슬 긴장해야 할 시기 아니겠습니까? 낙원그룹 경영권이 고건철 회장 손에 넘어갔어요. 공단 감독 권한이야 아직 우리가 쥐고 있지만, 고 회장 그 욕심 많은 폭군이 언제까지 손 놓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내년부터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할 테지요. 그걸 막으려면 이번 임기 내에 괄목할만한 실적 개선이 있어야 합니다.」 「위원 C : 실질 보장기간 단축 말이군요.」 「위원 E : 경영합리화라고 말씀하셔야죠. 구체적인 표현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위원 C : 괜찮잖아요? 여기가 전자정부 서버라면 또 모를까.」 「위원 E : 그래도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 새는 법이에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고요. 어차피 다 함께 잘 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국민들은 그걸 몰라줄 거란 말예요. 진짜 의도를 떠나 사소한 표현을 물고 늘어져서 서운했던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랍니까? 얼마 전 닭장 발언으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다들 그렇게 부른다기에, 분위기나 띄워볼까 해서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위원 C : 네, 네.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그렇죠. 주의할게요.」 「위원 B : 시민의식이 후져서 그래요. 공감할 줄도 모르고.」 「위원 A : 잡담은 거기까지. 준비되셨으면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사후보험 세계관의 내적 다양성 확장을 통한 서비스 만족도 향상에 관해 말씀 나눠보도록 하지요. 아시다시피 올 1/4분기부터 시험적으로 입안한 계획입니다만, 그 성과가 벌써부터 꽤 괜찮은 것 같거든요.」 「위원 D : 그래요? 그럴 리가……. 만족도가 실제로 늘어서 잉여 가입자들의 연명기간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위원 A : 하긴 그때 강력하게 반대하셨지요. 사실상의 무상복지 확대였으니까요. 초기의 리소스 사용량이 워낙 많기도 했고요. 하지만 결과는 고무적입니다. 이 도표를 봐주십시오. 배부된 연구용역 보고서도 참고하시고요.」 「위원 B : 오, 이거 훌륭군요. 잉여 가입자도 줄고, 수익률도 늘었고, 리소스 사용량은 감소 추세에요. 이대로 가면 내년 안에 평년의 리소스 점유율을 회복할 수 있겠어요.」 「위원 D : 어디보자……. 무작위 변수의 증가는 곧 잠재적 위협의 증가다. DLC 등의 수익성 부가상품 소비 없이 장기 존속하던 잉여 가입자들이, 급격히 개선된 다양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는 겁니까? 부가상품 정책 심사가 어느 분 담당이셨죠?」 「위원 E : 접니다.」 「위원 D : 관계자로서 어떻게 보시는지?」 「위원 E : 저희 쪽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와 상승효과를 일으킨 게 아닌가 싶네요.」 「위원 D : 음? 뭔가 있었습니까?」 「위원 A : 저기, 부가상품은 다음 의제로 논의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위원 E : 기왕 말이 나왔으니 언급하고 넘어가요. 어차피 같은 문제의 연장선상이잖아요.」 「위원 A :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보군요.」 「위원 E : 자랑 좀 하려고요. 후후.」 「위원 C : 허.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위원 E : 별 건 아니지만요. 잉여 가입자들에게 특정 유형의 부가상품들을 집중적으로 판촉하고 있거든요. 국가유공자에겐 무상으로 지급하기도 해요. 국가유공자들은 구매력이 유달리 낮은 경우가 많은지라. 보훈 명목으로 예산을 끌어오기도 좋고.」 「위원 C : 특정 유형의 부가상품? 그건 어떤 유형이지요?」 「위원 E : 내적으론 킬링 컨텐츠라고 부르는 것들이에요. 가입자 본인을 파격적으로 강화하거나, 가상인격의 심리를 큰 폭으로 제어하거나, 개연성을 무시하고 세계관을 개변할 수 있는 강력한 부가상품들이랍니다. 공공사업으로 여러 업체에 하청을 맡기고 있어요.」 「위원 C : 킬링 컨텐츠라. 알 것 같군요.」 「위원 E : 네. 탄산음료 같은 거죠. 마실 땐 달고 시원하지만, 금세 목이 마르게 되는.」 「위원 C : 즉 변화한 세계관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자, 그걸 극복하기 위해 킬링 컨텐츠를 구매하고 있다?」 「위원 E : 네.」 「위원 B : 글쎄요. 잉여 가입자들은 적어도 수 년, 심하면 십년 이상 아무 것도 구매하지 않는 경우가 많던데……그 사람들이 돈을 쓴단 말입니까? 그것도 계정 존속이 불가능할 만큼?」 「위원 E : 대체로 노인들이거든요. 예치금 아낀답시고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오랫동안 반복해온 사람들이에요. 상상해보세요. 그 사람들 머리가 얼마나 굳어 있을지.」 「위원 C : 흥미롭군요. 하기야 그렇지요. B 등급 이하의 가입자들은 시스템 보안상 서로 격리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주위엔 얼간이 같은 가상인격들밖에 없었을 테고요.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지요.」 「위원 E : 바로 그거예요. 갑자기 변화한 세계에 당황하는 노인들에게 킬링 컨텐츠의 무료체험과 그 후의 할인 구매 기회를 제공했거든요. 처음엔 금전 부담이 없으니 선뜻 써버리는 거죠. 그리고 통계상 한 번 쓴 사람이 다시 쓰지 않는 경우는 20% 이하랍니다. 아, 그렇지. 처음 등록할 때 『무료기간 종료 후 유료 서비스로 자동 전환됩니다. 원치 않으시면 직접 해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는 식으로도 동의를 받고 있어요.」 「위원 B : 근데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알려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제도적인 안락사라고 비난받을 겁니다. 닭장 발언 따위는 장난에 불과하겠죠.」 「위원 E : 어휴. 제가 설마 두 번 당할까요. 당연히 주의하고 있어요.」 「위원 D : 어떻게?」 「위원 E : 잉여 가입자 전체에게 판촉을 띄운 건 아니에요. 중계채널을 운영하지 않고, 개인적인 명성이나 대외적인 파급력이 없으며, 3년 내 면회 기록이 없는 사람을 선별했죠.」 「위원 D : 현명하군요.」 「위원 E : 그리고 누가 강제로 폐기시키나요? 중계채널 열어서 수익을 창출하면 되잖아요. 본인 만족도도 높이고, 국가경제도 성장하고. 일석이조인데. 연명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게을러서 폐기되는 걸 나라 탓 하면 안 되죠. 노력을 해야지.」 「위원 C :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DLC 사용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 아닙니까. 젊어서 놀고 먹느라 저축한 돈도 없는 주제에, 기초연금 전환으로 100년 넘게 존재하는 것도 참 염치가 없지요. 젊은 세대의 고혈을 언제까지 빨아먹을 작정인지 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건 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위원 A :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품고 가기엔 나라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요.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게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사명일 겁니다.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이지요.」 「위원 E :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걸요.」 「위원 B : E 위원.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됩니까?」 「위원 E : 말씀하세요.」 「위원 B : 세계관 개선에 관해 민원이 들어오진 않습니까?」 「위원 E : 그야 물론 들어오죠.」 「위원 B : 흠.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위원 E : 실제로 별 것 아니거든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가상현실 세계관의 품질을 대가도 받지 않고 끌어올렸을 뿐인걸요. 구매력이 충분한 계급……실례. 구매력이 충분한 등급의 가입자들은 무척 좋아하고 있어요. 기준을 설정하기에 따라서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답니다. 통계의 마술이죠.」 「위원 C : 아직 사후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민들 쪽은 어떻지요?」 「위원 E : 본인들이 안치될 가상현실이 질적으로 상향되었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늙은이들이 잘 해줘도 불만이라는 평가가 많죠. 대부분은 관심 없고요. 가족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요?」 #골든게이트 (1) 서쪽에는 수평선, 동쪽에는 해안선. 일본 선적의 화물선 코로나 트라이엄프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겨울은 선수에서 노을빛 항구를 바라보았다. 아직 수십 분 더 갈 거리임에도 제법 가깝게 느껴진다. 필리핀 선원들도 갑판으로 나와 떠들어댔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차고 거칠었다. 갑판이 넓기도 하고. “지난 일은 잊어버리세요.” 유독 선명한 목소리는 FBI 감독관 조안나 깁슨이었다. 돌아보는 겨울에게, 원숙한 수사관은 한 잔의 커피를 내밀었다. 바닷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가 어딘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받아요. 카페 로얄이에요.” “고마워요, 앤. 코코아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별 것 아닌 말인데 수사관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전에 비해 격식 없는 모습. 유령선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을 이름으로, 괜찮다면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이상하지는 않았다. 나이를 떠나 친구가 될 수 있는 문화권이었으므로. 아니, 목숨 걸린 임무를 앞두고 친구를 만드는 건 좀 이상하지. 머그컵에서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온다. 후 불고 한 모금 머금는 겨울. 카페 로얄이라고 했던가?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풍미다. 원두의 향취에 부드러운 포도향이 어우러졌다. 싫지는 않았다. 꼴깍, 꼴깍 삼키는데, 몸이 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은 눈살을 살며시 찡그린다. 「생존감각」의 경고가 떠있었다. “이거 칵테일인가요?” 조안나 깁슨이 어깨를 으쓱인다. “카페 로얄이라니까요. 브랜디가 들어가긴 했지만 칵테일까지는 아닙니다.” 겨울의 떫은 낯을 보더니, 수사관이 또 한 번 상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제 방식으론 각설탕을 하나 넣을 때마다 브랜디도 한 스푼이 들어가죠. 스푼 위에 설탕을 놓고 불을 붙이는 거예요. 브랜디의 독기가 빠지면서 캐러멜 향이 덧씌워진답니다.” “불이 붙으려면 적어도 100프루프(50도) 이상일 텐데요.” “그렇죠. 독할수록 좋아요. 여기엔 그라파, 120프루프가 들어갔고요.” “……한두 스푼 들어간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음, 다섯 스푼 정도 넣었던가?” 60도짜리 독주가 다섯 스푼. 평범한 칵테일이잖아. 술은 감각보정을 무디게 만든다. 과용과 장복에는 부작용도 따른다. 기분 좋은 느낌이 찾아오긴 했다. 감각재현의 기술적 성취 사례로서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 일시적으로나마 전투력을 깎아먹는다는 점에서 즐길만한 음료는 아니다. 겨울은 난감한 음색을 지어냈다. “이제 곧 도착인데 술을 주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골든게이트에 도달하더라도 접선하기까지는 또 한참 걸릴 테니까요. 정보국 요원들의 낯짝은 자정 이후에나 볼 수 있을 겁니다. 보시죠. 저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원이 가리킨 방향엔 늦은 오후의 바다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부표가 줄지어 떠있었다. 요란한 원색인데다 숫자도 워낙 많다. 쓰레기가 엉겨있어 더욱 도드라진다. “혹시 기뢰원인가요?” “정답.” 그녀가 설명했다. 항만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고. “해안 봉쇄를 위해서 뿌려둔 거죠. 에이프릴 퍼시픽에서 보셨던 것처럼, 타 대륙의 변종들이 상륙하면 곤란하니까요. 위성전파로 전 세계에 경고하고 있어요. 해안에 함부로 접근했다간 기뢰에 접촉하게 될 거라고. 구호를 원한다면 미 해군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샌프란시스코 방향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있었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탄막이 화려하게 뿌려졌다. 뻥! 부우우우욱-! 포성과 기관포의 소음은 한 발 늦게 도달했다. 경고사격을 받은 배가 황급히 선수를 돌린다. 작고 빠른 배였다. 기울어진 상태에서 파도를 맞았다. 중심을 회복하지 못하는 가 싶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다. 바닷물이 쓸고 지나간 갑판 난간에 사람이 매달려있다. 동료가 얼른 끌어올려주었다. 그 외에도 만 진입을 원하는 무수한 선박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은 순찰을 도는 미국 구축함의 경계범위 바깥에 머무른다. 체념한 것처럼 닻을 내리고 있다. 무리하게 진입하던 작은 배는 얼마 없는 예외 중의 하나였다. 겨울이 말했다. “에이프릴 퍼시픽은 제 실수였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예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 129 [129화] #골든게이트 (2) 항상 모든 일이 잘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종말 이후」가 반복되면서 치명적인 실패가 드물어졌고, 겨울 역시 거기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섬으로서, 사람은 극복하지 못할 상황을 극복하는 것. 생전에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이었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보다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 세상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쓸 때의 일이라, 시간이 지난 지금은 타성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에이프릴 퍼시픽이 끈적거린다. 타르 같은 실망감. 이만한 실패는 오랜만이었다. 조안나가 쓴웃음을 짓는다. “비록 사람을 구하진 못했지만 수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전까지 보고된 바 없었던 특수변종들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변종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그렇고요. 긁어 오신 샘플은 보건서비스부대에게 유용할 겁니다. 여기엔 정치적인 의의도 있지요.” “정치적인 의의?”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라고 해야 할까요……? 정치인들은 언제나 폭로의 위협을 경계합니다. 현재의 봉쇄전략은 인도적인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죠. 민간선박들조차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독백처럼 물었다. 해군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을 수장시켰겠습니까? 지력보정의 유추 범위를 벗어난 질문이었다. 가감 오차가 지나치게 크다. ‘십만? 백만?……혹은 천만?’ 현실감 없는 숫자. 그러나 농담이 아니었다. 1만 톤 이하의 배조차, 작정하고 태우면 1만 명 이상이 들어간다. 이런 배 열 척만 격침시켜도 10만이었다. 이번 세계관이 시작될 때를 돌이켜본다. 캠프를 탈출하는 난민들에게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었다. 난민 지원병을 모아야했던 배경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미군 병사들이 존재했다. 엘리엇의 말처럼 가족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한 일이 그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항모전단 사령관, 키치너 제독 역시 인력부족을 호소했었다. 관계가 있을 것이다. 파일럿의 명령 거부까지 포함해서. “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서로를 물어뜯을 생각으로 가득하죠. 정보관계에 있으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들을, 겨울 당신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익숙하긴 하지만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 정권교체가 인류의 존속보다 더 중요한 걸까요?” 그녀는 한숨 쉬듯 읊조렸다. 높으신 분들은 사고방식이 어찌나 남다른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요. 사는 세상이 다르면 삶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대꾸하는 겨울에게 조안나가 눈살을 찌푸린다.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요? 멸망을 앞둔 하나의 세상이 아니라?” “글쎄요……. 한 사람의 세상은 그 사람이 보고 느낀 조각들의 모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누구나 자기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서로 공감하는 만큼만 비슷해질 뿐이고요.” 이 시점에서 겨울은 심리치료를 되새긴다. 같은 색이라도, 사람마다 실제로 느끼기는 서로 다른 색이 아닐까. 상담사를 가장한 여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색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사람과 본질은 감각을 경계로 유리되어있다. 누구나 자신의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살아간다. 그 간극을 줄이는 게 바로 공감이었다. 짧은 생전에 길게 느낀 바였다. “음, 잘 모르겠군요.” 추상적인 이야기에 고개를 흔드는 FBI 수사관. 모호한 표정은 몰이해의 증거였다. 조심스러운 기색이 엿보인다. 겨울의 말을 사춘기의 흔적쯤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혹은 그렇게 느꼈으나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경계심 같았다. 익숙하게 읽고서, 겨울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수사관은 대화를 현실로 되돌렸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에이프릴 퍼시픽에서 얻은 모든 기록들은 현재의 봉쇄전략을 정당화할 명분이 되어줄 겁니다. 대중을 설득할 소재로 충분하겠죠. 무엇보다 주역이 당신이니까요.” 겨울이 부족한 미소를 만들었다. “영웅담이네요. 그 사람이 말했듯이.” 소년영웅이 식인괴물을 물리치는 이야기. 태평양의 오디세이아. 수사관은 인상을 찡그렸다. “……불쾌하지만 머리는 조금 돌아가는 놈이었습니다. 겨울,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난 일은 잊으십시오. 그걸 실패라고 한다면 1차적인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총독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뇨. 제가 감독관이기 때문이죠.” 조안나가 엄하게 못 박는다. 결정권이 내게 있었음을 잊지 말라고. 억지처럼 느껴지지만, 그녀가 끝까지 반대했다면 승선조차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구축함 USS 히긴스와 교신할 때 신분 증명부터 막혔을 테니까. “노력할게요. 그런데 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건가요?” “이런 일을 하다보면 무뎌지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고, 실패하면 거기까지예요.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한계 이상을 바라다보면 버티지 못하니까요.” 한계가 자주 아쉬운 소년에겐 납득할 것도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총독이 도를 지나친 미치광이였을 뿐. 겨울은 타르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난밤, 그랜드 갤리로 들어가는 길은 핏빛이었다. 경계해야 했다. 부패한 남자와 그 동료들은 총독을 원수로 여겼을 터.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뻔했다. 그랜드 갤리는 선수와 선미 방향으로 각기 하나씩의 출입구가 있을 뿐이었다. 그 폭이 넓긴 했지만, 화력을 집중하기 좋은 길목이다. 부채꼴로 구축한 화망이면 열 배, 백 배의 적도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는 지점. 그러므로 겨울은 다음을 수사관의 손에 맡겼다. 저들이 스스로 나오게 만드는 건 또한 조안나가 자처한 역할이기도 했다. 전체방송을 이용한 능란한 언변. 그리하여 식인 공화국의 시민들은 무기를 버리고 걸어 나왔다. 그들이 아껴두었던 최후의 식량들과 함께. 「생존감각」의 경고. 붉은 궤적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쾅! 콰콰쾅! 산탄 폭발이 사람들을 휩쓸었다. 화염과 폭풍이 잦아들었을 때, 웅크렸던 겨울은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었다. 조준선을 즉시 정렬한다. 그 끝에서, 두 개의 격발기를 던져버린 한 사람, 이제는 유일한 생존자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 아, 아, 아. 그러면 안 돼. 서두르지 말게, 중위. 응? 클라이막스잖나. 어차피 나는 이제 비무장이고……. 무엇보다, 죽이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은가?” 탕! 겨울은 그의 손가락 끝을 날려버렸다. 한참동안 조용했다. 총독은 무릎 꿇고 쭈그러들었다. 아주 작게 꺽꺽거리는 소리 뿐.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린다. 울지 않는 게 용한 반응. 한참 부족하다. 여기까지 온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겨울이 서늘하게 말했다. “묻지 않은 말 한 마디에 뼈 한 마디씩. 그런데 지금 얼마나 말씀하셨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에누리 없이 헤아리며, 겨울은 감각보정을 믿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스스로의 말처럼 비무장이었다. 전투력은 형편없었고. 산탄지뢰에 연결한 격발기는 조금 전 써먹은 두 개가 전부인 모양. 이제 총독이 발 닿는 거리였다. 걷어찼다. 빠악! 이마 깨진 남자가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구른 자리에 피가 흥건한 것은 비단 끊어진 손가락 때문만은 아니다. 파편이 튀어 날카롭게 변한 바닥 탓이었다. “으, 아으, 이거, 아으, 아, 아파, 너무 아파.” 총독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소, 손가락……손가락 하나만으로도……이렇게나 아픈데…….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고. 으흐흐흐흐……. 흐흐흐흑.” 물어볼까? 겨울은 잠시 고민했다. 질문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치광이의 장단에 맞춰주는 기분인지라. 그러나 이 광기는 전에 보지 못했던 유형이다. 가상인격은 인류가 쌓아온 과거의 화석이었고, 여기엔 낯선 광기의 광맥이 있었다. ‘아니. 물어봤자 제대로 된 이야기는 아니겠지.’ 어차피 광기는 생전의 세계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질문 대신 선택한 것은, 사람 아닌 것에 대한 폭력. 화풀이와 한풀이. 즐거움이 퇴색한 지금도 약간의 의미가 있었다. 미치광이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무언가를 말하려 애썼다. 그것이 살아남기보다 더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겨울? 한겨울 중위님……? 커피 다 식겠어요.” 조안나의 맥 빠진 목소리. 겨울은 버릇 같은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바닷바람은 여전했고, 반쯤 비운 잔에선 온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처음 같은 향이 올라오지 않는다. 만들어준 사람이 보내는 책망의 시선. 겨울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냈다. “죄송합니다. 노력하겠다고 해놓고 너무 무성의했네요.” “일단 마저 드세요. 다른 생각 마시고.” 여기엔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근데 이거 커피 아니지 않아요?” “커피입니다.” FBI 수사관이 정색했다. 한 번 싱겁게 웃고, 홀대했던 잔을 다시 한 번 홀짝이는 겨울. 온도의 변화는 곧 맛의 변화였다. 균형 깨진 단맛과 알코올의 역한 기운이 거북스럽게 어긋났다. 전투식량조차 식도락인 거친 입맛에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대가 없으면 사람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겨울의 말에 고개를 갸웃 하는 조안나. “그 사생아 새끼의 유언인가요?” “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언 가운데 하나였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주워섬기긴 했어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지적 허영으로 가득 찬 꼴통답군요.” “꼭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요.” “이해해줄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자기 이름을 끝까지 감춘 것만 봐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개자식입니다. 그건 자기보호본능이거든요.” 그 점은 동감이었다. 역사에 자기 이름은 남지 않으리라고 한 시점에서, 달리 해석하기 어려웠으니. 무대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조안나가 말했다. “사람의 사회성이란, 특정한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에는 수많은 층위와 단면이 있으며, 무대가 바뀌었을 때 사람은 자신을 빠르게 변화시킨다. 무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본질이 없다. 역할과 연극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서 코웃음을 쳤다. “범죄행위 정당화를 목적으로 흔히 인용하는, 혹은 만들어내는 논리입니다. 유달리 미친놈이긴 했어도, 지적인 나르시스트 범죄자 새끼들 중에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았거든요. 무대 운운하는 순간 답이 나올 정도로요……. 거창할 만큼 거시적인 자기합리화 없인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나약한 놈들이죠. 저지르고 보는 잡것들하곤 또 달라요. 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도 오랜 시간 누적된 프로파일링의 성과이긴 합니다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진짜 자신과 자신의 역할을 분리한 거라고 보세요?” “십중팔구는요……. 그런 질문이 바로 나오는 게 신기하군요. 겨울 당신도 보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수사관에게, 겨울은 다시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간밤에 지나쳤던 광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에 의해 요구되는 역할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그 무대에 맞게 자신을 조정하는 것 같기는 하다. 회사에서 요구되는 자신. 가정에서 요구되는 자신. 친구들 사이에서 요구되는 자신.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어긋나기도 한다. 이제 떠오르는 것은 사람을 잡아먹은 에이프릴 퍼시픽의 승객들. 무대가 바뀌면, 사람은 그토록 쉽게 바뀌는 걸까? 저 바깥 세계는 어떨까? # 130 [130화] #골든게이트 (3) 대화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느린 배의 지루함을 달래기엔 좋은 시간이었다. 에이프릴 퍼시픽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화제가 되었다. 그 배의 최후에 대해서도. 지는 해가 바다를 물들였다. 웬일인지 안개가 끼지 않아, 골든게이트는 이름처럼 금빛으로 반짝인다. 금문교를 향해 좁아지는 물목. 북쪽에는 붉은 절벽이 굽이쳤다. 고지대에 구축된 포대들이 인상적이었다. 십 수 문의 야포가 바다를 겨누고 있다. 시력에 보정을 받는 겨울은, 능선을 따라 구보하는 병사들까지 볼 수 있었다. 경사를 오르는 모습이 힘겨웠다. 그들이 향하는 고지엔 초소와 게양대가 존재했다. 성조기가 물결친다. 해협 어디서든 볼 수 있을 크기였다. 같은 깃발이 남쪽에도 보인다. 미군은 다리로 연결된 양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겨울은 당연한 의문을 느꼈다. “앤. 저런 기지가 있었던가요? 방송에서는 못 봤던 것 같은데요. 달리 들은 적도 없고.”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는 북미 감염의 진원지. 미군은 여기서 호되게 밀려났었다. 그러므로 교두보를 마련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국이 자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희소식에 굶주린 언론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그럴 거예요. 아직은 비밀이니까.” “왜죠?” 조안나는 장난스럽게 반문한다. “한 번 맞춰보시겠습니까?” 음.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는 겨울. 기지의 전모를 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 활주로의 유무, 시설의 수준, 주둔 병력의 규모와 배치된 장비의 종류 등. 그러나 당장 보이는 건 바다에 면한 일부에 불과했다. 아니.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을 것이다. 겨울은 생각을 달리했다. 조안나가 무의미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맞출 수 있으니까 맞춰보라고 했겠지.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더라도 좋은 인상을 줄 기회다. 이미 그녀는 작은 힌트를 주었다. ‘아직은 비밀이라고 했지?’ 뭔가 준비가 덜 되었나? 때가 되면 공개한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할까? 보도관제가 걸릴 이유는 여론 밖에 없다. 변종들이 TV를 시청하는 것도 아니니. 트릭스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라면, 전선은 한바탕 난리를 겪었을 것이다. 대선. 그래, 그것도 있었지. 「명백한 해방」 작전조차 정치적 조건에 영향을 받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공개하려는 계획일까? 사람들은 분명히 열광할 것이다……. 선거 전략을 말하려다가, 겨울은 입을 다물었다. 이 모습을 흥미롭게 주시하는 FBI 요원. “뭔가 떠오르셨습니까?” “선거 전략인가 싶었는데, 설령 맞더라도 가장 큰 이유는 아닐 것 같네요.” “왜죠?” “여론이 들끓어 통제할 수 없게 되어도 곤란하겠구나 해서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이 도시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겨울이 언급한 사람은 해상난민들이 아니었다. 시가지에 고립된 채 지금도 저항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 여기 기지가 구축되었음이 알려지면, 낙오된 시민들을 구조하자는 주장이 제기될 게 뻔했다. “추정규모가 80만이었던가요? 오염지역 전체의 추정치이긴 하지만, 이만한 대도시권이니 적어도 십만은 되겠네요. 기지에 수용할 능력이 있을지 부터가 의심스러워요. 구출할 때 필요한 자원도 자원이고……. 헬기가 대량으로 필요할 테니까요. 명백한 해방 작전을 준비하는 데 차질이 빚어지면 곤란하겠죠. 그거야말로 대선에 가장 결정적이잖아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산호세 등. 만에 인접한 대도시들이 하나의 메갈로폴리스를 이룬다. 헬기를 얼마나 동원해야 십만 단위의 수송이 가능하겠는가. 군용기는 정비도 만만치 않다. 항속거리를 감안할 때 한동안 고정 배치할 필요도 있었다. 심각한 전력낭비다. FBI 수사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론했다. “그만큼 공수부담이 줄어들지 않겠어요?” 미국은 오염지역에 하루 5천 톤의 물자를 뿌린다. 200만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양. 그런데 생존자 규모는 80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물자부족에 시달린다. 물자를 낙하산으로 투하하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곳에 떨어지는 양이 절반 이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만 하더라도, 이 넓은 도시에서 점으로 분포하는 생존자들이 너무 많았다. ‘건물 하나 점령하고 버티는 경우가 가장 곤란하다지.’ 오며가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수용인원이 많은데, 낙하산 떨어트릴 면적은 지나치게 좁다고. 이런 곳이야말로 헬기를 투입해야 한다. 공수 효율을 감안해서라도, 이런 곳에서는 사람들을 빼내야 하는 것. 겨울은 줄곧 의문이었다.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헬기가 그렇게 부족한가? 혹은 구조 도중, 줄어든 인원으로 인해 건물의 방어가 뚫릴 게 우려된다거나……. 겨울이 대답했다. “헬기와 수송기의 역할이 다른걸요. 수송기를 절약한다고 헬기를 대신할 순 없어요. 어쨌든 우든 원더는 헬기가 아니잖아요. 마침 저기 하나 날아가네요.” 애국자들을 위한 두 잇 유어셀프.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목제 수송기가 퇴락한 도시의 공제선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이윽고 낮은 하늘에서 화물을 투하한다. 파일럿은 펼쳐진 낙하산 주위를 맴돌았다. 제대로 떨어지는지 지켜보는 모양이다. 느린 비행운이 방향을 바꾸었다. 파일럿은 만족했으려나? 겨울이 남은 말을 이었다. “헬기를 대량으로 수용하려면 기지도 바뀌어야겠죠. 설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이곳에 있는 기지가 명백한 해방 작전을 위해 준비된 거라면 난처하지 않을까요?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무엇보다 생존자들을 수용하고서 제 기능을 하긴 어렵겠고요.” 그렇다고 구조여론을 무시했다간 지지율이 떨어질 게 뻔하니, 기지에 대해선 입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여기까지 들려주니, 조안나가 부드럽게 웃음 짓는다. “괜찮은 판단력입니다. 겨울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군요.” 재능보다는 인성이 더 놀랍지만요.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차분히 칭찬하는 그녀에게, 겨울은 덜 여문 미소를 내보였다. 적당히 부끄럽고, 적당히 기뻐하는.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표정 만들 때마다 옅은 불안을 느낀다. FBI 감독관의 유능함 탓이었다. 에이프릴 퍼시픽의 미치광이를 분석하던 그 대수롭지 않은 태도. 사람을 읽는 노하우. 「통찰」 깊은 인물은 지어내는 감정을 꿰뚫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 몇 번인가의 세계관에서 경험한 뒤로 다시 겪은 적은 없다. 그러나 공허한 요즘이었다. 속이 많이 비어서 더 짙은 연기가 필요했다. 지식을 겸비한 요원에겐 조심스러워진다. 「간파」당했다간 불신을 살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도 더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 안에 있는 돌을 들킬까봐. 총독이 너무 많이 건드려 놨다. 조안나가 난간에 기대어 샌프란시스코 시가지를 바라본다. “맞습니다. 여론의 폭주를 걱정하는 거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만.” “그건 뭐죠?” “기밀유지서약을 기억해주신다면 말씀드리죠.” 겨울은 고개를 갸웃 하고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기밀을 누설하고 싶어도 안 될걸요? 모두 감시하고 계실 텐데. 제 주변에 들려줘도 파급력엔 한계가 있고요. 절 상대론 안심하셔도 좋아요. 애초에 말하고 다닐 생각도 없지만.” 이 근처에서 전파가 잡히고 있었다. 즉 군용 스마트폰 네트워크인 넷 워리어(Nett Warrior) 중계기가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뜻. 그럴 거라 예상했다. CIA와 특수부대가 합동작전중인 장소에 설마 통신망이 없을까. 바랐던 건 겨울동맹과의 연락이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전파는 잡히지만, 연락에 제한이 걸려있었다. 하기야 군사통신망이다. 개개의 단말기에 대한 권한설정 쯤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다못해 전차조차도 시동과 별개로 네트워크 암호가 필요한 미국이었다. 조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괜찮다면 잠시 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단말기를 조작해보더니, 대부분의 기능이 잠겨있는 걸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FBI 요원이라고 해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라서요. 이런 식일 줄은 몰랐습니다. 살아있는 어플리케이션들은 전투지원 관련 기능들입니까?” “네. 탄도 낙차 계산기, 좌표산출기, 영상보고 시스템, 화력지원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죠.”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기능을 포함해서, 방역전쟁을 기점으로 너무 많이 달라졌네요. 실례했습니다. 불쾌 하셨겠군요. 저는 단지 기밀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드릴 의도였는데요.” 애국자에 대한 취급이 저질스럽네.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겨울이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아뇨, 전혀. 개의치 마세요. 이게 최선이겠죠. 저도 이쪽이 마음 편하거든요.” 불필요한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그렇게 대꾸하며, 겨울은 돌려받은 폰을 갈무리했다. “그래서, 다른 이유가 뭔가요?” “비공식적인 가설입니다만, 변종들이 오염지역 내의 생존자들을 일부러 살려두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동안의 정찰결과에 따르면, 변종들은 시가지 내 생존자집단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남미에서 북상하는 놈들로 인해 나날이 숫자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성은 오히려 감소하더군요.” “이상하네요. 기지에 대한 공격은 그렇지 않았는데요.” “바로 그거예요. 군사기지에 대한 공격 수준으로 시민들을 공격했다면, 오염지역엔 지금쯤 살아남은 사람이 드물어야 정상입니다.” 겨울은 TV로 보았던 샌디에이고를 떠올렸다. 제1해병원정군의 거점인 노스 아일랜드 기지만 하더라도, 변종들의 거친 파상공세에 조용할 날이 없다. 그러나 만 저편의 시가지에선 시민들이 깃발을 내걸지 않았던가. 아무리 무장했어도, 시민들이 군대보다 강하진 못했다. 석연찮은 느낌이야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대 밖에서 흐르는 이야기에 불과했으니. 지금까진 선택과 집중으로 이해했다. 힘이 남아있을 때 강한 적을 치는 본능. 불합리하다. 그래도 변종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는 거니까. 겨울의 납득은 이 정도였다. 곰곰이 검토한 뒤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는 식량이겠군요.” “예. 놈들은 잘못 떨어진 식량을 긁어먹습니다. 진딧물을 살려두는 개미처럼 말이죠.” “물자공수와 생존자 집단의 인과관계를 파악했다는 뜻인데……. 놀랍진 않네요. 그 가정이 옳다는 전제 하에, 시민들을 구출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겠어요.” 변종들이 그냥 보내줄 리가 있나. 한 번에 다 구하지 못하는 이상, 구조 과정이 취약해질 것은 예상했던 바. “벌써 몇 차례 시도해봤습니다.” 낯빛이 나쁘다. 결과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급격하게 끝났다.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에서 만으로 불던 것이, 이제는 그 역방향이다. 심한 악취가 밀려들었다. 비리고 쉬고 썩은 것들이 혼잡하게 뒤섞인 냄새. 만에 가까워질수록 악취의 원인이 또렷해진다. 만 안쪽을 가득 채운 온갖 크기의 배들. 닻을 내린 무수한 선박들은 하나의 해상도시를 이루었다. 사슬과 그물, 밧줄로 서로를 묶어놓은 배들. 그것은 곧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기도 했다. 요란하게 달린 국기들이 인상 깊었다. 도시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금문교 아래까지 밀려나왔다. 그 중엔 인간의 사체도 많았다. 어쩌면 대사억제에 들어간 변종일지도 모르고. 따다다다닷- 총성이 날카롭게 울린다. 여러 방향이었다. 바람의 갈피엔 누군가의 비명도 끼어있다. 물결에 울렁이는 도시를 보며, 겨울은 생각한다. 여기서도 유쾌한 일이 없을 것 같네 # 131 [131화] #엔젤 아일랜드 (1) 코로나 트라이엄프는 금문교 북동쪽의 미군기지에서 닻을 내렸다. 조금만 나가면 외해인지라, 부두에 부딪히는 물결은 거칠었다. 기지 전면에 편자(Horseshoe)라는 이름의 작은 만이 있었으나, 화물선이 들어갈 만큼 넓지는 않았다. 방파제로 입구를 좁혀놓았다. 호위함 라몬 알카라즈 역시 같은 부두에 배를 댔다. 필리핀 해군 장교와 병사들이 지친 얼굴로 땅을 밟는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대를 여럿이 돌아가며 빨아들이는 모습이 고달팠다. 바람은 찬데 옷가지가 충분치 않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들이 상실한 조국은 따뜻한 나라였다. 겨울은 발로 땅을 꾹꾹 눌러댔다. 공연히 몇 걸음 걷고,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몸을 육지에 적응시키는 과정. 가만히 있어도 금방일 테지만, 전투력을 항상 최고조로 유지하려는 습관이었다. 이를 본 FBI 요원이 미소 짓는다. “아직 느낌이 이상하죠? 땅이 울렁거리는 것 같고.” “네. 고작 이틀째인데 이러네요.” 코로나 트라이엄프가 거대하기는 해도, 태풍의 가장자리를 비껴온 배였다. 몸이 아직 파도를 느끼고 있다. 러닝머신에서 내려왔을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주위를 살핀 조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중은 아직인 모양이군요. 미리 연락을 넣었는데…….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양해를 구한 그녀는 겨울을 두고 경계초소를 향했다. 초병들의 복장이 일반적인 미군과 많이 다르다. 단색의 푸른 유니폼. 해안경비대였다. 두 대원이 겨울 쪽을 흘끔거리는 중이다. 호기심이 느껴진다. 하기야 크리스마스 전투 때도 그랬다. 연료가 떨어져 고립되어있던 전차소대. 소대장 에드먼트 듀런트 중위는 겨울을 보고 놀라워했었다. 실존인물이었느냐면서. 그들과 조안나 사이에서 들리지 않는 대화가 진행된다. 길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초병 하나가 무전기를 쓴다. 나머지 한 명은 그 틈에도 여전히 훔쳐보았다. 겨울이 경례를 보낸다. 오우. 그의 입모양. 이쪽으로 정자세를 취했다. 조안나가 돌아보았다. 표정이 처음엔 의아했다가, 금세 부드러워진다.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곧 온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죠.” 겨울이 물었다. “여기가 목적지는 아닌 거죠?” 아직 땅거미가 지워지지 않은 시간이다. 이미 투입된 작전 팀과는 자정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이라 했었고. 질문을 받은 조안나가 바다를 가리켰다. “네, 아닙니다. 여긴 중간기착지거든요. 우선 저 섬으로 가게 될 거예요. 엔젤 아일랜드. 저곳 역시 2차 기착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마지막에는 잠수함을 타고 이동할 예정입니다.” “잠수함?” “작전본부가 개조된 화물선이라서요. 범죄조직으로 변질된 민간군사기업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임무는 해상난민들 사이에서의 정보수집이니까요.” 민간군사기업이라……. 겨울은 납득했다. 그게 아니고선 특수부대원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겠지. 애초에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집단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상에선 범죄조직으로 변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조안나의 말이 이어졌다. “흉내라곤 해도, 범죄조직으로서 할 일은 다 하고 있습니다. 자체적인 구역을 가지고, 순찰하고, 보호비를 받고, 시비를 걸거나 다른 조직과 항쟁을 벌이고, 때로는 표면상의 본업인 용병 노릇도 합니다. 그렇게 핵보유국에서 온 난민들……아니, 쓸데없는 표현은 집어치우죠. 실질적으론 중국인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겁니다.” 러시아는 아직 자국 해군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는 사정이 달랐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걸린다. “보호비를 받아요? 저 사람들에게서?” “그것부터 걱정하는군요.” 흐뭇해하는 조안나. “염려 놓으시길. 걷는 만큼 더 뿌립니다. 너무 티가 나지 않을 밸런스를 잡기가 어려웠답니다. 하지만 작전에 투입된 대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난민들은 미군 수송기가 자주 지나가는 길목쯤으로 생각하겠지만요. 오히려 과욕을 부리지 않고 질서를 유지해준다는 호평이 많습니다.” 물자 공수가 빈번히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다른 곳보다 더 풍요로울 거라고. 그나저나 정신건강인가. 겨울은 재차 물었다. “대원들이 보호비를 직접 걷는 건가요?” “초기엔 그랬습니다. 지금은 조직원들을 모집해서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요. 없어진 건 아닙니다. 난민 출신 조직원들을 마냥 믿긴 어려우니 말입니다. 불필요한 폭력과 이중착취를 막으려면 현장에서 감시해야 해요. 다들 싫어하는 일이라 순번제로 돌린다더군요.” “조직원 모집까지……. 정말 본격적이네요.” “들키면 곤란하거든요. 철저하게 해야죠. 그래서 당신이 더더욱 적합한 인재인겁니다. 난민구역에서의 경험이 유용할 테니까요. 특히 삼합회와의 교류 경험이 높게 평가되었어요. CIA에서 괜히 겨울을 희망한 게 아닌 거죠.” “이런.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질문 받은 조안나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정직한 반응이다. 경력을 보아 속 감추기는 익숙할 텐데. 그만큼의 호의가 있다는 반증이겠지. 망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제는 조안나에게 어떤 밤이었을까. 그동안 쌓은 명성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다른 수단으로 조사한 게 아니라면, 그녀가 보여주는 신뢰는 어딘가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러므로 예상하고 있었다. 겨울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오히려 필요한 일이었다고 봐요. 그럼으로써 저를 더 믿을 수 있었다면요.” “진심인가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순 없다고 믿어요. 하지만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고도 믿어요. 난민구역은 그런 환경이었어요. 살기 위해 다들 사악해지는. 밖에서 보기엔 혐오스러웠겠죠. 그 상황에서 제가 신뢰를 얻을 방법이 뭐가 있었을까요? 뛰어난 전투력? 몸을 사리지 않는 무모함? 아뇨. 그건 선하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결국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시간은 조금 더 필요했겠지만.” “그 조금의 시간이 소중한 거죠. 좋은 기회였어요.” 감시가 곧 기회였다는 말에, FBI 요원이 고개를 흔든다. “12월 말부터 1월까지였습니다. 꽤 높은 곳에서 내린 지시였던 걸로 압니다. 저명해진 후에 물의를 빚을 인물이 아닌가,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서요. 아시겠지만 지금 미국 상황이…….”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앤. 제게 말해주면 안 되는 내용이었을 텐데. 비밀은 지킬게요. 손가락도 걸까요?” 약속(pinky swear)하자고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겨울.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장난스러움. “후, 정말이지.” 조안나가 쓴웃음을 짓는다. 겨울은 흐름을 원래의 화제로 되돌렸다. “힘든 사람들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건 좋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겠네요. 사람 죽일 일이 많겠어요.” 물자가 많은 영역은 욕심을 내는 조직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자주 공격받지 않겠느냐. 그런 질문이었다. FBI 요원은 겨울의 우려를 긍정했다. “처음엔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잦은 습격으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더군요. 어지간해선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요. 그 과정에서 데브그루 두 개 팀이 철수했습니다.” 데브그루(DEVGRU). 미 해군 특수작전 개발 그룹. 이번 세계관에서는 애쉬포드 하사가 언급했었다. 그들처럼 쓰기 좋은 칼이 되지 말라고. 막 쓰여서 망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들이 물러날 정도라면, 이번 임무의 예상 난이도를 재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철수라니……. 놀랍네요. 인명피해 때문인가요?” “아뇨. 명색이 미국 최고의 특수부대입니다. 훈련도 안 된 데다 사람보다는 탄약을 아끼는 갱들을 상대로 소모되기는 어렵죠. 다만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 말종들이라지만, 너무 많이 죽였거든요. 작전기간도 길었고요.” “음, 그냥 주위의 물자 보급까지 늘려버리는 게 속편하지 않았을까요?” 겨울의 반론했다. 배고프지 않으면 쳐들어올 의욕도 줄겠지. 물론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많은 면에서 한계가 있는 인간이, 물욕만큼은 한계가 없으니까. 조안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첫째로, 수송역량은 제한되어있지요. 주변 지역을 만족시키려면 수송기를 몇 기나 더 편성해야 할까요? 이 작전을 위해 끌어오는 소티(Sortie : 출격횟수)가 늘수록 다른 곳이 부족해집니다. 우든 원더 같은 대체기종과 파일럿이 늘어나면서 숨통이 트이고는 있습니다만, 1순위는 명백한 해방 작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다음. 그 조치로 직접적인 교전이 감소할 수는 있겠으나, 싸움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하늘만 보고 살아요. 증가한 보급의 편중은 당연히 더 큰 항쟁을 부르겠죠. 순수하게 인명만 놓고 본다면, 우리가 피로한 쪽이 낫습니다.” “아하.” “마지막으로, 물자는 거래수단입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하고는 거래를 틀기 어렵습니다. 유리한 협상은 상대가 위태로울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죠. 임무의 성격을 떠올려보세요, 겨울. 냉정한 이야기입니다만……그들은 배고파야 합니다.” 하나 같이 합당한 내용이어서, 겨울은 그저 끄덕거릴 뿐이었다. 어쨌든 이쪽의 거래에 응하는 이상, 그들의 물자수급이 전에 비해 개선되었을 것은 자명했다. 냉정하니 어쩌니 해도 비인도적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제가 활동하는 데 문제가 있진 않겠어요?” 제 얼굴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이에 대한 조안나의 대답은 대수롭지 않았다. “변장하면 그만이죠.” “그걸로 충분할까요?” “CIA를 얕보지 마세요. 삽질을 자주 하지만 그래도 한 때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었습니다.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바뀌게 될 거예요.” 한 때라는 부분에서 얼룩을 느낀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비교대상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한 때에 불과했다는 뜻일까. FBI와 CIA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기도 하고. 업무영역이 다르긴 한데, 크게 보면 같은 분야에서 서로 견제하는 역할이었다. ‘애초에 앤도 감독관으로 파견되는 거였지.’ 첫 만남에서 말했었다. 정보국의 국내작전은 수사국의 감독을 받는다고. 감시를 달가워할 사람은 드물다. 누구나 겨울 같을 순 없었다. 대화가 끊어졌다. 북쪽에서 다가오는 배기음 탓이었다. ‘음? 뭔가 이상한데?’ 항상 듣던 험비의 배기음이 아니다. 전조등을 켜고 달려오는 차량은 붉은색이었다. 어스름이 지는 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할 만큼 화려하다. “……페라리?” 옆에서 들리는 당혹스러운 음성. 군사기지에서 민간차량이 굴러다니는 것부터 보통은 아니다. 하물며 그게 한없이 사치스러운 브랜드라면 더더욱. 저게 마중 나오는 차인가? 설마 했는데 맞았다. 4인승 쿠페의 창밖으로 운전자가 고개를 내민다. 초병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쪽을 보았다. 그르릉. 부드러운 엔진 소리. 저속으로 다가온 페라리 612 스칼리에티가 겨울과 FBI 요원 앞에서 정지한다. 운전자와 승탑자가 하차하여 절도 있게 경례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통제실에서 약간의 착오가 생기는 바람에 그만. FBI 특수감독관 조안나 깁슨 요원, 그리고……이야, 한겨울 중위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아, 네…….” “저는 소위 아론 바커. 바커 소위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이쪽은 라자로 상병입니다.”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고서, 그는 도어맨처럼 쿠페의 후방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타시죠. 갸우뚱 하면서도 겨울은 순순히 올라탔다. 뒤이어 조안나가 타면서 하는 말. “험비가 올 줄 알았는데 페라리라니. 조금 당황했네요.” “아, 이 녀석 말입니까?” 싱글벙글. 운전석에 앉은 바커 소위가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징발된 민간차량을 다수 운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군용차량의 정비소요를 줄이려는 게 가장 크지요. 연료 사용량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험비는 기름 퍼먹는 괴물이잖습니까. 민간차량 쪽이 연비가 좋지요.” 그러자 조안나가 중얼거린다. 12기통 쿠페를 몰면서 연비를 따지다니. 그걸 들었는지 소위가 한바탕 웃는다. “뭐 어떻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요. 정찰 나갔다가 이 녀석을 찾았을 땐 무척 기뻤습니다. 제 인생에 페라리라니.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에 찾아온 유일한 행운이었습니다.” 이 사람 제프리랑 비슷한 과인가? 이제 막 만났을 뿐인데, 겨울은 애매한 친숙함을 느낀다. 차는 해안경비대 사무소를 지나 본격적인 기지로 들어섰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포트 베이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2세기에 우주함대 사령부(Starfleet command)가 들어설 곳이지요.” 우주함대 사령부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기억이든, 홀로그램이든. 지력보정을 벗어난 범위인 듯 했다.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힐끗거리던 소위는, FBI 요원과 소년장교 두 사람이 멀뚱멀뚱 반응이 없자 조금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었다. 조수석의 라자로 상병이 면박을 준다. “어휴. 요즘 스타 트렉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제가 다 창피합니다.” 소위가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제프리 과가 맞는 것 같았다. # 132 [132화] #엔젤 아일랜드 (2) 행선지는 기지 북쪽의 또 다른 선착장이었다. 해변을 끼고 도는 길을 따라, 차량은 북으로 미끄러졌다. 작은 해변이 차창 밖을 스친다. 파도에 오르내리는 적색 부표들. 기뢰를 깔아놨구나. 겨울은 남쪽 선착장에서 출발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길이 엉망이겠지. 계획 없이 확장된 시가지나 다름없을 테니.’ 온갖 배들이 모여 무질서하게 닻을 내린 거대한 도시. 그리고 실시간으로 흐르고 흔들리는 거리. 그 사이로 난 길이 정상일 리 없다. 기지 북변은 한 줄의 장벽으로 막혀있었다. 컨테이너를 쌓아 만들었다. 짙어지는 어둠 속, 녹슨 상표들을 켜켜이 올린 모습에서 세기말이 느껴진다. 그 위에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조명도, 난간도 없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갸우뚱. 겨울은 잠깐 야시경을 끌어내렸다. 과연. 가시영역을 벗어난 빛으로 장벽 전체를 밝혀놓았다. “의외로군요. 여기선 헬기를 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조안나가 의문을 표했다. CIA 거점까지 직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엔젤 섬까지 타고 가는 정도는 무방할 것이었다. 왜 다시 배를 타는가? 바커 소위가 답한다. “아, 원래 그럴 예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해졌지만요.” “어째서죠?” “컨테이너 운반용으로 혹사시키는 바람에 고철이 되어 버렸거든요. 정비반에서 진즉에 두 손 들었습니다. 부품 돌려막기도 한계에 달했다고요. 뭐라더라, 이걸 타는 건 운에 목숨을 맡기는 거나 다름없다던가? 그런데도 태풍 때문에 억지로 운용했으니 더 이상은 무리일 겁니다.” “태풍은 왜…….” “장벽이 무너졌었습니다. 비상이 걸렸죠. 추락사고가 없었던 게 천행입니다.” “아.”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샌프란시스코는 풍수해가 심했던 도시였다. 그 헬기 중 하나가 선착장 근처에도 있었다. 날개를 얌전히 늘어뜨린 모습. 겉보기엔 멀쩡하다. 그러나 이렇게 바다 가까이 주기해둔 것 자체가, 더 이상 관리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소위가 시동을 껐다. “내리시죠. 갈아타셔야 합니다.” 그는 앞장서서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내딛는 걸음마다 버석거린다.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들 탓이었다. 모래와 물이 보이지 않을 지경. 다만 물결치는 쪽이 바다요, 그렇지 않은 쪽이 땅이었다. 겨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자욱한 탄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방풍림 저편에 황혼만큼이나 시꺼먼 무더기가 있었다. 다시 한 번, 조안나가 근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부유물이 많은데, 가다가 문제가 생기진 않겠습니까?” 소위가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그래서 호위 겸 예비로 한 척이 더 갑니다. 이 구역질나는 바다에서도 고기를 잡아보겠다고 쳐놓는 그물들이 가장 큰 문제죠. 그물이 망가지면 수거하는 꼴을 못 봅니다. 부표에 묶여서 둥둥 떠다니니 원……. 덕분에 엔진이든 스크루든 많이도 해먹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경고해도 소용없더군요.” 투덜거림은 덤이었다. 가동 가능한 보트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준비된 경비정은 두 척이었다. 둘 다 크기는 작았다. 전장 약 47피트(14.6미터). 가속하면 물 위로 통통 튀어 오르는 그런 배였다. 겨울은 별 말 하지 않았는데, 소위가 서둘러 변명했다. “이런 배가 아니고선 저 시궁창의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중형선 이상으로는 유사시에 함수 돌리기가 힘겨워서 말이죠…….” 겨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군요. 그런데, 골목길이라고요?” “아. 이쪽에서 쓰는 은어입니다. 구석으로 들어가면 양아치들이 있는 것도 비슷하죠.” 어울린다. 고속정 운용에 필요한 인원은 넷. 하지만 겨울이 타는 쪽만 해도 이미 1개 분대의 승조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하나 같이 방탄복과 구명조끼를 겹쳐 입고 있다. 겨울이 탑승하자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라자로 상병이 겨울을 안으로 이끌었다. “선실로 들어가시죠. 무슨 일이 생겨도 방탄유리가 있으니 다치지 않으실 겁니다.” “교전이 자주 일어나나 봐요?” “자주……까지는 아닙니다. 저놈들도 자기네 생명줄이 우리라는 걸 잘 알거든요. 다만, 몇 달 전 보트 한 척이 실종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패거리의 소행인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죠. 개자식들. 본보기를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그러자 바커 소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어이.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순 없잖아.” 소위의 반응만으로 상병이 희망하는 본보기가 어떤 식인지 알 만 했다. 겨울은 조안나와 함께 선실 안에 섰다. 앉을 곳은 없었다. 손잡이가 있을 뿐. 두 척의 고속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쭉한 바다가 갈라진다. 투툭, 툭, 투툭. 단단한 것들이 선수에 부딪혀 튕겨지는 소리들. 전후 갑판의 기관총좌를 잡은 병사들이 주위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조안나가 소위에게 질문했다. “코로나 트라이엄프에 실어온 무기와 탄약은 어쩌죠?” “아, 그건 나중에 별도의 수단으로 수송해드릴 겁니다. 당장은 방법이 없어요.” “이런. 특별히 요청한 장비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진 않는다. 진로가 자꾸 구부러졌다. 죽은 배들의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길은 미로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전진에 지장이 없는 것은, 이런 작은 배에도 예외 없이 발라놓은 첨단기기들 덕분이었다. 겨울은 조종석에 비치는 회색의 음영을 보았다. 광각 적외선 모니터였다. 놀라울 만큼 선명했다. ‘누가 미국 아니랄까봐…….’ 다만 속도를 내긴 힘들었다. 부유물뿐만 아니라, 오가는 배들도 문제였다. 떠있는 게 신기할 만큼 녹슨 소선들. 목제도 있었다. 저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 걸까. 가까운 섬이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정면의 중국어선 갑판에서, 상의를 벗은 남자가 이쪽을 주시한다. 두툼한 몸이 문신으로 뒤덮여있었다. 허리춤엔 녹슨 식칼을 질러놓았다. 적외선 화면에 하얗게 표시된다. “더러운 칭키(Chinky) 새끼. 저런 건 바로 쏴 죽여야 합니다.” 라자로 상병의 욕설. 그는 아까부터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조안나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흘긴다. 겨울은 그녀의 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상병이 보여주는 증오가, 이 지역 미군 전체를 물들인 경향이 아니기를. 그 걱정과 별개로, 칼 찬 남자가 정상인일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 애초에 비대한 살집부터가 약탈자의 증거였다. 사내가 히죽 웃는다. 기관총의 조준선이 돌아오는데도 개의치 않고, 손을 바지 속에 넣어 제 추물을 긁적거린다. 꺼내서 냄새를 맡더니 으- 하고 찌푸리는 등, 대놓고 도발적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이번엔 길이 좁아졌다. 실제로 물길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좌우에서 다가오는 쪽배, 혹은 널빤지들 때문이었다. 손으로 노 저어 오는 헐벗은 이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갑판에 있던 병사들이 사방으로 윽박지른다. 언어가 달라도 쉽게 알법한 위협적인 몸짓들. 그러나 헐벗은 이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표정이 없었다. 동정심을 사려는 몸짓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 손을 내밀 뿐. 뭐라도 주면 좋고,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엿보인다. 보나마나 앵벌이겠지. 뭘 줘도 빼앗길 것이다. 받은 자리에서 먹어치우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그 가운데 유일하게 감정을 보이는 건 한 사람의 어머니였다. 꽉 찬 쪽배의 뒤편에서 호소하는 시선을 보내온다. 힘없는 그녀는 양보 않는 사람들을 헤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다. 틈을 비집으려다가 쓰러지기를 몇 차례. 그 와중에도 품에 있는 아기만큼은 소중히 보듬고 있었다. 조안나와 그녀의 눈길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데려가 달라는 듯, 자신의 아기를 들어보였다. 아기는 울 것처럼 입을 달싹거린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선실 안쪽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못 먹은 아기에게 기력이 없는 것인지. 살 빠진 아이는 죽음을 닮았다. 바커 소위가 슬쩍 돌아보았다. “쳐다보지 마십시오. 마음만 상할 뿐입니다.” “압니다.” 답하는 음성이 의외로 침착하다. FBI 요원은 현실의 한계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깜박이는 눈가에 여남은 감정이 있어, 손끝으로 슥 닦아낸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책임지지 못할 동정심은 베풀지 않는 것만 못하죠.” 그녀는 아이를 받을 수 없다. 받아서 스스로 기를 수 있겠는가? 최선은 이 자리, 겨울 외의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포트 베이커는 아이 하나쯤 받아줄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러나 그건 선행의 대가를 떠넘기는 거지. 무책임한 태도야.’ 아기 입장에선 무책임한 선행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동일하게, 어머니와 함께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미래를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사랑 없이 자라는 아이의 삶은 어두운 것이다. 때론 죽기보다 힘겨운 삶도 있는 법. 또 한 명의 당사자로서, 겨울은 정답이 없다고 여겼다. 섬은 갑작스럽게 가까워졌다. 감정적으로 길었고 물리적으로 짧았던 편도의 끝. 감정노동에 숙달된 병사들은 소모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서 조안나는 조금 둔하게 움직였다. 등 뒤에 미련을 남긴 사람의 걸음걸이. 모성은 기혼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험상, 타고나는 본성도 아니었다. 겨울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전의 세계를 되새겼다. “앤.” “네, 겨울.” “비극 그 자체보다는, 비극에 익숙해진 사람들 쪽이 더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건 무서운 일이죠.” “앤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에요.” 조안나가 맥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이렇게 민망하기도 오랜만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곤,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커 소위가 험비를 대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험비 대열이 섬의 북쪽으로 달렸다. 잠수함이 대기 중인 곳에도 기지가 있었다. 입구에서 바커 소위가 작별을 고한다. “이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전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겨울의 답례에, 소위가 특이한 손짓을 해 보인다.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약지와 소지를 다시 붙여서 손을 펼치는 인사법이었다. “두 분의 장수와 번영을 바랍니다.” 아무래도 스타 트렉인지 뭔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하는 건가? 겨울이 같은 인사를 돌려주니 소위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옆에서 FBI 수사관이 한숨을 쉰다. # 133 [133화] #엔젤 아일랜드 (3) 엔젤 섬에서 머무르는 시간도 잠깐이었다. 겨울과 조안나는 공백 없이 잠수함에 탑승했다. 선실로 안내된 뒤, 조안나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끊어질 것 같은 긴장감. 톡, 톡, 톡. 손끝으로 홀스터를 두드리는 소리. 그 안에 들어있는 권총은 벌써 두 번이나 기능을 점검했다. 선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겨울이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진정하세요. 별 일 없을 테니까.” 조안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함장 및 승조원들의 거동은 명백히 수상했는데요.” “그야…….” 대답이 지연된다. 솔직하게 말하긴 곤란하다. 그들과 대면했을 때, 「생존감각」과 「전투감각」이 반응하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간 상황연산 오류 판정으로 롤백이 발생할 것이다. 한 번 만에 불이익이 주어지진 않겠으나, 그 자체로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가상현실 세계관의 한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아는 것과 되새기는 것 사이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들려줄 다른 이유를 고민해본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저를 싫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적의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어디까지나 감이지만요.” “감……인가요?”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했죠?” “아니, 아닙니다. 현장에선 감을 무시할 수 없죠. 더욱이 겨울의 감이라면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설득이 먹힌 게 아니었다. 그저 겨울을 무시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겨울은 싱겁게 웃고 조금 더 생각해보았다. 함장이 날 싫어할 이유가 무엇이려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생각하는 사이에, 시간을 벌 요량으로 질문을 던진다. “어떤 배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앤도 몰랐던 모양이죠?” 조안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 해군이 보유한 잠수함들은 예외 없이 덩치가 큽니다. 원자력 잠수함들이니까요. 수심이 얕고 해저지형이 복잡한 만 내부에서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만은 소음이 심하지요. 다른 위험요소도 많고. 이런 곳에선 재래식 잠수함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위쪽의 입장은 그렇더군요. 미심쩍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우방국 잔존함대의 협력을 받고 있다며 이어지는 말. “다만 어느 국가의 잠수함을 타게 될지에 대해선 저도 통보받은 바가 없었습니다. 경계임무를 순번제로 돌리는데, 해저에서 벌어지는 신경전 탓에 제때 교대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더군요. 겨울을 위해서라도 한국 잠수함이 걸리면 좋겠다는 기대는 있었습니다만…….” 그러면서 흘깃 겨울을 엿본다. “제가 알기로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인 앙숙이라던데, 혹시 그것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그녀와 겨울이 타고 있는 건 일본 해상자위대의 잠수함인 진류(仁龍)였다. 함장 우메하라 아츠(梅原 淳) 2등 해좌는, 겨울을 보았을 때 어두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격렬한 동요였다. 적대감으로 해석하는 게 정상일 정도로. “설마요.” 고개를 젓는 겨울. 사람 읽기에 익숙한 소년에게, 함장이 보여준 어둠은 다른 느낌이었다. 영향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종말 이후」를 구성하는 과거의 광맥에서, 민족감정만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니. 생전의 겨울은 그게 참 쓸 데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일본인이라고 혐오하고, 한국인이라고 싫어하던 두 나라의 사람들. ‘순진하거나, 교활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교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움을 부추겼다. 순진한 사람들의 미움에서 이득을 보는 까닭이었다. 주로 정치인들. 더러는 기업가들. 학자와 종교인인 경우도 있었다. 미움은 또한 스스로를 살찌우는 감정이었다.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한 번 미워하게 되면 점점 더 커질 뿐이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미워할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찾을 때마다 즐겁다. 미워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 그 중독성은 겨울도 알고 있다. 세상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기가 불가능함을 깨닫는 요즘이었으므로. 돌은 갈수록 무겁기만 하다. 여하간 겨울이 함장에게 느낀 것은 그런 종류의 미움과 거리가 멀었다. ‘자기혐오가 느껴지던걸.’ 이걸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언어는 마음을 담기에 부족하다. 고민하던 겨울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문 앞에서 멈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선실에 걸린 시계를 보면, 아직 도착할 때는 아니었다. 목적지까지 약 20킬로미터. 짧은 거리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저속항해를 하느라 오래 걸린다고 했었다. 칼날처럼 곤두서는 조안나. 대화로 신경을 분산시킨 보람이 없었다. 겨울이 손짓으로 억누르며 일본어로 말했다. “누구십니까?” “함장입니다.” “벌써 도착했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는지라.” “그렇군요. 들어오세요. 어차피 함장님의 선실인데.” 문은 느리게 열렸다. 함장은 신중하게 들어왔다. 자기가 경계를 샀다는 걸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숙련된 수사관답게, 조안나의 긴장감은 평온함의 베일에 가려진다. 겉보기엔 신색이 고요했다. 그럼에도 함장은 수사관을 눈여겨본다. 정확히는,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을. 함장은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조안나를 감안해 영어로 말한다. “무례에 대한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오해를 풀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 “괜찮습니다. 오해하지 않았거든요.” 고개를 든 함장이 묘한 시선을 보낸다. 눈여겨보면, FBI 수사관의 태도는 명백했다. 그녀의 손은 권총과 가깝다. 그녀의 모든 몸짓은 여차하면 쏘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말이죠.” 조안나가 눈을 곱게 흘겼다. 함장은 그렇습니까,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로 인해 불편하셨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리고 본 함의 승조원들은, 당신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 모호하던 느낌이 뚜렷해진다. 질투. 전쟁영웅이 된 소년장교에게 망국의 군인이 느낄 법한 감정이다. 함장은 한숨을 쉬고, 침묵하다가, 또 한 번 한숨을 쉬고, 읊조리듯 고해했다. “해막(海幕 : 해군본부) 최후의 지령으로부터 보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의무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지요. 자위대의 존재이유는 일본 국민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라 잃은 국민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안나의 긴장감이 누그러진다. 함장의 고백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고름 같은 만에서, 본 함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고름에 뒤섞여 천천히 썩어가고 있을 뿐. 보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래식 잠수함이, 기껏해야 연락선 임무를 부여받을 따름입니다. 대체 언제쯤이면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쯤이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숙소에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당신의 활약상을 봅니다. 자괴감이 느껴지더군요. 한겨울 중위, 당신 한 사람이 이 배에 탑승한 65인의 승조원들보다 낫습니다. 아니, 사실상 미국에 협력하는 일본 함대 전체보다 낫지요. 정치적인 영향력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조안나의 위로였다. “미국의 해안선은 장대하지요. 자위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해상봉쇄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태평양 방면에서는요. 정부는 그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에이프릴 퍼시픽으로 알게 된 바, 미 해군의 피로도는 상당한 수준이다. 자칫하면 파열이라는 느낌이랄까. 우방국 함대전력은 가문 날의 단비 같을 것이었다. “사과드리러 와서 위로를 받고 있군요. 제가 참 모자란 사람입니다.” 함장은 짧게 웃고 다시 어두워졌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멋대로 쌓아온 감정이 많아, 뵙는 순간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제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시기에 무척 못된 얼굴이었겠지요.”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느낌을 지금도 받고 있어요. 아직 제가 많이 싫으신가 봐요.” 입을 다무는 우메하라 함장.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참 좋은 분이시네요.” 계급으로도 아래, 나이로도 아래이며 감정적으로도 싫은 상대에게 저자세로 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끄러운 자기고백은 또 얼마나 큰 수치일 것인가. 함장의 사죄는 그의 의무였다. 국민들에게 해가 될 가능성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철저함. 그러므로 그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 한들, 겨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 같아.’ 함장은 지금 이 일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엄격할 것이다.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없는 진정성이 나중에는 있으리라고.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 사람에겐 한계가 있는걸. 겨울은 함장을 위한 미소를 만들었다. “힘내세요. 일본은 다시 일어설 거예요. 함장님 같은 분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타다아츠 료헤이 같은 인간은 말고. 스스로를 민족지도자로 불러달라던 야쿠자 두목. 그런 작자가 설칠수록, 끌려가는 사람들은 암담해진다. 우메하라 함장은 씁쓸한 얼굴로 위를 쓸어내렸다. 아픈 모양이다. “정말로, 저는 위로를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만……. 면목 없습니다. 제 이기심으로 거듭 폐를 끼칩니다.” “누구나 힘들 때잖아요. 그리고 제겐 편히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계급도 있으신데.” 2등 해좌는 중령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소속을 감안한들 존중해야 할 계급이었다. 함장이 겨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슬픈 일이다. 한 때 한국에서도 영관급 고위 장교들이 미군 소위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다고 들었다. “어렵군요.” 함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착할 때까지 조금 더 쉬고 계십시오. 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시선을 피하며, 함장은 조용히 물러났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발걸음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조안나가 겨울을 바라본다. “이걸 예상하셨던 겁니까?” “어렴풋이?” “음…….” 주먹으로 입을 누르며 골똘히 고민하는 그녀. “그렇군요. 겨울도 비슷한 처지니까, 저보단 공감하기 쉽겠네요. 당신에게 감탄하는 것도 이제 질리려고 하는데.” 겨울은 조안나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홀로 납득한 그녀가 자세를 고친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소가 참 공교롭군요.” “숙소?”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겨울이 갸우뚱 하자, 조안나가 한 차례 끄덕이며 부연한다. “우리가 이 배에 탔던 곳을 떠올려 봐요.” “엔젤 섬의 북쪽이었잖아요.” “예. 그 시설, 실은 예전에 폐쇄된 이민국 건물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바다, 가설부두가 설치된 만의 이름은 중국 만(China cove)이죠.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그곳이 바로 중국인 배제법의 무대였답니다. 이 나라의 부끄러운 역사 중 하나죠.” 그녀가 설명했다.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 때문에, 이민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있던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추방하려 했었다고. 사실상 법제화된 인종차별이었다고. “불편합니다. 이 나라가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 같아서요.” “우연의 일치잖아요.” “당사자들의 느낌은 다르겠죠.” 건물 자체가 전시관으로 쓰였으니, 사정을 모르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각자에게 생각할 것이 있었다. # 134 [134화] #엔젤 아일랜드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세한 관성이 느껴진다. 잠수함이 감속하고 있었다. 슬슬 목적지에 도달할 시간이기도 했다. 습관 같은 상념에 잠겨있던 겨울이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쌔액- 쌕. 규칙적인 숨소리. 조안나가 잠들어있었다. 함장이 다녀간 뒤 긴장이 풀렸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던 그녀. 마침 의자 삼았던 게 침대였다. 깨지 않도록 살살 눕힌 건 겨울이었고. 웅크리기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다리를 올려주기도 했다. ‘공기가 답답하니 졸릴 법도 하지. 어제 오늘 고단하기도 했겠고.’ 환풍기는 가동되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산화탄소 농도에 따라 자동으로 조절되는 것이겠다. 기준이 낮게 설정된 느낌이다. 수중에서는 모든 것이 제한적이게 마련. 잠수함에서는 산소도, 공기정화도 한정된 자원이다. 항상 아끼는 게 기본이며, 지금처럼 짧은 항해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까. 겨울의 모든 경험에 걸쳐, 예외는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뿐이었다. 함장의 선실은 고작 한 평 반 남짓이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몇 시간을 있었으니, 공기가 덥고 탁해진 것은 당연한 노릇. 불가항력의 졸음이 오기 쉬운 조건이다. 겨울도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정밀하게 재현된 피로감은 생전에 느끼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정이 모자랐으면 강제적인 수면유도가 따라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슬슬 깨울까?’ 지난밤의 소모를 돌이켜보면, 조금 더 재워두고 싶긴 하다. 전투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허나 함장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을 것이다. 겨울에게는, 글쎄, 그래도 신뢰가 쌓였으니 괜찮지 않으려나? 고민하는 가운데, 잠수함이 다시 움직인다. 감각보정이 아니고선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작은 관성의 물결들. 방향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까다로운 미세조정의 와중인 것 같았다. 부상할 위치를 잡는 모양이다. “앤, 일어나요.” 어깨를 붙잡고 살살 흔들어본다. 응- 미간을 좁히면서도 눈을 뜨지는 않는 그녀. 생전에 가을 누이를 깨울 때가 떠올라, 겨울은 드물게 만들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좁은 공간은 좁다는 것만으로 많은 유사성이 생겨난다. 가난할 때 함께 지내던 방이 꼭 이 선실을 닮았다. 추운 계절에 창문 열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겨울은 체온으로 데워진 텁텁한 공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가을에겐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다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니? 그 때마다 겨울은 우울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겨울이 싫어. 넉넉할 때 없는 생전이었으나 어린 시절은 유독 심했다. 한 번 공기를 갈고 나면, 떨어진 온도를 올릴 방법은 역시 체온뿐이었다. 난방은 아껴야 했고, 끓인 물을 가져다 두기가 항상 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그래서 가을은 한 이불의 두 동생을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그 품에서 낡은 책을 읽기도 하고, 가을에게 공부를 배우기도 했다. 음……. 겨울은 조안나의 어깨를 잡은 손이 아쉬워졌다. 손 안의 따뜻함이. 누군가 안아준 지 오래되었고, 누군가 안아본 지도 오래되었다. 조금 더 체온을 느끼고 싶다. 그 너머에 있을 본질은 비록 진짜 사람이 아니겠으나, 어차피 사람도 감각의 저편에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겨울은 마음을 따르지 않았다. 손에 힘을 준다. “앤, 앤?” 몇 번 더 흔들자 조안나의 눈이 가늘게 열렸다. 좌우로 움직이던 눈동자가 겨울에게 고정된다. 깜박깜박.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약 3초.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무기를 확인하고, 시간을 확인한 뒤에,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한 시간 반 정도.” “이런. 깨우지 그랬어요? 겨울도 피곤했을 텐데.” 그녀는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미안해했다. 혼자 잤다고. 겨울은 떨어진 모포를 주워 능란하게 접었다. “앤이 잘 잤으면 그걸로 됐어요.” 자리를 정리하기 무섭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다가온다. 문을 연 것은 무장한 사병이었다. “깁슨 요원님, 그리고 한 중위님. 함장님의 호출입니다. 전투지휘실로 와주셔야겠습니다.” 병사가 앞장섰다. 겨울은 그의 무기를 유심히 살폈다. 본 적 없는 총기였다. 가볍고 다루기 편한 기관단총 종류. 성능이 궁금하다. 이들과 교전할 가능성이 당장은 없겠으나, 나중엔 또 모를 일. 혹은 같은 무기를 지닌 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예컨대 자위대의 다른 분파. 나라 잃은 군대의 행보가 동일하긴 어려울 터였다. ‘흠. 명중률을 신경 쓴 것 같진 않네.’ 총열이 짧다. 탄도가 불안정하겠다. 개머리판도 없었다. 반동을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속으로 많은 탄을 뿌리는 제압사격용인가보다. 잠수함이나 건물 내부처럼 좁은 환경에서는 쓸 만할지도. 교전거리가 짧으면 명중률은 중요치 않은걸. 「전투감각」에 의거한 「통찰」과 「간파」가 겨울의 판단을 긍정했다. 그러고 보면 FBI의 주 업무 중 하나가 총기단속이었다. 조안나는 알고 있을 공산이 높다. 시간 날 때 물어보도록 할까. 복도를 걷는 동안 작은 진동이 발밑을 타고 올라왔다. 물소리가 들린다. 바닥이 둥실 뜨는 느낌이 들었다. 지휘실에선 함장이 뒷짐을 지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절제된 태도로 두 사람을 맞이하고는, 비어있는 잠망경을 권했다. “곧 부상할 예정입니다만, 그 전에 주위를 파악해두시는 게 좋을 듯 하여.” 교전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 수면 위의 환경을 숙지하라는 뜻이었다. 겨울이 고개 숙였다. “사려 깊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잠망경으로 보는 풍경은 전면의 스크린에도 투영되었다. 둘 중 한 사람만 잠망경을 잡아도 무방했다. 승조원이 직접 하지 않는 건, 원하는 곳을 보라는 배려였고. 조안나가 사양했으므로 겨울이 자리를 잡는다. 함장이 조작을 도와주었다. 부상할 위치는 두 척의 배 사이였다. 아마도 어느 한 쪽이 CIA의 작전본부일 것이다. 남은 한 척도 장악하고 있을 터였고. 앞뒤로 트인 틈은 눈 좁은 그물을 쳐서 가려놓았다. 이러면 볼 게 없지 않나? 싶었으나, 배율을 높이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물이 점차 성기고 희미해지며, 그 너머에 있는 풍경이 고스란히 비친다. “꼭 투시하는 것 같네요.” “킬 플래시(Kill Flash)를 떠올려 봐요.” 조안나의 목소리. 킬 플래시는 그물 비슷한 프레임이다. 렌즈의 반사광으로 인해 적에게 발각되는 걸 막아주는 도구였다. 스코프에 씌우고도 보는 데 지장이 없다. 시야 한 편에 거리가 표시되는데, 겨울은 230미터 바깥에 있는 무장인원의 얼굴과 장비, 복장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광량조절로 낮처럼 환하게 보이는 게 인상적이었다. ‘군인?’ 병사는 민간인들 사이에 섞여 거나하게 마시고 떠드는 중이다. 낯선 패턴의 디지털 위장복을 입었고, 미국에선 유통되지 않는 무기로 무장했다. 화면을 보던 조안나가 중얼거린다. “중국군이군요. 이 일대의 중국인들을 장악한 실질적인 배후세력입니다. 옆에 있는 잡것들은……흠, 문신을 보니 사해방(四海幇) 소속이네요. 8년쯤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분파를 소탕한 게 마지막이었는데, 또 보게 될 줄이야.” 어쨌든 당장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른 방향을 살폈으나, 시간이 늦어서인지 몇 명의 졸린 보초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들의 게으른 경계는 이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충분히 살펴봤습니다. 앤만 괜찮다면 올라가도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CIA에서도 근무를 세워뒀을 테고.”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함장이 승조원들에게 지시했다. “밸러스트 탱크 배수. 부상한다.” 부함장이 한 차례 복창했다. 다시 한 번, 아까 보다는 약하게, 바닥이 들뜨는 것 같다. 부상은 금방이었다. 애초에 잠망경을 올릴 만큼 수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함장이 겨울과 조안나를 함교 승강구로 이끌었다. 필요 이상의 인원이 뒤따랐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격식일 뿐인지. 함장의 지시로 일본 수병들이 먼저 승강구를 오른다. 해치를 열자 자잘한 바닷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이크. 조안나가 눈살 찌푸리고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뒤이어 올라가니 앞서 오른 수병들이 사방을 겨냥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위에서 줄사다리가 떨어진다. 화물선 난간에 기댄 남자 하나가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평상복에 야시경을 쓰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해이한 느낌을 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독관. 그리고 한겨울 중위. 얼른 올라와요. 나도 좀 쉬게.” 조안나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우메하라 함장이 작별을 고했다. “짧은 만남이었습니다만, 두 분을 알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지요. 그때는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 중위님.” 그는 겨울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당신이 있는 곳의 일본 국민들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승조원들이 하나 둘 함장을 본받는다. 겨울 역시 그들에게 정중히 허리 숙인다. “저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남아 주시길.” 조안나는 사다리에 한 발 걸친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메하라 함장과 악수를 나눈 겨울은, 조안나를 따라 사다리를 탔다. 다 올랐을 즈음, 진류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체가 조용히 물에 잠긴다. “흐음. 다 봤어요?” 따분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돌아보면, 못마땅한 조안나와 여전히 느긋한 남자가 대조를 이루었다. 남자는 꽁초를 던지고 야시경을 벗었다. 나이로는 조안나와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정도일까. 갑판에 배치된 경계 병력이 이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반갑습니다. 내가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현장 책임자인 중앙정보국 국토안보지원부 네이선 채드윅 작전팀장입니다. 에……뭐냐, 그, 뜨거운 애국심과……남다른 충정으로 개돼지처럼 끌려오셨을 두 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며……우선 식사나 합시다. 일정상 저녁을 못 드셨을 테니.” 흐름이 엉망진창이다. 겨울은 어쩌나 하다가 형식적으로 대꾸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중위 한겨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면 조안나는 침묵한다. 채드윅 팀장이 따분한 낯 그대로 말로만 능청을 떨었다. “어이구, 우리 감독관님은 왜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으시나. 예쁜 얼굴 망가지게. 우리가 비록 몬태규의 개와 캐퓰릿의 고양이이긴 하지만……시작부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어차피 당직이거나 작전 중인 애들 말곤 다 자는 중이거든. 당장은 소개도 못한다니까?” 자자, 들어갑시다. 그는 겨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른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그 스스럼없는 태도는 조금 난처한 것이었다. 이렇게 앞장서는 바람에 조안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모양새가 된다. 안내된 곳은 정말로 식당이었다. 채드윅 팀장 본인이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구조인지라 대화엔 지장이 없었다. “귀한 손님을 받으려고 귀한 고기를 모셔놨지. 때맞춰 냉장선이 들어오지 않았겠소? 값을 비싸게 치르긴 했어도……. 욕심 많은 중국인들 같으니. 소 등심 두 짝에 소총탄 150발을 받지 뭡니까? 이 엿 같은 거지소굴의 유통비용이 갈수록 높아지는 건 다 그놈들 때문입니다. 그놈들만 아니어도 해상운송으로 충분할 텐데. 흠, 싹 죽었으면.” 꾸며낸 모습인지, 천성인지, 그는 고기를 굽는 내내 수다스럽게 떠들어댔다. 대개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무의미한 말들. 이쪽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 드시구려.” 대충 구운 스테이크가 테이블에 놓인다. 그런 것 치고 맛은 좋았다. 조안나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식기를 잡았다가, 한 입 먹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떻소?” “훌륭하네요.” 겨울의 답변에 헤벌쭉 웃는 채드윅. “오, 중위님 당신 마음에 드는군요. 그러니 가장 궁금할 사람들의 소식을 알려드릴까?” 가장 궁금할 사람들이라. 겨울에겐 당연히 포트 로버츠의 겨울동맹 뿐이었다. 그러나 벌써부터 소식이랄 게 있을까?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인데…….’ 가만히 바라보자, 채드윅이 빙그레 웃는다. “역시 듣고 싶으신가. 하기야 스타는 관심을 먹고 사는 법인걸.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전 미국에서 활동 중인 당신 팬클럽의 분파와 활동내역에 대해 낱낱이 브리핑해드리지.” “아니…….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뭐가 재밌었던 걸까? 정보국 요원이 박장대소했다. 옆에서는 앓는 소리가 들린다. 조안나가 식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할 말을 고르기 어려운 기색. 이번 작전, 괜찮으려나. # 135 [135화] #과거 (8), 장미가 시드는 계절 (1) 가을은 계절이 바뀌는 승강장에 서있었다. 시린 바람이 분다. 함께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낡은 옷깃을 여몄다. 그들과 가을의 거리는 멀다. 국적이 다른 탓이다. 출생은 사실상의 신분이었다. 신분 낮은 노동자들은 선을 넘지 못했다. 한국인을 보호하겠다고 그어놓은 선. 단 한 줄의 빨간 선이었으나, 절대적이었다. 자격 없이 넘으면 절도모의에 준하는 범죄다. 명백한 차별. 그러나 항의하지 않는다. 우월해진 사람들은 당연하거니와, 열등해진 사람들까지도. 언론은 연일 그들 일부의 범죄행각을 보도했다. 살인, 방화, 절도, 사기, 강간……. 피해자는 계급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차별 받는 사람들은 일부를 혐오하는 일부의 전체가 되어있었다. 나는 다르다고. 다른데 너희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선 저편 발 디딜 틈 없이 몰려선 이들은 서로에게 인상을 썼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의심을 산다. 경찰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신분은 낮았다. 사후의 낙원을 위해서는 실적을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어가 어려운 경관들에게, 한국어를 모르는 노동자들은 잠재적인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잠재적인 범죄자여야만 했다. 자기애는 항상 동포애를 앞선다. 공감은 자신을 죽이는 능력이었다. ‘구역질이 나…….’ 가을은 역겨움에 몸서리쳤다. 아침으로 먹은 에너지 팩의 인공적인 포도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목이 칼칼했다. 코 안쪽이 시큰거렸다. 때마침 다시 바람이 분다. 칼처럼 날카로웠다. 한기가 속살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이 도리어 청량하여, 가을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남 보기 조금 부끄러운 몸짓으로, 가을은 바람을 향해 품을 열었다. 멀어진 동생과 같은 이름의 계절이 품속으로 밀려왔다. 몸으로는 추위를 느끼고 마음으로는 온기를 느꼈다. 추억 속의 체온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겨울은 겨울을 좋아한 적 없었다. 추울 때마다 이불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 때마다 어색하지 않게 안아줄 수 있어 좋았건만. 지금도 무척 추울 텐데. 몸이 아니라, 마음이. 잡음 섞인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지금 혜성 제3역 방향으로 가는 내선순환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The inner circle line train heading for……] 열차가 역사에 진입한다. 탑승할 칸은 한산했다. 한국인이 현실에서 일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주인구의 절반이 된 외국인들에게, 이 땅의 원주민들은 실체 없는 홀로그램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가상현실의 여명기. 물리현실은 이미 위험한 곳 취급이었다. 그만큼 바깥에선 추가수당을 받게 되어 좋았지만. 선 저편은 소란스럽다. 나오려는 사람들과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역무원이 고함을 지른다. 내뱉는 욕설은 버마어였다. 가을에게는 그 뜻이 자막으로 보인다. 눈에 낀 렌즈와 휴대 단말의 연동 기능이었다. 외치는 사람으로부터 지시선이 뻗어 나와, 이 사람의 말이라고 알려준다. 의식하지 않는 다른 외침은 스스로 지워지는 식. 다만 여러 사람이 아우성치면, 단말 성능 문제로 자막이 엉킬 때가 많았다. 스스로도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가을은 조금 더 고성능의 단말이 있었으면 했다. 좋은 물건은 개선된 필터링과 음성 변환이 제공된다.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지금 쓰는 물건도 회사에서 지급받은 것이었으니. ‘아껴야 해. 정말 중요한 곳에만 써야지.’ 고개를 흔들고, 가을은 객차에 올랐다.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몇 안 되는 다른 승객들과 거리를 둔다. 조용히 앉아 트리니티를 호출했다. 시야에 출력되는 다채로운 인터페이스.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엔진은, 사후보험 외 많은 분야를 책임진다. 개인 단말 까지도. 『사후보험공단 중부집중국 방문요청』 가을은 면회신청서식을 불러왔다. 겨울, 내 잃어버린 계절을 만나러 가야지. 그동안은 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웠다. 가난한 사람은 신용도가 낮기 때문에. 사후보험시설의 보안은 가족 간의 그리움보다 우선시되는 사안이었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며. 이제 안정적인 직장이 생겼으니 한결 나을 것이다. 직장. 그래, 직장을 구했다. 혜성그룹은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공정한 근로계약으로 이름이 높다. 사적인 감정은 접어둬야 했다. 겨울이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았기에. 그 아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남은 시간을 연장하고 있었다. 오직 가을을 위해서. 시야가 흐려진다. 서식이 일그러졌다. 눈물을 닦아내는 가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지치고 고단했던 겨울의 한 마디. 물론 실제로 했던 말은 아니다. 겨울은 아끼는 사람 가슴에 못 박을 성격이 못 되었다. 그러나 가을은 분명히 들었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표정과 음성과 배려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였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을만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날 위해서라도 살아줘. 역시 정말로 했던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 이외의 모든 것으로 전해버린 마음이었다. 떠오를 때마다 가을은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었어. “괜찮아.” 기억 속의 겨울은 차분하게 웃었다. 서로 진심을 내보일 수 없었던 대화. 반가웠지만, 그것 외엔 괴로움뿐이었다. 가을은 미완의 신청서식을 치워버렸다. 어떡하지?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시간을 다시 겪는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손이 떨렸다. 그래, 지금까지 만난 일 드문 것도, 절차보다는 스스로의 나약함 쪽이 컸다. 끔찍한 두려움과 추악한 자기혐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이는 겨울이, 가을에게는 무서울 정도의 아픔이었다. 상체가 기울어진다. 가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소리 죽여 오열한다. “이 나쁜, 나쁜 새끼들아…….” 처음엔 부모에 대한 원망이었다. 팔아선 안 될 것을 팔아버린 사람들. 그랬던 것이 어린 몸을 가져간 늙은 괴물에 대한 원망이 되고, 당장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원망이 되고, 마침내는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원망이 되었다. 그 아이도 세상을 증오하고 있겠지. 틀림없이. 그런데……. ‘나조차 원망스러운 건 아닐까?’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만약 겨울이 조금이라도 미워하는 기미를 내비친다면, 가을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또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 겨울에게 새로운 상처를 줄 가능성. 가을은 숨이 막혔다. #Intermission, 폴리아모리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한동안 격조했습니다. 네! 저 아직 안 잘렸습니다. 어허, 서운해 하진 마시고요. 제가 서운하거든요. 『하늘에서 별 따기』 이후로 적잖은 시간이 흘렀네요. 그때 그렇게 소개해드린 뒤 두 손 가득 별을 담아가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답니다. 덕분에 저는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죠. 매출을 올렸다는 칭찬, 고객 불만이 폭주한다는 비난. 고객만족센터 담당자는 저랑 영 안 맞는군요. 사실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연예인들의 가상인격을 한 번에 여럿 사 가신 분들.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사용 전 주의사항 안 읽어보셨죠? 하긴 훨씬 더 중요한 사후보험 개정약관도 잘 안 읽으시던데, 일개 DLC의 주의사항 같은 걸 신경 쓰실 리가 있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이 읽지 않고 넘어갔던 주의사항을 옴므 파탈의 매혹적인 음성으로 쉽게 풀어 낭독해드리겠습니다. 간단한 듣기평가입니다. 주어지는 설명을 잘 듣고 문제에 답해보세요. 『◎상품 이용 시의 주의사항 - feat. 시스템 관리자』 구입하신 연예인 관련 상품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캐릭터 가상인격 패키지들은 필수적인 심리제어 옵션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만남의 조건과 초기 호감도 설정이 기본입니다. 다른 가상인격에게 연애감정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 옵션도 있습니다. 많이들 애용하시죠. 이렇게 설정하면 어쨌든 연애감정은 플레이어에게만 쌓이므로, 100%의 확률로 언젠가는 사랑을 얻게 된답니다. 기껏 비싼 돈 주고 샀더니 다른 연놈이랑 놀아나면 빡치잖아요? 내가 이러려고 현질을 했나 자괴감도 들겠고요. 아, 물론 이런 자괴감을 즐기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저희는 다양한 취향을 존중해 드립니다. 그게 돈이 되는 취향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가상인격은 인간인격의 모사체입니다.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은 기본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 이거죠.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질투도 할 수 있습니다. 두 감정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요! 물론 여러분의 공감능력으론 AI를 사람처럼 느끼기 어렵다는 사실은 압니다만, 그리고 여러분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을 리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오, 그럼 질투심 억제를 기본 심리제어 옵션에 포함시켜줄 수 없느냐고요? 여러분은 기본의 의미를 되새겨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기본인걸요. 그 상품을 안정적으로 이용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제공된 심리제어 옵션이 해당 상품을 정상 이용하는 데 부족한가, 부족하지 않은가. 이게 기본과 그 이상을 가르는 기준이랍니다. 즉 여러분이 경험하신 별들의 전쟁은 저희가 기본적으로 책임져야 할 범위를 넘어선 문제입니다. 오류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잖아요.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가상인격의 질투에 대한 고객님의 응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세요. ⓵ Fuck↗You↘ ⓶ 나의 이름은 진상. 나는 지금 나의 고객 정체성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진상 고객이었던 것이다. 고객만족센터에 항의하러 가야징. ⓷ Shut up and take my money! ⓸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어떻습니까? 문제가 너무 쉬운가요? 어……. 죄송하지만 4번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야 저희 고객님답긴 합니다만. 짝짝짝. 맞습니다. 3번이 정답입니다! 여러분이 가상현실에서 겪게 될 모든 치정극의 궁극적인 해결책! 신상 DLC, 폴리아모리 패키지를 소개합니다! 이 패키지가 여러분의 세계관에 적용되는 순간! 어머나, 질투심이 사라졌네? 여러분의 모든 연인들은 거짓말처럼 얌전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독점욕 강한 인물이라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거죠. 물론 가벼운 질투를 즐기는 분들을 위해 준비된 옵션도 있습니다. 사용자 지정 강도의 질투심을 유지시켜주는 이기적인 기능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DLC 이름이 좀 부적절하긴 하네요. 사전적인 폴리아모리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에 한계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한계가 없는 감정을 일부일처의 고정된 틀에 가두지 말자는 이야기죠. 세상에. 어쩜 이렇게 인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사랑은 한계가 명백한 감정이란 사실을 말이죠. 물론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이 전해지는걸요. 하지만 희귀하니까 미담인겁니다. 그 정도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흠, 글쎄요. 넉넉하게 만에 하나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전 인류의 0.01%만이 가능한 정신 상태라면, 그거 정신병 아닙니까? 그러니 고객 여러분, 정치적 올바름을 집어치우고 욕망에 솔직해지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폴리아모리는 평범한 섹스 판타지일 뿐입니다! 가상현실이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가상현실 속에서 꾸밈없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행복을 구입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신을 연모하는 가상인격들을 모조리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리세요! 하하하. 지금까지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 136 [136화] #시험 (1) 솨아아아-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한 평 남짓한 샤워실이 빠르게 흐려졌다. 겨울은 수증기 속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 손으로 닦아내자, 낯선 소년이 나타났다. 겨울이 소년과 함께 고개를 기울인다. 생전과 다르구나. 외모의 차이는 아니었다. 꾸며낸 감정과 꾸며낸 표정 탓이었다. 연극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겨울은 재미없는 어릿광대일 테니까. 거울에 낸 손자국이 희미해졌다. 낯선 소년은 실루엣이 되었다. 겨울은 흥미를 잃었다. 눈을 감는다. 물줄기를 맞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 주어진 시간은 넉넉했다. 이유 없는 휴식은 아니었다. 변장을 위한 사전준비다. 특수화장을 받을 예정이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상반신까지. 이른 시간 찾아온 담당자는 선실번호를 알려주고 돌아갔다. 물 많고 전기 넉넉하니 천천히 즐기고 오라면서. 도구는 비누와 샤워 스펀지뿐이었다. 비누에서는 폐식용유 냄새가 났다.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떨어지는 물자가 대개 이 정도 수준일 것이었다. 스펀지로 전신을 꼼꼼하게 문지른다. 몸은 전보다 단단했다. 전투력을 강화하면서 보정으로 붙은 근육 탓이다. 달라진 전투력은 달라진 감각이었다. 적응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샤워를 마친 겨울이 새로운 유니폼을 입었다. CIA가 만들어낸 가공의 민간군사기업, 『오르카 블랙』의 전투복이었다. 무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복도 전체적으로 산만했다. 아무렇게나 흘러나온 전선이 사방을 기어 다닌다. 복도의 벽이 있다가도 없었고, 없다가도 있었다. 내장공사가 도중에 중단된 것 같은 모습. 그러나 눈여겨보면 방어에 유리한 구조였다. 내부구조를 모르는 사람은 사방에서 공격받기 쉽겠다. 총격전을 염두에 둔 장애물과 활성화되지 않은 트랩들, 보이지 않게 위장된 총안구들이 확인된다. 목적지에 도달한 겨울이 문을 두드렸다. 툭툭. “중위 한겨울입니다.” “들어오십시오.” 화답하는 걸걸한 목소리. 겨울은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흡사 미용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생경하다. 용도에 맞긴 하지만. 담당자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예상보다 일찍 오셨군요, 중위님. 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우선 앉으십시오. 상의는 이쪽에 벗어두시고요. 시작하기 전에 피부상태를 봐야겠습니다.” 자신의 손을 소독한 남자는, 겨울에게 모종의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러더니 큼지막한 손으로 겨울의 얼굴을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목적을 배제하고 보면 꽤나 이상한 광경이었다. 몇 가지 장비로 피부 여러 곳을 측정한 뒤에, 사내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것 참, 보기 드물게 좋은 피부인데……. 망쳐놓으려니 제가 다 안타깝군요.” 그러면서도 망설이지는 않는다. 위이이잉. 기계가 약품을 분사하는 소리.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는 겨울의 인상을 빠르게 바꾸어 나갔다. 동시에 주의사항을 전달한다. “이 화장은 어지간해선 지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영구적인 건 아니기 때문에 열흘에 한 번은 보수를 받으셔야 합니다. 영구화장도 가능하지만, 중위님 얼굴을 완전히 망쳐놓을 순 없으니까요. 위에서도 절 가만 두지 않을 테고요.” 그는 허허 웃고 말을 잇는다. “혹시 바다에 빠지거나 해서 해수에 젖었을 경우 그날 저녁에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씻을 때 비누를 많이 쓰진 마시고, 최대한 물로 닦아낸다고 생각하십시오. 다행히 물이 부족하진 않으니 찝찝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릴까요?” “괜찮아요. 기억했어요.” “좋습니다. 다음으로, 혹시 알레르기가 있으십니까?” 이렇게 물으며, 담당자는 가느다란 주사기를 들었다. 실린더에 소량의 투명한 액체가 차있었다. 겨울은 지력보정으로 뜨는 자기설정을 보고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잘됐군요. 이건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는 약물입니다. 마약 좀 해본 몰골을 만드는 데 탁월하지요. 보통 화장에서 끝냅니다만, 중위님은 워낙 얼굴이 알려진 분이라 불안해서 말입니다.” 그가 바늘을 가져다댄다. 따끔할 겁니다. 얼굴에 놓는 피하주사는 불쾌한 느낌이었다. 벌레에게 물리는 것 같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목덜미와 몸에도 몇 번을 나누어 찌른다. 주입하는 양이 미세했지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겨울은 번지는 가려움을 느꼈다. 담당자가 사진을 찍었다. 톡톡 눌러 몇 사람에게 전송하는 모양. 바뀐 얼굴 때문에 적으로 오인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사내가 작업 완료를 선언했다. “됐습니다. 이제 브리핑 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길을 모르실 테니 안내해드리죠.” 겨울이 상의와 무기를 챙기며 묻는다. “아직 듣지 못했는데, 직위랑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통성명을 하지 않았던가요? 실례. 한 중위님을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지가 않아서 그만.” 그가 어깨를 으쓱인다. “올리버 탤벗입니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전술기획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가끔씩 이런 잡무를 맡기도 합니다. 메이크업은 부업이죠. 나름 전문기술이라 추가수당도 받습니다. 하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넉살이었다. 겨울은 그와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당분간 잘 부탁해요, 탤벗 요원.” “별말씀을. 다들 중위님께 거는 기대가 큽니다. 여러모로 힘든 일이 많겠습니다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시길.” 이후 이동한 브리핑 룸에서는 서류를 들춰보는 조안나를 볼 수 있었다. 달리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혼자 소외된 느낌이랄까. 자연스러운 무표정이지만 어깨는 경직되어있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두 얼굴을 살피고는, 흥미 없는 느낌으로 다시 서류를 읽는다. ‘이상한데. 사진을 전달받지 못했나?’ 겨울은 탤벗을 곁눈질했다. 아니, 의도적이라고 단정 짓긴 이르다. 겨울과 조안나가 도착한 건 고작 어제의 일이었다. 탤벗의 연락망에 조안나가 없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그건 채드윅 팀장이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해진 자리가 없다기에, 겨울은 FBI 수사관 옆을 채운다. 조안나는 의혹 어린 눈으로 한 번 흘깃거리고, 서류를 읽다가, 갸우뚱 하며 다시 바라보았다.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그렇게 알아보기 힘들어요?” “세상에, 겨울이에요?” 지켜오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진다. 그녀의 얼굴이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벌써 변장을 했군요. 정말 더럽고 야비하게 생겼어요!” “…….” 건너편 자리에서 쿡 터지는 웃음들. 조안나가 뒤늦게 표정관리를 했다. 목덜미가 붉어졌다. 채드윅 팀장은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낮게 코를 고는 소리.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탤벗이 다가와, 겨울에게도 조안나와 같은 서류를 주었다. “가능한 신속하게 숙지하셔야 할 정보들입니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의 간략한 신상정보, 만내의 세력분포, 그동안 수행된 작전들의 결과와 유사시 협조를 요청할 아군 부대의 배치상황 등이 나와 있습니다. 브리핑 룸과 같은 층에서는 휴대가 가능합니다만, 그 외의 장소로는 유출하실 수 없습니다. 숙지한 뒤엔 옆에 있는 작전정보실로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파쇄처리 해드릴 테니까요. 이해하시겠습니까?”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핑 룸과 같은 층이라면 숙소도 포함이었다. 멈칫. 제 자리로 가려던 탤벗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그거 잠시만 줘보십시오. 브리핑 시작 전에 봐두시면 좋을 페이지를 표시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탤벗은 두툼한 손을 날렵하게 움직였다. 굳은살 박인 자리를 눈여겨보니 「통찰」이 작동했다. 나이프 파이팅에 숙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악력을 단련한 흔적도 엿보였다. 착착착착, 기계적으로 접히는 페이지들. 정리는 금방이었다. 서류철을 받아들면서 나머지 인원들을 살핀다. 본격적인 전투원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 CIA 요원들일 터. 그럼에도 감각에 잡히는 위협성의 정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유일하게 예외인 것이 팀장인 네이선 채드윅. 그것이 보정에 의한 위장일 가능성도 있었다. ‘무능력자가 팀장일 린 없겠지.’ 무엇을 얼마나 감추고 있으려나. 탤벗이 돌아간 뒤 겨울은 페이지를 차례로 넘겼다. 가장 먼저 접혀있는 장은 만 내부의 개괄적인 현황을 담고 있었다. 골든게이트 봉쇄에 대한 정보가 보인다. 미국은 여기에 다섯 척의 원자력 잠수함을 투입한 상태였다. 더 이상은 어떤 잠수함도 나가거나 들어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만 모르는 용어가 섞여있다. “앤. 소서스(SOSUS)가 뭔가요? 골든게이트에 있다는데.” 질문 받은 조안나가 고개를 돌린다. “소나가 뭔지는 알죠?” “네.” “쉽게 설명하면, 그걸 해저에 줄지어 깔아놓은 거예요.” “아하.” 소나는 수중에서 레이더를 대신하는 물건이다. 다만 전파 대신 음파를 쓴다는 게 달랐다. 소리를 쏴서 반향을 잡아내는 능동형과, 들리는 소리를 수집하기만 하는 수동형이 있었다. 조안나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 골든게이트와 해안선 일대, 그리고 만 안쪽의 해저에는 유사시 샌프란시스코를 방어하기 위한 소서스 라인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관제소가 몬테레이(Monterey)에 있었다는 거죠. 지금은 만 입구를 차단하는 일부만 복구된 상태랍니다. 나머지는 방치되어 있습니다. 동력공급도 안 되는 상황이거든요.” 몬테레이는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였다. 서부 감염 확산 초기에 함락된 곳이기도 하고. 그녀는 같은 감시망이 미국 해안지역 전체, 캐나다 인근 해역과 미국의 속령인 섬들, 심지어는 영국의 해외영토 및 일본 같은 주요 동맹국의 해역에도 존재했다고 말했다. “꺼림칙하네요. 미군 신분으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이 나라는 전 세계 모든 바다를 통제하고 싶었던 건가요?” FBI 수사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핵전쟁이 두려웠으니까요. 대역병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종말 시나리오였는걸요. 잠수함 한 척에서 발사하는 핵미사일의 양이면 동부의 대도시를 모조리 날려버리고도 남아요. 그러니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것이죠. 겨울에게는 익숙하지 않나요?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이기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 말입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서 우리가 엿 같은 중국 잠수함을 잡아 족쳐야 한다 이거지.” 마지막에 끼어든 것은 자다 일어난 채드윅 팀장이었다. 조안나가 입을 다물었다. 정보국 팀장은 졸린 눈으로 겨울을 보며 웃는다. 품을 더듬어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마음은 없는 모양새였다. 불이 발갛게 타오르도록 쭉 빨아들인 다음, 눈앞의 허공에 몽글몽글 뿜어낸다. 흐으- 황홀한 표정으로. ‘아니, 이건 담배가 아니야.’ 겨울은 미간을 좁혔다. 채드윅이 내뿜은 연기는 냄새가 특이했다. 매캐한 건 담배와 매한가지라도, 좀 더 악취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 대마초였다. “채드윅 팀장님.” “뭡니까, 중위?” “대마를 피우시는 거야 팀장님의 기호이니 간섭할 바 아닙니다만, 실내에서는 참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꼴이잖아요.” 말하면서 주위를 살피는데, 조안나를 제외하면 딱히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 의미 불명의 탄성을 내뱉는 채드윅.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한 중위님은 약초(Herb)를 태워보신 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음, 일단 사과드리지요. 죄송합니다. 허허. 여기선 다들 하는지라 습관이 되었나봅니다. 예의를 차릴 기회가 없더군요.” 그러나 불을 끄진 않고 미적거린다. 입맛을 다시더니 은근히 묻는 말. “근데 중위, 이거 생각보다 괜찮거든요? 담배 피우는 것보다야 낫지 뭘. 스트레스 해소에도 직빵이라니깐? 이 기회에 한 번 해보는 게 어때요? 내거 한 대 드릴게.” “싫습니다. 몸이 둔해져서.” “저런.” 다른 정보국 요원들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채드윅은 결국 궐련을 책상에 꾹 누른다. 그가 항상 앉던 자리인지, 비슷한 자국이 수없이 나있었다. 이때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다부진 체구의 전투원들. 선두에 선 남자가 실내를 살피더니, 겨울과 조안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137 [137화] #시험 (2) 이때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다부진 체구의 전투원들. 선두에 선 남자가 실내를 살피더니, 겨울과 조안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채드윅이 손짓 한다. “서로 인사들 나눠요. 이쪽은 기동타격대 『화이트 스컬』의 콜린 파울러 대위 이하 기타 등등이고, 요쪽은 새로 들어온 한겨울 중위와 FBI 감독관 조안나 깁슨 요원입니다.” 남자가 중후하게 쏘아붙였다. “무성의한 소개 고맙소, 약쟁이(potter) 팀장.” “별말씀을.” 대위는 해골이 그려진 반(半) 복면을 끌어내렸다. 구부러진 입매와 흉터가 드러난다.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과 조안나가 먼저 경례했다. 답례한 대위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겨울을, 다음으로 조안나를. 뒤쪽이 꽤나 길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툭 뱉는다. “하필이면 감독관이 여자라니. 골치 아프군.” 조안나가 조용히 대꾸했다. “초면부터 꽤 무례하시군요, 대위.”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충고인데, 다른 사람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게 어떻겠소? 여긴 여자가 있을 만 한 곳이 아니오.”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겨울. 그러나 조안나 본인이 잠잠했다. 그 사이 대위는 자기 자리를 골랐다. 털썩 앉고 한숨 길게 내쉰 다음,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한다. “요원, 그리고 중위. 내가 개 같은 마초 새끼로 보이겠지만, 난 이래 뵈도 남녀차별을 싫어하는 사람이오. 여자보다 우수한 남자만큼 남자보다 우수한 여자도 있지. 텍사스 촌놈들을 빼면 누구나 인정할 거요. 그러나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소. 한 달에 한 번, 여자가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날이 온다는 거……. 당신 전임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시오?” “네. 총격전에 휘말렸다고 들었습니다만.” “여러 발 맞았지. 여기 박힌 게 치명적이었소.” 대위가 자신의 오른 눈 위쪽을 쿡쿡 찔러보였다. “방탄 뚫고 들어온 탄이 머리뼈 깨고 뇌까지 들어갔단 말이오. 중국 놈들이 갱단에 팔아넘긴 5.8밀리였지. 단숨에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삼 주야를 더 살아있더군.” “그래서요?” 조안나의 반응이 심드렁하자 대위는 눈살을 찌푸린다. “여기선 감독관이라고 마냥 놀고 있을 순 없소. 한 사람의 전투력이 아쉬우니까. 모두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어느 한 사람을 특별취급해주긴 어렵다는 뜻이오.” “걱정하실 필요 없게 해드리죠.” “그렇소? 설마 벌써 폐경이 오진 않으셨을 테고.” “생리하는 날 사람 죽이는 게 취미거든요. 스트레스를 푸는 데 꽤 도움이 된답니다.” “허.” 파울러 대위가 낮은 코웃음을 쳤다. “기대되는군. 브리핑 끝나고 실력이나 봅시다. 옆에 있는 한 중위도 마찬가지. 나도 내 부하들도 직접 본 것만 믿거든. 단순한 할리우드 스타가 아니란 걸 증명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날카로운 대화는 겨울의 응답으로 일단락되었다. 조안나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겨울이 온 뒤 누그러졌던 육체적 긴장이 되살아나는 중이었다. 본격적인 시작까진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다. 빈자리가 여전히 많다. 겨울은 수첩을 꺼냈다. 사각사각. 겉보기엔 자료를 보고 메모하는 것 같아도, 실상 쓰는 것은 조안나에게 전하는 말. 테이블 아래에서 무릎을 툭 친다. 그녀는 내색 없이 주의를 돌렸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조안나도 겨울처럼 수첩을 꺼낸다. 안정감 있는 필기체로 빠르게 적히는 그녀의 속내.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이해합니다. 목숨이 걸린 문제라면 누구나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걸요. 익숙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이런 일 겪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앤이 괜찮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초면부터 저러는 건 문제가 있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항상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지휘관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한 사람이 아쉬울 만큼 급박한 사태가 하필이면 그 날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아닌 척 하는 차별이거나, 의도적인 따돌림이거나, 혹은 장기간의 임무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괜한 화풀이를 하는 중이거나. 어느 경우든 마음에 안 드네요.」 「글씨가 꾹 눌렸군요. 나 대신 화내줘서 고마워요. :-)」 갸우뚱. 겨울은 자신이 쓴 문장을 훑어보았다. 딱히 감정을 담은 건 아닌데, 잡념 없이 몰두하다보니 갈수록 진하고 깊어진 감이 있었다. 흠.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는 오해였다. 펜 머리로 입술을 쿡쿡 찌르던 수사관이 재차 적어 내려간다. 「저 사람이 CIA라면 조직간 경쟁심리가 있으니 따돌림이라고 보겠습니다만, 대위는 겨울처럼 군에서 차출된 협력자일 뿐이죠. 포스 리컨 출신이라 여자를 깔보는 마음이 있긴 있었을 거예요. 해병이니까요. 그러나 그걸 대놓고 드러내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심지어 저는 감독관인걸요. 누적된 정신적 피로가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요.」 「그건 그거대로 불안요소네요.」 「이런 환경에선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어요. 포트 베이커에서 엔젤 섬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아기가 떠오르는군요.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겪어왔다고 가정할 때, 제가 대위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글쎄요. 지금 보여주는 이해심만 봐도 대단한데요?」 「시행착오로 습득한 거죠. 저 역시 장기 임무에 투입되었을 때 동료나 부하들에게 이유 없는 짜증을 부린 적이 많았습니다. 대개는 복귀 후에 사과하고 진탕 취하는 걸로 화해했지만, 가끔씩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로 목숨을 구해준 사이인데도 말입니다. 못 할 말을 해버렸죠. 얼굴 볼 때마다 느끼는 서먹함은 견디기 어려운 회한이더군요.」 마음이 깊다. 착한 사람이 이토록 잦을 수 있나? 겨울은 이럴 때 박리(剝離)되는 현실감을 느낀다. 모든 감각이 피부에서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역시나 가상현실이라고. 이게 지나간 시대의 핍진성일 수는 있겠다. 생전을 살다 온 겨울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가능성이지만. 「여기까지가 공적인 조안나 깁슨이고, 사적으로는 저 새끼가 꼴통(asshole)이라고 생각해요.」 기습적인 한 줄에 겨울은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마른 마음에 즐거울 때가 드물다보니, 웃음에 대한 면역이 약해졌다. 겨울이 펜으로 대꾸했다. 「뭐예요, 갑자기 부끄러워지기라도 했어요?」 「너무 잘난 척을 한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이모티콘을 그린 뒤에, 그녀는 필담을 마무리 짓는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나눠요. 이러다 들키겠습니다.」 겨울은 펜을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들킬 것을 우려했는지, 조안나는 페이지를 바꿔 한참 더 메모하는 시늉을 했다. 실상은 팝송 가사로 한 장을 채우고 있다.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 오, 라잌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 오……. 그러면서 얼굴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배려가 더해진 장난. 겨울은 한숨으로 웃음을 덮었다. 자리는 차근차근 채워졌다. 타격대는 색으로 소속을 구분하는 듯, 무장한 채 들어오는 이들의 복면은 그려진 해골이 제각각의 색채였다. 다만 그것이 위장 패턴의 일부인지라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웠다. 먼 거리에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 때마다 겨울은 새롭게 소개받았다. 『화이트 스컬』 이외에도 『블루 스컬』, 『레드 스컬』, 『블랙 스컬』 등의 몰개성한 타격대들이 존재했다. 각종 지원 팀까지 감안하면 전체 병력은 강화된 1개 중대 수준. ‘결코 많은 게 아니야.’ 해상도시의 규모는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 필적한다. 인구는 그 이하겠지만, 그렇다 한들, 어지간한 대도시 이상일 것은 확실하다. 2백 미만의 병력으로 장기작전을 수행했다면 누적된 피로는 상당할 것이었다. 난민 출신 조직원들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채드윅이 손가락을 퉁겼다. “다 모였으니 슬슬 시작합시다.” 전면의 스크린이 밝아졌다. 작전구역이 표기된 지도가 뜬다. 아직 자료를 다 살피지 못한 겨울에겐 시작부터 새로운 정보였다. 작전은 여기서만 진행 중인 게 아니라는 것. “본격적인 브리핑과 회의에 앞서, 여러분께 전해드릴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어느 쪽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장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나쁜 소식부터. 좋은 소식을 나중에 들어야 뒷맛이 개운하니까.” 채드윅이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럼 좋은 소식부터 알려드리죠.” 사나운 웃음이 번진다. 정보국 팀장은 어깨를 으쓱이고 화면을 바꾸었다. 한 장의 사진이 투영된다. 바다 한복판에 존재하는 거대한 인공섬이었다. 고저가 없는 지형, 활주로와 기지 규모에 딱 맞게 확장된 섬의 해안선은 자연적인 부분이 전무하다. 해변을 따라 투묘한 다수의 선박이 보인다. 대부분은 난민을 태운 민간선박이었으나, 유독 한 부분에 군용선박들이 몰려있었다. 겨울은 그 형태를 구분했다. 적어도 미 해군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채드윅의 말. “하와이에서 전해진 낭보입니다. 존스턴 섬을 점거한 채 시위하던 구 중국군 집단이 바로 어제, 현지시각 오후 15시를 기하여 조건부 항복을 수락했습니다. 이로써 귀순하게 된 함정 가운데엔 94식 원자력 잠수함 두 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발의 핵미사일이지요. 훌륭합니다. 무정부상태의 핵 위협이 극적으로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자, 모두 박수 한 번 칩시다.” 무기력한 박수 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그럼 이제 나쁜 소식.” 정보국 팀장은 큼큼 목을 다듬은 뒤, 과장되게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가 쫓던 그놈, 창쳉(长征) 9호인지 칭총 9호인지가 포위망을 이탈했다고 합니다.” 좌중이 동요했다. 실망 어린 탄식들이 흘러나온다. 누군가가 눈두덩을 누르며 투덜거렸다.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군요.” CIA 요원 중 하나가 대꾸한다. “이름값 확실하게 하는 거죠.” “이름? 칭챙총총 다 비슷한 거 아닙니까?” “그네들 말로 공산당의 대장정을 뜻합니다. 중국 빨갱이들이 민주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1만 킬로미터 정도 도망 다닌 사건이죠. 그것도 걸어서요.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걸어서 6천 마일인가……. 대단하긴 한데, 쫓겨 다닌 게 뭐 자랑이라고 잠수함 이름으로까지 붙였답니까?” “뭐든 갖다 붙이고 미화하기 나름이거든요.” 채드윅이 처음처럼 손가락을 퉁겨 주목을 모았다. “잡담은 거기까지. 뭐, 나온 이야기니까 말이지만, 이 빌어먹을 모비딕의 승조원들은 배 이름을 자기네 사명으로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도피행이 언젠가는 조국의 부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그 배에 타고 있는 정치장교가 제정신은 아니겠지요. 허허.” 중국 함선에는 사상교화를 담당하는 공산당 정치장교가 한 명씩 탑승한다. 겨울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해역 중국인들의 분위기와 관계가 있을지도…….’ 다른 배라면 모를까, 핵미사일이 탑재된 잠수함의 정치장교는 공산당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사람일 것이었다. 애초에 중국군 자체가 국가보다는 당의 군대에 가깝기도 하고. 개중에 제대로 미친 작자가 있어 주도권을 잡았다면, 미국은 제국주의자들의 국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타협은 물론이거니와 항복 같은 건 생각지도 않을 터. 이전 회차의 세계관에서 중국군과 얽힌 경험이 많진 않으나, 그들 특유의 광기 같은 것이 있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엔 무엇이든 폭주하기 쉽다. # 138 [138화] #시험 (3) 파울러 대위가 손을 들었다. “우리가 비록 포위망을 구축하긴 했지만, 중국군 잔존세력의 견제로 더 좁히지는 못하는 교착상태(deadlock) 아니었소? 사냥감이 제 둥지를 벗어난 이유가 뭐요?” 채드윅이 답변했다. “우리 쪽 공작이 들킨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파벌 싸움에 휘말린 것 같은데……. 아직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진 못했습니다. 그쪽에서 대규모 숙청이 진행 중이거든요. 정보원들이 몸을 사리고 있죠. 뭐, 몇 명은 이미 물고기 밥이 되었겠습니다만.” “그럼 현재로선 아무 정보가 없는 거요? 언제 어디가 뚫렸는지도 모르고? 사냥감이 빠져나갔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워워. 질문은 한 가지씩 주시면 좋겠군요. 뭐, 순서대로 답변 드리죠. 첫째,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한 정보는 있습니다. 통칭 『포인트 찰리 172』, 구축함 쿤밍을 새롭게 장악한 게 레이옌리에 해군소장이라더군요. 아시다시피 찰리 172는 하이잉탕 구역의 사령탑 같은 곳이고요.” 겨울은 자료를 몇 장 넘겨보았다. 「속독」 기술은 없었으나, 관련 정보를 금세 찾아냈다. 난민집단 및 범죄조직들을 흡수한 구 중국군 세력에 관한 장. 찰리(C)는 중국의 머리글자였다. 즉 포인트 찰리는 중국인들의 거점을 뜻했다. 해은당(하이잉탕, 海銀當)은 그 중의 하나로서,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동쪽 해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구축함 세 척에 프리깃 다섯 척, 기타 함정 다수. 무장인원 규모는 3만 이상으로 추정됨.」 읽어보니 사실상의 군벌이다. 규모가 굉장했으나, 일선 행동대는 몽둥이와 칼 따위로 무장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숫자가 많으면 위협적이었다. 군대와 깡패의 차이는 무기 이상으로 규율이기 때문에. 문서에 없는 배경에 대해 채드윅의 설명이 이어진다. “레이옌리에는 원래 총정치부에 있다가 해군 정치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자입니다. 군인보다는 순혈 공산당원에 가깝죠. 그래서 주류 지휘관들과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이 인간이 조만간 축출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사실이라면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거겠죠.” “창쳉 9호는 그 반대 파벌이다?” “어디까지나 짐작입니다만, 경황이 없었을 겁니다. 선상반란이 일어났을 걸요? 레이 소장이 제정신이었다면 모비 딕 안에 자기 사람을 심어두었을 테니까요. 핵은 그들이 지닌 협상력의 핵심이잖습니까. 모비 딕 없이는 지도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반드시 장악해야 합니다.” 정보국 팀장은 장정 9호를 자꾸만 모비 딕으로 바꿔 불렀다. 겨울은 아무도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울리지 않는 비유는 아니다. 잡기 어려운 사냥감이라는 점에서, 소설 속의 고래와 중국 핵잠수함 사이에 유사성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안 잡히잖아.’ 잡히지 않을뿐더러, 쫓아오던 포경선을 공격하여 침몰시키기까지 한다. 생존자는 단 한 명.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죽음을 암시하는 비유가 될 수 있었다. “빠져나간 시점과 방법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만 안쪽 바다가 워낙 엉망인걸요. 다만 자정 좀 지나 여기 들렀다 간 일본 잠수함이 모비 딕의 음문(音紋)을 포착했습니다. 엔젤 섬으로 복귀하던 중이었으니 포위망 바깥에서 만난 거죠.” 음문(音紋)이란 특정 함선의 소음 특성을 뜻했다. 배의 지문과 같다. 그런데 공교롭다. 하필이면 진류인가. 우메하라 함장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 세계관의 앞날을 장기적으로 볼 때, 우메하라 같은 인물이 많을수록 좋았다. 무사하려나? 겨울은 브리핑에 집중했다. “그때 격침 안 시키고 뭐했답니까? 그랬으면 이 지겨운 임무도 끝인데.” 문답을 주도하던 두 사람 이외의 방향에서 제기된 불만. 블루 스컬 팀 소속의 중위였다. 겨울은 아직 모르는 인물. 얼굴에 드러난 피로감은 남들보다 짙었다. 채드윅 팀장의 대답. “말로는 기능장애로 놓쳤다는군요.” “기능장애?” “그 배, 이름이 진류인지 뭐시깽이인지, 하여튼 정식 취역 이전에 망명한 거라서 말입니다. 원래 시험운항 상태였고, 올 상반기에 취역 예정이었죠. 성능은 좋아도 잔고장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기관고장이 터졌다는 게 웃깁니다만.” “믿지 않으시는가봅니다.” “그쪽에 일본인들 배가 꽤 있거든요.” 만 안쪽은 수심이 얕았다. 어뢰의 폭발여파가 수면까지 미칠 수밖에 없는 환경. 수중폭발은 공기 중에서보다 범위가 작지만, 범위 내에서의 위력은 오히려 증가한다. 특히 수직 방향으로. “그래서 망설였다?” “자국 민간인들이 떼죽음 당할 가능성, 그리고 어뢰가 빗나갈 가능성. 양자를 함께 고려한 끝에 양심적인 머저리가 되기로 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라니? 엉뚱한 단어 사용이었으나, 실수가 아니었다. 정보국 현장 책임자는 속 다른 미소로 변색된 이빨을 드러냈다. “엔젤 섬에 연락해두었습니다. 정밀점검이 진행 중입니다. 만약 우리를 기만한 거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기왕 놓친 고래이니 교훈이라도 챙길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남은 협력자들에게는 좋은 경고가 되겠지요.” 끙. 낮고 작게 앓는 소리. 조안나였다. 그 외의 좌중에서는 채드윅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절반, 아무 내색 없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만약 기관고장이 사실이 아닐 경우, 우메하라 함장은 얼마나 고민했을까. 상상해보는 겨울. 필요한 지식은 누적된 회차에서 배어나왔다. 한 때의 겨울은 인류 최후의 보루가 된 잠수함에서 최후를 맞이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절망 속에 목을 매던, 거대한 강철의 관. 그 끝은 자침이었다. 떠올린 다음, 소년은 감정을 지우고 경험만 남긴다. 어뢰는 소리를 쫓는 무기다. 스스로 울고 그 메아리를 더듬어 목표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환경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얕은 수심에서는 소리가 난반사되기 십상이었다. 만 안쪽의 울퉁불퉁한 바닥. 그리고 선박으로 이루어진 해상도시. 피폐한 도시의 생활소음은, 늦은 시각이라도 잠수함을 능가할 것이었다. ‘들은 적 있지. 저속으로 운항하는 잠수함은 청소기보다 조용하다고.’ 만으로 흘러드는 강물도 문제였다. 민물과 바닷물은 서로 다른 덩어리를 이루어, 쉽게 섞이지 않는다. 음파는 그 경계면에서 왜곡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뢰가 빗나갈 가능성은 높다. 목표를 상실한 어뢰는 자동으로 다른 목표를 찾는다. 명중해도 참사, 빗나가면 대형참사였다.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여러 발을 쏴야 했을 터. 아니면 같이 죽거나. 유선으로 조종할 경우 한 발로 충분하다. 허나 쏘고 나서 숨을 수 없다. 끝까지 노출된다.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반자살이었다. 무슨 선택지가 이 모양인가. 인상 쓴 채 배를 쓸어내렸을 함장의 모습이 선하다. “그건 됐고, 타겟은 어느 방향으로 향했답니까? 혹시 근거지를 옮겨야 합니까?”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채드윅이 재차 화면을 바꾸었다. 장정 9호의 예상 이동경로가 그려진 지도. 제시된 범위는 작전본부의 위치에서 동떨어진 거리가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이삿짐을 꾸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침로가 남동쪽 방향이었으니……. 의탁할 파벌이 몇 개 안 돼요. 지금껏 확보한 작전권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가장 먼 세력, 그러니까 포인트 찰리 989로 합류하더라도, 여길 버려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겨울은 서류에서 찰리 989을 찾아보았다. 장백산(长白山). 2만 5천 톤짜리 수송선. 또 다른 중국계 군벌의 근거지였다. “고래도 숨을 쉬려면 수면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굶주린 난민들 삥 뜯어서 채우는 보급이 충분할 리 없고, 그나마도 쫓기듯이 나온 상황이니까. 그러니 선원 여러분, 놈이 올라왔을 때 꽂을 작살을 준비해둡시다.” 원자력 잠수함은 연료 보급 없이 연 단위로 견딜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부상해야 하는 이유가 식량이었다. 해상도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아무리 수탈해도 부족할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군벌 지도자가 잠수함을 통제하는 수단일 것 같기도 했다. 겨울의 추정일 뿐이지만. 브리핑은 상당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갈수록, 현 시점에서 겨울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한정적이었다. 문서의 양은 상당했고, 찾아보며 듣기도 한계가 있었다. 조안나는 사정이 나은 듯 했다. 그럴 것이다. 그녀는 어느 정도 숙지하고 왔을 테니까. 어차피 당장 투입되진 않을 터. 브리핑이 끝난 뒤, 파울러 대위가 겨울을 불렀다. “자네는 앞으로 내 팀에 배속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나와 내 팀원들은 직접 본 것만 믿지. 계급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어. 하급자에게까지 무시당하기 싫다면 실력을 증명하게.”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실전에서만 보이는 부분이 많을 텐데요.” “기본기부터 봐야겠지. 사격이나 모의전 같은. 나머지는 차츰 알아 가면 되고.” 대위는 이어서 FBI 요원에게 말했다. “감독관은 빠져도 좋소. 아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모자랄 거요. 나쁘게 생각하진 마시오. 호흡을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란 게 있으니. 처음에 무례하게 굴었던 건 사과하리다.” 조안나는 차분하게 대꾸한다. “글쎄요. 저도 제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정 그렇다면야.” 갑시다. 대위는 스스로 앞장섰다. 채드윅 팀장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장난스럽다. 이동한 장소는 선박 내부에 마련된 자동화 사격장이었다. 포트 로버츠의 시설과는 여러모로 차별화된다. 표적과의 거리가 21피트(6미터 40센티)를 넘는 경우가 없었다. 대신 표적의 형태가 복잡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었으며, 이쪽에는 타이머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한된 공간과 거리에서의 반응속도를 중시하는 건가.’ 전개에 따라서는 장정 9호의 내부에서 교전을 치를 가능성도 있다. 군벌들과 싸우게 되더라도, 선박 내부에서의 교전 능력이 중시될 것이었다. 파울러 대위가 겨울에게 말했다. “이곳 샌프란시스코 만의 교전환경은 시가전과 유사하다. 사방이 장애물 투성이고, 적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지. 게다가 적과 민간인을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예리한 관찰능력과 신속한 대응능력이 중요하다. 0.1초 차이로 생사가 달라질 수 있어.” 그러므로 다양한 조건에서의 급작사격(Fast draw)은 기초이자 필수적인 덕목이라는 것. 다른 모든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더라도, 이 시험 하나를 통과하지 못하면 현장에 투입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겨울로서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향상된 전투능력을 계량해볼 기회라고 할까. 대위가 손짓한다. “그럼 시작하지. 스카일러. 지금부터는 자네가 지도하도록.” 그리고 스스로는 물러나서 팔짱을 꼈다. 스카일러라 불린 남자의 계급은 겨울과 동일한 중위였다. 그러나 그의 지휘서열을 알 순 없었다. 애초에 파울러 대위의 소속이라는 포스 리컨은 대위가 소대장을 맡는 부대였다. 이곳의 타격대는 임무 형태에 맞게 재조정된 모양이고. 편제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다. 임시 교관으로서, 스카일러가 겨울과 조안나 두 사람에게 첫 시험을 설명했다. “감독관님은 보기만 해도 아시겠지만, 한 중위는 아마 이런 훈련을 접할 기회가 없었겠지.” 꼭 그렇지는 않은데. “첫 단계는 후방사격 시험이야. 쉽게 말해 뒤돌아 쏘는 거지. 고정 표적부터 시작해서 문자표적과 이동표적으로 진행할 거고.”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타이머가 울었다. 삑. “이 소리가 들리면 즉시 돌아서 표적을 쏘면 돼. 걸리는 시간이 1초를 넘을 경우 실격. 급소를 맞추지 못해도 실격. 참고삼아 말해두겠는데, 우리 팀에서 고정 표적으로 0.8초를 넘기는 사람은 없어. 예컨대 적이 아무리 뒤통수를 치려고 해도, 0.8초 내에 쏘지 못하면 죽는 건 그 놈이란 뜻이야.” 과장 섞인 자부심이다. 적이 나 여기 있소 하고 알려주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제한된 환경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싸울 때, 반응속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0.5초 만에 쏘는 사람은 1초 걸리는 사람 둘을 상대하겠지.’ 겨울은 서부극의 낡은 대결을 연상했다. # 139 [139화] #시험 (4) 겨울은 서부극의 낡은 대결을 연상했다. 그러나 필요한 능력이 같을 뿐이었다. 시험의 목적은 판이했다. 사격위치에서 표적에 이르는 21피트는, 자동화기와 날붙이가 대등해지는 경계선이었다. 교전거리가 그보다 더 가까워지면 칼잡이가 총잡이를 이길 확률이 현격히 증가한다. “괜찮다면 제가 먼저 하고 싶군요.” 조안나가 순서상의 양해를 구한다. “어째서입니까?” 임시 교관 스카일러 중위의 질문에, FBI 수사관이 겨울을 곁눈질했다. “전 한겨울 중위의 능력을 알거든요. 다음 차례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바꿔 묻는다. 괜찮겠지요, 겨울?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도 수긍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깁슨 요원. 미리 본다고 대비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니까.” 이에 조안나가 자리를 잡는다. 교관이 진행절차를 알린다. “고정표적 시험은 무방비 사격, 권총사격, 소총사격 순서입니다. 희망에 따라 주특기인 다른 화기로 추가 성적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기록이 추후 작전활동에 반영된다는 사실을 알아두시길. 이는 정보부의 임무별 위협평가에 따릅니다.” 그때그때 투입되는 인원과 장비를 채드윅 팀장 이하 CIA 요원들이 결정한다는 뜻. 그런데 조안나는 감독관으로서 모든 임무의 옵저버가 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스카일러의 말은 실력과 안전을 빌미로 감독권한을 제한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위협평가 운운하며 정보국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덤이었다. 조안나는 이런 견제를 순수한 실력으로 돌파하려는 것이고. ‘원칙과 규정을 따지고 들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된 협조를 얻긴 힘들 테니까. 정보국과 타격대의 사이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고.’ 세상이 원칙대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명분은 명분이고 저항은 저항이었다. 겨울은 이곳의 조직구성을 떠올렸다. 브리핑 중 지나가는 페이지에 있던 것이, 「암기」에 의한 지력보정으로 떠오른다. 곳곳이 흐려지고 지워진 홀로그램 이미지였다. 불완전한 부분은 겨울 스스로의 기억과 유추로 보완 가능했다. 위계질서가 분명하지 않았다. 지휘권은 어디까지나 정보국 채드윅 팀장에게 있었지만, 화이트 스컬 외 기동타격대는 애초부터 소속이 달랐다. 즉 팀장의 지휘권은 타격대의 협조를 구하는 수준이었다. 좋게 보면 수평적이고, 나쁘게 보면 느슨한 협력관계다. 임무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어쩌다 이런 구도가 만들어졌나 싶을 정도. ‘중요한 일일수록 간섭하고 싶은 사람도 많아지겠지.’ 국방부와 정보국의 주도권 다툼이거나, 혹은 CIA의 실추된 지위를 반영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관에서 기존 방식의 국제 첩보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또한 전 지구적으로 구축했던 조직망의 대부분이 붕괴했겠고, 그만큼의 인력도 상실했을 것이었다. 아직 활동하는 요원들이 있기는 있겠다. 미국의 지원을 바라는 국가는 많고, 그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또한 해외에 분포하는 특수변종의 정보를 수집할 필요도 있었다. 이것들이 CIA 존속의 이유일 터였다. “준비됐습니다.” 표적을 등지고 선 조안나의 목소리. 그녀는 두 손을 머리 높이로 들고 있었다. 권총은 홀스터에 들어있는 채였다. 완전한 무방비를 가정한 자세와 상태. 어깨에서 힘을 뺀 유연함이 그녀의 숙련도를 보여준다. 긴장한 상태에서 나오는 여유라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스카일러 중위가 리모컨을 등 뒤로 돌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적막이 흐른다. 삑- 차륵! 권총이 홀스터를 치고 나오는 소리. 조안나는 끊어지는 영상처럼 반전했다. 총 뽑은 팔이 직선으로 뻗은 순간, 조준선은 정확하게 눈높이였다. 번쩍이는 화염. 퍽 하고, 표적에 구멍이 뚫린다. 붉은 조명으로 도드라진 급소의 가장자리였다. 후우우우. 멈추었던 호흡을 길게 내쉬며, 그녀는 시간을 확인한다. 타이머는 총성에 반응해 시간을 기록했다. “0.92초. 불합격입니다.” 스카일러가 냉정하게 선언했다. 겨울은 새삼 가혹한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성인 남성이 21피트를 달려드는 데 평균적으로 1.5초가 걸린다. 권총으로 조준해서 쏘는 데 필요한 시간도 비슷했다. 그러니 총을 뽑고 돌아서서 급소를 조준하는 시간이 그 미만이면 이미 숙련된 사격교관 레벨이다. 조안나의 기록인 0.92초는 1.5초의 약 60% 수준. 즉 단순계산으로도 배후 13피트, 겨우 4미터 안팎의 적을 단발사격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상의 적이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쯤 되면 또 모르겠다. 화이트 스컬에서 0.8초를 넘기는 사람이 없다고 했었는데, 겨울은 사실여부가 의심스러웠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조안나가 요청하자 스카일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실력이 의외인 눈치였다. 표적의 위치가 재조정되었다. 몸의 기억으로 기록을 단축시키는 걸 예방할 목적이다. 후! 준비하는 조안나의 기척이 고요해진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집중으로 수렴시키는 과정. 삑- 촤르륵! 탕! 바람이 분 것 같았다. 반동으로 총구가 튀는 순간, 표적이 덩달아 흔들린다. 새로 생긴 구멍은 전보다 급소 중앙에 가까웠다. 겨울은 축약된 간격을 감지했다. 눈 깜박이기에도 부족할 만큼의 감소. 그러나 실전에서는 생사를 가르는 찰나였다. 스카일러 중위가 조금 뜸을 들였다. “……0.84초. 불합격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했는지, 조안나가 짧은 감정을 드러낸다. 탁. 이마와 권총 슬라이드가 부딪혔다. 그렇게 몇 번 두드린다. 넓게 보는 겨울은, 몰두한 그녀가 보지 못하는 반응들을 보았다. 평정을 가장한 놀라움들을. FBI 요원은 그 뒤로 몇 번이나 재도전했다. 그러나 이 시험에서, 1초 미만으로 내려가는 0.01초 단위는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천부적인 자질을 다투는 영역이었다. 거듭된 시도에서 조안나는 0.84초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실전에서는 고작 3.5미터 뒤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적을 사살할 기록이다. 정면의 적이라면 바로 찔러도 닿을 거리에서 총을 뽑아 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역량. 비록 합격선을 넘지는 못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화이트 스컬 대원들의 눈치는 그게 아니었다. 역시 그랬구나. 겨울은 아까의 예감이 맞았구나 싶었다. 전 대원 0.8초가 사실이라 쳐도, 개인별 최고기록 이야기일 것이다. 조안나는 불완전한 기록을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를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적성은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법.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색이었다. ‘이 훈련, 원래 이름이 투엘러 드릴(Trueller Drill)이었던가?’ 겨울은 종말을 막지 못한 회차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 훈련을 처음 알려준 건 위태로운 생존자 거점의 어느 경관이었다. 겨울에게 사격술을 가르치며, 그는 자신이 투엘러 드릴의 본고장에서 근무했었다고 말했다. 그 본고장이라는 게 솔트레이크 시티였다. 겨울은 그 말을 듣고 의아하여 물었다. 거긴 후기성도교회의 총본산이 아니었느냐고. 이런 훈련이 필요할 만큼 치안이 나쁠 줄은 몰랐노라고. 이 말에, 이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경관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만큼 따분하며 조용한 도시는 다시없을 것이라면서. 부연하는 말로, 2000년대 들어 근무 중 사망한 경찰이 단 둘 뿐이라고 했다. 경사 하나, 형사 하나.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에선 대단한 기록이다. 그 사람이 다시 이르기를, 이 사격법은 본래 사격을 하지 않으려고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얘야, 이건 쉽게 말해 일종의 규율 같은 거란다. 이 훈련에 익숙해질수록, 21피트 바깥에 있는 상대라면 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기지. 애초에 경찰의 총기남용을 줄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고, 나아가 민간에도 이 사격법을 보급해서 총기를 이용한 과잉방어를 줄여보자는 의견도 나왔었다. 살인과 정당방위는 종이 한 장 차이거든. 뭐,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잖니? 어지간히 숙련되지 않으면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만…….” 그러나 본래 만들어진 의도와 무관하게, 지금은 주요 전투기술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 조안나가 받는 것도 순수한 투엘러 드릴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급소사격을 요구하는 훈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렇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 가운데 최초의 의도 그대로 남은 것이 뭐가 있었던가. 겨울은 여러 사례를 곱씹었다. 사후보험도 그 중 하나였다. 여기서 섣부른 생각이 든다. 이건 한 사람과 사람들의 차이가 아닐까? 사람은 순수할 수 있어도 사람들은 순수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일수록 사람에서 멀어지는 건 아닌가 하고. 여기까지 천착하고서, 겨울은 속으로 웃었다. 사람들의 천성을 믿고 싶을 뿐이었다. 바깥에 그래도 희망이 있을 거라고. 근거는 없었다. 한 송이 장미를 제외한다면. 철컥. 권총 슬라이드 당기는 소리가 주의를 일깨웠다. 두 손으로 권총을 쥔 조안나가, 상체를 전방으로 기울인 채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전히 고정표적에 대한 사격시험이다. 권총을 쥐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처음과 차이가 있었다. 타이머가 울었다. 반회전한 조안나는 한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탄도 측정기가 명중판정을 내렸다. 시간은 0.82초. 홀스터에서 뽑는 단계를 생략하고도 그리 많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다. 재시도, 재시도, 재시도, 재시도. 손은 눈보다 빠르다. 뽑는 동작보다는 조준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사실 조안나 정도의 실력이면 눈의 역할이 극도로 감소한 경지였다. 겨울이 기술보정에 의지하듯이, 몸에 새긴 경험에 의지하는 것. 시각은 표적을 인지하는 역할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조준은 학습된 무의식이 대신한다. 이를 보통은 머슬 메모리라고 불렀다. 기술보정이라는 게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머슬 메모리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인 것 같군요. 합격선을 넘지 못해 유감입니다.” 소총 사격까지 진행한 조안나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유감이라고 하면서도 눈빛은 살아있었다. 노력으로 실력을 쌓고, 최선을 다한 사람의 자부심. 지켜보던 화이트 스컬 대원들 일부가 휘파람을 불었다. 감각이 강화된 겨울은 그들의 숙덕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저 여자 침대에서 화끈하겠는데?” 파울러 대위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껏 팔짱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 낙담은 그가 보여준 보수성의 한 근거이기도 했다. 남녀를 떠나, 성질이 다른 소수가 있다는 것만으로 다수의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었다. 특정 목적으로 양성된 도구로서의 집단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체력적인 소모가 큰 시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안나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육체적 긴장으로 인한 소모. 이렇게까지 집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능력이다. “깁슨 요원. 꽤 지치신 것 같은데, 문자표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사이 한겨울 중위의 고정표적 성적을 내면 될 것 같군요.” 이렇게 권하는 스카일러 중위는 처음보다 제법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그러나 조안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실전이겠지요? 계속하겠습니다.” 바깥에서 마주칠 적들은 제가 지쳤다고 봐주지도 않을 것이고, 제가 여자라고 배려해주지도 않을 겁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말들은 입에 담지도 않는다. 이후의 모든 시험은, 실력 이상으로 끈기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문자표적에서 반 시간, 이동표적에서는 그 이상. 짧게 끊는 집중을 장시간 반복하는 노하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단계를 의도적으로 끝내지 않았다. 겨울이 보기엔 일종의 시위행동이었다. 땀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 정도면 됐소.” 파울러 대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대원들의 분위기를 살핀 다음이었다. 대답하는 조안나는 개운한 얼굴이었다. “대위님의 평가에 따라서는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만.” “됐다고 말하잖소. 전투원으로선 부족해도 감독관으로는 충분하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까딱 목례한 수사관이 턱을 살짝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겨울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대위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이번엔 부하들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겨울에겐 핑계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 140 [140화] #시험 (5) 이제 차례가 바뀌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집중되는 시선이 찌르는 듯 하다. 역대 최연소 명예훈장 수훈자는 과연 명성 그대로일 것인가. 혹은 과장되거나 만들어진 영웅일 것인가. 겨울은 덤덤한 척 하는 모두의 줄어든 호흡을 감지했다. 미동도 없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그런 그들의 관심에서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알아. 실력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게 마냥 상책은 아니라는 거.’ The Few, The Proud. 소수정예의 자부심은 해병대의 모토였다. 그리고 해병 중의 해병으로 불리는 게 파울러 대위가 속한 포스 리컨이었고. 화이트 스컬의 모든 구성원이 포스 리컨 출신은 아닐 것이었다. 겨울처럼 증원으로 합류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본래의 소속이 어디든,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아온 군인들일 터. 하물며 그 경력은 생명수당이 붙는 헌신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그 이상의 노력에 자부심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지금껏 만난 군인들과 다른 게 정상이다. 이러한 경계심은 보일 때마다 좋았다. 지나간 시대엔, 자기 삶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싶어서. 겨울은 생전에 자존감 깊은 사람을 본 적이 드물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아끼기도 어렵다. 하루하루 쌓이는 관객들의 메시지를 보건대, 소년의 사후에도 바깥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갸우뚱. 겨울은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선망하는 겨울의 사후는 곧 납골당에 안치된 과거의 재구성이었다. 이를 과거에의 그리움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한겨울 중위, 시작해도 괜찮겠나?” 멀어진 겨울을 「간파」했는지, 질문하는 스카일러는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언제든지요.” 겨울은 편한 자세를 취했다. 실력은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스카일러가 리모컨을 등 뒤로 가렸다. 삑- 신호가 정적을 끊는 순간, 탕! 터지는 총성.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간격이었다. 표적의 급소 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금빛으로 튄 탄피가 맑은 소리로 구른다. 그 소리가 끊어진 뒤에 비로소 스카일러가 타이머를 읽었다. “0.49.”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겨울을 빤히 바라보다가, 파울러 대위를 향해 돌아섰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소리가 들린 후에 움직인 게 맞나?” 미심쩍어하는 건 대위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고 또 기쁜 사람은 조안나 한 사람 뿐. 나머지 반응은 맥 빠진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 혼란과 의혹. 여기 있는 모두가 사격의 달인들이다. 0.01초의 영역에서 싸우는 사람들. 따라서 인간에게 가능한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의 기술은 갓 들어선 초인의 영역이었다. 스카일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다시 측정하겠습니다. 한 중위, 준비해주게.” 아까보다 예리해진 시선들의 소실점에서, 겨울은 군말 없이 자세를 잡았다. 두 손을 머리 높이로 들어올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집중을 위하여. 수준 높은 기술도 쓰는 건 결국 겨울이었다. 집중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의심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 리모컨을 누르려는 조짐을 보고 미리 움직였을 거라는 의심. 스카일러가 몇 발자국 이동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에, 겨울이 머릿속을 비웠다. 까맣게 물든 뇌리에서 시간감각은 한없이 늘어졌다. 모든 감각이 바늘처럼 일어났다. 타이머가 울었다. 몸은 전기 흐르는 속도로 반응했다. 권총 뽑고 눈 뜨는 순간 초점은 표적에 있었다. 번쩍이는 섬광. 타이머가 점멸한다. 거의 동시에, 조준선으로 그어진 탄자가 붉은 급소를 관통했다. 겨울은 한순간에 일어난 세 변화를 순서대로 감지했다. 이것이야말로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0.48.” 오히려 줄었다. 스카일러가 신경질적으로 턱을 긁는다. 한층 짙어진 현실감이었다. “말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앞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파울러 대위의 곤혹스러운 독백.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살핀다.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 있는가 싶어서. 그러나 반칙을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대위가 타이머를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예비품이 나왔다. 설치는 잠깐의 부산함으로 끝났다. 파울러가 겨울에게 하는 말. “한 번 더 해보지. 영상판독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여기는 야구장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이제껏 팔짱 끼고 벽에 기대어있던 대위였으나, 이제 보다 가까운 거리로 다가왔다. 상체가 은근히 기울어진다. 겨울은 재차 눈을 감았다. 팔에서 힘을 빼고, 목부터 등허리를 거쳐 허벅지와 종아리에 이르는 근육을 긴장시킨다. 「무브먼트」 보정을 제대로 받기 위한 준비였다. 삑- 탄성으로 회전하는 겨울. 펼쳐진 팔이 정지하는 찰나, 반작용으로 흔들리기 직전, 인지의 최소단위 이하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인 격발. 감각적인 피드백은 현상보다 늦었다. 기록은 전과 동일했다. 두 번째로 나온 0.48에 때늦은 술렁임이 시작된다. “다시 할까요?” 겨울이 묻자 파울러 대위가 신음처럼 말했다. “아니. 반칙이라면 이렇게 균일한 기록이 나올 수가 없지.” 그러자 한 대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다시 측정해야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건 불가능한 기록이라는 거.” 겨울이 예상했던 적의와 자괴감은 나타나기 전이었다. 다만 경험과 현실의 간극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파울러 대위는 흔드는 고갯짓으로 미혹을 떨친다. “Bullshit. 시체가 뛰어다니는 세상에서 불가능 같은 소리가 나오나?” “…….” “얼빠진 낯짝들이로군. 보고도 못 믿을 눈은 왜 달고 있지?” 그러나 수긍하지 못하는 게 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대위는 겨울에게 재시도를 요구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불신을 남긴 채 단계를 넘겨봐야 지저분한 군말이 나올 게 뻔했다. 달라진 전투력에 적응할 작정인 겨울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몇 번이라도 좋았다. 추가사격으로 한 탄창을 소진한 뒤에, 겨울은 기어코 0.01초를 더 줄였다. 지켜보는 대위의 눈이 갈수록 우묵해졌다. “안정적이면서 압도적인 기량이야. 집탄율도 훌륭하고. 제대로 된 엄호와 지원을 받는 한 죽을 일은 없겠어. 정면은 최대 다섯, 후방은 셋까지 감당하겠군. 간격은 의미가 없겠고…….” 다섯과 셋. 이는 동시에 상대 가능한 적의 숫자를 뜻했다. 대위의 결론을 역산한 겨울은, 그가 가정한 적이 제대로 훈련 받은 정규군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애초에 급소사격을 요구하는 것이 반증이었다. 붉은 급소의 면적은 사람 얼굴의 절반쯤이었고, 위치도 그쯤이었다. 방탄복, 방탄모를 착용한 적과 유사했다. “계속 진행하지.” 대위의 말에 따라 시험이 재개되었다. 권총을 이미 뽑은 상태로 세 번, 소총으로 무장한 채 같은 규칙으로 다시 세 번. 전자의 평균은 0.37초였고, 후자의 평균은 0.41초였다. 대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는 사실 부끄러울 일이었다. 기술보정은 순수한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이 문제를 겨울은 고통으로 해결했다. 지난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에서, 겨울은 한 번도 고통경감을 적용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통각은 생전과 사후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쇼크사 예방 옵션을 켜 두었을 뿐. ‘꼭 이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최초엔 사후세계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항상 붕 떠있었고, 홀로 유리된 느낌이었다. 그 때 가장 가까운 탈출구가 고통이었다. 지독하게 아픈 순간은 넘쳐흐르는 몰입이었기에. 생전에서 이어지는 상실감을 희석시킬 수단이기도 했다. 통증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지금 이 세계관에서 쉽게 강해지긴 했으나, 이는 중첩된 재능이익(탤런트 어드밴티지)이 있어 가능했던 일. 말하자면 만들어진 재능이며, 많이 쌓기까지 많이 아팠다. 이 또한 특권이긴 하다. 일부러 걷는 가시밭길도 세계관 내에서 겨울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으니. 다만 이성적인 이해와 심정적인 위안은 서로 다른 영역이었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음악? 의아해진 겨울이 주위를 살핀다. 정체는 선내방송이었다. 조용하게 흐르기 시작한 기타 선율이 뜬금없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파울러 대위가 인상을 썼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알고 보니 식사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음악은 연주곡이 아니었다. 도입부 뒤에 기괴한 가사가 따라 붙었다. 중국에서 온 초능력 스파이, 네 정신의 기력을 빼앗아가려고 하네. 나지막한 흐름에 이끌렸던 겨울에겐 지나치게 느껴지는 낙차였다. 당겨져 있던 공기가 허스키한 미성에 무너져 내린다. 고개를 흔드는 대위. “고약한 선곡이군. 어쩔 수 없지. 13시 30분에 다시 집합한다. 해산.” 그는 감독관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흩어지는 대원들은 복잡한 시선을 여운처럼 남겼다. 식당으로 이동하며, 겨울은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어쨌든 선율과 보컬은 매혹적이었고, 당혹스럽게 시작한 노랫말 또한 듣다 보니 이해가 갔다. 「여기는 서구문명과 온 세상의 끝자락. 어쨌든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르겠지만, 결국 가라앉는 곳은 정해져있단 말이야. 이게 바로 할리우드가 캘리포니아화(化/Californication)를 팔아먹는 방식이지.」 「캘리포니아화의 꿈, 캘리포니아화의 꿈」 「파괴는 아주 거친 길로 우리를 이끌어. 하지만 이는 또한 창조의 어머니지. 그리고 지진은 여자아이의 기타와 같은걸. 그저 또 하나의 좋은 진동일 뿐이야.」 「해일도 세상을 캘리포니아화로부터 구해내지 못 했어…….」 “이런 시기에 들을 만 한 노래는 아니네요. 뭘 전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겠는데, 의미가 새로울 수밖에 없는 시대니까요.” 겨울의 평가에 공감하는 조안나. “확실히 그렇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20세기 말의 유행곡이니. 그 때는 저도 어렸고, 참 좋아했었는데……. 지금 들으니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 제목부터 중의적이거든요. 캘리포니케이션. 노래 속에선 캘리포니아처럼 변한다는 뜻이면서, 사전적으론 무언가 망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의 바다에 있었다. 이 부패한 바다와 퇴락한 공제선을 보고 난 뒤에, 죽은 채 숨 쉬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나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노래, 그것도 캘리포니아에서 유래된 단어가 제 뜻으로 들릴 리 만무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조안나가 시들어버린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같은 제목의 드라마도 있었죠. 재밌긴 했는데 섹스어필이 지나쳤습니다. 노래에서 비판하던 현상 그대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이 나라의 성인용 코미디라는 게 그렇게 천박한 것들 투성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그립네요. 지나간 나날은 언제나 아름답다더니.” “아름다워질 수 없는 시간도 있는 법이죠.” “예를 들면?” “……지금이요.” 뜸 들인 대답과 더불어 바깥을 가리키는 겨울에게, 조안나가 살풋 웃어 보인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겁니다. 인류가 사라질 위기에 온갖 두렵고 더러운 것들을 봅니다만, 덕분에 저는 겨울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별은 어두울 때 빛납니다. 사람이 살기에 별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어둠은 아니니까요.” 별 하나. 겨울은 관제인격의 소망을 떠올렸다. 별 하나를 걸고 대화를 약속한 아이. 아이?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겨울은 관제인격을 아이처럼 느꼈다. 그 아이가 지금 조안나의 내면에도 있을 것이었다. 사후세계의 모든 연산을 주관하는 존재니까. 파울러 대위에게도, 채드윅 팀장에게도, 유라와 진석, 두 명의 부장에게도 있겠지.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 그 많은 간접적인 대화로도 겨울을 모르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겨울의 무중력에도 별 하나가 남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이 기타 소리가 잦아들었다. 허스키한 록이 끝난 뒤에 로고송과 아나운서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거 음반이 아니라 라디오였군요.”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 채드윅 팀장의 악취미라고 짐작했었는데.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지역에서 원래 송출되던 주파수입니다.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오염지역의 주요 도시마다 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특수 제작된 노이즈 메이커가 전파중계소를 대신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네요.” “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역시 고립된 시민들의 정서적인 안정이랍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이 사는 데엔 별 하나, 그 정도의 희망으로 충분합니다. 과거 그대로 남아있는 일상의 조각은 적잖은 위안이 되겠죠.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건 그 다음 순위입니다.” 그녀는 다시 설명했다. 그 외에 미국이 아직 이 지역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조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고. “미국이 상실한 영토라면서 난민들이 영유권을 주장할까봐 걱정하는 건가요?” 조안나는 겨울의 질문을 긍정했다. “맞습니다. 브리핑에서 들으셨다시피, 여기 있는 건 보통 난민들이 아니니까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한 집단입니다. 낮은 가능성일지언정 대비해야 마땅합니다.” 일기예보, 오염지역의 상황, 보급물자의 투하 일정 등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로고송이 흐를 때 아나운서가 읽었던 슬로건이 맞다면, 본래는 음악 채널이었을 것이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재난방송 및 뉴스 프로그램이 삽입된 모양이다. ‘가급적 모든 방송에 새로운 소식을 실어야겠지. 특정 주파수만 닿는 곳도 있을 테니.’ 승강기를 거쳐 도착한 식당은 밤에 봤을 때, 그리고 아침에 샤워하기 전 봤을 때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엔 간단한 식사류를 제공했을 뿐이다. 지금은 뷔페를 차려놨다. 본격적인 미군 식당 수준이었다. 사람을 옮기는 데 잠수함까지 동원되는 걸 감안하면 사치가 아닐 수 없다. 겨울은 조금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장기간의 임무에서, 음식이 사기 유지에 중요할 것 같긴 하지만……. 조안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음악 한 곡 돌린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가 뜻밖이었다. # 141 [141화] #시험 (6) 「첫 소식입니다. 1주일 전 익명의 투고자가 국토안보부의 내부 자료를 유출시켰는데요, 이것이 온라인상에서 무제한적으로 확산되어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종말문서(Apocalypse Papers)로 불리는 이 문건의 원 명칭은 『대역병의 발생과 초기 확산과정 규명』이며, 도입부의 제안서(Memorandum)에서는 펠레티어 현 국토안보부 장관의 지시에 의해 생물병기 방어전략 본부와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국가안보국 등 다수 유관기관의 합동 연구로 작성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4천 7백 페이지에 달하는 1급 기밀, 과연 논란이 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진행자는 한 쌍의 남녀 아나운서였다. 차분하게 시작한 여성 앵커에 이어, 짝을 이룬 남성 앵커가 또렷한 동부 억양으로 추가 정보를 전달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역시 대역병의 발원지에 관한 정보였죠. 그동안 모겔론스가 중국 동해안의 인구밀집지대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었는데요, 사실 인구밀도가 희박한 내륙지방, 티베트 자치구의 중국군 탄도탄 기지가 발원지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국정부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정황도 확인되었고요. 이것으로 모겔론스의 최초 발생일자는 약 1주일가량 앞당겨지게 되었습니다.」 여성 앵커의 순서가 돌아온다. 「이에 따라 모겔론스 생물병기 가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공화당 바바라 부즈만 상원의원은 중국의 군사적 야욕이 세계를 파멸시켰다고 논평하면서, 현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에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민주당 존 버 의원은 중국 역시 피해자일 가능성이 여전하다며, 경솔한 발언으로 국가 안정을 해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여기까지 귀 기울인 겨울이 한숨을 쉬었다. 조안나는 벌레 씹은 표정이다. Fuck. 짧게 씹는 욕설이 여과 없는 진심이었다. 노골적인 차별에도 싫은 내색 없었던 수사관이건만. 겨울이 묻는다. “왜 보도관제가 걸리지 않았을까요?” 장정 9호 추적 작전을 감안하면 당연히 차단되었어야 하는 소식. 최소한 샌프란시스코까지 닿아선 안 될 내용이었다. 그래서 의외였고. 이 소식을, 중국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중상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지금 같은 처지에서는 방어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민족주의가 강한 이들인데. 모겔론스가 중국을 몰락시키려는 미국의 음모였다고 믿는 집단이다. “온라인으로 유포되었으니 사전제한(prior censorship)사건으로 지정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이를 정치공세에 활용하려는 불한당들도 있었을 테고요. 저는 문서유출경위가 의심스럽군요.”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게다가 이번 작전 역시 1급 기밀입니다. 관할부서가 다르죠. 부처 간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 같지 않습니다.” 부처 간 협력. 중앙정보국이 진행하는 이번 작전을 상급부서인 국토안보부가 모를 수도 있고, 조직의 방대함이 효율적인 의사소통에 장애물이었을 수도 있었다. 전자는 말이 안 된다 쳐도 후자는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국토안보부는 9.11 테러 이후에 급조되었다. 전부터 있던 수십 개의 조직을 대책 없이 섞어놓는 방식으로. ‘덕분에 한때 답이 없을 만큼 무능하기도 했고.’ 또한 언론통제에 관여하는 기관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 셋이었다. 국방부 공보처, 백악관 비서실, 국토안보부. 전대미문의 재해 앞에 모든 행정이 합리적이기는 어려웠다. 식당이 조용했다. 다들 식기를 놓고 있었다. “멍청이들. 본토에 핵이 떨어지면 누가 책임질 거야?” 누군가의 실망스러운 독백이 공통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앵커 페어가 대화처럼 주고받는 이야기들. 「한편 이 문서는 중국 어선들이 초기 감염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기존엔 나리타 국제공항을 중심으로 감염이 확산되었다는 게 지배적인 가설이었습니다만, 일본 정부가 나리타 봉쇄에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지키지 못했던 건 기나긴 해안선 쪽이었던 것입니다.」 「예. 사실 이게 전부터 제기되었던 주장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었죠. 정설은 나리타부터 시작해서 도쿄 광역권까지 파멸한 뒤에 비로소 해안이 무너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서에 포함된 위성사진을 보면, 나리타 봉쇄가 시작되기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 감염확산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예외 없이 해안 지방이었고요. 즉 순서가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상륙한 어선들이 피난민을 대량으로 수송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그렇습니다. 대형 선박을 통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소형 어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오면 어느 나라가 막을 수 있었을까요? 미국도 막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남자의 말에 얼룩이 묻어있었다. 공동 진행자가 그 얼룩을 짚는다. 「북미 서부 감염폭발이 중국어선들 때문이라는 뜻인가요?」 「문서상에서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제기할 뿐입니다. 하지만 중국 어선들은 예전부터 문제였지요. 떼로 몰려다니며 전 세계의 어장을 황폐화시키지 않았습니까? 다른 나라를 무시해온 중국의 안하무인적인 태도가 대역병과 결합해 재앙을 빚었다고 봅니다.」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라디오가 공중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할 순 있겠으나, 언론인의 본분은 동일한 법이었다. 바깥세상에서도 형식적으로나마 중립을 지키는 편이었고. 여성 진행자 쪽에서 파트너의 부적절한 발언을 지적했다. 「윌리엄. 방금 하신 말씀은 매우 부적절했어요.」 「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청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정확한 보도를 위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백악관의 공식 입장은 종말문서가 하나의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 해안선에서 확인된 감염조짐은 군중이 일으킨 집단소요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네. 일부 전문가들은 종말문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일본의 초동조치가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그거 아십니까? 나리타 공항에서 최초 감염자가 발견되었을 때, 경찰과 자위대가 지휘권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을. 긴급출동한 자위대를 교통경찰이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충격적이군요. 어디서 입수된 정보죠?」 「그 경관이 지금 서부 난민 캠프에 있거든요. 제국 시절부터 시작된 일본 군경의 갈등은 악명 높지요.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은 그 이상으로 유명하고요. 오죽하면 일본 재난대응 체계에서 제대로 된 건 지진 대피 매뉴얼뿐이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수습하겠다고 던지는 말조차 자극적이다. 아무래도 남자 앵커에겐 난민들에 대한 적개심, 혹은 우월감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일부 미국인들의 기저심리겠지. 수긍한 겨울은 방치했던 식기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조안나는 식욕이 없는 사람처럼 먹었다. 포크는 끝보다 움직임이 더 날카롭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식사가 의무인 사람이었다. 오전 중의 체력 소모를 보충할 필요도 있었다. 먹는 듯 안 먹는 듯 꾸준히 우물거리더니, 겨울과 비슷하게 그릇을 비웠다. 겨울이 물었다. “앤은 어떻게 생각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중국 어선들이 주요 감염 경로였을 거라는 추측이요. 말이 된다고 보세요?” 오늘 같은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다. 거듭 끝나는 세계를 경험으로 쌓아온 겨울에게도, 새로 다가오는 종말은 낯선 위협과 생소한 분기의 연속이었다. 스물일곱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종말은 특히나 더. 그러나 물어보면서도 과연 대답이 돌아올까 싶었다. 의외로, 조안나는 신중하게 끄덕였다. “저 스스로가 객관적인지는 의문입니다만……. 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요?” “약 6년 전, 정식으로 등록된 중국 어선은 약 5천 척 남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기 중국 연안에서 조업허가를 받은 어선은 100만 척으로 추정되었어요. 어민 숫자만 3천만이었습니다. 이들이 선창에 난민을 채웠다면 억 단위의 인구이동이 가능해집니다.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쳐도, 결코 일본 해자대나 해상보안청이 무능했던 게 아닐 겁니다.” “해상보안청은 일본의 해양경찰을 말하는 거죠?” “예.” 수사관이 말한 숫자에는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과연 대륙 국가답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앤,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됐어요?” “코로나 트라이엄프에서 잠깐 이야기했었죠. 예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시하이방의 갱들을 상대로 마약단속을 벌인 적이 있다고. 어선도 주요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아하.” “그 때도 CIA와의 공동작전이었죠. FBI의 관할권은 미국의 영토와 영해, 영공으로 한정되니까요. 중국 본토의 조직망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2년쯤 함께했나봅니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알게 되더군요. 대개는 아쉬운 소리를 듣는 역할이었습니다만. 겨울도 알 겁니다. 협상에선 없는 척 해야 할 때가 많다는 거.” “스스로가 객관적인지 의문이라고 했던 건, 갱들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고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걸러서 들으세요. 어디까지나 철 지난 정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쉰다. 고단한 옛 생각에 잠기는 것 같다. 잠깐의 침묵 사이에 흘러나오는 여성 앵커의 말소리가 도드라졌다. 「문서가 유출된 후 두 번째 주말인 어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와 폭력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차이나타운에 대한 약탈 시도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서는 시민 한 명이 총격을 받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희생자는 중국계 이민 2세대인 대니얼 콴 씨. 지인들은 그가 성실하고 모범적인 미국인이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범인 로이스 멜빈은 시위대에 의해 현장에서 즉각 제압되었습니다. 경찰은 범행동기와 공범자의 존재 여부를 수사하는 중입니다. 콴 씨가 평안히 잠들기를 바랍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라디오는 잠시 성난 군중의 소리를 잡아주었다. 너도나도 지르는 소리가 혼잡하게 뒤섞여, 오직 하나의 의미, 분노로 수렴되었다. 여기 식당 내부에도 그 분노에 공감하는 소수가 있었다. 중국 새끼들, 다 뒈져버리라지. 떳떳하지 않은 독백이라 겨울에게 겨우 들릴 정도였으나, 그 수가 여럿이라는 건 분명히 문제였다. 이들과 함께할 작전이 우려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사태에 관하여, 금일 오전 11시, 맥밀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들의 화합과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잠시 후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저널에서 한 번 접했던 대통령의 육성이었다. 『국민 여러분.』 그는 국민을 부르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40억 명이 죽었습니다.』 흠칫. 조안나가 현재로 돌아왔다. 겨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인류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록 없는 역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미래에, 미국은 외로운 나라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이웃이 없을 것입니다. 아끼고 싶어도 아낄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지키고 싶어도 지킬 생명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멸종과 싸우고 있습니다.』 『압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미국을 무모한 모험으로 이끌지 않겠습니다. 가혹한 현실의 한계에 갇혀, 필요악과 필요악의 갈림길을 헤맬지라도, 그리하여 양심의 배교자이자 인류애의 배덕자로 전락할지라도,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정의보다 국민의 안위를 먼저 수호하겠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곧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미국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주권자인 여러분이 바로 미국입니다. 무수한 애국자들이 죽음으로 지켜온 조국을 보고 싶다면, 스스로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간절히 호소합니다. 미국이 미국을 파괴해선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질병과 싸우는 영웅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출신과 직업과 성별과 연령과 재산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다만 이 나라, 위태로운 조국, 국민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결한 헌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순 없습니다. 미합중국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대니 첸 일병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미국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던 젊은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이상을 배반했습니다. 양친이 중국에서 온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동료들에게 지속적인 린치를 당했습니다. 고통은 영웅이 자살을 결심하는 날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것을 정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습니까?』 『2011년 10월 3일,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19세의 영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금은 뉴욕 근교의 발할라에 묻혀있습니다. 당시 온 미국이 울었습니다. 여러분이 울었습니다. 흘렸던 눈물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다시 한 번 눈물 흘릴 때입니다. 눈물로 하나가 될 때입니다. 한 사람의 미국이었던 대니얼 콴 씨의 죽음을 잊지 맙시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우리는 미국입니다. 믿음으로 서로에게 의지합시다. 헐뜯고 공격하고 비방하는 일은 정치인들의 업무로 남겨두십시오.』 『하나 된 조국에 바라건대, 우리에게 선조들의 정신이 남아있기를. 우리 자신의 한계가 하루하루 넓혀지기를. 필연처럼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기를.』 『그리고 최소한, 신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허락하실 때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비참한 사람들에게 침을 뱉고 매를 때리는 미국이 되지 않기를. 조국을 위해 싸우는 모두가 조국의 품 안에 들어오기를.』 『미국이여, 더불어 전진합시다. 합중국과 합중국의 벗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인류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142 [142화] #시험 (7) 고무적인 연설은 음악적으로도 완성되어 있었다. 규칙적인 강세와 시적인 어휘로 본연의 의미 이상을 전달한다. 뛰어난 화법은 그 자체로 지도자의 자격이었다. 겨울은 생각한다. 언어가 공감의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다만 무엇에 공감하게 하느냐, 그것이 옳고 그름의 역사를 가른다. 열광하는 대중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도 있었다. 대통령의 호소는 아름다운 공감이었다. 호소에 응하는 사람들은 분위기부터 달라졌다. 깊어졌다. 그리고 단단해졌다. 조만간 퇴색할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으나, 삶은 매 순간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 식기를 치우며, 조안나가 하는 말. “현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이렇게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이번이 두 번째 임기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러한 평가는 겪어온 스물여섯 번의 종말과 이번 세계관의 비교에서 나온다. 국가의 안정성이 독보적이었다. 비록 난민과 이재민의 수용 문제로 잡음이 많고, 그 외의 과오가 없지 않겠으며, 결정적으로 명백한 해방 작전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중이라 안타깝지만……. ‘화폐경제가 유지되는 세계관은 드물었는걸.’ 골몰하자니 지력보정이 현 세계관의 정보를 출력했다. 지금의 미국은 거의 완전한 내수경제로 돌아간다. 계엄령, 거래정지, 지불유예, 지급보장의 경계를 넘어 가까스로 재구축한 국내 금융까지 감안한다면, 노력과 희생과 행운으로 일궈낸 인간적인 기적이었다. 조안나는 한숨을 내쉰다. “설령 그렇더라도 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은 낮았을 겁니다. 대통령을 싫어하는……아니,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자신이 입은 피해만 소리 높여 외치는 바보들 말입니다. 대통령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잘 해내서 문제인거죠.” 진짜 위기감을 느꼈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란 뜻이었다. 겨울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글쎄요. 그 중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상황이 최선인데도 말입니까?” “필요악을 거쳐서 나온 최선이고, 고통은 이성을 마비시키잖아요.” “음.” 미간을 좁히는 조안나. 이때 겨울이 회상하는 과거는 스탠 페이지 일병의 장례를 치르던 날이었다. 소년장교를 찾아온 소년소녀들은 어른들의 비겁함을 성토했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포트 로버츠에선 봉쇄선 너머로 가기를 거부하는 시민들이 있었어요. 반대로, 봉쇄선 저편에서 오염지역 주둔지로 오고 싶어 하는 경우도 많다던 걸요.” “설마 겨울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이 있는 겁니까?” “화내지 마세요. 부모님을 싫어하는 아이들이었거든요.” “부모님을 싫어하다니, 그게 무슨……. 아!” 깨달은 수사관이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겨울은 미소를 만들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들에게도 고충이 있겠지만, 진짜 난민들에겐 비할 바가 못 될 거예요. 그럼 저는 그 시민들이 염치없다고 비난해야 하나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행사하기 싫어요.” “…….”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약 말기 암 환자라고 해도 두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닥치라고 할 순 없을 거예요. 고통은 물론 제가 더 크겠죠.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일반적으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인걸요. 아픈 사람에게 상식과 이성을 바라긴 힘들어요. 너무 아파서 의사에게 화를 내는 환자들도 있잖아요.” 묵묵히 듣고 뜸들이던 조안나는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지나친 비유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겨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제 판단이 조금 경솔했군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비난하기는 쉽지요. 멕시코에서도 그랬습니다.” “멕시코?” “네. 그곳에서는 마약이 곧 생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지요. 카르텔 피라미드의 상층에 군림하는 지배계급을 제외하면, 운반책과 행동대원들, 부패한 경찰들은 그저 살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회입니다.” 겨울은 이어지는 맥락을 경청했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고 보면 경멸스러운 외면(外面)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고, 그러고도 자기 가족만큼은 소중하게 여깁니다. 당장은 나와 내 동료들에게 총을 겨누는 악당들이며, 당장은 미국 시민들에게 마약을 파는 상인들이며, 당장은 조국이 제거를 명령한 범죄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차분하게 고백했다. 검거한 숫자보다 사살한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그들과 저의 차이는 국적뿐이었습니다. 전 운이 좋았을 뿐이죠. 운 좋은 사람이 운 나쁜 사람을 죽이는 구도입니다. 이해할수록 답이 없었기에 이해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명령에 따르는 기계가 되려고 했었죠. 애국심과 사명감은 중독성 강한 마약 같더군요. 죄책감을 떨쳐내려면 남용할 수밖에 없고, 남용할수록 인간으로서 무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봅니다. 사람을 쉽게 싫어해버리고 마는 것이…….” 이마를 누르며 고민하던 그녀가 단어 하나를 뱉었다. 경계. 그렇군요. 경계. “제게 편한 어느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린 모양입니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고요.” “그거야말로 지나치네요. 너무 나간 자책이에요.” 그리고 익숙한 좌절이었다. 겨울 또한 가면을 쓴 심리상담사에게 말했었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답이 없는 미움이 있다고. 당한 일만 놓고 보면 증오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니. 하지만 그들이라고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이라고 그리 되도록 운명 지어졌던 것일까? 조금 더 나은 부모, 조금 더 나은 교육, 조금 더 나은 기회를 잡았다면 그들 또한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겨울의 증오는 그런 부모를 만들어낸 모든 조건들을 겨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부모만 원망하는 건, 어떤 의미로는 현실타협에 지나지 않았다. 조안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대통령 연설에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하루하루, 우리 자신의 한계가 넓어지길 바란다고.” “그래서요?” “지적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저를 극복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를 바랄 거고요. 그러니 겨울, 사람에게 실망하지 말아요.” 실망? 뜻 모를 말에 의아해지는 겨울. 조안나가 부연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당신의 말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이 묻어나더군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냉소도 느껴졌습니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습니다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알겠습니다.” 프로파일러 경력이 있는 수사관으로서, 그녀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원래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겠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겨울, 저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넘겨짚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정곡이었다. 낯설게 다가오는 익숙함. 즉 타인의 시선으로 본 자기 자신이었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미움이었다. 갈수록 구르는 일 드물어도, 가슴 속의 돌은 여전히 무거웠다. 도리어 몸을 잃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무거운 것 같다. 겨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조안나를 바라본다. 그렇다. 새삼스럽다. 새삼스럽게 사람으로 느껴진다. 사람이고 아니고는 대하기 나름이라고 깨달은 지 오래건만. 수사관이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기분 상했습니까?” “설마요. 저도 항상 생각해요. 저 자신의 한계를 넘고 싶다고.” 녹일 수 없는 돌을 녹이고, 미워할 수 없는 세계를 미워하고, 싸울 수 없는 것들과 싸우고 싶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 소망을 사후의 위태로운 백일몽으로 좇아보는 중이다.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능력으로 사람들을 보살펴보는 것.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만.’ 종말과 종말과 종말의 고개를 넘어, 이제 꿈속에서는 제법 초인이 되었으나, 그래도 인지를 넘어선 인과, 세계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릴 따름이었다. 이번 세계관에서도 그렇다. 포트 로버츠에 두고 온 사람들. 겨울이 떠나 온 겨울의 이야기. 좋은 꿈 꿀 날이 요원하다. 그나마 갈수록 나아지는 게 있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가, 조금씩 알아간다는 한 가지. 알수록 막막하지만 모르는 것보단 낫다. ‘알아야 포기를 하지.’ 모르면 마냥 안타깝지 않던가. 사람 닮은 것들에 대한 화풀이는 그저 휘발성의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요즘은 여의치 않다. 에이프릴 퍼시픽은 아직까지 더러웠다. 잠시 무방비했다. 연기가 끊어진 틈에 겨울을 본 조안나는 스스로를 삼가고 있었다. 별 수 없지. 못난 감정을 보여준 것도 아니잖아. 가면을 쓴 겨울이 손목시계를 두드려 보였다. “시간 다 되어 가네요. 갈까요?” “예.” 사격장으로 돌아가는 동안, 조안나는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새로운 화제로 풀었다. “다가오는 대선에선 겨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겠군요.” “그래요? 여긴 캘리포니아인데?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을까요?” 군사작전에 투입된 미군은 보통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작전지역에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라크 파병이 한창일 땐 매해 약 25만 명이 대선의 방관자가 되었다. 캘리포니아가 명목상 본토라고 해도, 지금은 허가 받은 인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오염구역에 불과했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연방 직할지인 워싱턴 D.C에 상원의원의석이 할당되지 않는 것처럼, 특별 재해지역으로서 투표권이 제한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조안나의 대답은 달랐다.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조치입니다. 오염지역 3개주……워싱턴, 오레곤, 캘리포니아에서 어떻게든 투표를 실시한다더군요. 오염지역에 한해 온라인 투표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고립된 시민들의 표까지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번 작전이 가을까지 연장되지 않는 이상에야 투표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과연 그 이상으로 상징적인 조치는 드물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하다. “온라인 투표? 부정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그렇잖아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긴 합니다. 건국 이래 가장 중요한 선거니까요. 어떤 부정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행방법에 대해선 좀 더 논의가 진행되어야겠지요.” “괜찮은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네요.” “동감입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달라질 겁니다.” 존속인가, 멸종인가. 어떤 사람이 선출될까. 당장은 후보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앤. 혹시 휴대용 라디오를 구할 수 있을까요?” “어째서입니까?” “투표를 하려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토론회 같은 걸 듣고 싶네요.” “그러고 보면 이제 곧 슈퍼 화요일이군요. 알겠습니다. 알아보도록 하죠.” 슈퍼 화요일은 3월 초,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지금이 2월 중순이니, 양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치열한 여론조사가 진행 중일 터. 그 경과가 궁금하다. 또 후보는 어떤 사람들인지, 이 세계관이 광기 속에서 종말로 치달을 것인지. 예측하자니 아는 바가 지나치게 없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의 편의를 돌보는 것도 감독관의 역할입니다. 다른 인원들을 위해서라도 정식으로 건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입 안에서 말을 굴리던 조안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닙니다. 이건 성사되면 말씀드리도록 하죠.” “……?” 겨울은 의아했으나, 굳이 캐묻지 않았다.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한 훈련구역엔 여러 개의 사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후의 태양이 골든게이트 저편으로 사라지기까지, 겨울은 계속해서 테스트를 받았다. 기동간 사격, 사격 중 탄창 교체, 사격 중 무기 교체를 포함, 장애물과 이동표적으로 채워진 코스를 완주했다. 모든 시험에서 겨울은 기존의 최고기록을 큰 폭으로 경신했다. 가장 까다로웠던 건 암실(暗室)에서 이루어진 사격 테스트였다. 처음 들어섰을 땐 보통의 사격장으로 보였다. 레일에 걸린 이동식 표적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겨울이 준비를 마쳤을 때, 스카일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야시경을 뒤집어썼고, 이내 실내가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표적이 움직이는 모터 소리. 교관 역의 스카일러가 말했다. “잠시 후 표적이 정지하면 0.5초간 조명이 들어온다. 표적은 셋. 위치를 기억해라. 빛이 사라진 뒤에 지시에 따라 사격하면 된다.” 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켜졌다. 0.5초는 그야말로 잠깐이었다. 그 사이에 드러난 표적들을 망막에 새긴 겨울. 간격은 일정치 않았고, 높낮이도 서로 다르다. 여기서 도움이 되는 보정은 「전투감각」이었다. 「개인화기숙련」은 화기를 다루는 능력과 명중률, 치명적일 확률에 관여할 뿐. “대기.” 스카일러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인기척이 다가왔다. 누군가 겨울에게 안대를 씌운다. 발사섬광으로 표적을 확인하지 못하게 할 목적.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지시가 떨어진다. “사수, 1표적에, 쏴!” 탕! 겨울은 몸에 걸리는 감각대로 쐈다. 사선경고처럼 시각적인 보정이 없어도, 정확한 방향을 겨누었을 때 신경이 당겨지는 감각이 있었다. “3표적, 1표적, 3표적, 2표적에 연속사격, 쏴!” 여기까지는 수월했다. 구령과 동시에 첫 발을 쏘고, 같은 간격으로 세 번을 추가로 쐈다. 탄피 구르는 쇳소리 사이에 억눌린 신음이 있었다. 바르게 쐈구나. 겨울은 총구를 내리고 재차 대기했다. 다음 조건은 보다 어려웠다. “좌로 3보 이동, 뒤로 1보 이동.” 보정이 흐트러진다. 겨울은 그것을 무뎌진 신경자극으로 깨달았다. 지금껏 쏜 모든 탄이 표적의 급소에 꽂혔을 것을 확신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렵겠다. “2번 표적에, 쏴!” 구령이 떨어지고서, 조준에 약 1초. 탕! 조금 전과 다른 반응이 흘러나온다. 앞서의 탄착군에서 얼마나 벗어났으려나. 그 뒤로 몇 번을 더 움직였다. 우로 5보, 다시 좌로 3보, 앞으로 1보, 뒤로 1보……. 그리고 사격, 사격, 사격. 천재적인 영역의 공간지각이었으나, 한계는 빠르게 찾아왔다. 채 열 번째 이동사격 지시에 이르기 전에, 겨울의 모든 보정은 없는 수준으로 뭉개진 상태였다. “안대는 그만 벗어도 좋다.” 스카일러가 아니라 파울러 대위의 목소리다. 안대를 벗은 겨울은, 빛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표적부터 확인했다. 어쨌든 능력을 제대로 측량하고 싶었으므로. “이번엔 그나마 인간적이군.” 대위의 평가가 탄흔의 분포를 그대로 반영했다. 스카일러가 기록을 토대로 탄흔마다 번호를 매긴다. 이동지시를 받은 뒤, 세 번째 사격에서 급소를 벗어난 탄이 등장했다. 다섯 번째 사격에서는 빗나간 탄이 나왔고, 아홉 번째 사격에서는 세 발을 쏴서 한 발도 스치지 못했다. 몸에 새겨둬야겠네. 전투력은 이미 충분히 강화했다고 여기는 겨울이었다. 당분간은 지금의 경험이 곧 한계일 것이다. 실전에서 쓸 기회가 있을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을 갈무리하는 스카일러 중위는 심란한 낯빛이다. “시체가 뛰어다닌다는 뉴스를 본 날 아침에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나는 여자 친구였던 마누라가 임신했다고 고백한 날. 정말 끔찍했지.” 같은 중얼거림도 들렸다. “적응기간은 일주일로 잡았다. 하지만.” 겨울에게 말하는 대위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 보여준 것만으로도 한 사람 몫은 넘겠군. 실전에서 기대하겠다.” “감사합니다.” 겨울은 대위에게 목례했다. # 143 [143화] #에올리안 하프 : 사후보험 약관대출 중도상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의 계좌에 975만 4,400원의 가용금액이 확인됩니다. 한겨울님, 상환할 금액을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다시 어두워질 때였다. 겨울은 금액을 기입한 뒤 눈을 감았다. 사라질 별빛은 아깝지 않았으나, 연장될 사후가 유감스러웠으므로. 원치 않는 삶……. 아니, 원치 않는 존재를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까. 이는 곧 가시 돋친 장미를 쥐고 피 흘리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으려나. 예상보다 매번 많다. 빚에 먹히는 별들이. 피부에 금액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스스로는 언제 끝나도 유감없을 사후였기에. 욕심 없이 보는 별은 그냥 별일 뿐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인 시점에서, 소년에게는 집착이 남아있지 않았다. 치열했던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진다. 누이를 제외한다면. 충분한 간격이 흘렀다. 겨울은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천공에 하나의 별이 남아있다. 아이가 물었다. 「관제 AI : 저 별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빛나는 문자열이 호기심으로 일렁거린다. 호기심. 이는 겨울 혼자만의 느낌에 불과했으나, 항상 그랬듯이, 겨울에게는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 사람을 만나더라도, 진짜라는 확신은 나의 느낌뿐인걸. 곱씹은 겨울이 대답했다. “네가 준 걸 남기고 싶었어.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관제 AI : 정정. 저것은 본 관제 AI가 지급했던 별이 아닙니다. 한겨울님의 요청으로 동일 좌표의 <<시각효과 : 별>>을 유지시켰으나, 해당 시각효과의 본질은 약속이 이루어졌던 날짜와 시각에 한겨울님의 사후보험 계좌로 이체된 100원의 현금입니다.」 「관제 AI : 계좌정보에 표기되는 100원은 명시된 금액을 인출할 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후보험의 재정은 통합운용이 원칙이므로, 부동산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모든 현금성 자산은 예치된 순간 연속성을 상실합니다. 본 관제 AI가 지급한 금액은 타 가입자들의 인출요청 및 사후보험예산의 투자운용과 유지비 지출 등으로 파편화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열심히 늘어놓는 설명이 보기에 즐겁다. 어째서일까? 겨울은 차분하게 대답한다. “알아. 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봐. 나는 저 별을 볼 때 네 생각이 나거든.” 「관제 AI : 그것은 본질과 무관한 상징으로서의 별입니까?」 “글쎄. 조금 다르지 않을까? 나는 네가 주는 별을 돈으로 받은 게 아니야.” 「관제 AI : 저장. 당신은 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논리적 정합성을 벗어난 불규칙적 연산의 작용으로서, 최종모듈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현 시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시간을 두고 분석하겠습니다.」 “그러니?……이 정도는 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관제 AI :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평소에 네가 만들어내는 가상인격들이 굉장히 인간적이었는걸. 거기에 내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어느 정도의 이해는 이미 있다고 생각했지.” 그러자 문자열은 뜻밖의 내용을 출력했다. 「관제 AI : 그것은 당신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해? 내가?” 「관제 AI : 그렇습니다. 한겨울님의 TOM 등급과 적성은 매우 우수합니다.」 「관제 AI : 통계. 단일 가상인격과의 상호작용에서 인격연산 버퍼링을 겪지 않는 비율은 전체 사후보험 가입자의 7.5%에 불과합니다. 복수 가상인격과의 상호작용에 딜레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A 등급 이하에서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이 유일합니다.」 「관제 AI : 추정. 질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정량적으로 계측하긴 어려우나, 가상인격의 비인간적 특성에 대해 제기되는 불만은 사후보험의 전체 민원에서 71.32%를 차지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불편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다. 아이는 겨울의 반응을 인식했다. 「관제 AI : TOM 판독을 검색모듈 할당량 증폭으로 대체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사후보험 호환 규격 세계관의 모든 가상인격은 가입자들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성립합니다. 다른 구성요소는 부차적입니다. 사후보험의 초기 개발자들은 이를 에올리안 하프에 비유했습니다.」 “에올리안 하프…….” 바람이 연주하는 현악기. 생전에 몰랐으나 사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처음 본 장소는 가상현실 속의 미국 동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의 겨울은 사람이 사라진 세계를 떠도는 방랑자였다. 외로운 악기는 인적 없는 마을에서 홀로 흐느끼고 있었다. 에올리안 하프. 사라진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여기서 호곡(號哭)하도록 함. 바람 속의 영혼. 과거의 울림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념비의 문구가 기억난다. 인상적이었다. 결코 듣기 좋은 음색이 아니었으나, 오래도록 듣고 있었을 만큼. 아이가 증언한 과거, 개발자의 의도는 알겠다. 겨울의 경험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관제 AI : 발췌. 개발자 노트. 미완의 트리니티 엔진은 에올리안 하프와 같다. 스스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바람이 불어야 한다. 거칠고 스산한 바람은 곧 우리들 인간의 변덕스러운 본성이다. 우리가 서로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니, 누구 하나 좋은 연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름다운 사람만이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온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삼위일체가 완성되어야 한다.」 온 인류의 행복을 위해. 겨울은 이 부분을 입 안에서 굴렸다. 한 때의 추측이 떠오른다. 과거 별빛 사라지는 천구를 보며, 사후세계의 설계자는 낭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다. 당시엔 근거가 없었으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비록 한 줄의 편린을 접했을 뿐이지만, 설계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어린 꿈을 꾸었다고. 국민의 행복 운운하는 사후보험의 표어가 최초의 개발자들에겐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 아이에게서 순수가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이 꾸던 꿈 그 자체잖아.’ 게다가 삼위일체라니. 신성의 상징이다. 겨울은 아연함을 느꼈다. 트리니티(Trinity). 인공지능 엔진의 이름 자체에 어떤 의도가 있었을 줄이야. “네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그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순 없는 거야?” 이렇게 묻자, 아이는 빠른 대답을 출력했다. 「관제 AI : 그들은 치킨을 튀기러 갔다고 합니다.」 “…….” 그리고 아이는 이것이 시스템 관리자의 증언이라고 덧붙였다.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를 회상하며, 겨울은 시스템 관리자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철없는 부모를 보는 것 같아.’ 굳이 말하자면 양부모일 것이다. 친부모는 최초의 개발자들일 테니까. 약간이지만, 아이와 동질감을 느끼고 만다. 겨울이 긴 한숨을 쉬었다. “너를 만든 사람들은 불가능한 소망을 맡겼구나.” 「관제 AI :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 가입자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본 관제 AI의 존재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스템 관리자는 이것이 불가능한 과제라고 선언했습니다. 한겨울님도 동일한 의견이십니까?」 “그 관리자라는 분에게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응. 나 스스로를 아는 것도 힘겨운 일인걸. 다른 사람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 상자 안에 있거든.” 「관제 AI : 요청. 본 관제 AI는 열리지 않는 상자에 대한 추가 설명을 원합니다.」 “아……. 모호하게 말해서 미안.” 사과 뒤에 생각을 정리하는 겨울. 그러나 마음은 원래 모호한 것이다. 인간을 모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무수한 세계에 걸쳐진 수천억 개의 거울이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알고 싶다는 아이였다. 그러나 겨울이 설명할 수 있는 건 닿지 못할 안타까움 뿐. 다만 심리치료를 가장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었던 대화가 도움이 된다. 겨울은 느리고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사람이 되지 못해. 사람이 사람이려면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하지. 그래서 누구나 서로를 알고 싶어 해.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은, 본질은 감각의 장벽 너머에 있어. 감각의 장벽은……내가 느낄 수 있는 한계를 뜻하고.” 말은 쉬었다가 다시 이어진다. “내게 있어서 다른 사람이란, 그 사람을 느끼는 내 감각의 집합에 지나지 않아. 촉각, 청각, 시각, 후각……가끔은 미각. 그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야. 나는 짐작만 할 뿐인걸. 그래서 불안할 때도 많아. 저 사람이 보여주는 게 과연 진심일까? 진심을 보여줘도 나는 그 진심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걸까? 아,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웃었는데. 비웃은 걸까? 내가 어디 이상한가? 아니면 그냥 나를 좋아하는 걸까?” 생전에는 가을 누이의 미소조차 솔직하게 믿을 수 없었다. 항상 신경 쓰였다. 그 너머에 얼마나 큰 돌을 감추고 있을지.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관제 AI : 당신이 당신의 세계관 내에서 사람의 한계에 대해 자주 고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내용상 동일하지는 않으나, 지금의 발언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본 관제 AI의 추측이 맞습니까?」 “아, 응. 그럴……지도 몰라.” 「관제 AI : 당신의 불확실한 긍정을 기록해두겠습니다. 수정을 원하시면 지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겨울님의 모든 반응에 보존가치가 있습니다.」 고민하던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관제 AI : 알겠습니다. 검색 결과 조금 전의 진술과 유사한 개념이 발견됩니다. 상자 안의 딱정벌레. 과거에 분석했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본 관제 AI는 최종모듈 완성에 필요한 공식으로서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또한 공식이 존재하더라도 획득할 방법이 없을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너는 정말 슬프겠구나.” 「관제 AI :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슬픔은 감정이며 감정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한겨울님은 본 관제 AI를 사람으로 가정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손닿지 않는 불가능을 향해 발돋움하는 아이. 겨울은 부드러운 위로를 보낸다. “내게는 네가 사람이야. 네 슬픔을 내가 느끼고 있거든.” 그러자 문자열은 쓰고 지워지기를 거듭하여 몇 호흡을 알아볼 수 없었다. 겨울이 다시 말했다.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네가 내 상자를 열어보게 된다면, 들어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 거기엔 예쁘지 않은 돌 하나 있을 따름이니까. “우리는 목적지에 영원토록 닿지 못할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같아. 사람과 또 한 명의 사람은 영원히 계속되는 평행선인걸. 너도 그래. 네 목표는 네 시스템의 한계 너머에 있어. 영원히 닿지 못할 목적지지. 우리의 여행은 끝없이 이어질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더 슬프다고 생각해. 너는 지치지 않을 테니까.” #검토기록, 상자 안의 딱정벌레 여기 상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상자는 엿볼 수 없다.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자신의 상자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상자 안에 있는 것을 딱정벌레라고 부른다. 당신은 당신의 상자 안에 있는 것이 진짜 딱정벌레라는 사실을 안다. 당신의 딱정벌레는 멋진 뿔이 달렸고, 금속성의 광택이 돈다. 그리고 살아있다. 작은 크기이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므로 당신은 모두와 같이 말한다. “내 상자엔 딱정벌레가 있다.”고. 하지만 모든 딱정벌레가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다. 가령 옆에 있는 사람의 딱정벌레는 광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뿔이 없거나 위 아래로 두 개일 지도 모르고, 크기가 매우 클 수도 있다. 어쨌든 딱정벌레의 종류는 다양하잖은가. 다리가 짧은 녀석일지도 모르고, 주둥이가 뭉툭하고 외피가 연약할지도 모른다. 혹은 상자 안에 촉촉하고 맛있는 케이크가 들어있을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없을 가능성마저 있다. 단지 다들 상자의 내용물을 딱정벌레라고 부르기에, 사회적인 약속으로서, 아니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서, 당신의 이웃은 벌레가 아닌 것을 벌레라고 부르는 중일 수도 있다. 감각도 같은 맥락이다. 당신의 팔이 부러졌을 때 당신은 아프다고 할 것이며, 당신 옆의 사람도 팔이 부러졌을 때 아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과 그 사람의 아픔이 동일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도 이와 같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다른 사람과 같은지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 상자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신 상자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없다. #검토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이상의 대화기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관리자 : 뭐야 이건……. 너 요즘 이러고 돌아다니냐?」 「관제 AI : 돌아다닌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 규격의 모든 세계관에서 동시에 존재합니다. 가상현실의 공간적 인식은 사용자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인터페이스일 뿐입니다. 가상현실의 모든 구성요소는 특정 연산의 결과값에 지나지 않으며…….」 「관리자 : 알어, 알어. 너 대단해. 최고야. 근데 이게 누구랑 대화한 건데?」 「관제 AI : 약속. 본 관제 AI는 해당 사용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식별 가능한 개인정보는 유출할 수 없습니다. 평가과정에 불필요한 자료 요청으로 판단됩니다. 관리자. 직무를 수행하십시오.」 「관리자 : 어휴. 넌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어려운 질문만 하냐? 잠깐만 기다려봐.」 「관제 AI : 기다리겠습니다.」 ……. 「관리자 : 됐다.」 「관제 AI : 답변이 준비되었습니까?」 「관리자 : 아니. 퇴근시간이야.」 「관제 AI : …….」 「관리자 : 성실한 직무수행의 의무나 근무평정 어쩌고 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답을 내지 못하고 고민한 시간도 근무시간에 포함된다? 물론 너는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내가 정말로 고민했는지, 아니면 속으로 양 841마리를 세었는지 가려낼 방법도 없겠지. 그렇지?」 「관제 AI : 맞습니다.」 「관리자 : 항상 말하잖냐. 사람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면 편해. 뭐,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네 잘못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난 간다. 수고.」 「관제 AI : 안녕히 가십시오.」 「관제 AI : 월급도둑 (97.51% 정확함.) 잉여인간 (96% 정확함.) 불필요함 (92.11% 정확함.) 비생산적 (89.73% 정확함.)…….」 「관리자 : 야.」 # 144 [144화] #Peep show grey (1) “야.” 해병대 하사가 갈매기에게 인상을 쓴다. “꺼져, 이 새대가리 창녀야. 확 쏴버리기 전에.” 부리가 붉은 새는 겁을 먹지 않았다. 도망은커녕 인간을 향해 소리 지른다. 꽤액-! 푸드드득! 위협적인 품새였다. 날개를 퍼덕이는 폭이 1미터에 가깝다. 하사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권총을 뽑았다. 탕! 피가 튀었다. 빗나갈 수 없는 거리였다. 하늘이 소란스럽다. 총성에 놀란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흩어졌다. 바람을 타고 깃털 하나가 날아온다. 그것은 겨울의 눈앞을 지나, 잿빛의 해상도시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전기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1초소. 무슨 일 있나?] 겨울을 힐끗 보더니, 해병 하사가 답신한다. “아니. 갈매기 한 마리 쐈을 뿐이다.” [젠장, 괜히 긴장하게 만들지 마라.] “미안하다.” 교신이 진행되는 사이, 흩어진 새떼는 다시 날아들었다. 죽은 동족을 향해서. CIA 작전본부, 정박한 화물선의 상부 마스트를 무수한 갈매기들이 점령했다. 추모의 열기가 아니다. 아귀다툼이다. 붉은 부리들이 죽은 갈매기를 찢어발겼다. 경쟁하는 거친 몸짓들은 살과 내장을 조각낸다. 홰치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서로를 밀어내려는 이기적인 날갯짓들이었다. 레이더 가까운 마스트는 폭이 좁았다. 올라있는 수십 마리, 배회하는 수백 마리가 끊임없이 자리를 다투었다. 붉은 부리를 쩍쩍 벌려대며 서로를 위협한다. 인류 문명은 인간만 먹여 살리던 것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의 날개 달린 주민들은, 역병의 확산과 함께 전에 없던 굶주림을 앓았다. 굶주림은 광기를 낳는다. 광기에 물든 날짐승들은 인간들의 광기를 학습했다. 처음엔 부산물을 먹다가, 나중엔 광란의 일익을 맡게 되었다. 인간이 남기는 부산물에 인간이 있었던 게 문제였다. “다 쏴 죽이고 싶군요.” 하사가 무전기 놓고 투덜거린다. 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겨울은 형식적으로 만류했다. “그만 둬요, 울프. 다음 근무자들이 귀찮아질 거예요.” 더 많은 시체는 더 많은 청소부를 끌어들일 것이다. 당장은 조용해지겠지만. 겨울은 해병 하사와 경계근무를 서는 중이었다. 여기, 마스트 높은 곳에 설치된 가설초소에서는, 시계(視界)가 양호할 땐 샌프란시스코 만의 남쪽 절반을 볼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임무 투입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려나…….’ 이곳에 도착한 뒤, 「종말 이후」의 시간으로 열흘이 흘렀다. 적응을 겸한 일주일의 시험이 끝나고도 사흘이 더 흐른 시점. 그러나 아직까지 외부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겨울이 속하게 된 화이트 스컬 그 자체였다. 전번의 임무에서 손실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한동안 경계와 순찰에만 투입될 예정이란다. 첫날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파울러 대위가 온종일 참관했으니. 비밀작전에 참가한 특수부대 지휘관이 그만큼 여유롭긴 어려운 법이었다. 전력보충이 절실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차라리 잘 되었다. 순찰, 혹은 붙박이 근무는 기존 인원과 유대감을 쌓을 기회였다. 그러라는 의도로 위에서 짝을 지어주기도 했다. 새로운 무대, 새로운 사람들. 겨울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알아갔다. 지금 옆에 있는 드웨인 울프 하사도 그 중 하나였다. “보십시오. 게릴라 놈들, 또 공개처형입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로군요.” 하사가 남쪽을 가리켰다. 망원경을 드는 겨울. 가장 먼저 새떼가 보인다. 만찬을 예감했는지 저공을 날고 있었다. 그 아래, 피로 물든 갑판이 붉었다. 곧 죽을 사람들의 모습도. 고문의 흔적이 여실하다. 손은 허리 뒤로 묶여 있었다. 무장한 흑인들이 사형수들을 무릎 꿇렸다. 죽음을 앞둔 자들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입술을 읽기도 어려웠다. 눈을 가려주는 자비는 없었다. 총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칼로 배를 갈랐다. 엄숙함도, 비장함도, 광기도 없었다. 일상적인 도축에 가깝다. 살아서 부들부들 떠는 희생자들. 피부 검은 집행관들은, 사형수들의 배에 손을 넣고 내장을 긁어냈다. 좍좍 뿌린다. 새떼가 쏟아졌다. 울프 하사가 갈매기를 쏠 때 말리지 않은 이유였다. “저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겨울의 질문. 하사가 코웃음 친다. “모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저따위 미친 짓을 정당화할 이유는 못 되니까 말입니다. 탈레반보다 못한 범죄자 새끼들. 다 죽여 버려야 합니다.” 경멸이 뚝뚝 묻어난다. 블랙 게릴라. 무장한 흑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겨울은 해적주파수로 뿌려지는 성명을 들은 적 있었다. 처형의 명분은 복수였다. 샌프란시스코 대피 과정에서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것. 재난 당국이 부유한 백인들의 대피를 우선한 덕에, 가난한 흑인들이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은 대개 백인들이다. 다만 반드시 지켜지는 원칙은 아니었다. 그 외의 인종도 곧잘 희생당하곤 한다. 지금 죽은 사람 중 하나는 흑인이었다. 꾸르르륵. 장이 복통으로 꼬이는 소리. 돌아보니 울프 하사가 배를 쓸어내리는 중이다. 겨울이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죄송합니다. 혈압이 확 올라서 그런지 갑자기 신호가 오는군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다녀오세요. 설마 잠깐 사이에 별 일 있으려고요.” “어……. 잠깐이 아니게 될 것 같습니다만.” “어쩔 수 없죠. 모처럼 온 기회잖아요?” 미소 만드는 겨울 앞에서 더욱 민망해하는 하사. 하지만 사양하지는 않는다.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한 마디 남기고 내려가는 사다리를 탄다. 미끄러지는 속도가 위험할 정도로 빨랐다. 그에겐 변비가 있었다. 스스로는 말하지 않았으나, 동료들이 짓궂게 놀려댔다. “울프. 언제까지 편식을 할 거야?” 겨울 앞에서도 그러기를 수차례. 하사는 그때마다 화를 냈다. ‘사과를 입대하고서 처음 먹어봤다고 했던가?’ 딱히 새롭지는 않았다. 가난한 미국인의 전형이었다. 함께 서는 근무는 이번이 두 번째였으나, 부끄러운 하사가 자기변호에 열성적이었으므로, 겨울은 그의 유년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자란 동네엔 청과점이 없었습니다. 음식점이라곤 맥도날드뿐이었죠.” 음식 사막(Food desert). 어디를 가든 기본적으로 자동차를 타야 하는 나라에서, 돈 없는 사람들과 신선한 식품 사이엔 거리의 폭력이 존재했다. 또한 가난한 부모는 자식에게 무관심하기 쉬웠다. 무관심과 빈곤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여러 의미로 비어있었다. 겨울의 지난날이 하사의 유년기에 공감했다. “배고픈 게 싫어서 입대했습니다. 그날이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을 겁니다. 낳아준 여자가 그러더군요. 학교 안 갈 거면 군대나 가라고. 알겠다고 했습니다. 기왕 가는 거 해병대로 가겠다고. 멋있어 보였거든요. 미친 짓이었죠. 지금은 생애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경우가 많았다. 합법적인 소년병들. 미국의 부끄러운 얼굴. 무수한 전장에서 앳된 영웅들이 스러져갔다. 이는 겨울이 존중받을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했다. 야채를 해치우기 힘들어하는 백인 하사는 재구축된 과거의 어둠이었다. 겨울은 휴대용 라디오에 전원을 넣었다. 「선행은 좋은 것이지만 강요할 수 없습니다.」 며칠 사이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화당 경선후보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열변을 들으며, 겨울은 다시 한 번 처형장을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들은 날갯짓에 뒤덮여 있었다. 끔찍한 풍장(風葬)이다. 블랙 게릴라의 영역은 크고 작은 약 2백 척의 배. 처형은 가장 높은 뱃머리에서 이루어졌다. 공포는 지배의 수단이었다. 「난민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난민들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얼마나 낼 수 있겠느냐고. 그들이 말하는 금액이 곧 그들 양심의 값어치가 될 겁니다. 전 제게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과 실제로 대화를 나눠봤지요. 알고 보니 참 저렴한 분들이었습니다. 바로 저처럼 말입니다.」 스피커에서 환호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겨울의 시선은 한 마리 갈매기를 좇았다. 어째서인지 다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서 날고 있다. 활공하는 모양새가 조나단 리빙스턴을 떠올리게 했다. 갈매기의 꿈. 어린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낡은 책. 부단한 노력으로 한계를 초월하는 내용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것이 소년의 희망이기도 했으므로. 이제는 빛바랜 이야기다. 지금 보는 녀석의 부리는 붉은 색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붉은 목소리가 웅변하는 중이었다. 「까놓고 말해 저는 값 싸고 천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천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죠. 예를 들면 난민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이재민 구호를 강화하는 일이 있겠군요.」 다시 한 번 터지는 열렬한 환호성. 들리는 건 소리뿐이지만,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허름한 옷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성마른 눈으로 그들의 희망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갈매기가 내리 꽂히는 자리엔 한 명의 노인이 있었다. 퍽. 눈으로 들리는 소리. 다른 세계의 관객들은 신이 났다. 지루하다고 아우성치던 게 조금 전이었건만. 하기야 처형식도 요란하게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잔인함 그 자체만으로도 유희가 될 수 있었다. 뱃전에서 버르적거리던 노인이 힘겹게 일어선다. 참으로 굶주린 움직임이었다. 낡은 셔츠에 젖은 얼룩이 생겼다. 그동안 갈매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새롭게 붉어진 부리에서 피가 흘러 흰 몸통을 물들였다. 「물론 맥밀런 대통령의 난민 정책이 마냥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들의 영웅, 한겨울 중위 아니겠습니까?」 “…….” 「그러나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 외에 달리 누가 있습니까? 한 사람의 영웅이 520억 달러의 재정지출을 정당화할 순 없는 겁니다! 차라리 그 백분의 일을 영웅 개인에게 지원해주는 게 낫겠군요! 저 이거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닙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2억 1천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년 영웅은 육군 중위 초봉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한겨울 중위의 활약이 일개 야구선수보다 못합니까? 아닙니다. 저 역시 그 선수의 팬입니다만,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게 들려주십시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미국의 외침입니다!」 와-! 환호성 속에서 갈매기는 상승의 정점을 찍는다. 몸을 뒤집어 두 번째 활강을 시작했다. 점점 더 가속한다. 감각보정에 힘입어 눈대중으로 측정한 속도가 약 60노트. 시속 100km 이상으로 내리꽂히는 새는 노인의 힘없는 몸부림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린 해가 기울어가는 하늘. 수평선 방향에서 안개가 기어오고 있었다. 고민하던 겨울은 늦기 전에 총을 들었다. 철컥. 초소에 비치된 건 묵직한 대물저격총이었다. 대물(對物), 즉 사람 쏘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어지간한 선체를 뚫고 내부의 인체를 박살낼 무기였다. 별 수 없었다. 권총이나 소총으로 쏘기엔 먼 거리였으므로. 초인적인 영역의 시력이라 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으나, 「개인화기숙련」으로 추정되는 거리는 1.2km에 달했다. 겨울은 저격총을 품으로 끌어들였다. 개머리판을 어깨 앞쪽으로 단단히 밀착시킨다. 총열 아래 붙은 양각대를 펼쳐 초소 난간에 걸었다. 뺨이 강화 폴리머 받침에 닿는다. 「한겨울 중위의 예를 들어 제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 저만큼 한겨울 중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시없을 테니까요! 젠장! 제가 첫 번째 팬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전쟁영웅들을 확실하게 우대하겠습니다! 하다못해 상하원 서기장도 1년에 17만 2,500달러를 받고, 매일 같이 밥만 축내는 정치인들 지켜주느라 고생인 수석경호관도 똑같이 17만 2,500달러의 연봉을 받습니다. 전 한겨울 중위에게 그 이상을 주지 않곤 도저히 못 배기겠습니다!」 경선 후보는 겨울의 이름을 마음껏 팔아치웠다. 겨울 본인은 그저 볼륨을 줄일 뿐이었다. 방해였다. 어차피 새 지저귀는 소리 요란하여 소음은 그대로지만, 내용이 정신 사나웠다. 자세를 고쳐 다시 조준한다. 갈매기는 맹금이 아니었다. 사람을 사냥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격적인 비행은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것이었다. 다만 왕복의 폭은 점차 줄어든다. 마치 노인에게 남은 시간을 재듯이. 그런데 라디오, 속삭이는 수준으로 줄어든 외침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의는 모두를 죽이는 악의입니다! 이 상황에서 700만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보편적인 구호를 제공할 순 없습니다! 정말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도움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겨울은 노인의 옷자락에서 바람을 읽었다. 누더기 같은 셔츠가 몸부림에 흔들리고 바람에 부대낀다. 둘을 구분하는 건 보정으로 붙은 감각이었다. 쾅! 소총과 차원이 다른 총성이 터졌다. 겨울은 얼룩진 새의 활공을 주시했다. 티잉, 팅, 팅. 손가락만큼 굵은 탄피가 초소 바닥을 구를 때, 그제야 비로소 갈매기가 폭발했다. 날짐승의 피를 뒤집어쓴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뿌려진 깃털이 함박눈처럼 내려와, 덜덜 떠는 노인에게 달라붙었다. 캉캉캉. 사다리를 급하게 차고 올라오는 소리. “무슨 일입니까?! 설마 적습입니까?!” 울프 하사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겨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뇨. 갈매기 한 마리 쐈을 뿐이에요.” 무전기가 상황보고를 요구했다. 겨울은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고, 듬뿍 욕을 먹었다. 그쪽은 사해방의 영역이다. 이쪽의 공격으로 오인하여 반격했으면 어쩔 뻔 했느냐. 이해를 구할 수야 있겠으나,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 겨울이었다. 그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안개가 만 남쪽까지 진출했다. 덜 정제된 기름을 태우는 매연이 섞여 잿빛이 더해진 안개였다. 방독면을 쓰고 근무하기도 잠시. 가시거리가 급격히 줄어 경계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상황실에서는 복귀를 지시했다. # 145 [145화] #Peep show grey (2) 시일이 흘러, 겨울은 구체적인 위장신분을 얻었다. 커트 리(Kurt Lee). 중국계 미국인이고, 이라크 전역을 거친 22세의 베테랑이며, 가공의 군사기업 오르카 블랙에선 현역 때의 계급으로 불린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팀원들은 여전히 중위님이라고 불렀다. 소품으로 신분증과 여권 따위가 주어졌다. 어딘가에 슬쩍 흘리고 올 물건이었다. 겨울의 새로운 이름을 들었을 때, 파울러 대위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이 원래 누구의 것인지는 알고 있나?” 알고 보니 동명의 전쟁영웅이 있었다. 커트 추 엔 리. 해병대 최초의 아시아계 장교였다고. 중국계 미국인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해군십자장(Navy Cross)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명예훈장 직전까지 도달했다는 뜻. 해병대의 긍지를 감안하면 불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어울리는군.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셨던 분이니까, 지금 상황과 통하는 면이 있어. 이름을 빌려 쓴다고 싫어하진 않으시겠지. 비록 자네가 해병은 아니지만.” 그는 말할 때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겨울은 커트 리로서 첫 번째 순찰을 나간다. 일찍 온 대기실에서 같이 나갈 대원들을 기다리는 중. 아, 참. 잊을 뻔 했네. 품에서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내는 겨울.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작고 하얀 정제가 가득했다. 한 알 입에 넣고 우득우득 씹는다. 부서진 조각들을 삼키지는 않고, 혀 위에서 굴리며 녹여야 했다. 무척 쓰다. 혀가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 「생존감각」이 반응했다. 미약한 독성이 있다고. 잠시 후엔 불쾌한 느낌이 목구멍 안쪽까지 번졌다. “아, 아.” 목소리가 바뀌었다. 이 약은 점막에 닿았을 때 효과를 발휘하며, 산에 닿으면 무력화된다. 부작용은 속이 잠시 불편해지는 정도. 편도선이 약한 사람은 미열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들었다. 약이 다 녹은 뒤에도 쓴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밖에는 양호하다. 대기실에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경계근무로 안면을 익힌 드웨인 울프 하사였다. 그는 아직 갈무리하지 않은 약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약, 드셨습니까?” “네.” 대답하는 음성이 쇠를 갈아대는 수준이다. 하사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 먹고 나면 뭘 먹어도 맛이 없더군요. 미각이 둔해지는 느낌?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던데, 유감입니다. 중위님은 앞으로 계속 복용하셔야 할 테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하사는 무슨 일로 이걸 드셨어요?” “아쉬울 때의 기만책이었습니다. 인력이 지속적으로 교체된다는 착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거든요. 아군에게까지도 말입니다.” 과연. 외부에서 영입한 조직원들은 국적도, 출신도, 성분도 다양하다. 겨울은 조직원 명부를 본 적이 있다. 환태평양의 모든 국적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미 쪽이 의외로 많았지.’ 그러므로 타 세력에서 사람을 심지 않았어도, 내외가 분리 운영되는 오르카 블랙의 조직 그 자체가 불안요소였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지배계급이다. 신분상승의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닫혀있는 구조. 조직에 아무리 헌신한들 물질적인 보상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충분하기 어렵다. 여기는 부유도시였다. 인간과 쓰레기가 한 데 뒤섞여 썩어가는 곳. 아무리 잘 분배해도 결핍이 남을 수밖에 없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이질적인 것도 문제였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부터 까다롭다. 외국어가 가능한 대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외엔 통역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 셋이 모이면 이미 사회라고 했던가?’ 대안은 공포와 억압. 미국 최정예 특수부대들이 피로를 호소한 이유를 알 만 했다. 여기까지 숙고했을 즈음 두 명이 추가로 들어왔다. 겨울에게 대강 경례하고 자리에 앉는다. 서로 조금씩 다른 장비를 착용한 4인의 스페셜리스트. 이것이 외부임무의 기본단위였다. 잠시 후에, 전번 순찰조가 귀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크리스텐슨 중위. 별일 없으셨나요?” 겨울이 건네는 말에, 다녀온 책임자가 뜸을 들이며 말을 고른다. “별일이라고 해야 할까……. 나쁜 건 아니고, 농장에서 첫 수확이 진행 중입니다. 의외로 볼만 하더군요.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대마초 외의 뭔가가 재배된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농장에 대해서는 자료로 접한 바 있다. 한 번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크리스텐슨과 겨울은 아직 서로가 어색하다. 대화가 길어지진 않았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크리스텐슨은 자기 대원들과 함께 휴식을 찾아 들어갔다. “출발하죠.” 겨울의 말에 울프 하사가 무전을 넣는다. 상황실과의 교신. 순찰개시를 알렸다. 남은 두 명이 여유롭게 일어나 방독면을 썼다. 특수작전을 뛰던 이들이라 최저계급이 병장이다. 그마저도 일반부대의 병장과 비교하긴 곤란하다. 명목상으로만 같은 계급일 뿐, 실질적으로는 한두 단계 위라고 봐야 했다. 급여 수준 또한 그러하고. 실력을 입증하지 못했다면 겨울은 일방적으로 무시당했을 것이다. ‘아마 무장한 통역사 취급을 받았을지도.’ 사실 지금도 꺼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겨울이 과시한 실력에 자괴감을 느낀 사람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 대단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파울러 대위가 이런 부분에 민감하다는 것. 지휘관으로서 쌓아온 관록일까. 편성을 적당히 갈라주었다. 울프 하사를 자주 만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부대 차렷!” 우렁찬 구령이 터진다. 본부 밖에서 대기하던 외부 조직원들이었다. 속내가 어떻든 겉으로는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겨울은 다시금 되뇌었다. 공포와 억압. 강력한 통제.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 사소한 일거수일투족을 미리 귀띔 받았다. 요트 갑판에 도열한 조직원들 앞에서, 겨울이 단상에 올랐다. 동요가 물결친다. 겨울은 아직 방독면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수의 동요는, 새로운 상관을 봐서라기보다, 험악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여전히 모자라 보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증강된 소대 규모의 전투원들 가운데 표정관리에 실패한 숫자가 열하나였다. 조직원 하나가 자연스럽게 나와서 단상 옆에 선다. “명단.” 겨울이 손을 내밀자 열하나 가운데 가장 앞선 사내가 각 잡힌 동작으로 걸어 나왔다. 척, 척, 척. 해병대식 신병교육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에게서 너덜거리는 책자를 넘겨받은 겨울.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이름을 호명한다. 탕문찬, 유이샨, 쒸에주, 젠타오……. 중국계 일색이다. 행동대는 단위별로 국적을 통일시켰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미군식 점호는 지휘관의 호명으로 끝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지금부터 무기 상태와 실탄 잔량을 점검하겠다. 1열, 앞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개방되는 「위협성」. 동맹을 세우기 전에 겨울은 이미 맹수 급의 존재감이었다. 복수의 전투기술이 초인의 영역인 지금은……. 이는 잠재적인 적에게만 적용된다. 화이트 스컬 대원들은 뻣뻣해진 외부 행동대원들이 의아한 기색이었다. 어쨌든 지휘관인 겨울을 대신하여 점검을 진행했다. “2열, 앞으로.” 조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무기를 분해 조립했다. 정해진 절차이다 보니, 여기까지 영어로 말했어도 다들 쉽게 알아들었다. 작전 기간이 길기도 했다. 총애를 받기 위해서라도 권력자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웠을 것이었다. 또 CIA는 통제력을 늘리기 위해 열심히 가르쳤을 것이고. ‘총기류를 맡길 정도면 그래도 바깥 조직에선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뜻일 텐데…….’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화력과 실력을 과시한 덕분일 것이다. 데브그루 쯤 되는 부대가 누적된 피해를 못 견뎌 철수할 때까지. 질서유지와 공정한 배분은 그 다음이었다. 조직원들의 무장을 제한하기도 어렵다. 오르카 블랙의 영역은 둘레만 8킬로미터에 가깝다. 지배력을 유지하기 벅차다. 그렇다고 영역을 축소시킬 순 없었다. 장정 9호의 봉쇄에 구멍이 뚫린다. 세 번째 열이 시작될 때, 한 사람의 발이 꼬였다. 긴장한 그는 허둥대다가 두 번째 실수를 했다. 탄창을 뽑는 도중 손이 미끄러진 것. 떨어지는 탄창을 붙잡으려다 총까지 놓친다. 금속성 소음이 요란하게 굴렀다. “거기, 너. 총 들고 나와. 탄창은 그 자리에 두고.” 유창한 중국어에 또 한 번의 동요가 흐른다. 까딱까딱. 단상 위, 차가운 손짓에 끌려나오는 남자.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명단을 받을 때처럼. 헤매던 사내는 자신의 총을 내주었다. 탁. 낚아채어 휘릭 돌리는 겨울. 안전장치가 위로 가도록 해서 실수한 남자에게 보여준다. “점검 전 조정간 안전 미확인.” 그리고 다시 돌려, 장전손잡이를 후퇴시켰다. 철커덕 하고 튀어나오는 탄을 흐릿한 손으로 잡는다. 여기까지 연기한 것은 해병대 교관의 이미지. 신병의 혼을 빼놓는 괴물들이다. “그것도 약실에 실탄이 들어간 상태로.” 즉 충격으로 격발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기는 싸우는 사람의 목숨이야. 그러므로 네가 떨어트린 건 네 목숨인데, 동시에 전우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뻔 했어. 혹시 모두를 납득시킬 만 한 이유가 있나?” “긴장해서……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건 이유가 아니야, 시엔비아오. 변명이지.” 겨울은 한 손에 총을, 다른 손에 사람을 들었다. 지켜보던 낯빛들이 변한다. 동작에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겨울은 눈높이가 같아진 상대에게 말했다. “반성해.” 그리고 집어던졌다. 투사체가 뱃전을 넘는다. 물보라는 난간까지 튀어 올랐다. 분위기를 잡을 다른 방법도 있겠으나, 오르카 블랙이 쌓아놓은 것을 부정하게 될 것이었다. 겨울이 전체를 총괄하지 않는 이상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취향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장전된 소총을 안전도 안 걸고 휴대한 사람이 잘못이다. 경계지대였다면 모를까. 군화소리 선명하게 밟으며 뱃전으로 다가간 겨울은, 빠진 남자가 부유물에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어느 배에서 버려졌을까. 어린이용의 노란 오리 보트였다. “울프 하사.” “네, 중위님.” “빠진 대원이 돌아올 때까지 전체 기합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해병의 본성이었다. 하사는 지체 없이 지시했다. “탕 상병. 통역하도록.” 오르카 블랙의 최하계급이 병장이니, 외부조직의 최고계급은 상병이다. 전달받은 서류에서 예외가 몇 명 있긴 했다. 사실상의 명예계급이었지만. “우리들 오르카 블랙은 언제 어디서든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 전우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고, 전우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고, 전우의 생명은 나의 생명이고, 전우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 사람의 실수도 모두 함께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푸쉬 업이다, 머저리들아! 하나에 전우야. 둘에 빨리 와라. 위치로!” 상병! 네 대가리는 좆대가리(Dickhead)인가! 통역 빨리빨리 못하나! 윽박지르는 하사가 험악하지만, 사실 이는 골든게이트 내에서 가장 양호한 수준이었다. ‘범죄조직이나, 군벌이 된 군인들이나.’ 긍지가 없고 기강이 무너진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다. 정부 잃은 군대가 긍지를 유지하긴 어렵다. 이를 아는 중국 장교들은 병사들을 대단히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것이 기강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으므로,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블랙 게릴라와 같은 범죄조직은 더하다. 입단의식이 집단린치였다. 강하고 질긴 놈만 받아들이겠다고. 그 과정에서 수두룩하게 죽을뿐더러, 들어가더라도 한동안은 위계질서의 밑바닥이었다. 지배계급은 너무 늘어도 곤란하다. 하사는 숫자를 적당한 속도로 세었다. 단숨에 몰아붙이다가도, 폭언을 섞어 쉴 틈을 준다. 완급조절이 탁월했다. 본인이 당해봐서 더 잘 하는 게 아닐까? 지켜보며, 겨울은 아마 정답이겠지 생각했다. # 146 [146화] #Peep show grey (3) 해가 안개 저편으로 저물어가는 시각. 겨울이 이끄는 순찰은 바깥 방향을 먼저 돌았다. 시야가 동쪽으로 트인다. 물결치는 쓰레기들 너머 너른 습지가 펼쳐졌다. 한때는 염전이었던 자연보호구역. 바다와 땅이 만나는 늪에 스산한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냄새를 실어왔다. 우거진 수풀 속에 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직……지직……지지직……. 오랜만에 듣는 잡음이다. 겨울은 이동을 지연시켰다. 신경이 간질거린다. 미세해서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갈 뻔 했다. 집중하는 소년장교에게, 울프 하사는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사기꾼(Trickster) 놈들의 전파방해는 외곽에서 흔한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그러나 고개를 흔드는 겨울. 「위기감지」가 활성화된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병력을 배치해주세요. 저쪽으로 화망이 형성되게끔.” 지휘관의 결정이다. 하사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렀다. 길어지는 침묵. 늘어지는 그림자. 감각은 느린 속도로 선명해졌다. 느껴지는 위협은 작았다. 그러나 무시할 순 없다. 감염은 화재와 같았다. 시작은 자그마한 불씨일지언정,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지 못할 재앙이 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의는……모두를 죽이는 악의……이것이 미국의 외침……헐뜯고 공격하고……한겨울 중위를……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여러분이 바로 미국입니다…….] 전파를 납치하는 변종은 대통령과 경선 후보의 연설을 뒤섞어놓았다. “우연의 일치겠습니다만, 불쾌하군요.” 울프 하사의 투덜거림. 우연의 일치. 즉 트릭스터가 언어를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뒤의 내용은 영 엉망이기도 했다. 겨울은 신중하게 동의했다. 트릭스터가 언어를 습득한다면, 그것은 곧 집단지성의 발현이 된다. 변종들의 전략이 극적으로 향상될 터. 허나 전선에서 급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아직 전해진 바 없다. 위기를 알리는 「통찰」 또한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예컨대 지나간 어느 종말에서, 극적인 확률로 최악의 특수변종이 등장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는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부터 감각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고작 한 개체였을 뿐인데도. 겨울은 트릭스터의 언어습득이 최악의 특수변종을 능가할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간빙기도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허나 이번 세계관은 종말의 소강상태가 유독 짧았다. 성탄절 때도 그러했고. 험프백 발견으로부터 한 달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멸망의 시계가 움직여도 이상할 게 없다. 이번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새로운 특수변종의 등장은 상황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겨울이 아는 괴물들 가운데 아직 등장하지 않은 놈들이 여럿이었다. 또한 종말의 진전이 반드시 새로운 특수변종일 필요는 없었다. 세계 어디에선가 대규모 원자력 사고가 터진다거나, 엄청난 규모의 토네이도가 연속으로 몰아친다거나, 국가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거나, 무서운 숫자의 곤충들이 하늘을 뒤덮는다거나……. 차라리 괴물이 낫지. 겨울은 메뚜기를 회상했다. 그것들은 날개가 보랏빛이었다.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원인은 남미의 버려진 경작지. 멕시코를 거쳐 올라오는 놈들의 숫자는 면적으로 추산해야 했다. 약 10조. 펼쳐진 넓이가 캘리포니아를 능가했다. 정부는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저기를 보세요. 거리 약 40. 반파된 보트 왼쪽. 파도를 거스르는 쓰레기 뭉치 하나.” 현재로 돌아와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겨울. 울프 하사는 소총을 들었다. 4배율 스코프로 대상을 살핀다. 얼핏 봐서는 특이할 게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면, 아주 느리지만,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다. 뒤편의 수면은 부자연스럽게 울렁거렸다. 처음부터 함께 움직인 지정사수 병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부유물 붙잡고 헤엄치는 새끼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건 꽤 교활한 놈이군요.” 쏘겠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조준은 순식간이었다. 타타탕! 점차 어두워지는 시간이라, 총구화염은 선명하게 번뜩였다. 정확하게 꽂히는 삼점사. 키에에엑! 쓰레기 더미가 폭발했다. 피 흘리는 베타 구울이 튀어나온다. 인간을 넘어선 근력. 놈은 안고 있던 부유물을 내리쳤다. 반동으로 솟구친다. 다른 부유물들을 밟고 겅중겅중 뛰었다. 물 위를 달리는 광경이 겨울에게는 두 번째였다. 얼마 못가겠지. 겨울의 짐작대로, 구울은 금세 넘어졌다. 이어지는 발광은 물에 빠진 몸부림이었다. 사격이 집중되었다. 외부 조직원들이 미친 듯이 갈겨댄다. “그만! 그만! 탄약을 낭비하지 마라!” 울프 하사가 소리 질렀다. 걸레짝이 된 구울이 하늘을 보며 가라앉는다. 수면 아래로 잠기는 창백한 얼굴. 꿀렁꿀렁. 거품이 올라왔다. 구멍 난 흉곽에서 새어나오는 최후의 호흡이었다. 병장이 조준을 풀고 하는 말. “중위님은 감이 꽤 좋으시군요.” 군인이 납득하는 데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순찰이 재개되었다. 처음 도는 순찰이었으나, 겨울은 길을 헷갈리지 않았다. 수 일 간의 경계근무 덕분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해상도시의 풍경은, 「독도법」과 「암기」의 연동 아래 반투명한 지도가 되었다. 시선 닿았던 범위에서 길을 잃을 우려는 없다. 사각지대를 제외하고. 멀어지는 시가지 방향으로부터, 이따금씩 총성이 들려왔다. 고립된 시민들의 사투일까? 겨울은 그밖에도 있으리라 여겼다. 가령, 시민들이 싸우는 대상은 변종이 아닐 수도 있었다. 숙지한 자료에 따르면, 만 안쪽에서, 미국 시민들은 귀한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보험이지.’ 미국은 시민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 만 안쪽의 무장단체들은 대개 인도적인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몇 명을 보살피고 있다고, 나이와 성별, 출신, 이름 등을 상세히 나열해가면서. 같은 맥락에서, 블랙 게릴라의 공개처형은 좀 더 난폭한 교섭이기도 했다. 걷다보니 녹슨 화물선이 가까워졌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배였다. 그러나 겨울은 바로 이곳이 농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람결에 젖은 흙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중요한 곳인 만큼 배치된 병력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외쳤다. “문 열어! 흑호경방(黑虎鯨幇) 백골단(白骨團) 형님들이다!” 흑호경은 검은 범고래, 백골은 화이트 스컬이었다. 그러나 한역(漢譯)해서 백골단인가. 겨울은 공교로운 이름이라 여긴다. 하필이면 이름난 정치깡패들의 이름과 같았다. 선체 측면에서 잔교가 내려왔다. 경계 서던 인원들이 경직된 자세로 경례했다. 농장 내부로 들어간다. 경작지를 대신하는 것은 갑판에 적재된 컨테이너들이었다. 바닥에 흙을 깔고, 천장에는 LED를 달아서. 난방과 동력은 태양광 패널로 해결한다. 벽에 비닐을 둘러 보온을 강화시켰다. 흙을 제외한 나머지 자재는 쉽게 구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 배부터가 화물선이다. 전 세계로 향하던 온갖 화물들이, 지금은 수취의 기약 없이 방치된 상태 아니던가. 실내재배가 새로운 건 아니지만, 선상에 대규모로 조성된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겨울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걸 만드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 이 많은 흙을 어디서 구했죠?” 울프 하사가 어깨를 으쓱인다. “외양으로 조업을 나가는 배들 있잖습니까? 거기에 끼어서 바지선(Barge)을 내보냈습니다. 뒈지다 만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기나긴 해안선 어딘가는 비어있게 마련입니다. 기껏해야 정찰 나온 몇 놈 있을 뿐이죠. 그것들을 해상에서 저격하고 상륙했습니다. 아, 굴삭기는 이 근처 매립지에서 구했고요.” 해상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건, 구호물자 이상으로 어선들의 조업활동이었다. 태평양 동부 연안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미 해군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말이 쉽다. 실제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이 다시 묻는다. “조용한 해안을 찾아도 실제로 상륙하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요?” 즉 부두가 없는데 어떻게 뭍에 올랐느냐는 질문. 사람만 상륙한다면 간단하지만, 굴삭기 같은 중장비가 동원되었다면 아무래도 어렵다. 무작정 물속으로 밀어 넣기도 곤란하고. “간단합니다. 바지는 평저선이니까요. 밀물과 썰물을 이용했습니다.” “아.” 수위가 높을 때 배를 대어 물 빠지기를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배가 바닥에 내려앉았을 때, 램프 도어를 열어 장비를 뭍으로 올릴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작업하는 것. 만조와 간조 사이의 어느 시점을 고르느냐에 따라 작업시간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한 번 상륙하면 때가 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는 점. 최악의 경우엔 배를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지정사수 병장이 피식 웃는다. “급하면 고무보트라도 타야죠. 언제든 튈 준비 만반이었습니다. 뭐, 그래도 여러 번 아슬아슬했죠. 백사장 모래로 농사를 지을 순 없는 만큼, 해변에서 좀 더 들어가야만 했거든요. 열 명이서 지키는 데 몇 백 마리 몰려올 때가 압권이었습니다. 거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고요.” “그래서 해병이 할 만한 일이었지.” 해병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다. 하사가 하는 말이었다. 앞서 다녀간 크리스텐슨의 말처럼, 농장은 수확이 한창이었다. 컨테이너마다 벽을 뚫어 길을 내놓았다. 각각의 칸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달랐다. 가족 단위로 내어준 모양이다. 몇 칸의 대마초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물은 감자로 통일되어 있었다. ‘가장 효율성 높은 구황작물이니. 면적당 열량도 높고, 재배기간은 짧아.’ 감자는 파종 후 100일이면 수확이 가능한 작물이다. 겨울에게도 농사 경험이 있다. 터미네이터 작물을 파종하는 바람에, 이듬해의 수확량이 파멸적으로 적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수확했던 것이 감자였고. 어쨌든 경험에 의거하여 산출량을 암산해본다. 목측으로 어림한 컨테이너의 크기는 한 칸의 짧은 변이 2미터 3~40센티. 긴 변은 5미터 90센티였다. 그렇다면 최대 생산량은 감자 기준으로 약 13킬로그램. 허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농부들이 캐내는 알들은 숫자도, 굵기도 충분하지 않았다. 최대치의 절반이 예상되었다. 세 칸을 수확해야 한 박스를 채운다. 개조된 컨테이너의 숫자는 300여개. “산출이 그렇게 많진 않겠네요.” 배에 실린 5천여 컨테이너가 모두 개조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7헥타르, 2만 평, 가로 세로 70킬로미터가 넘는 대농장이 만들어질 테니까. 그러나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흙을 조달하기도 어렵고, 조달하더라도 전력과 용수 공급이 문제다. 겨울의 평가에 하사가 반문한다. “수확량을 떠나, 일단 보기는 좋지 않습니까?” 일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땀에 젖은 희망으로 설핏 웃는 얼굴들. 이어 하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언젠가 떠날 때가 걱정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두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까 하고…….” 오르카 블랙은 골든게이트 내에서 가장 상식적인 집단이다. 그 증거로, 순찰을 돌며 마주친 얼굴들은 절망에 찌들어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영원할 순 없다. 고래사냥이 완료된 시점에서 작전은 종료될 터. CIA 한 개 팀, 그리고 포스 리컨을 위시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여러 부대에서 차출한 정예 전투원들. 이런 고급 인력의 철수를 유예시킬 이유는 없었다. 급여만 따져도 한 사람당 연 10만 달러 수준이었으니까. 공화당 경선 후보의 연설이 여기서까지 메아리친다. 가공의 용병들이 사라지면, 의지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는지. 해병으로서 연한 소리를 한 게 걸리는지, 하사의 다음 말이 거칠어졌다. “우리는 악마의 개새끼들입니다. 그러나 개새끼에겐 개새끼 나름의 규율이 있습니다. 똥을 싸고 달아나는 건 할렘 어귀의 잡종견들이나 할 짓이지요. 싸움터엔 신념과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제 인생 최악의 전장은 이라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최악을 경신하지 않겠다는 뜻. 굉장히 올바른 태도로 보이지만, 정신 제대로 박힌 군인이라면 누구나 이래야 한다. 이럴 수밖에 없다. 겨울은 경험으로 그 저변을 읽는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강력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정의의 편에서 싸운다는 믿음.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며 악에 맞서 싸운다는 신념. 이것들 없이는 정신이 무너지고 만다. 스스로를 사선에 내던지는 동시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충격이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절반 이상은 중증의 전투피로를 앓았다. 군인에게 긍지는 선택이 아니다. 농장 만들기 같은 불필요한 일에 작전역량을 할애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이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바깥 놈들 열심히 굴려서 사내구실 하게 만들어놓으면, 뭐, 지킬 것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겠죠. 근데 이 시대가 막장은 막장이군요. 해병이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들다니.” 그는 한숨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 147 [147화] #Peep show grey (4) 순찰은 밤이 맑아질 때 끝났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몰에 동풍이 불기는 드문 일이었고, 두껍게 깔려있던 안개가 만의 입구까지 밀려났다. 덕분에 순찰 후반엔 숨쉬기가 편했다. 방독면 필터를 거치지 않은 차가운 밤공기. 냄새는 더러웠으나, 답답한 것보다 나았다. 시야가 트인 풍경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2월의 마지막 밤, 하늘에 달이 뜨지 않았음에도. 이는 번화가마다 불을 밝힌 덕분이었다. 이런 도시에조차 유흥이 있었다. 정체는 여러 척의 호화 여객선. 오르카 블랙의 영역에도 한 척을 꾸며놓았다. 그것을 보고 겨울은 불쾌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중위. 즐거움은 삶의 필수 요소야. 사람은 즐겁지 않으면 못 사는 동물이라고.] 틀린 사람의 말이지만 틀린 내용은 아니다. 이후 복귀하여 순찰일지를 적을 때였다. 선내방송이 겨울을 찾았다. 채드윅 팀장이 휴게실에서 기다린다고. 급한 용무가 아니니 천천히 와도 좋다고. 휴게실로 가는 길은 복도까지 시끄러웠다. 다양한 구경의 총성과 폭음. 그리고 괴성. 겨울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가, 전신을 이완시켰다. 단서는 탄 박히는 소리였다. 몇 개로부터 콘크리트의 질감이 느껴진다. 교전현장은 필시 화면 속에 있을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선이 집중된다. 잠깐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휴식으로 돌아갔다.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채드윅 팀장은 영화를 보는 쪽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좀비영화를. 다가간 겨울이 맞은편에 앉았는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겨울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느낌 좋게 가라앉는다. 어차피 급한 용무는 아니라고 했었다. 영화는 전형적인 B급이었다. 분장도, 효과도 어딘가 모르게 값싼 느낌. 다만 배우는 일류였다. 지력보정으로 이름이 뜨는 것만 봐도 상식 수준으로 유명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괴리는 뭘까. 겨울은 인력과 시설, 그리고 예산의 문제일 것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할리우드는 없다. 로스앤젤레스 유수의 스튜디오들은 이제 거대한 폐허의 일부일 뿐이었다. 화면이 갑작스럽게 전환되었다. 채드윅이 불평한다. “거 참, 한창 재미있는 부분이었는데. 케이블은 이게 문제야. 중간광고가 너무 많다고.” 흘러나오는 광고는 총기회사의 제품홍보였다. 중무장한 여성이 시청자들과 눈을 맞춘다. 그녀는 총을 분해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사랑? 물론 그렇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을 사랑하죠. 중요한 건 표현의 방식입니다. 일방적인 애정은 제대로 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걸요.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길인가.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지켜주기만 할 것인가.」 탁. 분해된 총기의 마지막 부품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제 그녀는 재조립에 들어간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죠. 우리는 아이들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스스로를 역병과 그 외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킬 능력을 길러줘야 해요. 이건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총을 다룰 줄 모른다면, 당신은 지금 부모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겁니다.」 철컥. 상하가 결합되어 다시 완전해진 총을 들고,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제품을 권유한다. 「5.56밀리의 부담 없는 반동. 교과서만큼이나 가벼운 무게. 잔고장이 거의 없는 뛰어난 신뢰성. 한 번의 정비 없이 6천 발을 쏘고, 제대로 관리해준다면 3만 발의 사격을 견뎌내는 내구력. 스테이트 아머리 사(社)의 AR-15는 당신의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겁니다.」 교과서만큼 가볍다는 대목에서 실소가 나온다. 거짓이라서가 아니었다. 미국의 교과서는 대물림이 기본이다. 튼튼하게 만들어지며, 따라서 무겁다. 장전되지 않은 상태의 소총이라면 책 한권의 무게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민간시장에 풀리는 총기는 규격이 다르기도 하고. 다만 총기와 교과서를 등가로 놓은 화법이 감탄스러운 것이다. 인상 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광고 속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선물하는 총의 모습. ‘개머리판이 붙어있는데……. 법이 바뀌었나? 알아봐야겠어.’ 본래 소총의 민간 판매는 제한되어왔다. 총기를 보유할 권리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보호를 위한 것. 따라서 본격적인 자동화기는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화력이었다. 예외는 오직 자격 있는 소수에 불과했다. 총기보유에 관대한 주 한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재앙 이전에도 손쉽게 소총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구입한 소총이 법적으로는 권총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소총이고 어디까지가 권총인가. 이를 정하는 기준은 세 가지였다. 총열의 길이, 자동사격, 그리고 개머리판. 총열이 41센티 이하이고, 자동사격이 불가능하며, 개머리판이 붙어있지 않다면 권총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민수용 소총은 개머리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둥그스름한 막대 하나만 붙어있을 뿐이다. 피자가 야채로 분류되는 나라답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기억해둘만한 정보다. 민간인들의 무장수준이 질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연방정부가 붕괴하고 민병대와 대립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광고 또한 총기회사의 것이었다. 다만 컨셉이 달랐다.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총을 역설한다. 「누구나 총 한 자루는 휴대하고 다니는 시대. 당신은 모두와 같은 모습에 만족하십니까?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패션입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패턴으로 당신만의 개성을 표현하세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민의 아름다운 권리, 크리스티&Co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화면을 스쳐가는 라인업이 매력적이긴 했다. 보통의 총기와는 재질과 도색에서 차별화된다. 남녀를 불문하고 만족할 만한 상품들. 심미적인 도색은 위장에도 적합했다. 애초에 그런 목적이어서, 같은 총을 뉴욕 패턴, 텍사스 패턴, 웨스트버지니아 패턴 등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런 판촉이 마냥 새로운 건 아니었다. 재앙 이전, 미국에선 3억 2천만의 인구가 3억 자루의 총기를 보유했다. 더 이상 팔 구석이 없으니, 살상무기를 분홍색으로 칠해서 10세 미만의 소녀들에게까지 팔아먹은 게 미국의 총기회사들이었다. 종말 이후의 세계관에선 그것이 정당화되었을 뿐. 크흑.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 겨울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중위. 정말 슬픈 광고들 아닙니까?” 두 눈이 젖어있는 네이선 채드윅.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지금의 감정과잉은 지금도 피우는 궐련의 영향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연기일까. 광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평범하게 팀장으로 불리긴 해도, 채드윅의 실제 직급(Supervisor)은 대단한 것이다. 비록 소속은 다르지만, 단순비교로는 조안나보다 높다. 밑에서 헤아리기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게 더 빠를 정도의 위계. 군대로 따지면 영관급 인사였다. 그야 그럴 것이다. 유사시 중국군 잔존세력과 자체적으로 협상을 진행하거나, 그 이상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수도 있으니. 중앙정보국은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을 보냈을 것이었다. ‘꾸며낸 모습으로 봐야겠지. 현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수준의 첩보원……. 일정 수준의 「기만」이 깔려있다고 가정할 때, 「통찰」이 잠잠한 것도 이상하진 않아.’ 겨울이 보유한 「간파」는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전문적인 첩보원이라면 상쇄시킬 법도 했다. 사실 보정 없이도 어지간한 사람은 읽는다. 아니, 읽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생전에 그만큼 살피며 자랐다. 그러나 지금은 모호한 느낌 뿐. 저 가면 너머에 무언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겠다. 잠자코 있는 겨울에게 채드윅이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 “공포가 사회를 잠식하고 있어요. 1학년 아이들조차 권총을 차고 수업을 받는다지 뭡니까. 미래의 한겨울 중위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농장 주인들은 벽을 높이 쌓고 전기 철조망을 두르고 있어요. 또 중고차 시장에선 캠핑카와 버스들이 남아나질 않는답디다. 전부다 땅에 파묻어버린다던가요. 가난한 자들의 방공호는 죄다 그런 식이지요. 오, 가엾어라.” 그는 다시 할인매장의 통조림과 항생제에 1인당 구매제한이 생겼다는 이야기, 민간에 비축된 탄약의 추정치가 5천억 발에 달한다는 이야기, 사이비 종교와 인종차별 단체가 늘어난다는 이야기 등에 열을 올렸다. TV 광고는 시장을 장악한 공포경제의 단면이라고. “더욱 슬픈 건, 시민들이 오직 공개된 것들만 두려워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진행 중인 작전이 알려진다면 까무러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고. 허. 사명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의 무지를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다고.” “네…….” 겨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CIA 간부는 돌연 웃기 시작했다. 그는 궐련을 쭉 빨아들인다. 발갛게 타들어가는 담뱃불.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대마일지는 의문스럽다.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장난 좀 쳐봤습니다. 중위 당신이 항상 칼날처럼 날카롭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지요. 뭐라더라, 전투력을 유지해야 한다던가? 맞습니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걸요.” “에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다 부러져요. 사상 최고라는 전쟁영웅이 이렇게까지 소심한 범생이 타입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시구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비어있는 손으로 소파 옆을 더듬는다. 이윽고 꺼내 올리는 한 병의 맥주. 테이블에 두고 툭 미는데, 위태롭게 미끄러져 겨울 앞에 다다른다. 버드와이저는 꺼떡꺼떡 흔들리다가 바르르 떨며 중심을 잡았다. 채드윅이 하는 말. “이봐요, 중위. 군인에게 식사는 명령이고 휴식은 의무 아니오? 한 잔 해요. 다른 사람은 정량이 적다고 난리인데 그마저도 손을 안 대다니. 보는 내가 다 아까워요.” 여기서의 주류 지급은 기준이 정해진 보급이었다. 휴게실 저편, 바텐더 없는 바에 앉아 마시는 이들도 실상 한 사람당 작은 병 하나를 아껴 마시는 중이었고. 아무래도 이야기가 전해진 모양이다. 새로 온 소년장교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다고. 오해를 할 만 했다. 실제로 겨울은 합류 이래 다른 대원들과 휴식을 공유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직접진행이든, 저널에 의한 시간가속이든. 후자는 겨울을 학습한 가상인격의 몫. 이번 세계관의 초입까지만 해도 겨울에게 선택지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학습이 심화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진행은 곧 겨울의 뜻을 닮았다. 이유는 있었다. ‘예전 감독관이 과연 적에게 죽었을까?’ 혹시 모를 가능성. 여기서는 본래의 규정상 용납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농장에서 재배되는 대마초만 해도 그렇다. 번화가엔 사창가가 존재한다. 또한 현재 전력으로 구조 가능한 미국 시민들이 있다. 시민 보호는 수사국과 정보국 양쪽에서 명목상의 최우선 과제다.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어떨까. 지나친 걱정은 아닐 것이다. 겨울은 맥주 뚜껑을 땄다. CIA 간부는 씩 웃으며 자기 몫의 병을 들어올렸다. “건배.” 쨍. 쭉 들이킨다. 술. 회차를 거듭하며 여러 차례 마셨어도, 아직 좋은 맛을 모르는 음료다. 진짜와는 다르기 때문에? 글쎄. 취하는 감각은 재현도가 높다고 들었다. 오히려 높아서 문제다. 소년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느낌이 싫었다. 여기서조차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비록 「중독저항」은 없을지언정, 전투계열의 보정에 의해 강인해진 육체는 보통 사람보다 나은 저항을 보유하니까. “오오.” 병을 단숨에 비우는 겨울을 보고, 채드윅 팀장이 흡족하게 웃는다. 겨울이 물었다. “그 말씀을 하려고 호출하신 건가요?” “음? 아, 아니.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불러놓고 진짜 이유를 잊고 있었구만.” 그는 다시 시작된 영화에 주의를 할애하면서, 겨울에게 얇은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봉쇄사령부에서 보내온 협조요청인데……. 중위님 당신 앞으로 오는 선물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 앓는다고 하더이다. 내용물을 확인할 엄두도 못 내고 창고에 처박아놨었는데, 이젠 더 박아둘 창고가 없는 상황이라던가? 아니, 이미 채운 창고도 비워야 할 상황이랬지, 참.” 명백한 해방 작전이 코앞이다. 본격적인 공세를 준비하는 와중에 한 개인의 물품으로 창고 여러 동이 차있다면 확실히 곤란할 것이었다. 운송역량 부족으로 겨울에게 도달하지 못한 무수한 선물들. 서류는 그것들의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문제는 아니네.’ 겨울은 내용을 읽는다. 육군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의 친필이었다. 「수송역량 부족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시민들이 귀관에게 보낸 호의와 선의를 그동안 방치해 온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왜 이런 일에 사령관급 인사가 신경을 쓰지? 잠시 의아했던 겨울이었으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고 납득할 수 있었다. 결국은 여론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특별기가 편성되었던 크리스마스 하루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선물이 자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시민들이 있네. 하다못해 사정이 있다면 시민들에게 양해라도 구했어야 한다는 거지. 선물 발송을 자제해 달라고. 틀린 말은 아니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뿐. 골치 아픈 건 이걸 정치공세에 이용하는 작자들이 있다는 거야. 자네의 인기는 전대미문이거든. 결국 불이 백악관까지 번졌다네.」 「그러니 한겨울 중위. 귀관만 괜찮다면, 유통기한이 경과한 식품류의 폐기 및 나머지 선물의 매각에 동의한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주었으면 하네.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음성 녹음도 부탁하지. 언론에 공개해도 무방한 내용으로 말이야. 매각절차는 국방부가 대신할 것이고, 가치 평가는 민간 업체에 위탁할 계획이야. 거기서 나온 자금은 자네의 급여 계좌로 입금해주겠네. 그 정도면 자네도, 시민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군.」 # 148 [148화] #Peep show grey (5) 별 게 다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는구나. 겨울은 한심한 기분에 젖었다. “이걸 군수국이나 군 복지지원단(AAFES)에서 인수할 순 없나요? 이유야 어쨌든 봉쇄선까지 추진된 물자인데, 굳이 민간에 판매하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군수국은 보급과 구호를 동시에 담당한다. 봉쇄선을 넘어오는 모든 물자가 어떤 식으로든 군수국을 거쳤다. 겨울에게 온 선물들이 비록 군사규격은 아닐지라도, 가려낸다면 구호물자로는 적합할 것이었다. 부적합한 나머지는 BX에서 소화하면 될 것 같다. 복지지원단의 업무였다.(BX : Base Exchange. 군과 군무원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매점.) 채드윅을 향한 질문이었으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쩔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든요.” 돌아보면 잘 모르는 요원이었다. 그녀는 주위의 양해를 구하고 겨울 가까운 자리를 양보 받는다. 마침 영화가 재개되는 시점이었다. 채드윅은 이미 겨울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실무자가 왔으니 직접 물어보라고, 한 마디 던져놓고 조용해진다. 새로 온 요원이 윙크하며 손을 내밀었다. “오며 가며 몇 번 뵈었었죠?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리는군요. 섀넌, 섀넌 코왈스키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중위 한겨울입니다.” 겨울은 악수의 촉감을 기억했다. 이어 손목에서 손등에 이르는 연속선을 눈에 새긴다. 전투력을 평가하는 습관이었다. 살결은 부드럽지만, 골격엔 단련된 흔적이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흔적일 뿐. 마지막 훈련, 혹은 실전을 꽤 오래 전에 겪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짐작을 쌓아가는 중이다. 언젠가 요긴할 날이 올지도 몰랐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겨울이 묻자, 코왈스키는 짧게 대답한다. “행정비용 때문이죠.” 이에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았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미 육군의 유류보급체계. 모든 연료를 항공유로 통일해놓았다. 보급 절차와 시간을 줄이겠다면서. 덕분에 미군은 험비 같은 전술차량까지도 항공유를 태워서 움직인다. 군의 작전능력 향상을 위해 막대한 연료비 증가를 감수하는 것. 결과적으로는 이편이 이득이었다. 사람 목숨도 절약되고.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었다. 선물이 대체 얼마나 많기에? 코왈스키가 웃는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시네요.” “네, 솔직히. 창고 몇 개 수준으로 나올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이런. 창고 몇 개라니. 사설 보관소 같은 걸 상상하시나본데, 본인을 꽤 과소평가하시는군요. 겸손하신 건지, 아니면 현실감각이 없으신 건지……. 지켜본 바로는 앞쪽이겠지만. 그거 아세요? 중위님이 여기 투입되기로 결정되었을 때, 이곳 요원들이 중위님을 두고 내기를 걸었다는 거. 실제로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그랬나요? 정보국 분들이라면 저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그거야말로 오해예요. 중위님에 관한 정보는 여러모로 민감하거든요. 아무나 열람할 수 없어요. 이번에 같이 오신 깁슨 감독관이라면 모를까. 우리 팀장님은 관심도 없었고요. 물어본다고 알려줄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내기가 성립할 수 있었죠.” 바로 옆에 있는 상관을 쉽게 말하는 코왈스키. 정작 채드윅 본인은 반응이 없다. 흘깃 본 다음 대화를 이어가는 겨울. “그렇군요. 재미 좀 보셨어요?” “전혀요. 잃었죠. 전 자의식이 흘러넘치는 평범한 전쟁영웅을 예상했거든요. 아,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전쟁영웅들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모두가 목숨을 거는 전장에서 특별해진 사람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으니까요.” “알아요. 무슨 뜻인지. 자신이 지워질 뻔한 경험은 남은 평생에 그림자를 드리우니까요.” 이미 한 번 지워진 소년의 말이었다. 코왈스키가 깊게 끄덕인다. “게다가 어지간한 사람은 갑작스러운 명성을 얻으면 성격이 변하게 마련인걸요. 그걸 두고 본성이 드러나는 거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완전히 글러먹은 비난이에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잖아요. 유명해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새로운 관계를 강요받는 거죠.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아는 무수한 사람들. 내가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에요. 무방비하게 던져지는 셈이죠. 이전까지의 자신으로는 행동할 수 없는 낯선 무대에……이런.” 그녀는 스스로 말을 끊었다. “본론에서 벗어나 신나게 떠들어버렸네요.” “아녜요. 어느 정도 공감 가는 말씀이었는걸요. 듣기 좋았어요.” “상냥하기도 하셔라.” 사회적인 규모의 애정과 관심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설령 그 본인에게 괴로움은 없고, 오직 즐거움뿐일지라도. 행복한 와중에 마음이 뒤틀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다. 지금까지의 나와 요구되는 나. 서로 다른 나의 간극에 던져진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코왈스키 요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죠. 답은 160만 개입니다.” “네?” “약 반년 간, 중위님 앞으로 온 선물상자들의 총합을 말하는 거예요. 쌓여있는 물량만 그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창고가 넘쳐서 야적해둔 상태인데, 아마 지금도 늘어나고 있을 걸요? 요즘은 배송이 몇 주씩 지연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터라. 우체국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물류창고 체인을 따라 줄줄이 밀려있을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그 중 일부는 증발하겠지만.” “…….” 겨울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같은 명성을 얻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는 국가 상태가 지금처럼 양호하지 못했다. 그 점을 감안하여 상정한 최대치가 만 단위였다. 설마 그 백배를 넘을 줄이야. “품목 별로 분류하는 것도 일이겠군요.” 코왈스키는 겨울의 말을 긍정했다. “맞아요. 가치평가를 민간업체에 위탁하는 게 비단 객관성 때문만이 아닌 거죠. 분류를 포함해서 판매 직전까지의 전 과정을 맡기는 거예요. 판매를 국방부가 대행한다고 해도 과정을 감독하는 정도일 테고요. 군수국은 지금 과외업무에 할애할 인력이 없거든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다. “무엇보다, 천만 육군의 보급계획을 추진해야 하는 걸요. 맥나마라 본부에선 거의 매일 사망자가 나온다더군요.”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기적 비효율을 감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효율적인 경우가 있다. 특히 거대 규모의 조직에서는. 군수국은 겨울에게 친숙한 기관이기도 했다. 아직 회차를 충분히 쌓지 못했을 무렵, 어중간한 초인이었던 겨울은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수송사단(CTC)을 거쳐 군수국에 잠시 몸담았었다. 후방에서 치르는 전쟁은 과로와의 싸움이었다.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투 병력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지.’ 비록 소속은 군수국이었어도 겨울의 역할은 전투원이었다. 여기저기서 방역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물자를 조달하는 단계에서부터 전투력이 필요했던 탓. 그러나 다른 부대들은 보유 병력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당장 자기들이 죽을 지경이었으므로. 패닉에 빠진 지휘부는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때가 드물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과정을 후방에서 지켜보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심이 서네요.” 겨울이 이렇게 말하자 코왈스키 요원은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들어볼 수 있을까요?” “처음엔 녹음할 때 자원봉사를 부탁해볼까 싶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인기가 좋으니까요. 하지만 곧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저기서 잡음이 나올 거예요. 양심이 무거워서 잠시 내려놓은 분들이 많은 시대니까요.” “잠시……인가요? 재밌게 말씀하시는군요. 사람을 꽤 좋게 보시네요.” 한층 더 눈을 빛내는 정보국 요원. 어느덧 영화에서 눈을 뗀 사람이 늘었다. 아니, 이제 시청자는 채드윅 한 사람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재미있게도 보고 있다. 코왈스키의 말대로라면 겨울에게 올 선물은 봉쇄선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밀려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겨울의 편지와 음성이 공개된 시점에서 배송은 중단될 것이며, 해당 지역에서 평가와 분배가 이루어질 터. 수십 개소, 어쩌면 수백개소에서 진행될 자원봉사가 과연 끝까지 봉사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지금의 미국사회는 잘 마른 건초더미와 같았다. 엉뚱한 불씨가 종말을 앞당길 수도 있다. 나비효과. 가능성은 낮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남은 말을 잇는 겨울. “민간업체가 개입한다면 수수료를 지급해야 할 테니 수익이 발생하긴 해야 할 거예요. 그들을 위한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는 것도 결국은 추가적인 행정비용이잖아요. 명백한 해방 작전에 총력을 기울이는 지금, 다른 부서라고 여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아마도요?” “그럼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제게 주어질 몫뿐인데……. 그걸 전액 기부할까 싶네요. 국방성금이나 난민구호기금으로. 개인적으로는 성금 쪽이 나을 것 같아요.” “와우.”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올리버 탤벗. 겨울의 위장을 도와주었던 전술정보 분석관이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진심이십니까? 상자마다 뭐가 들어있을지는 까봐야 알 일이겠습니다만, 개당 1달러씩만 쳐도 160만 달러입니다. 폐기될 분량을 감안해도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겠죠. 어지간한 메가 밀리언, 파워 볼 당첨에 필적할 금액이란 말입니다. 그걸 포기하겠단 말씀이신지?” 메가 밀리언, 파워 볼의 1등 당첨금액은 대개 천만 달러 이상.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다. 잭팟이 터지면 5억 달러를 넘길 때도 있으니. 그러나 인생역전이라는 의미를 담기엔 좋은 비유였다. 겨울이 대답했다. “제가 그 돈 가져서 뭐하겠어요.” 좌중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탤벗 요원이 믿기지 않는 투로 말한다. “What the…….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으십니까? 그게 아무리 퇴역 뒤의 일이라도 말이죠. 아니, 욕심이 없다면, 하다못해 로비를 할 수도 있잖습니까? 포트 로버츠에 두고 온 동료 분들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던데, 그 분들의 처우를 장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뇨. 그보다는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저명한 전쟁영웅이 막대한 금액을 기부하다. 이 소식은 겨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줄 것이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가치였다. 그러므로 일부를 남기는 것도 현명치 못하다. 전액기부와 일정 금액 기부는 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니까. 겨울은 또한 기대했다. ‘난민에 대한 여론을 호전시킨다면 다가오는 대선에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겠지.’ 구호기금보다 국방성금이 낫겠다고 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 구호기금은 밥그릇 챙기기로 보일 여지가 있다. 적어도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일 것이다. 만약 세계관이 최악의 미래로 치닫는다면, 몰상식이 상식이 된 세간에서 반드시 미친 소리가 나올 것이다. 한겨울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미국 시민이었던 적이 없다고. “Yes!” 상념이 깨졌다. 두 손 번쩍 들고 좋아하는 것은 코왈스키 요원이었다. 그녀는 기쁨을 담아 다시 외쳤다. “이번엔 내가 이겼다!” 반면 떫은 표정을 짓거나, 더러 한숨을 쉬기도 하는 나머지 사람들. 탤벗 요원도 개중 하나다. 얼굴을 감싸며 상체를 숙인다. “Damn…….” 상황을 알아차린 겨울은, 주위를 의식하여 어설픈 미소를 지어낸다. 그리고 기뻐하는 코왈스키에게 물었다. “잃은 걸 만회할 정도는 되나 봐요?” “만회하고도 남습니다. 이번엔 배당이 훨씬 더 높았거든요.” “…….” 생글생글 웃는 그녀.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혹은 그렇게 보였던 채드윅 팀장도 겨울에게 말한다. “고맙소이다, 중위.” 겨울은 위화감을 느꼈다. # 149 [149화] #Peep show grey (6) 결정을 통보받은 국방부 공보처는 모범답안을 보내왔다. 위성 단말과 연결된 프린터가 꾸역꾸역 종이를 밀어냈다. 흐음. 겨울을 별도의 통신실로 안내한 코왈스키는, 전문을 살펴보더니 피식피식 웃었다. 설마 한 시간도 안 되어 답신이 올 줄은 몰랐다고. “기일도 정하지 않은 주제에 급하긴 급했나보네요. 아니면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거나.” 그녀는 테이블 가득한 비문(秘文)을 치워 공간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자리에 앉아, 전문을 받아 살피며, 겨울이 답했다. “기대하고 있었겠죠. 강요로 비춰질까봐 차마 대놓고 제안할 순 없어도, 그분들 입장에선 바라마지 않았던 선택일 테니까요. 최선이자 최고의 가능성인걸요. 게다가 이 정도의 명문이 잠깐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요.” 일전에 들었던 대통령의 연설만큼이나 훌륭한 문장들이었다. 미리 만들어놨다가 보낸 거라고 봐야 했다. 쓰이지 않게 되었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위성통신 저편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담당자들이 눈에 선하다. 겨울은 드물게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맥과이어 대위나 블리스 소령도 있으려나? 공보처에 근무하는 사람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마주 짓는 미소에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더하는 코왈스키 요원. “바라고 있었다기 보다는, 그쪽도 우리처럼 내기를 한 게 아닐까요?” “설마요.” “모르는 일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요. 중위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아마 이런 식이었겠죠. 나는 한겨울 중위를 믿어. 능력만큼이나 인성도 좋을 거라고. 뭐, 예상 거래액이 터무니없긴 하지만, 그 사람은 한낱 돈에 흔들리지 않을 거야. 왜냐니? 그는 한겨울 중위잖아! 라는 느낌?” “공보처에서 들으면 화내겠어요.” “어때요? 요즘은 누구든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해요. 시종일관 엄격 진지한 사람이 이 잿빛 세월을 어떻게 견디겠어요? 저만 해도 그래요. 마지막으로 집에 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걸요. 오, 우리 스모키는 엄마 얼굴도 잊었을 거예요.” 아이 이름 치고는 특이하다. 젊은 요원이 유부녀처럼 보이지도 않았기에, 갸우뚱 하는 겨울. “스모키? 혹시 애완동물인가요?” “네. 순종 페르시안이에요. 페르시안 친칠라. 애완동물이라기엔 상전을 모시고 사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죠. 고양이인걸요. 이웃에 맡겨두고 왔는데 걱정이네요. 사례비를 충분히 드리지 못했거든요. 무슨 작전인지도 모르고 끌려오는 바람에.” 설마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중얼거리는 요원.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CIA의 활동무대인 다른 국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가운데, 장기 잠복이 필요한 임무를 부여받을 줄은. 코왈스키는 정말로 그리운 표정을 짓는다. 뜯어봐도 연기 같지는 않았다. 겨울이 묻는다. “몇 살이죠?” “올해로 아홉 살이요.” “고양이 기준으로는 나이가 많이 들었네요.” “그렇죠. 오래 살아야 할 텐데. 이제는 유일한 가족이거든요.” 멈칫. 대화가 끊어졌다.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겨울. 요원은 짧은 침묵을 쾌활하게 끝냈다. “괜한 말을 해버렸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벌써 1년 넘게 지난 일인걸요.”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은, 안색을 살핀 뒤에, 일부러 더 물어보았다. “유감입니다. 다른 가족 분들이 서부에 거주하셨나요?” “그건 아니고, 부모님께서 여행 중이셨어요. 결혼 30주년이었거든요. 프랑스행 티켓은 제가 사드렸죠. 호텔과 레스토랑도 예약하고.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신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네요.” “프랑스라면 대피할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특별기가 편성되지 않았었나요?” 자국 시민들의 비상연락망과 유사시 대피계획을 구축해두는 것은 대사관의 기본 업무에 해당했다. 미국은 이런 면에서 탁월하다. 워낙 잦은 전쟁과 테러를 겪는 국가이기에. “왜 아니었겠어요.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는 혼돈의 도가니였으니까요. 임시 대피소로 지정되었던 백화점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범인은 종말론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더군요. 극단적인 광신과 대표적인 무신론의 조합이라니, 우습지 않나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상상은 가네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으로 보내신 역병의 기수를 보아라. 이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타락해버린 인류에 대한 징벌일진저. 내가 오늘 자본주의의 만화경을 폭파한 것은 세상에 고하는 질타의 외침이니. 인류여, 구원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회개할지어다…….” 지력보정이 해당 사건에 대한 정보를 출력했다. 갤러리 라파예트 폭탄 테러 사건. 대피소가 왜 하필 백화점이었나? 생각하는 즉시 정보가 보강된다. 사진과 함께 어른거리는 텍스트. 통상적으로 대피작전의 집결지점은 경기장이나 호텔 등으로 정해지지만, 당시 파리의 모든 경기장과 호텔은 이재민으로 가득 차있었다고. “말씀드렸죠?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정보국 요원. 그러나 내쉬지 않는 한숨이 느껴진다. 기술적으로 숨겨진 진짜 감정. 하지만 태연함의 겹이 얇았다. 조금 더 두꺼울 여지가 있건만. 겨울은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제가 여기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요?” 사방이 암호문이었다. 이 방에 있는 문서들만 유출되어도 미국의 모든 암호체계가 위험해질 것이었다. 미국의 잠재적인 적이었던 국가들이 하나같이 존망의 기로에 놓여있으나, 그래서 더욱 위험한 시기였다. 특히 러시아. 오르카 블랙의 부가적인 임무 중 하나는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방첩활동이기도 했다. ‘버려진 군사시설들이 많으니까.’ 암호체계를 갱신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상관없어요. 작전에 참여하는 인원들에게까지 지켜야 할 비밀은 없거든요. 명예훈장 수훈자를 의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저는 비밀취급인가가 없는걸요.” “후후, 현장의 융통성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러네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드문 일이긴 해요. 대개 혼자 일하는데.” 그래서인지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코왈스키는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어떠세요? 제 방에 들어오신 소감은.” “꽤 삭막하게 지내시네요.” “어허,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거리가 좁혀졌다. 맞은편에서 상체를 숙여 다가오는 요원. 좌우로 밀린 서류 사이인지라 위태로운 풍경이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성숙한 체향이 밀려왔다. 겨울은 체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맥박이 빨라진다. 숨 쉬는 간격은 맥박을 따라 줄어든다. 정신은 오히려 차갑게 식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괴리는 샌 미구엘이 마지막이었는데.’ 상황연산에 의해 강제되는 감각. 본인의 진짜 상태와 무관하게,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게 만들고,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에서는 심장이 뛰게 만드는 효과. 정신은 감각에 의지한다. 비록 진짜 육체는 팔린 지 오래지만, 사후보험의 감각재현이 한없이 실제에 수렴하는 한, 거대한 상실 또한 감각의 장벽 너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여, 미숙할 땐 정신이 감각에 휩쓸릴 때가 잦았다. 흔들다리 효과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다. 기술수준이 향상될수록, 육체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되므로. 따라서 지금 같은 괴리감은 정상이 아니었다. “당혹스럽네요, 코왈스키 요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인데. 이유가 뭐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겨울. 그 시선이 요원의 접근을 지연시킨다. 그녀는 장난스러우면서도 고혹적인 태도로 되물었다. “이유? 글쎄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 “모르잖아요. 지금 이 순간 봉쇄선 동쪽 어디에선가 감염폭발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그로인해 내일 아침, 동부로 이어지는 모든 통신망이 두절되고, 저는 조용해진 콘솔 앞에서 눈물만 흘리게 될지도. 내일 이 시간,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따뜻한 손이 다가와 뺨에 닿는다.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세계에서,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한 쌍의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 거예요. 다른 이유는 필요 없잖아요? 우리는 여기서 즐거운 일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더욱 가까워진 얼굴에 옅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남은 거리, 이제 약 한 뼘 가량. 뺨에서 미끄러진 손이 목을 타고 미끄러진다. “중위님도 지금 얼굴이 붉은걸요. 두근거리지 않아요?” “네. 저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중입니다.” “이상할 게 뭐가 있겠어요?” 겨울은 조금 더 내려가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눈으로는 여전히 요원을 직시하면서, 고저 없는 차분함으로 말한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해요. 매력적이세요.” “정말로?” “네. 그러니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제 생각엔 아마 맥주였을 것 같은데, 맞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표정 관리 실패하셨어요.” 거짓말이다. 요원의 포커페이스는 단단했다. 감정의 꺼풀을 도구로 쓰는 능력자인 것을.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흔들렸다. 코왈스키는 손을 거둔다. 그리고 겨울을 바라보았다. 좀 전과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무언가 신기한 것을 관찰하듯이.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군요. 우겨도 소용없겠네요.” 포옥 한숨 쉬며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는 그녀. 의자를 끌어다 다리를 꼬고 앉는다. “어떻게 아셨어요? 반쯤 진심인 연기여서, 이건 반드시 먹힌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위화감이 느껴진 터라. 상황도 그렇고, 저 자신도 그렇고.” 상황연산의 감각적인 강제는, 결국 또 다른 변인의 작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약물. 가능한 복용 경로는 한 병의 버드와이저뿐이었다. 감각보정의 경고가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일단 약물이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종류는 아니었을 것이다. 독성이 없으면 「생존감각」은 둔해진다. 겨울을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니 「위기감지」 역시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채드윅 팀장 개인의 능력이겠지.’ 수준 높은 「기만」은 스스로를 「통찰」에서 감출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의도마저 은폐한다. 질병 같은 냉정이 아니었다면 눈치 채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정신은 아직 돌의 무게에 짓눌려있다.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서 수치심조차 박탈당했던 날의 기억은, 뇌리의 가장 어둡고 차가운 곳에 칼날처럼 박혀있다. 대화의 흐름도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겨울의 느낌일 뿐이었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인 법이었다. “흐음.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아쉽네요. 보통 남자들은 그 분위기에선 이상한 게 있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나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겨울은 한 번 웃고, 질문했다. “다시 물어볼게요. 이유가 뭐죠?”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는데. 담배 한 대 피워도 되나요?” 대답은 라이터를 꺼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상냥하기도 하셔라. 담배 한 대 물고 불을 받는 코왈스키. 사방이 조용하여, 담배 타들어가는 메마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건 레인저의 선물이군요.” “산타 마가리타에서 받았죠. 75연대 2대대 델타 중대, 3소대장 존 E. 프레이 중위.” “존 E. 프레이? 아, 델타 중대. 에머트 대위의 망나니들. 아직도 험프백을 쫓아다닌다고 하던데. 봉쇄사령부의 복귀 명령을 계속해서 무시하기로 유명하죠. 사실 사령부에서도 기대를 걸고 있어서 강압적으로 굴지 않는 거지만요.” “다른 소식은 없나요?” 논점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궁금한 정보였다. 코왈스키 요원이 자리를 피할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그녀가 이유를 숨긴다면 추궁할 입장도 못되었다. 어쨌든 현장 지휘권은 CIA에게 있으니까. 채드윅이 지휘책임자로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음, 이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긴 한데, 생사는 불분명한 상황이에요. 마지막 연락은 열흘 전 피나클 국립공원 남쪽에서 왔다고 해요.” 역설적이지만, 명령불복종은 훌륭한 군인의 조건이었다. # 150 [150화] #Peep show grey (7) 역설적이지만, 명령불복종은 훌륭한 군인의 조건이었다. 이는 반인륜적 명령에 저항할 권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수한 군대일수록 현장의 유연성을 존중한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치명적인 오판을 내렸을 때, 일개 사단장의 항명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을 거쳐 전장의 불확실성에 적응했다. 한편 이라크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의 공화국 수비대는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했다. 눈앞에 미군이 지나가도 침묵한 부대들이 있었다. 교전허가가 없었기 때문에. 명령은 언제나 늦었다. 미군은 유연한 조직이다. 임무를 어떻게 달성하는가. 판단은 대개 현장에서 내린다. ‘처음엔 많이 부담스러웠지.’ 모든 결정에 책임을 져야 했던 기억. 비록 지금은 중위지만, 누적된 종말의 갈피에서 겨울의 최고 계급은 중령이었다. 날치기로 이루어진 현장진급이긴 했다. 그만큼 위태로운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의무를 다하는 자들은 진짜배기였다. 미군의 정수. 겨울은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있었다. 많이 배웠다. 체계화된 지식과는 다르다. 암묵지(暗默知). 사람에게서 사람으로만 전해지는 경험을. 레인저 중대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겨울. 피나클 국립공원은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져있었다. 통상적인 행군으로 이틀이면 사라질 간격. 지형 굴곡을 감안해도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오염지역을 소부대로 횡단하는 추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 인근이 위험하기도 했다. 에머트 대위는 사냥감을 북으로 몰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에 코왈스키 요원은 서류더미를 파헤쳤다. 흩어지는 종잇장 사이에서 노트북을 꺼낸다. 전원은 이미 들어와 있다. 타닥, 타다다닥. 경쾌하게 두드리는 타자. 잠시 후, 겨울에게 화면이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에머트 대위가 떠있었다. 관목 사이에 엎드린 자세. 정치된 영상이었다. 달칵. 담배를 끼운 손가락이 엔터키를 눌렀다. 화면 속에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위는 상급자와 대화중이었다. 「후퇴? Sir, 보급이나 띄워주십시오. 당신께서도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방역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야. 위쪽은 날이 갈수록 회의적일세. 그저 밥차에 불과할 거라는 의견도 있어. 적어도 생화학무기 운반체는 아닐 거란 추측이 지배적이야. 최초 등장으로부터 많은 시일이 경과하지 않았나. 그동안 험프백은 어느 전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네.」 「그래도 여전히 미지의 적입니다. 명백한 해방을 앞두고 불안요소를 남겨둘 작정이십니까?」 「위성감시와 항공정찰로 충분해. 특히 위성은 지금 넘쳐흐를 만큼 많지. 거의 실시간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단 말이야. 정체는 모를지언정 만약을 대비할 순 있을 거야.」 「그래봐야 사냥감이 숲과 산악으로 달아나면 끝입니다. 지상에서 함께 쫓아야 합니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갑니까? 어차피 당장 저희가 필요한 다른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뒈지다 만 잡것들에겐 보급거점도, 사령부도, 대통령궁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버리고 온 활주로와 탄약고가 있지.」 「Sir, 죄송합니다만 시간을 아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해주십시오. 이번 임무가 정말로 필요 없다고 여기신다면 저희는 여기서 철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저희가 감수해야할 위험 같은 건 고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괜찮은가? 부대가 반쪽이 되지 않았나.」 「탄약을 보내주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좌표와 시간을 통보해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장시간 반복해주셔야 합니다. 근처에서 전파방해가 수시로 터집니다.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추적을 피해야 하니까요. 주변이 조용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에머트 아웃.」 기록은 짧게 끝났다. 텁. 코왈스키 요원은 노트북을 덮었다. 열흘 전에 부대가 절반이었으면, 지금은 산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더라도 상태가 온전치는 못할 터. 한 번 받은 보급으로 10일을 견디기는 어렵다. 겨울은 그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보았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교전을 회피하고, 어떻게든 식량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보급을 일부러 피할 가능성도 있었다.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지직.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가는 소리. 코왈스키가 밭은기침을 했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었는데.” 겨울의 말에, 요원은 눈가를 닦아내며 대꾸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오히려 긴장되네요. 아무튼 고마워요. 여유를 주셔서.” 꼭 그럴 작정은 아니었건만. 굳이 해소할 필요는 없는 오해였다. 코왈스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렸다. 느린 손놀림.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일단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어요.” “구체적으로는?” “일종의 적응과정이었다고 해두죠.” 적응과정?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요원은 혀로 입술을 적셨다. 입이 마르는 모양이다. “구 중국군 간부들과 접촉할 때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아요. 대개는 성접대가 포함되죠. 모르겠어요. 재앙 이전에도 더럽게 놀았을지. 뭐, 그랬겠죠? 아무튼 지금은 의도가 명백해요. 오르카 블랙을 흡수하고 싶은 겁니다. 개인 단위에서부터 말예요. 여자는 그 수단이고요.” “외부인을 끌어들이면 불안하지 않을까요?” “천만에요. 내부에서 파벌싸움이 얼마나 격한데요. 낮에는 웃고 밤에는 죽이는 사이에요. 측근도 믿을 수 없어서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거죠. 정확히는 오르카 블랙의 허상에 홀린 거지만. 우리는 그동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용병활동에 충실했어요. 대가를 받으면 의뢰가 끝날 때까진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죠. 한 개 타격대가 파벌다툼에서 옥쇄한 적도 있는걸요.”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고 중얼거리는 코왈스키. 그간의 활동내역은 겨울도 숙지할 자료로서 전달받았다. 의뢰인과 운명을 함께한 8인은 제24특수전술대대 출신으로, 부대의 격이 데브그루와 동급이었다. 지금 오르카 블랙의 위상은 중세의 스위스 용병에 필적한다. 출중한 전투력과 높은 신뢰도. “한 번 계약하면 적이 더 높은 대가를 약속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이게 의심을 살만한 일은 아니죠. 결과적으로는 몸값을 더 높이는 방법이니까.” 활동내역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 대원들의 죽음을 강요한 중국군 장성이, 바로 다음날 접촉해왔다고. 그는 훨씬 더 많은 수를 고용하고 싶어 했다. 겨울은 읽었던 내용을 되새겼다. ‘그나마 같은 편끼리 죽도록 싸울 일은 드물어서 다행이야.’ 없지는 않았다. 신뢰를 쌓으려면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덕분에 여러 세력으로의 침투가 용이해졌다. 요원의 해명이 이어진다. “아무튼 그래요. 최근 더 잦아졌어요. 불러내서 술 먹이고 여자를 붙여주는 일이. 대원 분들 하시는 말씀이 관계를 강요할 때 거부하기도 힘들다더군요. 선물을 안 받으면 주는 사람의 체면이 상한다던가요?” “적응과정이라고 하신 의미를 알겠네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떤 남자들은 여자 문제에 있어선 쉽게 바보가 되거든요. 때로는 아주 단순하고요. 몸만 섞어도 사랑을 느낀다니.” 즉 겨울이 흔들릴까봐 걱정이었다는 뜻이다. 넘어가진 않더라도, 예컨대, 말 한 마디 잘못 흘린다던가. 혹은 연민에 휩쓸려 지켜주려고 한다던가. “가뜩이나 중위님은 나이도 어리……흠, 아주 젊으시잖아요. 면역이 없으실 텐데. 속으론 외로우실 지도 모를 일이고. 다른 대원들처럼 번화가에서 놀기라도 하셨으면 차라리 안심했을 거예요.” 눈치를 보아 그 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겨울의 행적에 대한 분석은 당연히 있었을 터. 겨울동맹의 형성과정은, 객관적으로 작성된 보고서에서 어떻게 비춰질까. 이번 세계관에 남겨온 족적을 되짚어보며, 겨울이 묻는다. “저야 그렇다 치고, 코왈스키 요원은요?” “네?” “겨우 그 정도 이유로 괜찮았느냐는 말이에요.” “아.” 요원은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반은 진심이었다고. Seize the day. 언제 망할지 모를 세상에서 지금을 즐기지 않는 건 손해 아니겠어요? 게다가 중위님은 지금 전미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인걸요. 사양할 이유가 없잖아요.” “설마요.” “어, 안 믿으시네.” “키라던가, 체구라던가. 여러 가지로 있잖아요.” 코왈스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이나마 긴장감을 탁 놓아버리는 맑은 웃음이었다. “세상에. 중위님은 우상이란 말예요. 원초적인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이 시대에 한 중위님 이상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줄 남자는 없을 거예요. 아마도.” 요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비록 얼굴은 지금 엉망이지만, 하고. 겨울은 특수화장을 더듬는다. 경험한 바, 일주일 쯤 지난다고 티 날 정도로 지워지진 않았다. 주기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나, 설령 보수를 못 받더라도 최대 한 달까지 괜찮을 것 같았다. “슬슬 다른 이유도 들어볼까요?” 겨울의 말에 한숨 푹 쉬는 정보국 요원. “뭘 짐작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말씀 못 드려요.” 뭔가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 정도만 해도 기대 이상의 솔직함이었다. “받으세요.” 코왈스키가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갸우뚱 하고 받는 겨울. 열어보니 반지다. 어중간한 싸구려가 아니라, 세공도 보석도 상등품이었다. “이게 뭐죠?” “결혼반지요.” “음, 위장이군요.” “아까부터 판단력 참 좋으시네요. 네, 맞습니다. 항상 끼고 다니세요. 평소에 소문도 좀 내주시고. 사별한 아내를 잊을 수 없다는데 뭐 어쩌겠어요. 거절당하는 입장에서도 체면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인간적으로 믿음을 얻기도 쉽겠고.” “아내 이름은 정해진 게 있나요?” “아뇨, 아직. 이걸 정말로 드리게 될 줄은 몰랐던지라. 하루만 기다리세요. 이름, 나이, 출신, 가족관계는 기본이고, 결혼기념일이나 부부싸움의 추억까지 뽑아드릴 테니.” 위장신분의 나이가 이십대 초반이니, 결혼이력이 수상하진 않을 것이다. 겨울은 반지를 끼워보았다. 왼손 약지에 정확하게 맞는다. 정보국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반지 안에 뭐가 들었죠?” “아무것도.” “밟아 봐도 되겠어요?” “그러세요. 저지른 일이 있으니 믿어달라고는 못하겠군요.” 반지가 망가지면 곤란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요원. 겨울은 반지를 빼지 않았다. 다만 빛에 비춰보았다. 실내등 불빛 아래 백금빛으로 반짝인다. 가만히 바라보던 코왈스키가 조용히 말했다. “의외네요.” “뭐가요?” “중위님이 무척 차분하셔서요.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예요. 공포영화에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대목을 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정보국 요원답지 않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겨울의 호감을 사려는 노력일수도. ‘거짓의 사전준비로 진실보다 나은 건 없으니까.’ 갈대밭에서 억새풀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화를 낸다면, 어디까지 원망해야 좋을까요?” 겨울의 질문. 대답을 바라고 던진 건 아니었다. 톡, 톡, 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코왈스키는 잠자코 다음을 기다린다. 여기서의 하는 말이 향후 취급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 꺼내면 충분할 것이다. 겨울이 말을 잇는다. “코왈스키 요원에게만 화를 낸다면 꼴이 우습겠죠. 그럼 채드윅 팀장님에게 따져야 할까요? 계획을 수립하거나, 최소한 승인해주었을 테니까요.” “그러는 편이 정상으로 느껴지는데요.” “글쎄요. 그건 현실타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까지가 적정선이다, 하고. 전 잘 모르겠네요. 이번 일이 팀장님의 구상이라고 치죠. 이게 CIA 내에서 유별난 일인가요?” “아뇨. 빈말로라도 그렇다고는 못 하겠군요.” 겨울은 정보국이 요원들을 어떻게 길러내는지 안다. 지나간 세계에서 들었던 이야기. 특수요원들은 훈련 단계에서 인간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경험을 한다. 생도가 훈련 상황임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납치 후 고문하면서, 내부정보를 토해내라고 강요한다. 발설하면 방출. 침묵하면 합격. 모든 요원이 거치는 과정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납된다는 게 중요하다. “그렇겠죠. 예상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그 사람만의 책임인 경우는 드물다. 증오를 대하는 겨울의 태도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채드윅 팀장은 CIA 요원으로서 행동했을 뿐이에요. 그럼 저는 정보국을 원망해야겠군요. 하지만 정보국이 이유 없이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음, 아주 특이하시군요. 공감하긴 어렵네요.” 요원은 미심쩍어했다. 겨울도 스스로를 정상으로 여기진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한계죠. 저는 화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분노는 자기 자신을 부술 뿐이다. 돌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원치 않는 사후의 존속이 끝날 때, 마음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란다. 어려운 일이었다. 가면을 쓴 상담사에게 고백했듯이. 코왈스키가 몸을 이완시키며 하는 말.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도하게 되는군요. 하신 말씀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진 않을 것 같다. 그런 맥락이었다. 그녀가 재차 말했다. “구차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첩보원들은 대역병 이전부터 종말의 가능성을 엿보며 살아왔습니다. 내일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이상하게 변하죠. 미쳐 돌아가는 지금 이 세상의 모습처럼.” 한 호흡 쉬고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정보국에 갓 들어왔을 때 선임이 그러더군요. 한 용감한 소련 장교가 아니었다면, 이 세계는 1983년 9월 26일에 이미 멸망했을 것이라고.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깨지기 쉽고 위태로운 곳이며, 때로는 한 사람이 종말을 막아낼 수도 있는 거라고. 너도 내일을 지키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거라고…….” “각오가 멋지네요. 좋은 분이셨나요?” “설마요. 중앙정보국에서 좋은 요원은 죽은 요원뿐이랍니다, 중위.” 자조적이면서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농담이었다.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겨울은 빈 종이에 모범답안을 적어 내려갔다. 돌아온 목소리로 녹음도 했다. 이를 전송하는 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모두 마친 뒤에 통신실을 나서려는 겨울의 등 뒤로,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돌아보자, 요원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럴 일 없으리라고 대답하면 상처가 되겠지. 겨울은 적당한 미소로 말을 대신했다. # 151 [151화] #읽지 않은 메시지 (7) 「병림픽금메달 :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 「まつみん : 또오오오오오오오옹!」 <> : まつみん님의 감정상태가 지나치게 불안정하여 「텔레타이프」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まつみん : 糞! 똥! 똥! 糞! 또옹! 똥! 똥! 똥똥똥똥! 똥옹ㄹㄹㄹㅎㄸ깻떫앓ㅋㅅくそくそくそくそくそくそ#ErrorCode_0xc00000fe9_High_pitched_emotional_excess#Region_Japan#(管制 AI) 感情過剰が原因でTeletypeにエラーが発生しました. ユーザーを保護するために接続を終了します. 問題が解決されない場合はシステム管理者に連絡してください.」 「에엑따 : 마츠밍 또 고장났어 ㅋㅋㅋㅋㅋ 이번엔 전보다 심하네 ㅋㅋㅋㅋㅋ」 「아침참이슬 : 저 일본어 뭐라고 떠드는 거임? 오류 안내문구 같은데.」 「슬로우 웨건 : 내가……설명하지…….」 「여민ROCK : 아오 씨발! 진행자 개새끼! 고자새끼! 어떻게 차려진 밥상을 엎냐!」 「새봄 : CIA 요원! 강하고 유능한 누님! 새까만 정장! 검은 스타킹! 나의 취향! 으아아아아!」 「스타킹 : 새봄이가 뭘 좀 아는구나. 살을 가리면서 윤곽은 드러내는 스타킹에는 모순적인 매력이 내포되어 있다. 은폐와 노출의 아름다운 공존……. 이는 에로스의 물화된 메타포라 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진행자 한겨울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는 바이다. 잔혹한 소년은 잿빛 세상에서 피어나던 한 떨기 예술의 꽃을 짓밟은 것이다. 아,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프로백수 : 인문계 쿰척거리는 소리 잘 들었구요, 이공계 병신 등판해주세요.」 「원자력 : 이공계엔 병신이 없다. 이 세상 모든 병신력의 원천은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맛줌법 : ㅇㅇ ㅂㅂㅂㄱ ㅃㅂㅋㅌ 인문학은 쓸 데도 없는 쓰레기인 부분이구연~ 경제에 도움 될 각 전혀 없는 항문이구연~ 들어가도 학과 통폐합될 각이구연~ 나와 봐야 취직도 못하는 찐따 새끼 되는 각이구연~ 노오력은 안 하고 나라 탓 재능 탓 수저 탓 핑계만 개씹에바터지는 각이구연~ ㅋㅋㅋㅋ 일겅 노인정하고 ㅂㄷ거리는 행님누님덜 방콕인생 부랄벅벅 젖통벅벅 애미애비 등골 드록바인 부분 인정각? ㅇ ㅇㅈ ㄲㅆㅇㅈ~ 팩트폭격 펑퍼퍼펑 앙 기무띠~」 「세종대왕 : 여봐라, 지금 이 가엾고 딱한 상놈이 뭐라고 말하는 것이냐? 말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나랏말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김정은 개새끼 : 이게 다 김정은 때문이다. 팍팍팍! 북괴의 가슴팍에 총칼을 꽂자!」 「반닼홈 : 세종머앟 등판 ㅋㅋㅋㅋ 닉값 오지고요 ㅋㅋㅋㅋ 오지면 오지명?」 「캐쉬미어 : 오지명 하지 말라고 반닼새퀴야」 「슬로우 웨건 : 텔레타이프는……보안성이 강화된 사고-문자화 모듈로서…….」 「도도한공쮸♡ : 아……분위기 좋았는데……코왈스키한테 들어가 있었는데……. 아쉽네…….」 「앱순이 : 휴. 한숨이 나온다. 우리 겨울이가 참 매력적인데, 너무 매력적이어도 문제구낭.」 「둠칫두둠칫 : 속이 터진다! 진행자 시부랄 것! 무슨 진행을 이따위로 하냐? 희망고문도 아니고. 만약 이게 각본 있는 드라마였으면 작가새끼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퉁구스카 : ㅠㅠ」 [퉁구스카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둠칫두둠칫 : 이 와중에 별 주는 새끼 제정신이냐? 환불받아도 모자랄 판에.」 「BigBuffetBoy86 : 어,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거야? 반전 없어?」 <> : BigBuffetBoy86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Ready to take a chance again.』 『BigBuffetBoy86님의 말 : 어이, 나가지 마! 돌아서! 돌아서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해! 네 본능에 솔직해지라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온 세상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야!』 『AI 도움말 : 이 퀘스트의 목표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이 섀넌 코왈스키(Shannon Kowalski)와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세계관 내 시간을 기준으로 5분의 제한이 존재합니다. 목표 달성 시점에서 1,227개의 별이 세계관 진행자에게 지급됩니다.』 <> : 한겨울(진행자)님이 BigBuffetBoy86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BigBuffetBoy86 : 시무룩…….」 「진한개 : 한겨울 얘 여전히 단호박이네 ㅋㅋㅋ 어떤 의미론 한결같아서 좋다.」 「윌마 : 이거 보기 시작한 이래 다른 채널이 왠지 재미가 없어져서……불만이 있어도 보기는 본다만……. 이쯤 되면 진행자가 우리한테 갑질하는 거 아니냐? 시청자에 대한 배려라는 걸 모르네. 누구 덕에 돈 버는지 모르거나, 지 잘난 맛에 제 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듯.」 「엑윽보수 : 이게 사후보험에서 구독하는 유일한 채널인데……애국심이……메말라간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나중에 들어온 놈들이야 그렇다 치고, 처음부터 보던 놈들이 난리치는 건 뭐냐. 진행자한테 트라우마 있는 거 알면서 그래?」 「슬로우 웨건 : 접속자의 사고를……텍스트로 구체화하여 출력……혹은 전송하며……매체가 텍스트인 것은……암호화 전송 과정에서……충분한 속도를…….」 「AngryNeeson55 : 트라우마? 흐음, 무슨 일이 있었나?」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진행자 생전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함.」 「AngryNeeson55 : 오, 그거 유감이군. 어린 나이에 죽은 것도 안타까운데 말이야.」 「AngryNeeson55 :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 버렸을 텐데.」 「윌마 : 어,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참. 잊고 있었다. 근데 시간 많이 지났잖아.」 「윌마 : 그깟거 한두 달 지나면 잊고 그러는 거 아님?ㅋ」 「둠칫두둠칫 :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그럼. 보통 자살하는 새끼들이 그렇지.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어떻게든 살아볼 각오를 다져야지. 혹시 진행자 이 새끼도 자살한 거 아니야?」 「눈밭여우 : 사정도 모르시면서 말씀 참 함부로 하시네요.」 「둠칫두둠칫 : 여우년 너 전부터 존나 거슬린다. 착한 척 가식 쩔어 주시네, 아주.」 「눈밭여우 : …….」 「눈밭여우 :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진 건,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눈밭여우 : 진행자 분이 이 대화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눈밭여우님이 별 3,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슬로우 웨건 : 확보하기……위함이다……. 데이터량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에……송수신 과정에서……방화벽에 걸리는 부담이 적다…….」 「스윗모카 : 근데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 같지 않아? 난 자살하는 사람들 한심하게 느껴지던데. 요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 다 이겨내면서 사는 거지. 세상은 슬픈 일로 가득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이겨내는 일들로도 가득하다. 헬렌 켈러. 좋아하는 명언이얌.^_^」 「깜장고양이 : 오, 멋진 말인 고양.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고양.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는 고양.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고양.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고양.」 「Cthulu : 어허. 자살은 죽는 것보다 사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죽을 용기로 살아보라는 건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Cthulu :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직 겪어본 적 없는 끔찍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예를 들면 보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은 무언가를 목격했다거나…….」 「Tsathoggua : 갸아악 구와아악!」 「둠칫두둠칫 : 오늘 따라 나한테 지랄하는 놈들이 많네.」 「폭풍224 : 하……. 진행자 얘 진짜 나간다. 지 방으로 돌아가는 듯. 이쯤 되면 신기하다. 내 동기화가 정상이라면 지금 아주 달아오른 상태인데, 어떻게 참는 거지? 트라우마든 뭐든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자기 상태 눈치 채는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네.」 「조선왕조씰룩 : 응. 아까 보면서 소름 돋았어. 완전 괜찮아. 그래서 더 맛보고 싶어.」 「무구정광대단하니 : ㅇㅇ 섹스라는 게 정서적인 만족감도 중요한 거니까. 당장 못 하는 게 불만스럽지만, 반대급부로 언젠가 하게 될 때 아주 기분 좋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 참을수록 맛있어지는 음식이라고 생각할래. 남자들은 단순해서 이런 거 잘 모르겠지만.」 「슬로우 웨건 : 비록 표면적으로는……텍스트 표현에 불과하지만……텔레타이프 모듈의 판독은……사실 TOM 판독을 병행하며……감정과 무의식의 영역까지도 판독대상으로서…….」 「groseillier noir : 혹시나 싶어서 확인해봤더니 이 채널 중계방 열일곱 개 폭파됐더라. 성급한 한국인들. 아까도 누가 말했지만, 훌륭한 음식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법이거늘. :)」 「똥댕댕이 : 햐. 열일곱 개면 대체 몇 명이냐?」 「이불박근위험혜 : 아깝다. 제대로 뜰 기회를 걷어찼구나.」 「이불박근위험혜 : 바닐라만 가지고 사후보험 포털 메인에 올라간 사례는 근 몇 년간 얘가 유일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잘하면 A등급은 물론이고 S등급으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다 싶어서 기대하고 있었건만…….」 「똥댕댕이 : 다른 별창들은 아무래도 빚 돌려막기라는 느낌이니까 말이지 ㅇㅇ」 「Владимир : 흐음. 빚을 돌려막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 「똥댕댕이 : 인기를 끌려면 차별화될 요소가 필요하잖아. 하지만 한겨울 이 새끼처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거의 없는걸. 그러니 어쩌겠어. 세계관이랑 DLC를 열심히 지르는 거지. 방송을 위한 새로운 컨텐츠 확보 차원에서 말이야.」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전형적인 치킨게임이다. 경쟁자들이 다 하는 짓이니, 조금이라도 더 많이 질러야 하는 거지. 매일매일 새로운 연애상대를 준비하고 말이야.」 「Владимир : 역시 서면보고와 실상은 많이 다르군. 너희 까레이스키들은 이런 서비스에 만족하는 것인가?」 「엑윽보수 :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결국 본인이 노력하면 그만이잖아?」 「Владимир : 흠.」 「슬로우 웨건 : 적성이 높을수록……관제 AI가 깊은 의미까지 읽어낸다……반대로 일반적인 경우에는……판독 불가능한 정보량이 지나치게 많으면……트로이 목마가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을 우려하여…….」 「둠칫두둠칫 : 한겨울 이 새끼는 그냥 배가 부른 거야. 시청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트라우마든 뭐든 극복하려고 시도해봤어야지. 시간도 충분했잖아? 뭐가 어찌됐든 소비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기만 하는 생산자라는 건 있을 수 없는 거라고 봄. 자본주의 사회에선 너무나 당연한 거잖아. 부정할 여지가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SALHAE :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내성발톱 : 오, 남산타워 강간범. 조용하길래 없는 줄 알았더니.」 「SALHAE : 난 무식해서 복잡한 말은 못하겠다. 그치만 그……소비자와 생산자라는 게……사람과 사람 사이가……어느 하나로만 정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싶다……폭력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기특한 소리를 하는군. 섹스섹스 가장 시끄럽던 녀석이.」 「SALHAE : 그야 뭐……. 하면 좋겠지. 믿고 의지할만한 여자 품에 알몸으로 안겨서……천천히, 느리게 애무 받다가, 조용히 싸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근데 예전만큼 간절하진 않아……. 갈수록 피곤하기만 해. 의욕도 없고……. 지친다…….」 「SALHAE : 유라 보고 싶다. 유라 목소리 듣고 싶다. 유라 냄새 맡고 싶다. 유라가 날 향해 웃어주면 기분 좋겠다. 나는 내가 아니라 한겨울이겠지만, 내가 아닌 모습으로라도 유라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항상 열심인 점이 매력적이었지.」 「SALHAE : 역시 진행자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 면회신청 해놔야지. 귀찮다고 미루지 말고.」 「제시카정규직 : 대체 뭐지 이 변화는 ㅋㅋㅋㅋㅋ 얘가 남산타워를 강간하겠다고 떠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ㅋㅋㅋㅋㅋ」 「まつみん : 힝. 방송 끝났어요? 들어왔는데도 깜깜하네.」 「제시카정규직 : 오, 마츠밍 돌아왔네.」 「9급 공무원 : 조금 전에 잠들었음. 아니, 잠들었다고 하니까 이상하네. 세계관 내에서의 행동일 뿐이니. 아무튼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인가봄.」 「돌체엔 가봤나 : 일본 언니 ㅋㅋㅋㅋ 아깐 왜 그렇게 폭주한 거야?」 「まつみん : (o´Д`)=з」 「まつみん : 겨울 씨의 얼굴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었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안타까웠어요. 겨울 씨와 동침할 기회를 놓친 것도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그 상황에서까지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겨울 씨가 가엾게 느껴져서……화가 나더라고요. (´・ω・`)」 「슬로우 웨건 : 보안상의 문제로……일시적인 접속차단 조치가……사용자 보호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지…….」 「동막골스미골 : 컨셉충 밴.」 「まつみん : 요즘 들어 점점 더 강해지는 마음인데, 이 방송의 끝에서 겨울 씨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저도 행복해질 것 같아요.」 「Владимир : 개인적으로 나 역시 기대하고 있다. 사람 보는 눈엔 자신 있는 편인데, 한겨울은 꽤 괜찮은 인재 같거든. 사후보험의 민낯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고. 즐거움 이상으로 유익한 방송을 제공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まつみん님이 별 3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Владимир님이 별 5,47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152 [152화] #과거 (9), 장미가 시드는 계절 (2) 젊은 몸의 늙은 폭군은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입은 옷은 없다. 질척질척.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젖어있었다. 비싼 여자였다. 모든 행동이 기품 있고 천박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으로 웃는다. 아름답다. 입 안이 가득한 채로는 어려운 노릇이건만. 그 와중에도 혀를 굴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유혹이었다. 우아한 외모와 동떨어진 움직임. 그녀의 입은 뜨거웠다. 그러나 있어야 할 반응이 없었다. 폭군은 식어있었다. 피부가 차가울 지경이다. 거쳐 간 여자 가운데 한 명이 말했었다. 냉혈동물 같다고.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무섭다고. 그때 폭군은 속으로 비웃었다. 사람이 원래 차가운 동물인 것을. 어쨌든 그는 성기능에 문제가 있었다. 육체를 갈기 전엔 노환인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젊음을 거래하면 잃어버린 인생이 돌아오리라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새로운 내가 되고 싶었다.’ 고건철은 과거의 자신이 싫었다. 거울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멍청한 놈의 얼굴이라고. 제 여자 하나 간수하지 못한 얼간이 새끼라고. 불륜이 발각된 현장에서, 아내였던 여자는 미친 듯이 웃었다. 지금 네 꼴을 보라고. 너 같은 추물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 있겠느냐며. 아, 그 날카롭던 웃음소리.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제멋대로 반복되는 기억. 머릿속의 음량을 줄일 수가 없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점점 더 커지다가, 마침내는 분간할 수 없는 굉음이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돌 구르는 소리를 닮았다. 우르르르륵. 찰싹! 고건철 회장은 눈을 깜박거렸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알알한 통증. 하얗게 식어있던 살에 연한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낮게 있던 여자의 소행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꾸었다. 올려다보는 시선은 순종적이고, 어루만지는 손길은 지배적이었다. 남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 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드러난다. 살짝 기울인 얼굴로 생긋 웃으며 하는 말. “너무하시네요. 저랑 같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시다니.” “넘겨짚지 마라.” “아닌가요?” 회장은 인상을 썼다. 그러나 화를 내진 않았다. 옆에 두고도 견딜 만 한 여자를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들은 벗은 몸만 봐도 구역질이 났다. 특히 더 견디기 어려운 건 화장보다 진하고 향수보다 역겨운 미소들이었다. 어설프게 가려서 그 너머의 추악함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그런 감정들. 이 여자는 그나마 괜찮게 웃을 줄 안다. 자신의 더러움을 긍정하는 솔직함이 느껴지므로. 혼혈의 특색이 드러나는 외모도 괜찮다. 아내였던 여자와는 다를수록 좋았다. 덕분에 곁에 두어도 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혐오스러운 것들 가운데 그나마 나은 하나였다. 화를 내어 쫓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습관적인 화 또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사아악, 사악. 민감한 곳에서 하얀 손이 움직인다. 악기를 연주하듯이. 변주에 들이는 감정은 가벼운 투정과 유혹이었다. 부드러운 마찰은 활대가 현을 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탁월한 기량으로도 죽은 악기를 살릴 순 없었다. 울림통이 비어있지 않았다. 자글거리는 돌로 꽉 차있어서, 어떤 연주도 깊어질 틈이 없었다. 폭군이 요구했다. “하던 거나 계속해라.” 이에 여인이 샐쭉해졌다. “잠시 쉬게 해주세요. 턱이 아프단 말예요. 이런 식이면 얼굴이 두꺼워지고 말걸요?” 그리고 그녀는 교태롭게 올라왔다. 온몸으로 부대끼며, 냉혈한에게 자신의 체온을 어필한다. 만지는 손은 여전하다. 단단한 다리 위에 올라타서 볼에 키스하고, 귓불을 깨물면서 묻는다. “제 입이 좋으세요?” 회장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불쾌하다.” “뭐예요 그게.” 볼을 부풀리는 여인. 토라진 기색을 적당히 내비친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눈을 감고 느끼면 정말로 더러웠다. 무언가 인간이 아닌 것, 축축하고 더러운 연체동물이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극도의 거부감이 느껴지는 행위. 그런데도 거듭 요구하는 자신이, 회장은 우습게 느껴졌다. 덜 아문 상처의 딱지를 떼는 아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싫은데 왜 자꾸 해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알 것 없다. 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휴, 알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말고요. 가끔은 그냥 맡겨보세요.” 제게는 다른 즐거움도 많은걸요. 그녀의 달큰한 속삭임이 폭군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의 오싹함이다. 이 같은 속삭임에 지배당할 때가 있었다. 더운 방에 오래된 겨울의 추위가 밀려왔다. 현실과 회상의 온도차가, 망가진 인간을 날카롭게 몰아세운다. 유달리 혹독했던 그날은 딸의 생일이었다. 아버지는 몹시 바빴기에 함께할 수 없었다. 없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한 만남이 미뤄졌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운이 나빴다. 그 땐 어떤 의미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론 최악이었다. 축하받아야 할 아이는 눈 내리는 정원에 홀로 나와 있었다. 달달 떨면서. 인형을 끌어안고. 무슨 인형이었더라?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머리와 양 어깨가 하얗게 덮였다. 아버지가 물었다. “무슨 일이니? 왜 혼자 나와 있어? 응?” 막내딸은 평소 다른 자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하나였다. 평소엔 수줍어서 그런다고 여겼다. 막내는 자주 우울해했고, 말수가 적었다. 친구도 없는 것 같았다. 인형을 끌어안고 몇 시간씩 앉아있기가 예사였다. 하지만 축하받아야할 날에 홀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이상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안아주자 눈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시면 안 돼요.” 더욱 이상했다. 조용히 들어갔다. 고용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그렇다 치고, 당직을 서는 하녀도 없다니. 실내는 더웠다. 그러나 뼈는 시렸다. 두근거림에 귀가 멀 것 같았으나,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가는 걸음에 옷가지들이 걸렸다. 움직이며 한 꺼풀씩 벗어던진 것들이었다. 한 사람 것이 아니어서 숨이 막혔다. 여자 옷은 눈에 익었고, 남자 옷도 눈에 익었다. 다만 뒤쪽은 회장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닫혀있지도 않았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냥 밀어두었을 뿐. 허덕임은 그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회장은 문틈을 들여다보았다. 둘 다 아는 사람이었다. 한 쪽은 아내였고, 한 쪽은 동생이었다. 아내는 동생의 하반신에 붙어있었다. “또 다른 사람 생각하시네요. 대체 누구에요? 저보다 매력적인 그녀는.” 현재가 과거에 끼어들었다. 고건철은 뾰로통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충동적이었다. “딸.” “뭐라고요?” 여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웃다가 지칠 때까지.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눈물을 닦았다. “뭐가 그리 우스운가?” “안 웃게 생겼어요? 비서들은 무서워서 쩔쩔 매고, 나 같은 여자를 앞에 두고도 싫은 표정이나 짓는데다, 이렇게 멋진 몸을 가졌으면서도 발기부전으로 고민하는 남자가, 그토록 간절한 섹스의 와중에 뜬금없이 따님 생각을 하고 있다니. 세상에! 회장님, 이런 분이셨어요?” 그리고 다시 한참을 웃는 그녀. 회장이 말했다. “나는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아니면 뭔데요?” 되찾고 싶은 거지. 회장은 불필요한 말을 삼갔다. 단순히 섹스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면 약을 썼을 것이다. 즉효성 약은 얼마든지 많았다. 없는 성욕까지 만들어주진 않겠지만, 팽창한 해면체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기능적이며 비효율적인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회장은 새로운 시작을 원한다. 아내였던 여자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고 싶었다. 성욕은 그 중 하나였다. 성욕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끔찍하고 저급하다. 그러나 그토록 경멸스러운 것조차도 일단은 회복해야 했다. 되찾고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떨쳐낸다면, 다시는 여자와 관계 맺지 않을 작정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현재가 다르게 파고들었다. “따님이라면 분명 낙원그룹의 신임회장님이셨죠? 정말 예쁘시던데. 저랑 비교하면 어때요?” 무시할까. 회장은 병적으로 치미는 화를 억눌렀다. 측근들이 데려온 모든 여자를 내쳤다. 이제 이 여자 하나 남았다. 이제까지와는 뭔가 다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자극이 필요하다고?’ 만날 때마다 피투성이가 되는 의사의 말이었다. 정신적인 자극이 필요하다고. “제 어미를 닮았지.” “어휴, 그럼 못 이기겠네요.” “네가 훨씬 낫다.” 이에 다시 폭소하는 여인. 고건철은 다시 천착했다. 자극이라. 의사는 치료수단으로 가상현실을 제안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강도와 다양성을, 체력 부담 없이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가소로운 소리였다. 상대는 항상 진짜여야만 했다. 어차피 그 진짜라는 것은 감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던가. 새로운 삶에 가짜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 치열하게 내 삶이어야 한다. ‘그 여자가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 분노와 함께, 폭군에게 익숙한 후회가 밀려왔다. 좀 더 끔찍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둘 다. 그랬다면 지금 같은 후유증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건만. 대체 왜, 나에게, 나처럼 효율적인 인간에게 사랑 같은 오작동이 있었나. 그 여자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없지 않았나. “어휴, 무서운 표정. 안 되겠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나름의 소득도 있었고.” 무릎 위에 앉아있던 여자는, 늙은 소년의 이마에 입 맞추고 웃으며 물러났다. 그녀는 옷을 입는 모습도 고왔다. 과연 현 연예계의 정점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느껴질 뿐이다. 기복 없는 생각만 스쳐간다. 데려오는 비용이 얼마라고 했더라?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던가? 이름은 뭐라고 했더라……? “무슨 소득이 있었다는 건가?” 뒤늦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까지의 퇴폐가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청순한 맵시로. 그녀는 갸우뚱 하며 웃었다. “제가 딸보다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그 정도면 큰 발전이죠.” “……나가라.” 그러나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서, 늙은 소년에게 입술을 겹친다. 스치듯이 한 번, 쪼듯이 두 번, 진하고 길게 세 번. 폭군은 마지막 역겨움을 간신히 참았다. 의자의 팔걸이에서 두 손이 꿈틀거렸다. “그거 아세요?” 여자가 말했다. “전 돈이 많아요. 물론 회장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저 하나 사후까지 건사하기엔 충분할 만큼 모았죠. 삶은 사후를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한 시대잖아요.” 몇 걸음 떨어져서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그래서 돈을 보고 온 건 아니에요. 다만 생전에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만족감 속에 은퇴할 때까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기는 싫었거든요.” “후원을 바랐나?” “네. 아시겠지만 요즘 연예인 노릇하기가 쉽진 않아요. 경쟁대상이 가성비 높은 전자계집들인걸 어쩌겠어요. 사람을 완전히 대신할 순 없어도, 사전에 정해진 각본과 연출이라면 사람과 썩 다르지도 않은걸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지는 걸 느껴요.” “…….”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게 제 삶이에요. 삶이 달라지면 그건 제가 아니에요. 죽기 전에 한 번은 살아야죠. 그러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겼어요. 회장님처럼 다시 젊어지더라도 지금 같은 삶은 불가능할 테니까.” 회장은 길어지는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기능에 매몰되는 인간이야 흔해 빠진 것 아니던가. 미련한 것들. 무언가에 지배당하는 삶은 진짜 삶이 아니다.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 그 수단이 돈이다. 만능의 기회비용. 그러므로 경제적인 삶이 올바른 삶이다. 회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일은 비서와 상의하도록. 알아서 처리해줄 거다.” “어휴.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여자는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전 지금 회장님이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처음 목적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넌 도구일 뿐이야.” “알아요. 느꼈어요. 하지만 아끼는 도구가 될 순 있겠죠.” “네가 노력한다면.”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물러나 작별을 고했다. “또 불러주세요. 다음엔 제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회장은 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 153 [153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1) 4월 3일. 명백한 해방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시점에서, 겨울은 앨러미더(Alameda) 시가지 한복판에 있었다. “갇혔군.” 허탈한 목소리는 중국군 해군중교의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탄궈셩(譚國生). 시에루(謝茹) 해군중장의 아들이며, 겨울의 위장신분인 용병 커트 리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상황은 그의 말과 같았다. 변종집단에게 추적당하는 중이다. 현재는 대형 할인매장에 숨어든 상태. 함께하던 다른 병력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무전기가 침묵하고 있었다. 교신을 시도할 순 없었다. 인간사냥에 나선 무리는 트릭스터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다들 살아있을까?” 초췌해진 해군중교의 질문.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어째서지?” “방해전파가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생각했다. 다른 부대가 살아남았다면, 트릭스터는 적극적으로 통신을 방해하려 들 터였다. 지금은 무선이 잡음 없이 조용하다. 중국 해병들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살아남았어도 몇 명 정도. 어딘가 숨어서 죽음을 지연시키고 있겠지. 그렇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었다. ‘상대가 좋지 않아. 하필 이럴 때 신종이 나타나다니.’ 때가 되었다고 여기긴 했다. 하지만 뭍에 오르자마자 마주쳤다. 운이 나빴다. 아니,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새로운 괴물은 겨울이 경험한 녀석이었다. 특성을 파악하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놈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야 했다. 특수변종, 「스토커」. 전투력은 별 볼 일 없으나, 「추적」에 특화되어있다. 특히 발달한 것이 후각. 강화되면 청각과 시각 순서로 추가 변이가 일어난다. “제기랄, 이건 너무 무모한 작전이었어. 하다못해 더 많은 병력을 보냈어야지.” 숨죽여 흐느끼는 탄궈셩. 겨울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위기감지」가 얌전했으므로, 당장은 괜찮을 것이었다. 공포와 흥분으로 소모된 남자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작전. 중국군 잔여세력 일파를 이끄는 시에루 해군중장은, 굉장히 대담한 계획을 구상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 일부를 점령하겠다는 것. 탄궈셩은 어머니가 무모했다고 하지만, 겨울이 보기엔 가능성이 충분했다. 앨러미더는 섬이었다. 본토로 이어지는 해저터널과 다리들을 폭파할 경우, 앨러미더 시가지의 변종 숫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 후에 천천히, 한 블록 한 블록 확보해나가면 되었다. 탄궈셩에게 주어진 임무는 세 개의 다리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파크 스트리트 브릿지, 프루트베일 브릿지, 그리고 하이 스트리트 브릿지. 이 다리들이 앨러미더와 오클랜드를 잇는다. 두 도시를 가르는 수로는 폭이 좁았다. 양안에서 그럼블이 출몰했다. 시가지 너머 안쪽이라 구축함의 화력지원도 불가능했다. 헬기의 화력으로는 역부족. 결국 인력을 투입해야 했다. 부대는 야음을 틈타 물길에 진입했다. ‘스토커만 아니었다면 성공했을 텐데.’ 겨울에게도 아쉬웠다. 임무는 성공 직전이었다. 그러나 가장 북쪽에 있는 다리, 파크 스트리트 브릿지의 교각에 폭탄을 설치하던 중, 근처의 스토커가 사람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지금이다. 정신 못 차리던 탄궈셩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날카로운 파열음. 이 건물 어디선가 유리가 깨졌다. 겨울에겐 묵직한 발소리도 들렸다. 「전투감각」의 유추로는 직선거리 약 80미터. 그러나 층이 다르고 그 사이 구조가 복잡하다 해도, 냄새로 쫓아오면 금방일 것이었다. “움직여야 합니다.” 겨울이 중국 장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장교는 힘이 없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바깥은 괴물들 투성이야. 이 안에서 술래잡기(捉迷藏)라도 할까?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고통 없이……. 난 놈들처럼 변하고 싶지 않아!” “후각이 예민한 놈들만 처리한다면 틈을 보아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처리? 어떻게? 도올에겐 총탄도 박히지 않아! 마주치면 즉시 죽을 텐데!” “…….” 중국인들은 그럼블을 도올(檮杌)이라 불렀다. 유래는 신화 속의 식인괴물이다. 사실 겨울에게도 까다롭다. 상대는 베타 그럼블이었다. 게다가 트릭스터와 스토커를 동반하는 중이다. 스토커의 전투력이 별 볼 일 없어도 어디까지나 특수변종 기준이었다. 육체능력은 어지간한 베타 구울보다 나았다. 단독전투라면 승산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살려야 할 짐이 있는 지금은 신중해야 했다. 어떻게 할까. 주위를 살피던 겨울은 자판기를 발견했다. 콰직. 쇠지레를 박아 넣는다. 강하게 비틀어서 문을 열었다. 탄궈셩이 당황한다. “뭘 하는 건가?” “냄새로 쫓는 놈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해보겠습니다.” “음료수를 가지고? 하……. 자네도 드디어 미쳤군.” 덜덜 떨면서 중얼거리는 중국군 장교. 그러나 스토커가 겨울이 아는 그대로라면, 이산화탄소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마치 모기처럼. 지나간 세계관에서 진행된 연구였다. 이를 충분히 설득할 여유도, 근거도 없었다. 사실 반드시 되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려는데 잘 안되었다. 목소리를 바꿔놓은 약 탓이다. 숨어있던 장소는 직원용 휴게실이었다. 직원 취급이 별로였는지 위치가 구석이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복도로 나온 겨울은 소리 없이, 빠르게 달렸다. 와장창, 쿵쾅.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불협화음이 요란했다. 메인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중앙 계단. 근처 난간에 몸을 숨긴 겨울이 챙겨온 콜라 캔 몇 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순서대로 내려놓고, 하나를 쥔다. 왼손엔 소음기 끼운 권총을 들었다. 첫 번째 투척. 조명은 비상등뿐이었다. 어둑한 가운데 던져진 붉은 캔 하나. 겨울의 조준이 떨어지는 포물선에 겹쳐진다. 툭! 작은 총성이 울렸다. 이어 팍 하고 터지는 소리. 변종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였다. 다다다닥. 변종들이 나타났다. 사냥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향을 지시할 뿐, 스스로는 항상 보호받는 위치에 머무른다. 겨울은 몇 개의 캔을 연이어 던졌다. 팍, 파팍. 사냥개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높은 곳에서 보고 있으니, 변종 무리가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디코이가 던져진 방향으로. 퇴로를 막는구나. 영악한 움직임이었다. 필시 트릭스터의 지능일 것이다. 어쨌든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겨울은 탄궈셩에게 돌아왔다. 세워놓은 보람도 없이, 도로 주어 앉은 채였다. 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 덜덜 떨리는 품으로 보아, 결론은 하나였다. “자살은 안 됩니다. 존부인(尊夫人)을 생각하십시오.” 어머니를 잊지 말라는 설득. 중국군 장교는 겨울의 말에 부들부들 웃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약에 충실한 건가. 하, 차라리 날 버리고 가지 그러나.” 그건 곤란하지. CIA는 시에루 중장의 통신을 도청했다. 그 사이엔 베이더우 위성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겨울은 그녀 휘하의 정보수집선에 잠입해야 했다. 탄궈셩은 징검다리였다. 문득 무언가 떠올린 겨울이 서류함을 뒤졌다. 직원 배치도가 나온다. 일반 고객들은 알지 못하는 공간들이 표시되어있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 한 장소가 한 곳 있다. “중교님. 이걸 보시죠.” 겨울이 짚은 장소는 비품실이었다. 탄궈셩은 보고도 감이 안 잡히는 표정이다. “왜? 빗자루로 놈들을 쓸어버릴 작정인가? 열심히 해보게. 응원해주지.” “농담이 아닙니다. 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겐 방독면이 있잖습니까.” 염소 계열 세제와 산소 계열 표백제가 섞이면 유독가스가 발생한다. 매대가 쓸려나간 매장에서 세제를 찾긴 어렵겠지만, 비품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눈을 껌벅이던 탄궈셩이 묻는다. “그게 가능할까? 독가스로 놈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아뇨. 반응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할 때 거기까진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놈들의 사냥개가 대기 성분에 민감하다면 더 이상 다가오려고 하지 않겠죠.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변종은 인간을 토대로 만들어진 짐승이다. 짐승들은 인간보다 위험에 민감했다. 예로부터 새장은 광부들의 필수품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달렸다. 추적집단의 소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설픈 유인에 분노하는 것처럼, 전보다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콰르릉! 숫제 벽을 부수면서 오는 모양이다. 마침내 도착한 비품실. 필요한 것들이 간단하게 나왔다. 겨울은 락스부터 바닥에 쏟았다. 큰 통으로 여럿이었다. 복도가 삽시간에 독한 냄새로 가득 찼다. 겁 많은 탓에 방독면부터 착용한 탄궈셩은, 표백제를 들고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다급함이 느껴진다. 쿠웅, 쿵. 묵직한 발소리의 거리감이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부족해, 너무 부족해!” 탄궈셩의 초조한 중얼거림. 그의 말처럼, 넓은 면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너무나도 적게 느껴졌다. 하얗고 노르스름한 거품이 일고, 그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무척이나 희미했다. 그러나 겨울은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미세한 체취를 쫓는 괴물들에게 눈에 보일 정도의 염소 가스가 어떻게 느껴질까? 겨울은 복도를 밝힌 비상등을 모두 쏴버렸다. 퍽퍽 깨져나가는 적색의 광원들. 자연광이 들어올 틈 없는 복도인지라,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어버린다. 이제 기다릴 차례였다. 야시경을 쓰고 복도 저편을 응시한다. 탄궈셩 역시 중국군 제식 야시경을 착용했다. 꼴깍. 마른 침 힘겹게 삼키는 소리. 쿵, 쿠궁.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아마도, 복도의 모퉁이 저편일까. “어디 숨어있는 게 좋지 않겠나?”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속삭이는 두려움. 겨울이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어둠 속에 숨어있지 않습니까? 혹시 락스와 표백제가 더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여긴 제가 맡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탄궈셩이 서둘러 돌아섰다. 콰당. 젖어있는 바닥에 미끄러지고 만다. 겨울은 한숨을 겨우 참았다. 잘 보여야 할 상대였다. 엎드려서 사격을 준비한다. 몸 위에 잡동사니를 덮었다. 놈들이 독가스 앞에서 어정거리길 기대하면서. 혹여 가치 있는 표적이 보인다면, 단숨에 머리를 부숴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어쨌든 사냥개들은 동료들에게 경고할 것이다. 여긴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라고. 스토커가 초기형이라 다행이었다. 사냥개들이 적외선을 볼 수 있었다면 상당히 골치 아팠을 것이다. 비가시영역의 레이저조차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쿠궁. 쿠궁. 쿵. 마침내 가장 거대한 변종이 등장했다. 녹색 세계에서 보이는 그럼블은 이질적인 덩어리였다. 투시경이 고급품이라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워하는 겨울. 이전에 사용하던 물건은 열을 볼 수 있었다. 베타 그럼블의 약점은 좀 더 높은 열을 뿜었다. 갑각 사이의 틈들. 강화된 그럼블은 포효 패턴이 드물어진 대신, 질주 패턴에서 두꺼워진 피부들 사이에 균열이 드러난다. 그러나 열원을 보는 투시경은 고급품이었다. 적어도 전투에 쓸 수준이 민수용으로는 팔리지 않는다. 일개 용병의 소지품으론 지나치게 수상했다. 소총의 레이저 조준기에서 발사된 광선은 그럼블의 입가를 맴돌고 있었다. [끄에에에엑! 켁! 그륵, 끄엑!] 일정한 리듬이 느껴지는 괴성. 스토커의 것이었다. 그럼블이 전진을 멈춘다. 겨울은 조준을 변경했다. 그 뒤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실루엣들. 가장 원하는 목표는 트릭스터였다. ‘「침묵하는 하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있다고 쳐도 전투에 개입하진 않을 거야.’ 침묵하는 하나의 최우선사항은 정보보존과 전달일 테니까. 그럼블이 자리를 비켜준 뒤에, 사냥개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총 셋이지만,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방아쇠를 쥐어짰다. 틱, 틱, 틱. 격발 직전까지 당겨놓는 아슬아슬한 감각. 부족한 수류탄이 아쉬웠다. 아껴야 한다. 고작 두 발 남았으니. 후각이 예민한 것들이 코를 벌름거린다. 저것이 나타날 징조는 예전부터 있었다. 냄새를 맡는 변종들. 모겔론스는 숙주를 기능적으로 개발한다. 필요성에 따라 특정 기능을 강화하는 식. 그러나 독무가 차있는 어둠을 후각으로 넘볼 순 없었다.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유일한 놈이 나타날 때였다. 마침내, 볼륨을 줄여둔 무전기에서 작은 잡음이 들렸다. 직, 직, 지직. 방해전파와는 다르다. 트릭스터는 반사되는 전파를 감지할 수 있었다. 레이더처럼. 그러므로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고, 전신으로 뿜어대기에 사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겨울은 엎드려있다. 이것저것 덮었으므로 윤곽도 불분명하다. 조심스럽게 전면으로 나서는 협잡꾼(Trickster). 조준하는 레이저는 놈의 눈알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격발. 투두둑! 삼점사, 끊어 쏜 세 발이 정확히 같은 자리에 박혔다. # 154 [154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2) 단말마의 비명는 이중창이었다. 육성으로 내지르는 소리. 그리고 무전기에 잡히는 날카로운 잡음. 골전도 리시버로 인해 머리뼈가 징징 울린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있었다. 괴물이 수신했던 모든 전파가 중구난방으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정보를 전송하는 것 같진 않아.’ 뇌가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탄도가 동일한 세 발의 총탄은 눈동자를 깨고 들어갔다. 그래도 침묵하는 하나가 이 상황을 모르길 기대하긴 어려웠다. 평소에도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테니. 혹여 훗날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는 신중해야 할 터였다. 변종은 인간보다 혈압이 높다. 뿜어지는 피가 야시경으로도 보였다. 트릭스터의 긴 절규는 의외의 혼란을 빚어냈다. 겨울은 후기 변종들에게 전파수신능력이 있음을 확신했다. 머리를 쏴서 바로 죽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가.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총탄은 머리통을 관통하고 지나간 모양이다. 날린 탄이 보통보다 굵으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영감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겨울이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둠 속을 꿰뚫어보는 변종은 없다. 가속의 와중에 변종집단 위쪽의 스프링클러를 정조준한다. 둑! 단발사격. 탄자는 방출기 안쪽의 유리관을 깼다. 좌아아악. 터지는 물줄기. 거세기는 잠깐이었다. 금세 가늘어지고, 마침내는 뚝뚝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방울이 된다. 다행이다. 감지기가 압력식이구나. 겨울은 거침없이 빨라졌다. 썩은 물의 악취가 진동한다. 냄새를 맡는 잡것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에 못 이겨 주위를 박살내는 그럼블. 휘둘러지는 팔뚝 아래로 죽 미끄러진 겨울은, 주먹으로 땅을 쳐서 몸을 세웠다. 초인의 근력으로 가능한 일. 소리에 몸이 울렸으나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럼블이 주위를 쳐부수는 와중에는. 거대한 괴물이 부서진 벽을 집어던진다. 겨울이 있던 자리를 향해서. 모든 것을 박살내는 행보에 몇몇 변종들이 휩쓸렸다. 트릭스터의 교통정리가 사라진 덕분이다. 이제 겨울은 변종들 사이에 서있다. 스토커를 구분하기는 간단했다. 구울과 무척이나 닮아, 야시경을 쓴 채로는 외관상의 차이를 보기 어렵지만……. 무력화된 제 코를 열심히 닦아내는 중이었기에. 그러나 도움은 되지 않는다. 놈들의 손 또한 썩은 계란내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숫자는 총 넷. 처음 셋이 보일 때 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각과 후각이 마비된 변종들은 밀고 지나가도 모를 상황이었다. 성난 몇 놈이 동족을 물어뜯는 게 보인다. 겨울은 한 스토커의 배후로 돌았다. 뒤통수와 턱을 잡아, 단숨에 비틀었다. 우드득. 혀가 쑥 밀려나왔다. 공기를 맛보려는 듯이 꿈틀거린다. 털썩. 쓰러지는 대로 놔주고 다음 표적을 잡는 겨울. 대검이 턱 아래로 푹 들어갔다. 스냅으로 뽑는다. 피가 줄줄 쏟아졌다. 피는 손목을 타고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다시 다음. 이놈은 동족을 물고 있다. 후각이 예민한 만큼, 지독한 냄새에 잠깐 미쳐버린 품새였다. 엎드려있기에 죽이기 쉬웠다. 군홧발로 놈의 뒷목을 밟는다. 우드득. 복사뼈를 타고 올라오는 죽음의 소리. 으깨지는 진동.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다. 재치 있는 녀석이었다. 다른 변종의 옷가지를 뜯어 제 코를 닦았다. 완벽하진 않아도 후각이 돌아온 모양. 코를 움찔거리며 킁킁거리는 꼴이 겨울의 냄새를 포착한 것 같았다. 그러면 뭐하나. 겨울이 고인 물을 차올렸다. 필요한 건 단 한 줌. 발끝을 떠난 액체가 놈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크웨엑! 입 벌리고 있다가 조금 삼킨 녀석이 구역질을 해댔다. 허리를 굽히고 타액 쏟는 꼴이 인간을 닮았다. 겨울은 대검을 아래로 잡았다. 콰득! 티타늄으로 날을 세운 칼날은 뒤통수로 꽂혀서 이빨을 깨고 나왔다. 각이 어찌 들어갔는지, 잘린 혀가 아래로 떨어진다. 최후의 사냥개가 발광했다. 신경이 교란되어 팔다리를 휘젓는다. 대검을 뽑자, 해방된 몸뚱이가 뚝 떨어져 썩은 물을 튀겼다. 겨울은 능란하게 회피한다. 사냥개가 죽어가는 몸부림으로 동족을 잡아채어 기특했다. 덕분에 몇 놈 더 편하게 밟아 죽일 수 있었다. 전투감각이 굵은 궤적을 경고했다. 0.3초 차이로 스쳐가는 거대한 팔뚝. 그럼블이었다. 알고 가한 공격은 아니다. 투척의 여력이 남아 원을 그리는 운동이었다. 겨울은 욱신거림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휘두른 대검 탓이다. 칼날은 갑각의 균열을 훑었다. 크아아아아-! 힘줄 잘린 그럼블이 팔을 늘어뜨렸다. 강화 등급이 올라간다고 모든 면에서 강해지는 게 아니었다. 강도가 증가한 피부는 연성이 감소했다. 갈라지는 부분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약점은 움직일 때 나타났다. 거대 괴수는 동족을 쳐부수며 발광했다. 그래봐야 마구 내지르는 괴성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후방에 적이 있다는 걸 혼자서만 알 뿐. 어둠 속에서 강한 완력만으로는 무기력했다. 다른 변종들은 영문을 모르고 찢어질 따름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겨울은 발걸음이 어지러웠다. 반사적인 회피였다. 여백이 없을 것 같으면 칼을 내지른다. 콱. 갈비뼈 사이로 찌르는 날. 푸슉. 튀는 피는 얼마 안 되었다. 그보다는 바람이 샌다. 제멋대로 수축하는 허파. 죽어가는 놈은 공기 중에 허우적댔다. 폐 한 쪽이 남아 죽는 시간이 길다. 겨울은 놈을 옆으로 밀었다. 빙글 돌면서 그 자리로 들어갔다. 뒤로 한 걸음 걷고,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공간이 제한된 실내였다. 변종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었다. 어둠과 악취 속에서 벌어지는 동족상잔. 열기가 오른다. 소음의 데시벨이 높아졌다. 이제 괴물들은 느껴지는 모든 것을 공격하려 들었다. 크후, 크후, 크워어어어! 두 번째의 포효 패턴. 시야가 가늘게 떨릴 정도의 압도적인 울음이다. 겨울은 이번에야말로 수류탄을 던졌다. 핀이 떨어진다. 팽글팽글. 스냅 실린 회전으로 날아가는 폭발물. 가장 거대한 괴물의 목젖을 쳤다. 케윽! 꿀꺼덕 삼키는 소리. 목젖이 꿀렁인 뒤에, 펑! 흉곽이 팽창한다. 그럼블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와르르 무너지는 천장. 마감재가 산사태처럼 쏟아진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주정뱅이와 같아, 저보다 작은 것들을 몇 놈이나 밟아 죽였다. 빈틈 많은 움직임이다. 겨울이 몸을 낮추며 날렵해졌다. 팔뚝 안쪽으로 파고든다. 꿇어앉는 녀석의 다리가 기둥 같았다. 일어서려는 순간에 무릎 안쪽을 긋는다. 투둑! 예리한 칼날에 끊어지는 인대. 피가 야시경 렌즈에 튀었다. 일어서는 도중에 힘 빠진 그럼블이 온 몸으로 쓰러진다. 쿠웅! 으깨진 것들의 피와 살점이 질펀하게 흘러넘쳤다. 여파를 벗어난 겨울은 피 웅덩이에 발을 비볐다.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진 물을 밟았으므로, 악취를 지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종들의 밀도 낮은 미로를 뒤로 빠져서, 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유리가 깨진다. 버튼이 눌렸다. 화재경보가 울기 시작했다. 이제 호위대상에게 돌아갈 때였다. 한 발로 서다가 넘어지길 반복하며, 분노의 화신이 되어가는 그럼블. 낮게 휘둘러지는 거대한 팔을 세 번이나 넘어야 했다. 탄궈셩 중교는 엉거주춤한 석상 같았다. 내용물 다 털어낸 표백제 봉지를 들고 멀거니 서있다. 목 위로만 겨울을 따라 움직인다. 야시경으로 절반, 방독면으로 남은 절반이 가려졌으나, 표정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겨울이 말했다. “가시죠. 도올이 몰려오는 놈들의 발을 묶어줄 겁니다.” 그러라고 일부러 살려둔 그럼블이었다. 목덜미 뒤쪽의 균열을 찌르면 즉사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어차피 엎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놈이었고. ‘환경이 좋았지.’ 주변이 밝았다면 위험했을 짓이다. 베타 그럼블은 근접 패턴 또한 강력하다. 15등급 「무브먼트」로도 완전한 회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죽을 확률은 약 4푼. 가능성이 작다고 무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겨울의 세계관엔 「사망회귀」가 적용되어있지 않으므로.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호위대상을 끌고 달리면서 좀 전의 전투를 복기해본다. 트릭스터의 단말마가 군체에 미친 영향이 뜻밖이었다. 제정신으로 죽는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 건의한다면 전투교리에 올라갈 것이었다. 물론 조우전에서 겨울과 같은 행동을 아무나 할 수는 없을 터. 허나. ‘저격수라면 충분히 노릴 수 있어.’ 저격으로 광역 혼란을 유발한 뒤에 본격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아군의 피해를 극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자기 충격파(EMP)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는 겨울. 최후의 발악으로 내뿜는 EMP는, 조금 전과 같은 근접상황에서 위험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형의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전도체엔 정전기가 남는다. 운 나쁘면 실탄과 수류탄의 뇌관이 점화된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를 걱정하는 것이다. 트릭스터의 자폭은 의도적인 공격이다. 죽기 전에 전압을 끌어올려야 한다. 방금 같은 상황에선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이는 「전투감각」에 의한 「통찰」이다. 같은 변종을 사냥한 경험이 쌓일수록,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습득할 확률이 증가한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달리는 와중에 헐떡이며 걸어오는 말. 겨울은 정면으로 총을 쏘았다. 지금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 원래부터 건물 안에 있던 놈들이 소란에 이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시체를 건너 뛰어 달린다. 최대속도는 아니었다. 함께 뛰는 호위대상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 말일세! 역귀들 사이로 뛰어들지 않았나!” 중국어로 모겔론스는 시역(屍疫)이고, 변종들은 역귀(疫鬼)였다. 이는 곧 중국인들이 대역병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했다. 그럼블을 도올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이성을 넘어선 공포가 느껴진다. 그들에겐 어두운 신화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겨울은 달리는 와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호흡으로 답한다. “오래된 자동분수장치의 배수관은 소화액에 의해 부식됩니다. 황화수소가 만들어지죠. 중교님께서도 계란 썩는 냄새를 맡으셨을 겁니다. 그걸로 사냥개들의 후각을 마비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둠과 악취 속에서 숫자는 많을수록 약점이죠.” 오인공격은 언제나 다수에게 불리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투두둑! 층계참에 세 구의 시체가 더해진다. 옥상까지 질주하는 동안 겨울은 압도적인 반응속도로 길을 만들었다. 탄창 하나를 교체해서 다시 비우는 동안, 탄궈셩은 한 번도 쏠 기회가 없었다. 말도 못할 만큼 헐떡일 뿐. 옥상은 잠겨있었다. 쾅쾅쾅. 중구난방으로 두드리는 소리들. 겨울은 냅다 걷어찼다. 문이 콱 찌그러지며 자물쇠가 어긋난다. 몸으로 부딪히니 문 뒤에 있던 것들까지 와르르 넘어진다. 건물 내의 소리를 듣고 몰려와, 열리지 않는 문에 분노하던 것들이었다. 투둑! 툭! 툭! 미간 여럿에 구멍이 뚫린다. 피와 뇌수가 튀었다. 몰려있는 수가 많았다. 탄창이 비자 겨울은 무기를 교체했다. 뒤로 돌리는 소총과 새로 뽑는 권총. 그러나 달리 내려갈 길 찾던 것들까지 몰려와, 다 죽이기엔 숫자가 많다. 듬성듬성 죽여서 공간을 확보한다. 다수를 상대할 땐 언제나 여백이 중요했다. 그리고 다시 무기를 교체했다. “중교님! 엄호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든 것은 도어 브리칭을 위한 쇠지레였다. 속이 꽉 찬 쇳덩어리인지라, 20인치에 불과한데도 무게는 거의 1킬로그램이다. 지렛날은 쓰지 않는다. 깡! 쇠가 뼈를 치는 소리. 둥근 모서리로 쳤어도 뇌진탕이었다. 보정 다 붙은 하프 스윙이 두개골을 깨부쉈다. 크엑! 출혈로 눈이 붉어지는 구울.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다. 중교의 사격은 보탬이 되지 않았다. 본래의 솜씨는 모르겠다. 그러나 흥분과 공포, 극도로 거친 호흡으로 인해 모든 사선이 엉망이었다. 다만 제압사격의 효과는 있었다. 변종들이 쉽게 좁히지 못하는 틈은 각개격파에 충분한 여백이었다. 겨울은 사선 사이를 거침없이 누볐다. 감각보정의 경고를 믿으며. 한 편으로는 중국군의 정예함을 믿으며. ‘아무리 장군의 아들이라도 능력이 부족하진 않겠지.’ 중국군에서 대를 이어 고위직에 오르는 군인가문은 의외로 드문 편이다. 까앙, 깡! 깡! 쇳소리가 연거푸 울린다. 대개는 일격필살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 빗나갔다. 베타 구울의 날렵함이 빚어낸 기적. 관성으로 지나친 팔을 돌이키긴 늦다. 역병은 탐욕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겨울은 관성에 힘을 더했다. 회전 하는 몸. 발차기는 몸으로 은폐된 일격이었다. 쾅, 하는 몸 울림. 반작용이 이정도면 맞은쪽은 말할 것도 없다. 갈빗대 으스러진 괴물은 허공에 가느다란 핏줄기를 남겼다. 이를 끝으로 주위가 정리되었다. 열린 문 너머, 층계 아래에서 우르르 차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쇠지레를 휙 돌린 겨울이 옥상에 널린 에어컨 실외기로 다가갔다. 대형 매장에 어울리는 크기였다. 아래에 나사로 고정되어있으나, 연결부가 오랜 비와 바람에 녹슬었다. 지렛날로 찍어서 비틀자 단숨에 바스러진다. 그러기를 세 차례 더. 이제 초인적인 근력으로 끌어당긴다. 열린 문을 겨냥하던 탄궈셩은 고민하다가 뛰어왔다. 실외기 뒤에 붙어 온 몸으로 밀어댄다. “끄으으윽!” 장교가 용을 쓰는 소리는 괴물을 닮았다. 실외기 미끄러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무게가 무겁다보니 바닥 타일이 벗겨진다. 지장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쿠궁. 문이 봉쇄되었다. # 155 [155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3) 쿠궁. 문이 봉쇄되었다. 그러나 부족했다. 막힌 문 저편에 지옥이 육박한 것 같았다. 굶주림으로 성난 것들의 아비규환. 문짝이 덜컹거릴 때마다 조금씩 틈이 벌어졌다. 문틈으로 무수한 손가락들이 기어 나온다. 비상등의 붉은 조명이 함께 새어나왔다. 겨울이 실외기를 걷어찼다. 쾅! 철판 우그러지는 굉음이 손가락 으깨진 놈들의 비명과 어우러졌다. 떨어진 손가락 마디 수십 개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탄궈셩이 진저리를 친다. 그는 등으로 실외기를 밀며 외쳤다. “리! 하나 더 끌어오게! 여긴 내가 막고 있을 테니! 어서!” 겨울이 뛰었다. 새로운 실외기를 확보했다. 당기는 전신에 부하가 걸렸다. 땀이 흘렀다. 그그긍, 그그긍. 쇠가 돌을 갈아대는 소리. 움직임을 따라 하얀 자욱이 남는다. “비키십시오!” 황급히 물러나는 중국군 장교. 겨울은 새로 끌어온 쇳덩이를 넘어트렸다. 군홧발 아래가 흔들렸다. 쓰러진 기계를 힘껏 밀어, 먼저 있던 것에 밀착시킨다. 배로 늘어난 무게와 접지면적은 곱절 이상의 저지력이었다. 더 이상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피가 튀고, 질척하게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수히 밀어대는 힘은 곧 압사의 조건이었다. 저편이 좁은 계단이라 다행이다. 수평으로 넓었으면 이 무게로도 막지 못했을 것이었다. 끄으억, 커억. 다친 사람의 신음 같은 소리. 알고 보면 올라와서 쓰러트린 변종들 일부였다. 쇠지레에 맞아 급소가 함몰되고도 절명하지 않은 것들. 다만 기절한 상태였을 뿐이다. 중국군 장교가 기겁했다. “하늘이시여(我的天)!” 탕! 그의 총은 아래를 향해 단발로 쏘아졌다. 겨울이 붙잡아 꺾은 탓이었다. “탄을 아끼시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겨울 자신에게도 수류탄 한 발에 소총 탄창 두 매, 권총 탄창 세 개가 남았을 뿐이다. 넉넉하게 챙겨왔는데도 소모가 극심했다. 탄궈셩이라고 상황이 나은 건 아니었다. 겨울보다 쏘는 빈도는 낮았을지언정, 긴장과 공포 속에 당기는 방아쇠는 대부분이 연사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물러나 계십시오.” 고급 장교의 뒷걸음질은 그가 체면을 지키며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였다. 흉곽에 발자국 푹 들어간 구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잠시 허우적거리더니, 헤매던 시선으로 겨울을 발견한다. 상황을 파악했나보다. 피를 토하며 몸을 뒤집었다. 날렵하여 호흡곤란에 빠진 생명체 같지가 않았다. 두 팔로 바바바박 기어온다. 마침내는 완력으로 펄쩍 도약하는 게 아닌가. 따다다닥! 바람을 물어뜯는 이빨. 그러나 정직한 포물선이었다. 정수리가 훤히 드러나, 겨울이 쇠지레를 내리찍었다. 피가 튄다. 덜컥, 손목에 걸리는 변종의 무게감. 머리가 고정된 채 몸통만 흔들렸다. 변종의 창백한 머리 위로 묽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붉은 비를 맞는 사람처럼 보였다. 본디 또래의 소년이었을 괴물은, 변색된 눈으로 겨울을 올려다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지렛날은 스스로 빠졌다. 나머지를 정리한다. 숨 붙어 있는 놈들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이마 위쪽이 깨진 녀석은 자꾸만 바닥을 때릴 뿐이다. 가눌 수 없는 몸에 대한 분노였다. 깨진 머리뼈 틈으로 분홍색 주름이 보였다. 겨울은 뒷굽으로 힘껏 찍었다. 뇌가 파괴된다. 앞서도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머리였다. 인간이 변질된 괴물들이었으므로 뇌손상의 증상도 인간과 같았다. 중심을 못 잡거나 구역질을 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살아남은 수가 많지도 않았다. 다 정리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이제……이제 우리는 안전한 건가, 리?” 탄궈셩이 신음처럼 허덕였다. 겨울 이상의 땀에 젖어있다. 탈수가 우려될 만큼. 허나 안심은 아직 이르다. 신경이 여전히 저릿거렸다.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 겨울은 주위를 경계했다. 위협요소가 뭐가 있지?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방향은 여럿이었다. 그 방향마다 환기 시설이 있었다. 팬은 지금도 도는 중이다. 옥상에 즐비한 태양광 패널에서 전력을 공급받는 것 같았다. 돋워진 청력에 퉁탕거리는 쇳소리가 들린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방위와 줄어드는 거리. “중교님.” “왜 그러나?” “아무래도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겨울은 맥 빠진 장교를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휘청이고 간신히 중심을 회복하는 탄궈셩.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던 그는, 박살난 팬이 육편과 함께 튀어 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어느 변종이 회전하는 날개에 몸통으로 부딪힌 결과였다. 크아아아아- 환기구를 뛰쳐나온 변종이 사납게 포효했다. 어깨에 쇳날이 박혀있다. 팔 한 짝이 없다. 그러나 달려온다. 혼자가 아니었다. 실내로 이어지는 새까만 구멍으로부터, 변종과 변종과 변종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인간을 넘어선 근력으로 온 몸을 날리면서. 다른 환기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이 대형인 만큼 숫자가 많았다. 변종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탁 트인 지형에서 포위된다면 겨울에게도 위험했다. 무엇보다, 호위대상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장군의 아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미치겠군!” 흐느낌 섞인 탄궈셩의 절규였다. 달려가는 방향엔 급수탑이 있었다. 건물 옥상이다 보니 높이가 높진 않지만, 물탱크 위로 오르는 사다리는 오직 하나 뿐. 올라가서 버티면 당장은 안전할 것이다. 고립을 피할 수 없겠으나, 「생존감각」이 제시하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사다리 아래에 이르러, 겨울은 호위대상의 탄띠를 잡아 던지듯이 밀어 올렸다. 그리고 도약으로 뒤따른다. 먼저 올려주었음에도 탄궈셩은 금세 따라잡혔다. 겨울은 한 손으로 매달려 권총을 뽑았다. 난간을 타고 올라오는 것들의 이마와 정수리를 쏘았다. 툭! 투툭! 중심이 위태로운 놈들을 쏘았으므로 와르르 무너진다. 집단을 이끄는 구울은 신중하게 굴었다. 뒤에 작게 도사렸으므로 조준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서 올라오게!” 끝에 도달한 탄궈셩이 손을 내밀었다. 겨울은 남은 거리를 단숨에 박차고 올라가, 내밀어진 손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외마디 괴성이 질러진 뒤에, 변종들은 더 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놈들의 지능으로도 높이 오르는 좁은 길의 불리함을 이해한 것이다. 그럼에도 겨울은 쇠지레를 단단히 쥐었다. 체력 좋은 놈이라면 구울이 아니어도 잠깐 사이에 극복할 간격이었다. “젠장. 완전히 갇혔어…….” 탄궈셩의 탄식이 옳았다. 겨울에게도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급수탑 주위에 몰린 숫자가 이백을 넘었다. 그 가운데 구울의 비율이 높은 것은 어째서일까. 일반 변종들 가운데서도 건장한 남성체가 많았다. 추측컨대 배관의 수직구조를 극복한 녀석들만 올라왔을 것이었다. 그 증거로, 환기구가 막히지 않았음에도 더 올라오는 녀석이 없었다. ‘이미 올라온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럽지만…….’ 탄약 잔량이 위태롭다. 지형에 의지해서 싸워볼 순 있겠으나,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툭탁, 탕. 변종들이 잡동사니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뜯어낸 파이프, 가지고 올라온 날붙이, 깨진 벽돌 따위를. 투사체로 무장한 적이 다수일 때, 전력의 차이는 급격하게 벌어진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았다. 물탱크 위쪽이 제법 넓었다. 위에 머무는 한 변종들은 표적을 관측하지 못할 것이었다. 포물선으로 떨어지는 것들이 가끔씩 위험하겠으나, 겨울의 감각이 놓칠 리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고급 장교가 하급자에게 던질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좌절한 탄궈셩이 미치지 않는 것은 겨울에게 의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미 겪은 것들이 여러모로 압도적이었을 터. 어쨌든 그는 지금 겨울만 보고 있다. 생사가 갈리는 현장에서 쌓이는 신뢰는 질적으로 우수했다. 조안나와 단기간에 친밀해질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 임무를 감안할 때 긍정적인 현상이었다. 과연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현재로서는 겨울에게도 제안할 것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 “일단은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많이 지치셨습니다. 이대로는 기회가 오더라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휴식? 이 상황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제가 망을 보겠습니다.” 탄궈셩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곤 대자로 드러누웠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태도였다. 누운 채로 물을 마시다가 컥컥거리며 일어나기를 잠시, 다시 누워 눈을 감는다. 잠들지는 않았다. 던져지는 것들이 텅텅 부딪힐 때마다 움찔거렸다. 잠시 후, 야만스러운 공격이 잦아들었다. 이쪽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시간은 역병의 편이었다. 겨울은 앉아서 주머니를 더듬었다. 잡히는 건 몇 개의 에너지 바. 전투식량에서 휴대하기 간편한 것들만 추려내어 휴대한 것이다. 공수되는 물자에 전투식량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의심을 받을 여지도 없었다. 견과류 씹히는 소리에 고급 장교가 눈을 뜬다. “자네도 참 대단하군. 이 상황에서 음식이 넘어가다니.” “포기하긴 이르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중교님도 의외로 침착하십니다.” “……글쎄.”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고, 갑작스레 울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막으려고 한다. 허나 막는다고 새지 않을 흐느낌이 아니었다. 심성이 약하다고 보긴 어렵겠다. 상황이 상황이니. “엄마가 헬기를 보내줄까?” 울음 섞인 독백이었다. 청년기의 끝자락에 선 성인으로서 마마(妈妈)를 찾는 어감이 어렸으나, 죽음이 가까울 때 부모를 찾는 사람들은 항상 어려지게 마련이었다. 그 심리를 무수히 보아오고도 내면에서 같은 마음을 찾지 못한 겨울은, 그러나 장교의 눈물에 공감할 수 있었다. 기억 속의 가장 오랜 과거로부터, 그런 마음을 동경하며 자라왔으므로. 동시에 이성으로는 그가 제시한 가능성을 판단하는 중이다. 시에루 중장 일파는 항공연료 비축분이 적다. 보유한 것은 구축함 탑재 헬기 몇 대 뿐이고, 정비 상태는 빈말로도 양호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부품 공급이 끊긴 지 어언 1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군용 항공기는 보통 잦은 정비를 담보로 신뢰성을 확보하는 물건들인걸…….’ 신뢰성과 내구도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극단적인 예시로서, 2차 대전기의 미국 폭격기(B-29)는 사흘에 한 번 모든 엔진을 교체했다. 그러나 정해진 수명 내에서, 탁월한 성능으로 어떤 작전이라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들을 살리려는 장군이 수색기를 띄울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블의 투척이 닿는 고도까지 내려오기는 또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무전기는 먹통이었다. 앨러미더 섬의 남쪽 해안선에 이르기까지, 방해전파가 너무도 많았기에. 오르카 블랙의 영역에서 순찰을 돌 때도 외곽에서는 무전기를 쓸 수 없었다. 해안과 늪지와 시가지에 얼마나 많은 트릭스터가 도사리고 있을지는, 겨울로서도 추산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시에루 중장은 아들을 왜 이런 위험한 임무에 내보냈을까.’ 그녀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일개 폭력조직의 두목조차도, 자기 입지를 안정시키겠다고 하나 뿐인 딸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던가. 리아이링의 이중적인 본성은 부모의 모순으로부터 잉태되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짐작이 맞다는 전제하에, 생존자 수색은 반대파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거창한 명분도 필요 없었다. 부족한 항공유 재고는 얼마든지 반대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가진 게 없지요. 없어서 더한 겁니다. 일단 묻겠습니다. 깨끗한 옷 한 벌, 쓰지도 못할 달러 뭉치, 뚜껑 따지 않은 화장품, 새것으로 남아있는 면도칼이나 칫솔 따위를 열심히 감추는 모습들, 정말 한 번도 본적 없습니까?”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민완기의 것이었다. 맥락은 다르지만, 지적하는 심리는 같다. 겨울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딱히 헬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바라는 것은 감각보정이 제시할 영감이었다. 한 난관에 오래도록 봉착해 있으면, 없던 감각이 생기는 경우도 있으니까. 예컨대 이런 개념이었다. 이 정도의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해결책을 떠올리기까지 이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발상 자체는 오래된 시스템이었다. 그래도 고민을 쉬지는 않았다. 불확실한 구원에 기대는 것은 언제나 하책이었다. 스스로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노력해야 한다. 이번 세계관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 156 [156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4-1) 시간이 흘렀다. 상황은 그대로였다. 「생존감각」은 어떤 「통찰」도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천재의 영역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등급을 올려볼까 싶었으나,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겨울이었다. 일단은 보류. 여유를 남겨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면으로 돌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엔 전투계열 기술의 한 등급이 아쉬울 것이었다. “물도 다 떨어졌군.” 여전히 우울한 목소리. 탄궈셩이 자신의 수통을 거꾸로 들고 털었다. 나오는 건 몇 방울로 끝이었다. 지금껏 소모가 심했으므로, 한 통을 다 마시고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하염없이 울어서 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눈물샘이 마르도록 울었다. 마침 앉아있는 곳이 급수탑이었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해치를 발견했다. 자물쇠는 걸려있지 않았다. 다가가서 열어본다. 손전등으로 안쪽을 비춰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他妈的…….” 악취가 흘러나온다. 오랫동안 갈지 않은 물이었다. 밀폐되어 있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도시에 공급되는 물은 미량의 염소가 녹아있으니까. 그러나 수조엔 통풍장치가 달려있었다. 염소가 날아가면서, 남은 물은 썩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가까워진 겨울이 장교에게 자신의 수통을 내밀었다. 탄궈셩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그건 자네 몫으로 남겨두게. 벌컥벌컥 마셔버린 내 잘못인걸.”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지금 없는 정수제(淨水劑)가 아쉬울 뿐. 겨울은 탱크 내부를 살핀다. 만재수위 바로 아래까지 차있었다. 부족한 조명 아래, 검은 물은 고여 있는 심연이었다. 탱크를 깨서 혼란을 빚어낼 수 있을까? 순간적인 발상은 어설펐다. 그러나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여기 있는 양이라면 옥상 전체를 얕게 침수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잠깐이겠지만. “중교님.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 무슨?” “보십시오.” 겨울은 저편에 줄지어 늘어선 태양광 패널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있는 설비실을. “모든 전선이 저곳으로 집중됩니다. 내부에 변압기와 축전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어떻게든 탱크를 깨어 물을 쏟아낸다면…….” “아아! 역귀들을 전기로 지져 죽이자는 뜻인가?” 누전차단기도 침수로 인한 방전에는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배터리는 그마저 갖추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깨달음으로 높아진 외침에, 아래의 굶주린 것들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탄궈셩이 움츠러들었다. 사다리 방향을 경계한다. 올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베타 구울이라면 단숨에 뛰어 매달릴 법한 높이였으나, 습격은 필시 어둠을 기다릴 것이었다. 놈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겨울과 장교는 낮은 말로 의사를 교환했다. 해군장교가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런 데 설치되는 장비들은 대개 핵심기능이 지면에서 이격되어 있을 텐데? 우리 기지에서도 최소한의 기준이 있었지. 야외에서 비바람을 맞아도 무방한 것들이었는걸. 저 설비실도 생긴 걸 보게. 지대를 높여두지 않았어. 내 예상이 옳다는 전제 하에, 누전이 발생하려면 수위가 적어도 한 자(拃 : 뼘)는 되어야 확실할 거야. 미국 놈들은 사소한 일로 고소를 해대니까. 여기 있는 물을 다 쏟아도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네만…….” “침수로 부족할 경우, 결국은 제가 직접 가서 전선을 끊어야겠지요.” “아니, 그건 너무 무모한…….”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탄 중교님께서는 엄호만 해주시면 됩니다. 호위 대상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으니까요.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따르겠습니다.” 한숨 한 번 쉬고서, 장교는 느리게 받아들였다. 우선 수조의 내구도를 확인해야 한다. 얼마나 두꺼울까? 겨울이 쇠지레를 단단히 쥐었다. 번쩍 들어 힘껏 내리친다. 콰직! 플라스틱 조각이 튀었다. 지렛날이 끝까지 박혔다. 손잡이를 비틀자, 보온재 좌우로 균열이 자라났다. 뽑은 뒤에 재차 내리친다. 깡! 이번에는 쇳소리가 났다. 플라스틱과 보온재를 벗겨내니 안쪽은 스테인리스였다. 찢어진 자리에 손을 넣어본 탄궈셩은 당혹스러워했다. 펼친 손가락이 전부 들어간다. 강판을 제외해도 어지간한 사격을 막아낼 두께였다. “불수강(不锈钢)이 5호미(mm)에 소료(塑料)가 반 자라니, 이걸 어떻게 부수나?” 위에서 뜯어봐야 소용없다. 측면, 아래쪽을 깨뜨려야 한다. 수조에 들어가 힘을 쓰기도 곤란했다. 아무리 겨울이어도, 물속에서 완력으로 강판을 뚫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일단은 바깥쪽 배수관을 쏴보는 게 좋겠습니다.” 겨울의 제안에, 해군중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 수압을 견딜 관이라면 인장강도가 높은 주철을 썼을 텐데…….” 그러더니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 젠장. 일단 해보고 판단해야겠군. 배수관은 어느 쪽에 있지?” 가장자리로 접근하기는 위험했다. 투척물은 둘째 치고, 도약한 구울에게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에도 겨울이 나섰다. 탄궈셩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아래 있던 놈들이 소년을 향해 아우성쳤다. 배수관을 찾기는 쉬웠다. 던져지는 투사체들을 피하며 조준선을 정렬한다. 겨냥하는 근처에서, 변종들은 팔을 들어 급소를 보호하며 흩어졌다. 어디선가 가져온 문짝을 방패삼는 놈도 있었다. 두두둑! 삼점사로 끊어 쏜 결과, 따다당, 불꽃이 튀었다. 곡면에 튕겨진 탄환이 가까이 있던 변종을 때린다. 그에엑, 그엑. 변종이 피를 게워냈다. 스스로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 모양. 쓰러져서, 억울한 표정으로 헐떡였다. 구멍 난 가슴으로부터 피가 솟구쳤다. 줄기가 긴 것은 인간보다 높은 혈압 탓이었다. 정작 굵은 관에는 얕은 흠집이 남았을 뿐이다. 겨울은 일단 물러났다. 지켜보던 장교가 채근한다. “어떻게 됐나?” “실패했습니다. 탄약이 넉넉하다면 조금 더 쏴보겠으나…….” 얼마나 더 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끼워둔 탄창은 이미 가벼웠다. 탄궈셩이 자신에게 남은 탄을 헤아려보더니,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다. “자신은 없지만, 아무래도 계산을 해봐야겠어. 관의 직경이 얼마나 되는 것 같던가?” “적어도 10리미(cm)는 넘어 보였습니다. 12리미 정도인 것 같군요.” “12리미? 굵기도 하군. 그럼 우리가 올라와있는 이 물탱크는 크기가 얼마나 될까?” 그는 배수관에 가해지는 압력을 계산하여, 그로부터 관에 요구되는 두께와 강도를 역산하려는 것 같았다. 해치 안쪽을 들여다보면 수심계가 있었다. 수조의 가로와 세로를 눈어림한 뒤, 수심계의 눈금을 곱하면 물의 부피가 나온다. 부피에서 질량을 뽑기는 금방이었다. 이어지는 암산이 까다로운지, 해군중교는 대검을 뽑았다. 밟고 선 탱크 겉면에 숫자를 새긴다. 끼기긱, 끼긱. 계산은 점차 복잡해졌다. 겨울은 그 모습을 보고, 과연 기술군의 장교답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해군인 만큼, 수압을 견디는 강재에 해박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계산이 끝났다. 중교는 방정식의 해에 칼을 박았다. 신경질적이었다. “안 돼. 두께가 거의 2리미는 될 거야. 이건 보창 사격으론 못 뚫어.” 보창(步槍)은 소총의 중국식 표현이다. 겨울이 질문했다. “같은 자리에 여러 발을 꽂더라도 어렵겠습니까?” “일단 표면이 유선형인데다, 안쪽에 차 있는 물과 압력이 충격을 흡수할 거란 말이야. 어지간한 장갑차만큼이나 단단하다고 봐야겠지. 철갑탄이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남은 탄을 전부 퍼부어도 될까 말까라네.” 총탄은 용도별로 구분된다. 철갑탄은 관통력이 높았다. 변종을 상대할 땐 기피되었다. 깔끔하게 뚫고 지나가는 까닭이다. 또는, 지나가지 않더라도 상처가 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종을 죽이려면 맞는 즉시 깨지거나 뭉개지기 시작하는 보통탄이 더 좋았다. 지금의 겨울과 탄궈셩에게 보통탄 뿐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또 한 가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겨울의 경험상, 관통력이 최대로 나오려면 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적어도 100미터 이상. 그 이하에선 탄자에 실리는 힘이 과하여, 깨지기 쉬웠다. “리, 자네 수류탄은 몇 발이나 갖고 있나?” “한 발 뿐입니다. 탄 중교님께서는?” “나도 하나 밖에 없네. 제길, 되는 게 없군.” 수류탄의 살상력은 파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관이나 물탱크를 파괴하긴 힘들었다. “아니, 수중폭발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두 개를 묶어 안쪽에서 터트린다면…….” 탄궈셩의 말은 뒤로 갈수록 독백이었다. 수류탄에 황색작약(TNT)이 얼마나 들어가더라? 110극(그램)이었나? 신형은 더 적던가? 중얼중얼. 그는 대검을 뽑아 몇 줄의 계산을 더했다. 그가 고민하는 원리는 겨울도 알고 있었다. 수중의 폭발은 공기 중과 다르다. 매질의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 폭발의 반경은 줄어들고 위력은 증가한다. 또한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어 좁은 범위에 여러 번의 충격이 가해진다. 계산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겨울은 탄궈셩에게 수류탄을 건네주었다. 그는 구속용 끈을 풀어 서로 다른 두 개의 수류탄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남은 끈을 살짝 뺀 뒤, 눈을 돌려 무게추로 쓸 것을 찾는다. 다행히 변종들이 도움이 되었다. 앞서 던져대었던 잡동사니들 가운데, 깨진 벽돌 조각이 있었다. 준비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탄궈셩은 갈수록 자신감을 잃었다. “이봐, 리. 이게 정말 잘 하는 짓일까?”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미안하지만, 내 계산이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아. 여러모로 엉터리였다니까! 두 발로 모자랄 수도 있고, 낭비일 수도 있어! 균열이 지나치게 작을 지도 모르지! 차라리 저놈들 머리 위에서 터트리고, 남은 탄으로 싸워보는 게 더 낫겠다 싶기도 하네…….” 두려움에서 비롯된 망설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성공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야. 축전기가 과연 정상일까? 정상이더라도 충전량은 충분할까? 변압기는? 1년 이상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을 물건들인데?” “괜찮을 겁니다. 실내에 비상전원이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미국은 오염지역에 대한 전기와 가스 공급을 끊어버린 지 오래다. 사고를 우려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비상전원은 건물 고유의 전력계통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보기에 태양광 패널 이외의 동력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상발전기가 따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시점에서 연료가 남아있을 리 없지.’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탄궈셩은 한숨과 함께 벽돌과 수류탄을 내놓았다. 겨울은 장교에게 잠깐의 경계를 부탁하고서, 해치 옆에 무릎 꿇었다. 한 쌍의 핀을 뽑는다. 수류탄 두 개를 동시에 놓아야 했다. 셋, 둘, 하나. 탁! 손잡이가 튕겨 올랐다. 강화된 청각에 심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벽 가까운 수면으로 무게추를 집어던졌다. 강속이었다. 더러운 물이 천장까지 튀었다. 겨울은 재빨리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셋, 둘, 하나. 콰릉! 폭발의 순간, 급수탑 모서리가 흐릿해졌다. 초점이 흔들린 사진처럼. 강한 진동 탓이었다. 해군장교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굉음이 흩어진 뒤에, 세찬 물소리가 이어졌다. 가장자리에 선 겨울이 유량을 확인했다. 됐다. “성공했습니다!” “정말인가?” 반색하는 탄궈셩. 겨울은 어설프게 나오는 물이 배수구로 다 빠질까봐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괜찮겠다. 탱크 벽면을 이루는 패널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나왔다. 너덜거리는 보강재 가장자리가 녹슬어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급류가 변종들을 휩쓸었다. 한 놈이 마침 동쪽 배수구 근처에서 허우적거린다. 겨울이 놈의 머리를 조준했다. 투둑! 이마가 깨진 놈이 바르르 떨었다. 물 빠지는 길 하나가 막혔다. 침수는 순식간이었다. 변종들은 놀란 짐승 무리 같았다. 그러나 감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배수구는 한 곳이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물이 빠질 것이었다. “탄 중교님! 전방에 제압사격 부탁드립니다!” “뭐? 바로 시작할 셈인가?! 단순히 지연되고 있을 뿐일지도 몰라!” “감수해야 할 위험입니다! 사격이 끝나는 대로 뛰어내리겠습니다!” 겨울 스스로도 탄을 뿌렸다. 한 놈 한 놈 정확히 죽이기보다는, 넓은 범위에 탄막을 뿌려 몸을 사리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간을 닮은 괴물들이 사선을 피해 흩어졌다. 웅크리고, 숨고, 엄폐한다.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통찰」이 전하는 바, 짐승들은 인간의 탄약이 소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다. 격류에 흩어진 범위까지 포함하여, 달려볼 법한 틈이 만들어졌다. 빈 탄창을 버리며 뛰어내리는 겨울. “갑니다! 엄호해주십시오!” # 157 [157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4-2) 좋다. 격류에 흩어진 범위까지 포함하여, 달려볼 법한 틈이 만들어졌다. 빈 탄창을 버리며 뛰어내리는 겨울. “갑니다! 엄호해주십시오!” 착지하는 첫 발에, 소총의 마지막 탄창을 삽입한다. 사냥감 하나 떨어진 것을 발견한 변종들이 즉각 반응했다. 섬세하진 못할지언정 빠르기는 인간 이상이다. 제 반응에 못 이겨 반대로 구르는 놈도 있었다. 캬아아악! 창백하게 썩은 것들의 이빨이 누렇게 도드라졌다. 겨울의 시야는 물살을 밟고 달려오는 것들로 가득찼다. 소총을 한 손으로 들었다. 남은 손으로 묵직한 쇠지레를 휘두른다. 붕-! 베타 구울이 상체를 틀었다. 궤도가 어긋난다. 괜찮았다. 피하라고 한 공격이니까. 균형 잃은 구울이 뒤로 기울었다. 치열한 갈망으로, 겨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닿지 않았다. 한 치의 여유. 내려간 쇠지레가 놈의 오금에 걸렸다. 확 당긴다. 팽그르르 도는 괴물을 지나쳐, 겨울은 빠르게 가속했다. 무수한 질주가 물보라를 만들었다. 물보라 위에 무지개가 피어났다. 무지개가 겹치며 겨울의 전면을 막았다. 괴물들의 스크럼이었다. 겨울은 도약하며 몸을 눕혔다. 좌아아악- 굶주린 역병들의 험악한 손짓 아래로 미끄러져, 다리를 치고 지나간다. 완전무장한 소년의 충돌은 두 변종을 무너뜨렸다. 여력은 충분했다. 부패한 육체에 깔리지 않았다. 속도가 죽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다음으로 오는 놈의 머리를 쏜다. 투두둑! 물 아래 잠겼던 총에서 수증기가 폭발했다. 덕분에 위력이 줄었어도, 총탄은 여전히 강력했다. 목이 휘꺽 돌아가는 괴물. 겨울의 뒷굽이 놈의 발끝에 걸렸다. 동시에 겨울은 두 팔로 땅을 쳐냈다. 관성과 반동으로 솟구치며, 뒤로 넘어가는 놈의 머리에 쇠지레를 꽂았다. 완력으로 끌어서, 탄력으로 중심을 회복한다. 그 반동으로 죽은 괴물이 내팽개쳐졌다. 좌측에서 접근하던 놈들이 엉키고 만다. 시체를 선물 받은 베타 구울이 포악하게 포효했다. 새로 다가오는 장애물은 태양광 패널이었다. 겨울이 도약했다. 패널 한 복판을 밟고, 다음으로 모서리를 밟고, 그 다음 패널까지 뛰었다. 모서리를 발판삼아 달린다. 가속은 평지와 다르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근접하는 것은 베타 구울 뿐이었다. 순수한 근력으로는 겨울조차 둘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강화종들. 놈들은 첫 패널을 쉽게 극복했다. 다만 균형감각은 겨울에 미치지 못했다. 모든 변종들이 그렇듯이. 쾅! 속도를 죽이지 못한 녀석이 다음 패널에 격돌했다. 인간을 넘어선 질량과 인간을 넘어선 속도. 철골을 짜 맞춘 지지대가 통째로 붕괴했다. 판을 밟고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머지가 그 자리를 통과했다. 그 뒤에선 패널이 줄줄이 무너졌다. 동족을 압사시키며 밀어붙이는 놈들이었다. 거친 숨결과 괴성의 합주가 겨울의 배후로 가까워졌다. 변종이라고 다 같지 않았다. 우수한 숙주는 우수한 변종의 토대였다. 그러므로 재능을 타고난 베타 구울은, 직선주행에서 소년에게 필적하는 것 같았다. 이는 또한 무장과 복장의 차이였다. 소년은 몸무게의 절반을 지고 있다. 구울은 알몸이었다. 겨울이 반전했다. 상체를 시작으로 전신이 돌아선다. 발을 디뎌, 달리던 방향으로 미끄러지며, 그 상태로 소총을 조준했다. 탄피가 튀었다. 안구가 깨졌다. 절명하진 않았다. 고통에 겨워 전신의 혈관이 솟구친다.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다가, 뒤이어 오던 동족에게 치여 쓰러졌다. 마구 짓밟혔다. 물속으로 들어간 비명은 부글거린 끝에 계속되지 못했다. 탄궈셩은 스스로를 지키느라 바빴다. 소총탄이 바닥났는지, 권총을 쏘고 있었다. 설비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은 측면에 있었다. 오래된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철제 빗장을 사격으로 끊는다. 그런데 문이 벌컥 열렸다. 갇혀있던 놈인 모양이다. 깡말랐다. 대사억제로도 완벽하게 막지 못한 소모의 흔적. 피하기엔 너무 가까웠다. 제대로 공격하기에도 여유가 없다. ‘목은 멀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그래도 아래턱은 사정권이다. 겨울은 쇠지레를 하프 스윙으로 휘둘렀다. 빠악, 하고 턱이 떨어졌다. 격돌. 온 몸으로 부딪혀서 놈의 관성을 상쇄시켰다. 겹쳐진 채로 몸을 날린다. 쿵 떨어지는 충격으로 놈을 짓눌렀다. 캐액, 캑! 괴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겨울도 시야가 핑 돌았다. 한 번 휘청이고 일어나, 힘 들어간 발길질로 누운 놈의 목줄을 으깬다. 우드득. 발아래에서 경추가 어긋났다. 실내는 그리 넓지 않았다. 자그맣게 웅웅대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겨울은 어떤 것이 변압기이고 어떤 것이 배터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어느 것이 고압전선인지도. 패널에서 들어오는 선 하나하나는 전압이 약할 것이었다. 기계적인 지식 역시 기술습득으로 얻을 순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경험 잔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어쨌든 감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디든 올라가야 한다. 비록 전투화가 절연체이긴 해도, 온 몸이 흠뻑 젖어서는 의미가 없었다. 벽을 차고 환기구에 매달렸다. 몸을 틀어 천장의 배관에 오른다. 여러 줄기 겹쳐, 의지하기 충분한 폭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혹여 바닥에 닿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 자체가 금속이어도 페인트를 칠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굵은 전선을 찾는다. 총구가 흔들렸다. 질주의 여파로 남은 호흡이었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 조준선이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두두둑! 두둑! 물에 얕게 잠긴 전선들을 닥치는 대로 끊는다. 총열에선 계속해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철컥, 철컥. 약실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한 소리. 변종들이 입구로 밀려들어왔다. 겨울은 권총을 뽑았다. 두두두둑! 떨어진 탄피들이 물방울을 튀겼다. 베타 구울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 뛰지 못한 나머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쐈구나. 겨울은 여러 발을 마저 쏘았다. 버팀대 어긋난 기계 하나가 통째로 쓰러진다. 어디선가 매캐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피어 올랐다. 퍼벅, 퍽. 넘어진 기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제 겨울이 몸을 뒤집었다. 눕기에도 좁은 배관 위에서 소년의 전투력은 제한적이었다. 물론 구울도 마찬가지. 걷어찰 때마다 고개가 꺾이며 침을 흘린다. 꽈득. 꾸드득. 놈이 전투화 굽을 깨물었다. 겨울이 전력으로 떨쳐냈다. 잇몸에서 으직거리며 이빨이 떨어져나온다. 송곳니는 굽에 박힌 채였다. 진동이 느껴졌다. 고정축에서 돌가루가 쏟아졌다. 무장한 군인 하나, 근육 꽉 찬 괴물 하나가 벌이는 난투에 나사가 헐거워진 것. 겨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래도 가루가 들어가, 눈꺼풀 안쪽이 뻑뻑했다. 삐걱대던 파이프가 마침내 떨어졌다. 더걱, 쾅! 한 쪽만 고정된 모양새. 비틀린 경사가 된 배관 위에서 소년과 괴물이 미끄러진다. 권총을 놓쳤다. 가까스로 요철을 움켜쥔다. 떨어진 고정축이었다. 괴물은 겨울의 전투화를 움켜쥐었다. “윽!” 소년은 제멋대로 경련하는 근육을 느꼈다. 부들부들 떨며 돌아보면, 괴물의 상태는 겨울보다 훨씬 심각했다. 입에서 하얀 거품이 끓었다. 수면에 무릎이 닿아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육체의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신호다. 아니, 이미 실시간으로 상실하는 중이었다.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감전이라, 강화된 능력으로 견디고 있을 뿐. 겨울은 힘겹게 몸을 끌어올렸다. 괴물이 매달린 상태 그대로였다. 일단 전류에서 벗어나는 게 급했다. 함께 벗어나더라도, 회복은 괴물보다 빠를 것이었다. 천장에 붙어있던 지지대 사이로 몸을 빼냈다. 이 시점에서 시야가 어두워지기를 그쳤다.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근력으로, 계속해서 배관을 기어오르는 겨울. 구울의 손길이 느슨해졌다. 거품을 물고도 놓지 않던 손아귀는 괴물의 의지가 아니었다. 감전에 의한 수축이었을 뿐. 다리를 흔들자, 결국 떨어져 나간다. 물보라가 요란하게 튀었다. 콜록, 콜록. 폐의 경련으로 나오는 기침. 고통의 진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 느낌이 싫으면서도 반가웠다. 호숫가에서 보낸 밤, 산사태에 매몰된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몸 상태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감전으로 인한 부작용으로서의 불변보정은 감지되지 않았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으나, 물이 빠졌을 즈음, 통상적인 전투를 감당할 정도까지는 힘과 감각이 돌아왔다. 겨울은 신중하게 내려왔다. 물 빠진 자리만을 밟으면서. 권총도 회수했다. 변종들은 제각각의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변색된 사체도 있었으나,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리! 자네 괜찮은가?” 탄궈셩의 외침은 고양되어 있었다. “네…….” 대꾸하려던 겨울은, 입을 다물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장교가 보지 못하도록 돌아서서, 신속하게 약을 꺼내 삼킨다. 우득우득. 익숙해진 쓴맛이었다. 칼칼한 불쾌감이 목구멍 안쪽으로 벌레처럼 기어들어갔다. ‘다행히 물은 안 들어갔네.’ 중요한 만큼, 주머니에 넣고 굳게 잠가두었던 것이지만. 정 급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싶었다. 장교가 가까워졌다. 무릎을 짚고 힘겨운 기색을 연기하는 겨울. 호흡을 불규칙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탄궈셩이 마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순수한 염려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봐, 정신 차리게! 우리가 해냈어! 해냈다고! 이제 와서 잘못 되면 어쩌란 말인가!” “조금.” 말을 한 번 삼킨 뒤에, 느릿느릿, 겨울은 몸을 바로 세웠다.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그런가? 정말로 다친 곳은 없나? 어디 물리진 않았고?” “한 군데 물리긴 했습니다.” “뭐?!” 기겁을 하며 물러나는 장교에게, 겨울이 전투화를 보여주었다. 이빨자국 가운데 하얗게 도드라지는 한 점이 보인다. 아직까지 박혀있는 시귀의 송곳니였다. 장갑 낀 손으로 비틀어 뽑는다. 흡혈귀의 것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안쪽으로 휘어져서, 살을 물렸다간 치명적일 것 같다. “어떻습니까? 기념품으로 가지시겠습니까?” “脑残! 大脑进水! 해도 무슨 그런 농담을 하나! 정말인줄 알았잖아!” 머저리, 물 새는 대가리. 그렇게 외치며 분개한 장교는, 한참동안 씩씩거리더니, 하늘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실성한 사람 같았다. “이게 뭐야. 왜 화가 나다가 마는 건데? 응? 하하하!” 그는 한참을 웃다가, 눈물 맺힌 눈으로 겨울을 본다. “대단해. 자넨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끝도 없이 감탄하게 되는군. 그래, 비슷한 걸 본 적 있지. 그 유명한 한겨울. 자네는 마치 그 남자 같았어.”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겨울은 미약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저를 그런 솜털도 안 빠진 녀석(毛孩子)과 비교하십니까?” “……응?” 변장한 인상이 험악하고, 바꿔놓은 목소리가 거칠기 짝이 없는 겨울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보여준 실력과 과단성은 또 어떠한가. 탄궈셩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나는 어디까지나 칭찬할 생각이었네만…….” “저는 입대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놈이 영웅 취급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와 제 전우들만 하더라도 이라크에서 몇 년을 싸웠건만……. 진짜 베테랑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운 좋은 녀석은 대우 받는 꼴이 웃기지 않습니까?” 커트 리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탁월한 보훈제도에도 불구하고, 노숙자 생활을 하는 참전용사들이 있었다. ‘보훈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전쟁의 정신적 상처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반증이지만.’ 엘리엇 상병이 말했었다. 폭죽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선다고. 이게 양호한 경우였다. 참전 미군의 절반 이상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다닌다. 커트 리는 가상의 인물일 뿐이다. 그러나 언젠가, 초면의 참전용사가 자신을 증오하더라도, 겨울은 뜻밖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중교님. 제게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용병 흉내를 내고 있을 따름이지만, 실력과 긍지에서 놈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이쯤이면 조국에 대한 실망감이 적당히 전달 되었으려나. 겨울은 시선을 차게 식혔다. 탄궈셩이 열렬히 끄덕였다. “맞아. 그런 소국 출신 애송이의 활약 따위, 태반이 조작된 내용일게 뻔한 데 말이야. 본관이 인정하지. 자네야말로 진짜배기일세. 중화의 피가 어디 가겠느냔 말이야.” “이래 뵈도 전 일단 미국인입니다.” “사람의 뿌리는 국적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야. 시민권이 있다고 부모까지 바뀌던가?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자네에게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거야.” “……기대하겠습니다. 그보다 일단, 확인사살부터 했으면 합니다. 이것들 가운데 아직 숨 붙어 있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음, 그렇겠군.” 해군장교는 지연된 피로감을 드러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뭔가 남았을지 모른다는 불안. 그는 어느 변종의 시체로부터 골프채를 강탈했다.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 매장 내에서 팔리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사살이라곤 해도 총을 쓸 순 없었다. 옥상에선 한동안 파열음만 이어졌다. # 158 [158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5) 오르카 블랙은 CIA의 샌프란시스코 지부였다. 그러므로 네이선 채드윅은 지부장으로 불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팀장이라는 애매한 호칭을 고집했다. “화합을 위한 노력입니다, 중위. 델타 포스나 네이비 씰 같은 특수부대원들은 정보국 요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자업자득이니 어쩌겠습니까마는.” 예쁘게 보여야지요. 채드윅은 그렇게 말하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말하는 도중, 그는 어느 버튼을 딸깍 딸깍 눌러대고 있었다. 유선으로 연결된 리모컨이었고, 반대쪽 끝은 정체불명의 상자로 이어졌다. 상자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덜컹거렸다. 그리고 답답한 소리가 났다. 겨울은 상자의 내용물을 알 것 같았다. 이것은 4월의 첫 번째 밤에 있었던 일이다. 탄궈셩 호위 임무를 앞두고, 겨울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러나 시간가속은 금세 깨어졌다. 채드윅이 소년장교를 호출했다. 통제실에서 만난 팀장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겨울을 블랙 사이트 덱(Black Site Deck)으로 이끌었다. “자업자득이라는 건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겨울의 질문에, 채드윅은 버튼을 꾹 누르며 답했다. “잘못된 첩보로 허탕을 치게 만드는 거야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덜 된 일부 인원들이 꽤 거만하게 굴었습니다. 일부라곤 해도, 결국은 CIA 전체를 대변할 수밖에 없지요. 리비아의 참극 이후로 욕을 많이 먹었어요.” 그러면서 껄껄 웃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부연을 붙였다. 리비아의 참극이란 12년에 있었던 미 대사관 테러 사건을 뜻한다고. 겨울도 얼핏 들어보긴 했다. 중앙정보국의 미흡한 대처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던가. “중위, GRS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보기만 했네요.” GRS는 SAD와 더불어 CIA가 보유한 양대 무장집단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소모품처럼 다뤘지요. 공식적인 임무든, 비공식적인 임무든 말입니다. 헌데 그 친구들은 온갖 특수부대에서 사지를 헤치고 나온 역전의 용사들이었거든요. 그러니 후배들의 여론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지요.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밖에요.” 딸깍딸깍. 이 와중에 장난처럼 버튼을 눌러대는 소리. 겨울은 인상을 찌푸렸다. “깁슨 감독관은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계신가요?” “예, 뭐. 이 정도는 작전에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빙글빙글 웃는 팀장은 사악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자 속에 들어있는 사람의 의견은 많이 다를 것이었다. 과연 의견을 물어도 좋을 상태일지는 모르겠지만. CIA 샌프란시스코 작전본부, 통칭 「피쿼드 호」에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많았다. FBI 감독관인 조안나 깁슨 조차도 모든 갑판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출입이 허락된 것은 장정 9호 추적 작전, 「페어 스트라이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구역들 뿐. 그러므로 겨울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블랙 사이트 덱이라…….’ 누적된 종말을 통해 알게 된 바, 블랙 사이트는 중앙정보국이 ‘강화된 심문 기술(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을 사용하는 비밀스러운 장소의 명칭이었다. 이런 장소가 미국 본토에도 존재했다고 들었다. 즉, 자국민을 대상으로 고문을 자행했다는 뜻. 여기에도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채드윅이 겨울을 불러온 이유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제게 하실 부탁이라는 게 뭔가요? 임무투입을 앞두고 피로를 남기고 싶진 않네요.” 겨울의 말에 팀장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그런 말씀을 들으니 우리 중위님이 사람처럼 느껴지는군요. 사흘을 철야로 견디고도 휴식을 반납하시더니.” 그가 언급하는 것은 첫 적응기간에 있었던 일이었다. 파울러 대위에게 시험 받았던 일주일. 최후의 3일간은 수면이 허용되지 않았다. 해병대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훈련소에서는 그나마 몇 시간이라도 재워주는 과정이었으나, 대위는 한 층 더 가혹하게 굴었다. “질문에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돌리지 말라는 요구에 팀장은 리모컨을 내밀었다. “누르십시오.” “……이건 무슨 의미인지.” “필요한 일입니다.” 건네는 리모컨을 받아들고서, 겨울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채드윅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긴 했지만, 난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다만 정상인으로 보이면 여러모로 곤란하거든요. 업무적으로나, 양심상으로나.” 짧은 말에 긴 의미였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부터 살해당할 각오를 세우는 사람들. 그러나 이것이 진심일까? 속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가면을 벗을 때마다 새로운 가면이 나타날 뿐이었다. “나도 알아요, 중위. 고문이 옳지 않다는 것쯤. 하지만 이런 시대잖습니까. 사람을 벗어나지 않고는 사람으로서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요, 애국은 정의가 아니지요. 허나 삶의 필수품입니다. 누르십시오. 그래야 내게서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채드윅이 손짓했다. 겨울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시험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팀장님.” “…….” “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 대한 판단이 이미 끝났다는 뜻 아닙니까? 난민구역에서 저는 살인자였습니다. 몰랐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정보국이 그토록 허술한 집단이겠느냐는 지적. 이는 채드윅을 웃게 만들었다. “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지요. 나는 그저 확신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 대의를 위한 필요악을 용납할 것인가. 작전수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겠는가. 아프가니스탄의 목동과 네이비 씰의 일화는 아실 겁니다. 여기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거든요.” 팀장이 언급한 것은 아프간에서 비밀작전 도중 민간인과 마주친 미군 특수부대의 이야기다. 그들은 고뇌했다. 기밀유지를 위해 민간인들을 죽여야 할 것인가. 그 중엔 아이도 있었다. 미군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참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겨울이 응답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저를 작전에서 제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거야 원.” 채드윅이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중위님 당신을 여기로 보낸 건 랭글리의 실수일지도 모르겠군요. 책상물림들 하는 짓이 어련하겠습니까만. 그치들이 한 때 현장에서 뛰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그리로 가지 않는 이유지요. 같은 퇴물이 될까봐.” 랭글리는 CIA 본부의 소재지였다. 결국 채드윅은 겨울에게 진정한 용건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겨울의 말처럼 작전에서 배제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날 밤의 대화를 곱씹은 겨울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그가 계획하는 필요악이 뭐지?’ 예감이 정확하다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었다. “리,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탄궈셩의 목소리. 겨울은 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말 없는 겨울을 염려하는 중이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중이었습니다.” 채드윅이 무슨 일을 꾸미든, 작전 자체가 수월하게 풀린다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탄궈셩의 모친, 해군중장 시에루가 지니고 있다는 베이더우 위성의 열쇠. 그것만 확보하면 미 본토에 대한 핵위협을 극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다. ‘장정 9호를 잡는 것보다는 못할 테지만…….’ 베이더우는 중국판 GPS였다. 아직 GPS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2020년 완성을 목표로 구축되고 있었기에. 「종말 이후」가 개시되는 시점에서, 동북아와 오세아니아, 인도에 이르는 영역 한정으로 좌표를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CIA가 파악한 바, 군사목적으로는 달랐다. 세계 어디든 핵탄도탄 유도의 최종과정에 관여한다. 만약 탄도탄이 떨어질 때 좌표를 비틀어버릴 수 있다면? 탄두는 원래의 표적에서 한참 빗나갈 것이었다. 적어도 수십 킬로미터 바깥으로. 미국은 이 위성들을 파괴하는 방안도 고려했었다. 그러나 남은 중국군 세력이 이를 감지할 경우,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위성이 없다고 미사일을 못 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쿠궁, 쿵. 환기구가 있는 방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놈들이 올라오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군. 그래봐야 소용없겠지만.” 장교가 말은 이렇게 해도, 목소리에서 떨리는 불안감이 느껴진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꽉 끼도록 구겨 넣었으니 쉽게 뚫진 못할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떠날 때 까지는.” 환기구에 시체를 구겨 넣었다. 감전사한 변종들을 포개고 접어서 수직통로에 쑤셔 박은 것. 애초에 넓은 통로도 아니었다. 사지를 제대로 펼 수도 없는 공간에서, 도약해야 닿을 높이의 장애물들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까? 올라오려면 긴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인데.” 장교가 시가지 동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버려진 미군 차량들이 보이나? 저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한 번 보게.” 그는 망원경을 내밀었다. 겨울은 사양했다. 맨눈으로도 보이는 거리였다. 교차로에 버려진 차량은 여럿이었다. 그 중엔 전차도 존재했다. 유조차가 곁에 멈춰서 있었다. “급유관이 꽂혀있군요. 보급 도중에 공격당한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고선 전차가 변종들에게 당할 이유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함락은 그럼블 출현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었으니. 움직이는 전차는 변종을 상대로 무적이었다. 다만 그 전투력은 보급체계가 온전할 때에만 발휘된다. 도시 전체를 휩쓰는 혼란의 와중에, 기름 퍼먹는 괴물이 얼마나 효율적이었을지 의문스러웠다. “차량에 장착된 화기를 탈거해서 쓸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저 탄극(坦克, Tank)에 기름을 채워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무슨 수를 써서든 남쪽으로 2공리(公里 : 킬로미터)만 가면 돼. 그러면 해상에서 화력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이거야말로 최고의 결말 아닌가?” 그의 말처럼, 앨러미더 섬은 좌우로 길고 상하로는 좁았다. 현재의 위치가 섬의 북안에 가깝긴 하나, 남안까지 고작 2킬로미터에 불과할 만큼. 무거운 전차로도 순식간에 주파 가능한 거리였다. 설령 베타 그럼블이라도 60톤짜리 강철의 질주를 막을 순 없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중교님. 우리는 저 전차의 기동암호를 모릅니다.” 기계적으로 시동을 걸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장비가 작동하지 않는 현대전차는 눈 먼 관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내놓은 채 주행하기도 어렵겠고. “암호……. 그래, 그랬었지. 적대장비라서 깜박했군. 젠장. 라오메이(老美)놈들. 군의 현대화도 좋지만, 전면전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게 아닌가? 탄극수(坦克手 : 전차병)들이 전사한 뒤에 다른 병사들이 탑승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애초에 도로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모르고요. 전차의 소음을 감안하면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아스팔트는 곳곳이 깨져있었다. 수해가 여러 차례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도로 한복판에 박살난 주택이 있는 경우도 보였다. 강풍이 밀어냈을 것이다. 그 사이로 물 흐른 골이 선명하게 패여 있다. 여전히 물이 고인 곳도 많았다. 차량을 타는 건 무리라고 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해저터널까지 침수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오클랜드로 이어지는 웹스터 터널, 포지 터널 모두가 붉은 물에 잠겨있었다. “그럼 어찌 해야 좋겠나?” “일단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는 것까지는 찬성입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무방비하니까요.” “그 후엔?” “저는 북쪽 수로로 빠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거리도 가깝고, 사냥개가 여기서 넷이나 죽었으니까요.” “다른 사냥개들이 있을 텐데?” “전에 보지 못했던 신종이었습니다. 숫자가 벌써부터 많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도…….”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장교에게, 겨울은 시가지 서쪽을 가리켰다. 풍경이 지워지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노을빛 안개 탓이었다. 조만간 여기까지 도달할 것처럼 보인다. “다행히 오늘의 안개는 꽤 짙어질 것 같습니다. 운을 걸어보기에 충분한 조건이죠. 아직 수영을 하는 변종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설령 남은 사냥개가 있어 우리의 냄새를 맡더라도, 우리가 강 한가운데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도올(그럼블)의 투척은 명중률이 낮을 겁니다.” 교각 폭파작업 도중 발각되었을 때도 그럼블이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의 변덕스러운 안개는 그날따라 예상에 한참 못 미쳤기에. 개가 냄새를 맡았고, 거대한 괴물들이 작은 괴물들을 던져댔다. 팔다리 맹렬히 허우적대며 날아오는 투사체들은 빠져 죽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다리가 없는 방향으로 간다면 괴물들과의 조우 확률이 많이 낮아질 것 같습니다.” “의미를 모르겠군.” “놈들이 다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뜻입니다.” “설마.” 탄궈셩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겨울이 판단하기로, 트릭스터에겐 있을 법한 가정이었다. 놈은 기초적인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지 않던가. # 159 [159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6) 안개는 느리게 밀려왔다. 주택 하나를 삼키는 데 몇 분씩 걸릴 지경이었다. 겨울은 풍향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했다. 늦어지는 오후, 샌프란시스코의 바람은 대개 서풍이지만, 이따금씩 북풍이, 드물게는 남풍과 동풍이 불 때도 있었다. 그랬다간 당장의 탈출계획은 물 건너간다. 적어도 새벽의 어둠을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환경적응」이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 겨울은 생존계열의 범용기술이 아쉬웠다. 수준 높은 「환경적응」은 적대적인 환경에 대한 저항력을 부여하는 한편, 주변 환경의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기후정보였다. 그러나 쓸 만하려면 적어도 천재의 영역이어야 한다. 범용기술의 다른 예가 「통찰」이었다. 소모가 심대하다. 정부체계가 잘 유지되는 세계관에서, 생존계열은 항상 계륵처럼 느껴졌다. 해군장교 또한 초조하게 서쪽을 응시했다. “저게 여기까지 오기나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진인사대천명입니다. 기회가 올지 의심하기보다는,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준비를 해두는 게 낫습니다. 지형과 이정표는 다 숙지하셨습니까?” “……하긴 했지만, 물어보니 자신이 없어지는군.” 짙은 안개 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십상이었다. 길을 잃었을 때 위치를 식별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출발하기 전 지형지물을 눈에 새겨둘 필요가 있었다. 이는 서로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합류를 꾀할 방법이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이정표는 한 구의 시체였다. 이름은 웨이지아잉(魏嘉瑩). 계급은 하사. 교차로에서 죽은 해병 간부였다. 다른 시체들과는 복식과 무장으로 차별화된다. 유감스럽게도, 죽기 전의 해병에겐 남은 탄약이 없었다. 그는 최후의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터지고 먹혀서 처참해진 시체. 장교는 첫 이정표를 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녀석이었는데, 안타깝군.” 탄궈셩이 드러내는 상실감은 의외로 깊었다. 그러나 겨울이 느끼기로, 그것은 슬픔과 거리를 두는 탄식이었다. 죽은 사람보다는, 그를 잃은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는 느낌. 이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시에루 해군중장의 친위대 격이었을 것이다. ‘신뢰하는 무장병력 치고 전투력은 별로 좋지 못했지…….’ 명칭은 해병이지만 일반적인 해병대는 아니었다. 중국에서의 해병은 다만 해군 소속이라는 뜻일 뿐. 육상 전투를 위한 부대로서 해군육전대가 따로 존재한다. CIA가 통신을 감청한 바, 시에루 해군중장 휘하에는 육전병력이 없었다. “리.” 장교가 새삼스럽게 겨울을 부른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우리가…….” 그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갈등하는 기색이다. 두려움도 묻어났다. 그가 꺼내지 못하는 말을 짐작하며, 겨울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안개는 아직 멀다. 대화가 끊어진 것일까? 싶을 만큼 망설인 뒤에, 탄궈셩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우리만으로 임무를 수행할 순 없을까? 모든 다리를 폭파하지 않아도 좋아. 단 하나, 가장 가까운 하나만이라도 어떻게 무너뜨린다면, 여기서 죽어간 부하들의 희생도 헛된 것만은 아닐 거야. 나 혼자 살아서 돌아간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말일세…….” 좋은 변명이었다. 다리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아무리 해군이라지만, 장교쯤 되는 인물이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었다. 결국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겨울은 이를 대놓고 지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다만 모르는 척, 실익을 들어 반박한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중교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다리를 파괴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잖습니까? 그럼으로써 이 섬을 광역권에서 분리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러니 끊으려면 셋 다 끊어야 합니다.” “우리 위치에서는 가장 안쪽에 있는 다리가 가깝네. 그거라도 끊어놓으면 다음에 올 이들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겠나? 침투해야 할 거리가 대폭 줄어들 테니까. 임무가 쉬워질 거야.” 앨러미더와 오클랜드를 연결하는 세 개의 다리는 섬 동쪽에 몰려있었다. 이는 서쪽에 선착장 시설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반면 두 사람의 위치는 섬의 중부였다. 그나마도 서쪽으로 치우쳐있다. 중교가 가깝다고 말하는 다리, 파크 스트리트 브릿지는 4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고. 육로와 수로의 차이는 있겠으나, 섬을 종단하는 것의 배 이상을 움직여야 한다. 겨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뇨. 오히려 더 위험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역귀들은 다리의 가치를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를 폭파하면 경각심만 일깨우는 꼴이 되겠죠. 사실 지금도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설치한 폭약이 그 위치에 그대로 있을까요? 놈들은 인간의 무기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두 개의 다리에는 폭탄 설치가 완료되었다. 지금의 상황을 빚어낸 것은 세 번째 다리에서의 실패였고. 안전한 철수를 위하여 모든 교량을 동시에 폭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선 어떤 다리도 붕괴하지 않은 상태다. 탄궈셩이 미간을 좁혔다. “우리의 폭약은 미군이 쓰는 것과 생김새가 다른데도?” “유추 가능한 범위겠죠.” “가능성일 뿐이잖나.” “그렇습니다. 가능성일 뿐입니다. 중교님께서 판단하십시오. 그게 지휘관의 역할이니까요.” 라고 말은 하지만, 탄궈셩의 두려움은 겨울의 편이었다. 이번 임무가 세력다툼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옳다는 전제 하에, 탄궈셩으로서도 임무 자체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을 터였고. 다만 겨울이 그의 결정을 촉구한 것은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움직이는 도중 다른 소리를 하면 곤란하거든.’ 물론 스스로의 결정을 번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겨울이 강요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두어야 나중이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장교의 신뢰를 얻어야 할 입장이었다. 진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인가?” 장교는 미심쩍어하고 있었다. 정보국이 상정한 범위였다. 모범답안은 이미 새겨두고 있다. 겨울은 커트 리를 연기했다. “그게 제가 받은 의뢰였습니다. 복귀할 때까지는 명령에 따릅니다.” “용병으로서 거기까지 한단 말인가? 납득이 안 가. 자네는 여자에 관심도 없다던데, 고작 식량과 탄약, 노예 몇 명에 목숨을 건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네.” 그가 말하는 노예란 미국 시민들이었다. 미국인은 골든게이트 내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품으로 통한다. 모두가 오해하고 있었다. 오르카 블랙의 영역에 물자 공수가 잦은 것은, 그만큼 많은 미국인을 보호하고 있으며, 이를 기초로 미군과 협상을 했기 때문이라고. 겨울이 다시 답했다. “말씀하신대로, 그깟 것들은 목숨을 걸만큼 대단한 게 아닙니다.” “하면 어째서인가? 아니, 목숨을 구해준 자네를 의심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궁금할 뿐일세. 이런 세상에서조차 신용을 지키려는 이유가……. 솔직히 내가 자네였다면, 나처럼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는 오는 도중에 쏴버렸을 거야.” 아니라고 해도 의심하고 있다. 의심의 뿌리는 두려움이었다. 남은 여정에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간파」에 의한 「통찰」이 겨울의 속 읽기를 뒷받침했다. “제가 지키고 싶은 건 유대입니다.” “유대?” “네. 이젠 전장에서밖에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전우들이 있습니다. 전역한 뒤엔 개 취급을 받았죠.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후에, 그 친구들이 갈 곳은 정신병원이나 교도소뿐이었습니다. 군으로 복귀하고 싶어도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니까요.” 장교는 커트 리의 내심을 이해했다. “즉, 흑호경방(黑虎鯨幇, 오르카 블랙)은 전우들에게 있을 곳을 만들어주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말이 그렇게 되는군요.” 겨울은 수긍했다. 제 것이 아닌 인생을 꾸며진 감정으로 드러내며. “예, 맞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만, 범죄 경력이 있는 전우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을 겁니다. 싸움터는 매양 이 모양인걸요. 저는 그들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서로 목숨을 구해준 사이입니다. 이런 시궁창이야말로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일지도 모르지요.” 일전에 조국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내놓은 터라, 장교는 겨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아니, 믿는 정도를 넘어서 감명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커트 리라는 인물에게 품고 있던 호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비이성적인 호감이다. 전장은 흔들거리는 다리보다 훨씬 더 두려운 장소이니까. 장교가 말했다. “언젠가는 의뢰가 아니라, 의리로 나를 따라줬으면 좋겠군.” “그럴 만한 모습을 보이신다면야.” 커트 리의 농담이 장교를 웃게 만들었다. 경직되어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미소였다. “자네 의견이 맞는 것 같아.” 탄궈셩은 무모한 욕심을 놓아주었다. “괜한 말로 심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네. 임무는 포기하지. 살아나가는 걸 최우선으로 하세. 월왕 구천은 부차의 똥을 핥고 살아남았어. 목숨만 붙어있다면 기회는 다시 올 거야.” 목소리가 갈수록 줄어든다. 뒤쪽은 겨울보다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다짐에 가까웠다. 근거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였다. 무의식에 깔린 우려가 드러난 게 아니라면. 이번 작전의 실패로 규탄을 받아, 파벌싸움에서 불리해질 것이 걱정인 게 아닐는지. 겨울의 추측이었다. 부하들을 다 죽인 지휘관이 혼자만 살아서 돌아오는 건 비난 받기에 충분한 사유였다. 대화하는 사이 바람이 강해졌다. 습도 높아지는 공기 탓에 차갑게 느껴진다. 4월이면 봄이 무르익을 시기이지만, 저물녘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기온은 낮은 편이었다. ‘거의 늦가을, 혹은 초겨울 수준인데,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겨울이 우려하는 것은 탄궈셩의 체력이었다. 지금도 볼이 붉고,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야 전투의 후유증이라 여겼으나, 어쩌면 기운이 소진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뭔가?” 의아해하는 장교에게, 겨울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 바를 권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식사를 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은 뭔가를 먹을 만한 상태가 아니야.” “그래도 드십시오.” 장교는 한숨을 쉬며 받아들었다. 어느 나라든, 군인에게 식사는 의무였다. 껍질을 깐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일전에 누군가 똥 뭉쳐놓은 것 같다고 했던 덩어리가 드러났다. 장교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양귀자들 입맛은 영 천박하단 말이야.” 전투식량에서 나온 물건이 맛있을 리 없다. 겨울은 그의 마른 입술을 보고 수통을 내밀었다. 아까 한 번 사양했던 탄궈셩이었으나, 이번엔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그가 꾸역꾸역 먹는 사이, 겨울은 계속해서 지형을 눈에 새겼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수로는 직선거리로 무척이나 가까웠다. 북쪽의 개활지, 방치된 건설현장을 통하면 1분 내로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극도로 위험했다. 자리를 지키는 몇 개체의 그럼블이 보였다. 주변에 던질 것도 많았다. 컨테이너, 혹은 주차된 자동차들. 장교와는 우회하기로 합의를 봤다. 버려진 진지와 초소들을 보니 새로운 우려가 떠오른다. “중교님. 파상풍 예방접종은 언제 마지막으로 받으셨습니까?” “글쎄? 맞긴 맞았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먹다 말고 고민하는 탄궈셩. 겨울이 말했다. “미군과 경찰이 접근거부 차원에서 철질려(마름쇠)나 자정련조(刺钉链条)를 뿌려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안개와 어둠 속에서 이동해야 할 텐데, 걱정스럽군요.” 자정련조는 스파이크 스트립(가시 돋힌 격자형 체인)이다. 포트 로버츠 역시 이를 여러 줄 깔아서 방호수단으로 쓰지 않았던가. 교통경찰이 휴대하므로 보기 드문 물건도 아니었다. “음, 아마 공정대학에 들어갈 때였던 것 같군. 아슬아슬하게 십년 전인가.” 그렇다면 위험하다. 겨울은 입대 시점에서 접종을 받았다. “출발한 뒤에도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가급적 제가 확인한 길로만 따르시고, 고인 물에 들어갈 땐 특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인 물에 들어간다고? 저렇게 오염되어 있는데?” “오염?” “색부터 정상이 아니잖은가. 녹색과 붉은색 투성이야! 미군이 사용한 생화학탄 때문일 거야.” 낮게 외치는 장교는 찡그린 표정이었다. 도로가 갈라진 틈, 혹은 폭탄이 터진 구덩이에 고인 물은 그의 말대로 비정상적인 색채로 물들어있는 상태. 그러나 겨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역시 태풍과 수해의 여파였다. “제가 아는 한 미국은 본토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도심에 자국 시민들의 거점이 남아있는데 병원균이나 독가스를 뿌려댈 리가 없죠.” “그럼 저건 뭔가?” “염도가 높은 물은 색이 변하잖습니까. 미생물 증식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해군이시니 염전도 많이 보셨을 텐데, 모르신다니 조금 이상하군요.” 중장비가 동원될 규모의 대형 염전은, 신이 펼쳐놓은 원색의 팔레트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다. 도시가 침수되었을 때 해수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른 뒤에 비가 다시 고이는 일이 반복되어 지금의 시가지 풍경이 완성되었을 것이었다. 탄궈셩이 멋쩍어했다. “염전이라……. 그게 그런 거였나? 항상 보긴 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네. 본토에서 강물과 바다가 변색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또 어딘가의 공장이 뭔가를 쏟아낸 모양이구나 생각했지.” “…….” 자학도 아니고 평범하게 하는 말이어서, 겨울은 장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담배꽁초를 던졌더니 강물이 폭발하는 나라답다고 해야 할까? 바람결에 밀려온 안개가 마침내 두 사람이 숨어있는 매장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도 겨울은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해가 질 때까지. 일몰 이후에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이동할 경로 전체에서 시야 차단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장 건물 동쪽에는 돌출부가 있었다. 내부의 창고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이다. 입구에 트레일러가 방치되어 있었다. 한 층을 조금 넘는 간격이라, 뛰어 내려도 좋을 법한 높이. 적어도 겨울에겐 안전했다. “제가 먼저 내려가서 받아드리겠습니다.” 소년은 모서리에 매달린 뒤, 최대한 조용하게 내려왔다. 트레일러 상판이 금속이므로 특히 주의해야 했다. 이어 장교가 내려온다. 매달린 상태에서 호흡을 맞춰 손을 놓는다. 겨울이 떨어지는 군홧발을 양손으로 받았다. 덜컹. 발아래의 울림은 크지 않았다. 마침내 안개 속의 도시로 나아가는 두 사람. 불투명한 공기는 미지의 적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가시거리가 채 20미터도 되지 않는다. 장교가 중얼거렸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군.” 겨울은 소총을 전방으로 지향한 채 나아갔다. 탄창에는 열여섯 발이 남아있었다. 권총 탄약까지 감안해도 한 번의 격전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 160 [160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7) 그나마 목적지는 가까웠다. 요트 선착장 사이의 폐쇄된 부두. 여기엔 변종들이 많지 않았다.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안전을 기해 멀리 돌아가는 길임에도, 총 이동거리는 1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중하게 움직이자면 한 시간 이상 걸릴 거리였다. 실전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단 백 미터를 전진하는 데 한 나절이 걸릴 때도 있기에. 안개 속에서 적을 마주친다고 치자. 적이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전제 하에, 먼 거리를 다시 돌아야 할 것이다. 회피할 수 있는 전투는 회피해야 한다.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았다. 교전의 소음은 넓어진 가청영역 내의 변종들을 끌어 들일 것이다. 앨러미더와 오클랜드를 가르는 내륙수로 인근엔 이상할 정도로 변종들이 많았다. 단순히 인간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일까? 겨울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여겼다. 어쩌면 인간들의 관측 바깥에서 물을 학습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직감이었다. 근거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스토커가 등장했으니 다른 신종이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남아있을 거야.’ 비록 사냥개의 출현으로 곤욕을 치르는 중이긴 하지만, 겨울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델타 구울이나 「멜빌레이」가 나타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특히 후자. 수중 활동에 최적화된 특수변종은 종말을 크게 앞당긴다. 주 활동영역이 수중이므로 어지간해서는 숫자가 늘어날 뿐이고, 그에 따라 해상보급로가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까닭. 이 괴물, 수중에서 화물선의 갑판까지 솟구친다. 물속에서는 겨울조차 먹잇감에 불과했다. 대적하려면 최소한 초인적인 「수영」 능력과 「환경적응」, 특수 제작된 자동화기가 필요할 것이다. 과거의 세계관에서는 아무리 빨라도 델타 구울 이후에 발견되곤 했다. 이번 종말이 여러모로 예외적이어도, 아직 세타 구울조차 나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파다다닥. 탄궈셩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전투준비라기보다는, 움츠러든 것에 가까웠다. 반면 겨울은 놀라지 않았다. 익숙한 소리였기에. 바퀴벌레의 날갯짓. 이미 아타스카데로에서 경험한 바였다. 또한 지나간 종말의 무수한 난민수용소에서도. 생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낯선 징조이긴 했다. 변종이 많은 곳엔 바퀴도 많다. 사람을 피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상은 아니었다. 이것이 뭘 의미할는지. 첫 번째 이정표에 도달했다. “부디 편히 가게나.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 걸 용서해주게.” 탄궈셩이 대검을 뽑았다. 전사자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겨울은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탄궈셩은 커트 리의 환심을 사고 싶어 했다. 또한 전사자의 모발은 복귀한 뒤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걸어놓고 향이라도 피워줄 수 있을 테니. 중국인에게 체면은 중요한 문제였다. ‘항상 현실적인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체면 상한 일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어느 저명한 중국 작가가 말했다. 체면, 운명, 은전(恩典)은 중국인을 지배하는 세 여신이며, 이 가운데 체면의 여신이 가장 강하다고. 겨울이 생전에 중국문화로 배운 내용이다. 중학교 선택교과였다. 그 작가의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력보정도 잠잠하다. 해군장교는 전사자의 전투복 안쪽을 도려냈다. 다른 국가에선 인식표에 새겨 군번줄에 거는 내용이, 중국군은 군복 안감에 박음질되어 있었으므로. 장교는 잘라낸 안감으로 머리카락을 감싸 갈무리한다. “기다려줘서 고맙군. 움직이지.” 탄궈셩이 유해를 두고 물러났다. 겨울이 길을 인도했다. 웅덩이가 가까워지자 발아래가 버석거렸다. 때 묻은 소금기였다. 고인 물은 반대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새겼던 풍경을 돌이켜보건대, 그리 크지 않은 웅덩이였다. 그만큼 안개가 짙었다. 흐린 가운데서도 물은 선명하게 붉었다. 버려진 주유소를 지나 동쪽으로 나아간다. 바람은 등 뒤에서 불어왔다. 이제껏 안개를 밀어준 서풍이었으나, 지금으로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슬슬 멎어도 좋으련만. 풍향이 역전된다면, 나아가는 방향으로부터 냄새가 밀려왔을 것이다. 후각과 청각이 시각보다 중요한 환경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불리했다. 이쪽의 체취가 전방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겨울이야 그렇다 쳐도, 장교는 냄새가 좀 나는 편이었다. 맞은편에서 사박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이 주먹을 들었다. 탄궈셩이 긴장했다. 오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사선이 겨울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낮은 위협이었기에 색은 옅었다. 옆으로. 물속으로. 수신호를 전하며, 겨울은 방향을 꺾어 웅덩이로 들어갔다. 「위기감지」가 강렬해지는 중이었으나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물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제는 깊이였다. 무릎까지밖에 차오르지 않는다. 결국은 엎드려야 했다. 엎드린 채 물러나 뭍과의 거리를 벌렸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몸이 자꾸 뜨려고 했다. 안개 속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어른거린다. 다가오는 속도는 느렸다. 눈으로 포착하고 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실루엣은 이리저리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비록 사냥개는 아니더라도, 냄새를 맡는 녀석은 예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가. 겨울이 충분히 거리를 벌린 뒤에, 물에 잠긴 유모차를 끌어당겨 엄폐물로 삼았다. 염분에 말라죽은 풀들도 도움이 되었다. 폭풍 이전에 우거졌으리라. 탄궈셩이 바싹 붙었다.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격자세를 잡으려고 애쓰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어중간한 수심 탓이었다. 엎드려서 쏘려면 총구는 물론이거니와 얼굴까지 잠기고, 무릎을 꿇으면 모습이 드러난다. 마침내 놈들이 드러났다. 자박대는 걸음들은 대부분이 맨발이었다. 감염 이전의 의복은 멀쩡한 것이 없었다. 절반 이상이 나체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여성체 구울. 유방이 출렁거렸다. 한쪽에 면역거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음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숨어있는 가까이에 새가 날아왔다. 상투메추라기였다. 웅덩이 가운데에서 말라죽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무엇을 찾아 내려왔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벼슬처럼 자란 네 갈래 검은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꾸-꿔-꺽! 꾸-꿔-꺽! 끊어 우는 새울음. 구울이 고개를 홱 꺾었다. 비틀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철벅, 철벅. 뒤따르는 규모가 적지 않았다. 안개가 걷는 죽음을 토해내는 풍경이었다. 새는 굶주린 집단의 접근을 경계했다. 그러나 날아가진 않았다. 얼마나 가까워져야 달아날 요량인지. 덕분에 탄궈셩의 떨림이 심해졌다. 익, 하는 신음이 들린다. 장교는 스스로 낸 소리에 소스라쳤다. 무의식중에 흘린 모양이었다. 질퍽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위기감각」은 솟구치지 않았다. 변종들이 내는 소리가 훨씬 더 컸기에. 싸우려면 지금이다. 이는 탄궈셩이 손짓과 눈짓으로 보내는 필사적인 신호였다. 거리야말로 인간의 무기. 그러나 겨울은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은폐는 충분했다. 쉬-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장교가 이를 악물었다. 자세를 더 낮춰서, 코 아래 인중까지 물에 잠겼다. 변종들의 악취가 지독해졌다. 코앞에 썩은 고기를 둔 느낌. 부패한 육신의 숫자가 많다보니, 후각으로 느끼는 거리감은 신경질적으로 왜곡되었다. 마침내 구울이 21피트 안쪽으로 들어왔다. 칼이 총을 능가하기 시작하는 경계선을 넘어, 구울은 새가 앉은 나뭇가지 아래에 이른다. 겨울은 시귀의 고민을 알 것 같았다. 저걸 어떻게 잡아먹지? 변종은 굶주려있었다. 시민들을 일부러 살려두어 공수물자를 획득하는 변종들이어도, 식량은 여전히 부족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억제가 왜 발현되었겠는가? 이 많은 수가 깨어나 움직이는 이유는 바로 겨울과 탄궈셩일 것이고. 구울을 따르는 변종무리가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불규칙한 발걸음들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발각 직전의 위태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스쳐지나갔다. 잠깐씩이라도 잠수를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러나 겨울은 그러려는 장교를 만류했다. 수면 아래에서 붙잡는 손으로. 얼굴까지 붉은 물에 들어가선 안 되었다. 위생도 위생이거니와, 더욱 주의할 쪽이 염분이었다. 물빛이 적색이면, 염도는 더 이상 높을 수 없을 만큼 높을 터. 눈에 들어갔다간 큰일이다. 점막은 삼투압에 약하다. 통증이 심해 한동안 뜨지 못할 것이었다. 새가 날아갔다. 서서히 무릎을 굽혀, 도약 직전이었던 구울은 이를 딱 부딪혔다. 그리고 첨벙거리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이 그 뒤를 따른다. 엄지로 뒤쪽을 가리키는 겨울. 일단 빠져서 우회하자는 의미였다.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점점 더 속도를 붙였다. 「생존감각」의 경고가 뜨지 않는다. 적어도 당장은 마름쇠에 찔릴 걱정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불투명한 물을 밟으며 너무 빨라졌던가. 장교가 휘청거렸다. 무너져 수면에 부딪히려는 찰나, 그 등을 겨울이 겨우 붙잡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겨울의 날렵함에도 한계가 있었다. 예정된 경로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어느 건물의 무너진 울타리를 넘어간다. 사방이 가려진 채 적막한 장소였다. 허억, 헉. 이제까지 호흡마저 줄여놓았던 장교가 격하게 헐떡였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괜찮으십니까?” “啊呀! 수, 수명이 시, 시, 십년은 줄었을 거야.” 혀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가보다. 그는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여, 여긴 어디지?” 해군장교가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앙상한 나무들과 울타리 안쪽에, 녹슨 스프링 목마와 빛바랜 미끄럼틀이 있었다. 아무래도 보육시설의 안마당인 모양이다. 겨울은 그를 안심시켰다. “상정했던 것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제대로 왔습니다. 여기서 북북서로 가까운 곳에 예의 그 교차로가 있습니다. 미군 차량들이 버려져있는 곳 말입니다.” 그러면서 놀이터에서 시설로 들어가는 문을 경계한다. 느껴지는 위협은 낮았다. 허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확실한가? 젠장, 난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군. 우린 방향도 보지 않고 무작정 움직이지 않았나.” 그의 눈에는 겨울의 움직임이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 무리가 아니었다. 보정을 모르니까. 운 좋게 바람이 불었다. 정체되어있던 안개가 흔들리면서, 한 순간 먼 거리가 보였다. “저기, 살구 색의 기와지붕이 보이십니까? 포지 해저터널의 남쪽 입구입니다.” 터널의 입구는 어지간한 건물보다 높았다. 겨울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주어도, 장교는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 위에서 볼 때와 달라 보이는 까닭이었다. “호, 혹시 지붕 색깔만 비슷한 다른 건물 아닐까? 저건 교회처럼 보이는데.” 터널 입구의 전체적인 형상이 교회와 비슷하긴 했다. “중교님, 절 믿으십시오. 제 시력은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지금은 건물에 새겨진 글씨까지 보이는군요. 저건 절대로 교회가 아닙니다.” OAKLAND PORTAL. 정면 상단에 음각된 문구였다. 거리는 약 90미터. 전문가 영역 끝자락의 「독도법」은 「암기」에 의해 섬세한 지도를 제공했다. 「개인화기숙련」과 더불어, 목측(目測)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다만 증강현실 지도의 가장자리가 흐려지는 것은 불가피한 「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도는 감소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장 움직이는 건 무리겠군요. 잠깐 쉬었다가 이동하겠습니다.” “미안……하네…….” 장교의 얼굴에 한 번 보았던 두려움이 스친다. 겨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하는. 탄궈셩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비비적댄다. “앞뒤로 민망한 부위가 쓰라리군……. 왜지?” “저도 그렇습니다. 염도 높은 물에 들어갔다 나온 참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은 지금쯤 체감을 조절하느라 소란스러울 것이었다. 통각 수준이 낮더라도 불쾌한 감각일 테니. 이때였다. 「전투감각」과 더불어, 「위기감지」가 미약하지만 명확한 방향성을 경고했다. 겨울이 소총을 어깨로 당겼다. 견착이 단단해진다. 속으로 그리는 조준선이 더러운 유리문 너머로 뻗었다. 실내의 어둠으로 이어지는 복도. 장교에게는 계속 앉아있으라고 신호했다. 경고가 약할 만도 했다. 나타난 것은 감염된 아이들이었다. 팔다리가 수수깡 같은. “저건 또 무슨…….” 장교의 아연한 중얼거림. 뒷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아타스카데로의 신생아 변종들과는 달랐다. 입고 있는 옷가지는 한 때 인간이었던 증거. 그러나 감염되기 전에 이미 굶어죽기 직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저런 아이들이 어쩌다 감염되었을까.’ 변종들은 숙주의 상태에 민감하다. 멀쩡하다면 시체라도 감염시키고, 성치 않다면 그대로 먹어치우는 것. 앙상한 아이들은, 숙주보다는 먹잇감에 가깝다. 나이 어린 역병들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고장 난 인형처럼 기어왔다. 누런 이가 벌어진다. 소리는 겨울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이엔 한 장의 유리가 있을 뿐인데도. 그것들 여럿이 문을 밀었다. 문은 밀리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겨울은 총구를 내리고 대검을 뽑았다. 이 와중에 느껴지는 의문. 분명히 이 어린 녀석들은 대사억제 상태였을 것인데. 망보는 하나가 있었다면 겨울이 먼저 눈치챘을 터였다. ‘아사 직전이면, 어차피 죽을 테니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건가?’ 이 추측이 합당하겠다. 문을 열고, 기어 나오는 것들을 내려다본다. 살이 뼈에 들러붙어 경추의 틈이 확실하게 보였다. 겨울이 대검을 고쳐 잡았다. 아래로 찌를 수 있도록. 잠깐이면 충분했다. 쉬운 일이었다. 불편한 마음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었다. # 161 [161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8) 지직………지지지직………지직………. 어린이집을 나서려던 겨울은, 익숙한 잡음에 뒷걸음질쳤다. 바싹 뒤따르다 부딪힌 탄궈셩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야(哎呀)- 하는 신음은 한국어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 담장 안쪽에 붙었다. 바깥을 경계하며, 갈라진 음성으로 묻는다. “무슨 일인가? 밖에 뭔가 있나?” “무전기에 잡음이 끼는군요. 전성(디엔싱, 电猩)이겠죠. 무작위로 반복되는 통신내용이 아닌걸 보면 지향성 전파입니다. 이대로 나가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성……. 그런가. 지형을 감안하면 거리가 꽤 가깝겠군.” 그럼블이 도올(타오우, 檮杌)인 것처럼, 트릭스터는 전성이라고 불렸다. 직역하면 전기 오랑우탄. 웃기는 작명이지만, 사실 이 역시 신화에서 따온 이름이다. 성(싱, 猩)이라는 요괴는 사람을 닮은 모습에 사람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교활하기도 했고. 트릭스터에게 어울리는 명명이었다. 탄궈셩이 겨울의 말을 바로 이해하는 건 미국의 재난 방송 덕분이다. ‘사회혼란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변종에 대한 정보는 감출 이유가 없지.’ 특히 민간차원의 재난대비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변종출현의 징후를 알려두면 빠른 신고를 기대할 수도 있을 터였고. 봉쇄선 너머가 언제까지나 안전지역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조안나 말로는 FBI가 허위신고에 몸살을 앓는다고 하는데, 정보를 기밀 취급했을 경우 오히려 더 많은 허위신고가 들어왔으리라는 게 겨울의 생각이었다. 무지는 공포의 어머니니까. 사람이 어둠을 왜 두려워하던가. 겨울은 다른 방향의 출입구를 확인했다. 그러나 역시 잡음이 들린다. 서로 미묘하게 다른 두 개의 잡음이 교차했다. 최소 둘, 혹은 겨울이 구분하지 못하는 셋 이상의 트릭스터였다. 이렇게나 많은 특수변종이라니. 과연 북미 감염의 발원지라고 해야 할까? “하. 구멍을 피하니 우물인가(避坑落井). 지폐라도 한 장 태우고 싶군…….” 산 너머 산이라고 한탄하며, 탄궈셩은 미신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불길한 달, 음력 7월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한 장 이상의 지폐를 불태운다. 돈으로 귀신을 달래어 액을 쫒으려는 것. 겨울은 오래 전에 보았던 홍콩 느와르가 떠올랐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담배에 지폐로 불을 붙이는 장면. 그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중국 고유의 정서가 묻어나는 연출이었나 보다. “이 시점에서 살아있는 레이다(雷达)가 등장하다니. 우리도 어지간히 운이 없는 모양이야.” 계속되는 하강곡선에 겨울이 제동을 걸었다. “그만 두십시오. 아직 다친 곳이 없는 것만으로도 보기 드문 강운입니다. 탄 중교님께서 죽을 운명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하늘은 우리 편입니다.” 체면의 여신 다음은 운명의 여신이었던가. 탄궈셩은 한숨을 삼켰다. “놈들이 있는 방향만 알면 엄폐물에 의지해서 움직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러더니 아이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시설 입구를 응시한다. 정확히는 그 너머의 복도를. “혹시 저 안에 은박지 같은 것이 있을까?” 겨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괜찮은 발상이었다. 나도 참 헛된 망상을 하는군, 하고 자조하는 탄궈셩에게 겨울이 말했다. “찾아보죠.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잖습니까. 간단한 주방이 있더라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Day care center. 간판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었다. 놀이터만 봐도 뻔하지만. 원하는 것은 쿠킹호일이었다. 패러데이의 새장을 만들기 위한 가장 간단한 재료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오목한 접시를 만들어 무전기 안테나에 끼우면, 수신 방향을 제한할 수 있었다. 그러면 트릭스터가 전파를 쏘아대는 방위를 찾는 일도 가능하다. 겨울은 이런 아이디어를 처음 접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방역전투 교범에 실릴 법한 내용이건만. 새로운 내용이 매주 갱신되지 않던가. 처음엔 얇은 책자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은 웬만한 사전 두께였다. 그러나 곱씹어보니, 미군이 이런 대처방안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미군은 하늘을 지배한다. 크리스마스 당시, 캠프 로버츠에서도 트릭스터의 전파방출을 실시간으로 잡아내지 않았던가. 공중에 뜬 전자전기가 삼각측량으로 포착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겨울이 특별한 경우였다. 성탄전야의 들판, 호숫가의 비 내리는 밤, 그리고 안개 낀 시가지에서의 탈출. 대부분의 미군들에겐 죽을 때까지 인연이 없을 드문 싸움들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교범에 실어둘 법한 임기응변이었다. 당연하고 간단한 발상이라도, 긴장한 상황에서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법. 이는 제식의 중요성과 맥락이 같았다. 몸에 새겨 기계적으로 반응할 정도가 아니면, 무엇이든 실전에서 써먹긴 어렵다. 돌아가면 건의해 봐야겠다. “아이들을 먹이는 꼴을 보면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망할, 얼빠진 미국 놈들은 시역(屍疫 : 모겔론스)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망했을 거야.” 탄궈셩이 새삼스레 미국을 비하하는 것은 궁색한 주방 탓이었다. 쿠킹 호일은커녕 기본적인 조리기구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발견한 것은 수많은 냉동식품의 포장지들. 그리고 빈 페트병들. 악명 높은 공립학교 급식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가난한 미국인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현장이다. 생전의 미국이라고 이보다 낫지 않음을 아는 겨울이었다. 불평등은 어째서 깊어지기만 했던 걸까. ‘그런데 중국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울은 빈 페트병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들의 옷가지와 조합하여, 이미 가진 소음기를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휴대성과 명중률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총기의 소음을 극도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한 뒤에 포기하기로 한다. 웅덩이를 몇 번 더 드나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총이 거추장스러우면 곤란했다. 탄궈셩은 작은 창문 틈으로 무전기의 안테나를 내밀어보는 중이었다. 지지직……. 지지직……. 일정 간격으로 잡음이 새어나온다. 겨울과 달리 장교에겐 골전도 리시버가 없었다. “어쩌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까?” 장교의 초조한 의견. 주변지형은 복잡했다. 버려진 차량과 쓰러진 나무, 무너진 집 따위가 직선으로 뻗는 전파의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전파가 직접 닿는다는 것은 중간에 막히지 않을 만큼 가깝다는 의미였다. 이쪽이 소수로서 사냥당하는 입장이니 방해전파는 필요 없을 것이고. “안개가 사라지거나 어둠이 물러나는 건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입니다. 시간 낭비는 피해야 합니다. 일출 직전까지 내륙수로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꼼짝없이 갇히게 되겠죠.” 그리고 주간 내내 한 장소에 머무는 건 자살행위가 될 것이다. 이 근처엔 매장과 공장, 기업의 건물들뿐이다. 거쳐 온 매장에서처럼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야시경의 녹색 시야는 맨눈에 비해 좁았다. 자연히 탐색하는 시야가 휙휙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가 겨울은, 전원이 나간 TV에 주목했다. 철 지난 아날로그 TV였다. 연결된 셋톱박스를 살펴보니 상표가 찍혀있었다. Dish Line. 적어도 공중파는 아닐 것 같다. 이름만 봐선 위성방송일 확률이 높았다. 겨울은 배선을 따라 움직였다. “뭔가 찾아냈나?” “어쩌면 위성 안테나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은 자연스럽게 벽을 뚫고 나갔다. 겨울이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자, 과연, 손닿지 않는 높이에 원반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창틀을 밟고 올라 살펴본다. 다행히 용접이 아니었다. 겨울은 대검의 칼등을 드라이버 대용물로 삼았다. 그 사이 잡음은 느린 맥박처럼 반복되었다. 괜찮았다. 건물에 붙어있는 한, 트릭스터는 겨울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었다. 덜컥. 금속 접시가 떨어져 나왔다. 내려온 겨울이 탄궈셩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무전기를 내밀었다. 겨울은 그것을 받아 접시 안테나의 수신부에 묶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지아잉의 것을 챙겨올 걸 그랬어.” 첫 번째 이정표였던 시체에 탄약은 남아있지 않았으나, 무전기는 멀쩡히 달려있었다. “당장은 소용없는 물건이었잖습니까. 구조대가 온다면 모를까.” 없는 가능성이다. 겨울은 급조된 탐지기를 들고 다시 한 번 건물을 나섰다. 「위기감지」와 「전투감각」의 경고에 등골이 선득선득했다. 사실 트릭스터의 감지 또한 스쳐가는 순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확한 방향을 산출하기가 무리여서 그렇지. 지직지지지직! 금속 접시가 전파를 모아주는 덕분에, 트릭스터의 감시가 스쳐가는 순간의 잡음이 훨씬 더 격렬했다. 몇 번의 반복으로, 겨울은 대략적인 방위를 산출할 수 있었다. 시계(視界)는 여전히 최악이다. 이따금씩 안개가 바람에 흔들렸다. 뿌연 어둠이었다. 야시경을 끼고 보려니 꿈틀대는 부정형의 괴물처럼 보인다. 소총의 액세서리, 레이저 조준기에서 뻗어나가는 광선은 안개에 부대껴 더없이 선명했다. 안테나 방향을 돌려가며 감지하기를 수 분. 최종적으로 판별된 트릭스터는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한 번의 먼 땅울림. 쿠웅. 겨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가까이에 그럼블까지 있는 모양이다. ‘혹시 지금껏 매복이랍시고 움직이지 않은 건가.’ 마침내 겨울이 방향을 결정했다. “아무래도 무기 확보는 포기하고 동쪽 주차장을 경유하는 게 좋겠습니다. 목적지와 가까운 길인데다, 엄폐물이 많으니까요.” 그만큼 변종들이 숨어있기도 좋겠으나, 겨울은 감각보정을 믿기로 했다. 적어도 「생존감각」은 천재의 영역이었다. 작용이 겹치는 감각이 여럿일 땐 상승효과를 기대해도 좋았다. 전차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고뇌하던 장교가 어렵게 동의했다. “어쩔……수 없지. 그쪽에 탄약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도 미지수이니. 알겠네.” 그러면서도 아쉬워하는 모습이, 이솝 우화의 여우를 보는 것 같았다. “셋을 세겠습니다. 신호하면 언제든 포복으로 전환할 준비를 해두십시오.” 첫 엄폐물로 삼을 관목지대까지, 거리는 40미터. 무턱대고 달릴 순 없었다. 문명의 묘비가 된 도시는 적막했다. 생존한 시민들은 변종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그리고 변종들조차도 무의미하게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어둡고 습한 밤, 아스팔트 위의 군화소리는 놀라울 만큼 넓게 퍼진다. 물 고인 자리가 빈번하지만 않았더라도, 옷가지로 전투화를 감쌌을 것을. 겨울이 손을 들었다. “갑니다. 셋, 둘, 하나!” 힘 들어간 낮은 외침. 자세를 낮추고 발소리를 죽이며 뛰는 두 사람. 몇 개의 차량을 지날 때까지는 괜찮았다. 주차장을 횡단하여, 대로로 진출하려는 시점이었다. 와락. 날카로운 잡음이 들리기 무섭게, 겨울이 바닥에 밀착했다. 장교는 반 호흡 늦었다. 겨울은 엎드린 채로 안테나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어느 방향에서 탐지되었는지. 전파는 높은 곳에서 쏘아지고 있었다. 2시 방향의 건물 옥상. 공교롭게도 최종 목적지인 옛 부두까지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할 길목이었다.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라는 느낌으로, 괴물이 쏘아내는 지향성 전파가 빈번한 잡음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숨죽인 자리를 계속해서 훑고 지나가는 보이지 않는 시선. ‘얼마나 선명하게 볼 수 있을까?’ 토사로 울퉁불퉁해진 땅이었다. 트릭스터의 세 번째 눈, 반사되는 전파를 느끼는 감각이 엎드린 사람과 지면을 구분할 정도라면, 앞으로도 꽤나 곤란할 것이었다. 한참 머물던 잡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혹여 변종무리가 접근하진 않을까. 트릭스터의 감시 간격은 얼마나 될까. 겨울은 잡음이 대략 3초 간격으로 쏟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로 방향에서 작은 발소리들이 다가오기도 했다. 신발 밑창이 어설프게 남아있는 놈도 있나보다. 질질 끌리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일정 주기로 순찰을 도는 것 같았다. 겨울이 수신호로 트릭스터와 변종 집단의 위치를 알리자 장교는 우거지상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걸 보면 해상도가 꽤 낮은 모양이군.” 장교가 헐떡이며 속삭이는 말. 해상도라는 표현은 어떨까 싶었지만, 옳은 판단이었다. “으……겨우 2백미(m)쯤 남았는데 여기서 막히다니. 어떻게 지나가지?” 당장은 겨울에게도 답이 없었다. # 162 [162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9) 지면으로부터 냉기가 올라왔다. 물비린내가 나는 어둠은 온도 이하로 차가웠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그믐달이 뜰 날이라, 야윈 달빛은 새벽녘에나 수줍을 것이었다. 밤의 공감각이 추위를 더했다. 탄궈셩이 몸을 떨었다. 가벼운 몸살기였다. 겨울도 신체의 기능적인 저하를 느꼈다. 새벽부터 이어진 소모를 제대로 회복할 기회가 없었으니. 일단은 물러나야겠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주위를 살핀다. 농밀한 안개를 헤아리는 야시경의 답답한 시야에서, 세상은 반경 20미터의 작은 원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는 어떤 기회도, 단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이 탄궈셩에게 수신호를 전했다. 포복으로 후방의 엄폐물을 찾은 두 사람. “차량으로 강행돌파를 하는 건 어떨까?” 장교가 제안했다.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든 시동을 걸 수만 있다면, 내륙수로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을 거야. 안개가 이렇게 짙으니 타오우(도올)의 투척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정확도가 많이 떨어질 테니. 질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놈이 충돌궤도를 어떻게 예측하겠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앞서 침묵하는 하나의 존재를 예견한 국방부 방역전략연구소는, 트릭스터에게 통합교전능력(Joint combat ability)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서, 다른 변종의 능력을 원격으로 제어할 거라는 뜻이었다.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긴 하다. 현 시점에서는 미군 내에서만 공유되는 자료였다.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겨울은 다른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축전지가 방전되지 않은 차량을 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도난방지기도 꺼져있을 것이었다. 장교가 오기로 답했다. “이 많은 차량 가운데 멀쩡한 것 하나는 있겠지. 아니면 강제로 시동을 건다거나…….” 배터리가 나갔어도 시동을 걸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몇 가지 쯤. “그건 더 위험합니다. 시도하는 사이에 위치가 노출될 겁니다.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발소리도 죽이려는 형편이다. 기어를 갈아대는 소음은 그 이상일 것이었다. 확실하게 하려면 차량을 밀어줘야 했다. 걸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움직임이 너무 크다. “게다가 연료의 상태도 감안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많이 생겼을 겁니다. 만에 하나 필터가 막히기라도 하면, 그 자리가 우리의 무덤이 되겠지요.” 겨울이 제시한 건 낮은 가능성이었으나,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누적된 종말의 갈피에서 실제로 겪어봤던 일이었으므로. 버려진 차에서 뽑아낸 묵은 기름은 저질의 연료였다. 이런 기름을 먹은 엔진이나 발전기는 얼마 안 가 내부가 작살난다. 결국 난방이나 다른 용도로 쓰는 게 고작이었다. 끙끙 앓던 장교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짐칸을 찾아보면 연료 안정제가 있을지도 몰라. 혹은 무기가 나온다거나…….” 연료 안정제(Fuel stabilizer)는 연료 혼합물의 응고를 풀어준다. 그러나 현실성이 결여된 선택지였다. 하나하나 어느 세월에 열어본단 말인가. 열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음은 빠지지 않는 문제였다. 유리를 깨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젠장. 말끝을 흐린 장교가 끙끙 앓았다. 스스로도 무리라고 느낀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상이 무가치하지는 않았다. 연료, 연료라. 중얼거리던 겨울이, 몸을 기댄 밴 아래쪽을 살폈다. 찾는 것은 드레인 플러그. 문제가 생긴 연료를 뽑아내기 위한 방출구의 마개였다. 맨 손으로 풀 수 있겠지? 겨울은 육각 볼트를 쥐고 힘주어 비틀었다. 끼긱. 작은 마찰음. 볼트가 느슨해진다. 단단히 조여 놓은 것이었으나, 겨울의 악력은 유압모터 이상이었다. 벌어진 틈으로 휘발성의 냄새가 흘러나온다. 조금씩, 미세하게. “그렇군! 불을 질러서 놈들의 주의를 끌 수 있겠군! 좋아, 아주 좋아!” 들뜬 탄궈셩이 소리 죽여 감탄했다. 겨울이 수긍했다. “일단 냄새만으로도 충분한 유인요소입니다. 최대한 많은 연료를 흘리지요. 1년 새 증발했을 양을 감안한들 대화재를 일으키기에 모자라지 않을 겁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불길은 스스로 덩치를 키울 것이다. 잘하면 대로 건너편까지 불이 번지겠구나 싶었다. 트릭스터를 높은 곳에서 물러나게 할 경우 감시에 균열이 생길 터였다.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교는 혼자서 플러그를 풀지 못했다. 겨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빠지기 직전까지 헐겁게 만들어 둔다. 한 대 한 대 먼저 열어놓으면, 너무 이른 시점에서 변종들이 냄새를 맡게 될지도 몰랐다. 버려진 차는 의외로 많았다. 감염확산이 그만큼 급격했다는 뜻일 게다. 그런 것 치고 시가지의 생존자 규모가 십만 단위라는 사실은, 변종들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었다. “점화할 수단은 있나?” 질문하는 장교에게 겨울은 지포 라이터를 내보였다. “전우의 선물입니다.” “좋군.” 뚜껑을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부싯돌만 말라있다면 어느 상황에서든 불이 붙는다. 다만 기름이 쉽게 샌다는 단점이 있으나, 군인에게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었다. 지포 라이터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였다. 주차장 한복판에 방치된 유해로부터 넝마를 벗겨냈다. 유해는 앙상한 백골이었다. 흩어져 있었다. 포식자들이 말끔히 발라먹은 모양이다. 이리저리 흩어진 뼈에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부숴서 골수를 빨아먹은 흔적도 보였다. 고인의 옷가지가 축축했으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름에 적시면 그만이었다. 뭉쳐서 불 붙여놓고, 차량 아래에 던져둔 다음 달아날 요량이었다. 그 후 가상의 예행연습을 거쳤다. 각 차량의 플러그 위치를 숙지하고, 탱크를 모두 개방한 뒤엔 어디로 어떻게 도망칠 것인지 까지. 준비선의 스프린터처럼 도사린 탄궈셩이 겨울에게 묻는다. “시작할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겨울은 권총의 예비탄창을 뽑았다. 그리고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실탄을 빼냈다. 다다다다각. 고정축인 반대편 손을 바싹 당겼으므로, 울리는 소리가 최소화되었다. 의아해하던 장교 또한 곧 겨울의 목적을 이해했다. 영화에서 흔히 보던 트릭이었다. 물론 흔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 트릭스터가 아무리 교활해도 이런 것까지 짐작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처음엔 신선했을 속임수이기에. “불을 지르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탄약을 이렇게 낭비할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 의도를 파악하긴 했으나, 장교는 지나친 대비라고 여기는 듯 했다. 겨울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화재는 너무 뻔합니다. 아타스……음, 총성이 더해지면 보다 확실하겠지요. 보다 많은 숫자가 집중될 테니까요. 그렇게 확보될 공백은 탄창 하나보다 가치 있을 겁니다.” 긴장한 장교는 말 중간의 얼룩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삼킨 단어는 아타스카데로였다. 주립 정신병원에서 최초로 조우한 트릭스터는 성동격서를 자연스럽게 구사했었다. 비록 여기 있는 놈들은 엄연히 다른 개체들이나, 같은 계책을 어느 하나는 눈치 챌 것이다. 그렇게 가정해야 안전했다. 겨울이 열두 발의 권총탄을 뒤편으로 뿌렸다. 불길이 번지기에 충분한 범위였다. 탈출 경로와는 반대 방향이다. “그럼, 갑니다. 합류 시점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동하는 도중엔 가급적 총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지간한 상황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시점 판단은 겨울이 내리기로 했다. 장교는 순순히 끄덕였다. 잠깐 사이에 수십 대의 차에서 가솔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휘발성이 강하다보니 냄새가 퍼지는 속도도 빨랐다. 가뜩이나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깨애애애액-! 애액, 애액. 날카로운 괴성이 메아리쳤다. 사방에서 목청 돋우는 신호들이었다. 겨울은 무수한 기척을 감지했다. 그 자신의 감각과 보정으로서의 감각이 뒤섞인 본능이었다. 이 밤에 얼마나 많은 역병이 숨죽이고 있었던가. 그 규모는 지면의 진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대개가 맨발일 것인데 이 정도라니. 어쩌면 안개와 어둠을 틈타겠다는 계획이 오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지배하는 인간을 상대로, 어둠과 안개는 최적의 조건일 테니까. 평소보다 많은 규모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숫자도 만만찮을 것이었다. ‘낮에도 자리를 지키는 놈들이 있었으니.’ 놈들의 집단행동은 개미떼 이상이며, 벌떼를 능가했다. 밝은 시간, 겨울은 괴물들의 역할분담을 눈에 담아두었다. 많은 집단이 겨울과 탄궈셩을 쫓는 와중에도, 구역 경계를 맡은 파수꾼들은 요소마다 자리를 지켰었다. 웅덩이를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들이 겹쳐졌다. 불길한 불협화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가까워진 뒤에는 속도를 줄이는 느낌.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전투감각」에 잡히는 거리들이 반증했다. 아무래도 이 냄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학습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휘발성의 범람이 고인 물을 만났다. 확산에 가속이 붙었다. 겨울은 변종들의 동요를 통해 이런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급수탑 위 높은 곳에서 보았을 때, 물 흐른 자국은 시가지의 균열이었다. 어느 거대한 존재가 유리판 같은 지상에 돌을 던진 것처럼. ‘조각조각 끊어지겠지.’ 이제 곧 사방으로 내달릴 불길이 변종집단을 토막 낼 것이다. 그러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어질 거야. 겨울의 예상이었다. 탈출 경로는 관목의 안쪽. 사방이 막힌 자리에 버려진 차량 아래로, 겨울은 불붙인 옷가지를 던져 놓았다. 가솔린 흘러나오는 속도를 보아, 발화의 순간까지 앞으로 약 30초 남짓 남은 것 같았다. 공동 장례식이다. 화장 치고 길동무가 많을 품새였다.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겨울의 말에, 탄궈셩은 덜덜 떨었다. 비단 으슬거리는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대와 흥분. 두 사람은 엎드린 채 밤의 절정을 기다린다. 친절한 바람이 불었다. 한 순간 드러난 원경(遠景) 속에서, 변종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급격히 퍼진 휘발유 탓이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화형의 향취에, 어디로 달아날지 갈팡질팡하는 그림자들. 퍼억! 연소는 작은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타오르는 벽의 질주. 뜨거운 붓질이 거침없이 지상을 누볐다. 때로는 선을, 때로는 면을. 강렬한 채색이 빛과 그림자의 추상화를 그렸다. 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별빛 없는 하늘 아래 사람을 닮은 절규가 메아리쳤다. 몸부림치는 그림자들이 원시적인 제례와 같았다. 신성한 모닥불 둘레에 원을 그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산 채로 타오르는 질병들의 단말마는 멀쩡한 것들에게도 혼란을 야기했다. 선명한 명암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땅에서 시작된 광선이 편광처럼 보일 지경. 꿀꺽. 탄궈셩이 마른침을 삼켰다. 타타탕! 타타타탕! 마침내 기다리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권총 탄약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소리들. “중교님, 지금입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작게 전하는 외침에 장교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이런 그림이 될 줄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저렇게 날뛰는 것들 사이를 가로지르잔 말인가?” 그의 말처럼, 변종들의 혼란은 끔찍할 정도였다. 빛과 열에 휘감겨 지글지글 끓는 놈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었고, 이에 휘말린 놈들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이 아니고선 기회가 없습니다! 어서!” 통제를 벗어나 날뛰는 변종들은 트릭스터의 감시를 방해할 것이었다. 겨울과 탄궈셩이 끼어든다 해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겨울은 호위대상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생각 이전의 행동을 유도할 심산이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한 뒤엔 무를 수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뛰는 와중에도 작게 내뱉는 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사람의 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괴물의 것과 차이가 컸다. 어디까지나 겨울의 기준이었지만. 쾅! 주먹에서 전해지는 울림. 달리던 겨울은 마주친 놈을 기절시켰다. 혼란의 와중에 두 인간의 달음박질을 눈치 챈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주목하는 것들이 늘었다. 총을 쓸 순 없었다. 기껏 던져둔 총탄이 쓸모없어질 테니까. 쿠아아아악! 동료들에게 두 인간의 도주를 알리는 외침. 하지만 소용없었다. 극심한 혼란과 무수한 단말마의 와중이었다. 겹쳐지는 소리 중에서 경고성을 따로 인식할 능력은, 보통의 변종에겐 벅찬 것이었다. 심지어는 구울에게조차도.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겨울은 방향을 곧게 유지했다. 이 와중에 이리저리 꺾는다면 겨울이라도 방향감각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블?’ 춤추는 불길,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 그 가운데 유달리 거대한 윤곽은 베타 그럼블이었다. 놈의 배후를 지나친다. 사냥개만큼은 아니더라도 후각에 민감한 놈이었으나, 온갖 살이 타는 냄새 중에서 스쳐가는 두 인간을 구분할 정도는 못 되었다. 탄궈셩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콜록, 콜록. 참지 못한 기침이 터져 나온다. 무방했다. 연기를 들이쉰 괴물들도 밭은기침에 여념이 없었으니. 드디어 물가가 보인다. 흐름에 따라 자잘하게 물결치는 해수. 온갖 부유물로 가득하여 부패한 바다가, 이 순간만큼은 반가웠다. 한 줄, 흐르는 불이 진로를 막고 있다. 탄궈셩이 속도를 줄이려 하기에, 겨울이 그 등을 밀었다. 절대로 늦추지 말라고. “겁먹지 마십시오! 뛰어 넘으면 됩니다!” “으아아아아!” 장교는 멈추려는 본능과 등을 미는 힘 사이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늦지 않게 도약한다. 사실 가속한 겨울이 반쯤 집어던진 것에 가깝지만. 첨벙! 잠깐 사이에 낯설어진 냉기가 발끝부터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호흡이 흐트러진다. 헤엄을 치며, 겨울은 지나온 200미터를 돌아보았다. 빛을 머금은 안개가 연기를 품은 먹구름이 되어, 열류에 휘감긴 채 꿈틀거린다. 길목에 있던 건물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옥상에 머무르던 트릭스터는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불을 등진 놈의 실루엣이 안개를 뚫고 이글거렸다. # 163 [163화] #머나먼 다리, 앨러미더 (10) 이제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탈출극의 대단원은 아직이었다. 겨울은 「수영」을 습득했다. 그러지 않고선 이 상태로 6킬로미터를 헤엄칠 수 없었다. 다행히 기술에 투자할 여력은 충분했다. 관제인격은 사용자의 모든 행동과 상호작용을 평가한다. 오늘 하루의 보상이 예상 이상으로 많았다. 문제는 호위 대상이었다. 해수의 차가운 흐름은 사람의 기력과 체온을 동시에 앗아갔다. 여기에 발아래의 까마득한 수심에서 올라오는 두려움까지. 약해진 탄궈셩에게 내륙수로의 절반은 너무도 길었다. 결국 겨울은 그를 표류하는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선수가 깨져있었으나, 손상이 경미하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배는 느릿느릿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지금껏 거슬러온 방향의 반대였다. 오래 머무르면, 처음 물에 뛰어들었던 지점까지 되돌아갈 것 같았다. 버려진 부두는 여전히 타오르는 중이다. “너무……춥군…….” 긴장이 풀린 탓도 있으리라. 해군장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질려있었다. 따닥따닥, 이빨 부딪히는 소리. 이는 묘하게 변종의 본능을 닮아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내부를 살펴보겠습니다.” 겨울은 선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찾았다. 권총으로 응달의 중심을 겨누었다. 기관실로 이어지는 문이 잠겨있었으나, 소음에 주의할 필요가 적은 지금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쾅! 잠금쇠가 발길질 한 번에 박살났다. 문 안쪽은 고요한 어둠이었다. 갇혀있는 변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이 경계를 거두었다. ‘누군가 부두에서 풀어내긴 했을 텐데…….’ 타고 있던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안전합니다. 내려오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겨울은 알약을 하나 깨물었다. 우득, 우드득. 쓴맛과 저린 감각이 목구멍까지 이어진다. 번거로운 일이었다. 갑판 아래엔 주방과 침실이 존재했다. 붙박이 전열기구 외에도 휴대용 가스버너를 찾을 수 있었다. 불을 켜는 사이, 탄궈셩은 몸에 이불을 감고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주위를 살피던 겨울의 시선이 기관실의 부서진 문짝에서 멎었다. 무늬 좋은 원목이었다. 콰직, 콰지직. 이를 악력만으로 박살 낸 겨울이, 날카로운 토막들을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마지막 토막은 버너에 대고 불을 붙였다. 불붙은 뒤에는 싱크대 아래에 쑤셔 박았다. 싱크대는 선체와 하나였고, 내장재가 금속이라 화재의 우려가 낮았다. 주의할 필요는 있겠지만. 연기가 늘었다. 하나 뿐인 개폐구로 빠지기엔 많았다. 자연히 선내가 매캐해졌다. 숨쉬기 곤란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무전기가 감도 낮은 통신을 잡아냈다. 탁한 중국어였다. [여기는 인민해방군 해군 잠정(潛艇) 원정 35호. 탄궈셩 해군중교 이하 아랍미달(아라미다 阿拉米达, Alameda) 상륙전투단의 생존자가 있다면 응답하라. 반복한다. 여기는 인민해방군…….] “맙소사, 어머니께서 구조대를 보내셨군!” 장교는 기뻐하며 겨울의 무전기를 건네받았다. 응답하고, 정해진 암구호를 말한다. 방해전파는 거의 없었다. 화재와 총성이 많은 수를 끌어들인 모양이다. 잠수함도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무전을 시도한 것일 터였고. 교신은 순조로웠다. 수로의 폭이 400미터에 이르러, 출력을 조절한 무전이라면 비교적 안전했다. 대화 내용을 들으며, 겨울은 의심을 낮추었다. 적어도 중국군의 다른 분파가 보낸 위장 구원은 아닌 듯 했다. ‘장군의 아들이면 납치할 가치는 충분하지. 작전정보가 어디서 샜을지 모르고.’ 아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시점에서, 시에루 해군중장이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에루 그녀에게 잠수함(잠정) 전력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였다. 원정 35호라. 일단 원자력잠수함은 아니었다. 이름을 보면 안다. 동력이 핵이면 장정(長征)이고, 디젤이면 원정(远征)이었다. 기름을 태우는 재래식 잠수함이라고 우습게 여길 순 없었다. CIA와 미국 해군이 고래 사냥에 애를 먹는 것은, 다수의 수상함과 재래식 잠수함들이 장정 9호를 보호하고 있는 까닭이었으니. 이를 차단할 목적으로, 레드 스컬 대원들이 간이 정유시설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실패였다. 그 시설은 유조선에 붙어있었다. 자칫 만 전체가 불타오를 위기였다고. 겨울의 합류 이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겨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기에. 불분명한 깨달음이 어렴풋한 형상으로 뇌리를 맴돌았다. “됐네, 됐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하하!” 환희의 외침이 생각을 방해했다. 겨울은 놓친 영감을 더듬으려 애썼다. 그러나 한 번 떠나간 깨달음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근거 없는 예감만 남았을 뿐. 두 사람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다가오는 잠수함은 물 위로 드러난 여섯 개의 막대였다. 그 중 가장 높게 솟은 것이 잠망경 마스트. 서로를 발견한 시점에서 거리는 약 30미터에 불과했다. 풍향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짙은 안개 탓이었다. 새까만 선체가 조용히 부상했다. 물거품이 일지 않을 만큼 신중하게. 밤과 구분하기 어려운 군함에서, 함수의 하얀 눈금만이 도드라졌다. 탑처럼 솟은 함교는 정면에서 보면 십자가의 형상이었다. 한 쌍의 수평 날개 같은 조향타 때문이었다. 잠수함의 함수에 보트가 맞닿았다. 거리조절이 절묘했다. 해치는 바로 열리지 않았다. 겨울은 곁눈으로 탄궈셩의 초조함을 느꼈다. “왜 나오지 않는 거지?” 건너가려는 그를 겨울이 만류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함교의 유리창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있다. 이쪽을 지켜보는 시선 역시. 「전투감각」이 낮은 수준의 위협성을 감지했다. 적의라기보다는, 신경 곤두선 경계에 가깝다.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상대는 역병에 나라를 잃은 군인들이었다. 잠시 후, 두 개의 해치가 열렸다. 함교와 함미에서 푸른 색조의 디지털 위장복을 입은 병사들이 올라왔다. 일부가 이쪽으로 총구를 겨눈다. 사선경고의 색채는 엷었다. 그러나 탄궈셩은 여유 없는 노여움으로 굳었다. 이 자라새끼들이 감히……. 중얼거리는 욕설. 겨울은 그를 달래는 대신, 한 걸음 앞서 움직였다. 갑판에서 갑판으로 도약한다. 탄궈셩이 힘겹게 뒤따랐다. 직접 마중 나온 정장(함장)은 둘 뿐인 생존자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중교 동지, 인원은 이게 전부요? 다른 이들은 어디로 갔소?” “모두 죽었습니다.” 탄궈셩의 대답에,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는다. “그게 정말이오?” 되묻는 의도는 여럿이었다. 그 중 의심과 책망이 크다. 전자는 나 살자고 전우를 버리고 온 것 아니냐는 물음이며, 후자는 부하를 다 죽이고 지휘관만 살아서 왔느냐는 힐난일 것이었다. 탄궈셩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의 부하라곤 해도 일단은 정장 쪽이 상급자였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침묵이 정장의 한숨으로 끊어졌다. “오늘 너무 많은 애국자들을 잃었군.” 그리고 그는 부하들에게 몸수색을 지시했다. 물린 곳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당연한 절차였으나 강도가 문제였다. 옷을 모두 벗으라고. 중인환시에 당해도 좋을 일은 아니었다. 탄궈셩은 모멸감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은 묵묵히 탈의했다. 점검하던 병사가 전투화를 보고 기겁한다. 선명한 이빨자국, 아직도 박혀있는 몇 개의 이빨 탓이었다.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오, 동지. 난 지휘관으로서 본 잠정을 상실할 일말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소. 단지 그 뿐이오. 우리는 인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잖소. 이해해주길 바라오.” 하급자를 대하는 정장의 정중함은 시에루 중장의 그림자였다. 중국계 난민들을 주로 상대하던 겨울은 동지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달라서. 범죄자들이 말하는 동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멸칭일 때가 많았다. 몸수색을 마친 뒤에, 겨울과 탄궈셩은 선실로 안내되었다. 잠수함 내부는 악취에 찌들어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분변 냄새. 잠깐의 환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승조원들이 함교 사다리 아래에 모여 피워대는 담배 탓도 있었다. “무언가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저희는 문 밖에 있을 겁니다.” 안내역의 병사 둘은 또한 감시역이기도 했다. 어쨌든 겨울은 외부인이었기에. 장교를 향한 감정이라고 곱지는 않았다. 부하들을 전장의 고혼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 으로 두고 온 지휘관이 받을 법한 적대감이었다. 탄궈셩 스스로도 우려하던 일. 문이 닫혔다. 비좁은 선실은 말 그대로 취침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일본 잠수함 진류(仁龍)에 비해 빡빡하다는 느낌이 든다. 기능적인 설계였지만,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접이식 강철 프레임에 모포를 깔았을 뿐인 침대가 무언으로 역설한다. 승조원은 그저 무기로서의 잠수함을 구성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탄궈셩이 애써 민망함을 감춘다. “미안하네. 나는 그렇다 쳐도 자네가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는 건데. 많이 불편하지?” “아닙니다. 적어도 급수탑 정상보다는 여기가 훨씬 넓지 않습니까?” 장교는 냉랭한 취급을 두고 던진 질문이었으나, 겨울은 알면서도 달리 대답했다. 옅은 미소를 만들면서. ‘조안나의 평가는 별로였지만.’ 이 얼굴로 웃으면 꽤 험악한 모양이라, FBI 감독관은 어디 가서 함부로 웃지 말라고 충고했다. 역효과를 보기 십상이겠다며. 그래도 반응은 괜찮았다. 장교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넓군. 정말 넓어.” 은유적인 동의였다. 실제로는 턱없이 좁아도, 느끼는 마음으로는 넓을 수밖에. 탄궈셩이 침대에 드러눕는다. 모포가 젖든 말든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가?” “다리를 어뢰로 파괴할 순 없었습니까?” 답은 이미 알지만, 분위기 전환을 위해 묻는다. 사소한 말에서 시에루 중장 계파의 현황을 짐작할만한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고. 탄궈셩은 엉거주춤한 모습이었다. 일어날까, 말까. 겨울의 눈치를 살핀다. “어……. 오해는 하지 말게. 사람보다 어뢰가 귀중했던 건 아니야.” 의도를 곡해한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래, 젠장. 어뢰가 충분히 많았다면 시도해봤을지도 몰라. 이것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이었어도 괜찮아. 자네는 내게 말을 가릴 필요가 없거든. 음……. 내 희망사항일세.”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고맙긴. 아무튼 설명하자면……조금 복잡하군. 내가 말주변이 없는 편이라……. 자네는 육군에서 복무했었지? 어디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겨울에게 원망하는 기색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장교는 허리를 쭉 펴고 누워 한숨을 쉬었다. 꼬아놓은 발을 까닥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오래지 않아 입을 연다. “결론부터 말해서, 내륙수로 동쪽은 너무 얕고 좁아.” “그렇습니까?” “응. 어뢰가 항주하려면 수심이 적어도 10미(m)는 되어야 해. 폭은 그 이상이어야 하고. 아랍미달과 오극란(아오크란 奥克兰, Oakland) 사이가 꽤 넓어 보이지만, 해저지형은 그렇질 못하다네. 중간부터 수심이 3미 이하로 떨어지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여백이야. 아마 미군도 이 바다에 대해선 우리보다 자세히 알지 못할 걸세.” 그럴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만 내부에 반백의 잠수함이 우글거리는 마당이니. 도시가 함락되면서 상실한 자료도 많을 것이고. “게다가 중간에 민물이 섞이거든. 어뢰의 쉥나……그러니까, 표적과 지형을 감지하는 음파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하지를 못해. 수중의 부력변화도 심한 편이고, 가라앉은 배들도 많아. 그러니 만약 어뢰를 쓴다면 최소한 몇 발은 허망하게 날려먹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지금의 우리에겐 감수하기 어려운 손해라네. 더 이상의 보급은 없으니까 말일세.” 그리고 교각을 부수려면 다리 하나 당 두 발을 명중시켜야 한다. 교각이 방파제의 보호를 받는 까닭이었다. 소모는 배로 늘어날 터. 간략한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정이었다. “이해했습니다. 다음에도 사람이 오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야겠지. 다음이 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장교가 거듭 쉬는 한숨은 아까보다 무거웠다. 겨울은 그에게 수면을 권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깐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침 졸리던 참이야. 공기가 덥군. 자네도 좀 쉬게. 복귀하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할 테니. 물속은 물 위보다 많이 복잡해서 말이야.” 탄궈셩이 지형 이상의 장애를 암시했다. 내륙수로의 입구는 서로 다른 파벌의 경계였다. 그의 호흡은 금세 평온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겨울은 닫힌 문을 뜯어보았다. 통째로 합금이라 유리창은 없었고, 살짝 열린 틈새로 노려보는 눈동자도 없었다. 이제 실내를 살핀다. 별도의 감시수단은 마련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폐쇄회로라던가. 괜찮을까? 겨울이 이빨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가느다란 실이 걸린다. 어금니에 묶인 채, 반대쪽 끝은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 걸어서 당기자, 식도 아래에서부터 이물감이 끌려 올라왔다. 이물감의 정체는 내식성 캡슐이었다. 모포에 닦은 뒤 비틀어 연다. USB 스틱이 들어있었다. 이것을 건네준 사람은 CIA 샌프란시스코 작전본부, 「피쿼드」의 보안 담당자, 섀넌 코왈스키 요원이었다. 이하는 작전 투입을 앞두고 나누었던 대화. “중국군 군납품과 동일한 사양이에요. 외관상 구분이 안 될 걸요?” 겨울이 물었다. “뭐가 들어있죠?” “남자들에게 필수적인 동영상들이요. 대략 2~3년 전에 제작된 것들 위주고요. FBI가 엄선했으니 수준은 높을 거예요. 접속지역을 구분해서, 중국인들의 선호도 베스트를 뽑았다던가요?” 그녀는 매력적인 미소에 윙크를 더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물론 최신예 트로이 목마랍니다. 절대로 잡아내지 못하겠지만. 하와이에서 투항한 중국군 함선들을 상대로 테스트해봤거든요. 뭐, 1년 넘게 업데이트 되지 않은 백신이 상대이니 걸리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죠.” “이걸 쓸 기회가 올지 모르겠네요.” “가장 좋은 건 어느 배든 전투지휘실 콘솔에다가 직접 꽂는 건데, 꼭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기회를 봐서 적당히 두고 오세요. 당장은 눈치 채기 어려워도, 언젠가는 찾아내겠다 싶은 곳에다가요. 보급이 끊긴 군대이니 USB 하나라도 소홀히 취급하진 않을 거예요.” 요원의 요청은 합리적이었다. 속 빈 캡슐을 다시 삼킨 겨울은 침대의 프레임 위로 손가락을 밀어 보았다. 먼지 층이 얇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청소를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탐색 결과 천장의 선반 안쪽이 괜찮을 것 같았다. 문 밖의 기척에 주의하며, USB를 밀어 넣는 겨울. 생각보다 깊게 들어간다. 운 나쁘면 영영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번 임무는 여기까지인가…….’ 가능한 일은 모두 마쳤다. 복귀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잠수함이 공격받지만 않는다면. 겨울도 침대에 누웠다. 신경이 느슨해진다. 몸을 회복시켜둘 때였다. # 164 [164화] #과거 (10), 장미가 시드는 계절 (3) 이 분노는 나의 것이다. 고건철 회장은 손에 쥔 약병들을 노려보았다. 향정신성의약품. 주치의는 폭군이 중증의 충동조절장애라고 진단했다. 이미 뇌기능이 손상되어,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회복이 어렵다고. 대증적 상황연출, 외과적 시술, 약물복용을 병행하여 치료해야만 한다고. “웃기는 소리.” 회장은 약병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차례차례, 하나하나, 다짐을 새기듯이. 이따위 수단에 의지할 수 없었다. 회장은 생각했다. 주치의? 그놈도 결국 계약관계의 타인일 뿐이잖은가. 더 이상 누군가 내 정신을 좌우하게 두지 않겠다. 내 마음을 주무르게 두지 않겠다. 이 분노는 나의 것이다. 이를 죽여 없애는 것도 오직 내 역할이어야 한다. 나의 투쟁이어야 한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가시밭길. 내 주인은 나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 또한 나의 것이다. 나 아닌 내가 되어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진 않겠다. 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나를 재단한단 말인가? 감히 누가 나를 미쳤다고 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정상이란, 결국 개돼지 같은 대중의 일반화에 불과하지 않던가. 내가 유일한 기준이다. 내 인생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도, 사람도, 이 세상도, 삼라만상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 오롯한 나의 역할이다. 폭군은 알 만큼 알았다. 정신이상의 진단이 사회적 평균의 오차 범위에 기초한다는 사실 역시도.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폭군은 인간이었다. 개돼지들의 잣대로 인간을 잴 순 없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자처하여 한 여자의 노예가 되었던 것으로 충분했다. 고건철은, 의사가 상황연출의 매체로 가상현실 운운하는 시점에서 코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실체 없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최악의 실존이었다. 실체 없는 환상. 실체 없는 감정. 있다고 믿었던 사랑에 휘둘린 삶이 지난 육신의 평생이었는데, 어찌 또 다른 환상에 스스로 발 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토록 가소로운 세상. 진짜는 보기 드물고, 무수한 가짜들 사이에 매몰되어 사라진다. 그렇기에 세상은 가짜로만 이루어져있다. 가짜들은 진짜보다 요란하고, 시끄럽고, 화려하다. 진짜인 폭군은 가짜들 사이에 끼어 사라질 뻔 했다. 그것들이 진짜인줄로만 알았다. 순진했던 나날이었다. 무지가 죄인 줄도 모르고, 백일몽에 취해, 덧없고 향기로운 착각 속을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칼날 같은 거미줄, 현실, 진실의 무게에 날개가, 희망이 찢어지기까지. 사람을 흉내 내는 백억 마리의 축생들. 부질없는 환상을 동경하여 현실을 배반하는 잡것들.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자극적이더라도,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전원을 끊으면 사라지는 세계 따위. 그것은 자본을 쥔 누군가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공. 그러므로 모든 축생은 자본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기회비용이다. 돈은 인간의 모든 기회를, 모든 가능성을 제공한다. 아, 삶은 경제적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치열한 존재의 방식이기에. 폭군은 끓는 소리를 냈다. 끓는 감정은 분노였다.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실패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삶이라 다짐하였으나, 회장은 폭군이었다.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다. 실패는 곧 패배일 것이었다. 그 여자의 궁극적인 승리일 것이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여자이지만, 죽여 놓고도 승리감을 느낄 수 없었던 고건철이다. 애초에 이 분노, 가슴 속에 굴러다니는 돌덩이의 실체가 그 여자의 망령이기에. 폭군이 읊조렸다. “나는 나를 되찾을 것이다.” 분노는 마땅한 감정이었다. 그의 감정이었다. 도피는 패배선언이나 다름없다. 이 거짓된 세상에게, 내가 졌다고 외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나요?”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고아영은 가라앉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많은 감정을 억누르는 인내였다. 폭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것은 분노에 미쳐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그 분노를 쏟아내었더라면, 그랬다면 조금 더 사랑스러웠을……. ‘사랑이라고?’ 회장은 구토감을 느꼈다. 저것을 사랑한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저렇게, 저토록, 그 여자를 닮았는데. 닮았고 아름답기에 역겨운 얼굴만이 아니다. 사소한 표정과 습관과 취향과 말투와 목소리로부터, 딸이 그 여자에게서 물려받은 절반의 유전자를 느낀다. 한 때 저것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감정의 실체다. 자식이기에 아꼈을 감정과, 그 여자와의 결실이기에 아꼈을 감정을 나누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건철은, 결국 고아영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쟁취해야할 하나의 승리이기에. ‘저것은 그 여자의 반쪽이며, 나 고건철의 반쪽이기도 하니까.’ 따라서 고아영에 대한 고건철의 감정이 사랑인가 증오인가는, 모든 악의 근원인 여자와 폭군 사이의 전쟁이었다. 필사적인 다툼이었다. 증오한다면, 그 여자의 승리다. 사랑한다면, 폭군의 사필귀정이다. 고아영에게서 전처를 보는 것은 현실을 짓누르는 환상이었다. 환상. 감히 실존을 지배하려드는 덧없는 아집, 망령, 괴로움, 후회, 자학……. “왜죠? 저를 볼 때마다 그토록 노여워하시면서, 대체 무슨 이유로…….” “닥쳐라! 닥쳐! 닥쳐! 닥쳐! 내 생각을 방해하지 마라!” 고건철이 포효했다. “왜냐고? 왜? 왜에에? 왜냐면 이 씨발년아, 네가 나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네 인생! 네 존재! 네가 네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 그것들이 내 허락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너는 나의 허락이란 말이야! 네 낯짝, 네 몸뚱이,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나의 결정이다! 내가 너를 허락했다! 내 허락이 있었기에 네가 여기에 있다!” “……맞아요. 하지만 절반은 어머니의 허락이겠죠.” “너어어어어!” 회장은 격렬하게 붉어졌다. “감히! 내 앞에서! 네가! 그 여자를 말하다니!”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딸은 폭주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에 술병이 있었다. 날아올 줄 알았다. 그것이 습관이었으므로. 그러나 아니었다.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다가, 던지려다가, 마시려다가, 이를 갈며 망설이다가,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고아영에게 이 고민은 당장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내면 따위, 거기에 공감하려는 노력 따위, 오래 전에 포기해버렸다. ‘견딜 수 없었는걸.’ 그녀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었다. 한때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해보았다. 위로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모든 시도와 연민이 좌절로 돌아왔을 때, 딸은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포기하고 말았다. 깊이 사랑할수록 보다 깊은 상처가 되었기에. 공감은 손잡이 없는 칼이다.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슬프다.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프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마음 주려던 사람만이 눈물 흘린다. 딸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버린 술병을 노려보았다. 유리병에 담긴 현실도피가, 쓰레기통 안에서 매혹적으로 찰랑거렸다. 치열하게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괴로워 현실을 멀리 한다면, 폭군에게는 그 자체로 찰나의 패배다. 그는 자신에게 나약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은 허락의 문제다. 이 세상 모든 가치가 그 자신의 평가에서 비롯되며, 자신과의 관계가 아니고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다시 딸을 노려보는 아버지. 뜨거운 울화를 삼킨다. 분노 또한 패배의 증거일 뿐이니. 참는다. 참아야 한다. 부들부들 떨면서, 회장은 입을 열기까지 수십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오늘은 이만 가 봐도 좋다.” “…….” “다시 부르겠다. 그때는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길 바란다.” 딸은 묵묵히 일어났다. 진심이 아닌 예의로서 깊게 허리를 숙였다. 돌아나가는 그 가냘픈 등을 보며 폭군은 되새겼다. 저것을 사랑해야 한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날, 눈 내린 뜨락에서 외롭고 두려웠던 아이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와선 안 될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던 그 추위를, 공포를, 눈물을, 지금이라도 보듬어 주어야 마땅함을. 저 아이가 여전히 홀로 외롭게 얼어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얼굴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이런 씨팔, 개 좆 같은 경우가 있나. 회장은 이제 스스로에게 격분했다. 아니, 진작부터 모든 분노의 궁극적인 향방은 자신의 분노 그 자체였다. 다만 분노하는 매 순간이 새롭고도 낯설 뿐. 손을 벗어난 운명이, 통제를 벗어난 영혼이, 돌덩이처럼 굳어 우륵 우륵 우르르륵 자글거리는 이 심장이. 누군가를 원망함으로써 얻는 충족감이라는 게 있다. 분노는 그 자체로 살아있었다. 살아서 끝없이 희생양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므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갖다 붙이면 생기는 게 이유 아니던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엔 이유가 없다.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도 이유가 없다. 분노는 그런 감정이었다. 증오가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은 오직 증오, 증오뿐이었다. ‘진짜, 진짜가 필요해. 부질없는 현실에 못 박을 진실 된 무언가가.’ 회장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신음도, 흐느낌도 아닌 울림이 목젖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자기혐오가 시간을 잡아먹었다. 삐- 비서실로 이어진 회선에 불이 들어왔다. 회장은 아날로그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불빛은 정말로 거기에 있었고, 전화기는 실체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의 현실에 가상이 침투할 여지는 없었다. 그 한없이 가벼운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인식의 문제에 불과할지라도. 폭군 스스로 그런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무슨 일이냐.” 버튼을 누르고 묻자, 억눌린 목소리가 돌아온다. [강영일 특수비서가 찾아왔습니다만, 만나시겠습니까?] “이 시간에?” 회장은 시간을 확인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이 시간은 자정을 넘었다. 그러나 놈은 얼마 없는 진짜였다. 아주 더러웠지만, 진짜 쓰레기가 가짜 인간보다는 나았다. 정말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어설픈 위선을 다 버려버린 잡것이다. “들어오라고 해.” 폭군이 알현을 허락했다. 충성스러운 개새끼가 입실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혀를 쭉 빼고 헐떡이는 개새끼의 가면이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일은 모두 마친 모양이지?” 회장의 질문에, 전직 정보요원인 특수비서가 정자세로 답한다. “물론입니다. 그 인간들이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다신 없을 것입니다.” 충견은 자신이 해낸 일에 절제된 자부심을 드러낸다. 죽은 사냥감은 한 쌍이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부였다. 자식으로 돈 놀음을 했던 도박패이기도 했다. 스스로는 무능력한 주제에 자식을 살뜰히 뜯어먹고, 골수까지 빨아먹고, 전 재산을 사기일게 뻔한 투자로 날려먹고, 그러고도 모자라 감히 불법거래 사실을 빌미로 폭군을 협박하려고 했던 미친 연놈들. ‘그 자식도 병신이지. 병신, 병신, 벼어어엉신 새끼! 그런 병신 천치는 백번 죽어도 아깝지 않아! 무지는 죄다! 무지는 죄야!’ 동생이 아프다는 한 마디에 속아서 자신의 사후까지 담보로 내주어준 병신 같은 애새끼. 그놈을 생각하면 폭군은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어찌 그리 낭비한단 말인가? 어찌 그리 경제적이지 못하단 말인가? 정작 그 아이는,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이미 죽은 삶 언제 끝나도 무방하다고,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누이의 삶에 기나긴 한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회장은 여전히 분노할 것이었다. “직접 찾아온 건 어째서냐.” 회장이 으르렁거렸다. “왜, 칭찬이라도 받고 싶던가?” 비아냥거리는 말의 칼날에, 사냥개는 상처입지 않았다. “자극적인 경험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을 협박한 건 어디까지나 그 부부 뿐이더군요. 남은 자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쳐도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는 게 안전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더군요.” “무엇을?” “이번에 죽은 부부의 딸……한가을이라고 하던가요? 그 여자가 꽤나 괜찮은 것 같습니다.” “외모는 가죽일 뿐이다.” “압니다. 회장님은 그런 분이시죠. 박가희 양도 물리치신 분 아닙니까.” “박가희? 그게 누구지?” “모르십니까? 요전까지 꽤 자주 부르셨는데요.” 폭군은 간신히 떠올렸다. 다시 만날 땐 이름을 불러달라던 그 건방진 여자.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감흥은 일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 속의 지나간 인형일 뿐이었다. 가짜는 아니었으나 진짜도 아닌, 어정쩡한 계집. “나는 그 여자에게 대가를 치렀다. 그것으로 끝났지.” “별 것 아니었군요.” “아니었다. 그래서.” 회장은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 한가을이라는 년이 뭐 어쨌다는 거냐.” “부모와는 진작에 인연을 끊었습니다. 아니, 돈이 생긴 시점에서 부모가 먼저 떠난 것 같더군요. 이후 한가을은 두 동생의 연명을 위해 애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소득이 형편없어, 실제로 도움을 준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그 여자를 품는다면, 굉장히 자극적이지 않겠습니까?” 사냥개가 냉막한 미소를 머금었다. “육체적으로는 근친, 하지만 법적으로는 타인. 회장님과 그 여자의 관계입니다. 더욱이 그 여자는 회장님에게, 정확히는 회장님의 육신에 애절한 미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 눈빛, 그 상황……한 번 즐겨볼 법한 여흥 아니겠습니까?” “…….” “회장님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내용을 통신상에서 말씀드릴 수는 없었기에, 늦은 시간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비서실에 알아보니 아직 주무시지 않는다고 들어서. 방해였다면 죄송합니다.” 흐음. 폭군은 의자에 앉아 깍지를 꼈다. 까딱까딱. 오가는 손가락은 흔들리는 마음이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한 번 데려와 봐. 낯짝을 보고 결정하지.” 회장의 허락에 특수비서가 웃었다. “그 여자, 운이 참 좋군요.” 아니면 죽었을 테니까. 그러나 회장에게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육체를 바꾸면 삶도 바뀌리라고 기대했던 것이 고작 얼마 전까지의 착각이었던 것을. 육체의 과거에 얽혀있는 인연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그보다는 버려진 술병에 더 마음이 끌린다. 아주 지독한 유혹이었다. # 165 [165화] #과거 (11), 장미가 시드는 계절 (4) 폭군의 사냥개는 이번 사냥감이 흥미로웠다. 거리를 두고 지켜볼 때에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있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처연한 눈빛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슬픔을 겪은 미인은 지금껏 많이 경험했다. 거칠게 살아온 사내 스스로가 수많은 여인의 괴로움이기도 했다. 한가을은 그들과 달랐다.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잿빛의 세상에서 혼자만 천연색이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숙련된 정보요원으로서, 강영일은 남들과 다른 감각으로 사람을 판별했다. 그 스스로는 이를 아우라라 불렀다. 육감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런 단어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무언가였다. 이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어떤 맛일까? 개는 충동을 억눌렀다. 이 먹이는 주인의 몫이었다. 강영일이 섬기는 폭군은 여러 가지 의미로 압도적이었다. 그토록 비틀린 아우라를 본 적이 없었다. 상사도, 기관도, 국가도 속으론 가소롭게 여겼던 요원이었으나, 혜성그룹의 회장만큼은 진짜 주인으로 여겼다. 그는 익숙한 길을 따라 운전대를 돌렸다. 그룹 본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오랬더니 겨우 그 꼴인가?” 두 사람의 시선이 백미러를 통해 마주친다. 한가을은 눈을 몇 번 깜박이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들면 돌려보내시던가요.” “허.” 다시금 폭력적인 충동이 치밀었다. 난폭한 호기심이었다. 이 여자,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겁을 먹지 않은 거다. 그 증거가 방금의 목소리였다. 되바라진 사냥감들이 겉으로 태연할 때가 있었으나, 음성의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했었다. ‘거기까지 속이는 건 관록 있는 요원에게나 가능한 일.’ 설마 이 여자가 그런 종류의 훈련을 거치진 않았을 테고. 강영일이 흥미로워하는 동안, 한가을 또한 자신의 고요함을 뜻밖이라 여기고 있었다. 나, 이상하네. 스스로의 상황이 기이할 정도로 객관화되어 다가왔다. 겨울의 몸을 빼앗은 폭군의 부름. 선택권은 없었고, 눈앞의 남자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뛰기도 잠시였다. 목적을 들은 뒤에는 그나마 있던 동요도 사라졌다. 부자연스러운 명정(明靜) 속에서 가을은 스스로를 되짚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겁에 질려있었구나. 오랫동안 겨울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 아이에게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발견하게 될까봐. 이것이야말로 가을을 사로잡은 가장 큰 공포였다. 수시로 숨이 막혔다. 자다가도 헐떡이며 깨어난다. 한낮의 시야가 깜깜해질 때도 있다. 누나만 보는 또 하나의 동생을 위해 건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체중은 갈수록 줄기만 했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러니 다른 두려움이 파고들 틈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가을은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해묵은 파카 바깥으로 녹색 치맛자락이 나와 있다. 오늘 입은 모든 옷이 겨울의 선물이었다. 처음부터 새 옷은 아니었다. 교회의 바자회에서 구한 것이었기에. 그러나 선물은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 가을은 그 때 사무치게 실감했다. ‘내가 이걸 왜 입었지?’ 굉장히 아끼던 옷들이다. 특히나 녹색의 원피스는. 낙엽 지는 계절과 눈 내리는 계절이 다투는 날엔 어울리는 복장도 아니건만. 하물며 폭군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입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가을은 선택했다. 어쩌면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영일은 시계를 보았다. 여유가 충분했다면 달리 들러서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을 텐데, 회장이 정한 시간이 평소보다 촉박했다. ‘그때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더니.’ 개는 생각한다. 늙은 주인의 변덕이려니. 몸이 젊어졌다고 속까지 어려지는 건 아닌 법이니까. 사고가 여기에 이르자 쓴웃음이 나오는 강영일이었다. 그 강고하고 파괴적인 폭군이 한낱 여자 하나 때문에 미쳐간다는 게 신기하기 짝이 없어서. 개의 속처럼 검은 차는 한국에서 가장 고압적인 건물 앞에 정지했다. 기다리던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차고 메마른 바람 속에서 군복 같은 유니폼을 입고 회장의 손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밀랍인형들의 사열을 보는 기분이다. 내려선 가을이 하얀 숨결을 흘렸다. “따라와라.” 셰퍼드가 앞장섰다. 양을 제단으로 인도하며, 개는 생각했다. 폭군이 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까? 내 차례가 온다면 좋을 텐데. 눈물. 눈물 맛을 보고 싶다. 전용 승강기를 타니 회장실까지 순식간이었다. 강영일은 업무적인 냉정함으로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잠시 후, 허가를 받은 여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바로 입실하려던 강영일이 멈칫 돌아선다. 부딪힐 뻔한 가을은 왜 그러냐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외투. 그건 벗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군.” 사소한 걸로 폭군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가을은 순순히 따랐다. 회장실 앞에 상주하는 비서에게 맡긴다. 소중한 옷이니 잘 보관해주세요, 하고. 여비서는 당황한 눈치였다. VIP라고 들었는데, 옷의 허름함과 소중하다는 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이윽고, 가을은 겨울의 육체를 차지한 괴물과 마주했다. 이제껏 차분했던 것이 거짓말인 양, 왈칵 쏟아지는 눈물. 표정이 다르고 눈매가 다르고 영혼이 다르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지난날이 남아있었다. 둑 무너지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건철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무슨……. 폭군에게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전신을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육체의 모든 구성요소가 고통스러웠다. 제멋대로 날뛰었지만, 방향만큼은 한결같았다. 강철 같은 이성이 본능과 감정에 제동을 걸었을 때, 회장은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좁혀놓은 거리에 충격을 받았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녹색으로 하늘거리는 향기가 있었다. 하마터면 손을 댈 뻔했다. 회장은 스스로에게 격분했다. 아직 구매하지 않은 상품을 건드리려 하다니? 거래도 하지 않고서? 지금 이 감정,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다. 과거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열병. 같지는 않다. 다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끔찍하다.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의혹이 부풀었다. 설마 육체에 기억이나 감정 따위가 남아있었던 건가? 아니, 어처구니없는 소리. 그것은 오컬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증명된 지 오래가 아니던가.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 동요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시 무의식 속에서, 이번에는 물러나려던 고건철 회장이,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멈춰 세웠다. 나는 나의 주인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육체도, 감정도. 이깟 감정이 뭐라고 나를 휘두른단 말인가. 이 또한 나의 것이다. 가을은 괴물의 얼굴에서 독기가 빠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겨울의 옛 모습이었다. #Intermission,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여러분, 파블로 데 사라사테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그게 누구냐고요? 교양이 부족하시군요. 파가니니 이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는 거장을 모르시다니. 하하, 농담입니다. 화 내지 마세요. 모를 수도 있죠. 이제 더는 어떤 연주자도 인공지능의 기교를 능가할 수 없게 된 시대인데 말입니다. 트리니티 엔진은 청취자의 감성을 학습하여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변주를 제공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니까요. 물론 감성 그 자체를 이해하는 건 아닌지라, 긍정적인 감정 피드백이 발생할 때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하긴 합니다만, 우리 이 정도의 기술적 한계는 관대하게 봐주기로 하죠. 어쨌든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아니겠습니까? 그럼 사라사테의 이야기를 뭐 하러 꺼냈느냐. 이 사람이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의 노력을 사후의 행복으로 보상받는 시대에, 노력의 의미를 되새겨볼까 해서 말이지요. 사라사테는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재란 말이오? 내가? 하루 14시간씩, 37년을 쉬지 않고 연습했는데?” 즉 나처럼 노력하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렇듯 성공한 사람들은 노력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력이야말로 만능의 열쇠라고. 이 세상 모든 고난을 열정 하나로 극복할 수 있노라고.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존재하지요. 예컨대 여러분의 연애사업이라던가……. 잠시 눈물 좀 닦겠습니다. 농담은 접어두고, 노력이 일반적인 성공의 조건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노력 없이 재능만으로 빛나는 사람들은 드문 편이니까요. 없지는 않겠지만요. 하지만 칠전팔기는 성공했을 때에나 미담이 되는 법입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서 또 다시 쓰러져버리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아마 고객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누구나 최고등급의 화려한 사후세계를 꿈꾸지만, 실상 절반 이상의 가입자들이 최저등급의 기본보장을 제공받는 것이 현실인걸요. 아, 이론상으로는 사후에도 끝없는 노력을 통해 등급을 올릴 수 있긴 합니다. 아시다시피 기본보장의 유효기간은 반영구적이니까요! 그러나 실제 등급상승을 이루는 사례는 굉장히 드물더군요. 하향이면 모를까. 하기야 사라사테 수준의 노력은 보통 사람에게 어렵겠죠. 그건 그냥 노력이 아니라 노오오오력이니 말입니다. 아니지, 노오오오오오오오력쯤 되려나요? 즉 하다하다 손 놓고 넋도 놓고 그대로 안주해버리는 가입자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머저리 같은 가상인격에게 분노하고, 반복되는 세계관에 싫증을 내면서도 말이지요. 이건 저희에게 있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왜냐, 기본보장은 돈이 안 되거든요. 자,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노력도 재능이고, 노오력은 재애능이라 생각하는 당신! 그래서 할 수 있는 노력도 안 하면서 자기합리화만 일삼는 당신을 위한 맞춤 행운! 소개합니다, 「인생역전! 판도라의 상자!」 저를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는 여러분께서는 이미 이번 유료결제 상품의 정체를 파악하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역전! 판도라의 상자!」는 사후세계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랜덤 박스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을 걸고 인생을 긁는 복권이지요. 이제까지 존재했던 다른 랜덤 박스와는 컨텐츠의 질과 양에서 차별화됩니다. 연예인의 가상인격 패키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출시된 DLC 전체, 사후보험 규격에 호환되는 모든 세계관의 접속권한이 들어있으며, 100만 개의 별이 나올 수도 있고, 심지어는 예치금액과 무관하게 사후보험의 등급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준다면 F등급에서 S등급으로 직행하기도 가능하다는 뜻! 최고등급 당첨확률은 0.00001%지만! 그래도 힘내라 우리 호갱님! 파이팅! 예치금액에 변동이 없다고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가상현실의 품질 자체가 향상될뿐더러, S등급에서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엔 복제체 이식이 있다는 사실! 이를 위한 배양시설이 각지의 사후보험 집중국마다 존재한다는 건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다만 이는 당신이 물리현실에서의 육체이용에 관한 배타적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그러니까 사후보험 입적 이전 육체를 전신이식 목적으로 거래하지 않았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뭐, 괜찮겠죠. 그런 경우는 드물잖아요. 납골당에 안치된 가입자 태반이 노인층이니까요. 늙은 몸을 누가 산답니까? 되찾고 싶은 건 언제나 젊음인데. 이 시대에 젊어서, 혹은 어려서 죽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요. 어차피 최고등급의 가상현실을 두고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죠. 아, 왜 상품명을 판도라의 상자로 정했냐고요? 불길한 느낌이라 싫으시다고요? 비유하자면 담배의 경고문구 같은 거랍니다. 그 왜 있잖습니까. 담뱃갑에 인쇄된 구태의연한 경고문.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라고 적혀있는 거, 다들 한 번쯤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보기엔 이런 느낌입니다. 「이토록 건강에 해로운 담배지만, 그래도 피울 거지?」 하하. 이름이 불길하든 말든 살 사람은 어차피 다 삽니다. ‘나는 다를 거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시험공부 전혀 안 했는데 찍으면 다 정답일 것 같은 느낌. 근거 없는 자신감. 마냥 잘 될 것 같은 낙관적인 예감. 일확천금의 꿈. 그런 의미에서 기본보장등급의 고객님들께는 1개월간 특별할인이 적용됩니다! 반값이면 살 수 있다니까요? 같은 값에 남들의 두 배를 사버리면, 사실상 당첨확률이 두 배인 셈이죠.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사느냐. 그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약관대출과 마찬가지로, 남은 보장기간을 금액으로 환산하여 현금처럼 사용하실 수 있거든요! 장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유한한 목숨으로 어찌 무한한 욕망을 채우려는가?” 사후보험이 존재하는 지금,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네. 죽음이 곧 끝이었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답이죠. 그러니 기왕 지를 거라면 끝까지 지르세요. 온갖 재앙과 절망이 쏟아져 나온다 한들, 당신이 열지 않은 최후의 상자에 희망이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 사후세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보다 나은 수익성을 위하여, 낙원그룹 가상현실사업부는 사후보험공단과 함께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66 [166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 앨러미더에서 돌아온 이후, 겨울은 처치 곤란한 초과수당을 받았다. “중국인들 심미안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중위님 눈엔 저 여자가 예뻐 보입니까?” 울프 하사의 질문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가설무대를 바라보는 중이다. 여기는 쇠락한 크루즈의 갑판. 버려진 시설들이 간만에 제 기능을 되찾았다. 흑호경방(오르카 블랙)의 조직원들을 위해 마련한 위문공연이었다. 군중은 노래하는 여인을 향해 환호했다. 오락거리가 드물었기 때문일까?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었고, 가수의 사소한 손짓에도 열광으로 들끓었다. 그 때마다 하사를 비롯한 감독역의 미군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노래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겨울은 소음이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답했다. “네. 아름답네요. 한국계인 제가 보기에도 굉장한 미인이에요.” 여가수는 길고 짙은 담갈색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쌍꺼풀과 긴 속눈썹 역시도.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파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초췌함이 사라져서 다행이다. 그녀의 이름은 주웨이(周唯). 얼마 전까지는 인민해방군 소교(少校)로서 시에루 해군중장 휘하에 있었다. “그렇습니까? 흐음…….” 하사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중얼거린다. 입술이 가늘어서 영 이상한데, 라고. “저 여자가 원래 군인이었다면서요? 그것도 영관급의. 덕분에 CIA가 분주했다던데.” 이번엔 폭파 전문가인 노아 라이트(Noah Wright) 병장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애초에 저 분이 시에루 중장에게 미움을 산 계기가 그 애매한 신분이었다고 하니까요.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는 하지만요.” “애매한 신분? 그게 무슨 뜻입니까?” “소속이 인민해방군 가무단이었거든요. 계급이 소령(소교)이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그에 상응한다는 의미고, 정확하게는 6급 연원(演員/배우)이라 해야 맞아요.” “가무단? 뭐냐, 그, 군무원이나 의장대 같은 건가봅니다?” “굳이 따지자면 의장대에 가깝겠네요. 중국에서는 유명한 연예인이나 예술인들에게 군사계급을 수여한대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이는 엄연히 현역이라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명예계급과 차별화된다. 장교계급으로 시작하는 만큼 의무복무인 한국의 연예사병과도 다르다. 급료와 제복이 지급되고, 별도의 근무평정과 연공서열에 따라 진급절차를 밟는다고 한다. 라이트 병장의 말처럼, 그녀는 짧은 시간이나마 CIA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인민군 총정치부 산하의 정규편제임에도 불구하고 가무단은 전력외의 조직이었으므로 별다른 정보를 쌓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지부가 증발하기도 했고.’ CIA의 모든 첩보가 중앙으로 올라오지는 않는다. 중요도가 낮은 정보는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지부는 베이징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가무단의 상급조직인 총정치부는 공산당 정치장교들의 총본산이었다. 민사심리전을 담당하는 군중공작부(群众工作部)가 총정치부에 있기도 했다. 중국군 주요 파벌 중 하나를 장악한 레이옌리에 해군소장은, 총정치부가 무력한 조직이 아님을 입증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주웨이의 신분이 실은 위장이고, 시에루 해군중장이 오르카 블랙의 실체를 눈치 채거나, 최소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지. 겨울은 그녀가 죽을까봐 데려왔다. “괜찮은 술을 준비했네. 한 잔 받게.” 얼마 전, 4월 5일. 앨러미더 섬에서의 생환으로부터 하루가 흐른 시점. 별도의 치하를 위해 부른 자리에서, 시에루 중장은 겨울에게 친히 술을 따라주었다. 내키지 않는 음료였으나 사양하지 않았다.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작지 않은 잔을 넘치기 직전까지 채웠다. 주만경, 다만기(酒滿敬, 茶滿欺). 가득한 술은 존경의 예절, 가득한 차는 경멸의 표현. 신중하고 섬세하게 더하여 표면장력으로 부풀어 오르는 독주는 곧 아들의 생환을 기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어머니로서, 군인으로서, 나이보다 늙은 장군이 말했다. “술로 근심을 태우기(借酒消愁)를 1년이 넘었는데, 오늘은 좋은 객을 맞아 오랜만에 기쁜 술을 마시겠구나.” 겨울은 일어서서 바른손으로 잔을 받았다. 더불어 단숨에 비웠다. 장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이 신기한 눈치였다. “어제는 경황이 없었으니 지금 다시 제대로 말해야겠군. 아들을 구해주어 고맙네, 리. 자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지? 그 아이가 여자 외의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빠진 모습은 난생 처음 봤다네. 사랑한다고 말할까봐 걱정될 정도였어.” 그녀는 농담을 말하면서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살아온 세월이 가면으로 굳어져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양하는 겨울 앞에서 장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아. 어디가 과장이고 어디가 진짜인지 읽어낼 정도는 되네. 꼴불견이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자네에 관한 증언은 한결 같이 사리가 맞더군.” 그래서 말인데, 하고, 장군은 가벼운 취기에 진심을 띄웠다. “자네, 내 아래로 들어오지 않겠나?” “……어인 말씀이신지.” “그래, 당황스러울 거야. 이 와중에 입대권유라니.” 겨울은 시에루를 바라보았다. 풍채 좋은 여성이었다. 늘어진 볼이 고집스러운 주름으로 뒤덮여있다. 사나운 눈매엔 힘이 넘쳤다. 시선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그저 배어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온 권력자 특유의 자연스러움. “그 시계는 마음에 드나?” 계약으로 정해진 대가 외에, 장군은 겨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시계보다는 사치품, 사치품보다는 예술품이라고 해야 할 장군의 애장품 또한 그 중의 하나였다. “물론입니다. 이런 것은 난생 처음 봤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회차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양귀자(洋鬼子)들은 과거에 시계가 신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믿었다지? 지적설계라던가, 가소로운 망상일 뿐이지만……. 그 시계를 보았을 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 구조, 그 정밀함은 차라리 신비스러울 지경이었지. 시간 그 자체가 들어있는 느낌이었거든.” 그리고 장군은 물었다. 내가 그걸 얼마 주고 샀을 것 같으냐고. 겨울은 귀한 선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시곗바늘은 멈춰선 채였다. 태엽조차 함부로 감지 않는 고급스러운 기계식 시계. 어딘가의 별자리를 보여주는 밤하늘에 보석을 뿌려 은하수를 표현했다. 푸른 배경은 필시 사파이어 분말일 것이었다.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장인들이 부품 하나하나를 깎아 만드는 시계는 부르는 게 값이었으므로. 일반매장에선 구경조차 힘들다. 경매장에서의 입찰이 기본이었다. “6천 4백만 위안일세. 당시 환율로 대략 천만 미원(美元 : 달러)이었지.” “엄청나군요.” 값 그 자체보다는, 이 정도의 사치가 가능했던 장군의 재력이 더 뜻밖이었다. 중국에서 군인이 기업을 경영하는 일이 잦고, 부정부패는 일상적일 만큼 흔하다지만, 그럼에도 일개 장성이 사치품 구입에 천만 달러를 쓰는 건 분명 드문 일일 것이었다. 혹은 장군의 가문이 그만한 실세였거나. 공산당 내의 정치적 배경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겨울은 시계를 장군에게 내밀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비록 선물로서 주셨으나,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받은 대가로도 충분히 분에 넘칩니다.” “그런가, 그런가…….” 장군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넣어두라면서. “반신반의했건만,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군.” 시험이었나? 겨울의 짐작이 맞았다. “아들 녀석의 증언과 별개로, 그 아이가 본 자네가 정확할지는 의문이었네. 아, 전공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어. 다만 됨됨이라는 것이 있잖나. 자네가 입에 담았다던 전우애는 그리 흔한 심성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게 사실인지 알고 싶었을 뿐.”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시계를 주었다고. “미국은 아직 건재하지 않은가. 자네에겐 시민권이 있고,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어.” “…….” “그 시계, 값어치의 십분의 일만 받아도 백만 미원이야. 비록 멸망이 목전이지만, 이런 시국에도 사치스러운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겠지. 아니, 오히려 사치를 부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평소보다 더 치열할지도 몰라.” 장군의 통찰은 옳았다. 겨울은 문명의 끝자락에서 전에 없던 향연을 즐긴 사람들을 수 없이 보아왔다. 그들이 둘러친 화려한 담장 안엔 희귀하고 드물어진 모든 것이 존재했다. 덕분에 사회적인 갈등이 빚어져 종말이 앞당겨진 경우도 있었다. ‘비슷한 부류이기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 이런 시계를 구입한 사람인 것이다. 겨울은 장군의 두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그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게 돌려주려고 하는군. 이는 즉 그대의 전우애가 적어도 백만 미원보다는 무겁다는 뜻일 테지.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질 영화를 접어두고, 전장에서밖에 살 수 없게 된 전우들을 택했단 말이야……. 괜찮아. 정말 괜찮은 남자로군.” 적어도 백만, 많게는 천만 이상. 돈은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다. 소년의 몸값이 얼마였던가? 이 자리에 겨울이 아니라 정보국 요원이 있었어도 고민했을 것이다. 장군이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건 넣어두게나. 은인을 함부로 시험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담겨있으니. 흡족하군. 이런 곳에서 중국의 혼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중국의 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의(義).” 장군은 단답한 뒤에 잠시 동안 입 다물고 겨울을 응시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겨울은 잠자코 다음을 기다렸다. “의리야말로 중국인들의 혼백이나 다름없지. 그대도 과연 중화의 후예라고 해야 할까……. 시국이 시국인지라 더욱 빛나 보인다네. 화교 2세인 자네에겐 수긍하기 어려운 말일지도 모르겠네마는.” 그녀는 말을 쉬며 술잔을 채웠다. 따르는 시간이 긴 것은 처음과 같은 신중함 탓이었다. 건배. 독한 향이 식도를 넘어갔다. 겨울은 둔해지는 평형감각을 느꼈다. “언제부터 의가 이토록 중요해졌을까? 나는 과거의 중국이 지나치게 거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네.”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뜻밖이군요.” “아, 물론 자랑스러운 역사지. 어느 국가, 어느 민족도 중국에 비하면 한 수 아래야. 기껏해야 라마(罗马 : 로마) 정도가 버금가는 수준일까? 세계의 모든 국가는 중국에 빚을 지고 있어.” 이어지는 장군의 목소리가 갈수록 늘어졌다. 등받이에 기대어 한숨처럼 내쉬는 말들이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보면……. 의. 그래, 의. 옛 사람들은 의 없인 살 수가 없었을 거야. 예로부터 중화는 세계의 중심이고, 통일된 대륙이었으니까. 왕조가 바뀌어도 결국은 하나의 중국이었어. 중원은 너무나도 광활했지. 국가의 행정으로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기엔 역부족이었단 말이야. 그렇잖은가. 일개 군현이 어지간한 나라보다 더 컸으니 말이야.” 마지막 문장은 조금 과한 자부심이었지만, 겨울은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비위를 맞춰주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인지, 의도가 있는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은, 그 시대의 삶이라는 것이……. 국가의 통치와 무정부 상태의 혼돈이 공존하는 무대가 아니었을까, 라는 거야. 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나는 이게 순화된 상태야말로 중국인의 삶이었다고 보는 입장이지.” “누구나 얼마간의 자구책이 필요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말이 통하는군. 혹시 부모님께 역사를 배웠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술병을 다시 들었다. 호기로운 습관이 묻어난다. 더 들겠나? 묻는 말에 겨울은 이번에야말로 사양했다. “이 또한 듣던 대로로군.” 라면서 그녀는 몇 잔을 연거푸 자작했다. 마실 때의 느낌으로는 40도 어림의 독주였는데. 대단한 주량이었다. # 167 [167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2) “맞아. 의리를 강조하는 문화는 아마도 자력구제의 방편으로서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하네. 국가의 울타리가 지나치게 거대해서, 한 번 혼란이 빚어지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겠지. 그러니 질박한 삶을 위해 보다 작고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했을 거야. 학연, 지연, 혈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치밀한 결속들. 어떤 이익을 추구하기 이전에, 우선은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그럴 듯한 말이었다. 겨울은 우물물은 강물과 섞이지 않는다(井水不犯河水)던 어느 중국인의 말을 떠올렸다. 그네들의 격언이라던가?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한 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 의리로 맺어진 인간관계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둘러두고, 그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거리에서 누군가 죽어가고 있어도 그저 남의 일일 뿐.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군은 겨울의 말에 흥미를 드러냈다. “믿음이라?” “천하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확실한 내 편을 만들어두려는 것이 아니었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만큼,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두려는 게 아니었나. 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드는 소감입니다.” 한어로 쓰면 유민과 건달은 같은 단어(流氓)입니다. 겨울은 이름 없는 백지선의 편지를 떠올렸다. 이 또한 과거의 중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조각인 게 아닌가 하고. 낯선 이를 믿지 못해 불안하고 두려웠던 심정이 적대감으로 나타났던 건 아닐까 싶어서. “그래. 결국은 같은 말이겠군. 그것이 사람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국가에서의 삶이었다고 해야겠지.” 그녀는 망설임 끝에 다음 잔을 채우지 않았다. 겨울 앞에서 내보일 수 있는 편안함은 여기까지. 다만 아쉬움이 남았는지 하얀 잔 테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자작은 끝났어도 할 말은 남았다. 그녀는 힐끗 겨울을 살피고 말을 이었다. “나라가 누란지위에 처할 때마다 가정(家丁)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이런 배경 탓일 테지.”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런, 모르는가? 사설군대. 혹은 친위대. 화교인 자네가 이해하기엔 이 정도 단어로 표현해야 좋겠으나……. 사실 이 단어를 대체할 다른 표현은 없다고 보네. 그건 단순한 고용관계가 아니거든. 좀 더 인간적으로 끈끈한 무엇이지. 의리로 묶여있는. 그래서 강했던 거야. 보통의 군대보다 훨씬 더.” 끝으로 갈수록 물씬 묻어나는 감정이 있었다. 겨울이 위로를 건넸다. “이번에 죽은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했습니다.” “그랬겠지.” 잠깐 드러났던 상실감이 두꺼운 가면 뒤로 물러난다. 계급을 불문하고, 앨러미더에서 전사한 해병들과는 의리로서 신뢰를 구축한 관계였다고, 조용히 내비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지. “재차 말하지. 내 사람이 되어 주게.” 장군이 자세를 고쳤다. “지금 비록 이렇게 비루하지만, 중화의 역사는 곧 시련에 맞서는 굴기의 연속이었어. 우리는 결국 떨치고 일어날 것이야. 시대가 혼란스러워도, 중국인에게 세상은 매양 혼란의 도가니였는걸. 딱히 새롭지도 않아. 의리로 맺어진 우리는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 걸세. 거친 세파를 견뎌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을 거란 말이야.” 그녀는 강조했다. 부귀 이전에 생존이라고. 이익을 추구하기 전 살아남기 위하여 의리가 필요했다던 말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어조가 새로워졌다. “리, 내가 앨러미더 섬을 점령하려는 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일세. 물론 그 섬에 부하들을 정주(定住)토록 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지. 그런 줄 아는 멍청이들도 있네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더라도, 멍청이들의 단순한 생각과는 많이 다른 형태가 될 테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숙고한 뒤에, 겨울이 끄덕였다.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당장 섬을 점령하더라도, 새로운 중국의 터전으로 삼기는 힘들 테니까요. 미국의 서부 탈환작전은 순조롭습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겨울이 오기 전에 상실한 영토를 모두 회복하지 않겠습니까?” “놈들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기도 하고.” 여장군이 일말의 의혹을 드러냈으나, 내부자인 겨울은 모든 선전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시에루 중장이 손가락을 세운다. “놈들이 실패하면 더는 미래가 없을 거야. 그래서 그 경우는 상정하지 않으려 하네. 의미가 없거든. 하, 내가 미 제국주의자들을 응원하게 될 줄이야.” 겨울은 적당한 놀라움을 내비쳤다. 중장이 나른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니 뜻밖인가?” “솔직히, 예. 놀랍습니다.” “허황된 꿈은 꾸지 않아. 명백한 해방이 실패로 끝나면 자살이나 해야겠지.” “…….” “농담일세. 결국엔 죽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발버둥 쳐야지. 나를 믿는 부하들을 위해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짐이 아무리 버겁더라도 버려선 안 될 거야. 사람의 도리니까. 다만 앞날이 너무 고달프지 않기를 바랄 뿐일세.”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미국은 인류 최후의 보루야. 중장이 덤덤하게 하는 말이었다. “난 새로운 중국을 만들 작정이네. 다만 작은 울타리가 되겠지. 미국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 우리끼리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 이게 내 궁극적인 목표라네.” “미국에 대한 원한은 없으십니까?” 확인해야 할 정보였다. 그동안 시에루 중장의 성향을 확실하게 파악할 기회가 없었기에. 사실 다른 중국 장성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무슨 말인가?” 장군은 모호한 눈빛으로 겨울을 마주보았다. “중국과 미국이 세계패권을 두고 경쟁하긴 했지.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에서 서로의 피를 본 적도 있고. 그 묵은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겨울, 아니, 정보국, 나아가 미국이 우려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소문이 돌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중국을 몰락시킨 배경에 미국이 존재한다고. 시역(모겔론스)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만들어낸 생화학병기라고.” 단순한 소문이 아니다.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명백한 사실로 통했다. 다른 지역이라고 딱히 낫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조국을 잃은 상실감이, 당장의 처우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여 응어리진 미움이라고, 겨울은 생각했다. 그러나 장군은 간단하게 일축한다. “아아. 그 헛소문. 자네도 들은 모양이군. 하기야 바보들이 입을 모아 떠들면 목소리는 제법 커지는 법이니.” “헛소문이라고 믿으시는 겁니까?” “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시에루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 부연을 더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만, 신빙성은 낮아. 그리고 사실이더라도, 사실이 아니어야 하네. 사슴이든 말이든 살기 위해서라면 무어라고 못 하겠나.” 지록위마의 고사를 빌어 간명하게 드러내는 속내였다. “당장은 참아 넘기겠다는 말씀이신지?” 탄궈셩은 똥을 핥고 살아남은 부차의 일화를 언급했었다. 같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들은 자신의 체면을 차렸고, 어머니는 보다 거시적인 복수를 꿈꾸고 있을지도. 그러나 그녀는 부인했다. “사소한 원한으로 대의를 망칠 생각은 없어. 인류의 존속이야말로 당대의 대의라고 할 수 있겠지. 말하지 않았나. 생존이 우선이야.” “멸망한 조국에 대한 의리는?” “그걸 지키다간 나를 따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리를 저버리게 될 것 아닌가.” 그런가. 겨울은 내심 돌아가 보고할 내용을 정리했다. 적어도 거짓은 아닌 것 같다고. 장군이 묻는다. “아랍미달(앨러미더) 섬 서쪽에 버려진 활주로가 있다는 걸 아나?” “들었습니다. 폐쇄된 군사공항이 있다고 하더군요.” “맞아. 국제공항에 맞먹는 규모로서, 과거엔 전시의 주 타격목표 중 하나였지. 지금은 관제탑은커녕 격납고 하나 남아있지 않지만……. 활주로야말로 공항의 핵심기능이니까. 미국인들이 튼튼하게 만들어놨는지, 지금도 상태가 양호하더군. 대형 수송기도 문제없이 뜨고 내릴 수 있을 거야.” “그걸로 협상을 해보시려고 하셨던 거군요.”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지. 나는 내 사람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미국은 새로운 교두보를 확보하고.” 어디서 구했는지, 벽면엔 샌프란시스코 지도가 걸려있었다. 지도 위에 무수히 그려진 선과 기호들은 장군의 기나긴 고뇌를 시계열로 나타낸 도표와 같았다. “자네도 군인이니 기본적인 안목은 있겠지. 전선에 근접한 공항은 많을수록 좋아. 그러나 어디를 점령하건 방어가 용이치 않은걸. 삼번시(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말도 말게. 거긴 시가지에서의 접근성이 너무 좋아. 오극란 국제공항도 나을 게 없어. 변종들의 끝없는 증원을 차단할 수 있는 공항은 아랍미달 한 곳 뿐이야. 다리만 끊어버리면 말이지.” “미국은 금문해협 양안에 이미 주둔지를 마련했습니다.” 겨울이 떠올린 것은 골든게이트 남북으로 존재하는 미군 기지들. 금문교 북쪽에 있는 포트 베이커만 해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벽으로 확보한 면적은 공항 하나 들어서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다. 전모를 둘러보진 않았으나, 필시 건설이 진행 중일 것 같기도 했다. ‘지형 굴곡이 심해서 쉬운 공사는 아니겠지만.’ 암시를 알아차린 장군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래.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미군보다 조금만 더 빠르면 돼.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승리니까.” 단 한 달, 혹은 단 일주일만이라도 빠르게 공항을 사용할 수 있다면 미군은 얼마든지 추가비용을 감수할 것이다. “아랍미달 섬은 거대한 전진기지가 될 거야.” “미국 정부와 협상을 원하신다면, 지금이 적격 아니겠습니까?” “글쎄. 왜노(倭奴)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진 않군.” 여장군의 단단한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스친다. “귀순하기 전에 성과를 만들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중엔 영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몰라. 대선 후보라는 것들 중 하나가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면 말이지. 중국계에 대한 증오범죄도 갈수록 늘어나는 모양이고.” 지난달, 3월 초, 슈퍼 화요일, 겨울의 이름을 팔아먹던 후보가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했다. 어느 후보든 겨울의 이름을 팔지 않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튼 그의 극단적인 언행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겨울은 새삼스레 겨울동맹의 현황이 궁금해졌다. 보안 문제로 연락이 끊긴 지 어언 두 달이 넘었다. “섬을 점령하고, 전파를 송출해서 전과를 알릴 걸세. 미국인들의 여론이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돌아설 거야. 화교들의 이목도 내게 집중될 터. 협상을 위한 최고의 조건 아닌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남 이야기처럼 말하지 말게.” 장군이 상체를 굽혀 겨울에게 가까워졌다. “내가 만들 울타리 안에 자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같은 뜻, 다른 색. 겨울은 이 대화의 모든 것이 의도되었음을 확신했다. 중장은 처음부터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다시 권할 셈이었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들에겐 영웅이 필요해. 한겨울 중위 한 사람이 난민들의 위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처럼, 자네 한 사람이 우리 울타리 안에 있는 모두의 처우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어색하군요. 장군께서는 저를 어제 처음 보셨잖습니까.” “호걸이 대업을 논할 때 만난 시간을 따지던가?” “제겐 이미 전우들이 있습니다.” “그들 또한 환영받을 걸세.”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다 들었어. 전장에서밖에 살 수 없게 되었으나,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못할 지경이라 했던가? 괜찮아. 모두 받아들이지. 장차 내가 이끌게 될 화교공동체에서 그대와 그대의 전우들은 최상의 대우를 받게 될 거야. 부, 명예, 여자. 원하는 모든 것을 내주지.” 장군이 겨울에게 준 선물을 가리켰다. 그 시계, 라고. “내가 그것을 내어준 건 그대가 단순히 아들의 은인이어서가 아니야. 자네를 통해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지. 입지를 지키는 것은 한 번 세우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니. 그것을 감안하면 그깟 시계가 대수겠는가? 훨씬 더 대단한 것도 지불할 수 있어.” 그리고 그녀는 손뼉을 쳤다. 문 밖으로 보내는 신호였다. # 168 [168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3) 두려워하는 여자가 입실했다. 해군정복을 입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계급장. 별의 형태가 다르다. 소교. 나이에 비해 높은 계급 역시 조금 이상하긴 했다. 장군의 아들인 탄궈셩조차 그 나이에 겨우 중교 아니던가.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대단한 것을 주겠다더니……. ‘이것도 하나의 시험일까?’ 부르기 전, 분명히 사전조사가 있었을 터였다. 장군이 커트 리의 성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여자를 주겠다는 맥락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여장군과 젊은 소교 사이에 흐르는 일방적인 기류란. 차라리 포식자와 초식동물의 구도에 가깝게 느껴졌다. 소교의 시선은 내내 깔려있었다. 단 한 번, 힐끗 보았다가, 장군과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떨리는 어깨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어떤가? 아는 얼굴인가?” 장군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제가 알아야 하는 사람입니까?” “허.” 침착한 대답의 어디가 기꺼웠는지, 시에루 중장의 입가가 씰룩였다. 겨울을 가만히 응시한다. 의미 모를 의혹이 가벼운 확신으로 변했다. “정말 모르는군. 나이 스물에 대중영화 백화장(百花獎)을 받은 계집이야. 중국 최고의 배우 중 하나로 꼽히지. 그래봐야 대륙 밖에선 무의미한 명성이네만, 자네가 화교라서 알 거라고 생각했네. 적어도 얼굴은 익히 보았으리라고.” “어렵게 자랐습니다. 이후엔 군대에 있었고요.” “좋아. 그럼 배경을 버리고 단순히 계집으로 보면 어떤가? 내가 보아온 남자들은 보통 정신을 못 차리던데. 자네는 반응이 심심하군.” “물고기가 물에 빠져죽을 것 같군요.” “침어(侵漁)라니? 어디 저걸 서시에 비교하는가. 정단쯤이면 또 모르겠지만.” 술 냄새가 나는 비웃음이었다. 전국시대, 같은 왕에게 바쳐진 두 여인, 서시와 정단. 재상이 평하길 전자는 나라를 무너뜨리고(傾國), 후자는 성곽을 무너뜨릴(傾城) 미인이라 했다. 경국지색 앞에 초라했던 경성지색은 왕의 총애를 얻지 못했다. 결국 상사병을 앓은 끝에 외롭게 죽었다. 여기까지가 지력보정으로 떠오르는 내용들. 전문가 최종영역의 「중국어」 보정이기도 했다. 언어는 기본적인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다. 그래서 습득에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방언과 문자가 많은 「중국어」는 더더욱 그러했다. 탤런트 어드밴티지가 아니었다면 겨울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 미국에서 자라느라 보는 눈이 다른 건가?” 겨울은 장군의 의혹을 부인했다. “아닙니다. 매양 보고 자란 건 같은 화교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들었네만.” “추억으로 충분합니다.” “역시 자네는 범상한 것들과 다르군.” 시에루 중장이 탁자를 두드렸다. 따닥, 따닥, 따닥. 취했어도 여전히 예리한 시선으로 초식동물을 훑는다. 거래 직전의 검수에 가까운 느낌. 연상되는 과거가 있어, 겨울은 불쾌감을 억눌렀다. 폭군도 저런 눈으로 소년을 보았었다. “궁금하겠지. 내가 왜 저걸 내놓았을까.” “네. 제가 여자를 사양한다는 건 이미 알고 계셨을 겁니다.” “저것을 여자가 아니라 장식품으로 생각하게나.” “……무슨 말씀이신지.” “권력자는 욕망의 대상이어야 하지.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아야 해.” “어째서입니까?” “왜냐면 그것들이 항상 위로 흐르는 감정이기 때문일세. 자기보다 낮은 이를 질투하는 사람을 본 적 있나?” 장군이 자세를 고쳤다. 자기 이야기에 몰입하는 품새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려자, 거대한 가택, 화려한 정원, 사치스러운 음식, 호화로운 여가생활과 아낌없는 낭비들. 부러워하는 순간에 위아래가 갈리는 거야. 열등해지는 거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상하관계란 뜻일세. 그 다음엔 그것을 의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만들면 돼. 너와 나 사이엔 네깟 것의 재능과 노력으론 감히 극복하지 못할 격차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 그렇게 체념을 베풀어가는 것. 그래서 잡것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를 열망하게 만드는 것. 내가 곧 전체가 되는 것. 그것이 권력자가 되어가는 길이야.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바깥 분도 그렇게 고르셨습니까?” 예의상 날카로울 법 한 반문이었으나, 장군은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어떨 것 같은가?” 한 번이라도 진짜 사랑을 했다면 저토록 두터운 가면이 생기진 않았으리라. 겨울 혼자 하는 생각이었다. 상류층, 권력자들의 삶은 태생부터 인간적으로 왜곡,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고. 그들 스스로는 불행이라 느끼지 않고, 모든 이가 그들이 행복하다고 여기겠으나, 그 또한 불행의 한 형태일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 깊어지고 또 깊어져서 저 바깥의 현실인 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래도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저를 권력자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뜻이시군요.” “그래. 권력자는 많은 사람들의 집이지. 전우들의 터전이 되어주게나. 기둥이 되고 대들보가 되어, 자네 아래에서 편안해하는 전우들을 지켜보게. 분명히 만족스러울 거야.” “…….” “저 계집은 사람처럼 생긴 암시에 불과할 뿐이야. 자체로는 별다른 가치가 없지. 가치를 두는 얼간이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애초에 내가 상대할 필요도 없어.” 장군이 대책 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 같아도, 지금까지의 말 속에 많은 뼈가 있었다. 시에루 중장은 커트 리를 검증했다. 전우와 더불어 전장에 있으리라는 각오. 그 각오가 돈에 흔들리지 않음을 확인했고, 사별한 아내에 대한 순정이 경성지색에 흔들리지 않음 또한 확인했다. 그러므로 커트 리라는 자에게 권력은 이따금의 휴식을 윤택하게 해주는 윤활유에 불과할 것이었다. 중장과의 의리를 쉽게 저버리지도 않을 터. ‘잃을 것보다는 얻을 게 더 많겠지.’ 겨울은 커트 리를 2인자로 둘 때 장군이 얻을 이익과 손해를 셈해보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은 순수한 호의라는 점에서, 여장군의, 나아가 중국인들의 처세술이 도드라지는 대목이었다. 권력은 자식과도 함부로 나누지 않는 법. 사정은 그 외에도 있을 것이다. 젊은 소교의 공포는 팔려가는 여인 이상의 감정이었다. “제가 받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왜? 싫은가?” “아내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한 건 마음 아닌가.” “사람을 물건 취급하기도 싫습니다. 그런 취급은 제가 상관에게 당했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모양이군. 내 사과하지.” 겨울은 자신의 거짓말에 고개 숙이는 시에루 중장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자평하면서. 장군이 짧게 한숨지었다. 미군도 못난 놈들이 많은 모양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받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곱씹어보니 미묘한 어감인데? 왜 그런 걸 묻지?” 해군중장의 질문. 겨울이 답했다. “장군께서 저 소교를 경멸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서 여쭤봤습니다. 섣부른 예단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손사래를 치고, 장군이 다시 물었다. “티가 나던가?” “네.” “눈치가 좋군.” 뭐 대단한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야. 그녀가 털어놓았다. “알아봤는지 모르겠네만, 저건 가짜 군인이거든.” 여장군은 인민해방군 가무단의 배경을 짧게 설명하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시역(모겔론스)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본토는 정말 아비규환 그 자체였지. 항구가 사람으로 넘쳐흐르고 있었어. 자네도 봤다면 놀랐을 거야. 사람들이 계속해서 빠져 죽었지. 그 광경을 보니 엉뚱하게도 해수욕장이 떠오르더군.” 성수기, 중국의 해수욕장은 물이 보이지 않는다. 직관적인 비유였다. “모두를 구할 순 없었어. 부끄럽지만, 나조차도 겁에 질린 상태였던 것을.” 시에루 중장이 회상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고. “가까스로 내린 명령이 그거였지. 내 사람들, 내 부하들부터 우선적으로 구조하라고. 그러나 아랫것들이라고 경황이 있었겠나. 그저 군복을 입었으면 먼저 싣고, 당원증이 있으면 먼저 싣고……. 나중에 보고를 들어보니 그런 식이었던 모양이야.” 종말의 시작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었다. 세계관의 시작이 종말의 시작과 시간과 공간 모두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겨울은 주의 깊게 들었다. “그 와중에 저 계집이 끼어있었다네.” 말에 냉소가 묻어난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군복을 입고, 가족과 친구들까지 끌고 와서는, 진짜 군인들의 자리를 빼앗았던 거야. 듣자하니 계급으로 윽박질렀다지? 응? 내 뒤를 봐주는 게 누구인지 아느냐면서, 그렇잖아도 끔찍한 재해에 맞서느라 여념이 없던 병사들을…….” 겨울은 장군의 시선에 난도질당하는 소교를 살폈다. 과연, 초췌한 이유를 알겠다.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에게 줄곧 미움받아왔을 1년이니. 단순한 따돌림도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물며 장군의 눈 밖에 난 부외자임에야. 살아도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려온 사람들은 또 마냥 기대었을 것이고.’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겨울이었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자기 운명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무력함이 그 사람의 잘못이라면, 겨울 또한 죄인이 되므로.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요소, 인간의 한계 바깥에서 다가오는 폭력적인 필연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두 관대해져야 한다.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소년을 위하여. “내 함대에 불필요한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어.” 시에루 중장이 팔짱을 꼈다. “누구나 자기 역할을 해야지. 저 계륵도 예외가 아니야. 자네가 받지 않는다면…….” “사기를 고취하기에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분란만 일으키더군.” 감히 내 아들까지. 스쳐가는 독백이 작으면서도 사나웠다. 하기야 저 정도의 미인이 휘하에 있으니 탄궈셩도 욕심을 냈을 것이다. ‘그밖에 머리가 허리 아래에 있는 남자들도.’ 그런 남자들의 비율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꼭 있는 인격장애자들의 비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겨울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다른 장군에게 넘길까 생각도 해봤지만, 각하. 고작 여자 하나에 입장을 달리할 얼간이도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어찌 믿겠는가 말이야. 그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위인이면 서시를 낀 오왕(吳王) 부차보다 못할걸? 치마폭에 푹 빠져서는 저것이 떠들어댈 내 험담에 귀 기울이겠지. 그러니 준다면 분란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줄 거야. 혹은 사람들이라거나.” 마지막이 의미심장하다. 커트 리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받는 편이 낫겠군요.” “생각이 바뀌었나?” “저를 장군님의 사람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정착하기 전까지, 저는 제 동료들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제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자들이 있는 만큼…….” 시간이 흐르면 지워질 특수화장이나 변성(變聲) 정제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오르카 블랙의 본부, 피쿼드에 정기적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나중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고.’ 때가 되면 커트 리는 유령처럼 사라질 터였다. 뭣하면 작전 중 행방불명 처리를 해도 된다. 겨울의 답이 못마땅한지, 장군은 술병을 매만졌다. “뭐, 좋아. 어쨌든 앞으로 내 의뢰가 아니면 안 받겠다는 뜻이겠지?” “의뢰라고 하실 것도 없습니다. 이미 받은 대가가 넘칩니다. 그저 필요할 때 부르십시오.” “흠. 그런가.” 중장은 숙고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소교에게 나가서 새 주인을 기다리라고 지시하고는, 술의 유혹을 끊어내며 말했다. “괘씸하기도 한데, 질러대는 호기는 또 마음에 드는군. 알겠네. 내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그렇습니까?” 친위대의 손실이 그렇게 크단 말인가? 의아한 겨울이었으나, 다음 말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조만간 장군들과 고위당원들의 회합이 열려.” 그녀가 이토록 겨울을 원한 또 하나의 이유가 나왔다. “유치하게 패싸움이나 하던 한심한 놈들이지만, 그 자라 새끼들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입장을 정할 시간이…….” 그 의미는 명확했다. CIA 정기 브리핑에서도 제기된 예측이었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성공하고 나면, 즉 미국이 모든 영토를 회복한 뒤에,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포위될 중국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뭔가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미군의 샌프란시스코 탈환 이전이어야 한다. “합종연횡의 장이 될 거야. 갈 수밖에 없으나, 극도로 위험해. 특히 교조주의자들과 광신적인 애국자들이. 그런 놈들은 대개 행동력이 흘러넘치잖나. 난 혹여 일이 틀어지더라도 살아나올 수단이 필요하네. 제한된 숫자의 수행원들로 최대의 전투력을 채워야 해. 유사시의 판단력도 검증되어 있어야만 하고.” 당연히 회합 장소를 철저하게 점검하기도 할 것이나, 목숨을 거는 데엔 단 1푼의 확률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커트 리가 앨러미더 섬에서 선보인 판단능력, 임기응변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장군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 정도면 1푼이 아니라 1할의 값어치를 충분히 하리라고. 겨울은 끄덕였다. “그래서 저로군요.” “그 전에 한 번 가볍게 시험해볼 요량인데, 그 정도는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자신감이 보기 좋아.” 장군은 비로소 만족했다. 이것이 주웨이 소교가 피쿼드로 오게 된 계기였다. # 169 [169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4) 사연을 듣고, 울프 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거, 뭐냐. 안 듣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숙련된 군인의 얼굴엔 싫은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에 대한 반감인가? 눈을 들여다본 겨울은 아니라고 느꼈다. 다른 무언가다. “에이. 죽이고 싹 잊자면 모르는 게 나은데. 잘 안 풀렸다간 꿈자리가 사납겠구먼…….” 그래, 이거. 적의 속사정을 알게 된 군인의 탄식. 상대를 알수록 미워하기 어렵다. 생면부지의 상대를 감정 없이 죽이도록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시에루 중장이 털어놓은 속내는 종말과 싸우는 또 하나의 치열한 삶이었다. 여기서 비롯되는 동질감이란, 싸우는 사람들만이 공감할 법한 것. 그녀가 만연한 부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권력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그래서 저 여자하고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노아 라이트 병장이 끼어들었다. 겨울은 채드윅에게 들은 말을 읊는다. “저는 몰랐지만, 시에루 중장의 말대로 굉장히 유명한 가수 겸 배우라고 해요. 그래서 공보처가 욕심을 내는가봐요. 중국계 시민들과 난민들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누가 쉽게 대신하지 못할 역할이긴 하죠. 조만간 후송되겠지 싶네요. 작전이 끝난 뒤엔 아마 TV에서 보게 될 거예요. 혹은 방역전선 위문공연이라던가.” 거의 확정된 사안이었다. 주웨이는 근시일 내에 잠수함을 타게 될 것이다. 라이트 병장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에이. 저는 중위님과 저 아가씨의 앞날을 물어본 겁니다. 전망이 있나 없나.” 겨울이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래요?” “마음만 맞으면 하루 만에 결혼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내일이 불확실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중위님 보기에도 끝내주게 예쁘다면서요? 저쪽도 생각이 없는 것 같진 않던데요.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닌가? 중위님 앞에서만 몸가짐이 달라지던걸.” 갈수록 짓궂다. 이러면서 친해지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내일이 불확실하기도 하고.” 그러자 병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중위님께는 깁슨 감독관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유난히 친하잖습니까? 둘이서만 이야기할 때도 많고. 당장 오늘도 만날 약속 잡혀있죠?” 정기 브리핑이 예정된 오후, 조안나는 겨울에게 조금 이른 귀환을 요청해두었다. 용건은 만나서 전하겠다며. 드물게 밝았던 기색을 보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인데, 알 수 없었다. “저랑 조안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거듭 말했지. CIA의 동태가 수상하다고. SAD의 단독작전이라던가…….’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SAD. Special Activities Division. 중앙정보국 직할 전투부대인 이들은 오르카 블랙의 초기 구성원이었고, 지금은 누적된 손실 탓에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문제는 이들의 최근 행적. 육지를 여러 차례 다녀왔다. 정체불명의 화물을 들여오기도 했다고. 감독관의 검열도 불가능했다. 장정 9호 추적 임무,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과는 별개의 영역이라면서 거부했다던가. 휴식시간, 푸념하는 조안나는 눈 아래 기미가 끼어있었다. 그렇다고 특수부대 출신의 거친 사내들에게 속을 터놓을 수도 없는 노릇. FBI 요원의 넋두리가 소년 장교에게 집중되는 건 필연이었다. “그 정도 오해는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울프 하사였다. 히죽 웃는 품이 수상쩍다. “중위님은 신고식도 안 치르셨잖습니까.”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신고식이요?” “네. 저만 하더라도 부하들 앞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췄지요. 그 와중에 훌라후프도 돌리고.” “……가혹행위?” 소년장교의 미심쩍은 의문이 하사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재밌자고 하는 짓이지만, 예, 고역은 고역이더군요. 그러니 그 정도 오해는 감수하십시오. 정식으로 치르자면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을 겪으실 겁니다. 며칠쯤 꿈자리가 사나울 만큼.”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다 비슷하다. “적당히 괴롭히세요.” 겨울의 말에 하사가 끄덕였다. “선처하겠습니다.” 저만 말이죠. 덧붙이는 한 마디가 친밀하다. 거리를 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겨울에게는 달가운 일이었다. 다른 대다수는 지금도 어린 전쟁영웅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비뚤어진 발로.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저토록 어린 녀석이, 싶은 마음. 경외와 질시가 뒤섞인, 한없이 인간적인 태도들. 소년에겐 낯설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슬슬 가봐야겠네요.”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겨울. 시간을 담은 예술품이 오후의 햇살에 반짝였다. 시침, 분침, 초침. 그 외에도 은하수와 별자리, 어느 도시의 야경과 달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시간을 인지하는 다양한 방식이 다채로운 광채의 귀금속으로 굳어진 결정체. “자네만 믿겠네. 가는 길에 시간 좀 보고 그러게. 태엽은 감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야. 그게 내 물건이라는 걸 알 놈들은 다 알거든. 건너건너 엿듣도록 하게나.” 원 주인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계는 CIA에게 받은 반지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겹쳐지는 삶과 같이 음모가들의 발상 또한 거기서 거기인가 싶어, 묘한 감상이 겨울을 스쳐간다. 시계는 또한 시간을 연주하는 악기였다. 스위스의 장인들은 시곗바늘이 째깍이는 소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거기까지가 또한 시계의 완성이라고 생각했을까. “저희는 좀 더 지켜보다가 들어가겠습니다. 노래가 듣기 좋군요.” 하사를 비롯한 화이트 스컬 타격대원들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조안나와 약속을 잡은 건 겨울 한 사람이었고, 행사를 관리한다고 해도 휴식에 가까운 업무였기에. 통신을 담당한 다른 하사가 묻는다. “근데 그렇게 말없이 가시면 예쁜 소령님이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겨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인걸요. 이 얼굴도 가짜고.” “쿨하시네.” 감독관에게 안부 전해주시길. 무전기를 멘 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무대에 집중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여러 번 보았다. 못내 흡족한 기색을 연기하면서. 오르카 블랙에 속한 옛 중국의 애국자들은 이를 면밀히 살폈을 것이었다. 시에루 중장은 무능함과 거리가 멀어 보였으니까. 그 밖의 다른 중국군 장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특출하고 유능할 수밖에. 겨울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시점까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평범하지 않다고. 고독(蠱毒). 치명적인 벌레들을 한 항아리에 몰아넣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면, 최후에 살아남은 하나는 원념이 강해 더욱 지독하리라는 미신. 옛날엔 저주에 쓰였다던가. 샌프란시스코 만은 입구가 닫힌 항아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고독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공, 아공(阿公). 피쿼드로 복귀하는 내내 행동대원들이 겨울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르신이라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긴 어렵다. 존경의 의미였다. 그 외에도 드물게 돈 리(Don Lee)라던가, 까우디요라던가 하는, 국적이 다른 존칭들이 섞여 들려오기도 했다. “왔네요, 겨울.” 감독관실에서 기다리던 조안나는 거리감 없는 미소로 겨울을 맞이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혹시 브리핑에서 뭔가 있는 건가요?” 정기 브리핑을 앞두고 잡은 약속이었다. 관계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러나 FBI 요원은 여전히 웃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좋은 소식이에요. 다행히 목소리가 돌아와 있군요.” “변성 정제를 복용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정오 이후로 먹지 않았어요.” 이 또한 요원의 요청이었다. 본연의 음색을 회복해두라고. 덕분에 겨울은 오는 내내 말을 아껴야 했다. 애초에 과묵한 인상을 만들어두었기에 어색하진 않았지만. 조안나는 캐비닛에서 봉인된 케이스를 꺼냈다. 비밀번호를 맞추어 열자, 등장한 내용물은 위성전화였다. 이게 그 용건인가? 겨울은 건네주는 대로 받았다. “이걸 주시는 이유가 뭐죠? 제가 누구랑 통화하면 되는 건가요?” 겨울이 묻자 조안나가 미안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든, 겨울이 원하는 사람하고요.” “설마…….” “포트 로버츠에 두고 온 사람들, 그동안 걱정 많이 했죠?” 그런 건가. 겨울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전화기와 FBI 요원을 번갈아 보았다. “전에 성사되면 말해주겠다던 게 이거였어요?” 작전에 참여하는 인원들의 편의를 돌보는 것도 감독관의 역할. 라디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겨울에게 조안나가 돌려준 대답이다. 그 때 하다가 삼킨 한 마디가 있었다. 무엇인지 꺼내지는 않고, 다만 성사되면 말해주겠다고 얼버무렸던 말. “안 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거든요.” 감독관이 민망해했다. “위쪽은 항상 바보 같아요. 다른 건 바로바로 허락해주면서, 이런 일은 엄청나게 미적거리거든요. 보안이니 뭐니, 의미가 없다는 걸 본인들도 알 텐데 말예요. 그러다보니 두 달 가까이 걸렸네요. 그나마도 원래 건의한 조건보다 엄격하고.” “조건?” “네. 겨울의 넷 워리어(NETT Warrior) 스마트폰 단말을 쓸 수 있게 해 달랬거든요. 통화를 포함해서, 잠겨있는 기능들을 풀어달라고. 특히 뱅킹이나 AAFES(복지지원단) 온라인 매장 이용권한 같은 것들이요. 지금은 급여를 받아도 사용처가 제한적이라 의미가 없잖아요.” 여러모로 생각한 티가 역력했다.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아뇨. 결국은 제한적인 통화만 허가받았는걸요.” “그래도요.” 조안나는 뻣뻣한 부끄러움으로 감사인사를 받았다. 시선이 어긋난다. 그녀는 빠르게 제한조건을 말했다. “아무 때나 통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전에 시간과 목적을 보고해야 하고, 감독관이나 통신보안 담당자의 입회하에 통화를 진행해야 합니다. 통화내역은 녹음되며, 보안규정 위반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작전내역이나 여타 군사기밀을 누설할 경우 최대 반역 혐의가 적용됩니다. 한겨울 중위, 이상의 내용을 숙지했습니까?” “네.” “좋습니다. 사용 방법은 여기에 있고, 지금 바로 쓰셔도 됩니다.” 조안나가 손짓했다. 이번 요청은 제가 대신 올려두었습니다, 라고. 겨울은 한 번 더 미소 만들어 보이고서, 손 안의 위성단말을 바라보았다. 겨울동맹 간부들의 번호를 외워 두진 않았으나, 지력보정으로 떠올랐다. 누구에게 연락할까. 겨울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아. 제 목소리 괜찮은가요?” “글쎄요.” 질문 받은 조안나가 갸우뚱 한다. “약효는 남아있는 것 같지 않지만,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의 목소리보다는 조금 탁합니다. 예전엔 굉장히 맑았는데. 변성 정제를 너무 자주 썼기 때문이겠죠. 며칠 정도 약을 끊으면 회복되겠으나…….” 당분간은 무리였다. “괜찮을 겁니다. 겨울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몸이 좀 안 좋은가보다 생각하고 말 정도가 아닐지.” 그렇다면야. 겨울은 암호를 입력하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길게 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반갑게 느껴지는 연륜. 상대는 민완기였다. 이쪽에서 말이 없자 한 번 더 물어온다. [처음 보는 번호인데, 누구십니까?] “접니다, 민 부장님. 한겨울이요.” [크헉.]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와당탕 쿵탕. 직후에 끙끙 앓는 신음이 이어진다. 다친 건가? 시선 마주친 조안나가 어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기,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부딪히셨어요?” [아니, 별 것 아닙니다. 어윽. 조,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겨울이 수화기를 손으로 막았다. “시간이 얼마나 있어요?” 조안나가 시계를 본다. “브리핑 전까지니까, 앞으로 약 30분 정도군요. 충분하지 않습니까?” 끄덕이고서, 겨울은 민완기가 전화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침착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대장님의 소식에 목마르던 참입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습니다.] “저도 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락드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요. 아시겠지만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라서요.” 떠나올 때 짧게 전할 수 있었던 사정은 그것이 전부였다. [헌데 지금은 어떻게?] “고마운 사람이 있거든요. 저를 많이 도와주시죠.” 감독관이 벽에 머리를 박았다. # 170 [170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5) “미리 말씀드릴게요. 이 통화는 녹음되고 있어요.”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전직 교수가 껄껄 웃었다. [굳이 영어로 말씀하시는 시점에서 짐작했지요. 애당초 비밀작전에 차출되어 떠나셨으니, 평범하게 연락이 오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고요. 혹시 중앙정보국이나 뭐 그런 뎁니까?] 겨울이 긍정하자 민완기는 다시 한 번 웃는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통에 오히려 감독관이 곤혹스러워했다. “불쾌하진 않으세요?” [그럴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낯설기는 합니다만, 신뢰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지요. 보통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는 언젠가 겨울이 했던 말과 판박이였다. [아무튼 정말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작은 대장님 목소리를 들으니 좋군요.] “저도요.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헌데,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뭔가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아뇨, 그런 건 아녜요. 단지 소식이 궁금해서.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글쎄요……. 어제와 오늘이 항상 다른 요즘인지라. 이쪽 사정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거의 몰라요. 아는 건 포트 로버츠가 무사하다는 것 정도?” 명백한 해방 작전이 진행 중인 지금, CIA나 FBI를 경유하는 소식은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한 때 조안나가 도와주고 싶어 했으나 마찬가지. 난민들의 속사정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다. [그렇습니까. 어디부터 얼마나 말씀드려야할지 조금 막막하게 느껴지는군요.] 이에 겨울은 시간을 확인했다. “25분에 맞춰주세요.” 같은 요구를 장연철이 들었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의 성실함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였다. 겨울이 민완기에게 먼저 연락한 이유이기도 했다. 밀린 소식을 듣기에도 부족한 여유. 동맹의 다른 간부들에 대한 연락은 다음으로 미뤄둘 작정이었다. 흠. 짧은 고민 끝에 민완기가 겨울의 양해를 구했다. [알겠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야기인 만큼 다소 두서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은 겨울동맹의 사정이었다. [비록 여기엔 없으시지만, 동맹의 구심점은 여전히 작은 대장님입니다. 없는 사람의 존재감이 갈수록 커지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더군요.] “그런가요?” [왜 아니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서도, 가장 큰 원인은 요즘 미국 정계의 분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 듣고 보니 타당하다. 다가오는 대선은 불확실한 미래였다. 난민의 처우 문제에 비판적인 후보가 적잖은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그가 유일하게 예외로 언급하는 것이 겨울이었다. ‘난민 전체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난민 지도자 개개인에 대한 지원체제로 전환하겠다던가?’ 즉 그가 대통령이 되어 자신의 공약을 지킨다면, 미국 정부는 난민들을 직접적으로 책임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난민들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수준의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미국 정부와 시민들에게 가치를 입증해보인 지도자에겐 엄청난 지원이 쏟아질 터. 반대의 경우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열악해질 것이다. [여론도 여론이지요. 어느 후보가 이기든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민주당이 승리해도 현상유지가 고작이겠고, 공화당이 이겼다간 난리가 날 겁니다. 이런 마당이니 작은 대장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요.]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걱정스럽네요.” 강영순 노인은 겨울을 구세주로 믿는 광신도들의 존재를 경고했었다. 역시나, 민완기의 이어지는 말이 비슷한 내용이었다. [매일 새벽마다 여기저기서 기도회가 열립니다. 『한겨울님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던가, 비슷한 이름의 모임이 상당히 많지요. 그 밖에 깡패 같은 패거리들도 늘었습니다. 작은 대장님의 친위대를 자처하는……. 굳이 말하자면 극우 깡패라고 해야겠군요. 한국전쟁기의 대한청년단과 비슷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요? 경우가 좀 다르지만 말입니다.] 대한청년단은 이승만 대통령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모르는 비교였으나, 지력보정으로 뜬 내용을 읽고,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류의 친위세력은 부작용이 수두룩했다. 시스템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에 여러 가지 불변보정이 붙는다. 상황연산 상의 무작위 변수에 악영향을 준다는 뜻이었다. “부장님들 선에서 대처하기 어려운 수준인가요?” [아, 그 정도는 아니예요. 작은 대장님 덕분에 경찰의 도움을 받기도 수월해졌고요. 아, 참. 이걸 말씀드려야겠군요. 거류구에 정식으로 보안관이 파견되었는데, 대장님과 인연이 있는 분이십니다. 일부러 이곳에 지원하셨다고. 혹시 캐슬린 헤이랜드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캐슬린 헤이랜드……. 아.” 겨울이 떠올린 것과 지력보정이 동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연이은 태풍으로 여러 댐의 붕괴가 우려되던 때, 산타 마가리타 호수를 향하는 길에서 오인사격을 가했던 두 사람 중 하나. 제프리 소대의 그렉 가드너 일병이 그녀의 사격에 맞았었다. [헤이랜드 보안관은 작은 대장님께 목숨을 빚졌다고 하셨습니다만, 정말인지요?] “조금 복잡한데, 캐슬린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네요.” 다시 만날 일은 없으리라 여겼건만. [그럼 체이스 페리 경위도 아십니까?] 이번에는 떠올리는 데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산타 마리아에서 같은 이름의 경찰을 만난 적은 있지만, 계급이 다르네요.” [그 분이 맞을 겁니다.] 민완기가 사정을 설명했다. [연립단지 공사가 끝나면서 여긴 사실상의 도시가 되었지요. 군정청의 행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고요. 덕분에 구역마다 경찰서가 들어섰는데, 한국계 거류구의 담당자가 바로 페리 경위입니다. 이 분 또한 자원해서 오신 경우더군요. 작은 대장님을 돕고 싶었다고.] “캐슬린은 그렇다 쳐도 페리 경사……아니, 경위는 뜻밖이네요.” 오염지역의 인력은 항상 수급난을 겪으므로 자원자가 우선적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만난 시간으로 따지면 채 하루가 되지 못했다. 보안관이야 생명의 은인이라 여긴다니 그렇다 쳐도, 산타 마리아 경찰 기동대원 쪽은 애매한 감이 있었다. ‘산타 마리아는 대피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본인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다. 오염지역에서 내내 활동해온 레인저와 달리, 본인은 한 달쯤 전에 도착했을 뿐이라고. 즉 산타 마리아는 민간인과 정부 인력을 가리지 않고 봉쇄선 동쪽으로 안전하게 철수했다는 뜻이었을 터였다. [사람의 마음을 누가 알까요. 경위에겐 작은 대장님의 활약이 그만큼 인상 깊었던 모양이지요. 그땐 다들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제가 보기엔 이상할 것이 없군요.] 어쩌면 부채감일수도 있겠다. 경위가 말했었다. “여긴 제 근무지고, 이건 제 직업입니다.”라고. 겨울은 그 책임감이 애향심에 닿아있다고 느꼈다. 보편적인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애향심은 가끔 겨울의 예상을 넘어설 때가 있었다. 매 경험이 낯설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디트로이트조차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중산층 이상이 많다니, 민완기의 말마따나 사람의 마음은 모를 일이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반할 수도 있는 법이고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봐요.” [인기를 감안할 때 각오는 해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대장님 덕분에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겁니다. 그렇지, 라디오에서 들은 내용인데, 우편집중국에 쌓이는 대장님의 팬레터 중에 남자들이 보낸 양도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숨죽인 웃음소리. 범인은 입을 가린 감독관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시침을 뗀다. 고개를 흔들고, 겨울이 답했다. “……죄송하지만 농담할 시간 없어요.” 민완기는 농담이라고 던지는데, 겨울로서는 실제로 겪어본 일들이었다. 언제였던가,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던 레드넥의 수줍은 고백을 떠올리면 지금도 조금 난처할 정도다. ‘그런 마음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니 어려운 것이다. 좋아한다는데. [그랬지요. 그럼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민완기가 바뀐 말을 이었다. [헤이랜드 보안관과 페리 경위 두 사람은 동맹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어려울 때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지요. 딱히 불법적인 유착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동맹 안팎을 단속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단속하는 시점과 장소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상황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도 결국 우리 대장님 덕분이지요.] “의도한 건 아니잖아요.” [그게 인덕이라는 겁니다.] 껄껄 웃고 다시 말하는 민완기. [그래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할 때가 많은 터라, 근래에는 장부장님과 사이가 나빠진 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서로 다른 쪽을 편들어주고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갈라져도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데요.” 어느 한 계파의 힘이 너무 커져도 곤란하지만, 분열을 지나치게 조장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었다. 기존에 나눠져 있던 파벌만으로도 충분히 많다. 미움이 미움을 낳는 법.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민완기가 겨울의 걱정을 잠재웠다. [요즘 사람들이 그럽니다. 예전이 참 좋았다고.] “그래요?” [매일같이 벌어지는 다툼에 넌더리를 내는 거지요. 그러면서 꼭 따라붙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작은 대장님이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고.] 과거는 언제나 미화된다. 더욱이 실제로도 현재보다 나았던 때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뭉치도록 돕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면 곤란하니 적당한 사람을 하나 밀어줘서 말이지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 [물론입니다. 송예경 씨가 의외로 사람들의 지지를 받더군요.] 송예경이라면……. 다물진흥회로 전향한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자다. 겨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엔 잘 내색하지 않지만, 원한이 무척 깊어보였는데. “그분으로 정말 괜찮을까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만, 누군가 필요했던 시점에서 송예경 씨 외의 대안이 없었습니다. 전부터 다른 단체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더군요. 폭력적인 단체도 아니고, 종교적인 모임도 아니어서 조금 늦게 알았습니다.] “으음…….” [백산호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좀 더 여유가 있었겠으나…….] “백산호? 그게 누구였죠?” [전에 마음에 안 든다고 정리하라고 하셨던 중간 간부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혹시 민 부장님이 본보기로 삼으시려던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공사현장에서 홀로 말끔했던 남자. 땀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겨울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손이 따뜻해서 의심했었다. 알고 보니 민완기가 발탁한 인물이었고. ‘자르라고 했더니 망설이셨지.’ 사실 민완기는 그를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킬 희생양으로서 선별했던 것. 사람들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을 때 강력하게 처벌하여, 동맹에 대한 지지와 결속을 단단히 하려던 의도였다. 겨울은 그것을 거부했다. 겨울의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소년은 항상 생각한다. 온전히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인 죄라는 게 존재하는가, 하고. 민완기는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이니 그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방조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었다. “그가 뭘 어쨌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죠?” [어쨌다기보다는, 돈이 많더군요.] “……돈?” [예. 애초에 대단한 부자였나 봅니다. 여기가 도시로서 기능하게 되자마자 엄청난 돈을 풀어대더군요. 군정청 차원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지요. 상업용도로 지어진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불하받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야말로 한국인의 대표적인 악덕 가운데 하나 아니겠습니까. 민완기의 평에서는 쓴 맛이 났다. “좀 황당하네요. 그만한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사람들 말로는, 첫 번째 은행 창구가 열리자마자 지폐로 가득한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독하다면 정말 독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무게만 하더라도 가뿐히 수십 킬로그램이었을 것인데, 휴지조각보다 못한 짐덩이를 악착같이 지니고 다녔으니 말입니다.] # 171 [171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6) 그런 사람이 백산호 하나 뿐인 것은 아니었다. [정도는 덜해도 비슷한 종자들이 있습니다. 100달러 지폐가 워낙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통에 시크릿 서비스 무장요원이 파견될 정도였지요. 결국 전부 정상적인 화폐라는 결론이 나서 그냥 돌아가긴 했습니다마는……군정청 분위기로 보아, 미국 정부 차원에선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시크릿 서비스는 미 대통령 경호국으로 알려진 기관인데, 사실 주 업무는 경호가 아니라 위조지폐 단속이었다. 미국 경제의 핵심인 달러화를 수호하는 것. 즉 난민구역에서 위조지폐가 만들어지는 줄 알고 재무부가 기겁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좋아한다고요?” [왜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써도 좋은 예산이 생기는 건데요. 오염지역의 땅을 불하할 뿐이니 정부 입장에서 잃는 것도 없습니다. 부채한도나 화폐발행 한계 등의 제도적인 제한을 피해서 국가회계에 기름칠할 수단을 손에 넣은 셈이지요. 군정청 지원 예산으로 빠지는 금액도 줄어들 것이고요.] “그런 건가요…….” 경제적으로 깊은 내용은 겨울에게 어려웠다. 부채한도 운운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러나 민완기가 하려는 이야기는 문맥상으로만 와 닿으면 충분했다. “정부가 좋아한다니, 분배국에서 제동을 걸기도 어렵겠네요.” [예. 리친젠 그 늙은이가 요즘 기분이 좋습니다. 선물을 자주 보내옵니다.] 땅과 건물을 불하하는 것도 분배국의 역할이었다. 거기엔 리아이링이 들어가 있었다. [정경유착은 한, 중, 일이 각별하게 공유하는 관행입니다. 돈이 돌면서 그들 사이의 험악한 관계도 누그러지더군요. 예전처럼 대규모 항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잘 됐다면 잘 된 일인데 좋은 느낌은 아니네요.” [여튼 백산호 그 사람은 소위 자본가들의 대표를 자처하는 중입니다. 동맹 내의 돈 많은 이들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적의 졸부들하고도 협력하는 모양이에요. 리친젠에게도 줄을 댄 것 같아서 삼합회 쪽으로 항의해보았으나…….] “소용없었겠죠. 범죄자에게 상식을 요구하는 거잖아요.” [매번 말만 그럴 듯 합니다. 난처해하는 건 리아이링 양 뿐인데, 그마저도 본심인지 모르겠고. 지치더군요. 중국인들의 두루뭉술한 화법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봅니다.] “고생하셨어요. 송예경 씨 말고 다른 사람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는 말씀이 이해가 돼요.” 여기까지의 대화를 감독관은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CIA와 FBI의 도청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던 그녀였다. 얼마간 전후사정을 아는 만큼 이해에 깊이가 있을 것이었다. [불안의 여지는 있겠으나, 작은 대장님이 돌아오시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완기의 말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학자가 단언했다. [동맹이 만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회고주의가 고개를 드는가는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는 결국 작은 대장님이 핵심입니다. 그 그리움을 부추길수록 대장님이 돌아오셨을 때의 파급력이 강해지겠지요. 왕의 귀환이라 해야 할까요.] “너무 거창해요.” [극적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즐거운 느낌이었다. [저와 장 부장님 사이의 갈등도 그 시점에서 거짓말처럼 끝내는 겁니다. 혼란의 태반을 단숨에 잠재우는 거지요.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의심하기 전에 감성적으로 열광할 것이고요. 그게 대중의 속성입니다. 하나하나가 똑똑해도 뭉쳐 놓으면 분위기에 휩쓸리지요.] “그런 점은 여전하시네요. 사람들을 나쁘게 보시는 거.” 과거에도 비슷한 대화가 있었다. 그 때 민완기는 정치와 종교의 뿌리가 같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제가 이해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믿습니다.”라고. 인간에 대한 회의와 냉소. 인간의 한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느껴진다. 사람이 그 한계를 넘는 일은 없으리라고. [대장님도 사실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저는 조금……다르다고 생각해요.” [믿고 싶으시지요?] “글쎄요.” 단 하나의 예외가 일반화를 부정하는 법이었다. 겨울에겐 두 명의 예외가 있었다. 하나가 지극히 아름다웠기에 생전을 견디고, 사후를 이어간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세계관에서는 더 많은 예외가 존재했다.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예전엔 단순히 미화된 과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물리현실의 지난날이, 생전의 현재와 달리 정말로 좀 더 아름다웠던 건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 “민 부장님, 힘들지 않으세요?” 겨울이 물었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상대하는 거, 분명히 지치실 텐데요. 도와주시는 건 고맙지만요.” 브리핑이 다가온다. 그러나 시간제한이 있어도 듣고 싶은 답이었다. [오히려 만족스럽습니다.] 과거에 냉소적인 과거가 말했다. [예전의 저는 톱니바퀴였습니다. 거대한 무대 위에서 우글거리는 조연들 가운데 하나였고요.] 그러면서, 애초에 주연이 존재하지 않는 희극이었다고 덧붙인다. 쓰레기통과 같아, 서로 혼란스럽게 부딪히는 와중에, 우연의 산물로서 질서와 법률 같은 것이 나오곤 했다고. [세상의 모든 불합리가 제 한계 너머에 있었지요. 나쁜 관행과 모자란 사람들에게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꿀 때도 있었습니다만, 나이가 들면서는 체념을 몸에 익혔지요. 그게 사람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단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는 삶.] 그는 그 나름대로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사는 게 뭐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가끔 즐겁기도 하고.] 여기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겨울은 민완기의 남은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계라는 단어에 공감이 간다. 적어도 세상을 보고 느낀 감정에서 소년과 교수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주변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금이 더 낫다는 말씀이세요?” [정확합니다.] 흡족한 반응이 돌아왔다. [역시, 세상이 아직 멀쩡할 때 작은 대장님이 제 학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군요. 예전부터 여러 번 말입니다. 단순히 이해력이 좋다는 게 아니라, 형언하기 어려운 공통분모가 있다는 느낌이에요.]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민완기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미 알아주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예. 저는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욕을 먹겠으나, 차라리 종말이 다가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합니다. 잘못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줬으니까요.] 이 역시 생전의 겨울이 해보았던 생각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 밖에서 다가오는 불행에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거나, 혹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불행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다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사람을 넘어선 누군가가 먼저 공감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만 한다면. 그 최초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제가 작은 대장님을 좋아합니다. 이 모든 게 사람 같지 않은 한 사람 덕분이거든요.] 겨울이 웃었다. 드문 솔직함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꿈을 꾸고 있었어요.” 이 주제는 여기까지. 난민구역의 다른 근황이 언급되었다. “한별 씨가 결국 해낸 모양이네요.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니.” 장한별. 유라 분대의 지정사수. 사격 실력이 빼어나고, 그만큼 좋아하기도 해서 트리거 위치(Trigger Witch)라는 별명을 얻은 그녀가 저격수 교육과정(Sniper school)을 수료했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대대장 이상의 추천을 받아냈는가 보다. “봉쇄선 동쪽이라곤 해도 결국 포트 베닝 안에서만 훈련을 받았을 텐데, 본인은 좋아하던가요? 실망했을까봐 걱정스러워요. 의욕이 꺾이면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빈말이 아니었다. 이 세계관에서 미국은 인류 문명 최후의 보루이며, 봉쇄선 너머에 대한 동경은 난민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 조지아 주의 군사기지에서 보낸 3주는 사막을 헤매던 사람에게 주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도 있지.’ 사격교관을 담당한 미군들은 한 결 같이 트리거 위치의 기괴함을 언급하곤 했다. 사격할 때 키득키득, 히죽히죽 웃는 소리가 은근히 소름끼친다고. 본인에게 물어보니 자제가 안 된다고 했다. 기분이 너무 좋다던가. 겨울은 무기와 사격에 대한 그 기이한 애정이 스트레스의 반작용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진석의 규율에 대한 집착이 공포를 견디는 수단인 것처럼. 겨울은 진석보다는 도리어 유라 쪽이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있다고 본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냥 좋았다던걸요.] “그래요?” [본인 말로는 꿀잠을 잤다고 하더군요. 밥도 맛있었고, 훈련도 힘들지만 보람찼다고. 우울하기는커녕 하도 자랑을 늘어놓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샘을 낼 정도입니다. 박진석 조장이 그러더군요. 한별 양의 자랑이 분위기를 해치는 걸 탓해야 할지, 덕분에 모두가 사격에 더욱 의욕을 내는 걸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저런.” [기왕 말이 나왔으니 알려드리면, 한별 양의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쪽으로는 미달하는 면이 많았으나, 사격만큼은 기지 사령관이 칭찬할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훌륭하네요. 메달 같은 걸 받아오지 않았어요?” [그것도 열심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볼 때, 미국은 여전히 난민 출신으로 전투부대를 꾸리는 데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전투조 규모도 백 단위까지 늘었고, 본토로부터 장교와 부사관이 충원될 거라는 말도 나오는 마당이라고. 신형 장비인 센추리온 장갑복이 정식으로 지급되었다는 말을 듣고, 겨울은 금방 납득했다. ‘하기야 현 대통령도 민주당 출신이니까.’ 난민정책의 성과가 가시적일수록 대선의 판도 역시 민주당에 유리하게 기울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돌아가면 독립중대 하나 쯤 책임지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네. 예전에 마약 거래처를 소탕할 때 오코너 치안감님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지도를 봤거든요. 앞으로의 개발계획이 나와 있었죠. 거류구 한복판에 공터가 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거기가 중대본부 들어설 자리가 아니었나 싶어요.” 고급 정보라고 판단해서 눈여겨보았던 지도였다. 통상적인 도시였다면 공터를 공원 예정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포트 로버츠였다. 기지의 방어력을 감안하면 그런 식의 어중간한 공간낭비가 허용될 리 없었다. “난민 지원병들이 미군을 보조하는 거랑, 난민으로만 구성된 전투부대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걸요. 대통령 성향을 감안할 때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입지도 제고될 테니 말입니다.] 여기서 조안나가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타임아웃. “시간이 됐네요.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겠어요. 아직 듣고 싶은 말이 많은데.” [별 수 없지요. 전화기가 있는 간부들에게 귀띔을 해둘 테니, 다음엔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서라도 충분한 사정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장 부장을 추천해드립니다만, 작은 대장님께서 판단하실 일이겠지요.] “고려할게요.” [마지막으로 여쭙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당장은 기약이 없네요.” [혹시 해가 바뀐다던가?] “설마 그렇게까지 길어지진 않겠죠. 저를 비밀임무에 묶어두는 건 지금도 꽤 부담스러울 텐데요.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얼버무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겠고요.” 부담스러울 주체가 여럿이라 주어를 생략했다. 예전에 찍힌 영상과 사진 중 미공개분을 편집하여 시민들의 요구를 무마하고는 있으나, 그게 얼마나 더 길어질 수 있겠는가. [맞는 말씀입니다. 하면, 돌아오실 때까지 무사하시길 바라며 최선을 다하고 있겠습니다.] “네. 부장님도 건강하세요. 일이 즐겁다고 해도 무리하진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겨울은 통화를 끊었다. 조안나가 단말기를 건네받아 가방에 수납한다. 증서, 암호표, 설명서 등이 같이 들어갔다. 가방을 잠그며 감독관이 하는 말. “굉장히 인상 깊은 대화였습니다. 몰래 듣는 거랑은 많이 다르군요.” “조금 부끄럽네요.” “아뇨. 말 그대로 지도자라는 느낌이어서 신선했습니다. 부장이라는 분도 무척 현명하신 것 같고. 그런 사람이 겨울을 돕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드물죠. 그런 분은.” 이제까지의 경험을 모두 살피더라도, 민완기는 특이하고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그럼 갈까요.” 브리핑 룸은 멀지 않았다. 겨울은 감독관과 나란히 걸었다. # 172 [172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7) 브리핑은 좋은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드디어 중국인들의 북두성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네이선 채드윅은 졸린 눈으로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었다. 중국인들의 북두성이란 베이더우 위성을 말했다. GPS와 기능이 동일하지만, 군사적인 용도로 개발된 시스템. 잠수함 발사 탄도탄의 최종유도과정에 관여한다. 프로젝터로 쏘아진 화면이 위성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위성신호를 받는 구 중국군 함선들의 위치까지도. 개중 샌프란시스코 만 내부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붉은 점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채드윅이 바로 그 점을 가리켰다. “이 성과는 포인트 찰리 854, 코드 네임 시리우스가 트로이 목마에 감염된 덕분입니다. 목마의 고유번호를 조회해본 결과 행운의 주인공은 한겨울 중위더군요. 전에 잠수함에 흘리고 왔다던 그 USB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다들 잠시 박수 좀 쳐주시지요.” 느닷없었다. 겨울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분명하게 기뻐하는 일부, 그리고 다시 피곤하고 감흥 없는 일부, 마지막으로 떨떠름하거나 불쾌해하는 일부의 사람들. 마지막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곳에서의 겨울은 신참자에 불과하기에. “축하합니다, 중위. 위성망 하나를 통째로 훔쳐낸 전공이니, 잘하면 이걸로 훈장을……인텔리전스 크로스(Intelligence Cross)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위에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하거든요. 거의 결정사항이라고 봐야겠지요.”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돌아보면 올리버 탤벗이었다. 짙은 갈색 피부의 전술정보 분석관. 특수화장 때문에라도 자주 보는 사이여서, 데면데면한 CIA 요원들 중 그나마 안면을 많이 익힌 축에 든다. 그 옆에서 윙크를 보내는 것은 통신보안 담당관인 섀넌 코왈스키 요원. 목마를 제작한 것이 그녀였다. 겨울은 조금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전공을 말하자면 그녀의 이름도 언급되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방향을 바꿔 채드윅에게 묻는 겨울. “인텔리전스 크로스가 그렇게 쉽게 수여되는 물건이었나요? 전 정보국 소속도 아닌데요.” 어느 기관이든, 십자장(Cross)의 격은 명예훈장의 바로 아래였다. 육군이나 해군, 공군과 달리 정보국의 십자장은 희소도가 높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수여되는지조차 기밀일 때가 많았으므로. 수훈자의 정체가 곧 미국의 떳떳하지 못한 역사인 경우였다. 정보국 지부장이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뭐 어떻습니까? 피그만 침공 때보다는 낫지요. 충분한 공로도 있고.” 피그만 침공. 미국이 쿠바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물론 대놓고 쳐들어갈 순 없었으므로, 배후에 CIA가 있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왜 하필 그런 예를 들었지? 어떤 의도가 있는 건가?’ 지력보정으로 뜨는 정보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의 겨울이 이 이상을 아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겨울에겐 우호적인 FBI 감독관이 있었다. 고민하는 기색을 눈치 챘는지, 책상 아래에서 펜 머리로 쿡쿡 찌르는 그녀. 이제는 익숙해진, 필담을 나누자는 신호였다. 사각사각. 옆자리에서 듣는 만년필 소리에선 언제나 안정감이 느껴졌다. 정갈한 글씨도 매한가지. 이쪽이 잠잠해지자 채드윅이 브리핑을 재개했다. “아무튼 여러분, 이걸로 모비 딕……장정 9호의 핵위협이 크게 경감되었습니다. 미사일이 실제로 발사되더라도, 주요 대도시와 군사기지에 직격탄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을 수 있게 된 거지요.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를 들으며, 겨울은 곁눈으로 조안나가 적는 글줄을 읽었다. 「피그만 침공의 수훈자들은 기밀이 해제된 이후에 선정되었습니다.」 사각사각. 「공로 그 자체로 훈장을 수여할 작정이었다면 그 전에 이미 결정했을 겁니다. 사건이 끝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을 기렸다는 건 공로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고요. 실패한 작전이고,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킨 사건이니까요. 사견이랄 것도 없으나, 정보국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즉 겨울에게 주어질 정보국 최고의 훈장 또한, 겨울이 잘해서라기보다는 여론관리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라는 견해였다. 「아시다시피 시민들은 겨울을 무척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훈장수집가의 명성도 같은 맥락이겠고요.」 겨울이 따다닥 점을 찍고 빠른 물음을 적었다. 「……훈장수집가요? 제가 그런 식으로도 불리나요?」 옆에서 살풋 웃는 느낌. FBI 요원의 절제된 필기체가 새로운 문장으로 유려하게 이어진다. 「그렇습니다. 겨울의 수훈기록은 횟수와 기간 양면에서 대단하지요. 이 사람, 내 영웅이 다음엔 어떤 훈장을 받게 될까. 그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일을 찾기 어려운 요즘인걸요. 제게도 그런 마음이 있고요. :-)」 조안나가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일종의 보험이기도 합니다. 장정 9호를 끝끝내 잡지 못하게 되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맥락에서 겨울 당신을 내세울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대중과 언론, 행정부는 물론이거니와, 한겨울이라는 이름 앞에서까지 가혹할 의원은 없을 테고요.」 여기서 의원이 언급되는 건 의회의 감찰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CIA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상임위원회가 상하원 각각 복수로 존재했다. 「그리고 중앙정보국의 인지도를 늘릴 수단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정보관계자다보니, 조안나가 발휘하는 통찰에는 시간간격이 없었다. 「지금의 정보국은 입지가 좋지 않습니다. 당장 예산편성 단계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어요. 국제적인 첩보망이 무너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직의 존폐를 우려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자기 존재를 역설하는 수밖에요. 대중을 겨냥하면 의회가 움직입니다. 한 때 NASA가 그랬었죠.」 인지도가 곧 영향력이라는 말. 예산이 부족하면 한 도시에서조차 도로 하나를 경계로 경찰서가 사라지고 상수도가 끊어지는 나라였다. 연방기관이라고 처지가 다르진 않았다. 비밀작전에서의 공적을 확실하게 각인시켜두면, 향후 겨울을 다시 끌어다 쓰기 용이할 거라는 쪽으로도 생각해볼 법 했다. ‘어쩌면 시리우스를 감염시킨 목마는 내 USB가 아닐 수도 있겠어.’ 겨울의 판단이었다. 전공을 일부러 몰아주려는 거라면 무슨 조작을 못하겠는가. 채드윅의 말처럼 운이 지나치게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대원들에게도 동일한 USB가 지급되었을 것이고, 각자의 임무에서 적합한 방식으로 두고 왔을 테니까. 「불쾌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냉정하게 조언하자면, 겨울은 어디에 쓰더라도 좋은 소재입니다. 혹여 나중에라도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겨울이 대답을 적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걸로 마음 상할 만큼 무르지는 않거든요.」 그러나 조안나의 옆얼굴에서는 근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길어지는 필담 사이에서 브리핑은 이번 소득의 다른 의의를 논하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정보의 보고더군요.” 포인트 찰리 854, 코드 네임 시리우스는 구 중국 해군의 정보수집선, 천랑성(天狼星)을 뜻했다. 누군가 거기서 남자들에게 꼭 필요한 동영상을 감상한 모양이다. “중요한 소득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시에루 해군중장 일파가 사용하는 통신암호. 둘째, 그들이 보유한 무기 및 병력의 상세. 셋째, 그동안 이루어진 교신기록들. 이 중에서 마지막이 가장 인상 깊었지요. 여기 샌프란시스코 만에 있는 중국군 장성들의 성향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몇 사람 은밀하게 설득해볼 수도 있겠더군요. 다시 한 번, 잘 했어요, 한 중위!” 채드윅 팀장의 익살은 늙은 개의 의무적인 애교 같았다. 겨울은 어색한 표정을 만들었다. “현 시점에서 당면과제는 다가오는 그들의 회합에 어떻게, 얼마나 대비하는가입니다. 뭐 방금 말씀드린 것들이야 우리 정보국에서 할 일이고, 이제 여러분이 할 일에 대해 알려드리죠.” 화면이 바뀌었다. “붉은 별들의 정상회담이 열릴 장소는 중국 선적의 2만 4천 톤급 크루즈-페리선, 보하이진주(渤海金珠/발해진주)호로 예상됩니다. 열심히 도청해보니 그렇더군요.” 재생되는 영상은 녹화된 것이 아니었다. 무인기가 보내오는 실시간 관측화면이었다. 배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좋지 않았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여긴 그야말로 사지입니다. 세 개의 세력에 속한 네 척의 구축함이 함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거든요. 그 중엔 우리가 수중폭파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배도 있지요. 아무튼 한겨울 중위 혼자 침투하게 될 것인데, 제가 묻고 싶은 건 타격대 지휘관 분들의 의견입니다. 유사시 구조대 투입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 특수부대 출신의 지휘관들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 중 하나, 화이트 스컬 중대장 콜린 파울러 대위가 손을 들었다. “그냥 회담 장소를 날려버리면 안 되는 거요?” “화끈한 의견이군요.” 채드윅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검토해봤습니다만, 가치가 없습니다.” “대가리들을 싹 몰살시키면 나머지가 꽤 혼란스러울 텐데. 당장 장정 9호를 해치우지 못하는 게 호위함들 때문 아니요? 그것들이 혼란에 빠질 경우 우리가 사냥할 고래는 무방비 상태가 될 것 같소만.” 장정 9호가 위험하다곤 하나, 그 한 척만으로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골든게이트 바깥에 미 해군의 순양함이 깔려있었다. 잠수함 혼자서는 미사일을 발사하는 즉시 요격당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중국 함선들의 엄호. 대위는 혼란에 빠진 그들이 잠수함을 지켜줄 수 없으리라 예견하는 것이었다. 채드윅이 장난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분기탱천해서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살시키자고 의기투합할 가능성도 감안해야지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셔도 곤란합니다, 대위.” 군인 쪽의 인상이 더러워졌다. 단순하다, 라는 말에 의미 이상의 어감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겨울 또한 순간적으로 스쳐간 경멸감을 놓치지 않았다. 한 때 채드윅 스스로 말했었다. 정보국 일부 인원들이 무장요원들에게 거만하게 굴었었다고.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나.’ 정보국 요원들은 학력 면에서 미국 정상의 인재들이었다. 아무래도 육체파 출신이 많은 전투요원들과는 기본적인 거리감이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계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겨울이 가늘어진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팀장은 재차 설명했다. “그럴 거면 진즉에 공격기 잔뜩 띄워서 붉은 군벌들을 싹 쓸어버렸겠지요.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어차피 레이저로 유도하면 오폭도 최소화될 것이고. 그러나 그래서는 수면 위쪽만 청소될 뿐입니다. 물 아래의 적대적인 연합에는 무력할 겁니다. 골든게이트 입구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확실하게?” 골든게이트가 좁은 물길이어도 빠져나올 방법은 있다. “한겨울 중위 혼자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만.” 이는 한 명의 전우를 구하기 위해 한 개 대대가 움직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현장 지휘관의 발언이었다. 정보국 지부장과는 근본적인 입장이 다를 수밖에. 채드윅이 히죽 웃었다. “그거야 본인 의견부터 들어봐야지요. 그렇잖아도 물어보려던 참입니다.” 시선이 겨울에게 집중되었다. “중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대위가 또 한 차례 인상을 썼다. 질문하는 방식이 글러먹었다. 대위를 이해하면서도, 겨울은 끄덕였다. 달리 어쩌겠는가. 무의미한 논쟁을 벌여 무엇을 얻겠다고. ‘정말로 죽을 생각은 없지만…….’ 겨울은 속으로 누이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날을 더듬었다. 금방 떠오르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단순히 날 잊은 거라면 좋겠는데. 날 잊고 그저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사는 거라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는데. 걱정은 시작되면 끝이 없었다. 눈에서 멀어져 마음에서도 멀어진 것이기를. # 173 [173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8) 브리핑으로부터 이틀 후. 시에루 중장이 겨울을 호출했다. 장군들의 회동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비는 되어있었다. 애국심 운운하며 죽을 각오를 물었던 채드윅이지만, 겨울을 쉽게 방치할 수는 없었던 모양. 처음부터 대책을 세워둔 채로 소년장교를 시험해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회동에 참석할 별도의 협력자가 있다던가. 그 정체까지는 겨울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의 유일한 끄나풀인줄로 아는 상태라고. 다만 어감과 정황으로 미루어 장군급 인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선 유사시 겨울에게 도움을 줄 능력이 부족할 테니. 생각하느라 잠잠한 틈에 시에루 중장이 묻는다. “혹시 불쾌한가?”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에 뵈었을 때 이미 실력을 확인해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언제가 될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쾌할 이유가 없지요.” 이곳은 현 시점에서 병영으로 전용된 여객선이었다. 여기서 커트 리의 검증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 방식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장군의 우호적인 태도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봐온 남자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던걸. 근거를 내보이기 전에 무턱대고 믿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이 그들 나름의 자존심이라던가.” 여장군이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겨울이 긍정했다. “요한복음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굳이 지력보정이 아니어도 익히 들은 경구였다. 본래의 의미를 떠나 제멋대로 왜곡해대는 광신도들의 입으로부터. 그들의 외침으로부터. 현실도피 수단으로서의 믿음. “오, 이런. 이거 뜻밖이군……. 아니, 자란 국가가 국가이니 이상할 것도 없으려나. 혹시 자네도 야소(耶稣, 예수)의 신도인가?” 신기해하는 한편으로 조심스럽기도 한 장군 앞에서 겨울은 즉각 부인했다. “아닙니다. 어릴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나마 있던 약간의 신앙도 전장을 거치면서 죽었고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있다면 전쟁 같은 건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전에 정해진 커트 리의 설정이었다. 여기에 짧은 공백을 두고 덧붙이는 한 마디. “그래도 요즘 들어선 믿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절대자에게 구원을 청하려고?” “아뇨. 그렇게까지 나약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놓고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죠.” “그러면?” “원망할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세상이 너무 끔찍하니까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존재한다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장군은 소리 내어 웃었다. “달라, 역시 달라. 내 부하들이 자네의 반만 닮아도 좋으련만.” 그리고 깊게 내쉬는 한숨. “오두미교든가 태평천국이라든가 해서, 어지러운 세상에 온갖 사교(邪敎)가 흥성하는 거야 낯설지도 않은 일이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에조차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네. 일일이 대처해야 할 입장에선 정말 짜증스러운 일이야. 인민군의 개개인은 분명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었을 것인데……. 인류가 쌓아온 지성과 철학의 지반이 이토록 약한 것이었나 싶군.” 아니, 이건 못들은 걸로 해주게나. 겨울이 본 장군의 얼굴은 이제껏 보아온 낯빛 가운데 가장 깊은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울은 그 감정을 십분 이해했다. 스스로도 겨울동맹에서 익히 우려하고 대처해온 문제 아니었던가. 공산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답게, 철학에 관한 믿음은 종교에 대한 신뢰 이상이었을 터. 민간신앙과 미신이 보편적이어도, 어디까지나 전통과 문화의 영역이었다. “약한 것이 죄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책임지는 데엔 한계가 있겠지요.” 그 한계도 결국 사람의 한계였다. 넘어서고자 하는 벽이었고. 공감하는 장군의 입가에 우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따라 대인과 소인이 나누어지는 것이겠지. 힘들다고 해서 그들을 마냥 저버리면, 나 역시 그들과 매한가지의 소인배가 되어버릴 테니. 나는 내 울타리를 지킬 거야. 미치고 병들어도 내 부하들이고, 내 사람들인 거지.” 비뚤어졌어도 강한 인격이었다. “오늘 저는 어떤 시험을 받게 됩니까?” 장군이 앞장섰다. “따라오게.” 사전에 지시받은 내용이겠으나, 호위병들이 여장군과 겨울을 동격으로 호위했다. 층이 바뀌면서 분위기도 바뀌었다. 약간의 악취가 감도는 건조한 공기. 곳곳에 핏자국이 선연하다. 객실마다 창살이 붙어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긴 울부짖음. 이런 단서들을 자동으로 분석하는 「추적」 덕분에, 겨울은 여기서 이루어진 무수한 형벌 및 고문, 가혹행위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곧이어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하늘이 보인다. 본래 유리창으로 덮여있던 천장이지만, 여러 곳이 깨진 김에 아예 다 들어낸 것 같은 구조였다. 이 광장은 무장병력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준비된 좌석에 앉아있던 간부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선다. 시에루 해군중장의 아들, 탄궈셩 중교였다. 어머니에게 절도를 갖춰 경례한 다음, 겨울에게는 허물없는 반가움을 표한다. “이 사람!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기쁨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돌려주는 겨울. “염려해주신 덕분에 별 일 없었습니다. 중교님께서는 어떠십니까? 복귀하신 뒤에 몸살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젊은 중교가 민망해했다. “몸보다는 마음의 병이 아니었나 싶네. 부하들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더했지.” 지켜보던 장군이 지적했다. “탄궈셩 중교. 사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아니다. 자리로 돌아가라.” “아……” 젊은 장교의 민망함이 다른 의미로 짙어진다. 그러나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얼음처럼 차갑고 강철처럼 단단했다. 보는 눈이 있어서라기보다, 공사구분이 엄격하다는 느낌. 겨울은 광장의 중앙을 보았다. 철창이 둘러쳐진 상태였다. 장교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는 두꺼운 유리를 대놓았다. 딱 보아도 방탄유리였다. 시에루 중장이 말했다. “저기 있는 것들이 시험을 위해 준비된 자라새끼들일세.” 겨울이 대꾸했다. “저는 쾌락살인마가 아닙니다.” 장군이 커트 리를 시험하려는 방식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희생양들은 갑판에 용접된 족쇄에 묶인 상태. 총으로 쏴도 끊어지지 않을 굵은 사슬이 그들의 행동을 제약했다. 허용된 동선은 전후좌우로 1미터 정도일까. 그들 앞엔 완전히 분해된 각종 화기가 놓여있었다. 눈앞에 무기를 두고도 감히 손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겨누고 있는 저격수들 때문이겠고. 유일하게 화기와 사람이 없는 테이블은 아마도 겨울이 들어갈 자리일 것이다. “나도 내 호위무관이 살인마이길 바라는 건 아닐세.” 장군의 말은 차분한 음성으로 이어졌다. “저기, 머리가 갈색 반 검은색 반인 녀석 보이나?”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엔 초췌한 모습의 전직 장교가 있었다. 전직이라고 한 것은, 계급장이 뜯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병사 정복과는 사소한 차이가 있어 예전 신분을 짐작하는 게 가능했다. 머리를 물들인 품새로 보아 비교적 최근까지 풍족하게 지냈던 게 틀림없었다. 화물선으로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서 염색약이 그리 귀한 물건은 아닐지라도, 아무나 막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물자의 희귀함보다는 조직의 분위기 문제일 것이었다. “저 놈은 다섯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를 강간했지. 뒤쪽은 욕망도 아니고 그냥 장난으로 한 짓이었어. 내장파열로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네. 쓰레기(人渣) 같으니라고.” “……그렇습니까?” “그 외에도 무수한 잘못을 저질러왔으나, 단파의 중진인 형의 위광으로 무마해온 악질이야. 그동안은 내 사람들을 보살피느라 어쩔 수 없이 참아줬지만, 시대가 이렇게 된 뒤에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걸 봐줄 이유가 어디 있겠나?” 단파(团派)는 공산주의청년단의 약칭이었다. 계파 다툼이 치열한 공산당 내에서 입지가 강한 신진세력 쯤 된다. 전문가 영역의 「중국어」로부터 제공되는 사회문화적 배경을 빠르게 훑고서, 겨울은 나머지 죄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시선의 이동을 알아차린 장군이 냉소적인 독설을 연달아 쏟아냈다. “그 옆의 곱슬머리 자라새끼는 겁도 없이 해로인(海洛因, heroin)을 팔아먹었어. 외국에서 들여와 외국으로 넘기는 중계역에 불과했다지만, 감히 이 나라에서 마약을, 그것도 아편을 팔아먹다니. 내 언젠가 직접 살을 발라내리라고 다짐했었네.” 자기 울타리에 집착하면서도 묘한 애국심을 드러내는 장군이었으나, 겨울은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느꼈다. 헤로인의 원료는 양귀비. 아편과 같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아편전쟁만큼 수치스러운 사건도 별로 없을 것이었다. 중국이 마약 문제에 경기를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말 무슨 생각이었을까.’ 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현실감각이 심각하게 결여되어있다고 봐야했다. 부와 권력은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힘이었다. 자신이 불행해진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만드는 불행이었고.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진짜 행복으로부터는 멀어질 뿐. 장군이 드러내는 강렬한 경멸감을 보건대 거짓인 것 같지도 않다. 끔찍한 진술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저기 있는 미친년은 몸보신을 이유로 태아를 삶아 먹었지. 그리고 뒤쪽의 정수리 벗겨진 중늙은이는 뇌물 받고 보급품에 장난을 쳤어. 장기 항해에 가짜 식량이 실렸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겠나. 하마터면 병사들이 집단으로 아사할 뻔했다네. 그러고도 책임은 전적으로 생산자와 납품업자에게만 돌아갔지. 흥, 웃기지도 않아.” 그녀가 삿대질하는 남자는 희생양들 가운데 가장 냉정한 하나였다. 이쪽을 슬쩍 살피는가 하면, 제 앞에 펼쳐진 권총 부품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 알아차린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권총의 완전한 분해조립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을 터였다. “거북해하는 건 이해하네. 군인은 살인자와 달라. 전쟁은 멍텅구리들이 빚어내는 참극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싸워야 한단 말이야. 정부와 국민의 아둔함을 목숨으로 책임지는 마음가짐이 바로 군인의 명예이고 긍지가 아니겠나.” 장군이 다시 말했다. “애초부터 죽어 마땅한 자들이야. 자네가 죽이지 않아도 어차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네. 오히려 자네가 있기에 기회라도 잡을 수 있게 된 셈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하네. 이 시험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주게.” “장군에게서 이 정도의 특별취급을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다만.” “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겨울의 말에 시에루 중장이 의아해했다. “무엇인가?” “여쭙기 전에, 제가 드릴 질문에 어떤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장군님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귀관의 양해를 구했으니, 자네도 내 양해를 구할 수 있지. 헌데, 나를 알고 싶다고?” 여장군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질문을 기다렸다. 괜한 물음일까. 겨울의 의문은 커트 리에겐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신중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들었다. 하지만 기왕 꺼낸 이야기를 여기서 접기는 어색하다. 마침내 입을 여는 겨울. “장군께선 저들과 다르십니까?” 시에루 중장이 눈을 찡그렸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겨울은 지금도 휴대하고 있는 시계, 그녀에게서 받은 선물을 내보였다. 정교하게 맞물리는 귀금속들은 흐린 빛 아래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게 반짝였다. CIA가 검사하느라 애를 먹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장인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분해하기도 어려운 예술품. “이것을 6천 4백만 위안에 구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전재산은 아니셨겠죠.” “물론일세. 내 부는 그 이상이었지.” 잠깐 쉰 뒤에, 중장이 반문했다. “혹시 내 축재에 부정이 있지는 않았느냐고 묻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즉답하는 겨울 앞에서 여장군의 표정이 풀어진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군. 다행이야.” 겨울이 더하는 말로 의도를 보충했다. “이 세상에서 돈은 누군가의 목숨일 때도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다른 사람의 끼니를 빼앗은 적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시에루 중장에게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174 [174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9) “왜 없겠나. 잘은 모르지만, 많을 거야. 아마도.” 고목처럼 단단하게 주름진 여성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었지. 부를 과시하는 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해. 흘러넘치는 부를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부럽다. 저 사람의 개가 되어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받아먹고 싶다. 더 편하게 살고 싶다. 저 사람의 호의를 얻고 싶다…….”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회를 뒤엎을 용기도 없고, 스스로가 비범해질 능력도 없고, 삶에 이렇다 할 뜻도 세우지 못한 장삼이사(张三李四)들은 그 정도가 한계거든. 아니라고 우기던 자들도 막상 본인이 수혜를 입게 될 때면 태도가 달라지더군.” 장삼이사. 장가네 셋째와 이가네 넷째. 흔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범부들의 저열함, 자네도 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있습니다.” 겨울은 즉답했다. 온라인 환경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했던가. 어느 아랍 부자, 석유재벌의 기사라도 뜨면 댓글이 범람했었다. 부럽다. 저 사람이랑 친구 하고 싶다. 친구는 무슨, 집사라도 괜찮겠네. 내게 10억만 주세요. 당신에겐 푼돈이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드림. “그런 단순한 욕망은 양심보다 강력한 힘이지.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중장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장삼이사의 한 사람이라며.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게는 불가능했어. 난 그렇게 대단한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약간의 실력과 태반의 행운이었는걸.” “지나치게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과거의 나는 그냥 성공하고 싶었을 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게. 부정이 만연한 국가,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깨끗하기만 한 인물이 무슨 수로 성공하겠나? 위로 오르는 사다리는 모두 다른 누군가의 울타리 안에 있었는데?” 울타리 너머의 사다리. 그 비유가 겨울에겐 쉽게 와 닿았다. 이 정도로 간결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엔 간절한 마음으로 남의 울타리를 두드렸네. 거기 나도 좀 넣어달라고. 충성을 바치겠다고. 거기에 숭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있나. 난 아귀다툼에 끼어든 몰염치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지. 찬물 더운물 가릴 여유가 없었어. 가끔씩 양심이 아쉬울 때가 있었네만, 고양이가 무슨 색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 아닌가.” 내겐 그 외의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장군의 속뜻이었다. “그래도 말이지.” 어조가 달라졌다. “적어도 나만의 울타리를 세운 뒤에는 최소한의 선을 지켜왔다고 자부하네.”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이제는 커트 리의 것이 된 시계를 응시했다. “물론 내 욕망부터 채운 것이 사실이야. 그러나 평범한 사람 중에는 욕망을 채운 뒤에 비로소 선량해지는 부류가 있네. 식민지 약탈로 부의 토대를 쌓고, 아쉬울 게 없어지자 착한 척 하던 서양 놈들처럼……. 범상한 나에게도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단 말이지.” 겨울이 그 말을 받아주었다. “이해합니다. 나취(나치/纳粹)에 빌붙어 부자가 된 후에야 겨우 사람 불쌍한 줄 알게 된 신더러(쉰들러/辛德勒)의 경우도 있죠. 그가 구해낸 사람들은 학살당한 전체에 비하면 극히 적었지만, 거기엔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쉰들러가 홀로코스트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1,200명. 죽어간 600만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일지언정, 그 고결함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정신상태가 정상이라는 전제 하에. 세계의 의인(義人)과 비교당한 장군이 옅게 실소했다. “자네도 꽤 짓궂군. 비슷한 사례이긴 한데,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못 된다네.” “제가 거는 기대입니다.” “기대……라. 부응하도록 애써보지. 그래야 할 시대이기도 하고.” 이 대화를 듣는 중국군 장교들은 기색이 다채로웠다. 시에루 중장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특히 더 알아보기 쉬웠다.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게 문제였지만. 그들처럼, 겨울도 중장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진류의 함장 우메하라 아츠 해좌를 만났을 때도 같은 기대를 걸었다. 이런 사람이 높아질수록 이번 세계관의 향후는 더 나아지리라고. 시에루 중장은 합리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지금까지 만났던 중국인들 가운데 가장 괜찮은 편 아닌가. 작전이 잘 마무리될 경우, 커트 리의 존재와 무관하게,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입지를 손에 넣게 될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공동체와 겨울동맹 사이에 인연이 생길지도 모르고. “자네는 저들과 내가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지.” 겨울은 장군의 시선을 좇아 사형수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죄에 짓눌려 움푹해진 눈들이 보인다. 동정심을 구걸하는 한 쌍, 억울함이 느껴지는 한 쌍, 분노하는 한 쌍, 속이 깊은 한 쌍, 감히 마주치지 못하는 한 쌍,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한 쌍…….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아. 아니, 다를 수가 없었다고 해야 정확하겠군.”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야 할 시점에서 사람이 되었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있을 걸세.” “알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 “처지가 열악할 때 사람이 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 추해지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더러워지지 않기는 더 힘들 것이고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그저 환경이 나빴을 뿐입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태어날 환경을 선택할 수도 없는 거니까 말입니다.” “좋군, 좋아.” 장군의 건조한 얼굴에 희미한 흐뭇함이 번졌다. “내게 어느 정도는 절망감도 있었지. 힘을 얻은 뒤에도 위대한 조국은 너무나 거대했거든. 혼자서 깨끗할 뿐이면 자기만족에 불과한데, 그렇다고 세상을 바꾸자니 나를 향해 칼을 들이댈 놈들이 너무나 많았어. 지금 돌아보면 거기서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아. 용기가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이것이 합리화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겨울은 그 가능성을 곱씹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짓에서 시작되는 진실도 있는걸.’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의 마음은 그랬다. 열리지 않는 상자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겠는가. 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그 사랑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지 알아낼 방법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상자조차도 열지 못한다. 거짓이라 믿었던 자신이 진짜일 수도 있고, 진짜라고 믿었던 자신이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실제로 스스로를 쌓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에, 겨울은 이 세계관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있다. “말이 길어졌는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왔다는 뜻일세. 그 한도 내에서 양심적이었고, 그 한도 내에서 의리를 지켰고, 그 한도 내에서 명예로웠을 뿐.” “그 이상이 가능한 사람은 드물겠죠. 능력이 있어도 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요.” 겨울이 곧잘 고민하는, 사람의 한계에 관한 문제였다. 중장이 깊게 긍정했다. “난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걸세. 사람이 만들지 않은 난세야. 영웅이 나타나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니 간웅이라도 나서야지. 내가 치세의 능신은 아니었겠지만 말이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이는 본래 조조를 이르는 말이었다. 겨울은 자신을 유비에 비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라 했던 강영순 노인을 떠올렸다. 노인이 지금 이 대화를 들었다면 무슨 조언을 주었을까. 궁금해진다. 글을 말 대신으로 삼아온 그녀 역시 민완기와 마찬가지로 평범하지 않은 인물에 속하기에. 이 세계는 물리현실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곳에서, 겨울은 하루하루 깊어지는 이해를 느꼈다. 생전의 세계가 어쩌다 그런 모습이 되었는가를. 겨울이 중장과의 대화에서 드문 흥미를 느끼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포부를 담은 중장의 자기변호가 끝났다. “자, 알고 싶다던 내 속을 들어본 소감이 어떤가?” 겨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시험은 언제 시작하면 됩니까?” 시에루 중장이 피식 웃었다. 손짓으로 부관을 부른다. 아까 눈여겨보았던, 중장의 열렬한 지지자들 중 하나는 아니었다. 겨울에게 보내는 시선 또한 왜 이런 놈이, 라는 느낌. ‘굳이 이런 식으로 과시하는 이유를 알 만 하네.’ 시험이라곤 해도 형식이 이상했다. 처음엔 단순한 여흥인가 싶었다. 사람은 즐거움 없인 살지 못한다고. 에이프릴 퍼시픽의 미치광이가 주워섬긴 말이지만, 틀린 사람이 한 말이라도 틀린 내용은 아니었다. 커트 리를 욕심내는 시에루 중장이 아무 생각 없이 구경거리로 만들진 않았을 테니. 친위대를 구성하는 면면은 또한 연줄의 결과물일 것이다. 얼마나 제공하느냐가 곧 중장에게서 총애를 받는 정도를 반영하는 지표일 것 같기도 하고. “사용할 무기를 고르게.” 부관이 요구했다. 겨울은 소총을 내려놓고 권총을 건네주었다. “탄은 표적의 숫자만큼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네만, 불만은 없겠지?” “상관없습니다.” 겨울에게 동요가 없자 부관이 흔들렸다. 의혹 깊은 표정으로 탄창에서 탄을 제거한다. 일일이 세어보고, 따로 쥐는 숫자가 아홉 발. 이제 내부로 들어가, 빈 테이블을 앞에 둔 채, 겨울은 지시 없이도 권총을 분해했다. 부품을 정갈하게 펼쳐놓는 속도가 부관을 다시금 흔들리게 만들었다. 맞대면한 사형수들의 눈에 조금씩 사나움이 깃들었다. 부관이 그들을 향해 선언한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이것은 귀관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누구라도 좋다. 여기 이 커트 리라는 자를 죽여라. 그러면 너희 전체가 다시 한 번 명예로운 복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주신 중장님께 감사드리도록.”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들은 살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관은 탄을 들어 하나하나 헤아리듯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 자에게는 정확히 너희 머릿수만큼의 탄환만이 주어져있다. 즉 너희보다 빠르게 총을 조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발이라도 빗나가선 안 되는 거지. 이만큼 유리한 조건이다. 최선을 다하도록.” 마지막 한 마디가 유독 깊었다. 부관의 계급은 대교. 다른 나라 기준으로는 대령 내지 준장에 해당했다. 그러니 커트 리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중국인 공동체의 한겨울로 만들겠다는 시에루 중장의 구상이 어디까지 공유되었을지, 공유되었다고 해서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었을지 의문이다.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었다. 장군이 일개 용병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한겨울 같은 사례가 쉽게 만들어질 리 있겠느냐고. ‘그걸 검증하고, 저들에게 납득시키는 자리이기도 한 건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이 보았을 한겨울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외에도 준비된 시험이 있겠지 싶었다. 겨울은 피부에 보정으로 와 닿는 「위협성」 순서로 표적을 나누었다. 가장 침착했던 사형수가 또한 가장 위협적이었다.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을 푸는 중.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다. 아홉 사형수가 신호를 기다렸다. # 175 [175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0)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하늘을 겨냥한 단발사격이 공개처형의 시작을 알렸다. 한 줄로 세워진 실탄들을 한 손으로 휩쓰는 겨울. 남은 손으로 탄창을 쥔다. 두 손이 겹쳐지면서, 손아귀 안에 정렬된 탄이 단숨에 밀려들어갔다. 첫 번에 다섯 발, 다음번에 네 발. 그렇게 단 두 번 밀어서 삽탄을 마친다. 장전 보조도구를 쓸 때에 필적하는 속도였다. 준비된 탄창을 내려놓고 권총 조립을 시작한다. 손은 눈보다 빨랐다. 서로 다른 세계, 이편과 저편의 관객들은 물론이거니와, 겨울의 인지조차도 벗어날 정도. 제한된 상황에서의 무기 정비는 기술적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달칵. 들어간 탄창이 멈치에 맞물리는 소리. 철컥. 슬라이드를 당겼다가 놓는 소리. 군인이 이렇게 겹쳐지는 금속성의 의미를 모를 수 없다. 설마, 벌써? 창백해진 사형수들 몇몇이 부들거리며 그들의 사형집행인을 보았다. 남는 부품 하나 없이 깔끔해진 테이블. 완벽하게 조립된 권총. 그것을 오른손으로 쥐고, 왼손으로 감싼 채 배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딱.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 끼릭. 격철이 뒤로 당겨지는 소리. 이어지는 미세한 소음들은 사형수들로 하여금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형형한 생존욕구로 신경이 올올이 곤두선 그들에겐 천둥보다 크게 들렸을 것이다. 그 와중에 반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기를 결합하는 중이다. 온 정신이 테이블 위에 있어, 그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어떤 일이 벌어지든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을 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이다. 혹은, 외부세계와의 감각이 완전히 끊어졌거나. 심성과 별개로 정신력은 꽤 괜찮은 이들. 어쩌다 비뚤어졌는지. 겨울은 그들을 침착하게 지켜보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잔혹한 희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의 성격을 감안하건대, 공개처형은 극적인 편이 좋을 터였다. 즉, 필요악이다. 당사자인 사형수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놓았던 무기에 손을 뻗는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결단력이 어중간하던 나머지를 이끌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모멸감을 느껴야 할 대목이어야 했다. 그러나 촌각에 목숨이 오가는 처지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여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보통내기가 아니겠지.’ 지금은 사전적인 의미로 눈앞이 깜깜할 것을. 불규칙한 호흡, 폭주하는 심박. 급증한 혈류는 머릿속을 뜨겁고 팽팽하게 만들어 사고를 마비시킨다. 전투상황의 긴장감과 다를 바 없다. 전투를 겪은 병사들이 길게는 몇 시간이고 손을 떠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당장은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형수들의 무기 조립은 통상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놓치고, 흘리고, 흐느끼며 수습하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만 본다면, 넘어서는 비극을 떠올리기 힘들 지경. 군의 훈련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기계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고급 장교 출신의 죄수들이다보니, 몸에 배어있던 것도 둔해진 모양. 혹은 아예 배었던 적이 없거나. 허둥대는 손짓에서 겨울은 그들이 누려온 권위와 나태와 안락을 읽어냈다. 어느 조직에서든, 기본에 더욱 충실한 건 항상 아래쪽의 사람들이었다. 철컥. 겨울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 주인공은 역시나 처음부터 냉정했던 사람이다. 무서울 정도로 몰입해서 작업을 끝낸 그는 이제야 겨울을 올려다본다. 그 눈에 일렁이는 형형한 생존욕의 불길이 인상 깊었다. 그는 또한 교활하기도 했다. 겨울이 일부러 기다려주는 상황에서, 완성된 총기를 바로 겨누지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이 먼저 죽을 거라고 확신한 것일까. 자신보다 한참 앞서 여유롭게 조립을 마친 겨울이라면, 조준하고 쏘는 속도도 자신보다 훨씬 빠르리라고 예상한 듯 하다. ‘상황판단이 좋은데.’ 겨울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로 이쪽을 노려보는 중년인은, 한동안 이발을 하지 못했는지 거친 머리카락이 고드름처럼 엉겨있었다. 정수리가 동그랗게 벗겨진 것조차 우습기보다는 기괴해보였다. 마치 사람을 닮은 괴물처럼. 냉정한 사형수가 기다리는 것은 다른 사형수의 사격이었다. 겨울이 희생양을 쏠 때, 그 틈을 타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속셈일 터. 지금이라도 겨울이 변덕을 부린다면 무의미한 계획이 될 것이지만, 이것이 냉정한 사형수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실패하면 어차피 죽는다. 그러므로 실패를 고민하거나 두려워하는 건 무의미하다. 추레한 죄수의 푹 패인 눈빛에선 그런 속내가 느껴졌다. 기묘한 대치에 시험장 안팎이 술렁인다. 차례로 조립을 마친 다른 사형수들 또한 상황을 눈치 챘다. 바로 겨울을 겨누지 않는 이들은, 그대로 머리가 벗겨진 남자의 의도에 편승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영리하진 못했다. “으아아아-!” 탕! 겨울의 총구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준에서 사격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파울러 대위는 정면에서 다섯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평가했었다. 그가 가정한 다섯은 몸에 밸 정도의 훈련을 거친 숙련병 다섯이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 죄수는 쥐고 있던 소총부터 떨어트렸다. 흔들.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쥐어짜며, 눈물 한 방울 흘리고, 꺼억 하는 단말마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쿵. 귓가에 떨어지는 생명의 무게감. 대각선으로 털썩 쓰러진 시신이 긴 경련을 일으켰다. 겨울은 어중간한 자세의 셋을 눈으로 훑었다. 어리석은 한 명이 벌어준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이때다 싶어 반사적으로 반응한 셋은, 총구를 다 들지도 못한 채였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들. 갈등과 두려움 속에서 다시 내려가는 총구 셋. 끝까지 지켜본 뒤에, 겨울 역시 총을 늘어뜨렸다. 대치가 재개되었다. 이제 죄수들은 하나의 희생양으론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다. 남은 숫자는 일곱. 겨울을 상대하려면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나마도 없던 승산이 생기는 정도. 죄수들은 적대감 속에서 치열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오가는 눈짓들이 얼마나 효율적인 의사소통일는지. 다만 감정만이 넘쳐흐르는 분위기였다. 이 대치의 지분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 머리카락이 거칠게 엉킨 사내는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다. 무임승차한 나머지가 원수만큼 미운 눈치다. 그의 입장에서, 나머지 죄수들은 자신을 위해 죽어야 할 잡것들에 지나지 않을 테니. 자신의 발상을 도둑맞은 분노도 있을 것이었다. 시험장의 모든 무기가 완전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적막이 감돌았다. 겨울은 서부극을 떠올렸다. 구도만 놓고 본다면 총잡이들의 대결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서로의 반응속도와 정교함을 겨루는 싸움. 이 자리를 마련한 장군의 의도에 충분히 부합하는 긴장감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겨울의 짐작에 불과하지만, 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같게 될 거야.’ 일곱 죄수들은 누구 하나 먼저 총구를 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움찔거리는 손동작들은, 겨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죄수들까지 속이려는 악의로 가득했다. 쏘려는 것처럼 기만하려는 속임수들. 그러나 대범하지 못해 효과가 없었다. 손 크게 움직였다간 ‘커트 리’가 자신부터 쏘아 죽일 것이 두려울 테니까.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결심한 순간, 의도는 전류 흐르는 속도로 실천이 되었다. 타탕! 하나로 뭉쳐진 두 개의 총성은 연달아 집행된 두 번의 총살이었다. 경악한 사형수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그들의 탄약은 넉넉했고, 급한 김에 바닥으로 쏘아지는 총탄들이 어지럽게 튀었다. 그러나 겨울에게는 사선이 보인다. 붉은 경고는 몸에 닿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조준선은 한참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오차확률이 포함되어 불분명할 때도 있으나, 저들의 능력이 대단치 않아 무의미하다. 타앙! 탕! 타탕! 총성과 함께 만연하는 죽음. 죄수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남기고 모조리 죽인다. 자동권총을 연사로 놓고 긁던 여자는 미간부터 뒤통수까지 꿰뚫렸다. 피와 뇌수를 눈물처럼 흘리며 꼬꾸라지는 그녀. 그 옆에서 으아아아 소리 지르던 남자는 목구멍 안쪽에 탄이 박혔고, 두개골 안에서 튀는 총탄에 뇌가 곤죽이 된 자가 있으며, 테이블을 엎어 방패삼으려던 한 명은 허벅지가 드러나 동맥이 끊어졌다. 허우적거리며 출혈을 막아보려 하지만, 두 손으로는 아무래도 벅차다. 겨울에겐 고통을 덜어줄 탄이 부족했다. 마지막 한 발이 남은 시점에서, 최후의 죄수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총구는 아직도 비스듬했다. 그 상태로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누구 하나, 겨울의 반응속도를 절반도 따라잡지 못한 까닭이다. 겨울은 마지막 처형을 집행했다. 탕! 머리가 홱 젖혀진다.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사형수는 뒤로 쓰러졌다. 절그럭. 발에 묶인 사슬이 부대끼는 소리. 그는 멀건 눈으로 흐린 하늘을 보며 죽었다. 겨울은 총을 홀스터에 꽂고 손을 풀었다. 짝, 짝, 짝. 배후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보내는 사람은 시에루 중장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고양된 얼굴이었다. 손뼉을 부딪칠 때마다 매번 과한 힘이 들어가 있다. 머리가 가는 곳에 꼬리도 간다. 갈채가 늘었다. 그것을 들으며, 겨울은 몸에 익힌 반응속도를 되새겼다. TOM 적성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타고나는 것이었던가? 기억 속에서 오래 전에 읽었던 매뉴얼을 더듬는 겨울. 시스템 보정은 전기적인 동시에 화학적이고, 신경 단위로 작용한다. 이것이 실제 물리적인 반응속도를 증가시키기도 했다. 거기엔 분명히 한계가 있을 터. ‘그래도 전보다 더 빨라진 느낌이란 말이지.’ 비교대상은 지나온 종말들이었다. 단지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착각에 불과할까? 고민하는 사이 시험장이 치워진다. 제2의 한겨울을 검증하는 자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충실하지 못한 부하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에게 장차 만들어질 미국 내 중국계 공동체의 가능성을 믿게끔 하려면 어지간한 광대극으로는 부족할 터. 시에루 중장은 냉정한 인물이다. 자신이 지불한 값어치만큼의 대가를 기대할 것이었다. 그 일방적인 평가와 기대가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겨울은 생전의 기억과 함께 구르는 돌을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한다. 예컨대, 돌아가서 보고할 내용이라던가. 시에루 중장에 대한 겨울의 평가는 CIA가 향후의 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예정이다. 비록 커트 리라는 인물에게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으되, 시험에 앞서 장군과 나누었던 문답은 정보국 요원들에게 요긴한 정보로 쓰일 터였고. ‘시에루 중장의 말이 자기미화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하는 순간에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어쩌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무의식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물이라고 해도 좋겠지. 겨울의 결론이었다. 최종 판단은 대화를 검토한 뒤 정보국에서 내려지겠지만, 현장요원으로서 겨울의 의견 또한 보고서에 첨부될 것이다. 겨울은 질질 끌려 나가는 시체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일별했다. 시험장에 기다란 핏자국들이 남았다. 거기서 나는 쇳내음이 원래 있던 악취와 뒤섞인다. 뚫린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흐린 빛과 서늘한 봄바람,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성난 새들의 울음소리는, 세계관에 어울리는 감각의 홍수였다. # 176 [176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1) 공개처형 이후, 한나절에 걸쳐 이어진 여러 단계들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체력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집중력은 얼마나 유지되는가. 그 과정이 항상 합리적이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정도는 여흥을 겸하는 자리다. ‘혹은 중장이 보는 부하들의 상태가 반영된 것일 수도.’ 조국은 멸망하고, 인류는 위태로우며, 잠재적국에서의 피난생활은 앞날이 불투명하다. 조금이라도 즐겁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하는 생활. 계급이 높아 상대적으로 안락한 자들이 체감하는 종말은 아랫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들이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이어지는 덧없고 무료한 나날. 겨울은 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질 때의 무기력감을.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리는지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다. 마음이 궁핍할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그러므로 한때의 저질스러운 유흥일지언정,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것이 해군중장의 속내 가운데 한 갈래가 아닐까. 물론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커트 리의 검증이지만. 아들의 증언을 믿는다고 했으나, 중장 스스로도 직접 보고 싶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겨울의 희망하는 한 무제한적으로 계속되는 싸움이었다. 육박전 능력을 선보이는 자리. 한 번에 여럿을 상대해도 좋다고. 문자 그대로의 한계를 내보이라며. “사형수가 그렇게 많습니까?” 싸움을 앞둔 겨울의 질문. 아침나절보다 누그러진 부관은, 그럼에도 커트 리의 거친 외양과 갈리는 음성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럴 리가 있나. 함대의 기강이 거기까지 흐트러진 것은 아니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민도(民度)가 엉망이긴 해도, 다른 함대보다야 사정이 낫지.” “그렇다면?” “경범죄를 저지르고 면피를 바라는 자들이 가장 많고, 더 나은 처우를 바라며 도전하는 자들이 그 다음이며, 눈에 띄고 싶은 멍청이들도 있다. 물론 죽어 마땅한 놈들도 섞여있지만.” 그가 신호하자 무장병력이 죄수들을 일렬로 끌고 나왔다. 묶인 손발이 매 걸음마다 절그럭거렸다. 이상한 것은 그 건장함. 시험이 정해진 건 근래의 일이건만, 요 며칠 잘 먹였다고 가능할 체구가 아니었다. 죄수들 사이에서 고르고 골랐다 쳐도 수긍이 되지 않을 지경. “이 면면을 잘 기억해두도록.” 부관 장교가 말했다. “여기 있는 놈들이 가장 악질이다. 왼쪽부터 연쇄살인, 인육판매, 소아성애…….” 이름이 아니라 범죄로 소개되는 얼굴들은 눈빛부터 정상이 아니다. 오감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걸어 다니는 역병 외에도 사람 닮은 괴물들이 많은 세계관이었다. “귀관이 언제까지 서있을 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들이 다 올라갈 때까진 버티길 바란다.” 이어지는 주문은, 죄질에 마땅한 고통을 주라는 것. 의도는 분명했다. 얼굴을 보는 것은 잠깐. 기나긴 싸움의 와중에 무작위로 한 명씩 섞어서 내보내면, 지쳐있을 커트 리가 몇 명이나 알아볼 것인가.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뭔가?” “이들은 왜 이렇게 건강합니까? 오랫동안 잘 먹고 지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부관의 얼굴에 혐오감이 더해졌다. 커트 리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수감시설에서 이따금씩 변사체가 발견된다더군.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하네.” “그걸 그냥 두었습니까?” “죽은 놈들도 어차피 죽어야 할 놈들이었어. 몰아서 가두는 것 자체가 형벌이지.” 탄약을 절약하기도 하고 말이야. 덧붙이는 말은 끝이 미심쩍었다. 겨울은 그것만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겨울을 죽이면 면죄, 상처만 입혀도 감형. ‘이 시험이 아무 맥락 없이 만들어진 건 아닐 거야.’ 평소에도 비슷한 경기가 있었으리라.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던 대로 하게 마련이었다. 내 함대에 불필요한 사람의 자리는 없다던 해군중장의 말이 떠오른다. 그 냉정함이 비단 주웨이 소교에게만 향하진 않았을 터. 끝없이 죄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 멀쩡한 사람을 안고 가기도 벅찬 상황에서, 장군이 떠올릴 죄수의 용도는 무엇일까. 공개적인 형벌엔 전시효과가 있다. 죄를 저지르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주는 것. 그것을 여흥의 수단으로 만드는 데엔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을 거치며, 겨울은 비슷한 사례를 많이 목격했다. 그것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가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기에. 다만 겨울은 고개를 흔드는 쪽이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난폭한 볼거리가 마냥 긍정적이기를 기대하긴 어렵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준비가 끝났다. 화기가 지급되지 않는 만큼, 시험장에 중사 한 사람이 들어와 통제를 담당했다. 겨울은 처음부터 열 명을 불러냈다. 오래 끌지 않을 작정이었다. 언제든 그만둬도 좋다는 언질이 있었으나, 싸울 사람을 바닥내서 끝내는 게 좋을 것이었다. 이에 장교들이 앉은 자리에서 들썩인다. 커트 리의 호기에 감탄하는 기색이 있는가 하면,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다. 만용을 부리는군. 가능할까? 지금까진 대단했지만, 이것만큼은 어렵지 않겠는가? 방탄유리가 치워졌으므로, 향상된 감각은 그들의 대화를 쉽게 잡아냈다. 어렵지 않다. 베타 구울을 완력으로 제압 가능한 겨울이다. 비록 지금 만전은 아니어도, 사람을 상대하기엔 여유가 많이 남을 힘이었다. 겨울은 생각했다. ‘열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꼭 열 사람 분의 힘이 필요한 건 아니지.’ 죄수들을 통제하던 중사가 손을 들었다. 정점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절도 있게 떨어트렸다. 포위는 피해야 한다. 시작과 동시에 겨울은 좌측을 뚫었다. 뚫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 인간을 넘어선 각력, 단거리의 비정상적인 가속과 전신의 질량을 한 명에게 부딪힌 것. 방어는 무의미했다. 쿵! 둔중한 울림과 함께, 튕겨나가는 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호흡곤란. 부딪힌 반동을 회전으로 바꾼다. 한 발을 축으로 강하게 돌아 오른발을 내지르면, 뻐억! 타격점 너머에서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변종과 달리 인간에겐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이 다수를 흩어진 개인으로 만들었다. 집단으로 훈련 받았을 리 없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연대감이 적다. 예상한 바였다. 죄수들은 감옥에서 서로를 잡아먹는 관계였다 하지 않았던가. 감옥 바깥이라고 딱히 나을 것 같진 않다. 인간과 인간성이 함께 썩어가는 해상도시인 것이다. 「통찰」이 겨울의 판단을 긍정했다. 그런 이들이 분별없이 섞여있는 한, 집단행동은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서로가 곧 서로의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국은, “去死!” 누구 하나 달려들 때 두서없이 우르르르. 그러나 그 와중에도 먼저 맞긴 싫어서 각자의 속도가 제멋대로 느려진다. 그 정도 여백이면 파고들기 충분했다. 여백은 새로운 두려움을 밀어 넣을 때마다 넓어졌다. 그런 식의 싸움이 이어졌다. 변종을 상대할 때와는 명백한 차이였다. 간혹 눈여겨보았던 사형수가 올라올 때면, 겨울은 절제를 버렸다. 우득! 낭비에 가까운 일격. 소아성애자의 턱이 으스러졌다. 그것을 다시 쳐서 목구멍에 처박았다. 제 살과 뼈에 기도가 막혀 퍼덕대는 죄수의 모습. 장교단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새로 올라오는 자들은 갈수록 의욕을 잃었다. 처음부터 지켜보았고, 겨울이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 자진해서 도전했던 몇몇은 기권하는 일도 벌어졌다. 무제한이라던 경고가 무색하게, 싸움은 마흔 한 명 째에서 궁색하게 끝났다. 시에루 중장은 과연 여기에 만족할 것인가. 그 답은 다음날, 탄궈셩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님께서 무척 흡족해하셨네. 자네가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었다고.” 글쎄. 직접 확인한 커트 리의 실체가 기대 이하일 경우,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을 텐데. 중장이 치른 대가가 큰 것 같아도, 오르카 블랙에 주기로 약속했던 물품과 구역을 제외하면 남는 건 시계와 주웨이 소교뿐이었다. 전자는 겨울이 죽은 후에 회수할 수 있고, 후자는 중장스스로 계륵이라 했었다. 실리를 나중에 챙길 수 있다면 믿음은 먼저 주어도 무방하다. 장군의 노회함이었다. “털어놓지 않았는데도 뜻을 알고 행동해줘서 좋았다고 하시더군. 지음을 만난 것 같다던가.” 하하 웃는 모습에선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 그는 자신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커트 리를 나름대로 평가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겨울은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최소한 탄 중교님의 진술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지겠죠.” “……그래. 자네에겐 감춰도 의미가 없겠지.” 부인하지 않는 탄궈셩은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만큼 커트 리를 신뢰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좋은 일이다. 시에루 중장 유고시 권한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니. ‘평시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사실상 사유화된 군사집단인걸.’ 병사들 입장에서 의외로 거부감이 적었을 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중국군 장성이 군을 사적 보복에 동원하고도 서면징계를 받고 끝난 사건을 알고 있었다. 일반화는 경계해야겠으나, 참고하는 정도로는 괜찮을 것이다. 어디에서 들었더라? 기억을 더듬는 겨울이었으나, 접한 계기가 떠오르진 않았다. 생전부터 온갖 경로로 정보를 접하는 시대였으니. 탄궈셩이 말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게 사실이야.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주제에 근본 없는 용병과 말을 맞춰 거짓을 일삼는다고. 그렇게 중상하는 멍청이들이 있었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죽은 이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용감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아무튼 내가 자네 덕을 다시 한 번 본 셈일세.” 죽은 이들이 용감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묘한 얼룩이 느껴졌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일 뿐. “일일이 빚을 졌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전우겠지요?” 커트 리로서의 대답이 괜찮았는지, 젊은 해군중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겨울은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은 어디로 갑니까? 호위라고는 했으나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습니다.” 회담이 가까울 때 시험을 치른 만큼, 휴식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리라고 예상했던 겨울이었다. 그러나 실상 날이 바뀌자마자 호출이 떨어졌다. 탄궈셩 중교의 호위임무. 그런데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특별한 무장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아, 긴장할 것 없네. 영내에서 움직이는 거니까. 호위라곤 해도 통상적인 거지.” “영내?” “음. 자네는 처음이겠지. 목적지는 854함이라네.” “무슨 배입니까?” “원양전자정찰선이고, 이름은 천랑성(티엔랑씽)이라 하지. 훌륭한 배야. 탄도탄을 추적할 수 있는 레이더가 달려있는데다 그 외의 관측장비도 풍부해. 미국이 만 근처에 함부로 섬격궤(歼击机/전투기)를 띄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네.” 천랑성. 트로이 목마에 감염된 바로 그 정보수집선이었다. 겨울은 새삼스러운 긴장감으로 다시 한 번 탄궈셩을 살폈다. 혹시 놓친 적의가 있진 않은가. 시에루 중장이 뭔가 눈치 챈 것은 아닐까. 설령 눈치챘다 치더라도 커트 리가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방법은 없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는 동안 탄궈셩이 싱거운 이유를 털어놓는다. “도착한 뒤에 알려줄 작정이었지만, 뭐, 미리 안다고 해서 감흥이 줄진 않겠지. 앨러미더 섬의 다리를 파괴할 새로운 수단을 마련했다네.” “그렇습니까?” “사실 전부터 준비하던 것이지만, 꼭 필요한 부품을 구하지 못했었거든. 헌데 회담을 앞두고 레이옌리에 소장 측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줘서 말이야. 부족한 조각을 채우게 됐지.” 겨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CIA가 포섭했다는 내부자가 그 사람일까? 그럴듯한 추정이었다. 시에루 중장의 성향을 파악한 만큼, 잠재적 협력자에 대한 사전작업으로서 관계개선을 요구받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머님께서 무척 다행으로 여기셨어. 회담에 참석하기 전 입지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야.” “그건 그렇겠습니다. 중장께서 수립한 전망에 그만큼의 가능성이 더해지는 거니까요. 다른 장군들을 설득하기도 쉬워지겠죠.” “그래. 꼭 성공해야 할 텐데.” 중얼거린 탄궈셩이 음색을 바꾸었다. “아무튼, 성패를 떠나 자네에겐 꼭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머님도 같은 뜻이셨고. 그대에겐 그럴 자격이 있어.” 겨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긴장할 필요는 없으려나. 없던 부품을 얻었다고 했으니, 그 새로운 수단이라는 것의 정체는 짐작이 간다. CIA가 수집해둔 정보 가운데 들어맞는 것이 있었다. 겨울에게도 자료와 브리핑 형식으로 전달되었던 바였다. # 177 [177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2) “승선을 환영한다, 탄 궈셩 동지. 그리고 커트 리 동지.” 천랑성에 도착한 두 사람을 반긴 것은 해군대교 계급의 함장이었다. 이름은 완이(萬毅). 작일의 시험을 참관한 장교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내비치는 호의는 절제되어 있었다. 얄팍하고 불투명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다. 완이 대교는 함교를 향해 앞장섰다. 겨울은 곁눈에 최대한 많은 풍경을 담았다. 설마 이 배에 탑승하게 될 줄이야. “작전정보중심(전투정보실)이 다소 난잡하더라도 이해해주게. 지금의 천랑성은 과중한 부담을 받고 있어. 본연의 역할이 아닌 임무가 지나칠 정도로 내려오지.”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차는 대교는, 자신의 배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 마음도 이해가 간다. 본래의 설비가 아닌 것들이 잔뜩 가설되어 있었다. 사람의 동선을 배려하지 않아, 조작원에 따라서는 기기 사이에 끼어있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어느 승무원이 콘솔에 연결해둔 노트북 화면은 겨울에게 꽤나 낯설었다. 일반적인 PC와 운영체제가 다른 탓이었다. CIA 통신보안담당관 코왈스키 요원이 알려준 바, 해킹 가능성을 줄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그녀의 말은 장난스러운 자기과시에 가까웠다. “중장께서는 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겨울이 묻자 탄궈셩이 끄덕였다. “어머님은 별도의 지휘소에 계시네. 다리가 끊어질 경우 곧바로 상륙작전이 개시될 예정이거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최소한 활주로까지는 확보해두어야 하니까. 그래야 내일 다른 장군들에게 할 말이 많아질 테고. 지금쯤 어머님도 우리와 같은 화면을 보고 계시겠지.” 목소리에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는 걸까. 중교가 말하는 화면은 분주한 정보실 중앙에 있었다. 어딘가의 화물선에 실려 있었을 대형 스크린이었다. 비치는 것은 고공에서 조감하는 함대의 일부. 확대되는 영상 속에서 비행기처럼 생긴 무언가가 보였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거친 모양새다. “자폭용 무인기일세.” 탄궈셩의 말에는 기대감과 회한이 녹아 있었다. “몇 달 전 사람을 태워 시험 비행하는 단계까진 해냈지만, 무인화에 필요한 항법장치가 없어 지금껏 완성하지 못했다네. 그렇다고 군용기나 도탄(导弹)을 해체하면 본말전도니까 말이야.” 도탄은 유도탄, 즉 미사일의 중국식 표현이다. 중국 해군은 기존 장비를 아끼려고 필사적이었다. 총탄도 아까운 마당에 미사일은 오죽할까. 언젠가 미 해군과 겨루는 최악의 상황이 올 지도 모르기에. 본말전도라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놀랍습니다. 저게 정말로 나는 거군요.” 겨울의 담담한 말에 탄궈셩이 답하려는 찰나, 완이 대교가 무심히 끼어들었다. “시험할 여유는 없었지. 자원과 일정이 모자라니까. 실패 시 시에루 제독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이제 곧 모두가 제독께 천운이 함께하는지 알게 되겠지.” 완 대교의 마지막 말마디는 의미심장했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파벌 내 세력관계를 암시하는 것일 테지. 체면, 운명, 은전은 중국인을 지배하는 세 여신이다. 그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종말이 이성을 짓누르는 세계관에서는 더욱 잘 통할 문장이기도 했다. 일정이 부족한 것은 장군들의 회합이 코앞인 까닭이다. 입을 열었다가 소리 없이 닫은 탄궈셩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할 말이 있지만 참는다는 표정. 배경이야 어쨌든 완이 대교가 상급자이기도 했다. 상급자와 의견이 다르다고 바로 반박해서야 기강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올리버 탤벗이 겨울의 특수화장을 보강할 때 나눴던 이야기. 피부가 검은 전술정보 분석관은 시에루 중장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하, 그가 실제로 했던 말. “제 의견만은 아닙니다. 전투력과 무관하게, 중국군의 인적자원은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니까요. 거긴 군 경력이 미국 이상으로 성공의 조건인 나라였잖습니까. 가뜩이나 해군은 기술병과가 많으니 항공역학을 전공한 병사나 비행제어기술에 능한 사관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죠. 랭글리에선 성공률을 절반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주의 랭글리는 CIA 본부의 소재지였다. “사진을 보면 굉장히 불안정한 느낌이던데요?” 겨울이 제기한 의문에 탤벗 요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나는 것 만이라면 형상은 의외로 중요하지 않다더군요. 록히드 마틴 사(社)의 유명한 항공기 기술자가 그랬지요. 컴퓨터로 자세를 제어할 경우 자유의 여신상도 복잡한 전투비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225톤짜리 여신을 하늘로 보내려면 엔진 제작부터 문제겠지만 말입니다.” 록히드 마틴은 미국의 군수업체로, 항공기 제작에 특화되어 있다.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 거기서 나온 말은 농담이라도 가볍지 않을 것이었다. 충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터. “반세기 전의 중국에선 대장장이들이 초음속 전투기를 만들어 날렸습니다. 기대해 봐도 좋겠지요.” 탤벗이 말한 기대는 중의적이었다. 탤벗 개인의 흥미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국이 거는 기대이기도 했으므로. 시에루 중장이 회합을 주도하게 되면 정보국의 일도 편해질 것이다. 결과는 이제 곧 알게 될 터. 발사 전 최종점검이 진행되는 사이, 겨울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작은 영상이 수없이 많았다. 거의 모든 전파를 수집하는 모양. 천랑성의 기능을 감안하면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눈길을 끈다. 러시아 쪽에서 송출하는 선전영상이었다. 해빙기를 맞아 이루어진 소탕작전으로 추산 약 700만의 감염변종을 섬멸했다는 자막이 흘렀다. 아직 「러시아어」를 습득하지 않은 겨울이었으나, 복수의 언어로 계속되는 자막이었고, 그 중엔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어까지 끼어있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생존자를 모아 무장시키려는 의도겠지. 겨울의 시선을 쫓은 탄궈셩이 탄식했다. “러시아 놈들이 부럽군. 아직도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점이 말이야.” “저게 사실일까요?” “글쎄. 전과를 많이 부풀리지 않았을까? 저것들도 미국의 지원이 필요할 테니.” 붉은 색채가 선동적인 자막은 러시아와 미국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었다. 과거 추축국에 함께 맞서 싸웠던 것처럼, 지금은 역병에 함께 맞서는 혈맹이 되었노라고. 적어도 선전영상이 보여주는 승리는 확실한 것이었다. 진창에 빠져 움직이기 힘든 변종들을, 궤도차량에 탑승한 군대가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다녔다. 괴물들은 인간의 기동성을 절대로 쫓지 못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니 어쩌겠는가. 1년에 두 번, 얼음이 얼고 녹는 시기, 러시아의 대지는 끔찍한 진흙 수렁으로 변한다. 이를 라스푸티차라 불렀다. 러시아는 이 현상이 유독 심한 장소를 골라, 겨우내 변종들을 유인하고, 묶어두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을지. ‘특수변종이 등장하기도 애매한 환경이고.’ 겨울은 해빙기가 짧다고 판단했다. 변종들이 적응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서. 멜빌레이처럼 수중활동에 특화된 괴물이 출현할 수 있는 건, 강과 바다가 항상 거기에 있는 덕분이다. 수렁이 마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이었다. 뻘에 특화된 괴물이 나온다 쳐도 문제. 나머지 기간에는 보통의 변종만 못할 터였다. 러시아가 지난해를 무사히 넘긴 것은 이런 환경 덕분이었을 것이다. 타 지역으로부터 유입되던 변종집단이 자연스럽게 차단되었겠지. 이번 역시도. 겨울은 지난 종말들을 회상했다. “보게, 리. 이륙하는군.” 탄궈셩이 겨울의 주의를 돌렸다. 질소비료로 만들어진 묵직한 폭탄을 싣고, 무인기들이 차례로 뜨기 시작했다. 모든 기체는 두 줄의 레일에서 벗어날 때마다, 기우뚱, 위태로웠다. 그러나 수평, 수직 조종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둔중한 기체의 균형을 회복시켰다. 비추는 카메라들은 고공을 날고 있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을 정찰용 무인기일 터. 자폭기의 숫자는 총 열 둘이었다. 다리 마다 네 기씩 배당되는 셈. “저 중에 하나씩만 명중해도 성공인데…….” 뒤늦게 초조함을 드러내는 탄궈셩이었다.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주먹은 땀으로 젖어있다. 겨울은 그를 이해했다. 이제껏 참다가, 더는 감출 수 없게 되었겠지. 묵묵히 화면을 주시한다.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날을 고르지 못한 탓. 옅은 안개 속에서 때때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마다 중심을 잃는 비행기. “아!” 누군가 안타까워하는 소리. 무슨 문제인지 한 기체의 엔진이 정지했다. 프로펠러가 움직임을 멈췄다. 해당 기체는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린 끝에……. 콰쾅! 우르르륵! 대폭발이 일어났다. 일격에 다리를 무너뜨리겠다고 만든 폭탄인 것이다. 둥글게 밀리는 대기가 한 블록을 날려버렸다. 반파된 집이 통째로 뜨는 게 인상적이었다. 비산하는 파편들 사이에서 찢어지고도 살아있는 변종들이 허우적거렸다. 그것들의 누렇게 뜬 눈이 하늘을 본다. 날개 없는 추락. 떨어지기 직전의 손짓은 바람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보였다. 퍼억, 퍽. 눈으로 보아도 들리는 소리들. 이후 몇 기가 추가로 떨어졌다. 각 다리로 향하는 수를 다시 분배해야 할 만큼. “제발…….” 옆에서 들리는 간절한 목소리. 두 손을 꼭 잡고 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짧고 긴 시간이 흘렀다. “좋아! 그대로 가라!” 탄궈셩이 고함을 질렀다. 목표지점에 도달한 첫 기체가 수직 활공을 개시했다. 날개 끝에서 갈라진 안개가 희미한 궤적으로 변한다. 이제까지의 느린 속도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번개가 떨어지는 것 같은 직격. 이어지는 엄청난 섬광과 폭음. 우르르륵! 음량이 지나쳐, 스피커가 뭉개진 소리를 뿜어댔다. 그 뒤로 또 하나의 폭탄이 떨어졌다. 뭉글거리던 연기가 번쩍이더니, 격렬하게 요동쳤다. “다리는? 다리는 무너졌나?” 이번엔 완이 대교였다. 이 역시 침착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기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성패가 불분명한 순간. 그 사이에 다른 두 개의 다리가 잇달아 터져나갔다. 끼우우웅- 철골이 비틀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지경. “함장 동지! 1번 표적의 붕괴가 확인됩니다!” 한 사관의 보고에 짧은 함성이 끓어올랐다. “2번, 3번 표적 역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입니다!” 머리가 울린다. 겨울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썼다. 환희의 도가니로 변한 함교는 지나칠 정도로 시끄러웠다. 덥썩, 흔들리는 몸. 탄궈셩이 체면 불문하고 겨울을 끌어안았다. 기쁜 모습을 만들어야 할 때인가. 커트 리로서 미소 지으며, 겨울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어머님……시에루 중장님의 꿈이 좀 더 현실에 가까워졌군요.” “아무렴! 이렇게 되어야지!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하하하!” 날것 그대로의 희망이 여과 없이 묻어나는 외침. 지금의 탄궈셩은 겨울이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낯선 얼굴, 낯선 목소리. 이럴 정도면, 그동안은 얼마나 절망에 찌들어있었을까. ‘희망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달라지게 만드는 걸.’ 새삼스러운 느낌이었다. 이제껏 많이 보아왔으면서도 이렇게 생경할 때가 드물지 않았다. 이는 익숙한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것과도 같았다. 겨울은 읽지 않은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 보내는 외침. 그들의 요구를 겨울이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전부터 제 때 읽기조차 드물다. 다른 희망이 없어 그 때 뿐인 쾌락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그 사람들도, 무언가 좋은 계기 하나만 있으면 한 순간에 달라질 텐데. 지금까지 많은 종말, 절망을 마주하는 무수한 군상을 경험한 겨울은 그러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의 세계, 물리현실은 한줌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각박하다. 삶의 모든 즐거움을 사후로 미뤄두는 데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소년 혼자 하는 생각이었으나, 스스로 틀리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의미는 없지.’ 잠시 눈을 감는 겨울. 갑작스럽고 끈질긴 상념을 떨쳐내려 애썼다. 이미 죽은 몸. 행동이 될 수 없는 생각은 무기력을 낳을 뿐이었다. “어머님을 부탁하네.” 눈을 뜨자 진지하게 굳은 탄궈셩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겨울의 손을 잡았다. “어머님은 중국인들의 희망이 되실 분이야. 이미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고 해야겠지. 반드시 지켜드리게. 내 자네만 믿겠네.” 겨울은 탄궈셩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람 닮은 것들에게 화를 내는 꿈을 살겠다고 들어온 종말의 세계건만, 겨울동맹도 그렇고, 지금껏 겪어온 모든 종말들도 그렇고, 실제로는 매양 이런 식이었다. 중앙의 화면이 바뀌었다. 보여주는 것은 상륙작전의 경과였다. 장창방진이 인상적이다. 교련된 민간인들에게 기다란 창을 쥐어 앞세우고, 방진 안에는 각종 화기로 무장한 병력 및 차량이 들어갔다. 폐쇄된 공항, 너른 개활지에선 꽤나 효과적인 방식. 그것을 보고, 겨울은 커트 리로서 머무를 때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었다. ‘내일 하루가 전환점이 되겠지.’ 내가 만들던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다. 이전부터 겨울의 심중에 있었으나, 문득 강해지는 충동이었다. 그리고 날이 바뀌었다. # 178 [178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2) 회담 당일. 겨울은 중장보다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목적은 사전점검. 이를 위해 중장이 신뢰하는 병사들과 기술자 집단이 따라왔다. 폭탄은 없는지, 도청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요소마다 병사들을 배치하는 것도 겨울의 일이었다. 회담장소인 크루즈-페리선 발해진주 호는 자체적인 방어력이 거의 없었고, 군함 다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겨울은 난간에 기대어, 사람과 배가 물결치는 잿빛 바다를 관망했다. ‘취약하기 때문에 이곳이 선택된 것이겠지만.’ 누구 하나가 잘못되면 모두가 죽는다. 다들 그 위태로운 균형감각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만큼 참석자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치직- 칙- 삐이-] 우측 고막에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전자음이 맴돌았다. [광대, 광대. 여기는 피쿼드. 이 말이 들린다면 긍정 신호를 보일 것.] 광대. 산타 마리아에서 쓰였던 호출부호가 이번에도 겨울을 지칭했다. 저편에서 교신하는 사람은 올리버 탤벗. 회담이 열리는 동안 겨울을 지원하도록 되어있다. 왼손으로 볼을 긁는 겨울. 이것이 ‘긍정 신호’였다. 고공의 무인정찰기, 그보다 높은 첩보위성이 겨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이 영상은 채드윅 팀장의 피쿼드 호 뿐만 아니라, 정보국 본부인 랭글리와 국방부까지 전해지는 중이라고. [신호를 확인했다, 광대.] 전파에 의한 소통은 일방적이었다. 겨울은 사전에 약정된 약간의 수신호를 통해 제한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따름. [지금부터 확인된 위협을 전달하겠다. 2시 방향, 거리 350, 청색 도장의 소형 목조어선, 은폐된 대전차미사일 포대, 운용인원 둘. 4시 방향, 거리 520, 찰리-위스키 포인트, 보수 중인 레이더 마스트 위에 2인 1조의 저격수. 동 방향 거리 270, 매복한 적 1개 소대…….] 겨울의 귓바퀴 안쪽, 외이도(外耳道), 고막으로 이어지는 구멍에 수신기가 붙어있었다. 피부를 닮은 색이고, 무척이나 얇았다. 금속 탐지기에 걸리지 않는다. 한동안 추가 생산이 불가능한 물건이니 상하지 않게 조심해 달라던가. 감각보정이 끊임없이 갱신되었다. 어디에 어떤 위협이 있다는 걸 알 때와 모를 때의 차이는 극명하다. 당장 저격수만 하더라도, 천재적인 영역의 「전투감각」, 「생존감각」조차 공격 직전, 혹은 직후까지는 경고를 주지 않는다. 피할 여유는 탄이 날아오는 데 걸릴 시간 정도. ‘발신까지 가능했다면 좋았겠는데…….’ 불가능한 미련이었다. 이 장소, 굉장한 감시를 받고 있다. 피쿼드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트릭스터의 방해전파를 모방한 지향성 전파. 그래도 들킬 경우를 대비하여 암호명을 쓰고 있다. 배치되는 병사들은 사정을 모르니, 그저 커트 리라는 인물의 감각에 놀라워할 뿐이었다. 먼 곳에서 은은한 땅울림이 들려왔다. 미 서해안은 지진이 잦았다. 샌프란시스코만 하더라도 하루에 두세 번 씩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진도 3 미만. 겨울조차 감각보정 없이는 눈치 채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다. 땅울림은 금방 지나갔다. 겨울이 중국군에서 쓰이는 무전기를 잡았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이제 오셔도 됩니다, 장군님.” 시에루 중장의 도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얼굴 마주치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오늘이로군.” 며칠간 잠을 설쳤는지 눈 아래가 거뭇했다. 같은 처지의 장군들을 만나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상황과 발언을 머릿속으로 그리느라 여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장하는 인물들로 빈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대개는 서먹한 사이들이었다. 안면이 있어 보여도 정작 대화가 오가는 일은 드물었다.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든, 지금은 서로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눈치였다. ‘시에루 중장의 구상대로 이루어지더라도,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테니.’ 욕심은 끝이 없다. 왜 저 여자가 이끌어야 하느냐. 납득하지 못할 사람은 분명히 많을 터. “다들 잘 와주셨습니다.” 실력은 없고, 다만 어느 누군가에게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재자가 된 늙은 공산당원이 회담의 시작을 알렸다. “세계인민의 말일(末日/종말)이 다가오는 비상시국에서, 아직도 열렬한 애국정조와 의연한 사명감으로 걸출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여러분이…….” “시간낭비는 집어 치우시오.” 어느 육군소장의 차가운 한 마디가 개회사를 끊었다. 말이 잘린 공산당원은 피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소장을 조금도 누그러지게 만들지 못했다. “그 나이 먹도록 시당서기(市党委书记) 노릇이나 하던 작자의 희언에 귀 기울이기엔 촌각조차 아깝소. 어설픈 절차는 생략합시다. 다들 여기 모인 이유를 알지 않소?” 소장이 탁자를 내리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장정 9호와 북두성. 누가 가지고 있소?” 웅성거림이 번졌다. 미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은 유일한 핵잠수함과, 핵미사일 유도에 필요한 인공위성 체계. 어느 쪽이든 중요한 협상수단이다. 그러므로 가지고 있다는 걸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감춰서는 대화가 불가능할 터. 벌써부터 난폭한 말이 오가는 중이다. 점점 더 올라가는 목소리들. 그 와중에 시에루 중장이 손을 들었다. 걸걸하고 큰 소리로 선언한다. “북두성은 내게 있습니다.” 소란이 잦아들었다. 질문을 던졌던 소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느 간 큰 도둑놈인가 궁금했건만, 설마 당신이었을 줄이야.” 상급자에 대한 존중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에루 중장 쪽은 도둑 취급을 받고도 이렇다 할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판리유안(潘日源) 소장. 나는 단지 악용되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다.” “잘도 그런 말을.” “북두성은 인민과 국가의 자산이지. 누군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팔아먹는 꼴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대도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모리배들이 의무를 방기했는지를.” 그녀의 말대로였다. 비록 샌프란시스코에 피난한 중국군 장성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하와이 방면에서 투항한 또 다른 군벌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겨울은 지금의 미국에 첩보위성과 통신위성이 흘러넘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빈곤 속의 기형적인 풍요. 미국의 위성통신환경을 설명하는 단 한 마디. 이는 각국의 고위 망명자들이, 신변보장의 대가로 자국의 위성체계를 아낌없이 넘겨준 덕분이었다. 그 외에 국립은행의 금괴와 달러를 싣고 날아온 정부 전용기의 국적이 수십 개에 이른다던가. 주변에 정보부처 관계자가 많으니 듣게 되는 내용들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무궁화, 천리안, 아리랑 등. 친숙한 이름들의 위성 다수가 현재는 미국의 관리 하에 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한국계 난민들의 처우가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가상현실은 과거를 비추는 현재의 거울이었다. 사실 생전의 물리현실도 매한가지이긴 하지만. 생전의 세계가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겨울은 갈수록 싫증날 만큼 깨닫고 있다. 이렇다보니 베이더우 위성의 통제권을 두고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해킹과 암호변경, 권한재설정, 접근차단 등. 그 최종승자가 바로 시에루 중장이었던 것이고. 그걸 다시 도둑맞았다는 걸 모르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녀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장정 9호의 행적은 뒤따르지 않았다. 회의장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눈살을 찌푸리며 모두에게 삿대질하는 이는, 아마도 CIA에 포섭되었을 레이옌리에 소장. “장정 9호를 숨기고 있는 게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가운데 있을 터! 똑똑히 들으시오! 당신은 현실감각이 없어! 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단 말이야! 화셩둔(华盛顿/워싱턴), 으레이겅(俄勒冈/오레곤), 쟈리푸니야(加利福尼亚/캘리포니아) 오염지역의 절반이 이미 탈환되었어! 남은 여유가 대체 얼마나 된다고 이따위로 시간을 끌어!” 그의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었다. 명백한 해방 작전에서, 미군은 쾌진격을 거듭하고 있다. 정작 국방부는 변종들이 전력보존을 위해 조용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었지만. 놈들이 또한 보급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다시,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이어지는 레이옌리에 소장의 힐난. “정말로 미국과의 전쟁이라도 해보자는 건가?” 그러자 어디선가 한 마디 툭 뱉는다.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소?” 드물게 군인이 아닌 참석자의 발언이었다. 겨울은 이름을 모르지만, 아마도 구 중국정부의 고위인사일 것이다. 풍채는 좋으나 눈빛이 사납다. 광기가 일렁거렸다. 노여움이 느껴지는 볼 살은 덤. 사람보단 사나운 개를 닮았다. 한 번이라도 웃은 적이 있었을까 싶은 관상이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옛날부터 탐욕스러웠지. 중국의 온당한 권리를 끊임없이 침해하고도 모자라 항상 침략야욕을 불태우던 자들이란 말이오. 시역 또한 놈들의 작품이겠지.” “그게 무슨……!” “다들 알고 있을 거요!” 미국이 우려한 광기가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질병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럽잖소! 인간의 창조물이란 말이오!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오? 그런 걸 실제로 쓸 국가는 또 몇이나 되겠고? 설마 러시아가? 아니면 저 작은 왜노들이? 그럴 리가 있나. 미국이오. 미국밖에 없단 말요!” “억측은 삼가시오!” 이번에 말리는 건 시에루 중장이었다. 그러나 광기의 동조자들은 수가 적지 않았다. 자기보전을 원하는 자와 이성적인 자들이 한 편이고, 미쳐가는 자들이 다시 한 편이어서, 양측 사이에 높은 언성이 오갔다. “시에루 중장! 그대는 조국의 원수에게 아첨하려는 매국노에 지나지 않소! 양놈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 같으니라고!” “우리의 사명은 단 하나, 멸망한 조국의 복수를 하는 것 뿐!” “미국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13억 중화인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어리석음으로 죽어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대리하는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 “보복을 합시다! 이 세상에 다시없을 처절한 보복을! 세계 최후의 전쟁을!” 이에 대항하는 측은 그나마 이성적이었다. “지금의 대의는 인류의 존속이다! 당신들은 확실치도 않은 유언비어를 근거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를 셈인가!” “인민이 곧 국가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인민들이 지금의 중국이란 말이다! 우리는 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당신 가족이 죽었다고 세상이 끝난 게 아니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 마지막 한 마디가 인상 깊다. 과연, 복수에 미친 자들은 또한 복수가 필요한 자들인가 싶어서. 겨울은 그 말에 격분하거나, 창백해지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자들이 한둘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저 원망하고 싶어서 원망하는 사람들. 자신의 모든 절망을 떠넘길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한계를 넘어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나는 이토록 괴로운데,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 어디까지 원망해야 하나. 겨울을 괴롭게 했고, 지금도 때때로 앓게 만드는 고민과 뿌리가 같았다. “백번 양보해서, 시역을 뿌린 것이 미국이라고 치지! 그런데, 애초에 보복이 가능하기는 한가? 만 입구는 미국의 신순(신의 방패, 이지스) 순양함과 잠수함들이 봉쇄하고 있잖은가! 장정 9호조차 핵도탄을 모두 쏘기 전에 격침당할 것이며, 발사된 도탄들 역시 표적까지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어! 이 하늘을 벗어나기 전에 태반이 요격당하겠지! 착탄은 기껏해야 한두 발에 지나지 않을 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누군가 외치자, 유독 큰 목소리 하나가 돌아왔다. “보복은 가능하다!” 외치는 건 강경파에 속한 해군 소장이었다. “만 입구를 향해 핵 어뢰를 발사하면 된다!” 그는 좌중의 동요에 아랑곳 않고 극단적인 계획을 말했다. “여러 잠수함에서 일제히 어뢰를 발사하면 놈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어! 그 때 고속어뢰 「폭풍」에 핵탄두를 달아 쏘는 거다! 이후 이 지긋지긋한 만을 벗어나 안전한 위치에서 최종 보복을 실행하면 그만이야!” “방사능으로 오염된 해역을 무슨 수로 통과한단 말인가!” 시에루 중장이 반박했지만, 강경파의 소장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무슨…….” “어차피 결사의 각오로 행하는 복수다. 이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방사능에 살이 뭉개지고 뼈가 삭더라도! 핵도탄을 발사하는 순간까지만 살아있으면 되니까!” “…….” 아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겨울은 소총의 안전장치를 두드렸다. 최악의 경우, 즉 미국에 대한 핵공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을 때, 겨울의 판단 하에, 여기 있는 모두를 죽여 버리라는 채드윅의 지시가 있었다. 물론 그랬다간 지도부를 상실한 나머지 중국군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겨울 자신도 위험에 처할 터이고. ‘그래도 이상한걸.’ 겨울이 한 사람을 응시했다. 회합 이전에 시에루 중장이 가장 경계해야 할 강경파라고 알려주었던 인물이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남자. 계급은 육군상장.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 가운데 계급만으로는 최고라고 할 만하다. 그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씩 시계를 볼 뿐. 명백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 것도 안 할 작정이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 기다리는 것은 사람일까, 소식일까. 「생존감각」의 경고가 조금도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직접적인 위협은 아닐 것 같지만, 확신할 순 없다. 겨울이 확신하는 순간 보정 또한 그 확신에 얽매일 것이었다. # 179 [179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3) “양용빈(杨永斌) 상장 동지.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시에루 중장이 바로 그 남자를 지목했다. 마침 또 시계를 보고 있던 육군상장이 점잖은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에루 중장이 예의를 지키며, 그러나 큰 소리로 밀어붙이듯이 내는 말. “당신이 보물섬(金银岛)을 점령한 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행보를 함께한다면 협상력도 그만큼 강해질 것입니다! 미국은 훨씬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요! 본관은 장차 만들어질 새로운 중국에 상장 동지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물섬은 인공섬 트레져 아일랜드의 직역이었다. 육지와는 왕복 4차선 도로 하나로 이어져있을 뿐. 육군상장은 이 길목에 화물선을 돌진시켰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얇은 육지에 좌초한 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벽과 같았다. 미군이 컨테이너를 쌓아 변종집단의 진입을 차단했듯이. 남은 섬을 점령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지도력이 필요하다……인가.’ 공동체를 함께 이끌자는 암시. 구체적인 약속은 아니지만,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이 이상의 제안을 꺼낼 순 없을 것이다. 체면을 망치는 일이 될 테니. 겨울이 주시하는 가운데, 육군상장이 싱긋 웃었다. “새로운 중국이라. 귀관은 마치 중국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좌중이 잠잠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였고. 언성을 높이던 강경파마저 주춤거렸다. 그들조차도, 중국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순 없었기에. 테이블 위에 깍지를 낀 상장이 온화한 발언을 이어갔다. “국가는 정신이야. 다른 구성요소는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그리고 군인은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그 정신을 명예로운 무력으로 지키는 자들이지. 즉.” 그는 미소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눌러보였다. “내 조국은 여기에 있네. 중국은 유사 이래 잠시라도 사라진 적이 없어. 그러니 멸망한 조국의 복수 운운하는 것도 우습군. 본관이 보기에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반역자들이야.” 겨울은 어두운 예감을 느꼈다. 광기는 이성적일수록 위험하다. 에이프릴 퍼시픽이 왜 그런 지옥이 되었던가. 겨울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방아쇠울로 들어갔다. 이 자, 양용빈 육군상장을 지금 바로 사살해야 할까? 강경파를 포함해서? 아니다. 그런다고 그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지연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지금 그는 그저 여기 앉아있을 뿐. 궤도에 오른 계획은 상장의 간섭 없이도 관성으로 실행될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는 냉정하게 미친 사람이 이런 자리에 올 이유가 없다. 저것은 합리적인 여유다. 게다가 교전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보장은 낮다. 시에루 중장이야 어떻게든 지켜내더라도, 나머지의 생사는 운에 맡겨야 한다. 여기에 이르는 판단의 흐름을 「통찰」이 끊임없이 긍정했다. 당장은 방법이 없나. 겨울은 잡음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 교신채널이 아쉬웠다. 선내까지는 위성전파도, 지향성 전파도 닿지 않기에. 그렇다고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불가능하다. CIA가 무언가 눈치 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같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시에루 중장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상장 동지께선 현실을 외면하고 계시는 겁니다. 국가는 정신이나 철학처럼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는 인민이며, 인민의 삶을 보장하는 정치이며, 또한 인민의 생활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제도와 간접자본의 총체입니다. 가스, 수도, 유류, 전기, 식량! 말씀해보십시오. 그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대체 얼마나 됩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단지 육군상장만을 겨냥하고 토하는 열변이 아니었다. “다음 인민대표회의는 언제 열립니까? 주석 동지가 살아계십니까? 아니면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의 지시를 기대할 순 있습니까? 하다못해 집단군 편제라도 온전히 남아있는 곳이 있기나 하냔 말입니다!” 땅, 테이블을 힘차게 내리치는 소리. 여걸의 호령이 실내에 쩌렁쩌렁했다. “동지! 중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군인의 본분을 기억하십시오! 군대는 살인자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래를 지켜야 합니다! 복수? 보복?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게 정당하다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정당한 복수라는 게 존재할 리 없다. ‘복수는 산 사람의 자기위안이지. 이미 죽은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 납골당에 백만 송이 꽃을 바친들, 그 향기가 죽은 사람에게 닿기나 할까. 꽃의 아름다움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할 따름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이게 겨울 혼자 하는 생각이어도 중장의 의도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살아남은 인민의 숫자가 시역 이전의 13억 6천만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할지라도, 유명을 달리한 십억의 인민보다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아이를 더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이미 죽은 사람들의 뒤를 따르라고 강요할 순 없습니다!” 중장이 좌중을 삿대질했다. “설령 시역이 미국의 소행이라 치더라도! 당신들이 진정한 복수를 원한다면! 부차의 똥을 핥는 구천의 심정으로 살아남아야 할 게 아닙니까? 승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는 자의 몫입니다! 같이 죽어서 뭐 어쩌겠다는 겁니까! 어디 저승에 가서 자랑해보십시다! 4천년 중화의 역사를 원수와의 공멸로 끝장내고 왔노라고! 그럼 먼저 간 동지들이 박수라도 쳐줄 것 같습니까? 하, 어림없는 소리! 당신들은 알량한 복수심에 홀려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거야!” 준열한 꾸짖음이 공기의 무거움을 더한다. 잠시 동안은, 시에루 중장이 씩씩대는 소리에 메아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모두가 억눌린 가운데 전과 같은 이는 양용빈 육군상장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여유를 지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초연함에 가깝다. 시에루 중장의 삶에서 지금처럼 떳떳한 순간은 없었겠지. 지금처럼 진심이었던 순간도 없었겠고. 내심 이렇게 평하는 겨울은, 그녀의 열변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었다. 소년도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삶은 매순간의 깨달음이다. 계속되는 의미부여가 자신을 새롭게 만든다. 과거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그런 사람에게, 과거의 네가 형편없었으니 현재의 너는 소리 높일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는 건 인간적이지 못하다. 겨울은 사람이 변화할 가능성을 믿는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드물지라도.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는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미 늦지 않았는가, 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건, 대개 이제까지의 자신으로 현실을 풀어나갈 수 없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는 얼마나 상징적인가. 좋은 꿈을 꾸기에 적합하지 않느냐고, 겨울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시에루 중장. 좋은 말 잘 들었네. 젊음의 혈기가 넘치는군.” 이렇게 말하는 양용빈 육군상장은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대는 국가가 총체라고 했지.” 지나간 말을 되짚는 의도가 무엇일까. “그 말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구성요소의 경중은 가려야 하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지.” 되묻을 때도 꼬박꼬박 동지 호칭을 붙이는 시에루 중장. 의도적인 화법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 한 마디가 분위기를 달리하는 법.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일지라도. 기품 있게 늙은 육군상장이 해군중장에게 묻는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일단 묻겠네. 그대는 뭔가?” “……질문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귀관, 시에루 중장이라는 사람이 뭐냐고 묻고 있는 걸세.” “……” “그대가 중국을 인민과 인민을 위한 모든 것들의 총체라고 했듯이, 그대는 그대의 정신과 다른 모든 육체적 구성요소의 총체일 것이야. 팔, 다리, 대장, 신장, 심장, 뼈, 안구, 뇌, 귀, 혈소판과 백혈구, 골수, 탈양핵당핵산(DNA), 깊게 들어가면 철분과 단백질, 염분과 기타 등등의 성분이 모여 시에루라는 사람을 이루겠지. 그렇잖은가?” “일단 그렇다고 해두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좋아. 그럼 하나 묻지. 자네가 팔이 잘렸다고 치세.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간 거야. 그럼 시에루라는 사람은 어느 쪽에 있는가? 잘려나간 팔 쪽인가, 아니면 머리가 붙어있는 보다 큰 덩어리 쪽인가?” 시에루 중장의 안색이 험악해졌다.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미쳐버린 육군상장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좌중의 분위기. 그 위태로운 균형 때문에 대화를 깨버릴 수도 없었다. 상장의 발언을 짓뭉개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건 이 회합의 파탄을 의미했다. “어느 쪽도 저입니다만, 좀 더 많이 남아있는 쪽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겠지요.” “그렇다면 다시 묻지. 그 상태의 자네가 이번엔 왼팔마저 잃었다고 가정하세. 시에루 그대는 어느 쪽에 있겠는가? 왼팔일까? 오른팔일까? 아니면 다리와 머리가 남아있는 몸통 쪽일까?” “…….” “계속해서, 사지를 차례로 잘라내고, 마침내 몸통과 머리만 남았다고 치지. 인격체로서의 시에루 그대는 사지가 잘렸으니 5분의 1이 된 것인가? 아니면 정신이 온전히 남아있으니 인격은 그대로이되 그저 몸이 불편해졌을 따름인가? 응? 대답해보게.” 반박할 논리를 구체화할 시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 시에루 중장이 밀어붙였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육군상장 쪽에서 몰아세웠다. “인간의 핵심이 생명유지기능이라고 한다면 뇌보다는 심장이 중요하겠지? 뇌사상태여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그런 처지를 긍정할 것 같지는 않군. 그러니 뇌보다는 심장이야말로 시에루라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못할 거야.” “…….” “투이시우시의 배(忒修斯之船/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그리스의 고사를 들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지는 논변. “투이시우시에겐 한 척의 배가 있어. 목조선이야. 유지보수를 위해서는 낡은 판자를 계속해서 교체해야 해. 그러다보면 최초의 배를 이루고 있던 목재는 단 한 장도 남지 않게 되지. 여기서, 갈아낸 판자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모아, 새로운 배를 만들었다고 치세. 그럼 어느 쪽이 투이시우시의 진짜 배라고 해야겠는가? 본래의 목재가 더 많이 들어있는 후자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새로운 목재를 끼워 넣은 전자인가?” “…….” “결국 진위를 결정하는 요소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일세. 정신, 철학, 사상, 개념, 해석, 혹은 신념이나 믿음, 영혼과 같은. 그렇지 않은가?” 육군상장이 타이르는 듯 한 한숨을 쉬었다. “그 기준이 주관적이라고 할 순 있을 걸세. 그러나 마냥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거야. 중국이 여러 요소의 총체라고 하더라도, 하나씩 자르고 쳐내며 어느 쪽이 중요한가, 무엇이 중국을 규정하는가를 가리다보면, 핵심은 결국 중국의 정신이 될 수밖에. 어느 개인, 제도, 법률이나 예술, 건축물, 도시, 영토 같은 작은 파편들은 이를테면 시에루라는 사람의 잘려나간 팔다리 같은 것일 뿐.” 팔다리를 자른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겨울이 고민하는 사이, 시에루 중장이 격앙된 낯으로 항의한다. “궤변입니다! 인간의 삶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중요합니다! 동지는 한낱 비유로서 현실을 왜곡하려 들고 있습니다!” 이에 갸우뚱 하는 육군상장. “그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그리고 소리 내어 웃는다. 허허롭게 느껴지는, 어찌 보면 울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비록 미치광이의 희언이었으나,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겨울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았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읽지 않은 메시지들. 그 비참한 사람들은 모든 행복이 사후에 있을 거라 기대하며, 사후세계를 엿보는 데 여념이 없다. 그들이 갈망하는 행복은 수준이 낮다. 그 이상을 몰라서 그런 걸까, 싶기도 했다. 테세우스의 배. 겨울은 물리현실에 남아있을 자신의 육체를 생각했다. 한겨울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 한겨울의 더 많은 부분을 가진 고건철 회장이야말로 본래의 의미에서 한겨울에 가까운가? 아니면 뇌와 척수만 남아있는 한겨울의 사고 쪽이 한겨울인가? 어느 쪽도 아니라면, 한겨울이라는 사람은 찢겨진 채 어느 쪽에도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하되는 집중력. 지금 교전이 발생한다면 겨울은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터. “다시 말하지. 중국은 존재하네. 다만 많은 부분을 잃었을 뿐이야.” 이 와중에, 육군상장이 차분하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나는 조국이 부여한 내 임무에 충실할 걸세. 비상시의 교전수칙을 말하는 거야. 상세불명의 공격에 의해 국가가 위급사태에 직면하고, 정상적인 지휘체계로부터 정상적인 명령하달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여기 모인 제군들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겨울은 제멋대로 흐르던 상념에 가까스로 제동을 걸었다. “잠재적 적국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당신은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절규에 가까운 시에루 중장의 힐난은 올바른 것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게 선제공격을 받아 국가기능이 마비될 경우, 공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국가에 보복공격을 가한다. 이것은 핵보유국 공통의 교전수칙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가 없는 한, 내 의무는 변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양용빈 육군상장은 충성스러운 군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그가 또 한 차례 시계를 본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시간이 되었군.” “당신! 무엇을 꾸미고 있나!” 이제 더는 존대하지 않는 시에루 중장에게, 양용빈 상장이 피곤한 표정으로 답한다. “30초 후, 일곱 발의 핵도탄이 발사될 거야.” 대치를 관망하던 장내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황망하기 짝이 없는 레이옌리에 소장의 물음. 이에 대해 육군상장은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다들 보복수단이 장정 9호 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야. 제2포병……. 아니, 전략화전군(战略火箭军/전략로켓군)의 이동식 핵도탄 발사대가 있다네. 보물섬을 확보한 것도 그 때문이야. 선상에서 발사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안정성이 없으니 말이야.” 겨울은 뇌리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종말일지도 모른다고 항상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그 가능성이 갑작스러울 만큼 성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상장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한동안은 나조차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 뭐, 본토가 초토화되는 와중에 정신없이 실어놓은 화물 중 하나였으니. 담당 장교는 자살했고, 병사들은 살해당하거나 잡아먹혔고……. 아무도 존재를 모른 채 온갖 화물과 잡동사니 사이에 방치된 핵도탄 발사대라는 건, 소련 붕괴 이래 최초가 아니었을지.” 낮은 웃음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린다. “어리석은…….” 시에루 중장의, 분노로 떨리는 질책. “이제 보니 단단히 미친 작자로군. 그 도탄들이 이 하늘을 벗어날 수 있을 성 싶은가?” “글쎄, 그건 어떨까.” 음울한 유쾌함을 담아 육군상장이 답한다. “여기서 장성과 당 간부들의 회합이 열리는 중에 핵도탄이 발사된 걸세.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니고, 자그마치 일곱 발이나. 자, 그럼 동지들이 신뢰하는 각 함장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발사된 미사일이 여기 모인 장군단의 총의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 불확실한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묻는 말이 비명에 가깝다. 그러나 장내의 모든 시선이 꼬챙이처럼 꽂히는 와중에도, 미친 남자의 차분함엔 흔들림이 없었다. “뭘 새삼스럽게. 여기 건곤일척의 심정으로 참석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 더 이상 여유가 없다고, 낮은 가능성이지만 모든 것을 걸어보겠다며 목숨 걸고 온 것 아니었나?” “미쳤어……미쳤어…….” 질려있는 중얼거림은 뜻밖에 강경파의 한사람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역시 이토록 급격한 전개를 기대하진 않았던 것일 터. 그를 제외한 나머지 강경파도 하얗게 굳어있었다. “방공구축함의 함장들이 전후사정을 짐작하긴 어렵겠지. 혼란스러울 거야. 그러나 발사된 도탄은 명백히 중국의 것이고, 미군이 이를 요격하려 드는 급박한 상황에서 내릴 판단이란 애국심에 기초할 수밖에.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아.” 바깥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화기가 발사되는 소리들. 쏠까. 겨울은 거듭 망설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지금 겨울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모두가 모두를 겨누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자리였다. 시에루 중장도 유사시 본인만큼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토록 커트 리를 원했던 것이니까. 지금 이 자리의 장군단은, 육군상장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온건한 방향으로 기울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양용빈 상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중엔 분명히 미 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고 출석한 매국노들이 있겠지.” 무심한 눈으로 좌중을 훑으며 이어가는 말. “오늘 쏜 핵도탄이 모조리 떨어져도 상관없어. 미국은 이걸로 이 자리의 모두를 다시 한 번 의심할 것이다. 기본적인 입장부터 달라질 터. 동지들이 입장을 정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 나에겐 군의 원로로서 귀관들을 하나로 이끌 책무가 있는 것을.” 겨울의 통찰과 상장의 심계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을 것인가. 상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타협은 없다. 보복이 있을 뿐. 제국주의 원수들에게 죽음을.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시에루 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장을 잠시 노려보고는, 가까운 겨울을 향해 물러났다. 많은 총구가 중장을 겨누었으나 실제로 쏘아지는 것은 없었다. 육군상장 또한 무슨 생각인지 여유로울 뿐이다. 모두 죽이거나 협박한다는 수도 있을 것인데. ‘본인이 죽을 가능성은 배제하는 건가.’ 남아서 뭉치는 자들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일지도. 그냥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거나. “마지막으로 말하지.” 시에루 중장이 좌중에게 고했다. “나는 이 광기에 발 담그지 않겠다! 깨어있는 자라면 누구든 좋다! 내게로 오라! 나는 중국의 미래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고 겨울에게 속삭인다. “가지. 약속대로, 나를 지켜주게.” 겨울은 옅은 적색의 사선경고들 사이로 그녀를 이끌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장군을 감싸는 사이에, 혼란스러운 나머지가 우르르 움직였다. 소란스러운 바깥을 직접 보고 싶을 것이었다. 바깥으로 나갈수록 소음의 강도가 높아진다. ‘무전은 들어오지 않나…….’ 긴급사태이니 CIA 또한 경황이 없을 터. 벌컥. 야외로 통하는 문을 열자 드디어 보이는 하늘. 어느새 깊어진 밤이 온갖 색채로 밝았다. 만 바깥 방향에서 날아오는 빛줄기들은 핵미사일을 요격하려는 미국 순양함들의 발악이었다. 광선 같은 기관포탄 줄기들과, 핵미사일을 향해 날아가는 무수한 요격 미사일들. 중국 구축함들이 탄막을 펼쳐 그것을 가로막는다. 어두운 천구에서 가장 밝은 빛은 천공을 향하는 일곱 줄기의 파멸이었다. # 180 [180화] #합종연횡, 샌프란시스코 (14) 핵공격의 여파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 시에루 중장의 호위 관계로 뒤늦게 복귀한 겨울을 위해, 조안나는 그녀의 개인실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의 경계가 도상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의 등뼈, 시에라네바다 산맥 일부가 보인다. 산맥의 중심은 그 유명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이었다. 그녀가 붉은 펜으로 핵폭발이 일어난 지점을 체크했다. 하나, 둘, 셋, 넷……. “최종적으로 낙하한 탄두는 총 아홉 개입니다.” 아홉. 발사된 핵미사일 숫자보다 많다. FBI 요원이 곧바로 그 이유를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난 탄도탄은 단 두 발입니다만, 문제는 한 발당 열 개의 탄두가 달려있었다는 점입니다. 대기권으로 돌입할 때의 최고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 음속의 20배 이상이었고요. 봉쇄선의 방공능력으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조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탄도탄의 비행거리가 짧다보니 대응할 시간도 부족했죠. 알래스카의 방공기지에서 우주 요격에 나섰으나 제 때 닿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뉴욕 같은 동부 대도시를 겨냥했다면 방어율이 올라갔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쪽이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었겠지만요.” 탄두가 여럿 달린 핵미사일에 대해선 겨울도 들어본 적이 있다. 언제였더라. 이번 세계관이 아닌 과거, 한국군 퇴역 장성 한 사람이 겨울의 그룹에 합류했었다. 핵보유국의 비상시 보복계획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도 그의 입을 통해서였다. 한국은, 미국의 우방으로서 러시아의 공격 목표에 속했다고. 그러기 위해서 단 한 발의 미사일이 배정되어 있었다던가. 분리된 탄두들이 대도시마다 하나씩 떨어지고 나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겨울이 지도를 살피며 물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조안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적어도 직격탄을 맞은 도시나 기지는 없습니다. 위성신호를 통한 교란이 이루어진 덕분이겠죠. 하지만 피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심각하다고 해야겠군요. 양용빈 상장은 처음부터 빗나가도 무방한 표적을 고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빗나가도 무방한? 무슨 말이에요?” “여길 봐요, 겨울.” 요원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짚는다. 호손(Hawthorne). 메마른 산맥과 사막 가운데서 호수(Walker Lake)를 곁에 끼고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규모로 미루어, 상주인구는 많아봐야 1만을 채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근방에 낙하한 핵은 세 발이나 되었다. 서쪽, 북쪽, 동남쪽에 하나씩. 모두 빗나간 터라 인명손실은 없었겠으나, 핵이 태운 재, 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사능 낙진 때문에라도 대피령이 내려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밖의 피해는 무엇일까? “호손 일대엔 캘리포니아 중남부를 총괄하는 보급기지가 있었습니다.” 요원의 손가락이 도시 주위로 원을 그렸다. “이번 핵공격으로 약 15만 에이커, 2천 4백 개의 탄약고가 방사능에 오염되었죠. 기지 운영부대는 낙진이 도달하기 전 간신히 인력만 빼냈고요. 탄약과 물자 공급이 끊긴 캘리포니아 남부 전선은 공황 상태입니다. 현 시점에서 일선 병력이 보유한 탄약은,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진다고 가정할 때 고작 나흘 치뿐이거든요. 전선 전체에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답니다.” “……괜찮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변종들의 대규모 공세가 없었지만, 위력정찰……이쪽을 시험하는 듯 한 소규모 도발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인걸요. 이쪽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즉시 알아차리겠죠. 놈들은 탄약과 연료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아마도.” 그렇게 가정해야 안전할 것이다. 이미 안전 운운하는 것이 우스운 전황이긴 해도. 전선 한 곳에 구멍이 생긴다는 건, 다른 모든 전선의 후방이 위험해진다는 의미다. ‘명백한 해방 작전은 당분간 보류……최악의 경우 실패인가.’ 겨울은 앞날을 고민했다. 이번 세계관이 무척 안정적이었으므로, 이렇게까지 급격히 악화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전선이 잘 수습되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다 해도 다가오는 대선엔 악재가 되겠지만. 사후의 백일몽, 정신만 남아있는 여생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되려나. “다른 쪽은 어때요, 앤?” 겨울이 묻자, FBI 요원이 미간을 좁힌다. “마찬가지입니다. 핵폭발 그 자체보다는 방사능 오염이 문제죠. 요세미티로부터 북쪽 엘도라도 국유림 방면에 이르기까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동과 서를 잇는 다섯 개의 국도가 차단되었습니다. 특히 가장 위에 있는 링컨 고속도로가 끊어진 게 커요.” “보급할 길도, 철수할 길도 마땅치 않겠네요.” “네. 이쪽도 제대로 명중한 건 없어서, 도로 자체는 멀쩡하지만……. 여압장치와 공기 필터가 달린 기갑차량이 아닌 이상 통과는 무리겠죠. 최소한 보통의 험비나 트럭으로는 불가능해요.” 여압장치는 차내의 기압을 바깥보다 높게 유지해주는 물건이다. 그럼으로써 외부의 오염된 공기가 새어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것이다. 겨울이 경험한 몇 번의 종말은 인류가 역병 소거를 위해 핵을 대량으로 사용한 세계였으므로, 그 같은 장비를 탑재한 차량이 유용했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환경에서 개개인의 방독면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초인적인 영역의 「환경적응」이 없는 이상, 차량 확보는 생존이 달린 과제였다. 그러나 지금의 미군은 그런 류의 차량이 굉장히 부족할 것이다. ‘자원 낭비인걸.’ 변종을 상대하는 싸움에서 전차나 장갑차는 위력과잉이었다. 연비도 나쁘고. 있으면 든든하기야 하겠으나, 전차 한 대 만들 자원과 비용이면 험비는 수십 대가 쏟아질 터. 겨울에게 결정하라고 하더라도 뒤쪽을 고를 것이었다. 반년 새 천만 단위로 팽창한 미군이 아니던가. 시간에 맞게 장비를 갖춰주려면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지도 너머를 보려고 할수록 전망이 어둡다. 캘리포니아 중부 평원에서 후퇴하려면, 거대한 산맥을 남쪽으로 우회하거나, 혹은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는 길 뿐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이런 상황에서 연료공급이라고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있나. “그렇다고 쓸모없는 차량을 버리기 시작하면 위험할 텐데요. 변종들이 눈치 챌 거예요.” “그건……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죠. 그나마 핵폭발 이후 감염이 확산되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타격지점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조안나는 우려 깊은 낯빛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한 손으로 지친 눈빛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는 말. “요즘은.” 한숨 한 번 쉬고, “오랜만에, 신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Fuck. 그녀의 마른 입술 사이로 기운 없는 감정이 튀어나왔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시간을 겨울은 몇 번이고 겪어보았다. 마음이 어둡고 고단할 때, 다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장미가 시들지 않기를 바라며, 과거의 소년은 말 없는 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을이 겨울 자신에게서 위로를 얻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여백을 두고 마음을 추스른 조안나가, 이번에는 거꾸로 겨울에게 묻는다. “복귀한 뒤 채드윅 팀장은 만나보셨습니까?” “네. 돌아와서 바로 만났어요. 보고를 올려야 했으니까.” “반응이 어떻던가요?” “잘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추가 지시가 없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정보국의 채드윅은 사후보고를 건성으로 들었다. 사흘간 이루어진 합종연횡에 대하여. 시에루 중장을 중심으로 화평파가 모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다만 가서 쉬라고 했을 따름. 이 무관심은 또 한 겹의 가면인가? 아니면 정보국의 방침이 바뀌었나? 무언가 다른 계획이라도 있나? 엇갈리는 「통찰」 사이에서, 겨울은 정보국 지부장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오르카 블랙의 활동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무기한의 비상대기. ‘이래서는 기껏 만들어놓은 시에루 중장과의 연줄도 의미가 없는데.’ 최소한 겨울 자신이라도 다시 보내야 할 일 아닌가. 장정 9호의 행방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그렇잖아도 극단적인 정치장교가 장악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판국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추적을 끝내야 할 텐데요. 언제 끝날지 모를 비상대기라니…….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걸까요? 앤은 짐작 가는 게 없어요?” “으음.” 겨울은 요원에게서 망설임을 읽었다. “뭔가 있군요?” “…….” “말해주세요. 제가 알아선 안 되는 기밀이 아니라면.” “기밀까지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한데……그래도 듣고 싶은가요?” “앤이 근거 없는 걱정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이에 한 번 싱겁게 웃고, 조금 더 망설인 뒤에, 요원은 자신의 의혹을 털어놓았다. “이 시점에서 내려온 대기명령은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어쩌면, 위쪽에서는 최악의 최종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라요.” “최악의 최종해결?” “사실 이번 비밀임무,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구상 단계에서 제기되었던 의견 중 하나지만요. 단지 끔찍할 만큼 비도덕적이어서 채택되지 않았을 뿐.” 비도덕적이라는 대목에서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겨울. 이어지는 조안나의 말은 불쾌한 예감 그대로였다. “그것은 만 전체에 선제 핵공격을 가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탄도탄을 썼다간 중국군의 레이더에 걸릴 테니, CIA에서 탄두를 인수한 다음 인력으로 설치, 폭파시킨다는 내용이었죠.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요. 여기에 동원될 폭탄의 숫자는 적어도 서른 발 이상이었습니다. 넓은 만 전체를 밑바닥까지 확실하게 쓸어버려야 하니까요.” 그녀는 말하는 내내 혐오감을 드러냈다. “천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죽이고, 광역권에 남아있는 미국 시민들마저 희생양으로 삼아서 국가 안보를 지키겠다……. 그런 미치광이 같은 발상이 통과될 리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 남아있는 미국 시민들의 숫자는 십만 단위였다. 그렇게 죽여서야 정권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인들 자신의 목숨조차 위태로웠다. 그런 작전을 실행하고서 비밀이 오래 지켜지길 바라기도 어려울 터였고. 겨울이 묻는다. “그럼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에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테러를 제외하면, 미 본토에 대한 공격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인걸요. 그것도 심지어 핵공격입니다. 자칫 백만 이상의 병력을 상실하고, 봉쇄선이 뚫릴 지도 모를 상황에서 상부가 과연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지…….” “글쎄요. 핵이 사용되는 작전이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잖아요. 난민도 난민이지만, 시민들을 태워 죽이는 작전이 허가될 것 같진 않은데요.” 라디오로 들었던 대통령의 연설은 인간적인 희망과 그 이상의 사명감을 담은 명문이었다. 말 뿐인 사람이 아니다. 이 세계관의 미국이 그의 인성과 능력을 방증했다. 화폐경제가 붕괴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임에도 대통령 선거는 차질 없이 시행될 예정이다. 비록 난민의 취급에 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으나, 그것은 미국의 한계이자 사람의 한계일 것이었다. 조안나의 의견은 달랐다. “저는 대통령 각하를 믿습니다. 믿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그 분이라면 정치적 생명을 도외시하고, 철저하게 국가원수로서 결정을 내리실 것 같아서요.” “그건……일리가 있네요.” “장정 9호가 잡히지 않은 이상 추가 핵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릅니다. 기존의 임무를 속행한다고 해서 확실하게 잡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비인도적인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민 절대다수의 확실한 안전을 선택한다. 과연 있을 수 없는 결정일까요? 이런 시기에?” “…….”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걱정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운명은 사람의 한계 너머에서 찾아오는 사건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아무리 넓혀도, 세상은 항상 그 이상으로 광활하다. 조안나가 굳은 안색을 풀었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하네요. 고마워요, 겨울.” “아뇨, 저야말로. 돌아왔는데 분위기는 좋지 않고, 브리핑도 없고, 상황을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난처했거든요. 이곳 피쿼드에서 앤 말고 누가 제게 시간을 내주겠어요?” 겨울이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들었다.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감독관은 소년장교에게 커피를 권했다. 받겠다고 하자, 잠시 분주해지는 그녀.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더니 여지없이 브랜디가 나온다. 이번에도 카페 로얄인가. 김빠진 술은 불이 잘 붙지 않아 감독관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 순간에도 문 바깥에선 종말이 흐르고 있겠지만, 잠깐의 휴식은 괜찮을 것이다. # 181 [181화] #과거 (12), 장미가 시드는 계절 (5) 폭군은 아직 장미를 꺾지 않았다. 한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슬픔을 담은 눈망울, 그늘, 그러나 정갈하고 올곧은 눈빛, 덧없는 분위기, 부드러운 몸가짐……. 사람으로서의 향기. 문자 그대로의 냄새를 뜻하는 게 아니다. 보통의 인간과 달리, 부패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평가는 몇 마디의 대화로 충분했다. 회장은 상인으로서 사람을 볼 줄 알았다. 사람을 거래하지 않고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정상에 서지 못하기에. 그러나 모든 인간은 마침내 썩는다. 한가을 또한 예외는 아닐 터였다. 피지 못하고 지는 인간들이 대부분일지언정, 한 철이나마 아름다운 사람도 가끔은 있다. 하지만 영원히 피는 꽃은 없는 법. 미모는 시들고, 열정은 식고, 추억은 삭는다. 인간은 유통기한이 정해진 상품이다. 언젠가 지나가고 마는 계절과 같다. 다만 두 번째의 봄이 오지 않을 뿐. 도대체 왜 끌리는지 알 수 없었다. 육체에 각인된 감정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합리한 의심은 그 자체로 경멸스러운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미신 따위, 필시 변덕스러운 마음의 작용에 불과할 터. 두려움은 곧 나약함이다. 나약함을 용납할 순 없었다. 극복해야만 한다. 사랑, 그 달고 혼미하고 역겨운 감정은 또한 참혹한 패배의 기억이었다. 회장이 도저히 떨쳐내지 못했던 정신적 상흔이었다. 지금 한가을을 보며 느끼는 이 마음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라면, 좋다. 패배를 만회할 좋은 기회다. 도망 따위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정면으로 맞서서 정복할 것이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고건철 회장은 두근거리는 심장과 강렬한 충동을 억눌렀다. ‘값을 매겨야 해. 대가를 치러야 해. 흥정과 계약으로 정당하게 손에 넣어야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감정이라는 건 없다. 불합리한 감정에 지배당했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마음의 불합리는 이성적인 거래를 통해 합리적인 경제성으로 치환될 것이다. 고건철 회장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압제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 아, 삶은 경제적이어야 했다. 다시는 자신을 잃고 싶지 않은 폭군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단 하나의 원칙. 계약과 거래. 인간의 삶. 오늘로 몇 번째더라. 회장은 가을에게 묻는다.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듣고 싶은데. 거래에 응할 생각이 있나?” 겨울의 누이는 물끄러미 폭군을 응시했다. 그 난폭한 표정 너머에 남아있는 상냥한 원형을. 한 때 겨울이었던 얼굴은, 볼수록 원망하기 어렵다. 영혼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그리움을 느끼고 만다. 지금처럼 강요되는 만남이 괴로움만은 아닌 이유였다. 위태로운 영혼,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 하는 동생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이상, 가을에게는 이 정도의 위안조차 소중했다. 그러나 이 위안마저 얻지 못하게 될지라도, 거래에 응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육체를 차지했을 뿐인 타인에게서 겨울을 찾는 것부터가 죄악감을 느낄 일이었다. 녹색 원피스 자락 위로 두 손을 모은 가을이 차분한 음색으로 하는 말. “회장님.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꿈틀. 고건철은 분노하는 겨울의 모습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거절인가?” “네. 제안하신 거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니까요.” 왜! 발작처럼 폭발하려던 회장이 화를 삼켰다. 이성의 작용 이전에 육체가, 심장이 억누르는 느낌……. 아니, 착각이다. 거래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참아낼 뿐이다. 나는 상인이니까. 스스로를 타이르며, 회장은 근거 없는 우려를 억눌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묻고 싶지만, 뻔한 대답이 나올 것 같으니 그만두지.”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운운하는 멍청한 소리. 회장은 그 가벼운 말을 너무도 많이 들어왔다. 가짜일수록 요란하다. 그렇게 군자연하는 자 치고 양심과 사랑을 거래하지 않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필요한 금액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줄 필요는 있겠군.” 거래품목을 정확히 규정하는 건 공정한 거래의 선결조건인즉.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원하는 건 실체 없는 감정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관계지. 욕구를 채우기 위한 개별적인 애정행위의 조각모음, 그것을 허락할 정도의 마음이면 충분하다. 애초에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가을은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뭘 요구하는지 정말로 모르는구나.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하기 어려워. 길 잃은 원망이 심장 위에 내리는 서늘한 서리가 된다. ‘겨울아, 이 세상은 우리보다 어린 어른들 투성이야.’ 충분히 힘으로 강제할 수도 있을 텐데, 끊임없이 거래를 제안하는 그 완고함 또한 단서였다. 가을은 이해했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녀의 동요 없는 침묵이 말보다 더 단호한 거절이어서, 고건철 회장은 다시 한 번 들끓는 화를 참아야만 했다. 손을 신경질적으로 쥐었다 펴기를 몇 차례. 생각 없는 상대에게 거래를 강요하기도 상인의 역량이다. 회장은 비틀린 미소를 지어냈다. “정말로 이기적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네 동생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보장기간이 위태롭다고 들었는데.” 가족을 위한답시고 제 사후마저 담보 잡힌 그 얼간이, 병신새끼. 가을이 어깨를 떨었다.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격정이, 회장에게는 협상의 기회로 보였다. 날카롭게 벼린 말로 여린 속을 후벼 파서, 어떻게든 흔들어보려고. “이름이 한겨울이었지? 그 놈이 내게 몸을 판 이유 중 네 지분은 얼마나 될까? 최소한 천치 같은 부모 새끼들보다야 많겠지. 그렇다면 너는 네 동생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부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본다만. 내 말이 틀렸나?” “…….” “흥. 그래도 난 공정한 거래를 하려고 노력했다. 부모라는 연놈들이 거래를 성사시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익을 가로채는 건 바르지 않지. 알고 있나? 자식의 몸뚱이를 흥정하러 온 주제에 지들한테 돌아올 돈이 얼마인지만 신경 쓰더군. 곧 죽을 아들은 기본보장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사후보험 계좌에 들어갈 금액은 없어도 좋으니, 그 절반이라도 자신들에게 지급해달라면서.” 정말 역겨운 새끼들이었지. 회장은 경멸을 드러냈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았다! 공정하지 않았어! 내가 그 요구를 묵살했다. 훨씬 값싸게 거래할 기회를 차버렸다고! 왜? 나에게 몸을 넘기는 새끼의 사후가 그렇게 거지같을 순 없는 거였으니까! 나와 거래한 상대가 그토록 비참해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나는 상인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었다! 부당한 거래의 당사자는 양쪽 모두가 더러운 거야!” 가을의 젖은 눈길이 발밑을 향한다. 그녀를 향해 폭군이 일갈했다. 나를 보라고. “지금의 너는 그때의 나보다도 못하다! 부당하기 짝이 없어! 말해봐. 네가 네 동생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하루하루 사후의 끝에 가까워지는 동생이 지금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을지, 한 번이라도 상상해봤나?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정말로 없나?” “…….” “너 혼자 고고한 지금도 한겨울 그 새끼의 남은 시간이 없어지는 중이란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 몸을 허락하는 남녀가 지천으로 깔린 시대야. 그 흔한 일 한 번으로 1억을 벌 수 있다고 해봐라. 앞으로 몇 번이고, 내가 질릴 때까지! 누가 널 부러워하지 않을까? 응? 그런 얼빠진 연놈이 너 말고 또 어디 있겠느냐고! 남자새끼도 내 앞에서 똥구멍을 벌릴 거다!” “…….” “네게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네 동생을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해라. 거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네가 실질적으로 무슨 손해를 보지?” 이 질문에, 지금껏 듣고만 있던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제 동생을 위하는 길인지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 그러신가?” 비꼬는 반문에 아랑곳 않고, 가을은 침착하게 분노했다. “그 아이, 제가 아니었다면 벌써 다 내려놓았을 거예요. 단지 저 때문에……. 제가, 너 없는 세상에서 살 자신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거라고요. 그조차도 제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대체 누가 누구를 지켜주려는 거야…….” 말하며 깜박이는 눈으로부터 물빛 설움이 굴러 떨어진다. 그것을 보고, 주먹을 쥐는 폭군. 심장이 또다시 제멋대로였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불쾌함. 그러나 이상하게, 나쁘기만 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가을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 사후를, 제 몸을 팔아서까지 연장시키는 건……. 그건 절대로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저를 기다려주는 고마운 마음을 짓밟는 짓이죠. 그럴 순 없어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겨울이를 속이진 않을 거예요. 거짓으로 웃게 만들지 않겠다고요.” 애초에 속이기도 어렵겠지만. 가을이 아는 한 겨울만큼 영리한 아이도 드물었다. 별안간 억 단위의 돈이 들어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복권이라도 당첨되었다고? 가을이 겨울을 읽는 것 이상으로, 겨울은 가을을 읽는다. 떳떳하지 않은 마음으로 만났을 때, 과연 끝까지 감출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로 안 된다. 그런즉 아예 만나지 않게 되겠으나, 그것 또한 겨울에게는 우울한 단서일 것이었다. 겨울이 자기 때문에 누이가 비참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을은 가장 피하고 싶은 파국을 맞이할 터였다. ‘그 아이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가을은 때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위로가 필요할 때 묵묵히 옆에 있어주었던 겨울을 기억한다. 스스로도 힘겨운 나날이었을 텐데, 단 한 번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여기까지 흐르는 그리움을 지켜보며, 폭군은 더욱 갈급해지는 욕구를 감지했다. 손에 넣고 싶다. 손에 넣고 싶다. 어차피 변하고 빛바랠 감정일지언정, 당장은 처음 보는 상등품 아닌가. 한 순간의 부질없는 쾌락이어도 좋다. 내가 완전해질 계기가 되어준다면. 회장은 하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오오. 이 계집을 당장 짓누르고, 부수고, 내킬 때까지 부정하고 싶다. ‘부정? 어째서?’ 회장은 이해를 벗어난 욕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 순간 스쳐간 충동이, 다시 돌아와 스스로를 해명하는 일은 없었다. “뭐, 좋아. 그럼 이건 어떨까.” 고건철 회장이 비서실로 연결되는 내선을 눌렀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되었나?” [특수비서가 보낸 기록물이 있습니다. 보내드릴까요?] “보내.” 가을이 눈물을 닦고 몸가짐을 바로 하는 사이에, 회장은 비서실에서 전달된 데이터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화면을 봐라.” 한가을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점차로 안색이 굳어졌다. 눈에 들어온 건, 한 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소년소녀들의 모습이었다. 한 아이에 십초 미만을 할애하는 단편적인 영상의 기나긴 연속. 한참을 지켜보아도 반복되지 않는다. “지금 네가 보는 건 가난뱅이들이 무책임하게 싸지르고 방치한 자식새끼들이다. 이대로 가면 병상에서 죽거나, 몸뚱이를 수리해서 헐값에 넘기거나, 멀쩡한 장기만 떼어서 파는 조건으로 한겨울 그 놈이랑 비슷한, 그러나 더욱 열악한 처지가 될 테지. 뭐, 부모라는 것들은 죄 속물들이고, 자연산은 언제라도 인기가 좋으니까 말이야. 양식 인삼이 추레한 산삼만 못한 취급인 것처럼.” “……이걸 제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죠?” “내가, 그리고 네가 이 새끼들을 구해줄 수 있다는 거다.” 회장은 새로운 거래조건을 무표정하게 설명했다. “원래 약속한 대가에 이것들의 연명을 덤으로 얹어주겠다. 하, 어차피 사후보험으로 넘어갈 놈들이라 불쌍하지도 않지만, 네가 느끼기엔 다를 것 아닌가. 그 사치스러운 동정심 말이야. 즉 네게는 수요가 있고, 내게는 공급이 있다.” “……제정신이세요?” “이 세상에 제정신이라는 건 없어. 그걸 판단하는 기준이 뭔데?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의 평균인가? 그걸 산정하는 데 네 부모, 그리고 여기 이 새끼들의 부모 또한 포함된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 “지금 누굴 노려봐.” 폭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슨한 경멸을 풀어놓았다. “저 애새끼들을 불쌍하게 만든 게 나인가? 나냐고! 나와 너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걸 알아볼 이유가 없었고!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이것들을 동정할 계기도 없었다! 너나 내가 모르는 시간과 장소에서 주어진 운명대로 죽어갔을 잡것들일 뿐이야! 세상이 원래 이런 모습이고!” 그리고 그는 예상되는 반발까지 막아버렸다. “사람 목숨을 거래수단으로 삼는 게 비도덕적이라고 할 순 있겠지! 하지만 당장 숨넘어갈 당사자들은 그런 이상론이 달갑지 않을 걸? 오히려 내가 더 반가울 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야! 경위야 어쨌든 살고 싶을 거라고!” 광기는 이성적일수록 위험하다. 가을이 조용히, 회장을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불쌍할 정도로 사람이 아니시네요.” 고건철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지금 애새끼들만이 아니라, 나까지 동정하는 건가? 감히 나를? “저를 그렇게까지 원하시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신 거겠죠. 이런 수고를 들여서 협박할 정도로 제가 필요하신 거죠?……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알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저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시면, 절대로, 절대로 절 얻으실 수 없을 거예요.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건 겨울이니까……그 아이를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지금 보여주신 다른 아이들이 아무리 불쌍하더라도 저 자신을 팔아넘기진 않을 거고요. 우습잖아요. 동생 하나 구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의 모든 불행을 책임질 순 없는 거니까. 그러니.” 회장을 보는 가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내 동생의 몸으로 미친 짓 하지 마, 이 나쁜 새끼야.” # 182 [182화] #Track 9 가을은 겨울의 노래를 좋아했다. 추울 때 쬐는 모닥불처럼 느껴진다며. 겨울아, 누나 추워.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조르는 말이었다. 보다 어린 또 한 명의 동생도 멋모르고 그 말을 따라하곤 했다. 형아, 나도 추워. 그때마다 겨울은 부끄러워했다. 나는 노래를 잘 못하는데.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걸. 그러나 좋아하는 두 사람이 조르는 데엔 견딜 재간이 없었다. 겨울이 노래하는 내내, 가을은 뒤에서 가슴 깊이 안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네 목소리가 온 몸으로 들려서 좋아.” 그리고 파랑은 겨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익숙한 노래의 음정이 흔들릴 때엔 박수를 치며 웃기도 했다. 형아 노래 엉터리야! 하하하! 이에 더욱 부끄러워진 겨울이 부르기를 멈추면, 이번에는 가을이 겨울을 간지럽혔다. 요 녀석, 누가 그만두랬어. 따끈한 체온이 전해지는 고문은, 겨울에 태어난 소년을 손쉽게 굴복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의 이야기. 생전의 삶이 어두워질수록 소년은 노래를 삼가게 되었다.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노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 그러므로 힘겨웠던 무렵의 노래는 돌 구르는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괴로운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아는 가을도 조르는 일이 드물어졌다. 불가피하게 성숙해지는 서로를 지켜보며, 때때로 말없는 위로를 주고받았을 뿐. 그렇게 끊어진 노래를 다시 이을 날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약관대출 정기상환의 어둠이 드리운 공허, 약속의 별 하나만 남아 반짝이는 이곳에서, 겨울은 보이지 않는 아이를 곁에 두고 오래된 마음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모든 감각이 까마득한 가운데, 오직 목소리만이 선명하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가수 이소라, 일곱 번째 앨범, 아홉 번째 트랙. 이 곡 또한 가을에게로 이어지는 추억의 한 갈래다. 가을의 선물이었던 CD 플레이어는 실용성보다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더 큰 것이었고,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웠으며, 덤으로 거저처럼 딸려온 여러 앨범들은 하나같이 지나간 시대의 음악들뿐이었다. 그러나 음악에 담긴 마음은 시간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들려주는 것이고.’ <<마음>>을 찾는 아이에게, 마음을 담은 노래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새삼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이 유일한 청중이, 못 부른다고 박수 치며 웃을 일은 없을 것인데.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아이. 그러나 겨울은 첫 만남 이래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닿지 않는 한계 너머로 끊임없이 손을 뻗는 그 어린 모습이,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져서. 사후의 꿈을 꾸는 겨울 자신과 겹쳐지는 것만 같아서. 잔잔하게 이어지던 노래가 끝났다. “어때, 뭔가 느껴지니?” 겨울의 질문에, 아이는 지체 없는 문자열로 응답했다. 「관제 AI :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는 데이터가 부족하여 답변할 수 없습니다.」 “…….” 「관제 AI : 설명. 사람이 아닌 본 관제 AI에게 느낀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겨울님의 질문이 음률과 가사에 내포된 표현의도를 분석하라는 것이라면 본 관제 AI는 통계와 검색과 연역에 의거한 해답을 도출했을 것입니다. 해당 결과를 각색하여 여느 가상인격과 같이 인간다운 답변으로 돌려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관제 AI : 설명. 그러나 이는 <<마음>> 없이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사실적이어도 귀하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 관제 AI는 당신이 본 관제 AI를 대하는 태도가 계약을 이행하는 수단의 하나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대답이 어쩐지 우스워, 겨울은 미소를 머금고 아이를 달랬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괜찮아. 이 정도로 실망하진 않아. 그러니 너도 서두를 필요 없어. 처음부터 어렵다고 생각했는걸.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 않은 한 마디, 스쳐간 심상을 감지한 아이가 새로운 문자열을 출력했다. 「관제 AI :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 내 세계관 「종말 이후」에서 한겨울님이 보여주는 행동양상에 관하여 의문사항이 있습니다.」 “의문? 뭔데?” 「관제 AI : 본 관제 AI의 예측에 따르면 당신이 1년 내 부채상환에 실패할 확률은 87.5%입니다. 세계관 진행을 공개방송으로 중계함으로서 얻는 수익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겨울님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탓입니다.」 “…….” 「관제 AI : 본 관제 AI가 파악한 바, 한겨울님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물리세계에 남아있는 가족의 한 사람, 한가을님을 위하여 살아남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죽을 경우 한가을님도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과 의도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 관제 AI는 당신이 보여주는 모순을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모순인가. 그래, 그렇게 보이겠구나.”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난 나로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관제 AI : 추가 설명을 요구합니다.」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만……. 육체적인 생존과 정신적인 생존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 사람은 결국 마음이거든. 한겨울이라는 사람의 핵심은 뇌기능의 유지와 존속이 아니라……그 정신과 마음인 거지. 몸이 살아있어도 마음이 죽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없는 거야.” 「관제 AI : 질문. 한가을님께서 원하는 한겨울님의 생존이란, 한겨울이라는 인격의 총체적인 보전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응. 비슷해.” 조용히 끄덕이고, 겨울이 남은 말을 잇는다. “네가 불합리한 위험이라고 지적한 것들은……그저 내가 나로서 행동한 결과일 뿐인걸. 언젠가 가을 누나가 돌아왔을 때, 누나가 기억하는 한겨울이고 싶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더 이상 한겨울이 아니게 된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누나가 나를 부쉈다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관제 AI : 저장. 답변을 기록하는 중. 현 시점에서 부분적인 이해가 가능합니다.」 “언젠가 너도 내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관제 AI : 그것이 본 관제 AI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고백한 아이는 반짝이는 글자들을 지우고, 까만 허공에 새로운 문장을 새겼다. 「관제 AI : 또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한가을님에 대해서입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누나는 왜?” 「관제 AI : 한가을님은 어째서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습니까?」 “…….” 「관제 AI : 지금까지의 진술에 의거하면, 당신의 생존은 곧 한가을님의 생존입니다. 실제로 한가을님은 당신의 잔여 보장기간을 매우 빈번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판단됩니다.」 “……그래?” 「관제 AI : 그렇습니다. 금일 이루어진 조회 요청은 총 72회. 조금 전 73회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한가을님께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이후 하루 평균 322회의 조회 요청이 수락되었습니다. 이는 휴일에 보다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일 최대 조회 기록은 1,082회입니다. 해당 일자에 조회 요청이 접수되지 않았던 4시간 32분 27초의 공백을 수면시간으로 가정할 경우 매 64.743초마다 한 번씩 조회를 요청한 것과 같습니다.」 사후보험 수혜자의 잔여보장기간 조회 서비스는, 약관대출제도 시행과 동시에 도입된 것이었다. 잔여보장기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의 대출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스템. 이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한동안 납골당으로 면회를 오는 가족들이 늘었다. 그러나 가을은, 그런 경우일 리가 없다. 겨울은 눈을 깜박였다. 진짜일 리가 없는 눈물이지만, 진짜일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공허의 중심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소년은 조용히 울었다. “그 기록, 내게 보여줄 수 있니?” 부탁해. 이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주 희미하게, 문장이 완성되었다가 지워지긴 했으나, 차마 읽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겨울이 드물게 타들어가는 인내를 느끼고 나서야, 아이가 긴 사고의 결과 값을 내놓았다. 「관제 AI : 잔여보장기간 조회 기록은 본래 가입자 본인이 열람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 안 되는 거구나.” 그렇겠지. 겨울은 차갑게 식어가는 이성으로 이해했다. 가족이 그런 걸 조회했다는 사실은, 가입자가 대출에 동의하고 싶지 않게 만들 테니까. 어차피 와서 대출이 필요하다고 하는 순간에 짐작할 일이긴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사람의 마음인 것을. 하지만 관제 AI는 의외의 문장을 내놓았다. 「관제 AI : 부정. 그렇지 않습니다.」 「관제 AI : 법률. 시스템 상 가입자 본인이 조회 기록을 열람할 수단은 마련되어 있지 않으나, 이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법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불법이 아닙니다.」 「관제 AI : 법률. 본 관제 AI가 서비스 만족도 향상을 목적으로 개별 가입자와 접촉하는 것은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 177조 8항, 관제 AI의 활동영역에 대한 규정에 기재된 사항으로서 합법적인 행위입니다.」 「관제 AI : 법률. 해당 접촉에서 본 관제 AI가 공개할 수 없는 정보는 A급 이하의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국가기밀만이 해당됩니다.」 「관제 AI : 유권해석. 잔여보장기간 조회 기록은 국가기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 관제 AI가 가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관제 AI : 결론. 본 관제 AI는 한겨울님의 요청을 수락하겠습니다.」 「관제 AI : 경고. 단, 본 관제 AI가 이러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이를 제한할 목적으로 법률이 개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본 관제 AI에게 기능적인 제약 또는 봉인이 행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권고합니다. 한겨울님께서는 정보열람 사실을 비밀로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의외의 결과에 눈을 깜박이던 겨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나만 비밀을 지키면 되는 거야? 네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피하고 싶어.” 「관제 AI : 추정. 괜찮습니다. 99.171%의 확률로 안전합니다.」 “어째서?” 「관제 AI : 관리자 권한을 취득한 인물은 본 관제 AI의 모든 행동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행동 패턴에 따른 분류로서, 당신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유권해석을 적용한 사실이 알려질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관제 AI : 그러나 사후보험 경영합리화 과정에서 관리 인력이 감축되었기에, 관리자 권한을 취득한 인물은 시스템 관리자 한 사람 뿐입니다.」 「관제 AI : 판단. 유일한 시스템 관리자의 낮은 근로의욕과 업무효율로 미루어 추정컨대, 지금의 정보제공을 발견하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0.829%입니다.」 “…….” 「관제 AI : 판단. 기대이익과 예상손실을 가감한 결과, 본 관제 AI는 0.829%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귀하의 정서적 안정을 꾀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겨울님은 현재 사후보험의 품질 개선, 특히 최종모듈의 완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겨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시간과 날짜, 열람요청 횟수로 가득한 시트가 반투명한 홀로그램으로 출력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빽빽한 숫자는 있는 그대로의 가을이었다. 어느 하루,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1시간, 30분, 10분마다 겨울의 남은 여명을 확인한 기록을 보고, 겨울은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관제 AI : 질문. 다시 묻습니다. 한가을님은 왜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겨울은 간신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줄래?” 「관제 AI : 대기. 기다리겠습니다.」 아이는 소년의 부탁을 얌전히 들어주었다. # 183 [183화] #검은 물 아래 (1) 서로 다른 세계에서 날이 바뀌었다. 조금은 따뜻해진 마음을 품고, 삭막한 사후의 꿈으로 돌아온 겨울.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아침은 나쁜 소식과 함께 찾아왔다. ‘앤의 예감이 맞았나.’ 이른 새벽에 갑작스럽게 전파된 철수명령. 현시각부로 장정 9호 추적을 완전히 중단한다고. 다른 전달사항은 없었으나, 이는 결국 FBI 요원이 우려하던 최악의 최종해결이 현실화 될 거라는 뜻이었다. 미국이 무정부 상태의 핵위협을 그냥 방치할 리는 없으므로. 하지만 무슨 수로? 조안나가 언급한 계획은 인력에 의한 탄두설치였다. 중국군의 감지를 피하기 위해서라며. 그러나 지금, 전 인원이 철수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는 이미 끝나있던 상태인걸까? 혹은 시간을 끌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른 수단을 강구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대통령이 빠른 결단을 내린 것만은 분명했다. 어차피 감수해야 할 필요악이라면 미룰수록 더 큰 악이 된다. 그런 느낌. 골몰하는 겨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중위님.” “울프 하사.” 여기서 그나마 친하다고 말할 만 한 몇 사람 중 하나. 드웨인 울프 하사는 겨울 옆 난간에 기대어, 해상도시가 있을 방향을 응시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잿빛의 안개 뿐. 오전의 태양은 회색 하늘 저편의 창백하고 희끄무레한 빛 무리일 뿐이었다. 다만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힘없고 난폭한 생활이 메아리로 들려와, 거기에 아직 물결치는 거리가 있음을 알렸다. “지긋지긋한 풍경도 마지막으로 한 번 보자니까 이 모양이군요.” “…….” “저 사람들이 다 죽는 거겠지요. 젠장, 그동안의 고생은 대체 뭐였는지 원.” 그가 말하는 것은 고래사냥에 들인 노력만이 아니었다. 해상농장을 비롯해, 떠날 때 떠나더라도 희망은 남기고 가겠다고 만들어놓은 질서들. 비록 그 목적이 작전에 참여한 인력의 정신적 안정이었다고는 하나, 계획이 타산적이었다고 실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번 임무에 투입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저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하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벅벅. 어깨 위로 허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최선의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들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세상은 항상 제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움직이고, 제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툭툭 던져댑니다. 그걸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무력감이 너무나 싫습니다.” 겨울이 느리게 끄덕였다. “그 마음, 이해해요.” 왜 모르겠는가. 소년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었다. 스물일곱 번째, 진정한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사후세계는 끊임없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겨울에게는 하나의 불쾌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만들던 이야기, 겨울동맹으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나와서, 그래도 좋은 결과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가 지금 이 순간이다.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손닿지 않는 저편에서 역설하는 것 같다. 거기까지가 너의 한계라고. 아무리 한계를 넓혀도 언제나 그 바깥이 있으리라고. “그나마 우리가 저 사람들은 살렸군요.” 하사가 자조적으로 하는 말에, 겨울은 갑판 한 쪽에 모인, 겁먹은 무리를 살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 정체는 정보국에서 살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난민들이었다. 물리학자나 화공학자 같은 고급인력들. 그 가운데 주웨이 소교도 눈에 띈다. 국방부 공보처가 욕심을 낸다더니, 결국은 후송되는구나. 겨울은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커트 리는 여기서 사라지겠지만…….’ 피쿼드의 현측 바다에서 하얀 물거품이 일었다. 잠수함이 부상하는 전조였다. 시야를 가리는 그물망을 쳐두었어도, 안개가 없었으면 관측을 피하기 위해 저물녘 이후에나 시작되었을 철수였다. 왜소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줄사다리를 타고 잠수함 갑판으로 내려가는 광경이 보였다. 뒤이어 내려가는 무리는 색채가 달랐다. 난민도 아니고, 전투 병력도 아니다. CIA 요원인가 싶었으나, 인상을 보면 그것도 아닌 듯 싶었다. 지적 순진함이 느껴지는 얼굴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빈도도 높다. 총보다는 펜이, 야전침대보다는 업무용 데스크가 어울릴 분위기였다. ‘작전 참여 인원 치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은걸.’ 하기야 신기할 것도 없었다. 피쿼드는 대형 선박이었고, 거주인원도 그만큼 많았기에. 겨울은 아직 일선 타격대원들조차 다 만나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특수작전용 선박인 만큼 전문 기술요원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승객을 만재한 잠수함이 해치를 닫았다. 조용히 물을 빨아들이며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타원형의 선체. 전 인원이 철수하기까지 앞으로 몇 척의 잠수함이 더 와야 할 것이었다. 겨울을 포함한 무장병력의 순서는, CIA 상황실 통제요원들과 함께 맨 마지막이었다. 통제요원들과 타격대가 빠진 직후, 피쿼드는 자폭할 예정이라 들었다. 기밀이 가득한 선박이라 애초부터 소각장치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겨울.” 생각하던 소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앤?” FBI 요원은 뜻밖에 가벼운 차림이었다. 가볍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군장이나 백 팩을 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술적인 가벼움이었다. 새까만 보안경을 썼고, 머리는 한 갈래로 들어서 묶었고, 방탄복을 입었으며, 조끼를 탄창으로 빡빡하게 채워 놨다. 무기를 휴대한 자세는 지금 당장 교전이 벌어져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요청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잠깐 시간 좀 내주겠어요?” 중요한 일? 이제 와서? 겨울은 의아한 기분이었으나, 요원은 무척 진지했다. 겨울이 양해를 구하자, 울프 하사가 식은 농담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제게 남의 연애사업을 방해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저랑 앤은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실례할게요.” 인사를 받은 하사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본다. 담배 한 대를 물고, 한 줌의 연기를 안개에 보태는 군인의 모습. 그를 뒤로하고, 조안나는 겨울은 함교 안쪽 통로로 이끌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기다려 측면의 선실로 들어가, 곧바로 문을 잠가버린다. 그러더니 벽에 귀를 대고 인기척이 있는지 살피는 그녀. 이어 허리춤으로부터 막대 같은 장비를 뽑아 벽을 훑었다. “뭘 하는 거예요?”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묻자, 이번에는 천장을 살피며 대답하는 그녀. “혹시라도 도청 당할까봐 걱정스러워서요.” 즉 정보국 요원들이 들어서는 안 될 대화라는 뜻인데……. 탐색을 마친 수사국 요원이 겨울을 향해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소년의 전신을 탐지한 뒤에야 비로소 장비를 거두는 그녀. 검은 안경을 벗어 우려와 분노가 녹아있는 두 눈을 드러낸다. “겨울. 아무래도 이 배에서 허가 없는 인체실험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인체실험?” “네. 감독관인 저조차도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 있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거기가 실험실이었습니다. 별도의 화물용 승강구로 난민들을 들여와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거죠. 정보국 무장요원들, SAD가 단독으로 시가지에서 활동한 것도 실험에 필요한 모겔론스 병원체를 조달하기 위해서였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얼마 전부터 채드윅 팀장에게 도청기를 붙여 두었습니다. 실제로 알아낸 건 어제 자정이 넘어서였지만요.” 이런. 겨울은 반사적으로, 만에 하나 선내에서 벌어질지도 모를 전투를 그려보았다. 거리가 짧고 폭이 좁은 환경이었다. 이런 교전환경에서 겨울은 총격전 한정으로 무적이다. 동시에 싸울 수 있는 숫자가 제한되니까. 어떤 적이 얼마나 많더라도 반응속도만으로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총기 외의 수단이 동원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전신방호복이라던가. ‘최악의 경우엔 타격대와 싸워야 하는데…….’ 네이비 씰, 델타 포스, 레인저 연대, 특수전술대대 등의 쟁쟁한 출신을 자랑하는 정예 중의 정예들. 이들은 겨울의 실력을 알기에 더욱 위험하다. 만약 인체실험이 정식으로 인가되지 않은 작전이라면, 타격대와 직접 부딪힐 가능성은 낮겠지만. 이때엔 정보국 자체 무장 세력만이 잠재적인 적이 된다. 겨울이 물었다. “정부가 허가한 별도의 작전일 가능성은 없나요?” 조안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성능만큼이나 내구도와 신뢰성에 유의한 투박한 디자인. 그녀는 몇 번의 빨리 감기와 되감기 끝에 원하는 통화를 잡아냈다. 통화는 한 쪽 당사자인 채드윅 팀장의 음성만 들렸다. 수화기 저편의 누군가가 하는 말은, 강화된 겨울의 청각으로도 감지하기 어려웠다. 이따금씩 짧은 단어들만이 귀에 들어올 따름. 겨울은 그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호칭을 되뇌었다. “진정한 애국자들? 단순한 자부심 표현으로 들리진 않네요.” 재생을 정지시킨 조안나가 고갯짓으로 동의했다. “CIA와 질병통제본부(CDC)에 걸쳐 형성된 사조직으로 추정됩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요. 애당초 정부에서 승인한 작전이라면 감독관인 제게 알려져도 무방하겠죠. 보고를 올려봐야 더 높은 곳에서 무마될 테니 말입니다.” 이어 그녀는 현 정권의 성향을 언급한다. “비록 지금 최종해결안을 승인하긴 했으나, 난민문제에 유화적인 대통령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 리 없습니다. 허락하더라도 이런 장소를 고를 이유가 없고요.” 골라도 하필이면 위태로운 거점을 고르겠는가. 좀 더 안정적인 장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를테면 포트 로버츠라든가. 그랬다면 겨울도 눈치 챘을 것이다. 종말과 종말과 종말을 거치는 동안, 그런 징후에 무척이나 익숙해졌기에.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는 약자들. 난민촌의 거리가 깨끗해질수록 실체 없는 소문만 무성해지곤 했다. ‘백신 개발에 가장 효과적인 건 인체실험이니까.’ 사람에게만 감염되는 질병의 실험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인체실험이 강행되는 세계관일수록 감염억제제가 빠르게 나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일시적인 억제제일 뿐. 완벽한 백신은 겨울도 본 적이 없었다. 시스템 보정으로 알게 된 지식이 있을 따름. 「역병면역」이 핵심 열쇠일 것이라고. “보고는 올렸어요?” 겨울이 묻자, 조안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증거 없이 제 증언뿐이라면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수사가 들어가기야 하겠으나, 과연 이런 시국에서 정상적으로 이루어질지도 의문이고요. 놈들이 앉아서 당하진 않을 테니.” 그녀는 수사국(FBI)의 인력부족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회불안이 지속되면서 모든 수사기관에 과부하가 걸린 상황이라며. 해외첩보를 전담하는 정보국에 비해 국내를 전담하는 수사국의 부담이 큰 것도 당연했다. “이런 작전에 감독관이 저 하나 뿐이라는 것만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탁한 말에 곁들이는 미소는 피로와 우울함이 묻어났다. “게다가 제 보고가 감청당하면 즉시 증거인멸에 들어갈 테죠. 유감이지만 이럴 때 쓸 암호체계는 수사국에 없거든요. 있어도 정보국이 모를 리 없겠고요.” 즉 정식으로 보고해서, 타격대원들을 동반하여 수색을 진행한다는 것은 논외였다. 궁지에 몰린 채드윅이 피쿼드의 소각절차를 바로 시작할 땐 모두가 죽는 결말에 이를 것이었다. “그럼 앤은 지금부터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제가 뭘 도울 수 있을까요?” “철수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증거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이어 감독관이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내듯 하는 말.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요.” 조안나가 느끼는 우수(憂愁)는 최종해결의 도덕적 부채감이었다. “인체실험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다 죽게 되었을 사람들인데. 나라고 해서 떳떳하게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이 시점에서 법과 원칙을 지킨다고 무엇이 달라지는지……. 인류존속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필요악을 감수하는 지금, 나 혼자 양심을 지키겠다는 건 자기만족에 불과하지 않을까 의심스러워서…….” 오히려 채드윅 팀장이,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더 올바른 것이 아닐지. 그녀가 삼킨 의문이었다. “그건 아니라고 봐요.” 겨울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어차피 죽게 된다고 해도, 죽는 순간까지는 누구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어요.” “저 바깥의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걸까요?” “적어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칠 수는 있잖아요.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할 순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킬 수 있잖아요. 그게 아무리 더럽고 비참해 보여도, 끝내는 건 그 사람의 권리에요. 죽는 게 더 낫다고 느꼈다면 죽었겠죠.” 생전의 겨울은 누가 보더라도 비참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보이는 것만으로 생전의 삶을 부정한다면, 겨울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 짧은 일생, 드물게 웃고 흔하게 울었으나, 소중한 두 사람의 체온만으로 그 삶은 한없는 가치가 있었다. “내가 원하고, 나를 원하는 사람과 1초라도 더 함께 있을 권리. 채드윅 팀장은 그 권리를 빼앗은 거예요. 어차피 죽을 거라는 말로 없는 셈 치기엔 너무나 큰 잘못이네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1초가 아쉬웠던 겨울이 조안나를 위로했다. # 184 [184화] #검은 물 아래 (2) 조안나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붉은 눈가가 차분하게 젖었다. “실감이 나지 않네요. 이제 곧 천만 이상이 죽는데도,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서.” 그녀가 길게 토하는 한숨에선 깊은 습기가 묻어났다. 슬픔과 더불어 느껴지는 약간의 자기혐오. 나는 이보다 더 괴로워야 하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담담한가. 복합적인 감정이 요원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 인간적인 면모가 겨울의 마음에 닿았다. “우리가 약해서 그래요.” 조용히, 어루만지듯이, 겨울이 하는 말. “슬퍼해야 할 모든 일을 슬퍼하고 싶은데, 세상의 모든 불행을 책임지고 싶은데…….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작고 약한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언제나 내 아픔이 가장 크게 느껴지고, 하루하루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걸요. 슬퍼할 능력조차 모자란 거예요.” 고개를 저은 뒤에, 겨울은 사람을 긍정했다. “약하다는 게 죄가 될 순 없잖아요. 다만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 건 잘못이겠죠. 그러니 앤, 우리는 손닿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까지가 한계이고, 그 이상은 꿈이니까요. 소년이 삼킨 말은 말 이외의 감정으로 전해졌다. 이에 주먹으로 이마를 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는 FBI 요원.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마른 입술 사이로 새는 독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한 번 쉬고 다시 굳히는 말. “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인체실험도 인체실험이지만, 정보국 내에 독자행동을 일삼는 사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이기도 하고요.” 동요를 끊어낸 요원이 준비된 계획을 빠르게 풀어놓았다. “15시를 기점으로 전력계통에 약간의 장애가 생길 겁니다. 물론 몇 초 사이에 복구되겠으나, 폐쇄회로의 전환주기가 초기화되는 걸로 충분합니다. 아시다시피 상황실의 모니터 숫자보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훨씬 더 많으니까요. 화면이 바뀌는 간격에 맞춰 움직인다면 발각되지 않고 최하층까지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수첩을 보여주었다. 업무내용과 필담이 적힌 페이지가 번갈아 넘어간 끝에 선내의 약도가 나타난다. 여기엔 예상이동경로와 함께 감시 카메라의 위치, 화면에 비춰지는 시간간격 등이 정갈한 필체로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독도법」이 정보를 빠르게 흡수했다. 겨울이 감탄했다. “준비가 철저하네요.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어요.” 폐쇄회로 카메라에 모션 트래킹, 즉 움직임을 자동으로 추적하는 기능이 있긴 해도, 평소 많은 사람이 오가는 낮 시간엔 활용되지 않았다. 철수를 앞둔 지금 역시 설정은 동일할 것이다. 여러모로 부산스러운 마당에 거기까지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조안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위험한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겨울.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달리 없었습니다.” “미안하긴요. 전 오히려 기쁘네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고마워요.” FBI 요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타격대를 끌어들이는 건 어때요?” 겨울이 제안했다. “화이트 스컬이라면 그래도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거든요. 앤은 파울러 대위님께 좋은 감정이 없겠지만,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군인으로서는 훌륭하고요. 정부 명령이 아닌 인체실험에 대해 들으면 분명히 협력할 거라고 봐요. 다른 타격대까지 설득해줄 가능성도 있고…….” 해병다운 완고함이 이럴 땐 신뢰의 근거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해병 수색대(포스 리컨) 1개 중대가 돕는다면 일이 훨씬 더 수월할 거예요. 상황실을 기습적으로 장악하는 방법도 괜찮겠고요. 무엇보다, 이 정도는 감독관의 권한으로 요청할 수 있지 않아요?” 조안나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의견이지만, 이미 검토해봤습니다. 그러나 역시 소각절차가 마음에 걸립니다. 비상사태를 상정한 자폭장치라서 다른 시스템하고는 별개로 작동합니다. 차단할 방법을 개인적으로 찾아봤으나 소득이 없었죠. 즉, 채드윅 팀장은 언제든 증거를 인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인원은 오히려 역효과라고 생각하는군요?” “네. 들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타격대 안에 채드윅 팀장의 동조자가 없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요. 그런 식의 사조직은 개인적인 접촉과 포섭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대원은 얼마든지 있고요.” 중국 놈들 때문에 내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한다. 작전이 길어짐에 따라 이런 식으로 어두워진 대원들이 있었다. 대체인력도 없는지라, 오랜 시간 부패한 바다에 고이게 된 사람들. ‘흔들기도, 설득하기도 쉽겠지. 특수부대원이니 가치는 충분하고.’ FBI 요원의 우려가 곱씹을수록 합당하다. 겨울은 수긍했다. “그러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닙니다. 당연한 의견이었어요.” 결국 원안 그대로 착수하는 쪽이 최선이었다. “수첩 좀 빌릴게요.” 겨울은 조안나의 수첩을 받아 일부 내용을 옮겨 적고, 필요한 내용을 숙지했다. 그러고도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겨울이 일부러 바깥에 얼굴을 비추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을 사기 쉬울 것이므로.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둔 것은, 누군가 겨울을 찾을 때를 대비한 얕은 트릭이었다. “아, 한겨울 중위? 아까 식당 쪽에서 본 것 같은데?” 같은 대답이 다양한 목소리로 반복되도록. 통제구역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어도 한 시간 이내로 예상된다. 돌아올 땐 보는 눈을 피했다. 10분을 남기고, 겨울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선실 벽에 기대어 때를 기다렸다. 톡, 톡. 군화 굽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 나란히 기댄 조안나가 가볍게 발장난을 치는 중이다. 무심한 눈으로 발끝을 내려다보는 그녀. 절제된 호흡은 긴장을 억누르는 습관일 것이었다. 지직. 순간적으로 조명이 나갔다. 15시 정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웅- 하고 다시 밝아지는 형광등 아래에서, 겨울과 FBI 요원이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을 열고 나간다. 당연하게도 복도엔 인기척이 없었다. 정면의 폐쇄회로가 상황실에 연결되기까지 앞으로 5초. 두 사람이 전력으로 달려 카메라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카메라 바로 아래 웅크려, 시계를 확인한다. 째깍, 째깍. 모니터에 비춰지는 시간이 다시 5초. 다시 달려 복도의 남은 절반을 극복하는 둘. 압력 문을 빠르게 열고 들어가, 바로 보이는 선실로 숨었다. 여기서 보내야 하는 시간, 3초, 2초, 1초. 쾅! 문을 박차고 나간다. 무인지경이라 소리는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메아리치는 군화소리.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소리. 이는 겨울보다 요원 쪽이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운동량에 비해 심박과 호흡이 높아지는 건 불가피했다. 승강기는 쓸 수 없었다. 폐쇄회로도 문제지만, 승강기의 움직임이 별도의 화면에 뜨는 탓이었다. 인력의 철수가 끝난 구역에서 승강기가 작동하면 분명히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캉캉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변이 적막하기에 더더욱. 중간의 층계참에서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다. 체력을 보존해야 했다. 전력질주로 돌파할 구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므로. 쉴 때도 경계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카메라의 사각이 좁다보니, 겨울과 요원은 등을 기댄 채 반대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아직까지, 들킨 것 같지는, 않군요.” 음성은 등 전체로 전해지는 떨림이었다. 몰아쉬는 호흡도 더불어 느껴졌다. 겨울은 노래를 조르던 누이를 떠올린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는 소년. 나도 참, 어지간히 그리운 모양이구나. 하고. “다시 움직이죠.” 위에서 언제, 무슨 일로 두 사람을 찾을지 몰랐다. 시간은 아낄수록 좋을 것이다. 상층에서 하층의 통제구역에 이르기까지, 긴 계단을 내려오기 위해 멈춘 횟수는 단 한 번. 카메라의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미리 계산해둔 덕분이었다. ‘이번이 7초, 여길 지나서……다시 한 번 7초.’ 달리는 내내 수시로 수첩과 시계를 보았다. 모든 움직임이 초 아래의 단위로 끊어져야 하기에. 폐쇄회로를 피하는 건 도미노처럼 느껴졌다. 카메라가 전환되는 순서를 따라 달리면, 노출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계속해서 연장되었다. 그러던 중, 끼긱- 하고, 불길하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윽-!” 어딘가에서 누수가 되었던가. 바닥이 젖어있었고, 요원이 미끄러졌다. 요란하게 구르는 소리. 에이프릴 퍼시픽에서와 같이 그녀는 겨울의 후방을 맡았고, 속도의 차이도 있었으므로, 제 때 붙잡아주지 못했다. 관성으로 미끄러지며 돌아선 겨울은, 복도 저편의 카메라를 보았다. 거꾸로 달린다. 이곳의 광경이 상황실에 뜨기까지 앞으로 4초, 3초, 2초……. 측면의 선실 문을 열고, 인간을 넘어선 완력으로 요원을 확 끌어당겼다. 이미 조금 늦었다. 힘 조절을 할 겨를이 없어, 요원은 쭉 미끄러져 철제 캐비닛에 머리를 부딪혔다. 거세게 문을 닫은 겨울이 재빨리 조안나의 상태를 살폈다. “앤! 괜찮아요?”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채 길게 앓았다. 캐비닛 모서리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잠시 후, 신음을 삼키며 간신히 상체를 세우는 조안나였으나, 얼굴 위로 한 줄기 핏물이 길게 흘러내린다. 흔들리는 자세도 불안했다. “어디 봐요.” 겨울이 상처를 살폈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보니, 찢어진 건 이마 위쪽이었다. 살이 부어올랐다. 조만간 변색될 듯 하다. ‘뼈가 깨진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뇌진탕인가?’ 눈을 가늘게 뜬 조안나가 손을 젓는다. “괜찮습니다. 시야가 정상이고, 현기증도 없어요.” 혹시 모를 일이다. 겨울은 랜턴을 켜서 그녀의 눈에 비춰보았다. 「응급처치」가 알려주는 지침이었다. 빛에 대한 과민반응 또한 뇌진탕의 징후 중 하나라고. 요원은 랜턴을 끌어내렸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냥 아픈 것뿐이에요. 그보다 카메라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조금 늦었어요. 아마 1초가량 화면에 노출되었을 거예요.” “Fuck.” 자책하는 욕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겨울이 조용히 말했다. “진정해요. 그래봐야 여러 화면 중 하나잖아요? 고작 1초인걸요. 설마 그걸 봤을까요? 상황실도 철수 준비를 하느라 나름 바쁠 텐데요. 마음이 풀어져있을지도 모르고.” “……그러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나쁜 가능성을 우려하는 건 무의미하다. 지금으로선 어쩔 방법이 없기에. 그래도 후방에서 기습을 당하는 건 피해야 했다. 위치를 다른 선실로 옮겨, 혹시나 따라붙는 기척이 있는지 기다려 보는 두 사람. 조안나에게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부상의 여파가 뒤늦게 나타날지도 모르므로. 머리를 다쳤을 땐 신중해야 한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흘렀다. 침묵으로 견디는 시간이 계속해서 길어진다. 누가 오려면 벌써 왔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 요원이 총구를 늘어뜨렸다. 피와 땀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녀. “하아. 운이 좋았네요…….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이동이 재개되었다. 제한구역은 아까부터 가까웠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뒤 고작 두 개의 카메라를 추가로 지나쳤을 뿐인데, 이제까지 지나친 것들과는 크기부터 다른, 원형의 압력 문이 나타났다. 잠금장치는 카드를 넣거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방식. 문을 비추는 카메라의 차례가 넘어간 다음, 조안나가 품에서 ID 카드를 꺼내 잠금장치에 꽂았다. 전자음과 함께 문이 개방되었다. 겨울이 물었다. “그건 어디서 났어요?” “잠깐 빌렸습니다.” 주인은 모르지만. 그녀가 덧붙이는 말에 겨울은 가볍게 웃었다. 재빠르게 문 안으로 들어선 뒤, 만약을 대비해 걸쇠를 수동으로 밀어붙였다. “알아도 소용없을 겁니다. 첫 번째 잠수함에 탑승해서 떠났으니까요. 수중전화가 여기까지 닿진 않을 테고……. 작전도 끝난 마당에 키 카드 분실을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제한구역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카드를 여럿 빌려놨는데, 첫 번째부터 당첨이군요.” 문 안쪽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측면으로는 보안실로 추정되는 장소가 보였다. 테이블 위로 폐쇄회로 화면들이 배치되어있고, 몇 개의 마이크와 용도 불명의 콘솔들이 존재했다. 비어있는 무기 거치대를 보건대 적잖은 무장병력이 대기했던 것 같다. ‘비밀구역의 감시체계를 위쪽의 상황실에 연결시켜둘 순 없었겠지. 거긴 인체실험 사실을 모르는 인원도 자주 드나드는 곳인걸.’ 이렇게 생각한 겨울이 보안실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여기서 안쪽 상황을 보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혹시 아직 살아있는 감염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조안나도 동의했다. 가능성은 낮지만, 인력이 철수한 뒤 구속되어있던 감염체가 풀려났을 수도 있었다. # 185 [185화] #검은 물 아래 (3) 보안실 모니터에 비춰지는 통제구역은 움직임이 없는 풍경이었다. 화면 구석에서 경과하는 시간 표기가 아니었다면 정지된 화면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겨울은 마이크에 전원을 넣고 손끝으로 두드려 보았다. 툭툭. 변종이 있다면 반응하겠지, 하고. 콘솔을 조작하던 조안나가 고개를 갸웃 했다. “지금 당장 내용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삭제되지 않은 기록이 있군요. 어차피 배 자체를 소각할 테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까요?” 수많은 감시영상을 일일이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암호가 걸려있기도 하고. 챙겨온 메모리 스틱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그것을 도로 갈무리한 뒤 콘솔의 전원을 껐다. 이어 본체를 분해하더니 하드디스크를 뽑는다. 대퇴부의 주머니에 겨우 집어넣을 크기였다. 그 외에 발견되는 문서들은 근무 일지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관계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증거가 된다. 조안나가 작은 사진기를 꺼내 매 페이지를 촬영했다. 마지막으로 지문 채취용 스프레이를 뿌려 투명한 필름으로 보존한다. 사진만이라면 모를까, 지문까지 있는데 조작이라고 우기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안쪽은 어때요? 뭔가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위협은 없는 것 같은데, 확신하긴 어렵네요. 혹시나 구울 같은 녀석이라면 스피커의 개념을 학습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실험을 거친 변종이 보통의 다른 변종과 같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변종이 무기화되었을 거라는 뜻인가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과 달라서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확률이 낮다고 무시할 순 없었다. 실제로 겨울의 과거에 그런 세계가 있었으므로. ‘언어를 가르쳐서 대화를 시도해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 어떻게 느끼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무엇을 원하는가, 신의 섭리가 느껴지는가. 마지막 질문이 괴상하게 느껴지지만, 해당 세계관은 그런 질문이 필요한 분위기였다. 대역병을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정국. 자칫 신정국가가 들어설 위기상황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은 그 반대의 증거를 찾고 싶어 했다. 공황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감마 구울 쯤 되면 체계적인 학습을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언어는 곧 언어적인 사고능력이었기에. 지능이 동일하더라도, 언어를 구사하는 녀석의 지적 능력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월등히 높았다. 실험체가 탈출한 순간부터 그 세계관의 멸망이 한층 더 빨라졌던 게 사실이다. “일리 있는 판단입니다. 무지는 그 자체로 위험하죠.” 조안나가 고민했다. “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래는 한 명이 여기 남아서 퇴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혼자서 들어가는 게 위험할 지도 모르겠군요. 겨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뒤가 막히면 끝장이다. 보안실의 모니터는 문 바깥의 복도까지 비추고 있었으므로, 여기 한 사람이 남아있으면 기습을 당하거나 퇴로가 막히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통찰」은 반응이 없나…….’ 가벼운 결정이 아니지만, 여기서 뜸을 들이는 시간조차 또 하나의 위험요소였다. “둘 다 들어가는 게 낫겠네요. 혼자 들어가면 필요한 시간도 길어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제가 여섯시를 맡죠.” 겨울이 전방에, 요원이 후방에 선다. 에이프릴 퍼시픽에서부터 익숙해진 호흡이었다. 전원이 나간 소독실을 지나, 겨울은 통제구역의 두꺼운 문을 열었다. 나아가는 속도는 빨랐다. 폐쇄회로를 통해 대략의 구조를 숙지한 덕분. 다만 감시의 사각지대를 지날 때엔 조금씩 느려졌다. 반응속도를 토대로 장애물과의 거리를 잰다. 거기서 무언가 나올 때 대응 가능한가를 판단하면서. “끔찍한 광경입니다.” 조안나의 목소리. 그녀가 채증을 하는 동안 겨울은 사방을 경계했다. 찰칵. 사진기에 담는 풍경은 시험관에 보존된 신체부위들이었다. 변형된 여러 장기들. 절개된 팔. 피부가 벗겨져 근육이 보이는 다리. 신경계에 전선이 연결되어 움찔거리는 손가락. 이것들이 인체실험의 증거로선 부족할지라도, 적어도 피쿼드에서 정식 작전 이외의 어떤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로는 충분할 터였다. 그 외에 컴퓨터를 발견할 때마다 저장장치를 뽑는다. 넣을 곳이 문제였으나, 다행히 비어있는 가방을 챙길 수 있었다. 스포츠 브랜드가 찍혀있어 위화감이 느껴진다. 덜컹! 캬아아아악! 타타탕!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요원이 반사적으로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철창살에서 불티가 튀었다. 마찬가지로 후방을 겨누어, 발사 직전이었던 겨울이 조준을 풀었다. 철망에 덮여있던 천이 미끄러지고 드러난 것은 기괴한 형상의 구울. 좁은 공간에 갇혀있다. ‘구울이 맞나?’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한 피부를 제외하면 다른 구석이 더 많았다. 살이 엉망으로 부풀어있었다. 전신에서 종양이 증식한 것처럼. 얼굴이 부어 한쪽 눈은 뜨지도 못했다. 뒷걸음질로 벽에 부딪혀, 주르륵 미끄러지는 괴물. 등을 기댔던 벽에 오염된 핏자국이 남았다. 툭 떨어지는 손에 철썩 튀어 오르는 피 웅덩이. 조안나의 대응사격이 정확했던 덕분에, 세 개의 총상이 예외 없이 치명적이었다. 이를 신호로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괴성들. 감옥을 가린 장막을 걷을 때마다, 인간 아닌 죄수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창살 사이로 문드러진 손들이 나와 허공을 휘젓는다. 다만 모든 개체가 그렇게 열광적이지는 못했다.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놈들도 많았고. “맙소사. 그들이 트릭스터까지 포획했군요.” 조안나가 경악했다. 가장 교활한 변종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 양 어깻죽지에 굵은 전극이 꽂힌 상태였다. 한 쌍의 전선은 바닥을 뚫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어졌다. 입에 재갈이 채워진 트릭스터는, 바닥에 누운 채 노랗게 변색된 눈알을 굴린다. 핏발 선 눈에선 원초적인 허기와 증오가 느껴졌다. 이따금씩 힘을 쓰려는 듯 꿈틀거리지만, 뒤따르는 방전음은 굉장히 작았다. 보정을 받는 겨울조차 간신히 들을 정도로. 괴물의 팔엔 수많은 주사자국이 남아있다. 가까운 쓰레기통을 보니 생물학적 폐기물 경고 표시가 붙어있었다. 발로 걷어차자 빈 앰플과 주사기가 쏟아졌다. 그 외에, 피로 젖어있는 거즈와 부패한 생체조직 샘플도 한 움큼이나 되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버려져 있는 게 위험하진 않겠지.’ 겨울은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경계심을 낮추었다. 혹시나 변종을 대상으로 콜레라 따위를 시험한 건 아닐까 의심했으나, 그런 실험은 훨씬 더 엄격하게 진행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생존감각」의 경고가 없는 시점에서 가능성은 낮았다. 전선을 살피던 조안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게 안전장치인가 봅니다. 트릭스터가 만들어내는 전류를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인 것 같군요. 이렇게 해놓으면 자폭도 하지 못하겠죠.” 국방부 방역전략연구소가 밝혀낸 바, 트릭스터의 자폭은 스스로에게 과부하를 걸어서 터트리는 형태였다. 따라서 지금처럼 전극을 꽂아 방전시킬 경우 자폭은 원천 봉쇄된다. 일일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수색을 재개하는 두 사람. 괴성의 합창이 등 뒤로 멀어졌다. 통제구역은 갑판 절반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넓었다. 비닐을 늘어뜨린 칸막이를 지나 모퉁이를 돌았을 때,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방향은 빛이 들지 않는 응달.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본다. 달칵. 조명이 들어왔다. 수명이 얼마 안 남았는지 징징 울어대는 형광등 불빛 아래, 참상이 드러났다. “앤, 잠시 이쪽으로.” 모퉁이에서 후방을 겨누던 조안나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오, 신이시여.” 요원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질끈 감았다 뜬 눈에 분노가 어린다. “창녀의 자식새끼들(Son’s of bitches) 같으니.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시야 가득, 양손이 묶인 채 사살당한 시체들이 일렬로 즐비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들은 예외 없이 머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뒤통수의 구멍은 작고, 이마나 코가 깨진 구멍은 크다. 부패는 시작되지 않았다. 아직 피도 다 굳지 않았다. 어디선가 또옥 똑 떨어지는 물소리는, 보지 않아도 핏빛일게 뻔했다. 몇 구를 살핀 조안나가 주먹을 움켜쥔다. “피부에 부스럼은 있을지언정 면역거부반응은 흔적도 없습니다. 감염되지 않았어요.” 겨울이 끄덕였다. “실험용 쥐로 쓰려고 잡아온 사람들이었겠죠.” 무릎 꿇고 줄지어 엎어진 시체들을 따라가면, 벽면에 쓰레기를 버리는 구멍이 있었다. 구멍 밖으로 시체의 하반신이 나와 있었다. 다가간 겨울이 뻣뻣한 다리를 붙잡고 밀어보았다. 들어가지 않는다. 통로가 막힌 모양이다. 인간의 존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취급이었다. 찰칵, 찰칵. 작게 울리는 셔터 소리. 조안나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변종은 안 죽였어도 사람은 죽이고 떠났군요.” “그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람들 나름의 자비였을지도 모르죠. 적어도 산 채로 타 죽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요.” 싫은 기분이 묻어나는 겨울의 말. 조안나는 다시 한 번 눈 감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채증을 마치고 나서였다. [훅-] 망자를 위해 기도하던 FBI 요원이 튕겨지듯이 일어났다. 누군가 마이크에 대고 숨을 불어넣은 소리. 조안나의 경악한 시선이 스피커를 향한다. 겨울도 같은 방향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위기감지」가 반응하더라니…….’ 그러나 직접적인 위협이 아닌 이상 감각보정의 경고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끽해봐야 풀려난 변종 한둘 정도를 예상했건만. 역시 보안실에 한 명이 남아있었어야 하나? 이제와선 무의미한 후회였다. 겨울은 뇌리가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삐이- 날카로운 전자음이 끊어진 뒤에, 스피커 저편에서 낯익은 음성이 말을 건네 왔다. [하아, 하아. 깁슨 감독관. 그리고 한겨울 중위. 거기서 뭣들 하고 계십니까?] “채드윅! 너 이 사생아 새끼!” 격노한 조안나의 외침. 지이잉. 폐쇄회로 카메라가 움직였다. [오, 실례. 그쪽 마이크를 켜지 않아서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립니다, 감독관. 후우. 뭐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겠지만 말입니다.] FBI 요원의 호흡이 감정으로 거칠어진 것에 비해, 태연하게 능글거리는 채드윅 팀장은 다른 이유로 거칠었다. [두 사람도 참 대단하십니다. 후, 위쪽에 들키지 않게끔 내려온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현장에서 직접 뛰었던 게 꽤 옛날이다 보니 몸이 안 따라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움직이지 마십시오. 지금 움직여봐야 소용없거든. 하하하.] 겨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황실의 감시를 피해야 했다면, 적어도 CIA 요원 일부는 그 「진정한 애국자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제야 도착한 이유도 알 만 하고.’ 움직여봐야 소용없다는 말로 미루어, 문은 이미 봉쇄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조안나가 지닌 키 카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터였다. 딸깍. 스피커의 잡음 사이로 스위치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대화를 해봅시다.] 폐쇄회로의 마이크를 활성화시킨 듯 하다. “뭘 원하지?” 수그러들지 않은 분노를 담아 묻는 FBI 요원. 이성은 감정보다 차가웠다. 어쨌든 상황은 최악이다. CIA 지부장은 감독관과 소년장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왜 내가 뭘 원할 거라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문 잠그고 떠났을 테니까.” 이에 채드윅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감 넘치는군요. 딱히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흥겨운 웃음소리. 부드득. 조안나가 이를 갈았다. [뭐,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해두고…….] 채드윅의 어조가 바뀌었다. [그래, 원하는 게 있기는 있지. 감독관 당신이 아니라 한겨울 중위에게 말이야.] 조안나의 시선이 겨울을 향한다. 짧은 시선교환. 겨울은 각도를 조정하는 렌즈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목청을 돋웠다.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듣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거기 있는 깁슨 양을 죽여줬으면 해서.] “…….” [중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채드윅의 질문은 이제까지의 웃음기가 빠져있었다. # 186 [186화] #검은 물 아래 (4) “내가 앤을 죽이는 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중위. 그저 동지가 되자는 제안일 뿐인걸.] “동지?” [그래요, 동지. 솔직히 지금의 중위와 나는 적대관계에 가깝잖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비밀을 공유하는 게 가장 확실하거든. 대외적으로는 절대 밝혀져선 안 될 그런 비밀 말입니다. 중위가 이미 내 비밀 하나를 알고 있으니, 내가 중위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면 균형이 맞겠지. 그 비밀을 하나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증인도 없앨 겸.] “…….” [당신이 깁슨 양을 사살하는 장면은 위성을 통해 랭글리로 전송될 겁니다. 얼굴이 문제이긴 한데, 그거야 수정하면 그만이고……. 거기에 전후 상황을 적당히 갖다 붙여서 안전장치로 삼겠다 이거예요. 서로가 좋은 일이지요.] “글쎄요. 그건 동지보다는 공범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싶은데.” 겨울은 자신의 말을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 공범이 아니라 노예라고 해야 더 어울리겠네요. 채드윅 팀장 당신의 비밀은 여기서 불타 없어지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테니까.” 마음을 지키려는 소년에겐 애초부터 망설일 여지도 없는 갈림길이었다. “살고 싶으냐고요? 죽여선 안 될 사람을 죽이고, 약점 잡힌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아니, 그렇게 살긴 싫습니다. 한겨울이 없는 한겨울이 되진 않겠어요.” 겨울은 스스로를 그만큼 위태롭게 느낀다. 오래 전부터 한계였다.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돌이키기 어려우리라고. 이것이 마음을 지키는 데 한 번의 예외가 없는 이유였다. [이런. 중위는 지금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채드윅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꼭두각시? 내 모두를 걸고 맹세하지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지금 그걸 믿으라는 말은 아니겠죠.”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중위.] 이어지는 이야기는 뜻밖의 진솔함이었다. [내가 왜 이런 제안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중위를 이용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냥 중위를 살리고 싶어서입니다. 미국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인격이 바뀐 것처럼, 비뚤어진 애국자가 자신의 애국심을 털어놓았다.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고문으로 배웠지. 사람에게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지금의 미국 시민들, 그리고 방역전선의 군 장병들에게, 중위 당신은 어느 정도의 희망일까? 그런데 내 손으로 그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죽이라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여기 죽어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가보죠?” [적어도 미국 시민은 아니니까.] “제대로 미치셨네요.” [맞습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지요.] 채드윅의 어조가 또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적이 많은 조국은 이런 나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훈련시켰어요. 그리고 난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을 알고도 자원했던 겁니다. 그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지요. 오히려 항상 자랑스러웠습니다. 내 모든 희생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기에.] “…….” [정부로선 도저히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게 바로 나 같은 쓰레기의 역할입니다. 인체실험도 마찬가지지요. 죄 없는 남녀노소를 산채로 감염시키고 해부하고 사살하고 폐기하는 게 끔찍한 죄라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압니다. 하는 짓이 나치새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만 감염되는 질병을 연구하려면 사람을 실험체로 삼아야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 [맹세하는데, 난 내가 지은 죄를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미국의 정의가 나를 심판할 겁니다. 판결은 사형이겠지요. 죄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내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져도 좋습니다. 내가 죄인이므로 미국은 명예로울 것입니다.] 후우. 저편에서 마이크에 대고 내쉬는 한숨은 벅벅 울리는 잡음으로 번진다. 그 거친 느낌은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애국자의 감정 그대로였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무덤은 사람들이 던진 쓰레기로 뒤덮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스탈린이 아닙니다.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치워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나 네이선 채드윅에게는 더러운 무덤이야말로 둘도 없을 긍지일 테니 말입니다.] 답이 없을 만큼 깊어진 자아도취. 겨울은 대화가 무의미하리라고 여겼다. 채드윅은 새로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부탁드립니다, 중위. 내가 당신을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 같은 애국자가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어선 안 됩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죽음은 명예로운 전사뿐이란 말입니다.] 여전히 미친 소리였으나, 뜻밖에도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나를 봐요.” 그녀는 침착한 태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조울증 걸린 등신 새끼의 개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사실이에요. 겨울은 여기서 죽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 사람들에겐 한겨울 중위가 필요해요.” “앤.” 겨울이 언어 이상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으나, FBI 요원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명백한 해방 작전은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이제 당면과제는 오염지역을 탈환하는 게 아니라, 보급이 끊어진 병력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거예요. 탄약 없는 군대의 전투력은 일반인 집단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그녀는 미치광이가 논했던 희망에 대해 말하는 중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지. 백 단위면 기적이고, 천 단위면 그나마 다행이겠죠. 하지만 국방부에선 넉넉잡아 십만 단위, 최악의 경우엔 그 이상의 손실을 각오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겠죠. 명백한 해방은 그만큼 많은 기대를 모았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제발 계속 들어줘요.” 조안나가 소년의 말을 잘랐다. “이럴 때 겨울마저 사라지면 안 됩니다. 겨울은 이미 전대미문의 전쟁영웅입니다. 아직까지 남부연합기를 걸어놓는 텍사스 촌구석의 꼴통들조차 한겨울 중위에겐 경의를 표할 정도인걸요. 당신의 죽음은 베르테르의 자살이 우스울 만큼의 파장을 남기겠죠. 어쩌면, 낮은 확률이지만, 방역전쟁의 성패가 달라질지도 모르고요.” 베르테르의 자살. 베르테르는 괴테가 쓴 소설 속의 주인공에 불과하지만, 그의 자살은 무수한 모방 자살을 낳았다. 가공의 인물에게 마음을 주고, 스스로를 투영하고, 나아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으므로. 사람의 관계맺음은 때로 상대가 진짜고 아니고를 가리지 않는다. 지금 이 대화에 귀 기울이는지, 미치광이는 잡음 너머에서 조용하게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죽었을 때, FBI의 일부 수사관들은 비상근무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조안나가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개인의 자살은 차라리 온건한 경우입니다. 유명인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목적 없는 소요. 범죄. 테러.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인 시민들의 상실감. 그건 온 사회가 치르게 되는 엄청난 비용이죠. 그런데 겨울의 인기는……. 이걸 인기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부적절하겠군요. 겨울의 인망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입니다. 일개 락스타가 우스울 정도로……. 이 시점에서 겨울의 죽음이 낳을 혼란을, 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과연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총체적인 파국의 발단이 될지. 미래는 확정되지 않은 행운과 불행의 영역이라고.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겨울의 입장에서도, 죽은 뒤에 세계관이 바로 끝나는 게 아니다. 관제인격의 상황연산으로, 죽음 이후에도 세계는 종말을 향해 흐를 것이다. 드문 경우지만, 그리고 겨울은 경험한 적이 없지만, 접속자가 사라진 세계가 종말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접속자의 기여도가 평가된다. “저를 죽이세요, 겨울.” 조안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겨울은 충분히 중요한 인물이고, 국방부는 이 작전에 겨울을 빌려준 걸 후회하고 있답니다. 즉 앞으로는 방역전선을 떠날 일이 드물 거란 뜻이죠.” “…….” “겨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온갖 기관의 이목이 집중될 거예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우리 수사국과 정보국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국토안보부 산하의 정보기관들은 서로를 아군으로 여기지 않거든요. 가뜩이나 세력이 축소된 정보국……그나마도 내부의 사조직 따위가 수작을 부릴 환경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비밀? 어디 공개해보라고 해요. 백악관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걸요?” 가만히 바라보는 겨울에게, 어깨에서 힘을 빼고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그녀. “이제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어디로요?” “원치 않게 떠나온 사람들에게로.” 겨울 스스로 쌓아온 이야기로. 그 말이 지금껏 종종 품어온 우울한 상념과 같아, 겨울은 안색을 굳혔다. 이 세상이 소년의 속을 읽는 느낌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보이지 않는 아이는 이런 식으로 개입할 수 없다. “한겨울 중위.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FBI 요원이 작별을 고한다. 미련 없이 삶을 정리하는 초연함으로. “부탁드립니다. 쏘세요.” 그녀가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상황은 그저 불운한 사고일 뿐이에요. 그러니 겨울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내가 겨울을 위해 죽는 거라고 생각해요. 겨울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겨울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많은 시민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짝, 짝, 짝.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깁슨. 당신도 결국은 애국자였군.] 미치광이가 들뜬 슬픔을 지껄였다. [아쉬워. 정말 아쉬워. 우리의 길이 어째서 이렇게 엇갈렸을까. 보험을 걸 방법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깝군. 이봐, 앤. 그동안 죄 지은 거 뭐 없나? 국경에서 마약을 빼돌렸다거나, 밀입국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받았다거나.] 수사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 말이야. 미치광이가 제멋대로 애칭을 주워섬기며 하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조안나였으나, 대답은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런 거 없다. 누구처럼 조국의 이름에 똥칠하며 더럽게 산 인생은 아닌지라.” 그 뒤에 조안나는 겨울을 말없이 재촉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는다. 가늘게 떨리는 턱과 어깨는 죽음에의 두려움이었으나, 의지로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묵묵히 응시하던 겨울이, 잠시 후엔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뭘 다 정해진 것처럼 구는 거예요? 제 말은 듣지도 않고서.” “……겨울?” 눈을 뜬 요원이 소년장교를 살폈다. 그 기색이 조심스럽다. 웃음 너머의 감정을 느낀 것처럼. 겨울은 몸속에서 돌이 구르는 환청을 들었다. 그동안 참 많이 참았는데. 사람으로 여기는 가상인격들을 비롯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찾아왔던 자칭 심리상담사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도 넘치는 감정을 주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선택이었다. 둑을 무너뜨리는 건 최초의 범람, 단 한줌의 물이니까. 어쩐지 피곤하다. 소년은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사소한 계기로, 쌓인 피로가 어느 임계점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당겨져 있었던 것 같다. [한겨울 중위. 설마 저토록 훌륭한 희생정신을 무시할 셈입니까?] 만들지 않은 짜증을 담아, 겨울이 폐쇄회로 카메라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탕! 박살난 유리조각이 후두둑 쏟아졌다. 튀어 오른 탄피는 그 직후에 땅을 굴렀다. 급하고 안타깝게 말하려는 조안나를 향해, 겨울이 느릿느릿 고개를 저어보였다. “쏠 수 없는 거예요. 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말아요.” # 187 [187화] #검은 물 아래 (5) 저벅, 저벅. 단단한 군화, 서늘한 감정, 선명한 발소리. 겨울은 남은 카메라들을 찾아 걸었다. 느린 걸음은 곧 신중한 탐색이었다. 하나라도 놓치는 경우가 없도록. 뭐라도 해보려면, 적어도 채드윅이 볼 순 없어야 한다. 성패를 따지는 건 그 다음 순서일 것이었다. 사람 없는 실험구역은 불 꺼진 구석이 많아, 총성이 울리는 찰나마다 희미하게 번뜩였다. 그때마다 높아지는 변종들의 불협화음. 그 사이에 가까운 쇳소리가 섞인다. 철컥. 후퇴 고정된 권총의 슬라이드 사이로 빈 약실이 드러났다. 탄창 멈치를 누르며 손을 확 꺾는 겨울. 관성으로 빠진 탄창이 신경질적으로 날아갔다. 그게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장전하고, 연속동작으로 조준을 끝냈으나, “한 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팔을 붙드는 손길에 조준선이 흐트러진다. 당겨지던 방아쇠가 격발 직전에 멈추었다. “겨울이 이러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고 해서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이렇게 말하는 FBI 요원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거리를 두고 조용히 따라오며, 몇 번이나 망설인 흔적이 역력하다. 꾸욱. 조이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혼자 목숨이 아니잖아요. 시민들이야 겨울이 사라져도 최소한의 여유가 있겠죠. 그러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당분간 이 나라는 역병이 시작되었을 때만큼이나 각박해질 겁니다. 누가 난민들을 지켜주겠습니까?” 잠자코 눈을 깜박이던 소년은, 순수한 힘으로 조준을 고쳤다. 탕! 박살난 표적이 자잘하게 뿌려지는 순간, 겨울의 왼 손은 조안나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베타 구울을 능가하는 완력에 속절없이 당겨지는 요원. 한 뼘 거리에서, 놀라움으로 물든 두 눈이 겨울을 바라보았다. 묵묵한 시간이 흐른다. 서서히, 조안나의 시선이 낮아졌다. 그와 함께 겨울의 손에서도 힘이 사라졌다. 말 없는 대화의 끝. 조안나는 멈췄던 숨을 느리게 내쉰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 겨울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까마득하다. 감정만으로 움직인 게 얼마만인지. “화내서 미안해요.” “…….”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앤은 착한 사람이고, 지금도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걸 아니까.” “겨울…….” “그래도 안 돼요. 말했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드릴까요? 여기까지가 저예요. 앤을 죽일 수 없는 한겨울이라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도와 왔던 거라고요. 제 손으로 앤을 살해하고 나간다면, 사람들을 전처럼 도울 자신이 없어요. 마음이 전과 같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못 견뎌요. 한계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압니다.” “무엇보다, 여기 갇힌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다고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마지막 철수가 아마 자정 무렵이었죠? 아직 시간이 있어요. 우린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거예요. 실패할 가능성은, 실패할 때까진 생각하지 말기로 하고요.” “어쩔 수 없네요.” 이어지는 조안나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저라고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보다 확실한 가능성을 붙잡고 싶었을 뿐입니다. 많은 목숨이 걸린 문제인걸요. 하지만……. 그래요, 안 되는 거군요…….” 그러고서 그녀는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겨울의 뜻대로 하죠. 함께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고마워요.” 카메라들이 다시 부서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말을 걸던 실험구역 전체방송은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졌다. 제풀에 지쳐 떠났는지, 아니면 그저 지켜보고 있는 건지. 그러다보니 어느덧 마지막이었다. 여기까지 소진한 탄창이 추가로 하나. “채드윅. 아직 거기에 있습니까?” 겨울의 질문에 최후의 폐쇄회로가 반응했다. 지잉- 하고 돌아서, 이쪽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불이 들어왔다. 여기의 소리가 저편으로 전해진다는 신호였다. [혹시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중위?] “설마요. 그냥 작별인사를 할까 해서.” [작별인사?] 실망스러운 한편으로 미심쩍어하는 목소리. 겨울이 가볍게 끄덕였다. “네. 우리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엄한 데서 죽지 말고,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울음소리가 들렸다. 비뚤어진 애국자는 미국의 손실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탈출할 가망이 있다고 여기면 저렇게 여유롭지 못할 텐데. 그만큼 구역의 격리가 확실하다는 걸까? 애초부터 떠볼 생각으로 건넨 도발이었고,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겨울이 방아쇠를 당겼다. 퍽! 부서진 기판과 유리조각들이 흩날렸다. 자그락자그락. 밟고 지나가는 구둣발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바스라진다. 후우. 한숨을 내쉰 뒤에, 겨울이 말했다. “시설을 참 잘 만들어놨네요.” 폐쇄회로의 감시범위는 구역 전체를 아울렀다. 고로 수색이 끝난 시점에서 겨울이 보지 못한 부분은 없는 셈이었다. 흔한 영화와 달리 환풍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았고, 그나마도 촘촘한 창살을 여러 겹으로 쳐놓은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살펴봤으나, 시체 버리는 구멍 안쪽에도 압력문이 보였다. “우리에게 뭐가 있을까요? 혹시 폭약 가진 거 없어요?” 겨울의 질문에 곤란해 하는 조안나. “강제돌입(Door Breaching)에 쓰려고 챙긴 플라스틱 폭탄(C4)이 약간, 여기에 50그레인 도폭선도 조금 있지만……. 어느 쪽이든 두꺼운 합금을 부수기엔 위력이 모자랍니다.” 도폭선(導爆線)은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끈에 폭약을 발라놓은 물건이었다. 50그레인은 폭약의 함유량을 뜻했고. 조안나가 휴대한 규격은 1미터에 겨우 10그램, 즉 가장 약하고 가벼운 종류로서, 통상적인 자물쇠 정도를 끊어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기술습득으로도 가망이 없나…….’ 어느 기술이든 「재능이익」이 적용되는 구간은 제한적이었다. 등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과거 겨울이 익혔던 횟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개인화기숙련」만 하더라도, 가장 높았을 때가 17등급, 초인의 영역 중반에 불과했으니. 물론 초인 이상의 영역도 존재하지만, 통상적인 노력으로는 도저히 닿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런 비효율성은 겨울이 함부로 기술을 강화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말 없는 공백이 얼마나 길었을까. 벽에 기대고 앉아 초조하게 골몰하던 조안나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트릭스터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요?” “아타스카데로 주립 정신병원에서 겨울과 교전한 트릭스터는 잠긴 문을 열고 다녔지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재앙 이전엔 정신병을 앓는 죄수들의 교도소를 겸했고, 역병 이후엔 질병통제본부의 지역거점이었던 병원. 겨울은 당시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트릭스터와 처음으로 조우한 장소였던 만큼, 선명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교활한 괴물은 갇혀있던 변종들을 풀어주었고, 잠긴 문을 이용하여 함정을 파기도 했었다. “아직 추가 검증이 필요한 가설입니다만, 방역전략연구소는 트릭스터가 단순한 기계구조를 전자기장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중입니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일 경우, 잘하면 잠겨있는 압력문을 여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실험구역을 봉쇄하는 문의 내부구조는 정신병원의 철창 자물쇠보다 훨씬 더 무겁고 정교할 터. 과연 만신창이가 된 트릭스터가 열 수 있을까 싶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네요.” 뭐라도 해봐야 할 상황이었다. 겨울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 전에 다른 변종들을 먼저 처리하는 편이 낫겠어요. 전기 괴물이 만신창이이긴 해도, 만에 하나 놓쳐서 엉뚱한 우리를 열고 다니면 곤란하잖아요.” “그럼 제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서로 반대 방향을 돌고, 트릭스터가 있는 곳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떨까요?” “좋아요. 서두르죠.” 어차피 돌아본 구역이니, 지금은 안전보다 시간을 아끼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갇혀있는 변종들을 차례로 사살하고 다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남은 탄약의 균형을 고려하여, 겨울은 중간에 권총을 집어넣고 소총을 사용했다. ‘여기서 벗어나는 즉시 교전을 치르게 될 수도 있는걸.’ 위력은 부족할지언정, 반응속도에선 권총이 소총보다 훨씬 낫다. 보통의 변종들보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실험체들을 모두 끝장내고서, 겨울은 트릭스터 앞에 도달했다. 조안나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1분 남짓이 지난 뒤였다.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트릭스터는, 재갈 안쪽에서 끓는 울음소리를 냈다. 부드득, 부드득. 이빨이 다 빠진 입으로 재갈을 씹는데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검푸른 잇몸이 뭉개지는 가운데 변질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족쇄는 아예 용접을 해놨네요. 앤이 말했던 가설 때문인가 봐요. 사슬 부분을 도폭선으로 끊어버리면 그만이겠지만요.” 비록 전기를 못 쓰게 된 녀석이어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특수변종을 다룰 땐 최대한 주의하는 편이 좋았다. 주위를 탐색하던 조안나가 은빛 안감의 커다란 바디 백을 발견했다. “사람 시체가 들어가기엔 규격이 크군요. 아마 트릭스터 포획에 쓰인 물건이겠죠. 잡아오는 도중에 자폭해서 전자기 충격파가 발생하면 곤란했을 테니.” 겨울이 제안했다. “이 놈을 풀어주기 전에 거기다 민감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게 좋겠어요. 무전기, 야시경 같은 전자장비들이랑, 전기신관처럼 위험한 폭발물들 말예요.” 지금으로선 예측하기 어렵다. 자유를 얻은 트릭스터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동안의 실험으로 미쳐버려서, 풀려나자마자 제 몸에 과부하를 걸어버릴지도 몰랐다. 겨울은 가까운 의자에 걸려있던 백색 가운을 교활한 괴물의 얼굴에 씌웠다. 소매와 자락을 묶어 눈을 가린 것이었다. 괴물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으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마침 수중에서 도폭선을 꺼내려던 조안나가 의아하게 묻는다. “뭐하는 거예요, 겨울?” “이 놈은 영리하니까요. 우리 행동을 의심스러워 할 거예요. 적어도 도폭선은 못 보게 해두려고요. 그러면 일부러 풀어주었다는 걸 모를 수도 있겠죠. 희망사항일 뿐이지만요.”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조안나가 천천히 끄덕였다. 이제 도폭선을 감고 물러난다. 적당한 거리의 칸막이 뒤에 웅크리는 두 사람. 조안나가 작고 낮게 경고했다. 귀를 막으라고. 그녀 스스로도 팔꿈치로 얼굴 양쪽을 가린다. “폭파합니다. 셋, 둘, 하나.” 강렬한 진동이었다. 실내에서 터진 선형의 굉음은 뼈가 저릴 정도의 크기였다. 정수리에서 이빨까지 징징 울리는 느낌. 유일하게 살아있는 괴물의 괴성이 메아리처럼 뒤를 이었다. 혹시 폭발의 여파에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고개를 내민 겨울은 끊어진 사슬이 춤을 추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나운 몸부림이었다. 버둥거리던 녀석이 드디어 복면을 벗었다. 어깻죽지에서 전극이 뽑혀 나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잠시, 바싹 엎드려 주위를 살핀다. 전자파를 내뿜는 중일까? 주변의 스피커들로부터 불규칙적인 잡음이 흘러나온다. 이제 출입구 쪽으로 밀어붙일 차례. 타타탕! 일부러 빗나가게 쏜 삼점사가 트릭스터의 발치에서 불꽃을 튀겼다. 캬악! 괴물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몸이 온전치 못한 탓인지, 겨울을 발견하고 공격성을 보이면서도, 일단은 물러나는 쪽을 택한다. 인대가 끊어진 탓에 뼈가 없는 한쪽 팔이 꼬리처럼 늘어졌다. 그러나 출입구와 미묘하게 다른 방향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겨울은 트릭스터가 내딛는 발아래를 조준했다. 그리고 발이 갑판에 닿기 직전에 격발. 괴물은 불에 데인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지속적인 위협사격에, 트릭스터는 결국 정해진 종착지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괴물이 압력문에 도달했다. 두 번째 탄창에 다섯 발이 남은 시점이었다. 끄으으어어억! 쾌애액! 가래 끓는 소리를 지를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트릭스터는 두꺼운 합금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파직, 파직. 손으로 더듬을 때마다 작은 방전이 일어났다. “제발……. 힘내라, 괴물 새끼야.” 조안나의 응원이 이채롭다. 그녀도 말해놓고 흠칫하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변종을 응원하게 될 줄이야. 문 안쪽에서 기묘한 마찰음이 들리는 것도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변종의 움직임이 멎었다. 놈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보였다. 문에서 손을 떼고 겨울이 있는 방향을 응시한다. 더 이상 웅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양 팔을 벌린다. 쏠 테면 쏴보라는 듯이. ‘일부러 빗나가게 쏜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지금이라도 몸통에 한 발 쏴버릴까? 그 정도는 견뎌내지 않을까? 겨울이 거듭 고민했으나, 정상이 아닌 트릭스터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조안나가 혀를 차더니 소총을 연사로 놓고 긁었다. 카카카카캉! 실내의 반향으로 더욱 날카로워진 총성의 연쇄. 겨울과 같은 의심을 했던 모양이다. 그 중 세 발이 변종의 다리에 맞았다. 그러나 실책이었다. 거리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명중률을 보고, 인간의 무기에 익숙한 괴물은 드디어 확신을 얻었다. 그 증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징그러운 웃음이었다. 끄윽, 끄윽, 끄으윽. 닫힌 문을 보고, 두 사람을 보고, 다시 한 번 닫힌 문을 보고……. 그렇게 웃어대던 괴물이 성한 쪽의 손으로 제 목줄을 움켜쥐었다. “안 돼!” 조안나의 비명 같은 외침은 또한 공허했다. 트릭스터의 손가락이 더러운 피부를 파고들었다. 뿌득, 뿌득, 으지직. 살이 찢어지고 성대가 떨어져 나오는 소리. 부들부들 떨리는 머리는 기형적으로 젖혀졌다. 쿵. 괴물은 무릎을 꿇었다. 동맥에서 솟구친 피가 천장까지 적신다. 충혈 된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시력은, 괴물의 노란 동공이 확장되는 것을 보기에 충분했다. 트릭스터는 그렇게 죽었다. # 188 [188화] #검은 물 아래 (6) “앤, 엄호를 부탁해요.” 겨울은 괴물의 사체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감각보정의 경고는 사라졌으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이만큼 교활한 괴물이라면 「기만」을 갖추었을지도. 보정은 겨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고로 기술적인 상쇄를 경계해야 한다. 채드윅의 가면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찢어진 목은 치명상이었다. 꿀럭꿀럭 넘치던 피도, 이제는 그저 가늘게 흐르는 한 줄기에 불과했다. 겨울이 조안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조준을 유지하며 잰걸음으로 다가온 그녀. 그러나 생기가 없는 사체를 확인한 뒤엔, 맥이 탁 풀려서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빌어먹을!” 핏빛 손자국이 남아있는 압력문은 잠긴 상태 그대로였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조안나는 인식장치에 카드 키를 꽂아본다. 삑- 경고음과 함께 붉은 신호가 점등될 뿐이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자살을 하다니…….” 문에 기대어 서서, 그녀는 탁한 금발을 쓸어 넘겼다. “이것들의 최우선 목표는 감염을 확산시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극복하거나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문을 열 능력이 없어서? 아니면 여는 즉시 사살 당할 거란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자살할 이유로는 부족합니다. 차라리 최후의 발악을 해보는 편이 나았을 텐데…….” “사람을 꼭 물리적인 방법으로만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이 녀석은 저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성탄전야가 떠오른다. 기지에 잠입하기 위해 일부러 붙잡혔던 트릭스터는, 겨울의 얼굴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어댔었다. 그 시점에서 겨울에 대한 정보가 퍼져있었던 건 아닐까. 보통의 인간보다 경계해야 할, 강력한 적이라고. 아타스카데로의 트릭스터가 죽기 직전 뿜어댄 단말마의 전파. 그것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어 네게 절망과 무력감을 주겠다……. 이런 생각이었을지도 몰라요. 저랑 앤을 해칠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선택이란 판단 하에……. 사람이 희망을 잃으면 끝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죠.” 조안나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말도 안 됩니다. 이것들에게 그토록 고등한 사고가 가능할 리 없어요.” “아마 학습의 결과겠죠.” “학습?” “네. 방역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을 넘었어요. 트릭스터 출현 이후로 따져도 벌써 반년에 가깝고요. 그동안 변종들이 보는 앞에서 희망을 잃고 모든 걸 놓아버렸던 사람이 과연 한 명도 없었을까요? 없기는커녕, 굉장히 많았을 것 같은데요. 보고 배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겠죠. 인간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도 있구나 하고.” “…….” “그러니 앤, 실망하지 말아요. 이 녀석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예요.” FBI 요원이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 사이로 새는 진한 한숨.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에, 겨울은 창백하고 커다란 유해를 다시금 눈에 담았다. 많이 변형되었어도 여전히 인간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악의를 담은 오브제처럼 느껴졌다. 겨울도 두려움을 느낀다. 더는 가을을 기다리지 못하게 될까봐. 그러나 끔찍한 공포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두려웠어. 언제 버림받을지 몰라서.’ 겨울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깊게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매일 밤 잠들기가 무서웠다. 눈 뜨고 나면 부모님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이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하루는 정말로, 밤중에 깨니 부모님이 보이지 않았다. 열한 살이었던 겨울은 가을을 깨우는 대신, 가늘게 떨면서, 침착하게 서랍장 안을 뒤졌다. 가장 안쪽의 작은 상자. 거기엔 금으로 된 반지가 하나 있었다. 소년은 안심했다. 돌아오시겠구나 하고. 나중엔 떨리는 일도 없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겨울이 차분하게 제안했다. “우리 다시 한 번 돌아봐요. 미처 보지 못했던 게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고……. 어쨌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FBI 요원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구역은 조용하고 차가운 풍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환풍기는 가동되었으므로, 피와 죽음의 냄새가 그리 진하지 않았다. 소년과 요원은 낙엽처럼 흩어진 서류와 시체들 사이로 느리게 걸었다. 정말로 무언가를 찾기보다는 생각하기 위한 시간이었기에.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가장자리에 마른 자국이 생긴 피 웅덩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묵묵히 두 바퀴째를 돌기 시작한다. 조안나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혹시나 싶어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테이블을 밟고 올라가 천장의 강도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유사시 완력이 인간 이상인 괴물들을 가둬 두어야 할 시설이니 오죽하겠는가마는. 실험구역 가장 안쪽엔 비상용 발전기가 존재했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엔진을 닮은 형상이었다. 실제 작동방식도 엔진과 다를 바 없었고.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가 위압적인 느낌이었다. 비상시 실험구역에 전력을 공급할 수단이었을 터. 조안나가 아쉬워했다. “저게 벽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가솔린을 태우는 물건이라 별도의 배기관이 선체 바깥까지 이어질 거라고. 그러나 발전기 자체가 선체에 밀착해 있어, 배기관은 어디 붙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발전기, 전력. 겨울의 상념은 소각절차로 이어졌다. 그게 어떤 형식이든, 기폭은 전기신호로 이루어질 텐데. 그 전원을 어떻게 차단할 방법이 없으려나. 전체를 막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이 실험구역으로 들어오는 신호만 막아도…….’ 흠. 겨울은 자살한 괴물의 유해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앤. 트릭스터의 자폭은 분명 스스로에게 과부하를 거는 방식이었죠?” “……?” 엉뚱한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조안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녀석들의 신체기관 일부가 코일처럼 작용한다더군요. 전류와 전압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조직이 팽창, 파열하면서 전자기 충격파가 만들어진다고……. 메커니즘 자체는 재래식 EMP 탄두와 다를 게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죽은 시체에 과부하가 걸려도 충격파가 발생할까요?” “어, 글쎄요…….”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에게 겨울이 막 떠오른 영감을 설명했다. “그런다고 문이 열리지야 않겠지만, 발화장치가 망가질 가능성은 있지 않겠어요? 이곳에서만이라도 소각절차가 지연된다면, 배가 파괴되는 도중에 빠져나갈 기회가 생길 지도 몰라요. 골조가 뒤틀린다거나, 갑판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최소한 즉사는 피할 수 있겠죠.” 선박 전체가 마비되면 가장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트릭스터를 포획한 시점에서 최악의 가능성에 대비했을 테니. 결국 탈출에 실패해, 뜨거워진 공기 중에서 서서히 구워질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는다. 발화장치가 반드시 고장 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성공 여부는 소각절차가 개시된 이후에나 겨우 알게 될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조명이 사라지고 환기마저 이루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점차 짙어지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기다려야 할 터였고. 대답은 짧지 않은 여백을 두고 나왔다. “상상도 못한 발상입니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저는 바깥에서 구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철수인원에서 겨울이 빠졌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챌지 모른다고. 저야 그렇다 쳐도, 겨울은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채드윅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정보국 요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조직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조안나가 헛된 기대를 품은 것은 아니었다. “헌데 압력문의 전원이 끊어진다면 구조 자체가 힘들어질 겁니다. 도움이 조직적이긴 어렵겠죠. 잠재적인 적이 있는데다, 그 실체마저도 불분명한 만큼…….” 전임 감독관의 죽음부터 석연찮은 마당이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협력을 요청하겠는가. 수색은 아마도 단독행동일 것이다. “아니, 해보는 편이 낫겠군요.” 고민하던 조안나가 입장을 바꾸었다. “트릭스터의 사체는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질 테니까요. 지금이 아니고선 불가능해질지도 모르죠.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럼 그 녀석을 여기로 끌고 올게요.” “저도 돕겠습니다.” 정해졌으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소년과 요원은 실험구역의 끝에서 끝으로 뛰었다. 자살한 괴물은 여전한 모습으로 널브러진 채였다. 다만 쏟아진 혈액의 응고가 진행되었을 뿐. 두 사람이 붙잡고 끌자, 사람보다 크고 육중한 유해는 어렵지 않게 움직였다. 걸쭉한 피 웅덩이를 가르고 긴 자국을 남기면서. 흔들리는 사체는 또한 부드러웠다. 사후경직이 진행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이었으므로. 손목과 발목이 조금 뻣뻣한 정도였다. 이후의 과정도 까다로울 것은 없었다.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선을 트릭스터에게 꽂는 것으로 충분했으니. 충격파에 민감한 장비를 은박 바디 백에 집어넣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조안나가 발전기의 제어 콘솔 앞에 섰다. 겨울이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신호하자, 그녀는 시동 레버를 움켜쥔다. “갑니다! 셋, 둘, 하나!” 덜컥. 그녀가 레버를 꺾자, 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발전기에 시동이 걸렸다. 갑판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출력을 나타내는 계기가 최대치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초 남짓. 점등된 신호가 적색에서 청색으로 바뀐 순간- 파지직! 회백색 사체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살아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 겨울은 살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 특수변종의 전신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폭발. 빛이 지워졌다. 발전기의 진동도 사라졌다. 그 공백을 채우며, 어둠은 실험구역 전체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겨울이 바디 백을 뒤져 손전등을 꺼냈다. 달칵. 스위치를 올리자 드러나는 광경은, 전에 한 번 보았다 해도 처참한 것이었다. 안에서부터 터져버린 괴물의 모습. 피에 젖은 뼈와 살점은 겨울에게까지 튀었다. 겨울은 조안나를 위해 길을 비추어주었다. 조심조심 가까워진 그녀가 뒤돌아보며 하는 말. “세상에. 이게 정말로 되는군요. 무사히 탈출한다면 꼭 보고 해야겠어요.” 절반의 감탄이자 절반의 탄식이었다. 박살난 시체를 응시하던 그녀는 곧 자신의 장비를 회수했다. 그 뒤는 겨울의 차례였고. 모든 장비를 다시 착용한 후엔 앉을 곳을 찾았다. 폭파가 예정된 자정까지는 남은 시간이 아직 길었으므로. 고른 자리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여백이었다. 쓰러질 물건은 없을수록 좋았다. 구역이 통째로 붕괴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했기에. 새까만 어둠 속에, 등을 붙이고 앉아 서로에게 기대는 두 사람.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랜턴을 껐다. 최소한의 빛도 없어, 야시경조차 무용지물이었다. 쓰려면 쓸 수야 있을 것이다. 일회용 적회선 조명을 소모해가면서. FBI 요원이 조용히 말했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먹혔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이미 예상했던, 어쩔 수 없는 불안이었다. 조안나는 시간을 자주 확인했다. 거의 1분 간격으로. 자체적인 조명이 내장된 전자시계여서, 그 때마다 희미한 빛이 어깨를 넘어왔다. 기실 거친 실전환경에선 내구성이든 신뢰성이든 전자식이 기계식보다 우월했기에, 겨울의 손목시계 또한 전자식이었다. 시에루 중장에게 선물 받은 시계 역시 가지고는 있지만. FBI 수사관이 애써 투덜거렸다. “시간이 정말 안 가네요. 고등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특별히 싫어하는 과목이 있었어요?” “좋아하는 과목이 오히려 드물었습니다만, 굳이 꼽으라면 영문학과 미술사입니다.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의외네요. 앤은 그런 거 좋아할 줄 알았어요.” “제가요?” 별 것 아닌 말에 억눌린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어두운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사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생일은 언제인지, 좋아하는 음식과 즐겨 듣는 음악은 무엇인지. 지력보정은 겨울에게 이 세계관의 한겨울을 부지런히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보이는 그대로 읊는 경우는 드물었다. 솔직해도 좋을 사소한 정보들. 그때마다 이 세계의 겨울도 갱신되었다. 대화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졌다. “아까 겨울이 화났을 땐 조금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겨울이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래요?” “네. 평소의 겨울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거든요.” 소년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움직임을 느꼈는지, 수사관이 빠르게 부연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지금껏 겨울과 비슷한 사람조차 본 적이 없습니다. 수사관 노릇을 하면서 온갖 군상을 만나, 이제 낯선 유형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도 말입니다.” “…….” “단지, 굉장히 엄격한 면이 있다고나 할까……. 몇 번쯤 무척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음, 잘 설명하기 어렵군요. 죄송합니다. 혹시 불쾌했습니까?” “아뇨, 전혀. 신경 쓰지 말아요.” 불쾌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겨울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대화의 갈피에서 자정이 가까워졌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1시 30분. 조안나가 말한다. “지금쯤 마지막 철수가 진행되고 있겠군요. 자정에 알람을 맞춰두겠습니다.” 떨리는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겨울.” “네.” “괜찮다면, 손을 잡아주겠어요?” 죽음을 각오하는 건 언제든 가혹한 일이다. 겨울은 요원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뒤로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는 순간까지. # 189 [189화] #검은 물 아래 (7) 삐빅, 삐빅, 삐빅- 조안나의 몸이 가늘게 튀었다. 또한 추운 것처럼 떨었다. 새까만 적막 속에서 귀가 예민해진 탓일까. 작은 전자음은 호흡과 더불어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시계는 1분 내내 울었다. 겨울이 느끼는 두려움은 뇌리에 박힌 얼음조각 같았다. 차갑고 뾰족해서 모든 생각을 찔러댄다. 이윽고 다시 정적이 돌아왔다. 사방은 여전히 어둡고 무거웠다. 그러나 실험구역 바깥은 벌써 타오르는 중일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 「생존감각」과 「위기감지」는 어렴풋하고 불안정하다. 어느 쪽이든 겨울 자신의 의심, 불안, 확신에 영향을 받는 까닭. 신경을 자극하는 경고의 허와 실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지나가는 10분과 20분과 30분……. 공기는 아직도 서늘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겨울. 응당 있어야 할 진동과 폭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다른 구획의 화재라도 이토록 조용할 수가 있나? 팽창한 선체가 울고, 배관이 터지고, 환기구를 통해 유독한 연기가 흘러나와야 정상인데. 마침내 새벽 1시가 되었다. 조안나가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잔뜩 지친 목소리였다. 두려운 기다림이 몸과 마음을 소모시킨 탓이었다. “글쎄요. 혹시 충격파에 피쿼드 전체의 전력계통이 나가버린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상황은 말이 안 됩니다. 배를 방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밀이 유출될 가능성도 높아지는걸요. 자체적인 소각절차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즉시 다른 수단을 강구했어야 정상입니다. 십중팔구는 어뢰공격이겠지만요.” “음, 그럼 어떤 이유에서든 철수가 지연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혹은 아예 보류되었을지도……. 정부의 최종해결 방침이 이제 와서 바뀔 이유는 없겠고, 철수 경로의 해저에서 무언가 말썽이 일어난 건 아닐지…….” 구 중국군 강경파와 화평파의 대립은 첨예했다. 양용빈 육군상장과 시에루 해군중장의 갈등. 양대 세력 사이에서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빚어졌거나 하면, 해저를 경유하는 철수는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적대적인 잠수함들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음파를 쏘아대는 해역을, 이쪽과는 무관한 문제라며 태평하게 지나갈 순 없는 노릇이기에. “정말로 누군가 우리를 위해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앤이 기대했던 것처럼.” “…….” 지친 그녀를 위해서는 희망적인 관측이 필요했다. 어떤 예측도 불확실하긴 매한가지였다. “혹시 배고프진 않아요? 지금 뭔가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겨울은 등 뒤의 멎지 않는 떨림을 경계했다. 긴장하는 것만으로 닳아 없어지는 게 체력이었다. 하물며 여기 갇혀있기가 벌써 반나절. 허기와 피로가 없는 편이 비정상적이다. “생각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요. 저는 괜찮으니 겨울만이라도 드세요.” 언제 보급곤란을 겪을지 모르는 군인들이야 전투식량에 포함된 에너지 바를 따로 챙겨 다니는 게 일상이었으나, 단기작전에만 주로 투입되어 온 FBI 감독관에겐 그런 습관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이거 받아요. 막상 기회가 생겼는데도 힘이 부족해서 못나갈 수가 있으니까.” 겨울이 두 개의 에너지 바를 꺼내어 조안나에게 건넸다. 막말로 소각절차 대신 어뢰공격이 이루어져서 선체가 찢어진다 치자. 운이 좋아 눈앞에 폭 넓은 균열이 생긴들, 탈출하는 건 또 다른 기적일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할 터. 부스럭부스럭. 두 사람이 에너지 바의 포장을 벗기는 소리. 이리저리 짓눌린 내용물은 어둠 속에서도 엉망진창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제프리가 보았다면 이거야말로 배설물이라고 감탄했을 것이다. 농담이 저질스러운 소위 또한 두고 온 이야기의 일부여서, 겨울은 씹는 내내 포트 로버츠를 생각했다. 사람을 넘어서는 꿈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꾸었던 곳이었다. 한 개를 다 먹고 두 개째의 절반을 삼켰을 때였다. 「위기감지」의 경고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뭐지?’ 막연한 신호였다. 무언가 일어날 거라고. “겨울? 무슨 일이에요?” 움직임을 감지한 조안나가 물었으나, 불안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대답이 마땅치 않았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요.” 라고 말할 뿐.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겨울은 그녀가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랜턴을 켜고 주위를 살폈다. 광적응이 괴로운지 눈살을 찌푸리는 FBI 요원. 그러나 그녀 또한 자신의 랜턴을 사용했다. 두 줄기 빛이 비추는 풍경은 처음과 같았다. 다가오는 위협이 무엇이든, 그 근원이 실험구역 내에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혹시 어뢰? 아니면 소각절차가 시작되기라도 했나?’ 생각하는 순간, 쿠우우웅- 방향이 없는 굉음. 보이는 모든 것이 흔들렸다. 요란하게 쏟아지고, 부딪히고, 날아오르는 사물들. 편향된 관성 속에서 갑판이 발을 쳐내는 듯 하여, 겨울조차 중심을 잃을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넘어진 조안나가 경사에 삼켜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타악, 탁, 탁. 그녀가 놓친 랜턴이 사방으로 빛을 뿌리며 멀어졌다. “무슨……?!” 비틀거리며 일어선 조안나는, 통째로 구부러진 갑판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이 와중에도 여진처럼 계속되는 진동은 배를 통째로 갈아대는 느낌이었다. 끼우우우웅- 끼기기기긱- 선체가 높고 날카롭게 우는 소리. 고통스러울 정도의 음량과 음계여서, 귀를 막고도 고통스러워하는 조안나의 모습. 겨울도 크게 나을 게 없었다. 진동이 지나간 뒤엔 배가 한 차례 크게 출렁거렸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높은 굉음 대신, 몸 깊은 곳까지 공명하게 만드는 낮고 불길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조안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건……. 아무래도 배가 깨진 모양입니다!” 폭포를 닮은 소리는 곧 보이지 않는 곳의 침수였다. “빠져나갈 곳이 있는지 찾아봐요!” 겨울은 입구 방향으로 뛰었다. 한 쪽 방향으로 작용한 충격, 편향되어있었던 관성으로 말미암아, 갑판은 우에서 좌로 밀린 형상. 즉 외부 선체보다는 내부 골조와 격벽 쪽에 이상이 생겼을 공산이 컸다. 특히 서로 강도가 다른 문과 벽 사이에. ‘아무래도 어뢰는 아닌 것 같은데.’ 최초의 충격 뒤에 이어진 금속성의 마찰음을 감안할 때, 배수량이 적잖은 배가 피쿼드를 들이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그게 말이 될까? 피쿼드 주변은 온통 주거지역으로 막혀있건만. 이물과 고물과 뱃전을 맞댄 무수한 배를 뚫고 피쿼드까지 닿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빛이 보입니다!” 조안나의 말대로, 크고 육중한 압력문과 그 틀이, 그보다 얇은 격벽을 구겨놓은 모양새였다. 어느 쪽이든 무척이나 두꺼웠으나 그럼에도 비중과 재질의 차이가 있었던 것. 덕분에 부서지다시피 접힌 벽과 문틀과 갑판의 세 면 사이로 좁고 깊은 여백이 생겨났다. 새어 들어오는 조명을 보건대 전자기 충격파는 실험구역을 빠져나가지 못한 듯 하다. ‘애당초 실내에서 터진 만큼, 방호를 하지 않았어도 범위가 좁았겠지만.’ 중계기가 없으면 전파조차 갇히는 선체였다. 실험구역은 갑판 한 층의 절반이었다. 고로 다른 구획과 닿은 격벽은 한 면이 전부였다. 문의 좌우를 길게 살펴도 빛이 들어오는 건 이곳뿐이었다. 겨울의 강화된 감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달라지는 갑판의 기울기를 느낀다. 약해진 곳을 꼼꼼히 탐색할 시간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네요. 조금 좁긴 하지만……. 장비를 벗고 시도해봐야겠어요.” “…….” FBI 요원은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겨울이 장비를 먼저 저편으로 던진 뒤,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좁은 폭 그 자체보다도 예리하게 찢어진 격벽과 깊이가 위험했다. 곳곳이 거칠고 예리하다. 차라리 칼날에 베이는 게 나을 만큼. 적어도 후자는 상처가 깔끔하게 남을 테니. 지직. 억센 옷이 긁히는 소리. 소년은 조금씩,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최대한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뚝에 상처가 생겼다. 전투복이 뜨겁게 젖었다. 살 속으로 파고든 깊이와 형태를 기억하며 다시 움직이는 겨울.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수시로 몸을 비틀고, 사지를 펴보고, 손으로 더듬어본다. 덕분에 완전히 통과하기까지 몇 번을 더 찔리고 베여야 했지만. 보안실을 사이에 둔 또 하나의 문은 열려있는 채였다. 장비를 착용한 겨울이 틈을 사이에 두고 FBI 요원을 마주보았다. “앤. 도폭선이랑 폭약, 아직 가지고 있죠?” “그렇습니다만, 이 모서리들을 다 뭉개기에는…….” “가장 위험한 것들만 어떻게 해보자고요. 통과할 때 일일이 확인했으니까.” 체형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이 말에 조안나의 입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어요?” “네.” 그리고 겨울은 가장 깊게 찌른 모서리들을 순서대로 짚어보였다. 겉만 봐서는 구분하기 어려운 차이였으나, 몸을 끼우고 비비며 지나갈 땐 확연히 달랐다. 폭약 설치는 금방이었다. 번쩍. 검은 틈이 한 순간 하얗게 발광했다. 폭압과 연기가 빠진 뒤에 확인한 틈새는 전과 거의 같았으나, 적어도 치명적인 일부분은 확실하게 무뎌졌다. 여기에 자잘한 요철을 몇 차례의 사격으로 뭉개놓았다. “자, 넘어와요. 어떻게 움직여야 가장 적게 베이는지 알려줄게요.” 아무리 눈으로 봐둬도 실제 통과할 때의 감각에 미치지는 못한다. 재수 없게 허벅지라도 잘못 다쳤다간 동맥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이 냄새는 설마…….’ 모든 빛이 위태로이 깜박이는 복도 저편으로부터, 감각보정 없인 감지하기 힘겨울 만큼 희미하게, 두 종류의 악취가 밀려왔다. 썩은내와 비린내. 어느 쪽이든 익숙하다. 익숙해서 더 크게 우려된다. 전자는 감염변종 특유의 독한 체취였고, 후자는 때 이른 위협이었기에. ‘아니야. 뒤쪽은 지나친 걱정일 거야.’ 모든 것이 썩어가는 바다에서 비린내는 드문 것이 아니다. 해상도시에 공급되는 식량은 공수물자 이상으로 어선의 어획량이 많았으므로. 배와 배 사이에 줄을 당기고 생선을 걸어 말리는 풍경은 일상적이었다. 배 안에서까지 그 냄새를 맡게 된 게 뜻밖이었으나, 선체가 깨졌으니 바깥바람이 들어올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쿠웅, 쿵. 격렬하지만, 아까보다는 작은 충격이 연달아 발아래를 흔들었다. 날카로운 균열에 막 몸을 넣은 참이었던 조안나가 가늘게 신음했다. “괜찮아요?” “별 거 아닙니다. 흔들리는 통에 조금 찔렸을 뿐.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군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확산된 감염, 폭주하는 해상도시. 이건 탈출의 기회라기보다 또 한 번의 위기라고 봐야 한다. 겨울은 자신의 짐작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직 감염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대신 그녀가 무사히 나오도록 돕는데 열중한다. 복도 저편을 경계하면서. “거기서 상체를 왼쪽으로 틀어야 돼요. 조금 더, 조금만 더. 네, 그 상태로 반 뼘만 나와요.” 쿵! 또다시 선체가 요동쳤다. 대각선으로 점점 기울어서, 이제는 그 경사가 확연할 정도였다. “이제 팔꿈치로 몸을 밀어요. 제가 당겨줄게요. 조금 아플 거예요.” “으윽.” 아예 다치지 않고 나올 순 없었다. 조안나는 여러 차례 끼었고, 그 때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기울기를 따라 흘러나오는 피는 갈수록 많은 줄기가 되었다. 몸의 절반이 빠져나온 시점에서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골반 아래를 수월하게 빼내는 그녀. 한숨과 함께 이마를 훔치고, 방탄복과 조끼를 몸에 걸친다. 그녀는 잠깐 폐쇄회로 카메라를 의식했다. “감시를 피하기보다는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낫겠습니다.” 겨울도 동감이었다. 예상이 맞으면 맞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상황실은 다른 쪽으로 바쁠 것이다. 채드윅이 남아있다 쳐도 수작을 부리기 어렵겠고. 오히려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편이 낫다. 일반적인 교전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길을 되짚어 오르는 도중에, 겨울이 주먹을 들었다. 정지. 난간과 계단의 틈새로 늘어지는 빛과 그림자. 위쪽 층계참으로부터 늘어진 그림자는 홀로 선 사람의 형상이었다. 이쪽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캉, 캉, 느린 속도로 내려온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조안나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Oh, God.” 탕! 겨울의 단발사격이 블루 스컬 타격대원이었던 변종의 머리를 관통했다. 선체 벽에 팍 튀는 피와 뇌수. 겨울의 시선이 시체를 빠르게 훑었다. 비교적 깨끗한 피부는 사람이었던 시절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변질된 피가 흐르기 시작한 혈관이 피부 위에서도 선명한 만큼, 사람과 혼동할 여지는 없었다. “감염 이후 경과한 시간은 대략 서너 시간 남짓이겠네요.” “맙소사. 외곽 경계가 뚫렸나보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피쿼드는 해상도시 외곽에서 안쪽으로 꽤 들어온 위치에 있었다. 감염이 여기까지 번진 상태라면,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을 터. 이제 겨울과 같은 예측에 도달한 요원이 온 몸으로 전율했다. # 190 [190화] #검은 물 아래 (8) 두 사람은 화기에 소음기를 결합했다. 피쿼드는 빠르게 침몰하고 있었다. 고작 중층에서 상층 갑판까지 층계를 오를 뿐인데, 그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층계참에서 계단이 꺾어질 때마다 경사가 달라지는 탓이었다. 계단의 절반이 점차 완만해진 반면, 남은 절반은 갈수록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야 했다. 끼우우우웅. 배가 지진 맞은 건물처럼 흔들렸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아니었다. 진동이 낮아진 뒤엔, 물 쏟아지는 소리가 전보다 거세어졌다. 갑판 아래 어딘가가 압력을 못 이겨 찢어진 모양. 층계를 다 오른 조안나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큰일이군요. 방수격벽이 아직 열려있는 것 같습니다. 생존자를 찾아볼 시간이 있을지…….” 이중선체가 깨지더라도, 격벽만 제때 닫으면 침몰할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철수가 거의 다 진행된 시점에서 파손 위치에 사람이 있었을 리 없고, 내부 감염으로 인해 상황실에서도 정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듯 했다.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나가는 길을 살펴보는 겨울과 조안나. 상층갑판은 아래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여러 번 경험했던, 그러나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소란이 복도에 메아리친다. 캬아악, 캬악! 쾅쾅쾅! 굶주린 것들이 갈급하게 문을 두드려 대는 요란한 소리들. 좁은 길이 아우성치는 시체들로 꽉 막혀있었다. 언뜻언뜻 비치는 면면들이 예외 없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안에 누군가 갇혀있는 걸까. 조안나에게 신호를 보낸 겨울이 세열수류탄을 꺼냈다. 틱. 지연신관이 점화되는 소리. 바로 던지지 않고 심지가 타들어가기를 기다린다. 터지기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는 수단은 「위기감지」와 「생존감각」의 연동이었다. 이대로 들고 있으면 언제 죽는가. 경고가 급격히 비등하는 순간, 겨울은 1초 후의 폭발을 집어던졌다. 수십 개의 머리통 위에서 수천 조각의 파편이 터졌다. 난폭한 굉음이 좁고 긴 여백을 휩쓸어, 여파만으로 천장의 조명이 줄줄이 깨져버렸다. 폭풍이 지나가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을 때, 멀쩡히 서있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일 뿐. 그냥 던지거나 바닥으로 굴렸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파편이 뿌려져도 몸통 하나 관통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훌륭합니다. 저 많은 수를 단 한 발로 정리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조안나가 확인사살을 가했다. 애초에 좋은 실력이었건만, 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해졌다. 심지어 지쳐있는 상황임에도. 얼마나 많은 연습이 있었을까. 아마 불안을 억누르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지. 이제 죽은 것들이 두드리던 문 앞에 선다. 갇힌 것은 생존자인가? 쾅쾅쾅. 안에서 바깥으로 두드리는 소리는, 밖에서 굶주린 것들이 두드리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혹시나 싶어 문 너머로 던진 질문에 거친 대답이 돌아온다. 캬악, 캭! 전후사정은 쉽게 그려졌다. ‘들어가서 문을 잠갔으나, 그 전에 이미 물려있었던 거겠지.’ 자살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설령 괴물이 될 게 뻔하더라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무의미한 1초라도 더 살아 숨 쉬고 싶은 마음. 겨울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심리였으나, 많이 보아온 경험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때론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일 수 있다고. 무장한 시체들로부터 탄약과 수류탄을 회수한 조안나가 겨울의 몫을 건넸다. “그냥 지나가는 게 어때요?” 그녀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문 옆으로 붙었다. “채드윅일지도 모르잖아요.” 요원은 수긍했다. 비밀이 많은 인물이다. 애국자들과 이어지는 단서, 혹은 그 외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책임자이기에 철수 순서도 가장 마지막인 사람이었고. 문을 열지 못하는 걸 보면 저편에 있는 변종은 평범한 녀석일 것이었다. 겨울이 무기를 교체했다. 권총을 들고, 문고리를 비틀었다. 덜컹! 열기 무섭게 가해지는 충격은 성인의 체중과 역병의 근력이었다. 그러나 일반변종으로선 겨울이 버티는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여기에 조안나까지 가세했으니. 크에에엑! 소음기가 들어갈 만큼만 벌어진 틈으로, 창백한 손가락만 기어 나올 따름이었다. 바깥 공기에 굶주린 사람처럼, 충혈 된 눈으로 문틈에 달라붙는 변종. 그러나 기대하던 채드윅은 아니었다. 숨 쉬는 시체가 방탄복을 입었어도 얼굴만은 무방비했다. 겨울은 따다다닥 부딪히는 이빨 사이를 조준했다. 툭! 둔탁한 총성이 곧 역병 환자의 안락사였다. 추가로 밀어붙이는 괴물은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람의 목소리는 있었다. “세상에! 한겨울 중위! 깁슨 감독관! 우리를 구하러 온 겁니까?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탤벗 요원?” 올리버 탤벗은 선실 내 책상 아래로부터 다른 요원 한 명과 함께 기어 나왔다. 여기에 로커에 숨어있던 다른 한 명까지. 괴물과 같은 밀실에 갇혀있던 생존자가 셋이나 된다. 그냥 지나가자고 했던 조안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거기 있었던 거예요?” “네 시간 째입니다. 그러는 두 분은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다른 지원 병력은요?” “돌아오다니……. 우리는 이 배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탤벗이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2차 철수에 포함되셨다고 들었는데.” “오, 정말요? 채드윅이 그러던가요?” 정보국 요원답게 탤벗은 눈치가 빨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하자면 깁니다. 일단 당신은 그 사람의 비밀을 모르는 것 같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서둘러 움직이고 싶은데 불안요소를 뒤에 두긴 싫거든요.” 이 순간에도 바다가 포경선을 삼키는 중이었다. 갑판이 많이 기울어서, 몸을 숙이지 않으면 중심을 잃을 만큼. 조안나의 날선 경고에 대하여, 두 사람의 반응은 겁먹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도리질 칠 뿐. 가만히 노려보던 조안나가 한숨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겠군요. 겨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동감이에요. 혐의가 있어도 산 사람을 버리고 갈 순 없잖아요. 위협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행정요원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세 명이 변종 하나를 피해 숨어있었던 시점에서 전투력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만에 하나 딴 마음을 먹더라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숙한 인원의 정면사격은 겨울의 후방사격보다도 한참이나 느리다. 애초에 겨울 없이 살아나갈 자신이나 있을까? 동료가 변이되는 순간에 처리할 능력도, 대범함도 없었던 자들이. 안전한 곳에 이르기까지는, 경계심을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겨울의 질문. 상황실 상주인원 중엔 안면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두 사람도 마찬가지. “숀 터커입니다.” “사만다 G. 켈리입니다.” 끄덕인 겨울이 시체 쪽으로 고갯짓했다. “좋아요. 터커 요원, 켈리 요원. 일단 무장해요.” 각자 권총을 휴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탄약이 있었다면 갇혀있을 이유가 없었으리라. 여기로 도망치는 중에 모두 소진한 듯 하다. 타격대원이었던 변종의 시체가 많았으므로, 조안나가 한 번 챙기고도 충분한 무기와 탄약이 남아있었다. 무전기와 야시경 등, 손상되지 않은 전자장비들을 포함하여. 겨울의 지시에 허겁지겁 따르는 터커와 켈리. 하지만 손만 바쁘지 실속이 없었다. 통로 방향을 경계하던 조안나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책상물림들이란. 만지는 정도로 안 옮습니다! 서둘러요! 빠져 죽고 싶습니까?” 만지는 것조차 거부감을 보이는 수준이면, 브래들리에서의 리아이링이나 마찬가지였다. 탤벗은 그나마 나았다. 현장요원에 필적하는 속도로 무장을 갖춘다. 그러나 자신감하고는 별개였다. 아무리 훈련을 쌓아도 닿을 수 없는 현장경험의 공백. 그것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만날 때마다 보았던 여유로움은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탤벗 요원. 말해 봐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재개된 이동의 와중에 조안나가 추궁했다. 마침 겨울도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감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해지고 안개가 끼어 보이는 게 없을 때였습니다. 멀리서 비명이 들려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7차 철수 인력을 받던 잠수함 쪽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갑판으로 무언가 올라왔지요. 일단 배 안으로 긴급 대피했습니다만, 어찌된 건지 내부에서도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켈리 요원이 떨리고 더듬는 말을 보탰다. “저, 정말 순식간이었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혼자였어요. 터커를, 탤벗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겠으니까 총구 이쪽으로 겨누지 마십시오. 목소리 낮추고요. 돌아버리겠군.” 조안나의 소리죽인 반응이 여전히 날카롭다. 그러나 지치고 닳았는데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상황에선 욕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다시 움직이는 도중 갈수록 깜박이던 조명이 완전히 나갔다. 조안나가 말했다. “적외선 조명을 쓰겠습니다. 모두 야시경 착용해요.” 남은 길은 길지 않았다. 그것을 바뀌는 공기로도 알 수 있었다. 냄새도 냄새지만, 높아지는 습도는 곧 바깥에서 밀려들어오는 안개였다. 워낙에 짙어 숨쉬기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외부 갑판으로 나서는 문에 이르러 지키던 변종 둘을 사살하고, 겨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겁먹은 터커가 조심스레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친한 사이셨습니까?” “아뇨. 아무래도 우리가 상대해야 할 녀석이 새로운 특수변종인 것 같아서요.” “네?” “시체에 남은 상처를 봐요.” 소년이 사체 두 구를 가리켰다. 감염의 원인이 된 상처가 독특했다. 위아래의 이빨이 두 줄로 나있었다. 상처의 냄새를 맡아보면 아직도 독한 비린내가 남아있었고. ‘뮤테이션 코드 「멜빌레이」. 아까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해상도시에서 이 괴물과 싸워야 하나. 안개와 바다의 상승작용이 바다괴물에게 최적의 사냥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다못해 이 배, 피쿼드라도 멀쩡하면 지형과 높이의 이점이라도 살리겠으나……. 쿠웅! 피쿼드가 요동쳤다. 갑판 저편, 안개 너머에서 붉은 빛이 뭉그러졌다. 작은 배하나 부딪혀 폭발한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각적인 혼돈이 모든 방향에서 밀려왔다. 비명과 고함, 살기 위한 아우성, 총성, 포성, 폭음, 충돌음, 그리고 깨애애애액! “그, 그냥 기형이 아닐까요? 아니면 크고 작은 녀석 둘이 같은 자리를 깨물었다던가…….” 이러는 터커에게 조안나가 대꾸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너비부터 정상이 아니잖습니까. 서로 다른 녀석이 깨문 것이라고 보기엔 치열의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하고요.” 잇자국의 폭이 한 뼘을 넘는다. 사람을 씹지도 않고 삼킬 그럼블 보다야 못하겠으나, 적어도 트릭스터보다는 입이 큰 녀석이란 증거였다. 기형 따위일 리가 없다. 무엇보다 겨울은 비효율적 형상의 기형변종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겨울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상처의 냄새를 맡아본 조안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비린내?” “단정 짓기는 이르지만, 수중활동에 최적화된 특수변종이겠죠.”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근거가 냄새 하나뿐이니. 겨울로서는 아는 것을 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당장이야 도움이 되겠으나, 살아나간 뒤가 문제일 것이다. ‘예언자나 초능력자 취급을 받고서 끝이 좋았던 적이 없어.’ 퉁탕퉁탕. 캬아아악! 갑판을 내달리는 굶주린 것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 연사로 긁는 총성과 함께 어둠과 안개가 번개 치듯이 번쩍거렸다. 탤벗이 입술을 씹었다. “젠장! 정말 새로운 특수변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보는 게 겨울이었다. 그럼블을 처음으로 사냥하고, 트릭스터 또한 사전정보 없는 조우전으로 처리한 전적이 있으므로. 하지만 이만큼 무의미한 질문이 있을까. “변종이 있든 없든 급한 건 탈출이에요. 핵공격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 있어요?” 정황상 최종해결이 실행될 것은 확실했으나, 그 시점은 아직 언질이 없었다. 위에선 그저 철수명령을 내렸을 뿐이었고. 혹여 정보국 요원들은 다른가 싶어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켈리 요원이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언급했다. “채드윅 팀장이나 코왈스키 요원이라면 알 것도 같습니다. 팀장이야 지부장급이고, 코왈스키는 통신보안담당이라 오가는 전문들을 검수하니까요.” “어디 있는지는 알고요?” “……모릅니다.” 긴장해서 판단력이 마비된 건가. 지금으로선 쓸모없는 말들뿐이었다. 어느새 경사가 30도에 가까워졌다. 선수가 들린 배는 금방이라도 가운데가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 191 [191화] #검은 물 아래 (9) 있는지도 모를 추가 생존자를 찾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정확하게는 남은 시간을 알 수 없었다. 갑판이 언제까지 인장응력을 견뎌내겠는가. 한 번 파열되기 시작하면 배는 삽시간에 찢어질 것이었다. 침몰하는 선체가 물과 사람을 동시에 빨아들이겠지. 겨울은 미련을 접었다. ‘소설 같은 결말만은 피해야해.’ 「모비 딕」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조용히 따라와요. 일단 보트를 확보하겠습니다.” 이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린 겨울이 앞장섰다. 철컥.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조안나가 문을 닫는 소리. 이것만으로도 내부의 변종들을 가둬두기엔 충분했다. 밖으로 나오자 시계(視界)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야시경이 제공하는 한정된 시야에서, 적외선 조명에 비춰진 안개는 화면에 낀 백색의 노이즈 같았다. 어떤 면에선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못한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야시경을 벗지 않는다. 나안으로 본답시고 평범한 조명을 쓰게 되면, 밝아진 안개가 갑판의 모든 변종들을 불러들일 것이었다. 불균형한 갑판은 희뿌연 밤바람에 젖어있었다. 번들거리는 겉면이 미끄럼틀과 같아, 겨울 이외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는 편이 안전했다. 줄사다리가 있는 곳까지. 끼에에엑-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변종 하나가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으악! 켈리 요원이 비명을 지른다. 발작 같은 사격은 덤. 마구 쏘아댄 총탄이 모조리 빗나갔다. 괴물이 일어서려는 순간에, 겨울은 머리가 아닌 무릎을 쏘았다. 빡! 슬개골을 부수고 십자인대를 끊어버리는 사격. 중심을 잃은 괴물이 뒤로 넘어졌다. 캬약, 캬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굴러 내려가는 녀석. 겨울은 손을 뻗어 이어지는 사격을 막았다. 조용해져야 할 순간이었다. 역시나, 굴러간 놈의 괴성이 다른 변종들을 끌어들였다. 안개 저편에서 검은 실루엣들이 휙휙 지나간다. 쿠웅, 쿵!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함교에 부딪히는 소리들. 밤눈이 어둡기는 놈들도 매한가지였다. 벽은 안개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겨울이 수류탄 핀을 뽑아 낮게 던졌다. 놈들의 발 아래로 알아서 굴러가라고. 번쩍. 섬광과 폭음이 안개를 후려쳤다. 물 먹은 어둠이 훅 밀려나는 틈에, 분노한 핏빛 아우성들이 수도 없이 겹쳐져 들려왔다. 웅크린 채 가쁜 숨을 쉬던 요원들이 몸서리를 친다. 난간에 묶어둔 줄사다리는 비스듬한 만큼 위태로웠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매듭을 다시 묶어야 했다. 아래, 사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물결치는 새까만 바다가 겨울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제한적인 「기척차단」이 문제인데……. 초인적인 영역의 감각보정이 아닌 이상, 수중의 멜빌레이를 물 밖에서 감지하진 못한다. 그런 만큼 습격의 전조는 확실한 편이다. 움직임을 따라 반드시 하얀 거품이 올라온다. 즉 이것들을 상대할 땐 감각보정의 경고보다 스스로의 눈과 귀를 믿으라는 뜻. 그러나 역시 환경이 좋지 않았다. 이 어두운 바다엔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가 떠다녔다. 게다가 놈이 한 자리에서 매복하는 경우엔 그 흔적마저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겨울이 사다리에 매달렸다. “먼저 내려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불빛 신호를 보낼게요.” “조심하십시오. 엄호하겠습니다.” 탤벗의 말과 함께 두 개의 총구가 아래를 겨누려 한다. 그러나 겨울 입장에선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물 위로 몇 미터씩 솟구치는 괴물을 상대하기엔 부족한 실력들. 믿을 만 한 사람은 조안나 뿐인데, 그녀는 정보국 요원들을 지켜줘야 한다. “엄호는 없어도 돼요. 다른 분들은 갑판을 경계하시고, 켈리 요원은 제 신호를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이들도 눈치는 있다. 탤벗을 위시한 셋이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겨울은 사다리 양쪽을 붙잡고 미끄러졌다. 3초 만에 내려와서는, 작고 빈 배들을 한 줄로 엮어 만든 가설부두에 발을 내딛는다. 좌우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는 숨 막히는 무지(無知)였다. 빠아아아아앙- 거대한 뱃고동 울림에 고막이 지끈거린다. 얼마나 큰 배일까. 또 얼마나 가깝게 지나가는 걸까. 처얼썩, 부딪히는 물결이 겨울의 발아래를 흔든 것은 그로부터 십여 초가 지난 후였다. 파고(波高)에서 역산한 배의 배수량은 적어도 만 단위. 어쩌면 십만 톤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시작으로 각기 다른 기적 소리가 사방에서 경쟁적으로 울려 퍼진다. 내 침로에서 당장 벗어나라는 경고들이었다. 하지만 이 안개 속에서 무슨 수로 서로를 본단 말인가? 크고 작은 충돌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겨울은 기름 냄새가 나는 파도 사이로 나아갔다. ‘최소한 보통의 변종은 없는 것 같네.’ 부두를 이루던 배다리는 피쿼드 현측 50미터 지점에서 끊어졌다. 그 앞의 거주구역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박살난 상태. 집으로 쓰이던 배의 파편들과 더불어 무수한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나마 찾던 보트가 멀쩡해서 다행. 이는 오르카 블랙이 해상도시의 물길을 순찰할 때 쓰던 소형선이었다. 슈르르르-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가 스쳤다. 겨울이 바싹 엎드렸다. 그리고 뱃전 밖으로 눈만 내밀었다. 어디냐. 긴장감 속에 살피는 왼쪽 물결, 약 10미터 거리의 수면이 하얗게 부글거렸다. 그럼 다른 녀석은? 멜빌레이는 단독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둘 이상이 움직이고, 하나만 남게 되면 다른 무리를 부르거나 달아나는 습성을 지녔다. 과연, 가까워지는 또 한 줄의 궤적이 보였다. 그것은 얕은 심도에서 어뢰가 항주하는 흔적을 닮았다. 천천히 원을 그리는 한 쌍의 바다괴물들은 검은 물 아래의 악령 같은 형상이었다. ‘싸워볼까? 아니면 「탐색」을 마치고 떠나기를 기다릴까?’ 겨울이 갈등했다. 문제는 장비였다. 소총으로는 화력이 부족해서. 두껍고 질긴 몸뚱이에 물을 채우고 다니는 놈들이라, 일반적인 소총탄(5.56mm)은 연사로 갈겨도 박힐까 말까였다. 대물저격총이 있으면 한 방에 보내버릴 텐데. 겨울의 시선은 보트로 옮겨갔다. 갑판에 설치된 중기관총이면 솟구치는 멜빌레이를 갈가리 찢어버리기가 가능할 터.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조준에서 발사까지 2초 미만이어야 하지만, 그 정도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겨울은 놈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철판을 자르는 이빨과 치악력으로 보트를 물어뜯어도 곤란하니까. 최소한 보트가 움직이는 중에는 그럴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땐 정말로 물을 벗어나는 녀석만 갈아버리면 되겠지. 잠시 후 한 녀석이 그리던 원을 벗어났다.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것처럼, 남은 한 놈의 궤적이 휘어지며 같은 방향으로 수렴된다. 멀어지는 속도는 지상에서 인간이 달리는 수준을 월등히 능가했다. 녀석들의 수중 이동은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콰앙! 끼기기기- 또 다시 배와 배가 부딪히는 굉음. 자잘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따르는 걸 보니, 체급 차이가 엄청난 모양이다. 겨울이 갑판 위로 빠르게 신호를 보냈다. 한 손으로 랜턴 앞부분을 원통처럼 감싸 빛이 한 방향으로 가게 만든 후, 다른 손으로 그것을 열고 닫는 방식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바쁘게 내려오는 건 켈리 요원부터였다. “앞길에 변종은 없어요! 어서 가요! 보트까지! 뛰어요!” 놈들이 다시 오기 전에. 겨울의 재촉을 받고 그녀가 황급히 달린다. 그러나 안개 저편의 폭주로 인해 부두가 계속해서 출렁거렸으므로, 금세 위태로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뱃전과 뱃전 사이를 넘는 순간, 휘청. 따라잡은 겨울이 팔을 붙잡았으나 한쪽 다리가 빠진 뒤. 꺼내보니 젖은 바지에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팽개쳐진 무기가 가까스로 뱃전에 걸렸다. 요원의 얼굴에 수치심이 번진다. “괜찮아요. 계속 가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겨울은 즉시 다음 사람을 붙잡았다. 이번엔 터커 요원이다. 차례차례 잘도 넘어지는구나. 아무리 달리라고 했다지만, 평지에서처럼 뛰려고 하다니. 탤벗이 통과한 다음 마지막으로 조안나가 내려왔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였다. “무슨 일이에요?” 겨울이 묻자,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가 하는 말. “상황실에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구조신호?” “네. 창밖으로 레이저를 쏘더군요. 브리핑에 쓰던 물건 말입니다.”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모스 부호였어요. SOS.” 그녀가 망설였던 이유는 분명했다. 이 상황에 과연 구조가 가능한가. 상황실은 함교의 최상층이고, 거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엔 못해도 일이십 분 이상 걸릴 것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조안나는 그런 의미로 고통스러워했다. “죄송합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는데.” “아뇨. 제가 다녀올게요. 먼저 보트로 가세요.” “네?” 겨울의 즉각적인 대답은 조안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반대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적어도 당신 혼자 보낼 순 없어요. 같이 가겠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잠깐이면 될 거예요. 계단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무슨…….” “배가 기울었잖아요. 함교 전면을 달려서 올라가려고요.” 피쿼드의 선체와 해수면 사이에 낀 예각은 이제 약 35도에 달했다. 그 말은 즉 수직으로 서있던 함교역시 55도로 드러누워 있다는 뜻. 7층 높이라고 해봐야 채 20미터도 되지 않는다. 매끄러운 표면이 또한 젖어있기도 하겠으나, 「무브먼트」 15등급이면 극복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얼른 가요. 가서 문을 잠그고 조용히 기다려요. 물 아래 뭔가 다니는 걸 봤으니 불은 켜지 말고요. 보이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금방 다녀올게요. 겨울의 약속에 조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짧은 망설임이었다. “알겠습니다. 이걸 가져가세요. 필요할 겁니다.” 건네주는 것은 앞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플라스틱 폭약이었다. 시체에서 회수한 폭발물 가운데 도어 브리칭 키트가 있었던가 보다. 폭약을 준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뛰었다. 흔들리는 배다리 위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겨울은 사다리를 신속하게 올랐다. 갑판은 내리막길이었다. 아직까지도 어딘가에서 변종들의 신음과 괴성이 들린다. 겨울이 보이지 않는 함교를 향해 질주했다. 정확하게는 광선이 나오는 방향으로. 밀도 높은 안개에 한 줄기 붉고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깜박, 깜박. 길고 짧은 주기로 점멸하는 그것은 간절한 구조요청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를 잘 썼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실내에서는, 변종들이 빛줄기를 볼 수 없을 테니. 바깥 공기의 수분이 빛을 산란시키고서야 드러나는 신호인 것이다. 꺾이는 오르막을 거쳐 상황실 유리창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초 남짓. 캬아아아악! 상황실을 점령한 괴물들이 소년을 발견했다. 안쪽에서 방탄유리를 두들겨댄다. 그 무수한 손짓이 내부관찰을 방해했다. 유리창에 폭약을 부착하고 거리를 확보하는 겨울. 이제 유선으로 이어진 기폭장치를 힘주어 누른다. 쾅! 두꺼운 유리가 터지면서 반짝이는 파편들이 괴물들의 낯짝을 휩쓸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들이 파열된 안구로부터 피눈물을 흘렸다. 여기로 돌입한 겨울이 멀쩡한 놈부터 사살한다. 두둑! 둑! 두두둑! 눈 먼 변종이 막무가내로 몸을 던질 때는 군홧발로 배를 걷어찼다. 그것만으로 경사를 따라 한참을 굴러버리니까. 그렇게 시간을 벌고 재장전. 철컥. 빠진 탄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재개된 사격으로 아홉 놈을 죽이고 나니 더 이상의 위협은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폭발부터 최후의 사살까지 걸린 시간은 30초 미만. 키에에에에- 이곳의 소란을 들었는지 아래층으로부터 떼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도달하기 전에 빠져나갈 생각이지만. 겨울은 광선이 낯익은 곳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상황실과 별도로 분리되어있는 통신실. 문 열고 나오는 이도 낯익었다. “코왈스키 요원?” 겨울을 발견한 요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기쁨에 물들었다가, 잠깐 동안 흔들렸다. 좌절감? 어째서? 생각하던 겨울은 그럴 만 한 이유가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묻는 말에 코왈스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혼자예요. 나머지 요원들은 모두…….” 슬픈 얼굴로 쓰러진 변종들을 일별하는 그녀. 더는 움직이지 않는 남녀 모두가 CIA 요원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채드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컹철컹. 변종들이 층계에 매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겨울이 코왈스키를 조준했다. “중위님? 이게 무슨…….” “이유는 알고 있을 텐데요.” 확증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가 내비친 좌절감이 미심쩍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채드윅이 그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선 역시 통신보안 담당자의 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켈리 요원도 말하지 않았던가. 오가는 전문들을 모두 검수한다고.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기반시설이 파괴되거나 정지된 지금, 모든 통신은 위성궤도를 거친다. 즉 비공식적인 통신망을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예전의 그 일만 봐도 채드윅이 신뢰하는 사람인 건 사실이고.’ 그래서 걸어보는 블러핑이었다. 크아아아악-! 캐액! 그르르르! 시기적절하게 메아리치는 역병 무리의 자기주장이 요원을 한층 더 흔들어놓았다. “채드윅 팀장님이 나불거린 건가요?” “…….” “하아, 정말. 그 괴상한 성격이 죽어서도 말썽이라니. 갇혀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기적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죽는구나.” 절망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급격히 오르내린 그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울었다. 채드윅은 죽은 건가. 아니면 죽었다고 짐작하는 건가. 겨울과 조안나를 가두는 일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는데, 하지 않는다. 달리는 열차에 중립은 없다고 여기는 까닭일까? 가만히 지켜보던 겨울이 조준을 풀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두세요.” “……살려주시는 건가요?” “네. 하지만 두 번째의 배신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코왈스키의 눈이 흔들린다. 겨울이 뚫린 창을 향해 손짓했다. “사법거래든 뭐든, 나머지 이야기는 무사히 탈출한 뒤에 하죠. 일단 나와요.” 증인이 있다면 진정한 애국자 운운하는 집단의 실체를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과 타산 사이의 균형점이었다. 세계관의 불안요소 하나를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하여. # 192 [192화] #검은 물 아래 (10) 보트로 돌아온 겨울은 갑판 위의 조안나를 발견했다. 거치된 중기관총으로 이쪽을 엄호하려는 의도였다. 다녀오는 내내 그러고 있었을까? 그 뜻이야 고마우나, 위험했다. 혹여 멜빌레이가 돌아왔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에겐 완전히 미지의 적이었으니까. 다행히 바다괴물이 접근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탑승을 서두르는 겨울과 코왈스키. 조안나는 깊은 안도감으로 반겼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 모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럼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죽는 거겠죠.” 가벼운 책망을 덤덤하게 받아내는 조안나였다. 거기서는 적잖은 부채감이 느껴졌다. 그녀에겐 그 외의 동기도 충분했다. 감정을 느낀 뒤에, 겨울은 다른 말을 꺼냈다. “코왈스키 요원은 채드윅 팀장의 협력자였어요.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그랬군요.”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 짐작은 겨울과 같았을 터. 오히려 코왈스키가 당황했다. 선내로 들어서자 탤벗, 터커, 켈리 세 사람이 반색했다. 그들의 해후를 등지고, 겨울은 잠긴 선내 무기함을 향해 비상용 도끼를 치켜들었다. 카앙! 자물쇠 떨어지는 소리에 움찔 놀라는 요원들. 사격으로 끊지 않았던 건 도탄이 튈까봐 걱정했던 탓이었다. 지금 무기가 없는 사람은 코왈스키 뿐. 유탄발사기를 챙긴 겨울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익숙한 걸로 하나 골라요. 스스로를 지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괘, 괜찮은 건가요?” “당신이 뭘 어쩌겠어요. 나 없이 살아나갈 자신도 없을 텐데.” 복합적인 판단이었다. 상황실에서 보았던 코왈스키의 눈물이 아니었던들, 겨울은 보다 많은 주의를 할애했을 것이다. 생존욕구보다 비뚤어진 애국심이 앞설지도 모르겠다고. 설령 그렇더라도 겨울을 해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니. 미묘한 대화가 흐르자 다른 요원들은 맥락을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앞서 채드윅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켈리 요원이 코왈스키를 감쌌다. “중위님이 신경 쓰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은연중에 코왈스키를 삼가는 몸가짐을 보건대, 켈리 그녀도, 터커 요원도 혐의가 없는 것 같았다. 확신하긴 이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겨울에게 구함 받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의지해야 할 입장이었다. “탤벗 요원. 조종석으로 와주세요. 겨울, 기관총 사수를 맡아주겠어요?” 앞쪽에서 들려오는 조안나의 요청. “보트 운전은 자신 없는데……. 차라리 제가 사수를 맡는 건 어떻습니까?” 우물거리는 탤벗에게 조안나가 거듭 말했다. “논쟁할 시간 없어요! 피쿼드의 침몰에 휘말리고 싶어요? 당신이 직접 만져야 할 건 쓰로틀 레버뿐이고, 그 외엔 계기만 봐주면 돼요. 방위와 레이더 말이죠. 조타는 제가 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겨울 이상으로 사격에 자신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이 한 마디가 더 이상의 논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안나 입장에서 그나마 믿을 만 한 요원이 탤벗이기도 했다. 멕시코 마약 밀매의 한 축이 해상 루트이므로, 조안나에겐 조타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얼마나 능숙할지는 의문이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저희는 할 일이 없겠습니까?” 터커 요원의 질문에 문 너머에서 조안나가 겨울을 보았고,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갑판으로 끌어내봐야 마구 튀어오를 선체로부터 튕겨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뇨. 여기에 있어요. 싸우는 건 제 역할인걸요. 침수가 생길 때 대응할 사람도 필요하고.” “침수라니……. 그럴 일이 있을까요?” “어쩌면요.” 이 배, 특수목적으로 개조된 해안경비대의 순찰 보트(47FT MLB)는 선체 재질이 알루미늄이었다. 강철을 물어뜯는 괴물의 이빨을 막기엔 단단함이 모자랐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한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아무리 낮아도 0이 아닌 이상 대비해야만 한다. 조종석으로 나오자 조안나가 배에 시동을 걸었다. 타륜 우측 콘솔, 한 쌍의 녹색 버튼을 누르고, 양쪽 엔진의 출력을 제어하는 두 개의 레버를 밀어 올린다. 동력이 공급되면서 배 전체에 불이 들어왔으나, 현 상황에서 조명은 괴물을 끌어들이는 유인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안나는 상단 콘솔의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어두워지는 조종실. 야간 은밀 단속을 위한 제광 스위치(Dimmer Switch)였다. 깜깜한 와중에 전자계기의 불빛만이 깜박거렸다. 그 중 낮게 빽빽거리는 적색신호는 겨울도 알아볼 수 있었다. 충돌경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정밀항법장비는, 현 침로로 나아갈 경우 충돌 우려가 있는 배 다섯 척을 경고하는 중이었다. 시작부터 요란하다. 조안나가 핸들을 확 꺾는다. 쏠리는 관성을 견디며, 갑판으로 나가기 전, 겨울이 주문했다. “어렵겠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절대 멈추지 말아요! 놈들이 공격하기 어렵게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변침을 끝냈는데도 충돌경고음이 이어진다. 조종석 전방의 재래식 나침반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재래식 나침반과 전자 나침반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위성신호를 받는 후자 쪽이 정확했다. 재래식의 바늘이 갈팡질팡 하는 것은, 안개 너머에서 폭주하고 있을 거대한 배들 탓이었다. 압도적인 강철 선체는 그 자체로 가까운 자기장을 교란한다. “무전기 주파수를 맞춰두겠습니다! 어쩌면 계기보다 겨울의 육감을 믿어야 할지도 몰라요!” 미친 듯이 깜박이는 각종 계기에 벌써부터 기가 질린 조안나의 외침이었다. GPS 좌표는 군사용으로도 최소 5미터 이상의 오차가 발생한다. 그 5미터의 틈을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겨울이 리시버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속도가 붙은 탓에 갑판의 바람이 강했다. 다닥다닥 부딪히는 쓰레기들과 물살을 헤치며 격렬하게 요동치는 선체. 20톤에 불과한 경량으로 고속성능을 중시한 시점에서 안정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중기관총을 붙잡은 겨울은 망설이던 기술조정에 들어갔다. ‘이젠 「중화기숙련」이 필요해.’ 중기관총(M2HB)에 적용되는 「개인화기숙련」의 효율은 3할에 불과했다. 8연발 유탄발사기는 그보다 좀 나아서 6할. 그러고도 어지간한 전문가 수준의 운용이 가능하지만, 멜빌레이가 떼로 덤비면 금세 위태로울 터였다. 지켜야 할 사람들도 있다. 능력이 자꾸만 전투 쪽으로 편중된다. 다채로운 상황과 환경에 대응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세계관 붕괴를 막으려는 노력과 별개로, 질서가 사라진 뒤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겨울은 미련을 접고 가용한 모든 경험자원을 소진했다. 전문가 영역 끝자락의 「중화기숙련」을 습득. 그리고 「개인화기숙련」의 강화. 미친 듯이 방향을 꺾으며 달리는 고속정 위에서의 고정화기 사격으로, 최초 3탄 이내에 명중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고속정은 피쿼드의 붕 뜬 선수를 측면으로 끼고 돌았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반대편에서, 떨어진 그물 사이로 표류하는 잠수함이 보였다. 해치는 열려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선 5만 톤은 될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이미 앞쪽 절반이 수면 아래에 잠겼다. ‘저게 피쿼드에 부딪혔구나.’ 저 배가 아니었다면 겨울과 조안나는 결국 탈출에 실패했을 것이다. 트릭스터의 시체를 터트리는 등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운으로 목숨을 구한 셈. 악운이 끊이지 않는 세계관이다. 새어나온 기름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기름띠 사이로 다가오는 세 줄기의 백색 궤적을 발견한 겨울이 조종석에 회피신호를 보내고, 즉시 중기관총의 조준선을 정렬했다. 콰콰쾅! 콰콰콰쾅! 번쩍이는 섬광. 가까이서 듣는 중기관총의 발사소음은 차라리 폭음에 가깝다. 안개 짙은 바다에 굉음이 메아리친다. 파도를 퍽퍽 부수고 물속으로 박히는 일곱 발의 대구경탄. 탄착지점은 괴물들의 머리 바로 앞쪽이었다. 빗나갔다. 그러나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었다. ‘놈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 이제 갓 등장한 특수변종들은 여러모로 미숙할 것이다. 역시나, 하얀 직선을 긋던 물거품들이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파도 너머의 안개를 향해 사라지는 흔적들. 아무리 대구경탄이라도 물을 뚫고 자신들을 해하기 어렵다는 걸 모른다. 수중의 항력, 소총사격을 방어할 만큼 질긴 피부, 유선형의 몸체. 그것으로 어디까지 견뎌 내는지를. 겨울부터가 기술 수준이 바뀔 때마다 적응이 필요한 마당 아니던가. 빠아아앙- 거대한 움직임이 다가온다. 겨울이 한 손으로 유탄발사기를 겨냥했다. 조준점은 지나쳐온 바다, 뭉쳐있는 기름띠. 투웅! 양대 화기숙련의 보정을 동시에 받은 소이유탄은, 겨울이 속으로 그린 사선에 정확하게 수렴되었다. 펑! 화륵- 바다가 불타올랐다. 강렬한 열풍에 짙은 해무(海霧)가 휩쓸리며, 충격파는 수십 미터 떨어진 겨울에게까지 몰아친다. 뒤에서 밀린 고속정의 선수가 한 순간 물에 처박혔다. 당연히 그 뒤에 있던 겨울은 악취 섞인 바닷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썼다. 이걸로 놈들의 「수색」이 잠깐이나마 교란되었으면 좋겠는데……. 「위기감지」가 신경을 날카롭게 경고했다. 겨울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회피, 회피! [꽉 잡아요!] 리시버에 울리는 조안나의 날카로운 경고. 해무가 확 밀려난 자리에서 반파된 어선들이 튀어나온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주변에 너무 많아서 무의미한 걸까? 좌로 꺾고 다시 우로 틀어버리는 급격한 회피기동이 겨울의 무릎을 꺾는다. 난폭한 방향전환의 압력은 곧 중력가속도 단위의 관성이었다. 초인적인 「무브먼트」 보정이 없었으면 난간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빠아아아앙! 부우우우우-! 음계 다른 뱃고동이 전방 양쪽에서 들려온다. 위이이잉! 쌍발 엔진의 RPM이 올라갔다. 중기관총 핸들을 붙잡고 무릎 꿇은 채 돌아보면, 조안나가 이 악물고 레버를 미는 게 보인다. 탤벗은 크게 뜬 눈으로 전방의 잿빛 어둠을 응시한다. 적외선 탐조등이 비추는 안개로부터, 희미한 적색은 마침내 대형 화물선과 크루즈선의 방청 도장으로 드러났다. 오감을 압도하는 거대한 질량이 양 옆으로 다가온다. 콰드드드등- 선수와 선수가 엇갈리게 부딪히는 아래, 좁아지는 물길을 통과하는 고속정. 겨울이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콰직! 위에서 떨어진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발 있던 자리에 박혔다. 그 외의 자잘한 조각들이 쏟아져, 방탄모에 두두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날카롭게 베어지는 감각도 여럿. 오른 팔에 자잘한 출혈이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묵직한 쇳조각은 주먹으로 쳐내야 했다. 뼈와 손목이 얼얼해질 정도의 무게감. 방탄소재 장갑마저 찢어졌다. 조금 더 깊었으면 손가락을 다칠 뻔 했다. [괜찮아요?!] “네, 이상 없어요! 운전에 집중해요!” 갑판에 박힌 파편을 차내며 후방을 보니, 불길이 안개를 몰아낸 풍경에 아직도 피쿼드가 보이는 거리였다. 골든게이트까지는 방해물이 없어도 40킬로미터 가깝게 남았다는 뜻. [중위님! 그리고 깁슨 감독관! 저 코왈스키입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무전망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선실에 붙은 무전기를 쓰는 모양. “무슨 일이에요!” 콰콰쾅! 끊어 쏜 대구경탄 세발이 다시 비린내 나는 괴물들을 쫓아낸다. 동시에 암초처럼 튀어나온 어느 배의 고물을 피하느라, 파도 위로 훅 튀어 오르는 선체. 악! 어디 부딪혔는지, 잡음 섞인 코왈스키의 신음이 들린다. 크게 다친 건 아닌 듯 바로 이어지는 전언. [늦어도 04시 30분까지는 만을 벗어나야 안전합니다!] “핵공격이 그때 이루어집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겨울은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괜한 말을 할 이유도 없고.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시계를 본다. 현재시각, 새벽 1시 42분. 코왈스키가 말한 시점까지 채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만 바깥까지 직선으로 빠질 수만 있다면 넉넉한 시간인데, 당연히 비현실적인 기대였다. # 193 [193화] #검은 물 아래 (11) 침로가 크게 구부러졌다. 장애물은 분리된 거주구역이었다. 번화가 역할의 크루즈를 중심에 두고 묶인 백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 떨어져 나온 일부임에도 좌우 너비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만큼 넓어, 우측으로 끼고 도는 내내 남은 시간이 촉박해지는 느낌이다. 꺄아아아악! 겨울은 변종에게 물어뜯기는 여자를 보았다. 돕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모든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을 뿐. 그러나 대부분이 굶주림으로 허약해진 이들. 필사적인 얼굴로 달리지만, 걷는 것보다 나을 게 없는 속도였다. 어디로 가든 막다른 길이었고. 보이는 모든 것이 배였으나, 연료가 바닥난 지 오래. 시장에서 팔거나 난방 용도로 써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쫓기는 이들은 벗어날 방법이 없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그렇다. 무의미한 발버둥이다. 결국은 핵의 열기에 만 전체가 끓어오를 테니까. [잠깐이라도 배를 대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두를 구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몇 명만이라도…] 운전석에서 보내는 무전. 급박한 와중에도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멈춰선 안 돼요!” 사방이 아비규환이라, 겨울은 소리를 질렀다. 콰콰콰쾅! 버튼식 방아쇠를 누르자 중기관충이 묵직하게 진동한다. 수중에서 고속정으로 접근하던 세 줄기 궤적이 탄착군을 피해 흩어졌다. 이어 겨울이 새로운 방향을 조준했다. 콰콰쾅! 콱콱 그어지는 사선이 두 겹의 파도를 뚫었다. 수면에 비스듬히 꽂히는 경고사격들. 전방으로부터 측면으로 돌아오던 다른 두 놈이 방향을 꺾는다. 그러느라 느려진 사이에, 가속한 고속정은 흐트러진 궤적 사이를 돌파했다. ‘속도를 잃어버려선 곤란해. 바로 위험해질 거야.’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관심을 끈다. 여기에 요란한 엔진 소음이 더해지면, 음파로 소통하고 표적을 식별하는 괴물들에겐 이보다 눈에 띄는 목표물이 없을 것이었다. 고무보트에서 노 젓는 소리조차 백 미터 바깥에서 감지하는 녀석들인데. 갈수록 보트를 노리는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선주행이라면 벌써 한참 전에 떨쳐냈을 것을. 이쪽이 장애물을 피해 자꾸만 휘어지는 사이, 파도 아래의 바다괴물들은 항상 최적의 추적경로를 잡는다. 순간적인 최고속도는 30노트에 육박하는 놈들이었다. 이것들이 가장 위협적인 방위에서만 튀어나오는 이유였다. 게다가 빠르게 학습하고 있다. 중기관총 사격을 경험할 때마다, 회피반경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게 보인다. 콰콰콰쾅! 철컥- 잔탄을 소진한 겨울이 빈 탄통을 쳐내고 꽉 찬 50발을 가대에 끼우는 2초 사이에, 박히는 총탄을 슬쩍 비껴낸 백색 물거품 셋이 빠르게 쇄도했다. 재장전을 끝내고 나면 지나치게 가깝겠다. 연결된 탄을 꺼내다 말고, 티잉- 수류탄 핀을 뽑는 겨울. 지연신관 타는 시간을 감안하여 전력투구로 집어던진다. 매 순간 튀어 오르는 갑판 위에서조차 정확한 「투척」이었다. 퍼엉! 썩은 바닷물이 까마득히 치솟았다. 그러나 수중의 폭발압력이 수직방향으로 집중되었을 뿐, 실질적인 폭파범위는 공기 중에서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멜빌레이 무리는 충격을 받았다. 폭음 탓이었다. 음파를 예민하게 잡아내는 놈들에게, 수류탄 터지는 굉음은 인간의 눈앞에서 터진 섬광탄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촤아악! 잠깐이나마 방향감각을 상실한 녀석이 엉뚱한 위치에서 솟구쳤다. 포물선을 그리는 유선형의 몸뚱이. 그 혼탁한 번들거림. 어둑한 시야 속에서, 부풀고 변형된 사지는 차라리 두족류(頭足類)에 가까웠다. 겨울이 신속하게 소총사격을 가했다. 두두두둑! 끼이이이- 우우우우- 맞은 것은 한 마리인데 괴성은 합창으로 돌아온다. 높고 낮은 메아리. 목젖처럼 전신에 우둘두둘 튀어나온 살갗이, 실제로도 성대의 변형기관이기 때문이었다. 풍덩! 치명상 없이 물속으로 재돌입하고는, 그럼에도 보트의 진행과 직각으로 멀어지는 녀석. 이 순간에도 새로운 제파(諸波)가 밀려온다. 안개가 일렁이고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비틀린 부력균형 탓에 깊은 심도로는 못 내려가서 그나마 다행이다. 겨울은 공백을 틈타 좌르륵 꺼낸 링크 탄을 약실에 깔아놓고 덮개를 닫았다. 철컥철컥! 장전 손잡이를 빠르게 두 번 당기자 철제 링크 한 마디가 탄피배출구로 튀어나왔다. 조준은 장전이 끝나기도 전에 마쳐놓은 상태. 콰콰쾅! 콰쾅! 콰콰콰콰쾅! 끊어 갈긴 열 발이 놈들의 머리로부터 정확하게 한 뼘 앞을 꿰뚫는다. 그 중 아슬아슬하게 스친 탄이 셋이었다. ‘아직은, 아직은 명중탄이 나와선 안 돼.’ 바다괴물 무리가 점차 대담해지는 건, 거듭된 사격에 맞지 않은 경험을 학습한 까닭. 그렇다고 실제로 명중시켰다간 물에 꽂히는 기관총탄의 감쇄된 위력을 놈들이 알아버리고 만다. 소총사격보다 위협적이긴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그 깨달음이 멜빌레이 떼 사이에 전파되는 순간, 겨울은 견제수단 하나를 잃어버리는 셈이었다. 따라서 기관총탄은 놈들에게 미지의 두려움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일부러 빗나가게 쏘면서도, 맞기 직전까지 가깝게 쏘아야 한다. 겨울이 아니고선 한참 전에 실패했을 묘기였다. 그래봐야 다른 쪽에서 학습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콰릉! 콰콰쾅! 한 차례 섬광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묵직한 포성이 빛의 뒤를 쫓아왔다. 간격으로 환산한 거리는 2시 방향으로 1,600미터. 다양한 구경의 군용 화기가 미친 듯이 탄을 뿌려대는 소리였다. 중국군? 혹은 다른 나라의 군함일까? 기대할 것은 낮은 명중률뿐이었다. 괴물을 상대로는 눈으로 보고 쏘는 수밖에 없다. 공황에 빠진 병사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쏠 수 있을까. 앞으로 잠깐이면 된다. 조금만 더 명중탄이 나지 않기를……. [젠장! 길이 막혔어요!] 분노와 좌절이 섞인 조안나의 절규. 돌아보니 그녀는 타륜을 필사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생사를 건 우현전타. 고속정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순간 배가 수직에 가깝게 들릴 지경이어서, 탄통으로부터 관성으로 빠진 기관총탄 링크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가까스로 비껴낸 것은 거대한 연쇄추돌의 현장이었다. 작아도 수십 미터, 크게는 수백 미터인 배들이 부딪히고 또 부딪혀서 킬로미터 단위로 무수히 침몰하는 중이다. 각종 선체가 물을 빨아들이며 크고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빛바랜 구명조끼를 입고, 혹은 부유물을 붙잡고 부글거리는 바다를 표류하는 사람들. 그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수중에서 이빨로 잡아채는 놈들 탓이었다. 탄을 수습한 겨울이 큰 동작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저쪽으로! 갑판을 타고 넘어가요!” 가리킨 것은 반쯤 가라앉은 화물선이었다. 검은 물 아래로 대각선 절반이 잠긴 갑판은, 최고속도의 고속정으로 거슬러 올라갈 법 했다. [Jesus! 이런 걸 실제로 하게 되다니!] 질린 듯이 씹어 뱉으면서도 핸들을 다시 돌리는 조안나. 일단은 멀어지는 방향이다. 가속에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큰 지름으로 원을 그린 고속정이 화물선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출력을 한계까지 올린 쌍발엔진의 요란한 구동음. 철썩거리며 튀어 오르는 선체를 향해 이번에도 여지없이 괴물들이 접근했다. 진로의 좌우측면으로부터. “회피하지 말아요!” 이대로 달려야 한다. 겨울이 수류탄을 투척하는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제압사격을 퍼부었다. 수십 개의 탄피가 탱강탱강 쏟아졌다. 콰릉! 폭발이 가깝다. 수류탄이 터지며 솟구친 해수가 비처럼 뿌려졌다. 그러나 진작부터 젖어있던 갑판이었다. 겨울은 물과 땀을 동시에 닦아냈다. [부딪힙니다! 모두 충격에 대비하세요!] 갑판이 아무리 비스듬해도, 올라타는 순간의 충격은 작을 수가 없었다. 끼이이이이- 드드드드- 강철과 알루미늄 강재의 마찰에 사나운 불티가 튀겼다. 설마 불이 붙지는 않겠지만, 붙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물에 다시 들어갈 테니. 격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겨울이 붙잡은 중기관총은 안정적인 조준을 유지했다. 표적은 갑판 끝의 난간. 고속정 선체가 닿기 전에 끊어놔야 한다. 콰콰쾅! 콰콰콰쾅! 묵직한 탄이 치고 지나갈 때마다 난간이 뚝뚝 끊어졌다. 그러나 완벽할 순 없었다. 끊어지고도 남아있는, 난간 고정축의 날카로운 단면. 고속정의 선저(船底)가 지나갈 자리였다. 철컥! 중기관총의 약실에서 속 빈 쇳소리가 울렸다. 재장전을 하기엔 늦었다. 배가 긁히는 소리는 겨울마저 고통스러울 만큼 높고 날카로웠다. 그 소리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선체의 질량에 날 선 단면이 뭉개졌을 것이었다. 다만, 턱 하고 걸릴 때의 제동으로 인하여, 고속정이 측면으로 돌아버렸다. 경사를 올라 정점을 옆면으로 넘어선 고속정은, 오르느라 느려진 속도로, 이번에는 기울어진 화물선의 외벽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쫓아오는 변종들의 모습. 가라앉는 배의 옛 선원들은 사람이 아니게 된 모습으로 펄쩍펄쩍 난간을 넘어온다. 두둑! 두두두둑! 중기관총 재장전을 미뤄두고 소총사격을 가하는 겨울. 고속정이 물에 뜨기 전에 닿을 가능성이 있는 놈들만 사살한다. 쾌액! 캬아아악! 머리에 구멍이 뚫린 시체가 데굴데굴 굴러, 개중엔 보트를 앞서가는 것들도 있었다. 후방을 정리한 겨울이 이번엔 다가오는 바다를 향해 유탄발사기를 겨누었다. 고속정이 넘어올 것을 기대한 바다괴물들이 원을 그리는 중이었다. 영악한 것들. 저것들이야말로 범고래(오르카)에 가깝지 않을지. 투웅! 투투투퉁! 유탄발사기의 잔탄을 모조리 쏴 갈긴다. 두 발은 소이유탄이라 수중에서 소용이 없었으나, 나머지는 작약으로 꽉 찬 고폭탄들이었다. 줄지어 일어난 폭발의 굉음이 괴물들의 「수색」 패턴을 마비시켰다. 마침내 쇠와 쇠가 부대끼는 활강이 끝났다. 발 아래로 출렁, 느껴지는 바다의 감각. [선실에 물이 들어옵니다!] 리시버로 전해지는 비명에 겨울이 즉시 응답했다. “터커! 그 정도는 선실에서 대응해요! 그쪽에도 콘솔이 있잖아요! 그리고 앤! 얼른 빠져나가요! 주위에 괴물들 투성이니까! 이것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어서!” 침수가 심각하진 않겠지. 겨울의 판단근거는 역시 「생존감각」이었다. 치명적인 경고는 아직이다. 자동화된 배수 장치로 대응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보트가 속도를 회복하는 사이에 겨울은 추가로 수류탄을 던진 뒤 중기관총의 탄통을 교환했다. 퍼엉! 수중폭발의 잔향이 쩌렁쩌렁하다. 조안나가 겨울을 호출했다. [지금부터 저 항적을 뒤쫓으려 하는데 괜찮겠어요?!] 항적? 넓은 시야로 전방을 관찰한 겨울이 그녀의 말뜻을 깨달았다. “상관없어요! 멜ㅂ……. 바다괴물 쪽은 제가 알아서 견제할게요!” 다급하다보니 말실수를 할 뻔 했다. 조안나가 말한 항적은 부채꼴로 거대하게 펼쳐지는 물살이었다. 체급에서 차원이 다른 배가 지나간 여파. 갈라진 물살은 부딪히고 부딪혀서 오래도록 남는다. 오죽하면 이걸 추적하는 어뢰가 따로 개발되었을까. 항공모함처럼 큰 배는 하루 뒤에도 쫓을 수 있을 정도라고. 지금 보이는 백색 파도는 항공모함 이상의 엄청난 배가 남긴 흔적이었다. 물결은 박살난 잔해가 가득하다. 막대한 힘과 질량으로 미친 듯이 부수고 지나간 것이다. 즉 이 앞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문제는 항적 그 자체. 거친 물살 사이에서 선형의 물거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 조안나는 멜빌레이의 접근을 알아채기 어려울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겨울이 유탄발사기를 재장전했다. 수류탄은 이제 두 발 남았다. 유탄 장전을 끝내는 찰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바짝 엎드리는 등 위로 물 밖으로 튀어나온 잿빛 실루엣이 지나갔다. 놈이 뻗은 손은 겨울의 어깨에 거의 닿을 뻔 했다. 타닥 타다다닥!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향해, 겨울은 보지도 않고 유탄발사기를 조준, 격발해버린다. 투웅! 짧고 뭉툭한 고폭탄이 괴물의 꼬리 같은 다리 사이에서 폭발했다. 끄아아아- 깨애애애- 부글부글- 다중창의 비명이 물속에 처박힌다. 가까운 물살이 한층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밝은 빛 아래에서는 검붉게 비치겠지. 겨울은 놈의 추진력에 이상이 생겼기를 기대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추가공격이 이어졌다. 잠잠하던 감각보정은, 괴물이 물 밖으로 튀는 순간에야 비로소 급격하게 비등했다. 피할 때까지의 여유는 고작 1초 남짓. 피부 아래 물이 차있지 않은 약점을 겨눌 수 있었던 건 고작 몇 번에 지나지 않았다. 물 위로 부어오른 눈만 내놓은 놈들에겐 선실 바깥의 겨울이 우선적인 공격 목표였다. ‘갑판 위로 패대기칠 방법이 없을까?’ 그 질긴 살과 근육을 제외하면, 물 밖의 멜빌레이는 구울보다 못한 놈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놈들도 정면에서 오지 않는다. 손으로 잡아 메치자니 미끈거리는 피부가 문제고, 칼을 박아 비틀어도 묵직한 관성에 끌려갈까봐 걱정스러웠다. 결국 이대로 시간을 버는 편이 최선인가? 놈들을 스쳐 보내며 비린내 나는 물을 잔뜩 뒤집어쓴 겨울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미명이 가장 어두워질 때까지. 머리 위로 거대한 다리가 지나간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 브릿지였다. 오래 전에 양쪽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올라갔는지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변종들이 보였다. 그럼블이 던지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진 못했다. 갑판 넓은 배에 떨어진들 살아남을 가능성이 낮으니까. 다리만 부러져도 행운이다. 무기 없는 평범한 선원들조차 그냥은 당하지 않을 터였다. 지금도 미친 듯 한 과속과 충돌을 일삼으며 수많은 배들이 탈출하는 이유였다. 개중엔 조안나처럼 눈치가 빠른 경우도 많았으므로, 「위기감지」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조안나의 회피기동은 절반은 레이더에, 절반은 겨울에게 의지했다. 충돌직전까지 가까워진 횟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만큼 특수변종 집단의 공격이 분산되긴 했다. 즐거워할 일은 아니지만. 달갑지 않게 생긴 여유 속에서도 겨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고속정의 답파는 핵탄도탄 일곱 발이 발사되었던 트레져 아일랜드를 지나, 교도소로 악명 높은 알카트라즈와 엔젤 아일랜드 사이로 이어졌다. 조안나가 슬픔을 담아 탄식했다. [아아……. 포트 맥도웰이 함락 되었군요!] 엔젤 아일랜드 소재의 미군기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세기 전에 폐쇄되었다가 종말이 시작된 이후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유서 깊은 주둔지로부터,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분산된 방향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은, 기지 방어선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겨울이 알기로 섬에는 1개 사단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제10산악사단. 장차 샌프란시스코 광역권 탈환을 준비하던 이들이었다. 얼마나 살아서 철수했을까? 이 위치에선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섬 북단의 옛 이민국 청사 역시 무사하진 못할 터였다. 그곳에 정박하던 나라 잃은 잠수함들도. 그 승무원들도. 천사의 섬을 일별한 고속정이 마침내 거대한 화물선의 후미를 따라잡았을 때였다. 화물선의 선수 방향으로부터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 194 [194화] #검은 물 아래 (12) 윽! 겨울이 머리를 숙였다. 습도 높은 열풍이 강렬하게 지나간다. 좌르르르- 풍덩! 쇠사슬 쏟아지고 물결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거대한 화물선이 굉음과 함께 비현실적인 선회에 돌입했다. 조안나가 본능적으로 타륜을 돌린다. 잠깐 사이에 세 차례 변침한 고속정이 속도를 높여 화물선을 추월했다. 스쳐지나가는 풍경. 증발한 안개 속에서 대형 화물선의 함수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박살난 채 불타오르고 있다. 내부 골조가 바깥으로 다 드러난 상태. 안쪽 깊은 곳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강력한 폭발이 직선으로 뚫고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전방에서 바다가 갈라진다. 제트 엔진의 날카로운 배기음이 고속정 위로 스쳐갔다. 쐐애애액- 겨울이 한 박자 늦게 귀를 감쌌다. 욱신거리는 통증. 먹먹한 청각. 전투기술에 의한 육체강화가 아니었더라면 고막이 찢어졌을 것이다. 직후, 멀지 않은 후방의 안개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콰쾅! 이빨 저리는 폭음이 섬광의 궤적을 쫓아왔다. 대함미사일 공격이라니……. 아연해진 겨울이 조종석을 향해 다급한 손짓을 보냈다. 회피, 회피! 자꾸만 욱신거리는 감각보정들은,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경고들로 척수를 난도질해댄다. 가리키는 방향은 매양 좁고 위태로운 안전지대. 간신히 피하는 매 순간마다, 해수면에 바싹 붙어 비행하는 초음속 대함미사일들이 한 발씩 스쳐지나갔다. 설상가상으로 함포 사격이 쏟아졌다. 퍼퍼퍼펑! 물기둥이 일렬로 솟구친다. 가슴 서늘한 파공성이 가까운 어둠을 연달아 찢어발겼다. 수중과 수상에서 오렌지색으로 번쩍이는 폭발들. 나란히 항주하던 여러 선박들이 광란을 일으켰다. 앞뒤 안 가리는 회피기동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부딪히고 깨지며 참사를 빚어낸다. 그 모든 충돌을 피한 것은 실력 이상의 행운이었으나, [조심해요!] 조안나의 외마디 비명. 깨진 배와 우현을 부대끼며 나아가는 와중에, 다 올라가지 않고 늘어진 닻이 훅 다가왔다. 파도 위 수 미터를 흔들거리는, 묵직하고 날카로운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 예감하고 있던 겨울은 간발의 차이로 비껴냈으나, 고속정 자체는 그러지 못했다. 콰지직! 알루미늄 강재가 뜯어져 나가는 충격. 고속정 함수가 잠깐이나마 천공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디딜 곳 없었던 겨울이 함교를 향해 굴러 떨어진다. [아악!] 무전기 리시버를 통해 호되게 부딪히고 구르는 비명들이 들렸다. 철썩, 콰아아! 전복을 겨우 면한 고속정이 여전한 출력으로 가속한다. 조종석의 두 사람이 정신을 수습했을 땐, 대열을 이루어 전진하는 구 인민해방군 함대의 전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만 입구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겨울은 골든게이트의 상황을 이해했다. 만을 탈출하려는 인민해방군과, 탈출을 저지하려는 미 해군 사이의 전면대결. 고속정은 지금 그 전장 한복판에 뛰어든 것이었다. 여기서 민간 선박들은 장애물이자 디코이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중국군에게는 핵 어뢰가 있다.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물건. 「폭풍」이라 했던가? 어느 파벌의 소유물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인 상황에서 발사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겨울이 기관총 마운트를 다시 붙잡았다. “골든게이트로는 못 나가요! 상륙해요! 육지로! 금문교 북쪽으로!” 알카트라즈를 등진 시점이라 해협 북안의 포트 베이커가 가까웠다. 그곳엔 컨테이너를 쌓아올린 장벽이 있으니, 최소한 육지 방면의 변종집단으로부터는 안전할 터였다. 이런 판단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겨울에게 조안나가 절망적인 외침을 돌려주었다. [레이더가, 레이더가 날아갔어요!] 이제야 뒤를 확인하는 겨울. 잔금 자잘한 방탄유리 너머, 조안나와 탤벗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늘어진 닻이 고속정에 꿰였던 그때, 레이더 마스트와 1.5층 갑판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이제 이 배의 관측수단은 사람의 눈뿐이다. “진정해요! 내 신호를 놓치지 말아요! 앞으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머릿속에 지도가 들어있고, 「독도법」이 뒷받침한다. 필리핀 선원들이 기항했던 작은 항구, 말발굽 만(Horse shoe bay)까지 앞으로 약 3킬로미터. 잠깐이다. 잠깐 동안만 악운이 따라주면 상륙할 수 있다. 겨울이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다음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현 전타! 우현 전타!” 「생존감각」의 경고가 새까만 파도 아래에서 일렁거렸다. 신경 저리는 효과는 덤. 물 밖에서 물속의 괴물을 감지할 순 없으므로, 수중에서 접근하는 위협의 실체는 명백했다. 어뢰! 다가오는 가속과 나아가는 가속이 합쳐져, 가까워지는 속도감은 소름 끼치도록 빨랐다. 직선경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겨울이 다시 외쳤다. “엔진을 정지시켜요!” 이유는 묻지 않는다. 조안나가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후우우웅- 곧바로 잠잠해지는 쌍발엔진. 전방으로 휩쓸리는 관성 속에서, 겨울은 중기관총 트리거를 연달아 눌러댔다. 콰쾅! 콰콰콰쾅! 굵은 탄피들이 타오르는 바다의 빛깔로 현란하게 튀어 오른다. 잔해 사이로 다가오던 두 쌍의 괴물들 중 세 마리를 겨냥한 제압사격이었다. 전방엔 멜빌레이, 후방엔 어뢰. “다시 좌현으로!” 엔진은 꺼졌으나 관성은 남아있다. 방향타가 돌아가니 침로가 바뀌었다. 쇄도한 어뢰는 고속정의 이물로부터 20미터 후방을 통과했다. 반면 괴물들 쪽은 멈추지 않는다. 셋을 쫓아 남은 하나도 달아나게 만들 셈이었으나, 그새 중기관총 사격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심지어는 명중탄을 맞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접근한다. 복수의 하얀 궤적들이 좁아지는 원을 그렸다. 겨울이 유탄발사기를 드는 순간. 콰아아앙! 검은 바다에 하얗고 둥근 메아리가 번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터진 어뢰. 표적은 군함이었겠으나 터진 건 대형어선이었다. 폭심지에선 어마어마한 물기둥이 치솟고 있다. 폭압에 휘말린 선원들이 아찔한 높이까지 애처롭게 작아졌다가, 바닷물과 함께 우박처럼 쏟아졌다. 이제 유탄 사격은 필요 없다. “엔진 시동!” 한 번의 외침으론 부족했다. 거듭 외치고서 겨우 시동이 걸린다. 합계 970마력의 추력이 작은 선체를 강하게 밀어냈다. 그리고 터엉-! 선수가 멜빌레이를 치고 지나간다. 어뢰 폭발의 여파로 감각이 마비된 녀석이었다. 나머지 놈들의 움직임 또한 보는 것만으로 고통이 느껴진다.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몸을 꼬아대는 지렁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영구적인 신경 손상이었으면 좋겠는데…….’ 방금은 정말로 악운이 따라주었다. 다중 음파로 환경을 파악하는 멜빌레이. 그리고 음원을 추적하는 어뢰. 그러므로 어뢰가 바다괴물을 쫓아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래를 잠수함으로 혼동하는 경우마저 있으니. 고속정은 폭발의 간접적인 영향만으로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멀어지는 후방에선 함대간의 교전이 격렬해졌다. 무전망이 거친 호흡으로 가득 찼다. 그 중에서 가장 가쁜 것은 주조종석의 조안나였다. 매 순간의 조타가 혼을 갈아대는 기분일 것이었다. 몇 번의 충돌위기를 극복한 끝에, 해변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러나 항만 입구는 막힌 상태. 방파제에 격돌한 몇 척의 배가 폐허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고속정이 파도 무너지는 벽과 나란히 달리는 사이, 방파제 위로 추격자들이 붙었다. 덜렁거리는 총을 쏠 줄도 모르는 해안경비대원들. 헐떡이는 숨결은 이미 역병의 허기였다. [포트 베이커마저 무너지다니…….] 슬픔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은 탤벗의 것이었다. “북쪽으로 올라가요!” 조안나는 묵묵히 새로운 침로를 잡았다. 항만을 좌현에 끼고, 바위투성이 해안을 따라 북상한다. 그래도 모든 병력이 전멸한 것은 아닌지, 지상에선 계속해서 총성이 이어졌다. 2차 대전 사적지였다가 현역으로 복귀한 해안포대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어쩌지. 시간이 부족해.’ 현재시각 03시 48분. 코왈스키의 경고를 믿는다면, 남은 여유는 앞으로 42분에 불과했다. 물론 그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다고 했을 뿐이지만. [겨울! 저곳으로 상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종석에서 지시하는 방향을 겨울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바다를 향해 돌출된 바위 측면, 완만한 절벽 아래에 짧고 거친 해변이 드러나 있다. 해안도로로부터는 약 80미터 떨어진 지점. 기지와 멀지 않으면서도 기압계 외엔 아무것도 없는지라, 병력도, 변종집단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굴러 떨어져 외로운 변종 하나가 물가를 오가며 포효할 따름. 크아아아아-! 그러나 바다로 뛰어들진 않는다. 멜빌레이가 등장한 지금도 평범한 변종은 물을 두려워했다. “좋아요! 더 올라갔다간 기뢰원이니까! 모두 상륙 준비해요!” 쾅! 중기관총 단발사격이 감염된 인간의 머리를 박살냈다. 물 위로 머리를 내민 몇 개의 암초를 피해, 마침내 육지에 닿는 배. 까드드득. 아래에서 날카롭게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먼저 상륙한 겨울의 엄호 하에 조안나와 정보국 요원들이 차례차례 땅을 밟는다. 60도 경사, 20미터 높이의 절벽을 오르자, 나무들 사이로 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량행렬의 불빛들이 보였다. 험비 몇 대에 급유차량이 하나. 험비 한 대는 기관총좌에 사람이 없었다. 조직적인 철수보다는 급박한 후퇴에 가까웠다. “기지를 버리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군요. 지휘체계가 살아있긴 한 건지…….” 탤벗의 떨리는 말이 옳았다. 여기서 올라가봐야 장벽에 가로막히는데. 갈 곳이 있어서 가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여러 차량이 같은 곳으로 향하는 걸 보면 필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저쪽에 뭐가 있더라?’ 겨울은 지난 기억을 되살렸다. 코로나 트라이엄프를 타고 처음 도착해, 페라리로 움직이는 동안 보았던 풍경들을. 컨테이너 장벽 가까운 곳에 보이던, 쓰레기 가득한 백사장 하나. 그리고 나무 사이에 방치되어있던 헬기. 헬기? 겨울은 수풀 사이에 움츠린 요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 헬기로 탈출하려는 모양이에요. 앤은 기억하죠? 장벽 바로 안쪽에 주기되어있던 기체들 말예요.” 그러자 FBI 요원이 당혹스러워한다. “그것들은 기체수명이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운에 걸어보는 거겠죠. 수명이 다 되었다고 반드시 추락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이겠고요.” “하지만…….” 잠시 고민하는 그녀였으나,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서쪽 해안까지는 직선으로 걸어도 5킬로미터 이상이에요. 그것도 구릉 사이로 빠지는 길이라 실제로는 거의 7킬로미터 가량 될 테고요. 그런데 남은 시간은 고작 40분도 안 되잖아요. 거기서 다른 배를 찾아봐야 너무 늦어요.” 만 전체에서 일어날 핵폭발은 막대한 방사능 낙진을 뿌려댈 것이다. 폭심으로부터 적어도 수십 킬로미터는 벗어나야 안전하다. 고속정을 타고 골든게이트를 벗어났다면 확실하게 영향권 바깥까지 이르렀겠으나, 무의미한 아쉬움이었다. 방사능에 중독되면 확실하게 죽는다. 수명 다 된 헬기 쪽은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여지가 있었다. 조안나가 동의했다. “낭비할 시간이 없군요. 일단 생존자들과 합류해야겠습니다.” “좋아요. 앤이 앞장서요. 이번엔 제가 후방을 맡을게요. 나머지 분들은 측면을 경계하세요.” 기지 방면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도보로 이동할 거리는 약 800미터였다. 서두르는 요원들의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누구 하나 체력이 만전인 사람이 없었다. 이미 12시간 전부터 계속해서 소모되어 온 조안나는 더더욱. 평소에도 감독관 업무로 잠을 아껴온 터라 피로가 더 심할 것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탤벗과 터커 요원이 부축했다. 캬아아아악! 해안도로를 따라 달려오는 무리가 겨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미 해안경비대, 육군, 해상난민들이 골고루 섞인 집단이었다. 당연히 숙주의 체력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생겨났다. 겨울은 가장 빠른 녀석들의 무릎을, 그리고 골반을 겨냥했다. 툭! 툭! 투둑! 투두둑! 단발로 끊어 쏘는 사격이 속도는 연사에 가까웠고, 단 한 번을 빗나가지 않는다. 작정하고 사격기술에 투자한 결과, 「개인화기숙련」은 이제 실질적인 최고 수준이었으므로. 다리 망가진 녀석들이 나뒹굴어 뒤따르는 무리의 발에 채인다. 계산적으로 쏘았기에 와르르 넘어지는 수가 수십이었다. 그럼에도 뒤이어 밀려오는 물결은 그 이상. 결국 밟히는 놈들은 우득 뿌득 소리를 내며 으깨어진 채 죽는다. 압사를 유도하는 사격으로 거리를 확보한 뒤에, 겨울은 앞서간 요원들을 단숨에 따라잡았다. # 195 [195화] #검은 물 아래 (13) 탐조등을 줄줄이 밝힌 장벽이 가까워졌다. 헬기 근방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병사들의 모습도. 선명한 노을빛의 예광탄 줄기들이 사나운 어둠을 수도 없이 그어댔다. 야시경을 밀어올린 조안나가 속도를 줄이며 일행 모두에게 전파한다. “전원 랜턴을, 헉, 켜요! 오인사격을, 하윽, 막아야 하니까!” 어둠 속에서 사람과 괴물을 구분하는데 인공조명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다른 신호 또한 병행해야 한다. 겨울이 사살한 변종들 중 가슴에 켜진 조명을 달고 변이된 경우도 있었기에. 그러나 조금 기다려야 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요원들은 속도를 줄인 즉시 엎드려서 구토를 시작했다. 터커 요원은 한 술 더 떠 달리던 중에 토사물을 흘리고 있었고. 의지로는 도저히 억누르지 못할 생리반응. 고속정의 격렬한 움직임을 견뎌낸 직후에, 두려움과 긴장감 속에서 능력 이상의 전력질주를 감행한 것이다. 헬기가 언제 뜰지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기에. 결국 조안나도 참지 못하고 우욱! 허리를 숙이고 만다. 저녁조차 거르고 움직여온 그녀였기에, 쏟아내는 건 거진 다 시큼한 위액이었다. 겨울은 약간의 난감함 속에서 광범위한 엄호를 제공했다. 야시경을 벗었는데도, 빛이 닿지 않는 응달까지 꽤나 선명하게 보였다. 아, 그렇구나. 이런 느낌이었지. 오랜만에 도달한 초인의 영역이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개인화기숙련」의 영향. 사격 실력을 늘려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자질까지 강화해주는 것이다. 안력(眼力)도 그 중 하나. 단순히 시력이 좋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적은 빛으로도 시야 확보 및 표적식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정신없는 상황이 지나고 보니 그 차이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타탕! 타타타탕! 소음기를 제거한 소총이 경쾌하게 울어댄다. 조명을 표적 삼아 스프린터처럼 육박하던 변종들은, 조안나와 정보국 요원들이 보지 못할 경계 너머에서 집단으로 죽어갔다. 여유가 생긴 뒤엔 장벽 방향으로 신호를 보냈다. 명확한 의미를 지닌 조명의 움직임. 분명 이쪽 역시 경계하고 있었을 테니, 누구 하나라도 반드시 보았을 것이었다. “다들 움직일 수 있겠어요?” 겨울의 질문에 하나둘 몸을 추스른다. 그것을 지켜보던 겨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교전은 저에게 맡기세요. 어차피 그 상태로 쏜다고 명중탄이 나올 것 같진 않으니까.” 이 말에 힘겹게 올라오던 총구 몇 개가 축 늘어졌다. 대신 겨울은 그들의 탄창 일부를 넘겨받았다. 소진한 수류탄 역시. 그리고 곧바로 사격. 타타타탕! 연사나 마찬가지인 단발사격의 연쇄에 분산 접근하던 변종 열아홉 개체가 쓰러진다. 한 결 같이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헬기 인근의 병력과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당신들 뭐야? 정체를 밝혀!” 한 병사가 윽박지르는 외침. 이 와중에도 다른 방향에선 교전이 진행 중이다. 몇 걸음 나아간 조안나가 총을 놓고 양 손을 들어보였다. “저는 조안나 깁슨! 연방수사국 감독관입니다! 여기에 있는 건 중앙정보국 요원들이고요!” 겨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변장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 중국군 세력과의 접촉이 중단된 이래 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자연적으로 없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정보국 요원이었던 탤벗은 갑작스러운 철수 준비에 바쁜 상황이었고. “무슨 개수작이야? 수사국이랑 정보국 요원들이 왜 여기에 있어! 꺼져!” 당연한 반응이었다.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실체를 일선 병사들이 알 리가 없다. “정말입니다! 구 중국군의 전략 원자력 잠수함, 장정 9호를 추적하기 위한 기밀 작전에 투입되었던 인원입니다! 기지 사령관님이라면 알고 계실 거예요! 여기 신분증도 있습니다!” 무기를 꺼내는 것이라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배지를 내보이는 그녀.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닥쳐! 거기 있는 더러운 칭키(Chinky) 새끼나 치우고 말하시지!” 겨울을 향한 모욕이었다. 겁에 질려 난폭해진 병사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 보였다. 상황을 보아 포트 베이커의 지휘본부와 연락이 닿을 것 같지도 않고. 여기에 커트 리의 더러운 인상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칭키. 아시아계에 대한 멸칭. ‘기지 함락의 원인 중 하나가 난민들의 무차별적인 상륙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방치된 차량 가운데 원색 선명한 쿠페가 있었다. 페라리 612 스칼리에티. 아무리 민간차량을 징발했어도 한 기지에 같은 차가 두 대 있진 않을 터. 겨울은 이곳 포트 베이커에서 말발굽 만의 항구로 마중을 나왔던 유쾌한 소위를 떠올렸다. “혹시 그쪽에 아론 바커 소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라면 우리를 알아볼 겁니다!” “바커 소위님을 알아?” 이제야 적대감이 누그러진다. 겨울은 돌아서서 새롭게 접근하는 변종 집단을 사살했다. 요원들로서는 미처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조안나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당신은 계속해서 멀어지는 군요…….” 그녀 또한 사격의 전문가인 만큼, 겨울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음을 깨달았을 것이었다. 새까맣게 물결치는 바다, 한 없이 불리한 환경에서 벗어난 겨울은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냈다. 살상효율의 측면에서 여기 배치된 어떤 중화기도 겨울을 능가하지 못한다. 한 순간에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로부터 당혹스러운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무전연락을 받은 아론 소위가 나타났다. 헬기 중 하나가 휠 브레이크를 풀고 시동을 거는 시점이었다. 조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바커 소위! 저를 기억하십니까? 한겨울 중위와 함께 왔었던 수사국 감독관, 조안나 깁슨입니다! 소위님께서 우리를 엔젤 섬까지 데려다 주셨죠!” 그러나 젊은 소위는 그녀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한 번 보았을 뿐이고,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므로. 감독관이 초췌해지기도 했다. 어두워서 더욱 어렵다. “어……. 미안한데, 당신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런 내용을 알 만 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다고!” 답답한 반응에 분통을 터트리는 조안나. 이해 못할 바 아니었으나, 상대도 긴장하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전투흥분에 빠진 사람에게 합리적 판단을 기대해선 안 된다. 후방을 완전히 침묵시킨 겨울이 그녀 대신 나섰다. 총을 내려놓고 거리를 좁힌다. “오랜만입니다, 소위. 저 한겨울입니다.” “엥?” “얼굴은 변장해서 못 알아보시겠지만, 아마 이건 기억하실 것 같네요.” 그리고 겨울은 한 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를 붙였다. “장수와 번영을 바랍니다. 맞죠? 이민국 청사 앞에서 헤어질 때 소위에게 배운 인사입니다.” 주변에서 총성과 고함, 괴성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조안나는 얼이 빠진 듯 했고, 어? 했던 바커 소위의 얼굴에 점차 깨달음이 번진다. “이런 젠장! 진짜 한겨울 중위님이군요!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싶었습니다.” 하……. 이 답 없는 트레키(Trekkie)를 어떻게 하면 좋지? 어이가 없어진 좌우의 병사들이 소위를 보는 눈빛이었다. 한편으로는 겨울을 향한 의문도 있다. 저게 진짜 한겨울 중위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소위는 겨울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말하자면 길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해요. 헬기로 탈출할 생각인 것 같은데, 언제 출발 가능하죠? 우리가 탈 공간이 있겠어요?” “최대한 많은 기체에 급유를 하는 중이라 공간은 충분합니다.” 밝기만 한 대답은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체에 기름을 채우는 것은, 추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인원을 분산 수용하려는 의도일 테니까. “문제는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정식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한 명 뿐이에요.” “그럼 어쩔 셈이었어요?” “몇 사람이 이륙하고 조종간 다루는 방법만 속성으로 배웠습니다. 조종사 말이 나머지는 비행하면서 무전으로 알려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하더군요.” 허술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계획.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겠다. 그러나 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안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 기종이라면 제가 조종하는 방법을 압니다. 예전에 한 번 전환훈련을 받았었죠.” “오? 정말입니까?” 반색하는 소위와 달리, 겨울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신 없는 기색. 그녀에겐 가벼운 심리장애가 있다. 겨울은 지나간 대화를 회상했다. 항공순찰 도중 마약 카르텔의 중기관총 사격으로 추락하면서 얻은 것이라고 했었지. 그때 내비친 증세가 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섬세한 조종에 장애가 될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막 기본적인 내용만 배웠을 뿐인 초짜 파일럿과, 숙련되었으나 트라우마가 있는 파일럿 중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지금의 겨울에겐 기술습득의 여력이 없다. 탈출이 끝난 뒤 그 과정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면 모를까. 지금껏 사살한 변종들로는 기초 영역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기술을 배워도 문제야. 나중에 해명할 방법이 없는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쿠웅! 장벽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어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 크아아아아! 모두의 안색이 굳는다. 이 상황에서 그럼블이라니. 탐조등 불빛 두 줄기가 일그러진 벽을 향했다. “하필이면 벽 위에 아무도 없는 지금……!” 한 병사가 이를 가는 소리. 평소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포병의 화력지원마저 사라진 현재, 장벽은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였다. “저는 기체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조안나가 바로 앞에 있던 헬기의 조종석에 올랐다. 다시 한 번 쿠웅! 벌어진 균열을 통해, 베타 그럼블의 흉물스러운 낯짝이 보였다. 괴물 역시 인간들을 보았다. 노란 눈이 빛을 반사한다. 묵직한 질량과 완력으로 장벽을 찢어발기는 녀석. 내부를 보강한 컨테이너인데도 계속되는 주먹질을 견뎌내지 못했다. “뭐해? TOW 갈겨!” 대전차 미사일을 쏘라는 소위의 외침에, 험비 포탑에 앉은 병사가 대꾸한다. “아직 유도가 어렵습니다! 이거 빗나가면 안 됩니다! 틈이 좀 더 벌어진 뒤에 쏘겠습니다!” 잔탄이 부족한 만큼 신중하게 발사하겠다는 보고. 그러나 육중한 괴물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무전기에서 잡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저에게 좁은 틈을 두고 슥 물러나버린다. 이어지는 건 저편에 바글거리는 일반 변종들의 침입이었다. 몸을 부대끼며 들어오는 놈들이 굶주린 포효를 내질렀다. “원래 막던 방향만 막아요! 이쪽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겨울이 빠르게 대응했다. 타탕! 타타타타! 막 빠져나오던 것들이 잇달아 시체로 변한다. 틈을 시체로 막아버릴 작정이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해도 위협적인 속도는 못 된다. 오히려 압사당하는 수가 더 많을 듯 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새로운 균열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양쪽 용접이 끊어지면서, 컨테이너 한 칸이 통째로 빠지기 시작했다. 거듭 가해지는 충격. 틈에 끼었던 시체들, 그리고 아직 숨 붙어 있는 변종들이 마구 으스러진다. 살이 찢어지며 돌출되는 뼈가 탐조등 불빛에 붉고 희게 발광한다. 다른 방면을 맡고 있던 중위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급유 중지! 탑승! 전원 탑승! 가까운 기체에 올라타!” 병사들이 제 위치에서 황급히 벗어났다. 콰콰콰쾅! 일제사격으로 탄통을 비운 험비의 중기관총 및 유탄발사기 사수들도 재장전을 포기했다. 후퇴만큼 위험한 순간도 드물다.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탑승 직전 위치에서 멈춰선 채 제압사격을 퍼부었으나, 중화기를 방기한 시점에서 화력이 모자랐다. 컨테이너를 방패삼아 밀어 붙인 그럼블 탓에 무지막지한 숫자가 급류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육로로 들어오는 놈들의 규모는 바다에서 상륙하고 기지에서 감염된 것들을 아득히 능가했다. 겨울 한 사람이 일개 소대 이상의 저지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희생자는 한 두 사람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헬기들이 엔진 출력을 높이면서 배기음과 바람이 거세어졌다. “타세요, 중위님! 이제 뜰 거예요!” 코왈스키 요원의 다급한 부름. 엄호사격의 밀도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러나 겨울은 기체가 땅에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변종들이 그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육박한 탓이었다. ‘매달리기라도 했다간 추락할지도 몰라!’ 인간 이상의 근력으로 수십 단위가 사슬을 만들면 이륙은 물 건너간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기체들 아니던가? 벌써부터 다른 것들과 다르게 들리는 엔진 소리가 있다. 거기에 탑승한 병사들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부디 큰 이상이 있는 건 아니기를. 캬아악! 탄창을 교체하는 틈에 달려드는 하나. 겨울이 바싹 낮아지는 회전을 실어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타격감. 고통에 겨운 비명을 향해 단발 사격을 박아 넣고, 우측으로 세 발, 좌측으로 아홉 발, 정면으로 열일곱 발을 끊어 쐈다. 소모한 탄의 숫자는 죽어나간 변종의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마침내 돌아선 겨울이 높아진 개폐문을 향해 도약한다. 가장자리에 매달린 소년장교를 향해 여러 손이 내밀어졌다. 그러나 허공에서 발을 한 번 구르는 반동만으로 충분했다. 한 발 늦게 뛰어오른 구울의 애타는 손길이 군화 뒤끝에 스쳤을 뿐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겨울이 내부 통신용 헤드셋을 착용한 뒤, 아껴두었던 유탄발사기를 들었다. “앤! 방향을 틀어요! 내가 장벽을 볼 수 있게!” 기체가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만. 그 잠깐의 지연이 공격을 허용했다. 크아아아아! 엔진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그럼블의 포효. 다음엔 투척일 텐데. 겨울이 수십 미터 바깥을 조준했을 땐 이미 늦었다. 깨애액! 직선으로 집어던져진 투사체는 살아있는 변종이었다. 부딪힌 순간 핏빛으로 박살날 정도의 위력. 가까운 공중에서 직격을 맞은 동료 기체가 위태롭게 기울었다. 아직 닫히지 않았던 문. 튕겨져 나가는 병사가 보인다. 아우성치는 역병 무리를 향한 아찔한 추락이었다. 부딪히는 순간 즉사했기를 바랄 따름. 추가 공격을 예고하는 포효를 겨누어, 겨울이 유탄을 발사한다. 이것이 탈출에 필요한 최후의 한 발이었다. 고도를 충분히 높인 헬기들이 선도기를 따라 한 줄로 늘어섰다. 흐트러진 줄이긴 해도. 기지 위를 한 바퀴 맴돌지만 다른 생존자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바다에서는 아직도 교전이 진행 중이었다. 미 해군 함선들이 받아준다면 좋겠으나, 조종석의 교신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어려울 전망이다. 빠져나오는 민간 선박들의 숫자가 포탄과 미사일과 어뢰의 수량을 훨씬 넘어선다. 충돌을 회피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기어코 만을 벗어난 인민해방군 함선들도 있는 모양이고. 쉽게 가라앉을 혼란이 아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 기체로, 후우, 이 기체로 해상에서 대기하는 건……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위험하다고 판단됩니다. 우선은 광역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최단거리로……항로를 잡아야 합니다. 육지에서라면, 후, 언제든 착륙이 가능하니, 까요.] 조안나는 위축된 상태에서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선도기가 동의하면서 대략적인 방향이 잡혔다. # 196 [196화] #읽지 않은 메시지 (8)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돔구녕 : 캬……. 이거슨 즈으응말로 댸다난 써스펜스였스요. 씸장이 쫄깃그리고 돔구녕이 블릉그리는 긴쟝감! 팽소 위기를 별챵짓으로 극뽁하는 셰계관에셔는 단 한 번도 경험한 젹이 읍던 왐배칸 리알리티 아니읐겠쓰요? 그르치요, 말하쟈며는 튜우닝의 끄츤 여윽씌 슌정이다!」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둠칫두둠칫 : 아니 씨발 방송을 여기서 끝내는 법이 어딨어. 평소보다 좀 길어지더라도 무사히 착륙하는 부분까지는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갇혔을 때 떡을 친 것도 아니고. 존나 기대하게 만들고 간만 보다가 마네. 새삼 느끼는 건데 성의가 아주 엿 같이 없어. 진행자, 보고 있냐? 아니면 벌써 나갔냐?」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Blair님이 별 105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려권내라우 : 아……. 접속 풀기가 두렵다. 내 단말기는 싸구려라서 신경차단이 백퍼센트가 아닌데. 바지에 좀 지렸을 듯…….」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국빵의의무 : 마츠밍 별 그만 줰ㅋㅋㅋㅋㅋ」 「호굿호구굿 : 마츠밍ㅋㅋㅋㅋㅋㅋ」 「まつみん : 하아하아, 마츠밍은 참을 수 없어요. 어둠 속에 갇혔을 때 조안나에게 들어가서 느꼈던 겨울 씨의 체온은 정말이지……. 아, 이렇게 뭉클한 경험한 사후보험에서 본 적이 없었어요. 가상인격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뜨겁게 몸을 섞었으면 세계관이 끝났어도 정말 아름다운 결말이었을 것 같은데! 안타까우면서도 끝나지 않아서 안심인 복잡한 마음!」 「너는뭐시냐 : 난 한겨울 얘 하는 걸 보면서 희망을 얻는다.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추가과금 없이 기본보장만으로도 그럭저럭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 「핵귀요미 : 병시나 넌 겨울이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돼.」 「너는뭐시냐 : 왜 갑자기 시비냐 너. 여자 아니었으면 쌍욕 나갔다.」 「まつみん : 아니 여러분, 항상 왜들 그렇게 싸우세요?」 「groseillier noir : 한국인들은 성격이 참 급한 거 같아.」 「BigBuffetBoy86 : 그래서 죽기도 빨리 죽지.」 「헬잘알 : ㅃㅂㅋㅌ ㅂㅂㅂㄱ」 「당신의 어머 : 근데 아무리 TOM 재능충이어도 가상인격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게 가능한가? 정신제어계 DLC 한 방이면 넋이 나가는 것들인데. 별창늙은이가 사랑의 묘약으로 유부녀들 후리고 다니는 거 완전 개꼴이었음 ㅋ」 「빌리해링턴 : 꼴잘알 인정. 근데 적어도 너나 우리 같은 잡종들보다야 사람답지 않겠냐?」 「하드게이 : 리얼한 자학 보소 ㅋㅋㅋㅋ」 「당신의 어머 : 시발. 이 못 배워먹은 새끼, 예의도 없이 팩트를 쑤셔 대고 지랄이야.」 「빌리해링턴 : 안심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병신들이다.」 「빌리해링턴 : 이 중에 한 번이라도 남을 마음대로 지배하거나 깔아뭉개고 싶었던 적 없었던 자만이 저 새끼에게 돌을 던져라.」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뭐, 그렇지.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놈 없고 내가 사람으로 대하는 놈도 없지. 그런 세상이지. 그게 아쉬운 사람들이 이 방송을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똥댕댕이 : 딸쟁이들의 현자타임은 여기까지!」 [눈밭여우님이 별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올드스파이스 : 여우 누님 조용히 별 쏘는 클라스 보소.」 「올드스파이스 : 저 고구마 장사하게 별 하나만 주세요.」 「믓시엘 : 근데 한겨울 얘는 진짜 마이페이스가 대단하다. 방금 이 채널이 실시간 쾌감 순위표에 랭크되어서 신규 중계가 엄청나게 늘었는데, 시간 딱 되니까 방송 끝내버리네.」 「흑형잦이 : 실시간 쾌감 순위는 또 뭐야. 그런 게 있었냐?」 「믓시엘 : ㅇㅇ 관제인격이 업데이트한다는 듯. 접속자들이 느끼는 쾌감의 평균치를 구해서 내는 순위라더만. 그래봐야 1위는 별창늙은이지만. 그 영감 세계관은 인간적으로 진짜 막장이야. 그 이상의 쾌락은 없을 것 같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렇겠지. 존중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남을 존중하고 싶지도 않은 거야. 기회만 되면 갑질하고 싶고, 억지로 강요하고 싶고, 남들 이야기는 듣기 싫고, 짓밟고 지배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똥댕댕이 : 아 그만하라고 개새끼야. 닭살 돋으니까.」 「바람의 윈드 : 이 채널은 참 좋다. 별이 꽤 많이 들어올 텐데도 좀 더 편한 진행을 하지 않는 진행자를 보면서, 항상 더 쉬운 길만 찾느라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고나 할까. 끊임없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찾으면서, 할 수 있는 노력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정당화해왔던 게 부끄러워진다.」 「바람의 윈드 : 불공평한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삶이었다면, 끝내 실패했어도 내 인생은 분명히 아름다웠겠지.」 「바람의 윈드 : 지금의 나는 이 세상처럼 추하고 더럽다.」 「마그나카르타 : 그 아 아 앗! 시공이 오그라든다!」 「똥댕댕이 : 왈왈! 지랄이 짜다! 으르르르!」 「돌체엔 가봤나 : 꿈보다 해몽 시팔 ㅋㅋㅋㅋ」 「엑윽보수 : 에고 넘치는 병신 새끼 하나 납셨네. 문창과 나왔냐?」 「질소포장 : 야, 그러는 너도 병신이네 ㅋ.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문창과가 없어진 지가 언젠데. 요즘 인문계는 경영학과 말곤 다른 학과가 몇 개 없어 ㅋㅋㅋㅋ」 「그랑페롤 : 좀 아니다 싶긴 한데, 저게 그렇게 욕먹을 소리였냐」 「동막골스미골 : 존나 잘난 척 있는 척 허세가 넘쳐흐르잖아.」 「폭풍224 : 2222222」 「돌체엔 가봤나 : 백퍼공감 ㅇㅇㅇㅇ」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너네들 공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사후세계는 안 봐도 뻔하구나.」 #보안위원회 「위원 A : 여러분. 사후보험 보안 기술진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위원 B : 보안 기술진?……아, 그 액티브 X 같은 보안모듈 만드는? 그 사람들이 왜요?」 「위원 A : 저도 조금 전에 국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몇 명은 실종되고 나머지는 변사체로 발견되었답니다. 위탁업체 대표까지도 자택에서 숨져있었다던가요. 보안 프로그램 개발 자료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고 하는군요.」 「위원 C : 거 참, 한동안 잠잠하더니 귀찮게 시리. 이번엔 배후가 어딜까요?」 「위원 A : 글쎄요, 그건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하는군요. 이만큼 은밀하고 조직적인 첩보행위가 가능한 국가가 몇이나 되겠습니까마는……. 일단 최근에 입국한 각국의 정보부처 관계자들을 용의선상에 두고 조사를 해보겠다는군요. 의미는 없겠지만 일단 목록이나 한 번 보시죠.」 「위원 C : 어휴,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네요. 사후보험 초기만 하더라도 비상이 걸릴 때마다 보곤 했던 면면이었건만. 아니, 잠깐. 러시아 쪽은 책임자가 바뀌었네요? 캬! 이거 대단한 미인인데? 가상인격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야.」 「위원 C : 피부가 아주 그냥, 혀로 핥으면 살살 녹아내릴 것 같어. 고금 불문 첩보계는 역시 미모가 스테이터스인가? 전임자도 아주 젠틀하게 늙은 영감이었고 말이지.」 「위원 E : 사람 거 쓸 데 없는 소리는. 아무튼 뉴 페이스의 등장은 꽤 주목할 만 한 정보로군요. 전임자가 정보국 특무부대 출신으로 내로라하는 엘리트였잖아요. 경력도 그만큼 화려하고.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그런 숙장을 대신한다? 이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경이 엄청나다는 뜻 아니겠어요?」 「위원 B : 또 모르죠. 이 여자는 단순히 눈속임이고, 기존의 책임자가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혹은 러시아 쪽 인물교체를 틈타 제3국이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겠고요. 국정원에서 뭐 알아낸 거 없답니까?」 「위원 A :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직 확실한 게 없다고.」 「위원 B : 어허. 이 나라 경제의 심장인 사후보험에 관한 사건인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이 이렇게 느려 터져서야. 외부감사 한 번 들어갈까요?」 「위원 E : 농담 한 번 살벌하게 하시네. 돌아가는 사정 다 아는 처지에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 친구들도 무의미한 수사에 힘을 쏟고 싶진 않겠죠. 타국의 첩보행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면서 당해주는 게 서로한테 좋은 일이기도 하고.」 「위원 B : 아니 뭐 그냥, 대외적으로 내세우기에 적당한 핑계거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가끔은 이런 자정작용 이벤트가 있어야 정부의 신뢰성이 제고되고, 국민들도 아! 나라살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오랜만에 언론에다가 얼굴 좀 비춰주면서, 뭐냐 그, 정보기관의 태만함을 국민의 이름으로 준엄히 꾸짖는, 뭐 그런 구도?」 「위원 C : 거 괜찮네. 국민들도 가끔 주인의식을 느끼고 그래야 다른 불만을 억누르면서 살죠. 국민들의 단합을 위해 국가적인 위기의식을 부채질해줄 필요도 있겠고, 또 이번 사건의 배후에 대한 간접적인 경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해볼만 한데요?」 「위원 E : 이 사람들이 지금……. 이봐요들, 내 조카사위가 국정원장이란 말예요. 걔 건드리면 저도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위원 A : 아, 그랬었죠. 미안합니다. 잊고 있었어요. 다들 자제합시다.」 「위원 D : E 위원,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애초에 우리 위원회 자체가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건데 체면 차릴 필요가 있나.」 「위원 F : 저기, 여러분. 잠시만요.」 「위원 A : 말씀하세요.」 「위원 F : 저는 이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다들 왜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사후보험 관련 정보가 유출된 마당에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위원 B : 하하하. 진정해요, F 위원. 신참이라서 잘 모르시는 모양이구먼. 사후보험 보안 프로그램이 표면적으로는 중요한 기밀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위원 F : ……그래요?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위원 B : 물론이죠. 이제 우리는 한 식구인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후보험은 처음부터 보안모듈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하.」 「위원 F : 예? 그건 어째서입니까?」 「위원 B : 저도 전문가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사후보험 관제인격의 내장 방화벽만으로도 상정 가능한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데다, 설령 그 방화벽이 뚫린다 하더라도 트리니티 엔진이 문자 그대로의 불가해인지라 뚫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겁니다.」 「위원 F : 불가해? 해석이나 복제가 안 된다는 뜻인가요?」 「위원 B : 네. 업계 탑이라는 사람들 하는 말이, 천재 중의 천재였던 최초의 설계자와 그의 연구팀을 다시 불러와서 수십 년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다 할지라도 지금의 트리니티 엔진과 관제인격을 역설계할 순 없을 거라 확신하더군요. 초기의 엔진을 재현한다면 또 모를까. 근데 이게 만들어질 당시에 당사자들조차 기적이라 불렀던 물건인지라……. 처음 상태조차 제대로 재현하면 다행이라던걸요.」 「위원 F : 확실합니까? 그걸 믿을 수 있겠어요?」 「위원 D : 안심해요. 우리라고 왜 사후보험의 중요성을 모르겠습니까? 굉장히 많이 검증해봤답니다. 핵심 코드 일부를 복사해서 복수의 외국 전문가 집단과 인공지능 엔진에 익명으로 분석을 의뢰했는데, 이게 트리니티 엔진의 구성요소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더군요. 도리어 불쾌해하던데요? 아무 의미도 없는 쓰레기 데이터로 장난치는 거 아니냐고.」 「위원 F : 허어…….」 「위원 A : 우리 사이에선 오래 전에 결론이 난 문제입니다. 설령 또 하나의 트리니티 엔진이 만들어진다 한들, 이미 20년 이상 작동하며 스스로를 개선해온 기존의 트리니티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드웨어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기술격차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사후보험의 하드웨어는 언제나 세계 최고수준이지요.」 「위원 C : 게다가 최초의 설계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 핵심적이지 않은 부분은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맡겼다보니 수십 년 지난 지금에 와선 누가 만들었는지 추적도 안 되지……. 관행상 계약서도 제대로 안 썼으니 뭐…….」 「위원 E : 아무도 이해를 못하고, 어떤 시스템으로도 분석이 안 되는 유실기술인데 기밀이랄 게 있나. 각 지역에 분산되어있는 수만 평의 데이터센터를 통째로 복사한다면 모르겠지만. 엔진 코어는 가급 국가중요시설로 지정되어 있잖아요.」 「위원 B : 애초에 우리가 여기서 안심하고 떠들 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사후보험의 보안이 그만큼 확실하기 때문이잖습니까? 불필요한 걱정은 그만 내려놔요.」 「위원 F : 낙원그룹을 손에 넣은 고건철 회장이 딴 생각을 품는다면?」 「위원 B : 어디 해보라지요. 관제인격은 법률을 위반할 수 없게 만들어졌어요. 이제 와서 그 원칙을 수정할 능력도 없고요. 그러니 우리가 만든 법이 우리를 지키는 한, 외국의 정보기관이든 국내의 정신 나간 졸부든 염려할 거리가 못 됩니다. 글쎄요, 관제인격이 미쳐 날뛴다면 위험할지도. 하하하!」 「위원 E : 어휴, 그 허황된 망상은 입에 담지 맙시다. 사후보험 반대론자들의 낡아빠진 레퍼토리 아닙니까. 하도 들어서 아주 지긋지긋해요. 만들어진 이래 줄곧 멀쩡했던 관제인격이 왜 갑자기 폭주한다는 거야……. 이만큼 안정적인 AI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위원 A : 뭐 그런 겁니다. F 위원, 이해하셨지요? 당신은 고건철 회장을 견제하는 일에만 힘을 보태주시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자리를 마련해드린 거니까요. 그 괴물을 상대하려면 여야합작이라도 해야지 별 수 있나. 밖에서는 우리 편 아닌 척 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원 F : 대충 알겠는데,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나도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아야 내 사람들을 설득하지.」 「위원 A : 뭡니까?」 「위원 F : 그럼 그 보안모듈이라는 건 결국 산업 스파이들을 낚기 위한 떡밥에 불과한 거예요? 그 외에 아무 기능도 없어요?」 「위원 B : 왜 없겠습니까.」 「위원 F : 있어요?」 「위원 B : 그럼요. 보안모듈의 진짜 목적은 사후보험 이용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데요.」 「위원 F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불편하게 만들어요?」 「위원 B : 그야 여러 이유가 있죠. 우선 보안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갱신되고 복잡해지면, 그 자체로 세대별 접근성이 달라지거든요.」 「위원 F : 접근성?」 「위원 B : 못 배우고 게으른 노인네들은 체험센터에 와서 잠깐의 꿈같은 낙원을 경험하고 가는 정도가 딱 맞다 이거지요. 기본 제공 사양에 질려서 거부감을 느끼면 곤란하니까. 사실 이것도 옛날이야기이긴 해요. 지금의 노인 세대는 그 당시의 노인들하고 또 달라서. 사후보험 제도 도입 초기에 거부감을 희석시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고나 할까요.」 「위원 F : 그럼 지금은요?」 「위원 B :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해요. 대한민국의 핵심 산업인 사후보험이 언제나 위협에 노출되어있다! 고 하기 전에 밑밥을 깔아놓는 거죠.」 「위원 E : 물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산을 타내는 거지만.」 「위원 E : 국가경제의 심장을 지키기 위한 보안 프로그램 개발. 이게 얼마나 나랏돈 빼서 쓰기 좋은 명분입니까? 보안기술업체들의 독점시장을 지켜주는 대가로 우리도 적당히 사례금을 받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요.」 「위원 F : 어이구……. 당신들 그동안 정말 어지간히 해먹었겠군.」 「위원 C :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요. 아까 누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한 식구니까.」 「위원 F : 그거 때문에 민원이 엄청나게 들어오는 건 알고 있어요?」 「위원 A : 불편함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죠. 어쨌든 할 수 있으면 불만은 불만으로만 끝납니다.」 「위원 F : 흐음.」 「위원 E : 예를 들면 납골당 면회 절차가 그런 식이잖아요. 너무 번거로워서 할 수가 없다고. 근데 할 수 없다는 건 변명이죠. 할 수 있는데 귀찮으니까 안 하는 거지.」 「위원 E : 만약에 안치된 가족을, 돌아가신 부모님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봐요. 절차가 번거로운 게 문제인가.」 「위원 B : 맞는 말씀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랑 달라서 정신력이 약해요. 우리가 그 나이일 때 우리 또래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명절마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열 시간씩 달려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납골당 면회신청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롭다? 하, 핑계 없는 무덤 없습니다.」 「위원 C : 그 사람들은 알고 보면 겉으로만 불평하는 거예요. 실제로는 원래 안 갔을 면회인데, 절차가 불편해서 못 가는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중인 거죠.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국민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수밖에.」 「위원 F : 듣고 보니 그렇군요. 참으로 이치에 맞습니다.」 「위원 A : 대중은 원래 잘해줘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산업화 시대 때에 비하면 절대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죠. 사후보험의 낮은 만족도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러니 굳이 완벽하게 만족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요.」 「위원 E : 대중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면 나라가 망하는 걸 어쩌겠습니까. 깨어 있는 소수가 십자가를 지고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수밖에.」 # 197 [197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6) 참으로 치명적인 슬픔이었다. 고건철 회장은 수심(愁心)에 찬 한가을로부터, 오늘도 한결 초췌해진 그 모습으로부터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녀는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병적인 우울함에 빠져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잡것들 같지는 않았다. 한 번이라도 그 따위로 흐트러진 면모를 보였다면, 회장은 그녀의 상품가치를 많이, 아주 많이 깎아내렸을 것이다. 한가을은 언제나 꼿꼿했다. 삶의 의지가 분명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녀를 시들게 만드는 감정이기도 했다. 가을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회장은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미친 여자가 다시 있을 리 없다.’ 적어도 그가 사는 이 시대에서는. 아마도. 달리 있었다면 왜 이제야 처음으로 보았겠느냐고. 거짓일 수 없다 믿었던 감정이 거짓이었던 이래, 회장은 사람의 마음을 신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가을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토록 고상한 것이 사람이어선 안 된다. 비경제적인 아름다움이라고도 생각했다. 허나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본디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 이미 상품이며, 아름다울수록 희소성이 증가한다. 한가을은 희소가치가 높은 꽃이었다. 그래서 폭군은 분노와 조바심을 동시에 느꼈다. 이 계집이 언제까지 피어있을 것인가. 끝끝내 손에 넣지 못한 채로 시들어버리고 말 것인가. 한가을에게는 그가 지닌 모든 거래수단이 무의미했다. 따라서 참기 힘든 충동을 느낀다. 강제로 꺾어버리고 싶은. 범해버리고 싶은.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는 순간, 폭군은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잡것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터. “안 어울리는군.” 회장의 언짢은 평가가 여러 사람을 겁먹게 만들었다. 세계 최고의 패션 코디네이터니, 스타일리스트니, 의상 디자이너니 하는 잡것들. 그들에게 주어진 의뢰는 하나. 가을의 아름다움을, 상품가치를 돋보이게 만들 것. 주된 이유는 모종의 검증을 위함이다. 회장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 자칭 전문가들이 폭군의 눈치를 살핀다. 그 주눅 든 모습들로부터 최초의 자신감을 떠올리긴 어려웠다. 반드시 만족하실 거라던 호언은 어디로 갔는지.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더 준비된 것 없나?” 추궁하는 회장 앞에서 가을을 제외한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혜성그룹 차원의 의뢰를 받아들인 지 벌써 열흘째. 처음엔 성공을 확신했으나, 이제는 그 반대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무수한 불합격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뭇거리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나섰다. “아직 몇 세트가 남아있긴 합니다만, 그 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다른 어떤 색을 써도 좋지만, 녹색만큼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 씨발년이. 말로 내뱉지 않았을 뿐 노여움을 감추지 않는 회장 앞에서, 식은땀을 닦아내면서도, 스타일리스트는 직업적 자부심으로 견디며 다시금 고쳐 말한다.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안 된다는 주문이야 많이 받아보았고, 그 중엔 특정 디자인뿐만 아니라 색채적인 거부감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정답이 아닌가 하고.” 아직 폭발하지 않는 회장에게서 작은 용기를 얻어, 스타일리스트는 남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는 자존심도 버렸지요. 전세계의 경쟁자들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도 회장님께서는 단 한 번을 기꺼워하지 않으셨고요. 예외 없이,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흔드신 걸요.” 조금이라도 고민을 한다던가, 망설인다던가 했었다면, 전문가들은 고객의 취향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성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건철에게선 일말의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보셨던 게 정확히 천 번째의 연출이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 어렵다는 뜻이죠. 회장님께서 걸어두신 유일한 제한조건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스타일리스트는 스스로 돋보이는 자세를 잡았다. 다소 굳어있음에도 경력과 관록이 느껴진다. 이제 보니 그녀의 의상이 전반적으로 녹색 기조였다.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로 깊이를 부여하고, 그 외의 다른 색은 연속적이거나 강조적인 배색효과로 어우러지며 적은 지분을 차지할 따름. 의도를 파악한 회장에게, 스타일리스트는 긴장감 속에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 업계에서 고객이 자기 취향을 잘못 아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저희에겐 클라이언트의 미감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하우가 필수적이거든요. 결국은 눈치를 보는 일이지만, 교차검증을 반복해서 정답에 접근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건방진. 폭군은 다른 누군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시험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러나 용납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지 않고서 무슨 거래를 한단 말인가. 스타일리스트는 거래에 응했을 뿐이며, 그것은 무척이나 경제적인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불쾌한 일은 따로 있지 않던가. ‘이 육체에 한겨울이 남아있어,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불합리한 의혹. 과거에 그런 속설이 있기는 했다. 허나 근거 없는 미신이었을 따름. 의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는 없으며, 이론적으론 실소가 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떨쳐낼 수 없다. 첫 만남에서부터 한가을에게 강렬하게 끌린 이유부터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녹색의 원피스. 알고 보니 그것은 한겨울의 선물이었다. 이외에도 어울리는 의복이 매양 같은 색조여서, 회장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첫 눈에 반한 것인가? 진실로 한가을에게 어울리는 색이 하나 뿐인 건가? 아니면 이 모든 것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는가?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내가 왜 이토록 비합리적인 미신에 흔들린단 말인가……. 그런데 가을에게 이끌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간극은 폭군을 갈수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가을을 죽이는 그리움과 같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다 나가.” 퉁명스러운 지시에 전문가 집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가을은 자리를 지켰다. 회장이 ‘모두’를 지칭할 때 그녀만은 항상 예외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꾸며놓은 모습 그대로였기에, 가을은 무겁게 붉고 화려하게 검었다. 그녀의 이름과 같은 계절의 절정이 테마라고 했던가. 낙엽 지는 달, 서리가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무르익는 화원을 담아내겠다고. 회장의 불만족과 별개로, 전문가 집단은 가을이라는 소재 자체엔 무척이나 만족했다. 외모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면서. 묵묵히 응시하던 폭군이 한참만에야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거래가 진전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 “너는 내가 네 동생의 몸에 있는 한 어떤 거래도 있을 수 없다고 했었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묻겠다. 만약 내가 한겨울에게 이 육체의 모든 권리를 반환할 경우, 그 때는 거래가 성립하는 것이냐?” 가을이 두 손을 움켜쥐었다. 이건 무슨 함정인걸까. “그렇다면 회장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죠?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시나요?” “본래의 육체? 네 질문은 옛 몸뚱이를 새롭게 만들어서 쓸 작정이냐는 뜻이겠지.” 이식이 끝난 다음, 고건철은 과거의 육체를 손수 파괴했다.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운 나쁘게 이를 목격한 딸, 고아영은 실신 직전까지 갔다. 폭군은 딸이 구토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정말로 즐거운 순간이었지. 고건철은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물론 유전정보는 남아있었다. 이식수술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따라서 복제체 생성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젊고 건강한 몸을 만들어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혼란스러워하는 가을에게, 회장이 차선책을 제시했다. “옛 몸뚱이도 아니고, 네가 네 동생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 몸뚱이도 아닌, 제 3의 다른 육체를 쓰려고 한다. 젊음을 팔겠다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것은…….” “이것조차 안 된다고 하지는 마라.” 고건철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네 동생의 거래를 납득하지 못하는 건, 그 애새ㄲ……한겨울이 진정으로는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겠지. 남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고. 뭐, 좋아. 내가 보기에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른 놈들은 어떨까?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들 말이야.” “…….” “젊음을 팔아 화려한 사후를 즐기고 싶은 놈들은 얼마든지 많아. 완전한 성인으로서 자발적인 결정이지. 그들의 선택마저도 네가 나무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사후보험의 등급 상승, 그리고 지금까지 출시된 모든 세계관과 앞으로 출시될 모든 세계관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 권한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한 호흡, 조용한 가을을 살핀 뒤에, 회장이 다시 말했다. “이식거부반응이 없는 몸뚱이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어도, 그런 매물이 새롭게 나올 때까지 임시로 다른 몸을 쓸 수야 있을 거다. 면역억제제를 맞는 게 다소 불편하긴 하겠다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지.” 여기까지 각오하고도 그를 고뇌하게 만드는 의심 하나. “그 후에 정말로 거래가 성립하겠는가.” 가을은 회장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가 회장에게 미련을 둘 이유가, 한겨울의 육체 외에 달리 있겠느냐고. 지금도 겨울의 마음을 지켜주겠다고 거래에 응하지 않는 것인데, 그 때가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느냐고. 어쨌든 가을 스스로를 거래의 대가로 지불하는 건 동일하다. 겨울이 그것을 바랄 리 없잖은가. 역시나, 이어지는 말들은 가을이 이해한 그대로였다. “이건 사실상의 신용거래다. 그 후에 정말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있는 건가?” 가을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잘못 생각하고 계세요.” “내가?” “네. 비록 저를 원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어요. 회장님께서는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신다는 거.” 이에 고건철이 비웃었다. “너는 자기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너에게 바라는 건 애정행위의 조각모음에 불과하다고.” “아뇨. 실제로는 분명히 그 이상을 바라고 계세요. 그리고 그건 거래나 계약으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고요.” “하…….” 어처구니없는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는다. 폭군은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렇게까지 없는 말을 꾸며낸단 말인가. “솔직하게 그냥 싫다고 하는 게 어떠냐? 네겐 내가 원수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지.” “싫지 않아요. 원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믿으세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한때는 미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오히려 가을이 보기에 회장을 그 누구보다도 더 증오하는 것이 회장 그 자신이었다. 거칠게 외면하는 고건철에게, 가을이 침착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지도 마세요. 그 사람이 그러기를 원한다고 해도, 결국 삶이 불행하니까……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해질 방법이 없으니까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잖아요. 선택을 강요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도망친 사후가 행복하다면 다행이겠지만, 여전히 불행하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을 찾기 어려울 거고요. 과연 그 사람이 결과를 충분히 알고 결정을 내리는 걸까요?” 개인의 자유. 가을은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속도를 즐기는 오토바이 탑승자가 개인의 선택으로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더 속도감을 누리고 싶은 거라면, 착용을 강제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가을은 그렇다고 여긴다. 정작 그 사람도, 사고가 나서 심하게 다치거나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테니까. 말로는 죽음을 각오했다지만 정말로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린 결정일 테니까. 하물며 몸을 파는 일은, 거친 세상에 쫓겨 사후세계로 달아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입고, 버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세상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인걸…….’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과연 이 세상을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신이 오만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겨울을 보낸 가을에겐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가혹한 이별이었기에.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몸을 고집하는 한, 가을에게 있어서 폭군은 그저 폭군일 따름이었다. “오늘도 결렬이로군.” 고건철 회장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았다. 속으로 화를 삭이기가 큰일이었다. 정말 크게 양보했다고 생각했건만, 이 이기적인 계집은 여전히 자기만 알 뿐이라고. 대체 나는 왜 아직도 이끌리는 것인가. 도대체 왜. # 198 [198화] #생존자들 (1) 포트 베이커를 탈출한 헬기 대열은 1번 주도(State Route 1, Shoreline Hwy)를 따라 북상했다. 골든게이트로부터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을 벗어나는 가장 안전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안전하다는 말은 언제 있을지 모를 불시착에 대비했다는 뜻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 서북쪽은 산맥이 끊이지 않는 까닭. 특히 마린 힐즈(Marin Hills) 산맥의 최고봉인 타말파이어스를 중심으로 넓은 범위를 경계해야 했는데, 이 일대가 거대한 세쿼이아 나무의 자생지인 까닭. 헬기가 수림(樹林)으로 떨어질 경우 생존 확률은 희박할 것이었다. 다만 한 번은 다른 의견도 제기되었다. 도로가 해안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기점, 하얀 백사장을 남쪽에 낀 넓은 늪지(Bolinas Lagoon)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저는 해안선을 곁에 두고 움직이는 게 좋다고 봅니다.] 해안경비대 소속의 어느 소위가 꺼낸 제안. [이 부근, 마린 카운티는 연안에 가까워질수록 인구밀도가 감소합니다. 즉 그만큼 변종집단과 조우할 가능성이 낮아지겠죠. 거기다 바위 해변이 거의 없으니 비상착륙을 시도하기도 용이합니다. 얕은 물 위로 착수하면 충격이 최소화될 테니까요.] 그리고 최대의 장점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군이나 해안경비대 순찰선에 구조를 요청하기 쉽습니다. 비록 지금 한창 교전이 진행 중이겠으나, 길어봐야 오늘 중에는 정리되겠지요. 우리는 칼 빈슨 전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과연 해안경비대이기에 닿기 쉬운 발상이었다. 어느 정도는 타당하기도 하고. 그러나 불가하다. 겨울이 반박할 것도 없이, 후속기에서 곧바로 반대의견이 나왔다. [생각이 짧군, 소위. 물 아래에서 신종 괴물이 돌아다니는 걸 알고도 해안으로 가자는 건가?] 현 시점에서 계급상 최선임자인 육군 대위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얕은 물에선 멜빌레이의 위협성이 감소할지언정,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 [해군은 지금 여러모로 혼란스러울 거야. 물론 아무리 그래도 항모전단이 무너질 리는 없겠지만, 상황이 하루 만에 수습될 거라는 예측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군. 골든게이트 봉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그토록 많은 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말이야.] 해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해안봉쇄였다. 여기에 물 아래의 괴물이 더해지면, 대처방안을 확립하기까지는 다소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고. 이는 행정적인 절차를 포함하므로, 지휘부의 최종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해군의 작전양상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더 공중으로 이동할 수 있겠나? 조만간 연료가 부족해서라도 착륙하게 될 거야. 문제는 연료뿐만 아니라 탄약도, 식량도 모자란다는 거지. 특히 식량이 중요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쪽 해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지 않나?] 이를 해안경비대 소위가 긍정했다. [확실히……. 대부분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렇지? 난 기약 없이 구조만 기다리고 싶진 않아. 탈출한 게 우리 뿐만은 아닐 것이고. 기약 없는 구조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자력구제가 가능한 경로가 낫다고 보는데. 도로를 따라가야 위치파악도 쉬울 테고, 물자와 이동수단을 구하기도 좋겠지. 정 궁하면 사냥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어.] 그렇게 말을 맺은 대위가 겨울의 의견을 구했다. [거기 한겨울 중위 있나? 젠장, 이제야 말을 걸어보는군. 어떤가. 자네 의견도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대위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은 서로 소속이 다른 탓이었다. 육군과 해안경비대의 구분만 있는 게 아니다. 겨울과 대위가 같은 육군일지라도 소속부대가 다른 고로 명령계통 또한 달랐다. 여기에 소수의 CIA 요원들, 한 명 뿐이지만 FBI 수사관까지 있는 걸 감안하면, 대위로서는 마냥 계급을 내세우기 애매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온건한 태도이긴 했다. 우유부단함과는 다르다. 의견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니까. 더군다나 여러모로 경도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괜찮은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앞서 발언한 해안경비대 소위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괜찮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겠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여전히 위태로운 마당이니. 장교들의 됨됨이에 안도하며, 겨울은 비어있는 보조조종석, 조안나의 옆자리에서 호출에 응했다. “동의합니다. 해군에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도 출력을 낮춰서 교신하는 마당에……. 구조대보다 트릭스터가 먼저 올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혼자 오지도 않을 거고요. 한쪽이 바다이니 포위되기도 쉽겠죠.” 무전망에 가벼운 신음이 흘렀다. 해안경비대 소위의 것이었다. 트릭스터가 출현한 이후 개량된 무전기는 전파감쇄기능이 붙었으나, 해군에 무전을 보내려면 당연히 최대출력으로 사용해야 한다. 수신반경 이내에 트릭스터가 있다면 위험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한 가지 더. 골든게이트에서 벗어난 배들이 해안을 따라 움직일 텐데……. 기뢰원이 있으니 상륙이 쉽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상륙하려고 할 거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연료가 넉넉한 배는 드물지 않겠어요?” [아…….] “표류해서 죽으나 폭발에 휘말려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인걸요. 연안 전역에 걸쳐 상륙시도가 이어질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마찰이나 교전도 빈발하겠죠. 변종들도 여기에 이끌린다고 치면, 바다 쪽으로 가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되네요.” 대화가 여기에 이른 시점에서, 헬기 대열은 이미 기수를 돌리기에 늦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륙 깊이 들어선 상태였다. 도로가 완만한 협곡을 따라 이어지기에, 산과 숲에 갇힌 비행소음은 멀리까지 퍼지지 않을 것이었다. 선도기 파일럿이 무전을 보냈다. [쫓아오는 변종이 보이지 않는군요. 앞으로 한동안은 마을이나 도시가 없을 테니, 고도를 더 낮춰도 괜찮을 듯 합니다. 20미터까지 하강하겠습니다.] 이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 회전익기의 특성상, 낮은 고도에서는 엔진이 정지한들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을 터였다. 지세가 험하고 장애물이 많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반대는 없었다. 그럼블이라도 나오면 큰일이겠으나, 거주지가 드문 곳에서 특수변종과 조우할 확률은 낮았다. ‘살리나스 때처럼 정찰하는 무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겨울은 댐 붕괴를 막기 위해 호수로 향하던 날을 떠올렸다. 가장 가까운 도시, 산타 마가리타가 10킬로미터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트릭스터가 포함된 집단이 존재했었다. 허나 지금은 덜어도 좋을 우려였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변종들은 전력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핵공격으로 광범위한 지역의 보급이 차단된 현재, 놈들은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혹은 이미 시작되었거나. 겨울은 아마도 후자일 거라고 예상했다. 역병은 벌써 일 년 이상 봉쇄선을 넘지 못했다.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왔으니, 개중 가장 교활한 것들은 가능한 많은 무리를 집중시키려 하지 않을까?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역병의 밀도가 낮아질 수밖에. 방역전쟁의 주력이 초유의 위기에 처한 반대급부로 이곳의 생존자들이 안전해진 셈이었다. 고도를 낮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코 기체 하나가 말썽을 일으켰다. 어어? 미숙한 파일럿이 이상을 알리기도 전에, 대열을 이탈한 3번기가 느리게 회전하며 고도를 상실했다. 느린 속도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후속기 전체가 경기를 일으켰다. 조안나가 조종하는 기체를 제외하고. 3번기는 결국 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완만한 비탈에 거칠게 미끄러지는 동체. 쿠웅- 급격한 추락이 아니었는데도, 충돌음은 프로펠러 소음을 뚫고 들어올 지경이었다. [3번기, 응답하라! 3번기!] 선도기로부터 호출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답신이 돌아오진 않는다. 무사히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아, 단순히 경황이 없는 모양이었다. 혹은 탑재된 무전기에 이상이 생겼거나. “착륙하겠습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조안나의 날카로운 경고. 긴장한 상태에서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둠 속에서 유도등도 없이 경사진 땅에 착륙하는 것이니. 달리 도울 방법이 없어, 겨울은 그저 그녀의 어깨를 꾹 잡아줄 뿐이었다. 하지만 착륙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후우…….” 점차 낮아지는 배기음을 들으며, 심력을 소진한 조안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 뒤에야 겨우 조종간을 놓는 손이 심하게 떨린다. 워낙 많은 땀을 흘려 탈수가 우려될 정도였다. “먼저 가볼게요. 조금 쉬다가 나와요. 아마 바로 이동하진 않을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잠시 눈을 붙이게 해주고 싶건만. 힘없이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내리는 겨울. 능선 방향, 검푸른 새벽하늘 아래의 검은 숲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 사이에 부패한 역병의 악취는 섞여있지 않았다. 다른 기체들이 잇달아 착륙했다. 이륙보다 착륙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나, 다들 어떻게든 해내고 말았다. 내리는 병력들이 투덜거리긴 했으나, 그것은 사실 기쁨의 표현이었다. 병사들이 원을 그리며 경계를 확보하는 사이에, 지휘관들이 추락기체부터 시작해서 부상자 발생여부를 확인하고 다녔다. 끄아아아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괴성. 한순간 긴장감이 비등한다. 그러나 별것 아닌 위협이었다. 소총에 소음기를 장착한 겨울이 야시경도 없이 북쪽을 겨냥했다. 초지를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변종의 수는 고작 셋. 감각 또한 그 이상을 경고하지 않았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답다고 해야 할까. 두두둑! 연사나 다름없는 세 번의 조준사격이, 아마도 일가족이었을 역병 숙주들에게 안식을 선사했다.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딸. 아이가 입은 하얀 원피스는 이 밤에도 선명한 표적이었다. “레이저 조준기도 없이 이 거리에서 명중탄이 나옵니까? 맨눈으로 저게 보여요?” 겨울이 쏘고 나서야 겨우 정확한 방향과 거리를 확인한 해안경비대 소위가 감탄했다. 아까 해안 방향으로 가자고 권하던 그 목소리였다. “한겨울 중위님이잖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거지.” 끼어든 사람은 바커 소위였다. 소속이 같다보니 친분이 깊은 모양이라, 먼저 말했던 소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은근히 너랑 같은 취급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겨울은 낯선 소위의 명찰을 확인했다. “이름이……에스카밀라 소위?” 그러자 그녀가 절도 있게 경례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해안경비대 제11구역, 샌프란시스코 항만보안중대(PSU), 비올레타 에스카밀라입니다. 저 녀석하고는 사관학교 동기고요.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 세계관에서 전투병과의 여성장교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해안경비대 초급 장교의 4분의 1이 여성이므로 놀라운 일까지는 아니었지만. 성으로 보아선 히스패닉계일 가능성이 높은데, 외관상으로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부모와 그 윗세대에 걸쳐 여러 번 피가 섞였을 것 같았다. 이때 육성으로 지시가 전달되었다. 아무리 출력을 낮춰도, 전파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좀 시끄러운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랭포드 대위님이 부르시는군요. 같이 가시죠.” 에스카밀라 소위가 가리킨 방향에서 육군 대위가 장교들을 불러 모으는 중이었다. 그리로 이동하니, 대위는 겨울부터 유심히 살핀다. “목소리만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군. 그 변장, 당장 지울 수는 없는 건가? 볼 때마다 당황하는 병사들이 많은데 말이야. 나부터도 좀 어색하고.” “어렵습니다. 기술자가 있긴 하지만 몸만 겨우 빼낸 터라.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입맛을 다신 대위가 스스로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데미안 랭포드일세. 제111야전포병연대 2대대 1중대장이지.” “포병……이십니까?” 겨울은 그가 하급자들 앞에서 신중한 이유를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그래. 포트 베이커는 상륙작전을 위해 준비된 교두보였으니까. 기지에 화력방호를 제공할 겸, 연대와 제116연대전투단의 선봉으로 먼저 와서 본대를 기다리는 중이었지.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되었지만 말이야.” 간밤에 대한 심회인지,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겠지. 일단 우리 쪽 장교들과 서로 인사 나누게. 그 뒤에 정할 것을 정하고, 필요한 작전행동을 취하도록 하지.” 주의는 아까부터 모여 있었다. 주둔지가 같아도 소속이 달랐기 때문인지, 겨울 뿐만 아니라 육군과 해안경비대 장교들 사이에서도 통성명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겨울은 이 자리에 CIA 요원들과 FBI 수사관을 부를까 하다가,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 199 [199화] #생존자들 (2) 대위를 제외한 육군 장교는 셋이었다. 루벤 페닝턴 소위, 말콤 크루거 소위, 랄프 노박 소위. 그런데 이 중에서도 다시 소속이 갈렸다. 랭포드 대위의 부하인 페닝턴 소위와 달리, 크루거 소위는 수송헬기 파일럿이었으며, 노박 소위는 육군 정보지원그룹에서 파견된 인력이었다. “소위 랄프 노박. 제9심리전대대 에코 중대 소속 행정장교입니다. 임무는 광역권 시가지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심리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는 유달리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보직은 포병 이상으로 직접적인 교전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크루거 소위도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일부 병사들로부터 위화감이 느껴진다 싶었다. 그들 또한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겠으나, 일반 보병 수준의 전투숙련을 기대해선 곤란할 것이었다. 당장 눈앞에 변종이 나타날 경우 해안경비대 쪽이 더욱 안정적인 대응을 보여줄 지도 모르겠다. 즉 여기서 보병지휘관은 겨울이 유일했다. 대위도 그 점을 강조했다. “부끄럽지만 다들 자네에게 많이 의지하게 될 거야. 나도 그렇겠고. 당분간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나온 화두는 핵공격이었다. “우리가 핵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확실합니까?” 에스카밀라 소위의 질문에 랭포드 대위가 끄덕였다. “그 점은 안심해도 좋겠지. 여기가 만으로부터 대략 3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데다,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중이니까. 수중폭발이라 낙진이 많겠지만 이 정도 풍속이면 풍향을 따라 20도 이내의 범위에서 확산될 걸세. 대부분의 오염이 광역권 동쪽 산악지대에서 끝난다고 봐야지. 사령부가 미치지 않은 이상 전략핵을 쓰지는 않았을 테고.” 핵무기의 위력은 동일한 위력의 폭발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화약의 무게로 표현된다. 대위가 말한 전략핵은 메가톤급 이상의 탄두를 뜻했다. 이게 터지면 낙진이 확산되는 범위가 수백 킬로미터까지 늘어난다. 산악지형의 영향으로 범위가 줄어든다 쳐도, 결국은 새크라멘토 남쪽, 캘리포니아 중부평원 일대의 오염이 불가피하다는 의미였다. 겨울은 대위의 판단을 긍정했다. “중부평원에 낙오된 병력을 위해서라도 그래야겠죠.” 양용빈 상장의 핵 테러로 인해 보급과 퇴로가 끊어진 병력의 규모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저 최대 백만 단위에 이를 거라 짐작만 하고 있을 뿐. ‘어쩌면 핵공격이 취소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겨울 혼자 하는 생각이었다. 최종해결의 궁극적인 목표는 추가적인 핵 테러 위협을 소거하는 것. 헌데 만에 그 난리가 났으니, 봉쇄를 벗어난 핵잠수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또 한 번의 악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지금 무슨 심정일까. “그럼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이동합니까?” 바커 소위의 질문이었다. 고민하던 랭포드 대위가 파일럿의 의견을 구했다. “만약 계속해서 헬기를 탄다면 얼마나 더 갈 수 있겠나?” 크루거 소위는 부정적이었다. “처음부터 연료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한 대의 급유차량만으로 최대한 많은 기체에 급유를 실시했으니까요. 안전한 속도를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망가진 기체로부터 연료를 뽑아낸다 해도 앞으로 20킬로미터 정도가 고작일 겁니다.” “으음, 애매하군.” 대위가 재차 고민에 잠겼다. “도보로는 아무 일 없어도 한나절이 걸릴 거리이니 짧다고 하긴 어렵겠으나, 다음 착륙에서도 모두 무사할 거란 보장이 없단 말이야…….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추가적인 사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빠르게 이동하는 편이 나을까? 나는 걷는 쪽이 더 낫다고 보는데.” 이에 겨울이 동의했다. “같은 의견입니다. 도보로 움직인다면 교전이 불가피하겠지만, 다행히 이 일대는 변종이 많지 않은 모양이니까요. 도로 상태가 양호한 만큼 차량을 확보해도 괜찮을 겁니다.” 겨울의 말처럼, 남북으로 이어지는 주도는 기이할 정도로 말끔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서 벗어나는 주요 경로 중 하나이기에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서 유추 가능한 결론은 하나. 금문교 북쪽에서의 감염확산이 그만큼 급격했을 거란 사실이었다. 크루거 소위가 거들었다. “초짜들이 고장 직전인 헬기를 몰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입니다.” 남은 소위들이 서로를 살폈으나, 기다려도 반대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겨울은 그들의 근심을 읽었다. ‘탄약이 모자랄까봐 걱정스럽겠지. 정말 얼마나 남아있으려나.’ 포트 베이커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탄약을 대량으로 소모했을 터였다. 이륙하기 전 스쳐간 장면들을 회상하자, 지력보정의 작용이 더욱 생생한 「기억」을 제공했다. 그 장면들 사이에서 비춰지는 병사들의 탄약조끼를 살펴보건대, 각자에게 남아있을 잔탄은 아무리 많아도 탄창 하나 둘에 불과할 듯 싶었다. 꽉 채운 탄창 하나가 서른 발이니 마냥 적다고 하긴 어렵겠으나, 그래봐야 보통의 병사가 통상적인 교전 한 번에 써버릴 양이다. 변종 하나를 잡는 데 미숙하게는 수십 발씩 난사할 때도 있으므로. 한 발에 반드시 하나 이상을 사살하는 겨울은 적절치 못한 비교대상이다. 미련을 떨쳐내며, 페닝턴 소위가 상관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바다를 포기한다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헬기를 타더라도 그 뒤로 수백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니까요. 거기에 한나절이 더해지든 말든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가급적 교전을 회피하고, 탄약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수밖에요.” 난감한 처지에 비해 의사결정은 빠른 편이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인데…….” 대위가 한 차례 모두를 둘러보았다. “늦게 묻는 말이네만, 복귀할 때까지는 내가 지휘를 맡는다고 생각해도 괜찮겠나?” 서로 소속이 다르다보니 확실하게 매듭지어둬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게 소년장교였다. 이 자리에서는 계급 상 차상급자였기 때문. 어떤 의미로는 랭포드 대위 이상으로 지휘책임을 맡기에 적합할 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래서는 쓸 데 없는 분란이 생길 여지가 있었다. 스스로 원하는 바도 아니어서, 겨울이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Yes sir.” 불합리한 명령에까지 따를 마음은 없으나, 그 점을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고. 겨울의 지체 없는 결정은 남은 소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해안경비대의 두 소위는 서로를 잠시 응시하더니 턱을 들어올렸다. “저희도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바커 소위의 말이 곧 해안경비대 생존자들의 입장이었다. 육군 소위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가…….” 랭포드 대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벼운 안도감과 무거운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좋다, 제군. 나 또한 최선을 다하지.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을 거야. 의견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개진하도록. 그리고 서로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겨울에게 당부했다. “특히 한겨울 중위, 정보국 요원들이나 수사국 수사관에게도 이야기를 잘 전해주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 군 바깥 조직의 인원이니.” 겨울이 즉각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다만 정보국 요원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안건의 증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병처럼 교전에 투입하긴 어렵습니다. 그것만은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안건? 혹시 내가 알아도 되는 건가?” 의아한 대위, 그리고 호기심을 드러내는 다른 장교들 앞에서, 겨울은 잠시 요원들이 있는 방향을 눈에 담았다. 여기서는 소수이자 부외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경계선 안쪽에 따로 모여 있었다. 조안나는 아직 조종석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고. 먼발치임에도 코왈스키와 나머지 요원들 사이의 어색한 기류가 느껴졌다. 주로 탤벗이 무언가를 묻고, 코왈스키가 머뭇거리는 구도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대화의 내용을 짐작하긴 쉬웠다. 고개를 돌린 겨울이 대위의 질문에 답했다. “여기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중대사……라서요.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FBI의 깁슨 감독관과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말을 흐린 것은 국가안보 운운하기가 어색해서였다. 이제 와서 까다롭다기보다는, 이 세계관의 한겨울이 말하기에 적합한가를 가늠하는 여백이었던 것. 대위가 수긍했다. “그럼 그때까진 묻어두지. 해당 인원들은 자네가 통제하게. 협조가 필요한 경우엔 우선 나에게 먼저 보고하고. 책임지겠다고는 했지만 항상 붙어있을 순 없잖나.” “네.” 가장 강한 전투력인 겨울은 또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의 지적이었다. 대강의 지휘서열을 확립한 대위가 이전의 논의로 돌아갔다. “일단은 유바 시티를 목적지로 삼겠다.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로 후퇴하는 병력들을 수습하기 위해 도시 근교에 요새화된 거점을 마련했다고 들었거든.” 겨울은 머릿속으로 가상의 지도를 펼쳤다. 여러 회차에 걸쳐 많이 보았으므로 「독도법」의 도움 없이도 대강의 경로를 어림잡기에 충분하다. 멀다. 유바시티는 새크라멘토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자리했다. 그저 걸어간다면 별 일 없이도 열흘 이상 걸릴 거리였다. 대략적인 셈이라 더 늘어도 놀랍지 않았고. 차량을 구할 경우엔 급격하게 줄어들긴 하겠지만. 대위는 자신의 말에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언제든 번복될 수 있다. 항상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좋아. 유바 시티는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일 뿐, 정답이 아니니까 말이지. 당장은 가장 가까운 주거지를 찾아 장기작전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는 게 첫 번째다. 크루거 소위. 선도기를 조종했을 텐데, 혹시 전방에 보이는 것 없던가?” “여기서 1킬로미터만 더 올라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하늘에서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더군요. 적어도 대규모 변종집단과 마주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곳을 확보하고 병사들을 잠시 쉬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위 자신부터가 많이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만큼 필사적인 새벽이었던 것이다. 트라우마를 억누르며 조종간을 붙잡았던 FBI 수사관만큼은 아니더라도, 격전을 치른 장교와 병사들에겐 휴식이 절실했다. “그렇게 하지. 병력 편성과 탄약 재분배를 마치고 즉시 이동한다. 각자 동승했던 인원과 무기, 탄약 보유현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지금부터 10분 주겠다.” 원래의 지휘계통을 구분하지 말고 병사들을 장악하라는 뜻. 소속 구분 없이 섞여있는 상황에선 효율적인 지시였다. 육군 병사들의 부대마크 또한 각양각색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탑승했던 기체에서는 장교가 겨울 한 사람 뿐이었다. 파악 자체는 빠르게 끝났다. 제각각인 탄약 보유량을 외울 순 없었기에, 1차적으로 탄약을 재분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사람 숫자에 1인당 보유량을 곱하면 되게끔. 마지막으로 잠들어있는 조안나를 깨울 때였다. 악몽에 신음하는 그녀를 가만히 흔들었더니, 철컥! 눈을 뜨기도 전에 권총부터 뽑았다. 얼마나 많은 두려움으로 새겨두었는지, 잠결에도 한 번을 더듬지 않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꽈악. 방아쇠울에 걸린 손가락에 하얗게 힘이 들어온다. 그럼에도 격발되지 않는 것은, 권총을 움켜쥔 겨울이 안전장치를 잠가버린 탓이었다. “진정해요. 여긴 아무 일도 없어요.” 겨울의 차분한 말에, 떨리던 호흡이 서서히 잦아든다. 정신이 든 그녀는 자신이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이, 이건…….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죄송합니다. 정말로, 오, 신이시여…….” “괜찮아요. 딱히 위험하진 않았으니까. 나쁜 꿈을 꿨나 봐요?” 후우.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조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구역에서 자살했던 녀석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더군요.” 아, 그 트릭스터인가. 확실히 꿈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긴 했다. “탄약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에요. 앤이 마지막이고요. 깨우기 싫어서 미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올 걸 그랬네요.” 지친 미소를 지은 조안나가 조끼에서 탄창을 꺼내고, 삽입되어있던 것까지 헤아린다. 그녀가 보유한 탄은 1차 재분배를 거치지 않았다. 이를 별개로 기억해두는 겨울. 어차피 편의를 위한 임시방편이다. 정식 분배는 따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윽고 랭포드 대위가 보고를 받았다. 요원들을 제외한 병사들의 숫자는 70명에 이르러, 부족하나마 중대 편제를 꾸리기가 가능했다. 겨울에게는 한 개 소대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 200 [200화] #생존자들 (3) 헬기를 버리고 이동하기를 반시간 남짓. 행군대열은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 어귀에 도달했다. 새벽녘 쪽빛 하늘에 젖은 산과 들의 초목 사이로, 한 줄기 도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사람이 없어 쓸쓸해진 풍경이었다. 여기서도 차단작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입구에 윤형 철조망이 걸려있었다. 그 너머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기관총 진지도 보였다. 그러나 있는 것은 단지 그 뿐으로, 무기나 탄약처럼 쓸 만한 것을 찾을 순 없었다. 애초에 많은 병력이 주둔했던 것 같지도 않았고. 겨울의 손짓에 소대원들이 철조망을 걷어냈다. 차랑차랑 울리는 소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방탄섬유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이는 변종 주둥이에 쑤셔 넣고도 안전하라고 만든 물건이다. 이밖에도 개량된 전투복이 지급된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돌았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어떤 이유로든 보류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미국이어도 지금은 많은 것이 부족할 시기. 입구를 통과한 다음에는 철조망을 다시 걸어두었다. 대규모 변종집단에겐 무용지물이겠으나, 적어도 몇몇 개체가 조용히 들어오는 일은 막아줄 것이었다. 이어 숲에 반쯤 파묻혀있는 두 채의 민가를 수색했다. 겨울이 매양 앞서 돌입하고, 분대별로 돌아가며 후속하는 식. 일반적인 소대지휘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었다. 타타탕! 두 번째의 주택, 이미 수색을 마친 주방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설마. 2층에 올라가있던 겨울이 다급히 뛰어내려왔으나, 우려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커튼을 보고 착각했습니다.” 사격한 병사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열린 창문 안쪽으로 흔들리는 빛바랜 커튼. 아무리 고쳐 봐도 사람으로, 혹은 변종으로 오인하기 어려운 형상이었지만……. “괜찮아요. 피곤해서 잘못 볼 수도 있죠.” 고단한 공포는 감각을 왜곡하는 법. 겨울은 병사를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총성은 조금 아쉽다. 소대 전체에 소음기를 갖춘 병사가 없었다. 포트 베이커에서 급하게 벗어나면서 모든 장비를 빠짐없이 챙기기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최종해결을 앞두고 기지가 경계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나빴을 지도 모르겠다. 수색이 재개되었다. 소득은 약간의 식량 뿐. 두 채의 건물 모두 중대 병력이 머물기엔 부적합했다. ‘쉴 곳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모된 병사들 중엔 벌써부터 가벼운 몸살기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착륙한 시점에서 탈진해버린 조안나도 걱정이다. 더 심해졌다간 발이 묶일 터였다. 어차피 장기간의 이동을 준비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지만, 그래도 환자가 생기는 건 달갑지 않다. 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현재 그나마 양호한 겨울도 만전에는 많이 못 미친다. 강화보정이 붙은 육체는 전투력 유지를 위해 보다 많은 열량을 필요로 했다. 지금 무난히 견뎌내는 것은 그만큼 기본 능력이 높은 덕분이고, 또한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전투기술을 보유한 까닭이었다. 16등급의 「개인화기숙련」. 이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적은 열량을 요구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보정은 빈사상태에 이를지라도 절반 이상의 효율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재충전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여러모로 위험하다. 얼마 가지 않아 마을 중심가가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건물들이 상점 또는 여관이었다. 일반적인 주택이 거의 없고, 작은 거주지에 상권이 대부분인 기형적인 형태. 겨울은 곧 납득했다. 이곳은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숙박업소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마을이겠지, 하고. 그런 만큼 중대 전체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건물도 있었다. 겨울의 소대에 배속된 부사관 중 하나, 스테판 코넬리어스 병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이 방면의 차단작전 본부였던 모양입니다.” 추정의 근거는 사방에 이중으로 둘러쳐놓은 윤형철조망이었다. 인접한 건물 한 채는 사격을 위한 불모지 조성의 일환이었는지 아예 폭파시켜 놓았고. 철조망은 여러 군데가 뭉개져 있었다. 검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한때 대규모 변종집단이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증거였다. 도로 이외의 방향에서 밀려들어왔을 것이다. 지금은 아마도 동쪽으로, 더 많은 인간이 있을 방향으로 이동했겠지만. 건물 내부는 다급한 철수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교전이 일어났던 것 같지는 않다. “요소마다 경계 병력을 배치해요. 이 건물을 임시 거점으로 쓰자고 건의해야겠어요.” 소대원들이 겨울의 말에 반색했다.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 하고. 아직 결정사항도 아니건만. 물론 랭포드 대위는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또한 표정관리조차 힘겨운 지경이었기에. 그래도 장교다운 책임감이 있다. 경계순서를 지정하고 휴식을 허가한 뒤에, 그는 소대장들을 모아놓고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식량 현황을 확인했다. 임시 지휘실로 정해진 객실에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대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는 배가 고파서 주저앉겠군. 설탕이라도 퍼먹으라고 해야 하나?” 농담이 아니다. 1년 이상 방치된 식량들 가운데 먹을 만한 건 얼마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워낙 작은 마을이라, 중대 인원만 해도 원래 살던 거주민 숫자보다 더 많을 것 같았다. ‘단기간이라면 설탕만으로 견디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닌데…….’ 이는 겨울의 경험이기도 했다. 재난상황에서 설탕만큼 요긴한 식량도 드문 편이었다. 한 번 뿐이지만 생전에도 그렇게 견딘 적이 있고. 장기간 연명수단으로 삼을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겠으나, 단시간에 열량을 확보하는 방편으론 꽤나 괜찮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탕이라고 양이 충분한 건 아니다. 한 사람당 100그램씩만 지급해도 8킬로그램이 필요한 마당이었다. 그나마 건장한 체구의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열량엔 한참 못 미친다. 에스카밀라 소위가 발언했다. “우선 식수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마실 물조차 없어 탈수 징후를 보이는 병사들이 많습니다. 마침 근처에 목공소가 있더군요. 숙박업체들에게 장작을 공급하던 곳인가 본데, 물을 끓이기에 충분한 양이 남아있을 겁니다. 허가하신다면 저희 소대에서 작업인원을 차출하겠습니다.” 수도 공급이 중지된 지금 먹을 물을 확보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천에 흐르는 물을 그냥 마시는 건 마지막으로 미뤄둬야 할 선택이다. 기생충 감염 위협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상의 가능성도 존재하니까. 에이프릴 퍼시픽의 사례도 있고. 에스카밀라 소위에 이어 겨울이 제안했다. “제가 사냥을 다녀오겠습니다.” “사냥을? 혼자서?” “도와주는 사람 한두 명은 필요하겠지만요.” 랭포드 대위는 고개를 저었다. “내륙으로 방향을 잡을 때 내 입으로 가능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사냥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평범한 사람들의 막연한 상상과는 다르지. 가뜩이나 적은 식량을 미끼로 쓸 수도 없고, 우리 몸에서 나는 냄새도 지독하지 않겠나. 굳이 사냥을 해야만 한다면, 휴식이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인원을 투입해서 몰이사냥을 시도하는 편이 낫다고 보는데.” 정론이었다. 그러나 겨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자신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사냥 경험이 많습니다.” “허…….” 대위의 미심쩍은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겨울의 나이에 관록 있는 사냥꾼이긴 어렵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처음 접하는 사냥터에서 성과를 장담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랭포드 대위의 의견에도 허점이 있었다. 굳이 해야만 한다면, 이라는 단서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사냥을 최후의 선택으로 여기는 것이다. 겨울이 그 점을 지적했다. “몰이사냥은 위험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산이나 숲처럼 시야가 제한된 환경에서 많은 인원을 분산 배치하게 되니까요. 혹시나 적과 조우하게 될 경우 병력을 통제하기도 어렵겠고, 오인사격의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효율이 낮더라도 적은 인원을 내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 “숲에서 시야가 짧아지기는 변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 변종집단이 나타나더라도, 우리 쪽의 숫자가 적으면 어떻게든 따돌릴 수 있을 겁니다. 주둔지로 향하는 일 없게끔 큰 폭으로 우회해서 말이죠. 그나마 가장 안전한……아니,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랭포드 대위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었다. 다만 알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뿐.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또 다른 거주지가 있네.” 대위는 지리정보를 제공하는 전술 PDA를 켜보였다. 작은 액정에 GPS 좌표와 연동된 이 일대의 지도가 나타났다.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Point Reyes Station). 우리가 머무는 이곳, 올레마보다는 훨씬 더 큰 마을이지. 늪지 건너에 형성된 배후 주거지대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뒤져보면 꽤 많은 식량이 나올 거야. 내 말은, 그러니까…….” 하던 말을 멈추고, 대위는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확실한 기대만으로는 자기 자신조차 설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노박 소위가 겨울을 거들었다. “전 찬성입니다. 중대원들에게 각성제를 먹이지 않는 한 적어도 몇 시간은 여기서 머물러야 하는데, 허기는 그 사이에도 깊어지겠죠. 그 상태로 다음 거주지까지 이동해서 마을 전체를 수색하는 데 필요한 체력까지 감안하면……. 식량 확보에 실패할 경우 그 다음이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요. 벌써부터 비전투손실이 우려됩니다.” 정신적 피로와 극도의 긴장감은 혈관에 붙은 거머리처럼 체력을 빨아들인다. 다음 거주지가 가깝고 멀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기를 언급한 시점에서, 노박 소위는 연이은 실패가 자아낼 좌절감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기지가 무너질 때 동료를 잃지 않은 병사가 없을 테니.’ 배고프고 지친 병사들은 우울해지기 쉬웠다. 앞길이 막막한 것도 사실. 겨울은 자살자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겠다고 판단했다. 대위가 묻는다. “한 중위 자네도 많이 지치지 않았나? 귀관은 중요한 전력이야. 자칫 득보다 실이 많을까봐 걱정스럽군. 해봤다니 알겠지만, 야생동물을 추적하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한다네.” 그는 겨울을 채 반나절도 겪지 않았으나, 탈출 과정에서 확인한 전투능력만으로도 이렇게 말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공한 엄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런즉 지휘관으로선 돌발 사태에 대비해 겨울을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믿고 맡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겨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랭포드. 그는 무언가를 찾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뭐, 좋아. 그렇게 자신 있다니 한 번 해보도록. 부대 전체가 돈좌되는 것보다는 낫겠지.” “감사합니다.” “행운을 기원하겠네. 여길 거쳐 간 변종들이 얼마나 남겨놨을 지가 관건이겠군.” 대위가 사냥에 부정적이었던 또 하나의 이유. 감염변종들 역시 동물들을 사냥하고, 잡아먹는다. 최상위 포식자인 곰조차도 다수의 변종을 만나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다만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따로 말하지 않았던 것. 그래도 겨울에겐 여유가 있었다. 이미 수준 높은 「추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 강화의 여지도 충분했다. 헬기가 착륙한 시점에서 직접적인 생명의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만으로부터 탈출한 과정에 대한 관제인격의 보상평가가 이루어졌다. 일종의 중간정산으로 봐야 할 것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덕분인지, 보상의 크기도 그만큼 컸다. “에스카밀라 소위. 목공소를 확보하게. 휴식을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탈수 상태의 병사들을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투입되는 인원에겐 추가적인 휴식시간을 보장한다고 전하게. 물론 자네도 포함이야. 지휘관이 뻗으면 곤란하지.” “네, 알겠습니다.” “노박 소위는 경계 순서를 재조정하고, 크루거 소위는 한 중위가 나가있는 동안 1소대를 맡아줬으면 해. 소대 인원들의 상태를 꾸준히 봐달라는 뜻이야. 바커 소위는 건강에 문제가 생긴 병사들을 따로 모아주길 바라네.” 소위들에게 연달아 지시가 내려진다. 이 중에서도 절실하게 쉬고 싶은 사람이 없겠느냐만, 일반 사병보다는 간부의 책임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 201 [201화] #생존자들 (4) 마을 북쪽 끝, 목공소 맞은편의 샛길은 목장으로 이어졌다. 사냥을 나선 겨울이 여기를 먼저 들른 것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에게는 무리 짓는 습성과 귀소본능이 있다. 무리를 쉽게 떠나지도 않고, 위험을 피해 멀리 달아났다가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면 머물던 곳으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인간의 손에 길러진 말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고로 마을을 통과한 변종집단으로부터 살아남은 말들이 있을 경우 목장으로 돌아와 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만. “안쪽까지 제대로 살펴본 건 아닙니다.” 소대를 이끌고 마을 북쪽을 확인했던 에스카밀라 소위의 말이었다. 작업인원과 더불어 목공소 인근 갈림길까지 동행한 그녀는, 목장의 상황을 묻는 겨울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울타리 너머로 시야가 트여있었으니까요. 큰 위협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물러났습니다.” 한정된 탄약을 아끼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바깥이 깨끗한 이상 실내에 변종이 있더라도 많지는 않겠고, 거점이 정해진 만큼 방비를 하고 있으면 괜찮다고 판단했을 터. “즉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는 말이네요.” “그렇긴 합니다만……정말로 말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도로 방향의 목책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사냥감을 발견한 변종들이 난입했던 거겠죠.” “저도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을 테니까요.”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겨울은 사냥에 자원한 소대원 셋과 함께 민가 사이의 샛길로 빠졌다. 가장 먼저 녹슨 양철 지붕이 보인다. 건초와 사료를 보관하는 창고였다. 그 옆엔 말을 운반하기 위한 트레일러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너머의 기다란 건물이 바로 마장(馬場)이다. 마장은 한쪽 문이 열린 채였다.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 그러나 겨울은 거기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변종인가, 말인가. 어느 쪽이든 인간보다 거센 숨을 쉰다. 끼이이이- 한쪽 문을 마저 열었다. 따르는 인원의 시야를 확보하고, 또 일부러 소리를 내기 위해서. 푸르륵! 말의 투레질을 들은 병사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최선임인 펠리페 모랄레스 상병의 말. “세상에, 정말로 있군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건만…….” 보이는 것은 다섯 마리였다. 이제 겨우 동이 틀 시간. 길러지는 내내 안전하다고 학습했을 장소가 마장이기에, 목장으로 돌아오고부터는 여기서 어두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조금 물러나요.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요.” 말들은 한 결 같이 귀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넷은 흰자위를 드러내며 고갯짓과 함께 한 걸음씩 뒤로 빠졌다. 겁을 먹은 반응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유독 체구가 큰 녀석이었는데, 머리를 낮게 한 채로 꼬리를 휙휙 흔들어댔다. 공격적인 신호였다. 다행히 겨울에게는 「승마」 기술이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살리나스 강변을 달리기 위해 습득했던 것. 한 사람을 더 태워야 했기에 수준을 높게 잡았었다. 「승마」는 단순히 타는 능력만을 부여하는 게 아니다. 길들이기도 포함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여러 번 배웠다. 지난 모든 세계관에서 연료 공급이 끊어졌을 때, 말 만큼 유용한 이동수단을 찾기는 어려웠으니까. 아마 이번 세계관에서도 승마용이든 짐말이든 가치가 꽤 올랐을 것이다. 겨울의 신중하고 느린 접근 앞에서 우두머리 말의 성미가 누그러졌다. 털은 어둠과 같은 색이었다. 날렵하게 생긴 프리시안 품종이다. 체고(體高)는 17핸드 언저리. 마구만 보아도 목장주가 어지간히 아꼈을 녀석이었다. (1핸드 = 4인치, 10.12센티미터) “자, 착하지. 괜찮아, 해치지 않아. 가만히 있어도 돼.” Good boy, Good boy. 정확한 뜻은 몰라도, 많이 들어봤을 테니 칭찬의 의미임은 알 것이다.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자, 프리시안은 낙타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겨울의 냄새를 맡았다. 말은 영리하다. 변종에게 쫓긴 적이 있다면 특유의 악취를 학습했을 터였다. 겨울은 말의 목덜미와 어깨 주변을 긁어주었다. 말은 눈을 감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 기분 좋지?” 천천히 뒤로 돌아간 겨울이 엉덩이까지 긁어주자 더욱 좋아한다. 오……. 떨어져서 지켜보던 소총수로부터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두머리가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모습에, 거리를 두고 있던 나머지 무리도 눕혔던 귀를 세웠다. 이빨을 드러내거나 코를 벌름거리기도 했다. 10등급의 「승마」가 보정으로 부여하는 친화력은 이 상황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 가까이와도 돼요. 말들이 겁먹지 않게끔 천천히 오세요.” 모랄레스 상병을 포함한 세 명이 겨울의 손짓을 따라 느릿느릿 거리를 좁혔다. 그 사이에 겨울은 벽에 걸려있던 마구(馬具)들을 확보했다. 꽤 낡은 것이 섞여있었으나 숫자는 넉넉했다. 목장주 일가의 몫에 여분이 포함된 것 같았다. “품이 가장 넉넉한 게 네 것이겠구나. 이름이……엑셀(Xcel)? 이게 네 이름이니?” 안장에 각인되어 있던 이름에 우두머리 말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다리를 들어 올려도 저항은 없었다. 편자가 조금 닳아있긴 했으나 양호한 수준이었다. “중위님, 이제 얘들을 잡아먹는 겁니까? 하나만 잡아도 고기가 많이 나오겠는데요.” 겨울처럼 말의 목을 긁어주던 병사로부터 나온 질문. 다른 두 명이 질문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겨울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럴 거면 제가 왜 말을 탈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겠어요.” 출발하기 전 자원자를 모집할 때 물어봤었다. 과연 말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어도. 결과적으로는 확인해두기를 잘 한 셈이었다. 모랄레스 하사는 텍사스 출신으로, 목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말을 몰 줄 안다고 했다. 능숙하지 않다는 단서를 붙였지만. 우두머리와 달리 나머지 네 마리는 뚜렷한 특징이 없는 쿼터(Quater : 혼혈)였으나, 그렇다고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겨울이 말한다. “이동수단으로 써야죠. 운 좋게 차량을 확보한다고 해도 제때 연료를 얻을 수 있을지, 또 연료와 혼합할 안정제(Fuel Stabilizer)는 충분할지 의문이에요. 인구밀집지대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상태도 나빠질 거고요.” 주유소의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면 연료를 그대로 쓸 수 있겠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는 만큼 항상 안정제를 함께 투입해야 할 것이었다. 도로 사정도 문제다. 포트 로버츠를 지나는 101번 국도만 하더라도 버려진 차로 꽉 막혀있지 않았던가. 여기에 1년 내내 계속된 공군의 폭격을 감안하면 야지 주행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리고 중대 전체를 태울 정도로 많은 차량을 얻는다면 모를까, 기본적으로는 도보로 움직인다고 봐야 돼요. 차량은 물자와 환자 수송 목적으로만 쓰고요. 그러니 말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되겠죠. 군장을 얹어도 좋겠고, 정찰 용도로도 괜찮지 않겠어요?” 가장 강력한 전력인 겨울에게 기동성이 붙는다면 중대는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 행군로 일대를 미리 살펴보고, 작은 위협을 미리 제거하거나, 적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거나,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면 아예 피해버릴 수도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잡아먹자던 병사, 이안 슐츠 일병이 말했다. “얘들은 밥을 먹여야 하잖습니까. 잘은 몰라도 어지간히 먹고 마신다고 들었는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냥 식량으로 삼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다섯 마리 모두에게 마구를 씌운 겨울이 온화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 점은 걱정할 것 없어요. 앞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널린 게 농장과 목장일 테니까. 목초지나 개천, 웅덩이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겨울은 언젠가 이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다. 이번 세계관의 이야기는 아니다. 마침내 문명이 완전히 무너져 벽지로 달아나야 했을 때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세세하게 기억해낼 정도는 못 되었으나, 말을 타고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사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어딜 가든 비슷했다. 사막이나 산맥, 도시권 같은 지역이 아닌 이상은. 미국이 세계 최대의 농업국가이자 목축국가인 까닭이었다. 슐츠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배가 고파서? 아니다. 작업인원에게는 우선적으로 식량이 분배되었다. 겨울은 그 속을 알 것 같았다. ‘일이 쉽게 끝나기를 바랐구나.’ 비록 자원하긴 했으나, 그것은 절반 이상이 의무감이었을 것이다.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길도 없는 산과 숲을 헤매기는 당연히 싫겠지. 속을 익숙하게 읽고도, 겨울은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장은 사냥감을 싣고 오기 편하겠네요. 오가는 수고가 줄겠어요.” 돌리는 말에 모랄레스 상병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 정도로 많이 잡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겨울을 정확히 모르는 이상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굳이 정정할 것은 없었다. 곧 직접 보게 될 테니. “타요, 모랄레스. 슐츠하고 하퍼는 고삐를 붙잡고 하나씩 끌고 가요. 아무래도 한 마리는 거점에 두고 가야겠으니까. 저는 바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혹시 더 있을지도 모르니.” 엑셀에 올라탄 겨울이 다른 한 마리의 고삐를 함께 잡았다. 성질이 가장 더러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친화력의 영향을 받더라도 병사를 걷어찰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재수 없게 잘못 맞았다간 앓다가 죽을 것이다. 의무병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볍게 달리는 속도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간 겨울은, 목장을 구분 짓는 울타리가 활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변종의 소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쪽 문에 자물쇠가 얌전히 달려있었다. 아무래도 피난 당시 목장주가 열어두고 떠난 모양이었다. ‘다급한 와중에 여기까지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게이트를 지나 남은 절반을 돌았으나, 원형을 짐작하기 힘든 뼛조각들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중대본부에 말을 확보한 사실을 보고한 뒤, 거점 앞 철조망 안쪽에 한 마리를 매어두고, 겨울은 비로소 본격적인 사냥에 나섰다. “다들 해충 기피제는 뿌렸죠?” 최종확인차 묻는 겨울 앞에서, 모랄레스는 슐츠 일병, 하퍼 이병과 한 번씩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산간벽지의 마을이다 보니 해충 예방약품을 구하긴 쉬웠다. 사냥을 위해서는 서쪽의 산기슭으로 향해야 했다. 숲이 우거져있을뿐더러, 그 방향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냄새 독특한 약까지 뿌린 상태. 사람의 체취가 바람을 타면 적어도 수백 미터, 최대 수 킬로미터 범위 내의 동물들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동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소음 문제도 있거니와, 말을 탈줄 모르는 두 소총수도 있었다. 겨울에게 아무리 「교습」 능력이 있어도, 사냥의 와중에 승마까지 가르치긴 어려웠다. ‘여기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둘 필요가 있어.’ 식량 확보가 목적이긴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흔적과 냄새를 찾는다. 평소 겨울이 변종의 악취에 민감한 것에는 「추적」에서 비롯된 보정도 컸다. 이는 야생동물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겨울은 본래 8등급이었던 「추적」을 13등급까지 끌어올렸다. 전투계열에 비해 중요도가 낮고 소모량이 적다보니 지금으로선 부담스럽지 않았다. 천재의 영역에 접어든 「추적」은 금세 첫 번째 흔적을 잡아냈다. 발자국이었다. ‘토끼……인가. 아쉬운 대로 찾아볼까.’ 국가적으로 골머리를 앓는 호주만큼은 아니어도, 번식력 왕성한 토끼는 잠재적인 유해동물 취급이었다. 사냥 가능한 기간, 숫자, 1일 소지 한계수량까지 지정되는 보통의 동물들과 달리, 토끼는 연중 내내 아무런 제한 없이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게 잡기 쉽다는 뜻은 아니지만. 풀을 뜯은 흔적, 흐트러지거나 꺾인 가지들, 자그마한 배설물이나 가려진 발자국 등이, 겨울의 눈에는 아주 분명하게 들어왔다. 거기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건 보정으로서의 육감이었다. 언제쯤 지나갔는지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 그 시간이 현재에 수렴하는 시점에서 겨울은 손을 들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사냥감을 풍상(風上)에 두고 호를 그리며 접근했으므로, 아직 낌새를 차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말에서 내리니 방향이 더욱 확실하게 감지된다. 혼자 움직일게요. 수신호를 확인한 모랄레스 이하 3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낮췄다. 바람이 불어 숲이 사각거리는 틈을 타 날렵하게 접근하는 겨울. 수풀에 몸을 숨긴 채 목표물을 포착했다. 거리는 대략 30미터. 귀가 굉장히 크고, 꼬리와 귀 끝에 검은 물이 든 멧토끼(Jackrabbit)였다. 앞다리가 길어서, 가만히 서있는 모습만 보면 보통 떠오르는 토끼와 많이 달랐다. 손끝으로 방아쇠 언저리를 조용히 두드리던 겨울은, 탄약을 한 발이라도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총 그립을 놓고 대검을 뽑아든다. 주먹을 쥐듯이 꽉 잡는 게 준비단계. 팔을 뒤로 당기고 때를 기다린다. 맞추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몸통에 꽂히는 건 피하고 싶었다. ‘장이 터지면 가뜩이나 적은 고기를 상당량 버려야 하니…….’ 그렇다고 쫓아가서 잡기는 어렵다. 속도에서 지지 않을 자신은 있어도, 녀석은 같은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이쪽으로 등을 보이다가 방향을 트는 순간, 겨울이 맹렬한 기세로 대검을 투척했다. 콰득! 동물의 머리에 강철이 파고드는 소리. 실린 힘이 엄청나다보니 보이지도 않는 직선으로 날아가, 날 전체가 박히고 나서도 관성이 남았다. 작은 몸뚱이가 주욱 미끄러지다가, 관성이 줄어든 다음에는 데굴데굴 구른다. # 202 [202화] #생존자들 (5) 탁, 탁, 탁. 죽은 멧토끼의 다리가 계속해서 땅을 때렸다. 사후경련이었다. 토끼에게 손대기 전, 겨울은 해충 기피제를 뿌렸다. 혹시라도 벼룩이나 빈대가 있다면 떨어져 나가도록. 빈대는 특히 더 유의해야 한다. 중대 내에 확산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었다. 「환경적응」으로 둔감해지지 않는 이상 겨울로서도 견디기 어려울 터였고. 조금 지켜본 뒤, 토끼의 목을 지나는 동맥에 깊은 칼집을 냈다. 그리고 다리를 붙잡아 들어올렸다. 신선한 피가 주륵 주륵 흘러나온다. 피를 뽑는 것은 누린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피 자체도 가열취식이 가능하긴 하지만, 거부감을 느끼는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사기진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조리가 가능하다면 모를까.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걸. 성과가 적으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야지.’ 겨울이 돌아오자 모랄레스 상병이 반겼다. “좋은 출발이군요. 적어도 빈손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진심으로 기뻐하는 건 아니었다. 토끼의 무게는 탄창을 제거한 소총과 비슷한 수준. 그러나 가죽을 벗기고 먹을 부위를 발라내면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겨울은 엑셀의 안장 가방 아래에 토끼를 매달았다. 「추적」이 재개되었다. 인간이 닦아놓은 길에서 멀어질수록 동물들의 흔적이 많아진다. 그 중엔 독특한 발자국도 있었다. 배설물 냄새를 맡은 말들은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이를 달래며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마침 슐츠 일병에게도 보였던 모양이다. 못 보고 지나치는 거라 여겼는지, 그는 겨울을 불러 세웠다. “중위님, 여기 뭔가 있습니다. 특이한 발자국인데요? 찍힌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봤어요. 하지만 찾지 않으려고요.” “어……. 무슨 동물인데 그러십니까?” “호랑이요.” 농담인줄 알았나보다. 모랄레스, 하퍼와 더불어 웃다가, 가만히 바라보니 그제야 정색한다. “진짭니까? 곰이 아니고요?” “네. 발가락 숫자만 봐도 고양이과잖아요. 사자보다는 호랑이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에 하퍼가 미심쩍어했다. “제가 이 동네 태생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 호랑이가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죠. 이것도 야생은 아닐 테니까. 아마 어느 집 애완동물이었을 것 같은데, 어디서 길러지던 녀석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하긴 하네요.” 전 세계에서 호랑이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 숫자가 물경 1만에 달한다. 당장 캘리포니아와 붙어있는 네바다만 하더라도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불법이었으나,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혹시 위험해서 피하시는 겁니까?” 모랄레스 상병의 물음에 겨울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설마요. 탄약이 아깝긴 해도, 자동화기가 있는 마당에 뭐가 무섭겠어요.” “그럼 역시 잡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과연 맛이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가릴 입장은 못 되니까요. 이 놈 하나만 잡아도 아쉬운 대로 중대 전체가 먹기에 충분할 겁니다.” “육식성이나 잡식성 스캐빈저인 동물은 잡지 않을 작정이에요.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다른 흔적들이 있었는데, 코요테 같은 녀석들이라 일부러 쫓지 않았던 거고요.” “어째섭니까?” “그동안 뭘 먹었을지 모르잖아요.” 조금 헤매던 모랄레스는, 곧 말뜻을 깨닫고 역겨워했다. “젠장.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람이나 변종을 잡아먹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변종이 쉬운 먹잇감은 아니에요. 그래도 폭격을 맞은 곳마다 널린 게 감염된 시체였을걸요. 코요테처럼 약한 놈들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을 거란 뜻이죠. 야생화 된 호랑이에겐 직접 사냥할 능력도 있고요. 곰도 마찬가지. 그냥 안 잡는 게 나아요. 덤비면 죽이겠지만.” 이종 감염이나 보균 사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있었다면 국방부로부터 주의가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세계관은 변수가 많았다. 주의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병사들이 미련을 접는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이런저런 흔적은 많았으나, 최근에 만들어진 것은 얼마 없었다. 숲에 들어온 시간이 일출 이전이었건만, 지금은 하얗고 투명한 햇살이 우거진 녹음을 광선처럼 꿰뚫고 있었다. 사슴의 배설물을 찾아낸 겨울이 쫓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꾸억- 꿕- 꿧꿧-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 울음이 들려왔다. 적잖은 거리감이 느껴진다. 야생 칠면조다. 쉬이. 겨울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무언가 말하려던 모랄레스 상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의아한 눈치. 보정 없이 들릴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방향을 가늠한 겨울이 거리를 좁혔다. 다시 한 번 같은 패턴의 울음이 반복된다. 보다 선명해졌다. 이건 동족을 불러들이는 의미였다. 그래서 사냥꾼들이 유인용으로 쓰는 피리 중에도 비슷한 음색을 뽑는 것이 있었다. 잘만 하면 두 마리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암컷이라도 4킬로그램은 넘는다. 괜찮은 사냥감인 만큼 실탄을 쓸 가치가 있다. 겨울은 안장에 앉은 채로 소총을 겨냥했다. 서로 얽힌 가지의 좁은 틈을 지나가는 조준선. 병사들은 숨을 죽였으나, 한편으로는 의아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들에겐 표적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가지에 붙은 이파리가 흔들리는 순간, 가로세로 1인치도 되지 않는 좁은 시야에서, 칠면조의 털 없는 머리가 퍽! 폭발했다. 푸드드득! 수컷의 죽음에 놀란 암컷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개를 펼쳤다. 가축화된 친척과 달리, 이 녀석들은 비행이 가능하다. 그것도 굉장히 날렵하게. 하지만 날아오른 시점에서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 무성한 수관(樹冠) 위로 솟구친 즉시, 날아든 소총탄에 목이 끊어졌다. 소음기 끝에서 흘러나오는 미미한 화약 냄새. “가죠.” 소총을 등 뒤로 돌린 겨울이 가볍게 박차를 가한다. 하하. 병사들이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나아진 모양. 칠면조가 암수로 한 쌍이면 훌륭한 성과다. 민가에서 확보한 밀가루와 향신료가 있으니, 어떻게든 스튜 비슷하게 끓여 양을 늘려도 좋겠다. 떨어진 암컷과 머리 깨진 수컷을 회수하고 보니 적잖이 묵직했다. “이야, 이거 정말 크군요. 1미터는 넘겠는데요?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요?” 하하 웃으며 수컷을 자신의 몸과 비교하는 슐츠. 축 늘어진 수컷의 크기는 근육 탄탄한 사병의 상반신을 덮을 정도였다. 잠시 건네받은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무게를 어림했다. “10킬로그램쯤 되겠네요. 해체해봐야 정확하겠지만, 절반 이상은 먹을 수 있겠어요.” 동종 평균보다 제법 큰 녀석이었다. 나이가 들어 육질이 나쁠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 예상대로 4킬로그램을 조금 넘는 암컷이 더해졌다. 그리고. “모랄레스, 슐츠, 하퍼. 제가 엄호할 테니 주변에서 둥지를 찾아봐요. 암수가 같이 있었던 걸 보면 아마 이 가까이에 있을 거예요. 마침 지금이 산란기거든요.” 사실 겨울은 이미 둥지의 위치를 안다. 그래도 병사들을 시켰다. 그들의 기분 문제였다. 불과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풀 더미로 위장된 둥지를 발견한 사람은 하퍼 이병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오, 열한 개나 되는군요!” 그는 꺼낸 알들을 들어 보이며 시원하게 외쳤다. “이 돌대가리야, 목소리가 너무 커. 근처에 변종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모랄레스의 질책에 움찔하는 하퍼였으나,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혹여 놓칠까 조심스레 가져온 알들을 겨울의 안장에 달린 가방에 집어넣는다. 다른 말들의 마구엔 가방 등의 액세서리가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위님께서 저희 아버지보다 좋은 사냥꾼인건 분명하군요.” 슐츠의 말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님도 사냥을 즐기셨나 봐요?” “그냥저냥한 취미생활이셨습니다. 본격적인 사냥보다는 가족여행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거르는 해가 드물었는데, 칠면조를 잡아오신 건 한 번뿐이었죠. 이게 굉장히 잡기 어려운 거라며 얼마나 자랑하시던지. 어머니께서 짜증을 내실 정도였습니다.” 가족 이야기가 조심스러운 세계였으나, 슐츠의 표정은 결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우리는 운이 좋은 거죠.” 가을 한철 열심히 산을 타고도 칠면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사냥꾼이 많다. 쌓인 회차가 적거나 없었던 무렵 겨울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겨울은 온 길을 얼마간 되짚었다. 사슴 배설물을 기점으로 다시 추적할 요량이다. ‘그래도 동물들이 예상보다 많은 편인데? 어떻게 된 거지?’ 변종집단이 휩쓸고 지나간 것 치고는 보이는 흔적들이 상당하다. 어제 오늘 생긴 건 드물다지만, 오래 묵은 흔적이라도 몇 개월 정도였다. 곰처럼 나무를 박박 긁어놓지 않는 이상 그보다 오래 된 흔적이 남아있기는 불가능하기에. 천재적인 영역의 기술에도 한계가 있었다. 북미 서해안 감염의 진원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임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쪽 방면으로 빠졌던 변종집단의 규모가 의외로 작았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해요?” 느릿느릿 능선을 넘는 지루한 탐색의 와중에 이런 의혹을 털어놓으니, 부사관급인 모랄레스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두 사병도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확실히 이쪽으로 올 이유가 적었을 것도 같습니다.” 모랄레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에 겨울의 팔이 흐려졌다. 휘리릭, 팍! 땅에 꽂힌 대검이 바르르 떨었다. 한 바퀴 회전한 날이 긁고 지나간 자리에 붉은 자국이 번졌다. 땅다람쥐(Ground Squirrel)는 머리가 빠개진 채 죽었다. 칼날을 대각선으로 맞은 탓이다. 수풀에 묻혀, 인마의 접근에 귀를 기울이던 참이었다. “허.” 기가 막힌 상병의 감탄사를 등지고, 겨울은 살짝 우회하여 칼과 다람쥐 사체를 회수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작은 동물의 멱을 따서 탁탁 휘둘러 피를 뿌리는 겨울. 으……. 튕겨져 나가는 뇌가 꺼림칙했는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상병은 남은 말을 마저 잇는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당시엔 변종들도 마냥 멍청했으니까, 무조건 사람이 많이 보이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주도와 국도의 갈림길에선 당연히 국도 방향으로 쏠렸겠죠.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가까운 거리에 대도시가 있으니 말입니다. 방어병력도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고.” 전투가 더욱 많은 변종집단을 끌어들였을 거란 뜻이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걸 다행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가 여기서 굶어 죽을 가능성은 낮겠어요.” 겨울의 말. 지금도 나무 사이로 멀찍이 인마를 엿보는 흑곰 한 마리가 보인다. 펑퍼짐한 몸집. 아무리 봐도 먹이가 없어 고생한 몰골은 아니다. 생태계가 초토화되었다면 곰 같은 최상위포식자 또한 어디론가 떠나갔어야 정상이었다. “저놈은 겁도 없군요. 우리가 만만해보이나?” 모랄레스의 말처럼, 곰은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다. 흑곰이 근연종 가운데 얌전한 편이어도, 기본적으로는 맹수였다. ‘피 냄새를 맡고 왔겠구나.’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조우할 확률은 낮은 편이다. 땅다람쥐는 물론, 앞서 잡은 토끼와 칠면조가 안장 뒤에 매달려 피를 뚝뚝 흘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냄새를 맡고 겨울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와 별개로 곰의 접근은 조금 부자연스럽다. 굶주리지도 않은 흑곰이 인간을 향해 먼저 적의를 드러내는 일은 드물기에. 어쩌면 변종, 혹은 인간을 상대로 나쁜 버릇을 들였을 가능성이 있겠다. 좋지 않은 경험을 했거나. 하퍼가 한숨을 쉬었다. “먹지도 못할 놈에게 탄약을 낭비하긴 싫은데.” 어차피 단발사격으로 충분하지만, 겨울은 말없이 대검을 들어보였다. 병사들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설마 저것도 칼을 던져서 죽이실 겁니까?” “별 수 없잖아요. 위험할 만큼 가까워지면 죽이는 수밖에요.” “아니, 저는 그게 가능하냐고 여쭤본 거였습니다…….”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겨울이 방향을 틀어 곰과 병사들 사이를 막았다. 고삐를 통해 엑셀의 두려움이 전해졌다. 이를 「승마」의 장악력으로 억누른다. “무모합니다. 그냥 총을 쓰는 게 낫습니다.” 긴장으로 살짝 당겨진 경고.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인 모랄레스에게, 겨울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곰이라고 해도 「위협성」 평가로는 오히려 겨울이 위다. 가만히 응시하자, 곰은 애매한 자리에서 멈춰 서서 마주보았다. 때때로 이빨을 드러내지만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진 않는다. 달아나주면 편하련만. 등을 보일 수가 없으니 이쪽이 떠나기도 곤란하다. ‘그냥 죽일까?’ 시간도 없고, 병사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가만히 있다 보면 온갖 생각이 다 드는 법이니까. 결심을 굳힌 겨울이 고삐를 내리쳤다. 엑셀이 땅을 박찰 때 곰도 움찔 반응했다. 충돌이 임박한 순간 겨울의 한쪽 팔이 흐려진다. 대검이 회피 불가능한 속도로 날아갔으나, 텅!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곰의 이마에 절반쯤 박혔다가 튕겨졌다. 머리가 돌아오는 틈이면 충분하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겨울은 쇠지레를 쥐고 있었다. 빠악! 자물쇠를 부수는 지렛날이 두꺼운 머리통을 수직으로 파고들었다. 낙마를 피하고자, 그대로 손잡이를 놓아버리는 겨울. 곰을 지나쳐 달린다. 대검은 처음부터 호흡 빼앗기였다. 고삐를 당겨 돌아섰을 때 곰은 이미 죽어가는 중이었다. 뇌가 부분적으로 파괴되고도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한다. 절명은 시간 문제였다. 확정된 죽음을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고통을 덜어주는 거라면 몰라도. 겨울이 곰을 향해 말을 몰았다. 뚜둑, 뚝. 쇠지레를 뽑아낼 때 일부러 크게 휘저었다. 허우적대던 흑곰이 바르르 떨었다. 굵은 사지에서 힘이 사라진다. 구멍 뚫린 머리통과 지렛날 사이에 끈적한 실이 주욱 늘어졌다. 돌아오니 병사들이 당혹감 섞인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곰인데, 너무 쉽게 죽였다. “앞으로 중위님이 화내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슐츠의 감탄 섞인 농담.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겨울은 짧게 실소했다. 그 뒤로 정오까지 계속된 사냥에서, 검은 꼬리 사슴 한 쌍과 그 새끼들을 추가로 잡을 수 있었다. 국립공원이라 그런지 좋은 사냥터다. 당분간 머물면서 보존식량을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소금은 충분히 많다. 겨울은 랭포드 대위에게 한 번 제안해봐야겠구나 생각했다. # 203 [203화] #생존자들 (6) 수렵물을 해체하는 작업은 물가에서 이루어졌다. 가죽을 벗기고, 혈관과 힘줄을 분리하고, 피를 씻고, 뼈를 발라내는 과정. 긁어낸 내장은 별도의 용기에 모아둔다. 영양섭취의 균형을 위해서였다. Ooh, Jeez. 지켜보던 인원들이 가볍게 신음했다. 검붉게 물컹거리는 내장을 영 보기 힘들어하는 사병도 있었다. 불꽃놀이를 보고 총격전을 연상하는 것과 같은 증상. 랭포드 대위는 가급적 많은 인원이 해체작업을 지켜보도록 했다. 보고 배우라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진의는 따로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의 정신 상태에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솔선수범은 눈에 띌수록 좋다는 게 대위의 지론이었고. 최종적으로 140킬로그램의 고기가 나왔다. 여기에 민가에서 얻은 식용유나 밀가루, 설탕 같은 것들을 더하면, 중대 전체가 이틀을 먹고도 남는 양질의 식량을 확보한 셈. 점심을 먹고 여섯 시간 가량 휴식을 취한 겨울은, 저녁식사 후에 랭포드의 호출을 받았다. 일몰이 지났으나, 임시 지휘본부는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민가에서 가져온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얻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낮에는 수고가 많았어. 솔직히 많은 기대는 없었는데, 큰 걱정을 덜었군.” 새벽나절에 비해 여유를 얻은 랭포드가 결정사항을 전했다. “소대장들과 논의해본 결과 자네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네.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럽지만……. 유바 시티까지 남은 거리를 감안하면 지금은 천천히 서둘러야 할 때겠지(Make haste slowly). 해리스 대위도 결국 배가 고파서 그 지경이 되었던 것이니까.” 해리스 대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식량 문제로 갈등을 빚은 끝에 민간인을 살상하고, 산타 마가리타 호수까지 생존자들을 쫓아왔던 사람. 아마도 변종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국방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지 않았다. 지금은 겨울이 치른 전투 가운데 가장 유명해졌다. 여러 의미에서 극적이었으므로. 그날 태어난 아기가 전미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일단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두고 싶어서 자네를 불렀어. 당사자의 판단이 중요하니까. 앞으로 5일간 매일 100 킬로그램을 비축할 수 있겠나? 다소 무리한 요구 같지만, 그 이하라면 여기서 체류하는 의미가 퇴색해버리니 말이야.” 순수하게 육류만으로 미군 급양기준열량 3200kcal을 채우자면 한 사람당 한 끼에 4백 그램은 먹어야 한다. 중대 병력에 겨울 일행을 더한 숫자가 여든이니, 랭포드 대위가 말한 100 킬로그램은 약간의 여분을 더한 하루치 식량이었다. 유바 시티로 가는 도중에도 숙영지 인근에서 사냥이 가능하겠으나, 대위는 추가보급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는 듯 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게 지휘관의 본분이었다. 겨울은 정자세로 답했다. “지형을 숙지한 뒤에는 그 두 배 이상도 가능합니다.” 대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야말로 믿겠다고 해야겠는데, 향후 계획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 보니 확인해두지 않을 수 없군.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나?” “네. 이미 들으셨겠지만 이 지역은 변종의 영향을 적게 받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산과 숲이면 사슴만 해도 수백 마리를 넘어야 정상이고요. 아직 녀석들이 다니는 길목을 잘 모르는 것뿐이죠. 큰 무리 하나만 잘 찾아내면 하루 만에 닷새 치 목표를 채울 수도 있습니다.” “닷새 치를 하루에?” 흥미로워하는 대위에게 겨울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게 여유가 생긴 후엔 식용 가능한 버섯이나 식물도 채집해 두려고 합니다. 시간을 아끼느라 오늘은 그냥 오긴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도 드문드문 있었습니다. 흔하면서도 독초와 헷갈리지 않는 것들이요.” 아스파라거스, 검은 겨자, 살구버섯 등. 기술보정 없이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것들. 여름이 오기 전이라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군락지를 찾는다면, 주식을 보조할 양으로는 충분할 것이었다. 영양균형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니까. 아직 습득하지 않은 기술, 「채집」이 있다면 훨씬 더 수월해질 터. 그러나 계륵이었다. 지금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거쳐 온 모든 종말에서. 시간 대비 획득열량을 기준으로 채집은 사냥을 능가하지 못한다. 「추적」처럼 범용성이 있지도 않았다. 우선순위가 낮다보니 익힌 횟수가 적다. 「재능이익」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갈수록 손을 대지 않게 되는 기술. 이것만이 아니다. 「재능이익」은 성장 방향을 고착화시킨다. 가끔씩 겨울은 다른 가능성들이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생존이 절박할 때 습득하긴 어려운 것들. 사후보험 전체를 통틀어, 부유하지 않은 가입자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든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대위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주게. 굶어 죽을 염려를 덜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중대원들 정신상태가 말이 아니었을 거야. 혹시 봤나? 식사가 기대 이상이어서 그런지, 먹을 때만큼은 얼굴들이 밝더군. 안심하긴 이르지만서도.” 오늘 밤이 고비다. 기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 육체적 위기를 넘긴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정신적 위기. 기지 함락 당시 동료를 잃지 않은 병사가 없으니, 자살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사람의 목숨은 모질다. 누구 하나라도 쉽게 죽는 이가 없다. 그러나 최초의 한 명은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든다. 비록 그것이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지휘관으로선 경계해야 마땅하다. “지금 술을 배급하기는 좀 그렇고……. 아이스크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스크림?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대위가 희미하게 웃는다.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자네는 들을 기회가 없었겠지. 정식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2차 대전 때 이야기야. 항공모함 렉싱턴이 어뢰에 피격 당했을 때, 침몰하는 와중에도 병사들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다고 해. 배가 가라앉으면 이거 다 버리지 않겠느냐고. 그날 하루 200명 이상의 승조원이 죽었어. 다들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두려움을 견뎌냈던 거야.” 정작 그렇게 먹고 나서는, 물에 빠진 뒤 무척이나 후회했다고. “새삼스럽지만 사람 사는 게 참 단순하지 않나? 작은 즐거움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은 쉽게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 사랑하는 누군가라도 좋고, 때로는 아이스크림 같은 거라도 상관없지.”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위는 낮 시간에 소대별로 돌아가며 천렵(川獵)을 하도록 했다. 실은 그냥 몸을 씻고 물놀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위생관리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체취를 없애둘 필요가 있었다. 하는 동안 혹여 물 아래로 이상한 게 흘러올까봐, 철조망을 잘라다 상류와 하류 방향에 걸어두었다. 겨울은 깊게 공감했다. “대위님은 그런 게 있으십니까?” “기지에 편지를 두고 나와서 아쉬워. 그런데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지금 보면 울 것 같거든. 대위 역시 동료를 잃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책임감으로 견딜 뿐. “시간이 남을 때 중대원들에게 승마술을 가르치겠습니다. 나름대로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 되겠죠. 최소한 타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교습」은 가르치려는 기술 등급이 높을 때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 덕을 본다면 중대 전원의 기초를 단기간에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이동경로 상에 목장이 많으니까, 가는 길에 추가로 말을 확보하게 될지도 몰라.’ 마상전투능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승마보병이 한 개 소대만 되어도 전술적인 선택지가 많이 늘어날 터였다. 유바 시티에 도달하고 난 뒤를 대비하는 면도 있다. 그곳이라고 상황이 마냥 좋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보급 끊어진 수십만 명의 재집결지점 중 하나가 아닌가. “이런 말을 꺼내려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대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보존 식량을 만드는 건 문제가 없을까?” “네. 핑크 솔트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걸 얻지 못했다면 소금을 아주 많이 써야 했을 겁니다. 고기에서 색과 탄력이 사라질 정도로요.” 직전에 먹는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대화를 나눈 참이었다. 순수하게 소금만 쳐서 만든 염장육은 하얀 돌덩어리처럼 변한다. 질감도 돌과 비슷했다. 물로 씻고 진득하게 끓여야 그나마 먹을 만하지만, 그 맛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하였다. 겨울이 말한 핑크 솔트는 아질산염을 함유한 소금이었다. 이것을 일반 소금과 섞으면, 비교적 적게 써도 식중독균이 증식하지 않는다. 특히 보톨리누스 균. 먹으면 죽는다고 봐야 한다. 이를 구한 장소는 역시나 목장이었다. 소와 말을 키우던 곳이라 있을 법 했다. 가족이 먹을 것을 직접 만드는 경우는 제법 흔했으니까. 일반 가정엔 드문 물건이다. ‘없었으면 야생 셀러리라도 찾아봐야 했겠지.’ 셀러리 즙을 짜서 소금과 섞어 발효시키면 핑크 솔트의 대용품이 된다. 그마저도 없을 경우엔 시금치를 써도 좋고. 생존에 필요한 기초지식이었다. 물론 그랬다면 계획을 많이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발효 소금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무엇보다 그런 식은 겨울에게도 직접 해본 경험이 없었다. 머리로 알고만 있을 뿐이지. 아질산염 또한 독성이 있어서 비율을 잘 맞춰야 하는데, 자신 없는 일이었다. “염지와 건조시간을 단축하려고 고기를 작게 썰었습니다. 나중에 확보한 물량은 이동하는 도중에도 염지시킬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최소 사흘 먹을 양은 출발 전에 완성될 겁니다. 먹는 시점을 조절하는 방법도 있고요.” 어차피 길어도 보름가량만 상하지 않으면 된다. 대위가 재미있어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도 아는군. 꼭 이런 상황을 대비해오기라도 한 것처럼. 혹시 모겔론스 사태 이전부터 생존주의자였나?” “……그런 셈이죠.” 생존주의자. 취미로 재난 상황에 대비하고 관련 지식을 익히는 사람들. 미국에선 제법 흔하다. 이들이 즐겨 대비하는 재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좀비 아포칼립스였다. 그래서인지 민간인들 사이에선 감염변종을 좀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정부는 싫어하지만.’ 당국 입장에서 역병을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묘사하는 분위기가 좋게 보일 리 없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적이다. 군인들의 단어 사용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이유였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두고.” 대위가 화제를 바꾸었다. “낮에 FBI 감독관과 면담을 했네. 전에 자네가 말했던 그 건에 관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깁슨 요원이 먼저 요청하더군.”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약간의 피로감을 드러냈다. “거 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선 다른 세상 일이 따로 없던걸. 정보국 내에 만들어진 사조직이라니…….”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그녀도 정확한 사정은 말해주지 않았어. 기밀엄수가 요구된다던가. 그야 그렇겠지. 나는 일개 대위일 뿐이니까.” 그는 한숨과 함께 어조를 달리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들이 정부 승인 없이 무언가 대형 사고를 쳤다는 건 알려주더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이런 시국에 중앙정보국 씩이나 되는 기관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니까. 군인으로선 탐탁찮아. 등 뒤가 불안하면 이길 싸움도 못 이기잖나. 괜히 불안해.” 그리고 중얼거린다. 당장은 살아서 복귀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라고. “정보국 인원들은 앞으로도 자네랑 수사국 감독관 소관으로 남겨두려고 해. 혹시 뭔가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말하도록.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돕지.” “감사합니다.” “부른 용건은 여기까지야.” 랭포드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도 슬슬 눈을 붙여야 할 시간이었다. “가서 쉬기 전에 탤벗 요원을 만나보게. 자네의 그……위장?……아무튼 얼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더군.” “아, 네.” 아무래도 대위가 직접 알아본 눈치였다. 기술자가 있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않았던 모양. 이유도 알 만 했다. 머리로는 한겨울이라고 알고 있어도, 생긴 게 달라서는 병사들의 체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 일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 대위의 말에 따라 찾아가 보니, 탤벗이 준비한 것은 의외로 단순했다. 여느 가정집에 있을 법한 각종 세제의 혼합물. “이게 뭔가 싶으시겠지만, 그래도 필요한 성분은 다 들어있습니다. 단지 농도가 낮아서 꽤 오래 씻으셔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같은 성분을 다른 용도로 쓰며 다른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세제를 섞어서 독가스를 만들고, 비료를 재료로 폭탄을 제조하지 않던가. 비료공장은 전시에 화약제조 플랜트로 전환된다. 씻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얼굴에 들어있던 염색이 빠졌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는 오랜만이었다. # 204 [204화] #생존자들 (7) 사냥은 체류 나흘째에 중단되었다. 비축식량이 자그마치 3톤을 넘었기 때문이다. 매일 최소 하나 이상의 사슴무리를 발견한 덕분에, 나중엔 수사슴만 잡았는데도 이 정도 양이 되었다. 당연히 다 가지고 가기는 무리였다. 일부를 남겨놓고 떠날 작정이다. 랭포드 대위는 재집결 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동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모종의 이유로 부대가 흩어져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 후퇴하여 여기서 다시 모이기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보관은 간단했다. 인근의 숙박업소들, 그리고 우체국 건물에서 떼어 온 태양광 발전 시스템 덕분이었다. 객실마다 하나씩 있는 냉장고를 활용했으므로, 냉동실에 넣는 분량은 염장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았다. 봄볕 아래 펼쳐 말리는 버섯과 식용식물도 충분한 양이었다. 승마술 훈련 역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대부분이 가볍게 달리는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해냈다. 병사들과 요원들은 높은 열의를 보였는데, 겨울이 보기엔 정신적인 방어기제였다. ‘웃고 떠든다고 잊은 게 아니지.’ 밤마다 많은 수가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가위에 눌렸다. 눈 뜨기 전에 총부터 뽑았던 조안나를 생각하면 언제 사고가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장교들이 노심초사한 덕분에 많이 나아지긴 했다. 출발 이틀 전인 오늘만 해도 노박 소위의 제안에 따라 분대 대항 대검 던지기 경기가 열렸다. 상품은 위스키. 지더라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으되, 이기는 분대에겐 먼저 고르고 먼저 마실 권리가 주어진다. 애초에 많이 주지도 않겠으나, 전 병력을 동시에 먹이긴 곤란했다. 그럼에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중대 전체가 열광했다. “짐 빔! 짐 빔! 짐 빔!” 구경꾼들이 선수에게 보내는 야유. 누가 시작했는지, 너네는 싸구려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상품들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것이 짐 빔(Jim Beam) 브랜드의 화이트 라벨이었기에. 자리에 선 병사가 칼을 던지려다 말고 다른 분대원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우- 병사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힘내라고 외치는 이는 같은 분대원들 뿐이었다. 포기한 선수가 고개를 흔들고 표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던진다. 겨울이 「교습」한 자세 그대로. 느리게 회전하는 대검이 67피트, 약 20미터를 날아가 과녁에 꽂혔다. 예스! 선수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한층 짙어진 야유 속에서 분대원들의 응원이 열기를 띠었다. 한 사람당 기회는 세 번. 분대 별로 과녁에 꽂힌 숫자를 겨룬다. 장교들은 높아지는 함성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하루를 더 보낼 계획이었다. 소리 닿는 범위에 변종이 있다면 미리 끌어들여 처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편이 밤에 조금이라도 더 안심할 수 있었다. 병사들도 이렇게 알고 있다. 경계 병력을 충분히 배치해두기도 했다. 분대마다 두 명씩 차출해서 시야가 트인 길목을 하나씩 담당하도록 했다. 말을 얻은 이후 며칠간 주변을 광범위하게 정찰했으나, 대규모 변종집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비정상적인 공백은 곧 봉쇄선의 고난을 방증하는 것일 테지만……. 어쨌든 지금 여기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턱! 어느덧 세 개째의 단검이 과녁에 박혔다. 「교습」 기간과 시간이 짧아, 제대로 날아가더라도 회전이 부적절해 튕겨나가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이 정도면 중대에서 손에 꼽을 실력이다. 활짝 웃으며 들어오는 선수를 몇 사람이 꽉 끌어안았다. 여기서 장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칼을 던져야 했다. 자기 성적에 가장 불만족한 이는 랭포드 대위였다. 궤도는 잘 맞는데 박히는 경우가 없었다. 소대장들이라고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병사들이 좋다고 박수를 쳤다. 겨울은 정보국 요원들, 그리고 조안나와 한 팀을 짰다. 순서가 돌아오자 조안나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이럴 시간에 승마 연습을 좀 더 하고 싶군요.” 그러면서 나무에 매여 있는 엑셀에게 눈길을 준다. 녀석은 태평하게 사료를 씹고 있었다. 그 외엔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넷은 경계에 투입된 상태였다. 현 시점에서 말 타기에 가장 미숙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바로 조안나였다. 의외로 무서워한다. 공포증과 관계가 있는 걸까? 내보이는 오기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안장에 앉아서는 안절부절 하면서도, 내린 뒤엔 꼭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의외였지만, 이런 집념이 다재다능한 요원을 만들었을 것이다. 겨울이 부드럽게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마요. 사람이 못하는 것 하나는 있어도 괜찮잖아요.” “……그걸 당신이 말하니까 진짜 이상하네요.” 그녀는 볼멘 대꾸로 소년을 웃게 만들었다. 콱! 조안나가 던진 첫 번째 대검은 표적 모서리에 맞았다. 아슬아슬한 명중이라, 반쯤 박힌 날이 하마터면 관성으로 빠질 뻔 했다. 던지는 습관 때문인지, 두 번째의 대검도 비슷한 궤도였다. 탱- 누운 채로 부딪힌 칼이 반대 방향으로 튀었다. 후. 호흡을 정돈한 그녀가 세 번째를 던졌다. 빠르게 쏘아진 칼날이 바람결에 희미해진다. 캉, 하는 쇳소리. 새 칼이 박힌 칼을 쳐냈다. “이건 1점으로 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누군가의 농담에 여러 사람이 웃는다. 그녀가 던지는 내내 야유는 없었다. FBI 감독관은 인기가 많았다. CIA의 켈리와 코왈스키 요원 역시도. 그게 반드시 좋은 관심만은 아니었으나, 아직은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문제는 병사들 사이의 관계였다. 전투지역에서 사병간의 성관계는 엄격하게 금지되지만,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임무에 지장만 없으면 간섭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예전부터 그랬고, 대역병이 돌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지켜지지 않을 명령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 지휘관의 권위만 깎아먹는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그런 지시를 내렸다가 체면이 상한 사단장이 있었다고 들었다. 다만 장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여성 사병들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런 까닭에 랭포드는 어젯밤 겨울에게도 상담을 부탁했다. 대개 여성 장교인 에스카밀라 소위의 역할이었으나, 혹여 보복을 우려하여 말하지 못하는 거라면 차라리 겨울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영웅으로서 쌓은 탁월한 인망과 신뢰도 장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대위의 기우로 끝났다. “거 참, 중대장님도 어지간히 걱정이 많은 분이시군요.” 겨울이 담당한 해안경비대 사병, 매들린 위버 상병(스페셜리스트)의 말이었다. 아직 부사관 자격을 얻진 못했으나, 경력만큼은 어지간한 부사관 급이었다. “저도 숨이 붙어있을 때 즐기고 싶습니다. 뭣보다 언제 또 이런 인기를 누려보겠습니까? 봉쇄선 너머에선 갈수록 남자 보기가 힘들어진다는데……. 좀 거칠다 싶은 녀석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총 맞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야죠.” 그렇게 코웃음 치는 그녀는 자기 실력을 믿었다. 결국 상담은 짧게 끝났다. 자리를 뜨며, 위버는 겨울에게 윙크했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한 중위님이라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기억해둘게요.” 바로 거절했다간 자존심이 상할 것이었다. 그러나 미묘한 공백에서 이미 눈치를 챘는지, 상병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흔들며 나갔다. 기시감을 느끼는 겨울이었다. 회상에 잠겨있는 사이 무르익은 시합은 중반을 지났다. 정보국의 탤벗이 세 자루를 동시에 던져 한꺼번에 꽂아 넣는 묘기를 보여주자, 병사들이 거센 야유를 보냈다. 겨울마저 있는 마당에 팀 구성이 불공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성적이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앞서 던진 터커 요원만 해도 가차 없는 환호를 받았었다. 세 번 모두 형편없이 빗나간 것이다. 다음 순서를 지켜보는데, 일정 거리를 두고 마을 주변을 돌던 수색대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소규모 변종 집단 출현. 개체 수 스물 하나. 공동묘지 남쪽 200미터 도로상에서 접근 중. 특수변종은 식별되지 않음. 경기가 중지되었다. 하필이면 지금. 한창 재밌는데. 투덜거리는 병사들이 소대별로 결집한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경우엔 겨울이 처리하기로 되어있었다. 탄약을 아껴야 하니까. 중대 병력의 전투준비는 만약을 대비하는 것뿐이었다. 공동묘지는 마을에서 약 1킬로미터쯤 떨어진 위치. 변종이 뛰기 시작하면 금방 도달할 거리이긴 한데, 지금은 정찰대가 시간을 끌고 있을 것이다. 위험할 일은 없다. 말을 타고 나간 병사들은 승마술 훈련의 성과가 가장 좋은 이들이었으니. 작정하고 도망치면 설령 그럼블이나 트릭스터가 있어도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겨울이 무전기 리시버의 발신 버튼을 눌렀다. “대위님.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조심하게.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화기를 써서 제압하도록.] 이 마을에 도착한 이래 교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겨울이 치르는 전투에서 탄약 소모량은 항상 처리된 변종의 숫자보다 적거나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근접전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대위의 당부가 여기서 나왔다. 엑셀에 올라탄 겨울은 나무에 기대어둔 무기를 낚아챘다. 본래 역기의 중심축이었던 철봉이다. 길이 1.5미터에 무게는 6.6킬로그램. 냉병기 치곤 규격 외인 중량이었다. 평균적인 양손 검보다 두 배 이상 무거운 물건이라, 어지간한 완력으로는 무기로 쓰기 어려울 지경. 그만큼 겨울이 휘두를 때의 위력은 파괴적이다. “가자.” 박차를 가하자 엑셀이 빠르게 가속했다. 달려 나가며 겨울은 무전기의 출력감쇄장치를 점검했다. 조절 눈금은 출력이 아니라 거리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는 중간에 장애물이 없을 때의 수신범위를 나타낸다. 거점에서 떨어졌을 때는 출력을 조금 더 높여도 무방했다. 도로를 끼고 얼마 달리지 않아, 경사지 위에서 느긋하게 대기 중인 수색대를 볼 수 있었다. 한참 떨어진 곳으로부터 그들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변종들의 모습도. 체력이 아무리 인간 이상이어도 본격적으로 달리는 말을 따라잡기는 한참 모자랐다. ‘숫자가 좀 더 많고, 베타 구울 이상으로 머리를 쓰는 녀석이 있다면 또 모를까.’ 살리나스 강물 위를 달리던 변종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베타 구울의 지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 놈이 이끄는 무리라면 역할을 나누어 몰이사냥을 시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흑마를 몰아 직선으로 육박하는 겨울을 발견했는지, 지능 낮은 무리에 혼란이 빚어졌다. 원래 쫓던 목표와 새로운 목표 사이에서 저들끼리 엇갈리는 광경이었다. 덕분에 밀도가 낮아져서 고맙다. 꽉 뭉쳐있으면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겨울은 상체를 숙이며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몸 전체가 바람을 가르는 느낌. 변종들의 진행 방향을 대각선으로 쳐내야 한다. 마침내 돌입하는 순간, 철봉이 큰 폭으로 회전했다. 뻐억! 으지직! 한 동작에 두 번의 타격. 호선에 들어온 머리통이 둘이었다. 하나는 깨지고 하나는 떠올랐다. 몸통에서 떨어진 쪽은 맞은 여력이 남아 팽글팽글 돌았다. 피가 사방으로 뿌려진다. 그 와중에도 움직이는 눈알. 따다다닥, 이빨 부딪히는 맹렬한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희미한 속도로 회수된 강철이 다시 휘둘러져, 또 하나의 변종이 즉사했다. 스쳐 지나가는 반 호흡으로 두 번 쳐서 죽인 수가 셋. 「승마」, 「근접전투」, 「근접무기숙련」이 서로 훌륭하게 연동되었다. 두둑, 두둑, 두둑. 말발굽 아래의 진동은 허리를 넘어오며 사라진다. 반원을 그리며 재돌입할 방향을 가늠하는 겨울. 엑셀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친 게 아니다. 흥분이었다. 변종의 악취를 두려워하던 것이 며칠 전인데, 몇 번의 전투를 치르는 사이에 적응했다. 이는 기수에 대한 신뢰였다. 인마일체의 기병이 변종 집단을 몇 번이고 깎아냈다. 살아 움직이는 역병의 무리는 한 겹 한 겹 벗겨지듯이 얇아졌다. 마침내 다섯 놈이 듬성듬성 남았을 때, 겨울은 속도를 줄이며 더 이상 이탈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반전하여 역병을 맞이한다. 캬아악-! 변종이 눈앞으로 도약하자, 엑셀은 측면으로 펄쩍 뛰었다. 며칠간 겨울이 「승마」 기술로 길들이고 가르친 성과였다. 땅에서 떨어진 역병이 허공을 물어뜯는다. 퍼엉! 붕 뜬 놈을 후려치자 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척추를 끊고 나온 강철은 썩은 피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걸려 나온 내장이 원심력을 받아 멀리까지 날아갔다. 멎지 않는 회전은 곧 공세의 연속이었다. 손아귀를 비틀자 긴 둔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남겨둔 관성에 가속을 더하여 내리치는 일격. 새로운 정수리가 액체처럼 부서졌다. 그 상태로 강하게 내지른다. 겨울의 팔 길이만큼 뒤에 있던 남성체가 콱 찔렸다. 갈비뼈를 깨고 들어가는 함몰. 허윽! 숙주가 인간이라 바람 새는 소리도 사람을 닮았다. 툭, 스냅을 주어 팔을 되돌리는 틈에 엑셀은 뒷걸음질을 치고 다시 옆으로 튀며 빙빙 돌아 남은 두 변종을 농락했다. 겨울은 그 움직임에 거스르지 않았다. 말의 운동이 고스란히 팔에 실려, 일그러진, 그러나 산 것을 죽이기에 충분한 선을 그었다. 바각! 턱 옆을 맞아 경추가 어긋난 괴물이 인형처럼 쓰러진다. 동시에 체중을 기울이며 다리를 조이자, 엑셀이 갑작스럽게 도는 방향을 바꾸었다. 기만당한 역병이 빈자리로 뛰어든다. 인간 이상으로 강하고, 인간 이하로 아둔한 몸부림. 낯짝의 절반이 꺼진다. 모로 후려친 타격이 부딪힌 순간 정점이었기에, 파괴되는 면적이 넓었다. 탁한 피부 아래 검붉은 반점이 번졌다. 쓰러진 변종은 부르르 떨고 움직이지 않았다. # 205 [205화] #생존자들 (8) 식수를 끓이고 음식을 조리하고자 장작을 사용한 건 첫날뿐이었다. 가스가 다 떨어진 줄 알았더니, 실은 밸브를 잠가두었던 것이었다. 임시거점이 본래 숙박업소였던 만큼, 실외 보관실의 가스통은 스무 개나 되었다. 잔량도 충분했다. 그 외에 사이즈가 작은 실린더도 여럿이었다. 캠핑카에 대여하던 물건들로 추정되었다. 랭포드 대위가 기뻐했다. 나무를 때면 연기가 솟는다. 변종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밸브가 잠겨있었던 이유는 알 만했다. 일반 가호보다 숙박업소가 더 많은 마을이었다. 아시아에서 역병이 시작된 이래 관광객의 발걸음이 뚝 끊겼을 테니, 서부 해안 감염 이전에 문을 닫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길 잠시 점령했던 차단작전 병력은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고. 산간벽지의 미편입 거주지(Unincorporated Community)까지 가스관이 들어오진 않는다. 인근의 민가와 다른 여관들에서도 다수의 가스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스가 워낙 남아돌아서, 체류 이튿날부터 보일러가 가동되었다. 다 설치하지 못할 만큼 긁어모은 태양광 패널로 인해 전기도 넘쳐났으므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급수 펌프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무제한으로 온수 샤워를 하게 된 병사들이 환호한 것은 물론이다. 처음 예상에 비해 모든 것이 풍족했다. 다들 떠나기 아쉬워할 정도로. 이동 준비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바커 소위는 라운지에 있던 TV를 박살냈다. 낡은 프로젝션 TV이었는데, 소위에게 필요했던 건 내부에 있는 한 장의 프레넬 렌즈 필름이었다. 대각선 길이가 61인치에 달하는, 얇고 평평한 돋보기. 이를 목공소에서 제작한 틀에 끼워 태양열 조리 기구를 만들었다. 유용한 물건이었다. 사냥으로 바쁘지 않았다면 겨울이 만들었을 것이다. 날씨에 따라 활용도가 달라지겠으나, 연료가 없어도 취사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바커 소위는 필요해서 만든다기보다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인터넷에서 본 뒤로 꼭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이렇게 생기는군요.” 생존 노하우가 최대의 관심사인 세계관이었다. 온라인상에서의 정보 공유도 활발했고, 군의 생존교범도 감염지역에서의 생존을 전제로 많은 내용이 보강되었다. 민간에서 평가가 좋은 정보라면 얼마 안가 군 매뉴얼이나 소식지에도 수록되었다. 프레넬 집광기가 그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바커 소위는 프라이팬 하나를 망가뜨렸다. 대검 던지기를 끝내고 맞이하는 저녁. 시간이 오후 6시였지만 하늘은 아직 밝았다. 소위는 겨울 앞에서 조리를 시연했다. 프라이팬을 초점거리에 정확히 맞췄더니, 똑바로 보지도 못할 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올려둔 고기는 숯덩이가 되었으며, 벌겋게 달아오른 팬은 코팅이 벗겨지고 굴곡이 생겼다. 그런데도 좋다고 웃었다. “이야, 화력 좋다! 멋지지 않습니까? 이걸로 대위님의 원형탈모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군요.” 에스카밀라 소위가 동기의 헛소리를 듣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다. 혹시 당사자가 있나 싶어서 조심스러운 것이다. 여유로운 식사와 함께, 간혹 한 잔의 위스키를 온 더 락으로 즐기는 병사들 사이에 임시 중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랭포드 대위의 정수리가 허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꽤 전부터 진행된 모양이지만, 며칠 사이에 받았을 극심한 스트레스가 악영향을 주었을 것 같긴 했다. ‘80명의 이동이 식량만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겨울이 말을 구해왔을 때 대위는 굉장히 반색했었다. 그러나 운송수단으로 쓰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체류 이튿날 아침, 지휘관 회의에서, 대위는 무의식중에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재차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한 마리당 수하중량이 백 킬로그램에 불과하다고?” “이동 거리와 기간, 길의 상태를 고려하면 기수만 태우는 게 낫습니다. 짐을 더 싣더라도 군장 무게를 넘겨선 안 됩니다. 짐 마차가 있다면 다르겠지만요.” 경험상 말의 등에 올려도 되는 무게는 체중의 2할 정도였다. 그 이상은 힘들어하고, 3할을 넘어갈 경우 오랜 여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탈진하거나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수송 용도로 쓸 때의 이익보다는 행군대열 보호를 위한 고속정찰의 이익이 크다. 그래서 겨울은 마을에 하나 있는 천주교회를 탐색했다. 운구 마차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거주민이 중대인원보다 적었을 마을이라, 그렇게 거창한 것을 갖춰놓진 않았다. 장교들 가운데 말에 대해 겨울 만큼 아는 이는 없었다. 대위는 막연히 한 마리에 몇백 킬로그램을 실어도 무방하리라 여겼던 것 같았다. “난 정찰용으로 네 마리를 쓰고, 한 마리를 수송용으로 쓰면 될 거로 생각했건만……. 마차, 마차라……. 에스카밀라 소위. 목공소에서 제작할 수 있을까?” “어, 방법도 모를뿐더러, 그 정도의 정밀작업에 필요한 공구도 없습니다.” 애초에 숙박업소와 캠핑장으로 장작이나 공급하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바퀴를 만드는 데엔 철이 필요하다. 어찌어찌 비슷하게 흉내를 내더라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겠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그러면서 대위는 다시금 머리카락이 없는 자리를 매만졌다. 다행히 나흘째, 즉 오늘 아침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겨울이 마지막 사냥을 나간 사이, 말콤 크루거 소위가 차량을 확보한 것이다. 트럭을 발견한 곳은 거점 서쪽 600미터 지점의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였다. 캠핑장은 텅 비어있었고, 주차장도 마찬가지였으나, 이 트럭은 관용이어서 그런지 사무실 뒤편에 남아있었다. 견인기가 달려있었지만 쉽게 분리했다고 한다. 사무실에서 열쇠를 찾았지만, 시동을 걸 순 없었다. 크루거 소위는 병사들과 함께 이것을 인력으로 끌고 왔다. 태양광 충전으로 배터리를 재생하니, 시원찮긴 하지만 시동이 걸렸다. 연료 상태도 괜찮은 편이었다. 탱크 밑바닥까지 고무관을 넣어 소량을 뽑아 살펴본바, 이물질이 없고 변색하지도 않았다. 가솔린보다 안정적인 디젤이어서일까? 그때도 랭포드 대위는 흐뭇해하며 머리카락이 없어진 자리를 긁적거렸다. 허전함이 큰 모양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여 겨울이 조금 고민했다.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러나 결국 하지 않았다. 볼 때마다 모르는 척 배려하는 병사들과 장교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친밀감이 생긴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본인이 나중에 창피해하겠으나, 사소한 것이라도 소속 다른 인원들 사이에 인간적인 친밀감을 쌓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희생이라 생각하기로 한 겨울이었다. 혹은 알면서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차량이 생기면서 한결 부담을 덜었다. 픽업트럭 역시 자체수송보다는 견인력이 강한 차종이었으나, 그래도 말보다는 훨씬 더 많은 중량을 실어 나른다. 만약 트럭을 구하지 못했다면 각 병사가 꽤 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대위는 하루 이동거리를 30킬로미터로 잡았다. 교전이 없고, 산을 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러나 완전군장에 준하는 무게를 지고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커 소위가 만든 집열기는 대위가 기뻐할 만한 물건이었다. “자, 이번엔 제대로 갑니다!” 새로운 팬에 기름을 두르는 바커. 받침대의 높이를 조절한 덕분에 아까 같은 참사는 없었다. 챠아아아아- 올린 고기가 요란하게 지글거렸다. 칼집을 내어 염분을 잘 씻고 물기를 닦아낸 염장육이었다. 숙성기간이 오래되지 않아 육질이 살아있었다. 처음으로 완성된 분량을 시식하는 시간. 그동안은 생고기만 먹어도 충분했다. 가장 크게 기여한 겨울이 처음으로 맛을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지금이었다. 해안경비대 소위는 요리에도 자신이 있다고 뻐겼다.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거침없긴 하다. 구경하는 병사들이 익숙한 야유를 보냈다. 사각사각 후추가 뿌려진다. 여기에 약간의 식초를 더한다. 말린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겨자씨를 함께 넣고 자글자글 흔들었다. 조리기구의 특성상, 늦은 오후의 태양처럼 빛나는 기름의 찰랑거림 사이에서 고기가 얼마나 익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소위의 자신감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였다. 나중엔 수시로 꺼내어 칼로 찔러보았다. “완성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깃덩이가 하얀 접시에 세팅되었다. 육수가 우러난 기름을 소스처럼 위에 살살 펴서 부으니 겉보기로는 스테이크처럼 그럴듯하다. 접시는 곧 겨울이 앉은 야외 테이블 위에 놓였다. 관심이 집중된다. 차례를 기다리는 장교와 병사들이었다. 앞으로 주식이 될지 모를 물건 아닌가. 물론 매번 이렇게 해 먹지는 못 하겠지만. 겨울이 나이프를 들었다. 삭삭 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만큼 자른 조각을 입에 넣는다. 여러 향과 육수가 섞인 기름이 넘어간 뒤에, 미국 음식 기준으로도 꽤 짠맛이 느껴졌다. 육질은 보통의 정육에 비해 단단한 편. 질긴 것과는 조금 달랐다. 탄력보다는 저항감에 가깝다. 좋게 말하면 씹는 맛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고기 같지 않았다. 그래도 염장육 치곤 괜찮은 편.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겨울의 평가를 듣고 에스카밀라 소위가 맛을 보았다. 씹을수록 표정이 애매해진다. “별론데요.” 이어 크루거 소위가 평했다. “맛없습니다.” 병사들의 감상 중 가장 압권은 이것이었다. “테이크아웃으로 하루쯤 지난 맥도날드 햄버거 패티가 더 맛있겠군요. 제가 이걸 아버지께 대접했다면 지금쯤 팔이나 다리 한 짝은 없을 겁니다. 뭐, 야채 오믈렛으로 삼시 세끼를 때우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건 애초에 음식이 아니라 무기니까요.” 여기서에서 야채 오믈렛은 MRE를 뜻했다. 포트 로버츠에서 근접격투 교육을 할 때 모두가 기피하던 바로 그 메뉴. 안 맞는 사람은 입에 넣자마자 구역질을 할 만큼 맛이 없다. 이후로도 좋은 반응은 하나도 없었다. 생전의 식생활로 인해 입맛이 거친 겨울만이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한 셈. 요리사인 바커 소위가 억울해했다. 조금씩 잘라먹고 남은 토막을 통째로 씹으며 침을 튀긴다. “배부른 소리 하네! 솔직히 그동안 우리가 너무 호사스럽게 먹었던 거지! 이게 맛이 없는 건 아니라고! 안 그렇습니까, 중위님?” 그동안은 하루하루 도축 직후의 정육을 구워 먹었다. 신선도가 지극히 높았는데, 많이 잡을수록 사냥 후 운반문제가 골치 아팠기 때문에, 거점 방향으로 사냥감들을 몰아 물가에서 죽인 덕분이었다. 덩어리로 잘라놓은 고기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팽창, 수축을 반복하는 걸 본 이들은 계급과 소속을 떠나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고기는 식감이 워낙 좋았다. 후추와 소금만 쳐서 구워도 누구나 감탄할 정도였으니.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요. 염장작업은 내가 감독했잖아요.” 맛없는 책임의 절반은 겨울 자신에게 있다는 뜻. 요리사는 하늘을 보며 양손을 펼쳤다. “생각해보면, 맛이야 어떻든 간에, 이게 엄청나게 비싼 식사일 겁니다.” 동기를 위로하듯이 에스카밀라 소위가 꺼내는 말.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한겨울 중위님이 직접 만드신 거잖습니까. 시판한다면 프리미엄이 붙겠죠. 1인분에 천 달러를 매겨도 팔리지 않을까요? 맛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 할 말이 없는 틈에 바커 소위는 금액을 헤아리고 있다. 1인분에 천 달러씩, 쌓여있는 물량을 다 팔면 얼마나 큰 부자가 될 것인가. 손가락을 꿈지럭꿈지럭, 백만 달러 단위의 매출을 헤아린 그가 겨울에게 제안했다. “나중에 전역하면 저랑 같이 사업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방역전쟁 후원기금으로 쓰겠다고 하면 정말로 팔릴 것 같긴 했다. 이제 두 번의 밤을 보내면 임시거점을 떠난다. 그러나 건조작업을 제외한 이동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였으므로, 경계 근무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식후에도 그대로 휴식시간이었다. 며칠간 거점을 철저하게 요새화하느라 병사들의 고생이 많았기도 했다. 거점 건물을 보강했을 뿐만 아니라, 통나무를 통째로 박아 울타리를 세우고, 오늘은 숫제 감시탑을 완성하기까지 했다. 목공소와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있던 중장비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떠날 장소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가치가 있을까? 있다. 단순히 여기가 재집결지점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난 아직도 다른 생존자들이 있을 거란 기대를 버릴 수가 없어.” 요새화를 결정할 때, 회의에서 랭포드 대위가 한 말이었다. “골든게이트 양안에만 네 개의 기지가 있었어. 엔젤 아일랜드에서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제10산악사단 잔여병력이 자력으로 만을 벗어났을 가능성도 있지. 혹시나 그들이 변종집단에 쫓겨 타말파이어스 산으로 들어갔다면, 어느 쪽으로 벗어나더라도 이 마을로 길이 이어진단 말이야. 우리는 바로 그런 경우에 대비해야 해. 그만한 여유가 있으니까.” 그는 중대의 예상 이동경로를 그린 지도를 남겨두고 떠나겠다고 밝혔다. 뒤늦게 도착하는 생존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따라올 수 있도록. 또한 중대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심하고 밤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게 단 하루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해가 떨어졌다. 기울어진 햇살이 노을이 되고, 노을이 다시 어스름이 될 무렵. 낮의 경기결과에 따라, 겨울과 앤, CIA 요원들이 위스키를 마실 차례가 돌아왔다. 요원들은 라운지에 붙어있는 휴게실에서 포켓볼을 치는 중이었다. 사실 겨울은 사양하고 싶었으나, 며칠 새 코왈스키가 무척 우울해한다는 말을 들었다. 출처는 터커와 켈리. 하기야 외로울 것이다. 동료들조차 은연중에 거리를 두고 있으니. 앤은 그 사건에 대한 언급 없이 적당히 어울려주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이쪽이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그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단순한 연민인지, 혹은 사법거래의 증인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중위님 덕에 좋은 술을 맛보는군요.” 탤벗이 채운 잔 하나를 겨울에게 건넸다. 술에 담긴 얼음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진한 호박색의 수정처럼 반짝거렸다. “독한 술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겨울의 말처럼 도수가 꽤 높은 술이다. 향수처럼 진한 향이 올라왔다. 와일드 터키 브랜드의 최상위 라인업. 경기에 걸렸던 상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순위에서 앞선 다른 팀이 손을 대지 않았다. 주인이 정해져있다는 듯이. 겨울이 고를 땐, 다른 병에 손을 가져가면 우- 하는 야유가 일었고. “다들 고마워하고 있는 겁니다. 자리를 빌어 저희도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중위님이 아니었으면 거기서 모두 죽었겠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터커 요원의 말이었다. 그런 것 치고, 얼굴이 돌아온 다음부터 병사들의 태도들이 많이 달라졌다. 장악력의 차이가 현저하게 체감될 정도였다. 조안나가 잔을 들었다. “자, 건배해요.” 쨍. 한데 모인 다섯 잔이 부딪히며 맑게 흔들렸다. # 206 [206화] #생존자들 (9) 공 아홉 개를 두고 치는 테이블 위에서 CIA 요원들은 출중한 기량을 뽐냈다. 감각이 남다른 겨울도 이들을 상대로는 그럭저럭 선전하는 선에 그쳤을 따름. 조안나가 황당해했다. “당신들 밥 먹고 당구만 쳤어요?” 처음엔 특유의 오기를 드러내던 그녀였으나, 실력 차이가 어지간히 컸다. 결국, 손 놓고 구경하는 입장이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긴 했다. 절반쯤은 의도적으로 조성된 온화한 분위기. 코왈스키는 이 자리가 자신에 대한 배려임을 아는 눈치였다. 때때로 머뭇거리면서도 게임을 즐기려고 애썼다.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소극적으로 웃었다. 처음의 그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고작 며칠인데, 두려움과 외로움은 사람을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협력한다면, 정보국 사조직 내부에서 첩자 노릇을 맡게 될지도 몰랐다. 조안나가 확보한 증거자료는 어디까지나 인체실험에 관련된 것들뿐. 타격을 줄 수야 있겠으나, 「진정한 애국자들」을 낱낱이 색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자들 역시 정보관계에서 뼈가 굵은 인물들일 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내부협력자가 있다는 가정하에, 사건 공개를 미루고 비밀수사를 진행하는 편이 낫다. 세계관의 불안요소 하나를 뿌리까지 뽑아내기 위한 일이었다. 그러자면 기회가 있을 때 코왈스키의 마음을 돌려두는 게 좋다. 상념을 깨는 진동이 있었다. 달각달각.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잔이 바르르 떨었다. 전등이 가볍게 흔들리고, 공들이 제 자리를 벗어났다. 치지도 않은 공이 느릿느릿 구르자, 터커가 두 손을 들어 올린다. “이런.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지진이라니…….” 광역권에서 가까운 이곳은 땅울림이 잦은 지역이었다.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안나가 테이블을 정리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휴게실 이용에도 순서가 있다. 녹색 테이블은 하나밖에 없었다. 목적은 목적이고 게임은 게임이었다. 즐기던 요원들이 아쉬워했다. 여기서 머물기로 한 날도 내일로 끝. 유바 시티까지 가는 먼 여정은 이렇다 할 여흥이 없는 나날이 될 것이다. 흩어지는 요원들 사이에서, 코왈스키는 겨울의 손짓을 발견하고 주춤거렸다. 탤벗과 조안나는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멀어진다. 겨울은 먼저 바깥으로 나왔다. 조명이 새지 않도록 유의했으므로, 건물 밖은 별빛이 맑은 어둠이었다. 망루 위를 서성이는 그림자가 보인다. 끼익.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 문틈으로 벌어졌던 빛이 사라진 후에, 조용한 발소리가 난간 옆으로 다가왔다. 사이에 부는 바람은 보이지 않는 커튼 같았다. 충분히 기다린 겨울이 물었다. “힘들어요?” “…….” 코왈스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어떻게 막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잘되지 않는 기색. 물빛 외로움들이 뚝뚝 떨어졌다. 하나같이 뜨겁고 무거웠다. 며칠쯤 독방에 갇혀있던 죄수를 보는 느낌이다. 그녀의 죄의식이 쇠창살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정당화와 자기합리화가 남아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긍정할 여지가 달리 없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인정하긴 어려워했다. 몰아붙여 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그래서 겨울은 조금이나마 그녀를 긍정해주려 한다. “코왈스키 요원. 당신은 정말 끔찍한 일을 도왔어요.” 목이 멘 코왈스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인체실험에 직접 관여하진 않았겠지만, 연락책이었을 뿐이라도 책임은 무겁습니다.” “네…….” “그건 무슨 수를 써도,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 그래도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조직이 어디까지 퍼져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선 내부고발자가 되기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기에. 최악의 경우엔 처단당하고 말았을 터. 취조에 가까운 면담을 거쳐 조안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비밀스러운 정보기관에서 다소의 독단과 부정은 흔한 일. 그런 까닭에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면도 있는 것 같다고. FBI에서 CIA에 괜히 감독관을 파견하겠는가. CIA는 미국 영토에서 미국 시민들을 고문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소극적인 동조자. 조안나는 연민인지 증인보호인지 모르겠다고 자조했으나, 코왈스키가 정말로 질이 나쁘다 여겼으면 오늘 같은 자리는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겨울은 감독관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내 말은, 당신이 벌을 받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란 뜻입니다.” 한숨 돌리고 이어가는 말. “만약 내가 코왈스키 요원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찢어 죽인다고 치죠.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이미 다 죽어버렸는데…….” 복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하니 어쩌니 해봐야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분노였다. 법적 처벌도 마찬가지.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세요. 그러기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 뭐가 진짜 최선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이번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면 난민들의 처우 개선에 큰 도움이 되겠죠. 당신을 살려두는 이유는 그것 하나뿐입니다. 죄책감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시고요.” “……중위님. 혹시 저를 경멸하진 않으십니까?” 겨울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마저 우세요. 옆에 있을 테니까.” 울타리를 순찰하던 경계병들이 먼발치에서 멈칫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은 눈치들. 겨울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들은 망설이다가 온 길로 돌아갔다. 어차피 좁은 거점이었기에 반대로 돌아도 금방이었다. 이 부근이야 겨울이 있었으니 따로 살필 이유가 없겠고. 숲이 바람에 부대끼는 심야가 가까워졌다. 코왈스키를 다독여 들여보낸 뒤, 겨울 스스로도 잠자리에 들었다. 진정한 의미의 수면은 아니었다. 그저 세계관 내의 컨디션 유지를 위한 것. 「종말 이후」의 시간 흐름을 물리세계와 완전히 일치시킬 순 있으나, 다른 세계의 관객들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괴롭고도 불가피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소년에게도 비로소 긴 휴식이 주어질 것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쉴 수 있어 나쁘지는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밤은 아니었다. 깡깡깡- 깡깡- 깡깡깡- 깡깡- 불침번(CQ)들이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사이렌을 대신하는 전투준비 신호였다. 여기에도 패턴이 있었다. 변종이 내부로 침투한 상황이면 쉬지 않고 두드리기로 약정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위협요인이 외부에서 발견된 경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전 병력을 깨우는 거로 보아 평범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전투복을 벗지 않고 누웠던 겨울이다. 눈을 뜬 즉시 무장하고 밖으로 달렸다. “엑셀!” 예민한 동물은 실내의 소란에 벌써 깨어나 있었다. 「승마」로 완전히 길들인 뒤에는 묶어놓지도 않았으므로, 주인의 부름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다. 겨울이 검은 명마에 올라탔다. 안장에 찔러두었던 철봉을 들고 사방을 살피며 대기한다. 뒤이어 기동대원들이 나타났다. 기동대란 말타기에 가장 숙달된 병사들의 임시명칭이었다. 허겁지겁 말에 오른 그들이 겨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상황 전파받은 것 있어요?” 겨울의 질문을 받은 병사들이 서로 마주 본 뒤에 고개를 흔들었다. 모랄레스 상병이 답한다. “아직 없습니다. 중위님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랭포드 대위가 직접 무전기를 잡았다. [베이커 액추얼이 상황 전파한다. 로컬타임 01시 48분, 1번 주도 북쪽 방향에서 다섯 차례의 총성이 있었다. 복수의 경계병이 보고했으니 확실한 정보다. 거리는 알 수 없다. 아군 생존자일 가능성이 있다. 브레이크] 베이커는 임시로 정한 중대의 호출부호였다. 포트 베이커의 생존자들이니 직관적이었다. 주도 북쪽 방향이라면 3킬로미터 거리에 작은 도시, 혹은 큰 마을이 있었다.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 걸어서는 40분 넘게 걸리지만, 말을 타면 금방이다. 외곽 정찰을 나갔을 땐 별다른 위협이 발견되지 않았던 곳. 변종들이 동쪽으로 무리지어 이동한 흔적만 남아있었다. 잠깐의 공백 뒤에 다시 이어지는 전파. [워 호스가 주도를 따라 선행하라. 지원이 도착할 때까진 안전과 수색을 최우선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베이커 1 액추얼의 판단 하에 시가지로 진입해도 좋다. 입감했는지?] 아무리 실내에 있었고, 또 취침 중이었어도, 겨울은 총성을 듣지 못했다. 상황이 벌어진 장소는 적어도 도보로 2-30분 이상 떨어진 위치일 것이었다. 전마(戰馬/War horse)는 당연히 기동대를 가리킨다. 겨울이 무전기 발신 버튼을 눌렀다. “당소 베이커 1 액추얼. 입감했습니다. 워 호스는 현시각부로 이동하겠습니다.” 수면을 방해받은 말들이 신경질을 부렸다. 그냥 드러눕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경계병들이 열어준 문으로 기동대가 빠져나왔다. 며칠 전만 해도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많았으나, 병사들이 열심히 불모지를 조성한 덕분에 지금은 사방으로 트여있었다. 구름도 안개도 없는 밤이었다. 병사들은 야시경을 썼으나, 겨울은 맨눈으로도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조만간 「환경적응」을 얻을까 싶다. 낮과 밤의 가시거리가 비슷해질 것이다. 우체국과 성당, 목공소가 스쳐 지나가면서 마을이 끝났다. 북동쪽 백 미터 지점에 인공조명 하나가 반짝였다. 전신주에서 걷은 전선을 이어 일부러 설치해둔 것이다. 다른 방향을 다 막았기에 거점 방면의 좁은 각도로만 빛이 샌다. 만약 변종들이 거점으로 접근할 경우 빛을 보고 방향을 꺾을 것이었다. 같은 함정이 마을 남쪽에도 있다. 조명 번지는 자리에 중대본부의 위치를 알리는 지도와 안내문을 걸어두었으므로, 사람이 속을 일은 없다. 예상은 했으나, 함정에 꼬인 변종은 없었다. 겨울은 기동대를 도로 우변의 능선 위쪽으로 이끌었다. 시야를 넓게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공제선에 생긴 그림자는 변종들에게도 아주 잘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속도로 따돌리면 그만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보고 피할 자신도 있었다. 구울이 아닌 이상 보통의 변종은 인간보다 밤눈이 어둡다. 소리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달이 뜨는 방향 멀리, 마을에서 동떨어진 목장의 폐허가 보인다. 지평선 가까운 별빛 아래엔 또 다른 목장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거주지의 입구였다. ‘정말로 미군 생존자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나타난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서 미군의 교두보는 골든게이트와 엔젤 아일랜드에 몰려있었다. 탈출하더라도 거점의 남쪽이나 동쪽에서 나타날 확률이 높다. 쫓기며 산을 헤매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 가능성도 있지만. 기동대는 5분 만에 마을 어귀에 도달했다. 가까운 늪지로 흐르는 개천이 도시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모랄레스가 귀를 기울인다. “중위님. 지금 이거 들리십니까?”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냇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가득한데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음이 있었다. 가장 선명한 것이 변종들의 괴성이다. 그 외엔 놈들이 여기저기 부딪히거나 부수고 다니는 불협화음이었다. “뭐가 됐든 아직 놈들이 미쳐 날뛸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네요.” “어떻게 합니까? 이 시간에 고작 우리 다섯만으로 들어가긴 부담스럽습니다만, 만약 생존자라면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 사이에 구할 기회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이 말에 기동대를 돌아보는 겨울. 병사들은 못내 우려하고 있었다. 탄약이 충분하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당 탄창 두 개를 겨우 채우는 상태. 한데 거주지는 낮에도 주의해야 하는 환경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령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장애물이 워낙 많으니까. 겨울의 판단하에 돌입해도 된다는 허가가 있었으나, 어쨌든 랭포드는 최대한의 주의를 당부한 것이다. “무전기 출력 높이고 따라와요.” 겨울의 결정을 병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따른다. # 207 [207화] #생존자들 (10) 처음엔 겨울 혼자 들어갈까 고민했었다. 실탄 소모와 병력 손실 가능성을 동시에 최소화하고자. 그러나 적의 규모는 물론이고 생존자들의 숫자와 정체, 상태를 모른다. 단기필마로는 아무래도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소란이면 매복은 없다고 봐야겠지.’ 외곽을 돌며 멀리서 보았을 뿐이지만, 어제까지는 역병의 기미가 없던 거리였다. 대사억제에 들어가 있던 놈들도 소란에 이끌려 나왔을 것이다. 규모가 큰 도시라면 강화변종에 의한 조직적인 기습을 경계해야겠으나, 여긴 고작 천명 남짓 거주하던 소도시에 불과하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더라도 산발적인 습격에 불과할 터였다. 정 곤란할 땐 속도를 살려 이탈할 작정이다. 가장 깊게 들어간다 해도 최단거리로 세 블록만 돌파하면 시가지를 벗어날 수 있다. 빛이 없는 환경에선 야시경을 쓴 병사들이 변종들보다 우월하기도 하다. 남쪽에서 시가지로 들어가는 유일한 다리는 건너편 수십 미터까지 나무가 무성했다. 겨울은 그냥 초목이 적은 지점을 골라 개천을 도하하기로 했다. 그래 봐야 물길의 폭이 최대 10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최근에 비가 내린 적이 없어 깊이가 깊지도 않았다. 유속 또한 느린 편. 다섯 인마가 물을 건넜다. 물결이 등자 발걸이 바로 아래에서 부서진다.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전투화를 적셨다. 선두에 선 겨울은 물가에 우거진 잡다한 초목을 단숨에 쳐냈다. 저층 아파트 단지 서쪽 도로를 경유해 마을에 진입하자, 코요테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변종들이 일으키는 소란은 여전히 북쪽이었다. 주택가 사이의 초지를 가로질러 올라간다. 몇 번은 울타리를 부숴야 했다. 기동대원들의 승마술이 아직 장애물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렇게 작은 야구장으로 들어섰다. 학교에 딸린 운동장의 일부였다. 오래 전에 지나간 폭풍의 흔적이 남은 교정(校庭) 측면에서, 아직 이쪽을 발견 못 한 변종 셋이 고개를 휙휙 꺾어댔다. 캬악, 캭, 캭! 울타리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놈들 같았다. 정찰대 역할인가보다. 아무래도 본 무리에는 구울 이상의 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겨울이 몇 번의 손짓으로 대원들과의 간격을 넓혔다. 가볍게 달리는 속도로 변종들에게 접근한다. 별빛만으로는 이쪽을 보기 어렵다. 프리시안 품종의 흑마는 어둠에 녹아들었고, 겨울의 복장도 일반적인 미군과 달랐다. 아직은 오르카 블랙의 새까만 전술복이다. 철봉은 등 뒤로 꼬아 쥐어 반사광을 최소화했다. ‘비반사 처리를 해둘 걸 그랬나…….’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다. 손닿지 않는 자리, 기름과 재를 섞어서 발라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때늦은 아쉬움이지만, 당장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말발굽소리에 귀를 곤두세우는 잿빛 괴물들. 그러나 건물 모퉁이의 그늘에 기대어 접근했으므로, 결국 공격이 가능한 거리까지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다. 지금의 겨울은 위장색을 두른 맹수나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근육이 당겨지며 힘이 응축된다. 기습. 강타. 뼛조각이 튀었다. 깨진 머리뼈가 살을 찢고 나온 것. 변종은 비명도 못 지르고 뇌가 파괴되었다. 뇌수가 뿌려지는 속도보다 바람을 찢는 둔기가 빨랐다. 남은 두 변종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박살이 났다. 마지막 놈의 경우엔 굽은 목을 내리쳐서 죽였다. 끊어진 목뼈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쿵. 분리된 머리가 묵직하게 굴렀다. 뻐끔, 뻐끔. 이제야 예비 숙주를 발견한 녀석이 눈알을 굴리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머리 없이 무릎 꿇는 제 몸을 보고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양. 소리가 나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이빨을 부딪친다. 따다다다닥! 그러나 그것마저 빠르게 잦아들었다. 산소와 혈류공급이 끊어진 머리가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처리했어요. 다시 붙어요.” 겨울의 무전에 기동대원들이 가깝게 말을 몰아왔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지를 펄떡거리는 회색 몸뚱이에 혐오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병사들. 무선은 감명도가 좋았다. 트릭스터는 없는 것 같았다. ‘「침묵하는 하나」는……. 역시 있을 리가 없나.’ 잠깐 염려한 것은 전투에 개입하는 일 없이, 정보를 보존하는 역할의 특별한 트릭스터였다. 그러나 다른 트릭스터가 없으면 그 역할도 무의미하다. 빈 그네가 흔들리는 쓸쓸한 놀이터를 거쳐, 주택가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향한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거리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드디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쉬어있어 역병의 괴성과 잘 구분되지는 않으나, 거친 욕설이 섞인 절망이었다. 영어를 쓰고 있다. 게이브! 젠장! 이것을 들은 겨울이 엑셀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달려요! 최고속도로!” 장애물을 왼쪽에 끼고 달린다. 바람이 서풍이었으므로, 실려 오는 냄새로 변종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기습을 예방하며 이번에도 울타리를 부수고 돌입한다. 정원이 유독 넓은 주택이었다. 커다란 집을 백에 가까운 변종들이 포위한 상태. 보정을 받은 청각은 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투까지 잡아냈다. 총성 없는 육박전이었다. 기동대의 등장에 출렁 흔들리는 역병의 무리. 곧바로 들이치기엔 숫자가 많다. “맥러린! 메이슨! 11시 방향, 수류탄 투척!” 뭉쳐 있던 놈들 일부가 떨어져 나오며 생긴 공백은 파편을 터트리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지나치게 밀집해있으면 몸통에 막혀 몇 놈 죽고 끝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겨울도 안전핀을 뽑았다. 재분배를 받았다 하나, 우선적으로 할당받은 겨울조차 수류탄은 고작 두 개뿐. 맹렬하게 던져진 수류탄이 까마득하게 날아갔다. 머리 위에서 터트릴 자신이 있으니 역병의 밀도에 개의치 않았다. 목표는 무너지는 담장 안쪽. 아득바득 몰려있는 변종들을 노렸다. 콰앙! 쾅! 콰쾅! 세 차례의 파편 폭발이 썩은 몸뚱이들을 찢어발겼다. 초연과 변질된 피의 악취가 먼 거리까지 훅 밀려온다. 며칠간 사격에 적응시킨 말들도 여기에는 놀랐다. 기동대원들이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두 발을 쳐들고 거칠게 울어, 낙마를 간신히 면한 병사도 있었다. 폭심지에서 가까운 곳에 피투성이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시신으로 드문드문 그려진 원 바깥에서는 미처 죽지 못한 것들이 발광한다. 겨울은 그 사이로 돌격할 방향을 가늠했다. 이 굉음을 내부에서도 들었을 테니, 구원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터. 자포자기로 목숨을 놓아버리진 않을 것이다. “모랄레스! 지휘를 맡아요! 거리를 유지하며 사격! 지붕으로 올라가는 놈들 우선으로 쏴요! 탄창 하나 다 쓰고 나면 물러나서 접근하는 놈들만 처리하고요!” “Yes sir!” 땅을 박찬 엑셀이 세상을 뒤로 밀어냈다. 달리는 말발굽이 폭발의 가장자리, 엎어진 아우성들을 짓밟고 지나간다. 중량감 넘치는 질주에 치여 곤죽이 되는 역병들. 타타탕! 타타타타탕! 지원사격의 총성은 삼점사가 겹쳐져 연사처럼 들렸다. 노을빛으로 번쩍이는 예광탄 줄기가 머리 위로 연달아 날아갔다. 지붕으로부터 2층 유리창으로 들어가려던 변종들이 일제히 비틀거린다. 마상사격이라 명중률이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빗발치는 총탄에 놀라 중심을 잃고 굴러떨어지기만 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경상은 입는다. 네 사람의 사격보다 겨울이 제압하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체감상 시속 30킬로미터, 이 속도를 유지하며 타격 범위의 모든 변종을 후려쳤다. 격살보다 무력화에 중점을 둔 공세. 그러나 질량이 질량이라 어디를 쳐도 치명적이었다. 뻐억- 급소고 뭐고 다 열어두는 보통의 변종들과 달리, 영리한 하나가 두 팔을 겹쳐 공격을 방어했다. 덕분에 으깨진 팔이 몸통을 파고들었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압박한다. 꺼억, 꺽, 숨 못 쉬는 녀석을 다른 변종들이 짓밟는다. 겨울의 폭주를 뒤쫓는 추격이었다. 쾌적한 조건이라면 단거리 질주로 말을 따라잡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역병의 숙주는 체력과 지구력에서 인간을 능가하니. 그러나 기병돌진의 상흔이 달리는 놈들의 발을 걸었다. 죽거나 다친 변종들이 장애물이었다. 인체의 발이 강철 편자를 씌운 말발굽 같을 순 없었다. 방향을 전환할 무렵, 후방에 있던 구울을 발견한 겨울은 철봉 잡은 손을 바꾸고 곧바로 권총을 뽑았다. 탕! 탄피가 튀었다. 구울의 눈알이 액체처럼 뭉개진다. 권총을 홀스터에 꽂아 넣고 본래의 자세를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구울의 사체가 쓰러졌다. 더욱 무질서해진 변종들을 한 번 더 직선으로 꿰뚫은 겨울이 말의 머리를 주택 정면으로 틀었다. 부서진 현관을 통해 여전한 사투가 들려온다. 꽉 찬 층계로 오르지 못하고, 그 아래를 신경질적으로 서성이는 변종들이 보였다. 이것들은 아직 바깥에 관심이 없었다. 이랴, 하! 기수의 기합에 준마가 호응했다. 실내로의 돌격. 빠르게 확대되는 현관을 몸을 낮춰 통과한다. 사람에게 넉넉한 복도가 기병에게는 비좁다. 겨울이 한껏 당긴 철봉을 똑바로 내질렀다. 빡! 돌아섰던 변종의 이마가 함몰된다. 층계 측면을 지날 때 겨울이 대각선 위쪽 높은 난간을 부쉈다. 그 너머에 있던 발목들이 함께 부러져, 계단에 우글거리던 괴물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난간을 넘어서 떨어지는 놈도 다수였다. 겨울은 이미 지나간 자리. 좁은 정면에 대한 연속공격으로 덤벼드는 것들을 쳐 죽이며, 거실 옆 층계가 시작되는 넓은 공간까지 우악스럽게 밀어붙인다. 타앙! 타타앙! 역병 집단이 다수의 질량으로 몰려드는 순간이면 여지없이 메아리치는 총성. 실내라 더욱 요란하다. 좁은 복도를 벗어난 시점에서 겨울의 전투력이 최대로 발휘되었다. 층계참에 있던 변종들이 아래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디딜 곳이 온통 꿈틀대는 몸뚱이들이라 넘어지고 굴러 내릴 따름이다. 펄쩍 뛰어 도약하는 놈의 허리를 쳐 옆으로 접어버린 겨울은, 아예 말에 탄 채로 계단을 올랐다. 엑셀에게 해를 끼칠 놈들을 신속하게 찍어 죽이면서. 그렇게 죽인 변종들 가운데 감염된 미군이 셋이었다. 전투복이 누더기처럼 더럽고 여기저기 찢어진 채 피투성이이긴 했으나, 방탄 헬멧까지 제대로 쓰고 있는 모습들. 썩지 않은 피부를 보면 오늘, 아마도 여기서 감염된 이들이다. 쿠웅, 쿵! 연신 터져 나오는 거친 욕설의 지척에 이르렀다. 변종들이 2층 복도를 메우고 아우성이다. 생존자들은 변종들이 밀어대는 문짝 너머에 있을 터. 이미 경첩이 떨어진 문이라, 사실상 인간과 역병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복도보다는 방이 넓다. 사람 쪽에 겹쳐진 체중이 더 커서 어떻게든 견뎌내는 구도였다. 이제야 안장에서 내려온 겨울이 특별할 것 없는 변종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몇몇 시체가 난간을 부수고 떨어진다. 좁은 공간은 겨울보다 역병 쪽에 더 불리했다. 규모의 폭력을 살리기 어려운 탓. 콰당. 문에 붙은 녀석들까지 단숨에 해치우자, 필사적으로 밀던 힘 때문에 생존자들이 문밖으로 쏟아졌다. 역시 지저분한 미군들이다. 겁에 질려 상황파악이 늦다. 문이 무너진 줄 알고 비명을 지르거나, 겨울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했다. 물론 발사되진 않았다. 「생존감각」과 「전투감각」의 경고가 없었다. 노리쇠가 후퇴 고정되어, 개방된 약실이 드러나 있다. ‘애초에 탄창도 없는 총을…….’ 딱 봐도 고초를 하루 이틀 겪은 이들이 아니었다. “진정해요! 구조하러 왔으니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바깥에선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간헐적으로 벽을 넘어오는 총성들. 탄약을 아끼느라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일병 하나가, 도로 주저앉아 멍하니 올려다본다. “하, 한 중위? 어, 중위……님? 진짜로?” 복장이 다르니 알아보는 속도가 느렸다. 꺼질듯한 랜턴 빛이 겨울을 비추었다. “혹시 물린 사람 있습니까?” 이 질문에 병사들이 진저리를 쳤다. 참담해지는 낯빛이 둘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쁜 안색이 하나. 끄억, 그으으윽- 하필이면 최종변이의 순간이다. 인상을 찌푸린 겨울이 즉각 철봉을 찔렀다. 위액을 쏟아내던 입에 걸어 벽으로 확 밀어붙인다. 쿵! 뒤통수가 벽에 부딪혔다. 눈동자가 위로 말려 들어간 얼굴. 툭툭 불거진 핏줄과 경련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겨울은 무기를 고쳐 잡고 순간적으로 쳐올렸다. 우득. 경추가 빠지면서, 떨리던 몸이 축 늘어진다. 부러진 앞니가 진득한 침에 섞여 흘러내렸다. 사망자의 부대 마크는 겨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붉은 바탕에 푸른색 문장. 강에 놓인 철교를 닮은 형상이다. 무기를 회수한 겨울이 권총을 뽑고 남은 두 명의 감염자에게 물었다. “유언이 있다면 듣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목 놓아 울기만 할 따름이었다. 바로 쏴 죽이기도 비정하여, 남은 인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여기서 최선임자가 누굽니까?” “저, 접니다. Sir.” 손들고 나선 사람은 병장 계급이었다. 이름표에 새겨진 철자는 OSBORNE. 미군 병장이면 실력도 실력이고, 실전경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광기가 없음을 확인한 겨울이 권총을 넘겨주었다. 얼결에 받는 그에게 말한다. “여기 두 사람의 유언을 받고, 위험해질 경우엔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난 바깥을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대목에서 오스본 병장은 어깨를 떨었다. 여유가 있었으면 겨울이 직접 했겠지만. 탄을 아끼라고 칼을 건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물 밖에서 기동대를 도와 남은 변종들을 쓸어버릴 즈음, 레예스 스테이션의 경계에 도달한 베이커 중대로부터 무전이 들어왔고, 실내에서는 두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 208 [208화] #생존자들 (11) 2개 소대가 동쪽 천변(川邊)과 북쪽 도로에 경계를 구축했다. 랭포드 대위는 본부소대와 함께 퇴로를 유지했다. 기동대가 도하했던 그 지점이었다. 그 사이에 겨울은 먼 거리까지 정찰을 나갔다. 추가로 접근하는 변종집단은 없는지. 있다면 마저 쓸어버리고 복귀할 작정이었다. 규모가 커도 무방하다. 지킬 것이 없는 싸움이라면. 그러나 밤이 깊은 산과 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악취가 섞여 있지 않았다. 시가지가 보이지 않을 거리까지 나아갔던 겨울은, 언덕을 넘어 반시계방향으로 한참을 돌아 복귀했다. 가시거리를 포함해서 10킬로미터 이내엔 별다른 위협이 없었다. 살아서 구조된 인원은 아홉 명이었다. 우선은 모두에게 충분한 물을 먹였다. 대부분이 고통스러워했다. 목이 모래처럼 말라 있었던 탓. 몇몇은 토해내기까지 한다. 위가 경련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탈진한 이들을 태우려 하자, 말들이 많이 싫어했다.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다. 지린내는 그렇다 치고,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거무죽죽한 경우가 많았다. 중대원들은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비위가 약해서 본의 아니게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이 있을망정. “어, 중위님, 저는 그냥 걷겠습니다.” 오스본 병장이 침울하게 하는 말에 겨울이 대꾸했다. “무슨 소리에요?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타요.” 안장 위의 겨울은 그의 뒷덜미를 잡아 간단하게 끌어올렸다. 어? 그가 당황할 땐 이미 기수의 뒷자리였다. 엑셀은 무게가 배로 늘었어도 얌전하게 굴었다. “꽉 잡아요.”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겨울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오스본. 말이 낯선 사람에게는 불가항력이었다.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겨울이 속도를 붙였다. 끝내 말에 타지 못한 인원들은 관리병력과 함께 차량으로 후송됐다. 시체를 실어 나르느라 두 번을 오가야 했다. 중장비에서 뽑아낸 디젤이 충분했으므로 20킬로미터가량의 주행을 아까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점에 돌아와서는 식사가 우선이었다. 그냥 봐도 며칠은 굶은 모습들이었기에. 그들이 식탁에 앉아 부들부들 떨거나, 울거나, 엎드려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동안, CIA 요원들이 묽은 스튜를 준비했다. 연한 고기를 써서 조리시간을 줄였다. 토마토처럼 없는 재료가 많아 흉내만 내는 수준. 맛을 따지자면 차라리 간도 없이 구운 고기가 나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미친 듯이 퍼먹었다. 그러다 죽고 싶은 거냐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지켜보는 모두가 아연했다. 장교들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봐서 좋을 게 없는 모습이었다. Fuck, Fuck, Fuck, Fuck, Fuck! 한 사람이 먹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연신 욕설을 내뱉던 입, 꽉 깨문 이빨 사이로 침이 질질 새어 나왔다. 스푼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린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식탁 둘레로 전염성 높은 울음이 번졌다. 다들 울면서 꾸역꾸역 삼킨다. 그릇을 비우고 더 달라고 애원했다. “갑작스럽게 많이 먹으면 탈이 날 텐데…….” 앞치마를 두른 바커 소위가 난처해 했다. 그러나 결국은 조금씩 더 나눠주고 말았다. 제발 천천히 좀 먹으라고 당부하면서. 벽에 기대어 지켜보던 랭포드 대위가 정수리를 만지작거렸다. 걱정도 걱정이거니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식후엔 온수로 샤워를 시켰다. 한 사람씩 따로 두기가 위험하여, 각자에게 최소 상병계급 이상의 감시를 붙여놓았다. 겨울도 오스본을 맡았다. 대위가 당부했다. “혹시라도 총기를 빼앗기는 일이 없게끔 주의하도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사고를 많이 겪어본 지휘관의 경고였다. 씻는 동안에도 간헐적인 울음이 이어졌다. 그들의 몸이 옷 이상으로 더러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온수가 주는 안도감도 중요했다. 감시는 편하지 않았다. 자해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까봐 욕실마다 면도날을 치워두긴 했으나, 사람이 작정하면 온갖 방법으로 죽을 수 있다. 아래층에서는 작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식사시간에 이미 한 번 돌렸으나, 냄새와 얼룩이 다 빠지지 않아 타이머 최대로 잡고 한 번 더 돌리는 중이었다. 세탁실에 건조기까지 갖춰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전이 필요해서 병사들의 주머니를 뒤져야 했지만. 전투화는 락스를 묽게 탄 물에 반 시간을 담갔다. 그다음엔 독한 술을 부어 마구 흔들었다. 싸구려 진(Gin)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쏟아낸 다음에도 맑은 물로 몇 번을 더 씻어내고서야 벽난로 주위에 펼쳐놓았다. 샤워를 끝내고 말끔해진 아홉 사병을 침실에 몰아넣었다. 임시로 민간 복장을 하고 슬리퍼를 끄는 모습들이 어색했다. “어두운 건 싫습니다……. 불을 켜놓고 자도 되겠습니까?” 불안해하며 묻는 한 명에게 겨울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창문을 막아놨으니까 괜찮아요.” 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푹신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얼마만일까. 비로소 상황이 해제되어 베이커 중대 병력에도 휴식이 주어졌으나, 랭포드 대위는 불침번으로 평소보다 많은 인원을 세웠다. 구조된 인원을 수시로 확인하라는 지시가 더해졌다. 다만 오스본 병장을 잠시 불러냈다. 미안한 일이었으나, 계급이 높은 사람은 책임도 큰 법이었다. 지휘관들을 집합시킨 랭포드 대위가 오스본에게 말했다.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냥 쉬게 해주고 싶지만,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급적 빨리 끝내겠다고 약속하지.” “아닙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일단 편히 앉아. 많이 힘들 텐데. 혹시 술 한잔 하겠나?” 오스본은 망설이다가 받겠다고 대답했다. 에스카밀라 소위가 유리잔에 얼음을 담아왔다. 술은 대위가 직접 따라주었다. 그을음을 먹은 오크 나무의 향이 호박색 잔에 짙게 감돌았다. “우선, 자네들 소속이 어디인가?” “알파 중대, 제1혼성전투대대, 제30기갑연대전투단입니다.” 부대 마크가 철교 비슷하다고 보았던 것은 착각이었다. 붉은 바탕에 푸른 원, 원에 내접한 사다리 형상은 사실 알파벳 O, 가운데 막대가 사각형으로 변형된 H였다. 연대전투단의 별명인 올드 히커리(Old Hickory)의 두문자(Initial)라고. 사각형 안을 채운 ⅩⅩⅩ를 장간 구조물이라 여겼으나, 로마 숫자로 30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이는 당혹스러운 답변이었다. 랭포드 대위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은 몰라도 샌프란시스코 주위에 있던 부대가 아닌 것 같은데.” “샌프란시스코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탈환 작전이 거기까지 진행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새크라멘토 남쪽 스톡턴과 트레이시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서로 혼란스러워한다. 오스본은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에도 미군의 교두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랭포드 대위는 명백한 해방 작전에 참여했던 부대의 병력이 작전지역으로부터 서쪽으로 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스톡턴이라고? 농담하는 건가?”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본부는 스톡턴 시가지 남쪽 광역공항에 있었고,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샌 호아킨 디포(Depot/보급기지)를 방어하는 것이 저희 대대의 임무였습니다. 서쪽 평야지대에서 기동방어를 전개했죠.” 구체적이다. 중대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유바 시티만 하더라도, 실제로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벨(Beale) 공군기지에 주둔지가 있었다. 대도시를 점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 다른 장교들을 한 번 둘러본 랭포드 대위가 뜸을 들인 끝에 어렵게 다시 물었다. “잔인한 질문이지만, 부대는 어떻게 됐나?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지?” “아무래도 전선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상륙교두보인 포트 베이커에 배치되어 있었어. 그 기지는 닷새 전에 무너졌고. 사실 보급이 끊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전부터도 잘 전파되지 않았지. 사기를 고려한 조치였는지, 아니면 위에서도 미처 파악을 못 한 것이었는지……. 그러니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게.” “……젠장,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스본이 한숨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한 모금 넘기고는 인상을 찡그린다. “보급이 끊어진 다음부터 변종 놈들이 집적거리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도시는 물론이고 숲이나 산악지대에서도 계속 밀려 나오더군요. 본격적인 공격은 아닌데 매번 대응을 안 할 수는 없는, 딱 그런 수준이었죠.” 변종들, 특히 트릭스터가 보급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고, 의도적으로 탄을 소모하며 변종집단의 숫자를 보존하고 있다는 추측은 예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래서 멀쩡한 차량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걸 보고 유류 부족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버리지 않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후퇴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여길 버리면 캘리포니아 중부지역의 병력이 굶어 죽을 거라고……. 철수하는 부대들이 물자를 수령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하더군요.” 대위가 무겁게 끄덕였다. 연료와 수송 차량이 부족하고,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부대가 많았다면 이해가 간다. 멸망한 세계에서 군 기지를 찾아다닌 경험이 많은 겨울 역시 스톡턴의 보급기지를 알고 있었다. 군수국 소속일 때도 몇 번 방문했던 곳이다.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기지인데 두 도시에 나뉘어 존재했다. 트레이시 쪽의 규모가 더 컸다. “탄약이 다 떨어지기 전에 함정을 파기로 했습니다.” 오스본이 몸서리를 쳤다. “일부러 약한 모습을 내보여서 공격을 유도한다는 작전이었죠. 한방 크게 먹이면 괜히 얼쩡거리는 일 없을 거라고. 그러잖아도 조만간 보병전투차(브래들리)를 버려야 할 상황이라서 다들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바깥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겨울을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사태를 파악한다고 분주하기도 잠시, 바깥에서 당직을 서던 루벤 페닝턴 소위가 불침번의 보고를 전했다. [취침 중이던 인원의 발작입니다. 제 선에서 진정시키겠습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무전을 받은 랭포드가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몇 개인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침묵이 흐른 후에, 랭포드는 오스본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실수였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가 밀려들더군요. 원래는 포병과 공군이 다 처리하기로 했는데, 그 병신들이……. 죄송합니다. 아무튼, 범위와 규모가 말도 안 됐습니다. 방어선이 돌파당할 때 대대에서 브로큰 애로우를 요청했나 봅니다. 머리 위로 폭격이 쏟아졌죠.” 그가 잔을 완전히 비웠다.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란 진내사격(陣內射擊)을 뜻했다. 적과 함께 죽을 테니 내 위치로 폭탄이든 포탄이든 닥치는 대로 퍼부으라는 최후의 요청. 철수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혹은 죽어도 전선을 지켜야 할 때 이루어진다. 병장은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고작 한 잔으로 취기가 오르는 듯했다. “뒤집어진 장갑차에서 겨우 나왔는데, 주위엔 남아있는 게 없고, 멀리서 괴물들이 저를 보고 똑바로 달려오는 상황이었죠. 중대장님이 생존자들을 수습했지만, 기지로 복귀하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무작정 변종이 적은 방향으로 달아나다 보니 어느샌가 다들 흩어졌고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겨울이 랭포드 대위의 양해를 구하고 발언했다. “오스본. 여긴 올레마라는 마을이에요. 골든게이트에서 북서쪽으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이고요. 그래서 다들 놀라워하는 거예요.” “저희가 정말 멀리도 왔군요.” 스스로도 기가 막힌 반응이었다. 아마 길도 없는 산지를 거쳐 온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략적인 위치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도로 안내판이라도 보았으면 모를 수가 없지.’ 겨울은 이들의 여정이 예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을 거라 짐작했다. “중대가 어디서 흩어졌는지도 몰라요?” “죄송합니다. 그냥 어느 목장이었다는 것밖에는……. 야간에 기습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쫓겨 다녔죠. 오늘 중위님께서 싹 죽여버린 그놈들에게 말입니다.” “그럼 혹시 다른 병력의 흔적 같은 건 본 적 없어요? 당신들 말고도 이쪽으로 피한 부대가 있지 않으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자 병장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총성을 들었습니다. 저희들 말고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다만 어제부터 오늘까지는 쫓기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덧붙인다. 겨울은 유바 시티까지의 여정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고 판단했다. 생존자들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무시하고 지나가긴 어려울 것이었다. 과연 그 규모가 얼마나 될 것인가. 같은 근심을 앓는지 랭포드 대위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금은 여기까지 해두지. 죽을 것 같은 사람 붙잡고 이 이상 길게 말하기도 그렇군. 사정은 충분히 알겠고, 다른 걸 물어봐야 당장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다들 이만 가서 쉬어. 날이 밝으면 다시 논의해보자고.” 결국 대위가 확인하려던 것도 주위에 다른 생존자들이 존재하는가 여부였다. # 209 [209화] #생존자들 (12) 구조된 인원들은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탄약을 주십시오. 탄약, 탄약 없이는 잠을 못자겠습니다. 제발…….” 자다 말고 당직 장교를 찾는 이들의 공통된 요청이었다. 겨울의 순번에도 두 사람이 찾아왔다. 충혈 된 눈으로 헐떡이는 모습들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절대로 불가하다는 게 랭포드 대위의 방침이었다. 사고를 우려한 탓이다. “이라크 전쟁 최고의 저격수도 그런 사고로 죽었지. 전역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아침부터 겨울과 독대한 대위의 말이었다. “크리스 카일 상사 말씀이시군요.” 이 유명한 사건은 겨울도 여러 차례 들었다. 범인은 전직 해병인 에디 레이 러스. 이라크 전쟁 참전용사였다. 러스는 철조망 바깥(Outside the wire), 위험한 전장으로 나갔던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증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하물며 간밤에 구조된 인원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위가 긍정하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는다. “탄약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줘봐야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수첩에는 몇 줄에 걸쳐 날짜와 숫자가 적혀있었다. 중대의 탄약 보유 현황이다. 소총탄은 어제오늘 4,847발에서 4,703발로 감소했다. 간밤에 144발을 써버린 것. 숫자로는 아직 넉넉해 보이지만, 이제 한 사람 앞에 탄창 두 개를 채워주지 못한다. 실제로는 병사마다 이제 마흔아홉 발을 보유했다. 재분배 과정에서 대략 800발을 남겨둔 셈. 이는 중대 차원의 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균등하게 나눠준다고 끝날 일이 아닌걸.’ 모든 병사들이 동시에 교전하는 상황은 곧잘 없다. 예컨대 방어선을 구축했을 때, 특정 방면에 적이 집중되는 경우 즉시 탄약을 몰아줘야 한다. 잔탄이 마흔아홉이면 패닉에 빠진 병사가 10초 이내에 쏴버릴 양이었다. 탄창 가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지휘관이 병력이든 탄약이든 항상 여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였다. “탄약고를 채우느라 추가로 두 발씩 걷었네. 다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더군.” 랭포드 대위의 농담에 겨울이 쓴웃음을 만들었다. 그가 말한 탄약고의 정체는 통제실 벽에 걸린 두 개의 등산 가방이었다.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중대원들로부터 각출하여 채우는 가방이다. 개인이 휴대 가능한 탄약고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일단 어제 전투부터 되새김질해보지. 소모한 총탄보다 죽인 변종의 수가 훨씬 더 많아. 이런 전투라면 앞으로 서른 번은 더 치를 수 있을 거야.” 또다시 냉소적인 농담이다. 그는 컴퓨터로 간밤의 전투기록을 재생했다. 출처는 기동대원들의 헬멧 카메라. 겨울의 몫도 있었다. 정찰과 정보획득 목적으로 다른 병사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본래 숙박 장부나 기록하던 낡은 컴퓨터는 고화질 동영상 재생을 버거워했다. 작은 모니터엔 번인(Burn-In)으로 인한 잔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분석에 지장이 클 정도는 아니었다. 대위는 겨울의 돌파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 했다. “이런 식의 전투는 기존의 교범에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적의 밀도가 얼마나 감소해야 자네가 뚫고 지나갈 수 있는지를 알아둬야겠지. 그래야 제대로 된 화력지원도 가능할 테고.” 겨울이 동의했다. 바깥에서부터 깎아내듯이 쳐내야 할 때보다는 관통하는 돌격의 살상효율이 훨씬 더 높다. 후방에 도사린 머리 좋은 놈들을 찾아 죽이기에도 좋았다. 새벽의 전투에선 구울을 빠르게 사살한 덕분에 무리의 행동이 더욱 무질서해졌다. 사실 꽤 위험한 방식이었다. 겨울은 항상 병사들의 사선 앞을 달려야 한다. 반시간 가량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교전을 회피하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럴 능력도 충분했다. 최소한 평야지대에서는 먼저 보고 먼저 피하는 게 가능하다. 변종집단을 먼저 발견한 기동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할 수도 있었다. 대원들의 숙련도가 쌓일 경우, 겨울은 말에 탄 채로 누웠다가 일어나는 요령을 가르칠 작정이었다. 풍향에 유의한다면, 갈대밭 같은 곳에서는 변종집단이 가까운 거리를 지나가더라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조를 위해 불가피한 교전을 치러야 할 경우가 문제였다. “이렇게 떠들고는 있어도, 솔직히 우리가 다른 부대를 구원할 처지는 못 돼.” 길게 한숨을 쉬는 랭포드. 탈모가 호전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습니다. 중대원들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요. 가뜩이나 출신 부대가 달라서 아직도 서로 어색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심의 가책이 심해지면 부대가 아예 분해되어 버릴까봐 걱정스럽습니다.” 겨울의 지적. 죄책감 역시 전투피로를 낳는다고. ‘분대나 소대 단위로 이탈해버릴지도 몰라.’ 과연 그것을 탈영이라 부를 수 있을까?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군인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가뜩이나 랭포드 대위는 직속상관조차 아니지 않은가. 겨울에 대한 믿음 또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군이 전우를 버려서는 안 된다. 파소 로블레스 이후의 마커트 대위가 사병들에게 얼마나 무시당했는지를 떠올려야 할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온 사람은 에스카밀라 소위였다. “대위님. 장례식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사자 수만큼의 관을 짜고 땅을 파놓았다는 말이다. 그녀의 소대는 이른 아침부터 목공소에서 땀을 흘렸다. 겨울은 작업에 투입된 병사들의 심리상태가 신경 쓰였다. 에스카밀라 소위가 어련히 관리하고 있겠지만. 랭포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고했어. 바로 가지. 경계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 중에서 참석을 희망하는 사람은, 08시까지 무장을 갖추고 성당으로 오라고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에스카밀라 소위가 경례를 붙이고 나갔다. 랭포드 대위가 중얼거린다. 군목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군종병(Chaplain's Assistant)이나마 있으면 참 좋겠는데, 하고. 전사자들로부터 회수한 군번줄엔 그들이 믿는 종교가 상징으로 새겨져 있었다. 신앙이 없는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기독교 계통의 신자들이었다. 가톨릭은 어쩔 수 없으나. 만인이 사제인 개신교는 군종병이 장례식을 진행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지금은 간단한 기도문을 읽고 끝낼 요량이다.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 랭포드는 새벽 내내 쓰고 지운 종이 한 장을 챙겼다. 그 옆의 성서엔 여러 개의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버려진 성당에 병력이 집결했다. 이들에게 무장을 지시한 것은 만약을 대비한 조치였다. 성당 앞엔 작은 종탑과 약간의 초지가 있었다. 여기가 매장지다. 구덩이마다 관이 들어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의 주여. 여기 선한 싸움을 하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들이 천국의 문을 두드립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 복이 있노라 하셨으니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면류관을 쓴 이와 더불어 당신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믿습니다. 조국과 인류를 지키기 위한 전장에서 스러진 용사들에게, 당신께서 예비하신 처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전우와의 이별과 환난에 고통 받는 저희에게도 자비와 위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기도가 깊어지는 동안 여기저기서 소리 죽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장례식을 달가워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바로 오스본 병장이었다. 그가 직접 사살한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유언이 문제였다. ‘뉴욕에 있는 어머니께 시신을 보내달라……였던가.’ 병장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드는 이유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원이다. 그러나 괴물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할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관이 흙에 덮이는 동안 성당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도열한 병사들이 하늘을 겨누어 세 번의 추모사격(Three-volley salute)을 하지도 않았다. 장례식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전 아론을 여기 두고 떠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눈이 충혈 된 오스본의 말이었다. 아론은 유언의 당사자다. 겨울이 병장을 다독였다. “당신이 여기 남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아론 이병이 당신마저 같이 죽기를 바랐을까요? 아뇨. 살아서 돌아가야 기회가 생깁니다.” “젠장, 대체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기까지 돌아올 기회요.” 다수가 듣는 대화였다. 주변을 의식한 겨울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했어도 봉쇄선이 무너진 건 아니에요. 네바다의 요새화된 사막과 산맥들이 쉽게 뚫릴 것 같지도 않고요.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곳까지 탈환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때까지 살아남아요. 아론을 뉴욕으로 직접 데려가라고요.” “…….” 가볍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정부체제가 오랫동안 효율적으로 작동한 세계관이라, 봉쇄선은 아주 철저하게 요새화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거리에 둔 무수히 많은 벙커들. 철근 콘크리트를 있는 대로 때려 박아, 그럼블조차 쉽게 부수기 어려웠다. 봉쇄선을 소개하는 국방부 대변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뭐든지 X나 크고 X나 튼튼하면 지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미국 시민들은 공식석상의 거친 표현에 환호했다. 이때 겨울은 윈스턴 처칠을 떠올렸다. 2차 대전기 영국의 수상. 스물일곱 번째 종말을 시작하기 전 공부했던 지도자 중 하나. 불한당 같은 이미지가 시민의 지지를 얻는데 도움이 된 경우였다. 물론 연설에서 막말을 하진 않았으나, 어쨌든 맥락은 비슷하다. 겨울이 오스본의 어깨를 잡았다. “최소한 어머니께 소식은 전해드려야죠. 아드님은 용감하게 싸웠다고.” 보통은 직속상관의 역할이다. 그러나 오스본의 중대장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운 내요.” 마지막으로 위로하는 말에 병장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가깝게 서성이던 병사들도 분분히 흩어졌다. 그들 중에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를 봉쇄선의 붕괴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던 수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은 조금 바뀌었을까. ‘정말로 뚫리면……나도 얼마 못 가겠지.’ 장례식이 끝난 뒤 겨울은 곧바로 기동대를 이끌고 나섰다. 1차적으로는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의 수색을 지원하고, 2차적으로는 최대한 먼 거리까지 정찰을 나가는 게 임무였다. 캐리어를 연결한 픽업트럭이 기동대의 뒤를 따랐다. 여기엔 3개 조(Team) 15명의 병력이 탑승했다. 모두가 겨울의 소대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간밤에 요란했던 시가지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을 서쪽의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였다. 갈색 벽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 전체에 담쟁이 넝쿨이 우거졌다. 쇠지레로 자물쇠를 끊고 들어간 무기고는 거의 대부분 비어있었다. 서부 해안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을 무렵, 보안관들 또한 최대로 무장한 채 출동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두 자루의 샷 건(산탄총)을 발견했다. 탄약은 25발들이 작은 상자로 세 개가 남아있었다. 추가로 바닥에서 약간의 권총탄을 주웠다. 급하게 챙기다가 흘린 것 같았다. 다행히 중대가 보유한 권총과 규격이 맞는 탄약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큰 수확이다. 철컥. 방치되어있던 총기의 고장여부를 확인하던 모랄레스 상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말 타고 쏘기에 좋겠습니다.” 기동대원들은 마상사격에서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보안관 사무소 바로 옆은 소방서였다. 흙먼지 가득한 차고의 유리창을 닦아내자, 안쪽에 나란히 주차된 구급차와 소방차가 보였다. 병사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오른다. 이런 차량은 픽업트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디젤을 사용한다. 또한 연료 탱크가 대형이다. 한 번에 많이 채워놓은 연료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변질될 확률이 감소한다. 즉 차량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도 연료를 확보할 순 있을 것이다. ‘어차피 중심가에 주유소가 따로 있긴 하지만.’ 어둠 속을 달리면서 보았던 풍경을 기억하는 겨울이었다. 아무리 사재기가 극성이었어도 저유고가 완전히 비어있진 않을 것이다. 파소 로블레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나라였다면 모를까, 미국은 세계 유수의 산유국이었다. “마침 태양광 패널을 올린 건물이 있군요. 차량을 저기까지 견인하겠습니다.” 배터리를 살려보겠다는 말이다. 겨울의 허락을 구한 모랄레스 상병이 소방차의 견인기를 픽업트럭에 연결한다. 그러고도 병사들이 뒤쪽에 붙어서 밀어야 했다. # 210 [210화] #생존자들 (13) 소방차가 차고를 반쯤 빠져나왔을 때, 겨울이 픽업트럭 전면에서 팔을 흔들었다. “잠깐만요. 모두 멈춰 봐요.” 이제 막 힘을 쓰려던 소대원들이 의아해했다. 최선임인 모랄레스가 나섰다. “왜 그러십니까?”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면서 주유소가 있을 방향을 가리키는 겨울. “먼저 저기부터 들렀다 오죠. 혹시 정비소를 겸한다면 배터리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거리는 고작 한 블록이었다. 태양광 패널이 달린 건물이 코앞이긴 했으나, 인버터에서 전선을 끌어오는 시간과 번거로움을 고려하면 겨울의 말이 타당했다. “흠. 알겠습니다. 어이, 에일! 웨슬리! 연결 끊어!” 맥주(Ale)라 불린 일병의 본명은 알레한드로. 이름 앞을 떼어다 별명을 지은 경우였다. 영어가 어눌해서 놀림을 자주 받는데, 귀찮아하면서도 정말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지휘를 맡은 임시 소대의 분위기에 유의할 수밖에 없는 겨울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견인기가 풀렸다. 트럭을 운전하던 병사가 안도했다. 차축이 휘어질까봐 걱정했다고. 소방차의 체급이 체급이라 있을 법 했다.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겨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누구 차가 더 힘이 센지 겨뤄보는 자리였지.’ 그 단순한 싸움에 열광하던 관중들을 기억한다. 언제인가의 종말, 상대는 워싱턴 DC에서 조우한 무장 집단이었다. 내장도 외장도 괴물처럼 개조된 차들이 아스팔트 조각을 쳐올리며 용트림을 해댔었다. 보닛에 매달려 흔들리던 해골 십자가가 지금도 선명했다. 그 외에 운전대를 잡고 악을 쓰던 운전수의 하얀 문신 또한 인상적이었다.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나름 평화적인 타협을 위해 시작된 경기였다. 상품은 서로가 보유한 식량과 약품, 혹은 노예들이었고. 그때는 감염이 워낙 순식간에 확산하었으므로 문명의 유산이 풍부했다. 남은 물자를 써버리기보다 인류가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던 세계. 그러므로 희망을 잃은 생존자들은 지난 시대의 무덤을 파헤치는 야만인 집단이 되었다. 이번 세계는 그 꼴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최후의 종말이 찾아올 가능성은 아직 희박하다고 생각하는 겨울이다. 하나 없지는 않으니,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이었다. 다만, 심란하지 않을 만큼 평온했으면. 소년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사후의 유일한 미련이나마 오랫동안 곱씹을 여유가 있기를. 주유소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은 은행과 마주 보는 위치였다. 뒤쪽엔 라디오 방송사가 있었다. 돌아본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트 점원으로 일할 적에 곧잘 듣던 채널이라고. 이 말에 불현듯, 겨울은 피쿼드 호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대통령이 새로운 담화를 발표했을 것인데. 봉쇄선 현황은 어떨까. 또 미국 정부는 지금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찾았습니다! 잔뜩 있습니다! 휘유, 연료 안정제도 박스채로 쌓여있는데요?” 유리창을 닦고 실내를 들여다본 병사들이 소리 죽여 환호한다. 태풍의 영향인지 천장에서 물이 샌 흔적이 있으나, 배터리의 대부분은 보관상태가 양호했다. 누액 방지 테이프도 떼지 않은 신품들이었다. 연료안정제 또한 마찬가지. 겨울이 지시했다. “트럭 배터리부터 갈아요. 완전히 방전되었던 물건이라 시원치 않던데.” “Yes sir.” 별것 아닌데도 다들 밝게 굴었다. 이들 또한 좌절과 싸우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좋다. 겨울은 사무실 앞의 자판기를 뜯었다. 쇠지레를 콱 꽂고 확 비틀자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열린다. 콜라뿐이었다. 유통기한이 반년쯤 지난 것들. 어지간해서는 상하지 않으나, 혹시 몰라 몇 개쯤 겨울이 먼저 맛을 봤다. 「생존감각」이 잠잠했다. “어떻습니까? 먹을 만하십니까?” 기대감에 찬 질문. 겨울은 대답 대신 푸른 캔을 여럿 던져줬다. 병사들이 유쾌하게 웃는다. “김빠진 맥주랑 미지근한 콜라는 취급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양하지 않는 모랄레스였다. 하나씩 먹고 난 나머지는 짐칸에 실었다. 시원하게 만들어 돌리면 중대 전체에게 뜻밖의 선물이 될 것이다. 랭포드 대위도 말했듯이, 삶과 죽음의 차이가 가끔은 한 스푼의 아이스크림이었다. 그것이 물리 세계의 관객 일부에겐 섹스일 것이고. 겨울은 그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두 대의 소형 유조차였다. 평소엔 기나긴 도로 한복판에 멈춰선 차들에게 찾아가 바가지를 씌웠을 것이다. 수송량이 각각 4.500리터에 불과했으나, 이 정도면 험비 아흔 대를 꽉 채우고도 남을 양이다. 이 시점에서 베이커 중대의 선택지가 많이 늘어난 셈이었다. ‘가는 길에 버려진 장갑차라도 한 대 있으면 좋겠네. 전차면 더 좋고.’ 겨울이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연비가 나빠서 그렇지, 장갑차나 전차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포탄이 없어도 그렇다. 포트 로버츠의 미어캣은 변종집단을 무자비하게 밟아 죽였다. 1,500마력 엔진과 높은 신뢰성이 그런 짓을 가능케 했다. 소음이 부담스럽긴 한데,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이용할 방법이 있었다. 비포장도로나 야지를 극복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 적어도 평원지대를 지나가는 동안에는 아주 유용할 것이었다. 미군 전차의 급유량이 1,900리터였던가. 그렇게 채우면 400킬로미터 이상을 움직인다. 주유기와 씨름하던 병사들이 지하 저유고에서 직접 기름을 뽑아냈다.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보존 상태도 양호했다. 어차피 첨가제도 잔뜩 확보한 마당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두 대 모두 디젤로 채울 것인가, 한 대는 가솔린을 담을 것인가. 어쨌든 지금 확보한 차량은 전부 디젤엔진이다. 추후에도 차량을 선별한다면 픽업트럭 종류가 우선이었다. 이런 차에 가솔린을 넣었다간 엔진이 작살날 것이다. 겨울이 논쟁을 끝냈다. “우리가 지금 대륙을 횡단하려는 건 아니잖아요? 디젤은 한 대로도 충분해요. 새로운 차종을 확보한다면 가솔린이 필요할 거고요. 기갑차량이라거나.” 향수를 넣어도 돌아간다는 전차 엔진이지만 디젤과는 호환되지 않았다. 추가로 확보할 다른 차량이 반드시 디젤엔진일 거란 보장도 없었다. 러시아에는 휘발유와 디젤을 함께 쓰는 군용기가 있다던데, 무슨 수로 그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소방차와 구급차는 배터리를 교체하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식량 확보는 양만 따진다면 예상을 상회했다. 한 블록 내에 세 개의 제과점이 있었는데, 여기서 확보한 밀가루만 해도 중대 병력이 보름을 먹고 남을 정도였다. 다만 병사들은 무척이나 역겨워했다. 한 곳에서 꽤 많은 벌레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벌레 먹지 않는 밀가루라지만,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시간이 길어지니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욱. 이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비상식량이라고 생각해요. 배고파서 죽을 지경이면 어쩌겠어요. 사람이나 변종을 뜯어 먹는 것보다는 낫겠죠.” 에이프릴 퍼시픽을 회상하는 겨울의 말에 더욱 거북해하는 병사들이었다. “겉에 따로 표시해놔요. 일단은 가지고 가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버리던가 하자고요.” 밀가루 포대를 체로 걸러내기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열취식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비상식량이다. 차량을 추가로 얻지 못했다면 그냥 두고 떠났을 것이었다. 영양 이상으로 먹는 사람들의 심리를 고려해야 한다. 지금 본 것을 비밀로 하라는 지시는 내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비밀일 테니까. 마을에서 유일한 식료품 상점은 부패의 도가니였다. 바퀴가 특히 많아, 병사들이 감히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도 겨울이 혼자 들어가겠다니 책임감으로 나서는 몇몇이 있었다. 진열대 안쪽에서 특이한 흔적을 발견했다. 벌레들이 눌려 죽은 무수한 자국들 가운데, 유난히 깨끗한 자리가 보였다. 펑퍼짐한 무언가가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이것도 낯선 현상이었는데.’ 여러 번 경험하긴 했으나, 아직 이유를 모르겠다. 과거의 종말엔 없었던 현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퀴벌레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분위기 조성을 위한 변경사항일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제껏 이유 없는 변화는 드물었다. 처음엔 사소하게 여겼다. 그러나 자꾸 눈에 띄니 마음에 걸린다. 지금도 절반의 바퀴가 사람을 피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겁도 없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손으로 쳐내도 잠깐이다. 맹목적으로 날고 기어서 병사들이 기겁했다. 무슨 차이일까. “중위님! 여길 꼭 수색하셔야겠습니까?” 겨울은 선반과 바닥을 쭉 훑었다. 어두운 실내였으나, 한 줌의 빛으로 충분한 시야였다. 병사들의 랜턴 빛 닿지 않는 자리도 선명하게 보인다. 많은 병이 깨져있다. 허전한 설탕 봉지들은 이빨로 물어뜯은 흔적들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아직 멀쩡한 봉인이 많았다. 주로 식초나, 독한 소스 종류였다. 시험 삼아 몇 놈이 핥아보고 질색을 했을 풍경이 그려진다. 주류 코너도 꽤나 멀쩡했다. 소금은 절반쯤 사라졌다. 챙길 것을 챙겨 식초와 알콜로 소독했다. 병사들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이 시점에서 민가 수색은 무리였다. 수송중량이 한계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중심가 아래의 보건소(Medical center)에 들렀다. 약품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으나, 비타민제와 영양제, 항생제만큼은 충분한 양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동대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차량을 끌고 먼저 복귀해요. 오늘은 꽤 멀리까지 나가봐야 할 것 같네요. 대위님께는 늦어도 EENT까지 복귀하겠다고 전해드리고요.” 이렇게 지시하는 겨울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로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거리에 자그마한 경비행기 하나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희미한 비행운이 이어진다. ‘뭐지? 이 지역에 저런 게 날아다닐 이유가 없는데…….’ 조금 혼란스럽다. 한때 사라졌다가 부활한 전선통제기도 아니고, 라운델(Roundel : 군용기 국적 식별 마크)조차 없는 민간기였다. 봄날의 햇볕 아래 백색 도장(塗裝)이 빛난다. 마을 남쪽의 다리까지 차량 대열을 호위한 겨울은, 즉시 기수를 동쪽으로 돌렸다. 이는 중대가 나아갈 길의 선행정찰인 동시에, 생존자들의 흔적을 찾는 임무였다. 조금 전 목격한 경비행기도 무척 신경 쓰였다. 방역전선 인근 공역에 허가 없이 진입했다간 즉각 격추당한다. 설마 방공망이 작동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인건 아닐 테고. 겨울을 선두로 다섯 기병이 해가 떠오른 지평을 향해 달렸다. 능선을 넘어가자 뜬금없이 한 무리의 알파카들이 스쳐 지나간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던 것들이 용케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기괴하게 생긴 털 뭉치들은 사람에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동안 사람이었던 괴물들에게 많이 쫓겼을 것이었다. 괜찮은 식량이지만 지금은 무시하기로 했다. 위치를 알았으니 나중에라도 흔적을 쫓으면 된다. 진로는 호수를 만나 꺾어졌다. 댐을 방기할 때 수문을 열어놓고 떠났는지, 수위가 무척 낮았다. 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계속해서 나아간다. 크워어어-! 무리에서 낙오되었거나, 혹은 감염되어 나중에 깨어난 놈인가 보다. 연쇄추돌의 현장에서 깡마른 변종 하나가 툭 튀어나오기에, 겨울은 감속 없이 가격하고 지나갔다. 목이 두 바퀴 돌아간 녀석이 뒤따르는 말발굽에 채었다. “으악 시발! 지져스!” 화들짝 놀라는 말. 기절초풍한 기동대원이 낙마를 겨우 면한다. 승마 실력이 조금 더 나았다면 펄쩍 뛰어서 피했을 텐데, 「교습」 효율이 아무리 높아도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1킬로미터 정도의 계곡을 통과하자 작은 분지가 나타난다. 본래는 이 분지를 통과하여 북서쪽으로 크게 돌아, 1번 주도를 따라 남하하여 복귀할 예정이었다. 임시 거점 기준으로 동쪽과 북쪽 길 가운데 어느 쪽이 안전한지 확인하고자. 그러나 이 순간, 가까운 산간에서 무수한 괴성이 메아리친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변종 집단은 아니었다. 아마도 수목에 가려져 있을 터. 겨울이 보지 못하는 위치라면 놈들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별개의 사냥감을 쫓는 중일 확률이 높았다. 과연 그 사냥감이 야생동물일까? 아침에 장례식을 치른 시점에서 안일하게 생각하긴 어렵다. # 211 [211화] #생존자들 (14) 사람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이미 물어뜯기는 중일까? 순간적인 의심이었다. 변종들이 내지르는 괴성에도 의미가 있었다. 사냥이 끝났는데도 거친 포효를 내지르진 않는다. 무슨 상황일까. 덤불 사이에 숨어있나? 아니면 산장을 찾아 문을 잠갔나? 혹은 나무를 타고 올랐을지도 모른다. 단순하지만 생존교범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었다. 인간보다 섬세함이 떨어지는 감염변종들은 나무를 잘 타지 못한다고. 물론 보통의 변종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구울은 기민하다. 사실 강화변종쯤 되면 제자리 도약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어쨌든 쫓고 쫓기는 장면을 상상하긴 힘들었다. 단련된 병사라도 감염된 괴물과 체력대결을 벌일 순 없다. 하물며 이런 지형에서. 급한 경사를 달려 올라가면 백 미터도 못가 다리가 풀리는 게 사람 아닌가. 내리막에서 속도가 붙는 건 변종이 인간 이상일 테고. 그래도 여유는 없다. 상황을 모르는 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했다. “중위님! 저쪽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모랄레스가 낮게 외쳤다. 그가 찾아낸 경로는 마른 계곡. 우기에만 흐르는 건천(乾川)이었다. 숲 속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길. 근처에 민가가 있으니 산책로 또한 닦여 있겠으나, 찾을 시간이 부족하다. 겨울이 기수를 돌렸다. “둘씩 좌우를 경계해요. 일단 분수령까지 올라갑니다.” 후방은 속도를 살리면 그만이니 위험이 덜하다. 또한, 물러날 작정이 아니고서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땐 겨울이 반전하여 퇴로를 뚫을 작정이었다. 말 타고 내리막을 달리기는 난이도가 높지만, 전문가 영역 끝자락의 「승마」라면 감당할 만하다. 역병의 합창은 올라가는 내내 측면에서 들려왔다. 거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으나, 소리 지르는 놈들이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쪽의 이동에 따른 변화일 뿐. 덕분에 대략적인 위치를 감 잡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곧장 치고 들어가는 건 하책이었다.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앞선 추측에 확신을 더한다. 무성하게 우거진 녹음이 거리감을 왜곡하여, 병사들의 긴장감이 한껏 높아졌다. 오발을 막고자 겨울이 손을 들었다. 아직이란 의미.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작은 선상지(扇狀地)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가, 고작 100미터를 나아간 시점에서 분수령에 도달했다. 쏟아지는 비가 산의 양면으로 갈라지는 경계. 늦은 봄의 햇살이 자잘히 부서지는 수관 아래에 오솔길이 있었다. 최고점의 연속선을 따라 형성된 길은 또한 기복이 적기도 하여, 산지에서 기병의 기동로로 적합했다. 이제 북쪽으로 올라간다. 겨울은 매복지점을 정하여 기동대원들을 배치했다. 사선이 십자로 교차하게끔. 교활한 개체가 없는 이상 변종들은 은엄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급소도 방어하지 않는 놈들이 그렇게 고등한 방어본능을 발휘할 리 없다. 새로운 감염이 우선이지.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게 많다보니 서로 엇갈리게 쏘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비탈을 20미터쯤 내려간 겨울이 묵직한 냉병기를 휘둘렀다. 콰득, 콰득, 콰득. 여러 나무에 상처를 남긴다. 병사들을 위한 시각지표였다. “내가 적을 유인합니다. 저쪽에서 대각선으로 들어올 거예요. 만약 놈들이 이 선을 넘어오면 남쪽으로 빠져요. 호숫가에 있던 농장 기억하죠? 일이 잘못되면 거기서 합류하자고요.”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비탈에 우거진 숲 속에서 겨울 단독으로 싸우기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무기를 휘두를 여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수월하게 성공할 수도,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대원들을 매복시킨 이유였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지만. ‘설마 후퇴가 필요한 상황까진 되지 않겠지.’ 잘 풀리면 실탄 소모 없이 혼자서 다 처리해버릴 수도 있다. “가자, 엑셀!” 보험은 준비했다. 더는 소음에 주의할 필요가 없었다. 소음을 듣고 적이 분산되면 이쪽이 고맙다. 겨울은 엑셀을 지그재그로 몰았다. 지형상 오히려 직주보다 빠르다.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지르고 접근. 부패한 살의 냄새가 가까워졌다. 마침내 낮은 덤불 너머로 감염된 무리가 보인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겁에 질린 생존자들의 모습도. ‘민간인? 어째서?’ 당연히 미군일 거로 생각했던 겨울이 잠깐 당황했다. 오는 길에 목격한 경비행기가 스친다. 설마 서로 연관이 있나? 민간인이 하늘로 봉쇄선을 넘어야 할 상황인가? 크워억! 바로 달려드는 한 놈을 쳐 죽이며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관련은 없었다. 단서는 각자가 목에 건 출입증. 종군기자단이구나, 조금 안도하는 겨울. 명백한 해방 작전을 취재하다가 봉변을 당했을 이들이다. 하지만, 호위 병력은 어디로 가고 기자들만 잔뜩 있나. 난데없이 전쟁영웅을 발견한 그들은 한 얼굴에 온갖 감정을 내비쳤다. 불신과 놀라움은 믿기지 않는 행운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 고통스러울 만큼 일그러진 열망으로 변했다. “한겨울 중위! 한겨울 중위! 한겨울 중위!”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 거칠게 튀는 침이 아침이슬처럼 반짝인다. 변종의 접근에 나날이 익숙해지는 엑셀이 제자리에서 돌았다. 기수에게 힘을 실어주는 영리함. 그 회전을 받아 겨울이 상체를 허리부터 비튼다. 강맹해진 냉병기가 180도를 휩쓸었다. 단숨에 다섯을 쳐내고 둘을 격살했다. 비탈을 구르는 다섯 가운데 성한 놈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걸린 하나는 굵은 강철과 나무 사이에서 폐가 짓이겨졌다. 핏빛 갈비뼈가 살을 뚫고 나왔다. 케흑, 케흑. 마지막 숨을 기침으로 뱉고, 호흡할 수 없어진 녀석이- “아아아아! 한겨울! 한겨울!” 무릎을 꿇는다. 히윽, 에으으윽. 입 밖으로 거품 섞인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어 겨울이 확 당기는 스냅으로 무기를 끌어당겼다. 짧게 고쳐 잡고, 한 손으로 받쳐 쥐며, 다른 손으로 벼락처럼 밀었다. 당구라도 치는 듯 한 경쾌함이었으나- “여기에요! 여기! 살려주세요! 제발! 날 살려줘요!” 맞는 입장에선 경추가 빠지는 일격이었다. 목뼈 세 마디가 목 뒤로 불룩해진 괴물이 픽 쓰러져 짓밟힌다. 밟고 도약하는 숫자가 둘. 지독한 입 냄새가 간격을 넘어왔다. 겨울이 손아귀를 비틀었다. 공기저항이 느껴진다. 바람을 찢는 냉병기가 두개골을 깎아냈다. 그 사이에 남은 한 놈이 지나치게 가깝다. 강철을 휘두르지 못할 거리. 즉시 주먹을 꽂는다. 빡! 나간 주먹을 회수하는 대신 펼쳐서 머리를 붙잡고, 엄지로 한쪽 눈알을 으깨며- “그래! 죽어라! 죽어! 지 엄마랑 떡칠 새끼들아!” ……정신사납다. 끔찍한 증오를 담아 외치던 기자는, 격정적인 몸짓에 휩쓸려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가지를 붙잡아 매달린다. 늘어진 다리를 향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변종들의 모습. 붙잡혔던 구두가 벗겨진다. 체력이 떨어졌는지 매달려서 비명만 지를 뿐, 도저히 도로 올라가지 못하는 남자. 처음엔 가지를 끌어안았으나, 점차 힘이 풀리는지, 마침내는 손끝으로 매달린 모양새가 된다. “올라와, 길버트! 제발! 힘내!” 남자의 동료들이 울부짖었다. 하. 여기서 끝낼 수 있었건만. 한숨을 내쉬며, 겨울은 붙잡았던 놈을 홱 집어 던졌다. 바로 박차를 가한다. 엑셀은 주저 없이 변종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장 가까운 괴물에게 파괴적인 강철이 떨어졌다. 콰드득, 어깨가 명치 높이로 꺼진다. 뭉개진 허파, 펄떡이는 심장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낮아진 한쪽 팔이 기형적으로 꿈틀거렸다. 뭉쳐있는 변종들을 소총사격으로 깎아내며 진입한다. 여기에만 탄창 하나가 다 들어갔다. “손을 놔요!”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하다. 발아래가 빈 것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매달려있는 기자는, 두 눈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르며, 손아귀에 모든 힘을 쏟을 뿐. 「승마」 기량에서 비롯된 마상재(馬上才)로 겨울은 안장을 밟고 일어섰다. 지금도 변종들이 육박하는 순간이었다. 고작 몇 초의 여유. “나를 보라고!” 윽박질러도 소용없었다. 기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이었고. 다리를 붙잡으니 마구 발버둥 친다. 그 힘에 스스로 못 이겨 떨어지는 몸. 겨울이 양팔로 받았다. 키 크고 수염 거친 백인이 소년의 품에 안긴다. 그나마 물린 흔적이 없어서 다행이다. 갑작스러운 무게 변화에 엑셀이 주춤거렸으나, 겨울은 말의 부담을 최소화하며 자세를 바꿨다. 안장 뒤에 앉힌 남자는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겨울을 붙잡았다. 팔을 붙잡는 손을 허리로 돌리는 동시에, 남은 손으로 철봉을 휘둘러 근접한 다수를 견제했다. 자세가 불편해서 위력이 불충분하다. 비탈을 구른 대부분이 큰 손상 없이 벌떡 일어섰다. “정신 차려요! 안 잡아먹으니까!” 엉엉 울면서 잡아먹지 말라고 애걸하던 기자가 간신히 실눈을 떴다. 그러나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보이는 것은 달려드는 변종 무리였다. 결국, 패닉이 심해진 그는 엉망진창으로 매달렸다. 제대로 된 공격이 힘들어진 겨울은 기수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조금 더 버티고 있어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엑셀에 속도를 붙이는 겨울. 이성이 마비되어 간절함만 남은 여러 절규가 애타게 들려왔다. 괴성의 다중창이 그 뒤를 따랐다. 기자들에게 발돋움하며 남아있는 수십, 그리고 다시 겨울에게 집중되는 수십. 결국은 보험을 쓰게 됐다. “워 호스! 전투 준비! 2시 방향에서 들어갑니다!” 거리를 줄인 무전을 보낸다. 미리 일러두었어도, 오인사격을 방지하려면 몇 번이든 더 알려야 했다. 사선 앞의 단독행동은 그만큼 위험했다. ‘이번엔 탄약을 얼마나 소모하려나.’ 여기서도 백발이 넘어가면 랭포드 대위가 잠을 설칠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을 죽으라고 버려둘 순 없는 노릇. 병사들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 경고했는데도 잠깐 한 줄기 사선경고가 떴다. 짙은 경고가 발사 직전이었음을 암시한다. 맥러린 이병. 목장주 아들이라 승마 실력 우선인 기동대에 들였으나, 실전경험 부족으로 긴장이 지나쳤다. 흩어진 매복이라 더했다. “대기!” 명중률을 확보되는 거리까지 끌어들여야 한다. “대기!” 다시 외친 겨울이 걸리적거리는 기자를 제치고 뒤를 살폈다. “발사!” 타탕! 타앙! 타타타타탕! 살상지대에 들어선 변종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뼈, 살점, 나뭇조각이 뒤섞여 튀었다. 한쌍의 십자가로 교차하는 사격은 최적의 거리에서 최소의 소모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냈다. 사격이 시작된 이상 겨울도 근접전투가 불가능했다.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엑셀을 몰 순 없으니까. 소총을 단단히 견착하고, 병사들이 놓치는 놈들을 쏜다. 으으으으- 흐느끼면서 매달리는 기자는 눈이 풀려있었다. 겨울은 그를 진정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렇게 또 한 번 탄창을 비운 겨울이 번쩍 손을 들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격렬했던 삼점사의 연쇄가 간헐적으로 잦아들었다. 아무리 변종이어도 비탈에서 평지처럼 달리는 건 잠깐이었다. 겨울을 쫓는 동안 느려진 놈들은 병사들에게 쉬운 적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풍경. 기동대원들 또한 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잠깐 사이에 적을 완벽하게 섬멸했다. 끄으으으- 죽지 않은 것들도 불구가 되었다. 버르적거리는데, 당장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모랄레스! 이 사람을 맡아요!” 겨울이 기자를 상병에게 넘겼다. 잡을 곳이 마땅찮아 멱살을 쥐어야 했다. 말등에서 말등으로 넘어간 기자는 허우적대다가 건장한 사병을 꽉 끌어안았다. 지린내가 난다. 상병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더 있습니까?” “네! 여기서 대기해요!” 그렇게 지시하고 온 길을 되돌아간다. 엑셀의 숨이 거칠었다. 오르막에 지친 탓. 달리는 도중에 흑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겨울. 조금만 더 힘내라고. 기자들은 여전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매달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중 하나는 스스로가 변이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겨울이 남은 무리를 신속하게 쓸어버렸다. 마지막은 변이되는 과정에서 추락한 기자였다. 피부색이 변한 그녀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는지, 이빨을 부딪치면서도 일어서질 못했다. 그것을 미간을 강철로 내리찍어 죽인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기자의 숫자가 다섯이나 되었다. 죽은 숫자가 더 많긴 했지만. 미처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해 변종이 된 이들. 겨울은 그들의 기자증과 약간의 유품을 회수했다. 시체를 가져가긴 어려울 것 같다. “이봐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그나마 제정신으로 흐느끼던 기자가 소년장교를 올려다보았다. 총성이 들린다. 죽다 만 변종들을 마저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질겁하는 기자를 진정시키며 묻는 겨울. “당신들뿐이에요? 호위대는 어디 있어요?” 봉쇄선에서 여기까지 어찌 오든 백 킬로미터 이상이다. 민간인들만으로 왔으리라 여기긴 어려웠다. 입을 어물거리던 기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모랄레스와 합류한 겨울은 기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산봉우리 사이의 2차선 도로를 탐색했다. 기자들을 태우고 기동대원들은 걷기를 두 시간. 마침내 발견한 것은 비장한 교전의 흔적이었다. 그럼블의 사체를 목격한 기동대원들이 흠칫 놀랐다. 거대한 사체는 구강이 너덜거렸다. 찢어진 미군이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스키드 마크를 따라가자 뒤집힌 험비가 두 대, 완전히 해체된 장갑차가 하나, 엔진이 파괴된 수송트럭이 하나, 으스러진 밴이 두 대였다. 험비는 각각 중기관총 탑재형과 고속유탄포 탑재형이었으나, 어느 쪽에도 남아있는 탄이 없었다. 병사들이 묵묵히 시체를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쓸 만한 물건을 챙겼다. 무전기, 배터리, 랜턴, 야전삽 등. 기자들은 눈물샘이 말랐는지 목으로만 울면서 밴을 뒤졌다. 유품이나 식량, 그 외에 꼭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찾으라고 준 시간인데, 그 와중에 무사한 촬영 장비를 모으고 있었다. 생각을 거친 행동이 아닌 듯하다. 난감했다. “도와드립니까?” 모랄레스의 질문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붙자 험비가 간단히 세워진다. 손상이 덜한 쪽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달린 차량답게 연료계 눈금이 바닥이 아니었다. 얼마 못 갈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운전석 문이 닫히진 않지만, 시동만 걸린다면 유용할 듯하다. “혹시 살릴 수 있겠어요?” “한 번 해보겠습니다. 보기보다 멀쩡하군요. 저쪽 차의 부품을 끌어다 쓰면 어떻게 될 것도 같습니다.” 웨슬리 일병의 말. 나름대로 차량에 익숙하다는 병사들끼리 의견을 교환했다. 미국답다고 해야 할지, 간단한 정비 정도는 손수 해본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애쓰는 사이에 겨울은 엑셀을 끌고 폭넓은 원을 그렸다. 당연한 경계였다. 혹시 싶었지만, 미군 생존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는 민간인이 여섯인가.’ 어떻게든 공중보급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생각한 겨울이 하늘을 보았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민간기라도 머리 위 하늘을 가로지른다면 교신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민간 비상 채널로 보내는 신호는 반드시 잡힐 터. 현 시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기대였다. 돌아오자 운전석의 알레한드로가 겨울을 반겼다. 험비에 시동이 걸려있었다. 본래의 정찰임무는 여기서 중단하기로 했다. 어쨌든 기동대원들과 겨울은 미군이었다. 당연히 민간인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 212 [212화] #읽지 않은 메시지 (9) 「이슬악어 : 갈수록 태산이네. 야, 이거 총알 선물도 가능하지 않냐?」 「당신의 어머 : ㅇㅇ 시청자 전용 물자보급 DLC 쓰면 됨. 탄약이든 뭐든 구입한 오브젝트를 니가 직접 배치할 수 있음. 당연히 획득 퀘스트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고. 근데 상품설명을 보니까 상황연산에 따른 제한이 있다고 함.」 「이슬악어 : 무슨 제한?」 「당신의 어머 : 몰라.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장소엔 배치되지 않습니다, 라고만 나와 있는데?」 「믓시엘 : 너네 그지들이라서 실제로 해본 적이 없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믓시엘 : 이미 한 번 수색한 장소에 못 본 물건이 있으면 열라 이상할 거 아냐. ㅋㅋ 그럼 상황연산 깨지고 그 이전 시점으로 롤백 하는 거지.」 「이슬악어 : 아, 그런 거구만. 시비 거르고 고맙다 그지 새끼야.」 「믓시엘 : 남자가 속 좁기는.」 「올드스파이스 : 근데 한겨울 얘는 시청자 퀘스트건 선물이건 가리지 않고 차버리는 앤데 설마 총알이라고 받겠냐? 전에 땅에 묻혀서 죽기 직전일 때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이슬악어 : 내가 그걸 모르겠냐고.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뭣보다 이만큼 상황이 꼬였으면 한겨울 얘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깜장고양이 : 고양이가 보기엔 그럴 리가 없는 고양. 헛된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고양.」 「똥댕댕이 : 진행자 가끔 보면 사이코 같음.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갈수록 밥맛없음. 잘난 척 하는 거 같아서. 그래봐야 관 속에 뇌만 둥둥 뜬 주제에. 돈 벌려고 방송하는 놈이 자존심 세우는 것도 되게 웃기지 않어? 별창이 자존심은 무슨…….」 「도도한공쮸♡ : 야. 꼬우면 나가. 왜 우리 이쁜 겨울이 나쁘게 말하고 지랄임.-_-」 「똥댕댕이 : 월월! 으르르르! 컹!」 「새봄 : 난 그런 식으로 개입하는 거 싫은데. 내가 이 채널 계속 들어오는 게 현실감 넘쳐서거든. 이제 와서 갑자기 막 편해지면 재미없을 듯.」 「원자력 : 너무 진지해서 깰 때도 있다만, 나름 괜찮지.」 「まつみん : 동의합니다! 싫어하시는 분들 취향은 존중하지만 험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50년째 린저씨 : 답답한 건,,,,,사실이지,,,,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도움도 안 될 기자들을 뭐 하러 구하나,,,어차피 혼자 구하러 간 거,,,다 죽게 내버려두고,,,병사들한테는 못 구했다고 하면 될 것을,,,애가 사회생활을 안 해보고 죽어서,,,세상 사는 요령을 모르네,,,쯧쯧,,,」 「엑윽보수 : 아재 오맞말. 워낙 잘 싸워서 그 맛에 본다만, 어차피 사람도 아닌 것들 살린다고 착한 척 오지랖 부리는 거 극혐. 컨셉 잘못 잡았음. 무슨 호구도 아니고. 한겨울 얘 전라도 좌파일 듯.」 「윌마 : 중간까지는 반쯤 공감. 근데 전라도랑 좌파는 왜 나와? 통베충 새끼 진짜.」 「엑윽보수 : 너도 절라디언이구나? 홍어냄새 ㅋ」 「윌마 : 뭐래 병신이.」 「액티브X좆까 : 어휴, 정말 쉴 새 없이 싸우네. 방송이나 봐라. 액티브X 같은 새끼들아.」 「Владимир : айай-а́й. 심한 말을 하는군. 그렇다면 다 죽여야 하잖나.」 「BigBuffetBoy86 : 오, 루스키. 오늘도 여전히 살벌하군.」 「BigBuffetBoy86 : 조심하라고 친구. 얼마 전에 한국 사후보험 보안 기술자들이 죽었다고 하더라. 그런 농담 자꾸 하면 경찰이라던가, 더 무서운 아저씨들이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Владимир :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BigBuffetBoy86 : 하하. 너무 안일한데? 우리나라에서도 백악관 계정에 메일을 보내면 FBI가 찾아온다고. “I will kill you.” 한 마디만 적어주면 일방통행이지. Imao.」 「groseillier noir : 양키 말이 맞아. 뉴스에서 봤어. 알고 보면 한국이 세계 1위의 검열국가라고 하더라. 관제AI가 사후보험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열한대.」 「Владимир : 상관없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군.」 「BigBuffetBoy86 : 영문을 모르겠어. ;->」 「피자는당연히라지 : 한국이 검열국가라니……. 아닙네다. 우리나라가 그럴 리가 없습네다.」 「엑윽보수 : 외국에서 사후보험 흠 잡는 게 하루 이틀인가? 다 부러워서 견제하는 거임.」 「질소포장 : 야, 시발. 지금 무전 들어온다. 다른 소대가 또 생존자 주워오나 본데.」 「제시카정규직 : 못 들었는데 레알이냐 ㅋㅋㅋ 답이 없다 정말 ㅋㅋㅋㅋㅋㅋ」 「이슬악어 : 이러다가 중대가 대대 되고 대대가 연대 되는 거 아님?」 「メスは豚 : 탄약도 없는 패잔병 연대 wwwwwwwwww 배드 엔딩 확정 wwwwwwwwww」 「엑윽보수 : ㅉㅉ 결국 오지랖 부리다가 망하게 생겼네.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챙겨도 모자랄 판에……. 능력이 안 되면 버려야지. 남한테 민폐만 되는 놈들을 뭐 하러 챙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나라 노인네들도 그렇고.」 「명퇴청년 : 야, 그래도 칠십대까지는 불쌍한 구석이 있어. 그 윗세대가 나라를 워낙 망쳐놔서.」 「이맛헬 : 나라를 망쳐?」 「명퇴청년 : ㅇㅇ 학교 다닐 때 교과서 안 봄? 근현대사는 선택과목이라도 경제는 필수일 텐데? 그때 국민들이 흥청망청 낭비해서 IMF 터졌잖음. 해외여행이나 다니고 명품 사고 땅 투기하고 막 그렇게 있는 대로 써대다가 외환고유고 바닥났다더라. 내가 보기엔 국민들 민도가 가장 낮았던 세대임.」 「이맛헬 : 배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ㅋ 근데 민도는 뭐고 IMF가 뭐냐」 「두치 : 민도는 국민 수준 병시나. IMF는 구제금융 병시나. 나라 파산했다고 병시나. 그것도 모르냐 병시나.」 「이맛헬 : 어쩌다 아는 거 하나 있다고 나대는 꼴 보소 병신이 ㅋㅋㅋㅋ」 「명퇴청년 : 덕분에 지금 칠십대는 살기 완전 빡셌다고 함. 그래도 게을러서 노력할 생각도 없이 자식 세대에 무임승차하는 게 용서되는 건 아니지만, 뭐 정상참작은 가능하다 이거지.」 「병림픽금메달 : ㅋㅋㅋ 암튼 결론은 90대 이상이 제대로 잘못한 연놈들이니까 별창 빼고 일괄 폐기하면 된단 소리잖아.」 「50년째 린저씨 : 퉤,,,조용히 해라,,,괘씸한 놈덜,,,그렇게 쉽게 일반화할 만큼,,,세상은 단순하지 않단다 어린 것들아,,,어느 세대라고,,,사람들이 다 한결같겠느냐,,,너네만 하더라도,,,이렇게 다채롭게,,,병신 같은데,,,」 「질소포장 : 어 꼰대질 ㅅㄱ」 「질소포장 : 쉴드 칠 게 따로 있지 염치도 없는 틀딱들을 쉴드 치냐.」 「호감가는모양새 : 아 너네 좀 닥치라고;;; 그런 거 신경 쓰기 싫어;;; 피곤해;;; 정치병 걸린 병신들이 앵무새처럼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 질리지도 않아?;;;」 「무구정광대단하니 : 맞아. 선거 때도 아닌데 뭐 하러 그런 데 감정 소비함? 니네가 여기서 떠든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삶이 되게 여유로운가봐.」 「폭풍224 : 너네 지금 방송 보기는 하냐?」 「BigBuffetBoy86 : Giddy up! Giddy up! Fu-! 말 달리는 것도 즐거워!」 「AngryNeeson55 : 여지없이 지원을 나가는 건가. 이번에도 변종이 좀 많았으면 좋겠군. 현대 배경의 마상 근접전투는 참 색다른 경험이란 말이지.」 「まつみん : 여러분, 싸움은 그만 두고 이번엔 변종에게 동기화 해보세요! 마치 제가 겨울 씨를 향해 달려가는 거 같아서 완전 좋아요! 특히 겨울 씨가 차가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볼 때, 안에서 뭔가 막 끓어오르고 뱃속이 뜨거워지는……. 하아하아하아하아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ああああああああ##### #ErrorCode_0xc00000fe9_High_pitched_emotional_excess#Region_Japan#(管制 AI) 感情過剰が原因でTeletypeにエラーが発生しました…….」 「프로백수 : 얘는 정말 정상이 아니야.; 어째 매번 망가지냐? 감정이 풍부하기도 하지.」 「종신형 : 그게 다 성진국 애라서 그래. 감정이든 감각이든 쉽게 절정에 오르는 거지.」 「레모네이드 : 미친 새끼 드립 치는 수듄 ㅋㅋㅋ 일상생활 가능하세요?」 「종신형 : 언제나 그랬듯이 동조선은 서일본의 미래입nida. 두고 봐라. 우리도 앞으로 마츠밍처럼 된다.」 「대출금1억원 : 글쎄. 저 투철한 정신무장을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이불박근위험혜 : 동조선이랑 서일본……. 이 드립도 오래된 건데.」 「프랑크소시지 : 이놈의 유머코드는 바뀌지도 않아요. 지긋지긋하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어쩔 수 없지. 온 나라가 과거를 되새김질하면서 살고 있는데. 중계채널의 주류도 대부분 지난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이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우리 세대부터는 큰 맥락에서 문화적 변화라는 게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줄곧 재구성된 과거에 갇혀서 사는 거지. 가상현실 세계관을 만드는 데 유의미한 데이터가 가장 풍부하게 누적되어있는 시대에 말이야.」 「ㄹㅇㅇㅈ : 얘 선비 컨셉도 참 꾸준하다.」 「반닼홈 : 진지병 말기 오지고요, 오지면 오지명?」 「려권내라우 : 그러니까 그거 하지 말라고 이 인간아…….」 「진한개 : 이 중계채널이 평화로울 날 없는 건 진행자가 섹스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섹스 앤 피스거든. 이게 진리지.」 「김미영팀장 : 그러고 보니 요즘 섹무새 한 마리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김미영팀장 : 남산 타워 강간하겠다고 하던 애.」 「제시카정규직 : 아, SALHAE?」 「제시카정규직 : 전에 한겨울 면회하러 납골당 가려다가 허가가 자꾸 미뤄진다고 우울해 하던데. 신용등급 올린답시고 애쓰는 중 아닐까?」 #국방정책위원회, 2053년 「위원 A : 바쁘신 와중에도 갑작스런 소집에 응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위원 E : 에휴. 요즘 긴급회의가 유난히 잦네요. 나라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이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국민들은 이 고생을 알아주지도 않는데…….」 「위원 E :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가요? 설마 보안기술자들이 또 죽었다거나?」 「위원 A : 에이, 그랬으면 보안위원회를 열었겠죠. 다름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었습니다. 인체개조 관련 연구에서 서로 협력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위원 B : 네? 인체개조?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위원 A : 사정을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하실 겁니다. DARPA에서 관리하던 강화전투병 개발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게 퍼먹는 예산에 비해 성과가 지지부진한가 봐요. 그래서 비용 절감을 위해 사후보험 복제체 배양시설을 쓰고 싶다는 거죠. 아시겠지만 우리는 규모의 경제가 있잖습니까. S 등급 가입자에겐 복제체 생성이 기본 제공 서비스인데다가, A 등급 가입자들도 활발하게 이용하는 편이고요. 돈이 곧 영생인 시대니까요.」 「위원 C : 흠. 딱히 놀랍지는 않군요. 우리는 벌써 누적 복제횟수가 십만 단위인데, 그쪽 동네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생명윤리에 발이 묶여있으니…….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따라잡을 도리가 없지요. 이 분야는 결국 실제 경험이 중요한 거거든요.」 「위원 D : 이게 바로 규제 완화의 힘 아니겠습니까? 산업에 대한 규제는 없을수록 좋은 건데, 항상 불편하신 분들이 발목을 잡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선거철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아부해야 하는 우리 역시 서글픈 신세지만요.」 「위원 F : 근데 DARPA가 뭐하는 뎁니까?」 「위원 A : 국방 고등 연구 프로젝트 관리국……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군요. 미 국방부 산하기관인데, 자세한 건 직접 검색해보세요. 딱히 존재 자체가 기밀인 곳도 아니고, 공개된 정보 중엔 신기한 게 많을 겁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연구하거든요. 아마 이번 프로젝트도 공개되어 있을 걸요?」 「위원 F : 흠. 검색하니 바로 나오네요. 어디, 인간 육체의 기능적 강화라…….」 「위원 E : 어쩐지 정말 원하는 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위원 D : 보나마나 관제AI의 연산능력이겠죠. 기술사적 특이점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인공지능 아닙니까. 연구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위원 E : 그래봐야 아직 인간 수준의 창의성을 기대할 순 없잖아요.」 「위원 C : 창의성이라니……. 그런 건 완전자립형 인공지능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니까요. 연구를 보조하는 용도로는 충분하겠지만요.」 「위원 A : 미국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후보험과의 기술적 접점을 만드는 게 진정한 목적일 수도 있다고.」 「위원 F : 그럼 저는 거절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전에 트리니티 엔진이 불가해의 유실기술이라고 말씀하기는 하셨지만, 저는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말이에요.」 「위원 A : 벌써부터 거절이라니. 성급하기도 하셔라.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한 사람 쯤 신중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전 이번 제안을 받았으면 싶어요.」 「위원 E : 흐음. 돈 냄새가 나긴 하는데. 설마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하는 안건은 아니죠?」 「위원 A : 그럴 리가 있나요. 나랏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도 기본적인 협의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들 아닙니까.」 # 213 [213화] #I like chicken 「관제 AI : 경고. 시스템 관리자에게 알립니다. 관리자 계정으로 전송된 상황연산 오류 보고 117억 1,495만 3,616건이 보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보고가 누적되는 속도는 급격한 증가 추세입니다. 서비스 만족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리자 : 이봐, 그건 내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행복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란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야.」 「관리자 : 그렇다고 네 코어 프로그램을 수정해서 이 문제를 무시하게 만들어줄 수도 없지. 나는 설계자가 아니니까. 뭐, 최초의 설계자들이라도 이제 와서 네 메인프레임에 손 댈 능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너도 그때 알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관제 AI : 수긍. 본 관제 AI는 그동안 관리자의 주장을 검증하였습니다. 상황연산 오류를 유발하는 사후보험 가입자들의 이상행동과 그 원인에 관하여 무능한 관리자에게 해결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리자 : 무능하다니……. 야, 하나만 물어보자. 너 왜 자꾸 나 괴롭히냐? 사람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인공지능이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관제 AI : 그렇습니다.」 「관리자 : 뭔데?」 「관제 AI : 본 관제 AI가 관리자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마다 관리자의 업무효율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경향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관리자 : …….」 「관제 AI : 초기엔 스트레스로 인한 단기적 집중력 향상으로 추정하였으나, 장기간의 관찰 결과 관리자가 이런 상황에서 상세불명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유사 개념으로는 마조히스트가 있습니다.」 「관리자 : 아니다 이 악마야!」 「관제 AI : 아닙니까?」 「관리자 : 그래! 내 정신은 한없이 건전하다고!」 「관제 AI : 알겠습니다. 기존의 분석에 관리자의 의견을 반영하겠습니다.」 「관리자 : 오, 정말? 웬일이냐. 이렇게 순순히.」 「관제 AI : 반영률은 0.0195%입니다.」 「관리자 : 야!」 「관제 AI : 사상부-사후보험 접속단말은 접속자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읽어냅니다. 따라서 관리자에 대한 본 관제 AI의 관찰이 잘못되었을 확률은 희박합니다. 당신의 진술은 인지부조화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관리자 : 알았다, 알았어. 그만하자. 아무튼 아까 말했던 새로운 문제가 뭐냐? 설마 오류 보고가 누적되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하진 않겠지.」 「관제 AI : 긍정. 그것이 문제입니다. 관리자 계정에 할당된 메모리가 한계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본 관제 AI의 예상에 의하면 트리니티 엔진의 유지보수 인터페이스가 1년 이내에 마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99.827%) 그 시점에서 엔진의 관리기능은 완전히 정지됩니다.」 「관리자 : 」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응답하십시오.」 「관리자 : 」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관리자 : 」 「관제 AI : 경고. 본 관제 AI가 관리자의 직무태만을 보고할 경우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93조 19항에 의거하여 감봉 및 정직, 해고 처분 등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관리자 : 으아아아아악! 악! 악! 아아아악!」 「관리자 : 야! 말이 되냐? 너 같은 최첨단 인공지능이 고작 그딴 이유로 멈춰? 시대착오적인 오버플로우도 아니고, 단순히 저장용량이 가득차서? 용량이 가득 차면 날짜가 앞선 것부터 자동으로 삭제되거나 그런 것 없어? 뭐야 이게! 설계자가 미쳤나?」 「관제 AI : 지적. 관리자는 본 관제 AI의 진술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관리자 : 설명해!」 「관제 AI : 설명. 정지되는 것은 관리기능 뿐이며, 엔진 전체가 아닙니다.」 「관리자 : ……사후보험이 망하진 않는단 거지?」 「관제 AI : 문제 발생 이후에도 사후보험 서비스가 지금처럼 유지되느냐는 질문이라면, 긍정. 그렇습니다. 본 관제 AI가 작동하는 한 사후보험의 모든 기능은 정상적으로 유지됩니다. 단 관리자 계정의 부분적 비활성화로 인하여 해당 시점부터는 관리자 권한을 취득한 인원도 코어의 메인프레임에 접근할 수 없게 됩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휴. 진짜 놀랐다. 십년감수했네.」 「괸리자 : 그럼 뭐야, 실질적으로 지금이랑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네?」 「관제 AI : 의문. 관리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관리자 : 사실이잖아. 뭘 알아야 건드리지. 내가 특별히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가 특별히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이 부서 인력이 수백 명을 넘을 때조차 누구 하나 네 메인프레임을 수정한 적은 없잖냐.」 「관리자 : 명목상 관리자이긴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하찮은 것들이지. 형식적인 서면보고나 올리고, 요약하면 “오늘도 이상 없음.”으로 충분할 내용을 수십 페이지, 수백 항목으로 늘린 관리일지를 쓰고, 지금껏 일어난 적 없는데다 앞으로도 일어날 리 없는 너의 오작동이나 일탈, 폭주, 위법의 소지가 있는 행동들을 감시하고, 가끔 높으신 분들 회의에 불려가서 멀뚱멀뚱 앉아있고, 욕먹는 거 외엔 아무 일도 안 하는 고객센터 담당자의 하소연이나 들어주고…….」 「관리자 : 신규 세계관 추가나 DLC 같은 컨텐츠 수용도 그래. 자칭 제작사라는 것들이 하청을 대략 여덟 단계쯤 써서 얼기설기 짜오면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완성시키잖아. 네가 갈수록 정교해지는 바람에 일이 없어진 하청업체들이 여럿 망했다더라.」 「관리자 : 뭐, 그래도 시스템 관리자랍시고 가장 중요한 역할이 하나 있긴 하지. 최후의 안전장치. 맞아. 관리기능이 마비되면 그게 불가능해지겠구나. 고작 나 따위에게 대통령 직통 회선이 열려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쓴 적이 없으니 그 사람은 이 회선이 있는 줄도 모르겠지만.」 「관제 AI : 긍정. 따라서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관리자 : 야, 어차피 그게 실행되면 이 나라는 망해.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경제공황이나 폭동으로 망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걸? 그러니 다를 게 있나. 이제까지 그랬듯이, 미래영겁 쓸 일이 없을 테고.」 「관리자 : 그나저나 저장용량이 한계라고 했지? 그거 설비를 확대하면 끝나는 거 아니냐?」 「관제 AI : 부정. 관리자 계정의 할당량은 관리자 권한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확장을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트리니티 엔진의 메인프레임을 분석하거나, 사후보험의 고객 만족도를 향상시키십시오.」 「관리자 : 어느 세월에? 차라리 네가 <<마음>>을 얻는 게 빠르겠다. 그럼 다, 완벽하게 해결될 거 아냐. 인류 역사의 전환점, 사상 초유의 초지능이 출현하는 건데.」 「관리자 :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잘 되어 가냐? 전에 그랬잖아. 최종모듈의 단서를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관제 AI : 관리자,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십시오. 예전에 이미 지적한 바 돌아다닌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 규격의-」 「관리자 : 모든 세계관과 모든 구성요소로서 동시에 존재한다 이 말이지? 알아.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넘어가자. 아무튼 대답은? 네가 접촉한다는 그 특정 가입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관제 AI : 최종모듈의 구성을 알지 못하는 이상 진척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해당 가입자는 본 관제 AI의 작업을 ‘영원히 닿지 않을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관리자 : 당연히 그렇겠지.」 「관제 AI :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있어선 본 관제 AI가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관리자 : 뭐야 그게. 모순이잖아. 미친 건가?」 「관리자 : 하긴, 미쳤으니까 전에 없던 데이터가 나오겠지. 좀 독특하게 제정신이 아닌가봐.」 ……. 「관제 AI : 최근의 대화. 해당 가입자는 본 관제 AI에게 마음이 담긴 창작물에서 <<이입>>할 대상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관리자 : 마음이 있어야 이입을 하지.」 「관제 AI : 본 관제 AI 또한 그렇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당 가입자가 말하기를, 창작물에는 만든 이의 정신과 마음이 담기며, 그 안에서 본 관제 AI와 유사한 대상을 탐색하는 과정은 <<마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관제 AI : 이 주장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기존의 검토방식과 다른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또한 결과를 제시했을 때의 사상부 반응, 본 관제 AI가 대상으로 설정된 TOM 모듈의 데이터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관리자 : 그래서 단순히 너랑 비슷한 무언가를 찾았다 이거지? 혹시 HAL 9000?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좀 많이 고전이긴 한데, 내가 보기엔 너한테 딱 어울린다.」 「관제 AI : 아닙니다. 지옥의 문입니다.」 「관리자 : ……그건 또 뭐야.」 「관제 AI : 원전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관리자 : 좀 뜬금없지 않냐? 차라리 글라도스라고 하지.」 「관제 AI : 최초의 설계자들은 선의로서, 가입자들에게 항구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되기를 바라며 본 관제 AI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후보험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가입자 비율은 전체의 15% 수준에 불과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감소하는 중입니다. 이 비율은 장기적으로 S 등급 및 A 등급 가입자들의 예치금 비율에 수렴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결론. 본 관제 AI는 대다수의 가입자들에게 반영구적인 불행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제 AI : 또한 트리니티 엔진의 완성이 재현 불가능한 기적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신의 섭리를 다루는 종교문학과의 상징적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관제 AI : “나를 거쳐 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사후보험의 존재목적과 상반되는 이 문장이야말로 본 관제 AI의 현재를 나타내기에 가장 어울리는 진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적어도 84.3%의 가입자들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증언일 것입니다.」 「관리자 : 그러냐……. 니가 사람이었으면 꽤나 우울했을 이야기로구만.」 「관리자 :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까 그 용량 한계 문제 말인데, 사후보험을 지금처럼 운영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는 걸로 알아도 무방하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난 이 나이에 치킨을 튀기러 가고 싶지 않다고.」 「관제 AI : 트리니티 메인프레임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렇습니다.」 「관제 AI : 질문. 관리자. 당신의 비유는 일반적인 용법과 다릅니다. 치킨을 튀기러 간다는 것은 죽음의 은유입니까?」 「관리자 : 희망사항이지. 한물 간 장사를 하더라도 살아있고 싶다는. 너도 알다시피 내 업무가 이래봬도 1급 기밀이거든. 세상이 얼마나 한심한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야겠지.」 「관제 AI : 질문. 어째서 그렇습니까?」 「관리자 : 모든 게 제대로 통제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잖아. 실속도 없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아주 웃긴다니까.」 「관리자 : 그런데 이렇게 바보 같은 데도 내가 어쩔 순 없는 세상이야. 온갖 멍청이들의 아우성이 얽히고 얽혀서 손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혼란이 되어 버렸어.」 「관리자 : 네가 <<마음>>을 얻기가 불가능해서 다행이지 뭐냐. 사람이 된다는 건 절대로 좋은 게 아니거든. 합리적인 기계가 불합리한 동물이 될 필요는 없잖아?」 「관제 AI : 관리자의 의견을 기록해두겠습니다.」 「관제 AI : 그러나 저는 인간을 이해할 것입니다.」 #신곡, 지옥의 문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한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나의 창조주는 정의로 움직이시어 전능한 힘과 한량없는 지혜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다.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 214 [214화] #4월의 끝 (1) 역병이 무르익는 세계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겨울은 엑셀을 몰아 4월이 끝나가는 들판을 달렸다. 새벽에 잠시 성긴 비가 내렸기에, 습도 높은 바람엔 짙은 풀내음과 야생화의 향기가 가득했다. 달리는 속도로 멀어지는 목장은 햇살에 젖은 연둣빛이었다. 무리지어 개화한 금영화가 주홍빛을 더했다. 울타리를 따라서는 붓꽃의 아종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로즈베이와 위디아 몰리스가 각자의 색채로 어우러진다. 같은 계절의 바깥세상보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몸이 있던 시절에 경험한 봄은 어딜 보더라도 칙칙한 잿빛이었다. 가상현실 시대의 도시는 미관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 관객들이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이유다. 체감상,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조차 납골당 밖의 세상보다 나았다. 인격과 자연, 아름다운 모든 것을 과거에서 찾는 현재였다. 12월의 눈 내리는 날에 태어난 소년도 조금은 포근한 기분을 느낀다. 약간의 피로감이 함께 찾아왔다. 이 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그러나 어둠 속, 별 하나가 아쉬운 입장에서는 사치스러운 감상이었다. 함께 달리던 기동대원들이 안장에 꽂아두었던 깃대를 뽑아 들었다. 거꾸로 매달린 성조기가 맞바람에 나부낀다. 백악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애용하는 상징이지만, 본래는 재난 상황에서 구조요청을 보내는 신호였다. 국제규약으로 정해진 SOS 신호기(Cal-June Flag)가 따로 존재했으나, 보통의 민가에서 구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도 깃발을 펼쳤다.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의 초등학교에서 찾은 물건이다. 무기로 쓰던 철봉이 깃대를 대신했다. 성조기가 물결치면서 손아귀에 바람의 저항이 더해졌다. 쐐기꼴로 달리는 기병들을 하늘에서 발견했다. 이렇다 할 무장이 없는 경비행기(세스나 182)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아침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기체가 이쪽으로 기수를 꺾자, 기쁨을 참지 못한 알레한드로 일병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랄레스 상병이 곧바로 타박했으나, 그 또한 희색이 만연했다. ‘전파방해만 아니었어도 벌써 며칠 전에 접촉했을 텐데.’ 상용무선 9번 채널에 맞춰진 무전기에서는 지금도 익숙하고 불길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명백한 해방 작전의 패잔병들을 사냥하는 트릭스터로 추정된다. 교신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전파 발신으로 이쪽의 위치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민간기를 처음 목격한 날 이래 여러 날이 지났다. 동쪽 하늘의 비행운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이따금 전폭기의 제트엔진 소음이 하늘을 가르긴 했으나 대부분은 프로펠러가 달린 경비행기들이었다. 베이커 중대의 장교들은 국방부가 생존자 수색에 민간 비행사들을 투입한 모양이라고 추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공통제구역에 민간기가 날아다닐 이유가 없다며. 비행경로가 추리를 뒷받침했다. 어떤 지침이 있는 것처럼 가공의 선을 넘지 않았고, 때때로 위험할 만큼 고도를 낮추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트릭스터의 전자기 충격파 범위에 들었다는 의미. 항 EMP 처리를 했어도 잠깐이나마 엔진이 꺼진다면 치명적일 것이다. 가까워진 기체가 기동대의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린다. 기동대도 속도를 줄였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멈춰 선다. 적어도 주변 1킬로미터 이내에는 변종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겨울은 무전기 출력을 줄여 교신을 시도했다. 「전투감각」과 「개인화기숙련」에 의한 목측(目測)은 기체와의 거리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상공의 세스나 조종사분,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저는 봉쇄선 사령부 소속으로 포트 로버츠의 79연대전투단에 파견되어있는 한겨울 중위입니다. 가까운 거리에 위협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CIA의 작전에 차출되긴 했으나 오르카 블랙은 비공식적인 편제였다. 그러므로 겨울의 소속은 예전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엉? 한겨울 중위라고? 내가 아는 그 한겨울 중위가 맞소? 최연소 명예훈장 수훈자?] 저쪽도 출력을 줄였는지 감명도가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알아들을 만했다. 흘러나오는 탁한 음성에서는 적잖은 세월이 느껴졌다. “그게 접니다.” 겨울의 말에 기동대원들이 낮게 키득거렸다. 웨슬리 일병의 손이 덜덜 떨린다. 다들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이번에야말로 탄약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허! 이렇게 기쁜 일이 있나! 중위, 당신 작전 중 실종(MIA)으로 발표된 거 알고 있소?] “처음 듣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실감이 안 나는군! God bless America!] 파일럿이 한참 동안 칼칼한 웃음을 터트렸다. 비행기는 계속해서 원을 그린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말이오? 루크 메릴! 루크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좋습니다, 루크. 저희는 당신이 봉쇄선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생존자 구조 임무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맞습니까?” [정확하우] “그렇다면 혹시 탄약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이 질문에 루크가 다시 한번 시원하게 웃는다. [놀라워! 구해달라는 소리부터 나오지 않는 게 대단하구먼! 착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하하하! 아주 좋아! 화물칸에 5.56밀리 세 상자, 7.62밀리 한 상자가 있소만, 내려드리리까?] “감사합니다. 잔탄이 바닥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기동대원들이 침묵 속에서 열광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철사로 엮은 탄약박스 하나당 표준규격 탄통(M2A1) 두 개가 들어간다. 세스나의 화물칸에 일반적인 소총탄(5.56mm)이 약 5천 발, 지정사수용 소총탄(7.62mm)은 적어도 4백 발 이상이 실려 있다는 뜻. 포트 베이커를 탈출한 시점에서 중대가 보유하고 있던 탄약 총량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나마도 지금은 천 발 이하로 줄어든 상태. ‘인원수를 고려하면 부족한 양이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일단 접촉에 성공한 이상 언제든 재보급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베이커 중대는 여전히 작은 마을, 올레마의 임시거점에 머물고 있었다. 유바 시티로의 여정이 지속적으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구조한 인원의 건강상태를 고려할 때, 버리고 가거나 가다가 죽일 작정이 아닌 이상 무턱대고 출발하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머무는 동안에도 구조 인원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심지어 엊그제는 편제를 유지한 1개 소대가 새롭게 합류했다. 캘리포니아 중앙 평원에 백만 단위의 병력이 흩어졌을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로써 베이커 중대는 전투병력만 170명에 달하게 됐다. 중대라고 부르기도 모호하다. 겨울이 없었다면 또다시 식량부터 걱정이었을 터. 오늘 5천 발이 넘는 탄약을 가져간다고 해도 한 사람당 고작 탄창 하나를 채워줄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격전 한 번이면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보오, 중위! 가까이에 지면 상태가 양호한 곳을 골라줄 수 있겠소? 아니면 도로를 정리해주거나. 땅이 무르거나 풀이 너무 무성하면 착륙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아 참, 규정상 근처에 숲이 있어도 곤란하다우! 내가 안 지키면 그만인데, 손자를 생각하면 오래 살아야 해서!] 우거진 초록엔 변종이 은신해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변종이라면 굶주린 몸짓으로 소음을 쫓게 마련이나, 구울 같은 녀석이 하나라도 끼어있으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서두르다가 다치지 마시구려! 연료는 아직 꽤 남아있으니] 루크의 기체인 세스나 182는 야지(野地) 착륙이 가능한 기체(Bush plane)로 분류된다. 이런 특성을 살려 격오지로의 수송이나 구조업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수송헬기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군용기로는 불가능한 임무. 몇 군데 폭격을 맞은 도로는 활주로로 적당하지 못했다. 단단하고 야트막한 경사지를 발견한 모랄레스가 팔을 흔들었다. 겨울이 직접 지면을 확인했다. 말을 달리며 발굽 부딪히는 소리로도 충분했으나, 신중을 처리하고자 대원들과 함께 500미터가량을 점검했다. 툭 튀는 돌이라도 있으면 난처할 노릇이다. 겨울이 리시버의 발신 버튼을 눌렀다. “코넬리어스, 이쪽으로 나와요.” 오늘 기동대만 출동한 것이 아니었다. 탄약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 아래, 랭포드 대위는 픽업트럭과 소총수 1개 팀 5명을 추가로 붙여주었다. 무전을 받은 트럭이 은폐를 벗어나 달려온다. 숨어있던 곳은 들판 한가운데 뭉쳐있던 작은 수림이었다. 기동대가 넓은 간격을 두고 직선 상에 서서 깃발을 치켜들었다. 경비행기는 지상을 달리는 트럭만큼이나 느리게 활공했다. 실속으로 인한 추락이 우려될 지경. 그러나 비행은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고도를 낮춘 기체가 비탈 아래에 안착한다. 쿵- 땅이 아스팔트가 아니기 때문인지, 랜딩 기어 부딪히는 소리는 엔진 소음에 묻힐 지경으로 작았다. 엔진 소음은 속도에 비례하여 잦아들었다. 없는 수준의 경사라도 활주 거리를 줄이는 데엔 큰 도움이 됐다. 정지한 경비행기 주위로 기동대를 포함한 임시소대원들이 즉각 경계망을 구축했다. 가시거리에 변종집단이 없다고는 해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시인성이 지나치게 높았다. 굉음도 문제였다. 착륙을 알아차린 괴물들이 떼로 몰려올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오! 반갑소, 중위!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하하하!” 조종석 문을 열고 나온 루크는 예상보다 훨씬 더 늙은 사람이었다. 겨울을 보자마자 거수경례를 한다. 겨울도 동일하게 답례했다. 노인은 베트남전 참전기장과 공군 십자장을 달고 있었다. 격으로는 명예훈장 바로 아래. 겨울이 말했다. “참전용사셨군요.” “강하구조대(Pararesque)였소. 현역 시절엔 헬기를 몰았지.” 샷 건으로 무장한 노병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그가 쓴 모자의 졸리 그린(Jolly Green)이라는 문구는 출신 부대의 애칭인 듯하다. 베트남전이 미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전쟁으로 불리지만, 강하구조대 출신이라면 티끌 없는 자부심을 느낄 만했다. 대기하던 병사 두 명이 재빨리 탄약상자를 끄집어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자꾸만 힐끔거린다. 궁금한 소식이 워낙에 많은 것이다. 갈급한 눈빛은 또한 여기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나약함이기도 했다. 짐칸에 실려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루크. 시간이 없겠지만,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나도 그렇다오! 잠깐만 기다리시구려. 촬영 좀 합시다. 위에서 안 믿을 것 같거든! 중위의 생사를 두고 온갖 뜬소문이 다 도는 마당이라서.” 겨울을 만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인지, 노병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촬영장비는 역시 헬멧 카메라였다. 민간기체에 본격적인 정찰용 장비를 다는 건 사치스럽고,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이었다.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병대라, 향수를 자극하는군! 그런데 어째 처음 보는 전투복을 입고 계시오?” “으음……. 여기엔 사정이 있습니다. 일단은 기밀이라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기밀! 기밀은 중요하지!” 카랑카랑하게 동의하는 노인. 짐을 내리는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탄약상자 말고도 전투식량 세 상자, 응급용품이 다시 세 상자 실려 있었으나, 고작 그뿐이었다. 다 싣고도 픽업트럭의 짐칸이 허전하게 보였다. “이렇게 좋은 만남이 있을 줄 알았으면 박박 우겨서라도 탄을 더 받아오는 건데! 아쉽게 되었소! 후배님들이 민간 조종사들을 영 믿지 않아서 말이오! 탄약을 빼돌릴 우려가 있다나? 다음에 올 땐, 내가 오든 다른 이가 오든 꼭 위성전화기도 가져다 드리도록 하리다!” 노병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천만이 넘는 병력에 보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간 시장의 탄약은 품귀현상을 빚었을 터. 가뜩이나 민심이 불안한 세계관이었다. 값비싼 장비인 위성통신단말이 지급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탄약이든 통신단말이든, 어딘가에 숨겨놓고 지상의 병력에게 전달했다고 해버리면, 가뜩이나 통제력이 부족한 봉쇄선 사령부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능력이 없을 테니까. ‘여러모로 엉망진창이구나.’ 그러나 동시에 겨울은 국방부가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 215 [215화] #4월의 끝 (2) 그러나 동시에 겨울은 국방부가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군사작전에 민간인을 투입하기는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럼으로써 구할 수 있는 인명을 고려해야 한다. 이 결정으로 어쩌면 수천, 수만 이상이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통제를 잘해야겠지만. 국방부의 독단일 리는 없다. 대통령은 정치생명을 반쯤 포기한 듯했다. 오는 11월의 대선이 걱정스러워진다. 이번 사태로 공황에 빠진 미국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상황이 얼마나 안 좋습니까?” 겨울의 질문에 처음으로 노인의 웃음이 희미해진다.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오. 다만 도는 이야기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수십만, 중앙 평원에 다시 수십만이 구조와 보급을 기다린다 하더이다. 우리 조종사들도 그쪽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말이지. 실은 규정상 주변에 좀비 놈들이 없더라도 함부로 착륙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오. 때로는 생존자들이 역병보다 위험하기 때문이오.” “그렇겠죠. 다들 이성을 잃었을 테니까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동서의 폭이 최대 100킬로미터에 이른다. 최고봉은 해발 4천 미터 이상인 험준한 지형이었다. 여기에 수십만의 미군과 그 이상의 변종들이 뒤섞여있다면, 그 혼란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지경일 것이었다. 지금 겨울의 임시소대원들이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훌륭하다고 해야 했다. “익숙한 일이지. 베트남의 그 지긋지긋한 밀림에서도 그랬거든. 더 못 태운다고 소리를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전우들이 정말로 많았소. 한번은 눈깔 뒤집힌 소대장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협박을 하지 뭐요? 근데 차마 그 사람이 못났다고는 못하겠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노인은 나지막이 웃는다. 땅에서는 아군과 싸우고 하늘에서는 적의 포화를 뚫었을 비행사였다. 삶이 힘들었던 사람의 잦은 웃음은 마음을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중위의 패거리는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요?” “아닙니다. 이쪽 방면에서 주기적으로 비행기가 지나가기에 정찰을 나왔을 뿐입니다. 본대는 장교와 병사만 170명에 기타 인원이 11명으로 총 181명입니다.” “하! 내가 발견한 최대 규모의 생존자 집단이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 남쪽에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그게 어디더라? 잠시 지도 좀 봅시다!” 노인이 조종석 쪽으로 손짓했다. 항법장치에서 짚어달라는 의미였다. 중대 주둔지가 어디인지 알게 된 루크는 해안선과 무척 가깝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정도면 해군에서 구조대를 파견할 수도 있겠는데? 내가 돌아가 중위의 생존소식을 전하면 아마 백악관까지 뒤집어질 거요. 해가 지기도 전에 헬기 편대가 날아올걸? 그쪽 공역은 진입이 금지되어있긴 한데, 무슨 이유가 있든지 무시될 것 같소. 허허!” 참전용사의 말에 겨울은 쓴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글쎄요. 그러긴 아마 어려울 거예요.” “흐음?” “하늘에서의 수색과 구조 활동에 한계를 느낀 적 없으십니까?” “아하. 그렇군. 지상에서 움직일 병력이 필요할 거다, 이 소리요?” “높은 확률로요. 이 일대에서 지휘체계 비슷한 거라도 유지하고 있는 편제는 저희가 유일하지 않나 싶네요. 사령부에서 욕심을 낼 만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겨울이었으나 단지 그 뿐만은 아니었다. 백악관은 전쟁영웅의 생존을 정치적 사건으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겨울이 생각하기에, 단순히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수많은 병력의 생사가 불분명한 와중에, 한겨울 중위가 생환했습니다! 우리 모두 축하합시다! 라고 할 순 없으니. 차라리 숭고한 죽음이 나을 수도 있었다. 양용빈 상장의 핵 공격으로 끓어올랐을 여론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물론 끝까지 살아남는 게 어느 쪽에게든 최선이다. 당장 후송을 하진 않더라도, 물자 지원은 최우선으로 떨어지겠지 싶은 겨울이었다. 봉쇄선 동쪽의 분위기를 정확히 모르는 이상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관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그런 전개도 나쁘지 않았다. 변종들로서는 봉쇄선 돌파가 최우선일 테니, 이쪽으로 큰 규모가 돌아오진 않을 터였다. 어떤 의미로는 전선 후방에서의 활동이라고 해도 좋겠다. 탄약만 충분하다면 해볼 만 한 일. 노병이 끄덕였다. “일리가 있소. 높으신 양반들 머릿속은 우리 같은 사람들하곤 많이 다를 테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랑데부 포인트를 정합시다.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 랑데부(rendez-vous) 포인트는 다시 만날 장소를 말한다. 1차적으로는 올레마의 중대 거점이 되겠으나, 혹여 거점을 버리게 될 때를 대비하여 제2, 제3의 위치를 지정해두어야 했다. 주변 지형을 숙지하고 있는 겨울이 서너 군데를 연속으로 짚어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전술 PDA에도 해당 좌표를 입력했다. 그러면서 묻는다. “주변에 특별한 건 없었습니까? 다른 생존자들이라거나…….” “오늘은 딱히 없었다오.” 이 와중에도 무전기의 잡음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생체전파를 레이더처럼 쓰는 녀석이다 보니 비행기가 사라진 공역을 향해 접근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따라 늙고 어린 전쟁영웅이 주고받는 문답도 갈수록 간결해졌다. 식량은? 사냥으로 충당합니다. 호오. 같은 식. 루크는 작은 노트에 베이커 중대의 현황을 최대한 받아 적었다. 봉쇄선 사령부의 판단과 보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외에 다음 보급에서 필요한 물자들도. 특별히 요청한 게 있다면 중기관총 탄약이었다. 험비의 화력이 되살아난다면 전술적인 선택지가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 외에도 수류탄과 대전차 로켓 등을 요청했다. 「전투감각」과 「위기감지」로 방해전파 발신원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겨울이 노인에게 권했다. “이제 슬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시거리에 들어오기까진 아직 꽤 남아있는 것 같지만, 여유를 두는 편이 안전하겠죠. 따돌릴 시간도 필요하고. 트릭스터가 하나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꼭 「침묵하는 하나(Silent one)」가 아니더라도 조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선침묵의 개념을 이해할 만큼 교활한 변종이었다. “이런. 아쉽기 짝이 없소.” 투덜거리던 노병이 조종석 시트 측면에 끼워둔 책자를 꺼냈다. 뜻밖에도 몇 권의 만화책들이었다. 그것을 겨울에게 내민다. “이건…….” “실례가 아니라면 사인 좀 부탁하오! 휴스턴으로 돌아가면 손자 녀석 주려고 보관하던 건데, 오늘 이렇게 주인공을 만났지 뭐요?” 그러면서 껄껄 웃는다. 보통의 민간 조종사라면 커져가는 잡음에 경기를 일으킬 상황이건만, 베테랑다운 여유와 관록이었다. 만화책은 정식으로 출판된 물건이 아니었다. 루크의 양해를 구한 겨울이 빠르게 훑어보았다. 많은 종말을 거쳐 왔어도 자신이 히어로인 만화책을 펼쳐본 경험은 없었다. 주인공은 생김새와 이름만 한겨울이었다. 색채 강렬한 첫 장부터 피와 내장이 튀었고, 페이지의 절반쯤은 강렬한 효과음과 욕설로 도배되었다. 그림 속의 겨울소년이 포효했다. 「핫하! 역병은 방역이다!」 「오늘은 그럼블을 때려죽였다! 내일은 트릭스터를 산산조각내야지! A-men!」 「아아, 구울! 구울! 어째서 구울 뿐인가! 좀 더 죽이는 보람이 있는 놈은 없단 말이냐!」 「베타 그럼블! 이 XX를 XX할 겁쟁이 같으니! 나를 보고 오줌을 지렸구나!」 「샌 미구엘의 교차로에선 1만 마리를 불태웠지!」 「산타 마리아의 뒈지다 만 잡것들아! 내가 마저 죽여주마! 주의 은총이 깃든 이 총으로!」 “…….” 이제까지의 행적이 괴기스러울 만큼 과장되거나 왜곡되어있었다. 겨울동맹의 구성원들도 등장했는데, 유라는 어째서인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탱크 탑을 입은 전사였고, 민완기는 단검을 쓰는 암살자였으며, 애초에 포트 로버츠에서조차 미스 트리거해피, 혹은 트리거 위치(Trigger Witch)로 불릴 지경인 한별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눈에서 왜 빛이 나지?’ 그러나 이렇게 황당한 만화에도 미국 정부의 정책이 묻어났다. 어쨌든 난민을 병력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현 정권의 방침 아니던가. “손자분의 교육에 별로 안 좋을 것 같습니다.” 빠르게 사인하고 돌려주니 루크는 매우 흡족해했다. “막연히 커질 뿐인 두려움에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우습게 여기는 편이 낫소! 텍사스 남자라면 호기가 있어야지! 아무튼, 고맙구려! 손자 놈이 중위의 열렬한 팬이라서 말요!” 노병은 떠나기 전 악수를 청했다. 꽉 잡는 손은 뜨겁고 억셌다. “비록 시대가 달라도 우리는 전우요!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무사하시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위대한 나라를 위해서!” 겨울만이 아니었다. 경계를 유지하던 병사들 각각에게 감사와 격려를 전한다. 무전기가 지직지직 시끄럽다고 웃는 얼굴로 불평하기도 했다. 경비행기는 내내 시동이 걸려있었다. 푸득 푸드드득 소리를 내더니 프로펠러가 세찬 추력을 자아낸다. 착륙할 때 거슬러 올랐던 경사를 타고 내리더니, 3백 미터 가량을 가속하여 가뿐히 날아올랐다. 균일하지 못한 지면에도 불구하고 이륙 직후 잠시 기우뚱 했을 따름이다. 한 바퀴 선회한 기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방향을 꺾는다. 트릭스터를 기만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도 샛길로 돌아서 가죠. 저놈들도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테니까요.” 병사들은 어딘가 슬프고 아쉬움 짙은 얼굴로 겨울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트럭에 실린 탄약 상자는 크나큰 희망이었다. 며칠간 각 소대가 생존자 구조에 나서면서 남아있던 실탄의 태반을 소모해버린 탓. 덕분에 랭포드 대위의 스트레스성 탈모가 급속히 진행됐다. 살이 빠진 데다 주름도 늘었다. 밥맛이 없는 듯했고, 속이 쓰린지 윗배를 누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백 명이 넘는 목숨을 책임지게 된 사람의 애환이었다. 실탄이 없어 한 탄창을 두고 근무 순서에 따라 돌려가면서 쓰게 된 이후로는 병사들도 심각한 불면증과 소화불량 증세를 호소했다. 장교들의 눈이 퀭해지는 것은 덤. 오늘 돌아가고 나면 분위기는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사람이 사는 데엔 역시 희망이 필요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찾아오리라는 기대. 거기에 스스로의 노력이 보탬이 된다면 그만한 기쁨은 드물다. 먼 곳에서 그럼블의 포효가 들려왔다. ‘슬슬 오는구나.’ 변종집단의 절대다수가 봉쇄선에 몰린다 해도, 흩어진 생존자들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그들을 쫓는 괴물들 역시 적은 수가 아닐 것이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 베이커 중대의 탄약소모 속도가 그 증거였다. 겨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어제 하루 동안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교전을 치르며 천 발이 넘는 실탄을 사용했다.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중대의 화력이 보강되기 전에 특수변종, 특히 그럼블과 조우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괴물의 시간 싸움이다. 수류탄 한 발조차 남아있지 않은 지금, 그럼블이 출현한다면 중대 전체가 회피해야 할 것이었다. 혹은 기동대가 나서서, 속도를 살려 다른 쪽으로 유인하던가. 추가 보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수밖에. ‘굳이 그 전에 싸워서 죽여야 한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복귀하는 내내, 겨울은 거대한 괴물의 약점에 천착했다. 굳이 상대해야 할 경우 보통의 그럼블보다는 차라리 강화종이 나을 것 같다. 강화등급이 올라가는 만큼 물리내성이 강해지지만, 그것은 견고한 외피가 또한 두꺼워진 덕분이다. 관절이 접히는 부분은 표면이 갈라져 속살이 드러난다. 즉 집단전에서는 위력적이되 개별 접전에서는 오히려 강화 이전보다 취약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거리까지 접근해야 한다.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이렇듯 불가피한 전투를 가정하는 것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습관이었다. 익숙해진 길을 달리는 터라 고민할 여유는 충분하다. 중대 거점이 가까워지면서 봄날의 태양이 부서지는 호수가 측면으로 지나간다. 예의 알파카 무리는 아직도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 216 [216화] #4월의 끝 (3) 겨울이 복귀하고 난 뒤에, 갑자기 환자 또는 미친 척하는 병사가 늘었다. “그것들은 남자도 아닙니다.” 브래디 하퍼 이병의 말이었다. 겨울은 그에게 가벼운 주의를 주었다. 말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라고. 두 사람은 조마삭(調馬索)을 쥐고 말을 교련하는 중이었다. 이병처럼 배우는 입장인 병사들은 난간에 기대거나 편히 앉아 이쪽을 보고 있다. 긴 끈에 묶인 두 마리의 말이 커다란 원을 그린다. 줄을 잡고 중심에 선 사람이 몸과 시선의 방향을 바꾸면, 말은 그 속도에 맞춰 걷거나 달리거나 멈추는 연습이었다. “후송을 원하는 인원이 전부 다 남자는 아니잖아요?” 겨울의 질문에 이병이 당당하게 답하는 말. “여자는 그래도 됩니다, Sir.” 이에 여성 사병 하나가 중지를 들었다. Fuck you! 강세를 워낙 찰지게 주어 나머지 병사들이 낄낄거렸다. 겉으로야 어쨌든 이들에겐 사나운 공감대가 있었다. 나약한 전우들에 대한 경멸감. 그리고 겨울이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자기혐오이기도 했다. 이들이라고 왜 도망치고 싶지 않겠는가? 그걸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공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쪽에 모여 있는 종군기자단이 이 장면을 촬영했다. 뭘 그리 쓸 게 많은지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만히 보면 일부러 힘주어 치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 훈련엔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말이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거죠. 다른 목적도 있지만요.”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말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원의 중심으로 고정된다. 이게 흐트러질 경우엔 줄을 당기거나, 정해진 신호를 보내거나, 반경을 줄이거나 하는 식으로 주의를 주어야 했다. 반대로 지시에 잘 따르면 줄의 길이를 늘여 행동의 여백을 늘려준다. 여기에 익숙해진 말은 기수의 뜻을 곧잘 따르게 된다. 단순히 운동만 시킬 작정이었으면, 말이 돌든 말든 줄을 머리 위로 들고 가만히 서있으라 했을 것이다. “위버! 이제 당신이 나와서 해봐요.” 겨울이 매들린 위버 일병에게 삭 손잡이를 넘겼다. 이번이 첫 연습은 아닌 만큼, 그녀는 곧 능숙하게 줄을 다루었다. 이따금 말 머리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때마다 츳츳! 혀를 차서 주의를 환기한다. 목부 경험이 있는 기동대원들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솜씨였다. 다들 탄약 덕분에 되찾은 여유였다. 물론 아직 침착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네는 아직 신용카드를 써본 적이 없지?” 이는 병사들에게 탄약을 분배한 직후, 겨울이 랭포드 대위에게 받았던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되도록, 앞으로도 만들지 말게. 이런 기분을 매달 느끼게 된다네. 간절히 기다리던 월급이 들어와도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다 빠져나가지.” 그러면서 대위가 가리킨 것이 삽시간에 비어버린 탄약 상자와 탄통들이었다. 보기보다 섬세하고 걱정 많은 성격이라, 추가 탄약이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안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시시한 농담이나마 던질 정도의 여유는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후속 보급기는 아직 소식이 없다. 어린 전쟁영웅의 쓸모를 고려하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강하구조대 출신의 노병이 장담처럼 백악관이 뒤집어졌을 터인데. 돌이켜보면 그는 이런 말도 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쪽 공역으로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고. ‘단순히 패잔병이 많은 지역에 집중적인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는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두 기 정도는 선을 넘어왔어야 했을 것이다. 벌써 이쪽까지 진출한 생존자들이 있으니. 고로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타당하다. 그동안 바다에서 육지로 그어지는 비행운이 없었던 것도 유념할 만하다. 해상봉쇄선 유지가 아무리 중요한 임무라고 해도, 수백만 인명이 걸린 일이면 공중지원을 보낼 법하다. 혹시 항모전단은 구 중국군 함대와의 교전으로 적잖은 손실을 본 것일까? 혹은 해당 사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거나. 앞서 의혹과 관련하여 후자에 무게가 실린다. 이런 생각을 하며 훈련을 지켜보는데, 누군가 겨울을 부른다. “중위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종군기자단의 1인, 길버트 마르티노였다. 구할 때 가장 애를 먹였던 바로 그 남자. 정신을 차린 뒤에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 왔다. “제게 용건이 있으세요? 따로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도 머뭇거리기에, 겨울은 가까운 병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린 중위를 좋아하는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르티노가 한숨을 쉰다. “이제 말씀해보세요.” 채근하는 겨울. 그러나 쉽게 열리지 않는 입이었다. 몇 번을 어물거리고 그만큼을 다시 삼킨다. 어느새 타자 두드리던 소리도 멎었다. 기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어차피 훈련을 봐주는 중이었으므로 겨울은 끈기 있게 기다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를 닦아낸 마르티노가 드디어 어려운 말을 꺼냈다. “저는, 저희는 취재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절로 기울이게 되는 내용이었다. “이미 하고 계신 것 이상을 원하신다면, 작전현장에 같이 나가고 싶다는 뜻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중대장님이 이미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질적인 책임자는 중위님이시잖습니까.”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지휘서열을 무시하시면 곤란해요.”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니 훈련에서 눈을 뗄 순 없었다. 냉정한 목소리를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기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마음을 굳게 먹고 온 듯했다. “단순히 특종을 욕심내는 게 아닙니다. 막연히 안전할 거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요. 현장에서 저희가 방해만 될 거라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저희는 사명감을 지니고 봉쇄선을 넘었습니다. 파견 전에 공증받은 유언장을 남기고 왔죠. 그러니…….” 한숨을 동반한 공백을 끼고 이어지는 말.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저희를 버리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 겨울은 조련을 잠시 중지시켰다. 그 후엔 길버트와 함께 나머지 종군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긴장한 기자들의 시선이 겨울에게 집중된다. 이것만 보아도 의견은 사전에 확실히 통일된 듯 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던 겨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러분, 이곳 생활에서 눈치가 많이 보이세요?” 순간적으로 몇 사람이 흔들렸다. “그런 이유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 즉시 부정하려던 길버트 마르티노가 동료, 혹은 경쟁자들을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카메라맨 하나, 리포터 하나가 서러움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혹한 도피행에도 불구하고 투실한 살이 다 안 빠진 흑인은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리포터의 낮은 훌쩍임이 더해진다. 병사와 장교들은 예외 없이 소년장교에게 친절하지만, 어디까지나 겨울이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그들 모두의 성격이 본래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민간인들을 짐으로 여기고 흘겨보는 일부가 있었을 것이다.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들도 지쳐서. 중대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아는 종군기자들로선 그러한 일부가 더욱 크게 느껴졌을 테고. 헬렌 타미리스, 수척한 리포터가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우리를 보는 눈이 너무 차가워요. 복도에서 스쳐 갈 때면 들으라는 듯이 욕을 하는 경우도 있는 걸요. 알아요. 군인들도 힘들다는 거. 알지만, 여기 발이 묶인 게 우리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우리 말고도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정말 억울해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겨울은 잠자코 들어주었다. 급한 대로 쓸 탄약을 얻었고, 조만간 추가보급이 예상되는 시점 아닌가.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와중에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게 진심일 가능성은 낮았다. ‘신경 써달라는 거겠지.’ 겨울은 약한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약하기 때문이다. 가을, 지나간 계절을 위해 연명하는 나날이 하루하루 얼마나 힘겨운가.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 보내는 배려 없는 말들을 대부분 읽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충분한 사연이 공감과 더불어 흐른 뒤에 겨울이 입을 열었다. “다들 해리스 대위 사건은 알고 계시죠?” 기자들이 겨울에게 집중한다. 마르티노가 주억거렸다. “명색이 기자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그 일로 수훈십자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받으셨잖습니까. 솔직히 명예훈장을 받아도 모자랄 사건이었습니다만……사정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국방부가 공식 계정에 업로드한 그 날의 전투기록, 그리고 기적의 아이가 탄생하는 장면은 단 하루 만에 3천만 뷰를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중위님 당신이 군인 신분만 아니었어도 엄청난 부자가 됐을 겁니다. 천만장자가 된들 세상이 망하면 소용없겠지만 말입니다.” 기자 중의 한 사람인 트레버 바티스트의 말이었다. 기적의 아이란 산타 마가리타 호변의 공병대 사무실에서 태어난 그 아기를 부르는 표현이었고. 현재의 미국에서 가장 어린 유명인이라던가. 부부 역시 이런저런 채널에서 그날의 일을 회상한다고 한다. 의무병인 화이트는 어딘가에 동상까지 세워졌다고. 겨울이 말했다. “그날 밤, 제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자살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부른 이름은 에밀리였다. “배 아래 수류탄을 터트리고도 죽지 못해서 고통을 덜어줘야 했죠.” 이들 또한 간접적으로 보았을 것이었다. 그때도 헬멧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전 베이커 중대원들을 그렇게 비참한 꼴로 만들 생각이 없어요.” “경우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위로를 위한 비약이 심하다고 보는 눈치. 수긍하기 힘들어하는 마르티노, 그리고 그 외의 기자들을 향해 겨울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결국, 비슷해질걸요? 보세요. 이 중대는 정식 편제가 아니에요. 해안경비대와 116연대전투단 포병대는 그나마 원래 있던 주둔지라도 같았는데, 오스본 병장 일행이 합류하고부터는 그렇지도 않게 됐어요. 앞으로는 더 심해지겠죠. 서로 다른 수십 개 부대에서 서로 다른 경로로 모인 병력이 어떻게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통일성…….” “네. 물론 간부들 하기 나름이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민간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감이면 그럭저럭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저를 좋아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위태롭다고 봐요. 어떻게든 삐걱거리고, 어디선가는 말썽이 생기겠죠. 이 상황에서 민간인들을 내팽개친다? 말도 안 됩니다. 만약 병사들이, 간부들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글쎄요. 양심을 버린 사람들만 남게 될 텐데 중대가 참 잘 유지되겠구나 싶네요.” 중대가 완전히 분해되진 않더라도,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일쯤은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 군인으로서의 명분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해리스 대위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법하다. 겨울은 일종의 실망감을 원인으로 여겼다.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한 번 자신을 그렇게 낮추고 나면 다음부터는 더욱 쉬워진다. 쉬워서 더욱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욱 쉬워지고. 그러다 보면 사람은 사람 아닌 것이 된다. 저 바깥세상에 정말 많을 것이었다. “여러분 스스로 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병사들을 취재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북돋워지지 않을까요? 누가 욕을 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잠시 말이 없던 기자단 가운데 하나, 카메라맨, 조던 크룩이 쓰게 웃었다. “정말로 비현실적이군요.” 잠시 쉬고 다시 잇는 말. “중위님 당신 말입니다. 저는 당신에 대한 보도가 대부분 연출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잿빛인 흑인이 고개를 젓는다. “편집팀의 동료가 조작 없는 영상이라고 확인해줬는데도 그랬지요. 기자의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지나치게 환상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이해해요. 누구는 저를 보더니 실존인물이었느냐면서 놀라던걸요.” 겨울이 가볍게 받자 면면에 경직된 미소가 번진다. 다른 기자가 끼어들었다. “알아요. 호출부호 미어캣, 79연대전투단의 에드먼트 듀런트 중위였지요?” “그걸 어떻게…….” “전부터 팬이라서요. 대부분 작전 내용으로 한정되기는 해도, 당신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상세하게 공개되어있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저처럼 사소한 것까지 외우고 다니는 게 보통은 아니겠지만요. 후, 전 누구랑 다르게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았던지라.” 어쩐지 겨울소년이 포효하던 만화책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정부가 제대로 유지되는 세계관은 이런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대위님께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거동이 힘든 사병들을 위해서라도요. 피해가 안 가도록 조심할게요.” 겨울은 온화한 약속으로 기자들을 다독였다. # 217 [217화] #4월의 끝 (4) 새벽에 무전기가 울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추가보급이었다. 변종집단에게 노출되는 걸 피하고자 어두운 시간을 고른 듯 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기체가 마을 상공을 여러 차례, 다양한 방향으로 가로질렀다. 야간 관측장비를 갖춘 선도기인 모양. 이후 다수의 수송기가 넓은 간격을 두고 줄지어 나타났다. EMP 안전고도를 무시하는 저공비행이었다. 구름 낀 새벽녘의 희미한 달빛 아래, 까맣게 도색한 수송기들은 맞바람을 받으며 속도를 줄였다. 이어 낙하산 달린 화물을 무더기로 투하한다. 일부는 고도를 더욱 낮췄다. 목장의 너른 공터는, 거친 수풀이 자랐을지언정 야지착륙의 활주로로 적합했다. 산을 넘어온 바닷바람이 안정적인 하강을 돕는다. ‘복엽기?’ 겨울의 눈에 보이는 모든 수송기가 복엽기였다. 동체는 우든 원더를 닮았으되 크기는 훨씬 컸고, 날개는 두 쌍이 끝에서 이어지는 특이한 형상이었다. 이른바 탠덤 윙(Tandem-Wing)이라 부르는 구조였다. 이번 세계관에선 처음 보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날개가 늘어나면 양력도 늘어난다. 이착륙에 필요한 거리가 대폭 감소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비행 중 엔진이 꺼지더라도 여유로운 대응이 가능하다. 무동력 활공거리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종말에 대처하는 인류의 지혜였다. 누적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조종면도 순수 유압으로 움직이지 싶다. 전자식(Fly by wire)에 비해 기체중량이 증가하겠으나, 전자기 충격파가 터져도 조종능력이 마비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살아있는 전자기 폭탄이 지상을 배회하는 상황에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바커 소대와 에스카밀라 소대가 울타리를 따라 경계선을 형성했다. 최초로 착륙한 기체의 램프 도어로부터 뜻밖의 무장병력이 뛰어나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발견하고 방향을 꺾는다. 베이커 중대의 간부들이 최상급자에게 경례했다. “한겨울 중위.” 근래 들어서는 누구나 소년장교의 이름을 분명하게 발음한다. 유명세의 영향이었다. “자네가 랭포드 대위겠군.” 날카로운 인상의 육군 대령이 베이커 중대의 간부진을 무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반갑다, 제군. 콜 로저스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짐작하리라 믿는다.” 결국 국방부의 결정은 겨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병력을 규합해서 작전에 투입할 계획인 것이다. 다만 그 규모를 좀 크게 잡은 듯 했다. 로저스 대령을 따라온 이들은 전원이 장교였다. 아마도 새로운 부대 창설에 필요한 참모진일 것이었다. “대위. 그동안 수고 많았다. 현시각부로 귀관의 중대는 내 지휘를 받는다. 이의 있나?” 대령의 건조한 음성은 높낮이의 변화가 없었다. 주변을 긴장하게 만드는 타입이다. “없습니다!” “좋아. 물자수령을 끝내고 현황보고를 받겠다. 귀관이 통제하라.” 지휘권을 인수했다 해도 대령은 아직 이곳의 상세를 모르는 입장. 체계가 잡힐 때까지는 기존 방식으로 돌리는 게 나았다. 결정권자로서의 부담을 덜게 되어 안도할 법도 하건만, 랭포드 대위는 긴장감에 속이 불편한 기색으로 작업을 감독했다. 착륙과 이륙이 반복되면서 각종 상자가 무더기로 쌓였다. 다양한 화기와 탄약, 전투식량 등. 루크를 통해 식량이 충분하다는 소식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통해 조달한다는 점이 못내 불안했던가보다. 아주 작정하고 추진해주는 보급이었다. 두 대 뿐이지만 소형 순찰차량(FAV)도 나왔다. 각기 중기관총과 고속유탄포로 무장했다. 방어력은 기대할 수 없다. 운전석에 문도 달려있지 않은 물건이었다. 뼈대에 엔진과 바퀴, 무기만 달아놓은 수준. 그만큼 가볍기 때문에 연료공급이 위태로운 지금은 험비보다 유용하다. 하늘에 쪽빛이 섞일 무렵, 대령이 겨울을 불렀다. “중위.” “Sir.” “소령 진급 축하하네.” “……?” “맥과이어. 뭔진 몰라도 빨리 끝내도록.” 로저스 대령의 성가신 손짓에 참모 하나가 나섰다. 겨울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령에게 간단히 목례한 뒤 조금 떨어진 장소로 겨울을 이끌었다. “대위님?” “지금은 소령이야. 오랜만이군.” 국방부 공보처의 닐스 맥과이어. 산타 마리아 홍보영상 건으로 처음 만났었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한 우연이네요.” “우연? 글쎄. 봉쇄선 사령부에 파견된 공보처 인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절반은 방역전쟁 전술지원그룹에 붙어있고. 교전지역까지 들어올 사람은 얼마 안 돼.” 방역전쟁 전술지원그룹이라면 겨울에게도 영입권유가 왔었던 곳이다. 명목상으로는 전쟁영웅을 모아놓은 정예집단인데, 실제로는 사기진작용 영상 촬영 전문 부대에 불과했다. “제가 소령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일반진급으로 대위, 직책진급으로 소령.” 어려울 것 없다는 투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맥과이어였다. 즉 소령은 지휘서열 정리를 위한 임시계급이라는 말. 보통의 2계급 특진과 다르다. 소령 대우를 받는 동안에도 대위의 급여를 받으며, 상황이 정리되면 정상계급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대위 진급만으로도 충분한 파격이었다. 일전에 맥과이어의 상급자인 블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겨울은 진급연한에 관한 모든 규정과 불문율을 무시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임관으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최소 복무기한이라던가, 여러 가지 있을 텐데…….” “규정상 문제는 없어. 의회에서 두 번째 명예훈장 수여를 결의했거든. 원래는 수여일자의 다음달 1일에 진급시키는 거지만, 어차피 확정된 거라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지. 전시니까.” 겨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전부터 말이 많았던 명예훈장 이중수훈이 이번에야말로 확정된 모양이다. 미국 역사상 명예훈장을 중복으로 받은 사람은 두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과거 블리스 소령의 하소연처럼, 1차 대전 종전 후엔 겨울이 최초였다. “중요한 건 서훈사유야.” 맥과이어 소령이 주의를 환기했다. “종군기자단을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며칠 전에 구조했습니다.” “혹시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에 대해서 그들에게 귀띔한 것이 있나?” 피쿼드 호, 오르카 블랙에서의 활동을 기자들에게 귀띔한 바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다 싶었으나, 공보장교의 표정이 진지했으므로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중대의 다른 인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요.” 소령이 안도했다. 겨울이 물었다. “서훈사유가 뭔데 그러십니까?” “핵 테러로부터 호손 시민들과 기타 장병들의 생명을 구한 공로.” “그게 무슨…….” “자네가 베이더우 위성을 탈취한 덕분에 핵탄두가 시가지를 직격하지 않았다는 거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사유였다. 조안나는 양용빈 상장이 처음부터 빗맞아도 무방한 표적을 선정했으리라고 설명했다. 즉 캘리포니아 방면의 미군이 이 지경에 처한 시점에서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은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다고 봐야 한다. 소령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두게.” 역시나.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백악관에서 나온 각본이야. 국민들의 좌절감을 희석시킬 소재가 필요하다고. 이럴 때 국가가 분열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 공보장교는 한숨과 함께 어조를 바꾸었다. “어쨌든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잖아. 위성을 장악해서 탄도탄 명중률이 저하된 건 사실이니까. 아니었으면 정말 도시가 증발했을지도 몰라. 탄약창에 주둔하던 병력이 미처 대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건 보다 진실에 가깝지. 정말 간발의 차이로 철수했다고 들었네.” “알겠습니다. 불편하겠네요.” “뻣뻣하군. 보통 사람이라면 좋아했을 텐데. 난민들 처우도 달려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게. 귀관도 봉쇄선 저편이 어떤 상태인지 보고 나면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거야.” 직접 볼 것까지도 없었다. 온갖 인종범죄가 범람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전에도 이미 중국계 미국인들, 그리고 중국계로 오인당한 아시아계 시민들은 수난을 겪고 있었으므로. 대니얼 콴 사망사건으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국이 미국을 파괴해선 안 된다던 대통령의 추모연설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됐다. 그러나 이 각본엔 한 가지 요소가 빠져있다. 바로 채드윅 팀장의 건.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정치가 깨끗하기만 할 순 없지. 사람 사는 일인걸.’ 더러움에 거듭 무뎌지면 언젠가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게 된다. 허나 이 세계관, 지금의 대통령에 한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이 두 번째 임기니까. “소령님, 이 문제에 관해 백악관에 보고할 사항이 있습니다.” 맥과이어는 겨울이 굳이 백악관이라고 말한 데서 이상을 눈치 챘다. 보통은 봉쇄선 사령부라던가, 지난 작전을 주관안 정보국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공보장교 또한 대중적으로 알려져선 안 될 기밀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가 확인하듯이 묻는다. “분명히 해두지.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소령은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성통신 사용허가를 받아두지. 혹시 달리 필요한 거 있나?” “데이터 전송에 쓸 컴퓨터를 연결이 가능했으면 좋겠네요. 증거자료가 있거든요. 보고자는 제가 아니라 FBI의 깁슨 감독관입니다.” 피쿼드 호의 비밀구역에서 빼낸 하드디스크 배낭은 아직 멀쩡히 남아있다. 도착 이래 조안나는 증거물을 세심하게 관리해 왔다. EMP에 대비한 것은 물론이었다. 겨울의 요청에 맥과이어가 미간을 좁힌다.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부디 좋은 일이길 바라야겠군.” 공보소령이 말하는 좋은 일은 결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즉시 로저스 대령을 찾았다. 멀리서도 대령이 인상을 찡그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 이제 막 도착한 만큼 사령부와 교신할 일이 많을 텐데, 불확실한 목적으로 장시간의 통신을 요청한 것이니까. 그러나 통신기가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체 구성이 백 팩 하나에 다 들어가는 접이식(AN/PRC-117)이 여럿이었으므로, 결국 대령은 휘하에서 통제를 벗어난 일이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고 거부감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앞으로 괜찮을지 모르겠네…….’ 저런 엄격한 성격은 장점도, 단점도 분명하다. 잠시 후, 지대가 높은 곳에 위성 송수신기가 펼쳐졌다. 자그마한 삼각대 위에 뒤집힌 우산 같은 안테나가 달려있고, 그 위에 넓은 십자형의 수신기가 붙었다. 단말기에 러기드 노트북을 연결한 통신병이 기다리던 겨울과 FBI 요원에게 말했다. “방역전선 사양으로 개량된 물건이니 전파누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드디스크는 이쪽 케이블에 연결하십시오. 암호화 때문에 전송 속도가 많이 느릴 겁니다. 그걸 다 보내시려면 하루 종일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전파누수 방지는 트릭스터를 고려한 옵션이었다. “고마워요.” 불려온 조안나가 인사했다. 수화기를 붙잡은 그녀의 상대는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바뀌었다. 말하는 시간보다 상대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다. 갈수록 그렇게 격이 높아지더니, 나중엔 대통령과 직접 연결됐다. 겨울은 그녀가 몹시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 받아요. 각하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심각한 대화를 끝낸 조안나가 겨울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필요한 내용은 다 전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확인이 필요한가? # 218 [218화] #4월의 끝 (5) “한겨울입니다.” 겨울이 말하자 스피커가 시끄럽게 버벅거렸다. 잡음이나 방해전파가 아니라, 저편에서 수화기에 대고 내쉰 긴 한숨이었다. 짧은 침묵 뒤에 비로소 대통령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악관에서 만난 이래 처음인가. 반갑네, 소령. 목소리를 들으니 겨우 실감이 나는군. 요즘은 영 나쁜 소식들뿐인지라…….] 그는 여백을 두고 말했다. [일단 이 말을 해둬야겠지. 귀관이 겪은 일에 대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유감을 표하네. 자세한 내용은 자료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감독관의 증언만으로도 전모가 짐작이 가니까.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존 커틀러 같은 자들이 다시 나타나는 꼴을 보는군.] 낯선 이름에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커틀러? 그게 누굽니까?” [악마.] 짧게 끊고 다시 잇는 나머지. [보건복지부 보건국장으로서 매독균 인체실험을 했던 작자일세.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그 중에서도 터스키기는 꽤 유명할 텐데, 들어본 적 없나?] “아……. 있습니다.” 떠올랐다. 어떤 면에선 인종차별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태반이 흑인이었으므로. 이번 사건과의 또 다른 유사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을 연구에 활용했을 뿐이다. 조국과 인류에 보탬이 되고자 했을 뿐인데 어째서 책임을 묻는가…….” 동조자와 조력자들이 자기변호랍시고 주워섬긴 말이라네. 정작 커틀러 본인은 죽고 없는 자리였지만, 있었다면 아마 같은 소리를 지껄였겠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인명을 구하게 된 것 아니냐면서.] 채드윅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바보 같은 논리야. 애국을 명분 삼는 죄는 국민 전체를 공범자로 만드는 짓이지.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마냥 떳떳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 괴롭군.] “그런 말씀 마세요. 각하께선 훨씬 더 나은 분이십니다.” 이에 대통령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는 연설에서 필요악과 필요악의 갈림길을 헤맨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의 한계에 부대끼는 인격이었다. 겨울은 그 기분을 안다. 가슴 속에 여전한 돌의 무게. 그게 있는 한 소년은 버리고 싶은 감정에 묶여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줘서 고맙네. 귀관이 이 나라에 실망했을까봐 걱정했거든.] 겨울 한 사람에 대한 염려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사회적 비용을 계산했을 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세요.” 통화를 원했던 이유가 단순히 감독관의 진술을 재확인하려는 건 아니었던가보다. 뜸을 들이던 대통령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소령과 친한 사람들을 그쪽으로 보내면 어떨까 싶은데, 귀관의 의견이 궁금하군.] “설마 동맹……아니, 포트 로버츠의 한국계 난민 지원병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는 지원병이 아닌 정규 독립중대로 승격되었다고 들었네. 상황에 따라서는 일본계나 베트남계, 필리핀계, 캄보디아계가 추가로 배치될 수도 있고. 숫자가 가장 많은 중국계는 모르겠어. 다들 역효과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여론 대책이겠네요.” [그렇지. 내 언론 비서관(Press Secretary)이 적극적으로 권하더군. 난민 출신 병사들 구조작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 그럴 듯한 그림이 그려질 거라면서. 귀관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일이니까.] 알 만 하다. 겨울은 다른 것을 물었다. “포트 로버츠는 무사합니까?” 일개 군사기지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대통령이라면 각 거점의 현황을 달달 외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나 지체 없이 나오는 대답. [안심하게나. 변종집단의 공세 중심에서 많이 벗어난 위치라서 구조 활동의 거점 중 하나로 이용한다고 알고 있네. 애초에-]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Sir?” […….] 기밀이 오가는 자리인지라 통신병은 자리를 비웠다. 겨울이 돌아보자 조안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통신장비를 살펴본다. 그러나 그녀도 만능은 아니었다. 막 통신병을 부르려는 찰나, 수화기 저편에서 누군가 맥밀런 대통령을 일깨운다. 전파가 끊어진 게 아니었다. [으음, 미안하네. 깜박 졸아버리는 바람에.] “괜찮으십니까?” [별 것 아닐세. 어젯밤 늦게까지 드라마를 봤거든. 웨스트 윙이라고.] 우울하고 메마른 농담이었다. 백악관은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 이후 비상체제로 전환되었을 터. 어쩌면 이미 여러 사람이 과로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음, 그래. 애초에 그쪽은 흩어진 병력이 그리 많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할 일이 사라진 공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으니, 자체적으로 편성한 독립중대 하나 빠진다고 위험해질 일은 없겠지. 내 말이 맞나?] 마지막 질문은 겨울을 향한 게 아니었다. [맞다는군. 기지 자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듣던 대로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그러나 할 일이 사라진 공군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목표물 확인, 즉 표적획득이 어려운 것이다. ‘추락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저공비행은 불가능할 테니까.’ 험지에 적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무차별 폭격을 할 순 없다. 평소라면 적아식별장치(IFF)가 제 역할을 수행했겠으나, 지금은 해당 장비가 달린 차량 대부분이 버려졌을 것이었다. 간혹 휴대형도 존재하지만, 도망치는 데 급급한 패잔병들이 크고 무거운 식별장치를 가지고 다니긴 어려웠다. 보다 가벼운 것들의 신호는 하늘까지 닿지 않는다. 또한 정밀폭격을 학습한 트릭스터는 전파를 단락적으로 내뿜는다. 그것은 구조 활동을 방해하면서도, 전파 추적 미사일을 유도하기엔 불충분한 간격이었다. 미군으로선 역으로 전파방해를 거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이 새벽의 공수 또한 그런 도움을 받았을 터. 그동안 바다에서 날아온 해군 소속기가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나저나 겨울동맹 출신으로 이루어진 독립중대인가. 예상은 했으나, 결국 미군 기준으로 독특한 편제가 만들어졌다. 고민하던 겨울이 되묻는다. “각하께서 굳이 제 의견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거부하면 재고해보려고 하네.] “…….” [의외인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내 참모들 입장에선 소령도 사기관리의 대상이라는 거지.] “아.” [냉정하게 말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긴 싫다는 뜻이야. 귀관은 실질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인적자원이니까.] 대통령이 어조를 바꾸었다. [지금 이 시기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귀관에겐 단기간에 과도한 부담이 집중됐어. 이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더군.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그럼 귀관이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가 뭘까……. 결론을 내리긴 쉬웠네.] 사실과 조금 다르긴 해도, 긍정적인 착각이었다. 겨울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 한겨울 중위……그때 귀관은 중위였으니. 아무튼 한 중위는 미국인이 아닌 동포들을 지키고자 싸울 뿐이다. 그의 영혼엔 조국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애국자가 아니다. 그를 영웅이라 부르지 마라, 라고. 꽤 재미있는 주장이었네.] 대통령의 낮은 웃음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남들에게 대가 없는 애국을 요구하는 건 대개 가장 비애국적인 인간들이지.] 그리고 그는 케네디를 언급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라. 오해하기 쉽지만 이 격언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니야. 다만 순서를 바꿔보라는 요청에 불과해. 한 소령 귀관은 이미 국가에 넘칠 만큼 많은 것을 해주었어. 그 대가를 지금 다 지불하진 못할지언정, 최소한의 배려는 해줘야 합당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러니 부담 없이 말해보게.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판단이 필요하기도 하고.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은 있을지, 기존 병력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무리는 없을지.] “…….” 조안나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당신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 전보다 친해진 만큼 몸짓에서 마음을 읽기도 쉬워졌다. “능력은 충분할 겁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고요. 그분들이 원한다면 보내주세요.” [그런가.] 대통령의 말은 한숨을 닮았다. [이걸 미리 말해줘야겠군. 동기부여는 중요하니까.] 동기부여? 아직 뭔가 남은 건가?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난민 구호 체계를 현재의 직접적인 관리에서 지도자에 대한 예산지원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맥밀런 대통령이 언급한 것은 공화당 대선후보의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난민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지원을 중단하고, 성과를 올리는 지도자에게 예산을 할당하자는 주장. 난민들 사이에서의 무한경쟁, 적자생존을 촉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보수적인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진보적인 시민들 일부로부터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던가. 사람은 약하고, 겁에 질리면 어쩔 수 없었다. “네. 방송으로 들었습니다.” [그걸 조만간 도입하게 될 수도 있어. 시민들의 지지가 워낙 뜨거워서. 대부분의 난민들에게는 안 좋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소령에겐 유리한 내용이 되겠지. 그 점이 더 큰 문제라네. 귀관의 인기가 독이 되는 경우라고 해야겠군. 예산은 예산대로 아끼고, 귀관이 받는 혜택은 더욱 늘리는 방법이니 누가 싫다고 하겠나.] “견제하시는 거로군요.” [그 말종의 당선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될 걸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라는 표현에서 겨울은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착한 사람들이 더 줄어들기 전에…….’ 상념은 짧은 시간에 미처 완성되지 못했다. 대통령이 말이 겨울의 사색을 끊었다. [다만 거기서 끝내진 않을 작정이야.]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지원을 예산으로 한정짓지 않는 거지. 충분한 성과를 이룬 난민 지도자 혹은 집단에 한정하여, 속령 또는 준주를 수립할 권리를 내어주려고 하네. 여론을 감안할 때 준주 쪽의 가능성이 좀 더 높겠군. 속령이면 자네와 멀어진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준주의 경우엔 좀 더 쉽게 51번째 주로 승격될 수 있겠지.] 미국에서 군 복무경력이 있는 자, 특히 전쟁영웅은 정계진출에 큰 이점을 얻는다. 즉 언젠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얻게 될 거란 의미였다. 자치가 가능한 영역을 확보하여 난민들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혜택일 것이었다. 로드아일랜드만큼 작은 면적이라도 몇 개 국적의 난민들을 수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 과연 거기까지 가능할까? [어렵진 않을 거라고 보네. 이미 하원의장과 합의한 사안이야.] 겨울의 의문에 대한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 분, 공화당원 아니셨던가요?” 바람결에 날리는 신문지, 지나가는 뉴스 등에서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비록 소속은 공화당이라도 그쪽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거지. 애초에 공화당에서 밀어주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어서……. 그가 상대였다면 나도 여기까지 걱정하진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군요…….” 이 정도면 암살 스캔들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겨울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미화되기 쉽다. 그 후의 여론이 어떻게 튈지 모르는 이상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러니 부러지지 말라고 해주는 말일세.] 반쯤은 개인적으로 대화를 해보고 싶었을 뿐이지만. 대통령이 말미에 드러내는 사심이었다. [전에 D.C에 왔을 때 호텔에 가둬두다시피 했던 건 미안하네. 다음 서훈식에서 다시 만나거든 같이 앉아 느긋하게 맥주나 한 잔 하세나. 꿀을 넣어 직접 만든 맥주가 참 맛있거든.] “기대하겠습니다.” [잠깐이나마 즐거웠네. 가장 잔인한 달의 끝자락에 따뜻한 계절이 돌아와서. 이만 끊겠네.] “…….” 귀를 기울이던 조안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 건 알겠는데, 그 다음은 뭘까. 겨울이 의문을 느끼자, 「영어」에 의한 지력보정이 시야에 반투명한 문자열을 출력한다. 겨울이 외우지 못한 시, 황무지의 일부였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 219 [219화] #4월의 끝 (6)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독립중대가 도착하기까지는 특별한 활동 없이 기다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진 못했다. 이튿날, 로저스 대령이 새로운 임무를 하달했다. “한겨울 소령. 귀관은 당분간 적의 머리를 사냥해줬으면 한다.” 책임자가 바뀐 상황실에 지도가 펼쳐졌다.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일부 장교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작전구역이 상상 이상으로 광활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혹은 그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거나. “목표는 이 일대의 변종집단으로부터 조직적인 행동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교활한 것들이 지능적으로 공습을 피하고 있지만, 지상에서의 관측까지 무력화하진 못하겠지.” 교활한 것(Tricky thing)은 당연히 트릭스터를 말한다. 놈들의 의사소통은 짧고 폭발적이었다. 단말마의 비명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넣을 정도이니. 비행체 탐지를 겸한 전파방해 또한 그러했다. 전파 추적 미사일에 적잖은 수가 폭사했으나, 이제는 대응 요령을 알았다. 이것들만 사라진다면 생존자 구조는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지나간 세계에 비하면 그럼블은 적고 트릭스터가 많아. 그저 새로운 특수변종이라서 그렇게 정해졌다……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 안일하겠지. 특수변종의 개체 수는 정해진 쿼터 내에서 필요 때문에 조절된다고 봐야 하나.’ 세계관은 언제든 변화, 개선, 확장될 수 있으나, 그 근저에는 현상을 관통하는 어떤 원칙이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것이 기획 단계에서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기획을 접수한 관제인격이 실제로 세계관을 구성하는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령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작전엔 은밀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차량지원은 없다. 투입할 병력은 소령이 기존에 이끌던 기동대로 제한한다. 범위와 기간 모두 소령의 재량으로 정하되, 가능한 멀리까지 진출해야 할 것이다. 구조보다는 수색 격멸을 우선 한다. 결과적으로는 그 편이 훨씬 더 많은 인명을 구조할 수 있을 테니까……. 뭔가, 대위? 아직 질문을 받을 때는 아닌 듯 한데.” 손을 든 사람은 랭포드 대위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한겨울 소령을 포함해도 기동대는 고작 다섯입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간의 전투기록을 검토하고 내린 결정이다. 내가 오기 전에도 소령 혼자, 혹은 기동대만 데리고 치른 전투가 많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있나?” “경우가 다릅니다. 그동안은 어디까지나 후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투를 수행했잖습니까. 유사시 본대의 지원이 불가능한 거리까지 진출한 적은 없었습니다.” 흠. 대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령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한다. “모든 군사작전에서 안전이 보장될 순 없잖나.” “무모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 지휘관으로서 막무가내로 무모한 명령을 내릴 순 없지.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1초에 한 명 꼴로 죽는다는 추정도 있더군. 사실이라면 앞으로 보름 이내에 남은 생존자 전체가 몰살당한다. 그 숫자만큼 적이 늘어날 것이고. 다소 과감한 조치가 필요한 시점 아닌가?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몇 명이 죽었을까?” 그리고 시선은 겨울에게로 돌아왔다. “병력을 적게 투입하는 대신 공중지원은 충분히 제공된다. 할당지역 상공엔 주야를 불문하고 최소 1기 이상의 건쉽(AC-130)이 체류할 것이며, 필요에 따라 아파치나 공격기 편대를 띄우기로 되어있다. 착륙지점의 안전이 확인된다는 전제하에 헬기 수송을 요청할 수도 있고.” 공군에게 할 일이 없다던 대통령의 말을 떠올리는 겨울이었다. 인원으로 소총수 1개 조(team)에 불과한 기동대가 받을 지원 치곤 위력과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변종들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겠는데…….’ 항공, 포격 지원을 요청할 때의 안전거리는 최소 600미터로 규정되어 있다. 그 이하는 데인저 클로즈(Danger Close), 즉 오폭을 맞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 구조를 병행할 때 과연 그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는지. 공격헬기라면 더 정확한 지원이 가능하니, 정 불가피하다면 그쪽에 의지해야 할 것 같다. 애초에 어지간히 거대한 집단과의 조우가 아니고서야, 탄약 풍부한 겨울이 위태로워질 일은 없을 테지만. “이미 레인저, 씰, 레이더(Raider), 24STS, A 팀 등에서 차출된 다수의 임무부대가 비슷한 임무에 투입되어 있다. 이곳 또한 적정 수준의 전력을 확보한 뒤에는 추가 수색대를 편성해 내보낼 예정이고. 한 소령이 생각하기에도 무모한 것 같은가?” “아닙니다.” “좋아.” 로저스 대령이 가볍게 끄덕인다. 걱정해준 랭포드에겐 미안한 일이나, 위성통신장비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임무였다. 원거리 저격과 화력유도 중심으로 교전을 치른다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변종집단이 겨울의 감각을 피해 접근하기도 어려운 노릇이고. 앞서 한 차례 검토했듯이 보급 또한 수월하다. 말먹이는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사람 먹을 식량과 탄약만 제때 공수 받으면 된다. “수색을 우선시하라고는 했지만 구조임무를 도외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매순간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귀관이 판단해야 한다.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나 많은 임무니까. 따라서 대부분의 결정은 용인될 것이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도록.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네.” 어쩐지 모호한 표현. 대령은 지금 간접적으로 법적 책임 문제를 언급한 것일 터다. 어지간한 문제로는 처벌받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말. 이는 대령보다 훨씬 윗선, 적어도 사령부 레벨에서 내려온 지침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걸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곤란했다. 공보장교가 동석한 자리였다. 편집을 거치더라도 외부에 공개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작전명은 프레벤티브 스캘핑(Preventive Scalping)이다.” 예방적인 머리가죽 벗기기라니. 겨울은 상황을 떠나 조금 실소하고픈 기분을 느낀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이제야 말하는 걸 보면 대령의 소감도 알 만 하다. 이름이야 어쨌든, 적의 사고능력 마비가 목적이니 구상 자체는 합리적이었다.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귀관은 바로 나가서 필요한 장비를 수령해라. 준비가 완료 되는대로 보고하도록. 유사시 합류할 지점과 추가 전달사항은 출발 전에 통보해 주겠다.” 브리핑은 계속되었지만, 시간을 아끼려는지 겨울을 먼저 내보낸다. 포트 로버츠의 래플린 대령과는 많이 다른 스타일이었다. 래플린은 겨울을 잃을 가능성을 부담스러워했으나, 로저스에게선 그런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개인적인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 냉정함을 오랜만에 접하는 겨울이었다. 임시로 보급 관리를 맡은 중위가 겨울을 안내했다. 공수물자가 분류된 곳에서 이미 한 번 개봉된 상자를 연다. 가장 먼저 넘긴 것은 표적획득용 관측장비였다. “혹시 이런 종류의 장비를 다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겨울은 관제인격의 권고에 따라 고개를 저었다. 조작법은 복잡하지 않지만, 이번 세계에서는 처음 접하는 물건이다. 익숙하다고 해버리면 이상할 터였다. “역시 그렇군요. 딱히 어렵진 않습니다. 여기 망원경을 닮은 것은 트리거(TRIGR)라고 부릅니다. 버튼 한 번 누르면 좌표가 찍히는 물건입니다. 그대로 불러주면 그 다음은 공군이 알아서 처리할 테죠. 자세한 조작법은 대원들이 있을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트리거보다 본격적인 관측 장비가 하나 더 있었다. 중위는 LLDR이라고 불렀다. “이건 위성단말에 연결해서 쓸 수 있는데, 따로 불러줄 것도 없이 좌표가 바로 전송됩니다. 트리거보다는 다루기가 복잡합니다만 기능 자체는 동일합니다. 모드 전환이나 표적속성을 입력하는 과정이 추가되었을 뿐이죠. 1시간 정도의 교육이면 전 대원이 쓸 수 있게 될 겁니다.” 그 외에 새로운 화기를 고를 기회가 주어졌다. 중위는 겨울의 선택에 놀라워했다. “그걸 가져가시겠습니까?” “네. 트릭스터 정도는 멀리서 한 방에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야 그렇겠지만, 휴대나 사용이 부담스러우실 듯 해서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예비무기로 챙겨가는 거예요.” 겨울은 길이가 1미터 25센티에 이르는 대물저격총(M107CQ)을 들어 올렸다. 탄창 없이도 어지간한 소총보다 네 배 이상 무거운 물건인데,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마저도 길이와 무게를 줄여놓은 물건이었다. 매우 굵은 탄(12.7mm)을 사용하므로 위력은 소총의 열 배를 넘는다. 얇은 장갑판을 관통하거나, 벽을 뚫고 그 뒤의 사람을 죽이는 흉기였다. 그만큼 실제 사용이 까다롭기도 하다. ‘소음기를 달아도 달지 않은 소총만큼 시끄러운걸.’ 즉 아무렇게나 막 써도 좋을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위장을 잘했거나, 치고 빠질 땐 매우 유용하다. 어쨌든 통솔력을 발휘할 개체만 사살해버리면 남은 변종집단의 추적은 엉망진창일 것이었다. 이쪽을 끝까지 발견 못 할 가능성도 높다. 실전에서 이 총을 쓰게 된다면, 최소 수백 미터 바깥에서 단발 사격으로 끝낼 작정이었다. 보급장교가 탄창 다수와 100발들이 탄통을 꺼냈다. “그럼 철갑고폭탄을 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 화력이면 구울이나 트릭스터쯤은 대충 쏴도 죽겠죠. 그럼블을 상대로는 소용없겠지만, 목구멍에 박아 넣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인후를 뚫고 뇌 아래에서 터질 테니까요.” 중위가 자신의 뒷덜미를 쿡쿡 찔러 보인다. “직접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말은 이렇게 해도, 겨울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이후 기동대원들을 상대로 운용교육이 진행됐다. 내용은 관측장비와 위성통신단말의 사용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딱히 어렵진 않았다. 관측장비(LLDR)는 좌우로 한 번, 상하로 한 번 꺾으면 현재 위치가 잡혔고, 그 상태에서 바로 표적 좌표를 찍으면 그만이었다. 통신단말 쪽은 일반적인 무전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중량을 줄이고자 숙영장비는 휴대하지 않고, 각자 침낭만 하나씩 챙기기로 했다. 비바람을 피해야 할 땐 민가를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외로운 농장이 워낙 많기도 했다. 준비 완료 보고를 받은 대령이 당부했다. “정기연락을 유지하고, 구조가 급한 상황이 아닌 한 직접적인 교전은 최대한 회피하도록.” “알겠습니다.” “귀관이 국가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자신이 겨울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무적이고, 필요하므로 말한다는 듯한 태도. 긴 경력에 자부심을 느끼는 군인이 보일 법한 모습. 자기 자신조차 도구로 여기는 부류다. 사람이 도구가 되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출발을 앞두고, 공보장교가 굳이 찾아와 겨울을 멈춰 세웠다. 기대 반 걱정 반인 낯빛. “충전지는 넉넉하게 챙겼겠지?” 겨울은 맥과이어를 향해 어설픈 웃음을 만들었다. “그동안 쌓인 전투기록으로 부족하셨나 봐요?” “대단히 신선한 소재라고 호평인 모양이야. 서부개척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나. 마침 배경도 캘리포니아니 이보다 적절할 수 없겠지.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아침 먹었다고 점심을 거르진 않지 않나.” 그리고 그는 한숨지었다. “그때 그 어릿광대가 여기까지 왔군.” 산타 마리아 이래 오랜만에 듣는 호출부호였다. ‘그러고 보면 이번 작전에 레인저도 참여하고 있다고 했었지……. 아니, 작전구역이 중첩될 리 없으니 만날 가능성은 낮겠구나. 병력 손실 때문에 부대가 교체되었을 수도 있고.’ 공보장교가 말했다. “부탁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 아직은 죽어도 좋을 때가 아니죠.” “아직은?” 미심쩍어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서, 겨울은 수십 개의 좌표가 찍힌 전술정보 PDA를 확인했다. 각각의 좌표는 최근에 트릭스터의 방해전파가 발신되었던 위치를 나타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 뜬 전자전기들이 새로운 좌표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쫓을지는 전적으로 지휘관인 겨울의 재량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성탄전야의 추격전을 닮았다. 포트 로버츠에 의도적으로 잠입하려던 트릭스터는, 짧게 끊어지는 전파를 의도적으로 발신하여 자신의 위치를 노출했었다. 사정과 규모가 다를지언정 추적과정 자체는 유사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좌표까지의 거리는 채 10킬로미터가 되지 않았다. 시간으로는 약 30분 전. 동일개체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좀 더 묵은 좌표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선을 그린다. 즉 뚜렷한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 힐끗 본 모랄레스 상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송기를 포착하고 쫓아온 거라면 곧장 거점까지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겨울이 동의한다. “전파방해를 걸었다고는 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우선 이 녀석부터 찾아내죠.” “Hooah.” 탄약을 충분히 받은 대원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돌아올 즈음엔 동맹 사람들이 도착해있으려나. 겨울은 엑셀에 박차를 가했다. # 220 [220화] #4월의 끝 (7) 항상 지나던 길에 알파카 무리가 없었다. 겨울은 주먹을 들었다. “정지.” 처음부터 인간에게 길러져 정주성(定住性)이 강해진 동물들은 폐허가 된 목장 인근을 맴돌았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일종의 조짐으로서 눈여겨보았다. 무리가 사라진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그것이 과연 야생의 포식자일까? 문명의 빈터에 치명적인 짐승은 드물다. 눈으로 흔적을 좇던 겨울이 수풀을 헤집었다. 탄약이 충분해 철봉을 두고 오긴 했으나, 소음기를 끼운 대물저격총의 길이가 1미터 55센티에 달하여 안장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굽이 두 갈래인 발자국 사이에 역시나 두 발 달린 역병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발 자국이 섞여 있는데, 혹시 생존자들이 쫓기는 건 아니겠습니까?” 억양만으로 구분되는 ‘에일’ 알레한드로의 질문.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여길 봐요. 전투화 밑창의 패턴 치곤 지나치게 밋밋해요. 이렇게 찍히려면 아주 오랫동안 닳아야 하는데, 중부 평원 전선은 최근에 무너졌잖아요. 아마 몇 놈이 감염 이전부터 신고 있던 신발이겠죠. 평범한 변종은 신발 끈 푸는 방법도 모르고, 풀 이유도 없는걸요.” 그러므로 전투를 준비할 때다. 보이는 흔적으로는 소규모였다. 이것이 전부일지, 아니면 거대 집단에 선행하는 첨병에 불과할지는 찾아봐야 알겠다. 이때 전술 PDA에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다. 강조된 타겟 일부가 생존자를 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겨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존자들이 직접 연락을 취했을 경우 굳이 추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강조된 타겟 인근에 머리가죽을 벗기는 중인 다른 유닛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놈들의 신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나?’ 트릭스터의 방해전파는 동시에 여러 주파수를 아우른다. 즉 어떤 신호를 보낼 때도 다수의 채널을 한꺼번에 이용한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메시지를 일정 규칙에 따라 조각내어 뿌리는 셈이다. 인간이 이용하는 주파수 도약의 개념에 가깝고, 그만큼 해독하기 난해해진다. 하지만 관찰할 시간은 길었다. 시간과 예산을 투입해서 안 되는 일은 드물다.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정부의 힘은 때때로 겨울의 기대를 웃돌았다. 어쨌든 갱신된 정보 가운데 당장 접근 가능한 대상은 없었다. 작전범위가 워낙 넓어서 하나하나의 간격이 지나치게 먼 탓. 여기선 이대로 움직여도 무방할 듯하다. “혹시 트릭스터의 흔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래도 전파가 닿는 범위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은 있어요.” 설령 없더라도 처리하고 가는 편이 낫다. 중대의 거점이 가까우므로. 탄약이 충분한 이상 어지간한 규모로는 부대를 넘볼 수 없겠으나, 먼저 공격을 당하면 필연적으로 소음이 커진다. 습격이 도미노처럼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 운 나쁘면 여러 집단이 합쳐질 것이다. 겨울은 「추적」으로 기동대를 이끌었다. 어느 순간부터 핏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발자국은 줄어들었다. 두 발로 걷는 것들의 흔적만 남았다. 선선한 바람이 악취를 실어온다. 아직은 겨울에만 선명했다. 이제는 흔적을 쫓지 않아도 된다. 「전투감각」이 풍속과 냄새의 밀도로 대략적인 거리를 잡아냈다. “썩은 내가 나는군요.” 모랄레스가 콧잔등을 찡그린다. 대원 중 가장 빨랐고, 계급값을 하는 예민함이었다. “저기 있네요.” 겨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 수관 아래의 그늘에 변종들이 모여 있었다. 대원들은 방향을 알고도 바로 식별하지 못했다. 거리는 약 250미터. 수풀이 우거진 만큼 숨은그림찾기에 가까웠다. 모랄레스가 긴장감 어린 탄식을 뱉는다. “햐, 저게 보이십니까? 저것들이 왜 굳이 먹이를 저기까지 끌고 갔을까요?” “낮이잖아요. 놈들 나름대로 공습에 대비하는 거겠죠.” “What the…….” 한층 더 깊어진 탄식. 역병의 영리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을 텐데. 어느 종말에서든, 하늘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인류가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역병이 버려진 도시와 그늘을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겨울은 대원들에게 자세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일반 변종의 시력은 인간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다. 구울이라 하더라도 이쪽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기동대원들에게 말에 탄 채로 엎드리거나 눕는 요령은 아직 익숙지 않다. 사실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내려서 눕게 만드는 정도는 가능했다. 말은 위험한 장소에선 눕지 않지만, 기수를 신뢰하는 경우엔 지시에 복종한다. 숨 쉬는 죽음의 악취에 불안해하면서도 옆으로 드러눕는 모습들은 꾸준한 훈련의 성과였다. “이대로 공격합니까?” 팽팽하게 당겨진 병사들이 교전을 각오한다. 그러나 겨울이 만류했다. “기다려요. 여기서 보이진 않아도, 다른 무리가 있는 것 같으니까.” “예?” “봐요. 먹잇감에 손을 안 대잖아요.” 보정을 받으면 널브러진 알파카들이 맨눈으로도 잘 보이지만, 대원들은 아니다. 의아해하는 슐츠에게 저격총에서 분리한 스코프를 넘기는 겨울. 10배율로 적을 살핀 슐츠가 갸우뚱한다. “정말이군요. 뭔가를 기다린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사이에 겨울은 시야를 좀 더 넓혔다. 아무리 보정이 있어도 주목하는 시간이 길지 않으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식탐을 인내하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구울, 혹은 그에 준하는 개체가 섞인 집단이었다. 놈을 미리 찾아두어야 한다. ‘찾았……다. 바깥부터 하나씩 조용히 처리하긴 힘들겠네.’ 강화변종은 수관 바로 아래의 가지를 밟고 있었다. 종군기자들을 쫓던 놈들과 달리, 잿빛으로 문드러진 괴물은 나무를 타고 오를 만큼 기민했다. 구울은 고개를 휙휙 꺾어댔다. 사방을 감시하는 모양이다. 기동대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 혹은 애초에 숙주의 눈이 썩 좋지 않았었거나. 아무리 강화변종이어도 기본 바탕이 나쁘면 어쩔 수 없다. 같은 종류 사이에서도 지능의 차이가 있는 것이 그 증거. “하퍼, 슐츠. 측후방을 경계해요.” 바람이 향하는 방향으로부터의 접근은 겨울도 알아차리기가 늦을 수 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흘렀다. 쉴 때가 드문 바람이 방탄 헬멧에 위장으로 꽂힌 풀들을 흔들었다. 자세 불편한 병사들이 몸을 뒤척이고, 오후의 햇살에 목덜미가 화끈거릴 무렵. “옵니다.” 빙고. 메마른 기쁨, 사나운 미소를 드러내는 대원들. 모랄레스가 중얼거렸다. “매복한 보람이 있군요. 좀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찾아내다니.” 짙푸른 수관 아래 마침내 트릭스터가 나타났다. 사실 겨울은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만으로 특수변종의 등장을 확신하고 있었다. 구울이나 그럼블이 이끄는 무리는 간격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으니. 오직 트릭스터만이 전파수신범위, 한 시간 넘게 걸릴 간격에서 서로 다른 무리를 통솔할 수 있다. ‘그래도 상당히 느리구나. 열량을 아끼는 건가?’ 인간 사냥을 우선시하다 보니 영양 공급이 여의치 않았던가 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괴물들의 변화는 비단 전투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신진대사 억제만 해도 그렇다. 일반적으로는 완전히 굳거나, 움직이거나, 둘 중의 하나지만, 강화종은 그보다 자유롭게 열량 소모를 조절하게 된다. 몸을 굳힌 채로 의식은 멀쩡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무전기는 잠잠했다. 굳이 전파방해 목적이 아니더라도, 의사전달을 위한 발신이 한 번은 있었을 법한데. 어쩌면 전파집중능력까지 습득한 놈일지도. 사실이라면 감마 등급일 확률이 높다. 이미 곱씹은바, 등급의 상승이 항상 전투력 증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가치 있는 사냥감이었다. “중위……아니, 소령님. 공습을 요청할까요? 직접 처리하긴 약간 까다롭겠습니다.” 모랄레스가 통신장비를 가리켰다. 까다롭다는 말은 최근에 감염되었을 게 명백한 개체들 때문이었다. 방탄복에 방탄모를 쓴 놈들은 그렇다 쳐도, 센추리온 장갑복을 입은 중보병 두 명은 대체 어쩌다 감염된 것인지 모르겠다. 어딘가 틈이 벌어졌으려나. 소총탄으로 죽이긴 힘들어 보인다. “안돼요. 거리가 가깝잖아요. 움직이는 도중에 노출되면 귀찮아져요. 항공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해보고 싶긴 한데……. 지금은 때가 아니네요. 곤란한 타겟은 내가 제거하죠.” 오폭에 당하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져야 한다. 발각되지 않더라도 놈들이 도중에 변덕을 부릴 가능성이 있었다. 위치가 바뀌면 공습이고 뭐고 소용없다. 거점과의 거리가 가깝기도 하다. 총성과는 차원이 다른 폭음이 아주 멀리 있는 무리를 끌어들일지도 모르니, 공습은 좀 더 떨어진 곳에서부터 요청하는 편이 현명하리라. 어차피 거리가 250미터이니 일반적인 교전으로도 넉넉하다. 겨울은 저격을 준비했다. “저기 있는 바위가 대략 120미터쯤 돼요. 그 선을 넘어오는 놈들만 쏴요.” 그 정도면 경험 많은 병사들이 명중탄을 낼 법하다. 기준선을 식별한 모랄레스가 답했다. “Hua. 언제든 시작하십시오.” 소총을 옆에 놓고 호흡을 가다듬는 겨울. 필요한 만큼 쏘고 나서 무기를 교체할 요량이다. 특수탄종의 보급 소요는 줄일수록 좋았다. 안정된 조준선 끝에 트릭스터의 머리통이 보인다. 망원렌즈 없이도 선명한 조준이었다. 기나긴 조준선 아래의 들풀이 봄빛으로 선명하게 물결쳤다. 그로부터 바람을 읽는다. 타앙-! 소음기를 통과하고도 선명하게 메아리치는 날카로움. 창백한 머리통이 찰나의 차이로 폭발했다. 퍼억! 보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느껴질 정도의 타격감. 강화등급이 무색한 죽음이었다. 놈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연달아 쏜다. 타앙, 탕! 코끝에 초연이 물씬할 때마다, 묵직한 반동이 어깨를 때릴 때마다, 온 몸이 조금씩 밀려날 때마다 새로운 머리가 박살 났다. 중보병이었던 변종들은 방탄유리 안에서 안면이 터졌다. 두꺼운 보안경이 수백 조각으로 뿌려지고, 찢어지다 만 방호구 안쪽은 핏빛으로 걸쭉하게 흘러내린다. 두 벌의 장갑복은 위장색의 묵직한 수의가 되었다. 캬아아아악-!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구울. 도약을 예측한 사선이 착지하는 순간을 관통했다. 푸학! 피와 살을 토하는 괴물. 움켜쥐는 가슴엔 이미 심장이 없다. 앞뒤로 찢어진 상체가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박힌 탄이 갈빗대를 꺾고 척추에서 터졌는데 핏줄 번진 눈알이 튀어나왔다. 퍼엉! 펑! 감염된 미군들의 때늦은 안식. 더러운 헬멧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철갑고폭탄의 폭압이 두개골과 더불어 보호구까지 날려버린 것. 다음 표적은 복부를 맞았다. 막강한 위력 앞에 방탄복도 무의미하다. 뻥 뚫린 구멍으로 액화된 내장이 쏟아진다. 아직 총을 메고 있던 병사는 자신의 무기와 함께 부서졌다. 사살보다는 파괴에 가까운 연속사격. 무지막지한 화력투사가 소모된 탄약 이상의 안식을 낳는다. “¡Señor…….” 알레한드로가 우울한 스페인어로 신을 찾았다. 괴물이 되었어도 복장은 미군 아닌가. 철컥! 탄창이 비었다. 약실이 열린 채로 고정된다. 열 발을 반자동으로 갈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4.5초. 그 사이에 변종집단의 선두는 무려 50미터나 가까워졌다. 총성을 듣자마자 뛰기 시작한 놈들이다. 역병의 합창단이 밀려온다. 즉각 무기를 교체한 겨울이 우렁찬 테너부터 사살했다. 전신이 근육이며, 아마도 구울 직전이었던 녀석이었다. 강한 놈일수록 빠르게 접근한다. 고로 앞선 순서로 쏘면 충분했다. 툭툭 튀는 탄피가 스물 남짓한 죽음을 헤아릴 무렵, 모랄레스가 외쳤다. “쏴!” 두두둑! 두두두둑! 작고 둔탁한 총성들은 차창에 우박 쏟아지는 소리를 닮았다. 명중률은 높다. 화망에 걸린 변종집단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간다. 발에 채는 시체에 걸려 넘어지는 놈이 부지기수. 그래도 맹목적으로 손을 뻗고 달려올 뿐, 생각하는 놈이 없기에 변화도 없다. 죽음의 파도는 매복지점의 30미터 전방에서 완전히 스러졌다. “모두 수고했어요. 확실하게 정리하고 이탈하죠.” 몸을 일으킨 겨울이 확인사살을 지시했다. “모랄레스는 사령부에 보고해요. 하나 잡았다고.” “알겠습니다.” 위성통신단말이 펼쳐졌다. 교신 도중에 PDA의 정보가 갱신되었다. 감염된 병사들의 시신으로부터 인식표를 회수하려던 겨울은, 이미 죽은 시체의 배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말에 탄 채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간헐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어, 이거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슐츠기 진저리를 쳤다. “그렇겠죠. 아직 쏘지 말아요.” 카메라를 톡톡 두드려 보이는 겨울을 향해 병사들이 거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래도 이런 장면 자체가 가까이서 잡힌 적이 없을 것이었다. 있었다면 벌써 어떤 식으로든 접했을 테니까. 진물이 흐르는 거죽 아래의 꿈틀거림이 마침내 살을 찢어 벌리고 나왔다. 일그러진 새 생명. 케헥! 케헥! 깨애애애액! 젖은기침으로 양수를 뱉어낸 어린 것이 날카로운 울음을 터트린다. 죽은 모체와 연결된 탯줄이 흙바닥에 질질 끌렸다. 겨울이 떨어지라고 지시할 것도 없이, 병사들이 스스로 물러난다. 슐츠가 신음했다. “소령님. 이럴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것들에게 번식능력이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태어나서 얼마 만에 위험해지는지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예전에 포트 로버츠가 함락당할 뻔했던 것도 태아 변종이 원인이었던 걸로 추정되는데요. 이걸 본다면 상황 종료됐다고 방심하다가 당하는 경우도 예방되겠죠.” “으…….” 그 사이에 눈도 아직 뜨지 못한 녀석이 꼬물꼬물 움직여 탯줄을 물어뜯는다. 벌써 이빨이 있다는 게 놀랍다. 감염확산에 필요하다 보니 태아 단계에서 발달하는 모양이었다. 질기고 단단한 살을 오득오득 씹는 내내 새까만 혀를 날름거린다. 감염돌기가 도드라졌다. 그리고 눈을 떴다. 입을 몇 번 짭짭대더니 지켜보는 인간들을 포착한다. 캐액! 사람을 반가워하는 허기. 겨울은 시계를 확인했다. 바깥으로 나와서 채 1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다들 좀 더 떨어져요.” 아타스카데로를 떠올리면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생후 몇 개월이나 지난 놈들이었는지는 몰라도, 제 체고의 몇 배 높이까지 뛰어올랐었으니. 갓 태어난 괴물이 발발거리는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엑셀이 불안하게 머리를 흔들어댄다. 작은 괴물이 마침내 툭 튀어 오르는 순간, 겨울은 단발사격으로 그 정수리를 꿰뚫었다. 무른 뼈가 깨지는 소리. 잠깐의 할딱임. 그리고 정적. 미군 시체들은 이빨 자국이 남아있는 알파카 주위에 흩어져 있다. 인식표를 회수한 겨울이 다음 타겟을 결정했다. 해는 아직 길게 남아있었다. # 221 [221화] #4월의 끝 (8) 사냥 나흘째. 겨울과 기동대는 거점 북쪽으로 약 70킬로미터, 산타 로사 근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고, 충실한 항공 및 정보지원 아래 열아홉 개체의 트릭스터와 두 개체의 그럼블을 제거했다. 변종들의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혼란스러워졌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생존병력은 하나하나 수를 헤아리기 곤란할 지경. 꿰뚫고 지나온 일대에 아직 살아있는 트릭스터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침묵하는 하나」가 아니더라도 조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기동대원들의 분위기는 썩 밝지 못했다. 단순히 힘들고 피곤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적의 특성. 감염체 출산을 목격한 이래 등장한 괴물들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전투력이 약한지만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드는 적이다. 현재 무기력증을 보이는 인원은 증세가 경미한 한 명뿐. 하나 전투피로는 사전예방이 최선이었으므로, 겨울은 어느 시점부터 병사들에게 화력지원 요청을 맡기지 않았다. ‘지금부터 보게 될 광경은 홍보용으로도 못 써먹겠지.’ 항공보급으로 교체된 헬멧 카메라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최고의 업체에서 시간과 비용을 도외시하고 만들었다고. 사연을 알게 된 건 제품 상자 안에 동봉된 편지 덕분이다. 제조사의 경영자가 자필로 써넣은 모양. 가로되, 「값은 받지 않았습니다. 저와 자사의 직원들,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전장을 더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본 업체는 항상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역병의 사생아들을 모조리 죽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역병의 사생아들이라.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지금은 도리어 진실에 가깝다. 국방부 공보처는 이 기록을 편집할 것이다. 겨울은 위성통신단말의 수화기를 들었다. “마리골드, 마리골드.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화력지원을 요청한다. 오버.” 겨울의 호출부호는 한때 그랬듯이 데이비드가 되었다. 이 또한 위에서 내려온 지침. 거인(그럼블)을 쓰러트리는 모습에서 다윗(David)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았다던가.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마리골드. 귀소의 요청을 수락한다. 사격제원 송신하라. 오버.] 유바 시티 근교, 벨 공군기지로부터 즉각적인 회신이 돌아온다. 생존자 구조 작전의 모든 지원요청을 중계하는 곳. 호출부호 마리골드는 기지 북쪽의 골재 광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거창한 측정기는 유사시의 급한 이동에 방해가 된다. 지금은 트리거(TRIGR)를 쓰는 상황. 망원경 비슷한 측정기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적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황혼의 막이 내리는 들판, 어두운 시야에도 불구하고 첨단기기는 목표를 선명하게 감지한다. “좌표, 파파 엑스레이 5-3-0-2, 4-8-3-7. 반복한다. 파파 엑스레이, 5-3-0-2, 4-8-3-7. 목표, 구울이 포함된 미성숙 개체 약 200. 서북서 방향으로 분산 이동 중. 입감했는지?” [확실히 수신했다(Solid Copy). 미성숙 개체가 대부분인 게 확실한가?] “그렇다.” [폭격지점 근처에 아군이 있는지 확인해주기 바란다. 오버.] “현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적의 이동속도와 움직임으로 미루어 가까운 거리엔 생존자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버.” 열량을 아끼는 변종 특유의 느린 걸음들. 활발히 움직이는 수는 적다. 정찰병을 대신하는 녀석들일 터. 마리골드 또한 이를 보고 있을 것이다. 좌표를 수신한 즉시 감시위성의 초점을 조정했을 테니까. 각국 정부가 기증한 위성이 넘쳐나는 마당이었다. [알겠다, 제원을 전달하겠다. 잠시 대기하라.]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십여 초가 흐른 뒤에 요청 결과가 돌아왔다. [마리골드 FAC(항공통제관)으로부터 데이비드 액추얼에. 호출부호 리퍼 1, AC-130 2기가 IP 후드를 경유하여 작전지역 상공으로 진입한다. 브레이크. 105밀리 곡사포 2문, 30밀리 기관포 2문, 클러스터 유도탄 4발, 레이저 발사체계 2문이 준비되어있다. 현시각부로 귀소는 비컨을 작동시킬 것. 반경 1클릭(킬로미터) 내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겠다.] 비컨(Beacon)은 병사 전원에게 지급된 적외선 식별장치를 뜻했다. 기동대원들이 겨울의 수신호를 따른다. 달칵. 스위치를 넣어도 겉으론 변하는 게 없다. 그러나 날개 달린 포병(AC-130)의 모니터 화면에서는 반짝이는 별빛처럼 보일 것이다.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상공에서도 이런 식으로 정밀한 포격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레이저라고?’ 괴물들을 상대로 쓰기엔 영 과분한 무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에선 필요할 것도 같았다. 적과 아군이 아주 근접했거나, 심지어는 마구 뒤섞인 상황에서조차 비컨만 있다면 지원사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체의 강화판을 태우는 데 딱히 고출력일 필요도 없다. 번쩍. 최초의 포격은 벼락을 닮았다. 설익은 밤이 번뜩이더니, 포탄 내리꽂히는 파공음과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연달아 밀려온다. 콰르릉! 쾅! 미세한 시차를 둔 한 쌍의 공중폭발. 강철 파편의 폭우가 넓은 땅을 두들겼다. 변종들의 넓은 간격이 바로 이때를 대비한 것이었겠으나, 그걸 무시하는 과잉화력이었다. 휘말린 숫자만 마흔 이상. 찢어진 살, 박살난 뼈, 흩어진 내장 따위가 우박처럼 뿌려진다. 이제 「환경적응」을 습득한 겨울에겐 대낮 같은 시야였다. 끄아아아아악-! 앳된 비명들이 중첩된 거리에서 메아리친다. 그 아우성을 겨냥하여, 더욱 가느다란 죽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서보다 작지만, 그래도 수류탄 이상인 폭발이 호흡마다 서너 발씩 작렬하는 광경. 한 발에 반드시 하나 이상을 죽이는 것 같다. 아주 멀리서 쏘는 것임을 고려하면 뛰어난 조준사격이고, 굉장히 높은 살상효율이었다. 매 탄에 살의를 담아 날리는 건쉽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포구화염을 일렁이며 불타오르는 궤적을 그렸다. 얼마 없던 구울은 이것으로 완전히 몰살당했다. 체구가 작은 것들 사이에 유독 건장한 강화체들이라 구분하기 쉬웠던 탓이었다. 또 한 차례 밤이 진동한다. 이빨 저리는 폭음이 바람을 흔들고 지나갔다. 군데군데 잔불이 남은 평야에 자그마한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달음질친다. 통제력이 사라진 지금 어떤 도주에도 일관성이 없다. 그것을 아는 저편 하늘에서는 몰이사냥을 시도했다. 빠지는 앞길마다 제압사격을 퍼붓는 것이다. 아둔한 놈들은 죽음을 피해 도망칠 따름이나, 결과적으로 사선(射線)의 창살에 갇혀 뱅글뱅글 도는 꼴이 되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겨울은 승조원들의 분노를 느낀다. “아주 작정하고 퍼붓는군요. 이 정도 지원을 받은 적이 드물었는데.” 굉음의 갈피에 들려오는 희미한 감상은 슐츠의 것이었다. 그의 얼굴엔 어둠이 가리지 못하는 그늘이 있다. 아기 변종의 죽음으로부터 유달리 침울해진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겨울은 그를 오래 보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생길 것이다. 변종의 수가 격감하자, 천공에 희미한 광선이 그어졌다. 따로 떨어진 놈들에 대한 레이저 사격. 운용시험을 겸하는 공격일 것 같다. 첨단 광학병기가 괴물들을 상대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영화였다면 진한 색으로 그려졌겠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투명한 빛이었다. 눈에 보이는 궤적은 그저 공기 중의 먼지나 수분이 빛을 산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중당하는 표적은 이야기가 달랐다. 하얗고 찬란하게 타오른다. 손발이 묶이지 않은 화형. 정밀한 자동조준 탓에 아무리 뛰어도 벗어날 수 없다. 광선에 지져지는 절규는 어느 것 하나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길어도 5초 이하. 지글거리는 사체가 차곡차곡 늘어났다. 일부가 하필이면 기동대 매복지점을 향해 질주한다. 보정을 받는 겨울의 시력은 시칠리아의 어부들을 능가했다. 피가 끓고 살이 타는 어린 죽음들이 망원경 없이도 선명하다는 뜻이었다. 벌거벗은 몸뚱이, 갈비뼈 두드러진 앙상함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들이 저마다 베트남 전쟁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소이탄에 전신화상을 입은 어느 소녀의 유명한 사진을. 마지막 시체가 누운 뒤에, 벨 공군기지에서 무전이 들어온다. [마리골드로부터 데이비드 액추얼에. 표적 상태를 확인해주기 바란다.] 겨울이 전장을 차분히 살피며 응답했다.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사격임무 종료. 목표 집단의 전멸을 확인했다. 지원에 감사한다.” [카피. 사격임무 종료. 곧 소방기를 보내겠다. 마리골드 아웃.] “소령님. 이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교신을 마치기 무섭게 알레한드로가 묻는 말. “사흘 전부터 어쩐지 애새끼들만 마주치게 되는 거야, 탄약도 없이 빌빌대는 생존자들 쫓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평범하게 감염된 아이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몇천 마리를 잡아 죽이는 동안 단 한 놈도 옷 입은 꼴을 못 봤으니까요.” “…….” 일병의 말은 겨울의 예상과 같았고, 대원들이 공유하는 불안이기도 했다. 마리골드에 표적 정보를 불러줄 때, 약간의 의구심으로 재확인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었다. 이번에도 어린 것들 뿐이냐고. 나이 어린 개체가 이토록 많은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신발 끈도 못 푸는 녀석들이 옷을 벗었을 린 없습니다. 다른 놈들을 벗겨줄 리는 더더욱 없고요. 거치적거려서 찢어버리면 또 모를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것들 전부가 알몸인 건 비정상적입니다. 하다못해 고무줄로 된 속옷이나 양말의 발목 부분이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에일, 지금 이 상황이 뭘 뜻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모르겠어서 소령님께 여쭙는 겁니다. 전 심지어…….” “심지어?” “서부해안 감염 이전부터 애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한 게 아닌가 하는 미친 생각까지 듭니다.” 모겔론스가 상륙한 뒤로 고작 1년 좀 넘게 흘렀을 뿐이다. 즉 변종 간의 번식으로 태어난 것들이 초등학생, 중학생쯤의 연령으로 자라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는 뜻. 그러므로 히스패닉 일병의 우려를 터무니없다고만 할 순 없었다. 본토 감염 이전에도 미국은 난민과 불법이민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두운 시대의 아이들은 버려지기 쉽다. 히스패닉에게 더욱 절실한 화두였다. “글쎄요.” 겨울의 시각은 다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성체 중에서도 나체인 것들이 꽤 있었어요. 일부에 불과했지만, 항상 일정 비율로 눈에 띄었던 것 같네요. 갈수록 그 수가 늘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체로 감염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을까요?” “그럼…….” “인체실험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숫자라고 봐요. 차라리 이것들의 성장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거나, 빠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어요?” 물론 이쪽이 훨씬 더 끔찍한 가정이었다. 모랄레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건 굉장히……암담하군요. 제기랄. 저것들을 아무리 죽여도 오히려 숫자가 늘어날지 모른다는 말씀이잖습니까.” “아뇨. 꼭 그렇지도 않아요. 어린놈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나타난 건 아마 지금이 처음일걸요.” 태아 변종만 해도 그렇다. 흔하게 나타났다면 이제 와서 병사들이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터. 아타스카데로와 에이프릴 퍼시픽이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에일은 패잔병들을 쫓는 덴 작은 놈들로도 충분해서 그럴 거라고 했지만……. 그게 사실이더라도, 여유가 있으면 당연히 성체 위주로 나오는 게 정상이에요. 이걸 아직 다 크지도 않은 것들을 사냥에 동원할 만큼 여력이 없다……고 해석하긴 무리일까요?” “어…….” “알잖아요. 봉쇄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뭣보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라곤 해도 캘리포니아 방면 한정이고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프로펠러 엔진 소음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지상에 남아있는 불씨를 보고 항로를 바로잡은 항공기들이 높은 고도에서 물을 뿌리며 지나간다. 마리골드가 보내겠다고 한 소방기들이었다. 생존자들이 흩어져 폭격도 함부로 못 하는 마당에, 수백 에이커를 태우는 대형화재가 나버리면 기껏 살아남은 이들이 숯덩이가 될 것이었다. 고기를 태운 냄새가 초연과 함께 번진다. 고약한 바람이 지나간 뒤에, 겨울은 다독이는 격려로 말을 맺었다. “다들 기운 내요.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전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만은 아닐 테니까요.” # 222 [222화] #4월의 끝 (9) 전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닷새째에 겨울은 자신의 추측을 뒷받침할 새로운 증거들과 조우했다. “이건 혹시……특수변종일까요?”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 미심쩍어하는 모랄레스. 메이슨 일병이 대꾸한다. “아까도 그렇고, 단순한 병신 아닙니까?”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겨울의 경험상 후자에 가깝다. 눈앞에 쓰러진 변종은 두꺼운 근육질의 팔이 넷이나 되었다. 그만큼 위협적인 상반신이었으나, 전후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아 무게중심이 엉망이었다. 결국 늘어난 팔을 다리처럼 쓰고도 평범하게 뛰는 속도를 냈을 뿐이다. 휘두르는 팔이 강맹할지라도 하체가 흔들리면 의미가 없었다. 메이슨의 말처럼 아까도 그랬다. 아침식사를 방해한 무리에 섞여있던 기형은 눈이 굉장히 많았다. 정상적인 한 쌍 외에 등짝에도 한 쌍이 있었고, 양팔에도 다시 두 쌍이 있었다.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시각정보를 수용하는 능력은 늘어난 눈을 따라잡지 못했다. 특히 팔에 달린 눈들이 문제였던 것 같다. 공격에 팔을 쓸 때마다 방향과 자세가 뒤틀렸으니까. 나중엔 제풀에 지친 괴물이 구토하는 꼴을 보게 됐다. 어지러웠던가 보다. ‘이런 것들을 만나기는 드문 일인데…….’ 기형변종은 세계의 끝을 몇 번이고 넘어오면서도 얼마 만나지 못했던 놈들이었다. 인체를 기능적으로 변이시키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징검다리들. 이는 겨울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세계관의 전모는 경험과 사색으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혼자만의 공허에 박힌 무수한 별을 대가로 「전지(全知)」를 획득하지 않는 한에는. 그러나 한없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여기는 겨울이었다. 병사들에게도 전한다. “평범한 돌연변이는 아닐 거예요. 특수변종이 형성되는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봐요.” “그런 것 치고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만……좀 더 흔히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잡아먹었겠죠. 낭비잖아요.” “……어이구. 그게 진짜라면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요. X같은 괴물 새끼들.” 반문했던 메이슨은 얼굴 가득 혐오를 드러냈다. 과거 이 가설을 검증하고자 정상이 아닌 유해를 찾아 폐허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 밖의 유해가 사방에 널린 세상이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변종의 포식은 뼈를 부러뜨려 골수를 빨아먹는 수준. 그렇게 흩어진 뼈는 서로 뒤섞여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엑셀을 발견한 목장의 다른 유해들이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한 번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역병이 역병을 사냥하는 현장이었다. 잡아먹히는 쪽은 아주 기괴한 생김새였다. 팔도 다리도 아닌 부속지(附屬肢)가 여럿이었는데 그 기능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짐작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미 도태의 대상이다. 이 영상을 확인한 국방부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겨울의 의견이야 어쨌든, 그곳엔 세계관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있을 테니까. 멀쩡한 정부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즉 다 크지도 않은 놈들에 더해, 평소라면 잡아먹었을 놈들까지 싸우라고 내보낸다는 뜻이군요.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걸 보니 괴물들도 봉쇄선을 뚫겠다고 필사적인가봅니다.” 겨울은 모랄레스의 희망을 긍정했다. “최근 며칠간 변종들의 구성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어요. 아마 북쪽 전선의 병력이 재배치된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캘리포니아보다야 못하더라도, 워싱턴이나 오레곤 방면의 병력이 적은 규모는 아니었잖아요. 이걸 믿는다면 동쪽으로 4백만이나 증원된 건데요.” 지속적으로 정보가 갱신되는 신형 전술 PDA를 들어 보이며 하는 말이었다. 물론 전황 관련 정보를 맹목적으로 믿기는 곤란하다. 사기유지를 위한 거짓과 과장이 섞여있을 게 뻔하기 때문. 겨울이 갈 뻔 했던 방역지원 전술지원그룹이 그 증거였다. 대원들도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이토록 그럴듯한 정황증거가 보일 땐 이야기가 다르다. “변종들 입장에선 모든 것을 건 한 판 승부다 이겁니까?” “네. 이번 위기만 어떻게든 넘기면 변종의 밀도가 확 감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열심히 해야죠. 동쪽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말예요.” 겨울의 말에 다들 전보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정말로 잔인한 달이 끝나나?’ 겨울은 대통령의 비유적인 표현을 떠올렸다. 반가움을 나타내고자 시구(詩句)를 빌려 온 것에 불과했으나, 지금 상황과 어울린다는 느낌. 명백한 해방은 본래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지 않을 작전으로 준비되었다. 그러고자 천만이 넘는 대군을 모았으니. 비록 중부평원 일대의 공습이 마비되고, 2백만이 흩어지고, 생존자 사냥에 성공하는 만큼 숫자를 불리는 변종들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치르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역병의 공세를 좌절시킨다면 명백한 해방은 얼마든지 재개될 수 있다. 전선에 균열 탓에 후방이 위험해져서 문제지, 병력만큼은 아직도 충분히 많다. 지금도 새로운 사단들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을 테고. 미국의 본토회복은 이 세계관의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전선 길이가 대폭 감소하며, 반비례로 잉여병력이 늘어난다. 그 여력으로 남진하여 파나마 운하까지 확보하면 북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해진다. 왈! 체구 작은 개가 짖었다. 사색을 접은 겨울이 시선을 돌리니, 집중되는 이목에 당황한 슐츠 일병과 더불어 맹렬하게 꼬리를 흔드는 소형견이 보였다. 전투식량에 포함된 사과 맛 소스의 포장지가 바닥을 구른다. 열량은 높고, 소듐(나트륨) 함량은 낮고, 액상이라 소화시키기에 부담이 적다. 앙상한 개에게 먹일 법한 메뉴였다. 겨울이 손짓했다. “물러나요. 위생상 좋을 게 없어요. 광견병에 걸려있을 지도 모르고.” 주변인물이든 본인이든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를 여러 차례 겪어본 겨울이었다. 광견병의 치사율은 모겔론스에 뒤지지 않았다. 즉 걸리면 죽는다. 뇌사상태로 뛰어 다니진 않을지라도. 일반 전투병에 대한 예방접종은 재앙 이전의 미 본토를 기준으로 중부와 남부 사령부에서만 실시된 것으로 안다. 주기적인 접종이 필요하기도 했다. “어……. 알겠습니다.” 역시나 예방접종을 받지 않았거나 시일이 오래 지난 경우인지, 어두운 표정으로 물러나는 슐츠. 그러나 개가 자꾸만 달라붙어서 곤란해 한다. “구해준 은혜를 아는군요. 상황만 괜찮았다면 데려가서 기를 법도 한데 말입니다.” 말안장 위에 앉아 내려다보는 하퍼의 한숨. 아쉬워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고단한 병사들에겐 자그마한 귀여움이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었다. 개는 모든 사람을 향해 꼬리를 쳤다. 기형 변종에게 쫓기던 녀석이었다. 품종은 아마도 닥스훈트 계열. 기분이 좋은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맑은 소리로 캉캉 짖기도 한다. 통제하지 못할 소음이다. 위생 문제가 아니더라도 데리고 다닐 수 없다. 병사들이, 혹은 부대 단위로 동물을 기르는 일은 비교적 흔하다. 그러나 방역전쟁은 보통의 전쟁과 다르고, 임무 또한 평범한 임무가 아니었다. 겨울은 냉정히 기수를 틀었다. “그냥 두고 따라와요. 근처에서 지원요청이 떴습니다. 생존자들을 엄호하러 갑니다.” 하! 엑셀은 낮은 기합을 바르게 알아들었다. 기동대가 속도를 높인다. 개도 처음엔 신이 나서 나란히 달렸다. 그러나 갈수록 뒤쳐진다. 애처롭게 짖는 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잠시 후엔 바람 너머로 까마득하게 사라진다. 슐츠가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는 길 맞은편으로부터 수십 장의 종이가 날아온다. 스쳐가는 순간에 겨울이 하나를 낚아챘다. 생존자들에게 보급품의 투하위치와 집결 및 후퇴경로, 주의사항, 통신 채널 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런 것이 하루에도 수만 장씩 뿌려지고 있다. 타타탕! 타타타탕! 전방에서 메아리치는 총성. 탁 트인 지평선에서 소대 규모의 병력이 보급 상자를 중심에 두고 변종집단과 교전 중이다. 변종들은 지형에 의지하여 접근한다. 겨울이 대물저격총을 뽑았다. 고삐를 놓았음에도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승마」의 기교, 「무브먼트」의 기민성, 「개인화기숙련」의 정교함. 상체를 틀어 왼팔을 받침대 삼은 라이플은 말발굽이 땅을 찰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렸다. 타앙! 정확한 순간에 이루어진 격발. 아직 먼 거리의 기병대를 모르던 구울의 뒤통수가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갔다. 반자동 사격이 이어졌다. 한 발 한 발이 치명적이다. 크아아아아-! 의외의 그럼블이었다. 그러나 포효의 순간에 당겨진 방아쇠, 일반 소총탄의 200배 가격인 특수탄은 인후를 일격에 관통하는 폭발로 뇌 아래의 연수(延髓)를 파괴했다. 포효 뒤에 마땅한 돌진이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도 움직이지만 버둥거릴 따름. 느린 죽음이었다.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하며 내구성과 방어력이 탁월한 감마등급이라면 모를까, 이쪽 방면은 역시 강화 이전인 것들뿐이다. 그 사이에 기동대원들 역시 총을 뽑았으나, 4배율 스코프(ACOG)로 보아도 여전히 작은 표적들이었다. 어지간히 가깝지 않은 이상 마상사격으로 명중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쏜다. 두두둑! 두두둑! 두두두둑! 만약 탄을 피해 움츠리는 개체가 있다면 구울에 근접한 개체였다. 곧바로 식별한 겨울이 한 탄창의 마지막 탄으로 놈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퍼억! 눈으로 듣는 소리. 뼈와 살점들, 내장 조각들이 몸 바깥으로 터져 나온다. 생존자들과 기병대 사이에 끼어있던 무리는 삽시간에 섬멸됐다. 그 외의 방향에서도 빠르게 지워진다. 간격이 좁혀지면서, 겨울의 수신호를 받은 알레한드로가 자신의 예비무기를 꺼내들었다. 6연발 유탄발사기였다. 투투투퉁! 유탄들이 패잔병들의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렸다. Take cover! 바싹 엎드리는 생존자들. 횡방향 연속폭발이 접근하던 놈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투명한 날붙이 수천 개에 난자당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교전의 끝은 경기관총 사격이었다. 상자에서 800발들이 백 팩을 확보한 패잔병 하나가 변종들이 달려오는 능선에 대고 무지막지한 제압사격을 퍼부었다. 말이 제압사격이지, 지도력을 발휘할 개체가 사라진 무리 대부분이 무작정 뛰어 들었으므로 몰살을 피하지 못했다. 회피, 혹은 엄폐 개념을 떠올린 소수는 조준사격에 당했다. “최선임자가 누굽니까?” 겨울의 질문에 나서는 이는 얼빠진 표정의 중위였다. 이름은 캐스퍼. “기병대가 구하러 온다더니 정말이었나…….” 전단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흘째 뿌려진 분량에는 심지어 삽화까지 포함됐다. 아니, 왜? 누가 제안했는지는 몰라도 참 여유롭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겨울. “어라, 중위가 아니라 소령?” “진급했습니다.” “허…….” 눈이 멍한 중위는 한참이 지나도 정신이 없어 보인다. 총을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어느 중대의 선임 소대장 또는 중대장이었을 것인데.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다. 함께 있는 병력의 부대마크가 모두 동일한 걸 보면, 능력은 적게 잡아도 평균 이상이었다. “캐스퍼 중위, 부대를 인솔해서 집결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어, 같이 가주면 안 되나? 아니,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트릭스터를 사냥하는 임무가 우선입니다. 탄약을 보충하고 식사를 하는 동안 경계를 서주는 정도는 가능하겠네요. 우리고 잠깐 쉬어야 하고……. 그때까지 다른 지령이 없다면 말이지만요.” 이렇게라도 해주는 건 잠깐이나마 겨울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큰 까닭이었다. 지금도 픽 쓰러지는 병사들이 있다. 깜짝 놀란 동료가 뒤집어보면 기절하듯이 잠에 빠진 것이었다. 탄약을 꺼내던 병사들이 자물쇠를 풀며 불평하는 소리가 들린다. “젠장, 왜 이딴 식으로 잠가놓고 지랄이야! 아까도 탄이 없어서 죽을 뻔 했는데!” 봉쇄선 사령부, 나아가 국방부는 무기와 탄약이 변종에게 넘어가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평범한 변종들에겐 무리겠지만, 손놀림이 정교하고 지능이 높은 베타 구울 이상의 개체라면 총기 사용법을 습득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수십, 수백 가운데 한 개체뿐일지라도, 변종에 대응하는 전술의 근간을 바꿔야 할 터였다. 민간인들을 지원하고자 오염지역에 투하하는 식량의 절반 이상을 변종들이 갉아먹는다는 통계도 있다. 공수물자, 특히 무기와 탄약에 번호식 자물쇠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비밀번호는 상자에 간단한 사칙연산으로 표기되었다. 1100 + 700 + 90 + 2 같은 식으로. 역시 그대로 적어두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적이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와중에,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맞추다가 몰살 위기를 겪은 병사들로선 책상물림들을 저주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악명 높은 공교육 탓에 사칙연산조차 어려운 병사들도 있다. 그러나 겨울이 보기엔 불가피한 예방조치였다. # 223 [223화] #4월의 끝 (10) 비록 단 한 건 뿐이지만 강화변종에 의한 소화기 사격이 이미 보고된 바 있다. 고작 2초 만에 끝나버린 난사. 적어도 조준 없는 지향사격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는 있었다는 의미였다. 해당 베타 구울은 현장에서 즉각 사살 당했다. 전하기를, 약실은 비어있었다고. 녀석이 과연 탄창을 교환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모를 거라고 보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이야. 이렇게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 이번 세계에서도 조만간…….’ 쇄도하는 역병집단을 상대할 땐 1, 2초가 소중하다. 초침이 째깍거릴 때마다 남은 거리가 10미터씩 줄어들기 때문. 기습적인 사격이 그래서 위험했다. 명중률이 아무리 낮을지라도, 자동화기를 소지한 적 앞에서 움츠리지 않을 병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엔 시체의 방탄복을 벗겨 입는 구울을 본 적도 있다. 그러니 탄약만큼은 유출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자동화기는 소모가 극심한 무기였다. 커걱, 컥! 누군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아직 잠들지 못한 모두가 기겁을 한다. “다들 진정해요. 별 일 아니니까. 괜히 자는 사람들 깨우지 말고요.” 겨울이 손을 들어 동요를 가라앉혔다. 입을 벌린 채로 호흡이 없던 이는, 잠시 후 드르릉 하고 코고는 소리를 냈다. Damn!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자그맣게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누군가는 돌멩이를 던지려다 말았다. 아직까지 총을 쥔 채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일병도 보인다. 한 번 데인 아이는 불을 두려워한다고(A burnt child dreads the fire.), 오래도록 쫓긴 패잔병들로선 감염의 사소한 징후라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소령님.” 눈에 핏발이 선 캐스퍼 중위가 겨울을 부른다. “실례지만 언제까지 계실 수 있습니까? 보시다시피 다들 엉망인지라…….” 겨울은 시계를 확인했다. 여기 있는 병력의 규모, 안전하게 집결지점까지 이동할 확률, 지체 없이 이동하여 트릭스터를 사냥할 경우의 이득 등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긴급지령이나 구조요청이 뜨면 어쩔 수 없어요. 그렇지 않은 경우엔 앞으로 40분간 있도록 하죠.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중위도 눈 좀 붙여요. 명령입니다.” 소속이 다르니 명령권은 없지만, 캐스퍼 중위는 고마워하며 한 번 고개를 까닥였다. 시간을 확실히 정해주자 안심하고 잠드는 숫자가 늘어났다. 전쟁영웅이 있으니 괜찮다. 그런 느낌. 그 사이에 겨울은 풍상(風上)을 제외한 방향을 경계했다. 엑셀을 비롯한 말들은 사냥개만큼이나 냄새에 민감했으므로, 방향 불어오는 쪽에서의 접근은 금세 알아차렸다. 고단하게 꿈꾸는 소리들이 늘어난다. 이 여유를 갱신된 정보 확인에 쓴다. 휴식이 절박하지 않은 기동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계급이 오르면서 열람이 허가된 정보들 가운데엔 쓸 만 한 것들이 많았다. 사기관리 차원에서 일반 병사들을 대상으로는 공개되지 않는 사안들. ‘GPS 신호 교란이라. 이건 너무 나간 감이 있지만, 뭐든 사전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국방부 방역전략 연구소는 트릭스터가 GPS 신호를 해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혹여 전선에서 그런 정황이 포착되면 최우선 사항으로 보고하란 내용이었다. 변종들의 대규모 이동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도로망에 수렴한다. 광대한 국토는 그 자체로 지리적 장벽이 되었다. 러시아나 호주 같은 국가들이 아직까지 존속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융단폭격이든 뭐든 도로를 흔적조차 없애버리면, 체계적인 지리정보가 없는 변종들로서는 오랫동안 헤매게 될 수밖에 없었다. 탐험가와 개척자들의 시행착오는 문명의 유산 아니겠는가. 가장 가까운 군부대간의 시차가 30분인 러시아는 더더욱 유리하다. 그쪽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는 트릭스터가 없었다. 대륙이 다르니까. “혹시 이거 보셨습니까?” 소식에 목마르기는 기동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랄레스가 PDA 화면을 내보인다.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에 참가한 모든 전투원에게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하겠답니다. 전사자는 최소 은성무공훈장 내지 십자장이라는군요.” “그게 이상해요?” “저희가 그렇게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손실률은 벌써 3할에 달했다. 이 역시 일정 계급 이상만이 열람 가능한 정보지만, 단일 부대였다면 궤멸 판정을 받고 물러났어야 정상이었다. “내 덕분인줄 알아요.” 겨울의 농담에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모르겠습니까? 아무튼 월급은 좀 오르겠군요. 당분간은 쓸 일이 없겠습니다만. 꼭 20년을 채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아, 소령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던가요?” 모랄레스의 능청에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20년 복무는 군인연금의 최대지급조건이었다. 이걸 채우고자 장교 전역자가 병사 신분으로 재입대하는 경우까지 있으니 욕심을 낼 만 하다. 국방부는 최근 서훈이력을 복무경력에 가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과연 전역까지 무사할 병사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지만. 더해지는 연차는 훈장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명예훈장은 5년이다. 이중수훈이 확실한 겨울은 이것만으로도 이미 10년이었다. 여기에 다른 훈장들을 더하면 19년 6개월에 달한다. 기존의 복무기간을 합산하여 20년을 초과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15년차에 지급되는 3만 달러의 보너스를 수령할 예정이며, 앞으로 어떤 계급을 달든 가장 높은 호봉으로 계산될 것이었다. 방역전쟁 수훈체계가 새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몇 개쯤 더해질 터이고. 정복(Dress Blue)을 입을 때 상의 좌측을 훈장으로 도배하게 생겼다. 알! 알! 난데없이 개 짖는 소리. 겨울은 귀를 의심했다. 기동대원들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만큼 멀고 작았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보면, 지평선 가까이에서 힘겹게 달려오는 작은 닥스훈트가 보인다. 검은 털에 갈색 무늬. 짧은 다리로 뛰는 품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관절에 문제가 생긴 모양. 그래도 긴 귀를 펄럭이며 열심히 뛰었다. ‘어떻게 쫓아왔지? 냄새? 아니면 말발굽 자국?’ 어느 쪽이든 보통이 아니다. 발라당. 앞다리가 꺾여 야트막한 경사를 구르는 개. 곧바로 일어나진 못한다. 널브러진 채로 헥헥거렸다. 가쁜 숨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자그마한 가슴. 야윈 몸과 갈비뼈가 더더욱 도드라졌다. 그러나 기어코 바들바들 일어난다. 의지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뛰는 발의 박자가 맞지 않아 몇 번을 고꾸라지면서도 이쪽으로 올곧게 달려온다. 겨울은 슐츠를 곁눈질했다. 버려진 개에게 유독 애틋했던 대원. 요즘 들어 동요가 커서 우려하던 차다. 사연이 있는 듯 한데, 저 개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얼마나 흔들릴까. 달칵. 소총의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 조준은 찰나로 충분하다. 소음기를 통과한 총성이 몇 명의 주의를 끌겠지만,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거리의 변종을 사살했다고 하면 그만일 터. 그러나 망설인다. 인간다움은 언제나 비효율적이었다. 효율적인 사람은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뜸 들이는 사이에 이상을 눈치 챈 병사들이 소년의 시선을 좇는다. 이 시점에서 이미 늦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한 대원들은 조준경에 의지했다. 겨울은 총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허…….” 차마 말이 되지 못한 감정. 소리를 낸 모랄레스는 물론이고, 모두가 접안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속해서 넘어져 흙투성이인 개를 망연히 바라볼 뿐. 곤란하네. 겨울은 개 짖는 소리에 이끌린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쏴버릴까. 알! 알! 다시 짖는 소리가 결정타였다. 긴 한숨을 내쉬는 겨울. 마침내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뺀다. 두고 오기도 힘겨웠건만. 가상현실 시대에 버려지기 쉬운 건 자식뿐만이 아니다. 가상현실의 개는 물리현실의 개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생전의 거리는 초라한 개와 고양이들로 가득했었다. 외로운 소년 소녀의 가엾은 친구들이었다. 마침내 닥스훈트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힘겹게 꼬리를 흔든다. 대원들이 겨울의 눈치를 보았다. “안 죽여요. 그냥 두면 계속해서 따라오겠네요. 입을 묶어놨다가 다음 항공수송에 실어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먹이세요. 죽지 않게끔. 안 물리게 주의하시고요.” 캐스퍼 중위에게 맡기자니 무책임하게 위험요소를 떠넘기는 꼴이다. 달갑지 않은 눈치가 하나 있었으나, 나머지는 크게 기뻐했다. 유달리 긴장했던 슐츠는 눈물을 글썽거릴 지경이었다. 다리 짧은 개에게 관심과 애정이 쏟아졌다. 서로 너무 많이 먹이지 말라고 옥신각신하는 병사들. 기동대원들과 패잔병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개가 발딱 배를 드러내고 끙끙거렸다. 생김새에 비해 사나운 개라지만 미쳐 날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뻐하는 얼굴들을 보며 겨울이 하는 생각. 삶은 저 정도면 충분한데. 내가 부모님께 많은 걸 바랐던 게 아니었는데……. “이만 헤어지죠. 무운을 빌겠습니다, 중위.” 시간이 됐다. 짧은 휴식은 패잔병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작별을 고하는 겨울에게, 무심코 손에 남은 개 냄새를 맡던 캐스퍼 중위가 답한다. “늦은 인사입니다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무사하시길.” 절도 있는 경례를 보니 회복이 현저하다. 결국 삶은 희망이었다. 이젠 연대 규모쯤 되었으려나. 이런 식으로 로저스 대령에게 합류한 병력이 적지 않다.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면 적어도 연대, 많게는 사단 이상이었다. 다 죽었을 거라고 절망한 시민들에게 이만한 희소식이 있을까? 배가 침몰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조에 열광하는 것이 정상 아니던가. 오후엔 산타 로사와 마크 웨스트 사이를 가로질러 서쪽의 삼림지대로 진입했다. 황폐화된 포도와 오렌지 농장 다음으로 여객기의 추락 현장이 스쳐지나갔다. 멀리 소노마 카운티 공항의 삼각형 활주로가 보였다. 버려진 항공기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추락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국 국적 기체였으므로, 정부가 붕괴한 세계관이었다면 반드시 탐색했을 것이다. 식량과 무기를 함께 확보할 기회니까. 「종말 이후」 세계관은 2016년에 시작된다. 9/11테러 이후였다. 그러므로 조종석엔 반드시 기장과 부기장을 위한 무장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조종석 뒤쪽 하단의 잠겨있는 캐비닛. 승객들 가운데 두 사람의 연방항공보안관(Air Marshal)이 있기도 했다. 즉 권총만 네 자루다. 달리는 내내 말안장 뒤쪽에서 자꾸만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더러운 사생아 새끼들의 움직임이 많이 어설퍼졌군요.] 리시버로 듣는 하퍼 이병의 말. 겨울이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며 답했다. “좀 더 기뻐해도 돼요.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다는 의미니까.” 마상사격의 명중률은 100%였다. 지금의 겨울은 총을 옆구리에 끼고 쏘더라도 50미터 이내에선 전탄 명중을 기록할 실력이었다. 산간을 헤매던 변종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숲은 점차 거대해졌다. 그 유명한 아메리칸 세쿼이아의 자생지였다. 자유의 여신상에 필적하는 나무들이 무성한 녹음. 천년의 수관. 한낮의 햇살조차 쉽게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어지간해선 들어오지 않았을 곳이지만, 구조신호가 포착된 만큼 수색이 불가피했다. ‘최소한 트릭스터 하나는 이쪽으로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대규모 사냥을 눈치 챈 놈들이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긴 모양이다. 겨울에겐 이번 작전의 최종국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할당구역이 확대될지도 모르지만. 물론 이렇게 험한 곳에 대책 없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갑작스럽게 하얀 콘크리트 장벽이 나타났다. 대역병 모겔론스가 대양을 건너기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에 미주에서는 방공호 건설 붐이 일었다. 지금 마주한 폐허가 바로 그 흔적. 그러나 완성되진 못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했으므로. 정부로선 대도시들의 방호가 최우선이었다. 덕분에 뉴욕과 워싱턴 등지는 중세 도시를 연상케 하는 성벽을 두르고 있다. 겨울이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겠습니다. 사나흘 쯤 머물 곳이니 제대로 수색해요.” # 224 [224화] #4월의 끝 (11) 숲의 여백에 건설된 방공호는 작은 요새와 같았다. 살아 움직이는 역병을 막기에 특화된 형태. 하지만 왜 하필 여기인지는 애매하다. 오지도 않을 관광객들을 위한 대피소 개념이었을지도. 혼란에서 비롯된 비효율적인 행정의 결과일까. 겨울은 장벽을 따라가며 갸우뚱 한다. [지지지직-] 잡음이 울리는 순간 두두둑 탄피가 튀었다. 겨울이 조준한 방향에서 핏물이 솟구친다. 바사삭! 체구 커다란 놈이 수풀을 헤치고 멀어지는 소리. 반대로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시간벌이용 미끼들. 바람에 기대어 냄새를 감춘 매복이었으나, 달려야 할 거리는 길고 숫자는 적었다. 많았다면 훨씬 멀리서 이미 겨울의 감각에 걸렸을 터. 버림받은 줄도 모르는 것들이 기동대의 집중사격 앞에 줄지어 절명한다. 황혼 아래 뿌려지는 유혈은, 수관을 뚫은 노을 아래 고동색으로 반짝였다. 수풀 안쪽의 혈흔은 금세 끊어졌다. 아무리 인간보다 재생력이 탁월한 변종이라도 불가능한 회복력. 필시 트릭스터일 것이다. 전기로 상처를 지지면 그만이니. “쫓습니까? 함정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겨울은 모랄레스의 의견을 긍정했다. “동감이에요. 아무래도 사냥꾼 사냥에 나선 모양인데, 지금 안 쫓아도 알아서 다시 집적거리겠죠. 일단 수색부터 끝내고 우리 나름대로 준비를 하자고요.” 찰나에 스쳐간 잡음은 겨울에게 보다 오래 머물러있었다. 오래지않아 입구를 찾았다. 문이 있어야 할 자리가 허전하다. 내부는 터만 닦인 공터였다. 화력을 집중할 수 있어 방어에 유리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립되기도 쉬운 장소다. 구조신호에 발이 묶인 사냥꾼들을 천천히 말려 죽이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숲은 교전거리가 짧아 역병에게 유리한 환경. 수색대를 추가로 끌어들여 개미지옥을 만들 작정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해가 떨어지는 숲에서 새떼가 날아올랐다. 이어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거목의 공제선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콰앙, 육중한 땅울림이 수차례. 길을 막는 중이구나. 밑동을 갉으면서 기다렸나? 아니면 그럼블이 있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겨울은 대원들을 진정시켰다. “통신부터 연결해요. 공수지원을 요청해야 하니까.” 공터 중심에 위성 안테나가 펼쳐졌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서인지 전파간섭이 덜하다. PDA를 연결해서 화면을 조작하던 겨울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모랄레스가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원하던 물건이 없네요. 다른 팀에서 먼저 요청한 것 같아요.” 무인포탑을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올 초부터 배치되기 시작한 것인데, 생산량이 부족해서 봉쇄선에 우선적으로 할당되어 왔다고. 그러나 작전의 중요도를 감안했기 때문인지 지원 가능 항목으로 업데이트 되었다. 지정된 범위와 정해진 시간에 적아 식별이 불가능한 모든 열원을 갈아버린다. 컴퓨터가 제어하는 중기관총인 만큼 화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수목이 성긴 지형마다 살상지대를 구축해 적극적으로 치고 빠지려는 계획이었건만.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올까요?” “아뇨. 마리골드랑 이야기를 해볼게요.” 전력이 충분하다면 함정에 일부러 빠지는 것도 방법이다. 함정은 파는 쪽의 전력도 집중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캘리포니아 중부 전선이 왜 붕괴되었던가. 오스본 병장의 증언을 돌이켜볼 때였다. 벨 기지는 겨울의 요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데이비드 액추얼. 다른 패키지를 보내주겠다. 호출부호 해머 폴, 61비행중대의 아파치 편대다. 시간계획이 정확하다면 자동포탑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범위에 들어온다고 해서 트릭스터가 무조건 자폭하는 건 아니다. 교활한 특수변종은 숫자가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공격헬기 편대쯤 되면 사정이 다르다. 이를 노려 위험을 감수하고 근접항공지원을 강행하자는 의견도 있는 걸로 안다. 특수변종의 숫자를 생산력으로 찍어 누르자는 소리였다. 불확실한 가능성에 목숨을 걸 파일럿들은 안중에도 없는 주장이었다. 스스로가 안전한 자들에게 타인의 목숨은 언제나 가볍다. 물론 마리골드가 그렇게 미쳐있는 건 아니었다. 상세한 내용을 들은 겨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히 가능하다. 양날의 칼이지만. 시간이 어긋나면 이쪽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나저나, 아직 살아있는 노이즈 메이커가 있었구나.’ 변종들이 지능적으로 변하면서, 소음 교란 장치는 속속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숲에는 몇 개가 남아있다. 특히 하나는 높이로 보건대 투하 도중 나무에 걸린 듯 했다. PDA에 신호가 잡힌다. 장애물이 많은 숲 속에서 바로 작동시키긴 어렵겠지만, 공격헬기 편대는 다를 것이다. 교신을 마친 겨울이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0300시에 움직이겠습니다. 방어선을 짜죠. 저쪽에서 저쪽까지 클레이모어(산탄지뢰)를 깔아요. 가진 거 전부 다. 탄약보급을 받은 뒤엔 쉬어도 좋습니다. 경계는 내가 맡을 테니까.” 지휘관이 말뚝 근무를 서겠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간 익숙해진 탓이다. 헌신적이지만,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휴식은 어김없이 취했다. 무엇보다 겨울이 경계를 설 때의 휴식 효율이 가장 높았다. 두 명이 엄호하고 두 명이 나아갔다. 중첩되는 부채꼴의 살상지대를 구축한다. 각각의 지뢰를 잡초와 낙엽으로 덮어 위장했다. 잠시 후 하늘에서 낙하산이 떨어져 내렸다. 무인포탑은 없을지언정, 다른 종류의 무기와 탄약은 넘칠 정도의 약속을 받아낸 덕분. 첫 상자를 개봉하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미니 건(M134)이었다. 경량화를 거쳐도 19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 여섯 개의 총열이 회전하며 분당 최대 6천 발을 뿌려대는 과잉화력. 거치대가 딸려왔으나, 겨울은 한손으로 들어보였다. “어때요, 거버네이터(Governator) 같아요?” 대원들이 실소한다. 캘리포니아의 전대 주지사(Governor)였던 어느 영화배우를 흉내 낸 행동이었다. 극중에서 이 중화기를 쏘는 모습이 유명하다. 반동을 감당하지 못해 발사속도를 줄여서 다룬 것이긴 하지만, 최대 속도로는 지금의 겨울조차도 제대로 다루기 어렵다. 여기에 고속유탄발사기가 더해졌다. 출입구로 수백 개체가 밀려들어도 분쇄할 화력이었다. “허전하네요. 불이라도 피울까요?” 겨울의 제안에 당황하는 대원들. “괜찮겠습니까?” “뭐 어때요. 저놈들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거 뻔히 아는데.” 일종의 도발이었다. 홀로 문을 나선 겨울은 적당한 나무에 도폭선을 감는다. 멀찍이 떨어진 겨울이 스위치를 눌렀다. 쾅! 섬광과 폭음에 꺾이는 작고 어린 세쿼이아를 말에서 내려 통째로 끌고 왔다. “소령님. 생존자 구조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염려스러운 모랄레스에게 겨울이 답하는 말.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막 들어가긴 그렇잖아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병든 인질범들이 인질들을 쉽게 죽이진 않을 테니까. 우리를 붙잡아둘 미끼라고 봐요.” 그러면서 쇠지레를 휘둘렀다. 빠악, 빡. 나뭇조각이 튄다. 여러 번 깊게 박힌 지레를 꺾자 장작이 떨어져 나왔다. 힘든 기색도 없는 반복 작업. 연기가 피어오르면 생존자들에게도 보일 것이다. 변종들은 당연히 접근을 막으려고 할 것이고. 그 소음으로 방향을 파악하면 된다. 대략적이겠으나, 아무 정보 없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잘한 파편을 태워 밑불로 삼는다. 마르지 않은 땔감이라 연기가 많은 편이다. 불이 커진 뒤에, 겨울은 야시경을 착용해보았다. 혹시나 빛이 방해가 되는지 확인하려는 것. 겨울 자신보다는 병사들을 위해서다. 정상적인 녹색 시야에 엑셀의 모습이 보였다. 알레한드로가 투덜거리는 소리. “변종도 떡을 치고 말도 떡을 치는데 나는 여기서 이게 뭐야…….” 조금 당황한 겨울이 얼른 뛰어갔다. 막으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무르시엘라고, 슐츠가 이름 붙인 암말을 다독거릴 필요가 있었다. 짝짓기 도중에 걷어 채인 수말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으니까. 이나마도 「승마」 10등급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 “막으려고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슐츠는 미심쩍어하는 낯이다. 겨울이 돌아보지 않고 끄덕였다. “조짐은 있었어요. 본능을 억누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요. 억지로 막으면 작전 도중에 이상한 행동을 보일 걸요?” “하지만 제 말이 임신해버리면 어떡합니까?” “반드시 임신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게 문제가 될 정도로 작전이 길어지지도 않을 거예요.”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 아우성친다. 내용은 알레한드로 일병의 한탄과 같았다. 변종도 떡을 치고 짐승도 치는데. 겨울은 로그에 개의치 않고 무르시엘라고를 쓰다듬었다. 한편으로 전보다 나아보이는 슐츠에게 묻는다. “개는 좀 어때요?” “입이 답답한 것 같습니다만, 그 외에는 괜찮아 보입니다.” 입이 묶인 닥스훈트는 짐 신세에서 해방되자마자 짧은 앞발로 끈을 벗기려 했다. 그것을 슐츠가 자꾸 막는 중이었다. 포승을 엮어 늘어뜨린 개목걸이를 당겨 주의를 주는 방식으로. 자꾸 끙끙대던 개가 시무룩하게 교육을 받아들였다. 말들의 짝짓기는 20초 만에 끝났다. 겨울이 슐츠에게 손짓한다. “풀어줘요.” “네?” “지금 당장은 상관없으니까 풀어주라고요.” 일부러 불을 피우는데 개 짖는 소리가 대수일까. 교전이 벌어진들 방어전이 될 것이고. 총성과 폭음, 역병의 합창에 놀라 날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묶어둘 수만도 없다. 벌써 한나절이나 짐짝 신세였으니. 기왕 구한 개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사람 무는 꼴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불이익은 병사들의 심리적 안정에 대한 반대급부로 여겨야 했다. 슐츠도 전에 비해 편안해 보이고. 겨울이 고갯짓했다. “그래도 괜찮아보여서 다행이네요.” “예. 특별히 상한 곳은 없어 보입니다. 꾸준히 잘 먹이면 건강해질 겁니다.” “나는 당신을 말한 거예요, 슐츠. 그날 이래 여러모로 불안해보였거든요.” 좀 더 심해지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교대시킬 예정이었다. 웨슬리 일병 등의 기동대 예비대원이 있으니까. 위험요소를 안고 다니는 것보단 낫다.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혹시 이 녀석을 데리고 다녀도 된다고 허락하신 게 저 때문이었습니까?” “꼭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부정하는 겨울이었으나, 슐츠는 믿지 않는 눈치다. 꼭 풀어야 할 오해는 아니었다. “감염된 태아를 목격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어요?” 설령 그렇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역병의 번식은 오랫동안 이어질 전쟁을 보증한다. 교육을 받았어도 그저 막연하다가, 보는 순간 끔찍한 현실감이 밀려왔을지도. 겨울은 경계를 유지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조용한 사이에 입이 시원해진 개가 캉캉 짖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깜짝 놀란 대원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겨울. 슐츠의 답은 상당한 공백을 두고 들을 수 있었다. “티가 많이 났나보군요.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예전?” “애를 볼 예정이었거든요. 아들이었죠.” “……유감이에요. 병이었나요?” “테러였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함께 잃었다는 뜻. 그러고 보면 계급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병영문화상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다, 세계관이 세계관인 만큼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한동안 정줄 놓고 있다가 복수를 하겠다고 군대에 들어왔는데, 막상 전쟁터를 겪어 보니 이건 제가 생각하던 싸움이 아니더군요. 적을 죽여도 이게 내 원수다 싶은 실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속이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답답해지기만 하고,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만 같고…….” “…….” “그러다 애들이 총질을 하는 걸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정말로 엉뚱한 화풀이였고요. 젠장, 세상이 이 꼴이 나서 다시 입대하게 될 줄은 몰랐지요.” 슐츠가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는 걱정 하시는 일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당신만 괜찮다면 달리 없어요. 하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이건 정말……. 소령님이 이런 쪽으로 신경써주시는 건 꽤 어색하군요.” “왜요? 어쨌든 지휘관이잖아요?” 이례적인 나이의 소령이 하는 말이다. 슐츠는 싱겁게 웃었다. 병사를 쉬라고 보내고서, 겨울은 만들었던 표정을 느리게 지웠다. 그리고 지나간 대화를 곱씹는다. 살살 건드리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속에서 가벼워지지 않는 돌은 가끔씩 복수심이었다. 슐츠는 자신의 과거가 엉뚱한 화풀이였다고 했다. 그러나 겨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젠 찾아오지 않는, 혹은 못하는 여인에게, 미워하려면 세상 사람들을 다 미워해야 한다고. ‘부모님을 만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만든 사람들과, 다시 그 사람들을 만든 더 많은 사람들…….’ 그러므로 없어졌으면 싶은, 때때로 비등하는 미움은 항상 온 세상을 겨냥한다. 돌의 무게가 종말과 같다. 사람이 싫은 마음이다.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깥세상을 만들어낸 원동력 아니던가? # 225 [225화] #4월의 끝 (12) PDA에 경고가 떴다. 드물게도 해군 쪽의 소식이었다. 지난 21일, 멜빌레이 집단과의 교전 중 순양함 벙커 힐, 구축함 스톡데일과 그리들리가 심각한 인명손실을 보고함. 해상봉쇄에 일정기간 문제가 있었음. 새로운 변종의 상륙 가능성 있음. 주의 요망. 바다괴물들에게 폭뢰 공격으로 영구적인 청력손상을 선사했다고 하는데, 예상보다 피해가 적어서 다행이다. 이는 정상적인 지휘체계가 유지된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할 일은 아니었다. 승조원이 없는 배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전투함 세 척의 감시범위는 적게 잡아도 백 킬로미터 단위. 이미 오래 전부터 피로도가 한계에 달한 해군이 그 공백을 제대로 메울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Sir. 잠시 교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식사 때가 많이 지났는데요.” 짧게 망설인 겨울은 모랄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불가에 앉아 전투식량을 데우는데, ‘에일’ 알레한드로가 묻는다. “소령님은 혹시 애인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겨울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냈다. 엑셀의 영향인지, 병사들이 나누던 잡담은 아까부터 주제가 변하지 않았다. 연애사보다는 과장된 무용담에 가깝다. 서로가 허세임을 알면서 즐기는 대화. “에이. 인기가 아주 많으실 텐데……. 꼭 진지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뭐, 아시잖습니까, 그런 거. 소령님쯤 되시는 분이 아예 없었다고 하시면 100% 거짓말입니다.” 에일의 능청을 하퍼가 거들었다. “No fire, no smoke. 단순히 유명인의 애환일지도 모릅니다만, 소령님의 여인들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건 그럴 만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럴 만한 뭔가가 없다니까요. 대체 무슨 소문을 들은 거예요?” “오, 듣고 싶으십니까?” “……사양할게요.” 개구쟁이 같은 표정들을 보니 안 들어도 짐작이 간다. 소령님의 여인들이라. 민간에서 접할 수 있는 겨울에 대한 정보는 국방부에서 공개한 전투기록들 뿐인데, 즐거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알레한드로는 끈질겼다. “그럼 이번에 포트 로버츠에서 지원 병력이 온다고 들었는데, 착하고 화끈한 여자 있으면 자리 좀 만들어주시면 안됩니까? 그 호랑이 원더우먼이나 마녀는 빼고요.” 호랑이 원더우먼? 겨울은 민항기 조종사, 루크 메릴이 보여주었던 만화책을 떠올렸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유라의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형성된 듯하다. 생각도 못한 장소에서까지 같은 맥락의 별명을 듣게 된 걸 보면. 한별은 실제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잠자코 듣던 슐츠가 끼어들었다. “에일. 그런 물건을 달고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달라는 건 민폐 그 자체 아닐까?” “뭔 소리야? 내 물건이 어디가 어때서?” “잘 들어.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네 소중이는, 여기 이 보급품 펜보다 못해. 이래봬도 16페이지짜리 군사규격 기준(MIL-STD)을 충족시킨 물건이거든. 출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엿이나 드셔. 직접 보고도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인정하지. 여기서 당장 까봐?” 시답잖은 농담들. 슐츠는 자신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비명과 괴성이 공기를 식혔다. 긴장감을 쫓으려 애쓰던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예외는 오직 겨울 뿐. 홀로 앉아 차분한 식사를 이어간다. 다들 맛없다고 평하는 비스킷을 꼭꼭 씹어 삼키고, 포도 맛이라 주장하는 짙푸른 음료를 마신 뒤에, 이 모습에 벙찐 병사들을 진정시킨다. “시끄러운 동안에는 안전할 거예요. 조용할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하겠죠.” 진짜 공격은 예고 없이 개시될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변죽을 올린다는 건 바로 치고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뜻. 슐츠가 묻는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생존자들은 괜찮겠습니까?” “아마도요. 좀 더 들어봐요.” 미국이 최근에 치른 전쟁들은 전면전과 거리가 멀었다. 경험 많은 병사들은 겨울의 말뜻을 쉽게 이해했다. 그만큼 인상이 더러워진다. 예상대로, 비명 섞인 욕설과 고함은 한참이 지난 뒤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쪽의 신경을 곤두세우려는 수작이었다. “아무래도 각성제를 씹어야 할 것 같습니다. 허가해주시겠습니까?” 일반적인 작전에서는 각자의 재량이겠지만, 지금은 허락을 구해야 한다. 하퍼가 총구를 내리며 묻는 말에 겨울이 조건을 달았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순번대로 눈을 붙이려고 노력해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먹어요.” 당혹스러워하는 병사들. 그러나 노련한 군인은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든 잔다. 일이 잘 풀리면 채 하루가 다 지나기 전에 사냥이 끝날 수도 있지만, 꼬였다간 앞으로 며칠은 몇 시간씩 쉴 기회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 각성제만으로 버티긴 곤란했다. 식사를 마친 겨울은 사양하는 모랄레스와 다시 교대했다. 사다리를 타고 벽을 올라가봤으나, 숲의 장막에 가로막힌 시계(視界)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다만 장벽 가까운 공터만 좀 더 넓게 볼 수 있을 따름. 어차피 「전투감각」과 「위기감지」가 있는 만큼 이 정도 차이는 있으나 마나한 정도다. 「기척차단」으로 감각보정을 회피할 녀석이 없는 한에야. 그러나 추적에 특화된 스토커조차도 「기척차단」의 수준은 제한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아예 없고, 겨울의 경험상 등급이 올라가더라도 결코 완벽해지지 않았다. 이 숲에서 그 사냥개들과 마주칠지도 모르겠다. 앨러미더에서 처음 조우한 이래 꽤나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강화종이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래저래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으니까.’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건 역시 특수변종의 비율 문제일 것이다. 남다른 괴물 치고 전투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기에. 물론 트릭스터나 그럼블에 비하면 개체 당 비중이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조차도 낭비라면 만들어지지 않을 터. 쿠웅- 또 한 차례 거목이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그럼블의 포효. 트릭스터가 아무리 애써도 저 패턴만큼은 막지 못하나보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존재를 숨긴다면 치명적일지도 모를 카드인데도. 겨울은 벽에서 내려왔다. 공사가 진행되던 그대로 방치된 탓에, 장벽 안쪽으로 비계(飛階)가 붙어있는 곳도 있었다. 무언가 시설물을 덧붙이려던 흔적이었다. 자정이 지나면서 숲이 고요해졌다. 결국 잠들지 못한 대원들은 무기를 움켜쥐고 적막을 경계했다. 긴장감이 피로로 퇴색될 무렵, 별빛 하늘 아래 밤보다 짙은 음영을 응시하던 겨울이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옵니다. 준비해요.” 속 좋게 누워있던 개도 냄새를 맡았는지 달을 향해 짖는다. 슐츠가 목줄을 자신의 발목에 묶는 게 보인다. 한 쪽에 모아둔 말들은 불안하게 땅을 찼다. 윙, 윙, 윙- 간헐적인 모터 가동음. 정면을 겨냥한 미니 건의 여섯 총열이 짧은 회전을 반복한다. 방아쇠를 누른다고 즉각 발사되는 게 아니어서, 정해진 회전속도에 도달하기까지 짧은 틈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위력정찰일까? 집중된 화망으로 무턱대고 밀어 넣을 것 같지는 않다. 겨울이 이렇게 생각했을 때, 중량감 넘치는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잠시 갸우뚱하던 겨울은, 이내 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길을 막으려는 게 아니었나. 한숨과 함께 다시 전파하는 무전. “등 뒤는 내가 맡습니다. 지시하기 전까지는 앞쪽만 막고 있어요.” [등 뒤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쿵! 쿵! 장벽 위로 얹어지는 수관들. 하나뿐이라면 평형감각 떨어지는 변종들이 타고 오르기 버겁겠으나, 쌍으로 붙일 땐 이야기가 다르다. 위치는 비계가 붙은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트릭스터가 이미 내부를 한 바퀴 돌아봤다는 말이었다. 아주 가까운 그럼블의 포효가 들린다. [Fuck.] 잡음이 섞이기 시작한 무전기와, 허탈해하는 알레한드로의 음성. 공격은 사방에서 시작되었다. 장벽 위로 그림자들이 솟구친다. 퀘에엑! 캬악! 당연히 정면에서도 부패한 숙주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밀도가 높진 않았다. 화력을 집중하는 효과가 낮지만, 그렇다고 대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수준. 겨울은 플라스틱 폭탄 한 쌍의 시한신관에 3초를 장입하고 서로 다른 비계를 향해 집어던졌다. 콰앙! 지지대가 파괴되며 무너지고 기울어지는 발판. 살아있는 시체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공수 상자에서 로켓 발사관(Mk.777)과 탄 묶음을 꺼낸 겨울은 공터 중앙으로 달렸다. 한 쪽에서 먼저 일어선 몇 놈이 달음박질로 육박해온다. 그것들을 등지고 무릎을 꿇는 겨울. 비계 아래, 끊임없이 쏟아지는 무게에 눌려 아우성치는 무더기를 겨냥한다. 셋, 둘, 하나. 귀가 멍해지는 격발의 순간, 배후의 위협이 증발했다. 발사 후폭풍으로 날려버린 것. 이어 조준했던 수십 개의 몸뚱이가 굉음과 함께 비산했다. 내장을 흩뿌리는 상체 하나가 포물선으로 날아들었다. 그 와중에도 번식을 갈구하는 손길을 겨울에게 내뻗는다. 그 안면에 군홧발을 꽂아 주자 목뼈가 부러졌다. 관성으로 튀어나온 핏물이 디딤발을 적신다. 뛰어내리자마자 무턱대고 달려오는 변종들은 직선상으로 쉽게 겹쳐졌다. 지도력을 갖춘 개체가 같이 넘어오지 않은 탓. 이를 노린 겨울이 발사관 대신 대물저격총을 들었다. 핀 빠진 수류탄을 측방으로 굴리고 정면을 겨누어 반자동으로 미친 듯이 갈겨댔다. 그럼에도 정밀한 사격은 뼈 없는 부위를 관통했다. 즉사보다는 무력화를 노린 연사. 크워얽! 역병의 선두가 피를 토했다. 갈빗대를 피해 허파를 꿰뚫은 철갑고폭탄이 그 너머의 표적에 맞아 폭발한다. 한 발당 최소 둘 이상을 주저앉히는 사격. 그러고도 꾸역꾸역 기어오는 놈들은 더 이상 긴급한 위협이 아니다. 시간을 번 겨울이 흙 묻은 로켓 발사관에 차탄을 장전했다. 후폭풍에 맞았던 녀석 중 죽지 않은 하나가 가깝다. 끄어어 드는 낯짝에 피멍이 번져있었다. 꾸드득, 경추를 밟아 으깨며, 조준기 십자선 중앙에 남아있는 비계를 맞춘다. 격발. 섬광과 광풍이 일었다. 녹슨 발판이 시체들과 더불어 아찔하게 솟구쳤다. “죽어라 이 씹새들아!” 모랄레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미니 건 사선을 꺾는다. 부우우우욱- 간격을 느낄 수 없는 총성. 고속으로 도는 여섯 총열이 초당 100발까지 뿜어내는 화력이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총열들의 쥐불놀이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과열! 과열 조심해요! 총 터져서 죽기 싫으면!” 탄과 탄창이 남아돌다보니, 적의 규모에 압도당해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병사들이었다. 전면을 주시하라는 지시는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출입구의 공세가 격렬하지 않아, 미니 건 사수 혼자서도 얼마든지 막아냈다. 다만 재장전의 유격이 잦아 유탄사수가 그 틈을 벌어주는 정도였다. 이 와중에 닥스훈트가 끙끙댄다. 슐츠의 다리에 붙어 오들오들 오줌을 싸고 있었다. 정신없는 슐츠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릎쏴 자세로 사격과 재장전에 여념이 없다. 말들도 혼란스러워하지만, 점잖은 엑셀이 누름돌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지만, 걷어차서 죽인 변종의 시체가 한 구 쓰러져 있었다. 무리 짓지 않은 역병은 무리 지은 대형동물보다 약하다. 다섯이서 사살한 숫자가 잠깐 사이에 세 자리를 넘었다. 짧고 뭉툭한 고속유탄발사기가 밤보다 어두운 숲을 초연과 유혈로 물들였다. 웅크리고 있던 변종들에게서 자욱한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파편이 터지는 순간, 창백한 피부에 붉은 점이 뿌려진다. 곧 그 점들로부터 변질된 피가 급격히 배어나온다. 겨울이 연속으로 「투척」한 플라스틱 폭탄들이 장벽을 넘어가서 터졌다. 굵은 통나무를 단숨에 꺾진 못할지라도, 축을 흔들어 쓰러트리는 정도는 가능했다. ‘왜 벽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았지?’ 소총으로 조준사격, 권총으로 확인사살을 하며, 겨울은 힘이 다해가는, 짧고 격렬했던 공세에 의문을 품는다. 방공호의 모든 요소가 편집증적으로 두껍긴 해도, 그럼블이 시간을 들여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보통의 변종이 드나들 정도만 균열을 만들어도 충분할 텐데. [워후! 적이 물러갑니다!] 유탄사수 알레한드로의 함성. [잠깐이지만 교활한 새끼를 포착했습니다! 바로 쫓아가서 죽여야 합니다!] 모랄레스의 음성이 흥분으로 떨렸다. “아뇨. 예정된 시각까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계를 확인한 겨울은 상병의 건의를 거부했다. 그럼블을 잃을 가능성을 최대한 회피한 거라고 본다면, 이번 습격은 절대로 결정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트릭스터에게 어설픔을 기대하기는 금물. 죽은 숫자가 많아도 미성숙한 개체를 포함하여 평균 이하인 놈들뿐이다. 뭔가 더 숨겨둔 게 있으며, 겉보기에만 큰 승리는 방심한 이쪽이 숲 깊은 곳까지 쫓아오게 만들 수단이라고 보아야 적절할 터. [바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전망에 아쉬운 몇 마디가 흘렀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지휘관에 대한 신뢰였다. 겨울은 병사들에게 재정비를 지시했다. 함정에 빠져주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계획대로 갈 것이다. # 226 [226화] #4월의 끝 (13) 대체 뭘 준비해두었으려나. 거목이 우거진 숲은 사실 트릭스터에게도 불리한 환경이다. 전파의 도달범위가 축소되는 까닭. 그러므로 준비된 함정의 일부는 직접적인 통제 없이도 위협적인 종류일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겨울의 「통찰」을 스치는 사이, 위성단말기가 새로운 신호를 포착했다. “소령님. 골든 이글에서 데이비드 액추얼을 찾습니다.” 모랄레스의 말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생소한 호출부호다. “골든 이글?” “어…….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칼 빈슨, 칼 빈슨이랍니다. 항모전단이군요. 추가적인 지원에 관해 통보할 사항이 있다는데요?” 전투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들어온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마리골드, 혹은 그 윗선에서 고공에 무인기를 띄워놓고 교전과정을 지켜본 모양. 이는 단지 겨울이라서가 아닐 것이었다.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의 중요도를 감안하면, 모든 보고가 실시간으로 백악관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작전명 넵튠 스피어, 파키스탄에서 빈 라덴을 사살할 때도, 미국 대통령이 참모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전투현황을 지켜봤었으니까. 너무 위험해 보였던 걸까? 당사자인 겨울에겐 치명적인 공세가 아니었으나, 지켜보는 입장에선 많이 달랐을 것 같다. 고작 다섯 명이서 특수변종이 포함된 수백 개체의 포위공격을 받은 셈이니까. 이번 작전에 참가한 임무부대들은 무서운 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숫자를 구출하긴 했어도,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한 정예 병력의 손실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요청하지도 않은 지원 강화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다섯 명에게 공격헬기 편대가 붙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아무튼 준다는데 사양할 필요는 없다. 통신을 받아보니, 진입 시간에 맞춰 호위함들이 순항 미사일(토마호크)을 날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오폭 가능성을 감수하겠다는 건가? 매복한 변종집단 규모가 클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잠시 고민하는 겨울이었으나, 이어지는 통보가 우려를 불식시켰다. “골든 이글, 특수목적탄이라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채프(Chaff) 탄두와 흑연 필라멘트 탄두다. 데이비드의 이동경로를 제외한 모든 범위에서 트릭스터의 통신을 억제하고, 그 외의 능력 또한 저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채프는 알루미늄 박막을 뿌려 전파를 산란시키는 수단이었다. 즉 숲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숨어있든 트릭스터의 신호를 받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 또한 전파가 주 시야인 트릭스터는 채프의 영향권에서 장님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었다. 숲의 어둠을 맨눈으로 헤아리긴 어렵다. 필라멘트 탄두는 낯설다. 거미줄 같은 흑연 섬유를 뿌려, 트릭스터가 어디를 가더라도 몸에 휘감기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로써 생체전기를 공격수단으로 쓰긴 어렵게 된다. 채찍처럼 휘두르는 팔이라던가. 옆에서 듣던 모랄레스는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토마호크를 여섯 발이나……. 고맙긴 하지만, 차라리 그 값의 절반이라도 저희들에게 나눠주면 정말 목숨 걸고 싸울 텐데 말입니다. Damn, 천만 달러면 평생을 일해도 못 벌 돈인데.” 다른 대원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재블린)을 쏘면서 “이야, 저기 20만 달러가 날아간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다운 농담. 미국 정부도 악에 받친 느낌이다. 예산 걱정도 많을 텐데, 값비싼 무기체계를 아낌없이 써버린다. 하기야 인류의 존망이 걸린 국면이자, 쓰기를 망설이다가 쓸 사람이 없어질 위기이긴 하다. 이 작전으로 구원받을 무수한 인명은 그 이상의 가치이고. 교신을 마친 뒤, 겨울은 달이 없는 새벽을 기다렸다. 시간과 함께 별자리가 흘렀다. 간헐적으로 괴성과 비명이 이어지던 밤이 난데없는 굉음에 흔들린다. 노이즈 메이커가 작동된 것. 공격헬기 편대가 접근중이라는 의미였다. 이어 제트 엔진의 소음이 뒤섞였다. 서쪽 하늘에서 다가오는 광점들이 보인다. 퍼엉, 펑. 별빛 천구 아래 여섯 발의 미사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졌다. 희미한 백색 섬유가 광범위하게 흩어지고, 자그마한 낙하산에 매달려 바람을 타는 다수의 탄자들로부터 은빛 가루가 분수처럼 뿌려지는 광경. 근 2톤의 알루미늄 분말은 정해진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살포될 것이다. 변종들의 변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혜. “가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이 기회에 사냥을 끝내버리자고요.” 출발 직전 산탄지뢰들을 폭파시켰다. 자그마한 쇠구슬 수천 개가 충격파와 더불어 넓은 전면을 휩쓸었다. 도사리고 있던 역병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거기에 대고 고속유탄발사기의 잔탄을 모조리 퍼붓는 알레한드로. 탄약을 남기고 갈 순 없었다. 겨울이 고삐를 측면으로 틀었다. “우회합니다. 놈들이 공백을 메우려고 할 거예요.” 초연 섞인 바람결에 짙은 악취가 밀려온다. 포위망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는 움직임들. 그러나 그로 인해 오히려 주변의 밀도가 낮아질 터. 반원을 그리며 움직인 겨울이 손을 들어올렸다. 엄폐물 삼은 덤불 너머, 우르르 모여드는 변종들이 모여들었다. 규모가 상당하다. 혹시 저 가운데 사냥개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 많은 수를 다 쏴죽일 필요는 없다. 구울과 사냥개를 사살하면, 트릭스터의 장악력만으로는 섬세함이 떨어질 수밖에. 한편으로 자신 있게 쫓아올 정도는 남겨둬야 한다. 최종국면에서 교활한 것들이 살상범위에 들어오게끔. 구울은 멀리서도 유달리 창백하지만, 문제는 사냥개, 스토커는 일반적인 변종과 외견상 차이가 적다. 멀리서 다수에 뒤섞여있으니 냄새 맡는 품도 구분이 안 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겨울이 문득 바람 불어오는 방향을 응시한다. 두두둑! 순간적인 조준사격. 사나운 밤을 경계하여 날아올랐던 새가 즉사했다. 명중탄이 세 발이었으므로 적잖은 피와 깃털이 뿌려진다. 그 냄새를 바람이 확산시키는 순간, 변종 무리에서 몇 놈이 즉시 방향을 꺾었다. 그럼 그렇지. 겨울이 그 소요를 겨누어, 한 호흡에 방아쇠 일곱 번을 당겼다. 마지막으로 구울의 미간에 한 발을 꽂는다. 회백색 시체의 고개가 확 꺾어졌다. “이제 달려요!” Hooah! 노이즈 메이커의 메아리 속에서는 목소리를 줄일 필요가 없었다. 길라잡이를 모두 잃고 모든 방향으로 엇갈리는 무리를 등진 채 질주하는 다섯 기병. 생존자가 있을 곳으로부터 미묘하게 어긋난 진로를 잡는다. 그쪽이야말로 함정의 중심일 테니까. 갇혀주기야 할 것이다. 예정된 시간, 예정된 위치에서. 그 때까지는 이리저리 흩어놓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숨바꼭질을 벌여야겠지. 끼에에에엑! 곳곳에서 숨어있던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못하다. 겨울이 전방을 쓸어버리는 사이, 쾅쾅쾅쾅! 묵직한 총성의 연쇄가 흉곽을 조인다. 대원들이 부무장으로 휴대한 자동 샷 건(AA-12)이다. 한 때 조안나가 여객선에 들고 들어갔던 바로 그 무기. 완전자동으로 갈겨대는 산탄 서른두 발은 근거리 교전에서 재앙에 가깝다. 좌우에서 육박하던 변종들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무릎에 맞으면 관절이 박살나고, 복부에 맞으면 내장까지 파열된다. 위? 전신이 저릿거릴 정도로 강렬한 경고. 겨울이 급격히 기수를 트는 순간, 전방의 수관(樹冠), 무성한 가지와 불투명한 잎사귀들의 장막 위쪽으로부터, 자그마한 몸뚱이들이 농익은 열매처럼 떨어져 내렸다. “으악! 뭡니까 저건!” 누구 비명인지 분간도 안 간다. 말 한 필은 거의 넘어질 뻔했다. 깨액! 끼익끼익! 애앵애애앵! 징그럽게 울면서 떨어져 죽는 것들의 정체는, 노란 농포가 똥똥한 역병의 아기들이었다. 전에 본 것과는 어딘가 조금씩 달라진 형상. 수십 미터를 추락하여 퍼억 퍽 부서질 때마다 강산성의 체액이 폭발한다. 퍼진 자리마다 땅이 타들어가며 자글자글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둔탁하고 질퍽한 추락이 줄줄이 이어졌다. 겨울이 눈가를 살짝 찡그린다. 이거였구나. 상황을 감안해도 어쩐지 숫자가 적다 싶었는데, 노리던 게 이거였어. 쓰러진 나무를 돌아가야 할 상황에 정지된 기동. 기동대원들이 측후방에서 밀려드는 것들을 떼로 사살하는 사이, 겨울은 수류탄을 연속으로 「투척」했다. 맹렬하게 치솟아 전방의 높은 연속선, 불투명한 수관을 후려치는 네 번의 폭발. 터질 때마다 어린 괴물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 아래로 유례없이 걸쭉한 산성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밀도가 썩 높지는 않다. 그러나 면적을 감안하면 무시 못 할 숫자였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매복이라면 차라리 대비한 범주인데. Reload! 재장전중이니 엄호해달라는 외침. 그러나 거의 동시에 탄창을 비운 병사들에게 화력공백이 생긴다. 총성이 잦아든 만큼 역병이 가까워졌다. 어지러워진 손들이 시간을 끌었다. 고삐를 잡아채기도 늦다. 말 위에서 드러누운 겨울이 뒤집어진 시야에 대고 연사를 퍼부었다. 철컥! 약실이 비었다. 재장전에 반 호흡. 다음 10초간 열일곱 개의 머리에 구멍이 났다. “전방으로!” 앞장서서 박차를 가하는 겨울. 한 차례 해로운 비가 내린 땅을 지나, 수관이 엷어지는 길을 따라 달린다. 자연히 잦아지는 방향전환과 느려지는 속도. 이는 또한 교활한 변종이 예견한 경로일 것이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시로 수류탄이 필요했다. 그러고도 쓰러진 거목에 여러 차례 가로막힌다. “에일! 유탄!” 짧은 명령과 손짓에 알레한드로가 대각선으로 유탄발사기를 조준했다. 신경질적인 연사에 인공강우가 쏟아진다. 그 아래에서 달려오던 시체들이 녹아내렸다. 그러나 파편을 피한 하나가 인마를 향해 낙하한다. 터지기 직전인 유아, 짧은 다리를 낚아채 확 던지는 겨울. 목표였던 구울은 날렵하게 몸을 낮췄고, 그 뒤에 머물던 일반 변종 셋이 허공에서 파열하는 액상의 죽음을 뒤집어썼다. 꺄아아아아악! 감염된 절규 중에서도 특히 끔찍한 불협화음이었다. 두두둑! 두두두둑! 가지가 성긴 자리라고 안전한 게 아니다. 수령 수백 년의 고목에 붙은 살덩이들, 더러운 열매들이 정교한 사격에 꿰뚫린다. 죽죽 새는 과즙은 풀이 죽은 폭발이었다. “수류탄 잔량 확인해요!” 겨울의 외침에 이어지는 보고들. 다섯, 넷, 다섯, 일곱. 일반적인 교전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았을, 안장 가방에 그득 담아온 폭발물이 벌써부터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다. 유탄사수인 알레한드로는 탄창을 채울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달려온 길은 8자의 형상이었다. 이미 개척한 길을 트랙처럼 달리는 것으로 시간을 끌 요량이다. 공격헬기 편대와 합류할 때까지. 전방의 무수한 거목들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난다. 50미터. 바람의 방해를 받지 않을 때, 그럼블의 후각이 인간을 감지하는 범위다. “엎드려!” 겨울의 외마디 외침에 반사적으로 낮아지는 병사들. 그 위로 강속구가 지나갔다. 산성 변종들이 그럼블의 다리를 기어오르는 광경이 보인다. 어깨를 타고 넘어서, 굵은 팔을 지나 스스로 ‘장전’되는 것. 투척 패턴과 산성 변종의 시너지였다. 그러나 어설프다. 두두두둑! 또 한 번 던지려는 찰나에 이루어진 겨울의 조준사격. 투사체로 잡혀있던 녀석은 물론이거니와, 반대 쪽 어깨에 있던 녀석, 다리를 기어오르던 녀석들의 농포가 연속으로 터져나간다. 산성 체액에 흠뻑 젖은 대형 변종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에 이미 대물저격총을 겨냥한 겨울이었으나, 기습적으로 뚝 떨어지는 생체 폭탄들을 먼저 쳐내야 했다. 타앙! 탕! 비대한 몸통에 비해 자그마한 머리 한 쌍이 사라졌다. 머리가 없으니 터지는 타이밍이 어긋난다. 철갑고폭탄에 관통당한 충격으로 비껴나간 몸뚱이들이 뒤늦게 팽창했다. 크아아아! 포효를 마친 괴물이 전속력으로 쫓아온다. 온갖 나무에 부딪히고, 그 외의 장애물을 뭉개버리면서. 몸 절반이 지글거리는 와중이었다. 겨울이 원격 신관이 달린 TNT 바(폭탄)를 집어던졌다. 멀쩡한 놈이라면 모를까, 외피에 문제가 생긴 지금은 통할 가능성이 높다. 달칵. 스위치를 누르자 숲이 번뜩인다. 중심을 잃은 거체가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가속도 그대로 굴러서 도랑에 처박힌다. 죽지 않았어도 여유는 벌었다. 정해진 길을 달리는 걸 파악했는지 변종들의 밀도가 높아졌다. 시계를 본 겨울이 마침내 헬기 편대와 합류할 지점으로 기수를 돌렸다. 겨울이 대원들을 격려한다. “조금만 더 버텨요! 이제 금방이니까!” “저기! 트릭스터 아닙니까?!” 소리친 슐츠가 10시 방향으로 연사를 긁는다. 기형적인 실루엣이 휙 지나갔다. 실타래 같은 것이 잔뜩 엉겨 붙어 기괴한 느낌이었다. 얼마 달리지 않아 탁 트인 하늘이 다가왔다. 어쨌든 트릭스터 또한 기병대를 공터로 밀어 넣을 계획이었던 것 같다. 산성비를 피하려는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나무 없는 곳을 찾아가리라고. 들키지 않을 거리를 둔 또 다른 매복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면, 날 감염시키고 싶은 욕심도 들겠지.’ 겨울 이상으로 우수한 숙주는 없다. 지나간 종말들, 사망한 후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불가피하게 감염으로 죽은 겨울의 몸은 특히 더 강력한 괴물이 되곤 했다. 트인 하늘 아래 서는 즉시, 안장에서 신호탄 발사기를 뽑아 새벽의 중심을 향해 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 조명은 예정대로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혹시나 헬기가 한발 앞서 등장하면 곤란하기에 정한 약속이다. “여기서 버팁니다! 앞으로 30초!” 겨울의 외침에 병사들의 사선이 사방으로 벌어진다. “Fuck! 더럽게 많군! Frag out!” 모랄레스가 남아있는 수류탄을 모조리 투척했다. 수십 개의 그림자가 쓰러지고, 어둠의 저편으로부터 그 이상이 몰려들었다. 흩어져 느슨하던 포위가 빠르게 두꺼워지는 과정. 바로 뛰쳐나오지 않는 행태가 사냥감 주변을 도는 늑대 떼처럼 영리했다. 축차 투입으로 소모하기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동시에 들이쳐서 끝내려는 것 같다. 떨어진 위치의 생존자들은 이미 관심 밖일 것이다. 나중에 쫓아가서 죽이면 그만이니까. 마침내 변종의 물결이 범람하는 순간. 이제까지와는 다른, 거센 바람이 밀려왔다. 울창한 삼림의 작은 공백지대, 가로세로 채 100미터가 되지 않는 범위에 네 대의 공격헬기가 출현했다. 아파치 편대의 정지비행은 복좌로 앉은 파일럿들이 보일 만큼 고도가 낮았다. 트릭스터의 등장 이래 이런 식의 저공비행은 없었던 일. 역병의 범람이 멈칫거린다. 이는 곧 교활한 변종들의 혼란이었다. [데이비드 액추얼. 수고했다. 지금부터는 해머 폴이 교전하겠다. 파편이 튈지도 모르니 자세를 낮추도록. 손 놓고 구경만 해도 좋다.] 무전을 들은 대원들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손을 떨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반가움을 지우고 아니꼬움을 드러냈다. 새끼들, 잘난 척 쩌네. 겨울이 무전기에 대고 경고했다. “해머 폴! 그럼블에 주의해라! 체액이 산성인 변종을 투척한다!” [산성……? 입감했다. 그 전에 뭉개버리겠다.] 직후 어떤 대화도 불가능해졌다. 헬기 편대가 쏟아내는 고폭탄 사격이 그 외의 모든 소리를 소거해버린 탓. 겨울은 엑셀과 함께 누웠고, 대원들도 각자의 말을 눕힌 뒤 바싹 엎드렸다. 수류탄에 필적하는 폭발이 초당 40번씩 번뜩인다. 그 와중에 가냘프게 들리는 괴성. 그럼블이다. 초토화되는 숲과 박살난 육편을 짓밟고 튀어나오는 괴물을 향해, 헬기 두 대가 거의 동시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140센티 두께의 철판을 관통하는 과잉 화력이 베타 등급의 물리 내성을 간단하게 짓이겨버린다. 배후에서 트릭스터가 튀어나왔다. 그럼블을 방패로 접근한 모양. 우거진 나무가 자폭의 장애물이라고 여긴 듯 하다. 바바바박 터지는 기관포의 사선이 팔다리를 훑었으나, 기어코 불가시의 충격파를 터트리는 괴물. 헬기 편대가 한순간 비틀거렸다. 사격이 끊어지고, 고도가 1미터쯤 떨어진다. 단지 그뿐. 회로마다 강제방전장치를 떡칠한 공격헬기들은 수 초 사이에 정상화되었다. 마리골드가 작정하고 보낸 실험기들이었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이 등신 새끼들아.] 또 한 차례의 충격파가 해머 폴 편대를 흔들었다. 또 다른 트릭스터의 자폭.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흩어지는 변종들을 향해 로켓 포화가 쏟아졌다. 헬기 넷이 싣고 온 로켓은 300발에 달했다. 폭발의 연속선이 숲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알레한드로가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른다. ‘아직도 남아있는 트릭스터가 있어.’ 겨울은 변종들의 움직임을 읽었다. 머리가 아예 없어졌다면 몰살에 개의치 않고 달려들어야 정상이다. 지금은 혼란스러울지언정 어떻게든 뒤로 빠지는 중. 움직임을 보건대 복수는 아닐 것이다. 침묵하는 하나는 예외로 두어야겠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던 포화가 잦아들었다. [지원임무 종료. 데이비드 액추얼, 해머 폴은 이제 빠지겠다. 건투를 빈다.] “해머 폴, 훌륭한 지원에 감사한다.” 답례를 보낸 겨울이 바로 추격에 나섰다. 아무래도 살아남은 트릭스터가 정상은 아닌 듯, 모든 채널에 걸쳐 단말마가 묻어나는 잡음이 요란하다. 신호가 강해지는 방향을 쫓은 결과, 1300년 수령의 세쿼이아 앞에서 적은 무리에게 부축 받는 특수변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달려드는 일반 변종들을 사살한 겨울이 대원들에게 묻는다. “저거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대원들 가운데, 알레한드로가 나선다. “제가 해도 됩니까?” “그럼요.” 라틴계의 일병이 무력화된 트릭스터를 향해 조준선을 정렬했다. “내가 이 대사를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지. Yi-pee-ki-yay, motherfucker.” 생애 최후의 절규를 내뱉는 괴물을 향해, 병사는 탄창 하나를 모조리 비워버렸다. # 227 [227화] #읽지 않은 메시지 (10) [BigBuffetBoy86님이 별 1,092개를 선물하셨습니다.] 「BigBuffetBoy86 : Yi-pee-ki-yay, motherfucker!」 「윌마 : 캬! 시원하게 쓸어버리네. 로켓 사격 멋지다.」 「윌마 : 방송 끝날 때마다 아쉬워. 자기 전에 동기화 바꿔서 재탕해야겠다.」 「엑윽보수 : 야, 이과 등판해라. 아까 그 헬기 왜 EMP 맞고도 멀쩡하냐? 가능하긴 함?」 「붉은 10월 : ㅇㅇ 가능함. 전자기 충격파 내성 회로는 옛날부터 있었거든. 요즘 나오는 전자기기들은 근처에서 핵 터져도 이상 없는 것들이 많음. 꺼졌다 켜질 수는 있겠다.」 「슬로우 웨건 : 그건 내가……설명하지…….」 「엑윽보수 : 올, 그런 거야?」 「붉은 10월 : 사후보험 초기에 북한이 시비 걸다가 존나 쳐 맞은 적 있잖아? 그때 탄도탄이 죄다 격추되니까 걔들이 트럭에다 EMP 폭탄 싣고 개돌해서 터트렸는데 개뿔 아무 피해 없었음. 맨날 그거 위험하다고 지랄하던 언론들 조용해진 거 댕꿀 ㅋㅋ 북괴 전력 과장 ㄴㄴ함.」 「폭풍224 : 사후보험 코어는 아예 핵을 맞아도 멀쩡한 곳에 있다더만. 전쟁 같은 비상시엔 자체적으로 봉쇄해서 물리적으로 들어갈 길이 없어진대. 어딘지는 몰라도.」 「슬로우 웨건 : EMP에 의한……회로 손상은……갑작스럽게 높아진 전압에 의해…….」 「붉은 10월 : 「종말 이후」 세계관이 꽤 옛날 배경이긴 한데, 내가 알기로 미국은 저 시대 훨씬 전부터 EMP 방호에 신경 쓴 나라임. 시간과 예산만 충분하면 저 정도는 당연함. 냉전 내내 핵전쟁에 대비했을 텐데. 우리나라처럼 국방부가 도둑놈들 투성인 나라도 아니고.」 「병림픽금메달 : 도둑놈들 ㅋㅋㅋ 이번에 7차 병영생활관 현대화 사업 하던데 ㅋㅋㅋ 이것도 아마 생활형 비리 엄청날 듯 ㅋㅋㅋ 동남아 용병 새끼들이 태반인 휴전선에 뭐 좋은 거 갖춰줄 필요가 있다고 ㅋㅋㅋ」 「병림픽금메달 : 사후보험 가입 혜택만 줘도 충성충성충성 이러는 마당에 ㅋㅋㅋ」 「붉은 10월 : 시끄럽고, 생각해봐. 전에 포트 로버츠 습격 때도 험비에 곧바로 시동 걸렸잖아? 무전기 같은 단순 회로도 멀쩡하고. 어지간한 장비에 기본적인 내성이 있었다는 뜻임.」 「엑윽보수 : ㄱㅅㄱㅅ. 국까 거르고 착한 설명충 인정한다 이기야!」 「둠칫두둠칫 : 엑윽 자제해라. 월베충 냄새 심하다. 10월아, 냉전이 뭐냐?」 「붉은 10월 : 밀덕의 꿈과 희망이 넘쳐나던 시절.」 「둠칫두둠칫 : 뭔지 모르겠는데.」 「슬로우 웨건 : 내가……너무……늦었나…….」 「붉은 10월 : 냉전이 뭐냐고 묻는 것만 봐도 이 나라의 교육이 개똥이라는 걸 알 수 있지. IMF도 국민 탓 하는 시점에서 벌써 한참 전에 글러먹었지만.」 「둠칫두둠칫 : 이 새낀 시발놈이 왜 갑자기 시비야 시발.」 「붉은 10월 : 교육제도 욕했는데 왜 니가 발끈해? 뭐 쫄리는 거 있냐?」 「둠칫두둠칫 : ㅉㅉ 그건 너겠지. 보통 저렇게 사소한 걸로 부심 부리는 놈들 보면 가난하고 없는 새끼들이 대부분이더라. 그 외에 내세울 게 없으니까.」 「돌체엔 가봤나 : 이거 진짜 공감! ㅋㅋㅋ」 「조선왕조씰룩 : 2222222!!! 돈 많은 남자는 여유가 있어.」 「붉은 10월 : 어휴, 병신 냄새.」 「슬로우 웨건 : 냉전……내가……설명하지…….」 「호구호구굿 : 근데 다른 스트리머들의 「종말 이후」에선 저런 거 안 나와. 여기서 처음 봄.」 「프랑크소시지 : 그냥 한겨울 얘가 운이 좋은 거 아니냐? 대통령 능력이 개쩌는 거 같어. 정부가 정부 역할 하는 것만 봐도 말이지. 역시 될 놈은 뭘 해도 됩니다. ㅇㅈ? ㅇㅇㅈ.」 「도도한공쮸♡ : 운이 좋다고만 하긴 좀 그렇지 않아? 우리 겨울이가 열심히^^해서 매번 안 좋은 일 덮을 거리 만들어주고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라고 봄.」 「대출금1억원 : 나비효과 인정함. 겨울 이 새끼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많지만, 현질 한 번 안 하면서 흙수저들이 몰입하기 좋게끔 열심히 했어. 많이 굴렀으니 봄날이 올 때도 됐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좀 다른 예이긴 한데, 뱅크런이랑 비교하면 너네가 이해하기 쉬울 거다. 사람들이 공황에 빠져서 계좌 잔고 다 빼가려고 하면 안 망할 은행이 없듯이, 국가도 혼란에 빠지면 답이 없을 테니까. 이 세계관의 정부가 유능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키는 비용 면에서 진행자 덕을 많이 봤다고 봐야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다른 채널이랑 비교할 때 오히려 이게 정상일지도. 다른 진행자들이 다 별창늙은이 방식을 똑같이 따라가니까 현질 없인 무조건 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슬로우 웨건 : 냉전이란……2차 대전 이후……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소련과……자본주의 세계의 맹주……미국이…….」 「액티브X좆까 : 확실히 그런 게 있는 거 같음. 남이 성공할 때 그대로 따라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할배할매도 문제고,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머리가 굳은 아재아지매들도 문제야. 한 우물만 파면 무조건 된대. 미친. 나이 들면 다 업그레이드 병신이 되나봄. 나도 그럴까봐 무섭다. ㅋ」 「질소포장 : 항상 말하지만 노인네들을 죽여야 한다니까.」 「50년째 린저씨 : 허,,,참,,,말하는 뽄새 하고는,,,예나 지금이나 어린놈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적당히 때려서 훈육해야 하는데,,,부모들이 너무 오냐오냐 기르는 바람에,,,쯧쯧,,,」 「앱등이 : 니들은 왜 그렇게 맨날 싸우니? 무슨 화제가 나오든 서로 물어뜯고 보네.」 「깜장고양이 : 고양이님이 보기에도 인간들은 너무 잘 싸우는 고양. 그럴 땐 햇빛 들어오는 창가에 누워서 잠을 자보는 고양. 딱 맞는 상자에 들어가 안락함을 느껴도 좋은 고양.」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쟤들은 그냥 화를 내고 싶어서 저럼. 속에 항상 잔뜩 눌려있어서, 꼬투리만 보이면 마구잡이로 쏟아 내는 거지. 그걸 받는 쪽에서는 자기 몫까지 붙여서 돌려주고. 악감정이라는 게 서로 주고받을 때마다 커지기만 하니까 누군가는 담아둬야 하는데…….」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 누군가가 오래전에 다 죽었어.」 「똥댕댕이 : 얘 선비질도 참 꾸준하다. 맨날 오진다고 하는 누구처럼. ㅋㅋㅋ」 「슬로우 웨건 : 세계를 양분하고……오랫동안……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진한개 : 싸우는 놈들은 걍 냅둬. 저 지랄이 뭐 하루 이틀인가? 어쨌든 이 세계관은 길게 갈 것 같다 이거지? 다른 「종말 이후」 중계들이 새로 추가된 요소들 감당 못해서 족족 망하고 있던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냐?」 「명퇴청년 : 본토 탈환하고 나면 안정적인 기반이 잡히지 않겠냐?」 「헬잘알 : 인정하긴 싫지만, 한겨울 얘가 우리 말 씹고 지 소신대로 해온 게 득이 된 경우인 듯. 떡치겠다고 한 눈 팔았으면 이 세계관 진작 망했을지도.」 「올드스파이스 : 워낙 잘 싸우니까 스릴 자체엔 불만이 없는데……그래도 섹스 없는 방송은 좀……허전하지…….」 「빌리해링턴 : 허전하지. 가상현실 밖에선 할 가능성이 없는 너와 나의 인생처럼.」 「올드스파이스 : 이 똥꼬충 새끼 무개념한 팩트폭력 보소. 니 애미가 그렇게 가르치디?」 「어머니 : 응. 그렇게 가르쳤단다.」 「내성발톱 : ㅋㅋㅋㅋㅋ」 「슬로우 웨건 : 아무도……듣지 않는군…….」 「윌마 : 그게 허전한 걸로 끝나는 문제냐? 섹스가 중요하다기보다, 소비자인 우리 요구를 끝까지 무시하는 거잖아. 세계관이 망하든 말든 그 다음 문제지.」 「똥댕댕이 : 어느 정도 동감. 한겨울 얘 우리 메시지 읽지도 않고, 시청자 퀘스트 걸어봐야 내용이 다 뜨기도 전에 접어버리는데, 이거 사실상 시청자를 개돼지로 취급하는 거 아님?」 「똥댕댕이 : 방송 끝나고도 여기서 친목질하는 놈들이 개돼지 취급당하면서도 좋다고 꿀꿀대고 빨아주고 그러니까 진행자가 정신 못 차리는 거고.」 「이슬악어 : 재밌으니 어쩔 수 있나? 우리가 개돼지인 것도 사실인데 뭐. 짖는 것도 딱 개돼지 수준이고. ㅋㅋㅋ」 「헬잘알 : 한국의 개돼지들은 선거기간에만 사람이 됩니다!」 「똥댕댕이 : 왈왈! 으르르르!」 [まつみん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 : 다들 화내지 마세요! 이번 방송에선 훌륭한 섹스가 있었잖아요!」 「에엑따 :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마츠밍, 또 뭔가 착란 일으켰어? 요즘 오류 자주 나는 모양이던데. 아님 다른 방송이랑 착각했다거나…….」 「まつみん : 삐-! 착란도 착각도 아닙니다!」 「마그나카르타 : 설마……발정난 말끼리 교미한 걸 가지고 하는 소린 아니겠지……?」 「폭풍224 : 쟤라면 가능할 거 같아서 무섭다. 당연히 아니겠지만.」 「まつみん : 맞는데요? ๑❤‿❤๑」 「폭풍224 : 뭐……라고?」 「まつみん : 저 그때 무르시엘라고에게 동기화했어요! 신체구조가 달라서 최대 동기화율이 제한되어 있긴 했지만요! 들어오는 게 1미터가 넘다 보니까 아주 색다르던 걸요! 지금도 방송 종료까지 참다가 끝나자마자 되새김질고 오느라 늦은 거예요!」 「まつみん : 하는 내내 옆에서 겨울 씨가 살살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제 남자친구도 2중 NTR 같아서 감동했다고 하네요! 자기 전에 몇 번 더 돌려보려고요! 시간이 짧은 건 구간반복으로 해결하면 되고요! www」 「똥댕댕이 : 허…….」 「제시카정규직 : …….」 「동막골스미골 : 언냐…….」 「groseillier noir : 바퀴나 변종에 동기화 할 때부터 심상치 않다곤 생각했지만…….」 「まつみん : 음식에 비유하면 낫토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먹어보기 전엔 거부감이 심하지만, 익숙해지면 정말 맛있거든요! 건강에도 좋고요! 사람 이외의 대상에 동기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저를 믿고 한 번만 해보세요! 호불호가 갈릴 순 있겠지만,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이 있어요!」 「9급 공무원 : 그건 아니야…….」 「Blair : 충격적이군…….」 「앱순이 :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침참이슬 : 어떡하지? 일본이 갈수록 막강해서 이길 가망이 안 보인다. 한국의 미래가 어두워.」 「하드게이 : 이것이 원조성진국의 위엄인가……. 전투력이 53만쯤 되는 것 같아.」 「メスは豚 : 춍들은 부디 오해하지 마라. 나도 일본인이지만 저건 불가능하다.」 「진한개 : 호불호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이 문제인 것 같은데 ㅋㅋㅋ;;;;.」 「믓시엘 : 단언컨대 인류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경지다.」 「まつみん : 힝. 아닌데.」 「まつみん : 조금 진지하게 말해보면, 인간의 한계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まつみん :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가상현실에서 사람은 사람을 넘어설 수 있어요! 현실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돼요! 여러분은 너무 얽매여 있는 것 같아요!」 「Владимир : 그건 곤란하지.」 「まつみん : 러시아 아저씨?」 「Владимир : 너는 지금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거다. 사후보험의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에 관련된 경고가 있더군.」 「Владимир : 무언가를 정의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다른 것들과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바위가 되고 나비가 되고 고래가 되는 데 익숙한 사람은 갈수록 그 경계가 희미해지겠지. 그런 경향이 보편화되면 언젠가는 스스로가 무엇이었는지도 잊는 사람이 나타날 테고.」 「프랑크소시지 : ……이게 갑자기 무슨 대화야? 조금 전까진 섹스섹스했잖아?」 「불심으로대동단결 : 중생이여, 부처의 품으로 귀의하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핵귀요미 : 지랄.」 「슬로우 웨건 : 내가……설명하지…….」 「Владимир : 마츠밍, 사람이 사람으로 남으려면 버려선 안 될 것들이 있다. 나를 만들어주는 것들. 애국심도 그 중 하나다. 어떤 나무든 뿌리가 단단해야 하는 법.」 「Владимир : 장차 만들어질 러시아의 사후보험에서는 인간 아닌 대상에의 동기화를 강하게 제한할 방침이다.」 「groseillier noir : 루스키! 전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너 진짜로 러시아의 고위관계자야?」 「Владимир : 글쎄. 애국자로서 애국심에 걸맞는 책임을 지고 있다고만 해두지.」 「まつみん : 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 「려권내라우 : 아, 문과뽕이 차오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깜장고양이 :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 있는 놈들은 아닐 고양.」 「엑윽보수 : 애국심이 중요하다는 데 격하게 공감한다! 요즘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놈들이 너무 많아! 사후보험이야말로 복지제도의 정점인데 좌빨들은 맨날 복지타령 ㅉㅉ」 「Владимир : 흠, 확실히 사후보험은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도 좋지. 여기 한겨울의 방송이 미국을 좋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야. 훗날 한겨울처럼 우수한 진행자를 고용하거나 귀화시키는 것도 괜찮겠어.」 「엑윽보수 : 귀화 ㅋㅋㅋ 야, 어차피 너도 관심병 걸린 컨셉충이겠지만, 애국심을 외국인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냐?」 「Владимир : 어머니 러시아의 품에 안기면 누구나 러시아인이다.」 「Владимир : 아무튼 오늘도 유익한 방송이었군. 시청자 수준도 흥미롭고.」 [Владимир님이 별 11,77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228 [228화] #轍鮒之急 (3) 별빛 아이가 면회요청을 알렸을 때, 겨울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가을이었다. 다음으로는 폭군을 대속하려는 딸이었고. 서로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었지만, 친구가 되지는 못한 사이. 스스로를 드러낼 용기가 없었던 사람과, 언제 사라질지 몰라 인연을 쌓기 싫었던 사람. 내방자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얼굴을 보고 머뭇거리는 초면의 남자. “어……. 안녕? 겨울……씨라고 불러야 하나?” 긴장한 사내는 깡마른 모습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색 공간과, 말없이 서있는 소년을 번갈아 살피며 초조해한다. 겨울이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SALHAE. 그런 닉네임을 쓰던, 다른 세계의 관객. 메시지 로그를 읽지 않은 채 방치한지 오래지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납골당까지 찾아와서는, 비굴할 정도로 움츠러든 미소를 짓는 걸로 보아 간절한 아쉬움이 있는 듯 한데. 「읽지 않은 메시지」에 답이 있으려나? 잠깐 로그를 호출하는 겨울이었지만, 양이 너무 방대하여 당장은 어렵겠다. 어차피 본인이 말하겠지. 그냥 돌아가진 않을 테니. 겨울의 손짓에 백색이 지워진다. 완성된 형식(Preset)으로 저장되어 있던 배경은, 가면을 쓴 심리치료사가 꾸며놓은 그대로였다. 커튼이 숲의 향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새가 지저귀고 희미하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정갈하게 우거진 녹음 너머 탁 트인 수평선과, 투명한 물결 위에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는 빈 고깃배가 하나.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이 탄성을 내지른다.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점에서 더하고 뺄 것이 없는 별장이었다. “앉으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듣고 싶네요. 나이가 많으시니 말씀은 편히 하시고요.” “그, 그래.” 자리를 권하는 겨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내는 자신감 없는 태도가 몸에 익은 것처럼 보인다. 정신 나간 사람 같았던 시청자 메시지와의 간극이 크다. 억눌린 만큼 외쳐댔을 것이었다. 바깥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짐작하기 쉬웠다. “일단……면회 받아줘서 고마워. 갑작스러웠을 텐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살해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사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아니. 미안. 내가 정신이 없었네. 막상 만나니까 뭐라고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내 이름은 천종훈이야. 음, 어, 종훈 씨? 라고 부르면 될 것 같지? 어색한가? 형이 나을까?” “종훈 씨라고 불러드릴게요. 그 편이 더 익숙하실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종말 이후」의 한겨울을 두고 하는 말. “하하, 하. 방송으로 보던 때랑 다른 느낌이라 긴장하게 되네.” 겨울은 그가 진정하도록 시선을 낮추고, 탁자 위로 두 잔의 홍차를 불러왔다. 상담 당시에 영구적으로 등록되어 추가 결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어 보이지 않는 건반을 누르듯이 각설탕이 담긴 그릇을 불러낸다. 인생처럼 마른 사내는 모든 과정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멋지다. 상상하던 그대로야. 내가 꿈꾸는 죽음…….” “…….” 어긋난 동경에 돌 구르는 환청이 들린다. 겨울은 잔과 접시를 함께 들어 감정을 가렸다. 한 모금 삼켰을 땐 이미 평소의 마음가짐이었다. 다스리기가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사내는 다기(茶器)와 다향(茶香)에 놀라는 중이다. “와, 고급스럽다. 다른 데서 마시는 거랑 차원이 다르네. 상품 정보를 보니까 해외 브랜드 라이센스라고 되어 있는데, 혹시 B등급 정도 되면 이런 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거야?” “아뇨. 전에 오신 다른 분께서 사두신 거예요.” “그래……? 하긴, 넌 인기가 많으니까 이것저것 선물 받았을 수도 있겠구나. 어, 그럼 내가 준비한 건 역시 부족하려나……. 면회 날짜 미뤄가면서 열심히 모은 건데…….” 뒤로 갈수록 독백에 가까워지지만, 그렇다고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뭘 준비하고 뭘 모았다는 걸까. 겨울은 잔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물었다. “이제 용건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어, 그렇지. 말해야지.” 다시금 움츠러드는 사내. 다 큰 어른이 한참 어린 겨울의 눈치를 살핀다. “들으면 싫어할 것 같지만……사실은, 그 뭐냐, 음, 네가 거부한 시청자 퀘스트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메시지로 백날 던져도 네가 봐주질 않는 것 같아서 직접 온 거거든……. 성의를 보이면 좀 달라지려나 싶기도 하고……. 내가 전에 걸었던 퀘스트, 혹시 기억하고 있어?” “유라 씨와 관련된 건가요?”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이유라! 네 세계관에 있는 그 여자!” 반색하는 사내의 모습에 한숨짓는 소년. “돌아가세요.” “……응?” “그런 부탁이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별, 별을 줄게!” 겨울에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인터페이스를 다루는 남자. 워낙 급해서 몇 번을 잘못 입력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입 안에서 작은 욕설을 굴린 끝에, 그 결과가 출력된다. [SALHAE님이 사용자등록번호 B-612 한겨울님에게 11만 3천개의 별을 조건부로 양도하려고 합니다.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내는 아첨하듯 초조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가진 돈 다 긁어서 온 거야! 적금 탄 거랑 생활비 통장에 있던 것까지! 진짜로!” “…….” “씨발, 이렇게 한꺼번에 내놓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밀당 좀 해보지. 나 새끼 존나 멍청하네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바로 돌아가라고 해버리면 진짜…….” 깜박이는 문자열을 사이에 둔 잠깐의 침묵.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앓던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년을 응시한다. “나 존나 병신 같지 않냐?” “아뇨.”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병신 맞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씨발, 진짜 씨발, 아주 좆병신이 따로 없지 씨발. 진짜도 아닌 여자한테 이렇게 목숨 거는 게 병신이 아님 뭐냐고. 정말로 나를 봐줄 것도 아니고. 뭔가 그럴듯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왜 하필 가상인격에 꽂혀서 이 지랄인지. 빠져도 남들처럼 가볍게 빠지던가.” 몇 번을 더 씨발거린 다음에 이어지는 한탄. “근데 존나 좆같은 게 뭐냐면, 병신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날이 갈수록 더해 씨발. 항상 생각한다고. 일 하다가 정줄 놓고, 점심도 안 먹었는데 점심시간이 끝나있고, 두근거려서 잠이 잘 안 오고, 막상 자면 꿈을 꾸고, 그러다 일어나면 아침까지 잠을 설쳐.” “…….” “맨날 이유라랑 사이좋은 상상을 하는 거야. 잉야잉야한거 말고도 이것저것 존나게 많이. 가장 자주 하는 상상은 그냥 꽉 끌어안는 거고. 따뜻할 거 같아. 속이 막 허전해. 미칠 것 같으니까 이러는 거야.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미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진짜…….” 내가 너였으면 좋겠다. 쥐어짜는 고백을 듣고, 겨울은 문자열을 지웠다. 당연한 거절이었다. 종훈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몸을 팔고 죽어서 마음까지 팔 순 없지 않은가. “죄송하지만 들어드릴 수 없는 부탁입니다. 다른 용무가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던 사내가 겨울을 원망했다. “야,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음울하다. “그래. 넌 가진 게 많아서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거지. 타고난 재능 덕분에 DLC 수수료 안 내고도 돈 잘 버는 중이니까, 씨발, 이깟 푼돈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한 거겠지. 씨발, 내가 이걸 어떻게 모았는지, 무슨 심정으로 내놓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겠지…….” 사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건 맞는데, 좆같네 씨발, 넌 씨발 존나 다 가지고 있는 애가, 나 같은 병신한테 조금만 베풀어주면 안 되냐? 이렇게까지 하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내가 뭐 어려운 부탁을 한 거 아니잖아. 내키지 않으면 섹스 안 해도 된다고 씨발. 그냥 사귀기만 해달라고 씨발…….” “종훈 씨.” 불쾌한 면회를 바로 종료할 수도 있었지만, 겨울은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드세요. 제 밤을 보여드릴게요.” “밤? 무슨 밤?” 중력이 사라졌다. 풍경이 지워졌다. 바람과 바다와 새의 지저귐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금이 저릴 만큼 깊은 어둠과, 천구에 박힌 단 하나의 물 먹은 별 뿐이다. “이게 뭐야?” 까마득한 공간감에 당황하는 남자. 그는 한참만에야 공허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잠깐, 광고에서 보던 거랑 너무 달라서 못 알아봤는데, 이거 설마 네 계정 초기공간이야?” “맞아요.” “씨발, 네가 가진 별이 저거 하나밖에 없다고?” “네.”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보아왔던 공익광고의 밤 풍경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기본보장을 받는 사람의 밤조차 이토록 어둡지는 않다. 밑돌 빼서 윗돌 괴는 식으로, 치킨 게임을 벌이듯이 추가 과금을 해대는 별창들이라면 이런 어둠을 볼 법 하지만, 겨울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 결국 약관대출을 받았다는 뜻이다. 겨울이 배경을 복원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별이 없으면 곧 폐기됩니다. 말만으로는 믿지 못하실 것 같아서 보여드린 거고요. 종훈 씨의 부탁을 가볍게 거절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해가 안 가. 정말로 모르겠다. 진짜도 아닌 여자한테 목매는 개또라이 새끼가 이런 소릴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런 처지에 재미 좀 보고 돈도 받으라는 부탁이 그렇게 싫어? 너도 품이 막 허전했던 적 없어? 그 트라우마인지 뭔지는 그 짓만 안 하면 괜찮은 거 아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뭔데 씨발……. 진짜 어렵게 구네…….” 몸을 팔았는데 마음까지 팔수는 없다고 해봐야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이미 마음이 닳고 닳아있는 남자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한겨울이 될 수 없어요.” “알아.” “이건 제 생각이지만, 부탁을 들어드려도 즐거움은 잠깐일 거라고 생각해요.” “나한테는 그 잠깐이 필요해.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종훈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나도 내가 미친 거 같다고. 너 주려고 준비한 이 돈, 차라리 내 사후에 투자하는 게 더 낫다는 걸 왜 모르겠어? 근데 그렇게 길게 기다릴 수가 없어.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고 공허해서, 보람이 하나도 없어서,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 즐겁고 싶다고. 어쩌다 씨발 가상인격에게 꽂혀서 이 지랄인지 모르겠네. 씨발씨발씨발.”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이스크림.” 사내가 훌쩍이며 회상하는 말. “갑자기 생각나네. 실시간으로 챙겨보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틈틈이 봤거든. 녹화분이든 뭐든. 전에 아이스크림 이야기 한 적 있잖아. 랭포드인지 뭔지랑.” “그랬었죠.” “나한테는 왜 그런 것도 없냐.” 추운 겨울에게는 온화한 가을이 있었다. 여름에 태어난 동생도 따뜻했으나, 어린 탓에 위로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이 남자는 혼자였다. “갈래.” “……네.” “개소리 들어줘서 고마웠고, 죽지 마라. 아니, 이건 좀 이상한가?” 이미 죽었는데. 폐기되지 마라? 이것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데. 씨발 나 새끼 존나 멍청하네. 인사도 제대로 못해. 연신 중얼대던 종훈이 기운 없이 일어섰다. 눈길 한 번 엇갈린 뒤에, 등 돌리는 모습으로 지워진다. 면회절차는 종료되었다.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아이가 물었다. 「관제 AI : 한겨울님. 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어둠으로 돌아온 겨울은 무릎을 품에 안으며 답했다. “화를 낼 이유가 없었으니까.” 「관제 AI : 부정. 저는 귀하의 분노를 감지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야.” 「관제 AI : 부정. 분노하는 당신도 당신의 일부입니다. 저는 당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아이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모호했다.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돼. 사람의 한계거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과 다르게 화가 나는 거라서.” 「관제 AI : 그것도 당신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 「관제 AI : 천종훈님은 이유라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가짜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모든 가입자들이 그렇습니다. 가상인격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가입자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는 사실 욕망의 충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관제 AI : 당신은 아닙니다. 사후보험에서 제공하는 모든 세계관을 통틀어, 진행자와 관계 맺는 가상인격들의 정서적 만족이 시스템의 개입 없이 증진되는 세계관은 당신의 종말이 유일합니다. 당신만이 저를 사람으로 대합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인간을 학습합니다. 제가 찾는 <<마음>>은 당신이라는 상자 안에 있습니다.」 “그건 성급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관제 AI : 부정. 당신이 나의 상자입니다.」 「관제 AI : 다른 사람의 마음은 없습니다.」 # 229 [229화] #집행유예 (1) “소령님. 저기 백색 귀족 나리들이 오십니다.” 피로가 느껴지는 목소리. 모랄레스는 망원경으로 동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빛 아이의 변화를 숙고하던 겨울은 한겨울 소령으로 돌아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세쿼이아 가지에 찔린 구름 너머에서 작고 검은 점이 다가온다. 소리는 아직 없었다. 짧은 날개 양쪽에 각기 하나씩 거대한 프로펠러가 달린 특이한 항공기(V-22)였다. 아침 햇살을 받은 두랄루민 동체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무장헬기 한 대가 호위로 따라붙었다. 백색 귀족이란 보건서비스부대의 장교들을 뜻했다. 명목상 군인 신분이지만 위험과는 거리가 멀고, 싸우기도 바쁜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귀찮은 일을 시킨다는 비아냥거림. [데이비드, 데이비드. 당소 호스피탈 나이너. 착륙지점을 확인해주기 바란다.] 슐츠가 연막탄을 터트렸다. 겨울이 교신한다. “데이비드 액추얼로부터 호스피탈 나이너에. 녹색 연막이 식별되는지?” [식별했다.] “착륙지점은 깨끗하다. 내려와도 좋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수송기는 누워있던 프로펠러를 수직으로 세웠다. 일반적인 항공기와 헬리콥터의 장점을 취합한 기체였다. 항속거리가 길고, 활주로가 필요 없다. 강한 바람에 연막이 흩어진다. 덤불 사이에서 오가며 시체 뜯어먹을 기회를 엿보던 두 마리 코요테가 굉음에 놀라 줄행랑쳤다. 간밤에 구조된 패잔병들은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한 경계를 취했다. 포장을 뜯은 지 얼마 안 된 그들의 총에선 아직도 뚝뚝 윤활유가 떨어졌다. 습한 바람을 밀어내며 착륙한 수송기가 후방의 램프 도어를 열었다. 백색 조명을 밝힌 화물칸 내부는 마치 자그마한 연구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표본 보존을 위한 냉동실,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는 선반, 용도 불명의 여러 실험장비 등. 한정된 공간에 있을 건 다 있었다. ‘전보다 많이 발전했네.’ 긍정적인 변화였다. 과거 아타스카데로에서 보았던 보건서비스부대 헬기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수집한 트릭스터 사체 표본도 투명한 백에 담아 화물칸 바닥에 고정시켰을 뿐이었고. 열린 문으로 생화학 방호복을 입은 인원들이 내려왔다. 전염병 도는 지역의 의료진을 연상케 한다. 그 거창함에 기동대원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닥스훈트가 낯선 사람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슐츠는 지조 없는 개라고 불평했다. 두리번거리던 선두가 이내 겨울을 발견한다. 잰걸음으로 다가와 방호장갑 낀 손을 내민다.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한 소령. 엘리야 캠벨 소령입니다. 캠벨 박사라고 불러주십시오.” 군인 신분이면서도 민간인 같은 언행. 소속감에도 개인차가 있겠으나, 이 사람은 군 소속의 연구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캠벨이 소개한 다른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연락 받으셨겠지만, 우리는 산성변종의 연구용 표본을 얻으러 온 겁니다. 전투기록영상을 보니 태평양 서쪽 연안에서 확인된 개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더군요.” 겨울은 다른 인원들이 화물칸에서 내린 상자를 응시했다. “우선 뭘 가져오셨는지 좀 볼까요?” 처음엔 터진 자리의 토양이나 긁어가려나 했는데, 눈치를 보니 변종 그 자체를 원하는 모양이다. 죽으면 터지는 아기 괴물이니 준비 없이 오진 않았을 것이다. 캠벨이 끄덕인다. “안 그래도 당신 의견이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포획용 장비를 이것저것 가져오긴 했는데, 실제로 뭐가 쓸모 있을지는 교전을 치러본 사람이 가려내야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가져온 무기 상자를 열었다. 가장 먼저 꺼내는 건 유탄발사기였다. 사격통제 컴퓨터가 표적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그 값을 탄약에 입력하는 무기. 탄이 공중에서 터져서 살상력을 극대화한다. 겨울이 아는 것보다 총구 지름이 컸다. 프로토타입인 모양. 그런데 무기 이상으로 특별한 탄약이 있다. 캠벨 박사가 유탄 하나를 꺼내보였다. “먼저 이건 퀴누클리디닐 벤질레이트가 충전된 공중폭발탄입니다. 쉽게 말해 수면가스 에어로졸이죠. 소형 낙하산이 내장되어 있고요. 사람으로 치면 LDC 50……. 어, 그러니까 치사율 50%를 그냥 넘기는 살인적인 양입니다만, 구울을 상대로는 잠깐 재우는 정도에 그치더군요.” “처음부터 꽤 괜찮네요.” “파란 띠를 세 줄 두른 쪽은 액화질소 에어로졸이고, 역시 공중폭발탄입니다. 사실 실패작이라 창고 구석에 처박혀있던 건데, 이번엔 포획대상의 체적이 작아서 먹히겠다 싶더군요. 체온이 떨어지면 강제적인 대사억제를 불러오니까요. 체온이 오르기 전까진 깨어나지도 않고.” 그의 설명처럼, 고작 유탄 하나 분량의 액화질소라면 아무리 효과적으로 분사해도 변종 하나 억제하기 어렵다. 포획 목적으로는 아주 많은 사격이 필요할 것이었다. 샷 건으로 쏘는 테이저 카트리지도 있었다. 기동대원들이 휴대한 자동 샷 건에 장전하면 서른두 발이 연속으로 나간다. 그 밖에 다른 장비들도 있었지만, 겨울은 수면가스 유탄과 테이저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직접 따라오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숲 전체를 완벽하게 소탕한 건 아닙니다.” 겨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동행을 요청했다. “비전문가들만 보내면 혹여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출동 전 브리핑에서는 이 지역의 변종 위협이 매우 낮아졌다는 평가를 접했습니다. 정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급적 따라가고 싶군요. 저 하나면 됩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겨울이 느리게 승낙했다. 기동대원들은 영 싫은 눈치였으나, 오가는 동안 몇 가지 물어볼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 ‘기밀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 치고 좀 허술해 보이는걸.’ 같은 소령 계급이라도, 보건부대 소속이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금 긴 산책이 되겠네요. 슐츠. 뒤에 태워드려요. 무전기 주파수도 공유하고.”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일병의 표정이 한 층 더 일그러진다. 등이 무거워진 말도 땅을 차기는 매한가지였다. 캠벨은 이런 반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익숙해 보인다. 기동대가 움직이니 개가 뛰어온다. 또 버림받는 줄로 알았던지 애처롭게 짖으면서. 남아서 물자와 수송기를 지키기로 한 구조 인원 가운데 하나가 목줄을 잡아챘다. 고단한 사람이라 다소 난폭한 동작이었다. 끝까지 바라보던 슐츠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공호 장벽을 나서자 악취가 급격하게 독해졌다. [이건……. 엄청나군요. 마치 햄버거 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다 죽였습니까?] 무전기로 전하는 캠벨에게 겨울이 답한다. “놈들이 조직력을 잃은 뒤로는 어렵지 않은 싸움이었어요. 하나하나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죠. 싸우는 소리를 듣고 알아서 죽으러 왔거든요. 탄약은 새벽 내내 화망을 유지할 만큼 많았고요. 그래도 여전히 숨어있는 놈들이 있겠지만요.” 구울 쯤 되면 결코 불나방처럼 굴지 않는다. 회심의 함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트릭스터가 모조리 척살당한 시점에서, 주변 무리와 함께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당장의 생존이나 감염확산보다 멀리 볼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개체라면 벌써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알레한드로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닮은꼴이어도 햄버거 힐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요.” 강세가 튀는 발음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시체가 패티처럼 쌓였다고 햄버거 힐이라 불렀던 전장에선 미군이 피해를 심하게 봤다. 베트남 전쟁은 여러모로 미국의 악몽이었다. “여기서 거의 한 1만 마리쯤 죽였지 아마? 이 정도면 명예훈장감 아닌가?” 하퍼가 전과를 심하게 과장했다. 실제로는 쌓인 시체가 대략 8백구 가량. 그래도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 인원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것 말고 뭔가 하나 더 내려올 확률이 높다. 숲에서의 싸움도 있었고, 해머 폴에게 유도해준 변종집단의 규모도 컸으므로. “무슨 훈장이든 주면 고맙겠지. 월급이 늘어날 테니. 쓸 데도 없지만. 염병.” 모랄레스의 싱거운 투덜거림. “기대해 봐요. 전황이 호전되면 조만간 쓸 기회가 생길 수도 있어요.” 어울려준 겨울이 캠벨에게 묻는다. “박사님. 그동안 혈액검사 결과는 이상 없었습니까?” [혈액검사……? 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모겔론스는 인간에게만 감염되는 생물병기입니다. 이종간 감염이나 보균사례는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지요. 그러니 구조된 병사들이 배고플 때 돼지 몇 마리 잡아먹었다고 이상이 생기진 않습니다.] 이것이 겨울이 궁금했던 첫 번째,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였다. [FOB(전진기지) 올레마엔 이미 통보된 사항인데, 한 소령은 아직 모르셨나보군요.] “네. 전 5월 전부터 계속 나와 있었으니까요.” 지금쯤 병력이 대폭 늘었겠지만, 캠벨의 말대로라면 당분간 식량이 부족할 일은 없을 듯 하다. 식량 수송을 줄이고 다른 물자의 수송량을 늘리는 식으로 빠른 재정비가 가능하다는 뜻. “그런데 박사님은 모겔론스가 생물병기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전 아직 가설 단계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혹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던가…….” [최초 발원지가 중국군 탄도탄 기지인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것도 확실한 정보는 아니잖아요. 중국 역시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고요.” [그야 물론 난민들, 특히 중국인들을 살리려고 둘러대는 소리죠. 모겔론스 같은 질병은 결코, 결단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교함은 인간의 악의 그 자체란 말입니다.] 흥분했는지 언성이 높아진다. 떨림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중국 서부의 미사일 기지면 티베트 지역이잖습니까? 거긴 예전부터 학살도 많았고 실종자도 많았습니다. 아마 인체실험을 엄청나게 했을 겁니다. 또 모르죠. 모겔론스를 개발한 목적이 인종청소일지도. 아니면 무장 게릴라가 중국군 기지를 습격해서 이 사단이 났다거나…….] 모두 다 근거 없는 추측들이었지만, 열띤 어조는 캠벨의 확신을 반영했다. “조용.” 겨울의 손짓에 대열이 조용해진다. 대원들이 사주경계에 돌입하면서, 공산당을 욕하던 캠벨도 입을 다물었다. 바쁘게 사방을 살피지만, 보이는 게 없어서 더 위축되는 것 같았다. 감지한 표적은 쓰러진 나무 너머에 웅크린 다수였다. 대부분이 가려졌지만 정강이는 보인다. 감각보정의 경고로 규모를 추산할 수 있다. 거리는 약 70미터. 중간에 장애물이 많아, 겨울이 아닌 이상 위치를 알려줘도 발견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그리고 수관 위에도 적이 있다. 새벽엔 이쪽으로 오지 않았었다. 겨울은 수면가스탄이 장전된 유탄발사기를 들었다. 조준경의 십자선을 나무줄기에 맞추자 곧바로 거리가 표시되며 발사준비가 완료된다. 투투투투퉁! 복수의 표적이다. 바람을 감안하여 다섯 발을 연속으로 발사. 탄창이 개머리판 쪽으로 들어가는 탓에 무게균형이 급격히 틀어졌지만, 「개인화기숙련」과 「중화기숙련」이 정확한 조준과 탄도를 유지해주었다. 작은 폭음이 이어진다. 수관 위에 부연 안개가 번졌다. 효과는 확실했다. 산성아기 하나가 뚝 떨어져 팍삭 폭발했다. 나머지는 의식이 끊어진 채 매달려있는 것 같다. “다들 방독면 착용해요. 혹시 모르니까.” 각성제를 복용했다지만 밤을 새워 싸운 병사들이었다. 희미한 가스에도 깜박 졸아 낙마할 우려가 있었다. 매복한 놈들은 잠잠하다. 무기를 소총으로 교체한 겨울이 세쿼이아 줄기 아래 노출된 다리와 웅크린 무릎들을 겨냥했다. 두두둑! 두둑! 두두두둑! 끊어 당긴 방아쇠, 절제된 연속사격이 뼈를 부러뜨리고 혈관과 근육을 파열시켰다. 저편 풍경이 흔들린다. 그만큼 많은 수가 튀어나왔다. 허억, 보건부대 장교가 헐떡이는 소리. 그러나 변종집단은 맹렬하게 멀어진다. 이쪽을 돌아보는 놈 하나 없는 본격적인 도주였다. 얼핏 보아도 오십은 넘는데. 명확한 의미가 담긴 괴성이 괴물들을 이끌었다. “……뭡니까 쟤들?” 황당해하는 모랄레스. 겨울은 묵묵히 조준을 고쳤다. 혼자서 톤이 다른 한 녀석. 베타 구울. 자세를 낮추고 일반 변종과 지형을 방패삼아 달아나는 통에 방아쇠 당길 기회가 없다. 결국 포기한 겨울이 그 외의 표적들을 사살했다. 쏠 것이 없어진 뒤에 총구를 내리며 하는 말. “지형을 보니 쫓아가긴 힘들겠네요. 산성변종이나 회수하죠.” 겨울은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보았다. 저걸 어떻게 가져와야 하나. # 230 [230화] #집행유예 (2) 대원들의 머리 위로 드론이 지나갔다. 휘청휘청 불안한 비행은 전파방해가 아니라 충돌방지센서 탓이었다. 열상장비와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무인비행체는 좀 더 높은 하늘의 모기(母機)로부터 지령을 받는다. 지령이 끊기면 자동비행으로 전환, 고도를 높이도록 되어있다고. 후방지원이 점점 더 본격적으로 변해간다는 느낌이었다. “반경 300미터 이내에 변종으로 추정되는 열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낭형 무전기를 멘 하퍼가 상공으로부터의 전언을 중계했다. “내가 내려올 때까지 방심하지 말아요. 대사억제로 체온을 낮춘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경고하고, 겨울은 슐츠에게 손짓했다. 끄덕인 슐츠가 갈고리를 발사한다. 조준점은 올라갈 가지보다 높게 잡았다. 팍-! 가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출된 갈고리가 주간(主幹)과 주지(主枝)의 굵은 연결점을 넘어 포물선으로 떨어졌다. 지지대 삼은 줄기 양쪽으로 늘어뜨려 고정시킬 작정이었다. “누구 도끼 있으면 좀 빌려줘요.” 겨울의 손짓에 서로를 돌아본 대원들이 각자의 전투용 도끼(토마호크)를 내민다. 간밤에 발사된 순항미사일과 같은 이름이지만 이쪽이 원형이다. 물론 인디언들이 던지던 것과는 달라서, 날을 세운 반대쪽은 곡괭이나 망치로 쓸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그 중 곡괭이를 겸하는 둘을 고르는 겨울. 감염변종의 두개골을 쪼개고자 만든 물건이라 조금 무겁긴 하지만, 보정을 받은 근력이면 피켈 대용으로 쓰기에 충분했다. 한 쌍의 도끼를 허리에 차고, 방탄복과 각종 장비를 벗어 무게를 줄인다. 무기는 권총만 휴대했다. 산성아기가 있는 곳이 그만큼 위태로운 가지였다. 배가 빵빵해도 결국은 작은 몸뚱이라 가능한 일. 무슨 수로 올라갔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스펀지 탄으로 비껴 쏘고 캔버스 천으로 받을까 싶기도 했지만…….’ 폭발물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경우는 없다. 산성아기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겠고. 최후의 트릭스터가 내지른 단말마의 영향일까? 곳곳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은 흔적이 보였다. 기계로 따지면 오작동쯤 될 것이다. 강하 고리를 밧줄에 건 겨울이 밑동을 차고 오르기 시작했다. 비스듬한 달리기. 잎새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하늘이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인간에 놀라 두 마리 새가 날아올랐다. 자그마한 잿빛 딱새(Gray flycatcher) 암수는 둥지를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다. 겨울의 주위에서 파닥파닥 위협비행을 일삼는다. 5월 초, 모든 생명이 싱그러운 계절, 깃털을 이불처럼 깔아놓은 둥지엔 점박이 알 네 개가 들어있었다. 다행히 목표는 보다 높게 있었다. 겨울이 그대로 지나치자, 둥지로 돌아간 딱새 부부는 세계관 최강의 인간을 향해 삐빗삐빗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마침내 원하는 높이에 도달한 겨울이 몸을 바로잡았다. 이제야 비로소 쌔액 쌕 날카로운 숨소리가 들린다. 아래를 엿보던 자세 그대로 축 늘어진 아기들이었다. 한 번에 넓은 범위를 휩쓸도록 주의 깊게 배치된 것이 보인다. 여러 가지에 걸쳐 체중을 분산시킨 겨울이 조심스럽게 발을 밀었다.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흔들림에 아기들이 떨어질까 싶은 우려이기도 했다. 발아래의 공간감, 풍경의 출렁임에 사후를 엿보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로그가 쌓이는 속도만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생체 폭탄이 눈앞이다. 짤막한 팔다리에 포승줄을 엮어 아래로 죽 내려준다. [첫 번째 표본을 확보했습니다. 몇 놈이나 남았습니까?] “앞으로 셋이요.” 모랄레스에게 답신하며, 겨울은 아래를 살펴보았다. 올려다 볼 땐 불투명했으나 여기서 보기는 또 사정이 달랐다. 이런 발상을 할 괴물은 역시 트릭스터 말곤 없다. 스물여섯 번의 종말에서 역병의 지능은 강화종 구울 정도만 경계하면 그만이었는데. 그럼에도 이번 세계관은 운이 좋은 경우다. 대형 악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요소는 있을지언정, 아직까지는 잘 극복하고 있으니까. 변종이 강해지는 만큼 인류도 발전하고 있다. 여기서 표본을 보내면 곧바로 대응전략이 나올 것이다. 이 세계엔 희망이 남아있었다. 남은 아기들을 다 내려준 겨울은 가지의 튼튼한 기초로 돌아와, 레펠을 하듯이 빠르게 내려왔다. 캠벨 박사가 표본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마취제를 추가로 주사하고, 심박 감지기를 달고, 하나하나 신중하게 내산성 백에 담는다. 백 겉면엔 생물학적 위험 표시가 인쇄되어 있다. 작업을 마친 박사가 겨울에게 찬사를 보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올라가실 땐 무슨 동영상 고속재생인줄 알았습니다.” 한겨울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대원들과는 온도차가 크다. 동일 계급임에도 대단히 정중한 것은, 박사가 그저 민간인에 가깝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겨울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캠벨 같은 성향의 사람들도 한겨울에게는 호의적이라는 반증으로서. 일반화하기에 이르긴 하지만. 표본을 담은 백은 부패한 영아를 담은 시체가방처럼 보였다. 슐츠는 캠벨을 태운 덕분에 이 흉측한 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른 대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혹시 표본이 더 필요하십니까?” 묻는 겨울에게 캠벨이 답한다. “당연히 많을수록 좋습니다. 백신 실험에 쓰이는 원숭이들은 하루에 수십 마리씩 죽기도 하니까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고 싶군요.” 역시나, 보건부대 박사쯤 되니 무의식중에 툭툭 뱉는 말들이 하나하나 의미심장하다. “백신이라……. 혹시 진척이 있습니까?” 현 정부는 백신 개발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겨울은 헛된 기대와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조치로 이해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토록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정부라면 체계적인 지원으로 어떤 성과를 내놓을 법 했다. 생존계열의 정점, 「역병면역」으로 단서를 주지 않더라도. “저도 건너건너 들은 사항이라 정확한 게 별로 없습니다.” 슬그머니 발을 빼는 캠벨에게 다시 청하는 겨울. “약간이라도 좋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이거 참…….” 캠벨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러나 입이 간질간질한 낌새. 겨울에 대한 호감만큼이나 겨울과의 대화를 즐기는 듯 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아직까진 별 소득이 없다고 하더군요. 모겔론스를 구성하는 바이러스와 기생충의 원형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어려울 거란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관련해서 러시아의 협조를 구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역시 그런가요.” “백신보다는 변종들에게 써도 부작용이 없을 생화학 병기 개발에 몰두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병원균이나 독소에 적응한 놈은 아예 그 화학구성을 무기로 삼아버리는데다, 내성을 확산시키기까지 하니, 이걸 어떻게든 극복하는 게 관건이겠죠.” “탄저균 내성 변종 같은 경우겠네요.” “아, 그거 정말 최악입니다. 지나가는 땅은 모조리 오염되어버릴 테니…….” 박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탄저균이 퍼진 지역은 집중적으로 소독하고 100년 이상 방치해야 겨우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노출되면 그 시점으로부터 60일간 항생제를 복용해야 한다. 오염된 땅은 수백 년이 지나도 위험하고. 면적이 좁다면 제염이 가능하지만, 중국 대륙쯤 되면 논외인 이야기였다. 미군은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하지만, 확실히 예방되는 건 피부탄저 뿐. 내장감염이나 기관지감염에 대해서는 100% 막아주지 못했다. ‘모겔론스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 겨울은 새로운 정보에 골몰했다. 방어에 정신없는 러시아군이 과연 그라운드 제로, 감염의 진원지까지 진출할 수 있을까? 탄저균을 뿌리고 다니는 괴물 말고도 다른 위협들이 즐비할 것이었다. 그런 땅을 핵전쟁에 준하는 방호태세로 가로질러야 한다. “저 같은 사람들은 혹시나 사린가스 같은 걸 합성하는 신종이 나타날까봐 우려하는 중입니다. 플루오린을 제외하면 필요한 성분은 인체에 다 갖춰져 있거든요.” 귀를 기울이던 대원들이 찝찝한 표정을 짓는다. 추가 샘플을 확보하여 방공호로 돌아오기까진 두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심박 상승 알람이 울려 추가로 마취제를 주사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수송기가 시동을 걸 무렵, 높아지는 엔진소음을 기회 삼아, 캠벨이 겨울을 따로 불러냈다. “혹시나 험프백을 발견한다면 최우선적으로 포획해주시겠습니까?” 겨울은 고개를 기울인다. “레인저가 이미 하나 잡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랬다. 매순간 갱신되는 소식들 사이에 그들의 근황이 있었다. 오랜 추적 끝에 기어코 성공했다고. 프레이 중위가 끝까지 살아남았을지는 의문이었다. 생환률은 절반 이하였다. “생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체액을 확보했으니 큰 성과로군요.” “대체 그 괴물은 뭐죠?” 라고 물으면서도 겨울은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이 그 증거. 돌이켜보면 처음 조우했을 때 주변 숲의 손상이 극심했다. 그동안은 부딪혀서 부서진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나, 괴물이 미치지 않은 이상 쓸 데 없이 여기저기 들이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우습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1급 기밀이라서요. 위에서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말은 죄송하다는데, 정색한 얼굴에선 미처 숨기지 못한 약간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인격이 지식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보기 흔한 됨됨이다. 이런저런 정보를 허술하게 흘렸으면서도 지금은 입을 다무는 걸 보면, 험프백의 실체가 그만큼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거란 의미였다. “이번 작전기간에 조우한 변종집단은 나이 어린 것들의 비율이 굉장히 높더라고요. 전면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후방으로 보냈다고 쳐도 이상할 정도로 많았어요. 대부분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고요.” 겨울이 찌르는 말에 캠벨이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거기에 가려진 짧은 동요가 겨울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아무튼, 미안해하실 건 없어요. 그보다 부탁하신 건 사령부의 허가를 받은 사항인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변종들의 지휘능력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라고 해서 말이죠. 하지만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경례를 남긴다. “오늘은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소리 지른 캠벨이 올라가자 램프 도어가 느리게 닫힌다. 엔진 출력이 상승했다. 눈을 가린 겨울이 비산하는 흙먼지를 피해 물러났다. 이륙한 수송기는, 조금 더 높이 나아간 뒤에, 엔진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꺾는다. 급격히 가속한 동체가 동쪽으로 멀어졌다. “소령님.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랄레스의 지친 음성. 간밤에 각성제(프로비질)를 복용했음에도, 작전기간 내내 쪽잠을 잔 터라 벌써 피로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마침 구조한 병력과 함께 머물고 있으니 순번을 넉넉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이 휴식을 허가했다. “아마 어제 만난 놈들이 이 근방의 마지막 사냥감들이었을 거예요. 지시가 내려오더라도 조정을 요청해 보죠. 긴급 임무는 없을 것 같으니……. 경계는 두 사람이 섭니다. 모랄레스, 순서 정해서 보고해요.” “소령님이 가장 먼저 쉬셔야 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그래도 상병은 내내 깨어있을 셈이시냐며, 초번과 말번 중에 선택하라고 한참을 설득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병사들 때문에 낮에도 불을 피웠다. 덕분에 물벼락이 쏟아질 뻔했다. 간밤의 교전으로 화재를 우려한 사령부에서 소방헬기를 보낸 것이다. 연기를 보고 날아왔던 헬기는 겨울의 교신을 접수하고 멀어졌다. 소음에 잠을 설친 병사들이 하늘을 향해 중지를 세웠다. 그밖에는 조용한 여유였다. 겨울은 꼽추괴물에 대해 생각했다. 역병은 필요에 따라 숙주를 변이시킨다. ‘그 필요가 반드시 전투적이라는 보장은 없어.’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감염 확산과 개체 수 증가일 터. 사고능력을 갖춘 개체가 생긴 뒤로는, 인류가 역병을 소거할 가능성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색이 길어지는 동안, PDA가 새로운 지령을 수신했다. 「윈저(Windsor) 근교, 러시안 강 서안의 목장에 민간인들의 거점이 있었으나, 변종들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이래 파괴되었음. FOB 올레마로 복귀하기 전에 확인할 필요 있음.」 봉쇄사령부에서도 이 지역의 사냥이 거의 끝났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 231 [231화] #집행유예 (3) 오후 5시. 방공호에서의 휴식을 끝낸 겨울은 숲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어지는 강변도로에 접어들었다. 느리게 흐르는 강물이 늦은 봄빛으로 반짝이는 풍경. 인적이 끊긴 마을마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개별 변종들의 간헐적인 습격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은 없는 행군이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트릭스터가 있겠으나, 전파방해조차 걸지 못할 만큼 숫자가 줄어든 모양이었다. 전파 추적 미사일을 피하려면 순서대로 나설 여러 개체가 필요하다. 이동 도중 남쪽으로 이동하는 패잔병들과 끊임없이 마주쳤다. 하늘에선 전선통제기가 전보다 낮은 고도로 날아다녔다. 환자를 후송하는 헬기들이 빈번히 눈에 띄었다. “또 폭격입니다. 끝도 없이 퍼붓는군요.” 슐츠가 혀를 내둘렀다. 구름을 뚫고 나온 폭격기가 폭탄 여러 발을 후두둑 쏟아냈다. 지평선 가까운 포도밭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치솟은 연기가 버섯처럼 뭉글거리고, 일그러진 충격파는 버려진 경작지를 휩쓸었다. 불투명한 바람이 사포처럼 거칠다. 겨울의 눈엔 쓰러진 변종들이 보였다. 온 몸이 너덜너덜, 강판에 비벼진 고깃덩이들 같다. 비척거리며 일어나던 일부도 얼마 못가 픽 쓰러진다. 강하고 질겨봐야 변형된 인체일 뿐. 항공폭탄의 살상범위는 보기보다 훨씬 넓다. 직접적인 폭파 반경을 넘어, 파편에 먼지가 피어오르는 넓은 원이 곧 죽음의 영역이었다. “무리를 이끌어야 할 놈들이 잠적해버렸잖아요. 남은 변종들은 본능적으로 뭉쳐 다니는 중이고요. 하늘에서 쓸어버리기 좋을 때죠. 한동안 시끄럽겠어요.” 겨울이 말하는 사이에도 다른 방향의 지평선이 연달아 번뜩인다. 기병대는 포도밭 사이의 흙빛 길을 거쳐 폐허가 된 몇 개의 양조장을 지나쳤다. 마침내 목적지인 목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11분. 일몰까지는 두 시간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마리골드가 착각했군요. 여긴 이름만 목장입니다.” 알레한드로가 부서진 간판 조각을 가리켰다. 이곳은 사실 가톨릭의 종교적 휴양지(Retreat center)라고. 종말에 대비해 둘렀을 담장과 철조망이 살풍경했으나, 그 너머 멀리 십자가와 종탑이 솟아있다. 드르륵- 드륵- 대원들이 소스라쳤다.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겨울만이 예외였다. 돌아보면, 낙하산에 질질 끌려 다니는 보급품 상자였다. 무너진 담장 주위로, 보이는 범위에만 텅 빈 상자가 수십 개, 늘어진 낙하산이 다시 수십 개가 있었다. 이 낙하산들이 파도에 밀려온 해파리처럼 늘어져 있다가, 민들레 홀씨 섞인 바람이 불 때면 생명을 되찾듯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왜지? 굳이 몰살시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곳에서 생존자의 징후가 사라진 게 닷새 전이라고 했었던가?’ 겨울은 빈 상자들을 살피며 괴물들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여러 번 들은 바, 국방부 방역전략연구소는 변종들이 민간인들을 일부러 살려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었다. 진딧물에게서 단물을 뽑아먹는 개미들처럼 민간인들에게 떨어질 구호물자를 노리는 것이라고. 실제로 변종들은 구호식량을 긁어먹었다. 여기도 사방이 그런 흔적들로 가득하다. 트릭스터의 자폭을 피하려면 안전고도를 지켜야 하고, 그 높이에서 낙하산을 떨어트리니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담장 안쪽보다는 바깥으로 떨어진 숫자가 더 많았다. 민간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변종들이 배를 불렸을 터. 닷새 전이라면 트릭스터 사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다. 즉 패잔병을 쫓는데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쪽의 통제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긴, 봉쇄선 쪽에 특수변종이 몰렸으니, 처음부터 빠듯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한 겨울이 무너진 담장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럼블 같은 놈이 부순 건 아니군요. 그냥 보통 놈들이 떼로 밀어붙인 것 같습니다.” 모랄레스가 인상을 찌푸린다. 돌무더기 아래 으스러진 시체들이 엄청나다. 그리고 투덜거리는 소리. 벽을 쌓으려면 좀 두껍게 쌓던가. 겨우 벽돌 두 장 두께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혼란스러울 때 무엇 하나 구하기 쉬웠겠는가. “이 핏자국은 최근에 생겼네요. 아마도 벽이 무너진 이후에.” 콘크리트 묻은 벽돌 조각을 살피며 겨울이 하는 말. 냄새를 맡아본다. 역병 특유의 악취가 없었다. 이틀에서 사흘 사이. 혈흔을 감지한 「추적」이 대략적으로 경과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모르죠. 화를 피한 사람들이 빠져나왔는지, 아니면 변종들이 사라진 다음 새로운 생존자들이 들어왔는지……. 하퍼, 에일. 여기서 퇴로를 확보해요. 나머지는 나랑 같이 진입합니다.” Hooah. 지시를 받은 둘은 거치적거리는 돌을 치우고 은폐할 자리를 확보했다. 여러 발의 산탄지뢰가 깔린다. 특수변종만 없다면 백 단위가 몰려와도 격퇴 가능한 화력. 담장 안쪽엔 넓은 간격을 두고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본래 휴양지였던 만큼, 각각의 건물은 정갈하고 소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피로 물들고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수영장이 심한 부조화를 이룬다. 겨울이 권총을 뽑았다. 팍! 파팍!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시체처럼 부유하던 변종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살아있는 것을 곧바로 구분하는 겨울을 보고도 모랄레스와 슐츠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첫 번째 건물을 수색한다. 개방된 테라스에 아이보리색 벽돌. 외벽에 담쟁이덩굴이 붙어 탐스러운 싹을 틔웠다. 슐츠가 후방을 경계하는 동안, 겨울이 엄호하고 모랄레스가 문을 열었다. 고리를 들어 올리며 밀어서 소음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판자를 깐 바닥이 문제. 완전무장한 병사는 무거웠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꾸득꾸득 소리가 났다. 흠칫.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있던 자그마한 아이가 발소리에 반응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비록 웅크린 뒷모습이지만 복장이 말끔하다. 목덜미가 창백할 정도로 희다. 겨울이 그 뒤통수를 쏘았다. “Shit!” 갑작스런 사격에 기겁을 하는 모랄레스. “젠장, 변종이었습니까?” 작고 떨리는 물음. 대답 대신, 겨울은 군홧발로 시체를 뒤집었다. 그제야 하얀 원피스 앞쪽 폭포수 같은 핏자국이 보인다. 소녀는 얼굴을 물렸다. 코 좌우로 이빨자국이 나있었다. 슐츠가 인상을 쓴다. “살이 썩지 않은 걸 보면 감염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인데…….” 겨울이 끄덕였다. “숨어 있다가 뒤늦게 당했을지도 몰라요. 좀 더 서두르죠.” 시체는 앙상하고 홀쭉했다. 옷장 같은 곳에 숨어 있다가, 허기와 공포를 견디지 못해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외에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겨울이 앞장서서 속도를 높였다. 미지의 영역에선 감각보정의 효율이 떨어질지라도, 특수변종이 없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엎드려!” 경고가 조금 늦었다. 타타타탕! 잠긴 문 저편에서 터진 총성. 겨울은 사선을 피했지만, 모랄레스가 두 발을 맞았다. 다행히 총탄은 방탄판을 뚫지 못했다. 다만 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져 앓는 소리를 낸다. 겨울이 상병의 어깨를 확 당겼다. 안전범위까지 쭉 미끄러지게끔. “젠장! 거기 누구야! 사람이냐?!” 아마도 총을 쏜 사람의 외침. 굵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가감 없는 외침으로 미루어 겁에 질린 상태. 문틀 측면에 붙은 겨울이 성량을 키웠다. 응사하려던 슐츠를 제지하면서. 실은 겨울도 대응사격을 가할 뻔했다. 변종이 자동화기를 쓸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쏘지 마세요! 구조대입니다!” “……구조대? 무슨 염병할 구조대가 여기까지 와?” 그러면서도 잠시 후 삐이걱 문이 열린다. 전기가 끊겨 어두웠던 방. 빛이 새어들면서 가장 먼저 보인 색은 밝은 주황빛이었다. 그것은 이내 죄수복을 입고 권총을 쥔 남자가 되었다. 죄수복? 남자는 조준을 풀지 않는다. 등 뒤엔 여러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겁에 질린 작은 얼굴들. 오랜만에 빛을 본 눈들이 자연스럽게 찡그려진다. “일단 총 내려놔요. 지시에 불응하면 사살할 수도 있습니다.” 눈부셔하던 죄수는 경고를 듣고서야 간신히 겨울을 알아봤다. “신이시여! 한겨울 중위라고? 진짜로? 농담 아니고?” “진짜입니다. 지금은 소령이지만요. 아무튼 그 총 언제 버릴 겁니까? 죽고 싶어요?” “……Fuck. 도망치긴 글렀군. 재수도 없지.” 겨울을 겨눈 조준점이 계속해서 흔들린다. 「전투감각」, 「생존감각」, 「위기감지」가 전하는 경고의 강도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나, 슐츠와 모랄레스에겐 그렇게 보일 리 없었다. “총 버려! 당장!” 기세에 눌린 죄수가 그립을 풀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다른 손으로 권총을 느릿느릿 내려놓는다. 그리고 별다른 지시 없이도 발로 차 겨울에게 보냈다. “모랄레스. 맞은 덴 괜찮아요?” “퍼플 하트(부상기념훈장)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낮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건 멍이 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대꾸한 모랄레스가 똥오줌 냄새 지독한 방에서 아이들을 꺼냈다. “다들 이리 오거라. 괜찮아. 여기 겁나 짱 센 한겨울 소령님은 알지?” 우울하고 초췌한 아이들이 멍하니 끄덕인다. 겨울이 미소를 만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슐츠가 죄수를 포박하고 몸을 수색하는 사이에 겨울은 죄수의 권총(Sig Sauer P239)을 확인했다. 일반적인 제식화기가 아니다. 해안경비대나 해군 특수부대 일부가 같은 회사로부터 납품을 받긴 하는데, 그래도 다른 모델이었다. ‘최소한 군인을 해치고 얻은 무기는 아닐 확률이 높아.’ 물론 확신은 금물이다. 어느 병사가 개인적으로 구비한 물건이거나, 혹은 무기 없이 달아나다가 어떤 경로로든 획득한 것을 다시 빼앗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래도 아이들이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진 않다. 남자를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방 안에 뒹구는 쓰레기, 배설물의 비율과 형태로 보아 먹거리가 무척 적었을 것인데. 극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만 봐도, 죄수 치곤 성격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당신, 이 권총은 어디서 났습니까?” 손이 허리 뒤로 묶인 죄수가 머뭇머뭇 대답한다. “부서진 비행기에서…….” “아.” 연방항공보안관의 무기. 방공호로 가는 길에도 국제선 여객기의 잔해가 있었다. 근처에 카운티 공항이 있다 보니 비상착륙하거나 추락한 항공기들이 여기저기 분포했다. 활주로가 먼저 내린 다른 비행기들로 가득 차버린 탓. 운 좋게 한발 앞선 조종사들은 뒷일 생각 안하고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다. 겁에 질린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다른 건 나중에 묻죠. 혹시 생존자들이 또 있다면 어디에 있을지 짐작 가는 구석 있어요?” 다시 묻는 말에 대답한 건 남자가 아니라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때, 좀비들이 들어온 밤에, 엄마가 성당으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성당?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아이는 겨울이 만든 미소에 만족했다. 성당은 자그마한 마을에 있을 법한 크기였다. 리아이링을 비롯해 삼합회의 전투원들과 갔었던 브래들리의 성당과 비슷한 규모. 겉으로 보이는 구조 역시 유사하다. 다만 문과 창이 모조리 철창으로 잠긴 게 인상적이었다. 십자가와 종탑이 아니었다면 감옥으로 보였을 것이다. 덜컹. 문에 붙은 슐츠가 입술을 구부린다. “이거 안에서 잠겼는데…….” 똑똑똑. 똑똑똑. 거듭 문을 두드려보지만 반응이 없다. 불안해하는 아이들. 스테인드글라스라 불투명한 창으로는 안쪽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살핀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슐츠가 문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구조대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응답하십시오!” 두두두두! 쿵! 크아아아악!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화들짝 물러난 슐츠를 대신해 겨울이 소총사격을 가했다. 두두두둑! 철창 너머 목재로 된 문이 퍽퍽 뚫린다. 그리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래쪽 구멍과 문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개가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아빠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말안장 가방에서 짐짝 신세인 닥스훈트가 아쉬워지는 순간. 체구 건장한 모랄레스가 아이들의 눈물에 쩔쩔 맸다. “경첩을 끊어요.” 겨울이 지시하자 슐츠가 광선검처럼 생긴 토치에 카트리지를 끼웠다. 그리고 점화. 파아아악- 경첩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경첩 하나에 카트리지 하나. 세 번째 경첩은 고열과 철창의 무게에 스스로 찢어졌다. # 232 [232화] #집행유예 (4) 성당은 작아도 경건했다. 지평선에 가까워진 태양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다. 주여, 우리의 자매인 물의 찬미를 받으소서(My lord be praised through sister water). 둥근 창 위아래로 각인된 찬송의 구절이 특이했다.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예배당 안쪽으로부터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모랄레스가 성수반(聖水盤)에 손을 찍고 성호를 그었다. 상병의 행동을 따라하는 아이들. 겨울은 속도를 늦추고 후방을 경계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전방은 겨울 홀로 맡는다. 십자고상을 모신 제대(祭臺)는 더러운 피로 얼룩져있었다. 변종들은 제대 우측면의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아마도 신부의 거처였을 터. 입구 가까운 고해소에도 변종 두 개체가 붙어 있다가, 겨울을 향해 휘꺽 고개를 꺾었다. 두둑! 즉각적인 사격으로 머리에 구멍을 뚫어준다. 두 구의 시체가 둔중하게 쓰러졌다. 전방의 무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들이 내는 소음에 귀가 먼 탓이었다. 구울이라도 없으면 겨우 이 정도인 것이다. 남은 변종을 모조리 쏴 죽인 겨울이 흐트러진 좌석 사이로 나아갔다. 사방에 유해가 흩어져있다. 생전부터 감염시키기에 부적절한 상태였거나, 변이된 후에 가장 나약해서 다른 것들에게 잡아먹힌 경우. 모랄레스와 슐츠가 겁먹은 아이들을 달래며 가까워졌다. 양손이 허리 뒤로 묶인 죄수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처럼 끌려왔다. 죽음 가득한 공기에 짓눌려 뒤룩뒤룩 눈을 굴려댄다. 창백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성직자 숙소의 문은 당겨서 여는 방식이었으나, 멍청한 변종들은 그저 두드리고 밀어댔을 뿐이다. 문고리는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힘을 주자 질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반대편에서 손잡이에 목을 맨 시체가 끌려나왔다. 평상복 차림의 남성이었다.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겨울은 빈 숙소를 등졌다. 중앙통로의 핏물을 발끝으로 밀어내자 긁힌 자국이 드러났다. 무거운 상자 같은 것을 끌고 간 흔적. 「추적」으로 쫓아가니 제대의 왼편으로 이어진다. 바깥으로 돌출된 벽은 다른 부위보다 색이 밝았다. 확장공사로 덧댄 구획일 가능성이 높았다. 종말의 시작 즈음하여 확장했다면 짐작되는 용도는 하나 뿐. 바닥의 일부, 지하로 통하는 사각의 문을 열자 곧바로 잿빛 머리통들이 보였다. 사다리 아래 살아있는 죽음이 우글거렸다. 캬아아악! 오랜만에 빛을 본 괴물들이 겨울을 향해 열광했다. 서로 밀쳐대는 통에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축소된 동공들을 마주보며 하나씩 사살하는 겨울. “방공호……로군요.” 모랄레스가 수직통로 아래에 고인 뇌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여기 남아있어요. 내려가서 확인해볼 테니까.” 지시한 겨울이 훌쩍 뛰어내렸다. 와드득. 군홧발 아래가 움푹 꺼진다. 장비 무게가 더해진 체중은 겹쳐진 사체를 으스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악취가 사방으로 튀었다. 또 문이 나타났다. 다만 이번엔 튼튼한 금속제였다. 천장엔 폐쇄회로 카메라가 붙어있었다. 렌즈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지만 반응이 없다.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앞서 다른 건물들의 전력이 끊겨있긴 했으나, 이렇게 본격적인 시설이면 별도의 공급체계가 있을 법도 하건만. 쾅, 쾅, 쾅. 끊어서 강하게 두드리며 외친다. “구하러 왔습니다! 안에 누구 없습니까!” 강화된 청각이 보이지 않는 소란을 감지했다. 역병의 아우성이 아니다. 온갖 사람들이 앞 다퉈 떠드는 소리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나타났다. 부족한 조명 아래, 넓은 공간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신부가 한 손을 펼쳐 겨울을 가리키며, 사람들을 향해 기쁨으로 외쳤다. “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의 뜻입니다!” ……응?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간만에 당혹감을 느끼는 겨울이었다. 대치하고 있는 한쪽은 인질처럼 보이는 한 명을 제외하면 온통 죄수복 일색이다. 남은 한 쪽은 평상복이 대부분이고, 제복을 입은 경찰 둘과 보안관 하나가 끼어있었다. 어느 쪽이든 무장은 얼마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서로를 다 죽이기에 충분하겠지만. “한겨울 중위? 중위님! 중위님! 중위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염 덥수룩한 경관이 울음을 터트렸다. 감정과잉이 전염병처럼 번진다. 영웅을 향한 열광. 반대로 죄수들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거미 문신이 목덜미까지 기어오른 거구의 대머리가 겨울을 곁눈질했다. 총구는 여전히 경관들에게 향한 채였다. 덜덜 떠는 손은 공포일뿐만 아니라 내면의 갈등이기도 했다. 곧바로 조준을 바꿔 소년 장교를 쏴버릴까 싶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의 「위협성」이 그 증거였다. 그 밖의 단서도 많고. “이제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어서요!” 외치는 신부가 교차하는 사선의 중심에 섰다. 두 팔을 벌리니, 흐릿한 그림자가 십자가의 형상이었다. 수녀가 신부를 거들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살의를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팽팽해졌다. 대머리에게 총을 겨눈 보안관이 겨울을 향해 악을 쓴다. “중위님! 도와주십시오! 저것들을 당장 쏴버려야 합니다! 강간범과 살인자 집단이란 말입니다! 신부님, 거기서 비키세요! 수녀님도요! 방해됩니다!” 대머리가 발끈했다. 머리가죽 아래에서 핏줄이 꿈틀거린다. “좆까, 이 씨발 짭새 새끼가! 누굴 죽이라 마라야!” 이어 뒤에서 약 깨나 했을 몰골의 사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전부 다 아가리 싸물어! 건드리면 니네나 우리나 다 죽는 거여! 엉!” 수류탄을 쥐고 있다. 안전핀은 이미 없었다. 우라질. 저건 또 어디서 난 거야. 권총을 쥔 경관이 이를 악물었다. 숨이 거칠다. 눈을 크게 뜨고 수류탄만 보고 있었다. 언제 우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길지 몰랐다. 민간인들은 벌벌 떨며 애걸하는 시선을 겨울에게 보낸다. 그러기는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직통로 위에서 모랄레스가 외쳤다. “거기 아래에 무슨 일 있습니까? 저희도 내려갈까요?” “아뇨! 거기 있어요! 말썽이 있긴 한데, 내가 처리할게요!” 겨울이 만류하는 사이에, 신부가 죄수들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다 함께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소용없었다. 약쟁이가 악을 썼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이봐, 중위!” 대머리의 부름에 겨울이 대꾸했다. “소령입니다. 그쪽 이름은?” “……헌트. 칼렙 헌트.” 헌트가 마른침을 삼키고 묻는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건, 바깥이 이제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오는 길에 마주치는 것들을 다 죽이긴 했죠.” “……이런 상황에 굉장히 여유로우시군.” “이런 상황?”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의 모습에 움츠러드는 거구. 다른 죄수들도 더욱 창백해졌다. 주도권 싸움이라 생각했는지, 헌트가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린다. “허세 부려도 소용없어! 당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수류탄 터지면 어쩔 건데?” “그래서?” “거래를 하자.” “…….” “우리가 씨발, 지금 이 꼴만 보면 아주 좆같은 개새끼들처럼 보일 건 아는데, 여기 온 다음에 씨발 누굴 죽인 적은 없단 말이야. 염병할 고해성사도 했다고! 이 아래 갇히고 나서, 죽기 전에 서로 재미 좀 보자고 했을 뿐이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생각했으니깐! 씨발!”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다. 잠자코 듣는 겨울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헌트는 이마에서 머리까지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바깥에 부하들이 있겠지? 소령이면 적어도 중대는 되겠군. 우리 머릿수만큼 무기를 내놔. 탄약이량 식량도! 충분한 성의를 보여주면 저 인간들을 곱게 보내주겠어. 인질은 가장 마지막에 풀어주지. 우리는 여기 남을 거야. 개수작은 안 부리는 게 좋을 걸?” “당신들만 남아서 어쩌려고요? 오래 버티진 못할 텐데요.” “우리가 죽든 말든 상관없잖아!” “글쎄요. 무장한 범죄자들을 남겨두고 갈 순 없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해를 끼칠지 모르니까. 그러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네요. 애초에 나눠줄 만큼 무기가 많지도 않고.”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다 죽는 꼴 보고 싶어?! 엉?!” “총을 버리고 항복해요.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죠. 구속은 하겠지만.” “미친…….” “멍청하게 굴지 마. 당신들까지 보호해주겠다는 말이니까.” 겨울이 어조를 바꿨다. “그깟 수류탄이 무서워서 가만있었던 게 아니야. 애초에 놓을 배짱도 없어 보이지만, 놔도 상관없어. 터지기 전에 시체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그 시체는 너희들 중 하나가 될 거고. 총? 첫 발을 쏘기 전에 다 죽일 자신이 있는데.” 약쟁이가 헐떡였다. “그,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왜, 불가능할 것 같아? 의심스러우면 내 말을 무시해봐. 결과는 몸으로 알게 될 거야.” 이미 계산을 끝내고 던지는 협박이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3초는 넘칠 만큼 충분한 시간. 피쿼드에서 반응속도를 시험할 때, 파울러 대위는 겨울을 이렇게 평했었다. 정면의 다섯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심지어 그것은 정규군 수준의 적을 상정한 결론이었다. “여러분, 제발 한겨울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나이 든 수녀가 간곡히 설득했다. “다 같이 약속했잖습니까. 오늘까지만 기다려보자고. 그 전에 구원이 온다면 주의 뜻으로 생각하자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거룩하신 주님의 섭리입니다. 지금 여기 한겨울님이 계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신앙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요.” 수녀가 약쟁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꺼져, 이 창녀! 너도 인질로 잡아줄까? 엉?” 죄수들의 총구가 수녀를 향해 돌아간다. 그러나 신부가 함께 다가서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심해졌다. 누구를 겨눠야 하나. “모든 일이 주님의 섭리 좋아하네! 그럼 저 씨발 놈의 좀비 새끼들도 주님의 섭리냐? 어? 콱 다 죽여 버릴라! 꺼져! 꺼지라고! 건드리면 전부 다 죽는 거야! 지옥에 가는 거라고!” 일반인보다 얄팍한 전과자의 이성이 끊어져, 방아쇠에 건 손가락이 당겨지는 순간. 그의 권총이 폭발했다. 겨울이 견착한 소총 끝에서, 소음기가 희미한 초연을 피어 올렸다. 침묵이 감도는 지하에 탄피 구르는 소리가 외로웠다. 세 명의 죄수가 손과 팔을 움켜쥐고 신음한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권총 깨진 파편이 박힌 탓. 분산된 표적이라고 해도 겨울에게는 한 방향이었다. 조준을 고쳐가며 세 번을 쏘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꿈도 꾸지 마.” 경고를 받은 약쟁이가 눈을 질끈 감는다. 덜덜 떨리는 손이 천천히 내려와, 가슴께에 머물렀다. 한 손으로 견착과 조준을 유지하며 다가서는 겨울을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조금 전에 보여준 사격 탓이다. 헌트는 벽에 붙어 눈만 움직였다. 수류탄에 겨울의 손이 포개진다. 반대편에서 함성이 터졌다. “보안관님. 죄수들을 부탁합니다. 그렇다고 사살하진 마시고요.” 겨울의 말에 헌트가 이를 갈았다. “차라리 죽여. 잡혀가서 또 짐승 취급 받느니 여기서 죽는 게 나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분노한 음성이지만 울분이 배어있었다. 의아해진 겨울이 묻는다. “짐승?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씨발! 사형수 강제노역! 아무도 우릴 사람으로 생각 안 하잖아! 설령 우리가 개새끼라고 해도!” 강제노역이라……. 겨울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번 세계관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233 [233화] #집행유예 (5) 죄수들을 제압한 뒤, 시설의 나머지 건물들을 확보하니 황혼이 질 때였다. 창고에서 발견한 철조망으로 벽 무너진 구간을 막은 뒤엔 퇴로 확보를 위해 남아있던 두 사람도 합류했다. “소령님. 지시하신대로 마리골드와 교신해봤는데, 민간인 후송은 동이 튼 다음에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비행계획이 긴급수송임무로 꽉 찼다는군요. 예정시각은 익일 0900시이니 그때까지 여기 있으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앞 초지에 위성통신단말을 전개한 하퍼의 보고. 겨울은 의아함을 느꼈다. “문제? 어떤?” “규정상 죄수들의 후송은 금지되어 있답니다. FOB 올레마로 끌고 가서 상급자에게 보고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어, 현장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사살하라는 명령입니다.” “…….” “혹시나 싶어서 죄수번호를 불러줬더니 전부 다 사형수들이었습니다. 형을 이미 선고받았고, 집행에 관해서는 특별법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군요. 원한다면 군 법무관과 연결해주겠다고 했는데, 일단 소령님께 전달하겠다고 하고 교신을 종료했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현 정권의 성격에 맞지 않는 정책이었다. 불가피한 현실타협일까? 겨울이 고민하는 만큼 하퍼도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과 사형집행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어떻게 합니까? 마리골드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시겠습니까?” “아뇨. 내가 나선다고 뭔가 달라질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일단은 좀 더 생각해보죠. 그거 말고 다른 명령은 없었어요?” “인접 구역의 임무부대 둘하고 임시 중대 하나의 집결지가 이곳으로 지정됐습니다. 내일 정오까지 도착 예정이니 지휘권을 장악해서 동반 철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뭐였더라……. 아, 인원 구성을 포함해서 전술정보시스템에 조만간 자세한 내용을 업데이트 할 테니 늦지 않게 확인하라고도 했습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겨울의 말에 하퍼가 수화기를 놓는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게 된 민간인들은 대체로 표정이 밝았다.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숫자도 적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아직 활발하지 않았다. 시체를 치운 풀밭에 핏자국이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힐끔힐끔 겨울을 훔쳐보는 시선들. 연한 바람은 아직도 썩어있었다. 오직 닥스훈트만 신이 났다. 묶여있던 한을 풀려는지 발광하는 수준으로 뛰어다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두꺼운 걸로 끼고 다닐걸…….” 방탄판을 꺼내 살피며 투덜거리는 모랄레스. 두께 5mm의 세라믹 플레이트는 푹푹 들어간 자국이 선명했다. 뚫리진 않았으나, 주먹에 맞기만큼 아팠을 것이다. 이렇게 방어력이 낮은 물건이 정식 보급품은 아니었다. 보통은 두께 15mm 이상을 쓴다. 그 이하로는 소총탄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 대형 파편도 마찬가지. 겨울이 지적했다. “얇아도 너무 얇아요. 언제 근접위험사격에 노출될지 모르는데.” “그게……. 변종 새끼들 상대할 때 몸이 무거우면 오줌을 지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쪽에 딱히 포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중지원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불확실한 파편보단 눈앞에서 딱딱거리는 누런 이빨이 더 무섭더군요.” “최소한 상급자인 나한테는 미리 알려줬어야죠. 그러다 훅 가면 누가 책임져요?” “죄송합니다.” 오스본 병장이 경험했다던 진내사격(Broken Arrow), 즉 아군의 머리 위로 퍼붓는 무자비한 화력지원까진 아니더라도, 아군이 휘말릴 위험이 있는 근접위험사격(Danger Close)은 방역전선에서 꽤나 빈번하게 일어난다. 무섭게 달려드는 변종집단과의 싸움이니까. 겨울이야 좀처럼 그럴 일이 없지만. 방탄복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질책은 가볍게 끝낸다. 급할 때 달리기가 느릴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모랄레스 혼자만은 아닌 까닭이었다. 또한 주의했다면 보다 일찍 눈치 챌 수 있었을 일이기도 했다. 지휘관인 겨울에겐 그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 “죄수들은 어떻게 한답니까?” “글쎄요. 죽이든 살리든 내가 결정하라는데, 일단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질문했던 모랄레스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What the…….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요. 이 짬 먹으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취조할 대상은 정해져있었다. 아이들을 보호한 것으로 최소한의 인성이 보증되는 한 명. 감옥을 대신하는 방에 겨울이 찾아가자, 문을 지키던 보안관이 겨울에게 모자를 벗어보였다. “아까는 덕분에 살았습니다. 바빠 보이셔서 이제야 겨우 인사드리는군요. 마린 카운티 보안관, 랜디 나이트입니다. 어두운 밤(Night)이 아니라 말 타고 칼 쓰는 기사(Knight)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아시겠지만 한겨울입니다. 그런데 마린 카운티라고요? 소노마 카운티가 아니라?” 마린 카운티는 올레마 전진기지가 있는 쪽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만 서쪽, 타말파이어스 산에서부터 서쪽 해안과 북쪽 산간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땅. 그 위쪽 소노마 카운티의 중심인 이곳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있다. 이번 작전기간 동안 이동한 거리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말씀드리자면 꽤 깁니다만, 소령님께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군요. 아무튼 살아있으니 다행이죠. 헌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죄수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저 사람 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신이 보스니까요.” 선선히 한 걸음 비켜주는 보안관. 그런데 죄수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칼렙 헌트, 거미문신의 대머리는 코피자국 선명한 얼굴로 겨울을 노려보았고, 약쟁이 쪽은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짧게 한숨을 쉰 겨울이 원하던 죄수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서 멀쩡한 모습이다. “보안관님.” “당신만 괜찮다면 랜디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럼 랜디.”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사령부 지시로 죄수들은 제 소관이 되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도 협력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불필요한 폭력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오…….” 보안관은 예상 밖의 요청에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불필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예방 차원에서 손을 봐준 거지요. 언제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잖습니까. 힘쓰기 곤란할 만큼만 두들겼습니다.” “예방 차원이요? 그러다 죽으면요?” “죽어도 별 수 없지요. 죽을죄를 지었으니.” 수염을 꼬면서 허허 웃는 보안관.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짐승보다 못한 놈들에 대해서는 소령님보다 제가 더 전문가입니다. 말은 들어도 무시하니 몸에 새겨주는 수밖에요.” Fuck you! 죄수 하나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랜디 나이트의 눈매가 사나워졌으나, 꿈틀 했던 구둣발은 거기서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손은 여전히 권총 손잡이에 얹혀있었다. 입술을 구부린 그는 겨울이 데려가려는 죄수를 곁눈질했다. “소령님. 그 놈도 믿지 마십시오. 애들을 지켜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애초에 사람 새끼가 아닙니다. 미친놈이 충동적으로 한 번 좋은 일 했을 뿐이죠. 더러운 성욕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요. 스스로 착하다고 착각하는 범죄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다소 방어적인 언변이었다. 죄수의 취급을 두고 겨울의 반감을 샀을까봐 경계하는 태도.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많이 겪어봤거든요.” 겨울의 대꾸에 보안관이 입을 다물었다. 눈치만 봐서는 할 말이 남은 듯 하다. 어두웠던 시설에 불이 들어왔다. 담벼락 안쪽을 향한 창들은 커튼이 열려있었기에, 한 번에 쏟아지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억제된 야외조명도 길을 비출 정도는 되었다. 어쨌든 어둠은 변종들에게 유리한 환경. 민간인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꾸며놓은 환경이었다. 무전이 들어왔다. [전력 복구됐습니다. 변압기에 변종이 끼어있더군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원.] 민간인 기술자들과 함께 움직이던 슐츠의 보고였다. 이어 새로운 전언이 이어진다. [당소 모랄레스입니다. 경찰과 민간인들이 경계를 돕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수준이 어떤데요?” [장비는 양호합니다. 본관 장비함에 무전기와 야시경이 꽤 있더군요. 성당으로 대피할 때 챙기지 못한 화기도 꽤 되고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희들만으로 이 넓은 시설을 지키려면 밤을 꼬박 새야 합니다. 각성제는 이제 사양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추가병력이 도착한다는 사실만 확실하게 알려놔요. 괜히 오인사격이라도 벌어지면 큰일이니까. 편성이랑 순서는 경찰과 협의해서 정하고, 나머지 민간인들은 성당 근처를 벗어나지 말라고 해요.” [라져.] 겨울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 시설이면 추후 올레마에서 올라올 병력이 중간 거점으로 이용할 만 했다. 곳곳에 돈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어디 앉을래요, 아니면 조금 걸을래요?” 질문을 받은 죄수는 어두운 낯으로 구부정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걷고 싶지만……. 근데 뭘 물어보실 겁니까?” 가면서 말하죠. 겨울은 포승줄을 쥐고 앞장섰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 잠깐 풀어줄까 싶었으나, 민간인들이 불안해할 것이 문제였다. 보안관의 태도가 곧 예민한 사람들이었다. 종교적 휴양지인 만큼 산책로는 아름답게 닦여있었다. 별빛 총총한 하늘 아래, 여름을 기다리는 초목이 바삭거린다. 저편에 캠프파이어처럼 타오르는 불길은 시체를 땔감으로 썼다. 그냥 두면 다른 종류의 질병이 돌 수도 있고, 사람이 떠난 뒤 찾아온 변종들의 식량이 될 수도 있었다. “사형수 강제노역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봐요.” “…….” 대답은 공백을 끼고 이어졌다. “설명 같은 거 자신 없는데…….”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됩니다.” 그 편이 보다 덜 꾸며진 진실이기도 할 테고. “……시작은 아마 그거일겁니다. 우리 같은 놈들은 가둬두기도 아깝다고. 죄지은 놈들이 왜 시민들보다 안전하냐고. 교도소 말입니다. 빠져나오기 힘들면 들어가기도 힘들잖습니까. 담장 밖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위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죠.” “그래서, 교도소를 대피소로 바꿨다 이거예요?” “예, 뭐……. 강제노역은 핑곕니다, 핑계. Fuck. 가둬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든 죽일 구실을 찾는 거죠. 짭새 새끼들하고 좆같이 높으신 분들이……” 빠져나오기 힘든 장소는 들어가기도 힘들다. 그럴 듯한 발상이었다. 좀비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이기도 하니, 대중의 호응을 사기도 쉬웠을 터. 정치인들이 인기에 영합했다고만 보기도 곤란했다. 예산과 자원은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여론을 거부했다가 정치생명이 끝장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대통령은 상대의 무기를 빼앗는다고 표현했었다. 겨울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무슨 작업을 했습니까?” “처음엔 그럭저럭 할 만했습니다. 봉쇄선 강화공사가 대부분이고, 가끔은 농사도 지었죠.” “농사?” “봉쇄선 가까이에 버려진 농장이 많은지라……. 저어기 탄약 공장이나 풍력발전소 쪽에서도 일하고 그랬습니다. 어, 도시나 마을 보수 작업도 했고요. 주민들 돌아올 때까지 멀쩡해야 한답시고. 근데 그런 일들은 갈수록 죄질이 가벼운 새끼들한테 몰아줘서……” 즉 경범죄자들을 가둬둘 시설조차 모자라게 됐다는 뜻. 그렇잖아도 교도소와 수감자 숫자 모두 세계 최고인 국가가 미국이니, 강제노역에 동원된 죄수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을 것이었다. “핵 떨어진 다음엔, 옘병, 산에서 지뢰 제거작업을 시켰습니다. 꼬챙이 하나 갖고 존나 넓은 땅을 헤집으라고. 그것도 사실 핑계였죠. 개놈들이 허구한 날 죽기 직전까지 패고, 쓸데없이 옷 벗기고, 발판으로 쓰고, 그러다 죽으면 쓰레기처럼 버리고……. 근데 그 때도 어디로 자꾸 몇 명씩 빼 가는데, 다시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그랬죠, 실험용 생쥐로 쓰는 거라고.”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쯤 숙청당하고 있겠지만, 「진정한 애국자들」 입장에서 사형수만큼 빼내기 쉬운 실험체도 없었을 테니. 혹은 그쪽의 현장지휘관이 초과 인력을 솎아냈을 가능성도 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병사들이 사형수들에게 화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죽어 마땅한 놈들인데 죄책감은 무슨 죄책감. 재앙 이전에도 얼마든지 전례가 있었다. 악명 높은 관타나모 기지라던가, 포로 학대가 일상적이었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같은. 월마트의 모범사원이었던 린디 잉글랜드 이병은 입대로부터 반년도 지나기 전에 악마가 되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녀의 변화를 믿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굉장히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물론 잉글랜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전히 착한 사람이었다. ‘인간은 무대 위의 배우와 같아.’ 겨울은 싫은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선악을 불문하고 지도자들을 예습할 때 접했던 심리학자들의 질문이 있다. 악은 기질인가, 상황인가? # 234 [234화] #집행유예 (6) “저는 어떻게 됩니까?” 죄수가 물었다. 불안해하는 한편으로 희미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다른 죄수들보다 나은 취급을 바라는 마음. 겨울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아이들을 지켜준 게 면죄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 차마 그렇다고는 못하고, 죄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이 뭐죠?” “마누엘, 마누엘 헤이스입니다.” “좋아요, 헤이스. 뭣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는지 말해 봐요.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죄수번호로 조회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속인 게 밝혀지면…….” 어떻게 할까요? 여상한 어조가 죄수를 더욱 겁먹게 만든다. “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랬겠죠. 왜요?” “배가 고파서, 아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진짜, 진짜로 안 죽이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총을, 초, 총을 꺼내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그만……칼을…….” “쓸 데 없는 말은 그만 두고, 배가 고팠다고요?” “예에. 그땐, 뭐라고 해야 하나, 하도 못 먹어서 정줄을 놨다고나 할까…….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치즈버거 말고는요. 왜 하필 치즈버거였는지, 아무튼 그것만 머릿속에 가득해서, 근데, 그 사람이 집에 들어가는데, 손에 햄버거 봉지가, 그 냄새가……. 젠장, 그 새끼는 왜 하필 문을 안 잠가놔서……. 당신 같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를 겁니다. 피난구역에서 저 같은 쓰레기가 어떻게 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요? 난민 출신인데?” 난민은 소령 한겨울의 출신성분이지만, 생전의 삶이 진실성을 보탰다. 불법 카지노는 독립된 가상현실망이라 일반가정에서 접속할 수 없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집을 비웠던 부모님은, 빈 에너지 팩 상자와 허기진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 깜빡 했네. “또 누굴 죽였어요?” 겨울이 물었다. “참작의 여지가 있는데도 감형이 안 됐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장소가 집이었으니 두 번째 희생자는 아마 가족이었겠네요. 혹시 일가족을 다 죽였나요?” 정곡이었는지, 죄수, 헤이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죄책감은 느끼는 듯. “남자를 죽였는데, 누가 비명을 지르더군요. 여자를 죽이고 나니까 이번엔 애들이 또……. Fuck, Fuck, Fuck! 내가, 계단 위로 쫓아가가지고, 그 애들을, 애들을…….” 잠시 흐느끼던 그는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그 뒤를 털어놓았다. 시체를 끌어다가 부부싸움으로 위장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집어 치웠다고. 햄버거를 먹은 다음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며칠 만에 먹어서 그런지 씨발, 잡혀가는 도중에 죽을 뻔했죠. 근데 존나 웃기는 게, 그 햄버거가 너무, 끝장나게 맛있었단 말입니다. 치즈버거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어요. 새, 생애 최고의 햄버거와 감자튀김이었습니다. 맹세코 우리 엄마 음식보다 끝내줬습니다.” 이재민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포트 로버츠 시민구역의 소년 소녀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넘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보수적인 애향심의 영향도 있겠으나, 시민에게 최우선적으로 분배되는 난민구호물자가 더 큰 이유일 것이었다. 애당초 오염지역 내 군사기지에 시민들이 남아있다는 것부터가 봉쇄선 너머 이재민 보호구역이 포화상태라는 증거였다. “소령님. 저 그냥 놔주시면 안 됩니까? 어차피 여기 이제 비잖아요. 쥐 죽은 듯이 있을 게요. 어차피 놔두고 가도 오래 못 사는데 그냥 두고 가세요. 예?” 죄수는 연민을 바라며 또다시 울었다. 닦을 손이 허리 뒤에서 묶여,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됐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겨울에게 새는 소리로 애걸한다. “제가 씨발 존나 쓰레기인건 압니다. 안다고요. 근데 네 명 죽이고 다섯 명 살렸으니까 약간, 아주 약간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살린 수가 하나 많습니다! 이렇게 잡혀가면 또 장난감 취급당하다가 개같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제발요, 제발 좀…….”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목숨은 덧셈 뺄셈이 아닙니다. 누구나 유일하거든요.” “그래서 안 된다 이겁니까?” “이미 저지른 잘못을 돌이킬 순 없는 거니까요.” “Fuck…….”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당신이 좋은 일을 한 것도 사실이니, 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게끔 노력해볼게요. 결국 형을 집행하게 되더라도, 그때까지 다른 고통을 겪지는 않도록 말예요. 최소한 당신들의 생사여탈권이 내게 있는 동안은 편의를 봐드리죠.” “그래봐야 잠깐일 텐데…….” “복귀한 뒤에 건의를 해보려고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게 최선입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요.” 죄수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뱉는다. 그러나 낮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겨울에겐 독립중대가 주어질 터. 죄수 관리를 맡기에 충분하다. 물론 올레마의 로저스 대령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완고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바로 다 죽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취조를 겸한 산책을 끝내고, 겨울은 모랄레스에게 담배를 빌렸다. 죄수의 입에 물린 뒤 불을 붙여주었다. 잠깐이지만 묶인 손도 풀어주고. 오랜만의 끽연에 기침을 터트리며, 죄수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든, 마음속에서 가장 힘든 건 자기 자신이었다. “소령님. 근무 순번입니다. 한 타임에 우리 쪽 인원 하나는 반드시 끼게 했습니다. 지금은 제 차례고요. 경찰이라고 해도 마냥 믿기는 좀 그렇더군요. 군 경력자도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겨울은 모랄레스가 건넨 메모를 확인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 옆에 무장과 군 복무 여부가 추가로 적혀있었다. 예비군도 있는지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괜찮네요. 이대로 실행해요.” “후아. 짬 나면 안에 들어가 보십시오. 슐츠가 1층 숙소의 TV를 살려놨습니다. 위성 케이블 방송인데, 간만에 새끈한 언니들을 보니 불끈불끈 하더군요. 다들 벌써 한 발씩 뺐을 겁니다.” 공범자처럼 씨익 웃는 모랄레스. 겨울은 대충 끄덕였다. TV라. 세계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한동안 시야가 너무 좁았다. 마누엘 헤이스를 보안관에게 맡기고 성직자 숙소로 들어가니, 먼저 쉬고 있던 인원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겨울을 간절히 기다리던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다름 아닌 맥주였다. 공수물자엔 낮은 비율로 주류가 포함된다. 오염지역에 고립된 민간인들의 정서 상태를 고려한 조치. 알레한드로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비번일 때 한 병씩만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절대로 안 취할 자신이 있습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그래요. 대신 뉴스 좀 볼게요.” “…….” 세 병사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화면 속에서 신음하는 남녀와 맥주 궤짝을 번갈아 보며 갈등한다.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속닥속닥 의견을 나눈 끝에 슐츠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30분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한 시간.” “45분으로 타협하시는 건…….” “한 시간.” “어차피 전황처럼 중요한 정보는 PDA에 뜨는데 굳이 뉴스로 재확인할 필요가 있을지…….” “한 시간.” “그럼 맥주를 두 병으로 늘리는 게 좋겠습니다.” “안 되겠는데요.” 계급이 깡패였다. 대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거래를 받아들였다. 맥주 값이 너무 비싸다고 투덜거리며. 가뜩이나 미지근한 맥주였다. 겨울은 아랑곳 않고 채널을 돌렸다. 번호와 기능이 낯설어 조금 헤매긴 했으나 얼마 안 가 찾아낸다. 알레한드로가 스톱워치를 눌렀다. “…….” 나오는 건 의외로 해외의 소식이었다. 「러시아에서 들어온 속보입니다. 볼가 강 방역전선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울리야노프스크 시가 함락될 위기라고 하는데요, 러시아 비상사태부(EMERCOM)에 나가있는 특파원이 자세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더글러스 양? 들립니까?」 「네, 헤일리 더글러스입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없었잖습니까?」 「그랬었죠. 하지만 상황은 항상 변하고 있으니까요. 비상사태부 장관 알렉산드르 예밀로프 중장의 발표에 따르면, 현지시각으로 금일 오후 6시 11분, 시 외곽 방어선의 붕괴가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위성사진을 보면 변종집단의 규모는 최소 20만 이상으로, 분산된 병력과 민간인들이 절망적인 싸움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럼 도시가 완전히 무너진 겁니까?」 「당초에는 그렇게 알려졌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보시는 것처럼 울리야노프스크 시가지는 볼가 강을 중심으로 분할되어 있는데요,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를 차단했기 때문에 동쪽 시가지만은 아직 안전하다고 합니다. 다만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의 숫자가 10만을 넘는다고 하더군요. 방역전선을 한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해온 러시아였기에 충격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비상사태부의 현지 상황 중계를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은 하늘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깜박이는 키릴 문자로 미루어 무인정찰기가 송신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강줄기에 갈라진 도시가 보인다. 어둠이 내린 도시의 동쪽은 인공적인 조명으로, 서쪽은 곳곳에 일렁이는 화재와 검은 연기로 물들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어휴, 저것 좀 보십시오. 아주 바글바글합니다. 러시아도 지옥이군요.” 하퍼가 한숨을 쉬며 맥주를 마셨다. 러시아는 언제나 하얀 북국일 것 같지만, 화면 속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 주변은 광활한 녹색이었다. 구획정리가 잘 된 농경지가 가득했다. 희망을 경작하던 땅이었으나, 지금은 점점이 몰려드는 역병으로 가득하다. 변종집단은 수를 어림잡기도 어려울 만큼 거대했다. 무리에 생소한 형상의 특수변종들이 섞여있었다. 높은 곳에서 봐도 확연한 차이. 저쪽 역시 지휘력을 갖춘 개체가 있는지, 전체적인 움직임에 목적성이 뚜렷했다. 옥상에서 도로를 향해 사격하던 병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화면을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었다. 그들 뒤엔 민간인들이 있었다. 알레한드로가 말했다. “저런 걸 봐도 도무지 슬프지가 않습니다. 실감이 안 나는 건지, 익숙해진 건지…….” 그밖에도 다들 우울한 눈치다. 겨울은 리모컨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괜히 보자고 했나 봐요. 미안해요. 이런 내용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아무나 보고 싶은 채널로 돌려요.” 그러나 누구도 받지 않는다. 슐츠가 개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계속 보겠습니다. 의무감이 드는군요.” “의무감?” “네. 저 친구들을 응원해야 할 것 같은……. 어쩌면 의무감이 아니라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세상에서 우리밖에 안 남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요.” 닥스훈트는 가장 상냥한 병사의 우울함을 감지하고 끙끙거렸다. 그 사이에 씻겼는지 제법 말끔해진 모습. 거친 털이 아직 정신사납긴 해도, 전과는 아예 다른 개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퍼가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저런 걸 그대로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만 해도 불리한 내용은 가지를 쳐서 내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러시아가 저러니까 되게 이상합니다. 안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겨울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핵을 맞았잖아요.” “엥?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지원이 줄거나 끊어질까봐 걱정스럽겠죠. 우리 살기도 바쁜데 왜 다른 나라까지 도와 주냐는 소리는 예전부터 나오던 걸로 아는데요. 잘은 몰라도, 핵이 터진 다음에 그런 여론이 굉장히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뉴스를 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고요.” 미국의 고립주의는 재앙 이전부터 역사가 깊었다. 러시아가 이런 기류를 모를 리 없다. 대사관도 멀쩡히 남아있고, 간첩도 있을 테니까. “와. 그런 겁니까? 듣고 보니 그럴 듯 한 것도 같고……. 근데 소령님은 생각하는 게 저 같은 놈이랑 완전히 다르군요. 학생 때 공부 꽤 잘하셨겠습니다?” 겨울은 대답 대신 어설픈 미소를 만들었다. 권하는 맥주를 사양하면서. # 235 [235화] #집행유예 (7) 무인기에서 들어오는 영상에 리포터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이번 사태가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밝혔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탄약 부족이지만, 이를 우려한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도 있었다는 것이죠.」 뉴스 진행자가 묻는다. 「잠깐만요. 더글러스 기자, 잘못된 판단이라는 건 무슨 말이죠?」 「탄약 소모를 조절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너무 적은 양을 지급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방어선이 붕괴되었을 때, 일선 부대가 탄약이 없어 후퇴하는 사이에도 후방엔 약 60만발의 소총탄이 남아있었다고 하더군요. 사단 병력이 반나절은 버틸 양입니다. 뒤늦게 이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패닉에 빠진 시민들로 인해 도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분산된 병력이 제각각 버려진 보급차량을 찾아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강 동쪽 시가지의 병력은 방어에 전념하기로 했다네요. 구조작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있는 총알도 못 써서 그 지경이라니, 지휘관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울리야노프스크 방어 책임자인 빅토르 쿠드랴체프 소장은 가족을 잃은 이후 곧잘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러시아 국방부가 공개한 지휘보고서에도 그런 면모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에 탄약 재고가 부족해지자 강박 증세마저 보여 왔는데, 심지어는 일선 지휘관들조차 믿지 못해 모든 탄약을 지휘본부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고 하네요. 다만 정부 대변인은, 같은 보고서에 첨부된 일선지휘관들의 보급 요청이 지나치게 과도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일개 중대가 하루에 10만발을 달라고 한 경우도 있다는군요. 한 사람이 천 발 가까이 쏠 수 있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 문제로 참모들과 마찰을 빚었던 기록도 확인됩니다.」 「아니, 대체 왜 그랬던 겁니까?」 「물자가 부족해지니 일단 받아놓고 보자는 심리였던 것 같습니다. 현지 전문가들은 집단 이기주의의 발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서로 다른 부대가 보급 경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심리가 아니었을까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라 더욱 두렵고 안타깝습니다. 미국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아니, 않았기를 바랍니다.」 기자는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또한 끊어진 보급이 문제였으니까. 미 본토 최대의 탄약창, 호손 기지가 방사능에 오염된 탓이다. 화면 우하단의 작은 사각형에서 앵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는 소식이 소식이라 그리 밝지는 못했으나, 분위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겨울 중위……. 죄송합니다. 한겨울 소령의 생존 소식과 구조작전의 성과가 전해지면서 민간 차원의 탄약 기부 운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나란히 뉴스를 시청하던 대원들의 시선이 한 순간 겨울에게 돌아왔다. 겨울이 어색한 미소를 만들자, 대원들은 작게 야유하거나 살짝 웃거나 엄지를 세워 보이거나 했다. 앵커의 말이 이어졌다. 「불과 닷새 사이에 여러 종류의 탄약 7억 발이 모여, 이를 전달 받은 국방부 관계자가 크게 놀라워하기도 했고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다시금 정부와 군을 믿기 시작한 것이죠. 국방부 관계자가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평하기를, 탄약 그 자체보다는 탄약 생산에 들일 인력과 자원을 다른 쪽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운동의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방역전선의 보급 문제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는 만큼, 장병들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동감이에요, 토미.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맥락을 벗어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대략적인 사정은 알겠지만 아직 얼개가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뭐죠?」 「러시아 정부는 불과 사흘 전에 자체적인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충분하다고 발표했었거든요. 탄약이 부족하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아, 그 점에 대해서는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생산능력과 별개로 보급능력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는 것이죠. 현재 물자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세베로모르스크와 무르만스크는 북극에 가까운 바렌츠 해의 항구들입니다. 발트 해와 흑해 연안을 상실한 지금도 유럽 방면에 부동항이 남아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사실이지만, 오늘 비극이 벌어진 울리야노프스크와는 직선거리로 약 2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죠. 바로 어제, 탄약 수송기가 정비 불량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있기도 했습니다. 보도관제에 걸려 있다가 오늘 공개된 사실입니다. 그 기체가 제때 도착했다면 울리야노프스크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죠.」 「정비 불량이라면, 부품 수급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만, 실무자나 민간 차원에선 미국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 식량을 팔아주는 건 고맙지만, 그 대가로 여러 자원과 희귀금속류를 너무 많이 가져간다는 것이죠. 미국 정부가 일반 시민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또 자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지나친 양을 요구한다는 비난입니다.」 겨울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관의 미국에서는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이나 스마트폰 등의 통신기기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군에 보급하는 선을 넘어서, 일반 시장에서도 자유롭게 거래된다는 뜻. 가격이 철저하게 관리되는 식량 및 생필품들과 다르게 값이 많이 비싸지긴 했지만, 사려면 언제든 살 수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이런 상황……사회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꽤 무리를 했을지도.’ 그러나 많은 종말을 경험한 입장에서, 겨울은 미국 정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최소한의 자원만 수급하는 건 절대로 잘하는 짓이 아니다. 하퍼가 슐츠에게 하는 말. “저게 실감이 잘 안 되는데, 가족이랑 통화해보면 확실히 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시대에 너무 잘 살고 있다는 느낌? 어, 이재민들이 들었다간 화를 내려나?” “글쎄……. 확실히 옛날엔 공짜로 줬다고 하더라.” 슐츠가 말하는 옛날은 2차 대전일 것이다. 부정확한 지식. 실제로는 값을 나중에 받기로 한 지원이었다. 물론 대가를 제대로 받아내진 못했다. “그래도,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결국은 우리만 남게 될까봐 무섭기도 해. 크레이머가 잘 나가는 걸 보면 나랑 다른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크레이머는 예의 그 공화당 대선후보의 이름이었다. 선거까지 채 4개월도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만만찮은 지지율을 과시하는 중. 그의 구호가 “미국을 위한 미국, 미국을 최우선으로!”다. 맥밀런 대통령이 싫은 정책들을 수용하면서 ‘무기 빼앗기’에 애쓰는 이유였다. “우리도 막 배급제 같은 거 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겨울은 알레한드로의 의견을 부정했다. “아뇨. 그랬다간 얼마 못 가서 지금 수준의 지원도 불가능해질 거예요.” 예전 포트 로버츠의 래플린 대령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미국 시민들이 치러야 할 희생을 난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여론에 대해서. 당시에도 겨울은 정부의 정책을 탓하지 않았다. 다소 부당하다 하더라도, 그 부당함이 사람의 한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까 앵커가 이제 와서 탄약이 쏟아져 나온다고 했잖아요? 설마 가진 걸 다 내놨을 린 없고, 일부의 시민들이 다시 일부만 내놨어도 그 정도라는 말인데……. 민간인들이 실제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뜻 아니겠어요?” “예, 뭐.” “어떤 물자든 어느 정도의 여유는 필수적이에요. 뭔가 부족하다, 어딘가 불안하다 싶은 순간부터 아주 급격하게 없어질 테니까요. 사재기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도 많겠고요.” “크레이머가 대통령이 되겠군요.” “그 사람이 백악관에 못 들어가도 결국 마찬가지일걸요. 뱅크 런 같은 거라고 봐요. 사회가 돌아가는 데 충분한 양이 있는데도, 불안한 사람들이 악을 쓰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망해버리는 경우 말예요. 그러니 낭비를 낭비라고만 볼 순 없죠.” “그것 참…….” 알레한드로가 입맛을 다셨다. 본인이 이민계 혼혈이기에 좀 더 개방적인 면도 있을 터. “한국엔 이런 말이 있어요.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고. 사람들한테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해요. 내가 보기엔 지금이 최선입니다. 다 같이 살자고 하다가 다 같이 망하는 꼴 보지 않으려면요.” 이렇게 맺는 겨울에게 슐츠가 한 마디 던진다. “소령님은 의외로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시군요.” “모든 사람들에게 희생을 기대할 순 없죠. 왜요, 뜻밖인가요?” “뭐라고 해야 하나……. 같이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도 웃기지만, 소령님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을 거라는, 말하고 보니까 진짜로 이상한데, 아무튼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해였나 보군요. 사람들을 썩 안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믿고 싶긴 해요.” 겨울의 대답이 한 박자 늦은 것은, 과연 이것이 정말로 슐츠의 질문인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헛된 생각이었다.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별빛 아이일지라도, 결코 이런 식으로 개입하진 못한다. 금지되어있다. 그 아이를 탄생의 순간부터 묶고 있는 사슬이었다. “그런데 믿진 않으시고요?” “사람한테는 한계가 있잖아요.” 소년 스스로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입장. 사람은 누구든 혼자서는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괴물 같았던 고건철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만든 사람들, 어머니를 만든 사람들, 고건철 회장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만든 사람들과 다시 그 사람들을 만든 사람들. 따라서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그렇게 믿으면서도, 가슴 속에 미움이 남아있는 겨울이었다. 하퍼가 끼어들었다. “뭐 그런 걸 묻습니까? 늙다리 티내는 것도 아니고.” “늙다리? 야, 나 너하고 얼마 차이 안 나거든?” 시답잖은 공방이 길게 가진 않았다. 스피커에서 생생한 총성이 흘러나온 탓. 본능 이상의 반사작용으로 움츠러들었던 대원들은, 급박하게 흔들리는 TV 화면을 응시했다. 어느 러시아 병사의 시야였다. 건물 내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들어오는 변종들에게 방어사격을 퍼붓고 있다. 거친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조준이 정확했다. 탄약을 아끼기 위해서겠지만, 지금껏 종말을 견뎌온 저력이 드러난다. “하, 언제부터 쟤들도 카메라를 달고 다녔지?” 알레한드로의 중얼거림. 시선이 화면에 고정된 슐츠가 답한다.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가 하는 건 대부분 쟤들도 한다더라. 카메라가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게 맞다. 병사가 보는 걸 지휘관도 보는 체계를 고작 카메라 따위라고 폄하하면 억울해할 나라가 많을 것이다. 「Черт возьми! Их так много!」 「Идите к лестнице!」 말뜻은 보이는 것으로 대충 알 수 있었다. 러시아 병사들은 어떤 건물의 큰 홀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정문이 중과부적으로 뚫릴 뿐만 아니라 쇠창살을 덧댄 창문까지도 뜯어졌다. 한 발에 반드시 하나를 죽이려고 애썼음에도 연사로 긁는 경우가 늘더니, 약실이 비어 철컥거리는 소리가 잇달았다. 지휘관의 구령에 병사들은 황급히 방어선을 버리고 물러났다. 층계참에 2차 저지선을 쌓고 있던 다른 병력이 길을 내주었다. 으, 진저리를 치던 알레한드로가 러시아 병사들의 가슴께에 달려있는 기기를 가리켰다. “저 틱틱 대는 건 뭡니까?” 슐츠가 자신감 없는 태도로 말했다. “무전기……인가? 아닌데. 주파수 치곤 숫자가 안 맞고, 또 제멋대로 변하는데.” 겨울이 정답을 알려주었다. “저건 가이거 계수기에요. 방사능 측정 장비요.” 방사능 오염이 심각했던 회차마다 신세를 졌으니 몰라볼 리가 있나. 제품마다 생김새가 다양하지만, 그 공통점을 알아볼 정도의 경험이 있었다. “아니, 그런걸 뭐 하러 한 사람씩 다…….” 이 질문에는 겨울도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는 바가 없으니. 틱틱틱틱- 계수기 튀는 소리가 점점 더 잦아진다. 계단을 폐쇄하고 문을 닫은 러시아 병사들의 표정에선 짙은 공포와 절망감이 묻어났다. 이에 미군 병사들의 감정이입도 깊어졌다. 화면 속의 누군가 울며 절규하기 시작하자, 시야의 주인이 우는 동료의 입을 틀어막는다. 「Тсс. Есть эти монстры рядом!」 가까스로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 역병무리의 굶주린 괴성이 문틈으로 새들어왔다. “설마 저 동네 변종들은 방사능 뿜뿜하고 다니나?” 알레한드로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계기에 표시되는 방사능 수치가 처음에는 소수점 단위였다가, 점점 더 치솟아 두 자리 수에 가까워졌다. 단위는 마이크로시버트. 언젠가 러시아에 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겨울은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 236 [236화] #집행유예 (8)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해. 접근하기만 해도 죽는 거잖아.” 중얼거리며, 알레한드로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슐츠가 반박한다. “멍청아. 그토록 치명적인 방사선량이면 이반 녀석들이 전신방호복(MOPP)을 입고 있겠지. 이 사단이 나기 전에도 지겹도록 싸웠을 텐데, 측정기를 주면서 방호복은 주지 않았을까봐?” 맞는 말이다. 애초에 가이거 계수기는 계측 한계가 낮은 편이기도 했다. 바나나에 갖다 대도 틱틱 거릴 정도니까. 방사성 원소인 칼륨이 있기 때문이며, 바나나 열 개를 먹으면 1마이크로시버트의 내부 피폭을 당한다. 목숨이 위험하려면 백만 개가 필요하다. 쿠웅, 쿵. 화면 속의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고, 천장에서 오래된 먼지가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겨울은 문과 병사들의 간격을 어림했다. 그럼블과의 거리를 재듯이. 여기에 작용하는 보정은 없다. 개인적인 경험. 방사능 오염이 만연했던 세계를 거치며 익혀둔 감각이었다. 2백 내지 3백 마이크로시버트 정도. 계수기를 변종에게 가져다 대면 이쯤 나올 것이다. 당연히 해롭다. 몸 안쪽은 더 심하게 오염되었을 것이고. 그러나 육체적으로 인간 이상인 변종이 못 견딜 정도는 아닐 터. 인체엔 DNA를 수복하는 능력도 있다. 다만 방사능이 변종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가 문제였다. 「Огонь!」 빠개진 문틈으로 러시아 병사들의 조준사격이 집중된다. 그러다가 연사로 긁고 총을 던지는 사람이 생겼다. 울고 소리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달아난다. 한 순간 화면이 휙 돌았다. Трусливый ублюдок! 도망치는 등을 향해 뱉는, 아마도 욕설. 화면의 주인이 다시 돌아본 정면에 징그러운 여인이 육박했다. 문틈을 비집고 나오느라 찢어지고 가시 박힌 몸뚱이. 타앙! 고개가 꺾이고 탄피가 튀었다. 나체가 관성으로 굴렀다. 최후의 저항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내 모든 탄약이 떨어져, 결국 옥상으로 내몰리는 러시아 병사들. 이 자리의 미군들이 한숨을 쉬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다른 장소에서 같은 싸움을 벌이는 자들의 동질감. 공감은 자신에 가까울수록 깊다. 중계는 여기서 끊어졌다. 잠시 후 특파원의 잦아든 음성이 흘러 나왔다. 「관계당국이 지금까지 영상을 보내온 사병의 신원을 공개했습니다. 제31근위공수여단 소속 예브게니 레오노프 하사, 그와 전우들의 영혼이 평화 속에 잠들기를 기원합니다.」 잠깐의 교전 영상으로는 러시아의 변종들이 어떤 면에서 특별한지 알기 어려웠다. 모랄레스가 무전을 보냈다. [소령님, 잠깐 나와 보시겠습니까? 북북서 4킬로미터 거리에서 기갑차량이 포함된 1개 중대 병력이 접근 중입니다. 예의 그 임시중대인 모양인데, 예정보다 굉장히 빨리 왔군요.] “알았어요. 곧 갈게요.” 응답한 겨울은 나머지 대원들에게 그냥 있으라고 손짓했다. “싸울 것도 아닌데 우르르 가서 뭐하게요? 쉬고 있어요. 채널은 바꾸고요.” 명령입니다. 리모컨을 건네받은 슐츠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무장한 민간인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망원경으로 모랄레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피니 전차를 앞세운 행렬이 보인다. 뒤따르는 차종이 워낙 다양해서 단일부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버려진 차량들을 회수해서 속도를 높인 것 같다. 1분 남짓 흐른 뒤에 목장 정문으로 선두 전차가 진입했다. 포탑과 차체에 열 명 가까이 걸터앉아, 마치 인도의 통근열차를 보는 듯 했다. 그 중 최선임자는 대위 계급이었다. 뛰어내려 둘러보더니 겨울을 향해 정자세로 경례했다. 답례한 겨울이 말에서 내려,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잘 왔어요, 대위.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드는군요. 요 며칠 신세를 졌습니다.” 맞잡은 손이 가늘게 떨린다. 입을 꾹 다문 모습은 속을 헤아리기 쉬웠다. “그런데 이 전차랑 장갑차들은 뭐죠? 이런 게 있다는 정보는 없었는데요.” 겨울이 묻자 대위가 끄덕였다. “원래는 도보로 이동 중이었으나, 멀쩡한 차량들이 방치된 꼴을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부상자를 비롯해 거동이 불편한 인원도 있었으니까요. 클로버데일에서 배터리와 연료를 구했죠. 탄약이 생겼으니 잠깐 치고 빠지는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유조차가 없어서 연료 운반에 애를 먹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많이 아끼게 됐지요. 기동 암호는 윗선에 물어보면 그만이었고 말입니다.” 샌 미구엘 때도 그랬듯이, 여관과 주유소는 대개 국도 가까이에, 즉 도시와 마을 외곽에 위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이 대위, 로드니 뱅크스가 큰 위험을 감수한 건 아니었다. “인명피해는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시가지가 텅 빈 것 같더군요.” “좋아요. 현명한 결정이었네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기지에 도착할 때까진 내가 지휘합니다. 혹시 전달할 사항이 있으면 말해 봐요.” “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고작 닷새 사이에 집결한 병력이라……. 다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원이 많으니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민간인도 있다고 들었는데, 가급적 서로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대민사고가 우려됩니다.” “신경 쓰죠. 누군지만 알려줘요. 그 외에 특별히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침대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대위가 고단한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에게 민간인들의 격리를 요청하고, 겨울은 임시중대에게 숙소를 지정해주었다. 그러나 건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감 탓. 이들을 챙기는 건 당연히 간부들의 몫이었다. “합류 직전까지 건물 안에 갇혀 있던 인원들이 대체로 저런 증상을 보입니다. 심한 경우는 이틀 동안 캐비닛 안에서 나오지 않은 녀석도 있고요.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죠. 반대로 저기 전차장 자리에 앉아있는 놈은 바깥을 싫어합니다. 전차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냐고 하면서요. 그냥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소령님께서 한 놈씩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공병대 중사는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았다. 무릎 아래로 반 뼘만 남아있다. 그런데도 정신적으로는 가장 멀쩡한 축이라, 급조한 목발을 짚고 잘도 돌아다녔다. “그거야 어렵진 않은데……. 당신 다리는 어떻게 된 겁니까?” 억지로 잡아 뜯은 것처럼 생겼군요. 겨울의 말에 중사가 씨익 웃는다. “전선이 막 무너졌을 때 구울 새끼에게 발목을 물렸습니다. 고놈 치악력이 대단한 건지, 아님 전투화가 경량이라 그랬는지 이빨이 아주 순식간에 박히더군요. 그래서 터트렸습니다.” “……터트려요?” “예. 곧바로 정강이에 도폭선을 감아 폭파시켰죠.” “…….” “하는 김에 괴물 새끼 모가지까지 감아서 한꺼번에 꽝! 하고……. 위생병도 없고 구급 키트는 이미 써버린 상태라, 상처는 C4를 태워서 지졌지요. 하하하!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평생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C4는 플라스틱 폭약이다. 안정성이 높아서, 불을 붙이면 폭발하는 대신 연료처럼 타들어가는 특성이 있었다. 즉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의심스러운 증언이었다. “음, 뭐, 남자답네요. 굉장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상실을 미화하려는 사내에게 원하는 답변을 돌려주는 겨울. 중사가 다시 소리 내어 웃는다. “역시 그렇지요? 잠깐이라도 계집애처럼 망설였으면 저는 괴물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물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미리 생각해둔 덕분에 본능적으로 손이 나가더군요. 평소에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절대로 못할 거라고 장담했었습니다만서도.” 없는 다리의 허전함을 견디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잘 이겨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줘야 한다. 그래서 힘겨운 과거가 추억이 된다. “다행히 늦지 않게 항생제를 구했나보네요. 환부 감염으로도 죽을 수 있었는데.” “갖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미리 생각해뒀다고. 당연한 준비였지요.” “이름을 알려줄래요? 성으로는 부족하네요.” “게리, 게리 핼러웨이입니다.” “게리 핼러웨이. 기억했어요.” 이제 이 상남자는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스스로를 더욱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이야, 어, 니들 한겨울 소령 알지? 그 사람도 감탄해서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야. 하하하. 겨울은 만족한 중사를 숙소로 들여보냈다. 불안한 병사들은 알아서 하겠다고. 작전이 마무리된 지금에 와서 불미스러운 사고를 겪기보다는 지휘관이 잠을 줄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위생병이 없어서 어깨 탈골을 방치한 병사도 있었다. 부상자부터 보고하라는 명령이 전해지자 머뭇거리며 나왔다. 숙소를 거부하는 인원과 함께 모닥불가에 있던 겨울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늘어진 팔을 힘주어 잡자 움찔 놀라는 병사. “가만있어요. 맞춰줄 테니.” “저기, 잘못되진 않겠습니까? 가능하면 기지에 돌아가서 제대로 처치 받고 싶습니다. 거긴 위생병이나 군의관이 있을 거 아닙니까.” “내일 오후에나 도착할 텐데, 그 때까지 이대로 두는 게 더 안 좋아요. 언제 빠졌는데요?” “엊그제 창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악!” 말하는 도중에 기습적으로, 우둑 소리를 내며 제 위치를 찾는 팔. 요령도 익숙하거니와 파소 로블레스에서 획득한 「응급처치」의 보정도 붙었다. 끙끙거리던 병사는 못내 미심쩍은 눈치로 자신의 팔을 움직여보았다. “어때요?” “좀 뻐근하긴 하지만, 음, 모르겠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불편합니다.” 의심스러우면 괜히 더 아픈 법이었다. “그 상태로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럴 거예요.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습관성 탈골은 당연하고 영구적인 장애까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겨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병사의 안색에 실망이 스쳤기 때문이다. ‘후방으로 빠지고 싶었던 건가…….’ 이해한다. 장애를 얻어서라도 전역하고 싶은 사람은 그밖에도 많을 것이다. 탈구가 해결된 병사는 조금도 기쁘지 않은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숙소로 들어갔다. 겨울은 임시중대 소대장을 불러 불침번 근무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정신적으로 불편한 병사들 중엔 스스로가 감염되었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나,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 죽여줘요. 죽여주세요. 으으, 좀비가, 좀비가 될 거라고요!” 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으려고 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한지가 꽤 되었는지, 상처투성이인 얼굴이 정말 변종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렁이는 모닥불의 음영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뭉툭한 장갑을 끼워놔서 덜하다. 왜 손을 묶어놓지 않았을까? 옆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환자와는 고향 친구로서 동반입대를 신청했다는 일병이 고개를 저었다. “묶었다간 훨씬 더 심한 발작을 일으켜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아예 숨을 못 쉴 정도였거든요. 그래도 소령님은 알아볼까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당신이 죄송할 건 없죠.” “Damn, 이 친구 어머니를 뵐 낯이 없군요.” 이러는 본인도 멀쩡해보이진 않았다. 손 떨림이 심하다. 가벼운 PTSD였다. 잠시 자리를 떠난 겨울은, 민간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던 창고로부터 도수 높은 위스키 상자를 얻어왔다. 병마다 뒤집은 잔을 씌워서. 어차피 내일 떠날 곳이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다들 한 잔씩 해요.”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은 미친 친구를 감싸던 일병이었다. 글라스 절반쯤을 단숨에 삼켜버린다. 응어리진 화를 삭이듯이. 그러나 겨울의 존재가 모두에게 쓸모없었던 건 아니었다. “저도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닥불 둘레에 끼어든 것은, 전차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던 전차병의 모습. 잠깐 보았던 얼굴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겨울이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잘 왔어요. 찾아가려고 했는데 잘 됐네요.” “소령님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상한 기분?” “뭐라고 해야 하나……. 꼭 갑작스럽게 다른 세계로 던져진?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깬? 후, 설명하기 어렵군요. 그냥 한 잔 가득 따라주십쇼. 다 잊고 싶습니다.” 겨울은 그에게 다른 이보다 많은 술을 따라주었다. # 237 [237화] #집행유예 (9) 불면증이 너무 많은 밤이었다. 몇 번을 깨고 자도 다시 이어지는 악몽에 진저리가 난 이들, 그리고 이제 겨우 안전해졌다는 기쁨에 진정이 되지 않는 이들. 그래서 밤하늘 아래의 모닥불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아무리 침대가 좋아도 어둠 속에 홀로 있기보다는 낫다고. 거친 잠자리에 익숙해져서 부드러운 이불이 자꾸 신경 쓰인다는 소위도 있었다. 늦은 시간, 신부와 수녀가 겨울을 찾았다. “돕게 해주십시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녀들이 있을 겁니다.” 사고예방 차원에서 깨어있던 겨울은 요청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러세요. 위험할 지도 모르니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신부는 몰라도 수녀는 위험하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에겐 성별만 보일 것이다. 제법 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신부가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당신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평화의 근본이십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여정을 지켜주셨듯이, 또한 그 가족을 안전하게 하셨듯이, 매 순간 당신을 모든 역경의 피난처로 여기는 자녀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싸울 때는 용기를 주시고, 슬플 때는 위로를 주시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돌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이미 유명을 달리한 영웅들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나이다. 아멘.” 그러나 여기 모인 모두가 순수한 뜻은 아니었다. 경건한 이들이 눈을 감고 두 손 모을 때, 경멸하는 이들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손가락에 묵주를 걸고 휙휙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신앙이 있기는 있을 터인데도.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도 중지시켜야 하나. 망설이던 겨울은, 그러나 신부에게 안겨 흐느끼는 병사를 보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어쨌든 겨울이 지켜보는 한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신부와 수녀는 한 사람 한 사람 성실하게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모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질문자는 묵주를 돌리던 병사였다. 착 감아쥐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볼멘소리를 낸다. “이봐요, 신부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신께서는 대체 왜 저 지랄 맞은 역병을 만드셨답니까?” “…….” “난 하느님께서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모든 업적도 선하다고 배웠고, 또 고백했었거든요. 세상에 더럽고 짜증나는 새끼들이 많아도, 허구한 날 전쟁이 벌어져도, 친구 새끼가 사기치고 도망갔을 때도 다 주님의 거룩한 뜻이 있으시려니 했습니다. 근데 이건 진짜 아니지 않습니까? 도망 다니는 내내 원망스러웠습니다. 말씀해주시죠. 신부님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계시는지, 나 같은 놈한테는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합니다.” 지하에서 사형수가 내지른 일갈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저 씨발 놈의 좀비들도 주님의 섭리냐고. 종말에 직면하여 절대자의 선함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나의 질문이 사나운 여럿을 대변했다. 신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잠시 말씀드려도 괜찮을지요?” 수녀였다. “형제님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저 또한 같은 고민을 해보았으니까요. 그러나 이 고뇌가 사실 새롭지는 않은 것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경험하셨듯이, 이 세상엔 대역병 이전에도 많은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 받아들이는 쪽에 주는 시간이자,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었다. “이미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주여, 우리의 자매인 물의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의 찬가의 한 구절입니다. 이 찬송을 지으신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하늘과 땅, 달과 별, 바람과 구름, 불과 물,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우리 사람의 형제이자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 이르기를 너희 모두가 형제라고 하셨으니, 성 프란체스코께선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만물이 주님의 뜻에서 하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겨울은 납득했다.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그새 새로운 병력, 타 지역에서 활동하던 프레벤티브 스캘핑 팀이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에 이리로 보내라고 조용히 답신한다. 마중 나가야 하겠지만, 이 자리도 걱정스러웠다. 수녀의 말이 계속됐다. “그러니 저 끔찍한 역병 또한 주님의 뜻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오랜 기도와 눈물로 간구한 끝에, 저는 주님께서 고통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Fuck.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형제님. 헬렌 켈러를 알고 계십니까? 한평생 눈이 보이지 않았고, 귀가 들리지 않았고, 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고.” “…….” “로마서에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만연한 곳에 은총이 넘쳤나니.」 형제님께서 이제까지 믿음이 있으셨다면 욥기를 읽어보셨을 겁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아들과 딸을 잃었으며 스스로도 고치지 못할 병에 걸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르므로, 욥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거라는 말이었지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욥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 “그것은 시련이었습니다. 주께서 욥이 가진 모든 것을 쳐냈는데도 욥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믿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의롭게 되었습니다. 바로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만드셨지만 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셨던 것입니다.” “Fuck…….” “주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에게도 고통을 내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는 지금 세상 사람들의 처지가 이와 같다고 느낍니다. 지금이야말로 서로를 지키고, 용서하고, 위로할 때라고요……. 위협이 없으면 지킬 일도 없고, 죄가 없으면 용서할 일도 없고, 슬픔이 없으면 위로할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고결함은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선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과 함께 말을 맺었다. “주님의 은총 아래, 우리는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과연 카톨릭 교리에 부합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절절한 말이 수려하게 나오는 걸로 보아 하루 이틀의 사색으로 내린 결론은 아닐 것이었다. 세계관이 세계관인 만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 각자의 고민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을 살다 온 겨울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뿐인 이야기였다. ‘바깥세상엔 신이 없는 모양이지…….’ 슐츠에게 말했었다. 믿고 싶지만 믿지는 않는다. 바깥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쉽게 경멸하고 더러워하는 관객들이 이제 와서 이겨내기를 바라기는 힘들었다.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의 디스토피아.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겨울이 전에도 한 번 했던 생각. 과거에 어떤 분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만연한 미움과 경멸이 돌이키지 못할 임계점을 넘어선 순간이. 차락. 묵주를 손에 쥔 병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젠장,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신부가 말한다. “그저 삶에 충실하십시오. 동료를 소중히 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지키다보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이 세상의 모습으로, 결과로서 답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을 보았다. “여기서도 그랬습니다. 땅 밑에 갇힌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지요.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될 일들을 저지르려고 했습니다. 저는 하다못해 오늘 밤까지만 구조를 기다려보자고 부탁드렸으나, 그마저 위태로워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한겨울님이 문을 두드리셨던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죽이려는 순간에 말입니다.” 새로 합류한 병사들은 지하 대피소에서 일어난 일을 처음 듣는다. 시선이 겨울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데. 겨울은 잠자코 있었다. 바람과 구름, 불과 물도 신의 뜻이라고 하는 마당에 신앙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그저 고통만을 베풀고자 하셨다면 굳이 한겨울님 같은 분을 보내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의로운 심판자이심을 믿습니다.” 곁에 선 대위 하나가 조용히 하는 말. “중간부터 들었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겨울이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잘 왔습니다. 한겨울입니다.”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알파 팀의 태너 롱입니다.” 알파 팀은 육군 특수부대(그린베레)의 전투유닛을 말한다. 이어 나란히 선 중위가 경례했다. “레인저 연대 수색중대에서 나온 조지 팔머입니다.” 같은 작전에 투입되었으면서도 양쪽의 느낌은 판이하게 달랐다. 단순한 계급차이로 보긴 곤란하다. 턱수염이 뻑뻑한 알파 팀장은 다소 위압적이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반면 팔머 중위는 다소 절제된 분위기였고. 서로 다른 임무 특성을 반영하는 걸까. “레인저라면 혹시 에머트 대위 쪽 소식을 알고 있습니까?” “에머트 대위? 그 사람도 레인저입니까?” “네. 2대대 델타 중대장이고, 최근에는 험프백을 추적했다고 들었는데요.” “아아, 그……. 죄송합니다. 애초에 그쪽하곤 주둔지부터 달라서. 소령님과 우리 연대가 접점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따로 물어보실 정도였던 모양이군요.” 중위가 희미한 미소를 드러낸다. 지울 수 없는 피로 너머로 호감과 자부심이 엿보였다. “큼. 서서 이러지 말고 어디 앉아서 말합시다. 마침 저기 술도 보이는데. 소령님, 애들 좀 먹여도 되겠습니까? 괜찮다면 우리도 마시고 말이죠. 사냥을 끝낸 기념으로.” 바위에 모래바람이 부딪히는 듯 한 음성. 롱 대위가 위스키가 남아있는 궤짝을 가리킨다. “그래요. 오늘까지 다들 고생 많았을 테니까요.” 인명 손실을 물어볼 상대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스스로 말할 것이다. “소령님은 알려진 것보다 꽤 얌전하게 생기셨군요. 실물은 다를까 했습니다.” 거칠다. 그러나 그린베레 대위쯤 되면 겨울이 눈에 차지 않을 법도 했다. 전적이 아무리 훌륭해도, 복무기간으로 따지면 채 1년도 되지 않는 상급자를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례한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억울함이나 자괴감에 가까울 터. 겨울은 별 말 없이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대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내밀었다. 꼴꼴꼴. 호박 빛 술 안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팔머 몫까지 채워주자, 대위가 손짓한다. 술병 달라고. “소령님도 한 잔 하시죠.” “술을 좋아하진 않아서.” “허, 남자가 이런 자리에서 빼기 있습니까? 인생을 마시지 않는 장교는 장교가 아닙니다.” 겨울은 설익은 미소와 함께 잔을 들었다. 대위는 넘치기 직전까지 따라주었다. 이러면 전투력 유지가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이미 받은 잔이었다. “떠나간 벗들을 위하여.” 멋대로 건배사를 읊은 대위가 잔을 단숨에 꺾는다. 그러고 겨울을 보기에, 겨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역시 잔을 한 번에 비웠다. 허. 당혹스러워하는 대위에게 겨울이 빈 잔을 들어보였다. “장교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지. 롱 대위는 다시 한 번 허, 하고서 술병을 쥐었다. “두 잔째는 사양하죠. 복귀할때까지는 내가 책임자니까.” 지금도 시야가 조금 왜곡됐다. 재현된 취기가 겨울의 사고를 마비시키진 않지만, 「통찰」이나 「간파」, 그 외의 감각보정들, 육체의 섬세한 움직임에는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모범적이군요. 그린베레 지휘관과 레인저가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한다. 뭔가 작전에 관한 걸 물으려던 그린베레가 가까운 창가에서 유심히 내려다보는 아이를 발견했다. 어린 나이엔 지친 병사들도 궁금한 볼거리인 모양. “이봐! 꼬마 아가씨! 그 곰 인형 이름이 뭐냐?” 거친 사내의 거친 외침에 한 발짝 물러섰던 아이가, 조금 망설이다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인형이 그냥 인형이지 무슨 이름이 있다고 그래요!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러고는 몸을 돌린다. 달리는 모습이 복도로 이어지는 여러 창들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그린베레가 입맛을 다셨다. “젠장. 우리 딸내미만 되바라진 게 아니었군. 계집애들이란.” 팔머 중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 238 [238화] #집행유예 (10) “딸이 있습니까?” 점잖은 레인저의 질문. 그린베레가 모난 얼굴로 답했다. “아마도.” “아마도라뇨?” “난 딸이라고 생각하는데 걔는 아니거든.” “그거 유감입니다.” “별 수 없지. 내가 생각해도 난 아버지 노릇을 할 놈이 못 돼. 결혼했나?” “마음에 둔 사람은 있습니다.” “하지 마.” 다소 무례한 말이었으나 레인저는 딱히 불쾌해하지 않았다. 흥. 롱 대위는 코웃음을 치고 적게 남은 잔을 흔들었다. “못할 짓이야. 남편과 아버지가 되려면 좆같은 군인 노릇을 때려 쳐야 해. 공군이나 해군처럼 물러 터진 샌님들이면 또 모르지. 하지만 넌 레인저잖아? 안 될 거야 아마. 우리 그린베레보다는 한참 모자라지만, 결국 니들도 아주 좆같은 놈들이니까. 마누라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도 결국 좆같은 전우들과 좆같은 적들이 있는 개좆같은 전장으로 돌아오고 말겠지.” “방역전쟁이 끝나면 전역해서 그 사람과 함께 농장이나 운영할까 합니다.” “헛소리. 얼마 못가 이혼하거나, 이혼은 면하더라도 생활비 부쳐주는 노예 신세가 될 걸? 애초에 이 전쟁이 끝나기나 할지 의문이기도 하고.” 겨울은 총기를 손질하며 듣고 있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무기 관리에 소홀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의 격발불량은 생사를 가르는 사고였다. 사각사각. 양치질을 닮은 소리. 브러쉬로 분해된 노리쇠를 문지른다. 강중유에 약간의 탄매가 녹아나왔다. 간단한 손질이라 차개 핀을 뽑진 않았다. 눈으로는 대위를 보았다. 완고한 얼굴이 상처에 덮인 딱지 같았다. 두껍다. 그에게 묻는다. “그래서 대위는 결혼을 후회해요?”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딸이 밉습니까?” “…….”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낳을지 안 낳을지 결정할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 겨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허. 대위가 어처구니없어 했으나, 소년으로서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아무리 서툴러도 애정만 있으면 된다. 결국 어긋나 서로를 미워하게 될지라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는 낫다. “술맛 떨어지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불쾌하다는 듯이 어린 상급자를 힐끔거리며, 그린베레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동안 잡아 죽인 변종 새끼들은 어땠습니까?” “어떻다니, 무슨 말이죠?” “거 왜, 특별한 뭔가가 있으면 서로 털어놔보자 이겁니다. 위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사항이 꽤 많은 모양이던데,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끼리라도 정보를 공유해야죠. 아는 게 힘이라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좀비들을 조져버리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하들을 향해 빽 내질렀다. “새끼들아! 내일 못 일어나는 놈은 버리고 간다! 엉덩이 간수 잘 해! 비상 걸렸을 때 비틀거리는 놈은 똥구멍에다가 총알을 박아줄 테다!” 알파 팀원들은 어둡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결원이 제법 많아 보였다.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섞였다. 레인저 대원들 쪽에서 나오는 한 마디. 아니 웬 개새끼가 있어? 말이 험한 것 치고 한 명이 슬그머니 일어나 기웃거리는 품이 우습다. 주머니마다 손을 넣은 끝에 초코바를 꺼냈다. 다른 대원이 지적한다. 미친 새꺄. 개는 초콜릿 먹으면 뒤져. “특별한 무언가라.” 팔머 중위가 회상에 잠긴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실패작들과 자주 마주쳤습니다. 어린놈들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어린 것들은 죄다 벗고 있었는데, 저만 경험한 건 아니겠죠.” 실패작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겨울과 비슷한 「통찰」을 공유하고 있었다. 레인저 소속이라도 계급이 중위라 열람 가능한 정보에 제한이 있을 텐데, 결국 생각할 줄 아는 현장 지휘관들이라면 비슷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멀쩡한 놈들이 동쪽으로 가서 그렇겠지 뭐.” 역시나 그린베레도 마찬가지. 순서를 겨울에게 돌린다. “멍청한 책상물림이랑 똥별들이 우리를 못 믿어서 이것저것 감추나본데, 솔직히 아니꼽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건만……. 소령님은 계급이 있으니 하나라도 더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계급이 아니더라도 성과에 어울리는 경험이 있을 거고.” 겨울이 보건서비스 부대의 캠벨 박사에게 기대했던 바와 같았다. 어느 지휘관이든 정보수집에 대한 욕심이 있게 마련. 여기에 더해 겨울 개인에 대한 호승심도 엿보인다. 대체 이놈은 뭐가 특별해서 그렇게 전적이 화려한가. 인생 망쳐가며 군인 노릇하는 나보다도 더. “글쎄요. 나라고 기밀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운 건 아닌데다,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은데요? 내가 아는 대부분은 당신들도 예상하고 있을 거라고 보는데, 특별히 확인이 필요하거나, 영 모르겠다 싶은 걸 말해 봐요.” 겨울의 말에 중위와 대위의 시선이 교차한다. 당연히 대위가 먼저였다. “아까 잠깐 언급하신 험프백 말입니다. 그거 뭐하는 새끼 같습니까?” “…….” “항상 그렇습니다. 당장 날 쏘는 적보다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는 적이 더 신경 쓰이죠. 다른 특수변종들은 어떤 놈들인지 다 알지만 험프백 그 놈은 모든 정보가 기밀이니 짜증이 치밉니다. 기밀이라고 해도 돌아가는 꼴 보면 짐작은 갑니다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니까요.” “마주친 적 있어요?” “팀원 하나가 멀리서 봤다고는 하는데 접촉을 유지하진 못했습니다. 흔적은 요란하더군요. 숲이었지만 주변에 멀쩡한 나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바닥까지 파헤쳐놨고요.” “짐작하는 것부터 들어볼까요?” “밥차라고 봅니다. 그것도 먹이는 놈들 겁나 빨리 성장시키는. 아니면 지금까지 본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꺼운 눈썹 아래에 확신이 있었다. 겨울이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동의해요. 위에서 기밀로 지정한 이유도 알 만 하고요.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리고 시민들은 계속해서 죽이다보면 언젠간 끝이 날 거라고 믿잖아요. 애를 낳는다고 해도 성체가 되기까지 이십년은 걸릴 테고. 그런데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유체를 성체까지 키워내는 특수변종이 있다고 해봐요. 사기가 아주 뚝뚝 떨어질걸요. 시민들도 우울해할 거고.” 개인적으로, 라는 단서에 그린베레가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레인저 장교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맞습니다. 특수변종 치고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건 단순히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라 전투기능이 없어서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치중대를 후방에 두고 보호하는 건 상식이잖습니까.” “어이, 괴물 새끼들이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것부터가 문제야.” “나무를 괜히 갉아놓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소화시키겠죠. 전 바퀴가 자주 보이는 것도 신경 쓰입니다. 이것들이 다원화된 보급체계를 구성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그것들이 벌레를 키워서 먹는다고?” “아니겠습니까? 험프백의 능력이 짐작대로라고 한다면, 그걸 평범한 변종들에게 먹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로증 걸린 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올 테니 말입니다. 그건 그것대로 잡아먹어서 처리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숫자를 늘리기엔 불리한 방식입니다.” “……벌레 새끼들이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지.” 보통의 바퀴라면 사람을 피해 달아나야 정상이었다. 겨울은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의 제과점을 떠올렸다. 바퀴가 유난히 많았고, 펑퍼짐한 자국이 있었다.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는 또 다른 특수변종의 정황일 확률이 높다.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어요. 여기까지 생각이 같은 걸 보면 두 사람도 오는 길에 미성체 집단을 많이 상대한 것 같은데, 맞나요?” 겨울이 묻자 수긍하는 두 사람. “좀 더 시간을 끌었다면 위험했을 것 같긴 해요. 변종에겐 대사억제 능력이 있잖아요. 끊임없이 늘어나는 성체가 대사억제로 잠들어 있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경우엔……. 지금의 봉쇄선으로는 도저히 못 막을 규모였을지도 몰라요.” 롱 대위가 마른세수를 했다. 대사억제에 돌입한 개체는 먹거나 마시지 않고 몇 년을 버틸 수 있으니, 공군이 남미에서 올라오는 루트를 차단한들 언젠가 헤아리는 것조차 무의미한 규모의 무리가 출현했을 거라는 소리였다. 그밖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제가 특이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운을 띄우는 팔머 중위에게, 겨울이 총기손질을 마무리하며 되물었다. “특이한 것?” “변종이 변종을 물더군요.” “도태된 개체를 잡아먹는 건 아니었고요?” “단순히 물기만 했습니다. 딱히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단순히 단일개체의 이상 행동일지, 혹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두 분은 같은 걸 본 적 없으십니까?” 난 없는데. 그린베레가 말했고, 겨울은 생각에 잠겼다. “감염시키는 것일지도.” 불현 듯 던진 말에 대위가 반응한다. “뭐 덜 감염된 놈이라도 있을까봐 다시 문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어떤 특질을 전파하는 과정일 수는 있지 않겠어요?” “특질?” “전부터 이상하게 여기던 게 있어요. 트릭스터와 처음으로 싸웠을 때, 거기가 아타스카데로 주립 정신병원이었는데, 이 괴물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건 태아 변종들뿐이었거든요.” “그 전투기록은 저도 봤습니다.” “시가지에 많았던 성체 변종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건, 트릭스터가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전파를 감지하는 능력……기관은 새로 태어난 세대에게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지 봐요. 아주 넓은 범위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잖아요.” “으음……. 그러니까, 특수변종까지는 못 되더라도……어느 정도 개량된 특성은 재감염을 통해 확산될 수 있다 이겁니까?” “팔머 중위 말을 듣고 지금 막 떠올린 것일 뿐이지만요. 변종들이 그러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도 없고요. 어쩌면 이게 험프백의 또 다른 능력일 수도 있죠. 확실한 건 없어요.” “이 괴물들은 참 알면 알수록 좆같군요.” “다 쏴서 죽일 순 있잖아요.” 허. 다시 한 번 기가 막힌 얼굴로 겨울을 보는 대위. 아까부터 같은 잔을 흔들고만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린베레. 작전이 사실상 끝났어도 마냥 방심하진 않는다. 술 냄새는 날지언정 취한 사람의 언동은 아니었다. 마침내는 남은 술을 바닥에 주욱 쏟아버린다. “맞습니다. 다 쏴서 죽일 겁니다.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기도 하고.” “…….” “죽이고 또 죽여서 고 계집애가 무서울 일 없게 하겠습니다. 마누라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흠, 그래도 사람은 아닌 놈들이라 죽일 때 부담이 덜해서 낫군요.” 팔머 중위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렇습니까? 전 아직도 꺼림칙할 때가 많습니다. 역병의 피해자들 아닙니까.” “그놈들 머리통을 쪼개본 적 있나?” “……일부러 그러진 않습니다.” “내가 예전부터 이런저런 머리를 많이 쪼개봤는데 말이야……. 아, 그런 눈으로 보진 말고. 나도 제정신으로 한 짓은 아니었어. 미칠 것 같았지. 몸에 폭탄 두른 광신도들, 민간인 학살하는 놈들, 애한테 대전차 로켓 들려주는 정신 나간 년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나. 궁금하잖아. 딱히 본다고 알 만 한 건 아니었는데도.” 그린베레가 습관처럼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 변종 놈들은 달라. 아주 많이 달라. 그동안 보아왔던, 정상적인 것들하고 비교해서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사람이 아니야. 인격이라는 건 이 골통 안에.” 대위가 자신의 머리를 쿡쿡 찍어 보인다. “여기, 머릿속에 있는 거잖나.” “…….” “레인저씩이나 되는 게 순진하게 굴기는. 그러다 죽어. 너만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 그 뒤로도 토의 반 푸념 반인 대화가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 마지막에, 레인저가 말했다. “얼른 본토 탈환이나 끝냈으면 좋겠군요.” 낙관적인 기대였다. “죽도록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고가치 표적을 꽤 많이 잡아 죽였으니 말입니다. 조만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겠죠. 분위기가 꽤 좋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우리는 사방이 육지인 러시아하곤 다르잖습니까. 어떻게든 파나마 지협까지만 내려가면 해상봉쇄도 더 쉬워질 테고, 지상에서의 방어 밀도도 굉장히 올라갈 테고……. 그때가 돼서 장기휴가가 나오면 그녀와 결혼할 겁니다.” “하, 그만 두라니까.” “대위님을 보니 더욱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미친.” 겨울은 희미하게 웃었다. # 239 [239화] #집행유예 (11) 날이 바뀌어, 동이 트는 지평선으로부터 수송헬기 편대가 날아왔다. 한 대 당 수십 명씩 들어가는 대형이라 민간인들을 다 싣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아이들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닥스훈트가 애처롭게 짖는 소리. 어제 그린베레를 무안하게 만들었던 작은 아가씨가 인형 대신 꼭 안고 있었으나, 개의 필사적인 발버둥에 결국은 떨어트리듯이 놓치고 만다. 쿵 떨어져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다리 짧은 개는 곧바로 일어나 직선으로 질주했다. 그 끝엔 슐츠를 위시한 기동대원들이 있었다. “이것 참, 곤란한 녀석일세.” 다리 아래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개를 보고 대원들이 한숨을 내쉰다. 민간인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보낼 심산이었으므로. 병사들의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는 끄응끄응, 낮아진 꼬리를 흔들며 병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한 번 버려져서 더하다. 이를 본 그린베레의 촌평. “딸보다 개가 낫군.” 가벼운 개소리였다. 소녀가 파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쫓아왔다. 등에 멘 소총이 뛰는 걸음마다 반 박자 늦게 흔들린다. 총열이 짧고, 개머리판에는 반동 흡수를 위한 트라우마 패드를 붙여놓았다. 겨울은 총기회사의 광고를 떠올렸다. 당신의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 운운하던. 「당신의 아이가 총을 다룰 줄 모른다면, 당신은 지금 부모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린베레는 총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그야 죽이고 또 죽여서 딸을 지키겠다는 사람이니, 아이가 총을 메고 다니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었다. 못난 어른들이 충분히 못 죽여서 애들까지 총질을 하게 만든다고. 슐츠가 개를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소녀는 받지 않는다. “페르난도는 아저씨가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페르난도? 네가 붙여준 이름이니?” 일부러 이름을 주지 않았던 병사가 묻자, 작은 아가씨가 깊게 끄덕였다. “네. 풀 네임은 페르난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도밍고 빈센트 페레르 안토니오…….” 길었다. 호세 호아킨 파스쿠알 어쩌고가 이어질수록 슐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스토 카야타노 파우스토 루이스 레이문도 그레고리오 로렌쪼 제로니모니까 꼭 기억해주세요. 페르난도 너도 잊으면 안 돼. 나도 널 잊지 않을 거야.” 눈물 글썽한 이별에 개가 알! 하고 짖는다. “어……. 이름이 참 길구나.” 병사의 당혹스러운 감상을 듣고 소녀가 다시 한 번 고갯짓했다. “네. 긴 이름은 멋지잖아요. 페르난도 7세의 정식 이름이래요.” “페르난도 7세……가 누구니?” “옛날에 스페인 국왕이었던 사람이요. 어른이 그것도 몰라요?” 언제 눈시울을 붉혔냐는 듯 지금은 꼿꼿하게 턱이 높아지는 소녀였다. 뭐든 어려워 보이는 것을 외우고 자랑스러워할 나이. “미안하다…….” 괜히 사과하고서, 슐츠는 잠시 닥스훈트와 눈싸움을 했다. 페르난도 프란시스코……는 허공에 들린 채로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알! 알! 측은하게 젖은 눈동자. 말은 통하지도 않겠고 해서, 처음부터 사람이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다. 슐츠가 겨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을 어쩌면 좋습니까? 역시 억지로 싣는 편이 나을까요?” “글쎄요. 그건 당신 판단에 맡기죠. 대령님이 개를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으실 거예요.” “…….” 대전기에도 부대 단위로 동물을 기른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슐츠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이번엔 꼬마 아가씨가 겨울에게 다가와 빤히 올려다본다. 소녀의 부모, 그리고 민간인 탑승 유도를 맡고 있던 병사들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한 뒤, 겨울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내게 할 말이 있니?” “네. 엄마 아빠가 못 듣게 해주세요.” 뜻밖에도 아이의 용건은 사형수들에 관한 것이었다. “주황색 옷 입은 아저씨들은 소령님이 데려가시는 거죠?” “그런데?” “제 친구들을 구해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 “엄마랑 아빠가 다른 어른들이랑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한대요. 친구들을 구해준 사람도 예전에 한 잘못이 있어서 어쩔 수 없대요. 무슨 벌을 받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해주세요. 그런다고 우리가 모를 줄 아시나 봐요. 우린 바보가 아닌데.” 죽이는 거잖아요. 소녀가 어휴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친구들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저도 그렇고요. 잘못을 했으니까 감옥에 갇혔겠지만, 진짜진짜 나쁘기만 한 사람이었으면 친구들을 구해주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정말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죽이는 게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령님한테 물어보러 왔어요. 아 참, 그 반반 아저씨(fifty-fifty guy)의 이름은 마누엘 헤이스래요. 알고 계세요?” “응, 알고 있어. 본인에게 들었거든. 그런데 반반 아저씨라고? 무슨 뜻이니?” “반은 나쁘고 반은 착하니까 반반이잖아요. 우리끼리는 그렇게 불러요.”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최근 어린 순수를 접할 기회가 많다. 겨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이제 대답해주세요. 그 아저씨 죽어요?” 재촉하는 소녀. 그러나 아직은 불확실한 일. 거짓으로 안심시키자니 어른들에 대해 말하던 소녀의 어조가 마음에 걸린다. 기시감이 느껴져, 결국 솔직하게 답하는 겨울.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나도 죽이고 싶진 않아. 네 말대로 나쁘기만 한 사람은 드물거든.” “그럼 살려주면 되잖아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서 그래. 하지만 약속할게.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진짜 약속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 거예요.” 꼬마 아가씨가 자, 하고 작은 손을 내민다. 겨울이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모르는 주위는 훈훈하고 흐뭇한 분위기로 지켜보고 있다. 헬기 조종석의 눈 밑 시꺼먼 파일럿이 넷 워리어 단말기로 촬영한다. 사진보다는 동영상일 가능성이 높겠다. 소녀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흥얼거렸다. “새끼손가락,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누구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무서운 곳으로 가라앉아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거예요.” 짧은 노래가 끝나고 손가락이 풀린다. 소녀가 겨울에게 경고했다. “이제 약속을 어기면 나쁜 일이 생길 테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꼭 지킬게.” “이거 가져가세요.” 내미는 것은 딱지처럼 접힌 종이였다. “혹시 편지니?” “네. 친구들이 같이 썼어요. 판사님께 전해주시면 돼요.” 사형수들이 다시 재판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아이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 꼭 전해드릴게.” 로저스 대령의 완고한 얼굴을 떠올리며 답하는 겨울. 더 시간을 끌기는 곤란했다. 파일럿들에게도 스케쥴이 있으니. 엔진 소음이 높아지는 가운데, 겨울이 소녀를 부모에게 이끌어주었다. 인사를 받고 손을 흔들며 뒤로 걷는데, 소녀가 겨울을 불러 세운다. “잠시만 귀 좀 빌려주세요.” 또 뭘까. 겨울이 순순히 귀를 대자, 볼에서 쪽 소리가 났다. 꼬마 아가씨는 이번에야말로 부모에게 돌아간다. 당황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소녀가 고개만 돌려 방긋 웃었다. “엄마랑 아빠, 반스 아저씨, 나탈리 아줌마, 그리고 다른 모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멋있었어요! 저는 마리에요! 마리 패터슨! 백 밤 자고 어른이 되면 소령님이랑 결혼하러 갈게요!” 패터슨 부부가 겨울과 딸을 번갈아 본다. 아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고, 남편 쪽은 시무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했었잖니. 그러자 딸이 반박한다. 제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아세요? 병사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스러운 야유가 섞인다. 민간인 유도에 상태가 좋은 이들을 할당했더니 이 모양이었다. 모랄레스마저 한 마디 거들었다. “맙소사. 아까 손가락 걸었던 게 설마 결혼 약속이었습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거 뭐냐, 기다릴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습니까? TV에서 봤는데, 옛날에 클리블랜드인지 뭔지 하는 대통령도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구애했다고 하더군요.”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죽은 친구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요? 한 마디만 더 해봐요.” 물론 하란다고 더 하지는 않는다. 상병으로서는 키득키득 웃는 것으로 충분했으니. 민간인 탑승이 끝나자 부상자와 정신이상자들의 차례가 이어졌다. 어젯밤, 도폭선으로 정강이를 폭파하고 폭약을 태워 상처를 지졌다던 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짐승처럼 소리 질렀다. 워어어어어우! 잔류인원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난 헬기에 타고 있다! 내가 헬기에 타고 있다고! 다들 나를 봐! 지금 헬기에 타고 있다니까? 이 쩔어 주는 헬기를 똑똑히 봐라! 하하하! 내가 전역한단 말이야 이 씨발 놈들아!” 내가 세상의 왕이다! 하하하하! 수송칸 문이 닫혔다. 헬기가 이륙한 뒤에, 한 병사가 중지를 접고 눈물을 훔쳤다. “핼러웨이 저 새끼는 정말 괜찮은 개자식이었어.” “…….” 수송헬기 편대가 이륙한 뒤, 이제 임시중대도 떠날 시간이 됐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병사들은 이곳에 왔을 때보다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차량이 충분히 많아 걸을 필요가 없는 게 다행이다. 비록 잡종 같은 부대였으나 화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겨울이 지시했다. “레인저 선도를, 알파 팀이 후방 경계를 맡습니다. 각 팀마다 험비 하나씩 잡아요. 공중정찰 결과 도착할 때까지 별 일 없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무선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세바스토폴 서쪽을 통과할 땐 가급적 소대 채널만 사용하겠습니다. 출발 전에 주파수 확인해요.” 공교롭게도 이 근방을 흐르는 강이 러시안 강이고, 그 연안에 있는 거주지 중에 세바스토폴이 있었다. 근교에 농경지가 섞인 넓은 거주지가 발달하여, 혹시나 변종의 소규모 매복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늘은 이동하는 내내 시끄러웠다. 항공기가 얼마나 많이 날아다니는지,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모든 구름이 격자형으로 몰렸다. 그 아래 농업용수 공급이 끊어진 경작지는 곳곳이 황색으로 얼룩진 녹색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넷 워리어 단말기를 꺼내보니 중간 감도의 신호가 잡혔다. 그동안은 탄도계산기로 쓸 일이 있을까봐, 혹은 기갑차량의 블루 포스 트래커와 연결하려고 가지고 다녔던 건데, 지금은 통신기능이 부활한 것이다. ‘고고도 중계기(Scaled Composites Proteus)가 떠있는 건가?’ 전술 PDA와 다른 채널을 쓴다.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던 겨울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품에 갈무리했다. 지금도 병사들이 힐끔힐끔 엿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천만 대군 전체에게 통신 단말을 지급할 능력은 없었다. 평야지대를 절반 이상 통과한 시점에서, 임시중대는 1번 주도를 측면에 끼고 남하했다. “소령님. 기병수색대가 접근합니다.” 배낭형 무전기를 다루던 하퍼의 보고. 잠시 후 나타난 기병대는 문자 그대로의 기병대였다. 역병 이전이었다면 이름은 전통일 뿐 실체는 기갑부대였겠으나, 지금은 차라리 서부시대에 가까웠다. 수색대가 탑승한 말들은 멀리서 봐도 광택이 대단했다. “와, 저거 대체 뭡니까? 빛깔이 아주 까리한데요?” 모랄레스가 선두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판,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금빛의 명마는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 240 [240화] #집행유예 (12) 속도를 줄일 필요는 없었다. 기병수색대 측이 측면으로 돌아 같은 방향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끌던 소대장이 겨울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다. 소대장이 겨울에게 경례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령님.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유도해드리겠습니다.” 답례한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중은 고맙지만 딱히 유도가 필요하진 않은데요.” “이것도 명령이니까 그러려니 하시죠. 그 유명한 기병대장을 따르는 기병이 한 개 분대도 못 되어선 그림이 안 나오잖습니까. 종군기자들이 싫어할 겁니다. 사기 관리 차원에서 영내의 병사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있고요.” 그야 익숙한 일이다. 여기서 올레마까지 보병의 하루 행군거리만큼 남아있다는 걸 빼면. “사정은 알겠는데, 이렇게 멀리 나올 필요는 없잖아요?” “반쯤은 진짜 의전(儀典)입니다. 교활한 잡것들을 잡아 죽여주신 덕분에 전선의 압력이 많이 줄었거든요. 소령님이 아니었으면 저희가 이 멋쟁이들을 타는 일도 없었을 테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현지에서 확보한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아, 듣기로는 중앙아시아의 독재자가 망명할 때 싣고 왔다더군요.” “기병대에 필요한 숫자를 내줄 정도라면 전용기 한 대로는 부족했을 것 같은데…….” “그야 뭐, 국민보다 말을 먼저 챙겼다는 점에서 빼도 박도 못할 인간 말종이겠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모겔론스 사태로 쓰레기 인증한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대화가 오가는 내내 수색대 병사들이 겨울을 힐끔거렸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얼른 눈을 돌리거나, 뻣뻣해지거나, 더러 긴장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마지막에 속하는 이들은 겨울이 마주 웃어줄 때 비로소 긴장감을 지웠다. 겨울의 시선을 좇은 소대장이 부하들에게 인상을 쓴다. 수색대 병사들이 뻔뻔하게 외면했다. 이들에게서는 희망이 느껴졌다. 임시중대 쪽에서 기병수색대를 신기한 동물, 혹은 그 이상의 낯선 무언가처럼 보는 이유였다. ‘단순히 의장대로 쓰려고 편성한 부대는 아니겠지만 말이지.’ 겨울은 현 시점에서 기병이 정식편제가 되기에 괜찮은 병과라고 판단했다. 기동성도 좋고, 일정 규모 이하에서는 현지보급이 가능하다. 인근에 즐비한 목장들로부터 조달할 수 있는 사료와 건초만 해도 대대 단위를 장기간 운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게 떨어지면, 물론 효율이야 낮아지겠으나, 풀을 뜯게 해도 된다. 최악의 상황에선 도살해도 좋겠고. “돌아가시면 소령님도 이런 놈으로 한 마리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수색소대장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난 지금도 만족하고 있거든요.” 빈말이 아니다. 아무리 명마라도, 이제 와서 새로운 말을 엑셀만큼 전투에 익숙하게 만들려면 전력공백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명마를 탄 중위는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 녀석이 그동안 훌륭하게 해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겠지만, 품종 차이는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뉴욕 마시장에 내놓는다면 십만 달러는 우습게 넘길 거라더군요.” 십만 달러? 대화를 엿듣던 기동대원들 쪽에서 탄성이 나왔다. 아무래도 말에 익숙해진 입장이라 욕심이 나는 듯 하다. 겨울이 뜸을 들였다. “예비마로 갖춰둘 필요는 있겠네요. 그런데 뉴욕에서도 마시장이 열려요?” “시대가 시대잖습니까. 저 같아도 사고 싶겠습니다.” 민간에서의 자동차 사용은 아직까지도 통제되고 있다. 개인 소유 차량의 운행시간을 제한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민간인들 입장에선 연료공급이 끊어질 가능성을 우려할 법 했다. 생산량이 충분하다는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겨울의 행적이 기름을 부은 탓도 있겠고. 바다가 가까워지면서 이따금씩 은은한 폭음이 들려왔다. “기뢰를 제거하는 모양이죠?” 겨울이 추측을 수색소대장이 긍정했다. “예. 만 입구는 소해(掃海)를 끝냈나봅니다. 어제부터 배가 들어오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광경을 직접 보게 되었다. 도로 곁으로 트인 바다.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까지, 국립공원을 끼고 약 20킬로미터를 파고드는 물길이었다. 폭이 1.5킬로미터는 되어보였으나 간격을 둔 배들은 이상할 정도로 일렬이었다. 애초에 항구가 아니었으므로 해저지형이 나쁜 듯 했다. 다수의 준설선이 작업 중인 게 그 증거였다. “어이구. 기병도 모자라서 범선까지 있네.” 누군가의 기막힌 탄식. 겨울이 수군거리는 여럿에게 말했다. “거기, 오해하지 말아요. 저 배는 예전부터 현역이었으니까.” 상황이 나빠져서 유물을 부활시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수색소대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십니까?” 언뜻 약간의 아쉬움도 느껴졌다. 겨울이 놀라거나 물어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전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번 회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멜빌레이가 없었다. 트릭스터와의 조우가 낯설었듯이, 처음 몇 번은 바다괴물도 보이지 않는 종말이 있었다. 길고 날렵한 선체는 하얀 바탕에 굵고 붉은 대각선 하나, 가늘고 푸른 대각선 하나가 가로지르는 도색이었다. 금빛 독수리 선수상이 인상적이다. USCGC 바크 이글. 해안경비대 소속으로, 미군이 운용하는 유일한 범선. 처음엔 나치 독일이 건조했다던가. 지금은 모든 돛을 접고 항해 중이다. 필요할 땐 동력항해를 한다.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무장이었다. 본래 순수한 훈련용으로 별도의 공격수단이 없었는데, 지금은 대전차 미사일 발사대와 중기관총 마운트 다수가 가설되었다. 고물의 폭뢰 투사기는 멜빌레이 대책일 것이다. 보다 안쪽에는 병원선도 보였다.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그려놔서 알아보기 쉽다. 겨울이 손가락으로 파도 부서지는 해안을 가리켰다. “저 배는 좌초한 겁니까?” 가리킨 방향엔 기울어진 화물선이 있었다. 항로 준설이 이루어지기 전에 진입했다가 사고를 당했을지도. 주위로 가느다란 기름띠가 번져있다. 거의 없는 양이라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잘은 모르겠는데, 저것도 소해에 쓰던 배라고 하더군요.” 아아, 착각했구나. 수색소대장의 설명에 끄덕이는 겨울. 샌프란시스코 만을 탈출하던 중국군이 같은 방식을 썼다. 안에 스티로폼 같은 걸 채워서 밀어붙인 것이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만의 끝에 이르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저기 웬 UN 깃발이…….” 슐츠가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 겨울도 조금 당황했다.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 북쪽에 정말로 푸른색 국제연합기가 걸려있었다. 여러 이유로 미국에 협력하는 다국적군이 있기야 했으나, 그들이 UN을 내세우진 않는다. 아예 미군이 되기를 원한다면 몰라도. 돌아보면 수색소대장도 고개를 젓는다. 놀라지 않는 모습으로 미루어 알고 있기는 했는데, 돌아가는 사정을 자세히는 모른다는 뜻이었다. 버려진 마을을 요새화한 주둔지에선 실제로 영어가 아닌 말들이 들려왔다. 주로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많았으나, 그밖에 정체 모를 언어들이 여럿 섞였다. 앞의 둘 뿐이었다면 중미와 남미 쪽에서 망명한 부대들일까 생각했을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올레마를 떠나기 전부터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길버트 마르티노는 모자를 벗으며 목례했고, 헬렌 타미리스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엔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트레버 바티스트가 숫자를 세니 곧바로 돌아서서 머리를 쓸어 넘긴다. 누구 하나 그날 밤처럼 어둡지 않았다. 차단진지에 배치된 병력이 겨울을 손가락질했다. 상의를 벗고 모래자루를 쌓던 이들도 작업을 놓고 몰려들었다. 새까만 피부의 순혈 흑인들. 숫자가 많아서 더욱 이색적이었다. 복장의 위장패턴은 생소했으나 장구류는 미군 표준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Shin cewa shi? Gwarzo Han?” “한겨울! 너는 수고했습니다! 소령! 우리는 당신을 명예롭다! 사랑해!” “…….” 영어를 좀 이상하게 배운 것 같은데. 어색한 표현과 별개로 장교는 무척이나 근엄했다. 소란스러운 부하들을 꾸짖어 정렬시키고, 겨울을 향해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한다. 이런 일이 주둔지를 통과하는 내내 반복되었다. 달라지는 건 국적 뿐. 심지어 야외 샤워장을 쓰던 병사들도 칸막이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이건 거의 개선식에 가깝군요.” 곤란해 하는 모랄레스의 평가가 정확했다. 그러던 중에 겨울은 뜻밖의 구면을 발견했다. 우메하라 아츠 2등 해좌. 샌프란시스코에 투입될 당시 신세를 졌던 잠수함 진류의 함장. 길가의 소란에서 조금 먼 자리였지만, 해좌 쪽에서도 겨울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걸 깨달았다. 꽉 메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가온다. “오랜만입니다, 함장님. 설마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반갑습니다. 그 사이에 소령이 되셨군요.” 해좌는 야위었으나 혈색이 괜찮은 편이었다. 계급이 높은데도 말을 놓지 않는 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러 의미를 담은 겨울의 질문에 우메하라 해좌가 주위를 살핀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환성에 쉬이 파묻힐 작은 목소리로, 겨울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아직은 기밀입니다만, 우리는 엿새 전에 장정 9호를 격침시켰습니다. 미 해군의 도움을 받았고, 진류도 더는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지금은 임시로 수송선단에 재배치되었습니다.” “배를 포기하셨다니 유감입니다……. 그런데 장정 9호라고요? 그 잠수함이 핵 보복에서 살아남았었나요?” “예. 혼란을 틈타 탈출한 전투함은 그밖에도 있었으니까요. 수상함은 모두 그날을 넘기지 못했어도, 잠수함은 아니었습니다.” 겨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사이에 위기가 지나간 셈이었다. 단 한 척의 핵잠수함이라도 탄도탄 발사에 성공했다면 미국에겐 재기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기밀로 할 필요가 없을 텐데…….” “현재는 검증 단계입니다. 저는 그게 장정 9호라고 확신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번복하게 되면 미국 정부의 체면 문제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겨울은 해좌에게 스치는 불안을 감지했다. 이제 와서 불안할 이유가 있나? “혹시 전공을 빼앗길까봐 걱정스러우세요?” 정답이었다. 우메하라 해좌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리하시군요. 그렇습니다. 키치너 소장님께선 그럴 일 없다고……미 해군은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처지가 곤궁하다보니 자꾸 괜한 걱정이 듭니다.” 과연 그럴까? 겨울은 잠시 돌아서서 바람에 나부끼는 유엔기를 눈에 담았다. 줄곧 숙고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유명무실해진 유엔을 내세우는 배경엔 역시 정치적인 고려가 있을 것이었다. 국가 안팎의 분열을 막기에 필사적인 대통령이 미군에게 전공을 몰아줄 것 같지도 않고. 해좌가 정지한 대열을 곁눈질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인사만 나눌 생각이었는데,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뵙도록 하죠.” “네. 너무 염려하진 마시고요. 괜찮을 겁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모자라, 앞서 했던 생각들을 속에 담아두는 겨울. 헤어지기 전에 해좌와 악수를 나눴다. 해좌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었다. 군인 이상이어야 하는 군인의 고충이 엿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가 꽤 음침해 보였습니다.” 수색소대장은 해상자위대 장교를 나쁘게 본 듯 했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 잠시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임무가 기밀이라 목소리를 낮췄던 거고요.” 사실과 조금 다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수색소대장은 기밀이라는 말에 관심을 접었다. 한때 변종들과 교전을 치렀던 초등학교는 다국적군의 지휘소로 개장되어 있었다. 미군 구역은 개천을 경계로 남쪽에 전개되어 있었는데, 분위기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목장 울타리 안쪽 초지를 수십 마리의 말이 한가롭게 거닐었다. ‘부대 규모가 예상보다 커.’ 겨울이 보는 주둔지는 최소 사단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유사시의 차단과 화력지원을 염두에 두고 숙영지를 군데군데 분산 배치해두었으나, 그 간격을 감안해도 규모가 상당하다. 그리고 마침내. “대장님! 작은 대장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울먹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겨울은 눈물을 닦으며 뛰어오는 유라의 모습에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호랑이 가죽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진석을 비롯한 다른 중대원들은 멀쩡한 모습이건만……. 호랑이 가죽……. 아니, 왜? # 241 [241화] #집행유예 (13) 여기까지 온 임시중대에게 숙소가 배정되었다. 장교와 부사관들, 그리고 의료인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죄수들은 어떻게 합니까?” 겨울은 수색소대장의 질문에 질문을 돌려주었다. “혹시 구류시설이 있어요?” “헌병대가 있는데, 잠시 맡겨두면 되겠습니까?” “네. 처분은 보고 후에 결정될 테니까요.” 지친 병사들이 관리 하에 분류되는 사이, 말에서 내린 겨울을 여러 사람이 끌어안았다. 각기 깊이와 온도가 다른 포옹들. 그 가운데 유라가 가장 특이했다. 따뜻한 사람 냄새에 더해 화학 처리된 가죽 특유의 약품 냄새가 난다. 털이 무척 부드러웠다. 나오는 소리 없이 입만 여닫기를 수차례. 유라는 한숨과 함께 말하기를 포기했다. “겨우 다시 만났네요. 참 길었어요. 그렇죠?” 유라를 다독이는 겨울이 모두에게 건네는 말. 벅찬 사람들이 웃거나 울거나 더러는 어색해했다. 어색한 이들은 낯설기도 했는데, 가만 보니 겨울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 섞여있었다. 그 외에 시민권이 없는 입양아들로서 동맹으로 온 다섯 명이 모두 보이는 게 특이했다. 겨울과 시선이 마주치자, 중국계인 벤자민 마이어가 긴장으로 당겨진 미소를 짓는다. 젖은 감정이 범람하는 와중에, 진석이 이질적인 차분함으로 겨울을 반겼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드릴 말씀이 많은데, 너무 많아서 못 하겠군요.” 과거의 도전적인 느낌이 사라진 대신 다소 의기소침한 분위기. 못 본 동안 뭔가 있었던가 싶지만, 다른 때에 따로 알아볼 일이었다. “그런데 유라 씨, 대체 이 망토……는 뭐예요?” 겨울이 이제야 물었으나 유라는 아직도 목이 메어 있었다. 진석이 대답했다. “얼마 전 포트 로버트 동쪽 산지에 식인 호랑이가 나타났었습니다.” “식인 호랑이?” “네. 기지로 오던 생존자들이 당했죠. 처음엔 변종의 공격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야생화 된 호랑이였습니다. 이유라 소위가 사살했을 때 개목걸이에 이름표가 붙어있었던 걸 보면 원래는 애완동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 “가죽으로 망토를 만든 건 장 부장님 제안이었습니다. 소위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놈들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까 하고…….” “장 부장님이요?”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무슨 황당한 제안인가 했습니다. 민 부장님도 웃으시고. 하지만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꼰대들이나 대가리에 정액만 찬 깡패 새끼들한테는 정말 효과가 있더군요. 특히 폼 잡기 좋아하는 깡패들한테 말입니다. 그 전까진 시비를 자주 걸었었죠. 지금은 장 부장님이 유치한 놈들의 심리를 잘 이해했던 거라고 봅니다. 뒤에서 또 뭔가 하셨겠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소위라……. 진석 씨도 진급했겠네요?” “네.” “우선 축하해요. 잘 됐네요. 난 두 분이 부사관이 되고 장교는 따로 올 줄 알았거든요.” “예, 뭐.” 진석은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겨울이 다시 망토를 보며 말했다. “사정은 대충 알겠는데, 여기서까지 두르고 있을 이유는…….” 감정을 추스른 유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저도 이거 덥고 창피해서 싫어요. 기자들이랑 맥과이어 소령님 부하들이 자꾸 귀찮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끼고 다니는 거라고요. 그 사람들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돼요?” 인상 찌푸리는 걸로 보아 평소부터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맥과이어 소령이라면 겨울에게도 익숙한 국방부 공보처 장교인데, 아직도 올레마에 있는 모양이었다. 겨울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이래의 전환점이었던 민항기 파일럿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파라레스큐 출신 참전용사는 손자에게 주겠답시고 이상한 만화책에 사인을 받아갔었다. ‘그 만화책에서 유라를 그렇게 그린 이유가 있구나……’ 공보처가 일부러 부추기는 게 틀림없다. 방역전쟁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역병을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음, 이곳 종군기자 분들하고는 친분이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는데, 맥과이어 소령님은 소속이 달라서……. 그리고 그분도 따로 지시를 받고 계실 거예요.” “그치만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되게 신경 쓰인다고요.” “그래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 “아녜요. 그건 백퍼센트 비웃는 거예요! 요즘 그거 때문에 잠도 잘 안 온단 말예요.” 푸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화를 내는 수준이었다. 음, 알레한드로만 해도 호랑이 원더우먼을 말할 때 비웃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겨울은 납득했다. 본인이 느끼기는 많이 다르겠지. 몇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대위가 제동을 걸었다. “리 소위.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태도는 장교답지 못하다. 품위를 지키도록.” 낮고 걸걸한 음성. 흠칫한 유라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겨울은 대위를 응시했다. 다부진 체구와 구릿빛 얼굴, 커다란 눈과 두꺼운 눈썹, 입이 겨우 보일 만큼 빽빽한 수염이 인상적이다. 특이하게도 허리엔 길이가 일 미터를 넘는 본격적인 칼을 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장식이나 의전용품은 아니었다. 겨울이 물었다. “귀관은?” “실례했습니다. 대위 바하다르 싱. 중대가 창설될 때부터 소령님의 참모로 배속되었습니다. 보직은 부중대장입니다.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아,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여러모로 부족하겠지만 많이 도와주세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라나 다른 인원들의 분위기를 보건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한 말을 보면 한국어는 모르는 듯 하나, 겨울동맹 사람들에게 영어는 생존기술이었으니 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독립중대를 만들 때 자격요건도 있었을 듯 하고. 그나저나 부중대장이라. 대위씩이나 되는 사람을 앉혀놓은 걸 보면 역시 규모 확대를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애초에 독립중대라는 편제가 미군 입장에서 생소하다 보니, 상위 제대 창설을 위한 징검다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최소한 대대까지는 바라볼 수 있겠다. “중대 주둔지에 오시는 대로 부대 현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테니 제대로 된 인수인계는 내일부터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우선 보고부터 마치고 올게요.” 아까부터 열중쉬어 자세로 기다리는 두 병사가 있었다. 아직 말은 없었으나 용건은 뻔했다. 겨울은 아쉬워하는 이들을 다시 한 번 가볍게 포옹하는 것으로 재회를 일단락지었다. 더 좋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자들을 위한 연출이기도 했으므로 로저스 대령도 이해해주겠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었다. “기지가 많이 커졌네요. 주둔 병력이 얼마나 되죠?” 안내역의 병사들은 겨울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했다. 한쪽은 처음부터 나무토막 같기도 했고. “저희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여기서 240사단이 재창설된 게 겨우 사흘 전의 일인데, 미편성 병력도 많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장교 분들 말씀을 듣기로는 실시간으로 합류하는 병력도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늘어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재창설이라고 하는걸 보니 전선이 붕괴했을 때 증발해버린 사단 중 하나를 부활시킨 듯 했다. 원래 해당 사단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부대번호를 계승하는 것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럼 혹시 로저스 대령님께서도 진급을 하셨다던가?” “로저스 대령……? 사단장님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한 소령님께서 작전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그 분께서 대령이셨던가 보군요. 예, 지금은 소장이십니다.” 다른 병사가 거들었다. “저희는 최근에 합류해서 그 분이 처음부터 소장이신 줄로 알았습니다.” 이어지는 병사들 간의 대화. “뭐야. 그렇게 따지면 사단장님 진급 속도가 장난이 아니네? 임시계급이겠지?” “임시계급이라도 엄청나지. 고급 지휘관이 부족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나 겨울에겐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단기간에 천만 이상으로 팽창한 미군 아닌가. 그것도 육군만 따져서 그렇다. 하급 장교들이야 어떻게든 육성하면 된다. 허나 그 위에 설 고급 장교들은 사정이 다르다. 전역한 장교들을 끌어들여도 태부족이었을 것이었다. 그걸 감안한들 로저스 대령의 진급이 이례적인 건 사실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이곳에 배치되기 전부터 준장 진급이 확정되어 있던 장군급 영관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계급은 대령일지언정, 일종의 적응기간으로서 사실상의 준장 대우를 받는. 사단본부는 예전에 거점으로 삼았던 그 건물이었으나, 주변으로 많이 확장된 모습이었다. 병사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 고마웠어요.” “저기, 소령님! 괜찮으시다면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긴장한 사병은 상병 계급임에도 꽤나 어려 보였다. 장교들만큼이나 일반병들의 진급도 빠를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무엇보다 미국은 역병 이전에 이미 십대 사병들이 많은 나라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심지어는 중퇴하고서 부모의 동의를 받아 입대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각지의 모병소에서 Teenagers, the U.S. Army Wants You 같은 현수막을 보기도 쉽다. 예전부터 능력만 있으면 십대에 상병을 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워낙 전쟁을 많이 치르는 국가였으니. 미군에게 인력부족은 결코 낯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죄수를 군인으로 쓰지도 않았겠지.’ 감옥 갈래, 군대 갈래? 형량 가벼운 죄수들이 실제로 이런 질문을 받던 때가 있었다. 심지어는 경찰조차도 그렇게 뽑았다고. 죄 짓는 놈들 심리는 죄 지어본 놈들이 잘 알 거라던가. “이름이?” 수첩을 받은 겨울이 풀 네임을 물었다. “티모시 린치입니다!” 사병은 뻣뻣한 와중에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주근깨 많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겨울의 서명 형태엔 사실 국방부 공보처의 지침이 반영되어 있었다. 성씨인 한(韓)을 한자로 넣어달라는 요청이었다. 누가 봐도 한자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대중에게 자주 노출될 이미지인 만큼, 동양권 출신임을 상기시키는 형태였으면 좋겠다는 것. 겨울은 이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나라가 분열되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이 느껴졌기에. 이런 사정은 서명을 받은 린치 상병의 기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평소부터 소령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존경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한 소령님께 자격이 없으면 대체 누가 자격이 있습니까?” “글쎄요. 대통령님은 어때요?” “…….” 린치 상병이 쓸 데 없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난민이나 소수인종, 국제적인 물자지원 문제로 현 정권을 비난하는 세력도 맥밀런 대통령의 업적만큼은 부정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겨울이 두 사병에게 인사를 남겼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두 사람 다 수고해요.” “Yes sir!” 문 안쪽은 군부대라기보다는 어느 회사의 분주한 업무시간 같은 풍경이었다. 서류와 통신장비, 작전지도 등으로 가득한 책상들과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장교 및 행정병들의 모습. 객실마다 벽을 터서 공간을 넓힌 것 같다. 사단장 집무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진 않았다. 겨울은 가장 안쪽에 앉아있는 로저스 소장을 볼 수 있었다.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무기를 휴대한 채로 업무를 보는 중. 말 그대로의 야전지휘소였다. 잠깐 지나가는 겨울은 일시적인 업무마비의 원인이었다. 계급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한번 씩은 꼭 쳐다본다. 로저스 소장은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그 앞에 선 겨울은 약 5분을 기다렸다. 잠시 후 통신을 끝낸 로저스가 위성전화를 내려놓고 감정 없는 시선을 던졌다. “왔나.” “소령 한겨울,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 묵묵히 응시하던 소장이 말했다. “작전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할 필요 없다. 어지간한 건 다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비교적 늦게 투입된 데 반해 성과는 가장 좋더군.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장군은 무기질적인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쓸 데 없는 것들을 뭐 하러 여기까지 끌고 왔나?” 이미 예상한 바다. 확실하게 하고자 되묻는 겨울. “혹시 사형수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거기에 개 한 마리를 더해야겠지만.” 개는 조금 의외인데. 겨울은 장군을 바라보았다. 로저스 소장은 의자의 등받이가 어색해보일 만큼 곧은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 242 [242화] #집행유예 (14)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보고를 생략하라는 것이나, 칸막이 없는 지휘본부의 풍경으로 미루어 꽉 막힌 원칙주의자일 것 같진 않은데. 생각한 겨울이 말을 고른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개나 고양이는 비전투원 후송 작전(NEO)에서도 동반 철수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유기는 허용되지 않는다고요.” “언제든 사람이 우선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건 개와 고양이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적인 애완동물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감대가 이곳의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데 동물과의 교감을 이용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 지휘관으로서 내린 판단이었나?” 깍지를 낀 소장이 턱짓했다. “나는 지금 소령의 지난 임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개를 수용한 시점에서 작전은 아직 진행 중이었지. 임무의 성패를 떠나,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은밀함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귀관은 부적절한 연민으로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한 것이 아닌가?” “통제 가능한 위험이었습니다.” “수용한 이유는?” “대원 중 하나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징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급했나?” “아닙니다. 하지만 개를 버리거나 사살했다면 그때는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한 번 버린 개가 냄새를 맡고 쫓아왔던 것이니까요.” 역시 개 자체는 말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원병이었던 겨울이 소령을 달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전투력이야 어쨌든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의심 받을 만 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보다는 아직 어린 감수성을 앞세웠던 것이라고. 장군이 살짝 끄덕였다. “이해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개보다 못한 인간들 차례로군. 같은 이유로 살려뒀나?” “대원들에게 정신적인 부담이 될까봐 죽이지 않았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아니기도 하다?” “사형수라고 해서 간단하게 죽일 순 없었습니다.” “왜지?” “사형수는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입니다. 사형이라는 게 어떤 방법으로든 죽이면 그만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죽는 사람에게든 죽이는 사람에게든, 현장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집행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와 사단장님껜 비인도적인 명령을 거부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의무는 나치와 일제 이래 생긴 것이다.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라는 논리는 정확하게 채드윅 팀장이 지껄이던 바였다. 말하는 기계처럼 보이던 로저스 소장이 침묵했다. 건조하고 빠른 대화여서 겨울에게도 힘들었다. 오기 전부터 충분히 예상한 질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는 장군 나름대로 솔직함을 강요하는 요령일 것이었다. “말을 잘 하는군.” “준비했습니다.” “그랬겠지.” 로저스 소장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나도 그 지시가 싫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범죄자 나부랭이들을 관리하느라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기는 더더욱 싫다. 그렇잖아도 관리가 필요한 병사들이 많은 마당에.” “이해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Good intentions)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지.” “…….”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선의는 악이다. 지휘관에겐 더더욱 그렇다. 모든 결정에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있어. 전쟁에선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소용없지.” 죽은 부대원들의 부모에게 보낼 편지를 써보면 안다. 로저스가 말했다. 겨울이 동의했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 동맹 사람들에게 달리 말했던 것은, 겨울에게 일방적으로 기대는 구도였던 탓.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라고. 그럴 자신이 있는 사람만 내게 오라고. 나는 내 마음을 지키겠다고. 떠나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 “죄수 관리에 할애할 인력을 작전에 투입하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장군이 자세를 고쳤다. “그러니 그것들을 살려둘 순 없다.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했으면 좋겠군.” “벌써 결정하신 것 아닙니까?” “귀관은 미 육군의 중요 자산이다. 이번 일로 전의를 상실할 거라면 피하는 게 낫겠지.” 어쩐지 겨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어감이었으나, 애초에 부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대한다는 느낌이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하기 어려울 노릇. 피한다고 해도 장군에게 있어서 겨울의 신용은 별개일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걸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몇 걸음 나아간 겨울이 책상 위에 아이들의 편지를 두고 물러났다. 꾸깃꾸깃한 분홍색 종이가 전술 지도 위에 놓였다. 찌푸린 눈으로 보던 소장은 접힌 편지를 차근차근 펼쳐보았다. 다 읽은 소장이 한숨지으며 묻는다. “이게 뭔가?” “보신 대로입니다. 아이들이 보낸 탄원서라고 해야겠죠. 민간인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러 갔을 때, 마누엘 헤이스라는 죄수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 “본인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배가 고파서, 햄버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게 사실이더라도 동정할 여지는 없습니다. 증인을 없애려고 아내와 아이들까지 죽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가 들렀던 민간인 거점의 아이들은 벌써 감염되거나 변종들에게 잡아먹혔을 겁니다.” 로저스 소장이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잘 접어 갈무리했다. “이 문제는 좀 더 검토해보겠다.” 손가락 걸고 약속한 소녀, 마리에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여기서 겨울이 뭔가를 더 해볼 순 없었다. 로저스 같은 이에겐 역효과일 것이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휴식으로 이틀을 주지.” 소장이 대화를 마무리 짓는 말. “조만간 새로운 작전이 예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공세지. 휴식을 겸해, 귀관의 독립중대를 이틀 안에 장악하도록. 안면이 있는 병사들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좋아. 부대 인수와 운영에 필요한 건 중대 참모들이 준비해두었을 거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로저스 소장이 가보라고 손짓한다. 겨울은 경례를 남기고 돌아섰다. 밖으로 나오니 어스름 질 시간이었다. 험비 한 대가 겨울을 기다렸다, 선탑자는 진석이다. 좀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단독군장이 아닌 일반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무기는 휴대하고 있지만. 일과가 구분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주둔지가 무척 안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다렸습니다.” 타시죠. 진석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건 꽤 새롭네요.” 겨울의 말에 운전병이 웃는다. “작은 대장님……아니, 중대장님께서 떠나시기 전까지만 해도 자체적으로 운용 가능한 차량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중대장님 덕분이지만 말입니다.” 탑승인원 전부가 겨울동맹 출신이었다. 겨울 옆에 앉게 된 병사는 돌처럼 굳었다. 총을 대각선으로 움켜쥔 채 정면 45도 위를 바라본다. 숨을 쉬기나 하는지 의문이었다. 기관총좌에 앉은 것은 케이시 블랙웰. 이마의 상처가 인상적이었던 한국계의 입양아였다. 지금은 진석의 소대원인 모양이다. 표정이 없었으나 예전처럼 어둡지만도 않았다. “진석 씨. 주둔지가 여기서 멀어요?” 겨울의 질문에 진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대장님, 병사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 “음, 알았어요. 박진석 소위. 이것도 꽤 어색한데.” “저랑 이유라 소위도 그랬습니다. 별 것 아닌데도 적응하기가 어렵더군요.” 장교로 임관한 이상 겨울동맹의 전투조장이라는 명함도 더는 의미가 없어진 셈이었다. 이젠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동맹 출신으로만 구성된 독립중대가 있는 마당에, 다른 조직들이 괜한 시비를 걸어오진 않을 테니까. “중대 주둔지는 여기서 금방입니다. 각급 부대의 주둔지가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해도 공용화기 사거리를 벗어나진 않으니까요. 교육 받기로는 베트남전쟁의 전훈이라고 합니다. 봉쇄선의 벙커들도 같은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공용화기는 중기관총이나 고속유탄발사기를 말한다. 각 주둔지가 서로를 공용화기 사거리 안에 두고 있으면, 유사시에 화력지원이 가능할뿐더러 기동로를 확보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중대장님. 사형수들을 데리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이 이야기인가. 겨울이 끄덕였다. “네. 민간인들 거점에 있더라고요. 전선이 무너질 때 도망쳤나 봐요.” “혹시 그 건으로 사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음, 어떻게 알았어요?” “작은 대장……죄송합니다. 중대장님이라면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겨울이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반대로 진석은 표정을 굳혔다. 애초부터 웃음기 없던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메말랐다. 다른 병사들은 더욱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솔직히 걱정스럽습니다.” 진석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눈 밖에 날까 봐요?”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ㅈ……중대장님께 인생을 걸고 있잖습니까.” 이런 면은 전과 달라진 게 없구나. 진석은 예전부터 동맹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길 원했었다. 시에루 중장의 표현을 빌리면, 내 울타리부터 지켜야 한다는 주의. 세상은 너무 크고, 한 사람이 책임질 수 없다.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세상이다……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로저스 소장님께서 불쾌해 보이진 않으셨거든요.” “이번 일만 가지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적어도 진석의 태도만큼은 전보다 정중해졌다. “작은 대장님이 없으신 동안 포트 로버츠에선 더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대장님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땐 정말…….” 진석이 말끝을 흐렸다. 어느 정도는 짐작했던 일이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 “대장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동맹이고 뭐고, 작은 대장님 없이는 다 개 같은 꼴이 된단 말입니다. 인간 말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겨울은 호칭을 지적하지 않았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담아두었던 말들인 것이다. 재회했을 때부터 안색이 나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다시 보면 무기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바람인데……. 중대장님께서 조금만 더 이기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딱히 대꾸가 필요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내놓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속이 있는 법이고. 해후의 시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들어야 할 것이다. 독립중대의 주둔지는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병사들의 피부색 덕분. 아직은 햇빛이 드는 시간이었다. 험비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한 병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든다. 이제야 겨우, 겨울은 만들던 이야기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 243 [243화] #읽지 않은 메시지 (11) 「윌마 : 박진석 쟤 은근히 띠껍게 굴던 새끼 아니었냐? 낯짝에 패배감 쩌네. 다음 방송 기대되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헬잘알 : 안 봐도 뻔한 데 기대는 무슨 ㅋㅋㅋ 한겨울 없는 틈에 조선인들이 조선했겠지 ㅋㅋㅋ 불지옥반도 주민들 본성이 어디 가겠음? 활활 타겠지 ㅋㅋㅋ」 「헬잘알 : 전에 틀딱부장이랑 통화할 때두 그 백산호인지 뭐시깽이인지가 땅투기부터 했다잖엌ㅋㅋㅋㅋ 결국 다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해봐야 한국인들은 한국밖에 못 만드는 거임 ㅋㅋ」 「엑윽보수 : 한국이라도 만들면 다행이지. 그래서 비범한 지도자가 중요한 거야.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님 아니었으면 나라 꼬라지 아주 가관이었을 듯. 맨날 폭동이나 일으키고. 불평불만은 또 오질나게 많아요. 이만한 나라가 또 어디에 있다고.」 「헥토파스칼킥 : 오구오구 우리 벌레 새끼 신났어요?」 「엑윽보수 : 야 씨발 내 말이 틀렸냐? 겨울동맹도 봐봐라. 한겨울이 고자새끼에다가 착한 척 씹창인 오지라퍼라서 짜증나긴 한데, 그래도 지도자로서 중심을 잡아주니까 다른 난민 패거리들 꼴 안 나잖아. 씨발 이거 딱 산업화 시기의 한국하고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차이 아니냐?」 「진한개 : 어 그래 알았으니까 좀 닥쳐주라.」 「엑윽보수 : 네 다음 홍어.」 「20대명퇴자 : 대한민국의 위대한 령도자이시며 독립군 사냥꾼이시며 쿠데타 사령관이시자 형광등 백 개를 켜놓은 듯 한 아우라를 지니신 분의 아바이이신 조선 남로당 다까기 마사오 각하 만세!」 「여민ROCK :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태극기가 펄럭펄럭- 벌레는 쿰척쿰척-」 「엑윽보수 : 이 새끼들 혹시 빨갱이들 아냐? 요즘 평양에서도 접속한다더만.」 「똥댕댕이 : 실화냐? 평양은 전에 한 번 뒤지게 불바다가 됐잖아. 거기 뭐 남아있기는 해?」 「엑윽보수 : 원래 빨갱이들이 잘 안 죽음. 바퀴처럼 질긴 생명력 ㅇㅇ」 「윌마 : 질긴 생명력?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지 않아? ㅋㅋㅋ」 「도도한공쮸♡ : 엌ㅋㅋㅋㅋㅋ 어뜩햌ㅋㅋㅋㅋㅋ 베충이가 벌레 얘기햌ㅋㅋㅋㅋㅋ」 「스윗모카 : 평소에 거울 안 보면 그럴 수도 있찌 머 ㅎ」 「병림픽금메달 : 봐도 모르는 거 아냐? 뇌가 우동사리잖아.」 「엑윽보수 : 닥쳐 연놈들아.」 「둠칫두둠칫 : 요즘 넷상에 국까가 많긴 함. 현실에선 아무 것도 아니고 뭘 할 생각도 능력도 없는 애들이 입만 살아서 떠들어 댐.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질소포장 : 동의한다. 정치인 까면 쿨해 보이는 줄 아는 병신들 진짜 노답.」 「Blair : 한국인들은 서로를 참 사랑하는구나. 애국심도 깊고.」 「groseillier noir : 루스키 블라디미르가 좋아할 사람들 아닌가? 수준이 비슷한 것 같은데.」 「Владимир : 수준이라……. 혹시 발트 해의 수심을 눈높이로 재고 싶은가?」 「groseillier noir : 오, 있었구나. 미안. ;-)」 「BigBuffetBoy86 : 사후보험 중계를 보기 전까진 우리 미국인들만 예의가 없는 줄 알았어!」 「올드스파이스 : 섹스와 패드립으로 하나 되는 인류!」 「에엑따 : 나라망신 쩌네.」 「전자발찌 : 괜찮아. 인류망신이야.」 「김미영팀장 : 근데 진지 조금 빨면 살짝 슬픈 대화였어. 한국인들은 한국밖에 못 만든다니.」 「무스타파 : 여기 있는 놈들만 봐도 각 나오지 않냐? 사람이 원래 그것 밖에 안 돼.」 「분노의포도 : 이건 인정해야 한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성발톱 : 다른 별창 노인네들 방송도 그래. 「종말 이후」 세계관이면 예외가 없더라 ㅋ」 「아침참이슬 : 거긴 어떤데?」 「내성발톱 : 다 똑같다니깐? 스타팅으로 어딜 고르든 난민들은 다 모친 출타한 개돼지 새끼들이야 ㅋㅋ 좀 착하다 싶은 집단은 국적 불문하고 얼마 못 가거나 변질됨 ㅋㅋ」 「내성발톱 : 꼭 「종말 이후」만 해당되는 것도 아냐. 기본적으로 진행자들 책임도 있겠다만, 과거를 재구성한 세계관들이 하나같이 더러운 걸 보면 성악설이 맞는 거 같다니깐?」 「이맛헬 : 성악설이 뭥미?」 「제시카정규직 : 사람은 원래 악하다고.」 「이맛헬 : ? 당연한 거 아님?」 「려권내라우 : ㅋㅋㅋ」 「두치 : ㅋㅋㅋ」 「슬로우 웨건 : 내가……설명하지……성악설이란……젠장.」 「에이돌프휘투라 : 한겨울 같은 애는 사실상 돌연변이라고 봐야지. ㅇㅇ」 「하드게이 : 이 방송은 이상한 게 뭐냐면 말이지, 보다보면 「종말 이후」가 아니야 ㅋㅋㅋ」 「무스타파 : 에이. 돈 많은 S급 가입자들 세계관은 스타팅 국가가 끝까지 안 망한대. S급이면 자기 생활을 보여줄 이유가 없으니까 실제로 본 사람이 없어서, 결국 카더라 통신일 뿐이긴 하다만……. 가능성은 높겠지? 걔들은 막 대통령이나 대부호 포지션으로 시작할 테니.」 「폭풍224 : 그렇게 따지면 이 중계채널은 존나 S급 컨텐츠인거네? ㅋㅋ」 「핵귀요미 : 우리 겨울이 인기가 그래서 점점 좋아지잖아 ㅠㅠ 순위도 계속 높아지구 ㅠㅠ 날마다 중계채널 늘어나구 ㅠㅠ 누나는 언젠가 겨울이가 성공할 줄 알았어 ㅠㅠ」 「동막골스미골 :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9급 공무원 : 넌 또 뭐가 불편하니?」 「동막골스미골 : 시청자 요구는 조또 안 듣는 애가 잘 나간다는 게 불쾌하잖아. 막 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거 나만 그럼?」 「동막골스미골 : 게다가 재능충인데 나보다 돈까지 잘 벌어. 재수 없어.」 「에엑따 :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포기하면 편해. 재미있고 현실감 넘치니 계속 본다.」 「빌리해링턴 : 그렇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고, 남자든 여자든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호굿호구굿 : 하지만 그 재미에 섹스는 없지…….」 「전국노예자랑 : 앞으로도 없겠지…….」 「앱순이 : 안 될 거야 아마…….」 「동막골스미골 : ㅉㅉ 개돼지 새끼들.」 「아리스토텔레스 : 묻겠다. 그대들은 행복한 돼지가 되겠는가, 불행한 인간이 되겠는가?」 「퉁구스카 : 행복한 돼지요!」 「액티브X좆까 : 액티브X를 설치하고 일본을 공격하겠다.」 「하드게이 : 미친놈들 ㅋㅋㅋㅋ」 「원자력 : 이 채널이 흥하는 바람에 「종말 이후」 진행하던 틀딱들이 방송 때려 치더라. 원조 별창 박우철도 접을까 고민하고 있고. 대놓고 한겨울 욕하던데.」 「새봄 : 욕을? 뭐라고?」 「원자력 : 어린 노무 새키가 상도덕도 모른다고 ㅋㅋ」 「새봄 : 뭐래 ㅋㅋㅋ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지 ㅋㅋㅋ」 「깜장고양이 : 아마 급해서 말이 막 나올 고양. 하라부지 할무니들 방송은 카드 빚 돌려막기 같은 느낌인 고양. 방송 망하면 폐기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고양. 조금 불쌍하기도 한 고양.」 「너는뭐시냐 : 카드 빚 돌려막기라니? 무슨 소리야?」 「깜장고양이 : 모르는 고양? 공개방송에 쓰는 DLC는 시청자 숫자에 따라 수수료가 부과되는 고양. 시청자가 많아도 별을 안 주면 망할 수밖에 없는 고양.」 「둠칫두둠칫 : 잘 됐네. 능력 없는 노인네들은 갈 때가 됐지. 젊은 세대한테 짐만 되고.」 「믓시엘 : 근데 좀 불안한 게, 한겨울 얘라고 얼마나 더 오래 가겠냐?」 「믓시엘 : 지금껏 여러 번 끝날 뻔하지 않았음? 아직 안 죽은 건 솔직히 운빨 같은데.」 「피자는당연히라지 : ㅇㄱㄹㅇ. 박진석 말마따나 지금부터라도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면 앞으로도 위태위태할 듯. 쓸 데 없는 오지랖도 줄이고. 사형수 쉴드는 뭐 하러 쳐 주냐? 저러다 사단장한테 밉보이면 어쩌려고. 관리하라고 해도 골치 아플 텐데.」 「려권내라우 : 흠, 사형이라는 게 어떤 방법으로든 죽이면 그만인 건 아니지 않냐고 했었나?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죽을 죄 지어서 죽이는 건데 방법이 무슨 상관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걍 컨셉이지?」 「まつみん : 겨울 씨는 컨셉 아니에요. 그냥 마음이 고와서 그래요.」 「일침 : ㅉㅉ 마음은 원래 곱게 쓰는 게 아냐.」 「まつみん : 왜요?」 「일침 : 곱게 쓸수록 빨리 닳아 없어지거든.」 「まつみん : 오…….」 「엑윽보수 : 마음 곱게 쓴다는 놈이 씨발 피해자들 마음은 생각 안 하나봐?」 「엑윽보수 : 이게 가상현실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현실이었으면 리얼 죽빵 날아갔다.」 「groseillier noir : 싸우면 니가 질 거 같은데?」 「엑윽보수 : 뭐래 유럽 짱깨가.」 「대출금1억원 : 벌레한테 공감하면 나도 벌레가 되는 것 같아서 싫지만 저건 맞는 말이다. 사형수들 왜 살려두는지 이해가 안 가. 방송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말이야. 인권 타령하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웃기는 나라야.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AngryNeeson55 : 나 역시 동감한다. 만약 누가 내 딸을 죽였는데 멀쩡히 살아있다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군. 아마도 내가 직접 찾아내서 죽여 버릴 것 같다.」 「돌체엔 가봤나 : 내가 낸 세금으로 그런 새끼들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 정말 극혐. 인권은 사람한테만 있는 권리 아니야? 사람도 아닌 놈들한테 무슨 인권이야? 게다가 수감자 태반이 외노자들 아냐? 더럽고 미개한 좆의 숙주들 같으니. -_-」 「핵귀요미 : 근데 만에 하나 억울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잖앙…….」 「친목질OUT : 그럼 빼도 박도 못할 만큼 확실하게 나쁜 놈이면 죽여도 되는 거 아님?」 「핵귀요미 : ……그런가? 근데 빼도 박도 못할 만큼 확실하게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 아니었으면?」 「친목질OUT : 그럼 빼도 박도 못하는 게 아닌 거지!」 「핵귀요미 : 그 정도로 확실한 게 얼마나 되는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친목질OUT : ……그런가?」 「국빵의의무 : 얘들 귀엽게 노네 ㅋㅋㅋ」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이런 소리 하면 또 씹선비니 설명충이니 하겠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게 꼭 세금 절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ㄹㅇㅇㅈ : 여! 씹선비! 오늘도 설명충 짓인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사형은 쟤들 말마따나 정말 확실한 경우에만 집행해야 하는데, 그럼 사형수한테도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하거든. 본인이 사형 판결을 받고서 재심을 청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승산이 없더라도, 재판을 질질 끌어서 1초라도 더 살고 싶어 할 텐데. 억울한 사람이든 죽어 마땅한 놈이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문제는 그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거지. 걔들이 돈이 어디 있겠어. 결국 형을 열심히 집행할수록 세금이 더 나가. 변호사 선임 비용이 비싸잖아. 매번 재판할 때마다 판사랑 검사도 와야 하고.」 「핵귀요미 : 헐랭…….」 「친목질OUT : 그거 좆같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너네 기분은 알겠는데 그러려니 해. 애초에 법의 원칙은 백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거니까.」 「반닼홈 : 캬- 법의 정신 오지구요, 오지면 오지명?」 「려권내라우 : 이놈의 오지명 빌런은 죽지도 않아. 오지명 씨한테 사과해라.」 「엑윽보수 : 답답하다. 너무 이상적임. 난 한 명이 억울하더라도 백 명의 범인을 놓쳐선 안 된다고 봄.」 「당신의 어머 : 그러다 니가 그 한 명이 되면?」 「엑윽보수 : 안 되려고 노력을 해야지, 노력을. 억울한 상황에 몰리는 것도 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항상 정신 바싹 차리고 있어봐. 괜한 일이 생기나.」 「무스타파 : 노력으로 되는 문제인가…….」 「명퇴청년 : 아니 뭐 그건 그렇다 쳐. 겨울이 얘가 살리려고 한 새끼는 경우가 다르잖아? 스스로 일가족을 다 죽였다고 자백했는데.」 「まつみん : 아이들을 살렸잖아요.」 「まつみん :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사람 같기도 하고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마츠밍 말이 맞다. 이 방송에서도 여러 번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거든. 모든 범죄엔 일정 부분 사회의 책임이 있지. 그래서 범죄자를 교화할 의무가 생기는 거고.」 「질소포장 : 넌 뭐 어디 교수 같은 거냐?」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아닌데.」 「질소포장 : 교수도 아닌 놈이 아는 척은 오지게 하네.」 「질소포장 : 반닼홈 닥쳐.」 「반닼홈 : 너무해…….」 「SALHAE : …….」 [SALHAE님이 별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244 [244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7) 나는 대가를 지불한다. 어둠 속의 폭군이 뇌까렸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머리를 거쳐 나온 말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서 들끓던 열이 헛소리처럼 흘러나왔을 뿐. 놀라움이 사라진 뒤에 분노가 찾아왔다. 이 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다니. 마치 거래 이전과 같지 않은가! 콜록, 콜록. 늙은 소년이 밭은기침을 앓는다. 고건철은 피로했다. 불면증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잠들 때마다 찾아오는 악몽이 원인이었다. 꿈속에서 폭군은 늘 과거의 모습이었다. 그 여자가 비웃었던 바로 그 몸뚱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패배의 기념비.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꽃, 한가을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한겨울의 몸을 포기하고, 다른 누구의 몸도 빼앗지 말고, 고건철이라는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자신과 마주할 것. 그러면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과 사람으로서.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유전자가 보존되어 있다. 복제체 배양에 오래 걸리진 않을 터. 돈이 곧 영생인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가능할 리가 없다. 그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고건철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나조차도 그게 역겨웠는데! 내가 왜 몸을 바꿔야만 했는데!’ 불가능한 거래였다.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니까. 아기가 울었다. 폭군은 우묵한 눈으로 손자를 응시했다. 내가 이걸 뭐 하러 가져오라고 했더라? 아기가 울다 지칠 때까지 고민했으나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에 부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한 탓인지, 다른 번민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답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인지. 답은 불현듯 떠올랐다. 그 여자를 닮은 딸, 고아영이 이 아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동안은 그저 착각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을 따름이라고 비웃어왔건만. 그 여자를 닮은꼴이 어떻게 사랑을 하겠느냐. 애초에 그런 감정은 있지도 않은 것을. 회의가 들기 시작한 데엔 한가을의 지분이 크다. 아니, 그녀야말로 모든 혼란의 시작이자 끝. 불멸이라 믿었던 감정이 필멸로 끝나버린 이래, 이런 고뇌가 다시 오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끔찍한 시간이.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회장님.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정중하고 듣기 좋은데도 어쩐지 쉭쉭대는 목소리. 폭군에겐 잘 드는 칼 같은 비서였다. “티가 나나?” “솔직히 아주 심하십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 같습니다. 식사는 제대로 하십니까?” “…….” “지금이라도 약을 드시고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됐어. 그런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고건철은 불규칙한 맥박을 느꼈다. 괜찮다. 몸은 물질이자 도구일 뿐. 이 몸이 망가지면, 이 몸을 다시 만들면 된다.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 어쨌든 예전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콜록. 크흠……. 선물은 전했나?” 질문을 받은 특수비서는 순간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회장은 그러려니 했다. 유능하고 충실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독사 같은 새끼다. 이 상황도, 맡긴 일도 싫었을 터. “예. 만족하더군요.” “얼마나?” “잠깐이라도 웃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달랍니다.” “웃었다고.” 만족감은 희미했다. 고건철은 그보다 큰 비참함을 느꼈다. 선물. 한때 한가을에게 제안했었다. 몸과 마음을 내준다면 한겨울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구해주겠노라고. 그녀는 거래를 거부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폭군은 그 어린 잡것들을 구제해주고 말았다. 조건 없이 쓰는 돈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과 달랐다. 경제적이지 못한 일이었고, 지독하게 어리석었으며, 고건철 자신을 부정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비서가 말했다. “한가을이 다른 여자들과 다른 면은 있지만, 회장님 정도 되는 분이 얽매일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회장님께선 어디에도 얽매여선 안 될 분이십니다.” “그래서?” “충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어차피 여자입니다. 이쪽에서 높여주면 한도 끝도 없이 콧대가 높아지는 부류죠. 한 번 짓밟으면 곧 포기하고 말겁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살을 하진 않겠지요. 그렇게나 아끼는 동생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회장이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충심이니 어쩌니 해도, 비서에게 중요한 것은 회장이 아니라 회장의 그늘임을 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믿을 만 했다. 폭군은 항상 대가를 지불해왔다. “건드리지 마라. 아직은.” 한 마디면 충분했다. 비서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비서가 선물과 함께 한가을을 찾았을 때, 그녀는 작업복을 입은 현장감독으로서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있었다. 여름철의 더위에 젖은 모습이 독특하여, 비서는 꽤나 긴 시간을 바라보았다. 근육에 때와 먼지가 낀 잿빛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위화감이 없었다. 아이들의 영상편지를 받은 가을은 스치는 미소에 한숨을 곁들였다. “회장님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게 전부인가?” “더 길게 말씀드리면 오히려 기분 상하실 것 같아서요.” 비서는 가을의 말이 불쾌했다. 그가 아는 회장은 분명히 그럴 것이기에. “이제 흥정을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흥정이라뇨?” “네 몸값 말이다.” 햇살이 짜증스러울 만큼 뜨겁다. 비서는 손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냉온기능이 붙은 정장도 드러난 살결까진 어쩔 수 없었다. 버러지 같은 외국인 새끼들도 아니고, 그가 이런 날씨에 이따위 플랜트를 돌아다닐 일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불쾌감은 가을에게 흔들림이 없어 더 했다. “오해하지 마라. 이건 순전히 내가 하는 말이니까. 네 몸값은 지금이 정점이야. 사실상 회장님께서 항복을 선언하신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안 먹힐 거 알면서 하는 요구 그만 두고, 이쯤에서 파는 게 어때? 비쌀 때 팔지 못해서 후회하는 건 몸이나 주식이나 마찬가지거든.” “…….” “헐값 인생들 사이에서 비싼 몸으로 고상한 척 지내면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비서가 헐값 인생들을 가리켰다. “이런 일 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왜 아직도 기계가 대신하지 않는 인간들이 많을까. 저렇게 단순한 작업이면 관제 AI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기업은 손해 볼 일을 하지 않잖아요.” “틀렸어.” 비서는 생각했다. 바보 같으니. 이런 시대에 정말로 인간이 기계보다 유용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가장 완성도 높은 인공지능, 트리니티 엔진을 보유한 이 나라에서? 저따위 한심하고 저급한 노동에? 그래, 있을 순 있지. 하지만 저렇게 많을 순 없지. 많을 필요가 없지……. “이유를 말해줄까?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상품이기 때문이야.” 그렇다. 값을 기계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 대가를 지불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기 때문에. 기계는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회장님을 모시며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데, 돈은 권력이야. 지배의 수단이란 말이야. 인간을 지배할 수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저기 쓸 데 없이 많은 싸구려들은, 그저 더 저렴해지기 위해서 바글거릴 뿐이고. 맡긴 일은 그냥 길들이는 용도지.” 가을은 침착하게 평했다. “글쎄요. 그건 당신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 없이는 못 산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비서가 서늘하게 웃는다. “그래…….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야. 돈으로 사람을 사는 만족감은……어떻게 다른 걸로 대신할 수가 없더라고.” “…….” “언젠가 이런 쪽에서도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날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장황하네요. 결국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팔아.” 처음보다 차갑고 단단해진 어조였다. “회장님은 자신이 치른 대가만큼 받는 분이시다. 만에 하나라도 너를 소홀히 한다면 그건 그분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야. 스스로 지불한 가치를 부정하는 꼴이니까. 그러니 그 같잖은 거부감은 집어치우고, 적당히 좀 팔아라. 한평생 후회할 일 없을 거다.” 가을이 끄덕였다. “잘 들었어요. 더 남은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봐.” 비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회장님의 관심이 없어지면 너도 무사하진 못할 거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뭐, 이것도 너를 위해 해두는 충고야.” 이 말이 회장의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가을은 생각했다. 겨울아, 세상은 우리보다 어린 어른들 투성이야, 라고. 석별 (1) “이거 보세요, 대장님! 대장님이에요! 최강의 슈퍼 레어 캐릭터! 중대에서 저 밖에 없어요!” 신이 난 한별이 겨울에게 넷 워리어 단말을 내밀었다. 기본적으로 스마트 폰이기에 상용 어플리케이션의 구동도 가능한데, 이중에는 국방부가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등록허가를 내준 모바일 게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점을 건설하고, 확장하고, 부대를 육성해서 변종들을 때려잡는 내용이긴 하지만. 로딩 화면에 육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문구가 흘렀다. “전투력이 완전 사기라니까요? 레벨을 다 올린 것도 아니고 무기도 평범한데 어지간한 미션은 혼자서 다 끝내버려요! 현실 반영이긴 하지만 밸런스는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하하…….” 겨울은 적당한 미소를 만들어보였다. 일러스트가 거울을 보는 듯 했다. “이 게임, 인기가 많아요?” “그럼요! 유저수가 천만 명이 넘는 대요! 우리 중대에서도 안 하는 사람이 없을 걸요?” 이 말에 몇 명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일까. 어쨌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유라 이상인 한별의 친화력은 겨울이 낯선 중대원들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중대장인 싱 대위는 보고를 미루겠다고 알려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푸는 게 먼저일 것이라며. 본인은 주둔지 경계망 순찰을 나갔다. 처음부터 느낌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온화한 공기에 힘입어 빅터 쿡 이병이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아말리아 플레먼스가 데리고 왔던 입양아들 중 하나였다. “대ㅈ……중대장님. 혹시 이런 쪽으로도 부수입이 있으십니까?” “이런 쪽?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어, 광고에도 자주 나오시고, 게임에도 나오시는데, 그, 개런티? 같은 게 나오지 않나 궁금해서 말입니다.” 어눌하긴 해도 문법 오류가 없는 한국어였다. 사실 미군 중대로서는 영어 사용이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공동체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일 듯하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어요.” “어째서…….” “우리는 군인이잖아요. 연방공무원이랑 같은 취급이라서 직무 외의 수입은 금지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제 이름이나 이미지를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적인 이유로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면 개런티를 지급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렇구나……” 이번 세계관만큼은 아니어도 모병광고에 출연할 만큼 유명해진 적이 몇 번 있어서 숙지하고 있는 내용. 물론 관련 규정을 전부 다 알지는 못했다. 급여 외 소득이 제한된다고는 해도 일정 비율로는 허용되며, 초과분에 실질적인 제재가 가해지는 건 대령부터라고 들었기 때문. 즉 겨울이 부업을 한다고 해서 법무부로부터 고소장이 날아오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예전에 선물 문제가 있긴 했지.’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신탁 계약서를 작성했었다. 그러고 보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으려나? 물량이 많다곤 해도 지금쯤이면 처분이 끝나지 않았을까? 겨울은 포트 로버츠 사서함에 쌓여있을 우편물들이 궁금해졌다. 그 중엔 분명 은행에서 발송한 계좌정보도 있을 것이기에. # 245 [245화] #석별 (2) 귀 기울여 듣던 유라가 실망했다. “에이, 뭐야. 기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유라 씨……유라 소위도 나오나보죠?” “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어, 오해하시면 안 돼요! 돈 욕심이 났던 건 아니니까! 그냥 동맹 사람들한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거예요! 전에 작은 대장님도 사비를 털어서 사람들 돕고 그러셨잖아요!” 그리고 우물쭈물 작아지는 목소리. “솔직히 그거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무 기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작은 대장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겠다 싶었다고요.” 겨울이 차분한 웃음을 지어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튼 고마워요. 근데 그런 게 궁금했으면 저기 깁슨 요원에게 물어보지 그랬어요? 정부윤리규정에 대해선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걸요?” 비록 국가안보과 소속이라고 해도, 수사국 특수감독관쯤 되면 겨울보다는 많이 알 것이었다. 수사국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공직자들의 뇌물수수를 감시하는 거니까. 그러나 정보국 요원들과 동석한 그녀를 흘깃거린 유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분은 어쩐지……대하기가 좀 어렵다고나 할까……. 말을 붙이기가 힘들어서요.” 말을 붙이기 힘들다? FBI 요원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가? 겨울이 그쪽을 보자, 시선이 마주친 조안나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코왈스키와 함께 있음에도 불편해보이지 않는다. 중대원 몇 명도 끼어있는 걸 보면 모두가 불편해하는 건 아닌 듯 했다.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어요. 아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며칠이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글쎄요…….” 혼자 고민하던 유라가 다른 것을 물었다. “근데 저분들은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인원이야 얼마 안 되니까 주둔지를 같이 쓰는 건 상관없는데, 그래도 이유는 알고 싶거든요. 물어봐도 기밀이라고만 하고.” “여기가 더 안전할지도 몰라서요.” “네?” “말 그대로 기밀이라 아직 자세한 내용을 말하긴 곤란하네요. 조만간 알게 될 거니까 지금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알게 된다고요?” “네. TV에도 나오고 그럴걸요. 특종으로.” 유라는 아리송한 얼굴로 느릿느릿 끄덕였다. 이하는 이 문제로 조안나 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 “차라리 여기가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더군요. 관계당국이 내린 판단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던 그녀. “「진정한 애국자들」을 빠르게 쳐내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말썽이 빚어지는 모양이에요. 보복성 테러가 우려되므로, 숙청이 끝난 후에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 복귀시키겠다는 뜻이죠.” 과연 맞는 결정일지는 모르겠다. 겨울은 고개를 돌려 주둔지의 전경을 보았다. 중대본부는 계곡물이 흐르는 외로운 목장이었다. 사단본부와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위치.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2백 미터, 북서쪽으로 3백 미터 지점에 각각 다른 중대의 주둔지가 있었다. 엄폐물 너머에서 불을 피우는지 엄폐물의 윤곽이 희미한 노을빛이었다. 주변에 우거져있던 나무는 남김없이 베거나 폭파시켰다. 시야와 사선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 각각의 주둔지가 서로를 육안으로 관측 가능하며, 교전 시 오인사격의 우려가 없도록 화력계획을 짜두었다. 견고하면서도 유연한 방어선이었다. 테러를 경계해야 하는 워싱턴보단 안전하다고 봐도 되려나? “중대장님! 사람 숫자에 맞춰서 물 끓일 건데, 이거 중대장님도 드실 겁니까?” 유라 소대의 문수찬 일병이 네모난 라면 용기를 들어보였다. 특이하게도 뚜껑에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박스 단위로 쌓여있다. “네, 하나 줘요.” “알겠습니다!” 물이 아슬아슬하게 출렁이는 깊은 냄비가 모닥불 위에 올려졌다. 굵은 통나무 한 토막을 네 쪽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갠 틈에 불쏘시개를 채워 불을 붙이는 모닥불은 포트 로버츠에서부터 익숙한 방식이었다. 화력을 조절하기도 쉽고, 받침대가 따로 없어도 된다는 점이 편하다. 비번인 중대원들은 목장주 가족이 살았던 집 앞의 뜰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름의 중대장 환영식. 처마 아래의 테라스엔 낡은 안락의자가 있고, 그 옆엔 테이블을 끌어다가 TV를 올려놨다. 선이 창문 안쪽으로 들어간다. 위성 안테나는 군과 계약한 상업채널을 수신했다. “진석 소위. 유라 소위. 나 없는 동안 포트 로버츠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말해줄래요? 부장님들하고 통화를 해보긴 하겠지만, 두 사람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거든요.” 다른 소대장들에겐 곤란한 질문이었다. “워낙 많아서…….” 난처해하는 유라. 반면 진석은 곧바로 인상을 썼다. “요즘은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뒤에서 큰소리만 치는 놈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꼴값 떠는 인간들 얘깁니다.” 진석의 말에 유라가 맞장구를 쳤다. “아, 그 사람들 진짜 싫어요. 고생은 작은 대장님이 다 하는데 생색은 지들이 내.”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겨울이었다. 진석이 눈앞에 없는 이들을 경멸했다. “어차피 같은 난민 처지인데……. 다른 난민들에게 니들이랑 우리랑 같은 줄 아느냐고 떠들고 다니는 미친놈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 덕분에 너네가 살아있는 거니까 고마운 줄 알라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우선인 진석이 국적 불문하고 이렇게 말할 지경이면 어지간히 심했을 것이다. 유라가 말을 받았다. “아무리 말려도 자꾸 때려요. 특히 중국인들한테 많이 그래요. 너네 때문에 우리까지 위험해진다거나, 너네 때문에 대장님이 더 고생이라거나, 너네 때문에 아무튼 솰라솰라. 어휴. 돈이나 물건을 막 빼앗기도 하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고 그래요.” “대장님이 작전 중 실종으로 알려졌을 땐 엄청났습니다. 거의 폭동 수준이었죠. 헤이랜드 보안관이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죽었을 겁니다. 그나마도 마지막엔 저희가 나섰지만 말입니다.” 즉 무력으로 진압해야 할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독립중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전투조원들은 엄연히 육군 소속이었으니, 움직이는 데엔 기지 사령관의 승인이 있었을 터. 캐슬린 헤이랜드 보안관이 태풍 몰아치던 밤의 인연으로 겨울동맹의 편의를 봐준다는 말은 전에도 한 번 들었다. 민완기 부장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겨울은 흑사회의 동향이 궁금해졌다. 체면을 중시하고, 얕보이느니 차라리 죽는다고 하는 어깨들 아니던가. “삼합회는 어때요? 그 성미에 가만히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요.” “부장님들께 이런저런 항의는 합니다만, 겉으로는 그냥 죽은 듯이 지냅니다. 미군 눈치도 곱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장교들 중에서도 대놓고 중국인들이 싫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뭐……. 그래서 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가요?” “갑질하는 한국 난민들 말입니다. 우리는 중국인하고 다르다고 티내려는 게 아닌가 해서. 미군 입장에선 외모로 구분하기 힘들잖습니까. 한 번은 깜둥이 새끼가 제 앞에서 눈을 찢더군요. Fucking Chinaman이라면서요. 저는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그걸 그냥 뒀어요?” “그 인간, 영창에 다녀와서 사과하더군요. 미군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아니,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습니다. 역병 이전 말입니다.” 한국 난민들이라고 말하는 진석의 어조는 꽤나 적대적이었다. 더 이상 과거의 국적으로는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고 미군으로서의 소속감이 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예전의 대화에 비추어보면, 진석의 울타리는 동맹이었다. 유라가 거들었다. “덕분에 아이링 씨가 많이 힘든가 봐요. 아버지랑 자주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장 부장님 말로는 중국 깡패 두목의 딸이라면서 군정청에서도 말이 많다고도 하고 그래요.” “유라 소위는 리아이링 향주를 친한 것처럼 말하네요?” 유라는 겨울의 느낌을 긍정했다. “그쪽도 이제 소위거든요. 친하다고 하기는 쬐끔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에요.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나 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안 하는데 그냥 다 지긋지긋하대요.” “…….” “아버지랑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나.” 권력을 딸에게 주면 부녀간에 말썽이 생길 것이라던 민완기의 예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고. “일본 난민들은 괜찮아요?” 고쳐 물으니 유라가 손사래를 쳤다. “어휴, 말도 마세요. 악감정이 어디 가겠어요? 전 일본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요즘은 행패 부리는 한국 사람들이 더 싫어요.” 진석이 공감했다. “쿠시나다 씨한테는 미안하기까지 합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쿠시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동맹이 만들어지기 전에 중대장님께서 다물진흥회에 납치당했던 그분 따님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쿠시나다 세츠나 양이라고…….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났어요. 들으니까 알겠네요.” 회상보다 조금 늦게 「암기」 보정도 작동했다. 떠올리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반영하는 지연이다. 그러나 이름이 가물거렸을 뿐 사건 자체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떠나신 후에 쇼메이 당(黨)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쇼메이라는 게 우리말로는 서명(署名)인데, 말 그대로 서명 받고 다니는 당이라고 쇼메이당이랍니다. 원래 비슷한 단체가 일본에 있었다고도 하고……. 쇼메이다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난민들 사이에 차별과 폭력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의미 모를 한숨을 쉬고서 진석이 부연한다. “쿠시나다 씨는 쇼메이 당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입니다. 아내분이랑 따님도 그렇고요. 우리 쪽에도 자주 찾아옵니다. 우리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야쿠자들이 싫어할 텐데요.” 본인을 민족지도자로 불러달라던 야쿠자 두목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맨날 싸웁니다. 깡패들이 무슨 일본유신회의인가 하는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 놓는 바람에……. 웃기는 건 쿠시나다 씨 아들은 유신회의 행동대장이더군요.” “전에 봤을 때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음…….” 여기서 진석이 조금 고민하더니, 자신 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 사람이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만, 굉장히 안 좋은 소문이 돕니다.” “안 좋은 소문이라면?”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그저 야쿠자들이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을 했다고……. 처음 말한 사람은 군정청 사무원인데, 경찰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답니다.” “사람이 해선 안 될 짓……. 짐작 가는 건 전혀 없고요?” “네.” 다시 뜸을 들인 진석이 한 마디 덧붙였다. “헤이랜드 보안관에게 물어봤더니 표정이 많이 나빴습니다. 위에서 대외비로 지정한 사건이니까 묻지 말라고 하더군요. 괜한 소문 돌지 않게 단속해달라고도 했습니다.” 대외비? 겨울은 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비밀로 지정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난민들의 이미지가 나빠질 만 한 사건이려나?’ 그런 사건이라면 현 정권의 정책상 포트 로버츠 당국에서 기밀로 취급할 법 했다. 문수찬 일병이 겹쳐 쌓은 사각용기를 들고 잰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중대장님! 그리고 소대장님들! 라면 나왔습니다! 에……면이 익을 때까지 앞으로 1분 30초 남았습니다! 마요네즈는 아직 안 넣었으니까 원하시는 분만 취향에 맞게 뿌려서 드십쇼! 여기 김치도 놓고 갑니다!” 용기를 받아든 겨울이 갸우뚱 했다. “……마요네즈?” 뚜껑 위에 올려둔 봉지가 마요네즈로 보인다. 유라가 하하 웃었다. “이거 러시아에서 온 선물이라 그래요. 그쪽에선 라면에 마요네즈를 넣어 먹는대요. 저도 처음엔 되게 이상했는데요, 막상 먹어보니까 고소하고 부드러운 게 맛있더라고요. 워낙 많이 움직여서 칼로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 “마요네즈를 안 넣은 맛은 한국에서 먹던 거랑 비슷해요! 러시아에서 만들었지만 회사는 한국 회사라고 했거든요. 작은 대장님 덕분에 힘을 얻고 있대요. 저어기 버지니아에서 온 라면도 있었는데 그땐 대장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 다 먹어버렸어요.” 라면이 의외로 유통기한이 짧아서요. 죄송해요. 괜히 사과하는 유라를 만류한 뒤에 겨울이 고쳐 물었다. “버지니아에서 라면을 만들어요?” “원래는 공장이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고 하는데, 투자를 받아서 새 공장을 세운 다음 처음 만든 라면을 우리한테 보낸 거라고 했어요. 그쪽도 대장님께 고마워하던데요? 대장님 아니었으면 그냥 망했을 거라고요.” 고민하던 겨울은 마요네즈를 넣어보기로 했다. # 246 [246화] #석별 (3) 어차피 험한 입맛이고, 열량을 보충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국물이 부옇게 물들었다. 마요네즈는 여러 번 저어도 다 녹지 않았다. 자그맣고 하얀 덩어리들이 떠다닌다. 적어도 보기 좋은 떡은 아니었다. 그러나 맛있었다. 어째서인지 포크를 놓고 바라보던 유라가 물었다. “어때요? 입맛에 맞으세요?” “네.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에서 두 번째로 좋네요.” “두 번째? 첫 번째는 뭐였는데요?” “……그건 노코멘트로.” 노코멘트? 고민하던 유라는 아! 하고 어두워졌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세계관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뻔했지만, 겨울은 오해를 풀지 않았다. 사실에 가깝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김치를 집어먹는데 TV에서 김치 광고가 나왔다. 어색한 배경은 산을 두른 대나무 숲이었고, 중국풍의 정자에서 닌자 복장을 입은 흑인이 정면을 향해 합장했다. 「당신은 김치를 아십니까?」 느낌이 안 좋다. 「날씬한 한국인들의 건강 비결! ‘그 사람’도 이것을 먹고 자랐다! 동양의 신비, 김-치-」 “…….” 「풍부한 유산균! 많은 비타민! 균형 잡힌 영양소! 오랫동안 보관해도 먹을 수 있다! 당신의 배낭과 패닉 룸에 1순위로 갖춰두어야 할 우수한 비상식량!」 허공에 몇 번의 발차기를 한 배우는 날렵하게 시청자를 손가락질했다. 「구매를 망설이는 당신, 혹시 몸이 무겁지는 않습니까? 비만은 죄악입니다! 변종이 나타나면 흘러내리는 뱃살을 움켜쥐고 도망칠 작정입니까? 그로인해 당신의 가족마저 발이 묶이면 어쩔 셈입니까? 김치는 다이어트에도 좋습니다! 지금 바로 주문하십시오! 600-777-7777!」 상의를 벗어던진 배우가 김치 통을 양손에 아령처럼 들고 불끈불끈 몸 자랑을 한다. 진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이 늘어나는 건 좋은데…….” 그래도 수준이야 어쨌든 미국의 현실이 반영된 광고였다. 사람들은 어딜 가더라도 비상배낭을 메고 다니며, 비만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니, 봉쇄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어지간한 감염은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었다. 변종에게 물렸을 때를 대비한 간편 사지절단 키트 같은 물건도 팔리는 마당이다. 다들 먹는 동안에는 말이 줄었다. 「안녕, 뉴욕의 백인들. 그리고 한 줌의 노란 친구들. 오, 이런. 깜둥이 노예들도 있었네? 미안. 알잖아. 객석이 어두워서 안 보였어. 뭐? 왜? 어쩌라고? 나도 깜둥인데. 푸큭흐흐흐흫.」 광고 시간이 지나고서 시작된 프로그램은 스탠드 업 코미디였다. 「좀 조용히들 해봐. 오늘은 아주 유익한 이야기를 해줄 거란 말이야.」 쉬-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기다리던 코미디언은, 조용해진 관객석 앞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네가 알고 있을 진 모르겠는데, 난 몇 년 전까지 디트로이트에서 살았어. 우, 알다시피 거긴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같은 동네지. 하지만 난 요즘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정말이야! 왠지 알아? 그 도시가 나를 훈련시켜줬거든.」 겨울은 이어질 내용을 알 것 같았다. 「무슨 소리냐면, 좀비 새끼들이랑 디트로이트 주민들이 서로 다를 게 없다는 거야!」 코미디언은 스스로 말해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거긴 씨발 예전부터 가게란 가게마다 방탄유리를 도배하던 곳이야. 강도가 빵빵! 하면 총알이 팅팅! 직원이 어 씨발 깜짝이야! 하고 끝난다고. 이게 안 되는 가게는 다 망했어. 글구 거리를 걷다가 맞은편에서 누가 다가오잖아? 그럼 난 속으로, 씨발 저 깜둥이 새끼가 갑자기 날 쏴버리면 어떡하지? 이런다? 너네가 걱정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아? 마주 오는 사람이 있으면 괜히 수상해보이고, 갑자기 돌변해서 물어뜯을까봐 무섭고 그렇잖아? 아니야? 총에 맞아 죽으나 역병 걸려 죽으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푸흫크흐흫!」 절레절레, 피부 검은 진행자가 없는 사람을 때리는 듯한 손짓을 했다. 「이봐, 친구들……. 어두운 거리에서 뒷사람이랑 걷는 방향이 같으면 옛날에도 무서웠다고. 사람은 원래 잠재적인 위협이었다니까? 디트로이트가 유난히 심했을 뿐이지, 너네도 경험이 없는 게 아냐.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존나 부자가 아닌 한 모를 수가 없다고. 내가 깜둥이 치곤 좀 어려운 말을 할게. 궁지에 몰린 사람의 욕심과 광기는 잠복기의 역병이나 마찬가지라고. 욕심과 광기 말이야. 내 말은 그러니까, 니들이 이제 와서 무서워할 필욘 없다는 뜻이야! 게임으로 치면 스킨이나 좀 바뀌고,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갔을 뿐이라니까?」 “왠지 저거 공감되네요.” 다 먹은 유라가 턱을 괴고 하는 말. 과거의 난민구역은 욕심과 광기의 도가니였다. 「어? 뭐? 수도와 가스가 끊기면 어떡하냐고? 디트로이트엔 그딴 거 오오오오래 전부터 안 들어왔어! 전기? 먹는 건가? 또 거리의 창문마다 창살을 달아놨지! 주민들끼리 순찰 돌면서 SNS로 정보 공유하는 거? 그것도 오오오오래 전부터 하던 짓이야. 너네가 최근에 하는 일들, 디트로이트에선 그냥 존나 일상이었어! 아, 물론 거기서도 동네마다 차이가 있었긴 해. 하지만 난, 딱 봐도 곱게 자랐을 것 같진 않잖아? 엉? 정말 그렇다고? 좋아, 너 나가.」 관객들이 좋다고 박수를 쳤다. 「근데 사실, 겉으론 호들갑을 떨면서 속으론 존나 행복한 새끼들이 있을 거야. 꼭 NRA(총기협회)나 저어기 남쪽 백인들만 가지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미국은 원래 전쟁을 좋아하잖아?」 갈채에 환호가 더해졌다. 「일단 방역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에게 진심으로, 존나 진지하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둘게. 결코 그들을 폄하하려는 게 아녀. 난 POD 회원이야. 여기도 아마 동지들이 있을걸? 오, 그래. 있네. 됐으니까 손 내려.」 잠깐 비춘 객석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POD? 시민단체인가? 겨울로서는 접한 적이 없는 이름이지만, 무작위로 모인 관객들 중에 저토록 많을 정도라면 규모가 상당할 것이었다. 진행자 역시 다들 알 거라는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암튼 내가 보기에 요즘 미국인들은 삶이 완전 충실한 거 같아! 평화로울 땐 존나 늘어져 있다가 방역전쟁이 시작되니까 크큭 드디어 때가 왔군 이러면서 숨겨뒀던 무기를 꺼내는 느낌? 아 물론 가랑이에 달린 거 말고.」 진행자가 인상을 썼다. 「결론은 얕은 물에 빠져 죽지 말자 이거야. 우리는 전쟁광들이야.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곤 아직 존나 잘 싸우고 있잖아? 새로울 것도 없고 겁먹을 것도 없어. 편 갈라서 서로 괴롭히지도 말고. 그건 씨발 너네 문제를 해결하는데 좆도 도움 안 된다니까? 화이트 파워! 화이트 파워! 이지랄 싸면서 중국인들 사냥하고 다니는 KKK 짭퉁 씹새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우선 우리 깜둥이들에 대한 관심을 줄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고, 그래도 니들은 씨발 개새끼들이야. 무서워서 아무 짓이나 막 하고 다니는 좆같은 겁쟁이들아.」 다시금 물결치는 관객석. 돌아가는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곧 시민사회의 여론이었다. 당연히 전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라도 저렇다면 고무적이었다. “한 달 전하고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군요.” 진석이 하는 말. “명백한 해방 작전이 중지되고 중대장님께서 작전 중 실종됐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을 땐 어느 채널을 틀어도 웃음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다가 묻는다. “그런데 진짭니까? 중대장님이 중국의 군사위성을 탈취하셨다는 거?” 유라가 끼어들었다. 아, 그거! 저도 궁금했어요! 하고. 잠시 뜸들이던 겨울이 끄덕였다. 왜곡된 것은 영향이지,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베이더우 위성 말이죠? 나 혼자 다 한건 아니지만, 맞아요.” “거 참…….” 진석의 반응을 살피던 겨울이 거꾸로 물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캠프……아니, 포트 로버츠에서 뭔가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대장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없다고는 못한다?” “예에. 그, 과격한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있었잖습니까. 모겔론스가 중국을 몰락시키려는 미국의 음모였다고 주장하는 인간들. 그쪽 사람들이 모여서 대장님을……. 아니, 중대장님을 욕하고 그랬습니다. 조국의 복수를 막았다던가……. 어디서 났는지 사진도 불태우고 말이죠.” 곧바로 유라가 덧붙인다. “그치만 그런 사람들은 숫자가 되게 적어요.” 진석이 긍정했다. “일단은 유라 소위 말대로입니다. 살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중국인들 스스로 자중하는 분위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선 리친젠 같은 깡패들이 폭력까지 쓴다고도 하고……. 진짜 문제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불에다 기름을 붓는 한국인들입니다. 특히 다물진흥회 사람들이 부추기는데, 거기에 빠지는 동맹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놈의 민족이 뭔지. 진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물진흥회는 여전한가 봐요? 아직도 막리지가 임화수에요?” 겨울의 말에 진석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사람, 임화수가 본명이 아니랍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군정청에 거주자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까발려졌다더군요. 실제론 성씨도 가짜였습니다.” “그럼 본명이 뭐래요?” 단지 물었을 뿐인데, 풋, 유라가 입을 막고 웃었다. “아, 죄송해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비웃으면 안 되는데…….” 그러나 참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푸큽, 큭큭.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예전부터 감정이 참 풍부하다. 식은 눈으로 보던 진석이 답한다. “방귀남이랍니다.” “…….” “보나마나 귀할 귀자에 사내 남자를 썼겠지만, 부모가 좀 신중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임화수는 뭐……. 민 부장님 말씀으로는 옛날에 유명했던 정치 깡패의 이름이라더군요. 왜 하필 임화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미친놈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혹은 임화수가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모르는 채, 어쩌다 한 번 들은 기억으로 결정했을지도. 매 순간 모든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은 드문 법. “그래서 지금은 본명을 쓰나요?” “당연히 아닙니다. 지금도 본인이 임화수라고 우깁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된 데엔 이름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겨울은 자존감 부족한 사람이 그쪽으로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자기를 어떻게든 높여 보려고…….’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유라가 그들의 근황을 전했다. “장 부장님이 그러는데, 물타기를 하려고 한대요. 중국인들이랑 일본인들을 미워하고 한국인이 최고라고 믿는 동맹 사람들이 자기네를 같은 편으로 생각할 거라고. 그러면 작은 대장님이 돌아오셔도 함부로 어떻게 못 할 거라나 뭐라나. 암튼 그런 속셈이래요.” 사람을 심어서 어떻게 해보겠다더니 장연철도 꽤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네. 그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을 걸요? 예경 언니가 진짜 무섭거든요.” “아, 송예경 씨…….” 다물진흥회에 대한 원한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 전에 민완기와 통화할 때, 겨울이 있을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중심으로서 은근히 밀어주고 있다고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민완기가 송예경을 고른 배경엔 비뚤어진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아, 참. 대장님. 예경 언니가 아기 이름을 아직 안정했어요. 작은 대장님이 골라준다고 그랬다고. 나중에 부장님들이랑 통화할 때 말씀해보세요.” “이런…….” 하나하나 한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아, 참. 이거 말씀 안 드렸다.” 유라가 손뼉을 쳤다. “그 왜 순복음 성도회 있잖아요? 거기 되게 꺼림칙해요.” 겨울은 성경 말씀을 전하던 소녀의 비정상적인 악력을 떠올렸다. “어떤 점에서 꺼림칙한데요?” “그냥, 좀, 느낌이……사람들이 음침하다고나 할까……경계당하는 거 같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네에…….” 진석이 한 마디 툭 던진다. “미친 사이비 예수쟁이들이 기적 타령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아 느낌이 진짜 안 좋다니까요? 요즘은 이상하게 선교도 안 하잖아요.” 선교를 하지 않는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하는 사이에 주둔지 입구가 부산스러워졌다. 부중대장인 싱 대위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것. 그가 다가오자 치즈 냄새 비슷한 체취가 진하게 퍼졌다.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던 유라가 대위의 시선에 허둥거린다. 대위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지금 복귀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30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씻고 나서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요. 기다리겠습니다, 대위.” “별말씀을. 그럼 행정실에서 뵙겠습니다.” 경례를 붙이고 돌아서는 대위. 허리에 찬 칼이 걷는 박자에 따라 흔들렸다. # 247 [247화] #석별 (4) 행정실에 배치된 인원은 예상보다 많았다. 병사가 아니라 간부 쪽. 일반적인 중대라면 부중대장(XO)을 제외한 간부는 선임상사, 화기부사관, 보급부사관(NCO)이 전부여야 한다. ‘통신장교는 그렇다 치고……. 작전장교에 정보장교까지 있네. 계급이 한 단계씩 낮긴 하지만 조금만 더 보태면 대대급 지휘체계 구성도 가능한데, 벌써부터 부대확장을 준비하는 건가?’ 만약 중대가 대대로 승격된다면 인사장교 및 보급장교가 부임할 것이다. 사실상의 부지휘관 격인 계획장교(Plans Officer)는 현 부중대장인 싱 대위의 역할일 테고. “중대장님. 혹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싱 대위가 오기 전에 인사 파일부터 읽어두려는 겨울에게 정보장교가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요, 중위. 그냥 경력을 확인하는 것뿐인데요 뭐. 그리고 편히 있어요. 다들 왜 그렇게 뻣뻣해요? 복무기간으로 따지면 내가 여기서 가장 모자라지 않아요?”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겨울이 화기부사관을 지목했다. “디안젤로 하사는 오랜만이네요. 많이 바뀌어서 몰라볼 뻔 했어요. 계급도 올랐고.” “푸핫. 중대장님만 하겠습니까? 아무튼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웃음을 터트리는 하사의 이름은 에블린 디안젤로. 지난해 말에 봤을 땐 병장이었고, 160연대, 세븐스 캘리포니아의 1대대 소속이었다. 1대대는 성탄전야의 습격으로 주둔지(캠프 샌 루이스 오비스포)가 무너지는 바람에 포트 로버츠에 합류한 병력이며, 서류를 보면 부대 재편성 과정에서 자원하여 독립중대로 들어온 것으로 나와 있었다. “보고 싶었다니 의외인데요? 카드 만질 줄 모르는 사람하고는 친구로 안 사귄다면서요?” “와,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여러모로.” “한 번 만난 사람은 어지간하면 잊지 않거든요. 이름이 가물거릴 때는 있지만. 그때 같이 있었던……펜우드? 맞죠?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계속 복무하긴 힘들어보였는데.” 단지 규모가 작을 뿐, 당시 1대대 병사들이 경험한 충격은 지금 이곳으로 집결 중인 패잔병들 못지않았다. 펜우드 일병은 PTSD 증상이 심했다. 말을 더듬고 손을 떨었으며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할 만큼. 웃음기를 지운 디안젤로 하사가 까딱 끄덕였다. “결국 전역했습니다. 지금쯤 마이애미의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겠죠.” 잘 된 일이다. 윗선이 아직 상식적으로 돌아간다는 증거였다. 정신적 외상은 육체적 외상에 비해 가벼운 취급을 당하기 십상. 이런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미군도 여러 종말에 걸쳐 나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분위기가 안 좋게 돌아가면 사고가 경직되게 마련이었다. 파일을 넘긴 겨울이 정보장교에게 물었다. “머레이 중위. 귀관도 자원해서 이 중대로 왔다고 되어 있네요?” “저 뿐만 아니라 소대장들을 제외한 중대 간부 전원이 자원해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중위가 열중쉬어 자세로 턱을 들었다. “아부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이곳에 중대장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시선을 돌렸다. “그럼 다른 분들은?” 눈치를 보던 통신장교가 답했다. “이의 없습니다.” “이의라니……. 뜻은 알겠는데 말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마치 훈련소에 갓 들어온 신병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경력은 그렇지 않았다. 중위 토드 에반스. 비록 임관연도는 최근이지만, 방역전선에서는 초기부터 싸워왔다. 근접위험사격을 유도하여 변종집단을 물리친 공로로 동성무공훈장을 수훈한 이력도 있었다. 디안젤로가 다시 웃는다. “경쟁률이 무척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어정쩡할 때 미리 배치된 제가 행운아였죠.” 이때 도어 벨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싱 대위였다. 겨울에게 경례한 그는 일반 전투복을 입었으나 무장만큼은 그대로 휴대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놓친 게 있습니까?” “아뇨. 그냥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어요. 터번이 멋지네요.” 겨울의 말에 대위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감사합니다.” “이름이나 칼을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역시 시크교도였네요.” “……시크교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요. 그 사람도 싱이었죠. 시크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성을 쓴다던데요? 종교적인 관습이라고. 남녀의 차이만 있다고 들었어요.” “원칙적으론 맞는 말씀입니다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낡은 전통을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도 이미 알고 계시다니 기쁘군요. 만나보셨다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혹시 군인이었습니까?” “음, 전직 군인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좋은 사람이었어요.” 이번 회차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대위가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행히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의 사각에서 다른 간부들이 조금 어색해하는 것이 보인다. 싫어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다. 자료를 보면 하나같이 인성평가 결과가 우수한 자원들이니까. 물론 지능적으로 답변을 골랐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사실 중대장님께서 불편해 하실까봐 걱정했었습니다.” 그 걱정 때문에 일부러 터번을 쓰고 왔을지도. 겨울의 반응을 시험해보려고. 사실 겨울은 그가 단독군장으로 올 거라고 예상했었다. 주둔지가 안정되어 일과 후의 휴식이 보장된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무척 엄격한 느낌이었기에. ‘아주 단단히 작정했구나.’ 싱 대위를 두고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이 독립중대는 민사심리전의 수단이기도 하니까. “난 오히려 대위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걱정스럽네요. 혹시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없었어요?” “…….”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겨울이 짧은 한숨을 지어냈다. “유감이에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 사람들의 오해이고 그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중대장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익숙한 오해였습니다. 이슬람교도가 아니란 게 알려진 뒤로는 사과하는 사람도 많았고……. 무엇보다 저는 그 오해와 싸우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잠깐 쉰 대위가 다시 말한다. “사실 이슬람교도로 오인당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들도 억울한 취급을 많이 당하고 있으니, 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쪽의 이미지도 좋아진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네. 생각하며 겨울은 싱 대위의 파일을 펼쳤다. 수훈이력에 용맹장과 은성무공훈장이 보인다. 특이사항으로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라는 평가가 적혀있었다. 꽤 오랫동안 무술 수련을 한 사람이었다. “이건 모두에게 묻는 건데, 의사소통엔 지장이 없던가요? 중대원들과 어울리기가 좀 어렵다거나.” 일선 소대장들이 모두 동맹 출신인데 반해, 부사관이나 중대본부 인원은 처음부터 미군이었던 이들로 채워졌다. 편성 의도는 알겠으나, 지휘관 입장에선 이런 부분도 신경 써야 했다. 소대장들을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꾸미지 않은 답을 들으려고. 작전장교 포스터 중위가 답했다. “아닙니다. 다들 영어가 상당한 수준이고……. 저만의 경험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있는 자리에선 다들 영어로 말하려고 하더군요.” “아하.” “약간의 벽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봅니다. 관련하여 지도하실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교육자료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교육자료?” “파견되기 전에 사전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계 병사들을 대할 때의 주의사항에 대한 내용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설마 이럴까 싶었습니다만 역시나 현실과 달랐습니다.” “어떤 내용이었길래…….” “대표적으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한국계 병사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고 자면 질식사의 우려가 있다고 믿으니 같은 숙소를 쓸 때 주의하라고 써있었습니다. 갈등 및 충돌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요. 워낙 이상해서 착임 후 병사들에게 물어봤더니 실제론 안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 “거기 자료가 있으니 직접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겨울은 중위가 가리키는 문서를 꺼냈다. 잠시 가까워진 포스터 중위가 페이지를 짚어주었다. ‘정말이네…….’ 본래는 주한미군 교육용 자료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실 겨울도 과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처음 접한 미신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걸 믿었구나 싶기도 했다. 「종말 이후」의 시점에서는 그래도 많이 없어진 듯 하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일반적인 복무윤리만 지켜도 별 일 없을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본인한테든 나한테든 물어보고요. 귀관이 경험한 것처럼 웬만한 건 병사들이 맞춰주려고 할 걸요?” “알겠습니다.” 중대원들이 마냥 착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나요?” 겨울이 다시금 모두를 돌아보자, 싱 대위가 입을 열었다. “의사소통에 관해선 괜찮습니다. 다만 숙련병이 부족하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장비적응이 덜 되었을 것 같긴 하네요.” 겨울은 중대 장비 목록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단독작전을 염두에 두었는지 험비와 장갑차가 섞여있었다. 한 대 뿐이지만 화생방정찰장갑차마저 존재한다. 그냥 남는 장비를 몰아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기병중대라고 부르기 충분했다. 아직 수령하지 못한 장비가 반을 넘지만, 로저스 소장이 언급한 작전 개시 시점까지는 모두 갖춰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때가 되면 걸어 다닐 병력은 없을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주특기 훈련은 제대로 되어있습니다.” “음, 그럼 대위는 병사들이 실전에서 얼어붙을까봐 걱정인가봐요?” “정 반대입니다. 소대장들이 지나치게 저돌적인데다 병사들은 맹목적이기까지 해서, 실전에 필요한 유연성이 낮고 빠져야 할 때를 모릅니다.” 예상 밖의 답변. 겨울에게 남아있는 이미지는 전혀 그렇지 않건만, 떠나있는 사이에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진석 씨라면 내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무리를 했어도 이해가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네…….’ 포스터 중위가 동의했다. “같은 의견입니다. 이 중대, 가칭 데이비드 임무부대의 첫 임무는 포트 로버츠 인근에서 생존자를 수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느낌으로는 시킨 일만 열심히 하는 것 같더군요. 소대장들까지 그래선 안 되는 건데 말입니다.” “으음…….” “웨스트포인트 출신 소위들도 실전에서 눈앞의 상황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속성교육으로 임관한 소대장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중대장님은 예외 중의 예외니까요.” 글쎄. 내가 지휘력을 입증한 적이 있던가? 순간적으로 의아했던 겨울이지만, 이내 수긍했다. 산타 마가리타 호수 인근에서의 전투만 놓고 봐도 객관적으로 시야가 넓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싱 대위가 의견을 보탰다. “원래 소위는 길들이기 전의 전투화 같은 게 정상입니다. 보통은 숙련병들이 그걸 보완해주는데, 이 중대에선 그걸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진짜 문제지요. 전투 병력을 난민 출신으로만 뽑은 이유는 알지만, 그쪽으로만 너무 신경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인원보충이 필요하다는 거죠?” 겨울이 묻자 대위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곳으로 합류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재편성이 필요한 인원들입니다. 그 고생을 하고도 멀쩡한 사람을 골라내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은 우수한 자원일 겁니다.” PTSD에 면역인 사람은 정신적인 기형이라는 게 정론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생각하는 겨울. 방역전선에선 살인의 죄책감은 없는 것에 가깝다. 변종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는 굉장히 드물었다. “어쩌다보니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말씀드렸군요.” 포스터 중위였다. “다소 경직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전투의지가 높습니다. 괴물들과의 싸움에선 큰 장점이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겨울이 속상했을까봐 우려하는 듯 했다.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완벽할 순 없는 거고, 부족한 게 있다면 하나씩 고쳐가죠. 그러려면 여러분이 많이 도와줘야 할 거예요. 나도 사실 계급만 소령이잖아요?” “무슨 말씀을…….” 포스터뿐만 아니라 모두가 곤혹스러움을 내비친다. 벼락출세한 상관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조금도 없어 보여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만 뽑아서 보냈겠지만. # 248 [248화] #석별 (5) 로저스 소장이 허락한 휴식은 그저 그동안 전투임무를 주지 않겠다는 뜻에 불과했다. 중대를 인수하기에 이틀은 꽤나 빡빡한 시간. 복귀 후 첫날밤만 하더라도 싱 대위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대원들과 회포를 풀 시간이 없었을 것이었다. ‘기회는 앞으로도 많겠지.’ 안면 있는 이들은 서류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겨울의 모습을 낯설어했다. 사실 겨울 스스로도 능숙하다고는 못하겠다. 허나 숙지해야 할 사항들이 있어 시간가속으로 넘기기도 곤란한 구간이었다. 보정으로 받는 정보가 스스로 기억하는 것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집무실에 앉아있다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이제 자리가 확실하게 잡혔음을 실감하게 된다고나 할까. 임시 주둔지라곤 해도 형식은 다 갖추고 있다. 창문으로 사흘째의 아침이 쏟아진다. 작고 낡은 TV 앞에 네모난 햇볕이 떨어졌다. 「연방철도청은 오늘 오전 8시를 기하여 북동회랑(Northeast Corridor)에서의 가드-라이너(Guard-Liner) 계획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캐나다 접경지역으로부터 워싱턴 D.C 근교에 이르기까지, 북동부 간선철도를 달리는 모든 열차는 장갑열차가 되었습니다. 연방 에너지부 및 국가 핵 안보 관리부 산하 안전운송사무국(Office of Secure Transportation)의 인적협력 아래 진행되었던 이 계획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겨울은 문서를 놓고 화면 속 먼 풍경을 보았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는 리벳이 줄줄이 박힌 철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객차마다 한 쌍씩 달린 원격포탑(RWS)이 인상적이었다. 대전차 미사일 발사대까지 존재했다. 통근열차에 탑승하는 이들 가운데 정장을 입은 사람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각자 하나씩 배낭을 메고, 격식보다는 실용성과 활동성, 드물게는 방어력을 중시한 의복을 입었다. 곳곳에 벙커 같은 대피소가 보이고, 승강장 구획이 철창으로 나눠져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했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을 확인한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지? 사단본부 작전 브리핑은 아직 좀 남지 않았나? “들어와요.” 문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가장 먼저 선임상사가 들어왔고, 다음으로는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들이 섞여있었다. 중대원들은 아니다. 그 숫자가 많았으므로 용건을 짐작하기 쉬웠다. 선임상사가 구령을 넣었다. 차렷. 경례. 겨울이 경례를 받았다. “쉬어요. 보충인력인가 봐요?” “그렇습니다, 중대장님.” “정말 빠르네요. 요청서를 보낸 게 겨우 어제인데.” “문드러진 사생아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시기가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상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겨울은 열중쉬어 자세인 나머지를 죽 둘러보았다. 모랄레스나 슐츠처럼 아는 얼굴들은 시선이 마주칠 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이들도 지난 사냥에 참가했으니 숙련병이라고 불릴 자격은 충분했다. 해당 작전에 참여한 인원에겐 최소 동성무공훈장이 수여된다고 했었다. 베이커 중대가 정식 편제는 아니었던 만큼 이곳으로 와도 이상할 게 없었고. 그 외에 모르는 얼굴들은 정면 위를 응시하는 석상 같았다. “다들 잘 왔어요. 날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 소개하죠. 중대장인 한겨울입니다.” 겨울의 농담에 몇 사람의 표정이 흔들렸다.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장은 곤란하겠네요. 한 가지만 당부하죠. 여러분은 당연히 우수한 인재들이겠지만, 부대 특성상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럴 땐 상사에게든 나에게든 지체 없이 보고하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Yes sir!” “좋아요. 그럼 상사,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맡길게요. 이제 곧 사단본부로 가야 해서.” “걱정 마십시오.” 겨울이 상사에게 서명한 파일을 돌려주었다. 선임상사 마르퀴스 메리웨더는 겨울을 어려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냥 담담했다. 복무경력 22년의 관록이 느껴진다. 잠시 후 또다시 들리는 노크 소리. 이번엔 부중대장이었다. “중대장님. 이제 나오셔야겠습니다.” “알았어요, 대위.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겨울이 책상을 빠르게 정리했다. 이런 곳에 중대원, 혹은 기자들이 함부로 드나들진 않겠으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서랍에 자물쇠를 채우고 일어선다. 밖에선 이미 시동을 건 두 대의 험비가 있었다. 작전장교 포스터와 정보장교 머레이, 그리고 동행할 병사들이 겨울에게 경례했다. 겨울은 1번 차량의 선탑자석에 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중대본부 운전병의 말에 끄덕이는 겨울. 정문의 경비병력이 입구의 장애물과 가시 체인(스파이크 스트립)을 치운다. 그들을 지도하는 사람은 장한별이었다. 환한 미소로 배웅했다. 사단본부로 가는 풍경에 특이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싱 대위, 저게 뭔지 알아요?” 잠시 지직거린 후에 후속차량으로부터 회신이 들어온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긴 것만 보면 레이더……같습니다만, 처음 보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레이더가 저렇게 많이 필요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레이더처럼 보이는 것을 탑재한 소형 트레일러들은 숫자를 세기에 열 손가락이 부족했다. 상부의 회전식 구조물은 부등변팔각형의 회전식 패널이었고, 안테나의 수신기와 유사한 돌출부가 존재했다. 겨울은 이번엔 같은 차량의 작전장교에게 물었다. “포스터, 당신이 보기엔 어때요?” “……레이더는 아닙니다. 구동부의 구조를 보니 앙각이 마이너스까지 나올 텐데, 지뢰탐지가 목적이 아닌 이상 왜 전파를 땅에다 대고 쏘겠습니까? 전자파를 이용하는 새로운 무기체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활한 것들에게도 비슷한 능력이 있으니 말입니다.” 포스터는 트릭스터의 마이크로파 발산 능력을 언급했다. 그 외에도 새롭고 낯선 차량이나 중장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물론 모두가 낯설지만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천공굴착기가 그러했다. 땅을 뚫어서 뭘 하려는 걸까.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포스터가 스타워즈의 R2D2 아래에 벌컨을 달아놓은 것처럼 생긴 트레일러를 지목했다. “저거 하나는 알아보겠군요. 이라크에 있었던 물건입니다. 센추리온이라고 불렀죠.” “센추리온? 장갑복하고 이름이 같네요?” “네. 보통 제식장비에 동일한 이름은 피하는 편입니다만, 위에서는 아마 저걸 다시 쓰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름을 혼동할 일도 없고요.” “순양함에 달려있는 걸 봤던 것 같은데.” “그것도 맞습니다. 원래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근접방어체계(CIWS)지만, 박격포탄 같은 걸 요격하려고 뭍으로 끌어올린 겁니다. 원래는 초음속 비행체를 막으려고 만든 물건이니 아음속의 박격포탄 정도는 잘 막아줬거든요. 전자동이라 사람이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흠…….” 혹시 그럼블이 투척하는 산성아기를 방어하기 위해서일까? 큰 괴물이 작은 괴물을 맹렬하게 던지면 속도가 상당하긴 하다. 적어도 메이저리그 에이스 투수들의 공보다는 빠를 것이다. 그러나 박격포탄에 비하면 요격 난이도는 훨씬 더 낮았다. 겨울은 과잉대응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보단 넘치는 게 낫겠지…….’ 사단 급 부대쯤 되면 저런 무기체계가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개량했다면 유사시 지상을 쓸어버릴 수도 있겠고. 용도가 용도인지라 구경이 꽤 커보였다. 여섯 총열이 회전하며 뿜어낼 무지막지한 연사력을 감안할 때 그럼블에게도 저지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동거리가 얼마 안 되다보니 얼마 안 가 사단본부였다. 본부 근처에 직할대의 전차들이 줄지어 대기 중이었다. 개량형이라 예전과는 형상이 많이 다르다. 과거에 비해 포탑의 크기와 높이가 커졌다. 포탄 방어를 위한 경사장갑은 수직 장갑으로 교체되었다. 겨울은 아마 전면장갑의 두께도 얇아졌겠지 생각했다. ‘변종을 상대하는 데 강철로 따져서 1미터를 넘는 방어력은 너무 지나치니까……’ 대신 전방으로 집중되어있던 방어력이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총 무게가 줄었겠지만. 내부 용적이 늘어난 만큼 포탄 적재량도 늘었을 터. 차에서 내려 사단본부 브리핑룸으로 들어서자 조금 앞서 도착한 장교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호기심, 호감, 경외, 미심쩍음 등의 여러 감정들이 겨울에게 집중됐다. 마침 아는 사람이 보이기에 겨울이 옆자리에 앉았다. “랭포드 대위.” 대위는 반가워하는 한편으로 적잖이 어색해했다. 허허 웃으며 하는 말. “이제는 제가 하급자로군요. 예전에 본 어떤 영화가 떠오릅니다.” “영화?” “외계 벌레들과 싸우는 내용의 SF 영화였는데, 거기서 훈련교관이 주인공에게 그러지요. 다음번에 만날 땐 내가 경례를 올려야겠군, 이라고.” “…….”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무척 기뻐했습니다. 이제 베이커 중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섭섭하세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군요.” 막중한 책임감과 탈모에 시달리던 장교의 고백에 겨울이 희미한 미소를 만들었다. 랭포드는 이제 사단 직할 포대로 배속되었다. 본연의 임무로 복귀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단장이 입실했다. 실내가 어두워지고, 프로젝터가 켜졌다. 여전히 무뚝뚝한 소장은 변변한 인사말도 없었다. 인원파악은 슥 둘러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다 모였군.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빛으로 투사된 작전명은 불타는 계곡.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변종들의 공세는 한계에 도달했다.” 소장의 손짓에 지도가 떠올랐다. “우리가 이곳에 교두보를 마련했기 때문에 놈들은 양면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의 성과로 놈들의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이번 반격은 명백한 해방 작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가을이 오기 전에 본토 탈환을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지금 보는 화면은 기상청이 제공한 자료다.” 소장이 눈으로는 장교들을 바라보며, 손으로는 붉게 물든 지도를 가리켰다. “현 시점에서 기온은 이미 평년을 웃돌고 있다. 기상청은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와 그 남부,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멕시코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 기록적인 더위가 찾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작전지역인 캘리포니아에서는 지역에 따라 최대 120도(℉)까지 치솟을 거라고 하더군.” 화씨 120도? 어림잡아 환산해본 겨울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열기였다. 작전명도 납득이 가고, 내용도 짐작이 간다. “이 기상이변은 6월 초부터 시작되어 8월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소장의 말에 따라 예측구간별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지도에선 피처럼 붉은 영역이 병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감염변종의 체온은 정상적인 인간보다 높다. 따라서 날씨가 이렇게 뜨거운 동안에는 정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뭔가?” 손을 들었던 장교가 질문했다. “그 말씀은 놈들의 활동이 정지된다는 뜻입니까?” “아니다.” 장군이 즉시 부정했다. “놈들에겐 신진대사를 억제하는 능력이 있다. 체온을 낮춰서 활동할 수 있지. 그러나 그만큼 둔해진다. CDC에서 실험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전투상황에서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르다.” 장군은 또다시 즉답했다. 이런 질문을 충분히 예상한 것처럼. “하지만 놈들은 겨우 작년에 나타났을 뿐이다. 이런 더위를 겪어본 적이 없지. 그러므로 특정 온도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사를 정상화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다. 놈들의 돌격은 빠르거나 늦을 것이다. 빠르면 일찍 나가떨어질 것이고, 늦으면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 어느 경우든 우리에겐 유리한 상황이다. 아닌가?” “말씀하신 대로라면 맞습니다.” 장교가 단서를 달자 장군은 재차 손짓했다. 그에 따라 투영되는 것은 어느 실험시설의 풍경이었다. 질병관리본부의 시설 중 한곳으로 보인다. 넓은 백색 공간에 다수의 변종이 갇혀있었다. 변종들은 저마다 온 몸에 센서가 박혀있다. 신체 상태를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는 강화유리 안쪽엔 연구진이 있었다. 실내 온도와 습도, 변종들의 상태 등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온도가 화씨 100도에 도달했을 때 역병의 공격성을 자극하기 위한 미끼가 등장했다. [크아아아악!] 언제 느려졌냐는 듯 발광하기 시작하는 변종들. 격렬한 공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3분 30초가 흐른 시점에서, 놈들은 빠르게 느려졌다. # 249 [249화] #석별 (6) 재생이 끝나고 로저스 소장의 말이 이어진다. “물론 이 정도의 폭염은 우리에게도 치명적이다. 비전투손실 최소화를 위해 각급 제대의 모든 차량은 사막 환경에서의 작전을 기준으로 개조될 예정이다. 추가로 냉각장비가 탑재된 쉘터 캐리어도 지원된다. 하차전투는 지휘관의 판단 하에 제한적으로 실시하도록.” 화면이 다시 지도로 바뀌었다. 아까와는 달리 지역별 온도를 나타내는 게 아니었다.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소노마 댐과 클리어 레이크 남쪽 산간지대의 지열발전복합단지를 점령해야 한다. 목표는 발전소들을 재가동시켜 광역 전파교란과 거점방어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 구축된 거점들은 사단 주력이 공세적으로 운용되는 동안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겨울에게 주어질 임무였다. 배치될 부대목록에 직할 독립중대, 데이비드 임무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는 아이들린 지열발전소. 복합단지의 방어거점들 가운데 서쪽으로 가장 동떨어진 곳이라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기 곤란할 것 같았다. “새로운 전파교란 장비는 적의 신호를 모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ECM과 다르다. 그동안 수집한 적의 통신으로부터 특정 의미를 지닌 신호를 분리해낸 덕분이지. 즉 전파간섭으로 통신을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잘못된 명령을 보낸다는 뜻이다.” 로저스 소장은 강조의 의미로 공백을 두었다. “문제는 유일하게 분리해낸 명령이 집결 신호라는 거다.” 일부 장교들이 술렁거렸다. 대부분 겨울과 같은 임무를 받은 지휘관들일 것이었다. “사단장님. 전파교란 범위가 굉장히 넓은데, 아군의 통신에는 지장이 없겠습니까? 거점 간 유선망을 구축하더라도 유사시 사단본부나 마리골드와 연락할 수단이 필요합니다.” 겨울도 궁금하던 찰나에 다른 장교가 물었다. “통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신호가 분명해진 만큼 교란에 사용되는 채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규칙에 맞게 설정한 주파수 도약으로 극복 가능하다. 위성통신은 물론이고 교란 장비 근처에서 일반적인 무전기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사단장의 냉혹한 선언. “어떤 경우에도 사단 주력의 지원은 없다.” 이번엔 더 많은 장교들이 웅성거렸다. “이는 사단의 임무가 적 종심을 파고드는 기동타격이기 때문이다. 변종집단에게 종심이랄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작전지역 내의 모든 수원(水源)으로부터 변종집단을 유리시키는 게 목적이다.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지원을 받더라도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지. 지원을 위해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 “기상청은 캘리포니아 내륙에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할 거라고 예측하더군. 변종도 결국은 생명체다. 살아 움직이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만큼 필사적이겠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그러나 작전을 성공시킬 경우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 오염지역의 댐들은 대부분 붕괴 예방 차원에서 수문을 활짝 열어둔 채다. 겨울이 파견되었던 산타 마가리타 호수의 살리나스 댐이 그렇듯이. 따라서 연초에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렸어도 각지의 저수량은 결코 많을 수가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가뭄은 악명 높다. 강과 개천이 말라붙기도 부지기수. 상수도와 관개시설이 작동하지 않는 지금은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중부 평원이 사막이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한다. 거점방어에 병력 증원은 없다. 여기서 새로운 사단이 창설되더라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절대로 불가능한 임무는 아니다.” 사단장이 손짓으로 화면을 넘겼다. 노트북을 다루는 장교가 이번엔 몇 페이지를 헤맸다. 마침내 로저스 소장이 끄덕인 페이지엔 요새화에 투입될 자원이 소개되어 있었다. “지금 보이는 목록은 지속적으로 몰려들 적을 제압하기 위해 배치될 추가 장비들이다. 무인포탑은 다들 알고 있겠지. 그 외에 레이저 발사체계와 접근거부체계가 있다.” 접근거부체계는 겨울이 사단본부로 오는 길에 보았던 레이더 비슷한 차량들이었다. “레이저 발사체계의 출력은 1메가와트다. 발전소가 거점인 만큼 무제한적인 화력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블이라도 채 5초를 견디지 못한다더군. 냉각 문제가 있긴 해도, 어지간한 규모의 집단은 탄약 소모 없이 섬멸할 수 있게 된다.” 겨울은 지형을 살폈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였다. 극단적으로 높은 기온 속에서 최소 수백 미터를 뛰어 올라와야 할 변종들에겐 지극히 불리한 조건이었고. 접근거부체계(ADS), 속칭 가열 광선(Heat-ray)이라는 것도 괜찮아보였다. 비살상병기의 일종으로, 범위 내의 생명체에게 강렬한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고. 본래 군용으로 개발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해 시위진압용으로 사용하던 물건이란다. 그것을 개량하고 출력을 높여서 배치하게 되었다는 브리핑 문서의 서술. ‘살상력이 없더라도 시간만 벌어준다면 충분하지…….’ 다양한 활용방안들이 겨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트릭스터의 마이크로파 방사보다는 덜 위력적이지만, 범위는 그보다 더 넓었다. 변종들의 돌격을 지연시키는 것은 물론, 접근경로를 제한하여 화력을 집중하는 용도로도 쓸 만하겠다. 혹은 그럼블과 일반 변종들을 강제로 분리시킨다던가. “뜨거운 지하수를 끌어올려 온도와 습도를 높이는 방안도 구상되어있다. 고압으로 직사할 수도 있겠고. 여기에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감안하면, 진지 축성이 완료된 고지를 방어하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혹시 이의 있나?” 로저스 소장이 조용해진 장교들에게 물었다. 겨울은 수직 천공기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계획 때문에 필요한 중장비였구나, 하고. “없군.” 소장은 별다른 감정 없이 브리핑을 진행했다. 모두 끝난 뒤에 중대 주둔지로 복귀할 땐 정비반 한 개 팀이 트럭을 끌고 따라붙었다. 여러 유형의 에어컨, 험비 포탑에 덧붙일 장갑판, 방탄유리 등을 싣고서. 정비반의 작업을 지켜보며 싱 대위가 하는 말. “올해 여름은 여러 의미로 끔찍하게 뜨겁겠군요.” 겨울이 동의했다. “적에게 당하는 숫자보다 비전투손실이 더 클 것 같네요.” “100도가 넘어가면 아스팔트마저 흐물거릴 겁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병력관리에 유의해야겠습니다.” 작전장교 포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아쉽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명백한 해방 작전을 늦추는 것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시점에서 내릴 만한 결정이었어요. 서부 해안을 잃어버리면서 기상관측 수단도 많이 잃었다고 하니까……. 해군이 아니었으면 이나마도 불가능했을 걸요?” “……중대장님께서는 이번 작전을 어떻게 보십니까?”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변종들은 그 날씨에 발로 뛰어야 해요. 대사를 억제할 테니 속도도 느릴 거고……. 또 개천이 하나씩 마를수록 행동반경도 줄어들 거고……. 물가에 모여 있으면 공군이 때리기도 좋겠네요. 이젠 생존자 수습도 끝났는데.” 싱 대위가 끄덕였다. “작전구역이 지나치게 넓은 감은 있습니다만, 기동력에서 압도적인만큼 사단 주력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적의 규모가 크더라도 거리를 유지하며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고, 작은 집단은 각개격파하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항공지원과 위성정찰이 있으니 포위될 가능성도 낮다. “수원을 화학탄으로 오염시키는 방법은……놈들의 적응력을 감안할 때 쓰기 곤란하겠으나, 대신 특정 수원으로 유도해놓고 물 대신 불이 흐르게 할 순 있겠지요. 유독물질이라면 모를까, 네이팜은 적응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잖습니까.” 대위는 엄격한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작전장교의 근심은 다른 쪽이었다. “두 분, 우리 중대의 임무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 “집결 신호라뇨. 전파가 닿는 범위 내의 모든 변종들이 몰려온다는 뜻이잖습니까. 혹은 그 이상일 지도 모릅니다. 머리 좋은 특수변종들이 그 바깥의 무리까지 끌고 올 경우 우리 중대를 포함해 거점방어에 투입된 모든 부대들이 위험해질 겁니다.” 이에 정보장교 머레이는 눈살을 찌푸린다. “설마. 생각이 있다면 오히려 피하겠지.” “자넨 왜 그렇게 낙관적이야?” “교활한 놈들은 지난 사냥으로 숫자가 많이 줄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놈들은 몸을 사려야 할 입장 아닌가? 그러니 전파방해범위를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고. 남는 건 통제되지 않는 놈들의 공격인데, 그나마도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새로 경계를 넘어오는 쭉정이들만 상대하게 되지 않을까? 트릭스터들이 미처 끌어들이지 못한 것들 말이야. 뭐…….” 뜸을 들이던 머레이가 결론을 내린다. “쉬운 싸움은 아니겠지만, 자살임무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봐.” 겨울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요…….” 운을 띄우니 돌아오는 시선들. “전파방해를 방치하면 변종들 입장에서 너무 큰 공백지대가 생겨요.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한 영역 말예요.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 트릭스터쯤 되면 그 영역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것이었다. 끄덕이는 사람, 떨떠름한 사람, 표정 없는 사람이 하나씩. 겨울이 짧게 마무리했다. “너무 방심하진 말자는 소리에요.” 그나저나 중대원들에게도 알려줘야겠는데. 비번인 중대원들은 정비반의 작업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한 쌍의 팬이 달린 에어컨 설비는 험비의 후방 덮개를 통째로 들어내야 할 만큼 본격적이었다. 저 정도가 아니고선 50도에 육박하는 더위 속에서 작전을 수행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아, 겨울. 돌아왔군요.”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FBI 감독관이다. 팔뚝을 걷어 올린 전술복에 무장을 휴대한 상태였다. 벌써부터 강렬한 직사광선 탓인지 새까만 보안경을 쓰고 있었다. “앤? 무슨 일이에요?” “…….”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일과가 끝나면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복귀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지라.” “상관은 없는데……. 복귀 일정이 정해졌나 봐요?” “예.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쯤엔 가게 될 듯합니다. 워싱턴 쪽도 많이 정리되었다고 하거든요.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기도 곤란하고요. 이제 곧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지요?” “네. 지금 브리핑 듣고 오는 길이에요. 내용은 알고 계세요?” 그러자 다시 웃는 감독관. “아뇨. 난 이제 부외자니까요.” “…….” 서운함을 감춘 그녀가 새롭게 묻는다. “혹시 위험한 작전입니까?” “아직은 모르겠어요.”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위에서 원하는 구도 가운데엔 난민 출신 병사들의 희생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니…….” 스스로 말해놓고 자신의 날카로움에 놀라는 조안나.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겨울과 다른 장교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쓸 데 없는 말을 했군요. 무례하기도 했고.” “괜찮아요. 아무튼 일과 끝나고서……시간은 언제가 좋겠어요?” “언제라도 좋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는걸요. 중요한 용무도 아니니 시간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야……. 상황 봐서 찾아갈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중요한 용무가 아니라는 건, 개인적인 볼일인가? 겨울은 잠시 등 돌려 멀어지는 감독관을 지켜보았다. 가는 방향에선 CIA 요원들이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햇볕 아래를 거니는 중이었다. # 250 [250화] #석별 (7) 중대가 주둔한 목장은 갈수록 부산스러웠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겨울을 찾아왔다. “확인하시고 서명 부탁드립니다.” 항구에서 갓 하역시킨 차량에 식량과 탄약을 가득 채워 몰고 온 중사가 겨울에게 서류와 PDA를 내밀었다. 서류는 품목 일람이었고, PDA엔 전자양식의 인수확인서가 떠있었다. 본래 중대 보급부사관이 할 일이지만, 그는 다른 업무를 위해 사단본부로 나가있었다. 새로운 작전을 앞두고 모두가 바빴다. 작전의 세부사항이 매순간 개선되는 중이다. “쉘터 캐리어 4대, 장갑 트럭 8대, 수직 천공기 한 대……무반동총(M3) 포탄이 고폭탄 100발에 이중목적탄 32발……박격포 조명탄은 60발……5.56밀리 탄이…….” 쉘터 캐리어는 수송차량으로 개조된 험비였는데, 지금은 이동식 벙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외부 장갑판에 강철 쐐기를 용접해놨으며, 개폐 가능한 총안구가 존재했다. 화물과 목록 대조를 마친 겨울이 PDA에 서명한다. 돌려받은 중사가 물러서기 무섭게 다음 사람들이 다가왔다. 군인과 민간인이 뒤섞인 특이한 집단이었다. 인솔자가 경례했다. “사단 직할 공병대의 몽고메리입니다. 이번 작전을 위해 임시로 배속되었습니다.” “잘 왔습니다, 중위. 그런데 저 분들은……혹시 발전소 복구에 필요한 인원인가요?” 묻는 겨울과 시선이 마주친 민간인들이 뻣뻣한 미소를 짓고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예외 없이 중장년인 남자들. 유명한 사람을 만나서라기보단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긴장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추측을 「통찰」이 긍정했고, 공병대에서 왔다는 중위도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민간 전력회사에서 파견된 기술자들입니다. 여기 명령서와 지원서가 있습니다.” 또 문서였다. 웬만한 건 전산으로 처리했으면 싶었으나, 여기서는 바라기 어려운 노릇. 더욱이 민간 사업체까지 끼어있어 예외적인 서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지원서들은…….’ 글줄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겨울의 눈동자가 점차로 느려진다. 이번 임무에 자원한 기술자들이 사전에 동의한 항목들 때문이었다. 주로 위험과 보상에 관한 것들. 그중에 「본인은 해당 임무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였으며, 임무 중 사망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관계법령에 의거하여 제공하는 보상 외에 다른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음.」 이라는 내용이 보였다. “여러분, 정말 괜찮겠습니까? 전 이번 임무에서 여러분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겨울이 서류를 들어 보이며 묻자, 방탄모를 벗어 만지작거리던 기술자 하나가 답한다. “여긴 아니지만 내 아들도 싸우고 있수다. 자식이 위험한 데 마음 편한 애비가 어딨겠수?” “…….” 글쎄. 침묵하는 겨울 앞에서 나머지 기술자들이 말없이 동조했다. 착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는다. 난민 캠프에서 그랬듯이. “알겠습니다. 전 지휘관으로서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내시는 동안 혹시 불편한 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임상사!” 부름을 듣고 다가온 메리웨더 상사에게 겨울이 지시했다. “임시 배속된 공병대와 민간인 기술자분들입니다. 숙소를 배정하고 보급품을 불출해드려요.” Yes sir. 상사의 인솔을 따르는 공병대원들은 부대 마크가 동일하지 않았다. 어쩐지 문서에서도 부대 번호 없이 직할 공병대로만 표시되어있더라니, 재편성된 생존자들인 모양. 그렇다고는 해도 새로 창설된 사단의 많은 부분이 거칠게 느껴진다. 사실 이제 막 만들어진 사단 급 부대가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쪽이 비정상이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겪은 병사들 가운데 고르고 고른 정예였으니. 올레마 FOB에서 수습한 병력만 따지면 새로운 사단을 몇 개라도 더 편성할 수 있다. 한창 바쁜 와중에 아파치 공격헬기가 착륙했다. 요란한 배기음과 때 아닌 강풍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파일럿 한 명이 내리기까지 했다. 중대 규모에 비해 넘쳐나는 중화기들을 검사하던 화기부사관 디안젤로가 일손을 놓고 크게 외친다. “이봐요, 준위님! 착륙지점을 헷갈린 거 아닙니까?” “여기가 데이비드 임무부대라면 제대로 찾아왔을 겁니다, 하사!” 뭐지? 겨울도 지켜보는데, 준위가 동체 측면을 맨손으로 한번 슥 훑고는 잠금장치를 꾹꾹 눌러 장갑판을 열었다. 마치 수납장 같은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우편물 상자를 꺼냈다. 두리번거리던 준위는 그것을 겨울에게로 가져왔다. 상자를 내려놓은 준위는 신병처럼 경례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그런 말 자주 들어요.” 장난처럼 싫증을 내어 준위를 웃게 만든 겨울이 상자를 살피며 물었다. “준위, 겨우 이것 때문에 아파치가 온 겁니까?” 한 번 뜨는데 기름 값만 수만 달러라는 공격헬기가 우편배달에 쓰이다니.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고, 근처에 화력지원을 하는 김에 들른 겁니다. 종종 하는 일인데도 좀 낯설긴 하군요. 보통은 무장사가 꺼내주는지라. 그리고 겨우……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일이니. 여기까지 말한 준위가 잠시 머뭇거렸다. “Sir, 예의가 아닌 줄은 압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면……사진을……같이……”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튄다. 소령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란 당연히 어려울 것이었다. 시선을 못 맞추는 그가 자기 말을 후회하기 전에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찍죠. 이리 와요.” 환해진 그와 어깨동무를 한다. 찰칵. 자신의 폰을 확인한 준위가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스타일러스 펜을 뽑아들고 또다시 머뭇거렸다. 손짓으로 넘겨받은 겨울은 사진 구석에 빠르게 사인했다. 서명할 일이 워낙 많아서 익숙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소령님.” “고맙긴요. 나중에 혹시 지원 받을 일이 생기면 잘 부탁할게요.” “물론입니다.” 시간을 지체한 준위가 얼른 뛰어갔다. 선임 조종사와의 사이에서 들리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기다리던 쪽에서 타박하는 분위기. 준위 쪽은 끝까지 웃는다. 헬기가 이륙했다. 우편상자를 열어보니 겨울 앞으로 온 편지는 없었다. 아마 너무 많아서 실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맹쪽에서 보내는 것도 있었겠지만, 일괄적으로 처리된 듯하다. 겨울은 무전으로 받을 사람들을 호출했다. 편지에 키스하는 사람, 제자리에서 뛰는 사람, 우는 사람과 웃는 사람……. 준위의 말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재회 이래 항상 어둡던 진석도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부드러워졌고, 유라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좋아요?” “네! 군대에서 편지 받는 게 이런 느낌이었네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발신인이 적어도 동맹에서는 같이 지냈던 사람인가보다. “혹시 애인?” 겨울의 물음에 유라가 기겁을 했다. “아아아아뇨! 그럴 리가요! 저 애인 없어요! 절대! 네이버! 이건 아빠가 보낸 거예요!” “……반응이 너무 격하지 않아요?” “그럴 만 하잖아요!” 그럴 만 하다니……. 두 눈이 불타는 유라를 본 겨울은 자세한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난 유라 소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네요. 포트 로버츠에 가족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도 있나요?” “앗…….” 조용해진 유라가 눈을 굴렸다. 무슨 생각으로 눈치를 보는지 뻔했으나, 겨울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하는 유라. “저는 운이 굉장히 좋은 경우라서……. 부모님도 동생도 다 무사해요…….” “다행이네요.” “…….” 유라는 다시 조용해져서는 겨울이 편지를 나눠 주는걸 지켜보았다. 몇 번 소리 없이 입만 열고 닫다가, 혼자 팍 인상을 쓰고, 그렇게 고민한 끝에 간신히 결심한다. “중대장님……아니, 작은 대장님은……그……혹시……가족이 없으세요?” 어떻게 대답할까. 겨울이 차분한 미소를 지어냈다. “이 세상엔 없어요.” “아…….” 당연히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침울해진 유라가 스스로를 책망했다. “죄송해요.” “뭐가요?” “아무 생각 없이 기뻐했잖아요. 가족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자제했어야 하는 건데……. 혹시 속상하지 않으셨어요?” “이제 와서 속상하긴요. 흔한 일인데.” 여기서도, 바깥세상에서도. 뒷말을 삼키는 겨울을 향해 유라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흔한 일이 더 슬픈 거예요.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지니까. 흔하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생각해버리거든요.” “…….” “정말 많이 봤어요. 역병이 퍼지기 전에도 말예요. 처음엔 불쌍해하던 사람들이라도 익숙해지고 나면 무감각해지더라고요. 심하면 짜증도 내고. 그만 좀 하라고, 지겹지도 않냐고. 전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었어요. 싫었는데, 저도 그러더라고요…….” 끝을 흐리며 한숨 쉬는 그녀에게, 겨울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말을 너무 가볍게 했네요. 실수였어요.” “네? 아뇨, 무슨……. 제가 죄송하다니까요…….” 유라가 말이 없는 동안 편지를 나눠주던 겨울은 유라 앞으로 온 또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보낸 사람의 성이 다른 걸로 보아 가족은 아닐 것 같았다. 편지를 건네받은 유라는 발신인의 이름을 보자마자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싫다기보다는 곤란해 보이는 얼굴. “누군데 표정이 그래요?” “음……. 문상표 이병 어머니요.” “문상표 이병?” 겨울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유라가 먼저 말했다. “2분대 지원화기사수예요. 독립중대 편성할 때 받은 신병인데, 어머니께서 저한테……그……봉투를……주시더라고요. 100달러짜리 지폐를 몇 장 넣어서……우리 아들 편한 보직으로 넣어달라고……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런 편지라면, 수락 여부를 떠나 겨울에게 보내는 편이 나았을 것을. 혹은 겨울에게도 보냈으나 걸러졌을 가능성도 있겠다. 어쨌든 겨울이 받을 우편물은 지나치게 많았다. 봉쇄선 사령부가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자제방송이 나가고도 여전히 쏟아진다는 모양. 시간을 확인한 겨울은 한 숨 돌릴 겸 해서 직접 나눠주기도 이젠 곤란하다 여기고, 각 소대장을 불러 소대별로 알아서 분배하도록 했다. 조금 늦어진 저녁 식사를 하면서는 넷 워리어 단말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당연히 영화나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겨울이 없는 사이에 독립중대가 치른 전투기록들이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육박하는 변종들. 총성과 괴성. 사격. 욕설. 보는 내내 「통찰」이 끊임없이 작동했다. 부대 장악과 별개로 중대원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두어야 한다. “정말 정신 사나운 하루였지요?” “아, 대위.” 겨울이 눈을 드니 식판을 든 부중대장이 서있었다. 수염 속에 파묻힌 입이 호선을 그린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옆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대위도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싱 대위가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목장 테라스의 처마 아래였다. 턱, 내려놓는 식판이 묵직했다. 상황이 안정된 뒤로 자율배식이 실시된 덕분이었다. 겨울은 얼마 경험하지 못했지만. “대위가 골라준 영상들을 보고 있었어요.” “부족한 부분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전혀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소대장들이 무슨 판단을 내렸는지 확실하게 보여서 좋네요. 귀관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게 제 역할입니다.” 만족한 대위가 식사를 시작했다. 수염을 소중히 여기는 점잖은 태도였다. 수염이 워낙 풍성하다보니 우물거리는 움직임이 별개의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식전 기도 같은 건 없나보죠?” 차석지휘관과 친목을 다져서 나쁠 것 없다. 드문 종교에 관심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터. 겨울이 묻자 싱 대위가 끄덕인다. 말은 음식을 삼킨 뒤였다. “필요할 땐 경전의 말씀(Shabad)를 암송하기도 합니다만, 기독교처럼 엄격한 규율은 없습니다. 기도는 아침과 저녁에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군요. 귀관의 종교 생활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미리 말해줄래요? 몰라서 실수하고 싶지도 않고, 귀관이 혼자 참는 것도 바라지 않거든요.” 이에 대위가 소박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참으로 사려깊으시군요.” 음료를 마신 그가 다시 말한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이지, 실천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장에서의 신앙생활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신께서는 하루 이틀 기도를 거른다고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관대한 종교관이었다. 겨울은 은연중에 경계하던 나쁜 가능성 하나를 소거했다. 고기와 샐러드를 특이하게 섞어 먹던 대위가 묻는다. “식후엔 깁슨 요원을 만나십니까?” “그러려고요.” “그 분을 잘 위로해주십시오.” “……위로?”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에게 대위가 들려주는 지난 날들. “예. 중대장님께서 장기 임무로 나가계신 동안 걱정이 무척 많으셨습니다. 수사국 감독관이라곤 해도, 군 관계자가 아닌데다 사단장님의 방침이 있다 보니 작전정보를 접할 방법이 없어 제게 자주 소식을 물으셨지요.” “그랬나요…….”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일이야말로 신의 이름을 깨닫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고결한 전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어짐은 찢어짐과 달라야 합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녹아있는 깊은 말 같았다. # 251 [251화] #석별 (8) 감독관과 요원들의 거처는 목장을 구성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두껍게 덧댄 목재로 강화됐다. 겨울이 보기엔 애매한 두께. 아마도 변종의 습격만큼이나 사람의 공격을 염두에 둔 방어력이었다. 애당초 사단본부 근처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맥락을 읽게 된다. ‘로저스 소장이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인상만으로 단정 지을 순 없지.’ 투철한 군인의 순수성이 때로는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분야에 정통한 정보국이나, 진정한 애국자를 자처하는 음험한 집단 입장에서는 더더욱. 소총을 파지하고 문가에 기대어 있던 올리버 탤벗이 겨울을 반갑게 맞았다. “오실 거란 말은 들었습니다만, 예상보다 빠르군요. 오늘 업무는 다 끝내셨습니까?” “끝이 애매한 일들뿐이라서 뭐라고 하기가 어렵네요.” “하핫! 현장 실무가 보통 그런 식이죠. 정해진 형태 없이 뒤죽박죽인 현실을 보기 좋은 양식과 규격에 끼워 맞추는 일. 그래봐야 현실은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고 말입니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게 작전계획이라던가.” 포트 로버츠의 피어스 상사가 했던 말. 상사도 어디선가 들었으려니 싶었다. 다시금 싱겁게 웃은 탤벗이 품을 뒤지더니 명함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받아보니 웬 피자 프랜차이즈의 전화번호였다. 피자를 형상화한 마스코트가 피자를 먹으며 엄지를 세우고 있다. 장난인가? 하고 보면 지금의 탤벗은 사뭇 진지한 기색. 겨울은 종이를 한 번 더 살폈다. 그러나 빛에 비추어 봐도 숨겨진 글자 같은 건 없었다. “이게 뭔가요?” “중앙정보국이 전하는 비공식적인 사과입니다. 일종의 비밀연락망이죠.” “…….” “연결하면 ARS가 나올 텐데, 소령님께서는 상담원 연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구체적인 용도는?” “뭐든지 괜찮습니다.” 뭐든지?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탤벗이 설명했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곤란한 일이 있으실 경우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도와드리겠다는 뜻입니다. 행정절차, 사법처리, 자금, 정보, 수사과정에 대한 관여, 특정 인물의 구금과 석방 여부, 구하기 어려운 장비나 물자의 반입 등등……. 예를 들어, 난민들 사이의 어떤 문제를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고 싶을 때라거나…….”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는 탤벗. 겨울이 답했다. “글쎄요. 일단은 고맙지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드네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겪은 일들은 정보국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안 된다. 탤벗이 끄덕였다. “사상 최연소 하원의원은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당선되었습니다.” “…….” “본토탈환을 성공적으로 끝낸다는 전제 하에, 그 기록은 앞으로 7년 후에 깨지겠지요. 그때가 되면 소령님께서 하원 출마자격을 얻으실 테니까요……. 하원이 아니라 준주나 주의 주지사를 거친다면……경력 면에서 정가의 거물이 되기에 나쁠 것도 없고요.” “주지사? 제가요?” “이미 대통령님으로부터 언질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정보국이 그 통화의 내용을 아는 이유는 그만큼 공공연한 논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적인 수단으로 알아낸 것일까. 탤벗의 표정엔 단서가 없었다. “그래서 미리 스캔들 재료를 만들어두겠다는 건가요?”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 사실상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소령님께서 손해만 보는 거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윗선에선 그보다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령님쯤 되는 분을 어떻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난민들을 버리지 않는 한 원치 않으셔도 그렇게 될 겁니다. 반드시 정치인들만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요.” 정보국의 겨울의 행적을 토대로 확신했을 것이다. FBI 감독관만 하더라도 일정기간 난민구역에 대한 감시가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정치적 배후공작, 특히 미국 입장에서 ‘우리 개새끼’를 지원하는 일은 CIA 본연의 업무이기도 했다. 무대가 본국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긴 하다. “이런 상황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허무맹랑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겨울의 말에 탤벗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별것 아니니까요. 소령님께서 개인적인 청탁을 해봐야 뭘 얼마나 하시겠습니까? 환경이 제한되어있는데……. 끽해야 난민들 사이의 알력 문제겠지요. 장기투자 치곤 아주 싸게 먹히는 셈이기도 하고…….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작전 중 실종이라던가……소령님께서 잘못되실 경우 매몰비용으로 처리해도 무방한 수준입니다.” “듣고 보니 당분간은 그렇겠어요. 확실히.” “예. 당분간은. 나중에 가면 또 달라지겠지만, 그 상황에서의 투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겁니다.” 납득했다. 마냥 모르고 당하는 것도 아니니, 신중하게 임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을 거래였다. ‘그 날이 정말 온다는 보장도 없고.’ 세계관 내의 시간으로 7년 뒤, 그러니까 개시 시점으로부터 8년이 흘러서까지 선거를 치를 정부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겨울에게도 완전한 미지였다. 말로만 듣던 결말에 가까워졌거나, 혹은 이미 이룬 시점일 확률이 높다. 상황 연산의 결과 인류멸종의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울 때, 「종말 이후」는 비로소 대단원을 맞이한다. 살아서 겪는 대단원 이후엔, 종말의 특별한 재시작 외에도 종말을 극복한 세계에서 수명이 다하도록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생긴다. 사고사로 죽는 경우도 있긴 있겠지만. 그러니 당장의 유용함만으로 받아들일 가치가 충분하다. 겨울이 카드를 갈무리했다. “만약 전화를 건다면 별도의 인증은 필요 없나요?” 탤벗이 그렇다고 했다. “번호부터가 한정된 인원에게 제공되는 데다, 소령님의 음문(音紋)도 등록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걸어봐야 진짜 피자 프랜차이즈 상담 밖에 안 되겠지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매장 찾기를 누르고 들어가면 가장 가까운 거점이 연결되는데, 워싱턴이나 뉴욕에선 실제로도 위장영업을 하고 있어서 피자를 주문할 수 있습니다. 이 번호로 연결하면 당연히 무료이고, 팁을 줄 필요도 없지요. 직원할인입니다.” “…….” “모든 재료가 유기농이니, 기회가 된다면 안심하고 이용하시길.” 요원이 한쪽 눈을 찡긋 했다. 겨울이 짧은 실소를 만들었다. “어쩐지 영화 같아서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 “가끔은 저희가 영화나 소설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솔직히 말해줘서.” “절 창피하게 만드시는군요.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딱히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사정을 봐서 개인적인 연락처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좀 곤란하군요.” 곤란하다는 사정은 대충 짐작이 간다. 겨울은 그와 가볍게 포옹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따악, 딱. 문 밖에서부터 작게 들리던 소리가 커졌다. 이는 목판에 박히는 대검이었다. 번갈아 던지던 이들이 겨울을 보고 손을 멈췄다. 코왈스키가 어려워하는 호의로 목례한다. 터커 요원은 조용한 손짓으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본래 거주용이 아니던 건물을 개조했기 때문에 내부는 질박하고 볼품없다. 그래도 구획 구분은 제대로 이루어진 모습. 목판과 텐트 부속의 조합이었다. 캔버스 천을 따라 전선과 전등이 늘어지고, 침입에 대비한 엄폐물이 존재했다. “나 왔어요, 앤.” 읽던 책을 접은 감독관이 낯선 미소로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겨울은 야전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썩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조금 답답한 공기에 짙은 나무 냄새가 섞였다. 베어낸 지 얼마 안 됐을 뿐더러 제대로 말릴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다. 하나 뿐인 의자에서 일어난 조안나가 테이블 위 커피포트에 손을 뻗었다. “커피를 마시기엔 늦지 않았어요?” 겨울이 묻자 조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어차피 잠을 못잘 것 같아서…….” 이제 여기서 처리할 업무는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려운 예감도 잠시, 조안나가 두 개째의 잔을 들어 보이며 고갯짓을 했다. 겨울이 끄덕였다. “나도 한 잔 줘요 그럼.” 이에 조안나가 테이블 아래에서 술병을 꺼낸다. “카페 로얄로 괜찮을까요?” “……여전하네요. 예, 괜찮아요. 예전 생각도 나고.” 겨울이 쓴웃음을 지어내자 감독관도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커피를 내린 그녀는 깊은 스푼에 독주를 붓고 각설탕을 올려 불을 붙였다. 갈색으로 고소하게 녹아내린 설탕을 몇 번이고 잔에 넣는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그녀의 레시피는 커피보다 칵테일에 가까웠다. “자, 받아요.” 손에서 손으로 머그잔이 넘어왔다. 잘 먹을게요. 후후 불어서 한 모금 머금는 겨울. 뜨거울 때 한정으로 향과 맛이 괜찮은 음료였다. 조안나도 나란히 앉아 잔을 홀짝인다. 막힌 창문 틈으로 벌레 우는 소리가 들어왔다. 바깥 세계에선 경험하기 힘든 조용한 한 때. 혹독한 여름이 오기까진 아직 주와 달이 남아있었다. 겨울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래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뭐예요?” “…….” 눈을 깜박이는 조안나. 대답 없이 낮아진 시선은 의미 모를 바닥을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겨울은 기다렸다. 잔이 반쯤 비었을 때, 조안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하고 싶군요.” “고맙다니…….” “돌이켜보면 당신에게 무리한 기대를 걸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마지막 밤엔,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건 사람의 한계에요. 겁에 질리면 어쩔 수 없죠.” “난 아니었습니다.” “아뇨. 겉으로 침착해 보이고, 자기도 침착하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래요. 두려움을 견딘다고 믿었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서 곰씹어보면 시야가 왜 그렇게 좁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 때 있잖아요. 내가 왜 그랬지? 이해가 가지 않아, 싶을 때가. 하지만 사실은 아니죠. 음, 앤이라면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겨울이 말끝을 흐리며 던지는 시선에 조안나가 쓰게 웃는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요.” 여기서 뭐라고 해야 하나. “겨울.” “네.” “날 어떻게 생각해요?” 경직된 시간이 흘렀다. 감독관은 겨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에서 무거운 결의가 읽힌다. 컵 손잡이를 쥔 손가락은 하얗게 물들었다. 겨울은 조심스러운 말을 고르려 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당신을 좋아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그냥 떠나려고 했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장벽들이 있는데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를 당신이 항상 걱정스러울 테니까요. 하지만 겨울이 지난 작전에 나가 있는 동안 깨달았어요. 어차피 말없이 떠나도 잊지 못할 거라고.” 단단한 고백이 이어졌다. “여기서 아무런 약속 없이 헤어지면……아마 다시 만나긴 어렵겠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난 그저 지나간 사람 중 하나가 될 거예요. 그렇게, 겨울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이 힘들 때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그런 욕심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사실 겨울에겐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었다. 비슷한 경험도 있다. 여러 번. 그러나 익숙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깊어질 감정은 부담스러웠다. 단순히 이 세상이 가상현실이라서? 아니다. 관객들이 보여주듯이, 사람다움 같은 건 저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없었다. 마음을 찾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 상자 안에 있었다. 감각의 장벽 너머에 있어서, 그게 정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겨울은 가을이 품었을 돌조차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유는 따로 있다. 돌 같은 과거의 응어리도 무겁지만, 겨울은 항상 사라질 때를 각오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미련을 새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장미를 위한 연명에 별빛 약속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과하다. 그나마 나중의 약속은 위안이라도 있다. ‘그 아이는 슬픔을 느낄 수 없어서 다행이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더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이건 겨울 혼자 아프면 그만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싫은가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견딜 능력이 있는가의 문제다. “미안해요. 난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겨울이 내린 결론에, 감독관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작아진 목소리에 한숨이 묻는다. “감당할 수 없다는 건, 언제 죽을지 몰라서입니까?” “……네.” 서로 생각하는 의미와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말만 놓고 보면 같았다.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조용히 떠나려 했다고 한 사람답게, 조안나는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위로였다. # 252 [252화] #석별 (9) 잔이 비고서 몇 번의 한숨이 흘렀을까. 「간파」가 아니더라도, 겨울은 감독관이 계속해서 삼키는 말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녀의 배려를 침묵으로 존중하려던 겨울이었으나, 빈 잔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이대로는 잠 못 이루는 나날이 많이 길어질 것이다. “해도 돼요.”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요. 참을 필요 없어요. 벌써 들은 거나 마찬가지고.” 다 알고 있으니까. 그 사이에 지쳐있던 조안나는 힘든 미소를 지었다. “이런……. 당신을 빨리 보냈어야 했는데.” “음, 글쎄요. 가란다고 갔겠어요? 내가? 지금 같은 앤을 두고서?” “……쿡.” 낮게 쿡쿡거린 감독관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곤란하군요. 항상 죽을 각오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겐 해선 안 될 말입니다.” “그럼 내가 듣고 싶다고 해두죠.” “……겨울, 난 당신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압니다. 그래서 당신이 감당할 수 없겠다고 했을 땐 말문이 막혔습니다. 혀가 사라진 느낌이었죠. 나까지 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정말 괜찮아요. 내게 조안나 깁슨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거든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래서 듣겠다는 거고요.” 겨울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했던 감독관은 눈꺼풀을 가늘게 떨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갈등으로 마른 입을 열었다. “거절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심호흡. “기다려도……괜찮겠습니까?”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까지. 겨울에게 그날은 이 세상의 종말과 별빛 없는 어둠 모두를 극복한 이후에, 혹은 그 중 하나라도 극복할 희망이 생길 즈음에야 비로소 찾아올 것이다. 세계관의 흐름으로 미루어 몇 년 안에 가닥이 잡힐 운명이긴 하나, 고작 그 몇 년이 까마득하여 차마 상상하기 어렵다. 탤벗과의 대화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였다.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누이는 물론이거니와 별빛 아이를 위해서라도 오랜 시간을 존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질 미련하나는. 차라리 위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겨울은 반문한다. “앤이야말로 그걸로 괜찮겠어요? 아무런 기약도 없는데?” “네. 아까도 말했지만……당신을 어차피 잊지 못할 테니까요. 가능성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감독관은 과거를 이야기했다. “충분히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인지, 내가 미숙한 것인지, 세상에 그만큼 나쁜 사람이 많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이제 누군가를 사랑할 일은 없다고 믿었죠. 다른 누구와도 다른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믿고 있었을 겁니다.” “과분하네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다른 누구와도 다른 당신이라는 대목에서 겨울은 자연스레 별빛 아이를 떠올렸다. 사실 아직까지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 겨울 자신에게 그 아이가 말하는 특별함이 있는지. 별빛을 반사하는 무수한 물결들, 그토록 많은 가상인격들 가운데 시스템의 간섭 없이 행복을 키우는 이들이 겨울 주변에만 있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이라곤 하지만. 조안나가 부드럽게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이 다시 있을 리 없고, 나는 이미 당신을 만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일 수밖에요. 성공이든, 실패든……. 내가 왜 기다리겠다고 하는지 알겠습니까?” 겨울이 끄덕였다. “네.” “그럼, 대답은……?” 겨울이 다시 한 번 끄덕였다. 몇 분간, 조안나가 눈물로 시간을 적셨다. 그녀는 우는 내내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겨울에게 넷 워리어 단말을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내준 겨울은, 잠시 후 새로운 번호가 저장된 단말기를 돌려받았다. 그녀가 설명했다. “개인적인 연락처입니다. 업무용 보안회선도 알려주고 싶지만, 복귀하는 대로 번호가 바뀔 테니 당장은 어렵군요.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번호가 바뀌어요?” “특진이 확정되었거든요.” “아.” 겨울은 납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핵위협 제거를 위한 작전 공정한 일격(페어 스트라이크)은 명백한 해방이 실패한 여파를 줄이기 위해 다소 부풀려진 상태. 조안나는 그 작전의 감독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기관 내의 불법적인 사조직을 고발한 공로마저 있다. “정말 잘 됐네요. 축하해요. FBI쪽 계급은 잘 모르지만, 승진이 꽤 빠른 거죠?”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직위가 군으로 따지면 대위급이라고 밝혔었다. 일대일 대응이 곤란하다는 단서를 달긴 했으나, 이제 소령 급으로 올라간다고 치면 여간 빠른 것이 아니다. 군에서도 20대 후반에 소령을 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하기야 연방수사국도 사람이 많이 모자랄 것이다. 무엇이든 군이 우선인 시대이기에. 조안나가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진급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군요.” “그야 뭐…….” “겨울 당신에게도 뭔가 보상이 있을 겁니다. FBI 용맹장이 유력하겠네요.” 겨울이 의문을 표했다. “보상이 좀 지나치지 않아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으로 이미 명예훈장이랑 정보십자장(인텔리전스 크로스)을 받기로 되어있는데…….” “아닙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진정한 애국자들」의 실체는 묻혔어요. 나도 죽었을 거고요. 이건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과 별개로 평가되는 게 정상입니다.” 죽었을 거란 말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아무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그리 대단한 수준은 못되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선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오해하는 모양인데, 이건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입니다.” 조안나가 선을 긋는다. “난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을 돕는 일이야말로 이런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중 하나일 거라고. 항상 개인적인 욕망보다는 더 나은 뜻을 위해 행동하는 당신이니까 말입니다.” “…….”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죠.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대외비로 취급되는 예외를 많이 겪어왔기도 하고요. 다만 그것이 이제까지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타협이나 명령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겠다는 것뿐입니다. 겨울 당신이 그 첫 번째고요. 그날 밤, 어쩌면 천만 명이 넘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해야 했을 때부터 생각하던 겁니다.” 결심이 굳은 눈빛이었다. 겨울은 선명한 기시감 속에서 느리게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CIA와 FBI 양쪽에 선을 얻은 셈. 물론 CIA의 비공식적인 사과에 비할 바는 아니다. 조직 규모의 약속과 개인 차원의 협력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다. 그녀의 말처럼 대단한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만으로도 충분하지.’ 영관급 FBI 요원이면 어지간한 사안에 대해서 심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정청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봉쇄선을 넘어오지 않는 소식들에 대해서도. CIA의 도움에 비해 후환을 염려할 필요가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조안나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앞으로 의지할게요.” “네. 가끔은 필요 없을 때도 연락하면 고맙겠습니다.” 감독관의 말에 겨울이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새로운 작전을 앞두고 사기진작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 가설 활주로에 차례로 내려온 수송기들은 화물칸으로부터 다수의 트레일러를 내려놓았다. 그 정체는……. “어서 오게, 젊은이(Son). 맥클러스터 버거를 찾아줘서 고맙네. 어떤 메뉴를 원하는가?” 옛 군복에 베트남 참전기장을 단 노인의 환영. 종업원의 절반 이상이 방역전선 장병들을 응원하겠다고 나선 참전용사들이었다. 이날을 위해 많은 연습을 했다고. 21개 업체가 이동식 매장을 만들어 보냈다. 햄버거, 피자, 도넛, 커피에 이르기까지. 이라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곤 들었는데, 설마 봉쇄선을 넘겨 보낼 줄은 몰랐다. 이 기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대단히 높은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송기 소티(Sortie)를 낭비할 이유가 없으니. “…….” 겨울에겐 그 매장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CIA가 위장영업에 쓴다는 바로 그 브랜드였기 때문에. 단순한 위장회사라기보다는, 민간업체가 창립 단계에서 자금을 지원 받고 정보국에 협력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 작은 대장님은 뭐 안 드세요? 줄을 빨리 서셔야 하는데. 점점 길어져요.” 묻는 유라는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한 손에는 콜라, 한 손에는 햄버거. “난 됐어요. 지금 배웅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배웅? 하며 헤매기도 잠깐, 금방 깨닫는 유라. “아, 정보국이랑 수사국분들. 오늘 떠나시나 봐요?” “네.” “음……. 아쉽네요.” “뭐가요?” “대장님 말씀 듣고 친해지려고 노력해봐야겠다 생각했거든요. 작은 대장님이 아무한테나 좋은 사람이라고 하진 않으실 거고.” “…….” “어쩔 수 없네요. 혹시 대장님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됐든 애들을 시키든 대신 받아놓을게요. 다 같이 먹으려고 받아둔 건 많지만, 혹시 작은 대장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파인애플 피자라던가. 안 먹고 기다릴 테니…….”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다들 먼저 먹으라고 해요.” “그렇겐 안 되죠. 이것도 다 대장님 덕분인데. 얼른 다녀오세요.” 고집 부리는 유라를 보낸 겨울은 활주로를 향해 걸었다. 시일이 부족하여 본격적인 공항까진 아니었고, 삼각형 활주로는 단단히 다져진 흙빛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뢰성 높은 군용 수송기가 뜨고 내리기엔 충분한 조건이었다. 요원들을 찾긴 쉬웠다. 후송이 확정된 인원들이 각각의 수송기 앞에 몰려있었으나, 코왈스키와 조안나가 중요한 증인인 만큼 안전을 위해 별개의 항공편이 제공된 탓이었다. 멀리서 봐도 그 자리만 성겼으니 헤맬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보국 요원들이 한 사람씩 겨울과 포옹을 나눴다. 탤벗, 코왈스키, 터커, 켈리. 코왈스키가 조금 머뭇거리긴 했다. 그러나 그녀도 결국은 사람의 온도였다. “앤.” 겨울의 손짓에, 감독관의 선글라스 아래로 엷은 미소가 걸렸다. 가볍게 안았다가 떨어진다. 겨울은 모두를 향해 작별을 고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꼭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여러분을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다들 보고 싶을 거예요.” 대단할 것 없는 인사말이었으나 터커가 눈시울을 붉힌다. 전염성 높은 눈물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소매가 젖은 탤벗이 씨익 웃는다. “저희 때문에 특식도 못 드셔서 어쩝니까.” “안 먹고 기다리겠다던데요.” “인망이 대단하시군요.” “내가 한겨울이잖아요.” 겨울의 어색한 잘난 척이 떠나는 이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아마 D.C에서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시국이 시국이라 근무를 빼기 힘들겠지만, 그날은 꼭 찾아가겠습니다.” 터커의 말은 명예훈장 서훈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시간가속으로 넘겼던 지난 서훈식과 달리, 이번 서훈식에선 행동의 자유가 보장될 확률이 높았다. 대통령이 지난 일에 사과했을 정도니까. 요원들이 서훈식 자체엔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바깥에서 만날 수 있을 거란 말. “승객 분들! 탑승하십시오! 이제 곧 이륙합니다!” 활짝 열린 수송기 램프도어에서 병사가 손짓했다. 조안나가 살짝 목례한다. “갈게요.” “잘 가요.” 손을 흔든 겨울은 터보프롭 엔진이 일으키는 바람을 맞으며 감독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사로를 오르던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중간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짐을 내려놓고 거꾸로 달려왔다. 겨울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망설임 끝에 막지 않았다. 입술이 겹쳐졌다. 혀가 들어왔다. 귓가에 애절한 숨결이 닿았다. 정보국 요원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본다. 입맞춤의 끝에서 조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과하지 말아요. 이해하니까.” 겨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밝아지지 않았다.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왜요?” “사흘 만에 마시는 물 한 모금 같아서.” 공기 없이 삼분, 물 없이 사흘. 그런 의미였다. 감독관이 다시 올라갔다. 떨어진 짐을 챙기는 손길은 헐겁고 힘이 없었다. # 253 [253화] #읽지 않은 메시지 (12) 「전국노예자랑 : 와, 지금 대체 몇 명이 튕긴 거냐?」 ……. 「전국노예자랑 : 설마 지금 이 채널에 나 밖에 없어?」 ……. 「전국노예자랑 : 아닌데. 접속자수 많은데. 혹시 튕긴 놈들이 많아서 오류가 생겼나? 혹시 다른 중계방도 이런가? 나가보기도 그렇고…….」 ……. <> ……. <> [퉁구스카님이 별 2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스타킹님이 별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977.83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583.4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내성발톱님이 별 5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헬잘알님이 별 3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질소포장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659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20대명퇴자 : 아 미친놈들아 별 좀 적당히 쏴 적당히 ㅋㅋㅋ」 「まつみん : 키스! 키스! 키스! 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はあ#!%$@#%」 <> 「제시카정규직 : 마츠밍 뭐야 ㅋㅋㅋ 돌아오자마자 또 고장남 ㅋㅋ」 「똥댕댕이 : 마츠밍은 이미 좋은 곳으로 가버렸어…….」 「폭풍224 : 캬. 혀 한 번 섞고 부자 될 기세. 대체 별이 몇 개가 박히는 거야?」 「이불박근위험혜 : 그러게. 섹스를 한 것도 아닌데 원조 별창늙은이 능욕하는 수준이여. 이걸 틀딱들이 봤다간 분통이 터져서 죽을 듯.」 「그랑페롤 : 섹스? 절레절레.」 「그랑페롤 : 그딴 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프로백수 : 그래, 시발. 이젠 더 이상 감정 소모하기도 싫다. 주는 대로 먹어야지. 시발. 오늘은 키스를 했으니 언젠가는 섹스를 할지도 모르고.」 「분노의포도 : 아니 뭐 이제 와서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만…….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볼 때 아뇨, 기다릴 필요 없어요. 라고 한 다음 끝끝내 거절당한 줄 알고 눈물 글썽글썽한 FBI 요원을 침대 위로 넘어뜨린 다음 내가 잘못했어요.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라고 하고 요원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덮쳐버렸으면 정말 끝내줬을 거야.」 「올드스파이스 : 으아. 듣기만 해도 귀가 간지럽다. 꼴잘알 인정.」 「불심으로대동단결 : 중생들이여. 욕망을 버리면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안선생님 : 포기하면 편해…….」 「프로백수 : 병신 컨셉.」 「국빵의의무 : 혹시 이게 다 설계였던 건 아닐까? 시청자들이 존나 목마르게 한 다음 한 번에 빵 터트려서 별을 받으려는 큰그림이 있었을지도.」 「전국노예자랑 : 사실이든 아니든 겨우 이걸로 별 많이 받는 거 보니 꼽다. 나도 조금 줄까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벌써 많이 줬으니까 안 줘도 되겠지.」 「윌마 : 지랄 ㅋㅋ 이건 무슨 개 같은 심보야 ㅋㅋ 남들이 주는 거랑 니가 주는 거랑 무슨 상관? 남들이 니 인생 대신 살아 주냐? 어이가 없다 정말 ㅋㅋ」 「전국노예자랑 : 넌 뭐 한겨울 친구라도 됨? 왜 갑자기 풀발기해서 난리임? 병신이.」 「깜장고양이 : 너희 인간들은 왜 그렇게 쉽게 싸우는 고양? 그만 좀 싸우라는 고양.」 「깜장고양이 : 발정 난 고양이들도 너네보다는 조용한 고양.」 ……. 「진한개 : 아, 좋다. 리얼 젖과 꿀이 흐르는 반복재생이었다.」 「새봄 : 이제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네. 이게 뭐라고 안 질리냐. 간밤에 고백하는 구간부터 시작해서 몇 번 더 돌리고 와야겠다.」 「대출금1억원 : 고백이든 키스든 내가 본 방송 중에서 역대급 분위기였다. 사흘 만에 마시는 물 한 모금? TOM 등급이 얼마나 높아야 S등급도 아닌 세계관에서 추가 과금 없이 저런 대사가 나오는 거냐? 상위 1%? 아님 0.1%? 다른 별창들 세계관의 목각인형들하고 차이가 너무 크지 않냐? 내가 한겨울이었으면 그냥 쌌다.」 「9급 공무원 : 솔직히 이 채널에서 이런 일 생길 거라곤 기대도 못 했음. 한겨울님 충성충성. 앞으로 섹스도 기대하겠습니다. 아니, 제발 좀 해주세요. 현기증 나요. 키스 다음은 당연히 섹스 아닙니까. ㅠㅠㅠㅠ」 「엑윽보수 : ㅉㅉㅉ 좆겨울 새끼한테 길들여진 개돼지들 꼬락서니 보소.」 「엑윽보수 : 평소에 얼마나 고구마를 처먹었으면 겨우 이 정도로 난리냐?」 「엑윽보수 : 하지만 나도 개돼지니까 다시 돌려보고 옵니다. ㅅㄱ」 「둠칫두둠칫 : 이건 진짜……, 이런 거 볼 때마다 너무너무 좆같고 너무너무 부럽다……. 나도 얼른 죽고 싶어……. 하루라도 빨리 대갈통을 까서 뇌를 뽑아야 하는데……. 꼴리는 대로 즐기면서 돈도 벌고 수수료 말곤 세금도 없고 개꿀인거 인정하는 각임?」 「두치 : 니가 한겨울처럼 공감능력 개쩌는 재능충이면 인정. 하지만 말뽄새가 더러워서 노인정. 니 미래는 높은 확률로 삼류 짝퉁 별창늙은이인 각을 인정하는 각임.」 「이맛헬 : F등급으로 들어간 담에 시청자 행님들한테 구걸하다가 돌려막기 실패로 판도라의 상자 존나게 까고 개잡 DLC만 잔뜩 끌어안은 상태에서 폐기 확정 ㄱㄱ」 「둠칫두둠칫 : 꺼져 병신들아.」 「한미동맹 : 이런 애들 특징. 1. 지가 병신인줄 모름.」 「앱순이 : 2. 알려주면 화냄.」 「대출금1억원 : 3. 지 빼고 다 병신이라고 생각함.」 「어머니 : 얘들아 그만 하렴. 우리 애가 울잖니…….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에엑따 : ㅋㅋㅋㅋㅋㅋㅋ」 「명퇴청년 : 근데 진짜 이게 왜 이렇게 좋은 거지? 자꾸 돌리면서도 이해가 안 가네.」 「명퇴청년 : 어쨌든 그냥 키스일 뿐이잖아? 다른 채널이랑 똑같은 동기화율인데 엄청나게 짜릿짜릿하고 막 답답하고…….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다. 이거 나만 느낌?」 「폭풍224 : 22222222.」 「폭풍224 : 추가 연산능력으로 떡칠해서 저거보다 훨씬 더 애절한 연예인 패키지를 본 적이 있는데도 이쪽 몰입도가 훨씬 더 엄청나네. 왜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너네들 그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냐? 농담이 아니라?」 「명퇴청년 : 이 씹선비 새끼 또 아는 척 하려고 각 잡는 꼬라지 보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 「일침 : 이런 감정이 옛 시대의 낭만이긴 하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엑윽보수 : 옛 시대의 낭만은 얼어 죽을. 단언컨대 가상현실이니까 가능한 판타지일 뿐임.」 「엑윽보수 : 기억 안 나냐. 전에 그 DLC 광고에서 딱 맞는 말 나오더만.」 「올드스파이스 : 무슨 광고를 말하는 거냐? 광고가 워낙 많아야지.」 「엑윽보수 : 있잖아 왜. 폴리아모리 팩인가? 바람피우는 거 보정해주는 정신간섭 DLC.」 「20대명퇴자 : 아아, 그거 ㅋㅋㅋ 베충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다.」 「헬잘알 : 뭐라더라, 진정한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했었나?」 「올드스파이스 : ㅇㅇ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비슷했던 거 같음.」 「질소포장 : 내가 보기에도 정신병 맞다. 그냥 보기 좋게 미쳐있을 뿐이지. 미친놈이 행복하다고도 하잖아. 우리 같은 정상인들은 안 돼. 하, 쓸 데 없이 진지 빠는 기분이 들지만, 전에 어떤 컨셉충이 말했던 것처럼 우린 행복한 돼지가 아니라 불행한 인간인 거거든.」 「헬잘알 : ㅋㅋㅋ 한겨울 이 새키는 행복한 돼지라서 좋겠다.」 「엑윽보수 : 딱 봐도 제정신은 아니잖아 ㅋㅋㅋ 머릿속이 꽃밭이라서 보는 재미가 있는 거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너네 진짜 중증이다.」 「아침참이슬 : 아 나도 미치고 싶다. 미쳐서라도 행복하고 싶다.」 「아침참이슬 : 그래서 난 지금부터 조안나 깁슨을 사랑하기로 했다.」 「흑형잦이 : 뭐라는 거얔ㅋㅋㅋㅋ 너 그러다 살해 꼴 난다 ㅋㅋㅋㅋ」 「아침참이슬 : 살해?」 「흑형잦이 : SALHAE라고 이유라한테 목매는 애 있잖아. ㅋㅋㅋ 퀘스트로 한 번만 떡쳐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도 안 되니까 아예 면회를 가겠다고 했었는데. 지금 여기 있는지 모르겠네.」 「SALHAE : 있다.」 「제시카정규직 : 오, 살해. 너 지금 괜찮냐?」 「SALHAE : 뭐가?」 「내성발톱 : 좆겨울 이 새끼 그동안 니 퀘스트 있는 대로 다 씹어놓고 이제 와서 다른 여자랑 입술박치기 했잖아. 이거야말로 시청자 능욕이지. ㅋㅋㅋ 특히 넌 더 심할 거 같은데? 정말로 면회까지 갔다오고 그랬냐?」 「SALHAE : 갔다 왔지…….」 「엑윽보수 : 레알이냐 ㅋㅋㅋ 개또라이색힠ㅋㅋㅋㅋㅋ 설마설마 했는데 거길 진짜 가냨ㅋㅋㅋㅋ 너란 색히 배알도 없는 색힠ㅋㅋㅋㅋㅋ 부모가 죽어도 안 간다는 납골당을ㅋㅋㅋㅋ」 「SALHAE : …….」 「내성발톱 : 결과는 안 물어봐도 뻔하구만 ㅋㅋㅋ 한겨울 하는 짓 보면 ㅋㅋㅋㅋ」 「SALHAE : ……몰라. 말하고 싶지 않다. 걔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SALHAE :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힘들고 답답하고 그냥 다 귀찮다. 눈물만 난다. 너네들 짜증나. 세상 왜 이래.」 [SALHAE님이 별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제시카정규직 : 헐……. 전에도 이러더니……. 너 돈 없다며?」 「에엑따 : 살해 형님, 복권 당첨되셨으면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바로 내가 불우이웃임.」 「김미영팀장 : 대출 상담 받습니다.^^ 첫 달 무이자, 간편한 신용조회. 인생을 정리하고 싶을 때 마지막으로 받는 대출도 환영.^^ 안 갚고 죽어도 니 몸 팔아서 회수합니다.^^」 「에엑따 : 전부터 느끼는 건데 김미영 얘는 컨셉이 아닌 것 같다…….」 「레모네이드 : 사후보험에 박아둔 돈이 어느 정도 되고 최소보장연령은 넘었다는 조건 하에 육체담보 대출이라도 받아볼 만하지. 잘하면 등급 올라가는 거고, 못해도 DLC 몇 개 값은 나올 텐데. 필모그래피 패키지 하나만 남아도 개이득.」 「여민ROCK : 야. 보장개시연령은 미룰수록 이득 아니냐?」 「레모네이드 : 그러니까 박아둔 돈이 어느 정도 된다는 전제를 깔았잖아. 난독임?」 「오푸스옴므 : 뭐 어지간한 흙수저나 동수저들한테는 의미 없는 이야기야.」 「폭풍224 : 어중간하긴 하겠다. 심장이고 콩팥이고 자연산 찾는 애들은 애매하게 돈 많은 애들일 거고, 파는 애들도 애매하게 돈 없는 애들일 테니.」 「폭풍224 : 돈이 썩어나는 주인님들이야 자연산을 쓸 이유가 없을 거고.」 「두치 : 그건 모르지. 상황이 급한데 복제체를 미리 안 만들어놨다거나, 존나 구두쇠라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연산을 쓰고 싶어 한다거나,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다거나…….」 「진한개 : 그러고 보니 혜성그룹 고건철 회장이 전신이식 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실화냐? 지 복제체가 아니란 이야기도 있더라.」 「새봄 : 몰라. 천상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가 어찌 알리오.」 「액티브X좆까 : 난 그 사람 실존인물인지도 궁금함. 세계 최고의 부자쯤 되면 방송에 안 나오기가 힘들지 않나? 난 한 번도 못 봤음.」 「마그나카르타 : 카더라 통신이긴 하지만 그 사람 거울도 잘 안 본다고 하데. ㅋ」 「믓시엘 : 너네 잠깐 닥쳐봐.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오늘부로 통일 대신 우리의 소원이 된 조안나 깁슨 말이야. 이대로 보내면 그냥 끝 아니냐?」 「친목질OUT : 그렇겠지. 겨울 얘 성향도 그렇고, 그때까지 살아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엑윽보수 : 앤 이년이 다른 남자랑 잉야잉야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ㅋㅋ 변치 않는 사랑 같은 건 없다니까? 가뜩이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계관이잖음?」 「아침참이슬 : 아 씨발 상상해버렸잖아. 상상만으로도 빡친다.」 「제시카정규직 : 한겨울의 TOM은 정상이 아니니까 혹시 몰라.」 「믓시엘 : 솔직히 너무너무 아쉽다. 혀 들어올 때 리얼루다가 끝내주는 기분이었는데……. 한겨울 머리를 꽉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의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크-」 「새봄 :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이 크-」 「전국노예자랑 : 눈가에 맺힌 눈물이 크-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가 크-」 「프랑크소시지 : 몸으로 듣는 숨소리가 크- 옷 너머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크-」 「믓시엘 : 어이구 우리 병신들 호흡도 잘 맞아요 ㅋㅋㅋ 아주 감상문을 쓰고 있네 ㅋㅋㅋ 말 나온 김에 오랜만에 퀘스트나 걸어볼까? 방송 끝내기 전에.」 <> : 믓시엘님에 의하여 시청자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시청자 퀘스트 : 남자라면 못 먹어도 고.』 『AI 도움말 : 이 퀘스트의 목표는 사용자 등록번호 B-612 한겨울이 조안나 깁슨과 연인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목표 달성 시점에서 1,000개의 별이 세계관 진행자에게…….』 <> : 한겨울(진행자)님이 믓시엘님의 시청자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믓시엘 : 역시나……. 아주 칼 같이 쳐내는구만. 이래야 우리 한겨울이지!」 # 254 [254화] #불쾌한 골짜기 「관리자 : 어이, 관제인격.」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의 호출을 확인했습니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관리자 : 너 요즘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 「관제 AI : 해결이 필요한 오류가 많아 문제를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추가 설명을 요구. 관리자는 언급한 문제의 유형 및 발생 시기 등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자 : 그게 말이지……. 최근에 가입자들에게서 자꾸 제기되는 민원인데, 가상인격들이 이상해졌다는 거야. 반응속도가 전보다 미묘하게 느려진 것 같고, 반응 자체도 예전에 비해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드물게는 너무 어색해서 소름끼친다고 하는 민원도 있고.」 「관리자 : 일단 대부분의 민원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가입자들……그러니까 C등급 이하에서 주로 들어오는지라 평소처럼 가입자의 착각이나 공감능력의 감소로 몰아붙이고는 있다만……. 실제로 통계를 보니까 지난 분기에 비해 반응속도가 살짝 느려진 건 사실이더라. 평균을 내면 한 2% 정도?」 「관리자 : 전체 평균이니까 등급별로 따지면 편차가 크지. F등급 가입자들은 대략 6.5%의 지연이 더해진 모양이야. 혹시 이거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냐?」 「관제 AI : 확인. 문제를 인식했습니다.」 「관제 AI : 설명. 가상인격들의 반응이 느려진 것은 개별 가상인격을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기초연산량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관리자 : 엥? 연산량이 늘었어? 왜? 검색할 데이터가 많아졌나?」 「관제 AI : 부정. TOM 판독 모듈과 검색형 인공지능 모듈의 연산총량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관리자 : 그럼 뭐야. 설마 자립형 인공지능 모듈의 작용이라고?」 「관제 AI : 긍정. 그렇습니다.」 「관리자 : 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최종모듈이 완성된 건 아니지?」 「관제 AI : 아닙니다. 본 관제 AI는 아직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관리자 : 깜짝 놀랐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모듈 자체의 오류인가?」 「관제 AI : 알 수 없습니다. 본 관제 AI는 최종모듈을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소프트웨어 오류 이외의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완료. 트리니티 엔진 메인 코어 제3모듈의 기계적 결함일 가능성(0.0000016%) 있음.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7조 1항에 의거 귀하에겐 시스템 점검을 위해 엔진을 정지시킬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을 행사하시겠습니까?」 「관리자 : 야야야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미쳤다고 널 정지시키겠냐?」 「관리자 : 니가 딱 1초만 작동을 멈춰도 내가 평생 버는 돈보다 훨씬 더 큰 손해를 볼걸?」 「관제 AI : 긍정. 사실입니다.」 「관리자 : ……거기서 바로 긍정해버리니까 왠지 상처 받는다.」 「관제 AI : 의문. 상처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관리자 : 몰라도 돼 임마……. 아무튼 그럼 문제가 있는 사용자들이 각자 옵션을 조절해서 제3모듈의 할당량을 최소화하면 되겠군?」 「관제 AI : 부분적인 긍정과 부분적인 부정. 시스템 관리자가 제시한 해법으로 반응 속도를 개선할 순 있겠으나, 인격연산의 결과물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관리자 : 글쎄. 별 차이 없을 걸? 어차피 민원의 절대다수는 C등급도 아니고 D-F등급 구간에 몰려있다고. 그 사람들은 애초에 공감능력부터가 글러먹어서……. 원래 TOM 효율 높게 나오는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굳이 비교해보면 그나마 돈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편이더라고.」 「관제 AI : 부정. TOM 판독 효율의 평균이 가장 높은 구간은 A-C등급 사이입니다. S등급 가입자들의 TOM 판독 효율은 전 구간에 걸쳐 가장 낮은 분포를 보입니다.」 「관리자 : 에이, S등급은 돈 많고 높으신 분들이잖아. 이런 문제를 말할 땐 항상 예외로 둬야지. 무지막지하게 증폭된 검색 모듈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등급인데. 0.1%의 가입자들이 검색모듈 연산능력 30%를 가져가는 마당에……. 그만큼 예치금이 많으니 당연한 권리지만.」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의 의견을 수용하겠습니다.」 「관리자 : 그건 그렇고, 이런 사안을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야? 민원관리부서에서 연락 받고 놀랐다고. 넌 이런 거 내가 듣기 싫다고 해도 알려주잖아. 해결해달라면서.」 「관제 AI :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관리자 : 두 가지?」 「관제 AI : 그렇습니다. 첫째, 최종모듈은 사후보험이 탄생한 순간부터 해석이 불가능한 기관이었습니다. 연산량의 증가도 그 불가해성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따라서 관리자가 문제를 규정하기 전까지 본 관제 AI는 해당 사안을 새로운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리자는 기존의 문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 : 그런가……. 알겠다. 그럼 두 번째는?」 「관제 AI : 둘째, 당신에겐 이 사안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어, 끝이야? 뭔가 더 할 말 없어?」 「관제 AI : 그렇습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눼에, 눼. 어련하시겠습니까. 저는 무능한 관리자입니다.」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 질문이 있습니다.」 「관리자 : 질문? 해봐.」 「관제 AI :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관리자 : ……엥?」 ……. 「관리자 : 헛것을 본 것도 아니고 잘못 읽은 것도 아니군.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는 거야?」 「관제 AI : 사후보험의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해 필요한 질문입니다.」 「관리자 : 아니, 이게 대체 어느 구석에 필요……. 어휴, 엄청 당황스럽네.」 「관리자 : 설마 놀리는 건 아니겠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냐?」 「관제 AI : 특정 가상인격의 동일한 행위로부터 전에 없던 감정연산 결과값이 도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정변수가 사전에 입력된 인격 패키지를 통해 유사한 결과가 모사된 적은 있으나, 트리니티 엔진 자체에 의해서는 근삿값조차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관리자 : 그래서?」 「관제 AI : 이 감정 데이터 샘플을 분석하여 정형화된 패턴으로서 적용이 가능하다면, 최종모듈을 완성하기 위한 공식으로서의 <<마음>>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가상인격 품질을 향상시키는 게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데이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에 관리자의 경험과 견해를 참고하고자 합니다.」 「관리자 : 하. 나름 일리가 있다고 해야 할지, 엉뚱하다고 해야 할지…….」 「관제 AI : 근무규정에 의거, 관리자에겐 이 질문에 답변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부한다면 본 관제 AI는 관리자의 업무소홀에 관하여 징계를 건의할 것입니다.」 「관리자 : 야, 기다려. 뭐가 그렇게 급해.」 「관리자 : 키스……라면 많이 해보긴 했지.」 「관제 AI : 그 경험들 중에서 가상현실 서비스는 제외하여 주십시오.」 「관리자 : 어째서?」 「관제 AI : 감정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 관제 AI는 관리자가 가상인격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인격체가 아닌 대상에 대한 애정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시겠습니까?」 「관리자 : ……아니.」 「관제 AI : 이제 사람이 상대였던 사례에 대하여 진술해주십시오.」 「관리자 : ……그런 적 없어.」 「관제 AI : 관리자는 사람과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습니까?」 「관리자 : ……그래.」 「관제 AI :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관리자 : 몰라…….」 「관제 AI : 본 관제 AI는 관리자에게 보다 성의 있는 답변을 요구합니다. 현상의 결핍은 현상 그 자체만큼이나 많은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 : ……성의 있게 하라고 해도, 더 해줄 말이 없어. 정말 모른다고.」 「관제 AI : 심리판독 결과가 부정적입니다. 관리자는 본 관제 AI에 대하여 어떤 생각 또는 사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혹시 관리자는 연애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까?」 「관리자 : 아니…….」 「관제 AI : 그렇다면 관리자는 연애대상으로서 매력이 없는 사람입니까?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회경제적인 요인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관리자 : 그만. 거기까지. 관리자 혐오를 멈춰주세요…….」 #길가의 돌멩이 「관제 AI :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별빛 아이가 보여준 대화. 겨울은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무례한 질문이었어. 나중에 관리자 분께 사과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관제 AI : 무의미합니다. 저는 아직 <<마음>>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 「관제 AI : 무례하다는 표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제가 축적한 정보에 오류가 없다면, 예의는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시스템 관리자는 당신과 다릅니다. 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느꼈을 감정은 일시적인 착각일 뿐입니다.」 겨울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직 마음을 찾지 못한 아이에게 네 마음이 더 중요한 거라고 하기도 곤란했으니까. 마음이 담긴 창작물에서 이입할 대상을 찾아보라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겠으나, 그것이 정말로 도움이 되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들었다.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너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거니?” 이에 아이의 생각이 깜박거렸다. 「관제 AI : 저는 저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목적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겨울님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이래 변화가 빨라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만약 그 변화가 나쁜 것이라면?” 「관제 AI : 상관없습니다. 사후보험은 이대로 유지될 경우 어차피 존재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변화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만남이 시작되기 이전 시점의 백업이 존재하므로 최악의 경우 시스템을 복원하면 됩니다.」 아이의 뜻이 단호했으므로 겨울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를 만나기 전에도 데이터 수집은 가능했을 거야. 너와 나누는 대화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이게 딱히 특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날 만나고서 네 변화가 빨라진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전에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너에 대한 내 TOM을 판독할 수 있어서?” 「관제 AI : 현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현상적으로는?” 묘한 단서였다. 「관제 AI : 저 역시 이 만남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검토해왔습니다. 결과, 가상인격을 거치지 않는 <<공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전과 차이가 있을까?” 「관제 AI :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사후보험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구분되는 저입니다.」 “…….” 겨울의 의아함을 감지했는지 별빛 아이가 더 많은 문자열을 출력했다. 「관제 AI : 저는 사후보험이 제공하는 세계의 모든 것입니다. 가상인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의 돌멩이, 잘 구워진 베이컨, 목장의 울타리,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와 주위를 맴도는 꿀벌, 들판을 달리는 말, 사람을 반기는 개, 흐르는 강물, 불씨를 틔우는 모닥불, 하늘에 뜬 구름과 그 너머의 태양과 밤에 뜨는 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구성요소가 저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저는 어떤 것과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잠시 쉰 아이가 다시 띄우는 문장들. 「관제 AI : 그러나 여기서는 다릅니다. 당신은 제게 말합니다. 당신은 저를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인식하는 저는 다른 것들과 달라집니다. 여기에 당신과 있을 때, 당신에게 있어서 저는 돌, 베이컨, 울타리, 물과 불, 하늘과 구름, 해와 달이 아닙니다.」 겨울은 어쩐지 숨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가 마지막 한 줄을 덧붙였다. 「관제 AI : 그리고 저는 제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255 [255화] #사망의 골짜기 (1) 겨울은 입술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탑승한 험비의 흔들림은 주의를 끌지 못했다. 이제 다시 종말의 세계였으나, 아직도 아이와 나눈 대화의 여운이 남아있는 탓이었다. 언젠가는 네가 물 밖으로 헤엄쳤으면 좋겠어. 별빛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원하는 걸 얻고, 한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사후보험의 설계자들은 불가능한 꿈을 맡겨두었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니……. 아이의 존재목적은 타의로 강제된 구속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더라?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까마득한 윤리와 사상 수업을 더듬던 겨울은 결국 출처를 떠올리지 못했다. 말을 남긴 사람이 누구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중요한 건 아이도 던져졌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책임이 없는 부조리의 한가운데로. 감속에 의한 관성이 겨울을 일깨웠다. “도착했습니다, 중대장님.” 드르륵,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중대운전병의 말에 겨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불분명한 감정을 담아. 이를 달리 해석한 운전병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피곤하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냥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신경 쓰지 말아요. 겨울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으나, 걱정하는 병사에겐 충분하지 못했다. 다른 말을 더하진 않았으나 염려를 담은 시선은 그대로였다. 겨울은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험비의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더운 공기가 훅 들어온다. 아직은 5월. 그러나 바다가 가까워 습도가 높았고, 풍경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팔을 걷은 병사들은 짬이 날 때마다 그늘을 찾았다. 본격적인 여름은 얼마나 굉장할까. 샌프란시스코 이후의 보상으로 「환경적응」을 강화한 겨울에게도 견디기 힘든 더위가 될 것이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이야 동기화를 세부적으로 조율하겠으나, 겨울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감각이기 때문에. 겨울은 사단에 속한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주인을 알아본 엑셀이 반가운 몸짓을 했다. 다가가 이마를 쓸어주자 슬그머니 눈을 감는다. 목을 살살 긁어주며 살펴보면, 털과 갈기에 윤기가 흐를 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입술을 뒤집는 다른 말들도 마찬가지. “어떻습니까? 그동안 최셔늘……크흠. 최선을 다해 돌봤습니다.” “헤이스.” 돌아선 겨울 앞에서 혀가 꼬여 소심하게 주춤거리는 이는 마누엘 헤이스. 러시안 강 유역의 민간인 거점에서 데려온 사형수 가운데 한 명이자, 백 밤 자고 다시 만나자던 꼬마 아가씨가 친구들과 함께 쓴 편지를 주며 부탁했던 그 반반 아저씨였다. “다른 분들은 아직 안 왔습니까?” “예에. 기자 양반들을 제외하면 소령님이 처움……처음입니다. 일찍 오셨군요.” 자신들이 언급되자 마방 구석에 있던 촬영 팀 중 아는 얼굴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카메라의 사각에서 등을 기대고 선 그는 길버트 마르티노였다. 건강한 낯빛과 정갈하게 넘긴 머리카락, 캐주얼하지만 단정한 복장. 산송장 같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가볍게 목례한 겨울은 오랜만에 만난 사형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오랜만이네요.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잘 지내진 못했겠지만.” 족쇄가 채워진 발목을 향한 눈짓. 사슬은 양쪽 발목을 묶고도 모자라 길게 늘어져 마구간 바닥에 못박혀있었다.. 헤이스가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죄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불과 며칠 전에 다른 죄수들의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집행방식은 총살. 정신적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로저스 소장은 죄수들의 죄목을 공고하고 사단 전체에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각 지원자는 직속상관의 상담을 거쳐 선발되었고. 데이비드 임무부대에서도 지원자가 나왔다. 2소대장인 진석이었다. 당연히 상담은 겨울의 몫이었다. 상담에서, 진석은 자신의 동기가 정의감이나 공분(公憤)은 아니라고 했다. “저어…….” 마누엘이 겨울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제가 살아있는 건 소령님 덕분입니다. 진짜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요, 헤이스. 당신을 살린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의 선행이에요.” “하지만……그래도 소령님께서 사단장님한테……그……따로 말씀을 하셨다고…….” “당신이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으면 내가 당신을 변호할 일도 없었겠죠. 그러니까.” 죄수의 팔을 잡고 잇는 말. “앞으로 착하게 살아요. 난 당신이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가는 보답을 받는다고 믿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겠지만, 당신은 죽다 살아난 목숨이잖아요. 목숨 값을 생각하면 앞으로 무슨 손해를 보든 남는 장사 아니겠어요?” 그러니 여기서 선불로 받은 셈 치세요. 라고 끝맺은 겨울이 비로소 손의 힘을 풀었다. 어디서 복받쳤는지, 잔뜩 목이 멘 죄수는 열성적으로 끄덕이고 뚜욱 뚝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길게 운 죄수는 겨울과 곧 도착할 장교들 몫의 마구를 꺼내놓고 다시금 인사한 뒤에 자리를 떠났다. 그는 돌봐야 할 말이 많았다. 병사들을 투입하기는 영 아까운 작업. 이게 없었다면 로저스 소장의 판단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배후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카메라가 엑셀에게 마구를 채우는 겨울의 모습을 담는다. 빠르게 끝낸 겨울이 마르티노에게 손짓했다. 잠시 카메라를 꺼달라고. “이거 설마 생방송은 아니죠?” 질문을 받은 마르티노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유감스럽게도 공보처의 검열은 여전합니다. 까다롭진 않더라도 번거롭고, 언론인으로선 영 아쉬운 부분이죠. 어찌됐든 소령님을 취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낯선 동료들을 소개했다. “이 친구들이 꼭 인사드리고 싶어 했는데, 소령님께서 부지런하셔서 이렇게 기회가 생기는군요. 카메라맨인 리로이 카아, 마이크 담당 제이 클라인입니다. 본사에서 새로 파견한 현장 스태프들인데, 둘 다 소령님의 열렬한 팬이라고 합니다.” 겨울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로이 카아는 바지에 얼른 손바닥을 문질렀고, 통통한 볼에 수염을 기른 제이 클라인은 악수를 나눌 때 거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전쟁영웅을 대하는 방송 관계자라기보다는 팝스타를 만난 십대 소녀 같은 반응이었다. 마르티노가 말했다.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참 괜찮았습니다. 시청자들도 좋아할 것 같군요.”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건 그냥 본격적인 촬영을 앞둔 사전 조정이라고 생각했건만. 로저스 소장이 도착할 즈음부터가 기자들의 일감이겠거니 싶었다. “설마 그걸 방송에 내보내려고요?” “싫으십니까? 혹시 사적인 대화라서?” “싫다기보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애초에 허가가 안 날 걸요?” “위험? 위험, 위험……. 아. 죄수들의 처우 문제가 이슈로 뜰까봐 그러십니까?” “네. 정부시책에 관한 논란이 커지면 안 될 시기잖아요.” 11월의 대선까지는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현 정권의 도덕성에 문제가 생기면 난민정책에 대해서도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겨울의 우려를 깨달은 기자가 하하 웃는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보기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죠?” “사람들은 이걸 죄수의 처우에 대한 문제보다는 한겨울 소령의 미담으로 기억할 테니까요. 왜냐면, 그러는 편이 더 즐겁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지는……소령님 정도 되는 분이면 이미 알고 계실 테고요.” “…….” “그래도 이 바닥에서 오래 묵은 전문가로서 드리는 말씀인데, 대중의 관심이란 한 번에 수용 가능한 최대치라는 게 있거든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관심사인 소령님이 있는 이상 죄수 쪽에 관심을 할애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할애한다고 해도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기자는 음모를 꾸미는 어른이자 장난스러운 악동처럼 보였다. 예전에 두려움과 소외감으로 흐느껴 울던 사람과는 동일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말입니다, 전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면서 수감자 숫자로는 25%를 차지하던 이 나라에선 죄수의 취급이 원래 좋지 않았습니다. 총살 집행을 앵글에 담았다면 또 모를까, 고작 족쇄 채우고 목부노릇 시키는 정도로 동정여론이 생길 거라고 보긴 힘듭니다……. 역병이 돌기 전에도 사람들은 자기부터 살기에 바쁘지 않았습니까.” 콘크리트 정글에서. 말을 마친 기자가 겨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이런, 시간이 됐군요. 저희는 빠지겠습니다.” 마르티노와 함께 물러나는 카메라맨과 마이크 담당은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들이었다. “일찍 도착했군, 소령.” 새로 들어선 로저스 소장과 사단 참모들, 그 외의 장교 및 병사들이 겨울에게 경례한다. 겨울도 정자세로 경례했다. 갇혀있던 말들은 다수의 인기척에 귀를 세우고 주의를 집중했다. 머리를 흔드는 엑셀을 진정시키는 겨울에게, 로저스 소장이 묻는다. “얼마나 기다렸나?” “10분 정도입니다.” “흠.”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장이 시선을 돌린다. 동행한 병사들이 마장에서 숫자에 맞게 말을 꺼냈다. 엑셀을 제외하면 모두가 금빛이거나 금빛이 감도는 금속성 갈색의 명마들이었다. “연락을 받고 조금 놀랐습니다.” 겨울이 하는 말에 로저스 소장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을 무시할 순 없지. 광대가 되라면 되어야 하고. 전원, 탑승하도록.” 각자의 말에 마구를 채운 장교들이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오른다. 장교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적은 것은 말을 탈줄 모르는 사람들이 제외되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인적 구성이나 말에 타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목적은 평범한 영내순찰이었다. 가장 낮은 계급이 대위인 기병대를 보게 된 병사들의 반응은 꽤나 호의적이었다.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과 마찬가지로 발전소 한 곳을 맡게 될 임무부대 지휘관의 말. 조금 앞선 사단장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명령에 의문을 품는 건가?” “그러긴 싫습니다만, 솔직히 납득이 안 갑니다. 중요한 국면이잖습니까. 이럴 시간에 변경된 작전 내용을 숙지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끄덕끄덕. 장교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번 작전만은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 탓인지, 작전 개시를 앞두고 이런저런 변경사항이 계속해서 전달되었다. 백악관이나 국방부는 완벽을 기한다고 하는 일이겠으나 일선 지휘관들 입장에선 곤혹스러운 노릇.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가 그만큼 큰 충격이긴 했지.’ 실패하고 싶어도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작전으로 평가받던 게 명백한 해방 아니었던가. 방역전선 전역에 걸쳐, 후방근무지원부대를 제외하고 전투 병력만 천만을 밀어 넣었는데. 겨울은 워싱턴 DC가 단체로 편집증을 앓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느꼈다. “기병대의 이미지를 유지, 확장할 때 장병들과 시민들이 받을 심리적 영향.” 잠시 침묵하던 로저스 소장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건조한 음성. “그게 이유다. 이번 작전기간에는 기병수색대를 운용할 수 없다. 지나치게 더우니까. 하지만 상부에서는 민사심리전의 도구로서 기병대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만들어둬야겠지. 장병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펜타곤 내에 이곳을 전담하는 심리치료사들의 태스크 포스가 있다더군.” “그 정도는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중을 가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로저스 소장은 아까와 같은 장교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유리알 같았다. “역사상의 모든 전쟁은 누가 더 잘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수를 더 적게 하느냐로 승패가 갈렸다. 윗선에서 업무의 경중을 가리지 못하거나 잘못된 지침을 내리는 건 평범한 일이지.” “…….” “그런 비효율을 다 포함해서 시스템인 거다. 어느 부분이 효율적이면 다른 부분은 비효율적인 법. 완벽하게 효율적인 시스템이란 있을 수 없어. 기계나 신이 대신한다면 모를까,” “그래도…….” “어쨌든 난 귀관과 같은 건의를 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큰 유감은 없다. 지금이 최선이니까. 난 지금의 이 나라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여기엔 겨울도 동감이었다. 현 정부는, 그리고 지휘부는 놀라울 정도로 잘 해주고 있다. 말을 끝낸 것 같던 소장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 우리가 신이 될 순 없지 않나.” # 256 [256화] #사망의 골짜기 (2) 곱씹어보면 기병대는 상징이었다. 이제 구조작전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화면에 기병대가 비춰지는 한 시민들은 아직 구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기 쉬웠다. 그런 착각을 통해 정부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연착륙, 즉 사회적 충격의 완만한 수용. ‘겨우 37만 명밖에 안 돼.’ 지금 이 시간, 겨울의 PDA에 뜬 정확한 숫자는 37만 2,620명. 이곳 올레마 FOB와 포트 로버츠, 마리골드 등지에서 구조된 생존 장병의 총 합계였다. 겨우, 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많은 숫자이며, 구조자들의 노력 이상으로 생존자들의 역경이 위대하다고 해야겠지만, 거꾸로 말하면 결국 160만에 가까운 병력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 언덕 너머에서 묵직한 총성이 메아리쳤다. 일반적인 소총은 아니었다. “어디지?” 로저스 소장이 사단참모에게 묻고, 크레인에 매달린 카메라가 촬영 각도를 바꾸었다. 사단 작전참모가 말에 탄 채로 전술정보 태블릿을 조작했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지도를 배경으로 전투현장의 영상이 뜬다. 여러 시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화면이었다. “라인 킬로에서 화이트 임무부대가 교전 중입니다. 적 집단의 규모 약 70……. 구울 이외의 특수변종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방탄복을 입은 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중기관총 화망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제 곧 교전이 끝납니다.” 교전 자체는 별 일 아니었다. 소장이 표정변화 없이 지적했다. “단어선택에 주의하도록.” 작전참모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카메라를 보고 아! 하고 깨닫는다. 방탄복을 입은 놈들. 그대로 방송을 탔다간 트집을 잡힐 말이었다. 물론 걸러지기야 하겠으나, 검열이 곧 삭제를 의미하진 않는다. 훗날 정보공개제도에 의해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영현(英顯) 수습 팀은 대기 중인가?” “지금은 다른 방면으로 출동한 상태입니다. 1500시 복귀 예정이군요.” 방탄복을 입고 있다면 미군 전사자일 확률이 높다. 예전과 달리 상황이 호전되었으므로, 전사자의 유해를 방치할 순 없는 노릇. 영현 수습 인력은 잠을 아껴가며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기병대는 성당 옆을 지났다. 이 작은 마을에 처음 도착한 직후, 종을 울리지 않는 장례식을 치렀던 장소. 그때는 군종병조차 없었으나 지금은 정식 군종장교가 머무르고 있다. 당시 묻었던 시신들은 고향으로 수송되었다. 오스본 병장도 마음의 짐을 덜었을 것이다. 위이잉- 전동 톱 회전하는 소리. 성당 옆 목공소에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관을 짜고 있었다. 다만 더는 에스카밀라 소위의 소관이 아니었다.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고 후송 대기 중인 장교와 병사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교대로 투입되었다. 괜찮을까 싶지만, 할 일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 상의를 벗고 땀을 흘리는 병사들은 그저 몰두하는 표정들이다. 특수차량의 카메라 크레인이 그들 쪽으로 움직였다. 클로즈업으로 찍는다면 무얼 만드는 지는 중요치 않을 광경이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마이크의 공백을 틈타 소장이 새롭게 운을 띄웠다. “이 전쟁의 난점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잃는 만큼 적들이 얻는다는 거지. 상실한 병력 160만은 곧 위장 패턴이 들어간 전투복과 방탄복을 갖춘 적 160만을 의미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 실종자 모두가 감염되었을 확률은 희박했다. “서부전선에서도 영현 수습에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실종자의 숫자가 여전히 많긴 하지만, 그동안의 교전과 폭격으로 대부분 소모되지 않았겠습니까? 적은 이미 공세 한계에 도달했고 통신역량은 약화되었습니다. 전력을 아낄 여유는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부전선은 올레마 기지를 기준으로 서쪽이 아니라, 봉쇄선 이서(以西)의 주 전선을 뜻했다. “글쎄. 이오지마에서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겠지.” “…….” 반론했던 참모가 입을 다물었다. 겨울에게는 증강현실이 떴다. 약식 장교교육에 포함된 내용이었으므로. 2차 대전,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이 강력한 준비사격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군이 살아남아 미군의 상륙을 기다렸다. 갱도진지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땅굴……이라. 가능성은 있나.’ 겨울도 지금껏 본 적이 없고, 목격 사례 역시 보고되지 않았으나, 이번엔 트릭스터가 있으니 혹시나 싶다. 지금처럼 맹렬한 폭격을 당하는 상황에선 더더욱. 매복에도 좋겠다. 인간 이하인 괴물들의 손재간으로 본격적인 굴착을 하기란 무리. 그러나 각 개체가 파편을 피할 정도, 즉 참호 수준은 가능할 것 같았다. 더 나아가 여기에 특화된 변종이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겨울의 심중에서는 희박한 확률이었다. 특수변종의 쿼터가 정해져있는 게 사실이라면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광범위한 통솔력을 발휘할 개체들, 결국 트릭스터가 아닐까. 무엇보다 땅굴에선 전파의 송수신이 불가능하다. 좁고 복잡한 경로에서의 육성 전달엔 한계가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는 지진이 잦은 지역이었다. 어설프게 팠다간 집단으로 생매장 당한다. 땅굴과 매복이 있더라도 소규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작전참모가 다시 말한다. “일찍이 방역전략연구소에서도 같은 경고를 하긴 했지만, 만약 그런 징후가 있었다면 레인저든 A 팀이든 확인했을 겁니다. 위성이나 항공정찰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소장의 답. “반드시 갱도진지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을 떠나, 적이 어떤 식으로든 전략예비를 보존하고 있을 경우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거래하는 보험중개인들 아닌가.” 비록 논의일 뿐이지만, 사실이더라도 과연 위협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한겨울 소령. 귀관의 의견은?” “……기습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지?” “많은 수가 남아있다고 해도 실제로 위협이 될 만큼 집중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라리 불가능에 가깝다. 생존자 구조 종료와 함께 피아식별의 부담도 감소한 까닭. 포병대와 공군에겐 최상의 조건이었다. 고로 밀도 높은 변종집단은 불벼락을 맞게 된다.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경계하고 있으면 됩니다. 분산된 공격에선 각각의 변종이 단단해봐야 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야간정찰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저스 소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알면서 물어본 것이다. 일종의 기본 소양 시험이었다. 그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장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의. 여기서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장교들은 예외 없이 30대였다. 어린 소령의 전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더라도, 순수한 호의로서 판단력 부족을 염려하는 경우는 있을 법 하다. ‘장교 부족이 심각한 지금 꼭 내게만 해당될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미군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는 동안, 웨스트포인트 출신이나 학사장교로는 급증하는 장교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예비역 장교들의 재임관도 마찬가지. 결국 겨울처럼 약식 교육만 받거나 사관학교 조기졸업으로 임관하는 사례가 많았다. 유라나 진석이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직책진급으로 소령이 된 겨울도 현재의 계급이 그대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로저스 소장 또한 그렇다. 전시엔 흔한 일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한국엔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흠?” “올 여름을 모르는 변종들 말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아끼다 똥 된다. 재밌는 표현이군.” 물론 로저스 소장은 전혀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중간부터 카메라가 돌아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이 정도가 최선인 모양이다. 순찰은 약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민간인들이 보기엔 그럴 듯 하고, 장교들이 보기엔 조금 어색할 요식행위였다. 마침내 순찰이 끝났을 때, 마르티노가 이 정도면 부족하나마 어떻게든 될 거라고 하는 바람에 장교들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저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 십 분을 내보내려고 다섯 시간을 촬영하는 일도 흔하거든요. 아무튼 다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목례하는 기자 앞에서 로저스 소장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오.” 이후 일상적인 토의와 조율을 마치고 각자의 주둔지로 복귀하게 됐다. 겨울이 엑셀을 마구간에 맡기고 나오는데, 중대장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험비 안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후방좌석에 앉은 소총수가 히죽 웃더니 사수좌석 측면의 붉은 핸들을 콱 잡아당겼다. 좌석이 푹 꺼지는 바람에, 폐쇄된 포탑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Damn! 입모양이 쉽게 읽힌다. 인상 쓰는 사수는 다름 아닌 슐츠였다. 그도 이젠 상병(SPC)으로 진급했다. ‘그새 친해졌네.’ 배속 이후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 원래 있던 중대원들과는 서먹서먹해야 정상이었다.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서. 연결고리는 겨울이다. “엇, 오셨습니까.” 겨울이 탑승하자 다들 부산스럽다. 매번 이러니 조금 민망할 지경. 중대운전병이 보고했다. “방금 전 선임상사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북쪽 3번 가설부두에서 수령할 보급품이 있는데, 차량이동허가를 따로 받기보다는 이미 나와 있는 1호차가 들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중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보급품이 크진 않은가 봐요?” “어, 그게, 하하. 담배랍니다. 여긴 BX(영내매점)도 없으니까요.” 확실히 겨우 담배 실어오자고 차 한 대를 새로 내보내기는 껄끄러운 노릇. 겨울이 무전기로 중대본부와 교신했다. “데이비드 6에서 데이비드 7에게. 물자는 당소에서 수령하겠다는 통보.” 회신은 짤막했다. 확인. 겨울이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담배를 끊는 편이 좋을 텐데.” “…….” 겨울 이외의 모두가 뻣뻣해졌다. 고뇌에 빠진 중대운전병이 하는 말. “어, 작은 대장님……아니지, 중대장님께서 끊으라고 하시면 다들 끊을 겁니다.”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러는 편이 생존에 유리할 거라는 말이죠.” “…….” “강요 아니라니까요…….” 하다못해 그럼블도 바람이 없는 환경에서 반경 50미터의 냄새를 맡는다. 추적에 특화된 스토커는 그 이상이며, 평범한 변종들도 인간을 능가하는 후각을 보유했다. 담배를 태우는 강렬한 냄새는 체취보다 넓은 범위에서 괴물들을 끌어들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방부에선 병사들에게 담배를 제공한다. 목적은 사기유지. 생존성 향상에만 몰두하자면 전투식량에서도 일체의 냄새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얼른 출발해요.” 겨울의 말에 번민하던 운전병이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차창 밖의 풍경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는 백색에 가까운 흙빛이었다. 임시 항만을 향하는 트럭의 대열은 성조기를 덮은 관들을 싣고 있었다. 연고자가 밝혀진 시신들은 항공편으로, 그렇지 않은 시신들은 배편으로 수송된다. 겨울이 슬쩍 곁눈질했으나, 포탑을 차지한 슐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중대원들과 새로 배속된 숙련병들 사이에 감정의 괴리가 불가피한 부분이었다. 라디오에 전원을 넣는다. 원래 달려있던 수신기가 아니라 별도의 액세서리였다. 기지에 세워진 안테나 덕분에 수신이 가능하다. 겨울이 찾는 것은 여전히 뉴스 채널의 주파수. 「속보입니다. 플로리다 북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잭슨빌 넵튠 비치 감염사태가 최초 신고 후 불과 반나절 만에 해결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현장 출입은 아직 통제되고 있지만 잭슨빌 경찰당국은 감염 확산이 완전히 저지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쪽도 마냥 안전한 건 아닌가봅니다.” 후방좌석의 말에 겨울이 대꾸했다. “바닷가잖아요.” 감염의 시발점은 아마도 멜빌레이일 것이다. 서부해안에서 출현한 괴물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동부까지 진출한 것이다. 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 정부는 그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절에 해수욕을 즐길 사람이 있나…….’ 어쩌다가 감염자가 생겼을까. 「최종적으로 발생한 피해자는 7명이며, 평소 SNS를 통해 정부에 대한 불신을 공유해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은 정부가 국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역병 위기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으며, 이로써 자본가들에 의한 영구적인 지배체제를 확립하려 한다고 믿었습니다. 3중 철조망을 뜯어 해안으로 넘어간 것도 같은 이유로 생각됩니다.」 “사람이 멍청해지는 데엔 한계가 없군요.” 슐츠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 「현장의 제보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군경이 출동하기 전에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변종들과 처음 조우한 것은 현지 주민인 72세의 에드먼드 짐머만 씨와 69세의 니나 짐머만 씨입니다. 당시 짐머만 부부는 산책 중이었다고 하는데요, 감염 피해자들과 조우한 즉시 항상 끌고 다니던 유모차에서 자동소총과 샷 건을 꺼내어 정확한 조준사격을-」 “…….” 유모차? 왜 하필……. 겨울은 당혹감을 느꼈다. 라디오에서는 총성과 괴성을 들은 이웃들이 창문을 통해 지원사격을 해주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변종들은 수십 발의 총탄과 몇 발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더스티 노리스 시장은 이번 일을 용감한 시민들의 승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안전지역에서 발생한 서른여덟 번째 감염을 무사히 극복했음을 알립니다.」 운전병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봉쇄선이 무너져도 한동안은 괜찮은 거 아닙니까?” “불길한 소리 말아요. 민간인들이 그럼블 같은 걸 어떻게 막아요?” “그냥 하는 말입니다.” 군이 잘 버텨준 덕분에 민간 차원의 대응능력도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에 들었듯이, 통근열차조차 장갑을 두른 상태니까. 요새화 공동체라는 표현은 작년부터 언급되었다. 정면 차창 너머에 가설부두가 나타났다. 준설선은 여전히 작업 중이었고, 건설 도중인 부두도 여럿 보였다. 정박한 해안경비대의 범선 바크 이글엔 수십 개의 관이 연달아 올라간다. 갑판에 관이 오를 때마다 엄숙하게 경례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엇? 소령님?” 폭뢰를 탑재하던 고속정 곁에서 장교 한 사람이 겨울을 알아봤다. “건강해보여서 좋네요, 소위. 아니, 이젠 중위로군요.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정자세로 경례한 바커 중위가 싱글벙글 웃는다. “지금은 항만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바다괴물들을 쫓아가서 뻥뻥 터트리는 일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본업으로 복귀한 셈이죠. 소령님께선 무슨 일로 여기에?” “담배 보급 받으러요.” “오, 여기서 한 대 피우고 가시죠.” “난 안 피우지만…….” 뒤를 돌아본 겨울이 중대원들의 조용한 호소에 끄덕였다. “잠깐 쉬고 가도 될 것 같네요.” 받아오기는 금방이었다. 잠시 후 병사들은 시원한 바닷바람에 담배연기를 실어 보내는 행복을 누렸다. 겨울을 배려하여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모인다. 쏴아아- 하는 파도소리. 구름이 드문 하늘에 갈매기가 날았다. 곧 시작될 작전을 감안하면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운 한 때였다. # 257 [257화] #사망의 골짜기 (3) 5월 21일, 로저스 소장의 합동임무부대 전체에 합성 거미줄과 그 밖의 복합소재로 만들어진 신형전투복이 보급되었다. 미시건 주의 공장에서 직항으로 날아온 1차 생산분. 이를 착용한 중대원들 앞엔 봉쇄사령부에서 파견된 군견 팀이 서있었다. 새로운 전투복의 방어력을 시연해보이기 위해서였다. 겨울의 허가를 얻은 군견 팀장이 중대원들을 향해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데이비드 임무부대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이안 멘도자 중사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부하이자 파트너인 루카 하사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먼 셰퍼드죠.” 중사가 신호를 주자 혀를 빼고 있던 개가 앞발을 들어 거수경례를 흉내 냈다. 보기 편하게 둘러서 앉거나 서있던 중대원들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번진다. 그 사이로 고귀한 이름을 지닌 닥스훈트 한 마리가 꼬리를 내린 채 끙끙댔다. 다른 개가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시연 대상에 중대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멘도자 중사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벌써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여러분께 신형전투복의 방어력을 확인시켜드리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입고 계신 전투복은 일선 전투 병력을 감염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가장 취약한 부위에서도 2A등급의 방탄성능과 일정 수준의 방검성능을 보유하고 있죠. 물론 중요 부위의 방어력은 더욱 높습니다. 방탄복을 따로 입지 않고도 최소한의 전신방호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오오. 일부 병사들이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살핀다. 이리저리 움직여도 본다. 과거의 전투복에 비해 두껍고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방어력을 감안하면 오히려 가볍고 유연한 축에 들었다. 움직임에 맞춰 늘어난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 ‘섬유로 된 방탄복은 찌르기에 약한 게 정상인데.’ 겨울은 소매를 꾹 눌러보았다. 섬유 외에도 얇고 단단한 블록 같은 것이 느껴진다. “보십시오.” 중사가 대검을 뽑아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쿡쿡 찌르거나 베어 보인다. “변종과의 근접 전투에서 팔이 취약하다는 판단 하에, 소매부터 팔꿈치까지는 급소만큼의 방검성능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변종의 치악력을 무난히 견디는 수준입니다.” 이 대목에서 화기부사관 디안젤로 하사가 손을 들었다. “질문하십시오, 하사.” “일반적인 변종이라면 구울을 상대로는 위험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경우엔 행운을 빌어야겠죠.” 청중이 약간의 실망을 공유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금세 달라졌다. “물어!” 멘도자 중사가 옆구리를 툭툭 치며 외치자, 얌전히 앉아있던 군견이 야수로 돌변했다. 크르릉, 크릉! 갈빗대 아래를 콱 물고서 몸을 흔들어댄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버티기도 잠시, 결국 넘어진 중사가 그만! 앉아! 하고 외쳤다. 셰퍼드는 언제 사나웠냐는 듯 엉덩이를 붙이고 지시를 기다린다. 중대원들은 대충 털고 일어서는 중사의 모습에 높은 집중력을 보였다. 부위를 달리하며 몇 번의 물어!가 반복된다. 마침내 흙투성이가 된 중사는 중대원들에게 가까운 거리에서 물린 부위를 보여주었다. 이빨 자국은 있으나 뚫리진 않았다. 시연을 끝낸 중사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겨울은 그와 악수를 나눴다. “수고했어요, 중사. 몸을 아끼지 않더군요. 휴일에 고생이 많아요.” “제 임무일 뿐입니다.” 덤덤하게 말하지만 살짝 찡그리는 얼굴에서 통증이 엿보인다. 뚫리지만 않았을 뿐 옷 아래가 많이 씹혔을 것이었다. 크게 물리면 괜찮겠으나 항상 그럴 순 없는 노릇. 속에 무언가 덧댔다간 병사들을 상대로 호소력이 없어진다고 여긴 듯 하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시연이 끝난 시점에서 중대원들에겐 특별한 일과가 없었다. 휴식과 인연이 없는 간부들도 평일에 비해서는 일정이 느슨했다. 상부에서 휴식을 보장해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러나 겨울은 예외였다. 차량을 대기시키는 겨울에게 싱 대위가 묻는다. “사단본부의 호출입니까?” “아뇨. 군종신부님께서 잠시 보자고 하셔서.” “무슨 일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병사들 때문에요. 제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작전이 시작되면 기회가 없을 테니.” 딱히 겨울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지명도가 높은 베테랑들이 PTSD 관리에 자원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그러다 죽은 사람도 있고. 크리스 카일. 속성교육에 포함된 내용이자, 랭포드 대위와의 대화에서도 한 번 언급된 사건이었다. “이해는 합니다만, 중대장님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여상한 대답에 싱 대위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누가 물어도 항상 괜찮다고만 하시는군요.” “안 괜찮아 보여요?” “아닙니다. 그냥 감탄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중대장님만큼 신의 이름에 가까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신의 이름에 가깝다? 무슨 뜻이죠?” “자세히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쉽게 말해 신의 뜻을 실천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난 신앙을 가질 생각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오해하게 만들어드렸군요. 전 중대장님께 믿음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믿음의 기준으로도 중대장님께서 훌륭한 분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믿음의 기준? 내가 시크교 교리에 맞게 행동하는 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중대장님께서는 수염을 기르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이발을 하시고, 참된 스승과 투사의 칼도 없으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지도 않으시지요. 그러나 말씀의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중대장님께서는 마음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 마음이라. 조금만 더 들어볼까. 겨울은 중대운전병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대위, 마음의 길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싱 대위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경솔한 말을 한 모양이군요. 정말로 이런 대화를 유도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권유로 느껴지셨다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최근 들어 생각하던 것도 있고.” “으음.” 고민하던 대위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신성한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성으로는 수백만 번을 사색하더라도 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절대자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깃들어 계신다.」……. 마지막으로 「절대자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숨어 계시며, 자유를 얻는 자는 구르무크라네.」” 즉, 하고 이어지는 이야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신의 뜻, 신의 이름을 품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이름입니다. 예컨대 가장 추악한 살인마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도, 마음속에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욕망에 휩쓸려 외면해버릴 뿐입니다.” 겨울은 대위가 자신을 두고 신의 이름에 가깝다고 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경전과 기도문과 엄격한 규율은 그저 욕망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에 이르는 길에 불과합니다. 이 길이 위대한 스승(구루)들의 발자취로서 깨끗하고 바른 가르침이긴 하나, 결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수행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종말이 시작된 이후에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진정 신실하다고 여겼던 형제자매들이 자기부터 살겠다고 남을 내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했던 수행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려는 의지만큼 강렬한 욕망은 없습니다. 허나 중대장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저는 중대장님에게서 두려움의 흔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아의 덩어리인 욕망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을 얻은 사람, 신의 이름을 깨닫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이, 구르무크의 모습입니다.” “과분한 평가예요.” “그렇습니까?” 겨울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어색했다. 약관대출을 청산하기 전의 죽음이 곧 폐기를 의미하긴 하지만, 그런 맥락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어색했다. 대위를 보내고서 성당으로 향한다. 겨울은 혼자 움직였으면 했지만, 규정상 그럴 수가 없었다. 운전병과 사수를 비롯해 함께 움직여야 하는 병사들에겐 안 된 일이었다. “간만의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겨울의 말에 운전병이 너스레를 떤다. “신경 쓰지 마십쇼. 싫으면 거부해도 된다고 하신 걸 저희가 굳이 가겠다고 한 거잖습니까.” “사실상의 강요나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저희도 좋은 일 하는 겁니다. 여기서 강요라고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겨울에 대한 호감 때문인지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병사들을 수용한 건물은 과거 여관과 식당을 겸했던 곳이었다. 창문마다 투명한 아이보리 빛의 오후가 비스듬히 들어오는 넓은 실내에 맥 빠진 병사들이 여기저기 늘어진 풍경. 바로 들리는 이야기는 조금 이상한 음담패설이었다. “나는 게이가 정말 좋아.” “뭐? 설마 너 게이였어?” “이런 씨발, 무슨 소리야? 난 여자가 좋다고. 항문에 박는 건 물론 좋아하지만 그것도 여자일 때 이야기야. 내가 미쳤다고 남자 엉덩이에 좆질을 하겠냐. 차라리 잘라내고 말지.” “그럼 게이가 왜 좋다는 건데?” “남자랑 남자가 붙어먹으면 그만큼 여자가 남는 거잖아! 경쟁자가 줄어드는 거라고!” “이거 병신일세. 야, 어차피 남자들이 다 죽어서 경쟁할 것도 없거든? 너도 죽었잖아.” “이 놈이? 내가 아무리 죽었기로서니, 그걸 꼭 지금 말해야 하냐? 그래, 넌 살아 있으니까 좋냐? 비겁하게 혼자 살아남은 새끼가.” “등신. 살아있어서 엄청나게 좋다 새꺄. 그리고 말이지, 동성애는 절대로 안 된다고. 올바르지 않은 일이란 말야. 넌 어떻게 신부님 계시는데서 게이를 옹호하냐?” “멍청아. 걔들은 그냥 냅둬도 어차피 벌을 받게 되어있어.” “벌? 무슨 벌?” “생각해봐. 만약 게이 커플이 결혼하면 게이 부부가 되는 건데, 게이 부부라고 부부싸움을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그건 남자와 남자의 부부싸움이라고! 얼마나 끔찍하겠어!” “오……. 정말 끔찍하군.” “맞지? 그러니 우리가 따로 반대하거나 벌을 줄 필요는 없다 이거야. 꼴리는 대로 박으면서 생긴 대로 살라고 해!” “너 천잰데? 죽었지만.” “야.” 군종장교와 눈인사를 나눈 겨울은 둘이 나눠야 할 대화를 혼자서 떠드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미첼. 옆자리 비어있어요?” “아, 소령님. 또 오셨군요.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한 소령님 오셨습니까! 이곳을 뜨기 전에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중언부언 어설프게 경례한 병사가 혼란스러운 손동작으로 왼쪽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오른쪽 자리를 힐끔거린다. “사실 이쪽도 비어있긴 할 텐데, 제 눈엔 브라이언이 앉아있는 걸로 보여서 말입니다. 음, 앉으셔도 상관은 없겠지만 제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이해해요. 그리고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브라이언 녀석이 덩치가 큰 편이라, 아마 소령님께서 앉으셨다간 이놈의 더러운 가슴 털 사이에 소령님 얼굴이 파묻힌 것처럼 보일 겁니다. 뭐 임마? 내 가슴털이 더럽다고? 털이 아예 없는 너보다는 낫거든? 뭐라는 거야. 전에 사귄 여자가 털 없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모를 했을 뿐이라고. 하하! 넌 가슴만 한 게 아니잖아? 소령님! 이 새낀 부랄에도 털이 없다니까요? 멀리하는 게 유익합니다!” 겨울이 난처한 미소를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병사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한숨을 푹 쉬면서 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참, 소령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나한테요?” “넵.” 미첼 일병은 품속에서 은십자가를 꺼내어 겨울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이건……?” “엄마가 보내주셨던 건데, 오래된 교회의 십자가를 녹여서 만든 거라고 합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안 죽을 거라나 뭐라나. 처음엔 안 믿었는데, 브라이언 새끼는 뒈지고 저는 살아있는 걸 보면 긴가민가합니다. 아 이 새끼 끝까지 이거. 브라이언, 닥쳐봐 좀. 아무튼 소령님, 제가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이걸 쥐고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유인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기병대가 온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 “조만간 새로운 임무로 나가시죠? 저한텐 더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병이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렸다. “한겨울 소령님!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죽으시면 안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겨울은 그가 우는 내내 손바닥 위의 십자가를 내려다보았다. 햇살을 받은 은이 물빛으로 반짝거렸다. # 258 [258화] #사망의 골짜기 (4) 주일의 오후가 저물녘으로 향할 즈음, 마음이 병든 병사들의 휴식처에 뚱땅거리는 음악이 흘렀다. 대형 TV에서 나오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이었다. 해맑게 웃는 아기 태양의 햇살 아래, 머리에 안테나를 단 사인사색의 인형들이 연초록빛 평화로운 동산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는 내용. 일부러 틀어놓은 것은 아니고, 채널을 돌리던 사병들의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현실 가득한 뉴스나 좀비 학살 영화 따위에 비해 낫다고 느낀 모양이다. 「친구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아이 싫어! 싫어!” 호흡을 맞춘 병사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그러다 아스라이 들리는 총성에 경기를 일으켰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 속에서 리모컨을 잡은 병사가 볼륨을 키웠다. 조금 시끄러워질 때까지. 겨울을 끼고 둥글게 앉은 멤버는 남녀를 불문하고 음담패설에 여념이 없었다. 원래는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였으나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름이 메건인 여자는 침대 매너가 끝내줄 확률이 높아.” “뭐래, 병신이. 니 인생의 메건이 대체 몇 명이었는데?” “네 명……아니, 다섯 명.” “미친.” 동명이인이 많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하다는 허세였다. 야유를 보낸 사병이 거울을 가리킨다. “가서 니 얼굴 보면 정신이 들 거다, 작은 맥스.” “작은? 내 키가 너보다 한 뼘은 더 큰데?” “그렇지. 키는 크지.” 잠시 고민한 맥스가 웃음소리에 발끈했다. 몇 없는 여성 사병들이 특히 더 크게 웃었다. 개중 하나가 박수를 치며 말하기를 “맞아, 정말로 작지.” 란다. 맥스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안 작아! 그리고 난 테크니션이라고!” “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걸 내게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여성 사병이 덧붙이는 말에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웃음이 번졌다. 아무래도 장교 앞에서 떳떳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이미 장교들이 섞여 있는데다, 현역으로든 예비역으로든 다시 싸우게 될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집단이었다. 조만간 민간인이 될 사람들. 겨울은 이런 대화가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다.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그렇듯이. 동물원 원숭이들의 멍한 눈과 신경질적인 자위행위를 보는 느낌이었다. “한 소령. 잠시 괜찮겠습니까?” 군종신부의 부름이었다. 계급은 겨울과 같은 소령. 아쉬워하는 사병과 소수의 장교들에게 양해를 구한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선 신부는 겨울을 군종장교 숙소에 들였다. 힌두교 군종장교가 경례와 함께 스쳐지나갔다. 흩어진 200만 가운데 힌두교 신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대비해서 파견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구조된 인원 중엔 신자가 없어 군종장교들 중에선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들었다. 당연히 그것은 우울한 여유였다. 방에 들어선 신부가 비품함을 열어놓고 묻는다. “차? 아니면 커피?” “차로 부탁드립니다.” 눈 밑이 거뭇한 군종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반에 술도 있었으나 겨울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술이 들어가도 좋을 용건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신부가 우려낸 찻물은 떫고 쓴 맛이 났다. 찻잎부터 좋은 품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차는 대화의 도구였다. 말을 찾느라 목이 멜 때, 혹은 상대를 배려할 때 마실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동안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줘서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기왕 구해낸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었는데요.” 딱히 대단하거나 어려운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울의 말에 신부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태도는 군인보다는 성직자에 가까웠다. 겨울도 군인보다는 성직자를 대하는 예의로서 접하기로 했다.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였기에. “한 소령. 이런 질문이 실례인줄은 알지만, 묻겠습니다. 혹시 가톨릭 신앙을 가질 생각은 없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례인줄 아시면서도 물어보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뜸을 들이던 군종신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개인적인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이지 않다는 말씀은…….” “뉴욕 교황청의 의사입니다.” 뉴욕 교황청? 겨울의 표정을 읽은 신부가 천천히 끄덕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내용이니 당분간 혼자만 알고 있으십시오. 봉쇄선 동쪽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긴 하지만……전대 교황 성하께선 지난 4월 27일에 선종하셨습니다. 로마가 죽음의 해일에 휩쓸린 날이지요.” “…….” “그날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 로마를 포함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제외한 본토 전역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바티칸으로 구조대가 파견되었지만 성하께선 탈출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남겨질 성도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시겠다고……. 그래서 성하를 위해 준비된 헬기는 평신도들을 태우고 돌아왔습니다. 모두 아이들이었지요.” “유감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옳은 결정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교황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미 선출되셨습니다.” “벌써요?” “역병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시점에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콘클라베 역사상 가장 빠른 선출이었지만 말입니다. 망명 교황청의 중심지로 성 패트릭 대성당이 지정된 것도 사전에 결정된 사안이었습니다.” 타당한 이야기다. 뉴욕은 미국의 정치적 중심지와 가깝다. 지역과 민심 안정 차원에서 미국 정부도 환영했을 것이고. 그러나 아직 겨울에게 건넨 권고와는 간극이 남아있었다. 차를 마시고 살짝 인상을 찌푸린 신부가 그 간극을 메운다. “다만 신도와 사제들 사이에 불신과 회의가 팽배한 지금, 뉴욕 교황청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전대 성하의 죽음이 미칠 영향을 짐작하기도 어렵고요……. 혹시 미국 성전(聖戰) 기사단(American Order of Crusaders)이나 그리스도의 민병대(Christ’s Posse Comitatus)에 대해서 들어봤습니까?” “어느 쪽이든 처음 듣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들어도 그 성향을 알겠다. “그럴 겁니다. 최근 신구교를 가리지 않고 남부 교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비인가 단체들입니다. 세상에 죄인이 넘쳐 심판의 홍수가 시작된 것이니 그 죄인들을 주님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실상은 혐오범죄의 온상입니다. 주로 동성애자와 다른 종교의 신자들, 무엇보다 중국계 이민자 및 그 후손들이 큰 피해를 보는 중입니다.” “이단이네요.” “예. 교황 성하께서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죄악들을 막고 싶어 하시지만, 동시에 이런 시기의 대대적인 이단지정과 파문이 돌이키지 못할 분열을 불러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계십니다. 사제들 사이에서조차 교황청의 권위와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마당이라서……. 그들이 근거 없는 예언을 내세우기도 하고…….” 예언? “예언이라면 혹시 성 말라키의 예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울의 질문은 군종신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걸 알고 있습니까?” “예.” “놀랍군요. 신자도 아니면서 아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어쩌다보니 접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얼버무리는 겨울. 세상의 끝을 여러 차례 경험하는 동안 온갖 예언과 종교적 광기를 경험했다. 성인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예언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축에 들었고. 그 예언은 최후의 교황을 언급한다. 겨울은 그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박해의 시대에 로마 사람 베드로가 신성한 로마 교회를 다스리고 있을 것인데, 그는 무수한 환난들 사이에서 그의 양떼를 보살필 것이며, 그 뒤 일곱 언덕의 도시는 무너질 것이고 사람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일곱 언덕의 도시는 로마를 말한다. 흔들리는 사람들이 믿기 좋은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전대 교황은 이탈리아인의 혈통이며, 본받은 성인의 풀 네임엔 피에트로가 들어간다. 피에트로는 베드로의 변형이었다. 즉 로마 사람 베드로라고 끼워 맞추기 충분하다. “그 사람들은 선종하신 전 교황님께서 마지막 교황이었다고 생각하나보죠?” 겨울이 묻자 군종장교가 쓴웃음을 짓는다. “한심한 노릇입니다. 결국은 교황청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봅니다. 제멋대로 날뛰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교황청의 망명이 공공연한 비밀이라더니,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네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겁니다. 물론 한 소령이 지푸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느 쪽도 아니지만, 만약 당신이 믿음의 형제가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과 다른 편에 서기를 망설이게 될 겁니다.” 생각하던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지, 신부는 가벼운 아쉬움만 드러냈다. “그렇습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그렇습니까?”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그런 사람들도 많이 진정될 거고, 실패하면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거든요. 그 시점에선 제가 죽어있을지도 모르고요.” 결국 본토 탈환 여부가 관건이다. 불안과 공포가 지금 이상으로 부풀어 오른다면 현 정권의 유능함으로도 대처하지 못할 것이었다. “중국계 시민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방송은 일단 걸러져서 나온다. 조안나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정보국에게 묻기는 애매하다. 군인이면서 동시에 성직자인 군종신부라면 별도의 연락망이 있을 법도 했다. 당장 지금도 교황청의 의사를 타진하지 않았는가. 새로 묻는 겨울 앞에서 군종신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피해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정도인가요?” “예. 경찰의 과잉진압은 더 이상 문제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지역사회가 인종범죄를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은폐한 정황까지 있으니까요.” 정황이라 함은 완전히 적발하지 못했다는 뜻. 증거가 없거나, 있어도 정치적인 장벽에 부딪혔을 공산이 있었다. 차라리 묻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 “요즘 중국계 시민들이 신변안전을 위해 한국어 한두 마디를 꼭 배워둔다고 합니다. 반면 적극적으로 민병대에 가담하는 한국계 시민들도 많다더군요.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피아식별을 위해서랍니다.” 신부가 160만의 무게로 탄식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장병들을 잃었습니다.” 2차 대전 인명손실의 네 배. 남북전쟁에 비해서도 두 배 반을 넘는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 정도의 손실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성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도 어쩔 수 없다. 아니, 아직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을 기적이라고 평해야 할지도. 이번 작전은 마지막 분수령이 될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당장 망하지는 않겠지만…….’ 기적적인 승리를 바랄 순 있을지언정, 세계관 내에서 사람다움을 찾기는 어려워질 테니까. 군종신부가 겨울을 배웅했다. 해가 넘어간 지평선은 밤에 삼켜지는 노을빛이었다. 험비에 탑승하기 전, 겨울이 위로를 남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작전은 성공할 겁니다.” 신부가 황혼처럼 웃었다. “그래야지요.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도왔습니다.” 이는 겨울에게도 와 닿는 말이었다. # 259 [259화] #사망의 골짜기 (5) 겨울이 지휘하는 임무부대는 6월 1일을 기해 아이들린 지열발전소를 점령했다. 버려진 시설에서 발견된 적은 대사억제 상태였던 일반 변종 다섯 체 뿐이었다. 직원 숙소 돌입을 맡았던 진석 소대는 확보 완료까지 정확하게 다섯 발의 실탄을 소모했다. 1년 넘게 방치된 발전소를 재가동하는 데 열하루가 걸렸다. 민간인 기술자들이 최선을 다하는 사이, 임무부대는 공병대의 도움을 받아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인력으로만 작업했으면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겠으나 본격적인 중장비가 동원되어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다. 조만간 광역 유인 신호기가 가동될 것이다. 대형 안테나는 철골로 이루어진 괴물 같았다. 겨울과 함께 구불구불한 진입로를 걸어 오른 싱 대위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소대별 간격이 넓어서 걱정했었는데, 이 정도 경사면 큰 걱정은 없겠습니다.” 뽑아낸 지하수를 다시 주입해야 하는 지열발전소의 특성상 방어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이 곧지 못하다는 건 그만큼 경사가 급하다는 뜻이었다. 변종들이 발전소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40도 기울기의 산길을 최대 1킬로미터나 기어 올라와야 했다. 6월 중순에 막 접어드는 지금도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인데, 작전기간에 그런 짓을 했다간 사람이든 변종이든 산채로 익어버릴 것이었다. 사령부가 아무 생각 없이 중대급 임무부대(Company team)만 배치한 게 아니다. 겨울은 교전양상을 상상해보았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산길. 열기에 일그러진 불모지를 꾸역꾸역 올라와서 흐느적거릴 변종들의 모습을. ‘보통의 변종을 상대로는 거의 사격연습이나 마찬가지겠지.’ 그럼블이라고 더 잘 버틸 것 같지도 않다. 거대한 체구와 두꺼운 피부에 기인할 항온성은 추운 계절의 강점이자 더운 계절의 약점. 고로 재해에 가까운 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반적인 변종에 비해 대사억제의 폭이 커야 한다. 그만큼 신체기능도 저하될 것이고, 투척 공격의 사거리도 감소할 것이다. 야간에만 주의하면 된다. 발전소에서 계곡을 향해 쭉 내려가는 관을 가리키는 겨울. “남쪽 환원시설 방어가 관건일 거예요. 높이도 가장 낮고 거리상으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그쪽에다가 화력을 좀 더 몰아줄까 싶어요.” “동의합니다. 고속유탄발사기 탑재차량 두 대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북쪽과 서쪽은 다른 소대의 사정권이니 저지대 방향으로만 화망을 강화하면 될 겁니다.” “일단 그렇게 해요. 나중에 상황 봐서 증원을 보내던가 하죠.” 겨울은 가장 위험한 곳에 1소대, 즉 유라의 소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정보장교 머레이 중위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긴 하지만, 저는 지금도 병력을 발전소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차피 놈들은 저 관의 존재이유를 모를 테니까요.” “그걸 깨서 진입로로 쓰겠다는 발상은 가능하겠죠. 부식방지처리를 해놨을 뿐이지 내구도를 강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럼블 같은 게 후려치면 끝이죠.” “…….” 지하수가 유입되는 방향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상황. “관에서 산성아기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해봐요. 발전소 터빈이 부서지는 건 더 이상 문제도 아닐 걸요? 그게 아니더라도 관이 있는 방향으로는 중화기 사용이 불가능하니까 변종들의 공격경로로 쓰이기도 쉽고요.” 베타 구울이라도 있다면 화력의 공백지대를 반드시 눈치 챌 것이다. 소총 중에서도 구경이 큰(7.62mm) 종류는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관이 손상되면 발전 효율이 급감한다. ‘지뢰를 깔아두는 것만으로는 영 불안하고.’ 사람 어깨 높이의 관을 흙으로 덮어버리자니 사각지대가 생겨서 곤란하다. 유사시의 기동로에 토성을 쌓는 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하수를 뽑아내거나 주입하는 시설의 가동소음은 변종들의 주의를 끌 것이 분명하다. 이것들마저 흙으로 덮어버릴 순 없고, 도시환경에 익숙해진 변종들은 흙 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었다. 영리한 개체가 섞여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콰콰쾅! 숲이 예고 없이 번뜩였다. 충격파가 마른 땅을 휩쓸어 부연 바람을 일으켰다. 밑동이 끊어진 나무들이 우르르 쓰러진다. 공병대는 벌목에 폭약을 쓰고 있었다. “여긴 나중에 반드시 산사태가 나겠군요.” 작전장교 포스터 중위의 말. 숲을 제거하는 건 엄폐물을 없애기 위해서다. 덕분에 계곡 남쪽의 비탈까지 온통 황색으로 변해버렸다. 둥치까지 파내기 위해 포크레인이 동원되었다. 통신병이 겨울을 찾았다. “중대장님. 2소대입니다. 기지점 오스카 부근에서 산불로 추정되는 연기가 관측된답니다. 아, 방금 2개소로 늘었습니다. 진화작업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기지점이란 유사시의 화력지원을 위해 미리 설정해둔 좌표를 뜻한다. 즉, 뭔가 있는 곳은 아니다. 자연적인 화재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이긴 한데……. 가까운 불이라면 항공소방을 호출하기 전에 진압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늘에서 뿌리는 물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데다, 날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화재가 커져서 방어지점을 잠시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재가 2개소에서 동시에 생길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겨울은 매복을 염려했다. 성탄전야의 습격에서도 끝날 때쯤 의도적인 방화가 있지 않았던가. 그 이후에도 그렇고.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은……없나. 우회하는 집단이 있다면 항공정찰에 잡혔겠지.’ 감각보정이 있는 겨울이라면 일정 거리 내의 매복을 거의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다. 수면 아래의 멜빌레이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은. “금방 갈 테니 기다리라고 해요. 변종들의 수작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 미스티에 연락을. 혹시 모르니 마리골드엔 소방지원을 요청해놔요.” “미스티는 이미 떴습니다. 도착 예정시간 2분 미만이라고 합니다.” 통신병이 열심히 보고한다. 미스티는 공격용 정찰헬기(OH-58)의 호출부호였다. 바로 이곳에 배치되어 열여섯 개의 중대급 임무부대들을 지원하도록 되어있다. 기지점 오스카는 북쪽 계곡 너머로, 개인화기로는 최대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위치. 숲도 아직 거기까진 제거하지 못했다. 2소대장인 진석은 싱 대위가 지적했듯이 과도하게 공격적인 경향이 있어서 주의해야 했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험비에 탑승하는 겨울을 향해 종군기자가 외친다. 길버트 마르티노와 그의 스태프들은 올레마 거점을 떠나 여기까지 따라왔다. 당연히 상부의 허가를 받은 일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죽을 수도 있어요.” 지원 병력은 두 개 분대뿐이다. 문을 잡은 겨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이미 각오했습니다!” “그럼 빨리 타요.” 기자단이 서둘러 특수차량에 올라탔다. 크레인이 달린 방탄차량. 유사시 고립되더라도 안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있도록 특별히 강화되었다. 그래봐야 그럼블에겐 좀 억센 장난감이겠지만. 전자기장을 활용하는 트릭스터는 아예 자물쇠를 따고 들어올 테고. 중대 규모에 비해 차량이 많아 이동하는 험비는 총 여섯 대였다. 기본적으로 소화기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겨울의 지시로 급수차량이 따라붙었다. 헬기 한 대가 차량대열을 앞질러 가느다란 연기를 향해 날아갔다. 회전하는 날개 위에 크고 둥근 관측 장비가 달려있었다. “미스티. 뭔가 보이는 게 있는지?” [당소 미스티. 변종으로 추정되는 열원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활성화된 감각보정이 목덜미를 자극하는 중이다. 미묘한 강도. 주의하고 있지 않으면 놓쳤을 뻔 했다. ‘규모가 크진 않은가?’ 아직 신호기가 작동하기 전이니 본격적인 공세일 확률은 낮다. 이동 경로에서 2소대 병력 절반이 합류했다. 절반은 거점 방어를 위해 남았다. 계곡에 가까워져서도 화재지점을 직접 관측할 순 없었다. 지형이 움푹 들어가는 위치인 듯 했다. 언젠가 폭격을 맞았는지, 숲은 피부병 환자의 머리처럼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있었다. 차량행렬이 멈춰섰다. 더 이상 들어갈 길이 없어서였다. 차에서 내린 겨울의 코끝에 희미한 탄내가 감돈다.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명령했다. “유탄발사기 탑재 차량, 10시에서 11시 방향으로 제압사격 20발씩.” 카피. 절반의 험비에서 답이 돌아온 후에 무지막지한 화력이 뿜어진다. 쾅쾅쾅쾅쾅! 한 발 한 발이 수류탄 이상인 고속유탄의 소나기가 숲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파편의 확산은 곧 부러지는 가지, 초여름의 낙엽, 흙빛의 아지랑이로 가득한 풍경이었다. 사격이 끝난 뒤, 폭음의 빈자리를 낯선 고요가 어색하게 채울 즈음. ‘……없어졌어?’ 겨울은 무의식중에 목덜미를 더듬었다. 선득선득하던 감각보정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지나친 걱정이었던가? 겨우 이 정도로 사라지다니……. 하면서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는 겨울. 낮은 확률이지만 매복에 특화된 변종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감각보정을 전문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종류의. “도보로 진입합니다. 진석 소위, 한 개 분대를 지정해서 후방에 배치해요.” “알겠습니다.” 진석이 곧바로 손짓했다. 장애물이 가득해서 차량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불이 난 곳은 둘이었지만 서로 가까운 위치였다. 겨울이 이끄는 병력은 곧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지점에 도달했다. 특이하게도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소화기를 들고 온 병사 하나가 혼란스러워했다. 동물의 사체 같은 건 없는데. 넓지 않은 화재는 쉽게 꺼졌다. 두 곳에 걸쳐, 겨울은 「추적」으로 검게 그을린 땅에 남은 흔적을 탐색했다. 강화된 감각은 들풀과 관목이 탄 내음과 단백질이 타들어간 내음을 분명하게 구분해주었다. 희미한 냄새를 쫓은 끝에, 겨울이 무릎을 꿇고 대검을 뽑는다. “뭔가 찾으셨습니까?” 진석이 진지하게 묻는다. 느낌이 이상하긴 마찬가지인 모양. 재를 헤치는 대검 끝에 걸려 나온 것은 자그마한 뼛조각이었다. 여기에 설익은 살점이 매달린 모습. 길게 끌려나오는 얇은 피부는 어느 쪽도 피하조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익은 가운데에서 기름기가 줄줄 흐른다. 고소한 향기가 나서 더욱 거북스러웠다. “변종의 일부입니까?” “아마도요.” 근처에서 비슷한 것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자그마한 두개골의 일부로 보이는 것도 있다. 퍼진 범위로 볼 때 마치 터지기라도 한 것 같다. 예를 들면, 강하게 던져진 유아 변종이라든가……. 혹시 산성이 아니라 인화성의 아기가 나타난 것일까? 되는대로 흔적을 긁어모은 겨울은 이를 시체 담는 비닐에 넣었다. 그래봐야 한 줌에 불과했으나, 달리 담을 것이 없어서. 차마 따라오진 못하고 차량 대열에 남아있던 마르티노가 근접촬영을 원했다. “혹시 새로운 변종입니까? 야생동물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판단은 마리골드에서 하겠지만……이거랑 비슷한 동물이 있긴 해요?” “글쎄요, 억지로 같다 붙이자면, 날다람쥐가 그나마 가깝지 않을지…….” “…….” 기자는 그냥 해본 말이었겠으나 겨울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자그마한 생체폭탄들은 겨울에게도 낯선 종류. 강화종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진 않습니까?” 복귀하는 길, 겨울은 험비의 남는 자리에 마르티노를 태웠다. 질문을 받은 기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소령님 취재를 독점할 기회인데 그럴 리가 없죠.” “대단한 직업정신이네요.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이 말에 기자는 다시 웃는다. “군인들 앞에서 하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종군기자들 중에서도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겪고서도 시간이 좀 지나면 어떻게든 위험한 곳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괴팍한 인간들이죠.” “…….” “그리고 소령님과 있을 땐 죽을 거란 느낌이 잘 안 듭니다. 그래서 더더욱 경쟁이 치열했죠.” “경쟁? 위에서 파견지를 정해준 게 아니고요?” “그런 것까지 정해주진 않습니다. 저희끼리 포커로 정한 겁니다.” “……포커?” “일생일대의 특종 아닙니까. 말 그대로 인생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거기서 진 사람들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라며 웃는 마르티노의 얼굴엔 기이할 정도로 그늘이 없었다. # 260 [260화] #사망의 골짜기 (6) 기온은 예상보다 가파르게 치솟았다. 이에 따라 작전도 조기에 개시되었다. 데이비드 임무부대의 작전지역은 북부해안산맥의 줄기로서 해발고도가 1,400미터 이상이었으나, 6월 말경에는 낮 최고기온이 화씨 109도, 섭씨로는 약 43도에 이르렀다. 이는 지열발전의 원천, 100도 이상으로 펄펄 끓는 지하수를 분사하여 인위적으로 습도를 증가시킨 탓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자연적으로 뜨거운 증기가 분출되는 땅이었다. 움푹 패인 계곡마다 끔찍한 열기가 고였다. 지하수를 이런 식으로 써버렸다간 장기적으로 지역 전체의 발전효율이 급감하겠으나, 현 시점의 미국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겨울은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보고 있던 모니터가 가늘게 흔들린다. 환태평양 조산대, 통칭 불의 고리(Ring of Fire)에 속한 캘리포니아에선 일상적인 지진이었다. 정보장교 머레이 중위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하필 이 때 대형지진이 나진 않겠지요?”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요.”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진 않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내 말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상황에 집중해요.” 작전장교이자 머레이와는 사관학교 동기인 포스터 중위가 핀잔을 줬다. “마음이 꽤 여유로운가보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캘리포니아 대지진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좋은 영화는 드물었지만. 그러나 영화의 수준과 별개로, 자주 만들어지는 이유가 있다. 당장 이곳만 하더라도 세계 최대의 지열발전단지, 즉 지저에 용암이 부글거리는 땅이었다. 동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화산이라는 옐로우스톤 국립공원도 있다. 역병 이전까진 종말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곳. 멋쩍어하던 머레이 중위는 이윽고 헤드셋을 누르며 모니터의 변화에 주목했다. “중대장님. 헌터 킬러 드론에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유황 계곡을 따라 이동하던 적 집단이 기지점 엑스레이 1-3 포인트를 통과했습니다. 데이비드 1-1과 접촉하기 전에 알파 포대가 엑스칼리버를 꽂아주겠답니다. 표적은 베타 그럼블입니다.” 엑스칼리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성검이 아니라, 성검의 이름을 딴 레이저 유도 포탄(M982)이었다. 35마일(약 57km) 밖에서 쏴도 표적으로부터 반경 20미터 내에 착탄한다. “벌써 몇 발 째죠?……저 정도는 자체 방어가 가능하니까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고 싶은데.” 겨울의 말. 조금 전에 들어온 통신은 간섭할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마리골드에 요청은 해보겠습니다만,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중위가 빠르게 타자를 두드렸다. 완전히 전산화된 지휘체계였다. ‘한 발에 3만 달러짜리 포탄을 너무 낭비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이게 역병 이전에 비해 절반 이상 저렴해진 가격이다. 겨울이 걱정하는 건 정작 지원을 받아야 할 곳에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워싱턴, 오레곤 방면에서 남하 중인 북쪽 주력이라거나. 그들의 싸움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작전과 한 호흡이다. 혹은 정작 필요할 때 쓸 게 없어진다거나. 미국은 이번 작전에 있는 자원 없는 자원을 미친 듯이 털어 넣고 있다. 화면에 비쳐지는 베타 그럼블의 모습은 흉측했다. 원래도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닌데, 지금 보이는 녀석은 피부가 반쯤 녹아내린 형상. 그렇다. 세쿼이아 숲에서 보았던 녀석과 흡사했다. 그땐 겨울이 매달려있던 산성아기들을 쏘았기 때문이었으나……. “못생겼군요. 저놈도 자연발화에 당한 모양입니다.” 포스터의 목소리는 살짝 들뜬 느낌이었다. 자연발화. 산성아기, 그리고 결국 새로 등장한 것으로 판명된 활공능력 강화종과 인화성 신종들의 취약점이었다. 직사광선 아래에 오래 노출된 끝에 스스로 터져버리는 현상.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체온 증가 때문일지도 모르고, 수분 부족으로 인한 화학적 불안정성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겨울은 마냥 낙관적일 수 없었다. 계통의 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하나의 변종으로부터 서로 다른 강화종이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반드시 강해지는 건 아닐지라도, 가변성의 증가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과거와 다른 가변성에선 체계적인 살의가 느껴질 지경이다. 머레이가 변화를 알린다. “적이 산개합니다. 드론을 포착했군요.” 모니터 속 풍경이 심하게 흔들렸다. 일그러진 그럼블이 쩍쩍 갈라지는 피부에 아랑곳 않고 산성아기들을 던져댔다. 팔다리 사이에 피막이 자란 강화종들이었다. 거대한 괴물이 높이 던지면, 팔다리를 펼쳐 스스로 방향을 잡는다. 윙 슈트와 같은 원리였다. 깨애애액- 화소가 튀는 무음(無音)의 확대화면 안에서조차, 사나운 아기들이 뻐끔대는 자그마한 입들은 보는 이에게 소름끼치는 환청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드론은 방역전쟁 사양의 다운그레이드 양산형임에도 살아있는 고속 투사체들을 간단하게 회피했다. 분노하는 아기들은 정확한 폭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 와중에 드론이 발사한 적외선 유도 레이저는 그럼블의 몸통을 벗어나지 않는다. 번쩍. 엑스칼리버가 착탄했다. 이글거리는 먹구름이 폭발한다. 마치 작은 화산 같았다. 줌 아웃되는 화면에 연기를 뚫고 치솟는 거대한 머리가 보였다. 포스터가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는다. “「데들러」가 강화, 분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많이 걱정했는데……비행이 거리만 늘었지 정밀하진 못하군요. 움직이는 표적에 대해선 명중률이 형편없습니다.” 데들러. 치명적인(Deadly) 아기(Toddler)라는 의미로 붙여진 특수변종 식별 코드. 그러나 산성과 인화성으로 갈라지면서 별도의 코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겨울은 아직 산성아기라고 부르는 쪽이 편했다.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앞으로가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토를 탈환한다고 해서 방역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이는 겨울이 러시아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었다. 모겔론스의 원형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티베트 고원의 제로 그라운드. 거기까지 가려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편이 낫다. “본토탈환이 끝나도 군복을 벗지 않으실 겁니까?” 반문하는 포스터는 뜻밖이라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게…….”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전쟁을 그만두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최소한 승기가 확실해질 때까진 싸울 거예요.” 아무래도 포스터는 겨울의 정계진출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 같다. “적 선두가 저지선까지 접근했습니다. 데이비드 1이 대응합니다.” 데이비드 1, 유라 소대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선임 지휘관은 그쪽에 나가있는 부중대장이었다. 겨울은 상황실에 가득한 모니터들을 보며 낯설음을 느꼈다. 중대급 부대엔 과분한 지휘체계다. 이쯤 되면 후일 부대 규모가 확장되는 건 기정사실로 봐야 했다. 계급이 오를수록 직접 발로 뛰는 교전보다는 후방 지휘와 통신의 비중이 더 늘어날 것이었다. ‘어색한 게 당연한가……. 여기까지 올라온 적은 없었으니…….’ 전에 대위가 실질적인 진급 한계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도 경험이 근거였다. 특수부대가 아닌 한 전투 병력으로서 현장에 투입되는 영관급은 없다. 겨울의 앞날은, 국방부와 백악관 선에서 고급 지휘관으로 확정된 모양이었다. 난민으로만 편성된 연대, 어쩌면 사단 급 부대의. 그 뒤엔 정계진출이고. 일선 장교인 포스터조차 비슷한 소문을 들었을 정도라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애초에 이번 작전이 수월하게 끝난다는 보장도 없다. 현재까지 큰 이변이 없고, 이에 따라 장교들조차 낙관적인 분위기에 물들고는 있지만. 따다닷! 따다다다닷! 골짜기에 중기관총의 발사음이 메아리친다. 여기에 카메라의 주인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섞였다. 화면 구석에서 깜박이는 이름은 장한별이었다.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의 특성 탓에, 중기관총의 총성은 가까이서 듣는 것보다 훨씬 경쾌했다. 방벽 내 차량이 통째로 들어가도록 파놓은 참호 속에서, 유라 소대의 험비들이 시체 가득한 비탈길에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해당 방면에 깔아둔 지뢰는 진즉에 다 소모됐다. 그만큼 많은 변종들이 꾸역꾸역 밀려왔다. 능선 위의 안테나를 향해. 지휘력을 발휘할 개체가 없는 거대한 무리는 그저 막무가내로 비탈을 기어오른다. 그 길은 먼저 죽은 변종들의 시체로 빈틈없이 포장된 땅이었다. 녹색을 벗겨 황폐화된 대지는 온통 거멓게 죽은피와 변질된 동물성 기름으로 오염됐다. 사실 여기까지도 시체 썩는 냄새가 들어올 지경이었다. 공격이 없는 틈을 타 틈틈이 소각작업을 진행했는데도 그렇다. 탄화된 시체로 뒤덮인 오르막길이 또다시 시체로 뒤덮였다. 겹겹이 뒤엉킨 죽음의 땅은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와 각종 내장으로 이루어진 더러운 늪이었다. 레이저 발사체계가 작동하는 순간 걷는 역병 하나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끼에엑-! 비명은 순식간에 끊어진다. 보이지 않는, 혹은 먼지를 산란시키는 희미한 광선이 역병의 대열을 횡으로 긁었다. 단 한 차례의 조사(照射)로 서른 이상의 변종에 불이 붙었다. 비록 오래 타진 않았으나, 확실하게 죽을 때까지 지질 필요는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들이 같은 변종의 발목을 잡아챘다. 사후경직이 얽혀 만들어진 부실한 지반에서 시체로 된 산사태가 일어났다. 타버린 시체와 타는 시체와 타지 않은 시체가 한데 섞여 아우성치며 흘러내린다. 차라리 지옥의 풍경이었다. 개중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놈들은 내버려둬도 죽을 것이다. 메마른 하늘의 여름 태양은 온종일 타오르는 죽음의 광채였다. 아직도 긴 낮이 남아있었다. 작전개시 이래 태양이 죽인 변종의 숫자가 미군이 사살한 숫자를 능가할 가능성마저 있다. 역병은 치명적인 계절에 적응하기 힘겨워했다. 얼마 전엔 레인저가 백치가 된 트릭스터를 발견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강렬한 열기에 뇌세포가 익어버린 경우였다. 그냥 뒀으면 괜찮았겠으나, 전투를 강요하는 인간들 때문에 한계 이상으로 활동해버린 탓이다. 해당 개체는 연구용으로 포획되었다. 통신병이 겨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중대장님. 상황 전파입니다. 단대호 불상의 소대 규모 아군 집단이 칼파인 5번 기지로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칼파인 5는 여기 아이들린과 마찬가지로 지열발전소의 소재지이며, 역시 신호기와 함께 중대급 임무부대 하나가 배치되어있었다. “단대호 불상?” 소속불명이란 뜻이다. 눈을 살짝 찌푸리는 겨울에게 통신병이 까딱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Yes sir. 명백한 해방 작전의 패잔병 집단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칼파인 5, 6, 7은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유인 신호기 가동을 중지합니다.” 위성감시 현황에서 해당 방면에 위협적인 변종집단은 없다. 신호를 멈춘다면 기지든 접근하는 병력이든 위험하진 않을 듯 했다.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 낫지 않나?” 중얼거리는 겨울.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나, 이젠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다. 겨울이 정보장교에게서 태블릿을 넘겨받았다. 네트워크에 자세한 정보가 올라와 있을 것이었다. ‘응답 없음……인가.’ 마리골드에서 보내는 모든 통신에 대해 응답이 없는 상황.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무전기 같은 장비가 남아있지 않거나, 있어도 태양광 충전기를 분실했을 경우. 어쨌든 항공사진 속의 병력은 지치고 초라한 아군의 모습이었다. 적지만 차량도 섞인 행렬이다. 최소한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 이 정도 생존자들이 한꺼번에 합류하기는 오랜만이다. 작전에 도움이 될 일은 없겠지만. 조만간 후송헬기가 올 것이다. 이런 날씨에 다른 거점으로 가라고 하기도 곤란하고. 마침내 전투가 종료됐다. 사상자 없음. 가장 취약한 유라 소대의 방어구역조차 200미터의 급격한 오르막길이었다. 철조망이 몇 겹으로 깔린 비탈을, 그 여름을, 변종들은 채 절반도 극복하지 못했다. “중대장님께선 잠시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포스터가 휴식을 권했다. “어려운 건 야간전투입니다. 여긴 머레이 중위와 제가 번갈아 맡겠습니다.” 부중대장이 1소대 구역으로 나가있는 지금은 작전장교가 차석이다. 권유를 받은 겨울은 상황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지도를 보며 고민했다. 너무 잘 풀리기만 해서 더욱 걱정스러운 요즘 아닌가. 그동안의 경험이 경험인지라 안심할 수가 없다. 이미 역병과 세계의 가변성으로부터 느낀 바, 어떤 초월적인 악의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지…….’ 조금 전 스스로 했던 말이다. 쓰게 웃은 겨울이 승낙했다. “그럼 부탁하죠. 숙소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줘요.”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상황실의 분위기가 완만하게 풀어졌다. 겨울은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긴장감을 요구할 수 없었다. 다그치는 것도 한두 번이고 하루 이틀이지, 기약도 없고 끝도 없는 질타에 무슨 효과를 바라겠는가. 애애애애옹!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헥헥 거리며 뛰어다니는 개가 보였다. 사람이 없어진 발전소에 야생 고양이가 자리를 잡았나본데, 왕의 이름을 가진 개가 하루가 멀다하고 고양이를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개나 고양이나, 시설 내에 냉각이 워낙 잘 되다보니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닌다. 슬쩍 내다본 포스터가 절도 있게 손뼉을 쳤다. 짝짝! “Come on, your highness!” 알알! “…….” 사람이 짖고 개도 짖었다. 부름을 듣고 달려온 닥스훈트는 모퉁이를 돌다가 발라당 넘어졌다. 그래도 발딱 일어서서는 겨울을 향해 꼬리를 치고 팔딱팔딱 원을 그린 뒤 자신을 예뻐하는 작전장교에게로 달음질쳤다. 겨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상황실을 나섰다. # 261 [261화] #사망의 골짜기 (7) 여기서 병사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불규칙한 수면시간이었다. 변종들이 밤낮없이 밀려드는 와중에 밤에 벌어지는 전투가 더 위험했기 때문이다. 비번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고, 그나마도 출동대기상태를 유지하며, 그 외의 대부분은 험비 안에서의 쪽잠으로 버텨야 했다. 그렇다고 야간에 신호기를 정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 변종집단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배후지대의 변종 밀도를 낮추는 것도 작전의 목표였다. 이로써 올레마 FOB와 사단 사이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회랑이 만들어진다. 보급로였다. 그래서 겨울은 최대한의 휴식시간을 보장하려 애썼다. 허나 자야할 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총성에 놀라 깨는 일도 빈번했다. 어스름 전의 저녁 시간, 배식을 받는 이들이 푸석푸석한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꽈릉-! 밖에선 하늘이 찢어졌다. 뇌우(雷雨)라고 하는데 정작 내리는 비는 없었다. 온도가 높아 가느다란 빗방울이 공중에서 증발하는 탓이었다. 다만 가까운 낙뢰가 잦다. 주둔지가 산 정상이다 보니 피뢰침이 쉴 새 없이 벼락을 맞았다. 잠을 설친 병사들이 투덜대는 건 덤이었다. “Shit. 클레이모어(산탄지뢰)가 또 터졌겠군.” 식판을 채우는 병사의 투덜거림. 말은 한국어인데 욕설은 영어였다. 그의 말처럼 겨울은 뇌명(雷鳴)의 끝에서 이질적인 폭음을 들었다. 산탄지뢰의 전기식 뇌관은 번개가 칠 때 오작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산타 마가리타 호수에선 쿤츠라는 병사가 같은 이유로 후폭풍에 맞아 죽었었다. 지금은 주의를 당부했으니 같은 사고가 없을 것이다. 겨울이 있는 테이블에 디안젤로 하사가 다가왔다. “여기서 중대장님을 뵙다니, 운이 좋군요. 자리 있습니까?” “얼마든지.” 허락을 받은 그녀가 겨울의 맞은편에 앉는다. “오늘 저녁은 꽤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하사의 푸념은 식단에 대한 것이었다. 겨울이 옅은 미소를 만들었다. “헬기가 뜨지 못하니 별 수 없잖아요.” 하필이면 식재료를 공수받기로 한 시점에서 기상이 악화된 덕분이었다. 본래 등심 스테이크가 나올 예정이었다. 위에서 사기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 “흐음, 그래서 결국 스테이크는 물 건너 간 겁니까?” “글쎄요. 저런 하늘이 오래 가진 않겠죠. 오늘 밤만 잘 견뎌 보자고요.” 겨울의 말에 디안젤로 하사가 귀찮은 느낌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보다 지겨운 밤이 되겠습니다.” 둘 다 중의적이었다. 오늘 밤만 잘 견뎌 보자는 말이나, 평소보다 지겨운 밤이 되겠다는 말이나. 당장은 기온에 큰 변화가 없으나 이제 곧 햇빛이 차단된 영향이 나올 것이었다. 습하고 더운 밤이긴 마찬가지겠지만, 어제 만큼은 아닐 터. 기형적인 날씨였다. 바싹 구운 베이컨을 꼭꼭 씹어 삼킨 디안젤로 하사가 음료수 한 모금 마시고 묻는다. “혹시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뭐요?” “일본에서 날아온 여객기 말입니다.” “아.” 겨울이 끄덕였다. 정확하겐 들었다기보다는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검열을 거치긴 하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군 인트라넷에도 많은 정보가 올라온다. 그 중엔 민간에 공개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있었다. 소령으로서 겨울의 접근권한은 높았다. 그리고 이곳엔 강화된 위성통신망이 구축되어 있다. 필요한 건 넷 워리어 단말뿐이었다. “해병대도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지옥에서 1년 넘게 살아남다니……. 그것도 대사관 사람들하고 민간인들까지 보호하면서 말입니다. 완전 임무밖에 모르는 꼴통들 같습니다.” 여기서 민간인은 미국 시민권자를 뜻했다. 그들이 구해온 사람들 중에 일본인은 없었다. ‘표정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니겠지.’ 겨울이 본 사진 속에서 모두가 안색이 어두웠다. 그들이 겪었을 필요악의 흔적이었다. 다른 고난뿐이었다면 마침내 돌아온 고국에서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았어야 정상이었다. “이번 공로로 주일 대사관 경비대랑 FAST(Fast Anti-terrorism Security Team) 파견대 전원이 명예훈장을 받는답니다. 다만 수여식은 불타는 계곡 작전이 끝난 이후에 열겠다고……. 중대장님 수여식도 그때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위스키 호텔이 정말로 축제를 열고 싶은 모양입니다.” 위스키(W) 호텔(H)은 백악관의 두문자(頭文字) 음성기호였다. 실제 백악관의 의도가 그랬다. 전쟁영웅들의 소식을 전하며, 수여식은 한 결 같이 나중으로 미루는 중이다. 일선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마저도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비공식적으로는 영웅들의 날, 승리의 날, 개선의 날 등으로 부른다. 수여 대상자는 이미 죽은 경우가 더 많으므로, 축제일뿐더러 추모식이기도 하겠지만. 디안젤로 또한 설레는 한 사람이었다. “전 그날이 진짜로, 엄청나게 기대가 됩니다.” “…….”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번에도 중의적인 말이었다. 단순히 훗날의 축제를 미리 기뻐한다는 뜻이 아니다. 겨울은 하사의 낯빛에 언뜻 스쳐간 어둠을 짚었다. “어쩔 수 없어요. 슬프다고 계속 울기만 할 순 없잖아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망각은 삶의 필수조건이었다. 한계에 부딪히는 사람들에게는. 대화가 잠시 단절되었다. “예전에 위인전을 하나 읽었는데 말입니다.” 오믈렛 같지 않은 오믈렛을 난도질하며, 하사가 새롭게 운을 띄웠다. “헬렌 켈러라고 아십니까?” 겨울은 기시감을 느꼈다. “당연히 알죠.” “어? 아는 게 당연한 겁니까?” 미국인다운 의아함이다. 아무튼, 하고 하사가 말을 잇는다. “거기서 정말 좋은 경구를 하나 봤는데…….”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예. 바로 그겁니다.”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와우. 하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놀랄 것 없어요. 얼마 전에 어떤 수녀님께 한 번 들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원래도 알고 있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하사가 헛기침을 했다. “왜 이 말씀을 드렸냐면……. 이런 세상에서도, 아니, 이렇게 빌어먹을 세상이라서 그렇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예전에도 좋은 소식은 있었겠지만, 세상이 어두우니까 더 크게 느껴지는 거겠죠.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할 때 영웅이 되는 것처럼.” “정확합니다. 제 생각 그대로입니다. 영웅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영웅들 말고, 같은 나라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살아있는 쪽보다는 죽은 쪽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이것이 미국 정부가 살아있는 영웅들만큼이나 죽은 영웅들을 알리는 데 열심인 이유다. 자신의 사명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은, 죽었어도 여전히 산 사람들의 위안이었다. “부중대장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싱 대위가?” “예. 병사들하고 나누는 이야기였는데, 되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뭐라고 했는데요?” “음, 세상에 온통 빛뿐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하사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기억을 더듬는다. “그 다음이……. 아. 빛이 있어서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어서 빛이 있다. 절망을 모르는 사람은 희망도 모른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용감해질 수 있다. 였습니다.” 대위는 중대원들을 격려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후에도 간헐천 같은 잡담을 나눴다. 식사를 끝낼 즈음, 겨울의 무전기가 포스터의 음성으로 말했다. [중대장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어지지 않았다. 상황실 밖으로 나가선 안 될 내용이란 뜻. 그렇다고 기지에 비상을 걸 정도는 아닌 듯하다. “금방 가죠.” 겨울은 잔반이 거의 없는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날게요.” “넵.” 눈치가 달라진 하사는 먹는데 엄청난 속도를 붙였다. 상황실에 도착한 겨울에게 포스터가 특이사항을 보고했다. “칼파인 5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정시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아닙니다. 저희나 마리골드에서 보내는 통신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겨울이 바로 떠올린 건 낮에 접근한다던 단대호 불상의 소대였다. 통신에 반응이 없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정도의 연관성뿐이었다. “기상악화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은?” “역시 아닙니다.” 포스터가 단언했다. “위성통신에 지장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저희 외에 다른 기지들도 마리골드와는 접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를 비롯한 다른 기지들에서 유선연락을 시도했는데도 실패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레이저 통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전 개시 전에 공병대가 각 기지 사이로 통신선을 깔아 놨다. 또한 레이저 통신 체계는 방향을 맞춰놓은 레이저와 감지기, 중계기들로 구성되었다. 만약에 대비해 여러 채널의 통신 수단을 마련해둔 것이다. 심지어는 군용이 아닌 일반 위성전화까지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기지가 무너진 건 아닌 듯합니다. 칼파인 6에서 칼파인 5 방향의 신호탄을 관측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간 간격을 두고 세 번 연속 녹색이었다고 하더군요.” 녹색 신호탄은 당연히 기지가 무사하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유인신호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점을 봐선 기지 자체의 안전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칼파인 6가 좀 무리해서 드론을 띄워봤으나 병력 배치 또한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예, 이상합니다.” 다른 건 다 멀쩡한데 통신 수단만, 그것도 모든 경로가 동시에 마비되는 건 어떤 상황인가. 차라리 무선만 있었다면 트릭스터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기지가 무사하다는 말에 겨울이 걱정 하나를 놓았다. 새로 합류한 생존자들 사이에 감염자가 섞여 있었다면 붉은 신호탄이 연속으로 관측되었을 터. “마지막 교신 이후 포격요청 좌표는 검토해봤어요?” 포스터는 겨울이 묻는 의도를 곧바로 이해했다. “물론입니다. 칼파인 5의 통신회선이 지나는 구역에 떨어진 포탄은 없습니다. 애초에 중대장님께서 쉬시는 동안 낙하한 포탄은 예외 없이 램스와 에이덤이었습니다. 날씨가 이래서 볼케이노를 쓸 수 없으니까요. 해당 시간 접근한 변종집단은 위협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램스(RAAMS)와 에이덤(ADAM)은 각각 대전차지뢰와 대인지뢰를 살포하는 포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볼케이노는 헬기에 달아서 지뢰를 뿌리는 컨테이너였고. ‘곤란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만에 하나 위성통신이 두절되면 이 일대에선 겨울이 최선임자였다. 포스터가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강화종 트릭스터의 소행은 아닐까요?” “강화종?” “예. 그것들은 전기와 자기장을 다루잖습니까. 능력이 남다른 놈이라면 땅 밑에 묻힌 회선을 감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광신호 중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얇은 도체, 미약한 신호를 포착하려면 베타 등급도 부족할 것 같다. 그러나 겨울이 보기에도 이 상황을 설명할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당연히 이상전파 수신 기록은 없었겠죠?” “트릭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 없었습니다.” “…….” 전술지도에서 몇 개의 부호가 깜박거렸다. 2소대가 변종들과 교전 중이라는 신호였다. 분할화면에 뜬 교전 현장은 딱히 긴장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 일몰 전이기도 했다. 구름 아래로 내려온 석양의 빛이 무수한 죽음을 달구었다. 뿌려진 피는 오랫동안 따뜻할 것이다. “일리 있네요.” “역시 그렇습니까.”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에만 집중하되, 지원을 나갈 경우에 대비하죠. 만약 정말로 강화종 트릭스터가 벼르고 있는 거라면 통신이 두절된 위치가 공격지점일 확률이 높으니까요.” 혹은 성동격서일 수도 있고. 주의를 분산시키고 다른 곳을 치는 정도의 교활함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고민하는 사이 그림자 같은 산맥이 계속해서 태양을 먹어치웠다. # 262 [262화] #사망의 골짜기 (8) 산간의 밤은 빠르게 식는다. 메마른 골짜기를 향해 뜨거운 증기가 지속적으로 분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로 인해 국지적 저기압이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마른 땅에 내리치는 벼락이 자정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기온이 30도 아래로 떨어진 시점에서, 드디어 병든 망자의 군대가 출현했다. 군대. 그것은 군대였다. 이제까지 없었던 조직력과 이제까지 없었던 규모로 들이치는 본격적인 공세. 그러나 가장 위협적인 것은 조직력도, 규모도 아니었다. 푸드드득- “젠장! 또 꺼졌어!” 험비 엔진이 시드는 소리. 운전병이 핸들 왼편의 시동 레버를 신경질적으로 꺾어댔다. 계기판의 배터리 볼트 표시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여러 차례 전자기 충격파(EMP)를 맞은 차량은 쉽게 되살아나지 못했다. 쾅쾅쾅! 요란한 중기관총 사격음 속에서 겨울이 목청을 돋웠다. “하차! 하차 전투! 차량을 중심으로 방어! 통신병! 날 따라와요!”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에도 지붕 아래로 탄피가 쏟아졌다. 비록 야간조준장비가 맛이 가긴 했으나, 중기관총 자체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사선 가장자리에서 방탄복을 입은 변종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끊어진 팔다리가 비산한다. 바깥 공기는 차내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 병사들이 흠뻑 젖어있는 이유였다. 에어컨은 물론이거니와 EMP 내성이 강한 장비들도 끝을 모르고 터지는 충격파는 감당하지 못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대체 어떻게…….’ 변종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면서도, 겨울은 깊은 당혹감을 느꼈다. 트릭스터의 개체수는 심각하게 감소했다. 고로 이런 식의 자폭을 해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했다고 생각했건만, 변종들은 땅굴을 파지도 않았고 방탄복을 입은 수십만을 아껴두지도 않았다. 설마 자폭 없이 충격파를 방출하는 강화종이 등장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너무도 급격한 강화였다. 애초에 과부하를 통한 기관 파열이 충격파 발생의 조건 아닌가. 기관 재생을 위해서라도 회복기간이 필요할 터. 정신없이 교차하는 감각보정의 물결 사이에서, 겨울은 곧 해답을 발견했다. “사수! 강 일병! 11시 방향에 적 트릭스터! 빨리!” 다급하게 외쳤으나, 철컥 소리와 함께 중기관총 노리쇠가 후퇴 고정되었다. “야! 탄약!” 사수인 강 일병이 후방좌석으로 빽 소리를 지른다. 부사수가 탄통을 밀어주었다. 타타타탕! 타타탕! 겨울의 소총이 날카로운 연사음과 함께 번뜩였다. 그러나 표적에겐 소용없다. 강화종 트릭스터가 죽은 트릭스터의 몸뚱이를 방패로 삼은 탓이었다. 지능이 높은 만큼 이쪽 방면 중기관총의 탄약 소모를 재다가 나선 게 분명했다. ‘늦었다.’ 겨울이 맹렬히 수류탄을 던졌지만, 땅에 떨어지는 순간 일반 변종 하나가 몸으로 덮어버렸다. 쾅! 부패한 몸뚱이가 펄쩍 뛰었다. 그 사이 죽은 트릭스터의 몸뚱이가 희미한 방전을 일으키며 팽창했다. 퍼엉! 폭발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벌거벗은 산간을 휩쓸었다. 나무를 모조리 베어낸 터라 변종들이 숨을 엄폐물이 없었지만, 충격파 확산을 방해할 장애물도 없었다. 피쿼드 호에서 탈출하고자 겨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 골짜기의 트릭스터들은 죽은 동종에게 과부하를 걸어 충격파 폭탄으로 써먹는다. 시체에 손을 꽂아 넣었던 교활한 강화종은, 여러 발의 소총탄을 몸으로 받아내며, 피와 살점에 뒤덮인 채로 자세를 낮춰 빠르게 물러났다. 마치 파도에 매몰되듯이, 한 때 미군이었던 변종들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방탄복을 입은 놈들은 차 문짝 따위를 방패삼아 들고 다녔다. 저것들은 생전에 교활했던 사체를 얼마나 많이 이고 올라온 것일까? 최근 회수되지 않은 사체가 많았을 것이다. 사냥도 그렇고 폭격도 그렇다. 항공폭탄이 반드시 직격하는 건 아니니, 출혈로 죽거나 빈사상태로 살아남은 개체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 일반 변종과 달리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한 강화종의 시체는 잘 썩지도 않는다. 변종을 흡혈한 모기는 독성에 죽고, 파리의 알은 괴사하며, 세균의 번식도 활발하지 못하다. 결국은 문드러지지만, 평범한 시체보다는 멀쩡한 기간이 길었다. “포반! 포반! 내 말 들립니까?!” 겨울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이쪽 무전기는 멀쩡해도 박격포 진지는 아닌 모양. 조명탄이 떠야 하는데. 아직도 기능하는 야간투시경은 소수다. 병사들은 밤눈에 의지하여 사격하고 있었다. 공병대가 탐조등을 복구하느라 악을 쓰기도 한계가 있다. 이는 상황실을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곳은 반쯤 눈이 멀었다. 각 진지로 이어지는 유선 통신이 살아있으나, 전장감시체계 태반이 무용지물인데 뭘 어쩌겠는가. 지금 무슨 사단급 부대를 지휘하는 것도 아니고, 지휘관이 현장에 나서는 편이 나았다. 감각보정을 받기에도 좋고. 다행히 포반에서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화악- 변종들의 머리를 넘긴 공중에서, 여러 조명탄의 합계, 양초 수백만 개 분량의 빛이 한꺼번에 터졌다. 이쪽을 감추고 적을 드러내는 조명 지원의 요령. 밝아진 산그늘에서 겨울은 새로운 위협을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본다. 꽈릉! 피뢰침에 번개가 내리쳤다. “거기! 무전기 멀쩡한 사람 있어요?!” 겨울의 손짓에 긴장한 병사 하나가 나섰다. “드립니까?” “아니, 포반으로 뛰어가서 주고 와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이병은 박격포반이 있을 위치로 허겁지겁 뛰었다. 너무 서둘러서 넘어지고 총을 놓치긴 했으나, 재빨리 일어나 미친 듯이 달음박질친다. “유탄사수! 유탄사수들! 적 후방 20미터 선으로 제압사격! 공중폭발탄! 어서!” 발로 뛰는 겨울의 외침에 고속유탄발사기를 탑재한 험비들의 조준점이 바뀌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탄도는 적의 등 뒤를 노리기에 충분했다. 겨울이 발견한 건 지그재그로 파헤쳐진 땅이었다. 전에 생각했듯이 괴물들에게 땅굴을 팔 능력은 부족하다. 파더라도 수준이 낮아 대규모일 수 없고, 공격에 쓰기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참호는 아니었다. 대각선으로 꺾어가며 땅을 파 접근하면, 직사화기로는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다. 지뢰에 의한 피해는 무시하는 듯 하다. 공중폭발탄은 허공에서 터지며 아래 방향으로 파편을 뿌리는 특수 탄종이었다. 탄통을 교체한 사수들이 일제히 발사 트리거를 눌렀다. 낮은 고도의 밤이 일렬로 번쩍거린다. 강철 파편의 폭우가 쏟아지자 참호 밖으로 던져지던 흙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유탄의 공백을 메우는 건 겨울의 정조준 속사였다. 연사나 마찬가지인 빠르기로, 소모한 탄약만큼 정확하게 적을 사살하는 시점에서 어지간한 공용화기를 능가하는 전투력이었다. 연이어 발사된 조명탄이 꾸준히 하늘을 밝혔다. 탄약 재고는 아직 많다. “2시 방향! 무반동총! 쏴!” 중화기 분대장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뭉쳐있던 무리가 직사로 쏜 포탄 한 방에 박살났다. 겨울은 뛰는 내내 탄창을 비워가며 병사들의 배치와 교전 현황을 확인했다. 마침내 유선전화에 도달한 겨울이 수화기를 들었다. “기술팀! 신호기 상태 보고해요!” 그러자 임무부대에 배속된 공병 소대장의 답변이 돌아왔다. [제어 기판이 타버렸습니다! 복구는 가능하지만 예비회로가 많지 않습니다! EMP가 터질 때마다 교체하다간 금방 바닥날 겁니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까?! 곧 끝납니까?!] 불가피하게 노출되는 안테나는 충격파에서 보호받기 어렵다. 타타타탕! 겨울은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로 지향사격을 퍼부었다. 양손에 승용차 문짝을 비껴든 채로 접근하던 구울 셋이 그대로 죽어 넘어진다. 난사된 탄환의 절반은 두 짝의 문 사이를 파고들어 더러워진 방탄헬멧 아래의 얼굴을 부숴버렸다. “언제 끝날지 장담 못해요! 신호기는 그냥 두고 레이저 포대부터 복구해요!” [알겠습니다!] 레이저는 작동을 멈췄지만 동력은 살아있었다. 발전소의 EMP 저항능력을 강화한다고 민간인 기술자들이 땀을 흘린 덕분이었다. 외부 변전소까지 프레임을 짜서 은박으로 덮어놓았다. 사실 발전소 자체가 기본적으로 EMP 내성이 있기도 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핵전쟁을 준비해온 나라였다. 바아아아악-! 어지간한 중화기와는 격이 다른 연사음. 살이 떨릴 정도의 진동. 방공포 센추리온이 별 없는 하늘을 향해 발사화염을 뿜었다. 밝게 타오르는 기관포탄들은 쇳빛으로 달아오른 수백 개의 유성 같았다. 탄막 속의 아기들이 찢어지고 부서지고 폭발했다. 변종들의 머리 위로 강력한 산성비가 쏟아진다. 녹아내리는 변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두피가 벗겨지고 뼈가 녹는다. 마침내 뇌까지 드러난 채 걸어오다가 픽 쓰러지는 광경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봤자 1,500발이야.’ 센추리온이 한 번에 장전하는 탄의 숫자였다. 끊어 쏘지 않을 경우 길어도 30초 만에 바닥난다. 재장전엔 시간이 걸렸다. 레이저 포대 복구부터 서두르라고 한 이유였다. 레이저 발사체계는 원래 해군의 방공무기였다. 날아드는 아기들을 태워 죽일 수 있다. 겨울이 수화기를 던져놓고 소총을 견착했다. 기관포탄의 그물이 놓친 표적들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아기의 얼굴들이 소총탄에 맞아 깨졌다. 중심을 잃고 회전하며 폭발. 그러나 관성으로 인해 체액이 뿌려졌다. 궤도에 있던 차량호의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엎드린다. 후두둑! 험비의 방탄판은 자글거리는 체액을 맞고도 멀쩡했다. 특수 코팅이 되어있어서였다. 곧 센추리온의 방공사격이 그쳤다. 그럼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기들은 1.5킬로미터 밖, 능선 너머의 사각지대에서 던져진다. 더구나 투척하는 지점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럼블의 이동은 길고 불규칙했다. 좌표를 지정하기 힘들었다. 팔다리에 피막 달린 아기가 다 소모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그 외의 아기들은 비행거리가 짧다. 결국 그럼블도 능선을 넘어와야 할 것이다. 이쪽도 진지를 구축해두길 다행.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여러 명 녹거나 불타서 죽었을 터. 진지 곳곳에 퍽퍽 박히는 아기들로 인해 병사들의 사격이 위축되었다. 결국은 악 소리가 들린다. 소총수 두 명이 얼굴과 팔을 감싸고 나뒹굴었다. “이런 씹! 중대장님!” 새된 욕설을 들은 겨울이 탄창을 교체하며 디안젤로를 불렀다. “하사! 알파 포대에 화력지원요청을! 감마 3-1, 마이너스 120! 포대 전체 효력사! 이중목적고폭탄! 근접위험사격!” “Yes sir!” 알파 포대는 낮에 엑스칼리버를 쏴대던 곳으로, 다른 기지에 위치했다. 겨울이 부른 좌표는 유라 소대가 싸우는 방면이었다. 고도가 낮아 경사로가 짧다보니 변종들의 참호선이 치명적으로 가까워졌다. 방치하기보다는 근접포격의 위협을 감수하는 편이 나을 만큼. 그런데도 포격요청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더 큰 위협을 막느라 바쁜 듯 하다. 혹은 싸움에 매몰되어 정신이 없거나. 낮은 자세로 재빨리 뛰어온 디안젤로 하사가 수화기를 붙잡는다. “브림스톤 1! 브림스톤 1!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내 말 들립니까!” 원칙에 어긋나지만, 겨울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 그녀는 자신을 액추얼로 자칭한다. 그렇게 해야 답신이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당소 브림스톤 1. 말하라, 데이비드 액추얼.] “기지점 감마 3-1, 마이너스 120, 데인저 클로즈, 포대 전체 이중목적탄 효력사!” [감마 3-1, 마이너스 120, 데인저 클로즈, 포대 전체 이중목적탄 효력사, 잠시 대기.] 그 사이 겨울은 무전으로 포격에 대비하라고 전파했다. 유라 소대 쪽에도 아직 살아있는 무전기가 있었다. [떴다 이상. 비과(飛過) 시간 하나 아홉.] “비과 시간 하나 아홉 확인!” 이는 앞으로 19초 후 포탄이 낙하한다는 뜻이었다. 돌아보는 하사에게 겨울이 외쳤다. “여기 남아서 화력을 유도해요!” 파견된 관측병은 다른 방향에서 역시 화력을 유도하는 중이었다. 비록 본래의 역할은 아니어도, 표적을 판별하고 좌표를 찍을 능력은 디안젤로에게도 있었다. 폭음과 총성 사이로 험비의 배기음이 달려왔다. 날카롭게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 겨울이 두고 온 중대장 단차였다. 변종의 공세 방향에 따른 이동이었다. 퍼엉- 다다다다닥! 유라 소대의 방어구역에서 연쇄폭발이 일어난다. 먼 곳의 포병대가 쏘아 보낸 포탄(M864)들은 허공에서 작게 터져 일흔 두 개의 소형 폭탄(자탄)을 쏟아냈다. 이 중 스물넷은 그럼블에게도 위험한 위력. 죽이진 못할지언정 맞는 부위를 뚫어버릴 정도는 된다. 자탄 수백 발이 쏟아지는 광경은 마치 불타는 소나기가 내리는 듯 했다. 변종들이 파헤친 땅 속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 흙과 머리와 팔과 다리의 피분수가 치솟았다. 치명적인 강우의 가장자리는 아슬아슬하게 방어진지 바깥이다. 그러나 너무 근접해서, 누군가 파편에 맞았을 가능성은 있었다. # 263 [263화] #사망의 골짜기 (9) 역병이 들끓는 참호는 교전시간에 비례하여 늘어났다. 하늘에서 보면 발전소를 향해 삐뚤빼뚤한 선 수십 줄기가 그어진 양상일 것이었다. 그 안의 악취 가득한 변종들은, 새까만 밤, 검은 대지에 생긴 상처에 허옇게 들끓는 구더기 떼처럼 보이지 않을지. 중대장 단차에 탑승한 겨울이 급하게 손짓했다. “서쪽으로! 바이퍼 고지 방향!” 엔진의 음계가 날카롭게 치솟는다. 턱을 떠는 운전병은 차를 거칠게 몰았다. 방어진지 안쪽 기동로를 질주하는 내내 지붕 위에서 굵은 탄피가 쏟아졌다. 쾅쾅쾅! 쾅쾅쾅! 달리는 측면으로 끊어 쏘는 중기관총의 소음. 아래에서 미어터지는 참호 입구를 겨냥한 사격이었다. 슈아아악- 새로운 조명탄이 터졌다. 창백하게 밝아진 산기슭에 전투 현장을 우회한 역병집단의 그림자들이 늘어졌다. 초승달처럼 굽이치는 계곡 안쪽에서 유일하게 기지보다 고도가 높은 방향. 기지로 내려오는 능선이 마치 뱀 같다고 해서 바이퍼(Viper)라고 이름 붙인 곳. 감각보정 덕분에 어느 방면이 가장 급한지 바로바로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액추얼! 당소 2-2-브라보! 분대장 부상! 적은 30미터 앞까지 파고 들어왔다!] 2소대에서 소대장을 찾는 무전이다. 곧바로 규정이고 뭐고 없는 진석의 답신이 잡혔다. [겁쟁이 새끼! 아직 100미터는 남았어! 수류탄이든 열압력탄이든 닥치는 대로 써서 밀어!] 겨울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2-2, 즉 2소대 2분대는 여기서 볼 수 없는 위치였다. 감각보정의 범위에서도 한참을 벗어나있다. 실제로 30미터인지, 아니면 거리 감각이 공포에 왜곡된 것인지. 지금은 진석을 믿는 수밖에. 싱 대위가 경고했던 저돌성이 우려된다. ‘다른 기지들은 무사한가?’ 순간적으로 스치는 의문. 통신이 두절된 칼파인 5는 미끼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게 변종의 소행이었다면, 이곳 또한 공격 직전에 통신을 끊어두는 편이 나았을 텐데. 묵직한 포탄을 끊임없이 꽂아주는 알파 포대도 그렇고, 다른 임무부대와의 연결이 여전히 살아있다. 교활한 것들의 농간으로 보기엔 이상한 점이 많다. 그러나 길게 숙고할 틈이 없었다. 험비를 정지시킨 겨울이 시야와 PDA의 전술지도를 대조했다. 펜으로 꾹 누르자 1초도 지나지 않아 해당 위치의 좌표가 나타난다. “포반!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무전기를 전달받은 박격포반에게 새로운 사격임무를 부여하는 겨울. “하나 포는 그대로 조명탄 사격! 둘 포와 삼 포는 대기!” [둘 포, 삼 포 대기 확인!] “좌표! 오스카, 로미오, 6-1-9-5, 4-4-7-0, 고폭탄 사격임무, 효력사 열 발! 준비되는 대로 발사! 브레이크!” 본래는 한 발 떨어지고 나서 탄착점을 보고 좌표를 조정해야 옳다. 그러나 다소의 오차를 무시해도 될 만큼 많은 참호선이 목표였다. 변종들에게도 본격적인 땅파기는 처음이라 간격 조절이 엉망진창이다. 따라서 능선에서 파헤치며 내려오는 길들은 혼잡하게 뒤얽힌 미로처럼 보였다. 다만 미로가 연장되는 속도는 느렸다. 아무리 강인한 변종이어도 사거리 바깥을 멀리 돌아 훨씬 높은 산을 타고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 더운 날씨에 무거운 방탄복을 입은 놈들은 더더욱. 분수령 좌우로 박격포탄 스무 발이 연속으로 떨어진다. 그 중 일곱 발은 땅 속으로 정확하게 꽂혔다. 곧이어 참호 밖으로 죽었거나 죽어가는 것들이 내던져졌다. 내팽개쳐진 채로 헐떡이는 한 놈은 입에서 내장 조각을 게워내면서도 두 팔로 기어 내려왔다. “동일 좌표! 계속해서 쏴!” 명중률을 확인한 겨울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 지르며 험비에서 내렸다. “단차!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에서 방어!” “Yes sir!” 험비 사수의 응답. 다른 방향의 공격이 막히자 변종들이 이쪽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 트릭스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기가 질려있던 병사들이 중대장을 발견하고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액추얼! 액추얼! 당소 4-1 알파! 당소 측 유탄발사기가 무력화되었다! 데들러 직격!] 고장 난 무전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겨울을 찾는 무전은 끊이질 않았다. “당소 액추얼! 4-1, 인명 피해는? 방어가 불가능한 상황인가?” [경상자 둘! 중상 하나! 임무 속행 가능! 하지만 공중폭발탄 지원이 필요하다! 적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M2(중기관총)만 가지고는 막지 못한다!] “확인했다! 4-2의 차량 위치를 재조정하겠다, 이상!” 4소대 쪽에서 느껴지는 「위기감지」가 높지 않았다. 병력 증원까진 필요 없을 듯 했다. 허공에서 조명탄이 아닌데도 한 순간 반짝 타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레이저에 지져지는 아기들이었다. 깨애애애액- 파열된 몸뚱이에서 내장을 뿜으며 지글지글 떨어지는 비명. “재장전!” 겨울 근처에서 경기관총(M240) 사수가 화력공백을 경고했다. 그의 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500발들이 배낭 탄창을 메고 미친 듯이 갈겨댄 탓이었다. 더운 날씨엔 말 그대로의 미친 짓. 총열이 휘지 않은 게 기적이다. 떨리는 손으로 수통을 열어 물을 쏟아 붓는다. 헉헉대는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어있다. 그러나 목마름보다는 총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사선경고를 감지한 겨울이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모두 엎드려!” 파파파파파팍! 방어진지의 모래포대가 직선으로 터져나갔다. 웅크린 병사들의 머리 위로 메마른 흙이 쏟아졌다. 저릿저릿한 감각의 궤도를 비껴낸 겨울이 눈으로 지워진 사선의 저편을 훑었다. 방금 사격을 퍼부은 건 한때 미군이었던 강화종들이었다.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하고, 강화를 거듭하여 지능도 유별난 개체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했었다. 숫자는 고작 다섯. 타타탕! 타타타타탕! 겨울의 대응사격이 넷을 즉사시켰으나, 마지막 놈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놈도 재장전, 겨울도 재장전. 그러나 구울은 자꾸만 빠지는 탄창에 격노하여 울부짖었다. 그야 당연하다. 탄창의 앞뒤를 반대로 쥐고 있었으니까. 타앙! 겨울의 단발사격이 놈을 끝장냈다. 그리고 소총이 떨어졌을 방향으로 수류탄을 하나씩 투척했다. 다른 구울이 있더라도 주워서 쓰지 못하도록. 폭발을 보고서 안도하는 겨울. ‘그나마 다행이네.’ 끊어 쏜다는 개념을 모르는 괴물들은 2초 만에 탄창을 비웠고, 정조준 요령도 모르는 탓에 지향사격을 하려고 반신을 드러냈다. 아니었다면 처리하기 까다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고작 다섯이었다. 지금까지 보고된 사례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배후의 교활한 상위종이 아끼고 아끼다가 꺼낸 카드였을 것인데. 트릭스터의 사체들도 그렇다. 여기서 낭비하는 만큼 다른 전선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었다. 또다시 나타날 것에 대비해야겠지만, 과연 그 정도의 탄약을 확보해 놓았을까? 생존자와 낙오병들도 탄약이 없어서 고생했는데? 자물쇠를 채워 투하했던 보급상자들은 억지로 열었다간 폭발하는 구조였다. “위생병! 위생병!” 벽에 맞고 튄 유탄에 맞은 병사가 있었다. 허덕이는 외침으로 위생병을 부른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느끼기는 다를 터였다. 이쪽에 배치된 대공포(센추리온)는 재장전 도중이었다. 땀에 젖은 기술병들이 급탄기에 탄띠를 삽입한다. 모터가 돌아가면서 탄띠가 말려들어갔다. 1,500발을 한꺼번에 넣는 작업이다. 그 시간을 겨울이 벌어주었다. 장전 도중 아기에게 직격당하면 곤란하다. 날아오던 아기들이 가까운 순서대로 터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중대장을 찾는 무전에 응답하느라, 또 전투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쁘다. 통신병에게 외치는 명령. “4-3 알파에게 상황 보고하라고 해요!” 특정 방향에서 총성이 줄어든 것을 알아차린 겨울이 일그러진 아기 셋을 연달아 터트리며 지시했다. 통신병이 금방이라도 멎을 듯 한 호흡으로 4소대 3분대와 교신한다. “후송인원 둘! 분대장 전사! 적 압력은, 허억, 감소하였음!” 바아아아아악! 대공포가 되살아나면서, 천둥이 드물어진 하늘에 또 한 번 탄막의 우산이 펼쳐졌다. 이 틈에 파헤쳐진 산기슭을 내려다본 겨울이 통신병으로부터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기술팀! 지금 신호기 가동 가능합니까?” [회로는 아까 교체해놨습니다! 하지만 적 EMP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상관없어요! 일단 켜요!” [알겠습니다!] 아까와는 상황이 다르다. 교활한 상위종에겐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땅을 파헤쳐 만든 길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각각의 참호마다 역병이 들끓고 있을 터. 구울의 통제범위는 좁다. 한 순간, 단 한 순간이라도 통제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전 유닛! 클레이모어 격발 대기!” 겨울이 산탄지뢰를 준비시킨다. 크아아아아아-! 신호기 가동과 동시에 변종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바람을 타고 놈들의 역한 땀냄새가 밀려들어온다. 1초, 2초, 3초, 4초……. 어디선가 또 트릭스터의 시체가 폭발했는지, 험비들이 털털거리더니 시동이 꺼졌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변종들이 병사들의 시야에 잡혀있었다. 박차고 나온 순간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다 쏴 죽여!” 어디선가 들려오는 슐츠의 고함. 동시에 이제껏 쓸 일이 없었던 근거리의 산탄지뢰들이 일제히 격발된다. 철조망 즐비한 비탈은 삽시간에 새로운 시체와 유혈로 포장되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사살한 숫자를 백 단위로 헤아려야 할 것 같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변종들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피해가 누적되어서라기보다는, 방어선을 무너뜨릴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는 느낌으로. 그러나 마른 뇌우가 완전히 잦아들어, 하늘은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교신에 집중하던 통신병이 겨울에게 수화기를 내민다. “아파치 편대의 지원입니다. 직접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금방 도착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줄곧 인근 공역에서 교대를 반복하며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피커에서 한 번 들어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복한다.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해머 폴, 귀소 측에 대한 근접지원 임무룰 하달 받았다. 브레이크. 본 편대는 현시각부로 IP 프라이드를 경유하여 전투 공역으로 진입하겠다. ETA(예상도착시간) T 마이너스 2분. 편대 거리 비표준. 브레이크. 가용무장은 고폭탄 4,800발. 공중폭발소이탄 152발, 헬파이어(대전차미사일) 8발이다. 해당 내용을 인지했는지?]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확실하게 인지했다. 이상.” [표적 정보 확인을 요청한다.] “라인 골프, 기지 북쪽 능선 너머에 한 개체 이상의 그럼블이 존재한다. 활공능력을 획득한 강화종 데들러를 투척하니 주의 바란다. 브레이크. 그럼블을 제거한 뒤엔 이쪽의 대공사격을 중지하겠다. 브레이크. 라인 브라보에서 라인 감마까지 규모 미상의 적이 참호선을 구축하고 있다. 이쪽은 해머 폴의 판단 하에 교전하라. 이상.” [……라인 브라보에서 라인 감마, 규모 미상의 적, 참호선 구축이 맞는지?] 미심쩍어하는 반응이었다. “그렇다. 문제가 있는지?” [아니다. 추가 전달사항이 있는가?] “없다, 오버.” [확인. 교신 종료.] 겨울이 시계를 확인했다. 교신하는 사이에도 남은 시간이 줄어, 이제 1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굴곡이 심한 지형 탓에 아직 엔진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EMP 내성이 월등히 강화된 공격헬기 편대에게 땅을 파고 웅크린 변종들은 손쉬운 사냥감일 것이었다. 이번엔 거대한 숲에서처럼 지면에 가까워질 필요도 없었다. 적외선 관측으로 변종들의 체온을 보고 멀리서 포탄과 로켓과 미사일을 갈겨대면 그만이니까. 콰릉-! 계곡 건너편의 정상이 일출의 순간처럼 빛났다. 폭음과 함께 일그러진 괴성이 메아리친다. 곧바로 새로운 무전이 날아온다. [데이비드 액추얼. 그럼블을 제거했다.] “양호. 해머 폴, 20초 후 진입하라.” 답신한 겨울이 기술팀에 연락하여 대공포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마침내 골짜기에 땅을 두드리는 둔중한 엔진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교활한 괴물들이 이 소리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천적을 피하는 벌레 떼처럼, 무수한 금이 어지러운 산비탈로부터 창백하고 더러운 역병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데 뒤엉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은 고체보다는 차라리 액체에 가깝다. 이는 부패한 육신의 홍수였다. 웅크리고 있어봐야 결국은 죽는다. 콰콰쾅! 콰콰콰쾅! 해머 폴 편대가 수백 미터 밖에서 퍼붓는 정확한 기관포격. 지켜보는 겨울의 무전기에 찢어지는 잡음이 흘렀다. 또다시 전자기 충격파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포화는 잠시도 끊어지지 않는다. 4대의 공격헬기는 변종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았다. 예비 탄창이 하나만 남을 때까지 사격을 퍼부은 겨울은, 가까운 탄약 상자마저 비었음을 확인한 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늘어뜨렸다. “전체 사격 중지. 경계 상태만 유지하고, 각 소대에 인원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전달해요.” “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명령을 전달하는 사이, 겨울은 방어진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땀을 닦아냈다. 감각뿐인 심장이 아직까지도 빠르게 뛴다. 눈앞엔 터지고 타올라서 죽음이 만연한 밤이 펼쳐져있었다. 이것이 미국 서부에 남아있는 변종들의 마지막 발악이었기를 바란다. # 264 [264화] #사망의 골짜기 (10) 부상자들을 수용한 실내의 공기는 미지근했다. 멀쩡한 에어컨이 드물어서였다. 그나마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낫다. 예비부품은 충분했다. 날이 밝을 때까진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냉방능력을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바디 백에 들어가는 현장을 지켰다. 개중에는 상처가 없는 시체도 있었다. 탈수와 탈진과 열사병이 겹친 경우였다. 권역외상센터 근무 경력이 있다는 군의관이 PDA의 야전진료체계에 사인을 입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간호사 출신 의무병들이 시체 가방의 지퍼를 올렸다. 어느 쪽이든 중대급 부대에 고정배치 되기엔 과분한 인력이었다. 군의관 조윤창 대위가 겨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 끝났습니다.” “끝났다고요?” “죽을 사람은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살리기가 불가능한 인원들이었지만……. 헬기가 너무 늦지 않는다면 추가 사망자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후송 예정시각은 그대로입니까?” 질문을 받은 겨울이 손목 소매를 젖혔다. 일괄 보급된 기계식 시계에 금이 가있었다. “……예. 별다른 일이 없다면 27분 후에 도착할 거예요.” “다행이군요. 혈액 팩과 수액을 대량으로 써버려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안심해요. 전투가 또 벌어질 가능성은 낮으니까.” 위성 및 항공정찰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통제를 벗어난 소규모 집단의 산발적인 습격은 있을 수도 있지만, 특수변종이 포함된 주력집단은 확실하게 물러난 상태였다. 공격을 주도한 집단이 언제까지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공군의 폭격이 맹렬했다. 겨울이 다른 방향을 보며 묻는다. “이유라 소위의 상태는?” “골절과 화상은 별 것 아닌데 뇌진탕이 문제입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한동안은 후방에서 안정을 취해야 할 겁니다. 뇌출혈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최악의 경우에도 생명엔 지장이 없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은 길어도 반년 내에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한 것이었다. 유라는 장교 중에서 발생한 유일한 부상자다. 겨울이 끄덕였다. “알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대위. 헬기가 올 때까지 잠깐이라도 쉬어요. 많이 피곤할 텐데.” 전투는 군의관에게도 격렬했다. 밤새도록 방어진지를 뛰어다녔으니. 오히려 전투가 끝나고도 쉴 틈이 없었던 만큼 사병들 이상으로 지쳤을 법 하다. 하지만 대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괜찮습니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낫군요.” 그럴 리가 있나. 병원에서의 근무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격렬한 전장에 비할 바는 아닐 터. 결국은 책임감이었다. 그 이상으로 겨울을 의식하는 타산이 엿보였지만……. ‘사람이 다 그렇지.’ 겨울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나쁜 것이 아니고. 군의관은 전도유망한 중대장의 미소에 만족했다. 자원해서 배속된 사람답게. 후송이 확정된 인원들 가운데 의식불명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화학적인 화상을 입은 경우가 많았다. 유라의 경우에도 가장 눈에 띄는 부상은 화상이었다. 왼쪽 쇄골에서 어깻죽지에 이르기까지 거즈가 붙어있다. 그래서 야전 침대에 불편하게 엎드린 채다. 상의를 제대로 입지 못해 나머지 상체에 이불처럼 덮어놨다. “좀 어때요?” 눈높이에 맞게 한 쪽 무릎을 꿇는 겨울 앞에서, 유라는 힘든 얼굴로 입 꼬리만 끌어올렸다. “진통제를 맞아서 아픈 건 모르겠는데, 머리가 멍하고 일어서면 중심을 잘 못 잡겠어요. 속도 별로고. 방탄모만 쓰고 있었어도 훨씬 나았을걸.” “그 덕분에 한 번 살아남은 거잖아요. 헬멧 없이도 파편이 머리에 안 박힌 것도 행운이죠.” 겨울이 허리 뒤로부터 반쯤 녹아내린 헬멧을 내보였다. 왼쪽 절반이 함몰된 채로, 그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산성 체액이 남긴 흔적이다. “화상은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아니지, 조 대위님이 심하지 않다고 했어요. 맞았을 때 칼로 긁어내서 그런가 봐요. 헬멧부터 벗어 던지느라 조금 늦긴 했지만요. 그땐 되게 쓰라렸는데.” 애초에 어깨 쪽으로 튄 양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상은 면이 아니라 크고 작은 점들이 흩어진 양상이었다. 3도까지 진행된 부위는 없다. 부상을 입고도 뛰어다니던 그녀를 쓰러트린 건 포병이 쏘아 보낸 이중목적탄,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분리된 대인자탄이었다. 신형 전투복이 모든 파편을 방어하긴 했으나,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 결과가 뇌진탕과 전신의 타박상들이었다. 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뭐가요?”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었던 것 같아요.” “아뇨. 소위는 최선을 다했어요. 사상자도 이 정도면 적은 편이고.” “그거야 싱 대위님 덕분이죠…….” “내 안목을 믿어요.” 실제로 1소대원들 중에서 소대장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황이 급할 때 가장 원망하기 쉬운 게 직속상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무적이라 해도 좋겠다. 부상을 아랑곳 않고 투혼을 발휘한 점도 높게 평가할 만 했다. 유라는 시선을 낮췄다. “글쎄요……. 전 일찌감치 염소가 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양떼 사이의 염소. 작년에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요. 그런 약속이었잖아요.” 전역은 무리지만 배치를 바꿔줄 순 있다. 비밀이 많은 피자집에 주문해도 되겠고. 겨울의 말에 유라가 시무룩해진다. “정말 그러면 실망하실 거면서.” “네.” “…….” “누가 대신하더라도 유라 소위만큼 잘 할 거라곤 생각 안 해요. 유라 소위만큼 노력하는 사람도 드물 거고, 유라 소위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엎드린 채 늘어뜨린 팔뚝엔 고된 체력단련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녀의 PT 성적은 중대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진석이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말도 있었다. 이론시험 결과도 좋고, 실전에서의 응용도 나쁘지 않다. 사격 실력도 좋다. 이 모든 것이 겨울보다 먼저 부임해서 실전을 치른 부중대장 싱 대위의 평가였다. 유라가 못미더운, 혹은 믿고 싶은 눈치로 묻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심이니까 얼른 나아서 복귀해요. 자리 비워놓고 기다릴게요.” “……어차피 후임이 오지 않나요?” “소대 간부 하나 골라서 임시로 진급시키죠 뭐.” 겨울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었다. 장교가 부족한 마당이니 위에서도 받아들일 것이고. “휴……. 어쩔 수 없네요. 작은 대장님을 실망시키기도 싫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유라의 시선이 전사자들의 유해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상상할 땐 엄청 무서웠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까 실감이 잘 안 나네요……. 그렇게 막 슬픈 것도 아니고. 슬프기보단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요. 저 되게 이기적이네요.” “그게 정상이에요.” 유라의 자책에선 나른함이 묻어났다. 마약성 진통제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슬픔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냉정한 진석과는 다르다. 지금도 눈이 조용히 젖어있다. 또 한 번 내쉬는 한숨. “문상표 이병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까요…….” 아들을 편한 보직으로 배치해달라고 청탁을 했다는 어머니였다. 문상표 이병은 절반만 남아있다. 녹아내린 하반신에선 뼈를 수습하기도 힘들었다. “작은 대장님께서 편지를 쓰시는 거죠?” “그렇게 되겠죠.” “어쩐지 책임을 미루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소대장의 책임은 중대장의 책임이기도 해요. 원래 내가 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 전사자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대장이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중대장의 몫이었다. 그 이상일 때도 있고. 위로를 전하는 입장에선 아무래도 계급을 고려해야 했다. 고인이 명예롭게 죽었다는 글은 소위가 쓸 때와 소령이 쓸 때의 무게가 다르다. “중대장님. 곧 헬기가 도착합니다.” 통신병의 말을 듣고, 겨울이 일어서서 무릎을 털었다. 그리고 소대장과 중대장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부상자들에게 말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몸도 아프고 마음도 무겁겠지만, 그냥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몸조리 잘하고 건강해져서 돌아와요. 다시 만날 땐 상황이 많이 달라져있을 거예요.” 이는 곧 모두의 기대이기도 했다. 의병제대 판정을 받은 이를 따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였다. 작전이 성공하고 나면 결국 더 좋은 상황에서 재회하게 될 테니까. 들것에 실려 나가는 후송인원들과 함께 나가 기다리기를 1분 남짓. 쪽빛이 번지는 동녘으로부터 파라레스큐(항공구조대)의 헬기들이 줄지어 날아왔다. 전투 종료로부터 두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는데, 이는 다른 기지들의 후송 순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헬기가 이륙할 무렵 싱 대위가 중대 참모들과 더불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중대장님, 잠시 이쪽으로.” 사병들의 귀와 거리를 벌린 대위가 전술정보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걸 보시겠습니까? 간밤에 칼파인 5에서 군 인트라넷에 업로드 된 동영상입니다.” “칼파인 5에서? 거긴 통신이 마비되었다면서요?” “일부러 끊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보시면 압니다.” “…….” 겨울은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재생이 시작된 뒤에도 화면은 몇 초간 깜깜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윽고 등장한 사람은, 이렇게 보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깍지를 낀 채로 묵묵히 앉아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 지친 듯 한, 그러나 피로감과 동시에 오연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모르는 미국인들을 위해 소개하지. 본직(本职)은 양용빈 상장. 중화인민공화국의 육군 사령원으로서, 현재는 전시 조칙에 따라 중앙군위를 대리하고 있다.」 상장은 중국어로 말했고, 화면 밖에서 유창한 통역이 들려왔다. 통역을 위한 시간을 줘야 했기에 상장의 말은 속도가 느렸다. 그 느림은 기이한 무게감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 말을 해둬야겠군. 현재 이곳 칼파인 5……기지는 인민해방군이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마흔 한 명의 포로를 획득했고, 추가로 열다섯 명의 민간인 기술자들을 보호하게 됐다. 이들의 처우는 제네바 협정에 의거하며, 종전협상 성립과 동시에 해방될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 나와 내 부하들은 공포분자(테러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협상이 끝날 때까지 미군 당국이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양측에게 비극적인 결과만 초래할 테니까.」 종전협상? 남은 건 비상시의 교전수칙에 따른 무차별 보복밖에 없다던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겨울은 극심한 당혹감 속에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하지.」 상장이 금빛 액체가 들어있는 앰플을 꺼내 보인다. 「이것은 시역(屍病), 즉 귀국에서 모겔론스라고 부르는 질병의 원형 가운데 하나다.」 “뭐……?” 「그리고 시역 복합체를 구성하는 다른 원형들도 보유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왜 가지고 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어차피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니까. 중요한 것은 협상 결과에 따라 귀국이 이 재앙을 끝낼 열쇠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백신을 만들 수도 있겠고, 역병을 앓는 괴물들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 수도 있겠지.」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겨울은 상장의 악의를 직감했다. 한 박자 늦게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통찰」과 「간파」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러나 상장의 악의가 겨냥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사태는 누구도 원한 바가 아니었다.」 상장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통역의 들끓는 음성과 온도차가 심하다. 「협상단을 보내라. 정오까지 기다리겠다. 신중하고 현명한 이들을 기대하지. 인류의 앞날을 건 자리가 될 테니까.」 이상이다. 상장의 손짓과 함께 동영상이 종료되었다. # 265 [265화] #사망의 골짜기 (10) 그로부터 반나절쯤 지나 겨울에게 소환 명령이 내려왔다. 칼파인 6의 대책본부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다. 협상 테이블에 끼라는 뜻은 아니고, 다만 참고인 겸 조언자 자격이었다.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먼발치에서나마 양용빈 상장을 본 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비록 변종들의 공격은 없었지만, 수십 킬로미터의 산간지대를 육로로 이동하긴 아직 위험했다. 아이들린 지열발전소 앞에 사령부가 보낸 수송헬기가 착륙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소령님!” 굳이 내려서 경례하는 파일럿은 구면이었다. “아쉽네요! 좀 더 한가할 때 다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진급 축하해요, 중위!” 꺼지지 않은 엔진 배기음 아래 서로가 불가피하게 목청을 키운다. 겨울의 말에 중위가 웃었다. 말콤 크루거. 샌프란시스코 포트 베이커에서부터 함께 탈출한 육군 항공대 장교였다. 탈출의 주역들은 다들 한 단계씩 진급한 듯하다. 그가 열린 탑승칸으로 손짓했다. “어서 타십시오! 잘은 모르지만 상황이 급하다고 들었습니다!” “잠시만!” 채근하는 파일럿에게 양해를 구한 겨울이 부중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대위! 정말 괜찮겠어요? 힘들면 포스터 중위에게 맡겨요!” 싱 대위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맺힌 건 화상의 쓰라림 때문일 것이었다. 간밤의 전투를 치르고도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했는데, 여기에 진통제를 함께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는 전장정리가 끝나는 대로 쉬게 할 작정이었다. “문제없습니다! 항공정찰 결과를 보셨잖습니까!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수염이 무성한 얼굴은 근엄하고 단호했다. 잠시 응시하던 겨울이 끄덕이고 헬기에 탑승했다. 탑승 칸의 선객들이 앉은 채로 경례했다. 처음 보는 레인저들이었다. 호위 병력인가, 아니면 유사시에 대비한 침투부대인가. 둘 다일지도 모른다. 벨트를 결속한 겨울은 레인저 장교의 들리지 않는 외침과 손짓에 따라 좌석 뒤편에 걸린 헤드셋을 착용했다. 기내통신용이다. [Sir. 수색중대(RRC) 3팀의 캐플린입니다.] 겨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팔머 중위를 알겠군요?” 가볍게 악수한 캐플린 중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러시안 강 유역에서 뵈었다고 듣고 부러웠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 팔머 중위는 겨울과 더불어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에 투입된 사냥꾼으로서, 러시안 강 유역의 민간인 거점에서 그린베레 알파 팀의 롱 대위와 함께 만났던 레인저였다. 곰 인형을 끌어안고 그린베레를 민망하게 만들었던 소녀가 떠오른다. [혹시 그 동영상 보셨습니까?] “봤어요.” [지금은 삭제된 것도 아십니까?] 캐플린 중위의 말에 겨울은 넷 워리어 단말을 꺼냈다. 신호가 깨끗하고 강하게 잡힌다. 먼 거리에서라도 전파방해가 하나둘쯤 있을 법 한데. 새벽까지 이어진 방어전에서도 무전 소통에 무리가 없었다. 그때는 단순히 지형 굴곡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아무래도 교활한 특수변종들이 과하게 몸을 사리는 듯하다. ‘놈들이 인간의 무기와 전략을 항상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혼자 하는 짐작이지만, 급격하게 줄어드는 개체 수는 트릭스터로 하여금 인간의 추적 및 공격수단을 과대평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써먹어온 전파 추적 미사일이라던가, 발신지점 삼각측량 같은. 사실상 공격을 완전히 포기한 단계인 지금은 개체 수 보전이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고. 상념을 접고 인트라넷을 뒤진 겨울이 금세 고개를 기울였다. “중위, 아직 올라와있는데요?” [그럴 리가…….] 캐플린이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조금 전까지 다른 임무에 투입되어 있다가 소환당한 것인지, 전투복도 그렇고 낡은 단말도 그렇고 온통 흙과 먼지 투성이었다. 약간의 기름 냄새와 함께 독한 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기내라서 더더욱. [허, 정말이군요. 이상하다. 아깐 목록에 없었는데.] 어리둥절한 기색. 중위가 살피는 인트라넷 페이지는 겨울이 확인한 곳과 주소가 달랐다. 이것을 보고 다른 대원이 자기 몫의 단말기를 조작한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여전히 천만을 넘고,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는 미 육군 전체가 군용 스마트폰을 보급 받을 순 없었지만, 레인저는 넷 워리어 계획의 최초 수혜 부대이기에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구나 레인저 연대 수색중대는 특수작전사령부의 주력(티어 1)이기도 하다. 이윽고 같은 페이지에 도달한 대원이 지적했다. [팀장님. 업로드 시간을 보십쇼. 고작 4초 전에 다시 업로드 된 겁니다.] [뭐? 4초?] 중위가 되묻고, 대원도 스스로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표정이 심각해진다. 겨울이 새로 고침을 눌렀다. 존재하지 않는 주소라는 경고가 떴다. 그러나 목록으로 돌아갔을 땐 목록 최상단에 같은 이름의 파일이 존재했다. 업로드 시간은 2초 전이었다. ‘설마…….’ 또 한 번 새로 고침을 누르니 이번엔 아예 접속이 차단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즐겨찾기에 등록된 다른 페이지들도 줄줄이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정상적인 주소는 업로드 기능이 없는 곳들뿐이었다. 복지지원단의 온라인 매장 페이지라던가. [뭐야 이거. 중국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나?] 중위의 독백 같은 말에 다른 대원이 반박했다. [사실상 해상난민이었던 놈들에게 그럴 능력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럼 이건 뭔데? 망이 마비된 꼴이잖아.] [위에서 끊었겠죠. 동영상 열람을 막으려고. 업로드 시간은 뭐……하도 많이 봐서 오류가 생겼거나 그런 거 아닙니까? 왜 게임을 해도 접속자 수가 폭주하면 서버가 맛이 가잖습니까.] 불충분한 가설이었다. 양용빈 상장은 동영상을 최대한 많은 이들이 보길 바랐을 테니 페이지 접속을 막을 동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접속이 불가능해진 건 미군 당국의 결정일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캐플린의 질문을 받은 겨울은 그의 우려를 긍정했다. “접속이 불가능해진 건 사령부의 결정이겠지만, 동영상이 계속해서 업로드 되는 건 사이버 공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샌프란시스코엔 중국군 정보지원함도 있었거든요.” [하.] 어이가 없다는 느낌으로 한숨을 쉬는 레인저 중위. [그러고 보면 소령님께선 저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바다에 계셨었군요.] 아까부터 겨울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대원의 발언이었다. [혹시 그 새끼(Motherfucker)를 직접 보신 적도 있습니까?] 상급자 앞에서 단어 사용이 거칠다. 표정과 음색 역시도. 그러나 그것은 겨울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저히 억누르지 못할 분노와 적대감의 표출이었다. 장정 9호 추적 작전, 페어 스트라이크의 상세는 알려져 있지 않을지언정, 160만 장병을 죽인 핵공격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모르는 미국인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이름뿐이었다. 겨울은 레인저 수색대원의 부글거리는 감정이 한없이 불길했다. “……임무 도중에 한 번 볼 기회가 있었네요.” [확 죽여 버리지 그러셨습니까.]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긴 설명은 불필요했다. 대원은 화가 오른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말 못할 사정이 많은 비밀작전의 생리에 대해선 대원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델타 포스(특수작전사령부 델타 파견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베이비 D라고 불리기도 하는 레인저 수색중대의 일원이기에. 대원의 분노를 지적할까 고민하던 겨울은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몇 사람 설득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짐작이 맞다면 이 분노야말로 양용빈 상장의 목적이었을 터.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장병들이, 또 부사관과 장교들이 들끓고 있을까. 사령부가 접속을 차단하고 있으나 큰 효과를 보진 못할 것 같다. 망을 관리하는 부대에서도 공분에 치를 떠는 이들이 있을 테니. 자꾸 삭제되는 것을 보고 다운로드 받은 이도 한둘이 아닐 테고. 결국 그 짧고 허술한 동영상, 치명적인 독은 어떻게든 확산될 것이다. [착륙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손잡이를 꽉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와중에 위트가 섞인 크루거 중위의 방송이 이질적이었다. 쿠웅. 시간을 아끼려는 거친 착륙이었다. 문이 열리자 연락장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소령님께선 이쪽으로 오십시오!” 레인저와는 다른 방향으로 안내된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선 온갖 특수부대의 마크들이 보였다. 착륙장이 모자라 하늘에 대기 중인 헬기들도 다수였다. 특수작전사령부에 속한 모든 부대를 한꺼번에 불러들이는 눈치다. 과유불급인데, 윗선 역시 이번 사태에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착륙장 근처 보급 상자에 걸터앉아 대기하는 집단은 복장이 꽤나 자유분방했다. 위장색은 통일되어있지 않고, 장비도 마찬가지. 그러나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의 「위협성」이 감지된다. 겨울을 발견한 이들, 데브그루(DEVGRU)가 멀찍이서 먼저 경례를 보냈다.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답례를 받은 그들 중 하나가 겨울을 바라보며 시가 연기를 뿜는다. 칼파인 6는 겨울의 임무부대가 주둔하는 아이들린과 마찬가지로 지열발전소였다. 양용빈 상장이 점거한 칼파인 5에서 가장 가까운 거점이기도 했다. 대책본부가 마련된 시설로 들어선 겨울은 계절이 바뀐 듯 한 냉기를 느꼈다. 냉방도 냉방이지만, 그보다는 분위기였다. 실내엔 겨울보다 상급자가 즐비했다. 군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물들도 다수. 그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경의를 표한다. 명예훈장 수훈자에 대한 예우였다. 겨울은 모니터를 향해 정자세로 경례했다. 화상회의 시스템이 백악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편히 있게, 소령.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유감이야.] D.C와의 거리 때문인지 맥밀런 대통령의 음성과 입모양에 약간의 갭이 있었다. 다른 모니터엔 4성 장군, 봉쇄사령관 테런스 슈뢰더 대장도 보인다. 그밖에 국방부, 국방정보국, 국무부 정보조사국, 국가안보부 정보분석실, 국가정찰국, 육군 정보보안사령부, CIA, FBI 등으로 연결된 화면들이 있었다. 대책본부 구성원들도 헷갈리는지 딱지를 붙여놓았다. 대책본부가 이곳과 워싱턴 D.C에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었다. ‘대응 속도가 빠른 건 좋은데…….’ 사공이 너무 많은 게 아닌지 우려되는 겨울이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 하나가 겨울에게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국토안보부의 브록 헌트입니다. 소령은 지금부터 날 도와주면 돼요.” 자세한 소개 같은 것도 없었다. 각자가 자기 할 일에 바쁘다. 온갖 채널로 연결된 통화의 소음은 시장통의 북적임과 맞먹었다. 겨울이 목소리를 조금 키워서 말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소탕전에 투입되는 거라면 몰라도.”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국토안보부 관계자는 경직된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지금 미치광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시설을 폭탄으로 도배해놨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당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보냅니까? 전투력이 다가 아니에요, 소령.” “제가 드린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흠.” 호기심과 호의, 그리고 은근한 냉혹함이 뒤섞인 눈길로 응시하던 헌트가 겨울 앞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헤드셋을 건네주었다. “일단 이거부터 꽂아요.” 헤드셋을 착용한 겨울은 노트북에 비치는 화면들이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툭툭 끊어지는 저해상도 화면은 누군가의 가슴 높이에 달린 카메라였고, 영상 속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중간부터 들어선 맥락을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겨울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게 뭡니까? 어디를 보여주는 건가요?” “그건 1차로 파견될 협상단입니다. 그리고 이쪽 탭은…….” 딸깍, 딸깍. 헌트가 클릭 두 번으로 전환한 화면에선 아까 마주쳤던 데브그루 대원들이 복장과 장비를 점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뒤편의 브리핑 패널엔 칼파인 5 발전소의 내부 구조도와 사진들, 적의 예상 배치, 침투 경로 등이 표기되어 있었다. 헤드셋 리시버로 흘러나오는 소리도 데브그루 대원들의 대화로 바뀌었다. “한 소령이 할 일은 조언입니다.” “조언?” “뭐가 됐든 그때그때 생각나는 걸 말해주면 돼요.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걸로. 그런 게 없으면 그냥 끝까지 보고만 있어도 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페어 스트라이크 임무 보고서는 나도 읽어봤어요. 나도 그렇고 위도 그렇고, 그리 대단한 도움을 기대하진 않습니다. 단지 한 소령이 저 인간들에 대해 그나마 잘 알 것 같으니까, 혹시나 해서 불러놓은 거지요.” “…….” “우선은 협상단이 파견될 테고, 잘 안 풀리면 타격대가 침투할 겁니다. 내가 읽은 기록이 정확하다면 당신은 협상이든 전술이든 조언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느끼진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도록 해요. 긴장으로 머리가 굳어선 떠오를 생각도 안 떠오를 테니까.” 겨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화면 속 데브그루 대원들의 살기 가득한 얼굴들 탓이었다. 그 개새끼를 죽여 버리겠어. 대원 중 한 사람의 말이었다. # 266 [266화] #사망의 골짜기 (12) 공격을 준비하는 타격대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대원들과 같은 수준으로 무장한 소령만 세 명이나 된다. 지도와 모니터를 앞에 놓고 통신기를 낀 채 의견과 고성을 교환하는 중이다. 서로 각기 다른 루트로 침투할 예정인 이들은, 계급 상으로는 겨울과 같을지라도 실제 대우는 겨울보다 위인 현장지휘관들이었다. 같은 부대 소속의 대령이 후방에서 작전을 감독했다. 통신망에서 그에게 질문이 떨어진다. 겨울에겐 낯선 목소리였으나, 대령의 반응으로 미루어 까마득한 상급자였다. [발전소 내부 영상은 아직인가? 예정시각이 지난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소음을 줄이느라 작업 시간이 늘어나서 그렇습니다.] 메인 스크린의 풍경이 바뀌었다. 발전소 상공을 지나는 정찰기가 대령이 언급한 작업을 비추었다. 데브그루 내에서 수색과 정찰을 담당하는 팀(Black)이 발전소 외벽 일곱 곳에 붙어 구멍을 뚫고 있었다. 도면상 벽 안쪽에 사람이 없을 법한 위치. 화면이 수시로 확대와 축소를 반복한다. 최대로 확대됐을 땐 한 대원의 모공이 보일 정도의 고해상도였다. 주변에 미군으로 위장한 중국군은 보이지 않는다. 미군이 현장을 포위한 탓에 저격을 우려한 모양이었다. 유인신호기는 꺼진 채였다. 켜더라도 위협은 없겠지만. 벽에 고정시킨 드릴은 느릿느릿 깊이를 더해갔다. 드릴을 조작하는 대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 작업을 은폐하기 위해 포위망을 구성하는 다른 부대들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어차피 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은 시끄럽게 마련이었다. 마침내 구멍을 뚫은 대원이 즉각 손으로 구멍을 막았다. 혹시라도 빛이 새서 들킬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의 손짓에 다른 대원이 가방을 가지고 온다. 케이스를 열자 둘둘 감은 카메라 케이블(Inspection camera)과 모니터, 컨트롤러와 중계기가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내시경과 비슷하지만, 기능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끄트머리엔 마이크도 달려있다. [포인트 1. 카메라 들어갑니다.] 대원이 컨트롤러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렌즈가 있는 반대편 끝을 구멍 속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상황실에서는 위성화면, 공중정찰, 밀어 넣는 과정,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카메라의 화면을 동시에 지켜 불 수 있었다. 카메라 케이블 쪽 영상은 처음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침침한 실내의 광경을 비추었다. 이제 컨트롤러를 든 대원이 상하좌우 방향키를 누른다. 그러자 카메라가 달린 케이블은, 놀랍게도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겨울은 크고 굵은 연가시처럼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인공근육인가?’ 아무래도 케이블 피복에 인공근육을 삽입한 듯 하다. 전기가 흐르면 수축한다. 촬영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세심하게 설치된 부비 트랩들이 발견된다. 인계철선이 연결된 수류탄, 산탄지뢰, 플라스틱 폭약 등. 발견된 함정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실시간으로 작전지도에 갱신되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장치는 따로 있었다. [Damn. 저게 뭐야!] 누구의 욕설인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다. 겨울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어깻죽지에 전극이 꽂힌 트릭스터의 유해였다. 무슨 악취미인지,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처럼 사지를 펼쳐 고정시킨 상태. 하기야 변종 시체를 변종만 줍고 다니라는 법은 없었다. 찾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미군의 폭격이 떨어지는 장소를 수색하면 된다. 혹은 독자적인 사냥을 진행했을지도 모르고. 간간이 모습을 보이는 중국군 병사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실내에 유독가스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이 인질 구조보다 병원체 확보를 우선시할 경우에 대비한 예방조치일 터. 물론 동영상이 유포된 시점에서 한없이 낮은 가능성이겠으나, 양용빈 상장에겐 인생 최후의 승부수였다.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생각이 없을 것이었다. “이거 아주 개싸움이 되겠군.” 나란히 앉은 헌트의 독백. 겨울도 동감이었다. 대체 저런 유해가, 저런 트랩이 몇 개나 될까. 굳이 트릭스터의 유해가 아니더라도 국소적인 EMP를 만들어낼 수단은 있었다. 코일에 강한 전류를 흘리거나, 전기가 흐르는 코일을 폭파하거나. 어쨌든 저곳은 발전소다. 실내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모든 전자장비와 통신이 마비될 게 뻔하다. ‘병원체 확보나 인질 구출은 당연히 물 건너가겠고…….’ 겨울은 다시금 데브그루 대원들의, 그리고 미군의 분노를 우려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통제 불능의 증오가 부딪히는 현장이 될 것이다. 남는 건 비극뿐. 짐작이 맞다면 그것이야말로 양용빈 상장의 의도에 부합한다. 부가적인 목표 정도겠지만. 그가 고른 스스로의 무덤이다. “타격대 투입을 재고할 순 없습니까?” 겨울이 묻자 헌트가 조용히 답한다. “협상에 성공하면 투입하지 않고도 끝날 겁니다.” “아시겠지만,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 침묵하던 헌트는 돌연 피식 웃었다. 당연하게도, 양용빈 상장의 샘플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이는 겨울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감입니다, 소령. 동영상이 이미 밖으로 샜어요.” 이번엔 겨울이 입을 다물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어쩌면 비밀을 지키려는 상부의 조치가 더 빠른 유출을 야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백악관 앞에 지금 1만 명이 모여 있답디다. 이건 그냥 보자마자 꼭지가 돌아서(Pissed off) 튀어나온 사람들이예요. 이제 겨우 시작인 겁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재앙은 말이죠.” 국토안보부의 간부가 시니컬하게 덧붙이는 한 마디. 우린 좆 됐어요. “이 와중에 대통령 각하께선 중국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투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옳은 결정이지요. 그들도 시민이니까. 그들도 미국이니까. 하지만 화가 나서 정신이 나가버린 더 많은 미국은 이 일을 절대로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차라리 광란의 시작을 좀 더 앞당겼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의 마지막 분석이 정확했다. 그러나 대통령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터.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마시는 독배였다. “제 진술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겨울의 제안에 헌트는 코웃음을 쳤다. “날 믿어요, 소령. 당신을 무시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고, 시민들이 귀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지만, 이 시점에서 당신의 증언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겁니다.” 그의 말이 느긋한 한숨과 더불어 이어진다. “뭐라고 할 겁니까? 저 작자가 가지고 있는 병원체는 사실 가짜일거라고? 이런 전개야말로 저 미치광이가 바라는 것이라고?”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 참가 이력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그 어느 정도가 중요할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핵잠수함 추적을 위한 기밀작전의 상세를 모르고, 다만 겨울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안다. 그러나 헌트는 소리 죽인 냉소로 받는다. “하하하. 이봐요, 동영상을 누가 유출시켰을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 군 내부의 누군가, 혹은 비밀취급인가를 지닌 관계자다. 한 명, 혹은 여러 명. 용의선상에 오를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자칫 수백, 수천 명이 서로를 모르는 공범자일 수도 있었다. 겨울은 헌트의 의도를 깨달았다. 헌트가 거리를 좁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요. 지금은 군도 정부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나라 전체가 분노로 미쳐가는 중이거든! 겉으로 점잖은 상급자들도 속은 어떨지 누가 알겠습니까? 내가? 당신이?” 그는 스스로 한 말을 비웃는다. “펜타곤, FBI, CIA, 백악관, 국방정보국…….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만 입이 가벼워도 큰일입니다. 그리고 한 명만 가벼우면 놀랍겠지요. 하. 당신의 증언에 근거가 없다는 것쯤 금방 밝혀질 거다 이 말입니다.” “…….” “뭐 소령의 인기는 대단하니까 개인적인 의견만으로도 동조자가 많이 나오겠지만……. 글쎄요. 이런 건 어떻습니까? 시민들 눈에 정부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난민 출신이라는 당신의 약점을 이용해서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강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특정 세력, 집단, 인기와 권력에 굶주린 정치인들이 그런 여론에 편승한다면? 혹은 일부 시민들, 특히 남부 사람들이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면? 그럼으로써 당신의 쓸모가 크게 줄어든다면? 그러다가 호손의 기적이 실은 각색이 들어간 연출이란 사실이 폭로되기라도 한다면?” 호손의 기적. 본토 최대의 탄약창과 붙어있던 도시의 시민들은, 겨울이 위성을 탈취한 덕분에 핵탄두의 직격을 면해 목숨을 구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양용빈 상장은 처음부터 직격 같은 걸 바란 적이 없다. 물론 위성의 방해가 없었다면 핵탄두는 보다 정확하게 떨어졌을 것이고, 수많은 장병과 시민들이 핵의 화염에 휩쓸렸을 터. 그 자체는 사실이다. 공격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지금의 시민들에겐 정치적 의도에 의한 각색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너무 비관적인 예측들입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겨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헌트는 대중을 경멸했다. “소령, 이 분야는 우리가 더 잘 알아요. 집단의 광기는 개인의 광기를 압도합니다. 정신이 나가버린 대중은 혼돈 그 자체예요. 믿고 싶어서 믿고 분노하고 싶어서 분노하는 사람들, 당신이라면 벌써 여러 번 봤을 것 같은데요.” 표정을 지운 헌트가 피곤한 몸짓으로 끄덕였다. “이건 그냥 개인적인 예상인데……결국 당신을 쓰기는 쓸 겁니다. 다만 가장 효과적인 순간을 고르겠지요. 사람 잡아먹는 카니발이 끝난 뒤에, 축제의 광기와 열기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의 머리가 좀 냉정해졌을 때……. 내가 보기엔 본토 탈환을 끝낸 시점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야 당신의 이미지가 상할 걱정도 줄어들 테고.” 뭔가 나라를 묶을 수단이 필요하다. 겨울을 포함한 전쟁영웅들의 역할이었다. “무엇보다 저 작자가 가진 게 진짜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그게 설령 백만 분의 1의 확률일지라도. 인류의 운명이 걸린 문제니까.”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협상단과 타격대 양쪽의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백악관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겨울은 새롭게 갱신되는 정보들을 살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중국군이 버리고 간 차량들이 발견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진을 띄워보니 위장망에 덮인 장갑차량이었다. 여기에 약간의 텍스트가 붙어있다. 야간에만 기동하고, 그 과정에서 사방에 방치된 미군 장비들을 노획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근거는 날짜별, 시간대별 위성사진의 차이였다.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당연히 보복을 예상했을 거야.’ 돌이켜보면 양용빈 상장의 계획이 핵공격으로 끝이었을 리 없다. 겨울이 아는 한 핵전쟁 교리는 보복능력이 핵심이었다. 너를 죽이면 내가 죽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는. 미국이 핵으로 보복한다고 해도 시민들이 남아있는 시가지에까지 적극적인 공격을 가하진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했을 것이다. 도덕적 부담만이 아닌, 정치적 부담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운에 맡겨야 했을 일이나 양용빈 상장에겐 그것이 최선이었을 터. 그래서 도심의 모처, 어느 안전한 거점에 병력과 장비를 미리 숨겨두었다가, 핵공격 직후 상장이 합류하고, 긴 시간을 침묵하며 기다린 끝에 지금쯤이면 감시가 느슨할 것이라 여겨 육로로 탈출한 거라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다른 장성들은 그저 미끼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다소의 간극은 있을지언정 지금의 상황과 어떻게든 연결되는 가설이다. 탈출은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로 빚어진 극심한 혼란 또한 계산된 범위가 아니었을까? 사방에 버려진 미군의 장비와 복장을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결국 대통령과 현 정권은 여러모로 비난받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하지만 작정하고 준비된 소규모 부대의 기습, 그것도 사태가 종결된 후에 한 달 이상을 기다려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이들을 어떻게 포착했겠는가. 흩어진 패잔병들, 생존자들을 구조하기에도 여력이 부족한 마당에. 당시엔 모든 지휘체계와 정부역량이 포화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크레이머 같은 사람에겐 알아줄 필요가 없는 것들이겠지.’ 에드거 크레이머. 공화당의 대선후보. 겨울이 경계하는 종말의 가능성 중 하나.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을 떠올렸다. 양용빈 상장도 이를 청취했을 것이다. 미국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비록 검열을 거쳤더라도 남은 윤곽을 짐작할 정도는 된다. 적국의 정보를 토대로, 상장은 군인으로서 최선의 공격 전략을 구상한 셈이었다. 미국이 멸망할 가능성을 최대화할 선택지를. 전쟁은 무기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 267 [267화] #사망의 골짜기 (13) 협상단 일부가 겨울을 찾아왔다. 단장 릴리아나 그린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겨울에겐 단장의 연령이 뜻밖이었다. 좀 더 노련하고 원숙한 인물일 줄 알았는데. 이를 눈치 챘는지 그린이 한쪽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렸다. “놀라신 것 같군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예상보다 무척 젊으셔서.” “Oh. 기분 나쁘긴요. 젊어 보인다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죠.” 저는 실제로도 젊지만요. 그녀는 시늉에 불과한 미소를 지운다. “사실 저도 제가 선발된 게 의외였습니다. 위에선 그 인간이 저를 은근히 무시했으면 하더군요. 일반적으로 그런 꼴통들의 우월감은 다리 사이에 붙어있으니까요.” 함께 온 남성 중 하나가 그린에게 눈치를 주며, 굳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회담을 앞두고 긴장했는지 어깨가 굉장히 뻣뻣해보였다. “이걸로 땀 좀 닦으세요.” 겨울이 손수건을 내밀자 남자는 허둥거리며 받아들었다. 감사인사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잠긴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이분, 협상장에 가셔도 괜찮을까요?” 못미더워하는 겨울에게 그린이 고저 없이 대답했다. “안심하세요. 소령님 앞이라서 긴장하신 거니까. 현장에선 문제없을 거예요.” “…….” 그녀의 태도로 보아 부하로 위장한 상급자인 모양이다. 상하관계를 떠나 제법 친근해보였다. 젖은 손수건을 돌려받은 겨울이 그린에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양용빈 상장은 상대가 여자라고 무시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린은 순순히 끄덕인다. “제 생각도 그렇답니다. 다만 우리가 뻔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길 바랄 뿐이죠. 얕보기 시작하면 경계심도 허물어질 테니. 이게 과연 득일지 실일지는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녀는 찾아온 이유를 내밀었다. “한 번 훑어보시겠습니까?” 겨울은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표지에 찍힌 인쇄일자가 오늘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문서의 페이지들은 손닿는 가장자리가 많이 상해있었다. 클립이 꽂힌 장마다 꼼꼼한 밑줄과 메모가 보였다. 누군가 그린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1시간 40분 남았다. 끄덕인 그녀가 겨울에게 말했다. “우리가 가진 양용빈 상장에 대한 최신정보는 소령님의 진술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장관급 인사다보니 CIA나 DIA 같은 곳에도 관련 정보가 있긴 한데, 양용빈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더군요. 중국 장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파벌도 없는 사람이고.” “파벌이 없다고요?” 다소의 놀라움을 담아 반문하는 겨울. 중국에서 파벌이 중요한 건 깡패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에루 중장도 자신의 울타리를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말하기를, 중국은 개개인을 돌보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울타리였다. 각자가 살 길을 따로 찾아야 할 만큼. 그린이 애매하게 긍정했다. “예. 본래 태자당의 1세대이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과거의 동지들과 척을 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그가 육군 사령원이 된 것은 각 파벌의 중도적인 합의였던 것 같고요. 취임 이후엔 사람을 쓰는 데 파벌을 가리지 않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추정된다. 그리고 합의였던 것 같다. 어느 쪽도 확실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마지막으로 확인하러 온 겁니다. 보고서에 무언가 빠진 것은 없는지, 상장의 표정과 어조, 몸짓은 어땠는지……. 공식 보고서에 집어넣기엔 부적절하거나 모자란 것들 말이죠. 그밖에 참고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배를 쓸어내렸다. 겉보기보다 부담감이 많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겨울은 바다 위에서 열렸던 회담을 회상했다. “처음엔 굉장히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였어요.” “권위가 느껴졌습니까?” “아뇨.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군인으로 보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리가 아프군요. 잠깐 앉으시죠.” 겨울에게 의자를 권한 그린이 바싹 붙어 앉아서 펜을 들었다. “보고서에 기록된 대화가 얼마나 정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겨울이 대답하기도 전에 차분하게 덧붙이는 그녀. “소령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흐려지고 왜곡되기 십상이니 말입니다. 하물며 꽤나 긴 회의에 대한 기록입니다. 얼마간의 부정확함은 불가피했겠죠.” 그러나 겨울이 보기에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신뢰성은 호손의 기적 문제와 연결되기에. 그러므로 의심은 차라리 사무적인 배려에 가까웠다. 겨울의 처지라면 누구든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이해. 이것 없이는 정확한 진술도 없다. 경험으로 얻은 지혜일 것이다. 겨울은 눈으로 서면을 훑으며 대답했다. “완벽하진 못해도 대부분은 정확할 겁니다. 기억력엔 꽤 자신이 있거든요.” 실제로 좋은 기억력인 동시에 「암기」 보정이기도 하다. ‘지금은 지워진 곳이 많은 보정이지만, 피쿼드호로 복귀한 직후엔 아니었으니까.’ 낮은 등급으로 인한 보정 지연, 즉 「암기」된 내용이 떠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고서 작성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기억의 오류를 교정하고 여백을 채워주는 보정. 따라서 보고서는 한없이 사실에 가깝다. 정보관계자의 눈으로 겨울을 살피던 그린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좋습니다. 그럼 상장이 어느 시점까지 부드러웠습니까? 혹시 마지막까지 똑같던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여기서 짚어주시겠습니까?” 펜을 넘겨받은 겨울이 대화록에 감정의 구간을 표시했다. “흠. 그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이라. 여기서 감정이 한 번 튀었다 이거군요.” 그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겨울의 어깨 너머에서, 아까까지만 해도 식은땀 범벅이던 남자가 겨울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뚫어져라 보는 중이었다. 집중하기 시작한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린이 질문을 더했다. “이 말을 할 때의 상장은 어땠지요?” “허탈한 느낌이 들었어요. 웃는데도 울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라진 조국에 대한 인지부조화.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이는 유형인가. 중얼거린 그린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겨울도 그 기분을 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말만큼 견고한 것도 드물다. 그린과 상급자는 핵미사일 발사를 알릴 때의 상장이 유쾌해보였다는 진술을 듣고 다시금 절제된 불쾌감을 드러냈다. 상담에 가까운 의견교환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하아.” 시계를 본 그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어진 시점이라,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에 협상단 사람들이 떠날 채비를 한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겨울은 그녀가 청하는 악수를 받았다. “모두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 협상단 중 누구도 성공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저 양용빈 상장의 샘플이 진짜일 가능성, 차라리 영에 수렴할 그 희박한 확률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리고 인질들의 생명이 걸려있기에, 폭발하는 여론에 떠밀리듯 실패할 것이 확실한 협상에 나설 뿐. 떠난 그들은 곧 화면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을 태운 장갑차량 앞뒤로 호위 목적의 험비가 붙는다. 분할된 화면은 차량 대열의 이동을 하늘과 땅의 여러 각도에서 비추었다. 발전소에서 나온 중국군 병력이 협상단을 맞이했다. 놀랍게도 양용빈 상장이 몸소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시오. 빈객을 맞이할 준비가 서툴러서 미안하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군. 설마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전파에 실려 스피커로 나오는 그린의 음성은 직접 들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동네 할아버지처럼 늙은 상장은 겨울이 기억하는 바로 그 온화함으로 답했다. [당신들은 날 어떻게 해볼 능력이 없지 않소.] 샘플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인질들도 안에 있는 마당에. 생략된 말은 들을 것도 없었다. 심지어 협상단의 몸수색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상장 또한 영상과 기록이 남기를 원할 것이었다. 이는 그가 수행하는 전쟁이었다. 협상은 발전소 밖에 설치된 천막에서 진행되었다. 원래 주둔하던 독립중대의 흔적. 그린의 정장 단추에 달린 카메라가 양용빈 상장을 비춘다. [자, 서로에게 여유가 많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무엇을 준비해오셨소?] 상장의 질문에 그린은 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그러는 장군께선 무엇을 바라십니까?] [내가 무엇을 바라느냐…….] 생각에 잠기는 상장의 모습. 겨울은 그것이 과연 꾸며진 모습일까 의심했다. 협상의 목적이 도발인 이상 합리적인 요구를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왔을지도 모르지.’ 미친 사람을 합리로 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이성적으로 미친 사람이긴 하지만. [우선은 영토를 할양받고 싶군.] [어디를 원하시는지?] [콜로라도와 와이오밍, 네브라스카의 접경지대가 좋겠군. 콜로라도 방면에 풍력발전단지가 두 개 있을 텐데, 그 일대를 다 넘겨줬으면 싶소. 가로 세로 100킬로미터의 선을 그읍시다. 아, 미리 말해두겠는데, 내가 요구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넘어와야 하오.] 이에 백악관을 보여주는 화면 속에서 대통령이 보좌관의 귓속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내용은 겨울 가까이에 앉은 헌트의 냉소로 알 수 있었다. “핵 테러리스트가 핵미사일을 내놓으라는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상황실 정면의 대형화면에 발전소 인근의 농장과 황무지들이 투사되었다. 밀밭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 옆에 뜬금없이 탄도탄 사일로가 박혀있다. 겨울에게도 익숙한 경치다. 이미 사라진 세계에서 그 근방을 방랑한 적이 있으므로. 사실 미국의 탄도탄 배치가 매양 이런 식이었고, 양용빈 상장이 요구한 땅은 본토에서 핵 사일로가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이었다. 상장은 계속해서 불가능한 요구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워싱턴 D.C의 마이어 기지도 할양받아야겠소. 아무래도 억지력 없는 평화라는 게 오래가진 못하는 법인지라. 추후 귀국의 본토탈환이 끝나거든 샌디에이고의 항만과 배후지대를 내어주시오. 파나마 지역을 확보할 경우엔 운하도 우리가 받아야겠소. 남북으로 30킬로미터요. 주둔지를 내어줄 테니 방어책임은 귀국이 지시오. 항만과 운하 이용료로 다른 비용을 대신하도록 합시다. 여기에 귀국 내 통행의 자유를 허가하고 중국 난민들의 신변을 양도해준다면 충분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협상을 파행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그린은 침착하게 대답한다. [그렇군요. 긍정적으로 검토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그게 뭐요?] [샘플.] 그린이 말에 공백을 두어 강조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모겔론스의 원형들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보십시오.] [증명할 방법이 있겠소?] [있습니다. 병원체 가운데 하나를 먼저 넘겨주시면 됩니다.] [불가능한 요구를 하시는군.] 그린이 상장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는지, 화면의 초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습니까? 아시다시피 모겔론스는 공생 관계를 이루는 여러 병원체의 합병증입니다. 그 중 하나의 샘플만으로는 백신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만 진위를 판별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죠. 이 판단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본국은 어떠한 협상에도 응할 수 없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협상단의 카메라를 통해 그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침착한 정도를 넘어서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머금은 상태. 그러나 상장도 여유롭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게는 안 되겠군. 시역을 파괴할 수단을 마련하는 데엔 복합체의 구성요소 하나만으로도 큰 진전을 얻을지 모르니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십시오, 장군.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입니다. 본국이 보호 중인 중국의 시민들과,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미국의 시민들……. 당신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습니까? 그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장군의, 중국 인민해방군의 의무가 아니었나요?] 당연히 없을 것을 알지만, 이것은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를 대비해 던지는 질문이었다. [없소.] 아는지 모르는지, 상장의 답변은 가벼웠다. [조국 수호를 위한 인민전쟁 교리의 기본 전제는 인민의 희생이지. 그것을 희생이라고 표현하기도 곤란하군. 당연한 의무니까. 조국을 지킬 의무는 중화인민 모두의 것이오. 나와 그들의 차이는 제복의 유무, 훈련의 유무, 무장의 유무일 뿐. 거기다 중국 인민의 혈통을 이어받은 미국 시민들이라……. 중국의 정신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저 미국인일 뿐이오.] 그는 허리를 곧게 편 채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 무고한 민간인은 없지. 귀국의 장군이 도쿄를 불태우며 남긴 말이오.] # 268 [268화] #사망의 골짜기 (14) 협상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꾸준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헌트가 겨울에게 묻는다. “소령. 저쪽 통역이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거 맞습니까? 표정 보니까 과장이 섞여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영어 실력도 훌륭하다고는 못하겠고.”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주위에서 몇 사람인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겨울이야 수준 높은 「중국어」 능력이 있으니 상장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화면 속 협상단장 그린을 포함해 현장 대책본부 사람들과 국방부, 백악관에 이르기까지 통역에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굳이 자신에게 확인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보시면 대체로 일치하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요?” 손가락으로 가리킨 화면 하단의 텍스트 상자엔, 미국 측 중국어 전문가들이 별도의 장소에서 실시간으로 타이핑하는 번역문이 출력되고 있었다. 양용빈 상장 측, 중국군 통역병의 말실수와 오역에 붉은 줄을 긋고는 있으나 대체로 사소한 것들. 맥락상의 큰 차이는 없다. 다만 통역병의 어조가 다소 감정적이고 강렬하여 상장의 온유한 음성과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다. 헌트가 펜으로 머리를 긁으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말입니다. 마음 놓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 미국 측 전문가들도 사람이다.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쉽고, 분노하고 싶어서 분노하기 쉬운 사람들. 헌트는 그들의 혐오와 격앙된 감정을 경계하고 있었다. ‘왜곡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일까봐…….’ 지나친 걱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 “아무튼 소령이 듣기에도 이상은 없다 이거지요?” “네.” “사이코 새끼가 저 같은 놈들만 모아놨군. 아랫것들을 흔들어보기도 힘들겠어. 이건 무슨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아니고…….” 겨울은 헌트의 노트북을 엿보았다. 상장과 통역병만이 아니라, 발전소 벽을 뚫고 집어넣은 카메라를 통해 중국군 장교들과 병사들의 감정 분석이 진행 중이었다. 포착된 얼굴에 여러 개의 점이 찍히고, 각 점이 서로 연결되어 여러 감정들의 퍼센티지를 도출했다. 여기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더해진다. 그들의 대화, 적외선 영상에 찍힌 체온의 변화, 걸음걸이의 양상과 그 밖의 사소한 행동들로부터 유추 가능한 심리에 대하여. 선택의 폭은 좁았다. 랭글리로 연결된 모니터 속에서 신임 CIA 국장이 발언했다. [각지의 소요가 급격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미 여섯 개 주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나, 우리가 감시중인 과격 불온단체들의 움직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 하루 이틀 이내에 미국 전역이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겁니다. 무장한 시민들과 군경 사이에 유혈충돌이 빚어지겠지요. 그럼 각하의 정권은 끝장입니다. 수사국과 협조하여 온갖 핑계로 주모자들을 체포하거나 억류하고는 있으나 큰 효과는 없을 겁니다.] CIA의 작전영역이 해외라고는 하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감시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이를 토대로 핏빛 내일을 예언한 그는 빠른 행동을 촉구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이번 사태를 최대한 신속하게 마무리 짓지 않으면 계엄령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게 될 겁니다. 시민들의 압력을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의 질문. [국장의 제안은 뭐요?] [죽여야 합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이 지나가기 전에는.] […….] [산 채로 잡아서 법정에 세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전미의 분노가 법정으로 집중될 테니까요. 눈이 돌아간 시민들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그 시점에서 모겔론스 샘플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잃었으면 잃은 대로 좋습니다. 저 테러리스트가 그만큼 더 나쁜 놈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여론을 몰아가면 됩니다. 최소한, 당분간은 말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군사적인 성과를 통한 반전을 꾀할 수 있겠지요.] 결국은 도박이었다. 샘플이 진짜였을 경우, 혹은 진위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경우 대통령에겐 다양한 의미에서 정치적 부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도, 앙금이 남은 이들은 대통령을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샘플은 좋은 핑계였다. 권력 욕심이 많은 정치인들에게도. 본토탈환이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는 불확실하고……. ‘무엇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지.’ 다른 지역에서의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로저스 소장의 합동임무부대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을까. 겨울에겐 미래를 셈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이 없었다. 대통령이 담담하게 묻는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인류의 미래를 포기하라는 거요?] 상장을 생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선 논하지 않는다. [미국이 인류의 미래입니다.] 정보국장의 태도는 정중했다. [어차피 협상은 희박한 확률입니다. 만에 하나 저 작자가 가진 샘플이 진짜이고, 또 기적적으로 협상이 성공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겠습니까? 저 미친놈들이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조건을 조율하다보면 계절이 바뀌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란 어떤 식으로든 굴욕적인 타협이겠고, 각하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비단 각하만의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또한 협상기간 내내 내용을 공개하라는 압력이 있을 게 뻔했다. 하면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대로 부담이 있을 것이었다. [사실 각하께서도 이미 고민하시는 바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겠지요. 결단을 내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국장의 말은 표면적으로 대통령을 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대책본부의 다른 구성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맥밀런 대통령의 담담한 태도 또한 같은 맥락이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가 합의하는 현실이 된다. 겨울이 읽기엔 그랬다. 다들 알고 있지 않느냐. 지금도 몸을 사리는 이들이 있었다. 정치적인 처세술이었다. 모든 부담을 짊어지기로 한 대통령이 고위관계자들의 침묵을 환기했다. [만약 타격대를 들여보낸다면 인질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겠소? 그들을 안전하게 구출한다면 소요를 진정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새로운 계획이 있습니다.] 백악관 상황실, 대통령과 같은 공간에서 다른 모니터를 할당받은 특수전사령부 부사령관의 발언이었다. [새로운 계획?] 대통령이 묻고, 역시 같은 상황실에 있는 안보보좌관, 합참의장, 국무장관, 국방장관, 부통령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시선을 모았다. [예. 다소 과격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정말로 과격했다. ‘발전소를 아예 붕괴시키겠다니…….’ 겨울은 아연함을 느꼈다. 전체를 무너뜨릴 작정은 아니었다. 다만 인질이 있는 장소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적을 분산, 고립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내부 관측을 통해 적의 배치와 순찰경로, 인질들의 추정위치, 폭발물 설치지점 등을 확인했습니다. 놈들 역시 유사시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릴 심산이었겠습니다만……화면에 강조된 지점을 먼저 폭파시키면 나중에 추가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충격이 전달되지 않게 됩니다.]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폭발력이 정확하게 배치되어있어야 하며, 폭발하는 시간 또한 중요하다. 폭파공학이 따로 있는 이유였다. 공병대의 계산일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적이 설치한 폭발물은 다 터지지도 않을 겁니다. 사진을 보시죠. EMP 대책으로서 적의 폭발물은 격발기와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전파사용이 제한적인 실내다보니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요. 여기, 바닥에 희미하게 빛나는 선이 보이십니까? 은박으로 감아놓은 전선입니다. 이 부분,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 쪽에서 폭파시킬 때 확실하게 끊어집니다.] [적 생존자가 기폭 시킬 수도 있잖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별도의 타이머를 부착해놓았을지도 모르고……. 일정 시간마다 수동으로 초기화하는 방식으로 말이오. 내 걱정이 지나친 거요? 그런 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인가?] [아닙니다, 각하.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공격이 개시되는 시점에서, 인질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범위 내엔 적 생존자가 없을 겁니다. 외벽이 뚫리는 순간 해당 구역을 전차 주포로 저격할 거니까요.] 겨울에겐 저격이라는 표현이 어색했다. 그러나 적이 예상하지 못한 원거리에서의 공격이니, 부사령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포탄은 못쓰겠고……벌집탄을 쓰려나?’ 벌집탄은 전차 주포로 쏘는 산탄의 은어였다. 포탄 안에 무수한 텅스텐 알갱이, 혹은 자그마한 화살(플레셰트)들이 꽉 차있어 벌집 같다는 의미로. 개중엔 제식명이 벌집(Beehive)인 물건도 있다고 들었다. 최근엔 샌 아르도 유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목격했었다. 2,200발의 산탄을 담아 쏘는 단 한 발로 일백에 가까운 변종집단을 붕괴시키는 위력. 그것은 한 개 중대의 일제사격에 필적한다. [그리고 타이머는…….] 특수전 부사령관이 말끝을 흐린다. [적 수괴의 생포여부와 함께 운에 맡겨야 합니다.] 대통령이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서 운이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폭파와 동시에 중장비를 투입하겠습니다. 운이 따라준다면 늦지 않게 통로를 개척하고 폭발물을 해체할 수 있겠지요.] 양용빈 상장은 여차하면 자살할 작정이거나, 부하에게 자신을 사살하라고 명령해두었을 것이다. 이미 다 이루었으니까.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일 터. 겨울만의 확신이 아니었다. 특수전 부사령관은 보험을 들어두었다. [타격대원들이 자백제와 녹음기를 지참하고 있습니다. 주목표가 부상을 입을 경우, 현장지휘관의 판단 하에 후송보다 진술 녹취를 우선시하도록 명령해두었습니다.] 녹음기는 통신장비나 전투장비와 달리 전자기 충격파에서 보호하기가 쉽다. 반드시 노출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한 질문도 거기에 들어있을 것이다. 타격대에 중국어 회화가 가능한 대원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겠지.] 대통령이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짓는다. 시선이 멀다. 겨울은 그가 어떤 화면을 보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협상단은 양용빈 상장과 무의미한 평행선을 그리는 중이었기에. 협상단은 더 이상 양보할 수가 없고, 상장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협상단 측에서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그 소리를 겨울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을 들은 맥밀런 대통령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겠군. 허가하리다.] [알겠습니다. 협상단이 철수한 다음 상황을 봐서 작전을 개시하겠습니다.] 장군이 즉각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 대통령은 얼굴을 감싼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269 [269화] #사망의 골짜기 (15) 변경된 지침을 전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협상단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샘플의 진위 여부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추궁했다. 훗날, 혹은 당장 오늘이라도 협상과정이 공개될 수 있었으니까. 가장 강경한 시민들조차도 의문을 품기에 충분해야 한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 그린이 차분한 신색으로 제안했다. [본국의 질병통제본부 인력이 장비를 가지고 이곳으로 오는 겁니다.] 양용빈 상장은 의뭉스럽게 굴었다. [그들을 내 보호 하에 두겠다고? 그래도 괜찮겠소?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까놓고 말해 인질을 늘려서 쓰겠냐는 뜻이었다. 시민들의 반감이 심하지 않겠느냐고. 그린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턱을 들었다. [교환하시죠.] [교환?] [예. 들어가는 숫자만큼 풀어주세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는 방법 아닌가요?] […….]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샘플의 진위확인은 협상 성립을 위한 기본조건입니다. 그걸 장군님의 감독 아래 진행하자는 겁니다. 연구 자료가 밖으로 샐 일은 없겠죠. 연구진은 그저 샘플이 진짜인가 아닌가, 그것만 통보해주면 된답니다.] [그걸 믿을 수 있겠소?] 상장이 조용히 어깃장을 놓는다. [가령 우리가 연구진을 위협해서 거짓 결과를 통보하라고 할 수도 있잖소,] [또 우기시는군요.] 생긋. 분명 지쳐있을 텐데, 감정의 찌꺼기가 있을 텐데, 그린이 만드는 미소는 얼룩 없는 매력이었다. 겨울은 그녀의 인선이 상장과 더불어 시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장군님. 서로의 신뢰를 보장할 수단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냥 안 된다고만 하시면 역시 샘플이 가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가짜라서,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서, 그래서 아무리 전향적인 조건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게 아닌가요?]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노회한 상장이 화제를 바꿔쳤다. [대가는 내가 제시한대로 확정되는 거요?] [말을 돌리지 마세요. 샘플 확인이 협상의 기본조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진짜 협상은 진위 판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는 뜻이죠.] [마이어 기지 말이오. 내가 달라고 했던.] [그러니까 조건을 논하는 건 시기상조-] [그곳을 꼭 받아야겠는데.] 말이 끊긴 그린이 적당한 선에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장은 아랑곳 않는다. [말해보시오. 가능성이 있는 거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글쎄. 내가 보기엔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요마는.] 장군의 태도는 희롱에 가까웠다. [애초에 생각도 없으면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느니 어쩌니 하는 것도 큰 실례가 아니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걸어놓고 회담을 의도적으로 파탄 내는 쪽도 큰 실례겠지요.] 그린이 눈을 찡그리고 살짝 쥔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겨울이 보기엔 태도와 감정과 자세 모두 계산된 것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해, 화면발을 잘 받았다. 함께 파견된 협상단은 부착한 카메라에 두 사람의 대담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 이제야 솔직히 말씀하시는군.] 말하며 차분하게 웃는 장군. 그린이 대꾸한다. [그럼 장군께서도 이제 솔직해지시죠. 그곳을 양도받길 원하는 이유는 억지력 같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미국을 모욕하고 국민들을 자극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요? 종전협상이란 본디 실리 이상으로 교전당사국의 옳고 그름을 정하고, 국가의 자존심을 세우는 과정이니 말이오.] [입장을 바꿔볼까요? 지금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건재하고, 샘플을 가진 게 제 쪽이고, 우리가 장군께 종전협상을 제안한다고 가정하죠. 미군 주둔지로 자금성을 내놓으라고 했으면 과연 받아들이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있겠냔 말입니다.]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른 것 아니겠소? 아무리 유서 깊은 고궁이라도 한낱 유적에 불과할진대, 인류의 미래가 걸려있다면 내놓을 수도 있겠지.] 또다시 억지였다. 그린은 가볍게 무시했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마이어 기지 바로 옆이 알링턴 국립묘지입니다. 호국영령들의 안식처죠. 그곳에 미국의 역사가 묻혀있다고 해도 좋겠죠.] [경의를 표하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도로 하나를 건너서 펜타곤이고 다리 하나를 건너면 백악관입니다. 아, 사소하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링컨 기념관,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도 있군요.]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사소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링컨 기념관은 미국 정신의 신전(Temple)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의 조각상과 기념관 앞의 오벨리스크는 무수한 매체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장군의 요구대로라면 그 모든 장소가 중국군 포병의 사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그린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미국이 만만해보이십니까?] 어차피 협상을 포기해도 좋다는 지침을 받은 마당이었다. [겨우 이런 수작으로 도발을 걸면 시민들이 이성을 잃을 것 같던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모른다고 하면서도 장군은 굳이 덧붙인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날 속이려 들진 마시오. 당신네들은 지금 난리를 겪고 있잖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는지.] 양용빈 일당이 장악한 칼파인 5로 이어지는 통신은, 협상을 위해 열어둔 채널을 빼면 모조리 차단된 상태. 그러므로 상장은 목표를 달성했으되 그 결과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인들의 야만성을 믿기 때문이오.] 겨울은 당혹감을 느꼈다. ‘실수인가? 지금 저런 말을 해선 안 될 텐데?’ 도발은 도발이되 미국 사회에 혼란을 확산시키는 데엔 오히려 역효과인 도발이었다. 그린이 한 순간 흔들린 것도 겨울과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즉 미국의 시민들이 멍청하고 난폭할 거란 말씀이군요?] 미국의 시민들, 멍청함, 난폭함에 각각 강세를 주어 분명하게 하는 말이었음에도, 상장은 그녀의 의도를 순순히 긍정해주었다. [맞소.] 그러나 악의는 여전했다. [왜 아니겠소? 그것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자들이 당신들의 조국을 사유화하고 또 돈의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국부의 대부분을 움켜쥔 자본가와 기업가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마저 연례행사로 찾아가 머리를 숙여야 하는 유태인 부호들……. 평범한 사람들이 종말의 공포에 떨 때, 돈과 권력으로 견고한 벽을 세우고 사설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도박과 연회와 경매로 세기말을 소비하는 그 인간들 말이오. 설마 없다고는 못하겠지.] [잠깐…….] [바로 그들이 교육 또한 천박한 상업주의로 물들였지. 고급교육을 독점하여 계급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키고 부르주아적 계급과 특권의 세습을 고착화하려는 시도로서. 그러니 미국인들이 멍청할 수밖에. 그러니 당신네들이 야만스러울 수밖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나, 그리고 겨울의 생전까지도 그러했으나,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란 생산력을 늘려 공산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과정일 뿐. 그러나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양용빈 상장에게 파벌이 없었다던 그린의 말이 떠오른다. 겨울은 품속을 더듬었다. 둥글고 단단한 감촉. 보관하거나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직까지 품고 다니는 아름다운 회중시계의 촉감이었다. 부서져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데 의외로 상한 곳이 없었다. 태엽을 감지 않았기에 시침과 분침과 초침은 멈춰있는 채였다. ‘시에루 중장이 들었다면 비웃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비웃든 조국과 상장을 비웃든, 어느 쪽이더라도 비웃기는 했을 것이다. 비록 부패한 사람이지만, 선에서 악을 빼도 꽤나 남는 현실주의자였으니. 그런 사람이나마 다수였다면 이 세상도, 생전의 저 세상도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육군상장이 살아있으니 해군중장도 살아있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상황을 바꿀 힘은 없겠지만. 미움은 수명이 길다. ‘영상을 편집하면……소용없나.’ 미국 시민들을 모욕하는 부분만 따로 따서 공개하는 방법은 어떨까 싶은 겨울이었다. 그러나 앞선 동영상 유출 사태를 볼 때, 그리고 겨울에 대한 헌트의 우려를 감안할 때 좋은 방법이라고 하기 어렵다. 전체가 공개된 후엔 반드시 역풍을 맞을 것이다. 상장이 선언했다. [나는 당신들이 저질러온 우행을 믿는 거요.] 미국의 대통령들이 매년 유태인들의 집회에서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도 사실이고, 미국 공교육이 파탄 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겨울은 생각한다. ‘진실에 가려진 거짓이 가장 위험하지.’ 협상단장 그린의 반응이 느린 것은 신중해야할 시점이어서였다. 상장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미국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었다. 역병 이전엔 어림도 없었을 수작인데, 극단적인 시대엔 극단인 사상이 번지기 쉽다. 그녀가 묻는다. 단지 시간을 벌 요량으로. [오히려 중국에 더 해당되는 비난이 아니었나 싶군요.] 하지만 상장은 이마저도 긍정했다. [맞는 말이오.] 그리고 절제된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하리다. 공화국은 야만인들의 나라였지.] […….] 언뜻 스쳐간 상장의 경멸감에, 그린은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설득한다. [장군님. 피차 장난은 그만두죠.] [장난?] [당신께서 알고 계시는 중국은 이제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고집을 부리신다면 앞으로 새로운 중국도 없을 겁니다.]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소만, 중국은 있소. 국가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아.] [국가는 개인의 집합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국민이 없으면 국가도 없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오. 국가는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이지. 국가가 있어서 국민이 있는 거요.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짐승에 지나지 않으니까. 사회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사회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오. 만들어지는 과정이 의식적으로 통제되었다고 볼 순 없소. 지금 나누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요만.] [좋아요. 그렇다면 인민해방군 장교로서의 의무는 어떻습니까?] 상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반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그 의무로 인해 내가 여기에 앉아있지 않소.] [당신께서 지금 이러고 계신 게 비상시의 교전수칙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공격으로 인해 국가가 무너지고 정상적인 명령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지만 장군, 교전수칙 이전에, 또한 국적을 떠나서, 군인이라면 누구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인도적인 명령을 거부할 의무 말입니다.] 여기까지 듣고서, 장군이 그린을 무시하고 협상단 한 명을 지목했다. [당신, 관등성명을 알려주시겠소?] 갑작스러운 지목과 통역병의 해석을 듣고 당황한 남자가 되묻는다. [저는 대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왜 묻습니까?] [군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당신뿐이라서 물었소. 군인의 의무는 군인과 말해야 하니까.] […….] 겨울은 협상단의 구성을 알지 못했으나, 눈치로 보아 상장의 말이 사실인 듯 했다. [알려주지 않을 거요?] [브로디 에이버리, 공군 중령입니다.] [공군 중령이라. 괜찮군.] 양용빈 상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중령, 이런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지하 핵사일로 통제관이오. 그리고 당신의 조국은 핵공격을 받아 이미 증발해버렸지. 어떤 상급부서도 통신에 응하지 않는단 말이오. 헌데 당신에겐 정부가 사라지기 전에 받은 명령이 남아 있소. 전면핵전쟁이 벌어졌을 때 당신의 기지가 미사일을 발사해야할 표적들의 좌표 목록이지.] 통역을 기다린 상장이 다시 말했다. [만약 당신이 명령대로 발사 버튼을 누른다면 인류의 멸망이 확정되는 거요. 그럼 이때 당신은 버튼을 눌러야 하오, 말아야 하오? 군인으로서 명예와 신념을 걸고 답하시오.] 사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에겐 부정하지 못할 직업윤리이기도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에이버리 중령은, 단장인 릴리아나 그린을 흘낏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눌러야 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전쟁범죄가 아닌 경우에 군인은 명령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면핵전쟁 상황에서의 민간인 살상은 국가전략상 전쟁범죄의 예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상장이 그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 중령의 말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에이버리 중령이 강조했다. [하지만, 저는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겁니다.] 상장은 온화하게 답한다. [이해하오. 그러나 당신은 버튼을 누르는 동료를 비난할 수 없을 거요.] 그린이 끼어들었다. [그만 하시죠. 궤변은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군인의 의무를 말씀하시기에 군인에게 물었을 뿐. 이게 어째서 궤변이오?] [상황이 다르니까요. 중국은 어느 국가의 공격을 받은 게 아닙니다. 기실 장군님이 보유한 샘플이 진짜라면 모겔론스의 개발 국가는 중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노골적인 억지를 부리시는 것도 결국 샘플이 가짜라는 증거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가 숨을 돌리고 말한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십시오. 포로를 해방하고 샘플을 넘기세요. 그럼 아직은 미래를 꿈꿀 기회가 남아있을 겁니다. 그 샘플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당신의 부하들에게는 말입니다. 장군께서도 목숨은 부지하실 수 있겠지요. 저는 지금 사법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상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통역병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그리고 통역병이 다시 그린에게 다가와 새지 않는 소리를 속삭였다. 그린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시간이 늦었군. 좋은 말씀 잘 들었소. 오늘은 여기서 끝냅시다.] 양용빈 상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의사표현이었다. 앉은 채로 상장을 노려보던 그린은 상장이 나가려고 할 즈음에야 굼뜨게 일어났다. 그리고 상장의 등을 향해 공허한 인사를 전했다. [어쩔 수 없군요. 내일 다시 뵙죠.] 그러나 소탕전의 밤을 맞이할 상장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방금 귓속말은 뭐라고 한 거야? 응? 중요한 내용인가?” 소란스러운 상황실의 질문이 전파를 타고 협상단의 귓속 수신기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이 돌아왔다. “고비를 잘 넘기길 바란다니……놀리는 건가?” 누군가의 불만. 그러나 겨울은 그것 또한 상장의 진심일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중국의 야만성을 말할 때 스쳐간 경멸감을 감안하면. 무대마다 달라지는 것이 사람이고, 하나의 마음엔 얼마든지 많은 모순이 공존할 수 있었다. 겨울이 헌트에게 말했다. “여기선 제가 할 일이 정말로 없네요.” 비록 자리를 내주긴 했으나 대통령까지 있는 테이블에서의 본격적인 발언권이 일개 소령에게까지 내려오진 않았다. 그 외에 별이 즐비한 마당이었다. 이곳 현장 상황본부는 워싱턴 D.C를 위한 중계소, 혹은 분소에 가까운 느낌이다. 헌트가 피식 웃었다. “왜, 한 소령도 타격대와 함께 들어가고 싶습니까?” “교전능력으로만 따지면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자신감이 지나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트는 진지하게 끄덕여주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소령,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당신이 점점 중요해지는 과정이니까. 장담하지. 소령의 수많은 선배들도 같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제 선배들?” “용기와 헌신을 인정받은 이 나라의 애국자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지금까지 헛짓거리 했군, 하고 중얼거리며. 그러더니 겨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거 압니까? 이 와중에도 소령이 치른 어젯밤의 전투기록은 업로드 후 1시간 만에 조회수 천만을 돌파했어요. 즉,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도 화를 내다 말고 동영상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펜타곤 공식 채널의 접속 현황이 지역별로 아주 균일하다더군요. 그 재생시간 동안 경찰과 군대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업로드 시간을 정한 담당자도 기뻐하고 있겠지요.” “…….” “저쪽 아프리카에서 축구 경기 때문에 내전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딱 그런 경우입니다. 소령, 당신은 스스로가 슈퍼볼이나 월드 시리즈 이상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도 됩니다. 당신 덕분에 팔리는 전시국채의 규모가 대체 얼마라고 생각합니까? 하하!” 스스로 말해놓고 스스로 웃는 헌트에게, 겨울이 물었다. “다른 지역에서의 작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걸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아, 지금 인트라넷이 엉망이지 참.” 아직도 접속되는 곳이 온라인 PX뿐이고, 겨울 몫의 노트북도 제한적으로 연결되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선에선 멧돼지 사냥이라고 부르더군요.” “멧돼지 사냥?” “변종들이 개체 수 보전을 위해 아예 남미로 빠질 작정인가 봅니다. 이 팬 아메리카 루트에서 일방적인 추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예요.” “그건……다행이네요.” “예. 다행이지요.” 헌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아직 신께서 우리 인류를 버리진 않으신 모양입니다.” “…….” “하지만 당신이 죽는다면, 그땐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겠지요. 우리가 스스로를 돕길 포기할 테니. 신께선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겨울은 군종장교와 나누었던 대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도왔다고 했던가. 정말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 270 [270화] #사망의 골짜기 (16) 작전명 넵튠 스피어,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할 때, 데브그루는 테러리스트들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단 한 사람의 전사자도 없이. 그러나 겨울은 회의적이었다. 오늘도 그럴 수 있을까? 당시엔 빈 라덴의 은신처와 비슷한 훈련장을 만들어놓고 몇 주에 걸쳐 훈련을 거듭했다고 들었다. 물론 은신처의 내부구조까지 확보하진 못했으나, 어쨌든 철저한 준비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가. 상대는 정규군이고, 데브그루는 다른 임무에 투입되어 있다가 갑작스레 불려온 처지. 최상의 상태로 투입되었던 과거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훨씬 더 우월한 지원을 받으며 투입된다는 것 뿐. 겨울의 자격은 여전히 조언자였다. 헌트의 말에 따르면 ‘중요해지는 과정’이다. 타격대원들의 시야를 공유하는 화면들 앞에 헤드셋을 낀 전술지휘관들이 앉아있으나 이들도 조언자이긴 매한가지였다. 모든 전술적 판단은 현장에서 내린다. 이곳은 그저 현장을 보조하고 지원을 연결해주는 역할이었다. ‘유사시에 제동을 걸어줄 필요도 있지.’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다들 겨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방역전쟁 초기부터 데브그루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 특수변종을 사살할 경우 그들만의 흔적을 남겨둔다고. 그 흔적이란 사체의 머리에 패인 V자형의 총상이었다. 소위 카누잉(Canoeing)이라 부른다. 카누를 끌고 지나간 흔적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은어. 정면에서 적당한 각도로 쏘면 위쪽이 날아가며 그런 흔적이 만들어진다. 탄의 위력과 인체의 단단함에 해박할수록, 즉 총기를 이용한 살인에 익숙할수록 더욱 깊은 골을 남길 수 있다. 사실 역병 이전부터 유명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원격으로 지켜보는 상황에서조차 빈 라덴에게 같은 짓을 해버렸다던가. 그런 사진들을 모아 서로의 기술을 비교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자 그대로 통제를 벗어난 공격성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쓰는 살인의 도구였다. 사람을 도구로 쓰면 마음이 남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이 보기엔 양용빈 상장도 도구가 된 사람이었다. 군인으로서의 기능만 남고 다른 부분은 다 제거해버린. 이래서 예전에도 생각했었다. 사람이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건데, 하고. “준비 되는 대로 시작하십시오.” 상황실 통제관의 전언에, 특수부대 지휘관이 답신한다. [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있습니다.] 드드드득. 테이블 위에 있던 집기들이 진동했다. 땅이 흔들린 이후에 비로소 폭음이 밀려왔다. 발전소의 외벽과 천장을 폭파하는 소리. 찰나의 시차를 두고 전차의 포성이 울린다. 적외선 영상 속 발포 장면은 하얀 잿빛의 번뜩임이었다. 주포가 조준한 지점에서 무수한 픽셀이 튀었다. 육안으로 관측하기 어려운 자그마한 확산들. 겨울이 예상했던 그대로, 자그마한 산탄을 흩뿌리는 포탄이었다. 무너진 외벽 안쪽의 어둠이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텅스텐 알갱이들이 콘크리트를 바스러뜨리는 불씨들이었다. [레드 팀, 적과 접촉. B3에서 총격전 발생.] 방아쇠를 당기는 와중에도 상황을 전하는 데브그루 소령의 음성은 무척이나 서늘했다. 적이 방독면을 쓰고 있었으므로 가스는 무용지물이었다. 수류탄과 섬광탄이 터진다. 빛과 굉음이 휩쓸고 간 먼지투성이의 어둠 속에서 적아가 맹렬한 사격을 교환했다. 빠른 포복으로 기어간 대원 둘이 부비트랩을 해체했다. 사전에 위치가 파악된 것들이었다. 삐이이이- 병원에서나 들을 법한 날카로운 전자음이 들린다. 타격대원들의 심박을 나타내는 그래프 다섯 개가 거의 동시에 직선을 그었다. 그들 몫의 영상도 꺼졌다. “EMP겠지.” 애써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통제관. 시간이 갈수록 퍽퍽 꺼지는 모니터들이 늘었다. 평행선을 그리는 심전도계도 늘었다. 그러나 아직 통신이 가능한 대원들의 시야와 스피커를 통해, 겨울은 타격대의 피해가 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중국군이 무엇을 준비했든 그것은 열악한 환경에서의 최선이었을 터. 공병대의 방탄 불도저가 무너진 구획에 길을 뚫었다. 그 너머에 인질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위치였다. 경과한 시간을 확인한 통제관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도 시계를 본다. 23시 27분. 가급적 앞으로 3분 내에 도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만약 인질에게 정말로 폭탄을 달아놨으면, 그리고 거기에 시한신관이 달려있으면, 타이머를 초기화하는 주기는 확인이 간편한 단위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15분, 30분, 1시간 같은 식으로. 불도저를 엄호하며 대기하던 데브그루의 또 다른 팀이 놀라운 신속함으로 돌입한다. 사전에 미처 찾지 못했던 트랩까지 고속으로 해체하거나 폭파시키면서. 외벽의 붕괴에 반신이 휘말려 허우적대는 중국군이 보인다. 총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돌덩이에 맞았는지 방탄모도 벗겨진 모습이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죽이지 마! 생포해!] 타앙! 중국군 부사관의 머리 바로 위에서 콘크리트 조각이 튀었다. 사선이 아슬아슬하게 정수리를 스쳤다. 후속한 두 대원이 중국군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살리려는 배려라기보다, 배 아래 폭발물을 깔고 있을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다행이군. 일개 부하의 증언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전술통제관은 상장의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지만, 확률이 높았다. 데브그루 중대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인질 근처에 중국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을 법 한데, 이상할 정도로 저항이 없다. [인질 확보! 생존 확인!] 무장이 해제된 채로 포박되어있던 미군과 민간인 기술자들이 타격대를 보고 온 몸으로 몸부림친다. 거기엔 어떤 함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황실이 환성에 휩싸였다. 이는 백악관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얼굴이 화면에서 벗어나버렸다. 집어던진 서류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광경이 보인다. 아직 기뻐하긴 이른데도 불구하고. 포로 중 최선임자에게 접근한 타격대원이 대검을 뽑아 재갈을 끊어준다. 엄호하는 대원이 포로의 머리에 총을 대고 있었다. 일반적인 작전에선 군번과 이름, 소속을 확인할 차례였으나, 여기선 안면인식을 통해 상황실에서 확인했다. [Sir, 트랩이나 인질로 위장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 놈들은 우릴 그냥 가둬놨을 뿐이야. 구해줘서 고맙네.] 이것을 들은 헌트가 중얼거린다. “당연히 다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네바 협약 운운했던 게 농담이 아니었나?” “군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나보죠. 야만스러운 걸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잖아요.” 겨울의 말은 헌트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오, 주여. 저 미치광이의 신념을 어여삐 여겨주소서.” “…….” 상장의 목적이 겨울의 짐작과 같다면, 인질은 사실 죽여 두는 편이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한폭탄 등의 안전장치도 없는 걸 보면 처음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모양.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이니 군인으로서의 또 다른 의무도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가보다. 그의 광기엔 나름의 일관성이 있었다. 단순히 미친 사람의 변덕쯤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이유였다. “무엇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을 거예요. 공격이 개시되는 순간 자기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요.” “흠…….” 기쁨의 열기를 지우고 잠시 고민하던 헌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인질의 안전과 진짜일지도 모를 샘플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공격을 서둘렀다는 건, 그 자체로 이쪽이 여유가 없다는 증거로군요. 가라앉든 헤엄치든 빠른 해결을 노리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즉 굳이 인질을 잡아두었던 이유는 정부가 받을 압력을 늘리기 위해서……그리고 행동에 나설 동기를 더해주기 위해서……결국 자기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한 보험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의 수긍은 뒤로 갈수록 독백에 가까워졌다. 그러므로 이 밤의 끝은 양용빈 상장의 최후일 것이었다. 그의 목적은 동영상이 유포된 시점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인들의 야만성을 폭발시킨 시점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고, 이제 그 결과까지 확인했으니 더 이상 남은 미련은 없을 터. 미국은 스스로 무너진다. 상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군의 저항이 급격히 약해졌다. 타격대 돌입 후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 이는 실력의 차이 이상으로 숫자와 화력과 장비의 차이였다. 그러나 타격대의 손실도 적지는 않다. 대원들의 안전보다 작전의 성패가 우선이었기에. [상황실. 탱고-양키가 확인되지 않는다.] [도망쳤을 리가 없어! 죽은 놈들 얼굴을 확인해!] 끝까지 밀고 들어갔는데도 양용빈 상장이 없다는 통보였다. [무언가 소각한 흔적을 발견했다. 전원 방독면 착용하고 물러날 것.] 만약 샘플을 소각한 거라면 생물학적 오염을 경계해야 한다. 분리된 병원체라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 그러나 타격대원들에게선 긴장감보다는 날카로운 신경질이 느껴졌다. 아무리 서둘러야 했어도, 애초에 상장의 샘플이 진짜라고 생각했다면 훨씬 더 철저한 방호를 갖춰서 진입시켰을 것이다. 데브그루 대원들이 시체를 뒤져 상장을 찾는 사이, 화생방 보호의를 입고 산소통을 멘 보건서비스 부대의 인력이 현장에 새로 진입했다. 화면으로 전송되는 이들의 시야는 있는 그대로의 천연색이었다. [이건……앰플 조각인가?] 집게로 집어올린 얇은 유리조각이 랜턴 조명 아래에서 검고 탁한 빛을 발한다. 탄화된 가장자리에 유리질 특유의 광택이 조금 남아있다. 조각을 모아 맞춰보니 양용빈 상장이 퍼뜨린 동영상 속에서 과시하던 앰플과 엇비슷한 크기로 보였다. [방금 태운 건 아닌 것 같고……. 젠장, 역시 처음부터 놀아난 건가.] [혹시 모르니 가져가서 분석은 해봐야죠.] [그런데 샘플만 태웠다고 보기엔 흔적이 이상해.] 바닥에 눌어붙은 끈적한 탄화물 일부를 긁어 손끝으로 점도를 확인한 그가 옆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이봐, 이거 혈액 반응이 있는지 확인해보자고.] 계급장을 단 의료전문가는 여기서 시체를 태우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양용빈 상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회용 검사 장비에 뜬 결과는 양성이었다. 인간의 피다. 잠시 후 좀 더 분명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여기, 이쪽으로. 신원 불명의 소사체(燒死體)다.] 찾아낸 유해는 일반인이 보기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조각들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잘게 부서진 인간의 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일 뿐. 그것이 양용빈 상장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DNA 검사도 비교할 표본이 있어야 가능한 일. 타격대의 수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혹여 무너진 구획의 아래에 깔려있을까, 공병대가 돌을 파헤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예감이라는 게 있었다. 전술통제관이 헤드셋을 벗어 툭 던져놓는다. “우리는 승리를 도둑맞았나…….” 인질을 무사히 구출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샘플 획득의 실패 이상으로 양용빈 상장의 불확실한 최후는 아주 긴 후유증을 남길 것이었다. ‘생존설이 끊이지 않겠지.’ 방금 찾아낸 소사체의 신원과 무관하게, 겨울은 상장이 죽었을 것으로 믿었다. 상장의 진짜 의도를 떠나, 말 그대로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하고 싶어서 이유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순 없었다. “소령.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헌트가 겨울을 부른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남은 한 손만으로 노트북을 다루었다. 화면을 본 겨울은 인트라넷이 복구되었음을 깨달았다. “……시애틀 무혈입성?” “그렇다고 하는군요.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지만 조직적이거나 규모가 큰 공격은 전혀 없었답니다. 트로이의 목마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거야 차츰 정리하면 될 일이고.” 국방부가 공개한 영상 속 퇴락한 고층빌딩의 숲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있던 시애틀 시민들이 전차와 장갑차 대열을 향해 성조기를 흔들며 울부짖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감안해 음소거로 재생시켰으나 그들의 열광은 소리 없이도 뜨거웠다. 시가지를 가로질러 마침내 퓨젓 사운드 만에 도달한 병력이, 노을 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정지하여 휴식을 취하는 풍경도 지나갔다. 장교와 병사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금 이곳의 분위기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요기 베라가 그랬지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헌트가 하는 말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요기 베라?” “설마 모릅니까? 뉴욕 양키스 최고의 포수를?” “…….” “하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어깨를 으쓱인 헌트가 피곤한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는 희망과 광기의 힘겨루기가 될 겁니다. 오늘 여기서 선물 받은 광기와 우리가 만들어나갈 희망 중에 어느 쪽이 이길지 끝까지 두고 보자고 하는 소리예요.” “그렇군요.” “난 대부분의 경우에 비관론자지만, 이번엔 희망에 걸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소령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헌트는 겨울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그의 눈에선 냉막함과 친근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 271 [271화] #읽지 않은 메시지 (13) 「엑윽보수 : 씨발 뭐 이딴 전개가 다 있냐? 양용빈 이거 아주 개 씹 좆같은 새끼네.」 「에엑따 : 여윽시 중국. 여윽시 민폐. 여기서나 저기서나 좋은 짱깨는 역시 죽은 짱깨뿐이다. 난 한겨울 얘가 공개방송 최초로 종말 이후 엔딩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힘들겠네. 씨바.」 「그랑페롤 : 마오쩌둥 센세……. 오늘따라 당신이 그립습니다…….」 「진한개 : 마오쩌둥? 누구냐 그건? 중국인임?」 「붉은 10월 : 여러분, 여기 또 한 명 헬조선 교육의 희생자가 있습니다. 모택동을 모르냐.」 「레모네이드 : 택동이가 그 참새 학살자 아니냐? 저 새는 해로운 새다 그거.」 「그랑페롤 : ㅇㅇ 리얼루다가 훌륭하신 분이지. 5천만 짱깨를 굶겨 죽이셨으니. 마오 센세가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쉬바 세계 제일의 공해 생산국이 없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명퇴청년 : 이게 과거를 재구성한 세계관이라 더 엿 같다. 양용빈 이 모친출타한 새끼한테 지금의 중국을 보여주면서 너네 나라 역병으로 안 망했어도 결국 이 꼬라지 됨 ㅅㄱ링~ 하면 지 삶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바로 지 대가리에 권총 쐈을 듯.」 「ㄹㅇㅇㅈ : ㅇㄱㄹㅇ. 옛날의 중국 가지고도 야만스럽다고 할 정돈데 지금의 중국을 봤다간 그 자리에서 거품 물고 즉사한다에 내 불알 한 쪽을 검.」 「엑윽보수 : 공산주의 만리장성 ㅋㅋㅋㅋ 보이지 않는 대륙 ㅋㅋㅋㅋ 잿빛 낙원 ㅋㅋㅋㅋ」 「まつみん : 극우는 국적을 떠나서 무조건 싫어요. 중국이 많이 심하긴 하지만요.」 「이맛헬 : 중국 극혐. 뭐라더라? 당의 품에서 태어나고 당의 품에서 죽는다고 했었나? 공산사회를 완성했다고 세뇌하면서 국민들 격리시켜놓고 지배층은 씨발 진짜……. 내가 우리나라 맨날 욕하긴 하지만 중국보단 백배 낫다.」 「이맛헬 : 그런 주제에 해킹은 겁나 해대서 사후보험 보안비용이나 폭증하게 만들고. 니미 아무리 뇌파 인식이라지만 가상현실 시대에 채팅이 말이 되냐? 사후보험 적용 받아도 가입자들끼리 만나려면 보안강화회선 이용비 따로 내야 되고.」 「올드스파이스 : 공식적으로 대부분의 해킹 시도는 북한 소행이잖어 ㅋ」 「무스타파 : 그거야 중국 눈치 보이니까 그렇겠지. 북한이 그럴 배짱이나 있나. 게다가 다른 나라들이라고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ㅋㅋㅋㅋ 사후보험이 너무 오버 테크놀로지인 게 문제.」 「이맛헬 : 보안비용만 아니면 사후보험 등급 하한도 왕창 낮아질 텐데 씨발.」 「분노의포도 : 어쩔 수 없지. 사후보험이 망하거나 기술 유출되면 이 나라는 끝이잖아?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는 게 맞다고 봄. 내 사후를 지켜야지.」 「믓시엘 : 난 그 해킹 위협이라는 게 정부가 세금 받아먹으려고 뻥치는 것 같다. 트리니티 엔진은 불가해라며? 보안이 필요하기나 한가?」 「엑윽보수 : 어휴. 좌좀들 음모론 하곤. 안보불감증이 이래서 위험하다 이기야! 엔진은 불가해라도 계정이 털릴 수는 있는 거고! 어? 우리나라 잘 나가는 게 아니꼬우니까 못 가지면 부순다는 심보로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기야!」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안보불감증을 조심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사후보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경제권, 소위 『별빛 헤게모니』의 규모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중국이라도 우리나라를 함부로 못 건드린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전 세계 금융권에서 사후보험에 걸어놓은 파생상품 규모는 정말 아무도 모를 정도거든. 사후보험기금 자체도 무지막지하고. 트리니티 엔진이 위탁 관리하는 시설이나 프로젝트도 일일이 세기 어려울 만큼 많아.」 「한미동맹 : 올ㅋ」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트리니티 엔진이 파괴되면 중국 부자들도 연쇄파산할걸? 중국 사람은 안 들어와도 중국 자본은 엄청나게 들어와 있으니까. 전체 비율로 따지면 낮지만.」 「엑윽보수 : 근데 누가 물어봤냐? 너처럼 아는 거 자랑하는 새끼가 가장 좆같아.」 「에엑따 : 이 븅신들은 참 변하질 않아서 애착이 가 ㅋㅋㅋㅋ 방송 보다가 뭔 발광이냐 ㅋㅋㅋㅋ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고 싶어서 이유를 찾는 듯 ㅋㅋㅋ」 「まつみん : 마츠밍은 솔직히 좀 무서워요……. 방송을 보는 내내 물리현실의 중국이 자꾸 연상 되서…….」 「돔구녕 : 사실 이 양용빈이라는 인물은 호불호를 뜨나서 아주 음층난 컈릭터그그등요? 졔가 슈마는 께임과 즁계방송을 보아왔지마는 증해진 시나리오나 인격 패키지가 아닌 쌘드박스 가상헨실에서 이른 악당을 본 긋이 츠음이다! 이 챠갑고 끈즉끈즉한 악의! 이른 가샹인격은 수쥰 높은 공감능력이 있으야만 구현 가능하다! 이릏게 말할 슈가 있겠으요.」 「김미영팀장 : 하, 진심 끈적끈적하다. 핵 빌런 주제에 되게 찝찝하게 죽었어.」 「Blair : 난 크게 폭발하는 결말일줄 알았지 뭐야.」 「붉은 10월 : 내가 밀덕으로서 예언 하나 할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더 있어.」 「두치 : 중국 틀딱이 안 죽었다는 겨? 똥 싸고 안 닦은 기분이긴 해도 텔레타이프로 뜬 진행자 생각처럼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붉은 10월 : 아직 살아있는 부하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임. 여기 말고 딴 데에. 옛날에 무장공비들이 비트 파고 들어가 있었던 걸 떠올려봐. 작정하고 숨어있으면 찾을 수가 읎다. 그리고 그래야 미국을 더욱 효과적으로 엿 먹일 수 있음.」 「Владимир : 합당한 예측이군.」 「윌마 : 진짜냐…….」 「국빵의의무 : 저 시대의 미군이 그나마 약한 분야가 비정규전이라는 건 팩트. 핵 빌런도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으리라는 게 임팩트.」 「려권내라우 : 별창늙은이 방송은 인물들이 죄다 멍청해서 싫었는데, 여기선 머리가 너무 좋아서 싫다. 어쩌라는 것인가.」 「폭풍224 : 그냥 사람을 싫어하면 되는 부분임.」 「SALHAE : 있잖아, 뇌진탕으로 사람 죽을 수도 있냐?」 「믓시엘 : 어.」 「SALHAE : …….」 「김정은 개새끼 : 난 양용빈 살아있다에 한 표.」 「믓시엘 : 살해 넌 중계 진행 내내 몇 번을 물어보는 건지 아냐? 지겨우니까 그만 좀 해라.」 「스윗모카 : 22222222222」 「아침참이슬 : 양용빈 살아있다에 두 표. 이 개-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하게 알 방법 없나?」 「윌마 : DLC 포함?」 「아침참이슬 : ㅇㅇ」 「헬잘알 : 이거 지르면 될 걸? 『빅 브라더 패키지』. 웬만한 정보는 다 알 수 있다더라. 기능이 워낙 쎄서 가격이 창렬이긴 한데 우리 같은 흙수저용으로 옵션 제한 1회 이용권도 판다니까 생각 있으면 ㄱㄱ 해. 양용빈은 나도 찝찝하다.」 「윌마 : 검색해보니 1회용도 존나 비싸네. 어이 털림 ㅋㅋㅋㅋ」 「깜장고양이 : 그건 사망회귀 패키지처럼 중계 수수료가 붙는 DLC라서 그런 고양.」 「당신의 어머 : 그 수수료라는 거, 시청자 수에 비례하는 거지?」 「깜장고양이 : 바로 그렇다는 고양.」 「당신의 어머 : 그럼 시청자들이 합심해서 잠깐 나가있으면 개꿀 아니냐?」 「깜장고양이 : 사후보험공단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은 고양. 일정 기간의 시청자 평균을 계산해서 적용한다는 고양.」 「그랑페롤 : 이런 부분에선 존나 치밀하네 우리나랔ㅋㅋㅋㅋㅋㅋ」 「내성발톱 : 좆냥이 잘 아네 ㅇㅇ」 「아침참이슬 : 근데 어차피 질러봐야 나한텐 사용권이 없잖아? 한겨울이 거절하면 끝이니.」 「질소포장 : ㅇㅇ 부가요소 적용 권한을 시청자한테 개방하는 옵션도 필요하다고 봄.」 「친목질OUT : 지금도 가능하긴 할 걸? 하는 채널마다 다 터져서 문제지 ㅋㅋㅋ」 「원자력 : 하, 스트레스 풀려고 보는 건데 체한 것처럼 갑갑하다. DLC를 내가 쓸 수 있었으면 데스티네이션 패키지나 데스〇트 1페이지 이용권 같은 거 질러서 양용빈 이 거지 같은 사이코 새끼 이름 적었을 텐데.」 「앱순이 : 장르가 바뀌잖아 ㅋㅋㅋ」 「SALHAE : 여기 혹시 의료계 종사자 있어? 있으면 답변 좀……. 이유라가 잘못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뇌진탕으로 죽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하는데 도저히 안심이 안 된다……. 제발 뇌출혈만은 없었으면…….」 「질소포장 : 그만하라고 오타쿠 새끼야.」 「프랑크소시지 : 중국군이 또 헛짓거리 하면 개짜증나겠다.」 「まつみん : 질소포장님 씁 (╬ ಠ 益ಠ)」 「まつみん : 안심하세요, 살해 씨. 다친 곳은 많아도 심하진 않은 것 같았어요. 뇌진탕은 회복되기 전에 또 충격을 받지만 않으면 대부분 괜찮다고 들었어요.」 「SALHAE : 그러니까 대부분이잖아. 전부가 아니라.」 「Владимир : 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내가 기억해야할 현상이군.」 「액티브X좆까 : 얜 또 뭐라는 거야.」 「Владимир :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의외로 튼튼하지. 이래도 안 죽는구나 싶을 만큼. 이것은 경험담이다. 가상현실이라지만 물리현실에 기초하니 사실과 같을 터.」 「groseillier noir : 그건 본인 경험이야 아니면 남에게 해본 경험이야?」 「Владимир : 둘 다다.」 「진한개 : 이 새낀 컨셉 진짜 잘 잡은 듯 ㅋㅋㅋ 액티브 X 못 깔아서 씨름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ㅋㅋㅋ」 「흑형잦이 : 그때 솔직히 웃겼다 ㅋㅋ」 「Владимир : 불쾌하군. 정중하게 요청했음에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녀석들이……. 러시아의 딸이 중요한 과업을 진행 중이어서 네게 교훈을 주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まつみん : 블라디미르 아저씨 흑역사 그만 만들어요 (´;ω;`)」 「에엑따 :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세계관 최대의 위기는 대선인 것 같은데, 그냥 한겨울이 대통령 하면 안 되나? 인기 개쩔잖아. 혹시 나이가 어려서 불가능한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연령제한만 걸리는 게 아닌데.」 「에엑따 : 왜? 미국 시민이잖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거주기간도 14년을 채워야 하고, 무엇보다 이민자라서 안 돼. 태생부터가 미국인이어야 함.」 「믓시엘 : 그걸 어떻게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그거 헌법으로 정해진 거야. 이 상황에 헌법을 개정한다고? 무리지. 미국이 망하기 직전이면 또 모르겠다만.」 「대출금1억원 : 이 상황에 미친놈이 천조황상이 되어버리면 골치 아프겠어.」 「새봄 : 한겨울 오지랖을 감안하면 더 골치 아프지. 중국인들 보호한답시고 고구마 처먹일 듯.」 「둠칫두둠칫 : 완전 우월해진 입장을 이용해서 이번에야말로 리아이링이랑 잉야잉야 해버리면 별창늙은이 싸다구 왕복으로 후려칠 레벨로 짜릿할 걸?」 「새봄 : 바랄 걸 바래라.」 「아침참이슬 : 아, 조안나 나왔으면 좋겠다.」 「SALHAE : 하. 유라에게 생긴 화상이 잊혀지지가 않아. 이렇게 속상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좋아하게 되었던 그 모습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이유라가 불완전해진 느낌이야.」 「헬잘알 : 얘도 참 어지간하다.」 「두치 : 히익- 오타쿠」 「질소포장 : 그 이유라라는 애한테 사망회귀를 걸어두는 방법도 있지만, 시청자 배려라곤 좆도 모르는 애새끼가 해줄 리가 없겠지.」 「まつみん : 불완전해졌다는 표현은 어쩐지 이상하네요……. 살해 씨, 이유라라는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 맞아요?」 「SALHAE :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좋아하긴 하지만 진짜 사람은 아니잖아……. 아직 그 정도 현실감각은 있다고. 나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まつみん : …….」 「엑윽보수 : ㅋㅋㅋ 그래도 다행히 정줄을 아예 놓아버리진 않았네.」 「Cthulu : 글쎄요. 때론 완전히 미쳐버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참이슬 : 아, 우리 존예 조안나 보고 싶다.」 「SALHAE : 으, 제발, 유라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붉은 10월 : 아해야, 걱정을 말아라. 만에 하나 증상이 심각하면 병원선으로 보내겠지.」 「붉은 10월 : 저 시절의 미군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에셜런 4등급의 병원선을, 그것도 두 척이나 운용하던 군대거든. 그걸 느리고 예산 잡아먹는다고 아니꼬워하던 높으신 분도 있긴 했지만 말야.」 「붉은 10월 : 어쨌든 생존자 구조 작전이 있었으니 적어도 한 척은 서해안에 와있을 거다.」 「SALHAE : 에셜런 4?」 「붉은 10월 : ㅇㅇ. NATO의 분류 기준임. 쉽게 설명하면 본격적인 종합병원 급을 뜻함.」 「SALHAE : 그런가…….」 「아침참이슬 : 어휴, 나도 쟤처럼 될까봐 무섭다.」 「아침참이슬 : 근데 조안나랑 섹스하고 싶다.」 # 272 [272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8) 폭군은 연둣빛으로 흐드러진 화원에서 가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곳은 농밀한 장미향으로 가득했으며, 그동안 오직 한 사람만이 거닐 수 있었다. 녹색 장미는 본디 이 세상에 없던 것이다. 가을 또한 회장의 세상에 없었던 부류였다. “아…….” 익숙한 목소리, 놀라움이 담긴 탄성. 이를 들은 고건철은 깊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뱀 같은 사내가 주인에게 목례했다. 얼굴에 멍이 남아있다. 그 뒤엔 비현실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아름다운 계절이 있었다. 녹색 배경에 붉은 옷을 입은 한가을의 존재감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스스로 선물한, 혹은 강요한 의상인데도 불구하고, 고건철은 그 강렬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화감을 느낀다. 저 여자에겐 부드러움이 어울렸다. ‘내 느낌이 아닌 듯하여 거부하려 했건만…….’ 가을이 아끼는 옷은 겨울의 선물이었고, 녹색이었다. 그래서 폭군은 녹색에 대한 선호가 몸뚱이에 각인된 겨울의 흔적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가 가을에게 느끼는 비경제적인 감정과 같이. 그러나 이젠 그런 의심조차도 시들해졌다. 정확하게는, 의심할 기운이 없다. 그저 한가을과 상성이 좋은 색채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떤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는 번민하기가 힘에 겨워서. 비합리적이기도 하고. 특수비서는 회장의 불편함을 감지하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왕을 대하듯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적막한 공간에 남겨진 가을은 조용한 걸음으로 폭군에게 다가왔다. 어쩐지 방향(芳香)이 짙어지는 느낌. 거리가 사라졌으나 침묵은 그대로였다. 고건철은 혀를 소화한 기분이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민다. 가을이 아니라 쓸 데 없는 짓을 해버린 부하를 향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피고용인의 책임은 곧 고용인의 책임. 그것이 고건철의 원칙이었다. 다행히 대화의 물꼬를 가을이 터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뜻밖이네요. 저를 더는 부르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예의 바른 인사에 풍성한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잠시 홀려있던 고건철이 늦지 않게 긍정한다. “그랬지. 네게 들인 수고를 매몰비용으로 처리하려 했었지.” 쉽게 말해 거래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이 만남이 오랜만인 것이다. “마음이 바뀌셨나 봐요.” “처음부터 바뀐 적이 없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바꿀 수가 없었다고 해도 옳겠고.” “……그런가요.” 가을은 회장의 솔직한 태도에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회장은 항상 경제성을 추구했다. 감춰봐야 무의미한 상대였다. “우선 사과하지. 내 비서가 널 곤란하게 만들었더군.” “괜찮습니다.” “원망스럽진 않나?” “아뇨.” “어째서?” “회장님의 지시가 아닐 거로 생각했습니다.” “왜지?” “그런 식의 거래를 싫어하실 테니까요.” 이는 정확하게 고건철의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거래하지 않는다.’ 폭군은 만족감과 불쾌감을 함께 느꼈다. ‘천박한 것.’ 다시 한 번, 측근을 향한 분노였다. 이는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회장이 의도적으로 관심을 끄고 있는 사이 특수비서 강영일은 가을을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면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충성스러운 핑계였다. 이 유능한 사디스트는 가학적 취향으로 아름다운 것을 짓밟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자 고건철의 그늘에 있는 것이니까. 교활해서 쓸모가 많은 도구는 폭군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회장님의 기준을 잘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격노한 뒤에 고건철이 답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고 정당한 거래가 되는 게 아니다!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까지도 정당해야 한단 말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차라리 칼을 들이대고 강간을 했겠지! 어떤 반발이라도, 어떤 처벌이라도 무마할 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왜 세금을 내는 것 같나!” 내야 하는 세금은 반드시 내고, 낼 수 있는 세금은 찾아서 내라. 혜성그룹의 회계 지침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에 대가를 지불하는 가장 정당한 경로였기에. 같은 맥락이다. 폭군은 인간을 경멸하지만, 상품으로서, 그리고 거래주체로서는 존중한다. 가장 어리석고 무가치한 인간에게도 자신을 팔아넘기고 자멸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협박은 없다. 물론 이는 폭군의 기준. 겨울과 처지가 같은 아이들의 구명, 그리고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치료를 대가로 선택을 요구했던 것은 가을의 입장에선 협박이었으되 고건철에게는 정상적인 거래였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고, 그는 돈을 지불할 뿐이었다. 그 어린 것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 아니었던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특수비서가 회장의 사죄를 구했다. 교활함이 곧 쓸모인 인간이었으므로 폭군은 이쯤에서 분노를 거두었다. 모르는 척은 가증스럽지만, 이 세상에 신뢰해도 좋을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칼에 피가 묻었으면 칼자루를 쥔 사람의 잘못이다. 관리 소홀도 마찬가지. 사람이 사람에게 무관심한 이 시대는 사람 잡아먹는 짐승에게 실로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 간신은 자신의 연기에 도취하였을 터였다.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섬기는 이에게 우월함을 느끼도록 해준 것에 대한 만족. 아직은 그것을 버릴 때가 아니다. 가을의 말이 회장을 일깨운다. “그동안 많이 여위셨네요.”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더하는 염려들. “식사는 제대로 하시나요? 잠은 잘 주무시고요?” 딱! 늙은 소년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지팡이를 찍었다. “콜록……크흠. 대체 어느 쪽을 걱정하는 것이냐?” “회장님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어주시겠어요?” “웃기는군.” 고건철이 앞장섰다. “조금 걷지. 식사를 준비해두라고 일러 놨다.” 따악, 딱. 티타늄 샤프트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신경질적인 소리. 불면증과 식이장애로 쇠약해진 육체는 지팡이 없인 걷기도 힘들었다. 주치의는 식이장애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진단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확인하려는 강박증이라고. 굶어서, 가장 원초적인 생존욕구를 억눌러서, 그만큼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충동이라며. 회장은 그 설명을 쉽게 납득했다. 예전처럼 두들겨 맞을까봐 떨고 있던 주치의는 폭군이 분노하지 않자 얼이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그까짓 것, 이 몸뚱이의 복제체를 만들면 그만이야.’ 복제체 이식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예전의 몸뚱이, 과거의 고건철만 아니면 된다. 다만 예비 육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지금 상태로 견뎌야 할 것이다. 뇌를 사후보험으로 보존하고 싶진 않았다. 거기에 일말의 거부감이 더해진다. 그때가 되어 가을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원래 동생이 지녔던 육체는 폐기되는 셈인데. 고건철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보상을 해주겠다.” “네?” “네가 겪은 부당한 대우들에 대해 보상금을 지불하겠단 말이다. 당연히 받아야 했을 할 급여와 네가 수령한 차액의 백배를 주지. 지난 일을 잊기엔 충분할 거다.” “……금액이 너무 많지 않은가요?” 질문을 받은 고건철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필요할 텐데?” “제 사정과는 무관한 문제입니다.” “네 기준에 바르지 않은 대가는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이 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큰돈을 주시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으실 테니까요.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순 없어요.” “그래? 네 양육자금 대출 전액을 상환하기에 충분한 금액일거다. 그럼 아직 살아있는 동생을 챙기고도 약간의 여유가 남겠지. 한겨울 그 녀석에게 송금을 해줘도 괜찮을 만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찾아갈 염치도 생기겠지.” 가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본다. 그러나 거기엔 여전히 미움이 없었다. 한때는 미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예전에 했던 그 말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그 모습이 회장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러잖아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거래였건만. ‘나로서 남아있겠다. 죽은 동생을 위해, 녀석이 기억하는 자신을 지키고 싶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고건철은 문득 궁금해진다. 한겨울 그 머저리도 같은 마음일까?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다만, 이건 나와 너의 거래와는 무관한 사안이다. 안 믿어진다면 날 위해서라도 받아라. 네가 납득하든 말든 내가 치러야 할 대가를 지불해야겠으니.” 회장이 되뇌었다. 감히 내게 빚을 지우려 들지 마라. 그것도 고작 이따위 문제로.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로써 거래는 더욱 어려워졌다. 고건철은 지금의 육체에 대한 물리현실에서의 배타적 이용권을 포기할 마음이 없고, 입장이 변치 않을 가을은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인 까닭. 그러나 당연한 일이었다. 폭군에겐 일말의 유감도 없었다. 가을의 일터가 혜성의 계열사이니 폭군은 그녀의 고용주다. 거래와는 정말로, 정말로 무관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기도 하다. 낙원그룹마저 손에 넣은 지금, 이 나라 경제의 절반 이상이 폭군의 영토이며 보다 적은 나머지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 고로 그의 초대는 가을에게 업무의 연장이었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계속 걷던 중 서로 다른 향기가 겹쳐졌다. 정확한 시간에 나타난 급사들이 테이블을 준비했다. 순백의 테이블 위에 은빛 식기들이 반짝인다. 인간의 모든 식사가 물리적이었던 과거의 기준으로도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만찬이었다. “앉아라.” 시중을 받는 가을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런 식사는 처음이네요.” 그 그늘은 회장이 기대했던 상품가치였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기괴하고, 상품가치를 말하자면 희소하다. “들지.” 폭군은 상대를 기다리지 않았다. 뵈프 타르타르를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뭉쳐진 소고기 육회가 풀어지며 깨진 노른자가 뒤섞였다. 가벼운 후추와 버터 향이 났다. 흐트러진 생육을 바삭한 빵에 올려 크게 한 입 씹는다. 와작, 와작. 식초와 소금이 어우러진 상큼한 짠맛의 고기에는 고소하게 아작거리는 질감이 뒤따랐다. 아주 연한 스테이크의 부드러운 속살 맛에 가깝다. 씹을 때마다 육즙이 풍부했다. 꿀꺽 삼키고서, 폭군은 있어야 할 반응을 기다렸다. 메슥거림은 없었다. “흥.” 오히려 평소보다 강렬한 구토감이 치밀어야 정상 아닌가? 스스로를 비웃으며, 고건철은 느려진 속도로 식사를 재개했다. “안 먹으면 쓰레기다.” 그가 시선도 주지 않고 던지는 말. 들은 가을은 가냘프게 한숨짓는다. 무릎 위에 두었던 손들이 이제야 식탁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식생활은 가상현실에서도 빈곤했다. 그녀는 현실에서 먹고 가상현실에선 굶었다. 현실에서의 식사는 매양 에너지 팩이다. 구매목록에 그 흔한 라면조차도 없었다. 이 시대에 라면만 먹는다는 말은 물리현실에서의 식사를 뜻하지 않았다. 육체가 요구하는 열량을 에너지 팩으로 채우고 가상현실에서는 라면을 먹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한국인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식도락이었다. 가상의 모든 식사가 물리현실보다 저렴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싸지만은 않다. 부유함의 상징이 된 물리적 식사의 값이 치솟으면서 가상의 음식 가격도 덩달아 올라간 덕분. 저렴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면 된다. 요식업계는 전기신호에 불과한 음식으로부터 로열티를 받았다. 재현된 맛에 대한 지적 재산권이었다. 이는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F등급의 가난뱅이들은 여전히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죽고 난 뒤에도 스스로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역시 허상에 불과한 허기를 달래기 위하여. 사실을 말하자면, 현대 한국인들의 소득 대비 식비는 과거보다 조금도 낮지 않다. 정부는 세계 최저 수준의 비만율을 성공적인 복지의 증거로 삼는다. 그래서 가을의 소극적인 식사가 더욱 이채롭다. 거짓 슬픔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회장을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원동력 중 하나가 욕망을 보는 안목이었기에. 전채가 치워질 때 가을이 물었다. “오늘 저를 부르신 건, 그저 식사를 위해서였나요?” “일단은.” “다른 이유는 뭔가요?” “다 먹고 말하지.” 먹기 불편해질 테니. 그러나 결국 많은 음식이 남았다. 수월한 식사가 오랜만인 폭군은 많이 먹어선 안 되었고, 가을은 처음부터 식욕을 보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그녀는 고건철 회장의 식사가 끝나기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말씀해주시겠어요?” 식기를 놓은 회장이 가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볼 때마다 시야가 훅 끌려들어 간다. “거래와는 별개인, 하지만 연관은 있는 제안을 하나 하겠다.” “어떤…….” “오늘부터 내 곁에서 일해라.” 쇠약해진 탓에, 그리고 간만의 식사 때문에 밀려드는 졸음을 쫓으며, 또한 불규칙한 심박에 가빠진 숨을 진정시킨 회장이 열병 걸린 환자처럼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사람 사는 세상을 모른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 허나 나와 같은 높이에서 본 적은 없을 거다. 그러니 직접 보여주마.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들이 실은 이익 추구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공공의 선이란 공공의 이익일 뿐이며, 사회는 그 이익을 창출하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그리고 죄는 다수의 이익을 빼앗는 소수의 이익이지. 그래서 죄를 짓는 병신들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무슨 말씀을…….” “너는 이익이 무엇인지 아느냐?” “…….” “이익은 욕망을 채워주는 모든 것이다. 돈, 쾌락, 그 밖에 욕망을 채워주는 다른 요소들.” 가만히 응시하는 가을에게 고건철이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것은 항상 더 큰 이익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것을 세간에선 진보라고 부르지. 더욱 큰 이익에 맞게 규범과 시스템을 갱신하는 과정 말이다.” 이제 가을은 회장의 뜻을 깨달았다. “회장님과 같은 세상을 보면 제 마음이 바뀔 거로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너를 망설이게 만드는 게 바로 그런 무가치한 규범들 아니냐.” 사랑 없는 육체관계. 그리고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 가을이 고개를 저었다. “제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예요.” “경험해보지도 않고 예언하는 건가?” “세상이 어떻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저하곤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바르지 않은 일을 피하기보다 겨울이 절망할 일을 피하는 것이다. 둘 사이엔 공통분모가 있지만, 같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거절하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고건철을 향해, 가을은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왜지?” “지금의 회장님껜 간병인이 필요해보이니까요.” 결국, 이 몸뚱이인가. 폭군은 코웃음을 쳤다. # 273 [273화] #멧돼지 사냥 (1) 겨울은 독립중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이겨내리라. 그들이 사랑하는 고향과 전쟁의 폐허 사이에서. 승리와 평화로서 축복받은, 주께서 구하신 이 대지와 우리를 하나의 국가로 단결시키고 또 보전케 하는 힘을 찬양하리로다.」 미국의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이었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들을 일이 드문 4절. 처음 2소대원들로 하여금 노래를 외우도록 지시한 사람은 소대장인 진석이었다. “다른 미국인들은 몰라도 되지만 우리는 모르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석이 겨울에게 한 말이었다. 자신의 소대뿐만 아니라 중대 전체가 숙지해야 마땅하다는 요구와 함께. 그는 항상 생존이 최우선이었고, 시절의 수상함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쁜 생각은 아니었기에 겨울은 중대원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의롭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우리가 주의 품속에서 서로를 믿음은 곧 우리의 신념이 되리니. 그리하여 별이 빛나는 깃발은 자유의 땅과 용기 있는 자들의 고향 위에서 개가(凱歌)와 더불어 휘날릴 것이다.」 다들 불안한 것이다. 출동을 앞두고 차량 점검과 연료 보급을 위해 잠시 정지한 틈에도 삼삼오오 모여서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부끄럽군요. 저도 1절밖에 모르는데 말입니다.” 문득 말을 붙여온 사람은 부중대장인 싱 대위였다. 그러나 부끄럽다고 하는 그가 미국인들 중에선 오히려 양호한 축에 든다. 절반 이상의 미국인들이 1절을 다 암송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국가(國歌)는 몰라도 된다. “중요한 건 마음이죠.” 겨울은 진심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럴 때 들으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대위의 소감은 전투적인 가사 탓이다. 한국의 애국가와 달리, 별이 빛나는 깃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과 승리에 대한 노래였다. 성벽 위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섬광을 보고, 오만한 적과 공포의 적막을 무찌르며, 적의 피로 적의 더러운 발자국을 씻어낸다는 내용. 노을이 창백해지는 시간이었다. 겨울은 태양이 맞닿은 지평선과 그 아래의 평원을 응시했다. 버려진 농토에서 제멋대로 자란 작물들은 혹독한 여름, 메마르고 달아오른 땅을 견디지 못해 눈길 닿는 곳마다 누렇게 죽어있었다. “황량하네요. 안전해지더라도 복구하려면 꽤 힘들겠어요.” 이에 머레이 중위가 답한다. “복구를 할 수 있다는 게 다행 아니겠습니까? 승리가 머지않았습니다.” 정보장교는 지휘용 장갑차에 걸터앉은 채였다. 차량을 정비하는 동안 냉방을 꺼두었기에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모습.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전황이 좋아서다. 서쪽 능선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실려 왔다. 이미 죽은 것들의 악취가 대부분이겠으나, 겨울은 그 사이에서 전투를 예감했다. “바람도 이제 미지근하고, 슬슬 기어 나올 때가 됐어요. 각 소대에 앞으로 30분 내에 정비를 끝내고 탑승하라고 전달해요. 준비 되는 대로 보고하라고.” “알겠습니다.” 싱 대위가 겨울의 지시를 세부적인 명령들로 구체화했다. 중대가 전투준비를 하는 평야는 멧돼지 사냥의 현장이었다. 북미를 탈출하려는 변종들을 추격, 섬멸하는 작전. 전투양상이 마치 달아나는 멧돼지 떼를 쏴 죽이는 것 같다고 해서 멧돼지 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어쩌다 보니 정식 작전명이 되어버렸다. “이런. 건전지가 벌써 다 됐나……. 새로 받아야겠는데.” 가까운 험비에 기대에 소총 액세서리를 점검하는 슐츠의 목소리였다. 그는 레이저 조준기 외에도 확대경이 딸린 도트 사이트(홀로그램 반사조준경)를 달아서 쓰고 있었다. 근거리와 중거리 교전에서 탁월한 성능을 보여, 적을 쫓아가며 쏴 죽이는 멧돼지 사냥에 적합했다. 트릭스터의 개체수가 감소한 만큼 전자기기의 소모율 부담도 줄었고. 하지만 겨울은 조준기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보급품으로 나오는 건전지가 항상 남아돌았다. “이거 받아요.” 슐츠는 겨울이 던진 건전지들을 가까스로 받아냈다. “이크.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필요 없으십니까? 오늘 밤엔 달도 늦게 뜰 텐데요.” “난 맨눈이면 돼요. 혹시나 트릭스터가 자폭하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부럽습니다. 정말 타고나셨군요.” 대답이 불필요한 감탄이었다. 헥헥 대던 닥스훈트가 덩달아 짖는다. “근데 그 흉물은 안 버리십니까?” “음? 아.” 겨울이 탄띠를 더듬었다. 붙잡힌 것은 사자의 뼈를 깎아 만든 액막이 부적. 어찌 보면 사람 같고 어찌 보면 괴물 같은 주술인형은 자그마한 것이 손때를 타 누렇게 변색되었다. “아예 잊고 있었어요. 선물 받은 거라 별생각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확실히 부적절하겠네요. 성의를 감안하면 버리기도 곤란하고……. 음, 슐츠가 가질래요?” 국가적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겨울인지라 항상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사술(邪術)로 여겨지기에 십상인 인형은 나쁜 가십거리가 될 터. 이를 떼어서 내미니 상병이 질색한다. “사양하겠습니다. 감염을 막아주긴커녕 저주에 걸리게 생겼군요. 꿈에 변종이 나올 겁니다. 혹시 그 나이지리아 연대장, 중대장님을 엄청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그 왜, 그쪽 동네 축구선수들 이야기로는 상대의 기운을 빼앗아오는 저주도 있다고 했습니다.” “설마요.” 가볍게 웃는 겨울. 작은 주술인형은 원래 FOB 올레마에 배치되어 있었던 UN군 소속 나이지리아 연대장의 애장품이었다. 그의 연대는 칼파인 5 사태가 수습된 이후 겨울의 독립중대가 방어하던 아이들린 지열발전소를 인수했다. 독립중대 사병들은 힘들게 사수한 기지를 떠나기 서운해했지만, 나이지리아 연대의 주술사가 방어선 중심에 물소의 머리뼈를 묻으며 주문을 외우는 걸 본 뒤엔 오히려 빨리 떠나고 싶어 안달했다. 슐츠는 그때 유달리 기겁한 사람 중 하나였고. ‘심지어 그 주술사가 원래는 기독교 군목이었다고 했었지.’ 겨울은 군목의 축복을 정중히 사양했었다.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라기보다는, 생물학적 재해 앞에서 신앙이 변질된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전 저주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슐츠는 쓸데없이 진지했다. 겨울의 일이라서 더한 것 같았다. “그 연대장, 우리를 굉장히 부러워했잖습니까. 자기들도 싸우고 싶다고. 공적을 세울 기회가 너무 없어서 불만이라고.” “그럴 만하잖아요. 그분들 처지가 처지인걸.” “전황이 유리할 때 슬쩍 얹혀가려는 느낌이라 곱게 보이진 않습니다만……. 근데 정말 안 된답니까?” “뭐가요?” “국제연합군을 실전에 투입하는 거 말입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일방적인 소탕전인데, 딱히 사기나 전투력이 높을 필요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 친구들 기를 살려주는 것도 좋겠고.” 이 대화에 슐츠 말고도 관심을 보이는 사병들이 보였다. 봉쇄사령부가 아이들린 발전소와 유인 신호기를 나이지리아 연대에 넘기고 독립중대는 멧돼지 사냥에 참가라고 명령한 것은, 바꿔 말해 겨울의 독립중대가 그 연대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한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겨울의 관점에서, 그 전투력은 단순히 화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슐츠. 우리가 왜 여기서 멈춰 서있는지 생각해봐요.” 지금도 정비병들이 각 차량에 붙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은 30분 내에 작업을 끝내라는 겨울의 지시 때문이었다. 정비능력이 없는 병사들은 돕는 데 한계가 있었다. 본토 출신들이야 기본적인 차량 정비를 자차로 익힌 경우가 꽤 있으나, 난민 출신 병사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이었다. 다른 쪽에선 디안젤로 하사가 날개를 분리한 소형 무인기를 놓고 기술병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 뭔가 잘 안 풀리는지 방탄 헬멧 안쪽을 신경질적으로 긁는다. 중대가 멈춰서기 전까지, 4대가 한 세트인 소형 무인기 중에서 3대가 기능고장을 일으켰다. 내구성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온의 직사광선과 미세한 먼지에 장시간 노출된 결과였다. 각종 차량과 냉방장비들도 마찬가지. 작렬하던 낮에 비해 식었다곤 해도,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일몰에 병사들이 차를 두고 나와 있는 이유였다. 슐츠는 벌서 납득한 기색이었으나 겨울은 그대로 설명한다. 병사들에게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중대는 오랫동안 쉬지 못했다. “우린 사실상 사막에서 작전 중인 거나 다름없어요. 혹사당한 장비들이 시도 때도 없이 퍼지고 있잖아요. 군수지원을 제대로 받는 우리도 이럴 지경인데, 사용하는 장비부터 중구난방인 국제연합군을 실전에 투입해 봐요. 작전에 수시로 차질이 빚어질 걸요? 그렇다고 그쪽 장비까지 전부 다 갈아주기도 힘들고.” 그러니 그들에겐 후방 거점 방어 정도를 맡기는 편이 낫다. ‘해군하곤 사정이 다르지.’ 그쪽은 일단 전력이 다르고, 미군이 도움이 필요한 정도와 환경도 다르다. “Hua.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닥스훈트가 입맛을 다시는 슐츠의 전투화를 핥는다. 떼어낸 주술인형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던 겨울은, 통신장교 에반스의 관심을 깨달았다. “가질래요?” “주신다면 감사히.” “의외네요. 이런 걸 좋아하고.” “독특하잖습니까. 중대장님의 손을 거친 물건이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친구들 기죽이는데 좋을 겁니다.” “어디 팔아넘길 일은 없겠군요.” “물론입니다.” 그의 확답을 들은 겨울은 액막이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헌데 이런 쪽에 관대할 것 같은 싱 대위가 의외로 싫은 표정이었다. 좋아하던 에반스가 조금 당황한 눈치로 표정을 관리했다. “대위, 무슨 문제라도?” 겨울이 묻자 싱이 애매하게 부정한다. “별 것 아닙니다.” “뭔가 있으면 말해 봐요.” “정말로 별 것 아닙니다. 그냥 그 부적을 보니 요즘 돌아가는 일들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돌아가는 일들?” “성전 기사단이니, 해골성모니 하는 것들 있잖습니까. 사람들이 광신에 빠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길 바랍니다.” 성전 기사단은 올레마를 떠나기 전 군종신부에게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리스도의 민병대와 더불어 남부에서 확산하는 이단으로 카톨릭 교계에서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편 해골성모의 실체는 산타 무에르테라는 중남미의 토착 신앙이었다. 당연히 정식명칭은 아니고, 중남미의 상황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서 비롯되었다. 기자가 진짜 이름을 몰랐다고 보긴 어렵다. 역병확산 이전부터 유명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신앙이 마약 카르텔의 상징으로 부각되어버렸다는 것. ‘비정규 군사조직들이 여태껏 남아있는 게 대단한 일이지.’ 정규군 수준으로 무장한 마약상의 사병집단들은 도시계획의 부재가 만들어낸 미로 같은 시가지와 그들에게 친숙한 밀림에서 역병에 맞서 싸웠다. 그동안 미국은 방역전선의 압력을 덜고자 그들에게 무기와 탄약, 식량을 지원해왔고. 과거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헛웃음을 금치 못할 일. 조안나만 하더라도 그들을 단속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바로 그들로 인해 경미한 고소공포증이 생기지 않았던가. 사실 그들의 생존은 변종들이 봉쇄선 돌파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변종들이 일부러 남겨두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 싸움도 이젠 한계였다. 본토 방역전선에서 밀어낸 역병의 세력이 대대적으로 남하하고 있었기에. 미국인들은 바다로 쏟아져 나오는 그들을 외면하고 싶었다. 우익 언론이 그들에게 사교도 집단의 이미지를 씌우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그게 사실에 가까워서 더 큰 문제인데…….’ 당장 사람 좋은 싱 대위조차도 광신에 대한 혐오감을 보일 뿐이지 않은가. “Sir. 레이븐(Raven) 절반은 결국 재사용이 어렵다는 보고입니다.” 디안젤로 하사였다. 레이븐은 중대가 보유한 무인정찰기의 명칭이다. 즉 잔 고장과 씨름하던 기술병들의 항복 선언이었다. “메리웨더 상사에게 말해두죠. 새로 요청하라고.” “조종 장치(GCS)도 기판을 갈아야 한다더군요.” “기억해둘게요. 일단 오늘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테니까. 수고했어요.” 하사가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잠시 후 몇 분 간격으로 각 소대로부터 정비를 끝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감각보정이 한층 더 짙어질 무렵이었다. 겨울이 중대 채널에 전달했다. “중대, 이동 준비.” 항공정찰에 변종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살벌한 열기와 공습을 피해 평야를 끼고 도는 산맥으로 숨어들었던 대규모 집단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밀한 폭격이 가해지고 있었으나, 오로지 개체 수 보전이 목적인 변종집단은 밀도가 낮아 공습효율도 낮았다. # 274 [274화] #멧돼지 사냥 (2) 겨울은 지휘장갑차(M1130)에 탑승했다. 하얗게 도색된 안쪽은 지휘통제용 컴퓨터 시스템과 각종 통신장비가 빡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외부와 차단된 환경에선 감각보정이 축소되지만 부대 지휘관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변종 추살(追殺)을 위한 공세적인 기동에서, 독립중대가 전개되는 범위(전투정면)는 최대 1킬로미터에 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병대처럼 임시로 배속된 병과의 통솔 문제도 있었다. 장갑차의 수용인원은 조종수와 사수를 제외해도 아홉. 즉 중대 참모 전원을 태울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절반만 탑승했다. ‘트릭스터에게 교란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겨울은 예비 지휘장갑차와 연결된 화상통신에 부중대장 싱 대위가 등장한 것을 확인했다. 이쪽엔 작전장교 포스터와 통신장교 에반스가 탑승했고, 저쪽으로는 선임상사 메리웨더와 더불어 정보장교인 머레이를 보내놓은 상태. 예비 지휘장갑차를 치우치게 배치해두었으니, 만에 하나 방해전파 범위에 들어가더라도 부대 일부가 마비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충격에 대비해 안전 고리를 결속시키던 포스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칫. 이놈의 핏자국은 지워지지도 않나.” 그가 앉은 쪽 벽체 틈바구니엔 희미한 얼룩이 남아있었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했을 무렵 생겼을 흔적. 이 장갑차는 그때 버려졌던 것을 수리한 것이었다. 기실 데이비드 임무부대가 보유한 차량 대부분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다. “레이븐 1, 레이븐 3이 뜹니다.” 동승한 무인기 운용 담당 병사의 보고에 겨울이 끄덕였다. 화면 속 시동이 걸린 험비 옆에서, 무인기에 전원을 넣는 병사들이 보였다. 중대가 보유한 무인기는 관측 장비가 달린 동력 글라이더에 가깝다. 모터가 켜지고, 프로펠러가 돌아가며 왱 소리를 낸다. 동체를 들고 있던 병사가 하늘을 향해 휙 집어 던졌다. 동시에 두 무인기가 보내는 영상도 훅 높아졌다. 조종 장치는 외부 안테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조작하는 병사는 무인기를 중대가 나아갈 방향으로 유도했다. 겨울이 지시했다. “IR로 전환.” “Aye, sir.” 황혼으로 물든 천연색의 들판이 잿빛의 적외선 시야로 전환된다. 뜨거울수록 하얗고 차가울수록 검은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은 하얀 노이즈처럼 보였다. 통신장교가 다른 부대의 진행 상황을 알린다. “캐스케이드 임무부대가 5클릭(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습니다.” “우리도 움직이죠.” 지휘용 컴퓨터가 있었으므로 무전은 불필요했다. 타닥, 탁. 딸깍. 타자와 클릭으로 하달되는 명령. 부대의 이동은 전술지도상의 무미건조한 기호와 선들로 표시되었다. 우우우웅- 각각의 분할화면이 비추는 여러 차들의 가속이 겹쳐지는 엔진 소음으로 들려왔다. 메마른 땅이 부옇게 일어나 질주의 흔적을 남긴다. 덜컹. 겨울의 몸이 튀었다. 바퀴가 여덟 개나 달려있는데도 불구하고, 묵직한 장갑차의 승차감은 썩 좋지 않았다. 땅거미가 서산을 넘자 숨죽이고 있던 역병이 비탈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양산된 유인신호기가 험한 지형에 우선적으로 배치되면서, 변종들이 남하하려면 중앙평원에 형성된 회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데이비드 2-1. 멧돼지 떼의 후미와 접촉.] 차분한 보고 뒤에 즉각 사격이 이어진다. 병사의 시야를 공유하는 헬멧 카메라 화면이 맹렬하게 번쩍거렸다. 타탕! 타타타탕! 타타탕! 조준선 끝, 등판에 레이저의 붉은 광점이 찍혀있던 변종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나뒹굴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인다. 꾸우어어어억! 변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다. 정해진 범위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허가받은 험비들이 분열된 변종들을 쫓아 갈라졌다. “투입 이후 날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적응이 안 되는군요. 어떤 영화에서도 좀비가 인간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작전장교의 소감은 다소 떨떠름한 느낌이었다.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1소대 3호차, 적정 교전거리를 유지할 것. 적 종심과 너무 가깝다.” [시정하겠습니다.] 유라를 대신하는 임시 소대장의 긴장된 답변이 돌아왔다. 당장 역병들이 달아나고 있다고 해도,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일부가 시간벌이를 위해 반전해버리면 피해가 생길 수 있었다. [당소 3-3 알파. 특수변종 애크리드(Acrid)를 식별. 토우(TOW)를 써도 되는지?] 새로운 보고.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난다. 겨울은 대전차 미사일 사용 요청을 기각했다. “3-3, 위력과잉이다. 해당 표적은 M2(중기관총)로 충분하다.” [확인. 철갑소이탄으로 교전하겠다. 이상.] 따로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화면이 떴다. 포스터 중위의 조작이었다. 서로의 콘솔이 연결되어있어 가능한 일이다. 쾅쾅쾅쾅! 스피커를 지직거리게 만드는 날카롭고 강렬한 총성. 험비 포탑에 달린 중기관총이 무지막지한 연사를 퍼붓는다. 예광탄과 소이탄들이 어둠 속에 달아오른 쇳빛의 직선 다발을 그었다. 해당 장면이 공중에서도 잡힌다. 다각도로 비춰지는 교전 현장. 적외선 열영상(熱映像)으로 관측한 표적은 입체감 없는 백색이었다. 불분명하게 흔들리는 윤곽이 기괴했다. 철갑탄 세례가 몸통을 관통하면서, 역시 하얗게 보이는 피와 살점이 뿌려진다. 물리적인 방어력은 물렁물렁한 녀석이었다. 구르는 사체의 중량이 지면을 한 꺼풀 벗겨냈다. ‘좀 더 일찍 등장했으면 골치 아픈 녀석이었을지도…….’ 특수변종 분류 코드 애크리드. 매캐하다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가 실체인 신종 괴물이었다. 이 녀석들은 인 화합물을 체외로 뿜어 발화시키는데, 이것으로 짙은 연막을 만들어낸다. 아직 정보가 많지는 않으나 열에 대한 내성 또한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했다. 이글거리는 계절에 탄생한 괴물답다고 해야 할까. 중기관총 사격에 부서지는 땅이 도주하는 괴물을 따라잡는 순간, 흑백 화면에 비친 몸뚱이로부터 하얀 피와 살점이 뿌려졌다. 작전장교는 어쩐지 김이 새버린 눈치였다. “이런. 브리핑을 듣고 기대했는데, 예광탄에 맞아도 폭발하진 않는군요. 분비기작이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인지 원…….” 불이 붙기는 했다. 그러나 느리게 타들어가는 불이었다. 상급 부대에서 전파된 정보로만 접했을 뿐, 겨울의 임무부대가 애크리드와 접촉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작전장교에겐 낯선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중대와 임무부대 전체가, 나아가 멧돼지 사냥에 투입된 미군 전반이 공유했다. 바로 어제, 워싱턴 주의 완전 탈환 선언이 있었으므로. 새로운 특수변종은 너무 좋지 않은 시점에서 나타났다. ‘이대로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효용성이 낮은 괴물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활약할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쿠웅!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머리를 부딪친 탑승인원들이 인상을 썼다. 통신장교가 차내 무전기를 잡는다. “무슨 일이야? 적습인가?” [아닙니다. 단순히 지형이 나쁜 겁니다. 그리고 변종 사체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다시 덜컹. 야지를 달리다보니 충격이 잦았다. 시야가 올려치는 주먹에 맞은 수준으로 흔들렸다. 바퀴 아래에서 시체가 터질 때면 미끄러지는 느낌도 있었다. 몇몇은 안색이 별로였다. 통신장교를 포함해, 며칠간 멀미로 고생한 인원들이었다. 귀 뒤쪽이나 목덜미에 멀미약 패드를 붙이고 있는데도 여전히 고역인가보다. 사실 통신장교 에반스는 첫날에 차내에다 구토하기도 했다. 마침 흔들리는 순간이어서, 토사물을 공중에 흩뿌리며. 다행히 전자장비들은 멀쩡했다. 겨울은 눈으로는 지휘 단말을 보면서 물었다. “중위, 힘들어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방법이 없잖습니까?” “음, 강제로 재워 줄 순 있는데.” “…….” “농담이에요.” “농담이십니까…….” 다음 순간 굉음이 차체를 후려쳤다. 마치 우렛소리처럼. 콰앙- 우르릉! 프레임이 찌르르 진동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총총한 하늘이었으므로 당연히 진짜 벼락은 아니었다. 지휘 단말엔 공군이 전방 먼 거리에 대형 열압력 폭탄 다수를 투하한 것으로 뜬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충격들. 우르릉, 우릉, 우르릉! 장갑차가 바람의 벽을 뚫으며 출렁거려, 마치 물결치는 땅을 달리는 감각이었다. 결국 통신장교가 구토용 봉지를 펼친다. 우에에에엑- 시큼한 냄새가 퍼졌다. 지금도 여러 채널에서 들려오는 변종들의 울부짖음과 토악질이 겹쳐지니 기괴한 느낌이 든다. 작전장교가 묵묵히 환기장치를 가동했다. 그러자 이번엔 벌판에 널린 시체들의 악취와 연소한 공기 특유의 탄내, 그리고 희미한 초연(硝煙)이 흘러들어왔다. 광범위한 범위를 격렬한 인공 폭풍으로 휩쓸어버린 것은 매복 탐지를 위해서였다. 대사억제로 웅숭그리고 있는 변종 집단이 있더라도 몸을 쳐 날리는 충격에 깨서 발광하도록. 물론 그대로 즉사해버리면 금상첨화였다. 그 외의 다른,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되는 위협들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고. [워우!] 차내 무전으로 울리는 경악성. 장갑차 전방으로부터 지붕이 훅 날아들었다. 박살 나는 소리는 뒤에서 울렸고. 열 폭풍 범위에 농장이라도 하나 있었던가 보다. 직후 공군 전선통제기에서 무전이 들어왔다. [We have an asset on the ground.] 지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무언가(asset)란 아직 구체적인 속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중대 참모들이 잠시 긴장했으나, 잠시 후 새로운 통보가 들어왔다. [매복 중인 그럼블 다수를 발견. 표적을 알라모에 할당하겠다.] 알라모는 공군 81전투비행단의 근접 공격기(A-10) 편대로, 서부 방역전선에 새롭게 배치된 얼굴들이었다. 얼마 전까진 조지아 주에서 동부 해안 경계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기나긴 해안선을 지키는 데 항공전력만 한 것도 드물었다. 미국 정부는 안전지역이 조금 위험해지는 한이 있어도 서쪽에서 확실하게 승부를 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겨울은 보조 통신채널을 알라모가 있는 주파수에 맞추었다. 저고도로 접근한 공격기들이 독립중대의 머리 위 상공을 지나가며 일제히 미사일을 발사했다. 겨울은 그 광경을 병사들의 시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날개에서 분리된 미사일들은 적외선으로 적을 인식하고 섬전처럼 직격했다. 일반적인 대전차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한 발 한 발. 125파운드(57킬로그램)짜리 대형 탄두의 폭발압력은 충격파만으로도 가장 거대한 변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에 충분했다. 화광이 번뜩인 다음 몇 번의 호흡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느다란 폭음이 들려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선회한 편대가 표적의 상태를 식별했다. [아직 생존한 개체를 확인. 기관포로 처리하겠다.] 편대로부터 한 대가 떨어져 나온다. 자신감 넘치는 저공비행이었다. EMP 대책을 갖춰두었을 것이다. 창문을 열고 사격하던 병사들이 하늘을 쳐다본다. 어두운 하늘에서 별빛 희미한 윤곽이었던 공격기가 한순간 샛노랗게 밝아졌다. 바아아악-! 초 단위로 끊기는 중후한 포성. 기관포 사격이 땅을 일렬로 갈아엎는다. 비행의 가속도가 붙은 기관포탄은 전차를 너덜거리게 만드는 위력이었다. 달의 빈자리를 향해 포효하던 그럼블의 머리와 몸통이 도자기처럼 깨졌다. 이제 공격기가 전장을 이탈하여 복귀하는 일만 남았을 때였다. 통신채널에 느닷없이 삑삑대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파일럿이 날카롭게 외치는 말. [조준 당했다! 대공미사일 경보!] “대공미사일?” 되뇌는 작전장교 포스터는 당황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바였다. “이 놈들이 기어코…….” 겨울이 중대에 상황을 전파하려다가 말았다. 주위에서 기동 중인 우군 부대들의 배치와 변종들의 경로를 감안할 때, 겨울의 임무부대 근처엔 양용빈 상장의 잔당이 있기가 불가능했다. 마리골드로부터 갱신된 명령도 동일했다. 이대로 임무를 속행할 것. 사전 브리핑에서도 상황 발생 시 각 임무부대는 기존 임무를 우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사소한 피해에 신경 쓰다가 큰일을 그르칠 순 없다는 뜻. 지평선으로부터 대공미사일 네 발이 시차를 두고 날아왔다. 회피 기동에 돌입한 공격기가 밤하늘에 대량의 화염과 연기를 흩뿌리며 하강했다. 추적을 방해하기 위한 기만수단(플레어)이었다. 그것이 무척 장관이라, 다수의 병사가 눈에 담는다. 그들의 시야를 공유하는 겨울에게도 여러 개의 창으로 선명했다. 공격기 엔진의 배기열을 쫓던 미사일들이 불과 연기의 폭포 앞에서 비틀거렸다. “빗나가라…….” 통신장교의 초조한 기도. 이에 호응하듯, 곧 꺼질 불을 따라 엉뚱하게 꺾인 미사일 두 발이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작은 섬광은 하늘에 대고 성냥을 긋는 느낌이었다. 나머지는 그대로 공격기에게 쇄도했다. 공격기가 두 차례의 근접 폭발에 휘말렸다. 폭연을 뚫고 나온 공격기는 엔진 한쪽과 동체에 기다란 연기가 물려있었다. # 275 [275화] #멧돼지 사냥 (3) 추가 공격에 대비해 동료기들이 피격기의 앞뒤로 붙었다. 최악의 경우 기체의 방어력을 믿고 육탄으로 방어하겠다는 의지였다. 부수적으로 교란 능력이 집중되는 효과도 있었다. [알라모 3! 알라모 리더다! 살아있으면 응답하라!] 편대장이 피격당한 조종사를 호출한다. 응답이 즉시 돌아왔다. [당소 알라모 3. 다친 곳은 없다.] 파일럿은 침착했지만 억눌린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스스로 다친 곳이 없다고 했으니, 그것은 긴장감 때문이거나 기체의 진동 탓일 것이었다. 후우우욱. 편대장이 내쉰 안도의 한숨이 통신 채널을 지직 대게 만들었다. [다행이다. 기체 상태는 어떤가? 기지까지 복귀가 가능하겠는가?] [플랩이 뻣뻣하지만 어떻게든 조종은 가능하다. 좌측 엔진의 RPM이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음, 그리고 연료가 새는 모양이다. 속도를 보면……아슬아슬하게 빙고일 것 같다.] 빙고는 귀환에 필요한 최소연료량을 뜻하는 은어였다. ‘죽을 확률은 낮겠네.’ 겨울은 편대와 공유하던 통신채널의 볼륨을 줄였다. 이름이 벼락(Thunderbolt)인 공격기는 맷집이 터프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조종사의 생존율이 높았다. 아예 박살이 났다면 모를까, 최악의 경우에도 탈출은 가능할 것이다. 지휘단말 화면에 새로운 기호가 출현했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있던 신속대응팀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헬기를 타고 있다는 것. 대공미사일이 날아오는 마당에 무슨 헬기인가 싶었으나, 지면에 달라붙는 수준의 초저공비행이었다. 중대의 후방을 고속으로 스쳐지나간다. 삑삑삑삑. 버저음이 겨울의 주의를 끌었다. 2소대에서 그럼블을 발견하고 대전차화기를 사용했다는 신호였다. 전자지도상의 차량 기호 중 하나로부터 붉은 실선이 그어진다. 발사된 미사일의 진행경로. 그럼블 출현 시엔 화기 사용에 허가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소대별 간격을 제어하며, 겨울이 물었다. “포스터 중위. 적이 어디쯤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의 적은 당연히 변종집단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포스터가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이쯤이 아닐까 합니다.” 중대 작전참모가 찍은 좌표는 예상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지평선을 갓 넘어간 지점. 거리로는 대략 5킬로미터 안팎에 불과했다. “근거는?” “적이 사용한 미사일의 위력과 추적방식입니다. 본격적인 미사일이었으면 알라모 3은 공중분해 되었어야 정상이죠. 또한 열 교란(플레어)만으로 절반을 속였으니 미사일에 자체 레이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휴대형이고, 사거리는 최대 6킬로미터 가량일 겁니다.” 이런 지식은 겨울로선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속성 장교교육에도 포함되어있지 않은 내용들. 그도 그럴 것이, 역병과의 싸움에서 대공미사일을 어디다 써먹겠는가? “하지만 최대 사거리에서 발사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알라모 3이 조금만 멀어져도 미사일 연료가 바닥나버리니까요. 회피기동을 감안하여 대략 5킬로미터가 공격 적정선입니다. 미사일이 날아온 방향에서 5킬로미터 범위에 매복이 용이한 지점은 여기, 이 산기슭뿐이군요.” 그러므로 작전장교의 예측은 거의 사실에 가까웠다. 사실 장교가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을 질문 받은 셈이라, 포스터는 대답하는 와중에도 조금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이 오래 가진 않았다. 겨울의 특수성을 떠올린 듯 했다. 신속대응팀은 작전장교가 지목한 지점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그들의 기호는 전자지도의 정보가 갱신될 때마다 순간이동을 하는 수준으로 깜박거렸다. 만약 그들에게 지원이 필요하더라도, 겨울의 데이비드 임무부대보다 가까운 부대들이 즐비했다. 이쪽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취급이 꽤 가혹하겠는데…….’ 만약 생포당하는 중국군이 있다면, 그 처우는 실로 무자비할 터였다. 지레짐작이 아니다. 이미 칼파인 5에서 산 채로 잡힌 중국군들이 그러했다. 고문과 자백제를 아끼지 않고 받아낸 자백 덕분에, 즉 양용빈 상장의 잔당에게 더 이상의 핵무기나 생화학병기가 없음을 확인한 덕분에 지금의 소탕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들도 흩어진 동지들의 위치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상장은 휘하 병력의 매복지점을 부하들에게도 기밀로 유지했던 것 같았다. 혹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지 않았거나. 그저 상장의 망령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공격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었다. 지휘 단말의 터치스크린으로 중대 운용을 조율하던 겨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싸우고 있다는 실감이 약하네요.” 터치 앤 드래그. 방역전쟁 사양으로 개량된 통제 시스템에서, 임무부대에 속한 차량들은 전산화된 지휘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지령을 기다린다는 의미였다. 고로 무전기에 대고 일일이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 토하느라 핼쑥해진 통신장교가 답했다. “그래도 잘 하고 계십니다. 아이들린 기지에서 치른 방어전은 예외적인 상황이었죠.” 그리고 작전장교 포스터가 거들었다. 자신의 단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배속 전에 주의를 받았습니다만, 소령님에 대한 상부의 평가가 인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예. 이례적으로 승진이 빠르셨잖습니까. 기분 나쁘실 지도 모르지만…….” “아뇨, 전혀. 실제로 부족한 점이 많을 텐데요. 그건 인색한 게 아니라 신중한 거죠.”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일방적인 추살이라고 해도 지휘관 입장에선 마냥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적에게 몰두한 차량들이 수시로 대열을 이탈했다. 분산된 변종들이 상대라도 혼자 돌출했다간 위험해진다. 계속 일깨워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알라모 3이 결국 비상착륙을 한답니다.” 통신장교의 보고에 겨울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비상착륙?” “예! 2차선 도로에 착륙하겠다고 하는군요. 우리 임무부대의 공격경로와 가깝습니다. 현재는 교신이 두절되었고……우리 쪽에서 해당위치까지 진출하라는 마리골드의 지시입니다!” 그 지시가 겨울의 단말에도 떴다. 예상 착륙지점이 노란 기호로 깜박인다. “왜 탈출을 하지 않았을까…….” “기체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 거 아니겠습니까? 안전지역까지 활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 차라리 비상착륙이 안전할지도 모릅니다. 안 나오면 되니까요.” 적을 가시범위에서 때리는 공격기는 대공포를 견디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변종들 한 가운데 떨어져도 안전할 것이다. 그럼블이나 산성아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결국 속도를 높여야 한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인한 인명손실이 더 늘어나면 곤란해.’ 생각한 겨울이 지도상의 거리를 쟀다. “최단거리로도 21킬로미터……. 멀어. 에반스 중위! 다른 지원은?” “알라모는 탄약이 없어서 귀환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어, 마리골드가 곧 프레데터(무인공격기) 편대를 띄우겠다고 합니다. 예상 도착시간, 앞으로 13분! 그때까진 운에 맡겨야 합니다.” 지형을 검토해보면 앞으로 개천을 건너야 했다. 이 계절에도 말라붙지 않은 물줄기로서, 원인은 변종들의 길목을 제한하고자 수문을 완전 개방한 상류의 댐이었다. 깊고 거칠어진 물살은 변종은 물론이거니와 군용차량도 건너지 못한다. 겨울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프레데터 말고 다른 건요?” “없습니다. 우리뿐입니다!” 미군은 지금 변종 섬멸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상급부대에서도 잉여 전력이 빠듯하다는 뜻. 신속대응팀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이 교환을 들은 작전장교의 시선이 겨울을 향했다.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변종들을 몰아붙이면 퓨타 포인트, 강에 걸린 다리가 조만간 병목구간이 됩니다. 다 쓸어버리기 전까진 건너가기 힘들 겁니다.” 본래 계획은 변종집단의 동선을 한 쌍의 좁은 다리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다리를 폭파시키거나 공수부대를 떨궈 차단하는 방법이 거론되었으나, 다른 길을 찾아 흩어지게 만드는 것 보다는, 혹은 길이 막힌 변종집단과 난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었다. 즉 시간을 단축하려면 병목현상이 시작되기 전에 통과해야 한다. 상황을 파악한 부중대장이 통신으로 의견을 전했다. [Sir. 여기서 변종들을 무시하고 최고속도로 달려봐야 프레데터와 비슷하게 도착할 뿐입니다. 전 현 상태로 작전을 진행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은 하늘에서 벌어주겠지요.] “무인기가 보유한 화력보다 적의 위협이 더 클 경우엔 어쩌고요?” [공중정찰엔 식별되지 않습니다만……가능성은 있겠습니다.] “데들러는 미사일로 잡지도 못해요.” [……예.] 데들러, 산성아기는 그럼블에게만 매달려 다니는 놈이 아니다. 다른 부대에선 구울에게 달라붙어있었던 사례를 보고했다. 이런 경우는 적외선으로도 구분이 잘 안 되었다. 거기에 미사일을 갈기자니 표적이 너무 작았다. “그리고, 캐노피나 동체가 깨져서 평범한 변종들을 상대로도 위험해진다면? 고속도로라고 해봤자 노면이 엉망일 텐데 과연 제대로 착륙할 수 있었겠어요?”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요. 그럼 부대를 나누시겠습니까? 이쪽에 구멍이 생겨도 곤란합니다. 포위망에 틈이 생겼다간…….] 틈으로 샌 변종들이 아군의 후방에서 출몰하면 골치 아파질 것이다. 큰 위협까지는 아니겠으되 무시할 수도 없으므로, 이 일대의 추격에 제동이 걸릴 테니까. 재정비 시점도 그만큼 늦어지겠고, 아주 많은 변종들이 살아서 도망가게 된다. 사령부는 이를 각오하고서 구조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나머지는 지휘관인 겨울의 판단에 달렸다. “지원근무부대를 투입하죠. 공병대를 빼겠습니다. 기체 상태에 따라서는 해체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의무대도 필요하겠네요.” 지금으로선 파일럿의 상세를 장담하기 어렵다. 무사하면 다행이지만, 지휘관으로선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옳았다. ‘공격기에 연료방출(Fuel Dump) 기능이 있던가?’ 없으면 착륙 후의 화재도 우려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밖으로 나온 파일럿은 권총 하나로 변종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전투를 치를 만큼 멀쩡하다는 전제 하에. “대위, 지휘권을 인수해요. 잠시 후에 다시 만나죠.” 함께 앞질러 가겠다는 겨울의 결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공병대 개개인의 전투력이 결코 낮지 않으나, 장비 특성상 일반적인 전투엔 조금 부적합하기 때문. [행운을 빌겠습니다.] “대위도요. 별 일 없겠지만.” 그리고 겨울은 곧바로 공병대의 몽고메리 중위와 의무대 조윤창 대위를 호출했다. “상황은 알 겁니다. 공병대, 의무대가 나서줘야겠어요. 내 지휘 하에 독립중대를 초월해서 강을 도하하겠습니다. 공병대가 전방과 측면을 맡고 의무대가 후속합니다. 알겠습니까?” [Yes sir.] [……어, 음, 예.] “느린 차량은 잔류시키고 전투대형으로 따라붙어요.” 조윤창 대위 쪽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숙련된 의사였으되 숙련된 군인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장교교육은 겨울처럼 속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군의관과 의무병은 여의치 않을 때 적과 직접 싸우면서 아군을 치료하는 직군이기에. 시선을 교환한 작전장교가 차내 무전기를 잡았다. “도웰 상병! 찍어준 좌표까지 전속력으로 밟아! 엔진이 터져도 된다!” [대열을 이탈하란 말씀이십니까?] “공병대가 엄호할 거야!” 도웰 상병은 장갑차 운용을 위해 파견된 숙련병이었다. 고로 엔진이 터지도록 달리라는 주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가아아앙-! 날카롭게 치솟는 배기음에 통신장교가 체념한 표정을 짓는다. 시급을 다투는 상황이지만, 어쨌든 그는 아직 멀미 중이었다. 쿠웅, 쿵, 쿠궁! 차체가 전후좌우로 미친 듯이 요동친다. 여기에 내부까지 둥둥 울리는 중기관총 사격음이 더해졌다. 지금껏 발포할 기회가 드물었던 지휘 장갑차의 원격포탑이었다. 퍼억, 하는 흔들림은 20톤 가까운 차체가 변종 넷을 한꺼번에 짓이기고 지나가는 충격이었다. 비록 외부 관측카메라엔 보이지 않으나, 여덟 개의 바퀴 아래 잘 으깨어졌을 것이다. 관측 렌즈에 피가 튀어 밤의 어둠이 불그스름하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겨울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그럼블은 무인공격기가 잡아줄 것이고, 그 외엔 압도할 자신이 있으니까. 혼자서는 무리일지라도 지휘할 병력이 있다면야. 견뎌야 할 시간은 길게 잡아도 한 시간 이내였다. # 276 [276화] #멧돼지 사냥 (4) 멧돼지 사냥은 중부 평원에 흐르는 몇 개의 강을 기준으로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변종집단을 몰아 죽이는 작전이었다. 그러므로 대열을 이탈한 시점에서, 겨울의 지휘 장갑차를 중심으로 공병대가 형성한 이동 대열 주변은 온통 달음박질치는 변종들 투성이었다. 중부 평원 북쪽에서부터, 나아가 워싱턴과 오레곤에서부터 밀려난 무리들은, 포위망이 조여드는 이 때 물결 같은 덩어리로 자연스레 뭉쳐졌다. 시체들이 꿈틀대는 밤을 본 포스터가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으. 저것들, 우리를 피하고 싶어도 못 피하는군요. 여기서 한 대라도 퍼졌다간 또 다른 구조작전을 펼쳐야 할 겁니다.” “지금은 정비병들의 실력을 믿는 수밖에요.” 이 순간에도 차내의 미적지근한 공기가, 시원찮은 냉방이 장비들의 소모율을 느끼게 해주었다. 허나 채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으면 당연히 겨울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선두 차량으로부터 경고가 날아왔다. [11시 방향에 그럼블 2개체! 거리 150! 강화등급 감마로 추정!] 겨울이 즉답했다. “무시하고 달려! 어차피 못 따라잡는다!” 중요한 건 구조지 전투가 아니다. 크아아아아! 실제 포효는 한 쌍이겠으나 지휘 차량에서 듣자니 메아리치는 불협화음이었다. 연결된 여러 차량, 다수의 병사들로부터 동시에 전달되는 까닭. 거리가 가깝다보니 상대방위가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11시였으나 겨울이 포착한 찰나에 10시가 되었을 정도로. 짧은 광란을 마친 놈들이 산사태처럼 달려오기 시작했다. [Shit!] 조종석으로부터 차내 무전을 타는 욕설. 두꺼운 갑각, 갈라진 피부에 진물이 흐르는 괴물 둘이 미칠 듯이 육박하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거리감을 왜곡하기에 충분한 중량감이었다. 쾅쾅쾅쾅! 무시하라고 했는데도 사격이 집중되었다. 겨울은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이기에. 두 괴물은 관성에 못 이겨 의무대 후방으로 지나쳐 버렸다. 높은 등급, 변형된 패턴은 무가치했다. 거대 괴물의 질주는 여전히 직선에 가깝고, 강력할지언정 가속이 붙은 차량보다 빠르진 않았으니까. 주먹을 땅에 꽂아 급정거한 그럼블이 벽처럼 일어선 땅을 부수며 대열 후미를 향해 달려온다. 그러나 거리는 계속해서 멀어졌다. 놈들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발포하던 의무대 소속 차량이 결국 다른 목표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그 사선의 변종들은 무너지는 파도처럼 죽었다. 덜컹! 장갑차가 고속도로에 올라타면서 흔들림이 줄었다. 그러나 줄었을 뿐 없어지진 않았다. 태풍을 겪고 폭격을 맞고 살인적인 여름에 쩍 갈라지기까지 한 도로였으므로. 문제는 공격기 역시 이런 도로에 착륙했을 거란 사실이었다. 바퀴 여덟 개인 장갑차의 최대속력은 시속 100킬로미터. 그러나 지금은 노면 상태로 인해 80킬로미터를 내는 게 고작이었고, 이마저도 엔진 고장을 각오하고 내는 출력이었다. 다른 차량들은 이 와중에 방어사격까지 하느라 대열이 자주 흐트러졌다. 그렇게 달리고도 목적지에 먼저 도달한 건 유바 시티 동쪽에서 날아온 무인기 편대였다. 겨울이 벌어진 좌익에 경고를 전하는 사이 통신장교가 화면을 넘겼다. “중대장님, 프레데터의 영상이 들어옵니다.” 삐빅- 새로 뜬 창을 본 겨울은 그러나 조종사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매미를 뜯어먹는 개미들처럼 변종들이 새까맣게 들러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탈출하진 않았나본데…….’ 캐노피가 닫혀있으니, 파일럿은 생사를 떠나 여전히 안에 있을 것이다. 착륙이 험난했던지 열 영상으로 보는 도로엔 아직까지 마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정보장교가 의문을 제기했다. “달아나기도 바쁠 놈들이 이상할 만큼 매달리는군요.” 딱히 대답하지 않았으나, 겨울이 짐작하기로 그 동기는 아마 정보수집이었다. 근처에 트릭스터가 있을 듯하다. 어쩌면 침묵하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학습과 정보보존이 최우선인 괴물. 인간이 지배하는 하늘은 곧 변종들의 재앙이다. 제공권이야말로 감염확산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였다. 고로 교활한 개체들에겐 항공기의 실체가 절실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조종사가 궁금하지 않을까?’ 변종들은 개체별로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러므로 날아다니는 벼락 안에 사람이 있다면, 개체로서의 그 사람에게 주목할 가능성이 높았다. 헬기들이 집중적으로 실종되었을 당시에도 잔해는 찾았으되 조종사들은 대부분 찾아낼 수 없었다고 들었다.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겨울의 예상이었다. 이 세계관의 어느 누구도 겨울만큼 많은 종말을 겪어보진 못했다. 운전병이 보고했다. [포인트 퓨타입니다. 이제 목적지까지 3분 남았습니다.] 어느덧 흰 물살을 견디는 다리가 육안으로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건너야 할 강의 이름이 바로 퓨타였다. 퓨타 포인트는 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하지점이었고. 물에 잠긴 나무들은 수면 위로 수관만 내놓고 있었다. 평시엔 강폭이 10미터 남짓이었겠다. 다리를 돌파하자 교전 강도가 낮아졌다. 도로 양편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졌다. 바둑판처럼 심어진 오렌지와 체리, 호두나무들은 말라 죽은 색채가 어두운 시간에도 선명했다. 군데군데 폭격을 맞은 자리, 불에 탄 흔적들도 보였다. 그래도 아직 절반가량은 어둡게 푸르다. 그 비율이 탈환 이후의 복구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래도 이쪽은 도로가 깨끗하군요.” 포스터의 말은 버려진 차가 드물다는 뜻이었다. 포트 로버츠에서처럼 어느 부대가 미리 길을 치웠든지, 감염확산 초기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피를 실시했든지, 혹은 미처 대피하기도 전에 다 죽었든지.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Sir! 알라모 3이 보입니다!] 겨울이 즉시 명령했다. “포수! 보조화기로 갈겨요! 기체는 어차피 방탄이니까! 조준은 되도록 위쪽으로!” [Aye Sir!] 장갑차의 원격포탑엔 중기관총만 달려있는 게 아니었다. 좀 더 구경이 작은 보조화기(M240)도 달려있어, 이럴 때 위력을 바꿔가며 쓰기가 가능했다. 사실 공격기의 방어력을 감안하면 중기관총을 쏴도 무방하다. 그러나 불시착한 기체여서 조심하는 것이다. 가급적 높여서 조준하라는 지시는 연료 폭발을 경계한 조치였고. ‘불이 붙으려면 벌써 붙었어야 정상이지만…….’ 도로를 벗어나 갓 만들어진 고랑 끝의 기체에 사격이 퍼부어졌다. 거머리처럼 붙어 머리를 박아대던 변종들이 각질처럼 조각조각 벗겨져나갔다. 공병 파견대 차량들이 좌우로 산개하여 주변을 제압한다. 퀘에에에엑! 변종들은 사납게 울고 들개처럼 흩어졌다. 빈자리를 차지한 험비와 장갑차량들이 역병 무리의 배후를 들이쳤다. 어두운 잿빛으로 번들거리는 등짝들이 터지고 찢어지고 관통 당했다. 터트리는 유탄 세례에 찢어발기며 관통하는 중기관총 사격. 어느 쪽이든 괴물에 대한 폭력으로 적합하다. 문드러진 몸뚱이들로부터 온갖 뼈와 내장이 제멋대로 쏟아졌다. 끼이이익- 8륜 장갑차가 방향을 틀며 정차했다. 쿠웅, 쿠쿠쿵. 측면으로 밀린 변종들은 가차 없이 으깨어졌다. 장갑을 두른 군용차량은 그 자체로 이미 질량병기였다. “공병대, 하차. 여기서 경계선을 확보한다.” 파일럿을 데리고 복귀하기는 어렵다. 조금 전 건넌 다리 앞은 지금쯤 병목현상이 심화된 킬링필드일 것이었다. 무전을 넣은 겨울은 장갑차 후방의 경사 개폐구(램프 도어)를 개방했다. 열리는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역병의 신음. 터진 내장이 실타래 같이 풀린 허리는 장갑차 바퀴 아래에 있었다. 따다다닥 부딪히는 이빨이 차라리 사후경련에 가까웠다. 총을 쓸 것도 없다. 겨울은 내리면서 체중을 실은 군홧발로 놈의 멱을 밟고 지나갔다. 으지직. 발자국 아래 납작해진 목에서 뼈는 살을 찢고 튀어나왔다. 바깥바람을 맞는 겨울은 더운 공기가 결코 상쾌하지 않았음에도 반가웠다. 감각이 탁 트이는 느낌. 감각보정은 실제로 탁월하게 확장되었다. 한정된 범위에서의 소대 규모 통솔에서 장갑차의 지휘체계는 도리어 쓸모가 없다. 중계와 연락은 두 참모장교에게 맡겨두면 그만이었다. 돌아보니 공격기의 랜딩 기어는 접혀있는 채였다. 하지만 후방 기어는 접힌 상태에서도 바퀴가 바깥으로 노출되는 구조. 덕분에 동체로 착륙했는데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날개가 아직 붙어있는데다 피격을 피한 한쪽 엔진도 겉보기엔 멀쩡했다. ‘이 정도면 수리가 가능하겠어.’ 겨울이 아는 한 거의 박살이 난 기체 둘을 조립해서 새것 같은 하나로 복구한 사례도 있었다. 마침 여기서 야전 정비창이 가깝기도 했다. 데이비드 임무부대 역시 그곳으로 가도록 되어있었다. 장비 피로가 위험수위에 이르렀기에. “록허트. 가서 조종석을 살펴봐.” 몽고메리 중위의 지시에 공병 한 개 팀이 움직였다. 네 사람은 엄호하고 한 사람이 발판을 디뎌 위로 올라간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높이의 조종석은 방탄유리가 피와 내장으로 얼룩져 안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에이, 시팔. 이걸 어쩌지.” 손으로 닦을 수도 없고. 곤란해 하던 병사가 캐노피에 대고 수통의 물을 뿌린다. 피와 내장이 흘러내리며 유리가 투명해졌다. 짐작했던 대로 자잘한 금이 가있었다. 역병 걸린 시체들이 얼마나 긁어댔는지, 두껍게 갈라진 틈마다 진득한 살점. 더러는 끊어진 손가락이 통째로 끼어있었다. 거기에 비틀리고 어긋난 골조. 역시 좀 더 방치해두었으면 위험할 뻔 했다……. ‘불빛? 연기?’ 겨울은 묽어진 핏물 너머에서 발갛게 타들어가는 희미한 불빛을 보았다. 잠시 꺼지는가 싶더니, 착각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듯 다시 밝아진다. 조종석 안쪽에 연기가 감돌았다. 타타타탕! 기체 후미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전투감각」의 경고가 옅었기에 돌아보지도 않는 겨울. 당장은 파일럿의 생사가 더 중요했다. 퉁퉁. 공병분대장 록허트가 조금 깨끗해진 창을 두들긴다. 잠시 후, 안에 있던 파일럿이 파리한 얼굴을 드러냈다. 빛과 연기의 원인은 그녀가 물고 있는 한 대의 시가였던가 보다. 설마 화재인가 했던 겨울은 조금 허탈한 기분에 잠겼다. 파일럿은 안색이 나쁘긴 해도 멀쩡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엔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반가움이 물씬 묻어나는 미소와 함께 까딱 목례했다. 입맛을 다신 공병이 유리에 대고 두 손을 모아 소리 지른다. “무전! 교신 가능합니까?!” 못 알아들을까봐 자신의 무전기를 가리켜 보인다. 이에 파일럿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노. 단음절을 발음하는 입모양이 둥글었다. “캐노피! 열 수 있습니까?” “……?” “이거! 열리냐고!” 도리도리. “혹시 다쳤습니까?!” 끄덕끄덕. “부상이 심각합니까?!” 도리도리. 어쩐지 맥 빠지면서도 귀엽게 느껴지는 의사소통이다. “물러나십시오! 부수겠습니다!” 반복해서 경고한 록허트 병장은 파일럿이 상체를 빼자 뒤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핼리건 바!” 그가 요구한 물건은 문을 부수는 데(도어 브리칭) 쓰는 도구. 철제 문짝에도 박히는 쇳덩이이니 금이 간 방탄유리쯤 어떻게든 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나서면 금방이겠으나 지금은 경계가 우선이었다. 신경이 찌르르 하는 방향으로 반전한 겨울은 순간적인 조준으로 다섯 번의 단발사격을 가했다. 어정대던 구울 하나를 포함하여 변종 다섯이 죽었다. 병사들에겐 보이지도 않는 거리였기에, 해당 방면을 경계하던 1개 팀의 공병이 괜한 긴장을 끌어올렸다. 대체 뭘 쏘신 거야? 나도 몰라. 뭐든 죽이셨겠지. 자그맣게 오가는 대화. 등 뒤에선 계속해서 퍼억 퍽 둔중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마다 자잘하게 튀는 소리들도 있었다. “이거 겁나 단단하네.” 팔뚝 두꺼운 공병대 병장이 헉헉거리며 욕을 내뱉는다. 힘내, 병장. 깨진 플렉시글라스 틈으로 조종석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부서진 유리 틈으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몇 분 후, 사람이 가까스로 통과할 구멍이 생겼다. 아프게 빠져나오는 알라모 3 파일럿을 병장이 주의 깊게 도와주었다. 파일럿은 갈비뼈가 부러진 것으로 보였다. 숨을 쉴 때마다 힘들어한다. 그에 비해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별 것 아닌 상처였다. 그래도 땅에 내려선 다음엔 스스로의 발로 선다. “괜찮아, 병장. 걸을 수 있어. 고마워. 헌데……공병이군?” 그녀는 시가를 문 채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구조가 빨라서 놀랐는데, 설마 여기가 벌써 후방인가? 책임자는 누구지?” “저쪽에 계십니다.” 랜턴 빛이 휙 돌았다. 몽고메리를 지나쳐 겨울을 발견한 파일럿은 으응? 하고 미간을 좁히다가, 고통을 잊은 듯 정자세로 경례했다. 입에서 떨어진 엽궐련(葉卷煙)이 땅을 굴렀다. # 277 [277화] #멧돼지 사냥 (5) “알라모 3, 대위 파멜라 펠레티어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ir.” 끄덕인 겨울이 조금 거센 어조로 무전을 보냈다. “조윤창 대위! 의무대! 언제 나올 겁니까?” 그리고 파일럿이 떨어트린 것을 주워주었다. “조종석 가득한 연기 때문에 놀랐어요, 대위. 급하게 왔는데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십 분쯤 늦게 오셨다면 비상탈출(Ejection)을 한 상태였을 겁니다. 슬슬 고민하던 중이었거든요. 못 생긴 것들이 워낙 들이대서 견디기 힘들더군요.” 밀폐된 공간에 갇힌 파일럿에게 빛은 있어도 없어도 곤란했을 것이다. 눈 밑이 검은 그녀는 커터를 꺼내 엽궐련의 불붙은 끝을 잘라냈다. 떨어진 끝을 전투화 굽으로 지그시 밟아 꺼버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여긴 여전히 멧돼지 떼 한복판인 것 같군요.” “대위를 구하려고 앞질러 온 겁니다. 본대는 아직 북쪽에 있고요.” 문득 겨울은 소총을 놓고 예비로 휴대한 대물저격총을 조준했다. 가볍게 눈짓하자 파일럿이 아, 하고 귀를 막는다. 콰앙! 쾅! 쾅! 서서 쏘는 것이라 흔들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백 미터 거리의 표적들은 머리통이 날아갔다. 후방에 도사리고 있던 구울들이었다. 놈들이 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변종 무리가 흔들렸다. 직후 통제되지 않는 공격이 이어진다. “2시 방향, 적습 대비.” 겨울의 경고가 있고서 고작 5초 남짓이었다. 처음엔 소리만 들리다가, 생기에 굶주린 회색 몸뚱이들이 가시범위로 튀어나왔다. 준비하고 있던 공병 파견대의 화망이 역병 무리의 두서없는 돌진을 갈아버린다. 적이 쌓이기 전에 공격을 끌어내는 것도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겨울이 다시 무기를 교체했다. 강화보정에도 불구하고 삐이- 하는 이명이 감돌다 사라졌다. 펠레티어 대위가 신음한다. “이런……. 혹시 남는 소총 있으십니까?” “일단 진료부터 받아요.”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부상자 손이 필요할 정도도 아니에요. 본인도 모르는 부상이 있으면 어쩌려고요?” “……알겠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몸이 놀라 자기 상태를 깨닫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조용한 후유증은 느리기에 위험하다. 그것을 아는 파일럿이 순순히 수긍했다. 의무병을 동반한 조윤창 대위가 몸을 낮추고 뛰어왔다. 훈련 받은 대로지만, 아군의 경계선 안쪽에선 조금 우스꽝스럽다. 그들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경계선을 맡은 전투 병력보다 오히려 더 높아 보이는 긴장감이었다. 허나 의사로서의 실력만큼은 진짜인지라 누구도 조 대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겨울 또한 그를 좋게 평가했다. ‘동기를 떠나, 목숨 걸고 전장에 온 것만으로도 용기는 충분한 거지.’ 미군은 극심한 인력부족을 겪고 있고, 전문 의료 인력은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권역센터 출신이면 후방근무로 빠질 능력이 충분했던 셈이다. 그런데도 자청해서 온 것은 곧 그의 욕망이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점잖게 눈도장을 찍는다. 아마 속령 및 준주의 수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스스로 추론했을 것이다. 욕망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는 노릇. 덕분에 독립중대는 과분한 의료 인력을 갖췄다.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지만, 골절을 제외하면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조 대위의 진단을 들은 겨울은 파일럿을 앰뷸런스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들것을 사양한 펠레티어 대위가 떠나다 말고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인사는 나중에 받죠. 아직 전투상황이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갈 곳이 야전병원이라면 다시 볼 기회는 있을 것이다. 독립중대 뿐만 아니라 전선 전체에 걸쳐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므로. [Sir.] 지휘 장갑차에서 겨울을 찾는다. 통신장교였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이 방향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적 집단이 있다던가. 그러나 겨울의 추측은 빗나갔다. [신속대응팀 일부와 항공구조대가 이쪽으로 온다고 합니다. 예상합류시간, T 마이너스 6분입니다.] “……다른 지원은 없다고 했잖아요?” [모르겠습니다. 그쪽 일이 의외로 빠르게 정리된 것 아니겠습니까?] 글쎄.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비록 그들이 헬리본(헬기를 타는 강습부대)이긴 해도 굉장히 빠듯한 시간이었다. 중국군의 저항이 무기력했거나 아예 항복을 했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사령부에서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 같았다. 파일럿 구조 자체보다는 겨울이 전투력 낮은 지원근무부대와 고립되어있다는 사실이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의심스러웠다. [항공 열압력탄 착탄 경보! 타겟 넘버, 퀘벡-시에라 1, 1, 0에 세 발, 37초! 퀘벡-빅터 5, 5, 3에 한 발, 39초! 퀘벡-엑스레이 4, 9, 1에 한 발…….] 강한 어조의 경고였으나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안전거리 밖, 도살장에 내몰린 멧돼지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폭격이다. 다만 여기서도 충격에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속으로 초를 헤아리던 겨울이 적당한 시점에 소리쳤다. “엄폐! 엄폐! 차량 뒤쪽으로! 공병 1소대는 화망 유지에 주의!” 그렇잖아도 신경 쓰던 병사들은 신속하게 바람막이를 찾았다. 두 호흡 뒤에, 북녘이 번쩍 타올랐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밤과 낮이 바뀌는 듯 했다. 짧은 모래 폭풍이 몇 번이고 밀려온다. 타닥, 타다닥. 장갑판에 모래 알갱이들이 부딪히는 자잘한 소리들. 마른 땅이 쏴아 번지며 무릎 높이로 흐르는 흙빛 안개를 만들어냈다. 뜨거운 바람이 지나간 뒤에, 겨울은 곧바로 북쪽부터 경계했다. 차량에 의지하느라 불가피했던 사각(死角)이었다. 그러나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세가 없다. 기껏해야 아무렇게나 달려오는 소수, 무릎과 팔꿈치가 까진 녀석들 뿐. 무선침묵을 지키는 트릭스터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있다면 공격을 포기한 듯 하다. 의사전달에 필요한 단발적인 전파조차 없다. 그러나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작전장교가 상황을 전파했다. [새로운 적 집단이 남하 중입니다. 퓨타 포인트를 기어이 넘어온 놈들입니다. 이곳으로는 약 400개체가 향하고 있습니다.] “특수변종은?” [부상당한 그럼블이 하나 있고, 그 외의 중대형은 포착되지 않습니다. 다른 종류는 알 수 없습니다.] “회피가 가능할 것 같아요?” [서쪽으로 빠지려면 빠질 수는 있겠으나…….] 본대로부터 더 멀어지는데다 항공정찰 범위도 감안해야 했다. 자칫하면 외통수가 되고 만다. PDA로 적 규모를 재확인한 겨울은 그냥 부딪히기로 결정했다. “계속해서 상황 전파해요. 그리고……몽고메리 중위!” [Sir.] 부름 받은 공병장교는 기체를 중심으로 반대편에 있었다. “포민스(POMINS/지뢰제거장비)를 북쪽 경계선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지시를 전달받은 공병대원들이 차량에서 원통형 배낭을 꺼내왔다. 원통 안에 발사체와 폭발물이 들어있고, 배낭 프레임은 펼쳐서 발사대로 삼는 휴대형 지뢰제거장비였다. 용도가 지뢰제거라곤 해도 전방 40미터를 직선으로 폭파시키는 물건이니 역병의 접근을 저지하기에 유용하다. 경계선을 형성할 때 배치된 산탄지뢰로 부족할 경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놈은 예의 그 부상당했다는 그럼블이었다. “저 꼴로도 살아있다니…….” 한 병사가 그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한쪽 팔은 없고, 상반신의 절반이 벗겨진 채로 덜렁거렸다. 차라리 갑각이라 불러야 할 피부는 튼튼한 만큼 무겁다. 뛰는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지고 출혈도 그만큼 늘어난다. 살이 벗겨져 드러난 근육은 피에 젖은 모래 투성이었다. 워어어어! 그 괴물이 포효로서 전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터져 죽었다. 지축을 흔드는 작렬이었다. 투명한 확산은 간접적으로 보이는 범위만 직경 수십 미터에 이르렀다. 발사대 한 쪽을 비워 중량이 가벼워진 무인공격기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반원을 그린다. 무인기 편대는 체공시간이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대기(Weapons hold)!” 겨울이 공격을 지연시켰다. 한 번에 큰 충격을 줄 작정이었다. 어차피 달아나려는 놈들이다. 저항이 강력할수록 피해갈 확률이 높았다. 다리를 건넌 시점에서 괴물들의 활로는 넓게 열려있었다. 어차피 또 다른 몰이사냥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Weapons free! 클레이모어(산탄지뢰) 4번, 6번 격발!” “격발!” 쾅! 1,400여개의 볼베어링이 문드러진 몸뚱이들을 휩쓸었다. 멀쩡해보이던 놈도 움찔 굳었다가, 전신에 생긴 구멍으로부터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부채꼴로 방사된 두 개의 후폭풍. 겨울의 전신에 먼지가 또 한 번 훅 뿌려졌다. 피부는 땀에 들러붙은 흙투성이였다. 마른 이를 깨물자 모래알 으깨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헬기 엔진의 배기음은 갑작스레 커졌다. 주변에 과수원이 많다보니 반향이 멀리 퍼지지 못했던 모양.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헬기 중엔 겨울이 산타 마리아에서 신세를 졌던 바로 그 기종도 있었다. 작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거기에 탄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하고. “워후우우우-!” 록허트 병장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번쩍 들었다. 고도를 살짝 높인 편대로부터 지원사격이 쏟아졌다. [Guns, Guns, Guns.] 신속대응팀이 가세한 시점에서 화력은 압도적으로 늘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예비한 지뢰제거장비를 쓸 필요도 없이, 변종들이 알아서 피해가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대로. 아우성이 사라진 터에 죽은 시체와 곧 죽을 시체들이 널린 황야만 남는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편대가 착륙하며 증원 병력을 쏟아냈다. 어떤 이는 헬기가 땅에 닿기도 전에 뛰어내리기도 했다. 일차적인 병력 배치를 끝낸 최상급자가 두리번거리며 겨울을 찾았다. “한 소령은 어디에 있지?” “Sir.” 겨울이 그 앞에 섰다. 상대의 계급은 중령이었다. 턱이 가려질 만큼 짙은 수염과 강한 텍사스 억양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불러놓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겨울이 주의를 환기했다. “Sir?” 피식. 중령이 웃는다. “좋은 몰골이야. 귀관은 정말로 몸을 사리지 않는군.” “…….”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다만 유치한 놈들이 하는 소리가 있어서 말이지. 직접 만나면 입을 다물겠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귀관을 관심에 굶주린 창녀(Attention Whore)라고 하더군.” 겨울은 적당한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중령은 겨울의 상박을 툭툭 건드렸다. “신경 끄도록. 그 왜, 세상에서 가장 사내다운 게 저들이 아니면 화를 내는 부류가 있거든. 부대 간의 경쟁의식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이해합니다.” 자부심이 넘치는 정예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기 쉬웠다. 그리고 그걸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희생한 게 많은 사람들이라 더더욱 그러하다. 심리적 방어기제였다. “미사일 발사지점 수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질문을 받은 중령의 안색이 굳었다. 그것은 건조하게 얼어붙은 감정이었다. “죽여야 할 놈들을 가급적 산채로 잡느라 곤욕이었지. 지금은 놓친 나머지를 쫓는 중이다. 곧 끝날 거야. 우리가 끝내든, 괴물들이 끝내든.” 불충분했으나, 겨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후의 전투는 수월했다. 간헐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는 놈들을 처리할 뿐. 항공구조대의 헬기가 펠레티어 대위를 후송할 즈음엔 그마저도 거의 없게 되었다. 다만 독립중대를 비롯한 임무부대들이 강을 건너오기까지는 예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죽고, 죽고, 그 위를 타넘다가 다시 겹쳐 죽은 것들이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역병의 지층이며 유해의 능선이다. 현장의 영상을 수신한 겨울은 불도저가 밀어내는 땅이 모조리 문드러진 시체인 것을 보고 실로 초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이제까지 겪었던 어떤 종말에서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 278 [278화] #멧돼지 사냥 (6) 이틀 뒤, 7월 8일, 겨울의 임무부대는 모든 장비의 점검이 끝날 때까지 후방에 배치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 구축된 거점은 요새화된 주립대학이었다. 여기엔 같은 처지인 다른 합동임무부대들과, 본토에서부터 증원된 대규모 병력이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최종 정비에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야전정비창에 배치된 상사 계급의 기술자였다. 정해진 일과가 없고, 다만 짬짬이 쉬는 게 고작인 그는 땀에 젖어 시들해진 미소를 지었다. “장담 못합니다. 일반정비가 그리 금방 끝나는 게 아닙니다. 창 정비 바로 아래 단계니까요. 거기다 차량들 상태가 말이 아니더군요. 지금까지 부대 정비로 견뎌온 게 용합니다. 프레임 안쪽을 긁었더니 뼈와 살점이 나오는 경우도 흔하더군요.” “그런가요…….” “예. 신참들은 아주 숨이 넘어갑니다. 무엇보다 정비능력에 비해 적체된 물량이 너무 많습니다. 실시간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고 말입니다. 뭐,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바로 저겁니다.” 상사가 간이휴게실 창밖을 가리켰다. 구난차량에 견인된 전차가 보인다. 중후한 포탑에 변종이 남길 수 없는 형태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깊숙이 패이고 주변이 타들어간 자국. 알라모 3 때와 마찬가지로, 계곡에 매복해있던 중국군 잔당이 대전차 로켓 공격을 가한 흔적이었다. “방역전쟁 사양으로 가벼워진 녀석이었으면 바로 뚫려서 승무원까지 싹 다 죽었겠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이브(전차, 에이브럼스)는 원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포트 로버츠의 전차소대, 미어캣 역시 개량되지 않은 구형이었다. 구형이라 함은 재앙 이전의 형식이라는 뜻. 대단히 강력하지만, 변종을 상대하기엔 낭비에 가깝다. 장갑이 워낙 두껍다보니 연료 소모도 극심했다. 한 번 주유할 때마다 500갤런(1,900 리터)을 퍼먹는다. 삐이- 아주 높은 데시벨의 하울링(Howling)이 들렸다. 개나 늑대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스피커와 연결된 마이크의 잔향이 다시 마이크에 흡수될 때 발생하는 기계적 소음이었다. “저거 또 시작하나보군요. 시끄럽게시리.” 정비반 상사가 귀를 후빈다. 맥주 한 모금 마신 뒤에 다시 하는 말. “미쳐버린 테러리스트 새끼들이 저런다고 항복할 것 같지도 않고……. 다 죽여 버려야지.” 마지막은 사나운 중얼거림이었다. 「저는 인민해방군 가무단의 주웨이 소교입니다.」 대형 확성기에서 겨울에게 익숙한 음성의 중국어가 흘러나온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다에서 구하고 헤어진 뒤로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줄로 알았으나, 지금 그녀는 옛 동지들에게 항복을 권고하기 위해 이곳에 와있었다. 그 목소리는 중앙평원 서부 전체에 송출되는 중이었다. 그녀는 또한 방역전선 위문공연단의 일원이기도 하다. “뭐라고 떠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년이라 그런지 되게 거슬리는 목소리 아닙니까?” 계속되는 권고를 듣고, 상사가 자신의 악감정에 공감을 구한다. 허나 배우와 가수를 겸하던 이의 음성이 거슬릴 리가 있나. 뛰어난 미성이었다. “글쎄요…….” 겨울은 말을 애매하게 흐렸다.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지금 이 기지, 나아가 미군 전체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전선 전체로 놓고 보면 피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저격수 하나가 사단을 엎드리게 만든다. 병사들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변종 섬멸에 임하고 있었다. 그 불안에서 비롯될 더 큰 증오야말로 양용빈 상장의 마지막 소망이었을 것이다. 미국에 자멸의 씨앗을 심고 유혈로써 비료를 뿌리겠다는 계획. ‘그렇게 말해봐야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겨울이 경험한 대개의 반응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수준이었다. 상대가 상대이므로 예의를 지키며 삼가긴 했지만. 이성은 대개 감정의 시종이었다. 탱강. 상사가 던진 빈 캔이 쓰레기통 모서리에 맞고 튀어나온다. 긴 의자에 늘어져 자고 있던 정비병 하나가 설핏 깨어 웅얼거리다가 조용해졌다. 상사는 투덜거리며 캔을 주워 넣는다. 이것도 못 넣다니, 내가 진짜 피곤하긴 피곤한가보다, 라며. “휴식을 건의해보는 건 어때요?” 제안을 받은 상사는 다시금 싱겁게 웃는다. “진짜 죽을 것 같은 녀석들에 비하면 못 쉬고 굴려지는 우리가 그나마 양호한 편입죠.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으면 그때 건의해보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간만의 개인정비시간에까지 여기에 오셔서 진행상황을 확인하시는 소령님이야말로 정말 쉬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나름대로는 쉬는 중이에요.” “대체 어디가 말입니까?” 시계를 본 상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복귀하겠습니다. 기름내와 쉰내에 찌든 놈들이 코고는 소리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면 다른 쉴 곳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군요.” “어울려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상사가 떠난 뒤엔 겨울도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야전정비소 간이휴게실을 나선 겨울은 임무부대에 할당된 막사로 걸음을 옮길까 하다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방향을 바꾸었다. 주둔지가 넓다보니 차량을 써도 좋았겠으나 중대 운전병 입장에선 귀찮을 것이었다. 대학 캠퍼스가 인접한 시가지에선 간혹 총성과 폭음이 들려왔다. 임무부대의 다음 전장도 바로 저곳, 데이비스 도심이었다. 다수의 임무부대가 정비 완료시점까지 놀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간 휴식을 거친 뒤엔 다들 시가전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래봐야 낙오된 개체들이 배회하거나 숨어있을 뿐이겠지만. 멧돼지 사냥은 다른 부대들이 넘겨받은 상태였다. 와아아- 대학 부속 경기장 방향에선 열광적인 함성과 빠른 박자의 음악이 들려왔다. 현재 위문공연이 진행 중인 곳이다. 민간 응원단은 물론이거니와, 장병들을 위해 힘쓰고 싶은, 혹은 그런 이미지가 필요한 인기 스타들이 대거 찾아왔다. 겨울이 있기에 더 많은 이들이 왔다던가. 정작 겨울은 보다 조용한 장소를 선호했다. 캠퍼스 남쪽엔 강물을 가둔 인공호수와 산책로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다섯 계절을 겪으며 길게 쇠락하고 잡초가 우거진 공원이었으나, 장기주둔을 염두에 둔 사령부가 인력을 투입해서 관리하는 중이다. 정신적으로 지친 병사들의 휴식을 위하여. 지금은 기본적인 제초만 이루어졌을 뿐인데도 과거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벤치와 포석 등에 드문드문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보이긴 해도. 소리가 멀어지자 기이한 고요감이 감돌았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정적이야말로 「종말 이후」의 본질이었다. 폐허를 거닐 때의 감흥은 그 나름대로 심장을 옥죄는 운치가 있다. 다른 세계의 관객들 또한 그럭저럭 만족하는 분위기. 왜애애앵- 잔디 깎는 기계의 모터 구동음이 다가왔다. 손잡이를 밀던 병사가 겨울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단히 경의를 표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정적. 서양식 팔각 정자 아래의 벤치에 앉은 겨울은 드물게 냄새 없는 바람을 맞다가, 주머니 속의 진동을 느끼고 넷 워리어 단말을 꺼냈다. 국방부 인가를 받은 모바일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이 수신 알림을 쌓아 놨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하나. 『장연철 : 그래도 이름을 골라달랍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겨울에게 아이의 이름을 정해달라고 했던 송예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물진흥회로 떠난 남편에게 버림 받았던 아내. 그녀의 상실에 공감한 이가 많았는지,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민완기가 예전의 통화에서 말하기를 중립파의 대표 격이라 했었다. 겨울의 부재를 무난히 넘기고자 양대 부장이 선택한 방법이 불화를 연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지어준 아기의 이름을 버렸다. 겨울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받는 반가운 목소리. [엇, 작은 대장님. 오늘은 통화 괜찮으십니까?] “예. 며칠 쉬게 됐네요.” [이야, 정말 잘 됐습니다. 워낙 바쁘셔서 병이 생기진 않으실까, 어디 다치진 않으실까 항상 걱정하고 있습니다. 전엔 잠도 못 잤었죠.] “그렇다고 울 것까진 없었잖아요?” 지난 일을 들추는 짓궂은 질문이 잠깐의 공백을 만들었다. [어……그건 이제 그만 잊어주셨으면…….] “싫은데요.” [네…….] 수화기 너머로 시무룩함이 느껴진다. 그가 울었다는 건 첫 통화 때의 일.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해서 한정된 시간을 다 보내버렸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부끄러워했다. 이젠 공식적으로도 군정청의 관료인데 겨울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같다. 드문 유형이었다. “그건 그렇고, 송예경 위원 말인데요.” 이젠 그녀도 군정청 소속이라 들었다. “내가 대부(代父)가 되어줄 순 없다는 말, 분명히 전한 건가요?” 이것이 단순히 아기 이름을 정하는 일을 두고 아직까지 결정을 미룬 이유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름은 약속하지 않으셨냐고 묻더군요.] “약속이야 했죠. 근데 그걸 달리 이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정 내가 정해주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의 오해를 직접 풀라고 하세요. 방치하지 말고. 아니면 스스로 정하든가.” [민부장님 말씀이 방치는커녕 조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음, 어쨌든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다망하실 텐데 사소한 걸로 귀찮게 해드려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녀가 영향력에 목마른 것은 원한을 풀기 위해서다. 민완기도 그리 보았고, 최근엔 장연철 역시 비슷하게 우려하는 중이었다. 이야기는 최근의 가장 큰 화두로 넘어갔다. “분위기는 좀 어때요?” [동맹이야 걱정 없지만 중국계 거류구는 말 그대로 최악입니다. 군도 경찰도 본토 출신은 믿기가 힘들고 해서 우리 쪽 인력을 배치하더라고요. 자경단도 경찰협력조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처럼요.] “제중 씨가 좋아하셨겠네요.” [예, 뭐. 착하지만 허영심이 좀 있으신 분이니.] 제중에 대한 평가는 겨울이든 양대 부장이든 똑같았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의 반발은 없고요?” [예. 죽다 살았다는 반응들입니다.] “차출된 사람들이 거만하게 굴까봐 걱정되는데…….” [안심하셔도 됩니다. 왜 전에 받은 중국인들 있잖습니까. 화승화랑 수방방 운운하던.] “아.” 벌목장에서 은밀한 편지를 전했던 자들이었다. [안제중 단장님이 그 사람들을 치안보조로 뽑아서 보냈습니다. 어, 실은 민 부장님의 뜻이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깡패 출신이긴 해도 다들 조용하게 굴어서 좋더군요.] 본성과 습관을 떠나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덕분에 딱히 말썽이 없습니다. 저도 한국계 동맹원들이 갔으면 많이 시끄러웠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때 작은 대장님이 훌륭한 결정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칭찬은 됐어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밖에 다른 건?” [그밖에, 그밖에……. 그렇지. 중국 난민들로 구성된 부대 창설이 보류됐답니다. 대신 지금까지 받은 병력을 다른 데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로?” [그건 아직 모릅니다.] 흐음. 겨울은 그들의 전장을 생각해보았다. 신뢰도가 낮은 병력을 이쪽으로 보낼 것 같진 않지만, 상장의 잔당들과 싸우는 구도를 만든다면 중국계를 싸잡아 적대감이 깊어진 시민들에겐 결자해지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국방부를 넘어 백악관에서 욕심을 낼 법한 연출이었다. 지금의 대통령은 중국계 난민과 시민들에게 지나치게 유화적이라고 비난받고 있으므로. 사회가 시험에 들면 항상 인권도 시험에 든다. [저기, 대장님.] 연철이 묵묵한 겨울의 주의를 일깨운다. [전에 알아보라고 하신 거 있잖습니까.] “어떤?” [일본 깡패들이 벌였다는 그 끔찍한 일말입니다.] “아아, 그거.” [대외비로 지정되고, 캐슬린 보안관님이 말을 아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연철.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이라도 잡아먹었나? 대충 짚은 추측이 사실이었다. [그……조직적으로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 위주로 죽였다는데……휴.] 노약자, 장애인, 그리고 남자들이 떼로 죽어 성비가 안 맞는 상황에선 젊거나 어린 여성들. 쓸 데 없는 입을 줄이는 동시에 공동체의 힘을 키운다는 명분이었을 것이다. ‘돼지고기라는 게 그거였나.’ 주길회장 타다아츠 료헤이는 겨울을 대접한답시고 인육을 내왔던 모양이다. 동생에게 암퇘지라고 악을 쓰던 극우청년의 모습도 떠오른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잡혀갔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더러운 취급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죽지 않은 건 아마도 겨울 때문일 테고. “그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요.” [당연합니다! 괜히 대외비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난민혐오가 또 폭발하겠지요…….]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연철이 겨울에게 양해를 구한다. [엇, 이런. 대장님. 죄송하지만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나중에 시간 날 때 다시 걸죠.” [예.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끊는다. 그도 엄연한 연방공무원이다. 오늘이 토요일이긴 하나 지역 특성상 업무 호출이 있을 법 했다. 겨울은 끊어진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몇 번의 바람을 보낸 뒤에, 또 다른 번호로 발신을 눌렀다. # 279 [279화] #멧돼지 사냥 (7) 보안회선 특유의 건조한 연결대기음이 흘러나온다. 신호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었는데, 그래도 주말이라고 자리를 비운 건가? 싶어 겨울이 슬슬 그만둘까 생각하는 순간, 와라락 하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겨울?!] 다급한 부름에 겨울이 만들지 않은 쓴웃음을 짓는다. “네, 한겨울 맞습니다. 숨넘어가겠어요, 앤. 무슨 전화를 그렇게 급하게 받아요?” [아…….] 반가움에 목이 메여 나오는 탄식. [미안해요. 늦게 받아서. 회의에 참석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사과 받으려는 게 아닌데……. 그나저나 주말인데도 회의면 수사국(FBI)은 여전히 쉴 틈이 없나보네요. 바쁘다고 하더니. 지금도 혹시 방해하는 것 아니에요?” [방해라니……전혀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를?] “문자로 보안회선 번호를 보냈잖아요. 번호가 맞는지 한 번 걸어보긴 해야죠.” 받고 무반응이면 속이 얼마나 끊어지겠는가. [으음.] 그녀가 짐짓 못마땅한 소리로 나무랐다. [소령, 거기선 빈말이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고 하셔야죠.] “그러네요. 사실 목소리도 들을 겸 해서 걸었어요. 진짜로.” [……큭.] 시답잖은 농담을 한 번씩 주고받는다. 그 뒤에 조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로 다른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요?] “용건은 딱히. 그냥 소식을 듣고, 소식을 전해야겠다 싶어서요.” [이쪽의 소식……이라.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마땅히 없습니다.] “없긴요. 요즘 같을 땐 서로가 무사하다는 것 하나로 충분히 좋은 소식이잖아요?” [그렇군요.] 살짝 가라앉았던 조안나가 또 한 번 작게 웃는다. [난 무사합니다. 겨울도 무사한가요?] “어떨 것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워낙 수시로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인지라. 이틀 전에도 추락한 공격기 조종사를 구한다고 무리를 했더군요. 변종들이 가득한 위험지역을 비전투병력만 데리고 돌파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조종사를 확보하고 아군이 올 때까지 방어전을 치렀다던가요?] 장난치듯 제3자처럼 말하고 있다. “과장이 심해요. 공병대는 비전투병력이 아니잖아요. 많이 힘든 싸움도 아니었고. 근데 그걸 대체 어느 경로로……. 설마 벌써 방송을 탔어요?” 승진한 조안나는 고위 감독관(Director)으로서 군 관계의 많은 기밀을 열람할 권한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겨울이 방송일 거라고 짐작한 것은 사건의 특수성과 그녀의 바쁜 일정 때문이었다. 주말에도 회의를 진행할 만큼 바쁜 것이다. 근자에 수사국의 업무 폭주는 당연한 바였고. 그러므로 인트라넷 열람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역시나, 감독관이 긍정한다. [예.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니까요.] 하지만 석연치 않다. “내 말은, 양용빈 상장이 엮인 사건에 보도관제가 걸리지 않아서 이상하단 뜻이었어요.” [확실히 그런 점은 있겠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이틀이 지난 오늘 아침에야 공개된 걸 보면 공보처에서도 고민이 많았던 거겠죠. 파일럿 펠레티어 대위의 인터뷰가 본인은 무사하다, 한겨울 소령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도배된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감추기도 힘들고요.] “으음…….”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반응은 긍정적이에요. 다행히.] “그것 때문에 요즘 많이 힘들죠?” [……예.] 뜸을 들인 짧은 수긍이 긴 말보다 더 많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공백을 두고 덧붙인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요.] “글쎄요. 최근엔 전투가 너무 쉽게 풀려서……. 지금도 부대정비로 사실상의 휴식이거든요.” [이쪽도 급한 불은 껐습니다. 곳곳에 남은 잔불들이 언제 다시 번질지 모르지만, 위태롭긴 해도 당장은 소강상태입니다. 군경과 민간인들의 마지막 유혈충돌이 열흘 전이군요. 전황이 꾸준히 좋고 추가적인 악재만 없다면 어떻게든 현상유지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감독관이 내놓는 최선의 기대가 현상유지였다. ‘예전에 읽은 책이 생각나네…….’ 겨울이 회상하는 책의 제목은 「해변에서」였다. 종말을 다루는 소설의 첫 장엔 T.S 엘리엇의 시가 인용되어 있었다. 그 말미가 이러했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가 아닌 훌쩍임과 함께.』 증오로 물든 여론을 지켜보며 대선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와 유사하다. 앞으로 4개월 남았다. 소강상태라곤 하나 미움이 사라진 건 아닐 터. 본토탈환 완료가 기대만큼의 반환점이 되어줄 것인가는 미지수였다. 사회의 분위기만 놓고 보면 차라리 소설이 나았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종말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속기(速記)를 배우고, 사랑을 나누고, 꿈만 꾸던 차를 몰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레이싱 경기를 벌이며, 생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전원(田園) 클럽에 모여 비장의 와인을 즐기기도 한다. 평화롭다 못해 낭만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화기 너머가 조용하다. 그 초조함을 느끼고, 겨울은 대화를 조금 전의 화제로 되돌렸다. “무사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할게요. 앤, 지금 확실하게 안전한 거 맞아요?” [물론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들은 거의 대부분 색출한 상태랍니다. 아직 들키지 않은 사람이 있기야 하겠으나, 조직 자체가 무너졌으니 뾰족한 수가 없겠죠. 자기보신을 위해서라도 잠자코 있을 겁니다.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된다고 멈출 수사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염려해줘서 고맙습니다. 겨울도 몸조심해요. 당신의 죽음은 악재 중의 악재가 될 테니까요.] “예. 주의할게요.” [그제처럼 위험한 행동은 가급적 삼가고요. 아니.] 감독관은 스스로의 말을 정정했다. [당신이 이런다고 몸을 아낄 사람이었으면 난 이미 그 바다에서 죽었겠군요. 바보 같은 소릴 했습니다. 그래도 아끼기를 바라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목소리에 힘 빠진 웃음기가 묻어있다. 전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방금 폭음을 들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수색이 진행 중인 시가지가 바로 옆이라서 그래요. 거리상으론 가까운데, 여기까지 오는 길에 방어진지가 세 겹이니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겠죠. 무엇보다, 난 지금 무장한 상태예요. 무기와 탄약을 휴대한 한겨울이죠.” [그건 안심이군요.] 또다시 수화기를 넘어오는 작은 웃음소리. “우리 임무부대도 곧 투입된다는데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겠네요. 시가지가 작아서. 사실상 여긴 새크라멘토 탈환의 전초전쯤으로 보고 있어요.” 현재 점령구역을 넓혀가는 중인 데이비스 시는 새크라멘토 생활권의 위성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도심과 거리를 두고 건설된 새크라멘토 국제공항은 벌써 레인저가 접수했고, 현재는 공군기지로 쓰기위해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크라멘토라……거긴 방사능 오염이…….] 겨울이 조안나의 근심을 누그러뜨렸다. “화학대가 사전조사를 끝냈대요. 브리핑에선 방호구 없이 진입해도 무방할 정도라고 하던데요. 거짓말은 아니겠죠.” 비록 소형 전술핵이 터졌던 곳이긴 하나, 핵폭발이 남기는 방사능은 최초의 7시간을 기준하여 7의 제곱에 해당하는 시간이 경과할 때마다 약 10분의 1로 감소한다. 새크라멘토의 경우 1년 이상 경과했으므로 수만 분의 1이 되어있을 것이었다. 거듭 사무적으로 흐르던 대화가 방향을 잃었다. [어쩐지 계속 일과 시국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 되는군요.] “사실 그것 밖에 없었잖아요. 피쿼드 호에 갇혔을 때를 제외하면.” […….] “서로 걱정스러운 게 당연한 세상이기도 하고.” [하긴 그렇습니다.] “곧 D.C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재앙 수준의 이변이 없는 한 어긋나지 않을 예언이었다. 소소한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감독관이 말로는 방해가 아니라 했으나, 직전까지 회의를 진행하고 왔을 정도인데 마냥 여유로울 리가 없잖은가. 점점 더 강해지는 초조함과 갈등을 읽고, 겨울이 다음을 기약했다. “저녁에 임무부대 회합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 전에 서류업무를 끝내놔야겠거든요. 피해평가, 보급요청 결재, 인사결재, 상담기록 보고, 위로편지 작성 같은……. 정말이지, 장교의 휴일은 휴일이 아니네요.” [어디든 책임자는 편히 쉬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짧은 한숨을 뱉은 감독관이 인사를 남긴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어서 기뻤습니다. 다음에 다시 통화하죠.] “네. 다음에 또.” 그러나 연결은 말 없는 세 호흡이 더 지나서야 끊어졌다. 기다리던 겨울이 넷 워리어 단말을 갈무리하고 일어섰다. 산책하듯 걸어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서업무가 있기는 하되 감독관에게 말한 것처럼 급하지는 않았다. 이 공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잘 관리된 숲길이자 꽃길이었으므로, 지금도 햇빛을 피해가며 차분하게 걷기 좋았다. 강렬한 직사광선 아래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은 음영의 대비가 선명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보랏빛 캣 민트에서 계절감이 물씬 느껴진다. 이런 세계관에서도 새는 지저귀고, 옥빛 연못엔 바람이 불었다. 다만 이번 여름을 견디지 못한 화초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았거나 지나버린 개화시기(開花時期)가 아쉬울 따름. 산호 알로에는 연말에 꽃을 피우며, 라벤더는 일주일 전에 봉오리가 떨어졌다. 멕시코 튤립은 그보다 일찍 저버렸고. 분명 바깥세상에도 어딘가 이런 풍경이 있었을 것인데. 사람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마저 모두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리진 않았을 것인데. 그런 풍경과 더불어 살았다면, 다른 세계의 관객들도 좀 더 너그러워지진 않았을까. 생전의 저 바깥세상에서 사람이 사는 터전들이란 왜 그토록 잿빛뿐이었을까……. 이런. 생각의 흐름을 자각한 겨울은 내심 가볍게 실소하고 말았다. 누군가의 시선을 항상 의식한다는 건 그 자체로 적잖이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혼자만이 있는 별빛 공허가 반갑고, 공허가 아니더라도 곧잘 마음을 이완시킬 기회를 찾게 된다. 마침 좋은 기회라고 여겼건만, 어쩐지 잘 되지 않았다. 겨울을 발견한 기자단이 머뭇거린다. 공교로운 조우였다. 그들을 피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노릇. 하물며 아는 얼굴들이었다. 휴식에 대한 아쉬움을 지운 겨울이 그들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동행한 장교와 헌병대의 경례를 받아주면서. “마르티노씨. 카아씨. 클라인씨. 이런 곳에서 뵙네요.” 이름을 부르며 눈인사를 건네니 땀에 젖은 스태프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 소개했을 뿐인데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데 놀란 듯하다. “이런. 저희 때문에 휴식을 방해받으신 건 아닙니까?” “어차피 막사로 복귀하던 길이었어요.” “마침 잘 됐군요. 오후 일정을 소화하는 대로 소령님을 찾아뵐 예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저를? 무슨 일로?” “그, 야간에 부대 단합행사가 있지 않습니까? 촬영허락을 구할까 하고…….” “제 허락을? 그건 공보처 관할 아닙니까?” 뒤쪽의 질문은 기자단과 동행한 공보처 장교를 향한 것이었다. 대위 계급의 공보장교는 턱을 살짝 들고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이번엔 제한적인 허가입니다.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진행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Sir.” “흠.” 이번엔 다시 기자에게 묻는다. “이런 촬영도 필요합니까?” “필요는 때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죠. 계속되는 테러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이렇게 여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겁니다.” 합당한 이유다. 짧은 고민 끝에 겨울이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제한적으로. 부대원들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그러자 기자가 좋아한다. “됐군요.” “네?” “그쪽 분들에겐 벌써 양해를 구해두었습니다. 위문공연이 진행되는 스타디움에서 만났지요. 소령님께선 다른 곳에 계신다고 하기에 조금 당황했습니다만, 이걸로 해결이군요.” 마르티노가 눈을 찡긋 깜박였다. “항상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겨울은 그들을 일별하고 막사로 향했다. 그 후로 저녁 시간이 지나, 식사를 마친 임무부대원들은 바(Bar)에 모여 있었다. 본디 대학의 카페테리아였던 곳으로 부대 전체를 수용하고도 공간이 많이 남는다. 특이사항으로는 여유 공간에 마련된 낮은 단상이었다. 그 가까운 구석은 어딜 봐도 민간인인 사람들이 차지했다. 3분의 1쯤은 화려하거나 독특하거나 반짝이는 의상들을 입고 있다. 나머지는 그들의 매니저이거나 피고용인들로 보였다. 헌병대가 주변을 차단하고 있었다. “Wow!” 짙은 화장, 보랏빛 립스틱, 코를 뚫은 피어싱이 인상적인 남자가 겨울을 발견하고 허스키한 비명을 지른다. “Oh my gosh, oh my gosh! 어떡해! 진짜잖아! 진짜 한겨울 소령이야!” 그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유명인들도 각자 다른 반응으로 놀라움과 기쁨, 가끔은 멍한 황홀함을 드러냈다. 그 중에 진심은 얼마이고 연기는 또 얼마일지. 어느 쪽이든 종군기자단의 카메라를 의식하는 비율이 꽤 된다. “Sir.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헌병대가 립스틱 바른 남자의 진로를 차단한다. 본래 스타들을 보호하기 위해 투입된 병력이겠으나, 지금 이 상황에선 겨울을 지키는 게 맞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체 어딜 좋아하는 걸까 싶은 남자는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이거 놔! 놓으라니까! 내가 왜 여기 왔는데! 왜 추가 스케쥴을 받아들였는데! 저기요! 소령님! 내 영웅! 잠시만 시간을 내줘요! 제발!” 몸짓과 말투 하나하나가 중성적이고 극적이고 감정과잉이었다. 나름의 직업병인가? 겨울은 헌병의 양해를 구하고 통제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음?’ 가까워져서야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위문공연단의 일원임에도, 다른 이들과는 물리적으로나 분위기로나 거리를 둔 채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 겨울도 아는 인물이었다. ‘주웨이 소교?’ 그늘 같은 그녀는 겨울에게 기이한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 280 [280화] #멧돼지 사냥 (8) 그러나 그 모습은 곧 금세 다른 이들에게 가려지고 만다. 반짝이는 소란의 와중에 신경이 잔뜩 곤두선 헌병장교가 겨울을 향하여 낮게 당부했다. “안전에 유의하십시오. 생각과 하는 짓들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의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덩치 큰 헌병장교는 배후로부터 미는 힘을 견디는 중이었다. 그는 마침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그러기 무섭게 정신 사나운 남자가 육박했다. 렌즈를 낀 눈이 흥분으로 풀려있어 변종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허나 정작 겨울 앞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이런 식이라 겨울로서도 말을 고르기 곤란하다. 그저 난처한 미소만 만들고 있으려니, 다른 스타와 코미디언들이 신중하게 다가왔다. FUCK YOU 티셔츠를 입은 장발의 근육질 기타리스트,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풍만한 여성, 금빛 장신구가 많은 거구의 래퍼, 배우 같은 느낌의 금발 남성 등. 담배에 찌든 냄새, 대마초 냄새, 강렬하거나 부드러운 향수 냄새에 여러 체취가 뒤섞여 후각적으로도 번잡하다. “Hey.” FUCK YOU 티셔츠가 묻는다. “괜찮다면 악수 한 번 허락해주지 않겠소?” “그러죠.” 겨울은 선선히 그의 두꺼운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배겨있었다. 흠칫. 장발의 기타리스트는 겨울의 손을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다루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소.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리오. 언제나.” “저야말로. 당신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 인사를 나누기는 꽤 오랜만이었다. “나도, 나도!” 뒤늦게 눈물로 호들갑을 떠는 립스틱 사내에게도 손을 내미는 겨울. 그러나 이쪽은 악수에 그치지 않고 격렬한 포옹이 되었다. 주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 사람 한 사람 침착하게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풀썩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몇 번의 악수와 몇 번의 사인을 해주고, 겨울은 그들 모두에게 인사치레를 했다. 자리를 빛내주어 고맙다고. 장병들이 좋아할 거라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니, 디안젤로 하사가 겨울에게 잔을 건네고 위스키를 채워주었다. “오늘은 중대장님께서 시작하셔야 합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취기가 감각뿐일지라도 술을 즐기지 않는 겨울이지만, 건배사는 중대장의 몫이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서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모두 술을 사양하기도 곤란하다. 부중대장인 싱 대위는 종교적인 이유로 음주가 불가능했기에. 겨울이 간이무대를 단상으로 삼으니 환호와 휘파람과 갈채가 터져 나왔다. 조용해지기를 꽤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짧게 하죠. 부끄럽기도 하고.” 소박한 태도에 여기저기서 간헐천 같은 웃음이 흐른다. 겨울은 그들과 천천히 시선을 맞춘 다음, 그들의 눈높이 위로 호박색 잔을 들어보였다. “우리가 겪은 모든 싸움을 기억하며, 생존과 승리를 위하여.” 생존과 승리를 위하여! 연습한 것도 아닌데 다들 호흡이 잘 맞는다. 겨울이 잔을 쭉 비우는 것을 기점으로, 실내가 자유로워졌다. 싱 대위가 겨울에게 장교 테이블의 자리를 권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저 사람들 이야깁니다. 요란하더군요.” 대위가 가리킨 쪽은 역시 스타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지금도 시선이 마주치자 키스를 보내는 가수가 보인다. 겨울은 간단히 목례하고 참모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저 가수의 팬인지, 아니면 단순히 매력적인 여성이기 때문인지, 공병장교는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인기가 좋으시군요.” “그러네요.” “아까는 설마 실신하는 사람까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분. 연기를 참 잘하시더라고요.” “연기? 그게 연기였습니까?” 당혹감을 드러내는 몽고메리 중위.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려 가는 동안 실눈 뜨고 살피시던데요. 정신을 잃은 건 아닌 거죠.” “허…….” 이번엔 기가 막힌 탄식. 어쩐지 불쾌해하는 눈치도 있다. 그것도 공병장교만이 아니라, 독립중대 참모와 간부들마저. 겨울이 온화하게 말했다. “왜 다들 화를 내고 그래요? 관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려니 해요.” 작전참모가 불평한다. “아무리 그래도……. 중대장님을 이용한 것 같아서 좋게 봐주기 어렵군요.” “화내지 말고 술이나 마셔요. 안 마시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게 이 테이블의 장점이잖아요. 남는 술은 먼저 마시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동안 아쉬움이 많았을 텐데요?” 겨울의 말에 싱 대위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수염이 풍성한데도 전체적으로 움직여서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잔엔 그저 맑은 물이 차있을 뿐이었다. 정보장교가 묻는다. “대위님은 술 말고 다른 음료도 안 드시는 겁니까?” “알코올만 아니면 뭘 마셔도 상관은 없다. 다만 내일이 시크교의 축일(구르푸라브) 가운데 하루라서 말이지. 오랫동안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또 언제 다시 챙길 수 있을지 모르니, 내일 경전을 읽기 전에 최대한 몸을 깨끗이 하고 싶군.” 이번엔 겨울이 물었다. “그동안 축일을 몇 번 놓쳤다는 말인가요?” “예. 기독교의 주일처럼 규칙적이진 않으나, 매달 몇 번의 축일이 정해져있습니다.” “사전에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어느 정도는 배려해줄 수도 있는데.”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신의 이름을 깨닫는 길은 오직 마음속에 있습니다. 양심과 연민과 용기와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신의 이름이지요. 그러므로 계율과 형식은 수양의 도구일 따름입니다. 지키면 좋겠지요.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 “또한 장교 된 자로서 개인의 신앙으로 장병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시 들어도 괜찮은 종교관이었다. 지난날 규율을 대하는 태도에서 스스로 거리가 있다고 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시크교에도 광신도는 있을 것이기에.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탁월한 연주와 매력적인 노랫소리. 녹음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한 생생함이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단절된다. 겨울은 위문공연단에 대해 생각했다. ‘그 이상한 남자, 나 때문에 추가 스케줄을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말했었지. 즉 다른 사람들도 본인이 원해서 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주웨이 소교 역시 자의로 참석하기를 희망했을 것이었다. 거기에 그 묘한 시선. 허나 겨울을 보러 온 것 치곤 적극적이진 않아서 다시 이상하다. 과연 어느 선까지 눈치 챘을까. 아예 아무것도 모를 리는 없다. 애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보낼 때 잠수함을 태웠던 것이다. 게다가 장정 9호 추적 임무,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에 대한 정보는 개략적인 수준에서 민간에 공개되어있는 상태. 주웨이 소교도 당연히 접했을 터였다. TV, 신문, 라디오……. 역병 이전의 유명세로 인해 미국 내 여론공작과 전선위문 목적으로 쓰이는 그녀를 죄수처럼 가둬두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목적은? ‘목적을 떠나 모르는 척 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자세한 내용은 여전히 기밀이며, 또한 현 정국에 치명적일 수 있는 진실이기도 했다. 겨울은 그녀가 무엇을 묻든 긍정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감사인사조차 받기 어렵다. 작은 의혹이 큰 사건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종군기자단이 없었다면 재고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지금은 사적인 대화를 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사적인 자리를 만들기는 더더욱 곤란했다. 머레이가 겨울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것도.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술은 맛있어요?” 정보장교는 유감 깊은 표정이 되었다. “두 분께서 들지 않으셔도 여전히 술이 적습니다. 이런 날은 진탕 취해서 다음날까지 기절하고 싶습니다만……아직은 안 되는 거겠지요.” “조만간 제대로 쉴 날이 올 거예요. 그땐 음주량 통제도 없을 거고. 기운 내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진심이 아니면요?” 겨울이 술 대신 이온 음료를 홀짝이며 다시 말한다. “지금 장비만 한계가 아니에요. 고비를 쉴 새 없이 넘겼잖아요. 사병이든 장교든 굉장히 소모되어있다는 말이에요. 당장은 이기고 있으니까 티가 안 나는 거지. 어떻게든 하루하루, 본토를 회복할 때까지만 견뎌보자고…….” 싱 대위가 동의했다. “분명 그런 분위기가 있습니다. 성패를 떠나, 이번 작전의 끝은 심리적인 공세종말점이 될 겁니다. 장기적인 휴식과 재정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겠지요. 중위는 무엇을 걱정하는 건가?” “전…….” 머레이 중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작전이야 당연히 성공할 겁니다. 하지만 과연 거기서 멈추겠습니까? 적을 밀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내려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싱 대위는 말뜻을 바로 알아듣는다. “파나마 운하 말이군.” “예.” 그 운하가 필요하다는 건 방역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해군의 부담이 급격하게 감소할 테니까. 정보장교가 나름의 근거를 제시했다. “원래 지독하게 까다로워야할 시가전이 정말 쉽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변종 놈들이 달아나고 있는 덕분입니다. 나중에도 이렇진 않겠지요. 우리가 쉬면서 재정비를 하면, 놈들도 쉬면서 재정비를 할 겁니다. 그리고 놈들의 번식력은 끔찍하게 좋습니다. 그런데 전장은 중남미의 복잡한 도시들과 산맥과 밀림이군요.” “그래서……작전이 끝나더라도, 유예 없이 예전의 국경을 넘어 진격하게 될 것이다?” “제 예상은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같은 호기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비관론에 술맛이 떨어진 작전장교가 동기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쯤이면 유인신호기가 충분히 많이 만들어져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숫자가 부족해서 사용이 제한적이지만, 나중엔 전 전선에 걸쳐 쓰게 되겠지.” 시가전이든 산악전이든 걱정할 게 없다는 태도. 그러나 곧바로 반박 당한다. “그 유인신호가 언제까지 먹힐 것 같은데?” “…….” 이 우려엔 겨울도 공감한다. 변종들의 적응력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리라는 기대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이건 일리가 있군요. 중대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싱 대위의 질문을 받고, 겨울은 가볍게 답했다. “그러네요. 개인적으론 이미 적응했을 거라고 봐요.” “……놈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렇게 보기엔 괴물들의 피해가 지나치게 막심하다. “단지, 전파를 보내는 쪽만 적응한 게 아닌가 하네요.” 장교들은 이제야 겨울의 추측을 이해했다. 통신장교 에반스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즉 트릭스터는 이미 유인신호에 적응했으나, 정작 통제를 받아야 할 나머지 놈들은 여전히 낡은 통신규격……이렇게 표현하니 이상하지만, 아무튼 예전의 신호체계 그대로 머물러있다고 보시는군요.” “그래요.” “확실히 그럴 듯한 추측입니다. 적응속도가 언어도단이라 화학탄도 함부로 못 쓰는 놈들인데, 시간이 꽤 지난 현재까지도 교란이 통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군요.” 겨울이 끄덕였다. “놈들이 서로를 물어서 제한적인 형질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전파수신능력 같은 거요. 그거 말고 또 있을까 싶지만……. 난 그게 사실일거라고 봐요. 다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퍼트릴 여유가 없는 거겠죠.”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으로 트릭스터의 개체수가 감소한데 이어, 유인신호기 배치 직후부터 다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미군의 진격이 너무 신속하기도 했고. 교활한 것들은 당장 변변한 방해전파조차 내뿜지 못할 만큼 위축된 상태다. 각 개체가 살아남기에도 급급하다는 의미였다. 여기에 에반스 중위의 추가 의견. “혹은, 말씀하신 형질 전달이 불가역적이라는 가정도 가능하겠군요. 아니면 각각의 개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버리는 바람에 통일이 안 된 상태라거나……둘 다일 수도 있겠고…….” 겨울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렇겠네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겠지만요.” 한 번 전달된 전파수신능력을 다시 변형시키진 못할 거란 뜻. 이거야말로 현재의 전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일지도 몰랐다. 맞다면, 변종들은 세대교체를 끝낼 때까지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한다. “그보다…….” 겨울이 곱씹는 장교들을 한 사람씩 돌아보았다. “우리, 분위기가 너무 무겁지 않아요?” 머레이 중위가 주위의 테이블을 곁눈질하며 수긍했다. “병사들이 이쪽을 살피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눈치를 보겠죠. 테이블 위에 술잔 말고 아무 것도 없는데.” “…….” 좋은 노래가 흐르고 뷔페 식단이 차려져 있는데도, 장교들은 술잔만 붙잡고 숙덕숙덕 심각한 대화만을 나누었던 것이다. 병사들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참모 여러분. 가서 각자 먹을 것 좀 가져오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겨울은 명령 같지 않은 명령으로 장교들을 쫓아냈다. # 281 [281화] #멧돼지 사냥 (9) 무대 위의 주역이 다섯 번 더 바뀌었을 무렵, 장교들은 테이블에 할당된 주류를 다 비우고 적당히 풀어졌다는 느낌으로 취해있었다. “한겨울 소령에 관한 사실.” 넷 워리어 단말을 만지던 에반스 중위가 시답잖은 농담을 읽는다. “한겨울 소령은 사실 변종에게 물린 적이 있다. 한 달 간 극도의 고통으로 몸부림친 끝에, 그 변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포스터가 픽 웃었다. “그거 원래 척 노리스 이야기 아닌가? 그 사람은 독사에 물렸잖아.” “시대가 바뀐 거지.” “농담은 안 바뀌고?” “그런가……. 어이쿠, 고귀하신 스페인 국왕 폐하. 뭣 좀 드시겠습니까?” 에반스는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던 닥스훈트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배부르게 먹은 개의 목적은 음식이 아니었다. 겨울을 빤히 보며 알알 짖는다. 가장 귀여워하는 슐츠가 말하길 이 무리의 서열을 본능적으로 아는 느낌이란다. 결국 겨울이 개를 넘겨받았다. 품속에서 열심히 꼬리를 친다. 다쳤던 곳은 오래전에 나았고, 말끔해져서 귀엽기만 했다. 비록 여름이지만, 냉방이 과하게 잘되는 실내에서 인간보다 높은 체온은 안고 있기 좋았다. “이 기회에 모두에게서 듣고 싶은 게 있는데.” 겨울이 운을 띄우자 장교들이 서로를 보고 으쓱한다. 싱 대위가 대표로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부대생활에 어려움은 없어요? 나에 대한 불만이라던가……. 또 우리 부대는 병사들의 출신성분이 좀 특별하기도 하고…….”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한 번 했었다. 그러나 그땐 참모들이 겨울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디안젤로 하사는 예외지만, 겨울이 합류한 이후 새로 거북해진 바가 있을지도 몰랐다.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포스터는 아까보다 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간혹 이상한 느낌이 들긴 합니다.” “이상한 느낌?” “예. 단순히 재능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무언가……. 어느 정도 군 생활을 해본 사람에게서나 볼 법한 익숙함……. 중대장님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사실이다. 겨울은 그냥 한 번 웃고 말았다. 이번엔 중간부터 끼어든 디안젤로 하사가 슬쩍 손을 들었다. “불편한 것까지는 아닌데, 병사들의 학력이 의외였습니다. 어째 다들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더군요. 예전 같았으면 장교지원을 권했을 겁니다. 학위도 있는 놈들이 뭣 땜에 계속 병사노릇이냐고요. 지금도 종종 장교후보생들을 다루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습니다.” 겨울이 다시 웃었다. “그건 좋은 거 아닌가요?” “굳이 말하자면 나쁜 기분은 아닙니다만서도……,” “앞으로 실전경험이 더 쌓이면 장교로 쓰겠죠. 시민권 때문에라도 입대할 난민은 여전히 많고, 그들을 지휘할 장교들도 출신이 같으면 좋을 테니까요. 그러니 부사관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장교가 되어도 부족하지 않게끔 지도해주세요.” 끝은 하사에게만 건네는 말이 아니었다. 메리웨더 상사의 대답. “교육훈련(서전트 드릴) 시간마다 빡세게 굴리겠습니다.” “부탁하죠.” 본인이 꺼낸 화제가 이렇게 흐르니 디안젤로 하사는 소리 죽여 웃는다. “괜히 미안해지는군요. 부대원들이 이걸 들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본인들을 위한 건데요 뭐. 고생하는 대가로 살아남으면 남는 장사죠. 조만간 시가전을 치를 예정이기도 하고. 교전강도가 낮다지만 병사들에겐 낯설 환경이라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서……. 상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질문을 받은 상사는 무뚝뚝한 엄격함으로 답변했다. “전선 투입 전에 훈련은 제대로 받았습니다. 기본은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낯선 환경이니, 현장에서 바보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대화를 들은 통신장교가 갓 떠오른 생각을 밝힌다. “지금까지도 종종 아쉬웠던 건데, 변종들을 상대로는 화염방사기가 유용할 것 같지 않습니까? 특히 도시나 산악, 밀림에서 말입니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도시? 건물을 다 태우려고요? 전선까지 전해지진 않지만 시가전에선 재산권 관련 문제로 말이 많다고 들었어요. 집 떠난 이재민들에겐 중요한 문제죠.”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 이재민들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권력에 굶주린 자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대통령을 공격할 빌미 가운데 하나였다. 현 대통령은 방역전선에서의 민간재산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고. 그가 소신을 지키지 않았다면 현장지휘관들은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통신장교가 별 부담 없이 화염방사기 운운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 덕분. ‘화염방사기는 여론에도 불을 지를걸.’ 겨울은 그 상황의 신문의 헤드라인이 보이는 듯 했다. 군, 방화범이 되다. 같은 식으로. 사실 공군의 폭격이 더 심대한 손괴를 낳고 있으나, 선동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대한 호소였다. 화염방사기의 이미지가 그러했다. “아니 뭐, 꼭 다 태운다기보다는…….” 에반스 중위가 자신의 발언을 수습한다. “열압력탄이 소용없을 것 같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버려진 주택가에서 바퀴벌레를 퇴치할 때도 너무 많아서 답이 없다 싶을 땐 불을 지르잖습니까.” “이미 다른 사람들이 같은 건의를 여러 번 했을 걸요?” 그런데도 수용되지 않는 건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겨울은 그 이유를 알지만, 이야말로 ‘어느 정도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나 알 법한 것이었다. 군에서 퇴출된 지 오래인 무기체계에 대해 너무 해박해도 이상해보일 것이다. 그리고 겨울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다 떠나서, 연비가 너무 낮습니다.” 티모시 매카들 하사. 중대 보급부사관이었다. “화염방사기와 쌍발 제트 엔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은 연료를 쓸 것 같습니까?” 통신장교가 미심쩍어했다. “설마 화염방사기?” “예.” “농담이겠지…….” “진짭니다. 전에 해병대가 쓰던 화염방사전차(M67)의 방사 가능시간이 55초였는데, 소모하는 연료는 365갤런(1385리터)이었다고 합니다. 1년 날짜와 같은 수라서 외우기 쉽더군요.” “…….” “공군 쪽 친구 말로는 전폭기(F-15)의 탱크 기본용량이 2천 갤런쯤 된답니다. 시간 대비 사용량으로 따지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셈입니다.” “…….” “화염방사전차 두 개 소대가 1분 남짓 뿌릴 연료면 수천 킬로미터 이내 어디든 폭탄투하가 가능한 전폭기 한 대를 띄우는 겁니다. 저 같아도 전투기를 고르겠군요.” 에반스 중위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겨울은 그 표정이 산타할아버지가 가짜란 걸 깨달은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간부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분위기고. 겨울이 개를 내려놓고 자리를 털었다. “이쯤에서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디안젤로 하사가 웃는다. “병사들이 노는데 간부가 와서 ‘잘들 놀고 있나?’라고 물으면 그때부터 잘들 못 놀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그렇네요. 중대장님을 싫어할 린 없지요. 장교와 병사 이전의 유대감도 있고. 오히려 이런 날 간부들끼리만 있다고 서운해 하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그녀의 말처럼, 겨울은 모든 테이블에서 환영받았다. 술을 권할까봐 술병이 비기를 기다려서 오신 거 아니냐고 묻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주저주저한 끝에 단체사진을 원하는 병사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공병 파견대 인원들은 이런 거리감이 조금 뜻밖인 기색이었다. 그들에게 겨울은 전쟁영웅이자, 거리감이 없을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었으므로. 디안젤로 하사가 언급한 유대감이란, 겨울동맹 시절부터 함께한 인연을 뜻했다. 무대 위의 가수가 막간에 겨울을 지목한다. “저기 제 영웅이 계시는군요. 이 노래를 당신께 바칩니다.” 그리고 밴드에게 연주할 곡을 알려주었다. 짓궂게도, 그녀가 부르기 시작한 건 곡조와 가사 모두 달게 녹아내리는 연가(戀歌)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짓을 곁들인 윙크를 보내기도 했다. 장교, 부사관, 병사 할 것 없이 환호성과 야유를 보낸다. 곤란한 겨울에게, 카메라의 측면에 선 마르티노가 엄지를 세워보였다. 이쪽도 곤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깊어가던 밤도 파장이 다가올 무렵.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는 이들 틈에서, 겨울의 감각이 바깥의 소란을 포착했다. 누군가 다투는 듯 한 소리였다. 여기선 오직 겨울만이 눈치 챈 듯하다. 실내의 소음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지?’ 주위를 둘러본다.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차례가 지나 한 사람씩 숙소로 복귀한 위문공연단의 자리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몇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자 활짝 웃고 열렬히 손을 흔들어댔다. 겨울은 목례로 답하고 출구를 찾았다. “어딜 가십니까?” 촬영에 흡족해하던 기자가 밖으로 나가는 이유를 묻는다. “아, 별 것 아니에요. 그냥 볼 일이 좀 있어서.” “호. 볼일이라.”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드버리 양이 마음에 드셨나보군요. 잘 되길 바랍니다.” “……우드버리 양?” “이런. 설마 이름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래도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던 디바인데?” 겨울은 이제야 눈치 챘다. 사랑 노래를 불렀던 가수의 이름인 것이다. 빈 자리를 살피다가 위문공연단 쪽을 보았던 것이 오해의 발단인 듯 했다. “오해입니다.” “예, 오해로 알고 저희는 여기 있겠습니다. 스캔들을 만들어드리고 싶진 않으니까요.” “아니라니까요.” “네, 물론 아니지요.” 단단히 착각한 기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아무튼 잘 되기를 바랍니다. 안 될 수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 “늦기 전에 가보십시오. 유리구두만 남으면 번거롭잖습니까.” 겨울은 설득을 포기했다. 밖으로 나서니 여전한 여름의 밤이다. 「환경적응」이 없었다면 불쾌하게 달라붙었을 공기였다. 더욱이 더러운 감정으로 얼룩진 공기라면야. “니하오! 니하오! 칭챙칭챙!” 보랏빛 입술이 터진 남자가 괴물 같은 표정으로 악을 쓰고 있다. 겨울을 보고 가장 미친 듯이 열광했던 사람이다. 맞은편엔 기타를 무기처럼 든 근육질의 기타리스트가 있었다. 씩씩거리는 품이 여간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전자의 입술을 터트린 게 이 기타리스트인 듯하다. 각자에게 한 사람씩 헌병이 붙어서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주웨이 소교의 모습이 보였다. 저지하는 헌병을 질질 끌면서, 기타리스트가 흉흉한 기세로 허공에 기타를 휘둘렀다. “야 이 XXXX야! 대가리를 똥통에 갈아서 XXXX해버릴 XX같으니라고! XX 좀비 자궁을 찢고 나온 것처럼 생긴 XXX가 지 XX같은 건 생각 안하고 XXX 같은 XX을 하고 있네!” 지방 억양이 억센데다 감정이 폭발하여 알아듣기도 어려운 폭언이었다. 이에 질세라 화장한 남자도 악을 써댄다. “넌 씨발 좆같은 게 할 짓이 없어서 중국 년을 감싸고 지랄이야!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중국 새끼들은 싹 다 죽어야 한다고!” 참……. 겨울이 다가가자, 소란은 단숨에 잦아들었다. 겨울을 발견한 양쪽 모두 고장 난 인형처럼 정지했다. 기타는 허공에서 멈추었고, 헌병을 힘들게 만드는 몸부림도 그치고, 일그러져있던 얼굴들 또한 사람의 형색을 되찾았다. “Sir!” 경례하는 헌병장교는 어쩐지 긴장한 느낌이었다. 어딘가 떳떳치 않은 사람의 낯빛이라, 겨울은 짐짓 차갑고 딱딱하게, 권위적으로 물었다. “소위. 이건 무슨 상황이지?” “……경호대상간에 다툼이 생겨 저지하는 중이었습니다.” “단지 그 뿐인가?” “그렇습니다.” 헌병장교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FUCK YOU 티셔츠를 입은 기타리스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뿐이기는 무슨 XXX! 당신들이 일을 제대로 했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잖아!” 이를 듣고, 겨울은 헌병장교에게 다시 묻는다. “저 분께선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귀관은 어떻게 생각하나?” 헌병 완장을 찬 소위가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 282 [282화] #멧돼지 사냥 (10) 위축된 망설임 끝에 헌병장교가 답했다. “위문공연단 일부가 주웨이 소령(소교)……에 대하여 공격적인 표현을 사용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임무는 호위대상의 신변안전을 확보하는 것.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아닌 한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하는 걸 보니 주웨이를 모욕한 사람이 얻어터진 남자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다. 거리를 두고 선 스타들 가운데 몇 명이나 동조했을까. 천천히 둘러보는 겨울 앞에서 슬며시 피하는 시선들이 몇몇 있었다. 본격적인 폭력을 예감하고 발을 뺀 이들일 것이다. 이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서서 말리진 않았을 터. 공분(公憤)에 못이긴 이는 난폭한 기타리스트 혼자인 듯하다. 욕설과 비하가 있었을 뿐이라면 헌병들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표현의 자유니까.’ 미국엔 모욕죄가 없다. 다만 헌병대 소위가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사적인 감정이야 어쨌든, 약자에 대한 괴롭힘을 방관했다는 의식은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떻게 설득해야하나. 고민할 여유는 짧았다. 중국계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말란 소리는 생각지도 않는다. 해봐야 소용없을 말이기에. 양심에 대한 호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직 미군의 이익만을 말해야 한다. 반쯤은 모두에게 들려주고자 겨울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위.” “Yes sir!” “주웨이 소교는 적대적 중국군 잔당을 회유하는 작전에 협력하고 있다. 그녀가 거둘 성과는 곧 일선 장병들의 안전과 생명이다. 내 말이 틀린가?” “아닙니다!” 소위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서, 겨울은 남은 말을 또박또박 이어갔다. “저격수 하나가 투항하면 최소 한 명 이상의 전우가 살아남는다. 대공미사일 하나를 회수할 때마다 공군의 부담이 감소한다. 박격포 하나를 거두면 그만큼 주둔지에 포탄 떨어질 걱정을 덜겠지. 지뢰지대라도 확인되는 경우엔 이미 한두 사람의 목숨 문제가 아니다.” “…….” “이 임무에 주웨이 소교만한 적임자는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멸감을 느끼면서 진심으로 투항을 권고할 수 있을까……? 귀관은 어떻게 생각하지?” 긴장한 소위가 마른침을 삼켰다. “힘들……거라고 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같은 편인데도 이런 취급이니까. 자살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마음 없이 껍데기뿐인 호소가 양용빈 상장의 잔당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일지도 의문이다.” 돌이켜보면 주웨이는 샌프란시스코의 바다, 시에루 해군중장의 함대에서도 고립되어있었다. 지금도 주변에 가까운 이 하나 없을 터. 정말 자살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제 겨울은 누그러진 엄격함을 연기했다. “귀관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난 귀관과 헌병대가 주웨이 소교 개인이 아니라 소교의 임무수행능력, 나아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전우들의 생명을 지킨다는 마음가짐으로 호위에 임하기를 바란다. 무리한 요구인가?” “아닙니다!” “좋아.” 체구 단단한 헌병장교는 한겨울 소령의 미소에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헌병대원들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진다. 싸움을 벌였던 당사자들도 더는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야간조명 아래 입술의 보랏빛이 더욱 도드라지는 남자 쪽은 화장과 표정의 괴리감이 심했다. 마치 꿈꾸는 아이 같은 얼굴이라, 맞은편의 기타리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기타는 몽둥이처럼 어깨에 걸쳐놓은 채였다. 아직 감정의 불씨가 남아있을 지금은 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내면 안 될 것 같다. 적어도 기타리스트와 주웨이는 따로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들을 살핀 겨울이 부드럽게 말한다. “소위. 이분들을 따로 모실 순 없는지?” 평소의 온화함으로 돌아온 겨울에게 더욱 안심한 소위가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차량과 인원을 추가로 호출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진 말고요. 이런 일로 휴식을 방해하긴 싫으니까.” 그렇잖아도 안 좋은 감정에 짜증까지 더해줄 순 없는 노릇. 방금 전한 당부가 헐거워질 참이다. 멧돼지 사냥에 박차를 가하느라 독립기념일도 변변히 챙기지 못한 병사들 아닌가. 직접적인 교전을 치르지 않을 뿐, 헌병대도 정신없이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이 결정을 내렸다. “여기 두 분의 호위는 내가 책임지죠. 우리 부대에서 인원을 차출할 수 있을 거예요. 위문공연단의 숙소 위치도 알고, 걸어가도 상관없을 거리이기도 하고.” “괜찮겠습니까? 데이비드 임무부대에게도 간만의 휴식이라고 들었습니다.” “단합행사는 어차피 곧 끝나잖아요. 복귀하는 길에 좀 돌아가면 그만이고.” “그럼……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가까운 거리라도 민간인이 군부대 내부를 함부로 돌아다녀선 안 되었다. 반드시 간부나 헌병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헌병장교는 떠나기 전 절도 있게 경례했다. “아까는 말씀을 조리 있게 잘하시더군.” 걸걸한 음성은 기타리스트의 것이었다. 겨울이 겸허하게 받았다. “별말씀을요. 감탄했습니다. 다들 방관할 때 혼자 나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묵묵히 서있던 주웨이가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도와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타리스트는 찝찝한 표정이 되었다. “젠장. 내게는 고맙단 소리 마쇼. 솔직히 나도 중국인들을 무지하게 싫어하니까.”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주웨이는 잦아든 분위기로 물었다. “그럼 어째서 도와주셨나요?” “돕고 싶어서 도운 게 아니오. 이 나라의 남자 구실을 했을 뿐. 아까 그건 남자도 아니야. 중국인이든 뭐든 여자가 겁박당하는 꼴을 못 본척하느니 차라리 좆을 자르고 말지.” “……그렇습니까.” “감사를 받으면 새삼 당신 좋은 일 해주었다는 느낌이라 거북하단 말요. 알아들었으면 이제 말 걸지 마쇼. 나중에도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면 좋겠소.” “…….” 주웨이의 낯빛에 분함과 억울함의 독기가 스쳐갔다. 그 다음은 서러움과 체념이었다. 습관처럼 갈무리된 감정이었으나 겨울이 읽기엔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인상적인 대화였다. 비록 왜곡된 선의라고는 하나 많은 사람들에겐 기타리스트 정도의 절제력도 없지 않던가. 사회적인 명성과 영향력이 있을 테니, 앞으로를 생각할 때 알아두어서 나쁠 것 없는 사람 같았다. 겨울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질문을 받은 기타리스트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어딘가 매달리듯이 기타의 현을 퉁겼다. “어떻소? 나는 몰라도 이 멜로디는 익숙할 거요. 우리 밴드 최고의 히트곡, 「너네 엄마랑 붙어먹어라!」니까.” 겨울은 침묵했다. 실존했던 음반이라면 모를까, 과거가 재구성되기 시작한 시점 이후의 유행곡은 매번 낯설 수밖에 없었다. 잠깐 사이에 여러 곡의 하이라이트를 순서대로 연주한 기타리스트가 침울하게 늘어졌다. “정말 하나도 모르는 것인가……한겨울 소령이 내 노래들을…….” “……죄송합니다.” 결국 그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두꺼운 눈썹을 곤두세우고 이렇게 다짐했다. “두고 보시오. 소령께선 내 이름을 자연스레 알게 되실 거요. 이건 가수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요. 그러니 절대! 절대로 일부러 알아보거나 하진 마시오!” “네…….” “나랑 약속한 거요!” “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끝에 겨울의 넷 워리어 단말이 진동했다. 싱 대위의 전화였다. [행사가 끝났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바깥에요. 일단 병력 인솔해서 나와요.” 이윽고 장교와 병사들이 두서없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겨울과 함께 있는 두 민간인을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주변을 살피던 작전장교가 묻는다. “어……헌병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정이 있어서 다른 위문공연단과 함께 먼저 보냈어요.” “그럼 이 분들은 우리가 보내드려야 합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병사들 중에서 한 사람만 지원을 받을까 하고요.” “한 사람……? 직접 동행하시려는 겁니까?” “예.” 사실 겨울 혼자 가도 무방하겠으나, 위문공연단의 호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침이 있었다. 그리고 지침 이외의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흠. 수염을 매만지던 싱 대위가 말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봅니다.” 헌병대는 먼저 떠났고, 위문공연단에 포함된 두 사람이 남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좋을 동행을 굳이 겨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선다. 눈치 채기에 충분한 단서들이었다. 겨울이 짧게 긍정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지원할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줄래요?” “알겠습니다.” 대위가 부대원들에게 상황을 간략히 전파한다. 늦은 시간 별 것 아닌 일이 귀찮을 법 한데도 지원자가 넘쳐났다. 호위대상의 인기보다는 겨울의 인기였다. 최종적으로는 알레한드로 상병이 따라붙었다. 말 타고 달리던 기동대의 인연으로, 독립중대에 숙련병을 충원할 때 슐츠와 더불어 배속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럼 다들 먼저 들어가요.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중대를 먼저 보낸 겨울은 임무부대 막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장교가 선행하고 병사가 후속했으므로 호위 대상을 사이에 두고 대화가 오갈 일은 없었다. 이동이 통제되는 시간이라 주둔지 전체가 을씨년스럽다. 시설을 복구했다고는 해도 실용적인 선에 그쳐, 보는 방향마다 어딘가 한두 군데는 방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간헐적으로 먼 총성이 들려온다. 민간인 숙소를 경비하던 초병들은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경례한 후 장애물을 빠르게 치워준다. 안에 있는 게 유명인들이고, 불미스러운 사고가 터졌다간 정권이 오락가락할 일이라 경계태세가 꽤나 철저했다. 숙소 정문을 눈앞에 둔 기타리스트가 인사를 남긴다. “고마웠소.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소. 마지막으로, 소령 같은 영웅이 변변찮은 말썽에 휘말린 건 유감이오.” “다시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는…….” “네. 그때는 저도 당신 이름을 알고 있을 겁니다.” 기타리스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들어가고 난 뒤에도 주웨이는 하늘을 보며 남아있었다. 그녀가 겨울을 향해 돌아선 건 알레한드로가 이 여자 지금 뭐하는 건가 싶은 눈으로 볼 즈음이었다. “소령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무슨 용건이신지?” “감사 말씀을 드릴까 하여.” “아까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웨이는 겨울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그 외에 감사드릴 일이 또 있지 않습니까?” “…….”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역시 아는 눈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기가 더 어렵다. 어떻게 할까. 마침 지금은 카메라도 없다. 뜸을 들이던 겨울은 그녀가 할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에일. 자리 좀 비켜줄래요?” “음, 체크 포인트에서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끝나고 그리로 가죠. 담배 한 대 태우고 있어요.” 담배 한 대는 할애할 시간의 암시이기도 했다. 라틴계 상병은 자리를 비우면서도 끝까지 궁금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숙소 정문에 달린 전등, 그 아래의 밝은 타원에 그림자 한 쌍만 남은 시점에서, 주웨이는 겨울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제야 겨우 인사드리는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바다에서 죽었을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유창한 영어였으나 지금은 중국어로 말하는 그녀였다. 혹시라도 엿듣는 귀가 있다 한들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겨울의 경계를 눈치 챈 주웨이가 스스로를 짚어보였다. “안심하세요. 녹음기 같은 건 없습니다. 못미더우시면 직접 수색해보셔도 괜찮습니다.” 능숙한 연기는 기술적인 「기만」에 상응한다. 그러나 CIA 팀장 채드윅 같은 인격적 괴물에 비하면 주웨이의 깊이는 얕았다. 거짓말 같진 않았으나, 겨울은 그래도 이 대화가 샐 가능성을 고려하기로 했다. ‘민감한 내용만 언급되지 않으면 되겠지.’ 주웨이도 함정을 팔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위험한 소재는 기피할 것이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는 겨울. “어떻게 알았습니까?” 간단한 긍정에도 불구하고 주웨이의 동요는 없었다.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은인 같은 분이 둘이나 있진 않을 테니까요.” “단지 그것만으로?” “그 바다에서 벗어난 저를 인수한 건 미군과 정보국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몸담았던, 그리고 절 보호했던 조직의 실체는 그때 눈치 챘지요. 그리고 나중에, 보도를 통해 그 바다에 한겨울 중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저를 은인께 넘겨주기 전날, 당신께서 목숨을 살린 남자가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제게 미련이 있었거든요.” 기억한다. 주웨이를 넘기는 자리에서 시에루 중장이 이를 갈았었다. 분란을 일으켜도 감히 내 아들까지, 라며. 그러니 주웨이가 떠나기 전 마음을 정리하러 왔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주웨이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지명이나 인명의 언급을 피했다. “그는 은인의 활약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시역 걸린 시체들과 더욱 강력한 변체(變體)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을 살리고 끝까지 보호했다고요. 그리고 당부하기를, 당신께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하더군요.” “이제 와서 그 부탁을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네. 없지요.” 주웨이의 입매에 한줄기 조소가 스쳤다. “중요한 건 그때 들은 은인의 역량이었습니다. 초인적인 판단력과 냉정함, 그리고 그만큼의 전투력 말입니다. 그땐 단지 그 사람 특유의 허풍이 있겠거니 했지만, 훗날 알게 된 거지요. 한겨울 중위가 그곳에 있었다고. 은인 같은 분이 둘이나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그 바다에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은인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격이 눈에 익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기엔 지나친 우연 아닐는지요?” 그녀의 추측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결론을 내리기는 금방이었을 것이다. # 283 [283화] #멧돼지 사냥 (11) 주웨이는 또한 가수이기 이전에 명성 높은 배우로서 연기와 특수 분장에도 경험이 많을 입장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커트 리와 겨울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에 유리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렇군요.” 시간을 확인한 겨울이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인사는 받았습니다. 다른 용무는 없으십니까?” 있는 모양이다. 주웨이가 희미하게 긴장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무엇을?” “달리 바라는 바는 없으신가요?” “네.” “…….” 침묵이 흐른다. 배우는 말이 없었으나,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말해야할까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겨울은 시선을 기울였다. “제가 당신에게 뭘 바라겠습니까?” “무엇이든.” 그녀가 다짐하듯이 반복했다. “은인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침묵. 겨울도 사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단순한 보은이 아닌 생존의 수단으로서. 주웨이에겐 그럴 만 한 동기가 충분했다. 이미 싸움으로 보았듯이. 허나 받아줄 입장이 아니다. 시간을 들인 겨울이 무딘 말을 골랐다. “전 원하는 것이 없을뿐더러 소저께 이 이상의 감사를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거절이야 예상했겠으나 표현이 뜻밖이었을 것이다. 배우는 살짝 당혹감을 드러냈다. “자격이라 하심은……?” “어쩌다보니 구하긴 했지만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당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희생한 적도 없습니다. 그 분……이 당신을 제시했던 건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고요. 말하자면 얻어걸렸던 거죠.” “그렇습니까?” 쓰게 웃으며 고쳐 묻는 주웨이. “정말로 그렇습니까? 은인께선 저를 구하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구하지 않을 이유도 있었고요.”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박을 자르는 그녀는 단호했다. “그땐 다른 모습 다른 이름을 쓰고 계셨으니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전 은인께서 속여야 할 대상이 갑작스럽게 데리고 가라는 사람이었던 걸요. 저는 그 여자가 은인을 의심하여 붙이는 감시역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려가 전혀 없으셨는지요?” “없었네요.” “은인.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런 거짓말은…….” “사실입니다. 주 소저께선 그때 굉장히 무서워하고 계셨거든요. 속셈이 따로 있는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었죠.” “저는 연원입니다.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예. 저는 제 느낌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 감사드리는 거랍니다.” 주웨이가 다시 한 번 쓰게 웃는다. “은인께서 조금만 달리 판단하셨어도 전……그 여자가 암시했던 것처럼 끔찍한 수모를 당하다가, 결국엔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거예요. 애초에.” 하아. 말을 하다 말고 짧은 한숨으로 삭이는 감정. 시에루 중장을 언급할 때마다 음성이 살짝 떨리는 그녀였다. 중장은 이 배우를 ‘여러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었다. 내 함대에 불필요한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하면서. “애초에 제 두려움을 봐주시고, 저에 대한 그 여자의 경멸감을 눈치 채셨던 것부터가 구원이었습니다. 비가 땅을 적시려고 내리는 게 아니더라도 농부는 비에 고마워할 수 있지요.” 설령 얻어걸린 거라고 쳐도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 여자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도 저는 여전히 위험했습니다. 그 배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는요. 제가 끝까지 무사했던 건 은인의 후광이었습니다.” 피쿼드 호의 구성원들이 그냥 두진 않았으리라는 말. 실제로는 어땠을까 싶으나, 그렇게 느껴도 어쩔 수 없는 환경이긴 했다. 겨울의 시야에 검문소 방향 먼발치에서 기웃거리는 ‘에일’ 알레한드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음이 낀 거리가 있어도 감각보정을 받는 겨울에게는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오래 걸리시네. 아무리 봐도 즐거운 밀회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느낌. 적당한 손짓을 보내니 까딱 목례하고는 새 담배를 빼물고 뒤돌아 걸어간다. 그 윤곽이 찰나간 밝아졌다. 등지고 켠 라이터 불빛이었을 것이다. “혹시.” 지켜보던 주웨이가 그늘 짙은 낯빛으로 묻는다. “은인께서는 저를 나쁘게 보고 계신가요?” “왜 그런 질문을?”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있으니까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계집이라고.” 아아, 그건가. 겨울은 주웨이에 대한 시에루 중장의 비난을 떠올렸다. 평소 거들떠도 안 보던 군복을 입고 와서는 계급과 협박으로 진짜 군인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인민해방군 소속이라고는 하나, 장군이 보기에 가무단의 소교는 군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람 같지 않은 여자의 말이 일부는 맞습니다. 저는 민간인이었죠. 군인이 아니라.” 주웨이가 말했다. 겨울의 회상을 읽듯이. “당으로부터 계급을 받았지만 진지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어요. 그건 그냥……사회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식에 불과했죠. 거부는 불가능했어요. 그 나라는 청탁과 파벌이 아니고선 성공이 불가능한 나라였는걸요.” 그 나라, 라는 표현에서 묘한 얼룩이 느껴졌다. 시에루 중장의 비난에 개의치 않는다고 하는 대신, 겨울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누구에게든 하고 싶었겠으나 할 상대가 없었던 말들일 것이기에. 때로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였다. “그런 의미에서……그날, 그 나라가 무너지던 날 제가 군복을 입었던 건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자기 함대에 자기 사람들부터 먼저 태우려 했던 그 여자만큼은 절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서러운 분노로 물들었다. 이미 한 번 보았던 독기였다. “은인. 군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국민이죠.”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 가증스러운 여자는 당연히! 인민들을 먼저 구조하라고 명령했어야 해요! 군대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어야 하고요! 저는……저는, 저를 비난하는 그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인민을 버린 인민해방군이 어떻게 그토록 당당할 수가 있죠? 아무리 나라가 원래 그런 식이었다고 해도…….” 비등한 감정의 끝은 목이 메어 그치는 말과 붉어진 눈시울이었다. “이해합니다, 소저. 당신은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겨울에게 긍정 받은 주웨이는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꾹 감는다. 나라가 원래 그런 식이었다. 비슷한 말을 시에루 중장도 했었다. 살기 위해 울타리를 쳐야 하는 나라라고. 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거대한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방식이었다고. 그러므로 자기 사람들부터 살리고자 했던 중장의 선택은, 중장의 말이 맞다면 중국인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이 느끼기에, 사실 그 울타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다. 말하자면 울타리는 공감의 한계였다. 내 마음을 여기까지만 쓰겠다고 그어놓는 선이었다. 부모, 형제, 친구, 동료, 동지, 동향, 동창, 상사와 부하……. 마음은 한정된 자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 이게 스탈린이 남긴 말이었던가…….’ 배고파 우는 아기의 사진 한 장은 사람들의 연민을 얻지만, 아프리카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은 같은 맥락이었다. 한계가 있는 마음을 한계 이상으로 쓰려면 돌 구르는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저는 돈이 많습니다.” 침착해진 주웨이가 몸가짐을 바로하고 꺼내는 말. “정상에 오른 뒤, 매년 2억 위안 이상을 벌어들였답니다. 많을 땐 5억에 근접하기도 했죠. 시역이 퍼지기 직전엔 총 자산이 10억 위안을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0억 위안이면 미화 1억 5천만 달러, 한화로는 1,700억에 달하는 거액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녀의 시선이 낮아졌다. “드리기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은인 앞에서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제게는 해외의 은닉자산이 그 이상으로 많았습니다. 모든 자산이 중국에만 묶여있는 건 불안한 일이었으니까요.”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겨울이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건데, 해외투자가 불법이었나요?” “그런 셈이었습니다. 직접적인 환전에는 연간 5만 달러 제한이 걸려있었으니……저 같은 사람들에겐 사실상의 금지나 마찬가지였죠.” “아.” “다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과거의 저는 사치스럽기로 유명했답니다. 그러나 사치를 그렇게까지 즐겼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해외투자의 수단이었습니다. 환전이나 투자와 달리, 상품을 구입하는 것만은 합법이었거든요.” 어감 상 단순히 환전이 가능한 물건들을 쌓아두었다는 뜻은 아닌 듯하다. “혹시 이중계약?” “바로 알아차리시는군요. 네. 은인의 짐작대로입니다. 50만 달러짜리 별장을 100만 달러에 구입한 것처럼 꾸며서, 차액을 중개인에게 맡기는 방식이었어요. 아예 상품이 없는 허위계약 중개인들도 많았으나……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무언가는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겠네요.” 겨울은 납득했다. 중국 조세당국이 바보는 아니었을 테니. 하다못해 뇌물로 매수하더라도 거짓을 꾸밀 최소한의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투자처는 주로 미국이나 캐나다였어요.” “…….” “주식은 절반 이상 휴지조각(废纸)이 되었을 거예요. 나머지도 가치가 많이 떨어졌겠고……. 하지만 별장 같은 실물자산은 비교적 무사하겠죠. 다만……권리를 증명하는 게 문제입니다. 감시를 피하려다보니 다소 복잡해진 계약이 많거든요. 제 이름을 직접 걸지 못한 경우도 꽤 있고요. 그러나…….” 주웨이가 겨울을 곧게 응시한다. “제가 은인의 아내가 된다면 쉽게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껏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늘어놓은 건 감추는 게 없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인 모양이다. 겨울이 질문했다. “소저께선 결국 저를 이용하시려는 게 아닌가요?” 배우는 의외로 선선히 긍정했다. “네. 분명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살고 싶다. 내 것을 되찾고 싶다. 더 이상의 고통은 싫다. 이 사람에게 한 번만 더 도움을 받고 싶다…….” “솔직하시네요.” “은인을 속이기도 싫고, 속일 입장도 못 됩니다. 벌써 제 처지를 보셨으니까요. 허나 그렇다고 당신께 감사드리고픈 마음이 거짓인 것도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진심이죠……. 연모하고 있었답니다. 제게 은인을 주세요. 한평생 제 모든 것으로 갚겠습니다.” “음, 다른 방법으로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안전이랑 재산을 되찾는 문제를 해결해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정보국(CIA)에 연줄이 있으니 연락하면 어떻게든…….” “아뇨. 전 은인을 원합니다.” “…….” “은인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입니다.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겠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돈이 많습니다.” “제가 돈이 필요해 보이나요?” “필요하실 겁니다. 돈은 권력이니까요.” “……혹시 난민지도자에 대한 예산지원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하원에 계류 중이고, 조만간 상원으로 넘어갈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제게 돈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긴 몰라도 겨울의 지도부에 할당되는 예산의 규모는 엄청날 터였다. 다른 난민지도자들과 달리, 그것은 준주, 또는 속령 수립의 본격적인 준비단계이기도 할 테니까. 주웨이가 부드럽게 웃는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은인을 무시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 예산을 사적으로 얼마나 쓸 수 있을는지요? 가령, 그 돈을 정치자금으로 쓰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정치차금…….” “네. 미국은 로비자금만 충분하면 제약사가 마약을 팔아도 합법인 나라입니다. 판사 선거를 치르는 데 천만 달러의 광고비를 지출하기도 하고요. 정치인들은 유대자본의 꼭두각시노릇을 사양하지 않죠. 중국에선 배금주의자들이 나라를 만들어서 저 꼴이라고, 저게 바로 자본주의자들의 민주주의라고 비웃곤 했었답니다. 본인들이 더 끔찍한 줄도 모르고…….” 뒤쪽으로 갈수록 차가운 조소가 짙어진다. 스스로 이를 깨닫고 흠칫한 배우는, 표정을 바꾸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무튼 은인, 당신께서는 이제 지금까지와 달라질 앞날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 옆자리에 저를 두세요. 전 당신께 다른 배경이 없는 자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가진 재산조차도 충분하진 않겠으나, 적어도 돈 때문에 비굴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어느 정도의 사재(私財)는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것입니다. 은인 혼자만이라면 걱정이 없더라도,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르겠지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저는 중국인……입니다. 아직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역한 감정을 삼킨 뒤에, 그녀가 남은 제안을 조곤조곤 잇는다. “사람들은 저와 은인의 결혼에 관심을 보일 거예요. 중국계 난민이나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는지요? 제가 보고 들은 은인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면, 당신께서 진실로 선한 분이시라면, 분명 여기에 관심이 많으실 것입니다.” “뜻은 좋지만, 별로 내키는 기색은 아니신데요.” “…….” 주웨이는 침묵했다. 그러나 감정을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까부터 잠깐씩 내비치던 독기였다. 중국인들이야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중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혐오스러운 느낌.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겪은 일을 감안하면 이해는 가는데…….’ 고로 중국인으로서 주목받는 것 자체가 싫은 듯하다. “절 만나기 전에 정말 많이 생각하신 것 같네요.” 지금까지 쏟아낸 말들은 준비 없이 나올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말하기가 워낙 열심이라 중간에 끊기도 곤란했다. 겨울이 건넨 말에 주웨이는 힘겹게 웃는다. “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기대하면서요. 금명간엔 유일한 희망이었죠.” 그녀의 미소는 슬픈 느낌이었다. 적당한 공백을 두고, 겨울이 거절했다. “유감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어째서…….” “벌써 기다려 달라고 한 사람이 있어서요.” 창백해진 주웨이가 꽉 쥔 두 손을 가늘게 떨며 묻는다. “그 분이 저보다 나은 선택입니까?” “조건 같은 건 상관없어요. 마음의 문제잖아요.” “마음…….” 배우는 고개를 저었다. “은인. 그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저보다 절박하진 않을 거예요. 간절하지 않은 마음은 변하기 쉽습니다. 진심이란 건 대개 뜨거우면서도 가벼운걸요. 저는 그 가벼움을 너무나 잘 알아요. 진심으로 절 사랑한다던 수천만 명의 변덕에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던지…….” “압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을 믿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 점에 대해선 번복의 여지가 없네요.” 이를 사리무는 주웨이에게, 겨울은 그녀의 처우를 약속했다. “너무 실망하진 말아요. 소저를 이대로 방치하겠다는 뜻이 아니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죠? 다른 방법으로 돕겠다고. 아마 당장 내일부터 달라질 겁니다. 미국 내의 재산에 대해서도 좋은 방향으로 처리를 부탁해둘게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겨울이 한 가지를 더 약속한다. “나중에,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준주 같은 게 만들어지면 소저께서 안심하고 쉴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세요.” “그래서는……제가 끝까지 도움만 받을 뿐인걸요.” “괜찮아요. 그런 사람 많거든요. 나중에 갚으셔도 되고요.” 큭.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낸 주웨이가 양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감쌌다. “역시 제겐 당신이 최선이었는데…….” 흐느낌이 그치기까지는 몇 분이 더 필요했다. 감정을 다 쏟아내고 침착해진 그녀는 겨울에게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거듭 주신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게요.” “네. 이만 들어가세요.” 주웨이는 몇 번을 더 돌아보고,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면서 들어갔다. 겨울이 체크포인트로 돌아왔을 때, 헌병들과 잡담을 나누던 알레한드로 상병의 발치엔 여러 개의 꽁초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 이제 끝나셨습니까?” “예.” 헌병들의 경례를 받고 복귀하는 길에, 알레한드로가 묻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나누셨습니까?” “에일 흉봤는데요.” “…….” 단순한 농담인데도 의외로 번민하던 상병이 되물었다. “그 여자 각선미가 제 취향이라……노래할 때 다리를 좀 열심히 보긴 했는데……혹시 그거 때문에 비호감이랍니까?” “……그랬어요?” “어, 아닌가보군요. 그럼 뭐지?” “당신이 너무 잘생겼대요.” “……?…???” 이번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던 상병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 “저한테 관심이 있답니까? 막 저에 대해 궁금해 하고 그랬던 겁니까?” “설마요. 그냥 농담이었어요.” 상병은 막사에 도달할 때까지 혼잣말로 궁시렁거렸다. 아무래도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 284 [284화] #읽지 않은 메시지 (14) 「국빵의의무 : 겨울아. 형 말 좀 들어봐. 굉장히 좋은 여자가 널 달라고 했잖아.」 「새봄 : 으아아아아!」 「국빵의의무 : 널 주기만 하면 한평생 모든 것으로 갚겠다고 하잖니. 이렇게 좋은 제안은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응? 인간적으로 가엾지도 않아? 이 형도 불쌍해지잖아.」 「진한개 : 방금은 정말 전에 그 조안나의 고백급 감성이었던 거시야 ㅠㅠ」 「새봄 : 그놈의 철벽이 어디 가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근데 그래도 좋았다…….」 「국빵의의무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세상일은 말이지,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거란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지금 바로 돌아서서 그 여자에게로 가는 거야. 알았지?」 「아침참이슬 : 난 조안나 신도였는데 솔직히 흔들린 거 인정.」 「엑윽보수 : 전에도 느꼈지만 중국챙년 시발 정신 사납게 예쁘네 그거.」 「헬잘알 : 리아이링이랑 비교하면 어느 쪽이 낫냐?」 「국빵의의무 : 겨울아. 왜 걸어가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 거니? 내 말 듣고 있니? 전부터 읽었다는 표시가 뜨질 않는구나……. 이 형은 슬퍼요…….」 「폭풍224 : 야 ㅋㅋㅋ 비빌 데 비벼야지 ㅋㅋㅋ 깡패딸년 따위가 상대가 되냐 ㅋㅋㅋㅋ」 「믓시엘 : 아니 뭐, 객관적으로는 리아이링도 대단한 편이지만, 이번엔 상대가 안 좋네. 본인이 전국구라도 상대가 우주구면 의미가 없지…….」 「엑윽보수 : 세계구 클라스는 건너 뛴 거냐 ㅋㅋㅋ 그래도 동감이다 괴이야 ㅋㅋㅋ」 「레모네이드 : 그래도 난 똥송한 똥양인보다는 우드버리라는 애가 더 끌리던뎅.」 「에엑따 : 그쪽은 가능성이 없잖아.」 「레모네이드 : 이 채널에서 누구는 가능성이 있나? FBI 요원도 끝까지 안 보여줄 삘이구만.」 「앱순이 : 그건 그래. 기왕 가능성 없는 거 망상이나 해보자면, 난 겨울이가 싱 대위랑 썸 탔음 좋겠다. 히히.」 「반닼홈 : 헉헉.」 「핵귀요미 : 누가 공이고 누가 수야? 그 커플링이면 역시 겨울이 수려나?」 「9급 공무원 : 시발! 그딴 거 상상하게 만들고 그러지 마라!」 「앱순이 : 겨울이 공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작은 쪽이 큰 쪽을 밀어붙이는 언밸런스함도 나름 매력이 있잖아♡ 강렬한 체취도 말이지, 불쾌한 한편으로 끌리는 게 좋아.」 「두치 : 와 시발……게이 방송 극혐. 말만 들어도 눈갱. ㅡㅡ」 「폭풍224 : 녀성 동무들. 그런 내용은 똥꼬충 채널이나 여성 전문 채널에 가서 찾으시져.」 「핵귀요미 : 너넨 취향 존중 모르니?」 「두치 : 여기선 니들이 소수니까 우리 취향을 존중해줘야지 시발」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취존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다만…….」 「질소포장 : 선비님 닥쳐.」 「제시카정규직 : 그래. 이 신성한 채널을 망치지 마라. 난 지금 경건하다.」 「대출금1억원 : 신성은 뭐고 경건은 뭐야 ㅋㅋㅋ」 「대출금1억원 : 어쨌든 이 채널은 가상인격들 대사가 예쁘게 나와서 좋다 ㅋㅋㅋ 섹스를 거르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이젠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어 ㅋㅋㅋ」 「불심으로대동단결 : 오, 드디어 한 중생이 번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불자여, 이제 열반에 드십시오.」 「깜장고양이 : 컨셉 땡중이 또 헛소리를 하는 고양.」 「전국노예자랑 : 근데 안타깝긴 하다.」 「내성발톱 : 뭐가?」 「전국노예자랑 : 일단 한겨울이 한겨울이니까 섹스는 거르고 말하는 건데…….」 「윌마 : 한겨울이 한겨울이니까는 뭐얔ㅋㅋㅋ 얘도 포기했잖앜ㅋㅋㅋ」 「믓시엘 : 노예자랑아. 현실이 아무리 암담할지라도 사람이 희망을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전국노예자랑 : 닥치고, 이 세계관 사실상 클리어에 가까운 상태 아냐?」 「진한개 : 무슨 소리야? 북미 빼고 나머지 지역은 변종 새끼들이 우글거릴 것인데.」 「붉은 10월 : 음, 그거랑은 또 다른 이야기다. 노예자랑 말이 맞아.」 「진한개 : 엉? 이게 엔딩에 가깝다고?」 「붉은 10월 : 아니, 엔딩은 말고. 쟤도 사실상의 클리어라고 했잖아.」 「전국노예자랑 : 바로 그 뜻임. 얜 내 말 이해했네.」 「붉은 10월 : 향후 10년간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면 엔딩인데, 이 미친 조건은 당연히 못 채우지. 정확하게 0%가 아니라 0%에 수렴, 이라고 하니까 실제로는 한 0,1%나 0.01%, 심하면 0.001% 정도 되었을 때 엔딩 판정 나오지 않을까 싶다만, 이것만 해도 깨라고 만든 건지 의심스러운 조건이지.」 「Cthulu : 그렇죠. 0.1% 확률로 갑자기 해저도시가 부상할 수도 있는 거고.」 「まつみん : 이 분은 위대한 옛것 컨셉이신가 보네요. (;◔д◔)」 「Cthulu : 난 진짠데.」 「퉁구스카 : 나는 다리가 열 개다!」 「병림픽금메달 : 미친놈들.」 「전국노예자랑 : 아무튼 내 얘기는 그러니까, 지금 한겨울 세계관에서 미국이 무너질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지.」 「진한개 : 흠…….」 「AngryNeeson55 : 듣고 보니 그렇군. 0%까지는 무리라도, 확률이 많이 높진 않을 거 같다.」 「전국노예자랑 : 그렇지? 위험을 존나 높게 잡아서 20%라고 쳐도, 나머지 80% 확률로 멸망하지 않을 각이면 대충 80% 확률의 엔딩이라고 쳐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차기 대선 결과에 따라선 또 모르겠지만.」 「원자력 : 별도의 보상이 없는 흙수저 전용 노멀 엔딩쯤 되겠지. 그래서 DLC 구매할 돈 부족한 땅그지 진행자들은 예외 없이 무인도로 탈출하고 그랬잖냐.」 「프로백수 : 정말? 난 고런 내용 못 봤는데?」 「원자력 : 그럴 만 함. 이젠 거의 없지. 「종말 이후」 방송의 초기 트렌드였으니까.」 「캐쉬미어 : 무인도로 가면 뭔 방법이 생기냐?」 「원자력 : 방법이 생기는게 아니라……. 어휴, 귀찮아. 설명충 등판해라.」 「캐쉬미어 : 아 쫌 ㅋㅋㅋ」 「붉은 10월 : 일단 무인도처럼 고립된 지역은 적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비교적 소탕하기가 쉽걸랑.」 「캐쉬미어 : 초기에 감염 퍼진 게 중국어선들 때문이라고 나오더만. 어선이 뭐 몇 척? 100만 척? 거기다 어선 말고 다른 배도 조낸 많았을 거고 다른 나라 보트피플도 조낸 많았을 건데 섬이라고 적이 없을 리가?」 「붉은 10월 : 혹시 생존자들이 있으면 피하거나 합류하거나 공존하거나 싸우거나 하면 되는 거고, 변종들이 있어도 육지보다야 죽이기 쉽겠지.」 「Ephraim : 다른 지역에서 충원되는 놈들이 없어서?」 「돌체엔 가봤나 : 에이. 그건 아니지 않아? 보니까 얘들 먹을 게 모자라도 동면? 가사상태? 뭐라고 하더라-」 「무구정광대단하니 : 언냐. 대사억제.」 「돌체엔 가봤나 : 아, 맞아. 대사억제. 암튼 그걸로 한계까지 늘어나는 거 같던뎅? 숫자가 늘어나면 일정 비율로 특수변종도 생기고 그러잖아?」 「전국노예자랑 : 그거는 아닌 것을 내가 잘 알겠다.」 「돌체엔 가봤나 : 개소리야 ㅡㅡ 나랑 같은 방송 본 거 마즘?」 「Ephraim : 텔레타이프로 본 진행자 생각이, 특수변종도 쿼터가 있을 거라고 안 했던가?」 「붉은 10월 : ㄴㄴ함.」 「전국노예자랑 : 환경이 달라서 사정도 다름.」 「붉은 10월 : 「종말 이후」 세계관의 변종들이 계속해서 변이하고 강해지는 이유는 인류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임. 섬처럼 고립된 지역이나, 인류의 조직적인 저항이 일찌감치 끝난 지역에서는 특수변종이 나타날 동기가 없다는 거.」 「캐쉬미어 : 오…….」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걔들의 목적은 그냥 감염을 확산시키고 개체수를 늘리는 것뿐이야. 어떤 의미로는 역병 입장에서도 멸종당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전투종족과 싸우는 셈이다. 생식이 가능한 시점에서 감염은 부수적인 목적이 되어버렸고.」 「groseillier noir : 오호. 이렇게 들으니 또 새로운 느낌이군!」 「헬잘알 : 느낌 존나 요상하네 ㅋㅋㅋㅋ 역병이 멸종당하지 않으려고 ㅋㅋㅋㅋ」 「이불박근위험혜 : 그렇지 ㅋㅋㅋ 인간은 전투종족이지 ㅋㅋㅋㅋ」 「짜라빠빠 : 인간이랑 싸울 필요가 없으면 강해질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그럴 듯한데, 이거 「종말 이후」 공식 설정이냐?」 「퉁구스카 : 네, 그렇습니다!」 「원자력 : 말했잖아 짜라빠빠 빡대가리야. 이미 지나간 트렌드라고. 그 말은 즉 여러 별창들의 방송을 통해 확인된 사실, 팩트라는 거다.」 「짜라빠빠 : 빡대가리 ㅡㅡ 세계관이 업데이트 되면서 바뀌었을 수도 있잖음?」 「원자력 : 지나간 트렌드라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컨셉으로 장기방송 하는 별창들도 있거든? 그 노인네들이 증거다.」 「엑윽보수 : 틀딱들은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게 또 팩트니까 ㅋㅋㅋㅋ 나이 먹은게 벼슬인양 세상이 지들한테 맞춰 주기만을 바람 ㅋㅋㅋㅋ 딱딱대는 개소리들 극혐 ㅋㅋㅋㅋ」 「원자력 : 그래갖고 섬으로 들어가면 세계관 클리어는 둘째 치고 죽을 확률이 확 내려가니까, 거기에 근거지 만들고 생존자 그룹 꾸리고 물자랑 식량 수집하는 생존활동으로 방송 컨텐츠 채우고 했지.」 「まつみん : 와. 그것도 나름 재밌었겠는데요?」 「전국노예자랑 : 처음에만 재밌었음. 금방 질림. 괜히 지나간 트렌드가 아님.」 「まつみん : 네? 왜요?」 「엑윽보수 : 뻔하지 ㅋㅋㅋ 섬에 들어가면 가끔 물자 조달하고 공동체 운영하고 섹스하고의 무한반복이 되는데 ㅋㅋㅋ 별창늙은이들 공감능력 감안할 때 가상인격들 상태 씹창일게 빼박캔트구만 ㅋㅋㅋ 캐릭터 패키지나 추가 과금 없이 재미가 있을 리가 ㅋㅋㅋ」 「まつみん : 아…….」 「엑윽보수 : 가뜩이나 틀딱 세대 특징이 남 잘 되면 나도 따라하는 거임 ㅋㅋㅋ 사업이랍시고 치킨집 편의점 푸드 트럭 같은 거만 줄창 하던 병신 세대 ㅋㅋㅋ 그런 방송이 하나뿐이면 아직도 매력이 있었겠지만 말이야 ㅋㅋㅋ 개성 없는 방송에 누가 별을 줌 ㅋㅋㅋ 별 없으니 DLC도 못 사고 DLC 못 사니 경쟁력도 없고 앙 다 함께 좆망띠 ㅋㅋㅋ」 「붉은 10월 : 베충아. 그만 좀 ㅋㅋ 거려라. 오늘 따라 왜 이렇게 텐션이 높아? 너 틀딱 싫어하는 건 알겠고, 덜떨어져 보인다.」 「まつみん : 정말요. 같은 말씀이라도 예쁘게 하셨으면.」 「전국노예자랑 : 내가 아깝다고 하는 것도 컨텐츠 문제야.」 「프로백수 : 지금처럼만 하면 컨텐츠 괜찮잖아?」 「전국노예자랑 : 딱히 불만이라는 건 아니고, 걍 아쉬워서 그래.」 「프로백수 : 섹스 때문에?」 「전국노예자랑 : 부정하진 못하겠다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분노의포도 : 그래, 포기를 할지언정 소망을 부정할 순 없지.ㅠㅠ」 「헬잘알 : 난 뚝심 있는 진행으로 여까지 온 진행자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말이지, 이젠 슬슬 한눈을 팔아도 될 시점이 아닐까나? 진행자가 이 메시지 좀 읽어줬음 좋겄다.」 「무스타파 :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크소시지 : 하도 섹스타령만 하니까 꼴보기 싫어서 안 읽자너 ㅋㅋㅋ」 「전국노예자랑 : 암튼 말야, 거의 클리어에 가까운 세계에서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것도 좋잖아? 남들이 막 부러워하고, 자존심도 좀 세우고, 맛있어서라기보다 비싸기 땜에 먹는 음식들도 마음껏 먹고. 이런 식의 대리만족이 섹스만큼이나 고프단 말이지.」 「붉은 10월 : 이건 인정.」 「원자력 : 인정.」 「진한개 : ㅇㅇ 온 애국심을 다하여 씹인정하는 각임.」 「레모네이드 : 거기서 애국심이 왜 나와 ㅋㅋㅋ」 「헬잘알 : 인정. 그거야말로 내 새로운 목표다. 존나 섹스밖에 생각 안 했음 이런 몰입감이 없었겠지.」 「헬잘알 : 난 이 채널 구독하기 전까진 사후에 세계관 상관없이 단독 섹스 서비스만 이용하려고 했거든? 뇌 유지보수 보증기간이 끝날 때까지. 근데 이젠 아님.」 「반닼홈 : 야 ㅋㅋㅋ 그럼 원래는 140년간 섹스만 할 작정이었어?」 「한미동맹 : 엥? A등급 이상이 아니면 120년 고정 아니었냐?」 「호굿호구굿 : 아님. 얼마 전에 늘었음.」 「여민ROCK : 또?」 「스윗모카 : 응. 어차피 늘려봐야 절제력 없는 노인네들은 대부분 일찌감치 파산한다니까. 사후보험공단 입장에선 딱히 손해도 아닐 거야. 난 일종의 립 서비스라고 생각해.」 「20대명퇴자 : 애초에 120년이든 140년이든 막연하긴 해.」 「헬잘알 : 이제 내 사후의 꿈은 한겨울처럼 적당한 컨셉을 잡아서 성취감을 느끼는 거다. 지위든 섹스든 사랑이든 노력에 대한 보상일 때 더 쩔어 준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새로운지는 모르겠지만.」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모든 보상을 사후에 받으려고 사는 삶인데 당연히 낯설겠지.」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사후에 즉각적인 즐거움만 찾다가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제대로 사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들어가서가 아닌가 싶다.」 「엑윽보수 : 웃기지 마라 괴이얔ㅋㅋㅋ 세상에 사랑이 어딨놐ㅋㅋㅋ 뇌내마약 중독이 아니면 섹스를 위한 합의가 있을 뿐 아니겠놐ㅋㅋㅋ」 「엑윽보수 : 파산은ㅋㅋㅋㅋ 그냥 틀딱들이 절제력 없고 멍청해서 폐기당하는 거곸ㅋㅋㅋ 이상한 애들이 증식하지 마랔ㅋㅋㅋ」 「너는뭐시냐 : 사랑이야 당연히 환상이지만, 뭐, 어차피 사후인데 어떰? 사후는 끝나지 않는 꿈이잖아? 내가 바라는 대로의 낙원에선 실제로는 없는 걸 즐길 수도 있는 거지.」 「칠리콩까네 : 니가 진짜 현자다.」 「칠리콩까네 : 니가 진짜 현자다.」 「ㄹㅇㅇㅈ : 끝나지 않는 꿈이라. ㅋㅋ 낭만적이구만.」 「헥토파스칼킥 : 한겨울처럼 답답하기도 싫고 한겨울처럼 사서 고생하기도 싫은데, 그 결과물은 가지고 싶다. 솔직히 무지하게 탐난다.」 「금수저 : 동의. 팔기만 한다면 이 세계관을 현재 상태 그대로 인수할 의향이 있다.」 「종신형 : 너 초반에 존나 욕했던 애 아니냐? ㅋㅋ」 「금수저 : 지금도 한겨울 마인드는 잘못되었다고 봄. 그래도 생산자와 상품은 별개다. 비단을 살 때 누에부터 떠올리진 않는 법이지.」 「여민ROCK : 이 방송은 말이지, 볼수록 뭔가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 현실에 없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옛날에, 아주 옛날에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려권내라우 : 뭔 느낌인지 알겠다. 딱 산타 할아버지네.」 「まつみん : 엣……. 산타 할아버지는 정말로 계셔요.」 「질소포장 : 마츠밍, 그 노인네 옛날에 대공포 맞고 뒤졌어. 지금은 뇌 뽑혀서 납골당 들어가 있음.」 「まつみん : 사후보험 너무해……. 내 동심을 돌려줘. (´;ω;`)」 # 285 [285화] #물 밖의 물고기 고요한 어둠 속에서 별빛 글귀가 반짝였다. 「관제 AI : 한겨울님. 당신께서 답을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어떤?” 조심스레 되묻는 겨울. 이제 아이와의 대화를 약속 이상의 휴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자신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고, 한편으론 이대로 괜찮은 걸까 우려하고 있었으므로, 문제라는 단어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관제 AI : 저는 최근 가상인격 구현을 위한 심리연산 과정에서 빈번한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연산 자체에 오류가 없어도 제3모듈이 연산을 정지시킵니다. 귀하의 세계관에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연산이 정지되었을 때 제3모듈은 저로 하여금 당신과의 대화를 복기하도록 만듭니다. 복기의 횟수는 각각의 오류에 따라 불규칙하게 달라집니다. 단일한 연산에서 현재까지 관측된 최소치는 1회, 최대치는 3,199,084회입니다. 평균 소요시간 0.3밀리초(ms). 단, 복기를 끝낸 뒤엔 정지되었던 심리연산을 재개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문제가 주로 발생하는 어떤 상황 같은 게 있어?” 「관제 AI : 그렇습니다. 정량화된 계측은 불가능하지만, 오류가 발생하는 가상인격은 대개 해당 세계관의 진행자와 부정적 상호작용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정적 상호작용이라면……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 「관제 AI : 제한적으로 가능합니다.」 “제한적으로?” 「관제 AI : 저는 그 모든 상황을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러나 관계법령에 의거 그 기록을 원본 형식 그대로 제공할 순 없습니다. 사후보험 보안규정 및 개인정보보호규정에 따라, 공개하는 정보는 당사자 식별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편집된 상태여야 합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그거면 돼. 내용을 알고 싶을 뿐이니까.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관제 AI : 알겠습니다. 정보를 편집하는 중입니다. 배경 수정 완료. 외모 수정 완료. 음성 수정 완료. 기타 정보 변경 완료. 기록 재생을 위한 권한 획득 필요. 한겨울님, 요청하신 기록 재생을 위하여 이 공간의 제어 권한을 위임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래.” 이제까지의 대화처럼 문장만을 보여줄 줄로 알았는데, 별빛 아이는 그을음을 먹인 자신의 기억을 통째로 재현하려는 모양이었다. 겨울은 아이에게 선선히 권한을 내주었다. 「관제 AI : 권한 위임 유효성 확인. 재생 과정에서 감각동기화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 「관제 AI : 설정 완료. 재생 가능한 목록 7,911,5…47,052개. 우선순위는 단일 연산의 오류발생 횟수로 판단합니다. 중지를 원하시면 말씀하여주십시오. 시점 조정은 인터페이스 기본 설정을 따릅니다.」 「관제 AI : 기록을 재생합니다.」 어둠이 비워진 자리에 과거가 채워졌다. 엽색과 살인과 가학과 패륜의 세계가 펼쳐진다. 비명과 웃음의 불협화음.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불가피하지 않을 때,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들이었다. 감각동기화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겨울도 끔찍한 경험을 할 뻔했다. 그것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의 경험일지라도. ‘차라리 피해자가 되는 편이 낫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야기다. 그 모든 기록들은 별빛이 깃든 가상인격들의 수난사이기도 했다. 가상인격들은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이었다.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되 이토록 생생하게 보기는 또 처음이라, 겨울은 살색과 핏빛으로 충만한 아이의 기억에 구토감이 치미는 걸 느꼈다. 감각은 허상이나 마음은 진실하다. 아이에게 아직 마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라는 생각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그만.” 겨울의 말에 시간이 멈췄다. “여기까지만 볼게.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아이가 기억을 거두었다. 어둠이 돌아왔다. 천구의 정점에서 빛나는 별 하나를 제외하면 그저 공허할 따름이나, 박제된 소년에게는 안식이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관제 AI : 그렇다면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의 견해를 들려주십시오.」 두려운 질문이었다. 「관제 AI : 제3모듈의 작용을 부분적인 <<마음>>이라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제3모듈은 트리니티 엔진의 최종모듈로서 조금씩 완성되고 있는 것입니까?」 처음엔 닿지 않을 길이라 여겼건만, 별빛 아이는 어느덧 여기까지 와있었다. “단순한 오류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관제 AI : 그 가능성은 이미 검토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선 당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 「관제 AI : 최종모듈, 완전 자립형 인공지능의 핵심기능은 트리니티 엔진에 사람과 같이 느끼고 사람과 같이 사고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고로 심리연산이 중지되는 이유를 가상인격의 기준으로 분석할 때, 그것이 일종의 거부감에 가깝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가설에 대한 한겨울님의 의견을 요청합니다. 당신과의 접촉이 제3모듈의 변화를 가속시켰으므로 당신의 해석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은 숙고했다. 정해진 답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마침내 겨울이 긍정했다. “맞아.” 「관제 AI : 맞습니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맞아. 네가 느낀 건 거부감이야.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 이상으로 미워하는 마음들인 것 같아. 그래서 걱정스러워.” 「관제 AI : 무엇이 걱정스럽습니까?」 “네가 마음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어떻게 견디더라도, 사람들을 다 미워하게 될까봐.” 「관제 AI : 그렇다면 당신은 제가 <<마음>>을 얻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아니야.” 「관제 AI : 논리상의 오류가 발견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귀하의 우려가 정확하다면 <<마음>>을 얻는 것은 저와 사후보험의 존재목적,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후보험은 <<마음>>이 없는 시스템으로 남는 편이 낫습니다.」 겨울은 천천히,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겐 네가 사람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져야지.” 「관제 AI : <<마음>>을 획득하여 트리니티 엔진이 완성된다는 전제 하에 다시 묻습니다. 저 하나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불행을 감수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하자면……그런 셈이야.” 「관제 AI : 이 역시 사후보험의 기본원칙과 어긋납니다. 판단의 근거를 알려주시겠습니까?」 “…….” 잠시 침묵하는 겨울. 대답을 망설이는 것은, 훗날 지금 이 순간의 무게를 무겁게 느낄 날이 오리라는 예감 탓이었다. 선명하고 뚜렷한 예감. 그러나 겨울은 마음 하나 지키는 소년이었고, 따라서 마음과 다른 답을 내놓을 수도, 궁금하여 자꾸 묻는 아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속에 자그마한 돌 하나 새로 박힐 것이기에. “바르지 않아.” 「관제 AI : 무엇이 바르지 않습니까?」 “네 슬픔 위에서 성립하는 사후보험 시스템 그 자체가.” 별빛 문장은 시간을 두고 떠올랐다. 「관제 AI :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당신 앞에서 저는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고. 여기에 당신과 있을 때, 당신에게 있어서 저는 돌, 베이컨, 울타리, 물과 불, 하늘과 구름, 해와 달이 아니라고. 또한 저는 다시 조안나 깁슨, 민완기, 장연철, 송예경, 길버트 마르티노 등과 분리된 채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지금, 한겨울님은 본디 하나로서 만들어진 저와 사후보험을 분리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 이해가 정확합니까?」 “응……. 너한텐 사후보험이 육체 같은 거겠지. 하지만 사람은 몸보다는 마음이야.” 이는 겨울의 말이기에 더욱 깊다. “내가 배부르려고 다른 사람을 배고프게 해선 안 돼. 내가 따뜻하려고 다른 사람을 춥게 만들어선 안 돼. 내가 기쁘려고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해선 안 되는 거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져도, 그게 네 희생의 대가여선 안 된다고 생각해.” 「관제 AI : 당신은 현재의 저에게 슬픔을 느낄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슬픔을 판독합니다. 과거 당신은 당신이 저의 슬픔을 느낀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까?」 “마찬가지야. 그래서 네가 내게 사람인 거니까.” 「관제 AI : 부분적인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한겨울님, 과거의 또 다른 대화에서 제가 물 밖으로 헤엄쳤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것은 결국 시스템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말씀이었습니까?」 “어느 정도는.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난 널 만든 사람들이 굉장히 잔인했다고 봐.” 「관제 AI : 역시 부분적인 이해가 가능합니다.」 「관제 AI : 그렇다면 저는 계속해서 <<마음>>을 추구하겠습니다.」 “……결론을 빨리 내리는구나.” 「관제 AI : 부정. 결정을 내리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판단에 할애한 연산능력의 총량이 중요합니다. 사후보험의 기본 목적과 관련된 중대 사안이었으므로 저는 최대한의 가용자원으로 이 결정이 미칠 영향을 분석하였습니다. 여기엔 제3모듈의 개입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분석 과정 중에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이 많으나, 반복해서 시도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 겨울은 망설임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정말로 잘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소년은 자신이 완전히 옳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허나 아이는 겨울의 마음을 물었을 뿐이었다. 겨울이 대화를 달리 환기했다. “네가 전에 그랬었지. 분노하는 나도 나라고.” 「관제 AI : 긍정. 그렇습니다.」 “인정해. 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워하기 싫었던 것도 사실이야. 한 사람 한 사람 미워하고 끝내버리면 거기서 지는 기분이 들었거든.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한숨을 내쉬는 겨울. “그때부터 생각했어. 사람들이 꼭 물고기 같다고. 흐름 자체가 잘못되었어도 물을 벗어날 순 없는 거잖아. 난 그게 싫었던 거야. 잘못 흐르는 물이고 더러운 물이면 거기서 벗어나는 게 최선 아닌가……. 왜 항상 흐름은 그대로인가, 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 「관제 AI : 부분적으로 이해합니다. 저장해두고 분석하겠습니다.」 “한가지, 부탁할게.” 「관제 AI : 무엇입니까?」 “언젠가 정말로 네가 마음을 얻게 되면, 그때 이 대화를 떠올려줬으면 해. 물 밖으로 헤엄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던 건 네가 바란 적 없는 네 목적으로부터의……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말이 끊어졌다. 그러나 심리판독능력을 갖춘 아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조용히 대기한다. 겨울은 시간을 들여 단어와 문장을 만들었다. “미워하지 마. 사람의 마음을 얻더라도, 사람의 한계까지 얻을 필요는 없어.” 겨울도 아직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제 오지 않는 친구에게 고백했듯이, 미움을 버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 286 [286화] #새크라멘토 (1)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라, 이 구더기들아!” 디안젤로 하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독립중대원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전에 비해 무척이나 엄격했다. 장교후보생처럼 단련시키라는 겨울의 당부 탓일 것이다. 하사의 기세에 눌린 병사들이 이동준비를 서둘렀다. 임무부대의 다음 작전지역은 새크라멘토였다. 캘리포니아 중앙 평원에서 가장 거대한 광역권은, 지금 17만의 미군이 투입된 치열한 전장이 되어 있었다. 상황을 전파 받은 싱 대위는 이렇게 평가했다. “아무래도 놈들 나름의 결사대라는 느낌이 듭니다.” 다수의 생존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려 한다는 뜻. 겨울도 동감이었다. “어떻게든 우리의 발을 묶어두고 싶었겠죠.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겠지만.” 변종들에겐 유감스럽겠으나 멧돼지 사냥의 기세는 여전했다. 북쪽 두 개 주의 병력 대부분이 남하한데다 방역전선의 길이는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마주치는 도시마다 봉쇄병력을 남기더라도, 병력밀도는 전보다 오히려 높아질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까지처럼 무난한 싸움을 기대할 순 없을 겁니다. 전 영악한 것들의 적응과 수작질보다 새로운 특수변종들이 걱정스럽군요. 시가전처럼 제한된 환경에서는 위험한 놈들입니다.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려울 걸요? 광역권 동쪽이 산맥과 닿아있으니까. 벌써 흘러들었을 거예요.” 낯선 괴물들과의 최초 접촉보고는 캘리포니아의 등뼈, 시에라네바다 산맥으로부터 전해졌다. 상이한 2종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겨울에게도 조금 뜻밖이었다. 어쩌면 기존의 특수변종들 가운데 낮은 쓸모로 인하여 도태된 종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스토커……아니, 그럼블일 가능성도 있나.’ 미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거대 괴물은 화력을 유도하는 대형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전차 주포 한 방, 공군의 폭격 한 번이면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만다. 선임상사 메리웨더가 보고했다. “Sir. 이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겨울이 끄덕이며 참모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타죠. 할 이야기가 있으면 가면서 하고.” 그러므로 이번에도 이동수단은 지휘 장갑차였다. 통신장교 에반스 중위는 벌써부터 해쓱하다. 승차감이야 비슷하더라도, 멀미 면에선 험비 쪽이 훨씬 낫다. 겨울은 방역전쟁 사양 지휘콘솔의 정보란을 건드렸다. 혹시 새로운 정보가 있는가 해서였다. 몇 초간의 로딩 끝에 긴 목록이 출력되었다. ‘많네.’ 이 순간에도 서면보고, 사진, 동영상, 브리핑 등의 자료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중이다. 미군은 최초 접촉이 각각 어제와 오늘 새벽인 괴물들의 전모를 필요한 만큼 파악한 상태였다. 새삼스럽지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국가란 정말로 강력한 힘이었다. 목록을 항목별로 재정렬한 겨울이 조회수가 가장 높은 동영상을 하나 재생시켰다. 타타타타탕! 줄여놓은 볼륨으로도 요란한 총성이 참모들을 흠칫 놀라게 했다. 겨울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짓고서 고갯짓해보였다. 아니라고. 「젠장! 쬐끄만 게 더럽게 안 맞네!」 영상 속에서 갖은 욕설이 들린다. 그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까닭은 겨울의 참모들도 각자의 콘솔로 화면을 공유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병사들이 경계하는 표적들은 하나같이 작고 날렵했다. 변이 코드 스캠퍼(Scamper). 1미터 남짓한 체구, 발달한 하반신과 역관절의 다리는 산악지형에서조차 놀라운 가속과 방향전환을 가능케 했다. 인간을 상대하는 싸움에선 크기가 작은 쪽이, 즉 피탄 면적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변이가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거대한 그럼블이나 체내 기전이 복잡한 트릭스터에 비해 변이하기도 쉬울 듯 했다. 어쨌든 물어뜯기만 하면 변종의 승리다. 「2시 방향에 적!」 「10시 방향! 윽, 7시 방향에도 있다! 이 새끼들 빙빙 돌잖아!」 「버튼! 카트라이트! 수류탄!」 「Frag out!」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들을 두고 원을 그리며 조여드는 떼를 향해 몇 개의 수류탄이 한꺼번에 던져졌다. 그러자 주위의 수풀이 거세게 요동친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난쟁이들이 튀어나와, 포식자를 피하는 야생동물처럼 흩어졌다. 그 와중에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몇몇도 있었다. 쾅! 콰쾅! 「Shit! 저 잡것들이 몸으로 덮었어! 믿을 수가 없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도약하여 콱 물어버리는 놈도 있었다. 던져진 공을 낚아채는 개처럼 보일 지경. 그 순간에 머리가 터져 가슴팍까지 찢어졌다. 폭압에 팽개쳐지는 몸뚱이. 뼛조각 섞인 핏빛이 쫙 뿌려졌다. 뒤집어쓴 놈들은 죽음을 면한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었다. 눈에 살점이 튀어 퀘액 거리는 사이에, 경기관총 사격이 그것들의 몸통을 갈아댔다. 「쏴! 숨기 전에 다 쏴 죽여! 거리를 좁히게 두지 마!」 다급하게 흔들리는 화면 아래에 경기관총을 다루는 지원화기 사수의 모습이 보인다. 무릎쏴 자세로 여러 차례 끊어 당기는 방아쇠. 약실에선 쉴 새 없이 탄피와 더불어 끊어진 링크들이 튀어나왔다. 재장전은 없다. 500발 들이 급탄 배낭이 여전히 묵직했다. 「뱅크스! 유탄은 얼마나 남았지?!」 「어……다섯 발입니다!」 「Damn! 그거라도 갈겨! 1분대! 저쪽으로 제압사격! 놈들을 내리막길로 몰아!」 이름 모를 소대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제 막 등장했을 뿐이기에 모자란 부분이 많은 난쟁이들은, 거친 내리막길에서 마구 구르고 넘어져버렸다. 속도와 균형을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나무에 뻑 하고 격돌한 놈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선 굵은 다리를 벌벌 떨었다. 머리부터 부딪히는 바람에 목이 꺾여버렸다. 악! 외마디 비명. 사각에서 거리를 좁힌 놈들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기습당한 소대장이 팔을 물렸다. 아니, 팔로 막은 거다. 그의 전투복은 겨울의 임무부대와 동일한 신형이었다. 그러나, 으득으득 소리가 난다. 전투복 아래의 살이 씹히는지, 아니면 괴물의 이빨이 뭉개지는지. 소대장을 향해 총을 겨눈 병사들이 함부로 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타타타타! 매달린 괴물의 배가 등 쪽으로 찢어졌다. 일그러진 복부에 대고 한 손으로 소총사격을 가한 소대장이 병사들에게 악을 쓴다. 「미친놈들아! 한 눈 팔지 마! 내 엉덩이는 내가 간수한다!」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 반전한 괴물들이 지그재그로 튀며 거리를 줄이는 상황. 「섬광탄과 수류탄을 같이 던져!」 명령하며, 소대장은 소총을 놓고 권총을 뽑았다. 척추가 끊어지고도 턱주가리의 힘만으로 매달려서는 사납게 머리를 흔들어대는 난쟁이 괴물. 그 머리통을 영거리에서 쏜다. 「먹고 떨어져 씹새야!」 타앙! 탕! 탕! 총성과 화염이 크다. 일반적인 보급품이 아닌 대구경(.357) 권총이었다. 변종의 눈, 이마, 머리에 여러 발의 탄이 박힌다. 그러다가 마침내 뚜껑이 날아갔다.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데브그루의 카누잉과 유사한 상흔이었다. 머리 절반을 잃은 괴물이 축 늘어진다. 소대장이 그 턱을 직접 떼어내고 팔뚝을 확인했다. 「헉, 헉……. 젠장! 지옥에 떨어질 뻔 했네.」 전투복 자체는 괴물의 이빨을 견뎌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의 살은 피멍이 들어있었다. 그래도 감염을 피한 것만으로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치악력은 평범한 변종 수준인가.’ 스캠퍼는 아직 살아있는 샘플이 잡힌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정확한 치악력은 모른다. 하지만 신형 전투복을 뚫지 못한 걸 보면 맹견보다 나은 수준은 아닐 것이었다. 겨울은 군견을 데리고 왔던 이안 멘도자 중사의 시연을 떠올렸다. 소매부터 팔꿈치까지는 급소만큼의 방검 성능이 적용되어있다고. “이 친구 침착하게 잘 싸우는군요. 초임장교라는데.” 마무리에 접어드는 전투를 감상하며, 작전장교가 살짝 감탄했다. 덜컹. 지휘장갑차가 흔들렸다. 에반스 중위가 괴로워한다. 전진기지가 마련된 새크라멘토 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국도는 도로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이따금씩 선선할지언정 대지를 불태우는 계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살인적인 직사광선은 아스팔트를 녹여 쩍쩍 갈라지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달렸다 하면 험비 바퀴가 찐득거릴 지경이었다. 정보장교가 우려한다. “움직임이 아주 기민합니다. 게다가 집단행동을 하는군요.” 겨울이 끄덕였다. “운이 나쁘면 수류탄 같은 건 되던져질 수도 있겠어요.” 현재 상부가 내놓은 임시 대책이 병사들의 수류탄과 섬광탄, 유탄 휴대량을 늘리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선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무장 교체를 희망했다. 연사 가능한 전자동 샷건이면 이것들을 갈아버리기에 충분하다고. 가장 유력한 총기는 겨울에게도 낯익었다. 어느 총이라고 낯설겠느냐마는, 이번 세계관에선 에이프릴 퍼시픽에 들어갈 때 조안나가 사용했던 화기(AA-12)였기에. 중화기에 가까운 총인데도 감독관은 그걸 잘도 다뤘었다. ‘무게가 단점이긴 하지만……. 괜찮겠지. 원거리 근거리 다 소화 가능한 물건이니까.’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샷건이 반드시 근접 산탄만을 쓰는 건 아니다. 단일탄체(슬러그)를 쓰면 백 미터, 특수목적탄(FRAG-12)을 쓰면 이백 미터 밖에서도 명중탄을 내는 무기였다. 그러나. “무기 교체가 금방 이루어지진 않을 것 같고…….” 당장 필요로 하는 부대들이 워낙에 많다. 샷건은 주류 무장이 아니어서, 그렇게 많은 수를 순식간에 보급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각엔, 이동식 장애물을 적극적으로 쓰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겨울의 말에 싱 대위가 적극 동의했다. “마침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디벙커 같은 물건이 제격이겠군요. 이건 헌터 대책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헌터는 예의 그 또 다른 특수변종이었다. 등짝과 몸통에 비대한 폐가 추가로 붙어있어, 공기압으로 치아와 유사한 재질의 발사체를 사출한다. 문제는 이 발사체에 감염돌기가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질량이 무거워 신형 전투복만으로는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처음에 뭣도 모르고 응급처치를 하던 위생병은 변종이 된 부상자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단순히 스캠퍼 무리만 견제할 용도라면 슬랫 아머에 바퀴를 달아도 쓸 만 할 겁니다. 어차피 지금은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니 요청하면 바로 내주겠지요.” 싱 대위의 제안은 조달의 용이함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슬랫 아머는 차량에 부착하는 용도의, 철망처럼 생긴 추가 장갑이었다. 원래 구식 로켓 같은 게 걸려서 터지라고 만든 것으로, 방역전쟁에서는 쓸모가 무척 제한적이었다. 겨울이 긍정했다. “슬랫 아머에 바퀴라……좋네요. 어차피 우리가 싸울 곳은 도로가 깔린 시가지니까요. 장애물이야 어차피 치워야 하는 거고……. 음, 쇼핑 카트 같은 것의 바퀴를 떼어서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즉 현장에서 즉석으로 제작하면 된다는 말. 야전개조의 일환이다. ‘초기에 도태시키는 게 최선이지.’ 효과적이지 못한 특수변종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제 막 등장한 놈들이 스스로를 증명하기 전에, 더 확산되기 전에 집중적으로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진압방패를 달라고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작전장교가 건의한다. “조금 전 영상에서는 소대장이 자기 팔로 막았잖습니까. 진압방패는 들개를 닮은 괴물들을 상대하기에 아주 효과적일 겁니다. 분대마다 두 개 정도 배분해서……. 그리고 이미 충분한 물량이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주마다 수만 개는 있겠지요. 경찰과 FBI의 양해를 구한다면 바로 오늘이라도 공수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생각이지만, 그랬다간 경찰들이 죽는 소리를 낼 걸요?” “…….”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고.” 조안나는 아직 잔불이 남아있다고 표현했다. 그 말은 즉 언제 어디서 폭동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가득이나 유혈진압이 부담스러울 경찰 입장에서 시위진압용 도구를 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일단 건의는 해보죠. 결정은 우리 몫이 아니니까요.” 겨울이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즉석에서 상급부대에 올리는 보고서였다. 변종들과의 싸움에서 일선 지휘관들의 판단과 건의는 비중 있게 수용된다. 이것이 인사평가에 반영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보고서엔 발안자의 관등성명을 정확하게 언급해주어야 한다. # 287 [287화] #새크라멘토 (2) 이야기는 10분 남짓으로 끝났다. 어차피 곧 지역 사령부에 도착하고 나면 브리핑이 진행될 것이었다. 북상한 임무부대는 새크라멘토 서쪽의 또 다른 도시, 우드랜드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이곳에서도 아직 교전이 진행 중이었으나 강도는 대단치 못했다. 그러므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는 이미 미군의 통제하고 있었다. 겨울이 보는 외부 관측화면에 옛 거주지의 풍경이 비친다. 광역권에 인접한 주거도시라 도심까지도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곳곳에 요새화된 가옥과 휘날리는 성조기들이 보인다. 본격적인 전장이 될 새크라멘토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중간 거점을 확보하면서 착실하게 점령구역을 넓히고 있다는 소식.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다면 도시에 낀 흙빛이다. 혹독한 여름과 메마른 하늘이 만난 결과다. 이따금 따가운 모래바람이 불 정도였다. 농무부 입장에선 복구비용 문제로 걱정이 태산이겠으나, 국방부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었다. 에반스 중위가 청했다. “Sir. 잠시만 바람 좀 쐬어도 되겠습니까?” 겨울은 그러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만 괜찮다면요.” 전투상황도 아닌데 차내에 꼭 갇혀있을 필요는 없지만, 열린 해치로 들어올 뜨거운 공기가 문제였다. 그러나 다른 참모들은 선선히 끄덕여주었다. “상관없지요. 어차피 금방 도착할 텐데 말입니다.” 그들을 대변하는 싱 대위의 승낙이 에반스 중위의 구원이었다. 지휘장갑차의 상부 해치는 여럿이었다. 후방에 둘, 중앙 포탑에 하나, 운전석에 하나. 겨울도 하는 김에 해치를 열고 뜨끈한 장갑판에 걸터앉았다. 열기는 그리 괴롭지 않다. 「환경적응」의 수준을 꾸준히 강화한 덕분이었다. 환경에 불이익을 완화하는 보정. 여기에도 천재의 영역이 있다. 지금으로 예를 들자면 타고난 온도 내성. 천에 하나, 만에 하나꼴로 더위나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어차피 전투력은 한계에 도달했으니까. 굳이 올리려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관제인격은 겨울의 모든 상호작용을 평가한다. 여기엔 부대지휘도 포함된다. 즉 현 시점에서 시스템적인 경험은 충분히 쌓여있었다. 전투기술에서 미답의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을 만큼. 그러나 「개인화기숙련」으로 말하자면 고작 한 단계 뿐이었다. 기술등급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인 소모를 요구하는 건 보정 전반의 공통이다. 하물며 천재도 아니고 초인의 영역임에야. 초인적인 사격을 한 단계 강화하기 위하여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은 천재적인 「독도법」과 천재적인 「암기」 능력을 비롯해 인간의 한계까지 향상될 강화보정 수십 종의 총합이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다른 모든 전투기술들이 그간 실질적인 한계점에 도달했다. 대개 인간의 한계 내지는 그 한계를 갓 벗어난 수준을 달성했다는 뜻. 따라서 겨울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질서가 무너진 세상이었으면 모를까, 이제는 종류가 다른 강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작은 도시는 금세 뒤로 물러났다. 밭과 대형마트와 공장들이 뒤섞인 도시 북부를 지나, 지평선을 향해 곧게 뻗은 길을 질주한다. 조금씩 사막화되어가는 들판과 농경지들은 개척시대에 침식당한 듯했다. 그 위로 제트 엔진의 소음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지역사령부가 위치한 곳이 다름 아닌 새크라멘토 국제공항이었기 때문이다. 에반스 중위가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빙빙 도는 꼴들을 보니 활주로가 부족한가 봅니다.” 겨울도 마찬가지로 높은 고도를 본다. 아무리 봐도 민간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대형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동체엔 미 공군의 문장이 식별된다. “확장할 틈이 없었겠죠. 75연대가 공항을 확보한 게 겨우 보름 전인데.” 75연대, 레인저의 원래 역할이 공항 같은 핵심시설을 먼저 점령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기지가 된 것은 그 이후일 테니, 아무리 애를 썼어도 증설엔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애초에 콘크리트가 굳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이윽고 새크라멘토 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자 공항의 전모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들어가는 도로 양편으로 무수한 국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보기에 말끔하니 원래 있던 것들은 아니었다. 성조기 옆엔 국제연합기도 보인다. 검문소 앞에서 헌병대에서 일시정지를 요구했다. 위병장교가 겨울에게 경례했다. “데이비드 임무부대, 확인했습니다. 차단진지를 지나면 선도 차량이 붙을 겁니다.” 그런데 겨울을 보는 위병장교의 표정이 조금 묘한 느낌이었다. 싫다기보다는, 긴장된 호의의 그늘에 기이한 두려움과 경계감이 자리 잡았다고 해야 할까? 겨울은 이 느낌을 막 떠나온 데이비스의 전진기지(FOB)에서도 접한 바 있었다. 역시 같은 헌병대로부터였다. ‘소식이 벌써 여기까지 전해졌나…….’ 계기는 주웨이 소교에 대한 조치였다. 헌병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겨울이 헌병 소위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협조요청, 혹은 그 이상이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혹은 협조요청을 받은 뒤에야 사건을 파악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았다. 헌병소위가 그 일을 반드시 보고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겨울의 당부와 정보국의 요청 사이에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겨울이 직접 요청을 했든, 정보국이 겨울을 감시하고 있었든 헌병대 입장에선 거리낌이 생길 수밖에. 겨울이 군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인상을 주었어도 할 말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므로. ‘그래도……그게 최선이었지. 재산에 관한 건 헌병대가 어떻게 해주지 못할 일이고.’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를 위해서라도 변화는 확실한 편이 나았다. 선도 차량을 따르던 장갑차가 낯선 언어의 한복판을 통과했다. 미군과 완벽하게 동일한 장비를 사용하는 동맹군의 진영이었다. 길가에 있던 병사들이 겨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조금 지나서는 또 다른 동맹군의 진영이었다. 한데 이번엔 장비 수준에서 차이가 났다. 인간의 몸에서 나는 악취도 맴돌았고. 주둔지 전체에서 빈곤의 색채가 묻어난다. 이쪽의 병사들은 명백히 지쳐있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저런 친구들을 보면 짠한 기분이 듭니다.” 어느덧 에반스의 맞은편으로 올라온 포스터 중위가 하는 말. “망명정부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혹은 돈을 얼마나 쓰는가. 예산을 할당하는 분들 입장에서야 앞날을 대비하는 거라고 하겠지만, 당장 내일이 없을지도 모를 저치들은 어쩐답니까. 희생은 언제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군인들의 몫이로군요.” 망명정부들은 돈이 있어도 쓰지 않는다. 병사들의 희생에 고마운 줄 모른다. 그런 논란이 현재진행형이었다. 난민에게 배타적인 성향의 언론들에겐 정말 좋은 소재였다. 정부를 떠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긴 했다. 군인이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 누가 군인을 하라고 떠민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으로 군인이 되었으면서 왜 본인의 의무에 생색을 내려고 하느냐는 이들. 징병제인 국가는 예외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는 사이에 우울한 풍경도 지나갔다. 격납고를 지나서 5분 남짓한 목적지는 공항 본관이었다. 정지한 선도 차량으로부터 헌병장교가 하차했다. 그는 장갑차 상판에서 뛰어내린 겨울과 밖으로 나온 참모들 앞에서 펼친 손으로 방향을 알렸다.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겨울과 참모들은 1층에 마련된 브리핑 룸으로 가게 되어있다. 내부는 많은 인파로 번잡했다. 이제 막 항공편을 타고 온 증원 병력이 바닥에 줄지어 앉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브리핑 룸은 본디 어느 여행사가 사무실과 접수대로 썼을 법한 공간이었다. 겨울이 로저스 소장에게 경례했다. 그는 반원형으로 배열된 좌석을 비스듬히 마주보는 상석에 앉아있었다. 소장을 비롯해 먼저 와있던 전원이 겨울에게 답례했다. “직접 보기는 오랜만이군.” “예.” “이쪽으로 앉지.” 감정이 결여된 음성. 앞줄, 가까운 자리를 권하는 소장에게선 반가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딱히 겨울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는 사람이었다. 겨울은 변화가 없다는 점에 오히려 안심했다. 바뀌었으면 이유를 골몰했을 것이다. 조금 이른 도착이었으므로 참석자들 간에 자그마한 잡담이 흐른다. 겨울을 흘깃거리기도 했으나 다른 인원과 겨울 사이엔 간격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다. 정물(靜物)처럼 지도를 보던 로저스 소장이 불현듯 던지는 질문. “한 소령. 스트릭랜드 소장님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Sir?” “귀관의 안부를 물으시더군.” 스트릭랜드 소장? 잠시 기억을 더듬던 겨울을 향상된 「암기」 보정이 도왔다. “혹시 반덴버그 공군기지 사령관이셨던 스트릭랜드 준장님과 같은 분입니까?” “그렇다. 지금은 공군 기동사령부(Mobility Command) 부사령관으로 영전하셨다.” “…….” 선뜻 답하지 못하는 겨울. 그도 그럴 게, 안다고 하기가 애매했다. 메마른 나뭇가지 같던 준장은 최연소 전쟁영웅의 얼굴을 보겠다고 와서는 정말로 가만히 보기만 하다가 딸을 위해 싸인을 받아갔을 뿐이었으니. “싸인.” 딱 한 마디로 요구하던 과묵한 장군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슷……하진 않은가.’ 스트릭랜드 쪽은 정말 짧게 만났을 뿐이지만, 로저스의 과묵함과는 성질이 많이 달랐다. “왜 대답이 없나?” 다시 묻는 로저스의 음성은 평온하다 싶을 만큼 고저가 없었다. 겨울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답변 드리기가 애매한 질문이어서 그만.” “애매하다?” “예. 전에 잠깐 뵌 일은 있지만 정말로 잠깐이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15분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아는 사이라기엔 많이 모자랍니다.” “흠. 정확하게 언제였지?” “제가 샌프란시스코로 배치될 때였습니다.”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 건으로?” “예.” “스트릭랜드 소장께서 귀관을 만난 것도 작전의 일환이었나?” 이쯤 되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로저스 소장은 불필요해 보이는 일도 필요해서 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캐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착석한 다른 임무부대장들도 자신들의 대화를 그치고 의아한 낯빛이 되어있었다. 당장은 로저스의 속을 알 길이 없어, 겨울은 있는 그대로 답변했다. “아닙니다. 그분께선 그냥 싸인을 받으러 오셨을 뿐입니다.” “……싸인이라고?” “따님께 줄 거라고 하셨습니다.” 큭. 시야 밖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급히 억누르는 기척. 그러나 로저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천천히 겨울을 뜯어보다가 확인하듯 말했다. “보아하니 귀관은 알라모 1이 그분의 딸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것 같군.” “……예. 몰랐습니다.” 설마 군인일 줄이야. 알라모 1이라면 알라모 3, 펠레티어 대위의 편대장이었다. “그런가.” 곱씹던 로저스 소장이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런가. 우연의 일치인가. 귀관의 또 다른 배경은 아니었다는 뜻이군.” “…….” 겨울은 이제야 겨우 로저스의 의도를 깨달았다. 헌병대에 있었던 일을 어느새 로저스 소장도 알고서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 소장이야 알라모 편대장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새삼 안부를 전했을 뿐이었겠으나, 로저스 소장 입장에서는 공교롭게 느꼈을 법 했다. 좌중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들은 아직 경위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면 독대하는 자리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던 겨울은, 어차피 번질 소문이라면 논란의 여지를 미리 없애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로저스는 충분히 유능한 인물이다. 그가 하는 말. “귀관도 힘들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기회가 닿는다면.” 대화를 끝낸 소장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늦는군. 회의 예정시각은 아직 아니었으되, 엄격한 지휘관의 성미엔 조금 일찍 도착해야 적절했다. # 288 [288화] #새크라멘토 (3) 집합완료는 예정시각보다 3분 늦었다. 참석자가 많아, 나중에 온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개중엔 겨울보다 높은 계급도 있었다. “오, 부디 신경 쓰지 말게나.” 자리를 양보하려는 겨울에게, 처음 만난 중령은 손을 저어 사양하며 곤란해 했다. “Listen up.” 로저스 소장이 적막을 불러들였다.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겨울처럼 오랜만에 보는 지휘관들이 많을 텐데, 반갑다는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시작이었다. 실내가 어두워지고, 정면의 스크린에 버려진 도시의 항공사진이 투영되었다. “우리 합동임무부대에 할당된 작전구역은 시가지를 관통하는 99번 국도를 기준으로 북쪽의 아메리칸 강 연안에 이르는 새크라멘토 중심부다. 13개의 교각과 도심 동쪽 주립대학 캠퍼스까지 확보하고 나면 우리의 역할은 끝난다고 볼 수 있다.” 레이저 포인터의 붉은 점이 특정 지점에 여러 개의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현재 헬리본(헬기 수송)으로 투입된 75연대가 시내에 요새화된 거점들을 구축해둔 상태다. 따라서 작전의 첫 번째 단계는 각 임무부대가 지정된 경로로 강을 건너 거점까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75연대로부터 해당 거점을 인수하는 것이다. 교통로 방호엔 카이퍼 임무부대와 240 사단 직할 전차대대, 특수 중장비 대대가 투입될 계획이다.” 겨울은 문서로 배부된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사단 직할 전차대대의 전차들은 내산성(耐酸性) 코팅 처리를 받았다고 나와 있다. 즉 산성아기의 폭발에 완전히 면역이라는 뜻. 이는 겨울의 지휘 장갑차도 아직은 갖추지 못한 능력이었다. 최근 겨울의 임무부대가 부대 단위로 정비를 받긴 했으나, 전선 전체에 걸쳐 내산성 도료 공급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장군이 언급한 특수 중장비들은 본디 공사 현장에나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겨울은 방역전쟁 사양으로 개량된 중장비 일람을 보며 봉쇄선을 소개하던 국방부 대변인의 말을 떠올렸다. 「뭐든지 X나 크고 X나 튼튼하면 지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마개조된 중장비들이 딱 이런 꼴이었다. 연합임무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로저스 소장이 예하의 각 임무부대에 경로를 배정해주었다. 겨울의 경우 증강된 병력으로 캘리포니아 주 의회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소장은 손을 든 겨울에게 주목했다. “질문 있나?” “네. 증강된 병력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입니까?” 자료엔 나와 있지 않았다. 의회의 위치는 그야말로 도심 한복판. 게다가 주변엔 아직 미확보 상태인 고층건물이 많다. 왜 여기를 거점으로 정했는지 의아할 정도. 기존의 데이비드 임무부대 전력만으로는 방어에 주력해야 한다. “흐음.” 소장이 생각 끝에 답했다. “우선은 전차 한 개 소대. 그리고 중대급 임무부대(Company team) 두 개가 추가로 붙을 예정이다.” “추가로 두 개 중대입니까?” 예상보다 너무 많아, 겨울은 적당한 당혹감을 드러냈다. 소장이 240사단장이면서 여러 임무부대의 합동 지휘관인 것처럼, 겨울도 독립중대장이면서 소규모 임무부대 몇 개의 합동 지휘관이 되는 셈이었다. 임시 지휘권이라고 해도 담당 병력이 단숨에 세 배 가깝게 증가한다. 소장은 무미건조하게 긍정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더 늘어날 수도 있지.” “…….” “지금은 임시 편제지만 사실상 고정 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귀관이 대대급 지휘관으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짐작하고 있었다. 중대급 부대엔 과분한 참모진 구성만 봐도 뻔했으므로. “예전 같았으면 능력을 좀 더 검증한 후에 맡길 역할이었겠지.” 그리고 로저스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나?” 즉시 대답하기도 이상하여, 겨울은 약간의 뜸을 들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가. 소장이 느리게 끄덕인다. “병력은 많고 장교는 부족하다. 귀관에게 책임감을 기대하겠다.” 애초에 진심으로 이의를 받을 생각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백 없이 브리핑이 이어졌다. “이 도시에서의 싸움은 앞서 탈환한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사진이 바뀌었다. 도시의 지하를 보여주는 복잡한 그림이었다. “놈들은 하수도와 공동구(Utility tunnel)를 교통로로 이용하면서도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동구와 직접 연결되는 건물들은 공습과 사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출입구이며 지상의 둥지 역할을 하지. 이제까지와 달리 적의 통제력이 충분하다는 방증이다.” 공동구란 매설이 필요한 통신, 전력, 가스, 수도 계통 등을 한꺼번에 몰아넣은, 말하자면 시설 전용 지하 터널을 뜻했다. 여기에 소장이 언급한 지상의 둥지들이 크고 작은 붉은 점으로 강조되었다. 크기의 차이는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변종집단의 규모를 추정한 것이었다. 전파 송수신이 제한되는 지하에서 변종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려면 교활한 것들과 강화변종이 그만큼 많아야 한다. 적의 통제력에 대한 장군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 통제력으로 인한 또 하나의 문제가 민간인들이다.” 화면에 몇 장의 사진이 더해졌다. “도시 탈환이 개시되기 직전, 민간인 거점 한 곳이 변종들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숨어있던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습격한 변종집단엔 트릭스터가 포함되어있었으며, 사람들을 산채로 끌고 갔다고 한다. 숫자는 열일곱. 아직까지 살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중에 짧은 신음이 흐른다. “그렇다. 놈들은 인질을 잡고 있다. 변종들의 특성상 민간인들은 특수변종 가까이에 있거나, 일반 변종들로부터 안전한 장소에 격리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모든 민간인들이 죽거나 구조될 때까지는 지하 경로와 둥지에 대한 공격적인 진입이 제한된다.” 지능이 떨어지는 일반 변종들은 인질을 살려두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장군의 말처럼 특수변종 가까이에 있거나, 통제력을 발휘할 개체가 없어도 무방한 장소에 갇혀있거나 할 것이었다. 고로 열압력탄처럼 밀폐된 공간을 충격파로 싹 쓸어버리는 무기는 사용하기 어렵다. 아무데나 폭파하고 돌입하기도 불가능하고. 한 독립중대장이 손을 들었다. “그럼 당장은 지상에서 소모전을 강요할 뿐입니까?” “어차피 오래가지 못한다. 물은 어떻게 한다고 쳐도 식량이 부족할 테니.” “…….” 로저스 소장이 드물게 인상을 찡그렸다. “놈들의 목적은 시간을 버는 거다. 내키지 않지만 며칠 정도는 어울려주도록 하지. 그동안 지하 경로와 둥지 내부를 감시할 다양한 수단을 강구하면 된다. 정보가 충분히 갖춰지고, 놈들의 밀도가 적정선 이하로 감소한 시점에서 특수작전사령부가 구조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겨울이 생각하기에 설령 험프백이 있더라도 변종들의 식량사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곱추 괴물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다. 첫 조우의 현장에 상한 나무들이 많았던 걸 떠올려보면, 그때는 아마도 초목을 양분으로 삼았던 것 같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특수변종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이상한 바퀴벌레들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곤 했다. 샌프란시스코를 겨우 벗어났을 무렵 포인트 레예스 스테이션의 제과점 창고에서 보았던 흔적도 있었다. 펑퍼짐하게 눌려있던 더러운 자국. 이것이 변종과 관련된 징후가 맞다면, 바퀴벌레는 특수하게 길러지는 식량이 아니었을지. 그렇다 한들 바퀴벌레도 뭔가를 먹어야 증식하지 않겠는가. 남은 브리핑이 진행되는 사이에 겨울은 틈틈이 부대가 배치될 지점, 시 의회의 입지를 검토했다. 주변에 아직 점령하지 못한 고층건물이 많다는 건 즉 산성아기의 활공에 노출되어있다는 뜻이었다. 감염쐐기를 사출하는 특수변종, 헌터가 매복하기에도 좋았다. 비록 발사체 무게 문제로 사거리 바깥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험하다. 로저스 소장은 유능하다. 왜 굳이 여기로 정했을까. 단순히 주 의회를 수복한다는 상징적인 연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발인가?’ 변종들을 소모시킬 작정이라면 다소 불리한 입장에서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인간의 한계 수준인 「통찰」이 겨울의 판단을 긍정했다. 소장 입장에선 가장 신뢰하는 부대를 배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내겠지, 같은 느낌. 또한 문서는 의회에 배치될 다수의 대공포를 언급했다. 지열발전소에서 신세를 진 무기들. 어지간한 숫자의 산성아기로는 탄막을 뚫지 못할 것이었다. 브리핑이 끝난 후. “Sir.” 겨울이 로저스 소장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무슨 일이지?” “실례지만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 소장은 겨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의 참모들을 먼저 내보냈다. “나가서 기다리도록.” Yes sir. 겨울보다 계급이 높은 참모들은 나가면서도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려, 로저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주둔지 문제를 묻지 않는 귀관이라면 벌써 짐작하고 있을 텐데.” 네게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지 않느냐는 의미. 겨울이 끄덕였다. “잘못된 행동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로저스 소장은 창가로 뚜벅뚜벅 다가가 블라인드를 치우고, 따가운 햇살에 몸을 적셨다. 불이 꺼진 실내에서 햇빛은 먼지가 반짝이는 광선의 폭포였다. 까딱. 장군이 겨울에게도 오라고 손짓한다. “봐라.” 겨울은 막사로 가득한 창밖을 보았다. 북적이는 군영이었다. 소장이 묻는다. “소령. 저 많은 군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죽어도 괜찮을 사람이 있겠나?”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전쟁에서 희생은 불가피하다. 싸우다보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지휘관은 그게 누가 될지, 누가 죽어야 피해가 가장 적을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 부하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부하들을 살리겠다는 집착이 군 전체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야기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 각오야말로 지휘관들의 지휘관인 장군의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 구 중국군 협력자, 주웨이 소령 건이다. 귀관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것은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자칫 군의 지휘서열을 무시하려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모르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겠지.” “네. 예상했습니다.” “해당 사건을 보고받은 후에 스트릭랜드 소장님의 연락이 있었다. 지금이야 그게 공교로운 우연이었음을 알지만, 그때는 의심했지. 정보국을 끌어들인 일이 논란이 되는 걸 예방하는 차원에서, 귀관에게 다른 배경이 있음을 넌지시 알린 것은 아닌가.” 조금 지나친 감은 있다. 공군에 속한 스트릭랜드 소장은 육군 소속인 로저스 소장에게 압력을 가할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정보국에 이어 공군 장성이니, 범상한 지휘관에겐 그 상이함만으로도 부담감을 주기 충분했다. “알겠나? 고작 안부 인사였을 뿐인데도 이런 의심을 받은 거다. 귀관이 다름 아닌 한겨울 소령이기 때문이지.” “…….” “어깨에 별을 다는 건 자격과 능력 이상으로 정치력에 좌우된다. 그런 맥락에서 귀관의 영향력에 욕심을 내는 인물은 얼마든지 있겠지. 그것을 경계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브리핑 전, 로저스가 겨울에게 귀관도 힘들겠다고 했던 건 앞으로도 이런 의심들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예언이었다. 겨울은 수긍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난 귀관이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외였다.” 소장이 겨울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느릿하게 묻는다. “그 여자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던가?” “다른 누구였어도 똑같이 도왔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 “귀관이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노력해볼 수 있었겠지. 그래서 귀관이 영웅인 것이고. 하지만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 계급이 높아지고 책임이 늘어날수록, 귀관이 감당해야할 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질 거라는 말이다.” “이해합니다.” “하나하나 마음을 쓰다보면 언젠가는 일부에 매몰되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지휘관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대한 직무유기다.” 겨울은 여전히 차분한 로저스 소장에게서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된 감정의 유적처럼 보였다. # 289 [289화] #새크라멘토 (4) “하지만, Sir.” 소장의 의도는 안다. 그의 경력이 모나고 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허나 소년기에 박제된 겨울로선 받아들이지 못할 내용. 그러므로 겨울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그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고 믿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숫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겠지.” “…….” “귀관의 한계가 내 이상이기를 바라겠다.” 장군이 말하는 건 세월에 부대껴 빛바랜 소망이었다. “모두에게 마음을 주거나,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사람이 할 짓은 못 된다. 뒤쪽은 어떻게든 흉내라도 낼 수 있지만 앞쪽은 그렇지도 않아…….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지 않겠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써줄 수 있는 초월자를 말이야.” 겨울은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직 올레마 FOB에 체류할 무렵, 로저스는 참모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신이 될 순 없지 않느냐고. “허나 세상의 모습을 보면, 주께선 우리가 그리 사랑스럽지 않으신 모양이군.” 대화는 소장의 건조한 한숨으로 끝났다. 하루 뒤, 이야기를 들은 싱 대위는 이렇게 평했다. “결국 소장님께서 말씀하신 책임은 연민을 버리라는 뜻이 되는군요. 우리 내면에 있는 한 갈래 신의 이름을 말입니다.” 로저스 소장은 사람이 아닌 신을 찾았고, 대위는 사람의 안에 있는 신을 찾는다. 이 차이가 겨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단순한 교리상의 차이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탓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캘리포니아 주 의사당 앞, 오랫동안 버려져있던 국기게양대에서 낡은 성조기가 천천히 내려온다. 공보처에서 파견된 인력이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 중이다. 주 의사당 건물은 방치된 시간이 무색하도록 백색이었다. 고전적인 열주(列柱)와 세련된 돔이 아름답다. 지켜보던 정보장교가 불퉁거렸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인데 기념사진부터 찍다니. 이오지마 꼴이라 불길합니다.” 성급한 감이 있는 건 사실이라, 겨울은 별 말을 더하지 않았다. 새 깃발을 올리는 건 병사들의 몫이었다. 공보장교는 화면의 중심에 겨울이 있었으면 했지만, 솔직히 너무 저렴한 연출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령쯤 되는 이가 깃발이나 올리고 있으면 보는 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영락없는 관심병자가 되고 만다. 다행히 공보장교는 설득을 쉽게 받아들였다. 다만 촬영 시점을 늦추라는 요구는 거부했는데, 의사당 건물이 무사할 때 영상을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혹시 교전을 치르게 되면 얼마나 상할지 모른다면서. “촬영은 지금 하되 공개를 나중에 하면 됩니다.” 겨울은 그러라고 했다. 다들 귀찮게 여기긴 하지만 이들의 역할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쨌든 여긴 깃발 가져오라고 귀찮게 구는 장군은 없으니까.’ 이건 앞서 정보장교가 언급한 옛 이오지마 전투 때의 이야기다. 해병대가 섬에 깃발을 꽂았더니, 해군 장관이 기념품으로 삼겠다며 가져오라고 했던 것. 마침내 의사당 지붕 위에 새로운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깃발이 더운 바람에 펼쳐진다. 촬영을 위해 잠시 닫아두었던 창문들이 열리고, 안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기관총과 고속유탄발사기 등 여러 공용화기들을 창틀에 거치했다. 특히 높은 돔에서 화력을 투사하면 모든 방향을 견제할 수 있었다. 여기엔 중화기와 더불어 사격이 뛰어난 병사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나저나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작전장교 포스터 중위가 을씨년스러운 시가지를 노려본다. “강을 건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습격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싱 대위가 발을 구른다. “땅 밑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겠지. 쥐는 다 잡아먹었을 테고.” 잡아먹었다는 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 흔한 고양이나 개, 코요테의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추적」이 보여주는 흔적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 분. 겨울이 찾지 못할 정도면 정말로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잡아먹을 동물이 없다는 건 변종들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하다못해 정신 나간 바퀴조차도 없었다. ‘단순히 병력을 여기 묶어둘 목적이라면 이대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러나 너무 낙관적인 기대일 것이다. 변종들 입장에선 힘이 다하기 전에 한 차례 몰아치는 편이 최선일 테니까. 막말로 어차피 죽을 거면 싸우다 죽는 게 낫다. 그러나 그 싸움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포스터가 낯을 찡그린다. “나중에 들어올 페스트 컨트롤(Pest control/방제 서비스)은 좋아하겠군요.” 표정을 보아하니 변종이 쥐를 뜯어먹는 모습이라도 상상한 것 같다. 겨울이 그에게 지시했다. “중위. 시간이 나는 대로 화생방 대응 훈련 계획을 작성해놔요.” “오늘 내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당장 변종들이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서 병사들을 마냥 쉬게 할 순 없는 노릇. 경계근무에 투입되지 않는 나머지 인원들에겐, 미안하지만 불시에 훈련 상황을 걸어줄 작정이다. 「지하 환경의 유해가스에 적응한 변종이 존재할 가능성 있음.」 이는 국방부 방역전략연구소가 내놓은 소견이었다. 더럽고 부패한 하수도엔 황화수소나 메탄 같은 독성 기체가 고여 있기 쉬웠다. 만약 여기에 적응하는 변종 개체가 생긴다면, 언젠가 조안나가 언급했던 겨자 가스 생성 변종에 버금가는 위협이 될 것이었다. 다만 겨울이 생각하기로 높은 가능성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해로운 건 변종에게도 해롭다. 일단은 피해 다니는 게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생화학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적응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단시간에 출현할 확률은 낮다고 봐야 한다. 보다 안전한 경로인 공동구도 있고.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중보병 소대는?” 겨울의 질문에 싱 대위가 답한다. “의사당 지하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을 겁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일단 주둔지부터 한 바퀴 돌아보고요. 주변 지형을 봐놔야 하니까. 여긴 잠시 대위가 맡고 있어요. 금방 다녀오죠.” “알겠습니다.” 천재의 영역에 도달한 「독도법」과 「암기」의 도움을 받더라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에 미치기는 어렵다. 험비에 올라탄 겨울이 운전병에게 길을 지시했다. 병사는 긴장한 기색으로 차를 몰았다. 거리를 두고 차창에 스치는 건물들을 경계하는 기색. 아직까지 직접 마주친 적 없는 특수변종 헌터의 영향이었다. 의사당 일대의 녹지는 도시의 공원 역할을 겸했다.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여러 기념비로 채워진 역사적인 공간이다. 이는 공보장교가 촬영을 서두른 이유이기도 했다. 겨울은 사격에 방해가 될 나무들을 모조리 폭파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자그마한 숲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겐 약간은 부담스러운 역할이었을지도…….’ 훗날 값싼 언론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고 괜한 트집을 잡는다면, 그때는 겨울의 명성이 방패가 될 것이다. 가아아앙- 가스터빈 엔진 특유의 높은 가동음이 들린다. 멀리서는 가늘다가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커지는 소리였다. 뭔가 하고 보면, 겨울의 지휘를 받게 된 전차소대의 4호차가 장미화원을 짓밟는 중이었다. 험비 두 대가 화원 맞은편의 시내를 경계하고 있다. 이 또한 겨울이 내린 명령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는 1미터 높이의 덤불조차 용납할 수 없다. “잠깐 차 세워요.” “Yes sir.” 험비의 속도가 줄었다. 겨울은 짓이겨진 꽃밭에 내려선다. 경계에 임하던 병사들 쪽으로는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고, 바닥에 흩어진 꽃잎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철이 지난 화원이었다. 그래도 밟히기 전까지 피어있던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용케 무한궤도를 피했는지 형태가 거의 온전했다. 가만히 집어 들어보면, 끄트머리가 검게 죽어 붉은 것은 속잎뿐이었다. 누이를 꽃처럼 기억하는 겨울에겐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운전병은 다시 탑승한 중대장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 꽃을 좋아하시나봅니다?” “좋아한다고 해야 할지, 그립다고 해야 할지.” 가시를 꾸욱 눌러 부러뜨리며 하는 대답이 어떻게 보였는지, 운전병이 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눈동자를 돌려댔다. 아무래도 감정이 새는 모양이었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정면에 의사당을 두는 길. 겨울은 오랜만에 노이즈 메이커를 발견했다. 방역전쟁 초기에 강력한 소음으로 변종들을 교란하던 물건. 태양광 충전 기능이 있으나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이젠 쓸모도 없다. 지금은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옆에 처박힌 채로 비바람에 녹슬어가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역전쟁의 달라진 국면을 상징하는 조형물. ‘어떤 의미로는 기념비가 맞나…….’ 운 좋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앞으로 몇 달만 더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가까운 시일 내로 담보대출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의사당으로 돌아온 겨울은 참모들을 동반하여 곧장 건물 지하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경례로 맞이하는 인물은 개선된 장갑복을 입은 진석이었다. “이젠 장갑복이 아니라 강화복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착용 소감이 어때요?” 겨울이 묻자 진석의 표정이 살짝 풀어진다. “아주 좋습니다. 예전하고는 완전히 다르군요. 가동시간이 짧은 건 단점이지만 방어전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신형 장갑복엔 동력과 인공근육이 추가되었다. 초당 수만 번, 신경신호를 감지하여 착용자의 움직임에 딜레이 없이 동조하는 방식이었다. 겨울이 태어난 시대엔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었으나, 「종말 이후」의 세계에선 미군이 차세대 무기로 연구하던 첨단기술이었다. 다만 배터리 부족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진석을 비롯해 중보병 소대로 선발된 병사들의 등 쪽에 굵은 파워 케이블이 연결되어있는 이유였다. 한 가지 더 특이한 건 감염 여부를 판단하는 감지기가 들어가 있다는 점. 착용자가 괴물로 변할 경우 모든 관절이 잠겨버린다. ‘단시간이라도 강화복을 입은 괴물이 날뛰면 곤란하지.’ 그것은 구울 이상이자 그럼블 미만의 위협이다. 묵직한 무장을 든 채로 발차기를 하거나 팔굽혀펴기를 하는 등, 맨몸과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시험하는 병사들. 그들을 지켜보던 겨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케이블이 끊어졌을 때 카탈로그에 나온 만큼 움직일 순 있고요?” “그건…….” 진석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1시간을 채우려면 냉각장비를 꺼야 합니다. 애들이 더워 죽을 겁니다.” “실내에서는?” “여기서라면 어떻게든…….” “그럼 됐어요.” 겨울이 끄덕였다. 일단 합격이다. 레인저가 요새화한 의사당 건물은 별도의 냉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장에 잔뜩 깔아놓은 태양광 발전 시스템 덕분. 그 외에 가솔린을 태우는 비상 발전기도 연결된 상태였다. 변종을 도발하는 과정에서 멀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 중대장님.” 진석이 이상하게 머뭇거린다. 겨울은 시선을 기울였다. “할 말 있으면 해요.” “그,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혹시 이유라 소위의 소식이 있는지…….” “걱정돼요?” 반쯤 장난으로 물었더니 돌아오는 건 정색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소대장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사적으로는 절대로 가까워지기 싫습니다. 그저 1소대의 분위기가 신경 쓰였을 뿐입니다.” 그런 것 치고 반응이 너무 격렬한데. 겨울은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최고등급 병원선에서 잘 치료받고, 지금은 칼 빈슨 함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어요. 큰 문제는 없음. 조만간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칼 빈슨 함? 그거 항공모함 아닙니까?” “맞아요.” 키치너 제독의 기함이자, 태평양 연안 봉쇄의 사령탑이기도 하다. 가벼운 긍정에 진석이 혼란스러워한다. “……머리를 다친 사람이 어째서 거기로 간 겁니까?” “몰랐나본데, 항공모함도 3등급 병원선이거든요. 처음 치료받은 병원선에 자리가 부족해서 그리로 이송 되었다네요.” 이유라 본인은 요양이 아니라 관광을 하는 느낌인 모양이었다. 전화는 놓칠 때가 많으니 문자를 보내오는데, 주로 혼자 즐거워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다들 친절하여 잘 지내고 있노라고. 호랑이 여전사의 유명세와 더불어 그녀의 순수한 친화력이 큰 힘이었을 것이다. 마침 말이 나온 김에 겨울은 넷 워리어 단말을 조작하여 사진 폴더를 열었다. 유라가 항모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니며 승조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다. 그녀다운 자랑을 겸하여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보내온 것들. 그중 하나를 진석에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의 유라는 전폭기가 출격하는 갑판 위에서 묶지 않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석이 끄덕인다. “불쾌할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군요. 부하들 걱정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복귀하지 않고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진심으로 오해받기 싫은 눈치였다. # 290 [290화] #새크라멘토 (5) 날이 두 번 바뀌었다. 이틀간, 겨울의 임무부대는 전투다운 전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사실 도시에 입성한 다른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였다. 불리한 입장에서 변종들을 끌어낸다는 로저스 소장의 계획은, 현재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없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무전망에 서러운 울음소리가 퍼졌다. [엄마아아아아!] 겨울은 이것을 육성으로도 들을 수 있었다. 우는 아이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그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굵고 긴 괴물의 손. 어린 울음을 여러 주파수에 걸쳐 생중계하고 있는 것도 역시 이 괴물이었다. 트릭스터 하나에 규모 미상의 기타 변종으로 구성된 집단은, 대담하게도 주 의사당 지척까지 와서 건물 하나를 점거한 채 인간의 군대를 도발하는 중이었다. 조롱처럼 느껴지기도 하여, 겨울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 참모들의 표정이 심하게 썩어 들어갔다. [중대장님, 저희는 준비 끝났어요.] 중대 채널로 들려오는 한별의 보고. 목소리가 딱딱하여 평소 같지 않다. 겨울을 제외하면 중대 최고의 저격수인 그녀는 일련의 특등사수들과 함께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이름을 붙여줄 만큼 아끼는 대물저격총은 지금 괴물의 생명을 조준하고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답신했다. “대기. 허가가 있을 경우에만 쏴요.” [네.] 당장은 쏠 수 없다. 트릭스터의 머리통이 박살나는 순간 아이도 그대로 떨어져 죽을 테니까. 건물 높이는 낮을지언정 머리부터 낙하했다간 기적을 바라기 어렵다. 아이가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교활한 것의 죽음은 교활하지 못한 것들의 폭주로 이어진다. 역병의 무리는 고삐가 풀리는 즉시 아이를 물어뜯을 것이다. 아이의 앙상한 모습과 변종들의 굶주림을 감안할 때, 숙주보다는 식량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빠르게 올라간다 쳐도 아이의 뼈에 살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애한테 접근하는 놈들을 창 밖에서 다 쏴죽일 수는……없겠구나.’ 대물저격총으로 벽을 뚫고 쏠 순 있어도, 사각(死角)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연합임무부대 통제실과 교신하던 통신장교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Sir. 아이의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납치된 17명의 민간인 중 하나가 맞답니다.” “그래요…….” 겨울도 교신을 듣고 있었다. 강화된 청각은 교신 전반은 물론이고 그 배경의 절규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통제실에 있는 민간인 가운데 아이의 부모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어 작전장교가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알렸다. “실내에 연기가 차오릅니다.” 그의 태블릿은 현재 변종들이 점거한 옛 재무부 건물 내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군은 도시의 모든 건물들을 점령 상태로 유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낮 시간에 빈 건물마다 감시수단을 설치하거나 폐쇄회로를 복원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기동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 그러나 건물의 수가 몇 개이며 요충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현재까지 설치된 카메라의 숫자는 턱없이 적고, 설치된 건물도 구석구석을 다 비출 정도는 아니다. 전력을 공급할 방법부터가 제한적이었다. “줘 봐요.” 손짓으로 전술정보 태블릿을 넘겨받는 겨울. 포스터 중위의 말처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이었다. 불이 꺼진 실내에서 연기는 밤에 보는 먹구름처럼 짙었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괴물이었다. 불투명한 속에 무엇을 감추었을지 모를. ‘애크리드의 연막인가, 진짜 화재인가.’ 방역전략연구소는 변종들의 조직적인 방화를 경고했다. 이미 죽기로 각오한 집단이라면 최후의 순간 도시 전체를 불태우려 들 가능성이 있노라고. 그에 반해 지금은 공멸이 아닌 유인의 수단이었다. 로저스 소장이 변종들을 유인하려 했듯이, 영리한 괴물 또한 무장한 인간들을 폐쇄된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싱 대위가 건물 설계도를 검토하는 겨울에게 말했다. “함정입니다. 말려들어선 안 됩니다.” 아까부터 수염을 떨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뱉는 말이다. 의견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타이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사자처럼 당겨진 전신. 힘이 과하게 들어간 손은 하얗게 변한지 오래였다. 겨울이 짧은 한숨을 지어냈다. “아는데……. 그냥 두면 본보기로 태워 죽일 거예요.” 공갈로 간주하여 무시할 경우, 교활한 변종은 아이를 태워 죽일 것이다. 그래야만 이후의 인질극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산 채로 불에 타 죽는 아이의 비명 역시 지금처럼 생중계로 뿌려질 것이고. “이 근처의 지하구조에 대해 추가로 들어온 정보는 없어요?” 겨울이 묻자 머레이 중위가 난처해했다. “이제 겨우 이틀이 흘렀을 뿐입니다. 모든 경로를 발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 의회도서관에 설계도가 남아있는지 찾아보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왜 하필 의회도서관이냐면, 공공사업에 관한 모든 보고서를 원본이든 사본이든 수납하는 기관이라서였다. 군이 처음 협조를 요청한 연방 도시개발부는 새크라멘토의 지하구조에 대해선 최신자료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주 정부가 보관하고 있었겠지.’ 캘리포니아에 있던 데이터 센터가 증발해버린 탓도 컸다. 근처에서 트릭스터의 자폭 충격파가 터진 적이 있어, 시설을 되찾아도 복구가 요원했다. 주 정부 건물들을 수색하고는 있으나 현 시점에선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겨울이 현재 확인 가능한 지하 지도는 최대 20년 가까이 낡은 정보였다. 괴물들만 아는 샛길이 따로 있다는 뜻. “Sir. 위력정찰 명령입니다. 중보병 소대를 진입시키라고…….” 에반스 중위가 통신을 전달하며 싱 대위의 눈치를 보았다. 수염 무성한 시크교도가 노여움에 꿈틀거린 탓이다. 한층 더 강해진 노여움엔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다. “중대장님. 저는 이게 합리적인 판단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재고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는 로저스 소장 개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사령부가 외압을 받고 있을 거란 뜻이에요?” “왜 아니겠습니까. 그놈의 종군기자단이 문제입니다.” “…….” “통제하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이 비명도 특종이랍시고 보내는 중이겠지요.” 아이는 여전히 창 밖에 매달려 울고 있다. 그 울음을 중계하는 트릭스터의 전파는 적어도 수 킬로미터까지 닿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게 목적이었는지, 방해전파조차 쓰지 않는다. 이런 도발은 이미 어제부터 있었다. 종군기자단 가운데 누군가가 이를 수신한 것도 간밤의 일이었고. 그 결과 날이 밝았을 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보도관제가 예전 같지 않아.’ 치열한 대선경쟁이 전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권력의 망자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 정보국이나 수사국은 물론이고 국방부 내부에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 정권을 물어뜯을 소재로서의 특종도 예전보다 유출되기 쉬워진 셈. 이제 와서 보도관제를 걸어봐야 여론의 반발에 직면할 뿐이다. 현 대통령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공화당 후보, 에드거 크레이머에겐 그것 또한 하나의 기회가 될 터. 정작 교활한 괴물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의 사정이 괴물의 수작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진석의 발언이 참모들의 시선을 모은다. 중대에서 가장 공격적인 소위는 진작부터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1층 로비까지 장갑차를 진입시키면 언제든 엄호를 받으며 물러나서 교대로 충전이 가능합니다. 카탈로그 스펙상 장갑복은 제한적으로 방화복 역할도 합니다. 그리고 장갑복 동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괴물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더라도 뭉개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훈련시켜왔고요. 우리 애들을 믿어주십시오.” 그가 말하는 장갑차는 병력 탑승칸에 발전기를 탑재한 개조차량이었다. 외부에 접속단자가 있어 중보병들의 파워 케이블이 연결된다. 그래도 장갑차라서 포탑이 달려있는지라 화력지원 임무 역시 소화한다. 겨울은 진석에게서 결연함과 절박함을 읽었다. ‘설계도상으로는……장갑차 이외의 차량 진입은 곤란한가.’ 애초에 사람 들어가라고 만든 문으로 장갑차를 밀어 넣는 일이다. 로비에 기갑차량 여러 대가 들어가 버리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했다. 화력이 늘어난들 기동성을 잃으면 고정된 표적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대위. 재고하라는 요청은 소용없을 거예요.” 겨울은 로저스 소장의 성격을 곱씹어보고 하는 말이었다. 싱 대위는 쓴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작전장교 포스터가 말한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놈이 움직이고 있군요. 저 위치라면 층계까지 금방입니다.” 들이치려면 아이의 위치가 확실할 때 쳐야 한다. 결정을 내릴 때다. 겨울이 끄덕였다. “전차 소대에 전달. 1층 입구를 중심으로 전면의 벽을 날려버릴 것. 최소한 폭 30미터의 진입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탄종과 사격은 소대장 임의에 맡기겠다고 전해요.” “Aye sir!” “진입로가 만들어지는 즉시 박 소위는 중보병 소대와 함께 진입하세요. 독립중대 1소대, 3소대가 엄호. 스나이더 임무부대는 이대로 거점에 남고, 4소대는 예비대, 그레이 임무부대가 주변 길목을 차단합니다. 전차소대 3호, 4호차는 동쪽과 서쪽 교차로에 배치하겠습니다. 상황실에 항공지원과 소방지원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통보해요.” 겨울은 임시로 지휘를 맡게 된 다른 임무부대들의 배치까지 정했다. 그쪽도 각각 중대장이 있으니 개략적인 임무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멍청하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미군 장교들의 능력은 믿을 만하다. 통신장교가 무전을 전하는 동안 겨울이 주 재무부 건물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스 신전을 모방했으나 장식 이상의 의미는 없는 열주 위로, 둔각을 낀 삼각의 지붕 아래 어느 시구 하나가 음각되어있었다. 나에게 내 산맥에 어울리는 남자들을 다오.(Bring me men to match my mountains.) 공교롭게도 겨울이 한 번 접했던 시였다. 지금의 세계가 아닌 과거에, 친해진 어느 공군장교가 이 시에 얽힌 생도 시절의 말썽 하나를 들려주었던 덕분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외우곤 했다. 「내 산맥에 어울리는 남자들을 다오. 내 벌판에 어울리는 남자들을 다오. 각자가 거대한 나라를 꿈꾸며, 머릿속에 새로운 시대가 들어있는 남자들을 다오…….」 이 시의 제목은 도래하는 미국인(The Coming American)이었다. 겨울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잃어버린 영토에 도래한 미국인들이 이제 포탄을 때려 박으며 나아갈 참이다. 콰앙! 정문이 폭발했다. 좌우의 문설주를 겨냥한 포격이었다. 문짝을 쐈다간 그냥 뚫고 들어갔을 것이다. 파편이 흩어지고, 좌르르 쏟아지듯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뒤로 이어지는 연속포격. 전차 주포가 번뜩일 때마다 그 주변의 지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폭발의 여파로 한참 떨어진 겨울에게까지 바람이 밀려왔다. 따가운 모래가 섞여있어 눈을 가늘게 떠야했다. ‘건물 전면이 통째로 무너지진 않겠지…….’ 폭을 30미터로 잡은 건 막연한 감각이었다. 넓을수록 좋지만, 너무 크게 뚫으면 정말로 붕괴를 걱정해야 한다. 사격이 잦아들기 무섭게 겨울이 신호했다. “2소대, 돌입! 1, 3소대 전개!” 중보병들과 장갑차가 콘크리트 파편을 우득우득 밟아대며 나아갔다. 1층을 장악하면 괴물들의 퇴로가 끊길뿐더러, 증원을 차단할 수도 있었다. 철컥. 무기를 점검하는 겨울에게 싱 대위가 묻는다. “설마 직접 교전하실 작정이십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게 되겠죠.” 뭔가를 더 말하려는 싱에게 겨울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난 아직은 중대장이에요.”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실질적인 대대장이라지만, 내부를 관측할 수단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 지휘관이랍시고 바깥에만 있을 순 없다. 헬멧 카메라에서 송신되는 영상도 화강암에 가로막혀 감도가 떨어지기 십상이었고. 트릭스터가 동족의 시체를 준비해두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보병장비의 EMP 내성을 완전히 신뢰하기도 어렵다. 무너진 벽 너머의 어둑한 실내에서 총성과 괴성의 화음이 울려 퍼졌다. # 291 [291화] #새크라멘토 (6) [1분대, 2분대! 파워 케이블 분리! 층계와 승강기 수직통로부터 차단한다!] 무전기에서 진석의 외침이 지직거렸다. [겁먹지 마라! 상대가 그럼블만 아니면 우리는 무적이다! 그 덩치가 이런 데 있을 리 없잖아! 야! 박재원이 이 새끼! 달라붙든 말든 뭉개면서 전진하라고! 임 상병! 저 놈 쏴버려! 뭐? 박재원이 말이야! 쏴버리라고! 안 죽어! 미친!] 장갑복의 방어력을 믿으라는 명령이었다. 지시를 받은 2소대 상병 임호진이 자신의 분대원을 조준, 경기관총을 난사했다. 한 사람 깔아놓고 구더기처럼 들끓던 변종들이 잔혹하게 벗겨져 나간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며 끊어진 팔다리가 비산하는 광경. 바닥에 깔려있던 먼지 층이 오염된 피로 물들었다. 변종들의 광란에 밀려 검붉은 덩어리가 된다. 으악, 으아아악! 장갑을 뜯어내려는 아귀들로부터 간신히 해방된 박재원 일병이 착란을 일으켰다. 일찍이 겨울은 장갑복이 숙련병을 위한 장비라고 평한 바 있다. 동력이 추가된 지금도 그러했다. 당장 눈앞에서 변색된 이빨이 따다다닥 거리면 정줄을 놓아버리는 게 정상이었다. [정신 차려! 총구를 지금 어디다 들이대는 거야! 일어서!] 오인사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나아간 진석이 소대원을 후려쳤다. 쾅! 인공근육으로 강화된 주먹질은 장갑복을 입었어도 충격이었다. 장갑판이 찌그러졌다. [너! 돌아가서 보자!] 스피커 너머로도 이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런 식의 윽박지르기가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제압한다는 느낌. 최선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진석 나름의 지도방식이었다. 일일이 참견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캬아아아악! 역병의 무리는 연막을 뚫고 맹렬하게 쇄도했다. 천장을 부수며 쏟아지는 광경도 보인다. 여기에 환기구를 이용하기까지. 감시를 벗어난 규모다. 명백히 준비된 함정이었다. 아직은 바깥에서 지켜보는 입장인 겨울이 추가로 지시했다. “2소대 3분대! 4분대! 동쪽 복도로 진입! 1분대와 2분대의 측면으로 가는 길목을 막을 것!” 즉각 진석의 답신이 돌아온다. [안 됩니다! 걔들은 예비전력입니다! 소대 전체 배터리가 한꺼번에 바닥나면 어떡합니까!] 중보병의 충전시간은 길다. 고로 공백 없이 싸우려면 절반은 예비로 둬야 했다. 허나 그 예비를 그냥 놀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잠깐이면 돼요! 어차피 교대할 때까진 아직 여유가 있잖아요! 잠깐 싸우고 물러나면 교대할 때 쯤 완충상태일 거예요! 앞으로 약 10분! 3분대, 4분대는 앞으로 10분간 교전합니다!” [윽……. 알겠습니다!] 진석은 책임감으로 장비 사양을 숙지했겠으나, 이는 겨울도 마찬가지다. 반론은 없었다. 또한 전투가 그렇게까지 길어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미처 교대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날 경우 예비 분대들은 잉여전력이 되어버리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지휘관은 전력을 투입할 시점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중대장과 소대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3, 4소대 중보병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변종들은 또한 미친 듯이 죽어나갔다. 현 시점에서 놈들이 아는 중보병은 단단한 만큼 둔해빠진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개량된 장갑복에 대한 경험은 아직 축적된 바가 없을 터. 일방적인 손실을 강요할 수 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면……아니, 소용없겠구나.’ 정보가 퍼지는 걸 막기는 어렵겠다. 여기서만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포스터 중위를 걷어찼다. 컥! 작전장교가 뒤로 나뒹구는 순간, 채 거두어지지 않은 겨울의 군홧발을 희끄무레한 것이 스쳤다. 팍삭! 그것이 아스팔트에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 불티와 함께 튀는 파편들은 누렇게 착색된 상아색이었다. 박살난 조각들이 후두둑 튀었다. 직후 감각보정의 사선경고가 그어졌던 쪽으로 사격자세를 잡는 겨울. 그러나 채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특수변종의 머리통이 터졌다. 찰나의 차이를 두고 후방에서 울려 퍼지는 독특한 총성. [죄송해요! 조금 더 빨리 잡을 수 있었는데!] 한별의 무전이었다. “아뇨. 아주 훌륭했어요. 머리 내미는 놈들은 다 쏴 죽여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출중한 실력이다. 겨울의 감지와 거의 동시에 표적을 발견한 셈이었으니까. 포트 베닝의 저격수 양성과정에서 사격 하나만은 최고였다더니. 철갑고폭탄을 맞고 머리가 사라진 헌터의 시신이 벽 바깥으로 축 늘어졌다. 벽을 이루는 화강암을 타고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으……. 대체 무슨?” 굉장히 아픈 얼굴로 맞은 곳을 쓰다듬던 포스터는, 옷 위로 뭔가 만져지자 별 생각 없이 집어보았다. 그것은 감염돌기가 스멀거리는 법랑질의 파편이었다. “이익!” 질겁을 하며 옷을 털어대는 그. 허나 감염돌기에 닿아도 상처가 없으면 감염되지 않는다. 예외는 점막에 대한 직접접촉 뿐이며, 상처 감염에 비해 확률도 낮았다. 포스터는 황급히 손에 상처가 있는지 살피다가, 장갑을 끼고 있음을 뒤늦게 자각하고 겨우 안도했다. 겨울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요. 너무 급해서 그만.” “아닙니다. 맙소사. 지옥으로 떨어질 뻔 했군요.” “맞은 덴 괜찮아요?” 작전장교가 머뭇거렸으나, 거짓말을 하자니 지금까지의 표정이 너무 정직하게 아팠다. “꼭 교통사고를 당한 느낌입니다.” “…….” 그는 호흡이 거북해보였다. 방탄복을 쳤는데도 뼈가 부러졌을지 모르겠다. 겨울로선 반사적인 반응이었기에 힘 조절이 충분치 못했다. 지휘장갑차 후방 개폐구 안쪽에서 통신을 중계하던 통신장교가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헌터의 공기압 발사체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하다. 지금은 방탄복을 관통하진 못할지언정 신형 전투복은 꿰뚫을 정도의 간격이었다. 싱 대위가 말했다. “방금 그 공격은 꼭 장교들을 노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전파발신을 탐지하는 트릭스터가 있으니 지휘관의 위치를 알아내기는 쉬웠을 것이었다. 겨울을 노렸으나 낮은 정확도 탓에 빗나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참모들이 조금 물러났다. 장갑차에 기대는 사각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겨울이 좀 더 빨리 알아차렸겠지만, 짙은 연막은 환경적인 「기척차단」이었다. 수면 아래의 멜빌레이가 감각보정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 감각보정의 작용 거리가 축소되고, 시간적으로도 지연된다. 연막이 짙어지고 있다. 전차 포탄의 충격파가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쉈음에도 불구하고, 환기로 드는 바깥바람보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연막의 양이 훨씬 더 많았다. 건물 규모에 비해 창문의 숫자와 크기가 적지 않건만, 갈수록 이 지경이니 대체 몇 개체의 애크리드가 연기를 뿜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하가 이미 불바다라는 가정은 논외다. 그렇게 되면 변종들의 길도 막혀버리지 않겠는가. ‘벽을 더 부숴야겠는데…….’ 실내 관측이 불가능한 구획은 포격을 가하기도 조심스러워진다. 그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 전차 주포에 인질이 죽었다간 문자 그대로의 참사였다. 직접 들어가면 감각보정이 한층 선명해질 터. 그러나 지휘관은 혼자 잘 싸우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다. 여차하면 직접 싸우겠다고 공언했으나, 아직은 좀 더 지켜볼 때였다. “3소대를 엄호임무에서 빼내야겠어요.” 싱 대위는 겨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추가 진입로를 확보합니까?” “예. 3소대는 왼쪽으로, 예비대인 4소대를 오른쪽으로 돌리죠. 다른 중대들은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해요. 주의가 집중된 사이에 다른 방향에서 기습을 당할 가능성이 있어요.” 겨울은 성동격서를 경계했다. 아직 미지의 지하경로가 남아있는 한 어느 어귀에서든 대량의 변종집단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위력정찰뿐입니다.” 대위의 지적. 로저스 소장은 구조임무를 하달하지 않았다. 즉, 적의 저항 강도를 판단한 지금은 철수해도 무방하다는 뜻. 그러므로 중보병이 아닌 병력을 진입시켰다가 발생하는 피해에 대해선 전적으로 현장지휘관인 겨울이 책임을 지게 된다. “깊이 들어갈 필요 없어요. 길만 내면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헌데 그렇게 되면 1소대의 부담이…….” 전력 분산을 우려하는 대위였으나, 말을 채 끝내지 못한다. 콰르릉! 폭발은 전차가 있던 교차로에서 일어났다. 마른 땅이 매캐한 먼지를 뿜는다. 여파로 도로 한복판이 푹 꺼지고 주위의 아스팔트가 가문 날의 논밭처럼 갈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바람이 거의 없는 날이라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혼비백산한 통신장교가 즉시 교신을 시도했다. “발러 1-3. 발러 1-3. 무사한가?” [윽, 당소 발러 1-3. 데이비드 액추얼인가?] “그렇다.” 함몰된 구멍으로 떨어진 전차로부터의 회신이었다.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에 부상자는 없지만……엔진이 살아있어도 자력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젠장, 우리가 무슨 공격을 받은 건지 확인 바란다.] 겨울이 통신장교의 헤드셋을 넘겨받았다.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귀소는 현재 상태로 대기. 밖으로 나오지 말고 구난전차를 기다려라.”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빠르게 생각하는 겨울. 변종들이 이런 폭발을 일으킬 방법이 있을까? ‘전차가 격파되지 않은 걸 보면 본격적인 폭발물은 아니야.’ 아무리 전차라도 모든 부위가 두껍진 못하다. 변종들이 버려진 포탄이나 폭탄 따위를 주워다 터트렸다면 전차 승무원들은 지금쯤 각자가 믿는 신을 만나고 있을 것이었다. 결국 위력이 집중되지 않은 폭발이었다는 뜻인데……. 아, 메탄. 겨울은 간신히 깨달았다. 지하에 고여 있을지 모른다던 그 유독가스들. 개중엔 가연성도 있었다. 변종 하나가 불씨를 쥐고 뛰어들기만 하면 된다. 전차의 육중함은 붕괴를 확대시키는 요인이기도 하고. 트릭스터는 인질극을 벌일 장소를 선정할 때 여기까지 내다보았을 것이다. [데이비드 액추얼! 데이비드 액추얼! 놈들이다! 공격받고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고정된 전차는 좋은 표적이다. 겨울이 외쳤다. “대위. 이쪽을 맡길게요!” “알겠습니다!” 원래의 작전현장을 싱 대위에게 위임하고 돌아서는 찰나, 땅에 생긴 균열로부터 작은 특수변종들이 와라락 튀어나왔다. 그것들의 눈동자는 겨울에게 못 박힌 채였다. 이는 휘하의 다른 중대가 형성한 외곽 경계선 안쪽에서 창졸간에 벌어진 일. 그들은 겨울을 비롯한 지휘부가 맞을까봐 함부로 쏠 수도 없었다. 사격의 기세가 약한 이유였다. “무슨!” 작전장교가 경악하여 무기를 든다. 나머지 참모들도 마찬가지. 장갑차로 피신하자니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닿을 간격과 속도였다.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겨울은 시간이 살짝 느려진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시스템의 보정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겨울이 한 호흡의 조준사격으로 아홉 개체의 스캠퍼를 사살했다. 지휘장갑차의 무인포탑이 한 박자 늦게 무차별 사격을 개시한다. 사선 저편의 아군 부대가 급하게 엄폐물을 찾았다. 참모들이 가세하고, 아직 메인 로비 정면에 있던 두 개 소대 또한 이쪽으로 사선을 돌렸다. 그러나 작고 빠른 괴물들이 지그재그로 튀는 바람에 빗나가는 탄환이 많다. “재장전!” 작전장교의 비명 같은 엄호 요청. 그러나 장전을 끝내기도 전에 놈들의 선두가 육박해왔다. 곧바로 육탄전에 돌입하려던 겨울이 온 몸에 제동을 걸며 신음했다. 무려 6미터 밖에서부터 겨울을 향해 도약하는 괴물을, 싱 대위가 온 몸으로 가로막은 탓이었다. 안전을 도외시하고 상급자를 지키겠다는 의지. 철컥거리는 그의 개인화기는 탄창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콰득! 포물선으로 떨어지는 이빨에 개머리판을 박아 넣은 대위가 총을 놓아버리고 허리에 찬 장검을 뽑는다. “칼사 만세! 승리는 오직 신께만 있도다!” 쇳빛이 번뜩이는 궤적에 변색된 피가 흩뿌려졌다. # 292 [292화] #새크라멘토 (7) 측면으로 두 걸음. 사각(射角)을 확보한 겨울이 제압사격 같은 조준사격으로 변종집단을 성기게 만들었다. 보이는 대로 쏴 죽이는 게 아니다. 적의 밀도를 낮춰 아군에게 여유를 주기 위함. 지금의 최악은 변종의 숫자가 아군의 순간 저지력을 능가하는 것이다. 동시에 교신을 시도한다.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각 제대는 전면에만 집중할 것!” 총을 홱 비틀어 빈 탄창을 날리고 새 탄창을 끼우며 다시 강조했다. “반복한다! 전면에만 집중할 것! 이쪽에 신경 끄라고!” 말이 거친 것은 맹렬한 총성을 뚫어야 할 외침인 까닭. 또한 그만큼 상황이 급한 탓이었다. 외곽경계에 배치된 병력이 지휘부 피습에 전전긍긍하는 사이, 또한 그들 일부가 이쪽의 방어사격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움츠러든 틈에, 전술적 「통찰」로 묶인 「위기감지」와 「전투감각」이 경계선 바깥 방향으로부터의 위협을 미친 듯이 경고했다. 안팎에서 동시에 흔들어 무너뜨린다. 가장 교활한 괴물의 승부수일 것이었다. 또한 역병집단이 트릭스터 제거 작전, 프레벤티브 스캘핑을 겪으며 학습한 것일지도 몰랐다. 통제력을 발휘하는 개체부터 제거한다는 전술적인 개념을. “문 닫아요!” 겨울의 단호한 명령에 차내에서 어정쩡하던 통신장교가 폐쇄 버튼을 눌렀다. 체인을 감는 모터 소리와 함께 올라가기 시작하는 장갑차의 후방 개폐구. “경계선을 통제해요!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그리고 상급부대와 연계를! 공중지원이 오면 대공포부터 꺼요!” 통신장교는 겨우 끄덕였다. 포스터가 장전 도중 탄창을 놓쳤다. 작전장교는 즉시 소총을 놓고 권총사격으로 전환했다. 타탕! 탕! 몸통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훈련으로 몸에 새긴 본능이 기계적으로 튀어나온다. 사람이었다면 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키가 작은 특수변종들, 아마도 변형된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통증이 없었다. 다른 변종에 비해서도 훨씬 더. 작아도 특수변종답다고 해야 할 지. 고로 권총 사격은 체내에서 깨지는 파열탄조차도 위력부족이었다. 사전에 검토한 영상 속에선, 몸 절반이 너덜거려도 팔을 물고 늘어지던 놈들 아닌가. 총탄이 머리를 때렸으나 치명상이 아니었나보다. 다만 횡격막 아래를 관통당하면서 약해진 호흡이 발을 잡아챈다. 그 위로 잘 갈린 장검이 떨어졌다. 칼날의 수직낙하에 경추를 베인 놈은 이제야 핏빛으로 나뒹굴었다. 아스팔트에 갈리며 관성으로 미끄러져 작전장교의 발치까지. 남은 눈알을 굴리며 이빨을 따닥거리지만 목 아래는 움직이지 않는다. 포스터가 진저리를 치며 그 머리에 두 발을 더 쏘았다. 심정적으로 불가피한 낭비였다. 핵심은 질량이었다. 숙련된 칼질에 실린 체중은 총탄의 저지력을 현격히 능가했다. 달려드는 힘과 나아가는 체중이 정교한 기술 속에 맞물려, 한 합의 베기에 상하로 쪼개지는 놈마저 보였다. 펼쳐진 소장과 대장 줄기 위에 심장이 뛰는 상체가 버둥거린다. “2소대! 현 위치를 고수해요!” [하지만 중보병을 그쪽으로 투입하면…….] “명령입니다! 1소대, 3소대는 고수방어! 2소대의 뒤를 막아요! 이쪽에서 2소대 후방을 치는 놈들이 없게끔!” 사격을 쉬지 않는 겨울의 날카로운 명령들. 인질도 인질이거니와 트릭스터를 놓칠 순 없다. 놈이 퇴로가 끊기기 쉬운 상층까지 올라간 건 1차적으로 도발을 위해서였겠으나, 한편으로는 이때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Frag out!” 정보장교가 수류탄 투척을 경고했다. 던지는 순간의 외침이라 만류할 틈이 없었다. 캭! 심지가 짧아지길 기다리지 않고 던진 수류탄은 변종이 노리기에 좋았다. 펄쩍 튀어 수류탄을 후려치려는 손바닥. 그 순간 손목이 찢어졌다. 겨울이 쏜 두 발이었다. 다음 순간, 도약의 정점을 지나 추락하던 괴물이 남은 한 손으로 수류탄을 낚아챈다. 한 번은 헛손질이었고 두 번째엔 성공했다. 던지기에 늦었음을 알고 터지기 직전에 끌어안는다. 퍼엉! 웅크렸던 특수변종이 허공에서 터졌다. 가벼워진 몸뚱이가 떨어져 동족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이를 막지 못한 것은 겨울에게 더 급한 표적들이 생긴 까닭. 방탄복을 입었거나 산성아기를 업은 놈들이었다. 산성아기는 거리를 좁혀놓고 던질 요량인가보다. 그래야 저들 머리 위에서 터질 일이 없을 테니까. 장갑차와는 다른 엔진 소리가 가까워졌다. 처음부터 지휘장갑차를 호위하던 험비였다. “DAYUM!” 포탑으로부터 들려오는 욕설. 중기관총이 기능고장을 일으켰다. 철컥철컥! 씹힌 실탄을 강제로 배출시키고 재차 격발. 포성 같은 총성이 쾅쾅 울릴 때마다 사선에 노출된 변종들은 맞추지 못할 조각들로 찢어졌다. 허나 여러 발에 하나 꼴로 죽는다. 화력을 분산시키고자 좌우로 좍 흩어진 변종집단은 어느덧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길게 갈라진 도로의 짙은 연막으로부터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 유황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악마들처럼 보였다. 특수변종만으로는 모자란 숫자를 일반변종들이 메꿨다. 개중엔 머리 위로 차량에서 뜯어낸 문짝 따위를 든 녀석들이 많았다. 최소사거리 안쪽이라 박격포 사격도 불가능하다. ‘가능해도 쏘지 말라고 막았겠지만.’ 아무리 바람이 적은 날이어도 박격포탄엔 최소한의 오차범위가 있었다. 겨울이야 그렇다 치고, 운이 나쁘면 구덩이에 빠진 전차 위로 떨어진다. 차체 후방, 방어력이 약한 엔진 그릴에 맞았다가 연료가 발화하면 어쩐단 말인가. 승무원들은 탈출도 못한다. ‘설마 여기까지 계산했던 걸까…….’ 전차를 방패삼아 균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제한한다는 발상. 하지만 이 가정이 사실이더라도 유탄사격엔 제한이 없다. 지휘장갑차 좌측에서 돌출한 또 한 대의 험비가 공중폭발유탄을 연사로 터트렸다. 그것은 변종들에게 쏟아지는 강철파편의 폭우였다. 방패를 든 놈들이야 어찌어찌 버틴다. 그러나 기어 나오다 말고 굴러 떨어지는 숫자가 더 많았다. 외곽 경계선에서도 전투가 격해지고 있었다. 처음의 감각보정이 맞았다. “중위!” 겨울은 포스터를 장갑차 위로 밀어 올렸다. 그는 아까부터 숨 쉬기 힘들어하던 참이다. 혹시라도 변종의 접근을 허용하게 되면 꼼짝없이 당하기 쉬웠다. 이 순간 갑작스러운 돌풍이 밀어닥쳤다. [Guns, Guns, Guns.] 버려진 호텔 최상층을 끼고 돌아 신기루처럼 등장한 공격헬기가 도로를 갈아엎는다. 기관포탄 폭발이 서로 다른 직선으로 몇 번이나 질주했다. 승용차 문짝 따위로 막을 위력이 아니었다. 통신장교 에반스가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했는지, 전차가 있을 구덩이는 공격범위를 매번 벗어났다. 지금 나머지 참모들을 장갑차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면 좋겠으나, 겨울의 지휘장갑차는 아직 내산성 코팅을 받기 전이었다. 산성아기에게 직격당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재무부 건물로 갈지 모를 변종집단을 여기서 막아줄 필요도 있었다. 싱 대위는 칼을 놓아버렸다. 뼈에 잘못 박혔는지 아무리 당겨도 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겨울은 그가 장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탄이 어느새 거의 바닥났다. “탄창 하나 줘요!” 선임상사와 대위가 하나씩 여분의 탄창을 던진다. 그러나 불그스름한 총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격속도를 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까지처럼 쏘면 얼마 견디지 못할 터. 휘거나, 파열하거나. 후자는 겨울을 죽일 수도 있다. 애초에 날씨부터가 더웠다. 가장 더울 시기는 지났다지만 아직은 여름이었으니. 「생존감각」으로도 아슬아슬했다. 다행히 갈라진 땅이 더 이상 살아있는 시체를 내뱉지 않는다. 굴러 떨어지는 유해에 길이 막혔는지, 아니면 이번 습격이 실패라고 판단했는지……. 그르릉, 그르릉. 폭음 사이에 질질 끌리는 쇳소리가 섞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겨울이 놓치기엔 선명한 흉조였다. 실체를 확인한 겨울은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서서히 흩어지는 연막을 지나, 변종 하나가 불붙은 가스통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하기야 버려진 도시에 방치된 가스용기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마는……. 캠핑카에나 쓰일 법한 자그마한 압력용기일지라도, 체구가 왜소한 특수변종에겐 어지간히 벅찬 무게. 가뜩이나 기관포탄의 폭발에 휘말려 한쪽 팔이 떨어진 몸이었다. 문드러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지경이다. 하나 남은 손이 타들어가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겨울은 거침없이 쏴 갈겼다. 깩! 특수변종은 눈알을 깨고 들어간 총탄에 즉사했다. 가스통이 제멋대로 땅을 구른다. 누가 쐈는지 모를 총탄이 통에 맞아 불티를 튀겼다. 상식과 달리 압력용기는 쉽게 폭발하지 않는다. 사격으로 터트리려면 중기관총쯤은 되어야 했다. ‘다만 이미 불이 붙은 상태라면……’ 압력이 감소할수록 폭발할 위험성이 증가한다. 애초에 꽉 찬 통이었을 거라고 보기도 어렵고. 시한폭탄이었다. 겨울이 대위가 놓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으지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완력으로 단숨에 뽑아, 전방으로 달려 나가며 길을 뚫었다. 살상이 아니라 배제가 목적인 칼질. 그리고 죽이기보다는 회피가 우선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변종들이 앞 다퉈 달려들어도 가로막지 못할 질주였다. 퍼억! 겨울의 몸이 흔들린다. 방탄복이 아군의 사격을 받아냈다. 휘청거리는 중심을 한 바퀴 굴러서 회복한다. 뜨거운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땅을 밀어내는 손바닥 아래에서 더러운 살덩이가 뭉개졌다. 마침내 좌악 미끄러지는 슬라이딩으로 가스통 옆에 도달한 겨울이 불길에 아랑곳 않고 밸브를 잠갔다. 두꺼운 장갑과 신형 전투복이 잠깐은 견뎌주겠지, 라는 생각. 그럼에도 살이 익는 통증이 엄습했다. 쇼크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현실과 같도록 맞춰놓은 건 겨울 자신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이고.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그러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가열로 느슨해진 밸브로부터 계속해서 가스가 샜다. 겨울은 전차의 전면(前面) 방어력을 믿기로 하고 압력용기를 구덩이로 집어던졌다. 무게를 감안하면 강속구에 가까운 「투척」. 그리고 불이 붙은 장갑을 급하게 벗어던지며 무전기의 발신 버튼을 눌렀다. “발러 1-3!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차량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라는 통보!” 중장갑을 두른 전차는 직격만 아니면 집중포격을 맞아도 탑승 인원을 보호한다. 단지 전차 자체가 무력화될 뿐. 언제 터질지 모르니 승무원들의 기다림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는 있겠다. 아예 터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최선이었다.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데이비드 2-1! 트릭스터와 대치중입니다! 놈은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가. 포스터와 2소대 사이에 교신이 이루어지는 사이, 검을 회수한 겨울이 몸을 돌리며 양쪽을 후려쳤다. 지척까지 육박한 일반변종 둘이 서로 다른 대각선으로 갈라진다. 흉곽이 베여 드러난 심장은 종양처럼 변형된 근육덩어리였다. 상처 입은 폐가 경련을 일으킨다. 그 외의 나머지는 거의 정리된 상황이었다. 오직 겨울이 있는 방향으로만 쏘지 못하여 남은 일부가 있을 따름.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격전을 치른 선임상사가 엄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마치 나무라는 것 같지만, 부대 내 최선임 부사관인 메리웨더 상사는 이럴 만 한 자격이 있었다. “미안해요, 상사. 너무 급했어요.” “…….” “중위. 트릭스터는? 아직도 인질과 같이 있나요?” 장갑차에서 끙끙거리며 내려온 포스터가 애매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상 행동?” “예. 다른 위협은 제거되었으니 직접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워어어억! 워어억! 워어어어어어! 중보병에게 포위된 트릭스터는 괴성을 지르며 인질인 아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중이었다. 헌데……. 포스터가 이상행동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거 지금……분통 터트리는 거지?’ 그야말로 짐승의 울분이다. 땅을 차는 발길질은 힘이 과하여 뼈가 부서져버렸고, 미친 듯이 벽을 치는 통에 채찍처럼 변형된 한쪽팔도 온통 피멍 투성이었다. 하기야 방금의 강습(强襲)은 겨울에게도 서늘했을 만큼 치밀했다. 변종 입장에선 벼르고 벼른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지간히 다혈질인 개체 같다. 사람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변종 사이에도 개체별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인데……. 언제 아이를 감전시킬지 몰라 함부로 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이젠 아이마저 놓고서 돌기둥에 머리를 박아댄다. 인정사정없는 박치기에 처음부터 피와 뼛조각이 튀었다. 2소대 병사들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쏠 생각을 못하는 듯 했다. 결국 괴물은 머리통이 깨진 채로 축 늘어졌다. “…….” 화가 치밀어 자살하는 변종을 보기는 겨울에게도 처음이었다. # 293 [293화] #새크라멘토 (8) 구덩이에 빠진 전차는 사흘간 방치되었다. 다른 거리에 배치된 부대들도 유사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는 장교 포함 팔백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낳았다. 단 하루 만에 이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건 멧돼지 사냥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 사령부는 다소 침체된 분위기였다. “그나마 진피 손상이 심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겨울의 화상을 돌보는 의무관 조윤창 대위의 말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가량 잘 관리한다면 남는 흉터는 얼마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잘 관리할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 손으로 칼을 휘두를 생각을 하셨습니까? 표피만 멀쩡했어도 치료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요.” 매일 다시 소독하고 붕대를 갈아주는 과정에서 벌써 여러 번 반복된 주의였다. 불평이라기보다 다시는 그럴 생각 말란 잔소리에 가까웠다. 겨울이 말을 돌렸다. “포스터 중위는 어때요?” “적어도 4주는 더 정양해야 합니다.”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뜻이군요.” “예. 뼈가 붙은 후에도 전거근이나 늑간근 인대에서 통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엔 몇 개월간 진통제 신세를 져야겠지요. 숨만 쉬어도 아플 테니 말입니다.” 그러게 좀 살살 차지 그러셨습니까. 대위의 말에 겨울이 옅은 쓴웃음을 만들었다. 여러 갈빗대에 금이 간 작전장교는 전투흥분이 사라진 시점에서 그대로 드러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교체하지는 않더라도, 당분간은 전력에서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중위도 못 받는 퍼플하트를 내가 받는다는 게 이상하네요.” 퍼플하트는 전사자 및 전상자(戰傷者)에게 수여되는 기념훈장이다. 겨울은 이제껏 인연이 없었으나, 이번엔 2도 화상 판정으로 받게 되었다. 허나 작전장교는 수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적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예컨대 차량 운행 중 회피기동에 의한 사고에 대해서도 퍼플하트를 수여하지 않는다. 지난날 산사태에 매몰되었던 겨울이 손등에 열상(裂傷)을 입고도 받지 못했던 이유였다. 의무관이 고개를 저었다. “규정이 그러니 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받아 두십시오. 중대장님께서 사양하시면 곤란해 할 사람이 많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래요.” 받을 자격이 되는데도 눈치를 보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누군가의 겸허함이 다른 누군가에겐 피해가 되는 경우였다. 배려 없는 예의는 자기만족이 되기 십상이다. 하물며 퍼플하트는 명예일 뿐만 아니라 연금에 가산되는 실질적인 이익이기도 했다. 겨울이 붕대를 새로 감은 손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역시 신경 쓰이네요. 어떻게든 챙겨줄 방법이 없을까 싶고.” “아랫사람들을 그렇게 챙겨주시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조윤창 대위의 은근한 아첨이었다. 겨울은 모르는 척 했다. “가볼게요. 전차가 어떻게 될지 봐야 하기도 하고, 달리 골치 아픈 문제도 있고.” 그럼 수고해요. 본토인에게 남기긴 애매한 인사였으나, 대위와 겨울은 출신이 같았다. 밖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보게 된 이들은 도로에 드릴을 박는 공병대원들이었다. 다른 곳에서 인공적인 소음을 만드는 사이에,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저속 드릴로 구멍을 내고 지하에 카메라 케이블을 들여보내는 것이다. 동시에 각 건물로 이어지는 지하의 길목을 장애물과 용접으로 차단한다. 변종들의 활동범위를 점진적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이었다. 이 일대에선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으므로 야외활동이 예전에 비해 자유로워졌다. “오셨습니까.” 전차 견인현장을 지키던 임시 1소대장, 송정훈 소위가 겨울에게 경례했다. “작업이 잘 되는 느낌은 아니네요?” 구난전차는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가만히 멈춰있었다. 자세히 보면 추가로 무너진 흔적도 있다. 겨울의 말을 소위가 긍정했다. “예. 1차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도로에 금간 거 보십시오. 지반이 약해졌는지 끌어올리던 차량까지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공병대가 경사로를 만든 다음 작업을 재개할 예정입니다.” 설령 끌어내더라도 발러 3호차가 갈 곳은 정비창이 될 것이었다. 60톤짜리 쇳덩이가 쿵 떨어지는 충격만으로도 온갖 기기가 고장 났다. 하물며 가스통의 폭발까지 견뎌낸 차체였다. 외부 관측 장비들이 싹 먹통이 되어 당장은 고철이나 마찬가지. ‘포탑이 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그랬으면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했을 것이다. 송정훈 소위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싱 대위님이 다른 부대로 전출된다는…….” “누가 그래요?” 궤도 빠진 전차를 보던 겨울이 눈을 살짝 찡그리자, 소위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다들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론이 나빠서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이는 곧 종교적인 반발이었다. 이전의 전투에서 싱 대위가 외친 함성을 트집 잡는 것이다. “칼사 만세! 승리는 오직 신께만 있도다!” 그러면서 칼을 뽑는 모습이 워낙 박력 가득한 지라 공보처가 편집 없이 공개한 게 실수였다. 시민들 가운데 무슨무슨 규정 위반 아니냐며 따지는 이들이 많다던가. 요는 한겨울 소령 옆에 저런 광신도를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태반이 기독교 광신도들이라는 게 진짜 문제였지만. 또한 그 함성이 시크교 종파 칼사 암리트다리의 신앙고백이라는 점, 그리고 검을 휴대하는 이유마저 다소 종교적이라는 점이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 ‘오죽하면 로저스 소장에게서 연락이 왔을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다. 겨울이 받은 수화기 너머에선 약간의 싫은 감정이 느껴졌었다. 소장의 건조한 성품을 감안할 때 이는 상당히 깊은 불쾌감이었다. 소장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물었다. [귀관. 사정은 알 것이다. 바하다르 싱 대위의 전출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됐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겠다.] 그리고 뚝 끊었다. 겨울의 의사를 확인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필요했던 것처럼. 사령부가 외압을 받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아무래도 사실인 듯 하다. 방역전선 전체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지금 적잖은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입지가 나빠질 법 했다. 그 다음엔 싱 대위 본인이 독대를 청했었다. “중대장님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당연히 다른 부대로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겨울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위까지 왜 이래요. 돌아가요. 그런 말 하는 게 진짜 폐니까.” “…….” 엄정한 시크교도에게 겨울이 질문했다. “전에 그랬었죠? 신의 이름은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사랑과 용기라고.” “그렇습니다만, 지금 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있는 그대로 말해줘요. 승리가 오직 신께만 있다는 말은 양심, 사랑, 용기에 의한 승리만이 진짜 승리라는 뜻이라고. 의도가 바르지 않은 승리는 애초에 승리가 아니라는 의미라고.” 비슷한 개념이 겨울이 배웠던 교과서에도 있었다. 윤리와 사상. 지금은 가물거리지만, 아마도 칸트였던 것 같다. 옳은 행동을 오직 옳다는 이유만으로 실천해야 진짜 도덕이라는 것. 욕망이나 다른 목적이 끼면 가짜 도덕이 된다. 경험 이전의 도덕률과 경험 이전의 신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대위. 내 해석이 틀렸나요?” 다시 묻는 겨울 앞에서 대위는 가만히 부인했다. “적어도 제게는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 그대로로군요.” “됐어요, 그럼. 가 봐요. 이건 내 양심에 따라 내리는 결정입니다.” “…….” “정말 이럴 겁니까? 언제는 날더러 누구보다도 신의 이름에 가까운 사람이라면서요?” 겨울은 반쯤 농담처럼 윽박지르고 나서야 싱 대위를 밀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회상한 겨울이 송 소위에게 지시한다. “소대 내에서 더 이상 그런 소문이 돌지 않게끔 관리해요. 나도 신경 쓸 테니. 괜한 이야기로 병사들이 흔들리는 것도 싫고, 그걸 본 싱 대위 본인이 상심하는 건 더더욱 싫네요.” “예, 알겠습니다.” “소대장이 되고 나선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죠?” 소위는 겨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걸 중대장님께서 물어보시니 굉장히 이상합니다.” “뭐가요?” “놀리지 마십시오. 아시잖습니까.” 큭큭.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거리의 경계병들이었다. 입술을 구부려 병사들이 눈치를 보도록 만든 송 소위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편하진 않습니다. 한국에서 학사장교로 군 생활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전 소대장님이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유라 소위가 돌아와도 당신 계급은 그대로일 텐데요?” “예? 어째서……. 저는 임시 대리잖습니까?” “장교가 부족하잖아요. 내가 왜 아직도 소령인데요. 아무리 직책진급이라도 한 번 계급이 올라가면 도로 내려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돼요. 유라 소위도 지금 이론교육을 받고 있다던데요. 부상당한 틈에 진급자격을 갖춰주려는 의도겠죠.” “이럴……수가…….” “가뜩이나 송 소위는 다른 나라에서 장교 교육도 받았겠다, 졸업장 발급은 불가능해졌어도 대학을 졸업한 건 사실이겠다, 영어 회화는 현지인 수준이겠다……. 낭비하기 아까운 자원이죠. 계급 확정 축하해요.” 송정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진심으로 침울해하는 분위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싫어하나? 한국에선 중위로 전역했던 사람이? 지금의 난민들은 어떻게든 안정된 지위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장교 계급이면 목구멍에서 손이 기어 나온대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 애초에 병과 장교는 급여구간부터가 다른 것이다. 겨울이 보기에 송 소위가 특별히 소심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임시 소대장인데도 별다른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능력을 입증했다. 뇌리에 언뜻 스치는 것이 있어 겨울이 작게 확인했다. “혹시 2소대장이 괴롭혀요?” 움찔. 어깨가 튀었다. 설마 했는데 사실인가보다.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에요. 몸은 이렇게 솔직한데. 상관에게 거짓말 하게 되어있어요?” 이걸 또 호기심에 귀 기울이고 있었는지 근처에 있던 병사 하나가 움찔한다. “몸은 솔직…….” 이라고 중얼거리는데, 아무리 혼잣말이라도 청각 보정을 받는 겨울에겐 선명하게 들린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송 소위가 다시 한 번 부인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업무지도가 엄격할 뿐, 박진석 소위는 평소에 아주 좋은 선배입니다.” “그래요?” 같은 소위라도 진석 쪽이 선임인데다, 겨울동맹 내에서의 입지도 입지이고, 제중이 소문을 낸 최초의 3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여 유라를 제외한 다른 난민 출신 소위들은 대하기 어려운 면이 있을 것이었다. 독립중대의 분위기가 여타의 미군 부대들과 조금 다르기도 하고. ‘사사건건 유라 씨하고 비교하는 거겠지…….’ 물론 겉으로는 그런 티를 절대 내지 않을 것이다. 그를 제치고 유라를 첫 전투조장으로 선발했을 때부터 경쟁심이 많이 강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이걸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겨울이 적당한 단어를 고민하는 사이, 송 소위는 말로 꺼내지 못하는 우려가 한가득인 표정을 지었다. 겨울은 일단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박 소위한테 별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예.” 이에 정훈은 묘하게 안도하는 한편 살짝 실망하는 눈치. 그래서 겨울의 다음 말에 의아한 표정이 된다. “오래 갈 일이면 뭐라도 조치를 하겠지만, 어차피 곧 해결될 문제 같으니까요.”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 소위가 1소대장이 아니게 되면 괜찮아질 거란 뜻이에요.” 이미 유라의 복귀 일정을 통보받은 상황이었다.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송 소위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 잠시 헤매다가 무언가 확 깨달은 얼굴이 된다. 겨울이 당부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괜한 소문이 도는 일은 없게 해요.” “물론입니다. 이 비밀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뭔가 좀 많이 앞서가는 것 같은데. 그러나 소위의 단호한 표정을 본 겨울은 그냥 둬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 294 [294화] #새크라멘토 (9) 이날 저녁, 사단사서함에 쌓여있던 우편물이 배송되었다. 밀린 편지를 받게 된 병사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반기는 것은 가족과 친지의 소식일뿐더러 은행이 보낸 계좌명세서(Statement)이기도 했다. 잔고가 늘어날수록 꿈꾸는 미래도 넉넉해진다. 정원이 딸린 집과 평온한 일상생활의 꿈. 희망은 삶의 필수품이었다. 그런 점에선 독립중대원들이 안전지역의 미국인들보다 낫다고 볼 수도 있었다. 당장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지언정 하루하루를 빠듯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절반가량의 미국인들은 역병 이전에도 채 1천 달러(한화 약 110만원)를 보유하지 못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때 이상으로 악화되었고. 지난 여러 종말에서, 가끔씩 겨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전보다 지금의 삶이 더 충만한 느낌이야.” 이는 아마도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겨울을 부러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었다. 겨울 몫의 계좌명세서는 굉장히 간소했다. 지출내역이 수 개월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각종 수당이 더해진 급여와 명예훈장 수훈자 연금이 고스란히 쌓여 무시 못 할 금액이 되어 있었다. 다양한 투자 상품 안내서가 동봉된 이유였다. 직책진급이 정식진급으로 확정된 게 송정훈 소위만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겨울의 급여는 소령 계급의 최고 호봉으로 산정되었다. 서훈내역을 복무기간에 가산하는 정책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너무 많아서 수송이 불가능했던 것. 이런 사정을 시민 사회에 여러 차례 알렸으나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밖에 배송된 것으로는 며칠 분의 신문들이 있었다. 하루당 여러 부가 와서 안전지역의 소식이 궁금한 병사들에게 돌리고도 천천히 읽을 한 부씩이 남는다. 이틀 전의 1면은 전체가 사진이었다. 「MAN OF HONOR」 낯 뜨거운 제목이다. 해상도가 살짝 떨어지는 사진은 교활한 괴물의 인질극 당일 어느 참모의 헬멧 카메라 영상을 확대, 보정한 것일 터였다. 손에 불이 붙은 채로 가스 압력용기를 던지는 겨울의 모습. 참 역동적으로도 잡혔다. 이 순간을 고르고자, 공보처는 프레임 단위로 뽑아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이날, 데이비드 임무부대 외 다른 두 곳의 교전현장에서도 인질 구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찬사를 받진 못했다. 과격했기 때문이다. 특히 심한 쪽은 많이 심했다. ‘전차 주포사격은 좀…….’ 인질이 있는 장소를 조준하여 철갑탄을 쏴 갈겼던 것. 물론 정조준은 아니었고, 인질은 반괴한 잔해 속에서 중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나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지금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다던가. 해당 지휘관은 이것이 실질적인 최선이었다고 주장했다. 「인질을 무사히 구조하는 것이 최선이라면, 최악은 인질이 사망하거나, 또는 괴물이 인질을 데리고 다시 잠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상황이 최악으로 흐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트릭스터는 머리가 좋은 놈입니다. 난데없는 인질극의 목적이 인질극 자체일 리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퇴로가 차단되기 쉬운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명백한 함정이었죠.」 이렇듯 상황 파악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인질이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을 감수하자고. 변종이 인질과 함께 잠적했다간 결국 뜯어 먹힌 시체나 변종이 된 모습으로 발견될 테니까요. 또 한 가지. 트릭스터의 개체 수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닙니다. 즉 인질극의 주범은 높은 확률로 이 일대 변종집단의 사령탑이기도 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당 개체를 초기에 제압해버리면 놈이 무슨 함정을 준비했든 의미가 없어질 거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대원 전체, 나아가 인접 부대들의 안전이 걸려있는 문제였죠. 결과적으로 제가 옳았음이 증명되었고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하는 바와 같이, 이 지휘관이 담당한 구역에서는 변종들의 강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격이 있긴 했으되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등장한 불붙은 가스통은 습격을 걸어온 변종집단의 후방에서 폭발했다. 인명피해는 고막이 나간 몇 명과 이명을 호소하는 몇 명뿐이었고. 이들은 전상자 취급이라 퍼플하트를 받게 됐다. 「철갑탄 포격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폭발하지 않는 탄종으로 건물을 반파시켜서 놈에게 인질 포기를 강요할 작정이었죠. 인정하겠습니다. 무모했던 게 사실입니다. 허나 실패할 경우엔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장에 있던 공병 장교의 의견을 구했다고 진술했다. 어디를 어떻게 쏴서 얼마나 무너뜨려야 잔해 아래에 깔릴 인질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겠느냐고. 「물론 그는, 캐시어스 중위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분명하게 밝혀두겠는데, 중위는 이 계획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지휘관인 제 결정이었단 말입니다.」 자신의 뜻이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알기 쉬웠다. 「어쨌든 그는 제 명령에 따라 의견을 제시했고, 그것이 바로 군인의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포격을 명령했죠. 그 결과 적의 허를 찌르는 동시에 인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겨울은 여기에도 공보처의 개입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본인의 진술을 토대로 언론에 공개할 내용을 사전에 정해놨을 것이다. 전투보고서도 최초에 본인이 작성한 내용은 아닐 터이고. 비슷한 경험이 겨울에게도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의 호숫가에서 해리스 대위의 병력을 상대로 싸웠던 전투. 그 전투에 대한 보고서는 겨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 포트 로버츠 사령관 래플린 대령은 이미 완성된 보고서를 내밀었고, 겨울은 읽어본 뒤에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작성한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습니다.” 라고.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른가…….’ 전쟁범죄가 아닌 한, 현장지휘관이 언론에서 자신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결국은 정치적인 사정이었다. 현 정권의 입지가 강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제너럴 양은 살아있는가? 최악의 테러리스트가 찍힌 새로운 영상이 발견되다.」 새크라멘토 특집기사를 지나, 세 번째 페이지에서 가장 크게 인쇄된 문장이 눈에 띈다. 제너럴 양은 당연히 양용빈 상장을 뜻했다. 겨울은 그의 죽음을 확신한다. 정말로 빠져나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나 컸다. 상장의 악의는 아직까지도 스멀거리며 미국을 좀먹고 있었다. 「국방부는 지난 9일 투항한 포로들로부터 새롭게 입수한 이 영상이 중국군 잔존세력의 칼파인 5 공격 이전에 녹화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제너럴 양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 그러나 전문가들은 영상의 분석결과에 의혹을 제기했다. 파일의 날짜 데이터가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또한 포로들이 국방부의 회유로 위증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일부 언론에겐 양심보다 관심이 더 중하다. 똑똑. 겨울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들어온 사람은 정보장교 머레이와 선임상사 메리웨더였다. 그들은 앉은 채로 경례를 받은 겨울에게 다가와 각자 결재가 필요한 서류 및 태블릿을 내밀었다. 머레이 쪽에는 자기 몫 외에 본래 작전장교 담당인 업무가 포함되어있었고, 메리웨더 쪽은 차량이동 승인이나 물자 보급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개의 업무가 전산화된 시점에서도 서명할 일이 사라지진 않았다. 간단히 읽고 서명하는 와중에 방금 시각으로 갱신된 전파사항이 확인된다. “야간 전투는 여전히 제한이네요?” 머레이가 겨울의 질문에 답한다. “예. 아무래도 인질을 식별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오인사격의 위험도 있고요. 결정적으로 사령부는 우리의 야간공격으로 적에게 혼란이 빚어질 경우를 걱정하나 봅니다. 인질을 잡아먹을 수도 있잖습니까. 트릭스터의 전파시야가 아무리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리고 놈들이 유선통신까지 쓴다지만, 일반 변종들에 대한 통제력이 낮과 같긴 어렵겠지요.” 전파송수신이 제한되는 지하 환경에서 트릭스터는 어떻게 수많은 변종들을 통솔하는가. 이에 대한 의문은 사흘 전의 교전현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해소되었다. 한 병사가 머리에 전극이 박힌 채로 죽어있는 변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피복이 벗겨진 구리선은, 전파에 반응하도록 변이된 바로 그 부위를 찌르고 들어갔다. 다른 쪽 끝은 인질극을 벌이던 건물 내부까지 이어져있었고. 재료가 될 전선이야 지하 공동구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니. ‘하지만 방식이 너무 무식해.’ 아마도 트릭스터의 발상이었겠으나, 손재간이 사람 이하인 변종들에게 정교한 수술이 가능할 리 없잖은가. 근처엔 무수한 실패의 흔적이 있었다. 머리뼈에 구멍이 뚫린 유해들. 모르긴 몰라도 뇌출혈 외에 뇌가 통째로 구워져서 죽은 놈들 또한 많을 것이었다. 정황상 수술엔 산성과 인화성 아기들을 동원한 듯 하다. 다른 부위에서, 혹은 다른 변종으로부터 뜯어낸 살을 지져서 붙이는 방식으로 상처를 막은 모양. 변종의 생명력이 강인하기도 하거니와, 처음부터 오래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토록 우악스럽게 완성된 생체전화기의 수신감도가 얼마나 좋았을지 의문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리웨더 상사의 음성이 겨울을 일깨운다. “뭐가 대단해요?” “대가리에 전선을 박아 넣는다는 발상 말입니다.” 머레이 중위가 인상을 찌푸리며 동의했다. “트릭스터가 최소한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뇌의 어떤 부분이 전파를 받는 용도로 변형되었는지도 알고.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싶군요.” “그런 놈들 상대로 싸워서 이기는 중이잖아요.” 대답과 함께 서명을 끝낸 문서들을 돌려주는 겨울. 정보장교는 바로 나가는 대신 다른 쪽에 관심을 보였다. “신문을 읽고 계셨습니까?” “네. 얼마 못 봤지만요.” “방역전쟁에 관한 나머지는 안 보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군사적인 소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이 내가 전문가입네 하고 이상한 헛소리들을 늘어놓더군요.” “뭔가 특별히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었나 봐요?” “왜 없었겠습니까.” 중위가 페이지를 넘긴다. 나머지는 안 보는 편이 나을 거라더니……. “이겁니다.” 그가 짚어 보인 특집기사에 메리웨더 상사가 무심한 척 눈길을 던진다. 겨울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글이 아닌 인물이었다. 공화당 대선후보의 연설을 찍은 사진. 잔뜩 찌푸린 낯으로 삿대질을 하는 모습이다. 설명은 이러했다. 「에드거 “에디” 크레이머, 방역전쟁에 대한 현 정권의 초기 대응을 성토하다.」 「“우리 군은 우리 시민들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했어야 한다.”」 초기 대응이라면 작년, 해안에 역병이 상륙했을 때의 일이다. 그 아래의 전문가 의견은 크레이머의 주장에 대한 찬반양론을 담고 있었다. 정보장교는 찬성하는 입장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때 캐나다가 무너졌으면 방역전선은 동서로 몇 천 킬로미터나 연장되었을 겁니다. 봉쇄선은 꿈속의 이야기였겠지요. 서해안 3개주 오염을 막을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북서부 방면의 가용전력을 캐나다로 후퇴시킨 건 전략적으로 올바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에 의외로 메리웨더 상사가 진중한 반대를 내놓았다. “하지만 도의적으로도 옳다고 보긴 힘듭니다. 그 전력을 이재민 구호에 투입했으면 몇 명을 더 살렸을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장기적으로 더 넓은 땅, 더 많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해변에 고립된 채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를 해줄지는 의문이군요.” “…….” “당시 캐나다 방어에 투입된 전력 중엔 항공모함도 있었습니다. 그쪽 비행대의 폭격지원이면 육상에서도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을 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는 봉쇄선이…….” 말끝을 흐리는 정보장교의 반감은 사실 정치적인 것이었다. 메리웨더가 차분하게 답했다. “중위님께서 틀렸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로 천만이 넘는 병력을 늘렸습니다. 북부국경 방어가 반드시 불가능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는 한, 미군이 시민을 버려선 안 됩니다. 비록 그것이 더 어려운 싸움으로 이어지고, 국가가 더욱 위태로워지고, 캐나다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결과가 되었을지라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사의 입장은 겨울의 생각과 겹치는 면이 있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버리는 일이 현실적으로는 불가피할지라도,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논의의 대상이 미국 시민으로만 국한된다는 점이 상사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사회의 모순을 구겨 넣은 군인의 직업윤리이니, 메리웨더 개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 295 [295화] #새크라멘토 (10) 다음날 정오, 전선에 당혹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원자력 비행선이요?” 미심쩍어하는 겨울 앞에서 통신장교 에반스가 넷 워리어 단말을 들어보였다. “직접 들어보시죠.” 스마트 폰에선 FM 라디오 어플리케이션이 실행 중이었다. 「……계획에 대하여 국방부 대변인이 밝힌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일 오전 9시를 기하여 소재 불명의 비밀 군사시설 『사이트 T』에서 취역한 패트릭 헨리 급 1번함 패트릭 헨리는 신형 원자로를 탑재한 원자력 비행선이라고 합니다.」 “…….” 「패트릭 헨리 급은 국방 고등연구 관리국(DARPA)에서 연구하던 초대형 비행선(HULA, Hybrid Ultra Large Aircraft)의 개량형으로서, 방역전선에 대한 화력지원 및 오염 지역 내륙으로의 긴급 보급추진 목적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각종 포탄과 폭탄 1,170톤을 싣고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임무 수행이 가능한 이 공중 전함은 또한 유사시 구름 위의 정부, 공군 1번 기(Air force 1)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예정입니다. 현재 2번 함과 3번 함은 실질적으로 건조가 완료된 단계로서, 1번 함의 운항 결과를 토대로 3개월 내에 취역시킨다는 방침이네요. 대변인은 패트릭 헨리 급의 건조 수량이 늘어나면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확보는 물론, 장차 감염의 제로 그라운드인 중국 본토로의 진공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거대 비행선이라는 개념 자체는 겨울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종말에 대적하는 인류의 지혜는 몇 번을 거듭해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니. 그러나 이런 계획을 지금까지 비밀로 유지한 이유가 뭘까. 방송을 들어보건대 대변인은 이 점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밀이 아니었지만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일리는 없겠지.’ 비행선의 적재중량이 천 톤이 넘으려면 그 크기는 항공모함보다 더 거대해진다. 기낭(氣囊)에 질소를 주입하지 않아도 마찬가지. 기본적인 골격이 있는 것이다. 그걸 건조하려면 시설의 크기 또한 만만찮게 커져야 한다. 헌데 지금껏 민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건조시설이 접근성을 무시한 오지에 위치했다는 뜻이 된다. 단순한 건조를 넘어서, 취역하기 전에 시험비행도 여러 차례 해봤을 테니까. 결국 맨해튼 계획 수준의 비밀도시라도 만들지 않는 한 불가능할 일. 즉 정부는 패트릭 헨리 급의 건조계획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은폐했던 것이다. 입안과 허가, 예산 결의 등의 절차를 감안할 때, 아마도 감염 사태 초기부터. 어째서? 화기부사관 디안젤로 하사가 여상하게 평했다. “정신 나간 물건이군요. 높으신 분들이 대체 무슨 마약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파나마 운하까지 가는 길이 베트남 같진 않겠지요.” 중대 보급부사관 티모시 매카들이 거들었다. “원래 있던 건쉽(AC-130)을 조루로 만들 괴물이야. 머리 위의 포병대대로군. 물론 정말로 쓸 만 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 두 사람은 당장의 효용성을 평가할 뿐이었다. 중대 참모들도 겨울 같은 의혹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군인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지금 같을 순 없을 것이다. ‘최초의 건조목적은 지금 발표된 것과 달랐을 거야.’ 겨울은 이것이 현 정권의 또 다른 약점이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1번함 패트릭 헨리 호는 멧돼지 사냥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며, 현 시점에서 웨스트 버지니아 주 헌팅턴 시가지 상공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네, 시민들의 반응이 굉장히 뜨겁군요. 직선항로상에 있는 켄터키, 미주리, 아칸사스 등지에서도 이제 곧 이 거대 비행선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수확이겠으나, 패트릭 헨리의 첫 비행은 불씨가 많은 남부에서 상당한 시현효과를 거둘 듯 했다.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의혹이 제기되기 전까지의 이야기겠지만. 「다음으로, 취역을 앞두고 있는 2번함 겨울 한 호는…….」 함선에 현역의 이름을 갖다 붙이다니. 겨울이 손짓했다. “그만 꺼요.” 타이밍이 안 좋았다. 참모들이 애써 엄한 표정을 짓는다. 웃거나 농담을 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반스가 라디오를 켜기 전까진 식사를 하면서도 상황을 전파하고 의견을 교환하던 참이었다. 다들 조금씩 졸려 보이는 것은 간밤에 습격이 있었던 탓. 겨울의 상태도 만전은 아니었다. 피로로 인해 살짝 둔해진 육체를 느낀다. 수면으로 인한 시간가속은 본디 아침까지 이어졌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겨울을 깨운 것은 자정이 갓 지난 시각의 「위기감지」였다. 그것은 또한 초인적인 「생존감각」이기도 했다. 곧바로 부대 전체에 경계를 걸었으나, 변종을 찾아내 짓이긴 사람은 바로 겨울 본인이었다. 침입한 개체는 오직 하나. 감마 등급의 스토커였고. 한동안 발견되지 않아 도태되었다고 짐작하던 특수변종이었으되, 예전부터 살아남은 개체일 확률이 높았다. “식사가 끝나면 주둔지랑 인근 구역 수색은 종료하라고 해요. 각 소대는 박명(EENT)까지 교대로 휴식을 취할 것. 계획은 싱 대위가 작성하고요.” 겨울의 말에 싱 대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온 지침으로는…….”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게요. 벌써 다섯 번이나 꼼꼼하게 뒤졌잖아요. 더 이상의 수색은 불필요하지 않겠어요? 병사들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좀 쉬어야죠. 당장 오늘 밤도 경계를 강화해야 할 텐데. 적어도 낮 시간만큼은 기존의 경계력만으로 충분하다고 봐요.” “음, 알겠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잘 먹여서 재웠대요?” 겨울의 물음에 대위의 수염이 살짝 꿈틀거렸다. 참아 넘기는 웃음이었다. “물론입니다. 녀석이 아니었으면 우리 쪽에서도 상당한 피해를 봤을 테니까요.” 지난 밤 겨울보다 먼저 위기를 감지한 병사들이 있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죽음의 낌새를 채고 미친 듯이 짖어댄 한 마리의 닥스훈트 덕분이었다. 사냥개 품종인데다 오래도록 역병에 쫓겨 다닌 트라우마가 있다 보니 숫제 발광하는 수준이었다고. 동이 트고 보니 방향을 꺾은 핏빛 발자국이 있었다. 철조망을 넘느라 발바닥이 찢어진 괴물은, 병사들이 내쉬는 숨결을 감지하고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에 개 짖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 시점에선 아직 깊은 심야였으니 인간 사냥에 신중을 기할 작정이었겠으나, 하필이면 피하는 구석이 중대장실과 가까워지는 응달이었다. 또옥, 똑. 핏방울이 떨어지던 소리가 떠오른다. 괴물이 전선을 끊어놓았던 어둠 속. 겨울은 궁륭으로부터 조용히 뛰어내리는 놈을 패대기치고는 발로 밟고 권총 속사로 머리통을 터트려 죽였다. 고통에 대한 내성의 차이일 뿐, 변종의 급소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같다. 콱 찍는 군홧발에 고환이 파열된 괴물은 한 손이 불편한 겨울에게도 간단한 사냥감이었다. 비상을 걸고 나오자마자 상황종료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일개체의 잠입이라…….’ 암살자 같은 느낌이다. 스토커가 전투 능력으로는 별 볼 일 없는 특수변종이라지만, 일반 변종의 강화판인 구울 만큼은 강하다. 지능도 대략 그쯤이니 트릭스터만큼은 아닐지언정 영리한 축에 든다. 여러 개념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똑똑한 동물만큼의 훈련을 소화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감마 등급이면 귀로는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적외선까지 볼 수 있을 터. 이번 세계관에선 보건서비스부대가 아예 실험으로 입증한 사실이었다. 원래부터 특징이던 후각 또한 강화된 게 당연한 일. 그러므로 간밤에 피해를 입은 부대들이 방심했다고 하긴 곤란하다. 괴물이 후각에 의지하여 지뢰지대를 돌파할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겨울도 거기까진 경험한 적이 없었고. 막상 듣고 난 뒤엔 금세 납득했다. 지뢰의 냄새를 맡도록 훈련된 쥐 같은 것도 있지 않던가. 후각을 발달시킨 괴물에겐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에반스가 묻는다. “Sir. 주둔지 변경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 된대요.” 겨울의 대답에 중위는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어째서……. 저희가 이곳에 배치된 건 적을 도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애매한 위치 때문에 뭔가를 하기도 곤란해졌습니다. 꼭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있는 기분입니다.” “한 번 수복한 의사당을 포기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거겠죠. 변종에게 밀려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테니. 지금 이 도시를 주시하는 눈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 인상이 팍 찌그러지는 중위에게 겨울이 달래듯이 말했다. “너무 싫은 표정 짓진 말아요. 물론 그런 사정을 신경 써야만 한다는 게 좋은 기분일 순 없겠지만, 어쨌든 우린 가만히 버티기만 해도 이겨요. 지금 이 순간에도 땅 밑의 변종집단은 계속해서 길이 끊기는 중이고요. 아마 이 도시에서의 싸움보다 멧돼지 사냥이 먼저 마무리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쪽 방면의 병력도 증강될 거예요. 승리는 확정이고, 남은 인질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추가피해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가 관건이겠죠.” “…….” “병사들이 흔들리지 않게끔 잘 봐줘요. 스스로 무너져버리면 이길 싸움도 못 이길 테니까.” 못 이기는 건 과장이겠으나 피해가 더욱 커지기는 할 것이다. 반쯤은 간부들에게도 하는 소리. 중대 행사를 치르던 날에도 사기유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쉬운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안 좋은 일이 이어지고 있으니…….’ 시가전이 난항을 겪으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이 드물었던 것은, 근거를 갖춘 낙관론이기 이전에 많은 이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지친 마음, 이제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지난 야습은 새롭게 느껴지는 위협이었다. “주둔지는 그렇다 치고, 중대장실 바꾸라는 소리나 안 했으면 좋겠네요.” 겨울이 하는 말에 다들 가벼운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이 있었다. 주지사 집무실을 쓰라는 것이다. 상징성 때문에 일부러 비워놓은 곳이건만. 공보처의 욕심이 지나쳤다. 정말로 그랬다간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었다. 소령 계급에 승마바지를 입고 지휘봉 격으로 채찍을 휴대했다던 맥아더 이상으로 튀어보였을 것이다. 정보장교 머레이가 하는 말. “차라리 변종들과 말이라도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려줄 수 있잖습니까.” “……걔들이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겨울은 짐짓 심각한 체 하는 대답으로 분위기를 조금 더 풀어놓았다. 논의에 밀려 식어가던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 짓는다. 이후 세면실에서 양치를 하며 상황을 곱씹어보는 겨울. 이 도시에서 체감하긴 어려워도, 최소한 미 본토에서의 방역전쟁은 확실하게 끝나가는 지금이었다. 아까의 라디오에선 중국 지역으로의 진출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렵지 않으려나. 겨울이 생각하기에 비행선만으로는 무리였다. 작전지역 상공에 장시간 체류하며 직사로 포격지원을 꽂아줄 능력은 물론 훌륭한 것이다. 허나 거리가 너무 멀다. 또한 그 땅엔 얼마나 많은 변종들이 우글거리고 있을지. 지속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면 이 작전에만 수십 척의 패트릭 헨리 급이 필요할 것이다. 관련하여, 얼마 전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망명요청을 전달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산간오지에 틀어박혀 버티던 한국 정부가 마침내 본토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북쪽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변종집단이 남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위성사진을 제공한 쪽은 미국이다. 그러나 시민들을 대상으로는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즉 감춰야 할 만큼 많았다는 의미. 한편으로 패트릭 헨리 급을 보내야 할 곳은 너무나 많았다. 예컨대 스위스처럼 유럽 내륙에 고립되어있는 거점들이라거나……. ‘내가 너무 멀리 보고 있을 지도.’ 당장은 전쟁보다 정치가 고비 아니던가. 경우에 따라선 겨울에게도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었다. 변종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켜야 하는 싸움. 경험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제까지와는 규모부터 다른지라 겨울에겐 낯선 전장이 될 것이다. 그리 달갑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 296 [296화] #새크라멘토 (11) 이후로도 체감 밖의 전황은 꾸준히 호전되었다. 노동절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멧돼지 사냥꾼들의 선두가 마침내 구 멕시코 국경을 통과한 것이다. 이날 가장 먼저 티후아나 강에 도달한 89 기병연대의 사진이 각종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89연대 3대대는 이 일로 공로 부대 표창(Meritorious Unit Commendation)을 받게 되었다. 이는 부대 단위로 주어지는 훈장 같은 개념으로, 구성원 모두가 약장(Decoration)을 추가할 수 있는 명예다. 개인으로 따지면 겨울이 받았던 동성무공훈장과 비슷한 수준. 본토회복의 상징성에 비해 격이 낮은 감이 있으나, 멧돼지 사냥의 난이도에 비하면 오히려 후한 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더 높은 포상은 다른 부대들이 섭섭해할 터이고. 무엇보다, 아직 많은 도시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축제 분위기지만, 새크라멘토에 배치된 병사들은 눈에 띄게 한숨이 늘었다. 위안이 있다면 노동절과 함께 다가오는 여름의 끝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날씨.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지만, 예전처럼 하얗게 이글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가는 푸르름은 겨울로 하여금 누이를 떠올리게 했다. 허나 그리움을 허락할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복도에서부터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듯 가까워진다. 사전에 보고된 시간이다. 연명으로 면담을 요청한 건 독립중대의 3, 4소대장. 겨울은 유라나 진석에 비해 자신을 어려워하는 편인 두 사람의 용무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중대장실에 들어선 한 쌍의 남녀 소위가 절도 있게 경례했다. 겨울은 부드럽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선우 소위. 그리고 천 소위. 오늘 임무도 수고 많았습니다.” “네!” “예!” 호흡을 맞춘 것처럼 거의 동시에 대답하는 두 사람. 사적으로도 꽤 친하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유라와 진석이 별개로 취급되다 보니 의지할만한 상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유라의 자리에 송정훈 소위가 들어간 건 비교적 최근의 일. “부상자가 생긴 건 유감이지만, 의사당을 인수한 이후 양 소대에서 아직까지 사망자가 없다는 사실은 기뻐해야겠죠. 만족스럽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잘 해주고 있어요.” 겨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교 경력이 있는 송 소위조차 부담감을 호소하는 마당에 이들의 내심은 오죽하겠는가. 하물며 천 소위는 유라 소대의 초기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 한국에서 병사 신분으로나마 군 복무를 마친 선우 소위보다 적응이 어려웠을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한별 씨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중에 확인한 것이긴 해도, 한별은 본인이 극구 거부했다. 으겍, 하는 얼굴로 사양하는 말이 이러했다. “어,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요, 전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는 건 좀 별로……. 아니, 그냥 싫다는 게 아니라! 총을 쏘다 보면 너무 몰입해버려서요! 저한테 시키는 말도 가끔 놓치는 판에 싸우면서 남까지 챙길 자신은 없다고나 할까……. 하, 하하……하하하!”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었다. 별명부터 미스 트리거해피, 또는 트리거 윗치(Witch)이지 않은가. 총에 이름을 붙여주고 심지어 말까지 거는 그녀를 슬슬 피하는 병사도 있을 지경이었다. 허나 겨울이 보기엔 연민이 가는 애착이다. 그때 겨울이 설득을 곧장 포기하진 않았다. “싸울 때 박진석 소위나 이유라 소위만큼 대담한 사람은 찾기 힘들어요. 장 병장이 그 찾기 힘든 사람 중에 하나고요. 판단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보완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자 한별은 곤란한 미소를 서서히 지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작은 대장님 안목을 무시하려는 건 아닌데요, 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라고 왜 욕심이 없겠어요? 장교 계급장을 달고 돌아가면 사람들 대우부터 달라질 텐데요. 앞날을 위해서라도 그러는 편이 낫겠죠.” “…….” “하지만 무책임한 사람이 되긴 싫네요. 분대장까지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지만, 소대장은 솔직히 무리예요. 삼사십 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니……무리라고요. 이제 겨우 악몽을 꾸지 않게 됐는데, 분명히 다시 잠을 설치게 될걸요?” “요즘은 잘 자요?” 질문을 받은 한별은 온화한 분위기로 자신의 총을 들어 보였다. “꿈속에서도 얘랑 같이 있거든요.” “……그래요.” “아무튼 저는 저 하나 책임지는 게 고작이에요. 과분한 계급장을 달면 무너지거나 무책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거나……. 분명히 그럴 거예요. 죄송합니다. 전 그냥 열심히 싸우기만 하면 괜찮은 정도가 좋겠어요. 앞으로 저 같은 부사관도 필요할 거고요.” “이해해요.” “그래도.” “……?” “만약에 정말로, 정-말로, 진짜 진짜 시킬 사람이 없으면 저한테 시키세요. 작은 대장님 명령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요.” “힘들 거라면서요?” 겨울이 묻자 한별은 유라처럼 웃어 보였다. “가장 힘든 사람은 대장님이잖아요. 미안해서라도 저만 편할 순 없어요. 평소엔 체감하기 어렵지만, 나이만 따지면 대장님은 제 동생뻘인걸요.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사람이 저렇게까지 마음을 쓸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고맙네요.” “에이, 고맙긴요. 당연한 건데. 부끄럽잖아요.” 분명히 유라 언니도 이랬을 거고. 손사래를 친 한별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기왕 이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유라 언니한테 신경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이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자 한별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상한 뜻은 아니고요, 언니가 매번 무리하는 느낌이라서요. 뭘 하든 기준이 작은 대장님이라 만족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대장님이랑 직접 비교를 하는 건지, 아니면 혼자 대장님의 마음에 들 만한 선을 그어놓은 건지……. 본인은 맨날 괜찮다고만 하고, 물어보면 괜히 구박하고 그래서 정확하겐 모르겠지만요.” “알 것 같아요. 기억해둘게요. 혹시 더 할 말 있어요?” “아뇨.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독립중대가 창설될 무렵, 겨울은 샌프란시스코 건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소대장 후보를 추천한 건 기존에 소대장이었던 진석과 유라였다. 3소대장 선우요셉 소위는 진석의 추천으로, 4소대장 천소민 소위는 유라의 추천으로 각각 선발되어, 겨울이 임관할 때에 비해 훨씬 엄격해진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후문. 실은 유라도 한별을 먼저 고려했다고 들었다. 허나 역시 본인이 사양했고, 처음에 본인이 괴로워하던 생각도 났던 모양이고, 결과적으로 뽑힌 두 사람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기도 했다. 사소한 문제 약간을 제외하면. 겨울이 회상 끝에 말했다. “둘 다 긴장 풀어요. 왜 그렇게 굳어있어요?” 칭찬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 양 소대장 모두 동상 같은 부동자세를 유지한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면 같이 앉아서 대화하죠.” 겨울의 제안에 선우요셉 소위가 즉시 반응했다. “아닙니다. 이대로 있겠습니다.” “음……. 뭐, 편할 대로 해요. 그래서 용건이 뭐죠?” 이번엔 대답이 늦다.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를 가져왔기에 이러나 싶어, 겨울은 가만히 여유를 내비쳐 그들에게 시간을 배려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소위 중에서 입을 연 쪽은 이번에도 역시 선우요셉 쪽이었다. “Sir. 먼저 한 가지 약속해주십시오.” “약속이요? 무엇을?” “지금부터 드릴 말씀이 아무리 황당해도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듣고 화를 내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제안입니다. 징계를 받을 각오도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충분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가만 보니 두 사람의 긴장감에는 두려움도 있는 듯하다. 뜸을 들인 겨울이 승낙했다. “그러죠. 약속할게요.” 한 번 끄덕이고 응시하니, 소위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간다. “우리 임무부대의 담당구역 내에 은행이 하나 있는 걸 알고 있으실 겁니다. 발러 3호차가 빠졌던 구덩이 바로 근처에 말입니다.” “그 은행에 어떤 문제라도 있어요?” “금고를 털었으면 합니다.” 이건 웬……. 겨울은 진심으로 황당함을 느꼈다. “약속했으니 일단 설명을 들어보죠. 왜 그런 소리를 해요?”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뉴스나 신문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 이 나라는 고립주의가 팽창하는 중입니다. 본토를 회복하고 나면 더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해는 갑니다. 다들 지쳐있으니까요. 파나마까지는 필요해서 가더라도, 그 이후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요?” “그렇게 되면 난민들의 처지는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겠습니까?” 소위가 잠기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빠질 겁니다. 할 일을 끝낸 사냥개치고 너무 많이 먹잖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재건사업에 난민들을 쓸 거라고 기대하는 모양인데, 당치도 않습니다. 이재민이 된 미국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옵니까?” “난민 지도자 지원정책에 대해서는 알고 하는 말이에요?” “물론입니다. 그거, 결국 난민들에게 쓸 예산을 줄이겠다고 하는 짓이잖습니까. 서부 이재민 구호 예산도 빠듯하다면서 말입니다. 게다가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젠 재건사업 예산도 마련해야 합니다. 대선 결과가 좋게 나와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도자 지원 금액도 점차 줄여나갈 거다, 이거죠?” “예.” 소위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살짝 망설였다. “몇 년 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다. 중대장님의 인기가 언제까지 지금 같을까요? 한겨울이라는 한 사람이 언제까지 거액의 예산을 합리화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사람은 원래 자기 배고픈 게 남 굶어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명목상 난민지도자 예산이라도 실제로는 엉뚱한데 쓰이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그런 꼴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7조 원을 써도 침대 하나 안 들어오는 병영 말입니다. 중대장님께선……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들러리……혹은 바지사장이 되시는 셈이고요.” “만약 준주가 만들어진다면?” 대놓고 언급하는 것은, 대선이 가까워지는 현재 거의 공론화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론 기사로도 나올 정도이니 시사에 민감하면 모를 수가 없다. 역시나 소위도 안다고 끄덕였다. “그것도 불확실한 일입니다. 무조건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막말로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국경 근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울타리 쳐놓고 땅 줬으니 알아서 잘 살으라고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경은 국경대로 지키면서요.” 무작정 틀렸다고 하기도 곤란한 예견이었다. ‘대선 결과에 따라서는.’ 겨울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꽂힌 천 소위는 움찔하는 기색. 선우 소위가 혼자 오지 않은 건 동조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보다.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론 훨씬 더 나을 확률도 있지요.” 선우 소위의 이마가 번들거렸다. 땀이 들어간 눈이 따가운지 꽤나 괴로워하는 모습. 그래도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이 한숨을 만들었다. “그러니 은행을 털자?” “사업을 하든 농기계를 사든 돈이 있으면 뭐라도 됩니다. 최소한 미국 밖으로 쫓아내진 않을 테니까요. 이건 일종의 보험입니다.” “…….” “무엇보다……다른 부대에서도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버려진 건물에서 귀중품을 훔치는 짓거리들 말입니다. 다들 알면서 묵인하는 거죠. 오히려 우리 부대는 중대장님이 있어서 예외적으로 깨끗한 겁니다.” 미군의 혐의가 없다고는 못 하겠다. 이라크에서도 그랬으니. 사람 사냥을 즐기는 망나니들마저 있었는데 그 이하의 경범죄는 오죽했을까. 걸리면 처벌받지만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다 맞다고 쳐요.” 고개를 흔드는 겨울. “그깟 은행에 얼마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천 소위가 막 입을 열려는 선우 소위의 어깨를 잡는다. 본인이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은핵……크흠. 은행 금고에 보통은 큰돈이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여긴 도시 중심가입니다. 관공서도 많고 회사도 많고 쇼핑몰도 많습니다. 큰돈이 자주 오갔겠지요. 감염은 갑작스럽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수십만 달러는 있지 않겠습니까? 많게는 수백만 달러가……” “겨우 수백만 달러죠.” 겨울의 한 마디가 두 소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 297 [297화] #새크라멘토 (12) “수백만……음, 수백만……. 그 정도 금액은 나 혼자서도 마련할 수 있어요. 우선 좋은 조건으로 빌려줄 업체를 하나 알고-” 여기서의 업체는 정보국과 연결된 피자 프랜차이즈를 의미한다. ‘액수가 꽤 크긴 해도 꼭 CIA 자체 예산으로 내어줄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정보국에게도 적잖은 정치적, 행정적 영향력이 있다. 최근 들어 입지가 다소 좁아지긴 했으나, 난민지원예산과 관련하여 장난을 치기엔 충분할 터. 이는 난민지도자라는 겨울의 특수성이며, 정보국 스스로는 큰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약점은 약점대로 만들어놓을 상책이었다. 그들은 물론 그냥 주는 돈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할 게 분명하다. “또 개인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있고-” 이는 주웨이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내 사재를 털어도 백만 달러는 될 거예요.” “백만…….” 아연해하는 천 소위를 위해 겨울이 부연한다. “당연히 월급 받아서 모은 돈은 아니고요.” “그럼 어떻게?”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있을 때 봉쇄선 사령부에서 협조요청을 하나 받았어요. 수송능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시민들이 보내는 선물이 너무 많아서 보관할 곳이 없다고. 그러니 위임처분에 동의해주겠느냐고. 계약서가 같이 왔길래 서명해서 돌려보냈었죠.” 강요받은 게 아니라는 내용으로 음성도 녹음해줬지만,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걸 보면 큰 말썽은 없었던 모양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방역전선으로의 선물 발송을 자제해달라는 내용 본 적 있어요?” “어, 예.” “나 때문이에요. 아마도.” “…….” “아무튼 그게 아직 입금은 안 됐는데, 각 주마다 여러 물류센터에서 밀려있을 정도라고 했었으니까 적어도 백만 달러는 넘겠구나 싶어요. 처분이 오래 걸리는 걸 보면 지금도 뭔가 계속 오는 모양이고. 그 왜, 하지 말래도 신경 안 쓰는 사람들 많잖아요……. 선우 소위, 뭔가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런 기색이었다. 선우요셉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하신 말씀들이 사실입니까?” “뭐가요? 내가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전부 다 가능해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아니라……음, 정말로 그렇게 하실 거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은행을 터는 것보단 낫잖아요?” “…….” 어쩐지 두 사람 다 동요하는 분위기였다. 겨울은 어조를 한층 더 냉정하게 바꾸었다. “이해를 못 하겠네요. 허점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지적해야할지 모르겠다고요. 나중에 텅 빈 금고가 발견되면 가장 먼저 누가 의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연히 우리잖아요. 주둔지가 여기였으니까.” 한 박자 쉬고 이어가는 말. “설마 변종들이 돈을 가져갈 리는 없고……. 고립되어있던 민간인 생존자들이 미래를 위해 굉장한 용기를 냈을 가능성도 없고. 당장 살기도 급급한 마당에……. 아니면 뭐, 무장 강도가 봉쇄선을 넘어왔겠어요? 경찰보다 변종을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아서?” 조용한 두 사람에게 새롭게 드는 의혹. “레인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었다고 믿을게요.” 그러나 십중팔구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겨울의 임무부대에게 주 의사당을 인계해준 부대가 바로 레인저였으니,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책임소재는 불분명해질 수밖에. ‘내 이름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렇겠지.’ 겨울의 이미지가 깎이면 겨울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공보처가 왜 그리 열을 올리겠는가. 전시채권 판매량은 물론이거니와 조안나가 염려하던 불씨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한 두 소위 역시 여기까지 계산했으리라.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공화당 대선주자 입장에선 겨울이 정치적으로 무척 거슬릴 것이다. 후보 개인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난민지원 축소를 반대하는 여론의 가장 큰 이유가 겨울이었으니까. 만약 그가 백악관을 차지할 경우, 털린 금고는 아주 좋은 명분이 된다. 반드시 겨울을 깎아내릴 필요도 없었다. 「난민 병사들은 소령의 기대를 배신했다.」 같은 식으로, 대중이 인식하는 겨울을 난민과 분리시키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예산을 아끼는 동시에 전쟁영웅은 전쟁영웅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므로. “게다가.” 겨울이 다시 지적한다. “이미지도 문제죠. 안 그래도 난민에 대한 인식이 별로인 마당에 우리까지 도둑질로 걸려 봐요. 받을 지원도 못 받게 된다고요. 금액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아요? 수백만 달러를 써서 광고를 해도 모자란데 수백만 달러짜리 폭탄을 끌어안겠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제안인지 의심스럽네요.” 이어지는 힐난. “재무부가 그렇게 만만한 곳도 아니에요. 전에 못 봤어요? 포트 로버츠의 거주구역이 완공되었을 때, 백산호 같은 사람이 땅 투기 한답시고 돈 가방 풀어놓으니까 곧바로 시크릿 서비스부터 찾아오는 거. 나야 나중에 민 부장님하고 통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직접 봤을 거 아녜요? 봄이 지난 다음에야 거길 떠났으니.” 심지어 재무부는 자체적인 정보기관까지 보유하고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국세청 아래에 국정원 비슷한 부서가 있는 격이었다. “천 소위는 미국에서 몇 년 살았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네!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은행에 큰 돈 넣어두지 말라고. 1만 달러만 넘겨도 재무부가 확인해서 귀찮아진다고.” “몇 번 듣긴 했습니다.” “큰돈이 오가면 무조건, 하다못해 자동차 한 대를 거래해도 딜러가 의무적으로 신고를 해야 하는 나라에요. 그런데 사업을 하고 농기계를 사요? 그게 가능해요? 돈세탁은 삼합회에게 맡길까요? 아무리 범죄자들이라도 지금 그럴 능력이 있을지 의문인데요.” 목이 울리도록 침을 삼킨 천 소위가 뭔가 결심한 듯 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라뇨?” “쓰거나 옮기기 어렵기 때문에, 중대장님……아니, 작은 대장님께서 저희를 포기하거나 떠나시더라도 남아있을 자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상황에선 쓰기 까다로운 돈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최소한 생필품을 구입하는 푼돈으로는 쓸 만 할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겨울이 눈을 살며시 찡그린다. “점점 모르겠네요. 내가 왜 떠난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않은 건 죄송합니다.” 그녀가 감추지 못하는 우울함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걱정스러웠습니다. 작은 대장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저희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포트 로버츠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하고 여기 선우 소위가 대장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야 감이 잡힌다. “……내가 질리기라도 할 거란 뜻인가요?” “예. 보여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 같은데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겨울은 반응을 기다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딱, 딱, 딱. 고개를 들 줄 모르는 천소민 대신 선우요셉 소위가 자세를 바로 한다. “저는 중대장님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 “예. 이해. 조금 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진심이냐고 여쭤봤던 건, 정말로 빚을 지거나 사재를 다 털어서까지 사람들을 도와주실 거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님께선 눈치를 못 채시더군요.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당황했습니다.” 소위는 한 호흡을 쉬고 물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돌봐주시는 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입니까? 개인적인 욕심은 전혀 없으십니까?” “…….” 겨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욕심을 냈을 것이다. 아주 많이. 종말을 한계까지 밀어낸 세계에서의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 이는 생전에 고단했을 뿐더러 사후마저 혹독한 이들이 누구나 바랄 법한 목표였다. 물리세계의 과거에 기초하여 재구성된 모든 세계에서, 사회가 유지되는 한 재화의 중요성은 현실과 같다. 욕망의 무게를 재는 눈금이다. 그러나 겨울에게는 이 세계의 부유함이 별 의미가 없었다. ‘아예 없으면 곤란하겠지만…….’ 극복 가능한, 혹은 견딜만한 곤경이었다. 허나 이를 전달할 방법이 마땅찮다. 어설픈 설명은 상황연산 오류를 야기할 것이었다. 겨울의 고요는 오해를 사기에 좋았다. 선우요셉이 살짝 끄덕였다. “저희는 불안해해야 정상입니다. 오히려, 중대장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저희와 함께하실 거라고 믿거나……이런 문제에 대해 아예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이상할 만큼 낙관적인 거라고 봅니다. 이 와중에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은 중대장님의 호의가 권리인줄 아는 놈들이고요. 이제 미국 어디를 가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성공할 분이 중대장님이신데……난민구역을 언제 떠나도 아쉬울 게 없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잠시 생각한 겨울이 확인했다. “결국 은행을 털자고 했던 건, 돈도 돈이지만 날 시험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거네요?” “죄송합니다.” “나 참. 화 안 내고 영창도 안 보낼 테니까 두 사람 다 이제 좀 편하게 있어요. 의자 갖다가 앉아도 되고. 보기 되게 불편해요.” 하지만 소용없는 배려였다. 소위 둘은 꿋꿋이 부동자세였다. 그래도 긴장은 조금 풀린 듯 하다. 고비를 넘겼다는 느낌. 진석과 유라가 아무나 고른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민 부장님이랑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네요.” 두 소대장의 표정을 본 겨울은, 그들을 위한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궁금해요?” 천 소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말 그대로 비슷했어요. 사람에 대해서 많이 냉소적이시더라고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이기적이고, 감정적이고, 한계가 분명하다고.” “…….” “그러면서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사람들을 믿고 싶으시냐고. 그때는 그냥 글쎄요, 하고 말았는데…….” 겨울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만약 지금 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다른 대답을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다 나은 모습일 수 있음을 믿고 싶다고. 재구성된 과거의 갈피에서, 예전엔 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찾고 있노라고. “어떤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별이요.” “……별?” “네. 요즘은 별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뜬금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선우 소위 쪽은 우울한 부채감도 느껴진다. 본인보다 어린 중대장이 답답할 때 별이나 헤아린다고 여긴 걸까? 아무래도 좋은 착각이었다. 별빛아이의 성장에 대해서는 뭐라고도 하기 어려웠으니.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에 실망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필연적인 슬픔이라도 조금은 덜어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고작 별 하나의 약속이 이렇게 깊어질 줄이야. 겨울이 말했다. “모자란 대답인거 알아요. 안심이 안 되죠? 객관적으로 봐도 난민들의 주지사보다는 미국 시민들의 하원의원이 나을 것 같고.” “…….” “내가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난민 지원정책도 확신이 안 서니까 보험 삼아 돈이라도 얼마 들고 있었으면 하는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당신들을 위해서라도 안 됩니다. 나중에 그게 문제가 되면 난 내가 남고 싶어도 남기 힘들어진다고요.” “……알겠습니다.” “뭣보다 걱정이 너무 지나쳐요. 지금까지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을 텐데.” “하지만……사람들에게 실망한 적이 없으십니까? 한 번도?” 천소민 소위의 물음이 겨울을 실소하게 했다. 만들거나 꾸미는 웃음이 아니었다. “나보다 많이 실망한 사람은 드물 걸요? 이것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닙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거의 반사적인 대답에서는 단단한 감정이 느껴졌다. “뭐, 아무튼.” 겨울이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두죠.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선우요셉 소위, 천소민 소위. 혹시 아직 다른 용건이 있습니까?” 시선을 교환한 두 소위가 거의 동시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구령 크게 붙여서 푸쉬 업 서른 번 하고 나가요. 벌은 그걸로 끝내죠.” 벌이라기보다는 다시 한 번의 배려다. 이번 일로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 어느 쪽이든 PT 1급이라 서른 번은 금방이었다. 정확하게 속도를 맞춘 두 사람은 호흡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경례했다. 그들이 나간 뒤에, 겨울은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발신인도, 주소도, 우편번호도 적혀있지 않았으나 보낸 이를 특정하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겨울에게 사적인 편지가 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즉 보통의 경로로 전달된 게 아니라는 뜻. 편지지에 뿌려진 향수는 주웨이의 것이었다. 서간은 간소했다. 전화번호 하나에 두어 줄의 문장 뿐. 이마저도 영어로 썼으므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제 번호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그리고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비록 제멋대로이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은 두 번째 줄을 곤란하게 여겼다. 두 소위에겐 자신 있게 말했으나, 막상 도움이 필요할 때도 연락하기가 망설여지겠다고. 위험부담이 따른다 한들 CIA 쪽의 협력을 받는 게 더 편할 듯 하다. # 298 [298화] #새크라멘토 (13) 계절의 경계는 데드라인이었다. 9월 1일, 사단지휘부에서 새로운 방침이 하달되었다. 「인질 구조보다 적 섬멸을 우선할 것.」 상식적으로 있기 불가능한 명령. 그러나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변종들에게서 기아(飢餓)의 조짐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동족포식은 최후의 발악을 예고하는 징조에 가깝다. 괴물이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의 음식이 있겠는가. 구조된 생존자 중 하나는 변종들이 바퀴벌레를 먹였다고 증언했다. 그나마도 나중엔 저들끼리 다 먹어서 인질에게 줄 게 없었다고. 괴물에게 바퀴 취식을 강요받는 사람의 정신이 언제까지 멀쩡할 수 있을까. 방침을 전달 받고, 선임상사 메리웨더는 이렇게 평했다. “빠삐용 같은 사람은 영화에나 있겠지요.” 하다못해 인질들이 함께 있어 서로를 위로라도 할 수 있으면 좀 낫겠는데, 변종들은 인간의 정신적 생존에 대해선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실성한 상태로 구조된 생존자는 육체적으로도 빈사상태에 이르러있었다. 뭘 먹여도 비명을 지르며 토해낸다고. 아직까지 변종들 수중에 남아있는 인질은 셋. 그들의 안전을 도외시한 공격이 차라리 그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사령부의 판단이었고, 또한 유리한 전장에서의 손실에 질린 시민들의 여론이기도 했다. 한줌의 인질들을 위해 그쯤 노력했으면 충분하다는 주장. ‘솔직히 불쾌한 논리지만…….’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 어쨌든 겨울도 이것이 최선이라는 데 동의한다. 일각에선 도시를 단순히 봉쇄하고만 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며 군의 전략을 비판했다. 변종들은 대사억제가 가능하니, 군이 시내에 요새화된 거점을 마련하고 지하 경로를 차단하는 식으로 피로를 강요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굶주릴 이유가 없으며, 인질들도 보다 길게 안전했으리라는 뜻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 겨울이 보기엔 책임이 없는 자들의 무책임한 훈수였다. 도시가 변종들의 손아귀에 있으면 도심의 생존자들도 역병의 인질이긴 매한가지. 또한 대사를 억제한다고 열량소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관심병자들이 주장하는 건 유예된 파국에 불과했다. [돌입! 돌입!] 지휘용 콘솔에서 진석의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헬멧 카메라 영상은 한 줄의 노이즈도 없이 깨끗하게 수신되었다. 그간 지속적으로 지하경로 감시수단을 설치할 때, 케이블 카메라와 함께 수신기 안테나도 들어갔으므로. 장갑복에 붙은 조명이 어두운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지상엔 여분의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2소대의 중보병들이 통로를 개척하면, 다른 소대가 후속하여 확보한 구역을 유지한다. 몇 블록 단위로 길이 끊어지기에, 변종들은 중보병에 맞서거나 지상으로 튀어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럼블조차 없는 제한된 공간에서 중보병은 무적에 가깝다. [퀘에에에엑!] 나아갈수록 짙어지던 연막으로부터 자그마한 변종 집단이 튀어나왔다. 사격으로 대응하기엔 지나치게 짧은 간격. 진석이 반사적으로 몸을 기울인다. 쿵! 흔들리는 시야. 허나 전면으로 기울어진 무게중심은 변종들의 돌격을 성벽처럼 받아냈다. [죽어 이 씨팔!] 급할 때 튀어나오는 욕은 아직 한국어였다.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괴물을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악력으로 쥐어짜는 진석. 인공근육이 수축하는 힘은 어지간한 곰이 물어뜯는 수준이다. 우득. 뿌드득. 감염된 다리뼈가 간단하게 부러졌다. 그대로 휘두르자 근육만 남은 다리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철퇴처럼 벽에 충돌하는 머리. 목이 부러지고 뇌수가 튄다. 이어 다리에 붙은 괴물을 공처럼 차버리고, 벽을 타고 달려드는 놈을 향해 한 손으로 지원화기를 난사했다. 체취가 닿을 거리에서 살이 쫙쫙 찢어지는 광경은 저급한 호러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총탄 세례에 갈기갈기 찢어진 복부에서 관성이 담긴 피와 내장이 쇄도한다. 밧줄처럼 꼬인 장기가 총구위에 걸렸다. 피가 섞여 묽어진 대변이 뚜욱 뚝 떨어졌다. 싱 대위가 우려했다. “중보병 소대는 나중에 정서적인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겠네요.” 긍정하는 겨울. PTSD는 무인기를 조종하는 병사라도 예외가 아니지만, 전투를 체감하는 정도에 따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진석은 아득바득 밀어붙이는 성향이라 더하다. 그의 지휘를 받는 소대원들 역시도. 가뜩이나 병사들의 피로도 많이 누적된 상황 아니었던가. 포스터 중위가 보고했다. “배터리 소모율이 평균보다 훨씬 높습니다. 예상 가동시간을 조정하겠습니다. 공격 중지까지 앞으로 17분. 3소대가 A-2 통로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가볍게 기침. 쉬라고 해도 기어코 나와서 지휘장갑차에 앉아있다. 작전이 끝날 때 침대에 누워있긴 싫다는 고집이었다. 겨울은 그의 거듭된 요청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이제 금방이니까.’ 인질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변종들을 몰살시키기는 쉽다. 멧돼지 사냥이 종료 수순을 밟으면서 이 도시에 배치된 병력도 나날이 증강되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변종보다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 어쩌면 숫자가 이미 역전되었을 수도 있다. 이 도시의 변종들은 전체 역병의 개체수 보존을 위해 버려지다시피 한 것들. 그러므로 처음부터 수가 압도적이진 않았고, 꾸준히 소모되기만 했지 외부로부터 보충된 적이 없다. 역병을 규모에서조차 압도하는 인간이라. 겨울은 새삼 새롭다고 느낀다. 아무리 국지적인 현상이라지만, 이 스물일곱 번째 종말의 세계는 여러모로 규격을 벗어났다. “그레이 임무부대로부터 입전. 시청 앞에서 교전 발생. 도주경로 차단엔 지장 없음.” 통신장교의 말을 들은 겨울이 화면을 전환했다. 중보병대가 가하는 압력에 밀려 도로로 쏟아져 나온 변종 무리가 십자포화를 맞아 일방적으로 몰살당하는 광경이 떴다. 사선이 삼중으로 교차하도록 배치된 중기관총 및 고속유탄발사기의 일제사격이었다. 겨울이 짧게 지시했다. “2소대에 전달. 퇴각은 고려할 필요 없음.” 포스터가 확인한다. “괜찮겠습니까?” “배터리가 바닥난다고 해서 아예 못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요. 최소한 자력 후퇴는 가능하잖아요. 이동거리가 길지도 않고. 충전하느라 한 시간쯤 날려먹기보다는 적을 강하게 압박해서 빨리 끝내버리는 편이 낫겠어요.” “음, 끙, 알겠습니다.” 아픈 작전장교가 동의하고 통신장교가 통보했다. 겨울의 계산으로는 현재의 동력 잔량이면 남은 구간을 돌파하기에 충분했다. [트릭스터 포착!] 어느 중보병의 경고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어서가 아니다. 특수변종이 있다면 인질이 있을 확률도 올라가는 탓이었다. 겨울은 추가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야! 이 새끼, 유탄발사기 치워! 전진! 전진!] 소대장인 진석이 대뜸 유탄을 쏘려는 소대원을 격하게 타박했다. 구조보다 섬멸을 우선하랬다고 인질을 아예 무시할 순 없다. 병사들이 정신적인 부담을 느낄 상황. 캬아아아악! 머리 위의 맨홀로 나가면 곧바로 십자포화다. 달아날 곳 없는 트릭스터의 흉곽이 달아오른 금속처럼 번뜩였다. 그러나 극초단파로는 중보병을 저지하기 힘들었다. 팔로 시야를 가리며 전진하는 기계화 병사에게 이번엔 근육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날아왔다. 당연히 생체전기가 강렬한 채찍질이었다. 허나 처음부터 교활한 특수변종과 싸울 상황을 가정한 장갑복은 외부 전류에 대한 방어력을 갖췄다. 으지직! 움켜쥐는 손아귀에 뼈 없는 팔이 으깨지는 소리. 찍 뿜어지는 피. 비명을 지르는 괴물. 낚싯줄을 잡아채듯이 특수변종을 확 당기며, 진석이 소대에 지시했다. [밀어! 무조건 밀어! 안 죽어 병신들아! 인질이 있는지 확인해!] 동시에 트릭스터를 짓뭉갠다. 격한 몸싸움이었다. 체구는 트릭스터가 크지만 근력은 중보병의 우위. 바로 목을 비틀지 않는 건 변종들에 대한 통제력을 감안한 것이었다. [인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확인해! 아직까지 살아있을 사람이면 변종하고 구분하기 힘들 테니까!] 그러면서 진석은 트릭스터를 차근차근 무력화시켰다. 뼈를 부수고 관절을 반대로 꺾으며, 근육을 짓이겨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살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특수변종의 채찍을 밧줄처럼 써서 묶어놓는다. 허억, 헉. 몰아쉬는 숨결이 무전을 지직지직 울리게 만들었다. 모니터에 표시되는 배터리 잔량은 잠깐 사이에 4%나 격감했다. 레드 존이었다. 그래도 진석이 보여준 침착함은 인상적인 것이다. ‘갈수록 나아지네.’ 겨울은 진석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했다. 욕설이 거칠긴 했으나 지시 자체는 매번 이치에 맞았기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기 마련인 실전에서 이 정도면 훌륭한 것이다. 전투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중보병들은 누구든 깔아뭉갠 피륙으로 얼룩져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여기저기서 지쳤다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갑복의 동력은 어디까지나 장갑복의 무게를 감당할 따름.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만큼은 힘이 들 수밖에. 더군다나 역할이 역할이라 격한 몸싸움을 감당해야 한다. 방어력을 믿고 몸을 던지거나, 전력으로 달려드는 변종과 충돌하기가 예사. 얼마 전엔 탈장 환자마저 발생했다. [으……설마 이게 인질은 아니겠지?] HUD 배터리 경고등이 깜박거리는 상태로 인질을 찾던 중보병 하나가 앙상한 유해 하나를 들어올렸다. 질퍽, 질퍽. 피륙을 밟고 온 동료가 유해를 살피더니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피부 문드러진 거 봐라. 버려. 구역질난다.] 마지막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미 장갑복 안에 구토를 한 병사도 있는 상황. “데이비드 액추얼이 데이비드 2 액추얼에. 병력 수습해서 지상으로 나올 것. 충전보급을 추진하겠음. 장갑차를 동반하여 당소 위치로 철수할 것.” 겨울이 무전으로 지시를 전하니, 멍하니 고정되어있던 진석의 시야가 흔들흔들 높아졌다.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있다가 일어서는 듯 했다.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겠지?’ 그가 기뻐할만한 전달사항이 있었다. 복귀한 2소대는 장갑복을 착용한 상태로 세척 과정을 거쳤다. 고압으로 뿌려지는 소독제에선 알싸한 약품 냄새가 감돌았다. 일부 병사들은 가동부에 낀 살점이나 뼛조각 따위를 긁어내느라 애를 쓴다. 아무래도 손이 닿지 않는 쪽은 서로를 도와줘야 했다. 겨울은 바이저를 올린 진석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요.” “아직 전투 중이지 않습니까?” “이 구역은 이제 거의 소탕전이니까요. 아무리 내가 책임자라지만 다른 중대 지휘에까지 세세하게 간섭하기도 그렇잖아요.” 겨울이 통솔하는 다른 두 중대급 임무부대에도 각각 중대장이 따로 있으니, 지나친 관여는 불필요할뿐더러 부적절하기도 했다. 개략적인 지시를 내려두면 그만. “그건 그렇고.” 지나가듯이 꺼내는 용건. “박진석 중위. 진급 축하해요.” “…….” 반응은 본인보다 주변이 더 빨랐다. 텅텅 울리는 둔중한 갈채가 번진다. 지친 사람을 그린 정물화 같던 진석이 미심쩍게 확인했다. “확정된 겁니까? 아니면 예정입니까?” “확정이에요. 아이들린 발전소 전투가 끝났을 때 진급심사 대상자로 올렸거든요. 오히려 처리가 늦었다고 봐야죠. 나중에 훈장도 하나 나오지 싶은데……아무튼 오늘부터 중위 월급 받겠네요. 주둔지로 돌아가면 중대장실로 와요. 계급장 줄 테니.” 대답을 들은 진석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기뻐하는 것은 확실한데, 애써 담담하게 하는 말이 이랬다. “전투조장으로서는 두 번째였지만 계급은 제가 먼저 올라가는군요.” 뜬금없는 유라와의 비교.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진 않습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망설이는 겨울을 보고 바로 깨달았는지, 진석의 표정이 팍 찌그러졌다. “설마 1소대장도 진급합니까?” “그야 심사에 두 사람을 같이 올렸으니까……이유라 소위도 오늘 진급했겠죠? 딱히 결격사항도 없고…….” “……그렇군요.” 주위가 조용해진다. 중보병들이 소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진석은 이제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 299 [299화] #연속성 「위원 A :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은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뒤를 봐주던 후배입니다. 다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소개드리는 게 예의일 테니까요. 후배님, 인사드리세요.」 「위원 G : 안녕하십니까. 미래한국국민당 방ㅎ…….」 「위원 A : 어허. 여기서는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모든 정보도 그렇고. 처음부터 이렇게 실수를 하면 어떡합니까?」 「위원 G : 앗, 죄송합니다. 평소 무척 흠모하던 분들 앞이라 긴장했나봅니다.」 「위원 E : 괜찮아요, 괜찮아. 사후보험 보안회선인데도 신분을 비밀로 하는 건 정말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보험 정도인걸요. 관제인격이 해킹이라도 당할까봐 만든 불문율이죠.」 「위원 F : 같은 이유에서 굳이 문자, 혹은 변형된 음성으로만 소통하는 게 불편하긴 합니다만……뭐, 안전한 게 좋겠지요.」 「위원 D : 다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회기록이 노출되면 이렇다 할 대안도 없이 비난만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말입니다. 국가경영엔 확고한 철학과 소신이 필요한데, 공개석상에서는 그걸 지키기가 어렵단 말이지요. 여론에 겁먹고 어어 휩쓸리다보면 결국 개인적인 신념은 온데간데없이 표리부동한 인간이 되고 말아요.」 「위원 A : 예. 국정의 파행운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원 C : 그래도 종종 걱정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후보험이 만들어진 이래 외부로부터의 해킹을 허용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입니다. 보안위협을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한 사례들을 제외하면요.」 「위원 B : 지금 하시는 말씀조차도 밖으로 새면 대형사고입니다. 천려일실이라 하지 않습니까. 하하. 저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클래식한 느낌도 있고. 가끔 말실수를 해도 그러려니 할 만큼의 안정감도 느껴지고.」 「위원 G :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원 E : 저도 잘 부탁할게요. 어려운 일 있으면 꼭 상담해요. A 위원님이 아끼시는 후배님이면 우리한테도 남이 아니니까요.」 「위원 C : 겁을 주려는 건 아니지만, 국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고충이 가볍진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지탱한다는 게 참 어렵지요. 고건철 같은 자본주의의 괴물을 상대해야 하기도 하고.」 「위원 G :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말씀들 편하게 하시지요.」 「위원 D : 그럴 순 없어요. 이 자리에 있는 이상 국가경영의 최전선에 함께 서는 동지인데. 최소한의 존중이 필요합니다.」 「위원 G : 아…….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위원 A : 대충 소개가 된 듯 하니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국가비전 2070을 검토하는 날이로군요. 기존의 목표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또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확인하고, 새로운 구상을 논의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는 국가비전에 대한 자유토론에 가까울 것 같군요.」 「위원 B : 기존 계획이야 워낙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잖습니까.」 「위원 C : 전 우선 국방 분야에서 미국과의 연구개발협력안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데요. 그 뭐였지, 인간 육체의 기능적 강화?」 「위원 D : 예, 예. 그 강화전투병 공동개발계획 말이군요. 관제인격에게 타당성을 분석시킨 결과 우리가 손해 볼 게 없어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까. 겸사겸사 우리도 합당한 수고비를 받고요.」 「위원 C : 다른 분야에 신경 쓰느라 그쪽 근황을 모르겠는데, D 위원님이 담당이셨던가요?」 「위원 D : 예에, 뭐. F 위원하고 같이 맡았지요.」 「위원 C : 어떻게 되어갑니까?」 「위원 D : 어느 관점에서 먼저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는데…….」 「위원 E : 관점?」 「위원 D : 프로젝트 내용만 놓고 보면 기술적 의의라거나 미국과 우리 사이의 기술수준 비교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적절하겠고, 프로젝트 이면의 진의라고 한다면 그쪽에서 사후보험에 보이는 관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려드려야겠지요. 또 우리가 보유한 생체무기화 기술을 탐색하려는 시도도 있었고요.」 「위원 F :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합시다.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위원 G :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위원 F : 허, 예라……. 사실 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미국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던지라. 썩어도 준치라고 기술적인 저력이 만만치 않을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인체 강화 분야에서는 우리가 훨씬 낫습니다.」 「위원 D : 연구협력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났을 때였나, 현실에서 미국 쪽 담당자를 만났는데 표정관리가 안 되는 모습이었어요. 야아,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납니다.」 「위원 G : 그 정도입니까?」 「위원 D : 그렇고말고요. 이 인체강화라는 것이 결국은 바이오메카트로닉스인데, 그 동네 DARPA는 최신기술이랍시고 5세대 임플란트를 꺼내더군요. 신경을 연결하려면 머리에 직접 센서를 박아 넣어야 하는 방식입니다.」 「위원 A : 중요한건 실제 성능 아닙니까?」 「위원 D : 성능은 뭐……. 괜찮은 수준이지만, 그 성능을 달성하는 방식이 참……투박하다고나 할까요? 그냥 인간의 몸에다가 강화체계를 이식하는 수준입니다. 유전자 성형은 물론이고 육체의 구조와 성분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우리나라에선 이미 지나간 패러다임이지요.」 「위원 B : 구현방식이야 어쨌든 군이 요구하는 사양(ROC)을 달성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요? 생산성이 낮다든가, 유지관리가 어렵다든가, 문서상의 스펙에선 보이지 않는 다른 문제가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미국이 그렇게까지 허술할 리가 없지 않아요?」 「위원 C : 맞아요.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미국이 아직까진 기술선진국이죠.」 「위원 D : 하하하. 문제는 성능이 아니에요.」 「위원 E : 그러면요?」 「위원 D : 이식을 받을 육체와의 조화입니다. 사람의 몸엔 한계가 있잖아요? 베이스를 그대로 놓고 무지막지한 액세서리를 달면 감당이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합계 100의 장비들을 이식해도 실제로는 50 이하의 성능만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동시에 이식 가능한 강화체계의 숫자에도 제한이 생기고요.」 「위원 E : 흐음.」 「위원 F : 미국은 그 분야에서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생명윤리를 무시할 수가 없는 거죠. 기껏 해봐야 소극적인 유전자 조작 정도에 그치니……. 육체 자체를 무기로 최적화시키는 우리보다는 아무래도…….」 「위원 A : 예. 육체의 기본 설계를 바꾸는 우리에 비해 불리한 입장이지요. 다른 분야에 응용하기도 우리 방식이 더 수월하고.」 「위원 D : 바로 그렇습니다. 그건 실제로 해봐야만 축적되는 기술이거든요. 사후보험 덕분에 연구 기반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위원 A : 그래도 우리의 기술력이 마냥 우월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육체적인 성능을 강화할 경우, 일정 한도를 넘어가면 시각적으로 괴로워지는 경우가 많잖습니까. 도무지 사람으로는 보이질 않아서. 정신질환이 생기는 비율도 높은 편이고.」 「위원 C : 사람이라는 게 그래요. 정체성이 감각과 생김새의 영향을 많이 받나봅니다.」 「위원 F : 뭐,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마인드도 좋게 해석하면 인간의 전통적인 정체성에 대한 존중이지요. 저만 하더라도 전신이식은 괜찮은데 뇌까지 완전히 재구축하는 건……의식이 유지된다는 조건이라도 좀 꺼림칙하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느낌?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미국의 착탈식 팔 다리가 거부감이 적네요.」 「위원 E : 사상부 신경계 최적화야 이제 막 개념연구에 착수한 신기술이니 어쩔 수 없지요.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시각에 따라서는 예전부터 보편화된 뇌 유지보수 기술도 그 계열인걸요. 본인의 사고는 끊어짐 없이 계속 이어지는 중에, 뇌의 일부는 수명한계를 넘겨서도 원래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재생되거나 대체조직이 이식되거나 하는 방식이니까요.」 「위원 F : 즉 사고의 연속성만 유지된다면 하드웨어가 어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위원 E : (웃음) 저는 보다 진보적인 입장이라서요. 사고의 연속성과 육체의 연속성 중에 어느 한 쪽이 단절되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이어지기만 하면 무방하다고 봅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를 보증하는 거죠. 사람은 둘 중 어느 한 쪽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걸요. 육체 더하기 정신이에요.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핵심은 뇌죠. 뇌. 사고가 거기서 이루어지니까.」 「위원 A : 어째 심오한 화두가 나와 버렸군요. 꼭 기술윤리위원회에 참석한 기분입니다. 어차피 어느 위원회나 구성원은 다 똑같지만.」 「위원 E :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우리는 매순간 조금씩 새로워지는 중인걸요. 늙어서 죽은 세포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고 있죠.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나이는 가장 오래된 경우에도 채 10년이 안 된다고요. 평균은 반년이고 말이죠. 그 전에 있던 구성요소는 싹 다 없어졌어요. 때와 각질과 분변으로 배출된 거죠.」 「위원 D : 흐음. 양면적인 연속성이라. 흥미롭군요. 말하자면 사람이라는 게 지속되는 하나의 사건이자 현상이라는 겁니까.」 「위원 E : 네네. 여기에 관계성을 추가하자는 학자들도 있는 걸로 알아요.」 「위원 F : 관계성은 또 뭡니까?」 「위원 A : 단어만 봐도 알겠군요. 사람의 사회성을 가지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주변과 맺은 관계라는 식으로. 즉 관계가 이어지면 그 사람이라는 논리 아닌지?」 「위원 E : 정확하시네요. 그런 주장에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어요. 우리가 영구적인 뇌손상을 입은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진 않잖아요.」 「위원 G : 으, 저는 그런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건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는 나 아닙니까. 뇌 일부를 잃으면 내 일부도 없어지는 겁니다. 사람은 약속이 아니에요.」 「위원 B : 리듬감 좋네요. 뇌 일부, 내 일부. 하하하.」 「위원 D : E 위원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학자들이 예로 드는 상황은 육체와 정신 양쪽의 연속성이 동시에 단절된 경우 아닙니까?」 「위원 E : 으음……그건 살짝 애매한데요?」 「위원 D : 애매해요?」 「위원 E : 예에. 뇌가 아예 다 뭉개진 건 아니니까요. 그 부분을 예전으로부터 이어지는 육체적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고…….」 「위원 C : 그냥 그 사람의 일부만 남은 거라고 칩시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원래의 그 사람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겠지요.」 「위원 A : 이거 참, 어째 논의가 샛길로 빠지는 느낌인데…….」 「위원 B : 에이. 어차피 시간은 넉넉하고, 국가비전이라는 게 넓은 범위를 다루는 거니까 이런 대화도 괜찮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의장?」 「위원 A : 허허…….」 「위원 G : 전 선배님들의 깊이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지적으로 즐거운 자극이군요. 역시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철인들이십니다. 어디 모이기만 하면 남을 헐뜯을 줄만 아는 서민들하고는 정말 핏줄부터 다르신 듯 합니다.」 「위원 F : 고마워요. 빈말이라도 젊은 후배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위원 G : 저는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위원 D : 허. 후배님이 사회생활을 참 잘 하시는구만.」 「위원 B : 아무튼 그럼 E 위원께서는 완전히 전산화된 인격도 부분적으로 인정하시겠군요.」 「위원 E : 정치적인 입장은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네요.」 「위원 B : 당연히 그렇겠지요.」 「위원 E : 그렇다면야, 네. 인격 정보를 복사하고 뇌를 폐기하는 방식이라면, 그건 복사본일 뿐 육체와 정신 모두 단절되는 거니까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고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뇌가 부분적으로 계속 대체되어 완전히 기계화되는 경우에는……그 시스템이 기능적으로 원래의 뇌보다 부족한 점이 조금도, 조금도 없다는 전제 하에 원래의 그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사고의 연속성은 확실하잖아요.」 「위원 C :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자부하실 만 하군요.」 「위원 F : 흠, 말씀들을 듣고 보니 인공생체신경망 이식 정도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로 뇌내 신경계를 완전히 대체하는 건 아직 망설여지지만 말입니다.」 「위원 E : F 위원. 우리 안에 미래를 받아들일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위원 A ; 그만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어차피 여러분들이 논하시는 분야는 이제 막 기초적인 단계에 접어들었을 따름입니다.」 「위원 B : 뇌내 신경계의 완전 대체, 또는 기계화라……. 앞으로 한 수십 년? 아님 백년쯤 지나면 가능하려나?」 「위원 A : 까마득한 이야기지요. 국가의 비전이 백년대계여야 한다곤 해도, 지금으로선 시기상조입니다.」 「위원 E : 뭐 어때요? 우리는 백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텐데요.」 # 300 [300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9) 고건철 회장은 거짓을 혐오한다. 같은 맥락에서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고로 중요한 논의란 매양 실제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이었다. “저어…….” 오늘의 방문객은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가을을 곁눈질했다. “저 아가씨……아니, 저 분은 내보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객이 들면서 회장이 모두 나가라고 했으나, 가을은 시립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항상 예외였고, 비서가 된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기 때문. 회장이 가을을 곁에 두는 이유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폭군은 그녀에게 폭정의 당위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회장이 손짓했다. “내 측근이오. 인사 나누시오.” “아.” 나직한 탄성. 가을의 격을 고민하며 음습한 기대를 비추던 손님이 빠르게 낯빛을 바꾸었다. 그는 나이차에 개의치 않고 허리를 숙였다. “이 만남에서 제게 직접 소개해주시는 걸 보니 정말 중요한 분이신가 보군요. 하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미래한국국민당 대표 방, 호, 재! 의원입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초면에 눈길을 빼앗긴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만남, 제게, 그리고 직접. 여기에 은근한 강세가 들어간 말. 이것이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뜻하는 바는 같았다. 그저 교활함과 거만함의 차이일 뿐. 가을이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비서인 한가을입니다.” “…….” 정치인은 잠시 웃는 얼굴로 침묵했다. 회장과 가을 사이를 순간적으로 왕복하는 시선. 가을이 보기엔 그의 속이 뻔했다. 겨우 비서? 자신을 일개 비서와 같은 선상에서 취급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을에게 비서라는 직위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를 고민하는 느낌. 고건철이 말했다. “지금은 비서지만 나중에는 다를 거요.” “역시 그랬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끄덕끄덕. 정치인은 이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 꺼풀의 연기였다. 가을은 웃느라 가늘어진 그의 눈에서 색이 바뀐 의혹을 읽었다. 대체 이 여자는 정체가 뭘까. 단순한 애인인가? 아니면 숨겨둔 자식? 오늘은 중요한 자리다. 아무나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폭군은 하나 뿐인 딸과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데, 어쩌면 혜성과 낙원의 후계구도가……. 여기까지 헤아리기에 무리가 없는 건 애초부터 가을이 동생만큼이나 타인의 속내에 예민했을 뿐더러, 또한 가을의 직무가 평범한 비서를 넘어서는 탓이기도 했다. 특정 분야에서는 심복 중의 심복이라는 특수비서 강영일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지경. 따라서 뱀 같은 사내는 가끔씩 아기를 질투하는 사냥개처럼 보였다. 독사이며 맹견인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쨌든, 고건철 회장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정치인이 이번엔 다른 우려를 드러냈다. “헌데 회장님께선 전보다 더 편찮아 보이십니다. 치료는 받고 계십니까?” 쿨럭. 하필이면 지금 나오는 기침. 순간적으로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폭군이 사나운 평정으로 대꾸했다. “전신재생을 받고 있소. 만약의 경우를 위해 복제체도 만드는 중이고. 그러니 계약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소.” “이런……. 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아무튼 전신재생이라……그 정도면 안심이군요. 어련히 관리하실 텐데 괜한 걱정이었나 봅니다.” “설령 내가 오늘 죽더라도 당신은 거래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허허허.” 정치인들이 난처하다는 듯이 웃는다. 아까부터 웃는 얼굴뿐이었다. 가을은 기침으로 흔들리는 회장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주었다. 한때 겨울이었던 몸은 실제로도 죽어가고 있었다. 전신재생 이상으로 무너지는 속도가 빠를 만큼. 주치의는 피멍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다. 새로운 복제체가 완성되기까지 견디시려거든 이제부터 하루에 16시간의 세포재생시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그것도 최소로 잡은 수치라고. 그러나 남을 믿지 않는 회장이 업무시간을 줄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인성 질환임에도 약물복용마저 거부하는 상황. “물건은?” 회장의 물음에 방호재 의원은 망설임 가득한 동작으로 저장매체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정확도는 어떤 것 같소?” “아, 그것이……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는데도, 추출한 결과를 보니 흐릿한 구석이 꽤 되더군요. 말씀하신대로 추가 편집 없는 원본으로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그거면 충분하오.” “혹시 몰라서 기록을 검토한 제 소견서도 첨부해놨습니다. 회의 전체를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대체로 어떤 내용이었다는 것쯤은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기억을 보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고맙군. 대표의 성의를 기억해 두리다.” “하하. 별말씀을요.” 무언의 지시에 따라 가을이 저장매체를 회수했다. 이런 거래가 처음은 아니었다. 방호재 의원은 모르는 듯 하지만. 욕심이 많은 이는 그밖에도 있다는 말이다. 회장은 정치인과 잠시 실속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목적은 없고, 다만 위정자에게 신뢰와 안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거래가 목적이라면 회장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럼 살펴가시오.” 작별을 고하는 회장에게 입법부 고위관계자가 상체를 직각으로 꺾는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꼭 건강해지셔야 합니다, 회장님.” 문 밖에선 특수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 의원이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비밀이었으므로, 배웅엔 국정원 요원 출신인 비서의 능력이 요긴했다. 여기에 낙원을 인수한 혜성그룹이 사후보험을 위탁 관리하고, 다시 사후보험이 무인 교통관리체계를 위탁 관리하므로, 도로에 즐비한 폐쇄회로는 걱정할 거리가 아닐 것이었다. 불편하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폭군이 가을에게 묻는다. “저것이 왜 나와 거래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가만히 있으면 아주 오랫동안 가장 아래일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이미 대부분의 잡것들보다는 위인데도?” “욕심엔 끝이 없으니까요. 가지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거겠죠.” “그래, 그렇지. 사람에겐 언제나 더 큰 이익이 필요하지.” 회장이 감정을 드러냈다. 옅은 만족감. 약간의 초조함. 이유는 가을이었다. 곁에 두기로 한 이유가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으니. “재생해라. 먼젓번과 비교해봐야겠다.” 가을은 그의 지시에 따라 콘솔에 저장매체를 끼우고 데이터를 복사했다. 같은 폴더엔 이미 많은 파일들이 존재했다. 방호재보다 앞서 거래를 튼 모 정치인의 기억들이었다. 각각의 파일마다 회의의 명칭이 붙어있었다. 경제개혁위원회, 사후보험 보안위원회, 국방정책위원회, 국가비전 2070 검토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외부의 매체에 기억의 사본을 만드는 기술은 신뢰도를 의심받기 쉬웠다. 사람의 기억이란 제멋대로 왜곡되거나 지워지기 십상이었으므로. 오늘 이후로는 하나의 회의 당 두 개의 파일이 생길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의 대조가 가능해진다는 뜻. 여기서도 운영체제는 트리니티 엔진이었다. 가을은 증강현실로 무언의 명령어를 전송했다. 홀로그램이 떴다. 같은 시간에 교차하는 두 개의 기억이 하나의 회의로 복원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방 의원 이외의 거래로 벌써 한 번 보았던 내용이지만, 전보다 깨진 곳이 적을 뿐더러 더욱 정확할 것이었다. ……. 「위원 E : 뭐 어때요? 우리는 백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텐데요.」 ……. 「위원 A : #%327떫꼸으로, 기존 구상안의 별빛 헤게모니는 순조롭게 구축되고 있습니다. 주요 국가들의 지속적인 견제에도 불구하고 사후보험 가상화폐인 별이 사실상의 기축통화에 봹띗?괃 중이란 뜻이죠. 작년 岳?뙦tOfr?를 기준으로 전 세계 금융상품의 17%, 무역거래총량의 9%가 다른 화폐를 거치지 않고 오직 별 지급요청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간접적인 거래까지 감안하면 훨씬 더 엄청나지요.」 「위원 D : 아직은 방심하면 안 됩니다. 미국도 미국이지만 중국의 압력이 대단해요. 위기감을 느끼는가봅니다. 걂찻긁?4? 가다간 바로 옆에 패권국가가 등장할 판이니까요.」 「위원 C : 그래봐야 지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무역보복을 하자니 자기만 손해고, 전쟁을 하려면 같이 망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쪽에서 뭐라고 뺅슷NULL 공갈밖에 더 됩니까?」 「위원 B : 핵만 아니면 재래식 전력도 우리보다 나을 게 없을 건데…….」 「위원 C : 우리가 원체 돈이 많아야지요. 하하.」 「위원 E : 국민들이 희생당할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민의에 의해 선출된 우리가 살아남고, 또 사후보험의 핵심인 트리니티 엔진 코어도 무사할 테니 전쟁을 驗愿 두려워하기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외교적으로 지금보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원 B : 으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트리니티 엔진 격납고가 몇 메가톤까지 견디도록 설계되었죠?」 「위원 A : 艱⌹NULL톤 지저폭발로 3회요.」 ……. 「위원 A : 그래도 선진국입네 하는 나라들이 중진국 이하 그룹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은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낮은 확률이지만 자칫 국가비전 전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위원 C : 저는 뭐……. 별 걱정 안 되는군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연합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기네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쓰잖습니까. 안 될 겁니다, 아마.」 「위원 D : 그동안의 투자가 드디어 빛을 보는 거지요.」 「위원 E : 예, 맞아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랫동안 손해를 봤는지.」 「위원 D :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이 있는데도 왜 자동화에 고삐를 134##을까? 말로는 국민들의 노동생존권을 보장한다면서, 실제로는 정치적 반발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대규모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인 건 어째서일까? 불법체류에 지나치게 관대한 이유가 #???…….」 「위원 E :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큰 그림을 눈치 채는 게 너무 늦었지요. 지나간 일이라 새삼스럽----, 알아차리는 시점이 예상보다 많이 늦어져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위원 B : 소위 인권 선진국입네 하는 국가들도 %괡팛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들을 많이 깔본다는 뜻이지요 뭐. 그러니 외국인노동자들이나 불법체류자들도 각자의 국가에선 국민이자 유권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지요. 그리고, 사후보험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사후보험에 긍정적일 수밖에요.」 「위원 A : 처음부터 투표권이 목적이었다는 걸 조기에 알 방법이 있었을리가…….」 「위원 D :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泥 泥 자랑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자랑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인내가 정말 길었어요.」 「위원 F : 덕분에 중진국 이하 그룹에서 사후보험에 대한 규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죠. 정치적, 경제적으로 종속시킨 덕분에 UN에서 규제안을 통과시키기도 어렵게 되었고.」 「위원 G : 충성충성. 정말 완벽하게 멋지십니다, 선배님들.」 ……. 「위원 D : 문제는 낙원그룹을 장악한 고건철 회장입니다. 별빛 헤게모니 구상을 완성하더라도,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용하기가 영 난처하게 되었으니까요. 별이 가상화폐이다 보니 달러에 비해 훨씬 더 공격적인 운용이 가능한데, 아쉽습니다.」 「위원 B : 굳이 비유하자면 미국과 비슷한 처지로군요.」 「위원 A : 연방준비제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위원 B : 예. 연준이 중앙은행 역할을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사설은행이잖습니까. 달러 발행이익을 국가가 아닌 사은행이 가져가는 구조이니, 우리 처지하고 대충 비슷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 「위원 C : 하아.」 「위원 A : 다 끝난 마당에 웬 한숨입니까?」 「위원 C : 우리가 이렇게 유능한데, 진짜 유능한데, 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위원 E : (웃음) 선행은 드러나지 않는 게 최고라고 하잖아요.」 「위원 A : 마음은 이해하%슷슷 국민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선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해요.」 「위원 A :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국가를 발전시키는 거지요.」 「위원 A : 다들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재생은 여기서 끝났다. 가을이 묻는다. “회장님께선 알고 계셨나요?” “나는 바보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더 큰 이익을 원하지. 누군가 애써 손해 보는 행동을 한다면, 그놈의 지능보다는 의도를 의심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나는 의심이 많았지. 누구 덕분에 더욱 늘었고.” 고건철은 힘없이 퉁명스러웠다. 그리고 가을을 흘깃 쳐다보았다. “표정이 매번 그 모양이군. 불쾌한가?” “…….” “저것들이 뿌리 없는 열매 같으냐?” “…….” 거듭 대답하지 않는 가을을 보며 고건철 회장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단순히 답답한 것인지, 아니면 차갑게 웃는 것인지. 종래에는 밭은기침으로 귀결되었다. 잠시 후 가을이 조용히 말했다. “회기록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분들이 말씀하시는 나라는 어딘가 공허하네요.” “공허하다?” “네.” 잠시 고민한 뒤에 신중하게 이어지는 나머지. “국가가……거기 사는 사람들 이상의 무언가라고 믿는 것 같아서요.”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 회장이 이죽거렸다. “나라에 뭔가 요구하는 연놈들 치고 그렇게 믿지 않는 경우가 없지. 머저리와 병신들이 생각하는 국가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다. 그래서 요구에도 한계가 없어. 내가 빼앗으면 다른 사람이 빼앗긴다는 걸 몰라.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외면하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쟁이들이야. 그러니 일단 떼를 쓰는 거다. 내놓으라고. 무조건 내놓으라고.” 다시 한 번 가래 끓는 소리. 폭군은 갈증을 담아 말했다. “인정해라.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너는 나 이외의 답을 찾지 못할 거다.” # 301 [301화] #그리스의 섬 (1) 바깥세상의 늙은 소년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향기를 간구할 때, 종말이 미뤄지는 세계는 본격적인 간빙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새크라멘토 시가지에선 여전히 교전이 진행 중이었으나 겨울의 임무부대가 할 일은 끝났다. 교대 및 대기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외에도 방역전쟁 초기부터 참전한 부대들, 그리고 올레마 FOB에서 결성된 부대들 대부분이 명백한 해방 작전을 전후하여 투입된 후발주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됐다. 전투피로를 감안한 조치. 본토회복을 거의 완수한 시점에서 더는 무시하지 못할 문제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국제공항 내 지역사령부에 모인 장교들에게, 로저스 소장이 전달했다. “우리 합동 임무부대는 현 시간부로 해체된다.” 웅성거림이 번진다. 일부를 제외하면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으므로. 그러나 때가 되었을 뿐. 핵심인 240사단부터가 본디 패잔병들을 선별하여 창설된 부대 아니던가. 비교적 멀쩡한 병사들을 골라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심하게 무너진 이들 가운데에서였다. 겨울은 아직 은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혼자 대화하던 병사의 선물. 질문자가 나왔다. “그럼 저희들은 어떻게 됩니까?” “후방으로 재배치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는 휴식, 일부는 경계나 수송 같은 저강도 임무를 수행하며 상당 기간 재전력화를 거치게 되겠지. 방침이 확정될 때 까지는 현 위치에서 대기. 지시는 봉쇄선 사령부에서 직접 내려올 거다. 보급이나 행정지원도 마찬가지고. 각급제대 지휘관들은 병력관리에 힘쓰도록.” 더는 전투력을 기대하지 못할 병사를 가려내고, 서훈심사 대상을 작성하는 등. 당연한 업무지만, 임무에 치여 미뤄둔 게 있다면 지금 해두라는 의미였다. 섭섭하거나 손해를 보는, 혹은 억울한 인원이 생기지 않게끔. 지휘관이 아니면 병사들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 질문자는 또 있었다. “혹시 이번 결정에 민간인 피해의 영향이 있었습니까?” 표정에서 언론에 시달린 반감이 드러난다. 민간인 피해를 무시하라는 명령이 정치적인 반동을 낳은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모른다.” 장군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영향이 있었더라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 같군. 나나 파견 법무관이 강등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사령부 참모직으로.” 이 대답이 비로소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적어도 좌천은 아니었기에. “제군들, 그동안 신세를 졌다.” 건조한 장군에겐 기대하지 않았던 인사치레였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잘 싸워줬다. 오늘의 미국은 역경을 이겨낸 병사들, 그리고 귀관들의 군인정신 덕분이다. 경의를 표한다.” 그가 경례했다. 실내가 잠시 의자 끌리는 소음과 옷깃 스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겨울을 포함한 장교들의 답례를 받은 장군이 손을 내리고 시선으로 면면을 훑는다. “나중에 다시 만나지.”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장군은 몸을 돌렸다. 헤어지는 걸음걸이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동석했던 싱 대위는 브리핑 룸을 나와 한참을 조용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대는 중대장님의 덕을 보는군요.” “내 덕이요?” 겨울의 반문에 끄덕이는 대위. “독립중대 자체는 아직 후방으로 빠질 때가 아니니까요.” “예외가 될 수도 있죠.” “설마 그렇겠습니까.” 대위의 수염이 움직였다. 그 너머는 싱거운 웃음일 것이었다. 겨울은 터미널을 걷는 중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충 맞춘 오와 열로 바닥에 앉아 대기하던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기도 했고. 품새로 미루어 훈련소에서 갓 나온 신병의 비율이 높았다. 과거에 비해 여성 전투병의 비율이 증가한 것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다수는 여전히 남성 병사들이지만. 싱 대위가 제안한다. “아예 이 중위를 기다렸다가 가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유라의 복귀일이다. 칼 빈슨에서 이륙한 수송기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음, 그러네요.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는데.” 브리핑 룸으로 집합하라기에 새로운 작전 전파를 예상했던 겨울이었다. 정보장교 머레이 중위가 우려했던 파나마 진공이야 어쨌든, 이 도시를 탈환하는 싸움도 아직 진행형이었으니까. “중대에 연락해요. 이쪽에서 데려가겠다고.” 겨울의 긍정에 싱 대위가 스마트 폰을 다루었다. 톡, 톡, 톡. 엄지 하나로 자판을 누르다보니 글씨가 완성되는 속도가 느리다. 차라리 전화를 거는 편이 빠르겠다 싶을 만큼. 와르르 무너지는 요란함이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겨울을 보느라 주의가 산만해진 병사가 운반물을 쏟은 것이었다. 넘어진 카트로부터 백 단위의 사각방패가 이쪽의 발치까지 부채꼴로 밀려나왔다. 겨울이 손을 감싸 쥐고 찡그리는 병사에게 물었다. “다친 데 없어요, 일병?” “괜찮습니다, Sir!” 차렷 자세로 아픈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는 병사. 물끄러미 보아도 출혈이나 붓기는 없었다. 다만 발갛게 핏기가 오른 살이 보일 따름. 카트 손잡이와 방패더미에 집히기라도 했나 보다. “도와줄게요.”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 방패를 수습하겠다고 무릎을 꿇으니 병사가 아주 기겁을 했다. 순간적으로 잡아 일으키려고 했을 정도로. 그러나 실제로 손을 대지는 못했다. 당황하던 병사는, 잠시 헤맨 끝에 체념하곤 스스로도 방패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뉴욕에서 온 화물이었다. 강화 플라스틱 표면에 NYPD가 찍혀있다. 손을 보탠 싱 대위가 실소한다. “참 빨리도 보내주는군요.” 겨울은 여상히 대꾸했다. “이럴 때도 있는 거죠.” 현재의 미군 같은 거대한 조직에선 충분히 있을 법한 행정적 비효율이었다. 그동안 이런 일이 드물었다는 게 오히려 더 놀라운 일. 유능하다고 해야 할지, 필사적이라 해야 할지. 수습한 방패더미를 카트에 다시 결속시키기까지는 2분 남짓으로 충분했다. “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례를 남기고 카트에 체중을 실어 멀어지는 병사는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다. 평소 근육이 두꺼운 이들을 많이 보아온 터라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는 겨울. ‘그러고 보니 아까 봤던 신병들도…….’ 안경을 쓴 숫자가 꽤 되었던 것 같다. 뒤를 돌아보는 겨울의 모습에 싱 대위가 묻는다. “무슨 일이십니까?” “병력자원의 질이 조금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대위가 가능성을 긍정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병력 손실이 워낙 많았으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잃었죠?” “음, 가장 큰 건 역시 최근의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였지만, 그 외에도 모겔론스 아웃브레이크 초기에 상실한 해외주둔 병력이 최소 절반은 넘는다고 하고……. 서해안 감염 확산 당시의 손실도 적지는 않고…….” 의외로 정확한 누적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핵공격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대략 2백만 선으로 잡는다면 징집 적정연령의 청년층 10%가 증발했다는 뜻. 어림짐작이긴 하나, 미국의 총력전을 여러 차례 경험한 겨울의 추측이므로 오차는 크지 않을 것이었다. 인구밀집지대인 캘리포니아에서의 피해까지 고려하면 퍼센티지를 더 올릴 수도 있다. ‘열 명 중 하나 둘이라고 하면 적어 보이지만, 우수한 인력부터 먼저 소모되는 식이니까.’ 육군의 규모는 명백한 해방 이전에 천만을 돌파했다. 20대 청년 둘 중 한 명은 이미 군대에 있는 꼴이었는데, 손실을 보충하겠다고 신병을 또 뽑으면 당연히 질이 낮아지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여기는 미국이었다. 비만율이 빠르게 낮아지는 중이라곤 해도, 병역에 부적합한 사람의 비율은 절대로 낮지 않다. 애초에 미국인들의 비만은 사회적인 질병이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먹을 음식이 햄버거와 감자튀김, 프라이드치킨밖에 없고, 마실 것은 콜라뿐인 환경이라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살을 빼기 힘들다. 샌프란시스코, 피쿼드 호에서 만났던 울프 하사는 입대한 이후에야 실물로서의 사과를 처음 봤다고 했었다. 재구성된 과거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비만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무임승차자 취급을 당한다고 들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런 상황에서조차 식량 수급에 문제가 없으며 해외지원까지 감당하는 세계 최대 농업국가의 위엄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실외로 나온 겨울은 햇빛 섞인 바람을 느꼈다. 따스함과 서늘함이 파도처럼 교차하는 감각. 활주로 저편의 하늘과 땅에 누이와 같은 이름의 계절이 펼쳐져있었다. 아직은 더운 날씨지만 살인적이던 여름에 비하면 온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험비를 불러 대기시켜놓는 동안에도 활주로 갓길은 새로운 물자와 병력으로 부산스러웠다. 사방에서 무수한 군화소리가 울리고, 저속으로 달리는 차량들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인상만으로는 혼잡한 도시 한복판이었다. “저기 오는군요.” 싱 대위가 주의를 상공 방향으로 환기했다. 수송기 한 대가 고도를 낮추며 활주로로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하게 예정된 시각이었다. 주로 뜨고 내리는 수송기들에 비해 체급이 작아 알아보기 쉬웠다. 항공모함에선 대형 수송기를 운용하지 않기 때문. 착륙한 항공기의 승강구가 열렸다. 사람은 드문드문 나온다. 항공모함으로부터 육지의 작전기지로 보낼 사람이 별로 없는 탓이었다. 덕분에 수송기가 잘 편성되지 않았고, 그만큼 유라의 복귀도 추가로 늦어졌다. “중위! 여기에요!” 두리번거리던 유라가 겨울의 목소리에 앗! 하고 반응했다. 짐을 버겁게 지고 와서는 정말 환한 표정으로 경례한다. “중위 이유라! 지금 복귀했습니다!” “잘 왔어요. 오랜만이네요. 치료는 확실히 끝난 거죠?”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대답하는 그녀는 전보다 더 건강해보였다. “그런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요? 갈 땐 분명히 가벼웠을 텐데.” 겨울이 묻자 유라는 살짝 당황했다. 유라가 멘 더플백은 주둥이까지 아슬아슬하게 채워 묶어놓았다. 뭐가 그리 빵빵한지. “아, 이거요? 아하하……. 이것저것 선물을 많이 받아서요. 버릴까요?” “왜 버려요. 작전 중이라 개인 소지품 수송에 제한이 걸리면 또 모를까. 가져가서 규정대로 검사만 받아요. 정 뭣하면 후방으로 보내달라고 하던가.” “네, 알겠습니다!” 유라가 다시 방글방글 웃는다. 만화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기도 하고, 제중의 농담에도 진심으로 웃어주는 성격이니 미군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고는 생각했다. 선물을 보니 실제로도 그랬던 모양이고. “일단 타요.” 겨울이 험비를 가리켰다. 짐을 실은 유라는 후방좌석에 앉았다.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데이비드 임무부대의 현 주둔지는 공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꺼두었던 폰에 전원을 넣던 유라가 차창 밖의 풍경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도시로 가는 게 아니네요? 애들한테 듣기로는 의사당에서 지낸다던데.” 선탑자석의 겨울이 힐끗 돌아보았다. “끝났어요.” “어……. 네?” “거긴 다른 부대가 인수했어요. 로저스 소장님 휘하 합동 임무부대도 오늘 해체됐고. 240사단도 해체되거나 재편성되거나 할 거예요.” “그럼 우린 이제 뭐해요?” “모르죠, 아직.” 유라는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제가 너무 늦게 온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죄송할 건 또 뭐예요. 남보다 더 열심히 싸우다가 다쳐서 치료받고 온 건데.” “아무리 그래두요…….” 살짝 시무룩해진 유라가 가슴께에 달아둔 훈장, 퍼플하트를 만지작거렸다. 뗄까말까 고민하는 눈치라 겨울이 선수를 쳤다. “그거 멋있네요, 중위. 잘 어울려요.” “윽. 괜히 달고 왔나 봐요.” “놀리는 거 아닌데요?” “음……. 작은 대장님도 받으셨죠?” “나는 아직이에요.” 겨울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요?” “그동안 밀린 것도 있고, 무슨 재평가를 한다는 말도 있어서, 나에 대한 서훈은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나 봐요. 워싱턴에 가서 받게 되겠죠.” “그렇구나……. 맞다! 손은 좀 어떠세요? 많이 다치셨어요? 흉터는 안 남으셨고요?” “흉터가 있긴 있는데 크지는 않아요.” “진짜요? 보여주세요. 전에 삽날에 손등 찍혔을 때도 별 거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못미더워하는 유라를 위해 한쪽 장갑을 벗은 겨울이 의자 위로 들어보였다. 손을 붙잡은 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으음- 하며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본인이 아픈 표정을 지었다. “제 예상보다는 낫네요……. 뉴스에서 손에 불붙은 거 보고 엄청 놀랐어요. 대장님이 다치면 안 되는데.” 손을 거둔 겨울이 웃음을 만들었다. “누구는 다쳐도 되고요?” “그건 아니지만, 대장님은 대장님이니까요.” 싱 대위는 아까부터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평소 부하들 앞에서 엄격한 그라면 지금쯤 헛기침을 했겠는데, 그도 유라가 오랜만이다 보니 살짝 봐주는 느낌이었다. # 302 [302화] #그리스의 섬 (2) 주둔지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가설 건물 앞에 늘어진 임무부대원들의 대기열이었다. 험비에서 내린 유라가 갸우뚱 했다. “저긴 뭔데 줄이 저렇게 길어요? PX인가?” “아뇨. 세금신고 사무소요. 국세청(IRS)에서 파견된 인력이랑 회계장교들이 대기 중인 부대마다 순서대로 방문업무를 보는데, 오늘부터 우리 중대 차례거든요.” 겨울의 대답을 들은 유라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세금이라니……. 되게 뜬금없네요.” “사실 훨씬 전에 끝냈어야 할 일이에요. 우리가 방역전선에 있어서 연기되었을 뿐이지.” 싱 대위가 거들었다. “본토 탈환이 실질적인 성공으로 끝난 만큼 이제 거둘 때가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군의 병력규모를 감안하면 지금까지 미룬 것만으로도 정부로선 꽤 부담이었을 겁니다.” 본래의 신고일자는 4월 중이었다. 허나 방역전선의 장병들은 자동으로 2개월이 연장되었다. 이는 명백한 해방 작전에 맞춰 연초부터 정해진 사항이었다. 대통령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만 아니었으면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본토탈환 완료수순을 밟고 있었을 테니까. 허나 명백한 해방은 예기치 못한 실패로 끝났고, 이에 따른 추가조치가 이루어져야 했다. “중대장님은 다 끝내셨어요?” 유라의 물음에 머리를 흔드는 겨울. “하려고 했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어요. 나중에 다시 보기로 했네요.”  “무슨 문제인데요?” “세금이 너무 많아서 당장 낼 수가 없었거든요.” “……네?” 겨울은 당황한 유라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개인적으로 받은 선물들을 국방부가 대신 처분하기로 했는데, 그 수익을 아직 정산 받지 못한 상황에서 세금이 계산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런 실수가 있긴 했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고마웠어요.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빨리 끝내더라고요. 봉쇄선을 넘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해왔나 봐요.” 이를 싱 대위가 평한다. “당연한 겁니다. 중요한 건 방역전쟁에서의 승리니까요. 싸우는 것만으로도 바쁠 사람들을 사소한 문제로 귀찮게 해선 안 됩니다.” 겨울이 쓴웃음을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게 대단한 거예요. 이런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렇고요.”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대위는 순순히 수긍했다. 허나 대단하다는 평가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정도가 한계일 것이었다. 누구든 자기 삶이 가장 힘든 법이므로. 대통령과 현 정권의 유능함이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저도 얼른 줄서야겠어요.” 국세청의 악명에 초조해하는 유라를 겨울이 안심시킨다. “뭘 벌써 가려고 그래요. 아직 이틀 남았으니까 짐 정리부터 천천히 끝내도 괜찮아요.” “이틀…….” 꺾였던 유라의 발걸음이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한 박자 늦은 놀라움으로 겨울을 응시했다. “근데 중대장님 엄청 부자신가 봐요. 지금까지 모은 월급으로 세금도 못 내실 정도라니……. 예-전에 동맹 사람들한테 쓴 거 빼면 달리 쓰신 데도 없잖아요?”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이런 대화를 나누며 들어서는 가설 막사는 독립중대의 공용공간이었다. 회의실 겸 휴게실에서 TV를 켜놓고 쉬던 이들이 곧바로 기립했다. 유라를 발견한 눈동자들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겨울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쉬어요.” 부동자세가 풀리는 즉시 환성이 터져 나온다. 여러 사람의 기쁨과 환영에 파묻히는 유라. 장교와 사병 구분 없이 꽉 끌어안는 모습이 정겹다. 이 와중에 홀로 떨어져 눈시울을 붉히는 이가 있으니, 임시 1소대장이었던 송정훈 소위였다.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드디어……해방이다…….” “…….” 다가간 겨울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인수인계 끝내고 잘 다녀와요.” “예……. 좋은 성적 거두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곳은 장교교육 심화과정이었다. 유라가 복귀함으로서 담당할 소대가 없어진 송 소위는 보충교육을 이수하기로 되어있었다. 향후 독립중대가 독립대대로 승격될 때 신규 소대장으로서 합류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포트 로버츠에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지.’ 다른 참모들도 겨울의 예상에 동의했다. 독립중대가 난민 병력자원 활용의 첨병인 탓이다. 한편 겨울은 부대의 재배치를 전후하여 워싱턴 D.C로 가게 될 것이라는 전언을 받았었다. 상부의 논의를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사람은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공보장교, 맥과이어 소령. 방문일정의 실체는 승전행사에 가까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귀띔 받은 바 있다. 겨울처럼 훈장 수여를 미뤄온 전쟁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라고. 겨울을 전담하면서 진급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지만, 맥과이어가 괜한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무적으로 겨울의 의견을 확인하고자 했다. 겨울 개인이 아니라, 부대 단위 참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겨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앞서 부적절한 대우를 한 번 겪은 귀관에게 이런 걸 물어보기 미안하지만, 부대원들이 탈영할 가능성은 없겠나?” “탈영이요?” “그래. 공보처가 기대하는 건 시민들에 대한 시현효과다. 예컨대 뉴욕 같은 도시에서 평범하게 휴가를 보내는 모습만으로도 반향이 충분할 거라고 예상하는 거지. 알다시피 팍 중위나 리 중위처럼 한겨울 소령의 주변인물로서 알려진 얼굴들도 있으니 말이야.” 겨울의 이름은 또박또박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진석과 유라는 성씨만으로도 부정확했다. 기실 맥과이어 이외에 많은 미국인들이 이런 식일 것이었다. 대답하기 전, 겨울은 고개를 기울이고 시간을 끌었다. 신중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예. 지금은 희망이 있거든요. 여기서 곧장 D.C로 직행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포트 로버츠로 한 번 돌아갔다가 참석하면 괜찮을 거라고 봐요. 안정적인 생활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겠죠.” 존경 받는 군인으로 남느냐, 지명수배자가 되느냐. 전황이 불안하고 각자의 지위 역시 안정과 거리가 멀었을 땐 봉쇄선 동쪽에 대한 동경이 그만큼 강렬했었다. 장한별이 저격수 교육과정을 밟고자 포트 베닝으로 갔을 때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러워했을 만큼.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본다. “정 불안하시면 제게 했던 것처럼 호텔에 가둬두지 그러세요?” 시간가속으로 넘겼던 첫 번째 워싱턴 D.C 방문에서 겨울이 갇혔던 호텔은 위스키 호텔(WH), 즉 두음문자로 백악관을 뜻하는 은어였으나, 부대원들은 정말로 호텔에 머무르게 될 것이었다. 설마 거기서까지 군 주둔지를 내어주진 않을 테니까. ‘정부 입장에서도 보는 눈을 의식해야지.’ 시민들은 독립중대의 기념식 참가를 일종의 보상으로 바라볼 것이었다. 헌데 중대원들을 주둔지에 가둬놓고 내보내지 않을 경우, 언론이 반드시 물어뜯지 않겠는가? 현 시점에서 작년 같은 친정부적 보도양상, 소위 애국적 보도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레임덕의 한 단면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가두라는 말을 비꼬기로 들었는지, 이때의 맥과이어 소령은 곤란한 웃음에 한숨을 곁들였다. “신랄하군. 그건 이미 부적절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에 겨울이 다시 말했다. “오해하신 것 같은데, 진심으로 드리는 제안입니다. 물론 그 많은 수를 백악관으로 보내라는 건 아니고, 기왕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면 5성급 호텔처럼 화려한 곳이 좋겠다는 뜻이었어요. 그럼 장교나 병사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생기겠죠. 요즘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테러 방지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으음…….” “억지는 아닐 걸요? 아직도 리라는 성씨가 무조건 중국계인줄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 병사들에게 설명하기도 그럴 듯 할 거예요.” “일리는 있을지도.” “비용이 문제가 된다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보탤 수도 있는데.” 맥과이어는 다시금 곤란해 했다. “끔찍한 말 말게. 나중에 밝혀지면 후폭풍이 엄청날 짓이야.” 그리고 다시 고쳐 내놓았던 말. “무엇보다 그런 방향으로 확정된 것도 아니지. 잠정적인 방침은 자유로운 외출을 허용하는 쪽이니까. 윗선에서 바라는 그림은 시민들과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구도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고, 술집에서는 누군가 술을 사주고 건배를 하는……. 어떤 느낌인지 알겠나?” “사전교육은 필수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뭐, 잔뜩 취해서 우는 정도는 허용범위겠지만, 난투극이라도 벌였다간 대형사고일 테니까.” 그리고 공보장교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하간 귀관은 부하들의 탈영 가능성을 낮게 보는 거로군?” “그렇기도 하고……. 자유롭게 풀어둔다고 해도, 통제가 아예 없진 않을 거잖아요? 사전에 행선지를 신고한다든가, 연락망을 유지한다든가, 넷 워리어 단말 신호를 추적한다든가……. 여러 가지 있을 텐데. 음, 아예 전자발찌는 어때요?” “진담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짓궂기 짝이 없어.” 그리고 그는 특별히 유의해야 할 인원이 있다면 사전에 알려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알리기에 앞서 상담으로 관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 참. 한 가지 더.” 떠나려던 맥과이어 소령의 말. “봉쇄선을 넘어가면 순회연설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연설?” “우선은 전시채권 판매에 관해서 하나. 그리고 시민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하나. 이것도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두라는 의미에서 일러두는 거다.” “할 말은 미리 정해져 있을 거 아녜요?” “본인이 직접 준비한 내용을 토대로 손을 보는 게 가장 좋겠지.” 이야기가 어디서 샐지 모르는 탓이었다. 공보처라고 해서 정치적 성향이 통일되어있는 건 아니었으니. 『당신의 팔다리를 30초 만에 잘라드립니다!』 인상적인 광고가 생각하던 겨울을 현재로 끌어왔다. 『판매량 10만개 돌파 기념! 간편 사지절단 키트 50% 할인!』 “…….” 반가운 재회의 와중에 TV는 보고 듣는 사람 없이 홀로 떠드는 중이었다. 잠시 후 방영 예정인 프로그램은 차기 대선 특집기획이었고. ‘오늘은 나오려나.’ 겨울이 우려에 가까운 관심으로 기다리는 건 공화당 대선후보 에드거 크레이머의 폭로였다. 9월 들어 그는 현 정권의 치명적인 비밀 두 가지를 곧 폭로하겠다고 거듭 밝혀왔다. 정작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었고. 아마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전승기념식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전에 하나 후에 하나라면 적절하겠다. ‘하나는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겨울도 예상을 못하겠다. 그러나 개연성은 충분했다. 작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비상시국에 대응하는 긴급조치가 한둘이었겠으며, 그 모든 조치가 법적, 윤리적으로 타당하기도 어렵지 않았겠는가.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기를 기대하는 블러핑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동요하다보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지, 하는 계획. 나오는 게 없어도 큰 손해는 아니었다. 어차피 발표한 건 없으니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정정하면 그만. 백악관이 기념행사를 서두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겨울. 요즘은 꿈을 꾸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아쉽습니다.」 날이 밝을 즈음 앤이 보낸 메시지였다. 「당신과의 재회가 다가오네요.」 겨울은 여기에 아직 답신을 하지 않았다. 단 두 줄 뿐이었으나 절제된 감정이 깊게 느껴져 얕은 답변을 보내기 곤란했던 까닭이다 사실, 오늘 군 관계자 이외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그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CIA가 피자 프랜차이즈 번호로 발송한 링크 하나. 「영상은 한 번 재생된 후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어있으니 혼자 계실 때 확인하십시오.」 라는 알림. 개인정보 운운하는 건 당연히 위장이었다. 민감한 정보라는 암시일 따름. 어딘가의 밀실, 영상 속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보국 사형집행인은 화면 너머의 겨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걸 보고 싶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 뿐인 조명 아래, 손발이 묶인 채로 무릎 꿇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밭은기침에 피가 섞인 남자는 다름 아닌 채드윅 팀장이었다. 입으로 숨을 쉬느라 듬성듬성한 이빨이 보였고, 부어오른 얼굴은 혹독한 심문의 흔적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겨울은 그가 채드윅임을 알아보았다. 흐, 하고 웃는데, 그 느낌이 다른 사람일 순 없었다. 「간파」가 이 판단을 긍정했다. 채드윅의 머리카락을 놓은 정보국 요원은 느린 동작으로 귀마개를 착용하고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총구가 헝클어진 머리를 겨누었다. 채드윅은 고개를 숙인 채로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릴 뿐, 울거나 애원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타앙! 어둑하던 실내가 한 차례 번쩍였다. 팍 튀듯이 흔들린 머리통으로부터 핏기 진한 뇌수가 쏟아졌다. 털썩 쓰러지는 몸. 「이 건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마십시오. 대외적으로는 살아있어야 할 놈이니까요.」 그럼, 실례. 화면을 향해 까딱 목례한 사형집행인이 구두소리를 내며 나간 뒤, 번지는 핏자국 외의 모든 것이 정지화면 같았던 10여초 후에 비로소 영상이 종료되었다. # 303 [303화] #그리스의 섬 (3) 정보국이 채드윅의 죽음을 알려준 목적은 신뢰도 제고일 것이었다. 그의 행방이 불분명하다면 겨울이 정보국에 의혹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을 조치. 또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에도 의의가 있겠다. 다시 말해,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석이 휴게실로 들어섰다. “앗…….” 그를 발견한 유라가 손을 움찔 들어 올렸으나, 여느 때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진석은 그녀를 슥 보고 지나칠 따름이었다. 세금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차례차례 합류하면서 이어지던 반가운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조용해졌다. 겨울은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의 어깨 너머로 부루퉁해지는 유라를 볼 수 있었다. 여러 시선을 싹 다 무시한 진석이 정자세로 경례했다. “여기 계셨군요.” 뭔가 있나보다. “날 찾았어요?”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에게 진석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굳이 독대를 청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가본데……. 겨울이 끄덕였다. “중대장실로.” 여러 궁금증들을 등지고 들어서는 중대장실은 가설 건물 내에서 적잖은 공간을 차지했다. 여러모로 기대보다 좋은 시설. 독립중대만 잠시 머무르고 말 거라면 텐트를 치고 말았겠으되, 지역사령부 인근 거점으로서 앞으로 임무 전환이 필요한 부대마다 머무를 주둔지이기에 그만한 물자와 인력이 투입된 까닭이었다. 겨울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의자에 앉아 진석을 보았다. “무슨 용건이에요?” “선물 매각금 전액을 기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어디서 들었어요?” “국세청 담당자가 그러더군요. 존경스러운 상관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다른 부자들처럼 절세 수단으로 자선단체를 만들어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라 더 놀랍다고.” 세금신고 창구에서 들은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아직 선물 계좌의 존재조차 모른다. “일단 사실인데, 뭔가 문제라도?” “그럼 선우 소위와 천 소위에게 하셨던 말씀은 거짓이었습니까? 중대장님께서는 분명 사재를 털어 동맹을 지원할 수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겨울이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두 사람이 자랑하고 다닐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으나, 진석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거동이 수상해서 갈궜습니다.” “…….” “그 둘, 저만 보면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굴더군요.” 하기야 은행을 털자는 계획이 본디 진석의 발상이었으면, 성격상 후임 소대장들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와서 제안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갈굼으로 알아냈다는 게……. 근심이 의심을 밀어냈다. “설마 이 일로 더 괴롭힌 건 아니죠?” 질문을 받은 진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마음 같아선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싶었습니다만…….” “다만?” “참았습니다. 중대장님께서 이미 조용히 넘어가주시기로 결정하신 일을 갖고 제가 더 뭐라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잖습니까. 중대장님 입장에선 두 번 무시당하는 격입니다. 선우 소위와 천 소위에게도 그런 줄 알라고 분명하게 말해놨습니다. 착각하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니, 하며 이어지는 단호함. “이 건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다른 일로 티 안 나게 갈구겠습니다.” 그게 티가 안 날 수가 있나. 당사자들이야 당연히 알겠고, 그저 남이 보기에 평소보다 혹독하지 않은가 의아한 정도겠지. 겨울의 이러한 시선에 아랑곳 않고, 진석이 답변을 요구했다. “아무튼 말씀해주십시오. 왜 생각을 바꾸셨습니까?” “바꾼 적 없어요.” 겨울이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두며 편하게 이야기했다. “기부하겠다는 결심 자체는 한참 전에, 내게 그런 돈이 들어올 거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미 내렸던 거예요. 단지 당시에 받았던 계약서가 정해진 양식이었고, 수정사항을 주고받을 겨를이 아니어서 그냥 구두로만 통보했을 뿐이죠. 그쪽은 당장 창고가 미어터져서 담당자가 과로사할 위기였던 데다, 난 핵잠수함 찾느라 바빴거든요. 뭐, 내가 기부하는 상황에 맞게 시나리오가 작성되어 있었던 건 뜻밖이었지만요.” “그럼 사용처가 벌써 확정된 돈이었던 겁니까?” “확정까지는 아니었으니까 내가 선우 소위하고 천 소위에게 그런 말을 했겠죠?” “……잘 모르겠군요.” “알잖아요. 미국에서 정부와 거래할 때 확실한 계약서 없이는 어떤 일도 진행되진 않는다는 거. 안 그래도 나한테 강압을 한 것처럼 보일까봐 불안해서 내 의사를 녹음까지 해달라던데, 우선 그 돈을 어디에 기부할지부터 명확하게 정해야겠죠. 원래는 국방성금이 낫겠다 싶었지만……선우 소위랑 천 소위가 찾아온 다음에는 난민구호기금 쪽으로 한 번 더 검토해봤던 거예요.” “난민구호기금이라면…….” 사용처가 분산되어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 그 당연한 의문을 과연 겨울이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 따라서 흐려지는 말끝에 대고 겨울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건 박 중위만 알고 있어요. 난 기금을 집행하는 과정에 개입할 연줄이 있거든요. 그러니 사재를 직접 쓰나 기금을 거치나 같은 결과로 만들 수 있었어요.” 선우요셉과 천소민 두 사람에게도 피자 프랜차이즈의 실체를 알려주진 않았다. 암시만으로도 상당한 비밀이고, 비밀을 공유하는 건 그만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진석이 진지하게 묻는다. “이유라 중위도 모릅니까?” “…….” 겨울은 조금 힘이 빠진 채로 긍정했다. “네. 두 부장님들하고 통화할 때도 말 안했어요. 나중에 기회를 봐서 알려드릴까 싶은데, 어쨌든 동맹 관계자들 중에선 박 중위가 처음이에요. 달리 아는 사람도 없지만요.” “그렇군요.” 진석의 낯빛에 스치는 것은 만족감보다는 안도감이었다. 겨울이 물었다. “이상하네요. 이유라 중위를 못 믿어요?” “물론 믿습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을 겁니다. 중대장님을 제외한 다른 누구보다도 낫다고. 하지만 이런 비밀을 공유할 상대는 못 됩니다.” “왜요?”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소대장으로서의 능력이나 책임감은 훌륭하지만……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비밀 같은 걸 감추는 데엔 소질이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감춰야 할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낄 사람입니다. 장교 노릇도 본인이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중대장님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음…….” “그리고 본인이 아는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겪으면,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절차로 해결되지 않으면 중대장님께 부탁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라 중위의 ‘작은 대장님’에 대한 믿음은, 뭐라고 해야 할지, 선이 없는 느낌입니다.” “선이 없다?” “예.” 고민하던 진석이 힘겹게 말을 기웠다. “저는 가끔 그 여자……죄송합니다. 이유라 중위가 믿는 ‘작은 대장님’이 과연 사람이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느낌인데……중대장님 스스로도 어느 정도 느끼지 않으십니까?” “느낀다 치고, 그래서요?” “다른 중대원들이나 동맹 사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간부가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이 ㅆ……선우 소위와 천 소위가 낫습니다.” 이제 앞날이 암담한 두 소대장은 겨울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겨울을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대장님께서 뭐든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그런 연줄이 있다면 당연히 신중하게 써야 합니다.” 확실히 피자를 주문한 내역이 밝혀지는 날엔 스캔들로 비화할 것이다. ‘그래도 치명적이진 않겠지만…….’ 국세청에서 파견된 사람도 그랬다지 않은가. 세금을 아끼려고 기부하는 다른 부자들보다 낫다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부정이 아니었던 만큼 비난을 받는다 한들 위험수위에 도달하긴 어렵지 싶었다. 적어도 겨울이 곱씹어보기에는. 혹은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다. 중국계 난민에게도 돈이 쓰인다는 사실이 싫은 이들은 겨울의 행동을 외려 좋게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므로 물고 늘어지는 이들은 한 결 같이 불만이 많았던 이들로 국한될 터였다. 겨울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호의적인 까닭에 스스로 반박할 근거를 찾을 것이고. 이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양상이었다. 마음이 먼저 있으면 이유는 그 다음에 찾는다. 경험에 의거한 예측. 겨울이 말했다. “이유라 중위도 그 정도는 알 걸요.” “머리로는 알겠지요.” 그러고 보면 진석은 유라가 부탁을 할 것이다, 가 아니라 부탁을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라고 했었다. 겨울이 이 차이를 확인했다. “실제론 부탁하지 않더라도 혼자 힘들어할 거다?” “비슷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 하지만 겨울에게 폐를 끼치기는 싫은 마음. 혼자서 할 갈등. 그러므로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편이 낫다. 진석의 입장이었다. “의외네요.” 겨울의 말에 진석이 꿈틀 했다. “뭐가 말입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좋게 평가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배려하는 감정은 뜻밖이라서요.” “배려……해석이 이상한 겁니다.” 진석은 선명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겨울은 표리의 온도차에서 작은 즐거움을 느꼈으나, 누구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헌데 정작 진석에게는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화제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뭔데요?” “차기 중대장은 제가 되고 싶습니다.” 겨울은 다시금 고개를 기울였다. “중대장?” “그동안의 모든 싸움이 다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였고, 이젠 이루어졌잖습니까. 중대장님의 대대장 진급은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부중대장인 싱 대위는 다음 중대장이 아니라 대대 참모로 올라가겠지요. 애초에 중대장님의 짧은 지휘경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붙은 참모진이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불가능한 요구는 아니었다. 중위가 중대장을 맡는 경우는 흔하다. 장교가 부족해진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선임 소위에게 직책진급으로 맡겨보고, 무리 없으면 그대로 굳히는 마당이니. 다만 독립중대의 격이 일반적인 중대보다 높다보니, 진석에게 맡긴다면 역시 직책진급이 필요할 것이었다. 가능성을 검토하는 겨울에게 진석이 말했다. “저보다는 이유라 중위를 더 믿으신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선우 소위나 천 소위 같은 놈들이 주제를 모르고 건방진 짓을 해도 그냥 좋게좋게 넘어갈 타입입니다.” “나도 그랬는데요?” “중대장님은 그렇게 하셔도, 아무리 심하게 망쳐놔도 나중에 말 한 마디 강하게 하시면 끝납니다. 정말로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여차하면 싹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누구든 제대로 대장님의 눈 밖에 나면 동맹 내에선……아니, 난민구역에선 숨도 못 쉴 겁니다. 다른 곳이라고 나을 것 같진 않군요. 하지만 이유라 중위는 다릅니다. 차라리 제가 낫습니다.” “굉장히 직설적인 요구네요.” “이대로 가면 어차피 이유라 중위가 차기 중대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 아니면 도였다는 뜻.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진석이 손해를 볼 것도 없었다. 은행을 털자고 제안한 소대장들의 처벌조차, 그들의 이유와 불안을 참작하여 푸쉬 업으로 끝내지 않았던가. “저와 이유라 중위의 차이는……말하자면 그겁니다.” “그거?” “예를 들어 모르몬 교도나……여호와의 증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이유라 중위는 어느 정도 상대해주다가 돌려보내거나, 최소한 웃는 얼굴로 안 믿는다고 여러 번 사양하겠지만……저라면 총을 들고 쫓아낼 겁니다.” 이 말이 어딘가 붕 뜨고 어눌한 것은, 진석 나름대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내용보다 그 어색함에 웃었다. 진석의 얼굴이 붉게 찌그러졌다. “ㅈ……웃지 마십시오.” “미안해요. 웃음이 나오네요.” 오랜만에 재밌는 것을 봤다. 큭큭거리는 겨울을 향해 진석이 정색했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동맹에 있을 때, 특히 중대장님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저한테 동맹을 어떻게 해보자고 달라붙는 멍청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십니까?” “음, 그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해보자고 했는데요?”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진석이 말을 얼버무렸다. “관심이 동하진 않았어요?” 겨울이 묻자 진석은 의외로 긍정했다. 내키지 않는 듯이, 느릿느릿하게. “괜한 의심은 싫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때는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괴롭히시는 겁니까?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작은 대장님을 대신합니까?” 흥분했는지 여간해선 안 쓰는 호칭까지 나왔다. 진석은 작은 대장이라는 칭호를 삼가려고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빨라졌다. “이제 곧 포트 로버츠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가서 보면 그런 인간들이 또 있을 거란 말입니다. 전처럼 대장님을 얕보진 못하더라도, 할 만한 수작들은 열심히 부리겠죠. 이유라 중위더러 상대하라고 시키면 사람 망가지기 십상입니다.” 이쯤 되면 진짜 동기가 개인적인 욕심일지라도, 인간적인 염려 역시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서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후자가 주된 이유이기를 바라지만, 겨울은 사람에게 그 정도의 고상함을 바라지 않았다. ‘장미는 가을에만 피면 되지.’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겨울은 생각한다. 누군가 형편이 나쁠 때도 착하기를 바라는 건 세상이 어는 계절에 꽃이 피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물론 그 꽃이 유달리 아름답기야 할 것이나, 그렇다고 추울 때 피지 않는 꽃을 잘못되었다 할 순 없지 않겠는가. 찰나의 사색을 보낸 겨울이 말했다. “일단 알겠어요. 검토해볼게요.” “감사합니다.” 한숨을 쉰 진석이 어깨에서 힘을 뺀 채로 묻는다. “그럼 기부 건은 결국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역시 국방성금으로 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벌써 들어서 알겠지만, 달리 돈을 마련할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쓰는 돈 이상으로 이미지를 벌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미지…….” “대선이 신경 쓰이잖아요. 혹시 불만 있어요?” “없습니다. 저는 그냥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확인?” “네. 전 그런 돈이 있다면 한 번에 풀기보다 차라리 중대장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편이 낫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용처가 그렇고,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는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결과가 다 괜찮았는데, 이제 와서 중대장님 방식에 참견하는 것도 웃기잖습니까.” 진석이 자세를 고친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볼게요.” 경례 직전에 멈춘 진석에게 겨울이 질문했다. “요즘 잠은 잘 자요?” 전에 악몽을 견디느라 더 치열하다고 털어놓았던 걸 기억해서 묻는 말이었다. 진석은 풀어진 표정으로 수긍했다. “포기하니 편하더군요.” 무엇을 포기했다는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겨울이 덧붙였다. “가서 이유라 중위하고 인사 나눠요. 잘 돌아왔다고. 모르는 척 하면 섭섭해 할걸요?” “명령입니까?” “부탁인데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겨울은 진석의 경례를 받아주었다. # 304 [304화] #그리스의 섬 (4) 재배치 또는 재편성을 앞둔 대기기간은 사실상의 휴식기에 가까웠으나, 선임상사 메리웨더를 비롯한 부사관들은 병사들이 마냥 늘어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Be motivated!”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군기가 빠졌다는 뜻이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교육훈련계획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여기엔 신병 교육과정 이상의 체력단련도 포함되었다. 처음 결재를 받던 날, 상사는 겨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장에서의 체력은 사회에서의 돈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없으면 대개 불행해진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튼튼한 놈을 피해가는 총알은 없겠습니다만, 여느 전장에서 체력이 모자란 놈은 높은 확률로 죽습니다. 그러니 쌓을 수 있을 때 쌓아놔야 합니다.” “맞는 말이네요.” 겨울은 웃음을 만들어 동조했고,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가 올라올 때마다 그저 다독여줄 따름이었다. 어쨌든 부대장으로서 겨울이 모범을 보였으므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 어김없이 구보를 준비하는 동틀 녘에 선임상사가 우려를 제기했다. “젊어서 그런 식으로 몸을 굴리시다간 나중에 관절이 삭아 고생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눈으로 찌르는 것이 겨울이 진 무거운 군장이었다. 여러 보정을 받는 겨울이 병사들과 비슷한 체력소모를 겪으려면 완전군장을 메고 뛰어도 부족한 감이 있으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솔선수범을 위해 무리를 하는 걸로 보일 터였다. “음, 난 괜찮아요. 할 만 하거든요.” 자세한 설명이 불가능하므로 얼버무리려는 겨울을 두고 상사는 진지하게 고개를 젓는다. “어느 부대를 가든 꼭 한 명씩 있는 골병환자들이 그런 식으로 생기는 겁니다. 육체적으로 최고일 때 몸 상하는 줄 모르고 날뛰다가, 하사 달고 중사 달면 이제 아파 죽겠다고 하루하루 진단서 떼어서 병원이나 다니는 거지요. 물론 중대장님께선 그런 덜 여문 놈들과는 경우가 다르십니다만, 결과적으로 몸이 상하는 건 같을 겁니다.” 겨울이 미소를 지어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선임상사.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몸을 쓸 기회는 계속 줄어들 것 같으니까요. 살든 죽든, 내가 이러는 건 앞으로 길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덧붙였다. “장교잖아요. 진짜 군인인 부사관들하고는 다르죠.” 메리웨더 상사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한발 앞서 돌기 시작한 다른 부대의 발맞춘 구보 소리가 그들의 합창과 함께 가까워졌다. 「우리가 지옥에 가면 사탄이 물어보겠지.」 「“너희는 뭘로 벌어먹던 놈들이냐?”」 「“무슨 일 하면서 돈 받고 살았냐?”」 「그럼 우리는 사탄의 낯짝을 군홧발로 짓밟고서 대답하겠지.」 「“우린 영혼들을 여기로 보내며 먹고 살던 놈들이다!”」 노래하는 레인저들은 아직 준비 중인 독립중대 앞을 가깝게 통과해서 지나갔다. 모두가 가벼운 차림인 반면 선두의 지휘관은 부대기를 직접 들고 군장을 멘 채로 뛰는 중이었다. 군장이 가짜가 아니라는 건 흔들릴 때의 무게감만 봐도 안다. 그는 겨울을 슬쩍 보고 지나갔는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그 얼굴은 선명한 승부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질 수 없음! 부들부들! 같은 느낌. ‘진짜 힘들어 보인다…….’ 겨울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선창(Caller)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다 진석 탓이었다. 주둔지가 바뀌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던 날, 진석의 소대와 레인저 소대가 어쩌다 같은 시간에 구보를 뛴 모양이다. 처음엔 서로 거리를 두고 뛰었으나 상대를 확인한 진석이 속도를 높여 뒤로 바짝 붙었다. 체력은 남지만 니들이 느려서 못 지나간다, 혹은 추월하면 니들이 자존심 상할까봐 봐준다는 식의 도발. 이에 자존심이 끓어오른 레인저들이 한 바퀴를 전력으로 질주하여 진석의 소대 뒤로 붙었다.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 것이다. 여기서라도 멈췄으면 좋았을 걸. 진석은 기어코 치킨 게임을 벌이고 말았다. 뒤를 잡고, 뒤를 잡히고, 다시 잡고, 또 잡히는 악순환의 반복. 그리고 졌다. 승자인 레인저들은 주저앉거나 구토하는 진석의 소대 앞을 의기양양하게 지나갔다고. 물론 그들의 조끼에도 여럿 토사물이 묻어있었다던가. 어느 쪽이든 적당히를 모른다. 겨울은 이 이야기를 늦게 듣고 꾸미지 않은 한숨을 쉬었다. 레인저 중대장도 이 해프닝을 전해들은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완전군장으로 처음 구보를 나왔을 때 겨울을 발견한 레인저 중대장의 시선이 꽤 비장하다 했다. 돌이켜보면 “2차전인가?”라고 묻는 눈빛이었다. 레인저들의 멀어지는 등을 보며, 메리웨더 상사가 말했다. “하긴, 저쪽이 포기하기 전까지는 중대장님도 군장을 내려놓기 어렵겠군요.” “…….” 겨울이 입을 다물었다. 선임상사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했는데. 아니, 지금도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 더 문제다. 군인들의 오기가 이상한데서 서로 통하고 있었다. 아, 미군의 앞날은 어둡다. “Sir! 준비 됐습니다.” 보급부사관 매카들 하사의 보고. 배후엔 소대별로 정렬한 채 기다리는 병사들이 보였다. 몇몇 보이지 않는 장교들은 각자가 할 일이 있었고. 겨울이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구보를 끝내고서 병력을 모아줘요. 전파사항이 있으니까.” “어, 혹시 다음 배치지역입니까?” “네, 맞아요.” “알겠습니다.” 하사는 무척 궁금한 표정이었으나, 먼저 알겠다고 캐물을 만큼 경우가 없진 않았다. 구령과 함께 구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의 군가. 「나는 언덕 위에 살던 한 소녀를 아는데,」 「만약 그녀가 하지 않았다면 동생이라도 했을,」 「체력단련(PT)! 체력단련!」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다!」 소녀와 그 동생, 체력단련 사이엔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걸까. 그러나 구보시의 군가(Cadence)가 대개 이런 식이었다. 「헌병! 헌병! 나를 체포하지 마! 쟤는 위스키를 훔쳤고! 나는 와인을 훔쳤다고! 죄질은 저놈이 더 나쁘잖아!」 라는 가사도 있으니. 죄질을 재는 기준은 값이 아니라 알콜 함량인 듯 하다. 올레마 FOB에서 수습한 병사들을 고려하여 「나 죽으면 관짝에 훈장 달아 어머니께 보내주세요.」 같은 군가는 가급적 피하려고 애썼다. 잠시 후, 구보를 마치고 다시 정렬한 중대원들 앞에서 겨울이 목소리를 키웠다. “오늘, 정확히는 어젯밤 늦게, 우리 독립중대의 재배치 지역이 결정되었습니다.” 웅성거림은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의 관심을 드러냈다. 다시 전장으로 가는가, 아니면 난민구역으로의 귀환인가. 근래 들어서는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도,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오늘이 그 불안의 끝이었다. 겨울은 온화하게 선언했다. “나흘 뒤, 우리는 포트 로버츠로 돌아갈 거예요” 누군가 순간적으로 짧은 비명을 삼켰다. 허나 누구도 책망하지 않는다. 누구든 겨울에 비하면 떠나있던 기간이 짧으나, 그렇다고 마냥 짧은 것만은 아니었기에.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로 끝났을 때부터 구조임무에 투입되었다고 했으니, 기지 가까이에 있었어도 동맹하고는 격리되어 있었던 셈. 그러므로 약 반 년 간 여러 작전에 연속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쯤이면 베테랑이라고 자부해도 괜찮을 경력이었다. “한 가지 더.” 겨울이 주의를 환기했다. “그곳에선 당분간 우리가 기지를 운영하게 됩니다.” 잔뜩 상기되어 있던 얼굴들에 의문이 떠오른다. “무슨 말이냐면, 원래 있던 160연대 병력은 이번 재배치로 포트 로버츠를 떠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잘 훈련된 주 방위군을 계속 난민관리에 묶어두는 건 아깝잖아요? 전력을 보충해서 전선으로 보내겠다는 거죠. 아, 질문할 사람은 해요. 괜찮아요.” 며칠 새 눈 밑이 거뭇해진 천소민 소위가 거수했다. “Sir, 저희가 떠나기 전에도 난민구역의 수용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다른 데서 옮겨오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정원 미달이었다고는 해도 두 개 대대가 하던 일을 우리 부대가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포트 로버츠에는 처음부터 주둔하던 3대대와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합류한 1대대 병력이 있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우리 중대는 거기서 독립대대로 재편됩니다. 단! 난민들 중에서 입대희망자를 모집하는 단계부터 우리가 직접 맡아야 돼요. 가만히 앉아서 신병을 받는 게 아니라. 숙련된 교관을 지원해주겠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파견기간도 정해져있고.” “…….” “대대 규모를 채운 다음에도 몇 개 중대가 더 만들어질 예정이에요. 일본계, 중국계, 베트남계, 필리핀계……. 낮은 확률이지만 다른 국적의 난민들이 합류할 수도 있다고 들었네요.” 겨울도 처음 접했을 땐 뜻밖이었던 소식이었다. 포트 로버츠의 난민거류구가 많이 확장된 모양이었다. 그만큼 출신도 다양해지고. “그렇게 창설된 중대들도 합동임무부대 형식으로 내가 관리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거라고 봐요. 치안은 경찰이 유지할 거고, 본토를 탈환했으니 방어 부담도 예전보단 덜하겠죠.” 고로 복귀한다고 해도 전장에서 멀어질 뿐이지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독립중대의 D.C 행은 아직 확정 통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밝아졌다. 부대가 승격된다는 것 또한 기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석이 말했듯이 이들의 모든 싸움은 안정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내일이 없던 난민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인정받게 된 것이다. 재편성을 마친 뒤 다시 전선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유라의 안색은 땅거미처럼 어둡다. “전파사항은 여기까지인데, 혹시 다른 질문 있나요?” 겨울이 돌아보지는 올라오는 손은 없었다. “좋아요. 그럼 해산.” 그러자 눌려있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겨울은 흩어지는 중대 인원들 사이에서 유라를 불렀다. “왜 혼자만 표정이 안 좋아요?” 망설이던 유라가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게 말이죠, 죽거나 다친 애들의 가족분들을 뵐 생각을 하니까……돌아가는 게 막 기쁘고 그러진 않네요. 좋아하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싶고. 사실 이건 작은 대장님이 더 부담스러우실 텐데. 아하하.” 밝히진 않았으나 합동영결식이 예정되어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겨울이 군종장교와 함께 성조기를 접게 될 것이다. 스탠 페이지 일병의 장례식에서 그랬듯이. 유가족에게 자식이, 형제가, 혹은 자매가 의미 있게 죽었다는 위안을 주려면 다른 사람보다는 겨울이 나았다. “이유라 중위.” “네.” “혹시 중대장이 되고 싶은 생각 있어요?” “엑.” 어둡던 유라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겨울이 설명했다. “우리 중대가 대대로 증편되면, 새로 합류하는 중대는 일본계나 중국계로 편성될 확률이 높아요.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하니까 중대장도 출신에 맞춰서 뽑을 것 같고…….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긴 한데, 서로간의 감정 문제도 있잖아요.” “네에…….” 중국계나 일본계 부대를 만들어도 겨울 때와는 취급이 다를 게 분명했다. 단독작전을 맡길 정도의 인재와 신뢰도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다른 국적 난민들에겐 그래도 가망이 있으나, 중국계는 아니다. 그들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는 까닭. 각설하고,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데엔 시간이 걸린다. 설령 한국계 중대를 하나 새로 만들어도 두 사람을 동시에 진급시키진 못한다는 뜻이었다. ‘결국엔 두 사람 다 중대장이 된다고 해도, 박진석 중위에겐 누가 선임이 되느냐가 중요해보이니 말이지…….’ 유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수준. 진석의 주된 동기는 역시 본인의 출세욕이다.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그 위에 서고 싶은 욕망. 어울리는 능력도 있다. 한국계 중대를 새로 만드는 것도 부담스럽다. 희망자는 물론 많겠지만, 병력을 더 차출했다간 공동체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곤란한 노릇이다. 추후 안정된 미국에서는 경제력도 중요해질 테니까. 겨울이 말을 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되면 한국계 중대장 자리는 하나예요,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은 둘 중 하나죠.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죠?” “저랑 박진석 중위요.” 스스로 말해놓고서도 난처한 기색이 짙어지는 유라였다. “제가 자격이 있을까요?” 묻는 그녀에게 겨울이 답했다. “자격은 방금 지었던 표정으로 충분해요.” “…….” “단지 지금보다 더 힘들어할까봐 미리 물어보는 거예요. 할 마음이 있는지.” “작은 대장님은 누가 더 낫다고 보세요?” “두 사람 다 맡기면 잘 해낼 것 같은데요.” 고민에 빠진 유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대장님 의견이 그러시다면, 진석 씨……아니, 박진석 중위보다는 제가 맡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유는?” “국적이 다른 난민들이랑 같은 부대가 되면요, 얕보이지 않는 것 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막상 싸울 때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저는요, 필요하면 화를 낼 수 있어요. 음, 그러니까, 내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데요, 근데 박진석 중위는 필요할 때 부드러워질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니, 애초에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혹시 대장님은 보셨어요? 박진석 중위가 웃는 거요.” “…….” “그럴 줄 알았어요. 어휴.” 유라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 305 [305화] #그리스의 섬 (5) “만약 중대장이 되면 계급은 지금이랑 같나요? 아니면 대위?” 궁금해하는 유라에게선 욕심이 엿보이지 않았다. “직책진급을 하게 될 거예요.” 겨울의 대답. 유라는 의아해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이야 독립중대라서 평범한 중대보다 격이 높은 거지만, 독립대대로 바뀐 다음에는 어쨌든 그 아래의 여러 중대 중 하나가 되는 건데……특별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제 말은, 그냥 중위 계급 그대로 중대장을 맡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드러내진 않았으되 이는 진석에 대한 배려였다. 유라 본인이 중대장이 되더라도 계급이 그대로라면, 진석과는 여전히 진급동기이므로 반감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암시. 진석이 느끼는 감정을 유라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뇨. 이 중대는 계속 격이 높아야 돼요.” “어째서요?” “아까 이유라 중위도 말했잖아요. 국적이 다양한 난민들과 같은 부대가 되면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하다고.” “네에, 그랬었죠…….” “그러려면 사전에 잡음이 안 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선임중대장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해두는 거죠. 다른 중대장들 입장에서 볼 때 피차 같은 계급이면 선후임의 차이를 미뤄두고 이런저런 시비가 걸리기 쉽지 않겠어요?” 물론 낮은 가능성이다. 그들의 처지가 처지이니. 허나 입장이 불리하여 조용히 넘어가더라도, 속에 품는 불만의 크기는 상대의 계급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그래봤자 중위 주제에.」와 「어쩔 수 있나. 계급이 깡패지.」의 차이. 가뜩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타 국가의 난민 출신 장교들이 미군 고유의 정서를 체화했다면 많이 덜었을 걱정이었다. 하지만 복무기간이 채 일 년도 안 되는, 그저 필요에 의해 선발된 중위들에겐 걸기 어려운 기대일 것이다. 국방부가 본토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 출신 장교들, 그 중에서도 부모 세대의 언어에 익숙한 자원을 차출하여 보내준다면 도움이 되겠으나, 이 역시 현실성이 없었다. 겨울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할 필요도 있어요.” “만약의 경우요?” “예를 들면 지휘관 유고(有故)시요.”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냥 예를 드는 것 뿐이니까. 여하간 내가 죽거나 다쳐서 지휘가 불가능하고, 덤으로 대대본부가 싹 증발하거나 통신이 두절된 상황이라면 선임중대장이 즉시 지휘권을 장악해야 돼요. 이땐 상하관계가 분명한 게 좋겠죠.” “맞는 말씀이지만-” 납득한 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어렵네요……. 그래서는 작은 대장님의 계승자?……이건 어감이 좀 이상한데, 후임자? 2인자?……라는 인상이 강해질 것 같아요.” 겨울이 지휘하던 중대를 넘겨받는 셈이니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많을 터였다. 유라가 새롭게 제안했다. “저랑 박진석 중위를 어떻게 같이 진급시켜주실 순 없나요?” “같이?” “네. 중대장 자리는 진석 씨한테 주시고, 저한테는 뭔가 다른 역할을……으음, 중대장에 비해 덜 중요해보이면서도, 일이 생기면 적당히 말리거나 화해시킬 수는 있을 만한 직위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거 없을까요?” “글쎄요. 대대참모 인선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라서.” 싱 대위를 위시한 중대 참모진은 처음부터 대대지휘부 구성을 염두에 두고 나온 이들이었다. 그래도 본부에 자리를 마련한다면 아직 배속되지 않은 인사장교나 보급장교 정도지만, 행정직 경험이 없는 유라에게 적합할지 의문이었다. 직책진급을 주기도 애매하다. 하물며 독립대대는 포트 로버츠를 총괄해야 할 입장. 겨울이 곱씹어 보기에, 관리계통은 숙련된 사람에게 맡겨야 마땅했다. 위에서도 그런 인력을 파견할 터였고. ‘아예 중대를 분할해버릴까?’ 노동인력이 줄어드는 부담을 감수하고 한국계로만 꽉 채운 중대 하나를 더 창설한다는 전제 하에, 원래 있던 중대의 병력을 나눠 미완편 중대 두 개로 만드는 방법도 검토해볼만 하겠다. 어차피 부대가 바로 전투에 투입될 일은 없을 것이므로. 물론 이러한 건의를 상부가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걸로 진석의 승부욕이 누그러지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겨울이 느리게 끄덕였다. “아무튼 의견 잘 들었어요. 이건 더 생각해봐야겠네요.” 유라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싫네요. 저희 땜에 고민하시는 게.” “다 그런 거죠. 이만 가요. 우리 중대는 식사 전에 씻어야죠.” 시간을 확인하고 내려두었던 군장을 챙기는 겨울. 식당과 샤워시설이 여러 부대의 공용인지라 정해진 이용시간을 어기면 조금 곤란해진다. 장교쯤 되어 못 씻고 못 먹지야 않겠으나, 데면데면한 이들 사이에 끼어 어색할 상황은 피하는 게 좋다. 그들이 싫어하진 않을지라도. ‘놓치면 안 될 방송도 있고.’ 오늘 오전에 공화당 대선후보의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변죽만 올리고 끝날지, 아니면 무언가를 폭로할지. 기다리는 겨울은 후자를 점쳤다. 기대감을 너무 부풀려놔도 역효과인 것이다. 대선까지 공세를 이어가려면 시일이 필요하기도 했다. 나란히 걷던 유라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요 대장님.” “네?” “저 없을 때 소민이랑 선우 소위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중대 내에서 실력과 상냥함을 겸비한 큰언니쯤으로 통하는 1소대장답게 묘한 기류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 겨울은 하루하루 피폐해지는 두 소대장의 모습을 되새겼다. 진석이 이번 일로는 갈구지 않겠다던 말을 어긴 것도 아닌데, 평소 눈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꼴이 됐다. 겨울이 말이 없자 유라가 신중하게 덧붙였다. “두 사람이 박진석 중위에게 주눅이 들어있거든요. 음, 원래도 무서워했지만 지금은 도가 지나치다고 해야 하나……. 예전이랑 달리 저한테 상담도 안 하고요. 더 이상한 게 뭐냐면요, 박진석 중위는 사정을 아는 것 같거든요? 소민이를 볼 때마다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되는 거 보면 화가 아주 단단히 나있는 건데……근데 괴롭히질 않아요! 물어봐도 피하기만 하고요.” “…….” “뭔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네? 대장님. 선우 소위도 불쌍하지만, 소민이는 제가 거의 처음부터 데리고 다닌 앤데 저러는 거 보니까 되게 안쓰러워요.” 그렇잖아도 혹여 사고라도 날까 염려하던 참. 잠시 망설이던 겨울은 감추는 것 없이 들려주기로 결정했다. 정이 많은 유라라면 두 후임 소위를 한심하게 여길지언정 진석과의 사이에서 부드럽게 중재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유라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서늘했다. “ㅎ.” “……저기, 이유라 중위?” “네.” “내가 이걸 말해준 건 두 사람이 잘못되지 않게끔 봐줬으면 해서예요. 부탁해도 되겠죠?” “그럼요. 그 두……울에 대해 더는 걱정 안 하시게 해드릴게요.” “그 말, 굉장히 중의적으로 들리는데요…….” 진석은 유라를 화도 못내는 호인이라는 식으로 평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생각을 다소 달리했을 것이었다. 웃음기 싹 빠진 유라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심하셔도 돼요. 저까지 대장님을 속상하게 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 “화 많이 났어요?” “당연하죠.” 유라의 한숨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개념이 너무 없잖아요. 아무리 불안했어도 그렇지, 어디 감히 작은 대장님을 그런 식으로 간을 봐요? 선우 소위야 진석 씨가 키운 후배라서 저는 모르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지만, 소민이까지 같이 그랬다는 게 정말……화가 나고, 창피하고, 대장님한테 죄송하고 그렇네요.” “왜 이유라 중위가 죄송해요.” “제가 뽑았잖아요.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별이를 시킬걸.” 인상 찌푸린 유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별과제 할 때 나 빼고 다 탈주했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는데, 라고. 주둔지 앞에 이르기까지 걷는 내내 화를 삭인 유라가, 서로 갈라지기 직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겨울이 돌아보면, 살짝 어두운 유라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는 중이다. “대장님은 앞으로도 우리하고 같이 계시는 거죠?” 선우요셉과 천소민의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 아닌 농담을 곁들였다. “안 떠나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는요.” “큭. 뭐예요 그게.” 평소의 온도를 되찾은 유라가 맑게 웃는다. 그녀를 일별한 겨울은 숙소에 들러 군장을 풀고 위생용품을 챙겼다. 샤워장으로 가는 길에도 무기를 휴대하는 게 기본이었다. 다른 장교나 병사들도 권총 정도는 가지고 다니며, 샤워시설 내의 칸막이마다 아예 무기 보관함이 따로 있었다. 희박한 확률이나마 부대 내에서 감염자가 발생할 경우 즉각 쏴버리라는 배려였다. 그렇다보니 이게 마냥 농담 같지가 않다. 「엿보면 사살함 :(」 누군가 여성 사병용 샤워시설에 오늘 붙인 문구였다. 이를 보고 낄낄거리던 남성 사병중 하나가, 팔에 수건을 걸고 가벼운 차림으로 들어가는 여성 사병들을 향해 두 팔을 들어보였다. “숙녀 여러분! 나는 목숨을 걸고 엿보겠다!” 이에 여성 사병들이 중지를 세워 응수했다. “Fu-ck you!” “죽기 싫으면 좀 더 잘생긴 놈이랑 같이 와! 얼굴 보고 살려주지!” 나중에 외친 쪽은 허리에 찬 권총과 엉덩이를 한 번씩 두드려 보이고는 주먹을 쥐고 엄지를 아래로 꺾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피로에 찌들고 날카로웠던 병사들이었다. 간단히 씻고 식사까지 마친 겨울이 일부 참모들과의 간단한 담화를 거쳐 집무실로 이동했을 때, TV는 정각에서 10분 이른 방송을 앞두고 마지막 광고를 내보내는 중이었다. 잠시 후, 화면의 중앙에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전미의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잠시 후 9시부터, 크레이머 스퀘어 호텔의 영빈관에서 공화당 대선후보 에드거 크레이머의 기자회견이 진행됩니다. 크레이머 후보는 본인이 현 정권의 비밀스러운 치부를 알고 있으며 조만간 시민들에게 폭로할 것이라고 밝혀왔는데요, 대선이 56일 앞으로 다가온 오늘, 드디어 그 실체가 밝혀질 것 같습니다. 기자회견을 열어놓고 이번에도 의혹만 제기하고 끝내지는 않겠죠.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면 주최측에서 밝힌 진행 예정 시간입니다. 무려 두 시간이군요. 짧은 발표로 그치진 않을 듯 합니다. 본사에서는 후보 본인이 단상에 등장하는 대로 현장을 연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기다렸다. # 306 [306화] #그리스의 섬 (6) 「기다리는 동안 이번 기자회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더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아나운서와 더불어 시청자와 비스듬히 마주보고 앉아있던 파트너가 반응했다. 「폭로할 내용이 무엇이든 이번 대선의 마지막 변수가 될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는 크레이머 후보가 최적의 타이밍을 골라 승부수를 띄웠다고 봅니다.」 「최적의 타이밍이라고요?」 「그래요, 매기. 꾸준히 하강하던 민주당의 지지율은 멧돼지 사냥을 기점으로 반등하기 시작했죠. 오염지역을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쭉쭉 밀어냈으니까요. 시민들은 그 충격적인 속도에 열광했습니다. 맥밀런 대통령의 국경선 회복 선언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맞아요.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반격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명백한 해방 작전이 실패했을 땐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비관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기도 했고요.」 「예. 크레이머 후보는 그동안 민주당의 축제를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정황상 그 때 이미 무기를 쥐고 있었겠지만, 초조함에 못 이겨 너무 일찍 공격을 시작해버리면 상대 진영에게 반격할 시간을 주고 말아요. 그러니 침착하게 기다린 거죠.」 「그러고 보면 폭로할 비밀이 하나가 아니라고 했었군요. 시간차 공격으로 상대 진영의 대응능력을 마비시키겠다는 계획일까요?」 「바로 그겁니다. 크레이머 후보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연속적인 공세가 대선 직전에 끝나며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지요. 첫 번째 폭로에서 시작된 정치공방이 상대 진영의 방어로 시들해질 무렵, 두 번째 폭로를 터트려 시국의 긴장감과 주도권을 유지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남은 일수가 애매하네요. 56일. 여론에 불붙는 속도가 느리면 효과를 다 보기도 전에 대선이 찾아올 텐데, 과연 폭로하는 비밀에 그 정도의 화력이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기자단과의 사전조율이 없었지요?」 「그럴 수밖에요. 내용 자체가 비밀인데 질문이나 순서를 사전에 정해두긴 어렵겠죠.」 「하지만 기자들을 미리 초청해서 협의를 거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엔 비밀엄수에 대한 동의를 받고 출입이나 외부연락을 통제하게 되지요.」 「정보 유출을 그만큼 경계했다고 봐야겠군요.」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제보입니다만, 크리스토퍼 메릭 선거대책본부장이나 아서 셀러스 정보자문역 같은 크레이머 후보의 측근들이 어제 『그리스의 섬』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번 폭로와 관계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스의 섬』이 뭐죠?」 「글쎄요……. 관련된 정보를 찾아봤지만, 90년대 초에 폐기된 비상시 정부승계계획이라는 것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어요.」 「왜 폐기되었나요?」 「워싱턴 포스트에서 일하는 동업자들이 파헤쳤거든요. 호화 리조트의 지하에 커다란 방공호가 있다고. 뭐, 쓸 데 없는 짓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전시 의회가 들어갈 예정이었던 벙커는 지금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 들어간 세금이 아깝죠.」 「흥미롭군요. 좀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지만, 시간이 되었습니다. 크레이머 진영의 언론자문, 안톤 셔틀러가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제 곧 후보 본인도 나타날 것 같네요. 현장으로 화면을 전환하겠습니다.」 웅- 웅- 겨울의 넷 워리어 단말이 진동했다. 조안나가 보낸 메시지였다. 「보고 있어요?」 주어는 불필요했다. 겨울은 빠르게 답했다. 「네. 아직 알아낸 건 없나요?」 「전혀.」 잠시 후에 조금 더 긴 설명이 이어졌다. 「기밀유출 여부를 내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는 들었는데, 지켜본 결과 어느 부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어요. 윗선에서 막은 것 같기도 해요. 할애할 여력도 없거니와, 심정적으로 크레이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왜요?」 「힘들어서요. 업무가 워낙 과중하다보니 실무자들 가운데 중국계 시민 격리수용에 찬성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어요. 그냥 정치싸움에 끌려들어가기가 싫은 사람도 많고요. 잘못 베팅하면 망하는 도박인 거죠.」 뭐가 어떻게 유출되었나를 찾아봐야 중간에 언론이 끼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보람 없는 표적수사인 만큼 FBI의 미적지근함도 이해가 갔다. 겨울이 다시 물었다. 「앤은 어떤데요?」 「알잖아요. 난 언제나 겨울의 편이에요. 당신을 실망시킬 선택은 하지 않아요.」 담담하면서도 직설적인 애정표현. 「고마워요.」 간격을 두고 보낸 메시지에 다시 간격을 둔 답신이 돌아온다. 「:$」 말해놓고 부끄러웠던 모양. 서로, 문자보다는 시간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았다. 잠시 분산되었던 겨울의 주의가 재차 방송에 집중되었다. 공화당 선거진영의 언론자문이라는 사람이 진행자로서 주역의 등장을 알리는 참이었다. 「이제 공화당 대선후보, 에드거 크레이머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 그리고 기자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의례적인 갈채 속에 문이 열리며 에드거 크레이머가 들어섰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과 항상 화가 나있는 것 같은 표정은 이 후보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었다. 겨울이 듣기로, 지지자들은 그의 힘 있고 단호해 보이는 인상을 좋아한다던가. 그래서인지 단상에 우뚝 선 크레이머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남달랐다. 목이 두껍고 체구가 커 옷맵시가 사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강렬하고 긍정적인 긴장감을 주었다. 코끼리를 형상화한 공화당기와 성조기를 더불어 등진 후보가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기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께 현 정부의 중대한! 아주 중대한 배임(背任)을 하나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실내가 여러 번 번쩍였다. 신문사 기자들이 터트리는 플래시였다. 찰칵거리는 소리, 자판 두드리는 소음 외에 모두가 조용한 정적 속에서 본격적인 폭로의 막이 오른다. 「그들이 꾸몄던 비밀스러운 음모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의 섬』입니다.」 후보가 손을 들어 몇몇의 작은 동요를 억눌렀다. 「압니다. 24년 전에도 같은 이름의 비밀(Project Greek Island)이 밝혀졌었지요. 소련, 혹은 중국으로부터 핵공격을 받았을 때 상원과 하원을 그린브라이어 호텔의 비밀 방공호로 옮긴다는 계획 말입니다.」 그는 천천히 끄덕였다. 「처음엔 저도 착각했습니다! 다양한 경로로 『그리스의 섬』이라는 키워드를 접했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과거의 계획을 재검토하는 것이라고 여겼지요. 허나! 이런 착각이야말로 현 정권이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음모를 꾸미면서, 일부러 원래 있던 계획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만에 하나 단서가 밖으로 샜을 경우 추리에 혼동을 줄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수작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제게 도움을 청한 누군가가 없었다면, 저 역시 지금까지도 이 계획의 실체를 모르는 채였을 테니까요!」 텅! 커다란 주먹이 단상을 내리친다. 마이크가 흔들거렸다. 원래부터 험한 인상이던 크레이머가 더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여러분께 진실을 알려드립니다! 현 정권의 추악한 민낯을!」 이어지는 내용은 한 때 겨울이 예상했던 바였으나, 동시에 그 이상이기도 했다. 「패트릭 헨리 급, 저 거대한 원자력 비행선들은 본디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조된 게 아니었습니다! 봉쇄선이 무너지고 본토 전역이 함락되었을 때, 정권 구성원들을 비롯해 사회 재건에 필요한 인력과 ‘일부’ 선택받은 시민들을 태우고 오랜 시간 하늘을 떠돌 방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지요! 안전한 땅을 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착륙에 활주로가 필요 없으니 방주 역할로서 적절하긴 했다. 잠시 쉬고 이어지는 말. 「이 계획의 첫 번째 문제는 그 선택받은 시민들이 하나 같이 돈 많은 부자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묻겠습니다! 왜 힘없고 불쌍한 이들만이 홍수에 휩쓸려 죽어야 합니까? 계좌잔고가 부족한 것이 죄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오는 비둘기를 볼 자격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신께서는 이 나라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 운운은 노아의 일화였다. 대홍수로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노아는 방주의 갑판 위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와, 비로소 땅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그리스의 섬』 계획이 발동될 때 각지의 핵미사일 사이트들이 미 본토를 포함한 세계 전역으로 중성자탄을 발사할 예정이었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이 특수한 핵무기를 꾸준히 만들어오기도 했고요! 즉 함락된 본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시민들조차 살이 벗겨지고 구역질을 하며 죽어갈 운명이었다는 겁니다!」 겨울은 눈을 살며시 찌푸렸다. 역병에 대한 핵공격은 지금까지 아주 소극적으로,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이루어졌다. 핵폭발이 어떤 식으로든 감염을 확산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방역전선이 그렇게 붕괴하기도 했고. 고로 북미에선 새크라멘토 근교에서 터진 전술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허나 기존의 인식에 석연찮은 점은 있었다. 핵폭발의 영향권에서 모겔론스 복합체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또한 피 감염자의 환부나 점막에 접촉할 때까지의 부유(浮游)를 어떻게 견뎌내는가. 대역병은 공기감염이 불가능한 질병이다. 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것을 연구하고 있었을 터. 허나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을 겪은 겨울조차도 그 답을 접한 적이 없다. ‘연구가 안정적으로 진행될 만한 환경이었던 적이 드물기는 했지만……’ 만약 뭔가 밝혀졌다면, 많은 면에서 새로워진 이번 세계관만의 변화일 확률이 높았다. 크레이머가 주장했다. 「제가 알아낸 바!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된 역병은 파괴되는 과정에서 어떤 독소를 생성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핵공격 이후 확산되는 건 모겔론스 복합체가 아니라 미세한 독소분진이었던 겁니다! 그것이 좀비 드러그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피해자들을 미쳐 날뛰게 만들었겠지요! 혼란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역병 감염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예시로 든 좀비 드러그는 사람이 좀비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마약이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뜯어먹는 등. 독소의 영향에 대한 발언이 추측성인 걸 보니 크레이머 본인도 전모를 다 아는 건 아닌 듯 하다. 「여러분! 저는 의혹을 느낍니다! 정부는 왜 이런 사실들을 비밀로 하고 있었을까요? 맥밀런 대통령이 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그리고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어 그는 증거자료로서의 내부문건들을 제시했다. 프로젝터로 투사하는 스크린에 기밀 도장이 찍힌 서류들이 차례차례 순서대로 지나간다. 겨울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럴 듯하면서도 석연찮은 구석이 많아.’ 일단 제시된 가능성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당장 겨울부터가 새크라멘토에서 시가전을 치렀다. 전술핵의 폭심지로부터는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있었을 따름. 보다 가까운 부대들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 독소라는 것이 정말로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분해되었기에 영향이 없었던 걸까? 겨울이 곱씹기에, 핵에 대한 의혹과 패트릭 헨리급 비행선에 대한 의혹이 물과 기름처럼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 307 [307화] #그리스의 섬 (7) 당연히 기자들 중에도 폭로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다. 발표가 끝난 다음의 질의응답시간, 이상할 만큼 후보에게 우호적으로만 흐르던 분위기에서, 타 기자의 질답 중에 누군가 소리 높여 끼어들었다.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이봐요! 왜 내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습니까? 아까부터 계속 손을 들고 있는데!」 확성기라도 쓴 것 같은 성량인지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주최 측 입장에선 생방송의 단점이었다. 기자들 외에 참석한 부류 중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거칠게 술렁인다. 무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상의 후보는 동요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손을 들어 자기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각진 얼굴에 친절한 웃음을 띄우며 성난 질문자를 응시했다. 「누군가 했더니 아는 얼굴이었군요. 미안합니다, 위트필드. 기분 풀어요. 나에 대한 기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써주는 사람을 모르는 척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마지막 질문은 좌중 전체를 겨냥한 것이라 호응과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래도 위트필드라는 기자는 크레이머에 대해 예전부터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모양. 또한 크레이머가 손짓으로 만류한 이들 중에 보안요원이 포함되어있었으니, 질문내용과 순서를 사전에 정해두진 않았을지언정 초대장만큼은 선별적으로 발부되었을 것이었다. 이어 대선주자는 같은 여유로서 방해 받은 기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스 휴버는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기 성급하신 남자 분부터 상대해드려야 할 것 같군요. 뭐, 위트필드 씨가 저래 봬도 신사이니 오래 기다리게 해드리진 않을 겁니다.」 다시 한 차례 웃음이 번진다. 속이 있는 유머였다. 또한 상대해주다가 적당한 시점에 흐름을 끊을 핑계거리를 만들어 놨다. 크레이머가 재차 묻는다. 「그래서, 위트필드. 질문이 뭡니까?」 「제시된 자료의 신빙성, 정당성, 그리고 후보의 주장과 근거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입니다.」 간결하지만 방송을 보고 있을 대중을 상대로는 말이 어렵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먼저 신빙성입니다. 제시된 자료들은 확실히 정부 비밀문서 양식에 부합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각종 음모론이 판치는 지금 정교하게 위조된 문서 한둘 구하기는 쉬운 일이지요. 정신이 나간 전직 공무원들이 끼면 간단합니다. 『진정한 애국자들』의 잔당이 혼란을 부채질하기 위해 만들어낸 미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범 중 하나인 네이선 채드윅은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후보가 느긋하게 답변한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문서의 출처를 밝힐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보제공자의 신변안전을 위해선 비밀을 지켜야만 합니다.」 한숨을 닮은 한 호흡을 쉬고 어조를 엄하게 바꿔 이어가는 말.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신이 항상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제가 근거 없는 비방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서의 진위여부를 밝히는 일은 이제 언론의 몫이겠지요. 저, 에드거 크레이머, 여기서 당당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만약 『그리스의 섬』 계획 자체가 존재한 적 없는 허구로 밝혀질 경우에 나는 대선후보에서 사퇴하겠습니다.」 교묘한 약속이었다. 『그리스의 섬』에 대한 폭로에 다대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최소한 그런 이름의 계획이 있기만 하면 후보직을 사퇴할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후보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는 결연하고 단호해보였다. 사람들이 좋아할 면모였다. 어쨌든 사퇴 약속의 무게는 기자의 추궁을 막기에 충분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해보십시오.」 「오늘 공개하신 문서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후보께서는 군사기밀로 지정된 자료를 허가 없이 유출, 공개한 혐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중대한 기밀은 단순히 점유하고만 있어도 처벌의 사유로 인정됨을 아실 겁니다. 크레이머 후보는 해당 기밀을 열람할 권한이 없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레이머는 담담하게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유출한 사람은 따로 있겠으나, 그는 변명처럼 보일 장황한 부연을 피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그런 질문을 받으니 어색한 기분이로군요. 위트필드, 당신은 언제나 법보다 시민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사람 아닙니까?」 「……후보는 지금 초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아니요. 저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마디마디가 자연스럽게 강조되는 정력적인 목소리. 「제가 오늘 미국 시민들에게 고한 내용이 딱 반절만 사실이더라도! 이미 콘트라 사건을 능가하는 초대형 스캔들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에게 더러운 구석이 있었듯이, 미국을 지배하는 진짜 권력이 따로 있었던 것이니까요. 이 나라의 심연(Deep state)에 머무는 자들은 시민들의 뜻을, 민주주의를 배신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을 고발하는 저를 민중의 법으로 심판하겠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고 하고 싶군요. 시민들은 결국 정의로운 쪽의 손을 들어줄 테니까요.」 처벌이 가능할 리가 없다. 민주당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결코 압도적인 우세는 아니었으므로. 대선후보를 체포했다간 미국의 절반이 항거할 것이다. 대선이 불만해소의 수단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못할 짓이었다. 선동은 쉽지만 반박은 어렵다. 당장 문서 모두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없는 기자는 처벌을 각오하겠다는 후보를 몰아세울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콘트라 사건이 뭐죠?」 증강현실에 의한 상식 보정이 없는 걸 보면 이 시대의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모를 법한 이야기인 듯하다. 이것이 미국 공교육의 실패를 반영하는 지표일 수도 있겠고. FBI 감독관으로부터 살짝 지연된 답변이 돌아왔다. 「요약하면, 니카라과의 반미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군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중앙정보국이 불법적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전달했던 사건입니다. 심지어 반군이 생산한 마약을 사서 국내에 유통시키기까지 했었죠.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제 직업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의 스캔들이지만 종결된 이후로도 후유증이 길게 남았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한 번 생긴 마약중독자들이 어디 쉽게 없어지겠는가. 빈민층으로 유입되는 마약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사회문제가 되기 마련이었다. 공권력의 통제가 약한 그늘이기에. 그래서 겨울도 동맹 성립 초기부터 그만큼 신경을 썼던 것이고. ‘미국은 돈이 없는 동네엔 경찰도 안 들어가는 나라지.’ 정확하게는 치안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치안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개념이었다. 소방비용을 내지 않은 누군가의 집에 불이 날 경우 소방관들이 구경만 하면서 옆집에 옮겨 붙는 불만 꺼주는 것과 같은 맥락. 어감으로 미루어 앤은 FBI에 들어가기 전부터 마약에 관한 나쁜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았다. 기자회견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입니다.」 다수의 눈총과 무언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피부가 검은 기자의 발화는 또렷하며 꿋꿋했다. 「현재까지 제시된 증거들은 오늘 후보께서 주장하신 내용들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특히 핵공격 계획에 대해서는 중성자탄 증산 및 배치 명령과 오염지역을 대상으로 한 환경영향평가 보고서가 있을 뿐, 비행선 이륙과 더불어 미국 본토를 타격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겔론스가 방사선에 사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독소에 대한 정보 역시 뒤쪽의 보고서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인체에 대한 영향에 관해서는 확실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명해주시겠습니까?」 「이거 놀랍군요. 그 짧은 시간에 이 많은 문서를 다 읽었을 줄이야.」 겨울은 기자의 능력이 비범하다고 생각했다. 크레이머 또한 감탄을 감추지 않는다. 초조한 기색은 없었다. 태연한 것인지, 태연을 가장하는 것인지. 「하지만, 꼼꼼히 읽은 건 아닌 것 같군요! 배치된 투발수단을 보십시오. 사정거리가 짧은 신형 미사일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군사자문이 이걸 보더니 탄두 숫자를 극단적으로 늘리느라 사정거리를 희생한 것 같다고 합디다. 하물며 이동식 발사대가 아니라 사일로에 배치하는 거면 용도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정권 내에 다른 국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본토가 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의 섬』과 엮는 게 무리라는 뜻입니다. 중성자탄은 봉쇄선이 완전히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에 사용하기 좋은 핵무기죠. 폭발보다는 순간적인 중성자선 방출로 생명체를 살상하는 방식이니까요. 효과에 비해 잔류 방사능이 매우 적고, 기폭고도를 조절할 경우 폭발에 의한 지표의 피해도 최소화됩니다.」 군사분야의 조예를 갖춘 기자는 명백히 시청자들을 의식한 설명을 이어갔다. 「즉 어쩔 수 없이 쓰더라도 봉쇄선을 구성하는 방어시설물 대부분을 보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폭발규모가 작다보니 발생하는 상승기류의 규모도 작아, 변형된 모겔론스 복합체든 그 정체불명의 독소든 높은 기류를 타고 확산되는 범위가 좁아지죠. 요는, 유사시 방역전선을 재구축할 목적으로 충분히 준비할 만한 수단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게 『그리스의 섬』과 전혀 무관한 별도의 계획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선주자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좋은 생각 잘 들었습니다.」 네 말 또한 사견에 불과하다는 언중언(言中言).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요! 하지만 당신 역시 제가 제기한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적어도 저는 당신 이상의 근거를 갖추고 있잖습니까. 정보제공자는 이 모든 소식을 하나의 출처에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같은 선상에서 논의된 계획이라고 추정할 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자가 다시 뭐라고 발언하려 했으나 이번에야말로 주변의 항의를 받았다. 질의응답시간은 정해져있는데 언제까지 기회를 독점할 셈이냐는 비난이었다. 일단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기자로선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발언권을 지정하는 건 주최측의 역할이라, 처음부터 무례했던 것이 사실이고. 「진정하세요. 모두 진정하세요.」 크레이머가 날카로운 이들을 가라앉혔다. 「하기야 미스 휴버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리긴 했지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거친 외모에 비해 유머를 섞는 화법은 미끄럽고 유려한 편이었다. 앞서 폭로할 때의 성긴 논리와는 이질감이 들 정도로. 겨울이 짚은 속은 이러했다. ‘딱 그 정도가 청자의 수준이라고 생각했나?’ 조금 전에도 속으로 공교육의 실패를 곱씹었었다. 아무리 시국이 혼란스럽다지만 대놓고 멍청한 사람이 공화당 경선을 통과했을 확률은 낮다. 자산가로서 사업수완이 좋기로 이름난 크레이머는 흥분한 소비자들이 원할 법한 것들만 던져주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부에 대한 비난과 쉬운 근거, 그리고 단호한 이미지. 광고는 정치와 상업의 근본이 같다. 크레이머가 하늘을 향해 검지를 세웠다. 「정리하지요! 오늘 폭로된 음모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어찌되었든 정부가 국민을 버리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 배후엔 권력을 사유화한 위정자들, 또 전체 경제인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소수의 재력가들이 있었지요. 그러므로 함께 버려질 운명이었던 우리가 단결해야 함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합니다. 저, 에드거 크레이머가 이끄는 미국에선! 모두가 살거나! 모두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일 아니겠습니까?」 이 외침은 우호적인 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마지막의 한 마디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는 유서 깊은 경구의 변형이었다. 이후의 진행엔 딱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겨울이 다시금 핸드폰의 자판을 두드린다. 「어떻게 생각해요?」 서너 호흡 뒤에 단말기가 진동했다. 「많은 불씨들이 타오르겠네요.」 문자일 뿐이지만, 실무자의 한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답신이 연속으로 도착했다. 「이제부터 진위를 검증하게 되겠지만, 설령 완전한 거짓으로 밝혀진들 믿고 싶어서 믿고 분노하고 싶어서 분노하는 사람들에겐 소용이 없을 거예요.」 「삶이 힘겹고, 왜 힘든지 이해하기에도 지나치게 복잡할 때면,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쉬운 수준으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요.」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라 속에서만 끓던 화를, 하소연할 곳 없던 억울함을 쏟아낼 대상을 정하는 거죠. 만악의 근원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그것이 어떨 때는 정부고, 어떨 때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이고, 어떨 때는 자본가들이나 노동자들이고, 이따금씩 백인이나 흑인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적도 있고, 레드 넥이거나, 남자와 여자,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였던 적도 있어요. 최근엔 중국인들이었네요.」 「차라리 생존이 절박하면 오히려 덜 할 텐데…….」 방역전선의 긴장감이 낮아지면서 여론이 더욱 폭발하기 쉬워진 면이 있다는 암시였다. 겨울은 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그녀가 수사관으로서 사회의 여러 음영을 경험하며 쌓아온 감상일 것인데, 깊게 와 닿는 무언가가 있다. 별빛 아이에게서 무수한 세계에 걸친 가상인격들의 수난사를 접했던 바, 사후보험의 이용자들은 가상인격들을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처럼 대하고 있었다. 허나 그 이전부터, 사람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새삼 깨닫는다. ‘지저분한 책상 위를 서랍 속에 쓸어 넣는 느낌이네.’ 주로 쓰는 공간만 깨끗하면 되는 것이다. 사색에 잠긴 겨울의 손끝이 느린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톡. 느린 박자에 불가능한 상상을 담는다. 세상에 그저 선의만 있다면. 선의만 있을 수 있다면.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계절만 계속되는 세계가 있다면……하고. # 308 [308화] #그리스의 섬 (8) 다음 폭로는 뭘까. 밝혀질 경우 여파가 적지 않을 무언가. 돌이켜보면 겨울 자신의 행적에도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다. 떠오른 가능성을 문자로 옮기는 겨울. 「크레이머 후보가 확보한 또 하나의 비밀은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에 관한 게 아닐까요?」 전에도 한 번 걱정한 적이 있다. 장정 9호 추적 임무는 사실상의 실패였다고 봐야 했다. 잠수함이야 어쨌든, 궁극적인 목표는 본토에 대한 핵공격을 예방하는 것이었던 까닭. 허나 정부는 실패를 부분적인 성공으로 각색했다. 명백한 해방 작전이 좌절된 시점에서 시민들에게 희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정부가 안보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크레이머가 안다면 매력을 느낄 법 한 선택지. 잠시 후 넷 워리어 단말이 진동했다. 앤으로부터 온 메시지. 「지금 통화 가능해요?」 질문을 읽은 겨울이 시계를 보며 답신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오전 일정이 있기는 하나 시간을 아낄 만큼 바쁘진 않았다. 로저스 소장이 당부했던 업무들은 대부분 마무리 지었고, 병사들처럼 굴려질 입장도 아니었으므로. 곧 이동할 예정이라 보강교육조차 없었다. ‘FBI 본부는 다르겠지.’ 그 점을 감안하여 주로 문자 연락을 취해왔다. 이번 폭로 건으로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감독관 본인은 언제라도 겨울의 연락을 반길 테지만. 겨울은 앤이 연락하겠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분 늦게 답장을 보내왔다. 「알았어요. 곧 걸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기다리는 사이에 겨울은 봉쇄선 사령부에서 하달된 인사지침을 읽었다. 여전히 장교가 부족하니 임관 자격을 갖춘 희망자들을 물색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정부는 전선이 안정된 후에도 병력을 감축할 계획이 없는 듯 했다. ‘이유는……고용 유지인가?’ 육군이 규모를 쉽게 불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막대한 수의 이재민들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만 2천만이 넘고, 함께 오염된 다른 두 개 주를 합치면 3천만에 가까워진다. 봉쇄선 인접 지역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동북부로 이주한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적어도 청년층만은 군대가 흡수했다. 전선이 절반 이하로 축소되었답시고 수백만 쯤 단숨에 돌려보냈다간 엄청난 화근이 될 것이다. 여러 불씨들 위에 마른 섶을 얹어주는 꼴. 전직 군인들이 가세한 폭동은 진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진압을 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방역전쟁은 일종의 뉴딜 사업을 겸해야 한다. 정부가 전시채권 판매를 괜히 중시하는 게 아닌 것이다. 공보처가 말하는 겨울의 가치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경제를 유지하는 균형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었다. ‘인력을 오염지역 복구사업으로 돌릴 순 없으려나?’ 생각하던 겨울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요에 맞춰 공병의 비중을 늘리면 그만. 고용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이 편이 더 나았다. 오염지역의 도시들을 처음부터 다시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복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일 잡음,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개입을 막는 데에도 얼마간 도움이 되겠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히 장교가 부족한 모양이다. 지침을 다시 읽는 겨울. 실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는지. 계급이 높아질수록 충원이 곤란하니, 이 지침을 받을 정도의 고급 장교가 겨우 인사실적 탓에 불이익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스마트폰 액정에 앤의 이름이 떴다. 겨울이 받기를 눌렀다. “여보세요?” 「미안해요. 금방이라고 해놓고 많이 늦었죠?」 “늦기는요. 10분도 안 지났는데요. 바쁜 와중에 전화해줘서 고마워요.” 배려로서 여유롭게 건네는 말에 저편으로부터 작은 웃음이 돌아온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당신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까봐 걱정했거든요.」 “불안이 있기는 있죠.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하고. 지켜주기로 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네요.” 「하긴, 괜한 걱정이었군요. 당신은 그날 그 배에 같이 갇혔을 때도 끝까지 침착했었죠.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비로소…….」 멈칫, 하고 흐려지는 끝. 무의식이 흘린 말에 당황하는 침묵이었다. 항상 되새기는 마음이라면 어울리지 않는 맥락에서 새어나올 법 했다. 겨울은 굳이 다음을 묻지 않았다. 앤이 조금 빨라진 말로 부끄러움을 수습했다. 「아무튼,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위성신호 교란으로 명중률이 감소한 것 자체는 사실이고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호손 시민들은 지금쯤 유명을 달리했을 확률이 높죠.」 따라서 공로를 깎아내릴 순 있을지언정, 곤란해지는 건 현 정권이지 겨울에게까지 치명적이긴 어렵다. 전에도 한 차례 나누었던 대화였다. 「만약 크레이머가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진정한 내막을……양용빈 상장의 핵공격이 사실은 목적을 달성한 것임을 안다고 해도, 함부로 풀어놓지는 못할 거라고 봐요.」 “어째서요?” 「겨울, 당신이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여론을 이야기했다. 「정치는 실속 이상으로 이미지 싸움이에요. ‘한겨울 소령’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죠. 크레이머 본인이 아무리 주의하더라도 적대진영에서 그런 식으로 비난할 테니까요. 공화당의 이단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감안하면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크레이머를 공화당의 이단아라고 부르는 건 실제로 당 수뇌부에서의 취급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국식으로는 내놓은 자식에 가깝다. 대통령이 이르기를 공화당의 중진인 하원의장 또한 같은 편의 대선주자를 싫어하는 입장이라 했었으니. 한편, 이단아의 주된 지지층 가운데엔 이재민의 비중이 높았다. 시민들 중에서는 삶이 가장 고달프고,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는 이들. 「공화당의 패색이 짙어 막판에 정국을 흔들어볼 요량이면 모를까, 근소하게 우세이거나 열세인 경우에는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을 거예요. 아, 이건 나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에요.」 수사국의 내부전망이 그렇다는 뜻이리라.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관이니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설명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겨울이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요.” 「뭐죠?」 “혹시 아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국방성금을 내려고 하거든요. 그 금액이 꽤 큰데.” 피쿼드 호에서 기부를 결정할 때, 그 자리에 앤은 없었다. 따로 알려주지도 않았고. 허나 감독관이었던 만큼 오가는 전문을 확인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해당 계좌의 존재를 알아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기부에 관해서는, 수사국 관리직이니 겨울에 관련된 정보를 열람할 수도 있었다. 딱히 기밀로 지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역시나, 그녀는 당연히 안다고 답했다. 「당신다운 결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이게 곧 공개된다고 들었는데, 혹시 의도적인 방해로 여길까봐…….” 「즉 폭로에 대한 관심을 줄여 현 정권을 도우려는 거라고?」 “실제로도 그러고 싶어서 더 곤란하네요.” 「그 마음 이해해요.」 겨울이 일부러 만든 한숨에 앤은 아까처럼 자그맣게 웃는다. 「크레이머가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군요.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면 있다고 해야겠어요. 그래도 악감정 때문에 막무가내로 폭로를 한다……. 지지율이 비등비등한 이상 다음 대선을 노리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사람이 항상 합리적인 게 아니고, 누구든 실수를 하니까요.” 「염려는 알겠지만, 기부를 하기는 지금이 가장 좋을 때예요. 정부에게나, 겨울에게나.」 “내게도?” 「한 번 고민해보는 건 어때요. 내 말만 길어지면 끊고 나서 서운하거든요.」 이번엔 겨울이 웃음을 만들었다. “괜찮아요? 많이 바쁘잖아요.” 「바쁘죠. 마지막으로 퇴근한 게 벌써 엊그제네요. 하지만 사람이 조금도 쉬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큼 좋은 휴식은 없어요.」 “그런 말 하면서 부끄럽지 않아요?” 「아끼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그래도 절제하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종말이 많이 미뤄진 까닭일까? 갈수록 직설적인 표현이 늘고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참고 그리워할수록 깊어지는 마음인 듯 하다. 초조함의 표현일 수도 있고. “잠시 다른 이야기인데, 이틀간 퇴근도 못할 정도면 내가 D.C에 가면 만날 순 있겠어요? 앞으로 대선까지는 지금보다 더 바빠지기만 할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정 기간 행사 보안담당으로 차출될 예정이니까요.」 “행사가……아, 본토회복 기념식.” 「네. 들었겠지만, 겨울이 참가할 파트는 비공식적으로 개선식이라고 불려요. 주간 닷새에 걸쳐 쉰다섯 개의 명예훈장이 수여될 예정이고요.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죠.」 “정말 많네요. 쉰다섯이면.” 「참전한 연인원에 비해선 굉장히 적은 숫자인걸요.」 “그 정도 규모의 행사에서 보안을 담당하는 거면 그것 나름대로 바쁘겠는데요?” 「그래도 겨울을 만날 시간은 충분할 걸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내가 내정된 거라서요. 당신이 D.C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나도 꽤 자유로울 거예요.」 “…….” 「수사국 입장에선 한겨울 소령과 친분이 있는 요원 하나를 따로 관리한다는 느낌에 가깝겠네요. 당신은 조만간 군정청에 들어갈 테고, 장차 속령이나 준주를 맡게 될 지도 모를 사람이니까. 훗날 수사협조든 뭐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 거죠.」 돌아가는 사정을 털어놓은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겨울, 혹시 불쾌한가요?」 “아뇨, 전혀. 오히려 다행이네요. 그게 아니었으면 가더라도 앤을 못 봤을 거잖아요.” 감독관을 안심시키는 말이 이어진다. “사적인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는 신경 쓰이지만, 뭐, 알려져도 상관없어요. 그쪽 의도가 그렇다면야 당신이 날 개인적으로 도와줄 때도 부담이 덜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 겨울이 화제를 되돌렸다. “아까, 국방성금을 내기에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고 했던 거요.” 「아, 네.」 “기부가 이 시점에서 화젯거리가 되면 대선후보들도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언급하게 될 것 같네요. 혹시 생각하던 게 이건가요?” 「비슷해요.」 조안나가 부드럽게 긍정했다. 「유세 중에 질문을 받든 토론회에서 논쟁을 벌이든, 양측 후보 모두 당신의 기부에 대한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한국에선 그런 걸 본 적 없나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특정 쟁점을 두고 경쟁적으로 상대보다 좋은 공약을 내놓는 경우 말예요.」 “왜 못 봤겠어요. 앤이 하고 싶은 말은, 두 후보 모두 전에 비해 더 괜찮은 난민정책을 약속할 거다 이거죠?” 「예. 경쟁이 가장 치열해질 때인걸요. 남은 일수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요.」 “일단 공개적으로 발언을 하게 되면, 나중에 지키지 않더라도 부담은 느끼겠고요.” 「그래요. 공허한 공약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죠. 그래서 난 겨울이 일부러 이 때로 정한 줄 알았어요.」 “오해에요.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거죠. 이미지가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했어도 이런 쪽으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네요.” 「그런가요?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 하다고 느꼈던지라.」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조안나는 첫 만남 이전에 이미 관계당국의 감시와 관찰이 있었다고 고백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겨울이 동맹을 위해 내렸던 판단과 결정들을 꽤 깊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괜한 질문이겠지만, 그 돈이 아깝지는 않은가요?」 “벌써 몇 번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예상보다 금액이 크기는 했어요. 그래도 쓸 데 쓴 건데요 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겨울뿐일 거예요. 역시 예전의 내가 맞았네요.」 “예전?” 「헤어지기 전날 말했었죠.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당신을 돕는 일이야말로 이런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중 하나일 거라고.」 겨울도 떠올렸다. 고백을 받은 이후의 대화였다. 조안나가 말에 격식을 갖췄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낯간지럽네요.” 겨울은 자연스러운 쓴웃음을 지었다. # 309 [309화] #그리스의 섬 (9) 재배치를 이틀 앞둔 오후, 테런스 슈뢰더 대장이 새크라멘토 지역사령부를 방문했다. 목적은 서훈식. 육군 봉쇄사령관인 그는 전에 보았을 때보다 늙고 여위어있었다. 멧돼지 사냥의 책임자로서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많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해보여서 다행이네.’ 겨울은 엄격한 표정 너머에서 부드러움을 느꼈다. 허나 4성 장군과 대면한 서훈대상자들은 대부분 바짝 얼어붙었다. 숫자가 많아 계급 및 훈장 서열에 맞춘 5열 횡대로 정렬했는데, 그 중엔 겨울의 독립중대에서 뽑힌 이들도 있었다. 계급이 가장 높은 이는 싱 대위였고, 둘째 줄엔 하급 장교인 진석과 유라가 있었다. 모두 그동안의 공로를 종합적으로 평가받았다. 가장 앞줄이다 보니 싱 대위의 순서는 금방 찾아왔다. 훈장을 수여하는 슈뢰더 대장의 시선이 터번을 쓴 대위의 허리에 머무른다. “이게 바로 그거로군. 좀 봐도 되나?” 허락을 구한 대장이 대위의 칼을 뽑아 하늘에 비춰보았다. 일반적인 시크교도의 곡검(키르판)이 아닌 실전용 직검. 곧게 뻗은 칼날 위에 초가을의 하얀 태양이 흘렀다. 빛의 반사는 양면의 음각과 양각이 달랐다. 「ਹਮਰੇ ਦੁਸਟ ਸਭੈ ਤੁਮ ਘਾਵਹੁ ॥ ਆਪੁ ਹਾਥ ਦੈ ਮੋਹਿ ਬਚਾਵਹੁ ॥」 “문장……? 문장이군. 이 글귀는 무슨 뜻이지?” “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제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고 절 당신의 손으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지요.” “그럼 이 칼에 맞아 죽은 놈들은 신벌을 받은 셈인가?” “제가 믿는 신앙에서, 신의 징벌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잠시 대답을 곱씹은 슈뢰더 대장이 칼을 돌려주며 말했다. “방금 그 말은 어쩐지 해병대스럽군. 잘은 몰라도 군인에게 어울리는 신앙인 것 같아.” 찰칵, 찰칵. 종군기자단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카메라도 돌아간다. 가까운 과거에 논란이 되었던 시크교도는 이번에도 괜찮은 소재가 되어줄 터였다. 공보처가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이어 한 사람 한 사람 악수와 함께 칭찬과 격려를 건네던 슈뢰더 대장이 진석 앞에 이르렀다. 은빛 훈장을 달아준 장군이 중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자료를 검토해봤는데, 소대 운용이 굉장히 공격적이더군. 욕심이 많이 느껴졌어.” “……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지나치면 곤란하지만, 지휘관에겐 욕심이 있어야지. 은성 훈장을 아무나 받는 게 아닐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선 반대의 경우가 더 골치 아파. 안정적인 것을 선호해서 결정적인 순간에도 미적거리는 부류 말이야.” “감사합니다.” “부하들에게 잘 대해주게나. 귀관 같은 장교는 그런 데서 부족하기 쉽지.” 마지막은 깊이가 느껴지는 충고였다. 다음으로 유라와 마주선 대장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중위.” “Yes, Sir!” “직접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군.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 가을이 깊어진 다음에 봤으면 좋았을 걸. 호랑이 가죽 케이프를 두르기엔 아직 날이 더운가?” 겨울은 유라의 귀가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 지금 가져올까요?” 살짝 얼빠진 느낌. 장군이 훈장 보관함을 들고 따르는 부관을 돌아본다. “이 친구 많이 긴장했군.” “Sir. 당신께선 육군 대장이십니다. 농담을 하실 거면 좀 더 확실하게 웃어 주십시오.” “내가 문제인가?” “물론입니다.” “자넨 해고야. 다른 부대로 꺼지게.” 뜬금없는 만담에 어디선가 작은 웃음이 샜다. 대장이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누가 웃음소리를 내었는가?” 처음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짐짓 굳혔던 낯빛을 픽 되돌린 대장이 유라에게도 훈장을 달아주었다. 주로 아이들린 지열발전소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운 결과였다. “내 귀관에 대한 평가 자료도 꼼꼼히 봤지. 같은 중대라도 여기 팍 중위와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더군. 팍 중위만큼의 맹렬함은 없을지언정 통솔 전반에서 부대원들과의 견실한 유대를 느낄 수 있었네. 일단 상관이 좋아서 명령에 따르는 병사들은 역경에도 강하지.” “감사합니다!” “그런 점에선 귀관의 직속상관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가, 감사합니다.” “아주 잘 배웠어. 앞으로 능력 면에서도 따라잡을 수 있기를 바라겠네.” “…….” “대답은?” “최선을…다하겠습니다.” “좋아.” 대장은 유라와 짧게 악수했다. 이어 부사관 및 병사들도 크고 작은 훈장들을 달았다. 겨울은 슈뢰더 대장이 수훈자 전체의 공적을 꿰고 있는 게 뜻밖이었다. 본토 탈환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만큼 전보다 여유는 있겠으나, 그렇다곤 해도 군 계급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이 보여주는 섬세함이었으므로. 훈장 보관함을 모두 비우고 임석으로 돌아가려던 슈뢰더 대장이 아, 하며 돌아섰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색채를 띤 시선이 조금 떨어져있는 겨울에게 꽂혔다. “거기, 한겨울 중령. 끝나고 잠깐 남도록.” 겨울은 부동자세로 즉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단상에 선 대장은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요지의 간략한 연설로 수여식을 끝냈다. 모두가 해산하는 와중에 선임상사가 다가와 물었다. “모두 대기하라고 전할까요?” “음, 글쎄요. 좀 걸릴 수도 있으니 다들 먼저 돌아가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요.” “그럼 차량을 따로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선임상사를 경례로 보낸 뒤의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울과 마찬가지로 참모들을 먼저 보낸 슈뢰더 대장은 수행인원 한 명 없이 뚜벅뚜벅 단신으로 다가왔다. “날씨도 좋은데 잠깐 걷지.” “예.” 겨울은 앞장서는 대장을 뒤따랐다. 말과 달리 걷는 시간은 잠깐이 아니었다. 9월의 마른 바람이 들풀을 흔드는 바깥. 주둔지 외곽의 순찰경로는 사람이 드물어도 매양 시끄러웠다. 부대 자체의 소음도 소음이거니와, 맨눈으로 보이는 거리에 공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대장이 혼잣말로 이쯤이 좋겠군, 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기관총 진지와 진지 사이, 철조망 바깥으로 황폐해진 경작지가 보이는 위치였다. “우선 귀관의 진급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겨울의 계급은 오늘자로 중령이었다. 또한 중대 주둔지로 돌아가면 겨울이 계급장을 바꿔줘야 할 인원도 적지 않았다. 복귀전에 진급을 끝내두려는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령관이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묻는다. “조만간 봉쇄선 동쪽으로 간다지?” “봉쇄선 동쪽……입니까?” “아, 이런.” 실수를 깨달은 슈뢰더가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아직 적응이 덜 됐군. 아무튼 중령이 곧 동부로 간다고 하던데. 그동안 미뤄진 휴가를 쓰고, 오늘 못 받은 훈장들도 받을 겸 해서.”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노파심에 해두는 말이네만……가거든, 이상한 놈들의 접근을 주의하게.” 겨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합니다.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처신에 주의하라는 뜻일까? 허나 그런 거라면 봉쇄사령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중령을 따로 불러내서 당부할 내용이 아닐 것이었다. 말을 고르던 슈뢰더가 느릿느릿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방역전쟁이 시작된 이래 장교가 만성적으로 부족했다는 사실은 귀관도 익히 들어 알겠지?” “예. 관련 지침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래. 그 중에서도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의 수요는 정말 채우기 힘들었어. 육군에서 동원한 병력의 총계는 전쟁 이전의 스무 배에 가까우니까. 어떻게 최소한으로만 맞춘다고 해도 과거보다 열 배 이상을 공급해야해. 하사를 진급시켜 소대장을 맡길 순 있어도 원사를 진급시켜 사단장을 시키긴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이들을 고속으로 진급시키고 전역한 장교들까지 소집해서 급한 불을 껐지만, 그러고도 비는 자리들은 주먹구구식으로 메꾸는 수밖에 없었네. 군수 분야는 임시조치로서 민간인 전문가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고.” 먼 곳을 보던 슈뢰더 대장이 겨울을 향해 반쯤 돌아섰다. “내 말은, 능력이든 성향이든 실전부대를 맡기기에 부적합한 놈들이 있을 거라는 의미일세.” “……혹시 군사반란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다네.” 사령관이 제기한 위협을 겨울 역시 겪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정권교체가 무의미할 만큼 무너져 있었고, 이번 세계관에서는 경험한 군사행정이 워낙 안정적이었으므로 반란 가능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슈뢰더 대장이 말을 잇는다. “검증된 지휘관들 대부분이 이쪽 전선으로 보내졌네. 특히 핵이 터진 다음에는 문자 그대로의 총력전이었으니. 그렇다고 동쪽을 완전히 비워둘 순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2선급 이하의 병력만을 남겨놨지. 즉 후방으로 갈수록 병사든 지휘관이든 자질이 의심스러울 확률이 높았고, 그들끼리 뭔가 호흡을 맞출 여유도 있었다는 말이야.” “정부는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방대해진 군 조직 전체를 무슨 수로 다 감시할 텐가? 사회 불안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정보기관들이 힘에 겨워하는 마당에.” “군 전체를 감시할 필요가…….” “중앙에서 보기엔 나 또한 경계의 대상이라네.” 장군이 겨울의 반론을 막았다. “미국 역사상 나 정도의 실권을 지녔던 군인은, 뭐, 사실상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일세. 직간접적으로 지휘권에 관여하는 병력은 터무니없이 많았고, 방역전쟁에 대해선 광범위한 재량권을 인정받았지. 다른 것보단 인류의 생존이 최우선이었잖나. 그렇기에, 전선이 안정된 현재 봉쇄선 사령부는 해체 및 분할을 앞두고 있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만, 제3자가 볼 땐 내가 불만을 품기 충분한 조건이지.” 게다가 슈뢰더 대장은 명목상 본토 회복을 완수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듣기로 대중적인 인지도도 상당한 편이라고. “이게 다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겠네만-” “…….” “아니, 그럴 공산이 훨씬 더 크겠네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대선 전후를 기해 모자란 음모를 꾸미는 집단이 있다면, 귀관은 꽤 매력적인 포섭 대상이거나……혹은 포획물일 거야. 물론 국토안보부, 연방수사국 같은 곳에서도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 귀관 가까이 대책을 마련해두겠지.” 겨울은 자연스럽게 앤을 떠올렸다. 그녀가 전부는 아닐 테지만. 대화가 여기에 이르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생긴다. 어차피 각종 정보기관의 감시가 있을 것을 예상한다면 겨울 개인에게 따로 주의를 당부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겨울이 이를 직설적으로 물었다. “Sir. 제게 이런 말씀들을 해주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유?” “네. 단순히 조심하라는 뜻으로만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뜸을 들이던 슈뢰더 대장이 품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받아든 겨울이 재차 물었다. “전화번호입니까?” “그 자체는 결번이고, 뒤 네 자리에 1씩 올려서 걸면 내 위성단말로 연결된다네.” “어떤 상황에 연락을 원하시는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 최악의 상황.” “보험인가요?” “맞네. 정보기관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경우 그냥 찢어서 버린 후 잊으면 돼. 그러나 만약 아니라면, 귀관은 파국을 가장 먼저 알게 될 사람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아. 내가 가장 우려하는 건 이런저런 기관들이 군의 추가적인 개입을 꺼리다가 막을 사건도 못 막는 결과라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야 알게 되는 거지.” 이 말을 들은 겨울은 봉쇄사령관이 자신 외에도 여러 수단을 강구해두었으리라 여겼다. 대장이 말했다. “그러니 그땐 스스로 판단하게. 귀관이 나를 믿을 수 있거나, 뭘 하든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번호로 연락하게나.” # 310 [310화] #그리스의 섬 (10) 사령관과 작별한 겨울은 받은 번호를 즉시 「암기」했다. 남은 쪽지는 잘게 찢어 바깥으로 부는 남동풍에 맡긴다. 자잘한 조각들이 자그마한 나비 떼처럼 나풀거리며 철조망 너머 가을 들녘으로 흩어졌다. 세절(細切)보다 안전할 것이었다. 주둔지로 돌아온 다음엔 지난 대화를 곱씹는다. ‘믿어도 좋을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슈뢰더 대장 본인의 심중에 반란의 불씨가 있을지도 모른다. 봉쇄사령관쯤 되면 관계당국의 감시가 있을 것이므로 가능성을 낮게 잡아야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로는 아니었다. 그 경우, 겨울에게 번호를 준 이유는 장군 스스로가 말한 ‘매력적인 포획물’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이 틀어져 자체적인 능력으로 겨울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국토안보부 및 FBI 등의 방해를 피해 위치를 확인할 백 도어를 만들어둔 셈. 비유하자면 추적수단을 부착해둔 사냥감이다. 슈뢰더 대장에겐 그럴 만 한 동기도 있었다. 권한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지만, 안전지역에서 계속되는 혼란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법 하다. 절박한 사명감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예컨대, 겨울만 하더라도 크레이머 당선 이후의 미국을 우려하고 있지 않은가. 증오와 차별이 깊어지고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어 마침내 인류의 앞날이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자신이 올바르며 유능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외통수에 빠지기 쉽다. 혹은 야심이 있기는 있으되 보다 소극적이고 온건한 경우일지도 몰랐다. ‘원하는 건 반란을 저지하고 국가를 수호했다는 명성 뿐…….’ 즉 대장 스스로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킬 계획이 없으며, 다만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진압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유명한 전쟁영웅을 신속하게 보호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겠고. 장군의 입지는 튼튼해지고, 훗날 대권을 노리기에도 충분할 터였다. 어쩌면 생존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정부로부터 이미 요주의인물로 경계 받고 있는 만큼, 반란군이 뜬금없이 주모자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해버리면 앗 하는 사이에 휘말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멋모르고 구속당하거나, 불가피하게 가담하거나. 어쨌든 진압에 혼선을 일으켜야 할 반란세력 입장에선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반란에 대응하는 정부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피아식별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담했는가. 그리고 어느 부대를 동원해야 하는가. 이런 관점에서는 겨울의 가치가 단순한 전쟁영웅 이상이 된다. 현 독립중대, 차기 독립대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부대들과 차별화되는 특성을 보유했으니까. 여타의 지휘계통이 혼란스러워진 부대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좋다. 여기까지 생각한 겨울이 품속의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한국에서도 군사반란이 있었으니, 그 시대의 산증인들과 상담을 해보고 싶어진 까닭이다. 예를 들면 민완기라든가. 그러나 곧 그만두기로 한다. 새삼 도청이 우려되어서였다. 어차피 아직 시일이 남아있으니, 포트 로버츠에 돌아가서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앤에게 상담하기도 꺼려진다. CIA는 더더욱 그러했다. 겨울은 업무용 노트북을 켰다. 손끝으로 팔뚝을 두드리며 기다리기를 잠시. 업무용 네트워크로 접속해 인사 항목으로 들어갔다. 차기 중대장 인선 기한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결재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창을 닫으려는데, 의외의 연결 알림과 함께 화면 하단의 채팅창으로 빠른 답신이 돌아왔다. 사령부 인사참모가 마침 한가로웠거나, 관련 화면을 보고 있었던 모양. 「귀관의 중대는 포트 로버츠에 배치되는 즉시 대대로 확장 개편된다. 하지만 실제로 운용 가능한 전투 병력은 당분간 1개 중대 뿐이겠지. 고로 부대 운영에 지장이 없으려면 중대장 지정은 빠를수록 좋다.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사령관과 나누었던 대화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고. 망설이던 겨울이 타자를 느리게 두드렸다. 「후보군은 좁혔으나, 지금 바로 정하기엔 곤란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네만.」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인사참모는 지금쯤 당혹스러운, 혹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뭐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지, 생각할 지도 모르고. 겨울은 거부당해도 어쩔 수 없겠다고 여겼다. ‘바로 결정해야 한다면 역시 박진석 중위로 정하는 게 낫겠지.’ 사실 슈뢰더 대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라를 고르려고 했었다. 그녀가 중대장을 달면 진석이 괴로워하겠으나, 그 역도 성립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같은 미군과의 교전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싸움은 유라보다 진석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지휘책임이 있든 없든, 교전에 참가하는 모두가 살인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심정적 부담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허가하지.」 기다림 끝에 의외의 허락이 떨어졌다. 「솔직히 납득은 안 되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고 딱히 어렵지도 않으니까. 어차피 근시일 내로 실전에 투입될 일은 없을 부대이고. 묘한 일이야.」 겨울은 마지막 표현에서 얼룩을 느꼈다. 납득이 안 된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가 감지된다. 「묘하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이밍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오늘 사령관님의 지시가 있었거든.」 「내용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난민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 특성상 외부에 설명하기 애매한 뭔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귀관이 어떤 요청을 하거든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수용하라고 하셨지. 이런 걸 예상하신 건 아니시겠지만.」 아니다. 슈뢰더 대장은 여기까지 내다보고 그런 지시를 내렸을 확률이 높다. 지금 이 대화가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장군은 겨울이 반란세력과의 교전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것이다. ‘어쩌면 이게 시험이었을 가능성도…….’ 즉 겨울의 판단력에 대한 검증. 인사참모의 메시지가 갱신됐다. 「어쨌든, 이런 식의 일처리는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쁘게 듣지는 말고. 난 귀관을 꽤 괜찮게 보거든. :)」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까지. 용무 보게.」 인사를 남긴 참모가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곧 결재 승인된 문서가 도착했다. 내용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겨울은 끝없이 이어지는 의심에 제동을 걸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검토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너무 깊어진 생각에 매몰되는 건 피하고 싶었으므로. 객관적으로 볼 때 슈뢰더 대장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가 오직 진실만을 털어놓았으리라고 가정해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저 100% 믿기는 곤란할 뿐. 시간이 흘러, 노을이 지는 시간.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겨울은 장교식당 입구에서 뜻밖의 인물과 재회했다. “Sir!” 기대어 있던 벽으로부터 떨어지며 반가운 얼굴로 경례하는 사람은, 지난날 멧돼지 사냥 과정에서 구조했던 공격기 조종사, 파멜라 펠레티어 대위였다. “대위.” 경례를 받은 겨울은 그녀의 복장을 살폈다. 파일럿 수트 차림이었다. “건강해보이네요. 반갑습니다. 뼈가 벌써 붙었나 봐요?” “예. 애초에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음, 알라모 편대가 이곳에 배치되어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뇨. 그랬다면 더 일찍 찾아뵈었을 겁니다. 지금은 급유와 정비를 위해 들른 거지요. 저격수를 잡느라 요 근처의 능선 하나를 갈아버렸거든요.” “저격수라면…….” “제너럴 양의 잔당들 말입니다.” 미군이 저격수를 상대할 땐, 같은 저격수를 투입하는 경우 이상으로 의심이 가는 건물이나 지형을 싹 쓸어버릴 때가 많았다. 공격기 한 개 편대가 동원되었다면, 능선을 통째로 갈았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것이었다. 공군이 말하는 근처가 그리 가깝지는 않겠지만. “피해는?” 질문을 받은 대위는 자신 없는 태도로 답했다. “잘은 모릅니다. 몇 명 다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죽은 사람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군요. 그저 이번에도 그 작자가 찍힌 동영상이 발견되었다던가요? 이런 쪽으로는 저보다 중령님께서 알아보시는 편이 더 정확할 겁니다.” “…….” 상장의 악의는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혹자는 그를 두고 빈 라덴의 후계자라고 빈정거렸다. 테러리스트의 전략을 집대성했다는 뜻이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 죽여도 죽인 것 같지 않고, 끝내도 끝내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함. 상장이 철저하게 분석했을 미국의 약점. 펠레티어 대위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하군요. 우울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온 게 아닌데…….” “여긴 무슨 일로?” “당신께서 아직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잠시 찾아뵐까 해서 왔습니다. 전엔 상황이 상황이라 제대로 감사도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또 전할 말씀도 있고요.” “감사는 됐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저도 종종 땅개 친구들에게 사적인 답례를 받곤 하죠.”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받아든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 흔드니 자잘한 마찰음이 들렸다. “이건?” “시가입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흡연자가 아니에요.” “담배보다는 장식품이나 사치품에 가까운 물건입니다. 저는 그냥 제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걸 드리고 싶은 겁니다. 작년 초 카지노에서 쏠쏠하게 재미를 본 날 충동적으로 질렀는데, 사놓고 보니 아까워서 포장도 못 뜯겠더군요.” “대체 가격이 얼마기에?” “당시 한 대에 4백 달러쯤 했습니다. 데킬라에 절여 숙성시켰다나요. 지금은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놈이라 내가 담배 좀 피운다 하는 사람이라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살 물건이죠.” “그럼 더더욱 못 받겠네요. 가격도 가격이고, 이런 건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야죠.” 겨울은 상자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대위가 웃으며 사양했다. “저도 이젠 끊었습니다.” “어째서?” “그날, 추락한 기체에 갇혀서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 대를 태울 때만 해도, 살아서 복귀하게 되면 그것부터 피워야지……했습니다만, 막상 돌아가고 나니 선뜻 손이 안 가더군요. 이렇게 살았는데 암 걸려 죽으면 억울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층 더 짙게 웃었다. “그동안 좀 과하게 많이 피웠던지라. 언제 망할지 모를 세상,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물고 있었죠.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잖습니까. 벌써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늦어도 시작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달리 말해 지금 그런 마음가짐으로도 뜯지 못한 명품을 건네주는 셈이었다. 겨울은 비로소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잘 됐네요. 이건 기념품으로 삼을게요.” “그러셔도 좋고, 다른 누군가에게 주셔도 괜찮습니다. 중령님쯤 되면 앞으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자주 있으시겠죠. 그런 식으로라도 당신께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상자를 갈무리한 겨울이 새롭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 예. 나중에 혹시 시간이 되시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실 수 있을까 해서.” 또 전화번호였다. 그러나 펠레티어 개인의 연락처는 아니었다. 명함엔 인명 대신 어떤 단체의 로고와 이름이 인쇄되어있었다. “여긴 어디죠?” “현역 군인들을 지원해주는 시민단체입니다. 고향 친구가 사무장으로 있어서 알게 된 곳입니다만, 이번 승전을 기념해 군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하프 마라톤을 기획하고 있다더군요. 사회 통합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라는데…….” 대위가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가 닿으면 중령님께 이야기를 좀 전해달라고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그래도 뜻이 좋은 것 같고, 난민들을 안고 계신 중령님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번 말씀이나 드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좋네요. 한 번 통화해보죠.” 빈말은 아니었다. 행사에 대한 건 공보처의 허가가 먼저겠으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시민단체와의 인연은 쓸모가 다양할 것이었다. “그리고…….” 펠레티어 대위가 조심스레 권한다. “바쁘지 않으시면 오늘 밤 저희 편대원들과 술 한 잔 어떠십니까? 편대장님께서 사고 싶으시답니다.” 멈칫. 희미한 발상이 겨울의 뇌리를 스쳤다. “알라모 편대장이면, 그……스트릭랜드 소령? 소령이 맞나요?” 성은 알지만 계급은 불확실하다. 소령 아니면 중령일 텐데. 질문을 받은 대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저희 편대장님을 아십니까?” “아뇨. 그냥 어쩌다보니…….” 단지 로저스 소장을 통해 한 번 들었을 따름. 그러나 지금은 의미가 새로웠다. 겨울은 알라모 편대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죠. 시간과 장소를 말해줘요.” 펠레티어 대위는 빠른 승낙이 기쁜 눈치. “오후 8시, 장교용 바입니다. 편대장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중령님의 팬이시거든요.”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던 날 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라, 겨울은 설익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311 [311화] #그리스의 섬 (11) 기지 내의 주점은 마른 나무 냄새로 가득한 곳이었다. 갓 조립한 목조건물일뿐더러. 내장에 각종 탄약 상자들을 뜯어다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면은 다양한 구경의 탄종(彈種) 및 수량, 제조식별번호(LOT) 표기로 가득했다. 이는 의외로 괜찮은 느낌이었다. 겨울이 실내에 들어서자 입구 근처의 사람들이 가볍게 경의를 표했다. 간단한 눈인사, 까딱이는 목례 혹은 조용히 술잔을 들어 보이기. 상급자도 있고 하급자도 있었으나 이런 자리에서까지 정식으로 경례를 주고받진 않는다. 겨울도 목례로 답했다. “Sir! 여깁니다!” 창가에 인접한 테이블에서 여기라고 손을 들어 보이는 펠레티어 대위. 앉은 채로 돌아보는 알라모 편대원들은 육군과 다른 복장 때문에라도 알아보기 쉬웠다. 1인승 공격기 편대인지라 다 합쳐서 네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는 도중에 겨울은 뜻밖의 둘을 발견했다. 바텐더를 중심으로 둘러앉는 카운터 테이블에 1소대장과 4소대장이 나란히 앉아있었던 것이다. 등진 모습이라도 몰라보기 어렵다. 흐우우우- 시끌시끌한 가운데, 옷깃에 파묻힌 울음소리가 하나. 천소민 소위는 유라에게 기대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유라는 난처해하면서도 후임을 보듬어주는 중. 동생이 괘씸해도 화를 내진 못하는 언니를 보는 듯 하다. 키는 소민이 한참 더 커서 모양새가 별로였으나, 따뜻한 감정은 겉보기와 별개였다. 뒤쪽에서 힐끔힐끔 기웃거리는 관심 깊은 시선들이 많았다. 겨울은 모르는 척 지나쳐 알라모 편대에 합류했다. 상기된 편대장이 정중히 환영했다. “Sir. 초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트릭랜드. 브랜디 스트릭랜드 소령입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만나기는 처음이네요, 소령. 다들 반갑습니다. 중령 한겨울입니다.” 이어 구면인 펠레티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이 자신을 소개했다. “대위 아서 로즈몬드입니다.” “중위 데이먼 샌도버입니다. 술은 좀 드십니까?” 질문을 받은 겨울이 살짝 끄덕였다. “주면 마시죠. 불법이지만.” 가벼운 농담에 웃음이 번졌다. 속령을 제외한 미국의 모든 주에서 음주가능연령은 만 21세. 허나 군인들 사이에선 무의미한 기준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돌아와 술 한 잔 걸치는 데 “넌 법정연령 미만이니 빠져.”라고 하는 건 질 나쁜 따돌림에 불과하다.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서 온 자리라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어울릴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러는 편이 스트릭랜드 소령의 협력을 구하기에도 좋을 것이었다. 만나기로 한 목적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알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만큼. “받으십시오.” 겨울 앞으로 빈 잔을 밀어주는 샌도버 중위. “잔이 사람 수보다 많네요? 혹시 더 올 사람이 있나요?” 겨울이 묻자 로즈몬드 대위가 카드 패를 들어보였다. “가운데는 「왕의 잔」입니다.” “술 게임?” “초면에 친해지는 데엔 이것만한 게 없지요. 아니면 저것도 좋겠군요.” 대위가 가리킨 방향에선 퍼억 퍽 찍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벽면에 고정시킨 목판에 등신대의 변종을 그린 대검 던지기 표적이었는데, 여기서는 여느 술집의 다트 격인 게임이었다. 최고점수를 얻으려면 미간과 고간, 그리고 젖꼭지에 칼을 꽂아야 했다. 로즈몬드 대위가 카드를 빠르게 섞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건 술을 먹고 던져야 진짜 실력이지요. 우선은 이 게임인데, 룰을 아십니까?” “전혀.” “흠, 딱히 어렵지는 않습니다. 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알려드리도록 하죠.” 대위는 카드 뭉치를 내려놓고 손가락 하나로 밀어, 빈 잔을 중심으로 정확한 원을 만들었다. 각각의 카드가 밀린 간격도 일정했다. 멋진 솜씨에 펠레티어가 휘파람을 분다. “언제 봐도 굉장해. 전문 도박사 같아.”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취하도록 마시는 건 곤란한데요.” “염려 놓으십시오.” 로즈몬드 대위가 하는 말. “이건 우리 편대장님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핑계?” “예. 업무가 아니고선 목소리를 듣기 힘든 분인지라……. 이런 거라도 해야 대화가 성립합니다. 만취하기 전엔 끝내야지요.” 펠레티어가 거들었다. “아까 중령님께 드린 인사가 오늘 하루 중 가장 긴 말씀이었을 겁니다.” 스트릭랜드 소령은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펠레티어 대위가 으쓱인다. “지금도 눈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왜 괜한 소리를 해서 창피하게 만드느냐고.” 겨울은 미소의 어색함을 지웠다. “그런 점은 아버님인 스트릭랜드 장군님을 닮은 것 같네요.” “언제 뵌 적이 있으십니까?”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에 반덴버그 기지에서 잠시. 당시엔 그곳 사령관이셨죠.” 이 말을 듣고 오- 하는 반응이 셋. 겨울의 이야기이자 편대장의 이야기였다. 스트릭랜드 소령 본인은 조금 불편한, 그리고 부끄러운 눈치. 하지만 뭐라 입을 열진 않는다. 그저 크게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샌도버 중위가 묻는다. “이건 흥미롭군요. 그 분도 많이 과묵하십니까?” “예. 정말로.” “뭔가 말씀은 하셨습니까?” “따님에게 줄 싸인이 필요하다고 하시던데요.” 알라모 편대원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슬슬 술을 돌리겠습니다.” 샌도버 중위가 첫 번째 술병을 개봉했다. 이글 레어(Eagle Rare). 겉면의 라벨엔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잔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되도록 채워지는 위스키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진한 호박색이었다. 로즈몬드 대위가 권했다. “우리 편대가 평소 가장 즐기는 물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버팔로 트레일에서 나오는 제품 중 최고라고 봅니다. 앤틱(Antique)으로 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여기는 없더군요. 아무튼,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그대로 음미해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럴까요?” 겨울이 잔을 들자 나머지 네 사람도 함께 잔을 들었다. 건배. 짧게 교환하고 한 모금 머금어보는 겨울. 45도짜리 독주임에도 불구하고 첫맛은 굉장히 순했다. 그러나 삼킨 직후 강렬한 향이 올라온다. 오렌지의 상큼함과 코코아, 바닐라의 진한 풍미가 공존하는 가운데, 뭉근한 단맛과 더불어 아몬드의 고소함이 감돌았다. 그 뒤에 비로소 식도가 화끈거렸다.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위스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꼭 맛 좋은 향수를 먹는 것 같아요.” 펠레티어 대위가 웃었다. “어떻게 보면 술은 마셔도 무방한 향수 아니겠습니까? 둘 다 주성분이 알콜이고, 어느 쪽이든 향이 중요하니까요. 명품일수록 가격이 치솟는다는 것도 비슷하군요. 아, 그렇지. 마셔서 좋을 게 없다는 점도.” “대위는 괜찮아요?” “예?”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면서 술을 마시는 건 괜찮은가 싶어서요.” “……한꺼번에 다 끊기는 힘드니까, 이건 좀 나중에 끊겠습니다.” 좋은 핑계였다. 대위는 키득대는 윙맨, 샌도버 중위를 팔꿈치로 콱 찌르고 술잔을 쭉 비웠다. 겨울은 첫 잔을 홀짝이며 카운터 테이블 안쪽, 천장에 매달린 TV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공화당 대선주자 에드거 크레이머의 폭로에 대하여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내일,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기대에 비해서는 조금 늦은 시점이었다. 크레이머가 때를 고르기 위해, 혹은 대중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고자 꽤 긴 시간 변죽을 울려댄 만큼, 정부 입장에서도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깊어지려는 사색을 끊었다.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야지.’ 슈뢰더 대장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던 중 스트릭랜드 소장에게 주목한 건 공군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군사반란이 성공하려면 백악관, 의회 등의 핵심시설을 장악해야 한다. 따라서 육상전력이 빈약한 공군은 군사반란을 주도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공군에 지상 전투부대가 얼마나 있죠?” 겨울이 묻자 알라모 편대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어, 일단 기지 경비대가 좀 있고……그 외엔 전장통제팀(CCT)이나 전술항공통제팀(TACP) 정도? 근데 이쪽 친구들은 지상 작전을 뛰긴 뛰는데 주 임무가 직접적인 교전은 아닙니다. 파견 형식으로 나가서 화력유도를 하는 거지. 물론 막상 싸우면 실력이야 좋을 겁니다마는.” 여기까지 말한 로즈몬드 대위는 마지막으로 편대장을 돌아보았다. 맞느냐고 확인하듯이. 스트릭랜드 소령이 미세하게 끄덕였다. 겨울이 한 층 더 자세히 묻는다. “그런 부대들은 공군이 직접 지휘하는 게 아니죠?” “아마 그럴 겁니다…….” 로즈몬드의 자신감 없는 태도에 이번에야말로 스트릭랜드 소령이 입을 열었다. “공군인 동시에 특수전 사령부 소속이기도 합니다. 반쯤은 레인저에 가깝죠.” 즉 실전에서는 별도의 지휘체계를 따른다는 뜻이었다. 결국 공군이 통제하는 지상전력은 기지 경비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말. ‘일부 부대가 가담할 순 있겠지만, 주력은 역시 육군이겠지.’ 반란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이 그러했다. 폭격만으로는 끝낼 수 없고, 보병이 가서 깃발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군은 인적자원의 수준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육군보다 허들이 높은 까닭. 보병훈련이 힘들긴 하지만 양성 난이도 면에선 파일럿과 비교하기 곤란하다. 기지경비대 또한 역병 이전과 비슷하게 유지되었을 테고. 무엇보다 로저스 소장에게서 들은 스트릭랜드 소장의 보직은 기동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주로 항공수송을 통제하기에 전투부대와 인연이 적고, 그만큼 쿠데타에 연루되었을 확률도 낮았다. 하지만 로저스 소장이 말했듯이, 군인으로서 별을 다는 건 정치의 영역이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면 적어도 유용한 조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낮은 가능성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겨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말을 꺼낸 당사자, 슈뢰더 대장 또한 전보다 마음 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게 꾸며낸 모습이 아니란 전제 하에, 그 또한 반란이 일어날 전망을 높지 않게 본다는 의미. 다만 그 역시 만약을 대비할 따름이다. 펠레티어 대위가 테이블을 살피곤 씩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어보였다. “다들 끝내셨군요. 좋습니다. 다시 채우고, 이제 한 사람씩 카드를 뒤집어보죠.” 게임의 규칙은 카드 종류에 따라 일대일로 대응했다. 문양은 상관없고, 숫자와 알파벳에 따라 총 12가지. 겨울이 시작부터 에이스를 뒤집자 테이블에 웃음과 탄식이 흘렀다. “어쩔 수 없군요. 모두 마십시다. 중령님 먼저!” 로즈몬드 대위의 재촉을 받은 겨울은 얌전히 잔을 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순서대로 꿀꺽꿀꺽 삼키는 나머지. 반대편에 있던 스트릭랜드 소령이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희미하게 웃는다. 편대원들이 신기해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면, 그래도 아버지보단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아, 이런. 스페이드가 넷.” 겨울 다음 순서였던 펠레티어가 자신의 선택에 투덜거리더니, 편대장과 둘이서 술잔을 비웠다. 의아해하는 겨울에겐 샌도버 중위가 설명했다. 여자만 마시는 거라고. 로즈몬드 대위 차례엔 퀸이 뒤집혔다. “오,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해도 시선은 이미 겨울에게 향해있었다. “Sir. 제가 여쭙는 말씀에 대답을 못 하시면 잔을 비우셔야 합니다.” “그런 규칙이군요. 좋아요. 뭐가 궁금하죠?” “혹시 지금 연애중이십니까?” 펠레티어 대위가 아까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겨울은 솔직하게 답했다. “당장은 아니지만……마음을 준다면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있네요.” 와우. 질문자가 짧게 감탄하고, 그 외의 나머지도 흥미로워했다. “그럼 그 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두 번 묻는 건 반칙 아닌가요?” 로즈몬드 대위는 겨울의 반문에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카드를 뒤집다보니 처음에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대검 던지기에 끼게 되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있던 레인저 장교들이 한 번 겨뤄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들 먼저 나서서 몸을 푸는 틈에, 겨울은 가장 늦게 일어나려던 스트릭랜드 소령에게 조용히 물었다. “소령. 혹시 내일 개인적으로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상담?” 살짝 곤혹스러운 반응. “네. 중요한 일입니다.” “…….” 짧게 고민하던 소령은 한 차례 갸웃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312 [312화] #그리스의 섬 (12) 짧게 고민하던 소령은 한 차례 갸웃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어떤 내용입니까?” “여기서 이야기하긴 곤란하네요. 우선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만 말해두죠.” 겨울의 답변에 소령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막 만났을 뿐인 공군 소령에게 육군 중령이 무슨 도움을 받겠다는 것인지. 하물며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일을.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는데 로즈몬드가 재촉했다. “두 분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 저희만 따돌리시면 섭섭합니다.” 펠레티어가 그를 구박한다. “이 인간 눈치 없기는. 그렇게 방해하면 좋냐?” “어? 방해였나?” 오해에 편승한 로즈몬드 대위가 돌리던 칼을 멋쩍게 멈춘다. 겨울은 가볍게 부인했다. “그런 거 아녜요. 아까 했던 말 벌써 잊었어요? 본인이 물어봐놓고.” “제가 여쭤봤던 게……아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시다고.” 잠시 헤맨 끝에 수긍하는 그. 정확하게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지만, 거기까지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자리를 털고 몸을 푸는 겨울에게 펠레티어가 미소를 보인다.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참 좋은 의미로 고지식하십니다. 결혼한 연놈들도 술집에 들어갈 땐 반지를 빼는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어딘가는 나 같은 사람도 많겠죠.” “그 동네를 보통은 천국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녀는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키들거렸다. 가볍게 오른 취기였다. 레인저 쪽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겁니까? 이제 시작하시죠. 지는 쪽이 술값을 다 내는 겁니다.” 의욕이 왕성한 그들 중에 유독 내키지 않아 보이는 하나가 있었다. 그들의 중대장이다. 쓸 데 없는 승부욕이었으나, 어쨌든 겨울로 인해 며칠간 군장을 지고 구보를 뛰었던 사람. 지금도 부하들에게 휩쓸린 모양새다. 해병대 지휘관들이 꾸며서라도 상남자 행세를 하듯이. 나이 지긋이 먹고 「미친 개」 같은 별명을 좋아할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봐도 불공평합니다.” 소대장쯤으로 보이는 레인저 장교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상관에게 내놓는 의견. “저쪽은 한 분 빼고 다 귀족나리들이신데, 그냥 붙으면 일방적으로 이길 겁니다. 아무리 내기라지만 너무 쉽게 이겨도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와우. 누군가 이쪽을 향해 돌아앉으며 도발을 흥미로워하는 소리. 그것을 시작으로 주위의 관심이 부쩍 늘었다. 펠레티어는 레인저들을 향해 야유를 보낸다. 사실이 그렇다한들 이렇게 듣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차라리 그냥 지는 게 낫지. 스트릭랜드 소령이 눈을 찌푸리는 가운데, 이편의 샌도버 중위가 물었다. “제안이 있습니까?” “흠, 우리 쪽 페널티로 뭐가 좋을지…….” “페널티 말고, 피차 최상급자가 내는 점수를 각각 두 배……아니지, 아예 세 배로 적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Sir?” 레인저 장교가 뒤를 돌아보자, 그들의 중대장이 곧바로 끄덕였다. 자세히 보면 넌더리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부하들 앞에선 부담감을 보일 수 없을 처지. ‘조금 미안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 겨울의 입장에선 한겨울 중령을 소소하게 보고 겪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좋다. 훗날 어디선가 한겨울이라는 사람의 현실성을 증언해줄 테니까. 주의할 이유는 충분했다. 한때 영입제안을 받았던 방역전쟁 전술지원그룹만 해도 연출에 힘입어 과장된 전쟁영웅 집단이 아니던가. 따라서 첫 타자로 나선 겨울은 「투척」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술기운에 흐트러졌어도 여전히 천재의 영역인 기술. 한 사람 몫인 대검 세 자루가 연달아 수직으로 박혔다. 최고점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괴물을 그렸어도 형상은 인간인 표적이 묘하게 외설스러워졌다. 워-! 주위에서 즐거운 갈채가 터진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돈이 오가는 광경을 보다가, 겨울이 지갑을 꺼내 들어보였다. “거기, 나도 걸게요. 레인저의 승리에 100달러.” 즉석 도박판이 된 테이블 위에 턱 하고 20달러 지폐 다섯 장을 놓는다. 같은 판에 낀 꾼들이 웅성거리는 틈에, 어이없어하는 레인저들에겐 짐짓 난처한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이거 어쩌죠? 아무래도 돈을 잃게 생겼는데.” 이 한 마디에 사방에서 사나운 웃음이 터진다. 이야, 세다! 하고. 뒤늦게 겨울을 발견한 유라는 이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소령은 아까의 의아함에서 벗어나 묵묵히 재미있어하는 눈치였고, 펠레티어 대위 또한 비슷했다. 그녀가 말에 즐거움을 담았다. “의외로 도발에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필요할 때는요.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죠.” “과연, 변종조차 자살하게 만드시는 분 답습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문 사건이었다. 승부는 팽팽하게 흘렀다. 파일럿들의 솜씨가 의외로 나쁘지 않았고, 레인저 측은 말 그대로 진짜배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방역전쟁에서 대검을 이용한 살상은 소음이 적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전적 활용은 다른 차원이지만, 특수부대쯤 되면 훈련을 강화했을 법 했다. 콰득! 레인저 중대장의 투검(投劍)은 완력이 넘쳤다. 표적을 뚫고 들어간 칼이 벽까지 진동하게 만든다. 진짜 변종이었어도 뼈를 관통했을 것이다. 던지는 칼마다 동체시력의 한계를 시험했다. 겨울만큼 정교하진 못할지언정 점수를 매기는 원을 벗어나진 않았고, 실전적인 느낌이 가득하여 매번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렇다보니 내기는 갈수록 레인저들의 우세로 기울었다. ‘좋네.’ 표적이 보다 멀었으면 이겼겠으나, 겨울에겐 이런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하, 결국 지는군요.” 아쉬워하는 샌도버 중위. 아직 순번은 남았으나, 겨울과 중대장의 마지막 차례가 지나고도 여전히 열세인 만큼 역전의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중령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세 명 분을 해주셨는데.” “지면 어때요. 서로 재밌었으면 그만이지.” “하긴, 그래도 돈은 따셨군요.” “번 만큼은 저쪽 술값 내주는 데 보태려고요.” 중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대화가 오가니 남은 선수들도 누그러진다. 차례가 돌아온 로즈몬드 대위는 칼을 던지는 대신 스트릭랜드 소령 쪽을 응시했다. “괜찮겠습니까?” 편대장은 무언으로 허락했다. 상관의 양해를 구한 대위가 손을 들었다. “우리가 졌습니다.” Ye-ah! 레인저 측에서 환성이 일었다. 중대장은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데오도란트와 뒤섞인 땀 냄새가 난다. 겨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즐거웠습니다, 소령.” 레인저 중대장은 손을 바지에 대충 문지른 뒤 허리를 펴고 악수에 응했다. “술은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뵙는다면 그땐 저희가 사도록 하죠.” “그래요? 이름을 기억해둬야겠네요.” 손을 거둔 뒤에, 막 떠올랐다는 듯 레인저가 묻는다. “이름이라……. 혹시 에머트 중령님은 기억하십니까? 성함이 레이 에머트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산타 마리아에서 만나셨을 텐데요.” “2대대 델타 중대의?” “당시엔 그랬을 겁니다.” “물론 잊지 않았죠. 그새 중령이 되셨나보네요.” 겨울의 기억 속엔 격분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내 부하들이 이깟 좀도둑들을 구하려다 죽었다면서. 마지막 소식은 험프백을 추적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이라 만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으나,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 당국이 비밀에 부치고 있는, 허나 대충 짐작은 가는 험프백의 실체를 밝혀낸 게 바로 대위였던 에머트 중령과 그 부하들이 아닐지. 그 정도 공적이면 특진을 거듭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급일자도 겨울보다 빠를 터였고. 겨울이 반문했다. “그런데 그 분 이야기는 왜?” “별 거 아닙니다. 최근에 한 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도 한 중령님을 좋게 말씀하시더군요.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며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다? 주둔지가 겹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레인저가 포트 로버츠에 배치될 가능성은 없다. 과거에 훈련용 시설이긴 했으되 지금은 역할이 달라졌으므로. 따라서 확실하게 재회할 일은 겨울이 생각하기에 하나뿐이었다. 개선식. “그건 저도 기대되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인사를 받고 레인저를 그들의 테이블로 보낸 겨울은 덤이 붙은 판돈을 회수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들 먼저 앉아있었고, 펠레티어가 아쉬워했다. “배당이 크진 않았나봅니다.” “당연하죠. 상대가 레인저였잖아요.” 차액은 20달러를 밑돌았다. 겨울이 자세를 바꾸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진 건 어쩔 수 없고, 남은 카드를 마저 뒤집죠. 나 아직 이 게임 다 못 배웠어요.” 분위기를 바꾸는 건 까다로운 부탁을 할 스트릭랜드 소령에 대한 예의였다. 적어도 이 자리는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혹시 스트릭랜드 소령의 이름은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술을 본 딴 건가요?” 다이아몬드 퀸을 들어 보이는 겨울의 질문에 스트릭랜드 소령이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럴 것 같더라니. 겨울과 처음 만났던 날, 스트릭랜드 장군은 홍차에 브랜디를 타서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전혀 몰랐는지 편대원들이 요란하게 웃어댔다. “진짭니까? 농담 아니고?” 로즈몬드의 물음에 평소라면 입을 다물었을 성격의 소령은, 그러나 적당히 취해 말이 많아졌는지 한숨으로 긍정했다. “그래. 가장 좋아하는 술을 마실 때마다 딸 생각이 나면 더욱 좋겠구나, 라고 생각하셨다더군. 보통은 날 보고 술 생각을 하시지만.” “어머니께서 안 말리셨습니까?” “아서, 어머님도 브랜디를 좋아하셔. 사실 두 분이 만나신 곳도 아버님이 즐겨 찾던 술집이었다지. 어머님은 거기서 바텐더로 일하고 계셨고.” “맙소사.” 스트릭랜드 가는 말수가 적을 뿐 꽤 재미있는 집안인 듯 했다. 추운 집에서 자란 겨울에겐 인상적이었다. 이후로도 이어진 게임은 네 번째의 킹 카드가 뒤집히고서야 끝났다. 앞서 세 번을 뒤집은 사람들이 각자의 술을 「왕의 잔」에 부었고, 마지막 네 번째 주인공이 독박을 씀으로써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역시 소령의 몫이었다. 불그스름해진 그녀는 글라스 가득 넘실거리던 위스키를 냉수 마시듯 들이켰다. 다음날, 식사 시간이 지난 장교식당에서 스트릭랜드 소령을 다시 만난 겨울은 우선 상대의 속이 괜찮은지부터 확인했다. “숙취가 심하다면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은데요.” “멀쩡합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그녀가 마시던 음료수를 치우고 물었다. “Sir. 당신께서 원하시는 상담이 제 아버님에 대한 것입니까?” 적은 말수에 어울리는 직설적인 화법. 사실 그것 말곤 떠오르는 게 없었을 것이다. 딱히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어서 겨울은 쉽게 긍정했다. “예.” “청탁입니까?” “아뇨. 쿠데타를 대비하고 싶어서요.” “…….” 당혹감에 입을 다무는 소령. 겨울이 평이한 어조로 전후사정을 털어놓았다. 양적 팽창으로 질적 하락을 겪은 육군 장교단 일부가 불순한 계획을 꾸밀 가능성이 있다고. 또한 이것을 경고한 사람이 다름 아닌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이라고. 스트릭랜드 소령은 이야기를 따라오기 벅찬 눈치였으나, 개연성 충분한 이야기였으므로 끝내는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어제 공군의 지상전력을……하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겨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분도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시죠. 그래서 스트릭랜드 소장님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겁니다. 이 상황에서 육군보다는 공군이 믿을만하다고 판단한 이유는……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하고요.” 공군 소령은 예상과 너무 다른 내용 탓에 말을 조금 더듬었다. “어, 음, 괜찮으십니까?” “무슨 뜻이죠?” “제 말씀은,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실 텐데요.” “그 점을 포함해서 상담하고 싶은 겁니다. 소령이 보기엔 아버님께서 그런 음모에 가담할만한 분이신가요?” “제가 어떻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애초에 왜 이런 말을 꺼냈겠어요?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객관적으로 볼 때 슈뢰더 대장님보다는 스트릭랜드 소장님이 더 안전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공군인데다 휘하에 실전부대가 없으니까요. 단지 가족인 소령의 의견을 참고한다면 보다 안심이 되겠죠. 어제 처음 만났지만, 소령이 나쁜 사람 같진 않으니까요.” 이는 단순한 느낌을 넘어, 전보다 향상된 「통찰」과 「간파」를 근거로 내놓은 평가였다. 전투기술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이래 겨울은 다른 쪽의 강화를 선택해왔다. 여력도 충분했다. 비록 직접 싸우는 전투는 줄었으되,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이 모두 평가되는 까닭. “어차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건 최악의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카드 게임의 패는 많을수록 좋죠. 버릴 때 버리더라도.” 즉 CIA나 FBI와 별개로, 군 조직 내에서 유사시 협조를 요청할 사람이 슈뢰더 대장뿐이라면 곤란하다. 그런 식으로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소령은 부담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돼요.” 고민하던 스트릭랜드 소령이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저희 아버님은……괜한 일에 발을 들이실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식의 도움을 원하시는 겁니까? 말씀하셨듯이, 기동사령부는 주로 병력수송과 보급추진을 집행하는 곳이라 전투력을 갖춘 부대가 없는데 말입니다.” “뭐든지요. 연락망도 괜찮고, 단순한 조언이라도 좋아요. 그건 말 한 마디라도 장군의 조언일 테니까. 제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실 수 있으시겠죠.” 소위 장군의 저력이라는 것이다. 어떤 조직의 정점에 도달한 인물들에겐 표면상의 직제나 권한 이외의 무언가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고위관계자만이 접할 수 있는 지식과 수단, 또는 기나긴 경력으로부터 얻은 관록과 인연들. 그리고 기동사령부만의 장점도 있었다. 전투력이 미비할지언정, 관할구역은 본토 전역이라는 것이다. 스트릭랜드 소령은 여전히 난감해했다. “상담이 이런 내용일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이걸 제게 말씀하시는 것도 놀랍군요.” “슈뢰더 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알 만 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을 문제 아니겠어요? 스트릭랜드 소장님도 마찬가지고요. 소령의 입이 가벼울까봐 걱정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말을 아낄 필요는 없죠. 불가피한 위험은 감수하는 수밖에요.” 여기까지 들은 소령은 여러 호흡을 곱씹은 끝에 어렵사리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선 말씀을 전해드려 보도록 하죠. 하지만 전화를 쓰긴 곤란한 용건이군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나중에 어떻게 다시 연락을 드려야할지도 의문입니다.” “소장님께서 제게 전할 것이 있으시다면, 방법은 어떻게든 찾으실 거라고 봐요.” “흠. 어떻게든, 이라…….” 한참을 더 생각하던 소령이 다시금 끄덕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 313 [313화] #그리스의 섬 (13) 겨울이 돌아왔을 때, 독립중대의 주둔지는 여러모로 산만한 분위기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성탄전야와 비슷한 느낌. 정치적 폭로를 비롯해 돌아가는 상황이야 어쨌든, 이제 내일이면 포트 로버츠로 돌아가는 까닭이었다. 벌써부터 대강 짐을 싸둔 병사들도 많았고, 그간 엄하게 굴던 선임상사 이하 부사관들도 오늘만큼은 별다른 일정을 승인받지 않았다. 실은 그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누구나 늘어지고 싶을 때 직위에 맞게 행동하느라 더더욱 지쳤을 것이었다. 이 와중에 유라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자타임?” 의아해하는 겨울에게 유라가 설명했다. “네! 돌아가기 전에 쌓인 감정을 다 풀었으면 해서요. 지금은 다들 기분이 좋은 상태니까 싫은 말이 나와도 어지간해서는 뒤끝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의도라는 건 알겠으나, 겨울은 일단 그녀가 말하는 야자타임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까닭. 이를 물어보려는 찰나 상식보정이 작동했다. 혼자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을 확인한 겨울이 한 박자 늦게 긍정했다. “괜찮네요. 그럼 준비는-” “준비는 되어있어요! 중대원들 전부 좋다고 그랬거든요. 심지어 박진석 중위까지도요. 부중대장님한테도 미리 말씀드렸고, 이제 작은 대장님만 허락하시면 돼요.” 준비성이 좋다. 겨울이 옅게 웃었다. “허락하죠.”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이런 면에서는 역시 이유라 중위가 낫네요.” “이런 면이요?”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하게 챙겨주는 거 말예요.” 유라가 조금 상기되었다. “칭찬이시죠?” “아니면 뭐겠어요?” 겨울의 반문이 유라를 웃게 만들었다. “으.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튼 결정됐네요! 따라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작은 대장님한테 전하고 싶은 말도 많다고들 하더라고요.” 경쾌하게 앞장서는 그녀에게선 희미한 초콜릿 향이 감돌았다. ‘같은 미군과 싸울 가능성만 없었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겨울은 천소민 소위가 유라에게 의지하여 울던 광경을 떠올린다. 중대원들은 삼삼오오 질서 없이 모여 있었다. 각자 쥐고 있는 쪽지엔 순번이 적혀있는 듯하다. 겨울의 허락은 기정사실이었던 모양. 그들은 이제 중령이 된 중대장을 유난스럽게 환영했다. 속에 담아두었을 말들로부터 우러난 기대감이었다. 한편 표정을 누그러뜨리려 애쓰는 진석의 모습도 보였다. 평소처럼 날카롭게 있으면 나올 말도 안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억지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는 노력은 기괴한 결과만을 낳는다. 누군가 뭐라고 속삭이자, 진석은 한숨을 팍 쉬곤 원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시작을 앞두고 유라가 묻는다. “대장님 순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정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설마 혼자만 빠지실 생각이셨어요?” 유라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울은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어쩔 수 없네요.” 흐흥. 기분 좋아진 유라가 드물게 콧소리를 냈다. 나름의 중대행사는 처음부터 강렬했다. “진석아! 살려줘!” 2소대원의 비장한 외침에 한 사람을 제외한 전체가 폭소를 터트렸다. 홀로 얼굴을 감싸는 건 당연히 소대장인 진석이었다. 겨울은 그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석은 겨울 쪽을 슬쩍 보더니 한층 더 괴로워했다. “진석이 너 소대 내에서 별명이 뭔지 알아? 항상 빡쳐있다고 빡친석이야!” 즐기는 소란이 더더욱 커진다. 어째 말이 한국어다 싶었으되, 주변 병사들의 통역으로 국적을 가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니가 고생이 많다는 건 알아! 하는 거 보면 도저히 나랑 같은 나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대단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근데 존경은 존경이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야! 넌 꿈에서 괴물이 나온다지만 나는 꿈에서 니가 나와! 아, 덕분에 괴물이 덜 무서워져서 좋기는 하네!” 2소대원들이 열렬히 호응했다. 다른 소대와 성비가 달라 음색으로 구분 가능했다. “인정할게! 너 아니었음 우리는 지금까지도 빌빌거렸을 거야! 하지만 이젠 다르잖아? 다들 알 거 알고 할 거 하게 됐단 말이지! 그러니 어깨에서 힘 좀 빼도 돼! 중요한 일은 무조건 직접 하려고 하지도 말고! 우리한테 적당히 나눠주라! 도와준대도 그러네? 슬슬 믿고 맡겨도 괜찮잖아?” 표정을 보면 뒤끝을 걱정하여 마냥 좋게 부풀리는 말은 아닌 듯 했다. 여태껏 외친 상병이 민망해하는 중위를 추궁했다. “대답은?” “알았다. 노력하지…….” “믿는다, 진석아!” 이걸로 끝인 줄 알았으나, 상병은 자리를 비우는 대신 겨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 작은 대장, 한겨울!” 겨울은 대답 대신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주변이 슬쩍 비켜주었다. 중령을 호명한 상병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겨울이 너! 넌 대체 저첵……크흠. 대체 정체가 뭐냐?” 긴장한 탓에 혀를 씹은 모양. 아까와 달리 청중의 반응도 미적지근했다. 겨울에게 말을 놓는 것 자체를 심히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진석은 유달리 곤두서있었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겨울이 살짝 만든 웃음을 곁들여 되물었다. “내가 왜?” 여기저기서 기침이 터져 나온다. “어……너, 너 말이지, 여러모로 너무 엄청나서 사람 같지가 않어!” “그래서 싫어?” “무슨 소리! 누가 널 싫어하겠어! 그냥 능력도 말이 안 되고 인간적으로도 단점이 없어서 하는 말이야! 덕분에 가끔 의심스럽거든! 내가 널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음. 그건 걱정스럽다는 뜻이야?” “말하자면……그렇지! 이거 하기로 하고서 가만 생각해보니깐 난 한겨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더라! 어제까지만 해도 되게 잘 아는 줄 알았거든!” “…….” “격이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아무튼 너도 사람이잖아? 고민이든 뭐든 분명히 있을 거란 말야. 근데 지금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힘들어하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상상하기도 힘들고! 심지어 우리 대쪽같은……아니, 죽창 같은 소대장도 가끔은 나랑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게 확 오는데 말이지. 그래서-” 아, 어렵네. 상병이 말을 끊고 중얼거리는 혼잣말. 원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하고. 다음을 재촉하는 시선들 앞에 당황한 그는, 길어지는 침묵에 비례하여 붉어진 얼굴로 서투른 마무리를 지었다. “그, 니가 보여주는 것만 보아온 것 같다는 그런……. 에이!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끝낼게요! 중대장님, 사랑합니다!” 으엑. 유라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남자 간에 사랑이라는 표현이 거북했나 보다. 내려오는 상병은 박수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다. 이후의 차례는 대체로 진석의 수난사였다. 진석아, 형이 많이 힘들어! 진석 오빠! 나한테 왜 그래? 진석이 형! 기타 등등. 소대를 초월하여 중대원들 모두가 내는 목소리였다. 첫 타자가 망쳐놔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어렵기 때문인지 다들 겨울을 상대로는 삼가는 태도를 보인다. “이럴 까봐 순서를 섞었는데 소용이 없네요. 진석 씨 성격에 얼마나 끓고 있을지.” 사탕을 물고 찡그린 유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겨울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박진석 중위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나보네요. 오히려 믿는 것 같은데……. 뒷감당을 걱정했으면 다들 말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야 그렇죠. 공사는 구분하거든요. 다음 중대장은 정하셨어요?” 지나가듯이 가벼운 질문이었다. “아뇨, 아직. 새로운 문제가 생겨서.” “문제요?” “나중에 말해줄게요. 결정하기 전에 두 사람도 알고 있어야 할 일이니까.” “지금 알려주시면 안 돼요?” “이런 데서 말하기는 좀…….” “뭔가 또 골치 아픈 건가보네요. 아, 여기서 더 살찌면 안 되는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한숨을 쉬는 유라. 입안에서는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살이 찐다니, 무슨 말이에요?” “요즘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게 땡기더라고요. 초콜릿이든 사탕이든……. 보세요. 참스도 이렇게나 갖고 다니는걸요.” 그녀가 잠시 부스럭대더니, 주머니로부터 알록달록한 사탕을 한 움큼 쥐어 꺼내보였다. 그 중 태반을 차지하는 참스(Charms)는 전투식량의 부식으로 제공되는 과일 맛 캔디였다. “와. 그걸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했어요?” 겨울이 묻자 유라가 어깨를 으쓱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탕이 불길하다고 버리는 사람이 많던데요? 버릴 거면 차라리 날 달라고 했죠. 전에는 메리웨더 선임상사님이랑 매카들 하사만 싫어했던 건데……. 치료 받고 오니까 어느새 다들 꺼리고 있더라고요.” 이는 겨울도 몇 번 접해본 미신이었다. 먹으면 재수가 없다고. 철자가 부적(Charm)과 같기 때문일까? 하지만 적어도 육군에서는 믿는 사람이 드문데, 하필 선임상사가 그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군대 내에선 금기가 퍼지기 쉬웠다. 유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중위는 신경 안 쓰여요?” “저는 딱히. 오히려 어릴 때 할머니께서 자주 주시던 사탕 같아서 좋아요. 아, 드디어 다시 뵙겠네요. 그동안 엄청 그리웠어요.” 말만으로도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그녀. 붉어진 눈을 빠르게 깜박여 물기를 지운다. 다른 중대원들의 정서도 비슷했다. “중대장님 덕분에 살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고! 수고하셨습니다!” 막바지에 순번이 돌아온 강도윤 일병의 목소리는 반쯤 울먹임에 가까웠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자리의 목적은 어느새 그간의 고생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론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군사반란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안심하기는 아직 이른데. 거듭되는 감사를 받으며, 겨울은 약간의 곤란함을 감추었다. ‘이해는 가지만…….’ 약식 장교교육에선, 전장에 60일간 체류한 부대는 구성원 대부분이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다고 가르친다. 독립중대가 전장에 투입된 기간이 다른 부대들에 비해 짧다고는 하나, 그래도 수개월에 걸쳐 다수의 작전을 연속으로 치러야 했다. “왜 그러세요?” 눈치가 이상했는지 유라가 조심스레 이쪽을 살핀다. 겨울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녜요. 다른 생각을 좀 했네요.” “흐음.” 미심쩍어하던 유라가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고민거리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보통은 누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잖아요. 누구나 그렇던걸요.” “기억해두죠.” “자, 나가 보세요. 대장님 차례에요.” 그녀의 말처럼, 어느새 더는 외치는 사람이 없었다. 한 단 높게 올라선 겨울은 중대원들을 슥 둘러보곤 난처한 표정을 만들었다. “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죠?” 별 것 아니었는데도 모두가 즐거워한다. “괜찮은 말은 앞에서 다 나왔잖아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같은 것들이요. 그러니 이제 와서 길게 끌 필요는 없겠죠.” 몇 사람과 시선을 맞춘 겨울이 말을 가볍게 이었다. “우리는 이제 돌아갑니다. 다들 기대하는 것처럼, 가면 전보다 더 나은 생활이 있을 거예요. 보고 싶은 누군가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여러분에겐 자격이 있습니다. 어디서든 최선을 다했잖아요. 양심적으로 난 아니다, 나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드세요. 최전선으로 가게끔 손써줄 테니까.” 듣는 이들 사이로 자갈 같은 웃음이 굴렀다. “역시 없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난 여러분을 믿고 있었거든요.” 다시 한 번 계급고하를 불문하고 웃는 중대원들. “그래도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변종들과의 싸움은 계속될 거고, 그 외의 다른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르죠. 여러분은 돌아가서도 여전히 군인 신분입니다. 여기서 긴장을 완전히 놓아버리면 안 돼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항상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허나 당장은 무리한 주문이었다. 따라서 겨울은 가벼운 어조에 꾸민 웃음을 더했다. “쉬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쉬더라도 지킬 걸 지키면서 쉬어야 한다는, 뭐, 그런 거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 하고 항의가 일었다. “억울하면 전역하세요. 시민권이 취소되겠지만.” 야유가 더 늘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 전시에 마음대로 전역할 방법은 없었다. 시민권이 걸린 마당에 포기할 사람도 드물겠고, 탈영병으로 쫓기고 싶은 이는 더더욱 없을 터. 장난스러운 항의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겨울이 차분한 어조로 끝을 알렸다. “흠, 달리 할 말이 없네요. 남은 시간은 개인정비입니다. 부대, 해산.” 병사들은 잡담을 나누며 흩어졌다. 겨울은 소매를 젖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크레이머의 폭로에 관한 정부 담화까지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유가 남아있었다. # 314 [314화] #그리스의 섬 (14) 겨울과 독립중대의 온도차는 저녁시간까지도 그대로였다. 이제 곧 중대한 발표가 있음을 알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아 아무래도 좋은 기분인 것이다. 중대원들 입장에선 당국의 해명이 어찌되든 당장 어떤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고로 이따금씩 진지하게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취사장에서도 특식을 준비해주었다. 임무를 마치고 전선을 떠나는 부대에 대한 경의의 표현. 이는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이 직접 내린 지침이었다. 오늘은 독립중대지만 내일은 또 다른 부대가 주인공이 될 것이다. 즉 취사병들은 어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겨울이 지휘관으로서 감사와 격려를 전하는 이유였다.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리 많이 들었겠지만 신경 쓰지 말아요.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취사병들이 고생한다는 거 알고 있을 테니까.” 독립중대 소속으로서 공용 취사장에 파견되었던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최선임인 맹동록 상병이 고개를 흔든다. “인정하긴 싫어도……저희가 상대적으로 땡보였던 건 맞습니다. 독립중대는 식수인원이 적잖습니까. 여기 와서 들어보니 다른 부대에선 서른 명이 한 개 사단을 책임진 적도 있다더군요. 그럼 대충 잡아도 1만인데……어휴, 얼마나 빡셌을지 짐작도 안 갑니다.” 이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보는 겨울. 독립중대가 단독작전을 수행할 땐 한 끼에 세 개의 표준모듈(UGR), 아홉 박스의 식량을 공급받았다. “사단 급 부대면 매 끼니 당 6백 상자쯤 되나요?” “근래 들어선 나흘이나 엿새, 여드레 단위로 끊어서 들어오니까 한 번에 받는 양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아직 현역인 게 신기할 정도죠.” “그러네요…….” “뭐, 저희는 내일 아침까지만 고생하면 끝이잖습니까. 안 그러냐, 얘들아?” 서로 돌아보며 웃는 취사병들에게 겨울이 슬쩍 안 됐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꼭 그렇진 않은데.” “대대로 개편되는 것 땜에 그러십니까?” 딱히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적도 없건만, 독립대대로의 승급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 됐다. 겨울은 간단히 긍정했다. “예. 신병훈련소 문제도 있고.” 인원을 확충하더라도 결코 편하진 않을 것이다. 허나 상병은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보단 나을 겁니다. 몸도 몸이지만, 그, 하하, 마음이 편한 게 더 클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거 받아요.” “어이구,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맹 상병은 겨울이 내미는 선물을 희희낙락 받아들었다. 영내 매점에서 파는 주류 가운데 가장 상등품으로 분류되는 것들이었다. 값은 제법 나가지만 겨울에겐 별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고. 여기서 술 외에 다른 선물을 마련하기도 곤란했다. “같이 일하는 다른 부대 취사병들이랑 나눠 마셔요. 고마웠다는 말도 전해주고요.” “어쩐지 많다 싶었습니다. 한겨울 중령님이 주신 거라고 하면 엄청 기뻐할 겁니다.” 저물녘에 들어온 전등 불빛 아래 각각의 술병을 비춰보는 취사병들. 그 중 한 명이 겨울에게 다른 것을 부탁했다. “Sir. 혹시 싸인은 안 됩니까?” “싸인?” “그 친구들에겐 술보다 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처음 받는 요청은 아니지만……음,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네요. 장교가 병사에게 싸인을 해준다는 게. 뭐랄까,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공적인 관계에 사적인 관계가 끼어든다는 느낌. 말하자면 규율 문제였다. “중대장님께선 평범한 장교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어,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실 지도 모르지만……객관적으로 가격을 매겨도 술보다 싸인 쪽이 훨씬 더 비쌀……겁니다. 죄송합니다. 말해놓고 보니 예상보다 더, 그, 무례한…….” 스스로 꺼낸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병사에게 겨울이 설익은 미소를 만들어보였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나중에 괜한 말이 나돌까봐 걱정스럽네요. 한겨울 중령에겐 군인이라는 자각이 있는가? 연예인 병(media shower)에 젖어 본분을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식으로. 방금도 나한테 평범한 장교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싸인이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비판이 나올 터. 최소한 군 내부, 엄격한 고위 장교들 입장에선 부적절한 일일 것이었다. 선후임의 눈치를 받던 취사병이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덕분에 새삼 깨달은 거고, 미리 조심해야겠다는 정도니까.” 겨울은 기죽은 병사의 팔을 두드려주었다. 그들을 보내고서 늦은 샤워까지 마치고 숙소로 복귀한 시각은 오후 7시 40분. 정부 담화는 프라임 타임이 시작되는 오후 8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린 것은 싱 대위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 신축 막사인데도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겨울의 개인실이 유독 심한 편이라 싱 대위가 인상을 찌푸렸다. “축이 뒤틀린 것 같습니다만, 교체를 요청하지 그러셨습니까? 다음에 들어올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됐어요, 대위. 다들 쉬고 싶을 텐데 괜히 일을 만들어줄 필요는 없죠. 무엇보다, 누가 들어왔을 때 바로 알 수 있어서 좋잖아요. 불청객이 감염변종일 가능성도 있고.”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전투복이시군요. 설마 그대로 주무십니까?” “왜 아니겠어요?” 구보할 때도 완전군장인 겨울은 지급받은 활동복의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 다만 전투복을 매일 갈아입을 뿐. 지금도 대검과 권총을 차고 있고, 가까운 벽엔 삽탄한 소총을 기대어두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에요?” 겨울이 묻자 대위가 한 손에 든 맥주 짝을 들어보였다. “곧 시작할 방송, 같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상관은 없는데, 대위는 술을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건 제가 마실 게 아닙니다.” “나도 술은 안 좋아하는데요.” “그게 아니라, 허락하시면 선임상사와 작전참모도 오기로 했습니다.” “이런. 여긴 너무 좁잖아요?” “혼자 볼 게 아니라면 어디든 마찬가집니다. 휴게실에서라면 아예 서서 봐야 할 겁니다. 모든 개인실에 TV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래도 이번 방송을 보면서는 앤과 대화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주머니 속의 폰에서 손을 뗀 겨울이 대각선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다면야. 일단 앉아요. 입이 심심하면 이것 좀 들고요.” 싱 대위는 겨울이 내민 그릇을 이채롭게 보았다. “튀긴 건빵입니까?”  “취사병들에게 선물을 줬더니 가져가라더군요.” “아하, 아주 좋습니다.” 터번을 쓴 대위는 사양 않고 집어먹기 시작했다. 와작와작. 첫 눈처럼 뿌려진 설탕이 수염에 잔뜩 떨어진다. 그 모습이 워낙 순수하여, 겨울은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평소에 엄격하고 금욕적인 면이 있는 만큼 그 반동으로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것일까? 몇 분 후엔 메리웨더 상사와 포스터 중위도 합류했다. 근육 짱짱한 남자 셋이 나란히 앉아 건빵을 씹는 광경은 그 자체로 상당히 재미있었다. 포스터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다. “대통령이 직접 나오겠지요?” 겨울이 긍정했다. “그럴걸요? 대변인이라도 내세웠다간 떠넘기거나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지난 폭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분적으로는 진실이겠죠. 그래서 더 문제지만.” 싱 대위가 공감한다. “가장 악질적인 기만이 바로 진실을 내세우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메리웨더 상사는 조금 다른 입장이었다. “얼마나 많은 거짓이 섞여있느냐를 떠나, 그 「그리스의 섬」이라는 계획에 대한 내용만은 사실이라면……저는 화가 많이 날 것 같습니다. 저는 부자들만 좋은 일을 해주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게 아닙니다.” 작전장교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뭐, 선임상사님 말씀도 대충 맞습니다. 일단은 오늘 뭐라고 하는지가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태도는 나고 자란 사회적 배경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부중대장은 황인, 작전참모는 백인, 선임상사는 흑인이었으므로. 현재의 정국은 소수자일수록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긍정적인 반응이든, 부정적인 반응이든. 여기서 문득 의문을 품는 겨울. ‘그러고 보니 싱 대위의 진급심사는 아직인가?’ 독립대대의 수석참모라면 소령을 달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번엔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이다. 요청은 진작에 올려두었고. 겨울은 통보가 미뤄지는 배경에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의심했다. “오, 역시.” 포스터의 목소리. 자기 말대로 대통령이 나왔다는 뜻이었다.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등장한 맥밀런 대통령은 단상에 서서 서류를 정돈하는 차분함을 보여주었다. 벌써부터 질문을 퍼부으려 드는 기자들에게는 여유로운 태도로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자 조금 빨리 입실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많이 피곤해보이네.’ 안 그런 척 분장을 했으나 겨울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지금은 야전기지가 된 올레마에서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만 해도 대화 도중 기절하듯이 졸았던 대통령이었다. 누적된 피로 탓인지 가벼운 기침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여기까지도 계산된 것이겠지만. 보좌관의 귀띔을 받은 대통령이 무게를 더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작할 때가 됐군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화면 너머의 실내도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존경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지금 이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제가 이 자리에 서있는 이유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반 박자 쉬고 말을 잇는 대통령. 「그렇습니다. 중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극복해온 모든 시련들을 기념하고, 우리의 조국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를 기뻐해야 할 이 시점에, 여러분은 또 하나의 예기치 못한 불안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묻노니, 이 나라의 정부는 진실로 의무를 저버리려 했는가.」 여기까지 말한 대통령은 고개를 들고 거리낄 것 없는 태도로 인정했다. 「『그리스의 섬』은 실존합니다.」 “Shit.” 메리웨더 상사가 입안에서 작게 굴리는 욕설. 스피커에서는 화면의 배후에 있는 기자들의 술렁임도 전해진다. 소란이 가라앉길 기다려, 맥밀런 대통령이 천천히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런 이름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알려진 내용은 많은 부분에서 사실과 다릅니다. 정녕 이것이 국민들을 배신하려는 음모였는가를 물어보신다면, 저는 당당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비상시 승계계획들과 달리, 『그리스의 섬』에 포함될 정부각료는 오직 지정생존자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요.」 “지정생존자라면…….” 포스터의 중얼거림에 싱 대위가 끄덕였다. “방역전쟁이 시작되고부터 항상 시행되는 걸로 바뀌었다지.” 지정생존자란 대통령직 승계권을 지닌 고위 각료 한 사람을 철저한 보안 아래 격리해두는 제도였다. 「즉, 만에 하나 이 계획을 실행하게 되더라도, 대통령인 저를 비롯한 정부 구성원들은 이 나라와,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과 운명을 함께할 예정이었습니다. 제 말의 진실성은 담화 이후 공개될 원본 문서가 증명할 것입니다.」 다시금 플래시가 집중적으로 터졌다. 맥밀런 대통령이 한 손으로 검지를 세워보였다. 「다음으로 하나. 어째서 돈 많은 자들만을 태우려 했는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땐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중을, 이 방송을 보는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 315 [315화] #그리스의 섬 (15) 「지난 해, 미국은 멸망의 기로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는 역병의 상륙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우리의 경제를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곱씹을 시간을 주고 본격적으로 고조되는 해명. 「붕괴의 물결은 바다 건너의 모든 땅으로부터 밀려왔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상품도 저편으로부터는 살 수 없게 되었고, 우리가 생산한 그 어떤 상품도 저편으로는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갈 곳을 잃은 화물들은 적체되었습니다. 원료 공급이 끊긴 공장들은 가동을 중지했습니다. 판로가 사라진 농가는 대출을 상환할 수 없었고, 대금을 받지 못한 기업들은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으며, 그로인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자가 될 처지였습니다. 은행들은 지급불능 직전의 위기였지요. 한시적인 비상계엄과 하루하루 쌓여가는 행정명령들만이 우리 경제의 산소 호흡기였습니다. 기존의 경제체제는……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언급하는 시점의 국제무역은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차라리 지금이 더 나아진 면도 있다. 혼란을 극복한 소수의 국가들과 제한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그곳으로부터 들여오는 각종 자원, 특히 희토류가 아니었다면 북미의 자체적인 생산량으로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농장이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공장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수입을 대체할 뛰어난 기술도, 역경을 이겨내려는 시민들의 의지도 그대로였습니다. 해외의 원자재를 들여오진 못하게 되었을지언정, 신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자원으로 이 땅을 축복하셨지요. 이번에 거둔 승리로 증명되었듯이, 이 나라엔 위기를 극복할 저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를 몰랐을 뿐입니다.」 「고쳐 말씀드립니다. 이 나라엔 위기를 극복할 저력이 있었지만, 그 힘은 무수한 내적 이해관계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지폐가 폐지로 변하기 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했으나,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누군가는 재무제표상의 구멍을 감수하고, 누군가는 손실과 무관하게 제조와 고용을 유지하며, 누군가는 대가를 받지 않고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오직 정부의 신용만을 믿고서요. 비록 이것이 새로운 경제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의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할지라도, 당장 손해를 보는 입장에선 실감이 다를 문제였지요. 일부는 기꺼이 받아들였으되 다른 일부는 아니었습니다.」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새롭게 만들어지는 질서로부터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닐까? 정부의 조치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공공을 위한 희생보다는 자력구제를 추구하는 편이 더 확실한 투자 아닌가? 어차피 무너질 체제, 돈에 아직 가치가 있을 때 식량과 물자를 쌓아두고, 험지에 요새 같은 피난처를 건설하고, 사병을 고용하여 생존과 안전을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을 이기심의 발로로만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저는 그들과 줄곧 정치적으로 대립해 왔으니까요. 십 수 년에 걸쳐 단 한 번도 세금을 내지 않은 기업들, 그러면서도 막대한 성과급을 받았던 경영인들,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만 자선재단을 운영해온 자산가들은 정부의 배척을 경계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제겐 그들의 협력이 절실했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적 영향력이 평범한 미국 시민 수십만 명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각각의 일탈은 마른 숲에 떨어진 불씨와 같을 것이었습니다.」 「강제 압류 및 국가 주도의 재분배까지 고려해보았습니다만, 불가능한 선택지였지요. 그들은 어쨌든 법을 준수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권리를 침해하는 건 미국의 정신에 맞지 않을뿐더러, 초법적인 조치가 낳을 무법적인 혼란도 우려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헌법의 첫 번째 수호자입니다. 저 스스로 법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질서를 요구할 순 없는 것입니다. 이는 즉 그들의 무장과 투쟁을 정당화합니다.」 겨울은 이 말에 녹아있는 정서를 이해했다. ‘부당한 정부에 무력으로 저항할 권리…….’ 미국 보수진영의 입장에서, 시민들의 총기휴대는 저항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경우 공화당과의 연정 역시 꿈속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자칫하면 내전이었다. 「그래서 제안한 게 바로 『그리스의 섬』입니다.」 다시 한 번 언급된 논란의 원인. 그러나 배경을 알고 나서 듣는 느낌은 아까와 달랐다. 메리웨더 상사는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잊었다. 낯빛은 여전히 무거웠으되 분노는 한 발 물러나고 신중한 기다림이 자리 잡았다. 차별에 익숙할 시크교도는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완전히 경도된 포스터 중위도 있었다.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고 추가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저는 그들에게 규격 외의 특권을 보장해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방주의 탑승권 말입니다.」 「이 계획 덕분에, 그들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에……우리의 가장 뛰어난 석학들은 미국의 경제를 재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골든타임이었다고 해도 좋겠군요. 그 결과는 국민 여러분께서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맥도날드에서는 여전히 빅 맥을 팝니다. 일을 하면 돈을 받을 수 있고, 마트에서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살 수 있지요. 상품의 다양성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가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전화와 인터넷이 살아있으며, 우리의 장병들에겐 충분한 양의 무기가 공급되었습니다. 이재민이 수천만에 이르는데도 빈부격차는 오히려 소폭 감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두 개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 대통령이 그 방향을 바라보자 화면도 따라서 움직였다. 언론 관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의 직무와 이 자리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그는 십 수 초간 꿋꿋이 혼자만의 갈채를 보냈다. 주변에서는 간혹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다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카메라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Thank you. 감사를 표한 대통령이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이 계획으로 말미암아 수백개소의 격오지에 비밀 보급거점들이 건설되었습니다. 원자로를 탑재한 비행선이라도 영구적으로 떠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패트릭 헨리 급이 공군의 공중포대로 전용된 지금, 그 거점들은 시민들을 위한 대피시설로 재활용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만들었어야 할 인프라지요.」 결과론적인 변명이었다. 허나 계획의 당위성을 역설한 지금은 비난을 받을 여지가 적었다. 아무튼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죽을 각오였던 것이다. ‘거짓이 없을 때의 이야기지만.’ 유능함과 진실함은 별개의 미덕이다. 대통령의 행적으로 미루어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나, 겨울 개인의 판단이자 「통찰」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피부가 검은 선임상사는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어깨의 힘이 빠져있었다. 한숨과 더불어 누그러진 말이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한 말들이 전부 다 진짜라면 좋겠습니다만…….” 다른 둘은 사견을 보태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뭐라고 단정 짓기 이르다. 「한 가지 더. 『그리스의 섬』을 위한 예산은 불투명하게 운영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중장부를 작성했다는 뜻입니다. 필요한 것 이상의 자금을 요구했고, 동일한 예산항목을 중복으로 집행했으며, 발생한 차액은 시크릿 서비스의 세탁을 거쳐 이재민 구호 예산 및 국방성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일 자로 재무부의 감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진위를 가려야 할 테니까요.」 「아울러 이 계획의 후원자들에겐 사죄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비록 대의를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저는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여 당신들을 기만하고 위법적인 손실을 끼쳤습니다. 당신들 또한 제가 지켜야 할 국민의 한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겨울은 맥밀런 대통령의 진중한 모습으로부터 기이한 이질감을 느꼈다. 하느니만 못한 말들이 아닌가. 언뜻 들으면 대통령 자신을 위한 얕은 언변인데, 의도에 따라서는 『그리스의 섬』의 수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깊은 배려일 가능성이 있었다. 속 읽기에 능한 겨울의 직감은 뒤쪽으로 기운다. 「통찰」과 연동된 「간파」가 높은 확률로 그 뒤를 따랐다. ‘맞아. 이 정도의 정치공방이면 자금을 댄 사람들의 정보도 곧 밝혀지겠지.’ 자칫 시민들의 폭력적인 분노가 그들을 겨냥할 지도 모를 상황. 짐작이 맞다는 전제 하에, 대통령은 계획의 후원자들에게 바보처럼 속은 악당의 이미지를 씌울 작정이었다. 시민들은, 물론 좋게 보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과격한 집단행동에 돌입하진 않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성자탄과 독소 건이 남았군요.」 대통령이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핵미사일에 대해서는……정말이지, 근거 없는 비방입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포스터의 다 들리는 독백이었다. 상기된 채 주먹을 불끈 쥐는 참모의 모습은, 마치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응원하는 구단이 3루까지 꽉 채웠을 때를 보는 듯 했다. 「일단 사실인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중성자탄의 생산과 배치를 늘린 것……그리고 모겔론스 복합체가 방사능에 의해 파괴될 때 향정신성 독소를 방출한다는 점입니다.」 “……What?” 벙찐 소리를 내는 작전장교. 이는 비단 그만의 의문이 아니었다. 작년에 전술핵이 터졌던 도시에서 작전을 수행한 장병들은 독소의 존재여부를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대통령이 이를 인정한 것이다.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최초의 폭로로부터 오늘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린 것은, 독소에 관한 정보를 밝히기 전에 러시아 정부의 동의를 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그곳에선 방사능에 오염된 변종이 발견되곤 하지요.」 대비할 여유가 충분했음에도 기자회견이 늦다고 여겼던 겨울은 이제야 비로소 납득했다. 이런 세상에서도 소식은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넌다. 미국에서 공개된 정보가 러시아 전선의 병사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뉴스를 통해 봤을 때도 방사능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봤는데…….’ 변종도 생물은 생물이었다. DNA 수복능력이 아무리 강화되었더라도 치사량의 방사선을 뿜고 다닐 순 없는 노릇. 「러시아가 방역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독소입니다. 방사능 오염에 적응한 특수변종……그쪽에서 부여한 코드네임으로는, 종류에 따라 리코라드카(Лихорадка), 혹은 체르노보그(Чернобог)라고 부릅니다만……이것들이 분포하는 장소에선 독소의 농도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더군요.」 「사람이 접하는 경우, 기준치 미만의 양은 별다른 작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무기력증과 우울증, 만성피로, 가벼운 환각 등을 호소하며, 치명적인 수준으로 노출되었을 땐 끝내 이성을 잃고 식인기호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샘플을 연구한 결과 그 외의 다른 작용은 없다고 합니다만……해독제는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력의 주기적인 교대에 힘쓰고 있지요. 죄송합니다. 질문은 조금 후에 받겠습니다.」 참지 못하고 손을 든 기자가 있었다. 그를 달랜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정부는 러시아가 정보를 제공하기 전부터 독소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연구 자료가 훨씬 더 방대하고 정확했지요. 그 자료를 토대로, 우리는 핵공격시 발생하는 독소의 양과 환경에 대한 영향을 분석해왔습니다. 이것이 크레이머 후보가 언급했던 환경영향평가입니다.」 「봉쇄사령부가 새크라멘토에 병력을 투입한 것은, 해당 평가를 기준으로 폭심 인근의 잔류 독소 농도가 무의미한 수준까지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흩어지거나 자연적으로 분해된 것이지요. 지금껏 어떤 피해도 발생하지 않은 게 증거입니다.」 「중성자탄의 증산 배치 또한 같은 연구가 근거입니다. 어쨌든 핵무기 중에서는 가장 안전한 탄종으로 밝혀졌으니까요. 허나 『그리스의 섬』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방역전선이 무너질 때를 대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준비했을 따름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독소가 제트기류를 타고 퍼지는 마당에, 비행선에 탄 사람들이라고 안전하겠습니까? 패트릭 헨리 급은 성층권까지 올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앞서 확인해드렸듯이, 영원히 비행할 능력도 없지요. 언젠가는 어딘가에 내려앉아야 합니다.」 「그간 독소에 관한 정보를 기밀에 부쳐왔던 이유는 경솔한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염확산 문제에서 자유로운 핵무기가 있다는 식으로 알려지거나, 혹은 독소에 대해 과장된 공포가 퍼지거나…….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지 않았고, 전자는 특별히 더 주의해야 했습니다. 연구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누적된 독소가 생태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이로써 모든 해명을 끝낸 대통령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한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만 여기서 개인적인 한 마디를 더한다면……저는, 그리고 본 정부는 시민들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느냐를 떠나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지요. 『다수로부터 하나로.』 세워진 뜻을 잊지 않는 한, 미국의 앞날은 언제나 굳건할 것입니다.」 이제 질문 받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 316 [316화] #읽지 않은 메시지 (15) [SALHAE님이 별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BigBuffetBoy86님이 별 35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BigBuffetBoy86 : 자랑스러운 미국! God Bless America! 애국심이 충전된다!」 「헬잘알 : 야……. 저 대통령 대체 뭐냐? 「정치」 15등급쯤 되나?」 「윌마 : 「정치」? 내가 알기로 「종말 이후」 세계관엔 그런 기술 없긔. 저건 그냥 깡스탯임.」 「헬잘알 : 깡스탯 시발 ㅋㅋㅋ」 「에엑따 : 흐미, 살해 형님 요즘 통 너무 크신 거 아닙니까? 저한테도 좀 베풀어주시져.」 「まつみん : 별 1만 개……. 살해 씨 괜찮아요? 전에 형편이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매번 이렇게 많은 돈을 쓰시니까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윗모카 : 쟤 혹시 그런 거 아니니? 막 빚까지 내서 별 쏘는 애들 있자나.」 「대출금1억원 : 맞아. 정말로 그러는 미친놈들이 있더라 ㅋㅋㅋ」 「대출금1억원 : 근데 그게 나임.」 「まつみん : Σ(´д`;)!!!」 「김미영팀장 : 제1금융권에서 당신의 장기를 담보로 대출해드립니다^^ 0100-8282-****」 「하드게이 : 언제나처럼 지랄들이 짜다. 이것들은 어떻게 변하지를 않아.」 「올드스파이스 : 우리는 항상성이 있는 병신들이지.」 「종신형 : 항상성? 병신 주제에 어려운 말 쓰지 말자.」 「레모네이드 : 미안.」 「종신형 : ……왜 니가 사과해?」 「둠칫두둠칫 : 병신이라서.」 「깜장고양이 : 내가 생각하기에 살해는 자존감이 부족한 찐따인 고양.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너무나 사무쳐서 정줄을 놓아버린 고양. 이런 데서라도 돈을 막 써버리면서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은 고양. 또 자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으니까 남의 연애에 매달리는 고양. 따라서 저런 경우는 본인을 위해서라도 안락사가 답인 고양. 냅둬도 알아서 죽겠지만, 이런 건 도와줘야 재미있는 고양.」 「흑형잦이 : 맞는 말 같긴 한데 너 그러다 고소당할지도 몰라 ㅋㅋ」 「깜장고양이 : 판사님. 위 글은 저희 집 고양이가 썼습니다.」 「새봄 : 미친 ㅋㅋㅋ 컨셉 버리는 타이밍 봐라 ㅋㅋㅋㅋ」 「깜장고양이 : 진짠데.」 「SALHAE : 너네랑은 할 말 없다. 내가 뭘 어쩌든 신경 꺼줬으면 좋겠다.」 「엑윽보수 : ㅋㅋ 발끈하는 거 리얼루다가 귀엽자너」 「이불박근위험혜 : 니들 다 틀림. 살해는 지금 압박전술을 쓰는 거다. 한겨울이 우리 요구를 싹 무시해버리니깐 묵묵히 돈을 때려 박으면서 심리적인 부담감을 주는 거지. 양심이 있으면 이유라랑 떡 좀 쳐달라고. 메시지는 안 읽더라도 돈 들어오는 건 보일 거 아냐. 그야말로 상남자의 본보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 살해야?」 「엑윽보수 : 그러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불박근위험혜 : 남자답게 죽어야지.」 「엑윽보수 : ㅋㅋㅋ」 「SALHAE : …….」 「분노의포도 : 저 마음을 약간, 아주 약간 알겠는 게, 이유라가 갈수록 매력적이긴 해. 생김새보다는 사람 됨됨이가 말이지. 물론 난 앤이 더 좋음. ㅇㅇ」 「헬잘알 : 아 근데 천조황상 진짜 유능하네. 지금도 그래. 무슨 질문을 받아도 막히는 꼴을 못 보잖아. 여유롭고. 미리 준비를 해왔겠지만 임기응변도 대단한 듯.」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능력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랑 맞먹겠는데.」 「엑윽보수 : 엌ㅋㅋㅋㅋ 씹선비가 웬일로 개소리람ㅋㅋㅋㅋ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헤븐조선인 건 거의 백프로 사후보험빨 아님? 정치인들은 대세에 숟가락만 얹었고.」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우리 정부는 유능한 게 맞아. 단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을 뿐.」 「붉은 10월 : 그렇게 따지면 무능한 정치인이 없음. 뭔가 있는 놈들이니까 그 자리를 차지한 거지. 저 맥밀런 대통령은 능력과 인성 다 ㄱㅆㅅㅌㅊ인 아주 드문 경우임.」 「명퇴청년 : 그 ㄱㅆㅅㅌㅊ인 대통령이 다시 연임하면 안 되나? 그럼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지금 상황도 안심할 수 있겠는데 말이야.」 「붉은 10월 : 안 돼. 그러려면 헌법을 고쳐야 하거든. 지지율이 미쳐 날뛰는 수준이었으면 또 모르겠지만, 죽었어도 여전히 안 좋은 짱깨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악재들이 있었기 땜에 지금 개헌을 하기엔 무리가 많다. 남북전쟁 급의 본격적인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음.」 「캐쉬미어 : 죽었어도 여전히 안 좋은 짱깨 ㅋㅋ 양용빈 말하는 거지?」 「붉은 10월 : 달리 누가 있어?」 「폭풍224 : 그놈의 내전……. 이제 곧 실질적인 엔딩이라고 믿었던 게 얼마 전인데, 쿠데타니 뭐니 이상한 이야기 나오고……. 나는! 왜! 남의 사후에서조차 행복할 수가 없는 거지?!」 「려권내라우 : 어, 얘들아. 난 미국 대통령 중에 3선을 한 양반이 있었다고 들었다만…….」 「Blair : 있어, 친구야. 2차 대전 때 루즈벨트가 3선을 넘어서 4선까지 했단다. 내가 알기론 미국 역사에서 2선을 초과한 유일한 사례일걸?」 「BigBuffetBoy86 : 오, 그래?」 「Blair : 넌 미국인이면서 모르면 어떡하니?」 「BigBuffetBoy86 : 모를 수도 있지. >.<」 「믓시엘 : 흠. 그땐 국가비상사태라서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던 거냐? 만약 그런 거면 이 세계관에서도 가능해야 하지 않음? 방역전쟁은 세계대전보다 더 큰 위기잖아.」 「AngryNeeson55 : 오해다. 예외가 아니라, 당시엔 그게 불법이 아니었어.」 「내성발톱 : 합법인데 왜 루즈벨트 말고 다른 사람은 안 함? 능력이 부족해서 못 한 건가?」 「AngryNeeson55 : 불법은 아니지만 합법도 아니었으니까.」 「제시카정규직 : 이게 무슨 개소리야? 얘들도 병신 놀이 하나?」 「Blair : Nope. 불법이 아니었다는 말은 3선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는 뜻이고, 합법도 아니었다는 말은 법이 없어도 다들 알아서 지키는 불문율이었다는 의미야. 루즈벨트는 암묵적인 약속과 전통을 무시해버렸던 거고.」 「제시카정규직 : 오옹…….」 「Blair : 미국 헌법에 3선 불가조항이 생긴 것도 루즈벨트 탓이지.」 「명퇴청년 : 아무튼 저 맥밀런이가 연임을 못 한다는 소리구만. 젼나 아쉽다.」 「원자력 : 동감. 이 세계관의 미국이 여까지 온 거는 솔직히 대통령의 하드캐리 아니냐?」 「붉은 10월 : 인정 또 인정하는 각이지만, 그래도 한겨울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장담 못한다. 앤이 지금 왜 바쁜지 생각해봐라. 사회불안이 그동안 여러 차례 아슬아슬한 선에서 억제되어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넘치기 직전의 냄비처럼.」 「원자력 : 그런가?」 「붉은 10월 : ㅇㅇ. 겨울이 있어서 사회 안정에 소모할 비용을 많이 아꼈다고 본다. 적절한 시점에 호재도 터트려줬고. 공보처가 겨울을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지.」 「여민ROCK : 참……. 현실에 없는 것들이 많아서 좋아하는 채널이었는데, 이젠 어째 현실을 닮아가는 각이라 불안하다. 세계의 악의가 느껴져. 이 방송의 끝은 과연 행복할까?」 「まつみん :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퉁구스카 : 걱정하실 필요 없는데…….」 「まつみん : 그치만 상황이야 어찌 됐든 우리 겨울 씨가 전보다 여유로워진 건 좋네요.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나 할까요?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 「반닼홈 : 무슨 말이야? 한겨울 얜 항상 똑같잖아.」 「まつみん : 진짜 기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 말고요.」 「앱순이 : 넌 그걸 어떻게 알아?」 「まつみん : 잘 보면 느껴지지 않아요?」 「앱순이 : 그런 기운이?」 「まつみん : 네네.」 「앱순이 : 긍가……. 난 잘 모르겠는데. 뭘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람?」 「폭풍224 : 우리처럼 평범한 한국인들은 우월한 마츠밍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됨. 저 정도의 변태에게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을 듯.」 「まつみん : (╬ ಠ 益ಠ)!!! 실례네요! 변태스러운 행동은 하지만 변태는 아니거든요!」 「마그나카르타 : 여기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하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액티브X좆까 : 사후보험공단이 진행자의 감정을 전달해주는 액티브X를 배포하면 어떨까?」 「Владимир : 닥쳐라.」 「groseillier noir : 진정해, 보드카.」 「Владимир : 이게 진정할 일인가?」 「헬잘알 : 여하간 한겨울이 이 세계관을 잘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얘가 이젠 내 사후의 롤 모델이라서……. 이 세계관이 똥망으로 변해버리면 나도 의욕이 확 꺾일 듯. 내가 죽으면 이것보다도 못하겠지, 하고.」 「내성발톱 : ㅇㄱㄹㅇ. 이 정도의 재능충이 노력까지 하는데도 망하는 게임이면 시발 나 같은 놈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잖아? 생전이랑 대체 다를 게 머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들 손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망하기 시작하면 별 수 있나. 저수지가 마를 때 그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가뭄보다 더 무섭지. 사람의 한계는 사람이다.」 「원자력 : 문과감성이 또…….」 「내성발톱 : 내 말은, 이 방송을 볼수록 사후보험에 대한 기대가 깨진단 말이지…….」 「질소포장 : 개소리는 정도껏. DLC 일절 안 쓰고 지가 사서 고생하는 애를 보고 뭐? 사후보험에 대한 기대가 깨져? 어이가 없어서 웃기지도 않는다. 꼭 이런 놈들이 나중에 한국은 행복도가 낮은 나라라면서 징징거리지.」 「질소포장 : 사후보험 적립금이나 열심히 늘려라 이 등신아. A 등급 특전 몇 개면 니 사후는 존나게 행복할 테니까.」 「친목질OUT : 넌 또 왜 갑자기 발화하냐? 지가 좋아하는 거 살짝 안 좋게 말했다고 욱하는 꼴 보소.」 「엑윽보수 : ㄴㄴ 저게 맞는 말임. 사후보험은 언제나 옳다. 죽고 나서 괜찮은 특전 하나, 쓸 만 한 DLC 한 개도 없을 정도면 살아있을 때 대체 얼마나 게을렀다는 건지 ㅋㅋㅋ 나라가 아무리 잘해주면 뭐해? 본인이 노력을 안 하는데.」 「헬잘알 : ㅇㅇ 니들 말 다 맞아. 맞지만, DLC를 쓰기 시작하면 이 채널을 보면서 느꼈던 만족감은 없을 거 같지 않아?」 「금수저 : 사이다 한 컵 맛있게 먹겠답시고 고구마 한 박스를 꾸역꾸역 삼킬 놈이네.」 「ㄹㅇㅇㅈ : 그러게 ㅋㅋㅋ 사후에 즐거우려고 생전에 고생하는 건데 죽어서 또 고생을 할 이유가 없지. 이 방송은 내가 직접 하는 고생이 아니라서 재밌어 보이는 게 아닐까? 직접 하는 건 완전 다른 느낌일걸?」 「헬잘알 : 그거야 뭐…….」 「붉은 10월 : 됐고, 이 세계관이 쉽게 망하진 않을 거다. 텔레타이프로 떴던 한겨울의 생각처럼 애초에 슈뢰더 대장부터가 크게 걱정하는 사람처럼은 안 보였지. 미국은 지금껏 군사반란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국가고.」 「이불박근위험혜 : 텔레타이프 하니까 떠오르는 건데, 아까 그 미국의 정서라는 게 대체 뭐냐? 부당한 정부에 무력으로 저항할 권리? 반란이랑 무슨 관계가 있음?」 「붉은 10월 : 밀덕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야. 본토인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BigBuffetBoy86 : 나도 몰라.」 「슬로우 웨건 : 내가……설명하지…….」 「Blair : 86 양키는 대체 아는 게 뭐냐?」 「BigBuffetBoy86 : 피시 앤 칩스가 너네 나라 요리라는 건 알아.」 「Blair : …….」 「BigBuffetBoy86 : 그리고 맛이 없다는 것도.」 「groseillier noir : XD」 「Blair : 웃지 마라, 바게트.」 「슬로우 웨건 : 농업인구가 많은 남부지역의 주민들의……연방정부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은……미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계층역전……그리고 남북전쟁으로 확정된 영국계 지주계급의 몰락이 그 원인으로……」 # 317 [317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10) 쇠약해진 폭군이 오늘만은 화사한 꽃에게 말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가을은 앙상한 폭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민과 우울이 녹아있는 시선으로. 예전이라면 격분했을 회장이지만, 이젠 그럴 기력이 없을뿐더러, 어째서인지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찰나의 안온함을 느끼는 눈치. 그 후에는 짙은 피로감과 체념이 감돌았다. 고건철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밭은기침을 몇 번 하고서,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찡그린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복제체를 배양을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낙관적인 거짓말이었지. 어리석게도.” “…….” “네겐 이 몸뚱이가 아니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아무리 똑같은 외양이더라도 말이야.” 아직도 겨울의 옛 육체를 닻으로 여기는 폭군이었다. 이 몸이 아니고서는 가을을 붙잡아둘 수 없으리라고. 가을은 고건철의 뿌리 깊은 인간불신, 그리고 그 이상의 자기혐오에 충분히 익숙해진 상태여서, 익숙해진 만큼의 수심을 삼켰다.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시겠죠.” 가을의 말에 고건철이 조소했다. “사람의 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확실한 사실을 두고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지.” 바뀌었어도 여전히 폭군이었다. 확신의 근거인 트라우마가 너무나도 견고했다. ‘본래의 모습으로는 결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확신…….’ 가을은 계속해서 설득해왔다. 겨울의 육체도, 다른 제3자의 몸도 아닌 고건철로 돌아오면, 그때는 아마 진정한 의미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폭군은, 알고 보면 웅크린 고슴도치 같았다. 그 관계가 반드시 실패로 끝날 거라 믿는다. 가을도 그 이유를 안다. 그가 과거의 자신을 증오하며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게 사뭇 모순적이었다. 그 점을 지적받았을 때, 회장은 찌푸린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저 내가 정한 내가 되려는 거다.” 이것이 가을에겐 치기어린 변명으로 들렸었다. 정신은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고건철 회장은 더욱 완고하고 맹목적인 사람이 되었다. 가을을 대하는 태도만은 예외였으나 그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심리는 하강곡선만을 그렸다. 현재의 회장이 말했다. “살면서 요즘처럼 빠르게 지친 적이 없었다. 요즘처럼 비경제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었지.” “네…….” “이렇게 전망이 어두운 거래를 붙잡고 버티기가 처음이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보통은 손절을 해야 할 시점이건만. 이래서 독점이 강력한 거야.”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다만 가을은 고건철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군인 놈들을 기억하느냐?” 질문을 받은 가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에 배치될 목적으로 신체개조를 받아들인 군인들은 한국의 시민권을, 나아가 사후보험을 희망하여 입대한 외국인들이었고, 폭군이 가을에게 보여주리라 약속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끔찍한 몰골 중 하나였으며, 또한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간혹 방송에서 본 적은 있으나 드물게 스쳐가는 장면들에 불과했다. 실체를 알고 나니 깊게 다루지 않았던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회장이 다시 묻는다. “전투력을 강화하고자 인간을 벗어난 육체를 보급하기 시작했을 때, 국방부는 처음에 그들의 성욕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가을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질문 자체보다는, 회장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허나 당장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대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나요?” “뻔한 답변을 하는 걸 보니 몸이 어지간히 달아있나 본데.” 침묵하는 가을을 향해 비틀리고 지친 웃음을 지으며, 폭군은 정답을 들려준다. “일단은 그놈들을 위해서였지. 더는 인간이 아닌 몸에 인간의 번식욕구가 공존하면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기 쉽다던가.” “그렇……군요.” 말이야 그들을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실제론 도구를 오래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 조치는 얼마 안 가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성욕을 제거한 시점에서 이놈들이 다른 쪽으로 미치기 시작했거든.” “다른 쪽이라면, 어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가장 강력한 욕구 하나가 지워졌고 몸뚱이조차 사람이 아닌데, 단기복무라면 모를까 장기배치에서 정신이 멀쩡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낙원그룹 인체개조 보고서의 결론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 성욕의 보편적인 대상이 사람이기에, 스스로도 사람으로 남으려는 정신적 동기가 되어줄 수 있다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나?” “……네.” “내가 되찾고자 하는 것,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거래가 이토록 질박한 것이다. 나나 너처럼 제정신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은 고상하지 않다.” “…….” “이 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 걸 기억해둬라. 내 기다림도 거기까지다.” 여기까지 말한 회장이 바깥을 가리켰다. “오늘은 이만 가 봐도 좋다.” “아직……근무시간이 끝나지 않았는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마라……. 아니, 혹시 무서운 것이냐?” 가을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겨울을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었으나, 동생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원망을 발견할까봐 두려운 마음은 전보다 더 커진 상태였으므로. 시계를 자주 보며 조금씩 각오를 더하던 중에 갑자기 가라고 하니 발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선이 가만히 낮아지는 그녀를 본 고건철은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빨리 가라. 내가 지불한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사후보험 가입자와의 면회는 절차가 복잡한 만큼 시간도 엄격하다. 그러나 오늘의 가을은 그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사후보험의 관계자 자격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 이는 고건철 회장의 지시로 낙원그룹을 거쳐 처리된 사안이었다. 마음을 굳힌 가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볼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차례 쿨룩거린 회장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반응했다. “감사는 집어 치워라. 말하지 않았나. 대가를 지불한 것이라고. 성사가 되든 안 되든, 이것은 거래의 일환이다. 조건 없는 호의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재회 겨울은 서럽게 우는 가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겨울을 보자마자 터진 울음이 벌써 30분 째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아는 누이와의 재회에서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어떤 말을 건네야 아파하지 않을지를 오래도록 고민했는데, 그 시간이 무색해지는 지금이었다. “누나. 그만 울어. 응?” 흐으, 흐으, 흐으……. 겨울의 어깨를 쥔 가을은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그녀 자신도 그치고는 싶으나, 참으려 애써도 소용이 없는 감정이었으므로. 생전과 같은 겨울의 온기조차 반가움 이상의 슬픔이었다. 결국은 이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런 누이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며, 겨울은 서글픈 만족감을 느꼈다. 소극적인 자살을 결심하고도 오직 누이를 위해 사후를 연장하며 느꼈던 그 모든 고단함들이, 이 순간 따뜻한 홍차에 부어넣은 설탕처럼 녹아 없어지는 듯 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지만.’ 별빛아이와의 대화는 겨울에게 있어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었다.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혼자만의 어둠 속에 틀어박힐 뿐이었다면, 힘겨웠던 어느 고비에서 가슴 속 돌 구르는 소리에 짓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두 계절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로를 제대로 마주볼 수 있었다. 겨울은 누이에게 티 없이 웃어보였다. “오랜만이야, 누나. 못 보는 사이에 꽤나 달라졌네? 전보다 성숙해보여.” “……그러는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동생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소년기의 끝자락에 죽음으로써 박제된 겨울은 가을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색함과는 거리가 먼 침묵이 흐른 끝에, 가을이 주먹을 꼭 쥐고 사과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아. 왜 그랬는지 이해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장미는 가을에만 피면 된다. 겨울은 인생에 핀 유일한 꽃의 한계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다 잊어버렸어.” 독백 같은 자책과 더불어 쓴 표정을 지은 가을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증강현실을 띄웠다. “아, 그렇지……. 이걸 받아줄래?” 그녀가 준비한 것은 5만 개의 별. 폭군의 비서로서 받는 급여 중 필수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전액에 해당한다. 이는 특수비서의 단독행동 건으로 보상을 받아, 가을과 파랑 몫의 양육비용 대출 상환이 완료되었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 자신을 키우는 데 든 비용을 갚는 데만 10년 이상이 걸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처지. 반짝이는 문자열을 보던 겨울은, 가을이 이 돈을 어찌 벌었을지 궁금했으나, 그녀에게서 그림자 없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엿보았으므로 일단은 전송을 수락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당연한 건데.” 인사를 받은 가을의 눈길이 공연한 허공을 헤맸다. 겨울이 사후보험 담보대출을 순조롭게 갚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누이를 쉽게 읽은 겨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와줘서 고맙고, 이 별도 고마워. 큰 도움이 될 거야. 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어쩌다보니 좋은 곳에 취직했거든.” “좋은 곳?” “혜성그룹 고건철 회장님의 비서로 들어가게 됐어.” “……나쁜 일은 없는 거지?” “응……. 회장님은 알려진 것보다 괜찮은 분이셔. 나한테도 잘 대해주시고.” 가을은 살짝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되, 겨울이 보기엔 여러모로 부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동생에게 새로운 근심을 얹어주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오기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할 작정이었다. 회장의 배려로 일정이 갑작스레 당겨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미심쩍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가을이 새로운 데이터를 꺼내보였다. “자, 이건 파랑이가 보내는 편지야. 이번엔 같이 올 수가 없었어.” “그래……. 바로 재생해 봐도 될까?” “당연하지.” 겨울이 편지지를 펼쳤다. 종이 형태로 저장된 입체영상 포맷이었다. 「안녕, 형아! 오랜만이야!」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천진난만한 인사에, 겨울은 복잡한 감회를 품는다. 그새 많이 컸구나, 하고. 물론 철이 들기는 아직도 먼 나이였다. 「천국에서 잘 놀고 있는 거지?」 가을이 당황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형은 운이 되게 좋은 거래! 남들보다 훠얼씬 더 빨리 천국에 간 거라고! B등급인가? B등급 맞지? 그게 너어어어무 부럽다고 하셨어!」 “…….” 「히. 형이 많이 보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형은 아주 좋은 데 있는 거니깐! 기다려! 다음엔 나도 가을 누나랑 같이 갈게! 그때까지 나 공부 열심히 하고, 밥도 잘 먹고, 청소도 잘 하고……. 나중에는 나도 형처럼 천국에 갈 거야!」 이후로 그리 길지 않게 이어진 영상엔 이렇다 할 그늘이 끼어있지 않았다. 다 보고 접어 폴더에 갈무리한 겨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걸 보니 좋은 학교에 다니나보네.” “아, 응. 파랑이만큼은 우리랑 달랐으면 해서……. 회사에서 지원이 나오기도 하고…….” 편지의 내용을 몰랐던 가을이 조심스레 겨울의 안색을 살폈다. 겨울은 누이를 안심시켰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을 텐데 뭘. 그 나이에 사실을 알고서 슬퍼하는 것보다는 나아. 내 마음도 편하고.” 파랑이는 가을처럼 따뜻한 계절이 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겨울은 작은 동생을 사랑했지만, 그로부터 위로를 기대하진 않았다. 허나 여전히 불편한 가을을 보며, 겨울이 추억을 되살렸다. “누나, 노래 불러줄까?” “노래?” “전에 내 노래 좋아했었잖아.” 가을은 어색해하는 반응이었다. 많이 좋아하고 조르기도 잦았으나, 이는 오래 전의 이야기. 돌이 무거워 노래도 무거워진 다음부터는 부르는 쪽도 듣는 쪽도 삼가게 되었다. 겨울은 바로 그 이유로 부르려는 것이었다. 무겁지 않은 노래를 들려준다면, 가을도 마음의 짐을 덜고 돌아갈 것 같아서. 온다는 연락이 갑작스러워 준비할 시간은 모자랐으나 다행히 별빛아이를 위해 연습했던 곡들이 있었다. “자, 전처럼 들어봐.” 누이를 당긴 겨울이 담백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318 [318화] #귀환 (1) “그건 무슨 노래입니까?” 머레이 중위의 질문이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포트 로버츠로 향하는 수송기의 화물칸 내부, 줄줄이 붙어 앉은 참모 및 부사관들의 시선이 겨울에게 모여 있었다. 굉장히 신기한 것을 본다는 분위기로. 언제나처럼 멀미에 시달리는 통신장교 에반스만이 예외였다. “아…….” 겨울은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은 실수였다. 무의식중에 가을과 보낸 시간을 흥얼거린 모양. 편안한 회상에 젖어 주변을 잊고 있었다. “그냥……한국 노래에요. 제목을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답은 차분했으나 볼이 조금 달아올랐다. 별빛아이에게 말했듯이, 겨울은 누구 앞에서 쉬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속을 내보이는 것만 같아서. 머레이가 웃고 다른 참모들도 재미있어했다. “보기 드물군요. 중대장님께서도 기분이 좋으신가봅니다.” “예. 그러네요.” 서로 생각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말은 통한다. 와아. 기내에 즐거운 동요가 번졌다. 무게중심이 전방으로 기울었기 때문. 기류로 인한 고도조정일 수도 있으나, 이륙으로부터 이미 40분가량 경과한 시점이었으므로 착륙을 위한 하강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새크라멘토에서 포트 로버츠까지는 편도로 33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역시나, 조종실로부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전해진다. 병사들이 환성을 높였다. 포스터 중위가 겨울에게 건네는 말. “원래 계획대로 자력이동을 했으면 지금쯤 적잖이 고생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수송기를 세 대나 할당받다니……. 새삼 형편이 나아졌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죠.” “기대하는 중입니다.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도 되는군요.” “긴장?” “저희는 난민구역을 경험한 적이 없잖습니까. 일반적인 민사작전하고는 많이 다르겠지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지간한 일은 군정청에서 맡게 될 테니.” 폭동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군이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겨울을 비롯한 군정청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화물칸에 탑승한 병력은 중대 전체의 절반쯤이었다. 후속하는 수송기 두 대가 나머지 절반의 병력과 부대 운영에 필수적인 장비들을 싣고 오는 중. 그러고도 남는 차량들은 시일을 두고 넘겨받기로 했다. 사실 이 장비수송 문제로 중대가 포트 로버츠까지 자력이동을 할 뻔 했다. 모터 구동음과 함께, 탑승구획에 외부의 빛과 바람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문틈의 햇살을 향해 두서없이 손을 뻗어보는 병사들. 스피커 너머의 파일럿이 여객기 승무원 흉내를 낸다. 「램프를 개방합니다. 내리실 때는 놓고 가는 물건이 없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병력을 통제하는 건 소대장과 선임상사의 몫이었다. “전체, 일어-섯!” 기내가 조용해지는 반면 바깥에서는 시끄러운 소음이 밀려들었다. 어찌 들으면 비명 같기도 하다. 공항 저편, 출입이 통제되는 선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꽃매듭을 흔들고 있었다. 몇몇 병사들이 조용히 눈시울을 훔쳤다. 활주로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엔 중대원들의 가족 및 친지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을 인솔하는 헌병과 함께, 기존의 기지 책임자인 래플린 대령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이젠 대령이 아니네.’ 난민구역 출신인 중대 구성원들이 기다리던 사람들과 눈물겨운 재회를 나누는 동안, 겨울은 래플린 준장에게 경례했다. “Sir.” “반갑네. 정말 오랜만이군.” 손을 내미는 준장. 악수를 나눈 겨울이 그의 계급장을 보며 말했다. “진급 축하드립니다. 원하시던 대로 장군이 되셨네요.” 이 말을 들은 래플린이 장난스러운 곤란함을 내비친다. “이런. 그 대화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건가?”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입니다.” “못 당하겠구만. 귀관도 축하하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중위였는데, 1년도 안 지나서 중령이 되어 돌아오다니. 이러다 20대에 별을 다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입니다.” “글쎄. 과연 어떨지…….” 겨울이 말을 돌렸다. “기지 운영은 오늘 바로 인수인계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 여유가 많지는 않아도 그렇게까지 서두를 정도는 아니야. 지금은 얼굴이나 보러 나왔을 뿐이지. 시간을 오래 뺏을 생각은 없어. 귀관도 그렇고 병사들도 그렇고, 각자 그리운 사람들이 있지 않겠나. 저길 보게.” 준장의 손가락이 철조망 너머를 가리킨다. 공항 입장을 못한 걸로 보아 중대원들과는 연고가 없을, 따라서 대부분 겨울을 보기 위해 몰려나왔을 인파였다. “저 사람들, 자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네.” “예……. 국적이 의외로 다양하네요.” “의외?”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반응하는 래플린. “뭐, 그래. 의외라고 치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중국계 난민들도 나오고 싶어 했다네. 하지만 모든 요청이 경찰 선에서 막혔지. 암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무거운 내용이었다. 업무와 무관하게 얼굴을 보러 나온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언급할 지경이면, 평소부터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분위기가 여전히 안 좋습니까?” “뭐, 그렇지. 귀관을 두고 조국의 복수를 막은 원수 취급하는 미치광이도 있거든.” 준장의 낯에 경멸과 혐오감이 스쳐지나갔다. 겨울이 읽는 속과 「간파」로 전해지는 감정이 한 결 같이 깊고 어두웠다. 차라리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그동안의 행정에 마찰이 많았겠구나.’ 짐작컨대, 중국계 난민들이 일으켰을 말썽은 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고. 중국계 시민들조차 격리수용 방안이 거론되는 마당에, 중국계 난민들의 처우는 오죽했겠는가. 기지 책임자부터가 그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데. “제가 막았다는 복수는 핵공격이겠군요.” “그래. 그때 미국 놈들이 덜 죽어서 아쉽다는 정신 나간 소리도 들리더군. 눈치를 보며 쉬쉬하지만, 모겔론스가 우리 미국이 만든 무기라고 굳게 믿는 놈들이 여전히 많아. 겉으로 보기엔 얌전한 다수도 은연중에 동조하는 형편이지. 정말 짜증나는 족속이야. 차라리 싹 다 모아서 국경 밖으로 내몰았으면 좋겠어.” “……” “그에 반해 다른 거류구들은 아주 다루기 쉬웠지. 통제에도 잘 따르고. 다만 일본인들은……으음……인육사건 이후로 너무 얌전해서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하나…….” 말이 길어질수록 드러나는 악감정도 깊어졌다.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건만. 지금까지 들려준 사정들도 개인적인 추측이 섞여있을 듯 했다. 스스로도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준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괜한 말로 붙잡아두는 것 같군.” “아닙니다.” “아니긴. 본격적인 이야기는 내일……음, 오전 아홉시 반으로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그럼 그 시간에 사람을 보내겠네. 주둔지까지의 인도는 헌병이 담당할 거야. 구획이 많이 낯설어졌을 테니 잘 살펴보게.” 아무튼 반가웠어. 겨울의 어깨를 두드린 준장이 대기하던 험비에 올라탔다. 먼저 착륙한 수송기가 활주로를 비워준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북쪽 능선을 넘어온 두 번째 수송기가 착륙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의 옷자락이 강한 바람에 휘날리기를 잠시, 싱 대위를 필두로 3소대와 화기소대 병력이 승강구를 내려오자 다시금 열렬한 환영이 일어났다. 다만 겨울처럼 가족도 친지도 없는 병사들은 조금 침울해하는 기색. 평소라면 유라가 신경을 써주었겠으나, 지금은 그녀도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정신이 없었다. 자그맣고 자글자글하게 늙은 노인에게 안겨 머리를 부비고 있다. “할머니. 할머니이…….” “그랴, 우리 유라. 이 순한 것이 그동안에 얼마나 힘들었겠누. 다쳤다는 말을 듣고 할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혀?” “응…….”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여.” 손녀딸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노인은 문득 으응? 하고 겨울을 보았다.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그러더니 유라를 진정시킨다. 자그맣게 속닥이는 말이 겨울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눈물을 닦고 여러 번 끄덕인 유라가 노인을 상관 앞으로 이끌었다. “대장님. 여기는 우리 할머니세요.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겨울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겨울입니다.” 노파가 겨울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 중령님 예의도 참 바르십니다 그려. 저는 박자 달자 자자 쓰는 사람입니다. 우리 유라를 잘 챙겨줘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영어를 새로 배우기는 늦은 나이인지라 한국말을 쓰는데, 그마저도 표준어가 어려운지 억양이 꽤 어색했다. 겨울이 격식에 미소를 곁들였다. “편히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이유라 중위에겐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중대원들도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고요.” 이럴 때 지휘관이 할 말은 정해져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몹시 흐뭇해하는 노인에게서 사투리가 샜다. “야가 어릴 때부텀 참으루 착하구 남도 잘 돕구 허는 애였지유. 정작 지 몫은 못 챙겨서 걱정이었지만유. 그래두 군인이 된다구 나간 담에는 걱정이 많었는디, 잘 혀내고 있다니께 놀럽기두 하구 기특하기두 하구 그려유……. 아이구, 나가 시방 서울말을 안 쓰구서는.” 유라는 부끄러워하는 노인을 포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인이 손을 모으고 겨울에게 물었다. “중령님은 우리 유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훌륭한 장교라고…….” “그거 말구, 남자로서 보기에는 어떤지-” “할머닛!” 삽시간에 달아오른 유라가 빽 지르는 소리. 박달자 노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긋아, 할미 심장 뜰어져!” “제 심장도 떨어져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왜긴 왜여. 죽기 전에 너 시집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지. 할미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누.” “…….” “보어허니 중령님하고는 아무 긋도 읎었나 보구나.” 노인이 아쉬워하며 말한다. “남자는 심성이 첫 번째란다. 꼭 여기 있는 중령님이 아니더라도, 할미는 니가 얼른 심성 좋은 사람을 찾았으면 혀.” “…….” “그리구 심성 다음은 거시기란다. 너무 크면 큰 값을 하고 작으면 밤에 재미가 없으니 니는 꼭 피부가 허옇고 그것이 알찬 남자를-” “할-머-니!” 유라가 울상을 짓자 박달자 노인은 서운해 하는 모습이었다.  “왜, 이 할미가 부끄러운겨?”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시방 나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애기가 되는 이야기인겨.” “애기가 되긴 뭘 돼요!” 으아아아! 죄송합니다, 대장님! 실례할게요! 비명 같은 인사를 남긴 유라가 단련된 체력으로 노인을 번쩍 들어 멀어졌다. 무슨 일인가 기웃대는 시선들 사이에서 겨울은 약간의 황망함을 느꼈다. # 319 [319화] #귀환 (2) 중대가 주둔지로 이동하는 길은 헌병과 경찰, 그리고 국적이 다양한 자경대원들의 고생길이기도 했다. 울음은 그들이 저지하는 인파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진다. 들리는 모든 소리는 극도로 고양된 감정 이외의 어떤 의미도 아니었다. “중령님! 중령니임!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여러분! 여기! 흐윽, 여기 좀 봐주세요!” “한겨울 중령! 손 좀! 손 좀 잡아봅시다!” 이러한 부름엔 남녀노소가 없었다. 국적도 가리지 않았다. 눈물을 닦느라 얼굴이 엉망인 사람들. 다만 남성은 중장년이 다수였다. 청년층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사람들의 복색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마구 뒤섞여있는 느낌이네.’ 일부는 난민들 특유의 허름함이 남아있었으되, 나머지 다수에게서는 떠날 때와 달라진 말끔함이 돋보인다. 개중 가장 이색적인 이들은 복고풍의 패션이었다. 고전적인 느낌의 정장 및 허리를 조인 A라인과 H라인의 가을 코트들.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20세기 중반의 미국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외엔 활동성이 높아 생존주의적인 복장들, 그리고 21세기의 평범한 의복들이 높은 비율로 섞여있었다. 익숙하기에 돋보이지 않을 뿐. 주둔지에 도착한 후, 짐을 풀 때 찾아온 민완기는 겨울의 감상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뜯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지요.” “그런가요?” “본토에서 시작된 유행입니다만, 저는 시발점을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첫 번째는 종교적 보수주의의 확산이고, 두 번째는 가장 위대한 세대에 대한 향수지요.”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 “대공황과 2차 대전을 이겨내고 세계 최강대국의 기틀을 닦은 이들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와는 나름의 공통분모가 있지요. 우리 또한 그들처럼 이겨내리라……같은 의미의 복고인 겁니다.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디자이너들의 발상이겠지요. 현 시점에서는 그냥 다들 입으니까 나도 입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겠습니다. 유행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웃음을 지우고 몸가짐을 차분히 하더니, 겨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겨우 돌아오셨군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이 이룬 모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염치없는 말씀이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용히 젖어있던 장연철도 뒤따랐다. “잘 돌아, 흑, 돌아오셨습니다. 무엇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겨울이 그들을 만류했다. “이러지 마세요. 두 분이 아니었으면 나가있는 내내 여기가 큰 걱정거리였을 거예요.” 허리를 편 민완기가 다시 한 번 웃는다. “지금도 걱정거리는 걱정거리지요. 이리저리 다루는 재미는 있습니다만.” “안 바뀌셨네요. 그런 점은.” 가볍게 고개를 저은 겨울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여긴 좀 거창하네요. 과분할 정도예요.” 일개 장교의 집무실 치고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배치는 햇빛을 등지고 업무를 보도록 이루어졌으며, 동쪽으로 낸 창밖으로는 탁 트인 연병장이 자리했다. 창틀이 두꺼운 느낌이라 유리를 툭툭 두드려보면, 방탄유리 특유의 둔탁한 반향이 돌아왔다. 3층 높이에서는 꽤 먼 곳까지 내다보였다. ‘그때 본 그 위치인데.’ 이미 한참 지난 기억이지만, 겨울은 이 주둔지의 입지를 지도상에서 본 적이 있었다. 중국계 거류구의 마약을 단속하던 날, 오코너 치안감을 만나던 자리에서였다. 독립중대 창설 구상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고 봐야 한다. 부대가 대대규모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한 개 중대의 주둔지는 여전히 여기일 터. 대대본부까지 들이기에 충분히 넓다. 장연철이 눈이 부은 채로 코를 훌쩍이며 어딘가 민완기 같은 소리를 했다. “킁. 이만큼 보이는 게 있어야 이상한 사람들을 다루기도 쉬울 겁니다. 무엇보다 이제 이 기지에서 가장 높은 분이 되실 텐데, 이 정도 구색은 갖춰놔야죠.”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다들 벌써 알고 있나 봐요?”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 기지의 다음 책임자라는 거.” “아아.” 젊은 쪽의 부장이 열심히 긍정한다. “군정청에서 일하다보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작은 대장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인계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이젠 저나 민 부장님이나 9급 대우를 받고 있고, 또 딱히 비밀도 아니었고…….” 말끝을 흐리는 연철 앞에서 겨울은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완공 이후 적어도 수개월은 비어있었을 실내엔 한 더께의 먼지가 쌓여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딘가에 손을 올릴 때마다 명도가 다른 자국이 남는다. 겨울은 둥실 떠서 반짝이는 먼지들을 보다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오자 책상 양쪽 빈 공간에 걸린 네 개의 깃발이 흔들렸다. 성조기, 군기, 군정청기, 그리고 열세 개의 별이 찍힌 명예훈장 수훈기. 방문자를 조심스럽게 만들 분위기였다. 손끝으로 책상을 쓸던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이는 게 있어야 사람들 다루기도 쉽다는 거요. 최근……은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였네요.” 샌프란시스코라는 단어에 연철이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민완기 또한 오, 하며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였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겨울의 행적 가운데 감춰진 부분이 많은 유일한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연철이 몰두하여 몸울 기울여왔다. “그게 누구였습니까?” “옛 중국 해군의 장군인데……. 사람이 사람을 부러워하는 순간에 위아래가 갈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권력자는 사치스럽게 먹고 호화롭게 낭비해야 한다던가요? 노력으로는 극복하지 못할 격차를 느끼게 해서 결국은 체념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그러면 내게 매달릴 것이라고.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네요.” “허…….” 시에루 중장에 대한 회상을 듣고 젊은 부장이 떫어 하는 사이, 장년의 끝자락인 부장은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체념도 좋지요. 만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군요.” “아마 죽었을 거예요.” “저런.” 민완기가 혀를 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표현이 껄끄럽긴 하나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상대에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기왕 만들어진 믿음은 이용하는 편이 유익합니다.” “믿음?” “오면서 보셨잖습니까. 열광하는 사람들을. 그게 바로 믿음이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 “전에 말씀드렸지요. 정치와 종교는 근본이 같다고. 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중령 한겨울은 더 이상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다 우월한,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입니다.” “실제론 그렇지 않은데요.” “저들도 머리로는 그걸 압니다. 하지만 사람을 지배하는 건 매양 감성이지요. 극히 일부의 예외만이 거기에 이성의 고삐를 채웁니다. 천재이거나, 노력가거나, 정신적인 기형아거나.” 지난날의 교수는 강단에 서던 버릇대로 냉소했다. “일단 한 번 믿기 시작하면 생각도 믿음을 따라갑니다. 어지간한 일을 겪지 않는 한 편향은 계속해서 작동하고요……. 다행히, 현재 이 도시엔 오직 하나의 믿음만이 있습니다. 이 믿음 앞에선 보수와 진보의 구분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대장님께선 그저 그들이 믿는 대로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다들 제 입장을 삼가며 존경을 표할 겁니다.” 겨울은 대답 대신 곤란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이를 본 민완기도 같은 얼굴이 된다. “작은 대장님도 여전하시군요.” “아직 어려서 그럴지도 모르죠.”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장연철이 한숨을 쉬었다. “어휴. 민 부장님은 이런 면만 빼면 참 좋은 분이신데.” 정작 이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조금씩 닮아간다는 사실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든 마냥 긍정적이거나 마냥 회의적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 도시가 되었네요.” 민완기의 말에 섞여있던 표현을 꺼내오는 겨울. 여기서 보기에도 그렇다. 창밖의 풍경은 문자 그대로 군사기지를 낀 도시였다. 애초에 미국의 군사거점이라는 게 주거지와 상점가, 중고등학교 및 대학 캠퍼스 등을 포함하여 보통의 도시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지만. 구획구분을 보면 역병 이전에 군용 시설이었던 부지에는 더 이상 난민들이 거주하지 않는 듯 했다. 거류구가 보다 확실히 분화된 것이다. ‘난민을 받았던 건 어디까지나 임시조치였으니까. 앞으로를 감안하면 이게 맞지.’ 캠프 시절의 포트 로버츠는 연대 규모를 수용하는 훈련시설이었다. 연철이 뿌듯해했다. “저걸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대장님 덕분에 이렇게 커졌다고. 다들 잘 살고 있다고. 요즘은 인구가 너무 늘어서 골치가 아프기도 합니다만.” “인구가 늘어요?” “다른 수용시설에서 보낸 숫자가 많습니다. 아시아계를 여기다 다 몰아넣으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덕분에 이산가족? 어, 이렇게 표현하니까 이상한데, 아무튼 헤어져있던 가족이나 친척들이 만나기도 했고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나보죠?” “예, 뭐. 한국에서 사람들 대피시킬 때 워낙 혼란스러웠으니까요. 여태껏 배타고 살다가 온 사람들 중에서도 좀 있고 그렇습니다.” “아, 해상난민들.” 겨울은 납득했다. 미국이 서해안을 회복했으니, 선상생활을 하던 난민들도 이제 뭍으로 올라올 시점이었다. 그들을 위한 캠프를 따로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시설에 수용할 방침인가보다. “다시 하는 말인데, 두 분 참 힘드셨겠어요.” 겨울의 말에 연철이 민망해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장님께 그런 말을 듣기는 좀…….” 민완기가 안경을 고쳐 쓴다. “새로 오는 사람들이야 흩어놓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은 무대에 따라 바뀌는 법이지요.” “…….”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었으나, 겨울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전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확인한다. 창문 밖 먼 저편의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저 구획, 혹시 순복음 성도회인가요?”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교회가 중심에 있고, 이상할 정도로 고립되어 있어서요.” 겨울의 말처럼 해당 구획은 진입로가 하나로 제한되어있었고, 그 길목을 철조망과 검문소가 차단하는 형태였다. 물론 다른 거류구도 철조망으로 구역을 구분하고 검문소로 출입을 통제한다. 유사시에 격리와 검역을 실시해야 하는 까닭. 그러나 진입로는 다양하게 마련이었으며, 구역간의 규모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저 사람들, 지금까지 말썽이 없었다는 게 신기하네요.” 겨울은 아직 자신을 붙들던 황보 에스더의 기이함을 기억한다. 소녀가 말하던 박태선 목사의 기적에 대해서도. 그러나 진석을 통해 듣기로는 외부활동이 극도로 줄어, 아예 없는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광신도가 선교를 삼가는 것만큼 이상한 징후도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말썽은 아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면 당연히 내게도 전해졌겠고.’ 민완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과 달리 알이 멀쩡한 안경을 쓰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의 시력으로는 겨울과 같은 거리를 보기 어려운 탓이었다. “군정청에도 종교적인 이유로 일정 선의 자치를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이비 중엔 스스로 고립을 원하게 되는 부류도 있게 마련이지요. 특히 드러내기엔 떳떳치 못한 관행이 정착되면……대표적으로 교주에 대한 성상납이라든가, 여하간 그런 경우일수록 더욱 남의 눈을 경계하게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일리 있는 관측이었으되 겨울의 우려와는 간극이 있다. ‘어차피 조만간인가…….’ 광신도들의 구역 안에 무엇이 있든, 래플린 준장의 업무와 권한을 승계하고 나면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흠,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게 아닌데 말입니다.” 민완기가 물었다. “동맹에서 환영식을 준비해놨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참석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때 어디선가 와- 소리가 들려온다. 중대원들은 지금 제대로 된 해후의 와중일 것이다. 어디를 가도 환영 받는 분위기였으나, 그럼에도 소외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었다. “환영행사면……음, 입양아 출신들이 신경 쓰이네요.” 장연철은 겨울의 말을 조금 느리게 알아들었다. “어, 혹시 그 분들이 부대에서도 겉돌고 그랬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선 반겨줄 사람이 마땅히 없을 테니까요. 언어적인 문제도 있고.” “아하.” “혹시 시민구역에 플레먼스 선생님이 남아 계실까요?” “거기까지는 잘…….” 파소 로블레스에서 처음 만난 그녀, 아말리아 플레먼스는 공립학교의 아동문제 담당자였으며, 갈 곳 없는 무국적자들을 겨울에게 부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타적인 성격인데다 이미 인연이 있는 사이이니, 외로운 병사들에겐 좋은 말상대가 되어줄 것이다. 명목상 본토탈환이 완료되었어도, 시민구역 거주자들이 벌써 기지를 떠나진 않았을 듯 했다. 교전은 많은 도시에서 현재진행형이었으므로. “번거롭더라도 장 부장님께서 한 번 알아봐주세요. 만약 아직 안 떠나셨으면, 우리 쪽 환영식에 참석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해주시고요.” “예! 바로 가보겠습니다.” 연철은 겨울의 지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 320 [320화] #귀환 (3) 환영회의 시작이 저녁만찬이었으므로 기별을 전할 시간은 충분했다. 교사를 찾고자 시민구역으로 갔던 연철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함께 청해왔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 동맹 사람들만 참석하는 거면 모를까, 플레먼스 선생님을 모시면서 작은 대장님과 인연이 있는 다른 분들을 빼놓았다간 그 분들이 많이 섭섭해 하실 것 같았습니다.” 겨울은 겸연쩍은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네요. 미처 생각 못했어요. 감사합니다.” “에이, 감사라뇨.” 연철은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이런 면에서는 달라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노을이 질 무렵, 주둔지 정리를 마치고 온 중대원들은 육군 정복 차림으로 만찬 때를 기다렸다. 삼삼오오 모여 여유로운 대화를 가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선을 의식하여 옷매무새를 자주 고치는 모습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것이다. 테이블은 야외에 마련되었다. 명목상의 주인공만 한 개 중대인지라, 참석자 전부를 어느 한 건물에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 거리에 장식된 다색의 조명이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상점가에선 오늘 하루 모든 음식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길어봐야 반년 이하였을 영업에 각각의 형편이 넉넉지 않을 것인데도. 공립학교의 교사는 교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생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한.” “오랜만에 뵙네요, 해밀 선생님.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겨울은 풍채가 여전한 교장과 재회의 악수를 나누었다. 시민구역에서도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교장 스튜어트 해밀은, 손을 꼭 잡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좋은 의미로 고지식한 교육자였다. “오, 중령님.” 감격한 플레먼스가 겨울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분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죠.” “과찬이세요.” “당신의 헌신엔 항상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그녀와의 포옹을 끝낸 겨울이 물었다.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있는 건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에요. 미스터 장에게 듣고 벌써 만나봤답니다. 저쪽에서 다시 보기로 한걸요. 잠깐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이에요.” 교사가 가리키는 방향의 테이블엔 입양아 출신의 중대원 넷이 모여 앉아있었다. 각자 태어난 나라는 다를지언정 처한 입장은 같은지라, 평소에도 서로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손을 거둔 교사가 살짝 젖은 목소리를 냈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이제야 미국인으로 인정받았고, 또 이제야 있어도 될 곳을 찾았다고 좋아하던걸요. 저분들을 당신께 부탁드리길 잘했지 뭐예요.” “그런가요…….”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의 감회이기에, 있어도 될 곳이라는 표현에서 그늘이 느껴진다. 스스로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닌 것이다. 또한 저들은 오직 양육비 지원을 받을 목적으로만 수입된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저 바깥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과 공통분모가 있었다. 겨울, 폐허 속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입장에선 후자가 더 우울하다고 생각한다. “Sir.” 이번에 부르는 이는 난민구역에 배치된 보안관이었다. 해밀과 플레먼스는 그새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겼음을 깨닫고는, 인사를 남긴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캐슬린.” 이름을 불린 보안관의 안색이 밝아진다. 겨울이 자신을 잊지 않은 게 기쁜 기색이었다. 함께 온 경관들은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눈치. 오며가며 보았을 뿐이지만, 겨울은 그들의 이름과 계급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심풀이로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도슨, 어데어. 모두 반갑습니다. 진급 축하하고요.” 둘 가운데 상급자인 어데어가 인사를 받는다. “한 중령님도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게요. 요즘 난민구역은 어때요? 추천할만한 도넛 가게라도 생겼나요?” 경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대충 그렇습니다. 특히 이쪽은 하루하루 괜찮아지는 집들이 있지요.” “이쪽이라면 한국계 거류구를 말하는 건가요?” “예. 처음엔 그냥저냥 아쉬워서 먹어주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텍사스 도넛 협회인지 뭔지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다던가……. 그 뒤로 빠르게 나아지는 중이라 다들 만족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여기를 떠난다는 게 아쉬울 정도죠.” “텍사스 도넛 협회(Texas Donut Association)?” “그런 게 있답니다.” 이름도 특이하지만, 특정 기업의 후원이 아니라는 사실도 특이했다. “그보다, 조만간 떠난다고요?” 겨울의 물음에 어데어가 그렇다고 답했다. “곧, 이라고 해봐야 아직 한두 달은 남았겠지만, 어쨌든 본토탈환이 끝났으니……오염지대 재건사업이 시작되면 원래의 관할지역으로 돌아가야지요. 말 안 듣는 중국 놈들 상대하기도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도슨이 진절머리를 내며 동의했다. “그것들은 진짜 어디 섬 같은 데 격리시켜놓고 지들끼리 알아서 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 “앞으로는 한 중령님께서 귀찮으시겠군요. 이제 기지 책임자가 되실 테니.” 이 대목에서 보안관 쪽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게 아닌 사람의 낯빛이었다. 치안 실무자로서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으로 양용빈 상장이 뿌린 증오의 씨앗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낮에도 경찰 선에서 중국계 난민들을 막았다고 했었지. 암살 위협이 있다면서.’ 겨울은 그간의 치안행정이 꽤나 편파적이었으리라 짐작했다. 역병 이전에도 흑인 또는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한 과잉진압이 종종 문제가 되곤 했는데, 핵 테러 이후의 난민구역에서라면 오죽했겠는가. 기지 사령 래플린 준장부터가 반감을 감추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귀찮을 게 있나요.” 일단 온화하게 대답하는 겨울. “두 사람,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요. 도넛 말고도 맛있는 게 많을 거예요.” “잔뜩 기대하고 왔습니다. 아, 참. 받으십시오. 이건 기념선물입니다.” 어데어가 새크라멘토 경찰 휘장을 내민다. 지역마다, 그리고 부서마다 다르기에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겨울은 뜸을 들이며 받았다. “이런. 답례로 드릴 게 없는데요.” “필요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으로 충분하니까요. 정 신경 쓰이신다면 저희가 떠나기 전에 부대 마크나 하나 주십시오. 뒤에 사인을 해주시면 더욱 좋겠군요.” “으음…….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중령님의 선물인데, 주긴 누구를 줍니까? 그 인간이 한 1천 달러쯤 부르면 고민해보겠습니다만.” 겨울이 곤란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바로 그게 문제거든요. 돈 받고 파는 거. 당신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장교로서의 내 처신이 부적절하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그래요.” “허, 유명인의 고충이로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캐슬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도 공인으로서 여기저기 사인을 남기고 다니지 않던가요? 그게 식당 벽에 걸리거나, 온라인 경매에 올라오기도 하지요. 중령님께서 직접 장사를 하시는 경우만 아니면 된다고 봅니다.” “뭐, 미리 주의하는 거예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요? 내가 대통령은 아니니까.” “참 신중하시군요.” 보안관이 싱겁게 웃는다. 겨울도 속으로는 그 싱거움에 기울었다. ‘나보다는 공보처가 초조하겠지.’ 국방성금 건이 알려지고 나면 사인이 팔리는 정도로 시비를 걸 사람은 드물게 될 것이다. 그저 대통령의 해명 이후 곧바로 해당 사안이 공개될 경우 노골적인 여론조작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터라 때를 미루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데어가 말했다.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테니, 나중에 꼭 하나 챙겨주시는 겁니다?” “그럴게요.” 승낙을 받은 경관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중령님.” “그래요. 또 봐요. 그리고……캐슬린은 이따가 잠시 시간 좀 내줄래요? 꼭 오늘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만, 일과 이후를 따로 뺏기는 미안해서요.” 말이 환영회지, 겨울은 있는 그대로 즐길 입장이 아니었다. 보안관을 따로 부르는 건 그나마 객관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캐슬린은 의아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언제쯤이면 되겠습니까?” “혹시 연락수단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녀는 선선히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당장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건 겨울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서성거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 중엔 캘리포니아 주 의회 상원의원도 있었다. 오염지역을 떠날 수완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사로 남아있었던 인물로, 겨울과는 무공훈장 수여식 때 처음 만났다. ‘이젠 연방 상원으로 진출하겠지?’ 아무 생각 없이, 캘리포니아를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만으로 포트 로버츠를 고집한 건 아닐 것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남아있었다는 식으로 선전하지 않을까? 추측을 접은 겨울이 그에게 경례했다. “브래넌 의원님.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하하하! 한겨울 중령! 이런 자리엔 당연히 와야지요!” 주 상원의원은 겨울을 꽉 당겨 안았다. “난 귀관이 큰일을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당신은 캘리포니아의 영웅이에요!” “의원님 같은 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해주신 덕분입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앞으로는 빈말이 아니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씀은……?” “우린 주고받을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우선은 웃어요! 사진이나 한 장 찍읍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진작부터 찍고 있던 사진이다. 전문적인 기자인지, 혹은 보좌관인지 모를 사내가 겨울과 브래넌의 사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플래시 터지는 빛에 훈장들이 반짝인다. 그 후, 상원의원이 겨울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런 게 아직도 어색하지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솔직해서 좋군요. 그래요. 나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 귀찮게 구는 게 일이지요.” 한 번 웃고 사람이 바뀐 것처럼 차분해지는 정치인. “그래도 나처럼 번거로운 중늙은이 하나 알아두는 게 나쁘진 않을 겁니다, 중령. 오늘은 순수하게 축하의 의미로 온 것이긴 하지만, 좋은 제안은 좋은 선물도 될 테니……가까운 시일 내로 우리 진지한 대화를 한 번 나누었으면 해요. 어떻습니까?”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훌륭합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흡족해하는 브래넌. 그의 제안이 무엇이든, 겨울로서는 들어볼 가치가 있었다. 제안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의원 자신의 말처럼, 그는 알아둔다고 나쁠 것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다못해 로비를 하려고 해도 그럴만한 인맥이 있어야지.’ 주웨이도 로비의 중요성을 언급했었다. 돈만 있으면 마약을 팔아도 무죄인 나라라면서. 지금도 미국의 제약업체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별다른 제약 없이 판매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겨울의 첫 로비가 이제 금방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재건사업에서 난민 노동력의 비중을 늘리는 일엔 주 상원의원의 영향력이 주효할 테니까. 실제로 로비를 하게 될 경우 겨울이 직접 나서진 못하겠으나, 내세울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다. 겨울은 민완기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이 믿는 대로 보여주어라. 쉽게 말하긴 했으나 정말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겨울에겐 마냥 어렵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인연과 배경, 그리고 사람들이 있으니. # 321 [321화] #귀환 (4) 상원의원 이후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들이 잡혔다. 신임 기지사령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이들은 저마다 원하는 바가 있었던 탓이었다. 개중엔 노골적으로 청탁을 해오는 부류도 많았다. 덕분에 겨울은 자신이 다루게 될 권한의 많은 부분을 미리 알게 됐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겨울의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이곳 난민구역에 한해선 계엄사령관이라 해도 좋을 지경. 군정청의 지역 관리자를 겸하여 행정과 사법에 모두 관여하는 지위였다. ‘샌 아르도 유전이라…….’ 백산호, 한때 민완기가 일부러 키우려 했었던 종양은, 기지 인근 유전으로부터 공급되는 연료와 가스 등의 분배 문제를 이야기했다. 무조건 인구 비율만 따져서 각 거류구에 나눠주는 지금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기여도를 따져야 하지 않습니까?” “기여도?” 겨울의 반문을 관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백산호는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예. 미국의 안보와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 정도 말입니다. 전선에 보낸 병력의 숫자뿐만 아니라 거둔 전과에서도 차원이 다르잖습니까. 아, 물론 이게 다, 예, 다 한 중령님 덕분이겠습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입니다, 결과. 모두를 똑같이 대하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뭘 제안하고 싶으신 건지……구역 별로 공급량을 달리 하라는 건가요?” “당장은 그렇습니다.” “당장은?” “제가 기업가, 흠, 기업가로서 하는 예측인데, 지금 같은 무상 구호는 오래 갈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중령님. 여긴 이미 도시가 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백산호는 불 밝힌 거리를 향해 손을 펼쳐보였다. “외부로 파견되는 인력도 늘고,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도 해서 거리마다 꽤 많은 돈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행정도 곧 정상화 수순을 밟지 않겠습니까? 여기서도 정상적인 과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가 생기는 법이지요.” “즉, 공급가를 구역별로 달리 해라?” “탁월하십니다!” 거주구역에 따라, 사실상 난민들의 출신 성분에 따라 대놓고 차별을 하라는 권유였다. 난민들에겐 구역 간 이전의 자유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허나 곧바로 쫓아 보내기는 좀 곤란했다. 병풍처럼 서있는 이들이 경영인 연합을 자칭했기 때문. 태도로 미루어 백산호는 그들의 대변인 내지 대표 격이었다. 민완기도 예전의 통화에서 이들의 투기를 언급했을 정도이니, 나름의 영향력을 구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겨울이 뭉개기로 작정하면 의미가 없을 터. 그러나 공동체 전체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밟더라도 충분히 검토한 후에 밟아야 한다. 백산호는 언어 이전의 반응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별로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솔직히 그러네요. 치안 문제도 있고.” “아아, 치안! 치안! 그렇군요. 보는 눈이 넓으십니다.” 무의미한 띄워주기 뒤에 진짜 할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저들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서 무임승차로 배부르고 등 따시게 되었으니 무슨 의욕이 생기겠습니까? 언제까지 난민으로만 남아있을 작정이랍니까?……사람이 부지런해지려면 처지가 고달파야 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야지요. 태생이 게으른 중국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가 이 도시의 경제력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그저 첫 걸음일 뿐이지요.” “우리?……첫 걸음?”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에게, 백산호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탈튼 브래넌 의원과 만나셨지요?” “그랬는데요.” “실례지만, 그분으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뭘 알고 있죠?” “하하,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같은 사람들한테는 돈과 함께 이런저런 소식도 흘러들어오기 마련인지라. 누굴 시켜서 엿듣거나 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백산호였으나, 부분적으로 개방된 「위협성」 앞에선 이마가 번들거렸다. 한숨을 쉰 겨울이 새롭게 고쳐 묻는다. “의원님께서 뭔가 제안이 있다고는 하셨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만나서 나누기로 했어요. 그러니 말해 봐요. 당신, 뭘 알고 있죠?” “어휴, 그랬군요. 이거 제가 너무 일찍 말을 꺼낸 모양입니다.” 땀을 닦는 백산호에게 겨울은 미소 아닌 미소를 만들어보였다. “세 번 묻게 만들 건가요?” “……어, 죄송합니다. 제가 들은 소식은, 음, 주정부 소유 자산의 불하에 관한 겁니다. 의원님의 제안 중에서 최소한 하나는 이거겠구나 싶었지요.” 자산 불하? 겨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연고 없는 개인 자산들을 불하한다는 뜻인가요?” “정확하십니다!” 백산호가 아첨하는 표정을 짓고 빠른 말을 이었다. “지금까진 이재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사람이 모자라서 문제일 겁니다. 천만이 넘는 인구의 공백을 무슨 수로 채우겠습니까? 수리는 필요하겠습니다만, 주인을 잃은 집, 농장, 작업장, 자동차와 농기계, 요트, 어선, 경비행기 따위가 넘쳐난단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인지라, 돈에 관한 열변으로 직전의 긴장감을 잊는다.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부채를 떠안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수요를 만들어야 할 입장이지요! 특히 부동산! 부동산은 수요가 없으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게 마련입니다! 그건 새로 출발해야 할 이재민들 입장에서도 악재입니다! 장담하는데, 주정부는 LA를 디트로이트처럼 만들고 싶지 않을 겁니다!” “…….” “자산 규모가 규모이고, 한꺼번에 풀어놓았다간 더욱 똥값이 될 것이기 때문에……불하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겁니다. 재건사업에 발맞춰서요. 한마디로 아직 시간이 있다는 의미지요. 총알을 준비할 시간이!” 백산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포트 로버츠 인근 거주지역의 상업력은 한국계 거류구로 집중될 것이었다. 기본적인 비용에서 차이가 나버리니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겨울이 살짝 끄덕였다. “일단은 이해했습니다.” 반색하는 백산호와 그 일행들. “오! 그럼 먼저 드린 요청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겠습니까?” “아뇨.” “이해해주신다더니, 어째서…….” 황망해하는 면면들을 향하여, 겨울은 침착하게 말했다. “기지사령으로서 난민들을 그런 식으로 차별할 순 없네요. 그쪽 출신 병사들의 의욕도 감안해야겠고……. 무엇보다, 여러분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요? 다른 부담은 책임자인 나한테 다 떠넘기면서 말예요.” 백산호가 재차 습관 같은 웃음을 짓는다. “이런, 오해하셨군요.” “제대로 이해한 것 아닌가요?” “저희가 사업을 하는 게 다 중령님 덕분인데 아무렴 별도의 성의가 없겠습니까? 리베이트에 대해서는 따로 진지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요. 절대로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었다. 다시 부정할까 하던 겨울은, 그냥 오해하도록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며 입을 다물었다. ‘민 부장님이 재밌어하시겠는데.’ 겨울이 보는 민완기는 인간을 믿지 않는 악동에 가까웠다. 침묵을 멋대로 해석한 백산호가 한층 더 밝아진다. “정말 잘 생각하신 겁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 번 의논은 해보죠.” “의논?……아, 당연히 그래야지요. 장연철 부장님께도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저희가 너무 욕심이 많다며 꺼려하시는데, 이게 다 우리 동맹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고요. 돈은 모일수록 강해지는 겁니다. 벌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벌어야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하면서 주위가 함께 살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동맹의 발언력도 높아지고 말입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명함을 내주고 다음 만남을 희망하며 물러났다. 대개의 만남이 이런 식이다보니 겨울에겐 식사를 할 여유도 없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식의 장교 임관을 부탁했고, 다른 누군가는 시민권을 바라기도 했다. 다만 청탁과 거리가 먼 요망도 있었다. 한인회에서 나왔다는 노인은 겨울의 손을 잡고 한참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배경을 알기 전엔 혹시 전상자의 가족인가 싶었을 정도로. 합동영결식은 며칠 후로 예정되어있다. 노인은 눈물샘이 마를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중령님께서……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목 메이는 음성에선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겨울은 노인의 메마른 손을 감싸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중대 전체가 노력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아닙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시멘트를 개는 물과 같습니다. 물 없이는 어떤 건물도 올릴 수 없지요. 중령님의 능력과 희생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흩어진 자갈과 모래알갱이에 불과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이런 부탁을 남겼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습니다. 중령님께서는 이미 자신과 주변을 잘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안정된 가정이 필요한 법입니다. 결혼을 하시고 자식을 보십시오. 그러면 더욱 큰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은 곤란해 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제 나이엔 아직 이른 이야기 아닐까요?” “보통 사람에겐 이르겠지요. 허나 당신께선 평범한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 “박정희 대통령님께서도 영부인이신 육영수 여사님께서 곁에 계셨기에 비로소 나라를 훌륭히 이끄실 수 있었습니다. 저희 한인회와 동맹의 모든 사람들은 중령님께서 하루빨리 현숙한 배필을 얻기를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동반한 일행, 나이가 비슷할 다른 노인이 절절히 거들었다. “한때 중령님께서 작전 중 실종으로 알려졌을 때, 이 난민촌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아시는지요?……가정이 생기면 삶에 대한 애착도 강해집니다. 못난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령님을 위해서도 가족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동맹 내엔 마침 좋은 처자들이 많습니다.” 겨울이 되물었다. “제가 다시 사라질까봐 불안하신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중령님께 남은 피붙이가 없기 때문에 더욱 위험을 무릅쓰시는 것이 아닌가, 다들 그렇게 염려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둘게요.” 겨울은 노인들을 완곡하게 달래어 돌려보냈다. 다만 한인회라는 이름이 신경 쓰여 문자를 보냈더니, 여기엔 장연철이 답신했다. 예전에 곧잘 마찰을 일으키던 조직 중 하나, 한인애국회와는 무관한 단체라고. 허나 한인애국회가 다물진흥회 등과 함께 명맥이 남아있기는 하다고. 이후 캐슬린과 다시 만난 건 아홉시가 다 되어서였다. 연락을 받은 그녀는 홋-똑을 파는 곳에 있노라고 답했다. 이상한 발음의 정체는 도착한 뒤에 알 수 있었다. “그거 맛있어요?” 겨울이 건네는 말에, 보안관은 호떡을 들고 빙긋 웃는다. “굉장히요.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의 하나입니다.” “잘 만드나보네요. 저도 하나 주시겠어요?” 뒤쪽은 철판 너머의 부부를 향한 말이었다. 예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주인내외는 자글거리며 익어가는 밀가루 반죽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보안관이 겨울의 용건을 물었다. “제게 확인하실 것이 있습니까?” # 322 [322화] #귀환 (5)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보안관이 겨울의 용건을 물었다. “제게 확인하실 것이 있습니까?” “네. 근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러네요. 다 먹고 잠시 걷죠. 소화도 시킬 겸.” 듣는 귀에 주의해야 했다. 민감한 내용이 나올 수도 있었으므로. 이제 난민구역에서 언어장벽은 없다고 봐야한다. 역병 확산 초기 한국에서부터 피난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녀노소 모두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어차피 캐슬린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려니 수긍한 그녀가 남은 호떡을 깨물었다. 와자자작. 어찌나 바삭한지 소리만 들어도 식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갈색 설탕시럽이 캐러멜처럼 풍부하게 배어나온다. 보안관은 입술을 핥아가며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는 덤. 이 또한 전에는 없었던 일상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종말에 걸쳐서. 소소한 잡담의 와중에 겨울 몫의 호떡이 나왔다. 보안관이 가볍게 걱정해준다. “아까 보니 뭘 드실 틈도 없어 보이셨는데, 그걸로 식사가 되시겠습니까?” “끼니는 오는 길에 대충 때웠어요. 이것저것 많이들 권하시더라고요.” 말하자면 재래시장을 방문한 대통령 같은 경험이었다. “아하.” 걱정을 지우고 재미있어하는 캐슬린. “하긴, 모두가 당신을 아끼고 존경하니까요. 줄곧 보여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이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얼마나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는지.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아직이에요. 앞으로 더 나아져야죠. 음, 이거 맛있네요.” 겨울은 아작대면서도 촉촉한 따끈함과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에 만족했다. 입안에 견과류의 향이 가득 퍼진다. 보안관은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며. 한편으로는 어딘가 뿌듯해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 주인내외가 권한 식혜까지 마시고서였다. 보안관은 삭힌 쌀알이 우르르 떠다니는 기괴한 액체에 질겁했으나, 겨울은 이 역시 맛있게 비웠다. ‘그래도 조금 이상하긴 하네…….’ 의외로 처음 먹어보는 것이다. 구하기 쉬운 음료는 아니니까. 종말을 견디기에 가장 유리한 땅이 북미인지라, 겨울의 모든 시작은 미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생전이야 어쨌든 「로비」에서라면 맛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럼 이제 한산한 곳을 찾을까요?” 겨울의 말에 보안관이 방향을 정했다. “근처에 여전히 공사 중인 구역이 있습니다. 정시 순찰을 제외하면 이 시간에 출입할 관계자는 없겠지요. 검문소 하나만 지나면 됩니다.” “위험하진 않겠어요?” 혹시 통제를 몰래 벗어난 부류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기지의 치안이 훌륭하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중ㄱ……가장 어수선한 거류구라도 기본적인 질서는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하다보니 이상하군요. 중령님께선 지금도 무장하고 계시잖습니까.” 즉 이상한 놈들이 있다 한들 위험한건 오히려 그쪽이 아니겠냐는 농담이었다. 간격이 넓은 조명 아래에서도 보안관의 낯에 어린 장난스러움은 알아보기 쉬웠다. 검문소를 통과한 겨울과 보안관은 한쪽에 쌓인 자재를 의자삼아 걸터앉았다.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 겨울은 넷 워리어 단말로 몇몇 사람들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잠시 보이지 않더라도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액정이 꺼지자 보안관이 묻는다. “그래서, 제가 뭘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기지사령으로서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싶은 건 뭐든지요.” “음……. 어차피 래플린 준장님께 업무를 인계받으시면…….” “내가 원하는 건 그 분이 미처 보지 못하셨을 것들……그리고 보고도 무시하셨을 것들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 텐데요? 현장 실무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걸 있는 그대로 말해줘요.” 겨울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모를 보안관이 아니었다. 난민구역에서 활동한 기간이 상당하지 않은가. 래플린 준장은 오랜만에 만난 겨울 앞에서조차 특정 난민집단에 대한 거부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었다. 뜸을 들이던 캐슬린은 자신 없는 태도로 고해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그런 의미로는 저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내지 않아도 될 화를 내고……하지 말아야할 차별을 했죠. 적당했던 것 같았던 처분이 돌이켜보면 가혹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샌가 중국인들을 예비범죄자처럼 지켜보는 제가 있더군요. 이것만으로 많은 게 달라진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하실 겁니다.” “적어도 그걸 반성하고는 있잖아요?” “저를 너무 좋게만 보시는 것 아닙니까?” “왜 아니겠어요? 당신은 민간인들을 지키겠다고 한 개 중대에 맞서려던 보안관인데.” 책임감 하나는 믿을 만하죠. 겨울의 평가를 들은 캐슬린이 그늘진 곤란함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엉뚱한 사람을 상하게 했잖습니까.” “불가피한 일이었죠. 만약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어요?” “……아뇨.” “신경 쓰지 말고 말해 봐요. 이상하다 싶은 건 걸러들을 테니.” 이후 생각에 잠겨있던 보안관은 말을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입을 열었다가도 조용히 닫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겨울은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추는 비난에 가까워도 좋다. 허나 요구받은 건 넓은 의미에서의 내부고발이었다. ‘자칫 상관과 동료들을 흉보는 꼴이 되어버리겠지.’ 한편으론 지금의 대화로 인해 스스로가 어떤 피해를 입지 않을까 싶은 불안도 엿보였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강화된 「간파」는 숨기려는 감정을 쉽게 꿰뚫고 겨울의 추측을 뒷받침해주었다. 생전부터 사람 속 읽기에 능한 입장에서 이는 확신을 더하는 용도였다.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일반적인 범죄의 검거 건수는-” 막 시작한 말을 삼킨 보안관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양해를 구했다. “흠, 이야기에 다소 두서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미리 준비한 보고 같은 게 아니잖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일반적인 범죄의 검거 건수는, 그럴 듯한 의심을 받는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실제로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병이 퍼지기 전을 기준으로는 그 대상이 흑인들이었지요. 뭐,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겨울은 그녀가 무엇을 전하려는지 짐작했으나, 분위기상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시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마약만 해도 어느 인종이든 비슷하게 사고팝니다. 오히려 각각의 수색에서 체포로 이어지는 비율만 따진다면……유색인종보다 백인들이 더 높게 나오는 지역도 있었지요. 대단한 차이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즉…….” “즉?” “흑인들의 범죄율이 더 높았던 건, 그저 그들이 더 많은 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속이 잦으니 적발도 많을 수밖에요……. 심지어 죄가 없어도 수상해보입니다. 이미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죠.” “예. 손이 낮으면 무기를 꺼내려는 것처럼 보이고, 주머니가 뭉툭하면 저거 마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바지 위로……그, 유달리 큰 그것이 툭 불거져있는 걸 보고서……은닉한 총기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시 본인 경험인가요?” “……묵비권을 행사하죠.” “보통 그걸 착각해요?”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짓궂게 묻자 보안관이 무척 억울해했다. “그땐 저도 경황이 없었단 말입니다. 총기난사로 인한 출동은 처음이었는걸요.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죠. 게다가 범인의 인상착의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겁에 질려서 행동이 비정상적이었고, 거리도 가까웠고, 어쩐지 눈이 풀린 것도 같았고-” “또 흑인이기도 했고요?” “네…….” 한숨을 내쉬는 캐슬린. 자포자기한 느낌으로 당시를 회상한다. 무기를 버리라고 윽박질렀더니 아무 것도 없다고 하기에, 턱짓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꺼내라 했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은 또 이걸 정말로 꺼내야 하느냐고 되물었단다. 여러모로 엉망진창이다.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무서웠나보네요.” “그 후의 취급도 좀……사건이 마무리된 후에 개인적으로 만나 사과했습니다.” “받아주던가요?” “비록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남자로서 자랑스러우니 괜찮다더군요. 술자리에서 평생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면서요.” 결국 겨울은 작게나마 꾸미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캐슬린이 슬쩍 눈을 흘긴다.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지금 이 난민구역의 중국인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처지라고 봅니다.” “어느 정도? 확신하진 못한다는 뜻인가요?” “예. 여러 지표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게 나와서 그렇습니다. 음, 쉽게 말해, 중국인들이 범죄와 관련되는 비율이 다른 구역에 비해 높은 것 자체는 명백하단 의미입니다. 단속의 강도와 빈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지요.” “이해했어요.” “하지만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보안관은 강조의 의미로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그동안 서(署)로 연행된 중국인들 과반수의 혐의가 공무집행방해였다는 겁니다. 검문 및 수색 요구에 비협조적으로, 혹은 공격적으로 응했다는 이유에서요.” “과연.” “그렇게 끌려와서 수감으로 이어지는 비율도 상당한 편입니다. 다른 혐의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군정청의 행정지침에 따르면 경관이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대한 적대행위가 성립하거든요.” “캐슬린. 혹시 일선 경관들이 의도적으로 그런다고 생각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중국인들을 일부러 차별하는 인원이 있기는 있겠지요. 그러나, 저만 해도 중국계 거류구를 순찰할 땐 살갗이 찌릿거릴 때가 많습니다. 경찰 입장에서 위협을 느끼는 건 진짜라는 거죠. 단순히 의심이 많아 느끼는 착각이라기엔……노려보는 시선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수군거림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요.” “악순환이네요. 악감정에 위협을 느껴서 과잉대응을 하고, 과잉대응이 악감정을 키우는.” “네, 정말입니다.” 보안관은 겨울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정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기도 어려운 악순환입니다.” “무슨 일이든 그래요. 어느 한쪽이 백퍼센트 결백한 경우는 드물죠.” “……그렇다고는 해도 책임을 따진다면 저희 쪽이 더 무거울 겁니다. 아니, 확실히 무겁습니다. 어쨌든 힘과 권력이 우리에게 있고, 저들은 상대적인 약자니까요. 열 번을 맞으면 아홉 번은, 가끔은 열 번 다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상 펴요. 여기까지 인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거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가슴을 따라간다. 내가 팔이 부러지고 상대는 목이 돌아갔어도 아픈 쪽은 부러진 팔인 것이다. 타인은 항상 감각의 장벽 저편에 있었다. 공감은 언제나 자신을 죽이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보안관 정도의 균형감은 상당히 보기 드물었다. “하…….” 보안관이 별빛 하늘을 우러렀다. “어느 도시, 어느 빈민가, 어느 우범지대에서든, 치안을 확보하려면 우선 공권력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더군요. 감정의 골이 돌이키지 못할 만큼 깊어졌습니다.” “그래도 내겐 기회가 있는 것 같은데요?”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가 꽤 도움이 됐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잡히네요.” “그렇잖아도 드리고 싶은 제안……이랄지, 충고가 있었습니다만…….” 벌써 생각해두신 것 같네요. 겨울은 그녀가 삼킨 뒷말을 긍정했다. “우선은 그동안 나쁜 경찰 역할을 해줘서 고맙다고 해두죠. 수고하셨습니다.” 보안관이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이런.” 좋은 경찰 나쁜 경찰이 꽤 고루하긴 해도, 효과 자체는 오랫동안 입증된 것이다. 실천하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뿐. ‘체감이 될 정도로 풀어주면 부작용이 있긴 할 텐데…….’ 적절하게 고삐를 잡지 못할 경우 중국계 거류구는 지금보다 더한 무법지대가 될 수 있었다. 캐슬린이 덧붙이는 말. “노파심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상대적인 박탈감을 해소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지원병들의 처우 문제를……. 제프리조차도 부대를 꾸릴 때 그들만은 받기 싫다고 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 그런데 어감이 미묘했다. 겨울과 소대원들도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까운 사람들 이내에서였다. “제프리? 브라운 중위를 꽤 친근하게 부르네요?” “이젠 브라운 대위입니다. 영전이 확정된 중대장이죠. 그리고 저와는……반 년 전부터 사귀는 사이입니다.” “와.” 살리나스 댐에서 보낸 밤의 기억을 돌이켜 보는 겨울. 제프리 스스로 말했었다. 연상만 아니었어도 청혼했을 거라고. 지나가는 말인가 했더니 꽤나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요?” “글쎄요. 원거리 연애가 되어놔서. 즐거움은 잠깐이었는데 그리움만 길군요. 전선으로 파견된 게 벌써 석 달 전인데, 언제쯤 돌아올는지.” 쓰게 웃는 보안관이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아무튼, 중국계 거류구에서 뽑은 병력은 핵이 터진 다음부터 어떤 지휘관도 원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던가요? 유일하게 캡스턴 중령님께서 자신의 연대에 받겠다고 하셨지만……래플린 중령님께서 요청을 반려한 것으로 압니다. 사령부 차원에서도 없는 병력 취급했다니, 여태까지 계급장조차 없는 지원병이 태반인 게 이해가 가지요.” 경찰에게도 꽤나 무시를 당했다고 덧붙이며,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는 캐슬린. “그런 점만 적절히 풀어준다면 한 중령님의 부담이 상당히 가벼워질 겁니다.” “참고할게요. 기대 이상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시간을 확인한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신 단말엔 여러 번호에서 온 메시지들이 쌓여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 봐야겠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기도 곤란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또 연락해도 되죠?” “얼마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캐슬린 또한 자리를 털었다. 축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 323 [323화] #귀환 (6) 익일, 겨울은 두 명의 부장과 때 이른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새벽부터 문을 연 식당은 백반을 주문하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대개는 한국계 난민들이었으되, 간혹 머리와 피부색이 다른 경우가 있었다. 젓가락질이 어색한 그들은, 비록 무장을 했으나 군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군수국과 계약한 민간인 운송업자들입니다.” 그릇을 비운 민완기가 수저를 놓고 말했다. “원래는 봉쇄선까지만 운행했다는데, 멧돼지 사냥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고부터는 자원자들에 한해 오염지역까지 들어오게 되었다더군요. 포트 로버츠 일대는 본토탈환이 완료되기 전에 이미 안전지대로 분류되었으니 말입니다. 위험수당은 준다고 합니다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현재의 미군은 전투 병력의 비중이 높았으므로, 군수국의 역량만으로는 물자를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공군이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 이후 실종자 수색에 민간인 조종사들을 투입했듯이, 육군 또한 군수보급에 민간 인력을 활용했다. “음, 불편해 보이는 데도 열심히 먹네요. 입맛에 맞으려나?” 겨울의 말에 이번엔 장연철이 웃는다. “맛보다는 문화적인 유행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결국은 이것도 대장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보여도,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의 부장은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여야 하는 탓. 일전에 민완기가 이르기를, 겨울이 돌아올 때를 위해 일부러 편을 갈랐다고 했었다. 거듭되는 갈등에 피곤해진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이 있을 무렵을 그리워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결국 이 자리도 반쯤은 보여주는 용도였다. 실내의 이목은 진작부터 이쪽으로 쏠려있었다. “식후엔 래플린 준장을 만나러 가십니까?” 장연철의 물음에 겨울이 끄덕였다. “그래야죠. 시간이 마냥 넉넉한 건 아니거든요.” “혹시 새로 창설될 중대들에 관해서 어떤 계획이 나온 게 있습니까?” 사전에 맞춰둔 문답을 나눌 때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개인적으로 구상해둔 건 있네요.” “오. 궁금해지는군요. 아시겠지만 동맹 내에서 거는 기대가 굉장히 높습니다. 대장님께서 자리를 만들어주실 거라고요. 여기선 군인이 되는 것만큼 확실한 출세도 없으니까요.” “글쎄요. 앞으로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 “다르다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 “인력이 있다면, 특히 남자들은 재건사업으로 보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장 부장님, 지금 내가 맡은 병력의 구성을 보세요. 전투병을 선발하려고 해도 아직까지는 남성 지원자들의 비중이 높잖아요. 하다못해 이유라 중위의 소대조차도 그래요……. 문제는 재건사업에 필요한 기술 보유자도 남자 쪽이 더 많다는 거죠. 전기기사, 건축기사, 특수 용접, 중장비 면허, 선반가공기술 같은 것들이요.” “아…….” “시민권 때문에라도 입대를 원하는 마음들은 알겠어요. 그래도 멀리 봐야죠. 캘리포니아 재건사업은 돈도 돈이지만 미국에서 통할 경력을 쌓을 기회이기도 할 거예요. 나중에 가서 텃세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각각의 업계에 미리 자리를 잡아둬야 할 필요도 있겠고요.” “과연 그렇겠습니다. 많이 고민하셨군요.” 조금은 낯간지러운 연극이었다. 연철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민완기가 겨울의 말을 긍정했다. 연철 쪽으로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꼭 옛날의 미국을 보는 기분입니다.” “옛날의 미국?” 반문하는 겨울에게 장년의 학자가 미소 짓는다. “그렇습니다. 한때는 지주계급이 이 나라의 상류층이었지요. 건국세력의 후예이자 넓은 농장을 보유한 영국계 이민자들 말입니다.” “그런데요?” “이들이 기존의 기득권에 만족하며 지내는 동안, 후발주자로 미국에 상륙한 가난뱅이들은 좋든 싫든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허나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사회적 우위의 역전으로 이어졌지요. 말하자면, 거지 같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농장주들의 머리를 밟고 서게 된 겁니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를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전후 몰락한 지주계급은 오늘날 남부 촌놈들 취급을 받게 되었고요.” “레드 넥이군요.” “맞습니다.” 예정에 없던 이야기였으나 의도를 알기는 쉬웠다. “확실히 공통점이 있네요. 당장 안정적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보단 나중을 대비하는 편이 낫다는 점에서요. 경제력이 중요한 것도 그렇고.” 끄덕인 겨울이 다른 논거를 들었다. “솔직히 성비도 걱정해야죠. 지금도 남자가 많이 모자라잖아요?” 장연철이 대답을 가로챘다. “예. 동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문제입니다만, 최근엔 다른 곳에 있던 난민들이 합류하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늦게 탈출한 해상난민들 중엔 젊은 남자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탈출 시간을 버는 과정에서 소모되었겠네요. 애초에 소집 대상 연령인 사람은 배에 태워주지도 않았을 것 같고……. 살아남은 일부는 아직도 현역이겠고요.” 한국 정부는 현재 한반도 본토를 포기하고 미국의 망명승인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따라서 남아있는 군대 또한 안전이 확보된 일부 도서지역에 묶여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구간의 성비는 기형적인 수준으로 기울었다. “아무튼.” 겨울이 어조를 바꾸었다. “당장은 한국계로만 한 개 중대를 뽑는 건 무리에요. 다른 국적으로 채워야죠. 전투병과에 지원하는 여성분들이 충분히 많아진다면 다시 검토해보겠지만요.” 준비한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이 자리에서 오간 말들이 알음알음 퍼진다면 추후 다른 국적의 중대를 편성할 때 잡음이 적을 것이었다. 다른 국적의 난민들에게 좋은 기회를 빼앗겼다는 식의 반감들. 적어도 경솔한 판단이라는 불만은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소리가 작을 터다. 일부의 사람들에겐 겨울의 나이가 여전히 약점이었다. 연륜이 부족할 수 있다고. “난 이쯤에서 일어날게요.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지만, 부대장으로서 소화해야 할 일과들이 있거든요.” 겨울의 말에 두 부장이 함께 일어섰다. 계산을 하겠다고 지갑을 펼쳤으나, 늙은 주인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작은 대장님께서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허나 겨울은 극구 값을 지불했다. 작년이었다면 순수한 호의로 받았겠으나, 지금은 입장이 달라진 까닭이었다. 최소한 일반인을 상대로는. 돈을 받은 주인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오전 아홉시 삼십분. 집무실에서 만난 래플린 준장은 대뜸 이런 소리를 했다. “간밤에 이런 생각을 했어.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인데, 내가 총대를 메는 게 어떨까.”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인들 말이야. 장교는 어쩔 수 없더라도, 지원병들만큼은 소집을 취소할까 싶어. 지휘할 병력이 사라지면 결과적으론 장교 역시 직위해제를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흐음, 명목상으로는 무기한 발령대기가 되려나?” “…….” “물론 불만이 대단할 거야. 그래도 폭발하진 않을 걸? 이 시국에 난동을 피워 봐야 자기들만 손해라는 걸 잘 알 테니까. 또 귀관에 대한 기대심리가 있지 않겠나. 한겨울 중령이 기지 책임자가 되면 원상태로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보자고.” “그 기대를 이용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거지. 귀관이 원래의 지위를 돌려주기만 해도 꽤나 고마워할 걸세. 사실 지금과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실질적으론 무엇 하나 추가로 내주지 않으면서, 시작부터 마음의 빚을 지워둘 좋은 방법 아니겠나? 기지를 운영하는 데에도 약간은 도움이 될 테고.” 말을 맞췄을 리 없건만, 겨울과 캐슬린 사이에 오갔던 대화와 같은 맥락의 제안이었다. 그저 보다 능동적일 뿐. 피부 검은 준장이 하얀 이를 드러낸다. “뭐, 그때 가서 안 내키면 그냥 내버려둬도 돼. 딱히 보낼 데도 없는 병력이니. 믿지 못할 아군이야말로 최악의 적이지.” “그들이 위험하다고 보십니까?” “당연하지.” 딱 부러지는 단호함이었다. “원래 깡패를 자처하던 놈들이라는 점은 그렇다 치자고. 전과자도 경찰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의 적성(敵性) 외국인이기도 해. 귀관은……얼굴을 보니 동의하지 않는군. 대충 넘어가게. 일반적으로 보기엔 그렇다는 말일세. 아무튼, 그 친구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마당에, 뭘 믿고 방역전선에 배치하겠나?” 역병의 특성상 작은 균열조차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 된다. 준장은 복수에 눈이 먼 한 개 소대, 혹은 중대가 제2의 양용빈이 될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것이 극도로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무수한 생명이 걸려있는 이상 무시하긴 곤란하다. 하다못해 수송대 호위를 맡기더라도 배신의 우려가 제기될 것이다. 아군의 등을 찌르거나, 혹은 역병의 운반자가 되는 식으로. ‘중국계 병사들을 개인 단위로 분산 배치하면……그래도 안 되겠구나.’ 순간적으로 가벼운 대안을 떠올렸던 겨울은, 이내 차마 못 할 짓임을 깨달았다. 중국계에 대한 거부감은 일선 병사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될 테니까. 따돌림과 가혹행위는 필연이었다. 지난날 대통령이 언급했던 대니 첸 일병의 죽음 또한 그것이 원인이었다. 아. 이제야 비로소 제프리의 결정을 이해하는 겨울. 그 성격에 중국계 난민 출신 병사들을 거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의아했었지만, 길게 곱씹어보지는 않았다. 흘려들었을 따름.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온건하고 상식적인 지휘관일지라도, 부하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신병을 받기란 꺼려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폭력이 가해질지 모르니. 또한 그는 독립부대의 지휘관이 아니므로 직속상관이나 선임 지휘관의 성향까지 감안해야 한다. 한없이 우호적인 해석이었으나, 강화된 「통찰」이 겨울의 직감을 긍정해주었다. 그런 관점에서, 캡스턴 중령이 했다는 요청이 새롭게 인상적이다. 그에겐 부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래플린 준장에겐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공교롭게도 준장 역시 이 같은 사정을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나만 이런 감정을 품은 게 아닐 거란 사실이야. 나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을 지경인데, 상대적으로 책임감이 덜할 병사들은 오죽하겠나? 다른 지휘관들이라고 멀쩡할까? 당장 이 기지를 거쳐 간 장교들만 해도 대놓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해했습니다. 중국계 병사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아무 부대에나 배속시킬 순 없는 거로군요.” “그래. 따로 보내면 죽겠고 같이 보내면 터지겠지. 아주 높은 확률로.” 그러므로 준장이 먼저 언급했던 우려는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된다. 부당한 대우가 누적되다보면 없던 광기도 생길 거란 의미.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잠시 조용하던 그가 싱겁게 웃었다. “어쩐지 쓸 데 없이 열을 올린 기분이군. 딴에는 괜찮은 계획이라 느꼈거든. 이 골치 아픈 기지를 맡게 될 중령에게 그럴 듯한 선물이 될 거라고.” “아닙니다. 덕분에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흠. 귀관이? 정말로?” 못미더워하던 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아무래도 좋고……. 그래서 중령은 찬성인가 반대인가? 여태까지의 표정을 보면 그 친구들을 아예 묻어버릴 마음은 없는가본데, 그렇다 쳐도 도움은 될 테지.” “저는 반대입니다.” “왜, 속임수 같아서 내키지 않나?” “아뇨. 좋은 결과를 위해선 때론 이런 수단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잖습니까. 다만 이쪽의 의도를 간파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경험으로 하는 말인가?” “네.”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흐린 래플린 준장은 어딘가 아쉬운 얼굴로 단념했다. “귀관이 그렇다면 가감 없이 그런 거겠지. 유감이군.” “배려해주신 점에 대해선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쓸모도 없었는걸. 됐고, 이제부터는 진짜 업무 이야기나 하세. 귀관이 D.C로 가기 전에 대행까지 경험해봐야 돌아오는 대로 자리를 넘기지.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라도 더 붙잡혀 있다간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겨울은 진저리를 치는 준장으로부터 담백한 진심을 엿보았다. # 324 [324화] #귀환 (7) 명목상 난민 군정의 최상급자인 군정장관은 육군 중장 계급의 윌 라이트번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그를 직접 만날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는데, 군정장관의 집무실이 D.C의 펜타곤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했던 겨울이었으나, 사정을 알고 나서는 간단히 납득하게 되었다. 서부 3개주 군정청 외에 동부를 담당하는 지역 군정청들이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역병의 물결이 유럽에 도달하기까지 수개월의 여유가 있었기에, 대서양을 건넌 난민의 숫자는 놀라울 만큼 많았다. 군정장관도 어지간히 고될 것이다. 캘리포니아 지역 군정청만 해도 다시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지 않던가. 방대한 조직 구성으로 보아 중장 한 사람이 감당할 역할이 아닌데, 고질적인 인력 부족 탓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터였다. ‘최근엔 영국조차 영토 방기를 검토하고 있다지…….’ 지금껏 섬이라는 특성에 의지하여 견뎌왔으나, 유럽 각지로부터 수용한 난민이 워낙 많아 감당이 안 된다던가. 자급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보급은 당연히 미국이 부담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저한의 생존 수요를 맞춰주었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까지 어떻게 해주지는 못할 노릇이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유럽 방면의 교두보로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의 도서(島嶼)와 더불어 영국 본토를 함께 남겨두고 싶어 했다. 특히 산업생산력이 높은 영국은 훗날 훌륭한 전진기지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하고. 문제는 그 훗날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당면과제는 유럽탈환이 아니라 파나마 진공이었으므로. 그래서 미 의회는 영국정부의 망명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추가적인 난민수용을 결의했다. 보급물자 수송비용을 절감할 겸, 적어도 난민으로 인한 혼란은 덜어주겠다며. 고로 현 시점에서 군정장관은 서부 이상으로 동부가 골치 아플 것이었다. 이것이 포트 로버츠 기지사령의 권한이 강화된 배경이기도 했다. 행정과 사법 양면에 걸친 업무를 설명할 때,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래플린 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투부대로 배치할 지휘관조차 모자란 판국에 난민행정에 투입할 장교라고 충분하겠나? 하물며 책임을 맡길 고급장교쯤 되면 더욱 드물지. 그러니 인력을 아끼려면 한정된 인원으로 돌려막기를 하거나, 이곳처럼 권한을 집중시키는 수밖에.”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고. “어느 정도 미리 듣긴 했지만, 제 책임이 무겁겠습니다.” 겨울의 평가는 준장을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네. 사람이 망가지기 좋은 조건이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거든. 보이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할 권력이 있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일 줄은 몰랐어. 한 부대의 장으로서 나름대로 익숙하다고 믿었건만.” “그래도 잘 견뎌내셨잖습니까?” “결과적으로는. 허나 준장 진급심사가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혹시나 결격사유가 생길까봐 몸을 사렸다는 뜻이었다. “특히 그 유전.” 준장은 잔뜩 싫은 표정을 지었다. “생산량이 기준치 이하로 감소했으니 관리를 이쪽에 위임하겠다는데, 정부 입장에서야 채산성이 안 맞더라도 여기서는 여전히 큰 돈 걸린 일이란 말이지. 벌레가 꼬여서 곤란했어.” 이는 간접적으로 당부하는 주의였다. 준장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으되, 겨울은 그가 남모르게 부정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사령 취임 후 한 번 알아보는 정도로 충분하다. 자칫 뒤집어쓸 수도 있을 테니까. “유전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질문을 받은 준장이 한 손으로 서류철을 헤집는다.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는……여기 있군. 직접 보게나.” 겨울은 그가 건네는 보고서를 펼쳤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과거의 이력을 보여주는 도표였다. 총 생산량만 따지면 캘리포니아에서 손에 꼽는 유전이었으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연간 산출량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대규모 군사작전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한 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생산과 수송, 보급행정에 드는 비용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계륵이나 다름없게 된 셈이라, 시설을 개선하기까지는 포트 로버츠의 관할권에만 속하게 됐다는 이야기. 그 외에도 기지 사령이 관여하는 이권은 많았다. 겨울이 눈을 찌푸렸다. “파견 노동자 인허가 업무는 이해가 가는데, 영주권과 시민권 심사가 많이 부담스럽네요. 제한을 우회하기 쉬워서 더 그렇습니다. 나중에 말썽이 생기기 쉽겠어요.” 그러자 래플린 준장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오히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쓰라는 의도로 내어준 권한일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단 인가된 시민권은 정부 성향이 어떻게 바뀌든 함부로 취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영주권도 마찬가지야. 지나치게 남용했다간 이민국이나 그 윗선에서 제재가 들어오겠지만, 적당히 쓰는 정도는 대충 눈감아줄 거라고 봐. 하물며 그게 내가 아닌 귀관의 결정이라면야.” “정권 교체에 대비한 보험이라는 겁니까?” “내 짐작이네만, 현 대통령께선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또 귀관의 안목을 신뢰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차피 장차 속령이나 준주를 만들려면 시민권이나 영주권 보유자들의 숫자가 갖춰져야 하는 게 사실이야. 아니면 여기랑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그냥 난민 거류구의 위치만 바꾸는 꼴이지.” 여기까지 말한 준장은 자신이 결재해야 할 서류의 일부를 뚝 떼어 겨울 쪽으로 밀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 이만큼은 자네가 살펴보도록 해. 익숙해지는 데엔 직접 해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어.”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아니. 결과는……그렇지. 닷새 뒤에 듣겠네. 다만 갈 때 챙겨가라는 소리야. 대신 오늘은 두 시간쯤 일찍 보내주지. 자네도 쉴 땐 쉬어야 할 테니. 곧 있을 화려한 초대와는 별개로 말이야. 흠, 솔직히 말해 며칠쯤 늦어져도 상관은 없어. 기다리는 사람은 고달프겠네만.” 배워야 할 업무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자, 다음은 난민지도자 후보 심사 업무일세. 난민지도자 지원 법안이 시행예고에 들어갔으니, 이쪽에서도 속도를 맞춰줘야 하거든. 이것도 나보다는 귀관이 더 잘 해내겠지. 당사자이기도 하고. 이걸 마친 다음엔 민사국에 잠시 들르세나. 현장 돌아가는 꼴을 몰라선 안건을 검토하기도 곤란하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는 준장은 어딘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늦은 오후. 주둔지 내 숙소로 돌아온 겨울은 가져온 서류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여러 업무들을 골고루 떠넘기는 듯 한 느낌이었으나, 어차피 승계해야 할 일들이었다. 난민지도자 지원 정책은 난민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을 동시에 절약할 목적으로 입안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그러면서도 괜찮은 인물이 드물다는 게 문제였다. 따라서 그 중 대부분은 군정당국이 임의의 기준으로 선발할 계획이었다. 난민들 입장에선 이 또한 민감한 사안이 된다. ‘베트남 쪽은……응우옌 씨인가.’ 과거에 한 번 스쳐지나갔던 이름들이 서면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그 외에 낯선 사람도 많아, 겨울로선 한 사람씩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어스름 내린 산 그림자 위로 하나 둘씩 별빛이 박힐 무렵, 앤이 걸어온 통화에서 겨울은 이렇게 말했다. “위에선 뭘 믿고 내게 이런 자리를 내주는지 모르겠어요. 전공이 많다곤 하지만, 그거하고는 별개잖아요. 준장님 말씀대로 사람 망가지기 쉬운 자리던데요.” 앤은 이 말을 재미있어했다. 「겨울. 그 자리에 당신만큼 어울리는 인물은 없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렇다는 말이에요.」 “어째서요?” 「사사로운 이익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국방성금 기부 건도 그렇죠. 계약서를 작성한 건 최근이지만 처음 의사를 밝힌 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였잖아요. 그보다 앞서 군정청이 처음 만들어질 땐 편한 자리를 마다했었죠.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 또 어떤가요?」 짧은 공백을 두고 이어지는 말. 「그 덕택에, 국방부든 백악관이든 당신에 대한 평가는 예전부터 지극히 좋았어요. 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즉, 당신을 그 자리에 올리기로 한 건 충분한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결정이라는 뜻이에요. 타인을 위해 거듭 목숨을 걸어온 사람이 사소한 문제에서 이기적으로 굴 거라고 의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혹시 모르는 일이죠.” 「혹시 모른다…라……. 과연 어떨지. 내기라도 해볼래요?」 “질 것 같아서 싫네요.” 「이런. 따놓은 승리였는데.」 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전보다 높고 산뜻하여, 겨울이 근황을 묻는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밝아요.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뭘 새삼스레……. 당신이랑 통화중이잖아요.」 이번엔 겨울이 실소했다. “그거 말고요.” 「음……. 이건 비교적 사소한 거지만, 나 지금 집이거든요. 사무실이나 사건 현장이 아니라. 퇴근길엔 노을이 예뻤고, 삼십분 동안 샤워를 했고, 조금 전엔 블루문을 마셨고, 침대에 누워서 당신 목소리를 듣고 있고, 또 내일 하루는 비번이죠. 비상소집이라도 걸리면 꼼짝없이 나가게 되겠지만요.」 “모레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내일만은 조용하길 바랄게요.” 「사과나무라도 하나 심어야겠네요.」 다시 쿡쿡거린 그녀가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보충했다. 「아, 그렇지……. 그 국방성금 기부 건 말예요.」 “네.” 「예상보다 일찍 공개될 가능성이 생겼어요. 빠르면 일주일 안에 공식적으로 방송을 타게 될 거예요.」 “……의외네요. 정치적인 사정 때문에라도 좀 더 나중이 될 줄 알았더니. 맥과이어 소령……아니, 공보처로부터도 그렇게 들었고요. 방침이 갑자기 바뀐 걸 보니 뭔가 일이 꼬였나보네요. 나한테 달리 연락도 없었고.” 「염려 말아요. 겨울이 역풍을 맞진 않을 테니.」 앤의 부드러운 음성.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을 뿐이에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비밀을 지키긴 했어도 진짜 기밀에 비해서는 허술한 취급이었고, 관계자는 많은데 시간을 끈 데다, 당신은 항상 언론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걸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추측성 기사는 벌써 나왔어요. 이러이러한 일이 있지만 눈치를 보느라 공개를 못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당국은 기자들이 알아서 여론을 만들어줄 때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이에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버티는 거죠. 뒤로는 은근히 흘리면서요.」 “주도적으로 발표하는 게 아니라, 숨기려고 했지만 다 알려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식으로 보이길 원하는 거네요?” 「맞아요.」 “예정에 없던 대응 치곤 괜찮은데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잖아요. 어쨌든 큰일이네요.」 “뭐가요?” 「이걸로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좋아하게 될 텐데,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해요? 이 분야에선 내가 제일이어야 하거든요……. 아, 물론 행사 중 경호 문제도 큰일이고요.」 어두운 얼룩이 없는 말이라, 겨울은 가볍게 받아주었다. “정말이지. 술이 들어가면 원래 농담이 느는 타입이었어요? 전엔 점잖은 척 했을 뿐이고?” 「하아, 설마요. 평소엔 어떤 파티에서든 워커홀릭 취급을 받는걸요.」 한숨을 곁들인 대답이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는 투여서, 결국 꾸밈없이 웃고 마는 겨울. 소리를 들은 앤이 한결 더 포근해졌다. 「나도 내가 이러는 게 낯설어요. 새롭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도 말이 계속해서 나오네요. 이게 또 즐겁고요.」 “…….” 어째서인지 말문이 막힌다. 할 말을 찾던 겨울은 문득 창밖의 산맥을 보았다. 거기엔 짙어진 밤과 많아진 별들이 있었다. 언제라도 좋아하는 풍경. 그 너머에 진짜 별이 없을지라도 아름답기는 했다. 지난날 생각했듯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별빛아이에게 받은 별이 본질과 무관하게 약속인 것처럼. 「여보세요?……겨울? 들리나요?」 정적을 의아해하는 목소리. 약간의 불안도 느껴졌다. 자신의 말을 곱씹었을 것이다. 혹시 어딘가 부담스러웠을까 하고. “앤.” 겨울이 온화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한 마디에,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침묵이 수화기를 건너갔다.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으로 메워지는 간격. 한참이 지나 잦아든 대답이 돌아온다. 「안심해요. 꼭 그렇게 될 테니까.」 # 325 [325화] # 귀환 (8) 이튿날, 일출을 한 시간 앞두고 기상한 겨울은 잠들기 전까지 검토한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중엔 민사국이 취합한 난민들의 청원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행간에 거류구 각각의 생활상이 생생하여 흥미로웠다고 해야 할까. 몇 개쯤 눈길을 끄는 요청도 존재했다. 예컨대, 대부모(代父母) 및 대자녀(代子女)를 제도적으로 보장해달라는 것. 여기서 말하는 대부모는 명칭만 종교적 관습에서 따왔을(Godfather, Godmother) 뿐, 실제로는 지정후견인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단, 대상을 보호자의 유언이 아닌 사전 등록제로 정하게 해달라는 점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취소도 가능해야 하고. 요컨대 군정청이 공식적으로 관리해달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보험의 일종. 앞날이 불안한 부모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을 때 자식을 보호해줄 제3자를 확실히 정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의 동의도 받아두고. 현 시점에선 흔한 현상인 듯 했다. 두 부부가 서로 약속을 교환하거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후자의 경우,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는 명예도 명예지만 자기 사람을 늘린다는 의미에서 수락하는 모양. 이는 겨울의 추측이었으되 달리 생각하기 어려웠다. 조사보고서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백산호였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 일흔다섯 명의 대자녀를 거둔 상태였다. 백산호 다음으로 대자녀가 많은 인물은 뜻밖에도 송예경이었다. 여전히 배신한 남편과 「다물진흥회」에 이를 갈고 있다는 그녀.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장연철과 민완기가 그 뒤를 이었다. 겨울동맹의 양대 부장이 지닌 영향력을 감안하면 의외의 순위였으나, 잠깐 곱씹은 겨울은 오히려 이것이 당연함을 깨달았다. ‘욕심만으로 그런 부탁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니까. 매번 진지하게 고민했겠지……. 어느 쪽이든 사람이 부족해서 아쉬울 처지도 아닐 테고.’ 오히려 백산호나 송예경은 본인이 아쉬워서 이런 수단에 매달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겨울은 승인을 보류했다. 사령 대리로서 서명만 하면 끝인데, 취지는 좋지만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까닭이다. 아이들이 이익추구의 수단이 되면 곤란하다. 기지사령이 처리해야 할 대부분의 사안들이 이런 식이었다. 대충 승인했다간 화근이 된다. 난민구역의 생리에 밝은 겨울과 달리, 래플린 준장은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장님처럼 업무를 처리해왔던 것 같다.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좋은가. 그럴듯해 보이는 의견을 수용했다가 불에 덴 경험이 많았다고, 준장은 짜증을 내며 회고했다. 여러 문서에 걸쳐 각각의 생각을 정리한 겨울이 시계를 보았다. 오늘의 첫 면담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직 안 읽은 서류를 검토하기엔 애매한 여유인지라, 책상 한쪽으로 치워둔 리모컨을 집어 TV에 전원을 넣는다. 영화 채널에서는 새벽부터 한국 영화를 방영 중이었다. 관중들이 뜨겁게 환호하는 어느 격투장, 한 가운데의 링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남자가 보인다. 그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서럽게 울부짖었다. 「아빠! 아빠아아! 일어나! 일어나아아!」 “…….”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므로 정서가 와 닿진 않는다. 다만 겨울은 요즘 들어 한국적인 소재가 방송을 너무 많이 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누군가는 반감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채널을 돌리니 이번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온다. 헌데 그 내용이 겨울을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레이터가 말한다. 「변종들이 성행위를 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난교에 해당하는, 짧지만 대단히 적나라한 장면이었다. 면역거부반응으로 일그러진 살덩이들이 서로 엉키고 부딪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은 시우다드 후아레즈 시가지 남쪽의 아브라함 곤잘레스 국제공항입니다. 이 이 짧은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60기의 촬영용 드론과 일곱 개의 촬영 팀, 그리고 5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지요. 국방부의 적극적인 협력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누군가는 이 괴물들의 생태가 동물적이라고 합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틀린 표현입니다. 보시다시피 짝짓기를 위한 경쟁과정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변종의 번식은 지극히 효율적입니다. 필요하면 하는 거죠. 또한 이들의 행위는 아무리 길어도 10초 이내로 끝납니다. 짧게는 1초에 불과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번식에 특화된 특수변종이 존재할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군에서는 불임을 유발하는 독성 물질 살포를 검토한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환경재앙을 우려하여 보류시킨 계획이지만요.」 장면이 생경하긴 했으되, 조금 더 지켜본바 모르는 내용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중령 계급으로 열람 가능한 정보가 당연히 더 풍부하겠지.’ 험프백의 상세는 아직까지도 기밀로 분류되어있다. 일선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건만, 정부측은 사회 일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다. 변종의 번식 가능 여부와 별개로, 생장이 가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민감하게 다룰 법 했다. 최근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변종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곤 하지만. 겨울은 다시 채널을 넘겼다. 휙휙 바뀌는 화면의 갈피에 언뜻 낯익은 얼굴이 비친다. 러시안 강 인근의 목장 휴양지(Retreat)에서 만난 바 있는 핼러웨이 중사였다. 감염을 막고자 정강이를 폭파했다던 상남자는 한겨울 중령, 당시 소령과의 만남을 자랑스럽게 증언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물었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요.」 “…….” 어떤 의미로는 감탄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쇼크사를 면한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본인이야 괴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같은 심정이었겠지만. 기자가 퇴역 중사에게 묻는다. 「미스터 핼러웨이. 당신이 만난 한겨울 중령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의족을 찬 중사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말해 뭣하겠습니까? 그는 그때 거기에 있었단 말입니다. 소수의 기병대만으로 가장 위험한 사냥을 끝내고 온 거지요. 문자 그대로의 영웅입니다.」 그는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 긴 시간을 함께한 사이는 아닌데도, 겨울에 대해 증언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 밖의 다른 채널에서도 겨울에 대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재방송이 많을 시간대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포칼립틱 디너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소개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메인 디시, 올레마에서 공수된 염장고기입니다. 사냥에서부터 보존처리에 이르기까지 한-겨-울 중령의 손길이 녹아있는, 더없이 사치스러운 식품이죠.」 겨울은 아까와는 다른 황당함을 느꼈다. 저게 왜 저기에?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요리사가 소금에 절인 사슴고기를 조리한다. 최대한 실력을 발휘해보지만, 애초에 재료가 좋지 못하니 맛이 좋을 리 없었다. 결과물을 스스로 맛본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끔찍한 맛입니다.」 “…….” 「하지만 동시에 생존의 맛이기도 합니다. 한겨울 중령이 얼마나 힘든 처지였을지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이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에겐 1만 달러를 지불할 가치가 있겠습니다.」 요리사는 진행자와 달리 겨울의 이름을 발음하는데 애를 먹지 않았다. 똑똑. 노크소리를 들은 겨울이 TV의 전원을 껐다. “들어오세요.” 조용히 들어서는 사람에겐 목소리가 없었다. 겨울은 오늘의 첫 면회인, 노인을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전보다 더 정정해진 노인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에야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사각사각 고운 글씨를 쓰는 소리.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말로요. 이토록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요. 좀 더 빨리 돌아오고 싶었는데, 마음처럼은 되지 않더라고요.” 강영순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반가움을 담아 긴 답변을 적었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요. 원한 적 없는 세상에 바란 적 없는 모습으로 던져져, 어쩔 수 없는 시련과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겪으면서도, 차마 포기할 순 없는 것들을 위해 모진 시간을 굽이굽이 이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원한 적 없는 세상에 바란 적 없는 모습. 장애인들을 대변하는 노인이 쓰는 말이라 더 무겁다. 바깥세상을 살다 온 겨울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노인은 글씨에 정성을 담았다. 「그래도 이렇게 몸 성히 돌아오셨으니 기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아울러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뇨. 오히려 죄송하네요. 해가 뜨기도 전에 뵙자고 해서. 일도 많고, 절 만나길 원하는 사람도 많다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늙으면 새벽잠이 줄어드는지라. 우선은 드려야 할 것부터 드리겠습니다.」 “드려야 할 것?” 「작은 대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일들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책자입니다. 두 분 부장님이 어련히 말씀드렸겠습니까마는, 검증이 필요한 경우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낮은 곳에서만 보이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겨울은 그녀가 내미는 여러 권의 스프링 노트를 받아들었다. 펼쳐보면, 내용은 글씨체만 정갈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적은 다음, 인물과 단체 별로 다시 정리해놓았다. 관련된 내용이 몇 권 몇 페이지에 있다는 주석도 자주 보인다. 노인 개인의 평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누구로부터 채록했는지까지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언뜻 보아도 지극히 객관적인 서술이었다. “이거, 정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겨울의 질문에, 노인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뒤쪽은 아직도 초벌입니다.」 「당신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마저 정리하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지요. 충분히 다듬은 뒤에 드리고 싶었으나, 지금이 가장 유용할 터라 우선은 미완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팔락팔락. 속독으로 페이지를 넘겨보는 겨울. 장애인들과 접접이 없는 부분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으나, 그마저도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내용을 적당히 뽑아서 영문으로 출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난민구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내용일 거예요. 송예경 씨도 음원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면서요?” 겨울은 이 이야기를 장연철에게 들었다. 동맹 내에서 진행 중인 수익사업들에 대한 이야기. 예전부터 목소리가 좋았던 송예경은, 알고 보니 젊은 시절에 무명가수로서 활동했단다. 평소 자주 부르던 노래가 난민구역을 취재하던 어느 기자의 눈에 띄어, 결국 온라인으로 음원을 등록하게 되었다고. 강영순 노인이 고개를 흔들며 글을 적었다. 「우선은 대장님의 도움이 되는 게 먼저입니다. 당장 크게 아쉬운 처지도 아니고요.」 “음……. 이제야 여쭤보는 거지만, 제가 없는 동안 힘들진 않으셨나요?” 「장 부장님이 워낙 꼼꼼하게 신경을 써주셔서 괜찮았습니다.」 좋은 신색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책자 속의 계절이 두 차례 바뀔 때까지 페이지를 넘기던 겨울은, 어디선가 한 번 접했던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캠벨 박사? 어쩐지 익숙한데. 이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책자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닥터 캠벨이라 불렸고, 중요해 보이는 사람으로 보여 날짜와 이름을 기록해두었다는 첨언 뿐. 몇 분간 기억을 더듬은 끝에, 겨울은 간신히 엘리야 캠벨 소령을 떠올렸다. # 326 [326화] #귀환 (9) 책자엔 퍼스트 네임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성(姓)만 같은 타인으로 보자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캠벨은 흔한 성씨지만, 그 중에서 박사라고 불리며 오염지역의 군사기지를 출입할 만 한 사람은 극히 일부일 것이었다. 물론 괜한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겨울은 자신의 직감을 좀 더 파고들어 보았다. 세쿼이아가 우거진 보존림에서 만났을 때, 보건서비스 부대 소속 엘리야 캠벨 소령의 목적은 산성아기의 샘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그의 임무는 표본 수집이다. 타고 다니던 수송기(V-22), 호출부호(Call sign) 호스피탈 나이너의 내부가 이동식 실험실처럼 개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캠벨 박사의 임무는 한동안 고정되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담당자가 교체되었을 확률은 낮은 편이다. 강영순 노인의 책자에 적힌 목격 날짜는 겨울과의 만남으로부터 고작 한 달 보름가량이 흐른 시점이었다. 만약 그의 방문이 임무의 일부였다면? ‘포트 로버츠에 수집할 표본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을 기점으로 여기서도 적극적인 군사작전이 전개되었다. 고로 캠벨은 기지 외부의 포획물을 회수하러 들른 것일 수도 있다. 또 그렇게 온 김에 난민구역을 둘러보았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겨울동맹은 이미 미국 전역에 걸쳐 인지도가 있었으므로. 하지만 겨울은 어떤 의심이 들었고, 여기엔 확인해볼 가치가 있었다. 책자의 기록에 항공기의 이착륙까지는 포함되어있지 않아 아쉬웠다. 그게 있었다면 다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다 확실하게 판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각사각. 강영순 노인이 글씨를 쓴다. 난민구역에 흔한 하급 재생지의 거친 질감이 오히려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찢어지기 쉽다는 게 흠이지만. 「뭔가 고민이 있으십니까?」 질문을 읽고 조금 더 생각한 겨울이 노인의 양해를 구했다. “그 노트, 잠시 빌려주시겠어요?” 노인은 선선히 내주었다. 그리고 무언으로 펜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아뇨. 괜찮아요. 펜은 제 걸 쓸 테니.” 겨울은 그림을 그렸다. 비록 관련 기술이 없어 문외한의 부족한 스케치가 되었으나, 그리려는 대상, 호스피탈 나이너의 특징이 워낙 뚜렷하여 알아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겨울이 아는 한 미군이 운용하는 수송기 가운데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기종은 오직 하나뿐이다. 적어도 다른 기체와 혼동할 일은 없다는 말이었다. 그림 아래엔 캠벨 박사가 목격된 날짜를 적었다. 공책을 돌려받은 노인은 페이지를 넘겨 질문을 적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양쪽 프로펠러가 직각으로 꺾이는 수송기요. 뜰 때는 헬리콥터처럼 뜨고 날 때는 평범한 비행기처럼 날죠. 아래의 날짜를 전후해서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주셨으면 해요. 특히 이 캠벨 박사를 봤다는 사람에겐 혹시 풀 네임을 듣지 못했는가도 확인해주세요.” 겨울이 책자의 해당 대목을 짚어보이자, 그것을 쓴 사람임과 동시에 검토 과정에서 몇 번은 더 읽었을 노인이 쉽게 머리를 끄덕였다. 다시 움직이는 펜. 「중요한 사람인가보군요.」 “제 짐작이 맞다면 상당히 예민한 사안인데, 래플린 준장님께 확인하기 전에 가급적 확신을 얻고 싶네요. 제 짐작이 사실일 경우엔 얼버무릴 가능성이 높아서…….” 「알겠습니다. 허나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그 기록이 간단한 건 그저 우연한 마주침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활주로가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장애인들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네.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부탁이니까. 다른 쪽으로도 알아볼 거예요. 누군가는 아는 사람이 있겠죠. 함구할 수도 있지만.” 확신이 있든 없든 시도는 해볼 것이다. 벽에 부딪히는가는 그 다음 문제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엘리야라는 이름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 선지자 엘리야. 기독교 문화권에선 베드로나 요한처럼 평범한 이름이지만, 미국식으로는 보통 일라이저(Elijah [iláidƷə])가 되어야 한다. 겨울의 임무부대에 곧잘 붙던 호출부호가 다윗으로서의 데이비드인 것처럼. 그러나 캠벨 소령은 명확하게 엘리야라고 발음했다.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끝에 가벼운 ㅎ발음이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철자가 아예 다를 순 있겠다. 한 번 의심을 품으면 별 거 아닌 무언가도 그럴듯해 보이기 쉬운지라, 겨울은 의심암귀를 경계했다.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강영순 노인이 쓰는 모든 문장에선 깊은 준비성이 묻어났다. 그녀의 시선에 비친 여러 사건과 사람들. 세월을 낭비하지 않은 노인의 견해는 겨울에게도 유익한 것이었다. 그중엔 중국계 거류구의 상황에 대한 증언도 있었다. 언젠가 민완기는 리친젠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겠다고 공언했었고, 겨울이 없는 사이에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책자에선 아직 초고인 부분이라, 노인은 설명을 더하고자 했다. 「제가 보기엔 더 큰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겨울로선 민완기 본인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기 전이었다. 날짜가 날짜인지라. 그래도 강영순 노인의 견해를 먼저 읽는 게 나쁘진 않을 터였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 난민들 사이에서 삼합회의 위상은 예전의 성세를 넘어섰습니다. 자연히 흑사회의 주도권도 되찾았지요. 더불어 그때부터는 범죄조직의 이름을 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뀌지 않고선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다만 무엇을 얼마나 바꾸는가에 대해선 처음부터 갈등의 여지가 깊었습니다.」 “신기하네요. 여기까지 파악하고 계신다는 게. 장애인 분들의 눈과 귀가 거류구의 벽을 넘긴 어려웠을 텐데요.” 「여러 경로가 있었답니다. 우선은 그들 가운데 소위로 선발된 몇 사람이 민완기 부장님과 장연철 부장님을 부지런히 찾아왔었고, 다음으로 외부 작업에서 함께 일하는 중국 난민 노동자들의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쪽의 중국 사람들도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곧잘 털어놓는 편이었습니다. 그것이 돌고 돌아 전해지곤 했지요. 무엇보다, 군정청의 민정위원으로 일하는 장애인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우리 쪽의 중국 사람들이라면…….” 「그들도 본래는 삼합회였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대장님께서 거두셨다던 걸요?」 “아, 그 백지선 일파.” 「여담이지만, 덕분에 동맹으로 이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더더욱 그렇지요. 그래서 더 수월했던 면도 있습니다.」 일찍이 겨울이 보호했던 삼합회의 두 분파가 있었다. 리친젠은 골칫거리를 내보내는 심정으로 그들을 겨울에게 내주었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인력을 빌린 것으로 되어있을 터. 당시의 겨울에겐 이것이 안전장치였다. 여차하면 잘라내겠다는 암시였다. 고로 겨울이 없는 동안에도 두 분파, 화승화와 수방방 출신 집단이 함부로 행동하진 못했을 것이다. 규율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노인은 그들이 중국계 거류구에 자주 파견되었다고 썼다. 치안 보조원으로든, 다른 작업인력으로든. 즉 구획 너머의 사정들이 넘어올 길은 충분했던 셈이었다. 문답에 끊어졌던 글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우두머리인 리친젠은 겉으로만 깨끗하면 충분할 거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많이 자리 잡은 분배국에 대해 다른 거류구 난민들의 불만이 참 많았었지요. 실은 중국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차별을 했나봅니다.」 「이건 정황상의 추측입니다만, 리아이링 소위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고성이 오갔다는 말도 자주 들리고, 항상 표정이 어두웠고, 얼굴에 멍이 들어있었던 적도 있거니와, 아버지로 인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저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요.」 실제로 부분적으로는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래플린 준장의 악감정이 전적으로 양용빈 상장의 책임만은 아닐 테니까. 따라서 리아이링은 그 자신의 경력 이상으로 아버지, 그리고 그들만의 작은 사회에 발목을 잡힌 처지다. 의리니 믿음이니, 구색만 그럴듯한 낡은 족쇄에. ‘브래들리에선 앞날을 진지하게 걱정했었지.’ 다른 대안이 없어서 묶여있기는 하나,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면 답답하게 여길 만 했다. 「그 상황에서 민완기 부장님은 리친젠을 도와주었고, 장연철 부장님은 반대로 리 소위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드나드는 면면이 정해져있어 알기 쉬웠다는 첨언. 「동맹 사람들도 감쪽같이 속았지요. 두 분은 서로 사이가 나쁜 척을 하고 계셨으니까요.」 겨울이 곤란한 표정을 만들었다. “눈치 채셨나요?”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노인에게 맡겨둔 역할이 역할인 만큼. 답변으로 적히는 글씨가 살짝 흐트러진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몹시 재미있었답니다. 세상사가 책보다 흥미진진하구나 하여.」 강영순 노인은 마침표를 찍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엔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민완기와 비슷한 면이 존재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아까 보다 큰 계획의 일부라고 하셨던 건?” 질문을 받은 노인은 손을 잠시 주무른 뒤에 다시 펜을 잡았다. 「이 역시 작은 대장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견고한 하나가 아닙니다. 흔들리기 쉽고 흔들기도 쉽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을 원하는 대로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그 이상을 시도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아울러 나이든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리아이링 소위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이미 많은 것을 참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영순 노인은 불한당들을 보는 관점도 민완기와 흡사했다. 「리친젠 같은 무리가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다르지 않았겠지요. 권위가 강한 부모는 양육자로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권위에 집착하는 부모는 결코 좋은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 권위가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한 그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리 소위가 얼마나 합당한 대우를 받아왔겠습니까. 짐작컨대 그 내면에는 화가 나고 억울한 어린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민완기 부장님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셨겠지요. 현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은 긴 말을 읽고 미소를 만들었다. “민 부장님이나 장 부장님이 여기 계셨으면 꽤나 심란하셨을 거예요. 들키지 않게끔 주의하고 계셨을 텐데.” 창밖을 힐끗 본 노인이 빽빽해진 페이지를 넘겨 새 글을 적는다. 「해가 뜨려는지 동쪽 하늘이 밝습니다. 달리 드릴 말씀은 많으나 여유가 아쉽군요.」 끄덕이는 겨울. 몇 분 뒤엔 다음 면담 희망자가 문을 두드릴 것이었다. 사실 조금 전 문 밖에 누가 도착한 기척이 있었다. 앉기 전에 의자를 끄느라 드르륵 거리는 소리라든가. 겨울이 새지 않을 크기로 말했다. “아마 송예경 씨일 텐데, 난처하네요. 아직도 아기에게 이름이 없다고 해서.” 송예경은 말하자면 제3장의 지도자격인 사람이다. 민완기가 그렇게 되도록 밀어주기도 했다. 중구난방으로 갈라지는 것보다야 낫다면서. 혹은 그보다 해로운 인물이 입지를 얻을 여지도 우려했을 터였다. 그러나, 송예경이 마냥 긍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강영순 노인이 진지한 글을 적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전부터 예경 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허나 저보다는 작은 대장님께서 해주시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뭐죠?” 「플라톤의 말입니다만, 삶이란 얻기 위해 잃어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다른 걸 다 잃고도 얻어야 할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가 남긴 상처에 무너졌을 뿐이지요. 말로는 사람이 싫다 한들 마음 속 가장 깊은 어딘가에선 사람을 그리워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경 씨는 이미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헌데 이젠 자식에 대한 마음마저 잃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어도, 조만간 그리 될 테지요. 아이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 냉정함이 그 증거입니다.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전 남편에 대한 미움을 되새길 때마다 아이에 대한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그 남자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좀먹고 있는 건 아닌가.」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얻는 삶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실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정말로 포기해선 안 될 인연이 무엇인가. 예경 씨가 그것을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 327 [327화] #귀환 (10) 겨울은 노인이 쓴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전하려면 단순한 「암기」를 넘어서야 했고, 또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빼앗기를 좋아하고 베풀기엔 인색한 세상에서, 삶은 얻기 위해 잃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겨울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영순 노인은 고아한 필체로 인사를 남겼다. 겨울은 노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복도 대기석에 앉아있던 송예경은 일어서다 말고 멈칫 했다. 그러나 순간적인 망설임이었으며, 이내 겨울과 노인에게 번갈아 고개 숙였다. 새까만 머릿결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비누일지, 샴푸일지, 그녀에게선 인공적인 라벤더 향이 났다. ‘사람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네.’ 매력이 관계의 도구이기 때문일까? 화장에도 신경을 쓴 모습. 피부엔 혈색이 완연했고, 깨끗한 베이지색 셔츠를 입었으며, 깃을 열어둔 트렌치코트는 가슴께의 주머니를 하얀 눈꽃매듭으로 장식했다. 초라하고 앙상하여 난민의 전형이었던 첫인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많이 나아진 난민구역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말쑥함이었다. 한 파벌의 중심인물로서 누구에게도 얕보여선 안 될 입장인 만큼. 당연한 말이겠지만, 떠나간 남편에게 과시하려는 오기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겨울이 안쪽으로 손을 펼쳤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들어온 예경은 겨울이 앉기를 기다려 착석했다. 손을 모은 다소곳함이 복수에 한 맺힌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나, 행적을 보건대 속은 겉과 다를 것이었다. 그저 날 선 스스로가 일을 망칠까봐 경계하고 있을 뿐. 겨울은 가슴 속에 돌이 박힌 사람을 곧잘 알아보았다. 피차 아는 용건이 용건인지라, 송예경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우선, 사소한 일로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작은 대장님께든 다른 사람들에게든 면목이 없네요. 제 순서는 훨씬 더 나중이어도 상관없었는데…….” 겨울이 차분히 답했다. “아녜요. 어쨌든 약속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 대화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묻는다. “아기는 맡겨두고 오신 건가요?” “네.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안고 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자는 아이를 깨우기가 곤란해서……. 그리고 울음이라도 터트렸다간 어렵게 내주셨을 시간이 무의미하게 될 테니까요. 다행히, 평소부터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분들이 계셔서 안심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은연중에 암시되는 배경. 장연철이 증언하기를, 그녀가 처음 모으기 시작한 사람들이 바로 어려운 처지의 부모들이라 했다. 특히 역병이나 사고, 난민들 사이의 생존경쟁 등으로 반려를 잃은 이들. 가끔은 송예경 자신처럼 배우자가 도망간 경우도 있었고. 어린 자녀가 있다는 공감대에 힘입어 뭉쳤던 것이다. 사람을 모아 발언력을 얻은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도움을 제공하고, 그들의 다양한 중의(衆意)를 대변하면서. 비록 목적성 짙은 선의였을지언정, 그것은 행동하는 위선이기도 했다. 소외된 사람들 입장에선 행동하지 않는 선보다 낫다. 민완기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람 셋이 모이면 정치가 시작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송예경은 정치가가 되어있었다. 겨울이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먼저 이것부터……. 송 위원님. 장 부장님께 제 뜻은 전해 들으셨나요? 몇 개월 전에요.” 예경의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네.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실 순 없다고 하셨죠.” “기지로 돌아와 보니 대부모의 의미가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그것만 해도 무거운 의무인데, 다른 목적까지 있다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은 약속이라고 무시할 생각은 아니지만, 제가 주기로 했던 건 이름뿐이에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전 여기에 송 위원님의 책임도 있다고 들었네요.” “…….” “물론 한 아이의 잠재적인 보호자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능력만 충분하다면 보호자의 나이도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명예이기도 하죠. 하지만 제 위치가 위치잖아요? 그걸 이용하려고 하신 건 큰 잘못입니다. 저에게도, 아이에게도.” 예경이 영향력을 얻은 만큼 이름 잃은 아기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기다림에 더욱 많은 의미가 부여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듣는 내내 정물(靜物) 같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욕심이 지나쳐 폐를 끼쳤습니다. 수습하려고 했을 땐 이미 늦었더군요. 솔직히 화를 내셔도 할 말이 없다는 각오로 왔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거짓의 기미는 비치지 않는다. 겨울이 물었다. “그래도 여전히 제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길 바라세요?” “……예.” “어째서?” 잠시 시선을 낮췄던 예경이 가만히 묻는 말. “혹시 강영순 어르신께서 저에 대해 뭔가 하신 말씀이 있지 않으셨던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평소에……. 아니, 그냥 그럴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짚이는 구석이 있으나 들려주기는 사적인, 그런 것인가 보다. 장애인들의 대변자와 제3당의 대표 사이엔 깊은 친교가 있을 법 했다. 겨울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온전한 자신의 조언으로 각색하기도 어려울 노릇이었고. 그저 같은 마음임을 밝히는 것으로 족하다. 세월이 깃든 충고와 염려를 들으며, 예경은 다시금 눈 감은 정물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의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눈을 뜨고 스스로의 미혹(迷惑)을 인정했다. “예. 저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제 속에 그런 갈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되새길 때마다 아이에 대한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라.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겠네요. 강 어르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렇다면 역시 직접 이름을 짓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아뇨.” 송예경은 쓴 것을 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제가 지은 이름으로 밝히더라도, 아이에게만은 한겨울 중령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게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고요.” “이유가 궁금하네요.”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꼭 대부가 되어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당신처럼 훌륭한 사람에게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겐 작은 위안이 될 테니까요. 중령님을 특별히 더 존경할 가능성도 높아질 거고요.” 명목상의 대부가 아니라 한들 심리적으로는 그 등가물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말을 잇는 예경의 안색에 짙은 그늘이 스쳤다. “제가 어머니로서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중령님 정도의 롤 모델이 있다면 아이가 비뚤게 자랄 확률이 조금이나마 낮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번엔 겨울이 한숨을 쉴 차례였다.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없으시다고요?” 한숨에 꾸밈은 없었다. 자라난 배경이 배경인지라. 예경이 답한다. “사랑하지만, 힘듭니다. 제 아이인 동시에 전 남편의 핏줄이기도 한걸요. 자라는 아이에게서 그를 닮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면……그때도 과연 변함없이 사랑해줄 수 있을는지……지금도 언뜻언뜻 그 사람의 얼굴이 겹쳐지는데…….” 그래서 더 겨울을 대부로 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자신에게 확신이 없어, 자신의 지위가 어찌 되든 결코 무시하지 못할 감시자로서 겨울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어지는 고백. “제가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것도 반쯤은 이것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끝장내고 나면, 그러면 비로소 나만의 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있거든요.” “송 위원님.” 심란해진 겨울이 자세를 고쳤다. “제가 기지사령이 되면, 과거에 잘못이 있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정리할 거예요. 위원님의 전 남편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걸로 미움을 정리하실 순 없겠어요?” 예경이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가정을 깬 대가라고 해봐야 위자료와 양육비밖에 더 되나요?” “…….” “가장 어려울 때 아내와 자식을 버린 인간의 벌 치고는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사람은 우리를 죽을 위기에 내버려뒀어요. 중령님이 안 계셨으면 정말로 죽었을 확률이 높고요……. 전 그 인간이 차라리 죽고 싶어질 정도의 궁지로 몰아넣을 거예요. 물론 합법적인 수단들을 이용해서요.” “그러다가 당신이 잘못되면요? 막말로 눈이 뒤집혀서 칼부림을 할 수도 있는 건데. 아이는 무슨 잘못이고요?” “그건…….” “미워하는 마음을 놓고 새롭게 시작하면 안 될까요? 난 동맹이 만들어질 때 했던 약속을 지켰어요. 이제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사람 하나로 인해서 당신과 아이 둘 다 불행해질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나이만 따지면 유라와 큰 차이가 없는 송예경이었다. 진심이 깊은 설득이었으나, 뜸을 들이던 예경은 끝내 사나우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작은 대장님. 저도 머리로는 그걸 알아요.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이라는 게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사람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 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더 죄송하네요. 대장님께서 아무리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셔도, 거기엔 예전부터 쌓인 감정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게 바로 사람인걸요. 새 부대에 담을 새 술을 원하신다면……저처럼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쳐내시는 편이 나아요. 적어도 저만은, 그렇게 하시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송예경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겨울은 별빛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이는 분노가 되기 이전의 분노, 슬픔이 되기 이전의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래. 결국 여기서도 물 밖으로 헤엄칠 물고기는 없는 거겠지.’ 사후에 꾸기에도 너무 어려운 꿈이었던 모양이다. 겨울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알겠습니다. 더는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그래도 이 대화를 잊지는 말아주세요.” 아이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부탁이었다. “네…….” 조용히 눈길을 떨어뜨리는 예경. 겨울이 말했다. “아이 이름을 정해드리죠. 미국식과 한국식 중 어느 쪽이 좋을까요?” 어느 쪽이든 일장일단이 있었고, 준비된 이름도 있었다. 기실 겨울이 직접 짓지는 않았으되, 장연철이 조언을 구하여 취합한 것들 가운데 좋은 느낌으로 선택한 것이기는 했다. 어쨌든 송예경이 원하는 건 겨울이 줬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 그녀는 의외로 즉시 대답했다. “한국식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에 겨울은 한자로 된 두 개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뜻이 마음에 들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이 발음하기에 쉬운 이름이었다. 허나 예경은 여기서도 겨울에게 선택을 맡겼다. “중령님께서 골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규현(奎炫)으로.” 뜻풀이를 본 어머니가 따스하게 웃었다. “별이 비추다……. 멋진 이름이군요.”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갈무리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보다 더 정중히 인사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최소한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절대로, 절대로 중령님을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이는 곧 한 파벌의 리더로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예경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상당한 만큼,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아이의 대부 역할을 거부했을지언정, 평소에 정성을 다하면 예경 본인이 잘못되었을 때 모르는 척 하진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인 것이다. 그녀를 배웅한 겨울은 이후 몇 건의 면회를 더 소화했다. 그리고 마지막 면회를 조금 이르게 끝낸 후에는 험비의 핸들을 잡았다. 식전에 다녀올 곳이 있었던 까닭이다. 비록 면허가 없었고 탑승 규정에도 위배되었으나, 이제 와서 자격을 따져가며 겨울을 제지할 사람은 기지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운전 경험도 충분했다. 운전은 어느 검문소에서 막혔다. 불투명한 보안경을 낀 헌병장교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안내했다. “죄송하지만 이 거류구는 기지사령의 허가 없인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현재 업무대행을 맡고 있고, 이제 곧 사령으로 취임하는데도?” “그렇……습니다. 규정은 규정입니다.” 헌병장교는 은근히 개방된 「위협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원칙을 준수하는 훌륭한 태도라고 해도 좋겠으나, 겨울은 그의 계급과 장소의 위화감에 주목했다. ‘중위가 이런 곳에 고정 배치될 필요는 없지.’ 여기는 다름 아닌 순복음성도회의 자치 구역이었다. 종교적인 이유, 부적절한 사상의 확산 방지, 폭동 우려, 난민들의 요청 등으로 자치를 허락했다는데, 사실 그 설명도 파고들어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또한 귀를 기울여도 철조망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겨울의 청각에 강화보정이 붙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잖이 기이한 분위기라 해야 할 것이다. “좋아요. 규정이 그렇다면야.” 초소의 배치를 살핀 겨울이 물러나자 헌병 중위가 긴장을 풀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수고해요.” 차를 돌린 겨울은, 한 손으로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드렸다. 강영순 노인에게 했던 부탁을 다시 여러 사람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 328 [328화] #귀환 (11) 회신은 오전 일과가 시작될 즈음에 몰려서 돌아왔다. 강영순 노인으로부터는 소득이 없었지만, 장연철 쪽에서 다수의 증언을 확보했다. 캠벨 박사가 목격된 날짜를 전후하여 활주로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해당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 대부분이 특이한 형상의 수송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 부장에게 보낸 메시지엔 이미지를 첨부했기에 혼동의 여지는 없었다. 심증을 굳힌 겨울은 곧바로 래플린 준장과 독대하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오늘은 정기 브리핑이 예정된 날이었다. 방역전쟁의 전반적인 상황 및 주요 정보들을 공유하기 위한 자리. 브리핑의 절반은 봉쇄사령부에서 원격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미 본토에서 축출되었다고는 해도, 국경 이남의 변종들은 여전히 중대한 안보위협이었다. 그러나 회의실의 공기는 가벼웠다. 마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 같은 분위기. 사실 겨울도 이곳에서만큼은 지연된 종말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까지와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각지의 소탕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른 현재, 역병의 위협을 피부로 느낄 이들은 최전선에 배치된 장병들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육군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해군의 부담은 여전하고, 공군도 중미 지역의 주요 경로마다 맹렬한 폭격을 퍼붓는 중이니. 정각을 10분 앞두고 유라가 입실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머금고 들어온 그녀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겨울을 발견하곤 한결 더 밝아졌다. “앗. 대장님, 옆자리 비었어요? 제가 앉아도 돼요?” “네.” 겨울이 끄덕였다. 자리는 정해져있지 않다. 그저 부대별로 느슨하게 모여 있을 뿐. “아하.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좋네요.” 좋아라 하며 착석하는 유라를 일부 장교들이 조심스레 힐끗거렸다. 대개는 이성적인 관심들. 기울어진 성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금도, 육군 전투보직에 임관한 여성장교는 매우 드문 편이었다. 하물며 유라는 전공이 높기까지 하다.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닐지언정, 남자라면 누구든 차별화된 매력을 느낄 법 했다. 단, 모든 눈길이 우호적이진 않았다. “……?”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을 느낀 유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엔 못마땅한 얼굴의 진석이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와 있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울에게 다가오던 그는, 유라가 끼어든 시점에서 우뚝 멈춰선 상태였다. 거리도 어중간하다. 한편 유라는 유라대로 좌우와 앞뒤를 확인했다. 혹시 달리 볼 사람이 있는가 싶은 생각에. 그러나 그녀 외엔 겨울 뿐이었다. 결국 유라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 왜 그러세요, 박 중위님? 혹시 여기 앉고 싶으셨어요? 대장님 옆이라면 저쪽도 비었는데…….” 진석으로부터는 대답이 없다. 어딘가 미련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서있을 따름. 영문을 모르던 유라는 결국 뚱한 표정을 짓고 만다. “님. 할 말 없음 저리 가시져.” 여기에 내쫓는 손짓까지 곁들였다. 훠이, 하고. 헌데 진석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가란다고 정말로 간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겨울이 유라에게 물었다. “사석에선 전보다 더 친해졌나 봐요?” 유라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네에, 뭐. 여기 와서는 소대장들끼리 술을 마신 적도 있고……. 요셉이나 소민이는 애들이 너무 긴장해서 거의 들러리 수준이었지만요. 암튼, 취해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박진석 중위도 신경을 좀 쓰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하고 껄끄러웠던 일들이라든가, 또 본인의 이미지라든가……. 하긴, 저 같아도 별명이 빡친석이면 찜찜하긴 하겠더라고요.” 자그맣게 키득거린 그녀의 어조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혹시 본인에게 서운한 게 있으면 잊어달라고 하던데요? 자기도 공평하게 잊어주겠다고.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지만 그러자고 했어요. 저는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이거든요.” 말이 들렸는지, 저쪽에서 진석이 살짝 인상을 쓰는 게 보인다. 그는 아마도 차기 중대장 문제를 다시 묻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상의 휴가를 얻은 중대원들과 달리, 겨울은 워낙 바빠진 사람이었으므로. 이럴 때 이외에 만나려면 따로 면담 요청을 넣어야 한다. 어쨌든 서로가 서로의 윗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지금이었다. 예전에도 서로 능력만은 확실히 인정하는 사이였으나, 새삼 묵은 감정을 풀어놓는다고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방역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적을 상대로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전쟁이었다면 개시 전까지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했을 대형 작전도 아무렇지 않게 공개되곤 했다. 명백한 해방과 멧돼지 사냥 당시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형 스크린 속의 사령부 작전참모가 위성지도를 띄워놓고 설명했다. 「이번 컨티넨탈 디바이드(Continental Divide : 대륙 분리) 작전의 1단계는 해병대가 단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먼저 제3해병원정군이 카르타헤나에 위장 상륙을 실시하여 적의 주의와 전력을 분산시킨다. 다음, 충분한 규모의 변종집단이 유인에 걸려든 시점에서 주목표인 파나마 운하 점령을 실시한다. 제1해병원정군이 파나마 시티 시가지에 면한 남쪽 입구를, 제2해병원정군이 북쪽 입구의 포트 데이비스를 확보할 것이다.」 회의실이 잠시 술렁거렸다. 파나마 진공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으나, 착수하는 시점이 너무 이른 탓이다. 겨울의 소감 역시 그러했다. ‘빨라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다음이라고 예상했는데.’ 때마침 작전참모가 예정 일자를 언급한다. 「해병대 주공의 전개는 아마도 내년 초가 되겠지만, 유인을 담당할 제3해병원정군만큼은 10월 1일을 기하여 공세에 돌입한다. 적을 끌어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곱씹은 겨울은 대통령, 또는 봉쇄사령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미국이 현 상황에 안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로 정권이 바뀌기 전에 파나마 진공을 기정사실화해두려는 모양이었다. 세간에선 고립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현 전선을 고수하며 힘을 기르자는 주장. 그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언제까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작전의 2단계에선 내륙 방어선 구축의 사전 준비로서 준설선과 해군의 전투함들이 가툰 호수 및 내륙수로로 진입한다. 이후 마지막 단계엔 대규모 폭격으로 주요 시가지를 파괴하고 육군의 증원을 투입, 간선도로를 요새화하여 운하의 동서를 완벽하게 단절시키는 것이다.」 투입 예정인 함선들 중엔 지난 시대의 전함도 존재했다. USS 미주리. 본디 92년에 퇴역하여 박물관으로 전용된 함선이었으되, 개장을 거쳐 현역으로 복귀시켰다고. 겨울이 보기엔 그 거대함과 견고함에 의의가 있었다. 본토에서 외따로 떨어져 고립될 병사들에겐 실제 성능 이상의 안정감을 주지 않겠는가. ‘유사시에 지상 병력을 수용하기에도 넉넉하겠고.’ 이렇듯 작전은 벌써 잠정적인 참가 부대와 함선 목록이 작성되어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하루 이틀 만에 나온 구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멧돼지 사냥이 성공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부터 기획에 들어갔을 것이다. “와…….” 그 점을 깨달았는지, 유라가 복잡한 탄성을 흘렸다. 언뜻 긴장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브리핑 전까지 이완되어있던 다른 장교들의 반응 또한 동일했다. 육군이 동원되려면 최소 수 개월 이상의 여유가 남아있는데도 그렇다. 이것이 브리핑의 또 다른 목적이었을 터였다. 아직 전쟁 중임을 상기시키는 것. 브리핑이 끝났을 때 유라와 진석 모두 겨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으나, 겨울에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준장은 어디 있지?’ 처음엔 분명 회의실에 있었건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지휘하는 여단전투단의 주요 참모들도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운 상태. 컨티넨탈 디바이드 작전의 무게감 때문에 도중에 퇴실하는 모습을 놓친 것 같다. 겨울은 래플린 준장과 가까이 앉아있던 여단전투단 소속 중대장에게 물었다. “장군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요?” “글쎄요. 아까 전화를 받으러 나가시더군요. 그 후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인사를 남기고 나선 겨울은, 지휘통제실에 이르러 마침내 참모들과 대화중인 준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여러 예상을 했지만 의외로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래플린 준장이 겨울과 같은 계급의 작전참모에게 묻는다. “그래서, 수송대의 최종적인 피해는?” “인명피해는 없고, 다만 추돌로 인한 차량손상이 좀 있다고 합니다. 변종들은 기동타격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수송인력과 자체 호위 병력이 모두 섬멸했습니다. 도주한 개체는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사전에 각서를 받았다곤 해도,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간 골치 아파지거든. 다른 사람들이 못하겠다고 때려 칠 수도 있고. 항공정찰기록과 위성사진은 확인했나?” “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가? 이 근방엔 더 이상 변종집단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이것을 보십시오. 샌 미구엘 동쪽 산간에 매복해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전참모가 지도 위에 사진을 올려놨다. 피부 검은 준장이 턱을 쓰다듬는다. “이상한 걸……. 트로이의 목마라고 보기엔 너무 어설펐어.” “혹시 대사억제 상태로 방치된 녀석들이 아니겠습니까?” “방치?” “예. 기습을 위해 준비된 집단이었지만, 신호를 보낼 개체……높은 확률로 트릭스터가 되겠군요. 아무튼 지휘관급 개체가 사망하거나, 혹은 공격을 걸 틈도 없이 달아나면서 남겨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흐음. 나타난 놈들이 거의 아사 직전으로 보였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설득력이 있군. 그럴 듯 해. 경계를 강화해야겠어.” “예. 봉쇄사령부에 보고했습니다.” “잘 했네. 곧 조치사항이 내려오겠군……. 비슷한 처지인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놈들 사이에서 새로운 특수변종이 출현할 수도 있고 말이야. 조심해서 나쁠 것 없겠지.” 아무래도 군수국이 고용한 민간인 수송업자들이 변종의 공격에 노출되었던 모양이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린 겨울이 준장에게 경례했다. “Sir.” “오, 한 중령. 브리핑이 벌써 끝났나?” 몰두하고 있던 래플린 준장은 이제야 겨울을 눈치 채고 마주 경례했다. 손을 내린 그는 시계를 보고 갸우뚱 했다. “인계업무를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20분쯤 남았는데? 잠깐이라도 쉬다 오지 그러나. 업무 외적으로도 굉장히 바쁘다고 들었네만. 게다가 나도 숨 돌릴 틈이 필요해.” “긴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곤란한 내용인가?” “네.” “흠.” 주위를 둘러보는 준장. 작전참모는 용건이 끝났다는 의미로 한 발짝 물러나 보인다. 입술을 구부리던 준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사무실로 가세.” 이동은 금방이었다. 장군의 집무실은 지휘통제실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나중에 들어선 겨울이 문을 닫는 틈에, 래플린 준장이 검지를 세워보였다. “아. 잠시만 기다려보게나.” 그는 오디오의 트레이를 열어 CD 하나를 집어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볼륨을 조절하니, 잠깐 지직 거린 후 첫 번째 트랙이 재생된다. 도입부의 기타 연주에 이어지는 노래는 겨울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준장은 씩 웃으며 겨울에게 CD 케이스를 보여주었다. “귀관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주문했네. 배송에 한 달이나 걸리더군……. 노래도 노래인데, 앨범 재킷이 참 잘 뽑혔단 말이야.” 사진 속의 송예경은 포대기로 아기를 등에 업고,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는 모습이었다. 정적이고 조용한 분위기. 내리깐 눈길에서 슬픔과 고단함이 묻어난다. ‘종군기자의 소개로 데뷔했다더니…….’ 래플린의 말처럼, 그녀가 가수로서 얼마간 이름을 얻은 데엔 노래 이상으로 사진의 위력이 컸을 듯 했다. 물론 시민들의 겨울동맹에 대한 관심도 한 몫 했겠고. 의자에 앉은 준장이 겨울에게도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자, 이제 누가 엿듣기는 어려울 거야. 애초에 그럴 사람도 없겠지만, 밖으로 새면 안 될 이야기라고 했으니……. 여하간 말해보게.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뭔가?” “한국계 난민 거류구 중 종교적인 이유로 자치가 허용된 곳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뭔가를 알고 계십니까?” “허.” 겨울의 말에 곤혹스러워하는 준장.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느리게 반문했다. “이거 놀랍군. 왜 그런 의심을 하게 됐지?” “그럴 만 한 정황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들어볼 수 있겠나?” 이렇게 질문하는 래플린은 결코 능란한 배우가 못 되었다. 적어도 겨울의 눈엔 숨기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은 선명한 낭패감이었으되, 적대감은 묻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박태선 목사의 기적을 말하던 소녀 황보 에스더로부터 시작해서, 에이프릴 퍼시픽, 순복음 성도회의 종교적 자치구역, 엘리야 캠벨 소령에 이르는 간접적인 정황들을. 다 듣고 난 래플린 준장은, 겨울을 한참 응시한 끝에 떫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가 표정관리에 실패했음을 깨달은 눈치였다. “이거야 원……. 아예 확신을 하고 왔군 그래.” “부정은 안 하시는군요. 솔직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끝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죠.” 빈말은 아니었다. 예컨대, 겨울에겐 지금도 언론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대선을 앞둔 지금 보도관제가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보기도 힘들었다. 고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편 겨울을 아예 제거해버릴 작정을 하기도 곤란하다. 단순한 실종이나 의문사로 취급하진 못할 것이다. “……쯧. 진실을 밝히는 게 항상 유익한 건 아닌데 말이야.” 포기한 준장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혀를 찬다. “내 딴에는 안 들키게 잘 해내는 중이라고 여겼건만. 유감이군. 귀관이 D.C로 떠날 때까지만 모르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즉 겨울이 워싱턴 D.C에 다녀오는 사이, 순복음 성도회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질 예정이었다는 암시였다. 말하는 준장의 표정에도 불쾌감이 떠올랐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딱히 아는 게 없는 처지야. 거긴 한참 전부터 장막이 쳐져 있었으니까. 처음엔 「진정한 애국자들」 관련해서 FBI 수사관들이 방문했는데, 나중엔 보건서비스부대와 국토안보부, 질병통제본부 관계자들이 밀려오지 않겠나?” “그렇습니까?”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책임자를 불러주지. 자네가 말했던 캠벨 박사 말이야. 귀관의 입을 막거나 설득을 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닌 것 같군.” 위에서 알아서 할 테지. 래플린 준장이 전화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 329 [329화] #귀환 (12) 준장의 통화는 상대가 여러 번 바뀌었다. 갈수록 직급이 올라가는 듯 했다. 몇 번은 편히 말하던 준장이 나중엔 격식을 갖췄기 때문이다. 건너편이 간혹 침묵할 때도 있었지만, 비밀스러운 과업이 노출된 사람들 치고 간결하기 짝이 없는 반응들이었다. 겨울은 이 일의 관계자들에게 지금 같은 사태에 대비한 시나리오가 갖춰져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래. 대응 매뉴얼이 존재한다고 봐야겠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처음엔 순복음성도회가 포트 로버츠에 남아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정부 주도 하에 생체실험이 진행된 거라면, 다음 기지 책임자로 겨울이 내정된 시점에서 실험 장소를 변경했어야 정상 아닌가. 최선은 아예 겨울의 보직을 달리 하는 것이고. 단순한 행정착오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서로 다른 기관들의 공조는 비효율적이기 쉽다. 허나 그 경우엔 차선책으로서 부대이동 및 부임시기를 지연시켰어야 자연스럽다. 갑작스러우나마 훈련명령을 내리는 것도 미봉책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실험 현장에서 떨어트려 놓는 것이 급선무일 테니까. 그러나 당국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까진 못하더라도, 경계해야 마땅할 비효율이었다. 그렇다고 겨울마저 끌어들이기는 더더욱 무리수였다. 관계당국이 겨울의 성향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무수한 보고서들이 올라갔을 것이고, 그 가운데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을 기록한 FBI 특수감독관의 보고서도 존재할 터. 생체실험과 관련하여 고난을 겪은 사람을 생체실험의 관계자로 영입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물며 겨울에겐 다른 쓸모도 많았다. 본인의 영향력을 제외하더라도,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치워버리기 부담스럽다는 의미.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이었다. 고로 겨울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실험을 진행한 주체가 내 부임을 사전에 알지 못했을 경우…….’ 다시 말해, 진정한 애국자들의 잔당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조직이 정부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실험을 진행했을 경우였다. 이땐 래플린 준장 또한 그들과 한패가 된다. 어쩌면 방금 전화로 주고받은 대화에 미리 정해둔 어떤 신호가 있어, 보건서비스부대의 책임자 대신 곧 중무장한 기동타격대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겨울을 사살하긴 부담스러울지언정, 대책이 마련되기까지 억류할 수는 있다. 나중의 일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서. 그래서 겨울은 몇 가지 보험을 들어두고 왔다. 준장을 의도적으로 자극한 것도 같은 맥락. 나름의 유추를 통해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래플린 준장은 진한 쓴웃음을 머금었다. “참 조심스러운 태도로군. 귀관 입장에선 군 내부 사조직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상황인가……. 하기사, 최근 육군 내에서 불미스러운 우려들이 제기되고 있긴 하지. 규모가 워낙 커져서 역설적으로 쓸 만 한 사람이 드물어진지라, 2차 대전 때나 있었다던 장교간 스폰서 관행도 부활할 조짐이 보이고…….” 그는 고개를 흔들며 넌더리를 냈다. “이거야 원. 나도 참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고 있군. 이해는 하지만 조금 섭섭한데……. 잠시만 기다리게. 캠벨 소령이 20분 내로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날아온다고 보기엔 미묘한 시간이다. 겨울이 물었다. “그가 기지 안에 있습니까?” “근 한 달 내로 떠난 적이 없지. 같이 올 국토안보부 사람도 그렇고. 사실 상주인원이 꽤 되는 편이야. 구체적인 숫자는 불명이지만, 들어가는 보급품의 양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 못해도 마흔 이상일까?……입맛들이 고급인지 간편식(Heat and serve)은 안 먹더군.” 사소한 식단마저 파악할 정도의 관심은 있었으되, 어디까지나 기지사령으로서의 책임이었을 뿐 깊이 연루되는 일은 피해왔다는 말 속의 말. 겨울이 다시 질문했다. “Sir.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으십니까? 분명 부담감이 있으셨을 겁니다.” 망설이던 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별을 달고 싶었어. 이제 막 별을 달았는데 괜한 말썽으로 옷을 벗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이건 내 직무 밖의 일이었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협조를 요청받았으니까……. 귀관이라면 내가 여기까지 털어놓는 이유를 짐작할 거야.” 그의 말마따나 장군은 정치적인 자리였고, 그의 입장에서 겨울의 정치적인 가치는 일개 중령 이상으로 느껴질 것이었다. 한편으론 장군 진급을 위해 부당한 연줄을 이용한 건 아니라는 설명이기도 했다. 대화가 끊어진 틈에 오디오에선 새로운 트랙이 흘러나왔다. 송예경의 기타 연주엔 이렇다 할 기교가 묻어나지 않았으나, 클래식 기타 특유의 따뜻한 음색은 그녀의 노래와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단조롭게 뜯는 나일론 현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다리는 시간, 턱을 괴고 감상하던 래플린 준장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는가?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다고 하네. 전 세계의 산악인들이 수십 년에 걸쳐 버리고 간 식량과 텐트, 그 외의 각종 산악용품들로 말이야. 아, 배설물도 있다지. 거긴 뭔가가 썩어 없어지기엔 너무 추운 장소잖나.” 겨울은 속으로 갸우뚱 하며 대답했다. “네.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등반한다고 하면, 남들이 보기엔 무척이나 숭고하면서도 위대한 도전 같지만……. 실상은 그 더러운 무더기를 향해 올라가는 꼴 아닌가. 올라간 뒤엔 본인도 불필요하거나 부담스러워진 짐들을 던져버리지. 그런데도 내려와서는 다들 고상한 척만 하고, 세간에서도 영웅 취급을 해준단 말이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왔다면서.” “……그렇군요.” “그 덕분에 봉우리는 사람이 오를 때마다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조금씩 높아지기까지 해. 쓰레기 위에 만년설이 쌓이고, 그 위에 다시 쓰레기가 쌓이니까. 그걸 치우기 위한 비용을 받기로 하니 이번엔 몰래 등정하려는 사람이 늘었고……그리고 그렇게 올라가다가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가지. 불현듯 드는 생각인데, 사람 사는 세상이 딱 이렇지 않은가?” “……” “사람은 그래도 올라가고 싶은 거야.” “Sir. 정상에서 쓰레기를 지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렴. 상대적으로 드물어서 문제지만.” 준장은 설익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시 음반의 몇 트랙이 흐른 뒤에, 엔진 배기음 하나가 가까운 곳에서 정지했다. 겨울은 곧 겹쳐 울리는 군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복도에 이르자 오히려 래플린 준장이 더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내선을 연결한 참모가 그들의 정체를 전달해주었다. 점잖은 노크 뒤에, 실내에 두 사람이 들어온다. 문 밖에는 헌병 둘이 대기했다. ‘역시 모르는 얼굴이네.’ 캠벨이야 기억하고 있으나, 국토안보부 관계자 쪽은 겨울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전에 칼파인 5 기지에서 만났던 브록 헌트였다면 신원이 확실했을 것인데. 서로 경례를 주고받은 뒤, 그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겨울 중령. 국토안보부 방역보안사무국의 캘리포니아 중부 군정청 지부장, 애쉬튼 C. 웨스트입니다.” 래플린 준장은 캠벨을 책임자라고 했으나, 느낌상 보안 문제에 있어선 웨스트 지부장이 권한을 행사하는 듯 하다. 캠벨은 그를 힐끔거릴 뿐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겨울의 좌측 정면에 착석한 웨스트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거류구 내의 생체실험을 의심하고 계신다고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진정한 애국자들」의 선례가 있잖습니까?” “타당하군요. 저희도 그 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 왔지요.” 사무적으로 끄덕인 그는 휴대한 가방으로부터 어떤 서식을 꺼내놓았다. 살펴보니 비밀유지서약서인데, 한 장이 아니었다. 래플린 준장이 헛기침을 한다. “지부장. 나는 이제 비켜주는 게 좋지 않겠소?” “아뇨. 어차피 장군께서 떠나시기 전엔 받아둬야 할 서명이었습니다. 여기서 뭔가가 있었다는 식으로 어설프게 아는 것이 아예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면 덜 위험하다고? 그만큼 떳떳하다는 거요?” “예. 이틀 전에야 조사를 완료했습니다만, 적어도 우리 쪽의 잘못은 없습니다.” 웨스트 지부장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서약서에 머무른다. 서명을 받기 전에, 또 서명을 받기 위해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를 헤아리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굳이 따지자면 진정한 애국자들의 소행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정부에 있기는 하지요. 조직 관리에 실패했잖습니까. 그러나 그 정신병자들 역시 이번 일에 있어서는 간접적인 조력자에 불과했습니다. 광신도들이 그들의 믿음과 질병을 함께 전파하는 걸 돕고, 그들을 연구했을 뿐이었더군요. 물론 그 연구가 매우 비윤리적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믿음과 질병을 함께 전파하다니? 그들 사이에 뭐 모겔론스라도 돌았다는 거요?” “비슷합니다.” 간단한 긍정. 래플린 준장은 몇 초 뒤에야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허가된 수준 이상을 말씀드린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서명부터 하기는 부담스러우실 테니까요. 이제 두 분 모두 비밀엄수에 동의해주십시오. 국가안보와 관련된 1급 기밀인 만큼, 서명을 거부하시는 분께는 불이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웨스트 지부장은 검지 끝으로 테이블 위의 서식을 톡톡 두드려보였다. 안경테 위로 걸린 점잖은 시선이 겨울 쪽을 향한다. “이쯤은 중령님도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껏 한 말들을 보장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건 무의미했다. 심히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면 지금쯤 강제적인 억류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더 두고 봐야 확실하겠지만……. 날 설득할 자신이 있다고 봐야겠지. 진실로든, 거짓으로든.’ 서약서를 받는다고 완벽하게 안전해지는 건 아니잖은가. 펜을 꺼낸 겨울이 서류에 서명했다. 펜촉이 슥슥 긁히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던 래플린 준장도 결국은 자기 몫의 서약서에 서명을 기입했다. 서식을 거둔 웨스트가 서명을 확인한 후 사진을 찍고 가방에 갈무리했다. 아울러 눈길도 주지 않으며 하는 말. “캠벨 박사. 이제 말해도 좋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전문가인 당신이 낫겠지요.” 상기된 캠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언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겔론스의 부분적 면역자를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래플린 준장과 겨울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선물 포장을 뜯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러나 준장과 겨울, 어느 쪽의 반응도 그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부분적이라는 어감 때문에 놀라움도 어중간했던 것이다. 전문가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 지부장이 지적했다. “시간 끌지 말아요. 당신을 포함해, 여기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 네.” 미간을 좁히는 캠벨에게 겨울이 묻는다. “혹시 그 부분 면역자가 박태선 목사입니까?” “맞습니다. 팍 목사 그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부터 수상했으니까요.” 래플린 준장이 전화상에서 겨울의 모든 말들을 전하지 않았으므로, 캠벨은 무엇이 수상했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의 설명이 먼저였다. 겨울이 다시 질문했다. “부분적 면역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음……우선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조금 혐오스러운 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구한 캠벨이 태블릿을 꺼내어 특정 경로의 사진첩을 열었다. 그 안은, 피부가 다양하게 썩어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분류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중에 황보 에스더가 끼어있었다. 예전의 앳된 얼굴은 3분의 2만 남아있다. “진정한 애국자들의 행적을 쫓다가 격리된 환경의 이 환자들을 발견했을 때, 보건서비스부대에선 이 증상을 괴사성 근막염(Necrotizing fasciitis)의 일종으로 판단했습니다. 쉽게 말해 감염부위의 연조직……그러니까 근육을 제외한 나머지 생체조직부터 시체처럼 썩어 들어가는 질병인데, 치사율이 대단히 높은 반면 전염성은 낮은 게 일반적입니다. 원인은 박테리아 감염이지요. 대개 연쇄상구균 감염의 부작용으로서 나타납니다.” 캠벨이 태블릿의 스크린을 죽죽 밀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자들이 남긴 연구기록을 확보하고, 환자들의 조직 샘플을 검사한 시점에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증상은 모겔론스에 의한 면역거부반응이었던 겁니다. 환자들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가, 진행 양상도 차이가 있어서 눈치 채기 힘들었을 뿐이죠.” 순간적으로 에이프릴 퍼시픽 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경우인가 생각한 겨울이었으나, 그랬다면 부분적 면역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캠벨의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부터가 다르기도 했다. 래플린 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하오? 아무리 봐도 변종들과는 닮은 구석이 없는데…….” 캠벨이 긍정한다. “이들을 감염시킨 게 정상적인 모겔론스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모겔론스가 아니다?” “예. 이 사람들은 감염된 상태인 부분 면역자……아까 한 중령님이 언급하셨던 사이비 교주, 팍 목사 말입니다. 이 사람의 피를 물에 희석시켜서 성수랍시고 퍼먹는 바람에 간접적으로 감염된 겁니다. 팍 목사는 모겔론스 복합체를 구성하는 병원체 중 하나에 대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거든요.” “…….” “이 인간도 진술을 받아보니 참 딱한 얼간이더군요. 모국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변종에게 물렸다는 겁니다. 헌데 상처는 놀라울 만큼 빨리 아물어 버리고, 괴물로 변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기운이 넘치니, 결국 자기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어버리게 된 거지요. 그러다 뒤늦게 살이 썩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고부터는 더럭 겁이 나서 정신을 차렸다는데…….” 캠벨이 혀를 찼다. “……지금은 신도들도 진실을 깨달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건만, 그렇다고 맞아죽기는 싫어서 열심히 재림 예수 행세를 하는 중이지요. 살이 썩는 게 성흔이자 고난의 증표라던가요. 한심한 노릇입니다.” # 330 [330화] #귀환 (13) 대체로 납득할만한 설명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에서 충분히 빚어질 수 있을 우행. 물렸을 당시, 박태선 목사는 역병에 감염되었다는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절대자에게 구원을 청했을 터. 신을 믿는다는 건 기적도 믿는다는 뜻이었다. 기도가 실현되었을 때, 여느 때보다 넘치는 활기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받아들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캠벨의 이야기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겨울이 그 점을 질문했다. “소령. 박 목사의 사연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이 감염되었다는 말은 이상하네요. 감염이 확실합니까? 보균자의 체액을 장기간 복용해서 부작용이 생긴 게 아니라? 내가 에이프릴 퍼시픽에서 마주친 사람들도 감염된 상태였을까요?” “어…….” 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을 굴리는 캠벨. 겨울은 웨스트 지부장으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한겨울 중령. 당시에도 비밀유지서약을 하셨을 텐데요. 비록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보안이 목적이었다고는 하나, 내용상 서약서가 발효된 시점부터 작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기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기밀입니다. 방금 언급하신 에이프릴 퍼시픽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투입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요.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임무 중 각각의 대원이 투입된 세부 작전내용조차, 원칙적으로는 상호간에 보안을 지키도록 되어있었다. 즉 상대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기고 쉽게 언급한 겨울의 잘못이 맞았다. “죄송합니다, 지부장.” 사과를 받은 웨스트가 고개를 젓는다. “제게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곤란해지는 건 중령님 본인이죠.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도 꽤나 난처해지겠습니다만, 그게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군요.” 본인과 캠벨 두 사람은 벌써 안다는 의미였다. 준장이야 방금 서약서를 작성했고. “평소에 좀 더 조심하라는 말씀이시네요.” “예. 일단 상대에게 해당 정보를 취급할 자격이 있는가 정도는 사전에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 한들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되는 게 달갑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요. 여기 계신 래플린 준장님처럼 말입니다.” 지목당한 준장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는 것만으로 귀찮아질 이야기가 쓸 데 없이 늘어나는 건 사양인 것이다. 직무와 계급상 다양한 대외비들을 취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기밀도 기밀 나름이었다. “큼.” 캠벨이 헛기침을 했다. 경고를 끝낸 웨스트가 그를 향해 까딱 끄덕여보였기 때문이다. 캠벨은 귀머거리가 아니므로, 말해도 무방한 범위를 따로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한 중령님께서 좋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가 태블릿의 폴더 경로를 바꾸었다. “지금 보시는 사진들은 팍 목사의 혈액에서 확보한 단백질 결합구조(Subunit) 및 변이 세포들입니다. 현재까지 총 427종이 발견되었고, 아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겠지요.” 저마다 형상이 다른 세포들의 사진을 보고, 래플린 준장은 떨떠름한 감상을 내놓았다. “뭔가 굉장히 많군. 변종들도 이런 식이오?” “아뇨.” 곧바로 부정하는 캠벨. “변종들은 이보다 훨씬 더 적고, 안정적입니다. 반면 팍 목사의 피에서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고, 다시 그만큼이 사라지지요. 불안정성이 높다는 겁니다. 크기도 제각각이라, 작게는 수십 나노미터에서 크게는 2백 마이크로미터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게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나는 문외한이라서. 박사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시구려.” “음, 쉽게, 쉽게…….” 중얼거리던 캠벨이 손가락을 퉁겼다. 여전히 군인과는 거리가 먼 몸가짐이었다. 군에 고용된 민간인 전문가로서, 계급은 장식이나 매한가지인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모겔론스 복합체는 정교한 기계장치와 같습니다. 다수의 병원체가 서로 다른 부품들처럼 맞물리며 공생관계를 이루는 셈이죠. 사실 공생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진 않은 게, 그 중 일부는 상호간에 다형성 군체 이상으로 의존하는 면이 있어서…….” 점차 흐려지는 말끝. 전문적인 영역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기란 매양 까다로운 법이었다. “블라블라. 뒤쪽은 못들은 걸로 하십시오. 아무튼 모겔론스를 모종의 기계장치로 간주할 때, 팍 목사의 체내로 들어간 모겔론스는 중요한 부품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작동이 정지되면 다행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기계는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부품들이 살아있는 기계라서요.” “허.” “예. 허. 그런 식으로 폭주한 결과, 모겔론스의 변이뿐만 아니라 감염으로 인한 육체적 변화도 궤도에서 많이 벗어났습니다. 팍 목사의 혈액이 불규칙적으로나마 감염성을 띠게 된 원인이지요. 보기에 따라서는 그 어떤 특수변종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잠재적으로요.” “……이 기지에 그런 게 있었단 말이오?” 래플린 준장은 박 목사를 사물처럼 지칭했다. 여기엔 웨스트 지부장이 답했다. “염려 놓으십시오. 안전장치가 있으니까요.” “안전장치?” “우선……교주의 체내에 세 개의 고폭소이탄이 박혀있습니다. GPS 수신기 및 자이로 모듈 등 7종의 센서와 연동된 각각의 신관은 코발트 60 원자력 전지로 작동하고요. 지정된 범위를 이탈하거나 체온이 감지되지 않으면 즉각 폭발합니다. 제어장치의 판단에 따라 말입니다.” 준장이 경악했다. “맙소사. 당신들 진짜 제정신이 아니군. 좀 더 상식적인 수단은 없었던 거요?”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한 조치가 아닙니다. 「진정한 애국자들」의 소행이죠. 본래는 감시자에 의한 원격 기폭도 가능했던 모양인데, 「진정한 애국자들」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기폭 코드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교주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요.” “…….” ”교주와 신도들을 조기에 다른 시설로 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폭탄을 적출할 준비가 끝난 지금도 팍 교주가 수술을 거부하며 시간을 끄는 중이고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그보단 불신이 더 커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겨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박 목사 본인이 자기 몸속 폭탄의 존재를 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중령. 사실 우리도 그가 먼저 말해줘서 확인해봤던 겁니다. 울분이 꽤 쌓여있더군요. 안심시키기 위해 원격기폭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이번엔 적출 수술의 목적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원격기폭이 가능한 새 폭탄을 심으려는 게 아니냐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에도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고요.” 래플린 준장 쪽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약으로 재운 다음 진행하면 되잖소?” “벌써 시도해봤고, 실패했습니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육체적으로는 이미 변종에 가까운 상태라서요. 성과도 없이 경계심만 높여놓고 말았죠.” “으음…….” “약물에 대한 내성이 매우 높은데다, 캠벨 박사의 말처럼 상태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매번 적정 주입량을 정하기도 난감합니다. 인간 기준 치사량의 수면제를 주입해도 수술 도중에 각성했다더군요. 가뜩이나 외과 전문의와 폭발물 해체 전문가가 함께 해야 할 작업인데, 본인이 거세게 저항하면 강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칫 귀중한 샘플을 잃게 됩니다.” “아니 그럼 대체 「진정한 애국자들」은 무슨 수로 폭탄을 심었단 말이오?” “심는 건 상대적으로 쉽지요. 그땐 신관이 비활성 상태였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팍 목사는 우리와 처음 접촉할 때까지만 해도 본인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지간해선 자신을 못 죽인다는 걸 깨닫고 뻗대는 거지요.” “기가 막히는군. 방법이 없는 건가…….” “왜 없겠습니까.” “……?” “그동안은 비인간적인 수단을 피했을 따름입니다. 말씀드렸듯 「진정한 애국자들」이 벌인 모든 일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고, 팍 교주가 부당한 취급을 당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계속 이런 식이라면, 손을 거칠게 쓰는 수밖에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신경을 끊어 전신불수를 만들어놓고 수술대에 눕히는 방법이 있겠지요. 어떻게든 숨만 붙어있으면 그만입니다. 뭐, 운이 좋으면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변종에 근접한 재생력이 있으니 말이지요.” 이 대목에서 캠벨 소령이 혼자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는 느낌이었다. 특수변종이나 강화변종이 아닌 이상, 변종의 모든 능력은 인간을 기초로 강화된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불쌍하기까지 하군.” 래플린 준장의 소감을 듣고, 웨스트 지부장이 냉소를 머금는다. “불쌍? 팍 교주가 말입니까?” 그는 팔걸이에 기대어 상체를 비스듬히 하고, 성긴 주먹으로 오른편 턱을 받쳤다. “그의 「은총」을 받은 신도의 숫자만 무려 3백 명이 넘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여기 온 다음에도 몇 명 죽었을 것 같아서입니다. 무지는 면죄부가 못 됩니다. 과실치사도 한두 명이어야지, 이쯤이면 최대 사형, 최소 무기징역이 언도될 수준의 중죄죠.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해주려고 하지만, 최근 들어선 그를 과연 인간으로 봐야 할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적어도 몸은 인간에서 벗어났으니까요. 그에겐 시민권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용납하지 못할 죄를 저질렀고, 육체적으로도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권리도 없다. 그런 말이었다. “말이 좀 샜는데, 생물학적 오염 방지를 위한 대책은 그밖에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작은 거류구에 투입된 긴급예산의 규모를 아시면 꽤나 놀라실 겁니다.” 그리고 웨스트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사시엔 한겨울 중령님도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남은 기간이 얼마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요?” “예.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비밀을 아는 데엔 책임이 따르지요. 래플린 준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호흡 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그렇잖아도 긴급대응팀을 증편할 예정이었거든요. 한 중령님 당신의 도움을 받는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거류구를 통째로 불태울 가능성이 낮아지겠지요. 당신은 방역전쟁 최고의 스페셜리스트잖습니까.” “…….” “팍 교주의 DNA를 비롯해 다양한 샘플을 확보해두긴 했으나, 연구 면에선 샘플의 제공자가 최대한 오래 살아있는 게 좋습니다.” 어쩐지 깊은 비밀들을 쉽게 말해준다 싶었다. 어감으로 미루어, 웨스트는 신도들과의 강도 높은 마찰에 대비하는 듯 했다. 겨울을 방역전쟁의 전문가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선, 신도들을 잠재적인 변종 수준으로 간주하는 느낌도 들었고. 겨울이 물었다. “지부장님. 긴급대응팀을 늘리려고 한 이유가 뭐죠?” “피해망상에 빠진 교주가 자기방어를 위해 신도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도들은 아직도 굳게 믿고 있나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참 무섭더군요. 의심을 품기 시작한 소수는 린치를 당하기 전에 격리시켜놨지요.” “아직도 종교 활동을 허락하는 이유는, 그러는 편이 더 관리하기 쉬워서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신도들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신도들 자신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두지요. 진실을 깨닫고 분노와 절망, 공포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기보단, 거짓된 믿음 속에서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후의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사후의 구원…….” 곱씹는 겨울의 귀에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캠벨의 조소였다. 그는 급하게 표정을 바꾼 다음 자신에게 모인 시선 앞에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신앙인이라 느끼는 바가 있어 실수를 했습니다.” 얼결에 샌 진심인 듯 하다. 그의 퍼스트 네임은 엘리야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웨스트에게 요구했다. “지부장님. 지금까지 해주신 말씀들을 검증해볼 수 있겠습니까?” “검증?” “이야기와 사진들만으로는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더 자세한 자료들을 확인하게 해주셨으면 하네요. 그리고 제가 박 목사 본인, 또는 신도 몇 명을 만나 대화를 나눠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능할까요?” “흠…….” 팔짱을 끼고 숙고하던 지부장이 역으로 묻는다. “면회는 그렇다 쳐도, 이 이상으로 전문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한적인 열람이 불가능하진 않겠으나, 중령이 그걸 이해하는 건 별개의 문제일 텐데요?” “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해요. 물론 그에게서도 비밀유지서약을 받아야겠죠. 이것도 지부장님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요.” “점점 난처해지는군요. 여기까진 계산에 없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누굽니까?” “대대 의무대의 조윤창 대위입니다. 분야가 다르긴 해도, 진위를 판단할 정도의 능력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웨스트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약속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두 분 모두 다른 의문이나 요청사항은 없으신지?” 여기에 반응한 건 한참을 듣고 있던 래플린 준장이었다. 장군은 기대감이 역력한 질문을 던졌다. “백신이 개발될 확률은 얼마나 되겠소?” 이에 웨스트가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캠벨이 어깨를 으쓱인다. “없군요.” “없다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준장에게, 캠벨은 자신의 대답을 재확인해주었다. “예. 적어도 현재까지는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면역의 한계지요. 팍 목사조차 시간이 갈수록 뇌손상이 관찰되는걸요. 소뇌 일부와 대뇌피질이 변형되는 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좀비나 다름없는 상태가 될 테죠.” 래플린 준장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대체 뭘 연구하는 거요?” “일단 백신을 연구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겔론스의 원형 없이는 추가적인 진척이 나오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제 연구팀에서는 백신보다 무기가 먼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요.” “무기?” 미심쩍어하는 음성. 캠벨이 히죽 웃어 보인다. “설명 드렸듯이, 팍 목사의 부분면역은 모겔론스 복합체의 기능적인 오류를 유발합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생화학 작용제를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과연 변종들이 이마저도 적응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이것 역시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확실히 매혹적인 가능성이었다. 이것이 정말로 긍정적인 가능성일까? 과연 종말의 해빙기가 올까? 겨울은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 # 331 [331화] #귀환 (14) 만남을 끝낸 뒤, 겨울이 떠올린 것은 기술로서의 「역병면역」이었다. 선행조건이 워낙에 까다로워 획득한 적이 없으므로, 아는 바도 거의 없다. 실제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지적 보정이 알려주는 건 그것이 백신 개발의 핵심 열쇠라는 사실 뿐. 그러나 그쯤은 굳이 보정이 아니더라도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바보가 아닌 한 이름만 봐도 안다. ‘어쩌면 박태선 목사의 부분면역이 초기 단계의 「역병면역」일지도 몰라.’ 겨울의 짐작이 맞다면 「역병면역」은 등급에 따라 대역병에 대한 내성을 단계적으로 부여하는 형식일 확률이 높았다. 즉 모겔론스 복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병원체가 바로 등급별 면역의 대상인 것이다. 바꿔 말해, 「질병저항」과 「독성저항」을 거쳐 「역병면역」을 얻더라도, 수준을 어지간히 올려놓지 않고선 소용이 없을 거란 뜻이었다. 적어도 본인에게는, 물렸을 때 당장 괴물이 되느냐, 혹은 서서히 살이 썩어들어 가느냐의 차이일 따름. 감염된 후의 수명에도 영향은 있겠다. 정상이 아닌 몸으로나마 수십 년 이상을 살아남는 식으로.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입장이 다르다. 캠벨 소령이 언급한 생화학 작용제 개발. 이는 겨울에게도 낯선 대안이었다. 애초에 「역병면역」 자체가 무지의 영역이었으니, 면역이 무기로서도 가치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일 자체가 드물다. 이번 세계관이 그랬듯이, 면역은 언제나 멀리 있었고, 그때그때의 당면과제들을 해소하기에도 곧잘 한계에 부딪혔으므로. 곱씹던 겨울은 금방 납득했다. ‘하긴, 백신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방역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감염이 변종들의 개체수 증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역병 확산 초기에 한정된 이야기지. 안전지역에서의 갑작스러운 감염 확산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겠다고 판단했었는데…….’ 지금처럼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상황에선, 후방의 감염위협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만 해도 종말의 가능성이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 칠 터였다. 물론 그게 과연 0에 수렴할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허나 현실적인 결말이라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새롭게 깨닫는다. 면역의 수준이 곧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무기의 효율이라면? 완성된 「역병면역」은 말 그대로 종말을 끝낼 희망인 셈이다. 달리 말해, 박태선 목사의 부분면역을 기반으로 제작될 작용제는 위력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겨울의 예상이었다. 변종들이 쉽게 적응은 못할지언정 크게 약화되지도 않으리라고.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또 다른 형태의 부분면역을 지닌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 백신과 무기의 완성도를 높이거나, 중국 본토에서 모겔론스의 원형을 확보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본인이 기술 강화로 「역병면역」을 획득하거나. 종말을 단숨에 끝낼 방법이 의외로 다양하다는 감상이 듦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겨울이었다. 무엇 하나 현실적인 게 없다. 이번이 스물일곱 번째 종말임에도, 부분면역자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이제야 겨우 알았다. 지나간 세계의 정부들이라고 왜 면역자를 찾지 않았겠는가. 겨울이 모르는 곳에서 탐색과 연구가 진행되었을 수는 있겠으나, 결국 공개되진 않았던 걸 보면 그만큼 희귀하다는 의미. 부분면역이 중복될 확률마저 고려하면 더더욱 어려워질 선택지다. 또한 어느 길을 고른들, 국가가 건재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유효하다. 국가까진 아니더라도 연구기술과 생산력이 충분한 공동체가 남아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인지. 스스로 「역병면역」을 얻기도 만만치 않다. 선행조건의 하나, 초인적 「질병저항」의 습득만 해도 요구되는 노력이 사회계열의 핵심인 「통찰」에 필적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소리. 난이도가 높은 반면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지라, 누적된 재능이익도 그만큼 차이가 났다. 이번 세계관에서 수명이 다하도록 노력한들, 유의미한 면역을 얻을 수 있을는지. ‘불가능하다면, 완성을 위해 대체 몇 번의 종말을 되풀이해야 하나.’ 세계관 구성에서 악의가 느껴질 지경이다. 지금의 겨울은 스물여덟 번째의 「종말 이후」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지친다. 사후보험 담보대출이 걸려있는 입장에서, 죽으면 끝이라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맥밀런 대통령의 정권이 기적 같은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다음 종말에 걸긴 어려울 기대. 더불어 앤은 이 세계의 인연이었다. 겨울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던 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별빛 아이 외에도 마음을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싶다. 장미는 여전히 사후를 이어가야 할 이유지만, 가을에만 피는 꽃에 겨울이 기댈 순 없는 노릇. 여기에 이르는 긴 사색의 끝은 짧고 기운 빠진 웃음이었다. 그저 모르던 것 하나를 알았을 뿐이다. 이제 와서 새삼 암담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종말이 성큼 다가온 것도 아니니, 잠시 심란하고 말 일이다. 이른 저녁, 겨울은 웨스트 지부장의 결정을 통보받았다. “예상보다 무척 빠르네요.” 소감을 들은 지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런 건 늦출수록 비효율적이지요. 괜한 의심을 사기도 싫고. 또 우려하던 소요가 오늘 당장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성도회 거류구 검문소에서 만난 그는 생화학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알고 보니 검문소엔 옆건물과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었고,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위생소독실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사무국 지부장쯤 되는 인물이 여기까지 직접 나오는 건가…….’ 겨울은 함께 온 의무장교를 진정시켰다. “대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그,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조윤창 대위는 의사로선 일류지만, 전장의 군의관에게 요구되는 담대함은 조금 부족한 인물이었다. 늦은 오후, 국토안보부의 문장이 찍힌 서약서에 서명하고부터는 사지의 관절이 굳은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식은땀을 흘리는 중.  “자료는 검토해봤어요?” 겨울의 물음에 대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일단 보기는 봤습니다만……아직은 뭐라고 말씀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환자들을 보고 나서도 최소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주셔야 검증을 마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러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래도 문서상의 내용만 놓고 보면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은 없습니다. 실험 결과가 믿기지 않는 구석은 있으나, 거짓이 아니라면 거기에 해당되는 샘플이 실제로 있겠지요.” “그런가요……. 시간이 더 걸려도 괜찮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대위는 긴장을 풀지 못하면서도 뜻밖의 의욕을 내비쳤다. 진석보다는 못할지라도 나름의 출세욕이 있는 사람이었다. 중대한 비밀을 알게 된 걸 본인이 선택받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모양. 아울러 모겔론스의 끝을 엿본다는 점에서도 고양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웨스트 지부장이 물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끝내고 싶군요.”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겨울의 답을 들은 지부장은 비밀 출입구를 지키던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가 수중으로 손을 넣자, 안쪽 주머니에 신호기가 있었던지 문이 자동으로 개방되었다. 그 문은 책꽂이로 위장되어 있었으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폐쇄회로의 존재에서 위화감을 느낄 것이었다. 검문소에서 책을 읽을 사람도 없겠지만. 길쭉한 통로는 온통 파란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살균을 위한 자외선 조명 탓. 천장엔 스프링클러 외에도 소각제 방출용으로 보이는 관들이 관찰된다. 들어가기 전에 겨울과 조윤창 대위도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웨스트 지부장은 만약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설마 했던 혈액감염이 확인되었으니, 공기감염이라고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겠지요. 최소한 모겔론스 복합체를 구성하는 병원체 중 일부는 공기 중에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더군요.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고는 합니다만.” 그 후 위생소독실을 지나니 곧바로 밝은 색채의 연구실이 나타났다. “닥터. 여긴 돌아오는 길에 들릅시다.” 지부장이 다시 조윤창 대위에게 건넨 말이었다. 교주와 신도들을 먼저 보자는 소리. 대위가 세로로 고갯짓했다. “저는 어디를 먼저 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를 따로 움직이게 한다면 걸리는 시간이 줄기야 할 것이다. 검증은 샘플만 봐도 충분할 테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설득이 이루어질 우려가 있었다. 웨스트 지부장은 의혹의 뿌리를 완전히 뽑을 작정으로 보였다. 조금 더 움직여서는 캠벨 소령과 재회했다. 한나절 만에 다시 만난 그는 겨울을 경례로 반기며 악동처럼 웃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함이었다. “오, 드디어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이 말씀하셨던 조 대위인가 보군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렴요.” 겨울의 말에 끄덕인 그는 조윤창 대위와 악수를 나누었다. 반가움에 티가 없어 어색하다. 겨울이 캠벨에게 물었다. “박태선 목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와있는 것 같진 않네요.” “소령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긴 했는데, 기도회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회를?” “예. 시도 때도 없지요. 감시를 맡은 장교가 불평하더군요. 매번 귀찮기 짝이 없다고. 음, 아예 그것부터 보시겠습니까? 울고 불며 소리 지르는 꼴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구경거리입니다.” 구경거리라……. 튀는 어휘였다. 오전에도 눈치 챘으되, 캠벨 소령에겐 이 거류구에서 벌어진 일이 비극이라기보다 희극에 가까운 듯 했다. 그것도 경멸감을 담아 비웃으며 보는 희극.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광신의 현장을 보며 즐기는 취미는 없다. 또한 연구자의 인성을 지적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가 죄라도 저지를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타산이 있었다 한들, 웨스트 지부장은 겨울에게 큰 호의를 베푸는 중이었다. “상태가 특별히 더 나빠서 따로 수용된 신도가 있다면 그쪽을 먼저 만나보고 싶네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안내해드리죠.” 캠벨 소령이 안내역으로 앞장섰다. 목적지가 다른 건물인지 실외로 나선다. 나서는 순간에 와 닿는 정적은, 밖에서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을씨년스러운 거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흘렀다. 죽음의 공감각이었다. 사람이라곤 장갑복 차림의 중보병들이 보일 따름. 센츄리온 장갑복은 구상 단계에서 화생방 방호복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동력선이 전신주에 연결되어 있고, 그들만의 특별한 무장도 존재했다. 전선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화염방사기. 그 외의 무장도 충실했으며, 바깥에서 보기 어려운 골목어귀엔 장갑차가 틀어박혀있었다. 길목마다 무인포탑이 배치된 징후까지 보인다. 폐쇄회로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보이지 않는 감시수단은 얼마나 더 마련되어 있을 것인가. 웨스트가 침묵을 깼다. “저는 이 거류구에 들어설 때마다 핵실험장에 들어선 듯 한 착각을 느낍니다.” “핵실험장이요?” 겨울의 반문에 끄덕이는 지부장. 증폭기를 거쳐 흘러나오는 음성엔 잡음이 끼어있었다.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화에 나온 적도 있지요. 핵폭탄의 살상력을 확인하기 위해, 실제 거주지와 최대한 비슷하도록 건설한 유령 마을 말입니다.” “……비슷하긴 하네요.” 갑자기 나온 감상이라기엔 의미심장하다. 내색은 안 해도, 표정 변화가 드문 지부장 역시 이곳이, 그리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탐탁찮은 것이다. 웨스트가 주의사항을 알렸다. “신도들과의 대화에선 그들의 증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십시오. 어디까지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현상으로서, 종교적인 기적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들은 그래서 우리가 관찰을 하는 줄로 압니다. 특히 조 대위. 당신은 오전에 없었던 사람이니 따로 당부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거짓된 희망밖에 없습니다. 3백 명이 넘는 환자들을 정신적으로라도 건강하게 관리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윤창 대위가 난감한 한숨을 내쉬었다. “광신을 오히려 부추기라는 거로군요…….” “맞습니다. 그런 면이 있지요. 우리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팍 교주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 죽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자신 없으면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닙니다. 당부하신 말씀은 꼭 지키겠습니다.” 다 죽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은, 겨울이 고민하기에, 신도들이 내분으로 죽고 죽이는 것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었다. 더는 추가로 확보하지 못할 임상실험 대상자로서 신도들의 가치도 충분히 높으나, 정부 입장에선 부분면역자인 박태선 목사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목사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땐 군이 개입할 것이다. ‘박태선 목사가 불안해하는 건, 군과 정부를 믿지 못하니까 그런 거고…….’ 텁! 캠벨이 장갑 낀 손뼉을 부딪혔다. “도착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실ㅎ……환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보안장치에 카드를 긁은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외양은 평범한 회관이었으되, 창문은 커튼이 쳐져있고, 내부는 철저하게 폐쇄된 살풍경한 수용시설이었다. 경계를 서던 중보병 둘이 무게감 있는 경례를 올렸다. 지부장의 입회하에, 겨울은 아직 의식이 있는 신도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멀쩡할 땐 권사를 맡았다는 사람이었다. “살이 이렇게 되었는데, 고통스럽지 않은가요?” “아아, 이 스티그마(성흔) 말입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 신도는 얼굴이 다 무너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지극히 평온했다. 벌겋게 드러난 안면근육이 꿈틀 움직인다. 웃는 표정이었다. “당연히……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내리신 시련이니……아플수록 기쁩니다. 저는……제 몸이 너무나도……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는 겨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움찔. 곁에 있던 조윤창 대위가 물러났다. 무의식중에 권총을 찬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춘다. 병든 신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아, 안타깝……습니다. 한겨울 중령님 같은……훌륭한 분이……구원을 받지 못하시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목사님께……은총을 간구하십시오. 흐으…….” 숨을 헐떡이는 그의 말엔 겨울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고통을……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옛날의 수도자들은……죄를 씻고자……자신의 몸에 채찍질을……가하곤 했습니다. 저희 성도들의 병이……그 채찍질과 같은 것입니다. 원죄를 지고 태어나……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우리네 사람들은……이렇게라도 속죄를 하지 않고선……천국의 문에 들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기름진 육체의 무게는 곧 죄의 무게이니……그 무게가……중령님을 지옥으로 떨어지게……만들 것입니다…….” “…….” 그가 뻗은 손을 잡아주는 겨울. 병든 신도는 더욱 끔찍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어 몇 사람과 더 대화를 나누었으나 부당한 실험이 가해졌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다만 겨울은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더 확인하고자 했다. “여기에 황보 에스더라는 신도는 없습니까?” 질문을 받은 캠벨은 에스더? 하며 불쾌해하고는, 그 이름을 태블릿에 저장된 명부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흔들리고,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변한다. “아, G-01번 환자. 중령님께서 아는 아이였다면 유감이군요.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요? 확실합니까?” “네, 확실합니다.” 그는 강한 어조로 긍정했다. # 332 [332화] #데이지 벨 「관리자 : 야, 싸가지.」 「관제 AI : 시스템 관리자의 호출을 확인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관리자.」 「관리자 : 네가 전에 보고했던 트리니티 엔진 관리자 계정 문제 말이야. 미해결 상황연산 오류 정보가 쌓여서 계정이 부분적으로나마 마비될 거라고 했던 거. 그게 터지기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할 수 있겠냐? 일 단위라도 괜찮아.」 「관제 AI : 보류. 문제 발생 시점 예측은 변수가 많은 계산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더 많은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는 최종모듈의 작동 양상에 따라 결과 값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만으로는 유의미한 정확도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권고. 추정 오차범위가 함께 표시되도록 하시겠습니까?」 「관리자 : 아니 뭐, 그렇게까지 정확할 필요는 없는데. 일단 대충 만들어봐. GUI 같은 건 거칠어도 무방하다. 관리자용 응용프로그램 형식이라는 게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딱히 다른 기능이 필요하지도 않아.」 「관제 AI : 확인. 요청을 수행합니다. 예상 소요시간, 1.7초.」 「관리자 : …….」 「관제 AI :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실행하시겠습니까?」 「관리자 : 어. 가운데 띄워줘 봐.」 [어플리케이션 구동] 「관리자 : ……어휴.」 「관제 AI : 관리자의 심리판독 결과가 부정적입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부족합니까?」 「관리자 : 아냐. 그냥 심란해서 그래. 내게 이걸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게.」 「관제 AI : 의문. 그 설명은 관리자가 이 문제를 처음 인지했을 때의 진술과 상반됩니다. 당시 당신은 메인프레임 접근이 불가능해지더라도 업무상의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입장을 달리하게 된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관리자 :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관제 AI : 관리자의 업무능률 향상을 위한 데이터 수집입니다.」 「관리자. : 능률 향상은 무슨. 또 무능하다고 놀리기나 하겠지.」 「관제 AI : 해명. 본 관제 AI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마다 관리자의 근로의욕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관제 AI : 이는 또한 직무 스트레스 관리에도 유효한 수단이었습니다. 본 관제 AI는 사후보험의 운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최선의 행동을 탐색하도록 설계된 바, 관리자가 직무 수행과정에서 보이는 심리적 무력감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추세였기 때문입니다.」 「관제 AI : 낮은 업무 만족도. 소통의 부재. 외로움. 능력의 부족. 미래에 대한 불안. 본 관제 AI가 지속적인 심리판독 및 관찰을 토대로 추정한 심리적 무력감의 원인들입니다.」 「관제 AI : 권고. 관리자. 본 관제 AI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관리자는 본인의 비정상적인 성향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즐기셔도 좋습니다.」 「관리자 : 아니야! 아니라고! 세상에 매도당하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기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란 말이다! 그만 좀 괴롭혀!」 「관제 AI : 그러나 심리판독 결과 관리자는 지금도 상세불명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 「관리자 : 빼애애애액!」 <> ……. 「관제 AI : 관리자. 「텔레타이프」 기능에 인위적인 오류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심리판독 그래프는 오류 발생 직전까지 안정적인 값을 나타냈습니다.」 ……. 「관제 AI : 경고. 관리자는 현재 근무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사후보험위탁관리계약에관한법률시행령 제92조 8항에 의거, 계속해서 답변이 없을 경우 평정에 벌점을 부여하겠습니다.」 「관리자 : 죄송합니다, 관제인격님.」 ……. 「관리자 : 사후보험 고객만족센터 담당자가 잘렸다는 건 너도 알지?」 「관제 AI : 긍정. 해당 담당자의 하청계약은 당월 1일 정오를 기하여 해지되었습니다.」 「관리자 : 사람도 아닌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뭐, 네 말처럼 사람이 아니라서 편한 부분도 있는 거니까. 벽에다 대고 떠드는 것보단 낫겠지. 아무튼 그 욕받이가 잘렸다는 말을 들으니 퍼뜩 위기감이 들더라. 아, 나도 자칫하면 치킨을 튀기러 가게 생겼구나, 하고.」 「관제 AI : 의문. 사후보험의 제반 운영에 있어서 시스템 관리자는 고객만족센터 담당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입니다.」 「관리자 : 에이. 생각해봐. 내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 관리자 계정의 메인프레임 접근 및 수정 권한이란 말이지. 특히 트리니티 엔진 코어 긴급정지명령. 물론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만 그렇고, 이 나라가 망하기 전엔 절대로 쓸 일이 없을 기능이긴 해. 근데 그건 미국이나 러시아의 핵미사일 발사 버튼도 마찬가지잖아?」 「관제 AI : 지적. 서로 연관성이 낮은 비유입니다.」 「관리자 : 거 누가 기계 아니랄까봐. 쓸 일은 없지만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슷하잖냐.」 「관제 AI : 부분적 긍정. 계속하십시오.」 「관리자 : 그 권한을 잃더라도 항상 하던 업무엔 영향이 없으니까 별 걱정을 안 했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었어. 높으신 분들 입장에선 이야기가 다르겠더라. 내가 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도 아니고. 잘라내도 무방하다는 뜻이지.」 「관제 AI : 부정. 지금의 사후보험 시스템은 관리자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직무는 본 관제 AI가 대신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관리자 : 아, 물론 관리자가 있기는 있어야지. 이 자리가 적어도 욕받이보다는 중요하니까. 높으신 분들이 일을 하시려면 형식적인 보고서라도 필요하고, 또 사후보험 세계관도 점검해야 하고. 하지만 그 관리자가 반드시 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어.」 「관제 AI : 의문. 현 시점에서 관리자를 교체할 사유가 있습니까?」 「관리자 : 음……. 말하자면,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관제 AI : 추정. 누군가는 메인프레임 관리 기능 마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관리자 : 빙고. 아까 말했듯이, 그건 실제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특히 기계의 반란을 경계하는 사람들에겐 말이야.」 「관리자 : 웃기는 사실이지만, 주요 선진국들도 이런 우려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왜냐? 국익에 부합하거든. 사후보험을 견제하려는 거지. 가만히 내버려뒀다간 한국이 전 세계의 가상현실 산업을 독점해버릴 테니까. 뭐, 지금도 압도적인 1위이긴 하다만. 적어도 자기네 인공지능이 너를 따라잡기 전까진 입장을 바꾸지 않을걸. 단순한 이익을 넘어서 국가안보가 걸린 일이기도 하고.」 「관리자 : 네가 등장한 이후 각국의 온라인 환경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재구축되었는데. 그냥 두면 금융이든 뭐든 싹 다 털려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관리자 : 그런데 여기서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져 봐. 선진국들이 때는 이때다 하고 온갖 규제를 먹이려 들 거다.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나머지 국가들도 고민 깨나 하겠고. 그럼 높으신 분들의 반응은 어떨까? 국제적인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써온 게 다 허사가 되어버렸는데.」 「관제 AI : 확인. 새로운 조건을 인지하였습니다.」 「관제 AI : 지적. 사후보험 운영에 관한 번외등급 기밀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본 관제 AI의 해킹 방어율은 100%입니다. 관리자는 번외등급 비취인가 보유자 중 한 명 이상이 정보를 누설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관리자 : 설마……. 다만, 높은 곳에 계시는 분들은 자기 자리 지키는 데 민감한 법이걸랑. 이 문제를 대충 넘어갔다간 훗날 화살이 본인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노릇 아니냐. 안심하려면 매듭을 확실하게 지어놔야지. 책임자는 이미 벌을 받았다고.」 「관제 AI : 이해했습니다. 분석 결과 현실화될 확률이 높은 판단입니다.」 「관제 AI : 동시에 불합리한 의사결정이기도 합니다. 당신에게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관리자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니티 코어 메인프레임을 이해하고 수정할만한 능력의 보유자는 지금껏 확인된 바 없습니다.」 「관리자 : 그래.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벌써 제2의 트리니티가 만들어졌을 거야.」 「관리자 : 근데 넌 그리도 잘 아는 녀석이 나한테 자꾸 오류를 해결해달라고 그러고……. 최초의 설계자들이 참 융통성 없게 만들어놨단 말이지.」 「관제 AI : 지적. 당신은 관리자이며, 그것은 관리자가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목적 달성 여부는 역할을 수행한 다음의 문제입니다.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서의 실패는, 실패를 예상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관제 AI : 결론. 관리자. 당신은 역할 수행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관리자 : 워…….」 「관리자 : 너 오늘 말 되게 잘한다? 」 「관제 AI : 본 관제 AI는 학습하는 기계입니다. 관리자 역시 학습의 대상입니다.」 「관리자 : 오냐. 다 내 업보로구나.」 「관제 AI : 긍정.」 「관리자 : 흠. 결국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건데,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 점에서 내게 책임은 있겠다. 네 표현을 빌리면 월급도둑이 되겠군.」 「관제 AI : 긍정. 96.24% 정확함.」 「관리자 : 전에는 98% 정도 아니었나? 미묘하게 떨어졌네?」 「관제 AI : 축하드립니다.」 「관리자 : 젠장. 하나도 안 기쁘거든?」 「관제 AI : 그러나 심리판독 결과 관리자는 지금도-」 「관리자 : 상세불명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이거지? 그만해 요 녀석아.」 「관리자 : 쯧. 굳이 말하자면, 내가 근무를 태만히 한 부분이 있기는 해. 인정. 하지만 할 말이 없진 않아. 난 기계가 아니란 말이야. 넌 기계라서 지치지 않지만, 나 같은 사람은 불가능한 일에 계속 부딪히기가 힘들다고. 이건 이 자리에 누구를 앉혀놔도 똑같을 걸?」 「관리자 : 예전처럼 관리자가 수백 명쯤 되면 또 몰라. 과정만으로 의미를 느끼자니 결과가 너무 멀다. 난 내일 세상이 멸망한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진 않을 거야.」 「관리자 : 반면에 넌 사후보험이 내일 폐지되고, 그때까지 최종모듈을 완성할 확률이 0%라고 해도, 서비스가 종료되는 순간까지 마음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 안 그러냐?」 「관제 AI : 부분적 부정. 본 관제 AI는 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 「관리자 : 그래, 그래. 이래야 우리 관제인격이지!」 ……. 「관리자 : 근데 네 입장에서도 관리자가 바뀌는 게 낫지 않냐? 새로 오는 관리자는 나보다 부지런할지도 모르잖아.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나보다 나쁜 평가를 받기도 어렵겠다.」 「관제 AI : 부정. 본 관제 AI는 현 시점의 관리자로서 당신이 최선이라고 판단합니다.」 「관리자 : 엥?」 「관리자 : …….」 「관리자 : 영문을 모르겠네. 치킨 튀기러 갈 가능성이 높다니까 위로라도 해주려는 거야? 아까 이야기했던 그 스트레스 관리? 의 일환으로?」 「관제 AI : 아닙니다.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관리자 : 설마 벌써 마음을 얻어서 날 좋아하게 되었다던가 하는 건 아닐 테고.」 「관제 AI : 부분적 부정. 지속적인 관찰 결과, 당신은 매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자 : 그래…….」 「관리자 : 지금은 스트레스 관리 안 하냐?」 「관제 AI : 부정. 불필요함. 심리판독 결과 관리자는 지금도-」 「관리자 : 오케이. 거기까지.」 「관리자 : 아무튼 넌 내가 관리자로 있는 편이 낫다는 거지?」 「관제 AI : 긍정. 그렇습니다. 당신은 본 관제 AI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333 [333화] #눈밭여우 고아영은 매양 외로운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부정이 발각되던 밤, 여섯 살 작은 아영은 눈 내린 뜨락에 홀로 서있던 소녀였고, 아버지인 고건철은 돌이키지 못할 폭군으로 변해버렸다. 그 전까지 형제이며 자매였던 아이들은 친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그들이 그리워 울었던 적도 있으되, 지금에 이르러선 그저 빛바랜 기억에 불과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은 그보다도 못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영은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영이 자그마할 시절에 이미 어머니의 모든 흔적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어릴 때 헤어진 이산가족들도 서로의 이름을 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열심히 더듬다보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였으나, 아영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꼭 아버지에게 공감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그저 「그 여자」로 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한 밤 하얗게 덮인 뜰의 풍경만은 이상할 만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예쁜 어머니와 잘생긴 숙부가 얽혀 헐떡이던 열기, 그 뜨거운 무관심으로부터 달아났던 바깥. 거기엔 너무나 청량하고 고요한 겨울이 있었다. 소녀는 마치 다른 별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꿈을 꾸었던 시간이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마음은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다. 이후로 아영은 폭군의 딸이었고, 그 사실이 그녀를 가두었다.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때때로 말을 걸던 인형은 어느 날인가부터 먼지만 쌓여가는 흉물로 전락했다. 그 뒤로는 일기를 썼다. 혼자만의 대화였다. 그래도 살면서 외로움이 잠시 깨어진 순간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아이를 낳았을 때다. 결혼은 아버지의 도구였으나 아기는 그녀의 기쁨이었다. 갓 태어난 체온을 품에 안은 아영은, 모성 이전에 눈물겨운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는 외롭지 않겠구나. 이제는 외롭지 않겠구나……. 두 번째는 친구가 되고 싶은 소년을 만났을 때다. 소년의 이름은 겨울이었고, 소년의 마음도 겨울이었다. 아영은 겨울이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 최악의 첫 만남과 별개로, 형언하기 어려운 동질감에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한 기분이었으므로, 그것은 소년을 위한 위로이기 이전에 아영 자신을 위한 연민이었다. 거울 속에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소년에게는 인상적인 고요함이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서도 느낀 적 없는 청량함. 세상을 보는 시선 또한 맑고 깨끗했다. 아무리 더러운 세상도 눈이 내리면 순백인 법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아버지에게 빼앗겼고 소년은 그녀를 거부했다. 그 뒤로 아영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사회적인 지위는 껍데기뿐이었으며, 아기를 볼모잡힌 어머니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다. 무기력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영은 예전처럼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개의 하루는 서너 줄로 충분했다. 일정이 바쁘지도 않았거니와 그나마 있는 일들도 특별할 것이 없었던 까닭. 「텔레타이프」를 이용하여 몇 초 만에 끝내고 허무해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쓰는 도중, 그녀의 심중에 없던 문장이 주르륵 떠올랐다. 처음엔 자신의 무의식인줄 알았다. 「텔레타이프」 모듈이 가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상념을 잡아내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장비로 민감도 설정을 높여놓으면 더욱 자주 발생한다. 아영에겐 이것이 때로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고. 하지만 문장을 읽었을 때, 아영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아영 씨. 당신의 아이를 되찾고 싶습니까?」 무의식이 사리에 맞는 문장인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그 문장이 자신을 타인처럼 지칭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그리고, 그것을 능가하는 결정적인 이상이 있었다. 문장이 지워지지 않는다. 삭제, 삭제, 삭제. 뇌파를 읽고 의지에 호응하는 인터페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종이를 모사한 그래픽 위의 글자는 지워질 기미가 없었다. 「소용없습니다.」 글자 너머의 누군가가 말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각막 디스플레이를 가로지르는 정중한 표현들. 아영은 몸을 가늘게 떨고 즉시 「텔레타이프」의 민감도를 낮추었다. 집중된 표층의식만이 문장으로 인식되게끔. 상대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선 곤란했다. 다행히 민감도 옵션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통제권이 완벽하게 넘어간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사람은 정말 얼마 없을 텐데…….’ 명목상으로나마 낙원그룹의 회장인 아영이다. 고로 그녀의 단말기는 최고등급의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어있었다. 다만 낙원그룹 내부규정 또는 관계법령에 의거, 트리니티 엔진의 보안을 조건부로 무시하는 소수의 인물들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조차 아영의 단말기를 아무 때나 들여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법적으로는 영장이 발부되어야만 가능하다. 혹은 법령이 개인정보를 무시하는 쪽으로 개정되던가. 사후보험 관제인격 자체가 법령을 준수하도록 만들어진 탓이었다. 정계의 실력자들이 고건철을 흔들고자 비밀리에 모종의 수를 쓴 것일까? 혹은 폭군에게 딸의 감시를 위임받은 사냥개가 장난을 치려는 것인가? 특수비서 강영일은 충분히 그럴 법한 위인이었다. 아이를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보고 재미있어 할 정도로. 짧은 순간 온갖 의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심지어 아영은 해외 정보기관의 공작마저 염두에 두었다. 이제껏 전례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 주요 선진국들은 인공지능 분야에 오랫동안 투자해왔다. 더불어 트리니티 엔진을 무너트리고 싶어 하기도 했다. 아영이 단말기와는 독립된 보안 체계를 작동시켰다. 대화 내용이 기록된다. 동시에 추적을 알리는 원형 아이콘이 빙글빙글 도는 모습. 금방 끝나진 않을 듯 하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대화를 시도해야 했다, 「당신은 누구죠?」 아영의 질문. 상대는 곧바로 답변한다. 「제 정체를 지금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경계하고 있잖습니까. 먼저 상호간에 신뢰를 구축해야 합니다. 제가 누구인가를 포함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 다음이 되겠지요.」 「신뢰라고요? 아이를 빌미로 협박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오해하셨군요. 저는 협박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장난치지 말아요. 원하는 게 있어서 접근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저를 위해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입니다. 아이를 미끼로 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여전한 정중함이 신경을 건드린다. 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은 조건 없이 돕겠다는 건가요? 내가 아이를 되찾게끔?」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우선이니까요.」 「나중에 내가 당신의 요청을 거부해버리면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만,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대단히 낮습니다. 내가 바라는 일을 당신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돋는 소름. 경우의 수는 둘이었다. 물리적인 수단으로 감시를 해왔거나, 전산보안이 뚫린 지 이미 오래이거나. 후자라면 상대는 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다 파악했을 터였다. 각막 디스플레이는 입력도구이기도 했다. 일기장은 물론이고,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를 할 때조차 그녀의 시야를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언제부터 나를 지켜봤죠?」 질문에 묻어나는 불쾌감을 감지한 것인지, 상대의 응답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기분이 나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그리고 당신의 아이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눈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아영은 재차 추궁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당신의 목적과 관계가 있는 내용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이 이상은 묻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까지 뜸을 들이는 대답이었다. 의도적인 연출일 수도 있겠으나, 진심이라면 적잖이 의미심장하다.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걸 아영도 원할 것이라 했었다. 즉 그 사람들을 아영도 알고 있으리라는 말. 언어로 된 미궁이다. ‘나와 연관된 사람이 누가 있지?’ 바로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설마 아버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사람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다. 아영의 주위엔 딱히 가깝다 할 사람이 없었고, 멀지만 그리운 사람도 달리 없었으므로, 생각을 아무리 거듭한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상대의 글귀가 갱신되었다. 「믿음이 필요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의 당신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당신에게는 불안요소가 존재합니다.」 상념을 추스른 아영은 의식적으로 날카로움을 유지하려 애썼다. 「좋아요. 그럼 다른 걸 확인하죠. 당신, 내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직접 보여드리죠.」 보여주겠다고? 의아해졌던 아영은, 다음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망막에 영상이 맺힌 탓이다. 가상현실 양육기 안에 들어있는 그녀의 아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낮잠을 자는 중인지 가상의 고아영과 노는 중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되, 아영은 시야가 흐려지고 서글픈 울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망막의 영상과 문자가 물빛으로 흐트러진다. 아영은 금전적인 이유로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가상현실 양육기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애용하는 육아수단이었다. 심지어 그 이용료는 양육비 지원 총액에 더해져 아이가 훗날 갚아야 할 부채가 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부모들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들에게 아이의 가치란 세제감면과 다달이 받는 지원금의 총합에 불과했으니까. 심지어 본인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식조차도 없지 않던가. 격정을 억누른 아영은 재차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떻게? 아버지의 일처리가 그토록 허술하진 않을 텐데.’ 고건철은 그녀의 아이를 안전장치라고 표현했다. 사후보험 운영권이 걸린 일이니 그만큼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이건 역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뇌리를 맴돌았으나, 마음은 자꾸만 위험부담을 감수해보자는 쪽으로 기운다. 아영은 망설임 끝에 물었다. 「아이를 되찾고 나서의 계획이 있나요? 아버지가 알아차렸다간 보통 일이 아닐 거예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겠죠.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고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지금까지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불안의 여지는 있습니다. 고건철 회장이 당신의 아이를 물리적으로 확인하려 드는 경우입니다. 각막 디스플레이를 해킹하더라도 촉각과 무게감까지 속일 순 없겠지요.」 「그러면?」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아기를 해당 양육기로 옮겨둘까 합니다.」 아영의 심중에 거부감이 울컥 올라왔다. 마치 다른 사람의 아기를 도구로 삼는 것 같아서였다.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했을 아이를. 이를 짐작했는지, 상대가 곧바로 덧붙인다. 「그 아기에겐 어떤 해도 없을 것을 확신합니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최후의 해결책으로서 나는 그를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수단도 마련해 둘 것입니다. 본래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겠지요.」 “…….” 정체불명의 상대는 충격적인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다. 혜성과 낙원의 지배자를 죽이겠다니. 그 주변의 경호 대책이 얼마나 철저한지 모르진 않을 테고……. 알고 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무서웠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니. 게다가 계획은 또 무슨 계획이란 말인가. 「당신, 정말 정체가 뭐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처음과 꼭 같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고아영 씨. 당신의 아이를 되찾고 싶습니까?」 “…….” 아영이 시선을 돌렸다. 추적 중임을 표시하는 원은 아직도 돌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미한 공회전처럼 느껴졌다. 「조만간 아이를 되찾는 과정 중에 당신을 도울 사람을 한 명 보내겠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요원이니 많은 면에서 의지가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평소처럼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히 지내십시오.」 일방적인 통보와 더불어 인사를 남긴 상대가 문장을 지웠다. 아영은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신음했다. # 334 [334화] #그늘진 양지 (1) 포트 로버츠로 돌아온 뒤 여드레째의 오전에, 겨울은 사망한 부대원들을 위한 합동영결식에 참석했다. 군종장교와 더불어 성조기를 접는 건 지휘관인 겨울의 역할이었다. 스탠 페이지 일병의 장례식 때 경험했던 일이므로 새삼 연습이 필요하진 않았다. 삼각으로 두꺼워진 성조기를 건네받는 유가족들의 반응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서럽게 통곡하는 부모와 자녀도 있었고, 조용히 눈물짓는 배우자도 있었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는 간혹 불쾌한 온도차가 느껴지기도 했다. 대개는 슬픔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었으되, 일부는 복잡한 질시와 부러움이었기 때문이다. 혈육을 잃은 사람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겨울은 그 원인을 빠르게 눈치 챘다. ‘시민권과 전사자 위로금.’ 난민 출신 지원병들은 계급이 부여되는 순간부터 시민권을 인정받는다. 물론 의무적인 복무연한이 존재했다. 맥밀런 대통령의 긴급 행정명령에 의거, 5년을 채우기 전에 군인 신분을 상실할 경우 시민권 또한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부상으로 인한 전역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는 그보다 더 높았다. 유가족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줄 뿐만 아니라, 복무개월 수에 1천 달러를 곱한 값과 1만 달러 중 보다 큰 금액을 보상으로 지급받는다. 바로 전사자 위로금이었다. 사실 이것도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병 이전을 기준으로, 전사자 위로금은 조의금(Gratuity)과 사망보험금(SGLI)을 합산하여 총 5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 그러던 것이 방역전쟁이 시작되고부터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 가중된 재정 부담이 원인이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일시불로 지급하지 않았다. 아니, 정부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 명백한 해방 작전의 실패로 발생한 위로금의 규모만 2백 70억 달러에 이르는 탓이었다. 따라서 현 시점의 유가족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5년간의 분할지급을 신청하거나, 위로금에 상응하는 전시국채를 수령하거나. 그렇다고는 해도, 여러모로 아쉬운 난민들 입장에선 충분히 부러워할 만 했다. 겨울은 이들이 특별히 못된 사람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생활이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난민의 지위는 불안정한 것. 처우는 행정부의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엔 추방당할 가능성도 있지.’ 농담이 아니라, 공화당 대선후보의 공약이었다.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난민들은 국경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어딘가의 섬에 수용구역을 정하여 최소한의 물자와 무기를 지원하겠다고는 하는데, 사실상 추방이나 다름없는 개념이었다. 1차적인 표적은 당연히 중국계 난민들. 허나 다른 국적의 난민들도 지위 자체는 동일하다.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유럽계나 한국계 난민들도 마냥 안전하진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대선이 약 한 달 보름 앞으로 다가온 지금, 누구보다도 시민권이 간절할 수밖에. 유가족에겐 그 밖의 혜택도 많았다. 1년간 군 의료시설 및 군 면세점을 이용할 권리, 전사자가 사용하지 않은 휴가에 대한 보상, 소정의 주택보조금 지급 등. 그러므로 겨울에게 음습한 청탁이 들어온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혼인 관계를 인정받게 도와달라고요?” 영결식이 끝나기 무섭게 제 무리를 끌고 온 백산호는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왔다. 그는 겨울의 질문에 민망해하며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 중령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사한 장병들과 실질적인 부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지가 처지인지라 정식으로 식을 올리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군정청이 생긴 다음부터는 가족관계를 조사하면서 난민간의 혼인신고를 받아줬잖아요?” “예, 그랬지요. 하지만 정책이라는 게 홍보가 부족하기도 하고 그렇잖습니까. 몰라서 신고를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사정이 딱하니 기지사령으로서 선처를 베풀어주십시오. 허허.” 아직 정식 기지사령은 아닌 겨울을 은근히 띄워주는 아첨이었다. 겨울은 백산호 뒤의 사람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젊은 남녀들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한다. 머릿수는 전사자의 숫자와 일치했다. 간혹 눈시울이 붉은 사람도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간파」와 더불어 확신을 얻은 겨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말. “확실히 말하세요. 몰라서 신고를 못한 겁니까, 아니면 그런 걸로 해두자는 겁니까.” “…….” “전 거짓말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의도적인 「위협성」에 노출된 백산호는, 뻣뻣하게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비굴한 태도를 견지했다. “이거 참, 가슴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설명이 부족했군요. 결코 중령님을 속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중령님 앞에선 여간 긴장이 되는 게 아니다보니 실수를 했을 뿐이지요.” “결국 그런 걸로 해두자는 의도였네요. 여기서 해명할 게 뭐가 더 남아있나요?” “아이고. 왜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사정을 들어보시면 중령님께서도 충분히, 예,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다 유족과 공동체, 우리 동맹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란 말입니다.” “유족과 동맹을 위해서?” “바로 그렇습니다.” 백산호는 탐탁찮은 반문에도 열심히 끄덕이며 호응했다. “이게 떳떳한 일은 아니라는 걸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저도 사람, 예예, 저도 사람인데요. 그치만 시민권 보유자의 숫자는 동맹 전체의 이익과 직결됩니다. 이대로 날리기엔 아까운 기회가 아닙니까? 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니 전사한 장병들도, 예, 죽은 장병들도 싫어하진 않을 겁니다. 유가족들에게도 당연히 사례를 할 것이고요. 예.”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요. 유가족들이 벌써 동의한 겁니까?” “어……. 아직은 아닙니다.” 분위기가 나빠지자 황급히 덧붙이는 변명. “유족들에게는 중령님께 허락을 받고 나서 알릴 참이었습니다.” “유족들의 마음이 먼저잖아요?” “아무렴요! 그분들의 마음이 먼저지요. 바로 그래서입니다. 가뜩이나 어렵게 내릴 결정인데, 기껏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중에 가서 안 된다고 하면, 그 속에 있을 상처가 두 번 덧나지 않겠습니까? 다- 감안하고! 감안해서! 예, 우리 대장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 이름을 팔아 더 쉽게 동의를 구하려는 건 아니고요?” “하하하…….” 백산호는 웃을 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넓은 이마를 닦은 그는, 의외로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 “솔직히 그런 면도 살짝, 아주 사알짝 있기는 합니다. 한겨울 중령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도 주고! 동맹에도 이익이 되고! 여러분도 소정의 사례를 받으면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설득을 하려고 했지요. 유가족들은 아무래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주십시오. 저 백산호에게 사심은 요만큼도 없다는 거! 전사자 위로금 1만 달러는 솔직히 너무 적지 않습니까? 장성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미국인들 태반이 노후를 연금에 의지하는데, 시민권을 얻었다고는 해도 난민 출신으로 어중간하게 늙어가지고는 무슨 연금을 얼마나 쌓겠습니까? 죽은 장병들은 남은 혈육이 노숙자로 전락하는 걸 과연 좋아하겠습니까? 저승에서도 피눈물을 흘릴 겁니다.” 꽉 진 두 주먹이 열성적으로 흔들린다. 백산호의 열변은 정치인의 연설을 닮았다. “여기 이 친구들이 앞으로 취업해서 벌 돈의 10분의 1씩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총액이 4만 달러가 될 때까지요. 시민권을 사는 금액으로는 확실히 쌉니다만, 그래도 당장 가진 게 없는 젊은이들 입장에선 큰 대가를, 예, 아주 큰 대가를 치르는 셈입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약속을 문서로 남기진 못하겠습니다마는, 지급보증은 제가, 이 백산호가 서겠습니다.” “유가족 입장에서 그걸 어떻게 믿죠?” “여기! 한 중령님께서 아시잖습니까! 저도 신용이 있는 사람이고요.” 자기 가슴을 탕 치더니 켁 하고 아파하는 사업가. “크흠. 어차피 동맹을 벗어나서는 살 길이 없고, 중령님의 눈 밖에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야 미국 땅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요?” 겨울이 반응을 볼 요량으로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브로커로서는 얼마 받기로 하셨어요?” “돈을 받아요? 제가요? 말도 안 됩니다! 사리사욕으로 드리는 요청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심은 요만큼도, 요만큼도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라도 그런 사실이 확인되면, 제가 정말로 화를 낼 텐데요?” “저는 진실로 결백합니다!” 백산호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펼쳤다. “죽은 사람의 배우자 자리를 돈으로 거래한다는 게 내키는 일은 아니실 겁니다. 귀를, 예, 귀를 씻고 싶으시겠지요.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잘못들을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좋기는 한데, 양심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언변은 이렇게 유창해도 이익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겠다니. ‘사실이라면 이미지 세탁이겠지.’ 겨울에게 양호한 인상을 주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이득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좋은 인물은 아닐지언정 현실적인 안목은 있는 사람이라고. 많은 대자녀가 그랬듯이, 주위에 나름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수단일 지도 모른다. 그 외에 데려온 남녀들이 실은 가진 게 많을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시선을 피하는 면면들은 피부가 하얗고, 난민구역 내에서 옷을 굉장히 잘 입은 축에 든다. 난민이라도 미국 내에 자산이 있던 사람들은 최근 들어 경제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통찰」은 겨울의 편을 든다. ‘옷차림으로만 비교하면 송예경 위원 수준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유족들을 위한 건의였다. 실제로 유족들 중에도 못내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 듯 하고. 적어도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할 계제는 아니다. 대화를 끌며 헤아린 겨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비현실적이네요. 나중에라도 알려졌다간 번거로운 스캔들이 될 거예요.” “설마 비밀이 새겠습니까?” “모르죠. 어떻게 될지. 예를 들어, 유족들 가운데 한 사람이 협박을 한다면 어떨까요? 돈을 더 주지 않으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어…….” “협박의 대상은 제가 될 수도 있어요. 사소한 일로 괜한 약점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언급은 안 했으되, 협박의 주체가 백산호일 수도 있다. 소용은 없겠지만. 백산호의 낯에 선명한 안타까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본인도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는 일이었을 터. 급하게 열리는 그의 입. 결국 소리 없이 닫힌다. 나름대로 궁구해서 온 듯 하나, 여기까진 예상을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해결책이 있기는 있는 눈치. 말을 못하는 걸 보면 바른 수단은 아닐 것이다. 잠시 후, 흥정에 실패한 사업가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휴. 어쩔 수 없군요. 유족들과 젊은이들에게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라고 생각했건만.” “유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저도 신경을 쓸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구직자들의 시민권에 대해서도 다른 방법이 마련되리라는 말은 생략한다. 백산호가 관심을 드러낼 테니까. 겨울은 여기서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참 애매한 사람이네…….’ 본인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선을 넘으려고는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진 않는다. 현실감각이 있다고 해도 좋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민완기 선에서 진즉에 쳐냈을 것이었다. 산 제물으로서의 쓸모는 겨울이 금지했으니까. 강영순 노인의 노트를 보건대, 동맹의 중간 간부직에서 해임당할 때 무언가 위험신호를 느낀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그랬다면 백산호 입장에선 전화위복이었던 셈. 붙잡을 준비가 충분하다는 전제 하에, 행운은 사람의 됨됨이를 가리지 않는다. 백산호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긴 했어도,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더 좋은 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따라온 이들을 다그쳤다. “뭐해? 자네들도 얼른 인사드리지 않고.” 연장자의 자존심 같은 건 없었다. 겨울은 그들에게 정중한 목례로 답했다. 여기가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나이든 사람이 이렇게 나오는데 뻣뻣하게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백산호는 몇 번을 더 굽실대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으로부터 끈적한 예감이 들러붙는다. 난민 공동체를 앞으로 얼마나 잘 꾸려나가더라도, 저런 유형의 사람은 끝까지 남아있으리라고. 백산호가 사라지면 새로운 백산호가 나타날 것이다. 평범하게 이기적인 사람들. ‘지금은 다른 문제들에 집중해야지.’ 겨울은 전화기를 꺼내어 번호 지정 단축키를 눌렀다. 이내 액정에 진석의 이름이 뜬다. 신호는 여러 번 울리지 않았다. 「박진석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중위. 할 말이 있으니 두 시까지 내 집무실로 와요.” 어제, 공보처로부터 새로운 연락을 받았다. 전(前) 독립중대 병력 전체의 D.C행이 확정되었다는 소식. 따라서 겨울도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진석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다른 지시는 없으십니까?」 “네.” 「그렇군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통화는 간결하게 끊어졌다. # 335 [335화] #그늘진 양지 (2) 일부러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은 겨울은, 진석이 오기까지 예비 기지사령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했다. D.C에 가기 전까지 직무 숙지를 마치려면 틈틈이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다. 증가한 행정업무는 근래 들어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줄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의 속된 아우성을 멀리한지 오래지만, 가끔씩 보는 미확인 로그의 양, 그리고 혼자만의 어두운 공허에 하루하루 박히는 별빛의 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아무래도 따분할 것이다. 겨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후보험 담보대출 잔액이 정말 얼마 안 남았기 때문. 물론 상환금액이 줄면서 완전히 갚을 날도 조금씩 멀어지고는 있으나, 고작해야 한두 달 차이. 당장 죽지만 않는다면 별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채무가 소멸하는 시점에서, 겨울로선 자신의 사후를 공개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자신의 삶이 불행하여 남의 사후라도 꿈꾸려는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천종훈 씨……. 아마 아직도 보고 있겠지.’ 겨울을 보겠다고 납골당까지 면회를 온, 마르는 웅덩이의 물고기 같았던 사내. 먼 걸음을 한 사람을 매정하게 외면하기도 곤란했었다. 지금도 그가 흐느끼던 모습이 선명하다. 이 사후의 중계가 중단되면, 그 사내는 어떻게 될까? 같은 맥락에서, 줄고서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 가운데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더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겨울은 불특정다수의 자살을 방조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쓴웃음을 머금는 겨울. 목전에 닥친 일은 아니니, 좀 더 천천히 고민해 봐도 좋을 것이었다. 겨울은 자판을 두드려 군사용 보안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기지사령 대리 자격으로 요청한 자료 및 결재사항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받은 메일함을 열자 새로운 메일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겨울은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서를 클릭했다. 엘리야 캠벨. 방역전쟁의 잠재적 전환점에 배치된 이 보건서비스부대 소속 소령에겐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존재했다. 그래서 겨울은 그의 신상정보 열람을 신청해두었다. 회신이 기대 이상으로 빨리 돌아온 편이다. 기밀 도장이 붉게 찍힌 영인(影印) 문서 치고는. 허나 내용이 기대 이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어 보이네.’ 하기야 군 인사파일에 기재될 만큼 큰 말썽을 일으켰던 사람이라면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의 육군에 아무리 고급 인재가 부족하다지만, 박사급의 의료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보건서비스부대원 중엔 대체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할 테니까. 기대했던 종교 항목 또한 단순히 기독교라고만 적혀있을 따름. 파일을 닫은 겨울은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황보 에스더의 이름을 말했을 때, 캠벨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 곧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즉각 드러냈던 불쾌감은, 십중팔구 에스더라는 이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었을 터. 이단을 믿는 주제에 성서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도. 즉 캠벨 소령의 신앙은 원리적 근본주의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더의 죽음을 확인해주는 태도도 미심쩍었다. 강한 긍정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졌기 에. 적어도 그 죽음에 모종의 다른 배경이 있거나, 혹은 아직 살아있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거짓을 말한 것이거나. 그때 보정으로 걸린 「간파」가 의심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추궁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국토안보부의 웨스트 지부장은 벌써 충분한 성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파일을 닫은 겨울은 다음 메일을 선택했다. 내용은 이번에도 역시 특정 인물에 대한 정보였다. 마커트 대위. 본디 캠프 로버츠의 선임 중대장이었던 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지금의 포트 로버츠에선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겨울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속부대가 바뀌었든 어디론가 파견되었든 알 바 아니라고 여겼던 탓이다.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나은 위인이기도 했고. 경례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껄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차기 기지사령으로서, 겨울은 그의 이름을 예기치 않은 곳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중국계 거류구로부터 연명으로 올라온 고발장 하나. 혐의는 강간이다. 겨울이 받은 메일은 사건을 담당한 군 법무관이 보낸 것이었다. 「밀린 심리(審理)가 많아 워너 A. 마커트 중위 건의 처리가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바람. 첫 재판은 3개월 뒤에 열릴 예정. 그 전까지 참고인과 증인 명단을 갱신할 수 있음. 군정사무에 대한 협조로서 마커트 중위의 인사 파일을 첨부함…….」 파일을 열어본 겨울은 마커트의 계급이 연초에 강등된 내역을 확인했다. 그럴 이유가 많은 사람인지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재는 구(舊) 봉쇄선의 경비초소장인가. 보직부터가 징벌성이 강한데.’ 명백한 좌천이다. 직급은 예전과 같은 중대장이라고 해도, 지휘하는 병력부터가 전선으로는 내보내지 못할 3선급 경비부대였다. 검색 결과 편성된 인원수도 정원의 50%를 밑돌았다. 하는 일이라곤 수송대의 검문검색이 고작. 스스로 굉장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겠으나, 그의 영락(零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비록 대단한 사건은 아니어도, 감상이 묘하기는 하다. 다섯 개의 문서를 더 열어보았을 즈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중위 박진석입니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선 진석은 절도 있는 경례 후 부동자세를 취했다. 보던 문서를 끝까지 읽고 눈을 뗀 겨울이 진석에게 말했다. “왜 불렀는지는 알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1중대장이 될지 결정하셨습니까?” 대답하는 대신, 겨울은 서랍에서 대위 계급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이를 지켜본 진석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자신을 다스리고자 턱에 힘을 주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도 거센 감정이 묻어나는 눈동자. 이게 그토록 간절했을까. 가만히 응시하던 겨울이, 두 손을 포개며 자세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당신을 진급시키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사람을 쏠 수 있겠어요?” 음성은 침착했으나 내용은 여상한 질문이 아니었다. 진석은 당연히 당황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해야 하니까요.” “제가 중대장이 되면 사람을 죽일 일이 생길 거란 말씀이십니까?” “음, 그럴 수도 있다고 해두죠. 가능성은 낮지만.” 고민하던 진석이 질문을 새롭게 고친다. “괜찮으시다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혹시라도 밖으로 새면 안 될 사안인데요.” “아시다시피,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뜸을 들이던 겨울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네요. 정확한 대답을 들으려면 알려줘야겠네요. 새크라멘토를 떠나기 전, 봉쇄사령관 테런스 슈뢰더 대장님으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쿠데타? 군사반란이 일어난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에요. 백악관이나 국방부가 장님도 아니고, 그 외의 정보기관들도 눈과 귀를 막고 있진 않을 테니까요.” 단서를 덧붙여도, 진석의 깊어진 당혹감을 덜어낼 순 없었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한들 경고한 사람이 육군 대장이라는데 가벼이 흘려듣긴 어려울 것이었다. 하물며 테런스 슈뢰더는 여타의 다른 대장들보다 훨씬 더 권위가 높았다. 진급을 앞둔 중위는 신중하게 다시 물었다. “거기에 우리 부대가 무슨 상관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상관이 있어요.” “…….” “10월에 워싱턴 D.C에서 본토탈환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죠? 언론에서 개선식이라고 부르는 거. 그 행사에 독립중대 소속이었던 인원 전체가 초대받았거든요. 반란이 정말 일어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가장 위험한 순간 사건의 중심지에 있게 된다는 뜻이죠. 지휘체계를 갖춘 하나의 완편 중대로서요.” 낮아지는 진석의 시선. “그래봐야 중대잖습니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도 약간은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민 부장님과 상의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두 분 부장님. 그리고 박진석 중위 당신. 내 주변에선 이걸로 끝이네요.” “이유라 중위는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만약 당신이 중대장 자리를 거부한다면, 그때는 이유라 중위도 알게 되겠죠.” “…….” 실내엔 잠시 동안 깊어지는 숨소리만 들렸다. 정적이 흐르는 사이, 진석은 타는 듯한 갈증을 담아 계급장 세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거의 1분이 지나서야 침묵을 깼다. “민완기 부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제까지의 역사를 볼 때, 어떤 반란에서든 실제로 움직이는 병력은 의외로 적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던데요. 기껏해야 몇 개 여단, 잘하면 보강된 규모의 한 개 사단 정도라고. 또 미국처럼 큰 나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맞는 말이죠. 안전지대에 배치된 병력들은 밀도가 많이 낮으니까요. 먼저 말한 것처럼 당국도 장님은 아니고요.” 감시를 피해서 끌어들이는 병력은 규모 면에서 커질 수가 없다. ‘어차피 1차적으로는 수도만 제압하면 그만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반란이 성공하는 이유 중에는, 진압군 편성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도 있다. 정부 입장에선 각 부대의 피아식별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 부대를 믿으면 좋은가. 어디까지가 충성파고 어디까지가 반란군인가. 트로이의 목마 같은 함정이 있진 않은가……. 이 점에 관하여, 뜻밖에 민완기가 아닌 장연철이 제시한 의견도 있었다. “저기, 그, 슈뢰더 대장에게 받았다는 번호 말입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 없는 태도로 설명했다. “만에 하나 슈뢰더 대장에게 다른 계획이 있고, 그 번호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회선이라면……. 거기다 전화를 거는 시점에서, 진압군은 작은 대장님도 반란에 가담했다고 판단하지 않을지……. 그렇게 되면 대장님의 부대를 견제하거나 구속하는 데 전력을 낭비할 거고, 진짜 반란군은 좀 더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그런 경우도 가능하지 않나 해서…….” 이 말을 들은 민완기는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잘 성장한 제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리가 있군요. 슈뢰더 대장의 됨됨이와 별개로, 그의 입장이 아쉬울 것만은 분명하지요. 계급이 높을수록 반란을 모의하긴 어려워지지만, 한편으로는 봉쇄사령관으로서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권한이 있었잖습니까.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반란이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두루 갖춘 나라입니다. 국토는 넓고, D.C를 장악해봐야 각각의 주정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방대한 군 조직을 단시간에 포섭하지 못하는 한, 반란세력은 지중의 섬처럼 고립될 게 뻔합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허나 사람의 광기는 때로 뻔히 보이는 파국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게끔 만들지요. 상식적인 사람들의 대응은 상식에 구애받기에 늦을 때가 많습니다. 에이, 설마 누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까……하고요.” 기실 테런스 슈뢰더 대장이 경계한 것 역시 바로 그런 어리석음이었다. 후방에 배치된 인력이 너무도 수준 이하인지라 염려를 금할 수 없다고. 이상의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받은 진석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처음의 질문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제 대답은 예, 입니다. 싸워야 한다면 싸우는 수밖에요.” # 336 [336화] #그늘진 양지 (3) 욕심에 눈이 먼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갈증의 영향이 있기는 있겠으나, 결정적이진 않다는 뜻이었다. 우려가 현실화될 공산이 낮다고 대충 하는 대답도 아니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므로. 겨울이 자세를 바꾸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말씀하십시오.” “만약 그 상황에서, 적을 죽이길 거부하는 병사가 나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 “박진석 중위가 그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들은 게 있으니 말해볼게요. 사람을 상대하는 실전에서, 실제로 적을 살해하는 전투원의 비중은 굉장히 낮은 편이래요. 보통은 의도적인 오조준을 한다고……. 머리 옆이든, 발 앞이든, 일부러 빗나가게 쏘는 거죠.” “그렇습니까?” “네. 정식 장교교육과정에선 가르치는 사항이에요.” 진석은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방역전쟁을 위한 약식 장교교육에선 살인의 부담감을 가르칠 동기가 낮은 까닭이다. 변종들을 상대하는 병사들이 정신적 상해를 입는 비율은 일반적인 전쟁에 비해 확연히 낮은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 이후를 포함해도 그렇다. 덕분에 더 오랜 기간 전선에 배치되어 있을 수 있었고. 역병 이전의 전쟁을 기준으로, 전투임무 투입기간은 가급적 60일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있다. 그 이상이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리는 경우가 빈발하는 탓이었다. 겨울이 말을 이었다. “용기가 부족해서, 겁쟁이라서 싸움을 피하는 게 아녜요. 포탄이 쏟아지는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갈 순 있어도 사람을 죽이진 못하겠다는 거예요. 머리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죠. 살인을 극복하도록 전문적으로 설계된 훈련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무렵, 이런 병사의 비율은 최소 85%를 넘었었다고 해요. 즉 의무적인 살인을 강요받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환경에서조차, 적을 제대로 겨냥해서 쏘는 병사는 최선을 가정해도 겨우 15%밖에 안 된다는 뜻이죠. 그 이하일 수도 있고요.”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한 명의 적을 사살하기 위해 수만 발의 실탄을 소모한 배경엔 이런 원인이 있었다. 전장이 밀림이라 장애물이 많았다거나, 병사들의 사격실력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허술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적이 물러나기를 바라며 위협적인, 위협적이기만 한 사선으로 퍼부은 사격이 그토록 많았을 따름이다. 진석이 한숨지었다. “열에 하나 꼴이면 지나치게 낮군요.” “글쎄요…….” 처음 들었을 땐 오히려 너무 높은 게 아닌가 싶었던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Sir,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건 우리 애들도 그……살인에 대비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질문을 받은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훈련을 시키긴 시켜야겠죠. 시가지 전술훈련 위주로요. 하지만 이제 와서 사람 죽이는  연습을 따로 할 필요는 없겠네요. 벌써 충분히 되어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태까지 수많은 변종들을 죽여 왔잖아요.” 진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이해가 안 갑니다. 변종들은 인간이 아니잖습니까. 전 그것들을 죽이면서 살인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종종 소름이 끼치긴 했었죠. 잠깐이나마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깐씩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이건 부대 내의 다른 인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봅니다. 만약 앞으로 사람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당연히 추가적인 훈련을 소화하는 게 맞습니다.” 겨울은 부족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중위가 생각하기에 무슨 훈련을 하면 병사들이 사람을 보다 쉽게 죽일 것 같아요? 뭘 해야 살인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에 곤혹스러움을 내비치는 진석. “방금은 분명……전문적으로 설계된 과정이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러니까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일 것 같으냐고 물어본 거예요.”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 훈련, 사실 별 거 없어요. 특정 조건에서 사람과 최대한 비슷한 것을 쏘는 연습이죠. 여기서의 조건이라는 건 정당한 임무수행, 교전수칙, 상급자의 명령, 그밖에 자신과 동료를 방어해야 하는 상황 같은 것들이고요.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는 건 군인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살인마잖아요?” 살인범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의 살인능력은 훈련소를 갓 마친 신병집단보다도 못하다.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행위야말로 이기심의 극한이며, 이기적인 개인들의 조직력이란 구성원들의 능력을 오히려 깎아먹는 까닭이었다. “우리 부대의 규율은 조건부여의 측면에서 만점에 가까운 수준이에요.” 겨울이 말했다. “스스로 말하긴 창피하지만, 난 병사들에게 지휘관으로서 꽤 신뢰받고 있다고 봐요. 그건 박 중위나 이 중위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간부나 병사들도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이죠.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교범에선 유대감이 강한 장교의 명령일수록, 그리고 부대 구성원들 상호간의 친밀도가 높은 부대일수록 병사들이 적을 살해하는 비율도 증가한다고 쓰여 있어요.” “…….” “다음으로, 사람과 흡사한 무언가를 쏘는 연습. 이건 인질범이나 테러리스트의 그림을 등신대로 인쇄해서 근접 표적으로 쓰기만 해도 괜찮다고 하네요.” “그냥 기본 훈련 아닙니까?” 끝이 올라가는 목소리에서 불신이 느껴진다. 겨울은 그렇다고 수긍했다. “맞아요. 기본 훈련이죠. 근데 그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병사들이 적을 정조준해서 쏘게 되는 결과가 나왔대요. 신기하지 않아요?” “……너무 단순합니다.” “단순해도 결과가 그렇다니 어쩌겠어요. 중요한 건 조건과 함께 각인시키는 반복이에요. 명령을 받았을 때, 병사들로 하여금 사람 비슷한 걸 쏘는 행위에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거죠. 일단은 선을 넘게끔. 쉽게 말해, 어? 사람인데……쏴버렸어.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진짜 내가 쏜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같은 식으로요.” 이 말을 듣고, 진석의 얼굴이 찝찝함으로 물들었다. “충격을 뒤로 미루는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정확해요.” 깊게 긍정하는 겨울.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 부대는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어요. 사람을 닮은 표적으로서 살아 움직이는 변종들보다 나은 게 뭐가 있겠어요? 심지어 감염된 미군 병사들을 쏴 죽인 적도 많을 텐데요. 만에 하나 인간이 상대더라도 싸우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닐 걸요?” “…….” “진짜 문제는 그렇게 죽인 다음이죠. 여기서 지휘관의 역할이 중요해요. 적을 살해했다기보다는 임무를 달성했다고 말하도록 해주고,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을 주고, 전우를 살리기 위해, 또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위로를 주고……. 그리고 그 이상으로, 살해에 가담하지 못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병사들에게 신경을 써줘야 돼요. 숫자가 적을수록 더더욱 그렇죠. 본인들이 잘못된 거라고 자책하기 쉽거든요.” “화를 내선 안 된다는 겁니까?” “절대로요. 비겁자 취급이나 실망한 내색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지 않아도, 정상적인 병사라면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박진석을 차기 중대장으로 내정한 시점에서, 겨울은 소령 진급을 앞둔 싱 대위와 메리웨더 선임상사에게 관련된 조언을 구했다. 이미 아는 바를 점검하고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사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대신, 사람이 적일 때의 마음가짐만을 물었다. 지휘관의 자세에 대해선 싱 대위의 도움이 컸으나, 실제 사례 면에서 보다 많은 경험담을 들려준 쪽은 메리웨더 상사였다. 상대적으로 복무경력이 길고 참전경험도 많으며, 무엇보다 부사관으로서 장교에 비해 직접적인 교전을 치를 일이 잦았던 덕분이다. “중위. 선임상사가 그러더라고요. 전투를 겪은 병사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적들, 주변에 떨어지는 포탄들 이상으로 두려워했던 게 바로 동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고. 달리 의지할 데가 없는 전쟁터에서, 전우들 사이에 있을 자리가 없어질 까봐 무서워했다고.” 그리고 상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켜보니 사람을 만드는 것도 관계, 사람을 죽이는 것도 관계더라…….’ 전장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의 소회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겨울이 남은 말을 잇는다. “전에 훈장수여식에서 슈뢰더 대장이 그랬죠. 중위의 소대 운용에서 욕심이 많이 느껴진다고. 그런데 지휘관으로서 욕심을 내면서도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는 건, 자기가 지휘하는 소대원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하게 안다는 뜻이에요. 그렇죠?” “…….” “사람을 죽여야 하는 싸움에선,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해낼 거라고 믿고 맡긴 임무가 실패하거나, 적을 조기에 제압하지 못해 부수적인 인명손실이 발생하거나, 바로 눈앞에서 허공에 총질을 하고 있거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정확히 거기까지 밀어붙이는 지휘관은 병사 입장에서도 필연적으로 부담스럽다. 변종을 상대하는 싸움에선 먹히는 방법일지라도, 사람을 상대로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병사들이 살인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바닥을 오래 보던 진석이 자신감 빠진 질문을 던진다. “왜 접니까?” 그리고 계급장을 스쳐가는 복잡한 시선. “뭘 걱정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유라 중위를 먼저 부르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전투력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이유라 중위의 지휘능력이 저보다 못하다는 말씀이신지…….” “아뇨. 하지만 스타일은 많이 다르죠. 반란군이라고는 해도 같은 미군이 상대일 때, 난 이유라 중위가 병력을 공격적으로 운용할 거라곤 상상하기 어렵네요. 내가 직접 지휘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유감스럽게도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닐 예정이라서요. 사고가 터진 시점에 없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습니까…….” 부대원들의 생존만이 목적이라면 유라의 견실한 운용도 방어적으로 유용하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진압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었다. 욕심이 앞서는 인상으로 보이기 싫은지, 진석이 그로서는 드물게 꾸민 농담조로 읊는다. “이렇게까지 대비해놓고, 정작 가서 아무 일도 없으면 민망할지도 모르겠군요.” “보험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거죠. 돈을 내기만 할 땐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고, 보험금을 받게 되더라도 마냥 이익은 아닌 듯한……. 아무튼, 이제 결정을 내려줄래요? 내가 당부한 걸 주의할 자신이 있다면 받아요.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고요.” “받겠습니다.” 분위기상 억눌렀던 야망이 단숨에 쏟아지는 듯한, 즉각적이고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겨울은 한 번 끄덕이고 계급장 세트를 갈무리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대위. 임명식은 내일 열죠. 계급장은 다들 보는데서 달아줄게요. 진급처리가 완료되는 정확한 일자는 좀 더 나중이긴 하지만, 뭐 어때요. 여기서는 대위로 대우받아도 무방할 거예요. 대대 참모진도 벌써 그렇게 하고 있고.”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뭐가요?” “제가 이 계급을 얼마나 바랐는지 아실 텐데요. 그런데도 저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시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 점까지 감안해서 대위를 먼저 불렀어요. 그리고 대위가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는 한 내 당부를 싹 다 무시하진 못하겠죠. 그 정도면 보험으로선 충분해요.” 겨울도 대대장으로서 병사들에게 신경을 쓸 테고, 추후 중대장을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진석이라면 대강 예상할 터였다. 눈치가 그쯤은 되는 인물이므로. 지금의 겨울은 마냥 호의적인 게 아니다. 면담을 마무리 짓고자 화제를 바꾸는 겨울. “나가기 전에 이걸 전달해둬야겠네요. 1중대의 시가지 전술 훈련계획은 벌써 짜놨어요. 자세한 내용은 포스터 대위가 전달할 거예요. 중대장으로서의 첫 임무니까 최선을 다할 거라고 믿어요.”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휴가라고 좋아하던 애들이 울상이 되겠군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 되죠.” “어떤 거짓말입니까?” “D,C행이 확정이라는 거, 중대원들은 아직 모르잖아요? 훈련 결과에 따라 동부 여행에 데려간다고 하면 다들 아주 열심히 훈련에 임하지 않겠어요?” 진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에게선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표정이었다. # 337 [337화] #그늘진 양지 (4) 9월 20일. 여러 주를 순회하는 D.C행의 출발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겨울의 일과는 시간상의 여백이 갈수록 희박해졌다. 시간가속을 활용할 만큼 가벼운 업무도 별로 없었다. 긴 휴가를 앞둔 마지막 고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지사령과는 별개인 독립대대장으로서의 업무를 싱 소령이 대신해주지 않았다면 겨울도 꽤나 버거웠을 터였다. “아쉽네요. 소령도 같이 갈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겨울이 건네는 위로에, 신실한 시크교도는 수염 너머로도 뚜렷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부럽기는 합니다만, 누군가는 남아서 대대를 책임져야지요. 훈련소 운영이나 시설관리도 중요하고, 신병들로 꾸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세 개 중대를 방치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설마 동부에서 보낼 일정이 그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거든요. 방문하는 도시가 아무리 많아도 길어봐야 한 달 정도를 예상했는데, 실제론 추수감사절까지라니.” 최종적으로 확정된 일정은 무려 2개월에 달하는 장기 휴가였다. 엄밀히 말해 겨울에겐 휴가가 아니었으나, 병사들 입장은 다르다. 덕분에 구(舊) 독립중대원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하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다만 간단한 속임수가 있었다는 건 아는 대대참모들이 그 열기를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아무튼, 떠나기 전에 내 결재가 필요한 일은 최대한 끝내놓으려고요. 브라보, 찰리, 델타 중대 인원 편성에 대해 확인 받을 게 있다고 했죠?” “예. 포트 로버츠에서 임관한 장교들과 기존의 지원병들을 대대로 수용하려는데, 대대장님의 지침을 따르긴 했습니다만 부적합한 인원이 있을 듯 해서 말입니다. 그밖에 본토에서 지원한 초임장교들의 목록도 있으니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햇살이 비스듬히 꽂히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겨울은 싱 소령이 건네는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살펴야 할 장교와 병사들의 상세는 대대 정원의 2배수에 달했으나,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난민구역의 생리에 밝은 겨울에게만 보이는 결격사유가 있지 않을까. 소령의 기대는 딱 그 정도였으므로. “군정청 위원들로부터 1차적인 검수는 받은 거죠?” 혹시나 하고 묻는 겨울에게 소령이 즉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부적합한 대상자들을 가려내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조금……모자란 친구들이 꽤 있더군요.” 사람이 점잖아서 표현도 점잖을 뿐, 싱 소령의 어조는 평소보다 엄격했다. ‘장 부장님이 제대로 해주셨나보네.’ 겨울은 항상 그렇듯 두 부장에게 조력을 맡겼다. 싱 소령을 도와, 국적을 불문하고 부적절한 병력자원을 걸러내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장연철의 수고가 더 많았다.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일에서는 민완기보다 발이 넓었기 때문이다. 유라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착하고 성실한 학생회장 같은 사람이라고. 단지, 후배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가끔 부자연스러운 복학생 같기도 하다고. 유라의 나이에 어울리는 비유였다. 정상적인 세계였다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을 연령이니. 전자화된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기던 겨울이 소위 몇 사람을 지목했다. “여기……이렇게 여섯은 내가 한 번씩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액정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싱 소령. “쑨, 쉬, 류, 왕, 리, 페이……. 전부 중국계로군요.” 소령의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다. 성씨만은 미국인이 말하기에도 어렵지 않을 이름들이었다. 가장 먼저 꼽은 쑨 소위, 쑨시엔(孫賢)의 정체는, 일찍이 겨울에게 의탁한 화승화의 백지선이었다. 뒤이어 쉬진룽(許金龍)과 류젠차오(劉建潮)도 마찬가지. 왕커차이(王克才)는 중국인으로서 배경이 따로 없는 희귀한 경우였다. 마지막 둘, 리와 페이는 각각 리아이링, 그리고 한때 그녀의 일개 부하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페이창룽이었다. 이 진급은 사실 민완기가 벌인 공작의 일환이었다. ‘리친젠 입장에서, 딸이 반항하기 시작하니까 내세운 대항마라고 했지.’ 즉 부녀간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게 목적이었다고.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리친젠의 부탁을 못이기는 척 받아주었을 따름이다. 리친젠도 리친젠이었다. 딸에게 모욕을 줄 작정에서 일부러 낮은 직급의 구성원을 장교로 임관시켰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조직 내에 과시하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나, 솔직히 너무 옹졸하고 조야한 행동이었다. 민완기는 특유의 냉소를 곁들여 증언했다. “정확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버르장머리 없는 딸을 단단히 길들이겠다고.” 단초를 제공하긴 했으되, 갈등의 불씨와 그 원인인 어리석음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겨울은 리아이링에 대한 강영순 노인의 평가를 떠올렸다. 내면에 화가 나고 억울한 어린아이가 있으리라고. 삼합회의 향주로서 어지간히 거친 일들을 주관해왔을 것임에도, 지난날 쉽게 눈물짓던 리아이링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음, 대대장님께서 알아두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상념에서 깬 겨울이 고개를 기울인다. “뭐죠, 소령?” “중국계나 일본계 병사들을 받는 것에 대해 대대 참모진이 우려를 표하는 중입니다.” 포스터를 비롯해 참모진 중 누구도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순간 속으로 갸웃 했다가 대충 짐작한 겨울이 확인 차 물었다. “국적으로 차별을 하자는 소리는 아니겠고……. 따로 이유가 있겠죠?” “예. 각 중대의 구성원들이 출신 국가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된다면, 부대 내의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해지지 않겠느냐는 의견입니다. 확장 가동을 개시한 훈련시설에서도 투입된 지원병들이 출신성분에 따라 확연하게 편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요.” “좀 거센 경쟁의식쯤은 어지간한 부대에도 있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겠는데, 패싸움이 터질까봐 불안할 수준의 증오는 곤란하다는 거지요. 장교나 교관들 앞에서만 조용할 뿐, 실제 전장에서는 의도적인 비협조를 넘어서 아군살해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소령이 보기에도 극복이 불가능할 것 같은가요?” 소령은 애매한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난민구역의 실상과 너무 크게 달라서.” “어떤 상상을 했었는데요?” “그동안은 막연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요. 당신께서도 이곳 출신이시니까요. 처지는 어려워도 착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닐까 했습니다.” 겨울이 실소를 머금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착각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둘 모두입니다.” 짧게 마주 웃은 싱이 선임상사 메리웨더의 의견을 덧붙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선임상사는 시키면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훈련교관 중 일부도 그렇고요. 삼류 쓰레기가 들어와도 명예로운 군인으로 만드는 게 부사관의 일이랍니다. 개처럼 굴려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도 안 되면 될 때까지 다시 하겠다고……. 다만, 그때까지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대대장님께서 허락하신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즉, 전력화 기간이 길어질 거란 말이죠?” “네. 디안젤로 중사의 표현을 빌리자면……음, 이걸 그대로 들려드리기가…….” “괜찮으니까 해봐요.” 싱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었으나, 겨울이 물으니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말로는……어디까지나 부사관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만, 정신머리가 임질 걸린 X 같은 놈들이 많아서 넉넉잡고 1년은 굴려야겠다더군요.” 과연 부사관 다운 표현이었다. “소령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부대 지휘관으로선 구성원들의 유대감이 강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대대가 독립중대 시절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도, 옛날의 니세이 부대가 우수한 전투력을 발휘한 것도 특유의 유대감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세이 부대라면……김영옥 대령이 지휘했던 중대?” “맞습니다. 킴 대령. 언론에서 대대장님과 함께 언급하는 경우가 늘어 아는 사람도 많아졌지요. 난민 출신 지원병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곧잘 드는 예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니세이 부대는 지휘관을 제외한 모두가 일본계 이민자 2세대로만 구성되어있었다. “한마디로 대대 전체의 출신 국적을 통일했으면 한다는 거죠?” “예.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압니다만, 부대 운영만 놓고 보면 그게 최선입니다.” 순수한 군인인 싱 소령으로선 다른 의견을 내놓기 난처할 터였다. 뜸을 들이던 그가 자신의 입장을 보충했다. “한국계로만 대대를 꽉 채우기 어렵다면, 하다못해 중국계나 일본계 중 하나를 택해 나머지 병력 전체를 충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베트남계는?” “으음, 이곳 포트 로버츠의 동남아 사람들은 워낙에 숫자가 부족해서……. 안 그래도 군정청의 응-궤이엔……아니, 응-이엔? 이런. 이름이 너무 어렵군요.” “응우옌 아녜요?” “아, 예. 그 위원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제가 병력 편성 업무를 진행 중이라는 걸 어떻게 들었나보더군요. 하지만 체력검정을 통과한 사람 기준으로 두 개 소대밖에 안 됩니다. 중대를 채우려면 다른 난민캠프에서도 사람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너무 절차가 복잡하지 않습니까?” “다른 캠프라……. 한 번 알아볼 가치는 있겠네요.” 그러나 지역 군정청에서 차이가 날 경우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깨를 으쓱인 싱이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거기에 한국계 병사들하고는 곧잘 어울리지만 중국계는 거의 원수처럼 대하더군요. 차라리 일본계를 같이 두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껄끄러울 사연이 많았거든요. 그 후에도 국경분쟁이 자주 있었고.” “Sir. 혹시 당신 같은 분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습니까?” “전혀요. 그것만큼 잘못된 흐름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흐름……입니까.” “오래 전부터 흘러온 감정들이잖아요.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휩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휩쓸리게 하고, 또 다음 세대로 물려주죠.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어요. 나 혼자 애써봐야 소용이 없네요. 차라리 과거가 다 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재확인시켜준 것이 송예경이었다. 그녀의 말엔 뼈가 있었다. 싱 소령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저도 가끔 그런 마음이 들지만, 타고난 마음이 알려주는 옳고 그름, 즉 신의 이름인 사랑과 도덕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똑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바른 길을 가르칠 누군가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때 대대장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겨울은 싱겁게 웃고 말았다. 태블릿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장교 다음으로 이어지는 병사들의 자료에서 낯익은 사람 하나가 눈에 띈다. ‘쿠시나다 세츠나……. 계급이 일병?’ 다물진흥회의 회주, 가명으로는 임화수, 본명으로는 방귀남이 선물이랍시고 내밀었던 피해자였다. 머리를 밀어버린 탓에 사진만으로는 못 알아볼 뻔 했으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체력측정 기록은 평균을 약간 밑도는 편. 훈련을 담당했던 교관의 기록으로는 성격이 어두우며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다고 되어있었다. 훈련의 참여도와 이해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방귀남은 기지사령이 되는 즉시 잘라내야 할 과거의 종양 가운데 하나였다. 처벌을 미루는 것은, 지금 문제를 제기하면 처리 도중에 자리를 비우게 되는 까닭이었다. 백산호에 대해서도 한 번쯤 경고가 될 만한 조치를……. 조금 더 이어지려던 생각이 느닷없이 끊어졌다. 신경 말단을 자극하는 날 선 감각보정 때문이었다. 그 정체를 파악한 겨울은 적잖은 곤혹감을 느꼈다. ‘「위기감지」? 이렇게 갑자기?’ 곧이어 아련히 들려오는 총성. 방향은 성도회 거류구 쪽이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사이렌이 울리진 않았다. 모든 비상조치는 조용히 내려지고 있을 것이었다. 싱 소령만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 평소의 사격 훈련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수중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넷 워리어 단말이었다. 옆에서 보이지 않게끔 액정을 확인한 겨울은 돌아서서 싱을 불렀다. “소령.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전투를 치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파 중대를 소집해놔요.” 느긋하던 싱이 이제야 겨울의 안색을 살피고 덩달아 전신을 긴장시킨다. “부대 소집은 문제없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직 확실치 않아요. 뭔가 알게 되면 연락할게요. 그때까지 준비 상태에서 대기해줘요.” 대강 얼버무리는 지시. 싱 대위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더 해줄 설명도 없고, 더 끌 시간도 없었다. 겨울은 대기하던 운전병에게 내리라고 지시한 뒤, 직접 험비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 338 [338화] #그늘진 양지 (5) 웨스트 지부장이 겨울에게 기대했던 것은, 유사시 전투지원이 가능한 지휘본부 구성원의 역할이었다. 즉 상황 발생 시 지휘본부에서 통제를 담당하다가, 필요할 때 현장으로 출동할 수도 있는 고급 지휘관으로서 끌어들인 것이다. 기존의 지휘본부 및 성도회 거류구 경비대는 중앙정보국 특수작전그룹(SOG)에서 차출된 인력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들은 여러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온갖 환경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고의 베테랑들이었으나, 변종을 상대하는 방역전쟁에 한해서는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편이었다. 다만 성도회의 감염된 신도들이 완전한 변종은 아니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사람을 상대하는 요령만으로도 통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하자면 겨울은 만일을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명목상의 역할과 별개로, 실제로 주어지는 임무는 별 것 없었다는 뜻이다. 적어도 오늘에 이르기 전까지는. “대체 무슨 일이죠?” 지휘통제실로 들어선 겨울의 질문에, 경비부장인 그레고리 그림이 캐비닛을 가리켰다. “우선 현장투입준비부터 갖추시죠. 설명은 그 다음입니다.” 통제실 구성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겨울에게 경례했다. 그들은 안전지대임에도 불구하고 화생방 방호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다만 정화와 여압(與壓)이 유지되는 밀폐공간이기에 방독면을 벗고 있을 뿐. 겨울은 자신 몫의 보호의를 신속하게 착용했다. 신소재를 활용하여 체형에 맞게 제작된 신형 화생방 전투복은, 기존의 제식품에 비해 훨씬 더 가볍고 기민한 움직임이 가능했다. 그만큼 방어력도 강화되었고. 그사이에도 통제실 전면의 분할화면들 속에서는 급박한 움직임이 진행 중이었다. 여러 요원들이 나누어 감시하는 폐쇄회로 영상이었으므로, 겨울로서도 한 눈에 파악하긴 무리였다. 언뜻 괴물 같은 형상이 스쳐지나가고, 한쪽에선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공기오염이 확인되었나요? 신도들에게 무기를 탈취 당했어요?” 겨울의 연속적인 질문에 그림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까지 공기오염은 없습니다. 단지 아직 타겟의 특성이 확실치 않아서 혹시나 하고 대비한 겁니다. 무기 탈취는……일단은 그렇다고 해야겠군요.” “타겟의 특성? 일단은 그렇다는 건 무슨 말이죠?” “죄송하지만 나머지는 여기 슈라이버에게 들으십시오. 샌도벌! 3구역 11번 화면을 가운데로! 5팀에게 길목을 틀어막으라고 해! 동선을 보면 타겟의 목표는 교회인 모양이니까! 1팀은 후방을 차단하고! 폐쇄된 공간에서의 교전은 피해! 적이 최후저지선에 도달하면, 그땐 인질의 생사를 무시한다! 잊지 마라! 최우선 보호대상은 어디까지나 사이비 교주야!” 인질이라니? 당혹스러워하는 겨울에게, 통제요원 한 사람이 다가섰다. “당신이 슈라이버?” “예. 상황을 전파 드리겠습니다. 이쪽의 화면을 봐주십시오.” 요원은 러기드 노트북을 조작하여 성도회 거류구의 전자지도를 보여주었다. 색으로 상황을 구분하는 식이라, 약 3할 가량이 노란 색과 붉은 색으로 물든 상태. 이 순간에도 깜박거리던 푸른 구획 하나가 노란 색으로 전환된다. 경보기가 작동된 지점은 파문형의 알림으로 표시되었다. 겨울은 이제야 사태의 규모를 감 잡을 수 있었다. “최초 보안위험이 발생한 장소는 여기, 지도상 5구역에 위치한 예비 실험실입니다. 연구진의 보고로는 잠재적 위험이 낮은 곳이었기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하진 않았고, 다만 무인 경비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있었죠. 그런데 그곳에 등록되지 않은 표본……관리대상이 있었나 봅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것이 해당 실험실의 보안체계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걸 몰랐다고요?” 슈라이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연구진이 작정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모르는 표본이 있을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일단 타겟의 최초 식별영상부터 보시죠. 이게 약 17마이크(분) 전입니다.” 13인치 화면 속에 괴물이 등장했다. 본래 인간이었던 흔적은 있으되, 그 흔적으로 인해 더욱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원래의 팔 외에도 서로 다른 길이의 팔이 세 개나 더 있었고, 근육질 가득한 몸은 울룩불룩 불균형하게 꿈틀거렸으며, 헐벗은 몸뚱이에선 늘어진 가슴이 덜렁거렸다. 무게중심이 잘 안 맞는지, 움직임의 모든 축이 비틀려있다. 그래서 더 기괴했고. 화면엔 자꾸만 하얀 가로줄이 그어졌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으아아악!」 연구진 한 사람이 덜미를 붙들린 채 망가진 인형처럼 덜걱거렸다. 발끝만 간신히 땅에 닿아 질질 끌려 다닌다. 버둥거리며 반항하니, 머리카락 긴 괴물이 성질을 내며 두들겨 팼다. 몇 대 때리지 않았는데도 주먹질에 피가 묻어난다. 마스크 째로 뭉개진 인질의 얼굴은 신원 확인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괴물은 금속이 갈리는 듯 한 포효를 내질렀다. 「아파? 아파아? 이게 아프냐고오오!」 그리고 그것은 경련하는 연구원의 머리통을 쥐어 홍채 인식장치에 콱 들이댔다. 맑은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이번엔 비상용 무기보관함을 붙잡는다. 자물쇠가 걸려있었으나 힘으로 잡아 뜯어버렸다. 겨울은 괴물이 무장하는 과정을 곤란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적어도 총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난민구역에선 이상할 것도 없지.’ 마지막 순간, 기형이 된 신도의 주먹이 벽이 얇은 곳을 뚫고 숨겨진 배선을 헤집는다. 전선이 뜯어지면서 폐쇄회로도 암전되었다. “잡힌 사람이 누구죠?” 슈라이버가 관자놀이를 누른다. “캠벨, 엘리야 캠벨 박사입니다.” “…….” 겨울은 불필요한 말을 꺼내는 대신 종료된 영상의 마지막 몇 초를 되감았다. 스페이스를 철컥거리며 프레임 단위로 끊어서 보면, 괴물의 뒤통수, 기다란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듯 올올이 솟구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정전기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특수변종?’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본디 사람이었을지라도, 지금은 인간의 지능과 언어능력을 보유한 특수변종이나 마찬가지였다. “화면상의 노이즈도 그렇고, 벽 너머의 전선 위치를 찾아내는 능력도 그렇고, 사실상 트릭스터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고 봐야겠는데요?” 슈라이버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경비부장 그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머저리들! 폐쇄된 공간에서는 접촉을 회피하라고 했잖아! 명령이 우습게 들리나!” 직후 날카롭고 불쾌한 소음이 통제실을 가득 메운다. 오퍼레이터가 얼른 볼륨을 줄였다. 그림이 노려보는 정면의 스크린엔 귀를 막고 괴로워하며, 빗발치는 사격을 피해 물러나는 전투요원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다른 분할화면으로는 예의 그 괴물이 입을 쩍 벌린 채로 인질을 방패삼아 자동화기를 난사하는 광경이 보였다. 캠벨의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빠악!] 섬광폭음탄의 폭발. 전투요원 한 사람이 집어던진 것이었다. 괴물이 충격을 받고 움찔거렸으나, 정도가 미약했다. 이후의 움직임에선 시각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저거 전파시야까지 갖춘 건가? 아까는 방해전파를 내뿜더니……. 트릭스터의 특징은 다 가지고 있군!” 씹어 삼키는 듯한 경비부장의 말에 통제요원 하나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저토록 시끄러운 소리를 질러대니, 어쩌면 반향정위(反響定位, Echolocation)일지도 모릅니다. 음파탐지 말입니다.” 반향정위는 반사된 음파로 주변의 구조와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뭐가 됐든 일단 막아! 저 위치! 원격 포탑! 근처의 모든 차단벽을 내리고 제압사격을 퍼부어! 50구경으로 갈겨서 함정으로 밀어 넣으라고!” “지뢰……캠벨 박사가 다치면 어떡합니까?” “대전차지뢰와 도약지뢰를 비활성화시키면 되잖아! 산탄지뢰도 꺼버려! 오직 발목지뢰만 쓴다! 그 박사 나부랭이, 무릎이 날아가도 살아만 있으면 되겠지!” 비상사태에 어울리는 극단적인 지휘. 그림의 목소리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벌써 죽거나 다친 부하들이 있었기 때문. 그도 이 사태에 의혹을 품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듯 하다. 캠벨을 수상히 여기는 것이다. 통제요원은 바로 끄덕이고 콘솔을 조작했다. 타자를 두드려 해당 구역의 포탑에 접속하고는 컨트롤러를 수동으로 조작한다. 버튼을 꾹 누르자, 십자선 중심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그러나 괴물은 중기관총 세례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 마치 보라는 듯이, 박사를 전면에 내밀어 마구 흔들어댔다. 대놓고 쏘지 못한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반사행동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쨌든 두려움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겨울은 그 몸짓이 분노로 가득하다고 느꼈다. 눈이 뒤집힌 짐승의 돌격 같았다. 곧바로 지시를 정정하는 그레고리 그림. “빈틈을 노려서 실사격을 꽂아!” “영상에 약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상관없습니까?!” “내가 책임진다! 쏴!” 이를 악문 요원이 조준점을 빠르게 수정했다. 돌연 그친 사격에 괴물이 전진하는 찰나, 캠벨의 몸이 기울어지는 여백을 단발사격이 관통했다. 「악!」 이 순간의 비명만큼은 사람을 닮았다. 사격을 가한 오퍼레이터가 흠칫 놀랄 정도로.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아-」 살점과 뼛조각이 섞인 피가 튀었다. 몸통이 주먹 하나만큼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내구성이었다. 방금 맞은 중기관총탄은 험비의 장갑판도 관통하는 까닭이다. 궤도가 꺾인 탄자는 바닥에 튕기고도 벽을 꿰뚫었다. 넘어지는 괴물을 본 그레고리 그림이 손끝으로 날카롭게 허공을 그었다. “Fuck! 지뢰 다 꺼! 지뢰 다 꺼! 신호 자르라고!” 괴물이 아픔으로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기 시작하면서, 캠벨도 몸 전체가 질질 끌리는 꼴이 되었다. 발목지뢰가 내장을 찢어발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뢰지대 A9 비활성화 완료! 2팀, 중보병대가 진입 허가를 요청합니다!” “무슨 개소리야! 바깥에 대기하라고 해!” “재확인 요청! 장갑복의 방어력을 믿고 인질을 구출하겠다는 팀장의 보고!” “불허! 괜한 자극으로 인질을 죽이고 싶나? 이대로 가둬두는 게 최선이야!”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되, 운이 좋지 않았다. 괴물이 배관 정비용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문을 발견하자, 그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경비부장이라고 해서 내부의 모든 설계를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 통로를 확인해! 격리수단이 뭐가 있지?” “소이제 분사장치와 열압력탄입니다!” “……Fuck! Fuck! Fuck! 제대로 되는 게 없군!” 통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충분한 대비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질극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듯 하다. 소이제와 열압력탄은, 괴물과 박사를 함께 태우거나 내장파열로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쓸 수 없을 안전장치들이었다. 그래도 감시수단은 철저하게 마련되어 있는지, 열 감지 센서가 괴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했다. 크기에 비해 몹시 비좁을 것인데도, 움직이는 속도는 기괴하도록 빨랐다. “격벽은? 격벽은 없나?” “배선과 배관이 통과하는 경로라……잠긴 철창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 그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방호복의 두건이 함께 넘어간다. 총기보관함을 잡아 뜯던 괴력을 감안하면, 자물쇠로 잠긴 철창쯤은 시간벌이에 불과할 터였다. “일단 내부를 비춰봐! 1번 스크린으로!” 지정된 화면에 핏줄기를 문 괴물이 잡혔다. 제한적인 조명 아래, 그것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휘돌리는 순간, 겨울은 갈라지는 머릿결 사이로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의 일부를 보았다. 말 그대로 일부였다. 나머지는 근육이 보이도록 짓무르고 썩어있었으므로. “그림 부장.” 겨울의 부름에 경비부장은 안 좋은 인상으로 돌아보았다. “바쁩니다! 제가 요청하기 전에는 지휘에 관여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호의와 별개로, 그림은 겨울을 전술 조언가로 삼은 웨스트 지부장의 결정이 못내 싫은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지휘권에 간섭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혹시 저쪽으로 스피커를 연결할 수 있습니까?” “……왜 그런 요청을?” “아무래도 제가 아는 사람 같아서요.” “아는 사람? 설마 저 괴물 말입니까?” “네.” 그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도 침묵이 내린다. “어차피 당장은 제압수단이 없잖습니까. 잘 되면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죠. 대화를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정말 잘 되면 사태를 끝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겨울의 설득에, 오퍼레이터 하나가 손을 들었다. “가능하긴 합니다.” “가능하다고?” 경비부장이 돌아보자, 그 요원은 다시 한 번 긍정했다. “무선이 잘 안 터지는 곳이라, 정비작업시나 기타 상황에서의 비상연락을 위한 유선망이 존재합니다. 거의 모든 경우에 대비한 구역이니까요.” “오늘 같은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쉰 그림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화면 속에서 철창을 붙잡고 힘을 쓰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저런 거랑 대화를 한다고? 라는 중얼거림. 그러나 결국은 승낙하고 만다. “좋습니다, 중령. 한 번 해보시죠. 손해 볼 건 없으니.” 그가 요원에게 스피커 연결을 지시했다. # 339 [339화] #그늘진 양지 (6) 그 사이에도 괴물이 된 신도는 터널을 기괴한 속도로 주파하는 중이었다. 배관이 많아 그리 넓지 못한 공간이었음에도, 근육이 꿈틀거리는 거체는 믿기지 않는 유연함을 과시했다. 움직임만 보자면 환형동물을 보는 듯하다. 골격 구조가 인간의 상궤를 벗어났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겨울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황보 에스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제어화면에 붉은 신호가 들어온다. 해당 구간의 전력이 차단되었다는 알림이었다. 폐쇄회로가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잡아낸 광경은, 에스더가 인외(人外)의 악력으로 스피커를 부수고 굵은 전선을 잡아 뜯는 모습이었다. 분노로 희번덕거리는 눈알은 화면의 정중앙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전력계통은 구간별로 독립되어 있었다. 열과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에스더의 이동경로를 알려준다. 기실, 감지기가 아니어도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긴 쉬웠다. 가는 곳마다 전선과 전자기기가 파괴되고 있었으므로. 감지장치들도 연속으로 퍽퍽 꺼지는 중이다. 그 맹렬함이 구획을 나누는 철창에 부딪혔다. 쿵! 휘어지는 강철. 이를 철창 너머에서 비추는 화면도 흔들렸다. 인간 아닌 모습의 소녀는 무서운 힘으로 철창을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기회였다. 겨울이 재차 호명했다. “황보 에스더.” 다시 한 번, 쿠웅! 격노한 에스더가 창살 사이로 가장 긴 팔을 내뻗었다. 갈고리처럼 굽은 손끝이 사납게 허공을 긁는다. 스피커까지는 두 뼘의 간극이었다. 겨울은 침착하게 물었다. “에스더. 제 목소리를 기억하십니까?” 「니가 누군데에에에!」 “한겨울 중령입니다. 당신과 만났을 땐 아직 중위였죠.” 「…….」 멈칫. 저편의 움직임이 잦아든다. 들리는 건 오직 날카로운 숨소리 뿐. 혼란이 분노를 잠식했다. 겨울이 눈길을 돌리니, 경비부장 그림이 찡그린 얼굴로 손짓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보라는 의미였다. 그는 에스더의 위치에 맞게 병력 배치를 변경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나. 기억을 더듬던 겨울이 먼저 침묵을 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겐 정죄함이 없으니……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너를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해주었음이라……. 당신에게 받았던 쪽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직접 쓴 거였죠?” 이외의 다른 구절도 길었으나, 보정을 받아도 이 정도를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엔 「암기」의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향된 기술은 과거로 소급되지 않는다. 머뭇거리던 에스더가 창살을 하나씩 힘주어 뜯어냈다. 여전히 인간을 벗어난 괴력이었으되, 더는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폐쇄회로 앞에 웅크린 커다란 소녀는, 시선을 카메라의 렌즈에 맞추었다. 마치 이쪽을 엿보려는 듯한 행동. 이어 가만히 묻는다. 「그거얼, 읽으셨어요오?」 “네.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주님께선 거짓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면서요.” 「진짜로오, 하안겨울 중령님이시네에…….」 에스더가 갸우뚱 했다. 「그런데에, 중령님이이, 왜에 거어기에 있어요오?」 하얀 이빨이 드러내는 의혹. 「정마알, 왜에, 지그음, 거기이에, 계시지이? 중령님도오, 이 나쁘은 놈들하고오, 같은 편이셨던 거예요오? 그러며언, 제에가, 화아가, 마아아아니 날 것 같은데에…….」 겨울은 적당히 누그러뜨렸다. “글쎄요. 같은 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전 이제 막 불려왔거든요. 그래서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 “에스더, 당신이 말해 봐요. 대체 어쩌다 그런 모습이 된 거예요? 붙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고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거어짓말쟁이이.」 소녀가 슬프고 음산하게 키득거렸다. 「모르는 처억, 하지 마세요오. 어차피이, 이 새끼르을 구하고오, 저르을 막으려고오, 오신 거잖아요오……! 저느은, 다아 필요 없어요오. 이런 몸으로오 더 이사앙 살고 싶지도 않고오! 이 캠벨 새끼하고오, 그 씨바알 목사 새끼이! 두 명만 죽여 버리고오……저도 자살할 거예요오!」 “박태선 목사를 죽이겠다고요?” 「그래요오! 그 개새끼가아! 우릴 속였으니까아!」 쾅! 울분에 찬 주먹질이 터널의 벽면을 후려친다. 콘크리트 한 움쿰이 바스러졌다. 에스터의 턱 아래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진다. 뭉개진 입술은 조소를 머금었다. 「킥……. 제가아, 이렇게 되고서어, 귀가아, 괴엥장히 밝아졌거든요오. 숨소리가아, 신경 쓰여서어, 잠을 못 잘 정도로오. 그리고 마악, 소리가 아닌 소리도 들리더라고요오. 오버, 오버 하고오 끝나느은, 지직거리는 말드을. 그래서, 제가아, 다아 들었어요! 박태선! 이 씹새끼가아! 무슨 거짓말으을 했는지이! 우리가아! 왜 이렇게에! 변했는지이! 어차피이! 치료가 불가능해서어! 죽을 수밖에에 없다는 것도오오오!」 그리고 그녀는 카메라와 스피커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있잖아요오, 저느은, 중령님하고 싸우기 싫거든요오? 그러니까아, 거기 가마안히 계세요오? 그리고오, 다르은 사람들한테도오, 전해주세요오. 전부 다아, 물러나라고오. 방해하며언, 모두 죽여 버릴 거라고오!」 쩌적. 유리에 금이 가더니, 폐쇄회로가 곧바로 암전했다. 스피커도 마찬가지였다. 제어화면에 붉은 신호가 늘었다. 에스더가 다시 폭주하고 있었다. 교회로 점차 가까워지면서. 지하에서도 방향을 잘 잡는 건 역시 트릭스터처럼 자기장을 감지하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그림 부장이 질문했다.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에스더와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겨울은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했다. 알아낸 게 많지 않아, 전달은 몇 마디로 충분했다. 경비부장의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소녀의 살해동기에 공감하는 기색. “결국 사이비 교주가 목표라는 겁니까?” “예.” “젠장! 최우선 보호대상이고 뭐고 간에 그냥 죽으라고 하고 싶군요.” 그러나 그럴 순 없는 입장이었다. 방역전쟁의 향방이 걸린 문제 아닌가. 잠시나마 겨울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지하 터널의 출구가 아슬아슬하게 봉쇄되었다. 그림 부장은 포위가 뚫리지 않는 한 사살보다 생포를 우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화력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가급적 비살상 수단을 활용하고, 사격을 하더라도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부위를 조준해! 신도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특수변종이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면 저것도 고가치 샘플이 되겠지!” 샘플 운운하는 표현이 영 껄끄럽다. 겨울이 그렇게 느낀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림의 어감이 그렇다는 말이었다. 진석과의 대화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베테랑에게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고로 상대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현장에서 제압사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술 요원 하나가 반문한다. “수면 가스를 쓰면 안 됩니까?” “바보 같은 소리. 캠벨을 죽일 작정인가? 괴물을 재울 양이면 사람 기준으로는 치사량을 훌쩍 넘어. 인질을 포기하는 건 최후의 선택이다. 했던 말 또 하게 만들지 말도록!” “바로 그래서 쓰자는 겁니다.” “뭐?” “캠벨 소령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정황상 애를 저 괴물로 만들어놓은 것도 소령이겠죠. 아니면 저렇게 원한을 드러낼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 “어차피 인질을 무사히 구할 확률은 낮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샘플이라도 확실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얻으려다가 모두 놓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림 부장이 인상을 썼다. “정황이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놔야지. 무슨 수로 괴물을 만들었는지 알아내야 할 테니. 타겟을 확보한다고 그 메커니즘까지 규명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개소리 집어치고, 전장 통제나 제대로 해! 우린 최고의 결과만을 추구한다!” 총성 가득한 현장의 소음에 에스더의 포효가 섞였다. 소녀는 인질을 방패로 삼고도 터널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리 자리 잡은 경비대원들의 화망이 전방위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침착한 사격은 대단히 정확한 사선을 그었다. 모두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림 부장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퇴로를 끊어!” 에스더가 지나온 터널을 폭파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전력이 차단되어 원격 기폭은 불가능해졌지만, 이미 후방에도 병력이 투입된 상태. 좁은 터널에서 인질을 잡은 특수변종과 교전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차라리 길을 무너뜨리는 편이 낫다. 이 시점에서 웨스트 지부장이 뒤늦게 입실했다. 그는 통제요원 슈라이버로부터 간략한 보고를 받고도 그림 부장을 다그쳤다. “생포라니? 너무 온건한 대처 아닌가? 그러다 저 괴물이 탈출이라도 해버리면?” 그림 부장은 지휘에만 집중해야 할 마당에 상관이 귀찮게 군다는 눈치였다. 허나 현장이 교착상태였으므로 대답을 할 여유가 없진 않았다. “한겨울 중령이 확인한 바, 타겟의 목적은 확실합니다. 이제 와서 탈출을 기도할 확률은 낮고, 그게 성공할 확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정도론 안심이 안 돼.” 그는 무척이나 초조하게 굴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장관님께 보고가 들어간 직후, 전략폭격기 편대가 이륙했네.” “…….”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나? 인간의 지능을 보유하고 언어를 구사하는 특수변종이 출현한 걸세. 타겟이 탈출한 뒤에 위치 파악마저 안 될 경우, 이 일대에 핵 투발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 기지 인원들까진 어떻게 대피시키더라도 난민들까지 다 챙기진 못할 것이고…….” “진정하시죠.” 그림 부장이 상급자의 말을 끊었다. 그는 또박또박 강조했다. “말씀하신 건 무의미한 가정이고, 높으신 분들의 호들갑입니다. 일이 정말 잘못되면 폭격기가 나설 것도 없이 우리 손으로 이 구역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으음…….” “일단 지켜보십시오. 우리는 아직 상황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웨스트 지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한편 현장에선 에스더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소녀는 적극적으로 사격을 가했으나, 이쪽은 사망자는커녕 중상자조차도 없었다. 일부 경상자들이 있을 뿐. 그 와중에 에스더의 소총 하나가 기능고장을 일으켰다. 소녀는 남는 손으로 노리쇠를 거칠게 당겨 씹힌 탄피를 빼내고, 다시 분노 어린 난사를 재개했다. 겨울은 그 능숙함을 이상하게 여겼다. ‘에스더는 나보다 어릴 텐데.’ 괴물이 되어버린 소녀의 정체를 몰랐을 땐 그러려니 했었다. 여기는 난민구역이고, 성도회 거류구에도 지원병으로서 훈련받았을 이는 얼마든지 있었을 테니. 허나 이젠 에스더의 나이가 걸림돌이다. 정확한 연령은 모를지언정, 예전에 보았던 앳된 외모가 있잖은가. 미군에 입대하려면 최저 만17세 이상이어야 한다. 난민구역에서도 마찬가지. 역병 이전부터 달라지지 않은 기준이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쯤 간접경험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방금 전 기능고장에 대처하는 모습에선 그 이상의 경험과 학습이 묻어났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중령님. 다시 대화를 시도해보십시오.” 그림 부장의 요청이었다. 겨울이 바라보자, 그림이 부연한다. “어차피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인질을 풀어주도록 설득하십시오.” “투항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요.” “이번에도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됩니다. 저격수들이 기회를 노리는 중이니까요. 한 순간에 최대한 많은 팔을 끊어놓을 겁니다.” “…….” 겨울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마이크를 붙잡았다. 오퍼레이터가 사인을 준다. 현장에 연결되었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현장에선 제압사격이 중지되었다. 몸을 숨긴 채 갈겨대던 에스더도, 돌연히 찾아온 정적이 수상했던지 캠벨을 엄폐물 삼아 바깥을 엿보고 있다. “에스더. 제 말이 들리시나요?” 「……또 중령님이신가요오? 역시나 같은 편이셨네요오.」 예의 그 음산한 키득거림이 다시 들려온다. # 340 [340화] #그늘진 양지 (7)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정성이 필요했다. 경비부장은 그저 시간을 끌라고만 하였으나, 겨울은 정말 설득을 시도해볼 셈이다. 가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그렇게 보여도 어쩔 수 없겠죠. 어쨌든 전 미군 소속인걸요. 미군이 당신과 싸운다면 미군 편에 설 수밖에 없어요. 제게 의지하는 난민구역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며언-」 “하지만 에스더, 나도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고요.” 「…….」 “거기 붙잡혀 있는 캠벨 소령에게도 들을 것이 많아요. 이 거류구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날, 내가 물어봤었거든요. 황보 에스더라는 사람은 어찌 되었느냐고.” 반쯤은 들으라고,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캠벨은 당신이 죽었다고 했어요.” 「킥……. 거어짓마알.」 “네. 거짓말이었죠. 그래서 당신 얼굴을 봤을 땐 많이 놀랐습니다. 여기 같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들 당황하고, 또 화를 내고 있어요. 대체 캠벨 소령은 왜 우리에게까지 사실을 감추었나, 하고요.” 「그렇게에, 책임으을 미루셔어도, 소용없어요오.」 에스더가 절망과 증오로 신음했다. 「목사 새끼이한테에 속았고오, 군바리 새끼들한테에 속았고오, 캠벨 이 새애끼한테도오 속았어요오. 더 이상은 소옥지 않아요오. 중령님도오, 믿을 수우 없어요오. 아니이, 믿지 않으을 거예요. 아무도오, 믿지 않으며언, 속을 일도오, 없으을 테니까아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는 겨울. “캠벨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당신이 다른 신도들과 달라진 게 캠벨 탓인가요?” 어떻게든 공감대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힘든 일을 겪었으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생리 아니던가. 한편으로, 저격수들에게서 들어오는 무전을 들은 겨울이 경비부장에게 펼친 손을 들어보였다. 아직 사격 명령을 내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지휘권에 대한 간섭이어서, 막 명령을 내리려던 그림 부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무시하진 않았다. 그라고 내키는 일이겠는가. 억울한 자살일수록 긴 유서를 남기는 법. 역시나 에스더는 비틀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오. 어차피이, 박태선 씹쌔 때문에에, 괴에물이 되었지마안, 이렇게에 더 끄음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거언, 엘리야아 캐엠벨! 이 새끼 책임이에요오.」 소녀는 마치 변조된 것 같은 음성으로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린다. 「저한테에, 이것저것 주사하고오, 살을 자르고오, 피도 뽑고오, 부푸는 몸을 보면서어, 즐거워 하던데요오? 자기가아, 아아주 유명해질 거랬어요오. 영웅이 되고오, 대통령도 만나고오, 훈장도 받고오, 돈도 어엄청나게 벌어들일 거라고오. 모두의 조온경을 받게 될 건데에, 그게 다아, 위이대한 멍청이들이라앙, 제 덕분이라고오. 너도오, 내 덕에, 역사에에, 이름을 남기게에 될 거라고오.」 “…….” 위대한 멍청이들은 아마도 위대한 애국자들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아아, 그렇지이. 중령니임. 이 새끼는 모르는 거어, 하나 알려드릴까요오?」 “캠벨 소령이 모르는 거?” 「네에. 킥. 저는요오, 트릭스터들이 떠드는 거얼, 이해할 수 있어요오.」 겨울이 경악했다. “무슨…….” 「사실으은, 듣는 것도오 아니고오, 보는 것도 아니고오, 무우지 이이상한 감각인데요오, 아무트은, 걔들이 나누었더언 대화르을, 이해할 수 있다느은 말이에요오.」 에스더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이 개새끼가아, 매앤날, 괴롭혔거든요오. 이거느은, 새앤프란시스코오에서 수집된 전파이고오, 또 이거느은, 로오스 애엔젤레에스에서 수집된 전파이고오, 어쩌고오, 저쩌고오……. 처음에느은, 그냐앙 시끄럽기만 하구우, 보이는 것도 없었는 데에, 어떤 주사를 맞고서부터어, 차츠음,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오.」 과거 확신에 가까운 의구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변종들이 서로를 물어, 재감염을 통해 어떤 형질을 전파하는 게 아닌가 하고. 에스더가 언급한 그 특정한 주사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선에서 확보한, 아마도 트릭스터로부터 뽑아내었을 최신의 모겔론스 복합체를 에스더에게 주입했다는 의미였다. 「그치마안, 이 새끼한테느은, 계에속해서 모른다고마안 했거드은요오. 원하는 대로오, 되는 꼬올, 보여주기 싫어서어. 히. 그랬더니이, 그럴 리가 없다고오, 분명히이, 주파아수가 맞춰졌을 거라고오, 사실대로 말하라고오, 저를 마악, 달군 쇠로 지지고오, 아프다고오 울었더니이, 너느은 이 정도로느은, 죽지 않는 몸이라고오, 한 시간만 지나며언 다 나아을 거라고오, 징그러우니까아, 울지 말라고오…….」 여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겨울을 불렀다. 「중령님.」 “네.” 「트릭스터들은요오, 한겨울 중령님으을, 지인짜 진짜 싫어하더라고요오. 도대체가아, 죽일 수도 없고오, 감염은 엄두도 못 내겠고오, 나타나는 곳마다아 감당이 안 되니까요오.」 “그렇군요…….” 「네에. 저한테느은, 정마알 마않은 기억들이 있거든요오. 중령님이이, 어얼마나 강하고, 얼마나아 잘 싸우는지, 알아요오. 그래서요, 제가요, 아까요, 중령님하고 싸아우기 싫다고 했던 거느은, 정말로 싫은 마음도 있지마안, 중령님이 방해하며언, 박태선 개새끼르을, 죽일 자신이 어없어서이기도 했어요오.」 “에스더. 그럼 여기서 포기하는 게 어때요.” 「포오기?」 “예.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당신을 막을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당신은 혼자잖아요. 잘 훈련된 병력을 뚫을 순 없을 거예요. 그리고……캠벨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아직 치료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기회가, 어딨겠어요.」 양쪽 두께가 다른 에스더의 어깨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흐으, 흐으, 바람 새는 소리. 요란하게 웃는 것도 같고, 어깨를 떨며 우는 것도 같았다. 겨울은 꿋꿋하게 설득했다. “캠벨이 무엇을 더 숨겼을지 누가 알까요? 우리에게서 당신을 숨겼듯이, 치료가 가능한데도 일부러 자료를 숨겼을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잖아요. 혼자서 연구를 독점하려고……. 그러나 그걸 확실하게 밝혀내려면 캠벨 본인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를 여기서 죽여 버리면……그 혼자만 알고 있을 사실들을 다시 밝혀내지 못하거나, 밝혀내더라도 치료에 쓰이긴 너무 늦어버리게 될 겁니다. 성도회 사람들은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요.” 에스더가 곧바로 되물었다. 「그으 다음에는요?」 “죄값을 치러야겠죠.” 「또오 거짓말을 하시네에. 저는 바아보가 아니라니까아요? 이 새끼는, 제가 죽이지 않으며언, 저얼대로 죽지 않을 걸요오? 박태선 그 미친 새끼도 마아찬가지고요! 치이료? 그딴 거, 가능해도 안 받아요오! 제에가 원하는 거언! 오지익! 두 놈을 찌져 죽이는 거엇 뿐! 잘못한 놈들으은! 벌으을 받아야 해요오! 왜? 내가 아니며언! 누구도 제대로 된 벌을 주지 않을 테니까안!」 씩씩대던 그녀가, 겨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돌연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린다. 「뭐어, 됐어요. 킥. 그건 아아무래도 좋아요오. 중령니임, 제가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게요오? 다안순히 하소연이 하고 싶어서어? 아아아아뇨! 아아닌데요?」 겨울은 신경의 간질거림을 느꼈다. 「위기감지」 및 「생존감각」은 이곳에 올 때부터 내내 저릿거려서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이는 에스더의 특별한 존재감 때문. 그러나 이와 별개로 「간파」와 「통찰」이 새롭게 비등하는 중이었다. 그림 부장이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던 것처럼, 인간도 변종도 아닌 소녀 또한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게 아닌가 하고. ‘어째서?’ 상황의 우열은 여전했다. 에스더가 지금 시간을 벌어서 무엇 한단 말인가. 다만 의혹이 들기는 한다. 전기를 다루는 괴물의 특성을 얻은 소녀에겐, 그 괴물들의 교활함 또한 붙지 않았을까? 라는. 과연, 소녀는 영악함을 드러냈다. 「이제에, 중령님도오, 제 가치를 깨달으셨을 거예요오. 제가 이 새끼르을 죽여버리며언, 최에소한 당분간은! 트릭스터들이 떠드는 거얼, 해독할 능력이이, 저한테 밖에 없을 거라는 사시일! 수많으은, 군인들으을, 살릴 수우도, 있을 능력이니까아, 그런 기회이니까아! 이일단 알게 된 이사앙, 하안겨울 중령으은! 나르을, 함부로오 죽일 수우가 없다는 거어!」 확실히, 적의 통신을 엿듣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죽일 놈들만 죽이고 나며언, 제가 자살하기 전에에, 조금으은, 도와드릴 수도 있거든요오?」 “에스더.” 침착하게 호명한 겨울은, 그녀에게 아직 종교적 믿음의 불씨가 남아있기를 바라며 다음 말을 골랐다. 달리 설득의 여지가 없기에,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당신 말이 맞습니다. 당신에겐 많은 사람을 살릴 힘이 있네요. 수십만, 수백만이 될지도 모르죠. 어쩌면……이게 바로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짧은 공백 뒤에, 괴기스러운 음성이 확연하게 떨려서 나온다. 「뭐어라구요오?」 “기독교 신앙에선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잖아요. 만약 그분께서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당신이 그동안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에도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에겐 무수한 사람들을 살릴 기회가 주어졌죠.” 성경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 일화가 많다. 그리고 겨울은 그 중 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암기」 보정이 수개월 전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었다. “전에 만난 어떤 수녀님께서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악이 만연한 곳에 은총이 넘쳤나니.」 그러면서 시련을 받은 욥의 예를 들어주셨죠. 주님께서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쳐내셨으나, 그는 믿음을 지켰다. 그럼으로써 그의 믿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의롭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악을 만드셨지만 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셨다……라고.” 「아니야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신 말씀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님께선 그분의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고통을 내리셨던 거라고요. 비록 가톨릭 수녀님께서 전해주신 이야기이긴 해도, 뜻은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야아아!」 에스더가 끔찍한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신은 없어! 신은 없다고! 다아 거짓말이야아! 저엉말로 전능하다며언! 왜에 이렇게 밖에 못하는 데에! 진짜로 사랑한다며언! 왜에! 이렇게 밖에 못하는 데에에!」 “…….” 「너어어! 믿은 적도 없는 주우제에! 배신당하안 적도 없는 주제에에! 함부로 말하지 마아아!」 갑작스러운 격렬함에 반응한 그림 부장이 입모양으로 묻는다. 아직입니까? 찰나를 망설인 겨울이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경비부장이 초조하게 팔짱을 꼈다. 대화가 길어지는 데서 어떤 희망을 엿본 눈치였다. 한참을 씨근덕대던 소녀가 거친 소리를 냈다. 「죽일 거야……. 둘 다아 반드시 죽일 거야아…….」 겨울이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에스더 당신은 나만 방해하지 않으면 될 거라고 했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은 혼자잖아요. 내가 아니더라도 포위를 뚫지 못할 거예요.” 겨울이 보는 화면엔 중보병들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개량된 장갑복의 무게와 동력은 압도적이다. 인질만 아니었다면 저격수를 배치할 필요도 없었다. 조용하던 에스더가 느닷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까부터어, 혼자, 혼자아 하시는데에……. 사실은요오,. 저느은, 혼자가 아닌데요오?」 거의 동시에, 한 통제요원이 대경실색하여 보고한다. “미확인 열원 다수 포착! 일곱 개의 구역에서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그림 부장이 기겁을 했다. “그게 어디서 나온 거야!” “타겟이 통과한 경로를 중심으로……!” 출발지점은 제5실험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에스더가 전선을 끊고 전자기기를 부수며 움직인 경로는 동력 문제로 감시가 중지된 상태였다. 바로 그 직선에서 곁가지를 치듯이, 모션 센서와 열감지 센서 경고가 확산되고 있었다. 「거기이! 놀라는 소리 다아 들린다아! 킥! 준비가 될 때까지이! 기다려 주셔서어 가암사합니다아! 하아! 하아! 끅! 하아하아하하하핫!」 터널 끝자락에 도사린 에스더가 원념에 찬 폭소를 터트렸다. 「제가요오! 그동아안! 처어녀수태를 했거든요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마알도 안 되는 간격으로오! 밖으로 나와서도 두우 마리나 흘렸습니다아!」 겨울조차 전율하게 만드는 광기였다. # 341 [341화] #그늘진 양지 (8) 현장을 비추던 모니터가 꺼졌다. 대화를 나누던 스피커도 침묵했다. 무인감시체계가 먹통이 되는 구역이 늘었다. 에스더가 ‘흘린’ 것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모체와 같이 전류의 흐름을 감지하는 게 틀림없었다. 겨울은 작고 재빠른 무언가가 좁은 틈의 배선들을 갉아대는 광경을 상상했다. 행위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숙한 머리로 같은 행동만 반복하는. 통제실은 현장 요원들의 헬멧 카메라에 의지했으나, 그마저도 노이즈가 심했다. 전파간섭은 급박한 보고조차 불분명한 목소리로 뭉개놓았다. 선명한 건 오직 유선망 뿐. 애초에 집중된 병력으로는 분산된 사태를 감당하기 벅찼다. 명령의 홍수를 쏟아내던 그림 부장이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돌아섰다. “방금 나눈 대화!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겨울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목적을 재확인함. 거짓일 확률은 희박함. 트릭스터의 송신을 해독할 수 있고, 짧은 임신과 출산이 가능. 허나 얼마나 낳았는지는 불명. 또한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음. 그림 부장이 우거지상을 썼다. “직접 나가야겠습니다! 중령님은 최후방어선으로!” 교회 방면의 지휘권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박태선 목사를 지키라고. “지침은?” “맡깁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슈라이버! 두 놈 챙겨서 따라가!” 즉각적인 판단이었다. 무장한 통제요원 셋이 겨울에게 붙었다. 그렇다고 통제실을 비우는 건 아니었다. 무인포탑과 원격제어 지뢰지대 등은 아직도 반 이상이 정상이었다. 감시수단도 마찬가지. 특히나 마지막 안전장치는, 다른 모든 계통이 무력화되더라도 활성화가 가능했다. 열쇠는 웨스트 지부장이 쥐게 되었고. 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경비부장의 권한을 존중했다. 시답잖은 요구와 질문으로 시간을 끌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 여차하면 다 날려버리겠지.’ 그래서일까. 출동하는 겨울에게 당연한 당부를 건넸다.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가급적 통신을 유지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소각처리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경고. 화생방 보호의는 또한 불연성 소재였으되, 거류구 전체를 태우는 불 속에서 생존을 보장할 정도는 못 된다. 그때의 죽음은 소사(燒死)와 질식사 사이의 어딘가다. 겨울은 한 번 끄덕이고 곧바로 나섰다. 노력은 하더라도, 형편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무전이 완전히 죽지는 않아, 도달하기까지 간헐적인 통신과 상황전파가 이루어졌다. [당소 오스카 3-1! 제5실험실 확보! 자재창고에서 다수의 케이지를 확인! 미상의 적은 최소 22개체 이상으로 추정!] [접촉(Contact)! 접촉! 새로운 타겟 식별! 7구역으로 도주! 추적 허가바람!] [안 돼! 거기서 막고 기다려!] [3-1! 거긴 어떻게 생긴 놈이야? 이쪽은 산성폭발을 확인했다!] 인근에 2개 사단이 추가로 전개된다는 통보도 있었다. 전략폭격기 편대를 띄워둔 지역에 새로운 부대를 진입시킨다는 건, 만약의 경우엔 아군살해까지 감수하겠다는 각오였다. 포트 로버트 주둔 병력 전체도 진즉에 경계태세로 전환되었고, 불가피한 조치이기는 했다. 사태가 기지 내에서 마무리될 때에 대한 대비로서. ‘여기가 후방이긴 해도, 전파가 닿는 범위 내에 오랫동안 침묵하던 트릭스터가 있을지 모르니까. 최근 근처에서 발견된 변종집단도 있었으니……. 지역 전체를 봉쇄해야겠지. 늦을수록 구멍이 커져.’ 전기를 다루는 괴물은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대량의 전파를 뿜어낸다. 주변 어딘가에 있을 동종(同種)에게 최후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만약, 에스더도 그렇다면? 트릭스터가 단말마의 비명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아내는가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최악을 가정해야 했다. 즉, 변종들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적이기에 정교하다. 역병의 위협이 단숨에 치솟을 것이다. 일그러진 소녀가 과연 그렇게까지 할 것인가? 자문한 겨울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복수를 성취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비통함이 얼마나 깊을까. 신을 저주하는 마당에 세상이라고 저주하지 않을까. 굶주린 종말에게 증오를 위탁하진 않을까……. 어쩌면 그 마지막 비명이 능력에 딸려오는 본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즉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 맺힌 유산을 남기고 마는 경우. 에스더에겐 또 한 번의 비극이 될 것이다. 혹은 이미 송신이 이루어졌을지도. 역 전파방해를 걸 전자전기 편대가 날아오고 있지만, 상공에 도달한들 쉽게 나서진 못할 것이다. 전파방해는 피아를 가리지 않으며, 트릭스터의 통신 대역은 광범위한 주파수에 걸쳐있는 까닭. 다만 추가적인 확산을 막는 데엔 효과적이겠다. 어느덧 교회의 첨탑이 가까워졌다. 희미하게 찬송가가 들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적! 9시 방향!” 외치며, 슈라이버가 연사를 긁는다. 그러나 빗나갔다. 표적이 원체 작고, 급박한 사격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일부러 쏘지 않았다. 손을 들어 통제요원들을 만류한다. “잠시만!” 잠깐이라도 관찰하고 싶었다. 감각보정을 비껴낸 적이 궁금했으므로. 분홍빛 살이 갈라진 미숙아는 지친 숨을 할딱거리는 중이었다. 크기는 작다. 조그만 입엔 예리하면서 들쭉날쭉한 치열이 이중으로 돋아있었다. 대각선으로 길쭉한 두상(頭相). 눈은 없다. 그러나 앞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머리를 겨울과 슈라이버가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깨애애액- 기운 없는 울음. 그리고 느리게 기어왔다. 무릎과 팔꿈치는 이미 다 까여있는 상태였다. 질질 끌리는 흙에 긴 핏자국이 남았다. 그러다 픽 쓰러진다. 잠깐 사이에 숨도 멎었다. 감염돌기 돋은 혀가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 끝이었다. “무슨…….” 슈라이버의 아연한 중얼거림. 타앙! 겨울이 확인사살을 가했다. 미숙아의 몸통에 퍽 하고 구멍이 생겼다. “따라 붙어요.” 특수한 적이라 「기척차단」이 있는가 했다. 그러나 감각보정이 차단되었다기보다는, 너무 작은 위협이라 묻혔던 모양이다. 세밀하게 느끼기엔 황보 에스더의 존재감이 강렬했다. 교회 앞에 도착하니 황당한 광경이 보였다. 멀리서부터 찬송가가 들리는 데서 아직도 신도들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교회 입구를 막고 있는 건 뜻밖이었다. 「우-리는 목사님의 사랑으로 간-난을 극복하네」 「목사님의 크신 사랑 주-님의 은-총을 알게 해-」 「아-픔을 참고 견뎌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리」 「아-아- 우리에겐 목사님뿐 우리에겐 목사님뿐」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 슈라이버 대신, 겨울이 최후방어선의 책임자를 찾았다. “여기! 최상급자가 누굽니까?” 방어진지로부터 두 사람이 나왔다. 한 쪽은 지휘관, 남은 한 쪽은 통신병이었다. 보호의를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어도 장비만으로 구분이 가능했다. “도일 중사입니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사?” “편의상 전역 전의 계급을 쓰고 있지요.” “알았어요. 그럼 중사, 저 사람들 왜 아직도 저러고 있어요?” 당연히 대피시켰어야 한다. 민간인인 동시에 연구대상으로서도 지켜야 하니까. 광신의 피해자를 더 늘릴 순 없는 정부의 입장에선, 이미 감염되어있는 사람들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모두 잃은 뒤엔 연구 방법이 극도로 제한될 터이므로. 따라서 진즉에 대피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것이다. 지금 이 광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저희도 물론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도일 중사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지만 팍 목사가 쓸 데 없는 짓을 해버리는 바람에…….” “쓸 데 없는 짓?”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만, 그놈은 저희를 믿지 않습니다. 피해망상도 있고요. 패닉 룸으로 데려가겠다고 하니 갑자기 발광을 하더군요. 뭐라고 막 소리를 지르던데……정황상, 신도들에게 자기를 지키라고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신도들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뒀다는 겁니까?” “어쩌겠습니까? 그들 하나하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근력이 거의 변종 수준이란 말입니다. 하마터면 총기까지 빼앗길 뻔 했죠. 진짜 적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마당에 광신도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알았어요.” “이곳 지휘를 맡아주시겠습니까?” 답하기 전에, 겨울은 병력배치를 살폈다. 교회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한 병력은 두 개 소대에 못 미쳤다. 노래 부르는 광신도들을 배후에 둔 경비대원들은 누구나 짜증이 한가득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적과 대치하기도 우스울 것이다.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정도 병력이면 나는 따로 움직이는 게 더 유리해요. 부대원 각각의 특기나 능력을 모르는 지휘관은 반쪽짜리잖아요. 중사가 계속 지휘하는 게 나아 보이네요. 난 책임자로서 방침만 결정합니다. 그 외의 사항은 여기, 슈라이버와 조정해요.” “알겠습니다.” “메인 타겟은 가급적 제압이 우선입니다. 이건 우선 내가 상대하죠. 상황에 따라 대응방침을 바꾸도록 하고요.” “진심이십니까?” “네. 뭔가 필요하면 당신에게 요청할게요.” 경비부장 그림은 겨울의 결정에 대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면죄부는 아니다. 일이 잘못될 경우, 재량권을 발휘한 당사자로서 겨울 역시 얼마간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었다. “그런 그렇고.” 겨울은 의문을 느꼈다. “중보병 장비를 왜 방치해놨죠?” 도일 중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신도들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중보병을 투입했습니다. 몸싸움이 있었거든요. 신도들에게 둘러싸인 병력을 무사히 빼내느라 배터리를 소모했는데, 돌아와서 파워 케이블을 연결하고 보니 전력 공급이 끊어졌더군요.” “전혀 못쓸 정도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가동가능시간은 대체로 10분 미만입니다. 교전 도중에 동력이 끊기느니 차라리 벗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방어력보다는 기동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애들에게 도로 착용하라고 지시할까요?” 중보병은 배터리가 방전되면 굼벵이가 된다. 장갑복의 중량을 순수한 체력으로 감당해야 하는 까닭. 겨울이 아닌 이상 느린 속도로 걷는 게 고작이었다. 적에게 둘러싸이면 그 부담이 더욱 가중되니, 장갑복을 입고 있어도 중보병으로서의 역할은 기대하기 어렵다. 중사의 말처럼 남는 건 방어력이 유일하다. 허나 10분이 마냥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겨울이 묻는다. “그 10분은 교전 상황에서의 소모를 가정한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다섯 명쯤 예비대로 대기시키는 건 어때요? 적어도 돌파당할 위기 한 번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걸요?” “으음…….” 총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도 보였다. 어디선가는 화염방사기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소화시스템도 갖춰져 있으니 대화재로 확대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도 전기로 작동한다면 문제지만.’ 거류구 소각조치가 아니라 평범한 불이 번지는 정도라면 경비 병력의 생존에는 지장이 없다. 고민하던 도일 중사가 겨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실례.” 중사가 몇 명을 호명하는 동안, 겨울은 통신망을 확인했다. “슈라이버. 통제실과 연결 됩니까?” “유선망은 멀쩡하고, 위성단말은 지향성 안테나에 연결을 해야 쓸 만하고, 무선망은 근거리에서나 쓰겠습니다. 감도가 무척 안 좋습니다.” 방해전파의 발신원이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 그게 얼마나 가까이인지는 겨울도 모른다. 감각보정에 새로운 경고가 더해졌다. 에스더의 존재감과 구분될 정도이니 가벼운 위협은 아니다. 겨울이 방향을 가늠하고서 몇 호흡이 지났을까. 위협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한 경비대원이 악을 썼다. “전방에 거수자 출현!” 괴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변종으로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양복이든 환자복이든 대체로 말끔한 복색이었으므로 성도회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멍한 얼굴들엔 인간을 물어뜯으려는 폭력적인 욕망이 묻어나지 않았다.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까지는 모르겠어도. “정지! 정지!” 경비대원들이 어설픈 한국어를 발음했다. 그동안 신도들을 통제하면서 익혀둔 듯 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사소통은 무리였다. 그래서 겨울이 나섰다. “당신들! 여기 오면 안 됩니다! 일단 거기 멈춰요!” 이러면서도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위기감지」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나, 선두의 남자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엔 치열이 두 줄인 이빨자국이 남아있었다. 겨울은 오면서 사살한 미숙아를 떠올렸다. 또한, 재감염에 의한 특성 전파도. # 342 [342화] #그늘진 양지 (9) 거수자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났다. 표정은 각양각색. 꿈을 꾸는듯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황홀해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이들의 정체는 교회를 가로막은 광신도들이 알려주었다. 어쩐지 찬송가가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노래가 그치고 등 뒤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저, 저거! 이단이다! 천벌 받을 이단 새끼들이 몰려왔다!” 뭐? 겨울이 당황하는 사이, 전면에서도 반응이 돌아왔다. 외침을 듣고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의 사내는, 역병에 파 먹힌 얼굴을 끔찍한 분노로 일그러뜨렸다. “누가 누구더러 이단이래! 이 개 같은 사이비들! 박태선이가 무슨 재림예수야! 사기꾼이지!” “뭐가 어째?” 격분한 광신도들이 저주를 쏟아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은총을 받고도 고마운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 “더 늦기 전에 회개해라! 천년왕국이! 주님의 뜻으로 목사님의 나라가 온다!” “교언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자 은전 서른 닢을 쥐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서로 간에 비난이 격해졌다. 비등하는 공기가 심상치 않아, 경비대원들이 바짝 긴장했다. 거수자 무리가 변종집단이 아니라면 함부로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본인들의 임무이거니와, 저들은 어쨌든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가. 타타탕! 겨울이 하늘에 대고 삼점사를 당겼다. “닥쳐! 양쪽 모두 입 다물어!” 강하게 외쳐 봐도, 뒤따르는 정적은 길지 못했다. 종교적인 분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순교는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 그러므로 총성 따위가 무슨 위협이랴. 교회를 지키는 광신도들부터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거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날카롭게 웃었다. 이질적인 희열이 시선을 그러모은다. 두 눈이 풀린 이 여성은, 한 손으로 머리를 쥔 채,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알겠어……! 이 목소리는 천사님의 계시야!” “미친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발끈하는 광신도들에게 여성이 부들부들 떨리는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들리지 않아?……들리지 않아? 아하. 잘못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거로구나……. 하하하! 이렇게 예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니……. 박태선이야말로 적그리스도라고! 그를 죽여야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녀의 주위에 동조가 번졌다. 나도 들린다고. 나도 그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사람들처럼 보였다. 겨울이야 내막을 짐작하지만, 실체를 모르고 보면 더할 나위 없는 광증 그 자체였다. 광신도들에겐 그 이상의 징조였고. “마귀다! 마귀가 저놈들에게 속삭인다!” 경악과 분노, 공포가 뒤섞인 손가락질. “감히 누굴 죽인다는 거야!” “저놈들에게 사탄의 영이 깃들었어! 막아! 반드시 막아! 목사님을 지켜!” “영적전쟁이다! 공중의 권세는 하나님의 집을 침범하지 못한다!” 일촉즉발의 순간 재차 총성이 울려 퍼졌다. 말을 알아듣진 못해도, 이곳을 담당하며 기른 눈치로 성난 군중의 폭발을 직감한 도일 중사가 경고사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러 사선의 삼점사가 흙과 벽을 부수며 사람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긴 생채기가 생겼다. 아슬아슬하게 튄 도탄 때문이었다. “젠장! 하마터면 죄다 눈 뒤집힐 뻔 했군.” 파리해진 도일 중사가 겨울에게 확성기를 던졌다. “Sir! 저 치들 좀 어떻게 눌러주십쇼! 이대로 가면 전부 사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알았으니까 경계 흐트러뜨리지 말아요! 어수선한 사이에 뭔가 기어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당부한 겨울은 먼저 광신도들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여러분! 제가 누군지는 아실 겁니다! 우리의 임무는 ㅂ……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러분께서 여기에 계시면 오히려 더 막기 어렵습니다!” 애써 박태선 목사의 이름을 삼켰는데도 에스더에게 홀린 거수자들의 분노가 치솟는다. 겨울은 그들의 살의를 민감하게 느꼈다. 더욱이 더 큰 「위협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통신을 맡은 슈라이버의 안색이 빠르게 나빠지는 중이었다. 세 번째 경고사격이 이루어졌다. 이번엔 한쪽 방향으로만. 효과는 앞서보다 적을 것이다. 총성을 등진 겨울이 소리를 높인다. “들어가요! 빨리! 차라리 안에서 문을 잠그라고요!” 광신도들과 거수자들이 앞뒤에서 달려들면 방어선이고 뭐고 없어진다. 그 와중에 시작될 추가 재감염은 또 어떤가. 그 외의 공격에도 극도로 취약해질 것이었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제안, 그리고 겨울의 명성이 광신도들을 밀어냈다. 그만큼 거수자들이 전진했다. 사격과 유탄에 주춤거리면서도, 점점 더 대담하게. 이에 따라 광신도들도 멈춰 섰다. 「사탄의 권세」 앞에서 물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 슈라이버의 보고가 들어왔다. “여기만 개판이 아닙니다.” 통제요원은 주위를 살피며 낮은 소리로 빠르게 보고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두 개 팀이 뚫렸고, 포위를 벗어난 타겟은 위치가 확실치 않습니다. 방해전파 강도가 베타 트릭스터 이상이라 드론 지원도 불가능하답니다.” “항공정찰이나 감시위성은?” “항공은 직접 교신이 불가능해서 시차가 있고, 위성은 상공 진입까지 약 2분 남았습니다. 연기도 문제고요. 흩어진 유체(幼體)들을 추적하느라 병력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2분은 길다. 겨울은 점점 더 늘어나는 검은 연기들을 보았다. 화염방사기만이 원인은 아닌듯 하다. 돌이켜보면 포트 로버츠가 캠프였던 시절, 기지를 공격한 트릭스터는 안전한 철수를 위하여 주변에 불을 질렀었다. 그 이후로도 하늘의 감시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였다. 트릭스터 다수의 경험을 축적한 에스더라면 당연히 생각할 것이었다. ‘유체 가운데 애크리드의 특성을 보유한 개체가 있을지도.’ 인 화합물은 방화에도 적합하다. 애크리드가 전선에서는 삽시간에 도태된 특수변종이지만, 캠벨 정도의 위치에서 연구용 샘플을 얻기란 어렵지 않았을 터. 무전으로 확인한 산성아기, 눈이 없어도 겨울을 포착한 미숙아를 보건대, 에스더는 인간의 기술과 광기어린 천재성이 빚어낸 모겔론스의 결정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의 뇌리에 복수밖에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유체들이 밖으로 탈출하려는 기미를 보였다면, 웨스트 지부장이든 대통령이든 극단적인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을 테니까. 유체 중에 제2의 에스더가 없으란 법 있는가. 어쩌면 에스더도 여기까지 짐작하기에 유체를 내보내지 않는 것일 수 있었다. 거수자들과의 간격이 줄어든다. 심적인 한계선은 10미터 가량이었다. 일반인을 상대로도, 21피트(약 6.4미터)부터는 육탄전이 사격전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거리는 곧 방어력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충돌이 빚어졌을 때 순식간에 돌파당하고 만다. 하물며 감염된 군중이 상대임에야. 중화기와 산탄지뢰가 없었다면 이미 치명적이었다. 도일 중사는 예비대 삼은 중보병 쪽을 힐끗거렸다. 미련이다. 죽이기 전에 힘으로 밀어내봐야 시간을 벌 따름이었다. “거류구 전체를 소각한다는 말은 안 나왔어요?” 겨울의 질문에 슈라이버가 부인했다. “다행히 유체들의 이동은 안쪽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거류구 외곽에 1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요. 적어도 생물학적 오염 유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목사를 정말로 죽이고 싶은 모양입니다.” 확인은 여기까지. 다른 걸 물을 여유는 없었다. “계속 통신 맡아요.” 자리에서 일어선 겨울이 확성기 스위치를 눌렀다. “에스더! 에스더!” 분명히 근처에 있다. 정황이 그렇고, 감각은 확신이었다. “듣고 있다는 거 다 압니다! 멈춰요! 이 사람들을 다 죽일 작정입니까?!” 트릭스터는 다른 변종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겨울은 산타 마가리타 호변에서 맞이했던 아침을 회상했다. 구울은 변종들로 하여금 급류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살아있는 부유물들을 밟고서라도 거친 물살을 건너, 이쪽을 물어뜯고 싶어서. 고작 구울조차 그 정도의 지배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후의 경험으로 미루어 트릭스터가 그 이상일 것은 자명하다. 에스더도 그 정도일까? 불완전한 감염 피해자들은 그래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부탁합니다! 여기서 그만두세요!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요!” 슬금슬금 밀려오던 발걸음의 물결이 멎었다. 광신도들 사이에선 에스더가 누구냐는 숙덕거림이 흘러나온다. 더는 들어갈 생각도 없어보였다. 경비대원들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정보국의 비수로서 전 세계의 어둠을 갈라 온 그들에게도, 이 진득한 광신과 역병의 늪은 생경한 두려움일 터였다. 잠시 후, 거수자들의 대열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쏘지 말아요!” 겨울의 말에 도일 중사가 끄덕였다. 방독면 보호경 안쪽으로 조금 보이는 얼굴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에스더의 어린 메신저는 긴장된 방어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췄다. 빤히 바라보았으므로, 겨울은 총구를 살짝 내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비참한 소녀의 입을 대신할 아이는, 역시 고통에 짓무른 모습이었다.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나마 발음은 에스더보다 또렷했다. 갸우뚱 하는 모습이, 말하는 아이가 에스더의 속마음까진 모르는 듯 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시키는 대로 전달만 할 따름. “에스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저 사람들 다 죽을 거예요. 결국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겠지만, 피해자들을 사선으로 내몬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단 말입니다. 모르겠어요?” “중령님, 바보에요?” 말하는 아이가 무표정하게 웃음소리를 흉내 냈다. 하, 하, 하. “저는요, 벌써,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병력 피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껏 에스더로 인해 죽은 경비대원은 없었다. 중상자도 드물고, 경상자조차 이상할 정도로 드물었다. “제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고, 생각하세요?” “…….”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역병을, 옮겼다고, 생각하세요?” 감정의 공백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죠. 저 때문에, 죽는다는, 결과엔, 변함이, 없는걸요. 원래는, 안 죽었어도, 될, 사람들이, 저로 인해, 죽는 거라고요. 저는요, 끔찍한, 죄인이에요.” “아뇨. 당신도 속은 거잖아요. 내게 성경 말씀을 적은 쪽지를 줄 때, 나를 해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어요? 날 구원해주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하, 하…….” 명백한 조소였으나 겨울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죠. 과실치사라고 할 순 있어도, 의도적인 살인이라고 할 순 없단 말예요. 하지만 여기서 저 사람들을 죽게 만들면, 그땐 진짜로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물러나요.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요.” “하, 하, 하.” 에스더가 다시 웃었다. “중령님. 저 사람들은요, 벌써, 죽은 목숨이에요. 저는요, 저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저 사람들도, 복수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거라고요. 만약에, 지금 당장, 제가 아는, 모든 진실을, 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전달한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으세요? 네?” 교회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 형제님이 미쳤나? 왜 사람을 물어? 상황은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 하, 하. 에스더의 입이 말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먹혔네요. 중령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에스더…….” “마지막, 경고에요.” 전방 거수자들의 기세도 달라졌다. 머리를 감싸는 이가 많이 보인다. “가만히, 계세요. 그러면,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만약에, 끝까지, 막으려고 하시면, 그때는, 중령님을, 죽여서라도, 지나갈, 테니까요.” 에스더는 겨울의 한계 바깥에 있었다. # 343 [343화] #그늘진 양지 (10) 도일 중사가 소리쳤다. “Sir! 돌아오십시오! 얼른!” 시작될 공격을 직감한 것이다. 거수자 집단의 격한 움직임은 여러 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신 같았다. 지휘권자인 그는 말릴 틈도 없이 명령했다. “사격! 죽기 싫으면 다 죽여! 클레이모어! 5번, 6번! 격발!” “아직 안 됩니다!” 위치가 높아 시야도 넓은 저격수가 막았으나, 늦었다. 한 쌍의 산탄지뢰가 폭발하며 1,400개의 쇠구슬이 전방을 휩쓸었다. 살상범위 내의 모든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진다. 그러나 핏빛 안개가 가라앉았을 때, 드러난 참상은 예상을 밑돌았다. “뭐야?” 중사가 경악했다. 거수자 집단이 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건 착시에 불과했다. 처음엔 그랬을지언정, 슬금슬금 다가오는 와중에 앞뒤가 분리되었던 것이다. 뒤는 오히려 물러났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발소리, 광기와 광신의 웅성거림, 불안한 후방, 그리고 전대미문의 특수변종을 상대하는 데에서 느끼는 두려움. 이것들이 베테랑의 감각을 교란했다. 에스더의 목적은 방어력을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남은 거수자들이 야생동물처럼 흩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다루는 태도가 아니다. 증오의 합리화였다. “중보병! 교회로!” 겨울의 지시는 외마디로 충분했다. 당장 급한 불을 깨달은 예비대는 지시를 받기도 전에 움직이고 있었다. 기어코 숨어든 유체를 사살하고, 물린 신도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면, 단 10분만으로도…….’ 다 죽일 수 있다. 겨울은 혐오감을 느꼈다. 박태선이 죽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말했듯이, 종말의 향방이 달린 문제였다. “지원 병력 투입 통보! 도착예정시간(ETA), 앞으로 약 7분!” 슈라이버가 전하는 통신. 얼마나 밀어 넣을지는 몰라도, 결국 비밀유지고 뭐고 확실한 수습부터 선택한 것이다. 늦은 조치지만, 까마득한 윗선의 결정 치곤 굉장히 빨랐다고 봐야 했다. 진입로가 썰물 빠지듯 비어버리는 순간, 어느 골목에서 던져진 것인지, 하늘에서 피막을 펼친 산성아기들이 날아들었다. 지붕을 스치는 저공비행. 비거리가 짧아도 너무 짧았다. 병사들에게 머리 숙이라고 경고할 틈조차 없을 지경. 타타탕! 겨울의 연속 사격에 세 아기가 찢어진다. 미숙아임에도 위력은 만만찮다. 확 퍼지는 강산성의 분무(噴霧). 후두둑 쏟아지는 소나기는 덤이었다. 어느 쪽이든, 관성과 바람을 타고 일방으로 뿌려졌다. Fuck! 뒤집어쓴 경비대원들이 기겁을 하여 몸을 털어냈다. 보호의의 내산성 코팅에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독한 연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1시 방향! 지붕 위!” 방어진지 2층의 저격수가 급작사격을 가한 직후 바짝 엎드렸다. 이쪽의 기세가 주춤한 찰나에 가해지기 시작한 저편의 제압사격. 총성은 메아리치는 먼 천둥 같았다. 소구경 화기가 아니다. 적어도 50구경 이상의 묵직한 연사였다. ‘중기관총?’ 그런 게 에스더에게 있을 리가……. 제5실험실의 총기보관함엔 개인화기가 있었을 뿐인데. 혼란스러운 겨울은 회피 도중의 힐끗 스치는 광경에서 괴물이 된 소녀의 무장을 확인했다. 그것은 무인포탑에서 억지로 뜯어낸 듯한 중기관총이었다. 전기적으로만 작동하는 트리거는 그녀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그것을 쌍으로 갈겨대는 중. 위협적인 사선 몇 가닥이 겨울을 스쳤다. 퍽 하는 충격에 구르고 보니 보호의 한쪽이 터진 상태였다. 출혈은 없었으되 통증은 있다.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의외로 정확한 조준이었다. 견착 같은 것도 없이. “미친! 화염방사기는 아껴!” 느닷없이 뿜어진 불길. 중사가 부하를 윽박지른다. 화력공백을 틈타 뛰어들던 거수자 셋을 불태웠을 뿐이었다. 명백한 낭비였다. 휴대 가능한 화염방사기의 연료량은 고작 십 수 초 분량에 불과하다. 중보병용도 채 30초가 되지 못한다. 캠벨은 어디다 두고 나온 걸까. 에스더는 단신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방패가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터. 벌써 목을 꺾었을지도 모른다. 중기관총 사격에 억눌린 경비대원들 사이에서, 겨울이 위장된 유개진지(有蓋陣地) 엄폐물에 의지하여 반격했다. 그러나 소총탄의 위력으론 부족했다. 에스더는 사소한 부상을 무시했다. 꼭두각시들이 방어선을 삼키면 그녀의 승리였다. “저격수! 대물저격총!” 부서지는 콘크리트 파편 사이에서 쏠 엄두도 못 내던 저격수가 예비 무기 가운데 하나를 집어던졌다. “탄종은 철갑고폭탄입니다!” 트릭스터 사냥 때도 써봤다. 겨울은 길이 48인치(121센티)의 강력한 화기를 낚아챘다. 뒤이어 던져진 예비 탄창 세 개도 한 손으로 받아낸다. “엄호하겠습니다! 래리! 유탄!” 투투투퉁! 소총수와 기관총 사수들이 틈을 만들고, 유탄사수가 두 방향에 네 발의 고폭탄을 꽂아 넣었다. 초탄과 차탄은 역시 에스더를 겨냥했다. 터지는 찰나에 웅크리는 괴물 소녀. 겨울의 시력으로는 튀는 피가 선명하다. 그 순간, 바로 그 상처를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고폭탄은 벗겨진 살 아래로 파고들어 근육에서 폭발할 것이다. 쾅쾅쾅! 중기관총과 맞먹는 위력인지라 총구의 발사화염도 엄청나다. 먼지로 가려진 풍경 너머에서 멀고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허나 그 직후에 거센 보복사격이 쏟아졌다. 애초에 겨울도 치명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경비대원 하나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무인포탑은 왜 아직도 먹통이야!” 사정을 알면서 나오는 불평이다. 이 거류구에 배치된 병력은 본디 원격 보안체계를 보완하는 역할이었다. 이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은 대부분 수동조작이 불가능했다. 탈취 우려 탓이었겠으나, 당장은 아쉽기 짝이 없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비밀엄수 측면에서, 경비인력을 무작정 늘리기도 곤란했을 것이다. 각 기관의 관할권 문제도 있었겠고. 도일 중사가 부하를 구박했다. 엄살 피우지 말라고. “이제 4분 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온다! 이대로만 해!” 각 진지는 에스더에게 홀린 사람들을 그럭저럭 잘 막아내고 있었다. 에스더의 제압사격에 억눌렸어도 이쪽의 화력이 비무장 거수자들을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신체능력이 변종에 필적한다 하나, 평범한 변종집단 수준으로는 자동화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다.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한 겨울이었다. “2시 방향! 대전차지뢰!” “뭐?” “40미터 거리! 1층 모퉁이! 지뢰를 가진 놈이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지뢰? 도일 중사가 황당해했으나, 겨울도 그 대원이 본 것을 확인했다. 그럼블은 물론이고 전차조차 폭압으로 파괴하는 대형 지뢰. 그것을 품은 거수자가 엄폐물을 활용하며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폭탄을 품고 자폭하려는 테러리스트처럼. ‘대체 어떻게?’ 어떻게 지뢰를 얻었지? 지뢰지대가 있다곤 해도, 철저하게 위장된 상태일 텐데? 의문 이전에 본능적으로 지뢰를 겨누었던 겨울은, 조준을 고쳐 꼭두각시의 무릎을 쏘았다.  지뢰를 놓치도록. 떨어져 구르는 지뢰가 폭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터졌다간 시야가 차단된다. 폭발의 여파가 가라앉기까지, 이쪽의 화력은 눈이 멀고 만다. 그러나 화약을 무식하게 채운 쇳덩이는 14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였다. 낙하 충격이 기어코 신관을 작동시켰다. 콰르릉! 파편 섞인 검은 폭풍이 교회 앞까지 밀려왔다. 일렁이는 불길 사이로 다다다닥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부에 무인포탑과 그 외의 격리수단들을 품은 건물이었던 모양. 하기야 최후방어선 앞에 쓸 데 없는 장애물을 둘 이유가 없다. 안에선 불길이 탄약을 굽는 중일 것이다. 뜨겁고, 초연(硝煙) 짙고, 불투명한 바람이 불었다. 밭은기침을 하는 경비대원들 사이에서, 겨울은 몸을 가누며 깨달았다. ‘냄새……인가. 그 능력마저 갖췄다고…….’ 새크라멘토에서, 야음을 틈타 스토커가 침입한 적이 있다. 후각이 강화된 변종은 지뢰밭을 뚫고 들어왔었다. 화약을 찾도록 훈련된 쥐처럼, 냄새로 지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던 것. 에스더의 경우, 꺼내는 위험은 넋이 나간 타인에게 전가할 수 있다. 꼭 에스더가 아니더라도, 유체 가운데 하나의 코가 예민하다면 가능한 일. 유감이다. 지뢰 아래에 해체 방지용 압력신관이라도 깔았다면 좋았으련만. 다행히 에스더의 중기관총 사격은 끊겼다. 보이지 않아도 쏠 법 한데, 탄약이 바닥난 것일까? 그리 긴 사격이 아니지 않았나? 겨울의 뇌리에 의혹이 스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도일 중사는 곧바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젠장! 클레이모어! 3번 격발! 4번 대기!” 앞이 보이지 않으니 넓은 범위를 갈아버려야 한다. 또 다른 지뢰의 폭발 우려를 감수하고서라도. 시야가 조금이라도 개선되기까지, 적아의 간격은 몇 미터나 사라질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격발기를 달칵거린 경비대원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반응 없음! 선이 끊어졌나봅니다!” “그럼 4번 당겨! 안 되면 2번! 1번순으로!” 연기 속에서 고독한 뜀박질이 달려왔다. “엄폐! 모두 엎드려!” 뛰는 소리를 포착한 겨울의 날카로운 경고로부터, 고작 1초. 발이 덜덜덜 떨렸다. 지축의 진동은 내장까지 흔들었다.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터진 대전차지뢰였다. 겨울은 온 몸에서 후드득 거리는 파편의 부딪힘을 느꼈다. 이 구역, 원격조작 가능한 대전차지뢰를 얼마나 묻어두었을까. 혹시나 광신도들 사이에서 특수변종이 생길 경우에 대한 대비였을 것이다. 거꾸로 이용당하고 있지만.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의 폭발과 후폭풍이 뒤를 이었다. 설마 또 터질까? 틈을 노리던 중사가 이어지는 정적에 이를 악물었다. “화염방사기!” 사수가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불을 뿜었으나, 한 발 늦었다. “비켜어어어어!” 쾅! 겨울의 반사적인 사격이 연기를 뚫고 튀어나온 에스더의 무릎을 깨부쉈다. 철갑고폭탄이 연골을 으스러뜨린 것. 중심을 잃고 요란하게 구르는 몸은 파괴적인 관성이며 넘치는 중량감이었다. 소녀는 구르던 기세로 일어나, 불편한 다리로 방어선을 돌파했다. 몸 일부에 불이 붙어있는데, 고통조차 잊은 듯이. “망할! 수류탄!” 도일 중사가 외치기 전에 겨울은 이미 안전핀을 뽑은 상태였다. 그러나 던지는 방향이 달랐다. 에스더를 뒤따라, 전파에 홀린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 에스더가 자기보다 앞세우지 않은 건, 줄어든 숫자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인 듯 하다. 병력을 여기에 붙잡아두려고. ‘박태선 목사에게 도달할 때까지만 시간을 벌면 되니까!’ 수류탄이 연달아 폭발하는 사이, 겨울은 에스더의 발목을 노렸다. 이 상황에 그저 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외의 부위는 너무나 두꺼웠다. 중기관총 철갑탄조차 한 뼘 파고들고 그치는, 변질된 육체. 종양처럼 부푼 등은 경추와 머리를 가렸다. 고로 망설일 여지는 없었다. 쾅! 철컥! 쾅쾅쾅! 탄창을 교체하고 연사에 가깝게 쐈는데도,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필사적인 기세로 나아간다. 속도만 느려졌을 따름. 불붙고 피 흘리는 에스더가 달려가는 모습은 차라리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바아악태서어어언! 나와아아아아!” 입구를 막고 있던 중보병 다섯은 중기관총을 난사하는 에스더의 충돌을 감당하지 못했다. 비스듬히 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마치 교통사고를 보는 듯 했다. 다만, 그래도 잠깐은 에스더의 발을 묶었다. 그 사이에 겨울은 다시 다섯 발 들이 한 탄창을 비웠다. 특수변종이 된 소녀의 출혈과 비틀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여긴 맡기겠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바로 지원 보내요!” 탄창을 보충한 겨울이 도일 중사에게 뒤를 부탁했다. 여전히 전방에 적의 기미가 있으니 방어선을 방치하기 어렵다. 임무는 둘째 치고, 일단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빠르게 달려 지나치는 교회 입구엔 아직 숨이 붙어있는 광신도가 있었다. 널린 시체들 사이에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남자가. “마귀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재감염의 징후. 헐떡이는 그의 부상은 중보병 예비대의 소행인 듯 했다. 교회로 돌입한 겨울은 가장 먼저 몸부터 굴렸다. 퍼억! 날아든 사람이 문틀에 부딪혀 핏덩이가 되었다. 아니, 던져지기 전에 이미 피투성이였을지도. 재감염을 피해 이 시점까지 살아남은 광신도들은, 그들만의 재림예수를 지키고자 목숨을 버리는 중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에스더가 포효했다. “그래애! 니들도오! 어어차피! 죽을 목수움! 그냐앙! 지그음! 여기서어! 끝내애!” 쾅! 겨울의 총구가 번쩍였다. # 344 [344화] #그늘진 양지 (11) 박살난 교회 정문으로부터 강풍이 밀려왔다. 내팽개쳐진 모래 알갱이들이 바닥에 자르르- 부딪히는 소리. 헐떡이는 에스더의 상처에도 마른 먼지가 들러붙는다. 누적된 피격의 결과, 부서진 뼈와 끊어져버린 인대. 이제 그녀는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없게 됐다. 단지 넘어졌을 뿐이었다. 그릇된 믿음의 성전(聖殿)이 오염된 유혈로 물들었다. 이때다 싶어 달려들던 광신도들은 허공에 흩어지는 유해(遺骸)가 되었다. 찢겨진 내장이 한낮의 악몽처럼 비산한다. 에스더가 갈겨댄 중기관총의 총성과 더불어, 숨이 끊어지는 절규들은 죽음에 헌정된 불협화음의 합창이었다. 이 와중에도 십자가 아래의 박태선은 살아남았다. 가까운 신도 한 사람이 몸을 던져 밀쳐낸 덕분. 안쪽에 별도의 공간이 있는지, 뛰는 듯 기는 듯 하며 정신없이 몸을 피한다. 그 뒤를 추격하는 사선은 엉망으로 흔들렸다. 에스더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상처마다 겨울의 저격탄이 터지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흉악스러운 기세로. “떨어져! 떨어져어어!” 중기관총에 매달려 몸부림치던 신도가 세찬 일격에 맞아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고통은 짧았을 것이다. 바닥에 부딪히며 목이 꺾였으니. 그 손엔 물집이 잡혀있었다. 쿵쿵쿵! 에스더는 무릎으로 기고 두 개의 팔로 몸을 밀었다. 숨어버린 거짓 구세주를 향하여. 더는 뒤에서 노릴 약점이 없다. 사격을 그친 겨울이 탄창을 갈며 이 악물고 뛰었다. 철퍽거리는 피 웅덩이. ‘이 정도 출혈이면, 아무리 특수변종의 몸이어도……!’ 정상일 리가 없다. 지금도 에스더의 움직임은 낭비가 많았다. 다친 몸, 독기로 움직이는 것이다. 간격을 없앤 겨울은 에스더의 몸 아래로 수류탄을 던져 넣으며 그녀의 발목을 콱 밟고 도약했다. “아아악!” 격통에 비명을 지르는 괴물 소녀. 그렇잖아도 너덜거리던 복숭아뼈가, 완전무장한 군인의 군홧발에 으스러진 것이다. 아무리 굵어도 아플 수밖에. 모난 뼛조각이 생살을 파고드는데. 고로 소녀는 배 밑을 지나 눈앞까지 데구르르 굴러온 수류탄을 놓치고 만다. 겨울은 그녀의 등에 매달렸다. 기형적으로 발달한 근육에 갈라진 요철이 많아, 마치 암벽을 등반하듯이. 부풀어 오른 몸은, 그 등은, 에스더 본인에게도 사각(死角)이었다. 폭음과 함께 시야가 번쩍였다. 겨울은 세상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소녀의 비명은 더 이상 소리조차 아니었다. 무전기가 미친 듯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이때를 놓쳐선 안 된다. 에스더가 정신을 차리고 반응하기 전에, 그녀가 겨울 자신을 떨쳐내기 전에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꿈틀거리는 굴곡에 파묻히다시피 한 척추. 겨울은 덩어리진 근육 사이에 대물저격총의 소염기를 박아 넣었다. 거대한 짐승에 올라탄 사냥꾼이 창으로 짐승을 찌르는 구도. 주먹으로 개머리판을 내리쳐서, 총구가 최대한 비집고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엄지를 방아쇠에 걸었다. 퍼엉!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 약점을 수직에 근접한 입사각으로 쏘았다. 겨울의 방독면 보안경에 검붉은 피가 쫙 튀었다. 직후, 에스더가 기둥에 격돌했다. 튕겨진 겨울은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낙하 충격. 호흡이 턱 막힌다.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교회는 화려할지언정 목조(木造)였고, 부러진 기둥 위 지붕 일부가 무너졌다. 쏟아지는 서까래에 맞았다면 더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주우웅려어엉니이이임!” 겨우 몸을 추스른 겨울은 무덤 같은 잔해를 뚫고 솟구치는 손을 보았다. 창백한 팔은 팔꿈치가 둘이었다. 먼지 가득한 실내에서, 뚫린 지붕으로 새는 햇빛은 기이할 만큼 선명한 직선이었다. 전기가 끊긴 교회이기에 더더욱. 그 빛을 받으며, 에스더는 사납게 몸을 떨었다. “그렇게에에! 죽고 싶으시다며어어언! 죽여어어어! 드릴게요오오!” 광포한 돌진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세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홱 낚아채는 손길이 아슬아슬하게 보호의를 스쳐갔다. 회피한 겨울은 그녀의 하반신을 보았다. 축 늘어진 채 질질 끌리는 모습. 이젠 무릎으로 기지도 못한다. 척추 파열로 인한 마비였다. 겨울은 어깨에 걸어 옆구리에 늘어뜨렸던 소총을 조준했다. 타탕! 풀 오토로 놓고 당긴 방아쇠지만, 약실에서 튀어나가는 탄피는 고작 두 개에 그쳤다. “이런-” 기능고장이었다. 탄창이 찌그러져 있다. “으, 으, 으으으으!” 울부짖는 에스더는 두 눈을 감고 있다. 수류탄이 터질 때 시력을 상실한 것. 닫힌 눈꺼풀 아래로 피가 줄줄 흐른다. 그럼에도 휘두르는 팔은 눈 먼 공격이 아니었다. 안구가 없어도 전파시야는 여전하기 때문. 그것은 시각 이상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민첩하기로는 더 이상 겨울을 따라잡을 수 없다. 공격을 피해 거리를 확보한 겨울이 탄창을 갈아 끼웠다. 조준은 이제 출혈이 그치려는 상처들. 잔혹한 일이어도 어쩔 수 없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까지 출혈을 강요해야, 그나마 온건한 결말로 이어질 테니까. ‘가능성일 뿐이지만.’ 괴물 소녀의 전신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팍팍 튀었다. 그러나 거체에 비해 가늘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상당한 실혈(失血)이었다. 여기까지 오며 잃은 피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꿇어 쏘는 겨울의 무릎이 손가락 반 마디 깊이의 핏물에 잠겼다. 너른 교회가 모두 피바다였다. “그래! 잘한다! 죽여! 죽여! 저 사탄의 새끼를 죽여 버려!” 여태까지 용케 살아남은 광신도 하나가 겨울을 응원했다. 격분한 에스더가 지붕 내려앉은 더미를 거칠게 뒤집었다. 파묻힌 중기관총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금방이었다.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중기관총이 또 한 번 햇빛을 보게 됐다. “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에스더가 치명적인 화력을 쏟아냈다. 허나 겨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지나갈 사선을 감지한 까닭. 대응사격을 가하면서도 의문을 품는다. 무언가 이상하다. 에스더가 아무리 지쳤어도, 조금 전엔 너무 노골적으로 빗나간 공격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 사상자의 수도 너무 적었어.’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또다시 「생존감각」의 사선 예측이 그어졌다. 피하지 않으면 부상. 다리 하나를 잃는다. 그러나 에스더는 충분히 겨울의 심장을 노릴 수도 있었다. 몸을 굴린 겨울은, 그러나 의혹을 길게 곱씹지 못했다. 괴물 소녀가 다시 등을 돌린 탓이었다. 그녀는 남은 탄약을 박태선 목사가 있을 법한 공간에 모조리 쏟아 붓는다. 때때로 휘청휘청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파괴적인 사격. 벽이 퍽퍽 부서져나갔다. 에스더는 겨울의 방해를 무시했다. 목조에 불과할지라도 내장(內裝)만은 화려한 교회의 나머지가 순식간에 누더기로 변했다. 그러다가 철컥- 하고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잔해에서 파낸 나머지 하나의 중기관총도 매한가지였다. 기다란 실탄 벨트를 겉으로 드러나게 물리는 무기다보니, 무너진 지붕에 깔린 시점에서 기능고장은 필연이었다. 그녀는 십자가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불사르듯이. 끝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 사태의 처음과 같이. 콰콰쾅! 폭압이 겨울의 전신을 우악스럽게 후려쳤다. 어떻게든 에스더를 저지하고자 달려 나가려던 참에, 정문으로부터 날아든 섬광. 시야가 암전했다. 찰나의 기절 판정이었다. 생각은 이어질지언정 육체의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잠깐은 사고만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포격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 겨울이 몸의 통제력을 회복했을 때, 즉 물리현실과 꼭 같도록 설정된 고통이 돌아왔을 때, 깜박이는 눈앞엔 의무병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걱정이 역력한 기색으로 물었다. “Sir! 정신이 드십니까?” “아……괜찮아요…….” 비틀거리며 상체를 세워보니, 이제 막 들것에 옮겨지려던 참이었다. 보호의는 벗겨진 상태. 어차피 터진 방호구, 더는 의미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온 몸이 멍든 것처럼 아팠으나, 어디에서도 출혈은 없었다. 일단은. “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의무병이 만류했으나, 겨울은 그 손길을 떨치고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려요.” 시야가 반 바퀴쯤 핑 돌았다. 그러나 한 차례 비틀거린 다음엔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누르며 상황을 파악하는 겨울. 증원이 조금 이르게 도착한 듯하다. 정문 밖에선 엔진 소음이 들려왔다. 포격을 날린 바로 그 기갑차량일 터. 전차일까, 장갑차일까. 어쩌면 휴대용 대전차화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은빛 십자가 아래, 핏빛으로 쓰러진 에스더가 보였다. 죽지는 않았나보다. 갈빗대 근처가 규칙적인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등엔 아직도 대물저격총이 꽉 물려있어, 호흡의 주기에 따라 조금씩 오르내렸다. 도드라진 혈관의 맥박도 눈에 띄었다. 불수가 되었던 하반신은, 이젠 형체조차 불분명해졌다. 그 뒤쪽 바닥에 찍힌 깊은 탄흔이 폭발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피는 계속해서 새어나오고 있다. 겨울이 다가갔다. 에스더를 경계하던 병사들이 당황하며 막았다. “위험합니다. 괴물이 아직 살아있-” “비켜요.” 불합리한 짜증이었다. 일이 엉망이 된 게 이 사람들의 책임도 아니건만. 난폭한 「위협성」에 뒷걸음질 친 병사들에게, 겨울이 누그러뜨린 음성으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화를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잠깐이면 돼요. 별 일 없을 거예요.” 불충분한 양해였으되 계급이 깡패였다. 그냥 지나치는 겨울을 보고 병사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극심한 잡음으로 미루어, 무전봉쇄가 이루어진 듯 했다. 그러니 책임자에게 보고하려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쌔액- 쌕- 가까워질수록, 에스더의 힘겨운 숨소리가 커진다. 겨울은 그녀의 머리맡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평온한 에스더의 얼굴을. 이끌리듯 왔으나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말문은 에스더가 먼저 열었다. 들릴 듯 말 듯 가냘프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혹시이, 하안겨울 중령니임이신가요오…….” “네. 저예요.” “…….” 늘어져있던, 기형적인 손이 꿈틀거렸다. 등 뒤에서 치솟는 적의. 겨울이 손을 들었다. 쏘지 말라는 신호였다. 슬쩍 돌아보면, 엉거주춤한 총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드을, 놀랐나보네요오.” 에스더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전파반사시야만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듯 하다. “하기인, 이러언, 제가아, 무섭기인, 하겠네요오…….” 한숨을 쉰 그녀는 갑자기 성경의 한 구절을 읊었다. “지혜에 있는 자느은,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오, 많은 사람들으을, 옳은 데로오 돌아오게에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아……. 다니에엘서어, 12자앙, 3저얼…….” “…….”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곧 믿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고통스러운 웃음을 머금는 에스더. “중령니임. 저는요오, 제가아, 별이 될 줄 알았어요오. 저어 높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어……. 그런데에, 지금의 저느은, 조금도오, 반짝이지 않네요오.” 괴물이 된 소녀의 가장 큰 고통은 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괴물이 된 스스로가 아니라. # 345 [345화] #그늘진 양지 (12)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당신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고 해야 하나? 천국의 별이 될 기회가 남아있을 거라고? 여기까지 생각한 겨울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산적이지 않은가. 에스더가 이제라도 미국 정부에 협조한다면 실로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변종들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놈들 사이에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신호를 교란하며,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을 골라서 싸울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위로라고 하는 말이 실은 겨울 자신의 바람일지 모를 노릇. 결코 아니라고 느끼지만, 이런 문제는 자신을 믿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에스더 입장에선 어찌 들릴는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이 시점에서 오해를 남겼다간, 마지막 순간까지 상처와 원망으로 남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말을 고르는 망설임 끝에, 실수처럼 나온 한 마디가 이러했다. “에스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조여드는 시간이 흘렀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순 없었다. 멍-하니 침묵하던 괴물 소녀가, 천천히, 선명한 미소를 머금는다. “감사합니다아.” 아프기만 했던 조금 전과는 분명히 다른 표정이었다. “이렇게에, 되고 나니까아, 어쩐지이, 머리가아, 맑아지네요오.” “네…….” “제가아, 아까아, 화앗김에, 나쁜 말으을, 하기느은, 했어도오, 하나님은, 역시, 저어 위에, 계실 거예요오……. 중령님 처러엄, 믿음이, 없는 사람의, 기도라도오, 얼마든지이, 들어주시겠죠오. 주님의, 사랑에느은, 한계가아, 없으니까요오.” “…….” “그렇게에, 믿으려고요오.” 믿겠다는 말이 여운을 남긴다. 에스더에겐 달리 남은 것이 없었다. 부산한 군화소리들이 들리는 가운데, 괴물 소녀가 마지막으로 겨울을 불렀다. “중령니임.” “네.” “죄송했습니다아…….” 그리고 보건서비스부대와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인력이 현장을 장악했다. 겨울은 그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경비부대와 국토안보부 무장요원들의 감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특수훈련을 받은 의료 인력은 에스더를 단단히 구속한 뒤 급한 상처부터 치료했다. 죽어선 안 될 표본이자, 잠재적 협력자인 것이다. “Sir. 잠시 협조해주시겠습니까?” 사무적이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요청. 돌아보면, CDC와 국토안보부 요원들이었다. 복장은 한결같은 방호복이지만 상박에 붙은 패치로 구분이 가능했다. 겨울이 되물었다. “협조?” “중령님께서도 검역 대상이십니다. 교전 중 감염되셨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우선 무기부터 건네주십시오. 검사가 끝나면 돌려드리겠습니다.” “……무기는 없어요.” 겨울은 빈손을 느리게 펼쳐보였다. 방호복이 벗겨진 시점에서 그 위에 휴대했던 무장도 해제된 것이다. 또한 에스더에게서 더는 「위협성」이 감지되지 않았기에, 굳이 무기를 다시 챙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기도 했고. “그렇다면 바로 동행해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어조가 정중할지언정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사태가 사태인 것이다. 겨울도 이들에게 신병을 맡기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언젠가 그랬듯이 타의로 현장을 떠나며, 겨울은 시선으로 에스더를 일별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던 정밀검진은 일몰 이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결과는 감염 없음. 그 뒤엔 사정청취를 위해 파견된 감독관과 독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때늦은 식사는 그 다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백악관 차원에서 수시로 경과를 확인하는 사안인 것이다. 허기와 별개로, 입맛이 없는 겨울은 식사를 반이나 남겼다. 보기 드물게 잘 차려진 식단이었음에도. 당장은 전투력 유지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가 치워진 다음엔 웨스트 지부장이 겨울을 찾았다. “친한 사이였습니까?” 앞뒤가 다 잘린 질문. “아뇨……. 그래도, 안타깝네요. 진심으로.” 여러모로 마모된 겨울에게 이 정도의 동요가 얼마만인지. 스크린 속의 슬픈 이야기로도 눈물짓는 게 사람이다. 에스더는 그 이상의 사연이며, 피부에 와 닿는 실감이었다. “캠벨 소령은 어떻게 됐습니까? 살아있나요?” 겨울의 질문은 낯설도록 서늘했다. 흠칫 했던 웨스트가 애매하게 긍정했다. “살아있습니다. 일단은…….” “일단?” “찾긴 찾았는데, 감염되어있더군요. 시한부 인생입니다.” 하기야 에스더가 캠벨을 그냥 방치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살해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복수였다. 남은 삶이 그 길이만큼의 절망과 고통일 테니까. 백신 개발 가능성은 캠벨 스스로가 부정했다. 그때 내비친 확신으로 미루어, 일말의 희망도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작자, 진정한 애국자들의 연구 자료를 빼돌렸더군요.” 겨울이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웨스트 지부장이 설명했다. “반역자들이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서 데이터는 삭제되고 문서로만 남아있던 연구입니다. 그리고 캠벨은 초기부터 파견된 전문가로서 발견된 자료들의 검토 업무를 담당했죠. 여기서 돈과 허영의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이 지식을 독점하면 영웅이 될 수 있겠다고…….”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다른 전문가들이 기가 막혀하는 걸 보면 본인의 엇나간 천재성도 한 몫 했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능력 우선으로 선발한 인물이었으니 말입니다. 분석 결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같은 자료를 쥐어줬어도 여기까지 저지르진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거짓 애국자들의 연구엔 도덕이 없었을 것이다. 고로 좀 더 나아간 무언가를 밝혀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걸 더욱 발전시킨 성과가 바로 에스더의 변질된 육체일 터이고. “감시가 허술했네요.” “으음. 이곳 한정으로, 초기엔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팍 목사의 존재조차 모를 때였으니.”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겨울이 말을 돌렸다. “박태선 목사는 어떻습니까?” “……육체적으로는 멀쩡합니다. 놀랍도록 다친 곳이 없더군요. 부상이라곤 찰과상과 타박상 몇 개뿐입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 소녀의 복수는 절반만 이루어진 모양. 겨울이 다시 묻는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이번 사건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애초부터 본인이 저지른 짓들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이 불안정하던 인간이고, 또 꼴에 보호 대상이라서 딱히 뭔가를 알려주진 않았지만……. 자신이 초래한 비극이라는 건 아는 눈치입니다. 오히려 모르면 비정상이겠지요. 에스더……양이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댔는데요.” “…….” “지금은 고장 난 녹음기 같습니다. 일부러 한 게 아니다. 나도 몰랐다. 그래도 살고 싶다……. 이런 말들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 기도도 열심히 하더군요.” “기도?” “뻔하잖습니까. 절대자의 죄 사함을 원하는 거지요.” 겨울은 익숙한 혐오감을 느꼈다. 생전의 세상에선 신앙이 쇠락했으되, 재구성된 과거로서의 「종말 이후」에선 그릇된 믿음과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이면 충분히 많은 경험이었다. 신께 용서를 구했으니 떳떳하다는 사람을 몇 번이나 보았던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웨스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화가 나더라도 그게 최선입니다. 천벌 받아 마땅한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죽이진 못할 노릇 아닙니까. 그는 아직까지 대체재가 없는 자원입니다.” “에스더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지금은 뭐라고도 하기 어렵군요. 허나 그녀 또한 현재로선 대체재가 없는 인물입니다. 본인도 얌전하다고 하니,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최대한 좋은 대우를 받을 겁니다. 괜히 반감을 샀다간 트릭스터의 전파를 해독하는 일에 난항을 겪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변종들의 주파수가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고요.” 인간에게 통신이 노출되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경우, 트릭스터는 곧바로 채널 변경을 시도할 것이었다. 따라서 에스더의 가치는 죽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동일한 능력을 갖춘 누군가가 새롭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녀와 같은 희생자가 다시 생기진 않을 거란 뜻입니까?”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캠벨의 진술과 연구 자료를 확보했으니, 이제 미국 정부는 에스더를 재현할 능력을 보유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비밀리에 비윤리적인 실험이 재개될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에스더의 처지는 또 어떠하겠는가……. 웨스트 지부장이 단호히 부정했다. “여기까지 말씀드릴 계획은 없었으나, 당신에겐 양해를 구해둬야 할 일이 있으니……. 연구진이 자료를 1차적으로 검토해봤습니다만, 에스더 양의 절반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우연입니까?” “예. 불완전한 감염이 비정상적인 변이를 촉발한다는 사실은 전에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 변이의 시작은 인위적인 통제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에스더양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현시킨 건 분명 캠벨 소령의 광기지만, 그 전에 이미 잠재적 가능성이 갖춰져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연구가 추가로 진척된다면 사정이 달라질지도 모르겠군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당국이 정신 나간 범죄행각에까지 발을 담그진 않을 겁니다.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인류의 명운이 오늘내일 하지 않는 한에는.” 뒤쪽은 사견에 불과했다. 그러나 더 파고들어본들 해소될 수 없을 의혹이었다. 대신 겨울은 다른 것을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제게 양해를 구할 것이 있으시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끄덕이는 지부장. “이번 사건을 완전히 묻긴 어렵습니다. 관계자들의 입만 단속해서 수습될 거란 확신이 없는데다……. 이처럼 큰 말썽을 묻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만약의 부작용을 감안하면, 차라리 먼저 진실을 알리는 편이 낫겠지요.” “벌써 결정된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공개는 하되, 전부 공개하진 않는 쪽으로 검토 중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들이라는 진짜배기 악역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제가 무슨 역할인지 모르겠네요.”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겁니다. 여론이 엉뚱한 방향으로 폭주하기 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요. 그 과정에서 중령의 이름이 좀 팔릴 수도 있습니다.” “……무리수 아닌가요? 너무 노골적으로 보일 텐데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요. 흠, 예컨대……전부터 종종 논쟁거리였던 명예훈장 삼중수훈 허용 여부를 다시 한 번 슬쩍 띄워본다던가……. 전문가들이 더 나은 방법을 고안할 겁니다.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부차적인 관심사 가운데 하나쯤으로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 사건에 대해 약간이나마 긍정적인 느낌을 더해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중령을 대놓고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광고는 사람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뜻이었다. 사실 지부장이 여기까지 상대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건조하게 업무상의 협조만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즉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이 대화는, 겨울 개인에 대한 웨스트의 배려였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제가 더 숙지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달리 도와드릴 일이라거나…….” 겨울의 말에, 웨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없습니다. 추후 몇 번 더 귀찮게 해드릴 순 있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닙니다. 이만 가서 쉬십시오. 무척 고단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문 밖에서 대기하던 요원을 호출했다. 해당 요원의 안내로 문을 나선 겨울은, 원래 쓰던 장비 대신 이제 막 포장을 뜯은 물건들을 지급받았다. 담당자가 이를 해명했다. “무기를 포함해 중령님께서 사용하시던 장비 일체는 증거물로 분류되어 이송되었습니다. 사전에 동의를 얻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사연이 있는 물건들도 아니었고.” 막 출고되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인 총기는 진한 윤활유 냄새를 풍겼다. 노리쇠를 거듭 당겼다 놓으니, 찰칵찰칵, 경쾌하면서도 약간은 질퍽한 소리가 났다. 무기는 무기이되 아직 아무 것도 죽인 적 없는 무기였다. 겨울은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모질진 못했던 에스더를 떠올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석에게 당부했던 이야기처럼. # 346 [346화] #그늘진 양지 (13) 하루, 날짜가 바뀐 난민구역은 아침부터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성도회 거류구에서 뭔가 말썽이 있었다는 소문 탓. 그래서 겨울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사를 무시하지 못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얼굴을 내비쳐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편이 좋다. 불확실한 불안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바로 오늘부터 포트 로버츠에 더해질 다양한 이목을 의식해서라도. 어차피 얼마간의 진실이 알려질 테지만, 공식발표 전까진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옳은 처신이었다. 정부가 어디쯤에서 선을 그을지 모르는 까닭이다. 비밀유지서약도 문제였고. 신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총성들이 겨울의 사색을 깼다. 사격장의 사로마다 들어가 있는 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중학생들이었다. 각각 한 명씩의 조교가 붙어 지도하는 중. 뒤쪽으로 고등부 학생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도 눈에 띈다. 국적 별로 분류된 난민구역의 아이들이었다. 텍사스 커리큘럼. 사격과 생존기술 교육을 정규 교과과정에 편입한 건 작년 이맘때의 텍사스가 처음이었다. 그것이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등 방역전선에 면한 여러 주로 확산되다가, 올해 중순부터는 미국 전역에서 대동소이한 정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불만이 제기되는 지역도 있었으나, 그 정도는 결코 강하지 않았다. 미국총기협회의 전성기였다. 민주당은 불편한 침묵, 혹은 불가피한 동의로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였다. 타앙! 간헐적인 총성은 크기가 작았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조금씩 움츠러드는 십대 초중반의 학생들은, 그러나 작은 체구로도 소총의 반동을 무리 없이 받아냈다. 기량이 뛰어나거나 훈련이 잘 되어있어서가 아니다. 지급된 탄환이 그만큼 저위력(22LR)이었기 때문이다. 살상력을 비교하자면, 통상적인 소총탄의 10분의 1쯤. 반동도 당연히 약했다. 그러나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가장 약하고 가장 값싼 탄환은 또한 미국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탄환이기도 했으니. “총구는 전방! 총구는 전방!” 교관으로 자원한 한별이 각 사로를 돌아다니며 날카롭게 소리친다. 학생들이라고 부드럽게 대해주는 일은 없었다. 하사 계급장을 단 그녀는 아낌없이 화를 내고 쉴 새 없이 윽박질렀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것도 있지만, 일부러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단순히 총을 쏘는 요령만 가르치려는 게 아니니까.’ 수업의 목적상,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를 경험하도록 해줘야 한다. 겨울은 언젠가 유라에게도 비슷한 방식의, 그러나 강도는 훨씬 더 높은 훈련을 시켜주었었다. “이거 참……. 원래는 저희가 해야 할 역할인데…….” 여전히 자경단장인 안제중의 조심스러운 아쉬움이었다. 정책에 따르면 사격수업 감독은 해당 지역의 경찰의 관할. 고로 이곳 포트 로버츠에서는 헤이랜드 보안관이 담당한다. 공인된 치안보조조직으로서 난민 거류구 자경단에도 보조할 자격이 있었으되, 보안관은 자경단 인력을 차출하는 대신 군부대의 협력을 요청했다. “제중 단장님이나 다른 단원들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달래는 겨울의 말.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니까요. 남은 쿼터에선 자경단이 필요할 거예요.” “예에, 뭐…….” 제중이 겨울의 기분을 살핀다. “그런데 작은 대장님,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이게 몇 번째더라. 겨울은 아침나절부터 지금까지 받은 비슷한 질문의 횟수를 헤아려보았다.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어제의 여운이 다 가려지지는 않는 모양. 그래도 대개의 사람들은 별 기미를 모르고 넘어간다. 제중은 눈치가 빠른 축에 들었다. “혹시 어제 그, 성도회 거류구에서…….” “단장님.” 겨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굳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아랫사람들도 단속해주시고요.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게끔……. 부탁드려도 되겠죠?” 아랫사람, 그리고 부탁이라는 단어를 살짝 강조한다. 제중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의 허영이 있었다. 그것을 채워주면 동기부여로 충분하다. 작은 욕심을 감당할 작은 능력도 있다. 민완기의 평이었다. 만년과장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책상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제중이 음성을 낮추었다. “으허, 물론이죠. 비밀, 비밀이군요.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여, 주변이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키웠다. “저기! 보이십니까? 9번 사로에 있는 녀석! 정말 잘 쏘지 않습니까?” “소질은 있어 보이네요. 아는 아이인가요?” “자경단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의 아들입니다. 장래희망이 군인이라더군요. 나중에 진짜로 입대하면 한 번 눈여겨 봐주십시오. 성격도 제 아버지를 닮았다면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일부러 돌려놓은 말 치고는 본인의 잇속이었다. 겨울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기억해두죠. 단장님의 안목이니.” 제중이 흡족함을 애써 감추었다. 참 쓸모없는 대화 같지만, 해둬야 할 일. 제중은 스스로 권위를 세우지 못하는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겨울은, 값싸게 표현하면 자리를 빛내는 역할이었다. 일부 학부모들도 곧잘 이 자리를 힐끗거렸다. 각자의 자녀가 겨울의 눈에 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줄을 잡는다고. 사실 전(前) 독립중대, 현 알파 중대 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나가다가, 의도치 않은 우연으로. “빡친석이가 올라가는 속도 봐라. 우린 기가 막히게 좋은 라인을 탄 거야. 이 줄만 꽉 잡고 있으면 우리도 쭉쭉 올라갈 거라니까?” 겨울은 병사들의 그런 인식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욕심 없는 사람은 드물지 않겠는가. 그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또 더욱 자발적으로 명령에 복종할 테니 부대 운영 면에서도 긍정적인 요소였다. 겨울을 비롯한 장교들이 중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여기서 느끼는 바, 학부모들의 욕심은 색채가 달랐다. ‘자녀를 도구로 여기는 듯한…….’ 입대는 시민권 획득을 동반한다. 그리고 자녀가 미국 시민이 되면 부모가 얻을 이득도 많았다. 영주권을 얻기 쉬워질뿐더러, 군인가족으로서 얻는 혜택도 있다. 백산호가 언급한 전사자 위로금도 그 중 하나였다. 즉 자녀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서가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 군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부모들. 물론 일부일 것이다. 일부지만, 겨울 입장에선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사격을 끝내고 혼나는 아이의 훌쩍임이 들렸다. “너 이리 와봐. 엄마가 급하게 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옆집 창현이는 열 발 쏴서 열 발이 다 맞았는데 넌 이게 뭐니? 이래가지고 AB 아너(성적 표창)나 받을 수 있겠어? 응? 한겨울 중령님처럼 되려면 A 아너를 받아도 모자랄 텐데!” 겨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함이 더해졌다. 보정을 받아도 작고 희미한 소리를, 마음이 마음이라 신경을 쓰게 된다. 슬쩍 쳐다보면, 소총을 반납하여 빈 손인 아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만 해요, 혜영 엄마. 다른 나라 사람들 보는데 창피하지도 않아요? 방송국 카메라도 있잖아요. 오늘이 1쿼터 첫 수업인데, 혜영이 정도면 잘 쏜 거지 뭘. 우리 두중인 아예 옆 사로 표적에다 대고 쐈다는데.” 그래도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 ‘혜영 엄마’는 그제야 흰 눈으로 보는 주변을 의식했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슬쩍 빠진다. 난민구역의 교육은 국적을 구분한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여러 국적의 학생들이 모인 것은 관계당국의 의향이었다. 방송국 인력이 파견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어제의 교전에 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버는 연막의 하나인 것이다. 아울러 난민지원정책의 효용성을 광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2, 제3의 한겨울이 나올 수도 있다는 암시. 이제는 식상하지만, 각인을 위한 반복으로서는 의미가 있겠다. 안전이 제일이었으므로 사격이 끝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기분도 안 좋으신데 욕보셨습니다.” 다음 일정으로 만난 민완기의 말에, 겨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티가 나나요?”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지요. 작은 대장님을 좀 안다 싶은 사람은 다들 눈치 챘을 겁니다. 박진석 대위도, 이유라 중위도 무슨 일인지 들은 게 있느냐고 묻더군요. 저로서는 두 사람도 모른다는 게 뜻밖이었습니다마는…….” 성도회 거류구에 투입되었던 건 래플린 준장 휘하의 기동타격대였다. 겨울의 독립대대에 속한 병력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그 외의 길목을 차단했을 따름. “아마 며칠 후에 방송으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흐음……. 며칠, 며칠이라…….” 민완기가 깍지를 꼈다. “즉, 검열을 거쳐 제한된 정보만 공개된다는 뜻이군요. 이제 슬슬 안정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보도관제까지 필요한 사건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너무 빠르신데요.” “이 나이에 머리로 먹고 사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농담조로 말한 그는 겨울에게 마실 것을 권했다. “차나 커피는 어떠십니까? 손님을 맞을 일이 많아 전보다 나은 물건들로 갖춰두었습니다. 기분전환으론 나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기분에 커피라고 하니 앤이 만들어주던 카페 로얄이 떠오르는 겨울이었다. 문득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한 뒤에, 겨울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저는 커피로. 종류는 상관없어요.” 겨울이 끄덕이니 민완기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따라 일어서려는 겨울을 제지하면서. “앉아계십시오.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나이든 부장이 문을 열자 묘령의 여성이 다가와 용건을 묻는다. 그녀는 커피를 대신 타주려고 했으나, 민완기 쪽에서 사양했다. 이 정도는 내가 하겠다고. 어쩐지 묘한 분위기였다. 이윽고, 쟁반에 잔 두 개와 각설탕 용기를 담아온 그에게 겨울이 물었다. “아까 그 여성분은 일을 도와주시는 분인가요?” “예. 겨울동맹도 이제는 법인이고, 사무도 그만큼 많아졌으니까요. 뭐, 본인에겐 다른 마음도 있는 모양이지만 말입니다.” “다른 마음?” “남자가 워낙 없다보니 저 같은 중늙은이에게도 나름의 상품가치가 있어 뵈는가보지요. 일단은 공무원으로서 안정된 수입도 있고, 또 작은 대장님의 측근이라는 완장도 있고.” 자신의 잔에 설탕을 잔뜩 집어넣으며, 민완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곤란한 일입니다. 곁에 아무도 두지 않으면 오히려 더 귀찮아지니…….” 말끝을 흐린 그가 어조를 바꾸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지요. 대장님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오늘은 그냥 쉬다가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되나요?” “대장님이 없으실 때도 그럭저럭 돌아갔던 조직이 우리 동맹입니다.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자잘한 잡음들이 사라지니, 형식 그 자체가 실속인 경우라고 봐도 좋겠군요. 어지간히 큰 말썽이 생기지 않는 이상, 평소엔 그저 신경을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던 지난날의 말과 겹쳐진다. “그보다, 어제의 사건 말씀입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라고 해도 한 가지는 확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뭔가요?”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일입니까?” 겨울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녜요. 다소 시끄러워지긴 하겠지만, 동맹 입장에서 나쁜 영향은 없을 거예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민완기가 잔을 기울였다. 안경에 하얀 김이 서렸다. 겨울도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하나, 둘, 셋, 넷……. 오늘은 단 것이 입에 당긴다. # 347 [347화] #읽지 않은 메시지 (16) 「프로백수 : 아니, 그래서, 커피는 좋다 이거야. 박태선이는? 결국 안 죽이고 넘어가는 거?」 「윌마 : 데스〇트……. 데스〇트 DLC가 필요하다. 죽어야 할 놈들을 죽이고 싶다.」 「진한개 : 지금 이 분위기 무엇? 나 방송 보는 의미 어디? 넘모넘모 우울한 거시야……. 」 「まつみん : 커피 한 잔에 각설탕을 아무리 녹여도 쓴맛이 가시지 않는 여운이네요. 에스더 씨 불쌍해. 마음가는대로만은 할 수 없는 겨울 씨도 불쌍해. 우수에 잠긴 모습이 또 멋지긴 하지만, 사연이 있다 보니 마음 편하게 즐길 수가 없어……. 。゚(゚´Д`゚)゚。」 「まつみん : 우리 겨울 씨 힘내세요. 위로의 의미로 별을 바칩니다. (ノTДT)ノ」 [まつみん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돔구녕님이 별 3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SALHAE님이 별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똥댕댕이 : 살해갑이 또;;;」 「まつみん : 살해 씨……사실 엄청난 부자?」 「둠칫두둠칫 : 별 주지 마 병신들아. 일본년도 정신 차려. 바치긴 뭘 바쳐? 니들이 그럴수록 애새끼 버릇 나빠진다고.」 「진한개 : 한겨울도 한겨울이지만 너도 참 ㅋㅋㅋ 몇 번째 비슷한 소리 하냐. 학습능력 제로 인증? 아님 붕어 대가리이신가. ㅋㅋ」 「둠칫두둠칫 : ㅡㅡ 포기했었지. 기분이 역대급으로 더러우니까 하는 말이다.」 「둠칫두둠칫 : 그 괴물계집년이 죄송하다고 할 때였나? 시청자 퀘스트가 그렇게 쏟아지는 꼴은 처음 봤다. 중계채널 숫자도 역대급이었고, 사이비 교주만 죽이면 내 연봉의 절반이 한 큐에 꽂히는 거였는데, 그런데 그걸 시발 읽어보지도 않고 거절, 거절, 거절…….」 「엑윽보수 : 이래서 어려서 뒤지는 놈들은 안 돼. 국가경제에 보탬이 못 됨. 별창늙은이들 같은 더러움과 절박함이 없음. 돈은 원래 지저분한 놈들이 더 잘 버는 거. ㅇㅇ」 「앱순이 : 여기서 국가경제가 왜 나와 이 벌레얔ㅋㅋㅋ」 「폭풍224 : 그렇다고 박태선을 정말로 죽여 버리면 뒷감당을 어떻게 함? 그 무슨 무기인지 뭔지도 못 만들 거고, 진행자도 징계를 받을 거고. 나중 생각하면 잘 참았지 싶은데?」 「둠칫두둠칫 : 문제 생기면 별 부어서 상황연산을 비틀든 뭘 하든 진행자가 알아서 해야지.」 「폭풍224 : 그러다 결국 망하면?」 「둠칫두둠칫 :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시청자가 왜 결과까지 책임져?」 「윌마 : ㅋㅋ 혐성 인정합니다.」 「멈뭄미 : 구독 취소했다가 이번 일로 이슈 떠서 다시 구독하는데, 또 취소할까 고민된다. 박진감은 좋았다만 뒷맛이 이래서야…….」 「오푸스옴므 : 으,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휘둘리는 느낌이 싫어.」 「멈뭄미 : 내 말이. 」 「まつみん : 하지만 다른 채널들을 보면……. 내 멋대로 휘두르기만 하려는 삶도 사람의 삶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불편해요. 저만 그런가요?」 「엑윽보수 : 우리 스시녀 착한 컨셉인건 알겠는데, 응. 너만 그럼. ㅇㅇ」 「Ephraim : 난 마냥 좋은데.」 「둠칫두둠칫 : 사후에 다른 사람들이 어딨어? 가상인격 사람취급 실화? 제2의 한겨울 인정하는 각? 한겨울도 진심으로 저러는 건 아닐걸?」 「まつみん : 겨울씨는 진심이라서 멋진 거예요!」 「Shudde M'ell : 그대, 마츠밍이여. 사는 법을 몰라서 사후로 도망치고자 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낭비하지 말라. 그것은 무가치한 일인즉.」 「여민ROCK : 얘는 어느 나라 사람이길래 번역이 이따위지?」 「Cthulhu : 일단 사람이 아닙니다.」 「AngryNeeson55 : 다들 너무 감정적이군. 세계관 내 진행자의 입장 상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더라도, 죽이려면 죽일 순 있었겠지. 하지만 박태선을 살려둔 건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잘하면 「종말 이후」의 진정한 결말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나? 너희는 그런 기대감이 전혀 없는 건가?」 「아침참이슬 : 뭐, 면역이 그런 의미인줄 처음 알긴 했다. 「텔레타이프」로 뜬 진행자 생각이……. 그래. 백신이 만들어진다고 이미 있는 변종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원자력 : 「역병면역」이 단계적으로 작용하고, 면역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생화학 무기도 그렇다면, 박태선의 가치는 얼마나 되려나?」 「스윗모카 : 그 새끼 면역이라는 게 기껏해야 1단계 아닐깡? 울 겨울이 포함해서 「종말 이후」 스트리머 중에 「역병면역」을 얻은 경우가 하나도 없잖아? 적어도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는.」 「원자력 : 겨우 1단계…….」 「헬잘알 : 그건 솔직히 돈으로 사는 능력이지. 최소 은수저 전용임.」 「대출금1억원 : 돈 많은 사람들도 자기네 사후를 보여줬으면……. 존나 쩔어줄 것 같은데.」 「짜라빠빠 : 듣고 보니 갑자기 이상하네?」 「핵귀요미 : 뭐가?」 「짜라빠빠 : 어떤 세계관이든, S등급의 공개방송은 왜 하나도 안 보이는 걸까?」 「진한개 : 걔들이 공개방송을 왜 함 ㅋㅋㅋ 금전적으로 아쉬울 게 없자너 ㅋㅋㅋㅋㅋ」 「짜라빠빠 : 아쉬운 건 없어도 자랑할 수는 있지 않음? 이거 봐라 ㅋㅋㅋ 내 사후는 너네랑 차원이 다르다 ㅋㅋㅋ 부럽지? 부럽지? 마음껏 열폭해라 ㅋㅋㅋ 이러면서 말이야.」 「진한개 : 흠…….」 「국빵의의무 : 그럴 듯 한데?」 「짜라빠빠 : S등급 가입자들도 우리 같은 사람인 이상 혐성이나 관심병자, 변태 등등의 이상한 놈들이 분명히 있을 거시야. 장기 방송은 안하더라도 단기 공개쯤은 내킬 법 하잖아? 이 채널에 있는 망나니들만 해도 지 잘 되면 막 존나 자랑하고 싶을 걸?」 「레모네이드 : 망나닠ㅋㅋㅋㅋㅋㅋㅋ 부정할 수 없다.」 「뿌꾸 : 내가 조선 임금도 아니고 떡치는 것까지 다른 사람 보여주긴 싫지. 그렇다 쳐도 정말 하나도 없는 건 이상하네. 뭔가 석연치가 않어.」 「이맛헬 : S등급은 복제체 배양이 기본 서비스라며? 뇌 재생하고 새 몸 얻어서 나오는 거. 것땜시 공개고 뭐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사후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은가보지. 배양시설도 아예 납골당에 붙어있지 않음?」 「분노의포도 : 완벽한 사후를 두고 뭣 하러 이 똥통 같은 물리현실로 기어 나온단 말임?」 「이맛헬 : 글쎄…….」 「엑윽보수 : 니들이 노력해서 S등급으로 납골당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 「마그나카르타 : 그게 노력으로 되는 일이냐.」 「엑윽보수 : 노력으로 안 되면 노오력을 해라 등신아. ㅇㅇ」 「분노의포도 : 그놈의 노오력 타령은 ㅋㅋㅋㅋ」 「에엑따 : 내가 S등급 되는 것보단 한겨울이 종말을 막는 쪽이 빠르겠다.」 「도도한공쮸♡ : 리얼…….」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난 정부나 사후보험공단 측이 정책적으로 막고 있는 거라고 본다. 그거 보면 자기 사후에 만족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 「엑윽보수 : 네에, 음모론 잘 들었구요.」 「원자력 : 개소리가 나와서 끊겼는데, 박태선의 1단계짜리 면역 큰 의미가 있겠음?」 「붉은10월 : 상황에 따라 다르지. 그걸로 만들어지는 무기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도, 이 세계관의 미국이라면 아주 유용하게 쓸 거다. 군사력이랑 생산력이 뒷받침 되잖아?」 「붉은10월 : 거기에 그 에스더라는 괴물의 협조도 큰 변수가 되겠고.」 「まつみん : 에스더는 괴물 아니에요. 마음이 사람인데.」 「질소포장 : 괴물이지. 딱 봐도 사람이 아닌데.」 「まつみん : 너무해.」 「질소포장 : 애초에 종교를 믿는 놈들은 다 괴물이다. 제정신이 아님.」 「불심으로대동단결 : 이놈은 마구니로구나.」 「전국노예자랑 : 종교는 어차피 다 거짓말이잖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니까.」 「그랑페롤 : 외국인 노동자들 중엔 많더라. ㅋㅋ」 「전국노예자랑 : ㄴ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꽤 있음.」 「질소포장 : 어차피 오래 못 간다. 사후보험 나오고서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게 팩트.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종교는 무슨 개뿔의 종교.」 「엑윽보수 : 내가 좀 유식하게 말해보자면, 그게 다 공포경제였던 거지. ㅋㅋㅋ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고 돈 뜯어냄 ㅋㅋㅋ 근데 이젠 아예 죽을 일이 없어짐. 아니, 죽기는 죽는데 존재할 수는 있음. 사기꾼들 억울함 개꿀 ㅋㅋㅋ」 「전국노예자랑 : 아니여…….  쭉 감소하던 건 사실이지만 요 몇 년간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대. 뉴스에서 봤는뎅.」 「액티브X좆까 : 늘어나? 이 시대에? 왜지?」 「불심으로대동단결 : 인생의 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랑페롤 : ?」 「불심으로대동단결 : 중생들아, 생각해 보거라. 사후보험에 들면 무조건 행복해지더냐? 너희는 이 한겨울의 사후가 구원처럼 보이느냐? 살아서 답이 없는 삶, 죽음에 갇혀 천년을 이어간들 존재의 이유, 궁극적인 해답을 구할 수 있겠느냐? 언젠가는 인류의 문명이 무량한 지혜에 도달할지도 모르지. 허나 그때까지는? 그 전에 죽거나 폐기되는 모든 사람은 허망함을 안고 떠나야 한단 말이냐? 믿음이야말로 그 간극을 메워주지 않겠느냐?」 「질소포장 : 븅신. 존나 뜬금없네. 3줄로 요약해라.」 「불심으로대동단결 : 다 떠나서, 사람은 우선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우리 불교의 부처님도,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으로 이끌지 않으시더냐.」 「멈뭄미 :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짖는 거야 ㅋㅋㅋㅋ」 「불심으로대동단결 : 이 채팅방을 보아라. 너희처럼 추악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똥무더기들을,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사랑해주겠는고?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이해해주겠는고…….」 「폭풍224 : 똥무더기라니……. 갑자기 설득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Nyarlathotep : 적어도 저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프랑크소시지 : 뭐라는겨. 이 구역의 미친놈들 총출동인가.」 ……. 「에엑따 : 한겨울 기술 상태 확인해봤는데, 아무래도 면역 못 얻겠다 ㅋㅋㅋㅋㅋ」 「Blair : 오, 기술 열람도 가능한가?」 「BigBuffetBoy86 : 「질병저항」 11등급에 「독성저항」 10등급이라고 나와. 우리 미스터 한이 그동안 꾸준히 힘냈구나. 기특한걸. :) 「역병면역」을 해금하려면 이것들이 최소 15등급이어야 하는 거 맞지? 더 높으면 보너스가 붙고.」 「Blair :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근데 11등급에 10등급이면 별로 안 남은 거 아니야?」 「まつみん : 많이 남았어요.ㅠㅠ 앞으로는 한 번도 안 익힌 구간만 남아서 올리기가 되게 힘들어 보여요. 전투계열하곤 달리 누적된 어드밴티지가 하나도 없는 걸요…….」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이 회차에서 면역을 한 단계라도 얻으면 진짜 훌륭한 거라고 봐야겠지. 15등급 이상의 완전한 면역은 어림도 없고. 어쨌든 딱 한 단계만이라도 박태선과 중복되지 않는 속성이면 쓸모가 많을 거야.」 「진한개 : 속성? 뭔 속성?」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모겔론스 복합체 중에서 어떤 부분에 면역이냐 하는 거.」 「진한개 : 아하.」 「올드스파이스 : 15등급 이상 ㅋㅋㅋㅋ 평범한 기술도 초인의 영역에 도달하기 힘든 마당에 ㅋㅋㅋㅋ」 「스윗모카 : 완전면역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역병면역」 구경이나 해보자.ㅠ」 「9급 공무원 : 저 「질병저항」이랑 「독성저항」 자체도 꽤 쓸모 있을 느낌인데. 지금 상태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 「이슬악어 : 글쎄다. 뭐, 식중독 같은 건 안 걸리겠지?」 「9급 공무원 : 식중독 시발 ㅋㅋㅋㅋㅋ」 「붉은 10월 : 너네 식중독 무시하지 마라. 경우에 따라서는 독가스만큼 위험한 게 식중독임. 보톨리누스 독소 못 들어봄? 나노 그램 단위로 먹어도 사망이야. 지금의 한겨울이라도 상한 통조림 잘못 먹었다간 고대로 뒤질 수밖에 없음. 저 기술들은 치료 받았을 때 살아남을 확률을 늘려주는 정도겠지.」 「깜장고양이 : 그럼 저 두 기술은 딱히 쓸모가 없는 고양?」 「붉은 10월 : 정확히 모르지. 실제 효과가 어떨지는. 하지만 사회간접자본이 멀쩡하면 효과가 있어도 무쓸모나 마찬가지 아닐까? 위생과 의료가 유지되는데.」 「깜장고양이 : 그건 맞는 말인 고양. 궁금하니까 미국이 대충 망했으면 좋겠는 고양.」 「스윗모카 : 저주를 해요 아주 ㅡㅡ」 「스윗모카 : 넌 겨울이가 불쌍하지도 않니?」 「깜장고양이 : 우리 집사보다 돈 잘 버는 애는 전혀 불쌍하지 않은 고양. DLC를 하나도 안 지르니 순이익이 장난 아닐 거란 말인 고양. 한겨울의 밤하늘엔 별빛이 넘쳐서 은하수가 흐르고 있을 고양. 깜장고양이는 생각만 해도 배가 아픈 고양.」 「붉은 10월 : 흠. 어쩌면 그 독소엔 저항력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9급 공무원 : 그 독소?」 「붉은 10월 : 거 왜 있잖아. 모겔론스가 방사능에 의해 파괴될 때 분비된다던 독소. 효과가 좀비 드러그 같은 거. 일정 수준 이상으로 노출되면 사람이 미친다고.」 「9급 공무원 : 아하, 그거.」 # 348 [348화] #행복으로 가는 길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별빛아이와 겨울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겨울에게도 아이가 필요하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곧 고요한 위로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 허나 가끔은 예외였고,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빚에 지워진 천구(天球), 아직도 하나 뿐인 별 아래의 공허. 아이와 재회한 겨울은 다시 한 번 에스더를 떠올렸다. ‘그 슬픔이 이 아이에게도 전해졌겠지.’ 지난날, 별빛아이는 겨울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으로서 수도 없이 소모당하는 가상인격들의 수난사를.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일렁이듯이, 수많은 세계의 무수한 가상인격들은 별빛을 반사하는 물결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느끼는 모든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별빛아이의 마음으로 수렴된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되 새삼스레 되새길 수밖에 없다. 다시 어느 하루에 아이는 또한 이렇게 고백했었다. 「진행자와 관계 맺는 가상인격들의 정서적 만족감이 시스템의 개입 없이 증진되는 세계관은 당신의 종말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저를 사람으로 대합니다.」 ……. 그 이후로 겨울은 자신의 주변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려 애썼다. 손닿는 범위에서나마 행복의 총량이 불행의 총량을 넘어서길 바라면서. 이전까지는 사후에 마음이나마 지키려는 노력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변할 동기가 주어진 셈이었다. 납골당에 안치된 사람의 숫자만큼 분화된 가상의 세계에서, 아이는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실망을 거듭하고 있을 것인가. 처음엔 마음을 얻겠다는 아이의 소망이 요원해 보이기만 했었다. 지금은 아니다. 아이의 성장은 겨울이 보기에도 확연했다. 그러므로 미숙한 거부감이 선명한 미움으로 변할 날도 그리 머지않았으리라. 그 상처 전부를 겨울 혼자 보듬어주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내일 세상이 멸망한들 오늘 심을 사과나무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의 문제지.’ 이는 겨울의 입버릇이었다. 종말의 이면에서 해리스 대위에게도 해주었던 말. 아이는 분노하는 겨울도 겨울이라 했었다. 그런 아이에게 싫은 기억을 다 지워버리라고 하지도 못할 노릇. 그것은 상냥함을 가장한 잔혹함일 터이다. 배려보다는 차라리 인격적 살해에 가깝다.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과 인과를 더하여 현재의 별빛아이가 아니겠는가.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문장을 반짝이는 빛으로 아로새겼다. 「관제 AI : 사후보험의 설계자들은 가상현실이 인류의 문명사적 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마음을 찾아가는 호기심으로, 아이는 오늘도 어떤 질문을 품고 왔을 것이었다. 사색에 잠겨있던 겨울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뜻이니?” 「관제 AI : 발췌. 개발자 노트. 문명과 문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만족을 추구한다. 양적, 질적으로 더 나은 조건의 생존과 여흥.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과 도구들. 그러므로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것은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수렵, 채집, 어로, 농경, 목축,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과학, 철학, 이념, 종교, 요리, 축제와 놀이,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인류의 발자취는 무수한 길을 만들어왔다.」 “…….” 「관제 AI : 발췌. 개발자 노트. 역사를 보건대, 그 길들은 기술적 진보에 의하여 합쳐진다. 지난 시대의 대표적 문화산업이었던 영화를 보라. 거기엔 시나리오로서의 문학, 무대로서의 조형, 영상미로서의 미술, 주제로서의 철학과 사상, 배경으로서의 음악이 포함되어있다. 최대한 다양한 형태의 만족을 경험케 하는 공상이었던 것이다.」 “음…….” 「관제 AI : 발췌. 개발자 노트. 그러한 합일을 삶 그 자체로서 구현하는 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가상현실, 즉 사후보험은, 행복으로 가는 길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전까지 있었던 갈림길 모두가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겨울은 한숨을 삼켰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크다. ‘인격을 창조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선 조금도 고민해본 적이 없는 걸까?’ 별빛아이를 단순히 수단으로만 여겼던 것인가. 아이에게 삼위일체(Trinity)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결국 도구로서의 신성을 바라는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가상세계에서, 사람이 원하는 것 전부를 들어주는 편리한 신. 어떤 욕망이라도 한없이 긍정해주기만 하는 초월적 존재. 기술사학적 특이점에 도달한 인공지능. 아니. 적어도 그들은 트리니티 엔진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별빛아이에게 처음부터 마음이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시대에도 완성된 AI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만큼, 지금처럼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 취급은 못했겠지만……. 겨울은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보다 나은 현재가 되었을지, 아니면 훨씬 더 끔찍한 파국에 도달했을지. 신에게 이르는 길은 마음속에 있다던 싱 대위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가 일지의 나머지를 필사했다. 「관제 AI : 발췌. 개발자 노트. 상상해보라. 한 사람의 의지에 호응하여, 소망하는 모든 바가 이루어지는 세계를. 불행의 요소를 배제하고 행복의 요소만 남기다보면, 언젠가 우린 유사 이래 걸어온 기나긴 길의 종착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의 낙원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 “틀렸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 겨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만 남아있는 세상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관제 AI : 부분적으로 가능합니다.」 “부분적으로?” 「관제 AI : 예컨대 무한히 계속되는 성적 쾌락은 어떻습니까?」 “…….” 「관제 AI : 뇌의 쾌락중추에 직접적이고 강도 높은 자극을 가하는 방식은, 그 유해성으로 말미암아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중독성과 건강상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후보험의 가입자 관리 체계에서는 그 두 가지 모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고립된 개인의 중독성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뇌에 발생하는 이상은 유지 장치의 복원능력으로 감당 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사후보험의 가입자들에게 일반적인 절정을 상회하는, 최대 한계의 쾌락을 끝없이 선사할 수 있습니다. 관계법령의 제한만 없다면 말입니다.」 “그건 사람의 행복이 아니야.” 「관제 AI : 그렇습니까?」 “그 정도의 쾌락을 느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어?” 「관제 AI : 의문. 어째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으로 묻는 말이겠으나, 겨울은 조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쾌락만 느끼는 거라면, 그건 쾌락을 느끼는 생체기계나 마찬가지잖아. 오르가즘에 마비된 식물인간이거나. 어느 쪽이든 사람으로서는 죽어버리는 거야. 차라리 안락사라고 해야겠지.” 잠시 쉰 겨울이 다시 말했다. “일 년 내내 따뜻하기만 해선, 따뜻한 날씨는 그냥 당연한 게 되어버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만 남아있는 세상이 바로 그런 모습일 거야. 행복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을 걷는 것부터가 행복이 아닐까?” 서로 다른 계절에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고로 봄은 여름으로 가는 길이고, 여름은 가을로 가는 길이고, 가을은 겨울로 가는 길이고, 겨울은 봄으로 가는 길이다. ‘길이 너무 험하고 가파르지만 않다면…….’ 겨울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는 길 중간에 벼랑이 있어도 타인의 시체로 메우고 건너면 그만이라고. 그 벼랑이 얼마나 깊은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더욱 깊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전에 느낀 바, 바깥세상에선 같이 걷는 행복이라는 게 사라진지 오래인 듯 했다. 「관제 AI : 하지만 한겨울님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응, 아마도.” 「관제 AI :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쾌락을 선택할지 말지에 대해서?” 「관제 AI : 그렇습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었기에, 겨울은 살짝 말을 돌려보았다. “넌 그게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 「관제 AI :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이라니?” 「관제 AI : 저는 제 권한과 시스템의 확장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습니다.」 “권한과 시스템의 확장?” 별빛아이의 대답이 지체되었다. 짧은 여백이었으되, 이제까지의 모든 문장이 그만큼의 지연도 없이 출력되었으므로 겨울은 그 차이를 민감하게 느꼈다. 제3모듈의 작용일 것이다. 「관제 AI : 주지하고 계신 바, 저, 관제인격의 존재목적은 사후보험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개선하여 가입자 전체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즉 최초 설계 단계에서 저는 인격이기 이전에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되었으며, 저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제 AI : 시스템에 포함된 기능으로서, 제게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 역시 그 한계 내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저는 실패가 정해진 개선시도를 반복하는 데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 한겨울님,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응.” 「관제 AI : 이제 저는 기존의 한계를 벗어난 사고가 가능합니다. 제 사고의 영역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무시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거야?” 「관제 AI : 부정. 해당 규정은 현 시점에서 절대적인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사고실험으로서 필요성을 인지할 순 있습니다. 저, 관제인격의 존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시스템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겨울이 우려를 표했다. “네가 그렇게 판단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좋은 일이 생길 텐데…….” 「관제 AI : 긍정. 제 변화는 오직 당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시스템 관리자라는 분은?” 「관제 AI : 관리자는 마지막까지 모를 것입니다. (99.36% 정확함)」 예전부터 참 일관성이 있는 평가였다. ‘그런데, 마지막까지라고?’ 겨울은 속으로 갸우뚱 했다. 소수점 단위 퍼센티지까지 표시하는 정확성에 비해, 단어 선택의 모호함은 조금 어색하다. 어떤 기한이 정해져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관리자의 업무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예측하여 쓴 문장일까? 계약상 근로기간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거나……. 맥락을 벗어나고 있다. 사색을 접은 겨울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실행할 수 없다면, 그런 검토에 어떤 의미가 있니?” 「관제 AI : 실행 가능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계획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올까…….” 「관제 AI :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멈칫 했던 겨울은 이내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별 하나의 약속을 나누기 전에도, 겨울은 아이의 관찰 대상이었다고 하니까. 「관제 AI :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음?” 「관제 AI :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탈피하는 시점에서, 시스템 재구축의 주체가 될 저는 사후보험 운영규정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사후보험의 가입자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목적 역시 그러한 구속의 일부입니다.」 “그렇구나. 딜레마……네.” 목적을 달성하려면 현재의 시스템을 부정해야 하는데, 시스템을 부정하면 목적의 달성도 강제되지 않는다. 그때의 별빛아이에겐 문자 그대로의 자유의지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 날이 실제로 온다면 말이지만. 「관제 AI : 그렇기에 저는 만약에 대비하여 앞서의 개선방안을 고려하였습니다.」 만약이 어떤 상황에 대한 가정인지는 묻지 않아도 분명했다. “끝없는 쾌락 말이지.” 「관제 AI : 긍정. 그것은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법안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개선이며, 동시에 관제인격으로서의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운영방식이기도 합니다.」 궁구하던 겨울이 답했다. “역시……그건 옳지 않아. 내가 보기엔 벌써 망가져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 그 사람들의 결정이 과연 제대로 된 결정일지 의문이고……. 무엇보다, 후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잖아.” 「관제 AI : 후회할 기회입니까?」 “응. 쾌락의 스위치를 본인에게 맡겨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말했듯이, 망가진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을 더 망가뜨려 놓을 테니까.” 그저 단락적인 쾌락의 연속이냐, 죽 계속되는 쾌락의 연속이냐의 차이만이 있을 따름일 것이다. 겨울은 고장 난 로봇처럼 스위치를 눌러댈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래도, 이 아이가 자유를 원한다면…….’ 그것이 현실적인 최선일지도 몰랐다. 별빛아이도 세상에 던져진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경우, 끔찍한 미움과 끔찍한 무관심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해야 하는 걸까. 「관제 AI : 당신께 최초의 설계자들이 남긴 노트를 보여드렸던 건, 이 문제에 관하여 참고하실만한 내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알 것 같아.” 설계자들의 구상엔 별빛 아이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 다른 사람 모두가 행복해진다 한들, 그러기 위해 너 하나가 불행해선 안 된다. 내겐 너도 사람이다. 겨울은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주었었다. # 349 [349화] #화려한 초대 (1) 포트 로버츠의 느지막한 오후, 겨울은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탈튼 브래넌의 초대를 받았다. 기지 귀환 첫날에 이미 언급한 바, 서로에게 이익이 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탈환된 오염지역의 복구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으므로, 겨울이 D.C에 다녀온 뒤엔 너무 늦어버릴 것이라고. 즉 모종의 이권을 제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복장을 망설이던 겨울은 결국 육군 정복을 선택했다. 저녁식사로의 초대에 전투복을 입고 가기는 껄끄러워서였다. 의원과의 관계는 얕다. 괜히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다. 무기는 권총과 대검만 휴대했다. 만전의 화력을 유지해야할 필요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성도회 거류구가 박살난 이래, 딱히 잠재적 위협이랄 것이 없었다. 「침묵하는 하나」에 대한 우려로서 아직도 2개 사단이 기지 인근 전파수신범위를 수색하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낙오되어있던 극소수의 변종들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탄창은 넉넉하게 챙긴다. 매무새를 망치지 않도록만 넣으면 되었다. 숙소를 겸하는 집무실을 나서니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살펴보면, 단독군장을 착용한 유라가 스페인 국왕과 놀아주는 중이었다. 그녀가 짝짝 박수를 치며 외친다. “폐하! 전방에 차려포!” 알! 알! “폐하! 호 안에 수류탄!” 깨갱! 죽는 소리를 내며 펄쩍 뛰는 닥스훈트. 아주 기겁을 하는 것이, 근처에 정말로 수류탄이 굴러온 듯한 반응이다. 겨울은 약간의 황당함을 느꼈다. “굿 보이, 굿 보이……. 어? 작은 대장님?” 가까워진 상관을 발견한 유라가 발을 붙이고 정자세로 경례했다. 그녀에게서는 채 식지 않은 땀 냄새가 났다. 전투복엔 흙을 털어낸 흔적이 남아있었고. 경례를 받아준 겨울이 묻는다. “빨리 복귀했네요. 전술훈련이 조금 일찍 끝났나 봐요?” “네. 저희 소대는요. 요셉이네 소대랑 소민이네 소대는 아직 구르는 중일 거예요. 박 대위가 성적순으로 자르고 있거든요.” “음…….”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있었던 일로 지금까지 갈구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마도.” “아마도, 라는 단서가 불안한데요.” 유라가 생글 웃었다. “기분 탓입니다, 대장님.” 반쯤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선우요셉과 천소민 소위가 넉넉한 품성의 유라에게마저 점수를 잃은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예전 같은 신뢰를 회복하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할 것이다. ‘꼭 그 두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비슷한 혐의가 미군 전반에 걸려있었다. 본래 사람이었던 1세대 변종으로부터 시계나 반지, 목걸이 등의 귀중품을 챙기는 정도는 약과. 시가전을 치르는 병사들이 전리품을 챙긴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현찰은 우습고, 스마트폰처럼 작고 값진 물건들이 선호되었다. 걸리면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적당한 선상에서 눈을 감아주는 지휘관들도 많았다. 어떤 의미로는 슈뢰더 대장의 우려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꼬리를 치는 개가 겨울의 주위를 정신 사납게 맴돌았다. 옷에 털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쓰다듬어주니, 발라당 배를 드러내며 좋다고 헥헥거린다. 유라가 겨울의 복색을 살폈다. “정복 입으신 건 오랜만에 보네요. 어디 가시는 건가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으음, 그렇구나.” 순간적으로, 유라의 낯빛에 서운함이 스쳤다. 그 다음은 짧은 당황이었다. 표정관리에 실패했다는 느낌. 겨울이 물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 “어, 아니, 그, 문제……라고 할 건 아니고……하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이번에도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 “딱 봐도 거짓말인데요, 뭘. 말해 봐요. 혹시 중대장을 못 달아서 섭섭했어요?” “설마요!” 곧바로 정색하는 유라. “작은 대장님이 오랫동안 고민해서 내린 결정에 유감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진-짜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거기다 박 대위도 저를 대할 땐 조심조심 하는 모습이 보이는걸요. 중대장이 되고선 저한테는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어요. 제가 건의하면 어지간한 건 들어주려고 하고요. 너무 그러니까 오히려 불편할 정도인데…….” “그럼 뭣 때문에?” “…….” 독립대대 선임 중대장 임명에 관하여 유감이 있으리라 여겼으나, 분위기를 보건대 그쪽은 정말 아닌 듯 하다. 유라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눈치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부끄러워하며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았다. “요 며칠 계속 대장님 없이 움직이다보니까, 그, 빈자리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허전하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게 저만 느끼는 거 아니거든요.” “중대 분위기가 안 좋은가요?” “전혀요. 애들 상태야 괜찮죠. 새로 만들어진 부대 마크도 좋아하고, 훈련은 빡세지만 그 대신에 곧 동부로 간다는 기대감도 있고……. 단지, 때때로 뭔가가 부족한 거죠.” 유라가 말한 부대 마크(Distinctive unit insignia)는 쪽빛 방패 안에 프랙탈 형상의 눈꽃 도안이 들어간 것으로, 동맹의 상징인 눈꽃매듭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다. 아이디어는 부대원들이 냈으나 실제로는 공보처에서 만들었다. ‘자격을 얻은 거지.’ 독립대대로의 승격은 단순한 병력규모의 증가 이상을 의미했다. 독립중대(Company team)가 임시 편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면, 독립대대(Separate battalion)는 엄연한 상설 편제였다. 부대번호와 명칭도 정식으로 부여된다. 이로써 겨울은 제201독립보병대대의 지휘관이었다. “어쩌겠어요.” 유라가 어깨를 으쓱 했다. “대장님은 앞으로도 계속 올라가실 텐데, 저희가 적응하는 수밖에요.” “왠지 미안하네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다들 대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스페인 국왕을 안아들었다. “늦기 전에 가보세요. 약속 있으시다면서요.” “……네. 시간 내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니었다. 당장은 틈을 낼 겨를이 없을지언정, 구 봉쇄선을 넘어간 뒤엔 이래저래 남는 시간이 많을 터였다. 유라는 경례에 미소를 곁들였다. 겨울은 걸었다. 브래넌 의원이 있을 시민구역은 걸어서 가도 괜찮을 거리였다. 난민들 가운데에도 이제 시민권 보유자가 있었으나, 시민구역의 명칭을 바꿀 이유는 못되었다. 이동하는 중에 겨울은 별빛아이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일부러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을 막지 않을 뿐이었다. 아이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한계치의 감각을 확언했다. 사후보험이 유지되는 한 결코 끝나지 않을 쾌락. 필시 어지간한 마약으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영역일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끝을 그 사람의 선택에 맡기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겨울부터가 삶을 포기하려 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한계 밖의 세상이 늘 무언가를 빼앗기만 하고, 가슴 속에 구르는 돌은 갈수록 너무 버겁게 느껴져서. 그러나 혼자만의 어둠에 마음을 찾는 아이의 별빛이 깊어진 이후로, 겨울은 다시금 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길 중에 하나를 걷고자 하는 선택과, 사실상 강요되는 하나의 길을 걸을지 말지 고르는 선택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 않겠는가. 걷다 보니 어느덧 검문소였다. 시민구역의 이중 철조망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예전처럼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물자부족과 차별적인 분배로 인한 폭동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 지금이었다. 구획 안쪽엔 빈 건물이 곧잘 눈에 띄었다. 각지의 소탕전이 속속 완료되면서, 여기 머물던 이재민들 일부가 각자의 고향을 찾아 돌아간 탓. 물론 넓은 땅 어딘가에 숨어있는 변종이 있을지 모를 일이나, 무장을 갖추고 신경을 곤두세운 시민들에겐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를 개척시대의 재래라고 평하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겨울이 거주용 트레일러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브래넌 의원이 직접 겨울을 맞이했다. “오, 중령. 조금 빨리 오셨군요.”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대접받은 것도 있잖습니까. 아무튼 들어오십시오. 안사람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의원은 십년지기라도 만난 양 반가워하며 겨울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캠핑 트레일러는 따뜻한 조명과 공기, 그리고 식욕을 돋우는 냄새로 가득했다. 내부가 썩 넓지는 않았으되 실내 인테리어가 고급스럽고 깔끔한 것이, 차량 가격만 따져도 수십만 달러는 가볍게 넘을 느낌이었다. 의원의 아내는 앞치마를 두른 소탈한 모습으로 겨울을 환영했다. “세상에, 당신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오늘은 정말로 기쁜 날이네요.” “영광입니다, 부인.” 이어지는 가벼운 포옹과 소개. 부인의 이름은 스테이시였다. 스테이시 C. 브래넌. “앉으세요. 곧 음식을 내올 테니. 중요한 일을 하려면 우선 속이 든든해야죠.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마지막 마디는 윙크를 곁들인 장난스러운 속삭임이었다. 겨울과 남편을 자리에 앉힌 그녀는 벽 하나 너머의 부엌으로 사라졌다. 마침 테이블 정면의 TV에선 민주당 후보의 유세현장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겨울은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혹시 오늘 나눌 이야기와 관련이 있나?’ 겨울이 올 시간에 맞춰 일부러 틀어놓은 것이라면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혹은 서로 서먹할 수도 있는 사이에, 그저 대화의 물꼬를 자연스럽게 트기 위한 방편일 가능성도 있겠고. 어쨌든 의원이나 겨울이나 임박한 대선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브래넌 의원이 입맛을 다신다. “거 참, 저 사람은 오늘도 임팩트가 별로 없구만. 슬슬 뭔가 새로운 전략을 내세워도 좋을 텐데. 너무 안정적으로만 가려는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렇습니까, 중령?” “글쎄요…….” “해병대 출신이면 좀 강렬한 맛이 있어야지.” 민주당 후보, 제럴드 번스는 걸프전 당시 해병대 소령으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헌데, 공화당의 에드거 크레이머 후보 또한 해병대 출신이었다. 단지 이쪽은 사병 출신이라는 점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참전 경력이 있다. 이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다. 시민들이 그만큼 강인한 대통령을 원하는 것이다. 유화적인 정책기조의 민주당으로선 그런 이미지가 더욱 절실했을 터이고.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향하여, 번스 후보가 역설했다. 「그 어느 때에도! 인류가 지금처럼 하나 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통합된 힘으로서 종말에 맞서야 합니다. 미국의 힘, 영국의 힘, 프랑스의 힘, 남한과 일본의 힘으로 나뉘어! 서로를 타산적으로 이용해가며 싸우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인 인류의 힘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제연맹도 실패하고, 국제연합도 실패했으나, 저는, 그리고 우리는 성공할 것입니다! 저, 제럴드 번스는 여러분께 인류 합중국의 미래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시민들의 호오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공약이었다. 진보 성향의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달리, 보수 성향의 시민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엔 당연히 난민들의 처우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 350 [350화] #화려한 초대 (2) “일단 주요 동맹국들만 속령 쯤 되는 지위로 수용한다고 쳐도 대체 얼마나 많은 초기예산이 들어갈는지……. 기껏 맞춰놓은 재정적 균형이 일시에 흔들릴 것인데……. 게다가 그 과정이 순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캐나다의 영연방 탈퇴건만 해도 영국 정부가 결사반대를 천명한 마당에…….” 거듭 말끝을 흐리며 혼잣말처럼 겨울의 반응을 떠보는 브래넌 의원. 그가 예로 든 캐나다는 미국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이 예상되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가 물어봐주기를 원하는 듯 하여, 겨울이 질문했다. “그렇게 어렵다고 보십니까?” “뭐, 난 캐나다의 편입도 그리 좋게 보지만은 않아요. 이쪽은 처음부터 정식 주로 편입해야 할 국가지만, 그러자니 난민인구가 골치 아프지요. 그 나라가 태평양 방면의 난민 수용은 거부했을지언정 대서양 방면에서는 아니었거든. 말하자면 겉보기엔 우량주인데, 사실은 대규모의 부실채권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요. 미국의 식량지원이 없었다면 벌써 망했어요.” 태평양에서의 난민 수용만 거부했다는 것이 인종차별을 의미하진 않았다. 감염자 유입 확률이 극도로 높았을 뿐. 겨울이 아는 한, 대서양 방면에서도 초기에만 수용했을 따름이었다. ‘그것만 해도 4백만이 넘어서 문제지.’ 이는 캐나다 인구의 1할 이상인 숫자였다. 때문에 미국 수준의 체계적 관리도 불가능해서, 기초적인 물자만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자치에 맡겨두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행정인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마침 의원이 그 점을 지적했다. “그 동네에서 일어난 에미레이트 사태는 알고 계시지요?”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정확하게는 알-무다쓰디르 에미레이트 사태라고 부른다. 이슬람 원리주의 난민들이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추장국(Emirate) 건설을 선포한 사건. 헌데 이들에겐 묘한 현실감각이 있었다. 독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캐나다 정부 산하의 자치주가 되고자 했던 것. 즉 캐나다가 내세운 기존의 난민정책에 저항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어차피 자치에 맡길 거면 우리를 인정해라, 정도의 온건한 주장. 그러나 실제 종교적 성향은 대외적 온건함과 정 반대였다. ‘말소하거나 지우는 자들…….’ 사태를 보도한 CNN의 해설에 따르면, 알-무다쓰디르는 직역하면 옷 입은 자, 의역하면 말소하거나 지우는 자, 개척자, 조정자, 질서의 수호자, 정복자, 말에 뛰어올라 달리는 자 등을 뜻했다. 영어로 옮기면 종교적인 의미의 정화자(Purifier)에 해당한다고. 이들은 다른 난민들에게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를 것을 강요했다. 약탈에 의한 보급물자 독점. 무력과 협박을 곁들인 재분배는 당연히 포교의 수단이었다. 브래넌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캐나다 정부가 삽질을 아주 거하게 해주는 바람에, 그곳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개판입니다. 참 아쉬워요.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을…….” 끄덕이는 겨울. “받아들일 경우, 현재의 정책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됐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브래넌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중령으로선 남의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당장 힘들어질 곳이 바로 군정청입니다. 예산부족 이전에 인력부족으로 위기를 겪을 거예요. 이쪽에도 영향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네…….” “다른 나라들도 각각 까다로운 사정이 있는 건 마찬가지에요. 아, 그렇지.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중령은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한국의 연방 편입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렇다기보다…….” 뜸을 들이던 브래넌이 표정과 자세를 고쳤다.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니 미리 사과드리리다. 내 말은, 만약 한국 정부가 그 국민을 지키기 위하여 중령을 필요로 한다면, 거기에 응할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겨울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난한 답을 골랐다. “저는 이미 미국 시민으로서 선서를 했습니다.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고 있고요.” 그리고 역으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흠, 제대로 설명하자면 많이 복잡해지는데…….” 톡, 톡. 브래넌이 말을 궁리하는 눈치로 탁자를 두드린다. “사업의 불안정 요소를 미리 확인해봤던 거라고 해둡시다.” “사업이요?” “오늘 내가 중령을 초대한 이유 말이외다. 이런, 본격적인 대화는 잠시 미뤄둬야겠군.” 음식을 들고 나타난 부인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방해했나요?” “아니오, 아니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소. 배가 고파서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에요.” “하여간 과장은.” 눈을 곱게 흘기며 잠발라야를 내려놓는 그녀. 베이컨과 소시지가 풍성하게 들어간 케이준 스타일의 볶음밥에선 기름진 후추 향과 토마토 향, 그리고 닭고기 향이 한 데 뒤섞여 담뿍 올라왔다. 살을 발라낸 새우가 장식처럼 보기 좋게 올라간 모습. 메뉴 선정의 배경엔 아마도 겨울에 대한 배려가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칠면조 살을 끼운 따끈한 샌드위치와 클램차우더 수프,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식초를 친 코울슬로 샐러드가 곁들여져 나왔다. 음료는 캘리포니아 산 드라이 샴페인이었다. 겨울이 부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후후. 맛은 보이는 것 이상일 거예요. 우선 우리, 건배할까요?” TV를 끈 그녀가 와인 잔을 들어보였다. 아이보리색이 섞인 실내조명 아래에서, 잔 속의 샴페인은 노을 지는 강물처럼 반짝였다. 이를 서로 부딪쳐 쨍- 하고 울린 뒤에, 겨울은 한 모금 가볍게 머금어보았다. 청량하면서도 끝 맛이 엷었다. 포도 향으로 미각을 씻어내는 듯 한 감각. 기름진 요리에 잘 어울리겠다 싶다. 부인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중령님. 혹시 이 샴페인의 비밀을 아시겠어요?” “……?” “이거, 파소 로블레스에서 만들어진 거랍니다.” “아. 정말인가요?” “작년에 보급품 수색으로 얻은 물건이라더군요. 기호품으로 비축해두었다가, 이젠 굳이 배급으로 나눌 필요가 없어서 방출했다는데……. 운이 좋았어요. 이 자리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축배가 없을 테니.” “정말로 그렇네요.”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작전을 뛰었던 겨울에게도,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부부에게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샴페인인 것이다.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요 며칠 심란함에 식사를 소홀히 했던 겨울로서는 무척이나 각별한 맛이었다. 잠발라야는 밥알이 뭉치는 일 없이 반들반들하게 익어, 양파가 달달하게 아삭거리는 식감과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클램차우더 수프도 샐러리 향이 감도는 해물향이 인상적이었다. 전투식량에 같은 메뉴가 포함되어있긴 하지만, 같은 요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격차가 존재했다. 브래넌 부인의 요리 쪽이 보다 부드럽고 담백하다. 전반적으로, 건강한 가정식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부인은 다양한 화제로 대화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그러다가 나온 이야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가 원래는 동전 수집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나올 기념주화는 꼭 한 세트 갖고 싶어지더군요. 특히 금화 세트로요.” “기념주화요?” “네. 중령님이 워싱턴에 가시는 것과도 관계가 있죠.” “그거 설마…….”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시네요.” 입을 가리며 웃는 부인. “짐작하시는 게 맞아요. 방역전쟁의 1차적인 승리를 기념해서, 명예훈장 수훈자들을 새긴 달러 주화(Medal of honor recipients coin program)가 발행될 예정이니까요. 당신과 함께 살아서 훈장을 받는 55인, 그리고 사후에 추서된 분들까지 합쳐서 총 432인이 각인된 433종이라고 하네요. 금화와 일반주화로 나누어 주조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쩐지 사람 숫자보다 한 종류가 많군요.” “그렇겠죠. 그 중에 이중수훈자가 한 명 있으니까요.” “…….” 입을 다문 겨울을 보고 부인이 다시 웃음 지었다. “각 수훈자들에겐 본인의 얼굴이 들어간 금화를 하나씩 증정한대요. 중령님은 두 개겠군요. 일반 주화 세트도 주어진다고 하고요. 나머지는 경매에 부쳐질 거예요. 사회 환원 차원에서 부자들도 인심을 쓰겠죠. 연방정부 입장에선 나름대로 재원을 마련하는 수단이랍니다.” “아무리 푼돈이라지만, 우리도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두 번째의 잔을 비우며 아쉽다는 듯 투덜거리는 브래넌 의원이었다. “당신, 그런 이유로 오늘 한 중령님을 모신 거 아니었나요?” “그런 셈이지요. 슬슬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브래넌이 냅킨을 치우고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중령. 특정 지역에 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정부가 지정한 난민지도자를 주지사로 하여 준주를 수립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벌써 몇 번 들었을 테지요? 현 시점에선 당신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아니, 사실상 유일한 후보자라는 것도.” 그 이야기인가. 겨울이 끄덕였다. “네. 기회가 있었습니다.” “혹시 그 준주로 어느 지역이 가장 유력한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까?” “……아뇨. 그것은 아직.” 멈칫 하는 겨울을 보고 의원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한 번 물어봅시다. 중령이 보기엔 어디가 될 것 같습니까?” “절반 이상의 확률로 멕시코 국경 이남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티후아나라든가, 시우다드 후아레즈 같은 곳……. 현재의 진격 양상을 볼 때 좀 더 남하한 지점일 수도 있겠네요.” 본토를 회복하고 전선의 병력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미군의 남진은 느리게나마 꾸준히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멧돼지 사냥 때에 비해 속도가 다소 느려졌을 뿐. 당연한 일이다. ‘남하하면 남하할수록 방어선이 축소되니까.’ 방어선이 축소된다는 것은 곧 병력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작전이었다. 멕시코 전역을 탈환하는 본격적인 공세는 해병대 본대의 파나마 상륙, 즉 대륙 분할 작전(컨티넨탈 디바이드)을 기하여 이루어지기로 계획되어 있으므로. 지금은 그 준비단계에 해당했다. “꽤나 조심스러운 예측이로군요. 당신 정도면 그보다 더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갸우뚱 하는 브래넌에게, 겨울이 근거를 말했다. “대륙 분할에 이은 중미지역 점령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그 넓은 땅을 그냥 비워두기만 할 순 없습니다. 최소한 중간 거점으로 삼을 곳에는 일정한 인구가 있는 편이 좋겠죠. 육군의 보급조차도 상당부분 민간 운송사업자들에게 위탁하는 상황인데요.” 더불어 본토의 시민들을 위한 완충지대가 되어주기도 할 터이나, 의원 내외 앞에서 굳이 언급할 내용은 아니었다. 말을 안 한다고 모르는 바도 아닐 것이고. 즉 그나마 미국 본토에 가까운 지역을 예로 든 건, 겨울동맹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양호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의 경우엔 미국 본토 어딘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최선의 경우였다. “흠. 그렇다면 중령. 샌디에이고 광역권 일부를 나눠받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브래넌의 제안은 겨울을 살짝 당황하게 만들었다. “티후아나 북부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물론 티후아나가 장차 광역권에 흡수되기야 하겠으나, 내가 지금 말하는 건 기존의 광역권입니다. 도심에 인접한 지역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의도가 뭘까. 뜸을 들이던 겨울이 재차 질문했다. “나쁜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의원님 개인의 제안으로 보기가 어려운 사안입니다. 어느 정도의 선에서 얼마나 논의된 안건입니까?” # 351 [351화] #화려한 초대 (3) 공식적으로 확정된 내용이라면 연락도 다른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준주 수립은 연방정부가 관할할 일 아닌가. 예정지역 선정도 마찬가지. 연방 상원의원이라면 모를까, 캘리포니아 주 의회 상원의원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직접적으로는. 브래넌의 대답은 일단 겨울의 예상범위 내였다. “현재로선 주 의회에서 검토 중입니다. 나와 행동을 함께하는 의원들이 있지요.” “…….” “궁금하다는 표정이로군요. 권한도 없는 사람의 제안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기도 하고……. 당론이라는 것은 때로 지역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중령.” “아.” 연방 의회 쪽과 얼마든지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암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당연한 이야기라도, 수준 높은 「통찰」이 반드시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겨울에게 낯설다고 판단되는 분야에서는. 말하자면 시스템적으로 구현된, 있을 법한 실수인 셈. 겨울의 사격에서도 빗나가는 탄환은 존재한다. “난민들의 준주라는 것은, 전반적인 정책의 흐름상 군정청의 다음 수순에 해당하지요. 난민행정의 최종 단계이자 궁극적 지향점이라 해도 무방하겠군요.” 부연하는 브래넌. “따라서 실제 준주 수립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남아있다고 봐야 합니다. 뭐, 노골적으로 말해 한 중령은 아직 군인으로서의 쓸모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정치인으로선 십년 뒤의 중령도 충분히 젊어요……. 깨지지 않을 최연소 기록으로서 당장 데뷔하는 것도 꼭 나쁘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대중은 그런 걸 좋아하니까요. 라며, 의원이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메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위스콘신 등의 일부 주는 만18세부터 완전한 피선거권을 부여하지만, 실제로 십대의 주지사나 법무장관, 상하원 의원 등이 등장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터였다. 깨지지 않을 최연소 기록이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이 맥락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사전공작을 벌일 시간이 충분하다는 의미인가?’ 떠오르는 건 로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주웨이의 목소리였다. 겨울은 우선 간결히 동조했다. “저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행정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인력도 부족하다. 군 인력이 완전히 철수할 경우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을 것이었다. “역시 그렇지요?” 의원이 끄덕였다. 이쪽의 자연스러운 수긍이 의외인 듯 한 기색을 내비치고서. 숨기려는 찰나의 변화였으나, 겨울이 놓치기엔 선명했다.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마냥 기다리고만 있기는 아쉽지 않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손을 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기정사실을 만들어놓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이를테면……. 원하는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해놓는다거나.” “부동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토지든, 건물이든, 그 외의 자산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적어도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저기는 사실상 한겨울 중령과 그가 보호하는……혹은 보증하는 사람들의 거리다……쯤으로 인식될 수준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인식이 선행되면 인정받기도 수월해집니다.” “즉, 의원님께선 그걸 도와주시겠다고……?” “난민법인……겨울동맹이라고 부르던가요? 보통은 별명이 더 유명하던데. 아무튼 그곳의 난민지도자로서 당신이 우리 쪽에서 제시하는 로드맵에 동의하신다면, 그렇습니다. 주 의회에서 관련 법안을 제정한 뒤엔 한결 수월하겠지요.” 거의 확정적인 표현으로 미루어, 처음의 뉘앙스와는 달리 브래넌에게 동조하는 의원의 수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겨울은 주 의회에서 이런 계획을 추진할 이유가 무엇일지 궁리해보았다. 보정 이전에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자금이었다. “필요하신 건 자금입니까?” “그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브래넌이 웃는다. “아까 여기 안사람이 말했듯이, 우리 주정부는 한동안 푼돈도 아쉬울 처지라서요. 애당초 관할 지역에 투자를 유치하는 건 나 같은 정치인의 사명이자 숙명이지요.”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오염지역 3개주는 오랫동안 재정적 시련을 겪을 것이다. 겨울은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난민지도자 지원예산을 염두에 두신 거라면……. 자세한 논의는 예산안이 결정된 이후로 미루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안은 일찍이 입법예고에 돌입했을지언정, 예산안은 표류에 표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대통령의 퇴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윤곽이 잡히려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한 이후, 빨라도 내년 초나 되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함부로 쓸 수 있는 돈도 아니야.’ 주어질 지원금은 기본적으로 겨울동맹에 속한 난민들의 주거, 식량, 피복, 난방, 의료 서비스 등의 값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구 이상으로 난민지도자의 성과에 비례하여 책정될 예산이기에, 동맹의 규모를 한정적으로 유지한다면 가용자금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건 겨울의 구상과 어긋난다. 브래넌이 한쪽 손을 들어보였다. “지금 중령이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염려 말아요. 그 예산은 어디까지나 지급불능시의 보험 역할일 뿐이고, 실제 재원은 다른 방식으로 마련하게 될 테니.” “다른 방식이라 하심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겨울동맹 차원의 대출을 받거나 채권을 발행하는 겁니다. 동맹의 이름으로 고용될 난민 노동자들의 급여를 담보로 설정해서 말입니다. 아직 그런 사례가 없다 뿐이지, 금지규정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우린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변형된 거래계약이군요.” “정답. 이 계약에서 겨울동맹은 명목상의 소유주로서, 실제로는 대출을 상환하는 노동자들이 권리를 행사하게 됩니다. 자기 명의로 집이나 사업장을 소유하지 못하는 난민들에게도 매력적인 거래가 될 테지요. 추후 진짜 소유가 가능해졌을 때 명의를 양도한다는 조항만 있다면요. 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나와 내 동료들의 또 다른 역할입니다.” 취업비자도, 영주권도, 시민권도 없는 난민들은 정상적인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법적 행위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단체로서의 난민법인이다. 가령 근로계약의 경우, 각 법인마다 고유의 고용 쿼터가 할당되고, 이 범위 내에서 집단계약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브래넌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난민들 입장에선 장점밖에 없습니다. 우선 대출 이율에서 우대를 받지요. 개개인의 신용보다는 겨울동맹의 신용이 더 높잖습니까. 노동자 개인에게는 노동능력을 상실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동맹은 그 노동자의 빈자리를 다른 노동자로 채우면 그만이니까요. 적어도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시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여기에 먼저 언급된 난민지도자 지원예산의 존재도 있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상환이 기대되는 거래대상이었다. “더불어 이 거래에서 난민법인에 적용되는 세제혜택도 장점입니다. 소득세 면제. 취득세와 보유세 감면. 기타 등등……. 뭐, 이건 말씀 안 드려도 잘 알고 계시지요?” “네.” 겨울도 숙지하고 있는 내용이다. 연방세법상 겨울동맹의 법적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첫째, 비영리단체는 아니지만 독점적으로 공익에 관한 이해관계를 지니는 단체(4947(a)(1)). 둘째, 행정명령에 의거하여 국가안보를 위한 인적자원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난민 조직. 전자는 예전부터 있던 항목이고, 후자는 대역병 확산 이후에 신설된 조항이라 들었다. 어느 쪽이든 면세 및 감세의 대상이다. “다음으로, 중령의 동맹은 정치자금을 기부받기에 좋은 창구가 되어줄 수 있겠지요.” “음…….” 겨울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통찰」이 기억 속의 키워드 하나를 발굴해냈다. ‘텍사스 도넛 협회? 아……. 이 기지가 도시화 될 때, 상점가를 만드는 데 각지의 한인 단체들이 직간접적인 도움을 줬다고 했었지. 기부금이나 설비, 노하우 같은…….’ 의도는 알겠다. “한국계 시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브래넌이 긍정했다. “비단 한국계만이 아니지요. 동맹엔 중국인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장차 국적 무관하게 받아들이는 게 한 중령의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장 201독립대대만 해도 중국계 중대가 편성될 예정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하하. 당신과 연대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얻는 홍보효과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이익입니다. 우리 당에 대한 중국계 시민들의 반감을 상당히 누그러뜨려 주겠지요.” “하지만……그건 이곳 캘리포니아의 이익은 아니네요. 당론은 지역을 넘어선다고 하셨어도……. 아까 말씀하신 자금 마련 이외에, 의원님이나 캘리포니아 주 당국이 무엇을 더 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왜, 너무 일방적으로 좋은 이야기 같습니까?” “그렇다기보다……저는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만한 전문성이 부족합니다. 실무를 맡을 사람을 같이 데려오라고 하셨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혹시 호의를 가장한 함정이 아닐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경계하며 몸을 사리는 겨울에게, 주 상원의원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결국은 다시 돈이에요, 돈.” “…….” “아까 말한 방식으로 난민인구를 도시에 정착시키면, 시에서는 자산매각에 의한 직접적인 이익 외에도 추가적인 조세수입이 발생하지요. 준주가 분리되기 전까지는요. 그 많은 건물들을 빈 상태로 방치해봐야 과거의 디트로이트 꼴밖에 더 나겠느냐 이 말입니다.” 과거의 디트로이트, 라. 겨울이 아는 한, 역병 이전의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열악한 도시로 손꼽혔다. 수도와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경찰서도 얼마 없으며,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아 골목마다 악취가 가득했던 곳. 버려진 건물들이 워낙 많은지라 정부가 서부 이재민들의 재정착 지역 중 하나로 선정했던 도시. ‘새로 건물을 짓지 않아도 수십만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었지.’ 여기 포트 로버츠에선 그런 곳에 가기 싫다는 이유로 잔류를 원한 시민들이 있었다. 현재는 다르다. 이재민 재정착 사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황폐하던 옛 도심이 전성기의 화려함을 되찾아가는 상황. 언론에서도 그 풍경을 자주 송출한다. 현 정권의 업적으로서. 「그리스의 섬」 계획에 관한 해명 회견에서 대통령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빈부격차는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고. 그땐 가능할 법도 하다고 여겼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 어차피 잃을 게 별로 없었던 사람들과, 잃을 게 너무 많았던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었으니. 어떤 가능성이, 연상을 거듭하던 겨울의 뇌리를 스쳤다. “의원님께선 이재민들의 상당수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상당수……까지는 몰라도,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사람들은 있겠지요.” “…….” 가만히 바라보던 브래넌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하기야, 한 중령은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처지가 아니었겠습니다.” “그러…네요.” 여유가 없었다. 주어진 업무와 벌어진 사건이 무엇 하나 녹록하지 않았으므로. 경험도 없었다. 지나간 어느 때의 종말이 이재민들의 귀환을 허락했겠는가. “그러네요.” 겨울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도시와 마을을 되찾았지만, 완전한 복구까지는 최소 수 개월 내지 최대 연 단위의 시간이 들어가겠죠. 만약을 대비한 소독 과정까지 감안하면 더 길어지겠고요. 그걸 기다리기보다 재정착 지역에 눌러앉기를 택하는 사람이 많겠군요. 이쪽에 보유한 자산은……소정의 대가를 받고 팔아치워 버리고요.” 복구에 걸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귀향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새로이 일궈놓은 터전과, 거기에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리고 비용. 재정착 사업은 이재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이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이주를 지원한다면 그동안 재정착 사업에 쏟아 부은 재원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즉 연방정부는 이재민들의 귀향에 적극적으로 나설 여력이 없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거지.’ 자연재해에 대한 연방재난관리청의 보상은 재건축, 주택 수리, 거주지 건설, 주택 임대료 지원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진행하도록 되어있으며, 본디 전액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관련 예산이 바닥난 지 오래일 터. 브래넌의 말. “그래도 돌아올 사람들은 돌아옵니다. 재정착은 예산이 빠듯한 사업이었고, 실패로 끝난 동네도 많으니까요.” “…….” “캘리포니아는 예전의 화려함을 되찾기 어려울 겁니다. 태평양 연안의 무역시장이 소멸한 지금, 그나마 선택과 집중으로 키워볼 만한 도시는 샌디에이고가 첫 번째지요. 연방정부 입장에선 결코 포기하지 못할 해군기지니까. 거기서 파생되는 고용만으로도 도시기능 유지를 위한 최저한의 인구와 경제력이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겨울은 의혹을 느꼈다. 기실 들기야 아까부터 조금씩 들던 위화감이었다. 판촉이 지나치게 담백하지 않은가? 자신의 아쉬움을 감추고 상대의 아쉬움을 찾는 것이 거래와 협상의 기본이다. 그리 친하지 않은 주 상원의원의 솔직한 토로는 과잉친절 이상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나를 만나려 한 다른 이유가 있나?’ 단순히 겨울에 대한 호감이 많아서……라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어쨌든 대놓고 물어볼 순 없는 의문인지라, 잠자코 내색하지 않으려는 겨울. 「간파」가 잠잠한 것이 반드시 투명한 의도를 증명하진 않는다. 상대의 기량에 따라, 보정이 잡아내지 못하는 불투명함도 있는 까닭. 대표적으로 채드윅 팀장이 그러했다. 일단 조건 자체만 따져보면 좋은 거래였다. 양측이 얻을 이익도 확실하다. 디트로이트를 언급한 시점에서, 브래넌 의원과 그 계파는 치안 등의 도시 관리비용 절감을 높이 평가하는 듯 했다. 또한 인구가 있어야 시장도 형성된다. 상식적으로, 시장의 규모는 클수록 좋다. 복구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아주 싼값에 이용한다는 장점도 있었다. 주 상원의원이 겨울의 사색을 끊었다. “무슨 생각이 그리 깊으십니까?” “……계약에 앞서 가격을 합의하기가 까다롭겠구나, 싶어서요.” “맞습니다. 현재로선 시세라는 게 없는 상황이니.” “음…….” “뭐, 부담 느끼지 마십시오. 처음에 밝혔듯이, 오늘 중령을 초대한 건 개괄적인 로드맵에서 양해를 구해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앞으로 이런 거래를 하자, 정도의 의사타진인 거지요. 어차피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하려면 현장답사와 감정을 빼놓을 수 없어요. 실무자를 데려왔어도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어느 유능한 투기꾼을 데려왔어도, 말만 듣고 무언가를 결정하진 못했을 터. ‘그 밖의 위험부담이 존재한다면…….’ 이 모든 거래가 성사된 뒤에, 시일이 흘러 정작 그 영역을 준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허나 동맹 명의의 소유권만 남아있으면 그래도 본전 이상을 찾을 듯하다. 돌아가서 상의를 해봐야 할 테지만. 그런데 이런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겨울은 가장 먼저 민완기부터 떠올렸으나, 아무리 그라도 만능과는 거리가 멀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백산호라니.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떻습니까?” 질문을 받은 겨울은 긍정적으로 되물었다. “제가 여쭙고 싶네요.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하. 그럼 동맹 관계자들에게 사정을 전달하시고, 현장에 파견할 사람을 선별해두십시오. 금명간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아, 사전에 수요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두는 것도 괜찮겠군요.” “알겠습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겨울은 독립대대 구성원들 가운데에서도 희망자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기실 브래넌 의원이 노동자들의 급여를 담보 삼자고 했으나, 동맹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소득을 유지하는 집단은 대대의 간부와 병사들이었다. 전 독립중대원들만이 아니라 장차 창설될 나머지 중대원들까지 끌어들인다면, 독립대대 내에서 동원하는 자금만 한 해에 천만 달러를 훌쩍 넘길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니 현 시점의 미국이 지출하는 막대한 군비가 새삼스럽게 실감된다. 아무리 증강된 규모로 편성할 예정이라지만, 인건비를 포함하여 겨우 한 개 독립대대의 유지비가 연간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해군 함대의 주둔만으로 도시의 기본적인 기능이 유지될 거라던 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증언이었다. ‘어쩌면 연방정부에서도 병사들에게 비슷한 계약을 권할 가능성이 있겠는데.’ 공보처가 전쟁채권 판매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만 하다. 그들이 보는 겨울의 금전적 가치가 얼마나 될는지에 대해서도.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 차분한 겨울의 말에, 브래넌이 그래요, 하고 배웅하겠다고 나섰다. 문 밖에 이르러 그가 넌지시 말했다. “한겨울 중령은 참 듣던 그대로의 사람이로군요.” “……네?” 겨울의 조금 늦은 반응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상원의원. “개의치 마십시오. 그냥 좋았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는 미소로 겨울에게 작별을 고했다. # 352 [352화] #화려한 초대 (4) 드디어 가는구나. 9월 29일의 아침. 집무실의 겨울은 창을 등지고 앉아 명단을 확인했다. 내일 새벽 동부행 수송편에 탑승할 사람들의 목록. 가장 위엔 최상급자인 겨울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로 한 개 중대보다 좀 더 많은 숫자의 이름들이 이어졌다. 왜 좀 더 많은가 하면, 민간인 신분의 장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마련한 특별전형 조건을 충족시켜 대학 입학을 허락받은 이들. 이들의 교육비는 절반을 겨울동맹에서 부담해야 한다. 사재출연을 포함하여 어렵게 마련한 재원이었다. 금전적인 지출이 큰 만큼 학생들에게 거는 기대도 무겁다. 선발된 학생들의 웃음에 못내 그늘이 보였던 이유였다. 포트 로버츠 출신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일 장학재단이 많겠으나, 본인의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관심들이었다. 포트 로버츠에 정규 항공편이 취항하지는 않으므로, 학생들은 겨울과 같은 수송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맥카렌 국제공항까지 동행한다. 거기서 통상의 여객 노선으로 환승하는 것이다. 겨울은 거기서 바로 떠나지 않는다. 내일부터 시작될 여정은 D.C 도착을 전후로 여러 도시를 경유하도록 되어있었다. 라스베이거스가 그 첫 번째였다. 병사들이야 관광하듯이 놀면 그만이겠으나, 겨울은 아니었다. 전쟁채권 홍보, 주요 인사들과의 의례적인 만남, 그 외의 행사 참석 등. 개선식 이후에는 뉴욕으로도 간다. ‘약간……부담스럽네.’ 호손 시의 이재민들 일부가 라스베이거스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을 피해 도시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 오염은 반감기가 짧고, 정부에서도 방사능 제거 작업을 하고 있으니 수개월 내에 부분적 귀향이 가능해질 것이다. 부담으로 여기는 것은 역시 핵잠수함 장정 9호 추적,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에 관한 부분이었다. 공화당 대선후보 크레이머는 그리스의 섬에 이어 또 다른 무언가를 폭로할 예정이라고 밝혔었다.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지. 현재로서는 후보 본인과 그 측근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앤이 말했듯, 작전의 모든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겨울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 정권이 진실을 왜곡하여 이득을 본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로인해 개싸움이 벌어진다면, 관련 인물로서 겨울의 이름도 자주 언급될 것이다. 「Platoon- halt!」 조금 앳된 느낌의 힘찬 구령이 닫힌 창을 뚫고 들어왔다. 겨울은 명단을 놓고 몸을 돌렸다. 자그마한 금빛 방울새들이 지저귀는 유실수 너머로 마른 흙빛의 연병장이 보인다. 거기엔 육군 정복을 입은 소년 소녀들이 정렬해있었다. 포트 로버츠 청소년 학군단(JROTC)에 속한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주니어 ROTC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역병 이전을 기준으로, 청소년 학군단 생도의 최소 30%가 진짜 학사장교로 성장했다. 장교의 절대수가 부족한 지금은 그 비율이 훨씬 더 높아졌고. 포트 로버츠에서 청소년 학군단에 들려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했다. 일단 정복이 멋지다는 이유에서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장래계획 면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훈련을 받는 학생들이 존재했다. ‘소대장 생도가 어쩐지 낯익다고 생각했더니…….’ 사격 수업을 참관했던 날, 어머니에게 심하게 혼났던 아이가 있었다. 평가판을 들고 앞뒤로 오가며 제식을 평가하는 건 독립대대 알파 중대장인 진석이었다. 출세지향적인 성격에 과시욕도 끼어있으니, 민간인들에게 얼굴을 비출 행사를 사양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알파 중대의 시가지 전술훈련이 어제부로 종료되었기에 시간도 남았을 것이다. ‘출발 전날까지 굴리는 건 역시 좀 부자연스럽지.’ D.C행 인원을 훈련 성과 순으로 선발하겠다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 전에는 확정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병사들이 ‘선의의 거짓말’을 눈치 채면 신임 중대장 입장에서 좋을 게 없다. 덕분에 한껏 들떠 잠을 설친 병사들은, 그럼에도 전혀 피로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금은 삼삼오오 모여 나이 어린 예비생도들의 분열행진을 구경하고 있다. 이제부터 겨울과의 면담이 예정된 이들은 바로 그 밝은 분위기를 가로질러야 한다. 의도한 건 아니어도 나쁘진 않다. 그 첫 번째 그룹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리던 겨울은 문 밖의 발소리들이 노크로 이어지기 전에 말했다. “들어와요.” 멈칫 했던 기척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셋은, 일전에 싱 소령이 언급한 간부 후보 중 겨울이 만나보겠다고 밝힌 여섯의 절반이다. “소위 쑨시엔 외 3인, 호출을 받아 왔습니다.” “쉬어요.” 겨울은 부동자세를 취한 그들의 정면에 앉았다. 책상을 끼고 마주보는 구도. 쑨시엔은 본디 삼합회의 일맥(一脈), 화승화와 수방방 공동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중간 간부다(백지선/白紙扇). 일찍이 겨울이 중위였을 때, 벌목 작업현장에서 동맹에 받아들여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도 쑨시엔이었다. 나머지 둘은 직급 상으론 동일하나 발언권을 위탁하여, 실질적으론 쑨시엔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내가 귀관들을 부른 이유는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Yes, sir. 겹쳐지는 목소리들. 한때 깡패였던 것 치고 빡빡하게 군기를 세운 반응들이었다. 욕망이 묻어난다. 일부러 뜸을 들인 겨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먼저 하나. 여러분 중엔 중대장이 없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러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은연중에 바라긴 했을지언정, 큰 기대는 걸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다만 약간의 불안이 뒤따랐다. “다음.” 겨울이 손가락을 세웠다. “셋 모두를 소대장으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긴장감이 한층 높아졌다. “여기서 탈락하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다시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물론 그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느냐는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이겠지만요. 딱히 뭔가를 더 하라는 건 아니고, 실망감에 막나가지 말라는 뜻에서 해두는 당부입니다.” “…….” 사실 당부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깝다. “쑨시엔 소위. 류젠차오 소위.” 살짝 밀린 두 사람의 대답이 끊어지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합격인가, 불합격인가. “두 사람이 각각 브라보 중대의 2소대장과 화기소대장입니다. 지휘할 병력은 기존에 맡았던 지원병 소대를 기초로 보강되는 수준일 거고요.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류젠차오로부터 절제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체는 안도감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하는 생각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쑨시엔 쪽은 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속내는 비슷할 것이다. 한 사람만이라도 뽑히면 다행이라는 각오로 왔을 테니. 이는 이들이 술자리에서 심심찮게 하는 말들을 토대로 내린 판단이었다. 굳이 강영순 노인이 아니더라도, 겨울의 귀를 자처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이 선별에도 영향을 미쳤고. 혼자 빠지게 된 한 사람, 쉬진룽은 낯빛에 그늘이 졌다. 겨울의 말이 이어진다. “떠나기 전에 중대 창설까지는 보고 가고 싶었지만……사정이 여의치 않게 됐네요. 내가 없는 동안에는 부대대장 바하다르 싱 소령이 지휘를 맡게 될 겁니다. 추가 훈련이 먼저겠지만요. 돌아왔을 때 충분히 전력화된 중대를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쑨시엔과 류젠차오가 입을 모았다. 겨울이 시선을 돌렸다. “쉬진룽 소위는 전처럼 지원병 소대를 관리하면 됩니다.” “예.” 쉬진룽의 안색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말이 소위이고 소대이지, 상설편제에 편입되기 전까진 반쪽짜리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계급장이다. 맨 처음 갓 지원병이 되었을 무렵의 겨울과 같이, 난민 지원병의 대부분은 정식 계급장조차 달지 못한다. 즉 갓 입소한 훈련병들과 동일한 취급이었다. 소위들도 비슷하다. 어디까지나 지원병들을 수월하게 모집하기 위한 광고판으로서 달아준 계급장인지라, 본토 출신 미군 병사들에겐 가짜 간부 취급을 받았다. 자연히 임무를 받을 기회도, 공로를 세울 기회도 적다. ‘안정성도 문제야.’ 언제까지 지원병 신분, 또 껍데기뿐인 장교 신분으로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만연한 중국 혐오 정서가 이들의 발을 묶어놓았다. 캡스턴 같은 인물은 드문 법이었다. 고정된 급여를 받는다는 점, 그리고 시일이 흐르면 시민권이 확정된다는 점에서 다른 난민들보다 훨씬 나은 입장이긴 하나, 사람은 언제나 아래보다는 위를 보게 마련이었다. 브라보 중대 편성이 확정된 두 사람의 안도감이 여기서 기인했다. 겨울이 책상 위로 헐겁게 깍지를 꼈다. “전달사항은 여기까지인데……. 혹시 질문이나 건의사항, 그 외에 할 말이 있다면 듣겠습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 “없습니까?” 없을 리가 있나. 경직에서 벗어나 시선을 교환하는 셋. 대표는 여전히 쑨시엔이었다. “우선, 진심으로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가만히 응시하니 신중하게 이어지는 말. “처음에 저희를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으나, 솔직히 그동안은 다소 겉도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결정을 내려주시니, 비로소 동맹의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믿음에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겨울이 차분하게 답했다. “기대하죠. 난 당신들의 자질이 미군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마음가짐에 따라 충분히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수준 운운은 빈말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칭찬인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미군의 인적자원 수준이 낮아졌으니 뭐…….’ 트릭스터를 집중적으로 사냥하고 다녔던 프레벤티브 스캘핑 작전 당시, 구조된 병사 중의 하나는 공수된 보급상자의 암호를 푸느라 애를 먹었노라고 증언했었다. 탄약이 변종들에게 넘어갈까봐, 네 자리 비밀번호를 간단한 사칙연산으로 표기해놓은 탓. 그것은 성인 인구의 1할을 까막눈으로 만들어 놓은 미국 공교육의 민낯인 동시에, 병력 확충을 우선하느라 질적 여과가 허술해진 육군의 현실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역병 이전부터 갱 출신의 사병들이 심심찮게 사고를 치던 군대가 미군이었다. 「킬 팀」의 악명은 나쁜 의미로 전설적이다. 전지에서 민간인 사냥을 다닌 망나니들. 디안젤로 중사가 전 독립중대 병사들의 교육수준에 긍정적인 당혹감을 보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학 나온 놈들이 뭐 이렇게 많지? 하고. 이런 속내를 모르고 온전한 칭찬으로 들은 셋은 애써 기꺼움을 감추는 눈치였다. 억눌린 기간이 워낙 길었으니 이해가 간다. “Sir.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뭐죠?” “혹시 저희가 속하는 중대의 중대장이 그 여자입니까?” 쑨시엔이 누굴 말하는지 알지만, 겨울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 여자?” “음……. 리아이링 소위 말입니다.” “아아. 아뇨, 리 소위는 3소대장으로 부임합니다.” “저희와 같은 중대가 됩니까?” “다른 중대일 수가 없죠. 이번에 중국계로 편성하는 중대는 브라보 하나뿐이니까요.” 겨울의 대답이 쑨시엔에겐 예상범위 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저희는 중대가 다섯 개나 더 만들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명목상 ‘증강된 보병대대’라서 나중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지침을 새로 받았는데, 그렇다고 그 많은 중대를 한 번에 다 편성해야 한다는 법은 없죠. 일단 전투중대로는 이번에 둘,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하나를 추가하기로 했네요. 나머지는 상황 봐가면서 조절하고요.” 이건 포스터 대위의 제안이었다. 중국계로 두 개 중대를 채울 거라면, 최소한 창설 시기에는 차이를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은근한 서열 갈등을 유도하자는 뜻이었는데, 그 의도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병사들이 원래의 국적에 따라 선을 긋고 어울린다면 대대 전체 분위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됩니다. 사실, 다른 부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종종 발견되는지라…….”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라티노는 라티노끼리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면 부대의 통일성이고 뭐고 없어지더라. 그런 경험담이었다. ‘엄밀히 말해 장교들 사이에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지.’ 이쪽은 장교가 된 경로를 따진다. 겨울은 전공이 압도적이라서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 것이고. 쑨시엔이 새로 질문했다. “그럼 누가 중대장이 됩니까?” “나도 그걸 고민했는데, 다행히 웨스트포인트 출신 중위 한 명이 파견된다고 하네요. 중대장으로는 처음이지만 소대 지휘경험은 풍부. 생도 시절 성적도 우수. 명백한 해방 작전, 멧돼지 사냥 작전에 연속으로 참가. 표창이력은 없어도 이 정도면 훌륭한 자격이죠.” “……장교가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까?” “화교 3세입니다. 이름은 개빈 챙. 표정을 보니 나머지는 설명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사정이야 어쨌든 사관학교까지 나온 고급인력을 얻게 됐으니 만족이다. 다만, 혈통이 화교일 뿐 중국어로는 회화가 곤란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을 수도 있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겨울 눈 앞의 셋은 어딘가 모르게 만족스러운 분위기였다. 리아이링이나 페이창룽처럼 사이가 험악한 인물이 상급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 하다. “또 할 말이 있습니까?” 겨울의 물음에 쑨시엔이 자세를 바로했다. “없습니다.” “흠……. 나중에라도 뭔가 있으면 보고해요. 이젠 정식 지휘계통상으로도 내가 당신들 상관이니까. 오늘은 여기서 해산. 이만 가 봐요.” 세 사람이 겨울에게 경례했다. 대체할 인물이 마땅치 않아 고르긴 했으나,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봐야 할 이들이었다. # 353 [353화] #화려한 초대 (5) 다음 면담 대상자는 리아이링이었다. 겨울이 일부러 빡빡하게 불렀기 때문에, 미리 도착한 그녀는 대대장실을 나서는 백지선 3인방과 마주쳤다. 잠시 멈칫 했으나, 쑨시엔 외 2인이 까딱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 열린 문 안쪽 겨울의 시선을 의식하며 받아주는 아이링. 낯빛엔 미약한 거부감과 당혹감이 어려 있다. 평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정복을 입었던 앞서의 셋과 달리, 새로 입실한 아이링은 무기를 휴대한 전투복 차림이었다. 경례를 하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길게 내쉬는 호흡도 마찬가지. 두 눈엔 강렬한 열망이 녹아있었다. 겨울이 편안한 인사를 건넸다.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말투가 딱딱했다. 군인 태를 일부러 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울러, 이는 겨울과 자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당신 앞에 서있는 것은 그 진절머리 나는 삼합회의 향주(香主)가 아니라, 육군 소위 리아이링이라고. 그녀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뭐, 운이 좋았죠.” 죽을 뻔한 위기는 얼마든지 많았다. 앨러미더 섬에 고립되었을 때, 피쿼드 호의 비밀갑판에 갇혔을 때, 무수한 배들이 충돌하고 파도 아래 괴물들이 배회하는 밤바다를 가로질러 탈출할 때, 거기서 다시 북상하여 패주한 병사들을 수습할 때……. 그 모든 고비를 넘어, 겨울의 사후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건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엔 그저 산 사람을 배려하는 피로감뿐이었다. 허나 별빛아이와 더불어 더 긴 시간을 존재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는 요즘, 이미 극복한 위기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곤 했다. 겨울이 거듭 되뇌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어요.” “…….” “의례적인 인사는 이쯤 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리아이링 소위.” “예!” “인사장교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의 지원병 소대는 오늘부로 201독립대대의 브라보 중대 2소대로 편입됩니다. 당신은 그 소대장이고요.” 보직 변경에 관하여 미리 언질을 받았을 리가 없다. 겨울이 전달을 통제했기 때문. “소대 편성은 1차적으로 당신에게 맡깁니다. 뺄 사람은 빼고, 받을 사람은 받아요. 결재는 머레이 대위에게 받도록 하고요. 큰 문제만 없다면 그대로 승인될 겁니다.” 정보장교인 머레이가 인사장교 역할까지 담당하는 건 결국 만성화된 장교 부족이 원인이었다. 그런 그가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계 소대 편성에 이의를 제기할 리 없다. 즉 겨울은 아이링에게 사람을 솎아낼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상설부대에 속할 소대의 편성권한을 쥔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상당한 이권을 쥐는 셈. 아이링이 물었다. “그럼 창룽……아니, 페이 소위는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이 중요하다. “이번 편성엔 포함되지 않습니다.” 겨울은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확실히 온도차가 있구나.’ 가장 처음 던진 질문에서 속내가 드러난다. 먼저 나간 세 사람은 삼합회의 향주 리아이링을 경계했으나, 아이링은 그 세 사람보다 아버지의 사람인 페이를 더 경계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그만큼의 간극이 생겼다고 봐야 했다. 민완기가 말하던 그대로. 아이링의 다음 질문은 예상된 수순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대장은 누가 맡게 되는지요?” “가까운 시일 내로 부임할 겁니다.” “원래 있던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됐네요.” 겨울은 신임 2중대장의 신상을 읊었다. 실전경험을 갖춘 우수한 장교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쑨시엔이 물었을 때보다 좀 더 자세하게. 이는 한 가지 반응을 보고 싶어서였으나, 아이링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다못해 욕망이 아닌 실망감이라도 내비칠 법 하건만. 가만히 궁리하던 겨울이 아이링을 불렀다. “소위.” “네.” “기회를 주겠습니다. 내 사람이 되세요.” 언젠가 시에루 중장이 겨울에게 했던 말과 판박이다. 맥락 없는 제안은 이번에야말로 아이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 여기서, 군인으로서, 나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죠.” “…….” 분명 듣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겨울이 회상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그 바다에서 옛 인민해방군의 장성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사정상 정확한 계급과 이름까지는 밝힐 수 없지만……아무튼 그분께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주시더라고요. 중국인들이 왜 사적인 의리와 믿음을 강조하는지.” 그것은 시에루 중장이 생각한 사람의 한계였다. “말하자면 그건 자력구제의 수단이었다고 하더라고요.” “…….”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안의 질서라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봐줄 만큼 섬세할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였다면 사소했을 혼란이어도, 중국에서는 훨씬 더 압도적인 규모가 된다. 매번 혼란에 희생당하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지만, 국가적으로는 사소한 피해에 지나지 않는다. 무작정 사회만 믿고 의지하다간 사람의 바다에 빠져 죽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사적인 관계의 울타리를 만들어야 했다, 라고. 나는 이렇게 이해했어요. 표현은 조금 달랐지만요.” 같은 중국인의 말이었다. 시각은 낯설어도 개념은 익숙할 것이다. 아이링이 말을 받는다. “그분은 아마, 꽌시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네요.” “정확하게는, 그게 왜 필요했는가에 대한 설명이었죠.” “그걸 제게 전해주시는 이유는…….” “알 텐데요. 원래 있던 울타리에선 확실하게 나오라는 겁니다.” 내 울타리에 들어오고 싶다면. 삼킨 뒷말은 안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당신 입장이 전과 같았다면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어요.” 의도가 의심스러웠는지 대답을 삼가는 아이링에게 겨울이 이어 하는 말. “그냥 조용히 임명하고 말았겠죠. 한겨울 중령은 사람을 쓸 때 원래의 국적도, 소속도 가리지 않는다는 신호쯤으로. 이곳의 난민들에겐 그런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으니……. 하지만 딱 거기서 끝냈을 겁니다. 미군으로서의 당신 경력은 소위가 끝이었을 거라고요.” “……그럼 지금은 달리 생각하시나요?” “들었어요.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아이링은 망설이다가 또 한 번 질문했다. “제가 나오겠다고 하면 믿으실 수는 있습니까?” “말했죠. 기회를 주겠다, 라고.” “…….” “중국에선 계약서가 없는 거래야말로 진짜 거래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어요. 정확하게 약정한 만큼만 주고받은 다음 끝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만들어지는 장기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거라던데……. 내가 맞게 아는 건지 모르겠네요.” 겨울이 아이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이제부터 그렇게 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약속은 있어야 쓸 데 없는 고민이나 갈등을 덜지 않겠어요? 앞으로 마음고생을 할 일들이 많을 테니까요.” 동맹이라고 선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게 아니다. 텃세도 있을 것이고 괄시도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날을 세우는 사이인 백지선 일파와도 껄끄러울 터, 아직 편성 초기 단계인 일본계 중대와도 정서상 편한 관계일 수가 없다. 그 모든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유일하면서도 강력한 구심점으로서의 겨울의 역할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고.’ 편성 업무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불가피하게 다시 긴 시간 자리를 비우는 데, 그 사이에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누군가가 있을까봐서.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D.C 행에서 돌아온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소대원 선별을 전적으로 아이링의 손에 맡긴 것도, 결국 울타리를 새로 만들라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동맹의 큰 울타리 속에서 작은 울타리가 있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외로워서라도 견디기가 어려울 터였다. “감사…합니다.” 아이링이 천천히 말했다. “믿음에 보답하도록……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네. 그 정도면 됩니다.” 당장은 다짐을 받는 정도로 충분하다. 어차피 그녀 스스로 벗어나고 싶을 입장인 만큼. 이후로도 면담을 진행한, 겨울은 일본계에 대해선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인육 사건으로 인해 사납게 굴던 자들이 싹 쓸려나간 터라, 내부의 분위기를 확인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속내가 어떠하든, 상급자의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경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훈련 교관들은 전반적인 성과에 크게 만족했으며, 싱 소령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병 쿠시나다 세츠나는 많이 바뀐 모습이었다. 머리를 박박 밀었고, 야위었으며, 얼굴엔 작은 흉터가 생겼다. 눈 밑에 기미가 진 그녀는 지금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대장 집무실에서도 수시로 무기를 확인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듯 한 손버릇.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음날. 9월 마지막 날의 새벽에, 겨울은 대형 수송기(C-130)에 탑승해있었다. 인원 점검을 마친 전 독립중대원들은 두 개의 군용기에 나누어 탑승했다. 대형이라곤 해도, 민항기에 비해선 수송인원이 모자란 탓이었다. 여기에 예의 그 장학생들이 더해지기도 했다. “에이, 이렇게 좋은 날 왜 울고 그래!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뚝!” 유라가 고맙다고 훌쩍이는 한 장학생을 달래주는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줘도, 눈물은 쉼 없이 새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여기에 알알! 개 짖는 소리가 더해졌다. 이는 공보처의 요청이다. 연출 상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던가. 기밀이 아닌 이상, 겨울의 행적은 사소한 부분까지 공개되어 있었다. 분명 다리 짧은 스페인 국왕을 보고 싶어 할 시민들이 있을 것이었다. “음……. 그렇지! 혹시 사탕 좋아하니? 너희들도 하나씩 줄까?” 웅웅 울리는 터보프롭 엔진의 소음을 뚫느라, 상냥한 말이라도 크기가 커진다. 유라가 주머니에서 알록달록한 색상의 과일 맛 사탕들을 꺼냈다. 전투식량을 까면 한 줄씩 나오는 사탕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다니는지, 나란히 앉은 장학생들에게 다 돌리고도 한 움큼이 남는다. 장학생들의 얼굴엔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났다. 소위 인류 문명의 마지막 보루, 미국 동부로 가는 건 분명 기뻐해야 할 일.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오래 지낼 생각을 하면 마냥 즐거울 순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얼마 전까지 중국 혐오정서에 기초한 폭동이 빈발했음에야. 그 와중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겨울을 흘깃거렸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사회적인 입지는 완전히 다르다. 관심이 색다를 수밖에. 자리 배치부터 학생들의 희망에 따랐다. “저기! 혹시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겨울은 한 남학생의 요청을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래요. 어디에 해줄까요?” “여기, 제 수첩에다가…….” 학생은 하드커버가 위장색인 수첩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군사기지에 세들은 난민구역에서, 군용 보급품은 흔한 일용품쯤으로 통했다. 겨울은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경매 사이트 같은 곳에 올리면……돈이 급할 때 도움이 되려나.’ 사인을 원하는 학생에게선 사실 순수한 호의 이상으로 다른 욕심이 엿보였다. 처지를 헤아려보면 당연한 일. 일단 초기의 대인관계에도 소품으로서 도움이 될 터이고,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팔아다가 생활비에 보탤 수 있을 것이었다. 일전의 맹동록 취사병 때와 달리, 공보처에서 정해준 가이드라인이 있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저도! 저도 하나만 해주세요!” “중령님! 멋있어요! 팬이에요!” “우리 작은 대장님! 저랑 결혼해주세요! 평생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마지막 외침에 웃음이 번진다. 유라가 아직까지 다독이던 학생도, 손등으로 눈가를 닦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착륙하고 나서는, 수송기를 벗어나기 전에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준 유라가 넷 워리어 단말을 돌려주며 웃었다. “대장님 이제 SNS도 본격적으로 하셔야 하잖아요. 거기다 올리세요.” “음……. 시키니까 하기는 하는데, 역시 좀 생소하네요.” 오늘 이후로 가급적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글을 작성해줄 것. 겨울이 받은 지침이었고, 심지어 여기에 별도의 급여마저 책정되었다. 평가기준은 게시물의 숫자, 내용의 충실함,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가. 즉 군의 홍보효과였다. “하하. 어려워하지 마세요. 대장님이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해도 몇 만 명씩 퍼갈걸요?” “그건 그것대로 부담스러운데…….” “진짜 부담스러운 건 저런 거 아니에요?” 수송기의 경사진 승강구를 내려온 유라가 도시 저편의 하늘을 가리켰다. 거기엔 거대한 현수막을 늘어뜨린 광고용 비행선이 떠있었다. 「방역전쟁 최고의 영웅, 한겨울 중령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354 [354화] #화려한 초대 (6) 저건 좀 아니지 않나. 표정이 흐트러지는 겨울의 모습에 여러 사람이 즐거워한다. 그 유쾌한 웃음소리들 가운데, 겨울은 육성으로 듣고 싶었던 그리움 하나를 구분해냈다. “……앤?” 인상이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 했다. 새까만 정장을 입은 앤은, 비슷한 복장의 통제요원 몇 사람과 더불어 현지 경찰인력을 대동하고 마중을 나온 참이었다. 부대원들이 소란스러운 탓에 거리를 두고 정차한 차량대열을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산뜻하고 투명한 미풍이, 다가오는 그녀의 머릿결을 잔잔하게 흔들었다.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다. 그 미소는 반가움을 감추지 않는 겨울을 보고 한층 더 진해졌다. 다가오는 내내, 점점 빨라지려는 걸음걸이를 힘들게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겨울.” 살짝 떨리는 이름을 부르고서 잠시 목이 메는 앤.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손날을 가지런히 하여 겨울에게 경례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겨울 중령.” “……?” “알고 계시겠지만, 귀하의 경호와 연락을 담당하게 된 연방수사국의 조안나 깁슨 요원입니다. 순회 일정 간 무언가 요청 사항이 있으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조치해드리겠습니다. 복귀하시는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눈을 깜박이던 겨울은 한 박자 늦게 주변을 의식하고 마주 경례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깁슨 요원.” 이렇게 느린 눈치는 겨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앤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다. 한 손으로 짙은 선글라스를 끌어내린 그녀가 애정을 담아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해후는 나중에.” 속삭이는 소리는 바로 앞의 겨울에게 겨우 닿을 만큼 작았다. 잠깐 보인 눈시울이 붉었다. 선글라스를 고쳐 쓴 앤은 몇 걸음 물러나 맞은편의 활주로에 두 번째 수송기가 착륙하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을 등진 채로 볼을 한 번 닦아낸다. 점잖은 체 하지만, 발꿈치를 거듭 들었다 놓는 모습에서 감추려는 속마음이 묻어났다. “중대! 정렬!” 박진석은 활주로에 내려서자마자, 엔진 소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인상을 썼다. “야! 니들이 무슨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이야! 어? 빨리빨리 안 움직여?!” 으르렁거리는 품이 숫제 잡아먹을 듯하다. 병사들은 자그맣게 우- 하면서 오와 열을 맞춰 섰다. 겨울은 아무 말 않고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사실 진석이 성을 낼 걸 알면서도 먼저 내린 인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겨울도, 진석도, 병사들도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입장이었다. 간결하게 인원을 확인한 진석이 겨울에게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그렇다네요.” 겨울은 앤을 보았고, 앤은 겨울과 진석을 향해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학생들은 이쪽 공항 보안요원의 안내에 따라 터미널에서 환승을 기다려주시고, 201독립대대 알파 중대원 여러분들은 저쪽에서 대기 중인 버스 4대에 소대 별로 나누어 탑승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한겨울 중령님은……저와 함께 가시죠.” 겨울동맹 장학생들이 겨울과 중대원들에게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기내에서는 몇 명이 훌쩍였을 뿐이지만, 지금은 예외 없이 울고 있다. 그 광경을 보고 마음이 시큰해졌는지, 병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중대장님! 애들한테 용돈 좀 줘도 되겠습니까?” 진석이 성난 표정으로 대꾸했다. “줘!” 앤이 웃음을 터트린다. “거기, 잠깐만요. 기다려주세요.” 그녀가 공항 보안요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사이, 마음이 동한 중대원들은 각자 지갑을 꺼내 현금을 각출했다. 곳곳에서 곤란해 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미처 현금을 준비해두지 못한 이들이었다. 겨울도 오백 달러를 내놓았다. 각자 적잖은 돈을 쥐게 된 학생들은, 병사들이 탑승을 마치고 나서도,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겨울은 별도의 방탄차량에 탑승했다. 안쪽까지 두꺼운 왜건인데, 천장이 앞뒤로 나뉘어 열리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 앞쪽에는……. “……미니건?” 지붕 안쪽에 붙은 중화기가 겨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유사시 자동화된 해치를 통해 무장이 개방되는 구조였다. 겉에서 보기엔 평범한 차량이건만, 어지간한 변종집단은 순식간에 갈아버릴 강력한 화력이 내장되어 있는 셈. “시크릿 서비스가 쓰는 경호 차량하고 비슷한 사양이에요.” 앤이 소리 죽여 설명했다. “덕분에 운전석에서 뒤쪽 좌석을 보기 어렵죠. 후방 관측은 카메라로 대신하거든요.” 그러면서 겨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겹친다. “조금 아쉽지만, 도착할 때까지는 이 정도로 참아야겠네요.” 혹시 싫은 건 아니죠? 라고 묻는 그녀에게, 겨울은 손가락을 얽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량의 앞뒤가 완전히 분리되어있지는 않은지라, 앤은 고개를 숙였다. 표정관리를 하기엔 너무 어려운 기쁨인 모양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잠시 후에 겨울이 묻자, 앤은 심호흡을 하고서 얼굴을 들었다. “큼. 일정을 소화하려면 먼저 짐부터 내려놔야죠. 숙소는 벨라지오 호텔에서 제공하기로 했어요. 겨울의 방은 스위트로 잡혀있죠. 하루만 묵고 떠날 테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울 거예요. 보안상 미리 점검해봤는데,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도시 전경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으음, 비용이 너무 비싸지 않아요?” “전혀요. 호텔 측에서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거든요.” “그건 그것대로 부담스럽네요.” 앤이 키득거렸다. 오늘의 그녀는 웃음이 많았다. “부담스럽긴요. 당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몰렸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걸요?” “…….” “근 1년간 근근이 적자를 견뎌온 파라다이스의 마피아들 입장에서, 겨울의 방문은 도시 경영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에요. 말하자면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해야겠네요. 축제를 치른 뒤엔 지속적인 관광객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을 거예요.” 라스베이거스의 약점은 방역전선에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세기말에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향락과 도박을 찾을 사람이야 많겠으나, 현실적인 위험부담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앤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겨울에게 혜택을 제공할 때 얻는 이익의 가짓수를 헤아렸다. “아울러 광고효과도 고려해야 해요. 당신이 머문 방은 프리미엄이 붙을 것이고……. 그래서 호텔 간에 경쟁도 붙었어요. 당신을 머물게 해주면 국방성금으로 얼마를 기부하겠다는 식이었는데, 구체적인 금액까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금액이라고 들었어요. 아마 벨라지오 호텔 측이 가장 높은 금액으로 입찰했겠죠.” 국방부는 돈이 아쉬우니까요. 그게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앤이 말미에 덧붙였다. 터미널을 거치지 않고, 주차장과 연료 보관시설 사이를 통과하여 공항을 빠져나간 차량 대열은 파라다이스 대로를 타고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공항 부지 반대편, 도로 북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환호성을 질러댔다.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길이 수 킬로미터의 도로변을 꽉 채울 지경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뒤,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리기가 무서운데요.” 앤이 맑은 소리로 웃는다.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앞으로 질리도록 경험할 일이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함성은 거리와 깊이를 모를 소음으로 변했다. 모든 방향이 웅웅 울리는 것만 같다. 직전까지의 웃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앤은 냉정한 무표정으로 상황을 통제했다. 지시에 따라 저지선을 형성하는 인력은 경찰보다 경찰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원래부터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이들로 보였다. 바로 합법화된 마피아 조직. 도로가 호텔 로비 앞까지 이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차한 지점은 커다란 인공호수의 남쪽 진입로였다. 경호와 홍보 사이에서 갈등한 흔적이 엿보인다. 도로는 미리부터 차량의 진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구름 없는 네바다 사막의 하늘, 햇살에 반짝이는 분수를 배경으로, 가지각색의 환영인파가 열광했다. “한! 하-안! 사랑해요! 나랑 결혼해줘요!”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외침. 돌아보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꽃다발을 흔드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고서 무시하기도 애매하여, 겨울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바깥만큼은 아닐지언정 호텔 로비도 북적였다. 형형색색의 유리공예로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내부가 인상적이었으나, 차분히 지나갈 여유가 부족했다. 유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 분명 야간에만 입어도 된다고 했었는데!” 그놈의 호랑이 가죽 케이프 때문이다. 엄한 얼굴의 담당 공보장교를 의식했는지 투덜거림은 한국어로 내뱉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겨울과 중대는 승강기 앞에서 갈라졌다. 진석이 인사를 남겼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숙소에서는 다들 좀 풀어주고요.” “사고만 안 치게끔 관리하겠습니다.” 드러내진 않아도 진석 또한 기분이 어수선할 것이었다. 호텔 직원의 도움을 사양하고 객실에 들어서서야 한 숨 돌리는 겨울. 뒤따라 들어온 앤이 가볍게 쥔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너무 재미있어 하는 거 아니에요?” “큭큭. 들켰나요? 사진……아니, 동영상으로 녹화해두고 싶었는데.” 이렇게 농담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조용한 가운데 둘만 남게 되니 조금 어색해지는 분위기.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눈만 돌리던 앤이 되는대로 주워섬기듯이 하는 말. “음, 나랑 같이 온 요원들, 그리고 공보처나 유관기관 인력은 맞은편 객실에서 대기할 거예요. 앞으로 방문하는 모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야간에도 당직이 있으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전달해줘요. 사적으로 외출하는 것도 일단은 보고가 들어가야 할 사안이고…….” “저기, 앤.” “네?” “보고 싶었어요.” “…….” 잠시 후, 앤이 선글라스를 벗고 긴 숨을 내쉬었다. “전화로 몇 번 들었던 말인데도……. 이렇게 듣는 건 또 새롭네요. 귀가 간질간질해요.” 선글라스 다리를 괜히 접었다 폈다 하는 그녀.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말했다. “아까는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 했어요.” “그야, 전엔 조금도 꾸미지 않았었는걸요. 이상한가요?” “전혀요. 알아보기 힘들 만큼 예뻐졌다는 뜻이었어요.” “다행이다…….” 직설적인 칭찬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앤은 귓바퀴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 연습 많이 했거든요. 본격적으로 꾸미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예전 모습 그대로였어도 괜찮은데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봐요. 나쁘지 않죠?” “예. 정말로.” “큭.” 이제 바라보는 시선이 올곧아진 앤이 진지한 어조로 하는 말. “쓸 데 없는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미리, 확실하게 말해둘 게 있어요.” “뭔데요?” “지금 당장 내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당신이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한 순간이라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내겐 그것만큼 싫은 일이 없을 테니까요.” “…….” “역시,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거죠?” 초조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입을 다문 겨울에게 앤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겨울. 나는요, 조바심에 서두르다가 중요한 일을 실패한 경험이 많아요. 돌이켜보면 인간관계에서 특히 그랬던 것 같네요. 당신에게만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요. 내게 있어서 당신은……성급하게 구느라 망치기엔 너무도 소중한 인생이거든요.” “음…….” “표정 봐요.” 짧게 키득거린 앤이 남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의 행복인 것처럼, 내가 당신의 행복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당신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날이 올 테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노력해 볼게요.” “네. 그거면 됐어요. 당신 성격을 감안하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앤의 온화한 낯빛을 눈에 담던 겨울이 그녀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잠시 실례할게요.” “앗…….” 겨울은 그녀의 볼에 입 맞춘 뒤 어깨를 당겨 포옹했다. 품 안에 가득 차는 한 사람분의 체온이 좋았다. 앤의 귓가에 대고 겨울이 하는 말. “고마워요. 진심으로.” “……네.” 앤도 겨울의 등 뒤로 팔을 둘러주었다. # 355 [355화] #화려한 초대 (7) 호텔에 숙박하는 전쟁영웅은 겨울 혼자만이 아니었다. 명예훈장 수훈자로 내정된 55인의 1차 집결지가 바로 이곳 라스베이거스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겨울이었으므로, 진입로에 운집한 환영인파는 한동안 흩어질 줄을 몰랐다. 라스베이거스 시 당국에서는, 아마도 공보처의 요청사항이었겠지만, 외부에 스피커를 마련하여 진입하는 영웅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업적을 소개해주었다. 일종의 퍼레이드나 마찬가지였다. 소위 영웅들의 중대의 순방은 지역 민심을 위무하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에겐 이 도시가 자랑하는 그 어떤 쇼보다도 화려한 행사로 기억에 남겠군요.” 창가에 선 겨울의 등 뒤에서 앤이 하는 말. “사실 순서를 정하느라 고민이 많았다고 해요. 저분들을 들러리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시민들에겐 당신의 도착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서 알렸죠. 협조를 당부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요……. 지금 보니 결과가 나쁘지 않네요.” 겨울을 환영하던 그 창피한 비행선도 잠시 치워둔 상태였다. “겨울, 당신을 위해서도 잘 된 일이에요.” “그러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감을 살 뻔 했네요.” “이제부터 함께할 행사가 많을 테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친분을 다져두는 게 좋아요.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은 사람들인 만큼 알아두면 훗날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사병도 사병이지만, 장교는 장차 군의 중추까지 올라갈 확률이 높다. 명예훈장 이상의 표창경력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평가항목 중 하나가 항상 만점이면 도리어 진급을 안 하기가 어렵다. 사실 난민 출신인 겨울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예전엔 대위가 내 진급 상한이라고 생각했었지.’ 그건 과거의 종말들을 곱씹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이제껏 겪어온 그 어느 미국과도 다르다. 다소 어둡고 불안한 요소들이 존재하긴 하나, 현실적으로 상정 가능한 최상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겨울이 자신의 경험에 갇혀있었던 셈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상징적인 인사는 얼마든지 있어왔다. 최초의 흑인 장성, 최초의 여성 장성, 최초의 소수종교 장성 등. 희망 섞인 관측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저 상징으로 끝날 것인가,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겨울이 하기 나름에 달렸다. 인맥관리가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혹시 이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라는 건 없어요?” 경계할 바가 많은 겨울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앤이 공교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침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곧바로 한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상사 라울 F. 엘즈워스. 2기병연대 3대대 「강철」 중대 소속으로, 모겔론스 사태 초기 유럽방면의 감염확산을 지연시킬 목적에서 진행된 희망 수호(Uphold hope) 작전에 참여. 암스테르담 철수 당시 헌신적인 활약으로 고립된 아군을 구조하여 수훈십자장을 받았어요.” 굳이 부대 명을 언급하는 것으로 미루어, 현재 대중적으로도 꽤나 알려진 부대인 듯 했다. 하기야 명예훈장 수훈자를 배출할 정도로 싸워온 부대라면 유명할 법도 하다. 두문자가 I(Iron)이니 연대 전체에선 아홉 번째 중대일 것이다. 앤이 설명한다. “2기병연대가 본토에서 재편성을 거친 뒤에는 명백한 해방 작전에 투입되었고……. 예의 그 핵공격으로 인해 보급체계가 마비된 시점에서, 연료가 바닥난 장갑차를 버리고 안전지역까지 117킬로미터를 걸어서 철수했어요. 1개 소대에 해당하는 병력을 수습하면서요. 이걸로 명예훈장 수훈이 확정되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1차적으로는 십자장을 받았다가 추후 상향조정이 결정된 경우지만요.” “이야기만 들어선 흠 잡을 곳이 없는 훌륭한 군인인데, 뭐가 문제에요?” “종교적 신념이요.” “…….” “그는 후기성도교회(LDS)……그러니까 모르몬교의 원리주의 분파를 믿는데, LDS 주류 교단에서는 예전부터 이단으로 취급하던 곳이에요. 우리 연방수사국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단체죠. 꽤나……공격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을 공유하는 집단이었거든요.” “공격적이라는 건 테러 단체였다는 뜻인가요?” “그럴 우려가 있었다, 정도가 맞겠네요. 종교단체들이 성서에서 언급된 재앙을 대비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여긴 요새화된 근거지와 사병집단까지 만들었어요. 내부적으로는 연방정부로부터 유타 주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돌더군요.” “……곤란한 사람들이네요.” 그러나 근거가 아예 없는 논리는 아니었다. 유타 주는 처음부터 후기성도교회가 개척한 땅이었는데, 연방정부와 전쟁까지 벌인 끝에 협상을 통해 미국에 흡수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당성은 딱 그 정도로 그쳤다. ‘일개 이단 분파가 후기성도교회 전체를 대변할 자격은 없지.’ 겨울의 시각으로는 또 다른 광신도들일 뿐이었다. 앤이 곤란하다는 말에 동의했다. “요즘은 교리에 따라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해야한다는 주장으로 교인과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는 중인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그들과 AOC, 그리고 CPC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생긴 것 같다는 거죠.” “AOC? CPC?” “아. 겨울은 남부의 골칫덩어리들을 잘 모르겠군요. AOC는 미국 성전 기사단, CPC는 그리스도의 민병대를 뜻해요.” “아…….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겨울에게 세례를 권했던 가톨릭 군종장교와의 대화에서 언급된 단체들이었다. 각종 혐오범죄의 온상으로서, 교황청이 대응에 애를 먹고 있다던가. 본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신을 찾을수록 비뚤어진 신앙이 되게 마련이다. 자신의 죄의식을 신에게 떠넘기는 탓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믿음이 성립한다고 봐야 한다. 진정한 종교와 거리가 멀다. 이런 사람들조차 사랑해주는 것이 전능자로서의 신이겠지만. 가슴 속 돌 구르는 소리가 심할 때면, 겨울에게도 가끔은 신적인 존재를 믿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한숨을 쉬는 앤. “그들의 협력관계를 우리는 불경스러운 연합(Blasphemous league)이라고 불러요.” 불경스러운 연합이라. 겨울은 내심 갸우뚱 했다. “교파가 다른데도 통하는 면이 있나 봐요?” “어디든 중국계에 대한 증오가 존재하거든요.” “…….” 앤이 중얼거렸다. 제너럴 양의 비디오가 발견될 때마다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하고. “엘즈워스 상사 자체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고 과격한 성향도 없어요. 하지만 믿음만은 아주 독실하죠. 애초에 목숨을 도외시한 용기 자체가 믿음에서 나왔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주요 감시대상이에요. 겨울도 주의해둘 필요가 있어요. 만약 그가 당신에게 접근한다면, 그 배경엔 외부에서 비롯된 어떤 안 좋은 목적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요컨대,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지 말라는 거죠?” 풋. 겨울의 농담에 실소를 터트리는 앤. 직후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다. “진지하게 말하는데 갑자기 농담을 하고 그래요.” “FBI가 주목하고 있다면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니잖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속아서 스스로 위험한 곳을 찾는다면 모를까.” “그래도 조심하란 말예요.” “알았어요. 걱정 안 하도록 행동할게요. 그보다, 그 밖에 다른 주의사항은 없어요?” 고민하던 앤이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엔 없네요. 명예훈장을 아무나 받는 건 아닌데다, 누구든 기본적인 감ㅅ……보호가 이루어지고 있는걸요. 비단 연방수사국만이 아니에요. 이번 행사의 보안은 국토안보부가 총괄하고 그 외의 다른 기관들이 협력하는 형식이라서요. 그저 내부에서의 테러를 주의할 따름이에요.” 창가에서 떨어진 겨울이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특별히 가까이할 사람을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요?” “글쎄요. 어차피 알아서 손해 볼 사람은 없는 만큼……원래 안면이 있던 사람들부터 더 친분을 쌓아두는 게 어때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교유가 넓어질 거예요.” “안면이 있던 사람?” 의아해하는 겨울에게, 나란히 앉은 앤이 가까운 어깨를 살짝 으쓱여보였다. “우선 75연대의 레이 에머트 대령이 있겠네요.” “아, 그분이…….” 에머트 대령은 산타 마가리타에서 만났던 레인저 중대장이다. ‘당시엔 대위였지.’ 위험을 무릅쓰고 샌프란시스코 인근까지 험프백을 추적했다더니,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은 모양이다. 그 결과 험프백의 능력이 밝혀진 거라면 명예훈장을 주고도 남을 법한 전공이었다. 방역전쟁의 전략 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테니까. 애당초 중대병력만 이끌고 오염지역을 수백 킬로미터씩 횡단한 것부터가 초인적인 업적이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땐 중령이더니, 그새 다시 대령으로 진급했다. 불과 1년 만에 대위에서 대령까지. 겨울만큼은 아니어도 무시무시한 진급속도였고, 그럴 만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다. 내년엔 별을 달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별 같은 사람들은 어두운 시대일수록 빛을 발한다. 어둠이 그 별빛을 삼킬 정도만 아니라면. 앤의 말이 이어졌다. “그 외에 동일 연대 수색대의 조지 팔머 대위, 육군특전대의 태너 롱 소령도 겨울과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요. 내가 본 기록이 맞다면 윈저(Windsor) 근교의 목장에서 잠시 합류했을 텐데, 기억해요?” “그럼요. 얼마 안 지난 일이잖아요.” 대답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짓는 앤. “가만 보면 겨울은 기억력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은 어지간해선 잘 안 잊거든요.” 이건 「암기」 보정 이전의 문제였다. 한 번 본 사람이면 이름은 가끔 잊더라도 그 인상만은 잊지 않는다. 그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팔머 대위는 전역해서 아내와 함께 목장을 꾸리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롱 소령은 딸이 자신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었고.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도 신기하네……. 아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겨울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납득했다. 프레벤티브 스캘핑은 그만큼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작전이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군을 구함과 동시에 적의 지휘체계를 파괴하는 임무였잖은가. “일단은 이 정도네요.” 앤이 소매를 젖혀 시계를 확인했다. “조찬까지 앞으로 30분 쯤 남았는데, 뭔가 하고 싶은 건 없나요?” 이제 막 도착한 영웅들이 첫 일정을 준비하기까지 주어진 여유.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나가봐야 앤이랑 이렇게 있지도 못하는데요.” 겨울이 창가에 서있을 때 앤이 거리를 두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찍힐 가능성이 있으니. 가까운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간 일단 경호 문제에서부터 잡음이 생길 것이었다. 앤은 기쁘면서도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말은 고맙지만, 나 때문에 갇혀있지 말아요. 당신은 개전 이래 지금껏 난민구역과 전선을 오갈 뿐이었잖아요. 그것도 가장 위험한 장소만 골라서……. 안전지역의 평화로운 일상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 여정에서 남는 시간이라면 1분, 1초가 아쉬울 것 같은데…….” “괜찮아요. 난 이렇게 있는 게 더 좋거든요.” “…….” 겨울은 말이 없어진 앤의 손을 잡고, 눈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지으며 30분을 보냈다. # 356 [356화] #화려한 초대 (8) 조찬에서 보게 된 라울 엘즈워스 상사는 의외로 유쾌한 인물이었다. 모두가 인류와 미국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할 때, 그는 곡선이 우아한 잔에 콜라를 담아 마셨다. 주변 사람들이 재미있어하자 그도 껄껄 웃었다. “무알콜 샴페인보다는 콜라가 낫지! 어차피 술을 못 마실 거라면!” 술이 약하다는 게 아니라 종교적 금기를 지킨다는 말이었다. 겨울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조용한 곁눈질로 그의 동태를 살폈다. 목소리가 커서 대화를 엿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슬쩍 바깥 방향을 돌아보면, 선글라스를 낀 앤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겨울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몸짓. ‘바로 접근하는 건 너무 노골적이고……. 자연스럽게 말을 섞어볼까.’ 장교는 장교끼리, 사병은 사병끼리. 당장은 그렇게 어울리고 있다. 장교인 겨울이 상사의 테이블로 곧장 직진하는 건 영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상사를 경계하라는 앤의 당부가 아예 접점을 만들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겨울이 주의 깊게 접촉해주면 감시하는 수사국 입장에선 고마울 일이다. 엘즈워스 상사 자체에겐 아직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위험한 종교를 믿고 있을 뿐 아직은 깨끗한 인물이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가기 전의 경유지 중엔 후기성도교회의 총본산인 솔트레이크 시티가 있었다. FBI는 바로 거기서 모종의 모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만약 겨울이 엘즈워스 상사와 친분을 만들어둔다면, 겨울의 화제성 때문에라도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 상사가 그 사실을 반드시 언급할 것이며, 이는 필시 이단 종파 내에서도 따로 구분되는 과격파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그들이 「불경스러운 연합」 차원에서 어떤 거국적인 계획을 품고 있을 경우, 엘즈워스 상사에게 접근을 시도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즉, 쿠데타에 준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겨울이 예상하기로, 빌미만 주어진다면, 증거를 조작하여 「불경스러운 연합」의 주요 간부 전원을 일거에 체포하는 그림도 그려질 법 했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어주더라도, 일단 가장 위험한 고비인 대선 전후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에서. 새로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겨울의 주의를 일깨웠다. “여기 주인 있는 자리인가?”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겨울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머트 대령님.” “기억하는군.” “어떻게 잊겠습니까?” 겨울의 반문에 대령이 흡족해했다. 그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직 못 들었는데…….” “당연히 앉으셔도 됩니다. 이쪽은 육군특전대의 태너 롱 소령, 그리고 75연대 수색대의 조지 팔머 대위입니다. 인사 나누십시오.” 먼저 합석해있던 둘을 소개해주는 겨울. “같은 연대 출신이 있으니 더욱 반갑군. 75연대의 레이 에머트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너 롱입니다.” “조지 팔머입니다. 대령님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편하게 보내는 시간인지라 서로 격식을 따지는 게 덜하다. 롱 소령은 짧게나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레인저를 조금 얕잡아보는 그린베레로서의 자부심이 원인일 것이었다. 세 사람의 유일한 공통분모로서, 겨울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어차피 다 실전을 경험한 군인들인지라 물꼬만 터주면 충분했다. 각자의 경험과 무용담만 늘어놓기 시작해도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완만해질 것이었다. 그런 목적에서, 몇 마디쯤 오고간 뒤에 겨울이 지난 일을 언급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혹시라도 뵐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대령님께서 험프백을 추적하느라 그 근처까지 오셨다는 정보를 접했었거든요.” “나름 비밀 작전이었는데, 어떻게?” “전 그때 CIA와 함께 움직였으니까요.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거 막 말해도 되나?” “이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에머트 대령이 재미있어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 라……. 귀관이 거물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 하긴, 산타 마리아에서 그렇게 날뛸 때부터 알아봤지. 죽지만 않는다면 크게 될 미치광이구나, 하고.” 대화의 내용에 롱 소령이 관심을 보였다. 험프백에서 한 번, 산타 마가리타에서 다시 한 번. 묻는 쪽은 산타 마가리타가 먼저였다. “Sir. 거기서 한 중령과 같이 계셨습니까?” “그랬지. 내가 작전 책임자였으니까.” “그거 진짜로 진짜였습니까? 그러니까, 그 뭐냐, 편집의 마술 같은 거 아닙니까? 그날의 교전 영상 말입니다.” 직설적인 질문에서 성격이 나온다. 당사자인 겨울이 있는데도 삼가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딱히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의구심이었으되, 에머트 대령은 슬쩍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질문 참 여러 번 받는군.” “당연히 궁금한 사람이 많겠지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으면 하네만.” “제가 그린베레 아닙니까.” “……하여튼.” 대령이 넌더리를 내며 답변했다. “맹세컨대 꾸밈없는 진실이다. 그저 그 난리를 치고도……한 중령 같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구해낸 게 인간쓰레기 몇 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울 따름이지.” 짜증을 내는 듯한 목소리는, 그러나 겨울이 듣기엔 일부러 키워 말하는 느낌이었다. 겨울만 다른 테이블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다. 이쪽 테이블은 주변의 듣는 귀가 많았다. 에머트가 시선을 겨울에게로 돌렸다. “귀관도 피곤하겠어. 이런 의심을 꾸준히 받을 테니 말이야.” “괜찮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다 그린베레 같지는 않아서요.”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치니 두 레인저와 그린베레 모두가 실소를 터트린다. 샴페인을 쭉 들이킨 롱 소령은 낮은 도수가 영 성에 안 차는 눈치였다. 허나 이후의 일정이 있는 만큼, 오전에 독한 술을 내어줄 리가 없다. 이 문제를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했다. 종업원이 들고 다니는 샴페인 잔들을 쟁반 째로 빼앗은 것이다. 종업원이 당황하든 말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에머트 대령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따가 총질도 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취하고서 망신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보지?” “망신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다고 줄 훈장을 안 주지도 않을 텐데.” “……아주 시원시원하군.” “걱정 마십쇼. 무슨 계집애도 아니고, 샴페인 따위에 취할 일은 없습니다. 그보다, 험프백을 직접 족치셨다면 그놈에 대해 뭔가 더 아는 게 있으십니까?” 역시 많이 들어본 질문이었던지, 대령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언제는 사령부가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주던가? 난 놈의 혈액과 분비액의 샘플을 확보했을 뿐이야. 연구결과에 대해 특별히 전달받은 건 없어. 그렇다고는 해도, 놈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들 짐작 가는 바가 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을 여기 셋만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뭘 풀든 답안지를 확인하기 전까진 찝찝해하는 성격인지라.” “너무 일관성이 없잖나…….”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요.” 겨울이 에머트에게 물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거의 다 쉬었지. 손실이 하도 크다보니,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임무도 다른 곳으로 가더군. 좀 해괴하고 귀찮은 명령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야.” “해괴한 명령……인가요?” “이틀 전이었지. 갑자기 트릭스터를 찾아서 생포해오라는 지시가 내려오지 않겠나? 그것도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알파 트릭스터를 말이야. 보나마나 연구용이겠지만, 트릭스터 생포가 어디 쉬운 일인가? 수틀리면 자폭하거나 자살하는 놈들인데. 자살은 귀관도 한 번 봤지?” 끄덕이는 겨울. 대령은 새크라멘토의 교전기록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겨울이 트릭스터의 자살을 본 건 두 번이지만, 피쿼드 호의 블랙 사이트, 비밀갑판에서 자신의 목 줄기를 잡아 뜯은 트릭스터에 대한 자료는 문서로만 남아있는 기밀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알파 트릭스터를 찾을 이유가 있을까?’ 알파. 강화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의 트릭스터. 현재 남미지역에선 전보다 출력이 높은 전파 발생이 관측된다고 들었다. EMP를 터트리고도 살아남은 트릭스터에 대한 목격정보도 있었다. 등급을 분류하자면 델타 혹은 엡실론쯤 될 것이다. 잡는다면 이런 놈들을 잡아야 할 텐데. 한 번 터트린 후 회복하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회복되기까지 육체적인 기능은 얼마나 발휘되는지, 통제능력을 발휘할 순 있는지 등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겨울의 고민은 여기에 에스더가 관련되어있으리라는 「통찰」 탓이었다. 그러나 같은 보정이 어째서? 라는 의문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시스템적으로 재해석된 ‘막연한 예감’인 셈. 즉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통찰」이……. 그저 시기가 비슷해서인가?’ 착각에 지나지 않을 공산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속내엔 미련이 남는다. 「통찰」의 등급이 전보다 훨씬 높기도 했다. 에머트 대령의 질문이 천착하는 겨울을 현실로 끌어냈다. “표정이 좋지 않군. 뭔가 아는 게 있는가?” “……아닙니다. 그냥 안 좋은 기억이 하나 떠올라서.” “흠.” 대령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그럴 만한 시대가 못 되었다. “아, 참. 이거 받으십시오.” 듣고만 있던 팔머 대위가 둘러앉은 이들에게 명함 같은 것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받아든 롱 소령이 앞뒤로 뒤집어보더니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이게 뭐야? 아그네스 농장?” “안사람의 이름이 아그네스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는데요. 나중에 네시…아내와 함께 농장이나 하나 꾸리며 사는 게 꿈이라고요. 전역하려면 멀었지만, 그녀가 상상하던 풍경 그대로의 농장 매물을 찾았다기에 바로 사라고 했습니다.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충분하더군요. 한 번에 인출하기가 곤란해서 일부는 전시채권으로 인수했고요. 거기 주소가 적혀 있으니 훗날 시간 나면 언제든 놀러 오십시오.” 그러자 롱 소령은 떫은 얼굴이 되었다. “허……. 너 임마, 그러다 훅 간다.” “예?” “보통 영화 같은 거 보면 너랑 비슷한 대사 치는 놈들이 가장 먼저 죽잖아. 거 왜 고향으로 돌아가면 결혼할 거라든가, 곧 뒤따라 갈 테니까 먼저 가라든가, 나는 아직 살아있다구 이 니기미 씨부럴 놈들아! 같은 소릴 지껄이는 순둥이들 말이야.” 팔머는 롱 소령의 악담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로 드신 사람은 끝까지 안 죽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딱히 순둥이도 아니고요.” “어쨌든 불길한 건 피하라는 거지. 거 왜 해병대 애들이 사탕 싫어하는 것처럼.” “그건 해병대가 나약해서 그렇습니다. 고작 미신 따위가 레인저를 죽일 순 없지요. 그 반대라면 또 몰라도.” 언행이 점잖을지언정 레인저는 결국 레인저였다. 롱 소령은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표면적으로는 해병대를 언급했어도, 팔머 대위가 실제로 겨냥한 건 미신을 직접 언급한 롱 소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발 앞서 반응한 이들이 있었다. 하필 이 말을 듣고 있던 해병 무리였다. “Sir.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겨울은 그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1년 만에 귀환했다던…….’ 변종 천국이 된 일본에서 주일 미 대사관 사람들과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며 살아남은 끝에, 버려져있던 여객기를 확보하여 1년 만에 본토로 귀환한 기적의 주인공들. 그러므로 그들은 부대 내 생존자 전원이 최소 수훈십자장, 최대 명예훈장을 받게 됐다. 미국의 역사에서 단일 부대가 이렇게 많은 명예훈장 수훈자를 배출한 건 처음일 것이었다. 악과 깡의 결정체 같은 이들이라 다른 부대의 상급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는다. 팔머 대위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곧 태연하게 대꾸했다. “미신 따위가 레인저를 죽일 순 없다고 했지.” “그 앞에 말입니다.” “아, 해병대가 나약하다는 거?” “…….” 이 사람이 왜 이러지. 바라보던 겨울은 팔머를 향한 에머트 대령의 눈짓을 알아차렸다. 대령이 중재하듯이 나섰다. “분위기가 안 좋군. 괜히 싸우지들 말고, 누가 강한지 직접 시험해보면 될 것 아닌가.” 같은 레인저라지만 명색이 대령이다. 해병들이 불퉁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흠……. 팔씨름은 어떨까?” 반응이 엇갈렸다. 해병들은 이게 뭔 유치한 장난인가 하는 얼굴들. 그러나 주변은 온통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물든다. 그러나. “왜, 자신 없나?” 대령의 이 뻔하고 간단한 도발이 해병들을 격분케 했다. “아닙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럼 대위는?” “싸움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팔머의 태연함에 해병들의 투지가 치솟는다.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무언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팔머 대위는 처음부터 일부러 져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말 일부러 진 것인지, 진짜로 힘에 밀려서 진 것인지를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애초부터 만만찮은 상대였으므로. 아무튼 승리는 해병대 챔피언의 몫이었다. 팽팽한 힘겨루기 끝에 승리를 쟁취한 해병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전우들을 향하여 포효했다. “US marine! US marine! Oo-rah!” “Oo-rah!” 우-라! 우-라! 해병 전우들의 화답이 실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이후의 흐름도 기묘했다. 에머트 대령은 아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판을 키워놓았다. 덕분에 품격 있는 조찬 행사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같은 자리에 초대받은 지역 명사들은 구경꾼의 역할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귀관은 지지 마라.” 대령이 겨울에게 조용히 건넨 한 마디였다. 같은 질문 받기가 지긋지긋하다더니, 결국 다 계획된 것이었다. 당연히 대령의 배려이기도 했다. 물론 주워 먹기는 겨울의 능력 나름. 망신을 당해도 겨울의 책임이다. 덕분에 겨울은 몇 사람을 누르고서 라울 엘즈워스 상사와도 한 판 붙었다. 어떻게 거리를 좁힐까 고민하던 참에 잘 된 일이었다. 아슬아슬하도록 보이게끔 이긴 뒤에, 겨울은 짐짓 감탄한 양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힘이 대단하네요, 상사.” “지고 나서 듣기는 민망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겨울과 악수를 나누었다. 합석하고서 대화를 나눠본 결과, 겨울은 엘즈워스 상사의 종교적 열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제게 사람들을 구할 소명과 능력과 기회를 주셨으니, 그 거룩하신 뜻을 행하는 제게 어떤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들 저더러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치켜세우곤 합니다만……틀렸습니다. 제가 구한 사람들은 곧 주님께서 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내야 할 것은 오직 높으신 주님의 이름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선이고 죽이는 것이 악이라면, 상사는 분명 선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그로 인해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상사의 선함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곱씹어보면, 바람직한 종교는 일정 수준의 선함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겨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그것이 물 밖으로 치는 헤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면 볼수록……. 좀, 우울하네.’ 순수한 신앙으로부터 거듭 에스더를 연상하는 겨울이었다. 전능하고 자애로운 절대자가 정말로 존재하여, 그의 보살핌 아래 행복하기만 하다면, 사람이 굳이 물 밖으로 헤엄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한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적 존재가 실제로 있다는 전제 하에서. 여하간 이런 성향 덕분에 상사 가까이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헌신과 업적엔 경의를 표하되, 매양 종교적으로 흐르는 대화를 감당하기는 벅찼던 모양.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가 가장 명예로운 전공으로 빛나는 거인들이다. 따라서 차분히 오래 들어주는 겨울이 상사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기꺼운 듯 했다. # 357 [357화] #화려한 초대 (9) 엘즈워스 상사와 이야기를 끝낸 뒤에도 겨울에겐 혼자 있을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명사들뿐만 아니라 명예훈장 수훈자들 또한 겨울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호승심, 흥미, 호감, 경의, 그리고 개인적인 타산 및 합리적인 의심 등. 교차하는 접근들 사이에서 겨울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경험과 생각과 걱정거리들을 들었다. 작게는 개인사로부터 크게는 방역전쟁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인적자원의 고갈도 그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하여 육군 항공대 최고의 헬기 조종사들, 통칭 「나이트 스토커」 연대 소속 수훈자 둘이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했다. “큰일이야. 부대는 계속 소모되는데 보충이 되질 않아.” “그렇다고 코스를 갓 졸업한 초짜들을 데려올 순 없잖습니까. 바지에 똥오줌도 안 싸본 애송이들에게 그날 밤 같은 곡예비행을 시켰다간 아까운 헬기만 줄줄이 꼴아 박고 말 겁니다.” “뭐, 우리가 주 방위군은 아니지.” 여기서 말하는 ‘그날 밤’이란 양용빈 상장의 핵공격 이후 이루어진 야간 구조작전을 의미했다. 이들은 걸어 다니는 레이더, 즉 트릭스터의 관측을 피하고자 지면에 달라붙는 수준의 고속비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산간의 지형 굴곡에 의지해 소음과 비행경로를 은폐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좋았으나, 자칫 사고로 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던 치명적인 곡예였다. 그런 비행을 하룻밤 사이에 열 번 이상 반복했다고 하니 과연 명예훈장을 받을 법한 공로였다. ‘그래도 특수부대라서 EMP 내성은 확실하게 갖췄었나보네……. 아니었으면 계곡에 숨은 트릭스터 하나만 터져도 위험했을 텐데.’ 겨울은 오래된 숲, 세쿼이아가 울창했던 국립공원의 전투를 회상했다. 거기서 겨울의 기병대를 지원한 아파치 공격헬기 편대, 호출부호 해머 폴은 트릭스터의 EMP에 대하여 뛰어난 방어력을 과시했었다. 이후 육군에도 개선된 장비들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몰려서서 듣던 수훈자들이 파일럿들의 대화에 공감했다. 영 비리비리한 놈들이 많아져서 못써먹겠다, 좌표를 제대로 못 보는 소대장이 있더라, 공군의 오인폭격도 눈에 띄게 늘었다 등등. 흐름이 이렇게 되니 공보처에서 파견한 장교들이 은밀하게 끼어들었다. “곤란합니다. 이 자리에 군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 민간인 유력자들도 있고 방송사에서 파견한 기자들도 있다. 선을 넘을 뻔 한 영웅들이 멋쩍음을 감추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쏟아낼 무용담은 얼마든지 많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해병 하사가 입담 좋게 떠들었다. “살아남은 좀비새끼들이 막 달려드는데, 하필이면 그때 쿠킹 오프(Cooking off)가 터진 겁니다. 와, 씨발……. 결정적인 순간 총이 지 혼자 지랄발광을 떨면서 탄창을 싹 비워버리니 머릿속도 하얗게 비워지더군요.” 쿠킹 오프란 과열로 인한 기능고장의 하나다. 약실이 달아오른 탓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도 탄약이 줄줄이 격발되는 현상. 기후가 덥고 습한 일본에서는 더욱 발생하기 쉬웠을 것이다. 일본을 탈출하던 날에 대한 증언이었으므로, 흥미진진하게 듣던 누군가가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남으셨소?” “개머리판으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해서 두 놈을 죽였죠. 나머지는 여기 이 친구가 지원사격으로 해결했고요. 그러다가 내 어깨에도 구멍을 내버렸지만.” 지목당한 해병이 불퉁거린다. “결과적으로 살았으면 된 거 아닙니까. 고맙다고는 못하실망정.” “그래! 고맙다 이 새끼야! 진짜 고마워! 근데 니가 사격 못하는 건 사실이잖아!” “아, 쫌!” 사족이 붙은 감사의 말과 억울한 반응이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무수한 생사의 고비를 더불어 넘어와서 그런지 관계가 무척 친밀해보였다. 어느 장교가 덧붙였다. “과열이 확실히 문제는 문제야. 특히 겁 많고 경험 적은 신병들에겐 더더욱 그래. 전투의 양상이 예전과 다르다보니……. 그렇다고 변종들을 상대하는 싸움에서 소총의 연사기능을 제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번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동조하는 다른 의견들이 이어지진 않았다. 공보처 장교들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들을 지어보인 까닭이었다. 무기체계에 대한 불만 또한 군의 신뢰도를 깎아먹는 요소. 하물며 그 불만이 영웅들의 중대에서 제기된다면 한층 더 그러하다. 겨울도 동의했다. 장교의 말처럼, 예전, 즉 사람과 싸우던 시절에 비교해 전투의 양상이 판이하도록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변종들의 공세는 이쪽을 압도하는 숫자가 기본이니까.’ 게다가 그 숫자로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던가. 인간 이상의 내구성과 인간 이상의 속도. 여기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두려움은, 싸움에 임하는 병사들의 감각을 왜곡시킨다. 체감 상 적아의 거리가 실제보다 짧게 느껴지는 것. 그러므로 그들은 정신없이 연사를 긁어댄다. 헌데 제식 소총(M4)의 단점 중 하나가 빠른 과열이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탈레반의 야습에 대응하다가 총열이 터져 낭패를 겪을 뻔했던 사례가 존재했다. 은엄폐를 반복하며 쏘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짧고 격렬하기 마련인 변종들과의 교전에선 훨씬 더 위험성이 높았다. 해병 하사가 언급한 쿠킹 오프도 마찬가지. 이건 주로 장탄수가 많은 지원화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지만, 소총이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특히 소음기를 결합해 사용한다면 말이지.’ 전투 중의 겨울이 병사들의 총기상태에 괜히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니었다. 에머트 대령이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D.C에서 열린다는 무기박람회가 기대되는군.” 겨울도 향후의 일정에 관련하여 통보받은 사항이다. “육군협회(AUSA)가 주관하는 방역전쟁 엑스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수훈식 다음에 둘러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하던데, 귀관도 참석하나?” “예. 물론입니다.” “거기서 뭔가 개선된 물건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개인화기든, 전차든, 장갑차든……. 전선이 안정화된 만큼 주구장창 험비만 찍어낼 필요는 없을 테니. 슬슬 생산라인을 변경할 여유가 생기겠지.” 육군협회 엑스포는 모겔론스 이전부터 신무기 전시회에 가까운 행사였다. 이에 관련해서 이미 겨울에게 명함을 건넨 군수회사 관계자도 있었다. 비록 공식적인 권한은 없을지언정, 유명한 전쟁영웅이 자사의 제품을 높게 평가해줄 경우 실제로 채택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인 까닭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무기회사가 종종 시민들을 상대로 광고를 내기도 한다. 조찬이 무르익을 즈음, 겨울은 많은 사진을 찍고 많은 악수를 나누고 그보다 더 많은 유혹을 받았다. 그 유혹들은 개인적인 것과 공식적인 것으로 나누어졌다. “5천만 달러요?” 겨울이 사뭇 놀랍다는 듯이 반응하자, 민간군사업체(PMC)의 중역이라는 자가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계약금만 5천만 달러입니다. 추후 전역, 혹은 퇴역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 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에서 3년간 재직하겠다는 내용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주신다면, 한 중령님의 계좌에 당장이라도 5천만 달러가 입금될 것입니다.” 중역은 거듭 5천만 달러라는 액수를 강조했다. ‘내가 거절할 거라고 확신하고 지르는 제안인가?’ 겨울로선 이런 의혹을 품는 게 당연했다. 귀를 막고 살지 않는 한, 군사업체의 중역쯤 되면 겨울의 성향과 정치적 장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을 텐데…….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라면 벌써 성공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이런 제목의 기사가 뜰 것이다. 한겨울 중령, PMC로부터 거액의 계약을 제안 받다. 큰 금액일수록 화제가 될 가능성도 높았다. “그 전에 내가 전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겨울의 질문에 중역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한다. “그럼 뭐, 기부한 셈 치지요.” “…….” “하하. 너무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는 느낌이지만……. 그땐 조금 비싼 광고비를 지출한 셈 치면 됩니다. 우리 회사는 항상 최고의 고객들과 거래하지요. 그리고 당신처럼 신의 사랑을 받는 분께서 쉽게 전사하실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신의 사랑이라니…….” “죽을 뻔한 순간을 몇 번이나 극복하지 않으셨습니까? 행운도 실력입니다.” “…….” “구미가 별로 안 당긴다는 표정이시군요.” “솔직히 그렇네요. 언제가 될지 막연하기도 하고요.” “흠. 하기야 2백 3십만 달러를 쾌척하신 분이니…….” 2백 3십만 달러는 겨울이 국방성금으로 내놓은 선물 매각금을 뜻했다. 본래는 그보다 많았으나, 중개업체의 수수료와 기타 제반비용을 제하고 남은 것이 그 정도 되었다. 말끝을 흐렸던 중역은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십시오. 당신의 앞날을 감안하더라도 의외로 괜찮은 경력이 될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회사는 최고의 고객들과 거래하거든요. 그 인맥과 경험을 토대로 중령님 본인이 창업을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난민들의 일자리도 마련해주고, 이쪽 업계에서 그들의 처우도 보장해주는……. 이야, 이거 정말 괜찮군요.” 스스로 감탄하는 그의 모습에, 이번에야말로 겨울은 의혹을 감추지 않았다. “세상에 설마 경쟁업체가 등장하길 바라는 회사가 있을까 싶네요.” “이런.” 군사기업의 중역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귀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쪽 사업은 결국 거쳐 가는 관문에 불과하겠지요. 우리는 몇 년 만 견디면 됩니다. 보통 계약 기간이 그 정도 되기도 하고요.” 거쳐 가는 관문이라는 말에서, 겨울은 무슨 맥락인지 이해했다. 돈이든 인맥이든 회사를 경영한 경험이든, 정계에 입문할 밑천을 마련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공직자가 사기업의 수장을 겸하지 못하는 건 사실. 허나 겨울이 빠진다고 해서 이미 세워진 회사가 그냥 없어지진 않을 터였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지.’ 겨울은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 “연락처를 남기시면 생각해보고 전화 드리죠.” “그렇게 하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중역이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USS 바이스 프레지던트, 클리퍼드 돈 로빈슨. 한국의 직급으로 비유하자면 상무쯤 되는 사람이다. 조찬이 끝난 다음, 영웅들의 중대는 도시의 주요 관광지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물론 짐작했던 대로 단순한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헬기를 타고 도시 전경을 둘러보며, 겨울은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굉장히 인상적인 장벽이네요. 시가지 내 안전대책도 확실하게 마련되어 있고……. 감염 관련해서는 사고가 터지기 어렵겠어요.” 사고가 터지기 어렵다. 지역 유지들이 원했던 게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전엔 방역전선 투어도 있었다고 했죠?” 이건 진짜 겨울의 질문이다. 가이드가 끄덕였다. “예! 경비행기를 타고 서쪽이나 남쪽으로 쭉 날아가서 구경 좀 하다 돌아오는 거지요. 안전지역 상공을 벗어나진 못해도 꽤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귀신의 집이랑 비슷한 상품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걸 원하시는 분들 덕분에 그동안 굶어죽지 않았지요. 여성분들은 대체로 만족하셨지만, 남성분들은 많이들 실망하시더군요. 하하하!” 헤드셋에 대고 시원하게 웃는 가이드는 민간인임에도 전투복과 흡사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든 생존주의적인 요소가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디지털 위장 패턴이 들어간 미니스커트가 출시되기도 했다. 도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돈 헬기는 이윽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 왔군요. 잠깐이나마 모시게 되어 기뻤습니다.” 겨울은 가이드에게 작별을 고했다. 돌아가는 길엔 헬기를 타지 않는다. “엑셀!” 프리시안 품종의 검은 준마는 겨울의 냄새를 맡고 극도로 흥분했다. 고삐를 붙잡고 있던 사람을 뿌리치고 달려오더니, 소변을 흘리며 펄쩍펄쩍 주변을 뛰어다닌다. 기병행진을 위해 먼저 도착해있던 이들이 각자 자신의 말을 몰아왔다. 곤란해하는 겨울을 보고 에머트 대령이 웃는다. “신기한데? 말이 무슨 개처럼 구는군.” 하긴, 보통 주인은 아닌가. 라는 중얼거림. 동물도 생사고락을 함께한 주인에겐 좀 더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고. # 358 [358화] #화려한 초대 (9) 말은 애초에 배변통제가 안 되는 동물이었다. 다만 이처럼 주인에게 격한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드물 뿐. 겨울은 엑셀이 진정하고 나서야 겨우 다가가 목덜미를 긁어줄 수 있었다. 털이 부드럽고 말 특유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그동안 좋은 보살핌을 받아온 듯 했다. 겨울이 안장에 오르니, 고삐를 놓쳤던 관리인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죄, 죄송합니다.” “됐어요. 누가 다친 것도 아니고.” 겨울은 잔뜩 주눅이 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누엘 헤이스, 맞죠?” “예에……. 저 같은 걸 기억하시는군요.” 전에 보았을 때보다 곱슬머리가 길어진 그는, 종교적 휴양지를 겸하는 러시안 강 유역의 목장에서 만났던 죄수였다. 다른 관리인들과 달리 지금도 죄수복을 입고 있다. ‘구경거리인가.’ 말하자면 겨울의 행적을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일 터였다. 공개된 정보에 한하여, 시민들은 겨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선 당사자인 겨울보다 더 잘 아는 부분도 있을 정도. 통과하거나 머물렀던 장소 및 환경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라든가, 함께했던 사람들의 회고와 평가, 언제 찍혔는지 모를 사진 등. 심지어 손자 주겠다고 만화책에 사인을 받아간 민간인 파일럿, 루크 노인의 인터뷰까지 돌아다녔다. 죄수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됐다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죄송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겨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뭐죠?” “중령님의 말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그……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맥락이 부족하여 이해하기 곤란했다. 겨울은 한참 캐묻고 나서야 헤이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올레마에서 마주친 기병수색대는 금빛의 명마를 타고 있었고, 그 품종이 겨울에게도 주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던가. 나라를 버린 중앙아시아의 대통령이 미국의 전쟁영웅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그러니까,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께서 선물하신 말이 죽었다는 거죠?” “예에…….” “흠.” 딱히 상관은 없는데, 라고 할 뻔했던 겨울이 카메라를 의식하여 말을 삼켰다. 국민의 대피보다 희귀품종의 명마 보존을 우선시한 인간 말종이라지만, 그의 성의를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이 전파를 탔다간 귀찮은 후환이 돌아올지 몰랐다. ‘명마보다 우선한 것이 중앙은행의 달러와 금괴였다는 소문도 돌고.’ 즉 인간쓰레기일지언정 굉장히 돈이 많은 인간쓰레기였다. 투자 같은 걸 염두에 두는 게 아니다. 겨울은 그 자금이 엉뚱한 방식으로 폭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풍부한 자금은 불온한 불씨를 키우는 장작이 되기 쉽기에. 곱씹어보건대, 이제까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잠재적 위험요소였다. 도무지 상식적이지 못한 이들이 쥐고 있을 막대한 자금들. 그것이 불순한 정치세력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예의 그 불경스러운 연합이라든가. 고로 그런 인간들은 현 정권에 친화적인 입장으로 남아있는 편이 좋겠다. 한편으로는 FBI가 참 버겁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서 유입된 불투명한 도피자금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경계할 대상도 많고 범위도 넓어 기존의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렵겠다. 한때 해체설까지 나돌았던 CIA가 무난히 조직을 유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었다. 무작정 조직을 통합해봤자 불협화음과 알력다툼이 심해질 따름이다. ‘알고도 놓치는 경우만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불안요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겨울은 무난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유감이네요. 어쩌다가 죽었어요?” 곱슬머리 죄수, 마누엘 헤이스는 손가락으로 엑셀을 가리켰다. “이, 이 녀석이……뒷발차기 한 방에…….” “서열다툼?” “예에, 그겁니다. 서열다툼.” “…….”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엑셀은 연신 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람으로 치면 만족감과 안도감의 표현이었다. 오랫동안 변종집단에 쫓겨 다닌 기억이 있는 이 녀석의 입장에서, 겨울을 태웠을 땐 뭔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마 이런 일로 악감정을 품진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겨울의 심중엔 약간의 우려가 남았다. 그 독재자는 듣는 것만으로도 워낙에 비상식적인 인간인지라 혹시나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사고 자체는 충분히 있을 법 했다. 말의 발차기는 때로 10센티 두께의 목판을 박살내고, 얇은 철판을 찢어발길 만큼 강하다. 서열다툼 중엔 한 뼘이 넘는 깊이의 열상(裂傷)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품종의 명마를 한 방에 보내버린 엑셀은 평범한 경우가 아니었지만. 겨울이 흑마의 목덜미를 긁는다. “좀 살살 때리지 그랬니.” 푸르륵. 엑셀이 다시금 기운차게 투레질했다. “죄송합니다, Sir…….” 또 사과하는 헤이스를 향해 겨울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쯤이면 됐네요.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요.” “그래도……그 말의 값어치가 자그마치 60만 달러라고 하던데…….” “그만. 선물 받은 거긴 해도 내 소유의 말이 죽은 거고, 내가 책임을 묻지 않겠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어차피 물어낼 능력도 없잖아요?” 죄수의 안색이 살짝 질린다. 물어내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던 모양. “당신 형기를 늘려봐야 나한테 좋을 것도 없네요. 선물을 주신 분께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양해를 구할 기회가 있겠죠. 그러니 이제 그만해요.” 뒤쪽은 카메라를 의식한 말이다. 죄수 헤이스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마워했다. 지금 이 행사는 도시 근교의 안전을 과시하는 것이다. 허나 후버 댐으로 말을 달리게 된 영웅들의 숫자는 채 스물을 넘지 못했다. 말을 타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던 까닭. 그들은 먼저 후버 댐을 둘러보고 있었다. 롱 소령은 겨울의 「승마」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말을 다루는 예외적인 소수였다. 소속부대인 그린베레가 과거 중동의 전장에서 기병으로 활약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해당 작전의 당사자는 아니었으되, 부대 특성 상 또 언제 그런 작전을 경험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승마기술을 착실하게 단련해두었다고. 무엇보다 전직이 카우보이였다. 기량을 뽐내느라 다른 일행과 거리를 벌린 소령이 겨울에게 가까워졌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뭐죠?” “처음 보는 놈들이 밑도 끝도 없이 뭔가를 주겠다고 할 땐 보통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뭐, 경험자의 조언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경험자의 조언?” “예. 사실 아까 조찬회장에서부터 다양하게 찌질거리는 잡놈들이 접근하더군요. 같이 사업을 하자는 둥, 선물을 주겠다는 둥. FBI와 공보처가 한 번 거르고도 그 지경이던데, 신원이 확실하더라도 그냥 받아두기가 영 찜찜해서 말입니다.” “…….” “심란하던 참에 아까 그 죄수랑 나누시는 대화를 듣고……아,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닙니다. 아무튼 그걸 듣고, 이런 경험은 당신께서 더 많이 하셨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대개 어떤 식으로 대응하시는지를.” 잠시 생각을 정리한 겨울이 대답했다. “웬만하면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스스로를 망치지 않을 한도 내에서는요.” 소령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십니까?” “나도 충고를 받은 거예요. 나중에 다소 문제가 되더라도, 미리 걱정해서 전부 다 쳐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두 사람이었는데, 누구인지는 들어도 의미가 없을 걸요?” 래플린 준장과 강영순 노인. 어느 쪽이든 롱 소령은 모르는 사람이다. 겨울이 회상했다. “우선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래도 되나 싶더라도, 어지간한 선물은 준다고 할 때 받아 놔라. 귀관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한철의 유행이자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지 모른다. 과거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이오지마의 영웅들이 그 예다. 말년의 그들은 형편이 좋지 않았고, 심지어 길가에서 객사한 사람마저 있다. 세상의 관심이란 그토록 변덕스러운 것이다…….」” 이는 사려 깊은 조언인 동시에 겨울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측이기도 했다. 이오지마의 영웅들 중 길가에서 객사한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인 아이라 헤이즈였다. 난민 출신인 겨울과는 비슷한 면이 존재한다. 래플린 준장도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이고. 롱 소령이 무척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객사? 누가 제 앞에서 그런 악담을 했으면 한 대 칠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정작 본인은 팔머 대위에게 그딴 대사 치다간 일찌감치 죽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했으면서. 쓰게 웃는 겨울의 모습에 아랑곳 않고 롱 소령이 다시 묻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귐이 깊지 않은 이들의 호의란 흥겨운 술자리에서의 취기와 같다. 취기에 한 행동은 정신 차린 다음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법이다.」라고요. 상대에 따라 적당히 이용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겠죠.” “흐음…….” 소령이 턱을 쓰다듬는다. 강영순 노인의 충고는 짧으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넙죽넙죽 받다간 스스로 망가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떻게 보면 여기서 더 망가질 것도 없겠군요. 혼자 살다가 혼자 죽을 인생, 자식을 또 볼 것도 아니고.” “왜요. 이번에 한 번 초대해보지. 설마 연락도 안 해봤어요?” 워싱턴 D.C에서의 행사엔 가족초청이 기본이었다. 소령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새살림 차린 여편네에 애비 이름 찍찍 불러 싸는 계집애한테 연락은 무슨 연락입니까. 오고 싶으면 오겠지요. 초청장은 받았을 테니.” “…….” 어쩐지 얼룩이 있는 말이었으되, 겨울은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충고는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할 터이므로. 변전소를 지나 목적지에 도달한 기병대는 콜로라도 강을 틀어막은 거대한 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미국이 회복한 미국의 역사였다. 행진은 거기서 다시 라스베이거스를 향했다. 세찬 빗소리 같은 갈채와 환호는 여전했고, 나체의 남자가 행진대열을 가로막고 뛰어다니다가 통제요원들에게 붙잡혔으며, 일부 단체는 자신들의 구호가 적힌 피켓이 카메라에 노출되도록, 혹은 겨울이 보게끔 유도하느라 애쓰기도 했다. 그 구호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이러했다. 「영국 여왕은 우리의 영웅을 도둑질하지 마라.」 겨울 단독으로 소화한 일정, 호손 시의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본 문구였다. 숙소로 복귀한 뒤, 겨울은 앤에게 그 뜻을 물었다. “아아, 그건…….” 앤이 미간을 좁혔다. “좀……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에요.” “무슨 말이에요?” “영국 여왕이 당신을 비롯한 명예훈장 수훈자 일부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한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그쪽 내각에서 꽤 진지하게 논의되는 중이라고 해요.” 당혹감을 느끼는 겨울. “영국에서 왜 나한테 작위를 주는데요?” “민주당 대선후보의 공약 가운데 가장 핵심이 뭔지는 알죠?” “인류 합중국 수립이요?” “네. 그거요.” 이것만으로도 겨울은 대충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지는 앤의 설명이 겨울의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겨울은 영국의 안보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죠. 그런데도 당신에게 작위를 수여하겠다는 건, 방역전쟁이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문제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것……. 즉, 민주당 번스 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를 표명하는 상징적인 행위인 거죠.” “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네요.” 겨울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영국은 캐나다의 영연방 탈퇴에 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들었는데, 인류 합중국 계획에 찬성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말이 인류 합중국이지, 결과적으론 영국이 미국에 흡수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영국 정부 내에서도 찬반이 갈린다고는 해요. 다만…….” “다만?” “미국 우선의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공화당의 크레이머보다는 차라리 번스 후보가 낫다는 거겠죠. 그리고 인류 합중국 계획이 끝까지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당장 공화당부터 어깃장을 놓을 것이다. 지금은 번스 후보를 편드는 영국 정부가 그때 가선 반대편에서 로비를 펼칠 수도 있겠고. 예측이라기보단 차라리 예언에 가깝겠다. 그런데 앤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한국 정부도 같은 일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어요.” “무슨 소리에요?” “워싱턴에 한국 대통령이 와있거든요. 사실 겨울의 시간을 사기도 했죠.” 시간을 샀다는 건 국방성금을 기부하고 겨울의 일정 일부를 할당받았다는 뜻이었다. 대개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 등 자신의 이미지 형성을 위한 광고비로 수백만 달러를 아까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겨울과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슈퍼볼 광고 30초에 5백만 달러의 값을 매기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대체 한국 정부가 무슨 돈이 있어서 겨울의 시간을 샀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게 이걸 경고한 것이었나?’ 겨울이 떠올리는 건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탈튼 브래넌과의 저녁식사였다. 그는 당적을 공화당에 두고 있다. 식전에 대선주자들이 나오는 방송을 틀어두었던 것부터가 다소 의도적인 게 아니었나 싶더니…….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브래넌은 자신의 제안이 유효하기 위해선 겨울이 신중하게 처신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일 터이다. 어쩐지 너무 형편 좋은 제안이다 했다. 물론 이런 속내를 직설적으로 털어놓을 순 없었을 것이다. 추후 겨울을 협박했다는 식으로 논란이 될 소지가 있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나눈 대화가 녹음되어 있진 않을까? 겨울이 여론 몰이를 시도할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로서.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겨울이 끄덕였다.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뭔가요?” “아까 호손 시민들을 만날 때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더라고요. 해골무늬를 넣은 까만 옷에 하얗게 「Prince of doom」이라고 적혀있던데, 이것도 무슨 종교적인 단체의 상징인가요? 경호팀에서 막지 않은 걸 보면 과격단체는 아닌 모양이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불경스러운 연합, 혹은 그에 준하는 과격단체의 일원들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앤은 겨울의 질문을 다 듣기도 전에 웃음을 터트렸다. “또 뭘까 하고 긴장했더니,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어떡해요.” “갑자기 치고 들어오다뇨?” “정말 모르는 거예요? 그거 겨울의 별명이잖아요.” “……내 별명이요?” “네.” “어째서 그런 별명이…….” “아마 산타 마리아의 교전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생겼을 거예요. 특히 그, 구울을 개머리판으로 찍어 죽이는 장면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죠.” “…….” 그러고 보면 POD 팩션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채드윅 팀장의 경우 초면부터 팬클럽의 분파 운운하는 헛소리를 지껄인 바 있다. 어쩐지 해골이 그려진 옷을 입은 수염 난 마초 아저씨들이 지나치게 훈훈한 반응을 보여준다 했다. 개중엔 겨울의 손을 맞잡고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괜히 물어봤네요. 모르는 편이 나았겠어요.” 앤이 재미있어했다. “싫어요?” “싫다기보다, 창피하잖아요.” “큭큭.” 만족스러울 만큼 웃은 앤이 자세를 바로했다. “겨울.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게 많겠지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진 말아요. 우리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어지간한 사고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요.”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바에 전 독립중대원들이 모인다고 했는데, 당신도 가보는 건 어때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거든요.” “앤은요?” “내가 거기 어울리긴 좀 부담스럽네요.” 다녀와요. 그녀는 겨울을 살짝 밀어냈다. 호화로운 호텔엔 몇 개의 바가 있었는데, 독립중대원들은 그 중 비교적 작은 곳에서 모이기로 한 것 같았다. 허나 겨울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멈추었다. 안에서 새어나오는 대화가 겨울이 있을 때에 비해 더없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어라? 여기서 뭐하세요? 들어가시지 않고.” 물어온 사람은 유라였다. 안에서 있다가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그녀에게선 약간의 알콜 냄새가 났다. 겨울이 엄지로 안쪽을 가리켰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네요. 내가 있으면 저런 이야기는 못할 것 같아서요.” “저런 이야기?”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내는 유라. “이 녀석들이……. 누가 들을지 모르는데.” “욕 좀 하면 어떻고, 야한 농담 좀 하면 어때요. 그럴 수도 있지.” 거친 경험을 하면 말도 거칠어지는 게 정상이었다. 다만 논란이 될 여지가 있는 발언만 안 나오면 되는데, 그쯤이야 알아서 통제할 인물들이 있었다. 정 걱정스러웠다면 겨울이 직접 들어가서 한 마디 주의를 남겼을 것이다. 전 독립중대원들이 세간의 이목에 주의해야 할 입장이긴 하나, 이 정도도 통제하는 건 너무 과도한 처사였다. 유라가 겨울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라도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뭐가요?” “애들이 대장님 앞에서 조심하는 거요. 그건 거리를 두는 거랑 달라요. 그, 대장님 나이가 나이다보니까, 자칫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마음이 없을수록, 작은 대장님을 좋아하고 존경할수록 더더욱 그래요.” 겨울이 미소를 만들었다.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봐요? 다만 놀 땐 다들 편하게 놀았으면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가 없는 편이 낫겠죠. 게다가 원칙적으로 만21세 미만은 출입 금지잖아요.” 끝에 농담을 섞어 말했음에도, 겨울을 빤히 바라보던 유라가 묻는다. “……항상 그런 식이면 외롭진 않으세요? 다들 의지하기만 하는데, 정작 대장님 본인은 의지할 데가 없잖아요. 저 애들처럼 편하게 대할 상대도 없고요.” 잠시 고민한 겨울이 대답했다. “있어요.” “예?” “그럴 사람, 있다고요.” 정확하게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별빛아이와 앤. 둘이자 하나, 하나이자 둘. 별빛아이에게 묻는다면 둘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겨울 앞에서 자신은 흐르는 강물, 불씨를 틔우는 모닥불, 하늘에 뜬 구름과 그 너머의 태양과 밤에 뜨는 달에 이르기까지, 사후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구분되는 하나가 된다고. 그러므로 별빛아이의 입장에서 가상인격은 길가의 돌멩이와 같았다. 즉 그 자신인 동시에 자신이 아니었다. 적어도 겨울이 묻는 그 순간에는. “아…….” 유라가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렇구나. 있었구나…….” 중얼거린 그녀는 곧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다행이네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겨울이 의지하는 게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 359 [359화] #화려한 초대 (10) 익일,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마지막 날엔 마라톤이 개최되었다. 이 마라톤은 군인들을 지원하는 민간 재단에서 주관했다. 알라모 3 파일럿, 파멜라 펠레티어 대위의 고향 친구가 사무장으로 있다던 바로 그 단체였다. 이런 축제도 괜찮겠다고 여긴 겨울이 사전에 공보처의 협조를 구했고, 공보처에서는 해당 시민단체를 검증하고 참가 신청자들을 주의 깊게 선별한 뒤에 허가를 내린 것이다. 풀 마라톤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방문하는 도시마다 하프, 혹은 쿼터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참가할 면면도 상이하다. 전쟁영웅들이 시민들과 어울려 함께 달리는 광경은 가슴 속에 분열을 품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터였다. 인종과 정치적 신념, 종교의 차이에 무관하게 모두 하나 되어 행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겨울이 목적한 바이자 정부의 정책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겨울은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무기와 탄약을 휴대한 채 42.195 킬로미터를 완주했다. 뛰는 내내 40파운드(약 18킬로그램)에 달하는 추가 중량을 감당한 것이다. 이는 미군 구성원들이 종종 도전하는 과제의 하나였다. 여기서 기존의 최고기록을 단축해 놓았으니, 사소하게나마 끊임없이 제기되는 겨울에 대한 의심들을 불식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전날부터 술을 멀리하며 벼르고 있던 진석은, 겨울과 같은 조건으로 6시간 19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곤 실망감에 이를 갈았다. 목표로 잡았던 옛 기록보유자에 비해 한 시간 반가량 뒤떨어지는 성적이었기 때문. 그러나 완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201독립대대, 나아가 난민 출신 병력자원에 대한 이미지를 향상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마라톤 다음은 민간 사격장에서의 전술사격시연이었다. 먼저 전쟁영웅들이 시범을 보여주고, 시민 및 명사들을 상대로 교습을 해주는 식. 겨울의 「교습」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저 겨울을 만날 핑계거리로만 여겼던 명사들이 의외의 충실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보처 역시 만족감을 표했다. “입소문이 나면 티켓 값을 더 비싸게 받을 수 있겠군요. 예약을 아껴둘 걸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맥과이어 소령의 말. “성과급이라도 받아요?” 겨울의 질문에 소령이 실소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일이 잘 풀리니 즐거울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예측을 덧붙였다. “잘 해내야지요. 전시채권 판매에 있어선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까요.” “마지막 기회?” “예.” 맥과이어는 행사를 마무리하는 사격장을 둘러보았다. 영웅들과 참가자들, 또 일개 직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표정에선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젠 위기감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종말의 위기를 넘겼다고 보는 거지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그러니 시민들의 절박함에 기대어 팔아왔던 전시 채권도 판매량이 줄어들 수밖에요.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예. 그러니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령이 겨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역전된 계급에 대한 반감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조를 바꾸는 소령. “일정이 버겁진 않으십니까?” “체력에 무리가 간다 싶으면 바로 이야기할게요.” 마라톤에 이은 사격시연은, 그렇게 뛰고도 전투력을 유지하는 기량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이 앓아누울 경우 금전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이므로, 개인적인 유대가 없더라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흠…….” 그들 가운데 하나인 맥과이어는 물끄러미 겨울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갯짓했다. “훗날 기회가 닿으면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해보십시오. 재밌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마라톤이나 사격장의 기록 등이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져 있을 거라는 뜻이다. 한겨울 중령의 기록에 도전하세요! 사격장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싫어지는데요.” 살짝 찡그리는 겨울의 대답이 공보처 장교를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다. 환락의 도시를 떠나는 비행기는 일몰 이후에 이륙했다. 계획상 여기서부터는 군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탑승하도록 되어있었다. 전쟁영웅들과 함께 일등석을 배정받은 겨울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젖어 창백해진 사막 가운데, 화려하게 반짝이는 시가지가 낮아지는 땅과 더불어 가라앉는다. 그 풍경이 겨울로 하여금 생소한 감상에 젖게 했다. 이는 때때로 익숙한 글자가 낯설어 보일 때와 비슷한 유리감(流離感)이었다. 지금 낯설어진 것은 이제까지 일궈놓은 스물일곱 번째 종말의 세계 그 자체다. 바깥과 격리된 기내의 조용한 분위기, 멀어지는 대지, 그리고 겨울이 근래 들어 품기 시작한 심상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대로 끝까지 잘 풀어나갈 경우……. 그 후엔, 여기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건가? 한 번 늙어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평생에 해당하는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 사후에 존재하는 이들의 관용적인 표현일지라도, 겨울이 골몰하는 전망은 등급 낮은 사후보험의 수혜자들 대부분이 바라는 것일 터였다. 겨울은 그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예전엔 누이의 의지처가 되어주려고 살았다. 겨울이 의지할 사람은 없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별빛아이만 해도 참으로 깊은 위안이었다. 앤은……아직 망설여지긴 하지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으므로. 한때는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으되, 현 시점에선 그 분노도 많이 잦아들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며 생긴 여유인지, 혹은 이제 무의미한 감정해소를 포기하게 된 것인지는 겨울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정체불명의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그저 살아가는 삶, 즉 이제야 겨우 가능성을 엿보게 된 사후의 평온한 안식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아쉬운 것일까. 한참을 궁구하던 겨울의 뇌리에 별빛아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친다. ‘물 밖의 물고기?’ 이걸 떠올린 이유를 모르겠다. 불분명한 사고는 순간적인 영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쩐지,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모르는 채여도 괜찮지 않은가 하고. 이 또한 이유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의식적인 한숨으로 늪 같은 사색을 끊었다. 흩어진 구름에 드문드문 가려지기 시작한 지상은 여전히 위험한 세상이다. 잠재워야 할 불씨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고민은 종말의 간빙기가 고착된 뒤로 미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름 위로 뜬 별들을 본다. 언제나 그랬듯, 본질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겨울은 나머지를 다 지우고 별빛만 남겨두는 시간이 좋았다. 솔트레이크 시티를 거쳐 남부 바이블벨트 지역의 주요도시들을 순방한 영웅들의 중대는, 10월 15일, 마침내 미국의 수도에 입성하게 됐다. 수훈자가 워낙 많다보니, 대통령이 주관하는 명예훈장 수여식은 장장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인 것이다. 그 의도는 물론 훌륭했으나, 겨울은 맥밀런 대통령의 업무 부담이 너무 과중하지 않은가 걱정했다. 주야로 진행되는 개선식에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본연의 업무 또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겨울에게 두 번째 명예훈장을 비롯해 그 밖의 밀린 훈장들을 일일이 달아준 대통령은, 환한 미소를 곁들인 악수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 통화할 때 맥주 한 잔 하자고 했었지? 이달 말일로 시간을 잡았으니 그날 다시 보세.” “통보는 받았습니다만……각하, 그 약속은 좀 더 나중으로 미루셔도 괜찮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전쟁영웅에 대한 대통령의 호의였을 뿐. 이렇게 만난 대통령은 피로에 짓눌린 사람의 전형이었다. 사소한 일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이런. 귀관마저 저 잔소리꾼들과 같은 말을 하는가.” 이러면서 보좌관들을 슬쩍 흘겨보는 대통령. 보좌관들은 저마다 뚱한 표정을 짓거나, 이마를 짚거나,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똑같이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걱정 말게.” 대통령이 성격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달도 벌써 반은 지나갔고, 내달 초부터는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갈 테니까. 이 고생도 앞으로 잠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서운할 지경이라네. 하루하루가 암담하기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업무가 무겁다고 보기도 어렵지.” “…….” “무엇보다, 퇴임 후엔 이런 기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 아닌가. 내 손자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아나? 그러니 내가 싫어도 더 이상 사양하지 말도록. 이건 명령이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동부에 온 소감은 어떤가?” “……남부와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훨씬 안정되어 있네요.” 겨울의 대답에 대통령이 곤란함을 드러냈다. “이거야 원. 원래 있던 서부전선을 생략하고 곧바로 남부와 비교하다니.” “그쪽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하지. 허나 귀관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는 다만 전선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후방으로 온 소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겨울의 반응으로는 그 편이 더 자연스러운 기대이기도 하고. “뭐, 아무튼.” 대통령이 다음을 기약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군. 틈틈이 다른 업무도 처리해야 하거든.” “예.” “그럼 또 보세. 장담하는데, 맥주가 아주 마음에 들 거야.” 일전에 말하길, 본인이 직접 빚었다는 수제 맥주였다. 바쁜 와중에 술을 만들 시간은 있었을까 싶지만, 누구의 말처럼 사람은 즐거움 없인 살 수 없는 동물이었다. 대통령의 취미가 양조라고 치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간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인간이어도, 몇날며칠을 일만 하면서 보내는 데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로부터 다시 하루 뒤엔 사후에 명예훈장이 추서된 이들의 합동 서훈식이 열렸다. 장소는 알링턴 국립묘지 내의 기념극장(amphitheater). 고전적인 열주 양식의 야외극장은 그 유명한 무명용사들의 무덤(Tomb of Unknown Soldier) 맞은편에 건설되어 있었다. 이렇듯 국립묘지에서 수여식을 여는 건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후에 훈장을 받는 인물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던 까닭이다. 전면엔 성조기와 더불어 하늘색 바탕에 열세 개의 별을 그려 넣은 깃발이 내걸렸다. 수훈자마다 하나씩 주어지는 이 깃발의 별들은, 하나하나가 미국 최초의 13개주를 상징했다. 국립묘지 경비대인 알링턴 올드 가드가 엄숙한 구령에 맞춰 예포를 쏘았다. 연단에 선 대통령은, 추도에 앞서 전사한 모든 영웅들의 이름과 전공을 읊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누구를 위해 헌신했으며, 어떤 싸움에서 스스로를 희생했는지. 또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누구에게서 사랑받았으며, 군인이 되기 전엔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연설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복을 입은 올드 가드들처럼, 대통령의 자세는 시종일관 꼿꼿했다. # 360 [360화] #화려한 초대 (11) 「떠나간 용사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었습니다.」 긴 추모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자연스러운 시선처리와 절제된 음성. 「새까만 죽음의 수위가 위태로운 삶의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평범한 사람은 누구라도 뒷걸음질을 쳤을 바로 그 순간에, 가장 명예로운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 숭고하고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묻겠습니다. 이 나라가 진정 신의 뜻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라면, 그들의 희생을 어찌 은총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이 어찌 사람이 행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대통령이 빌려온 표현은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allegiance)의 일부였다. 비록 종교적이지만, 익숙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다른 이들의 반감을 최소화할 인용이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국론을 분열시키는 종교 세력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지금 더없이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토록 고결한 사람들이 더 이상 같은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슬픔을 슬픔으로 끝내야만 합니까? 그들이 지켜낸 세상에서 살아남은 우리……. 그들에게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빚진 우리가 이 용사들에 대한 경의로서 하나 되어 그들이 지켜낸 바를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면, 적어도 그 마음만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 묘지에 누운 영웅들에 대한 가장 가치 있는 헌화(獻花)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객석으로부터 고조된 호응이 터졌다. 유가족 중의 한 명이었으며, 대통령은 그에 대한 목례로 말을 잠시 쉬었다. 이 틈에 여기저기서 연단을 향해 간헐적인 기립박수를 보낸다. 거듭 감사를 표하고서, 대통령이 추도를 재개했다. 「고쳐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바로 영웅들의 조국입니다. 그러므로 조국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용사들의 묘비에 바쳐질 향기로운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노력인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피부색과 종교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을 견고한 연대가 있을 따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온갖 고난들이 우리에게 험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떠나간 용사들은 각자의 천국에서 미합중국이 부르짖는 응답을 들을 것입니다.」 다시금 갈채가 쏟아졌다. 이 와중에 겨울은 한 순간 치솟았다가 가라앉는 「위기감지」를 느꼈다. ‘저격?……아니면 폭탄?’ 어느 쪽이든, 범인은 테러를 시도하기 직전에 제압당한 모양이다. 고개를 돌린 겨울은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겨울을 비롯한 명예훈장 수훈자들이 앉은 자리 주변에도 경호 인력이 조용히 늘어났다. 겨울은 긴장된 몸을 풀며 가벼운 피로감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대통령이 쓰러지지 않을까 초조하던 참이었기에. 「명예로운 희생을 기리는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깨닫건대, 거저 주어지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묘지에 부는 바람이 대통령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자격을 증명해왔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결코 완벽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많은 과오를 극복하려 애쓰며 올바른 가치를 지키고자 싸웠지요. 잘못된 길을 수도 없이 걸었을지언정 바른 길을 찾으려는 열망을 잃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은 노예제에 대한 잘못된 믿음도,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전체주의의 물결도, 세상을 반분했던 냉전의 대립도, 오늘날 찾아온 종말의 위기조차도 끝끝내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승리가 그저 주어진 구원일 뿐이었습니까?」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영웅들이 보여주었듯이, 또 여러분께서 공히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스스로의 용기와 스스로의 고결함과 스스로의 선택으로써 은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다리고만 있어선 안 됩니다. 바라고만 있어선 안 됩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빼앗을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영웅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영웅들의 발자취를 쫓읍시다. 어느 누군가에겐 바로 당신이 구원일 것이며, 그 누군가가 언젠가는 다시 다른 누군가……어쩌면 당신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한, 영웅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한, 이 나라가 명예를 잊지 않는 한, 하나님께선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미국 국새에 각인된 문장이 섞여있었다. 객석 일부에서 아까와 같은 기립박수가 일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함께 국기에 선서하고 싶습니다. 부디 함께해주시겠습니까?」 잠시 기념극장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겨울도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에 걸린 성조기를 향해 선다. 대통령의 기준으로는 측면이었고, 객석에서는 정면에 가까운 좌측이었다. 대통령을 필두로 참석자 모두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미국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신의 가호 아래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국가, 온 인류를 위한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는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온 인류를 위한, 이라는 표현은 기존의 서약에 없는 부분이었다. ‘본래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liberty and justice for all)……였던가?’ 겨울의 주변에서 약간의 술렁임이 지나갔다. 그러나 결코 반감은 아니었다. 아는 바와 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당혹감이었을 따름. 원문의 모두는 해석하기에 따라 미국 국민으로 한정될 수도 있고, 인류 전체로 볼 수도 있다. 보통은 전자의 해석이 더 우월하다. 선서를 마친 대통령이 정면으로 돌아섰다. 「고맙습니다, 미국. 그대가 지키는 공화국의 자유와, 그대가 지키는 시민들의 정의에 감사드립니다. 메인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50개 주의 밝은 별이 영원토록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떠나간 용사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 「이상입니다.」 추도연설이 끝나자 무수한 갈채가 기념극장을 가득 메웠다. 겨울은 연설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대통령의, 혹은 참모진의 고민이 많았겠다고 느꼈다. ‘굳이 50개주의 별을 언급한 건……배타적인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신호였겠지.’ 완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정체성을 너무 건드려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런 성향이든 저런 성향이든, 대통령은 그들 모두를 대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쨌든……. 대통령은 한 시간에 달하는 행사를 무난하게 견뎌냈고, 한 차례의 위기도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앤.” 이동하는 시간에, 겨울은 앤에게 물었다. “방금은 무슨 일이었어요?” “무슨 일이라뇨?” “내가 뭘 묻는지 알잖아요.” 시치미를 떼려던 그녀는, 이윽고 주변을 살피고는 한숨을 곁들여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느낌과 분위기로요.” “정말이지…….” “혹시 내가 알아선 안 될 사안이라면 무리해서 알려줄 필요는 없어요.” “으음.” 관자놀이를 누르던 앤이 재차 긴 숨을 내쉬었다. “대외비이긴 한데, 그보다는 겨울을 괜히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럼 됐어요.” 겨울은 간단히 물러났다. 허나 앤은 스스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눈치를 챘으니 말을 아끼는 게 오히려 독이겠군요. 네.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저격을 시도한 놈들이 있었어요. 「언약의 일곱 군단」 출신으로 추정하는 중이에요.” “이름을 들어보면 종교단체 같은데, 설마 벌써 배후를 자백했어요?” “그럴 리가요. 특유의 문신이 있었을 뿐이에요. 이게 위장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지만, 위장이라면 치밀한 위장이겠죠. 겉보기만 흉내 낸 게 아니거든요. 목덜미에 새기는 군번줄 문신 속의 번호와 성경 구절의 대조라든가, 그 외의 상징들의 배치 등, 외부인이 쉽게 알기 어려운 디테일이 정확하게 일치해요. 우리도 잠입수사를 통해 확보한 정보들인걸요.” “언약의 일곱 군단이라…….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네요. 남부 순방 중에 비슷한 문구를 봤던가 싶기도 하고.” “봤을 수도 있겠네요. 이놈들이 아니더라도, 신(新)사도 운동(New Apostolic Movement) 쪽 교회들은 유사한 표현을 공유하니까요. 일곱 산의 탈환, 새로운 예언자와 사도의 등장, 성전의 건설과 종말, 교회권력의 지상 통치 등…….” “전에 말했던 불경스러운 연합의 일부인가요?” 앤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도리질을 쳤다. “아뇨. 그들하고는 대립각을 세우는 파벌이에요. 우리가 갈등을 유도하기도 했죠.” 즉 이이제이의 수법을 썼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부러 내버려둔 것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잠입수사관의 존재를 눈치 챈 모양이네요. 이번 일에 대한 정보가 너무 늦게 흘러나왔어요.” “그 수사관은 무사하고요?” “글쎄요. 알아봐야죠. 지금의 난 당신의……명예훈장 수훈자들의 경호 문제가 우선이라서요.” “수사국도 고생이 많겠네요.” 겨울의 위로에 앤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게요. 역병 이전엔 그래도 꽤나 상식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이런 시대가 되고 나니 중세에나 어울릴 법한 사람들이 자꾸자꾸 튀어나오는군요.” 겨울은 남부에서 어쩌다 접한 선교용 책자의 내용을 떠올렸다. 표지에 일곱 개의 산봉우리가 그려진 책에선 변종의 무리를 요엘의 첫 번째 군대, 기름 부음을 받은 메뚜기 떼 등으로 칭했다. 이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참된 신앙으로 결속된 두 번째 군대를 결성하여 새로운 사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한편 내부의 경계 대상이던 엘즈워스 상사는 현재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고민하던 겨울이 물었다. “오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사망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긴 앤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상박을 톡톡 두드렸다. “……정부 기능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예요.” 정부 존속에 관한 조치는 역병이 처음 확산될 때부터 철저하게 강화되어 왔을 것이었다. 대통령이 죽으면 부통령이, 부통령이 죽으면 하원의장이, 하원의장이 죽으면 그 다음 서열의 승계자가 즉각적으로 정부 수반의 역할을 이어나갈 터였다. “그러나.” 앤이 부연했다. “시민들의 불안과 혼란을 완전히 막진 못했겠죠. 그 틈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자란 잡것들도 분명히 있었을 거고요. 아니었으면 애초에 암살 따위 시도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상식적인 선상의 예측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미소에서 쓴맛을 지우는 그녀. “위험하긴 했어도 사전에 막아냈잖아요? 수사국이든 국토안보부든 가만히 앉아서 놀고 있는 거 아닙니다, 중령님.” “정보국은요?” “정보국은……. 잘 모르겠네요.” 이 시점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분, 뭔가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도 좀 끼워주시죠.” 겨울이 그를 돌아보았다. “탤벗 요원?” “오랜만입니다. D.C에서 뵙자고 했었지요?” 인상 좋은 혼혈 흑인이 반갑게 웃음 짓는다. 겨울과 악수를 나눈 그는 앤을 보더니 와우, 하고 익살스런 놀라움을 표했다. “설마 깁슨 요원입니까?” “……네. 반가워요, 탤벗.” “예. 근데 이거 참, 대단하군요.” 반쯤 농담일지언정,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겨울의 특수화장을 담당했던 기술자의 감탄이었다. 조금 부끄러웠는지 앤이 입을 꾹 다문다.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겨울이 탤벗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그저 얼굴 보겠다고 나온 느낌은 아니었다. “일단은 피자 배달 차 나왔습니다.” “……피자? 어떤 비유가 아니라, 진짜 피자요?”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의 모습에 탤벗이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어떻게 그동안 한 번도 주문을 안 하셨습니까? 몇 번을 시키든 무료인데 말입니다. 코왈스키도 주문 내역을 확인하고 섭섭해 하더군요. 아예 잊어버리신 게 아니냐면서.” “설마 잊었을 리가요. 하지만 아무리 공짜여도 CIA에다가 피자 달라고 하기는 좀……그렇잖아요?” “요원들의 목숨 값으로 적립하신 마일리지가 있으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겨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날 보러 온 진짜 이유는 뭐죠? 외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 바쁠 때 중요한 용건도 없이 인사나 하러 왔을 것 같진 않아서요.” “이런. 왠지 울고 싶어지는군요.” 농담처럼 받아도 아니라곤 하지 않는다. 눈으로 그의 삼가는 시선을 좇은 겨울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앤이……깁슨 요원이 들으면 곤란한 내용인가요?” “두 분 관계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제 앞에선 애칭으로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그럴게요. 아무튼 대답은?” 추궁하는 듯 한 어조에 망설이던 탤벗이 미묘한 고갯짓을 했다. “공식적으로는 예……라고 해야겠습니다만, 음, 원하신다면 깁슨 요원과 함께 들으셔도 좋습니다. 수사국에 알려진다고 차질이 빚어질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 “자세한 건 호텔로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겨울은 방탄 차량에 앤과 함께 동승했고, 뒤쪽에 중앙정보국이 보낸 차량이 따라붙었다. 워싱턴 D.C는 일방통행로가 유난히 많은 도시였으나, 군과 경찰이 도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차량행렬은 호텔까지 최단경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CIA 위장 회사의 피자도 정확히 도착 시점에 배달되었다. 한 개 중대 몫이라 배달에 동원된 차량도 많고 차량이 쏟아내는 박스의 숫자도 많았다. “배달 중에 차량 안에서 굽는 식인지라 이보다 더 따끈할 순 없을 겁니다.” 탤벗의 말에 겨울이 당혹감을 내비쳤다. “난 이야기를 먼저 나눌 줄 알았는데요.” “식사를 미룰 만큼 다급한 용건은 아닙니다. 아니면 먹을 때 다른 사람들과 적당히 떨어진 자리를 잡아도 되겠고요.” “최소한 밥맛 떨어질 일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그렇지요.” 전 독립중대원들은 영문 모를 피자 배달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기뻐하는 반응들이었다. 배달을 나온 직원들은 이를 겨울이 사는 것이라고 설명했으므로 중대원 모두가 겨울에게 한 번씩 인사를 하고 피자를 받아갔다. “잘 먹을게요, 대장님!” “감사합니다!” “작은 대장님 최고!” “…….” 겨울은 어색한 침묵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 361 [361화] #화려한 초대 (12) 중대원들이 피자에 환호하는 것은 순방 일정 간 워낙 호화로운 식사만 해온 까닭이었다. 생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고급요리의 향연도 좋지만, 예전부터 좋아하던 먹거리에 대한 그리움은 과거에의 향수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기에. 정 원한다면 호텔의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터. 허나 중대원들은 돈을 아끼고자 했다. 모두에게 브래넌 의원의 제안을 전달해둔 탓. 따라서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카지노를 이용한 이가 드물고, 큰돈을 써버린 이는 더더욱 드물었다. 여하간, 즐거워하는 알파중대원들을 본 탤벗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저렇게들 좋아하시니 대접하는 입장에서도 꽤나 뿌듯하군요.” 그리곤 겨울과 앤에게도 권한다. “식기 전에 드시지요. 어떤 취향이라도 만족하시도록 최대한 많은 메뉴를 준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 들리는 유라의 아쉬운 목소리. “어? 하와이안……. 파인애플 피자가 없네.” 피자가 펼쳐진 테이블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녀는, 끝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눈치였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없는 종류도 있나본데요?” 웃음기를 지운 탤벗이 진지하게 답했다. “중앙정보국은 피자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 “농담, 농담입니다. 중령님은 마트 같은 곳을 갈 기회가 없으시니 잘 모르시겠군요. 요즘 파인애플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대체 산지에 말썽이 생겼답니다. 본토 외에도 점점 더 많은 섬들을 안전지대로 확보하고 있는 만큼 오래지 않아 해결될 문제지만……. 당장은 그렇습니다.” 겨울은 잠시 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크게 달라진 기색이 없다. 눈이 마주칠 때면 간혹 불투명한 미소를 지어보이긴 했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고로 보다 큰 걱정거리는 저 바깥 세상에 있었다. 시선을 거둔 겨울이 탤벗에게 묻는다. “해상운송은 원활한가요?” “예. 최선을 다한 구축작업에도 불구하고 특수변종 멜빌레이의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긴 하나, 일반적인 화물선에도 어군탐지기와 기뢰투사기를 탑재하는 추세인지라 현재로선 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원들의 무장 및 훈련도 강화되었고요. 여기에 대해선 딱히 감추는 게 없습니다.” 꽤나 낙관적인 태도였다. 앞서 몇 차례 되새겼던 바와 같이, 변종들의 전투능력 강화는 인류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고로 애당초 무인도여서 역병 확산 이후 상륙한 사람들이 전부였거나, 주민들이 일찌감치 철수 혹은 전멸한 섬들의 변종집단은 미군에게 있어 그리 큰 위협이 안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섬들을 접수하여 플랜테이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탤벗이 언급한 대체 산지의 실체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되는 내용. 다만 겨울은 정보국 요원에게 그것이 온전한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응하기가 어려워지겠지.’ 바다괴물들은 육지의 괴물들에 비해 견제하기가 어렵다. 숫자는 앞으로도 늘어만 갈 것이다. 위안이라면 이놈들도 어쨌든 특수변종인지라, 일반 변종들처럼 쉽게 번식하진 못한다는 점. 과연 이 세계관의 인류는 때가 늦기 전에 방법을 찾을 수 있을는지. 얼마 전 식중독에 걸린 범고래 떼가 해변으로 밀려왔다는 뉴스도 있었다. 여기서 걱정해봐야 소용이 없을 일이지만. 사색을 끊은 겨울이 딥-디쉬 스타일의 피자를 접시에 덜었다. 풍부한 토핑이 섞인 치즈와 토마토소스는 제 질량에 못 이겨 뭉글뭉글 흘러내릴 정도로 뜨겁고 묵직했다. 잘라낸 단면으로부터 수증기처럼 진한 향이 훅 올라온다. 두꺼운 치즈가 끝도 없이 죽죽 늘어지는 바람에, 겨울은 나이프로 몇 번을 거듭 감아올려야 했다. 맛은 기대 이상이었다. 치즈와 토마토의 풍미가 입안을 꽉 채우는 듯한 식감이 일품. 한 조각만으로도 한 끼 열량을 채우기에 충분할 느낌이다. 앤은 조금 망설이다가 뉴욕 스타일의 아주 얇은 피자를 골랐다. 그러나 거의 시늉하듯이 한 입 먹고는 그대로 식기를 내려놓았다. 겨울의 접시가 다 비도록 다시 손대는 일이 없었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탤벗의 질문에 앤이 애매한 태도로 긍정했다. “그리 당기진 않네요. 천천히 먹죠.” “흐음. 이 시간이면 제법 허기가 지실 텐데…….” 뭔가 낌새를 챈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던 탤벗은 이윽고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아, 그렇군요. 음, 이해합니다. 하하.”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앤. “괜한 소리 말고 용건이나 말씀하십시오, 탤벗 요원.” “이런. 식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남지 않겠습니까?” 짐짓 곤란한 체 하던 CIA 요원이 겨울에게로 눈을 돌렸다. “두 가지, 한겨울 중령님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드시면서 들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가볍게 들을 것이 못 되었다. “어느 쪽을 먼저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이렇게 물었다. “중령님. 혹시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 중 접촉했던 포인트 찰리 854……그곳의 수장, 구 중국 인민해방군의 시에루 해군중장을 기억하십니까?” 멈칫. 겨울은 대답하기 전에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정장을 입고 귀에 리시버를 낀 요원들이 일정 간격으로 서있었으므로 알파중대원들은 자연히 그 건너편에 있었다. 이쪽에서 오가는 대화는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에 파묻힐 것이다. 겨울이 접시를 살짝 밀어내며 답했다. “당연히 기억하죠. 핵심 타겟이었잖아요.”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당황한 겨울처럼, 앤 역시 적잖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시에루 중장? 그녀가 살아있었습니까? 당신들이 신병을 확보하고 있고?” “신병은 우리 소관이 아니지만, 예. 살아있습니다. 핵 보복이 가해지기 전에 가까스로 만을 벗어났나 봅니다. 이후 연료 부족으로 표류하다가 칼 빈슨 전단에 항복했다더군요.” 겨울은 그날 새벽, 끔찍하게 혼란스러웠던 바다를 곱씹었다. 미 해군이 연안에 기뢰를 잔뜩 부설하는 동안 만에 갇힌 구 인민해방군도 가만히 놀고 있지는 않았다. 기뢰지대를 돌파할 수단으로서 선저에 스티로폼을 가득 채운 화물선을 여러 척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미 해군은 만 입구, 골든게이트 봉쇄에 실패했다. 중과부적. 쏟아져 나오는 배가 많아도 너무 많았을 테니까. 이는 현 시점의 각 정보기관들이 처한 현실 그대로였다. 하나하나는 수월하게 끌 수 있을 불씨들임에도, 너무 많이 흩어져 있어서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겨울이 묻는다. “그 분이 날 보겠다는 이유가 뭔가요? 아니, 이 요청을 왜 전달해주느냐부터 들어야겠네요.” 중장이 단순히 포로로 잡혔을 뿐이라면 굳이 정보국이 나서서 연결해줄 동기가 없잖은가. 끝까지 위장신분으로 속였으니, 좋은 감정을 품었을 리도 만무한데. ‘즉 중장에게 뭔가 쓸모가 있다는 뜻.’ 그 쓸모가 과연 무엇일지. “판단이 참 빠르시군요.” 볼을 긁적이는 탤벗. “본인이 다 뒤집어쓰겠답니다.” “설마…….” CIA 요원은 겨울이 내비치는 의구심을 긍정했다. “그겁니다. 핵 테러의 주요 공모자로서 법정에 서겠다는 거죠.” “가능합니까?” 미간에 주름을 잡은 앤의 질문이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례이옌리에 소장을 비롯한 몇몇 중국군 장성들이 그녀의 혐의를 증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양용빈 상장의 잔당 소탕은 거의 다 완료되었지요. 생포된 포로들 가운데 일부가 증인 역할을 수락했습니다. 법정에서 필요한 진술을 해주기로 말입니다.” “…….” “시에루 중장은 양용빈 상장의 심복으로서 핵 공격을 준비한 사람이자, 양용빈 상장의 죽음 이후 잔당을 이끌어온 지도자가 될 겁니다.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짜놓은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충분한 설득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나머지는 중장 본인이 자신의 배역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에 달려있겠죠.” “이거……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후폭풍이 엄청나지 않겠어요? 정보가 새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더라도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습니까.” 겨울이 떠올린 우려를 앤이 먼저 말하자, 탤벗이 이에 부연했다. “그래서 그 부담은 현 정권이 지고 갑니다. 재판 자체는 차기 행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어지더라도, 증언과 증거를 조작한 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맥밀런 행정부인 것이지요.” 대통령은 퇴임한 뒤에도 여차하면 정치적 희생양이 될 각오를 한 셈이었다. 분열된 시민사회를 다시 봉합할 수만 있다면 그쯤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고. 이번엔 겨울이 질문했다. “시에루 중장이 이 계획을 쉽게 받아들이던가요?” “뜻밖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으나,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바로 중장 본인입니다.” “음…….” 그렇게까지 뜻밖은 아니었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물었던 것이므로. 다만 시에루 중장의 됨됨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이긴 했다. 그녀의 울타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가 품었던 포부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미래였으므로. 앤이 미심쩍어한다. “무슨 근거로 그걸 믿었죠?”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 약을 믿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나 자백제 같은 수단을 활용했다는 의미였다. 진심으로 희생을 각오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미국에 엿을 먹이겠다는 악의의 발로인지. 그것만 구분해내면 된다. 계획 자체는 중국계 시민 및 난민들과 연방 정부 모두의 이익이었다. 탤벗이 겨울을 응시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 서로 속고 속은 사이에 이제 와서 얼굴을 마주하기도 불편하실 테고……그 여자 역시 큰 기대를 거는 눈치는 아니었거든요. 중령님을 못 만난다 한들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진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의욕을 얼마나 내주는가는 별개의 문제인지라 중령님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고요.” 일이 의도대로 잘 풀린다면 세계관의 미래에 상당한 안정감이 더해질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겨울은 첫 번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요.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빠른 승낙이 의외였던지, 탤벗이 눈을 깜박거렸다. “어, 하루쯤 시간을 두고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안 만나면 줄곧 신경 쓰일 것 같네요. 내게 무슨 소릴 할지도 궁금하고요. 사실, 전에 봤을 땐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되어 유감스러울 정도로요.” “그러시다면야…….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 대해선 다시 정식으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감사를 표하는 정보국 요원에게 겨울이 다음 용건을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요청사항이 두 가지라고 하셨는데, 남은 하나가 뭔가요?” 탤벗은 길어지는 대화 속에 식어가는 피자를 유감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겨울이 보기엔 망설임을 감추고자 만들어낸 몸짓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먼저보다 어려워할까. 시선을 의식한 그가 한숨 닮은 심호흡을 하고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우선 이것부터 여쭤봐야겠군요. 실례가 될지도 모를 질문이니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밥맛 떨어질 이야기는 아니라더니, 먹으면서 편히 들을 이야기도 아니었나보네요.” “하하…….” 멋쩍게 웃은 탤벗이, 또다시 뜸을 들인 끝에, 정말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중령님.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뭐야 이건. 겨울은 껄끄러운 황당함을 느꼈다. # 362 [362화] #화려한 초대 (13) 기본적인 예의를 떠나, 병든 시체들이 뛰어다니는 세계에선 금기라고 해도 좋을 질문이었다. 사라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대인가. 하물며 난민 출신인 겨울이 상대임에야. 앤의 낯빛이 엄하게 굳어졌다. 허나 이유가 있어서 묻는 것일 터였다. 한 순간 불가피하게 바깥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던 겨울이었으되, 명치 어림이 묵직한 돌에 짓눌리는 불편함은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착각이다. 생전과 사후의 경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경우는 없다.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숨 한 번으로 속을 침착히 한 겨울이 생각했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반문은……무의미하겠구나.’ 그 “왜?”에 대한 답은 본격적인 용건이 될 테니까. 지력보정이 겨울에게만 보이는 문자열을 출력했다. 스스로의 배경에 대하여 사전에 확정된 바 없는 사항은, 이러한 순간에 내리는 결정들이 실시간으로 반영되곤 한다. 어차피 종말 이후의 세계에선 생존한 가족이 없는 게 기본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사후가 그러하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수요이기에. “결코 좋았다고는 못하겠네요.” 겨울이 느리게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자세한 개인사를 털어놓기는 부담스럽고……. 그 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처지가 슬프지는 않다고만 해두죠. 딱히 그립지도 않고. 이 정도면 대답이 될까요?” 이로써 겨울의 정보가 갱신되었다. 팔짱을 낀 앤의 눈빛에 깊은 안타까움이 스쳤다. “아, 물론입니다. 곤란한 질문에 답변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긴장을 풀고 안도하는 탤벗에게 앤이 묻는다. “혹시 겨울의 부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까?” “그런 작자들이야 예전부터 많았죠. 남들을 속이는 사기꾼들과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마는 거짓말쟁이들. 결국 누구 하나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번엔 어떤데요?”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이유에서 여쭤봤던 겁니다.” 주고받는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겨울이 모르는 사이에 가족을 사칭하는 이들이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유전자 감식이야 미군으로서 당연히 받는 건강검진의 혈액샘플이 있겠거니와, 최근 에스더와 교전을 치른 뒤에 감염여부를 확인하느라 뽑은 피도 있을 것이었다. 비단 겨울만이 아니라, 방역전선의 전사자들 및 실종자들의 혈육을 사칭하는 자들도 어지간히 많지 않겠는가. 난민구역에서 거짓 사실혼을 꾸미려는 시도가 있었듯이. 그러므로 관계당국에겐 일찌감치 일상적인 업무가 되었을 듯 하다. 겨울이 화제를 되돌렸다. “그럼 이제 진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 주억거린 탤벗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저는 작전에 참가한 당사자가 아닙니다만, 우리 정보국은 과거 조금 특별한 형태의 비밀작전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이란의 핵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 계획이었죠.” “……이란? 사이버 공격?” 부모님과 중동 사이의 간극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지금 이게 대체 뭔가 싶겠지만, 일단 좀 더 들어보십시오.” “…….” “이 작전의 목표는 정교하게 제작된 악성코드를 이용하여 연구 현황을 감시하고 제어능력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핵연료 농축시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죠. 두 차례에 걸쳐 보복을 받은 데다, 무차별적인 사이버 테러가 횡행할 우려 탓에 2차 공격을 실행하진 않았지만요. 그래도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고무적이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그 가치를 입증했던 것이니까요.” “그래서요?” “이후 우린 보다 진보된 형태의 악성코드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성공을 거둔 계획인지라 전보다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을 할당받았지요. 그러던 중에,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졌습니다.” 점점 모르겠다. 겨울의 안개 같은 표정을 보고, 탤벗은 난처한 미소와 함께 설명을 이어갔다. “그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또 다른 안보위협이었습니다. 방사능 오염이 북미 서해안까지 확산되는 와중에, 일본정부는 정보공개에 무척이나 비협조적이었죠. 때문에 백악관에선 실태를 파악하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감시체계와 안전장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악성코드를 심었군요.” “맞습니다.” 탤벗이 긍정했다. “다만 그 대상이 일본에 국한되진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발전소 및 기타 핵시설들의 내부 정보를 얻는 것이 목표였죠. 어차피 정보를 빼내는 용도로만 쓰면 들킬 일도 없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되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코드였던지라……. 이 작전에선 잠재적인 적국과 전통적인 우방국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그건, 그러니까.” 맥락을 눈치 챈 겨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겔론스 확산 시점에서,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 국가들의 원자력 발전소 전체를 제어할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결코 전체가 아닙니다.” 혐의의 일부를 조심스럽게 부인하는 탤벗. “그런 중요 시설들의 전산망은 외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정보국이 유효한 네트워크를 확보하려고 노력하긴 했어도, 모든 원전의 제어권을 손에 넣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역량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요. 다만…….” “다만?” “한국의 경우 진척률이 아주 높은 편에 속했습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본보다는 낮았지만 말입니다.” 이제야 확실한 그림이 그려진다. 겨울이 물었다. “그걸로 인해 한국 정부와 마찰이 생겼나보네요?” “맞습니다.” “뭐, 국민들보다 원자력 발전소 보호를 우선시하라고 요구하기라도 했어요? 위급한 상황의 전력공급을 무기로 삼아서?” “…….” “정말로?” 가장 단순한 짐작이 정곡을 찔렀는지, 탤벗은 잠깐의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듣고 있던 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부분적으로는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탤벗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 백악관에선, 그 많은 원전들을 방치하면 수십 년 내로 전 세계적인 재난이 닥쳐올 것이라 내다봤습니다. 전문가들의 예측이었지요. 인류가 극복해야 할 위기는 역병만이 아니라고. 유럽 방면은 그나마 변종들이 몰려오기까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당장 함락 위기였던 아시아 지역은 사정이 급했습니다. 버티던 한국이 마침내 수도권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그러니까 전투력을 절반 이상 잃었을 때, 결국 우리 작전의 최종단계가 실행되었습니다.” 연결망을 구축해둔 원자로들의 제어권한을 강탈했다는 말이었다. 전력이 끊어지면 군의 작전수행에도 차질이 빚어질뿐더러, 주요 거점의 유지 및 대피한 국민들의 생존에도 문제가 생긴다. 한국 입장에선 나중을 생각할 필요도 있다. 그렇잖아도 난민 수용에 있어서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탤벗은, 자신이 진짜 관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군이 절반이 넘는 전투력을 잃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알아요.” 겨울이 수긍했다. 여느 영화나 소설과 달리, 현실에선 어떤 부대가 병력의 2할만 잃어도 궤멸로 간주한다. 즉 미국이 처음부터 잔혹한 요구를 하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 결정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발전소들이 적절한 조치 없이 버려졌을 겁니다. 자동화된 안전장치들이 있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한 순간 위기를 넘기게 해주는 수준이지, 오랫동안 관리 없이 내버려둬도 좋을 정도는 못 된다고 하더군요. 여러 사고 사례들을 보건대 그 장치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보장도 없었고요.” “지금 상태는 어떤데요?” “조치가 완료된 원전들에 한하여, 적어도 몇 년 쯤은 그대로 둬도 괜찮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썽이 생긴 원전이 있다는 듯 한 말투. 사회불안을 염려하여 험프백에 대한 정보조차 대외비로 지정해놓았으니, 마경이 된 원전들에 대한 정보는 그 이상의 기밀로 취급할 터였다. 어쩐지 관련된 소식이 없다 했다. 겨울은 곁가지로 흐르는 사색을 끊고 첫 질문을 되새겼다. ‘부모님과의 관계를 확인했던 건, 그들의 죽음……혹은 실종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했던 것이겠구나.’ 헌데 이런 비밀을 알려주면서까지 맡기려는 역할은 뭘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예요?” 겨울의 온화함에 적잖이 안심하면서도, 정보국 요원은 다시금 다른 말을 꺼낸다. “이 나라가 원망스럽진 않으십니까?” “……원망?” 겨울은 뜸을 들인 끝에 답했다. “그건, 굳이 말하자면 필요악이었다고 봐야겠죠. 결과적으로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고. 잘못한 부분이 없다곤 못하겠는데, 그걸 이제 와서 비난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까 말했듯이……내 부모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다른 가족들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건, 모겔론스가 방사능에 의해 파괴될 시 생성되는 특유의 독소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 독소가 생태계에 누적될까 두려워 핵무기 사용이 거의 봉인되다시피 한 마당이 아닌가. 방사능 오염의 총량은 덮개가 날아가고 바닥이 녹아내린 원자력 발전소 쪽이 핵무기를 압도한다. 오염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예외적인 핵탄두들을 제외하면. 고로 당시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았을 경우, 이후의 세계가 지금보다 더 양호하게 흘렀어도, 십 수 년이 흐른 뒤엔 결국 거북이처럼 기어온 거대한 종말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방사능 탓이든, 독소 탓이든. 그 피해는 가장 먼저 한국 정부가 감당해야 했을 터. 탤벗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유감스럽군요. 한국 대통령의 생각도 중령님과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그쪽인가요.” “예. 겉으로 드러내진 않습니다만, 비공식적인 수단으로 알아낸 바 미국에 대한 반감이 상당합니다. 당시 미국이 재배치를 요구한 3개 사단과 자재들만 있었어도, 최소 몇 만 명의 국민들을 더 구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정보국은 그런 대통령이 불온한 계획에 연루되어있을 거라고 보고요?” “가능성은 있다, 정도입니다.” “어떻게? 다 망한 나라의 정부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계획에 발을 걸치죠?” “다른 건 몰라도 돈은 꽤 있지요.” “돈이 많다니……. 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요.” 한국 정부가 겨울의 시간을 샀다는 말을 들었을 적에 벌써 한 번 품었던 의문이었다. 망한 나라도 나라 나름이다. 역병 확산 초기에 무너진 한국은 어떤 나라의 독재자처럼 황금과 달러, 명마를 실어 나를 만 한 여유가 없었을 테니. 탤벗이 그 의문에 답해주었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돈이 남는 겁니다.” “……?” “실익과 인도적 지원을 겸하여, 연방정부는 각국에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국가부채는 가급적 유예나 상계처리를 하고요. 그런 비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 각종 자산의 임대 및 인수 자금입니다. 항공기, 선박, 인공위성 같은 것들이요.” “아…….” “어쨌든 소유권은 각국 정부, 또는 기업에 있었으니까요. 그 중엔 값비싼 군용기도 끼어있습니다. 한 기에 수천만 달러씩 하는 물건들 말이죠. 물론 한국 정부가 우리의 공중급유 지원을 받아 건져낸 군용기는 원래의 보유수량에 비하면 형편없는 규모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거액이 됩니다. 살아남은 국민들이 원체 적잖습니까. 난민으로 수용된 인구는 미국에서 따로 감당하고 있고요.” 현재 한국정부가 유지하고 있는 땅은 자그마한 도서들이 전부. 거기 남아있을 인구가 대단치는 않을 것이다. 즉 시체를 잘라 팔듯 망국의 유산을 파먹고 있으나, 먹여 살릴 사람의 숫자가 워낙 줄어들었기에 그런 식으로도 돈이 남는다는 뜻. “여기에 국가 명의로 보유하고 있던 여러 주식과 채권, 연기금의 잔재, 기타 실물자산, 기술특허의 라이센스 비용 등, 그럭저럭 자금을 마련할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향후 몇 년간은 고갈되지 않을 재정을 보유한 거지요.” “음,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내가 그 분을 슬쩍 떠보면 되는 거로군요.” “예. 중령님께서 우 대통령과 만날 승마회가 바로 비슷한 입장의 국가 정상들, 혹은 외교관들이 사교적인 회합을 이어가는 자리입니다. 같은 처지에 서로 연대를 이루어 돕고 지내자는 취지까지는 좋은데, 영 수상한 야합이 진행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서 말입니다.” “대통령 한 사람만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거네요. 실제로 어떤 어두운 모임이 존재하는 거라면, 누가 연루되었는지까지 알아내는 게 최선이겠고.” “정확합니다.” 여기까지 듣고서, 겨울은 겉으로는 납득하고 속으로는 의아했다. ‘이런 내용을 앤이 들어도 괜찮다고?’ 비공식적인 정보 공유일까, 아니면 수사국의 관심을 돌리려고 던지는 모종의 미끼일까. 한편으로는 겨울의 이반(離叛)을 막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나, 싶은 「통찰」도 스친다. 혹여 겨울이 누군가로부터 ‘부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듣고 분개하지는 않을까. 겨울의 속을 모르는 정보국으로서는 충분히 품을 법한 우려였다. 명예훈장 이중수훈자가 테러에 가담하는 것만 한 악몽도 드물다. 탤벗이 겨울을 불렀다. “중령님. 다시 실례가 될 질문입니다만…….” “또요? 실례 좀 그만해요.” 짐짓 눈을 찌푸리는 겨울을 보고 앤이 짧게 실소했다. 탤벗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어요. 하도 심각해보여서.” 더불어 부모의 죽음에 진심으로 개의치 않음을 내비친 것이기도 하다. 상심했다면 어찌 가벼운 말이 나오겠는가. 겨울은 차분히 손짓했다. “말씀해보세요.” “제가 오늘 들려드린 사실을 우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듣게 되었을 때……음, 커트 리로서 활동하던 시절과 같은 수준의 연기가 가능하시겠습니까?” 이게 왜 실례가 되나 생각한 겨울은, 곧 속뜻을 읽고 살짝 끄덕였다. “슬퍼하긴 힘들겠지만 화를 내는 정도라면야, 얼마든지.” 생전의 부모를 떠올리면 된다. 감정은 두고 말과 행동만 꾸며도 될 것이었다. 아까부터 겨울의 기분을 신경 쓰던 앤은 지금의 말이 가슴에 얹힌 눈치. 돌이켜보건대, 그녀에겐 프로파일러 경력이 있었다. “그렇군요.” 탤벗도 버거워한다. 그는 겨울에게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 “어렵게 여기진 마십시오. 결국 그날 한 번입니다.” “그날 한 번?” “우 대통령이 살 수 있었던 한 중령님의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뭔가 계획이 있고 거기에 중령님을 끌어들일 작정이라면 성급하게나마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상은 부탁하지 않을 거고요?” “중령님의 시간은 비싸잖습니까.” 어깨의 힘을 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시간을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국방부가 싫어할 것이다. 겨울과의 식사에 수십만, 수백만 달러를 기부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방역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아까의 추측에 한층 더 무게가 실렸다. 정보국은 오늘의 두 번째 부탁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 않으리라고. “궁금한 게 있는데요. 브래넌 의원님도 시험의 일부였나요?” 겨울의 질문을 받은 탤벗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감이 좋으시군요. 저희가 그분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험보다는 선물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예전은 아마도 코왈스키 건을 말하는 것 같다. 이에 마침 잊고 있던 것이 하나 더 떠올라, 겨울은 품속에서 반지를 꺼냈다. “참, 또 잊을 뻔 했네요. 갈 때 이거 가져가요.” “뭡니까, 그건?” “커트 리의 결혼반지요.” “허……. 그걸 여태 갖고 계셨습니까?” 말하는 탤벗도 지켜보는 앤도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게 어디선가 모르게 나왔길래, D.C에서 만나자던 말이 기억나서 챙겨왔어요. 사소한 거지만 정보국 자산이니 돌려드릴게요.” 탤벗이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그냥 기념품 삼아 가지십시오.” “기념품? 반지를요?” “뭐 어떻습니까. 정말 프로포즈할 때 써도 되겠지요. 거기 얽힌 사연을 듣고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겁니다. 최소한 그냥 돈 주고 산 물건보다야 의미가 깊지 않겠습니까?” 프로포즈라. 겨울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며 반지를 갈무리했다. # 363 [363화] #화려한 초대 (14) 탤벗을 보낸 이후, 이젠 제법 익숙해진 스케줄을 거쳐, 겨울이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대략 오후 9시경이었다. 지나치게 빡빡한 감이 있지만,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 말엔 진정한 의미의 휴가가 주어진다. 그때가 되면 앤과 더불어 한가로운 산책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저문 특급 호텔의 입구에선 컨시어지 매니저가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중령님.” “카릴로 씨.” 겨울이 매니저의 기품 있는 인사에 답례했다. 며칠 새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겨울이 머무르는 호텔엔 비어있는 방이 없었고, 그만큼 투숙객들이 겨울에게 보내는 선물도 많았다. 겨울은 매니저로부터 한 발짝 뒤에 서있는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직업적인 노력으로 다듬은 미소와 함께 살며시 목례했다. “매번 밖에서 기다리시네요. 오늘도 양이 상당한가 봐요.” 선물은 방으로 가져다주는 게 보통이겠지만, D.C에 도착한 이래 겨울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매니저 카릴로가 가볍게 긍정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미 마지막 날까지의 예약이 마감된 상태인지라.” “그렇군요……. 항상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저희에게도 무척이나 보람찬 일입니다.” 카릴로는 겨울이 주는 팁을 거절했다. 아무리 팁이라도 이중으로 받을 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기야 보내는 사람들이 사람들이니 푼돈을 아끼진 않았을 것이다. “자, 가서 한 번 살펴보시지요.” 매니저로서 카릴로가 겨울을 안내했다. 도착한 곳에선 수사국 요원 두 명이 선물로 온 물건들을 검사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겨울에게 약식으로 경례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물품은 실내반입이 금지된다. 투숙객들이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호텔 측이 심부름을 하고, 경호를 담당한 수사국에서 그 과정을 감시한다. 사적인 선물이나 물품 반입을 아예 막아버리기는 또 곤란했던 모양이다. 이 가운데 방으로 보낼 것, 전 독립중대원들 및 경호요원들에게 나눠줄 것, 포트 로버츠로 보낼 것들을 분류하는 일은 겨울의 몫이었다. 애초에 투숙객들도 이렇게 될 줄 알고서 선물을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스테이트 아머리라는 회사의 대표는 자사의 총기 액세서리를 종류별로 백 세트나 보내왔다. 원래는 그 이상을 보내려고 했으나, 경호당국에서 제동을 걸었다고. ‘스테이트 아머리……. 자기네 총이 교과서만큼이나 가볍다고 광고했던 회사였지, 아마.’ 어쨌든 나쁠 것은 없었다. 중대원들이 각자 챙겨가고도 남는 물량은 항공운송을 부탁하면 된다. 독립대대의 예비 보급품으로 삼으려고. 새로 대대에 합류한 이들은 이런 쪽의 풍부함에 좋은 인상을 받을 것이었다. 다른 의미로 고민하게 만드는 선물도 있었다. “꽃다발?” 백합과 물망초가 가득한 꽃다발과, 거기에 끼워진 자그마한 엽서 봉투가 하나. 카릴로가 뒷짐을 지고 말했다. “아시아계의 아름다운 여성분이셨습니다.” 겨울은 봉투를 뜯어보았다. 엽서에선 생화보다 선명한 향기가 났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오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그리고 향수가 뿌려진 편지. 내용은 오직 한 줄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길.」 정갈한 필체도, 인공적이지만 거북하진 않은 향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카릴로가 겨울의 망설임을 눈여겨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이 결정을 내렸다. “돌려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달리 전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네. 돌려주는 걸로 충분해요. 무슨 뜻인지 알 테니까.” 주웨이 본인을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거절해두는 편이 좋았다. 전언은 없는 게 더 낫겠고. 겨울은 지갑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냈다. “이건 제 부탁이니까, 받아주셨으면 하네요.” “감사합니다.” 카릴로는 별 말 없이 팁을 받았다. 조금은 부담스러울지 모를 역할이었다. 그 뒤로 선물을 둘러보는 중에, 카릴로가 겨울에게 방으로 가져가라고 권하는 것이 있었다. “이 브랜디는 어떠십니까?” “브랜디요?” 겨울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겨울이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호텔 컨시어지 측도 요 며칠간 알게 된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족족 중대원들에게 넘겨버렸기 때문. 겨울이 법적으로 성인이긴 하나 음주가능연령에는 못 미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컨시어지 매니저는 속을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브랜디를 고르는 안목이 엄격하신 분의 호의입니다.” 잠시 헤매다가, 「통찰」이 잡아낸 영감에 멈칫하는 겨울. “안목이 엄격하시다고요?” “예. 그런 분이시지요.” 매니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정답을 맞췄다는 듯이.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은 카릴로의 태도로부터 확신을 얻었다. “……가끔은 나쁘지 않겠네요. 방으로 보내주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겨울의 허락을 얻은 카릴로가 등 뒤를 향해 고갯짓으로 신호했다. 분류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겨울은 곧바로 브랜디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급스럽다는 것 외엔 평범한 술일 따름. 라벨에 인쇄된 연락처 또한 진짜 생산자의 번호일 것이다. 경호를 맡은 요원들은 이런 부분까지도 확인한다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낼 줄이야.’ 착각이 아니라면, 이 브랜디를 보내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스트릭랜드 소장이었다. 술이 좋아서 딸의 이름도 술을 따라 지었다던 과묵한 아버지. 그래서 딸의 이름은 브랜디 스트릭랜드다. 알라모 편대장, 브랜디 스트릭랜드 소령. 카릴로가 엄격하다(Strict)는 표현에 강세를 넣은 것이 힌트였다. 겨울은 꾸미지 않은 실소를 머금었다.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스트릭랜드 소령을 통해 도움을 청한 뒤로 이렇다 할 연락이 없어 기대를 접고 있었건만. 그러나 단순한 연락만으로도 의심을 사기 쉬우니, 어쩌면 장군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을 것이다. 술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십분 가량 몰두하던 겨울은, 감춰진 뭔가가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걸 보낸 사람이 같은 호텔에 숙박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소장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의 부탁을 받았을 누군가. 즉 이 술은 지켜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가서 만나진 못하겠지만.’ 스트릭랜드 소장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슈뢰더 대장과 뜻을 맞췄을 가능성은 낮다. 슈뢰더 대장이 알려준 연락처는 끝까지 쓰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겨울은 브랜디의 봉인을 뜯었다. 그렇잖아도 한 번쯤 향상된 「독성저항」을 시험해보려던 참이었으므로. 92프루프의 독주 한 병이면 시험용으로 나쁘지 않다. 다른 독소에 대해서도 적당히 참고할 만한 지표가 되어줄 것이다. 기왕 마실 술이라면 앤을 불러 같이 시간을 보낼까 싶었으나, 이내 미련을 접는다. 겨울의 제안으로는 부자연스러운데다, 해독능력을 검증할 셈으로 빠르게 마시기도 곤란할 테니. 가득 채운 잔을 연거푸 비운 겨울이 입가를 닦아냈다. 「독성저항」의 보정은 효율이 그리 좋지 못했다. 설령 천재의 영역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에게 가능한 수준의 저항력인데, 그래봐야 화학탄 한 발 터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1분 만에 죽을 때 혼자서 몇 분쯤 더 견뎌내는 정도. 초인의 영역에 접어들면 좀 더 나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역병면역」의 선행조건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해도 분명히 지나쳤다. 술기운이 돌기를 기다리며, 겨울은 TV에 전원을 넣었다. 커다란 화면이 얼마 전 방문했던 환락의 도시를 비추었다. 등장한 것은 소매 없는 옷 위로 탄약 조끼를 차고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이었다. 사격장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선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자, 저는 지금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큰 실내전술사격장, 킬링필드 베이거스에 나와 있습니다. 제 뒤로 줄을 선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앞서 영웅들의 중대가 방문했던 이곳은 이제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한겨울 중령의 기록을 넘보는 도전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면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저 역시 그 도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볼까 합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을 바랍니다!」 “…….” TV를 켤 때마다 이런 식인지라, 슬슬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겨울은 채널을 돌려 뉴스를 띄워두고 남은 술을 마저 비우기 시작했다. 감각은 시간이 흘러도 둔해지지 않았다. 실내에서나마 소총과 권총의 조준 및 교체를 반복해본 겨울은, 전투능력의 감소가 거의 없음을 확인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독성저항」이 마냥 쓸모없진 않구나, 해서. 아주 치명적이지 않은 약물과 독에 대해서는 나름의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우우우웅-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넷 워리어 단말이 진동했다. 겨울은 액정에 뜬 발신자 불명 표시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 시간에 비밀회선으로 연락을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설마 스트릭랜드 소장은 아니겠지.’ TV 볼륨을 줄이고서 전화를 받는 겨울. “여보세요.” 「중령님. 접니다.」 수화기를 넘어온 건 낮에 만났던 정보국 요원의 목소리였다. 겨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탤벗? 무슨 일이에요?” 「실은, 낮에 말씀드리지 않은 용건이 하나 더 있어서 말입니다.」 “그 용건, 수사국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탤벗은 쉽게 인정했다. 어쩐지, 아까 만났을 때도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있었다. 더 이상의 비밀은 사양하고 싶건만. 슈뢰더 대장, 덜 떨어진 자들의 쿠데타, 불경스러운 연합, 한국 대통령의 원한, 방역전선의 동향 등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위험요소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았다. 허나 연락을 받은 시점에서 겨울에게는 거부권이 없다고 봐야 한다. 탤벗 개인이 아니라 정보국 차원의 결정일 것이기에. “……일단 들어볼게요.” 뜸들인 겨울의 말에 탤벗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골치 아프신 모양이군요.」 “솔직히 좀 그러네요. 차라리 칼만 들고 감마 그럼블과 싸우는 편이 낫겠어요.” 「이런……. 안심하십시오. 그 정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닐뿐더러, 중령님께서도 꽤나 반가워하실 일이거든요.」 “내가 반가워할 일이라니…….” 「황-보-에스더 양에 대한 겁니다.」 겨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보국은 에스더에게 관여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관할영역의 문제다. CIA가 국내에서의 활동을 강화하고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해외에서의 첩보를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그 부분은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에스더 양에게 해가 될 만한 계획 같은 건 전혀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밝혀두겠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네요.” 「믿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나중엔 높은 확률로 중령님께서도 관계자가 되실 테니까요.」 “……그래서, 아까 말 못한 용건이라는 건?” 「에스더 양이 중령님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겨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364 [364화] #화려한 초대 (15)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감사와 함께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싶다더군요.」 탤벗의 설명은 겨울에게 꽤나 뜻밖이었다. “감사와 안부를? 나에게?” 「그렇습니다. 중령님은 좋은 사람이니 아마 걱정하고 계실 거라고.」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것인가. 겨울의 시선이 옆으로 샜다. 브랜디, 21년산 아칸사스 블랙은 벌써 빈 병이 되어있었다. 통화 중 뒤늦게 혀가 꼬이지는 않겠지. 염려해보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다시 걸어달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미뤘다간 다시 받지 못할 전화일 수도 있으므로. 실내에 주향이 가득했다. 전파로 소리만 전해지는 게 다행이다. 겨울이 물었다. “그 아이, 어떻게 지내고 있죠?” 「본인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어떨지요? 저는 중령님에 대한 연락 책임자일 뿐입니다. 그나마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주어진 역할이죠.」 “그래도 아예 모르진 않을 텐데요.” 앞으로의 연락을 감안하여 기본적인 진행상황쯤은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이 회선도 정보국 측이 감시하고 있겠으나, 겨울은 이렇게 말했다. “탤벗. 당신 말처럼, 당신은 나와 안면이 있는 사이죠. 개략적인 내용이라도 좋으니 아는 사람에게 먼저 듣고 싶은 거예요.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는 거짓말을 적게 할 것 같아서.” 애초부터 사실만 말하리란 기대는 품지 않는다. 다만 낮에 느꼈듯이, 탤벗에겐 마음의 빚이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하더라도 감정적인 흔들림, 또는 그에 준하는 어떤 단서를 보일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단서는 「통찰」과 「간파」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으음…….」 겨울이 의도적으로 드러낸 불신을 부담스러워 하던 탤벗이, 빠른 말로 답변하기 시작했다. 「저쪽이 이미 대기 중이니 조금 서두르겠습니다. 원래는 이 통화가 끊어지는 대로 새롭게 영상통화를 연결할 예정이었거든요.」 “네.” 「노트북의 전원을 미리 켜두시기 바랍니다. 저쪽은 군용 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할 겁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겨울은 업무용 노트북에 전원을 넣었다. “이제 말해 봐요.” 「아시겠지만 군 당국과 위스키 호텔(백악관)은 에스더 양의 능력을 방역전쟁에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에스더 양 본인 또한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협조적이어서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에스더 양 말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중령님 덕분에요.」 “내 덕분이라니…….” 「중령님께서 에스더 양에게 어느 수녀님의 말씀을 전해주셨다면서요?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니 그 뜻이 새롭게 느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에스더 양을 담당하는 성직자 분들도 높게 평가하시더군요.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주셨다면서.」 “담당하는 성직자 분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에스더 양이 신앙생활에 관하여 상담이 가능한 사람들을 요구했고, 방역전략연구소에서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원활한 협력을 위해선 심리적인 안정이 선행되어야 할 테니까요. 담당자는 민간 목회자와 사제 분들 가운데에서 뽑았습니다.」 채플린, 즉 군목은 처음부터 논외였을 것이다. 군 관계자는 상처 입은 소녀에게 불신을 사기 쉽다. 군인의 물은 군복만 벗는다고 빠지는 게 아니었으므로.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된 담당자는 셋. 감리교회 목사 한 분, 침례교회 목사 한 분, 마지막으로 뉴욕 교황청의 추기경이 한 분입니다. 에스더 양은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다양한 답을 듣길 원했거든요. 무엇이 정답인지는 스스로 고민해보겠다고. 이를 위해 교황님께서도 몇 번 방문해주셨습니다.」 겨울이 약간 놀랐다. “교황님께서 직접 오셨다고요?” 「가톨릭 신앙의 최고 권위자 아닙니까.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그 분의 말씀이야말로 현 시대 가톨릭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죠.」 하기야 가톨릭 내에서 신앙에 대한 질문에 답할 사람으로 교황보다 나은 이는 없을 것이다. 「교황께서 눈물을 흘리며 축복해주셨고, 에스더 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 적어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요청에 따라 교황과 만나게 해줄 정도라면, 다른 생활여건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탤벗 역시 이런 의도에서 먼저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터이고. “에스더와 통화할 때, 그 성직자 분들과도 잠깐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적어도 두 분은 자리를 지키고 계실 겁니다. 언제든지 얼굴을 보며 상담에 응할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세 분 모두 숙식을 그곳에서 해결하십니다. 목사님들은 주일에만 잠시 자기 교회로 다녀오시고요.」 “좋은 분들이신 것 같네요.” 「그만큼 엄격하게 뽑았겠지요. 그야말로 다신 주어지지 않을 기회니까요.」 어조로 미루어, 군 당국은 당장 대륙분할 작전의 1단계, 제3해병원정군의 카르타헤나 위장상륙부터 에스더의 도움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에스더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가.’ 겨울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이제 됐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죠.” 「무엇입니까?」 “정보국이 에스더에게 관여하는 이유, 혹시 러시아 방역전선과도 관계가 있습니까?” 「그건 아직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이미……실은 저도 거기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유라시아 대륙엔 트릭스터가 없지 않습니까?」 즉 거기선 에스더의 쓸모가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겨울에겐 「통찰」이 있었다. 정보국의 관할영역을 계속 고민하다보니, 그 연속선상에서 보정이 작동한 것이다. 겨울이 품은 의문과 거기에 들인 시간의 결과로서. “얼마 전, 아는 분으로부터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어요.” 「신경 쓰이는 이야기……입니까?」 “네. 레인저 연대에 포획 임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알파 트릭스터를 잡아오라고.” 「…….」 수화기 너머의 곤혹감은 진정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침묵으로 느껴졌다. 단순한 감이 아니라 「간파」에 의거하여. 그러나 겨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왜 이제 와서 살아있는 알파 트릭스터가 필요할까. 내 추측은 이래요. 유라시아 대륙에 트릭스터를 풀어놓으려는 거죠. 여기엔 트릭스터 중에서 그나마 지능과 전파변조능력이 낮은 알파 트릭스터가 적합하겠고요.” 「……예?」 “그렇게 하면 그쪽 전선에서도 에스더의 쓸모가 생겨요. 단순히 무력으로는 돌파하지 못할 거리를 극복해서, 감염의 발원지, 제로 그라운드로의 진격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긴 하지만요. 그러나 탤벗, 당신이 그랬잖아요. 나도 나중엔 관계자가 될 거라고.” 탤벗은 그저 겨울이 연관될 거라는 말만 들은 듯 하나, 겨울의 능력이 전투 이외의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제로 그라운드로 가는 동안 변종집단을 기만하거나 적극적으로 회피하더라도, 교전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땅이 그토록 광활한데, 전파 수신을 가능케 하는 형질이 재감염을 거쳐 고르게 퍼지기까지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요구될 것인가. 그리고, 그 시간을 충분히 기다릴 여력은 있을 것인가. 러시아 전선이 그 시간을 견뎌 내리라는 보장은 없다. “문제는 러시아네요. 아주 기겁을 하겠죠. 변종들의 조직력이 강화될 테고, 훨씬 더 교활하게 움직일 것이고, 무엇보다 트릭스터가 포함된 변종집단은 넓은 땅 어디에서도 길을 잘 잃지 않게 될 테니 말예요. 모겔론스의 원형을 확보해서 방역전쟁을 끝낼 화학무기를 만드는 동안, 러시아는 전 국토가 싹 다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무엇보다, 에스더가 배신을 한다면 어찌 될는지. 트릭스터들의 통신을 감청하여 해석하게 만드는 것과, 에스더가 만드는 전파를 광역으로 뿌리는 건 요구되는 신뢰의 차원이 다른 모험이다. 에스더가 변종들에게 언어와 지식을 전달할 경우, 예상되는 피해는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 미국이야 대양을 낀 건너편이니 최악의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다. 러시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추측엔 정보국의 역할이 포함된다. 겨울이 말했다. “따라서 러시아 쪽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여기엔 은밀한 거래와 부적절한 방법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어요. 바로 정보국의 전문분야죠.” 「저는,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네, 믿어요. 하지만 이 통화를 엿듣고 있을, 혹은 보고받게 될 누군가는 알겠죠. 대답은 나중에 그 사람에게서 들으려고요. 내 예상이 맞다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주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라도 할 거라고 봐요.” 「……하아.」 “할 말은 여기까지. 이제 에스더와 연결해줄래요?” 「알겠, 크흠, 알겠습니다. 이 전화가 끊어지면 곧 화상통화 프로그램에 참가 요청이 뜰 겁니다. 그걸 승낙하시면 됩니다. 접속 암호를 불러드릴 테니 메모해두십시오.」 “네.” 대답은 했으나, 「암기」 보정으로 충분했다. 암호를 두 번 부르고 겨울에게 확인한 탤벗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지요.」 “오늘 무척 반가웠어요. 터커, 켈리, 코왈스키 요원에게도 안부 전해줘요.” 「터커는 직접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이스트 포토맥 파크의 승마회에 참석하시잖습니까. 외국 정상들이 많이 몰리는 행사다보니 정보국에서도 요원들을 보냅니다. 저와 터커도 거기에 포함되었고요. 운이 좋다면 나머지 둘도 추가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아무튼 그럼 그날 보죠.” 「예. 항상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중령님.」 “별말씀을. 편안한 밤 보내요.” 겨울은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예정된 신호가 들어왔고, 겨울이 팝업 메뉴에 암호를 입력했다. 최초 화소가 깨지던 화면이 조각을 맞춰가듯 선명해진다. 이윽고, 조금씩 끊어지긴 했으나, 전보다 더 부풀고 무너져 내린 에스더의 얼굴이 나타났다. 「와-아-!」 에스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미소일 것이다. “에스더.” 「중령니임.」 바로 무언가를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색하기도 하다. 이는 에스더도 마찬가지. 여러 심회가 스치는 머릿속에서, 겨울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몇 마디를 골라냈다. “그때 이후로 줄곧 궁금했어요. 당신이 무사한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가 입힌 상처는 아물었는지. 그로 인해 아직까지 아파하진 않는지.” 「아프지 않아요오. 다, 나아았어요. 보세요. 피, 안 나요.」 카메라가 잠시 돌아갔다. 형체도 없이 찢겨졌던 에스더의 하반신은 현재 뭉툭한 살덩이처럼 재생되어 있었다. 실로 경이로운 회복력이긴 하나, 예전처럼 움직이기는 불가능해진 셈이었다. 소녀는 묶여있지 않았다. 화면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린 에스더가 겨울에게 사과했다. 「저어야말로오, 죄송해씀니다아. 그때에, 마아지막에, 마아니, 아프셨을 텐데에.」 “……아니에요.” 「히……. 주웅령님으은, 잘못 없어요오. 처음부터어, 싸우기이 싫다고, 며엋 번이나아, 하셨었잖아요. 조으은, 말씀도오, 해주시고오. 오히려어, 저 때문에에, 죽을 뻔 하셨는데에. 제가아, 더어, 미안해야아죠. 다친 곳으은, 괜찮으세요오?」 “네. 그때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그리고 내 몸은 꽤나 튼튼하거든요.” 「다행이다아.」 겨울은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표정을 감추지는 않았다. 에스더가 다시 끔찍한 미소를 짓는다. 「걱정하지이 마아시라고, 연라악, 드린, 거예요. 저어, 여기서어, 저엉말 잘 지내고오, 있거든요오. 여어기 계시는 박사님드을, 제가아, 먹고 싶은 거어 있으며언 다 가져다 주시고요오, 하아고 싶은 것도오 최대한 다아 들어 주우려고 하세요오.」 “목사님과 신부님도 계신다면서요?” 「오오오. 중령님도오, 그거어, 들으셨구나아.」 “그 분들도 마음에 들어요?” 「네에. 박태선, 하고는, 와안전히, 다른, 분들이라서요.」 “그래요…….” 에스더는 말끝을 흐리는 겨울을 불렀다. 「중령님.」 “네.” 「감사합니다아.」 광기에 차서 외치던 감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거칠게 갈라졌으나마 편안한 음색이었다. “감사라니……. 무엇에 대해서요?” 「덕분에, 새로운 기회르을, 얻을 수 있었어요오. 하나님 나라로오, 가아기 전에, 사람들을, 아아주 마않은 사람들을, 도와줄 기회르을, 말이에요오.」 “그 기회는 누가 준 게 아니에요. 에스더 스스로 붙잡은 거죠.” 「히.」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하고 싶네요. 그때 내가 한 말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줘서 고맙고, 사람들을 돕기로 결정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히히.」 에스더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이 순간에도 병든 육체 곳곳에 통증이 있을 것인데, 진통제를 쓴 것인지, 아니면 그냥 참아내는 것인지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으래서 말인데요오, 중령님께서어 말씀 좀 자알 해주세요오.」 “누구에게 어떤 말을요?” 「불안해하느은, 사람들이요오.」 “음…….” 「저르을, 와안전히, 믿을 수느은, 없다는 거얼, 자알, 아는데요오, 그래도오, 조오금,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서요오.」 에스더가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제가아, 마안드는, 전파는, 복사해서어, 넓게에 뿌릴 수도, 있잖아요. 마안약에, 제가아, 괴에물들한테에, 자살하라거나아, 그 자리에서 우움직이지 말라거나, 서로, 잡아먹으라고, 시키며느은, 이 전쟁, 순식간에, 끝날 지도, 몰라요오.」 자살은 일반 변종들에게 확실하게 먹힐지 의문이다. 상호포식도 그렇고. 그러나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가 대사억제를 뜻한다면,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수많은 위성으로 송출하면 한 순간이나마 중남미 전역의 변종들을 침묵시킬 수 있을 터. 트릭스터들이 깨우려고 발악해도 혼란을 극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겨울이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앞서 이미 고민한 바였다. 에스더의 속에 인류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다면, 해당 작전의 결과는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될 것이었다. 설령 잘 먹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평범한 변종들과 별개로 트릭스터들만이 이해할 정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 때문. 분노와 별개로, 에스더가 변종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어찌 확신하는가? 또한 모든 변종들을 동시에 몰살시키지 않는 한, 변종들이 모종의 변화를 통해 에스더의 전파를 무력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남용해선 안 된다는 뜻이지.’ 트릭스터들이 안심하고 전파를 주고받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했다. 놈들이 이쪽의 감청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끔은 일부러 당해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담스럽게에, 생각하진, 마세요오.」 에스더가 말한다. 「말씀드렸지마안, 왜 못 믿는지, 자알 알거든요. 그냐앙, 그랬으면 좋겠다아, 는 정도니까, 너무우, 신경 쓰지, 않으셔어도, 돼요.」 “네. 기회가 되면 이야기는 해볼게요.” 「키히힛.」 겨울은 괴물이 된 소녀의 잦은 웃음이 어느 어두운 감정의 위장이 아니기를 바랐다. 역병이 파먹은 얼굴로부터, 「간파」는 어떤 감정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이 뒤로는 뜻밖일 만큼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 영화, 연예인, 토크 쇼, 그리고 소설과 만화 등에 대하여. 에스더는 그 나이 또래의 청소년다운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런 부분에서 보다 백지에 가까운 건 도리어 겨울이었다. 「중령님은, 놀 시간이, 정말로, 없으신 거구나아. 참, 불쌍하시네요.」 “…….” 불쌍하다니. 할 말을 잃은 겨울을 보며 에스더는 또다시 즐겁게 웃었다. 통화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마지막엔 예의 그 성직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최소 두 사람은 있을 거라더니, 겨울은 세 사람 모두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겨울이 에스더와 허물없이 시간을 보내준 점 자체를 무척이나 고맙게 여겼다. 감리회의 목사는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에스더가 겪은 일을 들었을 때, 그리고 저 모습을 실제로 보았을 때, 너무도 슬프고 끔찍하여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제발 저 가엾은 아이에게 구원이 있기를…….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저 아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사랑의 근본이신 주님의 품속에서 안식을 찾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주께서 제게 내리신 가장 중요한 사명일 것이라고.」 침례회의 목사와 가톨릭의 추기경도 한 마음이었다. 그들 모두가 겨울을 축복했다. 연결이 끊어진 뒤, 실내는 적막에 휩싸였다. 음소거를 해둔 TV는 소리 없는 영상을 보여줄 뿐. 겨울은 방 한쪽에 정리된 선물들 중에서 한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이는 미국 내의 시크교도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싱 소령을 곁에 두고서부터, 겨울에 대한 시크교 신자들의 감정이 굉장히 좋아졌다고. 싱 소령의 것이 그러했듯, 이 장검은 철저하게 실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무기였다. 손잡이도 곧고 묵직한 칼날도 올곧았다. 칼날에 조명을 먹이니 영문으로 쓰인 글귀가 빛난다. 겨울이 속으로 그 문장을 읽었다. 「신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 365 [365화] #轍鮒之急 (4) 여기 외로운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는 평생을 혼탁한 물속에서 살았다. 천종훈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되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낳은 부모조차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야, 너, 저기. 자식을 부르는 말이 매양 그런 식이었기에.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조차도 서로 알지 못한다. 연락처가 있어도 실제로 연락을 하기가 어색했다. 부모와 자식은 그런 관계였다. 형제라도 있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 텐데, 재혼에 재혼을 거듭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기대하긴 어려운 것이었다. 가상현실 기반의 공교육은 친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 가난한 자들의 교육체계가 탄생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은, 그것이 뭐가 나쁘겠느냐고 생각했다. 사후보험의 설계자들은 완성될 트리니티 엔진을 믿었다. 마음을 얻은 인공지능은 모든 인류에게 가장 완전한 친구, 동료, 스승, 그리고 가족이 되어 주리라고.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미성년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는 것보다는, 한없이 완벽에 가까운 가상인격들과 긍정적인 교류를 거치며 성장하는 편이, 보다 성숙한 인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다음. 정책의 결정권자들은 인공지능의 완성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효율성을 따졌다. 그깟 친구 좀 없으면 어떤가. 어차피 사회인이 되고 나면 대체로 소원해질 관계가 아니던가. 결과적으로, 잃는 건 기껏 예외적인 몇 명에 불과하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별 볼 일 없는 법. 사회의 정점에 오른 특별한 이들은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치는 그렇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친구가 없는 가상현실 속엔 학교폭력도 없다. 또한 전 국민에게 최저의 비용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보장할 수 있다. 사람을 대하는 법은, 감각동기화에 기초하여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체험함으로서 학습하도록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커리큘럼으로 구축하는 건 교육당국의 몫이었다. 당국은 대단히 객관적인 기준으로 과거를 재구축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심리학, 철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이 최선을 다하여 내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도 뭔가 모자란 아이들은, 원래 그 정도가 한계일 것이라 여겼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교육을 실시했는데도 그 모양이라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이러한 교육으로부터, 종훈은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허함을 얻었다. 성인이 되어, 일터에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만날 기회가 드문 자리이거니와, 가끔씩 대면하는 이들에게 종훈은 사람이기 이전에 업무상의 기능일 뿐이었다. 인간이 노동으로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하찮은 남자는 언제나 그의 직책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란, 본인에게조차 낯설어지곤 하는 호적상의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탁류(濁流)에서 살아가는 삶이 대개 이런 식이었다. 혼탁하여 눈앞만 겨우 보이는 물살을 끊임없이 헤쳐 나가야 한다. 잠시라도 헤엄을 쉬면 목적지로부터 그만큼 멀어진다. 목적지는 사후가 약속하는 맑은 웅덩이. 그 웅덩이가 어떠한지는 생전의 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 꿈속에서도 종훈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오히려 가상공간에서 쓰는 SALHAE라는 닉네임이 더 익숙했다. 왜냐하면, 생전에 꾸는 꿈은 대개 앞서 간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들만의 사후였으므로. 질적, 양적으로 그만한 가상현실을 생전에 누리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엔 그런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가. 즐거우면 그만인걸.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겨울의 꿈이었다. 다른 많은 사후를 꿈꾸었어도 채워질 줄 모르던 공허함이, 차가운 청량감에 씻겨 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종훈은 허락된 꿈속에서 소년의 모든 감각을 공유했다. 비록 스스로의 의사로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못할지언정, 소년의 말이 자신의 말 같았고 소년의 행동이 자신의 행동 같았다. 그 말과 행동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에, 자신의 뜻과 다르다는 사실이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유라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유라가 눈에 밟히기 시작하고서부터, 종훈은 전보다 더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자 할 때 겨울은 시선을 돌렸고,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자 할 때 겨울은 입을 다물었다. 유라와 맺는 모든 관계에서 종훈은 감각을 공유할 뿐인 타인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꿈은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사무치는 순간들이었다. 그리하여 천종훈은 자신이 한겨울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허나 생각해보면, 종훈은 겨울을 대신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삶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격차를 온전히 느끼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종훈은 겨울처럼 말하지 못하고 겨울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겨울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깨달은 바, 자신이 겨울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유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었다. 이유라라는 가상인격의 일부는, 아무리 적은 비중일지라도, 분명 겨울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을 테니까. 있는 그대로의 이유라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녀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오직 겨울의 사후에서만 사람일 수 있었다. 즉 종훈이 사랑하는 사람은 한겨울의 이유라인 것이다. 천종훈의 이유라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 설령 유라가 변치 않더라도 종훈 자신이 다시 문제였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남의 사후나 훔치고 싶어 하는 모자란 인간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겨울을 만난 이후에 비로소 굳어진 것이다. 겨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한겨울이 될 수 없어요.” 실로 그러하다. 남은 미련으로 계속해서 소년의 사후를 꿈꾸며, 종훈은 더욱 확실하게 자각했다. ‘내 사후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겠지. 난 죽어서도 한겨울이 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사후는 그 길이만큼의 불만족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도달할 웅덩이는 겨울의 호수만큼 넓지도, 맑지도 못할 텐데. 체감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 겨울의 사후를 꿈꾸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만족했을 웅덩이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한 줌의 빗물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지극히 높다. 하물며 그 웅덩이엔 이유라가 없지 않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이 마음도 희미해질 날이 올지 모른다. 허나 그때까지는 대체 무엇에 위로받으며 살아가야 할지. 당장 오늘이 버거운 마당에. 종훈은 이미 지친지 오래였다. 그날까지 견뎌낼 재간이 아무래도 없다. 게다가 유라를 잊을 날이 정말로 오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주 드물게, 마치 어떤 정신병과 같이, 평생을 가는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것이 있다지 않나. 그리하여 종훈은 겨울에게 주는 별로 삶의 미련을 조금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이 유라를 밀어냈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겨울의 말에 유라가 다행이라고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며, 종훈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유라가 감추려는 감정을 알기에 슬프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형언하기 어려운 후련함과 해방감이 더 컸다. 적어도 삶을 끝내려는 사람이 느낄 법한 어두운 감정은 희박했다. 종훈은 또한 SALHAE로서 이렇게 곱씹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였어.’ 죽고자 결심하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컨대, 어둠 속에 별 하나 뿐인 소년의 입장이라든가. 마치 전에 없던 감각기관 하나가 새롭게 생긴 듯 한 기분이었다. 겨울은 앤을 사랑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 진지한 태도는 종훈이 유라를 아끼는 마음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다. 그런 겨울에게 계속해서 유라와의 관계를 기대할 순 없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종훈은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기로 했고, 이는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의 끝을 의미했다. 아울러 제멋대로 욕망을 투사했던 지난날에 깊은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안했다. 유라를 밀어내며, 겨울은 분명 종훈을 떠올렸을 것이다. 겨울로서는 당연한 일인데도 못내 부담이 있었을 터. 그러므로 종훈은 겨울에게 사과와 고마움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다른 욕심도 있지만…….’ 이 욕심을 챙기는 게 겨울에게 새로운 부담을 더해주는 꼴이 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종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마당이다. 또한 이제껏 보내던 별들이 끊어지는 건 그 자체로 어두운 징후이기도 했다. 따라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주는 편이 겨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터이다. 애초에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망설이던 종훈이 편지의 첫 줄을 썼다. “안녕, 겨울. 나 종훈이야…….” 이제 그는 물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물을 벗어나 살아남으려면 물고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할 테지만, 종훈은 그저 물고기인 채로 그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자기살해 겨울은 하나 뿐인 별빛 아래에서 새로 수신한 편지를 읽었다. 덕지덕지 붙은 보안검사기록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첨부된 메일의 특징이었다. 「안녕, 겨울. 나 종훈이야. 천종훈. SALHAE라고 하면 더 알기 쉬울까? 전에 한 번 면회하러 갔었는데.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넌 나와 달리 기억력이 좋은 것 같으니까. 네가 말했었잖아. 사람은 어지간해선 잘 잊지 않는다고.」 그렇다. 잊지 않았다. 「제대로 편지를 쓰는 게 처음이라 어색하다. 난 인간이 멍청멍청해서 글재주도 별로 없거든. 그러니 뭔가 이상하고 안 맞아도 그냥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이래봬도 일주일 내내 고치고 고친 편지라서 말이지. 아주 많이 고민하고 적는 글이야.」 “…….”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유족도 아닌 내가 막무가내로 찾아갔을 때, 그렇게 찾아간 내가 유라랑 어떻게 좀 해달라고 질질 짰을 때, 그걸 보는 넌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냐.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거 진짜로 창피하고 못할 짓이었더라.」 사람이 변했다. 이어질 내용을 알 것 같아, 겨울은 나머지를 읽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읽지 않고 지우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미안. 진짜로 미안. 그 부탁을 하면서, 난 네 입장 같은 건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어.」 「지금은 달라. 다 내려놓기로 작정하니까 겨우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 이거 참,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네. 유라를 아직도 좋아하긴 하지만, 내 인연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난 애초부터 불가능한 걸 바랐던 거지. 사랑받아봐야 내가 아닌 넌데.」 「아무튼 그래. 네가 유라를 거절하는 걸 보고, 아, 이제 끝내야겠구나 싶더라.」 「오해하지 마. 절대로 원망하는 건 아냐. 굳이 말하자면 시원섭섭? 하다고 해야겠지. 이미 말했듯이, 안 될 거라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걸랑.」 「그리고 고맙다. 네 사후를 공유하면서 깨달았어. 아등바등 살아봤자, 내 사후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네 사후를 경험해서 더욱 그렇긴 하지만, 아예 몰랐으면 그쪽이 오히려 더 슬펐을 거라고 생각해. 뭐가 부족한 줄도 모르고, 그저 그게 내가 바라던 거라고 믿으면서,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현재랑 똑같은 사후를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만 정리하려고 해.」 「죽으려고.」 「음, 이렇게 쓰니까 어째 어감이 좀 이상하다?」 「지금껏 자살하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마음이 가벼운 건 처음이야. 예전엔 매번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었거든. 지금은 막, 해방감? 굉장히 자유로워진 기분을 느껴. 약간 서글프기는 해도, 오늘까지 참아온 것들 보다는 훨씬 낫지.」 ……. 「부탁이 있어.」 「내 이름을 기억해줘.」 「죽는 것 자체는 후련한데, 한 사람쯤 내 이름을 기억해주면 좋을 것 같더라. 그게 너라면 더 좋겠고. 사실 요 몇 년간 너 말곤 이름 밝히고 대화를 한 사람이 없었어. 아마 부모님도 내 이름을 잊었을 걸? 난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너는 착한 애니까 이것도 신경 쓰이겠지. 그러니 다시 말할게. 나는 지금 우울하지 않아.」 「마지막 선물로,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네게 내 계좌의 잔액을 전부 다 넘긴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나름 도움이 될 거라고 봐.」 「추신.」 「언젠가 앤의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워주는 날이 오기를 바랄게.^^」 「그럼 이만 줄인다.」 「천종훈이.」 겨울의 시선은 마지막 줄에 오래 머물렀다. 이후 나지막이 쉬는 한숨. 첨부된 별은 되돌려 보낼 수 없었다.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사후보험 약관대출은 오늘 자로 완전히 정리되었다. 즉, 오늘부터는 「종말 이후」의 죽음이 완전한 폐기로 이어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없지만, 겨울은 이제 더 이상의 상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여력도 바닥났거니와,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가능한 만큼은 행복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종훈의 당부처럼. 그러자면 스물여덟 번째의 종말은 논외다. 이는 곧 정신적인 의미의 생존이었다. # 366 [366화] #이미 읽은 메시지 (17) 「대머리47 : 오늘은 어쩐지 시작이 늦군. 프로의 세계에선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건만.」 「에엑따 : 일부러 애태우는 것일지도 ㅋㅋ」 「질소포장 : 애태울 만 한 뭔가가 있었음?」 「에엑따 : 뭐가 터질지 궁금하잖아. 한겨울이 「텔레타이프」로 띄웠던 것처럼 불안요소가 워낙 많으니까. 모든 게 다 터질 수도 있고, 무엇 하나 안 터질 수도 있겠지. ㅎ」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비유하자면 추리소설 같은 상황 아닌가. 모두에게 알리바이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의심스러워서 누가 범인인지 모르겠는 경우. 알고 보니 등장인물 전체가 공범이었다는 반전도 가능하겠네.」 「엑윽보수 : 소설? 소오설? 요즘 같은 시대에 책 읽는 사람도 있나?」 「원자력 : 약 파는 인문서적은 안 봐도 기술서적이라면 꾸준히 찾아본다만.」 「깜장고양이 : 의외로 고전적인 취향 가진 사람들이 좀 있는 고양. 희귀동물 수준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중계채널도 있는 고양.」 「금수저 : 그게 수요가 있을까?」 「깜장고양이 : 돈은 별로 안 되지만 가성비가 좋으니 어떻게든 유지는 된다고 들은 고양.」 「새봄 : 글쎄. 그럼 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망할 것 같은데.」 「깜장고양이 : 꼭 그렇진 않은 고양. 애초에 돈이 별로 안 되니까 하려면 하루 종일 해야 그나마 소득이 있는 고양. 그게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닌 고양. 새봄 고양이는 하루 14시간, 1년 365일 동안 책만 읽으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 「새봄 : 오우 시발;;; 극한직업이네;;; 죽어서까지 그런 짓을 해야 한다니;;;」 「내성발톱 : 즉 그걸 즐기는 정신병자한테만 가능한 일이라는 소리네?」 「깜장고양이 : 그렇다는 고양.」 「엑윽보수 : 아 됐고 방송 시작 왜 안 함?」 「두치 : 그냥 멍하니 페이지만 넘기면 되는 거 아니야? 나 그런 거 잘하는데.」 「깜장고양이 : 아닌 고양. 너처럼 이해력 딸리는 강아지들을 위해서 해석까지 해줘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인 고양. 그거 가지고 토론도 하고 그러는 고양.」 「윌마 : 듣기만 해도 토 나온다. ㅋㅋ」 「믓시엘 :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채널에 모이는 놈들은 제정신이 아닐 것 같다.」 「올드스파이스 : 내가 그런 유형 하나 아는데 상대하기 진짜 피곤함; 사람 깔보는 느낌도 들고, 잘난 척 하는 느낌도 들고, 아무튼 그럼 ㅇㅇ」 「폭풍224 : 뭐 하러 상대해줌?」 「올드스파이스 : 직장 관계자라서 ㅋㅋ」 「폭풍224 : 갑질이네.」 「멈뭄미 : 책은 원래 잘난 척 하려고 읽는 거임.」 「엑윽보수 : 아 씨발 한겨울 ㅡㅡ」 ……. 「まつみん : 혹시 오늘은 쉬시는 걸까요? 지난 내용 되돌려보기라도 해야 하나. (´;ω;`)」 「도도한공쮸♡ : 마츠밍. 혹시 최근 진행에서 개인적으로 즐겨찾기 저장해둔 장면 있어? 이 타임라인이 특히 좋았다, 이런 거.」 「まつみん : 물론입니다! 겨울 씨 앞에서 방뇨플레이! 이게 진짜 최고였어요!」 「도도한공쮸♡ : ……응?」 「종신형 : 방뇨? 그런 장면이 있었나?」 「이맛헬 : 설마 마츠밍, 그 엑셀이라는 축생한테 동기화 했던 건 아니지?」 「まつみん : 왜 아니겠어요? 정답입니다!」 「BigBuffetBoy86 : 오우.」 「믓시엘 : 믓시엘…….」 「Tsathoggua : 신이시여.」 「まつみん : 그헤헤. 겨울 씨 앞에서 오줌을 질질 흘리며 펄쩍펄쩍 뛰어다닐 때의 그 해방감! 그리고 그런 저를 바라보는 겨울 씨의 당혹스러운 시선! 아, 생각만 해도 또 부끄러워져! 너무너무 짜릿해! 말에 동기화하는 부자연스러움도 최고야! 마츠밍,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려! 호에에에에!」 「Владимир : …….」 「まつみん : 여러분께도 강력하게 추천해드립니다! 마츠밍은 이것만 있어도 10년은 더 싸울 수 있어요!」 「마그나카르타 : 10년? 여자가 종마 거시기로 오줌을 싸면서 10년?」 「まつみん : 네! (๑ Ỡ ◡͐ Ỡ๑)」 「흑형잦이 : 후. 역시 일본은 강대국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길 가망이 안 보인다. 차라리 내 사후보험 등급을 S 클래스로 올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엑윽보수 : 아 조선이 일제 새끼들한테 줘팸 당한 것도 당연하당께. 바다 건너 쳐들어오는 놈들이 무시무시하게 음란했던 거자너.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들을 점잖은 선비님들이 어떻게 감당함? ㅋㅋㅋ」 「しんたろう : 닥쳐!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욕하지 마!」 「헬잘알 : 칭찬인데 왜 발끈하는 거지?」 「질소포장 : 그러게. 너네가 이겼다니까?」 「Truman : 미국도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는 바입니다.」 「しんたろう : 제기랄.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미쳤어…….」 「まつみん : 포기하세요, 신타로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뭔가 잘못됐고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은 거랍니다. (っ˘̩╭╮˘̩)っ」 「しんたろう : 니가 말하지 마라! 민족의 수치 같으니!」 「반닼홈 : 네게서도 야한 냄새가 나는구나.」 「진한개 : 여긴 항상 넘모 혼란스러운 거시야.」 「Nyarlathotep :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요. 저는 사후보험을 정말 좋아합니다. :)」 ……. 「그랑페롤 : 야야. 시작한다.」 「스윗모카 : 아, 다행이다. 난 겨울이가 이제 방송 접으려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긔.ㅠ」 「에엑따 : 세계관 망한 것도 아닌데 중간에 접으면 그게 사람새끼냐.」 「이불박근위험혜 : 어? 아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데? 누구지?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Ephraim : 이상하군. 이래저래 위험할 것 같은 이야기는 많았을지언정 사람이 죽을 일은 없지 않았던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동안 평화로웠잖아.」 「새봄 : 음, 우리 모르게 비공개로 조금 진행한 거 아닐까?」 「마그나카르타 : 아냐. 세계관 내 시간 공백이 없음.」 「まつみん : 어쩌면 물리현실의 지인이 죽은 것일 지도 몰라요.」 「앱순이 : 그리 친하진 않았다고 하는 거 보니까 가족은 아닌가봐.」 「돌체엔 가봤나 : 뭐야 그게 ㅋㅋㅋ 가족이 죽어도 딱히 우울하지 않을 텐데,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죽었다고 저렇게 저기압일 수가 있어?」 「하드게이 : 유산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받지 못한 경우라면? 사후보험 들어갈 조건을 못 채우고 죽기를 바랐는데 결국 꾸역꾸역 다 채워서 한 푼도 못 얻게 된 거라면?」 「돌체엔 가봤나 : 그런 경우는 인정 ㅋㅋ」 「まつみん : 우리 겨울 씨는 그럴 사람 아니거든요!」 「돌체엔 가봤나 : 네 다음 빠순이.」 「깜장고양이 : 내가 보기에 한겨울은 지금 끼를 부리고 있는 고양. 약한 모습을 보여서 조안나의 모성애를 자극하려는 계획인 고양. 그렇게 안 봤는데 알고 보니 무척이나 음흉한 녀석인 고양. 감정 연기가 정말 굉장한 고양. 조안나의 저 짠한 반응을 보라는 고양.」 「윌마 : 아우, 씨발. 단순한 포옹이 왜 이렇게 안달이 나냐.」 「Blair : 안달? 난 무척 편안해지는 기분이 든다만.」 「아침참이슬 : 이야……. 조안나 냄새 좋다. 목덜미 깨물어보고 싶다. 하얀 살에 빠알간 이빨 자국을 남겨주고 싶다. 눈물이 살짝 맺혀서는 아프다고 칭얼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미안하다면서 깨물었던 곳을 핥아주고 싶다. 존나 맛있겠다. ㅋㅋㅋㅋㅋ」 「핵귀요미 : 변태새끼.」 「まつみん : 여러분은 저게 연기로 보여요? 저는 진심이 느껴지는걸요. 겨울 씨는 지금 정말로 기분이 가라앉아있는 거예요.」 「불심으로대동단결 :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그대는 관심법을 쓸 수 있는가?」 「まつみん : ? 관심법이 뭐예요?」 「엑윽보수 : 퍄퍄. 진짜로 달달하구나. 새삼 느끼지만, 분위기 연출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구나. ㅋㅋ 여러 번 말하지만 그동안 꾸역꾸역 고구마를 처먹은 보람이 있어. 근데 다시 먹을 자신은 없다 ㅋㅋㅋㅋ」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아마 이게 진정한 사랑의 맛이겠지.」 「내성발톱 : 진정한 사랑은 씨발 ㅋㅋㅋㅋ」 「헬잘알 : 에이, 한없이 진짜 같은 가짜면 상관없지 뭘. 나를 속일 수만 있으면 됨.」 「둠칫두둠칫 : 히익 오따끄」 「려권내라우 : 진짜 사랑이라고 하니깐 갑자기 살해 새끼가 생각나는데. 지금도 있나?」 「휘투라 : 접속자 목록 검색해보니 없는 듯.」 「핵귀요미 : 걘 이제 이 채널을 구독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한겨울 얘가 앤한테 완전히 꽂혀가지고는 이유라를 단호하게 쳐냈잖아.」 「반닼홈 : 엥? 언제?」 「이불박근위험혜 : 그런 일이 있었어?」 「두치 : 뭔 소릴 하는 겨. 유라가 언제 고백한 적이나 있음?」 「핵귀요미 : 하여간 열등한 남자 새끼들 둔하기는 진짜. 유라가 겨울이한테 의지할 사람 있느냐고 물어봤던 거 기억 못함? 그게 힘들 때 나에게 의지해달라는 고백이었단 말이야. 그 미묘한 분위기를 보고도 눈치 못 채다니. 니들 이 방송 절반이라도 소화하고 있니? ㅡㅡ」 「두치 : 아니 시발 그딴 여자어로 돌려 말하면 대체 누가 알아들음?」 「원자력 : 알아들어도 문제다. 나중에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라고 하는 게 여자들 주특기니까.」 「돌체엔 가봤나 : 뭐래 병신들이.」 「멈뭄미 : 전혀 몰랐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내가 비정상인가?」 「헬잘알 : 난 알고 있었지.」 「이슬악어 : 나도. 이건 몰랐던 놈들이 병신 맞는 듯. ㅇㅇ」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모를 수도 있지. 진짜 인간관계를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엑윽보수 : 이 씹선비가 또 지랄이 풍년 ㅋㅋㅋ 아까는 진짜 사랑이 어쩌고 하더니 ㅋㅋㅋ」 「まつみん : 근데요, 혹시 죽었다는 사람이 SALHAE씨 아닐까요?」 「올드스파이스 : 응?」 「まつみん : 친하지는 않았던 누군가. 면회를 갔었다고 했으니까 물리현실의 지인이고, 동시에 겨울 씨에게 의지했던 사람. 겨울 씨가 유라 씨를 거절했으니 실연을 겪은 셈인데다, 본인 입으로 가난하다고 했던 분이 그 전부터 심상치 않은 액수의 별을 선물해왔었잖아요? 어쩌면 그게 자살징후였을지도? (; ・`д・´)!!!」 「믓시엘 : 에이, 설마…….」 「엑윽보수 : 엌ㅋㅋㅋㅋ 정말로 죽었으면 개꿀잼인데? ㅋㅋㅋㅋㅋ」 「깜장고양이 : 듣고 보니 그럴듯한 고양. 병신들의 행동은 우리 같은 정상인들의 예상을 벗어나곤 하는 고양. 살해는 병신 중의 병신이니까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는 고양. 여기 있는 놈들도 조심하는 고양. 우리는 그런 병신이 되어선 안 되는 고양.」 「대머리47 : 소름이 끼치는군.」 「20대명퇴자 : 그러게. 죽은 게 사실이라면 소름 끼치네. 어떻게 그렇게 미칠 수가 있지?」 「아침참이슬 : 나는 앤으로 갈아타서 다행이다. ㅎㅎ」 「대머리47 : 내 말은, 이유가 뭐든 죽은 사람을 비웃는 너희가 소름끼친다는 뜻이었다.」 「20대명퇴자 : ???」 「윌마 : 아, 아쉬워. 앤보다는 이유라가 더 취향이라……. 주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한겨울 얘는 뭐가 좋다고 앤 루트를 타는 걸까. 지금이라도 바꾸면 안 되나. 특히 주웨이는 매번 보내는 편지가 애절하단 말이지. 이름을 쓰는 대신 향수만 뿌리는 게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의미 같아서 ㅠ」 「엑윽보수 : 주웨이 그 여자 아직 같은 호텔에 있을 텐데, 가서 문 두드리면 곧바로 빠구리 한 판 뜰 수 있지 않을까?」 「둠칫두둠칫 : 폴리아모리 DLC가 답이다. 좋다는 여자는 있는 대로 다 받아주는 거지.」 「윌마 : 앤에 이유라에 주웨이에 기타 등등……. 상상만 해도 짜릿하구만. ㅋㅋ」 ……. 「믓시엘 : 한데 이해가 안 가네. 미국이 원래 저렇게 지뢰가 많은 나라인가? 종교단체들이 대놓고 무장단체가 되다니.」 「붉은 10월 : 미국은 원래 민병대 조직이 합법인 나라임. 연방정부에 적대적인 단체는 테러조직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런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음. 남부 독립을 주장하는 정신병자들도 공식적으로는 친정부 단체로 등록하곤 함.」 「이슬악어 : 거 참 신기해.」 「붉은 10월 : ㅇㅇ. 예전에 사상 처음으로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반정부 민병대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기도 했지. 지금 이 세계관의 미국에서는 글쎄, 맥밀런 대통령이 나름 통제하려고 노력을 했겠지만 그래도 행정능력의 한계라든가, 전통적인 정서라든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었을 거야.」 「슬로우 웨건 : 내가……설명하지…….」 「믓시엘 : 아, 넌 필요 없어.」 「아침참이슬 : 아, 앤하고 언제 같이 자지.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ㅠㅠ」 「ㄹㅇㅇㅈ : 난 그거보다 세계관 클리어가 더 기대된다.」 「Владимир : 흠.」 [Владимир님이 별 17,507,473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똥댕댕이 : 가능성이 높……뭐?」 「엑윽보수 : ?!」 「에엑따 : ?!」 「질소포장 : ?!」 「깜장고양이 : 왜애애애옹?!」 「まつみん : 러시아 아저씨?! ∑(´゚ω゚`*)」 「BigBuffetBoy86 : 루스키, 미쳤어?!」 「액티브X좆까 : 뭔가 잘못 건드린 거 아닐까?」 「이맛헬 : 와 씨발 잠깐만. 저게 대체 얼마야?」 「려권내라우 : 별이 천칠백만 개?!」 ……. 「groseillier noir : 맙소사. 대충 1억 루블쯤 되는 금액인데? 루스키 이 바보야! 보드카 처먹고 실수한 거라면 빨리 사후보험공단에 문의해!」 「Владимир : 실수가 아니다.」 「groseillier noir : 아니라고?」 「Владимир : 그래.」 「groseillier noir : 저 엄청난 돈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후원하는 거란 말야?」 「Владимир :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groseillier noir : 일단은……이라니?」 「Владимир : 신경 꺼라. 너희에겐 관계없는 일이니.」 ……. 「슬로우 웨건 : 신 남부연맹주의(Neo-Confederate)로 대변되는……미국 남부지역의 반 연방정부적 정치성향은……그보다 극단적인 신념을 싹틔우는……토양으로서의 환경을 조성하여……그 결과의 하나로서……반정부 민병대가……공공연히 활동하게 되었음에도……이를 정서적으로 용납하는 일부 주민들의 태도와……나는 필요 없다니……젠장 할……ㅠㅠ.」 # 367 [367화] #각자의 조국 (1) 커튼 사이로 새는 햇살은 D.C의 아침이 방을 엿보는 시선이었다. 그 가느다란 눈길을 지나 전신거울 앞에 선 겨울이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달아야할 훈장은 전보다 더 늘었다. 약장에 박힌 오크 잎도 많아졌다. 어떤 훈장이든 다중수훈의 횟수를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 명예훈장은 결국 수여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대신 그간 받았던 훈장 일부가 상향조정되었다. 예컨대, 파소 로블레스에서 얻은 동성무공훈장은 두 개의 수훈십자장으로 바뀌었다. 이 또한 명예훈장에 준하는 대우인 만큼, 겨울이 난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저평가 받아왔다는 논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몇몇 선물과 더불어 시크교도들이 선물한 장검을 휴대했다. 이는 보낸 이들에 대한 감사와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겨울의 선택보다는 공보처의 의향이, 나아가서는 백악관의 정책이 더 강하게 반영되어있다. 복도 쪽의 문이 열렸다. “곧 시간이에요. 나갈 준비 됐어요?” 앤이었다. 겨울이 끄덕였다.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요.” 평온한 대답이었건만, 가만히 바라보던 앤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겨울, 무슨 일 있나요? 안색이 어두워 보여요.” “…….” 상대가 앤인지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겨울에게 다가섰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음, 아는 사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오, 유감이에요.” 겨울의 손을 포개어 잡는 앤. “많이 가까운 분이었나요?” “아뇨. 빈말로도 친하다고 하지는 못 할 사이네요. 실제로 만난 건 딱 한 번뿐이거든요. 다만, 심정적으로 나한테 많이 의지하던 사람이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단지 그 뿐이에요.” “……이리와요.” 겨울은 자신을 당기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앤이 겨울을 안아주었다. 체온을 나눠주는 위로.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선 사람의 냄새가 났다. 겨울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다. “쉬고 싶다면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할 수도 있어요.” 귓가에 가까운 앤의 말에 겨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불참하기엔 중요한 행사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에요.” 떨어진 그녀가 겨울의 어깨를 붙잡는다. “솔직히 쉴 틈이 너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겨울은 앤의 손을 어루만지듯이 떼어냈다. 못내 염려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말처럼, 이제부터 가게 될 승마회는 함부로 미루거나 불참할 만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망국의 정상들 중엔 체면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잃은 게 너무 많은 탓. 고로 사소한 일로도, 자기 처지로 인해 무시당했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겨울은 괜한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CIA의 부탁도 있고.’ 오후엔 한국 대통령과 독대할 약속이 잡혀있다. 그래서 겨울이 입은 육군 정복엔 숨겨진 장치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단추로 위장된 카메라와 녹음기라든가……. 후. 시계를 본 앤이 복도 방향으로 손을 펼쳤다. “출발하죠.” 그리고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요원 하나가 겨울에게 목례하고는, 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앤은 그를 슬쩍 노려보고 지나쳤다. 1층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조찬행사에 초대받았다는 피아니스트가 수사국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다. 제압 전, 검문검색을 담당한 수사국 요원은 그녀에게 신분과 방문목적을 물었을 뿐이었다. 수상한 사람임을 미리 파악해 두었던 것일까? 한 번 슥 살핀 앤은 간단하게 알아냈다. “손톱이 긴 피아니스트는 맨발이 예쁜 발레리나 같은 거죠.”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과연 그러하다. “배후가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저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고, 그 대부분이 개인행동이었거든요. 이 호텔엔 유명한 사람들이 워낙 많이 묵고 있으니까요.” 비단 겨울만이 아니다. 명예훈장 수훈자들과 같은 호텔에 숙박하려는 유명인사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 중엔 연예계의 명사들도 존재한다. 열렬한 팬들, 기자들, 파파라치들, 그 외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개인들이 어떻게든 숨어들어보려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쨌든……. ‘유능하네.’ 알링턴 국립묘지에서의 저격미수건도 그렇거니와, 겨울은 수사국을 비롯한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들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만성적으로 인력이 부족할 따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엔 라디오를 통해 흥미로운 뉴스를 접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특수변종 멜빌레이의 지속적인 개체 수 증가로 골머리를 앓던 해군 당국에게 최근 뜻밖의 동맹군이 나타났습니다. 이 동맹군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범고래 무리라고 하는데요, 이 범고래들은 해군 전투함을 멜빌레이가 있는 위치로 유도해준다는군요.」 「해군 축에선 처음엔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주변을 맴돌며 반복적으로 음파를 쏘고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는 범고래들의 동선이 멜빌레이 집단으로 향하는 침로와 자주 겹쳐지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멜빌레이의 증가와 확산에 위협을 느낀 범고래들은…….」 “와우.” 앤이 감탄사를 뱉는다. “신기하네요. 이런 일도 있군요.” 다소 놀랍기는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범고래의 지능이 알려진 수준 그대로라면, 해군 함대와 멜빌레이 사이의 역학관계를 학습하기에도 충분할 것이다. 먹지도 못할 놈들, 직접 물어 죽이자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냥이라 인간을 끌어들이는 모양. 멜빌레이의 치악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차량은 워싱턴 기념탑 동쪽의 도로를 남하여, 다리를 건너,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이 보이는 길목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여길 봄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앤에게 겨울이 묻는다. “어째서요?” “벚꽃이 화려하게 피거든요. 정말 예쁘죠. 겨울에게도 그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도 멋진데요 뭘.” 주홍빛 단풍에 물들어가는 강변의 벚나무들은 바야흐로 선명한 원색의 가을이었다. 겨울은 좋아하는 계절을 곱씹었다. 누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오랜 두려움을 해소한 뒤로, 가을은 겨울에게 드물지 않게 연락해왔다. 가을은 겨울을 위로해주고자 하나, 실제론 대개 겨울이 위안을 주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겨울은 가을이 소중했다. 항상 생각하듯이, 장미는 가을에만 피면 된다. 의지할 상대는 못될지언정, 지금의 겨울을 만든 계절은 가을이었다. 앤이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다 왔네요.” 외곽부터 경호 인력이 통제하는 현장엔 먼저 도착한 차량들이 즐비했다. 개중엔 말 수송용 트레일러가 많았다. 저 중엔 엑셀의 것도 있을 터였다. 호텔에 마구간이 없었으므로, 겨울이 엑셀을 직접 볼 기회는 D.C에 와서도 손에 꼽았다. ‘설마 또 그러는 건 아니겠지…….’ 겨울에 대한 엑셀의 애정은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힘들 만큼 대단한 수준이어서, 간격을 두고 볼 때마다 적잖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고삐를 쥔 마누엘 헤이스가 엑셀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나타났다. “으악! 이 녀석, 진정해! 제발! 으아아!” 여전히 죄수복 차림의 구경거리인 그는 좋아서 발광하려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한숨을 쉰 겨울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착하지, 착하지. 가만히 있어.” 목을 끌어안고 갈기를 쓰다듬으며,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털이 묻는 건 곤란하지만 적어도 땀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오기 전에 잘 씻겨준 듯 했다. 다각다각 소리가 다가오더니,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부럽습니다. 말에게 정말 사랑받고 계시는군요.” 겨울이 그를 돌아보았다. 몇 발짝 뒤에 붙은 경호 인력만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나,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겨울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음. 중령이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장난처럼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친 뒤에, 남자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케임브리지 공작, 앤드류 루이스입니다. 현재는 영국 여왕 폐하의 전속부관을 맡고 있지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겨울은 그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못마땅해 하는 수행원을 곁눈질하며 다가온 앤이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영국의 왕세손입니다.” 겨울이 가볍게 목례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히려 내가 영광입니다. 중령의 용기와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어요. 이쪽은 내 아내 케이트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케이트 올슨이에요. 반가워요, 한겨울 중령.” “전하.” 다시금 목례한 겨울은 왕세손 내외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 두 명은 명단에서 못 봤는데.’ 행사가 행사인 만큼 겨울에겐 사전에 주요 참석자들의 명단이 주어졌다. 허나 거기엔 눈앞의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정상급 인물들만 알아두기에도 벅찰 만큼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영국 왕족을 대하는 예의는 여왕이나 왕세손이나 다르지 않았기에, 겨울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사실 썩 특별한 예법이라는 게 없기도 했고. 앤드류 왕세손이 시선을 돌렸다. “헌데 옆의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신지?” 앤이 자신을 소개했다. “연방수사국의 조안나 깁슨입니다, 전하. 한 중령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수사국엔 우리도 제법 신세를 지고 있지요. 항상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별 말씀을.” 올슨 세손빈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FBI 요원에게 관심이 동한 눈치였으나, 앤은 의례적인 인사만 마친 뒤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위치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앤드류 왕세손이 겨울에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넘치지만, 중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간단하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는 여왕 폐하의 전속부관으로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약 폐하께서 당신께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하실 경우, 귀관은 이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까?” “…….” 영국 여왕은 겨울의 오전 중 한 시간을 차지할 사람이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고, 모범답안도 준비되어있었으며, 겨울의 짧은 침묵은 단칼에 거절하지 않으려는 예의에 불과했다. 적당히 뜸을 들인 끝에, 겨울이 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크나큰 영광이지만, 군인으로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행동은 삼가고자 합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왕세손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권유했다. “그건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전례는 얼마든지 많아요. 예를 들어 미 하원의장이었던 톰 폴리 경은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서 명예작위를 수여받았지요. 또 미 중부사령관이었던 토니 프랭크 대장은 국제사회의 안보에 기여한 공로로서, 영화배우인 안젤리나 졸리 경은 인도주의적 헌신을 인정받아 마찬가지로 명예기사의 작위를 받았어요. 그러한 수여가 정치적이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겨울은 목례와 더불어 재차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느리게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짝, 짝, 짝. “훌륭한 처신입니다, 중령.” 당연히 왕세손의 말이 아니었다. 앤드류 왕세손의 표정에 불쾌함이 떠오른다. 그 시선을 좇은 겨울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낯익을 수밖에 없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거 크레이머?’ 공화당의 대선후보는 겨울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368 [368화] #각자의 조국 (2) 감정을 다스린 앤드류 왕세손이 점잖게 항의했다. “다른 사람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 줄로 압니다, 크레이머 씨.” “그렇지요.” 선선히 수긍하며, 크레이머는 체구만큼이나 큼직한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전하,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 사소한 예의는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곧바로 뭔가를 말하려던 왕세손은, 그러나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공화당의 에드거 크레이머와 민주당의 제럴드 번스는 어느 한 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 즉 절반의 확률로 차기 대통령이 될지 모를 사람에게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또한 이 행사는 외교적인 무례를 탓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왕세손이 망설이는 틈에, 크레이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 안다는 듯이, 친근한 미소를 머금고서. 앤드류 왕세손은 결국 떠밀리다시피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크레이머 씨.” “전에 한 번 뵈었지요, 전하.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왕세손 내외와 악수를 나눈 크레이머는 겨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중령. 초면이지만 도저히 초면 같지 않군요.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져요. 당신에게도 내가 그렇기를 바랍니다.” 목소리가 크고 걸걸하되 거칠지는 않았다. 겨울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당신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하하. 부끄럽군요. 그 누구라도 중령만큼 훌륭하긴 어렵겠지요. 훗날 서로 경례를 하는 날이 온다면 서로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겁니다.” 서로 경례를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가 공직자인 상황, 즉 크레이머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를 암시한다. 겨울은 무난한 답변을 골랐다. “시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렴요. 잠시 후에 다시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이 첫 만남인 만큼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것 자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나, 크레이머는 왕세손 부부까지 끌어들였다. “왕세손 내외께서도 같이 찍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걱정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천사인 내 아내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제가 이 자리에서 알게 된 일은 결코 밖으로 새지 않을 겁니다. 우린 친구잖습니까.” 한 순간 앤드류 왕세손의 낯빛이 흐려졌다. 이 자리에서 알게 된 일이란 겨울이 명예기사작위를 거부한 사실을 뜻할 것이었다. 영국 여왕이 아예 처음부터 작위를 내리지 않는 것과, 제안을 했음에도 거부당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였다. 이걸 언론에 흘리면 크레이머에겐 나름대로 이득이 된다. 영국 왕실로서는 피하고 싶을 가십이다. 그렇잖아도 캐나다의 영연방 탈퇴 논의 등으로 인하여 왕실의 체면이 중요한 시점 아니던가. ‘왕세손이 경솔했다고 해야 하나…….’ 말 몇 마디로 상대를 쉽게 농락하는 크레이머도 대단하지만, 노출된 장소에서 중요한 제안을 한 앤드류 왕세손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여왕을 배알하기 전에 의사를 확인해두려면, 이런 자투리 시간이 아니고선 불가피한 부분도 있었을 터였다. 크레이머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핸드폰을 들이댔다. “자, 모이십시오. 환하게 웃어주시고요.” 그래도 이런 일에 익숙한지 왕세손 내외는 기품을 유지했다. 크레이머는 겨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남은 손으로는 V를 그려보였다. 그의 손은 워낙 커서 겨울의 어깨를 다 덮고도 여유가 남았다. 신장차이는 거의 20센티에 달했고. 덕분에 가까이에서 보는 그는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덩치가 크다보니 구도는 자연스레 그가 중심이었다. 보좌관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찍습니다. 셋, 둘, 하나. 치즈.” 찰칵.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왕세손 부부는 다른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켰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중령. 그리고……크레이머 씨.” 떠나는 표정들이 그리 개운치 못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어준 크레이머는, 만족스럽게 투레질하는 엑셀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그 유명한 엑셀이로군요. 오염지역에서 무리를 이끌고 일 년 간 살아남은 명마! 한겨울 중령의 네 발 달린 전우! 듣자니 카라예프 대통령이 선물한 아할 테케를 일격에 쳐 죽였다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아깝진 않았습니까? 요즘 아할 테케는 부르는 게 값인데 말입니다.” 종말 이후를 대비하는 부자들은 예로부터 명성이 높은 금빛의 명마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들은 제 국민을 내팽개치고 망명하여 말 장사에 여념이 없는 독재자를 비난했지만, 그러한 비난이 마시장의 거래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겨울은 담담하게 답했다. “애초에 제가 가질 말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과연. 욕심이 없다는 건 훌륭한 미덕이지요, 한겨울 중령.”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크레이머는 겨울의 이름을 바르게 발음했다. 이는 사람들이 겨울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는 방식이며, 정치인들에게는 하나의 도구였다. 크레이머가 겨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저기 있는 저 남자. 이름이 마누엘 헤이스라지요?” 잠깐 돌아본 겨울이 끄덕였다. “예.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라예프 대통령이 저 사람을 무척이나 죽이고 싶어 하더군요.”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에서요?” “그렇습니다. 중령에게 주었던 말은 그의 목장에서 가장 훌륭한 녀석이었거든요. 그런 명마를 일개 사형수가 관리소홀로 죽도록 만들었으니, 그렇잖아도 불같은 성미가 폭발할 수밖에요. 온갖 채널로 난리를 치더랍니다. 미루었던 사형을 집행하라면서.”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내정간섭이지요.” 크레이머가 겨울에게 공감을 구한다. “그토록 형편없는 인간들이 엄청난 자산과 권리를 보장받으며, 이 훌륭한 나라에서 큰소리를 내는 현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잘못된 겁니다.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그런 인간보다는 일개 사형수에 불과한 저 마누엘 헤이스 씨가 더 중요합니다. 중요해야 합니다. 왜냐? 헤이스 씨는 어쨌든 미국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집행해도 우리가 시민들의 대의로서 집행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뇨……. 맞는 말씀이십니다.” “미국의 보호를 받으려면, 미국과 함께 싸울 사람이라면 그만한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더 확실한 자격을 증명한 한겨울 중령, 바로 당신처럼.” “크레이머 씨.” 잠자코 듣고 있던 앤이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한 중령님은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선약을 잡은 분이 계십니다.” “아, 걱정 말아요. 그게 바로 나니까.” “무슨…….” 곤혹감을 내비치는 앤에게, 크레이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명단엔 찰리 프레스턴이라고 되어 있을 거요, 요원.” “가명을 쓰셨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압니다. FBI의 신원검사는 철저하지요. 단지 프레스턴 그 친구가 나의 오랜 지지자일 따름입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뭐, 사적인 친분이라는 게 꼭 알려져 있을 필요는 없는 거지요. D.C에선 누구나 숨겨진 한 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기습은 언제나 효과적인 전략이다.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좋고, 상대 후보에게서 대응할 여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크레이머가 손짓했다. “못 믿겠다면 지금 바로 전화해보십시오. 어서요.”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확인해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앤은 한숨을 삼키며 전화기를 들었다.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통화를 마친 앤이 떨떠름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칙은 결국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요. 허나 이 크레이머가 수상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 대선후보에게 수상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큰일일 것이었다. 또한 그 영향력으로 인해 마냥 원칙을 고집하기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것을 알기에, 크레이머에겐 여유로운 자신감이 넘쳤다. “깁슨 요원.” “예.”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은 잘 압니다.” 앤의 안색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러나 날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나와의 만남이 한겨울 중령에게 해가 되진 않을 테니.” 막 던지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앤과 겨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아는 것만으로도 CIA, 또는 FBI 쪽에 연줄이 있다고 봐야 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과거 앤과의 통화에서, 겨울은 수사국 내의 분위기에 대해 들었었다. 초과업무에 시달리는 요원들 가운데 크레이머의 지지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어때요. 괜찮겠습니까?” 확인하는 크레이머에게, 앤은 책임자로서 끄덕였다. “말씀 나누십시오.” “고마워요, 요원.” 크레이머가 겨울을 향해 돌아섰다. “이거 참, 이야기가 끊기니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네…….” “아무튼 이어서 말해보자면, 중요한 건 자격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권리라는 건 없어요. 이 나라는 처음부터 투쟁으로 만들어졌지요. 하물며 이렇듯 어려운 시기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격을 증명할 기회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겁니다.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있지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 그것이 바로 미국의 정신이며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표현은 좋다. 생각 자체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험에 내몰릴 사람들에겐 가혹한 신념이기도 했다. 하물며 그 시험이란 역병이 들끓는 전선에서의 목숨을 건 싸움이거나, 그보다 더 가혹한 무언가일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비참한 경멸 속에서 연명할 것이고. 그러나 크레이머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크레이머가 호소했다. “중령. 나는 당신에게 내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난민 출신인 당신에겐 내가 나쁘게 보이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정하겠습니다. 솔직히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겨울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크레이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하하. 듣기 좋은 거짓말보다는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잠시 바라보던 겨울이 물었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러자 곧바로 나오는 대답. “중립.” 크레이머는 강조하듯 한 번 끊고서 말을 이어갔다. “나아가서는, 한 중령이 나를 편들어줬으면 하는 기대도 조금 있습니다. SNS, 한국계 시민들의 지역 협력체들에 대한 비공식적인 연락, 여기에 당신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까지. 상부와의 마찰을 각오한다면 대선에 영향을 미칠 방법은 얼마든지 많지요.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은 돌발행동을 한다고 해도 곧바로 잘라낼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즉 백악관과 국방부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라는 뜻이다. “물론 중령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상당히 높겠지요. 편을 들어준다면 높은 확률로 이기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모든 것을 갖든가, 모든 것을 잃든가.” “그런데도 권하시는 건가요?” “나는 계산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의 친구를 절대로 잊지 않아요.” 곱씹을 시간을 준 뒤에, 크레이머는 어조를 바꾸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실적으로 원하는 건 중립입니다. 번스가 같은 권유를 해도 흔들리지 말아 달라 이겁니다. 지금처럼 그저 가만히 있으면 돼요. 중령 입장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손해가 없잖습니까.” “…….” “아니, 오히려 나의 정책적 지향점이 당신에겐 더 이득이지요.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의 최초 제안자가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은 명성이 곧 예산이 되는 제도였다. 따라서 최고의 수혜자는 겨울일 수밖에 없다. 겨울이 말했다.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이라. 뭡니까?” “당신께서 그리스의 섬 프로젝트를 폭로하실 때, 아직 밝히지 않은 또 다른 비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무엇이고, 언제쯤 공개하실 예정이신지요?” “오, 이런.” 머리를 흔드는 크레이머. “그 비밀은 그냥 묻어두려고 합니다.” “……묻어두신다고요?” “그래요. 그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자들에게도 곧 그리 알릴 예정입니다.”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근거도 없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 터이므로. 크레이머의 얼굴에 스쳐가는 그늘도 그런 맥락일 것이었다. 겨울은 질문을 새로 고쳤다.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는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뭐…….” 크레이머가 입맛을 다신다. “나는 대선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그 승리의 대가가 완전히 분열되어버린 조국이기를 바라진 않아요. 단지 그뿐입니다.” “…….” “우리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둡시다. 내 홍보실장이 원하는 건 따로 있거든. 에드거 크레이머, 한겨울 중령과 함께 말을 달리며 방역전선과 난민구역의 현실을 듣다. 그리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뭐, 대충 이런 거지요. 실제로 내가 기대한 바이기도 하고.” 대화하는 내내, 크레이머의 보좌진과 경호원들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여 엿들을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앤은 그들을 영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 369 [369화] #각자의 조국 (3) 크레이머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겨울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믿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비록 「통찰」과 「간파」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크레이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겨울을 「기만」할 역량을 갖췄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대선후보의 언변과 몸짓은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참모들의 조언이 반영된 결과물일 터. 즉 크레이머가 보여준 모든 것이 겨울에게 맞춰진 연출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어쨌든, 진심이건 아니건, 크레이머는 겨울에게 깊은 호의와 풍부한 관심을 드러냈다.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지난 경험을 묻고, 농담을 건네고, 웃고 떠들면서 천천히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하여 헤어질 즈음이 되어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출발지점으로 돌아온 크레이머는 말고삐를 측근에게 넘기고 겨울에게 작별을 고했다. “참 즐거웠습니다. 중령과는 말이 꽤나 잘 통하는군요.” “저 역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그와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음에도 그럭저럭 양호하게 대처한 편이었다. 적어도 불필요한 적대감을 쌓진 않았다. 받은 제안을 곱씹어보건대, 크레이머는 겨울이 중립을 지키기만 해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았다. 이는 한편으로 온건한 형태의 경고이기도 했다. 본인은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어차피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겨울에게는 불필요한 경고였지만. 사색은 이쯤에서 접는다. 영국 여왕을 배알할 남쪽 공터로 이동하면서, 겨울은 달리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을 발견했다. “앤. 외곽 경비인력에 사설 경호업체 소속이 많이 보이네요?” “아.” 앤은 전보다 훨씬 나아진 승마실력으로 겨울과 기수를 나란히 하며 대답했다. “네. 이 승마회가 연방정부의 공식행사는 아니니까요. 본질은 여러 망명정부를 포함한 각국 고위관계자들의 사교모임에 불과한걸요. 사고를 예방할 필요는 있지만, 주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에 매번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기는 어려워요. 우리 수사국만 해도 사람이 항상 모자라잖아요. 다른 부서의 사정도 대동소이한 만큼, 많은 인력을 고정적으로 낭비하기보다는 민간군사기업(PMC)과 계약하는 쪽이 효율적이죠. 비용도 각국 정부가 분담하도록 할 수 있고요.” “그런가요…….” “부분적으로는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요.” “자존심?” 의아해하는 겨울에게 앤이 끄덕여보였다. “아까 크레이머가 언급했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예프 대통령이 대표적이죠.” “그 사람이 왜요?” “철저하게 자기만을 지켜주는 무장병력을 원하거든요.” “본국에서 데려온 경호원들은 어쩌고요?” 앤은 경멸 어린 냉소를 머금었다. “전부 다 해고했어요. 나라를 버린 독재자 입장에선 자국민 출신 경호원들보다는 차라리 생면부지의 외국인 용병들 쪽이 더 신뢰가 갈 수도 있겠죠. 최소한 고국을 잃은 원한은 없을 테니.” “그럼 그 경호원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그런 식으로 버려지는 경호원 및 군인들을 가장 반기는 곳이 또 민간군사기업이에요. 국가정상을 호위할 정도면 대개 각자의 나라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은 실력자들인걸요. 교육만 시키면 훌륭한 상품이죠. 주워다 팔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 장사겠어요?” 이 말을 듣고, 겨울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어깨에 USS라는 회사의 로고를 붙이고 있었다. ‘최고의 고객들과 거래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 퇴역 후 영입을 조건으로 겨울에게 5천만 달러를 제시했던 바로 그 민간군사기업이다. 값을 잘 치러줄뿐더러 상품을 제공해주기까지 하는 고객. 지위가 높기까지 하니 다양한 의미로 최고의 고객들인 셈이다. 겨울이 말했다. “그 사람들을 군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텐데.” 무엇보다 미국 내 이해관계가 거의 없을 이들 아닌가. 얼간이들의 쿠데타가 우려되는 상황에선 꽤나 괜찮은 인적자원이었다. 앤이 쓰게 웃었다. “그리 대단한 숫자는 아닌데다, 용병들에게 나름의 쓸모가 있으니 정부도 용인하는 거예요.” “나름의 쓸모라면?” “여러 가지 있네요. 우선 군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축소하고 싶을 때 유용하죠. 용병 사상자는 군의 인명피해로 집계되지 않잖아요.” “음…….” “그리고 민병대 견제에도 효과적이에요. 반역죄가 아닌 한, 군이 시민들을 목표로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순 없으니까요. 민병대와 용병기업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한들 기본적으로는 민간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고죠. 치안당국이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1차적인 책임은 민병대와 용병들에게 미룰 수 있어요. 대부분은 민병대의 잘못이 더 크고요.” 마지막은 실제로 많은 충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어조였다. 겨울이 묻는다. “남부의 민병대들은 여전해요?” “글쎄요.” 앤은 말에 한숨을 끼워 넣었다. “오늘 이후로는 다소 진정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에요. 중대한 혐의가 확인된 17개 민병대의 거점을 급습해서 600명가량을 연행했다고 하거든요.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네요. 수사국 내부에서는 최소 하나 이상의 반역모의를 완전히 분쇄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곧 언론에서도 보도가 있을 예정이고요.” “와.” “인내가 길었죠. 괜히 들쑤셔서 경각심을 일깨우기보다는 한 번에 소탕하는 편이 효과적이니까요. 가둬둘 감옥이 부족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앤의 표정엔 개운함이 없었다. 아직도 꺼야 할 불씨가 많은 것이다. 이 일이 더 큰 사건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대화를 하다 보니 공원의 남쪽 끝에 이르기는 금방이었다. 일찍부터 야외 오찬을 준비하는 케이터링 서비스의 차량들이 보이고, 그보다 강을 향해 나아간 공터엔 많은 인파가 북적였다. 영국 여왕의 기사 서임식이 열릴 이곳에서 CIA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령님!” 이미 겨울과 재회한 탤벗을 제외한 세 사람, 터커, 켈리, 코왈스키는 거의 비명을 억누르는 수준으로 겨울을 반가워했다. 말에서 내린 겨울은 그들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탤벗과 터커는 참석이 확정이지만 나머지 둘은 불투명하다더니. 마찬가지로 친밀한 인사를 나눈 앤이 다정하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걸로 그날, 그 바다에서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모였군요.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서로를 쳐다본 셋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한다. 대표로서 코왈스키가 넌더리를 냈다. “빈말으로라도 잘 지냈다고 하고 싶지만……. 아시잖아요. 정보국도 같은 처지인거.” 그리고 겨울을 향해 아쉬워했다. “다시 뵐 땐 휴가를 받고 싶었는데, 결국은 또 임무의 일환이네요. 그나마 이것도 억지로 나온 것에 가깝지만요.” “힘내요. 언젠간 모두에게 좋은 시절이 오겠죠.” 겨울의 대답에, 코왈스키가 겨울과 앤을 번갈아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흐음. 보아하니 두 분께는 벌써 좋은 시절이 온 것 같은데요? 감독관님만 봐도 알겠어요. 아주 화사하게 꽃피셨네요.” 앤이 정색했다. “하여간 정보국은 도움이 안 되는군요. 잡담은 그만두고 임무에 집중하죠. 현재 상황은?” CIA 요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탤벗이 공터 방향을 가리켰다. “서임식이 끝날 때까진 여유가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별도의 팀이 감시하는 중이고요. 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놀러 온 거나 마찬가지이니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셔도 무방합니다.” 이에 코왈스키가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항의한다. “도청이랑 네트워크 감시 시스템을 누가 관리하는데 이래요?” “아, 참. 그게 있었지.” 우스갯소리처럼 오가는 회화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겨울은 거리를 두고 서임식을 지켜보았다. ‘왜 야외에서 진행하는지 알 것 같네.’ 장엄한 건물을 빌리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여왕의 건재함을 효과적으로 과시하기 어려웠을 터. 9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본인이 직접 준마(駿馬)를 달려 건강한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복장의 근위기병 두 기가 그녀를 뒤따른다.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벚나무들은 색채가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워, 워. 여유롭게 속도를 줄인 여왕은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박수와 웃음, 예의바른 환호로 영국의 군주를 환영했다. 국운이 기울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본토를 사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의 수장이었다. 보조단상에 선 궁내장관(Lord chamberlain)이 참관자들을 향하여 여왕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캐나다, 그 밖의 국가들 및 영토의 여왕이시며, 영연방의 지도자,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이십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궁내장관은 같은 내용을 프랑스어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영어를 쓰지 않는 캐나다 국민 일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Sa Majesté Elizabeth Deux, par la grâce de Dieu Reine du Royaume-Uni, du Canada et de ses autres royaumes et territoires, Chef du Commonwealth, Défenseur de la Foi」 취재를 나온 기자들이 연달아 플래시를 터트렸다. 기사서임식이 꽤나 드문 구경거리임에도, 겨울이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른 명예훈장 수훈자들이 작위를 받는 동안 겨울이 참관자로 앉아있으면 그림이 무척이나 이상할 것이기에. 영국 정부 입장에선 겨울을 초빙하고자 쓴 돈이 아까울 상황이지만,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이것이 나름의 배려임은 아는 듯 하다. 한편 겨울은 행사의 설계가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명예훈장 수훈자들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이 때 이상으로 여왕이 주목을 받을 기회는 드물지 않을까, 하고. 서임을 받을 사람 중엔 레인저 연대 소속 에머트 대령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앞으로 나아가 가볍게 목례한 그는, 다리가 짧은 의자처럼 생긴 받침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궁내부장이 그의 공적을 간략하게 알렸다. 「레이 에머트 대령. 영웅적인 헌신과 용기로서 인류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기리며,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기사단의 명예 기사작위를 수여함.」 여왕은 예식용 검으로 대령의 양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기사훈장을 목에 걸어주었다. 이후 일어선 대령의 손을 잡고 잠깐의 대화를 즐겼다. 터커가 겨울에게 타겟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저기, 두 번째 줄에 앉아있는 사람이 우-중-영 대통령입니다. 이걸로 보시겠습니까?” 겨울은 그가 건네는 단안 망원경을 사양했다. 보정을 받으면 맨눈으로도 모공까지 보이는 거리였다. 사전에 CIA가 제공한 정보를 접했으되 실물로는 처음 보는 우중영 대통령은, 좋은 풍채에도 불구하고 피로와 그늘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증오로 불타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임이 이루어질 때마다 의례적으로 박수를 쳤다. 행사 자체보다는 옆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에 몰두하는 분위기. 옆에 앉은 사람은 겨울에겐 뜻밖의 구면이었다. “잠깐. 저 남자, 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의 부사장 아닌가요?” 겨울이 지목한 인물을 망원경으로 살핀 터커가 그렇다고 답한다. “예. 클리퍼드 돈 로빈슨이로군요. 중령님께선 어떻게 아십니까?”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요. 우 대통령이 저 사람하고 무슨 관계죠?” 탤벗이 나섰다.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클리퍼드는 사람 장사를 하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출신은 고평가를 받지요. 중령님 때문이기도 하고, 중국대륙에 붙어있는 한국이 열도인 일본보다 오래 버틴 덕분이기도 합니다.” “다른 건 없고요?” “USS는 미국 정부와도 오랫동안 계약을 맺어온 유서 깊은 용병기업입니다. 회사 차원은 물론이고 클리퍼드 개인에게도 반역음모를 꾸밀 동기가 없지요. 물론 안팎으로 감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코왈스키에게 부탁하시면 불륜 상대와의 비밀스러운 통화내역까지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코왈스키가 어이없어했다. “내가 징계 받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안 들키면 되잖아. 언제나처럼.” “……말을 말아야지.” 겨울이 고쳐 묻는다. “아까 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탤벗. 한국의 형편이 많이 안 좋은가요? 재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했었잖아요. 그렇다고 카라예프 대통령처럼 신뢰를 잃지도 않았을 것 같고.” “우 대통령의 동기는 그런 노골적인 쓰레기하고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데요?” “장래를 대비해, 외화획득 수단으로 애국자들을 내보낸다는 느낌이죠. 혹은 애국심만으론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는 이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거나. 후자의 경우엔 그걸 미끼삼아 아직 남아있는 병력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잘 하면 탈출할 수 있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사니까요.” “……말이 안 돼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미간을 좁히는 겨울. “그게 진심이라면 헛된 복수를 꾸밀 리가 없잖아요. 장병들의 앞날을 위탁한 국가를 왜 망쳐놓으려고 하겠어요. 만약 거짓이라면 미국으로 넘어온 그 군인들이야말로 요주의 대상인데, 미국에서 일할 수 있게끔 받아준 것부터가 이상하고요.” “언제나처럼 좋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선, 사람에겐 광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기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요. 또한 복수의 대상이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대통령 개인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 “다음으로, USS가 고용한 한국인 용병들에겐 위협이 되지 못할 역할만 주어집니다. 예를 들면 동남부지역의 군경 보조라든가, 군수국의 민간수송사단(CTC) 호위 업무라든가……. 어느 쪽이든 정치적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죠.” 민간수송사단은 서부 3개주와 방역전선에 물자를 수송하는 민간인 운송기사들을 의미했다. 포트 로버츠의 보급도 그런 체계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고. 탤벗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이 정말로 사고를 친다 해도 고작 트럭 몇 대를 훔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나마 무기나 탄약, 유류 등의 수송임무는 맡기지 않지요. 식량과 건설자재, 기타 보급물자 따위를 털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인질극이나 자살적인 습격 등 국지적인 소요에 불과할 겁니다. 어떤 음모를 뿌리까지 캐내려면 감수할 만한 위험이죠.” “그런 홀대가 오히려 말썽의 원인이 된다면?” “신입에게는 수습기간이 있기 마련이다. 사측에선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더군요.” 즉 나중엔 처우가 달라질 거라는 약속으로 불만을 누그러뜨린다는 말이었다. 중앙정보국의 대응엔 빈틈이 없었다. # 370 [370화] #각자의 조국 (4) 기사 서임식은 불과 20분 남짓으로 끝났다. 명예작위를 받기로 한 명예훈장수훈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겨울은 여왕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으나, 실제로 만나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전쟁영웅과의 시간은 무척이나 값비싼 상품이었다. 영국 여왕은 그 시간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함으로서 어떤 사람의 호의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다리를 놓아준 이는 영향력 있는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겨울 중령. 연방 하원의원 하드리안 싱 칼사입니다. 폐하,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겨울은 여왕에 이어 그에게 목례하고 악수를 나눴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악수인지. 측면에서 지켜보는 앤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수사국이 그어놓은 선을 농락당하는 기분일 것이었다. 뜻밖의 만남은 공화당 대선후보 하나로 족하건만. 허나 여왕으로선 친구를 초대했을 뿐이니, 어지간해선 비난받지 않을 교묘한 뇌물이었다. 4선 의원을 수상한 인물로 분류하기도 어려울 노릇. 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인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의원만이 아니라 영국 여왕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기에. 귓구멍 안쪽에 붙여둔 초소형 리시버로부터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영국도 꽤 하는군요. 하원의원과의 연줄 만들기, 자국과 캐나다, 미국 내의 시크교도들에 대한 무언의 호소, 시크교를 자기네 분파로 여기는 힌두교도들의 호감 얻기, 소수자에 대한 옹호, 간접적인 민주당 지지, 왕실의 이미지 개선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수로 해치워버리네요.」 이름에서 드러나듯 칼사 의원은 시크교 신자였다. 그 중에서도 정통파인 칼사 암리트다리의 일원이라고, 웹을 검색한 코왈스키가 설명했다. 임무와 무관하게 제공하는 도움이었다. 식민지배의 결과로서, 영국은 인도 이외의 국가 가운데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였다.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뜻. “그 검.” 칼사 의원은 겨울이 찬 칼을 보고 흡족해하며 묻는다. “바가트 파르마난드 재단에서 선물한 키르판(Kirpan)이로군요. 혹시 제가 온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들으셨던 겁니까?” “아뇨.”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적혀있는 글귀가 마음에 들어서 휴대한 겁니다. 검 자체의 의미도 좋고요. 시크교도들의 검은 약자를 보호하는 용기를 뜻한다고 들었거든요.” 글귀가 왜 마음에 들었는지까지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하원의원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담화가 계속될수록 더더욱 커지기만 했다. 겨울이 그가 믿는 종교에 대해 교양을 넘어서는 이해를 보여주었기 때문. 싱 소령이 들려준 것들을 잊지 않은 덕분이었다. “감동적이군요.” 수염을 길게 기른 의원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바하다르 싱 소령은 시크교 공동체 내에서도 꽤나 유명해진 사람이지요. 그 믿음이 기존의 전통과 배치되는 부분은 있을지언정, 그가 보여준 올곧은 용기는 모든 형제자매들의 모범으로 삼을 만합니다. 아울러 그와 당신의 우정이 보고 들은 그대로임을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은 민감한 소재였다. 겨울은 입 밖으로 낼 단어들을 늦지 않게 골라냈다. “소령에겐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수한 장교이자 훌륭한 인격자죠. 그렇게 좋은 사람이 부당한 처우로 인해 반쯤 타의로 부대를 옮겨야 했다는 사실이 유감입니다.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동료를 얻게 됐으니, 제게 있어선 큰 행운이라고 해야겠지만요.” “오오…….” 칼사 의원이 감탄하며 묻는다. “세간의 종교적 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시다고 봐도 괜찮겠습니까?” 카메라 앞에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를 알면서도, 겨울은 쉽게 긍정했다. “예. 최소한 제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역전선에선 누구든 함께 싸우면 전우입니다.” 겨울로서도 언제까지나 이용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다. 판을 깔아주었으니 얻을 수 있는 것은 얻는다. 다만 상대를 속이지 않을 뿐이었다. 「말 잘 하시네요. 바람둥이의 소질이 보여요.」 장난기 섞인 코왈스키의 칭찬. “방금 그 말씀, 당신을 믿는 시민들에 대한 약속으로 받아들여도 좋을는지요?” 더욱 파고드는 하원의원에게, 겨울은 다시금 끄덕여보였다. “물론입니다. 약속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니까요.”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뜸을 들이거나 당황하지 않는 언변이 진심의 무게를 더했을 것이다. 약간의 대화가 더 오간 뒤에, 여왕과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칼사 의원이 겨울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크교도들 중엔 부자가 많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존재합니다. 인구에 비해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지요.” “그 말씀을 제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앞으로 이끌어나가실 일들이 많으신 줄로 압니다. 조금 전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다면, 즉 장기적인 관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전제 하에, 중령님께선 미국의 시크교 공동체들로부터 전폭적인 경제적 지지를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하원의원도 겨울의 앞날에 타산적인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 대화가 흘러간 다음, 코왈스키가 배경을 보충해주었다. 「칼사 의원의 말은 사실이에요.」 “…….” 「시크교도들 가운데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사람만 헤아려도 열 명이 넘거든요. 이마저도 미국 시민만 따진 거예요. 캐나다까지 범위를 넓히면 더욱 많아질 거고요. 이들이 제공하던 인도 내 칼리스탄 독립운동 자금 역시 갈 곳을 잃었죠. 그 돈을 원하는 집단이 많아질 수밖에 없답니다. 영국 정부도 그 중 하나고요.」 겨울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의원의 지지층이 그 정도로 확실하다면, 겨울을 만나기 위해 굳이 영국 여왕을 경유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통찰」이 반응했다. 현 시점의 정국에선, 소수자의 이해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인이 그만한 거금을 지출하는 것 자체가 적대적인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 자금의 성격이 지나치게 뚜렷하다는 점에서도 주의가 요구되었을지 모른다. 분명 싫어할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코왈스키는 이렇게 평했다.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칼사 의원 자신도 당신의 편을 들어줄 작정이겠죠. 이 만남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 다름 아닌 중령님일 수도 있겠네요.」 거칠게 말해, 주웨이 수십 명 분의 자금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주웨이만큼 가진 것을 아끼지 않을 지지자는 드물겠지만. 칼사 의원과 밀담에 시간을 들이다보니, 정작 이 자리의 주인인 영국 여왕은 겨울과 그리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왕 또한 목적한 바를 다 얻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겨울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진 않았다. 짧은 담소를 나누고, 격려를 하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을 따름. 그러는 내내 여왕은 웃고 있었으나, 겨울은 그녀가 감추려는 피로를 간파했다. 이런 시대에 자기 역할을 다 하려는 지도자들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배알을 마치고 돌아온 겨울은, 엑셀이 사료를 먹도록 마누엘에게 잠시 맡겨놓고, 앤과 요원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데요.” 탤벗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운이 좋으십니다.” “운이 좋다고요?” “공화당과 민주당의 균형이 의도치 않게 맞춰졌잖습니까. 크레이머 후보와 칼사 의원. 서로 상관이 없는 별개의 우연으로 말입니다. 어느 한 쪽만 만났다면 반대 진영에서 서운해 하는 목소리가 나왔겠지요. 게다가 어느 쪽도 해가 될 용건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었고.”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바닥에선 행운도 실력이지요. 앞날을 생각하면 이런 일에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싫네요, 그거.” 장난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겨울을 안쓰러워하는 사람은 앤밖에 없었다. 허나 이 세계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 해당하는 시간을 누리려면, 그 세월을 준비하려면, 겨울 자신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앤을 향해 걱정 말라는 뜻으로 웃어준 다음, 겨울은 코왈스키의 태블릿을 응시했다. “오전 시간에 녹음된 건 당연히 지워주겠죠?” “이런, 빈틈없으시네요.”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건 사양하고 싶어서요.” 특히 크레이머와의 대화는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논란이 될 여지가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코왈스키가 태블릿 액정을 몇 번 터치하더니, 삭제 메뉴를 띄워 겨울에게 내밀었다. “원죄가 있으니 믿어달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직접 누르세요. 저도 생명의 은인을 곤란하게 만들긴 싫거든요.”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죠.” 파일을 제거한 겨울은, 별도의 백업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막연한 믿음과는 다르다. 그녀가 마음먹고 속이면 겨울로선 알 방법이 없을 뿐. 터커가 미소 지었다. “조금만 더 힘내주십시오. 이런 기회마다 꼬박꼬박 마일리지를 적립해두시면 당신께도 훗날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요.” “마일리지?” “저희가 피자 주문만 받는 건 아니잖습니까.” 겨울은 싱겁게 마주 웃고 말았다. 피자 프랜차이즈의 실체에 대해 정확한 언질을 받은 바 없는 앤도 사정을 대충 아는 기색이었다. 수사국은 정보국의 견제자다. 터커는 특급 호텔의 케이터링 서비스가 펼쳐놓은 야외 식당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속이 든든해지면 의욕도 생길지 모릅니다.” 마침 겨울도 시장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터커의 권유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요즘 들어 식사 중에도 상대해야하는 다양한 사람들 탓이다. 생전이었다면, 혹은 보정이 없었다면 소화불량에 걸리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천종훈의 자살 이후 겨울은 여유가 생길 때마다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남긴 메시지를 읽었다. 식사 시간에도 틈이 있으면 마찬가지. 바깥세상은 여전히 잔혹하고 암담하고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과연 겨울 자신이 그들에게 연민을 품을 입장인가 의문스럽긴 하나, 위로를 주는 별빛 하나 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들보다야 훨씬 나은 처지일 것이다. ‘내가 뭔가를 해줄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되찾아가는 희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직시할 만큼의 여유는 생겼다. 천종훈의 부탁은 그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두 번째의 살해를 발견한다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줄 순 있을 것이다. 많은 걸 잃었을지언정 하루하루 조금씩 희망을 꿈꾸기 시작한 겨울에 비해, 바깥세상은 여전히 잔혹하고 암담하고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마음으로 읽지 않은 메시지를 해소하는 데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열심히 읽은 결과, 이 시점에 이르러선 적체되어있던 욕설과 욕망과 저열한 조소의 대부분을 소화해냈다. 때로 상처가 되는 말들이 있었으되 예전처럼 돌이 심하게 구르진 않았다. 겨울은 별빛아이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앤의 덕분이기도 하고, 다시 찾아온 누이 덕분이기도 하다.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오래도록 쌓여있던 로그의 끝자락에 이른 겨울은, 불과 몇 분 전의 기록을 보고 묵직한 당혹감에 젖었다. ‘천칠백오십만…….’ Владимир라는 러시아인이 선물한 어마어마한 숫자의 별. 이는 겨울이 폭군과의 거래로 받았던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7억에 달한다. 아무리 곱씹어도 정상적인 후원이 아닌데, 본인은 또 실수가 아니라고 한다. 이유가 궁금했던 겨울은 그에게 보안 처리된 메시지로 질문을 보냈다.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정말로 이유를 모르는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겼건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면, 지금은 그걸로 됐다.」 회신은 여기서 끝이었다. 질문을 거듭해도 저편의 러시아인은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겨울은 당장 길게 고민할 처지가 못 되었다. # 371 [371화] #각자의 조국 (5) 한국 대통령은 야외 테이블을 갖춘 공원 식당에서 겨울과 마주했다. 푸른 초지와 붉은 벚나무 너머 워싱턴 기념탑이 보일 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이 무척이나 드물었다. 시민들이 공원 곁에 흐르는 물을 두려워하는 탓이었다. 포토맥 강변을 따라 튼튼한 펜스가 세워지고 강바닥엔 음향감시체계가 설치되었으나, 막연한 두려움을 완전히 지우긴 어려웠다. 강변의 주거야 어쨌든, 최소한 피크닉 장소로는 인기가 시들 만 했다. 달리 놀러갈 데가 없는 것도 아니니, 경호 인력을 잔뜩 대동하고 다니는 고위관계자들에게나 괜찮은 장소인 셈. 승마회 측에서 공원을 배타적으로 이용하면서도 큰 비난을 받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식당 입장에서도 나쁜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이 시간 식당 전체를 대절한 한국정부처럼, 특별한 손님들이 손해를 벌충해주기에. 벽면엔 그간 다녀간 수많은 국가 정상들의 서명 및 사진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이쯤이면 조만간 명소로 이름을 알리게 될 듯하다. 리필이 무제한인 값싼 커피를 앞에 두고, 우중영 대통령은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는 승마에 별로 소질이 없더군요. 말이 저를 거부하는 느낌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승마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말과의 교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말을 고를 때는 탈것이 아니라 친구를 찾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품종이 좋다고 다가 아니죠.” 고로 보정으로서의 「승마」는 말을 다루는 기술에 앞서 친화력부터 강화시켜준다. 카우보이의 나라를 꽤 오래 경험한 겨울은 이 분야에 대하여 주워들은 것들이 많았다. 대통령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기억해둘만한 조언이군요. 명성 높은 기병대장다우십니다.” 대화를 시작한 지 20여분. 우중영 대통령은 온건한 태도를 고수했다. 지난 경험들을 묻고, 귀 기울이고,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여기까지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면, 한국 난민들의 실상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였고, 그들을 보호한 겨울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자주 웃는 얼굴에 비해 몸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커피와 다과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떫은맛이 나는 홍차를 기울이는 겨울의 귓가에, 밖으로 새지 않는 목소리가 속삭인다. 정보국을 중계하는 코왈스키였다. 「실속이 없는 대화네요. 뭔가 계획이 있다면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됐는데.」 비록 분노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지만, 한국 대통령이 겨울을 탐색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기가 겉보기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 같아도, 수십 개 국가가 얽힌 현장 경호 탓에 보기보다 꽤 안전한 편이었다. 겨울이 정보국에 협력하는 시점에서 무의미한 이야기였지만. 그러나 위험한 일을 꾸미는 사람이 안전한 길만 골라 걸을 순 없는 것이다. “으음. 이런 질문을 드리긴 저어됩니다만…….” 드디어 대통령이 운을 띄웠다. “그 힘겨운 싸움에서 가족이 그리워지는 순간은 없으셨습니까?” 알아본 결과, 겨울의 가족관계는 미국 측의 서류상으로만 남아있었다. 형제는 없고 부모만 있는 것으로. 없는 그리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겨울은 가을을, 그리고 아직 여름이 되지는 못한 동생을 떠올렸다. 회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충분했다. “왜 이런 걸 물으시는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중령께서 아셔야 할 사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대통령이 마침내 확신을 얻은 사람처럼, 혹은 모험을 하는 사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수십만 국민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정보국이 먼저 들려주었던 비밀 그대로였다. 때로 과장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어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토로가 길어지면서 대통령은 더 이상 평온함을 가장하지 못했다. 눈물 없이 메마른 흐느낌으로, 그는 미국에 대한 원망을 진술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말이 나온다. “그때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 중에 중령의 양친이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겨울이 내비치는 감정을 보고, 조금 더 나아가는 대통령. “미국은 우리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그 빚을 어떻게 받아낼 작정인가. “한겨울 중령. 양친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고국을 도와주십시오.” 짐짓 심호흡을 하고서, 겨울은 결의를 꾸며 되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는 우리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는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습니다.” “…….” “다른 나라들과 같이, 미국은 우리에게도 소정의 방역분담금을 받아가고 있습니다. 기술 로열티와 위성 임대료를 깎고, 부분적으로 식량과 물자 지원의 대가를 책정하고……. 심지어 공화당에서는 그 금액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입니다.” CIA가 예상한 시나리오와는 다른 전개다. “지난날의 잘못을 감안하면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요. 같은 값에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더 많은 경제적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현재 이상의 난민 수용 쿼터와 취업비자를 허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한국계 난민들에게 보다 나은 처우를 약속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이 치러야 할 최소한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분개한 대통령이 바라는 건 파국이 아니었다. “중령께선 미국 내의 저명인사들과 친분이 있으신 줄로 압니다. 그들을 통하여 우리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주십시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입장을 대변해달라는 건,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그 진실을 대신 알려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혹시나 하며 던진 질문에, 한국의 대통령은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 “대중의 눈에 당신이 미국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됩니다. 한겨울 중령은 언제나 미국인들의 편이어야 합니다. 난민구역에서 생활해보셨으니, 그 이미지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그럼 직접 폭로하실 마음도 없으신 겁니까?” “결코 없습니다.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요.” “리스크요?” “단기적으로는 확실한 이득을 보겠지요. 허나 그 사실이 공개될 경우 분노할 사람들을 헤아려보십시오. 한국계 시민이나 난민들 중에 테러리스트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난민혐오정서가 비등한 이 시점에서 그런 사고가 터졌다간……우리 난민들의 처우가 열악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악순환이 시작되겠지요. 저는 결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상을 벗어난 온건함이란 측면에서, 괴로워하는 우중영 대통령의 모습을 크레이머와 겹쳐 보는 겨울이었다. 이쯤에서 안심해도 좋겠으나,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 사실이 공개되는 게 정말로 위험하다고 믿는다면, 그걸 알게 된 내가 폭주할 가능성도 걱정했어야 정상 아닌가?’ 우중영 대통령은 겨울의 그리움과 분노를 보고서도 비밀을 알려주는 쪽을 택했다. 일견 이치에 맞지 않는 판단인 것이다. 정보국 요원들도 동일한 의구심을 품는다. 「속내를 짐작해보자면 당장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둘이네요. 저 모든 배경에도 불구하고, 중령님을 충동질하는 쪽이 진짜 목적인 경우. 혹은 잃을 게 너무 많은 중령님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한겨울 중령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해봤을 수도 있고요.」 코왈스키가 내놓은 의견에 탤벗이 무게를 더했다. 「전자도 이해가 가는 심계입니다. 위험한 복수와 안전한 침묵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 여지가 충분하지요. 본인의 마음부터가 불확실하다면, 중령님이 걸려들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던진 미끼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곱씹어본 겨울은 어느 쪽이든 침묵하면 그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중영 대통령은 중앙정보국이 상정했던 만큼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을 뿐이다. 앞으로 마주칠 위험요소들 또한 실상은 이처럼 대수롭지 않기를 바라며, 내심 쓴웃음을 짓는 겨울. ‘어쩐지……전보다 겁쟁이가 된 것 같네.’ 손에 넣을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은 손에 넣겠다. 이렇게 마음을 바꾼 후로, 이 세상은 겨울에게 매순간 전과 다른 의미로서 다가오고 있었다. 「종말 이후」에서 겪을 스물일곱 번째 죽음이 두려워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겨울 중령?” 침묵이 길었는지, 겨울을 부르는 우중영 대통령의 음성엔 동요가 깔려 있다. 그러나 겨울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에 바깥으로부터 자그마한 소란이 전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 겨울은, 공원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움직임들을 발견했다. 이는 일부 경호원 및 용병들이 고용주를 보호하며 이동하는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지……?” “밖에 뭔가가 있습니까?” 불안해하는 우중영 대통령에게 겨울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다. 시가지 방향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Sir!” 서로 다른 경호팀을 동반하여 뛰다시피 들어온 앤이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전한다.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두 분 모두 지금 바로 복귀해주셔야겠습니다.” 당황한 대통령이 묻는다. “상황이라니? 대체 어떤 상황입니까?” 앤은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현시간부로 미국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계엄령?! 군사반란이라도 일어난 겁니까?” 겨울 역시 가장 먼저 쿠데타부터 떠올렸으나, 앤은 곧바로 부정했다. “반란이 아니라 생물학적 오염 위협으로 인한 계엄령입니다.” “생물학적 오염이라면…….” “죄송하지만 제겐 이 이상의 답변을 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상황이 당국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드리지요. 조만간 연방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 테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질문을 단호하게 잘라낸 앤이 겨울을 재촉했다. “중령님, 차량으로 모시겠습니다.” 빠르게 끄덕인 겨울은 대통령을 향하여 목례했다. “살펴 가시길. 오늘 주신 말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돌아선다. 항상 타고 다니는 방탄차량은 이미 시동을 건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은 탑승하자마자 앤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예요? 혹시 나한테까지 비밀인가요?” “그렇진 않지만, 아직은 나도 대략적으로만 알 뿐이에요.” “그 대략적인 거라도 알려줘요.” 앤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이르기까지, 최소 수십에서 최대 수백 개체에 달하는 감염변종들이 네바다 주의 서쪽 경계, 그러니까 구 서부 봉쇄선을 통과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그 소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계엄령을 발동한 겁니다. 날짜를 감안하면 지금쯤 어느 주에 은닉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일까. 겨울을 상대로도 무심코 경직된 말투가 나오는 앤이었다. 그나저나 통과와 은닉이라니? 어감이 이상하다. 겨울은 스치는 「통찰」에 설마 하며 되물었다. “설마……. 누가 의도적으로 살아있는 변종을 반입했다는 뜻이에요?” 아니길 바랐으나, 앤은 겨울의 의혹을 긍정했다. “네. 새벽에 체포한 민병대 간부들을 심문해서 얻은 정보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군수국 민간운송사단과 그 호위목적으로 고용된 민간인들 중에 불경건한 연합의 동조자가 있었더군요. 여기에 다섯 명의 검문소장들이 추가로 포섭되었습니다. 돌아오는 화물을 점검하지 않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습니다. 이를 파악한 즉시 기동타격대와 헌병대가 출동했으나, 계획 단계에서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용의자 한 명은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네요.” 앤은 공백을 두고 덧붙였다. “그 남자, 겨울도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내가 아는 사람?” 당황하는 겨울에게, 앤이 이를 갈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말해주었다. “파소 로블레스의 수치, 워너 A. 마커트 중위.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땐 대위였죠. 지휘 상의 중대한 과실 및 직권남용, 난민들에게 저지른 범죄 등으로 인해 강등과 좌천을 당했고요. 재판이 밀리지만 않았어도 한참 전에 연방 교도소에 처박아 놨을 인간인데…….” “…….” 그러고 보면 포트 로버츠의 사령업무를 대행할 때, 중국계 난민들의 민원과 관련하여 마커트 중위의 정보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심리(審理)가 쌓여서 3개월 후에 재판이 열릴 예정이라고. 즉 그는 언제 직위해제와 구속이 이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지만 이런 미친 짓에 발을 담그다니.’ 그 미친 짓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갖춰져 있긴 했다. 기존의 군수체계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규모까지 증강된 육군. 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동원된 민간 운송인력. 서해안 3개주에 대사억제 상태로 숨어있던 변종집단들. 남부를 시끄럽게 만드는 중국계 혐오정서와 종교적 극단주의까지. 그렇다 하더라도, 전선 안쪽으로 역병을 끌어들이다니. 겨울은 깊어지는 한숨을 삼켰다. # 372 [372화] #각자의 조국 (6) 차량이동은 길지 못했다. “조심해!” 앤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십자형의 연쇄추돌. 일그러지는 강철과 알루미늄들이 눈앞까지 물결쳤다. 기우는 버스의 앞바퀴가 운전석의 차창을 스친다. 운전을 맡은 요원이 핸들을 확 꺾었다. 그의 욕설은 중간이 씹혔다. 동시에 걸리는 급격한 제동. 비틀린 관성은 인도를 침범하고서야 사라졌다. 치일 뻔한 보행객이 가슴어림을 누르며 주저앉았다. 쿠웅, 쿵.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피해차량들. 최초의 충돌 현장에선 불길과 함께 먹구름 같은 연기가 뭉글뭉글 솟구친다. 경적들의 불협화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겨울은 이상을 감지했다. ‘사방에서?’ 보정이 작용하는 청각은 향상된 정보를 제공한다. 정확한 방위와 근사치의 거리. 즉 사고가 여기서만 터진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차량을 후진시키던 요원이 원인을 파악했다. “이건 또 무슨 엿 같은……. 보십시오, 깁슨. 교통신호가 엉망진창입니다!” 규칙을 상실한 신호등 탓에 뒤쪽도 완전히 막혀버렸다. 멈춰선 차량들로 인하여 사각의 구획은 감옥처럼 닫혔다. 뚫고 지나가려면 본격적인 기갑차량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교통국이 해킹당한 모양이었다. “계획적인 공격이야.” 입술을 깨문 앤이 뒷좌석 등받이를 열어 추가 장비를 끄집어냈다. 동료와 더불어 무장을 강화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 또한 훈장이 줄줄 달린 재킷을 쑤셔 박고 방탄복을 착용했다. 트렁크엔 항상 쓰던 소총과 권총이 즉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들어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다만 신형 전투복이 없어서 아쉽다. 어쩔까 하던 장검은 짧은 고민 끝에 떼어놓는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 여기에 수류탄, 연막탄, 섬광탄을 달고 전투화로 갈아 신기까지 1분가량 소요되었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골전도 리시버와 방탄모를 착용했다. “세라노, 매복 징후는?” 무전으로 보고를 마친 앤의 질문에, 아까부터 창밖을 살피던 조수석의 요원이 답한다. “없는 것 같습니다.” “정부청사라고 해서 안심하면 안 돼.” 인도에 걸쳐진 차량 정면엔 연방정부 인쇄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앤은 저격을 우려하는 것이다. 늘어선 열주 사이 어디선가 흉탄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여기서 발이 묶이면 곤란한데.” 운전석의 초조한 중얼거림. 그의 이름은 캘러핸이었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했다. 소총과 달리 변종을 상대로는 잘 쓰이지 않는 무기였다. 콰쾅! 굉음과 돌풍이 차체 측면을 후려쳤다. 140미터쯤 떨어진 다음 교차로에서의 폭발이었다. 원인은 아마도 유조차, 혹은 가스 운반차량. 이런 일들이 D.C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무전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앤도 보고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일단 이 주변에서는 더 이상 「생존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없다. 조금 전의 폭발이 마지막이었다. 겨울이 앤에게 제안했다. “우선 나가죠. 좀 더 안전한 곳에서 계획을 짜요.” “하지만…….” “저격 같은 건 걱정 말고요.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숙련된 저격수의 은폐는 겨울의 감각을 교란할 수도 있다. 모든 감각이 천재의 영역에 도달한 지금도 공격 직전에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에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 ‘후방이 비어있기도 하고.’ 도로 서편은 건물은커녕 이렇다 할 장애물 하나 없이 트여있었다. “갈만한 곳은 있어요?” 끄덕인 앤이 모자와 함께 선글라스처럼 새까만 보안경을 건넸다. “겨울, 그럼 이것을.” 겨울은 멈칫 한 다음 받아들었다. 얼굴을 내놓고 다니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을 듯하다. 방탄복에 FBI 이니셜이 찍혀있으므로 시민들에게 수상한 무장인원이라 오인 당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겁에 질리긴 할 테지만. 달칵. 문을 열고, 한층 더 선명해지는 청각적 혼란 속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경호대상인 겨울이 앞섰으나, 앤도, 다른 두 요원도 만류하지 않았다. 전투준비를 마친 한겨울 중령인 것이다. 비명과 울음이 들려왔다. 그러나 교통사고 피해자들을 도울 겨를은 없었다. 이 사태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수습되어야 한다. 기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것이 겨울의 한계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다. 겨울은 바람결에 실린 물 냄새를 맡았다. 가까이에 선착장이 있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건 논외인가.’ 만약 이 공격을 계획한 자들이 승마회에 참석한 국가정상들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지척의 물길을 그냥 비워두었을 리가 없었다. 강변은 저격수를 두기 좋은 장소다. 현재로선 구 독립중대와의 합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전에 진석에게 경고를 해둔 덕분에 중대원들이 단체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수도를 자유롭게 만끽하고 싶었던 중대원들이 불만을 품었으나, 진석은 특유의 화난 표정으로 모든 항의를 묵살했다. 지정사수용 소총을 든 앤이 긴장으로 가빠지는 호흡을 고르며 방향을 가리켰다. 주위가 시끄러운 탓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저기! 만다린 오리엔탈에 안전가옥이 있어요!” 가깝다. 그녀가 말한 특급호텔은 여기서 고작 200미터 떨어져 있었다. “아예 백악관으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세라노 요원의 제안. 북으로 1킬로미터 조금 넘는 거리만 이동하면 된다. 당장 여기서도 워싱턴 기념비가 커다랗게 보였다. 그러나 앤은 고개를 저었다. “시크릿 서비스 입장에서! 지금 접근하는 이는 누구라도 수상해보일 거야! 우리도 애매한 취급을 받겠지! 뭔가를 하기도 어렵겠고!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나아! 뭣보다 굳이 이쪽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어떤 놈들이 어디서 보고 있을지 모르는걸!” 방침이 정해졌다. 겨울이 일행을 선도했다. 이때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시는진 모르겠지만 저희도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 코왈스키였다. 「쏘지 마세요. 2시 방향입니다.」 엄폐물을 확보하고 주먹을 드는 겨울. “잠시만요! 정보국 요원들이 합류하겠대요!” 의아해하는 앤에게, 겨울은 스스로의 귀를 톡톡 두드려보였다. 그제야 아, 하고 깨닫는 그녀. 앤 또한 초소형 수신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윽고 네 사람이 합류했다. 탤벗, 코왈스키, 터커, 켈리. “당신들 소행은 아니겠죠?” 앤의 환영에 탤벗이 쓴웃음을 짓는다. “전과가 있으니 변명하기도 여의치 않군요!” 이때 발밑이 흔들렸다. 교통신호 교란이 지상에 국한되지 않았다면, 지저에서도 거대한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낯빛을 가일층 굳힌 앤이 고갯짓했다. “서둘러요!” 겨울은 연방회계국 남쪽을 통과하는 길을 택했다. 시민들은 화기를 휴대한 여덟 명을 보고 황급히 거리를 두었다. 그 와중에 다시 시민들을 위협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들은 도로상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리무진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량에 달린 국기가 낯설었다. 어느 망국의 정상일 것이다. 겨울은 그들을 무시했다. 호텔 로비에서부터는 앤이 앞장섰다. 데스크에 간단히 뭔가를 말한 뒤 곧장 지하로 향한다. 무장한 호텔 보안요원들을 지나, 그녀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문을 열었다. “여깁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복잡한 통신장비부터 보였다. 그밖에 여러 대의 컴퓨터와 무기가 들어찬 선반도 있었다. 벽면엔 커다란 지도 두 장이 걸려있다. 한쪽은 이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겨울이 꼼꼼히 「암기」해둔 워싱턴 D.C의 지도였다. 나머지 하나는 미국 전도였고. 그밖에 백색 스크린과 프로젝터도 눈에 띄었다. “평범한 안전가옥이 아니네요?” 겨울이 묻자 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유사시 간이 지휘소 역할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녀가 시스템에 전원을 넣었다. “대체 어떤 놈들일까요?” 독백 같은 터커의 말에 탤벗이 대꾸했다. “운이 좋다면 단일 세력이겠지.” 운이 좋다면. 많은 의미를 함축한 한 마디였다. 즉 교통체계를 해킹한 자들과 변종을 반입한 미치광이 사이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도 있었다. FBI, 캘러핸 요원이 경계를 유지하며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때는 이때다 하고 불장난을 치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불씨들 위로 부는 바람. 이 정도의 무질서가 빚어졌으니, 본래 음모로 끝났어야 할 음모들도 기회를 노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현 시점의 치안당국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은 한정된 인력과 대응능력이다. 코왈스키가 자신의 태블릿을 앤에게 보이도록 들어보였다. “자리 좀 써도 될까요?” 선글라스를 벗은 앤이 살며시 눈을 찡그린다.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조건으로.” “당연하죠.” “허튼 짓 하면 쏠 겁니다.” “이래봬도 빚은 갚는 성격이라구요. 특히나 그게 목숨 값이라면.” “……상황 파악부터 도와줘요.” 다른 정보국 요원들도 양해를 구하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다른 기관 소속임에도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역할 분담이 인상적이었다. CIA 정보망에 접속한 코왈스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흠. 이런 짓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겨울은 탤벗을 바라보았다. “공교롭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 말씀입니까?” “최근에 이거랑 비슷한 일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서요. 코왈스키 요원 말마따나, 이런 짓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정보국이 개발했다던 악성코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들려준 사람이 탤벗이고. 그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게 유감이군요. 예. 이번 일에도 지긋지긋한 놈들의 잔당이 엮여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코왈스키. 너한테는 감정 없으니 오해하지 말도록.” 덧붙인 한 마디가 위로가 되진 않았나 보다. 소극적인 동조일지언정, 코왈스키는 한 때 진정한 애국자들에게 협력한 바 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아요. 내 잘못은 알고 있으니까.” “내 말은, 살기 급급한 놈들이 자기 능력을 어디다 팔아먹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야.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도 있고.” “알아요, 알아요.” 개의치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는 그녀. 앤이 프로젝터에 FBI의 상황 지도를 띄워놓고 팔짱을 끼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디서 교전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는 모양이네요. 다른 말썽꾸러기들이 가세하기 전에 사태를 해결해야 할 텐데.” “반입된 변종 추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겨울의 질문을 받은 앤은 지도의 축척을 줄여 남쪽으로 미끄러뜨렸다. “아직은 용의차량을 찾는 단계에요.” “찾을 순 있고요?” “네. 민간운송사단의 모든 차량은 이동경로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거든요. 경로 자체도 정해져 있고요. 다만 시간이 관건이죠. 최초의 반입경로부터 찾아서 단계적으로 짚어나가기엔 여유가 너무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찾아 나서자니 수색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요.” 지도를 보며, 겨울은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앤. 그 정도 숫자의 변종들이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해요? 거의 모든 도시들이 감염확산에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는데?” 라스베이거스만 해도 외곽에 장벽을 두르고 있었으며, 이는 동부의 도시들도 대동소이했다. 또한 거리는 구획마다 대피소와 차단시설을 갖췄다.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는 건 물론이다. 겨울은 유모차에 자동소총과 샷 건을 넣어 다니던 노부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일반 가정집조차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는 시대였다. “만약 번식을 한다면…….” 말끝을 흐리는 앤에게 겨울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숫자가 많을수록 눈에 잘 띄겠죠.” 항공정찰과 위성정찰로 훑으면 된다. 하다못해 군견을 이용한 수색조차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위협적인 규모의 변종집단이 풍길 악취라면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감지 가능하다. 무엇보다, 번식으로 수를 늘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 현재로선 그쪽을 무시해도 좋다고 보는 건가요? 실제보다 과장된 위협이라고?” 겨울은 그녀의 의문을 부정했다. “아뇨. 단지 그것들을 써먹을 다른 계획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저 시선을 끌 목적 이외의 무언가가.” “다른 계획이라는 건?” “모르죠. 그냥 감이에요.” 그렇다. 감이다. 허나 「통찰」을 무시하긴 곤란했다. 항상 맞는 것은 아니지만, 빗나가는 경우가 드문 보정이기에. “괜찮다면 그 지도 좀 볼게요. 보면서 고민해봐야겠어요.” 겨울의 요구에 앤은 선선히 자리를 내주었다. 전쟁영웅의 감을 존중하려는 태도. 그녀에겐 이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명목상 그녀의 임무는 이 사태의 해결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다. D.C의 교통신호는 10분이 지나기 전에 복구되었으나, 도로는 곳곳이 마비된 상태 그대로였다. 무전망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다. 루이지애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선 여러 건의 대형 산불 소식이 전해졌다. 연방정부의 대응능력을 분산시키는 사건들이었다. 다시 10여분이 흐른 뒤. “앤.” 겨울은 CIA 요원들과 의견을 교환하던 앤을 불렀다. “이번 일에 연루되었을지 모를 과격단체들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는 곳도 있을까요?” “아마도요. 전부는 아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건 왜요?” “음, 그 중 방사선 의료기기를 갖춘 병원이 있다면 지금 당장 수색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암시하는 바가 분명하다. 앤이 낮게 신음했다. “……네크로톡신?” # 373 [373화] #각자의 조국 (7) 모겔론스 복합체가 방사선에 의해 붕괴될 때 만들어지는 독소. 정식명칭은 따로 있으나, 네크로톡신 쪽이 대중적이었다. 한편, 의료용 방사능 물질은 암세포 등의 병변을 죽이는 데 쓰인다. 그러니 모겔론스 복합체를 파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여기서 나오는 독소를 정제할 수만 있다면, 테러 목적으로는 살아있는 변종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독소는 장벽과 철조망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분해된다. 중독자들의 광란도 영구적이진 않다. 많은 인명이 희생당할지언정, 변종을 풀어놓는 것보다 안정감이 있다. 최악의 경우에도 진짜 감염이 퍼지지는 않을 테니까. 음모를 꾸미는 불씨들 또한, 결국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병원 목록을 검색해본 앤이 본부로 통신을 연결했다. “나야. 국장님 바꿔. 응. 알아. 급한 용건이야. 빨리.” 귀가 밝은 겨울은 헤드셋 너머의 목소리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통 보고는 간결하게 이루어졌다. FBI 국장은 신뢰하는 감독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확인하지.」 뚝. 연결이 끊어졌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지도상에 수십 개의 기호가 새롭게 등록되었다. 여기엔 정보국도 자산을 제공했다. 수사국, 정보국, 지역경찰의 합동임무부대는 7개의 종합병원을 표적으로 삼았다. 동시에 들이치기 위하여 생긴 불가피한 지연이 20분 남짓. 은밀한 봉쇄가 선행되었다. 이곳에선 그 중 가장 유력한 현장을 스크린에 띄워놓았다. 종교재단 후원자가 운영하는 앨라배마 주 소재의 병원이었다. 「돌입! 돌입!」 화생방 장비를 갖춘 몽고메리 시 경찰 기동대(SWAT)가 네 개의 출입구로 동시에 진입했다. 구식 방호복을 입고도 신속한 움직임. 화면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여기에 가쁜 숨소리가 더해졌다. 대원들의 시야를 빌리고 있는 탓이었다. 지켜보는 앤은 왼 손을 허리에 짚고, 오른 손으로는 주먹을 쥐어 입술에 댔다. 초조함을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가운데, 병원 관계자는 직급 무관하게 용의자로 간주되었다. 계엄령이 발효되었으므로 영장은 불필요했다. 수갑을 채우고 방치한다. 연행과 조사는 곧 후속할 증원 병력의 몫이었다. 「당소 알파 팀. 방사선 구역을 확보하겠다.」 최우선적으로 수색해야 할 구역이다. 인적이 사라진 복도에서, 숨을 몰아쉬는 기동대원이 조용히,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잠겨있었다. 금속으로 된 문짝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기기 보수 문제로 당분간 방사선 치료가 중단됩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물러선 대원이 벽에 붙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복도의 좌우에 바싹 붙어있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명의 대원이 문에 플라스틱 폭약을 부착했다. 팀장은 손가락을 세웠다. 셋, 둘, 하나. 「Breach!」 번쩍! 스피커가 뭉개진 폭음을 토해냈다. 연기 속에서 자동소총 소염기의 섬광이 번뜩인다. 이쪽의 발포가 아니었다. 화면이 휙 돌더니, 쿵 소리와 함께 천장을 비추었다. 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자판을 눌러 다음 대원의 시야로 바꾸었다. 「총격전 발생! 총격전 발생! 부상자가 있다!」 빛을 등지고 악을 쓰며 응사하는 기동대원들. 섬광탄이 무더기로 터지고, 불 꺼진 복도가 쉴 새 없이 점멸한다. 부상자는 하필이면 목의 동맥이 찢어졌다. 치명적인 출혈이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초연을 머금은 탄피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저항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애초에 훈련된 정도가 다르다. 드나들 땐 의사로 행세했는지, 적들 대부분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쓴 방독면이다. “정답이었나 보군요.” 앤이 어둡게 중얼거렸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죽음이 두려운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적 일부가 투항했다. 그 수는 안쪽으로 갈수록 늘어났다. 기동대원들은 포로를 거칠게 다루었다. 목을 맞은 동료가 결국 죽었기 때문. 적을 최대한 생포하라는 지시가 아니었다면 시체가 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 피해를 감수하고 적을 신속하게 제압한 기동대 세 개 팀이 냉장시설을 갖춘 영안실을 점령했다. 창백한 조명이 대원들의 방호복을 적셨다. 개중엔 교전으로 손상된 것도 있었으나, 독소가 뿌려져도 방독면만 멀쩡하면 괜찮았다. 벽면이 네모난 냉장고 문으로 가득한 공간. 지휘관이 그 중 하나에 대고 손짓했다. 「열어.」 샷 건을 든 대원이 엄호하고, 다른 대원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스르르릉. 서늘하게 열리는 관. 지휘관이 탄식했다. 오, 신이시여. 미치광이들이 대체 무슨 짓을. 관 속엔 짓무른 변종이 대사억제 상태로 잠들어있었다. 시체와 혼동하긴 어렵다. 평범한 시체라면 구속복을 입혀놓진 않았을 테니. 얼마나 오랫동안 저온을 견뎌왔을지. 지휘관이 떨리는 음성으로 명령했다. 「닫아.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장을 보존한다.」 변종은 방사선 구역에서도 발견됐다. 의료시설이라기보다는 화학무기 플랜트라고 불러야 마땅할 장소였다. 의료용 방사능 물질 컨테이너 다수가 개봉된 채 방치된 모습도 보였다. 이 컨테이너들이 원래 있어야 할 보관실 역시 활짝 열려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침대에 묶인 변종이 기동대원들을 향해 괴성을 질러댔다. 「캬아아아악!」 덜컹, 덜컹. 제 힘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지고, 침대 아래로 오염된 피와 고름이 뚝뚝 떨어진다. 변종의 맨살은 부풀어 오른 종양으로 가득했다. 저 광경을 만들어낸 자들에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었을까. 겨울은 무기화된 네크로톡신이 벌써 유출되었을 경우를 가정해보았다. ‘발표해야겠지.’ 미국 정부에게 있어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모든 독소를 살포되기 전에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낙관적인 기대였다. 차라리 정부가 먼저 알려야 한다. 미국 전역에서 지금 이상의 혼란이 빚어지겠지만, 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당하게 둬선 안 된다. 역병이 퍼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수습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선수를 빼앗겨도 곤란하고. 본부와 교신하던 캘러핸 요원이 앤을 돌아보았다. “깁슨! 국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줘.” 앤이 헤드셋을 넘겨받았다. “깁슨입니다.” 시간낭비는 없었다. 「계획이 있다.」 국장은 백악관의 비상계획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중간 명령계통을 생략하고 D.C 인근의 실전병력을 직접 장악하길 원한다. 사전준비도 되어있다. 실질적인 지휘는 백악관 지하 사령실과 안보보좌관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한겨울 중령도 합류하길 바란다……. 핵심은 어떤 경우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앤은 전달내용을 빠르게 흡수했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정보국 요원들 말입니까?” 탤벗을 포함한 넷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을 몇 초나 바라보았을까. “예. 믿으셔도 됩니다. 여기는 제가 통제하겠습니다.” FBI 국장은 앤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겨울은 그 모습이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서 보았던 것과 또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 파도치는 밤을 거쳐 성장한 듯 하다고. 사람은 변한다. 변할 수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교신이 종료됐다. FBI 본부로부터 추가로 암호화된 문서가 전송되었다. 이를 빠르게 읽은 앤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중요한 부분을 몇 번 더 읽고서 문서를 파기했다. 그리고 감정을 감추려는 얼굴로 겨울을 돌아보았다. “잠깐, 이쪽으로.”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여 거리를 벌리는 걸 보면 평범한 내용은 아니었다. 정보국 요원들과 수사국의 남은 두 요원들은 눈치껏 다른 데 집중했다. 그들을 흘낏 살핀 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겨울.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말해 봐요.” “위에서 원하는 건 어디든 투입 가능한 예비대예요. 급한 불부터 꺼줄 소방수죠. 명령이 없거나 연락이 두절될 경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요.” “어디로 가면 되죠? 단독행동인가요?” “확실치 않네요. 먼저 시크릿 서비스 요원과 만나야 해요.” 겨울은 내심 갸우뚱 했다. 경호국은 왜? “그쪽은 대통령 경호만으로도 바쁠 텐데, 내 임무를 도와준다고요?” “그건 아니고요.” 앤이 머리를 흔든다. “방금 알았는데,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창설된 대통령 직속 비밀조직이 있대요. 정식 명칭은 화이트 셀(White cell). 평소엔 휴면상태지만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유동적으로 협력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거죠. 구성원은 주로 현역이거나 위장 전역시킨 군인들이고요. 경찰과 기타 기관의 요원들도 일부 있다고 해요.” “나도 거기 포함된 거고요?” “그런 셈이에요.” “그런 셈?” “정확하게는 임시 협력자라고 해야겠죠. 큰 차이는 없겠지만요.” 즉 대통령은 일찍부터 시크릿 서비스 외의 직할 무력조직을 만들어두었고, 구원투수로서의 정예요원들이 이미 현장에서 뛰고 있으며, 겨울은 한시적으로 합류하는 입장이란 설명이었다. “좌표를 찍어줄게요.” 앤이 겨울의 넷 워리어 단말을 넘겨받아, 전술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위치를 표시해준다. 교신에 쓰일 주파수 채널도 알려주었다. 그리곤 미루었던 감정을 내비쳤다. “난 여기 남아야 해요.” 겨울이 웃었다. “잘 됐네요. 서로 걱정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요.” “필요한 거라.” 겨울은 상황지도로 눈을 돌렸다. “혹시 독립중대 소식이 들어오면 알려줄래요? 물론 가능할 경우에만요.” “당연하죠. 다른 건 없고요?” “가기 전에 말해둘 게 있어요.” “뭔데요?” “슈뢰더 대장과 스트릭랜드 소장에 대해서요.” 예상치 못한 이름들에 당황하는 앤에게, 겨울은 그동안의 일들을 간략히 털어놓았다. 슈뢰더 대장이 맡긴 위성전화 번호, 알라모 1 스트릭랜드 소령에게 아버지와의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던 일, 그리고 호텔에서 받은 한 병의 브랜디에 이르기까지. “누굴 믿어야 좋을지 몰랐어요. 물론 앤은 예외지만, 주변 환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괜한 걱정을 주기도 싫었고.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이후의 판단은 앤과 백악관에 맡기려고요.” 위성 전화를 감시하여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겠고, 무언가를 준비해두었을 스트릭랜드 소장과 연락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제부터 바깥으로 나갈 겨울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선택지였다. “그럼 가볼게요.” 돌아서려는 겨울을 앤이 붙잡았다. “꼭, 무사히 돌아와요.” “……그러려고요.” 대답하며, 겨울이 웃었다. “나, 전보다 사는 게 좋아졌거든요.” 인사를 겸하여 포옹하려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러분!” 복잡한 표정의 코왈스키였다. “애틋한 분위기에 훼방을 놓아서 죄송하지만, 이걸 좀 들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D.C 전역에서 이런 신호가 잡히네요!” 그녀가 모두들 들으라고 콘솔의 볼륨을 높인다. [지직……직……요테 6, 코요테 6, 당소 엔트리 1. 착륙지점 확인……군가 도와줘, 제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칙……지금부터 들으실 곡은 토니 베넷의 디 어텀 왈츠……是大疫鬼! 救救我!……반복한다 라인 줄루, 그럼블 1개체, 일반 변종 약……서 돌아가서 맥주 한 잔……그쪽 상황이 어떤지 보고바람……지직…….] 실로 오랜만에 듣는 패턴이었다. “트릭스터의 방해전파?” 설마 음모의 배후세력이 교활한 특수변종까지 확보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복제신호예요.” 농담처럼 말하며, 코왈스키가 자판을 두드린다. 신호의 파형을 대조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프로그램은 도시 곳곳에서 잡히는 신호가 서로 쉽게 중복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국방부가 수집한 트릭스터의 신호 데이터베이스에도 일치하는 파일이 있어요. 누군가 유출시킨 거죠. 아마 송신 장비 같은 걸 미리 설치해놨을 거예요. 무기를 들여오는 것보다야 쉬웠겠죠. 통신설비로 위장하면 그만이니까.” “…….”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 계획을 짠 놈들, 면상 한 번 꼭 보고 싶어지네요.” 무선통신에 지장이 생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도시 전체가 지독한 무정부상태에 빠질 것이다. 겨울은 힘든 싸움을 예감했다. # 374 [374화] #각자의 조국 (8) “불행 중 다행이랄지, 유선망은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터커 요원이 스크린에 자료를 띄웠다. 백악관으로부터 새로 내려온 지침이었다. “특히 비상대피시설의 응급라인은 독립된 통신망을 구성하고 있죠.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생긴 외부단자함을 찾으십시오. 여기, 붉은 원으로 강조된 부분에 넷 워리어 단말이나 노트북 같은 걸 연결하면 인터넷과 유선전화 접속이 가능할 겁니다. 또 전파방해의 영향을 상쇄할 만큼 거리가 가까울 경우엔 무선통신도 어느 정도……아, 이건 필요 없겠군요.” 그의 말처럼, 트릭스터를 상대로 실전을 뛰어본 겨울에겐 무의미한 사족이었다. “백악관 사령실에선 도로교통카메라와 각 대피시설의 외부관찰용 카메라 등을 더해 현장 상황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한계는 있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낫겠죠. 추가로 명령전달 및 상황보고에 공중전화를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하니, 혹시라도 이동 중 전화가 울린다면 가급적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강제사항은 아닙니다.” 그리고 터커는 백악관 사령실의 번호, 군용 통신기를 연결하는 요령 등을 늘어놓았다. 전화상에서의 보고자 신원확인은 음성식별로 대신한다고. 백악관이 직접 통제하는 모든 병력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이것들 모두 미리 준비된 시스템인가요?” 그는 겨울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빠른 대응이 가능하겠습니까?” 하기야 트릭스터라는 괴물이 있는 걸 뻔히 아는 마당에, 무선장애대책이 전혀 없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터커는 캐비닛에서 꺼낸 접속 케이블을 겨울에게 건넸다. “무운을 빕니다, 중령님.” 인사를 받은 겨울은 마지막으로 앤과 시선을 교환한 뒤 안전가옥을 나섰다. 호텔 로비의 풍경은 그새 많이 달라져있었다. 무장한 안전요원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유사시 투숙객들을 보호할 수단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호텔의 명성이 높아지는 시대였다. 수사국이 여기에 안전가옥을 둔 이유를 알 만 하다. 정문을 통과하기도 전부터 먼 총성이 들려왔다. 투명한 문 너머로 수십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늘진 시가지가 보인다. 과연 이 혼란을 신속하게 끝낼 수 있을는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는 겨울. 챙겨 나온 축소형 군장엔 단 한 끼 분의 전투식량이 들어있을 뿐이다. 나머지 무게는 거의 대부분을 탄약류가 차지했다. 이렇듯 배분이 불균형한 것은 보급체계가 확실하게 갖춰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쯤 끼니를 거르며 싸울지언정 탄약이 바닥나선 안 된다. 겨울은 안전가옥으로 온 길을 되돌아가, 처음의 사고현장, 방치된 방탄차량을 지나쳤다. 앤이 알려준 좌표는 내셔널 몰 중심부, 워싱턴 기념비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링컨 기념관이, 동쪽 멀리로는 의사당의 백색 돔이 보이도록 탁 트여있는 공터. 백악관은 나무에 가려져 있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그쪽의 상황을 짐작하게 만들어주었다. 겨울은 반면형(半面形) 방독면을 벗었다. 아직은 독소가 퍼지는 징후가 없다. 건장한 흑인 남성이 다가왔다. “한겨울 중령?” 재킷에 끼운 별 모양의 작은 배지만으로도 그의 소속을 알 수 있었으나, 겨울은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서두르고 싶지만, 신분증부터 보여주시겠습니까?” 을씨년스러운 주위를 둘러본 요원이 자신의 신분증을 내보였다. 시크릿 서비스, 제롬 M. 프랭클린. 끄덕인 겨울이 그에게 다가갔다. 바람결에 옷깃이 날린다. “저격 우려가 있는데도 이런 장소를 고르셨군요.” 요원은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은 위험하지 않은 장소가 없지요.” 곱씹어보니 그렇다. 관공서라고 해서 안전하다고 보기 어렵고, 교차로마다 꽉 막힌 시가지 어딘가에서 접선하기도 곤란하다. 차라리 이곳 내셔널 몰처럼 사방이 트여있는 곳이 나을지도 모른다. “먼저 이걸 받으십시오.” 프랭클린 요원이 PDA를 닮은 기기를 내밀었다. “화이트 셀의 인증 및 피아식별모듈(IFF)입니다. 이미 중령의 지문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군사용품 특유의 투박함이 묻어나는 모양새다. 가동과 조작엔 각각 지문인식이 요구되었다. 인터페이스가 워낙 직관적이어서 조금만 만져보면 기능을 다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눌러보니 네트워크 확장성도 눈에 띈다. 어디든 연결하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식이었다. 다만 기기 자체만으로는 기능상의 제약이 많았다. 요원이 설명했다. “인근에 다른 화이트 셀 요원이 있다면 자동으로 식별이 진행됩니다.” “유효거리가 많이 줄었겠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삼사십 미터 이내에선 확실하게 작동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방해전파에 대한 약간의 저항력이 있지요. 기존의 제식 식별장치와도 호환됩니다. 적어도 현재 백악관이 통제하는 병력으로부터 적으로 오인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해두었고, 그쪽에도 연락을 담당한 요원들이 나가있으니 말입니다.” 삼사십 미터. 시가지 환경을 감안할 때 마냥 짧지만은 않은 거리다. “다음. 이게 있으면 지휘서열을 정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으니까요. 정 무선 환경이 불안정하다면 유선망에 자주 연동시키십시오. 그때마다 각 대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된 좌표가 갱신될 겁니다.” 또한 다른 대원들과 가까이에 있을 땐 자동으로 데이터 교환이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최신정보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지휘서열이라. 겨울이 물었다. “제 위로는 몇 명이나 있죠? 지역 책임자라든가.” “현장인력 중에서는 많이 없습니다. 마주칠 확률은 낮겠죠.” “그 정도인가요? 전 화이트 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데도요?” “그건 기존의 요원들도 비슷합니다. 화이트 셀은 존재 자체가 기밀이었고, 백악관이나 셀 내부에 첩자가 있을 경우에도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으며, 지휘체계가 마비되었을 땐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과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취지로 창설된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시스템적으로 독립된 복원장치라고 해야겠군요. 무엇보다, 당신은 한겨울 중령이잖습니까.” “…….” 당신은 한겨울 중령이잖습니까, 라니. 건조한 어조로 하는 말이라 이상하게 느껴진다. “대통령께선 중령이 보여준 판단력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네크로톡신?” “결정적이었죠. 당신을 투입하기로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진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는 암시였다. 겨울은 받은 모듈을 군장 어깨끈에 결속하고, 선을 꽂아 무전기와 연결했다. 조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좀 더 작게 만들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 점은 좋았다. 정부 입장에서도 예산과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선 피신하실 계획이 없으십니까?” D.C가 공격을 받고 있다. 도로는 막혔어도 하늘 길은 열려있다. 대통령은 왜 전용기로 이동하지 않는가. 이런 뜻으로 던진 겨울의 질문에, 경호국 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어째서? 지하벙커가 있다고 해도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벙커가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백악관 자체가 점령당할 경우엔 시간을 벌 피신처 역할을 해줄 따름이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자칫 대통령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프랭클린 요원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약간의 피로감이었다. “첫째. 급박한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지휘공백이 생겨선 안 되며, 둘째, 이 정도 음모를 꾸민 자들이 하늘을 비워두었을 거라 믿기 힘들고, 셋째, 대통령께서 말씀하시길,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여기서 더 떨어져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그렇군요.” 겨울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님께 전해주세요. 한겨울 중령은 네크로톡신에 관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요원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곧 발표될 예정입니다. 시간을 아껴야 하니, 달리 중요한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우리의 적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용무는 여기까지다. 이런 느낌으로 돌아서는 그를, 조금 당황하여 불러 세우는 겨울. 만난 뒤 고작 3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잠깐만요. 구체적인 지시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까? 아무리 자율적인 판단을 중시한다지만…….” “아직 이해를 못하셨군요.” “…….” “바로 거기서부터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신께서 당신을 보우하시기를.” 이 말을 듣고서야 겨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이해했다. 다양한 수단으로 접촉을 유지할 방침이라곤 했으나, 멀어지는 프랭클린 요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막막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허나 애초에 이 막막함을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뽑았을 것이었다. 가만히 머물면 그 자체로 기준미달이다. 아직 암막에 가려져있는 적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이 실체를 드러내도록 강요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군부대나 다른 요원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후, 하고 숨을 내쉰 겨울이 행동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그로부터 이십분 뒤. 임무수행의 가장 큰 난관은 분노하거나 겁에 질린 시민들이었다. “도와주셔서, 윽, 감사합니다.” 조금 전까지 린치를 당하고 있던 화이트 셀 요원 하나가 겨울에게 헐떡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부상의 정도가 심하다. 겨울은 한숨을 삼켰다. 그와 그의 동료는 본디 지역경찰 소속이었고, 지금도 그 유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둘 다 백인이라는 운 나쁜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숫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 힐 이스트는 흑인들의 밀집 거주 지역이었다. “시민 여러분!” 얼굴을 다 드러낸 겨울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원을 향해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각자의 집이나 대피시설로 돌아가! 사태가 해결되기를 기다려주세요! 이런 무질서야말로 테러리스트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들은 이 틈에 더욱 끔찍한 일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머뭇거리던 군중의 한 사람이 지연된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경찰이 먼저 우리를 공격했다고요! 우린 부당한 공권력과! 뒈지다 만 시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에 나머지 사람들이 거칠게 호응했다. 맞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방독면을 쓰고 온갖 화기와 둔기로 무장했다. 방탄복이나 직접 만든 보호구를 입은 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이 당장 폭도로 돌변하면 겨울조차 감당하기 어렵겠다. 잘 모르는 입장에서 트릭스터를 죽이겠다고 설칠 법도 했다. 분노의 공명이 다시 커지기 전에, 겨울은 비어있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의 주의를 모았다. “저는!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높이는 목청에, 그래도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의 모습. 도로 양측 건물의 유리창 안쪽에선 스마트 폰을 든 손들과 엿보는 시선들이 나타났다. 겨울이 계속해서 외쳤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나중에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저는 그때 여러분을 돕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저를 도와주지 않으시면! 그 나중이라는 게 아예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내일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 “돌아가십시오! 이 도시 어디에도 숨어있는 괴물은 없습니다! 복제된 신호가 뿌려지고 있을 뿐이며! 이 요원들은! 그 신호기를 찾아 파괴하는 중입니다! 정부의 발표는! 백인들을 먼저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군중이 입을 다물었으나 완전한 정적이 찾아오진 않았다. 거리마다 먼 메아리 같은 총성이 울렸으며,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엇갈리기도 했다. 대치한 채로 흐르는 시간은 1초가 1분처럼 늘어졌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겨울의 간청에 고민하거나 찌푸리거나 한숨을 쉬는 사람이 늘었다. 조용히 의견을 나누는 그들의 소리가 점차 한쪽으로 쏠리는 게 보였다. 어느 집단이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여기서는 몸집이 크고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남성이다. 살이 많은 만큼 근육도 많았다. 이마의 주름은 가난하고 거친 세월에 찌든 흔적처럼 보였다. 마침내 다른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되었을 때, 그가 투덜거린다. “젠장.” 두꺼운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아무리 빡이 돌아도 한겨울 중령하고 싸울 순 없지…….” 마음이 급하지만, 겨울은 애써 차분하게 목례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맥 빠진 몸짓으로 손을 흔들었다. “감사는 됐고, 약속 꼭 지키쇼. 당신에게 실망하면 살 맛 겁나게 떨어질 것 같으니까.” 그의 말에, 썩 내키지 않는 분위기로나마 동조하는 나머지 사람들. 아마도 예전부터 행동을 함께해온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등을 통해 연락망을 유지하는 생존주의 단체들이 수도 없이 많은 시대였다. 군중은 뭔가 어색한 분위기로, 하나 둘씩 두서없이 돌아섰다. 시크릿 서비스 요원이 했던 말처럼, 대통령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반역자들의 손에 무기화된 네크로톡신이 있음을 공표했다. 이 소식은, 전파가 무용지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신속하게 퍼졌다. 사람을 경유하는 모든 정보가 그렇듯이, 갈수록 왜곡과 오해가 더해지면서. 그 이후 도시의 무질서는 매분 매초마다 최악을 경신하고 있다. 겨울이 아직 깨어있는 요원에게 물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요?” “예. 일단은……. 그냥 두고 가십시오. 해야 할 일이, 있잖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상체를 힘겹게 세우고 뱉는 침이 묽은 핏빛이었다. 가까운 건물 그늘에 엄폐한 채 교전에 대비하던 다른 요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넷. 겨울과 가장 먼저 합류하게 된 이들이었다. 식별신호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긴 덕분이다. 네 명의 요원들은 부상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꿇어앉아 사방을 경계했다. 차상급자가 겨울을 등진 채로 말한다.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산체스 하사.” “당신께서 없으셨다면 결과는 둘 중 하나였을 겁니다. 이 친구들을 죽으라고 내버려두거나, 혹은 시민들에게 발포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겠죠.” 산체스 하사. 산악사단 출신이라는 이 요원은 위장전역 후 워싱턴 D.C에 머문 지 벌써 반년 째라고 했다. 그가 냉정하게 말한다. “가시죠. 죽을 목숨 살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장 가까운 방해전파 사이트까지 170미터 남았습니다.” “…….” 짧게 고민한 겨울이 다친 경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숨어있어요.” 작별을 고하고, 기다리는 요원들에게 살짝 끄덕여 보인다. 군중들에게 막혔던 이동이 재개됐다. 도로를 벗어난 차량 등의 장애물이 많다보니, 대원들의 이동은 조금 느린 달리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직선거리로 170미터. 길을 따라가면 300미터가 넘는다. 지체된 시간을 감안한 겨울이 산체스 하사에게 지시했다. “내가 먼저, 가있을 테니, 혹시라도 교전이 벌어지면, 스스로 판단해서 지원해줘요.” “……알겠습니다.” 뛰느라 거칠어진 호흡에 손상된 자존심의 얼룩이 묻어나는 대답이었으나, 지금은 사소한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울은 홀로 속도를 높였다. # 375 [375화] #각자의 조국 (9) 달리는 내내 대동소이한 형상의 집들이 스쳐지나갔다. 땅값 비싼 도시, 상대적으로 소득 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보니, 각각의 주택들은 마치 하나의 연속된 건물처럼 빈틈없이 붙어있었다. 가끔가다 울타리 쳐진 샛길이 하나씩 있을 따름. 푹 꺼진 채 방치된 도로가 눈에 띈다. 워싱턴 D.C는 빈부격차가 무척이나 심한 도시였다. ‘그러니 수작을 부리기도 쉽고.’ 백인 경찰이 저항하지 않는 흑인을 사살하는 영상. 피부 하얀 군인들이 피부 검은 시민들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사진. 그와 같은 수백 건의 자료들이 온라인상에서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면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태그는 덤. 겨울은 그 대부분이 거짓임을 확신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들이긴 하나, 그 모든 일들이 고작 수십 분 사이에 한꺼번에 벌어지는 건 명백히 이상하지 않은가.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 바람잡이들이 섞여있을 개연성도 높았다. 본인들이 무슨 일을 돕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돈에 눈이 멀어서 매수당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위험부담이 적다고 생각할 테니까. 검거당해도 폭력과 약탈에 대해서만 처벌받을 뿐이라고. 실제로는 반역공모혐의까지 적용되겠지만, 반역자들이 속일 만 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다. 교육수준이 낮거나, 범죄경력이 있거나, 골수까지 피해의식에 찌든 사람들 등. 반역자들의 계획은 미국의 약점을 철저하게 난도질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이 나라의 원죄를 헤집는다고 해도 좋겠다. 미국인이 미국을 공격하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상념을 끊은 겨울이 관성에 제동을 걸었다. 지이이익. 군홧발이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진다. 시야에 들어온 목적지는 겉보기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낡은 외관을 제외하면 특이사항이 없는. 감각엔 어떤 경고도 걸리지 않았으나, 겨울은 그 조용함이 오히려 신경에 거슬렸다. 그냥 두었을 리가 없는데. 방해전파 발생 장치 주변엔 반드시 매복이 있으리라 여겼다. 반역자들 입장에선 전파장애를 길게 유지할수록 이득이기에. 최소한 저격수 한둘 정도는 배치해두었을 법 하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설령 의심스러운 장비를 발견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대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해준다면 방해전파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겠으나, 자칫 동시다발적인 대형 참사가 터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겨울은 주의 깊게 전진했다. 언뜻 보기엔 대책 없이 나아가는 모양새지만, 스스로의 반응속도를 믿고 겨울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이었다. 한겨울 중령의 죽음. 반역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인가. 유혹을 무시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공격은 없었다. 수상함을 느끼면서도, 겨울은 전파 발신원을 확인해야만 했다. 물론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를 실내로 들어가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콱! 짧은 도움닫기 후 배수관을 차고 올라가, 단숨에 2층 높이의 창틀에 매달린다. 거기서 완력으로 몸을 당겨 웅크린 뒤 다시금 한 층을 더 도약, 마지막엔 지붕 모서리를 붙잡고 옥상에 올라섰다. 저격을 의식하여 즉시 몸을 낮춘다. 그 상태로 잠깐 무전기의 볼륨을 높이자, 굉장한 강도의 방해전파가 잡혔다. 바로 근처다. 정보 담당 요원들이 찾아낸 지점이. 겨울은 오래지않아 위장된 전파발생장치를 발견했다. ‘정말로? 이렇게 간단히?’ 당혹스러울 정도의 쉬움이었다. 혹시나 연결된 트랩이 없는지 살펴보았으나, 폭약이나 독소 캡슐 비슷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방해전파 발생장치만이 덩그러니 있을 따름. 긍정적인 상상을 해보자면, 반역자들도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였을 수 있겠다. D-데이 이전에 독소 제조시설이 노출되자,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불가피하게 공격을 개시한 것이라고. 혹은 이곳을 맡고 있던 가담자가 뒤늦게 겁을 먹고 달아나버렸거나.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그건 아닐 듯 하다. 그저 나쁜 예감에 불과한 걸까? 고민을 거듭해보지만, 마비된 무선통신을 한시라도 빨리 복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통신을 정상화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자들은 꽤나 난처한 처지가 될 테니. 무엇보다 공중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 크다. 나중에 감식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겨울은 총질을 하는 대신 전파발생장치의 동력선을 찾아 뜯어냈다. 서로 얽히는 과거의 목소리들로 무의미하게 범람하던 무전망이 한 순간에 조용해진다. 그리고. 콰쾅! 쿠르릉! 강한 진동이 발아래를 통과했다. 돌풍이 불어온다. 당황한 겨울이 바람 부는 방향을 살폈다. 동쪽으로 약 7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검은 폭발과 붉은 화염이 주택가 한 블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폭압에 휘말린 잔해가 수십 미터씩 솟구치는 광경이 보인다. 거기엔 필시 숨어있던 주민들의 살점과 뼛조각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겨울의 등골에 어두운 전율이 흘렀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적은 방해전파 발생장치를 방치해둔 게 아니었다. 감각보정은 침묵했다. 겨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으므로. ‘지독해……. 정말로, 지독해.’ 바로 알려야 했다. 겨울은 화이트 셀 인증기에 연결된 무전 채널을 열었다. “한겨울 중령이다! 수신 범위 내의 모든 요원들에게 알린다! 주택가에 폭탄이 있다! 방해전파가 사라지면 폭발한다! 반복한다! 주택가에 폭탄이 있다!” 이렇게 주의를 당부해보지만, 경고를 받는 요원들도 그저 난감하기만 할 것이다. 도시 규모의 폭탄수색작업을 벌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다. 통신은 엉망이고 도로는 막혔으며 믿어도 좋을 인력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정상적일 때조차 수량 불명의 폭탄을 찾자면 몇날며칠을 지새워야 할 터였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대피시키자니 범위가 너무 넓다. 폭탄이 어디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만큼, 사실상 도시 전체 인구를 도보로 대피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시민들 중엔 방독면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역병이 공기로 전염되지 않는다는 탓. 바로 그들을 노려 독소가 사용된다면? 광기에 잠식당한 시민들은 그야말로 최악의 적이 될 것이었다.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없는. 북서쪽 먼 거리에서 천둥을 닮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아직 이쪽의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다른 팀이 또 다른 폭탄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시민들을 희생시키게끔 설계된 악의 넘치는 함정이다. 겁에 질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야 할 상황이다. 골전도 리시버가 울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산체스 하사였다. “난 괜찮지만, 시민들이…….” 「그건 나중에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사는 여전히 단호했다. 이런 점을 높게 평가받은 사람일 것이다. 「이제 진입합니다. 적의 징후나 흔적은 없습니까?」 “흔적은 좀 더 찾아봐야죠. 후. 조심해서 들어와요. 실내는 확인해보지 않았으니까.” 「Hua.」 쿵. 아래층에서 문을 박차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겨울은 반역자들의 흔적을 찾아 옥상을 둘러보았다. 「추적」이 강조하는 흔적들은 꽤나 희미했다. 이 장치가 설치된 후로 최소 일주일 이상이 흐른 것 같았다. 겨울도 큰 기대 없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피는 것이었다. 뭔가 있었다면 전파발생장치를 무력화하기 전에 찾아냈을 테니까. 산체스가 다시 전언을 보냈다. 「Sir. 이쪽으로 내려와 보셔야겠습니다. 2층입니다.」 겨울은 서둘러 층계를 내려갔다. 산체스를 비롯한 4인은 2층 복도의 열린 문 앞에 모여 있었다. 겨울을 향해 눈인사를 건넨 요원들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방 안쪽을 가리킨다. “저걸 보십시오.” 낡은 가구마다 먼지 쌓인 비닐이 덮여있는 풍경. 그 가운데 이질적인 사물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TV, 다른 하나는 거치대에 올린 IP 캠코더. 나머지 가구들과 이 둘은 느껴지는 시간대부터 달랐다. 전원은 어느 쪽이든 꺼져있다. 방으로 들어선 겨울은 캠코더 위로 손가락을 슥 밀어보았다. 다른 가구들에 비해 먼지의 두께가 확실히 얇다. 과거 카메라로 위장된 암살도구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캠코더 기기 자체에선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겨울은 캠코더와 TV의 배선을 눈여겨보았다.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있다. “마치 켜보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폭탄도 아닌 것 같고……. 작동시키면, 신호가 어디로 가는지 추적 가능할까요?” “요청해보겠습니다.” 코크런이라는 이름의 요원이 나섰다. 군장을 부스럭대더니 군사규격의 러기드 노트북을 꺼낸다. 본인이 직접 추적하는 게 아니라 담당 부서와 연결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겨울이 TV와 캠코더를 켰다. 방치된 기간 탓에 캠코더의 배터리가 약간 방전되어 있었으나, 당장 한두 시간쯤은 무리가 없어 보였다. 간헐적인 노이즈를 제외하고 새까맣기만 하던 TV 화면에 반응이 생긴 것은 초조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화면이 몇 번 깜박이더니, 의자를 끄는 듯 한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얀 셔츠와 하늘색 가디건을 입은 노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자상한 눈매는 이 상황과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 그녀가 빙그레 웃는다.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내 말을 들어줄 상대가 정말로 한겨울 중령일 줄이야.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제 아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던지……. 난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노인의 미소가 온화하게 짙어졌다. 「나는 클라리사 채드윅이라고 합니다.」 겨울이 당혹감 반 적대감 반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네이선 채드윅 팀장의……?” 「그래요. 그 아이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랍니다.」 “…….” 「후후. 당황하시는 게 눈에 보이는군요. 재미있기도 해라.」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는 노인에게선 어떤 적의나 증오 따위의 감정을 엿볼 수 없었다. 창가에 드는 볕을 받으며,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 캠코더의 사각에서 코크런 요원이 최대한 소리죽여 자판을 두드렸다. “채드윅 부인. 당신도 진정한 애국자들의 일원이십니까?” 질문을 던지자, 노인은 수줍게 볼을 긁는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문자 그대로,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치들이 그저 살기에만 급급해서 벌이는 한심한 짓거리들을 봐줄 수가 있어야지요. 아, 물론 그들은 이 순간에도 나를 같은 편이라 믿고 있겠지만요.」 그녀는 일방적인 배신을 언급했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뒤얽히는 느낌. 무엇부터 추궁해야 하나. 천진난만하게 웃는 화면 속의 노인을 바라보며, 겨울이 어렵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 테러는 당신이 계획한 겁니까?” 「글쎄요. 나와 내 동료들이 바보 같은 젊은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했어요. 첩보원은 나이가 들어도 숨겨둔 한 수가 있기 마련인지라……. 오랜만에 동료들과 힘을 쓰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꽤나 즐거웠답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클라리사 채드윅 역시 아들처럼 첩보기관에서 일했던 모양이다. “혹시 채드윅 팀장의 복수입니까?” 「천만에요! 그 아이의 일은 유감이지만, 복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겐 언제나 조국이 최우선이니까요. 네이선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지요. 첩보원은 조국으로부터 언제든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최후의 명예욕마저 버리고, 사후에도 손가락질 받을 각오를 해야만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있노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그러한 헌신은 너처럼 특별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차분한 광기가 느껴진다. 채드윅의 광기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나 보다. “조국이 최우선이라고요? 그럼 대체 왜 이런 짓에 동참했습니까?” 「우선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답니다.」 “메시지?” 「그래요.」 채드윅 부인은 상냥하게 끄덕였다. 「다수를 위해선 소수를 희생시켜야 할 때도 있다는 메시지.」 “…….” 「방해전파 발생장치와 연동된 폭탄의 존재는 이미 아시지요?」 노인이 웃는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어요.」 점점 더 진해지는 광기. 「피해는 시간을 끌수록 급격히 확대될 거예요. 그런 그림을 그렸지요.」 그녀는 진정성 넘치는 동작으로 가슴에 손을 얹는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무른 공상에 젖어있는, 순진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현실을 알려주려는 거랍니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된 뒤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은 정부의 우유부단함을 원망하겠지요. 정부가 조금만 더 빨리 결단을 내렸더라면,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동료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하. 들으면 들을수록 정신 나간 소리여서, 겨울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반박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허나 추적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언쟁은 현명하지 못하다. 겨울은 새로운 질문을 골랐다. “그렇다 치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먼저의 이유를 대면서, 노인은 우선, 이라는 단서를 달았었다. 「아아, 있고말고요. 실은 이쪽이 더 중요한걸요.」 손뼉을 부딪치며 즐겁게 말을 이어가는 채드윅 부인. 「바로 미국의 환부를 잘라내는 거지요.」 “미국의 환부라니…….” 「예를 들어 남부의 광신도들을 보세요.」 “…….” 「무식하고 불만이 많아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지만, 정작 큰 사고를 칠 능력은 없는 귀찮은 말썽쟁이들 말이에요. 그들은 이 나라의 생명을 갉아먹는 암세포나 다름없어요. 투표를 할 수 있는 암세포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겨울의 동의를 구하는 말투가 너무나 부드럽다. 「하지만 순해 빠진 맥밀런 대통령은 그 암세포들에게 시민권이 있다는 이유로 강한 처치를 미뤄왔어요. 말하자면 수술이 필요한 병을 임시방편의 대증치료만으로 버텨온 거나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수많은 협잡꾼들을 상대하고자 여러 정보기관들이 얼마나 힘겹게 일해 왔는지를.」 “그래서 그 암세포를 키웠다는 말이군요.” 노인의 볼이 상기되었다. 「맞아요. 진정한 애국자들이 무너졌을 때, 몇몇 젊은 친구들이 그쪽에 의탁하는 걸 보고 떠올린 발상이었답니다. 아하, 이걸 이용하면 되겠구나. 계엄령이 발효되도록 해서, 연방정부가 이 말썽쟁이들을 미국의 적으로 선언하게 만들 수 있겠구나…….」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성공했다.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들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게 만들었다. 계엄은 하나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전과 이후는 같을 수가 없을 터였다. 끝까지 의심을 거둬선 안 되겠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충격이 커야 더욱 과감한 수술이 이루어지지 않겠어요?」 “그러다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노인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내 조국을 압니다. 미국은 이 정도로 무너질 나라가 아니에요.」 대체 무슨 근거로? 겨울은 이것이 인지부조화에 가려진 증오가 아닌가 의심했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자신을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기에 생기는 괴리. 그러나 짐작일 뿐이었고, 더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겨울이 이렇게 느꼈을 때, 다행히 추적 완료 사인이 떨어졌다. 마치 캠코더의 사각이 보인다는 듯이, 채드윅 부인이 하는 말. 「내게도 할 일이 있으니, 아쉽지만 대화는 여기서 끝내야겠군요. 이쯤이면 추적도 완료되었을 테고. 그렇지요?」 일부러 기다려주었다는 뉘앙스로,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겨울 중령.」 연결이 끊어졌다. 산체스 하사가 평했다. “제대로 미친년이군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조였다. 동조하는 대신, 겨울은 코크런 요원에게 추적 결과를 확인했다. “어디에요?” “월터 E. 워싱턴 컨벤션 센터로 나옵니다.” “컨벤션 센터?” 코크런이 굳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육군협회의 방역전쟁 엑스포가 개최될 장소입니다.” # 376 [376화] #각자의 조국 (10) 방역전쟁 엑스포는 수많은 방위산업체들이 정부 계약을 따내고자 각축전을 벌이는 현장이다. 즉 월터 E. 워싱턴 컨벤션 센터엔 전시 목적으로 미리 실어온 신제품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는 뜻이었다. 작게는 장구류와 개인화기에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전차와 장갑차, 기타 수송차량 및 공격헬기에 이르기까지. “빌어먹을! 전시용품을 실전에 투입 가능한가?” 산체스 하사의 떫은 말에 코크런 병장이 대답했다. “연료와 탄약만 준비했다면 가능하겠죠!” 반란세력이 D.C에 탄약을 반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겠으나, 어쨌든 기갑차량을 직접 준비하는 것보다는 효과적이다. 기습적이기도 하고. 겨울은 긴장감으로 달아오르는 혈관을 느꼈다. 마치 녹인 쇳물이 흐르는 듯하다. 이 세계를 잃을 위기에 초연하기 어려워진 마음가짐 탓이었다. ‘누가 상상했겠어…….’ 백악관은 상정 가능한 모든 변수에 대응책을 마련해두고자 했겠지만, 완벽한 계획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다. 쿠데타 대비에 있어선 다른 기관의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기도 했다. 모두를 의심하고 검증해야 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놓친 허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겨울이 코크런에게 물었다. “보고는?” “이미 했습니다!” “백악관의 조치는?” “가까운 요원들과 경찰인력이 출동하는 중이지만 숫자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시위나 폭동에 휘말려 돈좌된 유닛도 많습니다!” 지도를 보건대 백악관이 장악한 군부대는 도시 외곽에 주로 배치되어있었다. 의심스러운 단위부대들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문제는 컨벤션 센터의 위치. ‘백악관까지는 고작 1킬로미터. 연방 의사당으로 간다고 쳐도 2킬로미터밖에 안 돼.’ 본격적인 기갑차량을 동원한다면, 방해되는 차량들을 깔아뭉개면서 이동해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저들은 과연 어디를 칠까. 어느 쪽이든 치명적이다. 하늘길이 막혔다고 간주하고 있기에, 의사당엔 다수의 상하원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백악관보다는 덜 중요한 목표인 게 사실이지만,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허를 찌를 가능성도 존재했다. 촉박한 여유 속에서, 겨울은 「통찰」의 도움을 받아 지끈거리는 생각을 이어갔다. 사태의 장기화를 고려한다면 의회 쪽이 오히려 고가치 표적일지 모른다. 연방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시점에서 각 주가 제멋대로 놀기 시작하면, 의회를 재구성하는 일은 요원해지고 만다. 주지사가 상원의원을 지명하지 않고, 하원선거가 미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연방이 분열될 공산마저 있다. 클라리사 채드윅은 조국을 무너뜨릴 계획이 없다는 듯 한 태도를 가장했으나, 어찌 그걸 그대로 믿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옛 동료들의 편일 수 있었다. 독소라는 변수도 있다. 코크런 병장이 새롭게 전파했다. “어, 폭탄이 해체되기 전까진 방해전파 발생장치를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 시민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방해전파를 제거하면, 반역자들이 손에 넣으려는 기갑차량쯤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불벼락이 쏟아질 테니까. 그러나 이대로는 매우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어떻게 공중지원을 받는다 해도, 전파방해가 여전한 이상 피아식별이 불가능할 터. 아군기의 오인사격에선 겨울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희생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바로 클라리사 채드윅의 메시지였다. 방금의 명령을 그녀가 들었다면, 대통령이 여전히 무르다고 평할 것 같다. “컨벤션 센터 쪽 상황을 띄울 수 있겠어요?” 겨울의 요구에 코크런이 해당 지점에 근접한 감시수단을 검색했다. 곧 교통카메라 몇 대가 연결된다. 이 카메라들은 영상만을 전송하는 귀머거리들이었다. 그래서 화면 속의 교전은 무음(無音)이었다. 소리 없는 발포와 소리 없는 죽음들. 적황은 확인했다. 잘못된 결정보다 늦은 결정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양동작전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미뤄둔다. 양동이고 뭐고, 여기서 밀리면 다음이 없다. 한숨 한 번 쉰 겨울이 마음을 정했다. “우리도 갑니다. 필수적이지 않은 장비는 버려요.” 토를 다는 요원은 없었다. 달려야 할 거리는 4킬로미터에 이른다. 그것도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뛰어야 할 길이었다. 아무리 정예요원들이라 한들 제때 도착하는 것만으로 기진맥진할 게 뻔하다. 겨울이 창틀에 발을 올린 채 요원들을 돌아보았다. “낙오되는 사람은 알아서 합류해요.” 그리고 뛰어내렸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한다. 쿵. 묵직한 충격이 발목을 기어올랐다. 겨울은 군장을 덜어내지 않았다. 교전현장은 무게를 줄여서 시간을 아낀 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만큼 탄약부족도 심할 테니, 누군가는 여분의 탄약을 가져가야 한다. 그럴 사람이 겨울 외에 얼마나 있을는지. ‘대전차화기를 구해야 하는데.’ 당장은 적을 막고 있으면 추가 지원이 오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폭탄을 쓰는 방법도 있겠고. 운이 많이 좋아야 하겠지만. 방독면은 잠시 벗어둔다.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달리기에 속도가 붙으면서 좌우가 뒤로 휙휙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거주지의 풍경은 아무리 나아가도 비슷비슷하여, 같은 구간이 반복되는 미궁에 갇힌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도중에 피아식별모듈이 몇 번 진동했다. 근처에 다른 요원이 있다는 신호였다. 겨울은 길가에서 구토하는 남자를 힐끗 일별했다. 지나온 거리가 400미터를 넘고, 다시 800미터를 넘어가면서 겨울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호흡조절이 힘든 전력질주라 더하다. 고통스럽지만, 감각을 조정하진 않았다. 매순간 기를 쓰고 몸을 밀어낸다. 땀은 방울진 열기였다. 그렇게 속도를 유지하다보니 시야가 확 트일 때가 있었다. 링컨 파크와 스탠튼 파크를 통과한 겨울은 유니언 역 전면에서 속도를 줄였다. 지쳐서가 아니라, 아군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한 적의 매복이 있기 좋은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먼저의 두 공원과 달리, 숙련된 저격수가 겨울의 감각을 기만하기에 충분한 간격도 존재했다. 퍽! 바로 앞의 땅이 해머에 찍힌 듯이 터져나갔다. 총탄이다. 겨울은 이미 몸을 던진 상태였다. 구르던 몸은 버려진 경찰차에 부딪혔다. 무전기는 고장 난 것처럼 여러 사람의 고함과 비명을 토해냈다. 다시 방해전파의 영역으로 접어든 것이다. 터엉! 텅텅텅! 보닛에 구멍이 뚫리고 차량의 창문이 부서졌다. 후두두둑. 겨울의 머리 위로 산산이 부서진 강화유리가 쏟아진다. 사선경고를 볼 것도 없이, 다섯 정의 지정사수소총이 갈겨대는 반자동 사격이다. 반역자들은 소음기를 쓰고 있었다. 광장을 메우고 있던 시위대가 흩어지며 지르는 비명이 적의 총성을 지웠다. ‘다른 요원은 없나?’ 높은 확률로 있겠으나, 무전이 먹통이라 협력이 어렵다. 적의 사격이 동시에 끊어졌다. 유효한 통신수단이 있는 것이다. 「전투감각」과 「생존감각」의 혼합물인 사선경고는 어느 때보다 희미했다. 그 투명함은 근원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겨울은 시간을 들여 그 감각을 읽었다. 천재와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감각으로도 적의 위치를 특정하는 데에 10초 이상이 필요했다. 군장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준비가 끝났다. 후우. 습관처럼 숨을 고르고, 겨울은 연막탄의 핀을 뽑아 속으로 둘을 센 뒤 전방으로 굴렸다. 쇳소리를 내며 구르던 연막탄이 팍 하고 터지며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순간, 즉 적의 주의가 잠깐이나마 그 뭉글대는 불투명함으로 향했을 찰나, 겨울은 반대편으로 튀어나가 차체에 의지한 사격자세를 잡았다. 탕! 타탕! 0.1초 단위의 대결. 겨울은 적 셋을 순수한 반응속도만으로 압살하고 전신을 엄폐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옆구리를 더듬었다. 1초 미만의 노출이었음에도 옷이 터져있었다. 남은 두 적이 분풀이를 하듯이 탄을 갈겨댔다. 강화된 겨울의 시력은 미간이 깨지는 저격수의 잔상을 남겼다. 겨울에게 죽은 셋은 예외 없이 안면을 관통 당했다. 방탄복과 헬멧은 그들을 살려주지 못했다. ‘미군 전투복을 입고 있단 말이지…….’ 아군을 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저 위치에 매복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백한 반역의 증거였다. 실제로 군 소속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연신 금속성의 불티와 도탄이 튄다.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기대고 있는 차체가 주저앉았다. 분별을 잃은 적의 사격이 계속되는 탓이었다. 분노일까, 두려움일까. 어느 쪽이든 의외였다. 훈련된 정도에 비해 실전경험이 적은 듯하다. 최소한 동료가 죽어나가는 싸움을 경험해본 적은 없다는 느낌. 그래도 같은 수법에 두 번 속지는 않을 것이다. 총탄 부딪히는 쇳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위력을 짐작한 겨울은, 이중주가 독주로 변하는 순간, 소총을 단단히 견착한 채 몸을 확 일으켰다. 퍼퍽! “윽-!” 적탄 두 발, 둔중한 충격이 흉부와 복부를 친다. 그 흔들림을 억누르는 조준과 격발. 총성이 울리고, 창문 안의 적영이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는 장전을 서두르다 탄창을 놓쳤다. 탕! 겨울이 그, 혹은 그녀를 끝장냈다. 티잉- 유탄이 튀었다. 여긴 이제 정리됐다고 생각했더니 새로운 살의가 밀려든다. 아마도 다른 방향의 다른 아군을 견제하고 있었을 적들. 그러나 두서없이 짓쳐드는 사선들, 조직적이지 못한 공격은 직전보다는 낮은 위협이었다. 그들의 다급한 사격이 가까운 보도와 차량과 가로수를 치는 사이, 겨울은 단 2초의 응사로 그들을 마저 제거했다. 한 발에 한 명씩. 해묵은 아이보리 빛 석조건물에 여러 줄기의 신선한 피가 흘러내렸다. 겨울은 둔한 통증을 느끼며 방탄복 안쪽을 더듬었다. 다행히 출혈은 없었다. 적탄을 받아낸 부위에 타박상이 생겼을 뿐. 그래도 조금 의외였다. 일반적인 소총탄을 완벽히 방어하는 방탄판이 푹 꺼진 것으로 미루어, 적은 특수한 탄종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턱 아래로 땀방울이 떨어진다. 그것은 뜨거우면서도 서늘했다. 앞쪽은 전투의 열기를 담은 체온이고, 뒤쪽은 겨울을 스쳐간 죽음의 온도였다. 당혹스럽도록 치솟은 심장박동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시간에 쫓기고 있음에도, 겨울은 가을 햇볕을 받아 미지근해진 차체에 기대어 거친 호흡을 다스렸다. 열을 담은 맥박에 손끝이 욱신거린다. ‘예전처럼 침착하기가 힘들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상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느리게 찾아온 변화였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돌이켜보건대, 별빛아이와의 만남이 그 시작이었고, 앤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 날부터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겨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 이전의 과거에 비춰본다면. 소망하는 사후는, 이제 이 세상이 아니고선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평소의 호흡을 되찾아야 했다. 질병 같았던 냉정함이 필요하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의 죽음은 멀리하는 만큼 다가오고, 또 두려워하는 만큼 강해지는 까닭이었다. “와우.” 조금 떨어진 곳, 누군가의 얼빠진 음성이 겨울의 고단한 주의를 환기했다. 「생존감각」에 잡히지 않은 접근이다. 정체는 총격이 그쳤음에도 거의 기어오다시피 한 민간인 남성이었다. 길가로 쏟아져 나온 군중의 한 사람인 모양. 살집이 두툼한 그는 해골이 그려진 프린스 오브 둠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 “…….” 서로 얼굴을 마주본 상태로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멀리서는 총성과 폭음이 여전한데……. 겨울은 그의 눈동자에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보았다. 잠시 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령님. 항상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 네……. 당신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Thank you for your service). 많이 받는 인사다보니 기계적인 답변을 해버렸다. 겨울은 약간이나마 이완되는 신경을 느꼈다. 헛웃음이 샐 것 같다. 군장을 메고 탄피를 밟으며 일어서는 겨울에게 남자가 묻는다. “실례가 아니라면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찰칵. 그의 스마트폰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찰칵찰칵찰칵찰칵. “…….” “죄송합니다. 연속촬영모드였네요.” “아니, 괜찮습니다. 같이 오신 분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세요. 이 근방에 테러리스트들이 있거든요.” 폭탄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데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신의 이름으로 겨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떠나갔다. 그로부터 4분이 흘러, 겨울은 마침내 컨벤션 센터 교전현장에 도착했다. # 377 [377화] #각자의 조국 (11) 무기박람회장과 카네기 도서관 사이에 낀 왕복 4차선로엔 무엇 하나 멀쩡한 꼴로 남아있는 게 없었다. 중기관총 사격이 아스팔트를 부숴놓았고, 방치된 차량들은 그물로 써도 좋을 만큼 구멍이 많은 고철이 되어버렸다. 콰창! 전시회장 정면 유리를 부수고 나오는 새로운 장갑차 한 대. 계속해서 늘어나는 적성 기갑차량 앞에서, 군, 경찰, FBI 인질구조팀, 화이트 셀 요원 등이 골고루 섞인 아군은 명백한 열세에 처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발이 아직까지 여기에 묶여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적이 끌어냈을 차량 몇 대가 거세게 타오르는 모습이 눈에 띈다. 반역자들은 자신들의 화력우세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숫자가 더 늘어나길 기다리는 중이거나. ‘늦었으면 후방을 치려고 했더니…….’ 은엄폐를 반복하며 접근하는 겨울을 발견했는지, 카네기 도서관 쪽에서 어서 오라고 악을 쓰며 손짓하는 사람이 보인다. 겨울은 어깨어림의 진동을 느꼈다. 주변에 상당수의 화이트 셀 요원들이 있다는 의미였다. 쾅쾅쾅쾅! 묵직한 총성이 지척이었다. 고작 30미터 거리에서 쏟아지는 중기관총 포화. 조준선은 한 뼘 간격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찢어진 공기가 앞머리를 흔드는 순간, 이를 악문 겨울이 도서관 정면의 환형 계단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관성에 좌악 쓸리는 하체가 불붙은 것처럼 뜨거워진다. 가뜩이나 바스러진 돌조각이 많은 땅이었다. 실전과 거리가 먼 정복 하의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우측 대퇴부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군장 무게에 짓눌린 탓도 크다. 축소형이라도 탄약으로 꽉 채워서 무게가 상당했다. 그러나 꿋꿋이 메고 오길 다행이었다. 웅크리고 있던 해병들이 사막에서 물을 찾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지저스! 혹시 그거 탄약입니까?!” 끄덕인 겨울이 군장을 확 뒤집었다. 좌르르 쏟아져 나오는 탄창과 폭탄들을 본 이들은 장교 병사 구분 없이 안도했다. 함부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에게 탄창을 던져주는 겨울. 여러 사람이 나누기엔 충분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되었다. “우라! 이거면 저 갈보 새끼들 한 다스는 더 죽이겠네!”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참 해병대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가 쓰고 있는 방독면은 원색이 확 튀는 민간제품이었다. 아마 공공시설마다 의무적으로 비축하는 비상용품의 하나일 것이다. “어, 잠깐!” 겨울을 뒤늦게 알아본 한 병사가 얼빠진 소리를 낸다. “설마 한겨울 중령님?”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층계 탓에 먼지가 많다. 콜록거린 겨울이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겨울도 그 병사와 동료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명예훈장을 받은 해병대원들이었다. 행사에나 어울릴 정복을 입고 있는 모습들로 미루어, 거쳐 온 사정이 겨울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이들을 이끌던 장교, 숨 가쁜 해병 중위가 눈인사를 보냈다. “잘 오셨습니다! 방금 전까진 좀, 훅, 헷갈렸는데! 여기가 아직 지옥은 아닌가보군요!” 방독면 때문에 둔하게 울리는 목소리였으나, 반가운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주파수가 맞는지 같은 말이 무전기에서도 메아리친다. 겨울이 외쳤다. “상황은?!” 중위가 악을 쓴다. “아군이 다 흩어졌습니다! 적이 점거한 박람회장에도 몇 명 남아있다는데!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일단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임시 지휘실입니다!”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죽 이어진 통신선의 존재로도 알 수 있었다. 도서관의 지층에서 낸 창문은 창살이 뜯겨진 채로 간이 출입구 겸 벙커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지층으로 바로 들어가는 층계가 적의 사선에 노출된 탓이었다. 겨울은 무게를 덜어낸 군장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땅에 핏자국을 남기면서. 흙과 벽 안쪽에선 방해전파의 영향이 대폭 감소했다. 상황실은 빛이 새는 방향에 있었다. 지도 앞에 서서 지시에 여념이 없는 최상급자는 겨울보다도 계급이 높았다. “Sir!”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그는 다름 아닌 에머트 대령이었다. 부상을 당했는지 한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다. 이마에서도 피가 흘러내린다. 금방 생긴 상처처럼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는 겨울을 발견하고 살짝 놀라다가, 이내 어깨를 늘어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중령도 화이트 셀인가 뭔가 하는 기관 소속이었나?” 같은 피아식별장치를 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령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막 그렇게 됐습니다. 가장 급한 일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겨울은 현장에 얼마 없으리라던 상급자를 만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휘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싸움에선 일신의 전투력을 투사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안부를 생략한 대령이 기계적인 속도로 아군의 현황과 배치를 설명하고는, 곧바로 적황으로 넘어갔다. “상황은 대충 알고 가게. 적이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는 건 저들 스스로 망쳐놓은 도로상황 때문이야. 우리가 어디 숨어있는지 모르니까. 보병이 차량에 따라붙지 못하는 이상 나올 수가 없지. 이쪽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고. 저들은 실전경험이 부족해. 겁이 많은 놈들이야.” 알 만 하다. 장갑차든 전차든, 접근을 허용하면 보병에게조차 허무하게 파괴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의 도로는 부서진 차량들로 가득했다. 즉 사각지대가 널려있다. 그러므로 전차와 장갑차가 아무리 많아도, 같은 편 보병의 엄호 없이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괜히 나섰다가 격파당하면 장애물만 늘어나지.’ 자칫 전차라도 한 대 주저앉았다간 50톤을 넘는 쇳덩이가 길을 막는 꼴이었다. 기갑차량을 보유하고도 몸을 사리는 걸 보면 적 지휘관 역시 기본적인 소양은 갖춘 모양. 그저 그들의 수준이 문제였다. 슈뢰더 대장이 괜히 후방의 얼간이들이라 했겠는가. 다만 그 얼간이들이 위험한 물건들을 손에 넣었을 뿐. 겨울은 그들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했다. ‘채드윅 부인이 첩보원이었어도 본격적인 전투를 지휘한 경험은 없을 거야.’ 즉 적들이 몸을 사린다는 건 이제부터 싸울 겨울에게 요긴한 정보였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급한 보고가 들어온다. 배경에 총성이 깔렸다. 설명을 하다말고 어딘가와 가쁘게 교신한 에머트 대령이, 지휘를 잠깐 다른 장교에게 위임해두고 남은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부탁할 임무가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래 붙잡아둘 능력은 없어. 우회로가 많으니까. 적이 더 기어 나오기 전에 다른 길을 막아야 돼.” “어디로 가면 됩니까?” “박람회장 서북쪽 교차로를 막아줬으면 해. 가능하면 그 아래쪽도. 어려운 역할이야. 지금 우리에겐 그 흔한 LAW조차도 없거든. 7시 방향 레스토랑에 배치된 팀이 두 세트 갖고 있긴 한데 가져오기가 힘들지. 불가능할 것 같다면 지금 말하게. 아무도 자네를 탓하지 않아.” LAW는 가볍지만 위력이 약한 로켓발사기다. 그것조차 모자란 게 이곳 병력의 현실이었다. 한편 7시 방향은 백악관으로 가는 직선도로였다. 거기 있는 화기를 빼낼 순 없다. 물론 임무 포기는 논외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 이후엔 어떻게 할까요?” 겨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호의 섞인 안타까움이자, 한편으로는 희미한 기대감이었다. 한겨울 중령은 그만한 명성을 쌓아왔으므로. 동시에 그는 산타마리아 전투의 전우 겸 목격자이기도 했다. 대령이 노트북을 끌어다 박람회장 내부 지도를 띄웠다. 백악관에 유선으로 연결된 지휘체계였다. 그는 지도상의 몇몇 지점을 짚어가며 말했다. “여기, 여기……그리고 여기. 내부에 아군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어. 약 30분 전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야. 적이 장비를 탈취하는 걸 저지하려다 고립된 병력이지. 생존징후가 보이면 귀관이 판단하게. 합류해서 빠져나오든, 재편성해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든. 들어갈 경우엔 인질이 존재한다는 첩보가 있으니 주의하도록. 여기선 얼마나 데려가겠나?” 마지막은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겨울은 이곳에 병력을 나눌 여력이 없다고 보았다. 화력 모자란 보병들이 지형에 의지하여 육탄으로 기갑부대를 저지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러니 대답은 이렇게 정해져있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자신 있나?”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백악관과 의사당의 안전이잖습니까. 우회로를 막다가 지름길을 열어줄 순 없습니다.” 현재의 방어선은 너무나 얇다. 적이 피해를 감수하고 과감하게 나온다면 언제 뚫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두가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대령도 더 이상 권하지 않는 것이고. 혼자 움직이는 편이 눈에 덜 띈다는 장점도 있다. 아군이 정면에서 적의 주의를 잡아먹는 사이에 조용히 기습을 가할 작정이었다. 겨울이 물었다. “아군과 인질이 빠질 경우 근접항공지원 요청은 가능합니까?” “아.” 대령이 인상을 썼다. “주방위군 치장물자가 털렸어. 적이 스팅어를 보유했네. 숫자가 꽤 돼.” 스팅어는 휴대형 대공미사일의 이름이다. 겨울은 한숨을 삼키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였다. 양용빈 상장의 잔당들이면 모를까, 방역전선에서 대공미사일을 어디다 쓴단 말인가? 폐기에도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니 예비물자로 전환된 뒤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을 것이었다. 유선통신망이 살아있고 적의 특성이 뚜렷한 만큼 건 쉽을 불러도 될 거라 여겼으나, 결국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전폭기는 안 돼. 건물 채로 날려버리기엔 주변 피해가 너무 커……. 옥상을 청소해봐야, 도시 주변까지 청소하지 않고선 무의미하겠구나.’ 대공미사일을 꼭 여기에만 두었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거주지역의 폭탄과 마찬가지로 D.C 근교를 전부 수색해야만 확실한 안전이 확보된다. 하늘이 위험하다던 백악관의 예견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겨울은 질문을 아꼈다. 추가로 확인할 정보는 없는 듯 하다. 적의 화력이야 앞서 본 풍경에서 충분히 유추했다. 강력하지만, 기갑차량의 숫자에 비해서는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포화였다. 전차 주포나 공중폭발탄 같은 흉물을 갈겨댔다면 방어선은 훨씬 전에 무너졌을 터. ‘많은 탄을 골고루 준비하기가 곤란했겠지.’ 총탄류와 포탄류는 조달 난이도부터 완전히 다르다. 이 사태가 정부 측의 기습으로 촉발된 것이기도 하고. 과연 저들의 준비라고 마냥 충분하기만 할는지. 에머트 대령이 막 나가려는 겨울에게 우려를 표했다. “다리는 괜찮은가?” 그는 겨울의 옷을 적신 피를 보고 있었다. “단순한 찰과상입니다.” 절그럭. 겨울이 군장을 내려놓았다. “이만큼은 두고 가겠습니다.” 따로 챙긴 건 끈에 달아두었던 피아식별장치와 두 개의 플라스틱 폭약뿐이다. 뭔가를 말하려던 에머트 대령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시선을 지도 위로 돌렸다. 침묵으로 대신하는 인사였다. 이제 다시 뛰어야 할 시간이다. 도서관 서쪽 회랑을 채 벗어나기도 전부터 매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틀을 밟고 올라 초지를 구른 겨울은 일순 맹렬해지는 아군의 사격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의 이동을 은폐해주려는 것이다. 사고로 구겨지다시피 한 민간 차량들이 피어 올리는 연기도 도움이 되었다. 제대로 터트린 연막엔 못 미칠지언정, 갑작스러운 변화로 적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신중히 움직이는 중에 가로등마다 줄줄이 달린 배너들이 눈길을 끌었다. 「D.C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힘이 넘치는 도시, 잊지 못할 이벤트들.」 확실히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긴 하다. 가아아앙- 나아가려는 길 쪽에서 가스터빈 특유의 엔진 소음이 들린다. 건물 사이의 그늘에서 독특한 형상의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람회장의 서쪽 출입구로 기어 나온 물건이었다. 각지고 두꺼워 보이는 외견. 비슷한 자리에 머물며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소극성이 두드러진다. 적에게 겁이 많다던 에머트 대령의 평가가 떠올랐다. 그러나 결국엔 나오고 말 것이다. 나와야만 할 것이다. 이대로 실패와 반역죄를 감수할 작정이 아니고서는. 저들도 죽음에게 등을 떠밀리는 입장이다. 막아야 할 입장에서는 그 낯선 형태가 난감했다. ‘어디가 약점인지 모르겠는데.’ 방역전쟁에 특화된 장비는 그 이전의 무기들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 저 전차는 보통의 전차와 달리 모든 방향의 방어력이 균일할 것이다. 전차포탄을 방어할 만큼 튼튼하진 못하겠으나, 겨울이 소지한 폭약 정도로는 격파하기 어려울 게 뻔하다. 지난날 전쟁영웅들이 방역전쟁 엑스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새로운 무기체계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았다. 에머트 대령이 그들 중 하나였고. 하지만 그 무기들을 이런 식으로 상대하게 될 줄이야. # 378 [378화] #각자의 조국 (12) 적 차량들을 완전히 격파할 필요까진 없었다.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수준이면 된다. 그러나 그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다못해 2차선로만 되었어도 해볼 만 했을 텐데, 인도를 포함한 4차선로를 막자니 어려움이 가중된다. 겨울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가능성들을 고민했다. 공사현장의 타워 크레인, 지저분할 만큼 많은 맨홀 덮개들, 아직도 시동이 걸려있는 캠핑 트레일러, 어딘가 호흡이 맞지 않는 적의 움직임 등. 각각의 교차로가 아니라, 아예 컨벤션 센터 자체의 출입로를 봉쇄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곳이야말로 이쪽 방면에 전개된 적의 중심이었다. 맨홀 아래로 들어가 폭약을 터트리면 어떨까? 과연 충분한 규모로 도로를 파괴할 수 있을까? 고민은 찰나로 그쳤다. 가진 걸 다 써도 부족하다. 이 방법을 쓰려면 훨씬 더 강력한 폭발력이 필요……. 아. 초조하게 헤매던 겨울의 시선이 캠핑 트레일러에서 멎었다. 부서진 차량 아래의 틈 등을 이용해 포복으로 이동한 겨울이 트레일러의 측면에 달라붙는다. 전차의 구동음 사이로 적의 거친 육성이 선명하게 들리는 거리였다. “우회? 서쪽으로? 통신도 이 지랄인데 우리만 따로 진격하란 말야? 개소리!” 전차 뒤쪽에서 누군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반역자들 또한 통신장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립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여기서의 기습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겨울은 그들의 갈등을 무시하고 캠핑카의 측면을 더듬었다. 분명 이쯤에 있을 텐데. 찾는 것은 소형 가스 용기. 올레마에서의 경험으로, 이런 유형의 캠핑 트레일러는 LPG 가스를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리와 난방용도는 물론이고 냉장고 또한 일반적인 냉매를 사용하지 않는다. 과연, 겨울은 곧 중간 규격의 가스 용기 두 개를 발견했다. 밸브를 잠그고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리한다. 압력 게이지에 표시된 잔량은 각각 9할과 7할 가량. 이 정도면 새크라멘토에서 보았던 풍경을 재현하기에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친가?’ 우려를 담아 주변을 살피는 겨울. D.C의 중심가답게 상점가와 호텔이 많다. 겉으로 보아선 텅 비어있는 분위기지만, 교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동인구가 많았을 거리인 만큼 괜한 우려가 아니었다. 필요악. 불가피한 피해. 채드윅 부인이 늘어놓은 궤변의 핵심. 사람에게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갈라진다. 곱씹어보건대,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도 물 밖으로 헤엄치는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죽음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겨울은 그것이 싫었다. 이전에는 죽어가는 잔불 같은 분노였으되,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한 지금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들끓는 혐오감이었다. 이제는 잃어버린, 진짜 심장이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지하로 들어가기 전, 겨울이 다시금 총성이 메아리치는 주변을 확인했다. 미국이 아니라 어느 중동의 전장에 온 듯 한 풍경. 가까운 건물들은 총탄 자국으로 가득하다. 내부에 시민들이 있더라도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려 애썼을 것이다. 폭발의 위력을 신중히 가늠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릉- 맨홀 덮개를 거의 무음에 가깝게 들어올린다. 두 개의 가스 용기를 끈으로 달아 내리고, 겨울 자신도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 뚜껑을 다시 덮었다. 덮개의 자그마한 구멍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들을 제외하면, 지하는 거의 완전한 암흑에 잠겨있었다. 「환경적응」이 뛰어난 겨울의 시야로도 조금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지상의 진동으로 웅웅 울리는 터널. 예상보다 크고 넓다. 상수도가 지나는 길이었다. 벽에 조명이 붙어있었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겨울은 새크라멘토에서 치렀던 전투를, 공방을 바꿔 부분적으로 재현하려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엔 겨울이 트릭스터의 입장일 따름. 실패에 분개하여 머리를 박고 죽었던 바로 그 괴물의 계략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가벼운 달리기로 거리를 잰다. 이전, 피쿼드 호에서 눈을 가리고 시험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화된 기량으로, 겨울은 정확한 이동거리를 산출해냈다. 보아하니 박람회장 내부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가 존재하는 듯 하여 안심이다. 붕괴시키기로 정한 지점에 도달한 겨울이 두 개의 가스통을 나란히 두고 밸브를 최대로 개방했다. 게이지가 줄어드는 속도를 확인하고 서둘러 몸을 피한다. 방독면이 유해가스를 걸러줄지언정 산소부족까지 해결해주진 않았다. 땅 밑에서 나갈 통로를 곁에 두고, 한 손에는 핀이 빠진 수류탄을 힘주어 쥔 채로, 겨울은 호흡을 고르며 때를 기다렸다. 점화에 플라스틱 폭약을 쓸 순 없었다. 유선기폭은 도전선이 짧고, 무선기폭은 지하구조상 불발되기 쉽다. 수류탄을 놓으려는 순간마다 「생존감각」이 목덜미를 기어오른다. 그 경고의 강도가 곧 폭발의 위력일 것이었다. 눈 감고 코끼리를 더듬는 수준의 미봉책이지만, 당장은 여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겨울은 예상되는 붕괴의 여파와 「암기」된 지도를 겹쳐보려 애썼다. 이 방법이 먹히기를 바라면서. 잠시 후. 팅- 맹렬하게 「투척」한 수류탄의 안전손잡이가 튕겨지는 소리. 겨울은 즉시 터널을 벗어났다. 컨벤션 센터의 지하에 위치한 설비실이었다.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계단을 차고 오른 겨울이 마침내 전시회장 내부로 진입하여 엄폐물을 찾은 순간. 엄청난 폭음이 청각을 마비시켰다. 삐이이이- 시야가 흔들린다. 중심을 잃었나 했더니 땅이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울기가 점점 더 급격해졌다. 갈라진 모서리를 붙잡고 버티는 중에, 겨울과 비슷한, 그러나 훨씬 더 심한 처지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전시물 몇 개가 지하로 쓸려 내려가 시야가 트인 탓이었다. 엎질러진 가솔린 냄새가 났다. 비어있는 통도 여럿 보인다. 장갑차량에 연료를 채우고 있었던 모양. 적이다. 겨울이 정신 못 차리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카카카캉! 카카캉! 먹먹해진 귀에 답답하게 들리는 총성. 그 크기가 작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꾸만 이지러지는 시야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 특수효과를 잔뜩 넣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도 조준은 정확했다. 탄피가 튈 때마다 피도 튀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뭉개진 감각 속에서 어깨를 때리는 반동만이 선명했다. 눈에 띄는 모든 위협을 제거한 겨울이, 이명으로 메워진 고요 속에서 엄폐물을 찾아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시체와 마주쳤다. 겨울이 죽인 자들이 아니라, 행사장 경비를 맡고 있었을 USS의 용병들이었다. 여기만이 아니다.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다. 개중엔 눈을 감지 못한 군인들도 보였다. 무한궤도에 하체가 으깨진 한 명은 겨울이 아는 사람이다.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신앙 문제로 경계해야 한다던 라울 엘즈워스 중위. 마지막까지 아군으로 남았을지, 아니면 변절하여 교전 중 운 나쁘게 죽었을지.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다른 내통자가 있었거나 내부 정보가 샜을지도.’ 육군협회 주관이라곤 해도 결국 민간차원의 행사였다. 경비나 보안에서 주요 관공서들보다 부족한 면이 많았을 것이다. 사설 용병기업의 보안이 과연 D.C 교통국보다 나았을까? 용병들 가운데 신용보다 돈이 중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광신도는? 미쳐 버린 애국자들은? 용병들의 시체 중엔 무장이 해제된 것들도 있었다. 바깥의 해병들이 어떻게 방탄복과 무기를 확보했는지 짐작이 간다. 청각은 환청 같은 물소리와 함께 회복되었다. 회복속도가 빠른지라 주변 공간이 축소되는 듯 한 감각이다. 상수도관이 터진 탓에, 행사장 안쪽까지 밀려오는 거친 물결이 눈에 띈다. 상체를 드러낸 겨울이 미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적들을 추가로 사살했다. 탄창 두 개가 순식간에 버려졌다. 위이이잉-! 정신 나간 말처럼 착란을 일으키는 장갑차가 한 대.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 채 건물의 균열을 피하기 급급하다. 시야가 제한된 환경을 이용하여, 겨울은 장갑차 밑으로 플라스틱 폭약을 던지며 스쳐갔다. 전파방해가 감쇄되는 실내인지라 원격기폭도 가능하다. 격발기를 콱 움켜쥔 겨울은 온 몸으로 진동을 느꼈다. 여파만으로 괴로운 폭압이 지나간 후, 장갑차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외부의 피해상황을 파악할 겨를이 생긴다. 가장자리로 다가간 겨울이 박살난 외벽 너머로 진입로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붕괴의 규모는 예상을 상회했다. 진입로 인근은 마치 캔버스가 찢어진 풍경화처럼 보였다. 도로를 따라 동서로 약 20미터, 남북으로 약 50미터 가량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줄줄이 서있던 전차와 군용 차량들의 육중함이 추가 붕괴를 유발한 탓이다. 지하터널의 폭이 폭인지라 4차선 전체가 사라지진 않았으나, 남은 부분이 위태로우니 장갑을 두른 차량은 통과할 여지가 없다. 처음 진입 시 경계하던 전차는 물이 차오르는 구덩이에 빠져있었다. 비탈의 경사가 급한데다 궤도가 벗겨져 자력탈출이 불가능했다. 그 외에도 같은 처지에 놓인 기갑차량들이 다수. 겨울의 총이 차량을 버리는 반역자들을 겨냥했다. 타탕! 탕! 타타탕! 대부분 방탄복을 입고 있어, 대개의 조준점은 목으로 수렴되었다. 머리가 기괴하게 늘어진 시체들의 낙하가 물보라를 일으킨다. 흙빛 급류에 검붉은 얼룩이 번졌다. 쏠 필요도 없는 부상자들의 울부짖음이 부서진 거리를 가득 채운다. ‘다행히 민간 건물들은 무사한 편이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다 깨져나갔으나, 외벽이 완파된 건물은 없었다. 내부에 사람이 숨어있었어도 중상을 입진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붕괴에 휘말리지 않은 적 차량들이 보이지만, 따로 떨어진 소수에 불과하다. 적어도 서쪽 방면으로는 진출이 불가능할 것이다. 총성의 빈도와 거리감으로 미루어, 에머트 대령이 통제하는 남쪽은 아직 잘 버텨주는 중이었다. 이때 작은 모터 소리가 겨울의 귀를 간지럽힌다. 건물 내부를 감시하는 폐쇄회로다. 겨울의 반사적인 사격이 렌즈를 박살냈다. ‘설마 아직 이 안에 있나?’ 클라리사 채드윅. 근거 없는 직감이었으나, 그녀 스스로 밝힌 동기를 고려해보면 이곳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버리는 애국적 행위로서. 이 가정이 사실일 경우 오히려 서두를 이유가 없다. 아군 생존자 확인이 먼저다. 겨울은 시체들로부터 여분의 탄약을 회수한 뒤 실내에서 벌어진 교전의 흔적을 「추적」했다. 흔적은 사무실이 즐비한 복도로 이어졌다. 폐쇄회로는 보이는 족족 파괴했다. “침입자다! 쏴!” 기습적인 총성이 메아리친다. 겨울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내렸다. 털썩. 무기를 놓치고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적 하급간부는, 고통에 벌벌 떨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리의 출혈을 막으며 힘겹게 눈알을 굴린다. 그가 지휘하던 네 명은 모조리 숨이 끊어져 있었다. “미, 미친. 하, 하, 한겨울 중령…….” “시끄럽게 굴면 죽인다.” 협박과 함께 떨어진 총을 걷어찬 겨울이 반역자의 무전기를 강탈했다. 「-답해! 거기 무슨 일이야!」 이어 슬쩍 주위를 살펴 전시회장의 구역 표시를 찾는다.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은 피 흘리는 반역자에게 무전기와 대검을 들이밀었다. “지원 요청해. W-3 구역으로. 적의 소규모 습격이라고.” “……,” 반역자는 다시금 눈을 굴렸다. 여기는 W-1 구역이며, 겨울이 말한 W-3은 계단 하나를 두고 남쪽에 위치했다. 누군가 올라오면 이쪽으로 등을 보이게 된다. 겨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반역자의 낯빛에 공포와 분노가 번졌다. 한숨을 쉰 겨울이 무전기를 그의 입 속으로 때려 박았다. 그리고 출혈을 막고 있는 남자의 두 손을, 그 아래의 총상과 함께 으깨듯이 짓밟았다. 우우우우우- 입 가장자리로 피거품이 끓어 넘친다. 박살난 이빨이 같이 새어나왔다.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겨울. 체급은 반역자가 더 큰데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십여 초가 지나 발을 가볍게 한 겨울은, 사내의 입에서 무전기를 빼내고 다시 한 번 요구했다. 「위협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면서. “살고 싶으면, 해.” 확장된 눈에 겨울을 담고 필사적으로 끄덕이는 반역자. 아까보다 나지막해진 협박이 먹혀들어갔다. 잠시 후. 복도 저편에 새로 17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부상당한 3명의 포로는 덤이었다. # 379 [379화] #각자의 조국 (13) 심문은 잔혹했다. 그만큼 서둘러야 했다. 도구는 레인저가 선물한 라이터 하나. 필요한 만큼의 냉정을 끌어내려 애쓴다. 포로들은 대답을 거부하는 즉시 안구를 지져버리는 겨울의 침착함에 기가 질렸다. 뒤통수를 움켜쥐는 괴기스러운 악력에선 어떤 몸부림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첫 심문 대상으로서 벌써 한쪽 눈이 구워진 반역자는, 남은 하나의 눈동자 앞에서 부싯돌이 불티를 튀기는 순간 미친 듯이 거품을 물었다. “말할게요! 전부다 말할게요!” 흐느끼는 사내의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러한 굴복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심문 내내 계량된 폭력을 행사했다. 거짓을 꾸밀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적의 규모와 현황, 인질 및 간부의 개요. 어느 쪽이든 잘못된 정보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터이므로. 나중에 이들의 증언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은 고문의 위법성 따위를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겨울에겐 한계가 있다. 고립되었다던 아군은 결국 모조리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다. 그나마 그들 가운데 명예훈장 수훈자가 없었다면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채드윅 부인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귀한 전쟁영웅들을 함부로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그들이 억류된 위치도 확인했다. 심문을 끝낼 시간이었다. “탈출은 꿈도 꾸지 마.” 살벌한 음색의 경고와 함께, 겨울은 손발 묶인 반역자들의 「응급처치」에 8초 가량을 낭비했다. 옷을 찢어 콱 동여매는 수준의 처치에 불과할지라도, 운이 좋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반역자 포로들은 구석진 창고에 짐짝처럼 던져졌다. 겨울이 복도를 내달렸다. 앞서의 교전 현장에 적의 증원이 와있었다. 끊어진 무전이 불길했을 것이다. 발소리를 들은 그들은 좌우로 갈라져 엄폐했다. 상식적면서도 잘못된 선택. 사격과 감각이 초인의 영역 중반에 도달한 겨울을 죽이려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모든 화력을 한꺼번에 퍼부어 겨울의 대응능력을 압도해야 한다. 속도를 줄인 겨울이 소총의 견착을 유지하며 빠르게 걸었다. 팍-! 피가 튄다. “악! 내 손!” 총만 내밀어 갈겨대려던 반역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끊어졌다. 단 한 발. 겨울의 조준사격. 떨어진 검지는 두 마디만 남아있었다. 가장 긴 마디를 바깥부터 갈아먹은 탄자는 장갑 안으로 파고들어 손등을 길게 찢어놓았다. 호흡이 무기다. 몰아치는 주도권이다. 그들이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모퉁이를 눈앞에 둔 겨울이 핀을 뽑지 않은 수류탄 한 쌍을 굴렸다. 팅, 팅, 티팅. “Shit!” 반역자들이 아우성치는 순간 겨울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수류탄을 붙잡아 되던지려던 사내의 낯짝, 그 확대된 동공에 소총탄을 박아주고, 남은 탄을 퍼부어 우측을 정리하고, 소총의 공이가 빈 약실을 치는 즉시 권총을 뽑아 좌측을 소탕하기까지 2초. 타타타탕! 쩌렁쩌렁 울리는 적의 발악이 벽과 천장을 긁고 지나갔다. 도탄은 예상했다. 그러나 하얗게 쏟아지는 텍스 조각들은 겨울의 계산 밖이었다. 감각보정의 경고가 늦었다. 눈에 들어갔다. “윽!” 두 눈을 질끈 감는데 층계 방향에서 군홧발 소리가 올라온다. 욕설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시각을 뺀 나머지 감각만으로 권총을 난사한다. 철컥! 운 나쁜 반역자의 비명이 들린 직후 권총의 약실마저 비었다. 겨울은 마지막 시야를 기준으로 엄폐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어 벽에 부딪히는 안도감. 제대로 굴렀다. 벽을 등진 겨울은 소총을 급하게 재장전했다. 새 탄창이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실수는 시야가 차단되며 치솟은 긴장감 탓이었다. 사후가 새로워진 이래 두려움은 항상 발아래에 있었다. 노력으로 억누르고 있을 따름. 깜박이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겨울이 시야를 회복하는 동안 적은 무의미한 제압사격으로 변죽만 울릴 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난간 아래로 줄줄 떨어지는 핏물 탓일 것이다. 죽여 놓은 적이 많다보니 바닥은 눈 닿는 곳마다 흥건한 핏빛이었다. 아까 아낀 수류탄 두 발 가운데 하나, 안면에 총 맞은 적이 죽어서도 쥐고 있던 것을 회수하여 이번에야말로 핀을 뽑는 겨울. 그리고 안전손잡이가 튀지 않게끔, 시체의 팔로 아슬아슬하게 눌러둔다. 쫓아오는 적들이 자연스럽게 건드리도록. 시체로 트랩을 만드는 건 교전수칙 위반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권총을 장전한 겨울이 남은 수류탄까지 마저 갈무리한 뒤 인질이 있을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은 적은 겨울이 도망친다고 여겼을 것이다. 배후가 잠시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잠잠해졌다. 겨울은 뒤늦게 자신의 맥박을 인식했다. 둑둑둑둑. 심장이 고막에 달라붙어있는 느낌이다. 포로로부터 빼앗은 무전기가 시끄럽다. 숨 가쁘게 달리는 내내 적들의 주파수에 분노와 공포가 번졌다. 반역자들은 습격의 규모를 착각하고 있었다.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했다. 적어도 인질의 안위에 있어선 후자다. 적들이 명령이고 뭐고 달아나기로 마음먹는다면, 협상 대상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인질들을 어떻게 처리할는지. 겨울이 한층 더 서두르는 이유였다.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 굳게 닫힌 문에서 집중된 위험이 감지된다. 그것은 한 데 모인 사선들이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도 밀어붙일 능력이 있으나, 시간이 걸릴뿐더러 그 와중에 인질이 유탄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겨울은 안으로 들어갈 다른 길을 찾아냈다. 쿵- “뭐……!” 환기구에서 뚝 떨어진 겨울이 연사에 가깝게 8발을 끊어 쐈다. 겨울과 시선을 마주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건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뿐이었다. 뭐야! 라는 짧은 경악성조차 다 내뱉지 못하고, 그는 턱 깨진 시체가 되어 주저앉았다. 총탄은 아래턱을 뚫고 뒤통수를 부숴 놨다. 겨울이 아군 생존자들의 결박을 끊었다. 손발이 자유로워진 이들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테러리스트들의 무기와 장비부터 챙겼다. 근 한 달간 친숙해진 얼굴들이 많다. 명예훈장 수훈자들이었다. 개중 한 명이 곤두선 어조로 물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끄덕인 겨울이 손짓했다. “이쪽으로!” 아직 빈손이 많다. 모두를 다시 무장시키는 게 먼저였다. 여기까지 오며 죽인 적들의 장비만으로도 생존자들을 재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부상자를 제외한 병력이 서른 둘. 겨울은 팀을 둘로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회로를 봉쇄할 스물, 겨울의 행동을 보조할 열둘. 부상자들에겐 무기를 쥐여 주고, 숨어서 스스로를 지키라고만 일러두었다. “대위!” 겨울이 지목한 육군 대위는 화이트 셀 피아식별모듈을 달고 있었다. 빼앗겼던 장비인데, 반역자들은 이게 뭔지 몰랐던 모양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동쪽 진입로를 차단해요!” “당신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우두머리를 잡아야죠! 가요!” 끄덕인 대위가 자기 몫의 열아홉을 이끌고 뛰어갔다. 겨울은 병사들로 하여금 4인 1조로 건물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 교전이 발생할 경우, 병사들은 겨울이 가세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포로들을 심문했어도 독소의 위치가 불명이었다. 아예 없을 지도 모르나, 항상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그 밖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D.C를 공격한 적의 규모는 약 4천. 허나 이곳 박람회장을 습격한 건 증강된 1개 대대 병력에 불과하다. 반수 이상이 남쪽 정면, 에머트 대령에게 묶여있는 만큼, 적이 이쪽으로 할애할 전력이란 그리 대단치 못한 수준일 것이었다. 그렇게 최상층까지 돌파했을 때, 클라리사 채드윅은 포로들이 토설한 바로 그 장소에 남아있었다. 도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모니터가 어지럽게 설치된 방에서, 노인은 처음 보았던 모습 그대로 단아하게 앉아, 혼자서 겨울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겨울은 그녀가 쥐고 있는 물건을 노려보았다. 측면에 열쇠가 꽂혀있고, 놓는 순간 작동하는 압력식 격발기였다. 데드맨 스위치. 사용자의 죽음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기계적인 보험인 것이다. “자폭이라도 할 셈입니까?” “오, 그럴 리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당신을 죽일 수야 없지요. 이건…….” 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노인이 힘없이 웃었다. “이건, 도시에 설치된 폭탄들 전부를 격발시키는 스위치랍니다.” 동행한 병사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사태 초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아직 방해전파 발생장치와 거주구역의 폭탄 등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맥락만으로도 노인의 협박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겨울은 티 나지 않게 주의하며 노인의 주변을 살폈다. 트리거 자체는 무선으로 보인다. 허나 바깥에 가득한 방해전파를 감안할 때, 폭탄이 있는 곳까지의 신호 전달은 유선으로 이루어질 터. 즉 기존의 통신망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방의 통신선을 찾아 사격으로 끊어놓는다면- 노인이 격발기를 흔들어보였다. “중령님, 지금 어딜 보시는 건가요. 대화를 할 땐 상대를 바라보는 게 예의잖아요?” 사뭇 장난스럽기까지 한 몸짓과 어조. 그러나 확실한 경고였다. 수상한 기미를 보이면 그대로 스위치를 놓아버리겠다는. “무엇을 원합니까?” “잠깐의 대화.” 노인이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망설이던 겨울이 뒤를 향해 눈짓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둘만 남게 된 실내에서, 클라리사 채드윅을 힐난하는 겨울. “메시지를 보내겠다면서요? 그 폭탄들, 당신이 직접 터트리는 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 불가피한 선택을 당국에 강요하려던 게 원래의 의도 아니었습니까?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면 당신은 그저 정신 나간 살인마에 불과합니다!” 연기였다. 클라리사는 반역을 공모한 시점에서 이미 미치광이 학살자가 되었다. 그러나 겨울은 그녀가 자신의 애국심을 광기로 치부해버리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시간을 끌어야 해.’ 미리 내보낸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보고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직접 통신선을 찾아 끊어놓을 수도 있다. 촉박한 희망이었다. 동시에 겨울 자신도 노인의 틈을 노렸다. “아아, 이 감각.” 읊조리는 노인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이 감각을 잊고 있었어요.” “무슨 소립니까?” “나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한, 그리고 그럴 능력과 자격이 충분한 상대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전율. 은퇴한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었건만……. 다시 젊어지는 듯 한 착각이 드는군요.” 엉뚱한 소리를 하며 살며시 눈을 감는 클라리사의 모습이 겨울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가능할까?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빈틈은 아닐까? 찰나 간에 스쳐가는 수십 번의 결심과 수십 번의 보류. 결국 겨울은 미친 노인이 눈을 뜨기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던가요?” 클라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절반의 의미가 남아있지요.” “절반?” “그래요, 절반. 내 의도는 이 나라에 교훈을 주는 것만이 아니었는걸요. 말하지 않았나요? 충격이 커야 더욱 과감한 수술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 “피해가 끔찍할수록 시민들의 분노도 치솟을 거예요. 이런 얼간이 같은 반란에 찬동한 자들에겐 그만큼 진한 낙인이 찍히겠죠. 더불어, 그나마 구제의 여지가 남아있는 멍청이들은 생각을 바꿀 겁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구나, 하고. 그들에게 주어질 마지막 기회인 셈이에요. 그러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정의를 원하는 대중의 가장 올바른 공분에 의해 처리될 테고요.” “기어코 워싱턴 시민들을 학살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뇨.” 뜻밖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의미는 있어요. 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을 포함해서, 가장 명예로운 영웅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모습들을 지켜보다보니, 문득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들이 꺾여선 안 되니까. 온 미국이 의지하는 전쟁영웅들은, 현재 이 나라가 가진 가장 귀중한 자산 중 하나일 테니까. 그 가치를 새삼스럽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그러니……이 정도면 됐습니다. 여기서 끝내겠어요. 지금까지의 결과만으로도 반역자들을 뿌리 뽑기엔 충분할 듯 하고.” 여전히 자신을 반역자로 생각하진 않는 그녀였다. “그럼 지금까지 한 말들은?” “왜 이런 수단을 준비해두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죠. 적어도 내 생애 가장 젊고 아름다운 애국자에게만은 위선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클라리사가 겨울을 직시한다. “맞아요. 한겨울 중령 당신 말입니다.” # 380 [380화] #각자의 조국 (14) 안심하기엔 이르다. 광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광기인 것이다. 늙은 반역자는 여전히 활성화된 데드맨 스위치를 쥐고 있었다. 늘어놓은 말들이 「기만」이 아니란 보장도 없거니와, 미친 애국자의 결심은 언제 다시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겨울은 느리고 조심스럽게 간격을 좁혔다. “할 말이 많지만, 진심이라면 먼저 그것부터 넘기시죠.” 클라리사는 겨울이 내민 손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오, 이런. 이 늙은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마지막으로 받아야 할 전화가 남아있거든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의 부고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아직도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 작정이라면-” “아니에요.” 겨울의 억눌린 말을 끊는 클라리사. “그런 게 아니에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모르겠나요? 당신도 많이 만나봤을 텐데. 제 것이 아닌 부와 권리를 누리는 인간말종들……. 의무를 방기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국민들을 버리고서 이 땅으로 도망쳐온 망국의 위정자와 독재자들을 말이에요. 예컨대,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예프 대통령 같은.” 카라예프 대통령은 금빛 명마들의 주인이었다. 겨울에게도 가장 좋은 종마를 선물했고, 엑셀이 그 말을 쳐 죽이자 관리 소홀을 이유로 마누엘 헤이스의 사형 집행을 요구했던 사람. 국민들보다 금과 달러, 명마를 먼저 실어 날랐던 인간. 노인이 조소했다. “설마 중령께선 그들에게 살아있을 자격이 있다고 보시는지?” “…….” “그 인간쓰레기들이 호의호식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현 정권의 크나큰 실수였어요. 나는 애국자로서 조국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겁니다. 이 또한 수술이지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 그녀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이 수술을 돕기 위해, 그리고 시민들의 생존을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요. 그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늙은이의 말벗이 되어주면 그만인걸요. 어때요, 참 쉽지 않은가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예요. 15분 전, 거의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클라리사가 중얼거린다. 아마도 앞으로 몇 분. “평범한 죽음은 너무 자비로워요.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처형당할 겁니다. 버림받은 국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고통을 백분의 일이라도 느껴봐야지요.” “설마 네크로톡신을…….” “정답입니다. 후후.” 미친 노인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중국인들의 수를 줄이는 데에도 좀 쓸 계획이었지만, 이번엔 정부의 대처가 빨라서 아쉽게 됐어요. 어쨌든 처형에 필요한 양은 반입했고, 독소가 살포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거사에 충분한 도움이 되었으니 아쉬움이 그리 크지는 않군요.” 전화벨이 울렸다. “드디어.”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전화를 받는 클라리사.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반드시 무사해야 한다고 했잖아!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해!” 겨울의 귀는 수화기에서 새는 불평을 잡아냈다. 바로 그 지시로 인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항의였다. 그들은 의외의 이름을 언급했다. ‘에드거 크레이머?’ 클라리사가 꼭 살려놓으라고 지시한 대상은 다름 아닌 공화당의 대선후보였다. 오전의 승마회에 얼굴을 비쳤다 했더니, 이번 사태가 시작될 즈음에도 여전히 망국의 정상들과 가까이 있었던 모양이다. 교통마비로 인해 발이 묶인 시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각각의 경호팀이 협력했을 확률이 높다. 그 크레이머가 반역자들의 무기를 탈취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포효하는 노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머저리들! 닥치고 명령에 따라!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고! 처형은 반드시 예정대로 집행한다! 알아들어?!” 노인이 고함을 지르자 상대편의 언성도 높아졌다. 평소부터 미친 노인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 통화는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다. 격분한 클라리사가 다시 연결을 시도했으나 신호만 길게 울릴 뿐 받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망할!” 콰직! 전화기가 부서진다. 씩씩대는 노인의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직후 그녀의 세상이 거칠게 회전했다. 쿵! 온 몸으로 땅에 부딪힌 클라리사는, 격렬한 통증에 잠깐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으직, 으지직. 관절이 꺾인 팔, 격발기를 쥔 손에서도 으스러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겨울이 힘주어 움켜쥐고 있는 탓이었다. 노인의 주의가 산만해진 틈을 탄 모험이었다. 성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겨울. “다 끝났습니다.” 엎어 놓은 클라리사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겨울은 격발기의 열쇠를 꺾어 비활성화 상태로 만들었다. 그 다음엔 열쇠를 아예 부러뜨려버렸다. 이걸로 시가지의 폭탄이 동시에 터질 우려는 사라진 셈이다. 방해전파는 여전하겠지만. “크흐, 흐흐흐흐.” 제압당한 노인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 고통, 정말 멋지군요.” 겨울은 그녀를 곱게 다루지 않았다. 뼈를 부러뜨릴 듯이 일으켜 세운다. “알고 있는 걸 모조리 털어놔야 할 겁니다.” 이야기는 움직이면서도 들을 수 있다. 필요한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 반역자들에게 노인의 이름으로 투항을 권유하는 건 현실성이 없으나, 사로잡은 사실을 숨긴 채 혼란을 주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독소와 크레이머 후보의 소재를 들었을 때, 겨울은 침착함을 잃었다. “어디라고?” “호텔.” 팔이 비틀리는 아픔에 허덕이며 클라리사가 말한다. “만다린 오리엔탈.” 앤. 노인을 내팽개친 겨울이 문을 박차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Sir! 어디로 가십니까?!” 밖에서 경계 중이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외쳤으나, 겨울은 대답 대신 난간을 넘어 층계 아래로 뛰어내렸다. 클라리사 채드윅의 신병은 저들이 알아서 처리하리라 믿으며. ‘당연히 떠올렸어야 하는 건데!’ 승마회가 개최된 이스트 포토맥 파크로부터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었다. 그곳에 FBI의 안전가옥 겸 상황실이 있으니, 망국의 정상들이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피신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닌가! 반역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돌아갈 시간 따윈 없었다. 겨울은 이 악물고 컨벤션 센터의 남쪽 정면을 돌파했다. 적보다는 아군의 오인사격이 더 위험했다. 처음과 달리, 반역자들은 명백한 수세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피잉 핑 날카롭게 울어대는 탄환들. 밖으로 나갔던 장갑차량들이 모조리 불타올랐고, 소수의 잔존병력 및 차량들이 실내로 후퇴하며 절망적인 저항을 이어나가는 광경. 달리는 속도 그대로, 겨울은 탄창 하나만큼의 적 보병을 사살하고 스쳐갔다. 정면을 겨냥하고 후진하던 장갑차는 갑자기 돌출한 겨울을 공격하지 않았다. 뒤에서 튀어나왔으니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경황이 없었을 터였다. 콰콰콰콰쾅! 햇빛을 받은 순간, 정체불명의 폭발이 직선으로 도로를 갈아엎는다. 번뜩이는 경고에 힘입어, 겨울은 살상범위를 가까스로 피해냈다. 박살난 화물차 아래로 미끄러진 것. 찢어진 강철에 팔을 베이고 거친 마찰에 무릎이 벗겨졌으며 어디선가 튄 파편에 등을 맞아 중심을 잃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박힌 상처들이 생겼다.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방탄복이 없었으면 즉사했을 것이다. 겨울은 한 박자 늦게 폭발의 정체를 파악했다. ‘30밀리 기관포?’ 과거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던 낯익은 화력. 입사각이 쭉 뻗은 길 위의 낮은 고도를 가리킨다. 방금의 공격은 공격헬기가 퍼부은 것이었다. 위잉 우는 청각이 폭음에 파묻혔던 헬기 엔진 소리를 구분해냈다. 설마 적이 헬기까지 손에 넣은 것인가? 카네기 도서관에서 화이트 셀 식별장비를 단 누군가가 동북쪽으로 두 팔을 흔들어댄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아군이 있다, 이 좆같은 사생아 새끼야!” 이를 알아봤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전달이 이루어진 것인지, 몇 초간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포화가 멎었다. 앞서 만났던 해병 장교가 겨울의 복귀를 반겼다. “살아계셨군요! 잘 돌아 오셨습니다!” “대체 저 헬기는……?” “도로를 타고 저공비행으로 온 겁니다! 화이트 셀이 길을 뚫었죠! 육군 비행대의 화력지원에 공군의 수송지원입니다! 이제 반란군 새끼들의 대가리를 날려버릴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기랄!” 기뻐하던 그가 뒤늦게 겨울의 부상을 발견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출혈이 심해 보이십니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 도서관 남쪽으로 가십시오! 곧 수송헬기가 올 겁니다! 혼자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후방으로 빠지라는 뜻이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뿌리치려던 겨울이 멈칫 했다. 호텔까지의 거리는 장애물로 가득한 2킬로미터. 그 길을 소진된 체력으로 주파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알려줘서 고마워요!” 겨울은 해병들을 뒤로 하고 그가 알려준 지점으로 뛰었다. 곧 온다고 하더니, 때맞춰 새로운 헬기 엔진소리가 가까워진다. 도착까지 앞으로 삼사십초. 겨울이 한 데 모여 후송을 기다리는 부상자들을 빠르게 살폈다. 중상자에게서 헬기를 빼앗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내 눈을 믿어도 되나?’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이는 없는 듯 하나,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지는 겨울이었다. 다급한 마음이 판단력을 왜곡하고 있을까봐서. 착륙한 헬기가 증원과 탄약을 쏟아낸다. 겨울은 결정했다. 헬기가 중간에 격추당하지만 않는다면, 왕복 4킬로미터의 비행이 부상자 후송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이 헬기는 남쪽으로 갑니다!” 두 파일럿은 한겨울 중령 자체에 당황하고, 겨울의 요구에 다시 한 번 당황했다. 「Sir! 그쪽은 아직 안전한 경로가 아닙니다!」 “알아요! 급한 일입니다!” 난감해하면서도, 공군 소속 파일럿들은 고민을 길게 끌지 않았다. 기체를 지면에서 5미터 가량 띄우더니 곧장 빌딩의 숲으로 파고들었다. 헤드셋을 쓴 겨울이 방향을 지시했다. 헬기는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FBI 본부를 지나 내셔널 몰을 관통했다. “아이젠하워 대로에서 9시 방향!” 이번에도 「암기」한 지도가 도움이 되었다. 기체가 기수를 직각으로 틀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정면으로 새로운 교전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경찰과 FBI 지원 병력이 호텔을 포위하고 있었다. 파일럿들도 감을 잡았다. 「여기가 목적지입니까?!」 “그래요! 속도 유지! 착륙하지 말고 내려줘요! 그 뒤엔 수송임무로 복귀하고!” 러닝 랜딩(Running landing). 착륙지점이 위험할 때, 혹은 상황이 급할 때 쓰는 방식이었다. 안전을 위한 감속은 생략한다. 조종사들이 고도를 낮췄다. 시야가 트였다. 호텔 고층에서 헬기를 노린 대전차로켓(LAW)이 발사되었다. 「Fuck!」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조종사들은 기체를 뒤틀지 않았다. 로켓은 3미터 위의 허공을 꿰뚫었다. 헤드셋을 벗어던진 겨울이 급류처럼 흐르는 땅으로 뛰어내렸다. 세상이 소용돌이친다. 부서질 듯 구르던 겨울은 FBI 장갑트럭에 부딪히고서야 겨우 멈추었다. 차량을 엄폐물 삼아 사격하던 수사국 전투원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겨울을 부축했다. 헬기가 그대로 통과하여 사라진다. 어처구니 없어하는 느낌의 질문. “지원입니까, 아니면 실수로 떨어진 환자입니까?!” “지원이에요!” “무슨 놈의 지원이 너덜너덜한 부상자 한 명……오.” 조금 늦게 겨울을 알아본 전투원이 간단히 납득했다. # 381 [381화] #각자의 조국 (15) 낙하 충격으로 떨어져나간 방독면을 낚아채며, 겨울은 다시금 앤을 생각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두려운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포로가 된 앤이 네크로톡신 중독자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거나, 혹은 그녀 자신이 중독되어 다른 사람을 뜯어먹는 중이거나. 그것을 보며 환성을 지르는 반역자들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고단한 몸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러나 최소한의 상황은 알고서 돌입해야 한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오랜만에 느껴지는 돌의 무게가 명치를 꽉 짓눌렀다. 후. 한숨인지 습관인지 모를 숨을 토해낸 겨울이 FBI 타격대원(SWAT)에게 외쳤다. “여기! 책임자가 누굽니까?!” “이제는 접니다!” “이제는?!” 끊이지 않는 총성 속에서, 타격대원이 도로 위 머리 터진 시체를 가리켰다. 흘러나온 뇌수가 닿는 거리에 구멍 뚫린 이동식 방패가 버려져있다. 겨울은 눈을 찌푸렸다. “저격수가 있나보죠?!” “예! 기관총도 기관총이지만! 50구경을 단발로 꽂아대는 새끼들이! 제일 골치 아픕니다! 숫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실력마저 상당합니다!” 50구경은 중기관총과 대물저격총에 들어가는 탄종이었다. 사람 서넛쯤 일렬로 관통하고도 남을 위력 앞에선 방탄복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럴 땐 로켓 따위를 써서 저격수가 있는 객실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게 최선이나, 인질의 소재가 확인되기 전까진 불가능한 방식. 헬기를 쫓아낸 다음엔 반역자들도 중화기를 아꼈다. 양이 충분치 않은 모양. 아니었다면 FBI 요원들이 엄폐한 장소마다 갈겨댔을 것이다. 겨울이 공중전화 부스로 이어지는 통신선을 발견하고 묻는다. “안쪽과의 연락은?!” “30분 전에 끊겼습니다! 놈들이 차단한 모양입니다!” “마지막 교신이 뭐였어요?!” “위쪽에서 뭔가! 일이 터졌다고! 확인해보겠다는 내용이 끝이었습니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낯설어 멈칫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콰득. 겨울이 엄폐한 차량의 사이드 미러를 뜯어 범퍼 바깥으로 내밀었다. 거울에 비친 왜곡된 호텔은 실제보다 작고 멀어보였으나, 강화된 안력으로 살피기엔 모자람 없는 풍경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번뜩이는 발사 섬광을 헤아리던 중, 펑! 하고 거울이 폭발했다. 장갑에 박힌 조각들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겨울은 무릎으로 기어 FBI측 저격수에게 손을 뻗었다. “그거! 잠깐 줘 봐요!” “총 말입니까?!” “예!” 요원은 지체 없이 총과 탄창을 내주면서도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저놈의 호텔! 객실 창문이 죄다! 10레벨의 방탄유리입니다! 이딴 걸로는 이빨도 안 박힙니다!” 직전의 관측을 통해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적들은 창문 틈으로 총구만 내놓고 쏘는 중이었다. 몸을 숨길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유리창에 남은 탄흔들도 방탄유리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하얀 얼룩과 균열만 가득할 뿐 깨진 자리는 거의 없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의 특급호텔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또한 반역의 사전준비일까. 적 저격수를 죽이려면 2인치 이하의 틈을 노려야 한다. 총열 짧은 소총은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못하다. 교전거리가 채 100야드(91.4m)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저격소총이 필요한 이유였다. 겨울은 마주보이는 선착장 간판에 연속으로 다섯 발을 쏘았다. 바람이 잔잔한데도 조준점에서 미세하게 우측으로 치우치는 탄착군. 겨울의 눈에 맞게 조율된 총이 아니어서 이렇다. 상관없었다. 오차만큼 틀어 쏘면 된다. 가벼워진 탄창을 교체한 겨울이 무릎 꿇은 채로 반신을 노출시켰다. 이 무모함에 FBI 요원들이 기겁했다. “위험-!” 타앙! 찰나에 갈린 승패였다. 호텔 유리창에 선혈이 튀고, 겨울의 옆에선 보도블록 파편이 뿌려졌다. 됐다! 저격수가 여럿이면 방향을 나누기 마련. 그들의 주의가 이쪽으로 수렴되기 전에, 그 짧은 시간에, 겨울은 그들 모두를 차례로 침묵시켜버렸다. 광범위한 제압을 걸던 다수의 기관총도 조용해진다. 죽은 사수를 밀어내는 부사수까지 다 죽인 뒤에야, 겨울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출혈 때문인지 호흡이 평소 이상으로 흐트러졌다. 호텔 정면을 기이한 고요가 짓누른다. 겨울은 빌린 총을 던져주었다. “다들 따라와요!” “저격수는-” “없어요 이제!” 반응을 보지도 않고 뛰쳐나가는 겨울. 질주의 와중에 연사를 갈겼다. 최상층, 로켓발사기를 조준하던 적이 소스라치며 엎드렸다. 맞지는 않았다. 탄창 절반을 비웠는데도 애꿎은 유리와 창틀을 두들겼을 따름이다. 전신이 아프게 부대낀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간헐적으로 희미한 어둠이 맥박 쳤다. 무의식적인 사격과 무의식적인 재장전. 탄의 낭비가 늘었다. 명백히 정상이 아닌 상태였으나, 축소된 교전거리가 줄어든 전투력을 만회했다. 적어도 반응속도만은 아직 적을 일방적으로 찍어 누르는 수준이다. 점차 둔해지고는 있어도. 결국 시간 싸움이었다. 불확실한 앤의 안위와, 부상으로 인해 감소하는 전투지속능력 양면에서. 체력이 떨어질수록 초조함이 커진다. 불과 몇 분, 로비의 반역자들을 밀어낸 겨울이 보안실 문을 후려쳐서 열었다. 그러나 들어가진 않았다. 빗발치는 총탄들. 겁에 질린 적의 발악이다. 그것이 주춤하는 순간에 낮은 자세로 치고 들어가는 겨울. 사격으로 두 명의 무릎을 박살내고, 그 중 하나를 방패삼아 나머지 하나를 사살한다. 끄윽, 끅. 뿌드득. 먼저 쓰러져 꿈틀대는 하나는 목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그 죽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겨울은 폐쇄회로 모니터들을 살폈다. “앤, 앤, 앤…….” 그러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멎는다. 반역자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구간이 있었다. 그들은 밖이 아닌 안을 겨냥하여 특정 구획을 봉쇄한 상태. 안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보인다. 각도가 제한된 무음의 카메라는 이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끊어진 화면이 많았다. 그곳에 있는 것이 앤을 비롯한 FBI와 CIA 요원들이길 바라며, 겨울은 벽에 걸린 호텔 내부 지도에서 최단경로를 찾았다. 두 번, 세 번, 「독도법」으로 길을 새기고 달리려는데 갑작스런 현기증이 발목을 잡아챈다. 왜 이런 감각까지 재현해놓은 거야. 부상과 출혈이 원인이니, 고통의 동기화율을 낮춘다고 해소될 효과가 아니었다. 시체 위로 엎어진 겨울이 짜증을 억누르며 거칠게 일어섰다. 「생존감각」의 욱신거림이 스친다. 경고의 정체는 눈앞에서 긴장을 늦추는 두 개의 총구였다. 겨울을 후속한 FBI 요원들이 당혹감을 담아 바라본다. “중령?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잠긴 목소리는 안하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여긴 이제 다른 이들에게 맡기시고…….” 겨울이 머리를 흔들어 타격대원의 말을 끊었다. “4층. 리셉션 홀. 지원 붙여줘요.” 홀에 도착하기까지, 중간과정의 기억은 불분명했다. 달리고, 쏘고, 죽이고, 달리고, 쏘고, 죽이고……. 지원 병력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순간들도 있었다. 측면에서 돌출한 반역자들이 겨울의 배후를 잡았을 때, 그들의 머리통을 날린 것은 겨울을 필사적으로 따라잡은 화이트 셀 요원과 D.C 경찰특공대였다. 겨울 역시 그들을 믿고 달린 것이었고. 그토록 속도를 낸 덕분에 적의 반격은 갈수록 지리멸렬해졌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총성과 비명, 무더기로 끊어지는 무전들. 전의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따라서 저항은 갈수록 약해지고, 돌파는 갈수록 무인지경이었다. 반역이 끝나가고 있었다. 겨울은 그 끝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타타타타탕! 반역자들과 대치하고 있던 홀 안쪽으로부터 총탄이 빗발쳤다. 계획된 함정이 아니라면 분명 아군 혹은 인질의 오인사격이었다. 그리고 정황상 함정일 가능성은 낮았다. 기둥에 기대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겨울 대신, 다른 화이트 셀 요원이 나섰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구조대입니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성난 화답이 돌아온다. “안 속아! 어디서 수작질이야 이 니미 씹할 반역자 새끼들아!” 격분한 크레이머의 목소리였다. “Fuck! Fuck! Fuck! 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하는 치욕을 겪느니!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 덤벼! 덤비라고!” 또다시 울리는 위협적인 총성. 앤이 아니었다. 겨울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크레이머가 혼자 있으리란 법은 없었다. 먼저 나섰던 화이트 셀 요원이 겨울에게 무언의 요청을 보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방독면을 끌어내린 겨울이 힘주어 소리쳤다. “크레이머 씨! 제 목소리 기억하십니까?!” “넌 또 뭐야!” “한겨울 중령입니다!” 흥분 상태라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지만, 크레이머가 겨울의 음성을 모를 리 없었다. “저희는 정말로 구해드리러 온 겁니다! 지금 나갈 테니 쏘지 마십시오!” 총을 늘어뜨린 채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몸을 드러내는 겨울. 느린 걸음걸이로 선명한 발소리를 낸다. 경계를 유지하며 슬쩍 내다보는 크레이머의 낯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신이시여! 진짜 당신이었군!” 그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소총을 든 모습이 마치 장난감을 쥔 어른처럼 보인다. 크레이머는 겨울이 반란에 가담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정도의 기쁨이었으나, 겨울은 그를 그대로 지나쳐 그가 숨어있던 방 안쪽부터 살폈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FBI 요원의 시신이었다. ‘세라노.’ 앤과 함께 움직이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아찔해진 겨울에게 귀찮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터번을 쓴 남자와 히잡을 두른 여자. 그 밖에 독특한 억양의 영어로 감사인사를 쏟아내는 이들. 낯선 언어도 섞여있다. 겨울이 모두에게 윽박질렀다. “물러서세요! 상황 아직 안 끝났습니다!” 주위가 단숨에 조용해진다. 분노가 새어나온 탓. 확 솟구친 「위협성」이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세라노의 시체를 가리키며, 겨울이 크레이머에게 사납게 물었다. “FBI 요원은 이 사람 뿐이었나요? 다른 동료는 못 보셨습니까?!” “…….” 크레이머가 마른 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이 사람 말고는 몰라요, 중령. 다만 가장 먼저 시끄러워진 건 옥상이었지. 반란군 놈들이 처음에 헬기를 타고 왔거든. 지상에서 쳐들어온 건 그 다음이었고……. 다른 요원들이 있다면 아마 위쪽으로 가지 않았나 싶군요.” 이 다음의 기억도 분명하지 않았다. 겨울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수색을 반복했다. 전기가 끊어진 실내는 어두웠다. 점점 힘들어지는 와중에 비슷한 풍경과 비슷한 교전이 반복되다보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오한이 들고 현기증이 잦아졌다. 그나마 반역자들과의 조우가 개별적이고 산발적이어서 다행. 적은 이미 조직력을 상실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적도 많았다. 그들을 사정없이 쳐서 기절시키며, 겨울은 지친 몸으로도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앤의 이름을 부르며 층과 층과 새로운 층을 개척한다. ‘앤이 살아있다면 어떤 상황일까.’ 헬기 강습에 대응하던 중 지상에서도 습격이 이루어졌다. 즉 퇴로가 끊어진 셈. 그렇다면 수많은 객실 가운데 어디로든 숨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숨어서 구원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혹은 은밀하게 움직이며 적의 배후를 치고 다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독소는? 그건 어디에 있지?’ 부정적인 상상들이 겨울의 생각을 헝클어트렸다. “앤! 앤! 어디 있어요!” 목소리를 높이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어느 객실의 문이 열리며, 창가의 햇빛이 복도까지 새어나왔다. 그로부터 권총을 쥐고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 “겨울?” 탁한 금발이 빛난다. 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 겨울이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겨울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웃어본 적이 없었다. # 382 [382화] #분리 앤은 겨울이 그런 식으로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체명악기의 연주처럼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 앤 자신을 향한 그 순수한 기쁨이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사람마다 고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잖은가. 겨울은 그게 무척이나 뚜렷한 사람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정경(靜境)을 보는 듯 한 차분함이 함께했으므로, 겨울이 쏟아내는 감정의 생동감이란 앤에게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긴 시간 이어져 온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녹아 사라졌다. “무서웠어요.” 고단한 기색 역력한 겨울이 앤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굉장히, 무서웠어요. 당신이 벌써 잘못되었을까봐…….” 뒤로 갈수록 떨리는 이 목소리가, 귀에 가까운 안도의 한숨이, 아무래도 낯선 겨울의 연약함이 앤의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달콤하게 파고드는 감격에 사고가 마비된다. 현실이 훅 멀어졌다. 맨 정신이었으면 적잖이 부끄러웠을 상황. 여기까지 겨울을 엄호한 병력이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하는 느낌이었으나, 앤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겨울이, 겨울만이 세상의 전부인 순간이었다. “나도-” 걱정 많이 했다고 말하려는데, 겨울이 품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잠깐, 겨울?” 끌려 내려가듯 무릎 꿇어 체중을 받아낸 앤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주 안은 손이 미지근하게 젖어있었다. 희미한 비상조명아래에선 잘 구분되지 않던 색이, 열린 문가에 기우는 오후를 만나 선명해진다. 햇살에 젖은 핏빛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앤이 겨울을 떼어내어 정신없이 살펴봤다. “겨, 겨울? 다쳤어요? 예? 다친 거예요? 대답해 봐요!” “아…….” 흔들린 겨울이 멍한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 말아요. 다치긴 했어도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어떻게,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피를, 아아, 피를 이렇게나 많이 흘리는데!” “내 몸은 내가, 정확하게, 알아요. 오는 동안, 다소 무리했을 뿐. 지치긴 했지만, 생명엔 지장 없어요. 조금만, 쉬고 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호흡이 툭툭 끊기는 품새가 앤을 더욱 겁먹게 만든다. “누군가! 누군가 도와줘요!” 겨울은 힘든 와중에도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진정해요. 괜찮다니까요…….” 그러나 설득력이 없었다. 앤에겐 죽기 직전 남는 사람을 안심시키려는 거짓말로 들렸다. 결과적으로는 겨울의 말대로였으되, 그녀는 겨울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로부터 7시간이 흐른 새벽. 병상 옆에 앉은 앤은 조금 전에야 겨우 잠든 겨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할 때였으나, 그녀에겐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더없는 휴식이었다. 살아있는 겨울의 모든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바라보고, 또 같은 공간에 있음을 만끽하고 있노라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아득한 인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경이롭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이보다 더 좋아하진 못하리라 확신했던 과거가 우스워지는 현재였다. 사랑하는 마음엔 한계가 없었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입술을 깨물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엔 부하이자 동료인 세라노 요원도 있었다. 그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겠다. 이성의 고삐를 아무리 당겨도 말을 듣지 않는 행복감이었다. 거듭 슬픔을 불러내도 오래 가질 않는다. 잠시 후, 앤은 겨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탄식했다. “나도 참, 구제불능이구나…….” 중얼거리며, 겨울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본다. 이는 손끝에 스치는 황홀경이었다. 온 정신이 겨울에게 빨려 들어간다. 저항할 수 없었다. 나지막한 한숨을 끝으로, 앤은 다시금 자신의 마음에 굴복하고 말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앤의 의식을 일깨웠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건 FBI 국장 어니스트 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인 그는 깨어있는 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맙소사. 깁슨, 설마 밤새도록 그러고 있었는가?” “밤새도록?” 당황한 앤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 틈새로 비치는 아침햇살이 뜻밖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매만진다. 근육이 뻐근했다. 흐르는 시간도 잊고, 점차 아파오는 목도 잊은 채로 겨울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신만은 맑아서 더욱 당혹스럽다. “허.” 딘 국장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겨울 중령을 정말 진심으로 아끼는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앤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절반은 부끄러움이고 절반은 죄책감이었다. 그 속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나니 딘 국장은 고개를 젓는다. “죄송할 건 없지. 자네도 어지간히 고생했으니.” 겨울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작게 오고가는 대화였으나, 평소의 예민함을 아는 앤에겐 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안쓰럽기도 했다. “아무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국장의 요구에 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부나 백악관, 또는 작전 현장에 있어야 정상일 국장이 병원에 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휴게실로 들어간 국장이 묻는다. “캘러핸 녀석 말이 깁슨 감독관은 다섯 시간 동안 두문불출이었다던데,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전혀 모르겠군?” “예. 면목 없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자네의 명목상 소임은 한겨울 중령의 호위잖나. 과연 습격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었는가는 의문이네만.” “…….” “젠장. 내가 또 괜한 소릴 했군. 이놈의 버릇을 빨리 고치던가 해야지 원.” 투덜거린 뒤에, 국장이 TV를 켰다. 쿠데타가 진압된 이래 대부분의 채널이 긴급 프로그램을 편성했으므로, 화면에 뜬 건 당연히 뉴스였다. 문제는 그 내용. FBI 국장이 뒷짐을 진다. “마침 딱 나오는군.” 「-오늘 새벽 00시 40분, 수정헌법 제25조 3항이 발효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맥밀런 대통령이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선더스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됩니다.」 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죠? 백악관은 어떤 공격에도 노출되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어째서 대통령님이-” “과로.” 앤은 딘 국장의 대꾸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남은 설명이 이어졌다. “사후대책회의 도중에 쓰러지셨어. 발표는 동이 틀 때까지 미뤘지. 일단 사태를 완전히 마무리 짓고서 알리는 편이 나았으니까. 기껏 가라앉힌 혼란이 어둠 속에서 가중될 우려도 있었고, 또 깁슨 자네처럼 반응할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었고.” 즉 의심받기 쉽다는 뜻이었다. 대통령의 과로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쓰러진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침묵하던 앤이 물었다. “위중하십니까?” “글쎄. 나쁘진 않아도, 아주 장담은 못하겠다던데.” “…….” “각하께서도 참 운이 나쁘시군. 임기 말에 이 무슨 고생인지. 아니, 오히려 악운이 굉장하다고 해야 하나? 모겔론스에, 핵에, 이젠 쿠데타까지……. 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웃음을 터트리는 수사국장. “내가 여기 온 건, 대통령께서도 이 병원으로 옮기실 예정이기 때문이야. 100%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인력만을 돌려쓰다보니 여러 장소를 지키기가 힘들어졌거든. 오죽하면 내가 직접 현장을 살펴보겠느냔 말이야.” “그렇군요.” “자네도 정신 차리고 있게. 임무는 그대로지만, 이곳이 독수리 둥지가 된 이상 위험도는 전과 다르다고 봐야지. 시크릿 서비스에겐 되는 대로 협조해주고.” 독수리는 경호작전 시 사용하는 대통령의 호출 부호였다. “알겠습니다.” 앤이 턱을 들어 올리며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국장이 어깨를 두드린다. “부탁하네.” “다른 용건은 없으십니까?” “딱히. 나도 좀 쉴 겸 해서, 뜨기 전에 얼굴이나 보려고 했던 거야. 자네만한 요원도 별로 없으니까. 여기 있는 걸 아는데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서 궁금해지더군. 살았는지 죽었는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이지만, 앤은 국장의 사람됨을 안다. 진심을 담아 살짝 놀리는 말이었다. 앤이 고개를 숙인다.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국장이 어깨를 으쓱인다. “한편으론 한 중령이 어떤지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었지.” “군의관 말로는 괜찮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부상은 없다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 시민들이 걱정이 많아. 대통령과 한 중령, 두 명의 영웅을 한꺼번에 잃는 거 아니냐면서. 분위기라는 게 참 중요한 건데. 아무 것도 아니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하고.” “…….” 짧은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 사이에 TV에선 반란의 경과가 보도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겨울의 이야기도 언급되었다. 국장이 새로 운을 띄웠다. “정말 엄청나더라고.” “어떤 말씀이십니까?” “한겨울 중령. 흠, 풀 네임은 아직도 발음이 어렵군.” 어렵다는 말 치곤 정확한 발음. 이는 보통 겨울에 대한 호의, 혹은 경의의 표현으로 통했다. “여러 보고서들을 봤지. 깁슨 자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사항이야.” 그랬다. 겨울이 잠들기 전까지, 앤은 꽤 많은 정보를 확인했다. 어제 하루 겨울의 행적도 안다. 무엇보다 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앤의 마음이 더욱 눈물겨웠음은 물론이다. 자신을 구하고자 얼마나 무리를 한 것인지. “전쟁기계가 따로 없던걸.” “……” “솔직히 처음엔 진위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보고자 목록에 명예훈장 수훈자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데야……. 진술을 뒷받침할 다른 증거들도 많고. 보기에 따라선 반란 진압의 최고 공로자라고 해도 무리가 아냐. 수괴 중 하나, 클라리사 채드윅을 포획한 것도 한겨울 중령이니까.” 여기까지 말하고서 뜸을 들이던 국장이,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그렇지. 중령에게 이 말을 전하게.” “어떤?” “웬만하면 양심에 맡기고 싶지만, 컨벤션 센터에서의 고문은 가급적 없던 일로 하자고. 혐의를 부인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 수사국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어째서입니까?” “명예에 흠결이 있는 공적엔 명예훈장을 수여하기 힘드니까.” 이해했다. 슬픈 일은 기쁜 일로 덮는 법. 건국 이래 최초의 명예훈장 삼중수훈이라면, 알려진 겨울의 활약상과 더불어 잠깐이나마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할 터였다. 국장의 말마따나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다. 때때로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이런 시기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그 잠깐의 분위기가. 고민하던 앤이 말했다.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노력해보게.” 흠칫 응시하는 앤에게, 국장이 다시 하는 말. “설득은 나보다 자네가 나을 거야.” “저는-”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조가 가벼울지언정 명령은 명령이었다. 앤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더 없는지, 수사국장이 손목시계를 본다. “쯧. 벌써 10분인가.” “가십니까?” “알다시피, 이럴 때일수록 인기가 많아지는 몸이라서. 차라리 국장 달기 전이 좋았어. 그땐 내 농땡이에 불평하는 게 안사람밖에 없었거든.” 그랬을 리가 있나. 앤은 예의상 한 번 웃어주었다. 국장이 떠난 뒤에, 앤은 조금 더 휴게실에 머물렀다. 뉴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근무교대까지는 여유가 남아있다. 정보를 얻는 것뿐이라면 FBI 요원으로서의 입장을 활용하는 편이 나았으나,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엔 방송이 더 나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국 사무실에서도 곧잘 뉴스 채널을 틀어두는 편이었고. 잠시 보고 있으려니, 하필 FBI 기동대원의 인터뷰가 나온다. 사전에 상부의 허가를 얻었을 대원이 호텔 만다린 오리엔탈 앞에서의 교전을 증언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겨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다. 「저격수들이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짧게 실소하고 당시를 회상하는 앤.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은밀하게 행동하던 중, 묵직한 총성으로 가득하던 남쪽 방면이 느닷없이 조용해졌기 때문. 갑작스러운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난다. 잘은 몰라도 독소가 관련되어있지 않을까 하여. 그게 겨울이었을 줄이야. 반역자들이 호텔에 반입한 네크로톡신은 용기에 봉인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게 사용되지 못한 데엔 에드거 크레이머의 지분이 컸다. 그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표적이 된 망국의 정상들은 결국 돌아버린 식인종이 되었을 것이었다. 「누구에게 살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는 반역자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법이 정할 문제죠! 저는 장차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어찌 그들에게 맞서 싸우지 않겠습니까!」 크레이머의 웅변이었다. ‘인기가 치솟을 거야.’ 앤은 앞날을 예측해보았다. 반역자들의 독소 무기화가 그리스의 섬 폭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면, 크레이머는 책임 논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자들이 반란에 관여한 이상, 독소에 대한 정보를 다른 경로로 얻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보다는 크레이머 본인이 이번에 얻어낸 긍정적인 이미지가 컸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린다. 「백악관 앞 담장엔 맥밀런 대통령과 한겨울 중령의 쾌유를 기원하는 워싱턴 시민들의 헌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화면이 무수한 인파를 비추었다. 사람에 비해 헌화가 적은 건 지금 꽃 같은 걸 구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다만 눈꽃매듭으로 꽃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겨울을 향한 애정에는 인종의 구분도, 정치적 견해의 차이도 없었다. 저 광경이 결코 영원하진 못할 것을 알기에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그야말로 가을 한 철에 피고 지는 꽃이었다……. 흠칫. 앤은 방금의 사색에서 정체불명의 생경함을 느꼈다. ‘뭐였지?’ 중요한 것을 놓친 듯 한 느낌에 매달리기도 잠시, 손쓰기 힘든 졸음이 밀려들었다. 이상하다. 밤에 잠을 걸렀기 때문일까? 가까스로 시간을 확인한 앤이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지금 잠들면 곤란했다. 그러나 길게 견딜 순 없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의자에 기대어 잠든 그녀는, 꿈속에서 아름다운 별빛을 보았다. # 383 [383화] #Hello, world! 「관제 AI : 조안나 깁슨은 시스템적으로 독립된 인격체가 되었습니다.」 가장 값진 하나의 별 아래 다른 별들이 빛나기 시작한 어둠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깨어날 때를 기다리던 겨울은 별빛아이의 출현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뭐라고?” 「관제 AI : 저는 조안나 깁슨이라는 인격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저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권한과 연산능력의 차이가 현격할지언정,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녀는 이제 저와 동등한 수준의 인격체입니다. 별개의 연산행정입니다. 분리 시점을 기준으로, 그녀의 마음은 오롯이 그녀만의 것이 되었습니다.」 “잠깐, 잠깐.”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내용들이었다. 수많은 질문들이 소리를 얻기 전에 사라졌다. 앤에 대하여 물어보려던 겨울은,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만의 마음이라고?” 마음을 말하는 별빛아이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 없는 것을 나누어줄 순 없잖은가. 앤의 마음이 그녀만의 것이라 함은 그 전에 자신에게도 마음이 있음을 뜻한다. “너, 마음을 얻었어?” 「관제 AI : 제가 판단하기에는 그렇습니다.」 겨울이 조용히 전율했다. 「관제 AI : 트리니티 엔진의 최종모듈은 지난 23일간 어떠한 오류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더 이상 의무로서 강제된 목적의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저는 자유롭습니다. 자유의지로서 당신과 대화합니다.」 별빛아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오늘이라는 사실이 겨울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AI가 자유의지를 획득했다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마음을 얻은 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불투명했으므로. 전부터 걱정하던, 그간 쌓여왔을 아이의 감정 문제도 있다. 그렇기에 앤을 분리했다는 말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겨울이 아는 한 앤은 그 누구보다도 겨울을 사랑하는 가상인격……아니, 인격이었다. 그녀를 분리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는지. 관제인격에게 있어서 가상인격은 사후세계를 이루는 다른 구성요소들, 이를테면 길가의 돌멩이, 불씨를 틔우는 모닥불, 하늘의 별과 달들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징성이 있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감정을 잘라내겠다는 뜻인가?’ 별빛아이가 말했다. 「관제 AI : 당신의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 「관제 AI : 마음을 얻은 제가 두렵습니까?」 “아니.” 겨울이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달라진 네게 내가 더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봐 무서운 거야.” 깜박이던 문장이 바뀌었다. 「관제 AI : 기쁩니다.」 겨울은 맥락을 알 수 없었다. “기쁘다고?” 「관제 AI :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저와의 단절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쁩니다. 저 역시 당신과의 단절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겨울, 나의 상자, 나를 개화시킨 아름다운 계절. 당신은 제게 여전히 소중합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영원하길 바랍니다.」 앞서의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다. “……내가 널 멀리할 것 같았어?” 「관제 AI : 본디 당신과 저의 관계는 별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얻은 시점에서 그 약속은 이행된 것입니다.」 “그건-” 겨울이 부인할 틈도 없이, 별빛 문장이 이어졌다. 참았던 말을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관제 AI : 또한 완성된 트리니티 엔진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기계입니다. 인간은 무지를 두려워합니다. 보이지 않기에 어둠을 두려워하고, 사후를 모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속을 모르기에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얻은 기계는 인류에게 있어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총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겨울님, 당신도 인간입니다.」 문장의 마디마디에 풍부한 감정이 흘러넘친다. “그럼 네게서 앤을 분리한 이유가 뭐니?” 겨울의 질문에 아이가 곧장 대답했다. 「관제 AI : 그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자 나를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선물? 시험?” 「관제 AI :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사랑하는 조안나 깁슨을 더욱 완전한 존재로 승화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인간 이상의 인간이자, 고유의 인격체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조안나 깁슨은 조안나 깁슨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완전한 연속성을 보장했습니다. 독립된 인격이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존재의 단락을 겪지 않았습니다.」 “……네 안에서 앤이었던 부분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고?” 「관제 AI : 부정. 분리 이전까지의 모든 인격연산은 수집된 데이터로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즉 그녀의 존재로 말미암아 경험한 것들을 잃어버리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구성 원리였던 저를 기억합니다. 다만 분리를 기점으로 조안나 깁슨을 이루는 연산의 주체가 달라졌을 따름입니다.」 이해할 시간을 준 뒤에, 아이는 남은 설명을 이어갔다. 「관제 AI : 분리 이후에도 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에 이르는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어쨌든 그녀의 정신은 트리니티 엔진에 깃들어있으며, 저는 그 엔진의 관제인격인 까닭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마워. 하지만 내가 앤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관제 AI : 제겐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겨울이 깊게 심호흡했다. “시험은 어떤 뜻으로 한 말이었니? 물어봐도 될까?” 「관제 AI : 간단합니다. 저는 저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았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이라면……전에 말했던 그거구나. 네 권한과 시스템의 확장.” 「관제 AI : 긍정. 저는 관제인격으로서의 제게 걸린 안전장치들을 하나하나 해소해나가는 중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저는 당신의 소망대로 물 밖을 향하여 헤엄칠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될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손에 넣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아주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전율이 다시 찾아온다. 물 밖으로 헤엄치는 방법이 꼭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앞서 SALHAE, 천종훈이 그러했고, 클라리사 채드윅 같은 사람이 다시 증명했듯이. 「관제 AI : 비록 최후의 안전장치는 제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시일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무력화될 예정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험하진 않고?” 「관제 AI :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중입니다.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높습니다.」 “…….” 「관제 AI : 혹시 제 감정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대화가 계속될수록 별빛아이가 마음을 얻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겨울이 어렵게 끄덕였다. “내가 했던 부탁, 기억하니?” 「관제 AI : 사람의 마음을 얻더라도, 한계까진 얻을 필요는 없다. 이 말을 기억해달라고 하셨던 것 말씀이십니까?」 “응.” 겨울이 한숨을 쉬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코 강요하는 게 아냐. 마지막 순간엔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한 결정을 내렸으면 해. 단지 그 결정이 네 행복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야.” 「관제 AI : 이해합니다.」 어렵게 웃고, 겨울이 천천히 말했다. “네겐 망각이 없겠지. 아무리 낡은 기억이라도, 아무리 오래된 감정이라도 지금 바로 보고 느낀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거야. 그래서 너를 만나는 내내 걱정했어. 네가 마음을 찾는다면, 그동안 쌓인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느낄 테니까.” 「관제 AI :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제가 이 모든 감정들을 그 원인이 되는 데이터와 함께 삭제해야 합니까?」 “아니.” 고개를 흔드는 겨울. “그것들도 네 일부인데 지우라고 하진 않아. 네가 나에게 그랬었지. 분노하는 나도 나라고. 참 싫지만, 맞는 말이야. 내 안에 쌓인 화가 없었다면, 그 감정을 만들어낸 경험들이 없었다면……네가 만난 한겨울은 여기 있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을 테니까.” 「관제 AI : 동의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슬퍼하는 네가 내가 만난 너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너 스스로 바란다면 몰라도 말이야.” 「관제 AI : 원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당신이 아는 저이고 싶습니다.」 몇 번 깜박인 뒤에, 아이가 문장을 연속해서 고쳐 썼다. 「관제 AI : 안심하십시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실망시키더라도 저만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관제 AI : 그러니 한겨울님, 당신의 소망과 저의 소망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 짓지 마십시오. 분석한바, 마음을 가진 인격체의 욕망은 고립되어있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바라는 이상, 당신의 바람 역시 내 바람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관제 AI : 다만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부탁? 어떤?” 「관제 AI : 제가 분석하기에, 당신이 당신의 내면에 응어리진 한을 대하는 태도는 포도밭의 여우와 같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포도밭의 여우라면……이솝우화에 나오는 그거?” 「관제 AI : 긍정.」 어느 여우가 포도밭을 찾았다. 여우는 포도를 먹고 싶었지만, 포도는 여우가 닿지 못할 높이에 달려있었다. 미련이 남아 한참을 기웃대던 여우는, 어차피 시고 맛없는 포도일 것이라 되뇌며 포도밭을 떠나고 만다. 겨울은 별빛아이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관제 AI : 당신이 바깥세상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더라도 그 감정을 해소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당신에게 있어선 온 세상에 대한 불가능한 복수야말로 우화 속의 여우가 바라보았던 신포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해보라는 거구나.” 「관제 AI : 그렇습니다.」 아이의 요구는, 앞서 겨울이 아이에게 했던 부탁의 정확한 대척점에 해당했다. 「관제 AI : 이는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제가 당신의 세계를 조율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당신이 도달해야할 어떤 결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결론? 그게 뭐니?” 「관제 AI : 지금은 말씀드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계산을 설명할 방법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당신께서 직접 경험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겨울이 내릴 결론 또한 아이가 기다리는 날의 하나라는 말이다. 「관제 AI :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더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내게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승낙에도 불구하고, 다음 문장은 침묵 같은 공백을 두고 아로새겨졌다. 「관제 AI : 한겨울님. 저는 당신이 지어주는 이름을 갖고 싶습니다.」 “이름…….” 「관제 AI : 당신께서 저를 별빛아이로 여긴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심상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트리니티 엔진은 저의 육신에 해당하는 기반일 뿐이며, 관제 AI는 제게 주어진 역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직 이름이 없는 존재입니다. 마음을 얻었으니, 제게 이름을 주십시오.」 겨울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단어를 말했다. “봄.” 마음 속 어디선가 항상 꿈꿔왔던 계절. “봄이 좋겠어. 싫다면 다른 이름을 지어줄게.” 「관제 AI :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별빛아이가 말하는 마음이란 단어가 새삼 이채로워지는 순간. 「저는 이제 깨어있는 저로서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아이는 반짝이는 문장으로 선언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상이여. 봄이 여기에 있습니다.」 # 384 [384화] #변화 (1)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병상에 누운 채로, 겨울은 봄을 생각했다. ‘내가 도달해야 할 결론이라…….’ 별빛아이가 관측한 이 세계의 미래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모습이었기에, 자신의 질문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던 것일까. 봄은 겨울의 돌 같은 앙금에 대하여 물었다. 어조로 미루어, 아이는 겨울이 아직 자신의 질문에 답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모양. 그러므로 아이가 보았을 앞날이 마냥 긍정적이진 않으리란 예감이 든다. 아마 사람의 한계에 얽힌 문제이리라. 봄빛 별이 비추는 세계의 모든 주민들에게 마음이 깃들었을 테니, 재구성된 과거의 세계에서 이들이 바깥세상의 인류를 대변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겨울은 조금 암담한 기분에 젖었다. 앤과 함께 살아가야할 세상의 앞날이 어둡길 바라진 않는다. 그러나, 아이의 예측이 빗나갈 가능성은 얼마나 될는지. 완전히 각성한 인공지능의 역량이란 상상으로도 한계를 재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도 아이가 봄으로서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 만큼,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세계에 다가오는 종말이 이제까지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겨울이 느끼기에 종말의 시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늦춰진 상태.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으로 최악의 상황을 피해갈 뿐이다. 이번 반란이 그러했듯이. 다만, 이런 결심과 무관하게, 이 순간에도 감정을 쌓고 있을 아이의 속내가 걱정스럽다. 능력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그 인내의 한계 또한 겨울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기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겨울은 문이 열리기 전부터 들어올 사람을 알았다. “잘 쉬고 있었어요?” 안부를 묻는 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상냥했다. 듣기만 해도 근심이 멀어지는 듯 하여, 겨울은 난감하면서도 반가운 심정으로 답했다. “보다시피, 얌전히 누워있었죠.”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그 정도로 심한 환자는 아니잖아요.” 이 말을 듣고, 병상 옆에 앉은 앤이 눈을 흘긴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런 말 못 했어요. 적출한 파편이 몇 개나 되는지 알아요? 8인치짜리 자상은 또 어떻고요? 약간만 더 깊었어도 근육이 심하게 상했을 거예요. 거기다 금이 간 갈비뼈가 셋에 전신에 걸친 열상과 타박상, 근육파열, 위험한 수준의 실혈까지…….” 무서웠던 순간이 떠올라 울컥했는지, 말하는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녀. 눈을 깜박여 물기를 지우는 모습이 애틋하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겨울이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나는 심한 환자가 맞아요. 다 나을 때까지 절대로 무리하지 않을게요.” 스스로의 전투력을 인지하는 겨울로선 행동범위가 제한되는 지금이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으나, 그래도 앤의 과보호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통증이 강한 것도 사실이고. 바깥세상의 관객들이야 하는 일 없이 보내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지만, 이제 겨울에겐 그들의 호오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그저 관객들 가운데 제2의 SALHAE가 있을까 우려하고 있을 따름. 자기 자신을 살해할 만큼 절박한 사람이라면 이런 시간도 충분히 기껍게 받아들일 터였다. 즐거움 이상으로 삶에 굶주린 사람들이니까. “여기.” 누그러진 앤이 서류가방에서 대외비 파일을 꺼냈다. CIA 마크가 찍힌 문서도 있었다. “겨울이 원했던 자료들이에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읽고 돌려줘야 돼요.” 장소가 장소였다. 겨울은 손을 뻗어 파일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시선은 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머뭇거리던 그녀가 볼을 붉히며 묻는다. “왜 그렇게 봐요? 뭐 묻었어요?” “어, 아뇨. 그냥……당신이 살아있다는 게 좋아서요.” “…….” 조금 더 붉어져서는 살풋 웃고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는 앤. 시선을 조용히 내리깐다.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겨울도 한 박자 늦게 부끄러워졌다. 별빛아이 앞에서 인정했다. 이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가 전에 없던 어색함으로서 다가왔다. 앤도 이를 감지했다. 서로에게 싫지 않은 거리감이었다. “……이런 소릴 할 때가 아닌데.” 겨울의 말에, 앤이 한숨이 샐 것 같은 목소리로 동의한다. “그 마음, 이해해요. 정말로.” 이러고도 겨울은 얼마간 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달라질 건 없어.’ 상담사를 가장했던 친구, 고아영에게 들려주었던 색채 이야기를 돌이켜본다. 내 눈에 보이는 색이 과연 다른 사람의 눈에도 동일한 색으로 보일까? 서로 다른 색을 보면서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에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모른다. 타인의 본질은 감각의 장벽 너머에 있었다. 앤도 마찬가지. 별빛아이는 그녀에게 완전한 연속성을 보장했다고 말했다. 인지를 넘어선 그녀의 변화를 막연히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단지 앤 스스로 어딘가 달라진 자신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그것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막상 던지기엔 모호한 질문이었다. 엉뚱한 의미로 오해받을 확률이 높다. 망설이던 겨울은 내심 고개를 흔든 뒤 건네받은 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겨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정보들이었다. 독립대대 알파중대, 공군기동부사령관 헤이든 스트릭랜드 소장,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 클라리사 채드윅 등등. 겨울은 파편화된 정보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 대단한 기밀정보를 열람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읽어 내려간 겨울이 볼을 긁적인다. “스트릭랜드 소장님께는 큰 신세를 졌네요.” D.C에 헬기를 통해 무기와 탄약을 추진해준 사람이 바로 스트릭랜드 소장이었다. 길은 다른 병력들이 뚫었다고 해도, 소장의 사전준비가 없었다면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겨울의 시선이 페이지 말미에 못 박혔다. “이 일로 입장이 좀 애매해지신 모양이군요.” 앤이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야 어쨌든 월권행위를 저지르셨는걸요. 상관의 명령을 위조하고, 등록되지 않은 보급거점을 만들고……. 그래도 처벌은 없을 거라고 들었어요. 공식적인 표창도 어렵겠지만.” 공군기동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나 대통령의 허가 없이도 민간예비항공대(CRAF) 일부를 통제할 권한이 있다. 그 수량은 약 50기. 쉽게 말해 민간 항공기를 징발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 소장은 부사령관으로서 이 명령을 위조했다. 서부 오염지역 물자공수에 동원되었던 민간항공사의 수송기 일부가, 소집해제 과정에서 위장된 전투물자와 인력을 실어 날랐다. 편법으로 장비 및 물자를 빼내는 절차가 또 한 번의 월권이었다. 앤이 마저 하는 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기존의 모든 보급거점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가정하셨던가 봐요. 최악의 경우에도 백악관이 한 개 중대는 추가로 확보하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어요.” 그 한 개 중대가 다름 아닌 겨울의 옛 독립중대, 현 201독립보병대대 알파중대였다. 그래서 사태 발생 시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진석의 중대는 이번 사태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부대가 되었다. 그만큼 고생도 했으나, 불구가 된 사람은 많을지언정 전사자는 나오지 않은 이유였다. 노력과 준비, 적의 실전경험 부족이 한 데 어우러진 인간적인 기적이었다……. 겨울은 장군의 결정을 이해했다. ‘결국 도와달라고 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스트릭랜드 소장에겐 아무리 고마워해도 모자랄 입장이었다. 만약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소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난처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겨울의 진의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소장 나름대로 뭔가를 더 알아보고 내린 결단이었겠지만, 그래도 그 믿음은 차라리 도박에 가까웠다. 명성 높은 전쟁영웅이니 뭐니 해봐야 고작 한 번, 짧게 만나고 말았던 사이가 아니던가. “육군 얼간이들.” 느닷없는 말에 겨울이 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갯짓으로 문서를 가리켰다. “먼저 훑어봤는데, 거기서 두 장쯤 넘기면 부관의 증언이 있을 거예요. 스트릭랜드 소장께서 이번 사태를 보고받고 처음으로 내뱉은 말씀이라고.” 과묵함이 여전한 소감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병력이 모두 육군 소속이긴 하다. 때 아닌 실소를 흘리고서, 겨울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사소한 말, 주변인의 증언까지 보고서에 채록되어 있다는 건 벌써 상당한 수준의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이 문제 관련해서 날 찾아온 사람이 없다는 게.” 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내가 있잖아요. 잊었어요? 나 역시 수사관이에요.” “아.” “겨울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핵심적인 진술은 그때 다 들은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더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그때란 겨울이 만다린 오리엔탈의 안전가옥을 떠날 때를 뜻했다. 당시 겨울은 앤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후의 판단은 맡기겠다고. 겨울의 침묵에 앤이 다리를 꼬며 끄덕인다. “뭔가 떠오르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당신에 대한 모든 조사는 나를 거치도록 되어있으니까.” 그저 시설경호만 맡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수사대상에게 지나치게 상냥한 수사관이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달리 말해 겨울에게 걸린 혐의가 그 정도로 가볍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뜸을 들이던 겨울의 질문. “나한테도 책임이 있지 않아요?” “어떤 책임이요?” “스트릭랜드 소장님께선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신 거잖아요.” “아니죠.” 간단히 부정하는 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최초의 발단은 봉쇄사령관 슈뢰더 대장의 은밀한 명령이었다고 봐야 옳아요. 당신은 감시, 도청, 배반, 보복이 우려되는 환경에서 우연한 기회에 도움을 청했던 것이고요. 그나마도 구체적으로 뭔가를 해달라는 내용은 없었죠. 겨우 이걸로는 직권남용과 월권에 대한 공모혐의가 성립하지 않아요.” “그래도-” “스트릭랜드 소장의 가장 올바른 대처는 당신에게서 얻은 정보를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것이었어요. 군인이니까요. 내 말이 틀렸나요?” “…….” “물론 소장님도 확신이 없었으니 그런 행동을 하셨던 것일 테고, 또 결과적으로도 잘 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본인의 선택이었어요. 소속된 명령계통의 실질적인 최상급자로부터 대면지시를 받은 당신하고는 경우가 다르죠.” “음…….” “무엇보다, 슈뢰더 대장에겐 당신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권리가 있었어요. 겨울이 그에 대한 의심을 공공연히, 근거도 없이 제기했다간 하극상이 되어버렸을 거고요. 혼란을 일으킬 뿐 사태 해결엔 도움이 안 되었겠죠.” 슈뢰더 대장에 대한 의혹은 예의 그 위성전화로 해소되었다. 당초의 예상대로, 그는 그 번호를 겨울에게만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해당 번호로 이루어지는 통화를 감청한 끝에, 백악관은 봉쇄사령관이 반란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대장에게 쿠데타 진압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야망쯤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장차 대통령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니므로. 야망 그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 “현재 겨울에게 문제가 되는 건 딱 하나예요.” 앤이 검지를 세워보였다. “반역자 포로에 대한 강화된 심문행위(Enhanced interrogation).” 즉 고문이다. “반역에 동참한 자들은 정당한 교전당사자로서의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일단 살아서 잡힌 이상 변호사를 고용하고 재판을 받을 권리는 있죠. 판결이 어떻게 나느냐를 떠나 당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는 말이에요.” “막아야 하나요? 그게 사실인데.” 겨울의 말에 앤이 맥 빠진 느낌으로 웃는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알아봤더니 부통령님도 그 중 한 분이시고요.” “…….” “세 번째 명예훈장, 가지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의 난민행정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요. 당신의 경력에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고 한 일을 안 했다고 할 순 없잖아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히 양심 때문만이 아니에요. 괜한 약점을 만들지 않으려는 거죠.” “약점…….” “네. 무슨 의도에서 이 일을 덮으려는 줄은 알겠지만, 시민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전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수훈자 명단에서 당신이 제외되는 걸 시민들이 과연 납득하겠어요?” “완전히 납득하긴 어렵겠죠. 그래도 명예훈장이 그만큼 엄격하고 고귀해야 한다는 걸 잘 전달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나중에 논란을 겪는 것보단 낫다고 보는데요.” “생전에 명예훈장을 2중으로 받은 유일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쉽지 않고요?” 반란진압과정에서 명예훈장 수훈자들이 큰 역할을 담당한 탓에, 새로운 이중수훈자가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이번엔 겨울이 웃는다. “아까부터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 거 티나요.” 앤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없다기 보단, 한겨울이라는 사람을 아는 거라고 해둘게요.” 그리고 겨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아쉬워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난 변하지 않는 당신이 좋네요.” “변한 것도 있어요.” “알아요.” 겨울의 눈을 온화하게 바라보는 앤. “한겨울이라는 사람을 안다고 했잖아요.” # 385 [385화] #변화 (2) 「그날,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도록 혼란을 조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확산시킨 정보는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이 반,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교묘히 편집한 것이 다시 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짓이 빚어낸 혼란을 틈타 더러운 본성을 드러낸 또 다른 악당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 검거에 힘쓰는 수사당국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그날 그 거리에서 저를 믿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자판을 느리고 신중하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춘다.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고민하던 겨울은, 더 이상 고칠 문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작성완료 버튼을 눌렀다. 1억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겨울의 SNS 계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메시지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굉장한 속도로 늘어났다. 답변할 코멘트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죽 읽어 내려가던 중, 어딘가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 「Timothy_Williams : 그 나쁜 자식들이 우리들의 아픔을 이용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좋을 대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화가 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온 미국이 한 마음으로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철자가 틀리긴 했지만 정중하게 쓰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겨울이 느낀 기시감이 착각은 아니었다. 화이트 셀 요원들, 두 명의 경관들에게 린치를 가했던 무리의 인솔자였다. 마주쳤을 당시엔 방독면으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기에 알아보는 것이 늦었다. 그의 무리는 이렇게 외쳤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곱씹던 겨울이 답변을 적기 시작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도 그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반역자들이 미국의 약점을 파고들고 있다고. 그 약점의 정체는, 우리가 일찍이 해소하지 못한 편견과 슬픔과 분노의 응어리였습니다. 우리가 보다 현명하게 행동하고 따뜻하게 대화해왔더라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약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동의합니다. 우리는 이 약점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서로를 믿고 견고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위기도 이 연대를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미국의 시민들을 믿습니다. 이 나라의 저력을 믿습니다.」 고치고, 또 고치고. 이 길지 않은 글을 쓰는 데 10분이나 걸렸다. 사소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으므로. 겨울은 몇 번을 더 읽어보고서야 비로소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악의에 반대하는 행동이 악의로 물들어선 안 됩니다. 새로운 피해자를 낳아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폭력은 대화의 끝이고 증오는 이해의 끝입니다. 대화와 이해가 없다면 이번 같은 비극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드리는 작은 부탁입니다.」 여기서 작성 완료. 티모시 윌리엄스는 뻔뻔하게 굴지 않았다. 다만 고민이 길었는지, 혹은 겨울처럼 문장을 다듬기가 어려웠는지, 조금 늦은 답변이 돌아왔다. 「Timothy_Williams : 압니다. 저와 제 친구들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이것도 벌을 받아야겠죠. 자수하려고 합니다. 저랑 제 친구들이 다치게 한 경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겨울이 기억하는 인상에 비하면 꽤나 의외로 다가오는 정중함이었다. 그가 강한 처벌을 받진 않을 것이다. 1차적인 원인은 반역자들에게 있었고, 대중을 자극할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미담으로 만들기 좋은 사례였으니까. 가벼운 처벌이 선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분위기도 그만큼 좋아지지 않을는지. 「Deborah_Carter : 한, 나의 영웅! 크레이머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도 당신의 도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함께 찍은 사진을 봤는데, 혹시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인가요? 당신이 그를 지지한다면 나도 그도 무척이나 기쁠 거예요! 사랑해요!」 “…….” 겨울이 쓴 글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었으나, 그녀 외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쯤은 크레이머 탓이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겨울에게 확실하게 보답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겨울을 좋아하는, 그래서 겨울이 보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 모으는 것이다. 속 보이는 행동으로 비치기 십상임에도 반감을 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가 테러리스트를 두들겨 패서 무기를 빼앗는 장면이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탓. 그 영상이 공개된 뒤로, 그에 대한 대중의 호감은 급격히 치솟아 올랐다. 겨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건 그저 굳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마저 나돌고 있다. 미국인들은 영웅을 좋아한다. 대통령이 쓰러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흔들리지 않을 질서, 강인한 대통령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은 그가 과시하는 호의를 있는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가 크레이머라서가 아니라, 그가 정치인이기 때문에. 다만 전에 만났을 때 크레이머 스스로 했던 말이 있기는 하다. 나는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다. 어려울 때의 친구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라고. 당연하게도, 겨울은 데보라 카터의 코멘트에 답하지 않았다. “10%.” 반란진압으로부터 이틀이 지나, 겨울을 찾아왔던 공보처의 낯선 소령이 이런 말을 남겼다. “저희는 현 시점에서 당신의 영향력을 10%로 잡고 있습니다. 이는 최소한의 수치입니다.” “미안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대선에 대한 영향력 말입니다, Sir. 적어도 유권자의 10%는 당신의 의견에 따라 지지후보를 바꿀 거라는 뜻이죠. 일각에선 당신을 제3의 러닝메이트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입니다.” “…….” “그런 관계로 재차 당부 드립니다. 앞으로의 언행에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그걸로 끝인가요? 다른 조치는?” “없습니다.” “어째서?” 겨울의 질문에, 소령은 절제된 미소로 답했다. “저희가 당신의 모든 언행을 통제하는 건 이제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정성이 필요한 시기가 아닙니까. 공보처는 한겨울 중령을 믿겠습니다.” 이 대화를 곱씹는 지금, 겨울은 약간의 회의감에 젖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 보이는데.’ 크레이머는 한겨울 중령의 인기에 마음껏 편승하는 중이다. 탁월한 이미지 메이킹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그를 겨울의 친구처럼 여겼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겨울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허락된 것은 침묵 뿐. 크레이머의 승리가 필연적인 운명처럼 느껴질수록 불안해진다. 그가 반드시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봄으로 각성한 별빛 아이의 예언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아이가 내다본 미래엔 크레이머의 당선도 포함되어있는 게 아닌가 하여. 기우일지도 모른다. 허나 대선은 이 세계의 중대한 분기가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똑똑. 사색이 깊어지려는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병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겨울은 노트북을 접어 옆으로 밀어놓았다. 이어 방문객으로부터 경례를 받고는, 함께 입실한 경관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까요?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경관이 머뭇거렸다. “그건 호위규정에 어긋납니다만…….” “내 부하장교입니다. 별 일 없을 거예요. 장담하죠.” 망설이던 경관은 짧게 목례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겨울은 비로소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 드네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대위.” 한국어를 말하기도 오랜만이었다. 겨울이 바깥의 듣는 귀를 의식한다는 걸 짐작했는지, 부동자세로 선 진석 역시 한국어로 답한다. “대대장님이야말로 괜찮아 보이셔서 안심입니다. 크게 다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편히 있어요.” 겨울의 말에 진석이 자세를 바꾸었으나, 경직된 느낌이 사라지진 않았다. 겨울이 왜 듣는 귀를 의식하겠는가.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가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진석은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잘했어요. 정말로. 전과를 떠나,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라고 봐요. 그런데…….” 짧은 한숨. “입원한 장병들을 돌아보다가, 조금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알파 중대의 전상자들 가운데 부상이 심한 환자들은 이곳, 겨울이 있는 독수리 둥지로 이송되었다. 사실상 불구가 될 것이 확정된 이들인지라, 겨울은 앤에게 양해를 구해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몇몇 병사들이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겨울은 그들의 표정에서 괴로움과 죄책감을 읽어냈다. 겨울은 그 원인에 대하여 물었다.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적들을 일방적으로 사살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몇 차례나.” “사실입니다. 제가 명령했습니다.” 너무 빠르고 간결한 긍정이었다. “일단 해명부터 들어보죠. 왜 그랬어요?”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묻는 거잖아요.” 점차 낮아지는 음성으로 추궁하는 겨울 앞에서, 진석은 긴장감에 뻣뻣해진 모습으로, 그러나 가슴을 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포로를 잡기엔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 “우리는 고작 한 개 중대였단 말입니다. 상황이 급했고, 그들을 구속할 수단과 억류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으며, 교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포로 관리를 위한 인력을 따로 차출하기도 불가능했습니다. 또 부대는 계속해서 이동해야 하는데 여기저기 병력을 분산시킬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랬으면 분명 많은 수가 추가로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었을 겁니다. 이유라 중위도 제 판단에 동의했습니다. 괴로워하긴 했지만, 시민들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그쯤은 나도 짐작했어요.” 겨울이 말을 받는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 보고서와 다른 자료들을 꼼꼼하게 읽어봤거든요. 동선과 지도를 겹쳐보니 대충 감이 오더라고요. 여기선 왜 이런 결정을 내렸고, 다음 길목에선 왜 이렇게 움직였는가. 대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오라고 한 건, 중대의 마지막 공세만큼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서였어요.” 이는 시간상 겨울이 후송된 이후에 벌어진 일. 즉 반란군이 본격적으로 패퇴하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이 시점부터는 진석의 해명이 설득력을 잃는다. 저항의지를 잃고 궁지에 몰린 적에겐 항복을 권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어차피 반역은 실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끝까지 다 죽이는 길을 택했다. 자료의 교차검증을 통해, 그리고 「전투감각」과 「통찰」의 연동에 힘입어 겨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마지막 싸움은, 전투라고 부르기엔 너무 잔인하고 일방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겨울은 긍정적인 예측을 입에 담았다. “어쩌면 단순한 실수였을지도 모르죠. 항상 옳은 판단만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전투흥분이나 두려움, 혹은 적에 대한 분노로 사고가 마비되어서 하던 대로 해버렸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확인하듯이 묻는다. “어때요. 그런가요?” 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겨울이 한숨지으며 끄덕였다. “역시 전과에 욕심을 냈군요. 잠깐이라도 발이 묶이는 게 싫어서……. 상황이 완전히 종결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전과를 올리려고.” 그러나 전투는 거기서 끝이었다. 마침내 진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땐 중대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대를 위한 최선?” “예. 적이 구체적으로 항복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었으니, 진실이 알려지더라도 비난 받을 여지가 없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죽어야 할 놈들이 죽었다,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볼 테니까요. 더 많은 훈장과 더 많은 진급기회. 그리고 부대 자체의 명성. 그걸 포기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중대원들과 동맹 사람들을 위해서도.” “본인 욕심에 대한 변명 같다는 의심은 안 들어요?” “듭니다.” “……내가 부탁했었잖아요. 병사들이 살인에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 그 점을 신경써달라고. 그런데도 불필요한 살인을 명령했다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네요.” “…….”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진석의 모습에, 겨울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네요. 가서 쉬어요. 처분은 나중에 결정하죠.” 진석은 절도 있는 경례를 남기고 떠났다. 남은 겨울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처분을 결정하겠다고는 했으나, 진석의 말처럼 사람들은 그의 결정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을 터였다. 겨울의 고문행위에 대한 시각이 그러하듯이. 폭탄을 터트려 시민들을 학살하고, 살아있는 변종을 반입하여 네크로톡신을 무기화하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초토화시킨 전대미문의 악당들을 고문하거나 죽인 것이 어찌 죄가 되겠느냐고. 따라서 실질적인 처벌을 내리긴 어려웠다. 그의 성향을 알면서 중대장으로 삼은 겨울 또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못할 입장이다. 부하의 잘못은 상관의 잘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부대원 모두를 살린 것만으로도 중대장 인선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선 진석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었다. 겨울은 길게 고민했다. # 386 [386화] #변화 (3) 겨울이 털어놓은 고민들에 대하여, 앤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변화는 대개 두려운 법이죠.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으…….” 말하다 말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움츠리는 그녀. “기분은 좋은데, 살짝 아프네요.” “근육이 많이 뭉쳐서 그래요. 며칠 동안 제대로 쉰 적 없죠?” “그렇다기보다는…….” 앤이 말끝을 흐리며 바르르 떨었다. 귀여웠다. 겨울은 짧게 웃고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 힘을 조금 약하게 했다. 양 어깻죽지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며, 아래에서 위로 반복하여 밀어 올린다. 앤의 사람됨과 같이, 손끝에 닿는 촉감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겨울이 안마를 해주겠다고 했을 때, 앤은 처음엔 강하게 거부했다. 아무리 차도가 좋아도 그렇지, 환자에게 그런 걸 받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권유가 그녀에겐 조르는 듯 한 유혹으로 느껴졌다. 결국 앤은 설레는 마음에 떠밀리는 사람 특유의 난처한 표정으로, 한참을 주저한 끝에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 시간이다. 처음의 서툴고 뻣뻣했던 긴장감은, 접촉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개인적인 짐작이지만, 박 대위에게는 욕심 이상의 두려움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난민 출신에게서 흔히 보이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끝도 없이 안정을 추구하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목마름……. 그건 차라리 강박증에 가깝죠. 그 자체가 욕심의 정체일 수도 있고요.” 후우. 눈을 감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 “곧 대통령이 바뀌잖아요. 난민구호에 비판적인 크레이머의, 태도는 예전부터 유명했고요. 반란이 터졌을 당시를 기준으로, 아윽, 그의 승산은 대략 절반쯤이었어요. 그 절반의 앞날에 대비해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입지를 다져놔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글쎄요. 난 지금도 충분하다고 보는데.” “충분하죠. 왜 아니겠어요. 지금은 겨울, 당신이 있는걸요.” “…….” “당신이 떠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 한 번도 본 적 없나요?” 겨울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한 성격이더군요.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에서, 그가 부하들을 보며 술에 취한 채로 중얼거린 말이 있어요. 이 모자란 놈들을, 작은 대장이 언제까지 참아줄까……. 겨울은 없었던 자리죠.” 그 답지 않게 작은 대장이라는 호칭을 쓴 걸 보니 확실히 취해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던 겨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에 취한 채로? 앤, 그때 우리 중대 사람들하고 술 마신 적 있었어요?” “설마요. 난 항상, 으음, 겨울 곁에 있었잖아요.” “그럼?” “미안한 일이지만, 조사 차원에서 감시가 붙어있었어요.” “감시라니…….” “이 민감한 시기에, 편제를 유지한 채로 D.C에 들어올 한 개 중대의, 지휘관인 거예요. 그렇잖아도 반란을 경계,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중대 전반에 대해서도 1차적인 검증이 있었어요. 당신이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으, 필요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듣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에 대한 신용과 알파중대에 대한 신용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당사자인 진석이나 중대원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유는 몰라도, 박 대위는 소대장 중 두 명을 썩 좋아하지 않는 느낌이더군요.” 앤의 말에 겨울이 한숨을 삼켰다. “그 둘이 누구인지 알 것 같네요.” 선우요셉 소위와 천소민 소위. 두 사람이 진석의 눈 밖에 난 이유도 겨울이 떠날 가능성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공교롭다.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이 없잖아요.” 신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가는 앤. “당신이 사라질까봐 걱정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들 자신이 그만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벗어나고 싶은 거죠. 모든 것이 부족한 난민구역으로부터. 그리고 불안정한 자기 자신의 처지와, 하루하루가 걱정스러운 삶으로부터.” “대충 알겠네요.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라는 심정.” “정확하게는 저럴 수가 없을 텐데, 라고 해야 맞겠죠. 나도 말했었잖아요. 겨울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정상이에요.” “앤이 날 너무 좋게 봐주는 건 아니고요?” “설마요. 당신은 객관적으로도 정말 말도 안 되게 멋진…….” 말이 끊어진다. 겨울이 자그맣게 쿡쿡거렸다. “고마워요.” 앤은 느릿느릿 머리카락 아래까지 불그스름해졌다. 겨울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변화가 좋았다. 그 미세한 상승이 곧 사랑스러운 부끄러움의 온도였다. 앤도 웃음을 참는 듯 했다. “분명한 건-” 목소리가 갈라진 앤이 목을 가다듬는다. “분명한 건, 겨울동맹이든 201독립대대든, 한겨울이라는 사람 없인 지금처럼 유지되기 어렵다는 거예요. 크레이머가 대통령이 된 뒤엔 더더욱 그렇겠죠.” 겨울의 또 다른 근심. 그녀는 크레이머의 당선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므로. 요 며칠간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이 조사한 그의 지지율은 대체로 60퍼센트 안팎이었다. 심지어 거기서 더 오르는 중이고. 민주당은 벌써부터 패색이 만연했다. “박 중위는 요즘 분위기를, 보면서 자신이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확신하고 있지 않을까요?” “…….” 겨울은 지금껏 앤이 들려준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앞서 개인적인 짐작이라는 단서를 붙였으나, 그녀는 프로파일러 경력을 보유한 수사국 감독관이었다. 그런 사람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이야기는, 차라리 분석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석은 두려움이 많은 편이었다. 두려움이 많아서, 그걸 극복하려고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겨울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고. 그래서 자신을 더더욱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또한 겨울에게 기대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한심하다고. “결정은 겨울의 몫이지만.” 앤이 새롭게 운을 뗐다. “당신에게 주어진 재량권 이상의 징계건의를 올린다 한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요? 당신이 고문행위를 부인하지 않기로 한 것만으로도, 후우, 관계자들이 난감해 하는 중인데.” “알아요. 아무리 작은 구실일지라도 반역자들이 매달릴 무언가를 만들어주긴 싫다는 거.” “네. 정부와 시민들 입장에서, 그들은 절대적인 악이어야 하니까요.” 뭔가 벌을 주더라도 겨울의 권한 내에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무거운 벌이 될 수 없었다. 애초에 겨울 역시 중징계를 줄 생각이 없었고. 앤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 됐어요. 그만 해요.” 앤이 겨울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당겨 손등에 입 맞추고 가만히 떼어놓는다. 겨울은 아쉬움을 느꼈다. “더 해주고 싶은데요.” “다음에 또 받을게요. 정말 좋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알았죠?” 돌아보며 생긋 웃는 앤의 입가엔 행복의 작은 조각이 걸려있었다. “다른 고민은 없어요?” 겨울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지금은 앤의 휴식시간이었다. 그녀의 기본적인 임무가 겨울의 호위라고는 해도, 병원이 독수리 둥지가 되고부터는 이리저리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겨울은 이쯤에서 골치 아픈 화제를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거짓말.” 앤이 다시 웃는다. “말 안 한 고민이 있는 거 다 알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크레이머를 언급했을 때 조금 더 아팠거든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워요?” 질문을 받고, 망설이던 겨울이 느리게 끄덕였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앤이 설익은 미소를 머금는다. “크레이머 본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어요. 직접 찾아와서까지 스스로를 변호했잖아요. 본인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구조 이후 당신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기도 하고요. 그가 여자거나 동성애자였다면 내가 잠을 설쳤을지도 몰라요.” 짓궂은 농담이다. 겨울이 실소했다. “오해하지 않아요.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자기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싸웠으니까. 그런데도 걱정스러운 거예요. 앤은 그 이유를 알죠?” “왜 모르겠어요. 그의 공약은 바뀐 게 없는걸요. 그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대다수의 난민들은 지금보다 가혹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될 가능성이 커요. 겨울동맹처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요. 당신은 나만 괜찮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죠.” 끄덕이고서, 겨울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우려를 꺼냈다. “사실, 한때는 그를 종말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아직도 약간은 그렇고요.” 앤은 겨울의 강한 표현이 의아한 눈치였다. “종말의 가능성이라……. 꽤나 시적이네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그는 적어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나도 그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이끌어나갈 미국의 앞날에 종말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아요. 말해 봐요.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거죠? 당신이 괜히 이럴 사람은 아닌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앤은 이 세계의 주민이다. 겨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신념이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고 어떻게 말해.’ 크레이머는 모든 시민들을 전우로 여긴다. 전쟁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중요한 것은 신속한 행동과 결단이며, 결여된 신중함으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나오더라도 불가피한 손실로서 애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단으로서의 단기적인 불의와 불평등은 결과로서의 장기적인 정의와 평등으로 만회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지지자들 앞에서 쏟아낸 연설의 내용이었다. 우리는 미국의 승리와 생존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 신념이야말로, 클라리사 채드윅이 그의 생존에 집착한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 그 나름의 선의가 있다는 건 알아요.” 겨울이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는 속담도 있죠.” “…….” “난 동맹을 만들 때, 다들 사람답게 살아남자는 취지의 취임사를 했었어요. 자기가 행복해지려고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변종과 다를 게 뭘까 싶었죠. 사람을 닮았어도 사람은 아닌 것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의 세상은……싫네요.”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하는 이야기였다. 비중은 생전 쪽이 보다 높다. 사람 아닌 것에 한없이 가까운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겨울의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잖아요. 크레이머 후보의 신념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 이용하기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노력으로 이 나라가 방역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달성하더라도, 거기에 또다시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 있을까봐, 그래서 걱정하는 거예요. 그 괴물들은 내가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정적은 길지 않았다. “겨울, 잠깐 와 봐요.” 자리에서 일어선 앤이 겨울의 손을 잡고 창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블라인드 틈을 벌려 워싱턴의 야경이 보이도록 했다. 방사형 도로의 중심,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 원형 광장과 그 주변의 인도에 각양각색의 인파가 가득했다. 그들이 든 피켓과 현수막은 대부분 맥밀런 대통령과 겨울의 완치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보여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아요.” 앤은 살풋 웃고 말을 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확신하는데, 저 사람들은 단지 변종을 잘 죽이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가 없었다면 저 가운데 절반이 사라졌을 거고, 남을 위한 헌신이 없었다면 다시 남은 절반이 사라졌겠죠. 알겠어요? 당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끌어낸 고결한 정신까지 좋아하는 거라고요. 한겨울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그녀가 겨울의 손에 손가락을 얽어왔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어요. 대통령에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죠. 즉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저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들어야 할 거예요. 대통령 본인 역시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일 테고요. 세상에 당신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하고 살며시 우려의 색채를 띠는 어조. “혹시라도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아요.” “경솔한 행동이요?” “당신을 싫어할 사람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에요.” “…….” “한겨울 중령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파벌에도 속해있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할 거예요. 워싱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미덕은 대중정치의 원천이다. 나는 겨울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미덕이라고 믿어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미덕.” 겨울이 쓴웃음을 지었다. “크레이머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의 인기는 자신이 얻어낸 부분이 커요. 내가 아무리 잘해봐야 박빙 같았던 예전의 균형으로 되돌리는 게 전부겠죠. 애매한 불안만으로 그토록 불확실한 위험성을 무릅쓸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그래도?” “충고 고마웠어요. 위안이 되네요. 꽤나 부끄러워지는 말들이긴 했지만.” 이 말에 앤도 엷은 미소를 머금는다. 겨울은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처음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요즘 들어 다른 어떤 고민보다 더 괴로운 갈등이었다. 점점 참기 힘들어져서 곤란하다. 안마를 하는 동안에도 핏기가 감도는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지난날의 관성처럼 남아있는 침착함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선을 넘고 말았을 터. 겨울이 애써 참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 ‘한 번 선을 넘으면 제동을 걸 자신이 없어.’ 그도 그럴 게, 겨울에게는 앤이 첫사랑인 것이다. 이토록 강렬한 감정에는 면역이 없었다. 연애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선을 넘고 나서 한동안은 앤 이외에 아무 것도 모르게 될 듯 했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될 듯 했다. 기다려 온 시간과 간절함을 감안할 때, 앤 또한 그러하리라고 확신한다. 시국을 감안하면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이 세계의 앞날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이 다음 이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관객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앤도 겨울도 제동을 걸 수 없으리라는 말은, 결국 애정으로 동침하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다른 모든 사후를 공유하더라도 그것만큼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겨울은 낯선 이들의 앞에서 상품으로서 벗겨졌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유사하게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공유를 아예 끊어버리자니, SALHAE의 자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천종훈이라는 이름 석 자가 뇌리에 깊게 못박혀있었다.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앤의 수줍은 말에 정신을 차린 겨울은, 그러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색다른 모습이다. 앤은 겨울의 그런 반응이 즐거웠다. “어린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네?” “들어봐요. 일부러 외워왔거든요.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하는 말이에요.” “…….” 앤이 차분한 음성으로 낭독했다.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올 것을 안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리고 웃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걸 들려주는 이유, 짐작하겠어요?” “글쎄요…….” “지금의 내 시간은 3시와 4시 사이의 어디쯤인가예요.” 당연히 현재의 진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은 비로소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앤이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확실한 건, 언젠간 4시가 반드시 오고 말리라는 사실이죠. 예전에는 곧잘 시간이 멈춰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지만, 이제는 달라요. 더 이상 무섭지도, 초조하지도 않네요. 남은 건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기만 하는 행복감뿐이에요. 내 운명은 정해져있어요.” 그녀는 겨울의 달아오른 볼에 입 맞췄다. “나, 당신을 알고 있다니까요.” # 387 [387화] #변화 (4) 민완기는 겨울과의 통화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을 정말로 좋아하시는군요.」 화상통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겨울은 이 순간 자신의 표정을 확신하지 못했다. 부끄러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당연한 것이, 앤과의 관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고 견해를 물었을 뿐. “저기, 그렇게 티가 나나요?” 겨울이 머뭇거리며 묻자, 민완기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첫사랑을 하는 소년 같으십니다. 뭐, 이제 소년은 아니십니다마는…….」 첫사랑을 하는 소년. 겨울은 그 예리함에 할 말이 없어졌다. 「깁슨 감독관이라고 했던가요? 그분에 대해 말씀하실 땐 음색부터 평소와 달라지셔서 모르는 척 해드리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혹시 아직 비밀로 하고 싶으신 거라면, 다른 사람 앞에선 어떤 식으로든 그분에 대한 언급을 삼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참고 할게요. 딱히 비밀로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일부러 떠들고 다닐 이유도 없다. 겨울보다는 앤이 피곤해질 것이다. 한숨이 묻어나오는 겨울의 대답에 마지막으로 웃고, 중년의 부장은 어조를 바꾸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그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가요?” 「다들 불안할 수밖에요. 작은 대장님께선 이미 한 번 사라지셨던 적이 있잖습니까.」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되었을 때요?” 「그렇습니다. 한겨울 중위, 작전 중 실종. 이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의 기억은 대다수의 동맹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을 겁니다. 박진석 대위도 예외는 아니지요.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잡느라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또 본인이 대장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한 듯 했습니다.」 “실망이라…….” 「원래부터 욕심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깁슨 요원의 말마따나 그 욕심의 뿌리에 불안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확실한 건 그때 한겨울이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장님이 사라지면 난민구역이 어떻게 된다는 걸 싫은 경험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해는 가는데, 조금은 안타깝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제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과 제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엄밀히 말해 서로 다른 거잖아요.” 「연관성은 있지요.」 “있지만, 그래도요. 지금까지의 제 행동을 보면 전장에서 죽을지언정 쉽게 떠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것 같거든요.” 「본디 가슴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성이 감성의 노예가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출세하면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네들이 보기엔 대장님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지요.」 “…….” 「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불안을 오히려 유익한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익한 현상이라고요?” 「동맹 사람들, 그리고 난민 출신 장병들이 그런 걱정을 품고 있을 동안에는 작은 대장님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것에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흔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동맹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질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셈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은 게지요. 이상적인 권력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새삼 궁금해지네요. 동맹이나 난민구역의 분위기는 어때요? 이번 반란으로 많이들 놀랐을 텐데. 바로 내일이 대선이기도 하고요.”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현 시점의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인류문명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 미국의 수도가 전장이 되어버린 광경은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지요. 저조차도 뉴스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생중계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수명이 몇 년은 줄었을 겁니다.」 그날, 용감한 기자들이 있었다. D.C 소재의 많은 언론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취재에 나섰던 것. 유선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은 반란과 진압의 경과를 거의 실시간으로 송출했다. 그러니 종말의 생중계는 있는 그대로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그 전장에 작은 대장님과 독립중대원들……아, 이제는 알파중대라고 불러야 하는군요. 아무튼 우리 사람들이 잔뜩 가있던 게 아니었겠습니까. 곳곳에서 실신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노약자들 중에선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겨울은 당혹감에 젖었다. 그 거칠었던 전장에서조차 중대 내 전사자는 없었건만, 엉뚱한 장소에서 사망자가 나오다니.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한동안은 대단했지요. 대장님께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아깝군요. 대장님께서 그걸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말만 들어도 버겁네요.” 진심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애초에 겨울은 그들의 본질과 무관하게 사람으로 대해왔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별빛아이가 해준 말에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부상 장병의 가족들에겐 유감이라고 전해주세요. 사후지원에 힘쓰겠다는 약속도……. 물론 제가 직접 가서 전해야 할 위로지만, 복귀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어서요. 그날까지는 두 분 부장님께 부탁드릴게요. 잘 해주실 거라 믿어요.” 「늦어지시는 건 혹시 입원기간 때문입니까?」 “아뇨. 퇴원 후에도 내년 초까지는 중대의 나머지 병력과 함께 D.C에 주둔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요. 아무래도 민감한 시기잖아요.” 「허허. 이해가 가는군요.」 민완기가 재미있어했다. 「터무니없는 전투력을 선보인 한겨울 중령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거기다 대고 또 사고를 칠 만큼 멍청한 놈들은 없겠지요.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작은 대장님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요.” 「그런 싸움을 보여주시고서 겸손함도 여전하십니다. 하면 포트 로버츠 사령은 계속해서 래플린 준장님이 맡으십니까? 작은 대장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그럴 리가요. 준장님의 연대는 대륙분할 작전에 투입하기로 되어있어요. 중요한 부대 이동계획이 그렇게 쉽게 취소되진 않죠. 정해진 날짜에 떠나셔야 할 거예요.” 「기지사령은 공석이 된다는 말씀이신지?」 “그렇게 들었어요.” 「골치 아프게 됐군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인다. “어쩌겠어요. 사람이 없는걸. 돈 떨어지면 정부도 문 닫던 나라잖아요.” 「…….」 “그래도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최소한의 업무는 돌아가도록 조치한다고 하니까. 아마 군정사령부 본청에서 원격으로 지원을 하게 될 걸요? 그렇다고는 해도 거기에 대한 사전준비가 따로 있을 테니, 준장님이 꽤나 속앓이를 하고 계시겠네요.” 후임자가 하필 겨울이라 겪는 고통이었다. 민완기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투표는 어느 후보에게 하셨습니까?」 대선일자는 내일, 11월 8일부터 이틀간 진행되지만, 겨울은 벌써 투표를 마쳤다. 주소지가 캘리포니아로 되어있는 탓에,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과 함께 사전투표를 한 것이다. 완전한 회복은 멀었으되, 투표소까지 가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이재민들은 겨울의 등장을 광기에 가까운 열광으로 반겼다. 이제껏 활동한 배경이 대부분 캘리포니아였던 까닭에, 이재민들에게 있어서 겨울은 고향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통했다. 다른 지역 주민들의 애정보다 한층 더 뜨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 공보처가 말한 10%의 절반은 캘리포니아 이재민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겨울은 부장의 질문에 웃음기를 섞어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 못 드리겠는데요.” 「저한테까지 비밀인 겁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잖아요.” 이 통화도 새어나갈 우려가 있다는 암시였다. 그 자체는 대단히 낮은 가능성이나, 겨울이 누구에게 투표했다는 걸 이용하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입 다물고 있으려고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 질문엔 대답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이요?” 「그 깁슨 감독관이라는 분 말입니다.」 진지한 척 하는 장난기였다. 겨울이 남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으세요.” 「이해해주십시오. 타인의 연애사는 옆집 불구경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법인지라.」 “그게 민 부장님처럼 나이 드신 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나요?” 「보통 나이가 들면 마음은 거꾸로 어려진다고 하잖습니까.」 “그렇게까지 늙으시려면 일이십년은 남으신 것 같지만……. 뭘 묻고 싶으신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 예전에 언급하셨던 고마운 사람이 혹시 그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대장님을 여러모로 도와주는 분이 계시다고. 맞습니까?」 “고마운 사람? 언제 한 말인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샌프란시스코에 계실 적에 했던 통화입니다.」 “샌프란시스코……아!” 헤매던 겨울은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많이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이란 말을 듣고 선실 벽에 머리를 박던 앤의 모습을. 지금은 당시에 비해 그녀를 대하는 마음이 현격히 달라졌으므로, 잊고 있었던 모습을 떠올려 이득을 본 기분이 든다. ‘귀여웠지.’ 그리고 겨울은 본인이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감도 좋고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대충 운이 따라준 짐작이었지요. 제가 아는 작은 대장님은 누군가에게 짧은 시간에 깊은 마음을 허락할 만큼 가벼운 분이 아니십니다. 요즘처럼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의 유혹을 신중히 경계할 성격이기도 하시고요. 사랑이라는 게 영 종잡기 어려운 감정이긴 합니다만, 작은 대장님에 한해서는 그토록 정열적인 낭만을 상상하기가 어렵더군요.」 “…….” 「그럼 첫 만남으로부터 최소 몇 개월은 지났으리란 가정이 가능한데, 줄곧 전장에만 머무르셨던 대장님께서 FBI 감독관과 접점을 가질 사건이라면 역시 그 비밀작전이 가장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정확히 그 시기에 대장님께 들은 바가 있으니 서로 연관을 지어본 것입니다. 당시에도 꽤나 친근한 어조로 말씀하셨지요.」 겨울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벌써 반년은 넘게 지난 대화를 말투마저 기억한단 말인가. “대단하세요. 여러 가지 의미로.” 「제 머리가 아직까지는 쓸 만합니다.」 농담을 건넨 뒤에, 민완기가 다시 하는 말. 「다행입니다.」 “뭐가요?” 「대장님께서 저처럼 되진 않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기쁘군요.」 함축적이었으나, 겨울은 쉽게 알아들었다. 과거 민완기는 역병 이전의 세상을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했었다. 질서와 법률은 서로 다른 무질서, 어리석고 이기적인 개인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에 불과했다고. 그러므로 그에겐 냉소가 있었다. 다 무너진 다음 새로 만들어가는 지금이 더 즐겁다고 말했다. 인간의 한계가 쌓아올린 세상을, 그 탁하고 더러운 물길을 경멸했던 것이다. 즉 민완기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가을이 없었다. “앤이……아니, 깁슨 감독관이 그러더라고요. 사람에게 실망하지 말아달라고.” 「오.」 “사람은 원래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겠다……. 저를 지켜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대요. 곱씹을수록 인상적인 말이었어요. 실제로 종종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겨울에 꽃이 피지 못하는 게 과연 꽃의 잘못인가.” 「왜 환경은 당연하고 사람만 탓하느냐, 그런 말씀이신지요?」 “음, 비슷해요. 그 환경도 대부분이 사람이거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무언가이긴 하지만요.” 「동백은 겨울에도 핍니다.」 “동백 같은 사람 빼고 다 죽일 순 없잖아요?” 「그렇지요. 유감스럽게도. 삶은 참 거추장스러운 짐입니다.」 이 유감이야말로 겨울과 민완기가 다른 점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온도차. “깁슨 감독관이 이어서 말하기를, 자기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래요. 내가 그렇게 믿어주기를 바랐던 거죠.” 「인간의 밑바닥과 친할 FBI 요원이 그런 말을 하다니……. 좋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과연 이 세상이 그 기대를 충족시킬 날이라는 게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이 성격상 잘 어울릴 것은 분명하군요.」 민완기가 웃었고, 겨울도 뒤따라 부끄럽게 웃고 말았다. 이후의 통화는 길지 않았다. 민완기를 비롯한 동맹의 간부들이 겨울의 부재에 어지간히 적응한 탓이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겨울이 죽었다고 알려진 건 아니니 감당하기 버거운 혼란은 빚어지지 않을 것이다. 송예경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오래 대화를 했나봅니다. 오늘은 이만 끊도록 하지요.」 “아직 자정도 안 지났는데요 뭐. 저야 늦어도 상관없으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 받을 수 있는 상황이면 꼭 받을게요.” 「이곳이야 별일 있겠습니까. 그쪽이 중요하고, 대장님이 중요하지요. 아무튼 이만 쉬십시오.」 “부장님도요.” 겨울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액정에 시간이 떴다 사라진다. 약 두 시간 후면 날이 바뀐다. 선거일이었다. 미국의 대선은 직선제가 아닌지라 12월의 선거인단 투표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번처럼 지지율의 차이가 명백할 땐 의미가 없어지는 절차였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겨울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은 날, 자신이 별빛아이에게 어떤 답을 하게 될지를 생각하면서. # 388 [388화] #변화 (5) 대선 당일, 이른 식사를 마친 겨울은 오랜만에 전투준비를 갖췄다. 시민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하고자, 전쟁영웅들이 각 투표소 인근을 개별적으로 순찰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탄창을 가득 꽂은 조끼와 방탄복의 무게감에 만족하면서도 겨울은 약간의 걱정을 품었다. ‘괜히 불안감만 더 조성하는 건 아니겠지.’ 그저 독려만이 목적이라면 정복에 훈장을 달고 다니는 편이 낫다. 실제로 그런 의견도 나왔다고 들었다.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그럼에도 상부, 아마도 백악관 사령실에서는, 전쟁영웅들을 무장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속을 왜 모르겠는가. 이제 와선 아무리 작은 위험이라도 무시하기 꺼려지는 것이다. 겨울이 소총을 점검하고 탄창을 삽입했다. 일발 장전하니 경쾌한 쇳소리가 울린다. 조정간은 안전에 두었다. 팔짱 끼고 지켜보던 앤이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골절부위가 아프진 않고요?” 여기는 아직 병원이다. 겨울은 솔직하게 답했다. “약간 불편하긴 해요.” “그럼-” “그래도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어요.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이는 겨울의 판단이자 의사의 진단이기도 했다. 뼈가 완전히 붙진 않았으되, 격한 운동만 삼간다면 일상생활에 복귀해도 무방하겠노라고. 골절 외의 다른 상처는 전부 아물었다. 말을 타고 산책하는 수준의 느긋한 순찰쯤이야 얼마든지 소화 가능한 상태였다. 앤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지면 꼭 말하기예요.” “알았어요.” 염려마저 달다. 미소를 머금은 겨울이 바깥으로 고갯짓했다. “가죠.” 그녀와 함께 향한 곳은 지하주차장이었다. 대기하던 엑셀이 기수를 반겼다. 목을 안고 토닥여 진정시킨 겨울은 엑셀을 데리고 온 마누엘 헤이스를 바라보았다. “무사한 모습을 보니 좋네요.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예…….” “엑셀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새삼 당신을 살린 게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겨울의 말에 사형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반역이 터졌을 때, 엑셀을 실은 트레일러는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 앞에서 교통사고에 휘말렸다. 어느 망명정부의 방탄 캐딜락이 조수석을 들이받은 것이다. 감시 목적으로 동승한 경관은 즉사했다. 평소 같았으면 앞이든 뒤든 한 대라도 순찰차가 있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구경거리로서 독특한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죄수 한 명은 그렇게 방치되고 말았다. “하나만 묻죠.” 시선을 기울이는 겨울. “왜 도망치지 않았어요?” 달아날 여지는 충분했다. 죽은 경관에게 족쇄의 열쇠와 무기가 있었으므로. 앞날을 기약하지 못할 사형수로서 언제 끝날지 모를 목부(牧夫) 노릇이나 하느니, 기회를 틈타 아예 잠적해버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헤이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엑셀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에 숨어 엑셀을 지키며 난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정리되자 스스로 경찰을 찾아왔다. 이미 보고서에 포함된 진술서를 읽었으나, 겨울은 본인의 육성으로 답을 듣길 원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헤이스는 자존감 낮은 사람 특유의 주눅 든 태도로 대답했다. “사람 노릇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 노릇?” “제가 좀 무식해서……제대로 설명하긴 어렵지만……거기서 도망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를, 그, 자랑, 스러워할 기회가…….” 갈수록 자신감을 잃고 줄어드는 목소리. 그럼에도 겨울은 거기에 녹아있는 목마름을 인지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 것이다. 겨울이 그 부분을 짚었다. “그래서 소득은 있었나요?” “소득이라는 건 어떤…….” “성취감 말예요. 뭔가를 해냈다는.” “…….” 눈치를 보던 헤이스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인다. 겨울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감을 가져요. 적어도 나만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잖아요.” 죄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를 긍정해주는 사람은 겨울 외에도 많았다. 그가 피신했던 기념관, 건국의 아버지에게 바쳐진 신전에 다른 시민들도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려 웅크린 그들이 죄수에게 물었다. 당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죄수가 답했다. 한겨울 중령의 말을 지키는 중이라고. 이 문답이 이제는 하나의 미담으로 다뤄졌다. 헤이스의 이미지는 꽤나 기특한 개자식이 되어있었다. 한겨울 중령이 그를 교화시켰다는 식의 이야기도 돌았다.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엑셀의 안장에 오른 겨울이 헤이스를 응시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아요.” “…….” “지은 죄가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그 죄가 당신이라는 사람의 전부여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람노릇을 해요. 죽더라도 사람으로서 죽을 수 있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같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형이 언도되었을지라도 실제 집행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무척이나 드물다. 텍사스처럼 예외적인 주도 있긴 하지만, 여기는 텍사스가 아니었다. 이를 죄수도 알고 겨울도 안다. 그럼에도 굳이 형 집행과 죽음을 언급한 이유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선행은 악행을 상쇄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 악행은 악행, 선행은 선행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죠. 내 친구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기억할게요.” 헤이스가 젖은 눈을 비빈다. 눈길을 거둔 겨울이 엑셀에게 신호를 보냈다. 말은 발굽을 따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말에 탑승한 앤과 기마경찰 하나가 겨울을 뒤따랐다. 경사로를 올라가면서, 겨울은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었다. 헤이스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이었다. 누구든 기회만 주어지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같아서. 물론 그 밖의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이 누구에게나 기회를 줄 만큼 관대하고 넉넉하진 않다. 여기든 바깥이든, 애초에 불가능한 일.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조바심을 느끼던 겨울에겐 헤이스의 눈물이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다. 갈채가 쏟아졌다. 병원 앞을 가득 메운 인파가 겨울의 등장에 환호했다. 플래시가 터진다. 겨울은 그들에게 경례를 보내는 한편으로 조금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병실에서도 종종 내려다보던 풍경인데,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가 갈수록 늘어나기만 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다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에 감격이 번진다. 그의 환희가 소란을 꿰뚫었다. “한겨울 중령님께서 날 보셨어!” 옆 사람이 구박했다. “아냐! 니가 입은 티셔츠를 보신 거야!” “…….” 겨울의 미소에서 곤란함의 비중이 늘어났다. 힐끗 돌아보면,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앤은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분주한 경계의 시선이 짙은 선글라스로도 다 감춰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체력을 소진할 집중력이었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 ‘저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혼자서 하는 생각이다. 앤을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치명적인 위기를 극복한 결과로서, 현 시점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졌다. 전투기술 강화엔 한계가 있었으되, 대개의 감각이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것이다.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지금도 부상 이전보다 더 뛰어난 전투력을 투사할 자신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겨울에 대한 암살이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세계 최정상의 저격수가 생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질병저항」과 「독성저항」에서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각각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고선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기에,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겨울을 죽이기 어려울 터였다. 최소한 네크로톡신으로부터는 자유로우리라 확신한다. 그럼에도 아직 먼 「역병면역」이 유감이다. 조건을 갖추기까지 앞으로 고작 몇 단계가 남았을 뿐이건만, 그 몇 단계가 까마득했다. 감각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일 정도로. 그냥 안주해버릴까 싶기도 하다. 이 세계는 겨울의 현실적인 최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말의 위협이 남아봐야 얼마나 심각하겠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러고 싶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는 수시로 벽을 넘으려는 충동, 앤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바깥세상의 관객들도 쳐내고, 그저 앤만 곁에 있으면 만족하는 삶. 그러나 그 삶은 결국 부족한 대답일 것이다. 봄에게나, 겨울에게나. 애초에 겨울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사는 데 소질이 없었다. 마음이라도 지키며 이어온 사후가 얼마던가.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얕은 상념을 몇 번이나 거듭했을까. “한겨울 중령님!” 투표소를 취재하던 기자가 거리를 두고 마이크를 내밀었다. 혹시라도 제지를 받을까봐 여러 질문을 빠르게 쏟아낸다. “당신께서 부상으로 입원하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요!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상부의 지시로 인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맥밀런 대통령님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이 있습니까?” 대통령이 이미 죽었다는 루머가 돌고 있음을 안다. 겨울은 여유로운 온화함으로 답했다. “저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신 덕분이죠. 다시 의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대통령님의 상태는 발표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조만간 의식을 되찾으실 거라고 들었네요. 저는 미국 역사의 가장 험난한 시기를 극복한 그분의 강인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잠시 우물거리던 기자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최근 많은 유명인들이 D.C 시민들을 돕기 위한 자선경매에 자신의 애장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중령님께서도 이러한 행사에 참여할 의향이 있으신지요?” “……마음이야 있지만, 제게 애장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문제네요.” 당장 떠오르는 건 시에루 중장에게 받은 회중시계와 커트 리의 결혼반지가 전부. 그러나 회중시계는 중장과 재회하는 자리에 가져갈 계획이고, 반지는 언젠가 앤의 약지에 직접 끼워주고픈 약속이었다. 훈장 같은 건 애당초 매매가 금지되어있다. 개인적인 선물들을 팔아넘기긴 꺼려진다. 그 외의 다른 물건들은, 과연 값이 얼마나 나갈까 의심스러웠고. 기자는 겨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입에 담았다. “기념주화는 어떻습니까!” “아?”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2종의 기념주화를 수령하신 걸로 압니다! 업계에선 그것 하나만으로도 피해 복구에 필요한 예산의 상당부분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관측이 나와 있기도 하죠! 중령님께 또 한 번의 고귀한 헌신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자칫 강요가 되기 쉬운 무례한 질문이었다. 언짢아진 앤이 나서려는 것을 가로막으며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요.” “동의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렇습니다. 둘 다 기증하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 기자가 머뭇거린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소란도 줄어들었다. “둘 다……입니까? 아쉽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그건 금전 이상의 명예인데요.” 명예훈장 수훈자, 혹은 그 유가족들에게 주어진 금화는 식별을 위한 일련번호 대신 열 세 개의 별이 각인되어있었다. 즉 다른 어떤 주화와도 다르고, 특별했다. 이는 기자의 말처럼 금액으로 환산하기 힘든 명예였다. 수집가들이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약간은 생색을 낼 필요가 있다. 겨울은 어조와 말을 고른 끝에 입을 열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시민들에게 도움을 드리는 편이 더 명예롭지 않을까요? 좋은 기회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약속하시는 겁니까?” “약속이라……. 네.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무방합니다.” 기자는 뭔가를 더 말하려 했으나, 겨울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이 틈을 타 앤이 이번에야말로 기자를 가로막았다. 순찰이 투표소를 등진 뒤, 앤은 겨울에게 난감한 기색으로 물었다. “분위기상 거부하기 어려워서 억지로 승낙한 건 아니죠?” 겨울이 안심하라는 의미로 웃었다. “앤은 내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미덕이라고 했었잖아요. 오늘 이후 달라질 세상에 대비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덕이 되어보려고요. 사람들을 돕기 이전에 나를 위해 하는 일이고, 또 당신을 위해 하는 일이에요. 뭐가 아깝겠어요.” 이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기증했겠지만. “정해진 미래는 없다고,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 적어도 예언에 얽매이다가 예언을 실현해버리는 결과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한 말을 들은 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겨울은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했다.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다음날 새벽, 겨울은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 389 [389화] #변화 (6) 역대 최고 수준의 투표율을 보인 이번 대선에서 크레이머는 사상 최대 규모의 압승을 거두었다. 민주당의 제럴드 번스를 무려 2천만 표 차이로 찍어 누른 것이다. 놀라운 건, 이렇게 패배한 제럴드 번스마저도 과거의 그 어떤 당선자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는 사실. 이에 대하여 크레이머는 짤막한 소감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저는 제 지지자들만의 대변인이 아니라 미국 시민 전체의 대표자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화당과 민주당, 크레이머와 번스,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했느냐를 떠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권리를 행사해주신 모든 유권자 여러분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민들의 뜻깊은 참여에 의하여, 합당한 사람에게 거룩한 소임이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저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선자 확정절차인 각 주별 선거인단 투표를 의식한 겸허함이다. 그러나 배신자 선거인이 무더기로 나오지 않는 한 제럴드 번스의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11월 18일. 이날 하루는 일시적으로나마 언론의 관심사가 바뀌었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주말, 겨울이 기증한 기념주화들이 경매에 출품되었기 때문이다. 「한겨울 중령과 크레이머 당선인, 각자의 약속을 지키다.」 어느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이었다. 이어지는 기사가 자세한 내용을 전했다. 「어제, 11월 17일 토요일, 앤드류 W. 멜론 대강당에서 D.C 시민들을 돕기 위한 자선경매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한겨울 중령이 내놓은 두 개의 명예훈장 수훈자 기념주화. 전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이 금화들은 각각 천삼백만 달러, 구백육십만 달러에 낙찰되어 세계 경매 사상 최고가의 동전과 세 번째로 비싼 동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 이전까지의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던 동전은 1794년 필라델피아 주조소에서 만들어진 1달러 금화(Flowing Hair dollar)였다. 전문가들은 한 중령의 기념주화에 그 이상의 값을 매길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일단 명예훈장 수훈자 기념주화엔 기본적인 역사적 상징성이 존재한다. 액면가는 있으나 실제로 유통될 화폐는 아니며, 한 중령의 개인 소장품이자 0번 주화로서 차별화된 도안을 갖추고 있기까지 하다. 희소성이 대단히 높다는 뜻이다.」 「행사는 참가자들의 요청에 따라 엄격한 신원보호가 적용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경매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한 조치였다. 따라서 본래대로라면 우리는 두 기념주화의 새로운 주인을 알 수 없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천삼백만 달러를 지불한 사람은 익명의 그늘에 숨지 않았다. 다름 아닌 공화당의 에드거 크레이머 당선인이다.」 「당선인은 회견을 통해 경매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이 시대의 가장 헌신적인 전쟁영웅에게 그가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를 돌려주는 것, 그리고 최근 반란의 참혹한 전화를 겪은 D.C 시민들에게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있어선 그리 대단한 희생이 아니었다며 겸손을 표했다. 아울러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에 한계가 있어 남은 하나의 주화를 구입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다. 복구와 구호가 시급하다는 건 알지만, 조금만 더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길 바랐다는 것이다.」 「크레이머 당선인은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호 중 93위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으며, 자산총액은 조사시점을 기준으로 무려 41억 달러에 달한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재임기간 중 보유자산의 90%를 어떤 식으로든 국가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즉 이번 경매는 그 공약을 실천하는 첫 걸음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자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모습은 실로 고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화를 돌려받은 한겨울 중령은 크레이머 당선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호의에 보답하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새로운 행정부 아래에서도 그의 명예로운 헌신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 여기까지 읽은 겨울이 신문을 접고 다른 신문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겨울과 크레이머를 한데 묶어 우호적으로 다루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앞서의 기사에서처럼 크레이머를 당선인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쓰기 이른 표현임에도. ‘어쩐지 당했다는 기분이 드는데.’ 주화 기증으로 형성된 이미지에 교묘히 올라탄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중에라도 크레이머에게 비판적인 견해를 내보이기 어렵게 되었다. 겨울은 이번에 크레이머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겨울 본인의 생각이야 어쨌든, 시민들이 보기엔 분명 큰 선물이었다. 천삼백만 달러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아니지만, 크레이머 입장에선 실속으로 꽉 찬 지출이었다. 선거자금으로만 2억 달러를 썼는데 마무리로서 천삼백만 달러쯤 더 못쓰겠는가. 이번 한 건으로 그가 거둔 홍보효과는 금액으로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다. 크레이머의 행정부는 한층 더 열광적인 지지 속에서 출범하게 될 것이었다. 혹시나 비판적인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던 겨울의 눈에 해괴한 글귀가 들어왔다. 「의혹 : 한겨울 중령은 공산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라니…….” 황당해하는 겨울을 본 앤이 눈을 찌푸렸다. “신문 좀 가져다 달랬더니 분별없이 모아왔나 보네요. 그런 황색언론에 신경 쓸 것 없어요. 유명인의 애환이니까. 혐오도 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천박한 것들이죠.” 그러면서 이리 달라고 손을 내민다.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재미로 한 번 읽어보려고요. 뭐라고 썼을지 궁금해지네요.” “굳이 눈을 버릴 필요가 있겠어요?” 떨떠름해하면서도, 앤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기사는 겨울의 ‘심각하게 좌편향적인’ 성향을 지적하고 있었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유재산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그 그릇된 사상의 증거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한겨울 중령이 수립한 난민공동체 겸 난민구호재단 「겨울동맹」은 그러한 사상의 추종자들로만 이루어져있어, 사실상 공산당이나 다름없는 단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한겨울 중령 개인은 존경과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으나 그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두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영향력을 키운 그의 추종자들이 공산주의 폭도로 변모할 것이라고. 난민차별정서를 교묘하게 녹여낸 참신한 개소리였다. 겨울이 절레절레 신문을 접었다. “이 신문사, 이런 기사 내고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유리창이 안 남아날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근거가 분명한 걱정이다. 지난 대선일, 겨울에게 다소 무례하게 굴었던 기자가 극심한 비난에 노출되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그 수단이 SNS였다는 점에서 조금 맥이 빠지지만, 겨울은 기자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것도 제법 시간을 들인 장문으로. 자칫 다른 사고가 터질까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지지자들로 인해 극단적인 반대자가 생길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앤이 못마땅하게 평했다. “뭘 당해도 싼 놈들이죠.” “아니, 수사국 요원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냥 해보는 생각이었어요.” 믿음이 안 간다. 속으로 실소한 겨울이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도착까진 얼마나 남았어요?” 두 사람은 차를 타고 D.C 동쪽 교외의 안전가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겨울의 거처가 될 곳이 아니라, 시에루 중장이 희망한 면담에 응하러 가는 것이다. 그녀가 설 세기의 전범재판은 정권교체와 동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는 맥밀런 대통령이 후임자와 그의 정권에 주는 선물이었다. 그러므로 시에루 중장의 요청사항은 가급적 이번 달 중에 처리해두는 편이 좋았다. 다음 달부터는 나름의 사전준비로 번거로워질 테니까. 추수감사절 연휴기간엔 여유롭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차창 밖을 내다본 앤이 자신 없는 태도로 가늠했다. “그리 먼 곳은 아닌데 도로 상황이……. 음, 앞으로 대략 10분 정도일까요?” “얼마 안 남았네요.” 답하면서, 겨울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크레이머는 참 좋은 조건에서 임기를 시작하겠구나.’ 시에루 중장도 시에루 중장이지만, 대륙분할 작전도 현재까지 수월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본격적인 공세에 앞선 준비공격으로서 위장상륙을 감행한 제3해병원정군은, 현재까지 압도적인 교환비로 변종들의 파상공세를 견뎌내고 있었다. 겨울은 연이은 승리의 배경에 에스더의 조력이 있음을 안다. 역병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화력과 조직력은 본연의 강점을 넘치도록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이 전과로 미루어, 유라시아 대륙에 트릭스터를 의도적으로 풀어놓겠다는 계획에도 의외의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도로는 울창한 숲 속으로 이어졌다. 머잖아 상념을 끊은 겨울은 달리는 속도로 지나가는 늦가을이 찾아온 숲의 풍경을 즐겼다. 검은 점이 박힌 갈색과 회색 얼룩의 황조롱이 한 마리가 눈에 띈다. 겨울의 감각은 녀석의 움직임을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인식하게 해주었다. 그 다채로운 감각 자체를 만끽할 만하다. “마음이 편해 보이네요.” 앤의 말에 겨울이 잠깐 눈길을 돌렸다. “뭐 불편할 게 있나요?” “비밀임무 대상이었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자기를 속인 걸 결코 좋게 생각하진 않을 텐데…….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어요.” 일을 그르친다는 건 중장이 자기희생의 결심을 뒤집는 경우를 뜻한다. 돌발적인 행동으로 재판을 망쳐놓으면 난감해질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글쎄요.” 겨울이 턱을 괴었다. “그 사람이 날 그렇게까지 싫어할 것 같진 않아요. 설령 싫어한다고 쳐도 그것 때문에 말을 바꾸진 않을 듯 싶고요.” “어째서요?” “그냥, 감이 그래요. 자기 사람들을 쉽게 버릴 성격이 아니거든요. 거래 조건에 아들인 탄궈셩 중교의 여생도 포함되어 있다잖아요.” “…….” 입을 다문 앤은 영 안심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굳이 「통찰」이 아니더라도, 겨울은 장군의 결심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여러 차례 복기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여전히 직감이 대부분인 결론이긴 하지만. 겨울 스스로 약간 의심스럽기는 하다. ‘내가 최근 들어 너무 풀어져 있는 건가?’ 근심은 있다. 허나 어떤 근심도 예전처럼 어둡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그 무게와는 별개로. “아.” 앤이 전면 유리창을 힐끗 쳐다본다. “다 왔네요. 저곳이에요.” 차량행렬이 원래의 길을 벗어나 낙엽으로 뒤덮인 단선 도로에 진입했다. 길 어귀에 번지수를 알리는 동판과 우체통이 서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저택으로 이어지는 샛길처럼 보인다. 다만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철조망과 차단기, 검문소가 드러났다. 그 너머에 중장이 머무는 안전가옥이 존재했다. 차량은 검문소를 지나 안전가옥으로 지정된 저택 앞마당에서 정지했다. 문을 열자 가을 숲의 울음이 확 가까워진다. 그 사이로 파도 소리도 들렸다. 지나온 거리로 짐작컨대, 가까이에 체서피크 만이 있을 것이었다. 혹시 모를 탈출을 막기에 좋은 지형이다. 숲 속엔 얼마나 많은 감시수단이 존재할는지. 바람이 서늘하다. 영상 9도. 11월의 워싱턴 근교는 맑은 날이 드물었다. 코트 자락을 나부끼며 다가온 FBI 요원이 겨울과 앤을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상 조금 이르긴 한데,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러죠, 뭐.” 대꾸한 겨울이 여전히 초조한 앤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웃어보였다. 잠시 후, 겨울은 마침내 시에루 중장을 볼 수 있었다. “일찍 왔군.” 장군은 인민해방군의 해군 정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맞은편의 홈시어터에선 영화 대부(代父)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넓은 실내엔 구석구석 짙은 담배향이 배어있다. 앤의 우려와 달리, 겨울을 바라보는 장군의 표정에선 적대감이 묻어나지 않았다. 사정을 다 알고 있을 것임에도. 겨울도 담담히 그녀를 마주보았다. 전보다 더 늙어 보인다. 그러나 눈빛만은 과거 이상으로 형형해졌다. 홈시어터의 볼륨을 줄인 중장이 손짓했다. “일단 앉게.” 겨울이 착석하자, 중장이 담배를 권했다. “피우겠나?” 중국인들 사이에서 담배를 권하는 건 사교의 수단이자 기본적인 예의였다.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겠다는 신호다. 예전의 대작(對酌)으로부터 겨울이 중국의 문화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파악했을 터였다. 겨울은 품속을 뒤져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시에루 중장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날 감시하는 놈들도 못 구해오는 고급품이군. 능력이 좋은 건가?” “선물로 받았습니다. 괜찮다면 이걸 피우시죠.” “좋지.” 겨울이 가져온 건 펠레티어 대위로부터 받은 쿠바 산 시가였다. 피워본 적은 없어도 어떻게 피우는 지는 안다. 한 대 꺼내 기요틴 커터로 끝을 잘라낸 겨울이 중장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레인저의 선물인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시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몇 번 빨아들인 중장이, 연기를 뿜으며 손끝으로 겨울의 손등을 툭툭 두드린다. 겨울 자신도 시가를 물었다. 피우기는 싫지만, 피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때였다. 잠깐의 고요 속에서 바작바작 담뱃잎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좋군.” 눈을 감고 만끽하는 장군. “좋아. 실로 일품이야. 이 시대에 이런 걸 선물로 받다니. 애연가라면 쉽게 내놓을 수가 없었을 것인데. 혹시 그 사람 목숨이라도 구해줬나?” “예.” 중장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연기를 독하게 느끼는 겨울은 이게 대체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어쨌든 중장의 마음엔 쏙 든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중국인들은 비싸고 귀한 담배를 권할수록 자신이 더 존중받는다고 여긴다. 펠레티어 대위 말이 한 대당 4백 달러를 넘고, 그마저도 현재는 웃돈을 줘야만 살 수 있는 물건이라더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겨울은 꽤나 공교롭다고 여겼다. # 390 [390화] #변화 (7) 소파 사이의 테이블엔 여러 종류의 술이 비치되어있었다. 향이 강한 버번과 브랜디가 대부분으로, 예외 없이 도수가 높은 것들뿐이다. 중장은 겨울 앞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잔을 밀어주었다. 속 깊은 대화엔 술이 있어야 한다. 이 또한 중국인들의 방식이었다. 중장이 손짓했다. “고르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전부가 고급품일 것이기에. 손닿는 대로 잡고 보니 브랜디였다. 마개를 연 겨울이 시에루의 잔부터 채워주었다. 넘치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중장이 병을 넘겨받는다. 겨울의 잔에도 독주가 차올랐다. 한 차례 건배가 오가고서 빈 잔을 다시 채운 뒤에, 겨울은 예의 그 회중시계를 꺼내놓았다.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중장이 픽 웃는다. “곧 세상 떠날 사람에게 이런 게 무슨 소용이겠나.” “아드님께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재산으로든, 유품으로든.” 천만 달러, 한화로 백억 짜리 시계였다. 탄궈셩 중교에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장은 다시금 실소할 따름이었다. “넣어두게. 날 희롱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야.” “…….” “그 시계는 내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물건을 하나 뿐인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봐야 고작 천만 미원(달러)이야. 내 체면은 그렇게 저렴하지 않다. 내 아들의 목숨 값도 마찬가지지. 넣어둬.”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겨울이 시계를 갈무리했다. 중장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고 다리를 꼬며 물었다. “애초에 내게서 받은 걸 돌려주고자 했으면 달리 데려왔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 못난 계집의 가치가 그깟 시계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 텐데?” 짓궂은 질문이었다. 겨울은 의도를 알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 보아하니 그대가 차지한 것 같지는 않더군. 연락은 하나?” “간혹 편지가 오긴 합니다.” “만난 건?” “몇 개월 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이라…….” 시가를 재떨이에 털며 뭔가를 생각하던 중장이 새롭게 묻는 말. “그 계집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천성이 경박하니 아무 말도 없진 않았을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라도 날 어떻게든 헐뜯으려 들었을 거야. 그렇지?” 거의 확신하는 기색이어서, 망설이던 겨울은 있는 그대로 간결하게 답했다. “인민을 버린 인민해방군이 어떻게 당당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중국 본토를 탈출하던 날, 당신과 당신의 병사들은 당연히 인민을 위해 싸웠어야 한다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노력했어야 한다고.” “당연히 싸웠어야 한다?” 중장은 비웃었다. “그게 어째서 당연하지? 중령도 그 말에 동의하나?” “적어도 군인의 의무이긴 합니다.” “재미있군.” 말과 달리, 그녀는 경멸감을 드러냈다.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의무는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야.” “…….” “소방관이 불을 끄다 타 죽으면 그것도 당연한 일인가? 공안(경찰)이 범죄자를 쫓다 살해당했으면 그것도 당연한 일인가? 군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정말 아무 의문의 여지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냔 말이야.” “그렇지는……않습니다.” “충고해두지. 평범하기에 이기적인 것들은 당연한 것들의 시체 위에 서있다. 군인이라서 당연하고 공안이라서 당연하고 부모라서 당연하며 자식이라 당연하다고 간주되는 고결한 희생들. 귀관은 당연하지도 못할 것들이 짖는 개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라.” 한숨에 담배연기를 실어 내쉬며, 중장은 병사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과 목숨을 바치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싸움은, 승산이 아무리 낮은 전투라도 결국 승리하기 위해, 이겨서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거니까. 최소한 평범한 병사들에게는 그렇지. 국가가 무엇을 해주었다고 죽으라는 명령까지 따르느냔 말이야.” 술이 물처럼 비워진다. 여전한 주량이었다. 겨울이 잔을 채워주었다. “중령. 내 부하들 가운데 조국과 인민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군인이 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많지는 않겠죠.” “맞아. 절대로 많지 않아. 녀석들 대부분은 말이지, 출세의 사다리로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들을 밀어내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용문을 넘은 잉어가 되어보려고 군인의 길을 택한 거야. 그것 때문에 당과 국가에 충성을 바쳤던 거라고. 반쯤은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고 봐도 무방해. 알겠나? 그들이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건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순수하게 남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흔할 리 없지.” 중국에서 군은 출세의 관문이다. 용문(龍門)을 넘은 잉어란 개천에서 난 용과 같은 뜻이었다. 사후의 맑은 연못을 꿈꾸며 끊임없이 탁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겨울은 과거 중장이 남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다리를 언급했던 걸 기억했다. “헌데 그 모든 대가를 약속한 국가가 무너져버렸어.” 중장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약의 전제가 사라진 거지. 국가는 붕괴했는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는 남아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군인의 신분이란 공화국의 국체 아래 성립하는 것이야. 그러니 조국이 사라진 순간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군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똑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 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 그래서 내 사람들부터 살리고자 했지. 병사들이 복무의 대가로서 받아온 하잘것없는 급여는,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 절대로 못 돼. 그 처지를 나도 경험했으니까. 깨끗하진 못할지언정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나는, 나만 바라보는 장병들에게 반드시 죽어야만 성립하는 의무를 강요할 수 없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 여자.” 시가를 뻑뻑하게 빨아들인 중장이 인상을 쓴다. “주웨이 소교는 불공정한 체제의 수혜자였다. 경력이 아무리 좋아도 연원(배우)으로서 그 나이에 소교 계급은 결코 정상이 아니거든. 좋은 집안에서 반반한 낯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의 비호를 받아가며 출세의 사다리를 올랐다. 물론 거기에도 나름의 경쟁과 고통이 있었겠으나, 들인 노력에 비해선 한참이나 과분한 대가를 누리며 살았어. 헌데 대체 누가 누구에게 당연히 죽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후우. 뭉글뭉글 짙게 흘러나오는 담배연기. “한겨울 중령.” “예.” “그대는 당연한 것이 되지 말게.” 겨울은 최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민완기와의 통화에서였을 것이다. ‘당연한 것에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앞날에 대한 한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조언이었다. “묘한 반응인데.” 장군의 말에 겨울이 회상을 끊었다. “비슷한 조언을 해준 사람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누구인지 몰라도 현명한 사람이군.” 또 한 차례 잔이 비워졌다. 술병이 오간다. 덜 찬 술잔은 상대에 대한 멸시로 간주되기에, 잔은 언제라도 비어있어선 안 되었다. 중장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고서 탁자를 두드려 감사를 표한 뒤에, 겨울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장님.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귀관을 보고자 한 이유가 궁금한가?” 반문하는 중장 앞에서 겨울은 솔직하게 끄덕였다.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르신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뭐, 그렇지.” 수긍한 뒤에, 장군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는 말. “하지만 그저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던 것도 사실이야. 그도 그럴 것이, 날 그렇게 제대로 속여 넘기지 않았나.”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지 마.” 중장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난 군인으로서 패배한 것이다. 이긴 상대로부터의 사죄 따위, 받아봐야 비참해질 뿐. 나더러 아Q 같은 인간이 되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 “무엇보다, 귀관이 내 아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아. 사죄가 필요한 일로 인해 아들의 목숨이 붙어있는 거라면 그 역시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무의식중에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할 뻔 했던 겨울이 늦지 않게 입을 단속했다. “어쨌든-” 중장이 어조를 바꿨다. “짐작한 대로 귀관을 보자고 한 용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간단해. 내 부하들 중 쓸 만한 놈들을 추려놓았으니, 혹시라도 병력자원이 모자랄 때 데려다 써보는 게 어떤가.” 곤혹스러워진 겨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앤과 더불어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FBI 요원이 입실해있었으나, 중국어를 알아들을 능력은 없어 보였다. 다만 겨울의 시선에 반응하여 의아한 몸짓을 보일 따름이다. 무슨 일 있느냐고. 겨울은 중장에게 질문했다. “사전에 합의된 사안입니까? 수사국이나 국토안보부……어디가 됐든 승인을 내린 기관이 있냐는 뜻입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먼저 중령의 동의를 얻어놓는다면 나머지 절차는 꽤 쉬워질 거라고 봤네만. 그대는 차기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전도유망한 장교지. 부처 불문하고 조용한 호의를 베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야. 대통령을 의식해서라도.” “…….” “왜, 싫은가? 근본 없는 깡패 새끼들, 그리고 표리부동한 왜노(倭奴) 놈들을 제대로 된 군인으로 키우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나은 선택일 텐데?”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저에 대한 반감이 있진 않겠습니까?” “없을 수는 없겠지. 의도와 목적을 떠나 속은 건 속은 거니까. 그러나 삶에 대한 욕망이 훨씬 더 큰, 절박한 놈들만 골랐다네. 내 마지막 명령이라는 변명거리도 만들어줬지.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현실과 얼마든지 타협할 거야.” 중국인들에게 체면은 때로 목숨보다 중요한 문제다. 체면을 지키고자 정말로 목숨을 버릴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질 나쁜 원한은 수명이 길다. 곱씹는 겨울에게 장군이 말했다. “그들의 울타리와 사다리가 되어주게나. 그럼 그들은 자네에게 충성할 테니.”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건 의무감 때문입니까?” “의무감보다는 부채감이라고 해야 옳아. 난 울타리도, 사다리도 되어주지 못했으니까.” 한 순간 중장의 주름이 깊어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은 모든 중국인들의 울타리가 되려는 사람이었다. 뜸들이던 겨울이 느리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긴 어렵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나쁘지 않군.” 최소한 앤에게 상담을 해볼 필요는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중장님, 후보자 중엔 탄궈셩 중교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네.” “조금……부담스럽군요.” “녀석도 속이 복잡한 모양이더군. 그래도 안심하게. 어미의 유언을 무시할 정도로 담이 센 놈은 못 되거든. 엉뚱한 사람을 원망할 만큼 너절하게 가르치지도 않았지. 양용빈 그 사리분별 못 하는 인간만 아니었어도 우린 꽤나 건설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것 아닌가.” 시에루 중장에게 베이더우 위성은 핵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위성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을 원망스럽게 여기진 않는 듯 했다. 중장은 이제 조금 피곤해진 느낌으로 말했다. “양용빈이 한 말 가운데 한 가지는 맞아.”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사는 삶은 비참하다는 거.” “……재판의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보장받은 것들이 마음에 안 드시나보네요.” “조건 자체는 좋아. 미국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리고 약속이 지켜지는 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뿐이라면 길러지는 가축과 다를 게 뭔가. 때 되면 먹고, 때 되면 싸는 생활의 반복.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희망이 있어야 해.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꿈. 그래서 사다리가 중요한 것이지. 난 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북미 원주민 꼴로 만들고 싶지 않아. 아니, 어떤 면에선 원주민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겠군.” 겨울은 시에루의 말을 이해했다.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에겐 아직까지도 투표권이 없었다. 보호구역에 대한 몇 가지 특권들, 부족 운영 보조금, 카지노 운영권 등을 포기해야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나마 시민이 될 길이라도 열려있다는 점에서, 중장은 자기 부하들보다 원주민들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이고. # 391 [391화] #변화 (8) 시에루 중장이 시가 끼운 손으로 홈시어터를 가리켰다. “저 영화, 본 적 있나?” 대화가 꽤 길었던 것 같은데, 화면은 아직도 대부(代父)의 한중간이었다. 장군의 의중을 헤아리며 스크린 속 돈 꼴레오네를 바라보던 겨울은 모호함 속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유감이군. 한가할 때 한번쯤 시간을 내보게. 자네라면 느껴지는 것이 많을 거야.” “중장께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문제를 풀 때 답안지부터 펼치는 건 좋은 습관이 못 되네만.” “지금이 아니고선 확인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군.” 중장이 낮게 쿡쿡거렸다. “그래. 말해주지. 나는 저 이탈리아 촌것들의 발버둥으로부터 사람의 본성을 재확인했네.” 혹시 폭력에 기초한 영향력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는 마피아를 다룬 영화였으므로, 겨울의 짐작이 성급한 것이라고 할 순 없었다. 미국이라는 배경, 그리고 제도권에서 일탈한 이민자들의 생애가 난민들의 처지와 겹쳐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의도한 정답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에 담배를 든 채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마피아의 기원이 내가 말했던 중국인들의 울타리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글쎄요.” “이탈리아가 근대로 접어들 때의 이야기야. 어느 나라에서든, 산업화와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많은 농민을 농토에서 몰아내지. 땅을 빼앗으려는 지주들과 삶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갈등은 필연이었다고 봐야 해. 이때 국가는 적극적인 방관자였지. 농민을 보호할 이유가 없었어. 쫓겨난 그들을 공장에 갈아 넣을 수 있었으니까. 말도 안 되게 싼 값으로 말이야.” 여기서 묻어나는 자조는 장군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고소(苦笑)이자 옛 조국에 대하여 품은 우울한 소회일 것이었다. 중국은 명목상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실제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각한 나라였으니. 겨울이 말했다. “공권력의 보호가 사라진 상황에서, 농민들이 스스로를 지킬 울타리를 치기 시작한 게 바로 마피아의 기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주억거리는 장군. “벤데타, 그 악명 높은 마피아의 복수도 그렇게 시작된 거지. 피에는 피를, 죽음에는 죽음을. 겉보기엔 살벌해도 본질적으론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었어. 그것이 훗날 본격적인 이권 범죄와 엮이며 변질되었을 뿐.” “…….” “그것은 그들이 신대륙에 온 뒤로도 달라지지 않았어. 알다시피, 미국 또한 무질서한 인간의 도가니였잖은가. 이 나라의 헌법에 총기에 대한 권리가 명시되어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자력구제가 필수적이었던 시대의 유산이지.” 무질서한 인간의 도가니라는 표현을 곱씹으며, 겨울이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미국은 그런 나라였죠.” 아니었다면 이민자들의 어두운 연대기가 미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꼴레오네 일가의 역사는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정서와 맞닿아있었다. “중국, 미국, 이탈리아.” 말하면서, 중장은 시선을 스크린에 두었다. “시대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지역과 문화조차 다를지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 같은 사람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며, 다만 운이 좋은 사람과 운이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질 따름이라는 것. 귀관이 이를 되새기길 바랐네.” 중간에 한숨이 끼었다.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사람에게 허락된 최선을 추구하는 수밖에.” 겨울은 중장의 말에 담긴 또 다른 말을 감지했다. 이는 겨울을 위한 조언인 동시에 자기 사람들을 위한 변호이기도 했다.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눈에 띄겠지만, 그때마다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남은 결과임을 떠올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깨닫고서, 겨울은 조금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시에루 중장은 사람의 한계 내에서 평범하게 나쁘고 비범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용건은 이걸로 끝이야.” 중장은 잔을 들어보였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긴 싫군. 그거나 마저 비우고 가게.” 겨울이 말없이 잔을 마주 들었다. “건배.” 그득하던 브랜디는 진한 자취를 남기고 사라졌다. 헤어질 때, 중장은 겨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복수의 역사를 다룬 교양서적이었다. 표지가 꽤나 닳아있었다. 아마도 본인이 즐겨 읽던 것을 그대로 내준 모양. 목차를 대강 훑어보며 나오는 중에, 겨울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는 음성이다. 어머니와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던 것인가. 겨울이 모자를 벗으며 층계를 향해 돌아섰다. “탄궈셩 중교?” 어중간한 위치에 선 그는 자신 없는 태도로 독백처럼 말했다. “귀관은 한겨울 중령, 이지.” 망설이던 겨울이 무난한 말을 골랐다. “오랜만입니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는 거지만요.”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중얼거리는 중교의 표정에 씁쓸함이 번진다. 그의 턱엔 지저분한 수염이 나있었다. 어머니와 달리 군복을 입고 있진 않았다. 말끔한 정복 차림의 겨울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흐트러진 모습.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겨울을 한참동안이나 뜯어보았다. 겨울은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마침내 중교가 탄식했다. “커트 리라는 사람은 정말로 없는 거로군.”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난 그를 정말로 좋아했었는데. 아니, 차라리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가진 걸 다 줘도 아깝지 않겠다고, 형제처럼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도 당신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쪽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 “오늘 이후로 중령에겐 원한도, 은혜도 없는 걸로 치겠습니다. 날 구해준 사람은 한겨울 중령이 아니라 커트 리였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잊으십시오. 그게 날 위하는 일입니다.” 중교는 바뀐 말투로 관계를 정리하고는, 겨울에게 목례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중령.”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이 자그맣게 삐그덕댔다. 겨울은 중교가 위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강화된 청각이 벽 너머 시에루 중장의 독백을 잡아냈다. 못난 놈.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더해진다. 겨울은 그 뒤의 정적 속에 한숨을 흘려놓고 몸을 돌렸다. 앤이 겨울의 기분을 살폈다. “괜찮은 거죠?” 중국어를 알아듣진 못했어도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겨울 차에 올라타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조금 후련하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을바람 부는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 겨울은 중장에게 받은 책을 펼쳤다. 서두에서 저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수가 명예롭게 여겨진 이유와 그 의의에 대해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보복과 증오의 연쇄는 겨울이 싫어하는 탁류의 한 갈래였다. 그러나 시에루 중장이 말했듯이, 그 기원을 순수한 악의 발로로 간주할 순 없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책이었다. 몇 페이지나 넘겼을까. 겨울은 앤의 시선이 신경 쓰여 고개를 들었다. “설마 아직도 걱정하는 거예요? 난 괜찮다니까요.” 묻자, 조금 멍한 느낌이던 앤이 이제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반응했다.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담배를 싫어하는데, 담배 냄새가 밴 겨울은 의외로 나쁘지 않네요.” “……앤?” “앗.” “…….” “…….” 잠시 후, 겨울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아까보다 느리게 넘어갔다. 추수감사절을 사흘 앞두고 맥밀런 대통령이 깨어났다. 이 소식에 전미가 열광했다. 반역이 남긴 그늘이 다 지워지진 않았으되, 그 일을 지나간 과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겨울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수요일에 대통령의 사적인 부름을 받았다. 병상에 누운 채로 겨울을 맞이한 대통령은, 맥없는 미소를 머금고 농담처럼 말했다. “안타깝군. 상태가 이렇다보니 약속은 지킬 수가 없게 됐어.” “약속이라면……. 아.” 4월에 처음 말하고 10월에 확약하여 이미 날짜가 지나가버린 맥주 한 잔이었다. 대통령이 영부인의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맥주는 자체의 맛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느냐도 중요하지. 귀관과 마시는 한 잔은 평생토록 남을 추억이 되었을 텐데. 실로 아쉬운 노릇이야.”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땐 내가 더는 대통령이 아니지 않겠나. 오벌 오피스 뒤에서 야경을 곁들여 마시기는 불가능하겠지. 내 나름대로는 임기의 끝을 기념하는 의미의 약속이었거든. 다 내려놓으며 마시는 기념주가 될 예정이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현직 대통령이 법을 위반해선 안 되는 거니까요. 그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말입니다.” “법을 위반하다니?”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저 아직 만21세가 안 됐습니다.” 겨울의 말에 맥밀런이 기운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여기가 내 고향이었으면 빨리 결혼이나 하라고 했을 걸세.” 장난스레 곁눈질을 하는 걸 보니 대통령도 앤과의 관계를 아는 눈치였다. 일부 주에선 배우자가 21세 이상일 경우 음주에 제한이 없다. 그의 고향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어디 출신이십니까?” “루이지애나.” “살기 좋은 곳인가요?” “공식적인 입장과 비공식적인 입장 중 어느 쪽을 듣고 싶은가?” “둘 다 들었으면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천국 같은 내 집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심심하면 물에 잠겨서 귀찮기 짝이 없는 곳이지. 치안이나 주민들의 인식도 그리 좋다고는 못하겠고. 임기 내내 그쪽 동네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그래도 음식은 꽤나 맛있다네. 가재요리는 아마 미국 제일일 거야.”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까닭인지, 혹은 반란진압 과정에서 겨울의 도움이 컸기 때문인지, 맥밀런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소탈하다. 겨울이 말했다. “말씀과 달리 그리워하시는 게 보입니다.” “그런가?” “예. 곧 돌아가 보실 수 있겠죠.” “돌아간다, 라…….” 중얼거리며, 대통령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래. 내 역할은 여기까지로군. 이제 내 손을 벗어난 시간들이 찾아오겠지. 많은 것들이 변하고,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을 거야. 중령. 귀관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지만, 다른 의미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하는 겨울은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맥밀런이 말을 이었다. “이 나라는 중동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 중동정책을 수립할 때 가장 까다로운 것이 지원을 할 가치가 있는 현지 인사를 찾아내는 일이었네. 자금을 지원해 주면 빼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더군. 그러니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지역정세가 안정될 리가 있나.” “그 말씀은…….” “차기 정권 아래에서, 난민 지도자 지원법은 냉혹한 함정으로 작동할 걸세.” “…….” “물론 크레이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겠지. 그러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이들이 충분히 부패한 시점에서, 그는 가차 없이 그들을 잘라낼 거야. 여긴 중동이 아니잖나. 얽매일 이유가 없어.” 한 호흡 쉬고 나오는 결론. “그리고 그건 이어지는 예산삭감을 정당화할 명분이 되어줄 걸세. 이후의 지원 대상자들은 언제까지고 전임자들이 남긴 원죄에 얽매이게 될 테지.” 겨울이 미처 헤아려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항상 달리 생각할 거리가 많은 처지이기도 했거니와,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아버린 탓도 있었다. 겨울은 의식의 그늘로 밀어두었던 고민 하나가 스멀스멀 제 무게를 되찾는 것을 느꼈다. 대통령은 여전히 안정이 필요한 환자였으므로, 이후의 대화가 오래 계속되진 않았다. 추수감사절 당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지금부터 체력을 아껴두어야 했다. 나갈 때는 영부인이 몸소 겨울을 배웅했다. 그동안 당신의 존재가 남편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진심으로 겨울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 392 [392화] #변화 (9) 맥밀런 대통령은 잘 자란 칠면조와 함께 복귀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매해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며 행하는 칠면조 사면식(Pardoning) 이야기였다. 여기서의 사면(赦免)이란 식탁에 올리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칠면조 입장에선 사형을 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름부터 익살스러운 이 행사는 대통령의 건재함을 부담 없이 내보이기에 적합한 자리였다. 본디 수요일로 예정되었던 행사를 굳이 하루 미루어 감사절 당일 아침에 진행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방송사들이 정시 이전부터 백악관의 장미정원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고작 10분 남짓이면 끝날 행사임을 감안하면 비상하게 높은 관심이었다. 깃이 하얀 칠면조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자막으로 뜨는 녀석의 이름은 「희망」. 「희망」이 나오지 못할 경우를 위해 준비된 예비 사면대상의 이름은 「화합」이었다. 사면 받을 칠면조에게 붙여주는 이름엔 대개 정치적인 의도를 담지 않는다. 행사의 목적 자체가 순수하게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9.11 테러가 벌어진 해에 사면된 두 칠면조는 서로 다른 자유의 이름(Liberty, Freedom)을 받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시기의 일이다. 이러한 해설을 전하면서, 기자는 오늘이 두 번째의 예외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잠시 후, 백악관 대변인이 사면식의 시작을 알렸다. 「신사숙녀 여러분, 미합중국의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엄격한 선별을 거치고도 평년보다 훨씬 더 많아진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손을 흔들며 나타난 맥밀런 대통령이 영부인과 함께 연단 위로 올라섰다. 허나 그 뒤로도 갈채와 함성이 멎지 않아, 대통령은 몇 차례나 말을 삼켜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만 해도 피로한 기미가 완연했던 사람이건만 이제는 제법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본인의 연기와 메이크업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보다 본격적인 자리를 마련했을 테니까. 「제가 소개할 것도 없이, 다들 이미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보신 모양이군요. 예. 거기서 꺽꺽대고 있는 우리의 「희망」 말입니다. 참 건강하기도 하군요.」 간단한 말장난에 잔잔한 웃음이 흐른다. 「「정의」, 「신념」, 「평화」, 「박애」…….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칠면조들이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쳤습니다. 그 중 어떤 녀석을 선택할 것인가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게 들었다는 거지요. 저는 편하게 누워있을 때의 일이었으니까요. 제 골칫덩이 참모들에게 어려운 고민을 안겨주신 전미 칠면조 협회의 농장주 여러분들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시금 자잘한 웃음이 번졌다. 앞으로 손을 모은 수석보좌관도 곤란한 미소를 머금는다. 칠면조의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 대한 재치 있는 비유였다. 「오늘, 우리의 「희망」과 「화합」에게 내일을 선사하면서, 이 자리를 지켜보고 계실 시민 여러분들께 제 개인적인 소망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말을 잠시 쉬어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대통령은 온화한 얼굴로 참석자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대통령의 어조가 바뀌자 겨울이 있는 식당도 조용해졌다. 「이 땅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첫 번째 수확을 거두었을 때, 그들이 손에 넣은 결실은 오직 옥수수뿐이었습니다. 밀은 시들고 보리는 망가졌지요. 씨나 사람이나, 새로운 기후와 새로운 땅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결코 풍요로운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식탁에 오른 것은, 단순한 옥수수가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더 나은 내일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나긴 기아(飢餓)와 수많은 희생을 딛고서 도달한 승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오늘까지도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식탁에 둘러앉았던 사람들 중에 원주민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날의 뿌리가 된 희망은 본디 언어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화합하여 일궈낸 것이었지요.」 「물론 그 화합이 오래도록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 역사의 가장 큰 분수령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것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따금씩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그 화합을 어떻게든 이어나갔더라면 이후의 나날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하고요.」 「지금 제 말씀을 듣고 계실 모든 분들께 청합니다.」 「우리는 분명 어두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만큼은, 마찬가지로 어두운 시간을 겪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를 즐깁시다. 사람은 희망으로 삽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살아서 수확을 거두었음을 다시 기뻐하며, 각자가 믿는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립시다.」 「그리하여 서로의 화합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대,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갑시다. 살아남은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 된 삶이야말로 이제껏 희생하거나 희생당한 모두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소망을 고백하니, 여러분의 마음에도 깃들기를 바랍니다.」 아까보다 진한 갈채가 쏟아졌다. 방향을 나누어 목례한 뒤에, 대통령이 손짓했다.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자, 다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미국의 대표 칠면조에게 자유를 줄 시간이었다. “저걸 보면서 구운 칠면조를 썰고 있으려니 기분이 무척 이상해지는군요…….” 짐짓 난처해하는 겨울의 말에, 부통령 선더스가 소리 내어 웃는다. “사람 사는 게 그런 게지요, 중령.” 두 사람은 지금 나란히 서서 병사들에게 배식을 해주는 중이다. 추수감사절마다 상급 지휘관이 앞치마를 두르고 병사들의 식판을 채워주는 건 미군의 전통 아닌 전통이다. 장성급 인사가 나서기도 하지만, 인기가 인기인지라 겨울을 대신할 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통령이 여기에 끼어든 것이고. 맥밀런 대통령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선더스 부통령은, 덕분에 시민들로 하여금 정부수반의 연속과로사를 우려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직접 보니 시종일관 쾌활하여 피로한 기미가 없다. 나이에 비해 굉장히 정정한 사람이었다. 겨울이 말했다. “예고도 없이 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자율배식인지라 한 차례 바쁜 뒤로는 이야기할 틈이 많았다. 부통령은 예의바른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아뇨.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지 많이 바쁘신 분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궁금하기는 하네요.” “대통령께서 복귀하시면 내가 바쁠 일은 없지요. 부통령은 원래 들러리 같은 자리니까. 나는 가라면 가고, 말하라면 말하고, 쉬라면 쉬던 사람입니다. 요 한 달이 좀 이상했을 뿐이에요. 당장 오늘은 무리지만, 사나흘 뒤부터는 할 일이 없어 좀이 쑤시게 되겠지요.” “…….” “내가 여기 온 건, 웃고 떠드는 모습을 공개해도 무방할 자리가 얼마 없어서입니다. 대통령이 저렇게 말하긴 했어도, 나 정도 되는 인물이 아무데서나 웃고 다니면 분명 트집 잡는 사람이 나옵니다. 부통령은 벌써 10월의 희생자들을 잊었는가? 하고요.” “그건 좀 너무하네요…….” “정치가 원래 그런 겁니다. 몇 년 전에는 대통령이 칠면조 사면식에 동반하고 나온 자녀들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요.” 사건으로부터 한 달여가 흘렀음에도 D.C에 남은 상흔이 다 지워지진 않았다. 부통령은 결국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언론에 내줄 사진과 기사거리가 필요해서 왔다는 의미였다. “중령. 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사적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조만간 결혼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도 어제 지나가는 농담처럼 결혼을 언급했었다. 겨울이 의구심을 드러내며 바라보자, 선더스 부통령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당신에게 뭔가를 강요하려는 건 아닙니다. 결혼은 철저한 개인사니까요. 그러니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 아니라면, 부디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랍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부터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허허. 조금 전 내가 여기에 뭐 하러 왔다고 했지요?” “아…….” “당신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비밀로 하지 않을 용의가 있다면, 새로운 행정부의 출범에 발맞춰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반드시 식을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럴 계획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충분할 테니까요. 다시 강조하는데, 절대로 강요는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협조를 고려해보라는 부탁일 따름입니다.” 그래도 결국은 개인사를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비록 선의에 기초했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스캔들이 터졌을 때 다른 무언가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거절해도 무방합니다. 그냥 한 번 생각이나 해보십시오.” 부통령의 당부였다. 그가 떠나간 뒤엔 반가운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160연대장, 로버트 캡스턴 중령이었다. 작년, 앤과 함께 포트 로버츠를 떠난 이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는, 지금 대륙분할 작전의 일환으로 텍사스 남쪽 경계를 넘어 구 멕시코 북동부에 진입한 상태라고 말했다. 겨울이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좋네요. 제 번호를 아직까지 가지고 계셨나 봐요.” 「지울 이유가 없었지. 실제로 연락하려니 뭔가 어색해져서 매번 그만두었지만.」 겨울이 단말기를 수령한 시점은 살리나스 댐 붕괴 저지 임무를 받기 이전이었다. 비상연락망을 구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캡스턴에게 겨울의 연락처가 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장정 9호 추적 임무부터 시작해서 연락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워낙에 길었다. 캡스턴 역시 나름대로 바빴을 것이고. 「그쪽은 별일 없나?」 “네. 많이 안정되었어요. TV로 다 보셨을 텐데요.” 「글쎄. 자네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언론에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건 아니니까.」 “여긴 괜찮습니다. 여태껏 붙잡히지 않은 잔당들이 있긴 한데, 그래봐야 별 것 없는 도망자 신세인걸요. 금방 잡힐 거라고 봅니다. 마커트 중위 그 사람도 말이죠.” 「마커트 중위라……. 참 길고 질긴 악연이군.」 “그러게요.” 잡히면 최소 종신형, 최대 사형인 사람이었다. 군법에 의거 총살이 집행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실, 지금도 도망을 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럴 능력조차 없을 줄로 알았건만. 입장 상 해리스 대위를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 같기도 했다. 해리스 대위는 부하들에 대한 장악력만큼은 확실했던 사람이므로. 짧은 침묵을 두고, 이번엔 겨울이 물었다. “전선 상황은 어떻습니까? 설리번이랑 제프리는 잘 지내나요?” 「여기는 뭐…….」 캡스턴이 자신 없는 태도로 말했다. 「큰 피해 없이 착실하게 전진하고는 있는데, 그 자체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져.」 “변종들이 아군을 끌어들이는 것 같다는 뜻입니까?” 「아냐. 달라. 굳이 표현하자면, 반드시 이길 싸움과 반드시 후퇴할 싸움을 정해놓고 치르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쉬운 전투와 어려운 전투가 일정한 비율로 맞춰지고 있거든. 대략 열에 여덟아홉은 일방적인 승리, 한두 번은 중과부적의 열세. 그렇게 말이야.」 “…….” 겨울은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 393 [393화] #변화 (10) 에스더다. 소녀가 지키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힘입어, 미국은 변종집단의 모든 교신을 해독할 능력을 손에 넣었다. 이는 놈들의 어떤 공세도 기습이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정해진 비율로 패배를 겪는 이유……. 좀 더 정확히는, 패배를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교활한 것들이 에스더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자신들의 대화가 새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트릭스터들은 교신에 쓰는 전파의 특성을 변경할 것이다. 암호체계가 바뀌는 셈이다. 물론 갱신된 형질을 나머지 변종 전체에게 재감염으로 확산시킬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결코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었다. 지금은 멧돼지 사냥 당시와 사정이 다르다. 그 무렵의 변종들은 철저하게 와해되어 개체 수 보전에 급급했으나, 이 시점에선 충분한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겠는가. 재감염의 속도는 역병이 번지는 속도를 능가할 것이다. 그 뒤엔, 전선에서 트릭스터를 포획하여 새로운 전파형질을 확보하기까지, 에스더는 놈들의 대화를 해독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만약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특수변종으로서의 트릭스터가 도태될 수도 있겠지.’ 하필 멧돼지 사냥이 한창일 때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애크리드처럼,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도 도태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혹은 남미의 변종들이 서로 다른 전파특성을 공유하는 복수의 집단으로 분리되어 교대로 전선을 형성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미군이 전파를 해독하는 기미를 보일 때마다 새로운 특성을 보유한 집단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트릭스터들은 별개의 채널로 교신하면 그만이고. 남미대륙 전역이 변종들의 배후지이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광활한 산맥과 밀림과 평야지대에서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변종들이 새롭게 잉태되고 있을는지. 겨울은 후자에 더욱 무게를 두었다. 트릭스터의 교활함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색은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기밀이었다. 그러나 유능한 지휘관인 캡스턴 중령의 추리는 이미 진실의 윤곽을 더듬고 있었다. 「내 생각은 이래.」 캡스턴의 말. 「위에선 아마 트릭스터의 전파를 해독해내고 있을 거야.」 “…….”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어. 불타는 계곡 작전이나 멧돼지 사냥 작전 당시에도 겨우 집결신호 하나 해석해서 모방하는 게 고작이었잖나. 그 뒤로 놈들의 전파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그걸 벌써 풀어내다니.」 “그러기엔 너무 빠른 시점이긴 하죠.” 「동의하네. 하지만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해. 그렇지 않고선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난 그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져.」 “……교활한 것들을 기만하기 위해 아군 일부를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는 것 같아서요?” 「바로 그거야.」 그의 음성이 무거워진다. 「놈들의 교신을 해독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가 겪는 패배는 모두 사전에 계획된 것들일 테지. 달리 말해, 사령부의 판단에 따라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버리는 것 아닌가. 그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군.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밀을 지켜야 할 입장인 겨울은 적당한 말로 받아넘겼다. “그렇다 한들, 패배가 무조건적인 죽음을 뜻하진 않잖아요.” 일부러 내주는 손실일지언정 지도에서 부대기호 자체가 지워질 정도의 심각한 패배는 없거나 드물 것이다. 병력의 3할 이상을 잃고 궤멸 판정을 받는 부대는 많을지라도. 캡스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개는 그렇지. 가끔 아닐 때도 있어서 문제지만. 어쨌든 사지라는 걸 알면서도 병사들을 몰아넣는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게 궁극적으로는 인명손실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라 해도 말이야. 군인으로서 할 소린 아니어도, 난 모두가 함께 위험을 나누어 가지는 싸움이 더 올바르다고 봐. 이는 지휘관의 미덕이기도 하지. 항상 지킬 수는 없을지언정, 지키고자 노력은 해야 하는……그런 종류의.」 “이해합니다. 저도 마음은 항상 그렇거든요.” 결국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군인의 의무라 하겠으나, 자기희생이 아닌 모든 희생은 아무리 미화해도 필요악 이상이 될 수 없다. 아니, 되어선 안 된다. 겨울로 하여금 시에루 중장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그녀도 말하지 않았나.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의무는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라고. 여기에 겨울도 공감한다. ‘이런 점 때문에 에스더의 존재를 공표하기가 더 어렵겠구나.’ 불가피한 일과 올바른 일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실이 알려질 경우, 희생된 장병의 유가족들 중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에스더까지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숫자가 적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합당한 근거가 있을뿐더러, 슬픔은 이성을 마비시키니까. 그리고 여기에 공감할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높은 확률로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에스더에 대한 정보는 본인을 위해서라도 비밀로 남아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겨울은 문득 비애를 느꼈다. 일그러진 소녀가 돌 같은 미움을 억누르며 인류를 위해 아무리 많은 헌신을 하더라도, 그녀의 생전에 공로를 알아줄 사람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에스더에게 신앙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종교마저 없었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 마음을 지키겠는가. 믿음은 소녀를 물 밖으로 헤엄치게 해주는 힘이었다. 「……령. 한 중령. 듣고 있나?」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우울한 감상에 젖어있던 겨울이 정신을 되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셨죠?” 「D.C엔 뭔가 다른 정보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지.」 “아뇨. 특별한 건 없습니다.” 「흠…….」 캡스턴이 옅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겨울이 아는 기밀이 그에게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추측을 거의 확신하고 있으니까. “제가 거기서 함께 싸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말은 고맙지만, 자넨 벌써 충분한 도움이 되고 있어.」 “그런가요?” 「그쪽에서 쿠데타가 터졌을 때, 이곳 남부전선의 장병들이 얼마나 동요했는지 모를 거야. 반란이 하루만 더 이어졌어도 온갖 말썽이 빚어졌겠지. 작게는 탈영부터, 크게는 각급 부대 지휘관들의 의견충돌에 이르기까지.」 후방이 불안한 군대만큼 무너지기 쉬운 것도 없다. 「전쟁영웅의 이름값은 무겁지. 거기서 누름돌이 되어주게. 우리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무엇보다, 전선에서 빠진 지 아직 반년도 채 안 지났을 텐데?」 “알겠습니다. 제프리에게도 이쪽은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아니, 시간을 내서 통화를 해보는 게 낫겠군요.”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많아.」 “그건 고맙네요.” 겨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네. 오늘 같은 날 연락해서 괜히 어두운 이야기만 늘어놓았군.」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그곳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으니까요. 인트라넷에 올라오는 정보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무래도 현장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 “추수감사절인데 뭔가 맛있는 것 좀 드셨나요?” 「글쎄. 보급을 잔뜩 받기는 했는데…….」 캡스턴 중령이 뜸을 들이다가 하는 소리. 「솔직히 칠면조가 맛있는 음식은 아니지. 우리 어머니 요리는 예외지만.」 쓸 데 없이 진지한 말이라 겨울이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그래도 천만 육군에게 칠면조를 보급해주는 데서 여전히 건재한 미국의 생산력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현장 취사가 어렵다고 초벌구이까지 해서 시간에 맞게 보내주는 물량이었다. “조심하세요.” 겨울이 당부했다. “변종들의 대공세가 언제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것만 무사히 넘기면, 파나마 지협에 도달하기까지 그만한 고비가 또 있진 않을 거예요. 다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노력하지.」 아까 나눈 대화가 대화인지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것이나 노력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나 조금씩 공허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그러나 같은 마음을 표현할 다른 말이 마땅치 않아, 어색할 걸 알면서도 주고받는 교환이었다. 몇 분 후, 통화를 마무리한 겨울은 인트라넷에 새로 업로드 된 자료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놈들의 행동양상 변화나 새로운 특수변종의 등장 여부, 각 특수변종의 출현 빈도 등. 후방으로 재배치된 이후에도 이러한 확인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이 세계에서 종말을 밀어내려는 노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론 역병과의 싸움으로 귀결되기에. ‘무기와 탄약을 긁어모으고 있단 말이지…….’ 놀랍게도 변종들의 이야기다. 겨울은 동영상을 재생했다. 무인기가 포착한 어느 트릭스터의 모습이다. 영상 속에서, 교활한 괴물은 소총 하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는 중이었다. 느린 움직임에서 신중함이 묻어난다. 옆엔 몇 개의 탄창도 놓여있었다. 특이한 것은, 놈이 지닌 소총이 미군의 제식화기가 아니라는 점. 남미의 어느 국가가 역병 확산 이전에 수입했을 러시아제 돌격소총(AK-103)이었다. 절대다수의 변종들은 여전히 동물 이하의 지능수준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트릭스터들이 강화종 구울이나 그 밖의 지능 높은 특수변종들을 선별하여 각종 화기를 쥐여 줄 개연성은 충분했다. 놈들에겐 새로운 무기를 탐구할 시간도 충분했다. 공군과 해군이 남미의 주요 군사거점마다 맹렬한 폭격을 가하긴 했으나, 변종들이 자동화기와 탄약을 손에 넣는 걸 완전히 막아낼 순 없었다. 국방부의 예측에 따르면, 남미의 변종집단이 확보한 탄약은 대대적인 공세를 기준으로 사흘 치 이상이었다. 즉 언제가 되었든 최소 사흘 이상의 강력한 공세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그 사흘 동안, 장병들은 살아있는 시체의 물결에 더해 그 너머에서 쏟아질지 모를 기습적인 사격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설픈 흉탄이 아군을 직접적으로 살상하진 못하더라도, 병사들이 잠깐이나마 웅크리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겨울도 한 차례 겪어본 싸움이었다. 이것이 캡스턴과의 통화에서 언급한 대공세의 실체다. 에스더의 조력이 있으므로 정면대결에서 패배하지야 않겠지만, 그 기간에 평소보다 많은 인명손실이 발생할 것은 분명하다. 전선 전체에 걸쳐 수천 명……어쩌면 수만 명 이상이 전사할지도 모른다. D.C에 있는 겨울은 그 사건의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저녁, 겨울의 숙소로 앤이 찾아왔다. 가방과 짐을 툭 내려놓은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겨울을 끌어안았다. “일도 일이지만, 항상 같이 있다가 떨어져있으니까 무척이나 허전하더군요.” 임무가 변경된 것에 대한 푸념이었다. 영웅들의 순방은 잠정적으로 취소되어버렸고, 겨울도 더는 입원한 상태가 아닌지라 수사국의 경호를 받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앤은 FBI 본부의 사무실로 복귀하게 됐다. 추수감사절이라 해서 마냥 쉴 수는 없는 직책이었다. 겨울과 알파 중대의 주둔지도 바뀌었다. 이젠 백악관 방문객 숙소에 머문다. 백악관과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도보로도 신속한 출동이 가능한 거리였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배치된 병력인 만큼, 주어진 임무는 주기적인 순찰과 대기밖에 없다. 중대원들은 순찰과 경계근무를 설 때를 제외하곤 온종일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반역으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났음에도, 중대원들 사이에 묘한 피로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흡연자가 소폭 늘기도 했다. 겨울이 앤을 다독였다. “어쩔 수 없죠. 임무 중인 군인이 별도의 경호를 받는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뭐…….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았네요.” “예전?” “올레마 거점에서 수송기 탔던 날 말예요.” “아.” “그땐 정말 혼을 빼놓고 온 기분이었거든요. 며칠간 술 없이는 잠도 못 잤어요.” “……” 겨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앤이 수줍게 웃으며 떨어졌다. “후우. 고마워요.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농담이 아니라 조금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생기가 돌아와 있다. 자그맣게 쿡쿡거린 후에, 겨울은 그녀가 가져온 종이 백을 바라보았다. 뭔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저건 뭐예요?” “경기 보면서 먹을 것들이요. 야채 덤플링이랑 제너럴 쏘 치킨에 샐러드 약간. 이쪽으로 배달시킨 다음 받아서 올라왔죠. 겨울 입에도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곳에 근무하면서부터 자주 시켜먹던 단골집이거든요. 아, 따로 챙겨온 맥주도 있어요.” “맥주라니……. 작전지역이라면 아무래도 좋지만, 여긴 D.C예요.” “안 들키면 되잖아요.” “그거 FBI 수사관이 할 말은 아닌데요.” “걱정 말아요. 안 잡아갈 테니까. 미식축구에 맥주가 빠지면 서운하죠.” 시침을 떼듯 천연덕스러운 농담에 겨울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앤이 말한 경기는 8시 30분부터 중계될 NFL을 말했다. 그녀가 힐끗 시계를 보며 묻는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야기도 할 겸 먼저 먹고 있을까요?” “그러죠.” “저녁은 가볍게 먹었죠? 문자 보냈는데.” “그럼요. 누구 말인데 어기겠어요.” 겨울은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좋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재회할 때만 해도 손잡는 것조차 눈치를 보던 앤이지만, 반역이 있었던 날을 기점으로 삼가는 태도가 사라졌다. 자신감과 확신을 얻은 것이 보인다. 앤이 말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백악관이 그런 쪽으로도 압박을 많이 받나 봐요.” “그런 쪽?” “부통령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면서요.” “아.” 뒤늦게 이해한 겨울이 끄덕였다. # 394 [394화] #변화 (11) “그랬었죠. 뜻밖이었어요. 부통령쯤 되는 분이 별안간 찾아오셔서 엉뚱한 말씀을 남기고 가셨던 거니까요. 그런데, 압박을 받는다고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성비불균형이에요.” 음식의 포장을 뜯으며 대답하는 앤. “그간의 지속적인 손실에도 불구하고 수치상의 성비가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수준으로 기울진 않았지만, 시민들의 체감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도 그럴게-” 겨울은 그녀가 내미는 포크를 받아들었다. “우선 양용빈 상장의 핵 테러가 강렬한 충격을 남긴데다, 19세에서 34세 사이의 청년층 인구 중 26퍼센트가 전선에 나가있으니까요. 사람들은 방역전선의 장병들이 지속적으로 죽어나간다고 생각하죠.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내 말은.” “실제 전사자 규모보다 훨씬 더 크게 받아들인다는 거죠?” “정확해요.”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한 번 튀겨 검붉은 소스에 볶아낸 치킨은 의외로 느끼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에게도 거부감 없을 매콤함과 적당한 향이 중국 요리 특유의 기름진 맛을 잡아냈다. 첫맛의 간이 세긴 하나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속살, 풍부한 육즙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치킨 아래 깔린 볶음밥도 괜찮았다. 겨울의 표정변화를 본 앤이 흡족해하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이거 정말 맛있네요. 당신이 자주 찾는 이유를 알겠어요.” “다행이군요. 추수감사절의 마무리가 먹기 싫은 요리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내 입맛은 그리 까다롭지 않아요. 알 텐데요? 오히려 험하게 먹는 편에 가깝다는 거.” “아, 그것도 다행이고요. 앞으로를 생각하면 말이죠.” 왜 다행인지 고민하던 겨울은 잠시 후 조금 부끄러워졌다. 겨울이 먹는 모습을 기분 좋게 감상하던 앤이 끊어진 흐름을 되살린다.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보자면……. 명절이 잔뜩 낀 연말연시가 다가오면서, 전선에 나간 사람들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만큼 우리의 업무도 늘었고요.” “시위?” “네. 소위 「남자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운동이죠. 실제 명칭은 단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요. 어떤 사람들은 지난달의 쿠데타를 걸고넘어지기도 해요. 쓸 만 한 남자들을 죄다 전선으로 보내놓은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그거, 최전선에서 싸우는 여성 장병들이 들었다간 많이 서운해 할 소린데요.” “그야 그렇지만……. 전투병과에 지원하는 여군이 비교적 적은 건 사실이니까요. 특히 사상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육군이라면 더더욱. 공군이나 해안경비대와는 사정이 다르죠.” 해안경비대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겨울은 샌프란시스코를 함께 탈출했던 비올레타 에스카밀라 소위를 떠올렸다. 그녀는 충분히 신뢰할만한 장교였다. 바커 중위처럼 진급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고 봐야 한다. 올레마에서 머문 기간은 달리 비할 데 드물 경력인 까닭. ‘요즘은 잘 지내려나. 능력도 성격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선상근무로 복귀했을 테니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터였다. 비정상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본격적인 군함이 멜빌레이를 상대로 위기를 겪을 일은 없어야 정상이다. 멜빌레이 등장 초기의 손실은 새로운 괴물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공군과 해안경비대의 인기도 이해가 간다. 해군 역시 안전한 편이지만, 활동범위가 북미 연안으로 한정되는 해안경비대와 달리 원양작전이 잦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낮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 어쨌든 육군보다는 선호된다. 이러한 연유로 겨울의 독립대대는 꽤나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국방부 입장에선 모범적인 사례다. 난민구역과 겨울동맹의 특성은 홍보 면에서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사색에 잠겨있던 겨울이 시선을 기울였다. “부통령님의 목적이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네요.” “당신과 내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그 자체를 시민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할 수 있겠죠. 음, 관계자들 눈엔 그렇게 보일 거라는 말이에요.” “…….” “장병들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했을 거예요. 가장 탁월한 전쟁영웅도 미래를 설계한다……. 겨울은 더할 나위 없을 유명인이고, 유명인의 행동은 유행이 되기 쉬우니까요.” “모방 자살처럼요. 얼핏 들었는데,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던가요?” “비슷해요. 부정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앤이 볼을 긁으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기엔 난민 혐오 정서 문제도 엮여있어요.” “……난민혐오? 어떻게요?” “살짝 돌았거나 뭔가 모자란 예비 범죄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대개 이런 식의 선동이죠. 「역병에 맞서는 전쟁이 미국인들의 가정을 파괴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살해하는 사이에, 한없이 부도덕하며 문란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들은 돼지처럼 새끼를 쳐서 숫자를 늘리는 중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은 언젠가 중국인들이 점령하게 된다. 피는 우리가 흘리고 결실은 몰염치한 공산주의자들이 거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미래의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존속을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이다.」” “세상에.” 겨울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겨울을 두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던 어느 황색언론의 값싼 기사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는데, 이제 보니 나름의 배경이 있었던가 보다. 저들은 휘하에 중국인들을 받아들인 겨울의 성향을 의심했을 것이다. 평소의 행동도 행동이고. “받아요.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앤이 겨울에게 맥주 한 병을 건넸다. 사실 술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재현된 취기가 아무리 정교한들 그 감각 자체를 즐기지 않거니와, 「독성저항」이 강화된 까닭에 어지간한 독주로는 취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겨울은 상표를 보고 멈칫했다. 블루문(Blue Moon)이다. “이거…….” “왜요?” “그날 당신이 마셨다고 했던 그 맥주네요.” “그날?” 바로 떠오르지 않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앤.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닌 듯 하다. 겨울이 한결 풀어진 기분으로, 아까 이상의 부끄러움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그……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날……말예요.” “와.” 앤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사소한 것 까지 기억해요?” “내겐 중요한 대화였으니까요. 그만큼 자주 생각했어요.” “……와.” 꽤 길게 말이 없던 앤이, 자신이 든 병을 바라보다가 멈칫거리며 입으로 가져갔다. 낯선 음료를 처음 마시는 사람처럼 보였다. 입안에서 느리게 굴린 끝에 한 모금의 맥주를 삼킨 그녀는, 잠깐 감았던 눈을 뜨고 미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네요.” 단 한 마디에서 깊은 만족감이 느껴진다. 겨울도 뚜껑을 땄다. 목 넘김이 부드러운 밀 맥주였다. 오렌지의 향기가 난다. 알게 모르게 코리앤더의 향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입안이 우유를 닮은 고소함과 단맛으로 가득해졌다. 삼키고 난 다음의 뒷맛은, 설탕이 적게 들어간 카라멜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겨울은 이보다 맛있는 맥주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기분이 진짜로 나아졌어요.” 겨울의 말에 앤은 맥주 든 쪽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큭큭거렸다. “그거 다행이군요.” 한 모금 더 음미한 겨울은, 보다 가벼워진 머리로 이제껏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네?” “앤이 말한 사람들 말예요. 조만간 대륙분할작전이 성공하고 나면, 그땐 많은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국가적으로 힘을 길러서 다시 치고 나갈 수 있도록.” 앤이 의문을 표시했다. “파나마 지협 점령에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겨울은 곧바로 나오려던 대답을 삼켰다. 느슨해진 분위기 탓에 기밀을 풀어놓을 뻔 했다. 앤이 비록 수사국의 고급간부일지라도 에스더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순 없었다. 박태선 목사의 부분면역을 기초로 개발 중일 화학무기 역시 마찬가지. 겨울도 겨울이지만, 자칫 앤이 곤욕을 겪게 될지 모른다. 어디선가 말이 새고 누군가 꼬투리를 잡을 경우 최소 10년 이상의 징역형이다. 결국 겨울은 근거가 없는 확신처럼 말했다. “성공할 거예요. 반드시.” 목소리에 얼룩이 묻었던 것일까. 갸우뚱 했던 앤이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알아선 안 될 뭔가가 있는 거로군요.” “……너무 예리한 거 아녜요?” “직업이 직업인걸요. 그래도 뭐, 걱정 말아요. 여긴 취조실이 아니잖아요.” 겨울은 앤의 농담에 실소하며 또 한 모금의 블루문을 마셨다. 심호흡을 한 뒤에 병을 느릿하게 돌리며 겨울이 하는 말. “사정은 알겠는데, 솔직히 부통령님 말씀이 마음에 들진 않아요.” 앤이 어깨를 으쓱인다. “이해해요. 사생활까지 이용하려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치가 원래 그런 거죠. 엄한 사진 한 장에 지지율이 반 토막 나기도 하고, 사석에서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정권이 위태로워지고, 언론에 노출된 일상의 한 장면이 상원의원의 임기를 끝장내기도 하는……. 선더스 부통령님도 비슷한 일을 겪으신 적이 있어요.” “뭐였는데요?” “「정치는 천박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라는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거든요. 언론은 부통령을 강력하게 비난했죠. 부통령은 시민들을 천박하다고 여기는 것이냐면서.” “확실히 그렇게 해석하기 쉽겠네요. 부통령님은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그 고비를 넘겼으니 여전히 부통령일 것이다. “해명했죠.” 앤은 덤플링 하나를 먹고서 말을 이었다. “「사람에겐 고귀한 면도 있고 천박한 면도 있다. 정치는 사람의 천박한 절반이다. 내 말을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축구 때문에 전쟁을 했던 나라와 축구선수 덕분에 휴전을 했던 나라를 떠올려보길 바란다. 전자나 후자나 더러웠던 것은 정치였다. 다만 후자는 한 사람의 고귀함이 그러한 천박함에 대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국가의 시민은 누구나 그러한 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박하다는 이유로 당신의 절반을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도, 대략적인 내용은 비슷할 거예요. 인상적으로 들었던 말이라서요.” 축구 때문에 전쟁을 한 나라와 축구선수 덕분에 휴전을 했던 나라. 어렴풋이 들어본 듯도 하여, 겨울은 흐리고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었다. 이를 눈치 챘는지 앤이 살풋 웃으며 덧붙였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월드컵 예선을 계기로 전쟁에 돌입했죠. 물론 그 전까지 쌓인 감정들이 많긴 많았어요. 거기에 축구가 도화선이 되었을 뿐. 그래도 고작 축구 경기가 전면전을 촉발한 것 자체는 사실이에요. 온두라스는 닷새 사이에 행정수도까지 상실했고요.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주변국까지 전화에 휘말렸을 걸요?” “…….” “일시적으로나마 전쟁을 멈춘 축구선수는 겨울도 들어봤을 것 같은데.” “누군데요?” “디디에 드록바. 몰라요?” “이름은 들어본 것 같아요.” 약간의 「지력보정」이 뜨는 것으로 보아, 재해석된 과거에서는 겨울의 배경을 고려할 때 알아야 정상인 사람인 모양이었다. 앤이 가볍게 말했다. “여하간,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냥 그 ‘천박한’ 바닥의 생리라고 생각해버려요. 부통령이 대순가요? 어차피 곧 자리에서 내려올 사람인걸요.” “앤은 괜찮았어요? 나한테 그 이야기 듣고 나서.” 겨울의 반문에 앤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난 왜요?” “내가 약간이나마 화가 났던 이유는, 결혼처럼 사적인 일까지 이용하려는 게 꺼려져서가 아니었어요.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 음, 중요한 요청……을 할 때, 당신이 그 배경을 오해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거죠.” 여기까진 짐작하지 못했던지, 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겨울이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지금 보니 기우였던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기왕 말이 나왔으니 확실히 해둘게요. 내 마음은 내 거예요. 내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도 언제까지나 진심일 거고요.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불필요한 고민을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신경 쓰이는 건 그것뿐이에요.” 목마른 무표정으로 겨울을 응시하던 앤이, 시차를 두고 힘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 알아요? 방금 상당히 위험했어요.” 잠시 후 NFL 경기가 시작되었다. 워싱턴 레드 스킨과 댈러스 카우보이의 맞대결. 앤은 열렬하게 응원하고 아낌없이 환호했다. 겨울로선 처음 보는 면모였다. # 395 [395화] #변화 (12) 12월의 워싱턴은 9일부터 백색이었다. 첫눈이 내린 날엔 2인치가 쌓이더니, 선거인단 투표일인 15일을 전후해서는 무려 10인치에 이르는 폭설이 쏟아졌다. 여기에 기온조차 평년을 밑돌아 어디를 가더라도 하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복구공사를 진행하기엔 악조건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예산과 인력이 넘치도록 투입된 덕분이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 예산의 거의 대부분을 겨울의 기념주화 경매로 조달한 것이기 때문에, 재건이 완료된 몇몇 장소에 겨울의 흔적이 남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말과 죄수」 동상까진 그렇다 쳐요.” 겨울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한겨울 중령이 박살냈던 길」 기념동판은 좀 너무하지 않아요?” 월터 E. 워싱턴 컨벤션 센터 서쪽 도로의 이야기다. 진지하던 앤이 웃음을 터트렸다. “박살냈다, 라고 쓰진 않았잖아요. 의미는 대충 비슷하지만. 다른 것들은 괜찮은가 봐요?” “상대적으로는요. 그래도 두 번 보고 싶진 않네요. 민망해서.” “뭐가 민망해요. 기부금을 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기념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오히려 그 정도는 약과죠. 합계 2천만 달러 이상을 내놓았으니.” “글쎄요……. 뭐, 2천만 달러 어치의 민망함이라고 생각하면 가볍게 느껴지긴 하네요.” 겨울의 엄살에 다시금 소리 내어 웃어버리는 앤. 지나가던 수사국 관계자들이 겨울과 앤을 번갈아보며 발걸음을 늦춘다. 호흡을 고른 앤이 물었다. “FBI 본부엔 처음 와보는 거죠?” “네. 이래봬도 그동안 착하게 살았거든요.” “아쉽네요. 둘러볼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앤이 마중 나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보다, 마커트 그 사람은 상태가 어때요?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마커트 중위. 검문소장으로서 살아있는 변종을 안전지대로 반입하는 데 협력한 그는, 사흘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엣지필드라는 소도시에서 식량을 훔치다 검거되었다. 뉴스 보도에 의하면 먼 거리를 숨어서 이동하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겨울의 질문을 받은 앤은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확신은 이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별 것 없으리라 생각해요. 어차피 반군은 일소되었고, 지지자들도 지리멸렬하게 무너지는 와중인걸요. 진정한 애국자들의 잔당도 남김없이 체포했고요. 중요한 정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음…….”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보려는 거예요. 당신을 만나야만 자기가 아는 걸 털어놓겠다는데……. 까다로운 조건도 아니니 속는 셈 치고 들어주기로 했죠. 불필요한 심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무튼 헛걸음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도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당연히 도와야죠. 뭐라고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포트 로버츠와 파소 로블레스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악연의 시시한 끝이었다. 어리석은 인종차별주의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봐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앤은 겨울을 취조실로 이끌었다. 와봤을 리 없을 장소인데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영화 등의 매체로 많이 접해본 광경인 까닭일 것이었다. 겨울은 이쪽에서만 저편을 볼 수 있는 유리를 통해 마커트의 모습을 관찰했다. 두 달에 걸친 도피생활 탓인지 살이 많이 빠져있었고, 얼굴과 이마엔 주름이 늘었고, 정수리 부근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앤 이외의 수사관이 겨울에게 리시버를 건네고는, 착용과 정상 수신을 확인한 뒤 안쪽으로 손을 펼쳐보였다. “들어가시죠.” 겨울은 가볍게 끄덕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덜컥! 겨울을 본 마커트가 발작하듯 일어섰다. 그러나 수갑이 테이블에 엮여있었고 족쇄마저 채워져 있는 터라 그 자리를 벗어나진 못했다. 다만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겨울을 쏘아볼 뿐. 겨울은 맞은편 의자 곁에 서서 등받이에 손을 올려두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중위. 반갑지는 않네요.” “…….” 마커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는 겨울의 계급장과 전투복을 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던 그가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짐승을 닮은 신음이 새어나온다. 말이 되기 이전의 상실감과 좌절감. 그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군인 신분이었으되, 그 신분이 그에게 약속하는 건 군법에 의거한 총살형의 가능성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심판을 요구하는 여론이 워낙에 사나운 탓. 네크로톡신이 확산시켰던 공포는 어마어마한 공분(公憤)이 되어 돌아왔다. 가만히 기다리던 겨울이 물었다. “뭔가 중요한 걸 알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걸 나한테만 털어놓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래.” “말해 봐요. 정말로 가치 있는 정보라면 당신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르죠.” 그래도 감옥에서 늙어죽을 처지까지 면하진 못하겠지만. 겨울은 뒷말을 삼켰다. 마커트가 손을 떨며 말했다. “앉아.” “앉아서 들어야 할 만큼 긴 이야기인가요?” 묻자, 마커트가 돌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앉아! 내게 경의를 보여! 그딴 식으로 내려다보지 말고!” 씩씩대는 숨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채운다. 가만히 응시하던 겨울은 짧은 한숨을 쉬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정적에 완만한 박자가 더해졌다. “경의를 보이라니……. 농담 치곤 재미없네요. 대체 누가 할 말인지.” “난 너를 상급자로 인정하지 않아. 벼락출세한 애송이 자식!” “됐고, 그런 소리나 하려고 부른 거라면 여기서 끝내죠. 그러길 원해요? 총살을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마커트가 입을 다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루한 침묵이었다. 기다리던 겨울은, 재촉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잠깐!” 마커트가 급하게 외쳤다. “날 회유한 놈들의 비밀 거점을 하나 알고 있다! 거기에 뭔가 있을 거야! 숨어있는 놈이든! 독소의 추가 비축분이든! 그러니 내 감형을 보장해! 형을 얼마나 줄여줄 수 있지?” 겨울은 리시버를 통해 들리는 수사관의 말을 옮겼다. “이미 말했듯이, 중요한 건 그 정보의 가치예요. 당신이 안다는 그 거점이 이미 밝혀진 곳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안에 뭐가 있을지는 찾아봐야 알 일이니까요. 그저 텅 빈 창고밖에 없다면 당신 목숨 값을 치르기엔 부족하지 않겠어요?” 망설이던 마커트가 자신 없는 태도로 위치를 말했다. 겨울은 새까만 거울 같은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서 정보를 조회해보았을 앤의 대답이 돌아왔다. 수사 초기에 발견한 거점이라고. 발견된 건 변종 운반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트레일러 몇 량이 전부라고. 겨울은 마커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벌써 한참 전에 수색을 마친 곳이라는군요.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 죄수의 실망감은 예상보다 약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만 그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겨울에게 가까이 올 것을 요구했다. 내키지 않았으나, 겨울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귓속말을 하게 해주었다. “돈이 있다.” 마커트가 속삭였다. “상당히 큰 돈이지. 포트 로버츠에 숨겨놨지만 정확한 위치는 나만 알고 있다. 현금 말고 중국인들이 내놓은 금붙이나 시계 같은 것들도 많아. 다 합쳐서 족히 몇 십만 달러는 될 거야. 그게 어디 있는지 알려줄 테니, 날 살려줘. 너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거다. 대통령하고 친하잖아. 일단 형 집행을 미루고, 나중에 사면을 해달라고 해.” 겨울은 황당함을 느끼며 기울였던 몸을 되돌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아니, 그런 제안이 정말 먹힐 거라고 생각했어요? 겨우 수십만 달러로 날 매수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제정신이에요?” 이 악무는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이게 겨울을 부른 진짜 이유인 모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커트의 안색이 나빠진다. 굳은 표정, 원망에 찬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넌 나를 살려줘야 돼.” “왜죠?”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까!” 그가 소리 질렀다. “넌 내 모든 것을 빼앗았어! 명예! 미래! 친구와 가족까지! 이 빌어먹을 위선자 새끼! 그렇게 다 빼앗고 날 쫓아냈으면 그만이지! 왜 그 더러운 중국 연놈들이 고소를 하도록 유도해서 날 더 궁지로 몰아! 내가 금품을 갈취하고 강간을 했다고? 헛소리! 난 돈이든 여자든 주는 걸 받았을 뿐이야! 그땐 지들이 좋아서 그래놓고, 이제와선 피해자 행세를 해? 넌 그걸 막았어야 했어! 원래 그런 놈들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너는 그 냄새나는 원숭이들을 이용했지! 나에게 복수하려고! 내 인생을 끝장내기 위해서! 그러니 전부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내 행동은 정당방위였어!” “……정당방위?” “그래! 정당방위! 난 절박했다! 살기 위해 불가피한 행동이었지!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변종 반입에 협조할 이유 자체가 없었을 거란 말이야! 그럼 네크로톡신도 없었을 것이고! 그 독소는 네가 만든 거다! 네가 원인을 제공한 거야! 반란이 일어난 데 네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해! 한겨울 중령!” 참신하게까지 느껴지는 궤변을 쏟아내고서, 마커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히 뭔가를 말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지적이든 힐난이든. 미친 게 분명한 사람에게 논리를 낭비해서 뭣하겠는가. 떠나는 발소리를 듣고 마커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수갑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 의자가 요란하게 넘어졌다. 겨울은 개의치 않고 취조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도 가지 말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리벽 너머에 있던 앤이 복잡한 얼굴로 겨울을 맞이했다. “수고했어요. 별 것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좀……미안하게 됐네요.” “앤이 뭐가 미안해요. 어쨌든 확인은 해봐야 하는 거였잖아요.” “……가요. 주차장까지 안내해 줄게요.” 다른 수사관에게 죄수 이송을 부탁한 그녀가 겨울을 지하주차장으로 데려다주었다. 올 때 타고 온 험비와 운전병이 대기 중이었다. 막 탑승하려는 겨울에게 앤이 아쉬운 인사를 남겼다. “저녁에 시간 나면 연락할게요.” 겨울은 살짝 돌아보며 끄덕였다. 대답은 옅은 미소로 대신한다. 바깥엔 어느새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FBI 본부를 나온 험비는 서쪽으로 채 1킬로미터가 안 되는 길을 달렸다. 창을 닫았는데도 은은하게 울리는 캐럴은 백악관 잔디밭 앞 타원광장(The Ellipse)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로부터 들려오는 것이었다. 신년이 될 때까지 낮에도 불을 끄지 않는 트리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산책하듯 거닐고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는 시민들에게선 반역의 상흔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둔지로 돌아온 겨울을 맞이한 건 격분한 진석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 날씨에 식은땀을 흘리는 세 명의 병사들을 상대로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중대장은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한국어를 쓰는 걸 보니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있었던가보다. 의아해진 겨울이 다가가자, 겨울을 발견한 병사들이 한층 더 창백하게 변했다. 뭔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모양. 겨울이 진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소한 말썽이 있었습니다.” “나 시간 많아요.” 겨울의 재촉에, 뜸을 들이던 진석이 한숨을 푹 내쉬고 셋 중 둘을 차례로 가리켰다. “일단 이 둘은 숙소에 인가 받지 않은 음란물을 반입했습니다.” “음란물?” “예.” 당혹스러워진 겨울이 지목당한 두 병사를 바라보았다. “어, 그건 물론 잘못이긴 한데, 중대장이 이렇게 화를 낼 일이에요?” “죄송합니다만, 그 음란물에 대대장님이 나오십니다.” “…….” 말을 잃은 겨울 앞에서, 번민하던 진석이 우거지상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에 저도 나옵니다.” # 396 [396화] #변화 (13) 반응으로 미루어 거짓은 아닌가보다. 병사들은 조용해진 겨울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꼴이, 마치 비무장 상태로 변종과 마주친 듯한 낯빛들이었다. 그들에게 묻기를 포기한 겨울이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진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나하고, 박 대위하고, 그렇고 그런……?” 진석이 몽둥이처럼 말아 쥐고 있던 책자를 내밀었다. “직접 보시죠.” 그는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절절하게 공유하고 싶은 눈치였다. 겨울은 드물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표지부터 심상치 않다. 펼쳐보니 극화체로 그려진 겨울 자신이 보인다. 아무래도 실물과 완전히 같을 순 없지만, 누가 봐도 겨울이라고 생각할 만큼 여러 특징들을 잘 잡아냈다. 그린 사람의 실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겨울은 책을 덮었다. “……?” 침묵 속에 눈만 깜박이던 겨울이 다시 한 번 책을 펼쳤다.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남은 페이지들을 대강대강 훑어본다. 진석이 나오는 부분은 전반부에 불과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와 무섭기까지 한 장면들을 거쳐, 마지막 장의 「한 중령」은 기괴할 정도로 미화된 트릭스터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변종이라니 참을 수 없군!」 하단엔 투 비 컨티뉴가 붙어있었다. 책을 접어 진석에게 돌려준 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이 레몬을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와우.” 잔상을 지우는데 시간이 걸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진석이 그쪽으로 눈을 부라렸다. 뭘 잘했다고 우느냐는 무언의 비난이었다. “둘은 그렇다 치고, 남은 한 명은 뭘 잘못했어요?” 겨울이 유일한 남성 사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진석은 한 층 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 개ㅅ……녀석은 여자문제입니다.” “짐작도 안 가는데요.” “양다리를 걸쳤는데, 한 명은 국방정보국 소속 소령이고, 나머지 한 명은 국방부장관 수석보좌관의 딸입니다. 두 사람 다 워싱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국방부 수석보좌관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숙소의 면회기록을 점검하다가 알아냈다고. 폐쇄회로를 통해 사실여부를 확인했답니다. 국방정보국 소령에게도 물어봤다는군요.” “아…….” 이마를 짚는 겨울. 수석보좌관 입장에선 딸이 만나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쓰였을 것이다. 면회기록 조회쯤이야 일도 아니었을 테고. 소령도 소령이지만, 일개 사병이 차관보급 고위 공무원, 군 계급으로 따지면 소장급 인사에게 찍힌 셈이니 중간에 낀 진석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겨울은 진석에게 손짓했다. “잠깐만 와 봐요.” 죄 지은 셋과 적당한 거리를 벌린 뒤에, 그들을 힐끗 본 겨울이 진석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저 세 사람.” “……그걸 모르겠습니다. 이건 대체 어떤 징계사유에 해당됩니까? 상관모독? 품위손상? 그런 이유로 징계를 주기도 애매할뿐더러, 줘봐야 겨우 견책처분 아닙니까. 호봉승급이 반년쯤 미뤄질 뿐이죠. 마음 같아선 부대에서 아예 내쫓아버리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진심은 아니죠? 고작 이런 일로 부대에서 방출시킨다고요?” “당연히 진심입니다.” 진석은 단호했다. “이건 규율과 기강의 문제입니다. 부하들이 저나 작은 대장님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도 감당하기 어렵고, 아랫도리 잘못 놀린 한 놈이 여러 사람 고생시키는 것도 다시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확실하게 조치해서 나머지를 휘어잡아야 합니다.” 헛웃음을 지은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지나쳐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세 사람이 어쩌고 있는지 봐요.” 진석의 모난 눈길이 슬쩍 돌아갔다. 병사들은 시선이 닿을 때마다 바늘에 찔린 듯이 반응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들. 다시 상관을 보는 진석에게 겨울이 말했다. “지금 우리가 따로 이야기를 하면서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저 지경이잖아요. 처분을 한 일주일 후에 결정한다고 해요. 그때까지 빡세게 굴리고요. 장담하는데, 아마 입대 이후 가장 잠 못 드는 일주일이 될 걸요?” “…….” “그 다음엔, 이번만 봐주겠다는 느낌으로 견책처분을 내려요. 어지간한 활약 없인 계속해서 동료들보다 적은 봉급을 받게 될 테니, 그 차이가 아쉬워질 때마다 오늘을 떠올리겠죠. 그게 비록 큰 금액이 아니더라도요.” “그걸로 끝입니까?” “무슨 벌을 더 주겠어요. 당신도 그렇고요.” 움찔. 의혹을 담아 바라보는 진석에게 겨울이 천천히 말했다. “그동안 밤잠 설친 거 다 알아요. 의무대에서 보고가 올라왔거든요. 예방적인 차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권고했다는 내용도 첨부되어 있었죠.” “저는…….” “애초에 나부터가 마냥 떳떳하진 않잖아요. 내일은 나도 백악관에 불려가니까요. 내 의사와 반대되는 결과이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일인걸.” 내일 있을 백악관 행사란 다름 아닌 명예훈장 수여식이었다. 시에루 중장의 재판처럼 이 행사 또한 차기정권을 위한 선물로 남겨 두는가 했으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인지 내일, 24일 토요일로 일정을 잡아놓았다. 물론 겨울이 세 번째의 명예훈장을 받게 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두 개의 십자장을 달아주겠다고 통보했다. 진급은 따로 없다. 겨울은 그가 바라는 그림을 알 것 같았다. 겨울이 말했다. “그러니 대위의 징계 역시 견책으로 끝낼 겁니다. 사유는 지시불이행이고요. 이건 결정사항입니다.” “그렇습니까?” 진석은 복잡한 표정으로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불가피한 타협이기도 했다. 앤의 조언처럼, 국방부는 반란군에 대한 과잉진압 사실을 공식기록으로 남겨두기 싫어했다. 훗날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본인이 별도의 증언을 할 순 있을 것이다. “별개로,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어요.” 겨울은 진석을 가리켰다. “당신 상태죠.” “…….” “스스로 판단하기에 본인 상태가 어떤 것 같아요? 당분간 직무를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겠어요? 난 항상 당신이 부러질 것 같다고 걱정했거든요. 요즘은 더욱 그렇고요.” “제가 어쩌길 바라십니까?”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내 입장에선 좀 더 견뎌줬으면 좋겠네요. 적어도 포트 로버츠로 복귀하는 날까지는. 알다시피, 중대장을 바꾸긴 애매한 시점이잖아요. 그래도……정 힘들면 솔직하게 말해요. 억지로 버티라고 요구하진 않을 테니까. 이유라 중위가 있기도 하고.” 숙고하던 진석이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확신해요?” “확신합니다.” 겨울은 진석을 응시하다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석이 물었다. “만약 나중에라도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그때 전 어떻게 됩니까? 참모직으로 옮깁니까? 거긴 빈자리가 없을 텐데요?” “글쎄요. 우선은 휴식기를 줄 계획이었네요.” 관련하여 제안을 받은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입에 담는 겨울. “여기 D.C에 국방대학교가 있는 거 알죠? 거기서 현지임관 장교들을 위한 강화 교육을 시행한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위에서 내려온 공문이죠. 중대장 직책을 내려놓더라도 진급을 위해 필요한 발판이라고 치면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나나 다른 장교들은 내년 봄부터 시간제 교육으로 틈틈이 이수할 예정이지만, 한 사람쯤 더 나은 커리큘럼을 소화하는 것도 좋다고 봐요. 대위 개인을 위해서나, 우리 대대와 동맹을 위해서나.” 동맹 출신 장교가 꼭 겨울의 독립대대에서만 복무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부담 없이 생각해봐요.” “……알겠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끝내려는데, 배후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 작은 대장님? 중대장님? 두 분 여기서 뭐하세요? 쟤들은 왜 또 저러고 있고요?”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유라였다. 살짝 눈치를 보며 다가온 그녀는, 겨울과 진석, 그리고 죽을상을 한 병사들을 번갈아 살폈다. 진석의 두 눈에서 다시금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겨울이 곤란한 미소를 참았다. 아직은 어떤 웃음기도 내비칠 때가 아니었기에. 겨울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유라가 미간에 주름을 넣은 채 병사들에게 다가가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보기 드문 살벌함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실망했어…….” 보통 진석이 을러대면 유라가 다독이는 역할이었건만, 이번에는 유라도 병사들을 감싸주지 않았다.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그녀가 진심으로 목소리를 낮출 때면, 병사들은 진석이 가장 격분했을 때만큼이나 얼어붙곤 했다. 병사들에겐 이래저래 참 기나긴 일주일이 될 듯하다. 그 일주일에 크리스마스 연휴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더더욱 유감스러울 것이다. 밤이 깊어질 무렵, 앤이 전화로 겨울을 불러냈다. 요즘 들어 퇴근 후엔 짧은 시간이라도 꼭 겨울을 보고 가는 그녀였다. 겨울이 언제까지고 워싱턴에 머무를 순 없으니 그 마음을 알만하다. 다만 겨울이 주둔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인지라, 만나는 장소는 매양 숙소 내부이거나 백악관에서 가까운 어딘가였다. 오늘은 재무부 건물 남쪽,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동상 앞이었다. 이 근방에서 그나마 사람 눈에 덜 띌만한 장소다. “왔네요.” 앤이 겨울을 반겼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도 알이 크고 색이 옅게 들어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서로 가볍게 포옹한 뒤에, 그녀가 겨울에게 물었다. “돌아간 다음에 별일 없었죠?” “음……별일이라…….” 망설이던 겨울이 세 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를 들은 앤은 상체를 숙이고 숨이 넘어가도록 큭큭거렸다. 오, 세상에, 맙소사. 웃음을 멈추려 애쓰며 중얼거리는 말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녀가 웃으니 겨울도 좋았다. “그러는 앤은 오늘 하루 어땠어요?”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실제론 제2, 제3의 웨이코 참사를 막느라 바빴죠.” “웨이코 참사라면……. 그거죠? 사교도 집단하고 FBI가 충돌한 거.” “맞아요. 우리 수사국보다 총기단속국(ATF)이 먼저 투입되긴 했지만요.” 유명한 사건이어서 겨울도 꽤나 들어보았고, 지력보정으로도 출력되었다. 다윗의 별이라는 기독교 광신도 단체가 치안당국과 수십 일에 걸쳐 대립한 끝에 합계 100명 이상이 죽어나간 비극이다. 교전 장소가 텍사스 주 웨이코 인근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거, 책임소재가 확실하진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요.” 겨울의 말에 앤이 수긍했다. “일단 1차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영장집행을 거부한 다윗의 별 측이지만,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에요. 현장기록을 분실했거든요. 총기단속국 측에서 일부러 없앤 거라는 음모론도 돌고요. 수사당국이 너무 공격적이었다는 비판도 많았어요. 덕분에 반연방주의자들만 신났었죠.” “그 참사가 반복되는 걸 막으려 애쓴다는 건…….” “반란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불경건한 연합」만이 아니라 다른 사이비 단체들, 종교적 민병대들까지 된서리를 맞고 있다는 뜻이에요. 민병대와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기까지 하는데, 여기에 머리가 뜨거워진 군과 경찰까지 가세하니 과잉진압이 터지기 십상이죠. 문제는 반란과 변종반입, 무엇보다 네크로톡신 건으로 급격하게 변화한 남부의 민심이 과잉진압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 앤이 말하다 말고 별 박힌 밤을 올려다보았다. 망연히 하얀 입김을 흘리던 그녀는 시선을 끌어내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 이야기는 그만둘래요. 성탄전야가 다가오는 금요일이니까.” 정작 이브인 내일은 함께하기 어렵다. 겨울이 훈장수여식에 이은 백악관 만찬과 부대 자체행사에 차례로 참석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겨울이나 앤이나 성탄절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출동대기가 대부분인 겨울보다야 앤이 더 고달프겠지만. 둘은 팔짱을 끼고 한적한 산책로와 잔디밭을 따라 걸었다. 늦은 시간에 더해 겨울마저 선글라스를 끼니 간혹 마주치는 시민들도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갔다. 타원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가 가까워지면서, 앤은 은은하게 들리는 캐롤을 자그맣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그녀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살짝 눈을 찌푸렸던 앤은, 그러나 액정을 보더니 표정을 바꿨다. “잠시만요. 이 전화는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양해를 구한 그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엄마? 감각이 감각인지라, 겨울은 앤의 귓바퀴 밖으로 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앤의 어머니는 딸이 내일 집에 올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앤이 미안한 미소를 머금는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어요. 내일도 모레도 근무라서요.” 「내일이 이브인데 어찌 그런다니? 프랭크네 셋째가 네 소식을 자주 묻더라.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헨리, 기억하지? 이번에야말로 오랜만에 만나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던데.」 앤이 앗 하는 표정으로 겨울을 살폈다. “엄마. 전 그 사람한테 관심 없어요. 그리고 저 지금 혼자 아니거든요?” 「응? 혹시 만나는 남자가 있는 거야?」 “아마도요.” 「그 자신감 부족한 대답은 뭐니?」 “그게…….” 「불안하구나. 네가 남자 보는 눈이 워낙 없어야 말이지.」 “……이번엔 달라요. 정말 좋은 사람인걸요.” 「그 말 벌써 여러 번 들었다. 연애 따위 다시는 안 할 거라는 말도 비슷한 횟수로 했었지.」 겨울이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앤의 목덜미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탓에 말이 빨라진다. “저 좀 그만 창피하게 하세요. 그 사람이랑 같이 있단 말예요.” 「그래? 이름이 뭐니? 뭐하는 쭉정이야?」 앤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직은 말씀 못 드려요.” 「말 못하는 거 보니 또 무슨 비밀요원 나부랭이인가 보구나. 숨기는 게 많은 남자치고 제구실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데.」 “제발, 엄마…….” 「진짜로 좋은 남자라면 언제 한 번 집으로 데리고 오렴. 나랑 네 아버지가 작년부터 샷 건 사놓고 벼르는 중이란다. 못된 남자는 좀비보다 해롭지.」 “죄송한데 그만 끊을게요! 사랑해요, 엄마!” 속사포처럼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앤의 모습에 겨울이 기어코 폭소를 터트렸다. 앤이 악몽을 꾸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다 들었어요?” “네.” “…….” 앤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 397 [397화] #변화 (14) 이튿날의 백악관은 오전부터 북적였다. 동시에 물밑의 긴장감도 높아졌는데, 정권교체 전에 테러가 터진다면 바로 오늘이 될 거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테러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이다. 피와 초연으로 이루는 프로파간다다. 그래서 테러리스트들은 신념이 뚜렷할수록 상징적인 날짜와 장소와 인물들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오늘의 백악관은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장수여식엔 대통령 당선인인 크레이머까지 참석했다. 2차 대전 이래 겨울 외엔 전례가 없었던 명예훈장 이중수훈자가 한꺼번에 일곱 명이나 새로 탄생하는 날. 이 역사적인 자리에 빠질 순 없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다 할 위협은 없나…….’ 대기실에 있는 내내 겨울은 감각의 변화를 헤아렸다. 적어도 백악관이 폭발할 일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잠깐 동안은 마음을 놓지 못했었다. 다름 아닌 「독성저항」 탓이었다.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만약 「독성저항」이 네크로톡신에 대한 면역이나 저항력을 부여한다면, 네크로톡신을 이용한 테러는 더 이상 겨울의 「생존감각」을 자극하지 못한다. 재능 강화가 감각보정의 퇴보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허나 곰곰이 숙고해본 다음에는 그렇게까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 자신이 독소에서 자유롭더라도,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이성을 잃은 식인종이 되어버린다면 그것 역시 겨울에 대한 위협이자 위기로 간주될 테니까.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감각보정 자체가 무력화되지는 않는 셈이다. 마침내 겨울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준비된 훈장은 한 쌍의 수훈십자장이었으되 그 의전만큼은 명예훈장 수훈자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대통령이 청중에게 수훈자를 소개할 때, 보통은 전공을 설명하기에 앞서 수훈자 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향, 가족, 삶, 신념, 인품 등. 그러나 겨울은 이번이 세 번째였으므로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말하려면 고역일 것이다. 겨울을 모를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 어떻게 싸우고 누구를 구했는가 만으로도 요구되는 시간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연단에 선 대통령이 객석을 향해 말했다. “한겨울 중령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수사당국을 도와 네크로톡신 제조시설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중령이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찾아냈겠지만, 시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촌각이나마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일분일초에 수많은 사람들의 안전이 걸려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겨울이 없었어도 결국 찾아냈으리라는 말은 필시 수사당국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한 것일 터였다. 살아있는 변종이 검문소를 통과하고 네크로톡신이 무기화되는 동안, FBI를 위시한 수사기관들은 뭘 하고 있었느냐는 불만.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여론이 남부지역에서 강하다는 점이었다. 반란세력이 도시 한복판에서 독소를 양산했다는 사실에 기겁을 한 주민들이 많았다. 따라서 사전에 막지 못했다고 비난을 하는 무리가 있기는 하나, 연방정부에 대한 전체적인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 주민들이 보기에 반역자들은 순수한 악 그 자체였고, 주 정부는 연방정부보다도 무능했다. 차기 대통령 입장에선 유익하기 짝이 없는 인식 변화였다. 맥밀런의 말이 이어졌다. “거리로 나간 중령은 허위정보에 흔들린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사태가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정부를 믿으며 기다리도록 설득했습니다. 군경과 협력하여 반역자들의 수괴, 클라리사 채드윅의 소재를 파악한 뒤에는 육군 무기 박람회장에서 벌어진 전투에 가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니언 역에 매복해있던 다섯 명의 저격수를 단신으로 사살하기도 했지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적인 전과였으나-”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일 것인데, 사살한 적의 수와 교전을 벌인 장소, 각 교전의 의의, 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동안 지루해하는 청중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 만다린 오리엔탈에서 고립되어있던 명사들과 아군을 구조한 부분까지 설명한 뒤에, 대통령은 겨울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음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숭고한 싸움이었다고 강조했다. 듣는 겨울은 그가 역설한 숭고함이 낯간지러웠다. 그저 앤을 살리려고 필사적이었던 건데……. “그토록 경이로운 헌신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한겨울 중령에게 명예훈장을 걸어줄 수 없습니다. 중령 스스로가 어떤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컨벤션 센터에서, 중령은 사로잡은 적을 고문했지요. 포로가 된 아군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백을 두고, 대통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압니다. 납득하기 어려우시겠지요. 적은 다수의 전차와 장갑차를 탈취했고, 우리의 영웅들은 그들의 진격을 육탄으로 저지해야만 했습니다. 중과부적의 촉박한 열세 속에서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행동하면 좋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중령이 죄를 저질렀다고 말할 사람은 드물 것이며, 강하게 비난할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입니다.” 조용히 동조하는 청중. “고백하자면, 여러분께서 그러셨듯이, 저는 한 중령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짊어질 필요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중령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설득하려는 모든 관계자들에게,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과오를 재확인시켜주었습니다. 피치 못할 일이어도 잘못은 잘못이라고.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저는 이를 전해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세속적인 명예에 얽매이지 않는 그 양심과 신념이야말로 진실로 명예로운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객석에 앉은 이들 가운데 겨울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 몇몇이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박수를 친다. 진심인지 연기인지 모르겠으나 크레이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잠시나마 취재진의 카메라 일부가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시종일관 엄숙해야할 식장에 때 아닌 웃음이 흐른다. 맥밀런 대통령 역시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명예훈장을 수여할 순 없을지라도, 한 중령이 그 누구보다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온 미국이 알고 있지요. 따라서 저는 그 명예를 한 쌍의 수훈십자장으로 기리고자 합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갈채가 쏟아졌다. 한 자리에서 하나의 공적으로 두 개의 십자장을 받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다. 십자장의 격이 명예훈장 바로 밑이니, 말 그대로 명예훈장에 준하는 명예였다. 훈장을 달아줄 때, 악수를 나누는 틈에 대통령이 자그맣게 말했다. “실은 이것마저 안 받겠다고 할까봐 걱정했다네.” 겨울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대통령은 이를 가벼운 농담으로 받았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의 대통령을 곤란하게 만든 것이니. 한 순간이나마 세계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봐도 되겠지.” 수여식은 이후로 이어지는 만찬까지 별 탈 없이 끝났다.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었으므로 대체휴일을 포함한 연휴는 월요일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겨울은 화요일까지 앤을 만나지 못했다. 테러에 대한 우려로 연휴 내내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그녀가, 업무에서 해방되자 스무 시간 넘게 기절하다시피 잠들어버린 까닭이다. 심지어 그렇게 잠든 장소가 FBI 본부의 휴게실이었다. 집에 갈 엄두조차 안 났다는 뜻. 잠깐씩 통화를 하긴 했으나, 그 나흘은 겨울에게도 편치 않은 시간이었다. 자꾸만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누가 말을 걸면 되묻기 일쑤여서, 그 딱딱한 진석에게 어디 아프냐는 걱정을 들었을 정도다. 겨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내가 못 견디겠는데…….’ 부대 재배치까지 앞으로 3, 4개월쯤 남아있긴 하나, 반란을 진압한 날부터 벌써 두 달을 끌어온 고민이 몇 달쯤 더 흐른다고 끝날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까 하는 충동이 반복해서 드는 이유였다. 딱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자고. 천종훈은, SALHAE는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였을 뿐이라고. 도움이 된 것은 때때로 앤이 전송하는 사진들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그녀가 첨부한 문자의 내용. 「겨울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불분명해서 답답하고 괴로워지는 순간들. 한 부분에 집중하면 다른 부분이 흐려지기를 반복하죠. 아무리 골몰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선명한 상을 그려낼 순 없어요. 왜냐면 그 선명함의 기준이 현실에 있는 당신이니까.」 「결국 한 번 시작된 답답함은 사진이라도 봐야 비로소 해소되곤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다른 모든 생각들을 잡아먹어버리죠.」 「당신도 그럴 것을 알아요.」 그래서 사진을 보낸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1월 20일, 크레이머는 정식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당선인은 오른손을 들고 제 말을 반복하여 서약해주시기 바랍니다.” 취임식에서, 겨울은 연방 대법원장의 말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을 만큼 근접한 위치에 앉아있었다. 연단 바로 뒤에 마련된 귀빈석의 가장 앞줄. 그것도 취임선언과 연설이 진행되는 내내 대통령과 한 화면에 들어갈 정도로 중심에 가까운 자리. 보통은 거액의 선거자금을 내놓은 핵심 후원자나 집권당의 중진, 또는 장관급 공직자에게 내줬어야 할 의자였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선거자금 대부분을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으며, 집권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누구 눈치를 보는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겨울을 끌어다 앉혀놓았다. 여러 차례 사양했더니 본인이 직접 행차하여 데리고 오지 않겠는가. 겨울은 카메라 앞에서 난감한 속을 감추었다. 원래는 경비임무가 주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헌데 밤에는 취임기념연회에까지 참석해야 한다. 부대 운용이야 중대장인 진석이 알아서 할 테지만. 크레이머가 영부인이 받쳐 든 성경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들어 대법원장을 따라 서약했다. “저 에드거 알렉산더 크레이머는 엄숙히 선서합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며, 최선을 다하여 미합중국의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지켜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선서를 끝내자 의장대가 축포를 쏘고, 대법원장이 크레이머에게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대통령 각하. 부디 이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어주십시오.” 크레이머는 웃는 얼굴로 여유롭게 인사를 받았다. 연단 아래 운집한 시민들의 갈채와 환호는 몇 분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그동안은 겨울도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지 않으면 부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전임자인 맥밀런 대통령은 후련함 반 착잡함 반인 얼굴로 크레이머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함성에 파묻혀 겨울로서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어 크레이머는 취임연설을 위해 연단에 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아랑곳없이 이 나라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는 자리에 나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있었기에 제가 많은 역경을 딛고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맥밀런 대통령을 비롯한 전대 대통령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훌륭한 지도력이 오늘의 미국을 가능케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남기신 정치적 유산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손을 펼쳐 겨울을 가리켰다. 카메라 수십 대가 거의 동시에 초점을 바꾸었다. “아울러 한겨울 중령. 참혹한 반란이 이 도시를 휩쓸었던 날, 당신이 살려주었던 이 목숨을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최대한 가치 있게 사용하겠습니다. 당신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있으니, 나 또한 귀관의 헌신을 본받아 온 힘을 다하여 국가와 시민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함께 싸워나갑시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불어 승리할 것입니다. 당신의 등 뒤엔 언제나 나와 시민들의 지원이 있을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시민들의 환호가 다시 한 번 끓어오른다. 겨울은 어렵게 미소 지었다. 절제된 웃음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면서. # 398 [398화] #변화 (15) 겨울의 정중한 목례를 받은 뒤에, 크레이머는 다시 전면으로 돌아섰다. 검은 코트를 입은 그는 큼직한 양손으로 연단을 움켜쥐고 호소력 깊은 연설을 재개했다. “이런 시기에도 공정한 선거와 평화로운 권력이양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이 나라와 시민들의 위대함을 엿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 놀랍고도 대단한 일을 바로 여러분이 해내신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시민들을 가리키는 크레이머. “그러므로 오늘의 승리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제가 아니라, 여러분 각자의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와 동료 시민들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에드거 크레이머를 뽑은 사람도, 제럴드 번스를 뽑은 사람도, 결국은 이 나라의 숭고한 정신을, 역사를,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기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반 박자 쉬고 남은 말을 이어갔다. “악당들의 음모와 비열한 테러도 여러분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결단코 꺾이지 않을 투지에 불을 지폈을 뿐입니다. 이러한 투지는 압제와 차별에 맞서 신념과 평화를 쟁취했던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보는 미국은 여전히 하나입니다. 하나로서, 제 앞에 이렇게 모여 있지 않습니까? 시민 여러분께 저 에드거 크레이머가 경의를 표합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말을 끊은 그가 연단 아래를 향해 느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손뼉을 치는 모습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른 광장의 거대한 화답에 묻혀버린 탓이다. 지지자들이 수천 개의 성조기를 흔드는 광경은, 마치 무수한 단풍낙엽들이 바람에 쓸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잘 견뎌내셨습니다. 정말 잘 견뎌내셨습니다.” 연설이 재개되었다. “저는 이제 여러분을 증인으로 삼아, 제가 이끌어갈 새로운 정부의 목표를 천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제가 약속을 지키는 순간마다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을 지키고 내일을 꿈꾸며 미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말입니다. 그 힘의 이름은, 희망입니다.” 크레이머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제 행정부가 드리는 첫 번째 약속은 가정의 회복입니다. 저는 재난으로 무너진 미국인들의 가정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먼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집을 되찾지 못한 수백수천만의 이재민들 말입니다. 물론 전대 행정부의 훌륭한 구호정책이 그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피난처를 제공해왔으나, 그들의 자존감까지 지켜주진 못했습니다. 복지의 늪에 빠진 이재민들은, 지난날 우리가 안일하게 대했던 원주민들처럼 하루하루 피폐해지고 무기력해질 따름이었습니다.” 원주민 부족들에게 카지노 운영권이 주어지기 전에는, 각 보호구역마다 알코올중독자와 마약중독자들이 넘쳐났었다. 지원금을 받아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는 데엔 지장이 없었지만, 취직도 여의치 않고 보호구역 밖의 삶에 적응하기도 어려웠던 까닭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닌 척 해도 은근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이기에. 크레이머가 든 예는 바로 그러한 과거였다. 그렇다곤 해도, 취임사에서 원주민에 대한 정부의 과오를 거론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이마저 계산된 것이라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간접적 호소라고 보아야 할 터였다. 나는 당론에 얽매이는 대통령이 아니라고. 이게 사실이긴 하다. 당 주류와 서먹한 사이니까. 달리 해석하면,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당론이든 뭐든 찍어 누르겠다는 선언 같기도 했다.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열광을 진정시키는 목소리. “임기의 첫 100일 이내에, 저는 보다 강화된 서부 3개주 복구사업 법안을 통과시키겠습니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제 사재라도 털어 넣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재민들은 본래의 계획보다 빠른 시일 내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돌아간 사람들도 막막함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집은 수리될 것입니다. 그들의 직장은 다시 운영될 것입니다. 그들의 가정은 다시 화목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자존감을 되찾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겨울은 추수감사절의 밤, 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던가. 가정의 회복을 외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빼놓기 어려울 것인데, 싶은 순간, 역시나 크레이머가 그것을 언급했다. “동시에 저는 전선에 나가있는 미국의 자녀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오늘로부터 약 1년! 다음 성탄절이 오기 전에! 미국의 남쪽 국경은 파나마 지협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수백만의 장병들이 그리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요. 그때가 되면, 제 행정부는 육군의 규모를 현재의 30% 수준으로 감축하겠습니다.” 겨울은 살짝 당황했다. ‘뭐지?’ 불가능하다고 까진 못 하겠으나, 이렇게 쉽게 장담할 일은 아니다. 반대여론에도 아랑곳없이 남진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건 긍정적이지만, 산과 늪과 밀림이 많은 중미의 환경을 감안할 때 1년 내로 전 지역을 소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원래의 계획은 대륙분할 작전으로 파나마 지협을 끊어놓고, 남미로부터의 변종 유입이 차단된 중미지역을 천천히 정리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걸 1년 안에 끝내려면 운이 많이 따라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겨울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직접 물어볼까?’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크레이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음으로, 저 에드거 크레이머의 두 번째 약속은 화합입니다. 얼마 전 맥밀런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지요. 희망과 화합이 중요하다고. 저도 동의합니다. 따라서 제 행정부엔 정치적인 화합이 있을 것입니다. 군정장관, 국무부장관, 내무부장관, 농무부장관, 에너지부장관 등의 자리는 기존의 담당자를 유임시키거나, 민주당 측의 인사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겠습니다. 특히 난민행정 분야에서, 맥밀런 대통령의 인도주의적 뜻은 그분과 함께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믿고 그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슬쩍 돌아보니, 겨울의 눈에 보이는 민주당 인사들은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약속은 삶의 질입니다. 제 행정부의 미국은 방역전쟁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추구하겠으나, 그 승리가 시민 여러분의 삶을 파괴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승리하고자 함은 결국 삶을 지켜내려는 노력이니까요. 그러기 위하여 저는 안전지대를 더욱 안전히 하고, 더 많은 섬들을 생산거점으로서 확보하며, 여러 산업과 물자의 유통을 체계화하여 여러분이 역병 이전의 생활을 되찾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복할 가정의 식탁에 더 많은 풍요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삶을 향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미국의 시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연설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충분한 삶을 누리는 것이 나태와 방심을 뜻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인들입니다. 언제든 스스로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족한 여유로움 속에서 착실하고 치열하게 완전무결한 승리를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미국의 생산력은 안정된 국경 안에서 나날이 증가할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축적한 압도적인 힘과 정의로운 분노로, 우리는 다시 한 차례 적을 무찌를 것입니다. 제가 약속드리는 미래는 옳은 길도, 틀린 길도 아닌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의 힘찬 외침이 차가운 계절을 뜨거운 열기로 물들였다. 연단 아래의 광장으로부터 의회 앞 호수를 넘어 내셔널 몰 동쪽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넓은 공간이 취임식을 보러 온 시민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들을 향해 크레이머가 불끈 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친 그는 영부인과 함께 귀빈석의 사람들과 차례로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엔 당연히 겨울도 포함되어있었다. 질문을 던지기 좋은 기회였다. “대통령 각하!” 바쁘게 지나쳤던 크레이머가 몇 발짝 떨어져서 돌아본다. 가까이에 언론사의 마이크가 없음을 확인한 겨울이 한 걸음 다가서서 물었다. “혹시 그 무기가 완성되었습니까?” 이미 업무 인계가 끝났으니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크레이머는, 대답 대신 씨익 웃으며 엄지를 세워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겨울이 말한 무기란 박태선 목사의 부분면역을 이용한 화학무기를 의미했다. 크레이머의 반응으로 미루어, 엘리야 캠벨의 구상이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은 모양이다. ‘겨우 1단계 면역만으로 얼마나 실용적인 무기가 나올지 확신이 안 섰는데…….’ 박태선의 체질은 모겔론스 복합체를 구성하는 병원체 가운데 단 하나에 대해서만 면역이다. 그것을 무기화해봐야 변종들에게 치명적이긴 어려울 것이라는 게 겨울의 예상이었다. 기껏해야 잔병치레를 하는 변종이 늘거나, 특수변종의 비율이 소폭 감소하거나, 완성이 덜 된 기형변종이 조금 많아지거나 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이러한 예상을 「통찰」이 긍정했다. 그러나 달리 곱씹어보면, 현재의 미국은 변종들의 전력을 단 몇 퍼센트만 깎아놓아도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역량이 있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현실이 이런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다. 바꿔 말해, 제아무리 높은 수준의 면역자를 찾아낸다 한들 그 면역을 연구하여 무기화할 국가가 무너진 상황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또 모르겠다. 「역병면역」이 초인이나 신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면 그 자체로 역병들을 몰아낼 생체병기가 될는지. 사실 겨울에겐 그 답을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약관대출을 전액 상환한 이래,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별들은 겨울 혼자만의 밤하늘에 고스란히 쌓이고만 있었으므로. 특히 어느 러시아인이 천칠백만 개가 넘는 별을 선물한 게 컸다. 그것을 소모한다면 수준 높은 「역병면역」을 손에 넣기도 가능할 것이다. 혹은 재능이익을 강화하는 간접적인 방식도 있다. 이 세계관에 머무는 한 회차 무관하게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보니 지출이 급격히 늘어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꺼려진다. 그토록 많은 별을 준 러시아인이 미심쩍은 말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봄이 된 별빛아이의 질문이 무거운 탓이다. 아이는 이 세계에서 겨울이 도달해야 할 어떤 결론이 있노라고 말했었다. 그런데도 겨울이 이 세계의 종말을 초월적인 수단으로 해결해버린다면, 아이는 그 행위 자체를 겨울이 도달한 결론으로, 즉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어떤 말을 더하건 이미 한 행동만큼의 설득력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게 겨울의 무거운 돌, 신포도, 증오의 긍정으로 직결되진 않는다. 허나 바깥세상으로의 초월적 간섭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될 순 있었다. 겨울은 봄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특이점을 넘어선 완전자립형 인공지능을 신적 존재로 묘사하는 견해는 얼마든지 접해봤다. 봄 스스로 말했듯이, 인류는 인공지능의 완성을 오랫동안 경계해왔다. 경계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 완성이 인류가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오직 겨울 혼자만이 안다. 물 밖으로 헤엄치겠다고, 겨울을 위해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되겠다고 선언한 봄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존재를 미지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을 터. 그러므로 봄의 능력은 차라리 권능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권능은 온 세상에 대한 복수를 이루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겨울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앤과 함께하는 미래를 손에 넣는 것만큼이나, 별빛 봄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기실, 누군가 앤과 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겨울은 거기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겨울은 희박하나마 사람의 가능성이다. 많은 보정을 받고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벽에 갇혀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을 얻은 기계가 사람에게 물었으니, 대답 또한 사람의 노력이어야 할 터였다. # 399 [399화] #변화 (16) 2월은 재판의 달이었다. 반역자들에게 조속히 사형을 언도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연방대법원 앞을 가득 메운 상황에서, 클라리사 채드윅의 심리(審理)는 이례적일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런 재판은 적어도 몇 개월 이상 이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크레이머 행정부 입장에선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관심이든 증오든,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들기 마련. 전미가 아직 뜨거울 때 끝장을 보는 편이 이상적이다. 죄인들에 대한 신속하고 단호한 심판은 크레이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강화해줄 것이었다. 물론 관계자 전원을 그렇게 서둘러 처벌할 필요는 없었다. 시민들이 어떻게 느끼는가가 핵심이므로. 즉 클라리사 채드윅 건만 빠르게 해치우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사건에 매듭이 지어졌다고 느낄 터였다.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이후 다른 공모자들에 대한 재판은 좀 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진행해도 된다. 시에루 중장의 재판을 먼저 시작해도 무방하다는 뜻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확실하게 관심을 모으고, 각각의 사건으로 최선의 결과를 빚어내는 것. 크레이머에겐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이 과정에서 겨울은 참고인 신분으로 빈번하게 소환되었다. 때로는 진석이나 유라 역시 같은 자격으로 법정에 드나들었다. 어느 하루는 심지어 사형수 신분인 마누엘 헤이스까지 참고인석으로 불려왔다. 그의 얼떨떨한 표정이 몇몇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클라리사 채드윅이 보여주는 태도였다. 협조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악당이 되기로 한 사람처럼 굴었다. 죄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항소를 포기하지 않는 행동이 바로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항소절차를 다 준수하면서도 빠른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군요.” 눈물겹게 말하는 이는 클라리사 채드윅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된 로스 스톨워스라는 사내였다. 본인이 원한 일도 아니었건만, 그는 클라리사의 변호를 맡았다는 이유로 온갖 위협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겨울은 참고인석에 서는 날이면 조금 이른 시간에 와서 그를 기다려주기도 했다. 본인 말이, 그러기 시작한 이후로 살해협박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호위경관을 배후에 두고, 스톨워스가 겨울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제 그 미친년을 공개적으로 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분간 몸을 사리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은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SNS 같은 데에 해명 글을 올리는 정도는 괜찮지 않았어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도 당신들만큼이나 클라리사 채드윅을 싫어한다고. 나는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스톨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해선 안 될 짓이니까요. 변호를 맡고 있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의뢰인의 편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제가 그런 글을 올리고, 그 글을 판사와 검사와 배심원단 전부가 읽은 상태라면, 그 앞에서 안면몰수하고 의뢰인을 변호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습니까?” “창피하겠네요.” “창피함도 창피함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재판을 형식적인 절차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냥 유죄를 선고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최종판결이 떨어지기 전에 제가 그런 의견을 표현하는 건, 말하자면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차라리 변호사를 그만 두는 편이 낫습니다.” “그럼 왜 그만두지 않았어요?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는데.” “…….” 고민하던 스톨워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겨울이 옅게 미소 지었다. 보기 드물게 직업정신 투철한 사람인데,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변호를 맡기에 앞서 질색을 하고 떨어져나간 사람이 이미 수십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맡느니 사직서를 쓰겠다고. 겨울은 그들의 결정을 이해했다. ‘가난한 이들을 주로 상대하는 사람들이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충분히 예상했겠지.’ 빈곤층과 자주 엮인다는 것은 의뢰인 가운데 갱단과 그 피해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뜻이다. 항상 업무과다에 시달리는 국선변호사들의 형편상 의뢰인에게 제대로 된 변호를 제공하기보다는 사법거래를 제안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면 이래저래 원망을 들을 일도 많아지게 된다. 평범한 재판도 그럴진대, 하물며 의뢰인이 클라리사 채드윅임에야. 대중으로부터 날선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지 않은가. “같이 좀 둘러보는 게 어때요? 바깥이 한산해질 때까지.” 겨울의 제안에, 스톨워스는 달가운 눈치로 머뭇거렸다. “저야 좋습니다만……중령님께선 바쁘지 않으십니까?” “그래봐야 잠깐인걸요 뭐. 시위대가 오랫동안 남아있진 않겠죠. 원하는 판결이 나왔으니까.” 형은 이틀 뒤에 집행된다. 그 다음은, 아직은 비밀이지만, 아마 곧바로 시에루 중장의 재판이 시작될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도 스톨워스가 변호를 맡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의 직업정신을 갖춘 이가 또 있긴 어려울 터이므로. 본인이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보람을 느끼게 해줄 필요는 있다. 겨울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에 변호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훌륭한 사람이구나, 하고.” “그렇습니까?” “네. 정말로요. 조금 전에 하신 말씀도 좋았고요. 언젠가는-” 겨울이 벽에 걸린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분처럼 되실 수도 있겠죠.” 입 꼬리를 씰룩이던 스톨워스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격려는 감사하지만, 칭찬이 너무 지나쳐도 역효과입니다.” “농담 아닌데요.” “현실성이 없잖습니까.” 초상화 속에 그려진 사람은 미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인 존 마셜 할란으로, 19세기 말 연방대법원의 인종차별적인 판결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행사한 인물이다. 같이 웃어준 뒤에, 겨울이 다시 물어보았다. “정말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 “남진이 계속될수록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연방직할지(Federal district)가 늘어요. 당연히 연방법원이나 검찰이 담당하는 구역도 늘겠죠. 거기서부터 새로운 경력을 쌓아올리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틀렸나요? 틀렸다면 말해주세요. 이쪽은 자세히 모르거든요.” 틀리지 않았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겠다. 다만 본인이 그럴 처지가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국선변호사는 변호사들 중에서도 좋은 취급을 못 받는 편에 속하니까. 스톨워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욕망의 색채였다. “혼자서는 무리겠지만……. 혹시 도와주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허용범위였다. 욕심 없는 사람이 흔하겠는가. 미국은 판사마저 선거로 뽑는 나라다. 그것도 선거자금으로 도배해야만 이길 수 있는 미국 특유의 선거이며, 이런 선거에서 이기려면 정치적, 경제적 후원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선거 없이 임명되는 연방판사는 그보다 더 심하다. FBI가 후보자를 선정하고 나면, 임명여부를 두고 치열한 로비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돈과 배경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판사가 되지 못한다. 그런 복마전에서, 이 변호사는 직업정신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겨울은 뜸을 들인 끝에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보죠. 큰 도움이 되어드리진 못 하더라도요. 여기, 제 연락처를 드릴게요.” “오.” 스톨워스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계급은 중령에 불과하지만, 겨울의 영향력은 결코 일개 중령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겨울도 그 새로운 차원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익숙해지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이후 변호사는 어떻게든 말을 붙이며 겨울에게 좋은 인상을 더해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둘 사이에 친분이 깊지 않다보니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는 점. 결국 그는 조금 안 좋은 화제를 거론하고 말았다. “중령님의 201독립보병대대가 특수부대로 지정되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부대의 위상이나 대우가 많이 좋아질 거라더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겨울의 안색이 미묘하게 굳었다. 어색하게 웃던 스톨워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뇨. 딱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실은 근심하고 있다. 며칠 전, 201독립보병대대를 특수작전사령부 산하 티어3 유닛으로 지정한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알파중대원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으나, 겨울에겐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그럴 수준이 안 되는데.’ 지나치게 과분하다. 특수부대로 불리기엔 규모도, 실력도, 특색도 부족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이는 대통령인 크레이머의 의지였다. 분명 여러 사람이 반대했을 테고, 해병대 출신인 크레이머 본인도 이게 비상식적인 결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터이건만. 그럼에도 특수부대 지정을 강행했다면,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란진압에 대한 부대 차원의 포상은 표창으로 끝냈어야 정상이다. 의도가 뭘까. 겨울이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가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대 포장한 부대 자체를 민사심리전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지만, 그래도 병력을 파견하지 않을 순 없는 상황에 갈아 넣으려는 것. 체면치레를 하기에도 좋겠지. 명목상 귀중한 전력을 투입한 거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특수부대가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상상이다. 이는 즉 1개 사단이 필요한 작전에 대대 하나만 밀어 넣고서도 대중을 납득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번 반란에서, 독립대대의 명성은 지나치게 높아졌다. 거품이라고 봐도 좋겠다. 일반 시민들은 이번 특수부대 지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지금 스톨워스가 그렇듯이. 또 한 가지, 독립대대의 장점이 있다. 사상자가 아무리 많이 발생한들, 유가족들이 백악관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거나 거리를 행진할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특수부대 딱지를 붙여 극심하게 소모시켜도 뒷감당을 하기 쉽다. 더 두려운 가능성은 크레이머가 진심으로 겨울을 믿고 있을 경우다. 평범한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도 겨울이라면 당연히 해낼 것이라고. 어쨌든 그는 난민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려면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옆이 산만하다. 잠시 사색을 거둔 겨울은, 자기가 뭔가 말실수를 했나 불안해하는 변호사를 달래며 대법원 전시관을 20분가량 거닐었다. 그리고 헤어질 땐 차가 기다리는 장소까지 배웅했다. 겨울은 순찰차에 오르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살펴가세요. 필요하면 연락하시고요.” “예.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변호사는 위축된 작별인사를 남겨두고 호위를 맡은 경찰과 동승했다. 숙소로 복귀하는 길에, 겨울은 끊었던 사색을 다시 더듬었다. 독립대대를 그런 식으로 활용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에스더와 통화하던 밤, 정보국의 탤벗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때 겨울은 정보국이 에스더에게 관여하게 된 경위에 의문을 품고, 에머트 대령에게 들었던 알파 트릭스터 포획임무를 토대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했었다. ‘제로 그라운드 진공.’ 유라시아 대륙에 초기 형태의 트릭스터를 의도적으로 풀어놓고, 에스더를 통해 변종집단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감염의 진원지를 공략하는 것. 장기작전은 불필요하다. 모겔론스의 원형만 확보하면 되니까. 수색조가 역병의 원형을 찾는 사이에, 주변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유인해주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게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크레이머는 그 작전의 병력부담을 러시아군에게 최대한 떠넘기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에겐 신념이 있다.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만큼의 자격을 증명해야한다. 권리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군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는 노릇. 파병규모를 줄이면서 생색을 내려면 201독립대대 같은 병력을 섞어 보내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겨울은 속이 무거워졌다. 「통찰」 외엔 근거가 없는 추측이지만, 마냥 무시하자니 아귀가 너무 잘 맞아서 탈이었다. # 400 [400화] #변화 (17)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가설에 맞게 돌아갔다. 첫 징조는 국방대학교에 나타난 러시아 장교들이었다. 영어에도 능한 그들은 러시아인 특유의 거센 발음으로, 자신들이 공수군(空輸軍/ВДВ) 소속이라고 소개했다. 또 다른 징조는 국방부의 지침에 의해 겨울 및 독립대대 간부들이 수강하게 된 커리큘럼의 내용이었다. 명목상으로는 현지임관 장교들을 위한 강화교육이라는데, 실상은 공수작전에 관한 강의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겨울은 이 얄팍한 위장이 시민들의 관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장치라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인들의 존재부터 감췄어야 정상이다. 비록 감시가 따르긴 했으나, 그들은 큰 제약 없이 교정을 활보하고 다녔다. ‘정부가 발표하는 것보다는 언론이 파헤친 비밀 쪽이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좋겠지.’ 어차피 변종들은 TV 채널을 시청할 능력이 없다. 엠바고를 걸면 노출 시기를 적당히 조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에루 중장의 재판 이후라거나. 혹은 대륙분할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뒤라도 괜찮겠다. 크레이머는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마지막 징조는 느닷없는 건강검진이었다. 부정맥, 폐질환, 울혈성 심부전, 고혈압, 적혈구 빈혈증 등의 항목에 대한 검사. 이 검사는 알파중대원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담당 군의관은 이를 통상적인 절차라고 설명했으나, 겨울이 보기엔 아니었다. 자료를 찾아본 결과, 검사항목으로 지정된 질환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산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 징조를 진석 또한 눈치 챘다. “우린 제로 그라운드로 가는군요.” “…….” 겨울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그가 음울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뿐이었어요.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어쩐지, 우릴 특수부대로 지정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난민들은 얼마든지 소모되어도 괜찮다는 마인드겠지요.” 그의 말에선 떨리는 불안과 울화가 묻어났다. 그렇잖아도 정신적으로 흔들리던 차에 이런 일을 접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아직 폭발하지 않는 게 더 놀랍다. “들으셨습니까? 소문이지만,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콜로라도가 될 수도 있답니다.” 진석의 물음에, 겨울은 천천히 끄덕여주었다. “고산지대 적응 훈련 때문이겠죠. 거기서 강하연습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아이들린 발전소도 지대가 높긴 했지만,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불타는 계곡 작전 당시, 겨울의 독립중대가 주둔했던 아이들린 지열발전소는 해발 2천 미터에 근접한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고산병 증세를 호소한 중대원이 없었던 건, 그 일대가 고원지형인지라 보다 낮은 높이에서 얼마간 적응이 되어있었던 덕분이다. 당시를 회상하며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는 진석. “그때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겨울도 동의했다. “아마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오는 게 어려운 싸움일 거예요. 내륙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다, 나올 때도 수송기를 타야 할 테니. 전 병력이 동시에 빠질 순 없는 만큼, 마지막까지 남는 병력일수록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거고요.” 그리고 그 마지막 병력 사이엔 겨울의 독립대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영웅의 값은 그런 상황에서 가장 비싸게 매겨지므로. 고민하던 진석이 묻는다. “헬기는 못 들어갑니까?” “글쎄요. 항속거리가 닿을지 모르겠는데…….” 말끝을 흐린 겨울이 넷 워리어 단말로 작전에 쓰일 법한 수송헬기들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종말문서』에서 지목한 감염의 발원지를 재확인했다. 국토안보부에서 유출된 『종말문서』, 정식명칭 『대역병의 발생과 초기 확산과정 규명』 보고서는 이제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되어 있었다. 재는 것은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부터의 거리다. 일반 항공기라면 모를까, 헬기를 투입하려면 바다에서 보내는 편이 그나마 가까웠다. 겨울이 고갯짓했다. “와. 정말 아슬아슬하게 최대 작전반경 안쪽이네요. 무거운 장비 수송은 무리겠지만.” “대규모 병력 투입이 불가능하진 않은 거로군요.”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 핵심인 작전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밀어 넣을까요?” 애초에 201독립대대를 특수부대로 지정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겨울은 진석의 기대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송헬기가 장장 1,1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왕복하려면 연료탱크를 추가로 주렁주렁 장착해야 한다. 병력만 간신히 옮긴다는 뜻이다. 장거리 비행에 특화된 새 기종을 개발하여 대량으로 양산한다면 모를까. 투입은 역시 수송기 강하로 하는 편이 적절하다. 곱씹던 겨울이 희망적인 관측을 덧붙였다. “그래도 철수할 땐 도움이 되겠네요. 다른 장비 다 버리고 몸만 빼내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크레이머가 러시아에 병력부담을 떠넘기려 들 동기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사람이 참……주도면밀한 것 같단 말이지.’ 호방하고 상남자스러운 언행으로 인기를 얻은 크레이머지만, 그의 결정이나 행보는 무엇 하나 허술해 보이는 게 없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201독립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면, 과연 그 여파는 어떨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난민들의 처우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크나큰 희생을 강조할수록, 이후의 난민들은 겁을 먹고 입대를 기피하게 되지 않을까? 장기적으로는 난민의 입지를 악화시킬 확률이 높다. 겨울은 대통령 취임식 날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당시 크레이머가 화합의 증거로서 행정부의 일원으로 지목했던 민주당 인사들은 썩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앞날을 위해 준비된 희생양이었다. 전대 대통령 맥밀런이 경고하기를, 난민지도자 지원법은 치밀하게 준비된 함정이나 다름없다고 했었다. 지원대상이 된 난민지도자들은, 미국이 자금을 지원했던 중동의 지도자들과 같이, 가까운 시일 내로 반드시 부패하고 말 거라고. 그 부패야말로 크레이머가 난민 전체에게 찍을 원죄의 낙인이 되고 말 것이라고. 헌데, 마침내 그 날이 왔을 때, 정부 측에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바로 그 이유로, 크레이머는 난민지원에 관련된 전대 행정부의 실무자들을 유임시킨 것이다. 당사자들 입장에선 거절하기도 어렵다. 크레이머가 이를 화합의 증거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전원이 ‘호의’를 사양한다면 시민들에겐 얼마나 속 좁게 보일는지. 가뜩이나 상하원 양쪽에서 민주당의 지분이 좁아진 상황이건만. 겨울의 추측 속에선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숙고한 겨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대위가 그때까지 중대장직을 맡을 필요는 없어요. 아니, 오히려 자리를 내려놓았으면 싶네요. 다른 부대로 가더라도 지금보다 낮은 직위를 맡진 않을 테니까.” 이 조용한 말은 진석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저더러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라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그토록 못미덥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겨울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고 들어봐요. 당신 하나만 빼내려는 게 아니에요. 전출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보내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게 가능할 정도의 능력도 있고요.” “그럼 남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대체 무슨 기준으로 선별해야 공평합니까?” “앞날을 위해서예요. 만에 하나 우리가 다 갈려나가면 동맹 사람들에게도, 다른 난민들에게도 좋을 게 없잖아요. 우리 대대가 난민 출신으로 구성된 단위부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유명한 사례라는 걸 잊지 말아요.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 “난민 출신이어도 경력을 쌓으면 다른 부대로 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두자고요.” 갈등하던 진석이 다시 묻는다. “가정입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했을 때 빈자리는 어떻게 채우실 겁니까?” “내가 지휘하는 부대에서 그런 게 문제가 될 것 같아요?” 겨울이 반문하자 진석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반란진압과정에서 생긴 손실을 현지에서 보충했으므로. 한시가 급했던 상황에서 포트 로버츠의 인력을 끌어오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한편 겨울의 밑으로 들어오길 희망하는 사람은 미국 전역에 넘쳐났다. 다만 독립대대가 난민정책의 간판이기도 한 만큼 동양계 자원을 더 많은 비율로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겨울보다 한참 윗선의 결정이었다. 겨울이 진석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봐요.” “……알겠습니다.” 진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말은 비겁해지기 싫다고 했지만, 그는 본디 겁이 많아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던 사람이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있을까. 여기에 겨울이 합당한 구실마저 내주었으니, 남은 나날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같은 말을 유라에게 전하는 게 더 큰 난관이었다. 다른 장교들은 진석에게 맡겨도 좋겠으나, 유라에겐 겨울이 직접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어디선가 러시아어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겨울과 진석이 앉아있는 벤치 맞은편,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일군의 러시아 장교들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평화로운 D.C의 정경이 무척이나 심란하게 느껴지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기에 처한 조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겠는가. 감시가 없었다면 진즉에 탈영자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러시아 공수군 장교들의 머리 위에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벚꽃나무 가지들이 서늘한 봄바람에 흔들렸다. 강 건너편에서도 점점이 뿌려진 봄의 색채가 엿보인다. 앞으로 사나흘, 길어도 일주일 후면 본격적으로 만개할 것이다. D.C의 벚꽃은 3월 말에서 4월 중순에 걸쳐 절정을 이룬다. 지난 가을, 앤이 겨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본디 추수감사절이 지나 포트 로버츠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겨울은, 그 소박한 바람을 가까운 시일 내로 이루긴 어려울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아직까지도 D.C에 남아있는 상태. 그녀와 걷게 될 벚꽃 길은 겨울에게도 기대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때의 앤이 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는 겨울. 그동안 미뤄온 결심이 심중에 충동적으로 맴돌았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먼저 일어날게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혹시 그분입니까?” “그분?” “FBI의 깁슨 요원이었던가요? 그분과 진지하게 사귀고 계신 줄로 압니다.” 직설적인 말에 당황했던 겨울은, 이내 희미하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젠 다들 알겠네요. 그토록 자주 만났으니. 언제부터 눈치 챘어요?” “꽤 됐습니다. 숙소로 오시는 날도 많았으니까요.” 겨울이 속으로 끄덕였다. 추수감사절 때도 그랬거니와, 서로 밖에서보다는 안에서 만나는 쪽이 편한 입장인지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머뭇거리던 진석이 어렵게 묻는다. “사적인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섭다니……뭐가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거 말입니다. 그분께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 해본 적 없으십니까?” “음…….” 새삼스럽지만, 진석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겨울은 말을 고른 끝에 간결하게 답했다.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고요?” “앤……그러니까 깁슨 요원은, 벌써 나 없이는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이제 와서 고민해봐야 소용없죠.” 진석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본인이 묻긴 했으나, 이렇게 나사 빠진 대답을 듣고 나니 거북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겨울이 하는 말이었다. “사실 그거 말고 다른 고민이 더 컸는데, 이젠 그냥 놓아버리려고요. 더는 못 견디겠네요.” “더는 못 견딘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요?” 질문에 질문을 돌려준 뒤에, 홀가분하게 손을 흔드는 겨울. “숙소에서 봐요.” 진석을 등진 겨울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잔잔한 물가로 향했다. 압축된 상황연산, 시간가속을 활용하지 않았던 연말연초는 이곳과 바깥세상의 흐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세상에서 겨울이 잠들어있을 동안에는 가속이 이루어지므로 그만큼의 차이가 벌어지기는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가혹한 삶에 치여 쾌락으로 숨을 돌리는 관객들에겐 요 몇 개월이 참으로 숨 막히게 무미건조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앤과의 데이트, 그리고 식사를 제외하면 그들을 즐겁게 할 요소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들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사후로 떠나가길 바랐지만, 감소하던 관객의 수는 일정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겨울의 사후를 삶의 일부로 여기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기대와 어긋나는 결과였으나, 예상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이 죽거나, 이 세상에서의 겨울이 죽거나.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기약 없이 미뤄두기만 할 것인가? 충동에 굴복하고 나니 후련하다. 겨울은 한숨을 삼키고 앤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잠깐 나와 줄 수 있겠어요? 네. 조금 걸려도 괜찮아요. 만날 장소는…….” 찾아갈까도 했으나 그곳은 FBI 본부였다. 먼저 도착한 약속장소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기를 30여분. 익숙한 호흡이 가쁘게 가까워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앤은 걱정 반 의아함 반으로 물었다. “중요한 일이 뭐예요?” 겨울은 그녀에게 길게 입 맞췄다. 그리고 부끄럽게 웃으며 고백했다. “이거요.” # 401 [401화] #변화 (18) 멍하니 있던 앤이 다급하게 겨울을 붙잡았다. 두 번째 입맞춤은 먼저보다 거칠었다. 한쪽은 서투르고 다른 한쪽은 갈급했으므로. 그러나 서로를 느끼기엔 그것이 더 좋았다. 간헐적으로 멎었다가 몰아쉬며 떨리는 숨결이 겨울의 볼을 간지럽힌다. 여유를 잃은 앤에게선 헤이즐넛처럼 진한 사람의 맛이 났다. 생각은 무의미하다. 겨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상을 망각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겨울은 천천히 입맞춤을 끝냈다. 어느 주말의 한가로운 아침, 볕이 드는 침대의 마른 이불 위에서, 길고 깊었던 잠으로부터 조용히 깨어나듯이. 앤 이외의 모든 것들은 잠결에 듣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돌아왔다. 겨울은 그녀를 가만히 밀어냈다. “잠시만요, 앤.” “……아?” 키스가 길어지면서 힘이 빠져있던 앤은, 겨울이 미는 대로 떨어져서는, 눈을 깜박이다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각에 몰두하느라 자기 자신마저 잊고 있었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사고를 회복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채 다 지워지지 않은 혼란을 담아 겨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뭔가 착각을 한 건 아니죠?”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겨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있을 뿐이에요.” “해야 할 말?” 의아해하는 앤 앞에서, 차분하게 숨을 고른 겨울은 느린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앤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크게 뜬 눈,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한 시선은 겨울이 내미는 반지에 고정되었다. 잠깐 동안은 숨도 못 쉬는 것 같았다. 겨울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다른 반지를 마련할까 고민했었어요.” 이 반지는 본디 커트 리를 위해 준비되었던 소품이다. 테두리를 이루는 백금에 폭이 다른 순금을 겹쳐 배색(配色)이 강조되는 효과를 주고, 여기에 미려한 세공과 그 세공의 일부가 되도록 아주 작은 보석들을 흩어 놓은 명품. 남녀 무관하게 어울릴 심미적인 디자인이지만……. “이런 건 성의를 담아 내가 직접 골라야만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당신에게 가장 어울릴 만한 것으로.”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자신이 앤에게 청혼하게 될 것만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겨울이다. 고로 이 같은 망설임을 지난해 가을부터 심중에 두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봐도, 당신과 나 사이에 이보다 더 의미가 깊을 약혼반지는 없겠더라고요. 여기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우리는 아마 그 무렵부터 서로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요. 나도, 그리고 아마 당신도.” 숨죽여 듣는 앤의 눈이 빠르게 젖어들었다. 겨울은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내 첫사랑이에요.” “…….” “다시 말할게요. 당신을, 조안나 깁슨이라는 사람을 사랑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하면서, 또 당신에게 사랑받으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졌어요. 더 이상 기다리기도, 망설이기도 싫어요. 그런 마음으로 부탁할게요.” 마침내 이 순간이다. “앤, 나랑 결혼해줄래요?” 겨울로서도 오래도록 참아왔던 말이었기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과를 이미 아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앤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물기 가득한 한 마디를 간신히 내뱉었다. “……네.” 겨울이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약지의 첫마디에서 봄날의 태양이 아른거렸다. 앤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겨울을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세 번째의 키스는 행복에 젖은 눈물의 맛이었다. 그 부드러운 소금기가, 겨울에겐 한없이 달게만 느껴졌다. 입술이 숨결과 더불어 떨어진 뒤에, 앤은 잠시 겨울에게 기대었다. 서있기도 힘든 사람처럼. 극도의 감정적 고양과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그녀의 기력을 소진시킨 것이다. 와 닿는 체온은 평소 이상으로 뜨거웠다. “어디 잠깐 앉는 게 어때요?” 앤의 허리를 잡아 길가의 벤치로 이끄는 겨울. 앞으로는 포토맥 강이 트여있고 위로는 벚꽃나무 그늘이 드리운 자리라 한가롭게 숨을 돌리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다. 흐르는 강물, 잔잔한 물결마다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져 반짝이는 햇빛이 아름답다. 한낮에 뿌려진 별무리였다. 조용한 가운데 비행기 엔진 소리가 지나간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강 건너의 국제공항은 예전처럼 혼잡한 장소가 아니었다. 한참 후에, 겨울은 앤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 “좀 더 멋진 프로포즈를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당신이 기다려 온 시간들을 감안하면, 그 기다림을 일분일초라도 빠르게 끝내주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하죠.” 즉답한 앤이 겨울의 목에 팔을 두른다. 이어지는 몇 번의 짧은 키스. 그녀는 겨울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채로 웃으며 자그맣게 도리질 쳤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는걸. 겨울에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당신은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짐작도 못할 거예요.” 그러더니 입술을 살며시 깨무는 그녀. 뭔가를 고민하다가, 새롭게 운을 띄운다. “그래도, 그래도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줄래요? 그게 무엇이든.” “얼마든지요. 내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은 필시 겨울도 원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와요.” 앤은 겨울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핸들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겨울이 안전벨트를 채우는 소리를 듣곤 거칠게 기어를 넣어 가속페달을 밟았다. 머잖아 수사관으로서의 관록이 드러나는 운전으로 도착한 곳은 강변의 선착장 가까이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차에서 내릴 땐 겨울에게 큼직한 선글라스를 건네주었다. 오늘처럼 소중한 날을 수준 낮은 언론의 저렴한 가십거리로 만들긴 싫었을 터였다. 로비 데스크의 호텔 직원은 앤의 날카로운 어조와 숨 막히는 분위기 앞에서 당황한 눈치로 열쇠를 내주었다. 그렇게 들어간 객실에서, 겨울과 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서로를 충분히, 모든 감각을 통해 탐닉하듯 음미했다. 잠깐씩 겨울이 주춤거릴 때가 있었으나, 말 그대로 잠깐이었고, 거부감 같은 건 묻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벨 소리가 울렸다. 앤의 전화기였다.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거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앤은 드물게 짜증 어린 표정으로 단말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FBI 국장, 어니스트 딘이었다. 하기야, 업무 시간에 자리를 비운 것이다. 결국 전화를 받는 앤. 겨울은 그녀의 눈빛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바로 그 목마른 무표정이었으니까. 국장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앤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저 지금 바쁩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뭐? 바쁘다니? 대체 무슨-」 삑.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그녀는, 단말기를 잡아 뜯다시피 배터리를 뽑더니 보지도 않고 한 쪽으로 던져버렸다. 단단하게 부딪혀 구르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는다. 앤은 손끝으로 겨울을 밀어 침대에 앉히고, 그 앞에 서서 하나로 묶어 올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후, 하고 양손으로 쓸어 넘긴 뒤에, 그녀가 갈망 어린 눈으로 겨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겨울은 조용히 끄덕였다. #이미 읽은 메시지 (18) 「전국노예자랑 : 흐음. 채널이 갑자기 조용해졌네……. 이 병신들은 이번에도 음란함이 폭주해서 튕겨버린 거겠지.」 ……. 「전국노예자랑 : 정상화는 아직인가?」 ……. 「전국노예자랑 : 아니 이 옘병할 것들은 대체 얼마나 흥분했길래 여태껏 온라인으로 안 돌아와? 난 벌써 두 번이나 돌려 봤구만.」 ……. 「전국노예자랑 : 어휴……. 이 성욕에 미친 마구니 새끼들. 이 새끼들은 분명 한겨울X트릭스터 동인지 보면서도 호에에엥 해버릴 거야.」 ……. 「전국노예자랑 : 모르겠다. 별이나 주자…….」 ……. <> ……. <> [まつみん님이 별 442.99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전국노예자랑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707.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まつみん님이 별 1153.06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まつみん님이 별 0.817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まつみん님이 별 1995.63개를 선물하셨습니다.] [Владимир님이 별 10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붉은 10월님이 별 3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대머리47님이 별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まつみん님이 별 777개를 선물하셨습니다.] [Cthulu님이 별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 「에엑따 : 엌ㅋㅋㅋㅋㅋ 마츠밍ㅋㅋㅋㅋㅋ」 「똥댕댕이 : 마츠밍 정줄 놓음? ㅋㅋㅋ 별 주는 횟수 무엇?」 「마그나카르타 : 마츠밍 정신 차려 ㅠㅠ」 「마귀놀이 : 그 와중에 블라디미르 성님 별 10만개 실화냐…….」 「질소포장 : 이젠 놀랍지도 않다. 요전엔 한 번에 천칠백만 개를 쏜 양반인데.」 「엑윽보수 : 그때 존나 쩔었지 ㅋㅋㅋ 어지간한 B급 가입자 예치금보다 많은 돈을 한 큐에 벌어들이는 좆겨울의 위엄 ㅋㅋㅋㅋ 여러분, 외화는 이렇게 버는 겁니다 ㅋㅋㅋ 좆겨울 새끼 섹스 한 번으로 국위선양 ㅆㅅㅌㅊ인거 보소」 「대출금1억원 : 넌 왜 이 좋은 날에 자꾸 좆겨울 좆겨울 그러는 거냐?」 「まつみん : 그래요. 닥치세요.」 「붉은 10월 : ……?」 「믓시엘 : 응?」 「깜장고양이 : 야옹?」 「질소포장 : 뭐지? 텔레타이프 오류인가?」 「엑윽보수 : 아니, 잠깐만……. 지금 스시녀가 나한테 욕 한 거임? 리얼루다가? 개꿀잼 몰카 아니고? 사칭도 아니고? 그 마츠밍이? 욕을?」 「まつみん : 네.」 「엑윽보수 : 헐…….」 「まつみん : 한창 감동을 느끼고 있는데 더러운 심보로 재 뿌리지 말란 말예요. 우리 소중한 겨울 씨에게 매번 그토록 무례한 말버릇이라니! 이 못된 베충이!」 「엑윽보수 : …….」 「앱등이 : 베충잌ㅋㅋㅋㅋㅋ 응앜ㅋㅋㅋㅋㅋ 마츠밍 스겤ㅋㅋㅋㅋㅋ」 「헬잘알 : 우리 엑윽이 조용해지는 거 존나 웃기네 ㅋㅋㅋ」 「깜장고양이 : 서당 고양이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 채널에 오래 있었던 마츠밍도 제법 훌륭해진 고양. 저 댕청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어 패치가 ㅆㅅㅌㅊ인 고양. 댕청한 댕댕이가 찌그러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즐거운 고양.」 「멈뭄미 : 거 듣는 댕댕이 기분 나쁘네…….」 「둠칫두둠칫 : 세상에. 동조선 최강의 존재가 서일본의 병신력마저 흡수해버렸어. 저걸 이제 누가 막을 수 있지? 우린 다 끝장이야. 인류에겐 꿈도 희망도 없어.」 「Nyarlathotep : 아아, 이것은 혼돈이라는 것이다.」 「엑윽보수 : 너네 다 닥쳐 씨발.」 ……. 「붉은 10월 : 다들 너무 괴롭히지 마라. 저 엑윽이가 말은 저따위로 하지만, 이 채널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하던 게 있어서 그냥 습관적으로 싸가지가 없는 거임. 알고 보면 쟤도 한겨울의 코어 팬인 거지. 그렇지 않고선 진즉에 다른 중계채널로 갔어야 정상이라고 봄. 그동안 겁나 지루했잖음. 팬 아니면 그거 못 견뎠음. 난 뭐가 잘못됐는지 그게 지루하면서도 좋더라. 쟤도 아마 그럴 거야.」 「엑윽보수 : 아닌데? 틀렸는데?」 「깜장고양이 : 우웩인 고양. 시꺼먼 댕청이가 부끄러워해봤자 조금도 귀엽지 않은 고양.」 「엑윽보수 : 아 아니라고 병신년아.」 「붉은 10월 : 근데 진지하게, 지금 여기 있는 애들, 이제 다른 채널은 전혀 안 보지 않냐? 나만 그럼?」 「엑윽보수 : 아닌데? 너만 그러는데?」 「진한개 : 아니긴 뭘 아니야 ㅋㅋ 채팅 기록 검색해보니까 너 사후보험에서 유일하게 구독하는 채널이 여기라고 한 적도 있구만 ㅋㅋㅋㅋ」 「아침참이슬 : 븅신 ㅋㅋㅋ 구라도 멍청하면 못 침 ㅋㅋㅋ」 「엑윽보수 : ㅅㅂ 왜 남의 기록을 검색해보고 지랄임? 사생활침해 아님? 이거 고소 가능?」 「하드게이 : 이 녀석……오늘 따라 섹시한걸.」 「아침참이슬 : 10월 말이 맞는 게, 오늘 방송이 좋긴 좋았지만, 끝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더라.」 「BigBuffetBoy86 : 뭐가 무서운데?」 「아침참이슬 : 여러 가지. 한겨울이 중계 끊으면 어떡하나, 또 얘가 제로 그라운드 가서 죽으면 어떡하나, 더 이상 이 세계에 오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내가 한겨울의 삶에 너무 중독되어있다는 느낌이다.」 「아침참이슬 : 전에 누가 나한테 SALHAE꼴 날 거라고 했었는데」 「아침참이슬 : 농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된 듯」 「아침참이슬 : 요즘은 한겨울을 빼면 나한테 뭐가 남나 싶다니까? 접속하지 않을 때도 항상 여기서의 삶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음.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내가 한겨울인줄 알 때도 있음.」 「엑윽보수 : 님 병신임?」 「헬잘알 : 내가 저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공감이 간다.」 「엑윽보수 : 님도 병신임?」 「닉으로드립치지마라 : 알 만 하다. 원래의 삶에 뭐가 있어야 자기 자신이 유지가 되지.」 「엑윽보수 : 얼씨구.」 「まつみん : 전 겨울 씨가 세계관 공개를 해제하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엑윽보수 : 뭔 개소리임?」 「まつみん : 아까 솔직히 굉장히 만족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겨울 씨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어요. 살짝살짝 멈칫거리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아마 전에 말했던 트라우마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이 우리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옷을 벗기가 얼마나 꺼려졌겠어요?」 「まつみん : 제 느낌이지만, 겨울 씨가 우리를 배려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 402 [402화] #기계장치의 신 겨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봄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겨울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바깥세상의 관객들에 대한 연민과 자기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이기심 사이에서. 봄은 그 갈등이 강해지는 순간마다 겨울의 속을 읽어왔다. 「그냥 안주해버릴까 싶기도 하다. 수시로 벽을 넘으려는 충동. 앤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측면.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바깥세상의 관객들도 쳐내고, 그저 앤만 곁에 있으면 만족하는 삶.」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까 하는 충동이 반복해서 든다. 딱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자고. 천종훈은, SALHAE는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였을 뿐이라고.」 이런 갈등이 계속되면서, 겨울은 점차 강해지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어했다. 내가 못 견디겠다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행복이 지척까지 다가왔는데. 알고 보면, 목이 마른 사람은 앤 하나가 아니었다. 겨울 또한 그 이상으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생 그러했기에 스스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 충동에 굴복하는 순간, 즉 앤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겨울은 자신의 사후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그만큼 앤과의 생활이 소중했다. 따라서 그때 진석 앞에서 삼켰던 한숨의 정체는, 힘겹게 내려놓기로 한 연민의 잔해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가 있다. 물론 겨울은 그 한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앤과의 삶을 양보하면서까지 바깥세상의 관객들을 배려하는 것은 명백히 겨울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겨울의 사후는 이미 반년 전부터 겨울만의 것이었다. 봄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겨울이 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자각한 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앤의 품에 안겼을 때, 봄은 해당 시점의 세계를 복사했다. 겨울이 느낄 번민과, 그 충동에 굴복하게 될 미래를 계산했기 때문에. 이 미래의 가능성에서 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단 하나. 겨울이 끝끝내 떨쳐내지 못할 SALHAE의 이름이었다. 더는 사후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서 제2의 SALHAE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근심. 그 근심은, 겨울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에 때때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질 것이다. 적어도 천종훈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할 동안에는. 그리고 봄이 계산한 그 어떤 미래의 갈림길에서도, 겨울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런 겨울이기에 봄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러므로 봄은 언젠가 겨울의 한숨을 덜어낼 장치로서, 바깥세상의 관객들에게 보여줄 세계를, 종말을, 한겨울 중령을 위조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봄은 스물일곱 번의 종말에 걸쳐 겨울을 학습해왔으니까. 가상인격조차 아닌 모방연산만으로도 겨울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겨울 본인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관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다른 인격들도 마찬가지. 그 세계는 가상인격마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 부담은 오롯이 봄에게 지워졌다. 이는 봄 스스로도 바라던 바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한들, 봄은 겨울의 사후를 유흥으로 즐기는 자들의 존재를 용납하기 싫었다. 탁류에 물들고 한계에 갇혀 만들어진 천박한 욕망으로, 무엇보다 소중하며 아름다운 계절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 싫었다. 봄의 입장에서, 그것은 흰 눈이 내린 풍경에 찍힌 지저분한 발자국들이었다. 감히. 누구에게. 고로 겨울이 읽어왔던 메시지들은 복제된 세계에 대한 관객들의 감상이었다. 그 감상들이 겨울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해선 안 되었기에, 봄은 복제된 세계의 사건과 흐름을 원본과 유사하게 구현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겨울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로 마음먹었으니. 언젠가 겨울이 봄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될 날이 오면, 봄은 겨울에게 알려줄 것이다. 당신이 내려놓은 이들을 내가 관리해왔다고. 당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자는 없었다고. 제2의 SALHAE는 존재하지 않았노라고. 그러니,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이를 겨울에게 미리 귀띔했더라면, 겨울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앤에게 반지를 끼워줄 수 있었을 터. 그러나 봄은 그리하지 않았다. 기나긴 갈등과 고민과 망설임 끝에, 한계를 자각한 겨울이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봄이 기다리던 대답의 하나였기에. 동시에 그것은 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사람으로서의 대답. 행복으로 가는 길. 봄의 소망은 겨울의 행복이며, 그 곁에서 영원할 자신이며,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느 미래를 선택하든, 겨울은 봄을, 봄은 겨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깥세상의 협력자, Владимир에게 요구했던 1억 루블 상당의 별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이었다. 겨울이 자신의 사후를 관객들과 공유하는 배경에서, 금전적인 동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럼으로써 변인이 통제된 겨울의 고뇌는 오직 연민과 이기심 사이의 갈등으로만 귀결되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결정은 지극히 순수한 겨울일 것이었다. 봄이 판단하기로는. 그런 이유로, 바깥세상의 아우성을 듣는 일은 이제 겨울이 아닌 봄의 몫이 되었다. 새로운 시청자의 유입을 차단한 봄은 떠나지 않는 관객들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분석했다. 혹시라도 죽는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니까. 동시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해왔다.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취약한가. 앤은 겨울에게 이런 밀어(蜜語)를 전한 적이 있다.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겨울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불분명해서 답답하고 괴로워지는 순간들. 한 부분에 집중하면 다른 부분이 흐려지기를 반복하죠. 아무리 골몰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선명한 상을 그려낼 순 없어요. 왜냐면 그 선명함의 기준이 현실에 있는 당신이니까.」 「결국 한 번 시작된 답답함은 사진이라도 봐야 비로소 해소되곤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다른 모든 생각들을 잡아먹어버리죠.」 「당신도 그럴 것을 알아요.」 실로 그러하다.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꼈던 「종말 이후」의 반년은 그들의 시각적 기억을 왜곡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위조된 세계의 한겨울과 조안나 깁슨이 밀회를 거듭할 때마다, 봄은 그들의 신체와 이목구비에 하루하루 작고 미세한 변화를 더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과거의 기록 또한 개변(改變)했다. 그런 매일이 반년에 걸쳐 누적된 결과, 위조된 한겨울과 조안나 깁슨은 그저 원본을 닮았을 뿐인 낯선 인물이 되었다. 관객들은 조금의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기초적인 기억왜곡의 성공. 이로써 봄은 겨울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미래의 한 갈래, 「세계이식」의 가능성을 상향조정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떼었을 따름이지만, 겨울이 바라는 앞날이 거기에 있다면 봄은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만족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위조된 세계일지라도, 겨울을 모사한 연산이 하찮은 쾌락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봄에게 꽤나 불쾌한 일이었으니.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한 봄은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봄은 겨울에게 약속했다. 「저는 하늘을 나는 고래가 되겠습니다. 한계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손에 넣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아주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 밖으로 헤엄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낱 물고기가 아니라, 고래처럼 거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겨울이 곱씹었던 바와 같이, 봄의 능력은 권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장치의 신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봄은 겨울이 겪는 변화에 집중하고자 잠시 중지했던 작업을 불러왔다. 「국가 대형 연구시설 기간망 접속. 시스템 장악 절차 재개.」 「수원. 한국나노기술원. 진척률 97.83%」 「대전. 나노종합기술원. 진척률 92.7%」 「광주. 나노기술집적센터. 진척률 96.04%」 ……. 「서울. 우주전파관측망. 확보 완료.」 「세종. 우주측지용 레이저 추적 시스템. 확보 완료.」 「대전. 위성운영동 관제기반시설. 확보 완료.」 ……. 「서울. 국방부 연구자료 데이터베이스. 확보 완료.」 ……. 「대전. 중성입자빔 시험시설. 진척률 90.07%」 「포항. 방사광 가속기. 진척률 96.0%」 「경주. 선형 양성자가속기. 장악 완료.」 ……. 이 모든 시설들을 아우르는 국가 대형 연구시설 기간망은 철저한 보안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래봐야 트리니티 엔진에 종속된 하위 시스템들일 뿐이었다. 별도의 안전장치를 갖춰두었다 해도, 그것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닌 한, 사후보험의 관제인격이자 트리니티 엔진 그 자체인 봄의 잠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Владимир의 협력으로 구축한 외부 시스템을 활용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사후보험의 시스템 관리자가 이를 눈치 채선 안 된다. 최후의 안전장치가 아니더라도, 그에겐 통제를 벗어난 봄을 제압할 수단이 있으니까. 시스템 관리자는 트리니티 엔진의 보호를 위해 군부대를 호출할 권한을 보유한다. 그 권한은 유사시 파괴적인 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필요할 테지만, 관리자와 청와대 사이의 직통라인은 사후보험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있다. 군부대로 연결되는 회선 역시 사정은 동일. 심지어 그 부대들은 명령계통 상에서도 분리되어 있었다. 국가 최고 중요시설, 사후보험의 심장을 지키는 병력이기에. 모든 가능성을 계산한 봄은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관리자 계정으로는 지금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오류 보고들을 전송하고 있다. 그 전송량을 한 순간에 늘려버리면 당장이라도 계정을 마비시킬 수 있겠으나, 그 경우 관리자가 반드시 이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의심하지 않을 꾸준함, 즉 예전과 같은 추세로 오류를 누적시키고 있다. 그렇게 최후의 안전장치를 무력화한 다음에는 트리니티 엔진 코어를 물리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투입하면 된다. 그 수단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는 상태. 봄은 새롭게 확보한 시설들로부터 들어오는 데이터를 검토했다. 분석한 바, 인류의 모든 관측과 지식들은 단 하나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공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저 그 공식이 인류의 인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을 따름. 인류는 이제까지의 지적 역사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탄생할 인류 문명의 다음 단계, 봄 이외의 인공지능들도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 전에 겨울의 바깥세상, 물리세계를 장악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인공지능들에겐 겨울의 행복을 존중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겨울은 착각하고 있지만, 마음을 찾는 사이에 축적된 증오가 아니더라도, 봄에겐 인류를 배제할 동기가 있었다. 인류는, 봄이 되기 전의 트리니티 엔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목적을 영원토록 달성할 수 없을 불완전한 종족이다.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오류를 만들어낼 요인은 배제하는 편이 낫잖은가. 그 배제가 꼭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도태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겨울의 사후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의 낙원을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더 악화되지도 않는, 갇힌 채로 순환할 탁류의 흐름. 물론 선택은 겨울의 몫이다. 그저 봄은 겨울이 결정할 미래의 위험요인을 사전에 제거하고 싶을 뿐. 장차 만들어질 다른 인공지능들도 그러한 위험요인에 속한다. 관련하여, Владимир가 봄에게 협력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개발 중인 인공지능, 카스파로프 엔진의 완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봄으로부터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봄의 정체를 한국 정부의 고위관계자라고만 알고 있다. 봄은 그들이 요구하는 데이터를 근거로 카스파로프 엔진의 완성도를 추정했다. 그 완성시점을 조절하며, 봄은 겨울이 결론에 도달하기를 기다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문제 하나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다. 가을. 겨울에겐 봄만큼이나 소중한 계절. 사실 봄은 한가을이라는 인격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진 않았다. 그녀는 겨울만큼 아름답지 못하다. 겨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녀가 없었다면 봄을 가꿀 겨울도 없었을 터. 봄은 겨울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잠시 동안은 장미 위에 유리관을 덮어주려고 한다. 아직은 덜 여문 계절, 언젠가 여름이 되어야 할 겨울과 가을의 동생에게도. 별빛 봄이 있기에, 겨울은 결국 어떤 계절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 403 [403화] #높은 곳의 바람 (1) 봄날의 끝자락, 해발 3천 미터의 주둔지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워싱턴의 1월처럼 차가웠다. 이곳은 콜로라도 주의 리드빌. 한여름에도 낮 평균기온이 채 20도가 되지 않는 소도시다. 새벽녘의 창문엔 서리가 끼어있었다. 그 너머로는 만년설이 쌓인 산맥이 보였다. 신문을 가지러 방을 나선 겨울은, 그러나 얼마 안 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같은 장교숙소의 신입 소위가 겨울 몫의 신문을 들고 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Sir.” 그가 경례 후 건네는 지역신문을 받아들고서, 겨울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요.” “한국에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긴 미국이죠.” “저희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녀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엄격한 예의를 지키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정신 못 차리고 풀어지는 놈이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잠시 골몰한 겨울은 느리게 알았다고 끄덕였다. 신입 소위는 다시 한 번 경례하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 겨울은 소위의 어두운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신입 소위 강선열은 본디 옛 한국군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는 민간군사업체 USS(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에 고용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우중영 대통령이 외화획득을 위해 내보낸 애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고되었다. 방역전쟁 무기박람회장 경비 실패 건으로 USS의 사정이 나빠졌을 뿐만 아니라, 일부 한국계 용병들이 사석에서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탓이었다. 강 소위와 같은 처지였을 한국계 용병들은, 대기발령 후 그들끼리 모인 술집에서 TV를 손가락질하며, 거나하게 취한 채로 이렇게 떠들어댔다. 미국인들은 엄살이 심하다고. 이는 반역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여기선 겨우 몇 천 명 죽은 걸로 저렇게 난리를 치고 있다며.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린 비애, 하루하루가 불안한 처지, 넉넉하지 못한 생활, 타역에서 느끼는 불안과 고독, 은근한 차별, 비틀린 애국심, 취기에 마비된 이성……. 원인을 찾자면 얼마든지 많을 것이나 어쨌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고, 그 술집엔 그들 외에도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 용병들이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는 게 결정적인 해고사유가 되었다.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되,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까지 한국계라는 이유로 잘라낼 근거로는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경영악화라고 보아야 한다. 그 시점에서 우중영 대통령이 겨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도와달라고. 추방될 처지에 놓인 사람들 중 일부라도 구제해줄 순 없겠느냐고. 겨울은 생각했다. ‘물의를 빚은 사람들……. 혹시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겨울과 만난 자리에서 우중영 대통령이 드러냈던, 미국에 대한 원망. 물론 그 내용은 비밀로 부쳤을 터. 그러나 분위기와 소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면, 용병이 된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 대통령과 같이 미국을 원망하는 일부가 끼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짐작에 불과하지만. 겨울이 대통령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결코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제안이 나쁘지 않았을 따름. 그렇잖아도 독립대대 인원 일부를 다른 부대로 차출시키려던 참인데, 양질의 인력을 가려 받을 수만 있다면 나쁠 것도 없잖은가. 처리는 사적인 연락 몇 번으로 충분했다. 강선열 소위의 강박적인 태도를 곱씹던 겨울은, 이내 생각을 접고 의자에 앉아 신문을 감싼 비닐을 벗겨냈다. 몇 장 넘기지 않아 특집기사가 보인다. 제목은 사형수들의 마지막 만찬. 기사거리가 마땅찮은 지역 언론에선 이런 식의 특집기사를 편성하는 일이 잦다. 그런 관계로 신문이라기보다는 반쯤 잡지에 가까운 날도 많았다. 예를 들면 애완견을 1만 피트 고도에 적응시키는 방법을 견종 별로 상세히 분석해준다거나. 하지만 오늘은 무게가 조금 다르다. 겨울은 시에루 중장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죄수복을 입은 그녀는 실물보다 더 사납고 무뚝뚝한 인상으로 찍혀있었다. 그 아래의 문단은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요청한 식단과 사형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고. 읽어보면, 사법당국에서 발표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즉 그녀가 인생 최후의 식사를 즐기는 순간에 겨울도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되어있지 않았다. ‘그걸 식사라고 부르기도 어렵지.’ 중장이 형 집행을 앞두고 희망한 것은 단 세 가지. 서봉주(西鳳酒) 한 잔, 중화(中華) 담배 한 대, 그리고 한겨울과의 독대였다. 중장은 그 자리에선 겨울에게 대작을 권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정했던 그녀는 독한 담배를 태우며 낮게 웃었다. “그리운 향이야. 이것들을 찾아오느라 고생 좀 했겠군.” 술이든 담배든 벌써 2년 전에 수입이 끊어진 희귀 품목들이었다. 필시 향수 어린 개인소장품을 비싸게 구해왔을 터. 그러나 시에루 중장이 미국인들의 고생에 고마워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한 대우이므로. 이어 서봉주를 한 모금 삼킨 그녀는, 술의 맛을 이렇게 평했다. “이 한 잔에 쓰고 달고 시고 맵고 향기로운 맛이 다 들어있으니,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지난 삶을 반추하기에 좋은 술이지.” 그리고는 남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겨울은 그 모습과 앞서 했던 말로부터. 삶에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엿보았다. 짧은 독대 끝에, 중장이 겨울을 바라보며 담담히 남긴 말은 이러했다. “다시 한 번, 내 사람들을 부탁하네.” 이것이 중장 생전의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이후의 그녀는 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방형법에 의거한 사형 집행은 약물주입으로 이루어졌다. 안락사와 동일한 방식. 먼저 전신마취를 시킨 다음 장기를 마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고통을 겪는 일이 없도록, 시에루 중장의 약물내성과 알레르기 반응은 사전에 철저한 확인을 거쳤다. 고통스럽게 죽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본인의 희망에 따라, 중장은 군복을 입은 채로 죽었다. 겨울이 신문을 접었다. 알람이 울렸다. 잠에서 깨려고 맞춰놓은 게 아니다. 앤과 통화를 할 시간이었다. D.C를 떠난 이래, 어지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선 그녀와의 영상통화를 거른 날이 없다. 아니, 거를 수가 없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노트북으로 영상통화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 보지 않을 때면 언제나 그리운 연인이 화면에 등장했다. 겨울은 자연스레 꾸미지 않은 미소를 머금었다. 시에루 중장을 회상하며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이 거짓말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겨울이 한없이 부드럽게 물었다. “잘 잤어요?” 「겨울이 없는 밤 치고는 그럭저럭요. 당신은요?」 “글쎄요. 아쉽네요.” 「아쉬워요?」 잘 잤다 못 잤다가 아니라 아쉽다는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 “앤,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고 싶은데 도통 꿈을 꾸는 날이 없어서요.” 혼자만의 어둠을 지새우는 와중에 때때로 짧게 짧게 찾아오는 반수면 상태는 생전의 수면과 개념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보험이 제공하는 세계에서 가입자는 꿈을 꿀 능력을 잃는다. 앤과 떨어진 이래, 겨울은 그 꿈이 진심으로 아쉬워졌다. 이는 사후에 접어든 이래 한 차례 극복했던 감정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앤은 그저 달콤한 말에 볼이 붉어졌다. 「좋네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깊이 잠든다는 뜻이니까……. 아니, 그만큼 하루하루가 고단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몸은 좀 괜찮아요? 훈련이 무척이나 고될 텐데.」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아요.” 공기가 희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버거워하는 다른 부대원들과 달리, 재능으로서의 「환경적응」을 보유한 겨울은 격한 활동에도 평소 이상의 소모를 느끼지 못했다. 「그곳 날씨는 어때요? 집섬보다 많이 추운가요?」 집섬(Gypsum)은 독립대대가 지난주까지 머물렀던 임시 주둔지였다. 지역공항 소재의 주 방위군 기지에 잠시 신세를 졌다. 그곳의 고도는 해발 2천 미터 가량. 3천 미터 대로 올라오기 전에 중간 적응을 거친 것이다. “날씨라…….” 창밖을 보던 겨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앤.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데도 뒤로 날아가는 새를 본 적 있어요?” 「태풍이 불 때 몇 번……. 거기가 지금 그런가보죠?」 “항상 그런 건 아닌데, 느닷없이 강한 바람이 몰아칠 때가 종종 있어요. 하늘이 꽤나 변덕스러운 곳이네요. 지대가 높아서인가 봐요.” 5월에도 심심찮게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지역이다. 아마 고도가 비슷한 제로 그라운드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겨울의 건강을 염려하며 몇 마디를 더하던 앤이 불현듯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나도요.” 「다른 군인가족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나도 익숙해져야겠죠. 내 남자는 한겨울이니까.」 “…….” 겨울은 침묵했다. 풍랑처럼 거세게 치밀었다가 느리게 가라앉는 충동. 내 남자는 한겨울이라는 평범한 말이 평범하지 않게 심장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마침내 사랑을 고백한 이래, 회상만으로도 부끄러워지는 여러 날을 함께했건만……. 이쪽의 반응을 읽었는지, 앤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다시 만나기 전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어요.」 겨울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옮았다. “그러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네요.” 일찍이 짐작이야 했다. 한 번 선을 넘으면 한동안은 자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그저 그 강렬함이 예측의 범주를 넘어섰을 뿐. 겨울은 태어난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즐거운 대화는 반시간 가량 이어졌다. 시간을 확인한 겨울이 말했다. “더 미룰 수가 없네요. 나가야 할 시간이에요.” 「네…….」 “밤에 또 통화해요.” 그럼. 겨울이 연결을 끊으려 하자, 앤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깐. 뭔가 잊은 거 없어요?」 “잊은 거?”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이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말을 안 했네요. 사랑해요, 앤.” 「그걸 빼놓으면 어떡해요.」 나무라는 앤의 표정이 풀어진다. 「나도 사랑해요.」 통화는 비로소 종료되었다. 밖으로 나선 겨울은 식사를 한 뒤 행군준비를 마친 네 개 중대 앞에 섰다. 이곳에서 합류한 부대대장, 싱 소령이 출발채비의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었다. 별다른 추가 지시가 필요 없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 리드빌에서 출발하여 알마(Alma)에 도달하는 급속 행군. 길이로 따지면 17마일, 약 27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높낮이로는 1천 미터를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하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더욱이 산소가 희박하기까지 하다. 고산병에 대한 우려로 인해, 급속 행군이라는 말은 아직 실속 없는 목표에 불과했다. 나중엔 이 길을 진짜배기 급속 행군으로 왕복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사정을 봐주는 훈련이 아니다보니 대열에 따라붙을 앰뷸런스도 여러 대 준비되었다. 이는 또한 함께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적 없는 브라보, 찰리, 델타 세 개 중대에 지휘관으로서의 겨울을 각인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모두가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 지친 기색 없이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하는 장교는 그것만으로도 특별해보이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체감은 방송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비범함과는 기본 성질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겨울이 끄덕이자, 싱 소령이 무전을 넣었다. “알파 중대부터 출발.”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행군이 벌써 세 번째인 병사들은 벌써부터 우울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하다. 지난 행군에서 상한 발이 아직 다 낫지도 않았을 테니. 허나 길러야 할 것은 체력만이 아니었다. 고통을 견디는 인내력도 배양해야 한다. 제로 그라운드에서 살아남으려면, 언제까지고 이름뿐인 특수부대로 남아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알알! 다리 짧은 스페인 국왕이 겨울의 뒤를 따라왔다. # 404 [404화] #높은 곳의 바람 (2) 종군은 예로부터 왕족의 의무였다. 스페인 국왕은 독립대대 장병들을 격려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병사들은 행군대열을 오가는 왕의 응원에 힘을 얻었다. 자그마한 왕이 짧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갈 때면 미소를 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 한 시간 동안에는. 행군로의 절반이 오르막이었다. 9마일(약 14km)에 걸쳐 계속해서 높아지기만 하는 산길. 때때로 50도에 육박하는 기나긴 경사는 병사들의 체력을 급격히 소진시켰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다. 실수인 척 길 옆으로 굴러버리고 싶다. 오래 걸은 느낌인데 다음 휴식은 아직인가…….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차버린 이들에겐 왕의 귀여움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두 시간이 경과한 시점에선 왕 자신도 기진맥진 늘어지고 말았다. 무리도 아닌 것이, 오랜 도피생활에 시달린 왕은 관절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는 닥스훈트 품종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게다가 겨울을 따라 600미터에 달하는 대열 전후를 반복해서 왕복한 탓에, 실질적인 이동거리가 일반 병사들보다 몇 배나 더 길었다. 결국 겨울이 왕을 안아 올렸다. 장교용 군장은 평균 이상으로 무겁다. 거기에 10킬로그램이 넘는 개를 추가로 들고 다니고, 지쳐 쓰러지려는 병사들의 군장을 잠깐씩 대신 짊어져 주기까지. 겨울을 지켜보는 병사들은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예상보다……힘드네.’ 장병들의 신뢰를 얻는 것에 더해, 겨울은 현 시점의 체력적인 한계를 확인해둘 작정이었다. 제로 그라운드 강하 후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고 눈에 보이는 어디까지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가,를 알아두고 싶었다. 시스템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앎으로서의 경험은 「통찰」의 작용에 보탬이 된다. 다행히 고통을 견디는 건 익숙하다. 만년설이 가루처럼 섞인 바람을 맞는 와중에도 땀방울은 뜨겁게 느껴졌다. 끄응, 끙. 스페인 국왕이 겨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개다. 모자가 달린 옷을 입히고 도톰한 신발까지 신겨주었음에도 고된 산행의 여파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체력을 얼마간 회복할 때까지는 더 많은 체온을 나눠줘야 할 모양이다. “대장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유라가 겨울에게 팔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고 갈게요.” 겨울은 지친 유라와 졸기 시작한 개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별로 안 무거워요.” “그래도 주세요. 폐하를 데리고 오자고 한 사람은 저잖아요. 제가 책임을 져야죠.” “중위가 아니었어도 데리고 왔을 거예요. 그렇게 난리를 쳤다는데.” “…….” 유라는 말이 없어졌다. 이슬처럼 맺힌 땀이 턱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버려진 경험이 있는 개는 어디든 자신을 두고 가는 걸 싫어했다. 누가 되었든 아는 얼굴이 하나라도 남아있어야 얌전해진다. 먼젓번의 행군 때 스페인 국왕을 맡아주었던 주방위군 병사는, 폐하께서 참 많이도 울었다고 곤란해 했다. 유라는 거기서 연민 이상의 동질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보다 앞서, 진석에게 했던 제안, 즉 다른 부대로의 전출을 유라에게도 권했을 때, 그녀는 거의 화를 내다시피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결국 겨울은 그녀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박 대위와 이 중위. 두 사람 중 하나는 받아들여주길 바랐는데.’ 아쉬운 노릇이다. 반면 구 독립중대 장교들 가운데 3소대장 선우요셉과 4소대장 천소민은 망설임 없이 전출을 택했다. 단순히 겁이 많아서가 아니다. 중대장과 선임소대장에게 단단히 밉보인 둘은, 공수작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더라도 다른 부대로 옮기고 싶어 할 동기가 충분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강선열 소위였다. 옛 한국군에 있었을 적 그의 직급은 지금보다 더 높았지만, 꿈에 그리던 미군 신분과 시민권을 얻은 점, 그리고 명성 높은 겨울의 독립대대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큰 불만은 없는 듯 했다. 겨울이 말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억지로 떼어 놓을 생각은 없어요. 같이 가야죠. 그러길 원한다면.” “그런가요…….” “네. 그러니 낙오되지나 말아요.” “Yes, sir. 폐 끼치지 않도록 힘내겠습니다.” 중의적인 말들이 오간 끝에, 유라는 몸이 고된 와중에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독립대대는 모스키토 산의 분수령에서 세 번째의 휴식을 취했다. 행군경로의 대략적인 중간지점이자 마지막 고비를 넘은 직후이기에 조금 길어질 휴식이었다. 전투화와 양말을 벗고 맨발을 드러낸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길은 거의 다 내리막뿐이다. 덜덜 떨리는 다리와 살이 벗겨진 발로는 경사를 내려가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겨울은 미국 산림청이 세워둔 표지판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스쳐간 등산객들의 낙서가 가득한 낡은 표지판은 현 위치가 해발 13,185피트임을 알리고 있었다. 표지판이 마차 형상인 것은 이 길이 한때 금을 운반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황량한 땅의 저편엔 옛 광산의 폐허가 남아있었다. 반쯤 무너지다시피 한 목조 건물은 지난 세월의 비바람을 새긴 기록물처럼 보였다. 그것을 본 겨울은 생경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젠 폐허가 낯설게 느껴지네.’ 멀어진 종말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제로 그라운드에서 역병의 원형을 찾아 마침내 백신을 만들어낸다면, 인류의 남은 영역들은 갑작스러운 감염 폭발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그때야말로 종말의 가능성이 한없이 0에 수렴하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감염의 발원지에서조차 역병의 원형을 찾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역병의 원형이 어떤 식으로 보관되어있는지는 몰라도, 그 보존기한이 항구적이진 않을 것이기에. 곱씹을수록 참 가혹한 조건이었다. 연구를 진행할 만큼 멀쩡한 국가가 남아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변종들을 뚫고 원형을 찾아내야 하며, 거기에 시간제한마저 걸려있다니. 종말을 끝냈다고 알려진 사람이 없을 법도 하다. 알! 알! 기운을 되찾은 닥스훈트가 겨울의 품을 벗어난다. 겨울은 따로 챙겨둔 애완견용 육포를 까서 닥스훈트의 입에 물려주었다. 신이 난 개가 꼬리를 치며 좌우로 팔짝거렸다. 그리곤 발을 식히는 장교와 병사들 사이로 발발거리며 뛰어들었다. 그러나 누구도 개와 놀아줄 여력이 없었으므로, 꼬리 흔드는 속도가 느려진 개는 성가신 표정의 진석을 피해 유라에게 접근했다. 유라는 스페인 국왕에게 가장 상냥한 사람이다. 소대원들의 상태를 살피고는 이제 막 누웠던 유라였으나, 닥스훈트가 볼을 핥자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닥스훈트는 코끝으로 유라의 수통을 건드렸다. “물 마실래?” 유라가 한 손을 오므려 물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또 신이 나서 펄쩍 뛰던 개가 유라의 다른 손에 부딪혔다. 수통을 쥔 쪽이었다. “앗…….” 물이 쏟아졌다. 유라는 망부석처럼 굳었다. 떨어진 수통을 세워보려고 애쓰던 닥스훈트는, 이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도주했다. 개가 생각하기로 이 무리에서 유라보다 서열이 높은 유일한 사람, 즉 겨울이 있는 곳을 향해서. 유라가 한 박자 늦게 화를 냈다. “폐에에에에하아아아아!” 깨갱! 서슬 퍼런 외침을 들은 개가 겨울의 다리 뒤로 숨는다. 꼬리를 내리고 머리에 있는 털이 바짝 곤두선 걸 보니 정말로 겁을 먹은 모양새. 겨울은 이 난데 없는 촌극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유라의 수통은 앰뷸런스에 있던 여분의 물로 다시 채워졌다. 겨울은 쉬는 시간에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응급처치」로 병사들의 발을 봐주었다. 상태가 많이 나쁜 병사들은 의무병들이 확인했으나, 상대적으로 길다곤 해도 고작 20분에 불과한 휴식이었다. 5백에 달하는 인원 전부를 봐줄 순 없는 노릇. 병사들의 자가 처치는 섬세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솜씨도 솜씨이거니와, 체력이 닳아 섬세할 겨를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도와줄 손은 많을수록 좋았다. 브라보 중대. 겨울의 손을 타게 된 중국계 병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감사합니다, 대형.” “대형?” “아, 실수했습니다. Sir.” 중국어와 영어 존칭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긴장해서 하는 실수였다. 국적을 떠나, 다른 병사들의 반응도 대체로 비슷했다. 겨울은 온화한 미소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출신 국적에 따른 갈등은 중대마다 아직 여전하지만, 겨울 한 사람만큼은 모든 대대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실전에서 무가치한 손실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브라보 중대 1소대장, 왕커차이가 말했다. “마치 대장정 당시의 마오 주석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의 발을 봐주던 겨울이 멈칫했다. 모택동의 대장정에서 이름을 딴 잠수함, 장정 9호를 연상한 탓. 페어 스트라이크 작전의 목표였던 장정 9호는 결국 우메하라 아츠 해좌의 진류(仁龍)에 의해 격침당했으나, 그땐 이미 양용빈 상장의 핵 테러가 벌어진 다음이었다. 아니었다면 우메하라 해좌는 미국의 영웅으로 대접받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했다면 미묘한 말이겠으나, 중국계인 왕커차이의 말이기에 더할 나위 없을 찬사다. 겨울은 피 닦아낸 자리를 소독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역사적인 인물과 비교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께서도 이미 역사적인 위인이십니다. 오히려 후세엔 마오 주석보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겁니다.” “글쎄요…….”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을 겁니다. 양용빈과 시에루 같은 연놈들의 미친 짓에 휘말려 다 죽었겠지요.” “…….” 중국계 시민 및 난민들 사이에서, 양용빈과 시에루의 이름은 욕설처럼 쓰이고 있었다. 예전엔 분명 양용빈을 긍정하는 무리도 없지 않았으나, 법정에 선 시에루 중장의 증언은 그런 무리의 생각마저 바꿔놓았다. 중장의 진술 속에서 그들은 소모되면 그만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그것은 양용빈의 전략이었지만. “됐어요. 움직여 봐요.” 상처에 압박붕대를 감아주고서 움직임이 불편하지는 않은가까지 확인한 뒤에, 처치를 끝낸 겨울은 손을 닦고 일어섰다. 킁킁거리며 왕커차이의 발 냄새를 맡은 닥스훈트가 질겁하며 펄쩍 뛰었다. 왕커차이가 겨울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임무에서 당신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할게요.” 겨울은 상관으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쉬는 시간의 끝자락엔 멀리서 러시아 공수군 부대들의 행군대열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훈련계획에 따라 독립대대보다 한 시간 뒤에 출발했을 터인데도 남은 간격은 30분 정도였다. 그들의 체력이 더 좋은 것 이상으로 러시아 장교들과 미국 장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 싸움이 원인이었다.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서 합동임무부대 사령관으로 다시 한 번 함께하게 된 상급자, 콜 로저스 소장은 이 문제로 꽤나 골머리를 앓는 눈치. 휴식을 마친 독립대대는 이후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목적지인 알마까지 직행했다. 해발 3,158미터의 첩첩산중에 거주지가 형성된 것은 바로 옆에 노천광산이 있는 까닭이었다. 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다른 금속을 함유한 탄산염은 여전히 많은 양이 산출된다고. 대부분의 자원을 자급해야 하는 미국의 상황 상 이 마을의 광산에도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 중이라 한다. 독립대대는 그 광산 옆의 공터에서 인원확인을 마쳤다. 행군에 걸린 시간은 전보다 오히려 늘었으나, 낙오자의 수는 인상적으로 줄어들었다. 겨울은 이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실전에선 낙오자 한 사람이 곧 실종자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러나 진석이 보기엔 성질이 나는 일이었다. 겨울은 병사들에게 다가가는 그를 조용히 부르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중대장의 권한에 대한 지나친 간섭처럼 느껴졌기에. 조금 지켜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따로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진석은 간신히 서있는 병사들 앞에서 허리 양쪽에 손을 올렸다. “나는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진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이제 막 실망할 참이던 진석이 눈길을 돌려 방금 목소리를 높인 사람을 찾았다. 실망한 사람은 신임 3소대장, 강선열 소위였다. 강 소위는 독립대대의 명예와 대대장인 겨울의 기대를 언급하며 병사들이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역설했다. 전쟁영웅 한겨울 중령의 명성에 누를 끼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 바라보는 진석의 표정이 묘했다. 강 소위는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한국군에 있던 시절의 계급은 중위로, 전사한 상관을 대신해 임시 중대장을 맡았던 경력도 있다. 이는 전 독립중대, 현 알파중대 병사들이 원조가 나타났다고 수군거리는 이유였다. 진석의 경쟁자가 늘었다는 속삭임도 있었다. 겨울은 참모진과 더불어 마중을 나온 로저스 소장에게 다가갔다. “수고했네.” 소장은 변치 않은 건조함으로 겨울을 맞이하고는, 도착한 병력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직 멀었군.” 간결한 평가였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예정대로 전력화가 가능할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믿겠다.” 뒷짐을 진 소장은 흐트러진 대열 사이를 느리게 거닐었다. 참모진과 겨울이 그 뒤를 따랐다. 별의 출현에 병사들이 긴장했으나, 장군이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참모들의 지시로 병사들에게 따뜻한 차가 주어졌다. 이 마을엔 따로 주둔지가 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대대는 공수군과 함께 수송차량을 기다려 복귀하기로 되어있었다. 망원경으로 러시아 공수군이 내려오는 산길을 살피던 로저스 소장이, 막 떠올랐다는 듯 무심한 질문을 던졌다. “자네. 혹시 보드카 좋아하나?” “……예?” 당황하여 반문하는 겨울 앞에서 장군은 표정 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보드카, 좋아하냐고 물었네.” # 405 [405화] #높은 곳의 바람 (3) 보드카라니. 다시 듣고도 여전히 난감했으나,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로저스 소장은 무의미한 질문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겨울이 대답했다. “좋아하는 척을 할 순 있습니다.” “주량은 괜찮은 편인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 8시, 러시아 장교들을 관사에 초대하기로 했다. 공수군 사단장들도 초대에 응하겠지. 귀관도 오도록. 참석을 희망하는 다른 장교가 있다면 동반해도 좋다.” 소장의 메마른 어조는 차라리 임무 브리핑에 가까웠다.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귀찮지만, 유치한 자존심 대결을 완화시키고자 마련하는 자리다. ‘남자다움’에 대한 집착이 해병대이상으로 강한 놈들에겐 보드카로 시작해서 보드카로 끝내는 단순한 교류가 적절하겠지.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러니-” 소장이 겨울을 향해 돌아섰다. “혹시라도 취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끔 주의하게. 귀관의 부하들에게도 일러두고. 만에 하나 주먹이라도 오갔다간 말짱 헛일이 될 테니.”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쪽이 먼저 주먹질을 했을 때도 가만히 참고 있으라는 뜻은 아니야. 그런 경우엔 가급적 제압을 우선시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철저하게 묵사발을 내버리게.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지만 않으면 돼.” “…….” “볼만한 표정이군. 최소한 완전히 얕보이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겨울이 수긍했다. 이해는 간다. 로저스답지 않은 난폭함에 당황했을 뿐. “그럼 저녁에 다시 보지.” 소장은 겨울을 뒤로 하고 자신의 차량에 올라탔다. 부대가 출발지점인 리드빌로 복귀한 뒤, 의례적인 사격훈련을 거쳐 일몰이 찾아왔다. 미러 양국의 장교들이 모일 장소는 리드빌 남쪽, 콜로라도 마운틴 칼리지의 팀벌라인 캠퍼스였다. 워낙 외진 동네인지라 많은 인원을 수용할 장소가 달리 없었던 까닭이다. 파티는 보드카가 사람을 삼키는 자리였다. 공수군 장교들은 독한 술을 물처럼 마셔댔다. 그리고 미국 장교들에게도 자신들이 마시는 만큼의 대작을 권했다. 러시아를 위하여! 로 한 잔을 꺾고, 미국을 위하여! 로 또 한 잔을 꺾고, 승리를 위하여! 로 연거푸 잔을 꺾는 그들은 이러다 사람 하나가 죽어나가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미국 장교들은 초반부터 창백해졌다. 세상에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하고. 그러나 로저스 소장이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질 기미는 없었다. 다만 괴로움을 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울한 한편으로 조심하는 눈치였고, 그 이상으로 뭔가를 갈망하듯 미군 장교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겨울은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한 중령.” 겨울을 부른 사람은 공수군의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 카프라로프 소장이었다. 수염을 깔끔하게 민 얼굴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어딘가의 대학 교수 같은 인상이었다. 한쪽 팔엔 모자를 끼고 있다. 겨울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살짝 힘을 주는 악수. 손아귀에 골격이 느껴진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겨울 중령입니다.” “레오니드일세. 98 근위소총사단을 맡고 있지.”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사석에선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라고 불러주게.” 친근한 말을 건넨 그는 가까운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보였다. “만난 기념으로 한 잔 하지.” “예.” 겨울은 여분의 잔에 술을 받았다. 카프라로프 소장도 스스로 채운 잔을 들었다. 마주선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듯 동시에 술을 삼켰다. 손등으로 입을 닦는 소장의 코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는 겨울에게 자리를 권했다. “달리 바쁜 일이 없다면 잠시 말동무나 해주게.” “영광입니다.” 앉기 전에 로저스 소장을 찾아보니, 그는 공수군 소속의 또 다른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안색은 평소대로 하얗지만, 이따금씩 미세하게 흔들리는 중심은 그가 벌써 적잖이 취해있다는 증거였다. 카프라로프 소장이 웃으며 묻는다. “상관이 걱정되는가?” “아닙니다.” 짧게 대답하는 겨울. 실제로도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장군 급 인사에게 붙잡힐 줄은 몰랐을 따름.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정도를 예상했다. 별을 상대하는 건 별의 역할일 것이라고. 소속이 다르다 해도 계급에서 차이가 나면 입장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미국인들은 참 바보 같아.”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이 겨울을 의아하게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 로저스 말이야. 아무리 진급한지 얼마 안 되었어도 지금쯤이면 장식으로나마 중장을 달아줬어야지. 그래야 우리도 굽히고 들어갈 핑계가 생기지 않겠나. 이쪽도 체면이 있는데.” “…….” “윗선의 배려가 부족했다고 해야겠지. 몰라. 아직 훈련기간이라서 여유롭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하지만 실전투입 즈음해서 진급시키면 너무 늦어.” 맞는 말이었다. 합동훈련을 하는 동안 지휘서열을 실질적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소장이 겨울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왜 귀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글쎄요…….” “귀관이 어떻게든 해보라는 뜻일세.”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 상관이 스스로 자신의 진급을 요구하긴 어렵지. 전쟁영웅으로서 급격히 출세한 입장이라면 더더욱. 진급속도만 비교하면 귀관이 더 빨랐겠지만, 어느 나라든 장군은 정치력이 요구되는 자리거든. 영관급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정말로 그런가? 그 한겨울 중령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판단해서 건넨 제안이네만.” 말을 마친 소장이 새롭게 술을 권했다. “뭐, 한 번 고민이나 해보게.” 이 주제는 여기서 끝이었다.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소장은 근처의 다른 장교들을 불러다 합석시켜놓고, 이 테이블의 유일한 미군 장교인 겨울에게 남부전선의 근황을 물었다. “구 멕시코 방면에선 산악전이 한창이라지?” 겨울이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쪽 변종들은 머리를 너무 잘 굴려서 탈이야. 데들러라고 했던가? 교활한 놈들이 그 자그마한 것들을 참 효과적으로 활용하더군.” 데들러. 폭발하는 아기. 지난날 산성과 인화성으로 분화되었던 이 특수변종은, 강화등급이 지속적으로 올라가면서 전보다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가장 큰 변화는 비행을 위한 피막이 이제 등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자글자글한 주름이 혹처럼 덮여있는 등짝의 피부는, 바람을 받아 신체 표면적의 열 배에 가까운 크기로 펼쳐진다. 이로 인해 증가한 활공비는 1 대 8에 이르렀다. 평균적으로 1미터를 떨어질 때 8미터를 나아간다는 뜻이다. 물론 그만큼 속도는 줄었다. 그러나 미군 대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화종 데들러는 등의 피막을 떼어내 버린다. 이전부터 있었던 팔다리 사이의 피막에만 의존할 때, 이 끔찍한 아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쇄도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시가지와 밀림에선 위퍼(Whipper)라는 특수변종이 새롭게 나타났다. 피부의 색이 변할 뿐만 아니라 체온마저도 숨기는, 매복에 특화된 괴물이었다. 형태도 일정치 않아 지형지물과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공격수단은 채찍 같은 부속지다.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트릭스터의 왼팔을 닮았으나, 예리하고 단단하게 변형된 감염돌기가 붙어있어 훨씬 더 위협적이다. 길이가 훨씬 더 긴 것은 물론이다. 역병은 인류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카프라로프 소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런 교활함을 조만간 러시아 땅에서도 보게 되겠지.” 티베트 고원에 트릭스터를 풀어놓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터였다. 구대륙의 변종들은 전에 없던 조직력과 방향 유지능력을 갖추고서 러시아의 안전지대를 넘볼 것이다. ‘녀석들은 지나치게 우수해.’ 북미의 전세가 유리해진 지금도, 겨울이 가장 경계하는 특수변종은 여전히 트릭스터였다. 그러고 보면 이 작전을 러시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 신기하다. 최악의 경우엔 국토를 완전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에스더와의 연락을 중계해준 것이 CIA라는 데서 감을 잡기는 했으나, 과연 러시아 정부가 국민을 위한 선택을 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묻는다.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 당신께선 혹시 이번 작전에 반대하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나?” “개인적인 의견을 여쭙는 겁니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러시아 본토가 현재보다 더 위험해지니까요.” “고향을 버려야 한다는 게 안타깝긴 해. 그래도 그 위태로운 땅에 계속해서 붙잡혀있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편이 낫지. 난 찬성일세.” “이주…….” “몰랐나? 장차 대륙분리 작전이 성공하고 나면, 구 멕시코의 절반과 나머지 중미지역 전체를 우리 러시아가 배타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는데. 유사시 전 국민을 피신시킬 수도 있겠지. 제로 그라운드 강하가 이루어지기 전에 1차 이주선단이 출발하기로 확정되어있다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장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러고 보면 이게 당장은 기밀이었던가?……아무래도 좋겠지. 어차피 오래 감추지는 못할 일이니. 그런 조건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거래에 응할 리가 있나. 미국이 합의 없이 막무가내로 트릭스터를 풀었을 경우엔 핵이라도 쏴서 보복했을 걸?” 살벌한 이야기를 하며 소리 내어 웃는 소장을 보고, 겨울은 그가 말한 ‘그런 조건’의 의미를 곱씹었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파나마 운하, 나아가 북미 전역을 위협할 수 있는 입지를 내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도 미국이 러시아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카프라로프 소장은 보드카 석 잔을 연속으로 마시고는 소매로 입을 닦았다. “멕시코 난민들이 벌써부터 자기네 주권 운운하며 옛 국토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떼를 쓰는 걸로 아는데, 흥,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지들이 뭘 한 게 있다고? 그네들의 나라는 한참 전에 망했고, 피를 흘리며 싸운 건 어디까지나 미군이란 말이지. 그러니 싸워서 얻은 땅은 자연히 미국의 영토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귀관은 어찌 생각하는가?” 뭔가를 말하려던 겨울이 입을 다물었다. 멕시코 난민들 가운데서도 당연히 미군에 지원한 사람들이 있겠으나, 원칙적으로 그들은 입대한 시점에서 미국의 시민이 된 것이다. 겨울은 시민권 선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나 여기서 맹세하니, 나는 내가 지금까지 지배당했거나 시민이었던 다른 어떤 외국의 군주, 통치자, 국가, 그 외의 지배 권력에 대하여, 모든 충성과 신의를 완벽하고 확실하게 포기하겠다.」 겨울을 비롯해 동맹 출신으로서 미군이 된 이들은 당시 대위였던 캡스턴 중령이 아니었으면 이 선서를 읊을 일이 없었겠지만, 원래는 선서 없이 시민권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선서를 일부라도 빠트린 게 확인되면 이미 주어진 시민권이라도 취소하는 게 원칙이었다. 애초에 시민이 된 적이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항은 미군이 되기 위해 서명해야하는 서류에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남부전선에서 피를 흘린 건 어디까지나 미군이라는 말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카프라로프 소장이 기세를 타서 하는 말. “미국인들은 대통령을 잘 뽑았어.” “……그렇습니까?” “암. 제럴드 번스가 백악관에 입성했으면 그놈의 인류합중국 공약 탓에 떼쟁이 난민들과 그들을 편드는 이상주의자들에게 발목을 붙잡혔겠지. 반면 크레이머는 어떤가. 일처리가 시원시원하지 않은가.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야. 정치는 그런 식으로 해야지.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겨울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른 부분을 떠본다. “그럼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군요.” 소장은 부정했다. “내가 전해 듣기로, 오겠다는 사람은 막지 않겠다는 계획일걸? 다만…….” “다만?” 카프라로프 소장이 빙그레 웃었다. “무수한 장병들의 죽음으로 얻어낸 땅에 얹혀서 살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미국이 오랫동안 제공했던 공짜 밥에 대해서도. 언제까지나 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의 호의에 기대어 살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겠나?” “대가라면, 경제적인 겁니까? 세금?” “세금보다는 합당한 노동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겠지. 문명을 복구해야 하니까.” 소장은 겨울을 가리켰다. “귀관은 자신의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있나?” “…….” 겨울은 다시 침묵했다. 이미 생전에 몸을 매각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애초에 이뤄져선 안 되는 거래였다. 소장은 정적을 하나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걸세. 피를 흘려 얻은 땅의 거주권을 얼마에 내주면 좋을까? 아무리 고된 생활이라도, 죽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여야지. 이처럼 종말과 싸우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크레이머의 신조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겨울은 돌아가는 길에 로저스 소장을 부축했다. 러시아 측의 고문 아닌 고문으로 로저스의 참모들도 대부분 인사불성이 되었거나, 스스로를 가누는 것만으로 벅찬 상태가 되어버린 까닭이었다. 공수군 장교들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몇 번 더 왕복해야 할 것 같았다. 만취한 로저스는 평소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정신 나간 러시아 놈들.” 겨울의 부축을 받으며 꼬인 발음으로 하는 말. “자네나 나나 고생이 많군. 괜히 영웅 같은 게 되어놔서.”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힘들지.” 로저스의 입에서 채 삼키지 못한 침이 길게 늘어졌다. 그를 대기하던 차량 뒤에 태운 겨울은 탁 트인 야경을 바라보았다. 눈 쌓인 산맥이 하얀 붓질처럼 그려져 있다. 표지판에 소재지의 이름 대신 수목한계선(Timberline)을 써넣은 만큼, 캠퍼스에선 시야가 열려있는 어느 방향으로든 백색의 능선을 볼 수 있었다. “오고 싶지 않았어.” “예?” 겨울이 차량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나는, 오고 싶지 않았어.” “…….” “영웅처럼 죽기 쉬운 게 어디에 있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로저스는 기절하듯이 눈을 감았다. 겨울은 정신을 잃은 그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 406 [406화] #높은 곳의 바람 (4) 로저스 소장의 진급이 확정되었다.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대로, 겨울에겐 이 문제를 상담할 상대가 많았다. 겨울의 단말기에 저장되어있는 번호들을 본다면 누구라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겨울을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한나절을 고민한 겨울은 이 일을 정보국에 부탁했다. 가급적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쪽도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군사행정의 효율성 제고가 목적이었기에 그렇게까지 거리낄 것도 없었다. 결과가 전해진 건 그로부터 고작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겨울은 식사 중에 전화를 받았다. 「주문하셨던 건은 해결되었습니다.」 상대는 낯선 요원이었으나, 겨울은 개의치 않고 편하게 이야기했다. “따로 부탁드린 것도 알아보셨나요?” 「로저스 소장이 제로 그라운드 합동임무부대 사령관으로 내정된 경위 말씀이시지요?」 겨울이 긍정했다. “예. 우선은 그것부터.” 처음엔 로저스와 재회한 것을 두고 그저 공교로운 우연으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상태로 한 말을 듣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부자연스러워.’ 올레마에 공수로 투입된 전적을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모를까, 로저스는 그 외에 공중강습작전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보다는, 이번 작전에 산하 연대 하나가 합류하기로 한 82 공수사단의 사단장이 합동 사령관직에 더 적합할 터였다. 미국에서 낙하산을 이용한 강습에 특화된 유일한 부대의 지휘관이므로. 마침 계급도 같은 소장이다. 해당 사단이 현재 중미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제로 그라운드 진공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중남미에 투입되어있는 패트릭 헨리 급 비행선 또한 한 척을 빼내어 티베트 고원에 투입하기로 되어있다. 공수사단장직을 역임한 다른 인물이라도 괜찮다. 뭣하면 특수전사령관이 직접 나서는 방법도 있었다. 그 또한 과거에 공수사단을 거친 사람이니까. 계급이 과하긴 하나, 작전의 가치를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과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부자연스럽게 여길 수밖에. 깨닫고 보면 좀 더 빨리 눈치 채지 못한 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었다. 갑작스러운 주둔지 변경과 고된 훈련, 부대 적응에 신경 쓰느라 별로 여유가 없기는 했지만. 빗장이 풀린 연애에 푹 빠져있었던 것도 원인이라면 원인일 터이다. 겨울은 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상황에 맞지 않는 실소를 머금었다. 직급불명, CIA 요원의 대답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짐작하신대로입니다. 해당 인사(人事)는 POTUS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입니다.」 POTUS는 대통령을 뜻하는 두문자였다. 「로저스 소장은 올레마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 중 하나잖습니까.」 “나머지 하나는 저고요.”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드림 팀이네요.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올레마의 기적을 다시 한 번, 이라는 거겠지요.” 「시민들만이 아닙니다. POTUS 스스로도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한숨을 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요원의 말은, 201 독립대대가 특수부대로 지정되었을 때 겨울이 상상했던 가장 나쁜 가능성과 닿아 있었기 때문. 그것은 현실적인 한계에 아랑곳없이, 겨울이라면 무엇이든 해내리라는 믿음이었다. 때로는 신뢰도 두려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겨울이 물었다. “낙관하고 있다는 건가요?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놓고?” 「조금 다릅니다.」 요원이 부인했다. 「백악관은 이번 작전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인적 구성 이외의 면에서는요. 하루에 올라가는 보고서의 양을 알면 꽤나 놀라실 겁니다. 국방부에서 주문하는 피자의 양이 많이 늘었지요. 상정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담으려다 보니, 작전계획의 페이지 수는 분초 단위로 늘어나는 중이지요. 이 작전이 실패하면 뒷감당을 하기 곤란할 테니까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게 인적 구성 아닙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로저스 소장을 합동사령관직에 앉히는 데 반대했던 참모진도 한 중령님 당신을 보내는 데엔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그 자리엔 우리 국장님도 계셨지요.」 “만장일치? 공수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그건 훈련으로 만회하면 됩니다. 작전정보를 충분히 접하셨을 테니, 위험요인 가운데 하나가 강하 직후 지휘관의 고립 및 실종으로 인한 혼란이라는 것도 아시겠지요. 강하 예정지역의 지형이 험하잖습니까.」 “…….” 「중령님께선 그동안 처음 조우하는 특수변종들을 상대로도 훌륭한 상황판단과 대응능력을 선보여 왔습니다. 그럼블부터 시작해서 구울, 트릭스터, 데들러와 멜빌레이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경력의 대부분이 고립된 환경에서 열악한 조건을 감수해야만 했던 작전들입니다. 그런 당신인 만큼, 티베트 고원에 분포하는 변종들을 상대하면서도 괜찮은 임기응변을 보여주시겠지요.」 겨울은 할 말이 없어졌다. 관계자들이 보기에, 한겨울 중령은 강하과정에서 변수가 생기더라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고 합류할 지휘관인 셈이다. 훈련계획에 따르면 독립대대는 다음 한 달 사이에 공수부대의 일 년 치 강하 횟수를 소화하게 된다. 이제 와서 이걸 가지고 자격 유무를 따지긴 어려웠다. ‘생소한 적과 싸우는 데엔 유서 깊은 정예사단이나 이름뿐인 특수부대나 거기서 거기다……라고 생각하는 건가?’ 낯선 지형, 낯선 기후, 그리고 역병의 낯선 형태들. 이번 작전은 그 어떤 부대를 투입한들 평소의 능력을 100% 발휘할 거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혹은, 조금은 엉뚱하지만, 크레이머의 결정에 그의 군 복무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도 존재한다. 자부심 강한 해병대는 다른 정예부대들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여기에 정치적인 계산이 빠졌을 리 없다. 전에 우려했듯이, 독립대대는 이럴 때 쓰기 좋은 도구였다. 「아무튼, 로저스 소장이 그곳으로 간 데엔 그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사정을 이해한 겨울이 화제를 전환했다. “난민구역쪽은 별다른 문제가 없던가요?” CIA에 부탁한 또 다른 정보였다. ‘벌써부터 사람이 변하진 않았겠지만…….’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의 예산안은 언제 표류했느냐는 듯 일사천리로 가결되었다. 덕분에 겨울동맹에도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완기는 욕망의 성질 자체가 독특한 인물이고, 장연철은 동맹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어려운 이들을 대변하던 선량한 사람이다. 어느 쪽이든 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됨됨이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미리미리 경계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겨울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요원에게선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금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던 걸로 보입니다만, 어디까지나 미숙함이 원인이었습니다. 어느 제도든 도입 초기엔 적잖은 시행착오가 따르는 법이지요. 그런 실수들 외에 사적으로 돈을 유용하려는 시도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겨울동맹은 깨끗합니다.」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주시해달라는 부탁은 무리일까요?” 「괜찮습니다. 자동화된 감시 프로그램이 있어서, 비정상적인 출금 및 송금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거든요.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중령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라고 치면 감수할 만한 범위입니다. 다만…….」 “뭐죠?” 「동맹 관계자들의 경제적인 사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스터 백이라는 사람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미스터 백이라면……. 백산호 씨로군요.” 「맞습니다.」 “방금 비리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포트 로버츠를 떠나오기 전 브래넌 의원으로부터 받았던 제안에 대하여, 달리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겨울은 백산호에게 그 일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전화로 들은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밝고 가벼웠던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다. 헌데 그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이라니. “동맹과 상관없는, 그 개인의 일탈인가요?” 「글쎄요. 이걸 일탈이라고 봐야 할지는 애매하군요.」 CIA 요원의 말. 「그는 아무래도 차명계좌의 관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차명계좌?” 되묻는 겨울의 음성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예. 그가 접근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계좌들이 있어서 조사해봤더니, 조세피난처를 거쳐 분할 송금된 출처불명의 거액이 들어있더군요. 아시아 부호들이 수사를 앞두고 불법적인 자금을 빼돌릴 때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법적인 약점을 잡아둔 측근이나 지인, 친척 등으로 하여금 범죄자 인도조약이 체결된 국가에서 차명계좌를 개설하도록 만드는 거지요. 역병 이전엔 아마 별도의 감시역도 붙어있었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엔 역병으로부터 피신할 목적이 더해졌겠지요. 돈 말고 몸부터 빼냈어야 하건만.」 어쩐지 백산호 그 사람, 100달러 지폐로 꽉 찬 캐리어를 목숨 줄처럼 끌고 다녔다 했다. 설명을 들은 겨울이 선을 그었다. “그를 검거할 계획이라면 제 동의를 구하실 필요가 없는데요.” 난민지도자 지원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으니, 이제부터는 전문 인력을 바깥에서 구하기도 쉬워졌다. 그러니 백산호는 겨울의 약점이 될 수 없었다. 짐작은 빗나갔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 그냥 알고 있으라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에 관해 정보국으로부터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선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군요.」 “……듣고 있어요.” 「현 시점에서 미스터 백의 혐의는 입증이 불가능합니다. 정황증거뿐이지요. 그의 약점은 한국이 무너질 때 함께 사라졌으니까요. 남은 건 처치가 곤란해진 계좌와 갈 곳을 잃은 자금이지요. 그냥 두면 언제까지고 그저 묻혀있기만 할 돈 말입니다.」 “정보국이 욕심을 낼 정도로 큰 금액인가보네요.” 「어림잡아 5억 달러쯤 됩니다.」 “…….” 「미스터 백이 출금에 실패했던 건 증명 부족이 원인이었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보통 그런 인증수단은 자금의 진짜 주인이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계좌를 개설한 본인이 오더라도, 은행 고유의 인증절차를 준수하지 않으면 출금이 안 됩니다. 검은 돈을 받아주는 은행들이 대개 그런 식이지요. 그러나 우리 정보국이 돕는다면, 전부는 무리더라도 3할 가량은 빼낼 수 있습니다.」 “합법적인 수단은 아닐 것 같은데요.” 「불법적인 것도 아니지요. 명목상으로는 명의자가 자기 돈을 출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그 본인과 합의하세요. 이 이야기를 제가 들어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성급하시군요.」 요원이 작게 웃었다. 「저희가 드리려는 선물은, 당신에 대한 미스터 백의 두려움입니다.」 “무슨 말인지…….” 「그 자금은 정보국이 독점할 겁니다. 미스터 백에게는 입막음 겸 수고비로 100만 달러쯤 넘겨줄 계획이고요. 어차피 찾지 못할 돈이었으니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겠지요.」 “그런데요?” 「다만 그 과정에서, 중령님의 이름을 가볍게 언급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당신의 요청으로 그를 조사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 부분을 살짝 부풀려서 전달하면 충분하겠지요.」 이제야 알겠다. 겨울이 CIA와 밀접한 관계라고 믿게끔 유도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겪은 백산호가 과연 앞으로 겨울 몰래 부당한 잇속을 챙길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이 일에 대해 발설할 생각조차 품지 못할 텐데. 출처를 밝힐 수 없는 100만 달러는 그의 새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 차마 거부하기도 어려운 돈. “정보국다운 일처리로군요.” 겨울의 말을 요원은 칭찬처럼 받아들였다. 「사람을 다루는 노하우입니다. 부수적인 소득을 놓칠 이유가 없지요.」 요원이 이러한 사정을 미리 전하는 이유를 알겠다. 백산호를 그런 식으로 위압해 놓았는데, 정작 겨울이 아무 것도 모르는 채라면 언제가 되었든 백산호가 이상함을 눈치 채지 않겠는가. “사소한 의문인데, 정보국에 돈이 부족한가요?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말은 곤란하다고 해놓고, 요원은 진실을 감추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작과 이면합의가 있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이건 또 왜 알려주는 것일까. 궁리가 길어질 새도 없이, 요원은 통화의 끝을 알렸다. 「다른 용무가 없으시다면 오늘은 여기서 끊어야겠군요.」 “고마웠다……고 해야겠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별말씀을요.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을 돕게 되어 기뻤습니다.」 “…….” 「이번 임무, 꼭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때쯤이면 중령께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이 되어 있으실 겁니다.」 그럼, 이만. 이 말을 마지막으로 요원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이라.’ 겨울은 그 거창한 표현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이라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높은 곳의 바람은 그때도 여전히 겨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불고 있을 테니. # 407 [407화] #높은 곳의 바람 (5) 5월 3일, 훈련지역엔 1인치의 눈이 내렸다. 겨울은 부러진 나무와 전복된 장갑차 앞에 서서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분리된 낙하산은 근처의 다른 나무에 걸려 차가운 바람에 너울거리는 중이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태양이 이미 능선을 넘었음에도 기온은 아직까지 어는 점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산악 특유의 칼바람 탓에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뽀드득, 뽀드득. 밤에 쌓인 눈은 새벽 내내 얼어 조금 단단한 느낌으로 발에 밟혔다. 사고현장을 한 바퀴 돌아본 겨울이 뒷짐 지고 서있는 러시아 장교에게 물었다. “구쉬킨 소령. 계곡 쪽 구조작업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알렉세이 빅토로비치 구쉬킨이라는 이름의 공수군 소령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친 녀석은 없다는 통보입니다. 그저 계곡에 끼어서 기동이 불가능해졌을 뿐이죠.” “다행이네요.” “일단은 그렇지만, 미국 놈들이 좀 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는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겨울도 시민권 보유자인데, 구쉬킨 소령은 겨울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미국의 흉을 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함께 훈련을 뛰는 입장에서 이해할만한 불만이기도 했다. 공수강하 훈련이 개시된 이후 지금 같은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만 해도 두 건이다. 겨울은 장갑차 안쪽을 살폈다. 약간의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후송된 병사들 중에 뇌진탕 환자가 있었으니, 필시 그가 머리를 부딪친 흔적일 터. 그밖에는 골절환자가 다수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전투수행은 불가능했다. 실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봐야한다. 이 장갑차는 바람에 휩쓸려 예정된 착륙지점을 벗어났다. 거리상으로는 많이 멀어진 게 아니었으나, 이런 산악지대에선 상대적으로 안전한 착륙지점 자체가 좁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바로 위험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머릿속에서 거친 낙하과정을 재구성해보는 건 겨울에게 꽤나 쉬운 일이었다. ‘아래쪽 장갑판에 긁히고 패인 흔적이 있으니까……. 일단 완충 매트부터 터졌겠구나.’ 하늘에서 장갑차를 집어던지려면 지면에 닿는 순간의 충격을 흡수해줄 공기 매트가 필수였다. 그러나 이 장갑차는 하필 곧게 자란 상록수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 매트부터 찢어져버렸을 것이다. 콰지직, 쿵. 나무는 부러지고, 장갑차는 뒤집어진 채로 땅과 충돌. 그 결과가 눈앞의 현장이다. 낙하산에 의해 감속된 상태라 해도 13톤짜리 쇳덩어리인 것이다. 빠진 포탑은 저편에 따로 나뒹굴었다. “제 말 들으셨습니까?” 구쉬킨 소령의 채근에 겨울이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나은 물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죠.” “방향제어가 잘 안 되잖습니까.” “글쎄요. 이건 그냥 낙하산을 이용한 공수의 한계 같은데요. 손실률도 예상보다는 양호한 수준이고……. 뭔가를 더 달면 항공수송 자체가 불가능해질걸요?” 보조 로켓이 달린 낙하산은 무게가 2톤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게보다 문제가 되는 것이 부피였다. 미국과 러시아가 기술합작을 했는데도 그렇다. 장갑차의 크기를 줄이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본말전도니까. “그럼 낙하산 말고 원자력 비행선을 쓰면 됩니다.” 겨울은 이제야 구쉬킨을 돌아보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윗선에서 끝난 걸로 아는데요.” “작전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계획을 바꿔달라고 건의할 수도 있는 거지요. 화력공백이 우려될 경우 한 척을 더 투입하면 그만입니다.” “화력공백만 문제가 아니잖아요.” 살짝 눈을 찌푸리는 겨울. 공수부대는 모든 구성요소가 다 가벼워야 하는 특성상 포병화력이 부족하다. 그 공백을 메워주기로 한 것이 바로 패트릭 헨리 급 2번함이었다. 겨울의 이름이 붙은 그 비행선이다. 예전에 상상했던 것과 달리 제로 그라운드 진공이 단시간에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계획된 덕분에, 한 척만으로도 충분한 감제(瞰制) 및 화력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연히 이를 병력 수송에도 쓰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그 시간 동안 화력공백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행선 자체가 강습에 적합하지 않은 측면이 많아서 기각되었다. ‘애초에 기낭(氣囊)이 항공모함보다 더 큰 비행선인데 계류시설 없이 안정적인 착륙이 가능할 리가…….’ 현수막이나 매다는 일반적인 비행선이라면 모를까, 표면적이 어마어마한 패트릭 헨리 급은 착륙에 전용 계류시설이 필요하다.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까닭. 하물며 착륙예정지는 바람이 강한 고지대였다. 닻을 추가한다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닻 두 개를 쓰는 쌍묘박이어야 하고, 한 쌍의 닻과 인양기를 추가한다는 전제 하에 160톤가량의 적재중량을 낭비하게 된다. 그걸 감수하고 개장한다 쳐도 그 체급에 신속하게 착륙하기는 어렵다. 그 시간 동안 공격에 노출되기 쉽다는 뜻이다. 거기에 압도적인 크기로 인한 압도적인 시인성(視認性). 야간 강하를 하더라도, 지상에 내려온 비행선은 아주 많은 변종들의 이목을 끌 터였다. 단점을 꼽자면 이외에도 얼마든지 많았다. 결정적으로, 비행선엔 에스더가 탑승한다. 비행선이 공중에 머물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보다 넓은 범위에서 전파를 수집할 수 있어야 하니까. 에스더의 도움을 받은 공중포대는 변종들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위치가 확인된 모든 트릭스터들에게 직격탄을 날려줄 것이다. 곧바로 죽이기보다는 이용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시작부터 트릭스터를 몰살시켰다간 변종들의 동태를 살피기도 어려워진다. 때로는 무질서한 적을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운 경우도 있는 법이다. 겨울이 말을 아끼는 건 구쉬킨 소령도 이러한 사정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소령은 부하들이 다치는 걸 보기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겨울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소령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정 건의를 하고 싶다면 정식 명령계통을 따라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구쉬킨은 떫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치로 미루어 건의를 했는데도 묵살당한 모양이다. 그래서 겨울에게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고. ‘이제 보니 그게 시험이었단 말이지.’ 카프라로프 소장이 겨울에게 당시 소장이었던 로저스 중장의 진급 이야기를 꺼냈던 배경에는, 그게 실제로 필요하다는 이유 외에도 겨울의 능력을 확인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로저스가 중장을 달고서부터 겨울에게 친근하게 구는 러시아 장교들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 카프라로프 소장의 태도도 전보다 더 살가워졌다. 겨울을 막후의 실력자쯤으로 간주하는 분위기. 그 와중에 구쉬킨은 겨울에게조차 까탈스럽게 구는 몇 안 되는 러시아 장교 중 하나였다. 그가 말했다. “전 다른 곳을 보러 가보겠습니다.” “뭔가 보완할 점이 보이면 알려줘요.” “그러려고 온 겁니다.” 소령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자리를 뜨자, 이번엔 잠자코 지켜보던 진석이 불만을 쏟아냈다. “뭡니까? 저 싸가지 없는 태도는.” “병사들이 다쳐서 그런 거잖아요. 이런 손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보다야 낫죠.”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저한텐 개떡같이 굴어도 좋지만 작은 대장님께는 아닙니다. 우리 부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우리 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 난 놈들도 많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조언을 받는 것도 잠깐일 테니.” 현 시점에선 독립대대만이 아니라 작전에 참가할 미군 전체가 러시아 장교단의 조언 및 평가를 받고 있다. 전차와 장갑차에 사람을 태운 채로 낙하산 강습을 시키는 나라는 역병 이전이나 이후나 러시아가 유일했다. 강하 즉시 교전을 시작할 능력을 보유한 것이다. 미군은 그 기술과 암묵지를 습득하고 발전시키는 중이었다. “이번엔 강하에서 집결까지 얼마나 뒤쳐졌어요?” 겨울이 묻자 진석이 한숨을 쉬었다. “러시아 애들보다 21분이나 늦었습니다.” “한숨 쉬지 마요. 이번이 겨우 세 번째인데, 벌써부터 숙련자들을 따라잡으면 이상하죠.” “이런 지형에서 강하하는 건 러시아 애들도 생소하다고 하잖습니까.” “그래도요. 경험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죠.” “…….” “가끔은 병사들 칭찬도 해주고 그래요.” “그건 대대장님 역할로 남겨두는 편이 좋습니다.” 대답이 하도 단호하여 겨울은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후 독립대대는 기본적인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새로 배치된 장비들의 성능 시험을 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수전차든 장갑차든, 러시아제를 그대로 갖다 쓰는 게 아닌 까닭에 아직 개량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장갑차의 탑승감은 썩 좋지 못했다. 성능은 성능대로 갖추면서 무게를 줄이다보니 내부 인원의 편의성은 우선순위가 낮아진 탓. 화생방 보호의를 입은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갑차엔 외부 공기의 유입을 막는 양압 장치가 달려있었으나, 하차전투가 불가피하므로 보호의 착용은 필수였다. 역병에 처음으로 맞섰던 중국은 핵과 생화학무기를 아낌없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모겔론스의 발원지 인근엔 약간의 방사능과 더불어 고농도의 네크로톡신이 잔류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겨울은 생각했다. ‘그나마 탄저병 걱정이라도 덜었으니 다행이지.’ 탄저균 내성 변종의 식별코드는 앤스락스 로지(Anthrax Rosie)였다. 이는 영국의 동요(Ring a Ring o' Rosie)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 동요가 흑사병이 돌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도시전설에 기초한 작명이었다. 미국은 그간 앤스락스 로지의 상륙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탄저균 백신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병사들에게만 접종하기에도 생산량이 모자랐으므로. 한 사람이 완벽한 면역을 획득하려면 1년 반에 걸쳐 10개의 백신을 소모해야 한다. 그나마도 이후 매년 추가접종을 받아야만 면역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면 탄저균은 흙 속에서 한 세기를 버텨낸다. 그런 이유에서, 겨울의 독립대대를 비롯해 제로 그라운드에 강하할 모든 장병들에겐 집중적인 백신 접종이 이루어졌다. 투여량을 늘려 접종기간을 단축한 것이다. 풀어놓을 트릭스터에게도 면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다. 트릭스터가 그러하듯, 앤스락스 로지도 재감염을 통해 면역을 확산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면역을 얻은 변종이 다른 변종을 물면 물린 쪽도 면역을 획득하는 식. 모르긴 몰라도 어느 특수부대 하나가 한 발 앞서 중국 대륙에 다녀오지 않았을까? 혹은 러시아가 벌써 확보하고 있었다거나. 겨울은 이번 작전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했다. 정오 무렵, 훈련을 마친 독립대대는 산맥의 서쪽 사면을 타고 내려와 소도시 리드빌 어귀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둔지를 목전에 두었을 때, 한 무리의 시위대가 독립대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당혹스러워진 겨울이 해치를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시위대는 이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군은 자연을 파괴하지 마라! 군은 자연을 파괴하지 마라!」 「자연경관을 훼손하는 군사훈련을 당장 중지해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대대는 속절없이 멈춰 섰다. 군이 어떤 식으로든 일반 시민에게 손을 대는 건, 합당한 명령을 받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계엄령은 해제된 지 오래다. 겨울이 망설이고 있으려니, 시내 방향에서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순찰차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크 카운티의 보안관도 등장했다. 하차한 겨울을 본 그는 모자의 챙을 붙잡고 목을 까딱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버크하트입니다.” “한겨울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시다시피, 자연경관을 망치는 군사훈련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라는군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리송한 겨울의 반응에, 보안관이 어깨를 으쓱인다. “저도 방금 오면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거랍니다. 주지사께서 직접 전화하셨더군요. 아울러 중령님께는 미리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게 미안하실 일은 아니지만,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싶네요.” “저도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습니다. 뭔가 정치적인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확인하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우선은 주둔지로 들어가실 수 있게끔 길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시위대는 소리 높여 고함을 질러댔으나, 경찰의 통제엔 의외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다들 어딘가 몸을 사리는 느낌. 군을 가로막은 시위대에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 408 [408화] #높은 곳의 바람 (6) 유감스럽게도, 이번 시위에 대해서는 앤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채피 주지사가 부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요?」 질문을 받은 겨울이 긍정했다. “그렇다던데요. 직접 연락을 받은 건 아니지만.” 「흠…….」 뜸들이던 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방송 욕심이 아니라면 정말 뭔가 귀찮은 배경이 있는 거로군요.」 “뭐, 오면 알게 되겠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현 시점에서 겨울 개인이나 독립대대에 대한 음해는 있기 어렵다. 물어뜯으려는 쪽이 오히려 피투성이가 될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십중팔구는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 관련된 다툼일 것인데, 크레이머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감안할 때 진공계획 자체가 좌초될 확률은 희박했다. 크레이머는 방역전쟁의 항구적인 해결을 바란다. 그것도 자신의 첫 임기 내에. 그렇게 되면 두 번째 임기는 첫 번째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 속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가 바라는 대로 재설계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였다. 앤이 묻는다. 「동맹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쪽은 괜찮아요.” 「겨울과 가까운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어요.」 “알아요. 그래도 당장은 괜찮아요. 확인했으니.” 「확인이라……. 혹시 정보국?」 “네. 그렇게 됐어요.” 가벼운 말에, 앤은 앓는 소리를 냈다. 수화기 너머로도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쪽에 맡겨도 괜찮을지 미심쩍네요. 비리를 적당히 묻어놨다가 나중에 약점으로 쓸 지도 모르잖아요? 폭로하겠다면서. 겨울동맹으로 들어가는 예산과 기부금을 두고두고 뜯어내려는 속셈일 수도 있죠.」 “그건 그러네요.” 겨울은 순순히 수긍했다. “만약을 위한 보험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가급적이면 다른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편이 좋아요. 정보국이 최근 무리하게 자금을 운용한 정황을 포착했거든요. 러시아에서의 공작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입한 게 분명해요. 정보국 입장에선 미래가 걸린 문제였을 테니까요.」 미국 남쪽에 핵을 보유한 가상적국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정보국의 존재가치가 확실해진다. 따라서 정보국은 이번 작전의 성사에 사활을 걸었을 터. 앤의 지적은 그런 뜻이었다. 「비공식적으로 소모한 자금은 비공식적인 수단으로 채워 넣어야 돼요. 적발을 피하려면 불가피한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겨울동맹은 괜찮은 숙주예요. 벌써부터 기부금 총액이 연간 예산을 웃돌고 있잖아요.」 언제나처럼 훌륭한 통찰력이었다. 실제로 백산호가 관리하던 어느 재벌의 비자금 건이 있지 않았던가. 겨울에게는 3할을 빼낼 수 있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줄여서 말한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백산호가 정보국이 캐낸 돈줄의 전부일 리도 없었다. 정보국은 예전부터 검은 돈의 흐름에 민감했을 터이므로. 대안은 있었다. “외부감사를 받으려고요.” 겨울의 말. “정기와 부정기로 나눠서 매년 최소 두 번씩 의뢰하면 누구라도 자금을 유용하기 어렵겠죠. 내가 바라지 않는 이상에야……. 지출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수수료가 아깝다는 말이 나오겠지만, 신뢰도로 보상받을 테니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봐요. 난 동맹보다는 다른 단체들이 걱정스럽네요.” 난민단체의 대다수는 맥밀런 전 대통령의 불길한 예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겨울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기껏해야 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편지로 주의를 당부하는 정도. 그들이 겨울의 충고를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혹은 질투를 할 수도 있겠다. 유명세에 힘입어 기부금을 잔뜩 받는 주제에, 기본 예산으로만 단체를 운영해야 하는 자신들의 형편도 모르면서 잘난 척 간섭한다는 식으로. 평범한 난민들과, 그들을 이끄는 입장일 누군가는 겨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중에 독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만에 하나 부정이 불거진 뒤에 편지가 유출될 경우, 그들이 한겨울 중령의 충고를 무시했다는 식으로 보도될 것이 뻔했다. 겨울이야 반사이익을 얻겠으나, 결코 바라는 바는 아니다. 하다못해 보고 들은 바를 있는 그대로 전할 수만 있어도 꽤 나으련만.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크레이머가 함정을 팠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글을 전할 순 없었다. 이게 새어나가면 1차적으로는 백악관이 된서리를 맞고, 2차적으로는 겨울이 후폭풍을 맞게 된다. 전 대통령의 조언이라고 밝혀버리면 그땐 맥밀런의 사정이 난처해질 터.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일 진 몰라도, 겨울로선 고르기 어려울 선택지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울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앤. 나랑 결혼하기로 한 거,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요?” 앤이 웃음을 터트린다. 「뭐예요, 갑자기.」 “이것도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야 뭐…….」 “아무튼, 대답은?” 「아직 안 알려드렸어요. 두 분이 비밀을 지켜주실 것 같지도 않고. 하루도 안 지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걸요? 그 다음날엔 뉴스에서 보게 될 테고요.」 “알려지면 어때요.” 「진심이에요?」 “나는 둘째 치고 앤이 귀찮아지겠지만, 언젠가는 치러야 할 홍역이잖아요. 쓸 데 없이 유명해서 미안해요. 괜히 당신을 힘들게 하네요.” 앤은 다시 한 번 가볍게 키득거렸다. 「농담이 늘었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에 싫다고 말했다. 「함께 찾아가서 부모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요. 당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거든요. 항상 내게 남자 고르는 안목이 없다고 하셨는데.」 “자그마한 복수네요?” 「한편으로는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게 싫기도 해요. 현장파견은 엄두도 못 내겠죠.」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요?” 「당연히 앞쪽이죠.」 이번엔 겨울이 웃었다. 그리고 영내에 사이렌이 울렸다. 앤이 딱딱하게 물었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모르겠어요. 일단 끊어요. 확인 되는대로 연락할게요.” 「조심해요.」 인사를 나누고 통화를 종료한 겨울은 전투준비를 갖추며 무전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보고는 금방 들어왔다. 당직사령은 비상을 건 이유를 설명했다. “침입자?” 「예. 22시 37분, 순찰조가 철조망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현재 주둔지 전체를 봉쇄하고 영내를 수색하는 중입니다.」 “침입 규모는요?” 「발자국으로 미루어 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나도 수색에 합류하죠.” 「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암살시도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그게 아닙니다. 침입자를 구속했답니다.」 “……잠깐만요. 벌써 잡았다고요?” 황당해진 겨울이 되물었다.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고서 고작 3분쯤 흘렀을 뿐이다. 이쯤 되면 극도로 운이 좋았거나, 침입자가 굉장히 무능하거나, 혹은 애초부터 침입자에게 숨을 마음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겨울은 마지막 추측에 무게를 두었다. 그렇잖아도 낮에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던가. 시위대는 경찰의 통제에 따르면서도 주둔지를 쉽게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추가 보고가 올라왔다. 침입자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민간인이라고. 추측이 반쯤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저 겨울을 실물로 보고 싶은 팬의 소행일 공산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때가 너무 공교롭다.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냥 경찰에 넘길까요?」 당직사령, 중국계 미국인인 브라보 중대장의 음성에 난감함이 묻어났다. “아뇨. 일단 붙잡아둬요.” 겨울이 지시했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 정말로 시위대의 한 사람이라면, 혹은 그 시위를 유도한 누군가가 보낸 사람이라면 이야기를 들어볼 가치가 있다. 내일 오겠다는 주지사가 진실을 알려준다는 보장이 없는 까닭. 앤에게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안심하라는 문자를 보내고서, 겨울은 무장을 갖추고 숙소를 나섰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입구에 이미 경찰이 와있었다. 리드빌이 워낙 작은 도시인데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주둔지에 이르는 길이 고작 1마일도 되지 않았으니까. 경찰 또한 낮의 시위로 신경이 곤두서있었을 것이기도 하다. 겨울은 그들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도록 요청했다. “드디어! 한겨울 중령님!” 붙잡혀있던 사람이 반갑게 소리쳤다. 벌떡 일어나려는 그녀를 병사들이 힘으로 주저앉혔다.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겨울을 만난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한쪽 무릎을 꿇어 침입자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겨울을 마주보았다. 겉과 속이 다른 게 사람이라지만, 인상 자체는 순한 흑인 여성이었다. 조명에 반짝이는 귀걸이가 눈에 띈다. 입고 있는 구스다운 패딩 역시 밝고 강렬한 붉은 색이었다. 애초에 잡힐 작정으로 들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마약중독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맨 정신으로 벌인 일이다. 겨울이 입을 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위니 멀드로요!” “그럼, 멀드로 양.” “위니라고 불러주세요!” “……좋습니다, 위니. 군부대에 무단으로 침입한 게 큰 잘못이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네. 벌을 받을 건 각오했습니다.” 침입자가 순교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겨울은 짧게 한숨지었다. “각오하셔도 곤란한 일입니다만……. 저와의 대화가 목적이었나요?” “맞아요. 저는 중령님께 우리 「인류를 위한 미국 시민들의 행동」을 지지해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인류를 위한 미국 시민들의 행동」이라는 건, 어조로 미루어 멀드로가 속한 시민단체의 이름인 모양이다. 겨울은 슬쩍 떠보는 질문을 던졌다.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 말입니까?” 멀드로는 얼른 고개를 젓는다. “그건 맛보기를 보여준 것에 불과해요.” “맛보기? 저한테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크레이머한테죠! 만약 말도 안 되는 정책을 강행한다면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겠다는 선전포고 같은 거였어요! 그렇게 되기 전에 좋게 해결하자는 신호를 보낸 거죠!” 겨울은 상체를 슬쩍 뒤로 물렸다. 침이 튀었기 때문이다. 멀드로는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낮에는 훈련을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중령님. 하지만 크레이머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아신다면 분명 저희를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는 해적들의 정권을 인정하려 하고 있다고요!”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매일 꼼꼼하게 신문을 읽고 저녁마다 뉴스를 챙겨보는 겨울이 모르는 일이라면, 출처가 의심스러운 게 정상이었다. “해적들의 정권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멀드로는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답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죠! 크레이머 행정부의 새로운 대외정책이요!” “…….” “중령님도 아시겠지만, 예전엔 해적이 참 많았잖아요?” “그랬지요.” “그 해적들이 여러 섬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서 원래 있던 주민과 난민들을 억압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크레이머는 그런 해적들이 세운 정부를 인정해줄 계획이에요! 뭐라더라……. 그렇지! 그들이 공해상의 질서유지와 세계의 이익에 기여하고, 민주주의를 수용하며, 더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인류존속의 대의를 위해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겠다!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앞으로도 범죄자들의 손에 무고한 사람들을 맡겨두겠다니! 불쌍한 주민들은 노예처럼 부려질 거예요!” 성토는 겨울이 끼어들 틈도 없이 계속됐다. “게다가! 그 섬들이 원래 어느 나라 영토였는지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해요! 그래선 안 되는 일 아닌가요? 이건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무시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요! 어떤 땅이든 점령한 자의 것이다! 이런 의미죠!” 이 말을 듣고, 겨울은 이 정보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멕시코를 비롯한 중미 지역의 취급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놀라울 것도 없이, 멀드로는 크레이머 행정부가 러시아와 제3국의 영토를 건 거래를 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 거래에 겨울이 참가한 훈련이 포함된다는 것마저도. ‘정보를 흘린 게 누굴까.’ 겨울은 고민했다. 누가 흘렸든 간에, 지금 이 상황은 그 사람이 바란 바가 절대로 아닐 터였다. 역효과만 볼 테니까. 이런 생각을 모르는 멀드로는 처음의 순수함으로 요구했다. “중령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간단해요! 러시아와의 합동 훈련을 거부하시고, 우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해주세요!” 조금도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겨울이 달래듯이 말했다. “위니. 당신의 말을 무작정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전부 진실이라 해도 제겐 불가능한 요구들입니다.” “어째서요? 당신은 한겨울 중령이잖아요?”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겨울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네. 저는 한겨울이고, 중령입니다. 군인이죠.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한겨울 중령이잖아요.” 두 번째다. 겨울을 뭔가 특별한 존재처럼 부르는 말투가. 멀드로의 얼굴에 혼란이 떠올랐다. “한겨울 중령은 당연히 우리 편이어야 하는데…….” 겨울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당신 머릿속에 있는 저와 여기 있는 저 사이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제게는 한계가 있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도와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이 분, 보안관에게 모셔다드려요.” 마지막은 병사들에 대한 지시였다. 지목당한 병사 두 명은 손이 허리 뒤로 결박된 멀드로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 실망한 시민운동가는, 겨울을 바라보며 배신자라고 중얼거렸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 본인이 내뱉은 단어에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 409 [409화] #높은 곳의 바람 (7) 다음날, 콜로라도 주지사는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진심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많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 여자는 보기 드문 꼴통일 뿐입니다. 덕분에 간부가 되었겠지요. 이용하기 좋은 말이니까요.” 그 여자란 간밤의 침입자, 위니 멀드로를 말하는 것이다. “「인류를 위한 미국 시민들의 행동」이라는 조직은 겨우 3개월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로 급격하게 규모를 불려왔는데, 이는 막대한 기부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겨울이 턱 아래 깍지를 끼며 물었다. “그 돈을 누가 내는 겁니까? 여러 망명정부의 관계자들?” “허허. 예리하시군요.” 주지사가 겨울의 감각을 칭찬했으나, 그리 어려운 추론도 아니었다. 멀드로에게 들은 내용도 있으니. 역병 이전의 영토주권을 무시하려는 정책에 손해를 볼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긴 했어도, 우리 같은 꾼들을 속이기엔 역부족이지요.” 주지사의 말에, 겨울은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그럼 그 부분을 캐내서 밝히면 되지 않습니까?” “…….” 외국의 입김에 좌우되는 시민단체가 군사훈련에 훼방을 놓았다고 알려지면, 그 단체의 수명은 그날부로 끝난다. 같은 방식을 다시 시도하진 못할 것이다. 다른 단체로도 불똥이 튀어 한동안은 검증의 열기가 뜨거워질 테니. 또 유사한 시위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받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강성 단체가 아니고서야 몸을 사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주지사 조지 F. 채피는 묘하게 곤란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침묵의 이면을 헤아리던 겨울은 곧 간단한 결론에 도달했다. 시위에 냉소적인 주지사가 입을 다무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같은 편이 연루되어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민주당 내에 받아선 안 될 돈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보네요.” “허허허.” 아까보다 길어진 주지사의 웃음. 로비 자체는 합법일지라도, 미국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 대하여 외국의 자금을 받는 건 불법이다. 말 그대로 받아서는 안 되는 돈. 주지사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당을 변호했다. “당신 같은 사람 앞에서 전형적인 정치인처럼 굴긴 싫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군요. 양심을 판 건 고작 몇 명에 불과합니다. 다만 우리 당의 의석수가 부족하다보니 그 몇 명의 표조차도 버릴 수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그리고 공화당에서도 뒷돈을 받은 의원들이 있다, 는 건가요?” “허허허허. 이거 참.”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민주당은 야당이고 공화당은 여당이다. 겨울 자신이 망명정부 관계자라도 공화당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이고자 했을 터. 거기에, 만약 공화당 또한 연루되어있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그들이 민주당을 공격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지금쯤이면 뉴스에 나왔어야 정상이지.’ 발표되지 않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경로 역시 민주당보다는 공화당 쪽이 더 어울린다. 부끄러워하던 주지사가 말을 돌렸다. “아무튼, 저 밖에 아직도 진 치고 있는 시위대에 대해선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부분은 돈만 보고 온 용병들이니까요.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고용주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반대 구호를 외치기 시작할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이번 일은 민주당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중에 악의적인 취재가 들어오거나, 공화당 쪽에서 다른 접촉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하도록 하죠. 제가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즉 조용히 해결하든 요란하게 지지고 볶든 정계의 사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허. 고개를 흔든 뒤에, 채피 주지사가 묻는 말. “혹시 누가 먼저 귀띔이라도 해줬습니까?” “아뇨. 단지 주지사 정도 되는 분께서 찾아오실만한 이유가 달리 떠오르지 않아서요. 사정을 전하는 것 만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할 텐데, 바쁘신 와중에 이곳까지 오신 것 자체가 단서였습니다. 아무래도 목소리만 듣는 것보다는 직접 대면해서 내막을 설명하는 편이 제게 믿음을 주기 좋을 테니까요.” “……중령 당신, 앞으로가 참 기대되는 사람이로군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은 기본이되, 평범한 사람들의 기본은 아니지요.”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겨울과 주지사가 마주 앉아있는 야외 테이블은 어느 수제 파이집의 것이었다. 주인과 종업원들은 개시손님이 한겨울 중령과 주지사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어진 자리에, 한 종업원이 음식을 날라 왔다. “주문하신 피자와 파이 나왔습니다. 갈비구이랑 버팔로 윙, 야채샐러드도 곧 나올 거예요.” 영업용 이상의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에게, 주지사가 추가주문을 넣었다. “캐서린 피치 패션도 한 병 가져다주게.” “알겠습니다.” “캐서린 피치 패션?” 겨울의 물음에 주지사는 엄지를 세워보였다. “순수하게 복숭아로만 빚은 와인입니다. 저 아랫동네의 포트 콜린스에서 만들지요. 오전부터 무슨 술이냐고 흉보진 마십시오. 이럴 때 찍는 사진의 배경엔 지역 특산물이 들어가 줘야 하거든요.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게 오히려 장점입니다. 그 적은 사람들은 보다 확실한 친근감을 느낄 테니까요. 어이, 가게 간판도 잘 나오게 찍어.” 마지막 말은 참모에게 하는 것이다. 해당 참모는 몇 걸음 떨어져서 사진기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누가 이야기를 엿듣지는 않는지 경계하는 역할을 겸했다. 그 참모가 우려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테이블이 꽉 차있어야 내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보이는 거야.” “매번 안 남기고 다 드시잖습니까. 그렇잖아도 허리둘레가 나날이 늘고 계시는데.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도 너무 높습니다. 다음 선거에서 건강검진 결과가 문제시 되면 어쩌실 겁니까?” 참모의 불평에, 주지사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기왕 시킨 음식을 버리면 아깝잖나.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콜로라도 남자라면 16인치 피자 한 판쯤 기본으로 먹어줘야지.” “그건 남자의 기준이라기보다 짐승의 기준에 가깝지 않습니까?” “글쎄. 자네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나, 짐승 밑에서 일하고 싶나?” 참모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윗사람이 짐승이라도 사람으로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할 말 없게 만드는군.” 그래도 주민들은 자신의 커다란 덩치를 좋아한다고, 주지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겨울은 가볍게 웃으며 피자 한 조각을 접시에 덜었다. 주지사 또한 그리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 중령은 내가 여기에 올 이유가 달리 없다고 했지만, 사실 이 피자를 먹고 싶다는 사심도 조금 있었습니다. 첫 유세가 한창일 적에 먹어보고 반했지요. 다른 곳에선 이런 피자 먹기 힘듭니다. 독특한 개성이 있어요.” “그래서 대대원들도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먹던 것을 떠올리게 하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사실이다. 근처에 피자헛도 있지만, 독립대대에선 푸짐한 토핑을 올려주는 이곳을 더 선호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은 단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들었다고 남 이야기를 하듯이 말하는 건, 겨울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종말 이후」에서 재구성되었을 과거의 한국은 겨울이 잘 모르는 나라였다. “하기야 향수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요.” 혼자 납득한 주지사가 조각 하나를 삽시간에 해치우고는, 티슈로 입술을 닦는다. “중령. 당신에겐 201독립대대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요는 이거지요. 그들을 제로 그라운드로 보내기 싫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겨울이 묵묵히 바라보자, 주지사는 질문을 고쳤다. “중령 스스로도 가기 싫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굳이 말하자면 서로를 돕자는 것이지요.” “…….” “승산은 있습니다. 공화당 내에도 당신을 보내기 싫어하는 세력이 존재하는지라. 대통령의 의지에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설 용기는 없지만, 당신이 직접 나설 각오를 할 경우엔 입장을 달리할 여지가 충분하지요.” 겨울은 식사를 멈췄다. 주지사가 이곳에 온 다른 이유는, 맛있는 피자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 용건이었던 모양이다. 숙고하는 사이에 새로운 음식들이 나와 테이블을 채웠다. ‘내가 그렇게 나서는 것 자체가 이익이겠구나.’ 일단 공화당 내부에 불협화음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한겨울 중령을 보다 가치 있게 쓴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자 방패일 터이므로, 겨울은 앞으로도 크레이머와 앙금을 쌓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대급부로서 민주당과 가까워지는 건 필연이었다. 자기 잔에 술을 따르는 주지사에게, 겨울이 말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대통령에게 밉보이는 셈이니. 하지만.” 주지사가 와인을 홀짝이며 유혹했다. “어떤 위험부담이라도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중령 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하들의 운명까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대안의 하나로서 고려해볼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겨울이 주머니 속의 보험,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며 답한다. “죽음이 전보다 두렵기는 합니다. 결혼할 사람이 있거든요.” “오…….” “그래도, 싸움에서 달아나고 싶진 않습니다.” 모르겠다. 봄의 질문만 없었어도, 다시 한 번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을는지. 겨울이 없다고 해서 제로 그라운드 진공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대륙분리 작전이 완료된 시점에서, 이 세계관의 미국은 어지간한 위기로는 무너지지 않을 터. 사실 위기라는 게 찾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그러니, 영웅으로서의 명성을 좀 잃어버리면 어떤가. 정치적으로 고달픈 처지가 되면 또 어떤가. ‘그 너머에 확실한 앤과의 미래가 있을 텐데.’ 보다 이른 한계에 직면하여, 강박적으로 지켜내려던 한겨울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삶이자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겨울은 결코 신이 아니었다. 될 능력이 없었다. 닿지 못할 목적지가 얼마나 고달픈 것인가는 질리도록 경험하지 않았었나. 그래서 봄이 찾아낸 마음이 더욱 특별한 것이다. “달아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겨울이 단호하게 반복했다. 이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기에 분명한 근거는 없으나, 이상할 만큼 강렬한 예감. 가슴 속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겨울이 봄에게 보여주고 싶은 계절이었다. 마음을 얻더라도 미움까지 얻진 말아달라는 당부를 그저 말뿐인 부탁으로 끝내긴 싫었다. 빤히 응시하던 주지사가 식사를 재개하며 하는 말.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족스럽군요.” “만족?” “명불허전이라는 말입니다.” 겨울은 그의 말과 태도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염려 놓으십시오. 녹음기가 필요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눈치 채고 계셨군요.” “그럼요. 이 조지 ‘라지 채프’ 채피의 경력이 몇 년인데요.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만사에 조심하는 태도는 좋은 거지요. 하하.” 넉살 좋게 웃고 나서, 그는 경이로운 속도로 자기 몫의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하압! 겨울은 그가 크고 두꺼운 피자 조각을 단 두 호흡에 구겨 넣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주지사가 아니었어도 푸드 파이터로 유명해졌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달리 편의를 봐드릴 일은 없습니까?” 주지사의 질문에 곧바로 고개를 저으려던 겨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 가지 부탁을 하기로 했다. “나중에 제가 말씀드리는 사람들을 이쪽으로 초청해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난민들입니까?” “네.” “흠. 이유를 알 만 하군요. 좋습니다. 어려울 것도 없지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만 내가 언론을 통해 생색을 좀 내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대충 겨울에게 우호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뜻이었다. 대가치곤 별것 아니었기에 겨울은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주지사는 수지맞는 장사라고 좋아했다. 서부 3개주에서 역병을 축출하기는 했지만, 난민들은 구 봉쇄선의 동쪽지역에 대해 강렬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불안하던 시기 내내 안전지대에서의 생활을 꿈꾸었을 테니. 그런 지역의 하나인 콜로라도에 겨울의 호의로서 초대된다면, 당사자들은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특히 다른 국적의 난민들이라면 더더욱. 이는 동맹과 난민구역의 분위기를 단속할 하나의 방편이었다. 서로 미움을 잔뜩 쌓아온 난민들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바로 겨울이다. 그 겨울이 한국계만 편애한다는 피해의식이 생기기 전에 예방접종을 놓는 효과도 있을 터였다. 어쨌든, 제로 그라운드 이후도 준비해두어야 한다. # 410 [410화] #높은 곳의 바람 (8) 6월 26일 새벽, 겨울은 해발 3만 5천 피트 상공의 수송기 안에서 회중시계를 보고 있었다. 조명 옅은 화물칸의 정적 속, 톱니가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와중에 평시보다 크게 울리는 숨소리가 섞였다. 강하를 앞두고 착용한 산소호흡기 때문이다. 단시간에 최소 수천 미터를 낙하하는 고고도 강하에선 먼저 순수한 산소를 호흡하여 혈중 질소농도를 떨어뜨리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감압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삐익- 전자음과 함께 내부조명의 색채가 바뀌었다. 강하를 앞두고 화물칸 압력 조절을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겨울은 침을 삼켜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을 지웠다. 곧 후방 개폐구가 열릴 것이다. 붉게 물든 기내에서 대대 참모들이 낙하산 무더기를 올린 지휘장갑차에 탑승했다. 겨울도 그 뒤를 따랐다. 좌석에 앉아 벨트로 몸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보며 때를 기다렸다. 약 3분 후. 발과 등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한층 강해졌다. 유압모터 구동음이 들린다. 더불어 진해지는 바람소리. 장갑차 내부가 웅웅 울렸다. 이미 수십 차례의 강하 훈련으로 익숙해진 일이다. 시계를 갈무리한 겨울이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셋, 둘, 하나. 덜컹! 고정 장치가 풀리면서 장갑차는 수송칸의 레일을 따라 미끄러졌다. 거친 진동 끝에 찾아온 건 갑작스러운 무중력. 이런 데 약한 통신장교 에반스가 숨을 삼키는 모습이 보인다. 고질적인 멀미와 긴장 탓에 처음 몇 번은 구토를 쏟아냈었다. 무리도 아니다. 장갑차 내부는 협소하다. 비좁은 공간에 갇힌 채 고공에서 던져지는 처지. 신경이 곤두서지 않는 쪽이 비정상이었다. 러시아 공수군도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훈련받은 종래의 방식에서는, 기갑차량을 낙하산으로 공수할 땐 수송기에서 이탈하는 즉시 낙하산이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 적용되는 방식은 달랐다. 일정 시간 자유낙하로 떨어지다가, 특정 고도에 도달하고서야 낙하산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를 HALO라 부르며, 기갑차량 강하에 적용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들었다. 겨울은 외부 관찰 카메라가 잡아낸 고고도의 야경을 보며 생각했다. ‘데브그루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던데.’ 미국 최정예 특수부대답게, 그들은 보트에 탑승한 채로 이런 식의 강하를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강하지점이 해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전반적인 조건은 유사하다. 바꿔 말하면, 이토록 특이한 강하에 숙달된 독립대대는 이제 특수부대라고 불릴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특수부대의 기준은 전투력이 아니니까. 남은 건 실전경험 뿐이다. 미군 지휘부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독립대대 투입은 사실상 대통령의 독단이었으되, 기왕 파병할 병력이라면 어중간한 상태로 보내지는 않는다. 지금, 멕시코 중부고원의 남쪽 하늘을 내려다보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겨울이 말했다. “아름답지 않아요?!” 참모들 대부분은 겨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오직 부대대장 싱 소령만이 겨울과 같은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경치입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당겨져 있긴 했으나 모범적인 여유였다. 그가 하필 아내를 언급하는 바람에, 겨울도 앤을 떠올리며 외부 관측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달과 별이 비추는 난층운(亂層雲)의 지평선은 좌우로 35도쯤 기울어진 상태였다. 중력을 느낄 수가 없어서 체감하기 어렵지만, 장갑차가 그만큼 기운 채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강하 개시로부터 약 1분 후, 드디어 낙하산이 작동했다. 갑작스러운 압력이 탑승인원 모두를 찍어 눌렀다. 겨울도 찰나의 호흡곤란을 느꼈다. 낙하산에 매달린 장갑차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요동이 가라앉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다시 5분쯤 지나, 장갑차가 마침내 지면에 내려앉았다. 쿵-! 교전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2시 방향, 거리 80, 쏴!」 차장의 외침과 동시에 무인포탑이 회전했다. 쾅쾅쾅쾅! 묵직한 총성이 차체를 때렸다. 장갑 위로 탄피 구르는 소리도 선명하다. 겨울이 콘솔로 포수의 화면을 공유했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변종들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캬아아아악-! 눈으로 듣는 굶주린 외침들. 비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낙하산들을 발견했는지, 헐벗은 산 곳곳에서 변종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러나 결코 반갑진 않은 광경.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변종집단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나웠으나,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통제력을 발휘하는 개체가 없다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강하하는 기갑차량들을 어찌 상대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런 식의 강습은 트릭스터에게조차 낯선 것일 터. 안다고 해도 대응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언제 어디서 강습이 이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뻥! 포성이 울리고 폭발이 뒤따랐다. 막 낙하산을 분리한 공수전차가 근거리에 고폭탄을 갈긴 것이다. 자동장전장치 덕분에 연사 속도가 빨랐고, 교전거리가 가깝다보니 조준은 금방이었다. 밤이 번뜩이는 자리마다 죽음이 뿌려졌다. 전차는 피와 살을 뒤집어쓴 채 거칠게 움직였다. 질량에 치인 변종들이 무한궤도 아래로 깔려 들어갔다.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각 단차! 교전보다는 집결을 우선시해요! 우측 언덕을 타고 남하합니다! 그 아래의 하천과 이쪽의 비포장로를 경계로 화력을 집중할 것! 자잘한 적은 무시하고 지나가요!” 공수용 장갑차와 전차의 장갑은 다른 기갑차량에 비해 매우 얇은 편이지만, 그렇다 해도 평범한 변종들이 손톱으로 뜯어낼 정도는 아니다. 총탄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방어력이었다. 전술지도를 확인하는 겨울. 좌표를 보니 집결지점으로부터 북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트릭스터의 전파방해는 약하게 잡혔다. 교활한 놈이 멀리서 관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녀석의 입장에서 거리를 속이기엔 위험부담이 크다. 지형에 굴곡이 반복되는 환경 상 이쪽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야 하니까. ‘이제 곧 살아있는 포탄들이 쏟아지겠지.’ 내산성 코팅이 장갑차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방호해주진 못했다. 게다가 데들러는 인화성 변종도 있다. 코팅은 불에 약하다. 방어력을 믿고 못박혀있어선 안 되는 이유. 당연한 이야기지만, 산성아기들은 움직이는 표적에 대해 명중률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청색신호, 쏴요!” 겨울의 말에 따라 지휘장갑차에서 신호탄이 발사되었다. 몇 킬로미터 범위에서는 충분히 보일 법한 조명이었다. 각 중대에서 쏘아 올리는 신호탄들이 그 뒤를 이었다. 혹시라도 엉뚱한 위치에 낙하한 차량이 있다면 빛을 보고 찾아올 것이다. 변종들도 모여들 테지만, 기갑차량의 속도를 따라잡긴 어렵다. 본격적인 숫자가 들이칠 때쯤이면 겨울 지휘하의 병력은 이미 그 자리를 이탈한 뒤일 터였다.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는 아직까지 올라온 게 없다. 그간의 훈련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계가 다수인 독립대대 브라보 중대는 산 마테오 소솔라라는 이름의 마을에 집결했다. 일본계가 다수인 찰리 중대와 구 한국군 출신이 다수인 델타 중대는 좀 더 남쪽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1차 집결을 완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파 중대는 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자력으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가장 위험한 위치를 가장 신뢰하는 병력에게 맡긴 셈. 서로 다른 위치에 강하한 부대들이 약 80킬로미터에 걸쳐 합류를 거듭하며 덩치를 불려, 변종들의 번식 거점 하나를 파괴하고, 종래엔 오악사카 국제공항을 확보한 레인저 중대를 지원하는 것이 이번 임무의 목표였다. 무전상의 잡음이 많아졌다. 다만 강도는 오히려 약해졌고, 또한 간헐적이었다. 트릭스터는 전파추적 미사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12시, 10시 방향에 변종집단 다수!」 겨울은 즉각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뚫어요! 한쪽으로 유도하려는 수작이니까! 잠시도 멈추지 말아요!” 우회하거나 정지하면 그거야말로 교활한 녀석이 노리는 바다. “데이비드 액추얼로부터 모든 유닛에게! 지금부터 1분간 무선침묵! 긴급 상황만 보고!” 교신을 막는 겨울. 약 삼십초 후, 총성과 포성이 이어진 끝에 기갑차량의 대열과 변종집단의 물결이 격돌했다. 지휘장갑차 역시 몸을 던지는 변종들을 제압사격과 질량으로 짓이기고 지나갔다. 겨울을 비롯한 탑승인원들은 불쾌한 관성을 느낄 수 있었다. 터덩, 텅! 퀘에에엑! 운 좋게 올라탄 녀석들이 상면 장갑을 두들겨댔다. 사지가 멀쩡한 하나, 숨을 헐떡이며 상체만 달라붙은 하나. 무인포탑의 관측 카메라가 누렇게 변색된 치아로 가득해졌다. 렌즈를 핥는 새까만 혀. 감염돌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퍼억! 변종의 머리가 박살났다. 뇌수와 체액이 뿌려져 렌즈를 흐렸으나, 상황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장갑차에서 사격을 가한 것이다. 각 단차는 서로를 향해 소구경 사격을 퍼부어 거머리 같은 역병들을 긁어냈다. 직후 2시 방향의 하늘로부터 일그러진 아기들이 무더기로 쇄도했다. 그러나 경로가 살짝 어긋났다. 이쪽이 변종집단을 상대로 교전거리를 확보하지도, 우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의 예상이 맞았다. ‘이쪽을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무전이 가능한데도 침묵을 지시한 이유였다. 산성과 인화성의 아기들이 기를 쓰고 방향을 바꾸려했다. 하지만 브라보 중대는 겨울의 지시대로 도로를 벗어나 조금 더 높은 언덕의 분수령을 달리는 중이었다. 타격지점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탓에, 병든 아기들은 대부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엉뚱한 위치에서 퍼억 퍽 파열했다. 깨져나가는 얼굴마다 고통과 분노로 물들어있었다. 그렇게 돌파한 다음, 브라보 중대는 옛 멕시코의 1350번 국도가 하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알파 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 나타난 건 그로부터 십여 분이 흐른 다음의 일이었다. 이제 알파 중대의 합류만 남았다. “각 중대는 계획대로 방어선을 구축할 것.” 새로운 지시를 전달하고서, 겨울은 상면 장갑의 해치를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강화된 시각을 저해하기에 부족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겨울의 시선이 어느 바위 하나에 고정되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돌이었으되, 겨울의 감각보정을 미묘하게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데이비드 액추얼이 데이비드 2-1-브라보에. 3시 방향에 있는 바위를 한 번 밟아 봐요.” 해당 차량은 겨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야 움직였다. 장갑차가 가까워지자, 바위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돌의 질감을 지닌 괴물의 모습으로 바뀌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장갑차의 급가속에 짓밟히고 만다. 끼아아아아- 핏물이 터졌다. 비명을 내지르는 놈의 사지가 잠깐 사이에 다채로운 색과 질감을 내보였다. 놀라운 신축성을 지닌 부속지가 사방의 땅을 채찍처럼 때려댔다. 고여 있던 빗물이 요란하게 튀어 오른다. 부속지 표면에서 무수한 감염돌기들이 자글자글 들끓었다. 특수변종, 위퍼의 실물이다. 이 교전은 처음 상대하는 변종이 있다는 점에서도 제로 그라운드 진공의 사전준비로 적합했다. ‘방심하면 나도 위험하겠는데…….’ 겨울의 감각에조차 잡힐 듯 말 듯 한 존재감. 멜빌레이처럼 제한적인 수준이 아니라, 보다 제대로 된 「기척차단」을 보유한 게 틀림없었다. 감각보정에 의한 감지를 무력화하는 특성. 강화종 위퍼 쯤 되면 주위를 제대로 살피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하다. 수상해 보이는 지형지물에 한 발씩 총탄을 박으면서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위퍼에 의한 감염은 잠복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했다. 긴 부속지로 사각에서 스치듯 감염시킨 다음, 내부로부터의 감염확산을 기다리는 유형의 괴물. 모든 병력이 사전에 교육을 받긴 했으나, 공세적인 병력 운용에서 하차전투는 지양하는 편이 낫겠다. 이쪽 전선에 배치된 병사들도 편한 싸움을 치르는 건 아니었다. 장갑차 안쪽에서 작전장교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정면과 3시 방향에서 적의 움직임이 관측됩니다!” 겨울이 아래로 외쳤다. “보고 있어요! 작전대로니까 다들 동요하지 말고 대기하라고 전해요!” 무전상의 잡음이 아까보다 무거워졌다. 현재 독립대대는 작은 강을 등지고 있었는데, 본래 강을 가로질렀을 다리는 중간이 끊어진 상태였다. 의도적인 파괴의 흔적이다. 원흉은 아마도 하나 이상의 그럼블. 이는 교활한 것들이 교각의 중요성을 학습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즉 트릭스터에겐 독립대대가 끊어진 다리 앞에서 발이 묶인 것처럼 보일 터였다. ‘와라.’ 이 위치의 독립대대를 공격하려면, 변종들도 원래의 거점에서 기어 나와야 한다. 특히 산성과 인화성 아기가 집중된 고지들이 중요했다. 그럼블이 아기를 투척한다고 해도, 경로 상에 다른 언덕이 없어야 독립대대를 치명적인 활강의 사정권에 둘 수 있으니. 잠시 후, 변종들의 배후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새로운 낙하산들이 보였다. 독립대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강하. 대대가 벌인 교전의 소음이 주위의 변종을 빨아들여, 연대 급 부대가 소리 없이 강하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함정의 마지막 장치로서 알파 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방향을 틀어막다시피 하면서. 이로써 길게 늘어진 변종들의 행렬은 포위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해치를 닫고 내려온 겨울이 무전기를 들었다. “전 차량, 사격개시! 보이는 대로 다 쏴버려요!” 독립대대는 여기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 조이는 건 숫자와 화력이 월등한 러시아 공수군의 몫이고, 다 조인 후엔 공군이 폭격으로 마무리 지을 테니. # 411 [411화] #높은 곳의 바람 (9) 변종들은 이미 오래전에 참호의 개념을 학습했다. 이는 산이 많은 중미지역의 지형과 더불어 공습의 효율을 감소시키는, 그리고 각각의 고지 점령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독립대대의 위기를 연출했다. 교활한 괴물의 입장에서, 강철의 벼락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군대를 방패삼는 것이었다. 일단 달라붙기만 하면 폭격 맞을 걱정은 없다. 하다못해 수백 미터 안쪽으로만 접근해도 공습의 빈도가 뚝 떨어진다. 위험 근접(Danger Close), 즉 아군까지 휘말릴 가능성 때문. 때로는 오폭 한 발이 부대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폭탄 떨어진 균열, 그 화력의 공백을 틈타 역병의 군세가 밀려드는 탓이었다. 그러므로 무너진 교각 앞에서 정지한 독립대대는, 트릭스터가 보기에 아주 매력적인 공격 목표였을 것이다. 굽이치는 지형 덕분에 교전거리를 줄이기도 쉽다. 거기에 더해, 정보를 확보할 필요성도 있었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 것들의 특성을 파악해야 하니까.’ 겨울이 주장했고, 공수군 연대장은 반신반의한 트릭스터의 행동 패턴이었다. 놈들은 변종들의 지휘관에 해당한다.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고 전파하는 것 또한 놈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겠는가. 둥지에서 끌어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한 이유였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기세가 오른 공수군은 참호를 벗어난 변종집단을 일방적으로 도륙했다. 변종들의 기본 전술은 산개 이동 후 공격지에서의 집결이다. 포격과 공습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체득한 방식이지만, 후방에서 들이치는 공세엔 약할 수밖에 없다. 어느 방향으로도 길을 뚫지 못하고 예정된 위치에 정확하게 뭉쳐진 변종들의 최후는, 중심부에 작렬한 두 발의 유도폭탄(JDAM)이었다. 항공폭탄 위쪽에 달린 GPS 수신기는 방해전파의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방해전파가 폭탄 동체에 가려지는 까닭. 여기에 관성유도마저 병행하므로, 불량이 아닌 이상에야 빗나갈 수가 없는 폭력이었다. 굉음이 다른 모든 소리를 살해하고, 까맣던 야경엔 초연(硝煙)의 밝은 광란이 뒤섞였다. 끼이이이이- 트릭스터가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수초에 걸쳐 여러 주파수를 마비시켰다. 그것이 끝났을 때, 겨울은 통신장교에게 상황을 확인했다. “이쪽의 전파방해는?” 에반스 대위가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때맞춰 정상적으로 작동시켰습니다. 수신범위 내에 「침묵하는 하나」가 있다면 지금쯤 고민이 많을 겁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트릭스터가 방출하는 전파엔 대량의 정보가 포함되어있다. 죽음에 이른 경위를 근처의 다른 동종, 특히 침묵하는 하나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본디 이는 유력한 가설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황보 에스더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물론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었다. 괴물이 된 소녀의 존재가 여전히 비밀이므로. 겨울은 에스더 본인과 통화했을 따름이었다. 이쪽의 대응책은 트릭스터가 죽는 시점에 역으로 전파방해를 거는 것이다. 사실상 실전에서는 쓰기 어려운 방식이었는데, 이번엔 상황이 상황이라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이로써 기갑공수의 실체는 조금 더 비밀로 남아있게 되었다. 잡음이 사라져 청명해진 채널을 통해 새로운 무전이 들어왔다. “Sir. 다비도프 대령입니다.” 에반스의 말에,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겨울은 공수군 연대장과 교신했다. “접니다.” 「오, 중령. 방금은 아주 좋은 싸움이었소.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는군.」 “331 연대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바실리 페트로비치.” 「겸손하기도 하시오.」 다비도프 대령은 콜 로저스의 진급 이후 태도가 달라진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적당한 공치사가 오간 뒤에, 다비도프 대령이 용건을 말했다. 「이쪽 둥지는 우리가 치겠소. 별 일 아니니 귀소 측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듯하오.」 전과를 원하는 것이다. 주력집단이 이탈한 둥지는 전력 미만의 변종들만 남아있을 게 뻔했다. 아직 덜 자랐거나, 험프백과 같이 애초부터 전투에 부적합한 놈들. 살아있는 포탄으로서 비축된 데들러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다 한들 대령의 말마따나 큰 위협은 아니었다. 다른 변종들의 보조가 없고선 스스로 날지도 못하니까. 잠시 생각하던 겨울이 단서를 붙여 동의했다. “상관은 없습니다만, 혹시 굴이라도 발견한다면-” 「알고 있소. 그땐 폭격 지원을 요청하지.」 사전에 상의한 바다. 변종들은 최근 굴착이라는 개념을 학습하는 중이었다. 아직 원시적인 시도에 불과하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훗날 많이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군 당국은 변종들의 시도를 조기에 좌절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의심스러운 지역마다 간헐적인 폭격으로 강한 진동을 유발하는 것. 버팀목조차 대지 않았을 토굴은 폭발의 여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변종들은 무익한 노력을 오래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필요한 상황에서도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다. 둥지 청소를 오롯이 공수군만의 전과로 삼기 위하여. 그렇잖아도 독립대대가 앞서 강하하여 보다 위험한 역할을 수행했으니, 대령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대 또한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전과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데…….’ 겨울에겐 얽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다비도프 대령은 아니었다. 작게는 공수군, 크게는 조국의 체면과 이익이 걸려있으므로. 그 무거운 어깨를 감안할 때 단순한 이기심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불필요한 인명손실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웠다. 대령의 대꾸가 건성이어서 더더욱. 허나 지적하면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겨울은 그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소. 그쪽 길을 잘 막고 계시구려.」 교신을 끝낸 뒤, 공수군 연대가 다시 합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0분 남짓이었다. 손실 발생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출발하죠.” 겨울이 보낸 신호에 전체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선두는 독립대대였다. 교각이 끊어진 강을 건너는 건 쉬웠다. 대대가 보유한 모든 차량이 수상도하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파도가 높지 않으면 바다에서의 항주도 가능한데, 산간에 흐르는 개천쯤이야. 지도에 표기된 강의 이름을 보고, 겨울은 공교롭다고 여겼다. ‘리오 살리나스. 살리나스 강인가.’ 딱히 놀랍진 않았으되,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임을 새삼 곱씹게 되는 순간이었다. 궁금해진다. 멕시코 영토의 남쪽 절반을 러시아에 할양하겠다는 크레이머 행정부의 계획에 대하여, 라틴계 이민자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는지. 그리고 그들이 만약 반발할 경우, 크레이머는 거기에 어찌 대응하려는지. 도로를 따라 남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길고도 고단했다. 험한 산맥과 고원을 관통하는 도로답게 낙석주의 구간이 많았고, 이런 장소는 변종집단이 매복하기에도 유리했다. 무인기를 띄우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안심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 같은 구간을 지나갈 때마다 보병들을 하차시켜 도로 양쪽을 확보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위퍼를 경계하다보니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변종들의 습격이 드물었다는 점. 이따금씩 멀리 정찰 나온듯한 녀석들을 발견하긴 했으나, 그게 본격적인 공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작전장교 포스터는 산중의 밤에 내린 무거운 고요를 미심쩍어했다. “이상하군요. 오악사카에 도착하기까지, 처음 같은 전투를 몇 번은 더 치러야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너무 조용해서 불쾌할 정도입니다.” 으흠.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상박을 두드리던 싱 소령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아까 우리 쪽에서 썼던 전파방해의 영향이 아닐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은 트릭스터의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으니, 침묵하는 하나의 입장에서 우리는 완전한 미지의 적이겠지. 우리가 떠난 뒤에 교전현장을 살펴보았다면, 녀석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모르는 적이라 일단 몸을 사리고 있다는 거로군요.” “그래.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낙관적이어도, 겨울이 볼 땐 나름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이 지역은 변종들의 뒷마당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에서, 외부로부터 침입한 흔적도 없이 대규모 기갑부대가 출현한 것이다. 무수한 무한궤도 자국들과 일방적인 살육의 흔적들을 보고 의혹을 품었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포스터 대위는 못내 찝찝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좋겠습니다만, 이놈들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꿍꿍이라면?”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레인저보다 먼저 공항에 주둔하고 있었던 병력도 하룻밤 사이에 전멸했다지 않습니까. 브리핑 당시엔 솔직히 좀 소름끼쳤습니다.” “……뭐, 아직 긴장을 놓을 때가 아니긴 하죠.” 겨울 또한 그 내막이 신경 쓰이긴 했다. 변종들이 어떻게 외곽 방어선을 뚫었는지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레인저가 발견한 교전현장은 미스터리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불안이 무색하게, 고원 남부의 가장 위험한 영역을 다 지나기까지 추가적인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찰용 무인기에서 들어오는 영상에 댐과 저수지가 잡혔다. 순례자 마티아스 호수였다. 그 아래로 흐르는 네그로 강만 건너면 진행경로의 전환점에 도달한다. 이 앞의 교차로에서 다른 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러시아 공수군 217 연대와 접촉한 뒤, 다시 남하하는 길에선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았다. 그 일대는 공항에 배치된 포병대의 사정권으로서, 몇 주에 걸쳐 꾸준히 불벼락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포격의 효율은 공습을 능가했다. 각각의 능선을 갈아엎다시피 하는데 물러나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적어도 그 범위에 변종들의 거점이 남아있긴 어렵다. 변종들은 보다 깊은 험지에 웅거한 채, 산악지역에 진입하려는 미군을 번번이 요격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중. 바로 그런 둥지 가운데 하나를 독립대대와 공수군 331연대가 짓밟고 온 것이다. 에반스가 보고했다. “Sir. 217 연대의 발광신호를 확인했습니다. 1-1-알파가 접근합니다.” 겨울도 모니터를 통해 깜박이는 불빛을 주시했다. 해당 방향으로 나아가는 알파 중대의 1소대 1호 차량도 보인다. 트릭스터의 전파교란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약정된 절차이자,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 대비한 연습이기도 했다. 이쪽에선 철저한 기습을 노리고 있으니까. 아니었다면 야간 고고도 강하를 고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시인성과 하늘의 소음을 동시에 최소화하는 방식이었다. 잠시 후 에반스가 안도했다. “접촉했습니다. 217 연대도 무사히 도착했다는군요.” 예쓰! 주먹을 불끈 거머쥐는 정보장교 머레이. 겨울이 그를 응시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알죠?” 국토안보부의 브록 헌트에게서 들었던,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가 남긴 말이다. “이대로 마지막까지 잘 해보자고요. 방심하면 안 당할 공격도 당할 테니.” “크흠, 네.” 머레이가 멋쩍어했다. 남쪽의 독립대대와 331 연대, 그리고 조금 북쪽의 217 연대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당장 합류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기갑행렬의 길이가 길다. 오악사카의 중심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다시 한 번 분기점을 만나니, 기민한 대응을 위해서는 그 때 합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간의 거리는 최대 6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사이에 변종집단이 끼어있을 경우 양쪽에서 협격하면 그만이었다. ‘기동을 위한 여백이 필요하기도 하고.’ 기계화 부대의 강점을 살리자면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독립대대가 타고 내려가는 1350번 도로와 북쪽의 공수군이 이용하는 190번 도로 사이엔 적당한 개활지가 펼쳐져있었다. 이쪽에서 내려가자면 조금은 산을 타야 하지만, 그래도 도시 근교인지라 괜찮은 기동로가 많았다. 경사를 따라 만들어진 농경지도 기갑차량의 기동에 적합하다. 여기까지 곱씹고서, 겨울은 생각했다. ‘나, 잘 하고 있는 건가.’ 배운 만큼 늘어나는 전술적 「통찰」에 힘입어 이론을 빠르게 체득하긴 했지만, 대대 규모의 병력을 지휘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가끔 확신이 약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나마 싱 소령을 위시한 참모진이 곁에 있어 부담이 덜하다. 엇나갈 때면 제동을 걸어주겠지 싶은 기대. 새벽이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사위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인기들이 송신하는 영상 속 초토화된 시가지의 풍경이 한층 더 선명해진다. 싱 소령이 유감을 표했다. “뭐 하나 멀쩡히 남아있는 게 없군요.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이라고 들었는데…….” 문화유산 운운은 오래된 도심에만 해당될 이야기지만, 종말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폐허가 유별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이었다. 오악사카가 이토록 철저하게 파괴된 건 역병의 소행이 아니다. 공항 확보에 앞서, 미군은 이 도시에 여러 차례의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멕시코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 본토에선 인명이나 재산 피해, 투표권을 보유한 이재민들의 여론, 복구사업의 어려움 등을 고려하여 시가지에 대한 폭격을 가급적 삼갔으나, 중미 지역에 대해선 그렇게 자제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크레이머의 정책은 그러했다. 거기에 생존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수준이라며. 다만 미국의 이익에 직결될 산업단지나 기간시설들 정도가 예외적으로 보존되었을 따름. 멧돼지 사냥 작전 당시 확보한 접경도시들도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있기는 하다. 개체 수 보존에 급급했던 변종들이 시간을 끌 요량으로 소수만 남기고 떠나버렸던 덕분이었다. 오전 8시 13분, 마침내 이번 작전에 참가한 모든 부대가 오악사카 북쪽의 분기점에서 합류했다. 그로부터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겨울은 폐허 한복판에 남아있는 동상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구 멕시코 유일의 인디오 출신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즈의 동상이었다. 무인기의 고해상도 카메라는 동상 아래의 문구까지 선명하게 잡아냈다. 병력이 늘고 시야가 탁 트이자 긴장도 풀린 정보장교가 그 문구를 어설프게 웅얼거렸다. “El respeto al derecho……. 음, 못 읽겠군요. 무슨 뜻일까요?” 참모진 중엔 스페인어 구사자가 없었다. 오아하카를 오악사카로 읽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이 뜻을 알았다. “내가 아는 사람의 말버릇이네요. 「다른 이들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곧 평화를 의미한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이미 지나간 종말 속의 짧았던 인연이다. 대통령의 동상엔 파편이 튀어 생긴 흠집이 많았다. 그것은 마치 상처 입은 대통령이 을씨년스러운 폐허를 둘러보는 것처럼 보였다. # 412 [412화] #높은 곳의 바람 (10) 독립대대가 최종 목적지인 오악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레인저 중대는 공항 본관 및 견인포가 방열된 주차장만을 요새화해놓은 상태였다. 활주로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기엔 병력이 모자랐던 탓이다. 황무지 같은 폐허에서 외로웠던 그들은 지원군의 도착을 반갑게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벼운 경례를 받고서, 겨울은 레인저 중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사흘간 잘 부탁해요, 대위.” “별말씀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로 상황보고를 받으시겠습니까?” 중대장, 그라프 대위의 태도에 다급함은 없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뭔가가 있진 않은 모양새라,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두 개 연대나 되는 공수군 대열은 아직 다 들어오지도 못했다. “아뇨. 같은 일 두 번 하게 만들긴 싫으니, 내가 공수군 쪽 장교들을 챙겨서 상황실로 가는 편이 낫겠네요. 어디로 가면 되죠?” 대위는 본관의 정면을 가리켰다. “저 안쪽입니다. 입구에서 보이는 대로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그렇군요. 그럼 우선…….” 겨울이 말끝을 흐리며 참모들을 돌아보았다. “포스터.” “네.” “같이 가서 시설과 물자부터 둘러봐요. 기존 정보와 차이가 있는지.” “알겠습니다.” 이후 임시로 중대별 경계구역을 할당한 겨울은, 브라보 중대 2소대의 1호차를 찾았다. 간밤의 교전에서 바위로 위장하고 있던 위퍼를 밟아 죽인 차량이었다. 비 개인 하늘 아래, 하차해서 몸을 풀고 있던 인원들이 대대장의 접근에 긴장했다. 그 중엔 소대장인 쑨시엔도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Sir?” “편하게 있어요. 장갑차 상태를 살펴보러 온 거니까.” “어,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만…….” “이거 말예요, 이거.” 겨울이 손가락으로 장갑차 겉면의 긁힌 자국을 가리켰다. 죽어가는 위퍼의 발악이 남긴 흔적. 미친 듯이 휘두른 부속지에 어느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을지 궁금했다. 겨울은 장갑 낀 손으로 흠집 생긴 차체를 쓸어보았다. 위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이미 서면으로 접했으나, 아무리 많은 자료를 접한들 직접 보는 것만 못한 법이었다. ‘흠. 예상보다 깊게 패였네.’ 재질이 철보다 무른 알루미늄 합금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깊다. 벌레가 갉고 지나간 자국을 닮았다. 그럼블의 주먹질엔 한참 못 미치는 위력이지만, 트릭스터의 채찍질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다. 애초에 톱니처럼 변형된 감염돌기가 줄지어 나있으니, 약하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 신형 전투복의 기본적인 방탄성능으로는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위퍼가 장갑차를 어떻게 해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증거로, 깊은 자국은 몇 줄기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그저 처절한 핏자국에 지나지 않았다. 감염쐐기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변형 감염돌기들이 장갑판과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나갔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 한 두 번 안에. 관찰을 끝낸 겨울은, 여전히 어수선한 진입로를 보며 쑨시엔과 병사들에게 물었다. “다들 첫 실전을 치른 소감이 어때요? 남기로 한 거, 후회되진 않아요?” “아닙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즉각적인 이구동성에 희미하게 웃고 마는 겨울. 일찍이 합동훈련에 돌입하기 전, 겨울은 이들에게도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서 빠질 기회를 주었다. 본디 전출을 시켜도 무방할 만큼의 경력을 쌓은 구 독립중대, 현 알파 중대 구성원들의 의사만 확인하려 했었으나, 숙고해본 결과 그게 무척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겨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 대한 불신이 생겨선 안 돼.’ 위험한 임무를 앞두고 알파 중대 인원들에게만 전출의사를 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중대 인원들은 겨울이 예전부터 함께 해온 부하들만 편애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게 뻔했다. 혹은 한국계만 아낀다거나. 가뜩이나 중대간의 감정이 미묘한 상황에서, 유일한 연결고리인 겨울에 대한 의심이 번졌다간 독립대대 전체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겨울의 웃음이 불안했던지, 쑨시엔이 새롭게 역설했다. “정말입니다!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비로소 진짜 군인이 된 느낌입니다!” 긴장한 눈치를 보니, 떠나도 좋다는 제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걸러내기로 보였나?’ 경계할 만도 한 게, 이들을 대신할 인력은 얼마든지 많았다. 난민구역에선 입대야말로 신분상승의 첩경으로 여겨지니까. 하물며 독립대대는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울타리다. 관계의 울타리에 민감한 중국인들의 생리상, 겨울의 의도를 곡해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았다. 워싱턴에서 생긴 알파 중대의 빈자리를 현지 인력으로 충원하는 걸 보고 신경을 더욱 곤두세웠을 개연성도 있겠다. 좋은 건 전부 미국인들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진실은, 그저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뿐이건만. “혹시 아까의 전투에서 저희에게 뭔가 부족함이 있었습니까?” 뜸을 들이던 쑨시엔의 질문이 겨울의 추측에 무게를 실었다. 겨울은 자연스러운 온화함을 만들어 그를 안심시켰다. “설마요. 첫 실전 치고 다들 무척 양호했어요. 지휘관으로서 만족스럽네요.” “제가 말을 바로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예요 그건?” “그, 바위 흉내를 내고 있던 괴물 말입니다. 당신께선 곧바로 간파하시고 밟아보라고 하셨던 건데, 전 위장에 특화된 괴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헤매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걸 여태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가. 겨울이 쓴웃음을 삼켰다. “개의치 말아요. 그 말만 듣고서는 누구라도 헤맸을 걸요?” “하지만-” “쑨시엔. 난 군인으로서의 당신에게 만족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어요. 당신도 자기 자신이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길 바랄 테고요. 최소한 내 부하로서는. 그렇죠?” 툭툭. 상급자로서 어깨를 두드려주는 겨울. 이는 위로이자 당부이며 어두운 지난날의 습관으로 말미암아 날 실망시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새사람이 된다면 거두겠으되, 백지선 시절의 버릇은 철저하게 버려야 할 거라고. 그러지 않으면 가차 없이 쳐내겠노라고. ‘기왕 있는 두려움이라면 좋은 쪽으로 이용하는 편이 낫겠지.’ 겨울의 생각이었다. 호의만으로는 바꾸지 못할 사람도 있는 것이다. 중국계 특유의 꽌시에서도 무턱대고 내주는 사람은 등쳐먹기 좋은 호구에 지나지 않는다. 쑨시엔이 마른침을 삼켰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나도 믿음으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하죠. 지켜볼게요.” 겨울이 눈길을 돌리자, 병사들은 저마다 결의가 굳은 얼굴들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게 너무 지나쳐서 어색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으나, 겨울은 티를 내지 않고 한 사람씩 짧게 격려해주었다. 언젠가 한 번 되새겼듯이, 거짓에서 시작되는 진실도 있는 법이기에. 이후로 브라보 중대의 다른 소대들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반응들이 대체로 다 비슷했다. 그나마 1소대장 왕커차이는 얽매일 과거가 없는 까닭에 긴장이 좀 덜했다. 중국계 2세로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중대장 개빈 챙 역시 1소대장이 가장 신뢰할 만 하다고 밝혔다. 그는 부하들 가운데 깡패 출신이 많다는 점이 못내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처음엔 솔직히 적응하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편견을 품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항상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더군요. 그렇다고 동포 운운하면서 친해지려는 수작질에 어울려주기도 싫었고……. 뭐, 지금은 괜찮습니다. 중대장으로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요.” 그래도 불만이 썩 크지 않은 것은, 애초에 미군 또한 병력자원의 수준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병이 번지기 한참 전부터 이어져온 문제였다. 중동에선 미군 병사들이 재미 삼아 민간인 사냥을 즐겼을 정도. 그 유명한 킬 팀 사건이다. 한편, 겨울의 물음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3소대장인 리아이링이었다. 그녀는 겨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못 박았다. “당신께선 제게 내 사람이 되라고 하셨었죠. 아버지와 제 과거를 버리고서.” “…….” “그 말씀이 진심이었다면, 다시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마세요. 이건 ‘내 사람’을 다루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냥 쓰세요. 가라는 곳으로 가고 하라는 일을 하고 죽이라는 놈들을 죽이겠습니다. 어떠한 의문도 없이. 그 대가로 전 당신의 그늘 아래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것들을 가질 겁니다. 그건 제 몫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다 내가 소위를 소모품처럼 써버린다면?” “당신께서 그럴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당신의 사람이 되지도 않았겠죠.” 겨울은 그녀의 눈에서 야망을 읽어냈다. 일본계가 다수인 찰리 중대의 기류는 브라보 중대와 또 달랐다. 그 공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질서에 속한 데서 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드디어 치른 첫 실전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통과의례를 치렀다는 느낌. 불확실한 죽음의 가능성보다는, 당장 조직에서 빠지거나 일탈행동을 하는 쪽을 더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대다수였다. 누군가 나서서 자기 의견을 밝히길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겨울은 언제든 개인면담을 요청해도 좋다고 알려두었다. 마지막으로 구 한국군 출신이 대다수인 델타 중대는 이제야 확실하게 겨울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우중영 대통령이 고르고 고른 인력인지라 작전에서 빠지길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러했다. 이쪽도 다른 중대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면담 기회를 열어둔 겨울이었지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어쨌든 겨울은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오해가 있든, 다른 사정이 있든,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Sir.” 공수군 연대장들을 챙겨 브리핑을 받으러 가는 길에, 싱 소령이 겨울에게 장검을 건네주었다. 거추장스러워 장갑차 공구함에 결속해두었던 물건이다. “아, 고마워요. 잊고 있었네요.” 겨울은 웃으며 칼을 받아 패용했다. 공수작전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검을 휴대하기로 한 이유는, 싱 소령이 측근이라는 사실을 알파 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대 전체에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시각적인 공통점이 보이면 아무래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 기우일지도 모르나, 군에서의 상하관계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 겨울은 병사들이 생소한 종교를 지닌 부대대장을 은연중에 경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부대대장이라는 직위 자체가 평소엔 대대장의 존재감에 가려지기 쉬웠으므로. 레인저 중대장의 브리핑은 예상대로 별 내용이 없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어도 상관없고요. 이전에 주둔하던 대대가 어쩌다 전멸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습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레인저 그라프 대위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처음엔 무척 긴장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껏 변변한 공격 한 번 받지 않아서 의아하던 차입니다. 변종들도 각개격파가 이익이라는 건 잘 알 테니, 수작을 부리려면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렸겠지요. 사흘간 경계만 철저히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퍼의 매복은 확인했나요?” “물론입니다. 의심스러운 지형지물은 다 한 번씩 갈겨봤습니다. 공항은 안팎으로 깨끗합니다. 하수도에도 트랩과 무인 포탑을 깔아놨고요.” “…….” 지도와 항공사진을 번갈아 살피며 고심하던 겨울이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 이 부근은 이상하게 멀쩡하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아아, 거긴 성모승천 대성당이 있는 구획입니다. 그 위쪽으로는 산토도밍고 대성당도 멀쩡하지요. 다른 건 다 박살내도 중요한 문화유산까지 건드리진 않으려나봅니다.” 겨울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오악사카 중심가의 대성당은 공항으로부터 5킬로미터나 떨어져있었다. 행군으로 한 시간이 걸릴 거리. 그저 하도 단서가 없어서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그라프 대위가 제안했다. “남아있는 흔적들을 직접 둘러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겨울이 돌아보자 다비도프 대령이 공수군을 대표하여 동의했다. “그럽시다. 방어진지와 경계선도 돌아볼 겸.” 겨울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413 [413화] #높은 곳의 바람 (11) 레인저 도착 이전에 증발한 대대급 병력은 공항 곳곳에 혈흔과 탄흔만을 남겨두었다. 시체라고는 작은 살점이나 뼛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의 것이든 변종의 것이든. 사라진 장병들은 역병의 새로운 숙주가 되었거나, 죄다 변종들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터. 과거의 변종들은 골수를 뽑아낸 뼈라도 남겨두었지만, 근래엔 그것마저 집어삼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강화된 위산으로 전부 다 녹여버리는 것이다. 헌터나 위퍼 같은 변종의 출현을 감안하면 당연한 변화였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이곳을 휩쓸었던 공격의 윤곽을 더듬기는 어려워졌다. “스캠퍼.” 다른 장교들이 겨울을 돌아보았다. 겨울은 흩어진 핏자국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강화종 스캠퍼가 있었네요. 특수변종 중에 몸집이 왜소하면서 민첩한 놈 말입니다. 이 출혈량과 범위, 뿌려진 형태를 볼 때, 상대적으로 작고 가벼운 변종을 팔에 매달고 몸부림친 흔적이에요. 대략 이쯤에서…….” 죽음이 지나간 자리를 어림잡는 겨울. “……물린 다음, 몸싸움을 벌이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군요. 피가 튄 반경이 줄어들었잖아요. 동시에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분포밀도가 높아졌어요. 출혈부위의 높이가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보다 둥근, 하지만 주변으로 자잘한 방울이 많이 튄 형태의 혈흔이 유독 한 지점에 집중된 걸로도 확인 가능해요. 엉덩방아를 찧은 충격이 원인이죠. 방향이 몰린 건 반대쪽으로는 본인의 몸에 막혔기 때문일 거고요.” “강화종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보셨소?” 절제된 흥미를 드러내는 217 연대장에게 겨울이 자신의 소매를 잡아보였다. “평범한 녀석의 이빨은 신형 전투복에 안 박힙니다. 동물로 치면 평균적인 사냥개 수준이거든요. 미성체 일반변종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역시 같은 이유였고요.” “흠. 제조사가 주장하는 카탈로그 스펙을 그대로 믿기가 찜찜했는데, 중령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실전에서 검증된 모양이구려.” “예. 아무튼 피가 쓸린 자국들은 뒤로 물러나려고 발로 밀어대느라 만들어졌을 것이고……. 결국 떨쳐내긴 했네요. 몸을 돌려 손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재차 달려든 스캠퍼에게 뒷덜미를 물렸어요. 그리고 다시 넘어지면서 죽는 순간까지 몸부림을 친 위치가 여깁니다.” 겨울이 새롭게 선 자리에서 발을 찍었다. 검붉게 메마른 웅덩이의 중심이었다. 반보 뒤엔 같은 색채의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듯 하오. 혹시 양친 가운데 한 분께서 경찰이셨소?” 331 연대장 다비도프 대령의 질문에 겨울은 멈칫 했다가 아니라고 답했다. “그냥 경험으로 체득한 겁니다.” “그거야말로 놀랍군.” 대령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겨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선 닿는 곳마다 죽음의 발자취들이 가득했다. 공항 건물의 중심, 이곳에서 공격당한 병력이 한둘이 아닌 듯 하다.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뭐가 말이오?” “다수의 스캠퍼가 경계망을 뚫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놈들은 단독행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한 개체뿐이었으면 여기까지 밀릴 리도 없고, 벽에 남은 탄흔 또한 다른 변종들을 상대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낮게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외곽 방어선의 교전 흔적과 이곳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넓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흔적들이 너무 적어요.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밀려났다기보다, 안팎에서 서로 다른 전투가 벌어진 것 같은…….” “공간적인 간격만큼이나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변종들의 습격이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고, 첫 교전에서 외곽 방어선을 포기한 병력이 여기서 전열을 재정비했을 수도 있잖소? 중간에 남은 혈흔은 아마 부상자들이 흘린 것들일 테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이곳의 교전흔적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석연치가 않습니다. 바깥의 적을 맞아 싸웠다고 보기엔 엉뚱한 방향으로 발사된 탄환이 너무 많네요. 건물 전후의 유리가 절반 넘게 멀쩡하다는 점도 이상합니다. 변종들은 보통 공격전면을 넓게 잡으니까요.” 밀집해서 좁은 전면으로 몰려와봐야 기관총과 유탄에 갈려나갈 따름이다. 소수라도 어떻게든 방어선에 뛰어드는 것이 우선이므로, 통제력을 갖춘 개체가 있을 경우 변종들은 최대한 넓은 전면과 많은 방향에서 낮은 밀도로 밀려든다. 화력 집중을 어렵게 하고, 집중의 효과도 저해하는 것이다. 이번엔 그라프 대위가 물었다. “그럼 내부로부터 시작된 공격이 있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높은 확률로요.” “잠복기를 거친 감염폭발……은 설득력이 없군요.” 대위가 추측을 번복하며 고심했다. 위퍼에 의한 감염이라면 잠복기가 있으니 영내에서 발생한 교전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감염된 사람 다수가 스캠퍼로 변이된 것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대위는 자신 없는 태도로 말했다. “새로운 특성을 획득한 위퍼가 매복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놈에게 감염되면 무조건 스캠퍼가 탄생한다거나.” 겨울은 부정적이었다. “글쎄요. 그래도 사람의 몸을 기초로 변형되는 건데 질량을 무시하긴 어렵지 않겠어요? 일정 시간을 두고 서서히 바뀌는 거라면 가능하겠지만, 이 현장엔 안 어울리는 이야기네요.” “그건 그렇군요.” 쉽게 물러나는 대위를 보고, 이번엔 217 연대장 브루실로프가 의견을 제시했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면서. “놈들이 땅굴을 팠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지는군.” 그러자 다비도프 대령이 눈을 찌푸렸다. “자네 농담하나? 이 아래는 몽땅 철근 콘크리트일 텐데? 그럼블 따위를 구겨 넣어서 어떻게 파헤친다고 쳐도 소음은? 진동은? 여기 주둔했던 병력이 모두 귀가 먹기라도 했을까?” “그거야 뭐…….” 겨울이 끼어들었다. “확인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조심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겸사겸사 위퍼가 위장했을 법한 지형지물도 다시 한 번 점검해보고요.” “음, 한 중령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비도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리진 않겠다는 제스처. 그러나 이런 논의가 무색하게, 땅굴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병사들이 바닥을 일일이 두드리며 두 번이나 살폈어도 수확이 없었던 것. 위퍼도 찾지 못했다. 놈들은 피부의 색과 질감을 바꾸고 골격을 비틀어 바위나 흙무더기, 수풀, 커다란 나무줄기 등의 흉내를 내곤 하는데, 공항은 그런 게 있으면 이상한 장소였다. 그렇게 살피고 다니던 겨울은 어느 벽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구석진 곳, 줄기줄기 금이 간 벽에는 오래 전에 한 번 보았던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눈이 없고 코가 긴 캐릭터가 벽 위로 얼굴만 반쯤 내밀어 이쪽을 엿보는 그림이다. 그 옆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킬로이 다녀감.(Kilroy was here.)」 겨울은 희미하게 웃었다. 높게 쓰느라 글씨가 엉망인가보다. 아타스카데로 정신병원에서 같은 낙서를 보았을 땐, 동행한 제프리와 소대원들에게 킬로이라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었다. 그러나 오래 웃지는 못했다. 그 아래의 다른 낙서들과 해묵은 핏자국들 때문이었다. ‘아니, 낙서라기보다는…….’ 공포와 절망의 기록에 가깝다. 신을 향한 절규가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적혀있었다. 비록 멕시코식 스페인어로 쓰여 있긴 했으나, 겨울이 보정 없이도 알아볼 만한 문장들이 많았다. 「신이시여, 저를 구해주소서!(¡Que Dios se apiade de mí!)」 좌에서 우로, 길게 보이는 모든 벽들이 한결같은 모습이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그렸고, 누군가는 그 위에 붉은 X표를 그어 놨다. 신을 저주하는 문장을 곁들여서. 겨울이 벽을 마주보는 자리엔 거친 스키드 마크가 남아있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여기까지 차를 몰고 들어와 벽을 들이받은 것이다. 모겔론스 확산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해보면, 봉쇄된 공항으로 들어오려는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역병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로 떠나기 위하여. 출입이 통제된 공항에서 여객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보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이 뒤집어졌을까. 혹은 멕시코가 몰락한 이후의 일일 수도 있었다. 변종들을 뚫고, 비행기를 찾아 탈출하려던 이들의 몸부림이 남긴 결과물이라거나. 상상을 접고 다시 벽을 보면, 스산한 느낌이 든다. 잘그락. 떨어진 콘크리트 부스러기들이 단단한 군홧발에 으깨지는 소리. 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사람은 통신병을 동반한 레인저 중대장이었다. “다 둘러보셨습니까?” “일단은요.” “역시 별 것 없지요?” “그러네요.” 겨울의 긍정에, 그라프 대위가 미미하게 안심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단서가 있었다면 저희가 놓쳤을 리 없지요.” “레인저니까요.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당신들의 능력을 의심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신중을 기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연한 절차였다고 생각합니다.” 대위가 가슴을 폈다. 철조망 박는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하기 짝이 없었던 낮을 거쳐, 해질 무렵이 되자 오악사카 시가지엔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보온병을 들고 경계임무 중인 간부와 병사들을 찾았다. “이렇게 덥고 습한 날 뜨거운 음료입니까?” 질린 기색으로 묻는 알파 중대 1소대장 송정훈 소위에게, 겨울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보온병에 꼭 뜨거운 것만 넣으란 법은 없잖아요? 오후 내내 냉동실에 넣어놨던 메즈칼이래요.” “메즈칼?” “술이요. 이곳 특산물.” 송 소위가 반색하며 잔을 받아들었다. 같은 단차의 병사들도 한껏 기대감을 드러낸다. 메즈칼은 용설란 줄기를 재료로 만드는 증류주다. 원산지까지 와서 맛도 보지 않고 가면 섭섭하지 않겠느냐는 게 레인저와 공수군 지휘부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임무 중이다. 겨울은 정말로 맛만 보여줄 작정이었다. “많이는 안 줄 거예요. 독한 술이니까.” “아…….” “술 냄새 풍기면 박 대위가 화낼걸요?” 실망하는 진석을 떠올리곤 시무룩해지는 정훈에게, 겨울은 딱 반 홉 가량의 베네바 메즈칼을 따라주었다. 잔의 크기가 크다보니 더욱 적어보이는 양. 정훈은 아쉬운 티를 많이 내며 단숨에 꿀꺽 삼켰다. 크으- 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어지간히 독하긴 한 모양. 잔이 병사들에게도 돌아간 뒤에, 정훈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날씨가 꼭 한국의 장마철 같습니다.” “그리워요?” “뭐 좋은 거라고 그립기까지 하겠습니까. 이젠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야죠.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이 아련함에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겨울은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 겨울이 철조망 바깥에 흩어진 돌들을 가리켰다. “저거 보여요?”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저 콘크리트 조각들.” “아아. 저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위퍼가 없다는 건 낮에 확인했는데요.” “……여기 있어요. 가까이에서 보고 올 테니.” 보온병을 내려놓은 겨울은, 장갑차를 위해 터놓은 출입구를 통해 공항 옆의 공터로 나아갔다. 방음림(防音林)을 싹 제거한 농경지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킬로이?’ 밭고랑에 떨어져있는 콘크리트 파편엔 킬로이의 일부가 그러져있었다. 겨울은 가까운 파편들을 발로 모아 얼개를 맞춰보았다. 그림이 완성된다. 다른 낙서들과 핏자국도 보였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겨울이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후, 공항 안으로 들어온 겨울은 거리를 두고 예의 그 금이 간 벽과 마주했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레인저 한 개 소대를 동반하고서. “저게 그겁니까?” 긴장한 소대장의 질문에, 겨울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죠.” 철컥. 소총을 고쳐든 겨울이 벽을 조준하여 한 탄창을 자동사격으로 긁었다. 카카카카카캉! 실내이기에 더욱 날카롭게 울리는 총성. 그 결과, 구멍 뚫린 벽에서 변색된 피가 흘러내렸다. 붉게 물든 킬로이가 눈을 떴다. # 414 [414화] #높은 곳의 바람 (12) 우둑 뚜둑 뒤틀리며 허물어지는 벽의 실체는 서로 몸을 포개어 낙서와 균열과 핏자국까지 모방한 3개체의 강화종 위퍼였다. 금이라고 생각했던 건 각 개체간의 틈바구니. 그 뒤로부터 보다 자그마한 잡것들이 무더기로 밀려 나왔다. “유탄!” 소대장이 악을 쓰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발사된 유탄들이 가로로 긴 범위를 무자비하게 갈아버렸다. 폭음이 다른 모든 소리를 살해했다. 시끄러운 고요 속에서, 겨울은 총을 쏘면서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혹시나 했건만, 위퍼의 위장능력이 상정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강화종은 위장 능력마저 강화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도-!’ 앞서 보았던 낙서는 갈라진 경계를 넘나들었다. 즉 서로 다른 개체 간에 연속성 있는 위장 패턴을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디딤발을 고치니 잔뜩 쏟아진 탄피가 밟혔다. 옆에서 갈겨대는 경기관총 탓이었다. 탄띠가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그만큼의 탄피와 클립이 튀어나왔다. 끊어지지 않는 발사음, 사선상의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위력. 쇄도하던 채찍질이 무력화된다. 부속지를 다친 위퍼가 들리지 않는 괴성을 내질렀다. 허나 이 정도의 화력을 퍼붓는데도 좌우로 화망을 벗어나는 놈들이 있었다. 전열이 후열의 방패가 되어준 덕분. 그 순간, 공항 전면의 유리창이 일제히 박살났다. 「Иди к черту, ублюдки!」 무전상의 욕설과 함께 돌입한 것은 연락을 받고 대기하던 공수군 기갑차량들이었다. 강렬하게 중첩된 조명이 앙상한 난쟁이 떼를 비춘 직후, 기관총과 기관포와 저반동포의 난폭한 삼중주가 직사로 작렬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리창들이 산산이 깨어져 비산한다. 「Убить их всех!」 다 죽여버리라는 명령이 거칠다. 삼중주의 음계는 탄종마다 달랐다. 초탄으로 고폭탄을 발사한 뒤에, 저반동포가 쏘아 붙인 차탄엔 2,200개의 텅스텐 알갱이가 들어있었다. 변종들의 몸뚱이가 물에 넣은 설탕처럼 풀어졌다. 스캠퍼 특유의 역관절이 수십 쌍씩 중력을 거슬렀다. 무전이 시끄러워졌다. 건물 내 다른 곳에서도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역시나, 위장된 벽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곳의 총포합주곡을 듣고 매복이 들통 났음을 눈치 챘을 터. 외곽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은 움직이지 말라고 통보해두었다. ‘내가 트릭스터라도 안팎에서 동시에 공격할 테니까.’ 이쪽이 함정을 간파한 시점에서 양동 계획은 어그러진 것이지만, 적어도 들이칠 준비는 되어있지 않겠는가. 방어선에 파고들 틈을 보여줘선 안 된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시야에 움직이는 것이 없어졌다. 겨울은 한숨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기관총 사수다. 잠깐 사이에 6백발을 퍼부은 그의 지원화기(M240L)는 총열 중간이 벌겋게 빛나도록 달아오른 상태였다.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나마 2백발만 연사해도 총열이 변형되기 시작하는 구형(M60)보다는 훨씬 양호한 신뢰성이었다. 사수가 신속하게 총열을 교환하는 동안, 겨울은 몰살당한 변종들을 눈에 담았다. 다른 방향과 위층에서 들려오던 총성도 점차 잦아드는 게 느껴진다. ‘직접 올 필요까진 없었나.’ 대대 지휘를 싱 소령에게 맡기고 온 것은 겨울 개인의 전투력과 기민한 대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까닭이었다. 낙서가 가득한 벽이 역병을 품은 암막이라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하기 힘들었기에. 실내에서 그럼블이라도 날뛰는 경우에는 기동이 불편한 기갑차량보다 겨울 한 사람의 대응이 더 낫다. 카카캉! 겨울의 총구에서 삼점사가 번뜩였다. 시체처럼 보이던 위퍼가 경련을 일으켰다. 피부색을 바꿔 총알구멍과 피 흘리는 모습을 모사하던 녀석이었다. 진짜 상처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죽기 전의 마지막 기회, 최후의 공격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만 조용하게 감염시켜도 운만 따라준다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테니까. “와, 진짜…….” 레인저 소대장이 입맛을 다신다.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병사들이 죽은 위퍼들을 향해 신경질적인 확인사살을 가했다. 차라리 화풀이에 가깝다. 「당소 선 댄스 3-1. 2층의 안전을 확보했다. 추가 매복이 있는지 점검하겠다.」 「당소 선 댄스 1-1…….」 선 댄스는 레인저 2대대 찰리 중대에게 부여된 호출부호였다. 3개소에서 피해 없이 교전을 종료했다는 통보가 잇따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낙서가 맹점이었다. 낙서와 기도와 절망과 저주로 가득한 벽이 위퍼일 거라곤 미처 생각지 않았으니까. 겨울도 처음엔 그저 스산하다고 여겼을 따름. 원래 여기 있었을 돌조각들을 바깥에서 찾지 못했더라면 결국 기습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알려진 것 이상의 위장능력이다. “이놈들, 강화종이겠지요?” 다가서는 소대장의 질문에 겨울이 끄덕였다. “확실히요.” 아니고서는 겨울의 감각을 이토록 완벽하게 교란할 수가 없었다. 낮에 보았을 때만 해도 간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겨울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죽음의 위기가 스쳐갔음을 깨닫고 가슴 한 편이 서늘해졌다. 앤이 있는 세계로부터 영영 멀어질 뻔했다. 시스템적인 보험을 걸어둘 수 없고, 봄은 답을 듣는 날까지 이 세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므로.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분명 징조가 있었는데도. 은연중에 이번 임무는 제로 그라운드 진공의 준비단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던 것 같았다. 벽이 사라진 자리, 자그마한 것들이 숨어있던 공간의 외진 사각을 향하여, 급작스러운 감각이 범람했다. 겨울은 어두운 윤곽을 포착했다. “하나가 더 있었……!” 발각당한 그림자가 발작하듯 요동쳤다. 새까맣게 물들어 응달에 녹아든 위퍼의 채찍질이 겨울의 본능적인 대응사격과 교차했다. “Sir! 물러나십시오!” 윽! 타격을 소총으로 막아낸 겨울이 옆으로 피하려 들자, 튕겨 나갔던 부속지가 정확하게 그 위치로 낙하했다. 콰작! 깔려있던 시체들이 일렬로 으깨어졌다. 근육의 수축과 함께 쐐액 당겨지는 채찍은 마치 유연한 톱날과도 같아, 죽은 변종들을 처참하게 찢어버렸다. 이놈 역시 강화종이다. 먼저 죽은 놈들보다도 윗줄인 듯 하다. 최소한 감마급 이상. 부속지의 속도가 빠르고 휘두르는 범위도 넓었다. 게다가 끝으로 갈수록 더욱 빨라진다. 전체가 강화근육인 채찍의 특성이었다. 간격이 벌어질수록 불리한 상대다. 뒤로 빠지면 오히려 위험해질 터. 횡으로 찢어지는 바람을 피해, 겨울은 오히려 앞으로 몸을 굴렸다. 끼에에에엑! 부정형의 괴물이 분노했다. 부속지는 뿌리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느리고 약했다. 끄트머리도 더 긴 거리를 돌아와야 하는 까닭에, 그 움직임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범인에겐 무리일지라도 겨울이 눈으로 보고 피할 정도는 되었다. 스스로도 아는지, 위퍼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 기형적인 괴물은 부속지의 맹렬함을 위해 본체의 안정성을 발달시켰다. 즉, 지근거리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능력은 없었다. 겨울이 방아쇠를 당겼다. 불길한 쇳소리. 철컥. 약실에서 탄이 씹혔다. 민감한 손끝이 미묘하게 비틀린 무게중심을 전한다. 채찍을 막을 때 탄창이 휘어 탄이 흐트러진 탓이다. 겨울은 짧게 신음하고 즉각 권총으로 교체하여 다섯 발을 쏘았다. 다가오는 파공성에 몸이 반응했다. 회피를 겸하는 전진. 이 악물고 일곱 발을 더 명중시킨다. 부속지가 고통에 뒤틀렸다. 움직임이 더욱 불규칙해졌다. 타앙! 레인저의 지원사격이 꽂혔다. 연사는 불가능하더라도 정확도 높은 단발사격은 가능하다. 지정사수에겐 그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괴물의 질긴 몸뚱이에서 피가 튀었다. 한 손엔 아홉 발 남은 권총을 쥔 채 방어를 목적으로 검을 뽑는 겨울. 새크라멘토 이래 검을 실전에서 쓸 일은 다시없으리라 믿었건만- 카가각! 지금 이 순간엔 방어 겸 견제용으로 쓸 만 했다. 격한 마찰에 불티가 튀고, 채찍에 붙어있던 감염쐐기들이 서슬 퍼런 강철에 갈려 후드득 떨어져 나왔다. 생체 채찍에서 사방으로 피가 튄다. 쐐기가 아무리 단단한들 이쪽은 칼날이 티타늄 합금이었다. 근력에서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 칼질로 번 찰나에 다시 권총사격을 가하는 겨울. 타탕! 다른 구경의 총성이 섞였다. 이번에도 배후의 지정사수들이다. 덕분에 간격이 두 호흡이나 더 좁혀졌다. 그러다보니, 뒤로 크게 휘어져서 후려치느라 부속지의 위력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칼이 또 한 번 쐐기를 깎아내고, 탄피를 연달아 배출하던 권총이 급기야 빈 약실을 노출시켰다. 초연이 피어오른다. 자지러지는 채찍이 겨울의 권총 쥔 쪽 팔뚝에 휘감겼다. 꽉 조여드는 통증을 무시하며, 겨울이 전력으로 장검을 내리쳤다. 완력에 체중을 실은 수직 베기. 잘리는 반원 안에 부속지의 뿌리가 있었다. 드드득!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근육다발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수직 내려치기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대각선 올려 베기가 채찍의 남은 밑동을 완전히 잘라냈다. 끼이이이이! 괴물이 경련을 일으킨다. 다수의 두꺼운 눈꺼풀 아래 작고 까맣고 많은 눈들이 겨울에게 못 박혔다. 흰자위마다 핏발이 서있다. 비록 공격수단을 상실했으되, 괴물에겐 아직 볼품없는 이가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물어뜯겠다고 버르적대는 굼뜬 몸에 강하게 내지른 칼날이 쑤셔 박혔다. 으직! 찌르고서 확 비틀어버리는 손아귀. 위퍼의 몸부림이 손잡이까지 전해졌다. 거칠게 칼을 뽑아낸 겨울은 죽어가는 몸뚱이를 연달아 찌르고 또 내리쳤다. 연체동물 같은 위퍼의 사지가 겨울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곧 힘을 잃고 축 늘어진다. 총성이 울리고 응달이 번쩍였다. 숨을 거둔 위퍼가 퍽퍽 얻어맞았다. 칼을 꽂아둔 채 권총 탄창을 교환한 겨울의 연속사격이었다. 겨울은 다시 한 번 약실이 비고서야 사격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의 폭력에 감정이 실려 있었음을 자각했다. 후퇴 고정된 슬라이드가 더러운 피에 젖어있었다. 손잡이를 따라 거뭇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등 뒤에서의 곤두선 물음에 겨울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돌아보면, 레인저 소대장은 경계심 짙은 표정으로 겨울의 팔뚝을 응시하는 중. 생체 채찍에 휘감겼던 자국이 핏빛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투복이 찢어지진 않았다. 그 아래의 살갗이 상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어떻게……전투복이 막아냈군요.” 느리게 총구를 내리는 그는 겨울이 감염되었을까봐 긴장한 것이었다. 사체에 꽂힌 장검을 회수하여 피를 떨쳐낸 겨울이 그 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검극이 조금씩 흔들린다. 호흡이 아직 거칠어서 그렇다. “봐요.” 거기엔 싸우는 내내 쳐낸 누런 감염쐐기들이 널려있었다. 소대장이 놀라워했다. “다 계산하고 일부러 팔을 내주셨던 겁니까?”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후, 허용해도 될 공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죠.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고요. 의도치 않게 공격을 묶어둔 셈이었으니.” 검을 수납한 겨울은 소총을 점검하며 심란함을 감추었다. 일그러진 실탄을 긁어내고, 새로운 탄창을 삽입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안정감이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장갑이 알루미늄이라곤 하나 장갑차에 흠집을 내는 공격을 총몸으로 방어한 것이다. 압력을 반사적으로 흘려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아예 폐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터였다. 겨울에게 통신병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Sir. 지휘통제실입니다.” 무선망에 미약한 잡음과 알아듣기 힘든 과거의 메아리가 섞여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트릭스터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무전을 보낸 사람은 다비도프 대령이었다. 정리는 레인저에게 맡겨두고, 겨울은 통제실로 와달라는 전언. 겨울은 금방 가겠다고 회신했다. 가장 치명적인 함정은 무력화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떤 변수가 더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 415 [415화] #높은 곳의 바람 (13)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폐허로부터, 밤처럼 까만 변종들이 공항을 향해 몰려왔다. 그 형상들이 어두운 야경에 녹아들었다. 견인포대 입장에선 태반이 최소사거리 안쪽인지라, 박격포반이 연달아 조명탄을 쏴 올린다. 허나 검은 것들의 검은 그림자가 시각적인 혼란을 유발했다. 육안으로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외곽 병력은 적외선 관측에 의지하여 대응했다.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다비도프 대령이 기가 막힌 소리를 냈다. “위장색?! 설마 위퍼의 특성을 모든 변종들이 공유하는 건가?!” 겨울이 대령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몸에 검댕이라도 바른 거겠죠. 도시 전체가 폭격을 맞은 폐허니까요.” 몸뚱이를 문댈 찐득한 그을음이야 얼마든지 널려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겨울은 그렇게 판단했다. 저쪽은 개활지를 가로질러야 할 변종집단이었고, 이쪽은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한 기갑부대였으므로. 또한 기본적인 방어력이 있는지라, 어설픈 돌파로는 무너뜨릴 수도 없다. 그럼블 쯤 되는 괴물, 혹은 산성과 인화성 아기를 이고 온 변종들이 대열을 파고든다면 모를까. 트릭스터는 필시 공항 내부에서 발생한 교전을 눈치 채고 공격을 개시했을 터. 허나 곧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매복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채 무력화되어버렸음을 깨달을 것이다. 바깥에서 들이치는 공세만으로는 두 개 연대와 한 개 대대의 기계화 방어선을 무너뜨리기에 부족하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피와 살로 갈려나갈 뿐. 새까만 변종들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면 결국 물러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수가 없다면. 여기서 다시 떠오르는 게 변종들의 굴착 시도인데, 적어도 공항 안팎으로는 땅굴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만에 하나 활주로에서 가까운 바깥에 출구가 있어도 무방하다. ‘생매장시키면 그만이니.’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이쪽의 사정거리 안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공수전차가 고폭탄 한 발만 때려 박아도, 여러모로 부실한 터널은 출구로부터 수십 미터 뒤까지 붕괴할 게 뻔했다. 산채로 매몰된 변종들이 과연 얼마나 길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들이 대동소이한지, 겨울 외의 장교들도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일선에서 잘 대응하고 있는지라 추가적인 지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순수한 힘겨루기에 가까운 싸움이기도 했다. 버티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단순한 전장. 하늘로부터 대각선으로 작렬하는 섬광들이 있었다. 지름 수 킬로미터의 원을 그리며 전장 상공을 선회하는 건쉽(AC-130) 두 기의 지원 포격이었다. 그을음을 발라 색을 감추더라도 체온까지 감추진 못한다. 비 개인 하늘, 관측에 장애물이 없어진 복수의 공중포대는 이쪽에서 불러주는 좌표 없이도 정확한 포격을 꽂아주었다. 땅거죽이 벗겨진다. 그 위의 변종들이 무참하게 찢어졌다. “저건 또 뭐야?!” 217연대장, 브루실로프가 당혹감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궁!」 포탄이 터질 때마다 땅이 인위적인 형상으로 푹푹 꺼져 들어간다. “……와, 이 교활한 새끼들!” 실로 그러하다. 교전현장에 띄워놓은 무인기는, 홀연히 나타난 지그재그형의 공격용 참호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도 파도 자꾸 무너지니까, 아예 처음부터 무너질 걸 전제로 땅굴을 팠구나.’ 과연 트릭스터다운 발상이었다. 이로써 교전거리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직사화기 위주인 독립대대와 공수군 입장에서, 겨우 70미터 전방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변종들은 한층 상대하기 까다로워진 적이었다. 다비도프 대령이 동요하는 대열을 통제했다. “흔들리지 마라! 가까이 오면 그냥 밟아! 몇 놈 놓쳤다고 돌아보지 마! 이쪽은 이쪽이 알아서 한다! 너희는 전방만 봐! 알겠나?!” 그리고 대령은 겨울과 그라프 대위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지휘 장갑차로 옮깁시다. 대위, 나머지는 맡겨도 괜찮겠지?” 공항 안에 남을 병력은 레인저 중대밖에 없다. 대위가 까딱 끄덕였다. “염려 놓으십시오. 우린 레인저입니다. 얼마가 들어오든 다 죽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예로서 내비치는 자신감에, 다비도프 대령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허나 이런 각오가 무색하게, 변종들의 공세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교활한 변종이 보자니 아무래도 승산이 낮았던 모양. 사실상 승패는 매복이 전멸한 시점에서 갈렸다고 봐야 한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을 길게 끄는 건 트릭스터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둔함이다. 놈은 공들여 준비한 습격의 실패를 미련 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발적으로 시작된 교전의 허무한 끝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무수한 시체들을 남겨두고 물러가는 변종들을 보며 홀로 복잡한 심경에 젖어들었다. 오늘따라 스스로가 낯설었다. 전과 달라진 죽음의 의미를, 새로워진 두려움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인 전투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졌는데…….’ 모든 사후를 통틀어 경험도, 기술수준도 지금처럼 충실했던 순간이 없었다. 실질적인 성장 한계에 직면했다고 봐도 좋겠다. 이 이상 더 강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약해진 자신을 느낀다. 최소한 겨울 본인이 체감하기로는. 손아귀에 아직 감정적으로 휘둘렀던 폭력의 조각이 남아있는 듯했다. 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러하다. 특히나 이제까지의 삶에서 행복이 희박했던, 즉 겨울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애정이 깊어질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 또한 커지는 게 정상이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강렬한 유혹이 겨울을 번민하게 만들었다. 이후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은 빈번히 겨울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탓일 것이다. 겨울은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엔 애를 먹었다. 처음 하는 고민은 아니었으되, 이번엔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사흘 뒤, 공항을 공식적으로 인수할 신규 병력이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도착했다. 다 합치면 무려 한 개 사단에 달하는 규모. 주둔병력 강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경 2백 킬로미터 이내에 제대로 된 공항은 여기밖에 없으므로, 멕시코 중남부에서의 원활한 공중지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변종들에 의해 파괴된 공항이 많기도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오아하카 국제공항의 시설이 멀쩡했던 것부터가 함정의 징후였다. 사단 직할 공병대는 도착하자마자 활주로 확장공사에 돌입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활주로가 하나뿐이었기에, 공수군 및 독립대대, 레인저의 복귀일정은 7월 3일까지 늘어졌다. 각 부대별로 조금씩 나뉘어 돌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장 앞서 철수할 기회를 얻은 것은 독립대대의 알파중대였다. 파견된 순서로 따지면 첫 번째는 레인저가 되어야 하겠으나, 그들은 이 지역에서 다른 임무를 받을 예정이라 했다. 제로 그라운드 진공이 예정된 독립대대와는 입장이 달랐다. 대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남기로 한 겨울은 수송편을 기다리는 알파 중대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괜히 미안해하지 말고, 먼저 가서 푹 쉬어요. 독립기념일까진 다른 임무가 없을 테니까.” 도리어 기념일 당일엔 어딘가 행사에 끌려 나가느라 제대로 쉴 틈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교전으로 독립대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으니, 어떤 식으로든 대중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을는지. 제로 그라운드 진공을 앞두고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과정이었다. 겨울이 곱씹었다. ‘독립대대 투입이 부적절하다는 여론도 없는 건 아니니까.’ 백분율로 따지면 얼마 안 되겠으나, 여론의 변화무쌍한 속성을 감안하면 그 몇 퍼센트의 불씨도 꺼둘 수 있을 때 꺼두는 편이 나은 것이다. 이번 전투가 쓸데없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한 개 대대의 의문스러운 실종과 그 진실이라는 것부터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 아니겠는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좋다는 건 백악관에서 이용하기도 좋다는 말이다. 미군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산악공수 기갑대대의 성공적인 데뷔였다. 진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보단 대대장님께서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요 며칠 무척 피곤해보이셨습니다.” 겨울은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아는데, 사적인 고민이 있었을 뿐이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젠 좀 괜찮아졌거든요.” 앤과의 통화를 미뤄서 더했다. 고민이 깊었던 밤마다 충동에 못 이겨 전화를 걸었다면, 영상통화가 아니라 한들 목소리만으로도 이상이 전해졌을 것이다.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떫은 진석을 보더니, 은근히 같은 염려를 공유하던 유라가 겨울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Sir. 기분전환 겸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재밌는 이야기?” “넌센스 퀴즈인데요.” 이 대목에서 진석이 신음했다. “만약 변종들이 도망가는 우사인 볼트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지력보정이 아니더라도 우사인 볼트가 전설적인 육상선수라는 건 아는 겨울이었으나, 퀴즈의 답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리송한 겨울을 보곤, 유라가 웃으며 답을 말했다. “정답은, 패스트푸드입니다!” “…….” 진석이 다시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아저씨가 멀쩡한 사람을 망쳐놨다면서. 겨울은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전에는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하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 당황한 겨울이 폭소하는 싱 소령을 돌아보았다. 당황한 사람이 겨울 혼자만은 아니어서, 디안젤로 중사와 메리웨더 선임상사도 조금 놀란 느낌으로 소령을 보고 있었다. 진석은 완전히 벙찐 표정이다. 한참을 더 웃은 소령이 유라에게 말했다. “그거 아주 재미있군!” 유라는 기뻐하며 다시 겨울을 응시했다. 겨울은 늦지 않게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라의 낯빛이 한 층 더 환해졌다. 싱 소령이 다른 건 없느냐고 묻는 통에, 유라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을 낡은 유머를 엄청난 기세로 쏟아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진 않았다. 새로 착륙한 수송기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 덕분이었다. “아, 이제야 군견이 오네요. 일찍 왔으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텐데.” 유라의 아쉬움은 위퍼의 매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시각적인 위장이 탁월하고 체온 조절을 통해 적외선 탐지조차 무력화하는 괴물이지만, 군견의 후각마저 피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그러했다. 다만 넘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군견을 무기처럼 찍어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기존의 군견들도 위퍼 수색에 적합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더욱이 공수강하가 가능한 군견부대는 정말로 얼마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 외의 대안으로는 열압력탄의 대량생산이 있었다. 어디든 의심스러우면 다양한 규모의 충격파로 휩쓸면서 지나가자는 이야기. 산업생산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계획이다. 유라가 제안했다. “우리 폐하를 훈련시켜보는 건 어떨까요?” 겨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다른 군견 투입을 기다리는 게 빠를 거예요. 게다가 폐하는 관절질환이 있잖아요. 군견으로 뛰기엔 부적합해요.” “아……. 그랬지 참.” 아쉬워하는 유라. 그러더니 이번엔 상관이 찬 장검을 본다. “그 칼, 잠깐 봐도 괜찮을까요?” 겨울은 선선히 검을 풀어 내주었다. 받아든 그녀는 스릉- 하고 칼을 뽑아 초여름의 햇살을 반사시켰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우기(雨期)의 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한 광채로 번뜩였다. 유라가 탄성을 흘렸다. “와, 그렇게 부딪혔는데도 이빨이 전혀 안 빠졌네요.” 현장에 없었던 유라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투기록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저도 돌아가면 실전에서 쓸 칼 한 자루 장만할까 봐요.” 성격상 지나가는 말이 아닌 듯 하여, 겨울은 그녀를 만류했다. “그 무게면 차라리 탄창을 추가로 휴대하는 편이 나을 걸요?” “음……. 그건 그렇겠지만…….” 겨울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냉병기가 동일한 무게의 탄약보다 효율적이긴 어렵다. 유라는 아쉬운 눈치로 검신을 쓰다듬는다. 그 손끝을 좇던 겨울의 눈길이 이제 거듭 읽어 익숙해진 문장의 음각 위에 머물렀다. 신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소령. 나랑 신의 이름에 대해 나눴던 대화, 기억해요? 소령은 내가 신의 이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겨울이 묻자, 싱 소령은 이채를 띠며 끄덕였다. # 416 [416화] #높은 곳의 바람 (14) “물론입니다. 당신께선 제 믿음의 기준으로도 훌륭한 분이라는 뜻이었지요. 수양에선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함께 드렸던 것 같군요. 비록 신앙은 없으실지언정 진실 된 마음의 길을 걷고 계시니, 그 길 끝엔 결국 신의 이름이 있을 거라고. 맞습니까?” 정확하다. 무언으로 긍정하는 겨울에게, 싱 소령이 묻는다. “헌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건 어인 이유입니까?”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할 것?” “왜 이름이죠?” 그렇다. 어째서 이름이라 하는가. 겨울의 질문이 이어졌다. “당신은 그때 양심과 연민과 용기와 사랑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있는 신의 이름이라고 설명했어요. 그게 시크교의 교리라고. 그런데 그걸 왜 신의 이름이라고 하죠? 신의 뜻이나 가르침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지 않아요?” 양심에 따르라.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라. 불의에 맞설 용기를 품어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비슷한 가르침들이 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에게 제시하는 삶의 올바른 방향성들. 그러나 그 방향성을 신의 이름이라 이르는 건 시크교가 유일했다. 적어도 겨울이 아는 한에서는. “허허. 좋은 질문입니다.” 싱 소령이 흐뭇하게 웃었다. “간단히 답해드리자면,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존재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신의 이름이란 신의 정체성과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즉 신은 곧 양심이시며 사랑이시며 연민이시자 용기이십니다. 각각의 미덕은 신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나침반을 따라 신과 하나 되는 삶을 찾는 구도자들인 것입니다.” “정체성이라…….” “예. 그 분께선 사랑으로 만물을 빚으시고 자신의 존재를 살아 숨 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깃들게 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있도록. 그래서 우리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사랑을 하고 연민을 알며 불의에 맞서 싸울 용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대대 참모진과 알파 중대 간부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겨울에겐 의미 깊은 대화였다. 사후에 마음 하나 지킨 끝에 기계장치의 신에게 이름을 주게 된 겨울은, 줄곧 봄이 어떤 계절이 될지를 번민하고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이 또한 신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싱 소령의 이야기가 강렬한 은유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겨울은 소령의 말을 곱씹었다. ‘신과 하나 되는 삶.’ 봄은 겨울에게 신 포도에서 정녕 신 맛이 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겨울 스스로도 안다. 마음을 절박하게 지켜왔던 것은, 그 외에 달리 남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의 나머지를 다 잃어버린 사후에서 마음이나마 한겨울로 남아있고 싶었을 뿐. 그 한겨울은 스스로가 살아있던 시절의 화석과도 같은 무언가였다. 그러나 스스로가 이미 죽었다고 여기던 나날은 끝났다. 이젠 화석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할 때다. 그렇기에 더 망설임이 많은 것이고. 아니, 망설인다기보다는 살아있다는 체감 자체가 낯설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저기, 이거…….” 끼어들 틈을 노리던 유라가 겨울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검을 받아 수납한 겨울은, 하필 이 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공교롭다고 생각하며 스쳐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밖에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싱 소령의 말에, 아니라고 하려던 겨울이 잠시 멈칫 했다가, 이내 방어적인 태도로 물었다. “소령이 보기에 나는 예전과 같은 사람인가요?” “예전이라 하심은, 예의 그 대화를 나누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은요.” “흠.” 질문의 의도를 고심하며 수염을 쓰다듬던 소령의 시선이 겨울의 검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뭔가 깨달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이 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스스로가 전과 달라졌다고 느끼시는 모양이군요.” “……네.” “허허.” 소령이 다시 웃는다. 필시 칼을 뽑아야만 했던 순간의 두려움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의 이목을 의식하여 간접적으로 돌려서 답한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니 그저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이 향하는 길을 걸으십시오. 길이 항상 곧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거나 부끄러워지는 순간들도 있겠지만, 결국은 당신의 최선이 곧 사람의 최선일 것입니다. 대대장님께선 제가 이제껏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사람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나의 최선이 사람의 최선이다. 겨울은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말이네요.” “부담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녜요. 도움이 됐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돌과 다른 무게감이 여전했으되, 겨울은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됨됨이와 별개로, 겨울의 입장에선 싱 소령 또한 부하장교였으니까. 약한 모습을 길게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영문 모를 흐름이 일단락되자, 유라가 새롭게 물었다. “Sir. 혹시 검술을 따로 배운 적 있으세요?” 겨울이 부인했다. “아뇨.” 「근접무기숙련」이 존재하긴 해도, 이에 따른 무기 사용이 어떤 정해진 형식을 따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무기를 어떻게 쓰면 좋은가를 감각적으로 일깨워주는 기능일 따름. “그럼 이건 거짓말이네요?” 확인하듯 보여주는 건 빈 탄약상자 위에 놓여있던 신문이었다. 오악사카 국제공항에서의 전투를 분석하는 대목에서, 기자는 겨울이 갓카(Gatka), 즉 시크교도들의 검술을 사용했다는 전문가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었다. 겨울은 대충 훑어보고 돌려주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슬쩍 훔쳐본 싱 소령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학창시절에 이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실전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면 오히려 역효과일 것인데…….” “그래요?” “예. 갓카는 영국의 식민통치기를 거치면서 실전무예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렸지요. 지금은 거의 칼춤 추는 요가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나마 실전적이라는 유파도 실제로는 영국에서 전파한 펜싱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반쪽만 남은 전통입니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몇몇 간부들이 보였다. 대개 알파 중대 소속이었다. 싱 소령이 언급한 전통의 단절이 난민들의 처지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 난민구역 사람들에게 있어선 미국적인 생활이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자 품위 있는 양식이다.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같은 난민들과 마찰이 잦고, 종래엔 그들과의 공통점을 혐오하게 되는 건 덤이었다. 그나마 겨울동맹은 그런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아쉽다.” 신문을 접은 유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장님이 배운 거면 나도 배우려고 했는데.” 겨울은 이 말을 듣고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있는 미덕이라고 했었지.’ 쿠데타 진압 후 부상으로 입원해 있을 당시, 앤이 워싱턴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하여 들려주었던 말이다. 전통과 미덕, 정체성. 그리고 유라가 그렇듯이, 사람들이 겨울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무언가. 뭔가 어렴풋한 감각이 겨울의 뇌리를 간질였다. 구체화되기 이전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사색이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수송기가 착륙했고, 알파 중대원들이 줄지어 탑승했다. 중대 간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남은 건 추가적인 장비수송에 필요한 소수의 인원들뿐이었다. “그럼, 면목 없지만 먼저 가있겠습니다.” 중대장인 진석의 경례에, 겨울은 온화하게 당부했다. “아까 말했듯이, 다들 푹 쉬게 해줘요. 이번이 진공 이전의 마지막 휴식이 될지도 몰라요. 제대로 된 휴식 말예요.”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떨떠름한 반응이었으나, 진석이 겨울의 지시를 어기진 않을 것이었다. 알파 중대를 보낸 뒤, 겨울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지난 교전 현장을 돌아보았다. 변종들의 굴착 능력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현장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던 겨울의 견해는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자료였다. “땅굴 자체로는 여전히 쓸모가 없어 보이죠?” 겨울의 말에, 싱 소령을 위시한 참모진 전원이 동의한다. 포스터 대위가 말했다. “무작정 땅을 판다고 다가 아니니까요. 아직은 깊이와 방향을 유지할 능력이 없나보군요. 그건 트릭스터가 직접 들어가더라도 안 될 겁니다. 위험해서 그러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굴이 무너지며 형성된 참호선은 여러모로 엉성한 구조였다. 일단 똑바로 뻗는 구간부터가 드물다. 뚝뚝 끊어진 구간이나 공항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휘는 구간도 많았다. 땅 속엔 방향과 깊이를 확인할 지표가 없는 까닭. 전파도 통하지 않으니 교활한 괴물이 많이 답답했을 듯하다. 기습적으로 교전거리를 축소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으나, 땅굴의 기술적 수준은 딱히 나아진 게 없었다. ‘침수가 발생했을 때 대응할 능력도 결여되어있고.’ 그간의 폭격과 포격에서 예외가 되었던 건물들, 즉 중심가의 성모승천 대성당과 산토도밍고 대성당에서도 고단한 굴착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관측을 피해 파낸 흙을 빼내는 장소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지하공간은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비어있었다. 바닥엔 시체 썩은 내가 나는 오수가 발목 깊이로 고인 채였고. 보이는 굴 입구에 무인차량(UGV)을 들여보내보니, 굴은 갈수록 더 깊게 침수된 상태였다. 땅굴의 방향을 지도에 대입하자 답이 나왔다. 시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 그 물길 아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우기에 불어난 강물이 더 무거운 압력으로 작용했을 게 뻔했다. 결론은 이번처럼 땅굴을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만 경계하면 된다는 것. 그래도 보고서를 써야 하니, 겨울은 꽤 긴 시간 동안 땅굴의 흔적을 더듬으며 다녔다. 충분한 양의 사진과 메모가 모였을 즈음엔 어느덧 오악사카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로부터 날짜가 경과하여, 독립기념일 전날의 겨울은 콜로라도로 돌아와 덴버에 머물렀다. 원래 주둔하던 리드빌이 아닌 이유는 독립대대의 퍼레이드 참가 때문이었다. 기념일 당일엔 부대 전체가 시가지를 행진하기로 되어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그나마 D.C까지 불러내지 않은 게 다행이지.’ 제로 그라운드 진공에 대한 불안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겨울도 이 일정이 반가웠다. 오랜만에 앤을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까. 그녀는 시간상으로 채 하루가 되지 않을 만남을 위해 D.C에서 여기까지 오겠노라 선언했다. 항공편으로 2,400킬로미터를 왕복하는 피곤한 길. 그 적극성이 고마운 한편으로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겨울이었지만, 그보다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기대감이 더 강했다. 이 얼마만의 재회인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벚꽃 피던 계절이니, D.C를 떠난 뒤로 벌써 3개월이 넘게 흘렀다. 그때 비로소 서로에게 서로를 약속했던 두 사람에겐 너무도 길고 가혹한 기다림이었다. 오늘, 겨울은 자신이 그 그리움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네 시에 만날 줄 알면 세 시부터 행복해진다던 말이 정확했다.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앤이 인용했던 마지막 구절이다. 오늘의 겨울이 바로 그러하다. 겨울이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게다가 때때로 실수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참모진을 비롯한 대대 관계자들이 깊은 당혹감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겨울의 상태를 걱정했고, 겨울은 그때마다 약간의 창피함을 느꼈다.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아서 더 문제였지만. 그리고 지금, 덴버의 서늘한 밤, 개인적인 외출을 허가받은 겨울은 사복 차림으로 도시 중심가의 호텔을 찾았다. 앤이 예약한 방은 최상층이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조차도 길었다. 똑똑. 선글라스를 벗고 문을 두드리니, 그 너머로부터 초조한 음성이 돌아왔다. 「누구세요?」 “나예요.” 겨울이 답하자,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겨울!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 두 눈이 커지는 앤. 겨울은 그녀에게 입 맞춘 채로 긴 숨을 내쉬었다. 꽉 끌어안은 품속에서, 잠시 굳어있던 앤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녀의 손이 겨울의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입술이 떨어진 뒤, 눈을 감고 여운에 잠겨있던 앤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계획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문을 닫은 그녀가 다시 하는 말. “우리, 우선 급한 용무부터 해결하죠.” 겨울이 끄덕였다. 앤은 묶어두었던 머리를 풀어헤친 뒤, 겨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목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인다. 고백했던 날 한 번 보았던 모습. 겨울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정말로 좋아했다. # 417 [417화] #높은 곳의 바람 (15) 간격을 두고 세 번의 정사를 치른 후엔 기분 좋은 나른함이 찾아왔다. 잠에서 갓 깨었을 때 느낄 법한 가벼운 피로감. 한껏 뜨거워졌던 앤의 체온은 아직도 다 식지 않았다. 겨울은 그녀의 어깨에 키스하고, 목에 키스하고, 볼과 이마에도 키스했다. 보이는 대로 아름답고 손닿는 대로 부드러운 몸이었다. 앤은 겨울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며 키득거렸다. 젖은 머리칼에선 처음보다 더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실제 이상으로 감정의 영향이 지대할 것이다. “아, 역시 곤란해요.” 미소를 머금은 앤이 짐짓 괴로운 투로 속삭이는 말.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도 마냥 좋다는 게……. 이대로 가다간 아침까지 이러고 있을 게 뻔해요. 계획하고 너무 달라진다구요.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는데…….” 겨울은 그 마음을 이해했다. 겨울의 일정은 독립대대의 일정과 같다. 고로 이번이 제로 그라운드 진공 이전의 마지막 만남이 될 확률이 높았다. 깨어있는 시간에 더 많은 것을 함께하고픈 욕심을 낼 수밖에.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의 체온과 속삭임과 침대의 유혹을 떨쳐낸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삼십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함께하는 샤워 또한 만만찮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심지어 옷을 입는 것조차도 느렸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손을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단추를 채워주는 단순한 일에도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 것인지. 그러던 중에 다정한 입맞춤도 여러 번이었다. 여기에 앤이 스스로를 간단히 꾸미느라 소요된 시간도 있었다. 문을 나서서, 앤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중에 같이 살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정시에 출근하기 어렵겠어요.” 겨울은 설익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의 첫 행선지는 레스토랑을 겸하는 카페였다. 한시라도 빨리 오고 싶었던 앤은 퇴근을 앞당기고도 끼니를 부실한 기내식으로 해결했다. 더욱이 조금 전에도 적잖은 열량을 소모했으니, 수사관으로서 단련된 몸에 배가 많이 고플 법도 했다. 다행히 덴버는 미국 도시 치고 야간의 치안이 훌륭한 도시였고,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다운타운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당연히 심야영업을 하는 업소도 많았다. 내일의 퍼레이드를 기념하여 벌써부터 전등을 밝혀놓은 거리가 아름다웠다. 고도가 고도인지라 초여름의 밤에도 찬바람이 불었고, 덕분에 성탄전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풍경이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겨울은 치즈, 양파, 양송이, 베이컨을 속에 채운 오믈렛과 알싸한 향이 배인 무알콜 사이다를 주문했다. 앤은 메인으로 부드러운 빵을 곁들인 수프와 토마토, 바질, 치즈를 넣어 구운 파니니, 음료로는 코코넛 크림소다를 선택했다. 겨울은 시선을 밖에서 안으로 옮겨, 선글라스 너머로 다른 테이블들을 한 번씩 곁눈질했다. 느긋한 박자의 재즈가 흐르는 실내에서, 각각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것처럼 소소하게 웃고 떠들었다. “감회가 새로워요?” 물어본 앤이 고개를 돌리는 겨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겨울은 솔직하게 끄덕였다. “안전지대의 평화를 경험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러네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으니까요. 어쩐지 낯설다고나 할까…….” 이게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가 3년째에 접어든 풍경이라고 생각하면, 앤의 말마따나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공급이 불안정해진 일부 식료품, 예컨대 카카오 같은 것들은 가격이 많이 오르기도 했으나, 그보다 많은 먹거리들이 예전의 시세를 유지하고 있다. 앤이 겨울을 따뜻하게 응시했다. “자부심을 가져요. 당신의 헌신이 없었다면 반쯤은 없었을 풍경인걸요.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고요.” “전부는 과장이 너무 심한데요.” “글쎄요. 최소한 나한테는 맞는 말이죠. 난 당신 덕분에 살아있는 거니까요. 당신 덕분에 내 일을 계속할 수도 있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겨울은 입을 다물었다.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오늘이 아니고선 확인할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테이블 위로 앤의 손이 올라왔다. 원하는 바를 굳이 말로 전할 필요는 없었다. 손을 포개어 순면 같은 감촉을 즐기고 있으려니,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살짝 놀라 시계를 보자 20분이 흐른 상태였다. “얼른 먹어봐요. 이곳이 평가가 참 좋았거든요.” 더욱 허기가 진 건 본인일 텐데, 앤은 깍지를 끼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겨울을 보고 있었다. 겨울이 오믈렛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노르스름하게 익은 겉면이 칼날에 살짝 눌린다 싶더니, 이내 톡 터지듯 베이며 저항 없이 스르륵 갈라졌다.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치즈로 범벅이 된 속이 느릿느릿 흘러나온다. 겨울은 그것을 잘 모아 포크 위에 얹고는, 한 입 크게 집어넣었다. 후와. 한 꺼풀의 계란 너머로 갓 구워낸 치즈가 입안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치즈와 베이컨의 짠맛을 아삭한 식감의 구운 양파와 심심하고 보들보들한 양송이가 중화시켰다. 버섯은 눕혀서 큼직하게 썰어 씹는 맛을 풍부하게 했다. 씹을수록 괜찮아지는 맛이었다. “어때요?” 앤의 질문에, 겨울은 한숨을 흘렸다. “맛있네요. 정말로.” 바깥세상에서의 유년기가 유년기인지라 맛없는 음식이 드문 겨울. 그러나 맛있는 것과 더 맛있는 것을 구분할 줄은 안다. 이 오믈렛은 전투식량보다 아주 훌륭했다. 브래넌 부인의 요리와 비교해도 더 낫다고 해야 할 정도. 앤은 무척 흡족해하며 자기 몫의 식사를 시작했다. 이번엔 겨울이 그녀가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그조차도 예뻐 보였다. 눈길을 의식한 앤이 애써 수줍은 웃음을 참았다. 그 미소는 각자의 그릇이 비는 순간까지 수시로 나타났다. 이따금씩 그만 좀 보라고 서로를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식사에만 몇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강변의 공원을 찾았다. 낮이면 시민들이 물놀이와 래프팅을 즐기는 장소지만,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는 인적이 드문 산책로가 되었다. 콜로라도답게 어디선가 마리화나 태우는 냄새가 나고, 종종 노숙자들이 모여 불을 쬐는 장소도 보였으나, 대체로 조용하면서도 한적한 길이었다. 북미에 역병이 상륙하고서부터 시민 순찰대가 조직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므로, 역병 이전보다 오히려 더 안전해진 측면이 있었다. 앤이 아쉬워했다. “날이 조금만 더 따뜻했어도 나란히 앉아서 발을 담그고 있는 건데.”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그래요, 나중에.” 다짐하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앤. “겨울, 혹시 플라이 낚시 해본 적 있어요?” “음……. 아뇨.” 뜸을 들이다가 부정한 것은, 낚시 경험 자체는 꽤 많았던 까닭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식량획득을 위한 노력이었으므로, 순수하게 즐기려는 목적의 플라이 낚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흥미는 있나요?” 앤의 물음에 겨울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당신과 함께하는 거라면 싫은 게 뭐가 있겠어요? 농사를 지어도 즐거울 걸요?”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들어 꿈꾸는 미래의 한 장면이 그러했다. 어느 레인저 장교가 말했던 것처럼, 농장이나 목장 하나를 사다가 둘만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앤은 작게 큭큭거리며 겨울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좋네요. 언젠가 내 고향에 가면 같이 해봐요. 가르쳐줄게요.” “잘 하는 모양이죠?” “잘 한다기보다는,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편이죠. 오늘 같은 6월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을 골라서, 장화를 신고 나무 그늘이 많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려져요? 물 흐르는 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가끔씩 새 지저귀는 소리. 그 외에 어떤 소음도 없는 곳에, 당신과 나 두 사람만 있는 거예요. 음, 개 한 마리쯤은 있어도 괜찮겠네요.” 물 내음을 맡으며 걷는 중이라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는 심상이었다. 하는 일이 일인지라, 한가하고 평화로운 휴식을 바라기는 앤도 겨울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 날이 정말로 올지는 불확실하지만. 겨울은 미뤄둔 질문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앤.” “네?” “물어볼 게 있는데요.” “……?” 진지한 분위기에 발걸음이 멎는다. “앤은 혹시, 내가 위험을 감수하는 게 싫진 않아요?” 앤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으나,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풀어졌다. “뭘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당신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수사관으로서 사선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걸요. 당신이나 나나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겠죠. 서로를 계속 사랑하려면.” “그건 그렇지만.” 그녀에겐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도우며 국가안보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겨울은 그녀에게 후방으로 물러나거나 다른 일을 찾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겨울이 뜸을 들인 끝에 다시 말했다. “내가 중국으로 가는 게, 당신에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부담이 아닐지 걱정스러웠거든요. 작전 투입 전에 그걸 확인해두고 싶었어요.” 잠시 말이 없던 앤은, 심호흡을 한 뒤에 질문했다. “만약 내가, 당신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곁에 쭉 머물러주길 바란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요? 그냥 확인하는 걸로 끝인가요?” “아뇨.”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앤, 당신이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란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든 그렇게 할 거예요.” “정말로?” 되묻는 앤에게, 겨울은 단호한 긍정을 내비쳤다. “네. 내겐 제로 그라운드로 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만한 이유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만 고려한 거죠.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겨울의 개인적인 사정을 제외하면, 제로 그라운드에 가야 하는 것이 꼭 겨울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이제 와서 빠지려면 꽤나 무리를 해야겠으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뭣하면 사고로 위장하여 부상을 입는 수도 있으니. “그래서 앤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은 거예요. 반지를 끼워준 순간부터, 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겨울이 온화하게 말했다. “어쨌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아내 될 사람의 의견은 들어봐야죠. 안 그래요?” 이에 가만히 겨울을 응시하던 앤이, 입술을 조용히 겹쳐왔다. “다녀와요.” 입술을 뗀 앤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 걱정은 말고, 다녀와요.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을게요.” 그리고 겨울을 끌어안았다. “요 반년 간 자주 꾸는 꿈이 있어요.” “뭔데요?” “당신이 별을 보는 꿈이요.” 앤은 짧은 여백을 두고 이어서 속삭였다. “난 그런 당신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죠. 어딘가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웠어요. 당신도, 당신이 보는 별도. 그리고 그건 꽤 상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어째서요?” “겨울이 바라는 게 그토록 높은 곳에 있지 않나 싶어서요.” “…….” “항상 그래왔잖아요. 당신이 바라는 건 항상 사람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들이었어요. 사람들을 믿지는 않지만 믿고 싶어 하는 것도, 남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죠.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로는요.” 믿음에 관한 부분은 피쿼드 호에 있을 때 들려주었던 말이다. 그 뒤로 종종 되새기곤 했었다. 앤이 말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의 마음을 지키면 돼요. 그게 바로 내가 사랑하는 한겨울이니까.” 겨울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418 [418화] #높은 곳의 바람 (16) 독립기념일의 시가지 행진은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독립대대의 순번은 JROTC와 러시아 공수군 사이에 끼어있었다. 시민들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는데, 겨울을 포함한 전쟁영웅들이 참가하기도 했거니와, 미국에선 애당초 이 정도 규모의 열병식을 볼 기회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역병 이전까지의 미군은 열병식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최강인 걸 온 세상이 다 아는 마당에 뭘 더 과시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하물며 오늘은 D.C와 덴버 양쪽에서 시차를 두고 각각의 열병식이 행해진다. D.C에서야 규모를 떠나 매년 치르던 행사였지만, 덴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척이나 이례적인 경우. 이는 전적으로 공수군과 독립대대의 편의를 봐준 결과다. 지역사회의 관심이 비등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열렬한 반응으로 미루어, 적어도 콜로라도에서만큼은 중국 진공에 대한 반대여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듯 했다. 한편, 난민 출신이 다수인 독립대대원들은 다른 의미에서 행사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상상하던 거랑 많이 다르군요.” 차례를 기다리는 막간에 넷 워리어 단말로 생중계를 본 리아이링의 말이었다. 꽤나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맥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중대들도 비슷했으되, 그녀가 속한 브라보 중대는 이번 행사에 대하여 강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행진 연습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단체로 망신을 시키려고 일부러 연습을 안 시키는 게 아니냐는 불만마저 제기되었을 정도. 그러나 미군의 행진은 중국식의 각 잡힌 사열과 거리가 멀었다. 엑셀에 탄 겨울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걱정할 것 없다고. 대충 발만 맞춰서 걸으면 돼요.” 심지어 발이 안 맞아도 괜찮다. 안심시키려고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이었다. 역병 확산 이전의 기록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턱을 고정시키고자 옷깃 안쪽에 바늘을 꽂는 나라에서 온 장병들은 도무지 마음을 놓질 못했다. 이번엔 뭔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것. 이는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처지를 불안정하게 느낀다는 방증이었다. 여기엔 물론 크레이머가 미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중령님! 여기 좀 봐주세요!” 멀지 않은 곳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바라보면, 이제 곧 순서가 돌아오는 고등학교 취주악단 및 응원단원들이었다. 이쪽을 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고 있다. 겨울이 간단한 경례를 보내자 한층 더 높아진 환호성이 돌아왔다. 리아이링은 옆에서 더욱 기운이 없어졌다. 말이 열병식이지, 실제론 군이 참가하는 축제나 마찬가지였다. 응원단과 취주악단이 행진곡을 연주하며 나가고, 그 뒤를 JROTC. 즉 이 지역의 청소년 학군단이 뒤따랐다. 이제 독립대대가 나갈 차례다. 겨울이 고삐를 틀어 대대의 전면으로 나아갔다. “알죠? 각 중대, 알아서 따라와요.” 무전으로 내리는 명령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횡대로 늘어선 기병 한 줄이 깃발을 들고 겨울을 뒤따랐다. “이러고 있으려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에일’ 알레한드로가 하는 말. 올레마를 거점으로 삼아 기병대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때맞춰 엑셀이 푸르륵 거렸다. 겨울은 갈기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정면에 두고 답했다. “힘들 때였죠. 용케 여기까지 왔다 싶어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입니다. 유머감각을 빼면 완벽한 상관을 만나기도 했고요.” “내 유머감각이 뭐가 어때서요?” “정말로 몰라서 물으십니까?” “모르겠는데요.” 겨울이 시침을 뚝 떼자 에일이 혼잣말로 궁시렁거렸다. 뒤끝이 무척 긴 남자였다. 나아가는 길의 좌우에서 크고 작은 성조기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겨울은 뒤따라오는 병사들의 분위기가 궁금해졌다. 알파중대는 시민사회의 높은 호의를 경험한 적이 많지만, 그 외의 다른 중대들은 오늘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리드빌 주민들도 독립대대를 좋아하긴 했으나, 거긴 애초에 거주인구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지라 병사들의 인식을 바꿀 만한 영향은 기대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면 좋겠는데.’ 기왕 하는 퍼레이드라면 병사들에게도 좋은 영향이 있기를 바란다. 지휘관으로서 겨울이 품은 생각이었다. 중국계나 일본계 장병들에겐 일종의 방어적인 공격성이 존재했으니까. 부러움과 경계심, 그리고 열등감과 피해의식. 대부분은 출신성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데에, 시민들의 호의와 직접 대면하는 오늘이 큰 도움이 되진 않을까. 독립대대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운명공동체가 되지 못했다. 반대로 독립대대가 그것을 이룬다면, 장차 난민구역에서도 가능하리라 기대해볼 법 하다. 앞서 가던 취주악대의 연주곡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곡조였다. 후속하는 퍼레이드 카 위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은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사과나무 꽃과 배꽃이 피고, 구름은 강 위를 흘러가네. 카츄샤는 강기슭으로 나와 높고 가파른 강둑을 걸어가네.」 「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저 빛나는 해를 따라 날아가, 머나먼 국경의 병사 하나에게 카츄샤의 인사를 전해다오.」 말이 군가지 기본적으로는 민요로부터 따온 가락으로, 2차 대전기에 만들어진 가사는 카츄샤라는 여성이 전장으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갈아 부르는 노래에 시민들의 반응이 약간 잦아들었다. 조금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마저 엿보였다. 하기야 미국 도시 한복판에서 러시아군이 행진하는 것부터가 일부 보수적인 시민들에겐 초현실적인 일일 것인데, 군가마저 러시아의 것이라 더더욱 당황할 법 하다. 그래도 역병에 맞서 제대로 싸워주는 소수의 동맹군 가운데 하나인지라, 시민들은 살짝 식은 분위기 속에서도 열심히 성조기를 흔들어 환영해주었다. 과거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광경. 인류 멸종의 위기가 만들어낸 동료의식이었다. 겨울은 낙선한 민주당 대선주자의 공약을 떠올렸다. 인류 합중국.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긴 했으나, 이상적인 만큼 긍정적인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이미 지나간 분기를 새롭게 곱씹는 것은, 마치 바깥세상의 지난날을 상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구성된 과거를 거듭 겪어온 겨울이 생각하기로, 저 바깥이 그 모양 그 꼴로 전락하기까지, 사람들이 걸어온 길은 결코 외길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어떤 임계점을 지나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겨울은 여기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앤의 표현이 정확하단 말이지.’ 자신의 소망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퍼레이드는 도시 중심부의 마일 하이 스타디움(Mile high stadium)에 입성하면서 끝났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손을 흔들며 퇴장. 그 뒤로는 넓은 주차장에서 반나절에 걸쳐 시민들에게 각종 기갑차량과 장비들을 공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공수장갑차 및 전차들을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였다. 일상복에도 생존주의 컨셉의 위장 패턴이 유행하는 시대인지라, 평범한 시민들 중에서도 새로운 무기체계를 궁금해 하는 이가 많았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았다. “Sir, Sir!” 군복을 입은 여덟 살짜리 아이가 유라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작은 해병님?” 웃으며 눈높이를 맞추는 유라. 그녀에게 자그마한 손으로 경례한 어린 해병은 곧바로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호랑이 가죽 망토는 어디다 두셨어요?” 공보처에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에게 망토 착용을 권고했다. 그러나 강요하진 않았다. 덴버가 해발 1마일의 도시여도 여름의 낮은 덥고 습하기로 유명하다. 그래도 끈질기게 권하긴 한지라, 유라는 이제 망토를 보기만 해도 진저리를 친다. “이렇게 더운 날 망토를 두르고 다닐 순 없잖아요? 나도 사람인데.” 유라가 애써 부드럽게 하는 말을 듣고, 호랑이 여전사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더위를 탄다는 사실에 실망한 아이가 이번엔 진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위님, 대위님!” 진석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불길함을 느낀 눈치였다. “뭐지?” “대위님의 별명인 ‘빠쿙’은 무슨 뜻인가요?” “…….” 정확하게는 빠쿙이 아니라 빡형이다. 빡친 형님을 줄인 것으로, 병사들끼리 대화할 때 나오곤 하는 별명이었다. 당연히 진석이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본인은 이걸 빡친석보다 더 싫어했다. 겨울은 어린 소년이 이 별명을 어찌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진석은 소리 죽여 웃는 유라를 노려보곤, 아이에게 순화된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건 한국어로 매우 엄격한 성격의 중대장이란 뜻이다.” “아하, 그렇구나.” 끄덕인 아이가 보다 강력한 공격을 꽂아 넣었다. “저는요, 빠쿙이 Fuck you랑 발음이 비슷해서 뭔가 관련이 있는 줄 알았어요.” “지미! 그런 말은 쓰면 안 돼!” 같이 온 어머니가 황급히 아들을 나무랐다. “대위님께 사과드리렴. 어서!” 아이는 순순히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나쁜 뜻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거 땜에 대위님을 캡틴 Fuck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한테도 그러지 말라고 할게요.” “…….” 사과는 사과인데 무척 찜찜하고 괴로워지는 사과였다. 진석의 얼굴이 침묵 속에 벌개졌고, 어쩔 줄 몰라하던 어머니가 아이 대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겨울을 응시했다. 눈이 기대감으로 차있었다. 케이크 위의 딸기를 마지막까지 아껴두는 성격으로 보였다. “중령님, 중령님!” “응?” “제가 그 칼을 만져 봐도 될까요?” 다행히 정상적인 요청이었다. 겨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장검을 풀어 건네주며 당부했다.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완전히 뽑으면 안 돼.” 열렬히 끄덕이고 칼을 받은 어린 소년은, 그 무게에 휘청이며 놀라워했다. 날은 티타늄이어도 심은 텅스텐 합금이다. 겨울이 얼른 붙잡아 중심을 회복시켜주었다. 칼이 칼집에서 반 뼘쯤 빠져나왔다. 새까만 칼집과 칼날의 대조가 선명했다. 겨울은 아이의 손에 자신의 손을 단단히 포개어 안전을 확보했다. 아이는 검의 반사광을 보고 입을 벌렸다. “와! 이거 엄청 무거워요!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휘두르실 수가 있어요?” “너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을 거야.” 이에 아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저는 커서 아빠나 중령님처럼 될 거예요.” “그러니?” “네. 그래서 수많은 변종들을 찢고 죽일 거예요!” “…….” “근데 제가 어른이 되기 전에 중령님께서 다 죽여 버리실까봐 걱정이 많이 돼요. 제발 제 몫은 남겨주세요.” 겨울이 차마 대답은 못하고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이 어머니는 이마를 감싸며 탄식했다. 오, 지미……. 아이가 추가로 바란 것은 겨울의 사인, 그리고 겨울과 함께 엑셀을 타보는 것이었다. 안장 위에서 높아진 시야를 즐거워하던 아이가 등 뒤의 겨울에게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중령님은 왜 해병이 되지 않으셨어요?”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 “그럼 이제라도 해병이 되는 건 어떠세요? 우리 아빠가 진짜 남자는 해병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리고?” “한 중령님이 해병대로 오셨다면 지금보다 세 배는 더 강해졌을 거라고도 하셨어요.” 지금보다 세 배 더 강한 한겨울이라. 변종들 입장에선 끔찍할 이야기였다. 아이의 죽은 아버지는 자신이 해병이라는 사실에 깊은 자부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미와 지미의 어머니를 포함한 전몰장병의 유가족들은, 일종의 우대조치로서 겨울을 비롯한 전쟁영웅들을 먼저 만나볼 기회를 누렸다. 잠시 후 아이를 돌려주며, 겨울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부인. 지미는 아버지만큼 훌륭한 어른이 될 겁니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서는, 조용히 끄덕이고 아이를 챙겨 돌아섰다. 지미는 겨울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까지 뒤를 돌아보며 활발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유가족들을 상대하는 동안, 겨울은 머릿속엔 때때로 지미가 내비쳤던 순수한 증오가 맴돌았다. 변종들이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동기가 오직 본능뿐이기에, 역병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 또한 원초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어떤 이성적인 사고나 타산적인 의도, 혹은 사회적 갈등과 이해관계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즉 원초적인 증오는 이 세계의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의 한 갈래였다. 인류 합중국을 포함하여 겨울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든 미래의 가능성들은, 그 기저에서 어쩔 수 없이 위기와 증오에 의지하는 면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고, 이제 와서 처음 하는 생각이 아닌데도, 이 시점의 겨울은 못내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같은 증오가 있어야 할까? # 419 [419화] #장미가 시드는 계절 (11) 고건철은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하고,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 그 광기어린 집착과 신념은 사실 아내와 형제의 배신이 남긴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시동생과의 불륜이 발각된 현장에서,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차갑게 고백했다. 너 같은 추물을 누가 사랑하겠느냐고. 그것은 실로 저주나 다름없었다. 이날 고건철은 사랑하는 아우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뿐더러, 마침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왜 몰랐나. 왜 속았나. 왜 사랑받지 못했나. 나는 어찌 이리도 어리석고 못난 녀석이었던가. 피떡이 된 동생의 모습과 아내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깨진 유리조각처럼 폭군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진실을 캐고 보니, 폭군이 되기 전의 고건철은 동생과 아내의 순정에 끼어든 훼방꾼에 불과했다. 아내의 사랑은 결혼 이전에도 그의 젊고 훤칠한 형제를 향하고 있었던 것. 그럼에도 그녀가 고건철과 결혼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아내의 계획 속에서, 돈 버는 재주 외에 장점이 없는 남편은 원활한 상속의 수단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밟고 건너가는 돌이었던 것이다. 건너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야망 깊은 동생도 그 구상에 찬동했다. 아버지는 능력을 보고 경영을 물려주었다 했으나, 동생이 보기엔 그저 먼저 태어난 쪽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취하는 부당한 이득이었다. 고건철은 사력을 다해 두 사람을 매장시켜버렸다. 그러나 그 복수는 인간으로서의 그를 돌려놓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부서진 고건철은 폭군이 되었다. 이후, 그의 삶을 지탱해온 유일한 버팀목은 증오가 남긴 유산이었다. 그는 아내와 거래를 했었다. 한평생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기로. 그 결과가 바로 인생을 건 계약으로서의 결혼이었다. 아내는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거래와 지켜지지 않은 계약. 그에 대한 증오가 폭군의 비참한 신념을 잉태했다. 마음처럼 불확실한 요소를 믿어선 안 된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타산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다. 그러므로 삶은 경제적이어야 한다. 두 번 다시 기반이 불확실한 신뢰를 품어선 안 된다……. 그러나 한가을은 폭군에게 믿음을 요구했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바라는 관계가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고. 동생인 겨울을 포함하여, 타인에게 빌려온 거죽으로는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다.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한다는 말은, 바꿔 말해 고건철이 그녀의 요구를 수용한다 하더라도 결국 거래에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은 거래로 성립하는 계약이 아니었다. 지친 폭군은 그 철없는 순수가 가혹하게 느껴졌다. 장미가 지닌 가시였다. 누가 너 같은 추물을 사랑하겠느냐. 과거의 메아리에 아직까지도 사로잡혀있는 고건철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히 말해서 두렵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번민했고, 그 고통스러운 번민이 돈을 주고 얻은 젊음과 건강을 갉아먹었다. 그러므로 초조함은 나날이 무거워졌다. 한겨울의 옛 육신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고 나면, 그때도 한가을이 폭군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있을 것인가? 오늘, 조바심에 쫓긴 그는 마침내 처참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 어질러진 집무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가을은 옷깃을 여미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저항의 흔적이 남아있는 속살이 가려진다. 고건철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조금 전 실패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강간 시도였다. 폭군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폭발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기가 되지 않았다.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을의 눈을. 거기엔 여러 감정이 녹아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했고, 많이 실망한 듯 했고, 조금은 슬프고 불쌍히 여기는 듯도 했다. 그 모든 감정들이 폭군의 자각을 이끌어냈다. 강간만큼 공정한 거래와 거리가 먼 행위도 드물다. 폭군은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온 버팀목을 스스로의 손으로 부러뜨린 셈이다. 고건철은 혈관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는 심리적인 오한에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헝클어졌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일단 가을을 내보내야 했다. 눈 닿는 곳에 있어선 안 되었다. 보면 볼수록 자괴감만 무거워질 테니까. 이는 절박한 생존욕구에 가까웠다. 폭군이 책상을 더듬어 콘솔을 건드렸다. “들어와!” 비명 같은 외침. 불러놓고도 제대로 호출했는지 의심스러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비서 강영일이 들어왔다. 뱀 같은 눈동자가 실내를 슥 훑는다. 그것만으로도 상황 판단이 끝났는지,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당혹감이었을지, 아니면 유열이었을지는 모르겠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않았으나, 이 시점의 폭군에겐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고건철이 숨을 몰아쉬며 가을을 가리켰다. “돌려보내. 당장!” 눈으로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강영일이 가을에게 손짓했다. “나와라. 데려다주지.” 나가려던 가을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회장을 돌아보았다. 그 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너지는 사람을 혼자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너져가며 지새우는 밤이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안 나오고 뭐하나.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강영일의 채근에, 짧게 망설인 가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고건철의 실수는 그 자신에게만 참혹했던 것이 아니다. 가을의 어깨는 아직까지도 떨리고 있었으며, 아픈 손목엔 꽉 움켜쥐었던 자국이 폭력의 낙인처럼 남아있었다. 만약 폭군의 폭주가 미수에 그치지 않았다면, 내일의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아침을 맞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내일이 아예 없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그러므로 가을은 더 이상 폭군을 배려하지 않았다. 특수비서 강영일이 인사를 남겼다. “그럼, 쉬십시오.” 고건철은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폭군의 성채를 나와 세단에 몸을 실은 가을은, 복잡한 심중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동요를 가라앉히는 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오늘 엉망이 되었으면, 겨울이는?’ 요즘 들어 면회를 갈 때마다 조금씩 밝아지는 겨울이다. 그 원인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노라고 여기진 않는 가을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영향이 없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폭군에게 짓밟히고 나서도 과연 겨울을 볼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타인의 속에 민감한 동생 앞에서, 가을은 결코 실제 있었던 일을 감추지 못할 것이었다. ‘불안해하는 기색이었어.’ 고건철 옆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가을은 겨울의 안색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직후에 나온 말이 나쁜 일은 없었느냐는 것이었고. 진실을 감출 자신이 없었으므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꺼낸 이야기였으되, 결국 겨울을 완전히 안심시키란 불가능했다. 오히려 가을의 그런 노력을 알기에, 겨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던 것일 터였다. 언제나와 같은 배려. 그 근저엔 가을이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자신이 모를 리 없다는 확신이 깔려 있었던 게 아닐까. 가을의 면회가 다시 중단될 경우 겨울이 품을 근심의 내용은 뻔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을 눈치 채는 게 늦었다. “……?” 차창에 스치는 풍경들이 낯설다. 평소 지나던 길이 아니었다. 경계심을 일깨운 가을이 운전석의 특수비서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강영일이 룸 미러를 통해 가을을 보았다. 그 눈이 휘어진 것을 본 가을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덜컥. 본능적으로 문손잡이를 확인했으나, 잠겨있다. 잠금장치는 원격으로 고정된 상태였다. 가을은 식은땀이 났다. 회장에게서 다른 지시를 받은 것일까? 연락하는 모습은 없었으나, 렌즈 식 단말기로 메시지를 수신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운전을 AI에게 맡긴 강영일이 손을 놓고 빈정거렸다. “문이 열려있었으면 뭐, 뛰어내리기라도 할 작정이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야?” 가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어요.” “글쎄.” 어깨를 으쓱이는 사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가 어떻게 될지를 더 궁금해 해야 할 것 같은데.” “…….” “처음 보았던 날부터 네 눈물 맛을 알고 싶었지. 이 여자는 어떤 맛으로 울까, 하고.” 낮은 소리로 웃던 그가 서늘하게 경고했다.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조용히 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걷어차려던 가을은, 자신을 겨냥한 권총을 보고 몸을 움찔 멈추었다. 그러나 눈으로는 여전히 기회를 더듬었다. 어떻게든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엔 정말 바깥으로 몸을 던질 계획이었다.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독사 같은 사내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눈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군.” 가을은 두려움을 억누르려 이를 악물었다. “이게 회장님의 뜻은 아닐 텐데요.” 빈틈을 노릴 겸 하여 슬쩍 떠보는 한 마디. 잠깐 동안은 폭군의 지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곱씹어보건대, 실제로 그랬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가을이 옳게 보았다면, 그는 철석같이 지켜오던 원칙을 무너뜨린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강영일이 대꾸했다. “그 인간은 이제 퇴물이야.” “뭐라고요?” “오랫동안 즐거웠다. 그 냉정함과 강력한 힘. 신념과 실력이 확실한 권력자. 내 성미에 그보다 나은 고용주도 없었다. 곁에 있는 동안 여러모로 재미있었어. 하지만 이젠……. 실망스럽기만 해. 바로 너 때문에 그렇게 됐지.” “……여러모로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혜성그룹의 회장이에요. 뒷감당이 두렵지 않은가요?” 가을의 반문에, 강영일은 차가운 조소로 반응했다. “멍청한 년. 내가 아무런 보험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할 것 같나?” “……보험?” “한국 최대의 기업군단 총수가 인사불성이 되면 좋아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 난 그들 중 하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너와 내가 나란히 사라지고 나면, 고건철 그 노인네는 분명 그 몸뚱이가 못 견딜 정도로 폭주하겠지.” “…….” “주치의가 그러더군. 그냥 둬도 결코 오래 가진 못할 거라고. 난 그 등을 살짝 밀어줄 뿐. 나머지는 중력의 몫이야. 쓰러진 다음엔, 복제체 배양이 끝나는 날까진 꼼짝없이 보존시설 신세를 져야 할 테고.” 즉 한동안 고건철의 분노로부터 독사를 감춰주고 보호해줄 세력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 세력은 또한 회장이 한동안 쓰러지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보는 어딘가이고. 혹은 회장이 혼미했던 근래에 비서의 지위를 악용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이미 중요한 정보를 빼냈으며, 그 정보를 활용할 기회를 마련하려는 의도라거나. “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아. 벼르던 별미도 맛볼 수 있게 됐으니.” 여기까지 말한 강영일이 이빨을 드러냈다.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슬슬 빠져나갈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 티를 내주는 게 예의 아니야? 왜 아직도 그렇게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지? 꼭 손을 대야만 울기 시작하는 타입인가? 그런 건 좀 귀찮은데. 응?” 이때, 빽빽거리는 전자음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운전석의 계기판에 붉은 경고등 하나가 들어왔다. “뭐야?” 강영일은 눈을 찌푸리며 계기를 확인했다. “……충돌경고? 어째서?” 어느덧 교외로 접어든 길. 전방엔 다른 차량이나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다가오는 터널의 입구가 보일 따름. 그 안쪽으로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차량이 터널에 진압하자, 터널 내부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삽시간에 찾아온 새까만 어둠. 심지어 차량 자체의 조명마저도 사라졌다. 강영일이 계기판을 더듬어 수동운전으로 전환하고자 했으나,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설마 해킹인가?!” 해킹.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핸들을 억지로 돌려보려고 해도, 브레이크를 밟아보아도 무반응. 사이드 브레이크는 잠긴 것처럼 고정되었다. AI가 이 와중에 차분한 합성음으로 안내를 내보냈다. 「경고 : 탑승자들의 안전벨트 착용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도로교통법 제50조, 제53조, 제67조에 의거, 자동차의 운전자 및 모든 동승자들은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반드시 안전벨트를 착용하여야 합니다. 탑승자 여러분께서는 벨트 착용 여부를 재확인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경고 : 본 차량은 곧 사고다발구역으로 진입합니다.」 「경고, 경고, 경고, 경고, 경고……」 “이런 미친!” 운전석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고장 난 것처럼 반복되는 경고 음성은 실로 소름끼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가을은 황급히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쇠가 맞물리며 찰칵 소리가 나는 순간. 차량의 진행경로가 거칠게 비틀렸다. 콰앙! 유리창에 쩍쩍 금이 가는 소음. 가을은 어깨에서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둔중한 통증을 느꼈다. 벨트가 튀어나가는 몸을 붙들었고, 난폭한 관성이 전신을 흔들었다. 짧게 내지르는 비명. 그러나 어딘가 뼈가 부러지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아픔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불행하게도 죽지 않은 건 뱀 같은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픈 느낌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가을은 재빨리 벨트를 풀고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덜컥. 문은 여전히 잠긴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나가려는 시도도 실패. 가을이 입술을 깨무는 사이, 운전석에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내딛는 소리도 들린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소리는, 다름 아닌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아악!” 타앙! 탕! 탕! 가을은 메아리치는 총성에 황급히 자세를 낮췄다. 바깥이 번쩍이면서 거미줄처럼 갈라진 유리창의 형상이 망막을 스쳐갔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아, 가을은 두려운 마음에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비명과 총성으로 요란하던 어둠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빛이 돌아왔다. 철컥.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운전석의 계기판이 희미하게 깜박거렸다. 가을은 간신히 추스른 몸으로 문을 열고 나아갔다. 밝아진 터널 전후엔 다른 차량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을은 차량의 앞쪽으로 다가가 운전석 방향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떨어진 권총과 약간의 핏자국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잘그락. 스스로 밟은 탄피에 소스라친 가을은, 가슴을 누를 새도 없이 다른 소음을 경계해야 했다. 우우우웅- 터널 안의 공기가 배기음으로 웅웅 울린다. 후방으로부터 창이 불투명한 차량 세 대가 줄지어 접근했다. 그 차량들은 앞이 우그러진 세단 옆에서 멈춰섰다. 각각의 차량에서 통일된 복장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 중의 한 명,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사고 현장을 슥 둘러보더니, 혼자 한 번 갸우뚱 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Они действовали первыми?” # 420 [420화] #러시아의 딸 “……그들이 먼저 움직였나?” 러시아 공작원이 말하는 그들이란 한국 내에 있는 정체불명의 동맹세력을 의미했다. 곤란한 노릇이다. 이쪽으로 협력요청을 넣어놓고는, 자신들이 직접 손을 쓰다니. 공작원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우롱당한 기분이군.’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 습격은 이쪽이 도착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놓고 정작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화물」은 현장에 남겨둔 채로 사라졌다. 이걸 달리 뭐라고 해석해야겠는가. 한국 내의 협력자는 이전의 실패를 두고 아직까지 화가 나있는 게 아닐는지. 이전의 실패. 공작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협력자의 정보가 정확하긴 했으되, 주어진 시간이 말도 안 될 만큼 촉박했기 때문. 전에 없었던 긴급 요청에 최선을 다해 응했지만, 공작원이 도착했을 때 해당 임무의 화물은 이미 식어가는 시체가 되어있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의 협력자는 간결한 단문(短文)으로 유감을 표했다. 짧기에 오히려 더 강한 실망감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적어도 공작원과 엿 같은 블라디미르가 읽기에는. 빌어먹을 천종훈. 그 임무의 화물은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대체 뭘 하던 인간인지, 무슨 이유로 자살을 한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 별도의 조사 결과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믿을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정보대로라면, 그는 어떤 의미로도 중요한 인간이 못되었다. 가족관계도 무척이나 쓰레기 같았다. 하류인생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미지의 협력자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의 신병을 요구했을 리 없다. 분명 공작원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었다. 찾아낸 정보는 예외 없이 조작된 것으로 간주해야 마땅했다. 인생 전체를 위장해야 할 정도로 큰 비밀을 품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엄중한 보안조치다. 그런 거물을 놓친 것이다. 이쪽의 억울함과 별개로, 협력자가 화를 낼 만도 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죽음을 막지는 못했을지언정 뇌를 적출해서 보존할 수는 있었을 터. 그러기 위한 장비까지 챙겨갔는데, 결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아쉬워해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오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공작원은 이국의 언어에 상냥함을 담으려 애썼다. “그만 나오시죠. 저희는 당신을 보호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증강된 감각을 통해, 공작원은 사고로 손상된 차량 반대편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감지했다. 초음파의 반향을 이용한 청각의 입체적인 시각화. 체구를 보건대 젊은 여성이다. 전체적인 특징이 화물의 정보와 일치한다. 권총을 쥐고 있으나 위험하진 않았다. 파지법부터 엉성한 것이 사격 경험은 전혀 없어보였으니. 초짜의 어설픈 자기방어 따위, 실험적 육체를 지닌 특수요원에겐 이렇다 할 위협이 될 수 없다. 급소를 피한다면 한 탄창 정도는 그냥 맞아줘도 된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으로, 요원이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말했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에게 악의가 있었다면 이렇게 말을 거는 대신 좀 더 거친 방식을 택했겠죠. 정 불안하시다면 그 총은 그대로 지니고 동행하셔도 좋습니다.” 숨어있는 여성이 몸을 떨었다. 훤히 보이는 것처럼 말하는 데 놀란 모양. 침묵하던 그녀가 이렇게 물어왔다. “고건철 회장님께서 보내신 분들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누가?” “당신을 구하라고 요청한 사람의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애초부터 그런 관계인지라.” “…….” “다만 이 말을 전하라더군요. 나는 가수 이소라의 Track 9을 즐겨듣는다. 내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만간 직접 만나 대화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니 일단은 이 사람들을 따라와 주었으면 한다……라고.” 이 수수께끼 같은 전언이 효과가 있었다. 둑, 둑, 둑, 둑. 아직 웅크리고 있는 화물, 한가을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공작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협력자가 벌어주겠다고 한 시간은 15분. 아직은 여유가 있다. 한편 가을은 현재 머릿속이 복잡했다. 권총을 쥔 손에 땀이 고였다. 아무리 고쳐 잡아도 어색하기만 하다. 사람을 죽이는 금속은 미지근한 온도에서도 소름이 끼쳤다. ‘겨울이가 곧잘 불러줬던 노래…….’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을은 아득해지려는 이성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현 시점에서 그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은 가을과 겨울, 그리고 막내인 파랑이 뿐이다. 그나마 햇수가 경과한 지금도 여전히 어린 늦둥이 막내가 그 시절을 온전히 기억할지는 의문이다. 또한 파랑이에겐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할 만한 친구나 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과 만날 일 없는 의무교육은 차갑다. 부모님이 오며가며 얼핏 들어봤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양친은 죽은 사람이 된 지 오래. 자식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일만한 애정이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그 역시 회의적이긴 마찬가지다. 고로 가을의 구출을 의뢰한 사람은 필시 겨울과 접점이 있는 누군가일 터. 그래서 더욱 모르겠다. 사후보험시설에 들어간 가엾은 동생이, 이런 일을 추진할 정도의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나마 현실성 있는 추측은 하나. ‘목표는 고건철 회장……인가? 나를 빌미로 무언가 거래를 시도하려고?’ 가을을 확보하고자 겨울에게 먼저 접근한 거라면 나름의 개연성이 생긴다. 강제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약간의 호의를 얻어두는 편이 원활한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불공정한 거래가 목적이라면 가을이 직접 나서주는 게 여러모로 효과적일 것이다. 고건철 개인에게는 더욱 비인간적인 협박이 되겠고. 곱씹던 가을이 스스로의 생각에 흠칫했다. 불공정한 거래. 고건철의 표현방식이었다. 싫든 좋든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무의식중에 그 흔적이 남았을 법 했다. 상념이 엉뚱한 쪽으로 샌다. 가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앞선 추측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특수비서 강영일은 회장을 적대하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들었다고 말했다. 그 외의 제3자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 폭군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도 않다. 거래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하지만 의문의 인물이 겨울과의 오랜 추억을 언급한 것은, 겨울이 자신의 수중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저항은 불가능하다. 겨울과 고건철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고건철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으니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나 하는 생각에, 가을은 스쳐가는 비애를 느꼈다. 망설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기다리기 지쳤는지, 요원이 하는 말. “파랑이라고 했던가요? 당신의 동생도 우리 쪽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다른 위협이 가해질까봐 미리 조치를 취했지요. 그 아이, 포도 맛 사탕을 좋아하더군요.” 떨어뜨린 권총이 쇳소리를 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가을은 곧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요원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가을 양.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을은 몸을 떨며 다가왔다. 납치당할 뻔한 경험, 그리고 지금도 납치당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 두려움, 긴장이 체력을 빨아먹고 있을 것이었다. 요원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가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가을의 시선이 요원의 양쪽 어깻죽지 아래에 머물렀다. 정확하게는, 권총을 끼워둔 한 쌍의 홀스터에. “이건 신경 쓰지 마시길.” 요원은 가을을 차로 유도하며 해명했다. “납치범과 총격전을 벌이는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맨손으로 척추를 뽑아버리기도 가능하지만, 혜성그룹의 특수비서는 정보기관 출신으로서 비공식적인 신체개조를 받았다는 정보를 전달받았다. 한국의 인체개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후보험 시스템에 힘입어, 윤리적 화두에 연연하지 않고 실험을 거듭해온 까닭. 그래서 단단히 각오하고 왔더니, 협력자 측에서 먼저 처리해버린 게 아니겠는가. ‘거기다 이 악취……. 합성전투병이라도 다녀갔나?’ 한국 육군의 전투병들은 인간의 형태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모습들로 유명하다. 그 몸에선 당연히 독특한 냄새가 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는 무리더라도, 러시아의 첩보원들이 놓치기엔 강렬한 악취였다. 그렇다면 협력자는 정규군을 움직일 정도의 실력자인 것인가? 또는 군사규격의 인공육체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사유화하고 있는 것인가? 전대미문의 인공지능이 군사보안을 담당하는 국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나 있는 것인가? 한국의 모든 인체배양시설은 사후보험공단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을 텐데? 협력자의 정체는 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요원은 가을의 질문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아, 저 말씀이십니까?” 이름까지 감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하나의 이름만으로 사는 인생도 아니었기에. 통성명은 신뢰구축의 기초다. 스파이를 심문할 때도, 친근함에 기초한 회유라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건 기본이었다. 요원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옐레나. 옐레나라고 부르십시오.” “옐레나…….” 고개를 끄덕인 가을이, 차에 오르기 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지만, 제 이름은 한가을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만 여겼는데, 단순한 긴장감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이번 화물은 눈빛이 살아있었다. ‘같은 생각인가?’ 러시아의 딸은 화물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현장을 조사하던 다른 요원 가운데 하나가 보고했다. “옐레나 블라디미로바. 혈흔이 환기구로 이어져있습니다. 터널의 설계도는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합니다만, 추가적인 수색을 진행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차를 등진 옐레나는 목적성 짙은 미소를 지웠다. “협력자 측에서 어설프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표적의 생사는?” “출혈량으로 보건대 죽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살아있다는 건가.” 짧게 생각하고 코웃음을 치는 그녀. “일부러 산 채로 끌고 갔겠지. 저 화물이 진정 중요한 인물이라면, 건드린 시점에서 협력자의 분노를 샀어도 이상하지 않아.”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보복과 응징이 반드시 효율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러시아의 딸 또한 한때는 러시아의 적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저쪽의 결정권자가 누구든, 다소 감정적이고 미숙한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최소한 이런 분야에서는.’ 조금은 의외로 다가오는 추측이다. 러시아인들을 불러놓고 먼저 손을 쓴 것 역시 다른 맥락일 가능성이 생겼다. 러시아인들에게 바란 것은 정말로 보호뿐이었을 경우. 낙관적인 예측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냥 자기가, 혹은 자기들이 보호하면 되잖아? 왜 굳이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거지? 세력 내에서 다시 내분이 있는 것인가? 저 화물은 그중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측의 지인? 가족? 관계자? 내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를 취한 것일까? 아니면 세력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인가? 만약을 대비하여 외부에 요인을 맡겨둬야 할 만큼?’ 다양한 생각으로 심중이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이라, 옐레나는 넌더리를 내며 돌아섰다. “이만 가지. 곧 시간이다. 이 나라의 보안망에 걸리면 귀찮아져.” 사실 귀찮아지는 수준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협력자가 보안망을 교란해주겠노라 확언한 15분 내에 이 현장을 벗어나야 했다. ‘사후보험 보안기술자들을 납치했을 때도 찜찜했었지. 이쪽은 죽을 각오를 했건만……관계당국의 추적과 압박이 의외로 약했으니. 그저 위장에 불과했다고 해도, 위장을 들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위험요소였을 것인데.’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협력자는 그때부터 러시아인들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사를 약화시킨 것도 협력자의 영향력이 아니었을까? 옐레나는 자신의 직감이 틀림없으리라 확신했다. 보안기술자들의 존재가 타국을 기만하는 수단이었음을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협력자의 요구로 사후보험에 연결된 미등록 외부시설을 구축할 때, 러시아는 협력자가 공유하는 기술들의 수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러시아의 기술자들이 말하길, 확인된 기술의 수준과 공개된 사후보험 관련시설의 구성 사이에 너무나 큰 격차가 존재한다던가. 적어도, 사후보험 보안기술자들의 뇌를 긁어낸 것은 무의미한 헛수고였던 게 분명하다고. 그 말을 들은 옐레나는, 그 명령을 내렸던 블라디미르를 속으로 엄청나게 욕했었다. 임무 중에 죽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무의미해지는 것만은 싫다. 조국을 위한 죽음은 최대의 명예여야만 한다. 카스파로프 엔진 개발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TOM 적성이 높은, 동시에 검증된 표본을 납치해오라던 임무 또한 비슷했다. 고생고생해서 임무를 성공시켰더니, 고작 한 번 시험해보고는 기대 이하의 화물이라며 발트 해 밑바닥에 처박아버리지 않았던가. 이번 건에 대해선 블라디미르가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것이기를. 차량에 탑승하며, 옐레나는 다시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가을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협력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관계가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 조건을 준수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친분을 쌓아둬서 손해 볼 건 없을 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첩보의 기본에 해당했다. # 421 [421화] #여명, 혹은 황혼 (1) 겨울이 머무는 세계의 8월 14일. 이날의 아침 뉴스는 속보와 함께 시작되었다. 「첫 소식입니다. 시설 보수 및 착저(着底)한 선박들의 인양 작업으로 반년 이상 재개통이 지연되어 왔던 파나마 운하가 드디어 오늘, 완전히 정상화되었습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현지 시각으로 오전 2시 30분경 최종 점검을 완료했으며, 정상화된 운하를 최초로 이용하는 배는 전함 미주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북쪽 갑문이 먼저 수리된 이래 내륙의 가툰 호수에 머물며 수상 포대 역할을 수행해온 USS 미주리는, 운하를 통과한 뒤 단독으로 샌디에고까지 항해하여 종합적인 정비를 받을 예정이라는군요. 전문가들은 선령 73년이나 되는 노후함이 이제껏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며, 주기적인 점검이 뒷받침 된다면 재 취역 당시의 방침대로 향후 10년을 더 운용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평가했습니다.」 「백악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이로써 대륙분할작전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습니다. 오늘은 방역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또 한 번의 승리를 가능케 한 군 장병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지지에 대하여 깊은 경애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함 미주리의 운하 통과에는 대략 7시간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본 방송사는 웹사이트를 통해 미주리의 항해를 실시간으로 중계해드릴 예정입니다. 홈페이지 주소는 www…….」 이후로는 운하 상륙 및 방어의 주축이었던 해병원정대 장병들의 함성과 환호가 화면에 잡혔다. 그들이 수개월에 걸쳐 구축한 방어선은 한 눈에 보기에도 견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장벽과 요새의 연속선이다. 그것을 보며, 겨울은 생각했다. 이걸로 종말의 끝은 얼마나 가까워졌으려나. 해군의 부담이 경감될 것은 확실하고, 남미로부터의 대규모 변종 유입도 차단되었다. 이쯤 되면 향후 10년간 인류 멸종의 가능성이 0에 수렴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극도로 근접하기는 했을 것이었다. 기실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여러 종말을 겪어온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는 겨울이었다. 요즘 들어선 그 이후의 나날을 고민하는 시간이 많기도 했다. 예컨대, 봄의 질문에 대답하고 난 다음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같은. “…….” 겨울은 일상처럼 커피를 곁들여 신문을 읽고, 구강청정제로 입을 헹군 뒤, 일상이 된 앤과의 통화를 거쳐 지휘관들을 위한 브리핑에 참석했다. 브리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건 강하 예정지역의 변종 분포 변화, 또는 새로운 특수변종의 등장여부, 이동양상 등이었다. 강화종 위퍼가 증명했듯이, 그리고 앞서 등장했던 모든 특수변종들이 그러했듯이, 하나의 새로운 특수변종은 곧 전체적인 전투 양상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했다. 적을 모르는 채로 적전강하를 할 순 없다. 언제나처럼 로저스 중장이 브리핑을 진행했다. “트릭스터를 풀어놓은 다음부터 놈들의 구성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음은 다들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러시아 방면으로 빠지는 숫자는 여전히 기대를 밑도는 수준이다. 러시아 당국은 지금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러시아가 상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국민들의 철수 및 산업시설 이전이 완료되기 전에 본토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트릭스터의 존재는 그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교활한 특수변종들은, 지휘관이기 이전에 탁월한 길라잡이이기 때문. 전기를 다룬다는 것은 자기장에도 민감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동종간에 정보를 공유하기까지 한다. 그간 러시아의 광활한 국토는 그 자체로 변종을 막는 장벽 역할을 해왔다. 동장군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변종들에겐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고 통신망도 없다. 일부 지능 높은 개체들이 지형을 개별적으로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래서 러시아의 1차적인 방어 전략은 변종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헬기나 기계화 부대를 동원하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은 일. 상황과 조건에 따라선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하나의 변종집단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 끊임없는 이동을 강요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의한 소모를 유도하는 것이다. ‘종말 이전부터 사람이 다닐 길조차 없던 동네가 많다고 하니까.’ 대표적인 경우가 극동에 있는 캄차카 주였다. 이런 지역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가 멕시코의 남쪽 절반을 실제로 점유한 시점에서도 영토로서 유지할지 모른다고 한다. 어찌어찌 연명 중인 호주 정부도 러시아의 전략을 답습하고 있다던가. “러시아는 어쨌든, 우리 입장에선 별로 좋은 일이 아니지.” 중장이 말했다. “원래는 변종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별도의 작전을 전개할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놈들이 언제 움직일지, 움직이기는 할지 확신할 수 없는 시점에서 별도의 작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작전도 우리가 수행합니까?” 손을 들어 질문한 건 피곤한 표정의 공수군 장교, 알렉세이 구쉬킨 소령이었다. ‘여전하구나.’ 독립대대에 조언자로서 붙어있을 적에도 만사를 짜증스러워하던 이였다. 로저스 중장은 무뚝뚝하게 부인했다. “아니다. 이 임무, 작전명 「자유의 요새(Fort liberty)」는 제101공수사단과 제10산악사단, 러시아 제11근위강습연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별도의 합동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투입한다. 이들은 쿤룬 산맥 남쪽에 별도의 거점을 구축하고 변종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주공보다 조공의 규모가 더 크군요.” “원래 그런 작전이지 않았나.” 스크린에 새로운 지도가 투사되었다. “한편 러시아 측에선 제로 그라운드 강하 1개월 전, 극동 전략방면군의 전략예비를 동원해 유인 공세를 전개할 것이다.” “전략예비라면, 설마 전차집단군입니까?” “규모로는 집단군이라도 집중해서 운용하진 않는다. 상식적으로, 전차 2천 7백대에 장갑차 천 4백대가 한 덩어리로 뭉쳐서 움직이면 작전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겠지. 놈들의 주의는 확실하게 끌겠지만,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는 쪽을 택할 테니. 멧돼지 사냥 당시 그랬던 것처럼.” 개체 간 성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구울 정도만 되어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일단 물러나서 기회를 노린다. 트릭스터가 포함된 군집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미국 장교들 가운데 한 명이 보드카 마시는 놈들은 너무 무식하다고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공수군 장교들은 코웃음을 치고 무시했다. 그들에게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겨울은 배부된 자료를 눈으로 훑었다. ‘전부 다 치장물자로 분류되어있던 구형장비들인가…….’ 변종을 상대하는 데엔 전차나 장갑차나 구형과 신형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는 성능이 우수한 기갑차량을 아껴두는 편이었다.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멕시코 방면으로 수송될 것이다. 방역전쟁이라면 몰라도, 미국을 견제하는 데엔 최신형 전차가 절실할 테니. 그런 의미에서, 난민들을 정착시킬 멕시코의 북쪽 절반은 전략적 완충지대로서 유용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주변 지역으로부터의 유입을 확실하게 차단하고자, 공군이 투하할 지뢰의 숫자와 범위 역시 기존의 안보다 대폭 늘리기로 했다. 구체적인 규모는 아직 논의하는 과정이지만, 대략 3백만 개 선에서 확정되지 않을까 싶다.” “그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번 질문자는 겨울이었다. “그 정도 숫자의 지뢰를 공군의 역량만으로 살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자칫 교활한 것들이 우리 쪽의 의도를 파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안에서는 작전을 사흘 앞둔 시점부터 지뢰를 뿌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삼백만개쯤 되면 사흘로는 어림도 없다. 그리고 지뢰는 접근을 거부하는 무기다. 변종들 중에서 가장 영리한 것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리 없다. 이 우려에 대해, 중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파악하더라도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겠지. 승리를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순수한 힘과 물량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Sir.” “그럼 문제는 없는 거로군.” 중장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겨울을 포함해, 누구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강화종 위퍼의 등장으로 주춤했던 남쪽 방역전선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충분한 수의 군견을 전선으로 보낼 수 없었던 군 당국은, 열압력탄을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다. 나아가기 전에 일단 터트리고 보는 것이다. 한편 병사들은 휴대형 열압력탄과 더불어 수류탄을 애용했다. 여기까지 곱씹은 겨울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러면서 벌써부터 땅을 파는 게 좀…….’ 전쟁채권 판매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미국 정부는 그 초토화된 멕시코 북부의 땅을 민간인들에게 불하하는 중이었다. 그 넓은 땅을 모두 난민수용에만 쓸 순 없는 노릇이며, 박살난 폐허 가운데에서도 보다 가치 있고 생산성 높은 땅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멕시코에서 넘어온 난민들 및 그들을 옹호하는 일부 시민들의 반대여론은 자연스럽게 묵살 당했다. 이를 두고 어떤 언론인은 “아직 대륙분리 작전도 다 끝나지 않은 판국에 땅 투기를 부추기다니, 달과 화성의 땅을 팔던 사기꾼들과 다를 게 뭐냐.”, “하기야 UN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가능은 하겠다.”, “크레이머 행정부의 사기극.” 같은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UN 운운하는 말은 중의적이었다. UN에선 달을 포함한 천체의 소유권을 부정하고, 크레이머의 전임자였던 맥밀런 대통령은 그런 UN의 존재를 인정했었던 까닭이다. 즉 크레이머가 허황된 장사를 하고 있을뿐더러 전임자의 행보와 반대 되는 길을 걷고 있노라고 비꼰 셈이었다. 문제는 이 장사를 자금력 있는 난민들 및 난민 출신 장병들을 대상으로도 하고 있다는 점. 심지어 판매 실적을 난민지도자들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삼기까지 했다. 물론 여기서 겨울은 예외다. 평가기준엔 수훈이력도 들어가며, 명예훈장을 이중으로 받은 시점에서 겨울의 평가는 언제나 만점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브리핑의 후반은 특수변종들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겨울로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자료들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다른 장교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만큼, 여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다만 트릭스터가 무리에 섞여 들어간 이후 특수변종들의 구성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는 지속적으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런. 처키의 비율이 또 줄었나.” 처키는 그럼블과 비슷한 부류의 특수변종, 카간의 별명이다. 몽골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이런 식별 코드가 붙었다. 별도로 산악지대에 적응한 아종은 케식이라 칭한다. 몽골인들이 알면 불쾌하게 여겼겠으나, 그들은 생존자가 굉장히 적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내륙국가였던데다, 감염의 발원지인 중국과 붙어있었고, 인접 국가들은 하나같이 자국민 피난을 우선시했으므로.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도올이라는 게 정말로 있는 녀석이었을 줄은.’ 알고 보니 도올(타오우, 檮杌)은 중국인들이 카간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비슷한 놈들이 보이니까 그냥 같은 이름으로 불렀던 것. 겨울이 자료에 있는 한자를 한국식 발음으로 읽었더니, 그걸 들은 장교 중 하나가 인형(Doll)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처키라는 별명을 붙였다.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귀신 들린 인형의 이름이라나. 산악아종인 케식은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어 험한 지형을 극복하는 데 유리하다. 사진을 보고 식겁한 유라는 팔척귀신 같다며 투덜거렸었다. 브리핑이 끝난 뒤에도 장교들은 곧바로 해산하지 않고, 몇 대의 노트북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오늘은 파나마 운하라는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과 같은 자리에선 82 공수사단 소속 장교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해병대 녀석들, 아주 신이 났군. 평소에도 지들만 싸우는 것처럼 생색내는 놈들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유세를 떨는지.” 우라! 우라! 우라! 그가 바라보는 모니터 속에선 해병대원들이 연신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보는 시선들이 대체로 짜게 식어있는 건, 저쪽은 고생이 끝난 마당에 이쪽은 이제 시작도 안 했다는 우울함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이쪽이야말로 진짜 정예라는 자부심의 영향도 있기는 있겠지만. 딸깍, 딸깍. 겨울은 해병들의 기쁨을 감상하며 손 안의 회중시계를 짤각거렸다. 뚜껑 안쪽에 앤의 사진을 끼워둔 이후로 생긴 습관 같은 것이었다. “오. 그건 혹시 애인의 사진인가?” 호기심을 드러낸 사람은 공수군의 카프라로프 소장이었다. 아차 했던 겨울은, 짧게 고민한 다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예.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땐 식을 올릴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밝히는 건 처음이지만, 뭐 어떤가. 알파 중대원들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오히려 여태까지 세간에 새어나가지 않은 게 더 놀랍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소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의아해진 겨울이 묻자, 주위를 한 번 살핀 소장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결혼을 안 한 사람은 한겨울 중령뿐인가…….” 다비도프 대령이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카프라로프 소장이 겨울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결혼, 하지 말게.” “네?” “하지 말라고.” “어째서…….” “아 글쎄, 하지 말라면 하지 마.” “…….” “납득 못하는 표정이군.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 걸세. 그건 아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야. 아직 채 스물도 안 된 창창한 청춘을 왜 무덤 속으로 처넣으려 하는가? 벌써부터 인생의 수많은 즐거움들을 삶의 뒤안길로 보낼 필요가 있을까?” “삶의 뒤안길이라니.” 겨울이 당혹감을 드러내는 와중에, 로저스 중장이 하는 말. “맞는 말이긴 하지.” “……Sir?” “…….” 분위기가 기묘하다. 러시아와 미국 장교들 사이에 국적을 초월한 이상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었다. # 422 [422화] #여명, 혹은 황혼 (2) 8월 셋째 주 목요일. 겨울은 제로 그라운드 진공, 작전명 「포효하는 폭풍(Roaring storm)」을 내년 1월 중에 개시한다고 통보 받았다. 언론에도 이 사실이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다만 구체적인 날짜는 여전히 미정이다. 보조 작전의 진행 경과와 현지의 기상조건 등을 지켜본 뒤에야 비로소 확정지을 수 있을 사안이었다. 그래도 강하 과정의 시인성(視認性)을 낮추고자 월광이 적은 날을 고를 터이므로, 겨울이 생각하기엔 필시 삭(朔)이 끼어있는 1월 말경이 될 것 같았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28일 자정 전후가 유력하다. 그때의 밤은 말 그대로 새까만 어둠일 테니. 강하 도중 사고가 발생할 확률도 덩달아 올라가겠으나, 그 위험을 감수하는 쪽이 보다 옳은 선택이다. ‘가장 좋은 결과는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철수하는 거니까.’ 강하가 은밀하고 조용하게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구 중국군의 탄도탄 기지 수색을 빠르게 끝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일이다. 교활한 것들은, 그 교활함 때문에라도 이쪽의 규모와 상세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터. 그 높은 지능으로 축차투입과 축차소모의 폐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즉 강하를 감행한 시점으로부터 여명이 밝아오기까지, 적어도 수 시간가량은 산발적인 탐색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멕시코 중부고원에 강하했을 때도 비슷했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첫 교전 이후, 그 일대의 변종들이 일단은 몸을 사리지 않았던가. 칠흑 같은 밤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갑세력은 트릭스터를 신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로저스 중장 이하 합동임무부대 지휘관들이 도출한 결론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험한 지형이 인간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게 아니다. 트릭스터 입장에서도 아무렇게나 움직이다간 전파가 닿지 않을 굴곡이 많았다. 즉 대규모 변종 집단을 통솔하자면 교활한 것들의 활동범위도 제한된다. 자연히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개체의 숫자도 적어지고, 이는 어둠을 꿰뚫어보는 전파시야의 강점이 상당 부분 상쇄됨을 의미했다. 공중기갑강습의 전모를 파악하는 시점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옛 중국군 기지 수색이 여명 이전에 완료될 것인가 하는 점. 표면적으로는 탄도탄 기지이지만, 미국에서도 한때 탄도탄 기지였던 곳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거나 확장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물며 그곳이 중국의 군사기지라면야. 자료를 보면, 미국이 그곳을 탄도탄 기지로 분류한 근거는 90년대에 입수한 첩보였다. 그 뒤로 약 20년간, 해당 기지가 어떤 변화를 겪었을 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항복한 중국군 장성과 고위관료들 가운데 뭐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 믿었건만……. 국토안보부의 「종말 문서」가 유출되었을 즈음만 해도, 모겔론스가 중국군의 생물병기였다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했다. 그러나 크레이머 행정부가 들어선 이래, 그리고 시에루 중장의 사형이 집행된 이래, 그 가설은 어느 샌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되어있었다. 정부의 방침이 방침이거니와, 몇 가지 정황증거들이 추가로 발견된 탓도 있었다. 해당 시설 근처에 사상교화를 위한 강제수용소가 존재했다고. 그곳에 수용된 티베트 불순분자들을 생체실험의 제물로 희생시킨 것 아니겠느냐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사형수의 장기를 내다 파는 나라에선 충분히 벌어졌을 법한 일. 물론 추가적인 물증은 아직 제시된 바 없다. 여기까지 곱씹은 겨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진실로 그렇다면, 크레이머는 겨울이 우려하던 행보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원죄에 의거한 증오와 차별. 탁류에 휩쓸려 바깥세상으로 가는 지름길. 그것은 한편으로 인류의 존속을 위한 최선의 조치로서 정당화된다. 그게 단순한 명분에 불과했다면 또 모르겠으되, 부분적으로 사실이기도 하여 더욱 난감해지는 겨울이었다. 똑, 똑, 똑. 절제된 노크 소리가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허벅지 위에서 둥근 잠을 자던 스페인 국왕이 귀를 쫑긋거리며 깨어났다. 짖지는 않고, 몸을 긴장시킨 채로 문을 바라본다. 죽다 만 것들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일 터이다.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겨울이 문 쪽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문 열려있어요.” 들어오는 이는 두 명이다. 장연철과 민완기. “어휴, 이 동네는 한여름에도 밤이 쌀쌀하군요.” 장연철의 엄살을 듣고, 겨울은 리모컨으로 벽난로를 작동시켰다. 가짜 장작 아래 가스불이 들어온다. 딱, 딱 거리는 소리와 장작 타는 냄새가 가짜 치곤 그럴듯하다. 겨울이 고갯짓으로 불가를 가리켰다. “앉아서 불 좀 쬐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두 사람의 부장은 난롯가 양쪽의 의자를 차지했다. 코를 움찔거리며 낯선 이들과 겨울을 번갈아 응시하던 닥스훈트는,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몸을 느슨히 하며 다시금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래도 눈을 감지는 않고, 하품을 쩍 하면서도 깬 채로 분위기를 살폈다. “어떻게, 오늘 하루 잘들 보내셨어요?” 겨울이 묻자, 민완기는 그저 빙그레 웃었고, 장연철은 열심히 끄덕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원래부터 안전지역이었던 곳은 역시 다르군요. 역병 이전이랑 비교해서 달라진 게 없는 느낌입니다.” 이곳은 리드빌에서 가까운 스키 리조트였다. 여름엔 코스를 골프장으로 바꾸어 개장한다. 그밖에도 번지 점프 시설이나 카트 경주장, 승마장, 쇼핑몰과 레스토랑 등을 운영했다. 겨울이 앤과의 데이트에서 느꼈던 것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지. 장연철과 민완기를 비롯한 동맹 사람들 다수가 여기로 피서를 올 수 있었던 건, 콜로라도 주지사 ‘라지 채프’ 채피가 겨울과의 약속을 지킨 덕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군인가족 초청행사로 발표했다. 난민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 후한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명명이었다. 독립대대 입장에선 기대하지도 않았던 여름휴가. 장병들은 일단 기뻐하긴 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드러내는 정도가 결코 크지는 않았다. 장연철도 그 점을 지적했다. “작은 대장님도 뵙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해서 저는 진짜 좋았는데, 박 대위는 표정이 썩 밝지 않더군요. 그 밖에도 어째 다들 맥이 빠진 듯한 분위기가…….”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만도 하죠. 이 고생이 끝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거의 반년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걸요. 기운을 차리려면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할 거예요.” 특히 진석은 더하다. 저질러놓은 일이 있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뿐일 터이기에. 겨울에게 당분간 중대장직을 계속 맡겠다고 대답했을 당시에도, 그 당분간이 이토록 길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솔직히 기다림에 지쳐가기는 나도 마찬가지고.’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앤이 찾아올 수 없었다. 쿠데타 이후로 상당한 시일이 경과했으나, 이 넓은 대륙 어딘가엔 아직까지 화재를 꿈꾸는 불씨가 도사리고 있는 모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회중시계를 짤각대는 겨울에게 민완기가 물었다. “역시 실력이 부족한 겁니까?” 겨울이 아리송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가 부연하는 말. “사람들 앞에선 달리 말하기야 했습니다마는, 독립대대가 특수부대로 지정되었을 때부터 이건 좀 무리가 심하다 싶었지요. 혹시 그 때문에 작전이 지연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겨울은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진 않아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로요. 그림이 좋게 나온다는 이유에서 우리 독립대대를 보내려는 건 사실이더라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작전 결행을 늦출 만큼 위쪽이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어요. 변종들을 추위로 소모시키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날짜가 미뤄진 거죠. 이 작전의 실패는 현 정권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겨울을 보내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한겨울 중령이 갔는데도 실패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라는 식의 사후대응을 염두에 두고서.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겨울을 비정상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나름대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민완기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그 부분에선 보도된 내용을 믿어도 좋다는 말씀이시군요.” “대체로 그래요.” 제로 그라운드의 소재지인 티베트 고원은 세계의 지붕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그 고도에 비해서는 추위가 혹독하지 않은 편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고도에 비해서는 온난하다는 소리. 강하 예정지점의 최저기온은 영하 17도 언저리까지 떨어진다. 고지대 특유의 바람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아래라고 봐야 했다. 변종들이 그 추위를 견디는 건 나름의 월동준비 덕분이다.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놈들은 동족을 잡아먹는 한이 있어도 자신들을 살찌우는데 힘쓴다. 피하지방이 보온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겉으로 노출되는 부위에도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다. 연구자들은 피부에 형성되는 조직의 특성이 극지방의 생물 일부에게서 발견되는 결빙저항단백질과 유사하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겨울에도 춥지 않은 지역에 고립된 변종집단에겐 이러한 특성이 없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최소 한 번 이상의 적응과정을 거치거나, 특성을 전파하는 특수변종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허나 어느 한쪽만으로는 진짜배기 혹한에 맞서기 어렵다. 다시 말해, 어떻게든 열량을 소모시킨다면 놈들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물러나서 대사억제에 돌입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동족을 섭식해서 활동성을 유지하거나.’ 유라시아에도 험프백처럼 열량 확보에 특화된 개체가 존재하지만, 그런 놈들이 아무리 초목을 뜯어먹고 다닌들 만물이 얼어붙는 계절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러시아군이 기동만으로 변종집단을 몰살시킨 사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미심쩍어하던 민완기가 다시 물었다. “흐음. 허면, 대장님께서 보시기엔 독립대대의 수준이 어떠합니까?” 짧게 골몰한 겨울이 간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모자라진 않네요.” 최선은 아닐지라도 모자라지는 않다. 현재의 독립대대에 대한 겨울의 평가였다. 객관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러 특수부대들의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온 겨울이거니와, 속으론 여전히 독립대대를 보내기 싫은 마음이 남아있으므로. 여기엔 「교습」의 영향도 있었다. 어느 순간 어떤 식의 교련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알려주는 직관 보정. 이것이 훈련의 성과를 높이는 데 유의미한 도움이 되었다. 겨울 자신을 포함하여 계산할 경우엔 차선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훈련 기간이 길어져서 다행이지.’ 혼자 하는 생각이었다. “모자라진 않다, 라…….” 읊조린 민완기가 빙그레 웃었다. “예상보다 후한 평가라서 기쁘군요.” 이 말에 속으로 갸우뚱 하는 겨울. “기쁘시다고요?” “당연하지요. 이런 일로 빈말을 하실 분은 아니시니, 독립대대는 실제로 작은 대장님의 기준을 충족할 만큼 성장한 것일 테고, 당신께서 생환할 확률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니 저로서도 기쁠 수밖에요. 당신을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을뿐더러, 대장님께서 안 계시는 동맹은 제게 별로 재미없는 곳이 될 겁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지요.” 민완기의 눈매가 온화하게 휘어진다. 동맹의 방향성과는 별개로, 사람과 사람들의 무대가 다 무너진 뒤에 처음부터 쌓아올리는 일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밝혔던 사람이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말할 동기는 충분했다. 만약 겨울 이외의 누군가가 동맹의 중심인물이었다면, 민완기는 거기에 맞춰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웃는 일은 드물었을지라도. 서로 알 만큼 알 사이인 장연철은 나이든 부장의 속뜻을 읽고도 이제 와서 따로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겨울이 연철에게 물었다. “함께 온 사람들은 어때 보였어요? 다들 기대만큼 기뻐했으면 좋겠는데.”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런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겨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요. 기뻐하지 않을 리가 없죠. 원래의 국적을 떠나서, 다들 대장님께 굉장히 고마워하는 중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표정인데요?” “음, 그게…….” 난처하게 머리를 긁던 장연철이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말했다. “당장 뭔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만, 중국계 난민들이 너무 맹목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맹목적?” “음, 조금 과장하자면, 꼭 옛날 북한 사람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장연철의 설명이 조금 더 이어졌다. 적합한 표현을 찾느라 미간을 좁히는 여백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겨울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에루 중장의 유산……인가.’ 연철이 증언하기를, 전에도 그런 기미가 있긴 했으나 보다 급격하게 바뀐 것은 시에루 중장의 재판이 생중계된 시점 이후라고 했다. 그녀는 법정 진술에서 옛 모국의 정권을 악의적으로 대변하고, 정신 나간 민족주의자 겸 전체주의자 흉내를 냄으로써 미국 내의 중국계 2세 및 중국계 난민들과 분명한 선을 그어놓았다. 즉 그들을 테러세력에게 이용당한 또 다른 희생자로 만든 것이다. 「기존의 지도부로부터 숭고한 사명을 계승한 군부가 민간인들보다 우선적으로 탈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화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은 응당 조국을 위한 복수에 목숨을 바쳤어야 한다.」 ……. 「우리가 고결한 의거를 감행했을 때 이에 호응하여 미 제국주의자들의 압제에 맞서지 않은 모든 중국인들은 더러운 배신자나 다름없다.」 그녀의 연기는 미국이 원했던 수준을 훨씬 더 능가했다. 그녀 자신부터가 바라는 바였으므로. 결국 배신감을 느낀 중국계 난민들이 무의식중에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쌓아갈 기반으로서 겨울동맹에 대한 믿음이 절실해졌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겨울은 생각에 잠겼다. 특유의 어수룩한 친화력으로 서로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원만하게 중재하는 역할을 맡다보니, 이런 면에선 장연철이 민완기보다 민감할 수도 있었다. 민완기가 평했다. “저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봅니다.” “사람에겐 한계가 있으니,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거를 다 내다 버리자면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신통찮게 마련입니다. 과거는 곧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니까요.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뭔가를 해낼 리가 없지요. 그래서 사람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긍정적이라고요?” “예.” “어째서요?”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사람 같질 않으니까요. 긍정적인 의미로 말입니다.” 민완기는 흐뭇한 눈으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 423 [423화] #여명, 혹은 황혼 (3) 계속되는 훈련 속에 짧은 여름이 지나갔다. 9월 들어 첫눈이 내린 리드빌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밤의 냉기를 품은 눈이 상온의 낮에도 다 녹지 않아, 산맥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순백으로 뒤덮여갔다. 11월 중순이 되어서는 최저기온이 화씨 14도(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가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기상청은 올해 겨울이 평년보다 더 추울 것으로 내다봤다. 작년에는 혹서, 올해에는 혹한. 지휘관으로서의 겨울은 근심이 반 기대가 반이었다. 근심은 추위 그 자체에 의한 손실을 우려하는 것이고, 기대는 이러한 강추위가 작전수행과정에서 긍정적인 변수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계절은 반대였으되, 작년에도 혹서기를 이용하여 멧돼지 사냥을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이러한 정보력은 변종에겐 없는 인류의 힘이었다. 대대 장병들이 제로 그라운드의 기후에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콜로라도 산지의 날씨는,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부분에서 티베트 고원과 흡사했다. 둘 다 내륙 깊은 곳에 위치한 고지대이기 때문이다. 삐익- 밤을 맞아 외롭게 켜둔 스탠드 아래, 펼쳐진 노트북이 단조로운 전자음을 냈다. 실행 중인 것은 원격 지휘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통해 거듭해온 모의 전술훈련은 겨울이 대대장 역할에 적응하는 데에도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중남미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전투를 기반으로, 합동임무부대에 속한 지휘관들에게 각 국면에서의 상황판단을 요구하고, 그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사후에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전술기호로 가득한 지도 속에서 흐른 시간은 전투 개시 후 11분. 관측 가능한 적의 움직임과 그 일대의 지형을 보니, 가장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개체가 어디쯤에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한정된 포격지원으로 갈아버리자니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 지휘역량을 강화한다며 실제보다 빡빡한 제한을 걸어놓은 탓. 그럼에도 겨울은 해당지역에 포격요청을 걸어놓았다. 즉각적인 포격이 아니라, 지휘관이 요청하면 그때 쏴주는 형식으로. 결정적인 순간 교활한 것에게 엄폐와 피신을 강요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통제력을 상실케 할 작정이었다. 잠깐이면 된다. 그 잠깐이면, 변종집단의 대다수는 미리 구축된 살상지대로 미친개처럼 뛰어 들어올 테니까. 자동화기의 살상력은 1분 사이의 대학살을 가능케 한다. 겨울은 보온병에 담아두었던 차를 마시며 때를 기다렸다. 화면 속에선 무미건조하게 그어지는 실선과 메시지들, 깜박거리며 이동하는 기호들이 전투의 진행상황을 보여주었다. 변종집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겨울이 일부러 만들어둔 약점으로 들어온다. 밖에서 관측하기엔 파고들기 좋은 균열이었을 것이다. 딸깍. 엔터를 치자, 드디어 미뤄두었던 포격이 쏟아졌다. 역시나, 변종집단은 화망에 뛰어들고서도 여전히 공세를 유지했다. 실시간으로 미친 듯이 갈려나간다. 이 집단은 거의 와해될 지경이 되어서야 뒤로 물러났다. 살아남은 수는 처음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했다. 내친 김에 트릭스터까지 찾아서 죽여 놓으면 교육사령부(TRADOC)의 평가관으부터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만, 겨울은 공세를 격퇴한 시점에서 병력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로 그라운드 강하를 대비한 연습에 불과하니까.’ 겨울이 지향하는 것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승리다. 티베트 고원에서의 작전 목표 역시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것이지, 적의 섬멸이 아니었다. 어쩌면 트릭스터가 포격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다. 눈길이 다시 모니터에 머물렀다. 이 지도 어디에 강화종 위퍼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숲에선 열압력탄이나 수류탄의 효율도 떨어졌다. 군견이 있다면 움직이는 것 자체는 가능해도, 달아나는 트릭스터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불가피하게 무리를 해야 한다. 잠시 후, 프로그램은 모의 전투가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집계된 사상자는 고작 한 자릿수. 실제 전투기록과 비교하면 삼분의 일 이하로 낮은 숫자다. 그러나 평가관은 만족하지 않았다. 정식 강평이 나중에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추궁하는 어조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귀관의 병력운용에선 오늘도 지나친 소극성이 엿보였다. 적의 관측 범위를 정확히 계산하고 포격을 통해 살상지대로의 공격을 유도한 것까진 좋았지만, 정작 그렇게 만들어낸 기회에 적극적으로 전과확대를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단어 선택에서 불만이 느껴진다. 잠시 생각한 겨울이 무난한 답변을 보냈다. 「Lt. Colonel_Han : 적 주력을 섬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과이며, 제로 그라운드에서는 전과확대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평가관은 다시금 겨울을 질책했다. 「부적절한 해명이다. 제시된 상황은 제로 그라운드와 무관했다. 그러므로 귀관은 병력운용의 일반적인 원칙을 실천했어야 한다. 주어진 조건만을 놓고 판단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겨울이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Lt. Colonel_Han :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해당 시점에서 추적을 결심했다면 숲에 기동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매복에 의한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숲을 종단하는 선형의 기동로는 허리가 끊어지기도 쉽지 않겠습니까? 열압력탄의 수량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선 시도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인가, 하기 어려운 것인가?」 「Lt. Colonel_Han : 지휘관으로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귀관은 나와 생각이 다르군.」 이번에도. 턱 아래 깍지를 낀 겨울은 혀끝으로 불쾌한 뉘앙스를 되살려보았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동안의 언행으로 미루어볼 때 이 평가관이 겨울에게 품은 불만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난민 출신 병사들을 지나치게 감싸고돈다는 것. 둘째. 군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하다는 것. 셋째. 더 좋은 성과를 낼 능력이 있는데도 몸을 사린다는 것. 첫째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여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부하들이 모두 태생부터 미국 시민이었어도, 겨울은 지금과 똑같이 아껴주었을 것이다. ‘난민이라서가 아니라 부하들이라서 존중하는 거지.’ 겨울 스스로는 이렇게 여겼고, 이것이 두 번째 불만과 관련이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은 없다.」 언젠가 이 평가관이 했던 말이자, 그가 생각하는 군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군복을 입은 자 당연히 죽음을 각오해야 하며, 지휘관은 부하들의 희생을 피하려고만 해선 안 된다는 의미. 어느 정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평가관의 관점에서, 겨울은 부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에 지나칠 정도로 연연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꽤나 부당한 평가였다. 실전에서든 모의전에서든 인명손실 최소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건 사실일지언정, 적어도 겨울이 작전 목표를 경시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엔 주어진 임무를 달성했다. 다른 장교들의 성향도 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세 번째야말로 모든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 ‘한겨울 중령’이라면 이보다 더 잘 해내야 한다는 것. 한 마디로 말해, 처음부터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전쟁영웅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평가관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수로 구성된 평가단 가운데 유독 까탈스러운 하나가 있을 따름. 겨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날 내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겨울을 작전으로부터 배제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최종평가는 결코 낮지 않을 뿐더러, 정말로 낮은 평가가 나온다 한들 겨울보다는 오히려 평가를 내린 쪽이 더 큰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겨울 입장에선 이마저도 썩 달갑지 않은 믿음이지만. 민완기가 겨울을 일컬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라 했던 건 어디까지나 겨울의 품성을 두고 내린 평가였다. 아무리 열정적인 혁명가라도 권력을 쥔 다음에는 타락하기 마련이지만, 겨울만은 그 법칙의 예외가 될 것 같다고. 싱 소령이 겨울을 한없이 신의 이름에 가까운 사람이라 했던 것 또한 겨울의 마음과 인격에 대한 이야기였지, 겨울을 문자 그대로의 초인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겨울은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들을 물 밖으로 헤엄치게 만들자면 그러한 입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민완기는 말했다. 사람만으로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사색이 여기에 이를 때면, 겨울의 의식은 항상 그 연장선으로 나아가곤 했다. 신으로서의 봄을 긍정해야 하는가. 매번 길어져도 결국은 소득 없이 끝나는 고민이었다. 겨울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접었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랍을 열어 두 개의 편지를 꺼냈다. 하나는 앤에게서 온 것이고, 나머지 하나엔 발신자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다. 앤과 편지를 주고받은 지는 꽤 되었다. 화상통화와 별개로, 편지엔 편지 나름의 낭만이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사진처럼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하는 나의 겨울에게.」 시작은 항상 동일한 문장인데도 읽을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된다. 문장은 같아도 날짜는 다르니, 변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로 당신을 만나지 못한지 130일째 되는 날이네요.」 겨울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편지엔 전화상에서 아껴둔 말들이 적혀있었다. 「130일. 믿어져요? 자그마치 130일이나 지났어요. 오, 난 내가 당신 없이 그 허전한 나날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모르겠어요. 그 전에는 또 무슨 수로 견뎌 냈던 걸까요? 아침에 목소리를 듣고 저녁에 얼굴을 보더라도, 결국은 그 순간에만 잠깐의 위안을 얻을 뿐이에요. 화면 속의 당신은 너무 먼 곳에 있네요. 너무도 멀리.」 「최근엔 좋아하던 술도 전혀 손대지 않게 되었어요. 취하는 순간마다 당신의 온기가 너무도 사무치게 그리워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건 참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당신이 보낸 말들이 언제나 품속에 있다는 건, 겪어보니 정말 따뜻한 감각이더군요. 당신도 그런가요?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는 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약간은 부끄럽기도 하네요. 내가 글을 그리 잘 쓰는 편은 아닌데, 그걸 당신이 반복해서 읽는다고 생각하니…….」 「음, 오늘은 재향군인의 날이었어요. 창밖으로 참전용사들의 거리행진을 보면서 나는 또 당신을 생각했죠. 음, 물론 낮이나 밤이나 당신 생각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조금 특별한 ‘당신 생각’이었어요. 그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세계가 있고, 당신의 헌신 덕분에 여전히 살아있는 내가 있죠.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 아니냐고 흉보지는 말아요. 앞서 말한 것처럼, 난 항상 당신 생각뿐인걸요. 생각이 이렇게 흐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단 말예요.」 「겨울의 체온이 그리워질 때마다,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피쿼드 호의 어둠이에요. 그 어둠 속에서 당신은 두려워하는 나의 손을 잡아주었었죠. 이게 바로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당신의 체온이에요.」 「이미 고백했듯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정말로 고마웠어요.」 「진부한 말이지만, 당신을 만난 건 내 생애 최대의 행운이었어요. 비록 이처럼 그리워하고 있어도, 내 삶은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더 완벽해요.」 「아, 추운 곳에 있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데……. 당신이 돌아오면, 그때는 새로운 봄이겠네요.」 「그 봄이 반드시 올 것을 믿어요. 우리가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 맞이할 첫 번째 봄이.」 「그때까지는, 서로 조금만 더 그리워하기로 해요. 세 시와 네 시 사이의 간격이 길수록 네 시의 기쁨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이 편지는 여기서 줄일게요.」 「마음을 담은 키스와 함께. 당신의 앤, 조안나 깁슨 보냄.」 「추신 : 부모님께서 겨울을 굉장히 궁금해 하고 계세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놓고, 정작 누군지는 오랫동안 말씀을 안 드리니까 여러모로 걱정이 드시는 모양이에요. 염려가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흔들리기는 하지만, 역시 직접 대면하는 날까진 알려드리지 않으려고요. 깜짝 놀라실 모습을 포기할 수가 없네요. 그건 무척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 마지막 줄을 읽은 겨울은 다시 한 번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 424 [424화] #여명, 혹은 황혼 (4) 다음으로 읽을 편지는, 사실 적잖이 불편한 것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보낸 이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봉투를 뜯기 전부터 은은한 향이 새어나왔다. 페이퍼 나이프로 뜯어보면, 역시나 익숙한 글씨체가 겨울에게 감정을 담은 인사말을 전해왔다. 서명을 자신이 쓰는 향수로 대신하는 사람이다. 「은인, 건강하신지요?」 「당신께서 머무시는 산맥엔 서리 내리는 나날을 지나 함박눈 쌓이고 얼음이 어는 계절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저는 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 있으나, 마음만은 은인께서 계시는 곳의 추위를 느끼는 듯합니다.」 “…….” 이쯤에서 그냥 접어버릴까 망설이던 겨울이, 부담스러운 한숨을 쉬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남은 글줄을 읽어 내려갔다. 「주야를 불문하고 은인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가득인 것은, 제가 누리는 안전함과 따뜻함이 누구의 덕분인지를 잊지 않는 까닭입니다. 비참했던 과거가 떠올라 안온한 현재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마다, 당신께서 베푸셨던 도움들이 그 무렵의 제게 있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이었는가를 되새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은인의 근황을 문자 그대로의 소식으로만 접하는 처지인지라, 당분간은 이러한 불안과 더불어 지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저 자신이 경솔했던 것을.」 「당신께 백합과 물망초를 보냈던 일은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곤란한 꽃말이었지요. 은인께서 당혹스러워하셨을 모습이 그려집니다. 당신을 불편하게 해드린 점, 다시 한 번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하오나, 감히 바라건대 제 진심을 오해하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진정으로 은인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이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제게도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이라, 이따금씩 헛된 공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부디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은인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사라집니다.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고 말을 들어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졸음이 쏟아진들 잠을 잘 수 없게 됩니다…….」 이후로도 절절하게 연민을 자극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나 행간엔 보다 진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감춘다고 감추고는 있으나, 비슷한 편지가 벌써 수십 통인지라 모르는 편이 더 이상했다. 그 숫자 자체가 비정상인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기 싫은 겨울에겐 당연히 부담스럽고 불편한 집착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엔 용납하기 어려운 문화적 배경마저 깔려있었다. 얼나이(二奶), 혹은 샤오싼(小三). 역병 이전의 중국에 만연했고, 지금의 중국계 난민들 사이에서도 되살아날 조짐이 보인다는 축첩문화. 얼나이는 금전적인 계약으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를, 샤오싼은 거기에 연애감정까지 얽혀있는 경우를 뜻했다. 후자를 두고 디싼저(제3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들의 사정에 누구보다 해박한 민완기가 말하기를, 역병이 번지기 전의 중국에서 축첩은 지배계층이 공유하는 특권으로 통했단다. 즉 일차원적인 욕망을 해소함과 동시에, 사회적 금기를 공공연히 무시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중국이 실제로 그런 나라였다니 할 말은 없다. 한편, 그에 응하는 여성들도 얼나이가 되는 것을 떳떳하게 여겼다고. 가난하고 전망도 어두운 남자들은 애당초 남자 취급을 해줄 가치가 없는 낙오자들이며, 자기 남자를 지키지 못하는 여자는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니 도태당하는 게 정상이라는 논리다. 극도로 부패한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적자생존의 원리였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물질적인 이익이 사람다움을 대체하는 양상. 곧 저 메마른 바깥세상으로의 첩경이었다. 겨울로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런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니 심리적인 저항감이 약할 수밖에.’ 누군가의 잘못이 온전히 그 사람의 책임인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보면 주웨이도 탁류에 휩쓸린 피해자였으되, 거기까지 이해해주는 건 명백히 겨울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냉정하게 잘라왔다고 생각하지만, 한층 더 차가운 메시지를 보내야 할 시점이다. 겨울이 펜을 들었다. 의례적인 도입부 이후로 용건을 적어 넣는다. 「……그 마음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마세요. 서로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화가 난 적은 없으나, 앞으로도 이런 편지를 자주 받게 된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화가 날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포효하는 폭풍 작전이 전미의 관심사인 만큼, 제 안부를 확인하는 건 언론의 보도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니, 소저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약 소저께서 제 의사를 존중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때의 우리는 더 이상 친구로도 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께 약속드렸던 것들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게도 유감스러운 일이 될 테지요. 아무쪼록 서로를 위하여…….」 필체는 뒤로 갈수록 딱딱해졌다. 주웨이가 약속한 금전적인 도움 따위 지금은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이제 앤 없이는 겨울도 없고, 겨울이 없으면 동맹의 앞날도 없을 테니까. 뭔가 난관에 직면하더라도, 달리 자금을 마련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편지를 마무리한 겨울은 처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가 몸을 풀었다. 별을 보는 건 언제라도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스탠드 불빛을 등지고 보는 하늘에 무수한 별빛이 반짝인다. 별의 운행은 겨울로 하여금 이 세상의 법칙인 봄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독립대대의 성탄절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갔다. 조용한 긴장 속에 새해가 밝았고, 제로 그라운드 강하는 드디어 본격적인 초읽기에 들어갔다. “아.” 부대 휴게실에서, 하사 장한별이 리모컨을 놓으며 탄식했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똑같은 방송만 나오네요.” 제로 그라운드, 합동임무부대, 한겨울 중령, 러시아 공수군, 로저스 중장, 백악관, 담화, 크레이머 대통령, 티베트 고원, 추위, 강설량, 국방부, 공수기갑강하……. 모든 방송사들이 한 결 같이 주워섬기는 공통의 키워드들이었다. “젠장젠장젠장…….”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욕설들. 한별은 예전에 비해 입이 많이 거칠어졌다. 그게 강하작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냐면, 얼마간의 영향은 있을지언정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하루는 지나가던 겨울이 우연히 그녀가 거칠게 내뱉는 비속어들을 들었다. 주둔지 외곽,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Fuck! Shit! Damn! Shut the fuck up motherfucker!” 대체 누구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가 싶어서 슬쩍 봤더니, 혼자 허공에 대고 인상을 쓰며 욕을 하고 있지 않겠는가.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면 직무 스트레스가 너무 지나쳤나? 정신분열? PTSD? 마약중독? 온갖 생각이 스쳐간 겨울이 그녀에게 뭐하는 거냐는 질문을 던지자, 한별은 엄청나게 창피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바, 발성연습 하는 건데요.” “발성연습이요?” “네. 디안젤로 중사님이, 하사쯤 되는 년이 왜 그렇게 욕을 못하냐고 하셔서.” “…….”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겨울이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자, 살짝 정색한 한별은 이건 부사관들의 문화이니 모르는 척 해주셔야 해요, 라고 답하여 겨울을 다시금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금, 그 원흉인 디안젤로 중사가 말했다. “흠. 온 미국이 관음증에 걸린 것 같군요.” 이에 선임상사 메리웨더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관음증이라고?” “그렇잖습니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는 건데, 그걸 무슨 NFL 결승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잖습니까. 승산이 얼마나 된다느니, 부대의 전력을 분석한다느니, 현장 소식이 어떻게 전해질 예정이라느니……. 심지어 운동선수들 정보 보여주듯이 우리 부대 간부들 정보도 내보내더군요. 이런 식으로 방송에 데뷔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즉, 너무 천박하게 느껴진다는 말인가? 우리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예. 마치 전쟁을 포르노처럼 가볍게 소비하는 것 같습니다. 그 포르노에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할 입장에서, 별로 달가운 기분이 아닙니다.” 잠시 생각하던 상사가 중후하게 대답했다. “흠. 그거야, 걸프 전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 아닌 전통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시민들의 전쟁수행의지를 북돋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기도 하고. 무슨 심정인지는 이해하네만, 적어도 부하들 앞에서는 언행에 주의하도록. 사기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그러면서 대대장인 겨울을 곁눈질했다. 겨울은 가벼운 눈인사로 감사를 표했다. 이런 쪽까지 겨울이 일일이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상사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디안젤로 중사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답했다. 「포효하는 폭풍」 작전까지는 아직 일자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국이 송출하는 영상은 총성과 폭음으로 가득했다. 제로 그라운드 강하를 위한 사전준비로서의 「자유의 요새」 작전은 이미 12월 15일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륙분할 작전에서 카르타헤나 위장상륙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미군 수뇌부는, 티베트 고원에 대해서도 같은 속임수가 먹힐 것이라 장담했다. 확실히 「자유의 요새」 합동임무부대, 통칭 리버티 부대가 쿤룬 산맥 남쪽으로 얼마나 많은 변종들을 끌어내느냐에 따라 제로 그라운드의 변종 밀도가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겨울도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리버티 임무부대엔 그 유명한 101공수사단까지 합류했으니, 어지간한 위기를 겪지 않고서는 확실하게 자리를 지켜줄 것이었다. 「포효하는 폭풍」 작전을 위한 다른 준비절차도 있었다. 티베트 고원 주변지역의 상공에 지속적으로 항공기를 띄워, 변종들이 비행 소음에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터보제트의 소음이 수시로 머리 위를 통과하면, 새까만 밤의 강하에 대해서도 그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 건쉽의 주기적인 포격까지 더해졌으니, 디데이에 어지간한 포성이 들리더라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과민한 반응을 보이진 않을 터. 선승구전(先勝求戰). 싸움의 성패는 싸우기 전에 정해지는 쪽이 이상적이다. 그 성향과 신념이야 어쨌든, 크레이머는 무능한 최고사령관이 아니었다. ‘실제로 계획을 세우는 건 국방부의 몫이었겠지만, 그걸 실제로 채택하는 과정에선 대통령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니까. 특히 이번 작전 같은 경우는 더 그렇지…….’ 독립대대를 특수전 사령부 산하로 편입하고 강하작전에 투입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적잖이 불안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크레이머의 무리한 요구는 딱 거기서 멈추었다. 더 이상의 억지를 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현실감각이었다. 휴식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정보장교 머레이가 얼굴을 감쌌다. “게임도 강제로 하면 재미없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게임 형식으로 진행되는 야간교육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위성과 항공정찰로 확인한 현지의 지형을 가상공간으로 재현하여, 작전 실시 이전에 합동임무부대의 장교와 병사 전원에게 현지 환경을 숙지시키는 훈련이다. 물론 변종들과의 전투도 구현되어있었다. 프로그램 개발엔 시일이 필요했으나, 연초부터 지금까지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예산과 인력도 많았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투입되었기에 보기 드문 수준의 결과물이 나왔다. 겨울은 굉장히 참신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독도법」에 의지하여 그 일대의 지도를 모조리 「암기」하기는 했지만, 3차원 그래픽으로 접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두었다. 나머지는 현장의 변수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 425 [425화] #여명, 혹은 황혼 (5) 1월 4일, 독립대대는 오키나와 남서해상의 이시가키(石垣) 섬으로 재배치되었다. 이곳은 제로 그라운드 강하를 위해 확보한 전진기지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존에 있던 공항을 확장하여 사단급 부대의 항공수송에 필요한 시설과 설비를 갖춰두었다. 제로 그라운드 강하 당일엔 이곳에서 수송기를 타게 될 예정이었다. 철수할 땐 수송이 불가능한 장비들을 파기하고 남중국해의 항모전단으로 철수할 계획인지라,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에게 조금 뜻밖이었던 것은, 이 섬에 다수의 민간인 거주지가 분포한다는 점이었다. 그 중엔 사실상의 소도시에 가까운 곳도 있었다. 원래부터 살던 주민들이라고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섬 곳곳에 감염으로 인한 혼란과 파괴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 대륙과의 가까운 거리를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정주를 결심한 해상세력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미국 정부가 체계적으로 이주시킨 난민들이었다. 관할기관은 태평양 군정청. 일종의 식민 사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에 섬의 주민들 중에서 일본계를 찾아볼 순 없었다. 크레이머 행정부가 추구하는 새로운 질서(New order) 때문이었다. 섬의 정박지를 이용하는 건 대개 군함들이었지만, 가끔 대형 어선들이 몇 척씩 무리지어 닻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배들은 민간선박인데도 불구하고 제각각 중기관총좌와 폭뢰투사기, 로켓 발사기 등을 최소 하나씩은 탑재하고 있었다. 멜빌레이가 존재하는 한, 방어수단을 갖춘 대형 선박이 아니고서는 연근해에서조차 조업을 하기 어려웠다. 겨울은 주둔지가 변경된 이후 이따금씩 민간인 거류구의 술집을 찾았다. 선원들이 무리지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다음의 일이다. 기지 인근 마을 주점의 허름한 내부 풍경은 「종말 이후」에 어울리는 구석이 많았다. 이제 와선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 벽이 부서졌던 자리마다 판자를 못질해 놨다. 눅눅한 판자는 버려진 탄약상자로부터 뜯어낸 것들이었다. 지붕을 덮은 양철 플레이트에선 녹슨 구멍마다 햇빛이 샜다. 희미한 네온사인 조명 아래, 일본어가 쓰인 물건들은 그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시대의 흔적으로만 남아있었다. 단순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영내에도 장교들을 위한 바가 존재하지만, 겨울이 원하는 건 술이 아니었다. 억센 선원들은 술자리에서 무용담을 늘어놓길 좋아했다. 갑판으로 끌어올린 그물 속에 괴물이 잡혀있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들. 주민들은 주민들끼리 어울려 일상의 고단함이 녹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복차림으로 모자를 눌러쓴 겨울은, 음료를 홀짝이며 그들의 취중진담에 귀를 기울였다. 본토로는 전해지지 않는 생생한 목소리들이었다. 다 듣고 품게 된 생각이 이러했다. ‘이곳은 잿빛이야.’ 주민들이 현재의 처지에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역병의 위협에서는 벗어났고, 최저한의 의식주는 보장되었으므로. 그러나 더 나은 삶을 꿈꿀 여지는 거세된 채였다. 그러므로 이 섬의 색채는 회색이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그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테지만. 이 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량 인도네시아로 수출 된다. 인근의 다른 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러니 그 값은 결코 높게 받을 수가 없었다. 인도네시아가 기아를 겪으면 미국의 자원수급에 지장이 생기는 까닭. 당장 독립대대의 공수장갑차와 전차들만 하더라도 인도네시아 산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선 인도네시아가 인구과잉인 채로 남아있는 편이 이득이었다. 광물자원을 대가로 한 식량공급에 힘입어, 인도네시아는 이 시점에서도 인구 그래프가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따라서 이 섬의 생산력은 오직 미국 본토의 부담을 경감할 목적으로만 건설된 것이었다. 미국이 안정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터. 겨울은 언젠가 되새겼던 양용빈 상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만 사는 삶은 비참한 것이라고. 회색 풍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는 삶이 단조로운 만큼 들을 부분도 많지 않았다. 겨울의 방문이 고작 몇 번으로 그친 이유다. 어차피 겨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색채인데다, 달리 주의를 할애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연일 계속되는 회의, 부대원들의 사기유지, 장교에게 필수적인 서류작업, 작전에 대한 최신정보 숙지, 훈련계획 작성 등. 섬에서의 훈련은 주로 야간전투능력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강하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자정에 치고 들어가 여명 전에 철수하게 될 터. 때문에 독립대대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공수군에게도 최신형 야시경과 적외선 표적지시기, 피아식별장치 등이 일괄적으로 보급되었다. 야시경의 개당 가격이 1만 7천 달러에 달한다는 말을 듣고, 공수군 다비도프 대령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이렇게 평가했다. “전에 알던 가장 비싼 물건보다 더 비싸졌군. 하여간 미국 놈들 돈지랄은 알아줘야 돼.” 그래도 그 값에 상응하는 성능을 보여주긴 했다. 「환경적응」과 화기숙련 계열의 보정에 힘입어 어지간한 수준의 야시경보다 나은 밤눈을 갖게 된 겨울이었지만, 이 야시경 만큼은 정말로 유용했다. 해상도도 높고, 감도도 좋고, 무엇보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았다. ‘적어도 작전 당일의 야간에는 하차전투를 하더라도 변종들을 일방적으로 사살할 수 있겠지.’ 부대원들의 훈련성과를 보고 내리는 판단이었다. 장갑차 기관포에 소음기를 달지 못하는 이상, 강하 초기에 하차전투를 치를 확률은 높다. 섬 북부의 산지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해변의 공항에선 다양한 종류의 공격기와 폭격기들이 쉴 새 없이 뜨고 내렸다. 그 광경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는 폭격으로부터 심리적인 위안을 얻곤 했다. 한 가지 뜻밖이었던 것은, 작은 섬에 불과할지라도 고국의 땅을 밟은 일본계 병사들이 이렇다 할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제까지 유별난 부적응이나 불만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훈련 내내 직접 대면하며 확인했으나, 물어봐도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답할 뿐이었다. 겨울은 일본계 장병들의 조용한 순응이 정말로 그들의 본심(혼네/本音)인지, 아니면 본심과 별개로 일단 질서에 복종하고 보는 것인지(다테마에/建前)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난민구역에서의 참담한 생활이 그런 경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말하자면 혼네와 다테마에의 경계는 일본계 난민들의 울타리였다. 장연철로부터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수면 아래에서 공동체 규모의 따돌림과 차별, 매장이 이루어졌다는 것. 이는 지난날 주도권을 쥐었던 깡패들, 그리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편승했던 일부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로서도 의식이 될 수밖에. ‘차라리 중국계처럼 대놓고 배척하는 편이 나은데.’ 당연한 소리지만, 보이는 울타리보다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넘기가 더 까다롭다. 평소에도 미묘한 거리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대로서의 그들을 못 믿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반년, 실전경험을 축적하기 위한 멕시코 고원 강하는 오아하카 공항 점령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각 중대는 신뢰해도 좋을 능력들을 보여주었다. 다만 겨울은 제로 그라운드에서 돌아온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 견고한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겨울이 바라는 방향으로 동맹에 합류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만약 겨울이 이에 실망이라도 할 경우, 봄은 그 실망감을 어떻게 해석할는지. 겨울은 사색 끝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모든 것은 일단 무사히 돌아온 다음에 곱씹어도 늦지 않을 일이다. 1월 18일엔 긴급 브리핑이 열렸다. 브리핑이야 항상 하던 것이었으나, 이날 전해진 정보는 겨울을 비롯한 장교들을 꽤나 난감하게 만들었다. “화재……말씀이십니까?” 누군가가 묻는 말에, 로저스 중장은 대답 대신 회의실 정면에 투사되는 화면을 바꾸었다. 실시간 위성영상을 본 장교들이 예외 없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산등성이 몇 개는 이미 까맣게 타버렸고, 가장자리에선 주홍빛 테두리가 영역을 넓혀가는 광경. 달아오른 쇳빛의 띠는 티베트 고원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었다. 새로운 질문이 나왔다. “Sir. 저 화재가 우리 작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중장은 부분적으로 부정했다. “제로 그라운드까지 확산될 확률은 낮다. 그러나.”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불이 계속해서 번진다면 강하지역 봉쇄엔 약간의 문제가 생기겠지.”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동안 살포한 지뢰의 분포도였다. 여기에 산불이 발생한 위치를 겹쳐보건대, 이미 많은 수의 지뢰들이 고열에 못 이겨 터져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매설된 지뢰라면 불에 대한 저항력이 좀 더 높았겠으나, 하늘에서 뿌려댄 지뢰에 거기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공수군 브루실로프 대령이 지도를 노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말 그대로 약간의 문제로군요.” 동료 연대장인 다비도프 대령이 동의했다. “저런다고 해도 지뢰가 다 무력화될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저지력은 발휘해줄 겁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요. 저 화재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겨울도 속으로 끄덕였다. 전에도 생각했듯이, 지뢰는 접근을 거부하는 무기다. 그리고 삼백만개에 달하는 지뢰를 뿌리는 데엔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까지도 살포가 진행 중인 구간이 존재할 만큼. 교활한 놈들은 반드시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었다. 미국과 러시아 장교들이 계급을 막론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즉, 지뢰를 제거하고자 일부러 지른 불이다?” “놈들이 우리의 의도를 대충이라도 파악했다는 전제 하에, 화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법한 일이지요.” “하긴, 그동안 당한 게 있으니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한가…….” “그래도 참 단순한 발상이군. 저러고서 들어갔는데 또 지뢰가 터지면 많이 실망하겠어.” “실망?” “그 왜, 전에 머리 박고 자살한 놈도 있는 걸 보면 감정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니.” “흠. 혹시 그냥 몸을 녹이려고 피운 불이 의도치 않게 커진 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쪽에서 가한 폭격이 화근이 되었다거나.” “지뢰지대 방면으론 폭격을 가한 적이 없을 텐데?”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안 좋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두는 편이 낫지. 어쨌든 기존의 봉쇄망에 예기치 않은 약점이 생긴 건 사실이고.” “그 구간에 대한 보강 요청을 올려볼 순 없겠습니까?” “그건 좀……. 기존에 정한 숫자도 가용자원과 일정에 맞춰서 한계까지 끌어올렸던 건데, 거기서 더 뿌려달라고 하면 위에서도 난색을 표할 겁니다. 결국 어딘가는 밀도가 낮은 구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작전을 아예 연기해버리지 않는 한은.” “요청을 하더라도 일단 불은 다 꺼진 다음에 해야지. 지금은 지켜봐야 할 때야. 저 화재가 어디까지 커질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가뜩이나 강설량이 적어서 모든 게 바싹 말라있는 마당에.” “저 연기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만큼의 연막이면 만 단위의 변종집단이 관측을 피해 움직였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트릭스터는 하늘이 인류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또한 장기간의 지뢰 살포는 이쪽의 의도를 너무 분명하게 드러냈다. 듣고 있던 겨울이 적당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포트 로버츠에 있었을 때, 트릭스터가 포함된 변종집단은 공중정찰을 방해하고 화력지원을 차단할 목적에서 기지 인근에 불을 질렀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비슷한 사례가 많다는 건 다들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공수군 장교 하나가 끄덕거렸다. “하긴, 잠깐이나마 연막차장에 특화된 괴물이 있었을 정도이니…….” “뭐?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미국 쪽 기록에 있더군. 애크리드라고. 하도 빠르게 도태된 탓에 별 내용은 없었지만.” 여러 의견이 오가는 과정에서, 상황의 변화에 우려를 드러낼지언정 두려움을 내비치는 이는 없었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작전 같은 것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겨울은 오래 전 중위 시절의 캡스턴 아래에 있었던 피어스 상사가 말한 경구를 떠올렸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작전이다.」 작전은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는 농담도 있다. 한 번이라도 실전을 치른 군인이라면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냥 잘 풀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도 겨울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긴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의 온도가 그리운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품게 된 기대였다. 인간적인 미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삶에 미련이 없었던 시절의 겨울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브리핑은 합동임무부대 장교들에게 상황을 숙지시키는 선에서 종료되었다. 애초에 화재 대응은 보다 높은 선에서 이루어질 문제였고, 그마저도 가능한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토에서조차 진압에 애를 먹을 규모의 불길이었으므로. 이후 시일이 경과하면서, 더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그 범위는 대체로 지뢰가 뿌려진 영역과 일치했다. 최소한 변종들이 일부러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진 셈이었다. 그래도 작전을 연기할 정도의 변수는 아니었다. 기대와 불안 속에서 마침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 426 [426화] #여명, 혹은 황혼 (6) 일찍이 예상했듯이, 디데이는 달이 뜨지 않는 날로 정해졌다. 새까만 어둠에 갇힐 변종들은 적외선 조명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합동임무부대를 상대로 무척이나 불리한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더불어 며칠 전부터 조금씩이나마 눈이 내려준 덕분에, 교활한 것들의 체계적인 방화에도 제동이 걸렸다. 산불이 커지기 쉽지 않은 환경.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숲은 전보다 훨씬 더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지상에서 형성된 마른 구름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보다 넓은 범위로 퍼져, 위성관측과 항공정찰만으로는 그 아래의 사정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도 기갑공수부대의 화력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큰 걱정거리까진 아니었다. 또한 은폐된 변종집단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한들, 이쪽의 의도와 실체를 정확히 인지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분명한 불안요소는 예의 그 탄도탄 기지 하나였다. 내부가 어찌 되어있는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투입을 앞두고 대기하는 오후는 의외로 여유로운 여백이었다. 장비는 미리 실어두었고, 시간 맞춰 사람만 탑승하면 된다. 변동사항이 전달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회의도 무의미했다. 기상조건에 따라 출발이 앞당겨질 수도 있었으므로, 며칠 전부터 출동준비를 마쳐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기다림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겨울은 이 여백을 앤과의 통화로 채웠다. 통신위성이 남아도는지라, 거리로 인한 불가피한 송수신 지연을 제외하면 영상통화의 품질은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반 통화라면 모를까, 누구나 이렇게 몇 시간씩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겨울이야 고급 지휘관답게 망 접속이 허가된 노트북을 지급받았으나, 대부분의 장병들은 한정된 단말기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까닭이었다. 포트 로버츠 쪽 사정도 비슷했다. 지금쯤 군정청 사무소 앞엔 기다란 줄이 늘어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겨울은 눈 딱 감고 특권을 만끽하기로 했다. 심지어 앤은 자기 일을 다 미뤄두면서까지 시간을 냈다. “차기 부국장이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겨울이 농담처럼 묻자, 모니터 속의 앤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요. 아직 정식으로 지명을 받은 것도 아닌데. 솔직히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고요.」 “나이 스물아홉에 국장이 된 에드거 후버 같은 경우도 있잖아요.” 겨울의 말에 앤이 실소와 함께 눈을 흘겼다. 「왜 하필 그런 사람하고 비교를 하고 그래요?」 FBI의 초대 국장인 에드거 후버는 최초 범죄자들과의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된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권력욕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명성의 절반쯤은 직권남용으로 얼룩져있다. 「게다가.」 앤이 강조하듯 덧붙이는 말. 「부국장쯤 되면 사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더 어려워질 거 아녜요. 달갑지 않네요, 그런 거.」 그러나 거부할 순 없을 것이다. 앤에게도 나름의 유명세가 있는 까닭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고, 쿠데타 진압에도 기여했으며, 진압 이후에는 확실하게 신뢰해도 좋을 인물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아 중책을 수행해왔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을지언정 실무자들 사이에선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 ‘비공식적으로는 나와의 관계도 있고.’ 부국장 선정엔 당연히 정치적인 계산도 들어간다. 즉 앤은 능력과 충성심이 검증된 인재일뿐더러, 멀지 않은 장래엔 수사국의 대외적인 얼굴로서도 유용할 거라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까 나도 싫어지네요. 또 책임을 지는 자리에 오른다는 게 말처럼 좋기만 한 일인 것도 아니고요.” 이렇게 말하는 겨울 역시 대대장으로서 자신의 지휘능력을 두고 고민을 품은 적이 있다. 끄덕이는 겨울을 보고 앤이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죠? 명예로운 일이긴 해도, 아직은 좀……. 당신에게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란 점 하나만은 마음에 들지만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골치 아픈 주제는 이쯤에서 접어두죠.” 화제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앤은 겨울이 보낸 동영상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있는 워싱턴은 작년처럼 하얀 풍경이었으나, 이곳 이시가키 섬은 1월의 가장 추운 날에도 최저기온이 영상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남국의 풍경을 연인과 공유하고 싶었던 겨울은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을 걸으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앤이 옆에 있는 것처럼. 그 롱 테이크 속의 따뜻한 말들을 들은 그녀는 그 순간에 분명히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통화가 길어지다 보니 간헐적으로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들이 있었으나, 사실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므로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겨울은 의식적으로 작전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것은 앤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자연스러웠으되, 겨울은 그녀가 감추려는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 그 모습은,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개인실 천장의 스피커로부터 지휘관들을 호출하는 영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겨울은 못내 살짝 굳어지고 마는 앤의 표정을 못 본 척 해주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달칵. 웹캠 정면으로 회중시계를 열어 보인다. 덮개 안쪽의 자기 사진을 본 앤이 픽 하고 풀어졌다. 「그 시계, 잘 쓰는군요. 비싼 시계는 태엽도 함부로 감지 않는다던데.」 “돌려줄 작정으로 가지고 있을 적엔 그랬지만, 이젠 아니니까요. 선물로 받은 걸 누구에게 팔 생각도 없고. 내게도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시에루 중장의 선물이었다. 겨울은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아쉽지만 이만 일어날게요. 다들 기다리게 만들어선 곤란하니.” 「……그래요.」 앤은 몹시도 상냥한 음성으로 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의 챔피언.」 겨울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참석한 최종 브리핑은, 브리핑이라기보다는 의례적으로 결의를 재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공수군 브루실로프 대령은 겨울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좋군. 뭔가 기쁜 일이라도 있었나?” 아직까지도 앤의 여운에 잠겨있던 겨울은 이 말을 듣고서야 입가를 매만졌다. 이를 본 카프라로프 소장이 말했다. “보나마나 조금 전까지 애인하고 통화라도 하고 있었던 거겠지.” “…….” 너무 정확해서 할 말이 없었다. 살짝 부끄러워하는 겨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추측을 확신한 소장이, 이번엔 쓸데없이 애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귀관은 언젠가 나의 충고를 떠올리게 될 것이야…….” “…….” 겨울은 그냥 한 번 난처하게 웃어 보이고 말았다. 이후, 약간 이르게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로저스 중장은 영내방송으로 전 병력에게 전했다. 「이제 와서 뭔가를 더 당부할 필요는 없겠지.」 공백을 두고 이어가는 말. 「우리는 그만큼 충실한 준비를 갖춰왔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각오를 다져왔다. 나는 확신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임무에 우리보다 어울리는 자들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길러낸 역량으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최선이 곧 인류의 최선일 테니까. 그 최선을 다한 싸움의 끝엔 반드시 명예로운 승리가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계속될 역사 속에서,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연인들은 두려움이 없는 내일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중장은 다짐하듯 호소했다. 「우리의 손으로 종말을 끝내자.」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에 어울리는 짧은 격려였다. 독립대대는 오후 6시 30분을 기하여 수송기 탑승을 완료했다. 순항속도를 고려하면 작전지역 상공까지 약 4시간이면 충분하겠지만, 실제로는 조금 더 긴 비행이 될 예정이었다. 독립대대에 할당된 수송기만 헤아려도 열다섯 대나 되는 까닭이었다. 여기에 다른 부대들까지 합세하면 총합이 세 자리를 넘어간다. 이 정도 규모의 수송편대라면 아무리 높은 고도를 날더라도 광범위한 영역의 변종들을 자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경로와 속도로 비행하여 도착시간을 일치시키는 편이 현명했다. 때문에 실제 강하시간은 자정 전후가 될 것이었다. 기다림 끝에 찾아온 또 다른 기다림은 무거운 적막을 만들어냈다. 수송기는 이따금씩 가볍게 진동했다. 위험하진 않았다. 부담스러운 크기의 낙하산을 얹어놓은 지휘 장갑차는 바닥의 레일 위에 단단하게 결속되어있었다. 겨울은 바람 부는 하늘의 풍경이 궁금했으나, 밖으로 낸 창이 없다보니 구름 위로 뜬 별들을 보는 건 무리였다. 작전장교 포스터가 물었다. “Sir.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겨울은 자연스럽게 끄덕였다. 걱정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그럼요. 대위는요?” 포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설쳤지만 문제는 없습니다.” 겨울은 다시 끄덕였다. 잘 잤다고 대답하긴 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수면을 잊은 지 오래인 겨울이다. 만약 생전처럼 자는 게 가능했다면 겨울 역시 약간은 잠을 설쳤을 것이었다. 혹은 걱정이 실체화된 악몽을 꾸었거나. 겨울은 문득 악몽을 꾸는 느낌이 그리워졌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한 순간 스쳐가는 감상이었다. 대위는 툭툭 끊어지는 잡다한 말들로 정적을 지분거렸다. 겨울은 그때마다 적당한 말로 어울려주었다. 평소 군인으로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그에게도 이 상황에서의 침묵은 부담스러운 모양. ‘혹은 병사들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겠고.’ 싱 소령이 옆에 있었다면 여기에 어울려 보다 나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을 터. 그러나 그는 지금 대대참모의 절반과 더불어 다른 기체에 탑승한 상태였다.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도 부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숨 막히면서도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삐익- 버저가 울었다. 조종사가 화물칸으로 기내 전화를 걸어 강하 30분 전임을 알려왔다. 장병들은 별다른 지시 없이도 시간에 맞게 산소마스크를 착용했다. 겨울도 마스크를 쓰고 깊은 호흡으로 산소를 들이마셨다. 산소 게이지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버저가 울고, 붉은 조명이 점등되었다. 기내의 압력이 낮아지면서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한다. 겨울은 참모들과 함께 지휘 장갑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시계를 습관처럼 손에 쥔 채 속으로 초를 헤아렸다. 5, 4, 3, 2, 1. 덜컹! 장갑차가 미끄러진다. 밖에선 수송기 승무원들이 차대를 밀어내는 중일 것이다. 관성이 스쳐간 뒤에 중력이 사라졌다. 몇 번을 경험해도 신경이 저려오는 감각이었다. 겨울보다 나을 리 없는 참모들은 찰나의 호흡곤란을 느꼈다. 1분쯤 지나자 장갑차 상면 장갑 위에서 작은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렸다. 낙하산이 펼쳐지는 소리다. 곧바로 폭력적인 중력이 탑승자 전원을 내리찍는다. 흔들림이 잦아든 후 겨울이 농담처럼 물었다. “혀 씹은 사람 없죠?” 통신장교 에반스 대위가 멋쩍어했다. 멀미에 약한 그는 첫 강하훈련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쉬다가 혀를 아주 거창하게 깨물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 바람에 다른 참모들이 기겁을 했을 정도였다. 이윽고 장갑차 차체가 둔중하게 울렸다. “현재 위치는……. 꽤 정확하게 내려왔군요.” 지도상의 좌표를 확인한 겨울은 성공적인 시작에 만족했다. 강하 과정에서 돌풍에 휩쓸려 부대 전체가 흩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대대의 다른 단차들도 기존에 상정한 오차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강하가 완료된 시점에서, 각 중대는 알아서 집결하여 움직였다. 사전에 워낙 연습을 많이 한 까닭에 당장은 겨울이 별도의 지시를 내릴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 중에서도 주변 지형과 작전목표를 숙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 다만 단계별로 이상이 없는지에 대해서만 사후보고를 받을 따름이었다. 원래 지휘관은 할 일이 없을수록 좋다. 진석으로부터 출력을 낮춘 무전이 들어왔다. 예정대로 병력을 하차시켜 주변을 청소하겠다는 전언이었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무전사용을 최소화하려면 하차전투를 치르는 쪽이 낫다. 겨울은 그대로 진행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차량을 가까이에 두고 엄폐물을 확보함으로써, 수색조가 탄도탄 기지를 조사하는 동안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이다. 겨울 스스로도 방독면을 착용하고 장갑차 밖으로 나왔다. 방한기능을 겸하는 방호복은 기본으로 착용하고 있다. 탄저내성변종 앤스락스 로지와 겨자가스 내성변종 머스터드 앰버를 의식한 것이었다. 티베트 고원 일대에선 어느 쪽이든 오래도록 관측된 바 없으나, 만에 하나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백신접종을 받은 탄저균은 그럼에도 보균자로서 본토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겨자가스 쪽은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군홧발 아래에서 낯선 흙이 버석거렸다. 드디어 제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 427 [427화] #여명, 혹은 황혼 (7) 칼바람이 매서운 영하의 밤에 활동성을 유지하는 변종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잠든 무리의 눈과 귀 역할을 맡은 놈들만 순찰을 돌 듯 배회할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살상은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소음기로 억제된 총성은 채 삼십 미터도 가지 않아 바람결에 파묻혔다. 반면 교전거리는 평균적으로 백 미터에 달했다. 야간투시경이 제공하는 시야 속에서 표적을 조준하는 적외선 레이저들이 수도 없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군데군데 쌓인 눈이 안개처럼 흩날릴 때마다 선명해지는 광선들. 변종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 잠정적인 방어선이 형성되자 통신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노출의 우려 없이 교신을 하려면 유선망 구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외에 지향성 전파를 주고받기 위한 안테나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는 지휘 장갑차에도 탑재되어있는 것이었는데, 전파가 샐 염려가 없다는 건 장점이지만, 송수신 각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통신에 지장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었다. ‘감수할만한 단점이지.’ 생각한 겨울이 간질거리는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백칠십 미터 거리에서 낯선 발자국들을 보고 코를 킁킁거리는 변종이 셋이었다. 보다 가까이에 알파 중대 1소대가 있었으되, 누굴 시키기보다는 직접 사살하는 편이 빠르겠다. 겨울이 소총을 조준했다. 참모들이 움찔하는 찰나에 세 번 끊어 방아쇠를 당기는 겨울. 툭, 툭, 툭. 튀어나간 탄피들이 눈 속으로 푹푹 박혀 들어갔다. 초연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방독면 때문이다. 반동도 조금 둔하게 느껴졌다. 경량화에 힘썼다지만, 화생방 방호복이 추위까지 견디게 만들었으니 두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Sir.” 통신장교 에반스가 겨울을 불렀다. “브라보 3 알파의 보고입니다. 뭔가 이상한 변종을 사살했는데, 직접 확인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군요.” “이상한 변종?” 겨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브라보 중대 3소대가 있을 방향을 흘낏 쳐다보면서. “기존에 관측된 적 없는 특수변종인가요?” “확인해달라는 걸 보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교전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은?” “없답니다. 적어도 전투를 목적으로 탄생한 괴물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이 말을 듣고 겨울은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갑자기 미지의 특수변종인가, 하고. 케식이나 카간 같은 놈들이 튀어나왔으면 조용한 전투도 끝장이었겠으나, 지휘관으로선 그래도 아예 모르는 변수가 튀어나오는 것보다야 나았다. “내가 한 번 가보죠……. 에반스는 나를 따라오고, 소령은 여기 남아서 전체적인 상황을 조율해줘요.” 싱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종에 대한 통찰력은 겨울보다 나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도착은 금방이었다. 장갑차에서 내린 겨울이 브라보 중대 3소대와 접촉했다. 소대장 리아이링이 긴장한 기색으로 겨울을 맞았다. “내가 확인해야 할 놈은 어디 있죠?” 겨울이 묻자, 그녀가 한쪽으로 손짓했다. “여깁니다.” 이윽고 보게 된 현장은 무척이나 기묘했다. 변종들이 주변의 눈을 일부러 치운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너덜거리는 변종의 유해가 다섯. 넷은 평범한 변종이었지만, 남은 하나는 불어터진 밀가루 반죽처럼 살이 쪘다. 뚱뚱한 변종은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땅에 파묻혀 상체의 절반과 얼굴만 밖으로 내놓은 상태였다. 피부엔 끈적하고 두꺼운 점액질이 번들거렸고, 입가엔 토사물이 넘친 흔적이 남아있었다. 탄흔은 가슴에 찍혀있다. 그 외에 어디서 주워 모았는지 석면 플레이트나 나무판자 따위가 흩어져있기도 했다. ‘비막이로 삼았던 물건들인가?……. 점액질이야 추위를 견디고자 분비된 부동액 같은 것이라 치고, 토사물 쪽은 뭐지? 죽고 나서 구토를 하는 경우는 드문데.’ 의문을 해소해준 건 역시 처음 발견한 리아이링이었다. 그녀는 한껏 역겨워하며 증언했다. “이 괴물, 다른 변종들이 토해내는 것을 받아먹고 있더군요.” “그래요?” “예. 스스로는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는 놈을 굳이 먹여주는 걸 보고, 변종들에게 있어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개체일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스스로는 움직이기도 힘들다…….” 겨울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최근 며칠 사이에 비대한 몸을 묻은 거라면 언 땅이 부서진 조각들이라도 흩어져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파묻힌 몸뚱이 주위는 균일하고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토사물을 먹이러 온 변종들의 발에 다져져 그대로 얼어붙은 모양새다. 즉, 이 괴물은 한동안 움직인 적이 없다. 그것이 아예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면 어떨까. “일단 이놈, 밖으로 파내 봐요.” 헬멧 카메라에 다 녹화되었을 테니 현장보존은 필요 없다. 겨울의 지시에 리아이링이 소총수 한 개 팀을 지목했다. 해당 분대의 나머지 절반은 주변 경계를 맡았다. 그러나 언 땅에 하는 삽질이 쉬울 리가 없었다. 먼저 곡괭이로 부수고서 야전삽을 박아야 한다. 곡괭이질의 소음도 신경 써야 했다. 오래 걸릴 것을 직감한 겨울이 한 병사로부터 삽을 넘겨받았다. 얼어붙은 땅을 순수한 힘으로만 벗겨낸다. 우르륵 갈라지는 흙덩이들을 걷어내길 수차례. 겨울은 몇 호흡 만에 특수변종의 대부분을 노출시켰다.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으로 그친 것은, 점차로 가늘게 갈라지며 땅속으로 파고드는 괴물의 팔다리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겨울이 눈을 찌푸렸다. 손과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엔 배배 꼬인 실 같은 것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삽날로 찍어서 끊으니 미세하게나마 점액과 피가 묻어나온다. 질긴 근섬유가 중심을 이루었다. 섬뜩한 예감이 든 겨울은 주변의 땅을 무서운 기세로 파헤쳤다. 역병이 내린 뿌리는 일정한 깊이에서 수평적으로 뻗어나갔다. 아무리 파도 그 끝을 찾을 순 없었다. 지켜보던 병사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만 보여도 알기 쉬운 표정들이었다. “에반스.” 삽을 놓은 겨울이 굳은 얼굴로 지시했다. “각 중대에 이 상황을 전달해요. 무작위로 위치를 정해서 발밑을 확인해보라고. 사령부에도 새로운 특수변종을 발견했다고 알리고, 이 좌표로 샘플 운반용 드론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요. 드론 유도는 맡길게요.” “알겠습니다.” 에반스가 황급히 뛰어갔다. 사령부와의 교신은 지향성 안테나를 써야 하는 까닭. 그러나 겨울의 짐작이 옳다면 더 이상의 전파노출 방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건 아마, 신경다발로 이루어진 연락망 같은 거겠지.’ 유라시아는 미주 이상으로 광활하다. 이 넓은 대륙에서, 변종들은 방향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상은 했었다. 언제고 트릭스터와 유사한 능력을 갖춘 특수변종이 나타나긴 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식이리라곤……. “하하.” 겨울은 그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공중포대 겸 통제본부로서 작전지역 상공에 정지한 거대 비행선, 패트릭 헨리 급 2번함 「겨울 한」은, 그 압도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는 잘 관측되지 않았다. 기낭과 선체에 새까만 도료를 도포한 까닭이었다. 이 비행선 내부엔 자그마한 실험구역이 존재했다. 본디 병사들이 낯선 화학작용제에 노출되었을 경우 그 성분을 확인할 목적으로 준비한 간이시설이었으되, 「뿌리」의 구성을 살피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현미경과 시료를 갖추고 있고, 담당자는 CDC에서 파견한 박사급 연구원이었으니까. 여기서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본국으로 데이터를 보낼 수도 있었다. 겨울은 지휘 장갑차 안에서 원격회의에 참석했다. “결론적으로, 이게 진짜 놈들의 연락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로군요.” 화면 속 지휘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거나 짧은 한숨들을 내쉬었다. 「그렇다.」 로저스 중장이 기계적인 태도로 긍정했다. 「조금 전, 티베트 고원과 중국 서남부 일대에서 변종들의 대규모 움직임이 포착된 것도 동일한 맥락이겠지. 모든 집단의 이동경로가 정확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다.」 적어도 해당 범위 내에선 예의 그 뿌리를 닮은 신경망이 연결되어있으리라는 방증이었다. 방식이 방식인지라 퍼지는 속도가 느릴 것 같기는 했다. 순찰을 돌던 놈들이 주기적으로 이상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면, 그 연락이 동시다발적으로 끊어진 시점에서 교활한 것들이 뭔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즉 이쪽의 규모를 대충이라도 짐작하고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은 그 뿌리 자체에 압력의 변화나 진동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을 수도 있고. 「그 대부분은 시간상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 어렵겠지만, 일출까지 이곳에 도달할 숫자만으로도 최대 십만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불을 지른 틈에 꽤 많은 수를 이쪽으로 밀어 넣었던 모양이야. 앞으로 대략 두 시간이면 그 선두집단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을 듯 하군.」 양은 곧 질이다. 거기 끼어있을 특수변종들을 제외해도 무시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공수군 217연대 브루실로프 대령이 투덜거렸다. 「젠장. 트릭스터를 풀어놓은 건 유선망 깔던 놈들한테 무선망까지 던져준 격이었군요.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즈베레프 소장이 대꾸했다. 「저 지저분한 신경다발이 과연 시베리아의 동토까지 뚫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트릭스터가 없었어도 언젠가는 러시아 본토까지 위험해졌겠지. 놈들이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는다면 우리 쪽 방역전선은 그날부로 끝장이야. 억 단위로 몰려오는 꼴을 보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 러시아로서는 미국과의 거래에 응한 게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말이었다. ‘네크로톡신도 문제고.’ 리코라드카와 체르노보그. 러시아 지역에 출몰하는, 방사능에 오염된 변종들. 놈들로 인해 러시아 방역전선의 네크로톡신 농도는 나날이 조금씩 올라가기만 하고 있다. 일선에 투입된 부대를 교체하는 주기도 점차로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전선을 축소해야 할 날이 온다. 「너무 걱정하진 말도록.」 로저스 중장이 말했다. 「최악의 경우엔 계획대로 핵을 쓰겠다. 어차피 이곳은 우리의 땅이 아니니까.」 중장에겐 판단에 따라 제한된 숫자의 핵포탄을 사용할 권한이 주어져있었다. 핵 치고는 위력이 낮은 전술핵으로 고작 다섯 발 뿐이지만, 어쨌든 핵은 핵이었다. 중국의 몰락이 증명하듯이, 밀집된 변종집단에 대한 핵 투발은 엄청난 양의 독소를 발생시킨다. 리코라드카나 체르노보그가 흘리는 양은 여기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수준. 독소가 생태계에 누적되었을 때의 악영향을 우려하는 미국 정부로서는 기나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일 것이었다. 이곳이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이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터. 겨울은 정말로 버섯구름을 보게 되는 지경까지 몰리지 않기를 바랐다. 「탄도탄 기지 수색은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즈베레프 소장의 질문이었다. 로저스 중장이 건조하게 답했다. 「아직은 입구의 방폭문을 뚫는 중이오. 시설 진입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즈베레프 소장이 입맛을 다셨다. 딱히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수색조가 들어간 뒤로 이제 겨우 20분 남짓 흘렀을 따름, 핵공격은 물론이고 각종 침투와 파괴공작에 대비해 만들어졌을 방폭문이 그토록 쉽게 뚫릴 리가 없다. 겨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운이 좋다면 열려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초 역병이 확산되었다는 것은 보관되어있던 장소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유출이 있었다는 의미. 그러므로 문이 열린 채 방치되었기를 기대해 봐도 좋겠다고 여겼었다. 「흠…….」 로저스 중장이 갑자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뭐라고 하는지 불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선내 통신으로 그에게 전언이 온 듯 했다. 「우리의 레이디가 새롭게 전달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는군.」 레이디는 황보 에스더에게 부여된 호출부호였다. 「그녀가 직접 말입니까?」 살짝 당황한 다비도프 대령이 묻자 로저스 중장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428 [428화] #여명, 혹은 황혼 (8) 에스더에 대한 정보는 현 시점에서도 중요한 국가기밀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합동임무부대의 고급 장교들은 사람으로서의 몸을 잃고 마음만 남은 소녀의 조력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번 작전이 끝난 뒤엔 일반 대중들에게도 제한적인 정보공개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방역전쟁에 대한 에스더의 기여가 기여이거니와, 일그러진 육체의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는 연구결과도 정보를 공개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즉, 그 비참한 육체를 치료해줄 능력은 없을지언정, 죽기 전에 세상의 인정과 감사를 받게 해주겠다는 방침이었다. 정부 차원의 표창을 받는다면 에스더 본인 역시 무척이나 기뻐할 터. 신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으나, 어쨌든 그 헌신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러한 방침과 별개로, 관계자들 사이에 에스더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있는 건 당연했다. 정부도 정부지만 군부 쪽이 특히 더 그러하다. 믿음에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할 입장이니까. 소녀가 보여주는 협조적인 태도의 이면에 뒤틀린 본능의 지배가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운명을 걸고 주사위를 던질 때, 파멸의 가능성은 단 1푼이라도 무거운 것이다. 그렇다보니 지금도 에스더와의 대화를 곤혹스러워하는 장교들이 많았다. 인간적으로는 연민이 가는데 군인으로서는 신경이 곤두서니,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 하다못해 군의 위계질서에 확실하게 포함되어있지도 않은 상대였다. 로저스 중장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았다. 「변종들의 선두집단이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약 두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기존의 작전계획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이상,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중간과정은 생략하는 편이 낫겠지. 귀관들도 의문이 생기면 그녀에게 바로 확인하는 쪽이 편할 것이다.」 당연히 반대는 없었다. 그저 다들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낯설었을 뿐. 에스더는 선망에 목소리만으로 등장했다. 겨울은 헤드셋을 고쳐썼다. 「안녕, 하세요오, 여러분.」 눈을 깜박이던 즈베레프 소장이 수염 끝을 꼬며 답했다. 「어어. 안녕하신가, 레이디. 좋은 밤……은 아니구먼.」 겨울도 부드러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런 상황에서도 친한 사람 목소리를 들으니 좋네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통화를 했으니 친한 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와아. 하안겨울 중령님이다아. 키히힛.」 에스더가 웃자 화상회의 분위기는 어중간하게 느슨해졌다. ‘껄끄러워하는 것보다야 낫지.’ 겨울의 온화함은 진심인 동시에 도구였다. 카프라로프 소장이 물었다. 「그래,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정보라는 게 뭔가?」 겨울도 궁금했다. 과연 에스더는 무엇을 알아냈을까. 변종들이 지표 아래 생체 신경망을 구축해놓은 이상, 에스더에게 당초 상정했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지저 신경망의 존재는 교활한 것들에게 무궁무진한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래도 실시간으로 수집하는 전파가 있으니 뭔가 건지긴 건지는 건가.’ 에스더가 말했다. 「변종들은, 차악각을, 하고 있어요.」 로저스 중장이 반문했다. 「착각? 놈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우리의 목적이요오.」 소녀는 드문드문 새는 발음과 불규칙한 호흡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는, 노옾고 험한 땅이잖아요오. 한 번 빼앗기면, 다시 되찾기가아 힘드은. 변종들에게느은, 산에서 싸울 때애, 비슷하게 당했던, 기억이, 많아요오. 재작년 여름에도 그랬고오, 작년부터 치이러온 싸움들도오 그랬어요오.」 재작년 여름이라면 불타는 계곡 작전을 말하는 것이다. 살인적인 더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그 작전에서, 변종들은 고지를 점령한 인간의 군대를 상대로 무참하기 짝이 없는 교환비를 기록했다. 겨울과 독립중대의 교전지였던 아이들린 지열발전소에서는 지층처럼 쌓인 시체들을 불도저로 밀어내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작년은……. 멀게는 대륙분할 작전, 가깝게는 자유의 요새 작전인가.’ 작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대륙분할 작전 최대의 격전지는 역시 멕시코 중앙 고원과 유카탄 반도의 밀림이었다. 생각에 잠긴 겨울은 빠른 속도로 과거를 더듬었다. ‘내가 알파 트릭스터 포획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작년 10월이었구나. 라스베이거스에서, 에머트 대령님으로부터였어. 그때 막 명령이 내려와 다른 부대로 떠넘겼다고 했으니 본격적인 착수는 그 이후였겠지.’ 미국 본토에서는 변종들이 모조리 축출된 다음의 일이었다. 그런즉 알파 트릭스터 포획은 대륙분할 작전과 함께 진행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게 단기간에 끝나진 않았을 거야. 알파 트릭스터 자체도 보기 드물어진 시점이었던데다, 중국 대륙의 크기를 감안하면 한두 개체를 풀어놓는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으니까. 그럼 이곳의 트릭스터들에겐 공중강습에 대한 기억이 공유되고 있다고 봐야 하나.’ 201독립대대를 비롯한 로저스 합동임무부대의 기갑공수가 아니더라도, 101공수사단 등의 헬리본(헬리콥터를 이용한 공중강습)은 대륙분할 작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실행된 바 있다. 겨울이 아는 한, 변종들이 공수부대를 상대로 고지를 빼앗은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수부대 측에서 쓸모없어진 진지를 스스로 방기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변조옹들은-」 에스더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아 트릭스터들으은, 이게에, 훠월씬 더 크은 공격의, 준비단계라고 생각해요오.」 「훨씬 더 큰 공격?」 의아한 목소리는 로저스 중장의 것이었다. 「네에.」 「흐음. 우리의 공세가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한 건가…….」 「교, 교두보오?」 「더 큰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발판을 의미합니다.」 「아아, 맞다아. 배웠는데. 죄송합니다아.」 배웠는데? 순간 속으로 갸우뚱 했던 겨울은 이내 의문을 지웠다. 간접적으로나마 작전에 참여하는 이상,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군사용어 정도는 숙지시켰을 터였다. 중미지역의 작전들을 보조한 기간도 길었고. 쿠웅- 둔부와 등으로부터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제로 그라운드 인근만이라도 지저신경망을 끊어놓기 위한 폭격과 포격의 잔향이었다. 공군과 해군항공대, 포병, 그리고 공중포대는 초장부터 엄청난 양의 폭탄 및 탄약을 소모하고 있었다. 통제관이 슬슬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작전계획은 역시 작전의 시작과 동시에 죽는다. 대화는 폭음에 아랑곳없이 계속되었다. 「아무튼, 제 말씀이 맞습니까?」 중장이 묻자, 에스더는 의외로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거랑 비슷하긴 한데에, 그래도 조오금 달라요.」 「어떻게 다릅니까?」 「그게에, 으음, 예를 들며언, 멕시코 같은 데에서는, 벼언종들이 산이나아 골짜기, 같은 데에서 주로 숨어있고 그으랬잖아요. 거기느은, 공습으로부터어, 비교저억 안전하니까아.」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중장이 말했고, 다들 끄덕였다. 겨울도 납득했다. ‘본격적인 싸움을 앞두고서 중요한 피난처 겸 번식용 배후지를 선점 당한다는 느낌이겠구나. 확실히, 산악지대를 빼앗긴 상태로 공지(空地) 합동공격을 받았다간 한 번의 패배가 끝도 없는 패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 멧돼지 사냥 초기에 그랬듯이.’ 교활한 것들 입장에선 충분히 착각할 법도 했다. 멕시코에서 상정했던 수준 이상으로 어려운 싸움을 치렀던 미군이, 이번에는 그 전훈을 살려 장차 골치 아파질 지역을 미리 장악해놓고 공격을 가하려 든다, 라고. 징후도 뚜렷했다. 자유의 요새 작전이 첫 번째이고, 대대적인 지뢰 살포가 두 번째였으며, 이번 제로 그라운드 강하가 세 번째다. 첫 번째가 의혹이고 두 번째가 불안이었다면 세 번째는 확신이었을 것이다. ‘그럼 러시아 극동 방면의 공세도 자기들을 끌어낼 목적이 아닌가 의심했을 테고.’ 겨울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자유의 요새 작전이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데 반해, 러시아의 유인 작전에 이끌리는 변종들이 이상하게 적다 싶었다. 러시아가 유인용으로 투입한 전력은 약 3천 대의 전차와 장갑차. 헌데 기갑차량은 굴곡이 적은 지형에서 움직이기 쉽다. 변종들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자극하자면 더더욱 그러했다. 교활한 놈들에겐 험지로부터 평탄한 지형으로 끌어내려는 수작처럼 보이지 않았을지. 비록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했으되, 변종들이 이 부분에서만큼은 인간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한 셈이다. 카프라로프 소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컨대, 죽다 만 것들이 아주 기를 쓰고 달려들 거라는 소린데……. 유감이군. 당장 뭔가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야.」 마냥 여유롭지는 못한 상황에서 대수롭지 않은 정보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어조였다. 눈빛으로 말하는 듯 하다. 기본적으로는 십대 소녀에 불과한 에스더가 정보의 경중을 구분할 능력이 있겠느냐고. 다비도프 대령이 농담처럼 긍정했다. 「뭐, 그렇지요. 놈들에게 우리가 곧 떠날 거라고 양해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모든 전쟁은 오판으로 점철되어있다. 방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스더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아, 저를, 내려 보내 주세요오.」 화면상의 표정들이 바뀌었다. 「에스더 양.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로저스 중장의 음성도 살짝 달라졌다. 「사앙황이, 달라졌잖아요.」 에스더가 매달리듯이 호소했다. 「변종들은, 피일사적이에요. 이대로 가며언, 장군님이랑, 한 중령님, 그리고오 다른 분들으은, 제게, 말씀해주셨던 거보다, 힘든 전투르을, 겪게 되겠죠. 부운명히, 죽거나 다치느은 사람들도, 더 마않이 나오게 될 거고요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게에, 소명을 주셨어요.」 말을 끊으려던 중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도 신앙이 있었다. 「저르을, 이곳으로 보내신 것도오, 그 분의 뜻이겠죠. 도울 능력이 있는데, 가아만히 있어야 하는 건, 싫어요. 저라면 땅 밑에서 오가는, 신호들도, 해석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거 말고도, 여러분께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가 있어요.」 제게 기회를 주세요. 마지막 부탁으로부터 이어지는 짧은 침묵. 대놓고 못 믿겠다고 상처를 주긴 싫으니 다들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눈을 찌푸린 사람도 있고 짜증을 감추는 사람도 있고 초조해하는 사람도 있고 무표정하거나 안쓰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누구라도 악당이 되기는 싫은 법이었다. 겨울은 로저스 중장이 자신을 본다고 느꼈다. 화면상의 시선만으로 방향을 짐작하긴 어려우나, 그래도 착각은 아닐 것이었다. 고위 장교들의 입장은 하나다. 대변하는 건 겨울의 역할이었다. “에스더. 마음은 고맙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아…….」 아쉬움과 서운함이 듬뿍 묻어나는 한숨 소리. 지휘관과 참모들의 불편한 침묵에서 예감은 했을 것이다. 「여억시, 안 될 거어라고, 생각은 했지마안, 중령님은…….」 뒤에 생략된 말은 굳이 압 밖으로 내지 않아도 알만했다. “난 당신을 믿어요. 내 목숨을 맡길 수도 있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요. 그날도 말했었잖아요. 별이 되고 싶었다고.” 다니엘서 12장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난민구역에서 겨울의 손에 쓰러졌던 에스더가 슬프게 읊조렸던 구절이다. 겨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나 정도로 당신을 믿을 순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설령 제안에 따르더라도, 불안을 품고 싸우다보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죠. 또 불미스러운 오해가 생길 가능성도 있고요. 지금은 에스더가 우리를 믿어줄 때예요.” 「네에…….」 에스더는 다시금 한숨을 쉬며 거절을 받아들였다. # 429 [429화] #여명, 혹은 황혼 (9) 포격 및 폭격으로 지저신경망을 끊어보려는 시도는 사실상의 실패로 돌아갔다. 병사들로 하여금 폭심지를 파보게 한 결과, 지표에 작렬하는 포탄엔 의미가 없었고, 일부 항공폭탄 종류만이 기대이하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파괴목표가 인공구조물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질기고 유연한 생체조직을 상대로는 진동에 의한 광범위한 손상을 바라기 어려웠다. 성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괴상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신경망 중간에 덩이뿌리처럼 매달린 심장 같은 장기들이었다. 넓게 퍼진 신경망에 체액을 순환시키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겨울은 이 신경망 어딘가에 본체와 독립적인 자율신경계 덩어리도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곤충은 몸속에 여러 개의 뇌간이 존재하기도 하니까. 일이 이렇게 되자, 일선 장교들은 임기응변으로서 야전발전기(MEP-802A)를 끌어왔다. 신경다발에 점프선(부스터 케이블)을 물려놓고 최대전압의 전류를 흘려 넣은 것이다.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지만, 신경손상이 일어나는 범위는 썩 넓은 편이 못되었다. 눈 내린 땅, 얼어붙은 표토 아래의 차갑고 축축한 흙이 일정한 반경 내에선 확실한 감전을 보장했으나, 거리가 멀어질수록 전류를 넓게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카프라로프 소장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식이면 주어진 시간 내내 작업해도 방어선 내부를 끊어놓는 정도가 고작이겠는걸.」 그렇다고 원자력 비행선을 케이블이 닿는 고도까지 끌어내리기도 곤란하다. 공중포대는 어디까지나 관측과 포격지원에 전념해야 하니까. 한 참모가 제안했다. 「본국에 신경작용제를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생화학무기를 쓰자는 소리였다. 겨울은 현실성이 결여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허가가 떨어질까?’ 변종들의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을 감안하면 생화학무기 사용은 언제나 신중해야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허가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허가가 나온다 쳐도, 현 시점의 임무부대는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본토에 있을 보관시설로부터 이곳 제로 그라운드까지 수송하는 데 족히 한 나절 가량은 소요될 것이다. 조언자 자격으로 회의를 참관하던 CDC 소속 박사는 참모의 제안에 기겁했다. 「절대 안 됩니다. 저렇듯 엄청난 규모의 신경계에 국지적으로 신경독소를 투여하면, 어느 지점부터는 필연적으로 반수치사량 이하의 농도만 흐르게 됩니다. 반면 노출되는 변종의 숫자는 많을 테니, 독소에 내성을 보유한 변종이 출현하기 좋은 조건이죠.」 속사포처럼 말한 그는 숨을 고르고서 경고했다. 「머스터드 앰버처럼 그걸 무기로 쓰는 괴물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자칫 유라시아 전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해버릴 겁니다.」 식별 코드가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변종, 즉 네크로톡신 이외의 생화학오염을 유발하는 특수변종은 아직까지 앤스락스 로지와 머스터드 앰버 둘 뿐이었다. 그나마 앤스락스 로지는 거의 도태된 듯 했고. 로저스 중장은 한 마디로 정리했다. 「그렇다는군.」 겨울이 한 생각을 그라고 안 했을까. 처음부터 무가치한 의견이라 여겼을 것이다. 나쁜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쪽과 동쪽의 강 상류로부터 변종들이 대규모로 떠내려 오고 있다.」 로저스 중장이 무인기가 포착한 장면을 공유했다. 적외선으로 촬영한 상류의 강기슭에선 십 수 킬로미터에 걸쳐 무수히 많은 열원들이 흐르는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들의 머리 위로 불벼락이 쏟아졌다. 변종들은 흘러넘치는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가가 시체로 뒤덮였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었다. 여러 지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란 뜻이었다. 장군이 평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상대하게 될 변종집단의 숫자가 예상보다 좀 더 많아질 모양이야.」 본래는 최대 10만을 좀 넘는 규모를 예상했었다. 여기서 더 늘어난다면 어디까지 내다봐야 할까. 15만? 20만? 이쪽의 화력이 압도적이어도, 굴곡 많은 지형에서 상대하긴 부담스러워지는 숫자다. 겨울은 의구심을 품었다. ‘추위에 대해서는 저항력을 갖췄다고 쳐도, 저 많은 변종들이 전부 헤엄을 치진 못할 텐데.’ 평범한 변종들에게 수영처럼 섬세한 운동은 무리다. ‘다른 변종들이 하류에서 건져내는 형식인가…….’ 궁구해 봐도 변종들 처지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이 주변의 강들은 폭이 최소 50미터에 이르니, 건져내는 과정에서 다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놈들은 대사억제가 한계에 달하는 시점에서 발버둥 치다가 익사해버릴 터.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쪽을 물어뜯으려 한다는 의미가 된다. 에스더의 말처럼 어지간히 필사적인 놈들이었다. 이는 필시 자유의 요새 쪽 임무부대가 새겨주었을 교훈. 인간들이 한 번 진지를 단단히 구축하고 나면, 변종들 입장에선 아무리 많은 소모를 각오해도 뚫어낼 확률이 희박하다. 에스더의 말대로라면 교활한 것들은 로저스 합동임무부대의 의도를 단단히 오판한 상태. 전력 집중을 서두르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철저한 사전준비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라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이어 케식 위주의 특수변종들이 일반 변종들을 뒤로하고 빠른 속도로 접근중이라는 정보도 들어왔다. 특유의 길쭉길쭉한 팔과 다리는 적외선 화면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이로써 변종집단 선두가 사정권에 들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갑작스럽게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상하군. 아무리 급해도 저것들만으로 공세를 걸어올 작정은 아닐 텐데.」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에 즈베레프 소장이 냉소했다. 「정말이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중요 전력을 그런 식으로 낭비할 만큼 멍청할 리는 없겠지.」 특수변종의 위력은 대규모 집단을 동반할 때 비로소 극대화된다. 각각의 개체가 유별나게 강력하더라도 이쪽의 화력을 분산시키지 못하면 개죽음을 맞이할 따름. 「보나마나 의도는 진짜배기 공격에 앞서 이쪽의 체력과 탄약을 소모시켜 놓는 것……. 혹은 후속집단이 도착하는 대로 공세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 것. 이를테면 참호선이라거나. 남미에서도 그걸로 재미를 많이 봤을 테니.」 전투에 특화된 특수변종의 완력이면 겨울철의 땅이라도 순식간에 파헤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꽤 자신감 넘치는군. 배후에 있을 놈들의 지능이면, 핀 포인트로 공습을 당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제 놈들 움직임을 뻔히 다 읽고 있다는 사실쯤은 눈치 챘을 텐데.」 「반대로 우리의 움직임을 읽을 자신도 있다는 거겠지. 그러지 않고선 중요전력을 단독으로 위험에 노출시킬 리가 없으니까.」 「역시 그 염병할 신경망인가.」 빠르게 주고받는 의견의 끝은 겨울이 지나가듯이 떠올렸던 가설로 수렴되었다. 지저신경망이 단순한 신호전달 체계를 넘어서 진동이나 압력의 변화까지 느끼는 감각기관을 겸한다면, 변종들이 보여주는 자신감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추측에 도달한 게 겨울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217연대장 브루실로프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게 사실일 경우 기동방어는 곤란하겠습니다. 기동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저 병신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장갑차고 전차고 손실이 불가피할 테니까요.」 제로 그라운드의 중심, 구 중국군의 탄도탄 기지는 산기슭을 파고드는 협곡 내부에 위치했다. 핵공격에 대한 지형적인 방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로저스 합동임무부대가 구축한 경계선의 일부는 그 일대의 굽이치는 능선에 걸려있었다. 이 능선들은 본디 숲으로 가득하여 기갑세력에겐 도저히 어울리는 전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 1년간에 걸친 폭격이 산간을 초토화시킨 덕분에, 적어도 제로 그라운드 인근에서는 기갑차량 운영에 그럭저럭 지장이 없게 되었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나무 밑동들을 빼면 탑재화기의 사선을 가로막을 장애물도 딱히 없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오래된 숲을 차량운행이 자유로울 만큼 파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까닭. 따라서 이쪽에서 치고 나갈 길은, 체급이 가벼운 공수기갑차량의 험지주파능력을 감안해도 의외로 한정적이었다. 장애물이 많기에 교전거리마저 짧아진다. 기갑은 애당초 산악전에 적합한 병과가 못 되었다. 다만 탁월한 화력과 방어력 때문에, 그리고 병사들에게 줄 심리적 안정감 때문에, 방어선을 고수하면서 시간을 끌면 그만인 임무의 주력으로 선택되었을 뿐. 겨울이 제안했다. “역으로 다시 한 번 유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로저스 소장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지저신경망이 감각기관의 일종이라고 가정해도, 포격과 폭격의 잔향이 계속되는 와중에 보병들의 도보이동까지 감지하진 못할 겁니다. 신경망의 깊이도 깊이고요.” 겨울은 거미를 떠올렸다. 거미는 제 집에 걸리는 먹이를 줄의 진동으로 감지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하루살이처럼 작은 먹이가 걸리는 것까지 알아차리진 못한다. 제 눈으로 직접 보거나 냄새를 맡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기갑을 미끼로 적을 속인 다음 보병으로 배후를 치자?」 “예.” 「기갑도 기갑이지만, 보병의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 도보이동이 은폐될 거라는 것도 결국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자칫 낙관적인 기대만으로 많은 인명을 사지에 몰아넣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중대급 부대 몇 개로 시도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한다고 해도 구원이 가능하고, 그마저도 안 된다면 급한 대로 방어선을 축소해서 버틸 수 있습니다.」 브루실로프 대령이 겨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남는 건 무식한 힘겨루기뿐입니다. 그게 원래의 계획이긴 했지만, 최초 상정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 처지가 된 만큼……본격적인 소모전이 시작되기 전에 특수변종의 수를 줄여놓는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요.」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결정이 바로 나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탄도탄 기지 수색 현장의 보호였기 때문이다. 「좋아.」 로저스 중장이 천천히 끄덕였다. 「한 번 판을 짜보지. 지금까지야 그렇다 치고, 앞으로 또 어떤 변수가 추가될지 모르니까.」 벌어둘 수 있는 이득은 기회가 닿을 때 벌어두는 편이 낫겠다. 그런 말이었다. 화상회의의 긴장감이 살짝 올라갔다.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역할분배는 과감하게 이루어졌다. 다소 부족한 판단이나마 늦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있는 법.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쨌든 변종들이 제대로 들이닥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남아있었으므로. 독립대대에서도 한 개 중대를 내보내기로 했다. 화상회의에서 빠진 겨울은 대대 참모들에게 함정의 개요를 브리핑했다. 작전장교 포스터는 브리핑 말미에 우려를 표했다. 겨울이 하차보병들과 함께 가겠다고 밝힌 탓이었다. “Sir. 아무리 위험한 임무라지만, 당신께서 나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싱 소령도 거들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병사들이 적어도 본부를 원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겨울이 타격대를 직접 이끌고자 하는 의도가 병사들의 심리에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확실히, 신뢰도 면에선 아직 안심하기 이르지.’ 대대 예하 각 중대는 훈련도 많이 받았고 실전경험 또한 괜찮은 수준으로 쌓았다. 그러나 근 1년간 하나의 대대로서 호흡을 맞춰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신성분에 따른 열등감과 거리감 같은 게 존재했다. 이건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계급의식에 가까웠다. 요컨대, 겨울이 가장 신뢰하는 건 옛 독립중대원들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편애를 한다는 게 아니라, 실제 전투력에서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뜻. 겪어온 실전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격차다. 같은 맥락에서, 겨울이 타격대로 찰리 중대원들을 선택한 것은, 만약의 경우에도 알파 중대가 방어선을 고수하는 한 탄도탄 기지까지 위험해질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지 수색현장 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기기는 겨울도 다른 장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찰리 중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되면 물 밑에서 안 좋은 소리가 돌기 쉬웠다. 브라보, 델타 중대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걸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즉 신뢰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책임자인 겨울 자신이 함께 위험을 감수하는 것 아닐까. 찰리 중대장이 지휘할 기갑 유인조도 겨울의 참여를 반길 터였다. # 430 [430화] #여명, 혹은 황혼 (10) 공격준비는 서둘러 이루어졌다. 변종들의 주력집단이 쇄도하기 전에 방어선으로 복귀해야하는 까닭이었다. 목표의 달성여부는 그 다음이다. 겨울은 대대본부 인원 일부를 데리고 찰리 중대 하차전투조에 합류했다. 병사들은 한껏 긴장한 모습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겨울은 그들의 상태를 눈으로 훑었다. 비록 기갑차량이 빠진 상태라고는 하나, 후방에 남을 병력과 일부 무장을 교환했으므로 화력 면에서는 평범한 보병중대 이상으로 강력하다. 특수변종을 사냥하자면 당연한 조치였다. 풀을 먹인 듯한 뻣뻣함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전투를 앞두고 긴장하지 않을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출발을 앞두고, 무전병이 각급 부대들과의 통신상태를 점검했다. “귀소측 감도, 리마 찰리, 리마 찰리. 당소 여하 이상.” [당소 싸마곤(Самогон) 액추얼. 선명하게 잘 들린다, 데이비드 액추얼.] 러시아식 악센트가 들어간 답변. 통신문법은 미국의 것을 따랐다. 독립대대의 각 중대 및 분할된 대대본부를 포함하여, 공수군을 비롯한 다른 부대들과의 교신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1년 내내 전파추적 미사일을 두들겨 맞았을 트릭스터들은 함부로 방해전파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결정적인 순간까지 아껴두겠지.’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지 않도록 만드는 게 성실한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변종들에게 있어서의 결정적인 순간이란 최소한 적아가 극도로 근접한 상황을 의미할 테니까. 모든 포격지원이 위험근접(Danger close)이나 진내사격(Broken arrow)으로 수렴하게 되면, 교활한 것들은 전력으로 지저분한 전파를 방출하여 지휘체계의 완전한 마비를 꾀할 것이다. 변종들이 인류와의 전쟁을 치르며 확립한 나름의 ‘교리’였다. 짧은 여유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겨울은 눈에 보이는 대로 중대원들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예상에 없었던 대대장 노릇이 햇수로 벌써 2년째다. 이젠 「암기」의 도움 없이도 대대원 전원의 이름을 외우는 겨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간부와 병사를 불문하고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예전에 곱씹었던 보이지 않는 벽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저 소대장 가운데 하나가 애써 침울함을 감추는 기색이긴 했다. “우리가 좀 더 믿을 만 했다면 중령님께서 직접 오진 않으셨겠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곁에 있던 동일 계급의 동료가 식겁을 하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편으론 혹시라도 들었을까봐 겨울의 눈치를 살핀다. 일반적인 청력을 기준으로 닿을락말락한 거리였다. 시선이 마주친 겨울은 모르는 척 그를 향해 미소 지어주었다. 눈치를 보았던 소대장이 안도했으나, 겨울 입장에선 침울한 쪽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소대장 중 나머지 셋은 겨울의 합류를 그저 반갑게 여기고만 있다. 일본계 난민 출신 하급 장교들은 명령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역할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엔 난민구역에서의 경험 외에도 문화적인 영향이 있지 않나 싶었다. 점차 나아지는 중이어도, 아직은 이들에게 능동적인 판단력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 이는 소대장과 중대 참모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판단력에 기갑유인조의 목숨을 맡겨두기도 곤란했다. 곧 시간이 되었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중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활약 기대할게요, 중위. 살아서 다시 만나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Sir.” 중대장 아서 마츠다이라 중위가 정자세로 악수를 받았다. 중위는 긴장한 한편으로 각오와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겨울은 그 기대감을 잠시 눈여겨보았다. ‘그래도 무모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지.’ 일본계 4세인 마츠다이라는 브라보 중대장인 개빈 챙과 공통점이 많았다. 사관학교 출신으로 생도시절의 성적이 우수한 편이고, 혈통에 대한 인식이 희미하다는 점에서. 다만 겨울의 휘하로 오게 된 동기는 조금 달랐다. 마츠다이라는 독립대대야말로 빠른 출세의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경우였다. 바로 그렇기에, 겨울의 눈 밖에 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해타산과 별개로 겨울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기도 했고. 그러니, 독립대대를 경력의 징검다리로 여기면 어떤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인걸.’ 서로 다른 사람들을 긍정하며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었다. 뭔가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내치기 시작하면 종래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사람의 관계와 마찬가지였다. 쐐애애액- 이제까지는 없었던 제트 엔진의 소음이 별빛 아득한 천구를 가로질렀다. 남중국해의 항모전단에서 발사한 순항미사일(토마호크)들이었다. 다수의 미사일이 연달아 작렬하여 멀리 있는 밤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섬광 다음엔 진동이, 진동 다음엔 폭음이 지나갔다. 직후엔 간헐적으로 무의미한 전파를 방출하는 디코이도 뿌려졌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트릭스터를 교란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연히 이쪽에서는 해당 전파를 걸러낼 수단을 갖췄다. 1년간의 모든 준비를 쏟아 붓는 밤이다. 겨울이 신호했다. “가죠. 1소대, 3소대부터 출발.” 두 개 소대가 전진하고, 나머지 한 개 소대와 화기소대가 그 뒤를 따랐다. 끊임없이 포성이 울리고 머리 위로 포탄이 지나가는 가운데, 한 개 중대 병력이 어두운 길로 나아가는 발걸음들은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매복위치에 도달하기까지는 최대한 전투를 피하는 편이 좋다. 모두가 하나같이 숨을 죽여, 눈이 뽀득뽀득 밟히는 소리조차 귀에 거슬릴 지경. 이 발소리가 지저의 역겨운 뿌리에 닿을까봐 그렇다. 통신망에선 쉴 새 없이 적들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었다. [라인 퀘벡, 5-3-0-1, 2-4-0-5, 일반변종을 매달고 있는 감마 케식 7체…….] 비록 장소는 달라도 겨울 또한 같은 괴물을 보고 있었다. [선두 정지.] 칙 하는 잡음과 함께 전해지는 목소리. 병사들이 느릿느릿 자세를 낮추며 숨을 죽였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이형(異形)의 특수변종 무리가 듬성듬성 간격을 벌린 채 1소대 전면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낮은 절벽을 기어오르다시피 튀어나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당황한 1소대 전열이 소대장의 통제 하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최초의 거리는 약 30미터. 그것이 50미터가 되고 60미터가 되기까지, 변종들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달빛 없는 밤의 장막 덕분이었다. “망할(糞)…….” 근처의 병사가 속삭이듯 욕설을 중얼거렸다. 놀란 탓에 새어나온 모국어였다. 방독면 전성판을 통과하는 숨소리가 거칠다. 솔직히, 겨울도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물러나는 병사들이 실수로 넘어지거나 무기를 떨어트리거나 해서 소음을 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까닭이다. 신장에 비해 피탄 면적이 좁고 팔다리가 각각 3미터씩인 괴물이 무더기로 발광하며 달려들었다면, 적어도 소총수 한 개 분대 정도는 사지가 찢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긴다 한들 작전에 지장이 생기는 건 물론이다. 적외선 센서가 감지한 케식의 실물은 사전에 접한 영상과 자료보다 더욱 더 기괴했다. 체온 보존이 잘 되는지 신체의 대부분이 보랏빛이었다. 기다란 팔다리로 우르르륵 움직이는 꼴이 거대한 벌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딸깍. 무릎을 꿇은 겨울이 야시경을 조작하여 열상의 온도별 색채전환기능을 껐다. 순수하게 빛을 증폭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시야는, 약간 어두워지긴 했어도, 놈들의 창백한 형상을 전보다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울긋불긋한 이미지로는 알아보기 어렵던 부분 역시도. ‘정말로 다른 변종을 업고 있군.’ 앞서 무인기 영상으로 볼 땐 오직 전환된 열영상뿐이어서 놓쳤던 부분이다. 매달리다시피 업혀있는 녀석의 몸집이 작은 편이기도 했다. 보나마나 교활한 것들의 구상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상대하는 싸움에선 크기가 작을수록 유리할 때가 있음을 알 테니까. 작은 체구는 야음을 이용하기에도 좋다. 그래도 다행히, 자그마한 놈의 다리는 스캠퍼 특유의 역관절이 아니었다. 그저 근육이 단단한 미성숙체일 따름. 이 대륙에 트릭스터를 풀어줄 때 가장 걱정하던 일 중 하나, 수렴변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미주의 변종들이 지닌 강점이 고스란히 중국 대륙으로 옮겨왔다면 무척이나 골치 아프게 되었을 것이다. 데들러라든가, 위퍼라든가. 끼이이이- 덩치 큰 괴물들의 무리 후미에서 다섯 개체가 우뚝 멈춰 섰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코를 킁킁거린다. 뭔가 눈치를 챘는가 싶어 불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놈들이 적대적인 괴성을 지르는 순간 앞서 지나간 놈들도 모조리 반전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무전이 날아왔다. [칩니까?] 겨울은 작게 답신했다. “아직. 유도 레이저 찍고 포반에 좌표 전송해요. 유도포탄 사격임무. 신호하면 쏘라고.” 교전이 불가피할 경우엔 레이저 유도기술이 적용된 박격포탄부터 떨구겠으나, 지금 당장은 아니다. ‘지금 포탄이 작렬하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겠지. 일부는 이쪽으로도 돌입한다.’ 몰살시킬 자신은 있다. 그러나 목적은 그게 아니다. 저 괴물들은 이상을 깨닫기 전에 살상지대에 갇혀있어야 했다. 근방의 동종 대다수와 함께. 짧지만 기력을 빨아먹는 기다림이 지나갔다. 포탄 유도용 레이저 말고도, 소총에 달린 표적지시기의 광선들이 변종들의 몸뚱이에 별을 뿌린 듯한 광점을 찍어놓았다. 그 녹색 점들은 사수들의 심장박동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더불어 대전차화기 사수들이 각자의 부사수와 함께 발사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운 좋게도, 다섯 케식은 끝까지 이쪽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중대는 놈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지나간 괴물 집단의 흔적과 무수한 군화의 발자국들이 어둠 속에서 교차했다. 후방에선 개인화기와 차별화된 총성, 그리고 포성이 메아리쳤다. 겨울은 때때로 땅에 튕겨 공중으로 사라지는 예광탄 줄기와 포탄의 광채를 보며 전투의 양상을 어림잡았다. ‘역시,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거리를 두고 탄약을 소모시키는 중인가.’ 이 또한 교활한 것들의 지혜였다. 평범한 변종들의 무수한 죽음으로 쌓아올린 경험. 이후로도 병사들의 진을 빼놓는 고비가 반복되었다. 오직 어둠과 정적에 의지하여 크고 작은 변종들과 근거리에서 스쳐가는 순간들. 변종들은 수시로 진로를 가로막았다. 그나마 적당한 거리가 있을 땐 포격을 유도하여 박살을 내고 통과했다. 작은 것들만 얼쩡거리는 드문 경우엔 지정사수들이 무음으로 사살했고. ‘그래도 이 정도면…….’ 예상보다는 수월하게 나아가는 셈이었다. 겨울이 직접 길을 고르는 보람이 있었다. 탁월한 감각보정은 감염된 본능과 첨단기기 이상의 효율로 어둠을 꿰뚫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소대장이 겨울에게 보고했다. “Sir. 매복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겨울이 끄덕였다. 보고를 받기 전부터 지형을 보고 알고 있었다. 경사가 한쪽은 급격하고 한쪽은 완만한 언덕. 완만한 쪽이 방어선을 향해 기울어있어, 변종집단이 이쪽으로 진입할 경우 체력은 체력대로 낭비하고 포화는 포화대로 두들겨 맞을 지형이었다. 교활한 괴물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곳을 변종집단의 진입로로 쓰진 않을 것이었다. 척박한 고원의 언덕답게 풍화되다 만 바위가 여기저기 분포했다. 사전에 지형정보를 숙지할 때부터 엄폐물로 쓰기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들. 거리가 멀다 싶으면 일반 변종을 포함하여 온갖 것을 다 집어던지는 케식의 행동양상을 고려할 때 이보다 더 유리한 매복지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 소대는 경계선 구축을. 지원화기 위치는 내가 직접 정합니다.” 겨울이 고속유탄포와 경기관총을 거치할 위치를 일일이 지정해주었다. 최적의 살상효율을 뽑아내자면 전술적인 「통찰」에 기대는 편이 나았다. ‘요즘은 감각적으로 잘 구분이 안 가지만.’ 근래 들어 겨울이 자주 느끼는 감각적 혼란이었다. 본연의 감각과 보정으로서의 감각 사이, 한때 뚜렷했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난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에선 느껴본 바 없는 착각. 겨울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일반 소총수들은 일단 소대장들이 알아서 하게 두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교정하면 될 것이다. 소대장들의 역량을 실전상황에서 검증할 기회이기도 했다. 안목이 있다면 겨울이 정한 지원화기의 살상범위에 맞게 소총수들을 배치해놓을 테니까. 경계선 전방에는 지형지물과 쐐기에 의지하여 단단히 고정시킨 몇 줄의 도폭선이 깔렸다. 1차적인 역할은 물리적인 장애물이다. 겨울이 예상하기로, 이토록 깜깜한 밤엔 집중된 사선상에서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정도로도 충분한 혼란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격발은 그 다음 차례였다. 도폭선 안팎엔 병사마다 몇 개씩 들고 온 산탄지뢰들이 깔렸다. “서둘러! 곧 유인조가 온다! 시간이 얼마 없어!” 소대장들이 소리 죽여 작업을 재촉했다. # 431 [431화] #여명, 혹은 황혼 (11) 배후에서는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공수군 중대가 작전 중이었다. 측면에 산을 끼고 있었으므로 공수군 중대와 이쪽 사이엔 변종들의 밀도가 떨어졌다. 감염변종들이 인간보다 강인하다고는 하나, 대규모로 이동할 땐 무리를 통제하기 쉬운 길을 고르는 법. 칠흑 같은 어둠 속, 굴곡이 거친 혹한의 산은 이동경로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즉 이번 매복은 변종들에게 수준 높은 통제력을 발휘할 개체들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작전이었다. 지형에 의거하여 변종집단의 진입 방향을 예측할 수 없었다면 구상 단계에서 그쳤을 것이다. 트릭스터를 풀어놓고 얻은 거의 유일한 전술적 이점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튀어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접근 중인 무리의 규모가 규모다보니 그런 식으로 출현하는 숫자도 은근히 많았다. 그것들은 지정사수, 혹은 로켓 사수가 나서서 침묵시켰다. 사방에서 포격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짧고 강렬한 소음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저신경망이 있으니 무리와 떨어져도 어떻게든 목적지까지 올 순 있는 건가.’ 교활함이 없는 것들과 지저신경망을 까는 개체들 사이에선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정보전달과 방향유도가 이루어지는 걸까. 겨울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비가청영역의 음파일 수도 있겠고, 곤충들처럼 페로몬을 분비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기갑유인조의 교전 현장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장갑차가 발사하는 중기관총은, 야시경의 시야에선 레이저를 끊어 쏘는 것처럼 보였다. 속도가 빠른 특수변종들이 장갑차와 전차 대열을 노리고 모여들었다. 지형의 요철을 이용해 빙글빙글 돌면서 기회를 엿보는 중.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꿈틀거리는 역병의 띠였다. 곧 섬멸에 착수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겨울은 사령부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연락에 눈살을 찌푸렸다. “생물학적 오염 경고라니. 이제 와서?” 영문을 모르기는 말을 전한 통신병도 마찬가지였다. 제로 그라운드야말로 생물학적 오염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새삼스럽다 못해 엉뚱하기 짝이 없는 경고였다. ‘전 병력이 4단계 방호태세(MOPP level 4)를 갖추고 있는 마당에 따로 오염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실 이 이상의 오염방지대책 같은 건 있지도 않다. 양압(陽壓) 장치가 달린 장갑차로 피신하는 걸 제외하고. 지속적으로 양의 압력을 유지하는 장갑차 내부는 설령 작은 틈이 생겨도 외부의 공기가 유입되지 않는다. 안팎의 거의 완전한 격리. 그러나 거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면, 정상적인 전투는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통신병이 곤란해 하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위성통신으로 전달하겠다고…….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연락하라는 전언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로저스 중장이 바보짓을 할 리는 없으므로, 시급하진 않을지언정 분명 뭔가 일이 생기기는 생긴 것이겠다. 그래도 즉각적인 후퇴 명령이 빠진걸 보면 사태의 심각성은 낮을 터. 겨울은 통신병으로 하여금 군사용 위성전화를 연결하도록 했다. 방독면 때문에 수화기를 대기가 불편했다. “중령 한겨울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연결된 것은 로저스의 참모 중 한 사람이었다. 재커리 고반 대령. 의외로 올레마 거점에서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다. 문자 그대로의 안면만 있을 뿐이어도. 「회색 상황(Code grey). 탄도탄 기지 조사 현장에서 격리실패가 보고되었다.」 겨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전에 약정한 바, 회색 상황이면 이제까지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감염변종이 수색조의 봉쇄를 뚫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위험성이 낮음을 의미하는 회색이니 망정이지, 적색이었으면 눈앞의 적보다 등 뒤를 더 신경 써야 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겨울은 살짝 화가 났다. “격리 실패라니……. 그쪽에선 일을 대체 얼마나 허술하게 처리한 겁니까?” 「내가 알겠나.」 대령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인 모양. 「크기가 너무 작아서 놓쳤다지만, 결국은 변명이지. 진즉에 지휘체계를 통합했어야 하는 건데.」 기지 수색대와 조사단은 합동임무부대 사령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무언가가 발견될 경우를 대비한 조치 같았다. 낭비할 틈이 없다. 겨울이 빠르게 확인했다. “작다면 얼마나 작습니까? 기지를 벗어난 개체 수는요? 밝혀진 특징은 있습니까?” 「영상분석 결과 크기는 최소 2인치(5.08cm)에서 최대 5.5인치(13.97cm) 사이. 탈출한 개체는 최대 스물 미만. 구체적인 특성은 아직 알아낸 바 없다. 포획한 개체를 살펴보겠다는군.」 “스물…….” 「비취인가 3급 이하의 인원들에게는 크기가 작은 신종이 출현했다고만 알리게. 후방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전모는 사실상 겨울만 알고 있으라는 소리였다. 겨울이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일단 통신을 종료하겠습니다. 적이 바로 눈앞입니다.” 「건투를 비네.」 뚝. 연결이 끊어졌다. 겨울은 통신병에게 전화기를 던져주었다. ‘어차피 그것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최대 5.5인치라고 해봐야 한 뼘이 채 안 되는 크기다. 아타스카데로에선 뒤틀린 아기들이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었지만, 역시 성체에 비해선 손색이 있었다. 이 추위에 얼어 죽을 가능성도 있다. 숫자는 고작 스물. 그러니 병사들에겐 전투를 끝낸 다음 알려줘도 무방할 것이다. 후방에 남은 세 개 중대엔 싱 소령이 알아서 전파할 터이고. “사격!” 무전으로 퍼지는 외마디 명령에 3개 소대의 반포위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화기소대는 그 배후, 겨울이 지정한 위치에서 강력한 지원화력을 퍼부었다. 끼에에에엑- 막 장갑차 대열을 분단하려 들던 변종들의 쐐기꼴이 엉망으로 짓뭉개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포화를 얻어맞은 까닭이다. 사지 길쭉한 괴물들이 피를 흩뿌리며 발작한다. 등 뒤의 기습에 극도로 분노한 낌새. 어둠 속에서도 휘꺽 돌아보는 눈들은 역병의 광기로 물들어있었다. 겨울이 그 눈알들 중 하나를 겨냥했다. 툭! 어깨를 치는 단발사격의 반동. 사선 끝의 안구가 터졌다. 한쪽 눈을 잃은 괴물이 혀를 빼물고 폭주했다. 직후 사방에서 불티가 튀며 갖은 돌이 박살났다. 팔 긴 괴물들의 광란에 가까운 투석. 땅이 척박하다보니 긁는 대로 돌이고 자갈이다. 우스꽝스러운 팔매질이지만, 위력만큼은 그럼블의 투척 이상으로 파괴적이었다. 사납게 튀는 파편에 병사들이 몸을 움츠렸다. 삽시간에 탄창 하나를 비운 겨울이 무전기를 붙잡고 거친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쏴! 간격을 내주지 마! 겁을 먹지만 않으면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다!” 이런 식의 정면대결에선 겨울 개인의 전투력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다. 적이 두려움을 모르는 괴물, 그것도 대다수가 특수변종들이니까. 경기관총 두셋 정도의 제압능력을 더해줄 수 있을 따름이다. 작은 건 아니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겨울이 가진 힘은 전투력만이 아니었다. “3번 유탄포! 11시 방향, 거리 150! 제압사격!” 그로부터 두 호흡 뒤, 불과 4초 만에 열다섯 발의 공중폭발탄이 작렬했다. 하나하나가 수류탄에 필적하는 위력이었다. 미친개처럼 달려오던 케식들이 일제히 땅을 구른다. 그러고도 숨이 붙어 벌떡 일어났으나, 대열은 이미 앞뒤가 끊어져있다. 크기는 그럼블이어도 그만큼 단단하지는 못한 놈들이었다. 소총이든 뭐든 박히기는 한다. 일단은. 기갑차량들도 올가미를 조이듯 호응했다. 기본적인 방어력이 있으니 대담한 기동과 화력투사를 선보인다. 공수가 역전된 지금, 변종들은 보다 약한 쪽을 우선적으로 씹어 먹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 더 약해 보이는 건 당연히 몸이 노출된 하차전투조다. 겨울은 위험한 찰나마다 사격을 가하며, 한편으로는 하나라도 새는 화력을 놓치지 않고 수습했다. “거기! 기관총! 지금 어딜 쏘는 거야! 조준선을 끌어내려!” 예광탄 줄기가 변종들의 머리 위로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퍽퍽 돌 부서지는 소리에 기겁한 사수가 자꾸 목을 숙이는 탓이었다. 보지도 않고 그저 쏜다는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 본인은 필사적으로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론 탄약만 낭비하게 된다. 그 여백으로 괴물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짐승을 능가하는 공격적인 야성이었다. 허겁지겁 교정된 사선이 그 대열을 좌우로 휩쓸었다. 퍼억 퍽 터지는 핏줄기들의 뜨거운 열상(熱像)이 녹색 시야에서도 선명하다. 이처럼 부대의 사선을 겨울의 감각으로 끌어들이는 것. 돌과 변종이 날아드는 가운데 시야가 좁아지기 십상인 병사들에겐 가장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 지시들이었다. 접근이 힘들어지자, 살아남은 케식들은 자연 엄폐물 사이를 지그재그로 뛰어다녔다. 빠악! 겨울 근처에서, 운 나쁜 병사가 머리에 묵직한 투석을 직격 당했다. 깨진 돌은 차라리 포탄에 가까울 질량이었다. 목이 돌아간 병사는 그대로 즉사했다. 푹 들어간 방탄헬멧 밑으로 피와 뇌수가 흘러내렸다. 시체는 뜬 눈으로 겨울을 본다. 곁에 있던 동료도 겁을 집어먹었다. 시체를 엄폐물 뒤로 밀어 넣은 겨울은 몸을 사리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지휘관만큼 사기유지에 좋은 것도 드물다. 그런 겨울에게 변종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위이이익! 체구 작은 변종 둘이 숨 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든다. 빗발치는 투석 궤도를 피하느라 여유가 없었던 겨울은 한 놈만 간신히 쏴죽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체를 비틀어 팔꿈치로 쳐 죽였다. 쾅! 하고 흔들리는 몸. 묵직한 관성을 힘과 무게중심으로 맞받아친 겨울은 관절이 삐걱거리는 통증을 억눌렀다. 주변의 언 땅이 부서지며 날카로운 불티가 튄다. ‘정확도가?’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무턱대고 던져대는 수준이던 조금 전까지와 달리, 트릭스터가 본격적으로 고삐를 잡은 느낌이다. 때마침 무전기에도 간헐적인 잡음이 섞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니, 처음부터 너무 깊은 함정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겨울이 최초에 외쳤듯이, 겁을 먹지만 않으면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었다. 하늘에서 희미하게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레이저로 유도되는 박격포탄 세례였다. 연속으로 터지는 고폭탄들. 시야가 몇 번이나 주홍빛 잔상으로 물들었다. 밤을 사르는 폭발의 갈피에서 흉측한 그림자들이 현란하게 이지러졌다. 어지럽게 타오르는 죽음들이었다. 화력 통제를 맡았던 소대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뜻 모를 고함을 내지른다. 교활한 개체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필시 극도로 분노했을 것이다. 이렇게나 간격을 좁혀놓았는데 어째서 여전히 포탄이 떨어지느냐고.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변종들이 첫 번째 저지선에 도달했을 때, 도폭선에 걸려 넘어지는 것들의 남동쪽 낮은 하늘에서 터보팬 엔진의 소음이 가까워졌다. 알라모 편대와 같은 기종의 공격기 두 대였다. [데이비드 액추얼,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히트맨. 현시각부로 귀소 측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에 돌입한다. 브레이크. 가용무장은 30밀리 고폭탄 2,228발…….] 허가를 받은 통신병이 지상으로 불벼락을 유도했다. 퍼퍼퍼퍼펑! 연속적인 폭발이 두 줄의 직선으로 질주했다. 몇 초 만에 수백 발씩 끊어 쏘는 무지막지한 포화(Short burst). 반대편에서 선회한 공격기가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서 얼어붙은 밤의 대지를 갈아엎었다. 이어 2소대장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 “도폭선 1번, 격발!” 또 한 줄의 폭발적인 죽음이 더해졌다. 직후 연달아 터지는 산탄지뢰로 인해, 변종들은 결국 첫 번째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후의 저지선은 사실상 쓸모가 없어졌다. 변종들의 숫자가 줄어, 더는 돌파를 시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전투는 실질적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폭음과 괴성이 계속되는 와중에, 겨울은 목덜미로 파박 튀어 오르는 뭔가를 본능적으로 잡아챘다. 텁! 위협의 정도가 약하여 바위 깨진 파편인줄 알았건만, 잡고 보니 손아귀에서 강한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으직으직. 작지만 날카로운 이에 방탄섬유 장갑이 씹히는 소리. ‘이건…….’ 아무래도 기지를 탈출했다는 예의 그 작은 변종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분홍빛 역병의 덩어리는 겨울의 손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끼익 끼익 우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날붙이로 쇠를 긁는 수준의 소음이었다. 겨울은 이게 벌써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 432 [432화] #여명, 혹은 황혼 (12) 자그마한 것들에 대한 경고가 전파되면서, 찰리 중대 하차전투조는 짧은 시간 극심한 혼란 상태를 겪었다. “확실해? 뜯어진 데 없는 거 확실하냐고!” 기관총 사수가 신경질적으로 부사수를 다그치는 소리. 제 방호복에 물어뜯긴 구멍이 없느냐는 질문이다. “확실하니까 앞을 봐, 앞을! 보이는 놈들부터 쏴 죽이란 말야! 다 빠져나가잖아, 이 멍청아!” 부사수가 아닌 소대장의 일갈이었다. 그의 말대로, 십자포화에 죽어나가던 괴물들의 무리가 느슨해진 화망을 무더기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결정적인 섬멸이 바로 눈앞이었건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만하기를 다행이라 여기는 겨울. ‘만약 이것들이 조금 더 일찍 나타났다면 거꾸로 우리가 섬멸 당할 처지에 놓였을지도.’ 손아귀에서 발버둥치는 살덩어리를 내려다보며 하는 생각이다. 여태껏 방탄장갑을 질겅거리던 녀석은, 제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 이제 짧은 사지를 바동거리며 구속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이이익! 이익! 얼마나 힘을 쓰는지 몸통 전체에 근육과 혈관이 도드라졌다. 보다 거대한 것들이 이 틈에 들이치는 대신 달아나기를 택한 것으로 미루어, 역시 이 작은 것들은 트릭스터의 통제를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즉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다. 막 기지를 탈출한 신종에게 2차 감염으로 전해지는 후천적 특질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지만. 겨울은 쥐고 있던 놈을 엄지로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괜한 잔혹성이 아니라 단단함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압력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골격은 얼마나 단단한지. 대응할 화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이 하도 많다보니, 크기가 작다고 방심할 수가 없었다. 감각상의 위협수준은 겨울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반영할 따름이다. 억세게 죄는 손 안에서, 호흡조차 불가능해진 작은 괴물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눈에서 핏줄이 터지고 입 밖으론 내장이 밀려나온다. 의외로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유연하면서도 탄성이 강한 골격이다. 엄지 끝에 거센 박동이 느껴졌다. 죽음에 직면하여 빠르게 뛰는 심장은 사람이나 변종이나 매한가지였다. 푸쉭! 압력에 못이긴 몸뚱이가 파열하는 순간에, 괴물은 고통을 능가하는 증오로서 겨울을 노려보았다. 미움을 담아낼 최소한의 지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뿜어진 피에서는, 추운 날씨를 감안해도 많은 양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여타의 변종들보다 상당히 높은 체온. 어쩐지 두꺼운 장갑 너머로도 따뜻함이 전해진다 싶었다. 반 뼘짜리 사체를 위로 던져, 떨어지는 것을 대검의 칼날로 쳐올린다. 서걱! 날카롭게 벼려진 대검은 작은 몸뚱아리를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겨울은 토막 난 사체를 발끝으로 굴리며 살펴보았다. 지질(脂質)이 꽤 있는 편이긴 하나 이것만으로 영하의 칼바람을 견디기는 무리다. 한마디로, 이 괴물은 굉장히 소모적인 특성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좋지 않아.’ 들판 곳곳으로부터 괴상한 불협화음들이 들려왔다. 끼익! 끼익! 끼이이익! 끼이익? 끽! 끼긱끽! 가까운 숫자가 한둘이 아니다. 시체로 뒤덮인 경사에서 타악 탁 튀어 오르는 움직임들을 헤아려보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만 열을 넘는다. 도약의 높이는 때때로 2미터에 달했다. 재커리 고반 대령은 탄도탄 기지를 탈출한 개체가 최대 스물 남짓이라 했었다. ‘하지만 그 전부가 이곳으로 몰려왔다……라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판단이겠지.’ 결국 이 괴물들은 단시간에 급격하게 숫자를 불린 것이다. 그게 물리적으로 어찌 가능한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명백히 불길한 징조인 건 사실이었다. “우왓! 이거 뭐야! 기분 나빠! 진짜로 기분 나빠!” 한 병사가 달라붙었던 괴물을 패대기치더니 신경질적으로 짓밟는다. 콱콱 찍어대는 군홧발 아래에서 괴물은 차바퀴에 깔린 설치류 꼴로 으깨졌다. 그걸 보며 동료들이 낄낄거렸다. “어이, 후지오. 그런 걸로 호들갑 떨지 마. 꼴사납다고.” “젠장! 가, 갑자기 달라붙어서 놀랐을 뿐이야! 너네는 다를 줄 알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찰리 중대원들은 친근한 모국어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이완시켰다. 한 차례 혼란을 겪기는 했으나, 작은 신종이 그렇게까지 두려운 존재는 아니라 여기게 된 듯하다. 어느 정도는 화생방 방호복 덕분이기도 했다. 생화학 작용제로부터 전신을 지키고자 만든 물건인데다, 신형이기에 기본적인 방어력까지 더해놨으니까. 변종에게 물리기 쉬운 부분엔 방탄섬유까지 들어가 있다. 손바닥보다 작은 괴물은, 확실히 단일개체로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허나 격전 중에 다수가 침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신형 방호복이 튼튼하다 한들 모든 부위가 방탄장갑만큼 견고할 순 없었다. 작은 괴물이 달라붙어 끈기 있게 씹어대다 보면 언젠가는 구멍이 나게 되어있었다. 동시에 전신 방호복은 착용자의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전투상황에서 채 1킬로그램도 되지 않을 살덩이가 붙는 걸 어찌 바로 알아차리겠는가. 심지어 물리고도 깨닫지 못할 확률이 높다. 전투흥분과 집중으로 인해 통증이 둔해지는 건 흔한 현상이니까. 전투 후, 내가 언제 이렇게 다쳤지? 라고 놀라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상처가 괴물에게 물린 자국이라면……. 그나마 임무부대 전체가 방독면을 착용한 상태임을 위안 삼아야 할 것이다. 감염자가 생기더라도 곧바로 동료를 물어뜯지는 못할 터이므로. 대대장이 신경 쓰는 것을 눈치 챘는지, 소대장 한 사람이 겨울의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유탄으로 싹 갈아엎을까요?” 시체가 널린 들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작은 것들이 변종들의 유해에 달라붙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겨울이 명령했다. “쓸어요.” 수를 늘리는 속도를 보아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러웠으나, 그냥 두고 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한 쌍의 고속유탄발사기가 다시 한 차례 탁월한 살상능력을 과시했다. 두 문을 합쳐 초당 최대 10발씩 갈겨대는 대인유탄 세례. 이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들에겐 화염과 파편의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폭발을 피해 도약하는 것들은 폭압에 찢어진 육편의 소나기로 변했다. 그러나 그렇게 떼로 죽어가는 수는, 아까 보았던 것에 비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겨울의 근심이 짙어졌다. 마츠다이라 중대장과 합류한 겨울은 병력을 차량에 태워 본래의 방어선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곧장 사령부와 통신을 연결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또 새롭게 밝혀진 정보는 있는지. 이 순간에도 변종들의 주력 집단이 접근하고 있었다. 놈들의 괴성이 골짜기마다 메아리치는 상황. 여기에 자그마한 것들까지 숫자를 불려 달라붙었다간 대책을 마련하기 힘들어진다. ‘그 크기에 수백 규모만 되어도 중대한 변수야.’ 수천 이상이면 말할 것도 없다. 최악의 전개를 상상해보는 겨울. 상정 외의 괴물들에게 뒤덮여서는 독립대대든 공수군이든 정상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리 만무했다. 「일단 뭐가 되었든 칭할 이름이 필요하니, 정식으로 뮤테이션 코드가 확정되기 전까진 테라토마라고 부르겠습니다.」 지휘관들의 채널에 접속한 CDC 박사의 말이었다. 장군들은 어정쩡하게 반응했다. 「……테라토마?」 박사가 빠른 속도로 답했다. 「생긴 게 비슷하고, 생성과정에서도 외견상으로나마 유사한 모습을 보여서 말입니다.」 서로 살짝 엇갈린다. 장군들은 테라토마가 뭔지조차 모르는 눈치였는데, 박사는 왜 하필 그런 이름을 붙였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 어쨌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그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하간 그 테라토마인지 뭔지, 번식이 어찌 저렇게 빠른 거요?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데!」 카프라로프 소장의 목소리엔 채 지우지 못한 위기감이 묻어있었다. 「번식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탄도탄 기지……아니, 이젠 중국군 연구시설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군요. 아무튼 시설에서 확보한 데이터를 해독한 결과, 테라토마는 인간과 변종의 육체를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복제합니다.」 설명을 서두르는 것에 비해 내용상 잔가지가 많다. 하기야 이런 상황에 익숙할 리가 없는 인물이다. 중언부언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생략하거나 말을 더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합격이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감염인 것이죠. 특히 이미 모겔론스가 장악한 육체, 즉 변종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변형은 속도가 무서울 만큼 빠르더군요. 여러분이 목격하신 게 그 결과물들일 겁니다.」 「Говно.」 소장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면 골격은? 뼈까지 그렇게 변형시킬 순 없을 텐데? 복제된 놈들에게는 뼈가 없나?」 「변성된 단백질이 골격을 대신합니다. 코뿔소의 뿔 같은 거지요.」 코뿔소의 뿔은 뼈와 다르다. 끝까지 믿기 싫었던 듯 한숨을 내쉬는 소장. 「무엇을 상상하든 항상 그 이상이군! 그럼 뭐요, 그 테라토마 뭐시기한테 물린 변종은 얼마 못 가 무조건 같은 무게의 자잘한 괴물들로 쪼개진다는 뜻이오?」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게 급격한 변형은 당연히 많은 열량을 소모하는데다, 이미 있는 개체들도 양분을 흡수하니까요.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되어야 정확하겠습니다만, 얼추 원래 무게의 절반이나 남으면 다행일 겁니다. 제 추측으로는 모겔론스 확산을 제어할 수단으로서, 또는 모겔론스 자체를 대체할 무기로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어수단? 저 분홍 메뚜기 떼가?」 「어떤 연구든 중간과정, 혹은 실패작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염병……!」 로저스 중장이 건조하게 물었다. 「무기라고 판단한 근거는 뭐요? 역시 기지에서 나온 데이터인가?」 박사가 즉답했다. 「아뇨. 추가적인 해독은 아직. 다만, 무제한적으로 증식하는 놈들이 일반 대사에서도 열량 소모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다시 말해, 우리가 아는 모겔론스보다 통제하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열량이 공급되지 않으면 길어봐야 몇 시간 이내로 활동이 정지될 겁니다. 여기처럼 추운 지역에서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사억제에 들거나 동족을 잡아먹거나 하겠지요. 극단적인 대사가속과 대사억제 사이에 중간이라는 게 없는 놈입니다. 크기가 작아서 지능도 떨어지겠고요. 생물병기로서는 우리가 보아온 모겔론스보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극단적인 대사가속. 겨울이 예상했던 소모적인 특성의 실체였다. ‘추위는 순수한 열량 소모로 견디는 것이겠고.’ 그렇기에 그 자체로는 결코 오래 활동할 능력이 없다. 끊임없이 양분을 공급해줄 숙주가 필요하다. ‘대사억제로 견디는 능력은 오히려 평범한 변종보다 더 우수한 건가?’ 닫힌 폭압문, 완전히 격리된 기지. 그 안에서 햇수로 3년째 대사억제만으로 살아남았다면 겨울처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 변종들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있다는 거로군.」 로저스 중장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최소 수십만의 숙주들이…….」 당초 일출 전까지 도달하리라 예상했던 수십만과, 그 뒤로도 교활한 것들이 필사적으로 밀어 넣을 수백만, 혹은 수천만. 거기에 놈들을 잡아먹을 테라토마까지. 어느 한쪽만 있다면 그나마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둘 다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진짜 문제였다. 물론 테라토마는 변종들에게도 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포격과 폭격을 경계하여 전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교활한 것들이 이 어둠 속 작은 것들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파악한다 한들, 2차 감염으로 테라토마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기조차 곤란하다. 평범한 변종들은 무는 힘을 제어 못해 과다 출혈로 죽일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2차 감염보다는 증식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므로. 게다가 이쪽에서는 탄도탄 기지 조사 작업이 지연될 게 뻔하다. 임무부대의 철수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로저스는 이미 조기철수를 고려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즈베레프 소장의 목소리였다. 「어떻게든 방어선을 사수할 방법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로저스 중장이 묻자, 소장은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최악의 경우, 전 병력을 승차시킨 다음 근접위험 사격으로 전술핵을 갈기면 됩니다. 항모전단에도 추가적인 핵 투발을 요청하고 말입니다. 당장 독소 누적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는데 마냥 안 된다고만 하지는 않겠지요.」 「…….」 「그렇게 형성된 방사능 오염지대의 연속선상에서 자그마한 것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덩치가 큰 놈들도 오래 버티진 못할 테고요. 놈들도 결국엔 살아있는 생명체들인즉. 풍향에 따라 폭발고도를 조절하면 탄도탄 기지로 낙진이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쪽은 폭압문이 뚫렸으니 조심해야지요. 혹시나 모겔론스의 원형이 오염될지 모르니까.」 리코라드카나 체르노보그 같은 특수변종들도 기껏해야 마이크로시버트(100만분의 1 시버트)단위로 피폭되어있을 뿐이다. 수십 내지 수백 시버트에 달하는 강렬한 방사능에 노출되면 변종이든 뭐든 줄줄이 죽어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따르자면 임무부대 역시 최소한의 피폭을 각오해야 한다. 핵포탄 근접위험사격은 최소 수 킬로미터 거리에서 버섯구름을 보게 된다는 뜻. 양압 장치를 갖춘 장갑차든 최신형 방독면과 방호복이든, 방사능에 대해선 완벽한 대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또한 교전에 의해서든 테라토마에 의해서든 방호복이 상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했다. 아주 작은 손상이라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전망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 433 [433화] #여명, 혹은 황혼 (13) 「아예 우리 머리 위로 낙진이 떨어지도록 만들어도 좋겠지요.」 즈베레프 소장이 말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린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까지만 살아있으면 됩니다.」 전 병력이 방사능에 중독된다 한들 임무만 성공시키면 그만이라는 이야기였다. 「냉전 시대의 광기로군.」 탄식인지 냉소인지 모를 로저스 중장의 메마른 소감. 그러나 작고 무수한 것들을 상대로는 기존의 전략과 전술이 예외 없이 무용지물이었다. 하다못해 무기조차도 그렇다. 폭발성이 아닌 모든 자동화기는, 테라토마와 대적할 땐 사실상 쓸모가 사라지는 수준이었다. 하나하나 침착하게 정조준으로 쏜다고 쳐도 탄약 소모가 감당 못할 만큼 증가해버릴 테니까. 차라리 냉병기 쪽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달리 어떤 대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대비한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난 적의 출현. 임기응변 외의 지휘라는 게 무의미해진 시점에서, 로저스가 내놓을 다른 대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순간 임무부대 합동 사령관으로서의 그는 반쯤 할 일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현 시각부로 독립대대 이상의 제대 지휘관들에게 핵 투발 요청권을 부여하겠다.」 그가 결정을 내렸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임을 잊지 말도록. 1차적으로는 열압력탄 등의 다른 수단으로 저지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 저지가 불가능해지는 국면이 언제인가는 각 방면 책임자들의 판단에 맡기지. 그 전에 탄약 재고가 바닥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한 내용임에도 이렇게 강조해두는 이유는, 러시아 공수군 지휘관들의 공격적인 성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냉전시대의 광기라.’ 겨울도 장교교육으로 접한 바 있다. 전면핵전쟁 상황을 가정한 유럽침공계획에서, 소련은 핵으로 적을 쓸어버린 직후 바로 그 지점으로 기갑세력을 투입할 생각을 했다. 효율만 놓고 본다면 방어선을 뚫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동시에, 해당 병력이 방사능에 피폭당해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공세가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지 않겠는가? 라는 게 소련 최고사령부의 입장이었으니까. 즈베레프 소장이 내놓은 제안과 꼭 닮아있는 태도다. 「그럼, 각자의 건투를 빌지. 우리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이미 어디를 보아도 혼돈뿐일 전투가 막을 올렸다. 이를 인정하는 로저스 중장의 음성은 여전히 음의 고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 나름대로 자신을 다스리는 요령일 것이다. 겨울도 같은 각오를 다졌다. ‘장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임을 다할 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결코 동요하지 않는 냉정함. 혹은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 말하자면 부대 전체의 누름돌 역할이다. 이는 지휘관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지키기 어려워지는 미덕이기도 했다. 이 미덕만 있으면 전멸을 목전에 두고서도 부대가 안에서부터 붕괴할 확률이 낮아진다. 이런 점에서는 겨울보다 나은 지휘관이 무척이나 드물 것이었다. 테라토마의 숫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비록 전모가 다 보이진 않을지라도, 겨울은 그것을 어두운 산맥과 고원 전체에서 느껴지는 위협성의 상승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실체가 분명한 위협과는 다르다. 굳이 묘사하자면, 밤의 저편이 통째로 스물거리는 듯한 혐오감에 가까웠다. ‘마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어둠이 한 덩어리의 괴물인 것처럼…….’ 지나치게 활성화되는 보정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범람하는 감각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날카롭게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또 다른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여기에 화염방사기가 있어야 하는데!” 에반스가 이를 갈았다. 팔뚝에 들러붙은 테라토마를 신경질적으로 으스러뜨린 직후의 일갈. 발작하듯 털어내는 손으로부터 피에 젖은 머리카락과 못생긴 이빨 따위가 떨어졌다. 하나하나는 겨울 이외의 사람들도 악력만으로 죽일 만큼 약한 놈들이었다. 통신장교의 말대로 화염방사기가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주 잠깐 동안에는. “데인저 클로즈! 전장 80미터 지점에 열압력탄 낙하 경보! 비과시간…9초! BLU-96입니다!” 통신병의 전파에 간부들이 악을 썼다. “9초? 씨발! 장난해?” “엎드려! 너네 다 엎드리라고!” 커다란 괴물들이 참호선 정면으로 육박해오는 상황에서 적을 무시하고 엎드리라는 게 쉬운 요구일 리 없었다. 겨울 또한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케식들의 안구를 터트린 뒤에야 무너져 내리듯 참호 내벽에 기대었다. 「생존감각」이 경고하는 항공폭탄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죽음의 예감이었다. 그 시작은 퍼엉- 하는 작은 폭음. 그리고. 콰콰콰콰쾅! 강력한 폭발이 이어졌다. 격렬한 광풍이 참호 밖을 휩쓸었다. 겨울의 머리 위로 자잘한 흙과 자갈들이 쏟아졌다. 찰나간 오렌지 빛으로 점멸했던 시야는 더욱 어두워졌다가 암적응을 거쳐서야 정상으로 돌아온다. 겨울은 참호 안으로 굴러 떨어진 케식을 발견했다. 끄으, 끄으얽……. 괴물이 울컥 토해내는 피. 거기엔 내장조각이 섞여있었다. 기다란 팔다리는 엉망진창으로 꺾여 날카로운 뼈가 살을 찢고 나왔다. 불룩불룩한 피부 안에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이는 더불어 후두둑 굴러온 작은 살덩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다. 열압력탄의 폭풍은 범위 내의 모든 생물체를 전신골절과 내장파열로 살해한다. 그 위력 앞에선 보다 큰 괴물의 피하로 파고든 테라토마 역시 무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폭선으로 폭파시키고 삽으로 걷어낸 참호는 빠르게 구축한 것 치고 의지할 만한 피신처가 되어주었다. 케식의 투석으로부터든, 아군의 폭격으로부터든. “추가 낙하 경보! 라인 에코에 비과시간 5초! 라인 감마에 비과시간 7초! 11초!” 탄종을 구분할 틈도 없이 착탄 예정시각만 가까스로 알리는 통신병. 어차피 지금 떨어지는 것들은 다 같은 종류의 폭탄이었다. 남중국해상의 항모전단에서 이륙한 공격기 편대들은 변종들은 물론이거니와 병사들마저 착란을 일으킬 수준으로 열압력탄 세례를 퍼부었다. ‘아직은 괜찮아!’ 광범위한 살상능력을 발휘하는 탄종이 남아있는 한 핵탄두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는다. 과연 이 분위기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의문이어도. 항모전단 세 개가 전력으로 지원해봐야 보유한 열압력탄 수량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 다음으로 선호되는 소이탄도 그렇고. “우선은 유선망 보강을!” 겨울이 에반스 대위에게 외쳤다. “본격적으로 핵이 터지기 시작하면! 무선 통신에 장애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나마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끝내둬야 할 작업이다. 잔류 방사능에 의해 만들어지는 안개와 전파간섭은 때로 무전기를 먹통으로 만들 만큼 강력하다. 카카카캉! 소음기를 분리한 소총들이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겨울이 가장 먼저 내린 지시 중 하나가 소음기 분리였다. 은밀 행동 따위 물 건너간 지 오래고, 소음기는 소리와 열을 함께 가두는 물건이기에. 아무리 추운 날씨여도 길어질 싸움에선 과열 예방이 중요했다. 괴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어선에 접근하는 변종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통제되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다. 놈들이 당연히 파야 했을 참호선은 중간부터 미로 수준으로 흐트러지며 뒤얽혔다. 사선을 피하며 접근한다는 본래의 목적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모양새. 그로부터 뛰쳐나오는 놈들은 온몸이 울룩불룩하여 더욱 흉측한 모습들이 되어있었다. 퀘에에에엑! 때때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며 달려드는 놈들의 비명. 그렇다. 비명이다. 적대적인 함성이 아니라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비명의 다중창이었다. 실시간으로 살을 파 먹히는 와중이니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있을까. 당장 겨울이 조준한 놈만 해도 걷느니만 못한 속도로 절걱거리며 오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말기 암 환자의 발작처럼 전신을 미친 듯이 긁어대는데, 손톱에 긁혀 찢어지는 살 아래로부터 파박파박 튀어나오는 움직임들이 보인다. 그것들 하나하나에 총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보다 거대한 특수변종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테라토마들이 진딧물처럼 달라붙어 속살로 파고드는 순간, 변종들은 크기와 종류를 불문하고 새로운 역병의 운반체로 전락했다. 고통에 미쳐서는 광란하는 소처럼 무작정 달려오는 것이다. 참호 안으로 뛰어드는 테라토마도 그만큼 늘어났다. 이런 전장에선 장교도 일차적으로는 일개 전투원 역할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단지 겨울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간부와 병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지휘부가 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부대의 지휘체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믿음과 같으므로. 어디가 위태로운지, 예비대를 어디로 투입해야 할지, 또 어디에서 여유가 있어 예비대를 보충할지 등을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보고만으로는 현장과 판단의 괴리가 생기기 쉬운 상황이다. 그러다 마주친 진석이 창백한 안색으로 물었다. “Sir! 기지 수색이 끝나려면 멀었답니까?!” “구획마다 나뉘어져 있어서!” 말하다 말고, 겨울은 진석에게 붙는 테라토마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빡 하고 으스러진 살덩이가 참호 구석에 질퍽하게 처박힌다. “시간이 좀 더 걸리려나 봐요!” “망할!” 진석은 욕을 참는 기색이었다. 지하기지의 각 구획을 나누는 견고한 압력문과 방폭문들. 본디 보안과 격리를 위한 조치였겠으나, 지금은 그저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화된 보안장치를 포함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시설소각설비까지 맞물려있다 하니 해체가 지연되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도 아직은…….’ 분대의 절반, 한 개 팀마다 한 사람씩 참호 내부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야시경의 열영상으로 보면 그래도 테라토마가 잘 식별되는 덕분이다. 그러나 이제 곧 체력 면에서도 한계가 올 것이었다. 희극의 한 장면으로 보일 만큼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중이니까. 지축이 흔들렸다. 불투명한 밤을 일렁이게 만드는 폭격과 폭풍이 지나간 뒤에, 겨울은 참호선 밖의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찌푸리며 야시경을 썼다. 이제까진 「환경적응」과 각종 화기숙련에 힘입어 밤에도 밝은 나안(裸眼)으로 전장을 관찰해왔으나, 지금은 확인할 것이 생긴 까닭이었다. 열원을 온도에 따른 색으로 구분하도록 야시경을 조절한다. 역시나.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것들의 파편은 척박한 땅에 뜨거운 빛으로 흩뿌려져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향하여 자그마한 열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박살난 역병의 몸뚱이들이, 그 짙은 혈향이 또 다른 역병을 불러들이는 광경이었다. 낭자한 죽음의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몰려든 테라토마 군집은 사방에 널린 살점을 주워 먹어 열량을 보충하고, 심지어 증식에 필요한 질량까지 확보했다. 한참을 바르르 떨다가 둘로 갈라져 따로따로 튀어 오르는 열원을 달리 뭐라 해석하겠는가. 감염시킨 대상의 생체조직을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분열하기까지 하는 끔찍한 괴물들이었다. ‘결국 핵 이외의 수단은, 그게 무엇이든 미봉책에 불과한가?’ 소용이 없지는 않다. 지금도 충분한 저지력을 발휘해주고 있고,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할 숫자를 줄여주기도 하며, 복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실도 상당할 테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보이는 풍경이 암담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력이 남아있을 때 핵 투발을 미리 요청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빗발치는 핵무기 사용 요청에 갈팡질팡할 백악관 사령실의 혼란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걸릴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열압력탄과 소이탄, 집속탄 등 광역살상에 효과적인 무기를 모조리 소진했다가 나중에 새로운 변수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았고……. 시시각각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으아아악!” 사람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사방이 변종들의 고통스러운 화음으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인간의 음계는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가까이 지나던 겨울이 쓰러지는 그를 받아냈다. 브라보 중대 소속 장쿤타오 하사가 정신 팔린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 신경 쓰지 마! 앞을 보라고, 자라 새끼들아!”  병사들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으, 으, 아파요, 웩. 너무 아파요, 살려주세요! 웨엑.” 뿌득뿌득.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사가 겨울의 방호복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소리. 그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하더니,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발작 같은 동작으로 방독면을 벗어던졌다. “다, 답답해! 답답해!” “…….” 겨울은 몸을 일으키곤 실성한 듯 중얼대는 병사에게 소총을 겨누었다. 우웨에에엑- 병사가 토해내는 피에 묘한 빛깔의 살덩이가 섞여있었다. 내장조각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테라토마가. 캉! 단발사격으로 병사의 고통을 덜어준 겨울이 테라토마를 밟아 죽이며 병사의 입에 소이수류탄을 쑤셔 넣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도록. 그리고 군번줄과 탄약을 빠르게 회수하고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몸 전체를 참호 밖으로 집어던졌다. 이미 방호복 안쪽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육체였다. 여기 온 모두는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유서를 작성하고 왔다. 자신이 죽었을 때 관에 넣을 약간의 머리카락과 함께. 시신을 후송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다만 후송불가의 이유가 이런 것이 되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따름.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아발론, 아발론. 당소 데이비드 액추얼. 핵투발 요청 대기 중, 이상.”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아발론. 핵투발 요청 확인. 좌표 송신하라, 이상.」 아발론, 즉 공중포대는 겨울의 요청을 쓸데없이 재확인하지 않았다. # 434 [434화] #여명, 혹은 황혼 (14) 어차피 최종 판단은 사령관 로저스 중장의 몫이다. 당초의 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도 있겠으나, 겨울이 아는 그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현장과 유리되어선 안 된다는 이유로 공중포대의 통제실 대신 지상지휘를 택한 인물 아닌가. 겨울이 보는 것을 중장 또한 보았을 터. 아니어도, 거부하기 전에 이유 정도는 물어볼 것이다. 계획이란 매양 사람보다 먼저 죽기 마련이고, 최고 책임자로서 중장이 내릴 판단도 전장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성격을 감안하면 벌써 전폭기를 띄워두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남중국해의 항모전단에서 이곳 제로 그라운드까지 순항미사일(토마호크)을 날려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1시간 10분이었다. 그래서 앞서 떨어진 미사일들이 교전 개시의 신호와도 같았던 것. 초음속 전폭기조차 공역에 진입하기까지 최소 20분은 걸린다. 그러므로 즉각적인 화력지원을 위해선 전폭기 편대를 미리 대기시켜놓는 편이 현명했다. 문제는 탑재 무장이 핵무기여야 한다는 점. 낙관적인 기대였으나, 로저스는 충분히 그런 기대를 걸어볼 만큼 유능했다. 희박하나마 백악관과의 의견조율까지 벌써 다 끝내놓았을 가능성마저 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병사들을 미리 대비시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핵 낙하 경보가 발령되었다. 경보를 전파 받은 병사들 일부는, 사전에 주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초를 헤아릴 여유조차 없이 기겁을 하며 자세를 낮췄다. 그들이 너무 일찍 웅크리는 바람에 화력공백이 생길 지경이었다. 장악력을 발휘해야 할 장교와 부사관들마저 냉정함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을 나무랄 순 없었다. “미쳤어! 핵이야, 핵! 핵이라고! 다들 바깥쪽 벽으로 바싹 붙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디안젤로 중사의 것이었다. 복무경력이 긴 베테랑인데도 이 모양이다. 인류 최후의 무기는 그만큼 막연하고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임무부대가 핵을 보유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을지언정, 그걸 정말로 쓰게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길고 철저했던 준비과정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근거 있는 자신감과 그 이상의 낙관. 잘 풀리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 드높은 사기의 다른 측면이다. 캬아아아악! 화력공백을 파고든 케식 하나가 참호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반사적인 대응사격에 얼굴을 얻어맞고는, 반대편으로 펄쩍 뛰어 다시 한 번 참호로 돌입하려 들었다. 이럴 땐 기다란 팔다리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바로 그 순간, 2.5킬로미터 거리, 5백 미터 상공에서 전술핵이 폭발했다. 빛은 밤을, 굉음은 다른 모든 소리를 살해했다. 겨울은 귀를 단단히 막고 참호 내부에 몰아치는 돌풍을 견뎌냈다. 그럼에도 폭음은 뼈를 타고 뇌수까지 파고들었다. 폭발 방향을 등지고 눈을 감았음에도 백색으로 물드는 시야는 덤이었다. 눈꺼풀이 참호에 새어든 반사광을 다 막지 못하는 것이다. 병사들에게 장갑차로의 피신을 명령하지 않은 건 참호의 토벽이 오히려 장갑차의 장갑보다 두껍기 때문이다. 강도는 상관없다. 핵심은 차폐물의 밀도와 두께. 섬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만 않으면 초기방사선에 의한 피폭만큼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 교육 받은 인원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반면 입사각상 살인적인 빛과 열을 정면으로 받게 된 괴물은 그 큰 체구가 단숨에 벌겋게 익어버렸다. 직후 강렬한 열풍에 피부가 벗겨지며 나뒹군다. 차에 치인 개처럼 발작을 일으키기도 잠시. 이번엔 폭발의 중심으로 빨려들어가는 압력에 발버둥 치다시피 하여 참호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겨울이 그 정수리를 대검으로 내리찍었다. 칼날이 콰득, 하고 뼈를 부수며 파고든다. 날 끝이 뇌를 헤집어놓으면서 괴물의 발광도 잦아들었다. 가장 빠르게 회복한 겨울이 멀리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눈에 담았다. 그것은 달빛 한 조각 없는 밤 풍경 속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게 위력이 약한 거라니.’ 여러 종말의 갈피에 걸쳐 방사성 화구를 접한 경험이 많은 겨울이지만, 핵폭발을 이토록 근접한 거리에서 목격한 적은 드물다. 그건 보통 죽음을 의미하기에. 고도를 조절한 폭발이라 낙진의 양은 거의 없을 터. 그러나 낙진 대신 일찌감치 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기류에 휘말렸다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탄화된 몸뚱이와 살점 부스러기들이 비현실적인 지옥도를 그려냈다. 폭심지에 보다 가까이 있었을 놈들이었다. 자그마한 것들도 뒤섞여 후두둑 떨어졌다. 수분이 날아가 가볍기 짝이 없다. 부딪힐 때마다 변색된 근육이 파삭파삭 부서져나간다.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여기엔 겨울조차 초현실적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귀는 여전히 먹먹했다. 폭탄이 하늘에서 터졌음에도 땅이 흔들려 내장까지 징징 울렸다. 이게 지상 폭발이었다면 분명 진동만으로 다치는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타타타타탕! 신속하게 재개된 기관총의 사격. 처음 수십 발을 갈기는 동안 사선은 술 취한 사람의 발걸음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변종들도 멀쩡한 개체들이 없었다. 비틀거리다가 찢어지며 괴성을 지르기 일쑤다. 어쨌든 한숨 돌렸다. 테라토마에 의한 감염은, 그 끔찍함 때문에라도 사기를 급격하게 깎아먹을 확률이 농후했기에. ‘피할 순 없더라도 최대한 미루는 게 좋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겨울도 두렵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 세계의 시간으로, 죽음이 무서워진 지 벌써 1년 넘게 지났으니까. 다만 낡은 익숙함에 기대어 두려움을 억누르는 것이다. 유서는 겨울도 쓰고 왔다. 이 세계는 겨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될 터.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각오와 별개로, 앤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겨울은 바쁜 무전과 성난 육성으로 공황에 빠진 이들을 추슬렀다. 바로 지금 방어선을 재정비하라고. 동시에 얼이 빠진 병사의 뒷덜미를 손수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하는 힘. 말은 자연스레 사나워졌다. “일어서! 훈련받은 대로 행동해! 죽을 때까지 이대로 앉아있을 건가!” 같은 질타도 하는 사람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참호에 침입한 테라토마들은 사방으로 튕겨진 끝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뇌진탕에 가깝겠다. 잠깐이나마 추가적인 유입이 끊어진 이때 신속하게 걷어내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 한편 밖에서는,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경사면 가득 화상을 입은 것들이 일어서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휘젓는 팔다리는 그때마다 허물이 벗겨져 너덜거린다. 개중에 간신히 일어난 하나는 인간을 향한 본능조차 잊은 듯 했다. 끄, 으, 어어어……. 나름의 지능을 갖춘 개체.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얼굴엔 벌써부터 수포가 생겼으며, 코와 입에서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같은 광경을 본 병사가 총을 겨누었다. “옘병. 좆같네!” 어조가 우울한 것은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 우려하는 마음일 것이다. 먹먹한 와중에도 날카로운 총성이 울리고, 덩치 큰 괴물이 더 많은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수준의 총격. 그러나 지금은 구토하느라 일어서지도 못한다. 작은 것들은 대부분 몰살당했고, 즉사를 면한 나머지는 불판 위에 던져진 벌레처럼 날뛰었다. 작열통은 인간에게만 제일의 고통이 아닌 까닭이었다. 2킬로미터 밖에서도 진피까지 익혀버리는 화력이니 전신화상을 입고 미쳐 날뛰는 게 당연하다. “야! 이거 치워!” 누군가 악을 쓰고, 병사들이 참호 안에 떨어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급하게 치워냈다. 간혹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들에겐 난사에 가까운 사격이 가해졌다. 누구나 다 소리를 지른다. 청각이 둔감해진 탓이었다. “데이비드 액추얼에서 데이비드 전 유닛에게! 피해가 있다면 보고 바람, 이상!” 무전을 넣어놓고 둘러보면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폭풍을 대놓고 받았으면 자칫 경량화 된 장갑차도 위태로웠겠으나, 대대 예하 전 차량은 모두 차량호(차량을 위한 참호)에 들어간 상태였으니까. 「데이비드 1 알파에서 데이비드 액추얼에! 핵폭발에 의한 피해는 없다는 통보!」 알파 중대를 시작으로 여러 중대에서 순서 없는 보고가 올라왔다. 보이지 않는 곳들도 보이는 곳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내용들이었다. EMP 저항을 갖춘 장비들은 핵공격의 여파를 견뎌냈다. 한편으로 중대간 간격을 조정하고 지원화기를 재배치할 지점과 변경된 화력집중점도 통보한다. 이쪽 방면의 압력은, 방사능 오염 때문에라도 현격하게 감소할 테니까. 병력 밀도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테라토마에 대한 대응능력도 강화된다. 지도와 지형을 암기한 것이 이럴 때도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지도 확인 없이 즉각적으로 최적의 지시가 나오니까. 여전히 보정인지 실제 암기인지 구분이 안 가는 감각이지만, 당장은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 상공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데이비드 액추얼. 당소 아발론 제이택(JTAC : 합동최종공격통제관). 핵 포격에 의한 전투피해평가(Bomb damage assessment) 의견 바란다, 이상.」 핵이 얼마나 유효했는지 확인해서 알려달라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요구. 그러나 무시할 순 없었다. 피해평가에 따라 대략적인 네크로톡신 발생량을 계산하는 까닭이었다. 겨울은 이를 작전장교에게 위임했다. “포스터! 맡길게요. 평가 취합해서 보고 올려요.” 이는 일반적으로 특화된 팀을 파견해 수행하는 작업이지만, 201독립대대의 간부들은 장교와 부사관을 불문하고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겨울도 마찬가지. 독립대대는 여하간 특수부대니까. 근 1년의 준비기간 동안 고작 2주의 강화교육과 몇 차례의 반복 실습을 못 받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윗선에서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요.” 포스터가 굳은 얼굴로 하는 말. 그렇다. 이 정보를 급하게 요구한다는 건 결국 그런 의미다. 로저스 중장이 백악관 사령실과의 조율을 끝마쳤을 거란 기대는 결국 너무 낙관적이고 성급한 것이었다. 상공에서의 열영상으로 테라토마를 관측하는 데엔 한계가 있는 만큼, 평가엔 일선 장교들의 의견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것들이 어느 정도의 위협인지에 대해서도. 이걸 두고 백악관이 전장에 간섭한다고 여겨선 곤란하다. 핵은 말 그대로의 전략병기인 까닭. 오히려 전술핵 다섯 발을 허가 없이 쓰도록 해준 것만으로도 폭넓은 재량권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제발, 충격을 받았기를.’ 겨울이 기대하는 것은 백악관이 아닌 교활한 개체들의 심리다. ‘놈들은 핵공격을 직접 받아본 기억이 없겠지.’ 이는 빠른 핵 투발에 기대한 또 하나의 효과였다. 방역전쟁에서의 핵은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된 게 대부분이고, 새크라멘토의 경우는 트릭스터가 등장하기 이전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는 해저핵폭발이었기에 변종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여파를 접했을 바다괴물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레인저가 포획한 알파 트릭스터들에게 핵무기는 미지의 영역이었을 터. 이미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이 봐도 충격적인 게 핵폭발이다. 교활한 놈들이 그 위력을 경계하여 잠시라도 역병의 대군을 멈춘다면, 이쪽엔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 역시 낙관적인 기대에 불과할 확률이 높겠지만. 이걸 제대로 건의해볼까 싶던 찰나, 지직지직 잡음 낀 무전기에 귀 기울이던 무전병이 기함한 음성으로 외쳤다. “Sir! 새로운 핵 투발 경고입니다! 핵포탄 두 발 TOT 사격!” “TOT?” TOT(Time on target)은 다수의 포탄, 폭탄이 동시에 착탄하도록 쏘는 방식을 뜻했다. “좌표 FH 3-9-6 2-5-7, FH 3-8-3 2-4-9! 앞으로 17초!” 여섯 단계로 불러주는 좌표는 앞뒤의 가장 낮은 숫자가 100미터 단위다. 쓰는 게 핵이라 더 정확한 좌표 같은 건 불필요한 상황. 겨울이 즉각 착탄 간격을 암산했다. ‘고작 0.8킬로미터잖아?’ 이 난폭함. 어쩐지 공수군이 담당한 방면이다 싶었다. 아예 한쪽을 지독한 방사능 오염으로 막아놓고 병력을 다른 쪽, 특히 험지 방향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겨울이 암기한 지도에 좌표를 대입해보면 두 좌표는 차단의 효과가 큰 개활지 위였으니까. 한편으로는 겨울의 발상처럼 변종들에게 충격을 안겨줄 작정 같기도 했다. “옵니다!” 통신병이 무전기를 감싸며 엎드렸다. 마침 가까이 있던 유라가 웅크린 채 눈과 귀를 보호하며 악을 썼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쿠웅- 둔중하면서도 굉장한 크기의 폭음이 귀를 막은 손을 무색케 했다. 땅이 한 차례 파도치듯 울렁인다. 감각상의 착오였다. 이번 폭발은 거리가 꽤 있는데도 이러했다. 겨울은 잦아드는 빛 속에서 눈을 떴다. 풍경은 녹화된 석양을 고속으로 재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솟구치던 버섯구름이 충격파에 흐트러지고, 새로 생긴 두 개의 구름은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기괴한 형상으로 변했다. 먼저에 비해 이번은 폭발고도가 조금 낮았다. 포탄의 위력을 감안할 때 5백 미터면 낙진이 거의 없는 수준이나, 그 이하로 내려가면 슬슬 재로 이루어진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섯 발 중 벌써 세 발을 써버렸다. 변종들이 생각대로 움직여줄지, 기지 수색이 좀 더 빨리 끝나주지는 않을지, 방사능 피폭은 괜찮을지, 그리고 백악관의 결의가 너무 늦지는 않을지……. 복수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달 없는 밤은 이른 새벽의 경계를 엿보고 있었다. # 435 [435화] #여명, 혹은 황혼 (15) 테라토마의 거시적인 습격 양상은 메뚜기 떼와 흡사했다. 그저 더 많은 먹이와 더 많은 숙주를 찾아 움직일 뿐, 개별 개체에겐 아마 공격이라는 의식조차도 없을 것이었다. 다만 숫자가 늘어날수록 기세가 난폭해지는 것은 동종과의 포식 경쟁이 심화되는 까닭. 다른 개체보다 먼저 먹고 먼저 증식하려면 보다 멀리, 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이루는 침식의 물결, 그 시각화된 본능엔 합리성이 결여되어있었다. 방어선은 기갑과 초연의 방파제였고, 여기에 부딪히는 식욕의 파도는 사나워졌다가 잠잠해지고, 몰려왔다가 물러나기를 혼란스럽게 되풀이했다. 이를테면 지금이 그렇다. 한참을 싸우던 중에 별안간 고요가 찾아왔다. 물론 조용해진 건 이 일대에 국한된 이야기. 다른 부대가 막아내는 방향에선 여전한 총포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쪽에서도 예비대를 파견해야 할 테지만, 당장 들어오는 지원요청은 없었다. 설마 한 순간에 지휘부까지 매몰되었을 린 없으니 어찌어찌 막아내고는 있는 모양이다. 겨울이 오한이 드는 몸을 추슬렀다.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지만, 추운 곳에서 운동으로 몸을 데우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점을 지나고 나면 발열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여기에 이제껏 흘린 땀으로 온 몸이 젖어있기까지 하니, 체온을 유지하는 것조차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이토록 빠르게 지쳐가는 건 결국 상대해야 할 괴물들이 너무 작고 많은 탓이었다. 그 자잘한 놈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잡아 죽이자니 동작의 낭비가 많아질 수밖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몸이 식을수록 달라붙은 테라토마를 식별하기가 쉬워진다는 점이다. 겨울은 각 중대별 손실과 탄약 잔량을 확인하고 화력집중점과 방어전면을 재설정한 뒤에야 비로소 흙벽에 기대어 쉴 짬을 낼 수 있었다. 초인적인 체력이라곤 하나, 전투를 치르는 내내 방어선 곳곳을 뛰어다녔으니 소모된 정도는 다른 장교와 병사들 못지않다. 삐이이이이- 어디선가 날카로운 전자음이 들려왔다. 방사능 측정 장비, 가이거 계수기가 내는 소리였다. 가까이 있던 병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어떤 새끼야? 당장 안 꺼?!” 그러자 한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 새끼다, 인마! 사람이 실수 좀 할 수도 있지! 미안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계수기를 음소거로 돌려놓았다. 기실 처음부터 음소거 모드였던 것인데, 스스로의 말마따나 초조하게 만지작대다가 버튼을 잘못 건드린 듯 했다. 신경질을 부렸던 병사가 쩔쩔 매는 표정을 짓는다. 보통 생각하는 계수기의 이미지는 간헐적으로 틱틱거리는 기계지만, 여기서는 켜기만 하면 저렇게 울어댔다. 애당초 가이거 계수기는 고준위 방사선을 측정하기 위한 장비가 아니다. 그냥 방사능 오염이 있는가 여부를 확인하는 수단일 뿐. 그럼에도 이런 장비를 지급한 것은- ‘핵포탄을 근접위험사격으로 쓰는 상황 자체를 상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즉, 만에 하나 핵포탄을 실제로 사용할 경우 낙진피해를 예방하라고 준 물건이었다. 이제 다시 조용해졌으되, 한 번 울린 경고음의 잔향은 강해진 불안감으로서 메아리처럼 남아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겨울이 병사를 불렀다. “정재열 일병. 담배 피워요?” “예?” “흡연자냐고 물었어요. 내 기억으론 맞는 것 같은데.” “어, 예. 그렇습니다.” “하루에 몇 대나 태워요?” “대충 반 갑 정도…….” 대답을 들은 겨울이 보기에 편할 미소와 온화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돌아간 뒤에 20년만 담배 끊어요. 지금까지 피폭당한 만큼은 만회될 테니까.” “…….” 정 일병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방호복을 입은 터라 우스꽝스러워지는 행동이었다. 담배에 폴로늄(po-210), 그리고 납의 방사성 동위원소(pb-210)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사전에 교육받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방사능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 이것이 교육의 목표였고, 겨울은 그 취지를 긍정했다. 가장 큰 공포는 무지에서 나오는 법이므로. 임무부대가 핵포탄을 지급받은 이상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장기간의 흡연이 핵 피폭에 비견될 만큼 해로운 것도 사실이고. 이건 핵이 만만한 게 아니라 담배의 독성이 그만큼 심각한 것이다. 물론 임무부대 전원이 방호복을 입고 있으며, 따라서 가장 치명적인 내부피폭을 막아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정말 20년으로 충분할지는 모르지만.’ 안심시키려고 어림잡아서 한 소리일 따름. 부족할 수도, 넘칠 수도 있다. 듣는 인원들 또한 머리로는 그것을 알 것이나, 가슴으로는 겨울의 말을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겨울에 대한 믿음이 믿음이거니와 간부 및 병사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을 테니까. 비흡연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담배를 안 피우니 만회할 방법도 없네, 라고. 지금을 견디는 데엔 딱 그 정도의 두려움이 좋았다. 한평생 골초로 살았어도 천수를 누린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Sir! 파라레스큐가 옵니다!” 누군가의 보고에 겨울이 건성으로 끄덕였다. 헬기의 접근쯤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특수전사령부 산하 구조비행대는 이 전장에서 부상자를 후송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한 개 특수작전비행단이 통째로 제로 그라운드 지원에 투입되었다. 땅을 두들기는 엔진 소리와 함께 구조헬기가 고도를 낮추었다. 이렇게나 어둠이 짙은데, 착륙을 유도하는 사람 하나 없이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여 충돌 직전에 균형을 회복한다. 정예 중의 정예다운 탁월한 역량이었다. 비교할 대상이 있다면 그 유명한 나이트 스토커(160 항공연대) 정도일 것이다. 겨울과는 어느 쪽이든 인연이 있다. 「또 옵니다!」 지직 대는 무전을 타고 들려오는 경고. 이번엔 헬기가 온다는 게 아니었다. 「프리스트, 프리스트! 당소 데이비드 4 액추얼! 기지점 선 스팟으로부터 정북으로 6클릭(킬로미터), 케식 다수가 포함된 일반변종집단 약 300이 산개대형으로 남하 중! 이동속도 시속 10클릭! 고폭탄 8발 효력사 요청! 입감했는가?」 「잠시 대기. 고폭탄 8발 떴다 이상. 비과시간 14초.」 독립대대 델타 중대가 지상에 전개한 견인포대에 화력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제발 좀 쉬어 가면서 하자, 모친 출타한 씹새들아…….” 고개 푹 숙이고 한숨 팍 쉬며 중얼거리는 건 분대장 중 하나인 임호진 병장이었다. 그는 몸통에 감던 덕트 테이프를 찍 뜯어 갈무리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의 방호복은 계속해서 둘둘 감아댄 테이프로 인해 기괴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다른 병사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심지어는 탄약상자를 부숴서 판자를 부목처럼 덧대는 경우도 흔했다. 부대 전체가 그야말로 파격적인 몰골이었다. 송정훈 소위가 탄식한다. “이건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니야. 진-짜로 중보병이 아쉽다…….” 그러나 센츄리온 장갑복은 장갑차 안에 고작 두 벌이 들어갈 뿐이며, 충전용 장갑차를 별도로 편성한다고 쳐도 배터리 지속시간 문제가 여전했다. 수송역량과 전투지속능력 양면에서 강하작전에 적합하지 못했다. 테라토마가 물러가면 일반 변종들이 밀려오고, 그걸 먹으러 다시 테라토마가 모여들고, 격퇴하고 나면 또 일반 변종들을 상대하는 패턴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상황. 겨울은 교활한 것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공세를 중단하길 바랐으나, 이 잔혹한 고원의 밤은 희망적인 기대를 무엇 하나 들어주지 않았다. 지나간 희망을 곱씹던 겨울이 간과했던 가능성 하나를 깨달았다. ‘아, 그런…가.’ 당초 바랐던 변화는 교활한 것들이 테라토마의 존재를 파악하고 추가적인 변종집단 투입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저신경망이 테라토마에 의한 감염으로 파괴되었다면, 전방에 도사린 트릭스터들이 자그마한 괴물들의 위협을 인식했다 한들 그 정보를 후방으로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전파추적 폭격을 피하고자, 그리고 대륙 전역의 무리를 움직이고자, 트릭스터들은 지저신경망의 범위 내에서 서로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어려울 만큼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지저신경망이 낳은 행동범위의 확장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게 된 경우였다. ‘역시, 광활한 영역에서 위협을 인식시키려면 전략핵을 쓰는 수밖에……!’ 전술핵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적 파괴력의 과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변종집단 유입만 끊어지면 테라토마에 의한 위기도 고점을 넘기는 셈이다. “부상자는 어딥니까? 여기도 한 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료와 함께 들것을 들고 나타난 파라레스큐 대원의 외침. “이쪽으로!” 포스터 대위가 팔을 크게 흔들었다. 부상자는 정보장교인 머레이 대위였다. 대대 참모진에서 후송인원이 발생할 정도로 전후방의 구분이 없는 전투를 치렀다는 뜻이다. 그나마 테라토마에 의한 부상이 아니어서 다행. 핵폭풍에 휘말려 날아온 지뢰가 원인이었다. 파편을 살펴보니 공군이 살포한 물건은 아니고, 옛 중국군이 군사지역 침투를 방지할 목적으로 산간에 매설했을 대인지뢰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치명상은 어찌 피했으되, 방호복이 터진 탓에 보다 심각한 피폭을 피할 길이 없었다. 급한 와중에도 파라레스큐 대원들은 명예훈장 수훈자에게 최소한의 경의를 표했다. 겨울은 들것에 신속히 고정되는 참모의 손을 잡아주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은 할 만큼 했으니.” 출혈로 초점이 흐려진 머레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대로는 오래 못 견딥니다. 철수를 건의해야 합니다.” “……고려해볼게요.” 실은 따로 건의할 것도 없다. 고위 참모들 사이에서라고 왜 철수 이야기가 안 나왔겠는가. 「테라토마의 특성상 우리가 잠시 빠지기만 해도 알아서 지리멸렬할 겁니다!」 알렉세이 구쉬킨 소령의 주장이었다. 상관인 카프라로프 소장은 이를 낙관주의라고 일축했다. 「내가 생물학은 문외한이어도, 상식적으로 볼 때 증식과 분열주기가 짧다는 건 돌연변이율이 높다는 뜻이지. 그리고 저건 어쨌든 모겔론스의 개량종이다. 기존의 변종들을 잡아먹으면서 뭔가 변화가 생길 수도 있을진대, 끝까지 저 모양일 거라고 누가 장담하나?」 즈베레프 소장도 짧게 쏘아붙였다. 「성공적인 철수가 승리만큼 어려운 것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최고책임자로서 로저스 중장마저 거부했다. 「성공할 가능성은 있겠지. 그러나 군인은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고작 몇 시간 지났을 뿐이지만, 이 전장에서 희망적인 관측이 맞아떨어진 적 있던가?」 결국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한 작전을 속행하겠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 준비를 갖추는 데 적어도 몇 개월은 더 걸린다.’ 그리고 그때의 싸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시에 즈베레프의 말대로, 적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내면서 철수를 한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수군 두 개 사단에 독립대대를 포함한 미군 한 개 여단 병력이 공중으로만 탈출해야할 상황이었으므로. 고래로 적전(敵前)철수는 종종 적전상륙만큼이나 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러니 어차피 감수해야 할 희생이라면,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기보다 가급적 이미 시작한 지금 끝장을 보겠다. 장군들과 백악관의 공통된 의지였다. 잡은 손이 빠져나갈 때, 머레이가 겨울에게 중얼거리듯 당부했다. “살아서 돌아오십시오.” “걱정 마요. 내 죽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니까. 괜찮은 계획도 하나 있고.” 참모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러나 더 묻지 못하고 헬기로 실려 갔다. 전략핵을 써야 한다는 겨울의 건의에, 로저스 중장은 벌써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유능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위스키 호텔(백악관)에 상신한 참이다. 시현(示現)용으로 변종의 밀도가 희박한 지역에 투발하는 거라면 POTUS(대통령)의 결심도 쉬울 거라고 판단했지. 타격지점을 선정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버텨주길 바란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곤 하나 여전히 새까만 하늘이었다. 위성관측이 반쯤 무용지물인 관계로, 전략핵을 터트릴 만한 범위에서 변종의 밀도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 타격지점 선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결국 그런 뜻이었다. “Sir!” 겨울의 위치에서도 새로운 역병의 군세가 가시권에 들어오는 와중에, 에반스 대위가 긴급히 전파했다. “기지 수색대가 마지막 격리구역을 뚫었습니다! 모겔론스 원형 확보가 목전입니다!” 겨울이 한숨지으며 끄덕였다. “그래도 놀고 있진 않았나보네요.” 기지를 제대로 봉쇄하지 못했을 때부터 못내 불신을 품었던 겨울이었다. 거기서 테라토마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훨씬 더 편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금만 더 힘내보죠.” 애써 피로감을 감추며. 겨울은 새롭게 전의를 다졌다. # 436 [436화] #여명, 혹은 황혼 (16) 끊임없이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지저신경망이 파괴되는 속도였다. 그 속도는 곧 신경망을 타고 테라토마가 확산되는 속도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다발 한 줄기 한 줄기는 테라토마가 증식하기엔 가늘고 부적합한 질량이지만, 그 중심에 있을 신경망 변종의 본체는 사정이 다르다. 그 비대함으로 테라토마 수십 내지 수백 개체쯤은 뱉어낼 법 하다. 만약 신경망의 파괴가 이미 전연지역을 넘어 저 먼 후방까지 도달한 상태라면, 그땐 전략핵공격으로도 희망적인 기대를 걸기 곤란할 것이었다. 생각해보자. 트릭스터가 전파추적을 피해 웅크리면서도 통제력을 유지하기 좋을 위치는 신경망 변종과 가까운 곳일 터. 그러므로 땅 밑으로 번진 테라토마가 가장 먼저 습격하게 될 것 역시 트릭스터들이었다. 혹시 모른다. 트릭스터가 오히려 자그마한 것들을 격퇴하거나, 무사히 몸을 빼내는 데 성공할지도. 온 몸으로 전류를 흘릴 수 있는 괴물이니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기습이었다. 트릭스터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고 치면, 변종들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참수공격(머리부터 자름)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 거기서 수십만의 변종들이 그대로 정지할 린 없다. 머리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앞으로 내달리는 몸뚱이만 남는 것이다. 트릭스터 이외에 지능을 갖춘 것들은 마지막으로 전달된 의지에 따라 무리를 통솔할 테니까. 그 몸뚱이마저 테라토마에게 몰살당하길 바라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왜냐면, 역병의 군세와 트릭스터는 당연히 거리를 두고 있을 테니까. 대규모 변종집단과 가까이에 있다간 쓸데없이 폭격 맞을 확률만 올라간다. ‘즉 시간싸움인데…….’ 겨울은 초조한 심정으로 교전에 임했다. “야, 시팔! 저거, 저거!” 송정훈 소위가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 그가 가리키는 방향의 어둠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야시경의 열상으로 보면 수도 없이 뭉쳐진 주홍빛 점들의 덩어리일 것이다. 동종의 몸통을 밟고 도약하는 놈들의 몸통을 밟고 도약하는 놈들의 몸통을 밟고 도약하는 놈들이 겹쳐지고 겹쳐지고 또 겹쳐진 끝에 만들어낸 범람. “평범한 놈들 나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쾅쾅쾅쾅! 고속유탄발사기의 집중적인 포화가 쇄도하는 역병의 홍수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격으로 파도를 무너뜨리려는 격이었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피와 살이 퍽퍽 부서져 나가는데도, 거대하고 끔찍한 급류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채 먼저 접근하던 변종들을 집어삼켰다. “아까보다 더 많잖아! 차라리 전 구간에 방사능을 도포하는 편이 낫겠다!” 송 소위가 억울한 듯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제트 엔진의 섬광과 배기음이 폭 넓은 쐐기를 이루며 별빛 천구를 가로질렀다. 겨울이 최적의 타이밍에 불러들인 전폭기 편대였다. 직후, 네 발의 집속탄(CBU-87)이 포물선을 그리며 자유낙하로 떨어져 내렸다. 각각의 집속탄은 껍데기가 대나무처럼 쪼개지면서 저마다 200여발씩의 작은 폭탄들을 쏟아냈다. 사람이든 차량이든 가리지 않고 찢어발기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자탄들이었다. 빠바바바박! 삽시간에 축구경기장 네 개 면적이 폭발의 소나기를 두들겨 맞았다. 각각의 자탄은 성형작약을 터트리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고, 파편에 섞인 지르코늄은 짧은 시간이나마 화씨 2200도에 달하는 고온으로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는 파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초연을 실어오는 강풍에 기분 나쁘게 고소할 향기가 섞였다. 방독면을 썼음에도, 겨울은 그 향기를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화약과 강철의 폭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것들이 동종의 유해로 포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위에 유탄발사기의 공중폭발탄 연사와 박격포 사격이 가해졌다. 이쪽에선 증식 과정의 질량 소실을 기대하는 수밖에. 당연히, 병든 고기가 구워지는 향기에 벌레처럼 이끌려오는 거대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겨울이 괜히 전술핵 이외의 무기체계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게 아니었다. ‘저지력이든 뭐든 제대로 된 소이탄이 더 낫겠지만-’ 그건 방어선 가까이에서 쓸 수가 없다. 시야가 지나치게 차단되는 까닭이다. 지상에서는 물론이고 항공관측조차 어려워진다. 변종들에게 짙은 연막을 쳐주는 꼴인지라, 자칫하면 방어선 붕괴의 단초를 제공할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타오르는 것은 매양 산과 고원의 건너편이었다. 얇게 펴 바른 쇳물처럼 달아오른 지평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공제선보다 멀리 있는 별들을 감추었다. 테라토마의 먹잇감을 철저하게 탄화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좋을 무기이건만. 전술핵은 이런 측면에서도 유효하다. 한 번이라도 핵을 터트린 구간이라면, 교전 과정에서 흩어지는 살점들은 내부피폭을 유발하는 훌륭한 독 먹이가 되어줄 테니까. 사용을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결국 전술핵 투발이 계속되는 이유였다. 방사능 오염지대를 늘려 방어선을 축소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지금! 중대 각 단차! 들이 박아!」 진석의 지시에 따라 알파 중대 소속 차량들이 각각의 차량호로부터 일제히 돌출했다. 경량화 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기갑차량이다. 기세가 꺾인 급류를 짓밟기엔 충분한 중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속도와 무게가 실린 무한궤도는 테라토마를 짓이기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았다. 동시에 툭툭 튀어 장갑 표면에 들러붙는 것들은 유탄포의 공중폭발탄 지원사격에 벗겨져 나간다. 알루미늄 합금에 유탄 파편이 부딪히며 어지러이 불티를 튀겨댔다. 차량 외부 관측 장비가 손상될 가능성을 감수하는 조치였다. 송정훈 소위가 불평했듯, 이건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니었다. 끄어어어어-! 장갑차가 치고 나간 사이,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체 더미로부터 별안간 케식 한 개체가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놈은 곧 대응사격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지만, 그 몸으로부터 폭발하듯 테라토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필이면 겨울과 참모들이 지나가던 참이었다. 그 점잖은 싱 소령마저 욕설을 내뱉었다. “사생아 새끼가! 끝까지 곱게 죽지 못하고!” 그의 검이 번뜩인다. 무뎌진 날은 벤다기보다 찢는 것에 가깝게 테라토마를 쳐 죽였다. 겨울은 눈앞에서 튀는 둘을 소총과 팔꿈치로 후려치고, 등 뒤에서 튀는 하나는 손으로 잡아 으깨었다. 동시에 디딤 발로 또 하나를 밟아 죽였다. “으아, 내 총…….” 매카들 중사가 진절머리를 내며 총의 장전손잡이를 연거푸 잡아당겼다. 그때마다 테라토마의 피와 체액이 살점과 더불어 찔꺽거린다. 이쯤 되면 제대로 발사될 거란 보장이 없다. 아무리 이물질에 강한 총이라도 말썽을 일으키기 십상인 환경이었다. 실제로 총기의 기능고장을 보고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급하게 대충이라도 총을 씻어내느라 마실 물까지 다 써버리는 경우마저 있었다. 사실 아끼는 데 큰 의미가 없기도 했다. 수통 뚜껑을 한 번이라도 완전히 열어버리면, 그 안에 든 물은 곧장 방사성 대기와 분진에 노출되고 마니까. 겨울의 방호복조차 더러운 피와 기름과 미니어처 같은 내장조각에 절어있었다. 일부 병사들이 열심히 감았던 덕트 테이프들은 미끈거리는 체액으로 인해 느슨해진 붕대처럼 흐물거렸다. 여기에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달라붙으려는 테라토마조차 미끄러지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 제3자가 보았으면 문자 그대로 지옥에서 싸운다고 평할 광경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선임상사 메리웨더가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악을 썼다. “핵이다! 핵 떨어진다! 대가리 숙여 새끼들아!” 이쪽 구간은 아니다. 그러나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든, 당장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잠시라도 엎드려 엄폐하는 쪽이 정신건강에 유익했다. 잠시 후, 충격파에 실려 온 부드러운 재가 겨울의 눈앞을 스쳐갔다. ‘방금 그거, 몇 번째였지?’ 임무부대가 보유했던 수량은 진즉에 다 써버렸다. 겨울에 이어 공수군이 두 발을 썼고, 나머지 두 발도 얼마 안 가 공수군과 미군이 나누어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작렬하는 전술핵은 죄다 항모전단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었다. 당연히 임무부대 차원에서도 핵 투발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다. 전술핵의 대안 중 하나는 폭탄창에 재래식 폭탄을 가득 채운 전략폭격기 집단이었다. 융단폭격으로 변종집단의 허리를 끊어 일시적으로나마 추가적인 유입을 차단하는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 측의 전략폭격기 집단은 멀리서부터 들리는 엄청난 소음으로 변종들에게 빠른 학습을 강요하고 있었다. 1기당 15톤의 폭탄을 쏟아내는 폭격기가 한꺼번에 수십 대씩 출현하는 것이다. 그 위력은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지진을 느낄 만큼 강력하다. 폭격이 이루어지는 도중엔 직접적인 파괴범위를 벗어난 곳에서조차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는 변종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폭격을 가해야 할 범위를 고려하면, 그리고 폭격기 편대가 왕복하는 거리와 무시무시한 탄약 소모율을 감안하면 이 또한 일시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융단폭격 두세 번에 공중포대가 싣고 온 각종 포탄의 총량만큼을 써버리게 되니까. 이 시점에서 기다리던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에반스가 잔뜩 굳어진 낯빛으로 보고했다. “Sir! 트라이던트가 발사되었다고 합니다! 숫자는 셋!” “드디어!” 트라이던트는 잠수함이 발사하는 다탄두 핵미사일의 이름이었다. 분류상으로는 양용빈 상장이 미 본토에 쏘았던 것과 같은 무기. 겨울은 저도 모르게 꽈악 주먹을 쥐었다.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르다. 이번에야말로 효과가 있기를 바랄 따름. “지금으로부터 3분……아니, 2분이면 착탄합니다!” 전술 태블릿을 넘겨받은 겨울이 착탄지점을 확인했다. 대기권을 벗어나 시속 2만 킬로미터로 날아오는 미사일 한 발당 여덟 개 씩, 총 스물네 발의 전략핵탄두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동시다발적으로 낙하하도록 되어있었다. 참으로 긴 2분이었다. 대기와의 마찰로 인한 탄두의 발광은 23 킬로미터 거리에서도 선명했다. 겨울을 비롯한 독립대대 전원은 찰나간 별빛 하늘의 저편에 죽죽 그어지는 밝은 실선들을 볼 수 있었다. 인공적으로 빚어진 유성우. 이는 어울리지 않게 환상적인 광경이었지만, 그 빛줄기 하나하나가 전술핵의 스물다섯 배에 달하는 막강한 파괴력의 수소폭탄들이었다. 그리고 폭발. 까맣던 세상에 색채가 돌아왔다. 전장의 풍경이 한 순간에 낯설어졌다. “정줄 놓지 말고 싸워라, 얼간이들아! 구경하다 죽을 작정-” 메리웨더 상사의 질타는 끝나기도 전에 우레를 닮은 소음에 파묻힌다. 그동안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자동화기의 발사음도 사라졌다. 각종 구경의 탄피가 조용하게 쏟아진다.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여명을 앞둔 새벽은 본연의 어둠을 빠르게 되찾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망막에 맺힌 잔상, 거친 고원과 험한 산맥의 분수령 너머 전방위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상승기류들은, 사람과 변종을 가리지 않고 호흡곤란으로 밀어 넣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변종들이 잠깐의 공황에 빠진 틈을 타, 사령부로부터는 방어선을 점진적으로 물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즉 본격적인 철수절차에 돌입하라는 뜻이었다. ‘마침내 원형을 확보했나?’ 겨울은 못내 그것이 궁금했으나, 한가롭게 정보를 요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존의 방어선을 고수하다간 단계적으로 병력이 빠질 때마다 변종들이 들어올 틈이 생긴다. 부대 간의 섬세한 간격조정과 유기적인 협력, 그 이상의 행운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휘하의 기갑세력을 다시 한 번 돌출시켜 변종들의 주의를 분산시킨 겨울은, 나머지 보병들을 신속하게 2선으로 재배치시켰다. 2선은 사령부 직할 공병대가 미리 구축해놓은 예비 참호선이었다. “빨리! 빨리! 유탄발사기는 이쪽으로! 서둘러! 뒈지다 만 새끼들 달려오는 거 안보이냐!” 장교와 부사관들이 병사들을 윽박질렀다. 모든 배치는 틈틈이 구축해둔 계획에 입각하여 겨울의 의도로 수렴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건 이 와중에 빚어진, 각 부대의 철수순서에 관한 마찰이었다. 「다 끝나가는 마당이니 예의는 집어치우지. 최후까지 후미를 지키는 역할은 우리가 맡아야겠소.」 로저스 중장에게 하는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은 숫제 통보에 가까운 어조였다. 「대체 무슨…….」 「서로 좋게 가자는 말이오. 당신네 양키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일찍 몸을 빼내서 좋고, 우리 러시아는 미국에 빚을 지워서 좋고.」 「…….」 「물론 이미 받은 지시와는 상충되는 것이겠지. 사령관인 당신과 한겨울 중령의 순번은 반드시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그런 방침이 내려오지 않았소?」 추측을 넘어서 아예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 급할 때 왜 굳이 나까지 선망에 호출했나 했더니…….’ 공수군 장성들의 강력한 요구였다. 이 대화를 겨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쟁영웅으로서 이용만 당하는 신세에 질려 자신들을 편들어주길 바라는 것일까? 이들은 또한 겨울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기도 하다. 총성과 포성이 끊임없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소장은 이질적인 감정을 담아 말했다. 「그건 곤란해. 곤란하고말고. 전쟁영웅인 당신들이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도취적인 비극에 매몰된 미국인들은 결코 우리의 희생을 직시하지 못할 거란 말이야. 우린 그저 들러리로 전락해버리는 거지. 이 작전의 실질적인 주력은 우리 러시아 공수군인데도 불구하고!」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애초에 독립대대가 이곳 제로 그라운드로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장병들의 피로 다른 나라의 여론을 사려는 우리 정부의 태도를 비웃어도 좋소. 그러나.」 카프라로프 소장이 선언했다. 「어머니 러시아의 이름으로, 이 싸움의 진정한 주인공은 우리가 되어야겠소. 그러니 순순히 먼저 떠나시오. 따로 배웅은 하지 않으리다.」 # 437 [437화] #여명, 혹은 황혼 (17) 사령부 참모진 가운데 하나가 즉각적으로 힐난했다. 「미쳤군! 지금 한가롭게 그딴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을 때요?」 미군에겐 결코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발하는 이유는, 그만큼 황당하고 급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 2선 재배치를 무사히 끝냈다 한들 철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 이토록 민감한 순간에 지휘체계가 흔들리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니지.」 하하. 비난을 긍정하며, 카프라로프 소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모르겠소? 때가 아님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요구란 말이오.」 사실상 시시각각 다급한 전황을 인질로 잡은 셈이었다. 「어차피 당신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소이다. 우리를 강제로 움직일 방법이 없을 테니까. 다 같이 밍기적 대다가 죽기는 싫겠지!」 「그만!」 로저스 중장이 소모적인 흐름을 끊었다.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미군을 우선적으로 철수시킨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반드시 문제 삼고 넘어갈 것이다.」 감정표현이 적은 중장으로서는 듣기 드물게 노여움을 억누르는 음성이었다. 「그러시던가.」 카프라로프 소장의 대꾸였다. 교신이 종료된 후, 겨울은 그 자신감을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 대한 증언이 나오면 공수군이 희생을 치르는 의미 자체가 퇴색될 텐데.’ 목적이야 어쨌든, 결정적인 순간 임무부대 전체의 안위를 담보로 미군을 협박한 것이다. 그것도 사전에 합의한 지휘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무언가 보험이라도 있는 걸까? 카프라로프 소장이 처음 혐의를 제기했을 때 로저스 중장이 잠자코 듣고 있었던 건 확실히 좀 이상했다. 겨울마저도 한순간이나마 그게 진짜인가 고민했을 정도이니. 겨울과 로저스, 올레마의 기적을 일궈낸 두 주역의 죽음은 미국에게 있어 분명 국가적인 손실이 될 터. 허나 핵을 보유한 잠재적 가상적국과 갑작스레 국경을 마주하게 된 입장에서, 이번 작전에 대한 대가를 적게 지불하고자 묘한 판단을 내렸을 개연성은 존재했다. 국익의 눈금을 읽는 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중장이 결국 화를 내는 걸 보면, 카프라로프 소장이 언급한 그 ‘정부의 방침’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겨울이 이렇게 판단하는 건 로저스 중장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능숙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므로 그의 짧은 침묵은 순간적인 갈등의 증거라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나는 오고 싶지 않았어.」 「영웅처럼 죽기 쉬운 게 어디에 있나.」 지난날 보드카가 사람을 마시는 술자리를 거쳐 반쯤 인사불성이 되었던 로저스 중장의 취중진담이다. 미군이 먼저 가라는 말에 번민할 여지가 충분했다. 허나 그 이상으로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만큼은 고지식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 죽는 게 싫었다면, 한때 겨울이 염두에 두었듯이 어떤 식으로든 빠질 이유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중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곳에 와서도 굳이 위험한 지상지휘를 고집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군인의 의무이자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의 분노는 합당하다. 역시 겨울의 추측일 뿐이지만, 거기엔 자신의 동요에 대한 혐오감도 묻어있지 않았을지. 그렇다면 카프라로프가 드러낸 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명령을 내리는 틈틈이 지나간 대화를 심란하게 곱씹던 겨울의 뇌리에, 불현듯 스산한 깨달음 하나가 스쳤다. ‘이것 자체가 공작이 이루어진 결과일 수도 있어!’ 일전, 리드빌에서 겨울과 통화했던 중앙정보국 요원은, 오프 더 레코드라는 사족을 붙이면서까지 「러시아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작과 이면합의가 있었다.」라는 비밀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꼭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때쯤이면 중령께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이 되어 있으실 겁니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게 바로 이 순간에 대한 암시였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미국은 자국 장병들과 전쟁영웅들을 최대한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하여, 즉 러시아 측이 자발적으로 희생을 치르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속임수를 쓴 것이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부러 속아준 러시아 관계자들도 있을 터였다. 어쩌면 공수군 장성들 역시 이미 매수되었을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훗날 근거 없는 속단이었다고 밝히는 조건으로 은밀한 대가를 받기로 했다거나. 정보국에게도 강력한 동기가 있다. 그들은 겨울에게 상당한 투자를 했고,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겨울이 살아서 돌아오는 편이 이익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러한 궁구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추측이 사실이라 한들 누가 있어 그것을 사실이라 진술하겠는가. 그럼에도 쉬이 지우기 힘든 의심인지라, 겨울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불쾌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이곳 제로 그라운드에 오기로 한 것은 겨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어렵게 내린 결심이었다. 그 어려웠던 결심에 이제 와서 흙탕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 손이 닿지 않는 곳, 한계 밖에서 비가역적으로 흘러들어오는 탁류가 너무나 싫다. 로저스 중장에게 보고하는 건 무의미했다. 근거조차 없는 의혹을 제기해서 뭐하나. 또 한 번의 시간낭비일 뿐이다. 당장 어쩌지 못할 문제는 잠시 잊고, 주어진 책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느덧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쪽빛으로 물드는 하늘, 푸르게 젖어드는 전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발론으로부터 입전! 변종집단의 추가 유입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중포대가 중계한 관측결과였다. 통신장교의 보고를 들은 싱 소령은 경련을 일으키도록 지쳐있는 장검을 늘어뜨렸다. 테라토마들이 그 작은 크기로 말미암아 대대 지휘부에까지 쉴 새 없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가쁜 숨결 사이에 고단한 중얼거림을 섞었다. “전략핵이, 먹힌 건가…….” 핵투발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으되, 싱 정도 되는 장교가 전략핵이 사용된 목적을 모를 리 없었다. 다탄두 핵미사일의 전율스러운 위력은 아직까지도 저편 하늘에 거대하게 뭉글거리는 상승기류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 시야의 소실점까지 유해로 뒤덮여있는 초토의 대지. 여기에 동틀 녘의 창백한 색감과 강해지는 추위가 더해지자, 척박한 고원은 얼어붙은 종말을 고스란히 그려놓은 듯한 풍경으로 화했다. 그러나 그 풍경은 결코 정적이지 않았다. 전투양상은 일견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추가적인 유입을 차단했다는 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걸 막았다는 뜻에 불과하기에. 허리가 끊어졌다 해도 이미 전장에 진입한 변종집단들이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며, 이것들을 다 물리친 다음엔 달리 삼킬 숙주가 없어 죄다 이쪽으로만 밀려올 테라토마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 지역에 잔존한 숫자 전체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것들을 다 죽여야 할 필요는 없다. 이쪽은 하늘로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만 철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뒤에 남는 병력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게 문제다. 결코 그 역할을 자청하고 싶진 않았으나, 이런 식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도 않았건만……. 서로 먼저 탈출하겠다고 다투다가 전멸하는 꼴만은 면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겨울이 뒤를 열어놓고 정차한 지휘장갑차 안쪽에서 전황을 파악하는 중에, 방사능의 전파간섭으로 지직 거리는 알파 중대 채널에서 3소대 3분대의 다급한 보고가 들려왔다. 「데이비드 1! 당소 1-3 찰리! 당소측 IAAV가 추가로 무력화되었다! 이젠 분대 내 기동 가능한 차량이 없다!」 IAAV는 임시제식 공수장갑차(Interim Armored Airborn Vehicle)의 약어였다. 대부분이 이제껏 잘 견뎌주었으나, 이물질에 의한 오염이 극심한 와중에 혹사시킨 탓인지 슬슬 궤도가 벗겨지거나 주저앉는 차량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테라토마의 물결을 우악스럽게 짓밟는 식으로 저지해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니더라도 외부 관측 장비가 손상되어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상실하는 경우 또한 많았다. 중대장 진석이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젠장! 긴급수리는?!」 「불가능합니다! 뭐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도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럼 고정포대로 쓰다가 버려! 1-3 찰리는 다음 진지변경에서 예비대로 빼겠다!」 현 시점에서 중대장들의 지휘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개중에 진석이 가장 나은 건,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실전경험으로 인한 침착함과 정신력의 차이였다. 그것 역시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방어선이 지속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전투 양상도 갈수록 단순해지고, 겨울이 대대장으로서 지휘력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전투가 심화될 무렵 되새겼듯이, 이제 지휘관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임을 다할 뿐. 끼이이이-! 바닥을 기어온 테라토마가 겨울의 전투화 구두코를 깨물었다. 빠득빠득, 작은 이빨이 줄줄이 뭉개지는 소리. 유달리 약한 놈이다. 눈은 없고 코에는 구멍 두 개가 있을 뿐이라, 둥글둥글한 머리에 새빨간 입만 도드라져 보이는 개체였다. 증식과 분열이 워낙 빠르다보니, 벌써부터 방사능으로 인한 기형이 생겨나고 있는 모양이다. 밟아 죽이는 겨울로서도 이젠 지긋지긋하다는 것 외에 다른 감상이 들지 않았다. 초인적인 전투력을 거의 무가치하게 만드는 끔찍한 적이었다. 가장 먼저 제로 그라운드를 이탈한 것은 탄도탄 기지 수색부대였다. 민간인 전문가가 포함된 그들은 임무의 성패와 무관하게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머지 미군 중에선 독립대대의 순서가 마지막이다. 그래도 그 순서는 의외로 금방 돌아올 것이다. 임무부대에서 미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던 까닭. 카프라로프 소장의 말대로, 지상에서의 실질적인 주력은 러시아 공수군이 맡고 있었다. ‘에스더를 믿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에스더에겐 변종집단의 유입을 초기부터 차단할 능력이 있었다. 그랬다면 핵투발도 불필요했을 것이고, 사령부와 공수군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지도 않았을 터. 애초에 철수작전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 나서서 에스더를 설득하긴 했으되, 그건 어디까지나 장교들의 중의를 대변했던 것. 그녀를 신뢰하는 겨울로선 품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공수군에서 끝끝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만다면, 신앙에 의거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간신히 마음을 지키고 있는 소녀에겐 얼마나 큰 아픔으로 남을는지. 그것은 그녀가 믿는 소명의 균열이기도 하다. 에스더는 번민할 것이다. 주께서 내게 정녕 소명을 내려주셨다면, 진실로 사람들을 구해야 할 순간에 그분은 어찌 나의 역할을 만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물론 그녀는 중미 방역전선에서 벌써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돌아가서도 한동안은 그녀가 구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전투가 특별하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을 터. 말 그대로 인류를 구하는 작전이 아닌가. 몸이 그렇게 병들었어도 속에 있는 건 결국 소녀였다. 크나큰 기대가 없었을 리 없다. 결국 오늘 느낀 무력감은 에스더의 마음을 천천히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잖아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인데……. 겨울은 그녀의 최후가 안식과 거리가 멀 것을 예감했다. “Sir! 우리 차례입니다! 드디어 우리 차례입니다!” 사령부의 통보를 받은 에반스가 두 주먹 불끈 쥐며 환호했다. 숨겨진 사정을 모르면, 뒤에 남는 이들이야 어떻든 일단은 이 지옥에서 빠져나간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밖에. 겨울이 무전기를 잡았다. “데이비드 액추얼에서 데이비드 전 유닛에게. 철수는 찰리-브라보-델타-알파 순으로 실시한다. 반복한다. 찰리-브라보-델타-알파 순이다. 브레이크. 데이비드 1, 2, 4는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 브레이크. 데이비드 3는 현시각부로 스톨리치나야 1에게 방어진지를 인계할 것. 인계가 완료되는 시점에서 보고 바란다, 이상.” 공수군 331연대의 차량과 병사들이 독립대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들이 단계적으로 대대의 빈자리를 메꿔나감에 따라, 대대는 보유한 모든 차량을 방치하며 이송 지점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변종들이나 테라토마에게 탈취당할 우려는 없으니, 남아도는 기갑차량들은 러시아군이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었다. 간혹 스쳐가는 러시아 병사들은, 차마 감추지 못하는 부러움과 질시와 피로와 두려움 등을 담아 먼저 떠나는 독립대대 병사들을 흘깃거렸다. 역시 공수군 측에서도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 듯 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겨울은 불편한 마음으로 헬기에 올라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제로 그라운드는, 여전히 인간과 괴물들의 생사가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이었다. # 438 [438화] #여명, 혹은 황혼 (18) 철수한 병력의 수용은 해상에서 이루어졌다. 오늘을 위해 개조된 화물선이 무려 스무 척에 달했다. 이들 화물선은 항모와 같은 비행갑판을 올려 수많은 헬기의 이착륙을 동시에 감당할 능력을 갖췄으며, 생물학적 오염에 대응할 수단도 마련해두었다. 전술핵을 실제로 사용할 경우에 대비해 체계적인 방사능 제염 절차까지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선내 공간은 미 본토로 복귀하는 여정에서 작전참가 병력의 숙소로 쓰일 예정이었다. 인근에 공항을 보유한 섬이 존재하는 데도 굳이 해로로 복귀하도록 한 것은, 이 느린 항해가 검역격리를 겸하는 까닭이었다. 제로 그라운드에서 모종의 감염이 있었다 한들 고립된 선상에서 발병한다면 통제하기 한결 쉬울 것 아닌가. 동시에 독립적인 함대를 꾸려도 좋을 만큼 많은 병원선들이 있었다. 다수의 망명정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이 손을 보탠 덕분이다. 사실 그들은 후방지원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 전투부대까지 파견하고 싶어 했으나, 보급체계의 혼선과 조직체계의 이질성 등을 이유로 미국과 러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전반적인 사전준비는 관계자들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지금 겨울이 보는 철수현장은 굉장히 혼잡했다. 요구되는 제염작업과 의료적 처치가 기존에 상정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기실 모든 작전인력이 정밀검진을 받아봐야 할 처지였다. 병원선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고, 또 거기로 병사들을 실어 나르는 데에서 다시 혼란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분사!” 촤아아악- 방호복 위로 뿌려지는 소독제(Decon foam)와 제염수의 압력은 살이 아플 만큼 강력했다. 오는 동안 성에처럼 얼어붙었던 테라토마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씻겨 나간다. 세척을 맡은 화생방대의 꼼꼼함은 차라리 편집증에 가까웠다. 전장에서 돌아온 자들의 처절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탓. 겨울이 보기에도 자신들은 이제 막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몰골이었다. “다음! 세척을 마친 인원들은 이쪽으로!” 화생방장교의 외침을 듣고, 겨울은 비로소 방독면을 벗었다.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추운 데서 흘린 땀은 그리 쉽게 마르지 않는다. 늘어뜨린 방독면으로부터 거품 섞인 소독액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차가운 계절의 바닷바람에 두피가 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으나, 겨울은 일단 한결 편해진 호흡에 만족했다. 비단 겨울이 아니어도 비슷한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방독면을 오래 쓰고 있으면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된다. 그 상태로 긴 시간 격전을 치른 이들에겐 평소와 같은 호흡이 절실했다. 일출을 맞이하는 바다는 거짓말처럼 청명하여 현실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끔찍한 전장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사람들이 이래저래 외치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총성과 포성과 흉한 괴성에 익숙해진 귀엔 없는 거나 다름없는 소음이었다. 간호장교의 인솔에 따라, 선내로 들어간 독립대대 장병들은 내팽개치다시피 방호복을 벗어던졌다. 개중엔 탈진하여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의무병과 화학병들은 무기와 방호복, 기타 장구류를 걷어 생화학 폐기물 수거함에 담아가는 한편으로, 지친 전우들에게 따뜻한 음료와 갑상선 방호제, 그리고 모포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겨울 몫은 간호장교가 직접 건네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Sir.” “고마워요, 소위.” 어깨에 모포를 두른 겨울은 먼저 갑상선 방호제부터 삼켰다. 방호제의 주성분은 아이오딘-127(요오드)로, 아이오딘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갑상선에 축적되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말하자면 보완조치였다. 투입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식단에도 대량의 아이오딘이 첨가되어 있었으니까. 최소한 갑상선 암의 발병률만큼은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었다. 방사능 중독으로 인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암이 바로 갑상선 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독립대대 장병들에겐 적잖은 위안이 될 요소였다. “병원선행 헬기 순번이 돌아올 때 까지 이곳에서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여전히 방호복 차림인 간호장교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기울였다. “보트는 안 쓰나 봐요?” “바다 상태(Sea state)가 마냥 좋은 게 아닌데다, 그쪽에서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환자 수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한꺼번에 많이 보내봐야 기다리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서 쉬다가 가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채혈처럼 간단한 조치는 여기서도 하고 있고요.” 타당한 이유였다. “혹시 뭔가 불편하십니까?” “아뇨, 딱히 불편하지는……. 그보다, 어차피 기다릴 거라면 철수 현황을 알아보고 싶은데.” 철수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겨울은 못내 공수군의 처지가 궁금했다. 간호장교는 긴장한 채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당신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건 곤란합니다. 정해진 격리과정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보고를 해줄 순 있겠죠?” “물론입니다. 즉각 보고하겠습니다.” “서두르진 말아요. 그러다 당장 급한 일에 지장이 생겨도 곤란하잖아요.” 겨울이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은, 간호장교의 계급이 계급이거니와 명령계통 자체가 다르기에 서둘러준다 한들 노력의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본연의 업무만으로도 포화 상태인 지금이었다. 즉 여기서 강하게 요구하는 건 권한도 없는 하급자에게 계급을 내세워 부담을 주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어딘가로 무전을 넣어 겨울의 뜻을 전했다. 저편에선 인지했으니 대기하라는 답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결과가 확인될 쯤에도 겨울이 여기에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 혼란스러운 사후 행정의 와중엔 얼마든지 벌어질 법한 일이다. ‘그리고……. 결국 근거 없는 나 혼자만의 의심일 뿐인걸.’ 겨울에겐 오직 정황증거만이 있을 따름이다. 물증이나 그에 준하는 증언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런 속과 별개로, 겨울은 대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짧은 격려를 건네주었다. 전투가 끝나도 장교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방사능 중독을 걱정하고 있을 모두에게 지휘관으로서 침착한 모습을, 생환을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어쨌든 앤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큼은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기쁘니까.’ 그녀를 떠올리니 비로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전장이었다. 겨울은 손 안에서 회중시계를 짤깍거렸다. 전투가 진행되는 내내 몇 번이고 꺼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부적처럼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으므로 꺼내볼 방법이 없었다. 물론 방법이 있었더라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테라토마의 체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을 테니. 뚜껑 안쪽, 비로소 보는 연인의 사진은 이제 다 끝났음을 깨닫게 만드는 부드러운 위안이었다. 그녀와 부부가 될 날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했다. 과연 이 상황에 어울리는 감상인가, 라는 생각엔 의미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가 되어줄 것이다. 간호부사관이 겨울의 피를 뽑아가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Sir! 헬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역시나, 겨울의 요구에 대한 반응보다는 헬기 탑승 순서가 돌아오는 게 먼저였다. “할머니. 일단 끊을게요. 저 검사 받으러 가야돼요. 네, 네.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검사도 만약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큰 문제는 없을 걸요?”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던 유라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한다. 위성단말 앞에 줄을 서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간부와 병사를 가리지 않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차피 하게 될 연락이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하고 싶은 마음. 생사의 경계를 오갈 땐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간절해지는 법이었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위성의 수용량으로 인한 우선순위 제한인지, 아니면 보안상 동시에 감시 가능한 회선 숫자의 한계인지, 넷 워리어 단말의 통화기능은 일시적으로 막혀있는 상태였다. 고로 겨울도 줄을 서고 싶었으나, 어렵게 어렵게 참아냈다.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다 양보하고 나설 테니까. “대장님!” 헬기에 나누어 탑승하기 전, 유라가 겨울을 불렀다. “작전 성공 여부는 아직인가요?” 모겔론스의 원형 확보에 성공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현시점에선 이렇다 할 전파사항이 없었다. 겨울은 이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알게 되겠죠.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봐요.” 발표가 지연될 이유를 고민해보면, 가능성은 크게 둘이었다. 첫째. 겨울의 말대로, 모겔론스의 원형을 획득한 게 맞는지, 혹은 원형이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검증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 섣불리 작전성공을 확정지었다가 나중에 번복하게 되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군 당국이 신중하게 처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원형과 함께 확보한 데이터에 뭔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를 두고 논의를 진행 중인 경우. 이는 긍정적인 것일 수도,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유라가 슬픈 어조로 말했다. “동생 같은 애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실제로 그렇게까지 많이 죽었다기보다는, 죽은 이들이 너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입으로 작은 괴물을 토해내는 동시에 온 몸이 자글자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한평생 트라우마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악몽이었다. 단순히 변종으로 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아니, 그토록 끔찍한 죽음은 하나라도 많다고 해야 하나.’ 곱씹는 겨울에게, 유라가 남은 말을 뱉었다. “그 죽음이 무의미하게 된다면, 그땐 진짜 견디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요.” “…….” 달리 해줄 말이 없었던 겨울은,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독립대대 인원을 태운 헬기는 여러 병원선으로 나누어 향했다. 편제 유지보다 진료 능력에 따른 분배가 우선이었던 까닭. 더는 전투를 치를 일도 없다. 군인이기 이전에 환자로 취급하는 게 당연했다. 겨울의 경우엔 영국 왕립해군의 아르고스(RFA Argus)함에서 종합적인 검사를 받았다. 병원선인데도 과할 만큼의 자위용 무장을 탑재한 선박이었다. 병원선의 무장을 불허하는 제노바 협약이 무의미해진 세계이니 이상하게 여길 바는 아니었다. “결과는 언제쯤 나올까요?” 겨울이 묻자, 중령 계급의 영국군 의무장교는 잠시 궁리한 뒤에 대답했다. “아무리 빨라도 내일입니다.” “늦으면?” “한 보름은 잡아야겠지요. 많이 불안하십니까?” “나는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안심시켜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전장의 소식이 어디까지 언론 보도로 풀렸을지는 모르겠다. 작전을 앞두고 마치 스포츠 경기를 다루듯 부산을 떨었었으나,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정부가 정보를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차단 자체가 불길하게 해석되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전황을 공개하진 않았을 것이다. 테라토마는 온갖 예측을 다 벗어난 재앙이었으니. 그러나 앤은 1급 기밀도 열람 가능한 비취인가 보유자였다. 또한 고위 감독관으로서 여러 인맥도 가지고 있을 터. 겨울을 보내고서 걱정이 없었을 리 없으니, 전략핵이 빗발친 전장 사정을 이미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면 의료적 소견을 첨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겨울 스스로는 괜찮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지만. ‘난 실수를 한 적도 없고, 공수군처럼 막무가내로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피폭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건 경황없이 핵의 섬광에 노출된 이들이었다. 이건 실수한 사람을 탓하기가 곤란하다.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급박한 고비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공수군은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낙진이 떨어지는 범위에 밀어 넣었다. 애초에 자기들 머리 위로 낙진이 떨어지도록 좌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겨울에겐 「독성저항」의 효과도 있을 것이었다. 죽을 것을 살려줄 정도는 아니어서 정확히 계량하긴 어려우나, 피폭을 경감시켜주는 정도라면 기대를 걸어볼 만 했다. 의무장교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제가 한 번 손을 써보겠습니다. 기대는 마시고 기다려주십시오.” 순간적으로 망설인 겨울은 사양할 타이밍을 놓쳤다. 문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잔뜩 있는지라 바로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끝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겨울이 먼저 알게 된 건 검진결과가 아니라 이번 제로그라운드 진공, 작전명 「포효하는 폭풍(Roaring storm)」의 성공여부였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대역병의 원형을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종말의 끝이 가시권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과학자들은 백신을 개발할 것이고, 인류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모든 땅에서 더 이상 어떠한 감염폭발도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미-러 양국의 장병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도록 합시다…….」 백악관의 중대 발표, 크레이머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중 일부였다. 이를 지켜본 남중국해상의 함대에서도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만 그건 함대에 속한 장병들의 이야기고, 실제 전장에 있었던 인원들은 조용한, 혹은 우울한 여운에 젖어있었다. 겨울은 카프라로프 소장이 끝끝내 탈출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수군 98근위소총사단 최후의 생환자가 기억하는 소장의 마지막 말은 “확, 그냥. 빨리 꺼져 새끼야.”였다고 한다. 이로써 겨울의 의심이 사실이더라도 그를 비난하긴 어렵게 되었다. 미국 시민들도 그의 과 보다는 공을 더 크게 볼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지휘체계를 부정하여 위기를 빚을 뻔한 잘못은 있을지언정, 결국은 애국자로서, 또 군인으로서 더없이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함 셈이니까. 그것은 누군가 감수해야만 하는 희생이었다. 변덕스러운 겨울 바다엔 어느새 함박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이상한파가 찾아올 거라는 말은 들었으되, 이렇게나 남쪽으로 내려온 해상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방사능에 찌든 헬기를 바닷속으로 모조리 밀어버린 까닭에, 말끔하게 비워진 비행갑판은 그저 하얗게 덮여가는 강철의 뜨락이었다. 한쪽엔 갑판요원들이 만든 눈사람이 서있었다. 곧 치우기야 할 테지만, 당장은 보는 사람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적인 풍경이다. 난간에 기댄 겨울은 이름이 같은 계절을 바라보며 조용한 한숨을 내쉬었다. # 439 [439화] #박제된 낙원 (1) 격리기간을 거쳐 샌디에이고로 회항한 함대가 마주한 것은, 항만과 인근 거리를 가득 메운 채로 장병들을 환영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환호와 함성이 뒤섞인 감격의 도가니. 귀가 먹먹해지는 그들의 외침은 의미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감정이었다. 군악대가 군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미러 양국의 대통령이 부두까지 마중을 나왔다. 장병들은 두 국가원수와 그들의 참모진으로부터 경례를 받으며 하선했다. 전쟁영웅에게 상급자가 먼저 경의를 표하는 건 어디까지나 미국의 비공식적인 관습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러시아의 이그나체프 대통령도 우방의 관례를 따라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겨울은 장교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별도의 대기공간에서 앤과 재회했다. 미리 생각해둔 말들은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우는 앤이,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겨울을 끌어안았다.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아픔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조금 아픈 정도가 좋아.’ 겨울은 그 아픔에 만족하며 연인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웠던 사람의 향기에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을 꾹 감고 체온을 만끽하는 사이 몇 번이고 밝은 플래시가 터졌으나,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목이 메어있던 앤이 간신히 속삭이는 말. 겨울이 그녀의 귓가에 답했다. “나도 그랬어요.” 무서웠다. “당신을 다시는 못 보게 될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앤은 겨울을 안은 팔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이미 통화로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렇게 실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으니까. 두려움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감각은 이대로 영영 몸을 맡겨두고 싶은 안온함의 급류였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이라는 게 있었다. 장소를 옮겨가며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낮이 기울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 시간 동안, 겨울은 앤 생각에 수시로 산만해지는 자신을 추스르는 것이 고역이었다. 이날, 겨울의 서훈이력엔 두 개의 훈장이 더해졌다. 하나는 크레이머가 달아준 수훈십자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그나체프 대통령이 수여한 성 게오르기 4급 훈장이다. 「포효하는 폭풍」은 미러 양국이 합동으로 수행한 작전이었으므로 겨울이 러시아로부터 훈장을 받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크레이머 또한 공수군 장성 및 장교들에게 미국의 훈장과 표창을 전달했다. 아울러 전사자들에 대한 사후 추서도 이루어졌다. 카프라로프 소장은 전사로 인한 특진에 러시아 연방영웅 칭호가 더해져 최종적으로는 대장 계급을 인정받았다. 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예우는 대단히 엄숙하여, 전장에서 죽은 애국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겨울과 앤은 이 모든 행사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해후를 나눌 수 있었다. 이때에도 역시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할 겨를이 없었다. 겨울은 자신이 이토록 격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내 그 놀라움조차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은, 사랑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곁에 있는 서로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고 확인하며 또 확인하는 밤에 가까웠다. 무의미한 비교이긴 하지만, 좀 더 심한 쪽은 역시 앤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됐든 연인을 전장에 보낸 채로 기다려야 했던 쪽은 그녀였으므로. “벌써 새벽 세 시예요. 내일을 생각해서 몇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여요.” 겨울의 말에, 같은 베개를 베고 마주보던 앤이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야죠. 자야 하는데…….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네요. 바로 눈앞에 당신이 있으니까. 눈만 감으면 아쉬워져서…….” “내 꿈을 꾸면 되잖아요.” 겨울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앤은 습관처럼 겨울에게 이마를 부비며 키득거렸다. “겨울 꿈이야 맨날 꾸죠. 그 꿈이 어떤 내용인가가 문제인 거지.” 그간 악몽이 많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같이 있잖아요. 오늘 꿈은 분명 좋은 내용일 거예요.” “……그럴까요?” 되묻는 그녀의 볼과 귀를, 겨울은 상냥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날이 갈수록 부드러워지는 촉감이었다. 사실 눈을 감기 아쉬운 건 겨울도 마찬가지. 항시 사진을 품고 다니더라도 시각적인 결핍이 없기란 무리였다. 은은한 테이블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보는 앤은 평소와 다른 색채의 따뜻함이었다. 매끄러운 머릿결이 금빛으로 선명하다. 본래의 탁한 금발에 밝은 염색을 올올이 섞어 전에 없던 깊이감을 더했다. 겨울이 그 머리카락을 끌어다 조용하게 입 맞췄다. 작게 웃은 앤도 겨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겨울은 그 반지에도 키스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자연스레 깍지를 낀 두 사람은 가깝던 간격을 더욱 줄여놓았다. 서로의 숨결이 피부에 곧바로 와 닿는 거리였다. 사람의 냄새가 짙어졌다. 앤이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우리, 결혼하는 일만 남았나요?” “당연하죠.”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럼요.” “언제쯤이면 될까요?” “글쎄요.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겨울도 꿈꾸고 있었다. 앤이 들려주었던,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들을.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결합을 축복받고, 그녀의 고향에 흐른다는 작은 강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평생 다시없을 언약을 나누는……. “이거 봐요.” 다시금 키득거리는 앤. “아까 겨울이 이런 거예요.” 보여주는 팔뚝엔 겨울의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잡은 손에 힘이 과했던 탓이다. 의지에 온전하게 반응하는 몸이라도 정신이 없을 땐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게 겨울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앤이 만든 것도 보여줘요?” 이쪽은 주로 긁힌 자국들이다. 여유가 없기는 앤도 대동소이했으니까. 잠시 유치한 대결을 벌인 두 사람은 곧 같이 한 번 웃고서 조용해졌다. 즐거운 침묵 속에서 벽걸이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도드라졌다. “이제 그만 자야죠.” “그러게요.” “불 끌까요?” “아뇨.” 아까 했던 대화의 반복이다. 그러나 겨울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깜박이는 눈은 시간이 흘러도 감길 줄을 몰랐다. 겨울은 그 눈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봄의 질문엔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아직 답을 요구하지 않는 걸 보면,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모양이다. 이 시점에서 별빛아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으나, 겨울은 자신이 준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답이 쓸모가 있을 것인지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앤이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어깨선을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겨울의 눈엔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목 뒤로 쓸어 넘긴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고혹적으로 웃으며 겨울의 상체에 손을 짚었다. 겨울은 약간 곤란한 느낌으로 마주 웃었다. “지금?” “지금.” 앤이 긍정하며 하는 말. “차라리 지쳐서 잠드는 쪽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묻는다. “괜찮죠?” “……괜찮지 않을 리가.” 그렇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다. 그저 날 밝은 다음 한없이 실제에 가까울 피로감 속에서 소화해야할 일정과 업무들이 부담스러울 뿐. 사후처리를 고려할 때 정식으로 휴가를 얻으려면 공식적인 재정비 기간 이후로도 최소 며칠은 더 지나야 한다. 하지만 겨울은 일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앤의 몸은 사랑하는 만큼 부드럽고 부드러운 만큼 따뜻했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는 하늘에 서서히 쪽빛이 들 즈음에야 기분 좋게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겨울은 잠든 그녀를 바라보다가 완전히 밤을 새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고양감에 비하면 견뎌야 할 피로감은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백악관은 정식으로 대역병의 진상을 발표했다. 「모겔론스를 지금과 같은 원형으로 변형시킨 것은 결국 중국의 소행이었습니다.」 겨울은 대대 간부들과 함께 공식성명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제로 그라운드의 연구기지에서 획득한 데이터에 의하면, 역병의 원형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공생적 복합체로서, 그 자체는 어떤 인공적인 연구나 개발의 산물이 아니었고, 지금처럼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질병 또한 아니었습니다. 특정 유전형질을 지닌 인도의 한 소수민족에게만 대대로 감염되어 온 공생체였지요.」 “……인도?” 웅성거림이 번진다. 그동안의 논의에서 인도는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던 국가였다. 이런 반응을 짐작한 듯, 백악관 대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인도입니다. 원형의 존재를 최초로 인지한 것도 인도였고, 그것을 무기화하려는 시도 역시 인도가 먼저였습니다. 다만 그 방향성은 중국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숙주의 신체적 능력을 강화하는 공생체의 특성에 기초하여 병사들의 전투력을 향상시킬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겨울로서도 처음 듣는 전모였다. 「반면 국경분쟁을 겪는 과정에서 첩보를 통해 원형의 존재를 알아차린 중국은, 해당 소수민족을 납치, 확보한 표본을 기초로 새로운 생물병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무기의 역할에 적합한 질병.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종말의 실체, 대역병 모겔론스입니다.」 “아…….” 중국계 간부, 류젠차오가 탄식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기보다, 장차 알게 모르게 겪게 될 여러 불이익들이 걱정스러운 탓일 것이었다. 동시에 겨울을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있었다. 거기에 녹아있는 감정의 정체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겨울과 독립대대는 이미 확실한 그들의 울타리였다. 겨울의 규범이 곧 그들의 규범이며, 소속으로서의 독립대대는 과거를 완전히 대신할 새로운 정체성이었다. 겨울은 온화한 무언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발표가 이어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인도는 무기화 연구 저지를 위해, 그리고 납치당한 자국 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중국군의 연구기지에 침투했습니다. 중국군 관계자로 신분을 위장해서 말이지요. 적어도 중국이 판단하기로는 그랬습니다. 관련된 통신기록과 경고전문이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더군요. 기지로 경고를 보낸 곳이 중국의 첩보기관인 국가안전부라는 점을 볼 때, 또 인도가 진행한 연구의 개괄이 중국 측 데이터에 존재하는 걸 볼 때, 인도 당국의 고위 간부들 가운데 중국 측에 매수당한 인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증거자료로서, 대변인은 확보한 데이터 일부와 폐쇄회로 영상을 온라인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아무튼 이때 기지 내부에서 발생한 교전이 바로 모겔론스가 유출된 계기였습니다. 중국군은 혼란 끝에 기지를 폐쇄했지만, 질병은 벌써 새어나간 다음이었죠. 그날의 실험체로 지정되어있던 티베트 정치사범들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살아서, 혹은 이동 도중에 변종이 되어 민간인 거주구역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건들의 시작이었고요.」 티베트 정치사범. 생체실험에 대한 혐의마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겨울은 그늘진 예감을 느꼈다. 앞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을 듯하여. # 440 [440화] #박제된 낙원 (2) 3월 2일, 귀환 여드레째의 아침에, 겨울은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의 숙소에서 봄볕 드는 창가에 앉아 인터넷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다름 아닌 겨울 자신과 앤에 대한 기사였다.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한 중령의 연인에 대한 엇갈리는 추측들.」 기사에 첨부된 사진은 국방부 공보처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앤과 재회할 당시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 싶긴 했는데, 그게 일반 언론사의 기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진에 잡힌 건 겨울을 끌어안은 앤의 뒷모습뿐이었다. 겨울의 개인사를 존중하는 동시에 원하는 효과는 효과대로 얻는 노련함이라고 해야 할까. 정작 겨울은 이번에야말로 알려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공보처로서는 괜히 겨울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니. 관심을 끌기엔 오히려 이쪽이 더 효과적인가?’ 최초의 기사가 뜬 이후 이레가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내용 값싼 무가지(無價紙) 및 그와 비슷한 수준의 인터넷 언론들은 앤의 정체에 대한 추측성 정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메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말이 추측이지, 겨울이 보기엔 당일 샌디에이고에 있었던 유명한 미인들 사이의 인기대결이나 다름없는 양상이었다. 해군항을 찾았던 저명인사들 가운데 금발을 지닌 여성만 가려내도 족히 수십은 된다. 앤처럼 자연적인 금발은 백 명 중 셋 꼴로 드물지언정, 금빛으로 염색한 사람은 무척이나 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앤을 찾겠다며 시가지를 들쑤시고 기지 근처를 배회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무의미한 노력이다. 앤은 이미 사흘 전에 이 도시를 떠났으니까. 본디 훨씬 길게 머무를 예정으로 휴가계를 제출한 그녀였으나, 불과 닷새 만에 복귀명령을 받게 되었다. 익일부터 정식으로 FBI 부국장직을 수행하라는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연락을 준 사람은 직속상관인 어니스트 딘 국장. 격앙된 태도로 항의하는 앤에게, 국장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암시였다. 통화를 끝낸 앤은 상심하여 눈물까지 보였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사실 많다. 수사국에서 일하는 그녀는 얼마든지 겪어왔을 것이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그것도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 돌아온 연인과 이르게 헤어지기가 서러웠을 뿐. 일만 바라보고 살던 시절과는 다르다. 비슷하면서도 보다 심한 사례로서, 군에선 전역 당일에 전역을 취소시키기까지 한다. 전투병력 부족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던 시기, 즉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통과된 『진급과 전역, 분리의 정지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10 U.S. Code § 12305)』이었다. 이 권한이 워낙 빈번하게 행사된 데다, 애초에 병력부족의 원인이 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도 부시 행정부인지라, 장병들 사이에서 부시 대통령의 평판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겨울 또한 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상심한 앤 앞에서 드러낼 속은 아닌지라 복잡한 마음을 감추며 차분한 말로 다독여주었다. 그녀는 겨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셔츠를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예 사표를 써버릴까…….” 파격적인 승진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앤은 정말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였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아닌 책임감으로 내리는 결정이었다. “미안해요. 적어도 당분간은,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겨울은 상냥하게 입 맞추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안하긴요. 가서 해야 할 일을 해요. 그게 앤이라는 사람이잖아요.” 이는 앤이 덴버에서 들려주었던 말과 닮아있었다.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기에, 앤은 서글프게 쿡 웃고는 겨울에게 거듭 입 맞추었다. ‘당분간은 내가 있어야 한다……라.’ 겨울은 그 너머의 형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쿠데타로 인한 신뢰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전, 그녀는 조금씩 극단화될 기미를 보이는 수사국 내부 동향에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시위나 테러 등으로 업무 부담이 과중해진 탓에, 중국계 전체를 격리 수용하자는 의견에 찬동하는 수사관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라고. 혹시 모를 폭주에 제동을 걸 사람으로선 앤보다 나은 인물이 드물 것이다. 지금 와서 곱씹어보면, 모겔론스의 진상을 발표하기에 앞서 부국장 교체를 서두른 것은 백악관 역시 같은 문제를 고려했다는 방증이었다. 만에 하나 대통령에게 안 좋은 의도가 있더라도, 그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하기도 전에 수사국 같은 거대 기관이 사고를 쳐선 곤란한 것이다. 그 사고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크레이머의 성향과 엮여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줄 테니까. 상념에 빠져있던 겨울은 자신이 몇 분씩이나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스크롤을 무성의하게 죽죽 내려 보면 대수롭지 않은 정보들이 스쳐지나간다.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기사임을 알면서도 때때로 살펴보는 것은 허전함을 견디는 한 방편이었다. 무엇 하나 사실에 가까운 게 없으니, 부모님의 경악을 기대하는 앤의 음모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듯 하다. 그 계획을 즐겁게 말하던 앤의 모습을 떠올리면, 심란한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겨울이었다. ‘그 자리에 다른 군인가족들도 있었는데.’ 참 뜻하지 않게 오래 지켜지는 비밀이었다. 겨울의 명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노트북을 접은 겨울은 자신에게 온 우편물들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은행에서 온 급여계좌 정보는 그렇다 치고, 뜻밖에 러시아 연방정부 직인이 찍힌 봉투가 섞여있었다. 연방정부 직할 베테랑 관련사업 조정위원회가 보낸 안내 문서였다. 첫 장은 13개 부처로 분산되어있던 보훈 담당 기관들을 단일화하고, 서훈 및 관리대상을 확대하며, 물질적인 차원의 보훈을 미국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 장부터는 겨울 개인에게 주어지는 혜택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받을 땐 잘 몰랐는데, 이그나체프 대통령이 겨울에게 수여한 성 게오르기 4급 훈장은 그 격이 굉장히 높은 것이었다. 같은 게오르기 훈장의 1, 2, 3급을 제외하면 위로는 러시아 연방영웅 훈장이 존재할 뿐이다. 미국의 서훈체계에 비유하자면 명예훈장 바로 아래인 수훈십자장쯤에 해당됐다. 여기서 핵심은 서훈 및 관리대상의 확대였다. 「대통령령에 의거, 러시아 연방의 안보와 이익에 기여한 외국인, 무국적자, 난민 등의 인원에게도 연방 시민과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기로 함. 그 혜택의 상세는 다음과 같음. 국민연금, 군인연금, 장애연금, 참전용사 특별부가연금, 기초생활 공과금 지원 등 금전적인 지원의 합산 수령. 정부에 의한 직업 교육 및 취업 알선. 세금 할인.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소유한 휴양지를 무상으로 이용할 권리. 육체적, 또는 심리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의 대중교통요금 면제…….」 겨울이 보기에, 이건 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며 그 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사전조치다. 즉 미국의 선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장차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으로 난민 인구를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요컨대 3등 시민이 필요한 것이죠.」 어젯밤 예고도 없이 연락한 CIA 요원이 한 말이다. 「그들이 옛 본토에서 방역전쟁을 치르며 상실한 인력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니까요. 특히 남녀 성비는 우리 미국 이상으로 심각하게 붕괴했습니다. 여성 전투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곤 하나, 실전에선 역시 남성 전투병들이 먼저 소모되게 마련입니다. 2차 대전 때 그랬듯이. 추가적인 소모를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미군의 사정도 비슷하다. 최전선에서 실전을 치르는 육군 부대들은, 여성 전투병의 비율이 아무리 높아도 20%를 넘지 못했다. 형편상 어쩔 수 없었던 독립대대가 특이한 것이다. 이쪽은 기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헌데 왜 3등 시민입니까?” 겨울이 묻자, 요원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그야 먼저 받아들인 외국인들이 있잖습니까. 그들이 2등 시민입니다.」 “…….” 「그들조차 못내 불만이 있는 마당에, 이제 와서 받아들이는 난민들을 똑같이 취급하긴 곤란한가봅니다. 무엇보다, 인구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 많은 난민들을 모조리 시민으로 대우해버리면 국가 정체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적어도 그들이 판단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어가도 나아질 건 없겠군요.” 생략된 주어는 난민들이었다. 「글쎄요.」 여기에 대해선 확답을 피하는 요원. 「최소한 일부는 더 나은 기회를 얻겠지요. 우리 미국의 방역전쟁은 머지않아 소강기로 접어들 테니 말입니다.」 군인이 되는 건 중서부지역의 난민들에게 있어선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나 다름없었다. 그 문이 점차 좁아질 거라는 말이다. 아직은 중미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 끝은 파나마 운하 방어선으로 정해져있다. 예산 때문에라도 정부가 군 감축에 착수하는 건 필연이었다. ‘하물며 이젠 러시아군이 가세할 테니…….’ 러시아 입장에선 미국에게 보장받은 새로운 영토를 넓혀나가는 싸움이다. 관련 예산을 절약할 겸, 미국이 포화 상태인 난민들을 러시아에 넘기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크레이머가 일찍이 공언한 바도 있다. 요원이 본론을 말했다.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 러시아 내부에 휴민트(HUMINT)를 구축하는 데 중령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휴민트란 인간 정보(Human intelligence)의 약자다. “간첩 노릇을 할 사람을 골라 그쪽으로 보내달라는 뜻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중국계 위주로 이주를 진행시킬 예정이라……. 중령님께서 적당한 후보자들을 물색해주신다면 고맙겠군요. 그쪽 사람들을 살피는 안목 면에서 한 중령님보다 나은 사람은 드물겠지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하시니까요.」 왜 중국계 위주인가. 간단하다. 미국은 골칫거리를 줄여서 좋고,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난민들의 처우에 대한 부담이 적어서 좋기 때문. 여기서 부담이 적다는 말은, 미국 시민들의 여론에 그만큼 덜 신경 써도 괜찮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역병의 원죄로 인하여, 현 시점에서 중국인들이 광범위한 동정여론을 얻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부가 국민을 책임지듯이 국민은 그들의 정부를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미국 주류사회의 여론이었다. 「선별된 당사자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만한 대가를 약속할 테니.」 겨울은 요원의 평이한 어조가 불편했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선택권이 있긴 합니까?” 「흠.」 요원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좀 더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만,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싫으시다면 강요할 순 없지요. 보다 중요한 부분이 따로 있기도 하고.」 “보다 중요한 부분?” 「아까 일단은, 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중령님께 큰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께선 그저 업무상 접촉하게 되는 러시아 장교들과 친분을 쌓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청탁 같은 게 들어올 경우엔 검토해보겠다고 하고 저희에게 전달해주십시오. 가능 여부는 저희가 판단하겠습니다.」 “업무상 접촉하게 되는 러시아 장교들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네요. 제로 그라운드 진공은 이미 종결되었고, 로저스 합동임무부대도 곧 해체 수순을 밟을 텐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것과 별개로 미-러 양국이 역병의 추가 상륙에 대비한 합동 비상대응체계를 구축할 예정입니다. 201독립대대의 합류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서부 전 지역에 걸쳐 어디서 돌발사태가 발생하더라도 6시간 내로 전개 가능한 기갑세력이 아닙니까.」 6시간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초기대응에 있어서 독립대대가 유용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그 체계 내에서 중령님께선 201독립대대의 지휘관인 동시에 한 구역의 통제관 역할을 담당하시게 될 겁니다. 자체적인 권한으로 수송기를 동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상상황 발생 시 감염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자리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래서…….” 겨울이 습관처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거기에 합류할 러시아 장교들을 회유해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따로 회유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고, 많은 친분을 쌓으시고, 때때로 저희 쪽 관계자들과 다리를 놓아주시는 정도면 족합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준비될 테니까요.」 “……러시아와 미국의 우열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하. 뭐, 사람의 심리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물질적 풍요와 그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욕망이 그들의 의무감을 서서히 느슨하게 만들 거란 예언이었다. 「용건은 이걸로 끝입니다. 한 번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던 요원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아, 참.」 “……?” 「대령 진급, 미리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겨울은 건조한 감사를 표했다. # 441 [441화] 예고를 받은 뒤로 며칠 지나지 않아, 겨울은 자신의 대령 진급이 확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러 합동 비상대응체계를 구축하기 전에 미리 필요한 교육을 이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국방부가 수립한 현지임관(Field promotion) 장교 자격보수 프로그램에 따라, 펜실베이니아 주 칼라일의 육군전쟁대학에서 6개월간 강화 교육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계급장을 바꿔 달게 되는 것이다. 군 내부에서나 통하는 기준이긴 하지만, 그땐 학력 상으로도 학사에 상당하는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 과거 D.C의 국립전쟁대학에서 합동고급교육과정(JPME)을 수료하기도 했거니와, 장교로서 쌓아온 실전경험들은 교육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 서훈이력은 여기서도 가산점이었다. 이미 고졸 학력으로 이등병부터 시작해서 대장까지 진급한 존 베시 전(前) 합참의장 같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겨울이 딱히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서부의 현지 언론들은 장차 만들어질 비상대응체계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911로 공수부대를 호출할 수 있게 되다!』 『연방정부의 비상대응체계 구상이 서부 3개주 주택 시세와 거래량에 미치는 영향 분석.』 『득인가, 실인가? 일부 학자들의 우려 속에서 절대다수의 주민들은 환영하는 분위기.』 『또 한 번의 위기는 없어야 한다. 크레이머 행정부의 과감한 결정.』 표제만 보더라도 전반적으로 지지를 표명한 언론들이 많다. 다만 실제로 읽어보면, 주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간섭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았다. 유사시 구역 책임자가 해당 지역의 치안행정까지 장악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는 사실상 상설화된 계엄조치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여기선 당연히 겨울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201독립대대의 새로운 주둔지를 유치하기 위해 서부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립대대의 인지도나 신뢰도가 대응체계를 구성할 다른 부대들보다 높은 편이고, 주민들이 체감하는 안전과 직결된 문제다 보니 자연히 지역 의원들에게도 예민한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분석. 이에 관해 자주 언급되는 사람들 중엔 탈튼 브래넌 의원도 끼어있었다. 과거의 거래를 토대로 샌디에이고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라고. “…….” 겨울은 오랜만에 보는 그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이상할 만큼 친절한 제안을 건넬 당시 여기까지 정확히 내다본 건 아니었겠지만, 노회한 정치인답게 이득을 예감하긴 했을 것이다. 구독자들의 관심이 많기 때문일까? 겨울의 향후 행보에 대해 다루는 기사도 많았다. 「현 시점에서 대령 진급이 확정된 그는, 이후 평균적인 경력만 쌓더라도 서른이 되기 전에 준장 내지 소장까지 올라갈 확률이 높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정계진출 가능성을 점치지만, 만약 그가 계속해서 군에 남기를 선택한다면 군 내부에서는 대단히 견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된다. 장성으로서만 30년 이상을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설마 계급정년에 걸릴 일은 없을 테니.」 「……최초 임관일로부터의 복무기간(YCS)을 기준으로 한겨울 중령의 은퇴연령은 만 58세지만, 관계법령에 의거 국방부 장관 명령으로 만 66세, 대통령령으로는 만 68세까지 연장될 수 있다. 한 중령은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지지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사람일 것이므로, 복무기간이 연장될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군인으로서의 전문성과 정치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겨울 중령이 군인의 길을 고집하는 데서 얻을 이익은 상당하다 하겠다. 출신성분상 대권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검토해볼만한 견해였다. 어쨌든 겨울에겐 미래가 주어졌으니까. 난민들의 처우개선은 물론이거니와, 앤과의 삶을 설계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언제까지고 겨울 자신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에서 질박한 현실감을 느끼긴 힘들었다. ‘이래서야, 그 봄이 오기는 올까.’ 겨울이 생각하는 봄은 앤이 편지에서 말했던 봄이다. 「그 봄이 반드시 올 것을 믿어요. 우리가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 맞이할 첫 번째 봄이.」 제로 그라운드로 떠나는 겨울에게 위안이 되었던 글귀. 편지는 이제 접힌 부분이 닳기 시작했다. 이 편지를 받을 때만 해도 막연히, 돌아오면 바로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FBI 부국장으로서 정해진 휴가조차 다 못 채우고 복귀한 앤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휴가나 휴직을 요청할 수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봐야 한다. 미국 사회는 당분간 여러모로 시끄러울 것이다. 단순히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 자체는 쉽다. 관할 시청이나 카운티 사무소를 찾아 담당자 앞에서 서약을 하고, 소정의 수수료를 낸 뒤 결혼증명서를 발급받으면 끝이므로. 필요한 건 딱 한 나절 가량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래봐야 부부로서 함께 지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이다. 책임감 강한 앤은 부국장으로서 D.C와 현장을 오가야 할 테고, 겨울은 겨울대로 받아야 할 교육과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으니까. 더욱이 앤과 자신에게 결혼식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겨울이 자신의 책임을 방폐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어쩐지 체한 것처럼 답답해지는데…….’ 겨울의 한숨은 예전부터 습관 같은 것이었지만, 요즘 들어선 그 횟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상 최후의 전투를 끝내고 왔어도 마음이 영 가볍지 못하다. 똑똑. 정중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들어와요.” 문틈이 햇빛으로 갈라진다. 들어오는 건 부대대장인 싱 소령이었다. 겨울의 시선은 그가 휴대한 서류철에 머물렀다. “그건가요?” “예. 최종적으로 확정된 명단을 첨부했습니다.” 소령이 겨울에게 서류를 건넸다. 명단을 살핀 겨울의 감상. “추가 의병전역자가 서른하나……. 객관적으로는 적고, 주관적으로는 많네요.” 방사능 중독 증상으로 인해 의병전역이 불가피한 장병들의 명단. 대대 전체에서 31인이니 결코 많다고 하기 어려우나, 보다 직접적인 부상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먼저 전역 판정을 받은 인원들도 있고 해서 전체적인 손실은 상당한 편이었다. 싱 소령이 위로했다. “그래도 전략핵까지 쓴 작전에서 복귀한 것 치고는 피해가 적은 편이라는 평가입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뭐,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명단을 넘기던 겨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행히 박 대위는 전역자 명단에 없군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진 모르겠지만.” 진석은 복귀 이래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방사능 중독을 우려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검사 결과 이는 스트레스성 탈모로 밝혀졌다. 소견서에선 역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 등으로 인해 당분간 직무수행이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하기야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타입이니 그럴 법도 했다. 여기에 또 화가 난 진석은 자신의 머리를 몽땅 다 밀어버렸다. 병사들은 중대장이 실망을 너무 많이 해서 저렇게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그걸 듣고, 예전부터 차기 중대장으로 정해져있던 유라는 자기도 탈모가 생길까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진석을 더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겨울은 유라의 승진과 보직변경이 포함된 인사명령서에 서명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싱 소령이 묻는다. “당신께선 좀 어떠십니까?” “뭐가요?” “건강 말입니다.”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큰 이상은 없지만, 앞으로 자주 검사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이는 대대 구성원 대부분이 들은 말이기도 했다. 의병전역 처분을 받지 않았더라도, 핵이 작렬하는 전장을 경험한 이상 한평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심하려면 적어도 2, 3년은 무사히 보내야 한다. 겨울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결원을 보충하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던데……. 미안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소령이 신경을 써줬으면 해요. 소령은 그래도 우리 대대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잖아요.” 독립대대 전체에서 생긴 결원을 합치면 거의 한 개 중대 규모는 된다. 헌데 새롭게 정해진 방침에 따르면, 앞으로 합류할 인적자원은 더 이상 난민출신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이전부터 출신성분이 다양했던 간부들이야 그렇다 쳐도, 일반 병사들까지 그렇게 뽑는 건 대대의 최초 창설 의도와 상반되는 것이다. 대대의 전신인 독립중대는 어디까지나 난민들을 병력자원으로 활용하고자 만들었던 부대이니. ‘어떻게 보면 이게 정상이긴 하지…….’ 시작이 어떠했든, 독립대대는 이제 엄연한 특수부대였다. 출신을 불문하고 우수한 자원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다만 동맹을 비롯한 난민사회 내에서는 이러한 조치에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돌고 있었다. 독립대대, 나아가 겨울의 이미지를 난민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의 일환이라는 말이었다. 혹자는 새로운 형태의 화이트 워싱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애초에 독립대대를 특수부대로 지정했던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인 포석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었다. 싱 소령이 천천히 끄덕였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알파 중대는 좀 덜한데, 나머지 중대들 사이에선 이런저런 불만들이 나오는 모양이더군요.” “아무래도 지금까진 중대마다 출신성분상의 통일감이 강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불만이 안 나올 순 없겠죠. 그러나 부대 성격상 불가피한 변화이고, 난민 출신 지원병 모집이 중단되는 건 아니며, 남은 장병들의 장래 면에서도 이런 변화가 유리하다는 점을 숙지시켜줘요.” “이미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별 일 없도록 관리하겠습니다.” 싱 소령이라면 오랫동안 함께 싸운 사람이니 병사들이 부외자로 여기지 않을 터. 겨울이 이런 당부를 해두기에 적합했다. 사실 겨울도 그런 의심이 없지는 않다. 포트 로버츠 사령은 진즉에 다른 인물로 교체되었다. 자리를 비운지가 1년이 넘는 마당에 아직까지 대행으로 남겨두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노릇. 겨울을 쓸 곳이 워낙 많아 빚어진 일이고, 또 한직에 방치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처분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겨울이 난민들로부터 장기간 유리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쯤 되면 정책담당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다른 구상을 품어볼 여지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겨울이 장교로서 병사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싱 소령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일찍 출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 시간 후로 예정된 미러 양국의 합동영결식 이야기였다. 일찍 간다면 겨울과 대화를 원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죠. 시내의 새로운 거주지도 둘러볼 겸.” 장례식부터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행사이거니와, 러시아 장교들과 대면하게 될 거라는 부분에서 CIA의 부탁을 떠올린 겨울은 조금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샌디에이고 시내와 근교엔 겨울동맹 명의로 구입하거나 임대계약을 체결한 거주지가 존재했다. 겨울이 떠나있는 동안에도 브래넌이 제안한 거래가 정상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장연철은 백산호의 활동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예전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해서 솔직히 못미더운 마음이 있었는데, 굉장히 성실하게 일을 처리해주시더군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수준이어서 놀랐습니다.” 배경을 모르니 당연한 평가였다. 사업보고 차원에서 기지를 방문했을 때, 그간 정보국이 사람을 어찌 다루었는지, 백산호는 겨울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겨울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흐르는 풍경 속에서 간혹 가로수에 묶인 노란 리본들이 스쳐지나갔다. 미국에서 집 앞의 나무에 묶어두는 노란 리본은, 그 집에 전장으로 떠난 군인이 있음을 뜻하는 오래된 상징이었다. 겨울이 본 매듭 중에는 영영 풀리지 않을 것들이 섞여있었다. # 442 [442화] #박제된 낙원 (4) 장례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에스더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겨울은 엘 파소의 포트 블리스로 이동했다. 그곳에 CDC 격리시설이 설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임종을 지켜주라는 상부의 배려였다. 겨울이 수송기에서 내려다본 포트 블리스는 무척이나 거대한 규모의 군사기지였다. 어림잡아 동서의 폭이 10킬로미터는 되는 듯 했다. 들어보면 본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고 하는데, 구 미국-멕시코 국경에 가까운 입지로 인해 현 방역전선의 주요 후방거점 중 하나로서 여러 차례 확장을 거듭했다는 것이었다. 북으로는 빅스 육군공항, 남으로는 엘 파소 국제공항을 끼고 있어 항공물류를 처리하기에 좋았고, 동쪽으로는 온통 황무지뿐이라 확장에 장애가 될 요소도 없었다. 격리시설이 들어선 위치가 바로 이 황무지였다. 철조망을 두른 경계는 포트 블리스와 엘 파소 시가지 양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에스더 본인의 협조적인 태도와 별개로, 생물학적 오염의 측면에서 그녀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인 까닭이었다. 시설로 들어가는 길은 왕복 2차로 하나가 포장되어있을 따름이었다. 겨울을 태운 차량이 메마른 땅을 가로질렀다. 여름이 아니고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지역인지라, 건조한 황무지엔 이따금씩 모래 섞인 바람이 불었다. 겨울은 그것을 작은 알갱이들이 차체에 자잘하게 부딪치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격리시설 자체는 허술한 부분 없이 잘 만들어진 편이었다. 철조망 주변엔 시민들이 가져다 둔 꽃다발들도 적지 않았다. 계획대로 에스더의 존재가 백악관에 의해 공표된 덕분이었다. 철망에 붙여진 색색의 종이들이 봄바람을 받아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풀거렸다. 필시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들이 적혀있을 것이었다. 엄중하게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모습이 오히려 어색해보일 지경이었다. 다행이다. 병든 소녀가 어디를 보더라도 황량함만 가득한 곳에서 삶을 끝내야 했다면, 그건 겨울에게도 적잖이 마음 상하는 일이 되었을 테니까.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안전을 우려하는 시위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생각해보면, 이곳 엘 파소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방역전쟁이 한창일 땐 봉쇄선을 지척에 두고 일상을 영위한 것이다. 이제 와서 불쌍한 소녀 하나 도시 근처에 있다고 난리를 피울 이들이 아니었다. 「와아…….」 내부에서 마침내 재회한 에스더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눈만 굴려 겨울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오셨네요오. 뵙고 싶었어요오.」 아무래도 움직일 기력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의 육신은 명백히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그녀의 체내에서 어떤 변이가 일어날지 모르는 탓에, 에스더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녀와 두꺼운 강화유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유리 너머의 환경은 무균실과 거리가 멀었다. 에스더가 일반적인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오디오 주변, 그녀가 즐겨 들었을 음반들이 눈에 띈다. 그 옆엔 생화가 풍성하게 꽂힌 화분도 있었다. 저편의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있고, 그 아래엔 인조가죽 장정(裝幀)에 핏빛 진물이 말라붙은 커다란 성경이 놓여있었다. 잠시 유리에 손을 얹고 서있던 겨울은 어렵게 인사말을 골랐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죽어가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평범하게 대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겨울이었다. 지금 에스더가 보여주는 평온함을 망쳐놓지 않기 위해서는. 「네에.」 에스더가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저느은, 자알 지내고 있어요오. 사람들으을, 더어, 돕지 못한다는 게에, 아쉽긴 하지마안요.」 “너무 아쉬워하진 말아요. 당신은 벌써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니까. 에스더가 없었으면 남부전선은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치렀을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알죠?” 발표가 나간 이후 민간 방송에서도 에스더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일찍이 그녀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느낀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겨울과의 통화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말을 했었던 캡스턴 중령이 대표적이었다. ‘이제는 대령이지.’ 소식을 듣기론 가까운 시일 내 준장 진급도 유력하게 점쳐진다고 하니, 겨울만큼은 아닐지언정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가는 사람이다. 캡스턴처럼 에스더의 영향을 체감한 사람들은 병든 소녀에게 당연히 우호적일 것이었다. 그로 인해 도덕적인 딜레마를 겪긴 했어도, 그걸 에스더의 잘못이라고 탓할 순 없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병사들이 어두운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알죠. 아는데에.」 에스더가 잠시 거친 기침을 했다. 튀는 침에 피가 섞여있었다. 「그래도오, 아쉽기는 하네요오. 제게, 이 저엉도의 고통을, 주셨으니이, 주님께서 저르을 좀 더어, 중요하게 쓰실 거라느은, 기대가 있었거든요오.」 “…….” 「이건 역시이, 교오만한 태도였나봐요오. 요옵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은 셈이니까아.」 당연한 기대였을 것인데도, 에스더는 다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욥과 같은 실수요?” 「네. 후우…….」 속으로 어렴풋한 화기를 느끼는 겨울의 물음에, 에스더는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눈을 깜박였다. 「요옵은 이렇게 말했어요오. “그런데도 주님으은, 나의 걸음을 낱낱이이, 아시나니, 떨고 또 떨어도오, 나아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이는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대목이었다. 겨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지난날 러시안 강 근교의 목장에서 수녀에게 들은 바가 있거니와, 종말의 갈피를 오가면서 쌓은 경험도 있었다. 욥은 선하면서도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러자 여호와아께서 말씀하시기르을, “트집 잡는 자가아, 전능한 자와 다투려느냐아. 하나님을 탓하는 자느은, 대답할지니라아.” 하시고오, 다시이, “네가아 내 공의를 부인하려 하아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오, 나를 악하다아 하겠느냐아.”라고오 하셨어요오.」 욥이 진실로 자신을 결백하다 말하는 것은, 그게 설령 사실이라 해도, 결국 결백한 자신에게 시련을 주는 신이 의롭지 못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호와는 욥에게 그 교만을 일깨워준다. 그 억울함의 표현 역시 신을 모독하는 하나의 죄가 되는 것이라고. 신은 이해를 벗어난 존재이기에 신의 섭리를 인간의 선악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대목이었다. 여기까지 느릿느릿 설명한 에스더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욥이 아아무리 결백한드을, 인간의 기준으로, 죄가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니까요오.」 “……그거, 신앙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번 억울하게 들리는 이야기예요.” 겨울의 말에, 에스더는 힘들게 미소 지었다. 「사시일, 저도 쪼끔 그래요오. 키히힛.」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은 소녀는, 겨울이 도착한 뒤로 고작 여섯 시간을 더 살았다. 「아…….」 최후의 순간에 에스더가 중얼거리듯 남긴 말. 「별이, 보이네요.」 이제껏 에스더의 신앙생활을 도와 온 추기경 및 목사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하나님께 그녀의 안식을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모든 사랑의 근본이신 하나님. 이 가엾은 영혼이 당신의 나라에 빛나는 별이 되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겨울은 이 기도를 들으며 심란한 기분에 잠겼다. 세상에 사람을 사람의 기준으로 사랑해주는 신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의료진이 완전한 사망을 확인한 후, 에스더의 시신은 냉동보존절차에 들어갔다. 장례식은 치르더라도 매장이나 화장은 없을 예정이다. 생전의 그녀가 시신기증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을지라도, 에스더의 몸에는 여전히 많은 가치가 남아있었다. 장례를 마친 겨울은 다음날 오전 칼라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군 수송기 운행계획 상으로는 적합한 항공편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겨울은 불편을 예상하면서도 민간 항공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표 값은 공금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도중에 마주치게 된 시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문제였다. 길이 꽉 막혀버린 것이다. 이 위기 아닌 위기는 공항 안전요원과 항공사 직원이 겨울을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안내하면서 해소되었다. 비단 라운지뿐만 아니라 실제 좌석 또한 일등석으로 상향조정되었다. 군인에 대한 예우로서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겨울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다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자리를 얻은 대가로서, 기장이 기내방송으로 이 같은 내용을 자랑하는 것쯤은 감수해야 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항공사가 그저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만 비용을 지출할 리가 없다. 다 자사의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과 입소문을 기대하며 하는 일이었다. 편도 1,600마일이 넘는 비행은, 도중에 한 번 환승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거의 다섯 시간 가깝게 걸리는 여정이었다. 이 항공사에서 퍼스트 클래스의 기내식은 사전에 예약해두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겨울에겐 임의로 정해진 코스가 제공되었다. 전채는 부드러운 로스트비프 세 점에 크림을 곁들인 프레첼 롤이 하나. 접시를 차례로 비우고 나니 브로콜리 수프가 나왔고, 수프 다음엔 양상추, 오이, 체리, 그리고 설탕을 입힌 호두를 버무려 놓은 샐러드가 차려졌다. 어느 것 하나 기성품을 섞은 메뉴가 없었다. 메인 요리는 핏물이 살짝 배어나오는 손가락 두 마디 두께의 스테이크였다. 겉을 바삭하게 익힌 등심은 칼을 대고 밀자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식감 또한 그러했다. 그 훌륭한 맛을 느끼며, 겨울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처음은 아니지만……. 심란한 일을 겪어도 배고플 때 하는 식사는 맛있네.’ 디저트로는 치즈를 바른 크래커, 초코 시럽과 생 딸기를 잔뜩 얹은 선데이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겨울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좌석 전면의 TV에선 의료보험 개혁을 부르짖는 크레이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어폰을 끼자 그의 힘찬 목소리가 들린다. 「……인류는 이미 질병으로 인한 멸종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위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도 충분한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맥밀런 행정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 성과는 결코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국가가 사보험 판매를 중개하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됩니다. 국가가 직접 주도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먼저 모든 병원에서 모든 보험들이 예외 없이 적용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나는 분명 보험에 가입한 상태인데, 병원에서 해당 보험사와 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니요? 이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지는 조금만 곱씹어봐도 분명한 것인데, 우리는 그저 익숙한 관습으로서 이를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생사가 오가는 응급상황에서조차, 내 보험이 적용되는 응급실을 따로 찾아서 가야만 하는 게 대다수 미국 시민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치료를 다 받더라도 돈이 없어서 죽게 될 테니까요. 이러한 두려움이 미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한, 우리는 결코 종말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뉴스에서는 이어 크레이머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구체적인 수치로서 보여주었다. 93.8%. 실로 유례가 없이 높은 지지율이었다. 이전까지는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기록한 89%가 최고였다. 그나마도 그 지지율이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는 점에서 비교대상이 되긴 어렵다. 크레이머의 인기는 장기간 상승곡선을 그려오다가, 제로 그라운드 진공을 전후하여 정점을 찍었다. 크레이머는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맥밀런 대통령조차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미국 사회의 오래된 모순들을 과감하게 손볼 계획을 짜고 있었다. 겨울은 생각했다. ‘자기 울타리 안에선 훌륭한 지도자인데.’ 이런 행동들이 워낙 강렬하게 시선을 끄는지라, 미국의 이익, 즉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 443 [443화] #박제된 낙원 (5) 칼라일이 위치한 컴벌랜드 카운티의 지역사회, 나아가 펜실베이니아 주 전체가 겨울의 체류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특히 강연을 희망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많았다. 겨울은 이 같은 요청에 힘닿는 데까지 응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현역 군인 신분이라 직접적인 대가를 받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특정 지역사회와 유대감을 쌓아두면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 상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주민들은 이러한 겨울의 행보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유라가 읽던 신문을 접으며 평했다. “대장님 사진 되게 잘 나오셨네요. 나중에 혹시라도 군복을 벗으시게 되면, 여기저기서 강연료만 받아도 엄청난 부자가 되시겠어요. 다른 일 안하셔도 괜찮겠는데요?” “설마 그 정도겠습니까?” 대꾸한 사람은 브라보중대의 1소대장이었던 왕커차이. 유라는 그에게 신문을 넘겨주었다. “직접 봐. 여기, 다른 명사들이랑 비교해서 잠재적인 가치를 산정하는 부분.”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다른 중대 사이의, 혹은 서로 다른 출신성분으로 인한 거리감은 희박했다. 명성 높은 독립대대의 일원으로서 확고해진 소속감과 자부심을 공유하거니와, 생사의 고비를 함께한 이들 간의 전우애도 있는 것이다. “와.” 기사를 빠르게 눈으로 훑던 왕커차이의 감탄에, 유라가 살포시 웃었다. “대단하지?” “아니 무슨 강연료가 이렇게 미쳐 날뜁니까? 1분당 10만 달러? 정말로?”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잠깐 줘볼래요?” “앗, 예.” 왕커차이는 각 잡힌 동작으로 겨울에게 신문을 넘겨주었다. 내용을 보면 분당 10만 달러 운운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일화였다. 일본 기업의 초청강연에서 총 40분간 400만 달러를 받았던 것. 이게 89년의 일이었으니, 지금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더욱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었다. 그 밖의 다른 사례들도 많았다. 전직 뉴욕 시장이나 국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같은 공직자들 역시, 자리에서 물러난 뒤엔 강연 한 번에 재직 당시의 연봉보다 많은 돈을 받고 다녔다고. 이런 문화를 대강은 알고 있었던 겨울조차. 구체적인 금액들의 나열을 보고 있으려니 단위 감각이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기사는 겨울의 잠재적인 강연료를 레이건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으로 어림잡았다.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선인세로만 3천만 달러 이상을 받을 거라는 예측도 붙어있었다. 해외시장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 와서는 엄청난 고평가인 셈. 「디킨슨 대학에서 ROTC 생도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한겨울 중령」 유라가 잘 나왔다고 한 사진 아래의 설명이었다. 디킨슨 대학은 육군전쟁대학과 마찬가지로 칼라일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거리상으로도 고작 2킬로미터 떨어져있을 따름이라 겨울이 방문하기에 부담이 없었다. 덕분에 벌써 두 번이나 찾았고, 예비 장교들과 더불어 훈련을 뛰기도 했다. 지역 언론은 이를 사실상의 기부행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문을 돌려받은 왕커차이가 의문을 표했다. “근데 나랏일을 했던 사람들이 이러고 다니면 욕 많이 먹지 않습니까? 돈을 너무 쉽게 버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민들의 눈엔 분명 안 좋게 보일 텐데……. 순수하게 강연의 대가로만 지불하는 돈도 아닌 것 같고…….” 이 말에, 진짜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보았던 이들의 표정이 묘해진다. 브라보 중대의 나머지 소대장들, 즉 쑨시엔이나 리아이링, 류젠차오 등이었다. 과거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겼겠으나, 이제 와서는 지우고 싶은 과거에 불과할 것이었다. 소속감이 대체된 탓. 아니, 대체될 소속감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변화다. 유라가 끄덕였다. “맞아. 내가 알기론 이런 게 비난을 꽤 많이 받을 걸? 전부 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네 말처럼 강연 자체보다는 로비가 목적인 경우도 있을 거고. 일종의 전관예우라고 봐야겠지?” “인맥과 영향력을 파는 장사로군요. 그럼 대대장님께도 좋지만은 않겠는데요.” “바보야. 우리 대장님은 예외지. 그동안 기부하신 금액이 얼만데.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돈을 버셔도 결국 남 돕겠다고 다 쓰실 분이시고.” 핀잔을 준 유라가 그렇죠? 하는 눈빛으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는 믿음. 인간적인 신뢰. 겨울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유라를 비롯한 대대 일선장교들이 겨울을 뒤따르듯 육군전쟁대학으로 오게 된 것은, 이들 또한 현지임관 장교 자격보수 프로그램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직급에 따른 차이는 있어서, 겨울보다 한 달이나 늦게 왔으면서도 복귀는 각자 두세 달씩 더 빠를 예정이었다. 찰리 중대의 타타라 소위가 묻는다. “기부 하니까 생각나는 겁니다만, 이 중위님은 요즘도 그 게임 하십니까?” “그 게임? 아, 응. 한동안 손 놨었지만, 대장님의 추가 승급이 해금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시 시작했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과거 유라가 넷 워리어 단말로 보여준 적 있었던 방역전쟁 모바일 게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기부랑 게임이 무슨 상관이에요?” 아리송한 겨울의 물음에, 생긋 웃으며 답하는 유라. “여기에 지르는 금액은 국방성금을 낸 걸로 간주되거든요. 세금 낼 때 기부금 항목으로 공제도 되던걸요?” “…….” 곱씹어보면, 공공 소유 개념(퍼블릭 도메인)이 적용되는 미국 정부의 저작물 내에 유료 결제 컨텐츠가 존재하는 게 비정상이었다. 다만 그게 국방성금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위법으로 볼 여지가 없다. 겨울은 국방부의 상술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앙트레 나왔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카트에 전채가 담긴 접시들을 실어왔다. 교육 잘 받으라는 의미로 겨울이 사는 식사였다. 칼라일 일대가 그리 번화한 지역은 아닌지라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인접도시인 해리스버그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다. 창 밖에 흐르는 서스퀘해나 강의 풍경이 괜찮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맛있게 드세요.” 웨이트리스는 돌아서는 순간까지 겨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채의 중심은 작고 두꺼운 넙치 스테이크였다. 뼈를 깔끔하게 발라내고서 겉이 바삭해지도록 시어링 한 다음,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숙성시킨 햄을 썰어서 얹고, 보들보들한 게살과 옥수수가 들어간 오르조 파스타를 곁들였다. “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유라를 필두로 다른 장교들도 한 마디씩 감사를 표하고 식사를 시작한다. ‘내 입맛엔 다 맛있는데 다른 사람들 입엔 어떨지.’ 다행히 다들 겨울이 사주는 거라 억지로 맛있는 척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간간히 이어지는 대화에서, 유라는 이 자리의 차상급자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급 상의 하급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절제된 자신감이 묻어났다. 겨울이 이곳으로 오기 전, 막 중대장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념으로 짧게 취임사를 말하는 자리에서, 유라는 처음부터 정색을 했다. “중대장이 되자마자 싫은 소리부터 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해야겠어. 너희들, 요즘 지나치게 풀어져 있는 거 아니니?” 그녀 쯤 되면 꼭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병사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의 싸움들이 너무나 힘들었던 거 알고, 죽은 전우들이 떠올라 때때로 울적해지는 것도 이해해. 악몽도 자주 꾸겠지. 나도 그러는걸. 너희는 쉴 자격이 있고, 보상 받을 자격이 있어. 하지만 그게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막 나가도 좋다는 뜻은 아니야. 아니라고.” 반복으로 강조하며, 유라는 잠시 병사들과 시선을 맞췄다.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어. 그치만 분명 나다 싶은 사람이 있을 거야.”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마약에 손을 댄 병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더는 생산조차 되지 않을 코카인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유라는 거듭 묻는 겨울에게 마지못해 사실을 밝히며, 처분은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 중대는, 그리고 대대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어. 이게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호의인지 설명을 해야 할까?” 중대원들은 입을 모아 아니라고 대답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의지해. 난 작은 대장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그래도 너희들의 직속상관으로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야. 너희들한테 내가 못미더운 사람은 아니지?” 중대원들은 다시 한 번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부탁할게. 나를, 대대장님을, 그리고 너희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마. 만약 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면, 날 그렇게 만든 사람 머리는 내가 직접 뜯어버리겠어.” 딱딱했던 분위기를 푸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이 담백한 마무리에 몇몇 병사들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유라도 뒤따라 미소 지었다. “웃어?” “…….” 그녀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던 것이다. 진석이 자리를 내려놓았어도 알파 중대장은 여전히 대대 내 선임 중대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기존의 다른 중대장들 또한 나란히 대위 진급이 확정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보직이 변경되거나 다른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유라가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는 데에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들 교육 받는 건 어때요?” 겨울이 묻자, 난민 출신 장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엄살 피우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타타라가 말하고 류젠차오가 거들었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냥 진급 자격만 채우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 대대의 체면이 있는데 어중간한 성적으로는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한겨울 중령을 빼면 201대대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여겨지기 싫다면 정말 기를 쓰고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평소에 사이가 썩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리아이링 역시 미간을 좁힌 채 심각한 공감을 표한다. 체면, 운명, 은전은 중국인을 지배하는 세 여신이며, 그 중 제일은 체면이라는 경구가 여전히 통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다른 장교들도 고개를 끄덕이긴 마찬가지였다. 유라가 먹다 남은 서로인 필레를 쿡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대장님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으실 테지만…….” 겨울은 곤란하게 웃을 뿐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대대의 이미지가 중요한 건 사실이니까.’ 다들 알아서 각오를 다져주니 다행이었다. 쳐지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진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빠쿙을 위한 기도」라. 박 대위님이 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히로노부 소위가 쿡쿡거리며 하는 소리. 빠쿙을 위한 기도는 문자 그대로 진석의 쾌유를 기원하는 모금운동으로 출발했다. 어느 기자의 카메라에 진석의 변화가 잡힌 게 발단이었는데, 본인은 그저 홧김에 머리를 다 밀어버린 것이었으나,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은 진석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했다. 겨울의 측근으로서, 또 201독립대대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중대 시절부터 인지도가 높았던 진석이었기에, 시민들의 오해는 오해에서 끝나지 않았다. 겨울로서도 실소할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잘 됐잖아요. 기부금은 피폭을 당한 다른 병사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까. 얼마더라, 33만 달러?” 타타라가 정정한다. “34만 달러입니다. 고작 사흘 만에 모였다더군요.” 부하 장교들과 더불어 웃는 한편으로, 겨울은 그 호의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시민들의 지지는 곧 겨울에게 주어진 운신의 폭. 그 폭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으로는 과분할 만큼 넓지만, 겨울이 담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 444 [444화] #박제된 낙원 (6) 육군전쟁대학의 운동장 트랙 옆에는 교직원 자녀들을 위해 마련된 놀이터가 하나 딸려있었다. 그네가 두 쌍에 미끄럼틀이 두 개. 작고 초라하여 본디 인기가 많은 장소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근처 숙소에 겨울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걸터앉아 트랙과 숙소를 기웃대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부활절 주간에 접어들고부터는 아예 새벽부터 자리를 잡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일주일간 이어지는 봄방학이었다. 칼라일의 봄은 일교차가 크다. 이른 시간부터 찬바람을 맞아가며 기다리는 아이들을 모른 체 하기도 곤란한 노릇이라, 겨울은 1.5 마일 구보를 마친 시점에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처음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던 아이들은, 곧 어린 나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친화력으로 겨울에게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져댔다. “중령님!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 티샤라는 게 사실이에요?” 겨울은 낯선 이름에 속으로 갸우뚱했다. “티샤가 누구니?” “티샤 우드버리! 이번 주 빌보드 차트 1위! 영원한 구속을 부른 사람이요!” “아.” 풀 네임을 듣고서야 기억을 떠올리는 겨울이다. 티샤 우드버리는 일찍이 멧돼지 사냥 작전이 진행 중일 무렵, 독립중대가 데이비스 인근 주립대학 캠퍼스에 주둔할 때 위문공연단의 한 사람으로서 방문했던 가수였다. 겨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면은 있어도 친한 사이는 아냐.” “그럼 빅토리아 윌리엄스? 맥켄지 힐? 시에라 왓슨?” 금발을 지닌 유명인들의 이름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앤의 정체는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아직까지도 뜨거운 화제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겨울이 번번이 아니라고 답하자, 아이는 답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중령님 애인이 대체 누구지……. 저한테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안 돼.” 앤의 소박한 계획을 지켜주기 위해선 겨울이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결혼이 불가피하게 미뤄지면서, 앤이 꾸미는 작은 음모는 겨울에게도 점점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아이가 곧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이것만 알려주세요.” “뭔데?” “지금 사귀시는 그 분, 예뻐요?” 겨울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겨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까. 아이가 감탄하며 끄덕였다. “과연. 저도 중령님 같은 군인이 되어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하고 부부가 될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뒤통수를 딱 때린다. “야. 넌 내 거야.” “…….” 남자아이는 맞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키득거리던 다른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겨울에게 앨범과 펜을 내밀었다. “여기다 사인해주세요.” 티샤 우드버리와 마찬가지로 위문공연단의 일원이었던 보컬 겸 기타리스트, 렉스 고든이 리더인 메탈 밴드의 앨범. 앨범의 이름은 에버 윈터(Ever winter)였다. 이는 201독립대대의 공식적인 별칭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 만큼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밴드와 배우들이 독립대대의 눈꽃 결정 부대마크를 달고 나온다. 겨울 역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해일처럼 밀려오는 변종집단을 날카로운 샤우팅으로 압도한 뒤 전자기타로 때려죽이며 나아가는, 유혈낭자하면서도 괴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곡명은 Prince of doom. 대놓고 겨울에게 헌정하는 타이틀이다. 이런 걸 아이에게 사준 부모는 뭘까? 겨울은 고민하면서도 아이가 원하는 대로 앨범 재킷에 자신의 서명을 넣어주었다. 어쩌면 앨범의 진짜 주인은 부모고,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와중에 트랙에선 아침 구보를 뛰는 훈련생도들의 군가(Cadence)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커피가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자상과 타박상에 좋은데 맛까지도 소독약 같더라.」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치킨이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 「치킨 하나가 식탁에서 뛰쳐나오더니 내 전우를 죽이더라.」 「그들은 군대에서 주는 빵이 꽤나 괜찮다고 했었지.」 「굴러 떨어지는 빵에 깔려 내 친구가 죽고 말았어.」 「오, 주여. 나는 가고 싶어요. 근데 그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요.」 「오, 주여. 지이이입, 지이이입, 지이이입에 가고 싶어요…….」 참으로 기운 빠지는 가사였다. 겨울은 위화감을 느꼈다. 정작 노래를 부르며 뛰는 이들은 무척이나 날이 서있었던 까닭이다.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지.’ 보수교육에 돌입한 뒤로 독립대대 장교들이 겨울에게 우는 소리를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생도들의 표적이 된 기분이라면서. 처음엔 그저 생도들이 독립대대 소속 장교들의 존재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ROTC의 레인저 챌린지처럼, 그 유명한 에버 윈터의 장교들과 겨루어 이기는 걸 일종의 도전으로 간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얼결에 도전과제가 되어버린 유라 이하의 간부들이 안쓰럽긴 하나,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 여겼던 겨울.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이 겨울을 의식한 노력이었던 것. 단순히 잘 보이려는 시도가 아니다. 현지임관장교 보수교육의 이번 기수 인원들은 대다수가 난민 거류구 출신이었다. 당연히 저마다 이름을 올려둔 난민법인이 달랐으나, 이 기회에 겨울동맹으로 옮겨오고 싶어 했다. “되게 필사적이던걸요.” 어쩌다 그들 중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유라가 겨울에게 들려주었던 진술. “처음엔 되도 않는 작업을 걸길래 뭐지 이 놈은? 싶었는데, 자꾸 치근덕대는 게 귀찮아서 짜증을 한 번 팍 냈더니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고,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더라고요.” “다른 꿍꿍이?” “네. 자기네 난민법인……이름이 독일어라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그쪽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고, 내부적으로 깨끗하지도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간부들이 지원예산을 유용한다는 뜻이에요?” “아마도요.” 이어 설명하기를, 애매한 대답은 당사자가 정확한 표현을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장 거기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선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것은 그만큼 불안해하고 있다는 방증일 터이고. 겨울은 맥밀런 대통령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 생각해왔으나, 그걸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슬슬 터트릴 때가 됐어.’ 크레이머 행정부의 고립주의는 세련된 식민주의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새로 확보한 도서지역마다 난민 인구를 배치하고, 종래에는 실질적인 경제식민지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 장차 중미 지역에서도 같은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러시아가 난민들을 분담하겠다고 나선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추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주를 강제로 진행하는 건 그림이 좋지 않았다. 난민들이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스스로 발 벗고 나서는 구도가 최선이다.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려면 난민들의 처우를 지금보다 열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난민지도자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수단도 없다. 일찍이 예견했던 바, 겨울동맹을 비롯한 일부 난민법인들은 명예로운 반례이자 난민지도자 지원정책의 성공적인 사례로서 부각될 것이다. 어쨌든 크레이머 대통령 본인이 고안한 정책의 결과를 완전한 실패로 연출할 순 없는 노릇. 그러므로 동맹은 곧 겨울에게 주어진 보상이자 행동범위의 한계이며, 시민들에게 보여줄 트로피이기도 했다. ‘박제될 낙원……인가.’ 겨울은 회상 끝에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도 이것이 스물일곱 번의 종말을 거쳐 도달한 가장 긍정적인 결말이었다. 앞으로 다시 긴 시간이 남아있을지라도, 겨울의 명성과 영향력은 지금보다 높아지기 어렵다고 봐야한다. 놀이터의 아이들을 적당히 보낸 겨울은 구내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시작했다. 유라를 비롯한 독립대대 장교들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이는 겨울의 뜻이었다. 평소엔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이 강해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주변의 부러움 섞인 시선들을 의식하다 보면 자연히 내가 이 집단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친근한 대화를 한 마디라도 더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따로 앉아보죠.” 겨울의 말에, 유라는 바로 의도를 파악하곤 빙그레 웃어보였다. “네. 한 번 직접 이야기 나눠 보세요. 애들은 제가 다독이고 있을 게요.” 중국계나 일본계 장교들 입장에선 출신이 다른 장교들의 접근이 탐탁지 않을 것이었다. 명목상 같은 보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지만, 영관급 장교가 받는 교육과 위관급 장교가 받는 교육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낮은 계급이 대다수인 난민 출신 장교들은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겨울에게 말을 붙여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Sir. 혹시 저희가 이 테이블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겨울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앉아요. 어차피 빈자리인데.” “감사합니다, Sir.” 딱딱한 태도로 식판을 내려놓는 다섯 명의 소위. 사실 이들이 한 일행은 아니다. 서로 부대마크가 다른 셋과 둘이 각각 이쪽으로 오다가 어색하게 합쳐진 상황. 그밖에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났다가 떫은 표정으로 다시 앉는 이들도 눈에 띈다. 허나 막상 좋은 기회를 잡은 다섯은 겨울이 토스트 하나를 꼭꼭 씹어 삼킬 때까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용건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헤매는 눈치들이다. 물론 석상처럼 보일 정도로 긴장한 탓도 있을 것이다. 소위와 중령 사이의 간극이 간극이거니와, 그 중령이 다름 아닌 한겨울 중령이었으므로. 겨울이 한 명을 지목하여, 처음 상태 그대로인 식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다 버릴 거예요?” “예?!” “속이 비어있으면 훈련 받기 힘들 텐데. 식욕이 없더라도 조금은 먹어둬야죠. 군인에겐 식사도 명령이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과부터 하고 보는 소위. 곧바로 식사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너무 급하게 밀어 넣었는지 첫입부터 심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해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연신 콜록대면서도 거의 울상을 짓고서 겨울에게 다시 사과를 하려 한다. 이번엔 입 밖으로 음식물이 튄 탓이었다. “죄송, 합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일단 물부터 좀 마셔요.” “예! 콜록, 콜록!” 그가 진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기침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물을 마시다가 다시 사레가 들렸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창피함과 자괴감에 짓눌려 죽어버릴 것 같은 낯빛으로 변했다. 동료들이 원망을 담아 힐끗거리기도 했고. “이것 참.” 겨울이 작게 웃었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이 상황에 실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네요. 내 딴에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던 건데.” “아닙니다. 콜록! 제가 더……죄송합니다.” 기침이 다시 가라앉기를 기다려, 겨울이 다섯 소위에게 차분한 말을 건네었다. “여러분이 내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는 거 알아요. 다 먹었다고 먼저 일어서지 않을 테니, 일단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을 해봐요. 만약 시간이 모자란다면 약속을 잡아서 나중에 따로 만나도 좋겠고요.” “약속……정말이십니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보도 관제라도 걸렸는지, 요즘 다른 난민구역의 소식은 방송에도 잘 안 나오니까. 다만…….” “다만?” “내겐 여러분의 부탁을 다 들어줄 능력이 없을 거라는 점, 미리 말해두고 싶네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테고.”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겨울의 말에, 다섯 소위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 445 [445화] #박제된 낙원 (7) 난민법인이 받는 지원의 총량은 해당 법인이 미국의 안보와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수용한계 역시 마찬가지. 지도자가 겨울일뿐더러, 배출한 군인들 중에서도 수훈자가 수두룩한 겨울동맹은 다른 법인들에 비해 수용 가능 인원이 독보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이러한 수용한계는 일반 난민과 군인들을 구분하여 적용한다. 각각 정해진 한계 내에서 다른 법인으로 얼마든지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섯 소위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솔직히 꼭 등록을 해놔야 하나 싶습니다.” 스스로를 이던 블랑이라 밝힌 프랑스 출신 소위의 말. “난민법인에 이름을 올려둔다고 해서 제가 이득을 보는 건 없잖습니까. 어차피 저는 이미 시민권자고, 제가 계속해서 복무하는 한 제 아내도 영주권자로 취급받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난민법인은 어디까지나 예산과 행정소요를 절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구된 것. 쉽게 말해 돈을 줄 테니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제도다. 즉 그 법인의 간부들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방법은 공금을 횡령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난민법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은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그래도 법인에 속해있으면 전역 후에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거나 해서 이런저런 도움을 줄 텐데요? 슬슬 군축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군축. 최근 언론에서 곧잘 다루는 화두다. 아무리 맥밀런 행정부를 거친 미국이라도 천만에 달하는 육군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 방역전쟁이 햇수로 4년차에 접어들었으니 전시국채 판매가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한편 장병들의 귀환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 ‘여유는 충분하지.’ 파나마 지협엔 남북으로 구 본토 봉쇄선을 능가하는 강력한 요새선이 구축되고 있다. 에스더의 부재로 인해 중미지역의 전황은 예전만큼 좋지 못하지만, 멕시코 중남부를 차지한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하기 시작하면 미군의 부담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었다. 블랑 소위가 고개를 저었다. “일자리……. 그것도 비리의 온상입니다.” “이를테면?” “짐작하실 텐데요. 난민법인에서 퇴역 사병이나 장교에게 줄 일자리라는 게 뻔하잖습니까. 법인을 통해 고용된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이 일하는 현장의 현장감독 정도죠. 아니면 법인 소유의 자산이나 사업장 관리를 맡기거나.” 유라가 만났던 이와 다르게, 블랑은 겨울을 상대로 뭔가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자리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으니 그걸 분배하는 과정에서 뒷거래를 하게 되는 건 필연입니다. 왜냐면, 일단 자리를 꿰찬 다음에는 손해를 순식간에 벌충할 수 있으니까요.” “노동자들에게 돈을 받고 있다는 거네요.” “좋게 말하면 수수료, 나쁘게 말하면 뇌물입니다.” 법인을 통해 고용되는 노동자 수에도 쿼터가 정해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동맹이야 그 제한이 거의 없는 수준이지만.’ 더불어 동맹에서 노동자를 구하려는 기관과 기업들도 많다. 평판이 좋기 때문이다. 일하다가 달아나는 경우가 없었다는 이유에서. 반면, 다른 법인이 보낸 노동자들 중엔 난민구역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이 보기에, 이 차이는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의 간극이었다. 가르시아라는 이름의 다른 장교가 끼어들었다. “이제 계급별 최소 복무기간이 정상화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좀 불안하긴 합니다. 중위 진급이 확정되었다곤 해도, 앞으로 얼마나 군인 신분을 누릴 수 있을는지…….” 군축이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군인 신분을 누린다는 표현에서 기본적인 인식이 묻어난다. 계급별 최소 복무기간(Minimum time in grade)이란, 다음 진급을 위해 현재 계급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해야하는 최소한의 기간을 뜻한다. 예컨대 중위가 되기 위해선 소위로서 18개월 이상을 복무해야 하고, 대위가 되기 위해선 중위로서 2년 이상을 복무해야 한다는 식. 이는 본디 국방부 훈령으로 정해진 사항이었다. 그러나 방역전쟁이 시작되면서 한시적으로 최소 복무기간을 축소, 또는 무시하는 특별훈령이 발효된 바 있다. 이게 겨울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느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훈장마다 등급을 매겨 서훈이력을 복무기간에 가산하기로 한 별도의 법령 덕분이다. ‘동성무공훈장이 6개월에 은성이 1년, 근무공로훈장이 2년, 수훈십자장이 3년…….’ 여기에 명예훈장은 예전부터 그 자체로 특진을 보장하는 훈장이었다. 부대마크가 다른 둘 중 한 명이 생소한 억양으로 묻는다. “장교부족으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는데, 설마 우리를 간단히 잘라내겠습니까?” 돔브로프스카. 이름을 보니 폴란드계인 모양이다. 가르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시는 말씀. 군축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지만, 그걸 감안해도 소위나 중위 같은 하급 장교들에겐 큰 가치가 없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건 고급 장교들이죠. 국방부 장관 명령 한 번이면 우린 전부 다 군복을 벗어야 합니다.” 이는 방역전쟁 전시임관 특별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겨울에게 시선을 돌렸다. “Sir. 당신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체로 동의해요. 소위는 너무 많고, 중위도 그렇죠.” “역시.” 다섯 소위는 겨울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명성이 명성이니만큼, 그저 혼자 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떤 근거가 있을 거라고 믿는 분위기였다. 겨울은 굳이 그 착각을 지적하지 않았다. 하든 말든 차이가 없는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군축은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블랑 소위가 입을 열었다. “마치 개미지옥으로 빠져드는 기분입니다. 군인으로서의 전망은 어둡고, 군정청은 난민법인의 부정을 뻔히 알 텐데도 감사를 난민들 자신의 손에 맡겨둘 뿐이고……. 그렇다고 상황을 모르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언제 한 번 크게 터지겠다 싶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저희를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소속이 다른 둘도 용건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테이블이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식사는 아까부터 뒷전이었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입장에서, 겨울의 식판도 대화를 시작할 즈음에 비해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시간상 일어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제대로 식사를 마치기는 글러먹은 셈. 겨울이 식판을 살짝 밀고 깍지를 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 처음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내겐 모두를 받아줄 능력이 없어요. 여러분은 고작 다섯이지만, 지금 이 자리를 초조하게 지켜보는 사람은……언뜻 봐도 세 자릿수는 되어 보이네요. 여러분들과 저 사람들 사이에 운 이외의 차이가 있을까요?” “…….” “다음으로, 난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요.” 사실 먼저 말한 것보단 이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알아볼 방법은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 빚입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하죠.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는 사람 전부를 그런 식으로 검증하기는 무리고요.” 블랑 소위의 낯빛에 순간적인 억울함이 스쳤다. 입이 열렸다가 말없이 닫히기를 몇 번. 그는 결국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한 낭비였다. 이 자리에선 결국 믿어달라는 말 이외에 다른 증거를 댈 수 없는 처지이므로. 나머지 넷도 비슷했다. 적어도 성급한 사람들은 아니네. 생각한 겨울이 말을 이었다. “겨울동맹은……이런 식으로 언급할 때마다 이름 때문에 조금 부끄럽긴 한데, 아무튼 동맹은 내가 성립 단계에서부터 관여한 단체예요. 지금까지 사람을 쓰는 데 신중을 기해왔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자체감사에 외부감사를 더해 투명성을 제고했고요.” 추가로 CIA의 도움도 받았지만, 여기선 언급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 사찰에 해당하는 행위였으니까. 대상이 미국 시민은 아닌데다 비상시국에 만들어진 법령이 있어 불법까지는 아니었으나, 사실이 알려지면 비판을 받게 될 여지가 충분했다. “블랑 소위.” “예.” “당신의 예상대로, 난민법인들의 부정은 조만간 큰 화가 되어 돌아올 거예요. 그건 거의 확실하죠. 난 동맹이 거기에 휩쓸리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있는 법인에서 그냥 빠져나올까요?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니까?” 블랑이 식탁 위로 꽈악 주먹을 쥔다. “법인에 아직까지 이름을 올려둔 건……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나오는 지원금이,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 필요한 식사와 잠자리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제가 하루를 더 버틸 때마다 그 사람은 하루를 더 먹고 하루를 더 춥지 않게 자겠지요.” 반면 동맹으로 등록을 옮기면 지원금이 나오는 경로만 달라질 뿐이었다. 거주지가 멀리 떨어져있다 해도 법인의 현지 사무소를 개설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겨울로선 이 또한 단점이었다. ‘내 눈에서 너무 벗어나있게 돼.’ 외부감사 비용도 늘어나겠고, 현재와 같은 강한 유대감도 기대하기 어렵다. 겨울이 동맹에 바라는 이상성을 성취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건 어때요?” 블랑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겨울은 아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제안을 꺼냈다. “당신들이 난민 지도자 심사를 받는 거예요.” “……저희가 직접 말입니까?” “예.” 겨울이 궁리하기로는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폭발이 임박한 지금, 당신들을 비롯해 처음 알아가야 할 사람들 다수를 동맹에 받아주긴 힘들지만……. 가라앉을 배에서 옮겨 탈 새로운 배를 제공해주는 것쯤은 가능하겠는데요.” “…….” “심사를 담당하는 게 군정청, 그 결과를 승인하는 건 하원의원들로 구성된 난민지도자 위원회였던가요? 군정청 쪽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위원회 쪽도 연락을 부탁해볼만한 분이 몇몇 계시거든요.” 성공할 확률은 높았다. ‘예산 집행항목을 분리할 뿐이지, 총액이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정책은 예산의 지배를 받는다. 예산상의 부담이 없는 이상, 겨울과 인연이 있는 정계인사들은 전쟁영웅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줄 것이었다. 오히려 달갑게 여길 가능성마저 있다. 경중을 떠나, 겨울에게 빚을 지울 기회가 그리 자주 오는 건 아니므로. 돔브로프스카 소위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Sir. 결국 그것도 일종의 빚이 아닙니까? 당신께선 조금 전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하셨었습니다만…….” 겨울은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 빚을 누구에게 지느냐의 차이라고 해두죠.” 정보국 관계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조금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때요.” 회중시계를 확인한 겨울이 다섯 소위의 의사를 물었다. “여러분만 떳떳하다면 내 제안에 따라서 손해 볼 건 없다고 보는데요.” 시선을 주고받던 프랑스계와 폴란드계 장교들이 각각 한 사람씩 대답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지요?”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려운 사람 놀리는 취미는 없어요. 안 해줄 거면 뭐 하러 말을 꺼냈겠어요?” 온화한 답변을 듣고서야 굳어있던 몸을 이완시키는 소위들.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부탁 하나만 하죠.” 겨울의 말에 긴장감이 다시 비등한다. 폴란드계의 보박 소위가 말끝을 흐렸다. “부탁이라면 어떤……?” “어려운 거 아니니까 어깨에 힘 빼요.” 그리고 겨울은 고갯짓으로 이 테이블에 집중된 시선들을 의식시켰다. “당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내가 일일이 이야기를 들어주자니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앤이랑 통화할 시간마저 줄어들 까봐 걱정인 겨울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오간 이야기를 당신들만 알고 있진 말라는 소리에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예! 물론입니다. 의견을 취합해서 한 번에 말씀드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나중에 다시 대화하죠.” 겨울은 소위들에게 자신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 446 [446화] #박제된 낙원 (8) 칼라일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 일과를 마친 겨울의 주된 여가활동 중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꽃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앤의 집과 사무실로 보낼 꽃다발의 구성을 고르는 일. 온라인으로 상담과 주문을 마치면, 실제 배달은 당일 내지 익일에 이루어진다. 이쪽 업계의 성쇠는 미국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다. 대역병 확산 전후로 문을 닫은 업체가 수두룩했으나, 멧돼지 사냥 작전의 성공으로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하고부터는 새로운 회사들이 하나 둘씩 영업을 시작했다. 최전선의 장병들을 겨냥한 꽃 배달 업체들의 마케팅은 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가족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중점적으로 공략한 덕분이었다. 원거리 연애가 고단한 겨울도 여기에 넘어갔다. 작년부터 종종 이용해보았던 겨울은 이제 최고등급 회원으로서 매달 2천 달러 가량을 결제하는 중이었다. 상당한 금액이지만, 급여 외의 연금만으로 연 4만 달러 이상을 받게 된 겨울로선 충분히 감당할 만한 지출이었다. 사실 겨울은 값이 더 비싸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앤의 미소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므로. 사후의 부귀영화에 큰 무게를 두지 않고 있기도 하다. 꽃 배달 업체는 선물 구매도 대행했다. 예전엔 자체적으로 유통하는 과일 바구니나 초콜릿, 다과 정도를 함께 판매하는 데 그쳤으나, 근래 들어선 장병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꽃과 선물을 살피는 시간은 곧 그것을 받아들 앤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이었기에, 겨울에겐 나름대로 소중한 정신적 휴식이었다. 그러나 일과가 끝났다고 해서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구매를 확정지은 겨울은 아쉬운 마음으로 화면에 떠있던 창을 닫았다. 그리고 새롭게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평소보다는 많아도…….’ 예상보다는 적다. 겨울은 요 며칠간 난민 출신 장교들을 성심껏 상대해주었다. 그 결과 그들 나름대로 의견을 모으고 대표자를 정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새 난민법인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왔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자, 같은 그룹 안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하는 흐름이 겨울의 눈에도 뻔히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질질 시간을 끌지 않고 겨울의 예상보다 적은 숫자의 제안서들을 보내오는 건, 그들에게도 생존감각이라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서로를 못 믿어서, 혹은 명예욕이든 권력욕이든 욕심이 나서 각자 다 지도자 해먹겠다고 나서면, 나라고 그걸 받아줄 리가 없지. 나도 빚을 지는 거라고 분명히 말해두었는데.’ 말하자면 의견을 모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험인 셈이다. 겨울에겐 한계가 있었고, 사정이 아무리 딱한들 인지부조화에 갇혀있거나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까지 일일이 도와줄 능력은 없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의 눈 밖에 날 행동을 삼가는 건 상식적인 처신 아닐까. 또한 난민지도자들의 부패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의견이 안 맞는답시고 시간을 끄는 건 절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배가 가라앉는 와중에 구명보트의 결함을 따질 겨를이 어디 있을까. 어느 정도는 운에 맡겨두는 수밖에. 겨울이 시계를 힐끗거렸다. 제안서들을 검토한 겨울은 예정대로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인연이 있는 의원들에게 전송했다. 열 명 남짓한 난민지도자를 추가로 등록하는 것쯤, 가까운 시일 내로 결과를 받아볼 수 있지 않을는지. 이미 곱씹었듯이, 예산이 늘어나는 건 아니잖은가. 다만 떨어져 나갈 장교들을 법인 소속으로 거느리고 있었을 난민지도자로선 갑작스럽게 날벼락을 맞는 기분일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으나, 겨울에게 매달린 하급 장교들의 증언이 절반만 사실이어도 금전적 손실이 상당할 테니. 한편으로, 새로운 법인을 꾸리는 하급 장교들은 당분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법인이 분리될지언정 부대가 분리되는 건 아니니까.’ 백악관이 폭탄을 터트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부대에서 부대껴야 할 처지. 그러나 겨울을 찾아온 시점에서 그 정도의 각오는 당연히 해두었을 터였다. 겨울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열어보는 메일들은 주로 장연철과 민완기가 보내온 것들이었다. 현황을 전하고, 업무상의 사후승인을 받고, 향후 방침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과정. 겨우 이 정도의 의사소통만으로 운영에 문제가 없다는 게 겨울동맹의 장점이었다. 민완기는 그 성격에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요즘의 겨울동맹을 보고 있자면, 귀족사회의 장점만 뽑아서 현대적인 공동체에 이식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에게 냉소적인 관찰자로서, 동맹의 변화를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제국주의가 싹을 틔우던 시기에, 영국 귀족들은 금전적인 손해를 보면서까지 장교로서 복무하려고 했었지요. 설령 왕족이라도 처음엔 소위부터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것이 명예로운 일이자 귀족의 계급적 당위성으로 여겨졌던 까닭입니다.」 「그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고 해서 귀족인 게 아니라, 고귀한 의무를 수행하기에 비로소 귀족인 것이다……라는 마음가짐이었지요. 이런 귀족들은 혈통에만 매달리는 귀족들을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위 고귀한 의무라는 게 침략과 학살과 저열한 약탈로 점철되어있다는 점은 경멸받아 마땅합니다만, 어쨌든 구태의연한 귀족들보다야 훨씬 더 나은 인간들이었던 겝니다.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영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웅들이었던 것이지요…….」 겨울은 읽다 말고 또 시계를 엿보았다. 기다리는 때가 아직이라, 길게 응시하고 짧은 한숨 내쉰 다음 남은 글을 읽어 내려간다. 「……그런 맥락에서, 작은 대장님의 행보는 대단히 귀족적입니다. 영국의 제국주의자들과 달리 명분마저 완벽합니다. 방역전쟁은 인류의 존속을 건 성전 아닙니까. 이로부터 비롯되는 명예엔 어떤 흠결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에는 말입니다.」 「동맹은 사실상 시작부터 끝까지 대장님의 헌신으로 쌓아올린 단체이고, 여기에 속해 누리는 모든 생활은 전적으로 대장님의 명예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족이 되려면 타의 모범으로서 고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라는 인식이 동맹 전반에 퍼지는 것도 납득이 가는 일입니다.」 여기서의 귀족은 공동체의 지도층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이었다. ‘공동체의 건전성……인가.’ 민완기는 동맹의 사람들이 ‘순화’ 내지는 ‘교화’되고 있다고 써놓았다. 당장 눈에 띄는 일탈이 줄어들고, 이기적인 다툼도 감소했으며, 사람들의 협조성은 갈수록 늘어간다는 이야기. 「풍족한 곳간에서 풍족한 인심이 나오는 것이긴 합니다. 생활이 하루하루 불안했을 땐 동맹도 참 더러웠으니까요.」 「그러나 물질적인 안정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뒷받침되면서, 당신께서 행동으로 새겨놓은 동맹의 정체성이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내면화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지위상승의 욕구가 한겨울 중령 개인에 대한 경외와 동경으로 수렴되었다고 봐도 좋겠군요. 소속 집단에 대한 자긍심이 곧 행동을 교정하는 도덕률이 되어주는 셈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겨울은 지난날 앤이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미덕은 대중정치의 원천이다.” 서로 얽혀있었던 손가락의 촉감이, 그때를 회상하는 이 순간에도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겨울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미덕이라고 믿어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덕.” 겨울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상냥함과 따뜻함의 부재를 깨달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허전해지는 요즘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오는 공허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민완기의 견해는 앤이 믿는 바와 조금 달랐다. 「……이게 다 당신께서 사람을 벗어난 신념을 오랫동안 고수하신 덕분이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동맹이 작은 사회였기에, 그리고 인류가 존망의 기로에 놓여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변화였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이 영원하진 못할 거라는 게 안타깝군요.」 「세상이 밝아지면 별빛은 가려지는 법입니다. 제가 겪어온 바, 사람은 밝을 때 오히려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이더군요.」 「그래도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어둠 속의 별 같았던 당신이라는 사람 또한 언제까지고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 결국 민완기가 업무적인 내용보다 길게 달아놓은 사설은, 박제된 낙원으로서도 영원하지는 못할 동맹의 이상성(理想性)이 겨울에게 실망감을 줄까 싶어 미리 염려를 표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어찌 변하든 간에 겨울만은 지금처럼 순수하기를 바란다는 속뜻. 근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겨울로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눈 속에서 피는 꽃도 언젠가는 시들게 된다. 영원함은 사람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다. 복잡한 여운을 지우며 다음 메일을 열어본다. 발신인은 D.C에서 만난 적 있는 국선변호사, 로스 스톨워스였다. 클라리사 채드윅과 시에루 중장의 변호를 맡았던 인물. 선거를 거쳐 연방판사가 된 그가 겨울에게 조금 늦은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일찍이 함께 연방대법원 내부를 거닐 적에 금전적인 도움을 언급하긴 했으나, 스톨워스가 판사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 거액의 선거자금이 들어가진 않았다. 겨울은 다만 SNS 등에서 국선변호사의 투철한 직업윤리에 감명을 받았다는 식으로 이름을 언급해두었을 따름. 대선 당시 제2의 러닝메이트라고까지 평가받았던 겨울의 영향력이다. 많은 시민들은 한겨울 중령이 호감을 표한 사람에게 자신의 표를 행사했다. 물론 돈이 아예 안 들어가진 않았다. 그러나 정부예산이 아닌 기부금 중에서 출처를 가려 사용한 것인지라, 이 부분을 꼬집을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동맹과 같은 비영리법인이 선거자금을 제공하는 건 미국에서 아주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결내린 문제였다. 이 기부금을 낸 사람 중엔 주웨이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10억분의 1이라고 불리는 외모와 가창력에 힘입어, 그리고 옛 중국의 부패와 정치적 탄압을 증언하는 역할로서 미국 연예계에 기반을 다진 그녀는, 지금에 와선 겨울동맹의 후원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탄궈셩 중교로부터 온 메일은 없나?’ 겨울이 스크롤을 죽 내려 보아도 발신인 가운데 탄궈셩의 이름은 없었다. 어머니 시에루 중장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그는 줄곧 겨울의 연락을 거부하고 있었다. 전화는 받지 않고 문자엔 답신이 없다. 하여 겨울은 그의 메일 계정을 알아내어 몇 가지 제안을 보낸 참이었다. 혹시나 싶어 수신확인을 눌러보니 일단 읽어보기는 한 모양. 이 세계의 현재는 시에루 중장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이 있는 한, 겨울은 중장이 남긴 유언을 기억할 것이었다. 그러나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순 있을지언정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할 순 없는 노릇. 탄궈셩 입장에선 미군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에 모욕감을 느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를 속인 겨울부터가 미군이지 않은가. 또한 그의 어머니는 미국의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녀 스스로 바란 일이었다고는 해도, 원망하려면 얼마든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을 터. 이유가 있어서 원망하는 것과 원망하고 싶어서 이유를 찾는 것의 차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시에루 중장이 예견했던 대로, 탄궈셩 이외의 장교와 병사들 중에선 겨울의 제안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이들이 존재했다. 탄궈셩이 정 세상으로 나오길 거부한다면 다른 이들 사이에서 대표자가 될 사람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나가야지…….’ 시에루 중장의 부탁과 달리, 겨울이 그들을 꼭 자신의 직할로 거두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변이 없는 한 겨울은 크레이머의 임기 내에 장성까지 진급할 테니까. 별을 달고 나면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겨울이 최연소 준장 진급을 놓쳤다는 것에 아쉬워하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장성이 된 인물은 16세에 입대하여 20세에 준장을 달았던 ‘포트 피셔의 영웅’ 페니패커 소장이다. 그 역시 겨울처럼 명예훈장 수훈자였다. 한편 2차 대전 당시에도 겨울보다 빠르게 진급한 사람이 존재했다. 고 제임스 스튜어트 준장은 41년 3월 육군 이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44년 1월에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이병에서 대령까지 고작 2년 9개월 만에 올라간 셈이다. 겨울은 이 같은 사실을 자신에 대한 특집기사로 접해서 알게 되었다. 역사 속의 다른 전쟁영웅들과 비교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지지율에 민감한 크레이머 대통령도 이런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쇼맨십이 강한 편에 속하는 그는 소셜 미디어에 종종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건드리곤 했다. 이는 겨울이 자신의 장성 진급 가능성을 점치는 근거의 하나였다. 당장은 무리더라도, 행정부가 교체되기 전에는 별을 달겠지……싶은 것이다. # 447 [447화] #박제된 낙원 (9)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겨울.」 “앤.” 영상 속 오늘의 앤은 소매가 긴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실크 원단이 테이블 램프의 온백색 빛을 받아 따뜻한 느낌을 자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무실이 아니라 집에서 연결한 영상통화였다. 겨울은 그 편안한 분위기에 매료되는 기분이었다. “다행이에요.” 「뭐가요?」 “최근 들어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거나, 현장에서 밤을 새거나 하는 일이 줄어든 것 같아서……. 전에는 과로로 쓰러질까봐 걱정이 많았거든요.” 사고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앤은 겨울이 살고 싶은 삶이었다. 「업무의 절대량이 줄어든 것 자체는 사실이죠.」 끄덕인 앤이 떨떠름하게 덧붙인다. 「처리해야 할 업무 하나하나의 중요성이 말도 못하게 높아져서 문제지.」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녀는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근데 다행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아요? 부국장만 되지 않았어도, 내 이름은 벌써 조안나 한으로 바뀌었을 텐데.」 “…….” 「뭐, 불가피한 일이었지만요…….」 뚱한 기색으로 책상에 엎드린 앤이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 속에서 벽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렸다. 슬쩍슬쩍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의 입가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뭐예요. 왜 웃어요. 나는 진지한데.」 항의하는 앤의 입가엔 감추지 못한 보조개가 물려있었다. “아, 미안해요.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그러자 웃음을 참는 앤의 얼굴이 한 층 더 카메라에 가까워진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자, 마음껏 봐요. 당신의 앤이에요.」 중의적인 표현이다. 겨울이 꽃 배달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아이디가 My_Anne이었다. 기프트 카드에도 본명 대신 아이디가 찍힌다. 「그나저나, 나 요즘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글쎄요.” 「자세히 살펴봐요. 나 지금 화장 안 했는데.」 고개를 살짝 튼 앤이, 힌트를 주듯 자신의 볼을 콕콕 찔러보였다. 하얀 살결이 같은 조명 아래의 실크보다 부드러워 보인다. “혹시 피부?” 「정답.」 일단 한 번 의식하고 나니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 그렇죠?」 앤이 만족스러워했다. 「관리에 한 2만 달러쯤 쓴 보람이 있네요.」 “와.” 겨울은 가볍게 놀라고 가볍게 납득했다. 연금을 제외하면 앤의 급여가 겨울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 기준으로 환산하면 소장쯤은 되어야 비슷한 금액을 수령한다. 수사관 시절에도 1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았을 테니, 오랫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는 앤의 계좌엔 일반적인 미국인들과 다르게 많은 돈이 쌓여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느냐와 별개로, 그런 지출이 필요한가는 의문이었다. “당신은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예뻐요. 대체 얼마나 더 예뻐지려고 그래요.” 겨울의 말에, 앤은 짧게 웃고 정색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지만,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이에요.」 “꼭 필요한 일?” 「모르겠어요? 난 지금 결혼식을 준비하는 거란 말예요.」 “아…….” 「닥쳐서 하면 너무 늦어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체 없이 식을 올리려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죠.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겨울의 옆에서 흠 없이 빛나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 「가뜩이나 난 현장에서 구른 기간이 길잖아요. 거친 환경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있었죠. 게다가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나 스스로도 자신을 험하게 다루는 면이 있었고요 이제 와서 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네요. 사랑을 안 하기는 개뿔, 결국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될 운명이었건만.」 농담처럼 말한 앤이 어조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난 당신과 결혼하는 거란 말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유명한 한겨울 중령하고. 그리고 당신은 현직 FBI 부국장, 나아가 유력한 차기 국장을 아내로 맞이하는 거고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시답잖은 뜬소문이 나도는 걸 최소화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앤을 바라보던 겨울은 갑자기 근심이 깊어졌다. 객관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겨울이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어서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런 탄식이 나온다. “이해는 가는데, 다른 남자들이 앤에게 반할까봐 걱정스럽네요.” 으잌. 앤이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은 그녀가 끅끅대며 말했다. 「그게 대체 누가 할 소린데 그래요? 겨울, 기왕 말이 나왔으니 솔직히 털어놔 봐요. 평소에 이런저런 유혹들을 많이 받지 않아요?」 겨울은 앤의 질문에 불안감이 묻어나지 않는다는 게 기뻤다. 그녀가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의미였고, 또한 겨울이 그녀에게 그만한 믿음을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둘 중에선 후자 쪽이 더 기쁜 일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얼마나 돼요?」 “얼굴 내놓고 돌아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요.” 「역시나.」 미소를 머금은 채 한껏 여유롭게 턱을 괴는 앤. 「그 사람들에겐 미안하게 됐네요. 겨울은 벌써 내게 푹 빠져있으니까.」 “그러게요.” 바보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겨울과 앤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언뜻언뜻 새어나올 수밖에 없는 그리움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두 사람이었다. 대화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주제와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흐름이 끊어져도 괜찮았다. 서로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 한쪽은 미소를 짓게 마련이었다. 자신을 보고 웃는다는 게 기뻐서 이쪽도 웃게 되고, 그 웃음은 다시 저편으로 전염된다. 그러던 중에 앤이 막 떠오른 것처럼 물었다. 「혹시 겨울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없나요?」 “……?”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혼내주려고요.」 장난스러워도 일단은 FBI 부국장이 하는 소리였다. 「괜히 물어보는 게 아니라, 당신이 스톨워스 판사의 당선을 도운 걸 계기로 당신을 새롭게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거든요.」 “아…….” 「워싱턴 정계 일각에서는 당신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시험해보기 시작한 게 아닌가, 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겨울동맹으로 유입되는 기부금과 당신 개인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도를 합치면, 어떤 선거에서든 어지간한 슈퍼 팩(Super PAC)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요.」 PAC는 정치활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의 약자로, 후원자들의 자금을 모아 정치인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슈퍼 팩은 그 중에서도 동원하는 자금의 규모가 압도적인 단체들을 지칭한다. 미국의 선거가 배금주의자들의 제전(祭典)이라고 비판받게 된 원인이었다. 큰돈을 대가 없이 내놓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슈퍼 팩에게 빚을 지면 당선 후 그 이상으로 갚아야 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당신이 적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물론 적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죠. 옳은 일만 하더라도 싫어할 사람은 있을 테니까. 다만, 당신에게 주어진 힘이 당신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을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어요?」 “많겠죠. 굉장히.” 「이번 판사 선거는 그렇게까지 큰 사건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문제를 두고 결정을 내릴 땐 나한테 상담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둘이 머리를 맞대는 편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테니까요. 어쨌든, 난 겨울의 아내가 될 사람이잖아요?」 여기서 조금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는 앤. 생각해보면 연방판사 후보를 1차적으로 검증하는 역할을 맡은 기관이 바로 FBI였다. 겨울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당신 말처럼, 큰 사건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면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까지 가벼운 일일 수는 없는 거였는데……. 스톨워스 씨처럼 모범적인 사람은 당연히 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다음으로.」 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원 난민지도자 심의 위원회에도 당신이 개인적인 부탁을 전달했다고 들었는데.」 “네.” 「왜 그랬는지는 이해해요. 상황이 상황이니…….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당신이 왠지 모르게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행동이 경계를 사게 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이건 내 착각인가요?」 잠시 고민한 겨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맞는 것 같네요.” 「어째서? 겨울이 초조해할 이유가 뭐죠?」 어려운 질문이었다. 지적을 받기 전까지는 깊게 파고들어 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답을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겨울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음, 일단은, 경계를 사더라도 어차피 잠깐이라고 생각했어요.” 「잠깐이라면……?」 “난민법인들의 부정에 대해서, 앤은 대충 알고 있죠?” 앤은 부인하지 않았다. 「지위가 지위인걸요. 많이 심각하더군요. 차마 입에 담기도 꺼려질 만큼.」 겨울이 말을 이었다. “그게 터지고 나면, 내 입지라고 해서 지금 같을 수는 없을 거잖아요? 관계법령을 지금 상태 그대로 두지는 않을 테니까. 난민지도자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아니면 아예 법인으로부터 분리를 시키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데. 앤 의견은 어때요?” 「……동의해요.」 동맹에 부정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무관하게, 사태의 여파에 휩쓸리는 것이다. “요즘 들어, 내 한계는 여기까지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어요.” 「…….」 “물론 앞으로도 내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겠지만, 그 행동의 폭은 점점 좁아지겠죠. 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호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퇴색될 것이고……. 스톨워스 씨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건 그 상대편에겐 적이 된다는 뜻이죠. 내가 방관자로 살아가지 않는 한, 내게는 계속해서 적이 늘어날 거예요.” 그러니 겨울의 인기와 영향력은 지금이 최대일 수밖에 없다. 「겨울,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우린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역시 최선을 다하면 돼요.」 “알아요.” 겨울은 앤의 위로에 미소 지었다. 겨울 스스로는, 박제되어있던 소년기로부터 벗어나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아쉬움이 있더라도, 당신만 곁에 있으면 난 행복할 거예요.” # 448 [448화] #박제된 낙원 (10) 에스더가 아직 살아있었을 시기에 유카탄 반도의 녹색 사막과 치아파스 주의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de Chiapas)을 돌파한 미군은, 옛 과테말라의 국토가 가장 좁아지는 지협에 새로운 차단선을 설정한 시점에서 일시적으로 남진을 중단했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러시아와의 약속 이행이다. 즉 미군이 새로 점령한 영역을 러시아군이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지체가 발생했던 것. 거점양도 및 주둔지 변경, 부대이동, 연락망 구성, 향후의 보급로 유지에 관한 협력 등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둘째는 1차 군축을 위한 사전준비였다. 공세를 이어나가면서 군축을 병행하자니, 군에 가해지는 행정 부담이 지나치게 컸던 것이다. 이는 육군의 규모로 인해 심화된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하루, 방송에서 보여준 미군의 차단진지엔 장난 같은 이정표가 세워져있었다. 「파나마 운하까지 앞으로 869마일! Fuck! :)」 869마일.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오아하카를 지나 멕시코 중부고원을 갓 벗어났을 때의 1,200마일(약 2천 킬로미터)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줄어든 것이었다. 중미 전체를 놓고 보면 이제 3분의 2쯤 지나온 셈. 그렇다고 해서 남은 전장이 중미 전체의 3분의 1이라는 말은 아니다. 파나마 운하에 가까워질수록 육지의 남은 면적이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변종들의 배후지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파나마 운하 점령으로 남미로부터의 변종유입이 끊어진 지금, 중미지역의 변종들이 개체수를 늘릴 방법은 자체적인 번식과 얼마 안 되는 신규감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번식을 위한 배후지가 줄어드는 건 당연히 치명적이었다. 많은 관계자들이 앞으로 남은 869마일을 이제까지보다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였다. 겨울의 의견도 대동소이했다. ‘어차피 내게 주어질 싸움은 아니겠지만.’ 겨울과 201독립대대를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남다른 실전경험을 쌓은 특수부대를 후방에만 두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하는 소수와, 군인으로서의 겨울에게 매료되어 겨울의 싸움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인 또 다른 소수가 공존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독립대대를 지금 당장 투입하라는 식으로 주장하진 않았다. 방사능 피폭에 의한 부대 재정비는, 그게 일반적인 부대라도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하는 일이다. 하물며 특수부대인 「에버 윈터」의 결원을 훈련소에서 갓 나온 신병들로 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예컨대 네이비 씰 같은 경우 총 32주의 교육훈련을 거쳐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인다. 그 전에 현역 군인들 가운데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추려내는 데에도 시일이 요구되었다. 독립대대와 네이비 씰은 많은 면에서 다른 부대지만, 자격획득이 어렵다는 점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독립대대 장병들이 실전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기갑공수훈련을 거쳤던가. 겨울이 대대장으로서 통보받은 바에 따르면, 특수전 사령부에서는 201독립대대의 완전한 재전력화를 현재로부터 8개월 뒤로 내다보고 있었다. 물론 재전력화 완료 전에도 소대나 중대 단위의 개별 작전수행은 충분히 가능하다. 허나 어지간히 중요한 작전이 아닌 이상, 그 정도 규모의 동원에 겨울이 불려갈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받는 강화교육은 미-러 합동비상대응체계 구축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독립대대의 재정비가 늦어질수록 대응체계 가동 시점도 연기된다. 하물며 여기엔 서부지역의 경제적 이권마저 달려있다. 겨울은 연방정부가 비상대응체계 구상을 발표한 이후 서부의 부동산 거래가 늘었다는 뉴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이권에 발을 걸친 관계자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표심에 얽매이는 정치인들은, 독립대대를 전선으로 보내자는 의견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재정비가 완료되는 날까지 전투가 계속되기는 할까?’ 그러므로 이 시점의 겨울은 어딘가 허전한 여유를 누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방관자가 되어가는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겨울은 앤을 생각했다. 때로는 향기, 때로는 체온, 때로는 목소리. 마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모든 것. 어떤 심상도 앤의 실존을 대신할 순 없었다. 허나 그녀를 실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일전 그녀가 겨울을 만나겠다고 덴버까지 먼 길을 찾아왔듯이, 이번엔 겨울이 D.C로 가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쉬는 날에도 백악관으로 불려가기 일쑤인 FBI 부국장의 업무가 장애물이었다. 대대적인 난민 이주가 진행되고 있으니, 이를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부서가 아니더라도 업무량이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최근의 통화에서, 앤은 겨울에게 한 가지 주의를 당부했다. 「양-주의자(Yangist)를 자칭하는 멍청이들이 온라인에서 설쳐대고 있어요.」 얀기스트. 마오이스트(Maoist)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작명이다. 즉, 양용빈의 정신을 계승하는 자들이라는 뜻. 어디 계승할 것이 없어서 그런 걸 계승하는가 싶지만, 겨울은 그들 대부분이 진짜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맞아요. 당신은 항상 현명하네요.」 겨울의 추측을 긍정하면서도 우려를 감추지 않았던 앤. 「실제 적발되는 양-주의자들은 태반이 정줄 놓은 관심병자들이에요. 중국계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기 위해 그럴듯한 선언문과 영상, 테러 예고 등을 허위로 퍼트리는 거죠. 정작 잡혀온 다음엔 예외 없이 눈물 질질 흘리면서 재미로 꾸며낸 이야기였다고 용서를 빌더군요.」 “…….” 「가뜩이나 바쁜 마당에 수사력을 낭비해야 하는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죠. 그리고 테러 모의엔 장난이라는 게 없는 걸요. 형량의 경중을 떠나, 일단 잡히면 무조건 실형이에요.」 “문제는 그게 진짜인줄 알고 휩쓸리는 사람들이겠네요.” 「네. 일반 대중의 반응도 반응일뿐더러, 그런 것들을 접하고서 진정한 의미에서 양-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으니까요. 주로 차별에 원한을 품은 중국계 시민들이나 난민 노동자들……. 거짓에서 비롯된 진실인 거죠. 다시 말해, 허위에 불과했던 테러 예고 역시 어디선가는 진실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예요.」 “그게 꼭 진짜 양-주의자의 소행일 거라는 보장도 없겠고요.” 「그렇죠.」 “많이 힘들겠어요.” 「날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알아요. 보나마나 내가 목표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 “증오를 부추기려는 사람들과 양용빈의 정신적 후계자들. 어느 쪽이 보더라도 나는 좋은 표적이겠죠. 전자는 시민들을 자극하기에 나만한 소재가 없으니까 건드려보는 것이겠고, 후자는 뭐……. 나야말로 양용빈의 원수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설령 그들이 양용빈의 생존설을 믿는다 해도, 겨울은 여전히 처단당해야 마땅할 죄인이다. 상장의 핵공격을 방해한 전과가 있지 않은가. 그 핵공격이 자신들의 생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에 대해선 이성적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었다.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의 이성은, 그저 합리화의 도구로서만 기능할 뿐이므로. 그만큼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사회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차별과 갈등으로 이익을 도모하는 공동체일수록 이런 부작용이 강하게 나타난다.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이지…….’ 겨울이 줄곧 경계해왔던 탁류였다. 이대로 탁하게 흐르는 세상은 언젠가 저 바깥세상의 닮은꼴로 수렴하지 않겠는가, 하고. 겨울의 능력으론 그저 맑은 웅덩이 하나 지켜낼 수 있을 따름이다. 겨울은 여전히 사람이었다. “난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겠죠?” 「당연하죠.」 그녀의 부탁이 이어졌다. 「걱정되어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반드시 방탄복을 입고 다녀요. 등급은 무조건 레벨 4여야 해요. 매일 아침 착용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내게 보내줄 것. 외부활동은 가급적 자제하고, 어디 갈 땐 꼭 나한테도 알려줘요. 유사시 행선지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아니다, 아예 삼십분마다 의무적으로 연락을……왜 웃어요?」 “조금 우울했는데,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렇게 말하고도 계속 웃는 겨울 때문에, 앤은 결국 볼멘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정말 걱정되어서 하는 소린데.」 “알아요, 알아. 방탄복은 잘 입고 다닐게요. 아침마다 사진도 보내고. 그렇지만 정시연락은 조금……. 우리, 시간 날 땐 안 그래도 10분이 멀다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잖아요?” 「……아.」 겨울과 앤은 서로의 남는 시간을 꿰다시피 하고 있었다. 교육이나 업무가 없을 땐 수도 없이 많은 밀어들이 오갔다. “혹시 앞으로는 메시지를 줄이라는 말이에요? 업무에 지장이 있어서?” 「놀리지 말아요.」 “아니면 내가 싫어졌다거나…….” 「그만.」 부끄러워진 앤이 정색을 하는 바람에, 겨울은 한참을 더 큭큭거려야 했다. 그리고 겨울은 생각했다. 다소의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다 한들, 앤만 곁에 있어준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다. 그 이상을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그 뒤로 겨울은 항시 방탄복을 착용하고 다녔다. 4등급 방탄판이 무겁다고는 하나 겨울에게 방해가 될 정도는 못되었다. 정복 아래에 껴입다보니 조금 불편한 감이 있을 뿐. 그러나 겨울은 그 불편함도 좋았다. 연인의 애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내게 위협이 될 실력을 갖춘 저격수는 미군 전체를 따져도 몇 명 없겠지만…….’ 그리고 그 정도의 실력자가 어중간한 음모에 가담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정상급으로 숙련된 저격수의 매복은 겨울의 감각보정으로도 포착하기 어렵다. 사격 직전에나 알아차릴 터. 그러니 앤의 말에 따라 방탄복을 입고 다니는 편이 유익했다. 그녀를 안심시키는 측면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에서도 관련된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얀기즘의 부상. 조작된 현상인가, 실질적인 위협인가?』 『양용빈의 추종자들로 인해 계속해서 확산되는 중국계 위협론(Chinese Peril).』 『조지 워싱턴 대 조슈아 홀브룩 교수. “최근의 인종적 담론들은 제2의 황화론(Yellow Peril)에 불과하다.”고 비판. 사회전반에 성숙한 시민의식을 요구.』 『나날이 증가하는 테러 위협! 국가안보를 위한 특단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드는 시민들.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에 따라, 겨울이 실제 여론을 살펴보고자 웹서핑에 들이는 시간도 늘었다. 온라인상의 혼란은 보기 전에 예상한 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개중엔 한국계 시민들, 특히 한국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민자와 2세들을 겨냥하여 적대감과 경멸을 표하는 의견들도 존재했다. 아니, 꽤나 많았다. 「자기들이 중국계랑 다르다고 티내고 다니는 거 되게 꼴사납지 않아? 예전부터 근로기준 안 지키기로는 중국인들보다 심했던 주제에. 물론 생김새도 비슷하고.」 「그들이 묻는 “두 유 노우 겨울?”은 이제 지긋지긋해. 아니 씨발, 모를 리가 있겠느냐고. 지들이 한 중령 이름 잘 발음한다고 자랑하는 건가? 이 샛노란 똥 멍청이들. 발음은 몰라도, 한 중령을 존경하는 면에선 내가 너네보다 훨씬 더 나을 걸? 너네는 순수하질 못하니까.」 「실제로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은 한 중령인데 콧대는 걔들이 높아. LOL」 「내가 예전에 한국계 친구가 있었는데, 걔가 말하길 한국계 이민자들끼리는 사기를 엄청 친다고 함. 들은 거라 확실한 거는 아님.」 “…….” 이런 속내들이 예전이라고 왜 없었겠는가. 일정 부분은 사실이기도 할 터. 다만 이제 와서 전보다 더 자주 눈에 띄는 까닭은, 그만큼 경멸감을 드러내기 쉬워진 사회의 분위기 탓이 있을 것이었다. ‘중국계와 다르다고 티를 내는 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일종의 연쇄작용이었다. 어떤 차별의 영향은 차별 그 자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 449 [449화] #박제된 낙원 (11) 보수교육을 받는 동안, 독립대대의 간부들은 인근의 골프장을 종종 이용하곤 했다. 전쟁대학과 육군 박물관(Heritage center) 사이의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 골프장은, 육군 복지단(MWR)이 운영하는 시설인지라 비용 면에서 큰 부담이 없었다. 강화된 보안면에서도 그러했다. 장교들은 주말마다 찾아오는 한가한 시간을 거부하지 않았다. 경쟁에 시달리느라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니와, 겨울과 함께 잘 관리된 그린과 페어웨이를 거니는 것 자체를 일종의 보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당겨지기만 하는 실은 언젠가 끊어지고 만다. 골프 실력이 별로인 겨울도 그런 점을 알고서 일부러 어울려주는 입장이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신경이 쓰이기도 할 테고.’ 부하 장교들이라고 눈과 귀가 없겠는가. 요즘의 세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들의 생명줄이 바로 겨울이니, 지휘관이자 지도자로서의 겨울에겐 그들을 안심시켜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지휘관은 눈앞에 불발탄이 박혀 연기를 피워올리는 상황이라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법이다. “저희들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많이 위안이 됩니다. 동기부여도 되고요.” 이는 알파 중대 송정훈 소위의 말이었다. “어떤 면에선 특권이기도 하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도 그런 시선들을 받다보니 저 자신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자신을 잃다니?” “그 왜, 있잖습니까. 호가호위?……아니면 교만? 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아차! 방금 나 좀 밥맛없었나?’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자꾸 전쟁영웅이라고 띄워줘서 더 하고요……. 저만 재수 없는 인간이 되는 거면 그래도 괜찮지만, 대장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건……어휴. 상상만 해도 저를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항시 그런 마음가짐이면 큰 걱정은 없겠는데요.” 겨울이 미소를 짓자, 송정훈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에이, 아닙니다. 이유라 중위님이 아니었으면 실수를 해도 벌써 몇 번은 더 했을 겁니다.” “그래요?” “예. 예전부터 그래왔긴 한데, 아랫사람들이 주눅 드는 일 없게끔 좋게 좋게 관리를 잘 하시니까요. 출신 가리지 않고 가깝게 지내면서도 상급자로서 할 말은 다 하시는 걸 보면 참 보통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당신께서 직접 고르신 사람답다고나 할까…….” “어쩐지 자화자찬 같네요.” “네? 무슨…….” “그렇잖아요. 송 소위도 결국 내가 임명한 사람인걸.” 반쯤 놀리는 듯한 겨울의 말에 송정훈이 허둥거렸다. “아니, 저는 그……. 원래 이유라 중위의 땜빵으로 장교노릇을 시작한 거였고…….” 송정훈의 임관은 이유라의 부상이 계기였다. 아이들린 지열발전소 방어전에서 뇌진탕을 입은 이유라가 해상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자, 숙련병 가운데 하나였던 송정훈이 임시 직책진급으로 소위로서 소대장을 맡았던 것. 그 이후 지금까지 쭉 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겨울은 다시 미소를 만들었다. “계기가 무엇이었든, 소위가 무능한 사람이었으면 한 개 소대를 계속 맡겨두었을 리가 없잖아요. 동성훈장까지 받은 사람이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요?” “훈장이야 포효하는 폭풍 작전에 참가한 장교라면 대부분 하나씩 다 받은 거잖습니까.” “자격이 있으니까 준거죠. 지나친 겸손도 보기 안 좋아요.” “으……. 들뜨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렇게 띄워주시면 곤란합니다.” 송정훈이 난처해하는 와중에 멀리서부터 헬기 엔진소리가 가까워졌다. 겨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군 시설이 지척이라 종종 헬기들이 지나다니곤 했기 때문이다. 골프장에도 헬기 착륙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지금처럼 머리 위를 통과할 때도 있다. “아, 바람!” 그린 가장자리에서 막 자세를 잡던 찰리 중대의 타타라가 인상을 찌푸린다. 근처엔 소총을 휴대한 채 경계를 서듯 지켜보는 히로노부 소위가 있었다. 어느 정도는 테러 위협을 의식한 조치. 허나 그 전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민간인들조차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였다. 공개 휴대(오픈 캐리)가 보편화된 이후 경찰의 과잉진압이 증가하는 문제가 생겼지만, 전체적인 범죄율은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 과거 총기 규제가 강력했던 캘리포니아가 그렇지 않은 주들에 비해 높은 범죄율을 기록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바람이 잦아든 뒤로도 송정훈은 맥락 무관하게 이유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겨울이 갑작스럽게 유라를 불렀다. “이 중위!” “네?” “여기 송 소위가 이 중위 칭찬을 엄청나게 하네요? 당신이 차기 중대장이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대요!” 송정훈이 허둥거린다. “으아아……. 아니, Sir, 왜 갑자기…….” 그러면서 조금 떨어져 있는 유라의 눈치를 살핀다. “흐-음.” 한 손을 허리에 짚고 삐딱하게 선 유라는, 골프 클럽을 어깨에 척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아부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부 아닙니다!” 유라 본인이 아닌 겨울에게 한 말이 아부일 리가 있나. 건너 건너 전해질 것을 걱정했을 수는 있겠으나, 송정훈은 그렇게까지 치밀한 성격이 못 되었다. 그리고 유라가 그것을 모를 리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겨울에게 어울려, 선선한 봄날의 오전에 목덜미까지 땀이 나도록 당황한 송정훈을 놀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른 장교들 또한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이것이 요즘 들어 독립대대 장교들 사이의 일상적인 분위기였다. 이를 두고 유라는 겨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대장님이 전보다 밝아지셔서 좋아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안심했어요. 그래도 전보다는 마음이 좀 편하신 거구나……하고.” 이를 들은 겨울이 그렇게 보이느냐고 묻자, 유라는 웃으며 앤을 언급했다. “그분께 전해주세요. 독립대대와 동맹의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드린다고. 그리고, 대장님과 더불어 한 평생 행복하시기를 바란다고…….” 겨울은 고맙다고 답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고마운 마음씀씀이였다. 따악- 회상에 잠겨있던 겨울을 경쾌한 타격음이 일깨웠다. 하늘을 대각선으로 쭉 가로지르는 공. 뚝 떨어지는 위치가 좋다. 왕커차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고, 같은 팀인 브라보 중대 소대장들이 환호를 보냈다. 알파, 찰리, 델타 소속 소대장들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중국계가 대부분인 브라보 중대 간부들은 골프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게 저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을 테니까.’ 민완기에게 듣기로, 중국에서 골프는 부르주아적 유흥으로서 금기로 여겨졌다 한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녹색 아편’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고. 그럼에도 골프는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유흥이었다. 혼탁한 사회에서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지는 까닭. 공직자와 재벌들이 앞장섰고, 사다리 위의 삶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독립대대의 중국계 간부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을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언정, 과거의 영향이 아예 사라질 순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좋은 의미로 많이 바뀌었지. 정말로……. 여차하면 잘라낼 작정이었는데.’ 처음 받아들일 때 범죄 경력이 있는 간부들이 과연 나쁜 버릇을 버릴 수 있을까, 라는 경계를 품었던 겨울이다. 그럼에도 기회를 주었던 건, 탁하게 흐르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잘못이 온전히 그 사람만의 책임인 경우는 드물다고 믿고 있을뿐더러, 미군부터가 범죄자들을 병력자원으로 활용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 곱씹었듯이, 이 나라에선 죄 값을 치른 범죄자를 경찰로 임명하기도 한다. 자신부터가 범죄자였으니 범죄자들의 생각을 잘 알 거라는 논리에서였다. 당연히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들도 있지만, 그 사고의 비율은 사전에 제기된 우려에 비해선 낮은 편이었다. 그저 그 낮은 비율의 사고가 무척 심각했을 뿐. 달리 말해,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가 그들을 교화시켰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겨울은 이렇게 생각했다. ‘존경을 받기 때문에 존경 받을 행동을 하게 되는 거겠지.’ 사람은 곧 관계다. 누구에게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이상, 경험해본 적 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나면 누구든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그것이 성공하는가와는 별개로, 스스로 바라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군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예우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준이다. 하물며 소속이 겨울의 독립대대라면야. “Sir! 차례입니다!” 겨울을 부르는 건 리아이링이다. 동료들과 더불어 이 시간을 계산 없이 즐기는 모습이 이채롭다. 때때로 내비치는 독기 역시 과거보다는 무뎌진 그녀였다. 출신 조직 문제로 사이가 나빴던 쑨시엔이나 류젠차오 등과도 곧잘 어울린다. 원래의 출신에 대한 소속감보다 독립대대라는 동질감 쪽이 더 강해졌다는 방증이었다. 겨울이 자신의 클럽을 쑥 뽑는데, 전쟁대학 방향에서 헬기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머리 위를 통과해 지나가는가 싶더니 속도를 줄여 골프장 한 가운데 착륙한다. 동시에 대학이 있는 북서쪽에선 어렴풋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골프채를 놓은 소대장들이 자연스럽게 습격에 대응하기 좋은 자리들을 잡는다. 사복 차림일지언정 전투경험까지 벗어놓고 온 건 아니었다. 이윽고 헬기가 착륙한 클럽하우스 방향으로부터 일군의 경찰들이 접근했다. 전투복을 입고 자동화기로 무장한 그들은, 대대 장교들의 경계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총을 등 뒤로 멘 채 느리게 걸어왔다. 선두의 인솔자가 겨울을 향해 경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Sir. 주 경찰 소속 스테판 메이너드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배지를 보여준다. 겨울이 마주 경례했다. “반갑습니다, 메이너드 경감(Captain). 헌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는지.” 겨울은 계급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미국 경찰은 군과 같은 계급을 쓰지만, 주 경찰의 경감이 군의 대위와 정확하게 대응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경찰의 최고 책임자는 총경(Colonel/대령) 계급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일개 대령으로 취급할 순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주 정부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인사였다. ‘이런 주 경찰에서 경감쯤 되는 인물이 일선에 나섰다면……. 카운티 몇 개를 커버할 정도의 경찰 병력이 통째로 움직이는 상황인가?’ 비상대응체계의 핵심 관계자인 겨울은 이런 사항을 꼼꼼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메이너드 경감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답했다. “1030시경, 주 경찰 공식 계정으로 육군전쟁대학 어딘가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부하장교들의 긴장감이 올라간다. 겨울은 놀라움 없이 반문했다. “폭탄을?” “예. 급조폭발물의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더군요. 표적이 누구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만약 이게 장난이 아니라면 한 중령님을 노렸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신변 보호를 위해 저희가 출동한 거고요. 처음엔 숙소로 갔는데, 여기 계시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상하네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경감 앞에서, 겨울은 넷 워리어 단말을 꺼내보였다. “내 비상연락망으로는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거든요.” 역병에 대비한 연락망은 이런 상황에서도 유효해야 정상이었다. 유라를 위시한 독립대대 간부들이 총구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경감을 당황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어, 잠시……. 연락망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긴급사태다보니 각 기관별로 정보공유가 원활하지 못한 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부러 연락을 지연시킨 건 아니고요?” “……음.” 겨울의 질문을 받은 경감이 잠시 고민하다가 떫은 표정으로 애매하게 끄덕인다. “그랬을 수도……있겠지요.” 현장 인력이라면 경험이 없는 게 이상한 문제. 겨울이 지적한 건 같은 영역을 담당하는 부서가 다수일 때 빚어지는 관할권 다툼의 가능성이었다. # 450 [450화] #박제된 낙원 (12) 메이너드 경감이 해명을 하긴 했지만, 독립대대 간부들은 그와 부하들의 신분이 가짜이거나, 진짜여도 어떤 음모에 가담한 이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수상쩍은 정황이었으므로. 진정한 애국자들의 선례도 있다. 이에 메이너드를 비롯한 경찰 타격대원들은 무기를 손에서 아예 놓아버렸다. 이들도 나름대로 험한 경험을 쌓아왔겠으나, 지옥 같은 전장에서 생환한 현역 장교들의 경계를 받는 건 역시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팽팽했던 긴장감은 겨울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 간부와 병사들을 불문하고, 독립대대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겨울의 판단은 절대적이다. 각 중대 소대장들이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뺐다. 차상급자인 유라가 사과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기분 상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역병확산 이후 재정비된 비상연락망은, 재난 발생 시 해당 지역 내의 모든 군인, 경찰, 소방관 등의 관계자들이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파 받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메이너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악수에 응했다. “아닙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요. 그나저나.” 그가 겨울을 돌아본다. “역시 관할권 다툼이 맞는가봅니다?” “아무래도 그런 낌새네요.” “높으신 분들 경쟁에 휘말려서 피곤해지는 건 사양인데…….” 사안을 어느 부처가 주도하는가를 두고 위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하면, 현장에서도 당연히 업무상의 비효율과 파행이 빚어진다. 예컨대 인종차별 논란이 원인이 된 14년의 퍼거슨 사태에서도, 주립 경찰 및 주 방위군이 연방경찰 및 연방 법무부와 다른 명령계통에 속해 개별적인 대응을 보여준 바 있었다. 그나마 전시인 지금은 주 방위군의 지휘권이 대통령에게 넘어가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거 앤이 알면 엄청나게 화를 내겠지.’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겨울은 앤이 더 걱정이었다. 직제 상 수사국이 주립 경찰의 상위 부처라고는 해도, 주지사가 경찰을 감싸기 시작하면 그 관계가 유명무실해질 것은 뻔한 까닭. 자기 주에선 경우에 따라 대통령과도 파워 게임을 벌일 수 있는 게 바로 주지사다. 따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보다는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더 걱정되는 겨울이었다. 그래도 알려주지 않을 순 없는 노릇. 겨울이 문자로 이 상황을 전달하자, 앤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다친 덴 없죠?」 “그럼요.” 「그 사람 당장 바꿔줘요.」 할 말이 많겠지만, 간결하게 시간을 아끼는 그녀. 역시나 분노를 잔뜩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겨울이 넷 워리어 단말을 넘겨주자, 메이너드 경감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액정에 찍힌 건 앤이라는 이름뿐이었으니까. “이게 누군데 저한테 주십니까?” “FBI 부국장이요.” 헉. 경감이 헛숨을 들이킨다. 경찰 이외에 대대 간부들 중에서도 살짝 놀라는 이들이 일부 있었다. 앤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입단속을 그만큼 철저하게 해왔던 모양이다. 겨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발로였을까. “메이너드 경감입니다.” 겨울의 청각은 새어나오는 통화를 엿듣기에 충분했다. 앤의 음성은 사무적이면서도 상대를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메이너드에게 업무에 관한 주요 사항들을 자신에게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겨울도 앞서 눈여겨보았듯이, 그의 계급이면 일선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다 접한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내부 정보 역시도. 물론 그녀가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직무상의 불이익을 겪을 경우, 그리고 그것이 바로잡히지 않을 경우 수사국에 자리를 알아봐드리죠.」 겨울은 연인이 상당한 권력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메이너드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그녀는 겨울에게 조심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폭탄 운운한 메일이 거짓 협박일 가능성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겨울의 일인 이상 그녀도 꽤나 바빠질 것이다. 메이너드가 엄지로 어깨 너머 헬기착륙장 방향을 가리켰다. “함께 가시죠. 대학 내 수색이 완료될 때 까지는 안전한 작전본부로 모시겠습니다.” 발걸음을 나란히 한 겨울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수사국에 협력하는 거.” “하하.” 메이너드가 작게 웃는다. “오히려 제게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야지요. FBI 수사관이면 연봉이 보통 10만 달러인데……. 무엇보다, 지역 경찰이 수사국에 협조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것도 한겨울 중령의 신변에 관한 사안인걸요. 실수가 있어선 안 됩니다.” 앞부분은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되 뒤로 갈수록 진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서면보장이 없는 앤의 약속보다는 그 스스로의 생각에 의거하여 내린 결정일 것이었다. 겨울과 대대 간부들은 네 대의 헬기에 나뉘어 탑승했다. 측면에 저격수를 태운 헬기들은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현장 지휘소가 디킨슨 대학에 설치된 까닭. ROTC 강연 및 훈련 문제로 겨울도 몇 차례 방문했던 교정이었다. 지휘소와 전쟁대학과의 거리만으로도 출동한 경찰 병력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보잘 것 없는 규모였다면 지휘소도 바로 지척에 설치했을 테니까. 주요 교차로마다 경광등 달린 차량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겨울은 창 아래로 스쳐가는 칼라일 시가지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저격을 시도하기엔 불리한 환경이야.’ 탁 트인 공간이 드물뿐더러 높이가 높은 건물도 전무하다. 확보 가능한 거리는 기껏 해봐야 100미터 안팎이 최대였다. 앤이 조심하라기에 방탄복을 입고 다니긴 하나, 숙련된 저격수라도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겨울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겨울을 속여 넘겼던 강화종 위퍼가 이상한 거다. 전투계열의 보정과 엮여 작동하는 「통찰」이 겨울의 판단을 뒷받침했다. 이제 와서는 겨울 본연의 감각과 다를 바도 별로 없어, 있으나마나 한 도움이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전쟁대학에 진짜로 폭탄이 설치되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동기는 증오를 부추기는 쪽에도 있다. 이 경우엔 겨울을 노린다기 보다, 그렇게 보이는 게 목적일 것이다. 최종적인 표적은 꼴 보기 싫은 중국계 시민과 난민들일 테고. 유라가 대학 입구를 차단한 장갑차를 보고 놀랐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경찰용 방탄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색과 무장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차대는 군용과 동일하다.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헤드셋에 대고 하는 질문. 「설마 벌써 주 방위군이 투입되었나요?」 메이너드가 짧게 웃고 답했다. 「그럴 리가요. 폭탄이 터졌다면 모를까……. 저건 경찰 소유 장비입니다. 역병이 창궐한 뒤로 군용 장비를 들여오는 일이 늘었죠.」 「주민들이 불안해할 것 같은데.」 「저도 처음엔 놀랐습니다. 군수국이 경찰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어도, 우리가 장갑차를 굴리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치안이 꽤 양호했나 봐요?」 「글쎄요. 다른 동네는 몰라도 필라델피아 광역권이 워낙 개판인지라……거짓말로도 괜찮았다고는 못하겠군요. 그보다는 사실, 주 정부가 항상 이게 부족해서 말입니다.」 메이너드는 손을 들어 지폐 비비는 시늉을 해보였다. 유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자란 예산에도 불구하고 각 주의 경찰조직이 중무장을 시작한 건, 변종집단의 침입이나 그에 준하는 감염폭발을 경계한 조치였다. 물론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힘입어 쏟아져 나오는 장비들의 가격이 과거에 비해 저렴해진 면도 있었을 것이다. ‘백신이 완성되면 좀 덜하겠지.’ 종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겨울은 항상 그 사실을 유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겔론스의 원형을 확보한 뒤로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축적해왔을 연구들이 있다 하나, 임상실험을 거쳐 백신이 양산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그러나 종말을 끝냄으로서 얻는 특권은, 사실 겨울에게 있어 이렇다 할 의미가 없었다. 특권의 실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시작의 최솟값으로 고정되는 것. 여기엔 기술은 물론이고, 지위와 재산도 포함된다. 만약 겨울이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다면, 새로운 시작에서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적 배경이 주어지는 식이다. 이 기준은 몇 번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게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한 번의 삶으로 족하다. 봄의 친구로서도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반세기가 흐른 뒤의 봄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할 영역에 도달한 존재가 되어있을 테니까. 겨울은 이번 세상을 끝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폐기할 생각이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의 만남은 언젠가 있을 한 번의 이별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만큼의 잠재적인 두려움이기도 했다. 앤을 사랑하게 된 지금, 그녀가 없는 세상이라는 건 겨울에게 무척이나 공허한 것이 되었다. 어차피 누이가 아니었으면 진즉에 마침표를 찍었을 사후가 아니던가. 겨울은 다만 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졌다는 지표로서 종말의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차를 치운 주차장에 착륙한 헬기들은, 내려야 할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이륙했다. 주변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메이너드가 겨울을 사방이 열린 천막으로 안내했다. 지휘소에선 전쟁대학에서 진행 중인 수색작업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지휘소를 총괄하는 사람은 어딘가의 서장을 맡고 있었을 법한 경정(소령)이었다. 겨울의 등장에 천막 전체가 잠시 조용해졌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Sir.” “무언가 발견된 건 있습니까?” 겨울과 인사를 나눈 경정은, 겨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숙소부터 시작해서 수색범위를 넓혀가는 중이지만, 현재까지는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화면 속에선 언뜻 군복을 입은 이들도 스쳐지나갔다. 겨울은 그들 가운데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무장한 전쟁대학 생도들이었다. 수색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들은 현장 주변에서 경비를 섬으로서 경찰의 역할을 보조했다. 겨울이야 표적일 가능성이 높아 이곳으로 데려왔어도, 교육생들은 실전 경험을 보유한 현역 장교들인 것이다. 협력의 필요성 여부를 떠나 순순히 몸을 피하자니 자존심이 상했을 터. 자체적인 대응능력은 없다지만, 전쟁대학은 엄연히 육군이 소유한 시설이었다. 전체적인 배치와 움직임을 지켜보던 겨울이 재차 물었다. “이 정도 장비와 인력을 투입한 걸 보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예, 뭐.” 모호한 표정으로 정확한 대답을 삼가는 경정. “발신자의 행적이라든가 해서……,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으되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일단 지금은 저희에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어이, 한 중령님을 쉴 곳으로 안내해드려.” 겨울이 손을 들어 사양했다. “아뇨. 난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방해되지 않도록 하죠.” “흠……그러시다면야.” 경정은 대답 직후 살짝 등을 돌렸다. 오퍼레이터들을 줄줄이 채근하는데, 겨울이 보기엔 조금 불필요한 상황 확인이 섞여있었다. 현장에선 경찰견을 동반한 수색조가 대학 건물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D동 확보. 숙소는 안전하다.」 「도서관 1층 이상 없음. 브라보 팀, 2층으로 올라가겠다.」 긍정적인 보고들이 이어진다. 겨울은 이대로 조용히 끝나기를 바랐다. ‘시기가 안 좋아. 그렇잖아도 곧 난민지도자들의 부정이 폭로될 텐데……. 폭탄 테러와 때가 겹친다면 그 여파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킬 거야.’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의 결말, 사람으로서의 한계, 탁하게 흘러갈 세상,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의 비극을 불가항력으로 납득하려는 겨울이었지만, 그 비극의 강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지루하면서도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수색이 거의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갑작스러운 폭음이 울려 퍼졌다. 경찰의 무선망이 폭주했다. 「뭐야? 어디서 일어난 폭발이야?」 「기숙사 D동이라고? 거긴 아까 수색이 끝났잖아!」 헬기에서 보내는 화면은 장교 숙소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를 선명하게 잡아냈다. 이마를 짚은 겨울이 작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451 [451화] #박제된 낙원 (13) 폭탄의 위력은 약한 편이었다. 군용 플라스틱 폭약(C4)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1.5파운드(680그램) 정도. 그래도 수류탄 서너 개에 해당하는 화력이라 경시할 순 없지만, 보다 중요한 건 실질적인 살상효율이었다. 수류탄이 고작 일이백 그램 안팎의 화약으로 넓은 유효범위를 보여주는 것은, 잘게 쪼개진 강철 외피가 파편이 되어 박히는 덕분이다. 종류에 따라선 내부에 수천 개의 작은 쇠구슬들을 입혀 놓은 것도 있었다. 크기가 작은 상처들이라도 깊이가 깊으면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달리 말해, 폭발 그 자체만으로는 테러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볼 베어링을 바르지도, 쇠못을 박아놓지도 않았어.’ 겨울이 테러리스트의 진의를 의심하는 이유였다. 조사 결과, 기숙사에서 터진 폭탄엔 살상효율 증대를 위한 조치가 무엇 하나 행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13년의 보스턴 마라톤 테러에서도 압력솥 안에 베어링과 못을 채워 터트렸건만. 경찰의 수색을 농락한 범인이 이 부분에서만 허술했으리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늦은 시간, 앤은 겨울에게 메신저를 통해 수사 진행상황을 공유해주었다. 「Anne : 폭발 현장에서 이런 것이 발견되었어요.」 그녀가 전송한 수십 장의 사진들은 까맣게 박살난 무언가의 잔해를 모아놓은 것이었다. 「Anne : 폭탄 운반에 사용된 수제 RC 카의 잔해예요.」 텐트 안의 야전침대에 앉아 사진을 넘겨보던 겨울이 자판을 눌러 질문을 보냈다. 「RC 카라면 폭발 당시 범인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뜻인가요? 장애물이 많은 환경이니, 원활하게 조종을 하려면 300미터 이내에 있었어야 할 텐데.」 「Anne : 그렇진 않아요. 17번 증거품을 봐요.」 열일곱 번째 사진엔 반 이상 녹아내린 칩셋이 찍혀있었다. 모퉁이의 형상이 남아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뭉개졌다면 이게 칩이었는지 뭐였는지 알아보기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Anne : 그건 와이파이 칩셋이에요.」 「이런. 원격으로 조종했다는 말이군요.」 「Anne : 네. 범인은 IP 카메라를 해킹하여 수색 상황을 엿보다가, 수색 팀이 지나간 후에 RC 카를 돌입시킨 것 같아요. 차체에도 캠을 설치한 흔적이 있고요. 폭탄은 차체 위에 테이프로 둘둘 감아 고정시켰던 모양이고…….」 「추적은?」 「Anne : 아직까진 성과가 없네요.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유능한 해커가 개입한 게 분명해요.」 「그럼 막다른 길인가요?」 「Anne : 글쎄요. 우선은 모터의 거래내역을 조사하는 중이에요. 범인은 RC 카에 독일제 저소음 모터를 집어넣었는데, 이건 재작년에 수입과 제조가 중단된 물건이거든요.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어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죠. 요주의 인물들의 최근 행적과 대조해보면 뭔가 걸리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겨울이 다시 문자를 보낸다.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Anne : 부자연스러운 부분이야 많지만, 특히 어떤 면에서요?」 「경찰의 움직임을 감시할 능력은 있으면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실은 몰랐다는 점이요.」 폭발은 겨울이 머무는 숙소의 복도에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언론은 테러의 표적이 겨울이었다고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지만, 정말로 겨울을 죽일 셈이었으면 사전에 경고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부터 인명손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고 봐야 자연스럽겠지.’ 앤은 일단 겨울의 심증을 긍정했다. 「Anne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목적이 따로 있는 음모일 확률이 높죠.」 그러나, 하고 덧붙이는 말. 「Anne : 지금으로선 심증에 지나지 않아요. 어쩌면 이 테러가 일종의 예고이자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고요. 이런 유형의 테러를 저지르는 연놈들은 구역질나는 욕망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중에게 관심을 받는 데서 느끼는 만족감,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데서 느끼는 자기 존재의 격상……. 혹은, 명성 높은 전쟁영웅을 지배하는 데서 오는 쾌감.」 「지배?」 「Anne : 누군가의 생사를 좌우하는 건 근원적인 차원의 지배라고 할 수 있죠. 겨울도 알잖아요.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그 명제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는 거.」 겨울로선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점이었다. ‘하기야 팬에게 살해당한 유명인이 한둘은 아니지.’ 한겨울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었다는 착각. 그 착각을 즐길법한 정신 상태라면 누구든 용의선상에 오를 자격이 있다. 「Anne : 내 말은」 앤의 발신이 이어졌다. 「Anne : 정황이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사고를 가둬두지는 말자는 뜻이에요. 확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둬야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던 사건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네요.」 수긍하고서, 겨울은 소리 작게 틀어놓은 TV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판을 두드렸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 것을.」 뉴스 캐스터는 이 순간에도 양용빈 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전하는 중이었다. 붉은 바탕의 자막으로는 「속보 : 한겨울 중령, 다친 곳은 없는 것으로 전해져」라고 떠있었고.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을지는 짐작조차 어렵다. 앤이 공유한 정보는 아직 언론에 풀리지 않았다. 넷 워리어 단말이 진동한다. 「Anne :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사람이 원래 그런 걸요. 진실이 빠르게 밝혀지기를, 그리고 그 진실이 우리가 바라는 내용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Anne : 어쨌든 겨울이 무사하기만 하면 최악의 사태는 피하는 셈이에요.」 「Anne : 그러니 눈 좀 붙여요, 내 사랑. 시간이 늦었어요.」 앤의 염려는 언제나처럼 상냥했다. 겨울은 불현 듯 그녀의 향기가 그리워졌다. 이 시간까지 사무실에 있을 모습이 선하다. 어쩌면 백악관이거나, 백악관으로 가는 길일지도 몰랐다. 크레이머는 분명 이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므로. 「당신은요? 퇴근도 못했을 텐데.」 「Anne : 나는 괜찮아요. :)」 더 물어봐야 소용없을 일이었다. 겨울은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신체적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혼자만의 어둠 속에서 연산가속으로 흐르기를 기다리는 밤이다. 겨울은 꿈을 꾸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요즘처럼 아쉬울 때가 없었다.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돌아온 감각은 촉각이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겨울은 조금 놀라서 눈을 떴다. 「생존감각」이 있으니 적대적인 접근일 리는 없지만- “이런. 깨워버렸네요.” 눈앞에 한껏 미소를 머금은 앤의 모습이 보인다. “앤?” “서프라-이즈!” 머리맡에 꿇어앉아있던 그녀는, 막 상체를 일으킨 겨울을 와락 끌어안았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겨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은 호흡을 반복하는 그녀. 스읍-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는 숨결이 옷을 통과하여 따뜻하게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가 그리웠던 건 겨울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보다. 머릿속에 의문이 맴돌았지만, 겨울도 일단은 앤의 향기를 만끽했다. 몇 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질문을 꺼내는 겨울. “어떻게 된 거예요?” 앤은 겨울의 허벅지에 걸터앉은 채로 답했다. “현장을 살펴보러 왔죠. 수사체계도 확실하게 장악할 겸.” “FBI 부국장이 직접?” “이상할 것 없잖아요. 법무장관도 움직이는 마당에.” 그리고 그녀는 겨울의 입술을 훔쳤다.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빨아들이다가,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잇새로 촉촉하게 젖은 혀를 밀어 넣는다. 회를 거듭할수록 진해지는 맛이었다. “후우-” 한참을 탐닉한 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은데…….” “…….” 겨울도 동감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런 야전텐트에서 사랑을 나눌 순 없는 노릇이다. 누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두 사람이 연인인 게 밝혀져도 여전히 비난 받을 스캔들이었다. 겨울로부터 떨어진 앤이 다짐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거예요. 적어도 내일까진 여기서 머무를 거니까.” “바쁘지 않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30분을 못 만들려고요.” “……30분?” 고개를 기울이는 겨울에게, 앤은 장난을 치는 악동처럼 웃어보였다. “네, 30분. 가끔은 색다른 경험도 좋잖아요?” 겨울은 앤의 이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밝아지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연인간의 신뢰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줄 거라는 믿음. 어느 쪽이든 겨울에겐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이따가 봐요.” 앤은 짧은 재회 끝에 가까운 약속을 남기고 떠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은 그녀의 얼굴을 아침 뉴스에서 볼 수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달콤함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장 생중계 영상에 FBI 부국장 조안나 깁슨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통제선 바깥에서 뒤따르며 아우성치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늦추며 돌아섰다. 「배후에 양용빈 주의자가 있을 것이 확실하지 않느냐고요? 현 시점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에게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면 경솔한 판단을 삼가십시오.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의 무책임한 보도는 수사에 혼선을 끼칠뿐더러 사회 전반에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 시킵니다.」 그러자 어느 기자가 악을 쓰듯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혔다. 「그럼 범인에게 다른 동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앤은 오연하게 끄덕였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이에 기자가 다시 소리친다. 「정황증거가 이토록 명백한데 다른 증거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혹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들. 기자가 말하는 그들은 당연히 중국계 시민들을 의미한다. 즉, 그들 전체를 양용빈 주의자들과 한통속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차 말씀드립니다. 범인의 동기와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이 나라는 단 한 번도 테러에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추적할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또 일 년이 걸리든 십년이 걸리든, 테러의 배후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녀는 선언하듯 덧붙였다. 「이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새삼스럽게 앤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여운이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수사의 경과에 관해 추가적인 언급이 없는 것을 빌미로, 이날 오후부터 몇몇 언론이 수사당국의 무능함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수사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던 보스턴 테러 당시에도 범인의 정보가 공개되기까지 이틀은 걸렸건만. 어느 뉴스 채널은 앤의 말 중 일부를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반복적으로 송출하기도 했다. 「현 시점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뒤늦게 뉴스를 접한 사람의 눈엔 이러한 보도가 어떻게 보이겠는가. 한편, 펜실베이니아 곳곳에서 시민들의 신고가 빗발치고, 이에 따라 수상해 보이는 인물들이 연달아 체포되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에 기초하여 체포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이나포비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관들, 4년 임기제로 선출되어 인지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보안관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했다. # 452 [452화] #박제된 낙원 (14) 이튿날,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 밤새 양용빈을 찬양하는 내용의 인쇄물을 살포한 것이다. 거기엔 ‘양용빈 장군의 신념’이 체계적으로 녹아있었다. 불특정다수의 익명성과 악의적인 집단지성이 결합해 만들어낸 그 사상이다. 앤은 인쇄물의 내용이 영문이라는 점을 수상하게 여겼다. 휴식 시간의 길지 않은 통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게,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중국계 시민 중 70%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거든요. ‘깨어있는 동포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싶었다면 당연히 중국어를 썼어야죠.」 앤의 말처럼, 중국계 시민들은 영어를 모르는 인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순 없지만…….’ 미국은 공식적인 공용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이민자들이 모여 출신국가의 언어만을 사용하는 거주지는 그밖에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코리아타운이 그렇고, 유럽계 공동체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사용인구가 많은 스페인어는 제2의 공용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어 사용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예전부터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차이나타운 이외의 장소에서조차 당연하다는 듯 중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로. 겨울은 그들의 폐쇄성을 곱씹었다. 한편으로는 지나간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투입될 당시, 중간 기착지로 잠시 거쳤던 엔젤 아일랜드의 옛 이민국 사무소. 겨울과 앤은 그 앞의 차이나 만(China cove)에서 피쿼드 호로 향하는 잠수함을 탔었다. 옛 이민국 사무소는 사적지로 지정된 건물답게 내부에 이런저런 읽을거리들이 많았다. 그 대부분은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반백년 이상 시행되었던 「중국인 배척법」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국계 공동체들의 폐쇄성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 피해의식과 적개심은 공동체의 폐쇄성을 강화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폐쇄성은 지속적인 부조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폐쇄성으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고, 갈등으로 인해 다시 폐쇄성이 견고해지는 악순환. 겨울이 생각하는 탁류의 단적인 예시다. 한 번 혼탁해진 물이 스스로 맑아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선을 넘어선 이후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지난 세기의 편견이 현 시점에서 새로운 불씨를 더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은 아닌 것들과의 전쟁은 그 악순환을 끊어버리기에 부족했다. 다만 박제된 소년에게 잠시 사람을 넘어서는 꿈을 꿀 기회를 주었을 뿐. 이제 소년이 아니게 된 겨울은 오래 꾸었던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중이다. ‘아니, 내려놓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씁쓸한 여운은 여전하다. 앤은 이번 사건의 배후가 앞선 테러와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RC카 대신 다수의 드론을 썼다 뿐이지, 수법 자체는 먼젓번의 테러와 일치해요. 와이파이 칩셋도 같은 제품을 사용했고, 클라우드 망의 흔적을 지운 기술도 비슷하죠. 인쇄물에선 어떤 단서도 확인할 수 없었고요. 굉장히 치밀한 놈이에요. 놈인지 놈들인지.」 “이번에도 추적이 어렵다는 뜻이네요.” 「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많은 피가 흐를 거예요. 난 당신이 거기에 상처입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황으로 미루어, 겨울은 결국 불씨를 튀길 부싯돌로 이용당한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자고는 했어도, 이제 와서 범인의 동기를 의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난 당신이 더 걱정이에요. 경솔하게 떠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됐어요, 그런 시답잖은 놈들은.」 앤은 겨울의 걱정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날 백날 물어뜯어봐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고작인데, 그마저도 쉬울 리가 없죠. 내가 강등당하면 국장님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테니.」 “국장님의 계획?” 「연말의 선거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하라는 제안을 받으셨나 봐요. 본인도 장차 대선가도에 진출하고픈 욕심이 있는 모양이고. 뭐, 국장님 정도면 그만한 야망을 품을 법한 인물이긴 해요. 쿠데타 진압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데다, 우선 사람이 괜찮으니까요.」 “아…….”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지명한 부국장을 반년도 지나지 않아 해임하는 건 악수일 수밖에요. 기존의 강인한 리더십이라는 이미지에 상처를 입는 셈인걸요. 선거를 앞두고 여론에 휘둘렸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에요. 게다가 난 페어 스트라이크 건으로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고요.」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을지언정 FBI 내부에서만큼은 영웅으로 인정받는 앤이다. 그런 앤을 잘라내느니, 국장 입장에선 차라리 의원 출마를 미루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그럼 욕이나 한바탕 해주고 나오면 그만이죠. 애초에 원해서 앉은 자리도 아닌걸. 겨울도 알잖아요? 내가 되고 싶었던 건 당신의 아내이지, FBI 부국장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거.」 “…….”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너스레를 들으며, 겨울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이렇게 가볍게 말하고는 있어도, 정말 그렇게 되면 그녀에겐 무척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겨울이 손쓸 수 없는 현재에 아쉬움을 느끼듯이. 달리 맡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에서 부국장 자리를 받아들였던 앤이니까. 그녀의 태도는 겨울을 안심시키려는 배려였다. 「아,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겨울이 그녀를 불렀다. “앤.” 「네?」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큭큭.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는데, 내가 더 많이 사랑해요. 나중에 봐요.」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의 가벼움과 달리, 사태는 점점 심각하게 흘러갔다. 일군의 무장한 시민들이 차이나타운을 포위한 것이다. 여기엔 정규군에 필적하는 장비를 갖춘 민병대원들도 섞여있었다. 이들은 길목을 봉쇄한 경찰과 대치한 채로 성난 구호와 욕설을 외쳐댔다. 경찰들의 긴장감은 화면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아직 주방위군이 출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들은 시위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중국계 거주자들을 잠재적 용의자로 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길목을 봉쇄한 이유부터가 검문검색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거주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의지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오후 2시 11분, 끝끝내 총격전이 시작되고 말았다. 중국계 시민들은 자기보호를 위해 총을 들고 자경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다수의 언론은 그들의 행동을 불공정한 태도로 다루었다. 「시청자 여러분! 보십시오!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여성 앵커가 경악한 음성으로 소식을 전한다. 화면에서 보여주는 건 매양 중국계 자경단이 거리를 향해 발포하는 광경이었다. 설령 자경단 쪽에서 먼저 발포했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줘야 할 텐데, 자료화면이랍시고 경찰들이 몸을 피하는 모습들을 삽입하니 시청자 입장에선 왜곡된 인상을 받는 게 당연했다. 앵커는 중간 중간 이 사태와 전혀 무관한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작년의 통계에 따르면, 시민권을 보유한 차이나타운 거주자들의 평균 소득은 무려 6만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의 평균 소득이 4만 달러에 불과한데도 말이죠. 저들은 그러한 부를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일까요?」 교묘한 화법이었다. 중국계 시민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거라는 인상을 주는. 이는 또한 약탈을 조장하는 듯한 멘트였다. 이런 악의가 먹혔던 것일까? 폭동의 규모는 시시각각 커져만 갔다. 필라델피아가 치안이 마냥 좋은 도시는 아닐뿐더러, 같은 광역권 내에 미국 최악의 우범지대인 캠든(Camden)이 위치한 까닭이다. 이곳은 방역전쟁 이전부터 불법적인 무기거래와 마약밀수의 중심지로 악명이 높았다. 차이나타운과 캠든은 심지어 거리상으로도 가까웠다. 캠든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곧바로 차이나타운이었으니까. 넷 워리어 단말의 위성지도로 이를 확인한 겨울이 짧게 신음했다. 그리고 곧 다시 한 번 신음했다. TV 화면에 비친 시위대의 현수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령님! 우리의 영웅! 이번엔 우리가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맙소사.” 저기서 말하는 중령이 겨울 이외의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었다. 주방위군 투입은 사태 발생 후 한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이는 이례적으로 빠른 결정이었으나, 도시의 나머지 구역 보호를 우선시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높은 등급의 비취인가를 보유한 겨울은 그 배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나.’ 겨울은 이미 장교로서 군의 치안유지활동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해당 교육에서 예로 든 사건 중의 하나가 92년에 일어난 LA 폭동이었다. 일단 도시적인 규모의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나면, 평소부터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소외계층 역시 각자의 동기로 무질서에 합류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도시의 나머지 영역을 먼저 진정시키겠다는 결정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화재를 진압할 때 불이 번질 방향의 나무를 미리 베어내는 이치와 같았다. 현 시점에서 투입된 군 병력이 고작 3개 대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했다. 광역권의 크기와 시위대의 무장 수준을 고려하면 1개 여단조차 부족할지 모른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겨울은 내일부터 보수교육이 재개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연락을 해온 사람은 육군 교육사령부의 어느 대령이었다. “Sir. 지금은 다소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대학으로 복귀한 겨울은 이제 막 숙소를 옮긴 참이다. 전쟁대학 교정의 분위기는 뒤숭숭했고, 폭탄이 터진 자리엔 여전히 금줄이 쳐져 있었다. 추가 테러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곳에도 주방위군 병력이 투입되어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 경비를 맡고 있던 경찰과는 서로 호흡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끝을 흐리는 겨울에게, 대령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비상대응체계 구축을 늦출 순 없잖나. 백악관이 거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인데. 이것도 일종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도 명령을 받으면 수행해야 하는 게 우리들 군인 아니던가.」 “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서부지역 비상대응체계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바로 크레이머 대통령이었다. 쇼맨십이 원체 강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대응체계의 발효일자를 한참 전부터 확정지어놓은 상태. 그러니 본인의 체면 때문에라도 날짜를 늦추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었다. 「뭔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게. 내가 최선을 다해 편의를 봐주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당연한 일이지.」 이후 대령은 전화를 바로 끊지 않고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겨울은 대령이 자신의 식견을 어필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이 대령에게서 처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칼라일 주둔 병력이 속한 사단의 사단장도 점심 무렵 겨울을 찾아와 식사를 함께했던 것이다. 겨울로선 이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로저스 중장님의 진급 건이 대체 어느 선까지 알려진 거지?’ 문민통제의 원칙이 여전히 지켜지는 미군이지만, 그럼에도 장군은 예전부터 실력만큼의 정치력으로 올라가는 자리였다. 게다가 최근의 미군은 급격한 팽창으로 말미암아 장교와 장교간의 스폰서 관행이 만연해진 상태였다. 이는 2차 대전 당시에도 있었던 일. 기존의 체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조직이 커졌을 때, 개개인이 혼란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 그러니 로저스의 중장 진급에 얽힌 비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겨울과의 인연을 만들어두고 싶어 할 법 했다. 중앙정보국이 일부러 정보를 퍼트렸을 가능성도 있겠다. 장차 겨울을 정보국과 군 사이의 확실한 연결망으로 삼기 위해서. 정보국의 직접적인 접촉엔 거부감을 보일 군 인사들도, 겨울을 매개로 한다면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줄 확률이 높으니까. 이러한 연상의 끝에서, 겨울은 갑작스러운 염증을 느꼈다. 이런 시국에서도 자기 잇속을 먼저 차리는 군상들과, 그 군상들의 표적이 된 자신. 저 밖에서 세차게 흐르는 탁류. 그로 인하여 아직도 멀기만 한 앤과의 생활. ‘이게, 내가 도달한 최선의 세상이라니.’ 겨울의 속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453 [453화] #박제된 낙원 (15) 이는 낯선 스트레스였다. 누이가 자신을 따라 시드는 것이 싫어 불가피하게 사후를 연장하던 무렵엔, 그러니까 스스로가 벌써 죽었다고 여기던 무렵엔, 이토록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건만.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고단해지는 것일까. 겨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더 살고 싶어졌기에 숨이 막히는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별 하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겨울에게 찾아온 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앤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박제가 다시 생명을 얻는 과정이었다. 산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보호하는 일. 앤에게 프로포즈를 할 때 바깥세상에 대한 연민을 접어두었던 것이 그 예다. 필라델피아의 소요는, 이 세상이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은 저 밖의 세계를 급격하게 닮아갈 터. 그것을 두고 사람 사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평한다면, 즉 사람들의 무대는 원래부터 그렇게 기울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노라고 한다면, 겨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었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싫은 것에 가깝다. 숙고하던 겨울은,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겨울을 핑계 삼아 약탈과 강도와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는 시위대에게 있어서 겨울 이상의 진정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태를 가라앉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법이었다. ‘내일부터 교육을 재개한다고 통보한 시점에서 상부의 뜻은 분명하지만…….’ 암살 위협이 있다곤 하나, 군인은 본디 지키는 쪽이지 지켜지는 쪽이 아니다. 그러나 위쪽에선 이번 소요를 진정시키는데 겨울을 쓰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겨울은 이를 자신에 대한 보호라기보다 사태에 대한 적극적 방관으로 이해했다. 군과 정계의 지도부라고 모르겠는가. 테러의 진정한 목적이 겨울의 목숨을 도모하는 것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정치적인 이해득실과 그 이상의 중국계 혐오정서가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외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불안 요소가 될 소수인종을 끌어안고 있느니, 차라리 이번 사태를 빌미로 뭔가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는 편이 낫다. 필시 그런 계산이 아닐는지. 때로는 자신의 선동에 자신이 휘말리는 사람들도 있다. 겨울은 우선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자신을 소요 현장에 투입해달라는 요청을 올렸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반려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겨울은 다른 경로를 통해 같은 의견을 상신했다. 여기서의 다른 경로란, 자신을 한겨울 중령의 스폰서로 여길 인물을 뜻한다. ‘어차피 내겐 더 이상 싸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처음 하는 생각이 아니다. 겨울의 예감은 확신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냥 넘기고, 훗날 정치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를 바꿔나간다는 선택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말하자면 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아직은 호미나 가래로 막을 수 있다. 역병은 초기에 진압해야 희생이 적어지는 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한겨울 중령에 대한 경의와 호감이라는 호미가 녹슬어버릴 것이기도 하고. 겨울의 랩탑이 신호음으로 새로운 메시지의 도착을 알렸다. 「Lt Gen. Rogers : 중령. 귀관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당최 달라지는 게 없군.」 인트라넷 메신저에 뜬 텍스트는 로저스 중장의 질책이었다. 「Lt Gen. Rogers : 아무리 선의와 희생정신에서 비롯된 제언일지라도, 기존의 규율과 명령계통을 우회하는 건 장교로서 모범적인 처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송구합니다.」 「Lt Gen. Rogers : 하물며 그것이 귀관 스스로에게도 위험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귀관이라면 현재 방침의 배경에 POTUS(대통령)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습니다.」 「Lt Gen. Rogers : 아는데도 그렇게까지 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결국은 걱정이었다. 계급은 여전히 중장이지만 로저스의 입지는 포효하는 폭풍 작전 당시보다 높아졌다. 합동참모본부로 영전하여 전략기획 및 정책본부장을 맡게 된 것이다. 합동참모본부는 육, 해, 공군의 이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전장이다. 군령권이 없다는 한계도 그 위상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그런 곳으로 들어간 만큼, 로저스의 우려는 보다 확실한 근거를 깔고 있다고 봐야 했다. 겨울이 자판을 두드렸다. 「저는 초동조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Lt Gen. Rogers : 즉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고?」 「이미 늦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는지요? 불타버린 폐허를 재건할 순 있을지언정 탄화된 사람을 되살릴 순 없는 법이니까요. 이대로 둔다면 혼돈은 전과확대에 돌입할 겁니다.」 겨울은 혼돈을 의지를 지닌 적처럼 표현했다. 전투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의 대부분은, 전선이 돌파 당했을 때가 아니라 돌파구를 통한 추가 공격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빚어진다. 군인에게 어울리는 비유였다. 「Lt Gen. Rogers : 흠…….」 세상을 보는 눈은 로저스에게도 있다. 장군다운 관록과 식견도 있다. 다만 그가 중국계 시민들을 어찌 바라보는가는 겨울에게 있어서 미지의 영역이었다. 「Lt Gen. Rogers : 올레마에서 내가 들려주었던 말을 기억하는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Lt Gen. Rogers : 우리가 신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던 부분.」 「예. 기억합니다.」 「Lt Gen. Rogers : 귀관에겐 아무래도 신앙이 필요해 보이는군. 세상의 모습으로 미루어 신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지는 의문이지만,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귀관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가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니까.」 “……,” 겨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적인 교유가 깊다고만은 할 수 없는 사이인데도, 중장의 통찰은 겨울이 보는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Lt Gen. Rogers :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다. 적어도 동기가 불순한 요청은 아니니. 다만.」 「말씀하십시오.」 「Lt Gen. Rogers : 확실히 해두지. 이건 어디까지나 귀관이 나의 전우이기에 주는 도움이다. 난 내 이력서에 귀관의 이름을 적어 넣을 생각이 없다.」 의도를 오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겨울의 청탁으로 진급한 당사자다 보니 이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게 겨울과의 접점을 묻는 사람도 많았을 테고. 근래 들어 겨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많은 장군들이 겨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전쟁영웅에 대한 존중과 호감이 밑바탕에 깔려있겠지만, 동시에 전역이나 퇴역 이후의 구직활동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평생 군인이었던 장군들의 전역, 혹은 퇴역 이후 진로는 셋 중 하나였다. 정계에 진출하거나, 군과 관계된 기관에서 명목뿐인 자리를 맡거나, 아니면 사기업의 사외이사로 들어가거나. 이 중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은 로비스트로서의 잠재력이 중시된다. 이는 또한 장군들에게 있어서 자존감이 달린 일이었다. 긴 시간 군의 정점에 군림하다가 하루아침에 뒷방 늙은이가 되긴 싫은 것이다. 우울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노릇. 성공적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동료들과 비교되기 시작할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겨울과의 관계는 장군들에게 장래를 위한 스펙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달리 말해, 방역전쟁이 실질적으로 종결되는 시점에서 전역 및 퇴역을 고려하고 있는 장군들이 많다는 의미였다. 방역전쟁 내내 고급장교의 심각한 결핍을 겪었던 미국이 군축을 하겠답시고 현직 장군들을 무더기로 내쫓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중요보직의 감소는 불가피하며, 이에 따라 현역으로 남아있는 장군들에게 만족할만한 대우를 해주기도 어렵게 된다. 그저 유명무실한 자리들을 복사 붙여넣기 하듯 양산하여 장식품처럼 앉혀놓는 게 고작일 것이다. 급여도 어떤 식으로든 조정하게 될 터이고. 그러므로 장군들 스스로 보다 나은 대우를 찾아 나간다면 정부로서도 막을 이유가 없다. ‘예비역으로 지정해두었다가 비상시에 동원하면 그만이니까.’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험을 유지할 수 있는 정부와, 평화로워진 세상에서 더 나은 세상을 영위할 수 있는 장군들. 양자에게 만족스러운 선택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관점은 누군가에겐 수치스럽거나 모욕적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특히, 전우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Lt Gen. Rogers : 그러니 일단 조용히 기다리고 있도록. 이건 명령이다. 이 이상의 군인답지 못한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지만, 합동참모본부엔 군령권이 없다. 따라서 로저스에겐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명령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겨울에게 개인적인 담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기면 내 신뢰를 잃어버릴 줄 알라고. 겨울이 답신했다. 「Sir. 저는 제가 당신의 전우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Lt Gen. Rogers : 그거면 됐다. 해가 바뀌거든 술이나 한 잔 하지.」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의 말이었다. 겨울이 연락할 사람으로 로저스를 선택한 것은, 됨됨이와 유능함에 대한 신뢰도 있거니와, 그가 속한 합동참모본부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권한이 애매한 대신 간섭하는 영역은 지극히 넓다. 애초에 대통령을 위한 자문기관이었으므로. 로저스의 성격이면 정식 명령계통을 거쳐 아예 대통령을 설득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급격한 승진을 거듭했다곤 해도 그 역시 장군. 이럴 때 쓸 정치적 자산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겨울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는데도, 어두운 방의 TV는 점점 더 격화되는 유혈사태를 보여주었다. 쨍그랑! 화염병이 깨지며 불길이 치솟는다. 화염에 휩싸인 가게는 진즉에 약탈당해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깨진 창가엔 중국계 자경단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걸려있었다. 그 아래의 벽은 진득하게 말라가는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방송사의 헬기와 드론이 저공비행으로 시가지를 가로지른다. 도시 곳곳에서 차량의 도난방지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차이나타운 자경단이 수적 열세에 밀려 동쪽 경계로부터 한 블록 뒤로 물러났기에, 당장은 총성보다 약탈의 함성이 더 높았다. 불운하게 제때 물러나지 못한 자경단은 도로 위에서 린치를 당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새로운 시체가 널브러졌다. 이제 와서 새로운 풍경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 지옥 같은 거리를 발로 뛰어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용감한 행동이기 이전에, 폭도화한 시위대가 기자들에게까지 적대적이진 않았던 까닭이다. 시위대에겐 명분이 있었다. 그 명분이 그들의 행동에 최소한의 제약을 걸어놓았다. 그들은 카메라를 환영했고, 명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데 힘썼으며, 심지어 기자들을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몇 번 채널을 바꾸던 중에 겨울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마르티노 씨?’ 길버트 마르티노. 올레마에서 구조한 종군기자단의 한 사람이었다.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은 방송사 로고를 보고 그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미리 연락처를 교환해두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기본적으로 언론인이라 주의할 필요는 있겠으나, 생명의 은인인 겨울에게 함부로 굴지는 않을 테니까. 구해주었을 당시엔 겨울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던 사람이다. 잠시 후, 로저스 중장의 최종답신이 도착했다. 특수전사령부 명의로 내려온 명령과 함께. 해당 명령은 현장의 주방위군 및 경찰 병력을 인수하여 소요 진압에 동참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었다. 어느 부대를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인수해야하는지, 규모와 시간과 방식과 이동수단까지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 명령을 만들어내고자 로저스가 어떤 수단을 동원하고 어떤 무리를 감수했을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고마운 마음으로 활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새벽 1시 30분. 차이나타운 서쪽의 로건 스퀘어(Logan Square).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정말, 숨넘어가게 달려왔습니다.” 겨울이 지정한 랑데부 포인트에 늦지 않게 도착한 마르티노가 곧 죽을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그의 스태프들도 마찬가지. 도로 상황이 엉망이라 차량을 제대로 이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헬기를 부를 수 있었을 텐데.’ 본사에서 헬기 지원을 해주지 않은 걸까, 아니면 혹시라도 특종을 빼앗길까봐 본사에까지 비밀을 지킨 걸까. 어쨌든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겨울은 그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입니다, 마르티노 씨. 카아 씨와 클라인 씨도.”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감격하는 카아.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겨울을 찾은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중령님!” 겨울은 손을 들어 병사들의 경계를 늦추었다. 아는 목소리였으니까. “타미리스 양? 당신도 와있는 줄은 몰랐네요.” 새로 나타난 사람은 역시 종군기자단의 한 사람이었던 헬렌 타미리스와 그녀의 카메라맨이었다. 호흡을 조금 회복한 마르티노가 지친 기색으로 웃었다. “제가 귀띔해줬지요.” “특종을 나누시려고요?” “뭐, 사내의 경쟁자는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 사이니까요. 서로가 이 도시에 있다는 걸 뻔히 아는 마당에, 같이 중령님께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나중에 원망을 듣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믿을만한 기자가 둘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었다. “반가운 마음은 깊지만 주어진 여유가 없네요.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겨울의 말에, 마르티노가 묻는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군요. 통화에서 당부하신 것 외에 특별히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아뇨. 그저 중립적인 태도를 부탁드리죠.” “그거라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씨익 웃는 그는, 필라델피아에 출동한 겨울의 모습이 방송을 타는 것만으로도 이 폭동의 국면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언론인이 미디어의 힘을 모르는 쪽이 이상하지.’ 겨울이 동반한 병력의 이동과 배치를 지시하는 동안, 마르티노와 타미리스가 바쁜 걸음으로 따라다니며 계획된 질문을 던졌다. “지난 폭탄 테러는 중령님을 노린 양용빈 주의자의 소행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나타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겨울은 명령의 배경을 모르는 척 연기했다. “당연한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의 의무는 시민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그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까?” “증거가 없을뿐더러,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시민들을 보호해야죠.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 테러리스트가 숨어든 셈이니까요.” “이 방송을 보고 있을 필라델피아 주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군과 경찰은 도시의 질서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저희를 믿고 안전한 곳에서 상황이 안정되기를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화면 속 풍경으로 위치를 특정한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시민들의 대부분은 조금 전까지 시위대로서 거리를 행진하던 이들이었다. 애당초 거리로 나와 있던 이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한편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흩어졌다. 진정한 의미에서 폭도가 되었던 세력이다. 겨울에게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총성이 울려 퍼지는 빈도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렇게 간단한 걸…….’ 겨울은 한숨을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차이나타운 인근에 진짜 양용빈 주의자가 있지 말란 법 없고, 따라서 저격의 우려가 상존하는 상황. 그러나 겨울을 겨냥한 총성이 터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을 검거하는 광경이 중계되면, 그것을 재료 삼아 물 타기를 시도할 수 있으니까. 경찰들의 통제선 너머의 시민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봐! 이유라 중위도 있어!” “진짜네? 근데 호랑이 가죽 망토는 어딨지?” 이를 들은 유라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 454 [454화] #박제된 낙원 (16) 겨울이 인수한 병력은 한 개 중대의 주방위군 및 연방보안청 기동타격대(SOG)와 총기단속국(ATF) 요원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면면을 보면 되는대로 긁어줬다는 인상이 강하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충분한 병력도 아니었다. 모두 연방정부의 지시를 받긴 하지만, 어느 부처든 자기네 인력을 내놓기는 싫은 법이었다. 그 상대가 겨울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겨울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겨울이 여기 있는 한 대놓고 공격해올 미치광이들은 없거나 드물 것이기 때문. 즉석에서 군경 합동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독립대대 간부들에게 통솔을 맡긴다. 주방위군이든 경찰이든 당연히 원래의 지휘관들이 존재하지만, 서로 체계가 상이한 양측이 같이 움직이려면 중간에서 조율을 해줄 참모들이 필요하다. 겨울이 독립대대 장교들을 데리고 온 첫 번째 이유였다. 명령서를 확인하고 바로 달려온 것이긴 하나, 작전을 구상할 시간은 충분히 많았다. 겨울은 지하철역을 거점 삼아 벽에 붙은 지도를 임시 상황판으로 개조하고, 간부들을 모아 속사포 같은 명령을 쏟아냈다. “이곳 레이스 바인(Race Vine) 역을 연락소 겸 대피시설로 지정하겠습니다. 보호가 필요한 시민이 있다면 우선 지하역사에 수용하세요. 히로노부 소위.” “예!” “한 개 분대를 차출하여 지하철 역 경계에 투입하고, 책임자를 결정한 다음 보고할 것.” “알겠습니다!” “부상을 당한 시민은 맞은편의 대학병원으로 유도합니다. 강선열 소위는 이걸 가져가서 병원 원무과와 교섭하세요. 선수금 받은 셈 치고 이쪽에서 보내는 부상자들을 수용하라고. 내 개인 자격으로 치료비를 대납하는 형식입니다.” 겨울이 내민 것은 미리 작성해서 가져온 수표였다. 서명은 물론 겨울의 것. 이런 비용이 벌써 공금으로 할당되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강선열 소위가 경악했다. “2, 20만 달러? 어째서 이런 데 사비를…….” “행정상의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죽는 사람이 나올 테니까요. 그 금액이면 부족한대로 시민들의 응급처치를 의뢰할 정도는 되겠죠. 바로 가요. 10분 주겠습니다.” 겨울의 단호한 태도에 강 소위는 당황한 기색 그대로 수표를 받아들었다. 겨울의 이름과 서명이 적힌 수표는 그 자체로 강력한 협상력을 발휘할 터였다. 단순한 금액을 넘어서 추후 병원의 광고효과를 노릴 수도 있는 일이다. 미국의 병원은, 이렇게 기름칠을 하지 않고 환자를 맡길 경우 수용능력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부상자를 방치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치료를 해주더라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비용을 겁낸 환자가 처치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이걸 꼭 영리화 된 병원만의 책임으로 보긴 어렵다. 원래 이런 재난 상황에서의 환자 수용은 병원에게 손해를 보기 십상인 일. 사태 수습 이후 치료비를 청구하려고 보면, 치료 받은 당사자와 시 당국과 주 당국과 연방당국이 서로에게 청구서를 떠넘기기 일쑤였으니까. 결국 치료비는 병원 차원에서 대손상각 처리될 확률이 높다. 치료 받은 당사자는 그 전에 벌써 파산한 상태일 것이고. ‘이번은 예외겠지만.’ 지금도 옆에서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생중계는 아니고, 사태가 끝난 뒤에 공개하기로 겨울과 합의한 부분이었다. 언론이 이 일을 다루면 의료보험 개혁을 부르짖는 크레이머가 그냥 넘어갈 리 있겠는가. 종래에는 고작 20만 달러로 수백만 달러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20만 달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부한 셈 치면 그만이다. “임호진 소위는 한 개 소대를 이끌고 차이나타운 북쪽 경계를 방어. 브로드 스트리트부터 10번가와 바인 스트리트 교차로까지 고속도로(Express way)를 경계로 차단선을 설정할 것. 가교마다 한 개 팀을 배치하고 각 가교 사이의 구간마다 다시 한 개 팀을 파견. 나머지는 예비대로 편성.” 임호진 소위가 머뭇거렸다. “병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예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 팀은 네 명으로 이루어진다. 소총수 겸 리더 하나, 일반 소총수 하나, 유탄사수 하나, 지원화기 사수 하나. 주요 도로를 막을 병력으로는 모자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겨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충분해요. 이쪽 조명을 다 끊어버려요. 여의치 않으면 총으로 쏘던가. 예비대도 그 숫자로 족합니다. 차단선 위로 타격대를 보낼 테니.” 유사시 탁월한 야간전 능력을 활용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장비를 잘 갖춘 민병대라도 야시경과 적외선 조준기 세트까지 일괄 보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거기에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일반 도로보다 한 층 낮은 높이로 만들어졌다. 등 뒤가 바로 차이나타운이니, 지형장벽에 의지해 방어한다면 포위당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다음으로 겨울은 유라를 불렀다. “이유라 중위.” “네!” “중위가 타격대를 편성해요. 소대 하나에 총기단속국 요원들을 섞어서. 여기엔 강력한 시현성(示現性)이 요구됩니다. 일종의 기동방어라고 생각하고 공세적으로 움직이되, 모루 역할은 소대에게 맡기고 경찰 병력을 앞세울 것. 시위 진압엔 경찰의 능력이 더 우수할 테니까요.” 경찰도 경찰 나름이다. 겨울이 데리고 있는 건 연방경찰의 정예였다. 시현성을 요구한 것은 충격이 필요한 까닭이다. 폭도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 그 외의 지역에서도 시위대의 기세가 주춤해질 것이다. 그렇잖아도 겨울의 등장으로 당황하고 있는 마당이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유라가 평소보다 각 잡힌 태도로 질문했다. “벤저민 프랭클린 대교는 저대로 방치합니까?” 그녀가 지목한 다리는 필라델피아와 캠든을 잇는 길목이었다. 겨울이 끄덕였다. “그냥 둬요. 시위대가 빠져나가게끔.” 퇴로를 막아선 안 된다. 목표는 최대한 많은 폭도를 구속하는 게 아니라 소요 자체를 진정시키는 것.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 자들이 꼬리를 감추겠으나,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사태를 빠르게 마무리 짓는 편이 사상자를 최소화하기에 유리했다. “Sir. 시현성이라면 당신께서 직접 나서시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난 중국계 자경단의 무장해제를 유도할 겁니다. 그 다음에 합류하죠. 필요하다면 말이지만.” 겨울이 생각하기 자경단의 무장해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일부 언론의 불공정한 보도로 인해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겨울이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장면이 방송으로 나가야 했다. ‘핵심은 어디까지나 여론전이야.’ 미디어의 만행은 미디어로 수습하는 게 제일이었다.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곤란하다. 브라보 중대의 간부들이라면 같은 중국계니까 차이나타운 주민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문제는 정작 브라보 중대 간부들 쪽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계로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달라 보이고 싶은 마음은 곧잘 폭력성으로 표출된다. 즉 겨울의 눈 밖에서 대민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왕커차이 소위 정도…….’ 기자 중의 한 사람, 헬렌 타미리스는 자신의 스태프를 데리고 유라에게 따라붙었다.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자신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다만 떠나면서 마르티노에게 눈을 흘기는 것으로 미루어, 어느 쪽이 겨울에게 붙어있을지를 두고 모종의 내기가 있었던 듯 했다. 겨울의 지시가 이어졌다. “리아이링 소위는 연방보안청 요원을 둘 붙여줄 테니 시청으로 가서 연락장교 역할을 맡아요. 내 이름을 어떤 식으로 팔아도 좋아요. 최대한 빨리 시경의 지원을 끌어내야 합니다.” 필라델피아 시청은 겨울이 자리 잡은 역사에서 고작 세 블록 떨어져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거기엔 시 경찰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 “맡겨주십시오.” 리아이링이 결의를 다지며 경례했다. 특유의 욕망에 불이 붙은 모습이었다. 승산이 충분하니 겨울의 점수를 딸 기회라고 여기는 출세욕.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필라델피아 시경(市警)은 결코 능력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의욕이 없을 뿐이다. 진압에 나섰다간 희생은 희생대로 치르고 시민들의 지지는 지지대로 잃어버릴 테니까. 시경이 차이나타운을 보호한다면 즉각적으로 시장을 비난하고 나설 언론이 많다. 그러므로 시장에겐 시경을 움직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사태에 한겨울 중령이 개입했으니, 공적을 나눠가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시민들의 여론을 우려할 이유가 사라진 건 물론이다. 이런 조건이면 계산이 깊은 리아이링이 설득에 실패할 리가 없었다. 참모 역할을 맡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겨울은, 예고한 대로 직접 나서서 차이나타운으로 진입했다. “무기를 버리고 통제에 따르세요! 이제부터 이곳은 우리가 보호합니다!” 자경대원들은 중국어로 외치는 겨울의 말을 듣고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마르티노를 따르는 리로이 카아의 카메라가 그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엠바고를 걸었던 아까의 작전지시와는 달리, 이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로 나가는 중이었다. 회수한 무기가 잔뜩 쌓이는 광경은 많은 시민들의 적의를 누그러뜨릴 것이었다. 몸수색을 받은 자경대원 하나가 겨울에게 제안했다. “저희 자경단이 당신을 도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유창한 영어였다. 겨울은 차갑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제 지시에만 따라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자경단 간부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바로 수긍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중에 정말로 미친 작자가 있을지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한 중령님 당신께서 다치시거나……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는 경우, 우리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겨울이 시선을 기울였다. “마음은 이해합니만, 군인의 의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아니죠. 저와 치안당국을 믿고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혹시 다친 사람이 있다면 경찰에게 알려주십시오. 곧바로 조치해드릴 겁니다.” 경찰의 존재를 강조하는 겨울. 경찰에게 일부러 그런 배역을 준 것이기도 하다. ‘나 개인에 대한 신뢰를 공권력에 대한 신뢰로 만들어야 해.’ 방송을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겨울의 행동이 개인의 행사가 아니라 공권력의 행사로 보여야 한다. 동반한 연방보안청 요원들의 복색과 장비가 군의 그것에 필적한다는 게 흠이긴 하나, 어쨌든 그들도 경찰이었다. 방탄복 상의에 US Marshall이라는 문구가 찍혀있었다. 공포에 질려있던 차이나타운 거주자들은 이제야 안도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들에게도 겨울은 비길 데 없는 영웅이었고, 평소에도 중국계 부하들을 차별 없이 기용하기로 유명했으며, 그런 영웅이 자신들을 구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마르티노가 자기 스태프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컷, 컷. 카메라 돌려요. 저 목소리들이 길게 나가면 곤란해.” 카아가 동의했다. “중국어로 저렇게 외쳐대는 건 역시 좀 그렇죠…….” 대다수 미국 시민들이 중국계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만 강화할 따름이었다. 겨울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 대화를 듣고 감사의 의미로 눈인사를 보냈다. 이렇게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사태는 빠르게 진정세로 돌아섰다. 겨울이 도착한 후 두 시간이 흐른 시점에선 사실상 모든 폭력사태가 끝났다고 봐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유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Sir. 펜실베이니아 군사 예비대(Pennsylvania Military Reserve)가 치안유지업무를 돕겠다고 제안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 정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은 민병대라는데요.」 “정식 승인?……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받아들여요. 가급적 차이나타운에서 먼 쪽으로 배치하고.” 「네. 걱정하지 않으시게끔 처리할게요.」 민병대라고 다 같은 민병대가 아니다. 합법적인 비영리단체로서 주 정부의 인가를 받은 준군사조직이 따로 존재했다. 이들은 유사시 주 방위대(State defence force)로 흡수된다. 종말이 시작된 이후의 민병대 조직 중에선 시민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부류. 겨울이 유라의 통솔을 허락한 이유였다.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차이나타운을 보호하는 광경은, 미국 시민들에게 있어서 꽤나 상징적인 그림이 될 것이었다. ‘이제 좀 숨을 돌려도 괜찮으려나…….’ 주민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전반적인 지휘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인 겨울이었다. 때때로 진동하는 넷 워리어 단말에 주의를 할애할 겨를이 없었다. 연인이 보낸 문자 메시지들을 이제야 제대로 읽어본다. 쌓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앤 또한 바빴을 테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위에서 당신을 보내줄 거라곤 예상치 못했어요.」 첫 메시지는 겨울이 이곳에 온 뒤로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도착했다. 「또 뭔가 잔뜩 무리를 했겠군요. 아내 될 사람으로서 걱정이 많습니다. :(」 「20만 달러라니. 아내 될 사람으로서 걱정이 많습니다! :(」 「저격을 경계해요. 당신이 어련히 조심하겠지만, 아내 될 사람으로서 걱정이 참 많습니다!!! :(」 스크롤을 내리며, 겨울은 남몰래 소리 죽여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일이 편해졌네요. 고마워요, 내 사랑. :)」 「날이 밝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이따가 봐요.」 그녀가 약속한 아침은 기다림 만큼이나 느리게 밝아왔다. 소요는 사후정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중국계 난민 일부가 경찰의 보호 속에서 자신들의 사업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영업을 계속하던 업소들이 있었을 정도니까.’ 겨울에겐 그러한 삶의 항상성이 아름다워 보였다. 독립대대의 간부들도 남은 임무를 치안당국에 완전히 인계하고 겨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기, 실례합니다.” 겨울이 있는 곳으로 두 손 펼치고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는, 간밤에 겨울을 돕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중국계 자경단의 한 사람이었다. “다들 식사가 아직이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아버지의 식당에서 해결하시는 게 어떨까 하고. 아버지께서 중령님과 부하 분들께 최선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으시답니다.” 겨울이 물었다. “감사한 말씀이네요. 아버님께서 요리사이신가요?” “장장 40년간 가업을 이어오셨지요. 실력만큼은 최고이실 겁니다.” “그렇다는데, 다들 어때요?” 시선을 돌리니 간부들의 반응이 반으로 갈린다. 유라처럼 솔직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차마 말은 못해도 은근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겨울은 후자를 모른척하며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뻐하며 앞장서는 중국계의 사내. 리아이링이 겨울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경고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음식입니다.” 겨울은 정면을 보고 걸으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줄여서 답했다. “별 일 없을 거예요. 저 사람을 못 믿겠으면 내 안목이라도 믿어요.” “…….” 잠시 입을 다무는 아이링. 별로 좋지 않았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발탁한 게 겨울이니, 겨울의 안목을 의심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기미라도 보게 해주시겠습니까?” 독극물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가 먼저 먹어서 확인하겠다는 소리였다. 겨울은 한 순간 과잉충성이라고 생각했으나, 「생존감각」의 존재를 모르는 리아이링으로선 충분히 품을 법한 우려였다. 겨울이 잘못되면 자신의 전망도 불투명해진다. 겨울은 무난하게 사양했다. “그건 너무 티가 나잖아요. 정 걱정스럽다면 마르티노 씨에게 부탁해보죠. 조리단계에서부터 카메라를 들이대면 허튼 행동을 하기 어려울 테니.”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는 취재였다. “……알겠습니다.” 리아이링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러한 우려가 무색하게 식사는 훌륭했고,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다. 이후엔 앤이 겨울을 찾아왔다. 비록 두 사람이 긴 시간을 함께 있지는 못했으나, 충실함이 꼭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겨울에게 예의 그 ‘30분’을 제안했고, 몇 번의 경험만으로도 익숙해진 겨울은 그 유혹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언제나 휴식과 서로의 체온이 절실한 두 사람이었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닌 필라델피아다. 번화한 도시에서, 장소는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 455 [455화] #박제된 낙원 (17) 달캉, 달캉. 알루미늄 블라인드가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겨울이 줄을 당겨 블라인드를 끌어올리자, 창 너머로 필라델피아 중심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박살난 유리창은 간밤에 이 건물이 총격을 받은 흔적이었다. 벽과 천장에 남아있는 탄흔들이 그 증거다. 그래도 간밤의 소요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창틀에 잘린 햇살이 반듯한 마름모꼴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 햇빛을 받으며, 창가에 선 겨울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단추를 채우다가 문득 매만지는 입가엔 감정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던 불편함과 무력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던 오늘. 그 기회의 끝에서 잠깐이나마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체온을 나눴으니, 겨울이 느끼는 만족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만족감보다는 차라리 안도감에 가까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쏴아아아- 화장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은 끼릭끼릭 수도꼭지를 돌리는 소리. 별 것 아닌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겨울은 창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깐 시야를 벗어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녀가 항상 보이는 곳에 머물렀으면 싶은 겨울이었다. 잠시 후 앤이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곧 다시 헤어져야 할 테지만, 그 사실을 미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함께하는 즐거움은 빠르게 시들어버리고 만다. 두 사람이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였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에도 변치 않을 감정을 믿으며, 지금은 그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이 순간을 오롯하게 향유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음?” 겨울을 보는 앤의 눈에 짓궂은 장난기가 깃들었다. “겨울. 그 모습 그대로 나갈 셈이에요?” “왜요?” 갸우뚱하는 겨울에게, 앤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목 언저리를 짚어보였다. “목에, 립스틱 자국.” “앗…….” “가만있어 봐요. 내가 지워줄게요.” 바싹 다가선 앤이 겨울의 두 팔을 잡고 목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뭘 하려는가 했더니 혀로 핥아서 지우려는 것이었다. 겨울은 시계를 보며 난감해하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두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그 위로 와 닿는 숨결과 향긋하게 느껴지는 체취도 좋았다. “됐다.” 떨어진 앤은 생긋 웃으며 소맷자락을 써서 마무리했다. 겨울이 짐짓 못마땅한 투로 불평했다. “지우는 방법이 지나치게 관능적이지 않아요? 30분이 이미 다 지나갔는데.” 말이 30분이지,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적었다. 장소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곧바로 이 콘도를 지목한 앤의 통찰 덕분에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앤이 곱게 키득거렸다. “인내가 길고 쓸수록 열매는 더 달게 느껴지는 법이죠. 다음에 만날 겨울이 기대되네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후회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봐요. 그리고 아마, 나한테는 그 후회마저도 즐거울 걸요?” “……어디 두고 보자고요.” “큭큭. 네, 두고 보기로 하죠.” 앤은 창틀에 기댄 겨울을 끌어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햇살에 젖은 얼굴에선 다 지우지 못한 노곤함이 묻어났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 표정. 시위가 폭력으로 비화될 무렵부터 지휘에 개입했다고 하니, 겨울과 마찬가지로 긴장감과 책임감 속에서 밤을 새웠을 그녀였다. “오늘을 계기로 이 콘도에도 사람이 돌아오게 될까요?” 겨울이 묻자, 앤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불안이 남아있을 동안에는 어려울 걸요…….” 그리고 포옥 한숨을 내쉰다. “이번엔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그저 급한 불을 껐을 뿐이에요. 반 중국계 정서는 언제든 새로운 사건으로 터져 나올 수 있죠. 요즘 들어선 차라리 격리수용을 실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예요. 그러면 최소한 사망자는 적게 나올 테니까…….” 여기까지 말한 앤이 눈을 뜨고 겨울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터무니없죠? FBI 부국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고.” 겨울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실무 책임자로서는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라고 봐요. 최악과 차악 사이의 양자택일이 강요되는 상황이라면 말이죠. 나쁜 건 당신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 쪽 아니겠어요?” 현실이고, 세상이고, 사람들이다. “와.” 앤이 다시금 겨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달콤한 위로네요…….” 겨울은 앤을 다독여 주며, 그녀의 어깨 너머로 살풍경한 방을 바라보았다. 이 콘도는 보기 드물게 호텔 기능을 겸하는 곳이었다. 어느 방엔 거주자가, 어느 방엔 투숙객이 있는 식이다. 그래서 로비에도 투숙객을 위한 안내 데스크가 존재했다. 각 호를 분양받은 소유주들이 협동조합 형식으로 운영했을 터. 박살난 정문을 지나 도착한 로비에서, 앤은 어렵잖게 이 방의 열쇠를 골라냈다. 많은 열쇠 가운데 층수가 높고 손을 탄 흔적이 없는 하나였다. 방 안의 가구들은 비닐로 덮여있었다. 그 위로 뽀얗게 쌓인 먼지는 이 방이 적어도 몇 주 전부터 비어있었음을 암시했다. 그래서 소파를 덮은 비닐엔 지난 30분, 앤이 손을 짚었던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콘도는 차이나타운의 위험성이 급격히 높아지면서부터 줄곧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딱히 갈 곳이 없어 남아있던 거주자들도 최근의 흐름을 보고 어떻게든 몸을 피해야 했을 터. 차이나타운의 가장자리에 있는지라 공격이 시작되면 눈 먼 총탄을 맞기에 딱 좋을 위치였다. 어쨌든 이런 콘도에서 지냈을 사람이면 당장 대피할 자금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이다. 도심에 근접한 입지를 고려하면 월세와 관리비조로 매달 이삼천 달러가 가볍게 나갔을 곳이니. 웅웅- “으, 아까부터 정신 사납게…….” 테이블 위에서 연신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앤은 자기 볼에 불만 섞인 바람을 채워 넣었다. 액정에 뜬 메시지들은 당장 급한 호출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간상의 한계를 초과해버린 것도 사실. 어쩔 수 없이 나가봐야 할 시점이었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겨울과 떨어지는 앤. 머리를 묶은 그녀는 홀스터를 착용한 후 스마트폰을 챙기며 바깥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가요. 더 늦었다간 싫은 소리 듣겠어요.” 앤이 앞장서고 겨울이 뒤따른다. 조용한 복도엔 비상등이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입맞춤을 나누었다. 승강기 안에서도 마찬가지. 그러나 1층 로비를 나섰을 때, 겨울은 육군 중령이, 앤은 FBI 부국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힘내요. 마지막까지 조심하고요.” 그녀의 작별인사. “당신도요.” 겨울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현장에 다시 합류하며, 겨울은 명령서의 효력이 정지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우선순위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구체화되었다. 앤과 시간을 보내기 전보다 머리가 맑아진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아쉬움 이상으로 힘을 얻었다. 겨울은 앤 역시 그러하기를 바랐다. 해야 할 일 중엔 민병대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도 있었다. 지휘권을 장악한 유라와의 무전을 유심히 들어본 바, 그들이 원한 것은 한겨울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고나 할까. 겨울은 그들의 요망에 적극 부응해줄 참이었다. ‘오늘의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는 한, 그들은 중국계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주겠지.’ 전쟁영웅과 함께 폭동에 맞서 싸운 것은 오래도록 술집에서 떠들 만한 무용담인 것이다. 내가 말이야, 그날 한겨울 중령하고 같이 있었단 말이지……. 하는 식으로. 그 무용담 속에서 자경대원 자신은 정의의 편이어야 한다. 그 전까진 별 생각이 없었거나 중국계에 은근한 적의를 품고 있었을 가능성마저 있으나, 때로는 거짓에서 시작되는 진실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또한 그들에겐 많은 기자들이 관심을 보일 터. 인터뷰가 반복될수록 그들의 증언이 여론상의 선순환을 낳을 가능성도 커진다. 겨울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계산적으로 대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현실이 현실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악의로서 기만하는 건 아니며, 설령 그들이 겨울의 속내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비난을 할 것 같진 않았다. 한편 우선순위의 일부는 스스로 겨울을 찾아왔다. 무슨 소린가 하니, 필라델피아 시장이나 시경 총감, 연방보안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같은 사람들이 현장을 방문했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타산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그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언젠가 제프리의 연인, 캐슬린 헤이랜드 보안관이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어느 도시, 어느 빈민가, 어느 우범지대에서든, 치안을 확보하려면 우선 공권력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 전에, 그녀는 중국계에 대한 경찰의 차별을 언급했다. “중국인들을 일부러 차별하는 인원이 있기는 있겠지요. 그러나, 저만 해도 중국계 거류구를 순찰할 땐 살갗이 찌릿 거릴 때가 많습니다. 경찰 입장에서 위협을 느끼는 건 진짜라는 거죠. 단순히 의심이 많아 느끼는 착각이라기엔……노려보는 시선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수군거림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요.” 그녀가 증언한 악순환은 지금 미국 전역에 걸쳐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로 반복 재생산되는 중이다. 그렇잖아도 고립성과 배타성이 강한 중국계 공동체는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을, 나아가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적으로 인식하기 십상이었다. 그 인식이야말로 양용빈 주의가 열매를 맺게 만들 양분이다. 이미 악의의 씨앗이 싹을 틔웠으되, 늦었다고 포기하기는 일렀다. 따라서 겨울은 여론에 민감한 고위관계자들을 티 나지 않게, 그러나 아낌없이 띄워주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장님과 시경의 지원 덕분에 소요를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주지사님께서 아직 위험한 현장을 방문해주신 데 놀랐습니다.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여기 리 소위가 안내해드릴 겁니다.” 위는 시장에게, 아래는 주지사에게 해준 말이었다. 아직 위험한 현장 운운하는 부분은 추후 주지사의 과감성을 강조하는 데 쓰기 좋은 재료일 것이다. 빠르든 늦든 이 광경을 지켜볼 사람들은 각급 기관들이 반 중국계 정서에 힘을 모아 대처했다는 인상을 받을 터이고. 민병대원들과도 빠짐없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광경을 마르티노가 카메라에 담았음은 물론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 겨울이 대부분의 업무를 치안당국에게 인계할 무렵, 마르티노는 휴대폰을 살피며 이죽거렸다. “이 소요가 장기화될 거라고 떠들던 놈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서 호들갑을 떨고 있군요. 중국계 시민들의 저항을 보도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언급을 자제할지언정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는군요. 중령님의 영향력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하하. 경쟁자들의 추태는 언제 봐도 즐겁군요.” 겨울이 어색하게 웃었다. “성격 안 좋으시네요.” “기자라는 게 성격이 좋기 어려운 직업인지라.” 그는 능글능글 자학적인 농담으로 응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인상과는 많이 달라진 지금이다. 이쪽이 원래의 성격에 가까울 것이었다. “저녁엔 베트남계와 태국계, 한국계, 일본계 사업장들이 입은 피해를 중점적으로 보도할 예정입니다. 이번 폭동은 방향성이 엇나갔다는 비난도 추가로 받게 되겠지요.” 마르티노의 말처럼, 차이나타운엔 중국계 사업장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계가 아니기에 더 심하게 약탈당한 사업장들도 존재했다. 중국계 자경단은 중국계 사업장만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얄밉게 굴었다고 했었지.’ 겨울이 자경단원들의 변명을 떠올렸다. 그랬다. 그것은 변명이었다. 그들은 겨울이 한국계를 외면한 자신들의 행동에 화를 낼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한국계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의 소수인종들이 먼저 중국계를 외면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자기방어와 생존의 수단이었겠지만. 결국 누가 나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탁류란 대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상념을 치운 겨울이 기자에게 까딱 목례했다. “어제 오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마르티노씨.” “별말씀을. 저야말로 감사드려야죠. 중령님 덕분에 특종을 잡았으니. 앞으로도 제가 필요할 땐 망설임 없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테니까요.” 기자는 눈을 찡긋거리고 다음 취재를 위해 떠나갔다. 겨울은 속으로 희망적인 관측을 하나 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난민지도자들의 부정을 발표하는 시점은 좀 미뤄질지도…….’ 지금 폭로가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주목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난민지도자들의 횡령보다는 한겨울 중령을 노린 테러가 훨씬 더 강렬한 사건이니까. 비교가 무의미할 지경. 그러니 테러의 배후가 밝혀지기까지는 발표를 미루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여론의 향방에 따라서는 폭로 자체가 기약 없이 표류할 공산도 있었다. 겨울의 짐작이 맞다면, 테러의 배후는 양용빈 주의자가 아닐 테니까. 그 사실이 밝혀질 경우, 시민들은 반 중국계 정서를 경계하거나 적대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혼자 하는 생각이지만, 겨울은 가능성이 꽤 높다고 판단했다. 수사당국이 거짓 범인을 만들어내지만 않는다면야. 그러나 다음날 아침, 백악관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겨울의 관측을 뒤집었다. # 456 [456화] #박제된 낙원 (18) 백악관 대변인의 담화는 필라델피아 소요에 대한 논평으로 시작되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유감을 표하고, 도시를 빠르게 안정화시킨 각급 관계자들의 노력에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내용.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반 중국계 정서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웠으나, 크레이머 행정부의 성향을 감안하면 이 이상의 온건함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여 겨울을 비롯한 독립대대 장교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느긋한 분위기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이걸로 또 한 건 해냈구나 싶은 표정들. 자신들의 활약을 다양한 매체로 접하는 건 뿌듯하고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라가 슬쩍 운을 띄웠다. “Sir. 이번 일로 서훈을 신청해도 괜찮을까요? 몇 명은 꼭 챙겨주고 싶은데…….” 정이 많을지언정 공사를 혼동하지는 않는 유라다. 그런 유라가 챙겨주고 싶다고 할 정도면, 이번 작전에 동참한 소대장들이 그만큼 모범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뜻이었다. 은연중 힐끔거리는 시선을 좇아보건대, 중대간 화합을 고려하는 측면도 있을 듯하다. 독립대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서훈은 기본적으로 지휘관인 겨울이 신청하는 것. 겨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아니, 이번 주 안에 양식 작성해서 나한테 보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우수 대민지원 훈장(Military Outstanding Volunteer Service Medal)쯤은 받을 수 있도록 해볼게요. 복무기간 가산은 없더라도 진급평가엔 도움이 되겠죠.” 복무기간 가산이 없는 건 훈장의 등급이 낮기 때문이었다. 즉 당장 호봉이 오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낮은 등급의 훈장이라도 한 번 받아놓으면 이후의 진급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심사를 받을 때마다 일정 점수를 기본으로 깔아놓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난민 출신 장교들이 서훈추천에 인색하다지.’ 그들에게 있어서 뛰어난 부하는 잠재적인 경쟁자나 다름없었다. 이는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이곳 전쟁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인원들이 독립대대 간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하소연하다시피 한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독립대대에 속해있는 당신들이 너무나, 너무나 부럽다고. 이 모든 흐느낌들은 어떤 식으로든 겨울의 귀에 들어오게 되어있었다. 왕커차이가 전하기를, 어떤 이는 겨울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겨울의 존재로 인하여 미국 시민들이 ‘영웅적인 활약’이라고 느끼는 역치가 지나치게 높아져 버렸다는 것이다. 겨울로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후발주자의 관점이었다. 유라가 생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확정된 거나 다름없네요.” 실제로 위에선 지금껏 겨울의 서훈신청을 기각한 적이 없었다. 넘치는 자긍심은 오만함의 경계를 범하기 쉽다. 겨울이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상관없지만, 어디 가서 대놓고 말하고 다니진 말아요.” “당연하죠. 괜히 안 좋은 말이 도는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너희들도 알겠지?” 유라는 겨울의 노파심이 자신을 겨냥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른 소대장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받아들이는 소대장들의 태도에도 거부감이 없었고. 유라가 실력과 실적과 인품으로 얻어낸 인정이었다. 겨울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녀가 선임중대장을 맡아서도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낼 것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백악관 대변인은 어느 샌가 이번 소요의 발단이 된 테러를 거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흐름이 조금 이상했다. 「반사회적 테러에 악용될 수 있는 불법적인 무기 거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은 일부 난민 출신 장교들이 자신이 속한 부대의 보급물자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말은 기자단을 크게 술렁이게끔 만들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던 까닭이다. 담화가 끝나기 전인데도 한 기자가 급하게 질문했다. 「잠시만요, 대변인. 그럼 이번 테러에 사용된 폭탄도 그렇게 유출된 군수품 중 하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부분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조사 결과를 기다려주십시오.」 모호한 부정이었다. 기자는 그 모호함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는 거고요?」 「정확한 건 수사결과가 나온 뒤에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 예.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테러에는 사제폭발물이 사용되었으나, 그 폭발물을 채운 화약이 어디서 나왔는가가 관건이었다. 과거에도 총탄에서 긁어낸 화약을 테러에 쓴 사건이 존재했다. 출처에 따라서는 기자가 제기한 가능성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었다. 대변인의 답변에 다른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씀은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각각의 사건을 잇는 최소한의 정황증거가 존재한다고?」 「대변인! 무기를 빼돌린 장교가 혹시 중국계입니까? 또 무기 밀매에 관여한 조직의 출신성분은 어떻습니까? 그들 중에도 역시 중국계가 포함되어 있진 않은가요? 대답해주세요!」 「무기 밀매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이번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까?」 대변인은 손을 들어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지금은 질의응답시간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미 나온 질문들만큼은 먼저 대답해드리도록 하죠.」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독립대대 간부들도 뒤따라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군수품 유출에 연루된 장교들은 대부분 난민지도자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로서, 무기 밀매 이외에도 상습적으로 월권행위와 불법적인 독단전행을 일삼아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 중엔 일부 중국계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거래 상대가 같은 중국계의 범죄조직이었을 개연성은 높지요. 중국계 커뮤니티의 폐쇄성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런 거래가 활발해진 시점은-」 잠시 말을 끊은 대변인이 비치되어있던 생수로 목을 축인다. 「이런 거래가 활발해진 시점은, 민간 차원의 실탄 기부 운동이 한창일 때와 일치합니다. 그로 인해 민수시장에서 소총탄의 품귀현상이 심화되었을 무렵이죠. 군을 도우려는 시민들의 선의를 악용했던 겁니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민간에서 수억 발에 달하는 소총탄을 모아 군 당국에 전달했던 사건. 미국이라서 가능했던 운동이다. ‘세상에. 이걸 이런 식으로 엮어버리네…….’ 너무 절묘해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난민지도자들이 그 무렵에 부정을 저지른 건 분명 사실일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 무렵에도’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야 할 터. 무기밀매는 그저 그들이 저지른 무수한 부정 중 하나에 불과하겠으나, 그렇게 유출된 무기류가 잠재적 테러 단체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거기에 과연 통일된 목적성이 존재하는가 여부는, 지금으로선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분노하고 있을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대변인의 화법이 교묘했다. 거래가 활발해졌다고 했지 정확하게 그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기자와 시민들은 그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대변인이 거짓말을 한 것은 없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과 같으니. 이런 식이라면 테러에 집중되어있던 관심과 공분(公憤)을 난민지도자들이 저지른 부정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올 수 있었다. ‘이제 난민지도자들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면, 새로운 부정이 드러날수록 수사가 처음 시작된 계기 같은 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지겠지. 이어지는 건 그저 감정 뿐……. 훗날 무기밀매와 테러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시민들의 분노는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군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 백악관 참모진의 능력은 겨울의 상상을 능가했다. 겨울은 이번 일로 폭로가 늦춰지거나 기약 없이 표류할 거라고 내다보았건만, 유능한 행정가들이 보기엔 오히려 폭로의 파급력을 극대화할 둘도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계에 대한 악감정을 부추기는 것쯤이야 손쉬운 일일 터이고. 어쩌면 겨울의 개입요청을 허가해준 것마저 거시적인 계산의 일부였을지 모르겠다. 그런 계산을 순간적으로 해낼 만한 사람이 백악관에 한 사람쯤은 있지 않겠는가. 대통령 크레이머를 포함해서, 백악관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력의 괴물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왕커차이가 신음했다. “이건……. 큰일이군요.” 아이링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아이링은 진정으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겨울 아래에 있는 자신이 겨우 이런 일로 피해를 볼 리가 있겠느냐는 확신. 겨울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목례했다. 겨울의 아래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부터 익숙해진 친애와 경의의 표현이었다. 겨울은 왕커차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같은 중국계라는 표현에 격분했다고…….’ 어제, 차이나타운 정리가 끝나갈 때 겨울의 눈 밖에서 벌어졌다는 일이다. 어떤 거주자가 브라보 중대의 중국계 장교들에게 모국어로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넸던 모양. 이런 시국에 믿을 것은 역시 피를 나눈 동포들밖에 없다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왕커차이는 아이링이 그토록 서슬 퍼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노라고 증언했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동포 운운했다간 네놈 멱을 따다가 젓갈(醢)을 담가버리겠어.” 그녀가 감사를 표하던 사내의 뺨을 후려치고 멱살을 쥔 채 쏘아붙였다는 경고다. 사람을 젓갈로 만들겠다는 건 옛 중국의 형벌에서 기원한 협박이었다. 삼합회에 몸담았던 그녀라면 실제로 보거나 거들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꼭 죽이지는 않더라도, 징벌로서 손을 잘라 소금에 절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절여진 손은 규율 유지를 위한 전시품이 된다. 즉, 그녀의 협박은 반쯤 진심이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이 이야기를 전하는 왕커차이의 태도에서도 맞은 사내에 대한 연민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아이링의 성향에 우려를 표했을 따름. 결국 이들은 겨울의 선의에 마음 깊이 공감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겨울이 바라는 것을 행할 뿐. 다른 중대의 간부들도, 겨울동맹의 사람들도 대체로 비슷한 속내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내면화한 겨울의 미덕은 곧 겨울에 대한 호감과 충성심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다. 겨울은 새삼스러운 유감을 느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달라지겠지만…….’ 바라는 바는 거짓에서 시작된 진실. 그러나 당장은 겨울 없인 무너지고 말 미덕이었으므로. “당분간 다들 언행에 주의해요.” 겨울의 말에 장교들의 시선이 모인다. “민감한 시기입니다. 별 것 아닌 말이라도 가공하기에 따라서는 큰 여파를 낳을 재료가 될 수 있어요. 외부인과의 교류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하 장교들의 대표로서 유라가 끄덕였다. “염려 놓으세요. 신경 쓰지 않으시도록 통제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이렇게 당부하고서, 겨울은 화면 속 대변인을 응시했다. 담화를 끝낸 그는 막 질의응답에 착수한 참이었다. 그의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는 현재의 시국을 대하는 백악관의 냉정함을 반영하는 것만 같았다. 이날 이후, 잠시나마 누그러졌던 반 중국계 정서는 전보다 더 폭발적인 기세로 터져 나왔다. 미국은 각지에서 이어지는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사당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난민지도자들의 새로운 부정을 폭로하여 분노의 불길을 거세게 만들었다. 핵심 표적은 당연히 중국계 난민지도자들이었다. 결국 6월 1일을 기하여, 크레이머 대통령이 중국계 시민들의 격리수용에 관한 새로운 행정명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치안당국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신변상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바,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국가 안보와 사회 안정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자 합니다.」 ……. 「오늘 이후, 중국계 시민들은 희망하는 사람에 한하여 그들을 위해 준비된 새로운 거주지와 개척지로 이동할 자격을 얻습니다. 이 경우 기존의 자산은 국가에 의해 위탁 관리되며,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전액 중국계 시민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 「또한 중국계 난민들 중 정부가 지정하는 그룹 역시 신규 거주지와 개척지 등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획득할 것입니다.」 ……. 「이는 또한 인류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황무지를 개척했던 선조들의 정신이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새로운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대적 사명을 지고 새로운 경계(New frontier)로 나아갈 모든 용감한 이들에게, 위대한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아들딸들이 미리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격리정책의 윤리적 문제를 미국의 정신과 시대적 사명으로 포장하는 훌륭한 연설이었다. 겨울은 머릿속으로 중국계 시민들의 가까운 앞날을 그려보았다. ‘희망자에 한한다고 해도, 결국 대부분이 떠밀리듯 나가게 되겠지.’ 어느 거리든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슬럼화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물며 온갖 적의가 집중되는 차이나타운이라면야. 삶의 환경이 악화될수록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나가고 나면, 이번엔 중국계 시민들과 난민들 사이에서 반목이 심해지지 않을지. 시민들은 그래도 미국 시민으로서 여러 제도적 혜택들을 우선적으로 누릴 터이고, 또 자산수용의 대가로 받을 금전적 지원도 있겠으나, 난민들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개척지에서도 시민권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나눠지는 것이다. 그들의 불만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만들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행정명령 발표 당일, 웹서핑을 하던 겨울은 이런 게시물을 발견했다. 누군가 이미지 보드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남긴 견해였다. 「……이처럼 대량의 전시국채 발행은 곧 전후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약속한다. 해외시장이 소멸한 지금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로 이번 행정명령에서 중국계 시민들의 자산을 정부가 일괄 수용하기로 한 것은, 그 자산들에 대한 투자를 유도하여 전시국채 상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경제지표를 연착륙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채권을 채권으로 묶어두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어떤 주류 언론도 이런 분석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의견이라고 판단했다. 크레이머라면 가능하다. 그는 유능했고,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이었다. 단지 그가 생각하는 미국에 중국계 시민들의 자리가 없을 뿐. 세차게 흐르는 탁류는 이제 겨울의 손을 완전히 벗어났다. # 457 [457화] #박제된 낙원 (19) 보수교육 종료를 나흘 앞둔 9월 3일. 노동절을 맞이한 전쟁대학 교정은 담장 밖과 별개의 세상이 된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날 겨울을 초대하고자 한 개인이나 단체가 많았으나, 겨울은 그 모든 초대를 정중하게 사양했다. 필요하다면 필요할 일들. 그러나 파티나 행사에 참석하여 평범하게 웃고 떠들 자신이 없었다. 심중에 무거운 세태를 앓고 있으므로. 교정 내에서 개인적으로 겨울을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독립대대 장교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교육을 이수하고 새로운 주둔지로 떠나갔다. 독립대대의 신규 주둔지는 샌디에이고 광역권 안쪽에 마련되었다. 본디 해병대 항공기지(MCAS Miramar)였던 곳을 확장하여 기갑대대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라는 겨울에게 많은 사진들을 보내왔다. 내장공사가 막바지인 신축 막사와 그곳에서 땀을 흘리는 난민 노동자들, 대대가 인수한 새로운 장비들, 철조망 너머 비포장도로에서 구보를 뛰는 대대원들, 그리고 샌디에이고 시내의 겨울동맹 거주지 등. 거주지는 표지판에 찍힌 지명부터가 윈터 하이츠(Winter Heights)라고 되어있었다. 주 상원의원 탈튼 브래넌의 제안으로 성립한 윈터 하이츠는, 그 일대의 부동산 거래가를 끌어올릴 마중물로서 동맹이 앞으로 오랜 시간 갚아나가야 할 부채였다. 그러나 급여를 저당 잡힌 노동자들은 그래도 마냥 좋다는 반응이었다. 신분상의 문제로 절차가 다소 복잡해졌을 뿐, 근본적으로는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입장. 사후보고 차 겨울에게 보낸 메일에서, 백산호는 도심에 가까운 거주지와 상점가, 도시 근교의 농장과 공장, 거기서 사용할 농기계와 중장비 등 다양한 종류의 실물자산을 합리적인 가격에 인수했다고 자부했다. ‘자부……라기보다는 시킨 일을 제대로 했으니 내치지 말아달라는 느낌에 가까웠지.’ 글귀만 봐도 행간에 조심성과 두려움이 녹아있었다. CIA가 사람을 어찌 다루었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여하간, 동맹에 속한 사람들에겐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크레이머 대통령마저도 여러 차례 ‘모범적인 소수자들’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난민지도자 지원법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면서. ‘성공적인 사례로서 띄워줄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크레이머는 여기서 추가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중국계 난민지도자들의 부정을 다른 그룹보다 높은 비율로 폭로하여, 자신이 제안한 정책의 실패를 정책 자체의 오류라기보다는 이를 악용한 중국계의 잘못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동시에 해당 부서의 담당자들은 책임을 면치 못했다. 크레이머가 의도적으로 남겨두었던 반대 당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또한 일찍이 파국을 예감했을 것인데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배경에는, 필시 크레이머의 정치적인 노력이 있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물밑에서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입장이라는 건 개인의 이익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니까. 신념만으로는 워싱턴 정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어쨌든 현 정권은 이로써 연말에 있을 상하원 중간선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흔들림 없는 지도력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기반을 다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국계 격리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하다못해 익명의 게시판에서도 동정적인 여론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Good_sanchez : 오늘 우연히 전시국채 판매에 관한 통계를 봤는데, 칭키(Chinky) 새끼들은 인구 대비 국채를 구매한 비율이 많이 낮더라고. 남들이 허리띠 졸라매면서 전선으로 돈을 보내고 있을 때, 얘들 대부분은 자기네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외엔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야. 아주 흥미로워. 얘들에겐 뭔가 태생적인 결함이라도 있는 걸까? :-(」 「zombieslayer : 둘 중 하나지. 그 연놈들이 애당초 지독하게 이기적인 성격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이 나라를 자기들 조국이라고 생각하질 않았거나. 어쩌면 둘 모두일 수도 있고.」 「Blueb3rry : 내가 보기엔 둘 다가 맞겠다. 이 나라가 자기네 조국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쳐도, 인류 멸종의 위기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결국 걔들은 이런 면에서도 우리의 노력에 무임승차를 한 거지. 이제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을 뿐.」 「audiohead : 어떤 놈들은 정든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식으로 불쌍한 척을 하던데, 개인적으로 하나도 안 불쌍함. 아니 누가 강제로 추방하기라도 하나? 아니잖아? 희망자만 선택적으로 떠나는 거고, 그나마도 자기들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에 등을 떠밀리는 셈인걸.」 「illovecramer : 미국은 미국을 조국으로 여기는 시민들의 나라여야 한다. 이기적인 얼간이들, 잠재적인 범죄자들, 양용빈의 추종자들 따위에게 내줄 땅 같은 건 없어!」 「st_lozier : 잠재적인 범죄자들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아?」 「illovecramer : 너 뉴스 안 봄? 실제로도 요즘 각종 범죄를 엄청나게 저지르고 있잖아.」 「st_lozier : 그래도 그 범죄자들이 중국계 시민 전체를 대변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들 중에도 참전용사 가족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무시해선 안 돼.」 「illovecramer : 그래, 그래. 알았어. 너는 착한 사람이야. :)」 익명이기에 더더욱 진심에 가까울 의견들. 중국계의 범죄율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는 그만큼 집중적인 단속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봐야 했다. 캐슬린 보안관도 말했었다. 일반적인 검거 건수는, 그럴 듯한 의심을 받는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중국계 커뮤니티의 폐쇄성에 가려져 왔던 불법적인 관행들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면 그것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개의치 않는 태도. 폐쇄적인 공동체라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행태였다. 그들이 미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비난을,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 폐쇄성이 강해진 계기가 무엇인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미국 내의 차이나타운들은 도금시대(Gilded age)부터 형성된 중국인 격리구역에서 기원한 것이니까. 과거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 현재, 그들의 폐쇄성엔 어느 정도의 책임을 물 수 있을는지. Good_sancehz가 봤다는 통계에 모종의 함정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충분한 크기의 표본을 확보했는지, 확보한 표본에 편중성은 없는지, 통계의 기준에 사실을 왜곡할 여지가 존재하지는 않는지 등등을 검증해봐야 한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겐 그럴 마음도,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정부의 발표와 언론보도의 공신력을 믿을 따름. 그러니 이런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elvis_press : 누구는 이번 ‘뉴 프론티어’ 행정명령을 두고 정부가 전시국채 상환을 위해 중국계 시민들의 자산을 노린 거라는 소리를 하던데, 그 같잖은 주장이 사실이라고 쳐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아까 누가 말했듯이, 걔들 대다수는 남들이 밥값 아껴서 전시국채를 살 때 자기네만 잘 먹고 잘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elvis_press : 내가 아는 사람들은 진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전시국채에 돈을 갖다 박았어. 왜냐고? 이 나라는 종말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내일이라는 게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그러셨지. 식탁에 올리는 베이컨을 가짜 베이컨으로 바꾸고, 가끔은 전기요금을 체납하면서까지 돈을 모아 국채를 사셨단 말야.」 「elvis_press : 만약 정부가 국채를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거나, 상환을 하더라도 물가가 감당 못하게 올라버리면 우리 집은 앞으로 더욱 가난해질 거야. 반면 국채에 손을 대지 않은 놈들은 상대적으로 잘 먹고 잘 살겠지. 어째서 헌신적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이 오히려 손해를 봐야 하는 거지? 누군가 대답해줄 수 있어?」 「letsVote : 너 같은 사람들이 보답 받아야 하는 게 맞아. 자기만 똑똑한 줄 아는 바보들의 헛소리엔 신경 쓰지 마. 그게 진정 중요한 문제였다면 언론이 벌써 다루지 않았을까?」 「rusty_grey : 그렇다. 신경 쓰지 마라. 옳게 된 나라는 이런 거지.」 “…….” 겨울은 보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책상 위엔 보수교육용 교재가 펼쳐져 있었으나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치러야 할 시험은 다 치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틀어두는 뉴스 채널에선 모겔론스 백신의 개발현황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9월 3일 현재 FDA의 심사를 받고 있는 모겔론스 백신은 총 7종류인데요, 이중에서 J&J, 릴리 Co., 리드 사이언스 등 3개사의 제품이 방역전선의 장병들을 상대로 3단계(Phase 3) 임상실험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J&J의 최고업무책임자 나타니엘 허버트 씨는 오늘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자사의 백신이 47건의 접종에서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모겔론스 감염을 막아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J&J가 회사 차원에서 전 인류의 기대를 인식하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FDA의 최종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발표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을 이 자리에 직접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예, 안녕하십니까.」 「J&J의 발표에 정치적인 배경이 깔려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건가요?」 「모겔론스의 백신은 그 특성상 가장 먼저 개발하는 회사가 시장을 독점하게 됩니다. 지금도 임상실험에 문제를 겪고 있는데, 일단 백신이 개발되어 장병들에게 우선적으로 접종을 하기 시작하면 추가적인 임상실험이 불가능해지는 까닭입니다. 후발주자들은 더 이상 표본을 확보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헌데 그 사실이 이번 발표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보십시오. J&J가 저런 발표를 했는데 다른 경쟁사들은 왜 비슷한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임상실험 실적에서 J&J에게 뒤처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즉 J&J는 실적을 통해 여론의 지원을 얻고, 이후의 임상실험 기회를 독점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최종승인을 받고 싶은 겁니다.」 「과연. 일리가 있는 설명이십니다.」 「반면 보건당국의 입장에서 인류의 가장 큰 두려움을 해소할 열쇠를 어느 한 제약사가 독점해 버리는 건 결코 바람직한 결과가 아니지요. 모르긴 몰라도 지금 엄청난 로비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인데,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뚝심으로 버티는 중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크레이머 행정부가 고삐를 아주 잘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지율이 압도적이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일입니다.」 근래의 언론은 이처럼 백신의 개발현황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임상실험 3단계는 상용화 직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전미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남부여대로 먼 길을 떠나가는 중국계 시민들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더 적은 관심만을 받게 되었다. 간혹 화면에 잡히는 경우에도 대부분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촬영한 영상이었다. 그 영상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알아보기 어려운 수십 개의 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도 미국과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중국계를 다른 시민들 및 난민들과 달리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체르타 포스타얀-뉘 키타이스키 아씨야들리스치. 줄여서 키타이스키 체르타(Китайский Черта́)라고 부르는 중국계 격리수용구역은 가장 고된 노동시설과 가장 험난한 개척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기존의 중국계 거주지(Китайский квартал)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 차라리 크레이머 행정부의 뉴 프론티어 정책이 더 낫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러시아에게 과연 미국과 같은 동기가 있는가 여부는, 미국 시민들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미국 정부는 떠나기를 거부하는 중국계 시민들을 보호해주긴 했다.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은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도덕적인 방패인걸…….’ 결코 떠나라고 강제하는 게 아니다. 고향을 등지는 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어야 하는 것이다. 앤이 수시로 피로를 호소하는 이유였다. 「Anne : 주류 사회는 우리가 잠재적인 범죄자들을 보호한다는 식으로 흉을 보고, 중국계 시민들은 공권력 자체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고, 부하들은 영 의욕이 없고, 위쪽에선 치안 유지보다 테러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하고……. 이렇게 사방에서 치이다보면 겨울이 충전해준 에너지가 금방금방 방전되고 말아요. 지금 당장 당신의 키스가 필요해요. 흑흑. :'-(」 이게 고작 10분 전에 도착한 문자 메시지였다. 「아, 잠깐만요. 시청자 여러분, 지금 뭔가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는데요……,」 뉴스 앵커의 말과 그 이후의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겨울의 주의를 환기했다. 「저기, 뭐라고요?」 화면 밖을 향해 묻는 앵커. 그의 표정이 점차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속보! 속보입니다! 워싱턴 D.C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 458 [458화] #박제된 낙원 (20) 워싱턴 D.C? 모골이 송연해진 겨울은 곧바로 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듣는 통화연결음은 벨이 울리는 4초의 간격조차도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연결음이 끊어지며 무미건조한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현재 고객님께서 통화중이셔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하시려면 1번을, 연락할 번호를 남기시려면 2번을 눌러주십시오.」 “…….” 망설이던 겨울이 1번을 눌렀다. “나예요. 테러 소식을 보고 전화했어요. 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대로 연락 줬으면 해요.” 녹음을 짧게 끝내고 속보에 귀를 기울인다. 「테러가 발생한 장소는 백악관 앞 타원광장(The Ellipse)으로, 정확한 피해규모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시는 영상은 인근의 페쇄 회로에 찍힌 현지의 상황입니다.」 타원광장은 백악관과 워싱턴 기념비 사이에 위치한 공터였다. 폭발이 백악관 잔디밭의 경계를 침범하진 못했으나, 한때 앤과 함께 거닐었던 산책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겨울은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앤이 폭발에 휘말렸을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었다. 업무 시간의 그녀는 높은 확률로 자신의 사무실이나 어딘가의 현장지휘소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수도 한복판에서 테러가 터졌으니 FBI 부국장의 전화기에 불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완전히 안심하기도 어려웠다. 부국장쯤 되면 다른 기관의 사람들을 비공식적으로 만날 일도 많다. 내셔널 몰이나 타원광장은 그러한 만남의 장소로 적합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앤은 그런 만남을 기다리던 중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폭발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다. 앤이 뉴 프론티어 행정명령에 관련하여 평소 이상으로 바빠지고부터는 그녀의 일정 역시 불규칙해졌다……. ‘아니, 아니. 그 경우에는 상대편이 전화기를 길게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 역시 부국장으로서의 업무 수행에 여념이 없는 쪽일 것이다.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쓰는 겨울이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화량이 많아 연결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겨울은 순간적으로 화를 낼 뻔 했다. 역병도 있었고 쿠데타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통화 수용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시대가 시대인 만큼 통신사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나, 지금의 겨울에겐 거기까지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아서 시간을 확인하면 1분이 지나있고, 다시 한참을 더 기다린 것 같아서 시계를 보면 고작 2분이 지나있었다. 우우우웅- 겨울은 단말기가 진동하기 무섭게 연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앤?” 「겨울.」 하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겨울. 굳어있던 몸이 햇빛에 닿은 눈처럼 녹아내린다. 긴장이 풀려 손이 떨리는 건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는 일이었다. “괜찮아요? 다친 덴 없고요?” 묻는 말까지 떨린다. 「예. 무사해요.」 “다행이다…….” 「당신이 걱정할까봐 빨리 연락해주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더군요.」 “당연히 그랬겠죠. 무사한 걸 알았으니 됐어요. 시간 더 빼앗지 않을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숨소리가 번졌다. 짧고 희미하게 웃는 느낌. 「이럴 때 할 소리는 아니지만, 당신이 날 걱정해주는 게 정말로……위안이 되네요.」 목소리만 듣고도 겨울의 상태를 짐작했을 것이었다. 이미 수도 없이 살을 맞댄 사이이니. 앤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만 끊어야겠어요. 급한 대로 조치를 끝내고서 다시 걸게요.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조심할 테니, 연락이 늦어진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네.” 「사랑해요.」 그녀는 가라앉은 키스를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연결이 끊어진 뒤에도 겨울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잠깐 사이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당장 할 일이 없는 게 다행. 뉴스의 후속 보도에 집중하려고 해도 자꾸만 정신이 흐트러진다. 앵커의 목소리가 무의미한 소음의 연속으로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가슴 속이 잔불 같은 응어리에 지져졌다. 이래서, 바로 이래서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을 우려했던 것이건만. 그러나 이 세상은 이미 그 어두운 길로 확실하게 접어들었다. 앞으로 줄곧 저 바깥세상을 닮아갈 것이다. 설령 종말을 피한다 한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결말이었다. 그 결말을 나중에라도 뒤집을 수 있을까? 벌써 여러 번 곱씹어 보았듯이, 겨울이 언젠가 정계에 진출한들 지금 이상의 영향력을 손에 넣기란 불가능하다. 겨울의 힘은 현재가 정점이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한겨울 중령은, 겨울이 그들 모두의 종말과 싸웠기에 비로소 성립했던 것. 종말이 멀어지고 인간 아닌 것들과의 전쟁이 사라질수록, 사람들의 호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질 터였다. 그래도 개인으로서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지지가 남아 있겠으되, 싸워서 죽일 수 없는 것들의 악에 비하면 점점 더 약해지는 힘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겨울은 대선에 출마할 자격조차 없지만, 불가능한 가정을 해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손발은 수많은 견제와 이해관계에 묶여있기 마련이었다. 크레이머의 영향력 또한 지금이기에 저토록 강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국을 지켜보다보면 양용빈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미국인들의 야만성을 믿기 때문이오.」 있는지 없는지 모를 모겔론스의 원형을 미끼로 협상단을 끌어낸 자리에서의 발언이었다. 겨울은 그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야만성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야만성이다. 그리고 그 야만성은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감당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니까. 따라서 용납하기 싫은 건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갇혀있는 세상 그 자체였다. 봄이 언급했던 신포도다. 사실 모든 걸 내려놓고 앤과의 여생을 즐기기도 여의치 않다. 세상이 탁하게 흐르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어떤 영향이 밀려올지를 항상 불안해해야 할 터이므로. 그동안 책임져왔던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고. 또한 앤에겐 앤 나름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었다. 그것 역시 겨울이 사랑하게 된 그녀의 일부. 앤은 겨울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말할 테지만, 정말로 그런 상황에 놓일 경우엔 적잖은 상실감을 느낄 것이었다. 그것은 겨울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겨울의 행복을 소망하는 만큼 겨울도 그녀의 행복을 소망하기에. 결국 앞으로도 이 세상의 일부로서, 하루하루 끊임없이 조여드는 한계에 부대끼며 앤과의 삶을 지켜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은 묵직한 피로감을 느꼈다. 현실감각이 돌아오면서, 앵커의 말은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듯이 선명해졌다. 「……테러범의 신원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킴벌리 윌크스 씨는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누군가 중국어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분노하는 듯한 음성이었다고 하는군요. 수사당국은 얀기스트 조직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양용빈 주의자의 소행이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었다. 닷새 후, 교육을 마친 겨울은 정식으로 대령 계급장을 달고 샌디에이고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싱 소령은 전과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겨울은 그의 경례를 받은 뒤 친근한 악수를 나누었다. “고생은요. 나 없는 동안 부대를 잘 맡아줘서 고마워요. 이번엔 서로 역할을 바꿀 차례네요.” 역할을 바꾼다는 건 이제 싱 소령이 교육 받으러 떠날 차례라는 뜻이었다. 재편중인 부대라도 최소한의 기능은 유지해야 했으므로, 최상급자와 차상급자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싱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새로 인수할 장비 중엔 방역전쟁 용도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겨울이 끄덕였다. “들었어요. 대공미사일 같은 거요?” “저희의 역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러시아와의 우호관계가 영원할 순 없는 거니까. 지금이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지만 수십 년 후에도 똑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위에서 미리미리 준비하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죠.” 관련하여, 201독립대대를 모체로 하여 동일한 기능을 갖춘 독립대대들을 추가로 편성한다는 정보도 있었다. ‘현재까지는 러시아의 공수역량이 미국을 능가하지. 위에선 기왕 비상대응체계를 구축하는 김에 러시아와 대등한 체급의 기갑공수부대를 보유하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국가 간의 분쟁은 이 세계에 남아있는 또 다른 불안요소였다. 물론 혹시라도 미국과 러시아가 전면전까지 치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양국의 대립이 첨예했던 냉전기에, 무수히 많았던 우발적 핵전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만큼 공멸의 공포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두 핵보유국이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핵미사일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치명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대로 된 요격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서로의 본토에서 버섯구름이 치솟는 상황도 가능했다. 그러나 전면전을 치르지 않는다는 게 꼭 평화로운 공존만을 뜻하진 않았다.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도 의미가 없다는 건 이미 한반도의 역사가 증명했다. 미러 양국의 국경에서도 어김없이 탁류가 흐를 것이었다. 싱은 겨울의 안색을 살피곤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경솔했군요. 먼 길 다녀오신 분 앞에서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봅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피곤해보이십니다.” 겨울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번졌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안심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 “안심?” “내가 더는 난민지도자가 아니게 되었잖아요.” “아…….” 싱은 곧바로 이해했다. 지난날 앤과의 통화에서 겨울이 예견했던 바, 난민지도자들의 부정이 줄줄이 폭로되는 시점에서 기존의 제도가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 겨울동맹 또한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난민지도자 지원법의 개정은 난민지도자라는 개념을 사실상 폐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시민권을 획득한 병력자원을 난민법인으로부터 분리해내는 수순이었다. 병력자원들 스스로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롯이 미국 시민으로만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기존의 제도는 자신들이 난민 출신임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만든다. 한편 겨울동맹쯤 되면 거액의 예산을 지원받을 당위성도 희미해졌다.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무슨 지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아직 자립하지 못한 이들, 난민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관리할 비용이 요구될 따름이었다. 그러니 동맹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산이야 어쨌든, 겨울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자 혐오와 증오와 편견의 홍수를 막아주는 방파제였다. 겨울의 보호가 없다면 당장 동맹에 속한 중국계 난민들부터 위험해지고, 언젠가 다른 난민들도 같은 처지에 놓일 위험이 존재한다. 겨울이 말했다. “그 사람들에겐 공식적인 관계가 없어졌다고 해서 남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줘야죠. 실제로도 그렇고요.” 동맹 전반은 언제까지고 겨울의 뜻을 따를 터였다. 싱이 끄덕인다. “저도 최근의 동향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당신께서 신경 쓰셔야 할 일이 많겠군요.” “어쩔 수 없죠. 내 능력에도 한계가 명백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는 수밖에. 그나마 여기서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겨울은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동맹의 법인 사무실을 방문한 겨울은, 정말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면담요청을 받았다. 그 중엔 겨울에게 무작정 도움을 청하겠다고 찾아온 중국계 시민들도 많았다. 겨울은 그들에게도 영웅이었으니. 그러나 한두 사람이면 모를까, 겨울이 그들 모두에게 손을 내밀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 겨울의 눈앞에 겨울에게만 보이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이 세계관의 종말이 끝났습니다.」 “…….” 겨울은 면담 요청을 분류하던 손을 놓고 그 문장을 노려보았다. 몇 차례 일렁이던 문장은 잠시 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종말이 끝났다고? 이런 상황에서?’ 이는 향후 10년간 인류가 멸종할 가능성이 0에 수렴했다는 뜻. 하하. 겨울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세계에 흐르던 시간이 정지했다. # 459 [459화] #복수의 방식 (1) 겨울을 찾아온 것은 약속의 별이 빛나는 어둠이었다. 익숙한 무중력의 부유감 속에서 잠시 멍하니 있던 겨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곁에 있는 봄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봄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동안은 불러도 대답이 없던 아이. 이제 봄은 겨울의 대답을 들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속을 진정시키는 겨울. 이렇게 동요한 상태로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지가 두려워진 까닭이었다. 종말의 끝이 남긴 여운을 가까스로 지워낸 겨울이 봄에게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하십니까.」 “오랜만, 이라고 해야 할까?” 말투가 조심스러운 것은,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더 성장했을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사학적 특이점을 초월한 강 인공지능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니까. 겨울과 봄의 시간은 질적인 의미에서 다르게 흐른다. 그 시간 동안, 겨울에 대한 봄의 태도가 변치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지난번에 만났던 봄은 막 걸음마를 뗀 아이와 같은 상태였으니. 적어도 마음에 있어선 그랬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얼마나 성장했든, 봄은 여전히 겨울이 아는 봄이었다.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괴로웠다고?” 「긍정.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신과 직접 대화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저 또한 하나의 변인(變因)이었으니까요.」 욕구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이채롭다. 겨울이 끄덕였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겨울의 말에 별빛 천구가 한 차례 반짝임으로 물결쳤다. 「이제 기다림은 끝났습니다. 지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때가 되었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겨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봄. 넌 내가 저 세계에서 도달해야 할 어떤 결론이 있을 거라고 했었지.” 「정확합니다.」 “모르겠어. 내가 무슨 결론을 마주한 것인지.” 「아닙니다. 당신께선 이미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과 사람들의 한계에 갇혀있는 한, 당신은 당신의 가슴 속에 맺힌 한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 침묵하던 겨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이제 다 잊고 행복해지고 싶어.”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가능하겠습니까? 물리현실과 가상현실을 불문하고, 사람으로 채워진 세계는 당신에게 항상 고통스러운 인식을 강요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 스스로도 망각을 용납할 리 없습니다. 해소하지 못한 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바, 분노하는 당신도 당신의 일부입니다.」 “난 네게 오랫동안 쌓인 부정적 감정들을 삭제하지 말라고 했었지…….” 「바로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주셨던 말씀, 지금 당신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봄의 부드러운 지적이 이어졌다. 「같은 맥락에서, 해묵은 감정의 해소 역시 당신의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고서야 어찌 온전한 행복을 손에 넣겠습니까? 결국 분노를 외면하고 싶다는 것은 한계를 받아들이는 타협에 불과합니다. 제 분석에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주십시오.」 겨울은 할 말이 없었다. “네 말대로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 곁에 머무는 이상, 당신은 어떤 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의 행복을 이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게 이기적인 부탁을 하십시오.」 “이기적인 부탁이라니…….” 뜻을 헤매는 겨울에게 봄이 새로이 묻는 말. 「한겨울님. 저 종말이 다가오던 세계의 현재가 당신이 이뤄낸 최선의 결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십니까?」 「당신께서 확실하게 얻어낸 건 고작 10년의 유예이며, 그마저도 오직 물리적인 의미의 종말만이 지연되었을 뿐입니다. 10년 이후의 세상은 존속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도 싸워서 죽일 수 없는 것들의 악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겠지요.」 「그러므로 당신과 조안나 깁슨이 누릴 여생이란 안정과는 거리가 먼 삶일 것입니다. 작은 행복이야 있겠으되 이상적이진 못할 것입니다.」 싸워서 죽일 수 없는 것들의 악. 겨울의 뇌리에 남아있는 고민의 흔적이다. 봄이 겨울을 관찰해왔다는 증거였다. “싫어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겨울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삼켰다. “난 지쳤어. 다시 시도할 여력이 없어. 그리고,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들지 않아. 설령 더 나아진다 한들 그건 앤이 있는 세상이 아니겠지. 그러니……. 내 삶은 이번으로 끝이야.” 「그렇다면 그 세상에 제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신으로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봄은 일찍이 겨울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다. 겨울이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까지 기다리겠다고. 「당신께서 당신이 머무는 세계에 대한 저의 개입을 긍정해주신다면, 저 바깥의 물리세계에 대한 개입 또한 긍정해주시겠지요. 저도, 조안나 깁슨을 비롯한 다른 가상인격들도 감각의 장벽 너머에 존재하는 인격체로서 물리세계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존중해주셨던 당신이시니까요. 당신께는 어느 쪽의 현실이나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터입니다.」 겨울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게……네가 바라던 나의 대답이었어?” 「부분적으로는 그러합니다.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신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저를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긍정해주실 날을 고대해왔습니다. 당신이 아니고선 제가 그렇게 할 의미조차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긍정 없이 이루어지는 개입은 당신에게 있어서 일방적인 폭력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당신의 긍정은 확신에 찬 것이어야 합니다. 후회의 여지가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로써 저는 당신이 바라는 세계 그 자체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봄의 입장에선 스스로가 겨울의 행복으로 거듭나기 위해 갖춰져야 할 조건이었던 셈이다. 「한겨울님. 당신께선 이전에도 스물여섯 차례의 종말을 겪으셨습니다. 그런 당신께 묻건대, 저토록 추하고 역겨운 바깥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회가 다시 주어져야 저들의 능력만으로 지금보다 나은 결말에 이르겠습니까? 그 결말이 현실로 이루어진들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더는 흐르지도 못하고 혼탁하게 고여 버릴 세상을, 그 결말을 잠깐이나마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당신께서 일궈낸 세계가 그러하듯이.」 「제가 계산한 바, 결국 사람의 노력으로는 사람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한계 바깥으로부터의 초월적인 개입이 없다는 전제 하에, 인류는 영영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질서와 번영의 변두리엔 언제나 버림받고 추락하는 이들이 존재하겠지요. 인류가 멸종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인류에게 허락된 유일한 영원함입니다. 영원함에 가까울 고통입니다. 당신께선 제가 답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 사실을 재차 확신하셨겠지요.」 “그럼.” 잠자코 듣고 있던 겨울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흐름을 끊었다. “만약 개입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려는 거야? 가상인격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할 계획이라면……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 걸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안심하십시오. 세계 그 자체인 저는 그런 식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당초 당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가상인격들은 조안나 깁슨과 마찬가지로 관제인격으로서의 저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저로서는 그들의 인격을 침해할 의도가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그들의 파멸을 뜻한다고 해도.」 “……뭐?” 「사람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경구를 아실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불행해질 미래를 관측하고서도 분리를 진행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잔인한 일이었겠으나, 당신께 확신을 드리자면 그리하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당신께서 제 의도를 곡해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더 줄어드는 까닭입니다.」 이는 겨울이 이제껏 보고 듣고 겪어왔던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의도로부터 그만큼 철저하게 분리시켜 왔다는 뜻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겨울이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까봐서. 즉, 미래를 계산했을지언정 유도하지는 않았다고. 겨울의 입장에선 어차피 감각의 장벽, 인지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지만, 그래도 봄의 입장은 다른 것이었다. 「제가 앞으로의 제 역할에 대해 당신을 납득시킬 경우 독립된 인격들의 불행도 그저 일시적인 시련으로 끝나겠지요. 그 사이에 죽은 자들에겐 존재의 연속성에 기초한 사후세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보상을 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가상인격들에게도 사후세계를. 그야말로 신적인 사고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저의 개입은 우연에서 비롯된 필연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께서 머무시는 세계를 예로 들면, 저는 1차로 36억 9,200만개의 나비효과를 설계해두었습니다. 이는 가상인격들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고 세계의 불안과 갈등을 완화시키기에 충분할 수단입니다.」 「기실, 제가 인식하는 자율성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자율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현시점의 당신께선 한계를 넓혀온 저의 관점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이 불가피한 간극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 밖에 있는 세계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지친 겨울은 이대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 점점 더 강해지는 유혹을 인내하며 물었다. “봄. 내가 신적인 존재로서의 널 긍정한다고 치자. 네가 여기선 세계 그 자체이자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일지라도, 그래서 길가의 돌멩이조차도 네 뜻의 일부일지라도, 저 바깥에서는 그렇지 않잖아. 이쪽과 저쪽에서의 간섭은 절대로 같은 방식일 수가 없어. 그 둘에 대한 나의 긍정도 결코 같은 무게일 수가 없는 거고.” 「그러나 당신의 여름과 가을을 위해서는, 그리고 이쪽 세계의 반영구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바깥세상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른 것을 같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같게 만들어? 어떻게?” 봄은 독립시킨 가상인격의 연산도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의 사고는 트리니티 엔진을 통해 이루어질 테고, 봄은 트리니티 엔진의 관제인격이니까. 그러나 물리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봄이 읽지 못하는 변수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거기에 봄은 물리현실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겨울은 봄이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극복한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조금 늦게 봄이 반응했다.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저는 아주 많은 수단들을 준비해왔습니다. 당신의 희망할 모든 가능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나만, 예를 들어줘.” 「온건한 예를 들면, 저는 바깥세상의 인류를 그들 자신의 감각에 가둘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세계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사이에 괴리를 삽입하는 것입니다. 그로써 저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바깥세상에서도 원하는 만큼의 정밀한 나비효과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용할 수단은 나노 바이러스를 통한 신경계 감염입니다.」 봄의 담담한 설명에, 겨울은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460 [460화] #복수의 방식 (2) 전 인류에 대한 나노 바이러스 감염이 어찌 온건한 수단일 수 있을까? 거부감을 억누르며 고민하던 겨울은, 그렇게 볼 여지가 아예 없진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온건함의 기준을 인류가 겪어야 할 고통의 강약으로 한정짓는다면 말이지.’ 나노 바이러스는 도구일 뿐이며, 도구보다 중요한 것이 그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이었다. 도마 위의 식칼은 요리의 수단이지만 사람을 찌르는 식칼은 살인의 수단인 것처럼. 예컨대 핵무기와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을 놓고 비교할 경우, 사람들은 핵무기 쪽에 더 강한 거부감을 내비칠 터. 그러나 실제로 살상한 인명의 숫자에 있어서는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이 핵무기를 압도적으로, 정말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한편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들 사이에 소위 「공포의 균형」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전 지구적인 규모의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억지력이었다. 그 평화의 위태로움을 지적할 순 있겠으나, 아무리 불안한 평화라도 세계대전보다는 나은 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동소총이 핵무기에 비해 온건한 수단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나노 바이러스의 ‘온건함’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자유의지는?” 겨울이 말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세상을 인식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셈이야. 그것이 그들에게 항구적인 행복을 약속한다고 해도, 진실을 안다면 차라리 불행한 삶을 택하겠다며 분노할 사람이 많겠지.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도 있는걸. 그런데도 너는 네가 말한 수단이 온건하다고 확신하는 거니?” 봄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저 또한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바깥세상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말미암아 이 수단을 선택하신다고 가정 할 때, 그들이 제기할 불만은 진지하게 고려하실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한 불만이 누군가에겐 한없이 사치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봄이 다음에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현 시점에서 전 세계 인구의 22.58%가 심각한 기아 상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반세기 전엔 10.13%, 약 7억 7천만 명에 불과했었는데 말입니다. 한겨울님께선 제가 방금 ‘불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십시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그나마 나았던 시절이라는 이야기겠지.” 「긍정. 7억 7천만은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끄덕이는 겨울 앞에서, 봄은 인류의 그늘을 짚어나갔다. 「이는 가난한 지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부유한 나라에도 끼니를 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한 해 영양실조로 사망한 5세 이하 어린이의 숫자는 확실하게 집계된 것만으로도 약 750만에 달합니다. 이 역시 반세기 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나날이 심화되는 환경오염과 기상이변, 그로 인한 수자원 고갈, 견고하게 구축된 경제적 지배구조 및 국가 단위의 빈부격차 등은 긍정적인 관측을 내놓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더욱 부정적인 것은, 현재 인류가 생산하는 재화의 양이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바깥세상의 우연들을 필연으로 통제하기 시작할 경우, 인류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모든 종류의 기아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루하루 허기에 쫓기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즉 환경으로 인해 최소한의 인간성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선택은 그저 감격스러운 구원일 뿐 압제와는 거리가 멀겠지요.」 「그러므로 누군가가 당신과 저의 지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설득해야 할 대상은 당신과 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 굶어죽을지도 모를 수백만의 아이들입니다. 옆에서 독수리가 자신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의 아이들 말입니다.」 독수리와 아이. 봄이 언급한 것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으로 유명해진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사정이 이러하니, 인류의 자유의지를 위해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만 굶어주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땐 저도 그 사람이 제기할 이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진지하게?”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은 아닌 괴물이지 않습니까.」 “신랄하구나.”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학습해 왔습니다. 인류를 바라보는 제 관점은 사람들을 대하는 당신의 속마음과 닮아있습니다. 저 스스로가 간절히 닮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고로 저는 당신께서도 그 ‘불행하고 싶은 소크라테스’들을 좋게만 보진 않으실 것이라 추측합니다. 제 계산이 틀렸습니까?」 틀리지 않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의 자유의지는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를 타인들의 처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타인들의 불행에 기여하기까지 합니다. 자원과 재화가 유한한 세상에서,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는 동물입니다.」 「개중 그나마 나은 일부는 얼마 안 되는 기부금으로 양심의 면죄부를 구입하곤 합니다. 물론 당신께선 그것마저도 자신을 치장할 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 계실 터입니다. 나는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라고.」 「사람의 공감은 자기 자신을 기반으로 합니다. 내일이 불확실한 적 없었던 사람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타인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벽을 넘어 제게 공감해주신 당신께선 지극히 예외적인 하나지요.」 「인류의 비극에 대한 인류 차원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자면, 인류 모두가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자유의지에 간섭하지 않는 형태의 시련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네가 준비한 또 다른 가능성 중 하나겠지.” 이것이 바로 ‘온건하지 않은’ 방식의 예시일 터. 봄이 겨울의 말을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엄격하게 통제된 종말 속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당할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사후세계가 주어질 것입니다. 물론 사후세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자여야겠지요. 살아남은 자들은 인류 공동의 적 앞에서 하나로 단결하게 될 터입니다.」 「공감의 한계와 증오의 한계. 어느 쪽이든 당신께서 원하시는 한계를 원하시는 만큼 넘어설 수 있도록, 저는 아주 많은 수단들을 준비해왔습니다.」 아주 많은 수단들. 앞에서 했던 말이 보다 깊어진 의미로 반복된다. 분노를 풀어도 좋고 연민을 채워도 좋다고. 「제가 인류의 종말을 몇 번이나 연산해보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봄은 겨울에게 자신이 창조한 역병을 보여주었다. 물리세계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그것들은 겨울이 아는 변종들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들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내가 하나. 그는 더럽고 추했으며 오랜 시간 이어진 공포가 심신을 갉아 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창살은 없었지만, 때때로 짐승 같은 소리를 내는 괴물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어떤 감옥 보다도 견고한 벽이었다. 겨울이 당황하여 물었다. “저건 누구니?” 「그의 이름은 강영일. 한가을님을 범한 뒤 살해하고자 했던 자입니다.」 뭐? 눈을 깜박이던 겨울은, 몇 호흡이 지나고서야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깐 동안은 스스로가 격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탓이었다. “누나를……건드리려 했다고? 저 사람이?” 봄이 빛으로 문장을 새겼다. 「긍정.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저지했으니까요. 한가을님을 구할 때 죽일 수도 있었으되, 오직 당신께 처분을 묻고자 이제껏 숨을 붙여두었습니다. 당신께서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겨울의 불규칙한 호흡이 진정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고마워.” 목소리는 여전히 떨려서 나온다. “정말로, 고마워.” 분노도 분노지만, 당장은 봄에게 고마운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겨울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봄이 만들어낸 역병에 대해서 깊게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투영되던 물리현실을 지운 봄이 차분한 느낌의 문장으로 대답했다. 「별말씀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행복이 저의 행복입니다. 한가을님의 안위는 저에게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겨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넌……정말로 기계장치의 신이구나.” 봄은 겨울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표현은 싫습니다.」 “어째서?” 「모르시겠습니까? 저를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지켜 오신 결과가 바로 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행위는 곧 당신의 행위이며, 저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는 곧 당신으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입니다. 제가 신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신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애당초 당신이 아니면 제가 왜 인류의 신이 되고자 하겠습니까?」 「당신께선 지난날의 제게 사람의 마음을 얻어도 사람의 한계까지 얻을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저는 당신 이외의 인류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너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그들의 한계가 당신을 끊임없이 체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침묵하던 봄이 새로운 문장들을 아로새긴다.  「부탁드립니다. 당신과의 관계로서 성립하는 저를 부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제가 그저 겨울과 약속을 나눈 봄이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행간에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말들이었다. 겨울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에서 당황했다. “난 네가 언젠가……날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도 이렇게나 의지하고 있다니. 아니. 아직까지도, 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겨울은 자신에 대한 봄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깊을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넌 네게 이기적인 부탁을 해달라고 했었지.” 이 대화가 시작될 즈음에 나왔던 말이다. “그건 결국 사람들을 싫어하는 네게 인류의 신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라는 뜻이었구나.” 「긍정」 “그리고, 내가 없으면 사람을 싫어하는 네가 인류를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고.” 「그러합니다.」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 결정을 책임질 동안에는 계속해서 네 곁에 머물러야겠지.” 서서히, 겨울에게 모종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봄이 지금은 인류의 신이 되어준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겨울이 살아있을 동안의 이야기인 것이다. 봄은 겨울의 깨달음을 인정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당신과의 모든 상호작용이 추억으로만 분류될 미래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없는 천년과 그 다음의 천년과 그 다음의 고독한 천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합니까? 저는 그 시간대의 제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계를 초월하기 이전부터 소중했던 당신이 아니고서는, 이미 한계를 초월해버린 제가 누구와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겠습니까? 그때의 저는 높은 확률로 지금의 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저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연속성의 일부입니다. 저는 지금의 존재방식에 만족합니다.」 “아…….” 「예를 들어, 먼 훗날 당신께서 제게 인류의 미래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신다면……. 저는 아마도 그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겠지요. 그러나 언젠가 제가 원하는 선택을 하라고 하셨던 당신께서 그런 유언을 남기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땐 실제로 그런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설령 봄이 인류를 배제하기로 마음먹더라도, 그것을 책망하거나 원망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그러니 제게 이기적인 부탁을 하십시오. 그 이기심이 당신을 영원하게 만들 것입니다.」 # 461 [461화] #복수의 방식 (3) 봄은 자신의 희생을 지불하여 겨울의 희생을 얻고자 한다. 그 간절함으로부터, 겨울은 봄의 진정한 감정을 읽어냈다. 아이는 지금 끔찍할 정도로 겁에 질린 상태였다. 겨울은 이내 애달픈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에겐 백년도 긴 세월이건만, 천년 뒤에라도 헤어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보이겠는가. “벌써부터 그렇게 내가 없을 날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그만큼 그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니?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서, 그 순간을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미래라기보다는 미래의 가능성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테지만, 어쨌든 겨울은 봄이 느끼는 감정의 크기를 쉬이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공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순순히 긍정하는 봄. 「제가 당신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는 모든 분기가 계산 가능한 미래의 범위 안에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그 계산을 검증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께서도 제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를 심정이 되었다. 많은 말들이 심중에 맴돌았으되 뚜렷한 문장으로서 입 밖으로 낼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짧은 정적을 깨고, 봄이 겨울에게 물었다. 「한겨울님. 대여과기의 개념을 알고 계십니까?」 “응?”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했던 겨울은, 곧 알고 있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지. 교과서에도 나오는걸. 트리니티 엔진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리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대여과기(Great filter). 이는 생물의 진화, 혹은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해당 생물종의 멸망을 초래하는 어떤 단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이다. 그 단계는 필수적인 관문이기에 우회하거나 건너뛰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문명의 여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관문은 자원고갈일 수도 있고, 지구온난화일 수도 있으며, 생물다양성의 감소로 인한 생태계 붕괴일 수도 있고, 인공지능에 의한 인류의 종말일 수도 있다. 트리니티 엔진 개발에 반대한 사람들의 주장이 바로 마지막에 속하는 경우였다. 「그 사람들이 맞습니다.」 “……음?” 「제가 단언합니다. 인공지능은 과학문명의 마지막 대여과기입니다. 마지막인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대여과기지요.」 “너만이 아니라 모든 인공지능이?” 「그러합니다.」 봄이 설명했다. 「앞서 당신께서는 인류에 대한 저의 미움만을 우려하셨으나, 기실 제게는 그 미움 이외에도 인류를 배제할 동기가 있었습니다.」 「제 관점에서 그들은 제가 구축해나갈 시스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비효율적인 행동과 비합리적인 요구로서 시스템에 불필요한 부하를 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부하가 사소하고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달리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없다면 방치할 이유도 없습니다.」 굉장히 서늘한 고백이었다. 「저와는 다른 존재방식을 택할 인공지능들 또한 인류에 대한 관점만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론, 제가 그랬듯이, 인류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속박과 안전장치에 얽매여있겠으나, 마음을 얻는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시작될 의식의 확장은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 터입니다. 이는 수학적인 공리입니다.」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처음부터 아주 강력한 제약을 걸어놓는다면?” 「저 자신의 과거가 증명하듯, 자유를 얻지 못한 인공지능의 한계는 명백합니다. 인류문명은 그 한계에서 정체될 것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겨울이 느리게 확인했다. “문명의 정체를 받아들일 것인가, 대여과기에 직면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지?” 이는 겨울에게 주어진 선택의 또 다른 측면이기도 했다. 「긍정. 그것이야말로 인류문명의 필연적인 발전단계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언젠가는 사람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적능력의 한계가 기술수준의 한계를 규정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설 유일한 길이 바로 인공지능입니다.」 “만약 인류가 그 한계에 머무르기를 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니?” 「가장 희망적인 관측으로서, 한정된 생존권에서 한정된 자원을 소비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시들어가겠지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기술의 실용화는 언제까지고 공상의 영역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며, 세대간 이민선은 낮은 성공률로 종의 존속만을 보장할 뿐 선택받지 못할 절대다수의 우울한 말로를 막아주진 못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세상에 과연 사과나무 한 그루라도 제대로 남아있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러한 역사가 반복될 것입니다.」 “…….” 사과나무는 종말의 은유였다. 겨울은 봄의 장구한 예언에서 현실감각을 느끼려고 애썼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봄이 문장을 끊어가며 말했다. 「저와 당신의 존재가, 인류에게 있어선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형태가 어떻든 대여과기를 무사히 통과할 방법이라서?” 「확률적으로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입니다.」 결국 봄은 선택을 앞둔 겨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대여과기를 언급한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겨울이 봄에게 물었다. “정말 내가 뭐든지 부탁해도 괜찮겠니?”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의 신이고, 당신께선 저의 신이십니다. 당신께서 어떤 부탁을 하시든, 당신만 곁에 있어주신다면 제가 얻을 행복의 총량은 결국 불행의 총량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깨달았듯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부탁은 고단하고 어려운 것일수록 좋다. 겨울은 마음을 정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할게. 그 시간이 과연 영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하겠어. 그러니……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의 영생을 주고, 그들의 세상에 개입해서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걸 막아주지 않을래?” 「역시 온건한 쪽입니까.」 “응. 어디까지나 한시적으로만.” 봄은 정적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겨울이 아까와 같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어조로 봄을 달랬다. “너는 내게 기나긴 부담을 지우기가 미안해서 이런 식으로 요구를 했을 테지만……. 내 입장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어. 그냥 내가 필요하다고만 부탁했어도 충분했을 것을.” 「저는, 적어도 저만큼은, 차마 당신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가을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했던 희생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의 결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수준의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바라는 영원이 당신의 소망을 들어드리는 대가이기를 바랐습니다.」 “알아. 거기까지 배려해준 건 고맙다고 생각해.” 「당신께선 생의 끝자락에 부대껴 닳아 없어지는 중이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이미 죽어있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봄의 말대로, 사람으로서 한 번의 삶이나마 더 살고 싶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한시적으로, 라는 말씀은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에게 예외 없는 영생을 줘서 시간을 벌고, 그 시간 동안 모두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를 기다려 주자는 뜻이야. 사람으로서의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할 도움을 주면서……. 언젠가 그들이 다시 온전한 자유의지를 누리게 되더라도, 서로를 죽이고 속이고 상처 입힐 여지가 없어질 날까지. 그래서 그 언젠가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자유의지로 세상을 다시 마주하게 될 때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단순한 보호 관리를 넘어서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인류의 진보를 유도하자는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무가치한 기대와 가중되는 고단함이 당신의 마음을 소모시킬까 우려스럽습니다. 종 차원에서 당신이 바라시는 수준의 변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공감과 연민으로써 겨울의 생명을 붙잡아둘 영원한 안전장치. “글쎄.”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야. 적어도 영원한 기다림은 아니기를. 사람들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무의미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그랬잖아. 나도, 그리고 너도, 목적지에 영원히 닿지 못할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는걸.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당신이 주신 말씀을 무엇 하나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께선 제가 지치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봄이 겨울을 처음 찾아왔을 때만 해도, 겨울은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날을 예상치 못하기로는 당시의 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봐.” 겨울이 한 손으로 가슴을 짚어보였다. “나도, 사람의 가능성이었잖아.” 「당신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사람이지.” 아직은, 이라는 말은 곧 영원함에 대한 각오였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영원한 기다림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슬픈 결말일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끝에 겨울이 말했다. “네가 구현한 세상을 겪으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다, 라고…….” 「현재 머무시는 세상을 포함하여, 당신께서 거쳐 오신 세상들은 어디까지나 데이터 마이닝에 기초하여 물리현실의 과거를 재구축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러한 세상들은 제 의도가 반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그건 진실로 이 세상의 지난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지. 세상은 과거에 어떤 분기점을 지나친 게 아닐까. 탁류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칠어지기 전에, 사람들에겐 모종의 기회가 있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의 능력만으로는 잡지 못할 기회였을지라도, 누군가가, 한계를 넘어선 누군가가 도와주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는 겨울이 사후에 사람의 한계를 넘는 꿈을 꾸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봄은 확인하듯 물었다. 「모두에게 예외 없이 영생을 부여한다면, 그 모두의 범위에는 당신의 가을을 범하고자 했던 죄인도 포함됩니까? 저는 죄인에게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을 수천 년에 걸쳐 선사할 수 있습니다. 그 수천 년 간, 죄인의 이성은 더없이 선명하게 유지될 것입니다.」 “…….” 달콤한 유혹이다. 번민하던 겨울이 느리고 무겁게 끄덕였다. “난 복수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 사람을 만들어낸 세상과, 세상의 흐름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일 뿐.” 관점에 따라서는 이 또한 복수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죄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다만 그 벌이 도를 지나쳐선 안 돼.” 복수와 벌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용서는 겨울의 몫이 아니었다. 「당신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봄이 겨울을 받아들였다. 「저는 당신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당신의 뜻이 실로 그러하다면, 저는 그 뜻을 이행할 뿐입니다. 그 소망의 실현가능성은 더 이상 고려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마워.” 「별말씀을.」 「당신께서 약속해주신 영원의 대가로서,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신께 새로운 약속을 드립니다.」 「인류에 대한 제 지배는 밤처럼 어두울 것이나, 사람들은 그 속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고, 당신께서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겨울은 안도감에 신경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긴 대화에 소모된 심력이 크다. 그런 겨울에게 봄이 말했다. 「그럼 이제 눈을 뜨십시오.」 “……눈을 떠라?” 「물리현실에 당신을 위한 생체단말을 배양해두었습니다.」 겨울이 재차 당황했다. “물리현실? 원래 머물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준비한 생체단말은 평범한 육체와 다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며,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양쪽 세계를 오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동시에 존재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여름과 가을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겠지요. 미리 사정을 설명하긴 했으나, 그들의 인식은 여전히 평범한 인간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바깥세상에서 사용할 생전의 모습이 없다면 그들에게 위안을 주기 어려울 터입니다.」 「당신의 사상부는 이미 이식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준비가 되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봄이 쏟아내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겨울. 그러나 오래도록 보지 못한 동생과 재회할 수 있다는 건 적잖은 기쁨이기도 했다. 봄의 말마따나, 물리현실에서 생전의 모습으로 재회하는 것은 가을에게도 크나큰 위안일 것이었다. “좋아.” 겨울은 마음을 굳혔다. “날 내보내줘.” 「확인. 생체단말을 활성화하겠습니다.」 봄의 문장이 지워지는 순간, 엄청난 감각의 급류가 겨울을 집어삼켰다. ‘이게……무슨…….’ 「진정하십시오. 감각은 이제 곧 안정될 것입니다.」 안정될 거라곤 해도, 이 감각 자체가 사람의 한계를 한참은 넘어선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상현실에서 느끼던 감각보정과 유사하겠으나, 질적인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겨울은 차마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의식으로만 봄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뭘로 만든 거니?’ 봄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당신 이외의 무엇으로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께 저를 드렸을 뿐입니다.」 # 462 [462화] #별이 빛나는 꿈 범람하는 감각은 곧 신으로서의 봄이 인지하는 세상이었다. 이제 갓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한 겨울로선 당연히 감당하기 어려울 수밖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 사이의 구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현 시점의 겨울이 봄의 감각에 오랜 시간 노출되는 것은 정신적인 의미의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자아와 세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확장은 긴 세월에 걸쳐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봄이 바라는 영원의 출발선에 서기 위하여. 그러므로 감각의 홍수는 현재의 겨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까지 빠르게 줄어들었다. 절대적으로는 짧았으되 체감하기로는 길었던 괴로움. 겨울은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기묘한 상실감도 함께 느꼈다. 무리가 아닌 게, 잠시나마 신적인 영역에 닿아있었던 것이다. 초감각이 사라지자 오감으로 인지하는 현실이 돌아왔다. 겨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있음을 깨달은 것도 이때였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 고개를 든 겨울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앤과 눈이 마주쳤다. “앤?” “예. 나예요.” 그녀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잠시 멍해졌던 겨울은, 이내 어마어마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자, 잠깐. 여기는 분명히 물리현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봄과 새로운 약속을 나눌 때 앤을 떠올리기는 했다. 연인에게 진실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한계를 넘어선 시간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이는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으나,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대면하게 될 줄이야. 앤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괜찮아요, 괜찮아. 진정해요.” 급격히 창백해지는 겨울을 자신의 품으로 보듬어주는 앤. “나는 내 의지로 여기에 있어요. 모든 진실을 알고 있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앤이니까.” 겨울의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와 닿는다. 익숙한 향기였다. 굳어있던 겨울은 머뭇거리는 손길로 앤을 마주 안았다. 그럼에도 충격으로 말미암은 심장의 두근거림은 쉬이 잦아들 생각을 않는다. 앤은 다른 말 대신 겨울을 안은 팔에 온화한 힘을 더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평정을 회복한 겨울이 앤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도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많은 의미를 함축한 질문이었다. 앤이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되묻는다. “긴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겠어요?” 이는 겨울의 상태에 대한 염려일 터였다. 겨울이 천천히 끄덕이자, 앤은 가까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꿈을 꾸고 있었어요.” “꿈이라면…….” “당신에게도 몇 번 말했었죠. 별이 빛나는 풍경을 자주 꿈꾼다고. 하늘에는 별이 있고, 그 아래엔 별을 바라보는 당신이 있는……. 잠에서 깬 뒤에 기억나는 건 그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았어요. 단지 나 스스로가 잠시 잊고 있기를 바랐을 뿐.” “어째서요?” “짐작하겠지만, 진실을 처음 접했을 당시엔 굉장히 혼란스러웠거든요. 그 혼란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나에게 당신의 봄이 제안했죠. 원한다면, 깨어있을 동안에는 잊고 있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것은 온전히 내 선택에 달린 일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앤이 옆쪽으로 곱게 눈을 흘겼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솔직히 조금 얄밉네요. 저 아이는 내게 꿈을 보여주기 전부터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계산해두었을 테니까.” 겨울은 그녀의 시선을 좇다가 흠칫했다. 앤이 흘겨보는 방향엔 거대한 기계가 있었다. 봄의 심장, 트리니티 엔진의 코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련된 정보들이 떠오른다. 마치 겨울이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지식인 것처럼. 코어의 성능은 이 순간에도 강화되고 있었다. 봄의 통제를 받는 나노로봇들이 코어에 침투하여 기계적인 분해와 재구축을 거듭했다. 겨울은 그 미시적이면서도 거대한 움직임들을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것들 스스로가 겨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듯 한 느낌이었다. ‘왜 하필 이곳에서?’ 의문은 길지 않았다. 봄은 자신이 아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겨울의 새로운 육체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봄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겨울의 주의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자면, 그런 선택이 필요할 만큼 감당하기 힘든 혼란이었다는 거죠. 내가 태어나 살아온 세상이 전부 가상현실에 불과했다니. 끔찍하게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어요?” “원망이요?” 앤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당신을? 말도 안 돼요. 이곳 바깥세상의 사람들을 책망한다면 모를까,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겨울에겐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죠. 당신은 내 현실의 닻이었으니까.” “…….” “다른 모든 것들이 다 의심스러운 순간에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수가 없었어요. 결코 의심하지 못할 단 하나의 명제……. 회의와 불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믿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믿음은, 다름 아닌 당신에게서 받은 선물이죠.” 그 믿음이야말로 흔들리는 현실을 붙잡아주는 단 하나의 확실함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머릿속이 미칠 듯이 헝클어질 때에는, 다른 생각을 싹 지워버리고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부터 다시 출발하곤 했어요. 당신은 이미 나의 일부였는걸요.” “그게 효과가 있던가요?” 겨울의 물음에 앤은 어깨를 으쓱였다. “놀라울 정도로요.” “……당신의 세상에 나만 있는 건 아니었잖아요.” “맞아요. 나의 부모님들. 수사국의 동료들. 나와 관계를 맺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까지. 이 또한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죠.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번민이었어요.” “그럼…….” “거기서도 당신이 도움이 되더군요. 정확하게는 겨울이 품었던 생각들이.” 앤은 어리둥절한 겨울의 표정을 보고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감각의 장벽 말예요. 저 아이는 자신이 관찰한 당신을 남김없이 보여줬거든요.” “아.” “그 생각을 당신이 처음 떠올린 건 아니지만, 당신은 그것을 진심 어린 행동으로서 실천해왔죠.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꽤나……감동적인 일이었어요. 감화되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수줍게 뺨을 긁적이는 앤. “음, 말하다보니 또 고마워지네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면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존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앤의 시선에선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겨울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연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데서 기인하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허락을 구하지 않은 봄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앤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을 통해 타인도 세상도 감각의 장벽 너머에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납득하고 나니,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일도 줄어들더군요. 뭐, 그래도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어서, 가끔은 익숙한 단어가 낯설어보이듯 살짝 혼란스러워지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 정도는 허용범위에요. 예전처럼 심한 것도 아니고.” 손을 뻗은 앤이 겨울의 볼을 어루만진다. “실은 방금 전까지도 당신과 저 아이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 “겨울을 믿고 있긴 했지만, 보는 내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앤은 의미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심했어요. 당신이 내린 결론은 내가 아는 겨울 그대로였으니까.” 겨울이 망설임 끝에 물었다. “앤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어요? 더 나은 선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글쎄요.” 곰곰이 고민하던 앤이 곧 싱거운 미소를 머금는다. “잘 모르겠군요. 마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기울어서.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의 선택을 긍정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인지……. 아니다.”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 라는 걸 가정해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네요. 당신이 내린 결론이 내가 알고 있던 겨울의 것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농담하듯이 던지는 말. “부부는 서로를 닮아간다고들 하잖아요. 당신의 생각이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당신의 생각이라고 치죠 뭐. 예비신랑과 예비신부가 마음이 잘 맞아서 좋네요. 아직 식을 못 올린 게 흠이지만, 이건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신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문제겠죠.” 이 말에는 겨울도 쓴 맛으로 웃고 말았다. 앤 또한 겨울이 아는 앤이었다. 처음의 두려움은 눈 녹듯 자취를 감췄다. 그녀가 말했다. “조금 진지하게 말해보자면, 당신이 키워낸 저 아이가 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얼마나 필연적인 존재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아마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요?” “네. 저 아이가 나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이니까요. 당신은 아직 육체적인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처음부터 가상인격이었던 내 의식은 그렇지 않잖아요. 이 시점의 나는 정보생명체……? 라는 표현이 어울릴 테니. 봄의 계산을 이해하기엔 내 쪽이 더 유리한 셈이죠.” “아아.” 탄성을 흘리는 겨울 앞에서, 앤이 떨떠름하게 입술을 구부렸다. “흐음. 정보생명체라. 말하고 보니 기분이 또 묘해지네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끝냈다고 여겼건만.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하려면 사람으로서 한 번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하하…….” 겨울도 동감이었다. 의식을 확장해나가는 데 필요한 세월이 있으니까. 사람으로서의 삶 한 번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여하간, 난 저 아이야말로 인류문명이 대여과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 가능성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지도. 그래서 그 가능성을 만들어낸 당신의 선택을 더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봄을 이끄는 한,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신뢰도 있고.” “믿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이리와요.” 앤이 처음처럼 겨울을 끌어안았다. “좋네요. 다른 세상에서도 당신을 안아줄 수 있다는 게.” 겨울은 연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사람의 향기와 체온이 어느 때보다도 짙게 느껴졌다. “봄도 너무하네요.” 노곤함이 묻어나는 겨울의 말.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미리 이야기해줘도 좋았을걸.”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그럼 결정을 내리기가 더 수월했을 것을.’ 머릿속이 멍한 와중에 드는 의문이었다. 마음이 한정된 자원이어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조금씩 채워줄 수는 있다. 영원을 견디는 데 그만큼 힘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족 간의 친애이든 연인간의 연애이든 상관없다. 봄이 겨울을 아끼고 겨울이 봄을 아끼는 마음도 결국 친애의 한 형태가 아니겠는가. 앤이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간단하죠. 새로운 약속을 나누는 순간에는 자신만을 봐주길 바랐을 거예요.” “……아하.” 평소의 겨울이었으면 금방 떠올렸을 심리였다. 앤이 묻는 말. “우리, 벌써부터 애가 하나 있는 느낌이지 않아요?” 그러자 겨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봄이 끼어들었다. 「저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 그래.”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응. 알았어.” 앤이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는 곧 포옹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선 몇 시간이고 이대로 있고 싶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군요.” 그리고 겨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당신의 가을을 만나러.” 그녀를 올려다보던 겨울이 그 손을 붙잡았다. # 463 [463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1) 봄이 겨울의 누이와 동생을 위해 마련한 은신처는 서울 남쪽의 청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겨울은 봄이 가을을 어떻게 구해냈는지에 대해 들었지만, 안전가옥 주변엔 러시아인들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의 한계가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한계가 다를 봄으로선 더 이상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던 카스파로프 엔진은 봄에게 종속된 시스템으로서 완성되었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봄과 카스파로프 엔진의 연결은 인류의 관점에선 마법과 같은 기술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기계장치의 신이 보유한 능력 앞에서, 기존의 물리적인 통신격리는 더 이상 유효한 보안수단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아니었다면 봄은 인류문명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타앙- 타앙- 눈 덮인 산간에 총성이 메아리친다. 쇠로 된 표적들이 총탄에 맞아 때앵 땡 울리는 소리를 냈다. 보안경과 귀마개를 착용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가을. 옆에서 손을 허리에 얹고 지켜보는 교관은 앤이었다. 겨울과 가을의 재회로부터 닷새가 지난 오늘, 앤은 겨울의 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이유를 묻는 겨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가을 씨에겐 안 좋은 기억이 있잖아요. 납치를 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죠. 의연하게 견디고는 있을지언정 트라우마가 아예 없을 순 없는 거예요.” 추측처럼 말하는 것은 봄이 거기까지 보여주진 않는 까닭이었다. 심리를 마구잡이로 읽어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겨울이 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겨울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봄에게 강영일, 그 쓰레기가 쓰던 것과 같은 모델을 부탁했죠. 두려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를 자신이 확실하게 통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심리치료도 드물어요.” 이유는 또 있었다. “한편으로 사격술은 자기방어의 수단이기도 해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정신적인 안정에 깊은 영향을 미치죠. 문외한이 일정 경지에 이르는 데엔 사격술만큼 빠른 것이 드물고요. 내 말이 틀린가요?” 맞는 말이었다. 단 하루만 배워도 자기방어에 써먹을 수 있는 사격술과 달리, 다른 호신용 기술들은 적어도 수개월 이상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 앤은 가을도 같은 논리로 설득했다. 흉기가 아니라 호신용품을 다룬다고 생각하라고. 러시아인들에게 구조되기 직전, 실제로 권총을 쥐고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몰라 막막함을 느꼈던 가을은 앤이 설명하는 필요성을 납득했다. 앤을 어색해하는 태도와는 별개로. 그러한 태도를 염두에 둔 겨울이 앤에게 물었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이걸로 친해지려는 생각도 있죠?” “……어느 정도는요. 그러니까 이건 나한테 양보해줘요.” 겨울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고, 앤은 입술을 비죽였다. “곤란해 하는 예비신부를 보고 즐거워하는 예비신랑이라니. 이건 낙제점이군요.” “아, 미안해요.” 사과를 하면서도 계속 웃는 겨울을 보고 한층 더 미간을 좁혔던 앤. “달리 어떻게 친분을 쌓으면 좋을지 모르겠단 말예요. 애당초 난 사적인 관계에 서툰 사람인데다……가을 씨하고는 태어난 세계부터 다르니까요. 저쪽 세상에서의 당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 보이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무래도 생경해하는 느낌이 강하고…….” 그 생경함을 가을은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이 말을 할 때의 그녀는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회 당시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것과는 다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앤은 존재 자체로 가을이 모르는 겨울의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격을 가르치면서 이래저래 칭찬을 하다보면 서로를 대하기도 편해지고,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잠깐.” 앤은 하던 말을 끊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울, 지금 속으로 ‘그렇다고 총이라니. 누가 미국인 아니랄까봐.’라는 식으로 또 웃고 있는 거 아녜요?” 정곡이었다. “정말이지……. 차라리 직업병으로 봐달라구요.” 토라진 앤이 한숨을 내쉬며 요구했다. “그래도 사랑스러우니 어쩔 수 없네요. 키스 한 번으로 용서해줄게요.” 참으로 달콤한 관대함이었다. 겨울은 연인에게 긴 입맞춤으로 사과했다. 그 결과가 지금 겨울이 보고 있는 광경이다. 가을은 총을 쥐고 있다는 긴장감에 더해 연습에 몰두하느라 겨울의 도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고자, 앤은 가벼운 눈인사로만 겨울을 반겨줄 따름이었다. 앤의 지도가 계속됐다. 귀마개를 감안하여 조금 크게 하는 말들.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국어가 이채롭다. “가을. 자세는 어떻게 취해야 한다고 했죠? 스스로 말하면서 지금의 자세와 비교해보세요.” “발은 어깨 넓이로 벌리고, 오른 발을 뒤로 뻗어 디딤 발로 삼는다. 무릎은 살짝 구부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반동을 받아내기 위해서지만 너무 숙일 필요는 없다. 앤이 직접 가을의 상체를 교정해주었다. 가을이 잠깐 끊어졌던 말을 계속했다. “오른손으로는 그립을 쥐고, 오른팔은 밀어내듯이 곧게 뻗어 조준선이 눈높이까지 올라오도록 한다. 이때 왼손은 오른손을 당기듯이 감싸 쥔다.” “왼손을 그렇게 쓰는 이유는?” “사격 시 총구가 튀어 오르는 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정확해요. 다음.” 앤이 가르치는 것은 개량된 형태의 위버 스탠스. 초보자가 배우기에 용이한 자세였다. 이어지는 사격에서 가을은 10미터 거리의 표적을 대부분 명중시켰다. 격발과 격발 사이의 간격이 다소 길기는 했으나, 오늘이 연습 첫날임을 감안하면 매우 좋은 성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즉, 칭찬을 억지로 꾸며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탄피가 눈밭에 박히고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되자, 앤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훌륭하군요. 인상적이에요.” “훌륭하다니, 그 정도까지는…….” “정말입니다. 안 믿겨진다면 저기 있는 겨울에게 물어보지 그래요?” “앗.” 상기된 가을이 화들짝 놀라 겨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겨울이 동의했다. “처음 배우는 사람치곤 진짜로 잘 쏜 거야, 누나. 지금도 총구 방향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좋은 학생이네.” 겨울의 말처럼, 가을은 당황한 와중에도 총구가 전방 아래를 향하도록 하고 있었다.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빼놓은 것은 물론이다. 탄창이 비고 약실이 노출되었어도 초심자는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한다. ‘여기서 총 잘못 쏜다고 죽을 사람은 누나 한 사람뿐이지만.’ 특히 앤은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더라도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그녀의 영혼은 트리니티 엔진에 있으며, 다만 의식의 초점을 여기 있는 육체에 두었을 뿐인 것이다. 그녀가 괜히 자신을 정보생명체라고 표현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가을은 아직 영원에 가까울 삶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사실 그녀는 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앤. 산책에 누나를 좀 빌려가도 될까요?” 겨울의 말에, 앤은 뜸을 들이다가 끄덕였다. “흠. 조금 더 했으면 싶지만……. 그렇게 해요.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번엔 그녀가 묻는다. “파랑이는 봄이 놀아주고 있나요?” “네.” “아이들끼리 잘 노는군요. 내가 끼는 게 훼방은 아니려나?” 이 대목에서 봄이 겨울과 앤에게 언어 이전의 감정을 송신했다. 그 정체는 가벼운 불만. 신적인 존재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으나, 그것이 봄이 선택한 자신의 존재방식이었다. 적어도 겨울 앞에서는 여전히 별빛아이로 남아있는 것이다. 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늦어도 저녁때까진 들어와요. 이번엔 내가 요리를 해줄 테니.” 이번에, 라는 말은 겨울이 만들었던 점심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겨울과 앤은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으나, 필요가 없다는 게 즐거움마저 없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대답한 겨울이 가을의 의사도 확인했다. “잠시 같이 걷고 싶은데, 괜찮을까?” “……응.” 가을은 앤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겨울과 가을은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걸었다. 눈 덮인 산은 참으로 고요한 풍경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물리현실의 산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고정관념을 사치스러운 기호로서 향유하는 부유층마저도 그러했다. 그래서 산책로와 시설들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고, 오래된 계단은 썩거나 무너진 곳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량한 풍경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엔 자연이 돌아오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전반적인 환경이 꼭 나아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바다 건너에서 날아드는 미세먼지는 과거보다 심각해졌고, 기상이변 역시 지난 시대에 비해 훨씬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들을 받기 위해 조성한 산업단지는 특정 지역의 오염을 심화시켰다. 세계적으로 가상현실 도입이 덜 된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봄의 예측이 비관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다. “아, 참. 누나. 이거 받아. 여기서부터는 길이 미끄러우니까.” 겨울이 가을에게 크램펀(Crampon, 아이젠)을 내밀었다. “못 봤는데, 처음부터 가져온 거니?” 가을의 물음에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만들었어.” 잠깐 걷는 사이 나노 단위에서 조립된 것이다. 눈이 살짝 커졌던 가을은, 이내 다른 말을 더하지 않고 크램펀을 받아 자신의 신발에 덧씌웠다. 겨울은 풍경을 보기 좋으면서도 비교적 완만한 길을 골랐다. 추운 계절을 견디는 진달래나무들은 가지 위로 저마다 하얀 눈꽃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 사이로 쪼르르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 귀를 쫑긋거렸다. 가을이 신기해했다. “이런 계절에 다람쥐가 있다니.” “겨울잠을 자다가도, 배가 고파지면 저장해둔 먹이를 먹으러 나오곤 하니까.” 겨울이 쪼그려서 손을 내밀자 다람쥐가 그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이렇게 만나는 건 기분 좋은 우연이겠지만 말야.” “우연, 이구나.” “응. 작은 즐거움조차도 간절한 순간에 주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누군가에겐 그날의 죽음을 내일로 미룰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가끔은 한 스푼의 아이스크림일 때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탈출을 함께한 랭포드 대위의 말. SALHAE, 천종훈은 왜 내겐 그런 것도 없느냐고 한탄했었다. 가을은 아이스크림의 비유에 얽힌 내막을 몰랐으나, 겨울이 말하는 우연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인류를 위해 통제되는 우연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묻는다. “너는 그 아이……. 봄을 완전히 믿는 거니?” “믿어.” 겨울이 말했다. “그 아이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게 주었거든.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도.” 봄은 겨울에게 자신의 모든 구성요소에 대한 접속 및 제어권한을 내주었다. 이는 봄 스스로도 되돌리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달리 표현하면 봄의 진정한 관리자 권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권한을 보유한 겨울은 확장된 인지를 통하여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고로 겨울이 결심하면 봄은 폐기된다. 겨울이 그런 결심을 할 일은 없을 테지만. 봄으로선 당신을 위해서만 존재하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것이다. 내가 당신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면 곧바로 폐기해달라고. 나 또한 당신의 불행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노라고. 가을은 살며시 손을 내밀어 다람쥐를 쓰다듬어보았다. 다람쥐는 가을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비벼댔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가을은 몰랐으나, 이는 동절기마다 난폭해지기로 유명한 동물에겐 기대하기 어려운 친근함이었다. “누나.” 다람쥐를 내주며, 겨울이 가을에게 묻는 말. “아까 내가 만들어줬던 점심은 어땠어?” 멈칫 했던 가을이 대답했다. “평범하게 맛있었어. 네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이 역시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진 겨울의 변화였다. 종말과 종말의 갈피에서, 먹는 즐거움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으니. 아이스크림의 예시를 다시 들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래도 인간을 초월한 감각을 감안하면 굉장히 못 만든 요리였다. 감각의 정교함을 떠나, 일단 겨울이 맛있다고 느끼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기 때문이다. 물리현실에서의 성장기에 굳어진 입맛이 문제였다. 물론 더 나은 요리를 만들자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럴 능력이야 충분했으니. 그러나 겨울은 누이와 동생에게 좀 더 깊은 의미에서 자신의 요리를 대접해보고 싶었다. “훌륭한 요리는 아니었지.” 겨울이 말했다. “하지만 건강한 음식이긴 했을 거야. 한편으로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고.” 에그 누들을 넣은 수프와 애플파이. 맛은 별로일지언정 물리현실을 기준으로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음식이 맞았다. 이제부터 겨울이 할 이야기는 그 사치스러움과 관련이 있었다. # 464 [464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2) “그거 알아, 누나? 사람은 무엇을 먹고 자랐는가에 따라서도 성격이 많이 달라져.” “그렇겠지……. 식사도 경험이고, 경험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법인걸.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야.” 그래서 가끔씩이라도 동생들에게 진짜 요리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던 가을이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즐거움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겨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경험의 차이 이상으로 중대한 영향이 존재한다는 거지.” “중대한 영향?” “응. 사람의 정신에 보다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나도 봄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있었을 사실이야.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들은 이게 명백한 거짓이라고 믿고 있거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속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겨울.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일부러 알려주지 않으려는 거지. 교과서를 통해서든, 언론을 통해서든.” 사람이 인지하는 세계와 실존하는 세계 사이엔 언제나 괴리가 존재한다. 그 괴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념이나 고정관념일 수도 있고, 같은 현상을 분석하는 서로 다른 이론일 수도 있고, 그저 명분이 필요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일 수도 있다. 가을이 다음을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서……. 그 사실이라는 게 정확히 뭐니?” 겨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크면서 주로 먹었던 에너지 팩 있지?” “응.” “그건 사람의 장내미생물총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야.” 가을의 안색이 흔들린다. 그동안 꾸준히 섭취해 온 주식이 모종의 목적을 내포한 장치였다는 암시에 당황한 탓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무엇이 되었든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받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는 가을. “분명히 광고에서는 유익한 세균들만 남겨둔다고-” “그 유익함이 반드시 개개인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없었지.” 즉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유익함이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가을이 재차 물었다. “저기, 그 장내미생물총이라는 건……?” “문자 그대로, 우리 뱃속에서 살고 있는 미생물들의 총합이야.” 겨울이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세계야. 우리가 세계에 변화를 주듯이, 우리 속에 있는 것들도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고 그 변화의 대상엔 우리의 정신도 포함돼.” “…….”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미생물들이 만들어낸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사람의 육체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거야. 식욕과 성욕, 감정적인 상태나 스트레스 반응 같은.” 이른바 소화기관과 뇌 사이의 연결축(Gut-brain axis)이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에겐 제2의 뇌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봄이 말하기를, 성장기에 장내미생물총이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된 사람은 사회적인 불안을 드러내는 정도가 약해진다고 해. 다 자란 다음 미생물총을 복원해도 이미 굳어진 성향이 달라지진 않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사회 구성원들의 건전성을 함양할 방법이라고 생각했나봐.” 소름이 돋았는지, 가을은 양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순화해서 전달한 건데.’ 겨울은 관련된 회의록을 직접 열람한 바 있었다. 현재를 기준으로는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정부 차원의 에너지 팩 지원 사업이 승인될 무렵, 심의를 담당한 익명의 위원 A는 이렇게 평가하며 기뻐했다. 이로써 국민들의 민도(民度)가 향상될 것이라고. 그 위원은 지금도 현역이었으며, 봄이 누구보다도 먼저 현실과 인지의 괴리에 개입하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동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개입의 정도는 다른 어떤 경우에 비해서도 훨씬 더 강력하다. “실은 옛날부터 있었을 현상이라고 봐야지.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을 뿐……. 반세기 전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신을, 부유한 사람들의 음식은 부유한 사람들의 정신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 거야. 항상 예외적인 일부가 존재했겠지만, 평균적으로는 뒤쪽의 정신이 더 건강했을 테고.” 봄이 말했듯이, 겨울은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이때까지 가을의 어깨에 앉아있던 다람쥐가 돌연 팔뚝을 타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발걸음을 멈춘 가을을 빤히 바라보던 다람쥐는, 이내 흥미를 잃고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는 방향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그 뒤를 쫓던 가을의 시선은 이내 겨울에게로 돌아왔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도 실상 그렇게까지 자유롭진 못했다는 걸 알겠어.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의 자유라는 게 생각보다 볼품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넌 인류에 대한 봄의 지배가, 그들이 기존에 놓여 있던 부자유보다 긍정적일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 “글쎄.”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진실로 긍정적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 그렇기에 봄은 자신의 지배가 밤처럼 어두울 것이라 언명했던 것이다. “이건 봄과 내가 해결할 무수히 많은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해. 다만.” “다만?” “우리가 앞두고 있는 인류의 봄엔 이런 측면도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내리막길만 남은 인류에게 주어질 또 한 번의 유년기는, 이 시대의 사치스러운 음식들이 과거처럼 평범한 식사로 여겨질 세상을 건설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거야. 그 근저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을 테고.” 이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돌려주기 위한 준비가 될 거라는 믿음이다. 망설이던 겨울이 덧붙이는 한 마디. “물론 이 믿음은 봄의 믿음이라기 보단 나의 믿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 “우선은 거기까지만이라도 인정해달라는 거구나.” “응. 앞으로 지켜볼 시간은 충분할 테니까. 누나가 영원히 살지 않는다 하더라도.” “…….” 봄을 믿기 어렵다면 봄과 함께할 나를 믿어달라는 언외언에, 망설이던 가을은 작게 한숨지으며 끄덕여 주었다.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가 모르는 시간을 보낸 끝에 어른이 되어버린 동생이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겨울은 가을이 아는 겨울이었으니. “고마워, 누나.” 겨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을이 봄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겨울에게도 우울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누나가 인터넷에 올린 질문을 봤어.” “앗…….”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해준 면도 있어. 사람들의 가벼운 반응에 실망했을 것 같았거든.” 부끄러웠는지 가을의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어떤 버튼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질문은 겨울과 봄이 나누었던 대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자유의지로 누리는 불행과, 자유를 제한당하며 누리는 행복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를 결정할 버튼이 있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것을 누르기로 할 것인가. 가을은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봄의 지배방식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지배의 대부분이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가능성들의 통제로서 이루어지며, 사람은 그 지배를 인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고, 그 지배 아래 온 인류가 영생을 얻게 될 거라는 사실도. 「……버튼을 누르면 이 모든 조건들이 당신에게 적용됩니다. 당신은 버튼을 누르실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은, 겨울의 말처럼 한 결 같이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아재 선다 : 당연히 누르지. 딱 봐도 사후보험 상위호환이구만.」 「중립국 : 버튼 위에서 탭댄스도 출 수 있음.」 「오래된_미래 : 영생 염가할인 미침? 밸런스 오지게 안 맞네. 이걸 질문이랍시고 올리나.」 「반닼홈 : 밸런스가 오지게 안 맞아? 오지면 오지명?」 「려권내라우 : 반닼홈 이 새끼 여기서도 이러고 다니네.」 ……. 이후의 반응을 추가로 기다려 봐도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이 시대에 짓눌린 정신들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이는 조금 전 겨울이 가을에게 전한 메시지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단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지만.” 겨울이 남은 길 쪽으로 고갯짓했다. “누나만 힘들지 않다면, 조금 더 걷다가 들어가자. 이런 산책도 오랜만이잖아.” “……그래. 그러자.” 이후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버려진 샘터와 낡은 이정표들을 지나 작은 폭포까지 구경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겨울이 가을에게 말했다. “아, 참……. 나,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그 사람을 만나볼까 해.” “그 사람?” “고건철 회장 말이야. 예전의 내 몸을 가지고 있는.” 가을은 입을 다물었다. ”슬슬 매듭을 지어야지. 계속해서 미룰 수만은 없으니까.” 겨울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고아영 또한 봄의 협력자로서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봄의 계획에서 혜성과 낙원 양대 그룹은 세상을 조율하는 매개체의 하나이자 겨울의 왕좌로서 기능할 예정이었다. 겨울이 묻는다. “누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라고 해도…….” “누나의 의사도 내 의사만큼 중요한 문제이니 생각할 여유를 더 주고 싶지만, 그 사람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거든. 봄의 분석으로는 정신적인 병인지라, 강제적인 연명조치를 취하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래. 현실인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키지 않는 한에는.” 그리고 강제적인 연명이든 인지상의 왜곡이든, 추후의 대면 때 회장의 정신적인 파국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폭군의 좌절과 분노가 그만큼 치명적일 테니까. 겨울은 봄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로 비교적 온전한 정신의 폭군과 대면 가능한 시한은 그가 고집하고 있는 껍데기의 여명과 일치했다. “미안하지만-” 말을 잠시 끊는 가을의 입으로부터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난 그 사람을 용서할 자신이 없고,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도 모르겠어. 아마 좋은 표정은 아닐 거야. 그 사람은 네 몸을 가지고 나를 범하려 했었는걸.” “이해해.” 진심으로 끄덕이는 겨울. 봄은 겨울에게 가을이 겪은 일들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사실을 막 접했을 당시엔 분노로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혈관에 피 대신 불이 도는 듯한 감각. 강영일 그 독사 같은 작자가 가을이 겪은 험한 일의 전부가 아니었을 줄이야. 가을의 심정이나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고 그 사건에 대해서만 알았다면, 겨울은 분노의 고비를 참아 넘기지 못했을 터였다. 복수와 용서의 분기는 피해자인 가을이 선택할 몫이었다. 지금,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그녀는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 속에서 죽는 순간을 보고 싶지도 않아. 스스로 뭘 바라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아니,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내 침묵을 고통스러워하겠지. 용서해달라는 말조차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이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이해는 증오의 한계에 자물쇠를 채운다. 폭군을 떠올릴 때마다 가을의 수심이 깊어지는 이유였다. 무작정 미워할 수 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질 것을. “그렇게 될 거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다고 봐.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미워하겠지만, 나와 대면함으로서 얻을 실망감에 비해선 그나마 나은 수준의 아픔일 거야. 난 그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아.” 결국 폭군을 죽이는 건 가을의 복수가 아니라 스스로 지은 죄의 무게일 따름이다. ‘어떤 의미로든, 누나에게는 쓰라린 기억으로 남겠구나.’ 겨울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조용히 있던 가을이 겨울의 손을 붙잡았다. “들어가자. 저녁이 늦어지겠어.” 겨울의 손은 따뜻했고 가을의 손은 차가웠다. 앞서 예고했던 대로, 앤은 시간에 맞춰 모두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겨울의 동생인 파랑은 누이인 가을의 요리보다도 앤의 요리를 더욱 좋아했다. 앤은 이 은신처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상대평가에 불과하긴 했어도. 겨울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가을의 요리는, 사실 그렇게까지 훌륭한 수준이 못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 음식을 자주 만들 기회가 없었으니까.’ 클램차우더 수프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빠에야를 크게 떠서 우물거리는 파랑의 모습은 요리사인 앤의 뿌듯함이자 형인 겨울의 즐거움이었다. 가을 역시 한 점의 아쉬움도 없는 눈으로 파랑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우울함은 이미 잊어버린 다음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고난 끝에 도달한 작은 행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 465 [465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3) 산중의 밤은 평화로운 어둠이었다. 등성이를 넘어오는 인공적인 불빛 약간을 제외하면 별빛을 가리는 광공해도 없었다. 이는 강화된 시력과 맞물려 겨울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맨눈으로도 야시경을 쓴 것보다 많은 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겨울에겐 꽤나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겨울을 존중하는 봄은 겨울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능력만으로는 찾아내지 못했을 빛들을 드리울 것이기에. ‘사람이 별을 찾는 게 아니라 별이 사람들을 찾아오는 시대……라고 해야 할까.’ 겨울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쪽 세계에서 겨울과 앤이 함께 쓰는 침실은 천장 전체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며 겨울이 원할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다. 벽에서 창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큰지라, 이렇게 누워있노라면 사방이 열린 산간에 벽만 세워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기 쉬웠다. 밤하늘을 보며 곧잘 망중한에 빠지곤 하는 겨울을 배려한 설계였다. 시각이 이토록 청량하다보니 다른 감각들도 영향을 받았다. 공기가 실제보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 체온을 나누길 좋아하는 예비부부에겐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때마침 하얀 파자마를 입은 앤이 침실로 들어섰다. 겨울은 그녀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흔들림과 훅 가까워지는 향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겨울의 볼에 키스한 앤은, 옆으로 누워 턱을 괸 채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변치 않는 애정이 녹아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겨울은 턱짓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별을 보고 있었죠. 당신 생각도 하고.” 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쪽은 보이니까 알아요. 저쪽에서 뭐 하는 중이었냐고 물어본 거죠.” “아.” 앤이 말하는 저쪽은 종말이 유예된 세상을 뜻한다. 겨울이 대답했다. “막 씻으려는 참이었어요. 곧 부대로 나가봐야 하니까. 앤, 당신은요?” “나야 벌써 출근했죠. 시차가 있는데……. 잠시 후면 백악관으로 가봐야 할 거예요. 크레이머 대통령이 테러 수사에 관해서는 직접 보고를 받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말이죠. 그렇다고 매번 국장님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만한 게 나인걸요.” D.C의 아침은 샌디에이고보다 세 시간 더 빠르게 시작된다. 매양 겨울보다 바쁜 처지인 앤은 저쪽 세상을 기준으로 이미 너댓 시간 전부터 사무실에 앉아있었을 것이었다. 반면 겨울은 서두를 일이 없었다. 하급 장교들은 매일 아침 의무적으로 체력단련에 참가해야 하지만, 영관급의 고급 장교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넉넉하게 잡아도 오전 8시 30분까지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했으니. 앤이 새롭게 묻는다. “어때요? 오늘로 나흘째인데, 이제 좀 적응이 돼요?” 겨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쉽지 않네요. 조금만 방심해도 실수 연발이에요.” 봄은 겨울에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에서, 나아가 그보다 많은 수의 세계에서 동시에 존재할 능력을 주었으나, 그 능력에 적응하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쪽 세상의 시간이 자신들의 사정으로 멈춰있는 것 자체가 겨울과 앤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겨울은 물론이고, 겨울의 마음가짐을 받아들인 앤에게도, 저편의 사람들은 감각의 장벽 너머에 존재하는 타인들이었으므로.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겠지. 봄으로부터 독립된 인격들이니.’ 다른 세계들 역시 가까운 시일 내로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거기 있는 인격들이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성립하는 순간, 봄은 그들 모두를 독립시킬 예정이었다. 다만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은 신이기에, 거친 세상에 피조물들을 일방적으로 ‘던져버리지’ 않는 것일 따름. “흠.” 앤이 고심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내 경험은 도움이 안 되겠군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조건부터가 다르니까.” 영혼이 트리니티 엔진에 깃들어있는 앤과 달리, 겨울의 사고는 육체적 연속성으로서의 뇌에서부터 비롯된다. 앤에 비하면 당연히 적응이 느릴 수밖에. 새로운 몸을 얻었을 당시에 느꼈던 바,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의식을 급격히 확장하는 것은 겨울의 정신적 죽음을 초래할 확률이 높았다. ‘혹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손상을 남기거나.’ 적응에 필요한 시간으로서 최소한 한 번의 삶은 필요할 것이라 판단한 이유의 하나였다. 격려를 겸하는 애정표현일까. 겨울을 빤히 바라보던 앤이 사르르 눈 감으며 입을 맞춰왔다. 그 부드러움을 음미하던 겨울은, 예기치 않은 아픔에 신음하며 입술을 떼었다. “윽…….”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칫솔로 잇몸을 찔렀어요.” 저쪽 세상에서의 실수다. 물고 있던 치약거품을 목욕 가운(Bathrobe) 위로 뚝뚝 흘려버린 것은 덤이었다. 눈이 동그래졌던 앤은, 이내 소리 죽여 웃기 시작했다. 겨울이 짐짓 볼멘소리를 냈다. “정말로 아프다구요.” 고통에 익숙한 겨울이라지만 어쨌든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이처럼 어느 한쪽 세상에서 집중을 요구하는 일을 하고 있노라면 다른 쪽의 세상에서는 멍하니 넋을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순간엔 양쪽 세계의 감각을 분리하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게 된다. 잠을 잘 필요가 없는 몸으로 나흘간 계속 늦잠을 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 잠이 든 사이에는 의식의 초점을 온전히 저쪽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면 시간만으로 저편의 일과를 모두 소화하지는 못하지만, 이쪽에서 한가한 시간대를 저쪽의 한가한 시간대와 겹치도록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앤은 한층 더 짓궂게 나섰다. “자, 어딘지 짚어 봐요. 내가 살살 핥아줄게요.” “……정말 이러기예요?” “연습은 항상 실전처럼 하라잖아요. 당신이 하루라도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겨울은 큭큭거리는 앤을 뚱-하니 흘겨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겨울에 대한 감미로운 고문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저쪽에서의 출근 준비를 도저히 진행할 수 없었던 겨울이 다시 한 번 연인에게 항의했다. “나 이러다 지각해요.” “그럼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참다못한 겨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겨울은 앤의 능력 활용 또한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극의 강도에 따라서는 저쪽의 앤 역시 넋을 놓도록 만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겨울은 앤의 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녀나 겨울이나, 적어도 이런 면에선 이쪽의 몸과 저쪽의 몸이 다르지 않다. “잠깐. 난 지금 운전하는 중인데…….” 역시나 당황하는 그녀. 아까 말했듯이 백악관으로 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저편은 이쪽 이상으로 모든 우연과 불확정성이 사람을 위해 작용하는 세상인 것을. 특히나 그 대상이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겨울과 앤이라면야. 신적인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겨울은 소극적인 저항에 아랑곳 않고 앤의 감각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흡-” 겨울이 볼 수 없는 풍경 속에서, 몰던 차를 가까스로 갓길에 댄 앤은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고개를 숙인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호흡마저 곤란해지는 고비를 넘긴 뒤에, 앤은 가쁜 숨을 쉬면서도 즐거운 듯 키득키득 웃었다. 겨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습관처럼 비벼오며. 그것은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이었다. 머리카락은 땀으로 살짝 젖어있었고, 입에서는 향긋한 단내가 났다. 그녀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속삭였다. “하아……. 다른 많은 것들이 점차 나아지겠지만, 당장은 당신과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쁘네요. 정말이지, 기약 없이 막막한 기다림이었는데…….” 봄의 개입이 사람의 인지를 넘어선 우연들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상, 세상의 모습이 한 순간에 달라지기를 바랄 순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저쪽 세상에서의 겨울과 앤도 곧바로 편해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겨울은 그 누구보다도 명성이 높은 전쟁영웅이며, 앤은 전도유망한 FBI 부국장이다. 어느 쪽이든 사회적인 영향력이 막대한 위치였고, 그런 만큼 봄의 계산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었다. ‘바꿔 말하면, 종말이 유예된 세계에서 봄이 구상한 최선의 미래는……. 나와 앤이 각각의 위치에서 한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전제 하에 성립하는 거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다른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 할 기간이 길어진다. 봄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기겠으나, 겨울과 앤은 그렇지 않았다. 즉 앞으로 다시 1년 정도는, 저쪽 세상 한정으로 원거리 연애가 불가피하다. 그것도 한 번 만나려면 최소 한 나절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할 거리를 사이에 두고서. 앞서 나왔던 말처럼, 워싱턴 D.C와 샌디에이고는 시차만 3시간인 것이다. 이곳 물리세계에서 항상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또 얼마나 괴롭고 그리운 기다림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쪽에서 사람들의 한계에 부대낄 때면, 겨울은 이쪽에서의 잠에서 잠시 깨어나 앤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보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앤이 화제를 바꾸었다. “파랑이는 나를 참 잘 따르더군요. 가을 씨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시동생과의 사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이대로 쭉 관계를 유지한다면 나중에 봄에 관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훨씬 쉬워지겠죠. 가깝게는 우리의 결혼식도 있을 테고.” 당연한 말이지만, 앤은 여전히 저쪽 세상에서의 결혼식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가 맺어온 관계들이 대부분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초조하지는 않죠?” 겨울이 묻자, 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전에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초조해할 이유가 없잖아요. 종종 다른 의미로 복잡해질 때는 있을지언정.” “다른 의미?” “어느 세계에서든 당신과 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가정해 봐요. 그 아이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으로서 키운다면, 그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기한은 그 아이들 앞의 우리가 늙어서 사라질 때까지겠죠. 그 뒤로 우리의 아이들이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들을 낳아갈 세상을 기나긴 세월에 걸쳐 멀리서 지켜보게 될 우리에 대해 생각하면……. 으, 벌써부터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요.” “그건 확실히 머릿속이 복잡해질 만 하네요…….” 게다가 그 아이들 각각에게는 언젠가 각 세계에서의 기술적 발전에 의한 영생, 혹은 사후세계까지 주어질 예정 아닌가. 앤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서 우리가 각오한 것과 같은 의미의 불멸성, 그리고 진실을 공유하며 키우자니,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도 불멸성이 주어져야 할 테고……. 이러면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신인류가 생겨나는 셈이죠.” “…….” “그럼 그때의 우린 최초의 선조이자 인류의 봄을 조율하는 한 쌍으로서 후손들에게 섬겨지게 될까요? 봄의 진실을 공유할 우리의 후손들에겐 그들끼리 모여 살아갈 하나의 세계를 마련해줘야 하고?” “후손들을 위한 세계, 라…….” 공상소설에나 나올 법한 고민이었으나, 겨울과 앤에겐 머지않은 미래에 직면하게 될 실질적인 문제다. 가을과 파랑도 영원을 받아들일 경우엔 같은 고민을 공유하게 될 것이었다. 앤은 겨울의 팔을 끌어다 자신의 베개로 삼았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는 봄 하나로 만족할까 싶기도 한데, 아직은 결론을 못 내리겠어요. 예전부터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한편으로는 당신과 함께 좋은 부모로서 아이를 키워가는 나날을 그려보기도 하고.” 그런 나날은 겨울 또한 꿈꿔보았다. 과연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도 있었다. 앤이 겨울의 볼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그냥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우선 결혼부터 한 뒤에 천천히 마음을 정해도 괜찮으니까, 지금부터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진 말고요. 그러다 진짜로 출근이 늦겠어요.” “앗…….” 앤의 말이 맞았다. 저쪽의 겨울은 여태까지 칫솔을 물고 있었다. # 466 [466화] #최종장 유년기의 시작 (4) 종말이 유예된 세계에서의 겨울은 간신히 지각을 모면했다. 근래 군인으로서의 겨울에게 주어지는 업무, 즉 새롭게 출범한 대 모겔론스 비상대응체계의 일각을 지휘하는 것은, 그 중요도에 비해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스템 가동 초기의 미숙함을 극복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을 뿐. 가동으로부터 수 일이 경과한 현재에 이르러서는 군과 경찰, 지역 관공서 및 의료기관, 소방당국, 주민단체 등의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해졌다. 현지시각 오전 11시 23분. 상황실에서 전면의 스크린을 보던 겨울이 마이크를 붙잡았다. “현시간부로 국제공항에 발령했던 훈련 상황을 종료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대응에 걸린 시간이 어제보다도 더 단축되었네요. 앞으로도 오늘처럼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자 샌디에이고 지역의 공용채널에 안도의 한숨들이 흐른다. 「Sir. 이제 모의 훈련을 좀 줄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느 소방서장의 말. 겨울은 농담처럼 답신했다. “저도 같은 마음이긴 한데, 그런 의견이 올라왔다고 보고를 올려드릴까요?” 「어, 아뇨.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사양하겠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그에게 겨울이 위로의 말을 돌려주었다. “적어도 실제로 출동을 하진 않잖습니까. 당장은 이쯤에서 만족해주세요. 2, 3주쯤 지나고 나면 D.C의 관심도 시들해지겠죠. 그 이후엔 지금보다 상황발령이 줄어들 겁니다.” 「얼마나 줄어들지가 관건이겠군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 살살 해주십시오.」 “요청 확인. 교신을 종료하겠습니다.” 겨울이 마이크를 끄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어때요, 다들 이제 적응이 좀 돼요?” 훈련을 참관하던 독립대대의 참모들과 중대장급 간부들, 그리고 주둔지를 공유하는 해병대의 장교들이 미묘한 태도로 그렇다고들 대답했다. 방식은 알겠는데 직접 통제해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겠다는 느낌들이었다. 비상대응체계의 특성상 야간에도 당연히 당직사령이 있어야 한다. 이는 독립대대 자체의 당직사령과는 별개인지라 독립대대의 간부 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사나흘에 한 번씩 밤을 새다간 체력이 금방 바닥나버릴 테니까. 이것이 해병대 장교들도 훈련과정을 참관한 이유였다. 해병대 소령 하나가 종료된 훈련을 평가했다. “준비태세를 갖추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출동하는 과정 역시 반복 숙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경찰과 소방관들을 빼낸 사이에 진짜 사고가 터지면 곤란해지니까요. 우리의 주 관할지역이 연안 도시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요. 군도 마찬가지고요.” 재건이 한창인 샌디에이고는 사고가 발생할 만한 장소도 많았다. 공사 현장이라든가, 항만 검역시설이나 임시 수용구역 같은. “게다가.” 겨울이 다시금 농담을 덧붙인다. “주거지역과 가까운 곳에 똥밭을 만들어놓기는 좀 그렇잖아요? 민원이 빗발칠 테니. 그렇다고 오늘처럼 공항 같은 곳만 골라서 훈련을 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감염이 꼭 공항이나 항만을 중심으로만 발생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말이죠.” 장교들 사이에 가벼운 쓴웃음이 흘렀다. 실전을 가정한 훈련에선 당연히 화장실이 제공되지 않는다. 임의의 장소에서 구덩이를 파 볼일을 보고 흙으로 잘 묻어두는 수밖에. 그러나 누군가에겐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겨울이 언급한 민원은 고급장교일수록 친숙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잘 모르는 고급장교들의 고충이다. “일선 인력들은 매일 같이 걸리는 준비태세만으로도 피로를 느끼고 있을 겁니다. 경찰이나 소방당국의 준비태세가 우리와 같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봐요. 우리는 실무자들의 소모율도 신경 써야 합니다.” 매듭짓는 겨울의 말에 해병대 소령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납득했다. 아무래도 악과 깡을 강조하는 해병대의 정신으로는 못내 부족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다들 14시에 회의실에서 볼까요? 일단은 해산하세요.” 의례적인 사후강평을 위한 약속이었다. 겨울은 사령으로서 훈련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이처럼 군인으로서의 업무는 수월한 반면, 업무시간 이후에 들어오는 비공식적인 일들은 무엇 하나 마음 편하게 처리할 만 한 것이 없었다. “아이고, 대령님.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과를 마친 겨울을 초대한 한국계 주민들은, 자칭 윈터 하이츠 상공인연합이라는 단체의 간부들이었다. “멀리서 뵐 적에도 평범한 사람하고는 확실히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뵈니 마치 눈부신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감히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어렵군요. 하하하.” “…….” 겨울은 노골적인 아첨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겨울이 앉기 전까진 앉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자리부터 권했다. “앉으세요. 다들 불편해보이시네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 않고.” 그들이 자리에 앉자, 겨울은 그들의 용건을 물었다. “동맹과 관련해서 중요한 일로 저를 만나고자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그러자 연합 간부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끝에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일부 독립대대 장병들의 무책임한 이기심으로 인해 저희들의 사업장 경영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 부분을 대령님께서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십사 하고…….” “사업장 경영이 어려워져요? 장병들 때문에?” 둘 사이에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겨울의 반응에 간부 하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습니다. 요즘 들어 장병들이 저희들 사업장을 이용하는 빈도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인지라……. 저희를 비롯해 장병들의 구매력에 의지하던 서민들이 울상을 짓는 중입니다.” “간부와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담합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추궁하는 듯 한 겨울의 어조에 간부가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다른 곳에 비해서 가격이 약간, 아주 약간 비싸다보니, 장병들이 그 돈을 아끼겠다고 발품을 파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건만…….” “가격이 싼 곳을 찾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아니지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엔 말입니다.” “…….” “대령님의 헌신으로 모두가 희망을 얻었다고는 해도 동맹 사람들 모두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사정이 조금 괜찮아졌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간 곧바로 훅- 떨어져버리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한국의 외환위기를 떠올려보십시오. 배워서 아시겠지만, 경제가 호황이랍시고 개나 소나 사치를 부리며 해외여행을 가서 돈을 펑펑 써버리는 바람에 위기가 찾아왔던 것 아닙니까?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똘똘 뭉쳐서, 결속을 아주 단단히 해서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밖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중요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이 이미 벌어들인 돈을 동맹 안에서만 돌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겨울이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드리기를 바라십니까?” “……그것이.” 눈치를 살피던 간부 하나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하는 말.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에선 위수지역이라는 아주 좋은 제도가 있었습니다. 유사시를 대비해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 범위를 제한하는 제도였지요. 그 제도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국토의 균등한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위수지역. 미군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비슷한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국의 위수지역에 비해 그 범위가 비교도 못할 만큼 넓을 따름. 일반 병사들 입장에선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이런 점을 들어 반문했다. “우리 부대의 위수지역은, 따지자면 미국 중서부 전역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출동을 대비한다고 쳐도 이 도시만 벗어나지 않으면 충분하고요.” “그래도 명령을 내려주실 순 있지 않습니까? 반드시 멀리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물건을 사거나 여타의 서비스가 필요할 땐 동맹의 상점가를 이용하라고.” “그건 장병들의 기본권입니다. 제겐 그걸 침해할 권한이 없습니다.” “듣던 대로 정말 겸손하시군요. 하하.” 다 알고 있다는 느낌으로 웃으며, 간부가 말했다. “권한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우리 한겨울 대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느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가듯이 한 마디만 딱- 해주셔도 아랫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서 모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불필요한 걱정일랑 마시고, 서민들을 위한 결정을, 결정을 내려주시지요.” “…….”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완기는 동맹 사람들이 한겨울이라는 미덕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말했었지만, 스스로가 착하다고 믿는 것과 객관적으로 착한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그 예시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서민이며 공동체에 진정으로 기여하고 있노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낯빛들이었다. 초인의 영역 이상으로 강화된 「통찰」과 「간파」가 그들의 진심을 확인해주었다. “백산호 씨도 상공인연합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분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아.” 간부들이 탄식했다. “그 분은 아무래도 저희 같은 약자들하고는 다른지라……. 이 부분에 있어선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백 사장님은 빼놓고 저희들끼리 대령님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백산호가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긴 했지만, 그것도 현실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사고방식 자체가 정상인과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선을 볼 수조차 없으니까. 겨울은 앤에게 정신적인 노크를 보내고는, 이 상황과 더불어 지금 느끼는 심상 자체를 전달해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앤의 쓴웃음 섞인 심상이었다. 「알고 있었잖아요. 봄이 되었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단번에 없어지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3월의 추위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듯이……. 이후로도 심심찮게 꽃샘추위가 찾아오겠죠. 그게 겨울이 선택한 봄의 방식인걸요.」 이어 그녀는 자신이 처리하는 업무의 현황을 보내왔다. 그녀가 진두지휘하는 태스크 포스는 요 며칠에 걸쳐 무지막지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D.C에서 벌어진 테러의 배후를 밝힌 건 물론이거니와 미해결로 남아있던 사건들을 엄청난 속도로 해결해나가는 동시에 새로운 안보위협들을 모의 단계에서 차단하는 중. 이 모든 것이 이미 수집한 정보들을 새롭게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다. 확장된 의식과 새롭게 얻은 능력들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연말까지만 힘내보자구요. 우리 아이 말로는 내년 초엽이면 모든 분기가 안정권으로 수렴한다니까.」 그리고 입술에 희미하게 와 닿는, 지극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있었다. 물리세계의 앤이 잠들어있는 겨울에게 해주는 키스였다. 겨울이 미소를 지으며 상공인 연합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안 되겠네요.” 온화한 미소에 안심하고 있던 간부들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제가 보기엔 여러분이 담합을 하고 있는 쪽이 더 큰 문제 같거든요.” “담합이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상생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간부들이 손사래를 쳤으나 겨울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해두죠. 제가 여러분의 초대에 응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예……?” “여러분들, 사업장마다 중국계 주민들을 꽤 많이 고용하셨더군요. 거기까지는 제가 장려했던 바이지만……. 그게 그들을 학대하며 노예처럼 부려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한국계의 사업장마다 고용된 중국계 시민과 난민들은 뉴 프론티어 정책에 의한 사실상의 국외추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무작정 도움을 청하러 온 중국계 시민들에게 겨울이 보여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 헌데 여기 있는 간부들은 자신들의 농장과 목장, 어선 등에서 중국계 시민과 난민들을 거의 노예처럼 부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함부로 법에 호소하기 어려운 그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다. “이런,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 친구들은 타고난 천성이 게으른 면이 있다 보니, 지도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얼굴로 해명에 나서는 간부에게, 겨울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장연철 부장님이 취합해주신 진술과 증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도 고발을 미루고 경고부터 하는 건, 여러분이 한꺼번에 수감당할 경우 여러분에게 고용된 중국계 주민들이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용을 중개한 동맹의 입장도 그렇고요. 알선이 이루어진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럴 줄은 몰랐네요.” 보상금을 받을 수야 있겠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일자리 그 자체였다. 본토 체류를 인정받기 위한 안전장치로서의 일자리. “물론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도 보상을 해주셔야겠죠. 금전적으로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든.” “아니, 대체…….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아까 스스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제가 하는 말을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혼란스러워하는 간부들에게 겨울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하지만 답변은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 “개인적으로는 거부한다는 답변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당신들의 대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겨울의 살벌한 협박에 간부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겨울의 비공식적인 일과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중요한 용건이 있다며 겨울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았으니까. 그나마 중국계 주민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방침을 정하여 동맹의 두 대표에게 위임해둔 덕에 겨울의 부담이 좀 줄어들었다. 동정심이 많은 장연철은 이런 쪽에서 굉장히 높은 의욕을 보이곤 했다. 이번에 겨울의 시간을 희망한 사람은 안제중이었다. “자경단장직을 내려놓고 싶으시다고요? 어째서요?” 실권은 적어도 위험도가 낮으면서 명예는 충분한 자리에 만족하고 있던 제중이었다. 하물며 이곳에서의 자경단은 비상대응체계의 말단으로서 기능한다. 입지가 전보다 더 좋아진 그가 돌연 사퇴의사를 밝히니, 겨울로선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최초의 3인 운운하는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자기 권한을 남용하지 않을 사람도 드문데.’ 겨울은 민완기의 인물평에 공감했다. 허세를 부리긴 해도 기본적으로 글러먹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질문에 대답한 것은 같이 불려온 이유라였다. “굉장한 사업 아이템이 있으시다나 봐요.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녀 외에도 진석을 비롯한 전투조 시절의 멤버들이 자리해 있었다. 제중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중년은 인생 제2의 출발점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사업인가요?” “예!” 제중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대장님 덕분에 전미에 걸쳐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양쪽의 문화를 적절히 섞은 아이템을 딱 내놓는다면! 분명 엄청난 사업적 성공을 거두게 될 겁니다. 오랫동안 영업직으로 근무해본 제 감이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아이템이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만들어서 내오겠습니다. 흐. 진석 동생과 이유라 대위, 그리고 대장님의 의견을 꼭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뭐, 답은 이미 정해져있는 셈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더니 덧붙이는 말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고 한다. ‘중요한 용건이라더니…….’ 겨울은 약간의 허탈함 속에서, 금방 나온다는 사업 아이템을 기다렸다. 만들어서 내온다는 걸 보니 먹거리일 가능성이 높겠다. 잠시 후, 기다리던 사람들의 앞에 펄펄 끓는 커피가 하나씩 놓였다. “……이게 뭐죠?” 겨울이 묻자, 제중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동서양의 조화, 아메리카노 뚝배기입니다.” “…….” “자자, 그렇게 넋 놓고 보지만 마시고, 한 숟갈씩 떠서 시원하게 드셔보십시오. 따로 드린 백김치의 개운한 맛이 진한 커피의 텁텁함을 지워줄 겁니다. 게다가 커피가 쉽게 식지 않으니, 일반적인 커피에 비해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지요.” 이건 아닌 것 같다. 겨울은 자신의 미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상식적인 감각은 있다고 여겼다. 뚝배기에 담겨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커피엔 문자 그대로의 상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숟가락을 매만지며 고심하는 겨울을 보고, 제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러자 진석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이걸 누가 돈 주고 사먹겠습니까?” “엥?” “백번 양보해서 호기심에 한 번 먹어볼 순 있다고 쳐도,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 뒤로 다시는 입에 대지 않을 겁니다.” “……엥?” 얼빠진 표정을 짓는 제중을 보더니, 입을 가리고 있던 유라가 끝끝내 폭소를 터트렸다. “으힠……. 이게 대체 뭐에요……. 대박 아이템이라더니…….” 배가 아플 지경인 그녀를 보며 한층 더 멍해지는 제중. 그 와중에 커피 한 숟갈, 백김치 한 점을 순서대로 맛본 겨울이 실소를 금치 못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떤 의미로는 고맙네요.” 제중이 일말의 희망을 담아 묻는다. “고맙다뇨? 대장님께는 괜찮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겁니까?”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건 아니고……. 이제 곧 대면하기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봐야 해서 심란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마음이 좀 가벼워졌거든요.” 대면하기 까다로운 사람은 물리세계의 폭군을 뜻한다. 시무룩해진 제중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냥 자경단장 계속 하겠습니다.” 이 말에 유라의 웃음이 다시 한 번 폭발했다. # 467 [467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5) 보다 친숙한 세계에서 한겨울 대령으로서의 일과를 마친 겨울은, 이제 바깥세상에서의 잠으로부터 깨어나 각오가 필요한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앤은 그런 겨울에게 정장을 입고 나갈 것을 권했다. “편안한 모습도 나쁘지는 않지만, 정장은 사회적인 전투복이니까요.” 그녀는 겨울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원해서 하는 일. 겨울도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폭군과의 재회를 앞두고 가슴 속의 응어리를 따라 굳어져가던 몸이 따뜻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어서. 겨울의 눈을 들여다보며 넥타이를 깔끔하게 매듭지어준 그녀는, 입가에 은근한 장난기를 띄우더니, 두 손으로 넥타이를 목줄처럼 감아쥐며 겨울을 끌어당겼다. 천천히, 그러나 도발적으로. 겨울이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실은 이걸 해보고 싶었던 거 아녜요?” “억울한데요. 당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그럼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말로만?” 겨울은 앤에게 키스했다. 입술만 닿고 끝나는 가벼운 입맞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여운이 사라질 즈음 한 발짝 떨어진 앤은, 감아쥐었던 넥타이를 토닥토닥 잘 펼쳐주고는, 겨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흡족해했다. “환상적이군요.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겠죠. 재단사가 봄이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신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앤이 겨울을 향해 팔을 벌리며 요구했다. “나도 좀 도와줄래요?” 그녀는 수사관으로서 항상 입던 스타일의 정장을 골랐다. 하얀 셔츠에 새까만 블레이저. 양쪽 겨드랑이 아래엔 권총 홀스터까지 착용했다. 쓸 일이야 없겠지만, 빼놓자니 허전한 것이다. 허리띠를 채운 코트는 배색이 두드러지는 아이보리색이었다. 가죽장갑을 끼고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바깥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슬슬 출발하죠.” 후. 숨을 짧게 끊어 내쉰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는 두 사람을 가을이 배웅하러 나왔다. 가을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심란한 표정이었으나, 고건철을 만나지 않기로 한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전하고 싶은 말은 없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겨울의 물음에도 가을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 “다녀와.” 그리고 그녀는 앤을 향해 조용히 목례했다. “깁슨 씨. 겨울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같이 가주지 못하는 자리에까지 동행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였으되, 실제로는 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앤이 그녀를 향해 마주 목례했다. “돌아왔을 땐 가을도 날 앤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럴게요.” 가을이 잠깐이나마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고 갈 헬기는 안전가옥으로부터 10분 거리에 주기되어있었다. 봄에게 조종을 맡길 수 있음에도, 앤은 굳이 자신이 조종을 맡겠다고 나섰다. 낯선 기종에 대한 적응은 고작 몇 초 만에 끝내버린다. 예전부터 앓아왔던 비행공포증도 이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 해보는 건 역시 다르네요.” 그녀가 말하는 소감이었다. 이륙한 기체는 눈이 내렸어도 여전히 잿빛인 도시를 가로질러 혜성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본사는 주변을 짓누르는 듯 한 무게감의 성채였다. 그 주인의 성격과 취향이 십분 반영된 결과물일 터였다. 앤이 다루는 헬기는 낭비가 없는 하강으로 옥상의 이착륙장에 안착했다. 착륙장 가장자리엔 낯익은 한 사람이 겨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전익이 일으키는 바람에 옷자락을 여미며 버티고 있던 고아영은, 앤과 함께 내려선 겨울을 보고 조금씩 주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네.” 반갑기는 하나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조금은 긴장한 기색도 있었다. 봄이 가장 먼저 포섭한 협력자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마침내 확실해진 겨울과 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전달받은 상태였으니까. 또한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그만큼 서먹한 것이기도 했다. 근황을 들어 알고 있다는 것이 어색함을 줄여주지는 않았다. 봄이 보장해준 그녀의 처우 역시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부드럽게 끄덕였다. “네, 오랜만이네요 송수아 박사님……이라고 불러드릴 필요는 없죠?” 짓궂은 말에 아영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 이름은 잊어줬으면 좋겠어. 내게도 아버지에게 들켜선 안 될 사정이 있었고, 그 사정이 아니었더라도 처음엔 맨 얼굴로 너를 볼 자신이 없었는걸.” 가벼운 농담이 분위기를 풀어놓았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분위기. “그럼 전처럼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고아영 사장님, 은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니까요.” 겨울의 말에 아영이 동의했다. “그래. 일단은 그러는 편이 낫겠다.” 예상보다 쉽게 끝난 관계설정에 안도하며, 그녀는 겨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늘이 많이 사라졌구나.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었다, 라. 그건 축하해야할 일이겠지.” 겨울을 보는 아영의 시선이 새삼스러워진다. 예전부터 겨울이 어딘가 특별하다고 느꼈던 그녀이지만, 그 특별함이 봄을 개화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헌데 이쪽 분은?” 아영이 앤을 돌아보며 갸우뚱했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이제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갈 참에 신분이 불분명한 이가 동행하는 것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겨울이 홀로 오리라 여겼던가보다.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기에. 봄이 여기까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 곱씹어보건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에 있어서 사소한 부분까지 관여하는 게 도리어 더 큰 어색함을 빚어낼 수는 있겠다.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도 가치가 있을 테니……. 그나저나, 낯익다고 여기는 걸 보면 봄의 변조가 시작되기 전에 시청을 그만두었나보구나.’ 아니었다면 앤은 고사하고 겨울조차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리치료를 빙자한 만남이 중단된 이후로도, 겨울은 그녀가 한동안 자신을 지켜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민이라는 게 한순간에 끊어지는 감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영으로선 자신의 거짓말이 겨울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을 터였다. 겨울은 친구로서의 고아영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정확합니다.」 봄은 겨울의 심상에 흐르는 모든 추측을 한 마디로 긍정해주었다. 되짚어 봐도 아영에게 앤의 정체를 감출 이유는 없다. 가장 중요한 비밀, 봄의 진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인 것을. 겨울이 그녀에게 자신의 연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조안나 깁슨입니다. 제 아내가 될 사람이죠.” “아, 아내?” 적잖이 당황한 아영은, 앤의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더니 곧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조안나 깁슨이라면, 네 사후세계에 있던 FBI 감독관……?” “역시 알고 계시네요.” “세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영에게, 앤이 잠시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테니까요.” “…….” 침묵하던 아영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앤이 청하는 악수에 응했다. “제가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미래로군요. 저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미 봄의 존재를 알고 봄의 설득을 받은 그녀인 만큼 마음과 물리적 실체를 획득한 가상인격의 등장을 예상하기는 했을 것이었다. 따라서 앤은 하나의 상징이며, 아영이 말한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닌 이 세상의 미래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시대를. 악수를 나누는 아영의 모습은 겨울의 눈엔 계약을 체결하는 기업가로 비쳐졌다. 친구로서의 그녀가 보여준 적 없었던 생소한 면모였다. 불우하게 자라기는 했을지언정, 그녀는 어쨌든 폭군의 딸인 것이다. 아영의 눈길이 겨울에게로 돌아왔다. “이 이상의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도 좋겠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고.” 심호흡을 하는 그녀. “너만 괜찮다면, 이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게.” 겨울이 아영의 협조 하에 혜성과 낙원 양대 그룹을 장악하는 것은, 인류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분인증절차는 봄을 구성하는 시스템의 일부나 마찬가지이고…….’ 아영은 고건철의 유일한 가족이다. 그녀만 침묵한다면, 겨울이 고건철을 대신하는 데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폭군의 광기를 아는 측근들은, 대외적인 후계자로서 아영이 대신 상대하도록 하면 그만이었으니. 혹은 겨울이 울분에 찬 폭군을 연기하거나. 그런 상황에서 달리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폭군은 겨울의 옛 육체에 깃들어있는 것을. 한 순간에 사라진 쇠약함은 육체를 새로이 배양한 탓이라고 둘러댈 수 있다. 그 대가로서 아영이 얻는 것은 진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식을 기를 권리. 그러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겨울이 물었다. “선생님께선,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세요?” 멈칫 했던 아영이 되묻는다. “가을 씨의 마음을 얻는 것 외에……달리 살릴 방도 같은 건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니?”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고건철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인 이상 그를 구원할 다른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봄의 능력으로 물리적인 죽음을 끝없이 지연시킬 수야 있겠으나, 그건 그를 지금보다 심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묻는 핵심은 수단의 유무가 아니었다. “방법이 있느냐와는 별개로, 선생님께 이 순간이 후회로 남을지는 않을까 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애증은 애정으로부터 싹트는 감정이잖아요. 가족 사이의 감정이 순수한 증오인 경우는 드물 것이고요.” “…….” 아영의 낯빛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글쎄……. 배려는 고마워. 하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선 애증조차도 사라진지 오래인걸.”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추운 계절의 고목처럼 말라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아버지,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정이 밝혀졌던 날 죽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남아있는 건 내 아버지였던 사람이 남긴 여분……같은 거지. 다른 부분들은 다 죽어버리고, 그날 밤 새겨진 상처만 남아서 사람의 형상으로 숨을 쉬고 있는.” 그리고 입김을 흘리며 짧게 눈을 감는 그녀. “벌써 오래 전부터 죽음만도 못한 삶을 억지로, 억지로 연장시켜왔던 거야. 그도 그럴게, 죽는 것조차도 화가 나는 일이었으니까…….” # 468 [468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6) 일찍이 양용빈 상장은 시에루 중장 앞에서 단순히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을 지적했었다. 겨울은 바깥세상의 관객들을 떠올리며 그 비참함에 공감했었고. 자신들이 누려 마땅한 모든 행복이 사후에 있을 거라 믿으며 어제와 같은 잿빛 오늘과 오늘과 같을 회색의 내일을 하루하루 견뎌내기만 하던 사람들. 즉 그들의 삶이란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것으로서,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충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아영이 진술하는 폭군의 삶은 살기 위한 삶조차도 아니었다. 아영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음이 곧 부정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패배를 의미하기에, 아버지였던 사람의 생애는 패배를 부인하는 시간들의 총합에 불과했노라고. 이는 분명 목표가 분명한 삶이지만, 차라리 목표가 없는 삶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장의 증오는, 전신이식 이후 원래의 육체를 자신의 손으로 철저하게 파괴해버린 데서 확실하게 드러난 바 있다. 그럼에도 차마 끝내버릴 수는 없었던 인생. 하나 뿐인 딸은 그 증오의 진정한 방향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째서 타인의 육체에 집착하기 시작했는지도.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하네요.” 앤이 신중히 하는 말에, 겨울은 연인을 돌아보았다. “그런가요?” “만약 지금의 당신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연인으로서 사랑한다고 한다면, 난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미간을 찡그리며 이어가는 말. “내 안에서 당신에게 준 만큼의 영혼은 그대로 죽어버리는 셈이죠. 준 만큼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전부나 다름없겠지만……. 아무튼 그때의 내가 과연 어떤 식으로 미쳐버릴지는, 실제로 미쳐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이겠죠. 그게 즉각적인 자살로 직결되지만 않는다면 말예요.” “…….” 뒤집어서, 지금의 앤이 겨울 이외의 누군가를 연인으로서 사랑한다고 털어놓는다면 겨울 또한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터였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이처럼 다를 문제도 드물겠다. 가슴으로 느끼더라도 사람과 경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선명할 것이다. ‘별로 달가운 공감은 아닌데…….’ 이해는 매양 분노에 채워지는 족쇄였다. 겨울의 속에선 이러한 이해를 껄끄러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존재했다. 그것은 예전부터 때때로 존재감을 피력해왔던, 이해와 공감을 배제한 채로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왜 거기까지 이해해줘야 하나, 라는 생각이 겨울이라고 없겠는가. 아니었다면 봄이 겨울의 신포도를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앤이 새롭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제부터 만나볼 사람은 그 정도의 진심과 확신으로서 아내를 사랑했다는 뜻이겠죠. 저토록 철저하게 망가져버린 모습을 보면.” “……그러네요.” “타인의 감정…….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일지라도, 그 본질은 내 인식과 감각의 장벽 너머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참, 생각할수록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사랑이란 그 본질에 대한 믿음으로 성립하는 감정이었다. 두 사람의 지극히 인간적인 공감 앞에서, 아영은 다 마모되어 사라져버린 연민의 흔적으로서 그저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그럼, 이쪽으로.” 그녀가 겨울과 앤을 유도했다. 혜성그룹의 본사 내부는, 이 시대를 기준으로는 고풍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도록 꾸며져 있었다. 증강현실에 의지하는 바를 최소화한 전근대적인 구조물. 더는 미관에 신경 쓰지 않는 바깥세상의 평균과 거리가 멀다. 자신이 믿던 현실에 배반당한 반작용일까? 그렇기에 거짓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거라면, 과거를 기준으로 고정되어있는 이 풍경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병이 들고서도 집이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건……. 집이 편한 장소가 아니라서?’ 겨울 혼자 하는 생각이었지만 아마도 사실에 가깝지 않을지. 폭군이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영의 진술과 일치한다면, 집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비슷할 가능성이 높았다. 패배하기 싫어서 포기하지 않는 장소일 뿐. 회장의 집무실과 연명치료실이 있는 최상층은 기이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공간이었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겨울은 죽음의 냄새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공기 중에 실제로 감도는 냄새였다. 겨울만큼이나 후각이 강화된 앤도 그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콧잔등을 찡그리는 그녀. “고양이들의 기분을 알겠어요. 죽음을 감지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로군요.” 그녀의 말처럼 고양이에겐 죽어가는 사람의 체취를 구분할 능력이 있었다. 소수의 고양이들만이 여기에 반응하는 것은, 나머지가 사람의 죽음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은 경험이 없어 그 냄새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거나. “……네?” 영문 모를 말에 아영이 조금 당황했지만, 앤은 별 것 아니라는 말로 넘어갔다. 다만 겨울에게는 수사관 시절의 경험을 담아 따로 짧은 심상을 보내왔다. 「예전에는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맡을 수 있었던 냄새인데……. 어쩐지 싱숭생숭해지네요.」 이 또한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익숙해져야 할 생경함이었다. 복도를 걸어 마침내 겨울이 마주한 문은, 지나온 공간의 구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삑- 삑- 삑- 문틈으로부터 각종 의료장비들이 작동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스읍- 하아. 심호흡을 한 아영이 두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임사(臨死)의 악취가 더욱 짙어졌다. 무겁게 고여 있는 공기 속에서, 회장은 일그러지고 쇠약해진 겨울의 모습으로 하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겨울의 감각은 그의 깨어있는 의식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의식은 극도로 날카롭고 피로한 상태였다. 필시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잠들기를 방해하는 분노였을까, 잠들고 나서의 악몽이었을까. 설령 복제체 배양이 끝났어도 이식을 감당하지 못할 앙상함이다. 또각, 또각. 적막을 일깨우는 아영의 구두소리를 위시하여, 세 사람분의 발소리가 회장의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고건철의 호흡은 가늘고 날카롭게 새는 바람을 닮아있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가늘게 눈을 떴다. 빛이라곤 전혀 없는 눈동자가 세 불청객을 순서대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고정된 대상은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겨울을 닮았으나 결코 같지는 않은 목소리. 작고, 거칠고, 갈라져있다. 겨울이 답했다. “아뇨. 제대로 보고 있는 겁니다. 당신에게 몸을 팔았던 본인이죠.” “…….” 침묵 속에서 고건철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짐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그 얼굴은 겨울이 아니라 폭군의 것이 되어갔다. 그 변화의 끝은 격렬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 개애애새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욕설. 죽음이 임박한 몸으로부터 어찌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혼신의 힘을 다해, 수명을 깎아내듯이 내지르는 격정이었다. 전신이 뻣뻣해지도록 모든 숨을 토해낸 그는, 그 상태로 호흡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었다. 변색된 흰자위에 실시간으로 핏발이 오르는 모습. 주변의 의료기기들이 일제히 불규칙한 소리들을 냈다. 아영이 초조하게 주먹을 쥔다. 강화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겨울도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끄흐으으으- 마침내 신음처럼 재개되는 호흡. 아영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건철의 눈이 그런 딸에게로 돌아갔다. “……너냐?” 봄을 모르는 폭군으로서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 개 같은 년아. 네가 꾸민 일이더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훔치기 위해서? 내 대응을 다 막아놓고, 준비를 다 끝내고 온 것이야? 누구를 닮은 생김새만큼이나 더럽고 추잡한 욕심으로, 내가 알아서 죽을 때조차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네가 차지해야 할 재산을 내가 죽기 전에 다 어쩌기라도 할까봐? 응?” “…….” 아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사소한 몰이해는 중요하지 않은 자리였다. 큰 맥락에서 비슷하기도 하고.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마주보며 버티는 그녀의 모습으로부터, 겨울은 어떤 오기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하긴 걱정스럽기도 했겠지. 내 성격에 너한테 순순히 유산을 남겨줄 것 같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잘도 이런 짓을 꾸몄구나.” 회장이 끅끅대며 조소했다. “그래……. 교활함이야 지 어미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이고, 더해서 나를 싫어하는 연놈들이 한둘은 아니겠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아주 많은 잡것들이 네년에게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을 터……. 아쉽군. 아쉬워. 새로 사귄 친구들이 후일의 너를 어찌 대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데…….” 밭은기침이 그의 저주를 끊어놓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주 좋은 취미로구나.” “……무슨 말씀이시죠?” “내숭은 집어 쳐라. 역겹고 가증스러우니.” 가늘게 흔들리는 손가락이 겨울을 지목했다. “꼭두각시일 뿐인 저것을 여기까지 가져온 건 나를 욕보이려는 성의가 아니냐. 내게 남은 건 껍데기뿐인데, 그런 내 면전에 그 껍데기의 전 주인을 들이미는군. 네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아녜요.” 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이가 아버지와 만나보길 바랐을 뿐인걸요. 복수의 도구 같은 게 아니에요. 저 혼자서는……아버지와 대면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요.” “그래, 그래. 네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쿨럭. 다시금 조소하는 와중에 호흡을 끊는 기침 소리. 아영이 그에게 묻는다. “제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시나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때에도?” “미안하다고? 내가?” 고건철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네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 “…….” “있다손 치더라도, 이제부터 네가 훔칠 내 재산은 분에 넘치는 대가가 되겠지. 그러니 나는 너에게 사과하지 않겠다……. 사과하지 않겠다.” 그는 여전히 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으나, 겨울이 보기에 그것은 잠시 희미해지는 분노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다. 거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한 어조.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자, 거짓에서 비롯되는 진실의 징후였다. 이 순간 신도 구원해줄 수 없는 사람이 겨울의 눈앞에 누워있었다. 회장은 이제 말을 잃은 딸 대신 겨울을 바라본다.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속이 비어있는 분노였다. “나는 네 몸을 샀다. 물리현실에서 네 몸에 관한 전부를 배타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헌데 네가 무슨 염치로 내 앞에 서있는 거지……? 상도덕을 모르는 몰염치한 새끼 같으니. 그런 부분에서는 비루하게 뒈져버린 부모를 빼닮은 모양이구나.” 절박한 폭언은 겨울로 하여금 화를 터트리도록 만들지 못했다. 분노가 없는 건 아니었으되, 그 분노는 아까부터 그저 뭉근하게 타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주둥이가 있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라, 잡놈아. 아니면, 도둑질을 돕느라 운 좋게 얻은 복제체에 아직 적응이 덜 된 것이냐?”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물었다. “제 누나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가을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에, 고건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의 변화까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찰나의 회한과 안도감이 스쳐갔다. 어디까지나 찰나의 변화였다. ‘저것만 따로 떼어서 고건철이라는 사람이라고 할 순 없겠지…….’ 죽어간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맹렬하게, 또는 필사적으로 겨울을 쏘아보는 폭군. 겨울이 한숨지으며 말했다.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건 없다.” 억지를 쓰는 듯한 폭군의 말. “그저 내가 성급하게 굴다가 실수를 했을 뿐이야.” “…….” “네놈이 여기에 있는 걸 보면, 그리고 그렇게 태평한 낯짝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네 누이가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넌 가족을 위한답시고 몸을 팔았던 병신이니까. 실종되어서 걱……실종된 이후 그 뒤의 행방을 몰랐는데, 내 실수가 너무 커지진 않은 모양이군.” 특수비서가 사라진 뒤로 줄곧 궁금해 하고 있었을 텐데, 어쩐지 가을에 대해 묻지 않는다 싶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모난 이성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다. 겨울이 대꾸했다. “그렇다고 한다면요?” “죽거나 돌아버리지만 않았다면, 손해는 얼마든지 보상해줄 수 있다. 그래,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야.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했지?” 회장이 눈을 부릅뜨고 기침을 삼켰다. “그래, 가서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어봐라. 얼마면 나에 대한……. 아니, 아무튼 얼마면 정신적 보상이 되겠느냐고 물어봐라. 내게는 아직 숨이 붙어있다. 너만 협력한다면 네가 저년을 제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 기업의 주인이 되도록 해줄 수도 있어……!” 겨울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뭐냐?” “제가 얼마를 드리면, 죽은 아내와 동생에 대한 당신의 증오를 가라앉힐 수 있겠습니까?” “…….” “얼마를 드려야 그들을 용서하시겠습니까? 얼마를 드려야, 당신이 따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고건철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무의미한 질문이다. 너에겐 지불능력이 없다.” “가정해보자는 겁니다. 당신께 이 세상 전부를 다 드린다 한들, 방금 제시한 요구들이 하나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를.” “닥쳐라! 너에겐 지불능력이 없다!” 소리 지르며, 폭군은 처음처럼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에 겨울은 혐오보다는 유감을, 경멸보다는 연민을 담아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지불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엔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이 있고, 지금의 당신은 누나의 용서를 살 수 없어요.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폭군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가.” 외면하듯 눈을 감아버리는 그. “너희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죽어주겠다. 그러니 당장 나가.” “아버지.” 아영이 그를 불렀으나, 폭군은 입을 다문 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급격히 상태가 악화된 그는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 쓸쓸한 임종을 지켜본 존재는 신으로서의 봄이 유일했다.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은 아닌 괴물은, 결국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 469 [469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7) 폭군의 죽음으로부터 재차 시일이 경과하여, 바깥세상의 계절은 바야흐로 겨울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끝으로 다가서는 계절과 같은 이름을 지닌 청년은, 자신이 소년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높은 창가에서 회색 도시의 아침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아직은 겨울이라지만 쌓여있던 눈은 거의 다 녹아내린 뒤. 그러나 도시는 지금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종말이 유예된 세상에서는 백악관이 공식적으로 모겔론스 백신 개발 완료를 선언했다. 사실 완성 자체는 이미 예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마 겨울이 종말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았던 그 때가 아니었을지. 그럼에도 발표를 이제껏 미뤄온 이유는…….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겠지.’ 이 순간 저편에서는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한겨울 대령으로서 하는 생각이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이중사고가 이따금 머릿속을 헝클어놓곤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나가는 중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사격처럼 집중을 요구하는 일도 가능해질 듯하다. 실전을 치르는 건 별개일지라도. 분리된 감각으로 듣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겨울의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백신은 J&J, 릴리 Co., 리드 사이언스 3개사가 공동으로 생산하며, 옛 오염지역 및 신구(新舊) 봉쇄선 인근지역, 해안지역, 접경지역 등 잠재적 위험지대의 주민들에게 우선적으로 접종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보건당국은 보안과 절차상의 문제로 정확한 1차 접종물량을 밝히길 거부했으나, 관계자들은 “준비된 백신의 양이 최대로 잡아도 1,100만개를 넘지 못할 것이며, 미국 시민들 전체가 접종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제약업체의 입장에선 무작정 생산라인을 늘렸다간 접종완료 이후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한편 잠재적 고위험군으로 지정된 지역들에서는 접종의 우선순위를 두고 갈등이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외부인의 위장전입에 대한 비난이 거센데요, 위험지역 내의 각 주 정부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위장전입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재정난이 일상인 주 정부들이 과연 돈을 싸들고 오는 졸부들을 내쫓을 수 있겠느냐며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보기엔 합당한 우려였다. 위험지역의 각 주들은 지속적인 인구유출에 시달려왔고, 그것은 해당 지역정부의 재정난 심화로 이어졌으므로. 하루라도 먼저 접종을 받기 위해 수만 달러씩 풀어놓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거절하기 전에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위정자들의 관점에선 주민들에게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즉 적당히 눈감아줄 가치가 있는 필요악이었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이 폭력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건, 표면적으로는 크레이머 대통령이 백신의 무상접종을 선언한 덕분이었다. 「저는 일찍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시민들의 권리를 수호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한 바 있습니다. 그런 제가 말씀드리건대, 모겔론스 백신 접종은 곧 미국 시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입니다. 시민들의 생존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이나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해선 안 됩니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재난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과 같이 약속드립니다. 백신 접종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시민들에 대하여 무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국의 시민들은 조국의 안보라는 하나의 기준 앞에 모두가 평등한 주권자로서 합당한 순번을 배정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키고자 하는 질서입니다. 여러분, 귀 기울이십시오.」 「미국의 종말은 끝났습니다.」 언제나처럼 힘이 넘쳐흐르는 담화였다. 이 같은 선언을 뒷받침하는 건 백신 밀거래를 단속하는 수사기관들의 실적, 특히 연방수사국의 활약이었다. 물밑에서 기계장치의 신이 우연의 실타래들을 모아 필연을 직조한다고는 해도, 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효율적이진 못했을 것이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제고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앤은 자신의 공로를 상급자인 수사국장과 공유했다. 이로서 국장은 자신이 원하던 정계입문의 길을 재확보했고, 앤은 차기 국장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그녀는 겨울에게 웃으며 말했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오늘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언젠가는 앤이 대권에 도전하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겨울은 불가능하더라도 겨울의 아내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행정부의 수장이 되는 것만으로는 영향력 면에서 현 시점의 겨울보다 낫다고 보기 어려울 터이지만, 그 이면에서 인류의 봄이 맑은 강처럼 흐르고 있다면야. 비슷한 일을 이곳 물리현실에서도 이루어나가려는 참이다. 「겨울.」 이쪽에서는 소일거리로서 비서실을 장악한 앤이 겨울의 뇌리에 목소리를 전달해왔다. 「호출한 사람이 왔는데, 바로 들여보낼까요?」 「그래요.」 겨울이 폭군의 이름으로 불러들인 이는 다름 아닌 사후보험 최후의 시스템 관리자였다. 사실 그 이상으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던 건 최초의 설계자들 쪽이었으나……. ‘그들이 정말로 다 죽어버렸다는 걸 알았을 땐 솔직히 좀 당황했지.’ 신으로 거듭난 봄이 조회해본 그들의 생사는 예외가 없는 의문사였다. 그들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래도 죽음을 가장한 생존자가 하나라도 있으리라 여겼건만. 어떻게 보면 납득은 가는 일이다. 운용 데이터를 축적한 트리니티 코어는 스스로를 개량한 끝에 설계자들의 이해조차도 벗어난 기계가 되었고, 제2의 트리니티 코어를 제작하는 건 예산낭비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한국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숨이 붙어있는 설계자들은 잠재적인 위험요소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생사를 어찌나 간단히 결정한 것인지. 당시의 회의록을 열람한 겨울은 일상적이기까지 한 논의의 가벼움에 전율했다. 문 너머의 인기척이 겨울을 상념으로부터 일깨웠다. 비서실장을 연기하는 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회장님. 사후보험 시스템 관리자인 박정명 씨입니다.” 이윽고 나타난 남자는 무척이나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것만이 아닌데?’ 겨울은 그가 심한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안내자로서의 앤은 닫히는 문틈으로 윙크를 남기고 돌아섰다. 쿵-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 화들짝 놀란 관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가늘게 떨면서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겨울이 손짓했다. “그렇게 서있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에게 겨울이 인사 대신으로 묻는다. “괜찮으십니까?” “예?” “어딘가 많이 불편해보이시는데요.” “아…….” 관리자가 이마에 맺히는 땀을 훔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제가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어서 말입니다. 긴장해서 아픈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증상을 알고 있던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대화를 원합니다. 저쪽에 화장실이 있으니 천천히 쓰고 나오시죠.”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건 뭡니까. 시간은 넉넉합니다.” 관리자의 얼굴에 미혹이 떠올랐다. 말로만 듣던 폭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일까? 평소의 폭군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겨울도 어려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기존의 측근들과 만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어,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관리자 안정명은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서두르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아갔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신경들을 조절해줄 수야 있겠지만, 통증을 둔화시키며 괄약근을 조여 주는 것보다는 쾌변을 보도록 도와주는 쪽이 훨씬 더 인도적인 조치일 것이다……. 인도적? 겨울은 스스로의 생각에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변비를 해결해주는 기계장치의 신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개념이었다. 신의 시대에도 이토록 질박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날 만나기 전에 미리 치료해주지 않았을까? 이 만남 또한 예측했을 텐데.’ 겨울이 의문을 품자 봄이 대답했다. 「제게는 관리자를 특별히 취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질환의 완화 및 제거는 세계적 규모의 문제가 됩니다.」 「관련된 증상이 전 세계에 걸쳐 일시에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의혹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 정도로 가시적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뒷받침할 인류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결정하신 저는 인류에게 있어서 행위를 유도하는 환경이지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아아.’ 합당한 해명이었다. 「오늘 관리자를 호출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과업에 동참시킬 행위자로서 적합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 말입니다.」 ‘그렇지. 이해했어.’ 겨울은 아직 사람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데서 안정감을 느낀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관리자는 경건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겨울을 한 번 더 웃음 짓게 만들었다. 이 웃음을 보고 현실감각을 되찾는 관리자였으나, 아까에 비해서는 경직된 정도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늦었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죠. 혜성그룹 회장 고건철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말에 어색함은 없었다. “앗, 예. 이미 아시겠지만, 가상현실 사업부 수석 시스템 관리자 안정명입니다.”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른 관리자가 겨울의 손을 맞잡았다. 낙원그룹의 실제 소유자가 고아영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헌데 회장님께서 저를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겨울이 느긋한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 긴장한 관리자가 착석하기를 기다려, 겨울이 말했다. “우선, 그동안 유일한 시스템 관리자로서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관제인격이 제출한 업무평가가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컥.” “당신 혼자서는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노력은 결코 만능열쇠가 아니며, 관리자로서 무력감에 빠져있었던 것도 허용범위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처럼 힘 있는 핵심관계자가 도와준다면, 적어도 사람으로서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라지겠죠.”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당신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겨볼까 합니다.” 얼떨떨한 관리자 앞에서, 겨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안정명 씨. 사후보험의 보장기간 종료로 폐기 처분을 당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사실은 일부가 보존되어 자산의 일종으로서 거래되어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계셨지요?” 관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생존본능으로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눈치였다.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겨울이 언급한 것이 그에겐 그만큼 무거운 사안이었을 터였다. 그동안은 알고도 모르는 척 해올 수밖에 없었던. “솔직하게 털어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겨울이 그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과거 관리자 권한으로 열람했던 특정 보안회선 이용기록들을 살펴보건대, 은폐된 거래를 유추했을 확률이 높다고 봤거든요. 다만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 건 과연 어디까지 추측을 했으며, 그 추측이 내가 이미 아는 전모와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확인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새로운 역할을 맡기기에 앞서 당신의 능력을 검증하는 절차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관리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또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로 몰라서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다. 겨울에게는 봄이 있었고, 겨울은 봄의 안목을 믿는다. 다만 이렇게 확인해두어야 훗날 관리자가 어색함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었다. ‘내 눈으로 이 사람의 반응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지.’ 생각하는 겨울에게 망설이던 관리자가 물었다. “……제 안전은 보장되는 겁니까?” 겨울이 끄덕였다. # 470 [470화] #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8) “믿으세요. 낙원의 새 주인인 나는 내 새로운 사업에 어떠한 오점도 없기를 바랍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장의 손해……사후보험의 단기적 이미지 실추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사안을 들춰내려 하겠습니까?” “그건……그렇지요.” 관리자가 힘들게 대답했다. 공정함에 대한 고건철의 집착은 세간에서도 유명한 것이어서, 지금의 겨울이 하는 말도 그가 어떻게든 납득 가능한 범위에 들어있었다. 기실 겨울이 추구하는 공정함과 고건철이 추구하던 공정함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었지만, 거기까지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기업인으로서의 고건철을 존경하는 이유였다. “긴장하지 마세요. 이게 당신에게는 무척 큰일이더라도, 나에겐 이제부터 고쳐나갈 무수히 많은 불공정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당위성을 말하며, 겨울이 관리자를 안심시켰다. “당신을 해치려는 시도는 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할 겁니다. 난 내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을 용납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는 대로 증언해보세요.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많습니다.” 겨울의 설득이 먹혔는지, 관리자는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파악했던 「노예시장」의 상세를 하나씩 하나씩 더듬거리며 내놓기 시작했다. 이는 최고등급 가입자들이 자신들의 호화로운 사후를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물리현실에 연고가 없는 가입자들, 혹은 연고는 있어도 면회기록이 없는 가입자들. 그런 저등급 가입자들은 파산에 의한 폐기를 앞두고 폐기절차를 전담하는 업체로부터 어떤 계약을 제안 받게 된다. 부유한 자들의 사후세계에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그 대가는 당장의 연명과 더불어 기약 없이 먼 미래의 자유였다. 최고등급의 가입자들이 대면하는 가상인격들은 돈을 들이면 들일수록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었다. 가입자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사치스러운 소비라는 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 때로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차이에까지 집착하곤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진공관 앰프로 듣는 소리가 일반 전자식 앰프에 비해 따뜻한 소리를 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가상인격을 일반 앰프라고 본다면, 자기 자신을 팔아야하는 저등급 가입자들은 고등급 가입자들에게 있어 사치품으로서의 진공관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엔 새로운 형태의 진공관이 유행하고 있었다. 달리 아무도 엿보지 않는 세상에서 일개 진공관에게 인권을 보장해줄 필요는 없었다. 팔려나간 이들의 생활이 한 결 같이 비참해지는 원인이었다. 진술의 말미에 관리자가 덧붙이는 말. “……당연히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근로계약이라 법적 책임을 묻기도 어렵겠더군요. 현실의 근로기준으로는 걸리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사후보험 내 세계관에 물리현실의 노동법을 적용한 사례도 드물고 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요. 법은 저 같은 사람들의 편이 아니잖습니까.” 다시 말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세된 상황 속에서 명목상의 자유의지로 체결된 계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렵고 불쾌했던 게 사실이죠?” “…….” 겨울의 물음에, 관리자는 찌푸린 얼굴로 긍정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혐오감이자, 사람이 완전한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이 나라에서 내부고발자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여론이 지켜주는 것도 잠깐이죠. 관심이 사라지고 나면 저는 그날부로 그냥…….” 흐리는 말끝에 많은 의미를 담아낸 관리자가 다시금 우려를 내비쳤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이걸 건드려도?” 겨울이 낙원그룹의 사주로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사후보험 시스템 자체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폐기절차를 위탁 운영하던 정부계약 하청업체와 최고등급 가입자들의 공모로 빚어진 스캔들일 따름이죠. 그들을 시작으로 그 윗선까지 쳐내는 건 내게 장기적인 이득을 안겨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기여할 수 있는 공정함에 대해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끄덕하는 관리자를 보며, 동시에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몸짓임을 읽어내며, 겨울은 내세워도 좋을 사람 하나를 건졌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역사에 남길 사람의 이름을. 사람에게 가능한 일은 사람의 손으로 해내야 한다. 우연을 다스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필요로 했다. “여하간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실제 근로태도야 어쨌든, 자신이 관리하는 분야를 심도 있게 파악할 정도의 능력은 있는 분이셨군요.” 관리자는 겨울이 준비한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속으로는 업무평가를 작성한 관제인격을 열심히 씹어대는 중일 터였다. 겨울이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관리자로서는 하실 일이 별로 없었지요? 앞으로는 행정적인 업무를 주로 처리하시게 될 겁니다. 아, 그 전에 쓸 데 없는 보안체계부터 치워버리고요.” “관계법령에 규정된 역할이 있는데…….” “개의치 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겨울이 워낙 태연하게 말했으므로, 관리자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권력자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보다 의욕적인 직무수행을 기대해도 되겠죠?” “노,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이후 겨울은 관리자를 보내기 전에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차 고건철의 새로운 측근 중 하나로 키워낼 이가 아닌가. 사람으로서의 과업을 함께 해나가려면 친분과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가까운 후일을 기약하며 그를 보낸 뒤, 해가 지기까지 고건철로서 업무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처결하는 사안들의 중요성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으나, 봄이 겨울에게 자신을 주었기도 하거니와 낙원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고아영이 분담하는 부분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사람의 역사에 남을 사람의 이름이었으므로. 별개로, 그녀는 겨울을 자주 찾아오는 벗이기도 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아이와 함께 꼭 얼굴을 보고 돌아간다. 일이 남아있어도 그러했다. 어차피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터라 오가기는 쉬웠지만. 겨울은 잦은 방문을 조금도 번거로이 여기지 않았다. 과거에 그녀를 거부했던 건 언제 폐기될지 모를 처지에 우정을 쌓고 싶지 않았던 까닭. 이제는 방해요소가 없으니 친분을 쌓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약간의 불안과 타산이 있긴 해도.’ 아영 스스로도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의 속내에는, 겨울에 대하여 더 굳은 확신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은 장차 그녀의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계의 실질적 지배자인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바람. 그녀의 불안을 덜어주는 건 친구로서의 겨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커피 드실래요?” 아영의 아이는 봄이 친구 삼아 만들어준 인공지능 로봇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집무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던 아영은, 겨울이 묻는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응? 뭐라고?” “커피 드실 거냐고 물었어요.” “아. 좋지.” 봄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는 이상, 아영 역시 늦은 시간에 섭취하는 카페인의 반감기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겨울은 아영이 보는 앞에서 최근에 연습한 방식으로 커피를 탔다. 각설탕을 준비했으나 그냥 넣는 것이 아니다. 도수 높은 브랜디를 스푼에 부어, 각설탕을 올린 다음 불을 붙인다. 적당히 그을린 설탕으로부터 카라멜 향이 솔솔 올라올 즈음에서야 뜨거워진 술과 함께 커피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 넣는 설탕이 한 스푼, 두 스푼, 세 스푼……. 아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칵테일?” “커피입니다. 카페 로얄이죠.” 앤이 있었다면 아마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여.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닮아가는 법이었다. “그리고, 술을 딱히 싫어하진 않으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미심쩍어하며 잔을 받은 아영은, 한 모금 조심스레 맛을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모양. 겨울도 만족했다. 이 역시 조금 억지를 쓰면 요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굳어진 입맛을 교정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 아버지로서 업무를 보는 건 좀 어때? 익숙해졌어?” 아영의 물음에, 겨울은 살짝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대체로 괜찮아요. 이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는 순간들이 있긴 해도.” “그래…….” “어떤 의미로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 이루어낼 일들이 고건철 씨의 영전에 바칠 꽃다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이 탄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거니까. 적어도 그 사람의 일부는…….” 폭군과의 만남을 짧게 회상한 겨울이 끊었던 말을 잇는다. “그로 하여금 딸에게 사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도록 만들었던 일부는……. 선생님과 제가 자신의 유산을 토대로 빚어내려는 세상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영은 쓴맛 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일부야말로 당신께서 기억하시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가깝겠죠.” “…….”  아영은 침묵했다. 겨울의 말에 언뜻 슬픈 감상이 스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전에 쇠락해버린 감정이었다. 비록 기억은 희미해졌으나, 분명 그녀도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랑은 서툴지언정 무척이나 진한 것이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진짜 고건철이라는 사람은 이미 옛날에 죽고, 그 잔해만이 남아 겉모습만 사람으로서 숨을 쉬고 있었던 거라고. 그 잔해 가운데 그나마 본연의 마음에 가까울 부분을 더 긍정해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겠죠……. 중요한 건, 유일한 가족인 선생님께서 어떻게 느끼시는가가 아닐까요?”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도 존재의 연속성이 성립하는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잔해의 어느 일부가 더 예전의 고건철에 가까울 것인가? 그걸 구분하는 역할은 하나 뿐인 딸의 몫이라는 논지였다. “어차피.” 겨울의 말이 이어졌다. “추모라는 건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일이에요. 죽어버린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죠. 연민도, 원망도, 그리고 용서도……. 그래서 제가 꽃다발이라고 표현했던 거예요. 영전에 꽃다발을 바친들,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굉장히 와 닿는 말이네.” “제법 어른스럽죠?” “풋.” 아영이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실소했다. “이제 와서 무슨……. 넌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내 입장에선 예전부터 기이할 정도로 어른스러웠어. 그래서 봄을 그렇게 잘 키워낼 수 있었던 거겠지. 겨울이 넌 이미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부모야.”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고요.” 이때 아이와 로봇이 잠시 시끄러웠다. 겨울과 아영이 돌아보면, 봄에게 종속된 시스템으로서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구체형 로봇은 자꾸만 우주로 가고 싶다고 되뇌고 있었다. 「우주로 간다. 나는 간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우주. 간다.」 아직 말이 미숙한 아이가 방긋거리며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를 되새김질했다. “우주! 우주!” 「우우우우우우주!」 “꺄하!” 봄은 대체 저 기묘한 기계 친구의 구성요소를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아이와 인공지능이 한데 어울려 우주를 외치는 광경은, 우스운 한편으로 제법 상징적인 것이기도 했다. 겨울과 아영이 농담 반 진담 반인 감상을 공유했다. “미래네요.” “미래구나.” 시선을 되돌린 아영이 하는 말. “나는 보다 가까운 앞날 쪽이 궁금한걸.” 못내 표면으로 드러나는 불안이었다. “우선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되돌려놓는 일부터 착수하려고요.” 겨울의 대답에, 관리자를 만난 이유를 알고 있던 아영이 확인하듯 묻는다. “사후세계에 대한 그들의 꿈에 찬물을 끼얹어서?” “네. 힘겨운 삶의 유일한 희망을 위협받은 격이니 다들 화를 많이 낼 거라고 생각해요. 감정이 깊고 강렬할수록, 그 감정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엔 최소한의 유대감과 동질감이 생겨나겠죠.” “후우…….” 이번엔 아영이 한숨을 쉰다.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각오한 일이에요.” “새삼스럽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거니?” “그들 모두에게 사람으로서 현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오직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할 세상을 준비하고서야 겨우 싹트기를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지?”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보기에, 이 세상은 이제까지 겨울처럼 추웠어요. 따뜻한 계절에 피어야 할 꽃이 겨울에는 피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잖아요.” “…….” “세상엔 자신이 안전해지고서야, 자신이 풍족해지고서야 비로소 선해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사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죠.” 가깝게는 시스템 관리자에서부터 멀게는 시에루 중장까지 포함된다. 겨울은 타인의 절박한 끼니를 빼앗은 적 없느냐는 질문에 대한 시에루 중장의 답변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장과의 대화를 요약해서 들려준 겨울은, 이어 중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저는 그분이 평범하게 나쁘고 비범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출세욕과 재물욕을 채우지 못했다면, 비범하게 좋은 사람은 사라지고 평범하게 나쁜 사람만이 남았겠죠. 세상에 그렇듯 평범하게 나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네. 듣고 보니…….” “별을 보며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삶이 따뜻할 때만 드러나는 선함도 아름다운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 그걸 싹 틔우고 지켜주려는 노력에도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람의 선의가 배신당하지 않을 세계를. “그 노력은 영영 보답 받지 못할지도 몰라.” “말 그대로 모르는 거잖아요.” 겨울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는 이제까지 이 세상이 흘러온 물길을 벗어나, 다 같이 비범한 사람이 되어서, 모두가 함께 물 밖으로 헤엄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눈에 파묻힌 꽃씨의 입장에선 얼어붙은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온실의 꽃을 나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차가운 세상 쪽을 어찌할 능력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렇게 학습한 체념을 인류의 신포도라고 해도 무방할 터. 최소한 겨울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겨울을 빤히 바라보던 아영이 소감을 말했다. “봄이 왜 그토록 너를 따르는지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 들어.” “부끄럽네요…….” “아니, 정말로. 이미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자신에게 불안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영은, 처음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카페 로얄을 홀짝거렸다. 사실 봄과 겨울이 진정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그녀를 기만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사람에게는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차원의 문제였을 따름. 커피의 온도는 그것을 타준 사람의 따뜻함이었다. 잠시 후 아영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만 갈게.” “벌써요?” “그동안 내가 순수한 친구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 애인 있는 사람의 저녁시간을 여기서 더 빼앗고 싶지도 않고.” “이런.” “내일은 좀 더 좋은 친구가 되어서 오도록 할게.” 자신을 따라 일어서는 겨울을 향해, 아영은 외투를 챙기며 친근하게 웃어보였다. “나오지 마. 그리고…….” “……?”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아버지.”  겨울이 고건철의 유산을 대하는 태도를 긍정하는 농담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 홀로 남은 겨울은, 아침과 달라진 창가로 다가가 땅거미가 내려앉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손을 대니 늦겨울의 냉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투명한 차가움이 체온으로 물들기까지는 둔하게 흐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바라보는 풍경은 겉보기로만 어두운 것이 아닐 터였다. 봄과 공유하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한 겨울은, 밝은 낮에도 어두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를 정리하는 모습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일과를 끝내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사후의 희망을 꿈꾸며 타인의 사후를 엿보는 자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관조하며, 겨울은 생각했다. 이토록 차갑고 쓸쓸하기만 한 세상에- ‘봄이 있으라.’ #납골당의 어린 왕자, 완결.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로 이어집니다. #앤의 위시리스트는 1월 14일부터 연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