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정윤강 D 버전으로도 못 깼는데, 이걸 현실에서 깨라고? 어쩌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조차도 쉽지는 않겠지만. ========================================= 1화 서장 어려서부터 게임이 좋았다. 계기는 간단했다. 병원에만 있으니 자연스레 할 게 게임밖에 없었고, 점차 시간이 지나다 보니 게임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뭐든 오래 하면 식상하고 질리는 법. “아, 씹… AI 판단 실화냐? 왜 거기서 걔한테 힐을 줘?” 언제부턴가 무슨 게임을 하던 이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AOS, RPG, FPS 등 장르 문제가 아니었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게임들은 전부 쓰레기 같았다. 스토리나 세계관은 판에 박힌 듯 비슷했고, 시스템엔 깊이가 없었다. 좀 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게임을 원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게 [던전 앤 스톤]이었다. 타다닷. 딸각, 딸깍. 장르는 싱글 RPG. 해외 인디 게임이었다. 한글 지원은 없었고,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2D 픽셀 그래픽을 사용했다. 솔직히 말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무료였기에 일단 해 보잔 마음으로 게임을 설치했고, 머지않아 나는 이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와, 신관 새끼 때매 다 와서 뒈질 뻔했네.” 여러모로 특이한 게임이었다. 캐릭터가 사망 시 처음부터 키워야 했다. 게임 진행에 NPC 동료가 필수였으며, 종스크롤 게임인 주제에 자유도는 또 엄청나게 높았다. 스킬 시스템이나 세계관도 매력적이었고, 스토리는 영문으로 읽었음에도 흥미로웠다. 결정적으로, 이 게임엔 알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타다닷, 타다다닥. 당시 막 지하철로 배정받은 사회복무요원이었던 나는 본격적으로 [던전 앤 스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다. 이 게임에서의 전투는 단순히 HP/MP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풀피에서도 판단 미스 한 번이면 세 달 동안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사라졌다. “…가 보자.” 2년이 넘도록 게임의 중반부도 가지 못한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공략법을 검색했다. 한국 포털엔 검색도 되지 않아 영문을 번역하며 읽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크게 의미 있진 않았다. 해외에도 유저 수가 많지 않아 관련 글 자체가 적었고 영양가도 없었다. 한두 달 해 보고 망겜이라 하는 그들보단, 2년간 부딪치며 진지하게 이 게임을 탐구했던 내 쪽이 훨씬 더 이해도가 높았다. 따라서 공략법을 찾는 것도 그만뒀다. “위로 세 번, 좌로 네 번, 아래로 한 번에, 좌로 두 번, 다시 위 여섯에, 우로 네 번. 마지막에 함정까지 피해 주고… 오케이.” 어차피 즐길 만한 게임을 찾아 헤매다 겨우 발견한 게 이것 아니던가? 얼마가 걸리던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후우.”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Gate of the Abyss」 지금 내 캐릭터는 최종 보스방과 이어진 포탈 앞에 서 있다. 물론 엔딩을 보는 건 앞으로 몇 번은 더 이곳에 온 다음이 될 것이다. 고작 한 번의 트라이로 보스를 잡을 수 있을 만한 게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경직된 손끝으로부터 지금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가 느껴진다. “최종 보스라…….”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9년이 걸렸다. 20대 시절 전부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사회복무요원 소집 해제일 때도,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가 복학 신청을 했던 날도, 졸업 후 원하는 직장의 합격 문자를 받았던 날도. 나는 항상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해 왔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캐릭터를 조작해 포탈에 다가서자 입장하겠냐는 물음이 뜬다. 당연히 YES를 눌렀다. 근데 최종 보스 방이라 그런지 뭔가 있어 보이는 메시지가 한 번 더 출력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입장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 입장에선 불필요한 연출이었다. 그럼 여기서 안 들어 가겠냐? 「예 / 아니오」 예를 누르자 화면이 로딩창으로 넘어간다. 검게 변한 모니터를 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놈은 패턴이 몇 개나 될까? 속성은? 즉사기는 당연히 갖고 있을 테고. 음, 첫 트라이에 성공할 생각은 버리고 최대한 정보를 모으자. 어쩌면 육성 방식이나 조합을 싹 갈아엎어야 할지 모르니까. 흥분과 기대로 자극된 뇌는 오직 최종 보스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당신은 심연에 도달했습니다.」 「튜토리얼 완료.」 튜토리얼 완료? 아니, 그것보다 왜 한글이 나오지? [던전 앤 스톤]은 영문만 지원하던 게 아니었나? 「전송을 시작합니다.」 위화감을 감지함과 동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발원지가 모니터라 생각도 못 할 만큼 강렬한 빛. “악, 씨발! 내 눈!”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한다. 귀에서는 이명이, 피부에선 정체 모를 열기가 전해졌다. 정신은 마취주사를 맞은 듯 빠르게 아득해졌다. 평소 위기 대처 능력만큼은 자신 있던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번뜩-! 빛이 한층 더 강해짐을 느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게임 속 바바리안이 되어 있었다. 2화 튜토리얼 (1) 눈을 감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만약, 이게 아주아주 불친절한 게임의 도입부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지?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는 것.’ 후,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다. 스스로 정한 1차 과제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떠 다시금 주변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이전과 변한 건 없었다. “…….” 내가 숲속 공터에 있다는 것도. 어두운 주변을 밝히는 것이 LED 가로등이 아니라 일렁이는 횃불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동서남북 어딜 보나 근육질의 야만인들이 득실거린단 사실까지도……. “축하한다! 어린 전사들이여!” 씨발,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오밤중에 옹기종기 모여서 뭘 하는 중인진 모르겠지만, 표정들이 꽤나 경건하다. 가운데 저 아저씨는 부족장 같은 건가? 뭐, 그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오늘부로 너희들은 성지를 떠나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부족장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눈을 감았다. 의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가 진단을 해 보자면, 지금 내겐 블랙아웃 증상이 있다.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 스스로에게 맞는 무기를 골라 보아라!” 그러니까 한번 해 보자. 방금 전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뇌에 문제가 생긴 상황은 아닌지, 차근차근 되짚자 곧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최종 보스 방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고, 흥분을 억누르며 포탈을 작동시켰다. 그때 갑자기 튜토리얼 완료니, 전송을 시작하니 뭐니 하는 문구가 뜨더니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이다. 어찌 된 게 처음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은 나와라!” 일단 몸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픈 감각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숙인 나는 흠칫 굳었다. …이건 또 뭐지? “양손도끼라! 훌륭하다!” 내려다 본 손이 우악스러울 정도로 크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내친김에 다른 곳도 확인했더니 가관이다. 상의 탈의는 물론이고 우락부락한 근육 위로 온갖 형태의 문신이 그려져 있다. …어쩐지, 다들 한 덩치 해 보이는데 눈높이가 맞더라니. 일단 나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아니, 사실 정리랄 것도 없었다. 어째선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야만인이 되어 있었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이여!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납치, 몰래카메라, 심리 실험 그 외 등등등. 이와 비슷한 가능성들을 즉시 머릿속에서 지운다. 상황이 요지경인데 희망 회로를 돌리며 억지로 근거를 끼워 맞추는 건 미련할 테니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생산적이다.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과학이나 현대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다. 이 커다란 몸뚱이 말고도 근거는 차고 넘친다. “다음!” 첫째로 저 야만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니다. 평생 어떤 미디어에서도 접한 적 없는 언어. 문제는 그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머릿속에 지식이 새겨지기라도 한 듯이.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는 나와라!” 두 번째로, 나는 이 상황이 익숙하다.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검을 골랐구나! 영민한 너와 잘 맞는 선택이다!” 어린 야만인들이 차례로 무기를 선택한단 것. 공통점은 딱 그것뿐이지만……. 이는 [던전 앤 스톤]의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정확히는 여러 종족 중 ‘바바리안’을 선택했을 때, 이런 식으로 게임이 시작됐다. 근데 이게 정말 우연이라고? 의문의 빛이 나를 집어삼킬 때 하고 있던 게임도 [던전 앤 스톤]이었고, 심지어 플레이하던 메인 캐릭터도 ‘바바리안’이었는데?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여! 이로써 너는 한 사람의 전사가 되었다.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마!” ‘이런 미친…….’ 남은 근거를 정리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라프도니아. 부족장이 방금 전에 언급한 이 고유명사 하나 덕분에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나는 이제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 내가 10년 가까이 플레이해 온 게임 속 세상. “더, 던전 앤 스톤.” 어, 얘는 또 뭐야. 뭔데 내 말을 대신해. 곁눈질로 옆자리의 야만인을 확인한 나는 흠칫 굳었다. 척 보기에도 그는 다른 야만인들과는 달랐다. “뭐, 뭐야 이게 내가 왜 여기에…….” 숨결은 거칠며 눈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던전 앤 스톤]을 아는 것도 그렇고. 혹시 얘도 나랑 똑같은 상황인 건가? 한번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었다. “방금 입을 연 것은 누구냐!” 고막이 얼얼할 만큼 큰 목소리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언제 왔는지는 몰라도, 나를 내려다보는 부족장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확 들었으니까. “네놈이냐?” 질문을 받는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옆자리의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나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 신속한 행동. 이에 부족장도 추궁 대신 옆자리의 야만인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미안, 근데 네가 맞긴 하잖아. 입 연 거. “네놈이냐?” “예?” “방금 중얼거린 게 네놈이냐고 물었다.” 이제야 느낀 것인데, 부족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암만 봐도 단지 떠든 것 때문은 아닌 듯한데……. “아, 던전 앤 스톤 말입니까? 근데… 그게 왜?” 녀석은 아직 이 분위기를 눈치 못 챈 듯하다. “네놈이었구나…….” 이를 악 문 부족장의 눈에 짧게나마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간다.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낀 나는 무의식중에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거 이벤트 같은 거죠? 아, 혹시 제가 너무 빨리 눈치챈 게 문제가 됐—” 뭐가 지나갔는지, 내 눈으론 볼 수도 없었다. 무언가 번뜩였고, 이후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 그게 사건의 전부였다. 찰나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머리가 데구루루 구른다. 비현실적인 것 같은 잔혹한 광경. 눈은 방금 본 그대로의 정보를 뇌로 전했다. “…….” 사람 목이 눈앞에서 잘라져 나갔다. 뼈가 보이고 근육의 단면이 보인다. 피와 살점과 함께 하얀 무언가가 얼굴에 튄다. 뭐지 이건? 지방인가? 음, 잘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영화나 만화에서 봤던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오는 일도, 전부 꿈일 거라며 멘탈이 나가지는 일도 없었다. 피슈우우웃! 사람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지는 걸 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왜, 부족장이 얘를 죽인 거지?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영혼에 ‘악령’이 깃들었다. 어린 전사들은 방금 악령이 뱉은 말들은 모두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라!” 부족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정보가 조합된다. 정보1, 나는 악령이다. 정보2, 이 사실이 들키면 죽는다. 정보3, 자칫했으면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사람 목이 잘려 나갔을 때도 멀쩡하던 등골에 오한이 일었다. “불칸! 그대는 어서 시신과 함께 이 사실을 신전에 알리도록 하라!” “성인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행하겠다!” 한바탕 피가 흘렀지만 성인식은 계속됐다. 여기선 이런 일이 흔한지, 어딜 봐도 눈 하나 깜빡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주변의 어린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워낙 불친절한 게임을 많이 해 봐서일까?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악령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치십시오. 친절한 게임이라면 이런 메시지가 떴겠지. 갱신된 과제를 뇌리에 새기며, 나는 억지로 몸의 떨림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태도를 가이드라인 삼아 표정을 연기했다. 누구도 내게서 위화감을 느껴선 안 된다. 이들에게 있어 나는 주인의 몸을 빼앗은 ‘악령’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듯하니까. “다음!” 사고가 그곳에 이어졌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 “케닉의 넷째 아들 세룸은 나와라!” 나는 내 이름을 모른다. 이것은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이름이 불렸는데도 혼자 가만히 있으면 분명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다음!” 물론, 잘못 들었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분명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상하단 이유로 부족장이 질문을 던져 온다면? 난 무엇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 불안한 감정이 뇌의 호르몬을 자극했을까.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호명되면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지 않나?’라는 나약한 생각. “다음!” 스스로가 한심했다. 운에 기댄다고? 평생 단 한 번도 운이 좋았던 적이 없던 주제에? 게임을 하다 이런 곳에 끌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 같은 놈이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선,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계획이 필요하다. “다음!”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턱은 정면을 향한 채 눈으론 다른 이들의 표정, 움직임, 습관 등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고 있자니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다음!” 물론, 이 방법도 100%를 보장하진 못한다.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나는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이게 가장 살 가능성이 높은 길이라고. “다음!” “다음!” “다음!” 이후로도 호명은 이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약 2초를 셌다. 그 짓을 여덟 번 반복했을 때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나와라!”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호명이 되고서 2초가 지났음에도 누구 하나 발을 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나는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당당히 어깨를 편 채 부족장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걸음을 내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게 내 이름이란 확신은 없다. 터벅. 만약 내 판단이 틀렸다면 수상하다며 저 미친 부족장이 대뜸 불러 세울 것이다. 그리고 묻겠지, 너는 엄마가 누구니? 나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터벅.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호흡을 고르며 계속해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간단한 이유다. 이게 가장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으니까. “어린 전사여, 원하는 무기를 택하거라!”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날 보는 부족장의 시선에선 어떠한 의심도 묻어나지 않았다. 다른 어린 전사를 대할 때처럼의 온화한 눈빛. 나는 묘한 흥분을 억누르며 숨을 다듬었다. 살았다. *** 눈을 뜨고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누군가에겐 이런 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부정하는 건 의미 없다. 꿈같은 게 아니다. ‘비요른 얀델.’ 앞으로 나는 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 이름뿐만이 아니라 완벽하게 이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일진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은 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알지 못하니까. 뭐, 게임의 클리어 조건을 채우면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다마는. 이 또한 아직 단정 짓기엔 이르다. 솔직히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아직 2D 버전으로도 못 깨봤는데, 이걸 현실에서 어떻게 깨? 어쩌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 그런 의미에서 무기 선택은 중요했다. 질질 끌면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신중히 무기를 하나씩 살폈다. 한손 검, 양손 대검, 메이스, 쇠곤봉, 창, 작살, 양손 도끼, 도리깨, 대형 망치 등등등. 활, 지팡이 류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이 야만인 새끼들에겐 힐러, 마법사, 궁수처럼 날로 먹는 직업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종족적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어서 무기를 택하라!” 선택의 시간이 길어지자 부족장도 슬슬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바바리안은 선천적으로 마법 쪽 재능이 전무한 대신 강력한 신체 능력을 지녔다. 그런 이유로 나도 바바리안을 키울 땐 항상 근접 무기를 쥐어 주고 전위에 세우는 식으로 플레이했다. 호기심에 활바바도 키워 봤지만 별로였다. 언제나 그들의 진가는 근접 전투에서 발휘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것.’ 나는 고심 끝에 무기를 택했다. “흐음.” 선택이 끝날 때마다 감탄과 칭찬을 곁들이던 부족장이 처음으로 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나는 그 누구도 고르지 않은 무기를 택했다. *** 그 시각, 섬광이 잦아든 어두운 방.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캐릭터 정보 및 일지가 기록되며 관리자에게 전송됩니다.」 꺼졌던 본체의 팬이 돌기 시작하며, 모니터에서 새어 나온 빛이 텅 빈 방 안을 비춘다. 다만 부팅은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삐비빅, 삐빅, 삑— 검은색 배경의 DOS 화면에 멈춰, 오류라도 난 것처럼 비프음에 맞춰 입력되는 타이핑들.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2 상승합니…….」 「…….」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실시간으로 적어 내리고 있듯, 그 소리들만이 주인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한없이, 계속해서. 「비요른 얀델」 레벨: 1 육체: 25 / 정신: 35 / 이능: 1 아이템 레벨: 24 (New +24) 종합 전투 지수: 67 (New+6) 3화 튜토리얼 (2) 바바리안Barbarian. 직역하면 ‘야만인’을 뜻하는 이 종족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내가 고른 것은 대검이었다. 그야, 멋있으니까. 남자라면, 양손에 검을 쥐고 적진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고픈 욕구가 있다. ‘문제는, 너무 잘 죽어 버린단 거였지만.’ 바바리안이란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나는 연구를 시작했다. 바바리안을 어떻게 키우면 생존력까지 챙길 수 있을까? 여러 시도를 했지만, 여전히 바바리안은 너무 쉽게 죽었다. 생존력을 아무리 챙겨도 광전사 같은 존재가 될 뿐이었다. 매 전투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지라 안정성이 떨어졌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얘를 꼭 딜러로 써야 하나?’ 바바리안은 선택 가능한 종족들 중에 생명력이 가장 높은 데다가, 근력 기댓값도 높아서 아다만티움 장비도 착용이 가능하다. 비록 사기적인 특수 능력을 지닌 드워프만큼은 아니더라도, 탱커로서의 기본 소양은 갖추고 있는 셈. 뭐, 그와 별개로 탱커인 바바리안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지만……. 그간 연구한 게 아까워 한번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육성법을 만든 뒤. ‘뭐야, 이 사기캐는.’ 나는 미련 없이 원래 탱커로 쓰던 드워프를 버렸다. 호쾌한 전투를 펼치지 못하면 어떤가. 난 언제나 효율을 중시했고, 공략에 도움이 된다면 게이머로서의 취향 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인간었다. 지금 내린 이 결정처럼. 터벅. 무기 선택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다른 야만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뭘 봐, 방패바바 처음 봐? 나는 야만인답게 전혀 기죽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내 자리로 돌아와 섰다. 이번엔 딱히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나는 내 결정에 미련 따위 없다.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 시작 무기 중에서도 방패가 되팔았을 때 가장 비싸다. 둘, 내가 당장 날붙이를 쥐어 봤자 제대로 쓰지도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 최종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건 방패바바다. 오늘의 나는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무기를 고르고 자리로 돌아서니 이제야 좀 시간이 주어졌다. 다른 야만인들이 성인식을 치르는 동안 나는 현사태의 원인을 추측해보기로 했다. 사실 진작에 짚고 넘어가야 했을 일이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그런 걸 생각하다간 내가 뒈질 판이었는데. 「당신은 심연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라도 정리해 보자. 나는 최종 보스 방에 도달했다. 아마 그것이 트리거였을 확률이 높다. ‘잠깐만, 그럼 아까 죽은 걔는 뭐지? 걔도 최종 보스 방까지 왔다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사람은 많고 그중 나처럼 별난 놈도 있으니.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자. 「튜토리얼 완료.」 나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알려 줄 건 다 알려 줬으니, 이 지식을 이용해서 잘 살아남아 보라고. 누군진 몰라도 악독한 새끼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살아남길 바랐으면 ‘악령’인지 뭔지에 대한 설정도 넣어 줬어야지. 오자마자 뒈질 뻔했잖아. 개새끼야. “후우…….”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와서인가? 평소와 달리 감정 조절이 되지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쯤에서 상념을 끝냈다. 괜히 흥분했다간 일을 그르칠 지도 모르는 데다가, 애초에 원인을 곱씹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나답지 않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 이럴 시간에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생각하는 게 생산적이다. 그러니까……. 그래,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자. ‘살아남는 것.’ *** 성인식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숲길을 걷고 있다. 앞에는 부족장이, 뒤에는 어린 야만인들이 있다. 모두 소풍이라도 가듯 즐거워 보인다. 허나 나는 이들처럼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 무성한 수풀을 지나 도착한 곳은 30m는 됨직한 성벽 앞이었다. “개문하라!” 투박한 기계장치 소리를 내며 성문이 열린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 그러나 어린 야만인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묘한 침묵 속에서 마침내 성문 너머로 회색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프도니아…….” 아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이들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비된 도로와 석재 건축물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탑. 로딩 창 일러스트로만 보았던 그 모습을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제기랄. “전사들아!” 문이 열리자 부족장이 뒤돌며 외쳤다. 떠나보내기 전에 뭔가 좋은 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도 싶었지만……. “떠나라! 저곳에 너희들의 운명이 있다!” 야만인들에게 지루한 연설은 필요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막 성인이 된 야만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도시 속으로 달려 나갔다. 내키진 않지만 나도 소리를 지르며 뒤를 따랐다. 저기 불 꺼진 건물들 안에 곤히 자고 있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야만인인데. 쿠웅-! 뒤에서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신경 쓰는 야만인은 한 명도 없었다. 잔뜩 흥분한 야만인들은 한참을 더 달려 나간 후에야 겨우 진정하고 속도를 낮췄고, 그제야 나도 차분히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현재 내게는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 “…….” 맞이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내가 가장 즐겁게 플레이하던 게임 속 세상의 일원이 되었다는 모종의 기대감. 조금 우습긴 하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고 다짐한 게 바로 전인데 이따위 감정이 피어나다니. …역시 나는 정상이 아닌 거 같다. 이 야만인 새끼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정지!” 선두에서 달리던 리더 격 야만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충격적인 고백에 야만인들이 웅성였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그에겐 이끄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책임을 져야 한다!” 지랄. 지들도 좋다고 따라가던 주제에. 이게 야만인의 사회인가? 비정하다. “알겠다. 그만해라.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이끄는 자에서 내려가겠다.” 지속된 원성에 파눈의 세 번째 아들인 카락이 푹 고개를 숙이며 무리로 돌아왔다. 차대 리더로 추대된 이는 여자 바바리안이었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현명한 아이나르라면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 수 있다!” 여러 기대 어린 말들에 여자 바바리안은 기쁜 얼굴로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대 리더와 같은 수순을 밟는 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놀랍게도, 둘은 하는 말마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했다. “그럴 수가! 우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미궁까지 가야만 한다!” “아이나르에겐 이끄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맞다!” 혼란에 빠진 야만인들은 3대 리더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테트란의 두 번째 아들 진이 좋을 거 같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새끼들은 뇌가 없나? 그 누가 앞장을 서든지 간에, 목적지엔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정말로 깨닫지 못한 건가? 어쩌면 이러다 내 차례까지 올지도. “…….” 조용히 뒤로 빠져 2대 리더에게 접근했다. 2m에 살짝 못 미치는 거구를 소유한 그녀는 낙심한 표정으로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너도 날 탓하러 온 것인가?” 그럴 리가. 내가 보기엔 전부 똑같은 놈들이었다. 고개를 내젓자 여자 바바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위로라면 필요 없다.” “아니다. 나는 길을 찾을 방법을 알려 주러 왔다.” “…그게 정말인가? 대체 어떻게?” 나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냥 저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논리적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설명했다. 한밤중의 도시.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들엔 전부 불이 꺼져 있다. 하지만 야심한 시각이라기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전부 일상복이 아니라 무장을 한 상태다. 그런 이들이 갈 곳이 어디겠는가? “확실히. 이제 보니 그런 것 같다. 한번 해 보겠다.” 여자 바바리안이 무리로 돌아가 ‘길을 알아냈다!’라며 소리쳤고, 이에 야만인들도 3대 리더를 뽑는 걸 멈추고 환호를 내질렀다. “역시 아이나르다!” “현명한 여전사!” 어쨌거나, 다시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에 무장한 이들이 늘어났다. 어느덧 저 멀리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빛무리도 보이기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으면 적어도 길은 잃지 않겠지. “미궁이다! 미궁이 보인다!” “신성한 전투의 차원!” 나는 다시금 끊겼던 생각을 이어 나갔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은 하나, 과연 미궁에 들어가는 게 옳은 판단인가다. “느껴진다! 미궁이 내 영혼을 이끌고 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야만인들은 내가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럼 난 미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피 흘려 괴물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직까지 이 고민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도망치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겠지.’ [던전 앤 스톤]엔 세금 시스템이 있다. 20세부터 모든 도시민들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며, 세금을 내지 못할 시 사형에 처한다. 이것만 들으면 뭔 망겜인가 싶지만, 세계관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벌써부터 고민할 문제는 아니겠다마는. “아이나르! 속도를 올리자!” “우오오오오오!!” 아무튼, 돈은 벌어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이 꼭 미궁에 들어가 괴물들과 싸우는 것일 필요는 없다. 하다못해 주점에서 일을 하더라도 당장 먹고, 자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바바리안만 아니라면 말이다. 게임 시작부터 무기를 주는 건 바바리안이 유일하다. 무척이나 간단한 이유다. [바바리안? 미안하군. 방금 사람이 구해져서.] [저리 안 가? 바바리안한테 시킬 일은 없어! 이번엔 또 뭘 부셔먹으려고!] 바바리안은 평범한 일을 할 수 없다. 게임 내 설정상 미궁에서 괴물과 싸우는 것 말고는 밥벌이해 먹을 수단 자체가 막혀 있다. 뭐, 실제로는 어떨지 미지수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일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무리에서 이탈하기에는 한 가지가 걸린다. “폐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미궁은 게임 시간으로 한 달에 한 번 열렸다. 즉, 이번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는 한 달간 이 도시에서 버텨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일자리를 못 구하면? 바바리안이란 이유로 어느 누구도 채용을 안 해 주면? 글쎄, 미래가 암울해진다. 일단 일주일은 부족장이 준 식량으로 버틴다 해도, 그다음은 음식 쓰레기나 주워 먹으며 연명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전에 굶어죽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시일을 버텨 내더라도 내 몸뚱이는 지금과 전혀 다르리란 사실이다.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 “아니다! 내가 먼저다!” 굶주림, 추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의 수면.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육체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들어갈 거라면 컨디션이 가장 좋은 지금 들어가는 게 합리적이다. ‘문제는 그게 내 명줄만 단축할 수도 있단 거지만.’ 고민이 깊어지던 때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누가 내 어깨를 잡았다. 확인해 보니 아까 그 여자 바바리안이다. 분명 이름이……. “프넬린의 세 번째 딸 아이나르.” “두 번째 딸이다.” 아무튼, 그래서 얘가 나한텐 무슨 용무지? “이미 다른 전사들은 모두 미궁에 들어갔다. 아직 들어가지 않은 건 너와 나뿐이다.” “아.” 어쩐지 조용하더라. 확인해 보니 다른 야만인들은 물론이고 광장에 남은 사람 자체가 별로 없다. 아이나르는 2대 리더로서 내가 가만히 있자 챙겨주러 온 모양. “서둘러야 한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시간이 얼마 없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저 멀리서도 강렬한 빛을 내뿜던 포탈은 어느덧 눈에 띄게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폐쇄까지 5분 남았습니다!” 때마침 안내원이 한 번 더 남은 시간을 알려 줬다. 5분이라, 생각보다 빠듯하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하긴 하겠는데……. “먼저 들어가라. 바로 뒤따라 들어가겠다.” “알겠다.” 아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포탈을 향했고, 이에 따라 내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다. 자,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극한의 효율충으로서 뭐든 빨리빨리를 선호했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다. 게임과 달리 실제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치려던 차. 갑자기 잘 걸어가던 아이나르가 휙 뒤돌았다. “아까는 고마웠다.” “…고마워할 것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엄마 이름만 아니라면 뭐든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나르가 100% 진심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너처럼 현명해질 수 있나? 너처럼 똑똑한 바바리안은 살면서 처음 봤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떻게 해야 똑똑해질 수 있냐고? 솔직히 그냥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지만……. 아니, 내가 이걸 왜 고민하고 있는 거지? 그냥 대충 대답해 주고 얼른 보내자.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흐음, 그렇군!”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이나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금 의외인 말을 했다. “조언해 줘서 고맙다. 만약 미궁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보답하도록 하겠다.” 살아 돌아온다면이라니? 바바리안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도 이상하게만 들린다. 그래서 나답지 않게 불필요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너는 죽는 게 두려운 건가?” “당연하지 않나? 죽는 건 당연히 두렵다. 아마 다른 전사들도 그럴 것이다. 내색은 않겠지만.” 그런가?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와닿지 않는다. 게임 속에서의 바바리안들은 공포를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고. 내가 말이 없자 아이나르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들은 전사로 태어났다. 싸우지 못하면 죽는다.” 말투는 서툴고 딱딱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내가 그랬듯, 이들 역시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바바리안으로 태어났으니까. 미궁에서 괴물을 잡아 죽이지 못하면,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어려서부터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 겨우 그뿐이었다. 이들이 야만인처럼 보였던 것은. “살아서 보자.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내 아이나르가 포탈에 들어섰다. “폐쇄까지 1분 남았습니다!” 이제 나를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최종 보스 방에 들어갈 때 떠올랐던 문구처럼, 선택지는 두 가지다. 「예 / 아니오」 왠지 복잡했던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그래, 차라리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자. 게임을 할 때의 난 언제나 목표를 위한 효율 중시 플레이를 해 왔다. 행동하기 전에 가능성부터 따졌고, 항상 그다음의 다음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당장 이득을 봐도 결과적으로 손해라고 판단이 서면 ‘아니오’를. 그 반대라면 ‘예’를 택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곧 게이트가 폐쇄됩니다! 물러서십시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부족장이 내 이름을 호명했을 때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이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평생 병약하게 살아왔던 내게는 흔한 주먹다짐 경험도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괴물이라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 온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지금의 내겐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바바리안의 육체가 있다. 수천 번 캐릭터를 육성하며 얻은 지식이 있다. 무엇보다 살아남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그러니까, 할 수밖에 없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고르지 않을 끔직한 고행이 예정된 선택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1층 수정 동굴에 입장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렸으니까. 4화 튜토리얼 (3) [던전 앤 스톤]에 한해서 나는 전문가다.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무슨 습성을 가졌으며 약점은 뭔지, 딱히 떠올리지 않아도 줄줄이 읊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나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바바리안의 육체와 내 지식이 합쳐지면 미궁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적어도,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하…….” 미궁에 들어오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미래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는 지금 누가 눈에 안대를 채워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래 봤자 별 차이가 없을 테니까. “씨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야만인들도 전부 무기 하나만 달랑 들고 있어서 나도 이 부분에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1층에선 횃불이 딱히 필요 없어야 한다. 벽에 붙은 수정들이 광원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1층에도 암흑지대가 있긴 하지만, 2층으로 이어진 최외곽부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분뿐— ‘아, 설마 내가 지금 거기 떨어진 건가?’ 나는 빠르게 가설을 세웠다. 미궁에 들어섰을 때 시작 위치는 랜덤이다. 물론, 말이 랜덤이지 이딴 곳에 내던져지는 일은 없다. 외곽부에서 시작하더라도 늘 근처엔 빛나는 수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긴 단순히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모두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부여한 일종의 편의였다면? 실제로는 암흑지대가 스타트 포인트로 잡히는 개같은 경우도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1층 전부가 이딴 식이라고 한다면 하루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으니까. “후…….” 그래도 차분히 정리를 하니 조금 진정됐다. 다행히 눈도 어둠에 적응을 했는지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그래 봤자 윤곽선만 겨우 보일 뿐이지만. 이 정도면 뭐, 혀 깨물고 죽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일단 확인할 것부터 하고 넘어가자. 이제야 혼자 있게 됐지 않은가. “상태창, 장비창, 캐릭터 정보, 스테이터스, 인벤토리. 일지 확인… 은 니기럴.” 역시 안 되는구나.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가자.” 한 손에는 방패를, 한 손으로는 벽을 짚은 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속도는 기어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 음, 아닌가? 어쩌면 기어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만, 속도를 더 올릴 수는 없다. 위험하니……. “끄아아아악!” 돌연 발목에서 쨍한 통증이 피어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신경이 미쳐 날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전투 로그 없이도 답은 금방 나왔다. 「캐릭터가 고블린 덫을 밟았습니다.」 씨발, 나는 지금 덫을 밟았다. *** 패착이 뭘까. 생각할 것도 없이 줄줄 나온다. 방패는 내게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하지만 그 대신 상당 부분 시야를 가렸다. 차라리 방패를 허리띠에 매고, 살피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덫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방패가 무슨 소용인가? 정신적 안정감보다는 실리를 챙겨야 했다. 제기랄. “끄으… 흐…….” 머리가 하얘진다. 당장에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는다. 비명을 내질러 상황이 나아진다면 모를까. 더 악화시킨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뛴다. “후욱, 후욱, 후욱…….” 입술을 짓누르며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지금 떠올려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가 아니다. 1층에 함정을 쓰는 몬스터는 딱 하나. 고블린밖에 없다. 그리고 놈은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머리를 가린다. 그다음 아예 호흡을 멈추고, 청각에 집중한다. 당장 들리는 소리는 없다.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된 것처럼 고요하다. …혹시 없는 건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거나 그런 경우의 수도 있긴 하니까. 고블린도 똥은 쌀 것이다. ‘지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도 안 하는 주제에.’ 나는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희망을 고이 접어 머릿속에서 던져 버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 긍정적인 것과 낙천적인 것은 다르다. 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다. “…….” 확신할 수 없다면, 아예 최악을 가정하자. 고블린은 내 비명을 들었다. 놈은 어둠 속에 숨어 내가 힘이 빠지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건, 그래서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덫이 있으면, 반드시 그 주변에 고블린이 있었다. “후우…….” 멈춰왔던 숨을 천천히 토해 낸다. 일의 전말이야 어쨌든, 워낙 조용한 환경이다 보니 긴장만 놓지 않으면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 일단은 내가 해야 할 일부터 하자. “…흐으읍!” 자세를 낮춘 뒤, 양손으로 덫을 벌려 발을 빼낸다. 그리고 바짓단을 뜯어낸 다음, 신발을 벗고 상처 부위를 강하게 압박한다. 걸레짝이 된 신발은 버리기로 했다. 사실 신발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내가 신고 있던 건 쪼리에 가까운 샌들이었으니까. 망할 바바리안 새끼들. 하다못해 가죽 장화만 신겨서 보냈어도 이렇게 덫 한 방에 반병신 상태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씨발,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성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더 이상 한심해지지 말자. 아무리 그들을 욕한들 마주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제대로 바닥을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그러니 그만 징징대고 몸 상태부터 확인하자. ‘후, 진짜 큰일 났네 이거.’ 벌써 오른발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뜨겁단 것은 느낄 수 있지만 그조차도 점점 무뎌지고 있다. “숨어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라.”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여전히 어둠 너머에선 작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터벅. 터벅. 한쪽 다리가 아작났지만, 생각보다 통증은 크지 않다. 아무래도 마비독 덕분인 듯한데…….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오라고, 씨발놈아.” 나는 놈들을 도발하는 말도 서슴지 않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야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니까. 싸워야 한다면, 되도록 이를수록 유리하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놈이 동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안 나와?” 물론, 이는 전부 내 망상에 불과하고 사실 고블린 같은 건 없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뭐, 혼자 덫을 밟고서 온갖 생쇼를 하는 병신이 되겠지.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은 병신이 되고 싶다. “그럼 그냥 계속 거기 있던가. 난 갈 거니까.” 속도를 올린다. 그래 봐야 기어가는 정도에서 조금 빨라진 수준이지만, 체감상 전력 질주로 마라톤을 뛰는 기분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무리해서 걷고 있자니 오른발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쓰읍, 하아, 하아…….” 둘 중 하나다. 마비 독의 약효가 끝났거나, 아니면 그걸로도 부족할 만큼 통증이 심해졌거나.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이 건 나쁘지 않다. 약효가 끝났다면 그걸로 좋고.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따져 보면 신경 세포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아니, 근데 나는 왜 이런 쪽으로만 긍정적인 거지?’ 글쎄,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럴 정신머리도 없고. “…네 엄마 고블린.” 뇌에서 필터링 없이 말이 튀어나온다. 피를 하도 흘려서 그런가? 술로 뇌가 절여진 기분이다. “네 아빠도 고블린.” 물론, 나오는 대로 뱉으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너도 고블린.” 그때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분명 작은 소리였지만 집중하고 있던 내 귀에는 몹시 크게 들렸다. 착- 드디어 놈이 처음으로 기척을 드러냈다. “왜 너도 부모 욕은 못 참겠냐?”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란 건 안다. 애초에 욕도 아니었을뿐더러……. 소리가 난 건 뒤쪽이었다. 이건, 내가 점점 멀어지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나는 더 속도를 올렸다. 이에 놈의 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착- 착- 착- 착- 보다 선명해진 놈의 걸음 소리는 특이했다. 걸을 때마다 끈적한 무언가가 매끄러운 표면에 붙었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신장 1m도 안 된다는 설정을 알면서도, 마치 거대한 괴물이 쫓아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놈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바바리안이다. 접근전으로 유도만 할 수 있다면, 결코 고블린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 “따라만 오지 말고 드루와. 좆밥아.” 그러한 이유로 도발을 이어 갔지만, 놈은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계속 따라오기만 할 뿐이었다. 놈은 이제 스스로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륵, 그륵……!” 하울링에 가까운 소리지만, 왠지 느껴진다. “그르르륵! 그륵!” 놈은 지금 낄낄거리고 있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냥감을 보면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내가 저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기를 바라고 있다. …똑똑한 새끼. 좋아, 계획 변경이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퍽! 바위에 부딪친 이마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인내심 싸움이다. 내가 쓰러졌다고 생각하고 먼저 접근해 준다면 나의 승리. 그전에 진짜 쓰러져 버리면 나의 패배. “그륵?” 나는 발이 아작난 채로 약 300m는 되는 거리를 걸어온 이 몸뚱이의 터프함을 믿기로 했다. 착- 놈의 걸음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진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다. 바라던 대로 사냥감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의심하고 있다. ‘미친, 고블린이 뭐 이리 신중해?’ 욕이 절로 나온다. 게임 내에서 고블린은 최약체 잡몹이었다. 독을 쓰고, 함정을 설치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고블린은 어땠는가. 착- 전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어째서 마을 NPC들이 그토록 고블린의 영악함을 이야기했는지 깨달았다. 체감상 야만인 새끼들보다는 얘네가 지능이 몇 배는 더 높다. 착- 5m에서 10m 사이의 그 언저리쯤에서 놈이 걸음이 멈춘다. 왜지?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차. 어깨에서 둔탁한 충격이 전해진다. 툭. 데구르르르. 뭐야. 지금 이 씹새끼가 나한테 돌멩이를 던진 거야? ‘…설마 피떡이 될 때까지 던지진 않겠지?’ “그르르륽! 그륵!” 우려와 달리 놈은 기쁨의 하울링을 뱉었다. 돌팔매질에도 반응이 없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 착- 착- 착- 착- 놈이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뜀박질에서 얼마나 신났는지가 느껴졌다. 나는 흥분을 잠재우며 차분히 소리를 통해 거리를 쟀다. 그리고 바로 지근거리까지 왔다고 판단을 했을 때. “씹새꺄!” 벌떡 일어나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패를 집어 들고 후려칠 시간에 손을 뻗는 게 더 신속하고 유효 거리도 길다는 판단. 다만, 나는 곧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직감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놈과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 멀었다. 그리고 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훨씬 기민했다. “그륵!” 놈이 허리를 빼며 뒤로 물러난다. 보이진 않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이제 어떡하지? 나는 머리를 굴리며 다음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찰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 참으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눈앞은 깜깜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고블린이 어디로 뛰었는지를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내 손은 궤도를 틀어 놈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륵?!” 손끝에서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팔목인지 발목인지, 그도 아니면 목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직!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기에 곧바로 놈의 상체 위에 올라섰다. “그, 그륵!”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내가 위고, 네가 아래야. 이 씹새끼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굴을 내리쳤다. 워낙 흥분해서 바닥을 칠 때도 있었지만, 이 바바리안의 육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주먹이 아프긴커녕 돌바닥이 깨져 나갔다. “…….” 머지않아 놈의 움직임이 멎는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먼지가 흩날린다. 특이하게도 빛이 나는 먼지다. 나는 주먹을 멈췄다. 어느샌가, 깔고 앉아 있던 고블린의 몸뚱이가 잘게 잘게 쪼개지며 흩날리고 있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하 씨발, 이건 또 그대로야?” 제발, 하나로 정해 줬으면 좋겠다. 게임이든가, 아니면 비슷할 뿐인 현실이든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자꾸 헷갈리잖아.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1」 곧이어 고블린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유 모를 허탈함을 느끼며 그 자리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를 집었다. 「9등급 마석을 습득하였습니다.」 강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빛이 났다. [던전 앤 스톤]에서 화폐가 되는 마석이었다. 이게 얼마였더라? 곧 기억이 떠올랐다. “빵 한 조각.” 게임 속 고블린이 뱉는 마석의 평균 값어치. 왠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흐흐흐흐…….” 그 개지랄을 떨고 얻은 게 고작 이거라고?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다. 잔뜩 울고 나니 묘하게 웃음이 나는 그런 기분에 가깝다. “크흐, 크흐흐흐.” 미궁이 있고, 몬스터가 있다. 죽은 몬스터는 드랍템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저 밖의 도시에선 실존하는 이종족들이 아우러져 살아간다. 분명, 이곳은 그런 세계다. 하지만……. 또다시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5화 기브 앤 테이크 (1) 돌이켜 보면 난 참 웃긴 인간이었다. 늘상 삶이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 번도 스스로 죽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겹다는 감정은 결국 감정일 뿐이었고, 내게 있어 목숨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기에……. *** 세 발로 어둠 속을 기고 있다.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 말 그대로다. 현재 나는 완전히 씹창이 나버린 오른발을 질질 끌면서, 세 발로 바닥을 기어 이동하고 있다. 누군가 지금 내 꼴을 본다면 골절상을 입은 유기견을 연상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 대가는 달콤했다. 우선 다친 발을 쓰지 않아도 돼서 아프지 않으며, 이동 속도도 오히려 이전보다 빠르다. 무엇보다 덫을 밟을 일도 없다. 반대급부로 팔꿈치와 무릎이 아리긴 하지만, 이거야 뭐…….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견뎌 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뭔가? 나는 개똥도 웃으며 처먹을 수 있다. 음… 마음 준비할 시간만 준다면 분명 가능은 할 것이다. ‘근데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으려나?’ 아저씨라는 건 그냥 내가 붙인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의 성별도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그저 말투로 유추할 뿐. 왠지 안경 낀 30대 백인 아저씨였을 거 같다. 아니면 말고.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몸에서 깨어났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다시 원래 몸으로 깨어났을까? 눈을 뜬 이래로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상황이 좆같아질수록 자꾸 그 아저씨 생각이 난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종교를 믿는지 알 것만 같다. 현실은 혼자 살아가기에 너무나 험난하다. 절망이 닥쳐왔을 때, 시선이 돌릴 곳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5% 미만입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캐릭터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후, 딴생각하면서 기어갔더니 꽤 많이 왔다. 미세한 차이긴 하지만 점점 주변이 밝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상황이다.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왔고, 1층 전체가 이렇게 어두울 리 없다는 내 가설도 맞았단 뜻이니. 어떻게든 밝은 곳까지만 가자. 거기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 마석을 주면서 도움을 구하자.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지랄, 웃기고 있네.’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속삭이며 당근을 주고 있는데, 내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났다. ‘야 이 병신아, 걔네가 바쁜데 꼴랑 빵 한 조각 받고 퍽이나 도와주겠다. 마석이랑 방패만 뺏고 죽이면 모를까.’ 나여서 그런가? 이 새끼, 똑똑하다. ‘애초에 사람보다 고블린 새끼를 먼저 만나면 어떡할 건데? 넌 뇌가 없냐? 응?’ 더 이상의 모욕은 본주로서 참을 수 없다. ‘병신아 그럼 어쩔 건데. 그래도 일단은 가야지. 거기선 적어도 앞이 보이기라도 하잖아. 고블린이 튀어나와도 여기서 싸우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 내 또 다른 자아가 수긍하며 머릿속이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계속해서 기어갔다. “크흐흐흐흐…….” 미칠 것 같다. 아니, 이미 미친 걸지도 모른다. 하긴 피를 이만큼이나 흘렸으니 당연한가? 아까부터 자꾸만 자아가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졌다가, 무뎌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일종의 선순환이다. 그 이상 무뎌졌다간 나는 틀림없이 다시 눈을 뜨지 못할 테니까. “흐흐흐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기력도 없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어느샌가 주변이 환했다. 저 멀리 통로 끝에서 수정이 영롱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 앞에 역광을 맞으며 서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고블린을 잘못 본 게 아니다. 틀림없는 사람의 형체. “도… 와…….” 뭐라 외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가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사람의 형체가 좀 더 가까워졌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그 사실이 놀라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앞에 서 있었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업적 달성」 조건: 생명력이 2% 이하로 하락.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그러자 무릎을 굽힌 금발 사내가 보였다.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묘한 눈길로 나와 주변을 관찰할 뿐 무엇도 묻지 않았다. 남의 말을 듣기보단, 우선 스스로의 경험과 직관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베테랑답게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초심자군.” 씨발, 그럼 도와줘 개새끼야. 보다시피 난 방패 하나만 달랑 가진 좆밥 바바리안이고, 그 외에 가진 거라곤 다리 하나와 맞바꾼 고블린 마석이 있어. 원한다면 이거라도 다 줄게. 그러니까……. “수상하군. 어떻게 초심자가 우리보다 빨리 왔지?”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온 것은 가래 끓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그르르…….” 아니, 솔직히 말해 고블린이 냈던 소리에 더 비슷한 거 같지만……. 내가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리기엔 충분했다. 이내 금발이 동료에게 물었다. “에르시나 신관님. 혹시 이자를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관? 설마 파티에 신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기적을 맞이한 중생의 눈빛으로 옆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흰색 법복을 입은 적발의 여신관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신관이 고운 입술로 똑부러지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응? 뭐라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넌 또 왜 수긍하는데. 서러웠다. 씨발, 내가 왜 이곳에 끌려와서 이딴 대접을 받고 있는지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던 순간이었다. “파츠란, 포션을 하나 주겠나?” “신성력을 쓰지 못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만?” “어차피 많이 갖고 있잖아. 값은 나가서 따로 치를 테니까.” “쳇.” 그제야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찬 사내가 혀를 차며 가방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던진다. 저게 내 목숨이라 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툭. 다행히 금발은 제대로 포션을 잡아챘다. “신성력이 아니라 조금 아플 거다.” 금발은 마개를 열어 반은 상처 부위에 뿌리고, 반은 직접 내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머지않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몸에 축적됐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이런 아픔일까?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게임상에서 전투 중에 포션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냥 시스템상으로 막아 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현실을 오지게 잘 반영한 거였구나. 제기랄. “허억, 허억, 허억…….” 몇 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통증이 줄어들며 정신이 든다. “자, 이제 말해 보겠나 바바리안? 어떻게 초심자인 주제에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도달했지? 만약 새로운 통로를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정보를 사고 싶다.” 과연, 그게 목적이었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목적이 있어서 날 잘 대해 준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이유 없는 선의만큼 불길한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왠지 미안하게 됐네. 비밀 통로 같은 건 모르거든. “…미궁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이었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금발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뭔가 납득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확실히……. 글에서 읽은 적은 있다. 간혹 차원 불안정 현상으로 그런 경우가 있기도 하다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나는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처음, 본 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이 파티에는 신관이 있고, 마법사가 있다. 최소 중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제대로 된 놈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처음이라고? “그래, 책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경우라더군. 이렇게까지 최외곽부에 떨어지는 건” 아, 그렇구나.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 거구나. 그리고 그걸 나는 미궁에 처음 들어온 순간에 겪은 거구나. 다른 야만인들이 횃불을 안 들고 다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벼락 맞을 걱정하는 놈은 없지 않은가? “보아하니 초행인 듯한데 그런 희귀한 일을 겪다니 그거 참, 재앙이었겠어.” 금발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였다. 포션 값은 생각지 말고 가 보도록.” 말투가 좀 재수 없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놈인 거 같다. “참, 저기 떨어진 방패도 챙겨가고.” 금발이 가리킨 곳을 보니 바닥에 떨어진 방패가 보인다. 거리는 약 20m 정도. 허리에 잘 매 둔다고 했는데 흘러내린 모양이다. “그럼 우리는 가 보도록 하지.” 그들은 내가 감사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나를 지나쳐 갔다. 미궁에서는 시간이 돈이나 다름없으니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날 위해 이렇게까지 시간을 써 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얼른 뛰어가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집었다. 분명 살아남은 건 기쁜 일일진데……. 그럼에도 뭔가 기분이 묘했다. *** 「비요른 얀델」 레벨:1. 육체: 25 / 정신: 36 (New +1) / 이능: 1 아이템 레벨: 24 종합 전투 지수: 68 (New +1) *** “아까 그 바바리안, 운도 좋군.” “글쎄, 운이 좋다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을까? 초행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 금발이 애매하게 웃으며 답하자 남검사가 코웃음쳤다. “고블린 덫을 밟을 놈이면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애초에 우릴 만난 부분에서 운이 좋은 게 맞지.”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드로우스를 만난 거겠죠. 당신은 포션 쓰기도 아까워했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여궁수가 끼어들자 남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저런 놈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어차피 오래 살아남지도 못해. 분명 우리 신관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걸?” 여신관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를 대신해 여궁수가 쏘아붙였다. “에르시나 님도 신전의 규율만 아니었으면 치료를 해 줬을 거예요. 아니, 포션이 없었다면 스스로 규율을 깨셨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전부 당신 같은 줄 알아요?” “글쎄, 그거야 또 모르지. 하도 앞뒷면이 다른 걸 많이 봐서 말이야.” “…파츠란, 당신은 조금이라도 드로우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면, 굳이 비밀 통로를 아냐고 물어보던 배려 같은?” “네. 바바리안들은 타인의 도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래서 그렇게 배려해 준 거겠죠.” “…저기, 나를 너무 띄워 주는 거 같은데?” 화제가 자신에게 쏠리자 금발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 역시 배려란 말은 부정치 않았다. “아, 지름길로 가려면 여기서 꺾어야 돼.” “역시 파티에 인도자가 있으니 편하군요.” “에르시나 님! 보통 인도자들은 포탈로 가는 방향만 알 뿐이에요. 이건 그냥 드로우스가 대단한 거죠. 1층의 지형지물 전부를 외웠으니까.” 여궁수를 보던 남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근데 저 핏자국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지? 이미 꽤 걷지 않았나?” “글쎄요. 하지만 이만한 거리를 기어서 온 정신력만 봐도 단순히 운이 좋았단 당신의 말은 틀린 거 같은데요?” “허, 참 이게 뭐 대수라고……. 그래 봤자 결국 이 근처겠지.” 핏자국을 따라가던 일행은 중간에 지름길로 방향을 꺾었다. 그리고 약 15분 뒤 목표지에 도달했다. “이 경로로는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네. 서두른 보람이 있어. 어서 작동시켜 보자.” 금발이 막다른 길 앞에 위치한 비석 위에 손을 올리자, 강렬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구체의 형체를 취했다. 2층으로 이어지는 포탈이었다. “잠깐만요.” 다들 포탈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차, 여궁수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저거, 아까 그 바바리안이 신고 있던 거 아닌가요?” “뭐?” 여궁수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일행은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포탈이 뿜어낸 빛으로 드러난 어둠 속에는 피 묻은 덫 하나와 정체 모를 샌들 한 쪽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맞는 듯하군.” 마법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새로운 빛의 구체를 만들어 통로 너머로 이동시켰다. 후우우우웅-! 덫으로부터 시작된 핏자국은 곡선형 통로를 따라 쭉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빛의 구체를 움직여도 이 자리에선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보게 드로우스, 여기서 아까 있던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나?” “…지름길을 쓰지 않는다 가정 하에, 15km는 될 듯합니다.” “허허허, 괴물 같은 몸뚱이구먼. 이 어둠 속에서 혼자 그 먼 거리를 기어서 오다니.” 마법사는 그저 놀랍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만, 옆에 있던 남검사는 그럴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가 느끼기에 이건 신체가 아닌 정신의 문제였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몇 시간 동안 기어갈 수 있었을까?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는 와중에?’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처음 발견했을 때도 바바리안은 기어가고 있었다. 의식도 없어 보이는 상태로 팔과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그다음엔 어땠는가?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손을 위로 내밀었다. 손엔 자그마한 마석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땐 별생각 없었지만, 이젠 그 행동이 뭘 의미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걸 줄 테니 도와달라는 거였겠지.’ 그것 말고는 대가로 내놓을 게 없으니까. 그래서 바바리안은 먼 거리를 기어 오는 동안 마석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혹여나, 사람을 만난다면 바로 보여 줄 수 있도록. 이내 사내는 결론을 내렸다.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어차피 저런 놈은 일찍 죽는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드로우스, 아까 그 바바리안 이름이 뭐였지?” 저런 미친놈은 어지간해선 뒈지지 않는다. 아무리 현 순간이 고되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결코 죽음을 탈출구로 삼는 법이 없으니까. 6화 기브 앤 테이크 (2) [던전 앤 스톤]은 특이한 게임이다. 동료 NPC가 게임 진행에 필수이면서도, 결코 그 새끼들을 믿으면 안 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라면 더욱더. *** 동굴 속을 걷고 있다. 뒤뚱뒤뚱. 한쪽 신발이 없는 탓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기쁘다.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은, 적어도 세 발로 기어가던 시절엔 느낄 수도 없던 종류의 것 아닌가.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았다.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후…….” 방패로 적당히 상체를 보호하며 나아간다. 이전처럼 눈이 빠개지도록 바닥을 살필 필요는 없다. 이곳엔 빛이 있으니까. 벽과 천장에 박힌 수정들이 뿜어내는 빛이 주변을 환하게 주변을 밝혀 주고 있다. 피 흘리며 어둠 속을 기어가던 게 꿈같다. 단언컨대, 앞이 보인다는 건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사악한 고블린 새끼들을 족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와악!” “그륵?!” 내 외침에 놀랐는지 고블린이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다. 이미 숨은 위치까지도 대강 파악하고 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킬을 사용했다. “스매쉬! 개새끼야!” 스매쉬는 MP 소모도 없으면서 준수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이다. 참고로 내가 방금 만들었다. 퍽-! 도약 중이던 고블린이 방패에 처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민첩하게 다가가 고블린의 상체를 발로 짓눌렀다. “그, 그륵?!” 불쌍한 눈빛을 지어 봤자다. 나는 이 씹새끼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사악한 생명체인지 알고 있다. “그, 그륵!” 뭐, 자기는 아니라고? 그럼 먼저 간 네 친구한테 따져. 그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콰직-! 방패 모서리로 고블린의 안면부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휘두르거나 밀쳐서 정면의 적을 가격할 뿐인 스매쉬와는 다르다. 이름은… 파이널 쉴드 어택. 마찬가지로 방금 지었다. 솨아아아아아-! 이내 깔끔하게 절명한 고블린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희미하게나마 악이 줄어들고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단 뜻이다. 나는 보상으로 나온 마석을 집어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미궁에 들어오고서 획득한 열 번째 마석. “후, 좆밥 새끼들.” 한 번 죽었다가 겨우 살아난 뒤, 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고블린과 조우했다. 처음엔 긴장했지만,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시야가 확보된 곳에서 만난 고블린들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똑똑하지도 않았고. 일단 저기 아무렇게나 설치한 덫만 봐도 그렇다. ‘흙이라도 파서 좀 덮어 두던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놓고 길목에 두면 대체 누가 밟겠냐고.’ 고블린 덫은 저 멀리서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조악했다. 심지어 덫을 밟지 않고 지나치려 하면 대부분 뛰쳐나와 먼저 덤벼들었다. 아무래도 그 새끼처럼 실실 쪼개면서 변태처럼 뒤따라오는 건 덫을 밟아야지만 생기는 일 같은데……. 차차 습성을 파악하고 나니 놈들과의 전투는 점점 쉬워졌다. 일단 놈들의 주무기가 짧은 단검일뿐더러, 피지컬도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 나는 2m에 달하는 체격을 가진 근육질의 바바리안. 전면전에 돌입하면 고블린 따위는 3초 안에 제압이 가능했다. 따라서 기습만 조심하면 됐는데, 덫을 통해 매복 장소까지 미리 알 수가 있으니……. ‘음, 이참에 고블린 슬레이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즉시 손을 움직여 뺨을 세게 후려쳤다. 퍽-! 아픈 만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미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면서 킥킥거릴 리가 없다. 고블린 몇 마리 죽였다고 자만하지 말자.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지 고작 2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며, 새롭게 생긴 문제들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우씨, 배고픈데…….” 일단 첫 번째는 식량 문제다. 내가 어둠 속을 기어 오며 흘린 것은 방패만이 아니다. 부족장이 준 식량 주머니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7일 치 중 약 5일 치에 달하는 식량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걸 찾자고 어둠 속을 헤맬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와그작, 와그작. 내친김에 바로 주머니를 풀어 빵 하나를 꺼내 먹었다. 보존을 위해선지 빵은 딱딱하고 수분이 없었지만, 침으로 살살 녹여먹으니 탄수화물의 단맛이 서서히 혀로 느껴진다. 이게 왜 이렇게 맛있지? 바바리안의 몸뚱이라 식성도 변한 거 같다. 몇 입 먹으니 내 손바닥만 하던 빵이 사라졌다. 나는 묘한 아쉬움과 입에서의 텁텁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마르다. 이게 바로 두 번째 문제다. …씨발, 물은 어디서 구하지? ***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경고: 체내의 수분이 부족합니다. 서둘러 식수를 조달…….」 *** [던전 앤 스톤]에는 포만감 시스템이 있다. 물론 미궁 안에서만 활성화되며, 식사만 해도 채워졌기에 식수를 챙겨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게임 속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아는 그 게임과 아주 닮은 또 하나의 세상에 가깝다. ‘안 그래도 하드코어한 게임이었는데, 이게 현실이 되니 난이도가 아예 미쳐날뛰는구나.’ 그래도 크게 걱정은 않는다. 물이 식량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인 건 맞지만, 부족장도 물은 챙겨주지 않았으니까. 분명 미궁 내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찾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스매쉬!” 고블린을 때려잡으며 개미굴처럼 복잡한 동굴 속을 헤매길 언 1시간.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소리를 추적한 나는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이미 탐험가 한 명이 쪼그려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상 금발 파티를 제하면 사실상 첫 만남인 셈이었지만……. “…….”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멀리서 날 보고서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 역시 굳이 다가가 말을 걸지 않았다. 이후로 만난 다른 탐험가들도 매한가지였다. 다들 날 보자마자 쓰윽 피해 지나갔다. 게임에서처럼 탐험가들 사이에는 어지간하면 서로 접촉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는 듯하다. 뭐, 그냥 피 칠갑을 한 바바리안이랑은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고블린을 잡다가 배고프면 빵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걸 반복하니 시간은 쭉쭉 흘러 지금이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세어보니 지금까지 총 마흔네 개의 마석을 얻었다. 빵으로 환산하면 44개의 빵을 획득한 셈. 죽어 가던 시절을 떠올리면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마는,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없는 법. 그 대가로 나는 짙은 피로감을 얻었다. 이게 내가 가진 세 번째 문제였다. ‘슬슬 졸리네…….’ 생물로 태어난 이상 수면은 취해야 한다. 그것은 이 고성능의 스펙을 지닌 바바리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몬스터들이 실존하는 미궁 속에서는 어떻게 수면을 취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선잠을 자거나. 서로를 지켜 줄 동료를 구하거나. 이미 내가 고를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목숨을 하늘에 맡긴다고? 경험에 따르면 그건 믿을 게 못 된다. 적어도 내게는 정말로 그렇다. ‘동료를 찾아보자.’ 물론, 정식 파티를 꾸리겠단 뜻은 아니다. 현재 피곤한 상황은 다들 똑같을 테니, 적당한 사람을 찾아 임시 협력 관계를 맺을 생각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피로도가 차면 대부분 그렇게 밤을 넘겼고. 터벅, 터벅. 판단을 마친 나는 전투보다 이동에 치중하며 미궁 속을 돌아다녔다. 그랬을 뿐인데, 아까와 달리 무리를 지은 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터벅, 터벅. 둘 내지 셋으로 이뤄진 탐험가 무리가 불침번을 번갈아 맡으며 쉬고 있다. 행색과 관상을 중점으로 살핀 나는 용기 내어 몇몇 무리와 접촉해 보았고, 전부 빠꾸를 맞았다. “미안하네만 필요한 인원은 다 구했네.” 말은 그리했지만, 내가 다가가자 인상까지 찌푸리며 코를 막던 그들을 보면 그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씹새끼들. 대체 지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는 인간 아저씨였다. 키는 180cm가량. 제법 선해 보이는 푸근한 인상이지만, 손에는 고블린 피로 떡칠된 망치가 쥐어져 있다.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밤친구를 구하고 있는 건가?” 씨발, 이 새끼 뭐야.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한다. “밤친구를 구하는 게 아니었던 건가? 바바리안이라서 믿고 편히 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군.” 진작 그렇게 말하라고요 아저씨……. 아무래도 밤친구란 내가 말한 임시 협력 관계의 은어인 듯하다. 게임 내 표기는 ‘Night Companion’. 밤의 동지, 밤의 동행 그런 느낌으로 해석했는데, 실제로 들으니 어감이 아주 변태스럽다. “…아니다. 밤친구를 구하고 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럼 나와 함께하겠나?” “그러겠다.” 그렇게 나는 아저씨와 밤친구가 되었다. “내 이름은 한스일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럼 비요른이라고 부르면 되겠나?” 경험이 많아 보이는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통성명까지 끝내더니 분위기를 리드했다. “밤친구는 세 명이 가장 좋긴 하네마는, 굳이 찾아다니는 쪽이 더 체력 낭비일 듯하군. 비요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쉽게 말해 둘이서 자자는 소리다 이 아저씨, 진짜 딴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능구렁이 같은 말투 때문인진 몰라도 자꾸 뭔가 당하는 기분이 든다. “좋다.” “잘됐군. 만약 누가 껴달라 한다면 그땐 서로 의논해 받아들이든가 말든가 하세.” 짧은 의견 조율 끝에 우린 둘이서 첫날밤을 보내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문제는……. “그럼 가위바위보를 해서 순서를 정하기로 하지.” 가위바위보는 여기서도 국룰인 거 같다. 씨바, 나 이거 잘 못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운이 없다. “흠, 웬일로 내가 이겼군.” 니미. “그럼 잘 부탁하겠네. 고블린이나 다른 탐험가가 접근하면 일단 깨우도록 하고. 알겠나?” “…알겠다.” “자, 이걸 받게.” 문자판에 0부터 23까지 새겨진 시계를 빌려준 아저씨는 친절히 사용법까지도 알려 주었다. “여기 짧은 시침이 여기에 오면 그때 날 깨우면 되네.” 아마 이게 이곳 사람들이 바바리안을 바라보는 인식일 것이다. “망가뜨리면 안 되네. 비싼 물건이니.” “…알겠다.” 거, 깐깐하기는. 이내 아저씨가 담요 하나를 꺼내더니 이를 덮고 배낭을 베개 삼아 눕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쿨쿨 자기 시작한다. 이게 짬인가? 존나 편해 보인다. 내 차례 때 빌려 달라 하면 안 빌려주겠지? “후…….” 그나저나 불침번이란 거, 엄청 지루하구나. 고블린 새끼는 보이지도 않고, 통로를 지나치려는 다른 탐험가들도 없다. 다들 밤친구를 구해 쉬고 있을 타이밍이라 그런가? 정적이 이어지니 자꾸 졸음이 몰려온다. 그래도 벽에 기댄 채 앞으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자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한스, 일어나라.” “…별일은 없었나?” “없었다.” “그렇군. 수고 많았네. 그럼 시계는 이리 주고 자네도 어서 쉬도록 하게. 2시간 뒤에 깨워 주겠네.” 빌려 달란 말을 꺼내 볼 새도 없이 아저씨는 담요를 배낭에 정리하고 일어섰다. 쩝. 나도 미련을 지우고 벽면으로 다가가 등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척을 했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이 아저씨가 친절하고, 지성적으로 보이며, 날 해칠 의도가 없어 보인다고 한들— 처음 본 새끼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7화 기브 앤 테이크 (3) 나는 지금 코를 골고 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곯아떨어진 야만인을 상상하며 아주 힘차게. 드르르르르렁! …음, 이건 좀 오버인가? 살짝 걱정하고 있는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신기한 종족이라니까.” 아무래도 잘 통한 거 같다. 내가 연기를 잘했다기보다는 종족적 어드밴티지가 컸겠지만. 바바리안은 단순하고 멍청하다는 게 사람들의 인식이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악령 문제가 아니어도 항상 바바리안의 모습을 연기했다. 일종의 소리장도 笑裏藏刀 같은 것이다. 웃음 속에 칼을 숨기듯, 순진할 거란 선입견을 무기 삼아 그들의 뱃속을 간파한다. …라는 건 좀 중2병 같고. 결국, 정리하자면 속내를 떠보는 게 한결 쉽단 뜻이다. 바로 이렇게. 드르르르르르렁!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배까지 벅벅 긁으며 옆으로 웅크린다.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여 아저씨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쏟는다. 이만큼이나 빈틈을 보여 준 이상, 꿍꿍이가 있다면 곧 행동에 옮길 거다. 아니면 그냥 쭉 자면 될 테고. 솔직히 이 상태로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요른, 교대 시간이네.” 아, 음……. 진짜 한숨도 못 잘 줄은 몰랐는데. “지금까지 고블린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너무 마음 놓고 있지는 말게. 영악한 놈들이니까.” 내가 못 미더운지 아저씨는 불침번 똑바로 서라는 말을 돌려 하며 아까처럼 편하게 누웠다. 그리고 5분도 안 돼 다시 잠에 들었다. 허탈함이 밀려든다. 나도 그냥 잘걸. 대체 2시간 동안 나는 뭔 뻘짓을 한 거지? 제기랄. 초면의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믿을 만하다고 판단을 내렸으면서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고블린을 조심하면서 혼자 선잠을 자는 게 나았을 듯하다.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었을 텐데. “후…….” 피곤해서 뒈질 거 같다. 아저씨가 자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더 졸리다. 그래도 내 순번이니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하며 수마를 쫓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비요른, 일어나게.” “…자지 않았다.” “입가에 침이나 닦고 말하는 게 어떤가?” 손등으로 쓱 문질러 보니 정말로 축축하다. “서서 자서 그런지 코도 안 골더군.” 아무래도 진짜 잔 모양이다. 교대 시간을 10분 남겨 두고서 잠깐이긴 하다마는. …심장이 철렁한다. 다만, 안일한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바바리안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밤친구는 일종의 거래 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아저씨가 불침번 동안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행히 자는 동안 문제가 없었으니 별말은 않겠네.” “고맙다. 원한다면 더 자도 된다. 내가 한 번 더 불침번을 서겠다.” “아닐세. 그럴 수 없지. 자네 차례이니 자게. 시계는 내게 다시 돌려주고.” 날 탓할 법도 했지만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용서해 주었다. 이에 나도 더 이상 사양 않고 자리로 가서 쪼그려 누웠다.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아저씨를 비롯한 모든 탐험가가 유난히 존경스러웠다. 처음 본 사람을 믿고 목숨을 맡기는 게 일상이라니? 엄청난 배짱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암만 생각해도 내게는 무리인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김없이 아까처럼 코골이 소리를 냈다. 드르르르르렁! 어쩔 수 없었다. 미안 아저씨, 근데 난 왠지 아저씨가 더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했거든. 드르르르르렁! 사기꾼들처럼 인상이 선한 점. 다른 멤버를 구하지 말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게 아저씨라는 점. 냄새난다고 뭐라 구박하지도 않은 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방금 전, 아저씨는 잠든 날 탓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자도 된다는 대가마저 거절했다. 물론 그냥 내가 미친 새끼고, 사실 이 아저씨는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친절한 새끼가 제일 수상하다. ‘항상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린 건 이런 새끼들이었거든.’ 분명 옛날의 나였다면 지금쯤이 딱 방심했을 타이밍이었겠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건 지능의 문제니까. 드르르르르렁! 그렇게 수상하면 이쯤에서 쫑내고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코를 골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작지만, 이질적인 소리가 피어난다. 배낭의 버클? 허리띠? 그도 아니면 신발 굽? 어디서 난 파생된 소리인지는 감이 잡히는 곳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함과 동시, 바바리안의 몸뚱이가 자의적으로 해석을 내린다. 위험하다. 이게 무협지에서 말하는 그 살의인가?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즉시, 눈을 떠 전방을 확인했다. “깼군.” 여전히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고블린의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양손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상태로. 이런 씹……. 피해! 전사로 키워진 몸이 내린 판단은 나보다 빨랐다.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옆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코앞에서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반동을 이용해 잽싸게 일어나 균형을 잡는다. “읏!” 회심의 급습이 실패로 돌아간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유를 묻기보단 앞으로 대쉬했다. “잠, 잠깐!”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몸이나 풀려고 했다고?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조금, 아니, 많이 웃기다. 씨발, 진짜 바바리안 새끼들은 얼마나 좆밥 같은 인식인 거지? 퍼억-! 방패를 이용한 스매쉬가 아저씨의 턱주가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다만, 건장한 체격의 인간은 고블린과 달랐다. 아저씨는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그럼 한 번 더. 퍼억-! 스매쉬. “끄아아악!” 쩔그렁, 소리가 내며 아저씨 손에 들린 망치가 바닥에 떨어진다. 벌써 빨갛게 부은 코에선 피가 철철 나고 있다. …으, 아프겠네. 생각은 하지만 방심하진 않는다. 난 그런 걸 모르는 새끼이고 싶은 새끼이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 그만! 설, 설명할 수……!” “스매쉬.” 연이어 방패로 안면부를 가격당한 아저씨가 비로소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게임으로 치자면 전투 불능 상태. 즉, 이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아저씨.” “잘, 잘못했네! 살려 주게!” 아예 용서를 구하기로 한 건가? 판단은 빠르지만, 차마 현명하다고는 못하겠다. 지금 내가 원하는 대화는 그런 게 아니다. “왜 그랬어?” “마, 마석이 탐 나서……. 기절만 시키고 훔쳐 갈 생각이었네. 믿어주게!” 믿기는 개뿔. 내가 그렇게 인류애가 넘쳤다면, 친구가 몇 명은 더 있었을 거다. “방패! 그 방패도 가져갈 생각이었네!” 슬그머니 방패를 들어 올리자 아저씨가 재빨리 뭐라 말을 덧붙인다. 내가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다들 거짓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제대로 속이지도 못할 거면서. “방패는 왜?” “…바바리안의 무구는 질이 좋으니까. 도시로 돌아가 팔아치울 생각이었네.” 확실히, 바바리안들이 튜토리얼 때 받는 무구들은 대부분 값이 비싸다. 강철 중량이 일반적인 무구들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내 방패만 봐도 통짜 강철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이걸 얻겠다고 사람을 죽인다고?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혀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랄.” 저 아저씨는 아직 뭔가를 숨기고 있다. “솔직히 말해. 왜 그랬어?” 나는 쓰러진 고블린을 대할 때처럼, 아저씨의 상체를 발로 짓눌렀다. “끄윽!” 아저씨의 눈에 두려움이 깊게 새겨졌다. 근데 나를 죽이려던 새끼여서 그럴까? 신기할 정도로 별다른 감흥이 피어나지 않는다. 소를 잡을 때 왜 눈을 보지 말라는지는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기분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쯤에서 대화를 끝낼까 고민하던 차, 아저씨가 외쳤다. “심, 심장!” “심장?” 예상치 못한 단어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저씨가 뭔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바바리안의 심장이 고가에 팔리고 있네.” “어째서?” “잘, 잘은 모르겠네만, 새로 개발된 마법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네!” “그렇군.” 이제야 동기가 이해됐다. 나는 이 아저씨에게 고블린이었던 것이다. 잡기는 까다롭지만 잡고 나면 커다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처음 잘 때가 아니라 이제 행동한 건 왜지?” “…나도 잠은 자야 하니까.” 아, 그렇구나. 이왕이면 잠도 자고 돈도 벌고 하려고 그랬구나. 난 영락없이 아저씨가 신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극한의 효율충이었던 거구나. “전부 말했으니, 용서해 주게…….” “용서?” 솔직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용서라니? 마석에 장비에 심장까지 뽑아가려 했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내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난 목숨을 구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거다. “제발…….” 하긴, 살고 싶겠지. 지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 자세는 칭찬해 줄 만하다. 하지만. “아저씨, 대가는 치르는 게 맞잖아.” 난 멋대로 저질러 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 그렇기에……. “전, 전부 주겠네! 지금 당장은 얼마 안 돼도, 도시로 돌아가기만 하면…….” 믿을 수 없다. 그런 부분에서, 나도 이 아저씨가 고블린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고블린과는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아저씨는 그럴 가능성이라도 갖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다를 뿐이고, 그래서 더 악질이다. 물론 이는 감정적인 견해에 불과하며, 나는 감정에 따라 선택을 하지 않는다. 늘 그럴 순 없지만,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아마 앞으로 아저씨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보겠지. 걔네들도 똑같은 말을 할 거고. 그럼 그때마다 내가 용서해 줘야 할까?” 용서란, 참 무서운 말이다. 좋은 마음으로 내린 그 결정이 오히려 비수로 돌아와 등에 꽂히기도 한다.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이 원초적인 세계에서의 실수는, 단순히 마음이 다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목숨까지 위협할 테니까. “미안, 아저씨. 내가 뒤통수를 너무 많이 맞아 봐서 그러진 못할 거 같아.” “아, 아니네!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다르네!” 그러고 보면 고블린도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눈빛만 보고서 멋대로 해석한 거지만 아무튼.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꽈악. 양손으로 쥔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린다. 다만, 그때와 달리 잠시 멈칫한다. 물론, 망설임의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팔을 잡아당기는 걸 느끼며, “아, 안 돼!” 나는 있는 힘껏 방패를 내리찍었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업적 달성」 조건: 첫 살인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외면치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지 약 하루가 지난 시점.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대형 망치, 어깨 보호대, 가죽 장화, 나침반, 나이프, 회중시계, 수통, 배낭, 담요, 약초와 붕대, 포션 한 병, 6일 치 식량과 간식, 9등급 마석 32개를 얻었다. 8화 밤친구 (1) 동굴 속을 걷고 있다. 이번에는 뒤뚱뒤뚱 거리지 않고 멀쩡하게. 「캐릭터가 가죽 장화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5 상승합니다.」 장화의 사이즈가 조금 남는다. 덕분에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그 아저씨 키에 비해 발이 컸구나. 아무튼 제법 튼튼했기에, 덫을 밟아도 이젠 옛날처럼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캐릭터가 양손 망치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0 상승합니다.」 통짜 철로 만들어진 이 망치의 길이는 약 1m 정도. 아저씨가 쓸 때는 양손 둔기였지만, 내가 쓰니 한 손으로도 충분히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캐릭터가 어깨 보호대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3 상승합니다.」 강철 재질이다. 끈을 좀 느슨하게 묶었더니 딱 맞는다. 상의를 벗은 상태에서 보호대만 걸쳤더니 검투사 같은 외형이 되었다. 「캐릭터가 배낭을 착용했습니다.」 「인벤토리가 늘어납니다.」 이제 피 묻은 마석을 빵과 같이 보관하지 않아도 됐고, 움직일 때도 훨씬 덜 거추장스럽다. 질겅질겅. 육포를 꺼내 씹는다. 간식용이라 몇 개 없지만 빵보다 맛있다. 남은 부분은 휴대용 나이프로 잘라 침이 묻지 않게 잘 보관했다. 2일 차, 나는 원시적인 생활을 졸업했다. 목이 마르면 수통에 담아 놓은 물을 마신다. 방향이 궁금하면 나침반을, 시간이 알고 싶으면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본다. 비상용 포션 한 병은 혹시 모를 부상에도 대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조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사람을 죽였더니, 조금 더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 「비요른 얀델」 레벨: 1 육체: 25 / 정신: 37(New +1) / 이능: 1 아이템 레벨: 72 (New +48) 종합 전투 지수: 81 (New +13) *** 스매쉬는 방패로 사용할 때도 좋은 기술이었지만, 제대로 된 무기를 쥐니 그 위력이 남달랐다. 퍼억-! 망치질 한 방에 고블린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할 때 그냥 무기를 고를 걸 그랬다. 어차피 방패야 나중에 돈을 모아서 사도 됐던 것 아닌가. 뭐, 그땐 내가 이렇게 잘 싸울지 몰랐지만.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와서일까? 전투를 할 때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슬슬 적응할 법도 한데, 늘 예상을 뛰어넘는 이 몸을 보면 아직도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졸려 뒈지겠네.” 하품을 내쉬며 주변에 떨어진 두 개의 마석을 집어 가방에 넣는다. 2일 차가 시작되며 생긴 변화다. 고블린이 둘씩 무리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내일이 되면 서넛으로 늘어날 것이며, 그 상태가 미궁이 닫히는 7일 차까지 이어질 것이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 새로운 무기가 생기며 전투력도 올라갔고, 다양한 소모품들 덕분에 좀 더 안전해졌다. 제법 순조롭다. ‘자꾸 눈이 감긴단 것만 빼면 말이지.’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움직이며 고블린들과 싸웠다. 그런데 내가 잔 시간은 고작 10분도 안 되며, 그마저도 서서 졸은 것이다. 자고 싶다. 이불과 베개는 바라지도 않는다. 맨바닥이라도 좋으니까 쪼그려 눕고 싶다. 진짜 이러다 뒈질 거 같— “아, 씨바!” 졸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나답지 않게 운이 좋았다. 덫이었으면 크게 낭패를 봤을 테니. “이럴 바에 조금만 자자…….” 판단을 내린 즉시 나는 방패와 망치를 양손에 쥔 채로 벽에 기댔다. 비록 내 옆엔 아무런 밤친구도 없지만……. 오히려 그편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기습을 당할 거라면 고블린 쪽이 낫다. 기왕이면, 조각칼에 찔리는 쪽이 더 살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누워서 자다가 망치로 처맞는 것보다는. 착- 니미. 이젠 너무도 익숙해진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불침번을 설 땐 4시간이 넘도록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니. 혼자 조는 거 같으니까 바로 나타나는구나. 아저씨가 왜 한눈팔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다. …집요한 새끼들. 나는 즉시 달려나가 고블린의 정수리에 망치를 꽂아 넣었다. 퍽-! “그, 그륵!” 슬금슬금 다가오던 건 총 2마리였지만, 한 마리는 친구가 곤죽이 되자마자 즉시 등 돌려 도망쳤다. 그래, 가라 가. 따라갈 기력도 없다. “하, 씹새끼들…….” 시간을 확인하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동굴을 돌아다니며 고블린들을 사냥했다. 그러다가 피곤해서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으면 아까처럼 벽에 기대고 잠시 졸았다. 졸면서 아찔한 상황이 몇 번인가 있었지만, 진짜 뒈질 뻔했다고 느낀 건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뜨자 웬 탐험가 새끼가 조용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 듯 웃더니 뒷걸음쳐 쓰윽 사라졌다. …다시 생각해도 존나 소름이 돋는다. 아찔한 것만으로 따지면 두 번째 것도 만만치 않지만. 현재 진행형이란 점에서 특히나 더. 「캐릭터가 수면 도중 고블린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처음으로 기척이 아니라 통증에 눈을 떴다. 코앞에서 고블린이 보였다. 일단 망치로 후려쳐 앞에 놈부터 죽였더니, 다른 한 새끼는 이번에도 부리나케 튀었다. “그, 그륵!!” 나는 곧바로 통증의 원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쇄골 뼈 사이에 조각칼이 박혀 있다. …씹, 어쩐지 왼팔이 잘 안 움직이더라니. 후, 그래도 아픈 걸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내 키가 조금 더 작거나, 고블린이 조금만 더 점프력이 좋았어도 이 조각칼이 박혀있는 곳은 내 목이었을 테니까. 까드득. 이를 악물며 조각칼을 뽑아낸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포션을 상처 부위에 몇 방울 떨어뜨린다. 마개를 닫고 가방에 도로 집어넣기가 무섭게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빠르게 재생된다. 치이이이이익. 포션을 만든 새끼, 사이코패스인가? 어찌 된 게 찔렸을 때보다 더 아프다. “끄으으윽, 흐흐흐흐…….” 약 5분의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사라진다. 이 정도 통증이면 잠이 확 깰 법도 한데,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더 눈꺼풀이 무겁다. 잠깐만 집중을 풀어도 흐려지는 초점. 미뤄 왔던 결단을 내릴 시간이다. 살의에 민감한 바바리안의 몸뚱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조는 건 한계가 있다. 방금 전엔 칼에 찔리고 나서야 깨어나지 않았나. ‘휴식을 취해야 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저씨와 헤어진 지 약 14시간이 지났다. 아마 1층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도 슬슬 다시 밤친구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 터. “이봐 바바리안, 혹시 밤친구를 찾고 있나?” 실제로 근처를 배회하고 있으니, 탐험가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 “흐음, 꽤나 피곤해 보이는걸? 이리 오겠나?” “바바리안이라면 믿을 만하지. 자네만 오면 3명이 되는데, 함께하는 게 어떤가?” 마치 인기 좋은 창남이 된 기분이다. 다들 비슷한 꼴이 된 2일 차라 그런가? 냄새로 딴지를 거는 새끼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처음부터 냄새가 문제인 게 아니었던가. 하기야, 피 칠갑 한 상태로 신발 하나를 잃어버려서 뒤뚱거리던 어제의 내 꼴이 조금 심하긴 했지. “그래? 아쉽게 됐군.” 수많은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나는 전부 거절하며 계속해서 통로를 지나쳤다. 하, 어디 튼실한 바바리안 하나 없나? 사실 내게 가장 좋은 경우는 동족을 만나 밤친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2일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바바리안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거겠지만. “동족을 찾고 있다고? 흠, 힘들 텐데?” “힘들다고? 어째선가?” “갓 성인식을 마친 바바리안이라도 두세 달이면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니까. 모르긴 몰라도 1층에는 백 명도 채 없을 것이네.” 탐문을 해 보니 1층에서는 바바리안 자체가 드문 모양이다. 하긴, 이런 육체를 갖고 있는데 1층에서 빌빌거리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애당초 1층에서 만난 탐험가 중 99%는 인간이었고.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렇군. 자네의 여정에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겠네.” “고맙다.” 이 아저씨는 제법 믿음직해 보였지만, 나는 그 대화를 끝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바바리안의 심장이 고가라는 걸 알게 됐더니, 도무지 탐험가 중에 수상해 보이지 않는 새끼가 없었다. 딸깍. 나는 나침반을 꺼냈다. 이걸 얻은 다음부터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난 고블린 지대도 벗어나지 못했다. 새삼 1층이 얼마나 큰지 느껴진다. ‘…동족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짓은 관두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동족이 아니어도 되니까 밤친구를 구한다. 단, 인간은 빼고. 1% 남짓의 인구비를 지닌 이종족을 찾는다. 약속을 중시하는 요정이나, 바바리안만큼 호방한 성격을 가진 드워프가 가장 베스트지겠만……. 다른 이종족이어도 큰 상관은 없다. 이종족들은 대부분 인간과 달리 여유가 있으니까. 시간만 주어진다면 위로 쭉쭉 올라갈 재능이 있는데, 벌써부터 푼돈에 눈이 멀어 같은 탐험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나는 약 1시간가량 동굴을 배회했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낯선 요정과 조우했습니다.」 마침내 찾아 헤매던 이종족을 발견했다. ***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하게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기 시작한다. “…….” 뾰족 귀를 가진 요정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말없이 나를 쳐다만 보고 있다. 밤친구 없이 혼자 졸고 있던 건가? 고양이처럼 빛나는 호박색 눈에는 당혹스런 감정과 짙은 경계심이 느껴진다. 암만 봐도 그냥 내가 지나쳐 사라져 주길 바라는 눈치지만……. 스윽. 대치 시간이 길어지자 요정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근데 자세가 부자연스럽다. 살펴보니 복부에 입은 상처가 보였다. “다쳤군.” 깊진 않지만 길게 찢어진 자상이다. 고블린이 쓰는 조각칼로는 결코 낼 수 없는.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인간인가?”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두려운 모양이다. 하기야, 이해할 수 있다. 나라도 내가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이따만한 덩치가 다가오면 존나 쫄 테니까. 심지어 쟤는 성별도 여자이지 않은가. 몸도 쪼그맣고. 한 160쯤 되려나? 아무튼, 나쁘진 않은 상황— “살려 주세요.” 응? “제발요. 한 번만 봐주세요 바바리안 아저씨, 도시에 돌봐야 하는 동생이 있어요.” 이게 무슨 전개인가 생각하던 차. 요정이 미련 없이 툭, 무릎까지 꿇었다. 어느샌가 눈에는 습기마저 맺혔다. “부탁드릴게요.” 뭐야, 무슨 요정이 이렇게 기개가 없어? 솔직히 말해 쿨미녀 타입인 줄 알았다.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게임 내에서 요정의 말투나 성격은 대부분 그따위였으니까. 후, 이런 캐릭터인 줄 알았으면 아예 다르게 접근하는 건데.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오해부터 풀자. “난 널 죽일 생각이 없다.” 시선을 마주한 채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진정할 시간만 준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저쪽도 알 것— “…꼭 이러셔야 하나요, 바바리안 아저씨?” —은 개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온다. 마치 학교 앞에서 여고생을 괴롭히는 바바리맨이 된 기분이다. 분명 난 바바리안인데.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내 침묵이 길어지자, 요정은 한층 두려움이 깊어진 눈빛으로 뒷걸음까지 치며 앞깃을 여몄다. 어이가 없었다. 바바리안 새끼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지? 평소 이미지가 어떻기에 얘가 이 지랄을 떨어?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떡하지? 내가 그런 쓰레기가 아니란 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면 오해가 좀 풀릴까?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일단 치료부터 해라. 대화는 나중에 하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가방에서 약초와 붕대를 꺼내 던졌다. “이건, 리쵸 잎……?” 역시 이게 리쵸 잎이 맞았구나. 앞으로는 마음 놓고 써도 되겠다. 독초일 수도 있단 걱정에 아까는 다치고도 쓰지 못했는데. 9화 밤친구 (2) “…왜, 이걸 주시는 거죠?”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려니 왠지 입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나, 어쩔 수 없다. 이런 타입엔 이쪽이 더 잘 먹힐 테니까. 난 이 요정과 밤친구가 되고 싶다. 왠지 그렇게 말하니 쓰레기처럼 들리긴 하지만, 얘한테도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부상에 수면 부족에 예쁘장한 외모까지. 암만 봐도 얘가 나보다 상황이 몇 배는 더 좋지 않다. 그걸 아니까 얘도 방금 그 지랄을 한 걸 테고. 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 보여 준 삶에 대한 집착만큼은 나도 놀랄 정도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선 치료부터 해라.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하지만…….” “난 경계를 서고 있겠다.” 일축하는 태도로 등을 돌리니 머지않아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상처에 바르기 좋게 약초를 씹는 듯하다. “…다 됐어요.” 벌써? 의외로 손기술이 좋은 편이구나. 뒤를 돌아보니, 찢어진 옷 틈 사이로 야무지게 묶인 붕대가 보인다. 왠지 날 보는 시선에서도 경계심이 조금은 줄어들은 것 같고. 일단 통성명부터 해 천천히 거리를 좁히자.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에르웬.” “무슨 착각을 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다.” “네? 아, 네…….” 아닌 척은 하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공포는 여전하다. 이만큼 했으면 슬슬 저 오해도 풀리리라 여겼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결국,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나를 그토록 두려워하지?” “…바바리안은 요정과 적대 관계잖아요?” “적대 관계?” “죄, 죄송해요.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고… 저는 아저씨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 질문에 얘가 급 정신을 차렸는지 아까처럼 다시 빌빌 기기 시작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요정과 바바리안이 적대 관계라니? 금시초문이다. 분명 게임 내에선 제법 사이가 좋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눈에 힘을 빡 주고 바라만 봤을 뿐인데 원하는 정보가 술술 나왔다. “…시, 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이잖아요? 저, 저는 거기에 아무런 앙금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10년 전이라……. 뭔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말만 들어 보면 적대 관계라기보다는 앙숙에 가까워 보인다. 음, 그럼 어려서부터 안 좋은 얘기를 듣고 자라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건가? 상황이 제법 골치 아파졌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다른 애를 찾아봐? 그러자기엔 이미 준 약초랑 붕대가 조금 아까운데……. 그래, 일단 시도나 해 보자. “앙금이 없는 건 나도 매한가지다.” “그, 그런가요!” “그렇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에르웬. 혹시 나와 밤친구가 되지 않겠는가?” “…밤친구요?” “나는 지금 피곤하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일 테고, 앙금이 있던 없던 오늘만큼은 협력하는 게 어떤가?” “으음…….” 갑자기 눈이 똘망똘망 해졌다. 솔직히 말해 아까 걔가 맞나 싶을 정도.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을 주자,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열렬히 고민하던 에르웬은 승낙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놨다. “바바리안은 전사로서의 명예를 중요시한다고 여겼어요. 그걸 걸고서 맹세해 줄 수 있나요? 먼저 절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라.” “무, 물론 저도 일족의 이름에 대고 약속하겠어요. 아저씨에게 먼저 해를 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한국 문화로 설명하자면 서로 엄지를 혓바닥에, 새끼를 이마에 찍잔 소리다. 물론, 나야 하루 종일이라도 찍을 수 있다. 다만, 그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하나 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아저씨가 아니라.” 나는 몰라도, 우리 비요른은 20살밖에 안 됐단 말이다. *** 계약은 성립됐다. 지장을 찍은 건 아니지만 우린 이곳 문화상 그와 비슷한 걸 찍었다. 덕분에 그 과정에서 요정 아가씨의 본명을 알게 됐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나이는 20살로 동갑이었다. 후, 내가 진짜 비요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분명 진짜 비요른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난 그렇다 쳐도 얘는……. 굳이 말은 않겠다. “그럼 순번은 어떻게 정할까요?” “내가 먼저 자겠다. 그 편이 너도 안심이 되겠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제가 어쩔 수 없기도 하고…….” 한 마디로 불감청 고소원이었단 얘기. “좋다는 뜻으로 알겠다.” “네.” 휴, 먹혀서 다행이다.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고 했으면 눈앞이 캄캄했을 텐데. 아까부터 자꾸 눈이 감기고 있다. 제발, 이제 그만 좀 자고 싶다. 한숨 편히 자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참! 시간은 어떻게 알죠?” 쯧쯧, 이래서 초심자는 곤란하다니까? 나는 배낭에서 시계를 꺼내 에르웬에게 전해 주었다. “비싼 물건이니 망가뜨리면 안 된다.” “네에…….” 말만이 아니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걸 보니 적잖이 마음이 놓인다. “조심히 다룰게요. 주무세요.” 나는 아저씨가 그랬듯이 배낭을 베고서 담요를 덮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드르르르르렁!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저씨!” …비요른이라니까. “아저씨,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나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몸을 일으켰다. 믿기지가 않는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고? “자, 여기 시계 받으세요.” 시간을 보니 정말로 2시간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떠보기용 코골이도 제대로 못한 거 같다. 혹시 모르니 10분은 하고 잘랬는데……. 와씨, 이게 배낭과 담요의 시너지인가? 무서울 정도다. 분명 아저씨가 이걸 빌려줬으면, 난 기습을 피할 수 없었겠지. 세상 모르고 존나 편하게 자고 있었을 테니까. 어찌 보면 인과응보인가? …그런 의미에서 얘한테도 빌려주자. “덮고 자라. 이것도 베고 싶으면 베고.” “네? 하지만…….” 말은 사양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보인다. 대충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뭐, 그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한 번 더 권하지도 않았음에도 에르웬은 알아서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양이처럼 웅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거, 외간 남자 앞에서 잘도 자는구먼? 하기야 지쳤을 것이다. 내가 힘들었던 것만큼이나 얘도 힘든 하루를 보낸 모양이니. “후…….” 벽에 등을 기대며 버릇처럼 시계를 열었다. [22 : 50] 체감상 한 5일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2일 차가 끝나려면 1시간도 넘게 남아 있다. 어서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 사실, 돌아간다는 말도 웃기긴 하지만……. 돌아가기만 한다면 며칠이고 잠만 잘 거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정말 몸이 살 만해지긴 한 모양이네.’ 나는 시계를 집어넣고, 본격적으로 상념에 잠겼다. 간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맞이해선지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났다.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실종 처리가 됐을까? 분명 아직일 것이다. 누가 찾아오기야 했어야지. 회사에서도 며칠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테고. “킥.” 괜히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게 아니다. 서글퍼만 지니까. 돌아가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의지가 꺾여 버릴 테니까. 여러모로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다. 그게 아무리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라도, 난 자가최면이 제법 잘 통하는 편이니. “…….” 의도적으로 사고의 흐름을 비튼다. 그래, 차라리 이틀간 있었던 일이나 복기해 보자. 성인식을 마치고, 미궁에 들어오고, 고블린과 싸우고, 아저씨와 싸우고……. 지금까진 잘했다고 칭찬해 줘도 되겠지? 진짜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아무도 칭찬해 줄 사람은 없으니 나라도 해 주면 안 되나? 딸깍- 자화자찬은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나 생각해 보기로 하며 시계를 열어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됐다. “에르웬, 일어나라.” “5분만 더…….” 무슨 5분만은 5분만이야 얼른 일어나. “으으…….” 바바리안의 우악스런 손길로 어깨를 흔들자 에르웬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 그때 아저씨가 왜 나를 못 미더워 했는지 알겠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서 졸 생각은 하지 마라.” “네…….” 조금 불안했지만, 일단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담요와 배낭을 빌려줘서인지, 다시 누웠음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껴 본 게 과연 얼마 만이지? 굉장히 낯설다. 어쩌면 내가 이틀간 겪은 모든 일보다 더. 드르르르르렁! 이번엔 제법 기운이 있었기에 떠보기용 코골이를 시작했다. 솔직히 떠보기보다는 얘가 안 졸고 잘 하는지 확인하는 게 더 컸다. …조는 것 같진 않네. 실눈을 떠 에르웬을 쓱 살펴본 나는 걱정을 버리고 다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탁. 나는 기척을 느끼며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끼얏!” 왠진 몰라도 나는 에르웬의 하얀 팔목을 쥐고 있었다. 정황상 내게 뻗어지고 있던 듯한데……. “뭐 하는 짓이지?” “저, 악, 악몽을 꾸시는지, 자꾸 땀을 흘리셔서…….” 손에 쥔 손수건을 보니 핑계는 아닌 듯하다. 뭐, 애당초 흉기였으면 이유를 묻는 일도 없이 방패로 후려쳤겠지만. “죄, 죄송해요.”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에르웬은 괴로운 표정으로 잡힌 부분을 쓰다듬었다. 벌써 시뻘겋게 자국이 올라왔다. 미안하단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해 봐야 어차피 빈말일 테니까.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교대까지 10분 정도 남았어요.” “그렇군. 그럼 지금 교대하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자 봤자 더 피곤해진다.” 내 말에 에르웬이 미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아저씨.” “문제라도 있나?” “아뇨. 궁금한 게 있어서요.” “물어봐라.” 에르웬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대체 누구예요?” 뭐지? 말장난인가? “계속 꿈속에서 미안하다고 하시기에……. 아,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죠?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이만 잘게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웬은 지 혼잣말을 다 하더니 담요를 머리 위에 덮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내가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닫자 슬슬 호기심이 피어나는 모양이다. “끄으으.”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해 보았다. 기억은 정말 하나도 나진 않지만, 말을 들어 보면 진짜 악몽을 꾸긴 한 모양인데……. 갑자기 조금 궁금해진다. 과연 내가 용서를 구했다는 아저씨는 대체 누구였을까? 떠오르는 후보는 둘이다. 성인식에서 목이 베어 잘린 무명의 아저씨와, 내게 사람다움을 가르쳐준 한스 아저씨. …근데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이든 이상하다. 난 둘 모두에게 사과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이내 나는 결론을 내렸다. 무슨 꿈을 꾸었던, 별 의미 없는 개꿈일 것이라고. *** [04 : 30] 3일 차가 시작됐다. 그리고 에르웬을 깨우기까지 10분가량이 남았다. 담요를 다리 사이에 끼고 새우잠을 자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애프터 신청. 즉, 동료 제안을 할지 말지에 대해서. 물론, 동료가 되면 전리품을 나눠야 하는 단점이 있기야 하다. 아무리 3일 차부터 고블린이 서넛 씩 나온다지만, 에르웬의 합류는 내 소득을 감소시킬 게 분명하니까. 그녀의 강함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뭐, 종족값이 요정이니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테지만……. 이미 전력 과다라고 해야 하나? 에르웬이 없어도 고블린 서너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쉽게 해치울 수가 있다. 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로 몇 번이나 실전을 겪은 나는 정말로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의 생활비나, 이후의 세금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되도록이면 최대한 마석을 모아야 하는 입장. “후…….” 안전한 잠자리냐, 더 많은 마석이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을 거듭하던 때였다. 터벅. 좌측 통로에서 탐험가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불침번 도중 몇 번이나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한 번 쓰윽 보고서 그냥 지나쳐 가는 게 보통이니까. 다만……. 탁- 퉁퉁이와 비실이로 이뤄진 이 2인조 탐험가는 이쪽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였다. “저거, 그 요정 아니야?” “맞는 거 같군. 활의 생김새가 일치한다.” 속닥이며 결론을 내린 두 놈 중, 퉁퉁이가 대표로 내게 질문했다. “바바리안, 그 요정과는 무슨 관계지?” “보다시피 밤친구다.” “바바리안과 요정이 밤친구라니, 신기한 경우를 다 보는군. 그래서 얼마나 남았지?” “대답해 줄 용무는 없다.” 내 대답에 퉁퉁이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씨익 미소 지으며 옆에 있던 비실이를 데리고 떠날 뿐. “그렇군. 가자.” “어? 어, 어…….” 이내 2인조의 기척이 주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대체 이 새끼들은 뭐지? 부족장이 코앞에서 소리 질렀을 때만큼이나 불길하다.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해 자고 있던 에르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으으…….” 야, 넌 지금 이 상황에 잠이 오냐? 빨리 일어나. 왠지 우리 좆된 거 같으니까. 10화 밤친구 (3)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란 말은 옳지 않다. 퉁퉁이와 비실이 2인조가 관심을 보인 건 내가 아니라 에르웬이었으니까. 툭툭, 나는 다시금 에르웬을 발로 흔들었다. “으으음…….” 으으는 무슨. 빨리 일어나. 안 자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아까 쟤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슬쩍 확인하더니 담요로 얼굴 가리는 거 다 봤어. “꺄앗!” 실랑이할 시간도 아깝기에 그냥 어깨를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왜 자는 척을 하지?” “그게…….” 에르웬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고 판단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꽤나 갑갑한 태도. 휙. 턱을 잡고 내 눈을 보게끔 돌리자, 에르웬이 마지못해 입을 연다. “제가 일어나면 가실 거잖아요…….” 과연, 그래서였나. 나는 맹세를 했다. 그러니 불침번을 서던 중 탐험가와 분쟁이 생기면 함께 싸워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약속했던 마지막 순번에 이 일이 발생했다. 뭐, 나야 명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얘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다. 눈을 뜨는 순간 밤친구 맹세는 끝이니까. “후.” 나는 일단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만약, 한스 아저씨 같은 성인 남성이 이딴 짓을 했으면 화가 났을 테지만……. 겨우 20살짜리가 이러니까 딱한 마음이 먼저 피어난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저 두 놈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숨은 거지?” “…옷에 박힌 문양이 같았어요. 절 해치려고 했던 그 인간 남자와. 분명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거예요.” 집단이라……. 씨바, 상황이 더 빡세지는데? 그냥 여기서 이 요정 아가씨와 작별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마저 들기 시작한다. “일단 이동하면서 얘기하도록 하지.” “도와주시는 건가요?” “얘기를 마저 들어 보고.” 우선 에르웬을 데리고 있던 장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거의 뛰어가다시피 이동하며 남은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라.” 에르웬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군말 없이 간략하게 중요한 정보만을 읊었다. “첫날에 밤친구로 만난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저를 덮쳤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1층을 주 무대로 하는 어느 집단의 간부라고 하더라고요.” 참고로 그 집단의 이름은 ‘수정 연합’. “어떻게 겨우 도망치긴 했는데, 이후로도 같은 소속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공격을 해 왔어요. 부상도 그때 입었고요.”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잠깐, 그들은 어떻게 그 얘길 알았지?” “메시지 스톤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내가 했던 게임에 그딴 건 없었어. “좀 더 자세히.” “미리 공명시켜 둔 메시지 스톤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예요. 반경은 300m 정도라고 들었고요.” “그렇군.” 일종의 무전기다. 주파수를 미리 맞춰 두면 반경 300m까지 통신이 가능한. 슬슬 상황이 이해됐다. 이런 마도구가 있고, 수많은 인력이 있다면 이런 폐쇄적인 환경에서도 정보 전달이 쉽게 이뤄질 거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널 쫓는 이유가 뭐지?” 에르웬은 잘못한 게 없다. 한데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공들여 피해자를 쫓는가. “혹시 입막음 때문인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요.” “더 있다고?” “그게…….” 시원시원하게 묻는 말에 답하던 에르웬이 다시금 말하기를 주저한다. 이런 태도라면, 나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막 생각하던 차였다. “처, 처음에 도망칠 때 나이프를 막 휘둘렀어요. 근데 그게 하필 안 좋은데 맞아서…….” “…안 좋은 데라면?” 왠지 서늘하다. 자꾸만 사타구니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그, 거, 거, 거기 있잖아요……?” 진짜구나. “흠흠, 아무튼 절 쫓는 사람들 얘길 들어 보니까 아예 잘려 나가는 바람에 포션으로 붙일 수도 없었다고……. 그래서인 거 같아요…….” 눈에 불 켜고 쫓을 만하네. “죄, 죄, 죄송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다. 원인 제공을 한 것은 그놈이지 않은가? 자업자득이다. 문제는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놈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는 것이지만. “아저씨, 추적자가 있는 거 같아요.” “뭐?” “뒤는 돌아보지 마세요.” 청각에 집중해 봤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거리는… 150m 정도 뒤인 거 같아요.” 기척을 느끼는 게 이상할 정도의 거리지만,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다. 얘가 굳이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럼 이게 그 요정이 타고난 기감인가? 갑자기 얘가 달라 보인다. “속도를 높여야겠는데, 괜찮겠나?” “네. 아직까진 버틸 만해요.” 상처가 벌어졌는지 하얗던 붕대가 붉게 물들었음에도 에르웬은 앓는 소리를 뱉지 않았다. 좋은 근성이다. 뭐,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지만. “추적자와의 거리는?” “…여전히 150m 정도요.” 속도를 높였음에도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쯤 추적자는 메시지 스톤인가 뭔가로 우리 위치를 동료들에게 알리고 있을 터. 해치워야 한다. 만약 저들의 목표가 나였다면, 나는 분명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고만 있다. 죽이고 나면,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발을 담그기 전에 확인해 보자. “저, 아저씨……?” 내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는 얼마이며,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보다 디테일한 정보가 필요하다. “에르웬.” “네, 네?” “너는 뭘 잘하지?” “빨래, 청소 같은 건 자신 있어요. 요, 요리는 잘 못하지만…….”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전투 중이라고 했을 때.” “…활, 활이요! 아, 그리고 정령술도!” 딱 정석적인 활요정이다. “속성은?” “…불이요.” 음, 가장 귀한 속성이네. 덕분에 슬슬 그림이 그려진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할 수 있어요.”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거고. “그렇군.”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에르웬, 나와 동료가 되겠나? 기간은 미궁에서 벗어날 때까지, 전리품 배분은 내가 9고 네가 1이다.” “할, 할게요!” 이로써, 내게도 명분이 생겼다. *** “—라고 일족의 이름에 대고 약속합니다.” “나 역시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우리들은 이전처럼 신뢰의 증표로 무언가를 찍었고, 하룻밤 밤친구에서 임시적 동료로 관계를 진화시켰다. 물론, 존나게 뛰면서. “거리는?” “100m 정도요!”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였음에도,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외곽 지역으로 빠진다.” “네!” 방향을 꺾어 어두운 통로 속으로 들어선다. 벽과 천장에 빛나는 수정들이 점점 적어지고, 머지않아 캄캄한 어둠이 우리 앞에 드리운다. 마음이 복잡하다. 후, 내 발로 다시 여길 올 줄은 몰랐는데. “에르웬, 정령을 소환해라.” 손바닥 위로 떠오른 수박만 한 불꽃이 주위를 밝힌다. 나는 바닥을 조심하며 빠르게 어둠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소환 해제해라.”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기척은?” “곧 아저씨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나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청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최상의 상황은 추적자가 우리를 놓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럼 굳이 죽일 필요도 없어지고, 나 역시 나중에라도 발을 뺄 수 있게 된다. 타다다다다닷-. 머지않아 내 귀에도 추적자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기대와 달리 놈의 걸음은 스쳐 지나가는 일 없이 멈췄다. 딱 우리가 꺾은 갈림길 앞에서. 툭. 제기랄……. 아무래도 저놈은 우리를 추적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듯하다. 냄새, 소리, 그도 아니면 마법적인 무언가든지 간에. 터벅, 터벅. 놈이 방향을 꺾어 천천히 걸어오더니, 우리와 약 30m 떨어진 거리에서 정지했다. 무저갱 같은 어둠이 시작되는 경계선. “…….” 그는 고개를 내밀어 그 속을 들여다보았고, 우리도 그 속에서 숨죽여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 있군.” 고요한 정적 속에서 몇 번 킁킁거리던 놈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나, 난 직감적으로 그 물건의 정체를 눈치챘다. 메시지 스톤. 이를 봄과 동시 짧게 읊조려 신호를 보냈다. 지금까지 계속 시위를 당긴 채 화살을 겨누고 있었을 에르웬을 향해서. “쏴라.” 푹-.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진 화살이 사내의 미간에 박혔다. 털썩. 절명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나는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 바로 옆자리에 있는 에르웬에게서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잘했다. 망설였으면 위험했을 거다.” 허울뿐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도 아저씨에게 방패를 내리찍을 때 멈칫했지 않은가. 방금 전의 에르웬에겐 그러한 시간조차 없었다. 내가 굳이 다시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던 거겠지. 결코 망설여선 안 된다는걸. “네…….” “너는 잠시 쉬어라.” 위로는 이쯤에서 끝내고 어둠 속에서 나와 시체를 뒤졌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 배낭은 다른 동료에게 맡겼는지, 추적자는 제법 단출한 행색이었다. ‘이런데서 아쉬운 감정을 느끼다니, 나도 이곳 사람이 다 됐군.’ 우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적자의 장비를 통째로 벗긴 이후, 하나씩 획득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허리띠, 가죽 재질의 상하의, 단검 두 자루, 제법 묵직한 마석 주머니, 포켓에 보관된 채로 허리띠에 매어져 있던 포션 한 병, 그리고 메시지 스톤까지. “잘됐군. 이리 와라.” 대강 분류를 마친 나는 에르웬을 불렀다. 그리고 붕대를 벗기고 포션을 이용해 상처를 치료했다.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끄으읏…….” 소리를 내도 괜찮은데 에르웬은 굳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얘도 독한 구석이 있구나. 아니, 그냥 멘탈이 나간 건가? 부디 전자면 좋겠다. 카운셀링은 자신이 없어서. “정신이 좀 드나?” “네. 번쩍요.” “그럼 이걸로 갈아입어라.” 몇 분간의 치료가 끝난 뒤, 나는 방금 획득한 가죽 상하의를 내밀었다. 나풀거리는 천 옷보다는 이게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판단. “바로 입고 올게요.” 내 판단은 전부 따르는 쪽이 살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을까? 찝찝할 법도 한데 에르웬은 곧장 옷을 들고 어둠 속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조금 남는군. 이리 와 봐라.” 나는 직접 팔과 다리로 삐죽 나온 단을 잘라 주었다. “이것도 차라. 조금은 나을 거다.” 전체적으로 조금 헐렁해 보이긴 하지만, 허리띠까지 차자 그래도 제법 편해 보인다. 그런데 옷이 달라져서인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에는 나들이 나온 요정 소녀였다면, 이젠 어엿한 여전사 같다. 그 표정까지도. “…느낌이 엄청 이상하네요.” “익숙해질 거다.” “그렇겠, 죠……?” “그래, 그럴 거다.” 나는 다른 물건들을 전부 배낭에 쑤셔 넣고는 벌거숭이가 된 시체를 질질 끌어 어둠 속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메시지 스톤을 손에 쥐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잠시만요. 제가 해 볼게요.” 에르웬이 메시지 스톤을 살펴보더니 무언가를 딸깍 눌렀다. […요정년과 바바리안을 추적하던 세르딘의 연락이 끊겼다. 연락을 받는 이들은 모두 고블린 지구로 집결하라.] 일단,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다. 11화 2층 (1) [지금쯤 둘로 나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한 손 망치와 방패를 사용하는 바바리안을 본다면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지원을 기다려라.] 인상착의가 퍼져 나간다. 상세하진 않지만, 별 의미는 없다. 방패를 쓰는 바바리안이 나 말고 더 있을 거 같진 않으니. “아저씨…….” 에르웬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여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안 버리고 가니까.” 이미 나는 에르웬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부터 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걸 좋아했었다. 그쪽이 내게 이득이 된다면. “앞서 말했듯, 이후 전리품은 내가 아홉을 갖고 너는 하나를 가진다. 알겠나?” “물론이에요.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은혜라……. “그래, 꼭 갚아라.” 굳이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크게 기대는 않겠다마는. “네, 꼭이요…….” 결의에 찬 눈으로 주먹을 꽉 쥐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장화 끈을 조이며 이동할 채비를 끝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일단 외곽 지대를 통해서 이동한다. 다시 정령을 소환해라. 나머지는 가면서 얘기하지.” “네.” 주먹 크기의 불꽃을 등불 삼아 어둠 속을 걸어가며 나는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정령은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소환이 가능하지?” “주변을 밝히는 정도라면 10시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다시 회복되는 시간은?” “2시간 정도 쉬면 될 거예요.” “그렇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들은 별다른 위험 없이 그들의 추적을 벗어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번에 짊어진 리스크만큼의 반사이익을 보게 될 테고. “아저씨.”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중 에르웬이 말을 걸었다. “이제 어디로 향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걸 안 말했구나. “2층이다.” “네……?” 그런 표정 하지 마. 제대로 들은 게 맞으니까. “우린 2층으로 간다.” “아저씨랑 저, 둘이서요?” “그래, 너랑 나 둘이서.” 사실 선택지가 없다기보단, 이전부터 생각하던 것이다. 1층에서는 둘이 움직여 봤자 소득이 줄어들 뿐이었지만……. 2층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저기… 아, 아저씨? 2층은 1층이랑은 아예 달라요. 그건 알고 계신 거, 맞죠……?” “알고 있다.” 1층에선 서너 마리씩 나오던 게 열댓 마리로 늘어나고, 그 외의 변이종, 심지어는 아예 상위 등급의 몬스터도 나타난다. “하지만, 초입부에서만 활동하면 괜찮을 거다. 너랑 나는 상성이 제법 좋으니까.” “제, 제가 아저씨랑요?” 뭘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근접 탱커와 원거리 딜러는 조합이 좋다. 일찍이 에르웬과 위층에 가는 걸 고민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고. 그곳이라면 마석을 반씩 나눠도 소득이 크게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어둠을 지나칠 수단이 없기에 나는 이 아이디어를 폐기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고, 고블린을 피해서 오크 소굴로 들어가는 거 같은데…….” 뭐, 이 반응을 보면 알고서 제안을 했어도 칼같이 거절당했을 듯하다마는……. 아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알다시피 1층에는 저놈들이 쫙 깔려 있는데.” 에르웬에게 2층으로 가야 할 동기가 생겼고, 그 틈을 타서 비율도 9:1로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결정에 감정적인 요인이 일절 존재하지 않던 것은 아니었다. [요정년을 잡는 자에게는 1만 스톤에 가장 먼저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추가로 주겠다.] 나는 이러한 놈들이 싫다. 아니, 싫은 걸 넘어 혐오하는 감정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놈들에게 엿을 먹이면서, 리스크보다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데다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었다는 자기만족까지 얻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효율의 결정체 아닌가. “선택할 기회는 주겠다. 어쩔 거지?” “갈게요…….” 에르웬이 울며 겨자 먹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방금 메시지 스톤에서 들려온 통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듯한데……. 나이스 타이밍. “그럼 계속 이동하지.” “…그런데 2층으로 가는 길은 아세요?” “정확히는 모른다.” “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다 보면 언젠가 나올 테니까.”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어둠을 따라서 한 방향으로만 가면 어떻게든 포탈이 나온다. 이 어둠이야말로 위층을 가리키는 항로 같은 것이니까. 워낙 미로 같은 구조라 헤매기야 하겠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다. “고블린 덫이에요!” 그렇게 걷고 있는데 덫이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늦은 시기였다. 원래였으면 나와도 아까 나왔어야 맞는데. …설마 빛이 없는 곳에선 고블린들도 별로 없는 건가?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왠지 가슴이 갑갑해진다. 시작부터 어둠 속에 떨어져, 곧바로 고블린을 만났던 난 대체 얼마나 운이 없던 거지? “제가 상대할게요! 아저씨는 쉬고 계세요!” 자기 어필을 할 기회라 여겼는지 에르웬이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정령은 쓰지 마라.” “…다, 당연하죠!” 당연하다기엔 너무도 당황한 모습으로 에르웬은 덫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륵!” 고블린이 튀어나오는 순간, 초근접 거리에서 미리 시위에 걸어 둔 화살을 쏘았다. 푹-! 오, 저러니까 무슨 레골라스 같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솜씨가 좋다. 몸동작도 아주 민첩하고. “어때요?” 이내 고블린을 해치운 에르웬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정령을 썼었겠지?” “네…….” “잘했다. 활 쏘는 걸 보니 요정이 맞긴 하군.” 에르웬은 쑥스러워하며 기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인정받는 게 좋은 건가? 솔직히 말해 조금 돌려서 까는 것도 있었는데. 실력이 아니라 성격 부분에서.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는 내가 하겠다. 화살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을 테니.” “아, 그냥 다시 주워서 쓰면 되는데요? 뽑을 필요도 없어요.” 에르웬이 허리를 굽히더니 마석과 화살을 주워서 돌아왔다. 화살은 척 보기에도 망가진 곳 없이 멀쩡했다. “…그렇군.” 거, 사람 무안하게. 게임에서 화살은 한 발 쏘면 없어지는 소모품이었다. 대신 한 칸에 천 발씩 들고 다닐 수 있긴 했지만. “자, 여기요!” 에르웬이 작달막한 손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아저씨가 아홉 개 가질 때 제가 한 개 맞죠?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그럼 저도 조금은 벌어갈 수 있겠죠? 돌아가면 동생한테 사 주기로 약속한 게 있거든요!” 어, 아, 음……. “그래, 열심히 해라…….” 뭐지? 돌려 까는 건가? *** 어둠 속에서 간간이 고블린을 잡아 가며 빠르게 북상하고 있던 때, 한동안 조용하던 메시지 스톤에서 음성이 출력된다. [추가 전달 내용이다. 요정에게 당했던 하츠 영이 현상금을 2만 스톤으로 올리겠다는군. 살았든 죽었든 관계없이.] 300m 근방에 놈들이 있단 뜻이다. 본능인지 에르웬이 슬그머니 내게 밀착했다. “안심해라. 횃불까지 써 가며 우릴 찾으려는 놈은 없을 거다.” “그렇겠죠?” “그래.” 사실 확신에 가깝다. 메시지 스톤으로 계속 대화를 엿들으며 느낀 것인데, 이들은 집단이라 해 봐야 시정잡배들의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까지 단합이 잘 되지도 않는 듯했고. 추측건대, 기껏 해 봤자 지들끼리만의 편리한 커뮤니티 같은 역할이나 했을 것이다. 애초에 1층은 5명 이상이서 활동할 수도 없는 곳이니까. [칼날늑대를 사냥하러 지역을 옮길 생각인데, 혹시 함께 이동할 자가 있는가? 전달은 필요 없다.] [피곤해서 같이 휴식을 할 자를 구한다. 큰바위 옆 연못으로 와라. 전달은 필요 없다.] 실제로, 이곳까지 이동하며 이러한 통신도 곳곳에서 들렸다. 현상금을 걸거나 말거나 그리 관심 없는 이들도 있단 거다. 다만,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일이 꼬였다기보다는, 너무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어서. 제기랄……. 내 팔자상 이쯤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질 때인데, 잠잠하니 오히려 불안해진다. “아저씨!” 뭐야. “저기, 구울이에요!” 안 보이는데? 고개를 갸웃하자 에르웬이 불꽃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너 눈 진짜 좋구나. 그제야 내 눈에도 구울의 형체가 들어왔다. 썩은 피부와 텅 빈 눈두덩이, 클로를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긴 손톱, 그리고 사람과 비슷한 체형으로 4족 보행을 한다는 점까지. 로딩 화면에서 봤던 일러스트 그대로다. 다만, 문제는……. ‘뭐야, 왜 구울이 여기서 나와?’ 1층은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출몰하는 몬스터가 바뀐다. 그리고 구울이 나오는 것은 서쪽 지역. 설마, 헤매다가 경계선까지 온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긴 했지만 막다른 길이 나오면 이리저리 빙 돌기도 했으니. 이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자. “…이번에도 저 혼자 싸우나요?” 고블린과 싸울 땐 의욕이 넘치던 에르웬이 싫다는 티를 팍팍 낸다. 처음 만나는 몬스터라 무서운 건가? 얘도 참, 남다른 구석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너는 가장 뒤쪽의 한 놈만 신경 써라.” “네!” 대강 전략을 공유한 나는 천천히 나가갔다. 통로를 가로막은 구울의 숫자는 총 셋으로, 전부 강아지 앉아 자세를 하고 있었다. 터벅. 제법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미동도 없다. 음, 게임에선 일정 범위에 다가가야만 선공을 해 왔는데, 이것도 게임 그대로인 건가? 터벅. 조심스레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구울 세 마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르르륵!” 내는 소리는 고블린과 비슷하다. 9등급 몬스터라 그런가? 거, 개성이 없구먼. “흐아앗!” 물러나기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가며, 선두에 있던 구울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찍었다. 이름하여 해머 스매쉬. 콰직-! 구울 하나의 대갈통이 짓뭉개지는 순간, 뒤에서 화살이 쏘아지며 또 다른 구울에 명중했다. 푹! 얘는 참 미간을 좋아하는 거 같네. 이어서 달려드는 구울을 방패로 한 번 밀쳐낸 후, 해머 스매쉬로 마무리하자 전투가 싱겁게 마무리됐다.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EXP +1」 순식간에 끝난 전투지만, 나는 짧게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투력 면에선 구울이 고블린보다는 위였다. 힘도 훨씬 셌고 속도도 빨랐다. 뭐, 고블린은 덫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당하는 새끼가 병신이다. …물론 주변에 빛이 있다는 가정하에. “그래도 고블린보다는 이쪽이 한결 낫군.” “네? 왜요?” “고블린은 잡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전면전에서 밀리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고블린보다는 구울을 사냥하는 게 효율이 좋아 보인다. 얘낸 적어도 덫 하나만 뿌려놓고 근처에서 존버타지는 않으니까. 다가가기 전까지 선공을 하지 않는단 것도 아주 큰 장점이었고. “다음번에는 화살로 한 마리를 먼저 죽이고 시작하는 편이 효율이 좋겠군.”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앞으로의 전투 플랜을 짧게 공유하고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마석들을 수거해 주머니에 챙겼다. “저, 아저씨……?”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이제 저 하나 주실 차례인데요…….” “아, 그렇군.” 우리는 계속해서 통로를 나아갔다. *** 경계선 부근이란 내 예상은 맞아들었다. 한동안 구울과 고블린이 번갈아 나오더니, 계속 북상을 하자 다시 고블린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22 : 47] 어느새 3일 차가 끝나가기 시작하는 시점. 도중에 4시간가량 휴식을 취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온 우리는 발견했다. 바닥에 그려진 검붉은 선 하나를. “어, 핏자국이네요? 고블린은 아닌 거 같은데, 누굴까요?” …왠지 난 그 주인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떨어진 빵 조각이 나왔다. 일정 간격마다 계속해서. 이에 나는 확신을 갖고서 핏자국을 계속 추적했다. “저기, 아까부터 왠지 말이 없으신 거 같은데…….” 10분. “혹시 저한테 화난 거라도 있으신가요?” 30분. “네? 아저씨?” 2시간. “…….” 그 긴 거리를 걸어온 끝에 나는 마침내 땅에 버려진 샌들을 발견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저…….” “씨발, 장난치나.” “자, 잘못했어요! 뭔진 몰라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포탈이 있었다. 12화 2층 (2) 포탈이 나오리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야 당연하다. 상위 모험가인 금발 파티와 조우한 것부터가 내가 온 방향에 2층 포탈이 있다는 방증. 핏자국을 발견하자마자 확신을 갖고 이를 따라갔던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스타트 포인트에서 10m도 안 되는 지점에 포탈이 있을 줄이야. “미치겠군.” 세 발로 기어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는 대체 얼마나 운이 나쁜 거지? 반대 방향으로 몇 걸음만 갔어도 포탈을 활성화시키고 빛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좆같은 덫을 보고 피할 수도 있었을 테고! “아저씨, 말해 주세요. 그렇게 무서운 표정만 짓지 마시고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칠 테니까…….” 근데 얘는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아, 나 때문이구나.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둘러대자. “신경 쓰지 마라. 그저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아…….” 에르웬이 날 보며 안심을 하더니 이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본다. 믿기지 않았다. 핏자국, 빵 조각, 샌들, 내가 짓던 표정. 이 정황만으로 내가 첫날에 겪은 일들을 유추했다고? 얘가? “분명, 그분도 좋은 곳에 가셨을 거예요.”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믿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무슨 예전에 잃은 동료라도 추억한다고 오해한 듯싶지만……. 구태여 정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하나씩 설명하기엔 너무 긴 이야기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말하다 보면 울분이 복받쳐 오를 거 같고. 그러니 그냥 이 이야기는 묻어두자. “위로 올라갈 마음 준비는 됐나?” “솔직히 아직도 무섭긴 한데, 왠지 아저씨랑 있으면 죽을 것 같진 않단 생각이 들어요.” 가만 보면 얘는 참 말을 길게 하는 요상한 버릇이 있다. 그냥 ‘네’ 한 마디면 되는데. “그럼 가지.” “네에…….” 에르웬과 함께 포탈 속으로 몸을 실은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모니터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때처럼. 번뜩-! [00 : 57] 미궁에 들어선지 딱 4일 차가 넘어가는 시점.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나는 2층에 도달했다. *** 현재 소감이 어떻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거대한 개구리 입속에서 한참 우물거려지다가 퉷! 하고 뱉어진 기분이라고. “꺄앗!” 무언가에 튕겨져 나가듯 몸이 체공한다. 에르웬처럼 볼품없이 비명은 내지르진 않았지만, 결과만 보면 나보다 쟤가 더 나았다. 쿵-! 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은 반면, 에르웬은 금방 균형을 잡고 멀쩡하게 착지했다. “와, 놀랐네요. 이런 말은 언니들도 안 해 줬는데.” 새삼 느끼는 건데, 얘도 진짜 피지컬이 좋구나. 바바리안으로선 가질 수 없는 민첩함이다. “아저씨, 여기가 2층인가요?” “그래.” “으음, 숲이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확실한 거죠?” “아마 네가 들은 이야기는 다른 2층을 말하는 걸 거다.” “다른 2층이요?” 요정들은 미궁 정보 공유를 제대로 안 하나? 왜 이런 것도 모르고 있지? “1층의 포탈은 동서남북 방향마다 네 개씩 있고, 이어지는 곳은 지역마다 다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까먹었을 뿐이었구나.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에르웬이 당황하며 뭐라 입을 열었다. “아, 3층! 어느 경로로 가던 3층부터는 다시 전부 이어진다고 했어요. 맞죠?”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고 싶은 모양이다. 대충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에르웬이 흡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슬슬 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온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죠?” “기다려라. 생각 중이니.” 일단 나는 차분히 주변 지형들부터 확인했다. 게임과 어떤 부분이 다르고, 같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방금 전에 포탈을 타고 넘어오면서 3m 정도 날았던 것처럼. 모니터 너머로는 알 수 없었던 그런 것들. “흐음.” 우선 한 번 더 주위를 확인했다. 뒤에는 언제든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포탈이 있고, 반경 50m쯤 되는 공터엔 어떠한 생명체도 보이지 않는다. 뭐, 저 멀리 나무속은 어떨지 모르겠다마는.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가만히 있어라.” 2층의 맵은 숲이다. 주변은 밤처럼 깜깜하지만, 하늘에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빛들 덕분에 어느 정도 시야 확보는 된다. 체감상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 정도의 밝기. 다만, 시간이 흐른다고 낮이 되며 밝아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이곳은 미궁 속이니까. 저것도 사실 하늘이 아니라, 그저 높은 곳에 위치한 천장이겠지. 뭐, 진짜 하늘과 태양이 존재하는 층도 있긴 하다마는.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네? 어디로 갈 건데요?” “이곳을 중심으로 근방을 탐색한다.” 1층에서부터 대강 세워 둔 계획은 있다. 하지만 이게 실제로 통할지에 대해서는 확인해야 하는 부분들이 몇 가지 존재한다. 그러니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 콰앙-! 공터 외곽의 나무를 향해 대뜸 망치를 휘두르자 에르웬이 흠칫한다. “뭐, 뭐 하세요?” “나무를 쓰러뜨리는 게 가능한지 확인해 봤다.” “그런 걸 왜 확인하는데요?” “포탈 주변에 목책을 세울 생각이었다.” “으음, 그렇구나.” 그제야 에르웬이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씩 대답해 주려니까 엄청 귀찮다. “아무튼 이 계획은 포기다.” 에르웬도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야 얘도 눈은 있으니까. 온 힘을 다해 후려쳤는데도 나무는 껍질이 조금 부서진 게 끝이었다. 이게 무슨 나무냐? 바위지. “그럼 다음 계획은요?” “예정대로 이 주변을 수색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가 앞장을 선다.” “…제가요?” 의문은 받지 않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은 앞서가며 함정을 찾을 것. 그리고 최대한 기척에 유의하며 적을 경계할 것. 이렇게 두 가지다.” “…역할 분담이라는 거죠. 알겠어요.” 의외로 에르웬은 순순히 부여된 역할을 받아들였다. 근데, 왜 아쉽지? 이미 설득할 말까지 다 준비해 둬서 그런가? “그래도 숲에 와서인지 뭔가 그리운 느낌이네요. 몬스터들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에르웬은 나로선 전혀 공감 못할 얘기를 하면서 숲길을 걸어나갔다. “아, 덫은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되도록이면 제가 걷는 길로만 오세요.” 뭐지? 얘? 갑자기 뭔가 든든해졌다. 실제로 덫이 두렵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머지않아 에르웬이 작게 읊조렸다. “덫이네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기 보시면 나뭇잎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안 보인다. 이내 에르웬이 ‘왜 이런 것도 못하지?’라는 눈빛을 하더니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채챙-! 진짜 있었네. 어떻게 이리도 어두운데 이 거리에서 저걸 발견할 수 있지? 요정의 탐지 능력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네가 성큼성큼 걷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어때요?” “돌멩이를 잘 던지는 거 같다.” “…그게 전부?” “달리 뭐가 필요한가?” 이때다 싶어 쭉쭉 펴지던 에르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근을 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너무 뻔하지 않도록 은근하게. “덫을 찾는 건 처음부터 네게 기대하고 있던 능력이었다. 너는 이미 어엿한 한 명의 탐험가다. 당연한 일을 갖고 너무 들뜨지 마라.” “흐으음…….” 아닌 척하지만, 어깨가 살짝 씰룩거리는 게 뒤에서 훤히 보인다. 덕분에 완전히 감을 잡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다루면 될 듯하다. “그래도 제가 한 사람분 역할은 하고 있다는 말씀이죠? 어엿한 탐험가로서?” “그래.” 그래 봤자 배분은 9:1이지만. 아무튼, 우리 부족장이 특히나 좋아했던 ‘한 사람의 전사’ 변형판이 생각보다 잘 먹힌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고블린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그야 당연하다. 2층은 1층과 다르니까. 덫이 있다고 무조건 고블린이 근처에 있지 않다. 2층에서의 덫은 그저 지형적 특성으로 보는 게 편하다. 어딜 가나 수도 없이 깔려 있으니.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하지.” “네.” 나는 풀어진 긴장을 다시 조이며 이 근방을 탐색했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게임상에서 ‘고블린 숲’이라 불리던 곳이다. 덫 외의 특징으로는 고블린이 기본적으로 열댓 마리씩 뭉쳐다닌다는 것. 가끔씩 변이종, 그러니까 고블린 검사나 고블린 궁수 따위가 출현한단 것이 있다. 물론, 외곽부로 나가면 변이종들도 늘어나고, 상위 등급의 몬스터도 나타나지만……. 포탈 근처 초입부에서만 깔짝댈 예정인 우리로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다. “일단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우리는 포탈을 중심으로 반경 200m가량의 수색을 끝마쳤다. 덫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고블린 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이 근방의 덫을 전부 제거한 뒤 차츰 범위를 늘린다.” 우리들은 멀리서 돌멩이로 덫을 제거하는 식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혹시라도 위험하면 1층으로 도망쳐야 하니까. 뛰는 도중에 덫을 밟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그렇게 반경을 500m 이상 넓혔을 때였다. “아저씨.” 에르웬이 발을 멈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 역시 덩달아 숨을 죽였다. “고블린 무리예요.” “몇 마리나 되지?” “모르겠어요. 열은 확실히 넘는 것 같은데…….” “거리는?” “50m 정도요. 아직 우리를 눈치채진 못한 거 같아요. 어떡하죠?” 얘는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을까. “싸운다.” 내 말에 에르웬은 토를 달지 않았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걸. 정 싸우는 게 싫다면 미궁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 “들키지 않고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아저씨 없이 저 혼자라면 30m까지는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이상은 무리예요. 고블린들이 생각보다 후각이 예민해서.” “그렇군.” 나는 짧게 고민한 뒤, 아까 말했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에르웬도 천천히 고블린들 무리들이 있는 방향으로 수풀을 헤치며 걸어갔다. 저게 바로 요정인가? 수풀 사이를 걷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 게 볼 때마다 신기하다. “…….” 이내 에르웬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등을 돌려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았다. 휘유우우웅. 명중인가? 모르겠다. 하도 멀어서 박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미간을 꿰뚫었으면 좋겠는데. 타다다닷! 화살이 쏘아지는 것을 기점으로 나는 곧장 에르웬에게로 달려나갔다. “그륵!!!” “그르르륵!!!” 잔뜩 흥분한 고블린들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에르웬은 침착하게 2발째를 준비하고 있었다. 휘유우우우웅! 매번 느끼지만 미친 연사 속도다. 이러한 부분들을 게임으로 봤을 땐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푹-! 달려오던 고블린 한 마리가 쓰러졌다. 명중한 위치는 미간이 아니고 목. 하긴, 아무리 요정이어도 멀리서 움직이는 얘를 정확히 맞히는 건 어렵겠지. “에르웬, 너는 뒤로 물러나라.” “네!” 에르웬이 망설임 없이 뒤로 빠지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내 전방에는 우르르 몰려드는 고블린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1층에서 마주치던 것에 비해 3배는 되는 규모. 아무리 고블린이어도 이만큼이나 되면 조금은 위축될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두려운 마음은 전혀 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근-! 이 육체가 지닌 전사의 심장이 호전적으로 꿈틀대며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륵, 그륵!!” “그르르륵!!!” 수많은 고블린들이 뱉는 위협적인 하울링을 들으며, 나는 도리어 소리쳤다. “스파아아르타아아아아—!!!” 다 덤벼 씨발. 13화 2층 (3) 내게 달려드는 고블린의 숫자는 총 아홉. 일반 고블린이 여덟에 고블린 검사가 하나 섞여 있다. 검사라 해 봤자 검신 60cm 정도 되는 시미터 하나를 들고 있을 뿐이지만……. 조각칼과 달리 저쯤 되면 훌륭한 날붙이다. “그르륵!” 정면부에서 달려드는 고블린을 보며, 나는 짧게 쥔 망치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퍽-! 원샷원킬. 고블린이 바닥에 쓰러질 새도 없이 빛무리로 변해 사라진다. 다만, 기뻐하긴 이르다. 이제 고작 한 마리를 해치웠을 뿐이니. “그르르륵!!!” 한 마리를 잡기가 무섭게 양측면에서 고블린 두 마리가 동시에 날아든다. 손에는 조각칼이 쥐어져 있다. 나는 오른쪽으로 대쉬하며 방패로 한 마리를 밀쳐낸 뒤, 곧바로 등을 돌려 다른 한 마리를 망치로 후려쳤다. 퍽-! 이걸로 두 마리 째. 하지만 숨 돌릴 시간조차 없다. 어느새 내 후방까지 점했는지, 등 뒤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더 날아든다. 고블린 검사다. “캬아악!” 꼴에 검사라고 뱀 같은 소리를 낸다. 나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바닥을 굴렀다. 휘익-! 매서운 파공음을 내며 위로 지나가는 칼.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었다. 1층보다 2층이 몇 배는 더 위험한 이유다. 일반 고블린 4마리야 피지컬로 어떻게 찍어누른다 해도, 이쯤 되면 그게 불가능하니까. 부상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내가 혼자였다면. 푸욱! 수풀 사이에서 쏘아진 화살이 고블린 한 마리의 미간을 꿰뚫는다. 에르웬이 다시 저격 포지션을 잡은 모양. 타닷! 나는 구르는 반탄력으로 재빠르게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패를 들고 적진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그야 전사가 어그로 끄는 건 당연하잖아? “새끼들아! 다 덤벼!” 방패로 막고, 망치를 휘두르고, 피하고, 발로 밀어내거나, 머리로 박치기를 하는 등. 들끓는 바바리안의 피와 줄타기하며 고블린 진형 한복판에서 날뛰는 사이, 재차 포지션을 잡은 에르웬이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냈다. 휘이이잇, 푹! 푹! 푹! 2초 내지 3초마다 쏘아지는 화살에 고블린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그륵!!” 조금 서두르는 탓인지, 늘 화살이 급소에 꽂히는 건 아니었지만……. 푹! 어깨, 팔, 배, 가슴, 허벅지 등 어딘가에는 반드시 명중한다. 어떨 땐 정령의 힘까지 불어넣었는지 확 하고 불이 붙어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나 역시 이에 지지 않게끔, 화살을 경계하느라 이도 저도 못하는 고블린 새끼들의 대갈통을 하나씩 망치로 부쉈다. 퍽! 퍽! 이내 고블린의 숫자가 둘까지 줄어들자, 고블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미친 듯이 뛰어서 머리끄댕이를 잡아챈 내가, 다른 하나는 에르웬이 뒤통수에 화살을 꽂아 넣어 처리했다. 「고블린 검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전투 상황이 종료되자 수풀에 숨어 있던 에르웬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아저씨, 다친 데는 없으세요?” “괜찮다. 너는 어떤가?” “저도 마찬가지예요.” “됐다. 그럼 마석들을 수거하지.” 이후 우리는 둘로 나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화살과 마석을 주웠다. 난전 중에 고블린 검사도 쓰러트렸지만, 시미터를 획득한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1층에서처럼 입고 있던 옷과 무기들도 함께 빛이 되어 사라진 탓이다. “여기 여섯 개요.” 그렇게 에르웬이 기습해서 죽인 두 마리 분까지 합쳐 수확한 마석은 총 11개. 1일 차에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마흔네 개의 소득을 올린 걸 생각하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전투 시간만 따지면 2분 남짓도 안 됐으니. “자, 받아라.” “2개나요? 감사합니다!” 내가 9개를 갖고 에르웬이 2개를 가졌다. 같은 9등급이더라도, 일반 고블린보다는 검사의 것이 좀 더 중량이 높다는 걸 감안한 배분.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죠?” “그래, 혹시 이번 전투에서 불편하다거나 위험하게 느껴졌다거나 한 게 있었나?” “아뇨, 딱히 없었어요.” 이후 나는 전투를 복기하며 전투 방식의 개선점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당장은 딱히 고칠 점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는 아직 우리들이 미숙하단 증거겠지. 전투 횟수가 늘고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좋아, 그럼 여기까지 하고 계속 이동하도록 하지.” “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01 : 31] 4일 차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소득을 올릴 수 있으려나? *** 우리들은 포탈을 중심으로 반경을 확장하는 식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3km 넘게 반경을 늘린 후로는 정말이지 5분에 한 번꼴로 고블린 무리와 조우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블린 궁수도 만났다. “키키키키!” ‘그륵’보다는 조금 더 개성적인 소리를 내는 고블린 궁수는 확실히 위협적인 상대였다. 하프를 연상시키는 작은 단궁을 무기로 사용했으며, 다른 고블린들처럼 무기인 화살촉에 독이 묻어 있었다. 심지어 은신 마법도 쓸 줄 알았다. 다만……. 「고블린 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집중만 하고 있다면 이 바바리안의 몸뚱이는 날아오는 화살에 반응해 피하거나 방패로 막는 게 가능했다. 뭐,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만. “고블린 궁수가 하나 더 있다! 먼저 해치워라!” “네!” 아무리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머리통에 화살이 꽂히면 즉사다. 도시로 돌아가면 투구부터 사던가 해야지. “잠시 쉬도록 하지.” “하! 드디어!” 한 번의 전투를 더 마무리 지은 우리는 포탈 근처의 공터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원한다면 먼저 자도 된다.” “정말요?” 얘는 정말 사양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공터에 털썩 앉더니 쉬 마려운 강아지처럼 나를 힐끔 바라본다. “저, 배낭이랑 담요는요?” “…여깄다.” 나는 한층 더 묵직해진 가방을 내려놓고는 담요까지 꺼내서 덮어 주었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로롱, 도로로롱-. 정통 바바리안 스타일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얌전한 소리지만……. 얘 진짜 피곤했구나. 지금까진 소리 하나 안 내면서 자더니. 음,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 걸지도. [18 : 20] 우리는 약 15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고블린 숲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다. 매번 열이 넘는 개체들과 싸워야 했지만, 익숙해질수록 위험한 상황은 줄어들었고,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다. 그 결과, 1층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하지만 긴장되는 순간이 없던 건 아니었다. “후…….” 반경이 넓어지다 보니 탐험가를 만나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주친 횟수는 총 열한 번. 전부 3인 이상으로 이뤄진 무리였고, 간혹 이종족들도 껴 있는 팀도 있었다. 전부 마주치자 관례대로 서로 거리를 벌리며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뭉텅이로 진이 빠졌다. 난 고블린보다 탐험가 새끼들이 더 무섭다. 지금은 특히나 경계할 이유도 있고. “얘가 너무 예쁜 것도 문제란 말이지.” 쿨쿨 자는 에르웬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노숙 중인데도 찰랑거리는 은발에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호박색 눈, 미인의 조건을 몽땅 갖춘 이목구비까지. 여자로서는 행운인 일이지만……. 탐험가로서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실제로 마주친 탐험가 무리 중, 에르웬을 보자마자 입술부터 핥는 새끼도 있었지 않나. 부디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그렇게 예뻐요?” 뭐야 씨발, 너 방금까지 코 골고 있었잖아. “자라.” “네에.” 잠결이었는지 에르웬은 대충 대답하고는 곧바로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드르렁, 드르렁. 진짜 뭐지 얘는? 내가 아는 요정은 이렇지 않았는데. *** 4일 차, 5일 차, 6일 차……. 고블린 숲에 들어선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내 7일 차가 시작됐다. 드디어 미궁을 떠날 날이 온 것이다. “돌아가면 일단 잠부터 잘래요…….” “동감이다.” 미궁을 떠나 도시로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 층계가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미궁은 해당 층에 있던 탐험가들을 도시로 뱉어낸다. 1층은 168시간, 2층은 좀 더 늘어난 240시간. 층수가 오를수록 미궁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나는 셈. 다만 우리는 7일 차가 끝나기 직전에 1층으로 내려가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오늘은 어제처럼 멀리 나가지 않고 근방에서만 움직이도록 하지.” “네!” 일찍 나가는 이유는 몇 있다. 1층이 폐쇄되면, 포탈 역시 사라진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퇴각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뜻. 또한 식량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다. 가끔 만나는 탐험가들에게 마석을 대가로 식량을 구매해 본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멀쩡한 화살이 이제 10발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재활용을 가정해 튼튼하게 만들어진 화살이라 한들, 소모품이기에 불가피했던 일. 애초에 지구의 나무로 만든 화살이었으면 몇 번 다시 쓰지도 못했겠지. 새삼 다른 세계라는 게 느껴진다. [22 : 27] 이후 한참 더 사냥을 이어 나가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혹시 모르니 이만 돌아가지.” “네!” 현재 우리는 포탈로부터 약 4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길어 봤자 40분이면 포탈에 도착한다. 물론 그러면 시간이 좀 남긴 하지만……. 늦어서 못 내려가는 것보단 일찍 가 있는 게 한결 마음이 편하겠지. 헤어지기 전에 얘랑 나눌 얘기도 있고. “조심하세요. 또 덫이 깔렸어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데, 어느샌가 또 숲에 덫이 뿌려져 있다. 고블린 무리들이 리스폰 됐다는 뜻이다. 뭐, 리스폰이라고 해서 게임에서처럼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는 건 아니었지만. 숲속엔 토끼굴같이 생긴 것이 자주 보이는데, 고블린들은 항상 거기서 기어 나온다. 그래서 한 번은 앞에서 대기도 해 보고, 에르웬을 이용해 불도 질러 봤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땅을 파도 금방 통째로 무너지는 바람에 밑을 확인하진 못했고. 터벅. 앞장서 걷던 에르웬이 걸음을 멈췄다. “1시 방향 약 70m 거리에 고블린 무리예요. 일반 여덟에 검사 둘, 궁수 둘이네요.” 이제는 얘도 익숙해졌는지 재차 질문할 필요가 없도록 완벽하게 브리핑을 해 준다. “싸울 거죠?” “싸운다.”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늘 그랬듯이 에르웬이 앞장서서 수풀을 헤치고 길을 열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날 멈춰 세우더니, 혼자 10m가량을 더 이동해 자리를 잡고 시위를 당겼다. 휘이이이이잇! 화살이 쏘아진다. 푹! 아마 명중한 것은 고블린 궁수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걔를 최우선으로 노리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아저씨!” “오냐, 너는 뒤로 빠져라.” 달려드는 고블린 무리에게 화살 한 발을 더 쏘아낸 에르웬이 뒤로 빠진다. 이젠 너무도 익숙한 바톤 터치. 나는 앞으로 달려들며 일반 고블린들 사이에 있던 검사부터 망치로 후려쳤다. 퍽-! 손맛이 좋은 걸 보니 두 번 때릴 필요는 없겠군. “와아아아아악!” 진형의 중심에서 포효하듯 외치자 고블린들이 주춤한다. 거, 새끼들 쫄기는. 퍽-! 고블린들이 멈칫한 찰나, 나는 빠르게 대시하며 나머지 검사 한 마리도 대가리를 터뜨렸다. “그르르륵!!” 하도 난전을 거듭해 왔더니 이런 개싸움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그건 에르웬도 마찬지였지만. 휘이이이잇! 푹! 벌써 자리를 잡았는지 본격적으로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한다. 합이 맞지 않을 때는 동선이 겹쳐 화살에 맞을 뻔한 적도 있으나, 서서히 그런 일이 사라졌다. 에르웬이 어떤 상황에 어떤 적을 우선시해서 어느 곳을 노리는지 대강 예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피차일반이긴 하겠다마는. 퍼억-! 1분 남짓의 시간이 지났을 때. 도망치려는 고블린의 뒤통수를 깨트리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앞서 고블린 궁수가 둘이라고 듣긴 했으나, 전투 중 화살이 날아오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아무래도 기습하며 쏜 처음 두 발이 전부 궁수에게 명중한 모양. “잘했다. 에르웬.” “히힛.” “그래도 궁수를 다 잡았으면 말은 해 줘라. 계속 신경 쓰려면 귀찮은 일이니.” “마지막 건 맞았는지 확신이 안 서서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얘도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왠지 뿌듯하다. “어서 챙길 것만 챙기고 이동하지.” “네!” 이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석을 줍고 있는데 에르웬이 다급하게 날 불렀다. “아저씨! 뭔가 신기한 게 있어요!” 얼른 가 봤더니, 허공에 주먹만 한 빛의 구슬이 둥둥 떠 있다. 그리고 난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정수군. 그것도 분명 고블린 궁수의.” 솔직히 보자마자 떨떠름했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저, 저, 정수요? 이, 이, 이게요?” “그래. 확실하다.” “어, 어, 어, 어떡하죠?” 얘의 반응만 봐도 알겠지만, 정수는 탐험가에게 있어 보물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정수야말로 [던전 앤 스톤]의 스킬 시스템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이, 이걸 먹으면 고블린이 되는 거예요?” “그럴 리가. 고블린이 갖고 있던 능력 중 일부분이 생길 뿐이다.” 예를 들자면, 1층에서 냄새로 우리를 추적했던 놈처럼. 아마 그때 그 추적자는 ‘칼날늑대’의 정수를 흡수했던 거겠지. “어떡하죠……?” 똑같은 질문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비율이 9:1이긴 하지만 쟤도 이건 욕심이 나나 보다. “갖고 싶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주신다면은 뭐어…….” 주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지만, 왠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듯한 건 착각일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속 하나만 한다면 너에게 정수를 주겠다.” ‘고블린 궁수의 정수’는 바바리안인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물건이 아니다. 당장은 약간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흡수 가능한 정수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훗날 삭제하려면 괜히 큰돈만 나갈 터. “…정말요?” “그래.”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정수는 몬스터를 사냥 시 극히 낮은 확률로 드랍된다. 그런데 초행에 일반 고블린도 아니고 고블린 궁수의 정수가 나오다니? 초심자의 행운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운이 좋았다. 이제야 내 기구한 팔자가 좀 피려는 걸까? “원래는 1층으로 내려가 말하려 했지만 지금 말하겠다. 에르웬—” “어이, 너네들! 지금 뭔 개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제기랄,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에르웬에게 한 가지를 약속받으려는 차, 멀리서 외침이 들려온다. “움직이지 마라!” 총 4명으로 이뤄진 인간 탐험가 파티. 그들이 멀리서 우릴 발견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힌다. 솔직히 말해, 그럼 그렇지 싶었다. “아, 아저씨?” 이게 올바른 수순이다. 운이 좋았다고? 그럴 리가. 난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달랐다. 내게 있어 행운이란, 언제나 직접 쟁취해야지만 겨우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에르웬, 싸울 준비를 해라.” 바로 이렇게. 14화 귀환 (1) 에르웬이 긴장한 얼굴로 화살을 집어 든 순간. 나는 그녀를 앞으로 툭 밀었다. “에?” 돌연 등이 떠밀려진 에르웬이 한 걸음을 툭 내디뎠고, 이 과정에서 허공에 떠 있던 정수와 살이 맞닿았다. 솨아아아아아-! 정수가 빛을 뿜어내며 에르웬의 몸속으로 휘감겨 들어간다. “이런, 미친 새끼가!” 역시 저 새끼들 목적도 이거였군.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테!” 이내 네 명으로 이뤄진 탐험가 무리가 10m 거리 앞에 도착했다. 근데 이걸 어쩌냐. 이미 정수는 얘가 먹어 버렸는데.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며 위압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왜 너희 말을 들어야 하지?” “그 정수는 우리 것이었다!” 에르웬에게 정수를 먹이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대충 그려진다. 아마 억지를 부리며 내놓으라 했겠지. 저 멀리서 우리가 화살로 잡은 거라거나, 뭐 이유야 붙이면 어떻게든 되니까.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넷과 둘. 수적 열세인 상황이지만 나는 도리어 강하게 대응했다. 소형견이 요란하게 짖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으니까. 사람은 짐승과 같아서 얕보이면 물어뜯긴다. “…….” 상대 무리의 대표로 보이던 빨간 머리가 말없이 이를 악문다. 하기야, 지도 생각이란 걸 하겠지. 정수가 허공에 남아 있다면 모를까. 이미 주인이 정해졌는데, 굳이 우리들과 싸워 봤자 얻을 게 없다. 그러니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는 게 현명— “…보상을 요구한다.” 징징거려 보기로 한 거냐. 눈앞에서 정수가 보였다가 사라지자, 얘도 아쉬운 마음이 컸나 보다. 내가 고려해 줄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가 획득한 정수를 우리가 챙겼는데 대체 무슨 보상을 말하는 거지?” “증거가 있나? 방금 그 고블린은 우리가 사냥한 것이었다.” ‘그러는 너는 증거가 있냐?’라는 질문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미궁 속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힘을 가진 놈 말이 진실이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나는 피하지 않는다.” 나는 여지없이 완고하게 대응했다. 덤빌 거면 덤비고, 말 거면 억지 부리지 말고 꺼지라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셋을 주지. 그전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아, 아저씨……?” 얘는 왜 분위기 파악을 못하니. 가만있으렴. 지금 강하게 나가니까 쟤네 다 잔뜩 쫄은 거 안 보여? “셋.” “둘.” “물러가겠다.” 하나를 세기 전에 놈이 선택을 내렸다. 하긴, 나였어도 이만한 문신 떡대 바바리안이 숫자를 세고 있으면 저럴 거 같다. 진짜 자기 게 뺏긴 거였으면 억울한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복수하려 들었겠지만……. 그게 아니란 건 본인들이 더 잘 알 테니. 이내 놈들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갔나?” “네. 그런 거 같아요.” “포탈에 도착할 때까지 속도를 올리겠다. 앞장 서라.” 내 말에 에르웬은 군말 없이 달리는 수준으로 길을 뚫었다. 본인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유혈사태 없이 지나갔지만,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라는걸. “놈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요. 아, 3시 방향에 고블린 무리가 있는데 어떡하죠?” “무시한다.” “네.” 원래는 느긋하게 고블린들을 사냥하며 돌아가려 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최대한 빨리 2층을 벗어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1층에 내려가서도 포탈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내 계획을 들은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1층까지 따라올까요?” “따라오는 게 아니다. 그저 행선지가 같을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간단한 추측이다. 놈들은 네 명이서 파티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이면 2층 초입부에서 활동하기엔 제법 넉넉한 숫자. 그런데 외곽이 아니라 초입부를 향해서 움직인다? 의도가 뻔하다. “아마 놈들도 7일 차에 1층으로 내려가 도시로 돌아갈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이곳에서 마주쳤겠지.” “아…….” 쉽게 말해 놈들은 우리처럼 2층에서 간만 보던 어중이떠중이란 얘기다. 그러니까 숫자가 2배나 되면서 나한테 겁먹고 도망쳤겠지. 어쩌면 제대로 된 파티도 아니고, 그저 1층에서 우연히 만나 급조된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구나…….” 내 이어진 말에 에르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아저씨는, 대단하시네요!” …못했지 너? “저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만 할게요!” 뭐,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는 놈들이 오히려 더 사고를 많이 치니까. “아저씨, 고블린이에요!” “피해 간다.” “그치만, 이미 저쪽에서 우리를 발견한 거 같은데요? 지금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어요!” “뭐?” 얘기를 듣자마자 이질감이 느껴진다. 4일 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블린이 우리를 먼저 발견한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에르웬의 감지 능력은 탁월했다. 아무리 그때와 달리 뛰어가며 이동하고 있다고 한들, 이게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다. 심지어 얘는 지금 정수까지 흡수한 상태 아닌가. “일단 반대 방향으로 우회한다.” “네!” 내 지시에 에르웬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휘이이익! 꺾은 방향으로부터 화살이 쏘아진다. 나는 발견과 동시 에르웬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켁!” 기도가 강하게 압박된 탓에 에르웬이 신음을 뱉었지만……. 잠시 목이 졸리는 게 나을 것이다. 목이 꿰뚫리는 것보단. 쾅! 에르웬을 끌어안으며 방패로 상체를 가린 즉시, 화살이 내 방패에 튕겨져 나간다. 빗겨맞았는데도 제법 묵직하다. 아까 그 석궁을 들고 있던 새낀가? “제, 제가… 알아서 피, 피할 수…….” 에르웬이 켁켁거리면서 뭐라 말을 한다. 미안하지만 들어줄 시간은 없다. “있었는…….” “일단 뛰어라.” 나는 다시금 에르웬을 앞세우고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 혹시 또 화살이 날아오면 굳이 그렇게 잡아당기실 필요는…….” “조용히 해라. 생각 중이니”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에르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뛰는 한편 생각을 이어 나갔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놈들이 고블린을 유인했다. 그리고 반대 방향에서 매복하며 우리를 쌈싸먹으려고 하는 중이다. 이대로 마냥 도망친다고 포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가능성을 점쳐 봤지만, 지극히 낮게 판단됐다. 저쪽엔 석궁수가 있다. 고블린들도 계속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운이 좋으면 살아서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적어도 그 운 좋은 놈이 나는 아니겠지. “싸워야겠군.” 숨 몇 번 가다듬을 시간. 그 안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에르웬, 이능을 사용해라.” “이능요?” “정수의 힘을 쓰라는 거다.” 몬스터가 드랍하는 정수에는 각 개체가 지닌 특수 능력이 담겨있다. 예를 들자면, [고블린 궁수] 민첩성+2 유연성+4 시각+6 후각+2 인지력+2 인식방해+6 명중률+8 독내성+4 집착+7 (P) 독화살 — 활류 무기를 사용 시, 독 데미지를 부여합니다. (A) 도둑걸음 — 은신 상태를 얻습니다. 게임에서는 이렇게 정보가 표기됐다. 스탯 증가와 패시브 하나, 액티브 하나. 이 정보는 이쪽 세상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악령, 스타트 포인트 등, 지금까지 몇몇 변수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항상 게임과 일치했으니까. “그, 그치만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데…….” 무리한 요구를 듣고서 당황하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됐군.” “됐다니요?” “은신 상태가 됐다는 뜻이다.” 뛰고 있는 에르웬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래봤자 미약한 정도라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지만……. “멈춰 봐라.” 걸음을 멈춰세우자 은신 효과가 강해진다. 게임에서 캐릭터가 느릿느릿 움직이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가만히 선 채로 시간이 흐르자 반투명을 넘어 거의 투명해졌다. 윤곽선에서 명확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근접 거리가 아니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어두운 숲에서야. “와아…….” 에르웬이 자기 몸을 보며 감탄사를 뱉는다. 신기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쟤랑은 포인트가 좀 다르긴 하겠다마는. 시동어나 그런 게 아니라, 의지에 반응해 스킬이 발동되는 메커니즘이구나. 아무튼, 이건 나중에 더 자세히 연구해 보자. “에르웬. 이걸 받아라.” “네?’ 나는 에르웬에게 배낭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석궁수부터 쏴 죽여라. 절대 그전에 나서면 안 된다. 알겠나?” “그게, 무슨 말씀…….” “시간이 없다. 알아들은 걸로 알지.” 나는 할 말을 얼른 끝마치고서 곧장 뛰기 시작했다. “잠깐만, 신호! 신호는 어떻게—!” 뒤에서 작게 소리치는 게 들려왔지만, 돌아가기엔 리크스가 많았다. 터벅. 원래 위치에서 약 30m가량을 이동하고서야 나는 멈춰 섰다. 애초에 멀리 갈 생각도 없었다. 이렇게 뛰다가 수풀 속에서 덫이라도 밟으면 큰일이니까. “그륵그륵!” 뒤로 돌자, 전방 좌측에서 고블린들이 몰려드는 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씹새끼들은…….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첫 발을 막고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않는다. 이 새끼들이 하고 있을 생각이야 뻔하니까. “그륵, 그륵!” 고블린과 싸우고 있으면 먼저 나타날 거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고블린을 유인한 것일 테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는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살폈다. “그르륵!!” 열댓의 고블린 중 검사는 둘. 다행히 고블린 무리 중에 궁수는 없— 깡! 있구나. 방패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나는 고블린 무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이전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고블린 궁수는 물론이고, 인간 석궁수까지 날 노리고 있을 테니까. 깡! 약 10초 정도의 텀을 두고 한 번 더 화살이 날아든다. 이번에도 고블린 궁수의 것이다. 깡! 화살을 방패로 막아 낸 나는 시미터를 휘두르는 고블린 검사의 대갈통을 박살 냈다. 그 대가로, 다른 고블린에게 조각칼로 다리가 살짝 찔리긴 했지만……. 푸슉.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한다. 고블린의 숫자가 줄어들어야지만, 놈들도 조급함을 느끼고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퍽! 퍽! 퍽! 그야말로 바바리안에 빙의해서 고블린들을 때려잡고 있자니, 점차 부상이 늘어난다. 팔뚝, 허벅지, 옆구리 등등. 하나하나 살펴보면 중상은 아니지만 이만큼 쌓이니 무시할 수는 없다. 퍽! 독까지 돌기 시작했는지, 부상 부위들로부터 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수하고 총 7마리의 고블린을 해치웠을 때. 휘이이이잇! 화살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무려 두 개씩이나. 휘이이이잇! 방향도 달랐다. 하나는 고블린 궁수의 것이고, 하나는 석궁수의 것이겠지. 둘 다 막는 건 어렵다. 나는 측면에서 날아드는 석궁수의 화살을 방패로 막는 걸 선택했다. 쾅! 고블린 궁수와는 소리부터가 다른 묵직함. 과연, 이게 석궁의 위력인가? 그런 생각이 들던 차, 푹! 소리를 내며 고블린 화살이 왼쪽 팔꿈치에 박힌다. “씨입.” 아프다. 뼈까지 닿았나? 아픈 것도 아픈 건데, 화살 한 발 맞았다고 팔이 아예 안 움직인다. 씨바, 이쪽은 어떻게든 어깨 보호대로 흘려내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구나. 툭. 나는 미련 없이 오른손에 쥔 망치를 버렸다. 그리고 못 쓰게 된 왼손에 쥐어진 방패를 들었다. 망치와 방패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무조건 방패 쪽이 좋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욱더. 퍽! 퍽! 퍽! 한 손에 쥔 방패로 셋만 남은 고블린을 후드려 패니, 일단 당장은 주변이 정리됐다. 고블린 궁수도 튀었는지 화살도 멈췄다. 상처투성이의 1라운드 승리긴 하지만 어쨌든 버텨 낸 셈인가? 나는 외쳤다. “나와라! 씹새끼들아!” 내가 이 말을 고블린이 아니라 사람한테 할 줄은 몰랐는데. 하긴, 뭐 다를 것도 없나? 휘이이이이잇! 나오란 놈은 안 나오고 저 멀리서 화살이 쏘아진다. 인간 석궁수의 것이다. 예상했기에 막는 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쾅! 씨바, 뭐야. 정통으로 맞았는지 화살이 철판을 꿰뚫고 촉을 드러낸다. 잘못하면 이쪽 손도 씹창이 나겠는데? 방패로 상체 쪽을 가리며 수풀 너머를 경게하자 머지않아 인기척이 들려왔다. “바바리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명이었다. 리더로 추정되는 빨간 머리. 일본도 같은 외날 검을 쥔 사무라이. 한 손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멀대. 석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역시 너희들이었군.” “그래, 우리들이다.” 어떻게 고블린을 유인한 거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더 깔보일 게 분명하니까. “덤벼라.” “역시 바바리안이라는 건가? 혼자 그 많은 고블린을 상대하고서도 기운이 넘치는군. 그 요정년은 어디 있지?” 말이 많다 싶더니, 역시 이게 목적이었구나. “배낭도 넘겨준 거 같은데, 아픈 꼴을 보기 싫다면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해주면 순순히 보내 주겠다니, 누구를 호구 병신으로 아나. “미친놈.” 실실 쪼개는 날 보며 리더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어딘가 질린 듯한 표정. 아무래도 저놈 눈엔 내 모습이 정석적인 바바리안처럼 보인 모양이다. “일단 제압부터 하고 천천히 물어봐 주지.” 리더가 동료들과 눈빛 교환을 하더니 다 같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온다. 생포라……. 듣던 중에 반가운 이야기다. 하기야, 나 하나 죽여 봤자 수지가 안 맞겠지. 굳이 기습을 한 것엔 여러 이유가 있을 테니까. 우리가 7일간 모은 마석, 착용한 장비, 어여쁜 외모를 소유한 에르웬, 그리고 코앞에서 목도한 남의 행운에 배가 더 안 아파도 된다는 것까지. 새삼 느낀다. “다들 방심치 말고, 대형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생각해라.”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효율충이 너무 많구나. 뭐,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자란 것이겠지만. 스륵.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에 화살이 박히고, 이젠 마비독까지 돌기 시작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왼손을, 억지로 머리 위까지 올려세웠다. 그리고……. “무슨 짓이지?” 가운데 중지 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렸다. 휘이이이이잇! 이 세계에서 살아온 그 누가 봐도 특이한 신호라고 여길 수 있게끔. 푹-! 이내 섬찟한 소리가 숲가에 울려 퍼졌다. 15화 귀환 (2) “페르시? 페르시!” 리더가 다급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내가 에르웬에게 내린 지시는, 무조건 석궁수부터 쏴 죽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대체 뭔 짓을 했지?” 그제야 리더가 내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서도 스스로 예상가는 게 있는지, 내가 아닌 뒤쪽을 경계했다. 이는 아주 큰 실수였다. 난 답을 정해 놓고 질문하는 새끼를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스매쉬! 리더의 시선이 잠시 수풀로 향하던 찰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대쉬하며 방패를 휘둘렀다. 후웅! 애석하게도, 손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피하다니, 고블린이었으면 영락없이 그걸로 세상의 빛이 되어 사라졌을 텐데. “일리스! 지금이다!” 리더가 호명하자 사무라이가 내게 대쉬하더니, 절도 있는 자세로 횡베기를 시전했다. 카칵! 방패에서 불똥이 튀는 소리가 난다. 미친, 뭐지 이 충격은? 하마터면 방패를 놓칠 뻔했다. 다만 놀란 것과는 별개로, 나는 도리어 셋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선을 분산시켜 에르웬에게 보다 확실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후웅! 또 한 번의 스매쉬가 빗나간다. 꼴에 2층 탐험가라 그런가? 이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처음으로 방패의 리치가 짧은 게 유난히 거슬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는 거리를 좁히며 호전적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휘이이이잇! 드디어 에르웬의 지원 사격이 시작된 것. 다만 쏘아진 화살은 미간도 목도, 다리나 팔에도 맞지 않았다. 검과 방패를 소지한 멀대 새끼가 방패로 막아 낸 탓이다. “화살은 내가 막겠다! 신경 쓰지 말고 바바리안을 상대해라!” 어쩐지 지 혼자 안 덤비더라니. 아예 화살만 전담하기로 한 건가? 역시 인간은 고블린에 비해 너무 까다롭다. 쾅! 사무라이의 일격을 방패로 받아내던 차, 리더가 얍삽하게 검을 휘둘러 내 왼팔을 노려왔다. 서걱-! 다행히 제때 반응해 깊진 않진 않다. 베이긴 했지만 이미 망가진 팔이라 그다지 의미도 없고, 마비독까지 돌고 있어서 크게 아프지도 않다. “이런, 괴물 같은…….” 팔이 베이고도 움찔하지도 않는 내 모습에 리더가 중얼거렸다. 씨바, 어디서 내 핑계야. 지가 시원찮은걸.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방패를 밀어내며 힘으로 사무라이를 튕겨 냈다. 그때 다시 한번 지원 사격이 쏘아졌다. 휘이이이이잇! 그새 저격 위치를 바꾸기라도 했는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으나 멀대도 만만치 않았다. 타악! 멀대가 다시 한번 방패로 화살을 막아낸다. 지가 무슨 외야수야? 다른 새낄 노린 걸 굳이 지가 몸까지 던져 가며 막는다. 쉽사리 진전될 기미가 없는 전황에 속이 타기 시작하려던 차. 화르르륵!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힌 방패가 빠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씹!” 이내 뜨거움을 참지 못한 멀대가 자기 손으로 방패를 집어 던졌다. 미안, 우리 궁수는 정령궁수라서. 그러게 나처럼 통짜 철판 방패를 썼어야지 거지새끼야! 휘이이이이익! 성가시던 방패가 사라지자 에르웬도 서슴없이 다시 화살을 쏘았다. “아아아악!” 명중한 곳은 멀대의 어깨. 이내 멀대는 쥐고 있던 검까지 놓치며 쓸모없는 새끼로 전직했다. “일리스! 요정년은 내가 처리하마!”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리더가 사무라이에게 나를 맡기고는 수풀로 달려갔다. 잡기엔 이미 늦었다. 제기랄……. 에르웬을 믿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만 포기해라 바바리안.” 사무라이가 뒤로 물러서더니 위엄 있게 말한다. 역시 인간은 이래서 엿같다. 어디서 훼이크질이야? 리더가 올 때까지 시간 벌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데. 타닷! 내가 앞으로 대쉬하며 스매쉬를 사용하자 사무라이의 인상이 구겨진다. “왜 혼자서는 쫄리냐?” “혼자가 아니다!” 질문은 사무라이한테 했는데, 대답은 멀대가 하면서 일어선다. 왼손에는 아까 놓친 한 손 검이 쥐어져 있다. 그런데……. 후웅! 오른손잡이여서 그런가? 칼질이 영 시원찮다. 방패 하나는 기똥차게 다루더니, 뭐 이리 매가리가 없어? 퍽!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깔끔하게 멀대의 공격을 회피한 나는 멀대의 무르팍을 발로 내리찍었다. 멀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어, 그게 그렇게 꺾일 줄은 몰랐는데. 무르팍으로 튀어나온 뼈 부근을 양손으로 잡으며 멀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예 이 기회를 이용해 멀대를 마무리해 볼까도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사무라이 덕분에 무산됐다. 카칵! 몇 번을 막아 내도 적응되지 않는 묵직함. 얘는 왜 이 좆밥들이랑 다니지? 사연이라도 있나? 모르겠지만, 그게 이 새끼 인생에서의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다. 후웅! 내가 스매쉬를 사용하자, 사무라이가 익숙하게 거리를 벌리며 피해 낸다. 그 즉시, 나는 방패를 버리고 한 번 더 대쉬하며 손을 뻗었다. 이름하여… 스매쉬인 척하면서 손 뻗기. 이제 이름 짓기도 귀찮다. 재밌지도 않고. “컥!” 목덜미를 잡힌 사무라이의 표정에 당혹이 어린다. “이건 예상치 못했나 보지?” 나는 넘치는 힘으로 사무라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는 왼팔 대신 입으로 사무라이의 목을 덥석 깨물은 다음— 뜨드득-! 뜯어냈다. “아, 아, 아아…….” 사무라이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멍한 눈빛으로 분수처럼 피를 쏟아내는 목을 양손으로 막으며 뒷걸음질 치더니……. 툭,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저쪽도 혼자 알아서 해치운 건가? 전투가 종료되기가 무섭게 에르웬이 헐레벌떡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 씨?” 나는 입안에 가득한 고깃덩이를 바닥에 뱉으며 팔로 입을 쓰윽 닦았다. 씨바, 존나 비리네. *** 힘겹던 전투가 끝났다. 아니, 나 혼자만 그렇게 느꼈나? 에르웬은 다행히 접근전까지 가기도 전에 끝냈는지 헤어질 때처럼 멀쩡한 행색이었다. 그에 비해 난 완전히 걸레 조각이 돼 있었고. “아저씨! 얼른 이거 마시세요.”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무릎 꿇은 내게 에르웬이 포션을 들이밀었다. 꿀꺽, 꿀꺽, 꿀꺽……. 사약을 마시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포션 한 병을 싹 비웠다. 독도 독이지만, 한 곳에 집중된 상처가 아니기에 마시는 쪽이 낫다는 게 에르웬의 설명. 아무튼, 한 병을 통째로 비워서일까? 평소와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끄으으으윽.” 내장에서 뭔가가 끓어오른다. 혈관을 타고 작은 밤송이가 통통 튕기며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피부는 뜨거울 정도로 가려워 미칠 거 같았다. 그런 시간이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아저씨, 힘내세요.” 에르웬은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몸을 이전의 손수건으로 하나하나 닦아내 주었다. 독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더러워서? 모르겠지만, 하얗던 손수건은 완전히 새카맣게 변했다. …나중에 새로 사 주던가 해야지. “됐다. 이제 괜, 찮다.” 조금은 살만해진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내려다보니, 베이고 찔린 크고 작은 부상들 위로 딱지가 앉은 게 보인다. 포션 한 병을 더 까잡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여긴 흉지겠네요…….” 흉터야 남으면 어떤가, 나는 바바리안인데. “물.” “네, 네! 여기요.” 말 한마디에 에르웬이 잽싸게 가방을 뒤져 수통을 꺼내 주었다. 마치 상전이라도 된 기분. 꿀꺽꿀꺽, 한 병을 전부 마시자 기운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이 이렇게 맛있었나? 어느샌가 온몸에 도드라져 있던 핏줄들도 가라앉았다. “시계 좀 꺼내 줘라.” 에르웬의 도움을 받아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23 : 20] 젠장, 쉴 시간도 주질 않는구나. 7일 차가 종료되기까지 딱 40분이 남았다. 그때까지 1층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이 빌어먹을 곳에서 3일을 더 보내야 한다. “에르웬, 옷을 벗겨라.” “네, 네?” 아니, 너 말고 쟤네들. 뭐라 할 기운도 없어 손으로 시체들을 가리키자 에르웬이 앞깃을 여미던 손을 풀었다. “아니, 옷은 내버려둬라. 시간이 없으니 장비와 마석주머니, 배낭 정도만 챙기도록 하겠다.” “네, 네!” 시간이 없단 걸 아는지 에르웬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아, 그 빨간 머리 아저씨 거랑 석궁 아저씨 것도 챙겨서 올게요!” 그래, 덫 밟지 않게 조심하고. 에르웬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사무라이, 멀대의 장비를 벗겼다. 가슴 보호대, 사무라이가 쓰던 검, 숯이 되어 버린 나무 방패는 버리고……. 장비 분류가 끝나자, 대충 쫙 견적을 내린 뒤 비싸 보이는 것만 골라서 루팅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낭에 닥치는 대로 욱여넣고 있자니, 때마침 에르웬이 도착했다. “으…….” 배낭 2개를 짊어진 것이 꽤 무거워 보인다. 근데 미안, 난 3개라서 들어줄 수가 없어. 이내 나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23 : 35] 이젠 25분밖에 남지 않았다. “뛰자.” “괜찮으시겠어요? 지쳐 보이시는데…….” “신경 쓰지 마라.” 에르웬은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내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었다. 그렇게 강제로 마라톤이 시작됐다. “어떻게든 따라갈 테니, 최대한 속도를 올려서 길을 열어라.” “네.” 나는 에르웬을 먼저 앞에 보내놓고, 페이스 조절을 하며 계속해서 뛰었다. 정신적 피로감 때문인지 묘하게 몸이 무겁다. 아니, 그냥 이 배낭들 때문인가? …그래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보상은 있어야지. 그게 정의로운 세상 아니겠는가. “후우, 후우, 후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저 멀리서 포탈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에르웬은 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응원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담긴 표정이 무슨 청춘 만화 여주인공 같았다. 씨바, 이러니까 무슨 나 혼자 남겨질 거 같은 분위기네. 왠지 불안해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먼저 들어간다!” “엣, 저, 저도요!” 만화가 아닌 현실답게, 감격의 포옹 따위는 과감히 생략하고 포탈에 들어섰다. 번뜩-! 터져 나온 광채는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빛이 나를 감싸 안아주는 기분이 들었다. *** 1층으로 돌아온 소감은 2층에 진입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의 뱃속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 “꺄앗!” 애석하게도, 그때와 결과마저 일치했다. 아니, 더 안 좋은가? 쿵-! 나는 거의 머리채 잡혀 내팽개지듯 던져진 반면, 에르웬은 이번에도 멀쩡하게 착지했다.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2층에 던져질 땐 그래도 하늘로 붕 뜨며 포물선을 그리기라도 했지, 이번엔 야구로 치면 거의 직구나 다름없었지 않은가. 제기랄, 뼈마디가 쑤신다. “이거 뭔가 재밌네요!” 응, 그렇겠지. 나라도 옆에 나 같은 놈이 있으면 웃길 거 같거든. “후…….” 뻐근한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23 : 58] 진짜 아슬하게 세이프구나. 운이 좋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럼 하늘을 원망할 일이 너무 많아질 테니까. 잘 되면 내 덕분, 잘 안 돼도 내가 못한 탓.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잠깐만, 뭔가 까먹은 기분인데……. “전리품 분배!” “아, 맞다! 정수!” 나와 에르웬은 동시에 생각이 났다는 듯 외쳤다. “정수?” “네! 아까 뭘 약속해 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래 그것도 있었지. 이제야 나는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다. 나는 재빠르게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23 : 59] 초침을 보니 약 15초가 남았다. 나는 얼른 시계를 닫고 고개를 들어 에르웬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그… 이름이 뭐였지? 블랙 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검은고래! 검은고래 주점에서 만나자!” “네!” 내 다급한 외침에 에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심해도 좋을 거 같—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아 씨바, 시간을 안 말했구나. 16화 귀환 (3) 빛이 눈앞을 뒤덮고, 그보다 옅은 빛이 얹어지며 시야가 돌아온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밝은 빛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뭐, 그래 봐야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었지만. “데릭, 숙소로 돌아갈 건가?” “한 달 만에 나왔는데 그럴 리가. 씻고 나면 바로 주점으로 갈 거다.” “돌아왔다아아아아!!” “7등급 이하 탐험가들은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변은 시끄럽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미궁에 들어선 탐험가들 전부가 한곳에 몰리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도시에 탐험가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무슨 월드컵 때의 광화문을 보는 거 같네. 딸각, 딸각. 나는 시계를 조정해 12시로 맞추었다. 미궁에 들어가도 도시에선 하루밖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건 밖에 나왔을 땐 다음 날 정오다. ‘게임을 할 땐 그냥 제작자의 배려 어린 세계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면 미궁에 갔다 와서도 도시에서 진행되는 퀘스트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유저를 위한 편의인 줄 알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누구지? 익숙한 목소린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와 눈높이가 비슷한 바바리안 한 명이 보인다. 첫 리더라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눈의 두 번째 아들 카락.” “파눈의 세 번째 아들이다.” 뭐지? 그럼 아이나르가 두 번째인가? 아무튼 이러한 인파 속에서도 키가 큰 바바리안끼리는 서로를 발견하는 게 쉬웠다. “케닉의 넷째 아들 세룸! 너도 살아서 돌아왔군!” “그러는 너도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 진짜로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바바리안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하! 칼날늑대도 별거 아니더군! 내 도끼를 한 방 넘게 버티는 놈이 없었다!” “너의 용맹한 도끼질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네룬의 아들 파르만!” 무슨 동창회인가? 순식간에 정신이 없어졌다. 쉴 새 없이 저 기다란 이름들을 부르면서 인사를 해대고, 서로의 무용을 칭찬하는데. 얘네들도 진짜 신기하다. 머리는 나쁜 거 같은데, 어떻게 저 긴 이름은 잘만 외우고 다니는 거지? “비요른! 뭐 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이제 마석을 바꾸러 갈 것인데, 같이 안 가나?”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최대한 우렁차게 답했다. “아, 가겠다!” “꽤 지쳤나 보군!!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렇다!” 그동안 바바리안 연기를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감이 사라진다. 네이티브는 다르구나. “저기 있다!” “전사의 용맹을 증명하는 곳!” 이내 바바리안들 무리에 섞여 움직인 나는 자연스레 탐험가로서의 절차도 밟을 수 있었다. 별건 아니고, 검문소에서 마석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24,476스톤입니다.” “28,420스톤입니다.” “41,498스톤입니다.” 무슨 마트 계산대 같다. 손이 빠르다는 점에서 특히나. 탁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공무원들은 정말 신속 그 자체였다. 그들은 바코드 찍듯 마석 주머니를 어딘가에 올리고 숫자가 나오면 기계처럼 돈을 꺼내 줬다. 조금 신기한 마음에 그걸 보고 있자니, 주변의 야만인들이 또 창피한 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수다를 떨었다. “오오오! 4만 스톤을 넘게 벌다니, 과연 대단하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은 전사 중의 전사다! 후, 요정이랑 며칠 살다 와서 그런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나저나 에르웬 얘도 찾아야 되는데……. 왜 찾는 애는 안 오고 이런 애들만 온 거지? 난 진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제 네 차례이다!” 한숨을 쉬고 있는데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영혼이 없어 보이는 공무원 앞에 주머니를 내려놨다. “주머니 3개 모두 마석입니까?” 다른 두 개는 멀대와 사무라이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내 거다. 40분인가 전에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무원이 주머니를 저울 같은 곳 위에 올렸다. 그리고 정확한 금액을 읊어 줬다. “182,413스톤입니다.” 빵 한 조각에 20스톤 정도였으니, 7일간 9천 개가 넘는 빵을 획득한 셈인가? 고블린 한 마리를 잡고 빵 한 조각 벌었다며 서글픔을 느끼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왠지 감정이 복받친다. “18만 스톤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18만 스톤을 벌었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역대 최고의 전사다!” 이 새끼들은 감상에 젖을 시간도 안 주는구나. 나는 얼른 공무원에게서 돈을 넘겨받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근데 인파 속에서 나오자 그제야 내 행색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는지, 먼저 나온 야만인들도 주접을 떨기 시작했다. “스톤만이 아니다! 망치도 들고 있다!” “아니다, 신발까지 신었다! 부럽다!” “가방이 세 개다!” “시계를 본다! 혹시 시계도 볼 줄 아는 건가?" “어떻게 저게 가능한 것인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마법사인가?” 뭐, 저 반응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마법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겠지. 맨몸뚱이로 미궁 속에 들어가 문명인으로 진화해서 돌아온 바바리안은 내가 최초일 테니까! 씨바, 이거 칭찬이 너무 과하니까 몸뚱이가 제멋대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워워, 진정해 비요른. 나는……. “내가 바로 최고의 전사다!!” “와아아아아아!!!” 내 외침과 동시에 바바리안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고는 나를 들고 헹가레질하기 시작했다. 근데 놀랍게도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괜찮다. 뭐, 될 대로 되라지. “이곳에서 너무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미안하다! 사과하겠다!” “그러니까, 목소리를 좀…….” “알겠다!!” 끝내 직원이 와서 한 소리를 하고 난 후에야 광기가 잦아들었다. 그제야 나도 평정을 되찾고서 주변의 야만인들처럼 바닥에 앉아, 남은 야만인들의 검문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때였다. “…….” 웬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북적이는 탐험가 무리 사이로 한 요정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에르웬이다. 대체 언제부터 날 본 거지? 제발 헹가래가 끝난 다음부터였으면 좋겠는데……. “…….”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마주치자 에르웬이 반갑다는 듯 미소 짓는다. 다만, 옆에 있던 미남미녀 요정들이 말을 거는 탓에 금방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궁금해서 대화를 들어 보니 상당히 신선했다. 언니, 오빠거리며 조용히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는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언니! 이제 좀 정령을 다루는 방법을 알 거 같아요! 그린데린 할머니가 왜 그렇게 우선 친구가 되라고 했는지 이해된달까?” “어머, 그러니? 불의 정령은 제법 성질이 급한 구석이 있다고 하니, 너도 금방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란다.” 음, 너는 그쪽 사람이구나. 난 옆에 야만인 새끼들밖에 없는데. 부럽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비슷한 마음으로 에르웬 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입모양으로 때를 말했다. ‘오늘 밤.’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꺄르르 웃으며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네!’ 일단, 이 비밀 대화가 에르웬에게 있어 상당히 재밌게 느껴졌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근데, 쟤가 내 말을 이해한 건진 모르겠다. 애초에 ‘네’라고 답한 것도 맞긴 한가? 후, 검문소에서 나오면 제대로 대화를 해 보든가 해야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왜 저길 그렇게 보니, 혹시 아는 사람이니?” “아, 아니에요! 언니! 그럴 리가요!” 옆에 있던 요정 언니의 물음에 에르웬이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는 틈을 봐서 나를 힐긋하며 입모양으로 말을 건다. ‘미안해요!’ 이번엔 제대로 들은 듯하다. 이후 요정 언니를 몰래 가리키며 고개를 휙휙 내젓는 제스처도 곧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언니 땜에 어쩔 수 없었단 거겠지. 뭐, 피차일반인 상황이겠다마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 뭘 그렇게 보고 있나! 아는 요정인가?” “그렇지 않다!” “하긴 그렇겠지! 너 같은 역대 최고의 전사가 야비한 귀쟁이들과 아는 사이일 리 없다!” 이 새끼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도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요정들이 찌릿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중에는 에르웬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씁쓸한 눈빛으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하…….” 저 애절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현타가 찾아왔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뭔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가자!” 이내 바바리안들이 검문을 마치고 입구로 나왔다. 어차피 기다려봤자 요정들 사이에 있는 에르웬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할 듯했기에,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지겹게도 그 앞엔 또다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아빠! 다친 덴 없어요? 보고 싶었어요!” “형! 여기야 여기!” 음, 그래 게임에서도 이런 게 있긴 했지. 쉽게 말해 여기 있는 자들은 탐험가들의 가족 혹은 지인들이다. “가자! 내가 길을 열겠다!” “우오오오오!” 나는 바바리안들을 따라 수많은 반가움, 환희, 절망, 슬픔, 애정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인파 사이를 헤쳤다. 그러면서 그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리마리온! 제 남편은, 제 남편은 어디 있죠? 설마…….” “죄송합니다.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안 돼… 안 돼요. 안 돼… 아아!” [던전 앤 스톤]을 수도 없이 플레이해 왔지만. 모니터 너머 2D 그래픽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표정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 굳이 바바리안들과 함께 이동한 이유는 하나. 앞의 검문소처럼, 초심자가 이 도시에서 겪어야 할 절차가 더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술이다! 술을 마시자!” “우오오오오오오!”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야만인들이 향한 곳은 주점이었다. 장난하냐? “나는 빠지겠다.” “어째선가!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안 그래도 길던 이름에 수식어가 붙었다. 나는 참을 인 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갈 곳이 있어 어쩔 수 없다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무운이 함께하기를 빌겠다!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거듭 느끼지만, 도무지 상식을 기반한 예상이란 게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후, 드디어 조용해졌네.” 야만인들과 잠시 같이 있었더니 정신이 나갈 거 같다. 에르웬이 나랑 지냈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다음부턴 야만인 연기도 자중하든가 해야지. 터벅, 터벅. 그들과 헤어지고서 하염없이 도시를 누볐다. 목적지는 있지만 일단 당장은 마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평화롭다. 처음 이 도시를 보았을 때는 한밤중이었지만, 낮인 지금엔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놀랍게도, 그것이 내게 안정감을 준다. “…….” 이곳엔 몬스터가 없다. 나를 해칠 인간도 없다. 길바닥에 쓰러져 자도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게 건넬지도 모르고. 이곳엔 법과 규칙, 그리고 여유가 존재한다. 물론 머나먼 이세계고, 보이는 것과 달리 이들의 사상, 문화, 사회제도 등 거의 모든 게 21세기에 비하면 야만적이리란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화롭다. 적어도 내가 7일간 지냈던 미궁에 비하면. “…….” 그 안정감을 더욱 느끼고 싶어 계속 걸었다. 방금 전에 탐험가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인지, 피 칠갑을 한 내 모습은 딱히 튀지 않았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고. 하지만 계속 길을 걷고 있자니, 씻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보인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고 씻었다. 조금 신기했다. 사람 몸을 씻는데 땟국물보다 시뻘건 핏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게. “…….” 약 1시간에 걸쳐 성심성의껏 몸을 씻고 밖에 나오니,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제기랄, 옷이라도 사고 와서 씻을걸. 한숨 자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다시 거리로 나와 옷가게를 찾았다. 그런데 왜일까.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상의를 벗은 것도, 흙과 피로 얼룩진 바지를 입은 것도 전부 그대로인데, 아니, 오히려 몸만큼은 훨씬 깨끗해졌는데……. 나는 다시 야만인이 된 기분이었다. 대체 왜지? “어서오십시오!” 옷가게로 추정되는 매장에 들어서자, 친절하게 종업원이 다가온다. 거지꼴의 바바리안임에도 싱긋 웃고 있다. 이렇게 프로페셔널한 종업원은 서울에서도 별로 보지 못했는데……. “상의요? 혹시 주문 제작을 원하신다면 옆 건물에……. 아, 당장 입을 걸 찾으신다고요?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찾아보겠습니다.” 종업원의 도움으로 나는 터질 것처럼 꽉 끼는 셔츠 한 벌에, 검정색 천바지를 살 수 있었다. 가격은 합쳐서 2,500스톤. 바가지를 쓴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게임에서도 아무 기능 없는 옷 같은 건 사서 입어 본 적이 없어서. “다음에 또 오십시오!” 이제 제법 사람 같은 행색을 하게 된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마석을 환전해 주던 공무원을 봤을 때도, 방금 본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느꼈지만, 묘하게 현대적인 분위기를 뿜는 도시다. 이 라프도니아는. 건물들도 대부분이 석재로 만들어졌고, 층수도 전부 높다. 아니, 대로변에는 아예 3층 이하짜리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씻을 때 보니까 수도꼭지에서 물도 나왔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해볼 만한 일일지도 몰랐다. “…….” 이내 여관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7일간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리자니, 나 또한 한스 아저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살아남는 것만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결국 수없이 참아왔던 말을 뱉고 말았다. “집에 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그곳에 날 반기는 이가 한 명도 없을지라도. 17화 라프도니아 (1) 슬며시 눈을 뜬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건다. ‘어서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해.’ 앞으로 도시에서 해야 할 여러 숙제들을 떠올리니 덜 깬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해 보자. 일단은 시간을 확인했다. [21 : 18.] 미궁에서 나온 게 정오였으니, 이것저것 빼고도 대충 4시간가량은 잔 셈. 근데 침대에서 자서 그런가? 잠든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개운하다. 꼬르륵. 미궁에서 먹던 빵이 있긴 하지만 나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돈이 목숨이나 다름없는 세계지만……. 그 정도 사치는 괜찮겠지. “…….” 낮에 그렇게 씻고도 왠지 몸에서 냄새가 났던지라 한 번 더 빠르게 몸을 씻고 숙소를 나섰다. 터벅터벅. 낮에 비하자면 한산한 밤거리를 걷고 있자니 조금 갑갑했다. 심리적으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현재 내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셔츠는 중세풍으로 가슴이 파인데다가 소매와 목에 레이스 같은 것이 달린 것이다. 단추 대신 V 자로 깊게 파인 목 부분에 끈이 달려서 신발끈처럼 교차해 조이는 방식인데……. 줄을 전부 풀어놨음에도 작다. 바바리안들이 상의를 벗고 다니던 이유를 알겠다. 맞는 옷이 없어서였다. 이 얼마나 슬픈 종족인가? ‘…근데 어디로 가야 하지?’ 현재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약속 장소로 가서 에르웬과 만나는 것이다. 근데, 검은고래 주점이 어딘지 모르겠다. 미궁 포탈이 열리는 차원광장 기준으로 남쪽 지대에 있던 건 확실한데, 게임에선 도시 크기가 수만 배는 족히 축소돼 있던지라 이런 부분에선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검은고래 주점? 그런 데가 있었나?” “처음 들어 보는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어도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머리가 희끗한 어느 중년 아저씨는 달랐다. “검은고래 주점이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자네는 젊어 보이는데 거길 어떻게 아는가? 10년도 전에 사라졌을 터인데.” 젊어 보인단 말은 고맙지만 내용은 그리 반갑지가 않다. “…사라졌단 말인가?” “그래, 몇 대째 이어 오던 가게였는데 아들내미가 도박에 빠져 주인이 바뀌었지. 그러면서 이름도 달라졌고.” 미궁에서부터 간직해왔던 가설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 세계관은 이 시대로부터 과거의 시기인 건가? 그렇다면 ‘악령’이나 바바리안과 요정의 앙숙 관계 같은 것도 설명이 된다. 낮이 되면 도서관부터 가 보든가 해야지. “고맙다. 크게 도움이 되었다.” “허허, 자네처럼 깍듯한 바바리안은 생전 처음 보는 듯하군.” 이후 나는 토박이 아저씨와 헤어져 밤거리를 걸었다. 상호만 바뀌었지 여전히 주점으로 영업 중인 모양이었기에, 일단 가보기나 할 생각이었다. 에르웬도 그렇게 찾아와 줬길 바라면서. ‘파이든푸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발음은 읽을 수 있는데 뜻은 모르겠다. 이 세계에서도 고대어 같은 건가? 내 머릿속에 자연스레 들어온 언어 지식에 대해서도 한 번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흐하하하하하!”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새끼들아!” 들어선 주점 속은 내가 딱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탐험가, 음악, 너저분함, 담배연기, 가끔 보이는 이종족들까지. 입구에서 쓱 스캔을 하고 있는데, 구석 자리에 익숙한 은색 뒤통수가 보였다. 심지어 살짝 튀어나온 귀도 뾰족했다. 반가운 마음에 어서 가 보려는 차. 툭. 술에 취한 웬 좆밥 새끼 하나가 내 어깨를 치고는 먼저 통로를 지나간다. 뭐, 그것만이면 문제가 안 될 테지만……. “요정 아가씨들, 혼자 심심해 보이는데 오빠랑 술이나 할까?” 에르웬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저따위의 상투적인 대사를 던진다. 음, 사실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도 별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시궁창 같은 주점이라 그런가? 별 같잖은 쥐새끼들만 꼬이는군.” 에, 에르웬……? 너 대체 언제 그렇게 된 거니? “…뭣? 쥐, 쥐새끼?” 찰진 비아냥에 수작을 부리던 좆밥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아마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꺼져라. 이마에 구멍이 나기 싫으면.” 미간을 특히 좋아하는 걸로 봐선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지? 어서 확인해 봐야 했다. 그전에 일단 얘부터 치워야겠다마는. “뭐, 뭐야 넌 또!” 내가 다가가 어깨를 잡자 추근대던 아저씨가 휙 고개를 돌리더니……. “어어, 어.” 곧장 눈을 깐다. “꺼지라는 말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아저씨는 대답 대신 조심스레 내 옆을 꾸겨져 지나가더니, 비틀거리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때였다. “아, 아저씨!” 내가 익히 아는 그 말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에르웬이 이중인격자였단 루머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야 아까 저 아저씨도 ‘요정 아가씨들’이라고 말을 걸었잖아? “네가 그 바바리안이군?” 구석진 자리라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테이블에는 총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 아마 그 바바리안이 맞을 거다. 근데 그러는 너는 누구지?” “얘의 언니.” 진짜 언니였구나. 어쩐지 옆모습이 얘랑 완전 똑같더라. “얘의 언니가 네 이름인가?” “…멍청하긴. 테르시아라 불러라.” 에르웬의 성이 테르시아였다. 아무래도 언니는 내게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 “그러지. 테르시아, 그럼 이제 앉아도 되나?”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르시아를 관찰했다. 일단 쌍둥이는 아닌 것 같다. 서너 살은 더 나이가 많아 보였으며, 정면에서 보니 이목구비도 꽤나 달랐다. 눈매 때문인지 분위기가 사나웠고. 아, 이건 딱히 눈매 때문만은 아닌가? “바바리안.”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무튼, 이 어린애를 대체 왜 이런 술집으로 불러낸 거지?” “저, 언니……?” “너는 가만히 있어.” 에르웬이 분위기를 느끼고 중재를 하려 했으나 언니에 의해 가로막혔다. 흐음, 상황이 꽤 재밌게 돌아간다. 에르웬이 왜 언니를 데려왔는지는 제쳐두고, 이 언니가 날 못마땅해하는 게 단지 내가 바바리안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직감이 든다. 일던 이것부터 파악해야겠군. “테르시아,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목적으로 날 보려 한 거지?” “에르웬이 어젯밤 외박을 해서 캐물었더니 밤새 주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하더군. 내 동생을 바람맞힌 게 어떤 놈인지가 궁금했다.” 잠깐,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소리지? 어젯밤이라니?” “시치미 떼는 건가?”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거 같진 않다. “…에르웬, 미궁에서 나오고 지금 몇 시간이 지났지?” “아, 어… 서른 시간 정도네요!” 미친, 하루를 넘게 처자고 일어난 거였구나. 4시간만 잔 게 아니라. 어쩐지, 존나 개운하더라. “사과하겠다. 자느라 하루가 지났는지도 몰랐다.” 순순히 사과를 하자 테르시아가 의외라는 눈빛을 짓는다. 왠지 나는 그게 서글펐다. 하루를 넘게 잠만 처잤다는 사실엔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는 듯 보여서. “바바리안이 시간을 제대로 지킬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왜 에르웬을 불러낸 거지?” 뭐, 여기엔 꽤나 길고도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다마는…….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걸 너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다. 정 궁금하다면, 나중에 에르웬에게 들어라.” 직역하자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꺼지란 뜻이었는데, 다행히 테르시아도 잘 이해했는지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재미있군. 이제 막 미궁에 들어간 초심자 주제에.” “초심자가 무슨 상관이지? 에르웬은 탐험가다. 옆에서 평생 보살펴 줄 게 아니라면, 그런 태도는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야만스럽긴.” “저, 언니? 아저씨……?” 눈싸움이 시작되자 에르웬 혼자서 안절부절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이내 테르시아가 주머니를 탁자에 올렸다. “35만 스톤이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지?” “에르웬이 흡수했다는 정수의 값이다.” 아,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구나. 아침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패턴이라 뭔가 기분이 묘하다. “왜 가져가지 않지? 역시 다른 속셈이 있던 건가?” 그런 건 아니다. 돈으로 값을 치른다면, 나 역시 정수의 대가로 에르웬에게 ‘약속’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직 에르웬의 의사를 듣지 못했다. “너도 같은 의견인가?” “그게…….”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린다.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 원래 단둘이 있을 때 나누려 했다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하기로 했다. “내가 요구하려던 약속은, 내가 원하는 정수를 얻을 때까지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에, 그게 전부예요?” “그렇다. 가능하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 팀을 꾸리고 싶지만, 이건 별개다. 약속은 필요 없다. 앞으로는 비율도 5:5로 나눌 거고.” 한마디로 2인조 파티를 꾸리잔 뜻이다. 과연 에르웬은 어떤 대답을 할까.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죄송해요.” 답은 거절이다. 고개를 푹 숙인 에르웬을 대신해 언니가 그 이유까지도 설명해 주었다. “에르웬은 앞으로 나와 함께 미궁에 들어갈 거다.” “이제서야?” “전통에 따라 첫 경험만큼은 홀로 해내야 했을 뿐, 나는 처음부터 에르웬을 혼자 둘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 얘는 튜토리얼만 끝내고 나오면 버스를 태워 줄 기사가 있던 거구나. 빌어먹을 혈연. “이해가 됐다면 이 주머니를 가져가라.” 에르웬은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나름 상성이 좋은 동료긴 하다마는, 꼭 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계산은 제대로 해야겠지. “35만 스톤은 정수의 평균 시세를 반으로 나눈 거겠지?” “물론이다. 함께 얻은 전리품이니까.” 고인물로서 판단을 내리건데, 70만 스톤이라면 상당히 괜찮은 금액이다. 그러나 비율이 잘못됐다. “그렇다면 28만 스톤이 모자라군. 약속된 분배 비율은 9:1이었으니까.” “좋다.” 테르시아가 흔쾌히 주머니 하나를 더 꺼냈다. 의심스러워 확인해 보니 정확히 28만 스톤이 들어 있다. 니미, 나 지금 호구 잡힐 뻔한 거야? 분명 내가 말을 안 꺼냈으면 35만 스톤만 받고 끝났을 것이다. 이런, 야비한 귀쟁이 새끼들……. 바바리안들이 왜 요정을 극혐하는지 알겠다. “용무가 끝났다면 슬슬 자리를 비켜 주겠나? 에르웬과 나눌 얘기가 있는데.” “굳이 나눌 얘기가 있을까?” 또다시 기싸움이 시작되려는데 에르웬이 끼어들었다. “언니, 걱정해 주고 같이 여기까지 와준 건 고마운데, 이제 가도 될 것 같아. “에르웬?” “나도 아저씨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응?” “…하긴, 이제 너도 어린아이가 아니겠지.” 테르시아는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바바리안, 맹세를 해라. 에르웬과 자지 않겠다고. 그럼 곧바로 떠나 주겠다.”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언, 언니?!” 음,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 같다. 자지 말라니……. 그 아래의 스킨쉽까지는 전부 허용이란 건가? “맹세하겠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아, 아저씨?” “그럼 됐다.” 마침내 테르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 이걸 깜빡했군. 바바리안, 에르웬을 구해 줘서 고맙다.” 한마디를 더 남기고서 쿨하게 주점 밖으로 떠났다. *** 딸랑딸랑.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를 들으며, 에르웬이 테이블 위로 축 늘어진다. “흐아! 어떡하죠! 한 번도 이렇게 대들어 본 적 없는데… 혹시 언니가 화났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야, 나가기 전에 널 한 번 보더니 씨익 웃었거든. 너한텐 안 보였겠지만. …잠깐만, 저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에르웬은 몇 번인가 자기 머리를 박박 긁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죄송해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이미 언니랑 함께 움직이기로 예전부터 얘기가 되어 있어서…….” “사과할 것 없다.” 나였어도 고렙 요정이 쩔해 준다는데 의리로 쪼렙 바바리안이랑 붙어 다니며 개고생할 거 같진 않으니까. “저,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에르웬이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정확히 63,000스톤이에요.” 석궁과 리더가 갖고 있던 마석의 값일 것이다. 실제 금액이 얼마였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의심치 않았다. 그래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아무튼 이걸 9:1로 나누면 얼마를 줘야 하지? “아, 제거는 제가 알아서 챙겼으니 굳이 안 주셔도 돼요.” 응, 그랬구나. 이런 데서는 참 야무지단 말이야. “두 사람이 갖고 있던 배낭은 일단 제 숙소에 놔뒀어요. 이것저것 많기는 한데… 이건 내일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지.” 며칠을 같이 지내서인지, 얘는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를 참 잘 알아차린다.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전리품 분배 관련 안건이 순식간에 일단락 지어졌다. 다만, 다음 안건에 들어서자 에르웬도 한층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보답은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보답?” “말했잖아요.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아,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지. “은혜라…….” 말꼬리를 흐리자 에르웬이 꿀꺽 침을 삼킨다. …설마, 이것 때문에 얘 언니가 마지막에 맹세하라며 그 지랄을 떤 건가? 내가 얘한테 뭐 이상한 보답을 바랄까 봐? “놀리지 말고, 어서 말해 주세요.” 눈치가 많이 늘었다. 놀리는 것도 바로 알아채고.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군. 일단 뭐 좀 시키려는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배는 안 고픈데…….” “그럼 내 것만 시키겠다.” 이내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있자니 에르웬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럼 술! 술 시켜 주세요!” “술?” “네. 일부러 어제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첫 귀환주는 아저씨랑 같이 마시려고! 히히.” 에르웬이 해맑게 웃으며 칭찬해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귀환주라……. 그러고 보니 그런 문화도 있었다. 뭐, 퇴근하고 맥주 한 캔 마시는 그런 느낌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다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성지에서만 자라는 이종족들에게 있어 ‘첫 귀환주’는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음, 근데 이럴 땐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예요!” “고맙다?” “고맙기는요! 우리는 미궁에서 동고동락한 동료인데, 첫 귀환주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얘는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고민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볼을 긁적였다. “물론 아저씨한텐 이게 첫 귀환주가 아니겠지만요…….” “무슨 소리지? 나도 이게 첫 귀환주다.” “네에?!” 왜 놀라는 걸까. “나도 20살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어쩐지 말을 해도 계속 아저씨라 부르더라. “미궁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그렇구나…….” 이내 에르웬이 내 눈치를 슬슬 보더니, 종업원에게 가 알아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온 건 한 20분쯤 지나서였다. “아저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냥 계속 아저씨라 할 생각이구나. 그래 뭐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너도 수고 많았다.” 우리는 술과 음식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미궁에서는 대부분 꼭 필요한 말들만 주로 했기에, 이런 사적인 대화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만은 없는 법. “아저씨, 오늘은 셔츠를 입으셨네요?” 응, 너는 치마를 입었네. 그런 얘기는 실컷 했으니 이제 됐고. “에르웬, 아까 은혜를 갚겠다고 했지?” “네? 네, 그랬죠?” “그럼 지금 여기서 그때 쓴 이능을 써 봐라.”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한다. 과연 이게 보답이라 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듯한데……. 내게는 중요한 문제다. 과연 게임 속의 정수와 실제의 정수는 어떤 부분이 다르고 같은가. 반드시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육성법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근데 이능은 갑자기 왜요?”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이능을 발현하는 건 불법인데요? 바로 잡혀갈 거예요. 경비병한테.” 이게 게임을 할 때 마을에서 스킬이 안 써지던 이유구나. 그럼 아예 방법이 없는 건가? 고민하던 때 에르웬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어떨까요? 아, 저희 숙소는 안 돼요. 다른 종족은 출입이 금지거든요.” 요정들은 전용 숙소도 있는가 보다. 흐음, 그나저나 어떡하지? 으슥한 뒷골목이라도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먼저 해답을 찾아냈다.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 방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그래, 그러면 되겠다. 18화 라프도니아 (2) 숙소로 돌아온 나는 약간 취한 듯한 에르웬의 몸을 낱낱이 연구했다. 물론, 언니와 한 맹세가 깨지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몸만 전사인 내게 그런 맹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에르웬, 조금 더 벌려 봐라.” “흐읏,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현재 나는 에르웬을 강제로 스트레칭 시키고 있었다. “아악! 어깨! 어깨가 빠질 거 같아요!” “흐음.” “원, 원래 이렇게까지도 안 꺾였어요! 진짜예요!” “확실한가?” “네, 네! 일족의 이름에 걸고!!” 이내 팔에 힘을 풀자 에르웬이 곧장 침대 위에 드러눕는다. ‘유연성+4’라고 해 봤자 그렇게 막 티가 나는 건 아니구나. 하긴, 그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또, 또 남았나요?” “아니다. 일단은 쉬어라.” [던전 앤 스톤]은 불친절한 게임이었다. 일단 스탯만 봐도 그렇다. 육체, 정신, 이능. 메인 스탯은 이렇게 세 가지였지만, 옆에 붙은 [+] 버튼을 누르면 세부 스탯들이 수천 개 나왔다. 예를 들자면, 육체의 하위 스탯인 근력이 올라가면 소지 가능한 중량, 물리 공격력 등에 보정이 생기는 식. 유연성? 미약하게나마 회피율과 치명타율이 증가했다. 시각? 원거리 계열 무기의 사정거리와 캐릭터의 가시 범위가 늘어났다. 후각은 관련 이능이 있을 시 그 이능의 계수가 되었고, 명중률은 말 그대로 명중률이었다. 때문에 육체 수치가 똑같이 50이더라도, 세부 항목이 어떠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전혀 달라졌다. “…….” 참고로 이는 전부 스스로 알아낸 것이다. 게임 제작사에서도, 그 어떤 해외 유저도 말해주지 않은 정보였기에, 나는 직접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며 통계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씨바, 그땐 그 열정이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후, 갑자기 또 열받네.’ 다시 돌아와, 나는 9년 차 진성 고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 알아내지 못한 스탯들이 몇 가지 있었다. 고블린 궁수가 뱉은 정수에 표기된 ‘집착+7’이 대표적이다. 집착 스탯은 정신 수치의 하위 항목이라는 것 말고는 모든 게 미스터리였다. “에르웬.” “아저씨가 한숨 쉰 다음이라 불안해지는데 그냥 말 안 하면 안 돼요?” “혹시 미궁에서 나온 뒤로 뭔가 달라진 것이 없었나? 자꾸 뭔가 머릿속에 아른거린다던가. 참기가 어렵다던가 그런 것 말이다.” “…그, 글쎄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말해 봐라.” “과자……? 네, 과자요. 그러고 보면 나오자마자 엄청 사 먹었는데…….” “평소에 단 음식을 싫어했나?” “아뇨, 좋아했는데요? 그래도 하루에 이만큼이나 먹은 적은 처음인 것 같기는 해요.” “그렇군.” 어쩌면 집착은 욕구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을 뜻할지 모른다. 그러니, 게임에서도 별 기능이 없었겠지. 괜시리 머리가 복잡해진다. 현실 패치가 되며 다른 세부 스탯들에도 추가 기능들이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연성만 보아도 그렇다. 게임 내에서 그랬듯, 몸 동작이 자연스러워지면 피하기가 쉬워진다. 상황이 맞으면 원래라면 못했을 동작을 성공해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유연성이 좋아지면 좁은 곳에 들어가기 수월해질 것이고, 착지 시에도 뻣뻣한 몸보다는 충격을 더 잘 흡수할 것이다. 그런 건 게임에서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그러한 것들까지 종합해 육성법을 재차 점검해야 한다. “아저씨, 저 이제 졸려요…….” 아, 너무 쉬게 뒀나? 이미 얘 눈이 반쯤 감겨 있다. 액티브 스킬을 쓰면 힘든 건 없는지, 다시 쓰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그런 것도 확인해 보려 했는데……. “알았다. 자라.” “네에…….” 나는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그리고 에르웬의 옆에 누웠다. 에르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궁에서 그렇게 볼꼴 못 볼 꼴을 다 보여 주었는데, 이제 와서 데면데면하는 것도 웃겼다. 드르렁! 그렇게 잤는데 또 눈이 사르르 감긴다. 뒤늦게 같이 자지 말라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지만……. 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쪽도 이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까. *** [07 : 35] 제법 이른 아침 눈이 떠졌다. 이틀 동안 거의 잠만 잤으니 이르다는 말엔 어폐가 좀 있겠다마는. “아저씨, 물 좀…….” 에르웬도 마침 일어났기에, 우리는 대충 세수만 한 뒤 1층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에르웬의 숙소로 향했다. 도시가 워낙에 크다 보니 걸어서 가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같은 구역이라 다행이네요!” 동감이다. 만약, 정반대편이었다면 마차를 타고도 한참은 가야 했을 테니까. 말만 요새 도시지, 라프도니아는 정말 터무니없을 만큼 넓은 면적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꼭 조용히 계셔야 해요. 알겠죠? 아저씨와의 일을 아는 건 아직 언니뿐이니까.” “그러겠다.” 숙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에르웬이 배낭 두 개를 힘겹게 메고서 걸어왔다. 7일차가 끝나기 직전에 우릴 기습했던 리더와 석궁의 배낭. 막 쑤셔박아서 잠기지도 않고 무기들이 삐죽 나와 있다. “들어 주마.” “아, 감사합니다!” 역시 얘는 사양이라는 걸 잘 모른다. 처음엔 안 그랬던 것도 같은데. “무기는 이곳에, 방어구는 이곳에, 도구나 소모품은 따로 잘 모아놔라.” “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물품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됐지만, 전리품이라 그럴까? 꽤나 즐거웠다. 나와 에르웬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바닥에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들을 쫙 둘러보았다. “전부 다 파실 건가요?” “필요한 것만 빼고.” “그럼, 아저씨가 준 가죽옷이랑 허리띠는 제가 계속 가져도 돼요?” “상관없다. 그만큼 몫에서 제외하겠다면.”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이내 팔 것과 팔지 않을 것까지 분류를 마친 우리는 다시 도시로 나왔다. 시계, 나침반 같은 중복되는 도구를 뺀 나머지 탐험 용품이나 포션 같은 소모품은 나눠 갖기로 했지만, 사실상 장비류는 거의 다 팔기로 결정했다. 안 맞는 걸 쓰는 것보단 돈으로 바꿔 다른 걸 사는 게 나을 테니까. 이제 그 정도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예요!” 그렇게 도착한 곳은 테르시아가 알려주었다는 한 무기상점이었다. 판매 물품은 일본도, 장검 두 자루, 석궁, 양손망치, 단검 두 자루, 휴대용 나이프 3개. “총 35만 스톤입니다.” 지인 소개였기에 더욱 걱정을 했지만, 비교를 위해 들린 어느 상점보다도 가장 값을 잘 쳐주었기에 그냥 싹 판매했다. “우아아…….” 상점을 나서자마자 에르웬이 참아왔던 감탄을 뱉었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저씨, 이거 꿈 아니죠?” 빼앗은 마석을 제외하면, 7일 간 순수 사냥만으로 번 돈은 10만 스톤 안팍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35만스톤이라니? 게다가 아직 방어구는 팔기도 전 아닌가. …탐험가 새끼들이 사람만 보면 눈깔이 뒤집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장비는, 돈이 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저씨, 그럼 제 몫은 얼마예요?” 에르웬의 두눈에 돈을 향한 갈망이 맺힌다. “기다려 봐라, 아직 팔 게 한참 남았으니까. 다음 행선지는 10분 거리에 위치한 방어구상점이었다. “여기 18만 스톤이네.” 물품 갯수는 방어구 쪽이 많았지만, 총 값어치는 무기보다 적었다. 방어구는 중고로 팔기가 어려워서 매입가가 낮다고 하는데, 충분히 납득 가는 이유였다. 우리만 해도 사이즈 문제 때문에 전부 팔기로 한 것 아닌가. “그 가격에 판매하겠다.” “바바리안답게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다음에도 이런 물건이 생기면 또 와 주게. 그때도 값은 잘 쳐 주지.” “그러겠다.” 이내 잡화 상점에 들려 불필요 판정을 받은 여러 용품까지 판매를 마치니, 총 145만 스톤이란 거액이 손에 들어왔다. 뭐, 전부 내 돈은 아니겠다마는. “여기 받아라, 4만 5천 스톤이다.” “어? 조금 많은 거 아닌가요?” 가죽옷과 허리띠로 2만 스톤을 제하고, 정확히 7,000스톤을 더 넣었다. 예뻐서 주는 건 아니고, 멀대와 사무라이가 갖고 있던 마석을 9:1로 나눈 값이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서, 네가 준 다른 두 명을 기준으로 잡았다.”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아무튼, 뗄거 다 떼고 나서 총 자산을 확인하니 무려 140만 스톤에 달한다. 조금, 아니, 많이 신기했다. 게임에서도 1회 차에 이만한 금액을 손에 넣어 본 적은 거의 없는데……. 시작이 좋다.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네?” 왜 놀라는 얼굴이야? 돈 계산도 다 끝났겠다, 서로 갈길 가야지. 너 때문에 계획이 어긋나서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거든. “뭐, 중앙광장까지는 같이 가면 되겠군.” “네에…….” 갑자기 에르웬의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마냥 길을 걷다보니 갈림길인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어?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네요?” 아까 지나쳤을 때와 달리 인파가 들끓었다. 절반은 병사들이었고, 남은 절반은 포승줄에 묶인 죄인들이었다. 아니, 죄인들이라 하기엔 좀 그런가? “읍, 으읍! 윽! 으으윽!” 살인, 강간, 방화 같은 강력 범죄자가 아니다. 재갈을 입에 물고서 두려움에 떠는 이들의 죄목은 ‘세금 미납’. 다시 말해, 돈이 없었기에. 저기 저 이십대의 젊은 여인은, 자식이 있을 연령의 사내, 한 평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을 주름 진 손의 노인은 사형수가 되었다. “집행을 시작하겠다!” 징수관이 외치자 병사들이 단두대 아래로 사내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걱-! 섬짓한 소리와 함께 잘려져 나간 사내의 머리가 앞에 비치된 나무통으로 쏘옥 들어간다. 근처에 있던 몇몇 군중들은 갖고 온 빵에 떨어지는 핏물을 적셔 허겁지겁 먹었다. “히끅!” 난데없이 눈앞에서 펼쳐진 유혈사태에 에르웬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대, 대체 뭐예요! 저 사람들은? 왜 사람 피에 빵을 찍어 먹어요?” “징수관에게 처형당한 자의 피를 마시면 재물운이 따른다는 미신이 있다.” 에르웬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얘한테는 사람 목이 잘린 것보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던 모양. “에르웬, 1년 차 세금이 얼마지?” “이종족 기준으로 70만 스톤이요.” “그렇군.” 게임에선 60만 스톤이었는데.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얼추 일치한다. “그래도 아저씨는 걱정 없으시겠네요. 그만큼이나 버셨으니까.” 응? 그야 그렇긴 한데……. 언니 빽을 가진 얘가 할 말은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이 돈을 내년에 낼 세금을 위해 아껴 둘 생각도 없고. 간단한 이유다. “에르웬, 2년 차부터는 세금이 얼마지?” “80만 스톤이요. 그리고 환전할 때 수수료도 생겨요.” 일정 년차가 쌓일 때까지 세금은 계속해서 오른다. 그러니 지금은 스스로에게 투자할 때다. 수수료 면제에 세금까지 비교적 적은 1년 차야말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니까. “아악! 사, 살려 주세요!” “재갈을 제대로 다시 물려라!” “다음 달! 다음 달이면 돈을 낼 수 있— 읍, 으으읍! 으읍!” 아무튼 다행이다. 인간은 시각 정보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생물이라던가? 서걱-!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실감이 확 난다. 원래 세계로의 귀환. 이딴 현실성 없는 목표보다는, 좀 더 명확한 중간 목표를 세우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내 수명이 90세라고 가정했을 때.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서, 평생 남은 삶을 이곳에서 보내야만 한다고 했을 때. ‘대체 얼마가 필요한 거지?’ 글쎄, 계산을 한번 해 봐야 할 거 같다. 부엌이 있는 집에서, 아플 땐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쉰 살부터는 일을 그만두고서도 강아지 세 마리쯤 키우며 여유롭게 보낼 수 있으려면……. “6층.” 최소 6층에서 은퇴 전까진 죽어라 저축하며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 그러니까—.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적어도 6층까지는 가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건 말건. 그건,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일 테니까. *** 「6등급 탐험가 다리아 위트엠버 디 테르시아에게 63만 스톤을 양도받았습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3 하락합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장비를 판매…….」 「…….」 「……」 「TIP: 현재 캐릭터의 총 소지금은 1,403,520스톤입니다. 이를 사용해 캐릭터의 종합 전투 지수를 올려 보세요!」 19화 라프도니아 (3)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아, 네에… 안녕히 가세요…….” 에르웬과 헤어진 뒤,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차분해지는 종이와 잉크 냄새. 기침도 참아야 할 듯한 정숙한 분위기. 그 속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여러 비실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 혼자만 이질적인 존재가 된 기분이었으나······. 드르르르르렁-! 놀랍게도 도서관엔 나 말고도 바바리안이 한 명 더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등을 쿡쿡 찔렀다. “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역시 너였구나. 프넬린의 두세 번째 딸, 아이나르.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군.” “너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이나르도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걸 느꼈는지 목소리를 죽였다. “미안하다. 나 말고 다른 동족을 여기서 볼 줄은 예상하지 못해 놀란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엔 무슨 일이지?” “지난번에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했지 않나. 이번에 미궁에서 돌아다니며, 생각을 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음, 그렇구나. 제법 기특하다. 책을 펼쳐 놓고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것만 아니었다면. “뭔가 미궁에서 일이 있었나 보군.” “처음부터 끝까지 쉽지 않았다. 싸우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아이나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경계해야 할 것은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얘는 다른 야만인들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걔내들은 자기가 몬스터를 얼마나 쉽게 때려잡았는지만 자랑하던데. 곧 죽어도 힘들었단 말은 절대 안 하더라. “그래서 여기서 공부를 하기로 한 거군.” “그렇다. 하지만 역시 이런 건 내게 잘 맞는 거 같지가 않다. 글을 읽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때 좀 잘 배워 둘 걸 그랬다.” …아, 거기부터가 문제인 거니? “그래서 오늘부터 성지에 들려 장로님들에게 다시 글부터 배울 생각이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 값은 치러야겠지만.” 그래도 조금 놀랍긴 하다. 내가 대충 한 조언에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이내 아이나르가 펼쳐 놨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갈 생각인가?” “생각이 났을 때 하지 않으면 까먹는다.” 그렇구나. 알면 알수록 슬픈 종족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가 보겠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출구 방향으로 향하던 아이나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살아 돌아온다면 조언에 대한 보답을 하기로 했었지.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성난 뿔소 여관으로 와라. 무슨 일이던 힘이 닿는 대로 돕겠다.” “그러지.” 부디 하루 이틀 사이에 이 약속을 까먹지 않았기를 바라야겠다. 도움을 청할 일이 곧 있을 거 같거든. *** 아이나르가 떠난 뒤, 나는 잠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야, 국회의사당만 한 건물이 통째로 도서관이라니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않은가. 게임에서도 도서관은 ‘건축 중’이라는 표시만 뜨고 입장이 불가했었고. 음, 근데 이런 데서 어떻게 책을 찾지? 현대에서처럼 키보드 몇 번 뚜닥이면 위치가 나올 거 같진 않은데……. 고민할 시간에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크흠.” 기침 소리를 내자 데스크에서 졸고 있던 사서가 천천히 눈을 뜬다. “무슨 일이십니까?” “책을 찾고 있다. 역사와 관련된…….” “파르시티에브.” 어떤 종류의 책을 찾는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졸려 보이는 얼굴의 사서가 읊조렸다. 그와 동시 희미하게 빛이 내 몸속으로 깃든다. 뭐야, 설마 마법이야? “이제 돌아다니다 보면 찾으려는 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출은 안 되고, 다 읽은 다음엔 꼭 원래 자리에 정리하시고요.” 빛이 잦아들자, 사서는 기계적인 멘트만을 뱉고서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이 여자는? 왠지 다시 깨울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일단 안내대로 도서관을 배회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유독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슬슬 어떤 식의 마법인지 금방 감이 왔다. 악령, 역사, 미궁, 탐험가, 정수 등. 속으로 생각하는 키워드가 바뀔 때마자 이끌림을 주는 책들도 변한다. ‘뭐야 이 편리한 마법은.’ 이런 마법이 있으면 사서가 한 명인 것도 납득이 간다. 애당초 규모에 비하자면 도서관 이용자 수는 거의 없다시피했고. 나는 책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이끌림을 주는 책들만을 골라서 하나씩 펼쳤다. [멸망한 세계] 일단 처음 펼친 700쪽 가까이 되는 이 책에는 이 세계관에 대한 초기 역사가 서술되어 있었다. 대부분 게임과 일치했다. 수천 년 전, 마녀의 저주로 이 땅에서 생명이 살 수 없게 됐고, 유일하게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만이 그 재앙에서 비껴 갔다는 것. 한정된 자원으로 굶어죽어 가는 신민들을 위해 왕가에서 또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통로를 뚫었다는 것. 그게 지금의 미궁이 되었다는 것까지. [연금술의 기본 이해 주석본 IV] 두 번째 책에는 몬스터에게서 나온 마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빵이 되고, 물이 되고, 강철이 되는지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다. 원리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됐지만. 나는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으며 지식들을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성물 전쟁 III] 덕분에 바바리안과 요정이 어떠한 이유로 지금의 관계가 되었는지, 악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보다 상세히 알게 됐다. 악령이란, 다른 차원에서 넘어와 몸을 빼앗는 사악한 존재란 게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음, 따져 보면 틀린 말은 아닌가? [심연의 악령들] 아쉽게도 이 책엔 악령이 어째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라프도니아 왕가와 신전에서 악령을 절멸의 대상으로 공표하고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악령 입장에서는 개꿀팁이었다. 책 내용대로라면, 금기어만 뱉지 않으면 악령으로 의심받을 일은 거의 없다는 거네. 예를 들자면, [던전 앤 스톤]이라던가. …스파르타를 외치는 것도 이제 자중하든가 해야지. [탐험가들은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라프도니아 왕가의 쌍둥이들] [영웅에 대하여] [수용소 비프론의 생애] 이후로도 주구장창 책을 읽고 있자니 마침내 원하던 정보도 획득할 수 있었다. [왕의 죽음에 관하여] 이 책은 초대왕, 혹은 불멸왕으로 불렸던 라비기온 3세의 죽음을 다뤘다. 다만, 이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나, 그로 인해 파생된 변화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 중요한 건 그 시기다. 어디 보자, 날짜가……. “150년 전이라고……?” 내 가설이 맞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책에 적힌 왕의 서거일은 약 150년 전. 바꿔 말하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게임 기준으로 150년이 흐른 뒤의 미래라는 뜻이 된다. 어느 종족을 고르던, 게임은 라비기온 3세가 서거한 다음 날로부터 시작됐으니까. 제기랄.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야겠네. “후우…….” 책을 덮고 잠시 눈의 피로를 풀었다. 중요한 부분만을 읽었다 해도 열 권이나 되는 책을 살펴봤더니, 눈이 빠개질 거 같다. 그렇지만 꺼내놓은 두 권은 마저 읽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혹시 중요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차원불안정 관측 기록] 세 발로 기어가던 나를 구해 줬던 금발이 읽었다는 책이 이거였을까? 책엔 나와 비슷한 사례와 통계가 적혀 있었다. 금발 말대로 최외곽부에 떨어지는 건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는데……. “지랄.” 경험자로써 한마디 하는데, 이러한 케이스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웬만하면 다 뒈져서 모르는 거지. 나머지 내용은 거진 통계였기에 대충 페이지를 넘기며 읽던 나는 마지막 장에서 멈칫했다. ‘포탈이 닫히는 순간 진입을 하는 것이 불안정현상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라는 작가의 추론이 끝에 적혀 있었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구나. 슬퍼질 거 같으니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9등급 정수 총합본] 드디어 마지막 책이었다. 9등급 몬스터가 뱉는 정수가 지닌 능력들이 백과사전처럼 정리되어 있었지만, 게임 내 표기와 달리 정확한 숫자로 정보를 알려 주진 않았다. [고블린] 인내심(하) 후각(하) 독내성(하) 손재주(하) 시각(하) *근접 무기 사용시 마비독 상시 부여. *덫 생성. 다른 몬스터들을 살펴보니, 스탯치가 21 이상이면 그때부터 중으로 표시하는 듯한데……. 상 등급의 기준치는 알 방법이 없었다. 첫장에 적혀있던 안내 문구에 따르면 8등급 이상의 정보부터는 탐험가 길드에서 구매해야한다는 모양이니까. “후…….” 나는 책을 덮고서 간단하게 기지개를 폈다. 어느샌가 창밖이 어두웠다. 슬슬 도서관도 닫을 시간인지 이용객도 거의 없다시피했고. 읽었던 책들을 전부 원래 자리에 꽂아넣은 나는 그대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그대로 침대 위에 뻗었다. 이로써 도시에서의 3일 차가 지나갔다. “앞으로 27일인가…….” 매월 1일이 되는 자정에는 미궁이 열린다. 이곳의 한 달은 정확히 30일이니, 약 4주 뒤면 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 “…….” 남은 시일 동안 도시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자니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내일이 되면, 새로운 동료부터 구해 보자. *** “아저씨! 아저씨! 어서 일어나요!” 아침 댓바람부터 에르웬이 찾아와 방문을 두들겼다. 꽤나 신난 목소리라는 건 둘째치고……. ‘대체 얘가 왜 찾아온 거지?’ 설마 이제와서 언니 대신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진 않을 터. 솔직히 이제 볼일 없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거 보세요! 계약에 성공했어요!” 이내 문을 열자 에르웬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뱉어 온다. “계약? 아, 설마 ‘정령석’을 먹은 건가?” 정령석이란, 요정이 다른 속성의 정령과도 계약을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물건이다. 사용자의 운이 좋다는 전제하에. “네! 어제 아저씨랑 헤어지고 새로운 정령과 계약에 성공했어요!” “운이 좋았군.” 게임 속에서 정력석의 가격은 약 15만 스톤. 성공 확률은 10%에 불과했다. 아마 얘로서는 거의 전재산을 꼬라박는 도박이었을 텐데 그걸 성공하다니? “네! 언니가 사준 걸로 열 번인가 하니까 되더라고요!” …씨바, 놀리러 온 건가? 물려받은 게 이 몸뚱이뿐인 근수저 바바리안으로서는 박탈감만 느껴진다. 첫 만남 땐 돌볼 동생이 있다느니 뭐니 해서 불쌍한 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이런 금수저가 따로 없다. 아마 갖고 있던 활도 언니가 사 준 거였겠지. “그나저나,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모양이군.” “네!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불과 바람은 궁합이 좋으니까!” “알았으니, 일단 소환 해제부터 해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배가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이유였다. “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못 보여드렸는데…….” “여기서 더 어지럽힐 셈인가?” “아, 아! 죄송해요!” 그제야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후,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야. 인상을 찌푸리자, 잔뜩 들떠 있던 에르웬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 제가 치울게요?” 왜 의문형인지 모르겠다. 그럼 나보고 치우라 할 생각이었던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웬이 난장판이 된 방안을 빠르게 정리했다. 놀랍게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번에 빨래나 청소는 자신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였구나.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처럼. “더 치울까요?” “…….” “더 치울게요…….”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더 치우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 어찌 된 게 여관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지금이 더 깨끗한 거 같네. 잘했으니 당근을 하나 주자. 이따가 부탁할 것도 있고. “그러고 보니 아직 이 말을 안 했군. 새로운 정령과 계약한 것, 축하한다.” “헤헤, 감사합니다!” “아침 식사는 했나?” “아직이요.” 식전이란 말에 1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하며 나머지 얘기를 나누었다. “바람의 정령으로는 뭘 할 수 있지?” “이미 쏘아진 화살의 궤도를 살짝 비튼다든가, 훨씬 더 빠르게 쏜다든가,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아요!” 기대했던 것에 비하자면 꽤나 1차원적인 운용 방식이다. 화살을 회전시켜 관통력을 올린다든가, 화살이 쏘아질 때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한다든가 그런 건 안 되나? 만약 된다면 전투력이 한층 더 상승할 텐데. “어,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왠지 될 것도 같기는 하네요?” 대체 뭐지 이 말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아무튼 잘 왔다. 식사를 마쳤으면 슬슬 다시 올라가지.” “네? 왜요?” “방에서 할 일이 있다.”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짐작 가는 게 없다는 듯한 표정인데……. “설마 저번에 그걸로 은혜를 전부 갚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네, 네? 아니었어요?” 얘도 참 순진한 면이 있다. 철컥.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까지 걸어 잠근 나는 에르웬을 침대 위에 앉혔다. “자, 이능을 써 봐라.” 스킬을 쓰면 힘든 건 없는지, 다시 쓰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은신 능력에 어떠한 약점이 숨겨져 있는지 등등. 확인해 봐야 할 게 산더미다. 20화 라프도니아 (4) “수고했다. 그럼 가 봐라.” “안녕히 계세요!” 에르웬은 사양의 말조차 없이 신속하게 떠날 채비를 갖췄다. 아무래도 반나절 간 이어진 이능 연구 시간이 꽤나 힘겹게 느껴졌던 모양인데……. “그럼 또 올게요!” 또 온다고? 아, 내가 그걸 안 말했구나. “이제 굳이 시간 내서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된다.” “네에에?” 뭘 놀라고 있어. 이게 당연한 거지. 네가 내 동료도 아니고. “너도 새 능력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질 것 아닌가. 미궁이 열릴 때까지 더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전부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어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목표란 중층 탐험가가 되어 5층에 진입하는 것. 따라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우선 300만 스톤을 사용해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가능하면 전문적인 격투 훈련도 받고 싶다. 아직 나는 이 괴물 같은 몸뚱어리의 성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또한 책을 읽으며 상식과 지식도 쌓아야 하며, 최대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물가나 문화에 적응할 시간도 가져야 한다. 한마디로, 용건이 없는 이상 에르웬과 노닥거릴 이유가 없다. “확실히! 그, 그건 그렇지만요?” “동생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만나서 시간도 보내고 그래라. 너도 3주 뒤면 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네에…….” 에르웬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얘의 첫 동료였어서 그럴까? 얘는 나한테 뭔가 이상한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어떤 느낌의 환상인지까지도 대충 예상은 간다. 하지만 원래 비즈니스 관계가 오래가는 법. “계속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니,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부담 없이 와도 좋다. 힘닿는 만큼 도와주겠다.” “어, 정말요?” “우리는 전우 아닌가.” “히히, 그렇긴 하죠! 알겠어요!” 이내 당근까지 던져 주자 에르웬도 만족한 얼굴로 떠났다. 거, 여전히 다루기 쉽구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르웬과의 친분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인맥이긴 할 테니까. 혈연은 어떻게 못해도, 지연은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너무 속물 같은가?” 뭐, 그럼 어떤가. 가릴 때가 아닌데. 이후 간단하게 씻고 밖으로 나온 나는 다시금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전날 보았던 귀차니즘 사서에게 마법을 부여받고 대여섯 시간가량 책들을 읽었다. ‘국밥 같은 거 파는 집은 없겠지?’ 조금 늦긴 했지만, 점심은 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멀건 스튜에 빵 몇 조각으로 때웠다. 가격은 450스톤. 아무래도 식사는 여관에서 해결하는 쪽이 좀 더 가성비가 좋을 듯하다.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식사를 마친 다음엔 수소문을 통해 아이나르가 묵고 있다는 성난 뿔소 여관을 방문했다. 놀랍게도 그곳엔 바바리안이 득실거렸다. “설마 너도 이곳에 묵으려는 것인가? 잘 생각했다! 이곳은 하루에 300스톤밖에 안 한다!” 뭐, 300스톤? 믿기지 않는 가격에 놀라며 조금 알아봤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좁은 침상 5개가 놓인 방에 들어가자마자 며칠은 숙성된 진한 땀내가 코를 찔러온다. “다섯 명이서 방을 함께 쓰는 건가?” “아니다! 열 명의 전사가 함께한다!” “…하지만 침대가 다섯 개뿐인데?” “시간을 정해 돌아가면서 자면 된다!” 딱히 싼 게 아니라, 그냥 여럿이서 내서 싼 거였구나. 하긴, 얘내들은 기껏해야 3, 4만 스톤을 벌어 왔으니 선택지가 없었겠지.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프넬린의 세 번째 딸 아이나르를 찾고 있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라면 아침에 나갔다!” 역시 두 번째 딸이었구나. 마지막에 바꾸지 말걸. 여하튼 1시간 정도 기다리자 외출 중이던 아이나르가 돌아왔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피차 바바리안이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와 싸우고 싶다.” “대련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현재 내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미궁에서 나는 어느 바바리안들 보다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순수 전투 기술만으로 나는 이들에게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조금 이상하군.”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운 부탁이어서 그런 건 아닌 듯한데……. “그런 거라면 부탁할 필요도 없이, 그냥 공터로 나가면 그만 아닌가?” 공터? 이내 아이나르가 날 이끌고 여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열댓은 되는 바바리안들이 모여 주먹을 휘두르고 바닥을 구르며 땀을 흘려 대고 있었다. 음, 어쩌면 피까지도. “흐하하하하! 방금 주먹은 꽤 묵직했다!” “네 것도 마찬가지다!” 어쩐지 아까부터 바깥이 계속 시끄럽더라니. 얘네들은 이런 게 그냥 일상인 거구나. 요정들은 깔깔거리면서 정령의 목소리가 어떻느니 그런 얘기를 하던데.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바바리안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는 사이, 아이나르가 물었다. “굳이 상대가 나여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사실 그렇진 않다. 그저 아이나르라면 내 부탁을 승낙해 줄 것이라 생각했을 뿐. 하지만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유일하게 검을 쓰니까.” “검사와의 전투법을 익히고 싶은 건가?” “그렇다.” “그런 이유라면 알겠다. 오전엔 글을 배우러 가야 하니, 이 시간에 오면 언제라도 원하는 만큼 상대를 해 주겠다.” 즉, 오후 5시부터 스케줄이 비는 셈인가. 앞으로는 매일 이곳에 들려야겠다. “오늘부터 시작할 건가?” “물론이다.” 잠시 기다리자 아이나르가 방으로 돌아가 검을 차고 돌아왔다. “아이나르와 비요른이 대결한다!” 이에 다른 바바리안들도 싸움을 멈추고 관전하기 시작했다. 배우러 오긴 했지만 허무하게 질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방패를 꽉 쥐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다만, 결과는……. “그럼 가겠다!” 개발렸다. 존나 후드려 맞기만 하다가 방패를 놓치기까지 3분은 걸렸나? 얘 진짜 잘 싸우는구나. 그래도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역대 최고의 전사가 아니었다!!” “이제 아이나르가 역대 최고의 전사다!!” “와아아아아아!!” 이 새끼들만 빼면. *** 그로부터 몇 번을 더 쳐발렸을까. 어느덧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더 할 건가? 나도 슬슬 쉬고 싶은데.” “아니다. 오늘 대련은 여기서 끝마치겠다.” 다른 바바리안들은 진작에 공터를 떠난 시간. 나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이나르.” “무슨 일인가?” 이내 기지개를 켜며 건물로 향하던 아이나르가 발을 멈춘다. “혹시 다음번에도 혼자 미궁에 들어갈 생각인가?” “그래야겠지. 팀을 꾸리기에는 돈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이번엔 가능하면 2층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새삼 바바리안이 얼마나 하드코어하게 살아가는지가 느껴진다. 나침반과 횃불. 이 두 가지만 있으면 2층까지는 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첫 진입에 소모품을 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곧장 다음 층으로 향하다니……. “혼자서는 힘들 텐데?”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선택지가 없다라……. 어쩌면, 이거야말로 저층에 인간만 바글바글하던 이유일지 모른다. 세금이 몇 배는 더 높게 붙는 이종족들은 1, 2층에서 활동해서는 1년 차 세금조차 낼 수가 없다. 동기 바바리안들만 봐도 확연하다. 가장 많이 벌었다는 놈이 겨우 2만 스톤을 넘게 벌었지 않았던가. “운이 좋으면 1층에서 다른 동족들과 만나 팀을 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군.”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아이나르가 곧장 본론을 물어온다. 나도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이나르, 나와 동료가 되지 않겠나?” “동료?” “팀을 꾸리는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다.” 오늘 몇 번 대련을 해 보며 느꼈다. 아이나르는 강하다. 주변에서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동기 바바리안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름 똑똑하기도 하고. “제안은 고맙지만, 어째서인가?” 어차피 동료는 필요하다. 매번 밤친구를 구하는 것도 고역인데다가, 파트너가 있으면 오히려 수익도 늘어나니까. 한데 아이나르는 높은 전투력을 지녔을뿐더러, 종족 특성상 배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까지 있다. 대신 클래스가 겹치긴 하지만……. 에르웬이 떠난 이상, 아이나르는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다. 물론, 구구절절한 말은 필요 없었다마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렇군.” 아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좋다. 영민한 전사인 너와 함께 미궁에 들어가다니, 모든 전사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거, 조금 더 욕심부려도 되겠는데? “다만,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 “비율은 내가 8을 갖겠다.” “……?” 내 갑질에 아이나르가 인상을 찌푸린다. 설마 심기가 불편해진 건가? 나는 재차 입을 열어 부연 설명을 이어 갔다. “팀을 꾸리는 비용도 내가 내지 않나. 그리고 약속하겠다. 비율이 적어도 혼자 미궁에 들어갔을 때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소모품 비용도 전부 내가 지불—” “그만,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 “비율이 8이니 뭐니 어려운 말을 해 봤자 어차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알아서 줘라. 나는 너를 신용한다.” “…그렇군.” 나는 내가 바바리안이란 종족을 너무 얕봤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세를 지겠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내 아이나르가 다가와 내 등을 거세게 후려쳤다. 호의라 여기기엔 너무도 묵직했으나……. 뭐, 얼른 익숙해지는 편이 좋겠지. “나야말로 잘 부탁하겠다.” 듬직한 바바리안 동료가 생겼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이나르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다. 성지란 일종의 공동 양육 시설 같은 곳이다. 도시로 떠난 바바리안들은 자식을 낳으면 이곳으로 아이들을 보낸다. 죽을 때까지 전사여야 하는 그들에게 자식을 키울 여력은 없으니까. 그리고 성인이 되어 도시로 떠난 바바리안들은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지금 신경 쓸 건 그런 게 아니겠다마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 도착하자마자 부족장이 나와 우리를 반긴다. 씨바, 이래서 어지간하면 오기 싫었는데……. “떠난 전사가 찾아오는 일은 드물지. 너도 프넬인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처럼 글을 배우러 온 것인가?” 콩닥이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부족장, 내가 성지를 찾은 이유는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라…….” 부족장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긴장하지 말자. 바바리안의 말투나 부르는 호칭 같은 건 미리 아이나르에게 배워뒀지 않은가. 실수만 안 하면 될 것이다.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혼령각인을 받고 싶다.” 이종족들에게는 저마다의 특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요정이 정령을 다루고, 드워프가 아티팩트를 다루는 것처럼. 바바리안에게는 ‘혼령각인’이 있다. 게임에선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기에, 초반부에는 쓸 수 없는 성장법이지만……. 운 좋게도 100만 스톤이 넘는 거금이 생겼다. 따라서, 고민을 거듭한 나는 판단했다. 이 좆같은 부족장 새끼 앞에 서는 건 아직도 존나게 무섭지만……. “정확히는 ‘불사자 각인술’을 받고 싶다.” 틀림없다. 이게 가장 올바른 돈의 사용처이다. 21화 레벨 업 (1) 부족장의 눈이 좁혀진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혼령각인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 어린 전사들이 알 수 있을 내용이 아닌데?” 당연히 최초 습득처는 게임이다. 고인물이었던 내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고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당당히 말했다. “책에서 읽었다.” 이미 도서관의 책들에서도 해당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왔기에 꿇릴 게 없다. “책에선 성물 전쟁 때 요정족들과 싸우는데 혼령각인이란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던—” “흐하하하하하하하핫!!” 내 말을 끊으며 부족장이 광소를 터트렸다. 솔직히 존나 쫄렸지만 그래도 제법 기꺼운 듯한 투의 웃음소리여서 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참으로 재밌구나! 아이나르도 그렇고, 이런 기특한 놈들이 한 번에 둘씩이나 나오다니!” 다행히 부족장의 눈엔 학구열 넘치는 어린 바바리안들이 좋게만 보이는 모양.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도 꼭 비술을 받고 싶다.” “확실히, 전사가 요구한다면 우리들은 혼령각인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어린 전사야!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뭐야, 괜히 쫄았네. 무슨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해? 혼령각인에는 값비싼 재료가 많이 들어간다. 상위 등급 각인에는 돈이 아니라 재료가 없으면 받을 것도 상당수였고. “하하하! 책을 읽고 여기까지 온 건 기특하지만,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돈이라면 있다. 얼마인가?” 부족장이 나를 보더니 귀엽다는 듯 말했다. “불사자 각인술에 들어가는 비용은 음, 80만 스톤쯤 되겠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으, 게임보다 15만 스톤이나 더 비싸네. 그래도 어떻게 낼 수는 있겠다. “지불하지.” “뭣?” “그게 정말인가?” 부족장과 아이나르가 동시에 기함한다. 뭐라 귀찮게 하기 전에 주머니를 열어 50만 스톤짜리 하나, 10만짜리를 세 개 꺼냈다. 이에 부족장의 눈에 의문이 맺혔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대체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얻었지?” 안 물어보면 서운할 뻔했다. 미리 시나리오까지 짜 왔거든. 나는 에르웬과 있었던 일을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대충 1층에서 만난 요정을 노예처럼 부리다가 우연히 정수가 나왔고, 이에 대한 대가를 그 언니한테 돈으로 지불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흐하하하하핫!! 꼴좋구나, 귀쟁이들아!” “야비한 귀쟁이들을 털어먹다니, 그런 건 네가 최초일 것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기대 이상으로 바바리안들은 이 얘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이나르과 부족장은 물론, 저 멀리 있던 장로까지 옆에 오더니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렇게 쌓인 게 많은 건가? “흐하하하핫! 이렇게 웃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내 부족장이 내 손에서 60만 스톤을 집어갔다. 어? 분명 아깐 80만 스톤이라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하자 부족장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위대한 자질을 보인 어린 전사를 위한 내 선물이다!”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뻐근했지만 그 보상은 실로 달콤했다. 씨바, 말 한마디로 20만 스톤이라니! 우리 부족장, 바바리안답게 화끈하다. 나는 진심을 담아 외쳤다. “앞으로도 보이는 족족 귀쟁이들을 엿 먹이며 더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기대하겠다! 어린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여!”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다는 게 이런 걸까. 점점 바바리안들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 혼령각인이란, 일종의 강화술이다. 원리는 마법 재료에 깃든 ‘혼력’을 육체에 불어넣어 특수한 힘을 선사하는 것. 바바리안들이 전부 문신쟁이인 이유기도 하다. 성인이 돼서도 영혼 회로가 보이도록, 비교적 영혼이 깨끗한 갓난아기일 때 미리 문신을 새겨넣어야 한다던가? 분명 그런 설정이었다. “한 번 더 고민할 기회를 주겠다. 이 경로를 택하면, 다른 경로의 혼령각인은 부여받을 수 없다. 그래도 괜찮겠나?” “물론이다.” 나는 모든 경로를 전부 꿰고 있다. 따라서 결정을 바꿀 일도 없다. 불사자 경로의 상위 등급 각인에 내 육성법의 핵심이 담겨 있을뿐더러, 그게 아니어도 불사자 경로의 모든 능력이 대부분 고성능이다. “장로도 도착한 모양이니, 너는 이만 가 보아라.” “그러겠다.” 이후 아이나르가 떠나자 부족장이 나를 주술사의 천막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술이 시작됐다. “흐음, 회로가 상당히 깨끗하군. 계속 순수한 마음을 유지한다면 앞으로도 혼령이 너에게 강한 힘을 선사할 것이다.” 안대를 찬 주술사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상체의 문신에 따라 바늘을 찔러 댔다. 그리고……. “끄으흐흐흐흐…….” “어린 전사여, 참지 말고 비명을 내질러도 좋다. 다들 그러니.” “끄아아아아아악!!” 체감상 포션의 10배 정도 되는 통증이 나를 덮쳤다. 제기랄, 단순히 타투 정도로 생각하고 왔는데. 앞으로 상위 경로로 갈 때마다 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건가? “자, 끝났다. 피곤하니 나가 보아라.” 주술사가 이내 기다려 온 말을 뱉었을 때, 이미 날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부족장도 보이지 않았고. “고맙다.” “크크크, 주술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전사는 처음이군.” 응? 뭔가 잘못한 건가? 모르겠지만, 책 잡히기 전에 어서 천막을 나왔다. 「불사자 각인 1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자연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육체 수치가 + 40 상승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나게 피로한데, 묘하게 몸에서는 기운이 넘친다. 이게 혼의 힘이라는 건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다. 왠지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한 건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개문하라!” 이내 성지를 떠나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새롭게 얻은 능력을 몇 번 시험해 보고는 그대로 쓰러져 잠에 들었다. *** 또다시 하루가 흘러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지난 날 에르웬과 방문했던 상업 지구를 다시 찾았다. 부족장의 화끈한 에누리로 남은 90만 스톤을 전부 나에게 투자하기 위함이다. “지난번에 왔던 분이시군요. 이번에도 판매이십니까?” “아니, 이번엔 사러 왔다.”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아저씨에게서 획득한 해머는 지난번에 함께 팔았으니까. 손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한 손 무기로 쓰자기엔 손잡이가 길어서 불편했었다. “한 손 둔기류를 보고 싶다.” “한 손 둔기라…….” 아이나르와 대련한 결과, 역시 내게는 날붙이보다 이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도검류 무기술은 숙련도가 필요하다. 뭐, 연습을 하면 못할 건 없겠지만……. 애당초 무기 자체도 초반부에만 쓸 것이니 효율이 떨어진다. 어차피 그 ‘정수’를 얻고 나면 방패에만 집중할 생각이니까. “흐음.” 점원은 나를 쓱 스캔하고는 한 손 둔기처럼은 보이지 않는 한 손 둔기를 보여 주었다. 제일 가벼운 것도 아저씨가 쓰던 양손 망치보다 3배는 무거운 거 같다. 근데, 이게 한 손 둔기라고? “모두 바바리안 분들이 선호하시는 한 손 둔기입니다.” 아, 걔네라면 좋아 죽을 거 같기도 하다. 내 방패만 해도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무식한 장비였으니.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평범한 것을 원한다.” “알겠습니다.” 굳이 저런 무지막지한 걸 살 필요는 없다. 저런 무기라면 한 방 한 방의 파괴력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올라가리란 건 자명하겠지만……. 이미 1층 몬스터들은 거의 원샷원킬인 상황. 대형 몬스터와 전투할 것도 아닌데, 이런 무기를 껴 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것들은 어떠십니까?” 이내 점원이 새로운 무기들을 꺼냈다. 물론, 이것들도 일반적인 규격과는 동떨어진 것들이긴 했지만 바바리안의 몸뚱이에는 이 정도가 딱 알맞겠지. 나는 적당히 무식한 크기의 메이스를 택했다. “이건 얼마지?” “25만 스톤입니다.” 25만이라고? 지난번에 6명 분의 무기를 판 게 겨우 35만밖에 안 됐는데? 인상을 찌푸리자 점원이 말을 덧붙인다. “제작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강철 함량이 높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아, 그렇긴 하겠네. 나는 납득했다. 비록 군말 없이는 아니었지만. “22만 스톤으로 가격을 조정해 준다면 바로 사겠다.” 내가 흥정을 시도하자 점원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바바리안 새끼들은 대체 얼마나 호구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이런 무기들은 팔리지도 않을 것 아닌가.” “바바리안 분들께서 자주 찾으십니다마는.” 글쎄, 처음 보여 준 것이면 모를까. 내가 아는 바바리안들이라면 이렇게 애매한 것은 고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바리안들은 대부분 둔기가 아니라 도끼 같은 날붙이를 선호했고. 그런 근거들을 덧붙이자 점원은 맥 빠질 정도로 쉽게 흥정에 응해 주었다. “좋습니다. 22만 스톤에 판매하지요.” …20만을 부를 걸 그랬나? 「종합 아이템 레벨이 +85 상승합니다.」 아무튼 이후로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두 개의 장비를 추가로 구매했다. 일단 첫 번째는 바로 하프 아머. 「종합 아이템 레벨이 +57 상승합니다.」 형태는 판판한 강철로 된 방탄조끼를 생각하면 쉽다. 가격은 36만 스톤으로, 마침 사이즈가 딱 맞는 게 있어서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아마 주문 제작이었으면 2배는 더 줬어야 했을 거다. 두 번째로 구입한 투구처럼. “3일 정도 걸릴 걸세. 주소를 적어 두고 가면 사람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지.” 투구 같은 경우엔 머리에 딱 맞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문 제작을 해야 했다. 디자인을 아예 포기하는 대신, 17만 스톤으로 비교적 싸게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7 상승합니다」 그 결과, 약 5만 스톤이 남았다. …앞으로 고기는 못 먹을 듯하다. *** 내 하루 일과가 정해졌다. 오전 7시에 기상. 그리고 에르웬과 함께 아침 식사. “와, 오늘은 스튜에 감자도 들어 있어요!” “근데 너는 왜 맨날 여기서 아침을 먹는 거지?” “그야 맛있고 싸잖아요?” 식사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천천히 걸어서 가면 딱 8시가 되어 개장하자마자 들어갈 수 있다. “파르시티에브.” 이 만성피로인 여자 사서에게 마법을 받는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럼 수고해라.” “…….” 물론,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꼬르륵-! 오후 4시까지 독서를 한 뒤에는, 되도록이면 처음 가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다. 음, 여긴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네. 탐험가들은 많아서 대화를 엿듣긴 좋지만. “아이나르는 아직인가?” “그렇다! 그전까지는 내가 상대해 주겠다!” 대강 식사를 마치고 바바리안 숙소로 가면 5시쯤이 된다. 훈련 7일 차부터는 다른 바바리안들과도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윗옷을 벗고서 주먹을 휘두르고 목을 조르며 치열하게 싸웠다. 내가 기대한 체계적인 격투 기술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본능과 직감이 극도로 발달된 바바리안들과의 대련은 결과적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됐다. 나 역시 바바리안이니까. 「반복된 훈련으로 반사 신경이 미약하게 향상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유연성이 미약하게 향상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동체시력이…….」 「육체 수치가 +1 향상됩니다.」 이제 슬슬 이 몸뚱어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온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이겼다!!” “역대 최강의 전사다!!” 새로운 장비 도움 없이도, 아이나르와의 대련에서도 승리하는 경우도 간혹 생겼다. 얘가 확실히 실력이 좋기는 한데 패턴이 일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조언해 줬지만,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 본인도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모양. “피곤하다! 나는 자러 간다!” “나도다!” “현명한 전사는 쉴 때를 아는 법!” 오후 9시가 되면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련도 모두 끝이 난다. 그럼 나도 땀과 흙으로 범벅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간다. 씻고 나올 때쯤이면 에르웬이 또 온다. “아저씨! 얼른 씻어요! 음식 다 식겠어요!” “알겠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다섯 번은 저녁에 한 번 더 만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대부분의 내용은 에르웬이 오늘 하루 동안 뭘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시답잖은 일상 얘기들. “매번 1시간씩 걸어가며 오는 게 귀찮지도 않은가?” “하나도요? 여기 밥, 싸고 맛있잖아요!” 싸고 맛있기는. 돈 잘 버는 언니를 냅두고 왜 여기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면 11시쯤 된다. 이 시기가 되면 에르웬도 순순히 자기 숙소로 돌아간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 그리고 내일은 저도 못 와요.” “왔어도 못 만났을 거다. 내일은 서로 바쁠 테니까. 여기까지가 반복되던 내 하루 일과였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얼른 방으로 올라가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벌써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23 : 41] 미궁이 열리기까지 약 24시간이 남았다. *** 「비요른 얀델」 레벨: 1 육체: 66(New +41) / 정신: 37 / 이능: 1 아이템 레벨: 218 (New +146) 종합 전투 지수: 158.5 (New +77.5) 22화 레벨 업 (2) 도서관, 도시 적응, 격투 훈련. 한 달간 매일같이 해 왔던 하루 일과는 모두 스킵 했다. 미궁이 열리는 날, 탐험가가 해야 할 일들은 그런 게 아닐 테니까. [08 : 10] 일어나자마자 아침도 거르고 아이나르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조금만 늦어도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된다고 들은 탓이다. “여기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놀랍게도 아이나르는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와 있던 거지?” “늦으면 날 두고 간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 앞에서 잤다! 어서 와라! 우리가 첫 번째다!” “…….” 오픈 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았는데도 입구 앞에서부터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다만, 아이나르 덕분에 우리는 문이 열자마자 탐험가 길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결속 마법을 받으러 왔다.” “팀원은 두 분이십니까?” “그렇다.” “여기에 같이 손을 올려 주십시오.” 지시에 따르자 수정구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온다. 색은 초록빛을 띠고 있다. “9등급 탐험가가 두 분이시군요. 비용은 1만 5천 스톤입니다.” 15,000스톤이라……. 생활비를 아끼지 않았으면 조금 빠듯할 뻔도 했다. 나는 순순히 주머니를 열어 비용을 지불했다. 속이 쓰리지만 불가피한 소비였다. 미궁에 입장 시 스타트 포인트는 랜덤이지만, 이 마법을 미리 받아 두면 적어도 같은 곳에서 시작할 수가 있게 되니까. “탐험가의 등급은 무엇을 기준으로 잡지?” “영혼에 새겨진 정수의 총량으로 측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결속을 맺는 비용도 증가하나?” “물론입니다.” 하, 이런 거까지 게임이랑 똑같을 필요는 없을 텐데. “끝났습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만 유지가 되니 유의하십시오.” “알겠다.” 이내 용무를 마치고 탐험가 길드에서 나오자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식사는 우리 여관으로 돌아가서 하도록 하지. 제법 맛이 괜찮다.” “여관? 여관에서 요리를 해 준단 말인가?” 얘는 대체 어떤 생활을 해 온 거지? 은근슬쩍 돌려서 물어보자 아이나르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보통은 미궁에서 먹던 빵을 사 먹었다.” 아, 1개에 20스톤 하는 그거. 나도 식비를 아끼려 한 번 시도해 봤다가 얼마 못 가 포기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궁에서는 제법 먹을 만하던 게 여기선 돌처럼 딱딱했거든. ‘그래서인지 이름도 돌빵이었지…….’ 근데 한 달 동안 그것만 먹었다니? 왠지 마음이 짠해져 고기에 스튜까지 시켜 줬더니 아이나르가 충성을 맹세해 왔다. “비요른! 불구덩이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가겠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라!” 눈물겨운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방으로 올라가 배낭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꼼꼼히 해라. 필요한 상황이 왔는데 깜빡하고 챙겨가지 못했다면 곤란해지니까.” “걱정 마라! 챙겨갈 것 자체가 없으니까!” 장비를 점검하고 탐험 용품 및 소모품들을 배낭에 차곡차곡 쌓고 있으니 의외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럼 이제 슬슬 한숨 자도록 하지.” “이렇게 푹신한 침대는 생전 처음 본다. 두 명이 누워도 될 거 같다! 냄새도 안 나고!” 당장에라도 미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비를 끝마친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근데 얘랑 누우니까 꽤나 비좁다. 에르웬이랑 누웠을 땐 자리가 남았는데. “잠이 안 오더라도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라. 한동안은 제대로 못 잘 테니—” 음, 내가 무슨 걱정을 한 거지? 드르르르르르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토종 바바리안식 네이티브 코골이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나도 피식 웃으며 눈을 붙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20 : 30] 조금 일찍 일어난 우리는 1층에서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다. 사치를 부려 인당 800스톤짜리의 특식으로. “대체, 이 맛은 무엇인가?” 식사 내내 호들갑을 떨던 아이나르가 디저트로 나온 크림파이를 배어 물고선 그대로 굳었다. “마, 마법인가? 자, 자꾸 눈물이 흐른다.” “아아, 그게 바로 ‘단맛’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이 든다…….” 의도한 건 아닌데,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된 거 같다. “가지.” 짐을 챙겨 밤거리로 나서자, 평소와 달리 길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대부분 나처럼 무장을 한 채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말했듯 전부 그런 건 아니고, 맨몸뚱이에 무기 하나만을 소지한 바바리안들도 보인다. 오늘 막 성인식을 끝마치고 도시로 들어온 듯한데……. “정지!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그럴 수가! 우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미궁까지 가야만 한다!” “파르툰에겐 이끄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이거, 매달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구나. 얘네는 어떻게 매번 미궁까지 도착하는 거지? 진심으로 고민을 해 보던 때였다. “저들을 따라가면 미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나르가 그들에게 다가가 조언을 해 줬다. 어린 전사들은 그녀를 보더니, 흡사 성공한 선배를 대하는 눈빛으로 고마워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멀어지는 바바리안들을 보며 아이나르가 코를 쓱 닦았다. “…후후, 옛 생각이 나는군.” 부디 옛날 일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엔 지금이나 그때나 딱히 달라진 게 없어 보이니까. “다들 물러나십시오!” 차원광장에는 벌써 수천이 넘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 틈에 껴서 자정이 되길 기다리고 있자니, 중심부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크기였지만 순식간에 형체를 키운 빛무리는 구체의 형태로 일렁거렸다. “이제 입장하셔도 됩니다!” 공무원이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탐험가들부터 빠르게 포탈 속으로 몸을 던진다. 나는 아이나르를 이끌고 인파의 물결을 피해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비요른, 우린 안 들어가나?” “기다려 봐라.” 광장에 모여 있던 탐험가의 숫자는 초당 수십 명씩 사라졌지만 인파는 여전했다. 때맞춰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다른 탐험가들 때문이었다. 포탈이 열리고 40분쯤 지나고서야, 붐비던 차원광장도 제법 한산해져 칠팔백 명 선을 유지했다. “…이제는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이미 수만에 달하는 탐험가들을 집어삼킨 포탈은 어느덧 그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아이나르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목소리를 달리했다. “비요른, 뭘 기다리는 거지?” 글쎄, 얘기하자면 너무 긴데…….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그래도 제법 시간이 남기에 간략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차원이 불안정할 때를 노려 진입할 생각이다. 책에서는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이랬지만, 만약 이 현상을 이용하면—” “뭔진 모르겠지만 네 말을 따르겠다.” “……?” “어차피 이해 못 할 거 같단 느낌이 든다!” 솔직히 이럴 줄 알았다. 물어봐놓고 저러는 건 열받지만……. 사실 행동 하나하나에 설명을 생략해도 된단 건 나름 편리한 부분일지 모른다. “곧 게이트가 폐쇄됩니다! 물러서십시오!” 이윽고 포탈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현시점에 남아 있는 탐험가는 한 명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아이나르와 함께 천천히 미궁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우리를 보며 관계자가 외쳤다. “지금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왜 위험하다는지는 모르겠다. 난 얘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통계를 낸 책까지 있는 걸 보면, 분명 이들도 이 현상을 인지하고 있는 게 맞을 텐데……. “비, 비요른! 높아 보이는 사람이 위험하다고 한다! 어서 물러나야 한다!” 어째서 이걸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지? *** 1초, 2초, 3초……. 음, 숫자를 세는 건 의미가 없으려나? 이 정도면 됐겠다고 감이 빡하고 왔을 때. “지금이다. 들어가자.” “꾸엑!” 나는 아이나르의 등을 떠밀며 동시에 미궁 속으로 입장했다. 번뜩-! 섬광이 눈앞을 가렸고, 이내 다시 떴을 때 깊은 어둠이 나를 반겼다. 내가 의도한 바가 제대로 통했단 뜻. “앞이! 앞이 안 보인다! 역시 높아 보이는 사람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비요른은 바보다!” “아이나르, 침착해라.” 서둘러 배낭에서 꺼낸 횃불에 불을 붙이자 아이나르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다.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말해줘도 이해 못 할 것이다.” “그건… 그렇겠군!” 손쉽게 아이나르를 납득시킨 나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막다른 벽 앞에 위치한 비석을 발견하고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역시 차원불안정 현상은 포탈을 타는 기점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사실이 기쁜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했다. 이 말인즉슨, 첫 진입 때 1분만 빨리 결정을 내렸어도, 한쪽 발이 씹창난 채 세 발로 기어갈 일은 없었다는 뜻 아닌가! 후우우우우웅-! 이내 비석 위에 손을 가져다 대자,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구체의 형태로 화한다. “이게 무엇인가?” “2층으로 올라가는 포탈이다.” 즉, 우리는 나침반을 보며 방향을 찾고, 보이는 대로 몬스터와 싸우고,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는 모든 과정을 스킵했다. 최소 하루이틀의 시간은 아낀 셈. “뭣?! 부족장은 포탈을 찾으려면 3일은 걸릴 거라던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어차피 말해 줘도 이해 못 할 거면서. 「최초로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2」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1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원래 고인물이 되려면 버그도 잘 써야 한다. *** 「비요른 얀델」 레벨: 2 (New +1) 육체: 66 / 정신: 37 / 이능: 11 (New +10) 아이템 레벨: 218 종합 전투 지수: 168.5 (New +10) ***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약 3m 정도 공중에 떠오른 나는 재빨리 균형을 잡아 두 발로 착지했다. 툭! 그야 연습했거든. 바바리안들이랑 레슬링을 하면서. “으갹!” 엉덩방아 찧으며 넘어진 아이나르를 보고 있자니 새삼 스스로의 성장이 느껴진다. 날 보며 꺄르르 웃던 에르웬의 마음도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고. “으으, 엉덩이가 저리다.” 보고 있자니 꽤 재밌다. 뭐, 얘 운동신경이면 금방 제대로 착지하겠다마는. “뭔가? 그 아쉬운 듯한 표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대충 둘러댄 나는 시계를 꺼내 0시 5분으로 조정했다. 원래 눈을 뜨자마자 해야 됐는데 깜박했다. 그래도 5분 빠르게 맞췄으니 문제는 없겠지. “…아이나르, 너도 느껴지나?” “뭐가 말인가?” “마치, 심장이 진동하는 느낌이 든다.” 밀도 높은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들어와 몸속을 가득 메우는 듯한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포탈을 타고 넘어온 순간부터 그러더니, 이제는 선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대체 뭐지? 증상을 설명하자 아이나르가 빠르게 진단을 내렸다. “영혼의 격이 승격했나 보군! 축하한다!” 아, 레벨 업을 한 거구나. [던전 앤 스톤]에도 레벨이 있다. 레벨에 따라 영혼력. 즉, 이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자원인 MP가 늘어나며, 흡수 가능한 정수의 총 개수가 증가한다. 예를 들자면, 1레벨이었던 나는 딱 한 개의 정수만을 흡수할 수 있었지만…… 2레벨이 되며 최대 두 개까지 가능해졌다. 뭐, 둘 다 정수가 나와야 의미가 있겠다마는. “신기하군. 아직 아무 몬스터도 잡지 않았는데 영혼의 격이 올라가다니!” “신기해할 거 없다. 최초로 포탈을 열은 게 공적으로 인정된 걸 테니.” 공적이란, 여기서 경험치를 뜻하는 용어다. “음, 그런 것도 공적으로 인정이 되나?” 된다. 아니,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스피드런’이야말로 가장 경험치를 올리기 쉬운 수단이다. [던전 앤 스톤]은 조금 특이한 성장 시스템을 가진 게임이니까. 동일 몬스터에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건 오직 최초의 한 번뿐. 따라서 도감을 채우듯, 다양한 몬스터를 처치해야지만 레벨업을 할 수 있다. 어, 잠깐만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아이나르, 이번 일은 너와 나의 비밀이다. 알겠나?” “비밀? 무엇을 말인가?” “포탈을 처음 열었던 것. 이것 하나면 된다. 누가 물어본다면 이틀 정도 걸려서 2층에 올라왔다고 대답해라.” 포탈 개방 경험치는 고작 2. 즉, 9등급 마물 2개체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몬스터와 달리 몇 번이고 누적이 되지.’ 따라서 일정 수준에 도달한 모험가들은 기를 쓰며 스피드런에 목을 멘다. 몬스터와의 상성, 활동하는 구역, 마법사의 유무, 신관이 모시는 신의 특성 등에 따라 사냥 가능한 몬스터는 한정되기 마련이니까. 벽에 가로막혔을 때, 벽을 뚫을 수단이 공적 노가다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쪼렙부터 이게 가능하다니? 이 꼼수는 나만 알고 꿀을 빨아야 한다. 알려지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까. “전사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겠다.” 내 표정이 사뭇 진지했을까? 아이나르는 눈빛을 달리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맹세까지 해 주었다. 덕분에 제법 안심이 됐지만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일단 이곳부터 떠야겠군.” 몇 시간만 지나도 곧 모험가들이 2층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초심자처럼 보이는 우리를 보며 의문을 갖겠지. 넌 뭔데 우리보다 빨리 왔니?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다. 늘 그랬지만, 난 몬스터보다 탐험가 새끼들이 더 무섭다. 23화 레벨 업 (3) 횃불을 투구 위에 새겨진 홈에 꽂는다. 그리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캔들 모드. …자괴감이 밀려들지만, 다른 탐험가들도 애용하는 실용적인 사용법이다. 아이나르가 일렁이는 불길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이내 감탄사를 뱉어냈다. “오, 신기하군! 정말로 뜨겁지가 않다!” 그야 이 횃불도 나름 마도구니까. 한 뼘 정도 길이 밖에 안 돼서 몸동작에 지장을 주지도 않고, 한번 키면 무려 3일가량 유지가 되는 유용한 물건. 석궁 일행이 갖고 있던 탐험 용품이었다. 평균 시세가 1만 스톤이랬나? …갑자기 에르웬이 그리워진다. “근데 여기가 어디인가?” 슬슬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지, 아이나르가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실제로 보는 것과 2D 픽셀 그래픽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겠다마는, 이번에는 제법 알기 쉬웠다. 걸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흑색 대지. 곳곳에서 보이는 석조 건축물 잔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슬픈 울음소리까지. “망자의 땅이다.” “아, 구울과 데스핀드가 나오는 곳이군!” 일단은 그렇다. 세세히 들어가자면 엘더 구울과 스켈레톤, 벤시 등에 나름 중간 보스 격인 듀라한까지 출몰하겠다마는. “내가 앞장을 서도록 하겠다.” 몬스터들의 전투력은 고블린 숲보다 망자의 땅이 훨씬 더 높다. 하지만 까다로운 것으로 치자면 나는 고블린 숲을 위로 쳐 주고 싶다. 이곳이 훨씬 어둡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엔 덫이 없지 않은가. 바바리안 둘이서 활동하기엔 이쪽이 훨씬 더 편하다. “구울이군.” 머지않아 우리들은 몬스터와 조우했다. 숫자는 세 마리로 적다. 물론 3일 차가 되면 지금의 3배가량 늘어날 터. 서둘러 이동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비요른, 여기 마석이다!” “일일이 보고할 거 없이 보이는 대로 챙겨라. 분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속도를 올리겠다.” 고블린 숲과 달리, 나는 즉시 초입부를 벗어나 북쪽을 향해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던 때, 근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아아아아아악!” “비, 비, 비요른?!” “벤시가 내는 하울링이다. 그냥 무시해라. 먼저 공격해 오는 일은 거의 없으니.” “그, 그렇군……. 근데 정말로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위험할 수도 있지 않나.” 글쎄. 정령을 쓸 수 있던 에르웬이 있다면 모를까. 물리 계열 둘이서는 뭔 짓을 하던 벤시는 잡을 수 없다. 설령 잡을 수 있어도 문제였고. “벤시를 먼저 공격하면 저주에 걸린다.” “저주?” “원한의 징표라는 이름의 저주다. 미궁에서 벗어날 때까지 벤시들이 집요하게 노려오지.” 열흘 내내 벤시만 잡을 게 아니라면, 벤시에게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다. 경험치가 목적이라면, 마지막 날에 한두 마리만 잡는 게 일반적이었고. “너는 정말 현명한 전사다. 널 따라오길 잘했다.” 칭찬해 주는 건 고맙다. 티는 내지 않으려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종류를 무서워한다는 것도 충분히 잘 알겠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끼야아아아악!” “까드득!” 소리가 날 때마다 달라붙는 건 제발 좀 그만해 주었으면 한다. 부담스러운 건 둘째치고……. 붙잡힌 팔이 뽀개질 것만 같으니까. “놔, 놔라… 스켈레톤이다.” 때마침 덜그럭, 관절이 엇물리는 소리를 내며 스켈레톤 무리가 나타났다. 숫자는 무려 10마리. 1일 차임에도 물량을 자랑하는 몬스터답게 숫자가 꽤나 많다. 뭐, 그런 만큼 다 잡아 봐야 나오는 마석은 서너 개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크흠! 내가 해치우겠다!” 벤시 소리를 무서워하던 게 무안했는지, 아이나르가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쯧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나르! 갈비뼈 사이를 보면 핵이 있을 거다. 도검류 무기로 스켈레톤을 잡으려면 반드시 거기를 노려야지만…….” 콰직-! “응?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신경 쓰지 말고 싸워라.” 콰직-! 콰직! 콰직! 약점이고 뭐고. 아이나르가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스켈레톤은 무참히 박살 났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엘더 구울을 살해했습니다. EXP +1」 「스켈레톤을 살해했습니다. EXP +1」 「스켈레톤 전사를 살해했습니다. EXP +1」 「스켈레톤 궁수를 살해했습니다. EXP +1」 *** 이후 약 8시간 동안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러 가지 새로운 몬스터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일반 구울보다 2배 정도 커진 엘더 구울. 변이종으로 분류되는 스켈레톤 전사와 궁수. 메이지는 아직 만나지 못해봐서 뭐라 단정 짓긴 어렵겠으나, 지금까지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1일 차라 개체 수가 적을뿐더러, 내 전투력도 이전에 비해 현저히 상승한 덕분이다. 퍼억-! 일단 장비만 봐도 그렇다. 아저씨의 양손 망치는 무게 중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짧게 쥐어야만 사용이 가능했다. 근데 길이가 약 70cm쯤 되는 메이스를 쥐니 보다 멀리서 타격하는 게 가능해졌다. 훨씬 안전하고 위력도 세다. 무엇보다……. 까앙-! 갑옷도 생겼다. 조끼 형태의 판금 갑옷이라 팔뚝은 무방비하게 노출되지만, 그것만으로도 방패로 막아야 할 부위가 훨씬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훨씬 과감한 전투가 가능했다. 마치 이제야 족쇄를 풀은 듯한 느낌. “비요른, 조심해라! 스켈레톤 궁수도 있다!” T자로 눈코입만이 노출된 강철 투구는 최중요 급소인 머리를 보호해 주었다. 물론, 석궁 같은 것에 직격당한다면 위험하겠지만 다 부러져 가는 활로 쏜 화살 정도는 가뿐하게 튕겨내 줬다. 그리고 그런 나와 엇비슷한 전투력을 지닌 바바리안이 한 명 더 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우리들은 바바리안의 조상신을 함께 부르짖으며 학살이나 다름없는 전투를 이어 나갔다. 퍼억! 퍼억! 콰직-! 어떤 몬스터가 나오던, 한 무리를 전부 박살 내는 데 10초 남짓이면 충분했다. 그래서일까? 전투가 끝날 때마다 에르웬과 함께할 때는 맛볼 수 없던 상쾌함이 느껴졌다. 아, 이게 바바리안의 참맛인가? “비요른, 부상을 입었군.” 응? 아이나르의 말을 듣고 확인해보니 팔뚝에 스크래치가 살짝 나 있다. 다만……. “걱정하지 마라. 금방 낫는다.” 포션은커녕 약초를 바를 필요도 없다. “오! 벌써 살이 아물고 있다! 이게 그 혼령각인의 능력인가?” 불사자 각인 경로의 1단계 효능은 자연 재생력이 눈에 띄게 상승한다는 것이다. 물론, 포션에 비할 바는 아니고……. 지난날 확인해 보니 0.5cm 깊이의 자상이 어느 정도 아무는 데 1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안정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체력 회복 자체도 빨라져서 지구력도 엄청나게 늘었고. “슬슬 준비해라. 이제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니까.” 나는 아이나르에게 긴장을 불어넣어 주며 이동속도를 낮췄다. 어느새 지형이 바뀌었다. 더 이상 바닥은 질척거리지 않고 딱딱했으며, 곳곳에 둔덕이 져서 평평하지도 않았다. 벤시의 하울링도 훨씬 더 커졌고. “끼히히히히히히!!” “끄흐흐, 흐아아아악!” 물론,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따로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상위종. 즉, 8등급 몬스터가 출현한다. “…비요른, 진짜 먼저 공격해 오지는 않는 거겠지?” 벤시 소리에 쫄았는지 아까부터 자꾸만 아이나르가 이를 까드득거린다. 바바리안들은 무서우면 턱에 힘이 들어가서 그렇게 된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그렇게까지 무서워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꾸오오오오오—!!”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자니, 어둠 속에서 웬 기괴한 포효 소리가 들려온다. 후, 실제로 들으니까 진짜 살이 떨리네. “아이나르, 전투 준비다.” “베, 벤시는 안 잡는다고 하지 않았나?” 얘는 귀가 없나? “벤시가 아니다.” 데스핀드. 게임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해 준 여러 8등급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씹새끼라고 평가를 받는 그놈이 틀림없다. ***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먼 거리에서부터 느껴지던 육중한 걸음 소리가 점점 더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놈이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랑 싸우겠다고?” 아이나르가 내게 묻더니, 대답도 전에 읊조린다. “재밌겠군.” 얘의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번엔 자기도 죽는 게 무섭다더니, 이런 애를 보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벤시 같은 건 무서워하면서? 쿠웅-! 불빛이 거슬리는지, 이내 데스핀드가 빛이 닿는 끝부분에서 걸음을 멈췄다. “긴장하지 마라.” “걱정 마라. 긴장하지 않았다.” 왜 네가 대답해. 나한테 한 소리인데. 후, 오면서 계획을 세우긴 했는데 막상 실제로 저걸 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데스핀드는 인간형 언데드 몬스터다. 아니, 키메라에 더 가깝나? 신장은 3m가 넘고, 양쪽 팔에는 칼과 방패가 달려 있다.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곡선으로 길게 뻗은 한 손은 반월처럼 날이 서 있고, 팔꿈치부터 옆으로 넓게 퍼진 다른 쪽 팔은 방패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름하여 프로틴 블레이드 앤 쉴드. “꾸오오오오옭—!!” 씨바, 그 꼴로 소리치지 마 존나 무서우니까. 어떻게든 공포감을 줄여 보려는데 쉽지가 않다. “차분히 계획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다.” “당연히 너를 믿는다.” 그건 고마운데, 이번에도 나 스스로한테 한 말이었다. …침착하자. 이번이 첫 트라이긴 하지만, 긴장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상황이 악화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자. “아까 말했듯이 무조건 머리를 노려라. 다른 곳은 의미가 없으니까. 알겠나?” “알겠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달려들란 신호는 아니었는데. “베헬—라아아아아아!!” 아이나르가 대검을 양손에 쥐고서 달려 나갔다. 말리긴 이미 늦었다. 기합 소리에 어그로가 제대로 끌렸는지, 횃불의 경계에서 간만 보던 놈도 검과 방패를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꾸오오오오옭—!!” 콰아아앙! 아이나르의 대검과 데스핀드의 프로틴 블레이드가 맞닿으며 굉음이 피어난다. “비요른, 조심해라! 힘이 장난 아닌 마물이다!” 보통 그런 건 보자마자 알지 않나? “베헬—라아아아아아!!” 일단 나도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방패로 앞에 벽을 세운 뒤, 튕겨 나간 아이나르를 공격하려던 놈의 측면을 가격했다. 근데 이게 체격에서 나오는 묵직함인가? 무슨 바위에 꼬라박은 듯한 느낌이다. 치지지지직. 놈이 힘을 주자, 방패를 쥔 그대로 몸이 뒤로 밀려난다. 굳이 버틸 이유는 없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발끝을 높이 세웠다. 그리고 온 체중을 앞으로 실어내며 포효가 아닌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씨바! 근육이 터져 나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형언키 어려운 희열이 느껴졌다. 뒈질 거 같지만… 버텨 냈다. 그리고 아이나르는 그 틈을 그냥 흘려보낼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후웅-! 이내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휘둘러진 대검이 데스핀드의 옆통수를 가격했다. 베어 낸 것이 아니라, 정말 단어 그대로. 카각! 저 두꺼운 대검의 베었는데, 1cm가량 날이 박혔을 뿐이다. 둔탁한 소리가 난 건 두개골 때문일 테고. 하기야 게임 내에서도 데스핀드의 방어력은 악명이 높았다. 뭐, 많은 초심자에게 게임을 접게 한 것은 방어력이 아닌 재생력 쪽이겠다마는. “꾸오오오오오!” “일단 물러나라!” 광분한 데스핀드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대검이 뽑힌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질질 흘러나왔지만, 출혈은 3초도 안 되어 멎었다. 놈이 가진 패시브 스킬 ‘육체보존’. “아이나르! 틈을 만들어라. 이번엔 내가 공격해 보겠다!” 신속히 오더를 내리고 다시 달려들려던 찰나. 드드드드드드! 돌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펙트는 처음이었지만, 나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데스핀드가 지닌 액티브 스킬. ‘망자의 부름’이다. “떨어져라, 구울이 나온다!” 진동이 끝나자, 땅 아래서 구울들이 땅을 파고 기어올라온다. 숫자는 정확히 열 마리. “일단 이놈들부터 정리해라!” “알겠다!” 아이나르가 구울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사이. “꾸오오오오!” 나는 데스핀드만을 신경 쓰며 밀착 마크했다. 다만, 자꾸 어그로가 끌린 구울 새끼들이 손톱으로 할퀴어 댄 탓에 피부가 순식간에 걸레 조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나도 재생력이 있거든. 너만큼은 아니겠다마는. “비요른! 이제 이놈은 내가 맡겠다!” 2분가량을 버티자, 구울들의 정리가 끝났다. 왠지 스스로도 웃겼다. 데스핀드의 소환 패턴을 말 그대로 처맞기만 하면서 버텨 내다니. ‘게임에서도 이런 짓은 잘 안 했는데 말이지.’ 바톤터치를 해 아이나르가 놈을 일대일 마크하는 사이, 나는 메이스를 꺼내 들고 놈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뒤통수에 스매쉬를 꽂아 넣었다. 퍼억-! 좋은 손맛에 좋은 소리였다. 실제로 산발인 뒤통수에서도 썩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억-! 퍼억-! 퍼억-! 고블린이라면 맞는 순간 빛이 되어 사라졌을 위력이 한 방 한 방에 담겼다. 근데 씨바 왜 안 뒈지지? 카각! 실제로 겪어 보니 두개골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내리치고 있는 와중에도 살이 아물고 있었고. …어떡하지? 공격력이 부족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무기 상인이 추천해 주던 걸 사는 건데. 그냥 얘를 잡는 건 포기하고, 9등급 몬스터나 사냥해야 하나? 칵! 칵! 칵! 고민을 하면서도 계속 메이스를 내리쳤지만, 뇌를 박살 내기에는 모자랐다. 후웅-! 결국, 휘둘러진 프로틴 블레이드를 피해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꾸옷!” 갑자기 데스핀드의 몸이 균형을 잃고 갸우뚱한다. 확인해 보니 빈틈을 파고든 아이나르가 3m 거구인 놈의 다리 한쪽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리는 게 보인다. UFC에서 자주 보던 기술이다. 이건 설마…… ‘싱글 레그 태클?’ “베헬—라아아아!!” 근육이 펌핑 되고 핏줄이 터질 것처럼 솟아오른 것이, 오히려 이쪽이 더 괴물 같아 보일 지경이다마는……. 노리는 의도는 명확했고, 가능성마저 보였다. 이에 나도 즉시 거들었다. 퍼억-! 지면과 맞닿은 한쪽 발목을 메이스로 있는 힘껏 후려치자, 육중한 거구가 균형을 잃고 잠시간 체공한다. 그리고……. 쿠웅-! 이윽고 바닥에 처박힌다. 전문 용어로 치면 테이크다운. 중대형으로 분류되는 몬스터를 상대로 이런 식의 싸움이 가능하단 건 처음 알았다. …바바리안에게 불가능한 건 없구나. “꾸오오오옷!” 데스핀드가 뒤집힌 벌레처럼 바둥거리는 게 보인다. 곧장 달려들려던 우리는 동시에 흠칫했다. “꾸오오오옷!!” 너, 설마 혼자 못 일어나는 거니? “비요른!” “오우!”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이 통했다. 나와 아이나르는 넘어진 놈에게 달려가 미친 연놈처럼 서로의 무기를 내리쳤다. 절구 위에 떡을 올려놓고 번갈아 망치를 내려치듯이, 사이좋게 한 번씩 돌아가며. 퍽! 퍽! 퍽! 퍽! 퍽! 그러고 보면 초등학생 때 방문한 민속촌에서 딱 이렇게 떡을 쳤었는데. “즐겁다!” 당시 나랑 같은 조가 된 짝꿍이 울면서 바꿔 달라 했던 게 떠올라서일까? 함께 즐거워하는 아이나르를 보니 마음속 상처가 치유된다. 왠지 영혼까지 순수해지는 기분. 「데스핀드를 살해했습니다. EXP +2」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데스핀드를 보며 우리들은 해맑게 미소 지었다. 마법사의 위력적인 마법도, 신관의 신성력도, 요정의 정령술도 없었지만……. “비요른! 이것 봐라! 마석이 엄청나게 크다!” 우리는 8등급 몬스터 사냥에 성공했다. 24화 약탈자 (1) 9등급 마석은 돌빵 한 개. 즉, 하나당 20스톤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8등급 마석은 어떨까? 애석하게도 데스핀드 한 마리의 가치는 고작 고블린 다섯 마리와 동일했다. “뭣? 겨우 백 스톤밖에 안 한단 말인가?!” “…소환된 구울이 떨어뜨린 것까지 하면 300스톤이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낮은 금액임엔 부정의 여지가 없다. 방금 우린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비요른… 여관에서 먹은 그 빵이 얼마였지?” “…한 300스톤 정도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래도 데스핀드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단맛을 한 번 느낄 수 있단 뜻이군!” 아무래도 아까 먹은 크림파이가 아이나르의 새로운 단위로 자리매김한 모양. 물론, 8:2 비율로 나누면, 마리당 단맛 0.2회가 될 테지만……. 이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비요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냥! 사냥을 하자!” 생각보다 적은 금액에 실망하기도 잠시. 다시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나르를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이런 면에선 바바리안이랑 같이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전 동료였던 에르웬은 다 좋았지만, 매사 수동적이란 단점이 있었으니까. 동기부여가 훨씬 간편하다. “좋다, 가자!” 이후 우리들은 계속해서 근방을 돌며 데스핀드를 사냥했다. 사냥 한 번에 20분이 넘게 걸리면, 300스톤을 벌어도 거의 손해라 볼 수도 있었지만……. 원래 첫 트라이는 예외로 쳐야 하는 법. “꾸오오오오!” “베헬—라아아아!” 데스핀드를 만나는 족족, 우리는 함께 조상신을 부르짖으며 돌진했다. 그리고 서로 양다리를 하나씩 잡고는 들어 올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름 하여, 더블 바바리안 태클. 쿠웅! 넘어진 데스핀드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팔이 닿지 않는 머리 맡에서 사이좋게 떡메질을 하고 있으면 놈도 금방 빛이 되어 사라졌다.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분.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이놈도 위기감을 느끼고 구울을 소환하는 탓에 더 단축하긴 어려웠다. “우오오오!” 사냥이 이어질수록 마석 주머니가 채워지는 속도 역시 빨라졌지만, 우리는 만족치 않고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3일 차가 되면 데스핀드 사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버그를 이용해 누구보다 빨리 2층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놈과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원래 이놈들은 혼자 다니는 개체가 아니니까. 두 마리까진 어떻게 가능해도, 서너 마리가 무리를 지으면 우리 둘만으로는 어렵다. [14 : 27]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있지만 늘 사고는 조급할 때 벌어지는 법이다. “비요른, 목이 마르다.” “아껴 마셔라. 내일은 돼야 시체꽃이 필 테니까.” “시체꽃?” 망자의 땅에서 수분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이 되면 석조 건물 잔해 위에 덮인 덩굴들 위에 꽃이 피는데, 갈라 보면 그 안에 물이 담겨 있다. 이 얘기를 해 주자 아이나르가 정색했다. “비요른, 그건 좀 비위생적인 것 아닌가?” 확실히 그건 그렇다. 마셔도 된다고 듣긴 했지만 나도 찝찝하니까. 다만, 5인실에서 열 명이 씻지도 않고 돌아가며 자던 놈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그럼 달리 방법이라도 있나?” “없다! 마시겠다!” 20분 정도 쉬며 체력을 보충한 우리는 다시금 사냥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 되었을 때까지 총 70마리의 데스핀드를 사냥했다. 하루에 무려 2만 스톤이 넘는 수익을 올린 셈. ‘이 정도면 9등급 몬스터만 잡는 것보다 나은데?’ 다만, 내심 기대했던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 정수의 드랍률은 극악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따라서 초반부엔 정수가 드랍되는 것에 따라 육성법을 짜는 게 이 게임의 기본일뿐더러……. 그걸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실력이 갈린다. 그런 의미에서 내심 기대했었다. 데스핀드의 정수는 초반부에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꼽히니까. ‘문제는 나올 기미가 없다는 거겠지만.’ 구울을 소환하는 액티브 스킬 ‘망자의 부름’은 솔직히 애매하지만, 패시브인 ‘육체보존’이 이를 메우고도 남을 만큼 좋다. 물론, 정수를 먹는다고 놈처럼 말도 안 되는 재생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겠다마는……. 불사자 각인으로 재생력 계수가 올라간 나와는 시너지가 좋은 편에 속한다. [02 : 57] 아이나르의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 2일 차가 시작됐다. 이제부터는 한 번에 데스핀드 두 마리와 전투를 해야 할 것이다마는,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부분도 있다. 적어도 다른 탐험가들과 마주쳤을 때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테니까. 거듭 말하지만, 나는 탐험가들이 제일 무섭다. “아이나르, 일어나라.” “…먹, 먹지 않았다!” “교대 시간이다.” 인당 세 시간씩. 총 여섯 시간을 휴식한 우리는 2일 차에도 어김없이 데스핀드를 사냥했다. “꾸오오오!” 무려 두 마리. 액티브 스킬로 소환하는 구울들만 스무 마리나 됐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볼 만했다. 1일 차에 수도 없이 상대하며 요령을 익힌 덕분이다. 쿠웅-! 눈 뜨고 코 베어가듯 단숨에 달려가 한 마리를 먼저 바닥에 패대기친 뒤. 나머지 한 마리도 합동해서 넘어뜨린다. 이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꽤나 난처해질 수 있겠지만……. 그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친다. “아이나르, 튀자!” “오우!” 데스핀드는 이동속도가 느린 데다가, 영역에서 멀어지면 따라오지 않는 습성까지 있어 아직 위험한 일은 없었다. 솨아아아아-! 전투 한 번에 걸리는 시간은 약 10분. 심지어 열에 세 번은 트라이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두 마리씩 잡다 보니 수익은 1일 차와 비슷했다. 1일 차에는 무리를 찾는데도 꽤 시간이 소요됐으니까. 다만 오후가 지나자 간간이 세 마리씩 무리를 짓는 놈들도 나타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조우 빈도가 더 늘어났다. “슬슬 이곳을 떠야겠군.” “현명한 전사라면 뺄 때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2일 차가 끝나갈 시기.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데스핀드의 영역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질척거리는 진흙밭으로 돌아와 적당한 야영지를 찾았다. 그러던 때였다. “……!” 처음으로 다른 탐험가 무리와 조우했다. 인간 셋으로 이뤄진 그들은 우리처럼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었지만……. 10m는 접근한 다음에서야 우리는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뭘 보고 있지? 볼일이 없다면 어서 꺼져라.” “크흠, 실례했군.” 아이나르가 차갑게 말을 뱉자, 상대 무리에서 먼저 우리를 지나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신기했다. 터벅, 터벅. 불과 이십보 가량 멀어졌을 뿐이며, 아직 저들의 발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올 정도다. 그런데 저들이 들고 있던 횃불의 빛은 벌써 보이지도 않는다. 미궁 대부분의 층계에 빛을 잡아먹는 성질이 있다더니, 이게 그 뜻이었구나. 아무래도 횃불 정도의 밝기는 10m만 떨어져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는 듯한데…… 한참 이 현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비요른, 이동해야 한다.” 아이나르가 완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들이 우리 위치를 알지 않나. 벽이 있어 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새 야영지를 찾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나도 그러려고 했고. 다만, 적응이 안 된다. 뭐야 얘, 다른 탐험가를 보자마자 꺼지라고 으르렁대던 것도 그렇고……. 갑자기 캐릭터가 달라졌다. “비요른, 인간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 “…동의한다.” 이제 보니 종족이 바바리안이란 것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다름 아닌 인간 불신이다. 얘도 첫 진입 때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보네. 나중에 물어보든가 해야지. “그럼 이동하지.” 이내 우리들은 다시 짐을 챙겨 이동했다. 하지만 아까만큼 입지가 좋은 야영지는 찾기 어려웠다. 그냥 등 뒤를 막아 줄 벽 하나로 타협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끄으으…….” 그리 멀지 않은 전방에서 신음이 들려온다. “크헉! 흐으읍!” 벤시의 것은 아니다. 일단 여성이 내는 음성도 아닐뿐더러……. “…잠, 잠깐!” 명확하게 말을 뱉고 있다. “살, 살려—” 제기랄. 그냥 아무 데서나 자리 잡고 잘걸. “…….” 중단된 비명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온다. 아이나르가 속삭이듯 읊조렸다. “몬스터에게 당한 게 아니다.” 나도 귀가 있으니 안다. 사람이 몬스터에게 목숨 구걸을 할 일은 어지간해서 없을 테니까. 정황은 명백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씨바, 이게 또 뭔 개같은 상황이야? 내가 무슨 꼬마 탐정도 아니고.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이나르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근데 뭔가 기척을 느낀 것일까? “거기 누구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긴 하지만 여자의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죽이며 꼼짝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피유우우우우우! 퍼퍼펑! 웬 조명탄 같은 것이 하늘 위로 쏘아지더니, 약 50m 반경을 은은하게 비춘다. 덕분에 나 또한 목소리의 주인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리는 불과 15m도 채 안 됐다. …에르웬이 있었으면 저 멀리서도 기척을 눈치채고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 “흐음, 초심자인가?” 정체불명의 여자가 우리를 보며 짧게 판단을 내렸다. 피차일반이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단검. 널브러진 네 구의 사체. “…약탈자군.” 여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처음 보나?” “애매해.” 너처럼 전문적으로 보이는 새끼는 처음이거든. “그렇군.” 살인 현장이 목격된 셈이니 당황할 법도 한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표정은 몹시 평온했다. 왠지, 난 그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 약탈자. 몬스터가 아니라 같은 탐험가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자들을 그렇게 칭한다. 그들은 마석이 아니라, 탐험가의 장비를 루팅하는 것으로 높은 소득을 창출한다. 물론 걸리면 도시로 돌아오는 순간 사형이겠다마는…….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이 없다. 정당방위긴 했지만, 내가 여섯이나 되는 탐험가를 죽이고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듯. 미궁에서 벌어진 일을 밖에서 알 방법이 없다. 누군가 밖에 알리지 않는다면. “…복면을 쓰지 않았군.” 현 상황에서 가장 지랄맞은 점이다. 이 사이코패스 년은 약탈자 짓을 하면서 얼굴을 대놓고 느러내고 있었다. 170이 조금 넘는 키에 마른 체격.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발과 눈 밑에 새겨진 문신, 반쯤 잘려 나간 오른쪽 귓등까지. 이 정도면 특정인을 추정해 내기 어렵지 않다. 현대였으면 저쪽에서도 증거가 있냐고 잡아떼는 게 가능했겠지만……. 내가 있는 이곳은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 물적 증거 없이도 진실과 거짓을 판별해 낼 수단은 엄연히 존재한다. “…동료였던 건가?” “글쎄.” 여자가 시체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이쪽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역시 그래서 맨얼굴이었구나. 굳이 답이 예상되는 질문을 하면서도 눈으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시체는 총 네 구. 착용한 장비의 수준이나, 마법사가 있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최소 5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탐험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세 구의 사체엔 외상이 없다. 다만 모두 피와 위액을 토해 낸 흔적이 입가에 남아 있는 걸로 봐서……. ‘독을 먹인 건가? 마지막에 직접 처리한 남자는 내성이 있어서 조금은 버틴 거고?’ 부디 이 추측이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 하나 없이 혼자 중견 탐험가 넷을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면 상황이 더 암울할 테니. 덜그럭, 덜그럭. 이내 여자가 쪼그려 앉더니 능숙하게 시체들의 장비를 벗겨 낸다. 그리고 하나씩 가방에 집어넣는다. 마도구인지, 부피가 큰 물건들도 무리 없이 쑥쑥 들어간다. 부러운 감정보다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저런 걸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놈과 우리의 격차가 절절하게 느껴졌으니까. “바바리안.” 여자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나르가 그런 내게 조용히 물었다. “싸울 건가?” 얘도 참 대단하다. 에르웬이었으면 진작에 쫄아서 어버버거리고 있었을 텐데. 격차가 얼만큼 나던 싸울 생각부터 하는 건 전사의 자존심 뭐 그런 건가? 나는 짧게 대답했다. “생각 중이다.” 솔직히 말해, 싸운다는 선택지는 피하고 싶다. 장비만 봐도 차이가 확연하거든. 한데 만약 장비만큼의 실력을 겸비한 자라면, 글쎄……. 2:1 상황임을 감안해도 우리 쪽 승산이 훨씬 낮을 것이다. 후우웅—! 지속시간이 다했는지 하늘에 쏘아진 조명이 꺼지며 다시금 어둠이 찾아온다. 나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뛴다. 전속력으로.” 자존심이 목숨을 살려 주진 않는다. 25화 약탈자 (2)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간간이 나침반을 열어 방향만을 확인하며 온 힘을 다해 미친 듯이. “그르륵!” 구울, 스켈레톤 등 다양한 몬스터들이 앞을 가로막아 왔으나, 전부 이동속도가 느렸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쫓는 쪽도 마찬가지겠지. 타다다다닷! 한 5분쯤 지났나? 슬슬 사이코패스 년도 루팅을 끝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다. 우리가 초심자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면, 그년도 루팅을 포기하고 곧장 추격해 왔을 테니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줘도 추격할 수단과 확신이 있었다는 방증이겠다마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시간을 번 게 어딘가. “비요른, 저게 그 표식 아닌가?” 모처럼 희소식이 이어진다. 망자의 땅에는 무너진 석조 건물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이를 지나칠 때마다 표식을 해 두었다. 추후 1층 포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쪽이다!” 근방에서 활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발견 속도가 이르다. 어쩌면 운이 따르려는 건— “웬 놈이냐!” 젠장, 플래그를 꽂는 게 아니었는데. 아이나르와 내 발이 동시에 멈추었다. 하필이면 또 다른 탐험가 무리와 조우를 한 탓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잘된 건가? 탐험가들에게 약탈자는 공적이나 다름없다. 사정을 설명하고, 적당한 보상을 제시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바바리안?” 어둠 속에서 나타난 우리에게 무기를 겨누던 탐험가 무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숫자는 넷. 종족은 전부 인간이고, 장비는 우리보다 최소 두 배는 좋아 보인다. 인간은 믿기 어렵지만 선택지가 없겠지. “약탈자에게 쫓기고 있다. 도움을 청한다.” “그러는 너희가 약탈자가 아니란 보장은?”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실이다.” 요정의 약속과 달리, 아무런 강제성도 없는 전사의 맹세지만……. 놀랍게도 이 맹세는 어디서나 잘 먹힌다. 넷 중 리더로 보이는 빡빡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약탈자를 잡게 된다면 보상은 우리가 전부 갖겠다. 동의하나?” “물론이다.” “좋다.” 빡빡이가 손짓하자 다른 탐험가들도 겨누고 있던 무기를 내렸다. 분명, 내가 바바리안이 아니었다면 경계심을 푸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 “일단 이리로 와라. 자세한 얘기는 그다음에 하지.” 그들에게 다가가자, 신장 160 정도의 노란 머리가 이능을 사용했다. “노움의 이능이다. 땅 위에서라면 반경 3m까지 주변 사물과 동화시켜 주지.” 쉽게 말하자면 고블린 궁수의 은신 능력이 범위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대신, 이동할 수 없단 단점이 있지만.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없다.” “운이 좋았군.” 빡빡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다. 우연히 만난 탐험가 무리에게 범위 은신 능력을 소지한 자가 있다니? 이거라면 아예 전투를 회피하는 것도 가능— “바바리안 두 마리가 굴러 들어오다니 말이야.” 씨발, 혼잣말이었구나. 어쩐지 뭔가 일이 잘 풀리는 거 같더라니. 아무렴, 어림도 없지. *** 「캐릭터가 [진압] 상태에 빠졌습니다.」 *** “후후후.” 빡빡이를 비롯한 탐험가들의 눈빛에 탐욕이 어린다. 이미 한 놈은 내 배낭을 뒤지더니 마석 주머니까지 열어젖힌 상태. “겨우 이틀 만에 많이도 벌었군.” 당장에라도 메이스로 대갈통을 후려치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아이나르도 매한가지. “왜, 갑자기 몸이 안 움직여서 놀랐나?” 더 볼 것도 없이 정수의 힘이다. 어떤 정수인지도 벌써 짐작 가는 게 있다. 비슷한 이능은 여럿 있지만, 우리와 고만고만한 수준의 탐험가인 이놈들이 갖고 있을 만한 건 하나뿐이니까. ‘스톤골렘의 [진압]인가…….’ 확실하다. 지금 나는 8등급 몬스터 스톤골렘의 액티브 스킬에 당했다. 가장 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1이라도 좋으니 대미지를 입는 것일 테지만……. 이 새끼들도 생각이 있으면 조심하겠지. “이봐 친구,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다네. 그런 식으로 풀리는 능력이 아니니까.” 지랄맞다는 말로도 모자란 최악의 상황이다. 씨발, 살겠다고 그 지랄을 다 떨어 댔는데 이렇게 죽는 건가? “눈빛 살벌한 것 좀 보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됐다, 라모드. 이쯤하고 끝내지. 이놈들이 만났다는 약탈자가 오면 괜히 귀찮아지니까.” “쳇, 아쉽군. 기껏 여자를 잡았는데 바바리안이라니.” “멍청하시긴요, 바바리안이니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심장만 떼다 팔아도 그게 얼만데?” 고스란히 드러난 추악한 욕망이 피부를 타고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내 빡빡이가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 들었다. “한 방에 잘 죽여라. 괜히 귀찮아질라.” “쯧, 걱정은.” 휘익! 바람을 타고 살의가 날아든다. 겨눠진 방향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목. ‘…목이라고?’ 죽음이 코앞인 상황에서도, 내 뇌는 주어진 정보를 종합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물론, 정말로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인생을 돌이키며 후회를 곱씹는 짓보단 훨씬 생산적일 터. 푹! 이내 예리한 칼날이 내 목을 파고든다. 그와 동시에 따끔한 감각이 일며 굳어 있던 몸이 풀린다. 나는 즉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치 복서가 얼굴을 틀어 펀치의 위력을 흘려내듯.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어?” 빡빡이의 얼탄 표정이 보인다.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은 텅 비었다. 그제야 목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아, 이미 반쯤 박혔구나.’ 깨달은 순간 뇌가 짧게 결론을 내린다. 나쁘지 않다. 출혈이 적은 만큼 조금이라도 더 버틸 테니. 츠즛. 풀리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불어넣으며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쥐고 있던 메이스를 휘두른다. 반질반질한 빡빡이의 정수리를 향해. 콰직-! 안면이 반쯤 함몰된 빡빡이가 쓰러진다. 0.5배속 정도의 속도로. “다르반!!” 곳곳에서 당황한 얼굴들도 여럿 보인다. 왜 씨발, 목에 칼이 박힌 놈이 반격해 올 줄은 몰랐나 봐? “니, 미…….” 사실 나도 몰랐어. 이게 될 줄은. “씨, 바…….” 자꾸만 목에서 울컥거리며 뭔가 올라온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빛이 뿌옇게 번진다. 쇼크인가? 발끝에서 머리맡까지 저릿하다. 산소와 혈액이 부족하다. 쩔그렁! 손이 풀렸는지 쥐고 있던 메이스와 방패도 바닥에 떨어졌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쉬고 싶지만……. 아직 할 게 남았다. 겨우 한 새끼 더 데려가겠다고 이 지랄을 떤 건 아니니까. 츠즛. 발을 내디뎌 휘청이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목에 박힌 칼을 직접 뽑아낸 뒤. 네 걸음 정도 떨어진 아이나르를 향해 던진다. 푹! 어, 그게 박힐 줄은 몰랐는데. “끄윽!” 미안, 그래도 이제 몸은 움직이잖아. 서걱! 팔뚝에 단검이 박힘과 동시, 아이나르가 대검을 휘둘러 지근거리에 있던 궁수의 허리를 양단했다. 그리고 마치 연계 동작인 것처럼 한 번 더 회전하더니 그대로 도약해 다른 놈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놈이 쓰고 있던 철 투구는 무용지물이었다. 콰직-! 고철덩이로 변한 투구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린다. “이, 이런 미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노랑머리는 이를 보더니 곧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다. 고블린만큼이나 빠른 상황 판단. “비요른!” 이내 주변 정리를 끝마친 아이나르가 무릎 꿇은 내게 다급하게 달려왔다. 후, 그럼 이제 뒷일은 맡겨도 되겠— “비요르으으은……!” 아이나르가 나를 끌어안더니 구슬프게 이름을 부르짖는다. …마치 고인을 대하는 거 같다. 왠지 불길해진 나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말했다. “포, 커헉.” “알았다!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하겠다!” 아니, 복수는 됐으니까. 「업적 달성」 조건: 생명력이 0.1% 이하로 하락.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포, 션…….” 씨발, 살려 줘. *** 「비요른 얀델」 레벨: 2 육체: 66 / 정신: 40 (New +3) 이능: 11 아이템 레벨: 218 종합 전투 지수: 171.5 (New +3) *** 치이이이이익! 목에 난 구멍이 아물기 시작하며 고통이 동반된다. 하지만 나는 기쁘다. 명이 다한 육신에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있다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져서. “끄흐흐흐.” 살이 타는 듯한 통증이 무뎌지던 정신을 일깨운다. …살았구나. 진짜 이번엔 요단강을 건너는 줄 알았는데. 140만 스톤으로 딴짓 안 하고 불사자 각인부터 받아 놔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뒈졌을 테니까. “아이나르.” “정신이 좀 드나?” “장비, 장비부터 챙겨라…….” 말할 기력이 생기자마자 아이나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다음,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남은 포션 한 병을 전부 목에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이게 다 돈이지만 어쩔 수 없다. 목의 상처는 얼추 나은 듯해도, 속은 어떨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방금 전 일로 뇌에 어떤 손상이 생겼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미리 만전을 가하는 쪽이 옳겠지. “끄흐흐…….” 실제로 머지않아 후두부 쪽에서 저릿한 감각이 피어났다. 통증의 강도로 보아 심각한 정도는 아닌 듯하다마는, 방치해 뒀다면 큰 문제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잠깐 확인해 봐도 괜찮겠나?” “…장비는?” “일단 보이는 대로 전부 챙겼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나르가 내 턱을 들어 올리더니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살핀다. “흉터가 남겠군.” 조금 묘하다. 그러고 보면 에르웬도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뭐, 속에 담긴 감정은 전혀 다르겠다마는. “대단하군. 목에 뚫린 흉터가 있는 바바리안은 네가 유일할 것이다!” 얘 눈엔 이게 훈장처럼 보이는 걸까? 하긴, 아무리 몸뚱이 하나 믿고 살아가는 바바리안이라고 한들, 목에 구멍이 뚫리고 살아나는 놈이 흔치는 않겠지. “이제 어쩔 것인가?” 아이나르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온다. 이에 나도 정신을 바짝 조였다. 생사의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던 게 바로 전이지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지났지?” “길어 봤자 5분 정도다.” 5분이라……. 오히려 이 새끼들과 만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급해도 다른 탐험가 새끼들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아무튼, 후회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아까 그놈이 도망친 방향이 어디지?” “저쪽이다.” 나는 아이나르를 이끌고 노랑머리가 도망친 방향으로 이동했다. 바닥이 질척거리긴 해도, 발자국 같은 건 남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추적은 불가능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여기 있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노랑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야 주변이 이렇게 어두운데 가 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무작정 뛰다가 건축물 잔해에 머리를 박았는지, 놈은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히익! 사, 살려 주시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뺏은 뒤 대충 발로 등을 짓밟아 깨우자, 노랑머리가 납작 엎드렸다. 이전에 비하자면 몹시 정중한 태도다. 아까는 기껏 잡은 여자가 바바리안이란 것에 혀를 차더니. “어, 어헉!” 아이나르가 놈의 목덜미를 잡고는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근데 노랑머리의 체격이 작아서인지 그것만으로도 발에 땅이 닿지가 않는다. “커, 커헉!” 사람이 목이 졸려 발버둥 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동정심이 일기는커녕 속만 시원해진다. 그러게, 훈수를 둘 거면 제대로 뒀어야지. 목이 아니라 확실하게 머리를 노리라고. 그랬으면 포션이고 불사자 각인이고 간에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텐데. “아이나르, 풀어줘라.” 지시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이나르가 손을 놓았다. 털썩, 쓰러진 녀석에게 다가간 나는 귀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이능을 써라. 살고 싶다면.” 내가 곧바로 이 노란 쥐새끼의 모가지를 따버리지 않은 유일한 이유다. 이놈이 가진 노움의 이능. 지금 당장 그게 필요하니까. “써, 썼소이다!” “얼마나 유지할 수 있지?” “30분! 아니, 40분은 버틸 수 있소! 그러니—!” 말이 길다. 물어보는 거에만 대답했으면 좋겠는데. 꽈악, 놈의 옷깃을 쥐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다시 그만큼 쓰려면 걸리는 시간은?” “쓴 시간만큼은 쉬, 쉬어야 하오.” “그렇군.”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놈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상체를 발로 짓눌러 주었다. 평소 고블린을 대할 때처럼.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그 여자도 우리를 포기한 거 같은데.”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으나, 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일단 부리나케 도망치긴 했지만 실제로 추격을 당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루팅 시간을 감안해도, 아직까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는 건 확실히 이상했고. “포기라…….”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존재는 한다. 어쩌면 사이코패스 년에게 우리 같은 잔챙이는 쫓을 가치도 없었을 수 있다. 도시로 돌아가 증언을 하면 문제가 되는 것? 아까 봤던 맨얼굴이 사실 마법적인 무언가로 변장한 것이었다면 설명이 된다. 하지만……. 피식. 상황이 그렇게 좋게 흘러갈 리 없지 않은가. 상대가 나인데. 26화 약탈자 (3) “아이나르, 뭔가 일이 벌어지면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해라.” 바로 조금 전 일만 봐도 그렇다. 인간 탐험가들과 우연히 조우해서 희망 회로를 돌리다 어떻게 됐던가?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리서 도망칠 수 있던 건 그 여자가 놓아 줬기 때문이다. 맘만 먹으면 금방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러니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나답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본론만 짧게 얘기하자. “지금쯤 그 여자는 분명—”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겠지.” 이런 니미……. 난 기껏해야 찾아오는 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밑바닥엔 또 밑바닥이 있구나. 아니면, 내 지능에 문제가 있거나. “비요른!” 나와 아이나르가 배낭을 내려놓고 싸울 자세를 취함과 동시, 어둠 속에서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복면은 쓰지 않은 상태다. “아쉽게 됐군, 바바리안.” …무슨 이런 소름 돋는 년이 다 있지? “그래도 방금 전의 투쟁은 인상적이었다.” 듣자 하니 노움의 이능이고 뭐고, 한참 전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인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포션을 마시고 거동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어째서 그때를 노리지 않았지? 대답을 기다리던 찰나. “으, 으아아아아!” 노랑머리가 바닥에 튕겨져 나가듯 일어나 온 힘을 다해 질주를 하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 년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탓에 나와 아이나르는 반응이 늦었다. 다만……. 털썩! 얇은 침 같은 것이 직선으로 날아가더니, 노랑머리의 목에 박힌다. 독이라도 묻어 있었을까? 그리 크지 않은 외상에도 노랑머리는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더니, 머지않아 축 늘어졌다. 이에 나는 깨달았다. 한가하게 이유나 묻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아이나르!” 서로 간에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이름을 부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아이나르가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도약한다.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야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후웅! 약탈자 년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아이나르의 대검을 피해낸다. 그리고 회피 타이밍에 맞춰 내려찍은 메이스를 단검으로 막아 낸다. 카앙! 이런 미친……. 대체 정수를 몇 개나 처먹은 거야? 메이스를 막아낸 단검이 멀쩡한 건 물론. 여자가 역으로 힘을 주자 그대로 몸이 뒤로 밀려난다. “무의미한 짓은 그만둬라 바바리안.” 글쎄. 그건 너무 어려운 부탁 같은데. 설령 무의미한 짓일지라도. “베헬—라!” 나는 바바리안이다. 물론 아직 정신은 현대인의 때를 전부 벗어내지 못했지만. 카앙! 매일이 두렵고, 아픔은 익숙해질 기미가 없으며, 여전히 도망칠 길부터 떠올리는 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그들과 일치한다. 카앙! 남은 길이 단 하나뿐이라면. 나는 그 너머로 나아가길 택한다. 주저 없이. 카앙! 단검과 부딪치는 동시 메이스를 버리고 태클을 시도했다. 예상대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탐색꾼인 주제에, 육체 능력이 뭐 이리 높아?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넘어뜨리는 건 못해도, 물고 늘어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이나르! 지금이다!” 내가 외치기도 전에, 아이나르의 대검은 이미 호쾌한 직선을 그리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이에 내내 무표정하던 약탈자 년도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다. “……!” 당황, 혹은 짜증. 음, 어쩌면 분노일지도 모르겠다. 푹! 등골에서 통증이 피어났다. 척추를 찌른 건가? 아니, 갑옷은 대체 어떻게 하고?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힘이 쭉 빠진다. 「캐릭터가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바짓춤을 잡고 늘어지려 해 봤지만, 목을 찔리고도 괴물처럼 날뛰었던 몸은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푹! 그때 연속적으로 또다시 피륙음이 들렸다. 쩔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나르의 대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알만 위로 움직여 확인해 보니, 아이나르의 팔목에 단검이 깊게 박혀 있다. 여기까진가도 싶었지만……. 아이나르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 무기를 잃고 무력화된 오른팔 대신 왼 주먹을 휘두른다. 그 투쟁심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알 것도 같다. 외형적으로 덩치가 큰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바바리안이, 어째서 모두에게 괴물 취급을 받는지. 다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후웅! 유연한 몸놀림으로 주먹을 피해 낸 여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나르의 팔목을 잡고 비틀더니……. 쿠웅!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아이나르는 즉시 지면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지만, 자꾸만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힘줄이 돋아난 팔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가 차게 읊조렸다. “포기해라. 바실리스크의 마비독에 당한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마치 사망 선고가 내려오듯.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은 캄캄해진다. 장비도, 실력도, 경험도……. 모든 부분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고 있다.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현 상황을 뒤집을 수단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어가 뇌리에 새겨지던 그때. “그러게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좋았지 않나.” 여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바짓단을 잡은 채 굳어진 내 손을 풀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바바리안,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겠다고 맹세해라. 그럼 살려 주겠다.” …뭐? * *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바로 도망간 것만 아니라면 처음부터 이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바바리안에겐 빚을 진 일이 있으니까.” 이게 유일한 살길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이해가 안 간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여자가 짧게 설명했다. “되도록이면 바바리안은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지 않다.” 내 손으로 직접이라……. 설마 그래서 내가 노랑머리한테 뒈져갈 때도 그냥 지켜만 본 건가?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겠다 싶어서? “비요른… 약탈자의 말이다. 믿지, 마라……. 우리를 갖고 놀려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선택지가 없지 않나. 농락 당하고 뒈지나, 그냥 뒈지나. 어차피 내겐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일단 목 끝까지 차오른 피를 거하게 토해 내고서 물었다.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생각이지……?” “물론 죽인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약속이라니… 대체 누구와?”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평소와 똑같은 톤이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조금 더 까칠한 목소리처럼 들린다. “선택해라. 조금은 시간은 주겠—” “전사의, 명예를 걸고서 맹세하겠다.” 시간은 필요 없다. 선택지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너는 조금 특이하군.” 묘한 눈길로 나를 잠시 내려보던 사이코패스 년이 무언가를 뿌렸다. 치이이이익, 익숙한 이 고통. 더 볼 것도 없이 포션이다. 「회복 포션(상)을 복용하셨습니다.」 「캐릭터의 마비 상태가 해제됩니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리며 서서히 몸의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여자 바바리안, 너는 어쩔 테지?” 내게서 시선을 뗀 여자가 입을 물었다. 아이나르는 짧은 침묵 후에 답을 내놓았다. “…거절한다.” “그렇군.” 여자도 재차 되묻지 않았다.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에서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다. 무기를 꺼내 들지도, 달리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지만……. 이제, 이 여자는 아이나르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막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나르, 맹세를 해라.” “비요른?” “날 전적으로 따르겠다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전사의 맹세란…….” 씨바, 그깟 자존심을 지켜서 뭐 하겠다고?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내 고함에 아이나르가 흠칫 굳었다. 나는 목소리를 줄이고,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얘기했다. “지금은 날 믿어라. 이게 올바른 선택이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 아이나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겠다. 맹세를 하겠다.” “잘 생각했다.” 이후 아이나르까지 맹세를 하자, 사이코패스 년도 포션까지 써 가며 치료해 주었다. 이게 진정한 채찍과 당근인가? 무력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는 기분은 예나 지금이나 썩 다를 게 없었다. 매우 심히 역겨울 정도로, 좆같다. “…몇 층이지?” 치료가 끝나자마자 등 돌려 떠나려는 여자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짧게 대답해 주었다. “8층.” 역시 5층 정도가 아니었구나. 어쩐지, 탐색꾼인 주제에 존나 세더라. 아마 내가 10명이 더 있었어도 이년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르륵. 연기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사이코패스 년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는, 다를 것이다. * * * “아이나르, 괜찮나?” “…나는 괜찮다. 혼자 일어날 수 있다.” 아이나르가 내 손을 밀어내고는 스스로 일어섰다. 나한테 실망한 건가도 싶었지만, 어쩌면 실망의 대상자는 내가 아니라 본인일지도 모른다. 바바리안들은 우직한 면이 있으니까. “…….” 복잡한 눈빛의 아이나르는 잠시 냅두기로 하고, 일단 내 상태도 점검해 보았다. 우선은 이것부터……. 철컥. 갑옷을 벗고 뒷면을 확인하자, 단검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관통면이 아주 깔끔하다. …설마 ‘오러’인가? 니미. 겨우 2층에서, 그것도 이렇게 넓은 망자의 땅에서, 하필 이런 괴물을 딱 만나다니? 뭔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하루라도 빨리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고 뭐고, 이 개같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다. “비요른, 이제 어쩔 것인가?” “…1층으로 내려간다.” 망자의 땅은 나쁘지 않은 사냥터다. 하지만 저 미친년이 돌아다니는 이곳에 계속 체류할 생각은 없다. 마음이 바뀌었다며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가… 알겠다.” 한껏 풀이 죽은 아이나르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내 말에 따랐다. 멘탈 케어는 내 전문이 아니지만……. 후, 일단 내려가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야지. 무슨 세상이라도 무너진 표정이다. “잘 따라와라.” 피할 수 있는 전투는 대부분 피하며 표식을 따라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6시간쯤 흘렀을까. 우리는 마침내 1층으로 내려가는 포탈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쿵-! 이번에도 나는 멀쩡히 착지한 반면 아이나르는 바닥을 굴렀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다만 그녀는 신음도 뱉지 않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일어났다. “…아프지 않은가?” “아프다.” “그런데 왜…….” “전사가 아닌 내겐 아파할 가치도 없다.”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구나. 목숨을 구걸하듯 맹세한 게 그토록 치욕스러운 건가? 음, 하긴 게임에서도 그랬었지. “저, 아이나르……?” “왜 부르는 것인가?” “살아남는 전사가 강한 것이다. 한 번의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승리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 아닌가!” “너무 길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러 기운 넘치게 말했지만, 아이나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울했다. “그렇지만, 살아남는 전사가 강하단 말이 무슨 뜻인지는 왠지 알 것만 같다.” “그, 그런가?” “이런 굴욕과 당장에라도 자결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다니, 틀림없이 강인한 전사란 뜻이겠지. 비요른, 너처럼.” 아니, 나는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자결이라니, 무슨 사무라이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의미로 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껏 얻어걸린 걸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아이나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이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보겠다.” “그래, 언젠가 치욕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진심 어린 응원을 해주며, 우리들은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야영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 아이나르부터 재웠다. “2시간 뒤에 깨우겠다.” “…이번만큼은 배려를 받도록 하겠다.” 배려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07 : 39] 시간으로 치자면 3일 차 아침. 벌써 20시간은 넘게 자지 못했다. 게다가 그만한 일들을 겪었더니 정신적 피로가 엄청나다. 하지만 분명 눈을 감았아도 어차피 나는 한참 동안 자지 못했을 것이다. “…….” 아이나르처럼 극단적인 충동에 휩싸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만큼은 같았으니까. 포션을 마실 때의 통증과 비슷하다. 이러한 종류의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까드득. 지난날, 금발 일행에게 구원을 받았을 때도 오늘과 비슷했다. 신관은 내 눈을 보며 치료를 거절했다. 검사는 아깝다는 듯 포션을 장난감처럼 집어던졌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개처럼 엎드린 채 포션을 받아먹었다. 물론 살아남아서 기쁘기야 했지만……. 그만큼 형언키 어려운 감정도 치밀어 올랐다. “후우…….” 잡념을 털어내듯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지금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감정에 휘둘려 괴로워하는 건 나답지 않다. 어쩌면 슬슬 그걸 꺼낼 때일지도. 눈을 감고, 어릴 적 존경했던 사람이 해 준 충고를 간만에 떠올렸다. ‘명심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절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언제나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던 마법의 주문. 그래, 이 감정조차 원료로 삼자. 늘 그래 왔듯이. 그쪽이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일 테니까. 27화 균열 (1) 사람은 성장한다.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독서를 하거나,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거나, 처음으로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 보거나, 진심으로 바라는 꿈이 생기거나. 혹은. 남이 가진 행운에 질투를 해 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불행을 목도하거나, 욕망이 가진 힘을 새삼 깨닫는다든가. 경험에서 오는 모든 영감은 성장의 보탬이 되어 준다. 오늘의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정신적인 성장은 극히 일부분일 테지만. “단궁 하나, 판금 각반 하나, 하급 포션 3병, 일반 횃불이 한 다스… 이건 뭐야, 초상화? 가족인 건가? 아무튼 이건 버리고…….” 다 합치면 80만 스톤은 훌쩍 넘겠네. 노랑머리 일행의 배낭 정리를 해나가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이랬다. 좆같은 일을 겪는다고 항상 성장이 뒤따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면 갑옷 세 파츠는 더 맞출 수 있겠군.” 내가 한 단계 성장할 땐 항상 좆같은 일들이 따랐다. 제기랄, 슬슬 뭘 해야 할지 알겠다. *** 동굴 속을 걷고 있다. 아이나르와 함께. “비요른, 이제 어디로 갈 건가?” “노움이 나오는 남쪽으로 이동할 거다.” 총 8시간 동안, 인당 네 시간씩 휴식을 취했더니 아이나르도 조금은 기운을 차렸다. 평소에 비하면 텐션은 바닥을 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겠다마는. “비요른, 서둘러 이동해도 좋다. 날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 “조급해하는 이유가 뭔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다.” “그렇군.” 더 이상 아이나르는 걱정치 않아도 될 듯하다. 보다 뚜렷한 목표가 생긴 이상, 어두운 감정들은 독이 아니라 양분이 되어 줄 테니. 음, 그건 피차일반인가?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불침번을 서는 내내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를 되돌아보았다. 성인식, 미궁 진입, 한스와의 밤친구, 에르웬, 고블린 숲, 석궁 파티와의 4:2 전투 등. 지금 생각해도 크게 잘못된 점은 없었다.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냈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순간순간을 모면하는 데만 급급했다는 뜻이 되겠지. “왜 갑자기 멈추는가?” “아니다, 계속 이동하겠다.” 참작의 여지는 있다. 튜토리얼 요정도, 시스템 문구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사람 목이 댕겅 베어져 나갔고, 그다음부터는 현실과 동떨어진 일들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따라서 최대한 수동적으로, 안전을 우선시하며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땠던가? “비요른……? 표정이 좋지 않다.” “신경 쓰지 마라.” 항상 최선의 선택지를 택했다고? 개소리. 그래 봤자 결국 대처일 뿐이다. 일이 벌어진 다음, 수습에 나서는 놈에게 최선이라고 해 봐야 얼마나 좋은 선택지겠는가? 정말 살아남고 싶다면, 앞으로는 좀 더 능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달라지니까. 매일 노름에 빠져 살던 삼촌도 말했지 않나. 남이 만든 판에서 놀아나기보다는, 직접 만든 판 위에서 주사위를 던지라고. 좋아, 계획 변경이다. “아이나르, 정말 강해지고 싶은가?” 돌연 발을 멈추고 묻자, 아이나르가 짙은 의구심을 내비친다. “…그게 무슨 뜻인가?” “각오를 묻는 것이다. 확실하게 강해질 방법이 있다.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너는 어쩌겠는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 제안에 얘는 과연 어떤 대답을 대답을 내놓을까? 잠시 지켜보자 아이나르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눈을 빛냈다. “당연히 하겠다. 어차피 강해지지 못하면 우리는 전부 죽는 거 아닌가!” 그래, 그렇겠지. 그런 세계관의 게임이었으니까. 승낙 의사를 표한 아이나르가 이어서 외쳤다. “나는 전사다!” 아까는 아니라더니? 피식. 너무도 비효율적이면서도, 어떨 땐 그 누구보다 효율적인 바바리안의 자세를 보고 있자니 새삼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강해지는 방법이 무엇인가?” 쉬운 길은 느린 길이다. 그리고 좆같은 일은 자연재해다. 어느 길을 걷든지 간에, 그것은 예고 없이 눈앞에 닥쳐온다. 내 꼬인 팔자에는 그 빈도가 훨씬 잦았고. 그렇기에……. “균열에 입장할 것이다.” 선빵필승.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좆같은 일을 찾아간다. 어느 유명한 누군가가 말했듯.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오오! 그렇군!” 내 계획을 들은 아이나르가 감탄사를 토해 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균열이 무엇인가?” 어찌 된 게 원주민이면서 나보다 지식이 얕아? 제발 책이라도 좀 읽었으면 좋겠다. 어… 아직 글자를 제대로 못 읽지. “균열은… 한마디로 미궁 속 미궁이다.” 세세한 설명은 스킵했다. 어차피 이해 못 할 테니까. “미궁 속 미궁?” “그래.” [던전 앤 스톤]에 몇 없는 요즘 게임 같은 점이라고 해야 하나? 만약 설명해야 하는 대상자가 같은 현대인이었다면, 난 ‘인스턴스 던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간혹 각 층마다 무작위 위치에 포탈이 열리는 일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2층도 3층도 아닌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다.” “아! 서리군주의 궁전을 말하는 건가!” 그래도 들어 보긴 했구나. 서리군주의 궁전은 8층의 균열에서 입장 가능한 공간이다. 서리군주의 정수 하나를 먹어 보겠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었는지……. “한데 우리 둘만으로 그게 가능한가? 젊었을 때 족장도 그곳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고 들었다.” “괜찮다. 우리가 있는 곳은 1층이니까.” 1층에서 개방되는 균열 타입은 총 네 가지. 뭐가 됐건 다른 층의 균열과는 비할 수 없이 난이도가 쉽다. 우리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별이 한 일곱 개쯤 붙겠지만. 물론, 5점 만점이라는 가정하에. “그런데 무작위로 나타나는 곳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걱정하지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까.” 이래 봬도 난 9년 차 고인물이었다. 이 불친절한 게임에서 수백 가지의 히든피스를 직접 발견한. “비요른, 너만 믿겠다!” 남쪽으로 향하던 나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래는 남쪽 경로의 2층인 ‘검은바위 산’에서 노움과 코볼트, 스톤골렘을 사냥하려 했다. 스톤골렘의 ‘진압’이 골치 아프긴 하지만 미리 준비하면 공략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그런 식으로 찔끔찔끔 안전주의식으로 플레이해서는 8층까지 도달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 기약이 없다. “바바리안 둘이군. 혹시 밤친구는 안 구하나? 셋이 자면 더 많이씩 잘 수 있을—” “꺼져라.” “아니, 그냥 물어봤을 뿐인—” “3초 뒤 머리통을 터트리겠다.” 1층 횡단을 하고 있자니 몬스터 외에도 몇몇 이들이 달라붙었지만, 모두 아이나르 선에서 정리가 됐다. …근데 그냥 싫다고만 해도 되지 않나? “나는 귀쟁이보다 인간이 더 싫다.” 아무래도 아이나르는 인간 불신을 넘어 혐오의 경지로 진화한 듯하다. 퍼억! 퍼억! 콰직! 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 부수며, 거의 20시간 가량을 이동한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 시간은 오전 4시경. 새삼 1층이 얼마나 넓은지가 체감된다. 아무리 헤맬 수밖에 없는 개미굴 구조라고 한들, 서쪽 끝에서 중심부까지 오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리다니. “비요른, 여긴 1층의 초입부 아닌가?” 엄밀히 말하자면 초입부란 말엔 어폐가 있다. 대부분의 스타트포인트는 북쪽이건 남쪽이건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여긴 빛이 없잖아? 화르륵! 노랑머리 일행을 잡고 얻은 일반 횃불을 태우며, 우리는 암흑지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노움을 사냥했습니다. EXP +1」 「칼날늑대를 사냥했습니다. EXP +1」 여덟 번째 전투를 끝마친 아이나르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토해 낸다. “네 종류의 몬스터가 모두 나오다니, 1층 중심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탐험가라면 대부분 아는 상식일 테지만, 뭐 어지간하면 잘 오는 장소가 아니긴 하니. 비유하자면,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이라 해야 할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선 동쪽의 칼날늑대, 서쪽의 구울, 남쪽의 노움과 북쪽의 고블린이 모두 출현한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군.” 이 구역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간단한 이유다. 네 종류의 몬스터가 다 나와 봤자 상대하는 입장에선 까다로워질 뿐이니까. 몬스터 수 자체도 적고. ‘게다가 횃불까지 소모해야 하는 터라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까지 존재하지.’ 사실상 이동 시간을 아끼려 가로지르는 자들을 제외하면 올 일이 없는 셈. 하지만 고인물들은 이런 공간을 좋아한다. 그야 수상하잖아? 제작자 입장에서 뭔가 숨겨놓기도 딱 좋고. “근데, 여기는 왜 온 것인가?” “조금만 기다려 봐라. 곧 나올 거다.”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헤매길 한 시간. 비로소 나는 원하던 곳에 도달했다. “자, 다 왔다.” 반경 30m 정도의 공동. 개미굴 구조인 1층에서는 흔치 않은 사방이 탁 트인 공간 가운데 비석이 떡하니 솟아 있었다. “…저게 대체 뭔가?” “기념비다. 이 미궁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를 기리기 위한.” 나는 조심스레 비석에 다가가 하단부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렸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 그 위대한 첫걸음을 기리며] 일단 글귀 내용은 게임과 동일하다. 그 말인즉, 내가 찾아냈던 그 ‘히든피스’도 일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아이나르, 앞으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비밀이다. 알겠나?” “그러겠다.” “단순히 말만이 아니라 맹세가 필요하다. 이 일이 알려지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질지 모른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다.” “고맙다.”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 멘 주머니를 풀었다. 고블린, 노움, 구울, 칼날늑대. 1층에서 출현하는 네 종류 몬스터의 마석과 8등급 몬스터인 데스핀드의 마석. 그리고 눈앞에 대현자 기념비까지. “슬슬 시작하겠다.” 균열을 강제로 열기 위한 준비물은 모두 갖춰졌다. *** [던전 앤 스톤]의 인던. 즉, 균열에는 쿨타임이 존재한다. 1층을 예로 들자면, ‘균열’이 다시 열리기까지 최소 2주기, 도시 시간으로 두 달이 필요했다. 물론 두 달이 지났다고 곧장 열리는 일은 드물고, 대부분 4~5주기 사이에 랜덤하게 균열이 열린다. 맥시멈이 8주기였나? 아마 그랬을 거다. “…….” 참고로 이 또한 전부 스스로 알아낸 것이다. 서리군주 정수 노가다를 하다 보니, ‘균열’에 대해 보다 상세히 알 필요가 있었거든. 매번 층계를 돌아다니며 하염없이 균열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 효율적이지 못했으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손에 집은 데스핀드의 마석을 기념비 앞에 올렸다. 만약 가장 최근에 ‘균열’이 열린 게 2주기 이내, 즉 쿨타임이 돌고 있는 중이라면 아무런 반응도 없을 테지만……. 드드드드드드! 머지않아 내려놓은 마석이 빛을 내며 사라지더니, 기념비를 중심으로 진동이 퍼져 나간다. 역시 진짜 되는구나. 후우웅! 진동이 한결 강해지며 시커먼 색채의 포탈이 열렸다. “어서 들어가지.” “어, 어. 알겠다!” 나는 서둘러 아이나르와 함께 그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야, 10초면 정원이 차거든. 「캐릭터가 1층 균열에 입장했습니다.」 어김없이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나르를 뒤로하고 주변부터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듯한 붉은 하늘. 그 위를 나는 까마귀 떼와 저 멀리 보이는 흑빛의 성채. 더 볼 것도 없이 1층 균열의 네 가지 타입 중 하나인 ‘핏빛 성채’다. 제물로 바친 8등급 마석이 데스핀드의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겠다마는. 후우웅! 잠시 기다리자, 허공에 틈이 벌어지더니 사람을 뱉어냈다. ‘균열’을 확정적으로 여는 방법은 물론, 공략법까지 속속들이 아는 내가 이곳에 오는 걸 나중으로 미뤘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난 몬스터보다 탐험가가 더 무섭다. “흐하하하! 드디어 들어오는 데 성공했군!” 비밀 보장이 되는 5인 팀을 꾸렸다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진입하면, 선착순으로 입장한 무작위 탐험가와 균열을 클리어해야만 한다. 게임으로 치면 자동 매칭을 해야 하는 셈. 나는 긴장하며 첫 번째 팀원을 확인했다. “오! 바바리안이 둘이나 있다니 든든하구먼! 잘 부탁하네! 내 이름은 히쿠로드 무라드! 보다시피 드워프라네 흐핫하하!!” 일단 말이 많아 보이는 드워프 하나.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부디 남은 애들도 이 정도에 그치면 좋겠는데……. 피식. 역시 그건 내 주제에 너무 큰 바람이겠지? 씨바, 올 테면 다 와 봐.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으니까. 「새로운 동료가 여정에 참가했습니다.」 이내 두 명의 팀원이 더 추가됐다. 28화 균열 (2) 다리아 위트엠버 디 테르시아. 5년 차 탐험가인 그녀는 현재 1층 수정동굴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눈엔 어리기만 한 동생과 함께. “에르웬, 또 정령을 썼구나.” “아, 언니 그게 단검만으로는 너무 힘들어서…….” “말했잖니. 활이 없어도, 정령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너는 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해.”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그만, 계속 돌아다니며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나아질 거다.” 테르시아는 에르웬을 데리고 1층을 돌아다니며 가혹하게 실전 연습을 시켰다. 모두 어린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동생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쳐 가는 게 한눈에 보였다. “아, 아저씨는 가장 잘하는 걸 특화시키는 게 좋다고 했는데…….” “…뭐?” “팀을 믿고 자기 할 일에 최선을 하는 것. 그, 그게 탐험가의 기본이랬어… 요.” 멍하니 듣던 테르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너무 정론인 말이라서. 세상이 그렇게 올바르게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던가? “에르웬, 동료는 그저 동료일 뿐이란다. 거기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지 말렴.” 테르시아는 많은 팀을 경험했다. 얼마 전까지 속해 있던 6층 탐사 팀부터 시작해, 수익성이 좋은 특정 몬스터만 노리는 헌팅 팀, 포탈 개방 공적을 노리는 런닝 팀까지. 여러 이들과 다니며 정말이지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중에는 에르웬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을 만한 것들도 여럿 있었고. 동료란, 믿을 족속이 못 된다.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면 모를까. “알겠어…….” 테르시아의 굳은 표정에 에르웬도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4일 차가 되었다. 1층을 시계 방향으로 뺑 돌은 에르웬은 어느새 단검 하나만으로도 모든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레벨도 올랐고. “저기 언니? 승급도 했는데 이제 그냥 2층으로 가면 안 돼? 아저씨는 지금쯤 2층에서 막 엄청 돈 벌고 있을 텐데…….” 테르시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2층에서 몬스터 몇 마리 더 잡는게 뭐가 대수일까. “에르웬, 곧 있으면 균열이 열릴 거란다.” 균열. 몇 년 차 중견 모험가들도 운이 없으면 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다는 그곳.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마지막으로 1층에서 균열이 열린 게 8개월 전이었으니까.” 테르시아는 어린 동생을 다루듯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로 4일 차니, 앞으로 3일 안에 균열이 열릴 수밖에 없는 통계학적 이유를. “그렇구나… 아저씨는 그런 말 안 해 줬는데.” 그야, 그럴 것이다. 에르웬은 매번 아저씨 아저씨 노래를 불러 댔지만 그래 봤자 결국 초심자이니까. 지금쯤 무작정 층을 올라가며 시행착오를 겪는 등, 경험자 입장에서는 비효율의 극치나 다름없을 행보나 이어 나가고 있겠지. “에르웬, 조급해하지 말고 언니를 믿으렴. 1년만 지나도 그 바바리안과 너는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있을 테니.” 때론 느린 길이 가장 빠른 길일 때도 있다. “으응… 그럼 그땐 내가 도와주면 되겠다!” “그래, 그러렴.” 테르시아는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그 바바리안이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설령 그렇다 한들 그때 말려도 되는 노릇 아니겠는가. 적어도 동생은 순수함을 간직했으면 했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드드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듯, 미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릴 때 생기는 현상. “에르웬!” 테르시아는 에르웬의 손을 잡고 전속력으로 통로를 내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포탈 하나를 발견했다. 균열이었다. 아마, 이와 같은 포탈이 지금쯤 1층 전역에 수천 개씩 생겨났겠지. 이제 일분일초가 중요한 시간 싸움이다. 후우우웅! 테르시아는 에르웬과 함께 포탈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 후웅- 포탈이 사라졌다. 털썩. 이내 허공을 가로질러 맨땅에 착지한 테르시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한발 늦었군.” 동시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단 동생만이라도 빠르게 집어넣었다면 입장에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동생 혼자 균열에 들어갔다가 자칫 죽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에르웬, 2층으로 가자.” 거듭 말하지만, 느린 길이 빠를 때도 있다. *** 등가교환等價交換.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은 이 법칙에 의해 굴러가지 않는다. 사이코패스 년을 만났던 것만 봐도 그렇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건만 얻은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망자의 땅에서 쫓겨나 시간만 오질나게 날렸지.’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내가 선택을 했다. 따라서, 반드시 대가가 따라올 것이다. 음, 아마도. 쿵. 팀원으로 매칭된 나머지 2명의 인간 남녀를 보며 나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착지한 남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지만……. 여자는 달랐다. 탁. 여자는 마치 중력의 영향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천천히 떨어져 살포시 착지했다. 이 광경에 말 많던 드워프도 입을 떡 벌리더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매한가지였다. “마법사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마법사. 그 신분만으로도 어딜 가나 대우를 받는, 명실상부 [던전 앤 스톤] 최강의 직업. “비요른, 마법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도서관 사서도 마법사였지 않나!” 아이나르의 의문에 여자 마법사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밉보이기 전에 나는 빨리 입을 열었다. “사서는 9등급 마법사다.” “다른 건가?”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이 길드나 공공기관, 공방 같은 곳에서 일하는 상급 노동자 계층이라면, 이 여자는 익히 말하는 진짜 마법사라 할 수 있다. 미궁에 들어왔단 것부터가 그 증거다. 마법사는 라프도니아의 중요 자원이기에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미궁 출입이 불가하니까. “그렇군!” “네, 그렇죠. 바바리안치고는 견문이 넓으시네요.” 눈높이에 맞춰 명료하게 설명을 해 주자 여자 마법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에 껴들었다.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게 왠지 어떤 성격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6등급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이라고 해요. 여기 이분은 제가 고용한 전문 운반꾼이시고요. 이름이… 뭐였죠?” “타르진입니다. 레이븐 님.” 이제 보니 두 명이 한 묶음이었구나. 아무튼 꽤나 나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마법사들 중에서 이 정도면 양반이다. 게임에선 더한 개차반들도 많았으니. “여러분들도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히쿠로드 무라드네. 짧은 여정이겠지만 잘 부탁드리겠네. 레이븐 양.” “무라드 씨는 몇 년 차이신가요?” “3년 차라네.” 3년 차 탐험가라……. 어쩐지 장비 하나하나 때깔이 좋더라.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짧게 이름을 밝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1층에서 활동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균열에 들어온 거지?” 1층에서 활동하는 탐험가들이래 봐야 제대로 된 장비도 못 갖춘 애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나도 진짜 개고생을 해야지만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겠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3년 차 드워프에 6등급 마법사라니? 이쯤 되면 마냥 좋아할 수도 없을뿐더러, 우연이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자세한 방법은 설명드릴 수 없지만, 이번 주기에 균열이 열린다는 말을 들어서요.” “나도 마찬가지네.” 과연, 이게 과연 사다리 걷어차기일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레이븐과 난쟁이놈은 방법에 대해서 함구했다. 물론, 크게 의미는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유추한 것인지 이제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니까.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다.” 이내 모든 인원의 통성명이 끝나자 레이븐이 대화를 주도했다. “전리품은 여기 타르진 씨를 빼고 인원수대로 나누겠습니다. 대신 다들 제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주실 수 있을까요?” “달리 이견은 없네. 미궁에서 마법사의 말을 따르는 건 상식이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난쟁이놈이 먼저 승낙 의사를 표하자, 레이븐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향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팀 내에 마법사가 있는 이상 튀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악령’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인지하고, 멸절의 대상으로 공표하도록 왕가를 설득한 게 다름아닌 마법사란 족속들이었으니까. 씨바……. 이제 더 이상 클리어가 문제가 아니다. “나도 찬성하겠다.” 딱 반반만 가자. 아까는 바바리안치고 견문이 넓다며 감탄하고 넘어갔지만, 언제 그 눈길이 의심으로 바뀔지 모르니. “나는 거절한다.” 응? 아이나르의 완고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마법사라고 뭐가 그리 대단한지 모르겠다. 나는 비요른이 우리를 이끌었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찬성했는데 대체 네가 왜 그러는 거니? 당장에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지만, 그랬다간 더 수상하게 보일 터. 이내 마법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비요른이라면… 이 바바리안 분을 말씀하시는 게 맞죠?” “그렇다. 비요른은 평범한 바바리안이 아니다!” “평범한 바바리안이 아니라니요?” “비요른은 누구보다 현명한 전사다. 매일 하루에 여섯 시간씩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흐음, 확실히 특이한 분이시네요.” “특이한 게 아니라 위대한 거다! 난 비요른처럼 똑똑한 바바리안을 본 적이 없다!” 씨바……. 제발 그만해 줘…… *** 아이나르의 극찬에 모두가 나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긴 했지만 해프닝으로 그쳤다. 바바리안의 치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도 다수결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하하핫!” “다수결이 뭔데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어…….” 다시 싸해지려는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아이나르를 진정시켰다. 근데 뭐가 그리 분한지, 아이나르는 씨익씨익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내지었다. “하지만! 비요른 네가 저 마법사보다 대단하지 않은가!” 혹시 ‘바바리안치고’라던 아까 전 말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미리 ‘맹세’를 시켜 두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차원불안정이나, 균열을 연 게 나라는 것까지 전부 까발렸을지 모르니. “아내의 존경을 받는 건 축복받은 일이지. 부럽군 바바리안! 하하핫!” “아, 아내라니! 나는 그런 게 아니다!” “하하핫!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네!” “이익! 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내용이야 어쨌든, 말 많은 드워프 덕분에 아이나르의 어그로가 다른 곳으로 끌렸다. 나도 안도하며 레이븐의 표정을 살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나에 대해서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흐음,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결계라. 흥미롭네요. 차원을 단절시킨 듯한데, 어떻게 건너편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걸까요?” 마법사다운 학구열이라 해야 할까. 수첩에 기록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니, 맵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이 결계의 원리가 궁금한 모양인데……. 부디 헤어지는 순간까지 저 관심이 내게 오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다들 그만하시고 슬슬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표본을 얻기 위해 조사해야 할 게 많아요.” “출발이라니? 우린 아직 서로의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데…….” 지휘를 맡은 레이븐의 말에 난쟁이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무릇 팀이란 서로 어떤 능력을 가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리 급조된 팀이라도 핵심 정수는 밝히고 시작하는 게 기본. 다만, 레이븐은 이를 불필요한 행위라고 딱 잘라 말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핏빛 성채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라고 해 봐야 전부 7등급 이하 몬스터인데.” 절대적인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에 난쟁이놈도 살짝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녀가 한마디를 더 꺼내기 전엔. “아, 그 말을 안 했네요. 수호자에게 나오는 전리품은 제가 따로 갖도록 할게요. 따로 연구할 부분이 있어서.” 무슨 이런 양심 없는 년이 다 있지? 하, 어쩐지 마법사치고 멀쩡하더라니. ‘제기랄.’ 아니나 다를까. 상황이 또 개같이 돌아가려 한다. 29화 균열 (3)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다 보면 ‘내분’이 일어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내분’의 원인은 백이면 백 ‘돈’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마법사에겐 연구가 최우선 목적일지 몰라도, 탐험가가 미궁에 들어오는 이유는 전부 돈을 벌기 위해서니까. 근데 지금 이 마법사 년은 바로 그걸 건드렸다. “수호자의 전리품을 전부 갖겠다고?” 난쟁이놈은 더 이상 사람 좋게 웃지 않았다.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수북한 털 사이로 드러난 눈은 희번뜩하게 빛났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순식간에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를 느꼈을까. 철컥. 인간 남자가 검자루 위에 손을 올린다. 역시 단순한 운반꾼은 아닌 모양. 무거운 정적을 깨며 레이븐이 입을 열었다. “…대신 균열에서 나오는 마석은 전부 여러분들에게 드리겠어요.” “찌꺼기들이나 주워 먹으라는 얘기군.” “…합리적인 계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무조건 나오는 물건들도 아니고.” 나름 감춘다곤 했지만, 레이븐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데……. 순진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수호자의 전리품이야말로 균열의 꽃이나 다름없다. 그중에서도 ‘넘버스 아이템’은 난쟁이놈에게 있어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보물일 테고. “넘버스 아이템은 양보할 수 없다.” “…좋아요. 대신 수호자의 정수는 제가 갖겠어요. 그리고 그 외에 제 지식을 이용한 다른 발견물에는 소유권을 인정해 주세요.” “좋다. 그럼 균열석은 공평하게 둘이 주사위를 굴려 가져가는 것으로 하지.” 얼씨구. 공평은 개뿔. 둘은 나와 아이나르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지들끼리만의 이권 싸움을 시작했다. 보고 있자니 골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1층 초심자들이랑 피 흘려가며 균열을 클리어하는 쪽이 나았겠단 생각마저 들 정도. 이런 식이면 기껏 들어온 균열에서 정말 부스러기나 겨우 주워 먹어야 할 판이다. 힘이 없다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이구나. “비요른.” “무슨 생각인진 알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어라.” “알겠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보다 선명해진다. 강해져야 한다. 저 개같은 것들이 사다리를 걷어차든 말든, 알아서 아득바득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저들처럼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다. 물론, 그게 오늘 양보할 이유는 안 되겠지만. “잠깐.” “……?” 내가 입을 열자 한층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던 둘의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정수와 넘버스 아이템은 알아서 해라. 하지만 균열석은 우리가 갖겠다.” “욕심을 부리는군.” “바바리안 두 명이 없다고 문제가 생길 거 같나요?” 눈빛이 아주 날카롭다. 씨바, 첫 만남에선 다들 사람 좋게 웃더니. 그래, 뭐 나도 이건 그냥 찔러 본 거니까. “좋아, 균열석은 포기하지. 대신 우리에게 수호자를 제외한 정수에 2개까지 우선권을 줘라.” “좋아요. 그 정도는.” “나 역시 마찬가지네.” 예상대로 레이븐과 난쟁이놈은 내 요구에 쉽게 응했다. 딱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었겠지. 이놈들 수준에선 수호자가 아니면 그렇게 매력적인 정수도 없었을 테니. “그럼 이제 가 보실까요?” “좋네, 가만 있었더니 벌써 몸이 쑤시는군 그래! 하하하핫!” 조율이 끝나자, 마법사년과 난쟁이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까처럼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며 하하호호 웃었다. 무서운 탐험가 새끼들. *** 산등성이 사이로 보이는 성채를 따라 산길을 오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성채 입구에 도달한 우리는 날개 달린 악마 조형물을 두 개와 마주했다. “가고일 석상이군요.” 8등급 몬스터 가고일 석상. 평소엔 가만히 있지만, 적이 시야에 들어오면 ‘석화’를 사용하며 활동을 개시하는 까다로운 몬스터다. 일반적인 공략법은 한 명이 희생해 ‘석화’를 전부 받아 내고, 나머지가 가고일 석상을 해치워 저주를 풀어 주는 것일 테지만……. 놀랍게도 지금 우리에겐 마법사가 있다. “캬아아아악—!” 나와 난쟁이놈이 접근하자 가고일이 눈을 뜨며 날개를 펼쳤다. 이와 동시 내 하반신이 순식간에 돌로 변했지만 지속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르테나 비아르.” 레이븐이 ‘저주 해제’ 스펠을 읊었고,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나와 아이나르가 한 놈을, 난쟁이놈이 다른 한 놈을 맡았다. 콰앙! 키가 작은 난쟁이놈은 미친 놈처럼 망치를 휘두르며 가고일의 양 다리를 박살 냈다. 그리고 가고일이 바닥에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망치로 호쾌하게 머리통을 깨부쉈다. 저게 드워프의 방식인가? 우직하게 아래부터 조져 나가는 것이 꽤나 상남자스럽다. 뭐, 피차일반이긴 했지만. “자네들도 제법 하는군!” 가고일 석상을 개박살내는 데 걸린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우리도 근접 전투는 자신이 있는 편이라. 「가고일을 처치했습니다. EXP +2」 가고일 두 마리가 빛이 되어 사라지며 마석을 떨궜지만, 직접 주울 필요는 없었다. 알아서 위로 떠오르더니 커다란 포대 하나에 쏘옥 들어갔으니까. “마석은 제가 모아뒀다가 중간중간에 나눠드리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해 준다면야 고맙지! 하하핫!” 난쟁이놈은 마법사가 마석을 빼돌리거나 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사가 이런 푼돈에 목을 멜 리는 없겠지. “그럼 어서 가지!” 난쟁이놈이 낡은 나무 문을 망치로 박살 내며 길을 뚫었다. 이제 진짜 던전이 시작되는 건가. 나는 묘한 감상을 느끼며 뒤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빛이 필요하겠군.” “리에이트.” 레이븐의 손 위로 빛의 구체가 떠오르며 어두운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현재 내가 들어선 이 공간은 외곽 검문소. 성에 들여보내기 전에 마차의 짐이나, 통행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등 여러 행정 업무를 수행했을 그곳. “그어어어.” 빛과 소리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벽면의 옷장, 혹은 탁상 아래에서 썩은 시체들이 일어서 다가온다. “데드맨이네요.” 데드맨. 경험치는 물론, 마석조차 뱉지 않는 무등급 몬스터. 심지어 얘넨 시체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수를 뱉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격이라 해 봐야 물고 할퀴는 정도니 마력은 아끼겠습니다.” 마법의 도움은 없었지만, 실내를 모두 정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제가 문을 여는 동안 무라드 씨와 얀델 씨는 위에 다녀와주시겠어요?” “금방 처리하고 오겠네! 하하핫!” 난쟁이놈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공용 침실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데드맨들이 열 마리 정도 있었지만, 1층보다 공간이 넓었기에 보다 쉽게 정리가 가능했다. 퍼억! 퍼억! 순식간에 2층을 정리한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녹슨 갑옷을 걸친 열댓의 병사 데드맨들과 조금 큰 체구를 지닌 지휘관 데드맨이 있었다. 1차 보스라 하기는 좀 그렇고……. 진행을 위해 꼭 잡고 가야 하는 놈이다. “덩치만 클 뿐이지 다른 데드맨과 다를 것도 없는 듯하니 어서 해치우세! 하하핫!” 이번에도 금방 주변을 정리한 우리는 지휘관 데드맨의 옷을 뒤져 뿔피리를 집어 들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반대쪽 철문이 어느샌가 열려 있었다. “마법사가 있으니 아주 든든하군.” 양방향으로 빛이 들어오자 창문 하나 없던 실내도 꽤나 밝아졌지만 의미는 없다. 외곽 검문소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는 50m가량의 다리를 지나갈 차례.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레이븐 님.” “아, 고마워요.” 중간중간 무너진 다리는 성문으로부터 약 20m 거리를 남겨 두고 끊겨 있었다. 세월에 부서지거나 한 건 아니고.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구조다. 뿌우우우우우! 미리 입수한 뿔피리를 불자,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개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수성 마법진이 활성화됩니다.」 “비요른! 아래서 물이 차오르고 있다!” 해자垓字. 외세의 침입을 막으려 성벽 주변에 파두었을 고랑에서도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거무죽죽하고 시뻘건 핏물. 이곳이 ‘핏빛 성채라’ 불리는 이유다. 하늘도 빨갛고 아래도 빨갛다. 하지만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은 따로 있겠지. “비요른! 손! 저기 수면 위로 손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데드맨들이니 긴장하지 마세요.” “흥, 누가 긴장했다는 거냐?” 이내 다리 밑까지 핏물이 차오르자, 수면 위로 허우적거리던 데드맨들이 기어올랐다. 도개교는 아직 5분의 1도 내려오지 않은 상황. 이번 파트의 컨셉은 간단하다. —도개교가 내려올 때까지 버티십시오. 분명 게임이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나왔겠지. “그어어어.” 별다른 지시는 없었지만, 다들 알아서 데드맨을 밀쳐내거나 무기로 내려찍는 등 응전을 시작했다. 퍼억! 퍼억! 콰직-! 무등급 몬스터인 데드맨이지만, 여기 다리 위에서만큼은 나름 까다로운 상대였다. 자칫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걸로 게임 오버니까. “다 됐어요.” 1분쯤 지났을 때, 레이븐이 마력 술식을 완성했다. “위테르나 데르투!” 스펠명을 직역하자면 ‘칼날폭풍’쯤 되겠지. 밀집 대형인 우리를 중심으로 세찬 돌풍이 퍼져 나가더니, 믹서기처럼 순식간에 데드맨들을 갈아 버렸다. 투두두두두. 순식간에 데드맨의 사체로 더럽혀진 다리 위를 보며 난쟁이놈이 탄성을 뱉었다. “…대단하군.” “겨우 데드맨들인데요 뭘.” 겸손한 말과 달리 레이븐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딱히 오만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광역기를 가진 마법사가 없으면 이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는 파트가 아니니까. 이후 간간이 다리 위를 기어오르는 데드맨들이나 대충 짓이겨 주고 있자니, 느릿느릿하게 내려오던 도개교가 마침내 다리와 맞닿았다. 쿠우웅! 핏빛 성채의 첫 번째 챕터가 끝난 것이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 도개교를 넘었으니, 남은 챕터는 세 개다. 외성벽의 시가지 전투. 내성벽의 지하 감옥. 영주성의 악마 숭배실. “이건, 흥미롭네요.” 성 안으로 들어선 레이븐은 폐허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마치 보물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대장간, 주점, 여관, 교회, 상인들이 사용했을 마구간… 이 잔해들은 대부분 공용 시설로 보이는군요.” 난쟁이놈이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놀랍나 레이븐 양?” “물론이죠. 우리가 올라온 산길에도, 성 안에도 농장 부지나 주거지는 없었어요. 농민들이 없었다는 뜻이죠. 궁금하지 않나요? 이런 외딴 산지에 지어진 요새 도시에서 다들 뭘 먹고살았을지.” “이쪽 차원에도 연금술사가 있던 거 아니겠나. 우리처럼 마석을 빵으로 바꿔 먹었겠지. 하하핫” “…확실히 학자들 사이에선 그 가설이 가장 유력하긴 하죠.” “하핫! 그런가? 배운 사람들이라 해도 생각은 다 비슷한가 보군!” “하지만 무라드 씨, 흥미로운 점은 그것 하나가 아니에요. 긴 도개교나 높은 성벽도 그렇고, 이 성채는 아주 실용적이게 건축됐어요. 대체 이들의 적은 누구였을까요?” 처음엔 잘 받아 주던 난쟁이놈도 대화가 길어지자 질색하며 거리를 벌렸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어차피 전부 만들어진 공간 아닌가.” “만들어진 공간이라, 확실히 차원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반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그만하게 레이븐 양, 몬스터들이 오고 있네.” 내성을 향해 시가지 사이를 지나고 있자니, 머지않아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데드맨부터 시작해 스켈레톤 아처와 메이지, 구울, 8등급 몬스터인 데스핀드까지. 출현 개체들의 수준은 망자의 땅과 크게 다를 것 없지만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 한 무리가 적어도 수십 마리는 된다. “다들 제 옆으로 모이세요.” 더군다나 한 무리와 상대하고 있으면, 그 소리를 듣고 또 다른 무리가 접근해 온다. 첫 무리와 조우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사방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까 전에 보았던 ‘칼날폭풍’이 다시금 주변을 휩쓸었다. 솨아아아아아-! 양학용 마법 주문답게 아까처럼 전부 갈아 버리진 못했다. 몇몇 구울은 팔다리 하나가 잘린 정도로 살아남았으며, 방어력과 재생력의 대명사 데스핀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남은 몬스터들은 부탁드릴게요.” 무리의 9할 이상을 차지했던 데드맨과 스켈레톤이 전부 쓸려 나간 것만으로도 몇 사람분의 일을 해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이나르!!” 내가 크게 외치자 아이나르가 달려나왔다. 목표물은 데스핀드. 사냥 방법은……. 달리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한 번 쓱 주고받은 눈빛이면 충분하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수백 번의 호흡을 맞춰, 이제는 거의 실수도 하지 않는 경지에 다다른. 이름하여, (진)더블 바바리안 태클. 쿵! 양 다리를 들어 올려 바닥에 패대기친 뒤, 데스핀드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우리를 보며 난쟁이놈이 기겁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사냥을 했나?” 마치 ‘뭔 이런 야만인들이 다 있지?’ 이런 눈빛. “뭔가 문제라도 있나?” “없다. 바바리안들답게 꽤, 꽤나 호쾌하군! 하, 하핫!” 이제 와서 창피할 건 없지만 조금 웃기다. 드워프들의 싸움법이라고 딱히 고상하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라비오드 에헬툰.” 남은 데스핀드는 일곱 마리나 됐지만, 레이븐이 ‘상처 악화 저주’까지 걸어 주자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패시브 ‘육체보존’이 봉인된 데스핀드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몬스터는 아니었으니. “왜 다들 마법사를 대단하다고 하는지 알 거 같다…….” 단 두 번의 전투로 마법사 한 명의 존재감을 여실히 느꼈을까. 아이나르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븐은 이에 아무런 대꾸도 안 했지만, 살펴보니 입가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우러름받은 게 기쁜 모양. 드워프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핫! 확실히 마법사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지지.”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만약 초심자 5인 파티로 ‘핏빛 성채’를 진행했다면, 이런 정면 승부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시간이 수십 배 더 걸리더라도, 외곽에서부터 야금야금 몬스터 수를 줄여 나갔겠지. “흐음, 뭐… 그걸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니까요. 물론 재능도 필요하지만요.” 연이은 칭찬에 레이븐이 살며시 몸을 꼬았다. 슬슬 캐릭터가 잡힌다. 겸손한 척하지만 과시하기를 좋아하며, 그 이상으로 마법과 연구에 열정적인 영재 마법사 아가씨.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감이 오기 시작한다. “그럼 잠시 주변을 돌면서 연구 자료 좀 얻으려는데, 괜찮다면 다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븐 양 덕분에 남은 시간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않겠나. 하하핫!” “감사해요.” 이후 우리들은 시가지 잔해들을 뒤지며 골동품, 서적, 토양, 금속, 데드맨의 살점과 뼈 등을 골고루 수집했다. “여러분 덕택에 일찍 끝냈네요. 그럼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 보죠!” 나는 잠시 멍해졌다. 어? 잠깐만, 끝났다고? 몬스터 다 때려잡고, 주변까지 샅샅이 뒤졌으면서 왜 그걸 안 가져가? “자네 거기서 뭐 하나! 어서 오지 않고.” …설마 다들 모르는 건가? 분수대 조각상을 부수면 나오는 그 찾기 쉬운걸? 30화 핏빛 성채 (1) 무릇 게이머라면 수상한 벽이 나타나거나, 특이한 조형물이 있으면 일단 상호 작용 키를 눌러보는 버릇이 있다.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 버릇은 9년간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며 수많은 ‘히든피스’, 즉, 숨겨진 요소들을 발견해 내는 데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면 여기 분수대 조각상처럼. “비요른?” “아, 가겠다.” 나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일행을 따라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굳이 조각상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평생 동안 배움에 매진하는 마법사조차 알지 못하는 지식을 바바리안이 알고 있다니? ‘괜히 의심 살 일은 피하는 게 좋겠지.’ 이번엔 책에서 봤단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할뿐더러, 어차피 ‘그 물건’은 왜곡 마법으로도 밖으로는 갖고 나갈 수 없는 아이템 아닌가. “이곳이 내성이군요.” 중세에 외성이 1차 방어선 역할을 한다면, 내성은 최후의 보루에 가깝다. 원래라면 이곳엔 영주의 가신들과 기사, 병사들이 주둔하며 무기고 같은 각종 군사 시설이 존재했을 장소.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븐이 한숨을 내쉬었다. “…듣긴 했지만 이래서야 뭐 건질 것도 없겠네요.” 외성의 삼분지 일 크기인 내성은 처참하리만치 파괴되어 있었다. 건축물들이 전부 무너져 터만 겨우 남은 정도. 심지어 이곳엔 몬스터조차 없었다.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븐의 지시 하에, 약 30분간 돌무더기들을 치워 낸 우리는 지하로 향하는 길목을 찾아냈다. “무라드 씨가 앞장서 주시겠어요?” “그러겠네!” “아, 마력을 아껴야 하니 횃불도 켜 주시고요.” 난쟁이놈이 횃불을 꺼내 머리 위에 끼웠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만화에 나오던 두더지 광부 같다. 화르륵! 두꺼운 나무판자를 밀어낸 우리는 그 아래 감추어져 있던 계단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핏빛 성채의 세 번째 챕터 지하 감옥. 나도 침을 삼키며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 「지하 감옥 1층에 진입했습니다.」 아오, 징그러운 건 잘 못 보는데……. *** “레이븐 양, 여기선 어떤 몬스터들이 나오나?” “스컬 랫, 벤시, 데스핀드, 키메라 울프, 구울로드 그리고 시체골렘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시체골렘 빼고는 전부 상대해 본 몬스터군.” “그러실 거예요. 시체골렘은 핏빛 성채에서만 나오는 몬스터니까.” “하하핫, 간만에 공적을 쌓을 수 있겠구먼!” 새로운 몬스터와 전투하며 경험치를 올릴 수 있단 사실에 난쟁이놈이 기뻐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일러스트조차 그리 끔찍했는데 실제론 얼마나 역겹겠는가. “달리 조심해야 할 점이 있나?” “살점폭발만 조심하면 돼요. 폭발력은 그리 세지 않지만, 체액에 산성독이 섞여 있어서 가까이서 맞으면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물론 그전에 제가 막아 드리긴 할 테지만.” “하핫! 마법사님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구먼!” “전부 무라드 씨처럼 든든한 전사분들이 계셔서 가능한 일인걸요.” 지랄.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전리품 갖고 설전을 벌일 때는 언제고. 터벅. 이내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미로 구조의 지하 감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철창 속엔 데드맨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으르렁거렸고, 바닥에서는 뼈만 남은 쥐새끼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비요른, 이것들도 몬스터인가?” “아까 말한 스컬 랫이에요.” “마법사 너한테 물어보지 않았다!” 참고로 등급은 데드맨과 같은 무등급. 사실상 몬스터라고 부를 만큼의 전투력도 없기에 우리들은 대충 보이는 대로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벤시와 조우했다. “끄흐흐흐, 흐흐흐흐흐!” 벤시는 기괴한 얼굴의 윤곽 형태만 드러난 원령 상태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 비요른…….” 아, 얘 벤시를 무서워했지. 내게 살짝 달라붙는 아이나르를 보며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아이나르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테니. “벤시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한두 번으론 크게 위험하진 않지만…….” “…않지만?” “아주아주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아, 아주아주 끔찍한 경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정확히 말해라 마법사!” “글쎄요. 상상에 맡기도록 할까요?” 혈색이 돌지 않는 아이나르를 보며 레이븐이 씨익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걸 보니, 얘도 성격이 그리 좋진 않은 거 같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화에 껴들었다. “마법사에겐 벤시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흐음, 책을 좋아하신다더니 역시 견문이 넓으시네요?” 견문이 넓단 소리를 들을 정도인가 이게? 음, 바바리안 치고라는 전제가 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커트라인 안쪽이겠지. “그럼 장난은 그만하고, 벤시들부터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테이룬 쉘.” 이내 레이븐의 지팡이로부터 생성된 빛의 화살이 쏘아지더니 벤시를 꿰뚫었다. 게임 속 마법명은 마력시. 마법사의 평타나 다름없는 기초 공격 주문이기에 캐스팅 시간도 없었다. “끼히이이이이이익!!!” 잠시 기다리자, 수십 마리의 벤시들이 격렬한 증오를 내뿜으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료가 죽으며 남긴 ‘징표’를 감지한 것이다. 위력적인 광역기를 다수 소유한 마법사 입장에선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었겠다마는. “이헤르노 하인다르.” 화염세례. 마법 지팡이에서 뿜어진 불길이 일자형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불길이 잦아들었을 때. 남아 있는 벤시는 없었다. 후우웅!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닥에 쏟아진 마석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주머니 속으로 알아서 들어갔다. 사실, 공격 주문보다 이게 제일 부럽다. 마석을 일일이 안 주워도 된다는 거. 후, 마법사를 팀에 넣어서 데리고 다니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새삼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다. *** 모니터 너머의 2D 세상과 현실은 다르다. 그게 피부로 전해지는 오싹함이라면 더욱더. 「캐릭터가 지하 감옥 2층에 진입했습니다.」 직접 겪은 지하 감옥은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돌연변이처럼 근육이 올록볼록하며 머리가 서너 개씩 달린 키메라 울프. 엘더 구울들을 서른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구울로드. 이 8등급 몬스터들은 전부 그로테스크한 외형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자잘한 소품들도 하나하나가 공포물 게임들을 연상시켰다. 화룡점정은 지금부터겠다마는. “그나저나 레이븐 양도 대단하군. 무섭지도 않나?” “글쎄요. 워낙 해부학을 좋아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네요.” 씨바, 그게 바바리안 해부는 아니겠지? 그러고 보면, 바바리안 심장이 비싸게 팔리는 것도 다 마법 재료라서라던데……. “아, 도착했네요.” 지하 감옥의 모든 몬스터를 사냥하며 지하 3층에 도달한 우리는, 무너진 영주성의 지하 공간과 이어지는 숨겨진 문짝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간수실에서 지도부터 입수해야 했겠지만……. “벽 뒤에 문이 감춰져 있다니, 지도를 미리 외워서 들어오길 잘했네요.” 철저하게 예습을 해온 레이븐 덕분에 헤매는 일은 일절 없었다. 뭐, 나 혼자였어도 잘 찾아오긴 했을 거다. 지하 감옥만큼은 게임과 구조가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전부 플레이어니까 가능한 얘기겠지.’ 새삼 마법사가 지닌 위상이 체감된다. 위력적인 공격 마법. 상처 악화 저주 같은 유틸성 높은 지원 계통 능력. 수많은 서적을 정독하며 쌓았을 지식까지. 괜히 마법사가 팀에서 신관 이상의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배낭은 여기 앞에 두고 들어가는 쪽이 좋겠네요. 적어도 얀델 씨는 더욱더요.” 나는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며 머리부터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특대형 사이즈의 배낭을 문 앞에 내려놨다. …돈 벌면 마법 배낭부터 사던가 해야지. 아까부터 이것 때문에 불편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지금부터는 얀델 씨도 횃불을 켜 주시고요.” 레이븐의 지시에 나도 머리 위에 횃불을 고정시켰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둥근 밸브를 돌려 철문을 열자 썩은 악취가 밀려든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군.” “마, 마법사… 꼭 여길 들어가야 하나?” “저도 죽을 만큼 싫지만, 어쩔 수 없어요.” 폐수 처리장을 연상시키는 공간. 원기둥 형태인 벽면에는 커다란 수도관들이 즐비했고, 거무죽죽한 오물 같은 것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또한. 바닥엔 꺾이고 절단된 팔다리들과 머리가 산처럼 쌓여 있으며, 그것들이 부패하며 쌓이고 쌓였을 가스가 코를 찌르며 두통을 유발했다. “웩, 웨엑!” 가장 먼저 구토를 한 건 운반꾼이었다. 호위라도 하듯 레이븐 옆에 붙어 무게만 잡고 있던 놈은, 정말 무표정한 얼굴로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두 번째는 레이븐이었고. “욱, 우에엑!” 많은 해부 경험으로 시각적 내성은 있을지 몰라도 냄새에는 취약한 모양. 놀랍게도 나는 버틸 만했다. 예전이었으면 분명 졸도했을 광경이 눈앞에 펼쳐있었음에도, 이 비위 좋은 바바리안의 육체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자네라도 멀쩡하니 다행이군. 어서 앞으로 가보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중심부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익. 걸을 때마다 스펀지를 밟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빛이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였던 거대한 형체가 또렷해졌다. “안, 녕.”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고장 난 안내 음성 테이프처럼 여성의 목소리로. “끅, 꺾! 살! 난, 커꺼꺽, 살려 줘! 나를! 끼긱, 까드드득, 맛있, 어, 아버지, 끼히!” 어, 음, 어……. 솔직히 좀 충격적이었다. “후…….” 씨바, 너 원래 게임에선 조용했잖아.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볼멘소리가 절로 튀어나오지만, 한탄해 봐야 바뀌는 건 없겠지. 옆을 보니 나름 믿음직하던 드워프 놈조차 바짝 얼어 있다. “다들 정신 차려라!!” 즉시 고함을 내질러 넋 나간 팀원들을 깨웠다. 한데 이에 자극이라도 받았을까. “아버지! 아버지! 아파! 아파! 아파요! 아파아아아아!!” 웅크려 있던 시체더미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발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앞으로 내디뎠다. 쿠우웅-! 핏빛 성채의 중간 보스. 시체골렘이었다. *** 마이너함의 결정체인 [던전 앤 스톤]이지만, 나름 대중적인 부분도 없는 건 아니다. 적어도 일러스트 하나만큼은 유명했다. 흑백 사진으로 찍어 온 듯한 생동감 넘치는 일러스트가 넷상에서 흔히 말하는 ‘짤’로 많이 사용된 탓이다. 정작 그 일러스트들이 게임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적었지만. 나는 새삼 한 번 더 깨달았다. “씨바.”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더라도, 진짜는 따라갈 수 없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아아!!!!” 사람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통을 수천 개 모아 오밀조밀 뭉치면 이런 느낌일까.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수백 개의 입들도 마찬가지다. 통제 없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대부분은 괴롭다, 춥다, 원망스럽다, 죽여줘라, 살려줘라는 식의 논리도 두서도 없는 순간순간의 감정들. “캬아아아아악—!” 음, 그도 아니면 단순한 비명이던가. 온갖 기괴스러운 음성들이 합쳐지며 자아낸 소름끼치는 하모니에 다시 한번 모두가 얼이 나갔다. “히쿠로드! 조심해라!” 해부학에 능하다던 마법사. 수많은 몬스터를 접했을 3년 차 드워프. 운반꾼이라기엔 제법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뿜어내던 인간 남자. 그들은 초심자 바바리안 둘은 깍두기 취급했지만…….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나와 아이나르뿐이었다. “다들 뭘 하고 있는 건가!” 시체골렘을 예의주시하던 아이나르가 난쟁이놈의 목덜미를 당겨 들어 올린 그때. 콰아앙! 투포환처럼 날아든 시체더미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피와 살점이 흩어지며 아이나르와 난쟁이놈에게 달라붙었다. 치이이익! 다행히 아이나르는 옷 위라 타격이 없었지만 난쟁이놈은 달랐다. “아악! 눈! 내 눈……!” 씨바, 어찌 된 게 투구의 좁은 틈으로 들어가 눈에 맞은 모양. 순식간에 난쟁이놈이 무력화됐다. 그리고 자기만 믿으라던 마법사는……. “웩, 웨에엑!” 아직도 토를 하고 있다. …너네들 진짜 뭐 하니? 어쩐지 일이 술술 쉽게 풀리더라니. 아무렴, 그럴 리가 없지. “아이나르! 난쟁이놈을 데리고 뒤로 가서 마법사를 지켜라!” 그리 외친 나는 방패를 위로 치켜들며 시체골렘과 마주섰다. 선택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튀고 싶지 않지만……. 버스 기사랍시고 설치던 놈들이 뻘짓을 해대고 있지 않은가. “베헬—라아아아!!” 살아남으려면, 직접 운전대를 잡는 수밖에. 31화 핏빛 성채 (2) 시체골렘의 패턴은 간단하다. 거리가 먼 적에겐 시체폭탄을 날린다. 그리고 가까운 적은 잡아당겨 먹어치운다. 마치 촉수처럼 온몸에 돋아나 있는 저 수백 개의 팔로. “비요른!” 아이나르의 우려 섞인 외침을 들으며, 나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 차라리 가까이 붙으면 시체폭탄의 타깃으로는 지정되지 않겠지만……. 그럼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타깃이 바뀔 터. 콰아앙! 어떻게든 시간을 번다. 적어도 마법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혼자 어그로를 끌면서. 콰아앙! 시체폭탄이 날아올 때마다 옆으로 구르며 거리를 벌린 다음, 방패 뒤로 몸을 웅크려 산성 체액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리고 이 짓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이헤르노 하인다르.” 화염세례가 쏘아졌다. 다행히 마법사가 정신을 차린 모양. 나는 굳이 뒤돌아 보지 않으며 시체골렘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수백 명이 내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시체골렘의 온몸이 활활 타오르며 껍데기가 벗겨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거리를 좁혔더 벌렸다 줄다리기하며 횃불로 수십 번 지져야 했을 첫 번째 패턴이, 마법 한 방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시체골렘의 외피가 무력화되었습니다.」 한데 썩은 시체 타는 냄새가 새삼 역겨웠을까. “읍… 우욱, 웨에엑!!” 뒤에서 또 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이제 좀 정신 차렸으면 좋겠는데……. 뭐, 됐다 이제 마법사는 필요 없으니. “아이나르! 됐으니 이제 옆으로 와라!” 나는 곧바로 아이나르를 호출했다. 시체골렘은 7등급 몬스터지만, 껍질이 벗겨진 이상 바바리안 둘이서 상대 못할 괴물은 아니다. “그오오오옭—!!” 거대했던 형체는 어느새 눈에 띄게 줄어들어 이제는 고작 직경 3m가량. 제각기 살아 움직이던 시체더미가 모두 불에 타 녹아내리자, 철근처럼 남은 뼈대만이 삐걱대며 움직인다. 이름하여 뼈골렘 모드. “카아아아악!” 무게가 줄었기에 움직임도 훨씬 날렵하다. 매섭게 휘둘러지는 골렘의 팔을 방패로 막아 내며 외쳤다. “운반꾼! 너도 도와라!” “나는 레이븐 님을 지켜야 한다.” 니미. 그럴 줄 알았다. 두고 봐, 지금 고생한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테니까. 퍼억! 나는 높이 도약하며 놈의 상체 위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늑골이 어찌나 단단한지 뼛조각이 조금 튄 정도. 하지만 이걸 반복하면 되겠지. “아이나르! 가슴을 노려라!” “알겠다!” 나와 아이나르는 어그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체골렘의 늑골을 공략했다. 그렇게 한 마흔 번을 내리쳤을까. 호두껍질처럼 단단하던 늑골이 깨지며 그 속의 알맹이를 드러냈다. 골렘류의 공통 급소인 마력핵이었다. 콰직! 이내 메이스로 핵을 깨트리는 것을 끝으로, 시체골렘이 작동을 멈추더니 빛이 되어 사라졌다. 「시체골렘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보상은 7등급 몬스터답게 한층 더 커진 주먹만 한 크기의 마석 한 개. “오오! 이거면 대체 빵이 몇 개—” 처음 보는 크기에 감탄하던 아이나르가 돌연 흠칫 굳었다. 보상이 마석 하나로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웅! 허공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흑색의 빛무리. “비요른, 설마 이게 그건가?”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가 나왔다. *** 균열은 보물 창고나 다름없다. 일반 필드에서 나오지 않는 정예 몬스터는 경험치 수급이 막힌 탐험가에게 단비와도 같으며, 수호자가 뱉는 전리품은 말할 것도 없다. 뭐, 핵심은 정수 드랍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이겠지만. ‘사실 확률로 따져 보면 이제야 정수가 나온 게 이상할 정도겠지…….’ “어떡할 건가?” 아이나르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거의 우리 둘이서 해치웠을뿐더러,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다만……. “…….” 원래 내가 노리던 후보군은 두 가지였다. 재생력의 ‘데스핀드’, 근력의 ‘키메라 울프’. 전부 8등급 몬스터의 정수였다. 한데 그런 와중에 7등급 정예 몬스터, 그것도 ‘핏빛 성채’에서만 등장하는 시체골렘의 정수가 나왔다. 입수 난이도는 어느 후보들도 상대 안 될 만큼 높은 희귀한 정수였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애매하다. 특이한 능력만큼이나 페널티도 심해서. [시체골렘] 고통내성+70 골강도+55 독내성+12 근력+15 인지력-5 식욕+9 체중+21 일단 기본 스탯은 탱커에게 적합하다. 인지력 하락으로 동체시력이나 판단속도 등에 영향을 주며 몸이 전반적으로 둔해지겠지만……. 대신 다른 스탯 증가치가 아주 높다. 물리내성만큼이나 방어력에 높은 영향을 끼치는 ‘골강도’가 +55에, 인게임에선 넉백이나 둔기류 대미지에 영향을 주던 ‘체중’이 +21. ‘고통내성’도 현실에선 몹시 유용할 것이며, ‘식욕’이야 어쨌든 ‘근력’과 ‘독내성’도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 스탯이었다. 하지만……. 특수: (P) 산성체액 — 혈액이 산성을 품습니다. (A) 살점폭발 — 신체 일부분을 강하게 터트립니다. 스킬이 유일한 하자다. ‘살점폭발’은 상당한 대미지를 자랑했지만, 캐릭터의 HP를 코스트로 삼았다. 액티브 스킬만 쓰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애초에 스킬 하나를 봉인한단 것 자체가 엄청난 손해일뿐더러……. 이 정수를 먹으면 부상을 당할 때마다 장비의 내구도가 엄청나게 깎여 나간다. 그야 피가 튀면 장비에도 묻을 테니까. “후…….” 터무니없는 포션비에 장비값까지. 보통 이게 나오면 쓰고 버릴 용도로 데리고 다니던 NPC에게 먹였다. 그만큼 계륵과도 같은 정수였다. 버리긴 아깝고, 본캐에 먹이긴 조금 그런. ‘어차피 초반에 먹는 정수는 언젠가 버려야 하니, 지금 이걸 취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일단 잠시 보류하고 난쟁이놈부터 치료하지.” 주인이 없어도 정수는 30분간 유지되니,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다. 이걸로 거래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나. 그런 판단을 내리며 후방으로 향한 나는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운반꾼이 포션을 뿌려 준 것일까? 난쟁이놈은 포션의 통증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어찌 된 일인지 마법사는 반쯤 죽어 가는 중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이름이… 타르진이었지. 이 싸가지 없는 호위 새끼는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우리를 보자마자 앞을 가로막았다. 씨바, 우리가 뭘 한댔냐? “왜 이러는 거지?” 멀찍이 떨어져 묻자 운반꾼이 답했다. “무리해 마법을 시전하시느라 반동을 입으셨다.” 반동이라……. 아무래도 ‘회로 단절’, 가끔 캐스팅에 실패하면 생기던 그 상태이상을 말하는 거 같다. 자세히 보니까 단순히 속에 든 것을 게워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웩, 웨에엑!”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이는 와중에 마법을 쓴 대가인가? 보는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지만……. 사실 [던전 앤 스톤]에서는 충분히 있을 만한 얘기다. 인과가 명확한 여타 게임과 달리, 이 게임에선 아주 하찮아 보이는 작은 ‘원인’이 때론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으니까.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일단 밖으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한데.” “…너희에겐 여기 드워프를 부탁하겠다.” 레이븐과 난쟁이놈을 지하 감옥으로 부축해 옮긴 뒤, 잠시 기다리자 상황이 나아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난쟁이놈이었다. “이거 면목이 없군……. 고맙네. 자네 둘이 아니었으면 큰일이었을 거야.”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나는 굳이 겸손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없을 테니까. 공로를 세운 건 확실했고, 나는 이걸 이용해 시급을 좀 더 올려 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오히려 부풀리는 쪽이 좋을 테고. “아이나르가 아니었으면 넌 이미 죽었다.” “알고 있네. 정말 부끄럽네만, 보자마자 몸이 덜컥 굳어 버리더군. 여태까지 볼꼴 못 볼꼴 다 봐 왔다 생각했는데…….” 새삼 이곳이 현실 속이란 게 느껴진다. 게임이었다면 충분한 전력이었지만, 멘탈적인 요소로 이들은 수호자도 아닌 중간 보스에게 죽을 뻔했으니. “그래서 이 아가씨는 왜 이러고 있는 건가?” “반동이 왔다더군. 포션을 마셨으니 곧 나아질 거다.” 포션을 복용한 다음부터, 구토 대신 비명을 내지르던 마법사는 무려 10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폐를, 끼쳤네요.” 자못 멀쩡한 척 입을 열었지만, 더 이상 고고한 분위기는 없었다. 입가와 목덜미는 토액과 피로 구덕구덕했고, 곱던 금발도 풀어헤쳐져 더러웠다. 바닥을 구르며 반질하던 로브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시체골렘은 우리가 처리했다.”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무리해서 마법을 쓰길, 잘했네요.” 과연 이게 탐험가 새끼들의 습성인가? 고맙다고 하기보다는 일단 자기의 활약부터 거론한다. 여기서 가만 있으면 시급 인상은 물 건너 갈 터.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 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희를 살렸다. 이 정도면 한 사람 몫 이상을 했다고 봐도 되겠지. 동의하나 마법사?” “…동의해요.” 레이븐이 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무시했던 바바리안 둘이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이 제법 수치스러웠던 모양. 솔직히 굉장히 속이 시원했지만, 이쯤에서 여지를 남기는 편이 협상에 도움이 되겠지. “물론 너의 마법은 대단했다. 그렇게 강한 불꽃이라니, 분명 팀을 위해 무리를 했던 거겠지.”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균열석은 우리가 갖겠다.” 정수, 넘버스 아이템, 균열석. 수호자가 드랍하는 세 가지의 전리품 중 하나. 처음 이걸 요구했을 때 이들은 욕심을 부린다며, 너네 둘이 없다고 문제가 생길 거 같냐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 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협상의 기본은 기다림이니까. “나는 찬성이다. 여기 이 바바리안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었을 테니.” 은혜는 갚는다는 걸까. 난쟁이놈이 먼저 긍정의 뜻을 표했다. 다만……. “저는 반대예요.” 레이븐은 쉽게 허락치 않았다. 양보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겠다마는. “하지만 만약 균열석이 나온다면, 적어도 기회는 균등하게 드릴 수 있다고 봐요.” 쉽게 말해 입찰 기회는 주겠다는 뜻이다. 조금 아쉽지만, 얘의 도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니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겠지.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 그럼 다음 안건이다. “아, 그리고 정수가 나왔다.” “정수? 설마 시체골렘이 정수를 뱉었단 말인가?” “그렇다.” 그 입수 난이도가 높은 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난쟁이놈과 레이븐이 입을 떡 벌렸다. “놀랍군. 보아하니 아직 정수 하나 얻지 못한 듯한데, 처음부터 그런 걸 얻다니.” “시체골렘의 정수는 너무 표본이 적어서 탐험가 길드에서도 제대로 능력을 파악치 못했다고 들었어요.” 레이븐은 희귀하기로만 따지면 시체골렘의 정수가 수호자의 정수보다 위일 것이라며 연신 감탄했다. 눈가에 연구 욕심이 드러난 건 덤. 나는 최대한 속내를 감추며 기다려 왔던 제안을 꺼냈다. “원한다면 수호자의 정수와 바꿔도 좋다.” “네? 하지만 수호자가 정수를 줄지도 확실치 않은데…….” 레이븐이 묘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린다. 보아하니, 정수를 바꾸자는 제안 자체는 마음에 드는 모양. “그건 내가 감수하겠다.” “그렇다면야, 네 좋아요. 탐험가 입장이라면 모를까. 사실 제겐 시체골렘이 더 흥미롭거든요. 이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교섭이 성립됐다. *** “레이븐 양, 마법사는 정수를 흡수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정수는 저 운반꾼에게 먹이는 건가?” “아뇨, 정수 자체만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있어서요.” 레이븐은 운반꾼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시험관 하나를 꺼냈다. 마법사가 사기캐인 이유 중 하나다. 얘네들은 직접 체내로 흡수하지 않아도 정수를 담아서 밖에 갖고 나갈 수 있다. 준비물이 하나 필요하긴 하지만. “아! 시험관을 가져온 건가? 무지막지하게 비싼 물건이라고 들었네만?” “…저도 하나뿐이에요.” 사실 6등급 이하의 정수는 시험관에 담아 봤자 거의 본전도 못 건지는 수준이다. 하지만 레이븐은 시체골렘의 정수에 그 이상의 가치를 매긴 모양. 후우웅! 레이븐이 스펠을 영창하자 시험관 속으로 정수가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에 이중포장을 하고서 배낭에 잘 갈무리했다. “그럼 어서 이 끔찍한 곳을 빠져나가죠.” “언제 그 말이 나오나 기다렸다네!” 끈적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우리는 수도관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출현 몬스터는 스컬 랫과 데드맨 정도가 전부. 역한 냄새가 가득하긴 했지만 시체골렘이 있던 곳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 30분쯤 이동한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내가 먼저 올라가겠네.” 발차기 한 번에 뜯어진 녹슨 철창 너머엔 계단이 있었고, 이를 타고 올라가자 드넓은 석실이 나타났다. 조금 깨끗해진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 마시며 나는 주변을 확인했다. “가고일 석상은 아닌 듯한데, 저건 뭔가?”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단순한 조형물일 거예요.” 위압스레 곳곳에 악마 조형물. 그리고 바닥에 가득한 사람의 두개골. “아마 바로 이 위에 영주성이 있었을 거예요.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그 안에도 조사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으스스한 느낌도 들지 않는지, 레이븐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듣던 대로 전형적인 종교 시설 패턴을 띠고 있네요. 다만, 지하에 숨겨놨다는 건 이 신앙이 당시 사회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는 의미겠죠. 예를 들면 사악한 신이라던가.” “그, 그렇군.” 레이븐의 지식 과시용 설명에 난쟁이놈이 식겁했다. 나는 더 길어지기 전에 짧게 읊조려 이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대화는 그만하고 조금은 긴장하는 게 어떤가?”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균열의 마지막 챕터 ‘악마 숭배실’은 결코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니까. “비요른, 뭔가 불길한 직감이 들고 있다.” 나처럼 운 없는 새끼에게는 더더욱. 32화 핏빛 성채 (3) 드르륵. 레이븐이 벽면에 돌 하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자, 석실의 촛불들이 일제히 켜지며 장내가 밝아졌다. “오,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나?” “책은 지식을 대물림해 주는 보물이니까요.” 거, 그냥 책에서 읽었다 하면 될 것을. “어디 보자, 아! 여기 또 있네요.” 레이븐이 추가로 벽돌 하나를 더 밀어 넣자, 기계장치 소리가 나며 책 한 권이 천장에서 떨어진다. 네크로노미콘. 흑마법이 담긴 마법서로, 상점에 꽤 비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다. …젠장. “제 능력으로 발견한 물건이니 약속대로 이건 제가 갖겠습니다.” “그러게나. 어차피 왜곡 마법이 없으면 우린 갖고 나갈 수도 없는 물건이니.” “하하하…….” 레이븐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지도 알고 있겠지. 네크로노미콘은 아이템 취급을 받아서 왜곡 마법이 없어도 밖에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걸. “이것 좀 배낭에 넣어 주시겠어요?” “예, 레이븐 님.” 속이 쓰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법사가 전리품을 혼자 꿀꺽 삼키는 걸 바라보는 것뿐. 후, 이건 나중에 혼자 수거할라 했는데……. 대체 왜 이런 건 알면서 조각상 아래에 숨겨져 있는 건 모르지? “그럼 가실까요?” 10m는 됨직한 넓은 폭의 일자형 통로를 걷고 있자니, 머지않아 거대한 악마 조형물과 함께 양갈래 길이 나왔다. “레이븐 양?” “어느 쪽을 택하던 상관없어요. 어차피 몬스터는 전부 잡을 거잖아요?” 우리들은 ‘ㅁ’ 자 구조의 악마숭배실은 한 바퀴 돌며 차근차근 몬스터들을 사냥해 나갔다. 출현하는 개체는 가고일 석상, 데스핀드, 키메라 울프, 본 나이트. “시체골렘의 정수가 나온 것도 모자라, 갈망 타입이라니 여러모로 운이 따르네요.” 나답지 않게 자꾸 운이 이어지고 있다. 증오, 슬픔, 갈망. 7등급 몬스터인 ‘본 나이트’는 랜덤으로 셋 중 하나의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쉬우면서 보상도 좋은 타입에 걸렸다. “갈망 타입은 타격 시 생명력을 회복하는 ‘생기 흡수’ 능력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건 제 ‘재생 저지’ 마법으로 간단하게 무효화 시킬 수 있죠.” 레이븐이 위풍당당하게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녀가 있든 없든 갈망 타입이 제일 쉽다. 정신 착란을 유발하는 안개를 내뿜는 슬픔 타입은 게임에서도 몹시 성가신 능력이었다. 뭐, 증오 타입에 비할바는 아니겠다마는. 난쟁이놈이 툭하고 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마는, 듣기로 증오 타입이 가장 약하다고 들었네만?” 지랄. 증오의 기사는 ‘영혼 베기’를 쓴다. 대미지는 없지만 극악의 확률로 레벨을 다운시켜 버리는 미친 스킬. [동료A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레벨이 하락합니다.] 일단 터지기만 하면 HP나 방어력, 마법 저항력과 무관하게 이러한 전투 로그가 뜬다. 그리고 이 로그가 뜨면 차라리 새로 키우는 편이 속 편하다. 포탈 개방 노가다로 경험치를 복구하는 것보단 그게 훨씬 더 쉬우니까. “…영혼의 격이 하락하다니, 정말이지 무서운 놈이로군.” 나를 대신한 레이븐의 설명에 난쟁이놈이 몸서리치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다만 이 마법사 아가씨는 지식을 자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꿋꿋이 설명을 이어 갔다. “아, 만약 영혼이 허락하는 만큼 정수를 소지한 상태라면, 무작위로 하나가 소실된다고 해요. 아마 이건 다른 탐험가들도 잘 모르는 얘기일 거예요.” 마법사답게 틀린 정보는 없었다. 다만, 고인물로서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영혼베기’는 레벨이 낮을수록 더 잘 터진다. 그리고 지금 내 레벨은 고작 2. 심지어 운까지 나쁜 팔자를 지녔으니, 증오의 기사를 만나지 않은 건 정말이지 행운인 일— “정수군.” 씨바, 드디어 내 팔자도 좀 피려는 건가? 몇 마리 잡지도 않았는데 정수가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7등급 몬스터 본 나이트의 것이다. 뭐야, 이거. 앞에선 시체골렘 정수를 뱉더니……. 이게 소위 말하는 ‘축방’이라는 건가? “마치 신께서 자네들을 보우하시는 것 같군. 흐하하핫!” “동감이에요. 어쩌면 이러다 정말 수호자에게서 정수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제각기 축하인지 모를 한마디를 뱉으며 내게 시선을 보낸다. 나와 아이나르. 둘 중 누가 먹을 거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잠시 고민한 나는 어렵사리 답을 내렸다. “아이나르, 이건 네가 가져라.” “그, 그래도 되는가?”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일 거다. 사실상 이제 수호자만이 남은 상황이었고, 추가로 정수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다만…….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않나. 이건 네가 가져라.” 플레이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역시 나보다는 아이나르가 취하는 게 합리적이다. ‘생기 흡수’는 도검류에 잘 어울리는 데다가, 나는 언젠가 무기를 버려야 하는 입장. 무엇보다, 아이나르는 믿을 만하다. 우직한 성격으로 보건대, 어지간해선 나를 떠나지 않고 옆에서 조력해 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기보다는, 강해진 아이나르를 이용해 내게 더 알맞은 정수를 취하는 편이 효율적이겠지. “고, 고맙다! 비요른! 역시 네가 최고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나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정수를 취했다. 변화는 극적이었으며, 즉시 찾아왔다. “뭐, 뭔가! 갑자기 너희들이 커졌다!” “네가 작아진 거다. 아이나르.” “뭐, 뭣?! 그게 정말인가!” 2m 언저리던 아이나르의 키가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한 170대 후반 정도로. “본 나이트의 정수가 가진 기본 효과예요. 골밀도가 대폭 상승하는 대신, 그만큼 신장이 줄어들죠.” 설명을 좋아하는 레이븐은 이 세계의 표준 정보까지 줄줄 읊어 주었다. (상), (중), (하) 따위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로 표기하자면 이렇겠지만. [본 나이트] 절삭력+12 골밀도+55 민첩성+15 지구력+15 유연성-7 신장-25 (P) 방부제 — 모든 상처 악화 효과(독, 출혈, 부패 등등)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A) 생기 흡수 — 생명체를 타격 시 일시적으로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걱정 마세요. 키가 작아졌다고 근력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을—” “나, 나는 망했다! 이래서야 누구도 나를 전사로 보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여자라서 다들 우습게 보았는데!” …여자라서 우습게 보다니? 혼자만 갖고 있던 콤플렉스인가? “그나저나… 굉장히 예뻐지셨네요.” 아이나르의 절규를 지켜보던 레이븐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굴 골격이 작아져서 그런가? 어쩌면 귀족들에게 미용 목적으로 팔 수 있을지도—” “그, 그건 전사답지 못해졌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질색팔색 할 줄은 몰랐던 나는 서둘러 수습했다. “아니다. 아이나르, 네가 훌륭한 전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 상체의 문신만 빼면 단지 키 큰 인간 여성으로도 보일 지경이지만……. “키가 조금 작아진 게 뭐 어떤가!” “이건, 조금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너는 훨씬 더 강해졌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나라도 위로를 해야 했다. 나머지는 남의 불행에도 자기 할 말만 하기 바쁜 소시오패스들이었으니까. “하하핫! 신기한 정수로군. 나 같은 드워프가 먹으면 보이지도 않게 될 걸세!” “흐음, 재밌는 발상이네요. 신장 감소 효과가 비례식인지, 절대값인지는 한번 돌아가서 사례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나는 망했다!!” “하하핫! 바바리안이라 그런가? 키가 작아져도 목소리는 아주 우렁차구먼!” “아이나르 씨, 혹시 괜찮다면 도시로 돌아가서 제가 정밀 검사를 해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망했다아아아!” 제발 다들 그만 좀 조용해 줬으면 좋겠다. 귀가 아파서 머리가 아파 오려 하니까. *** “데스핀드다!” 멀리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몬스터 덕분에 소란은 겨우 잦아들었다. 다만 정수를 흡수한 아이나르의 변화가 궁금했는지, 다들 한 걸음 물러서 관전 의사를 표시했다. “베헬라…….” 아이나르가 성의 없는 기합 소리를 내며 대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서걱!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 검을 쓰면서 처음으로 ‘쾅!’이 아니라 베는 소리가 났다. …절삭력+12가 이 정도였나? “아이나르 머리를 노려봐라!” “어, 어… 알겠다!” 스스로의 변화에 당황하던 아이나르가 높게 점프하더니 그대로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서걱! 둘이서 수십 번 내리쳐야 잡을 수 있었던 데스핀드가 칼질 한 방에 절명했다. 그 단단한 두개골을 베고 뇌까지 닿은 것이다. “봐라! 훨씬 강해졌지 않나!” “그럼, 나는 아직 전사인 것인가……?” “그럴 리가 있나.” “……?”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이제 너는 그냥 전사가 아니다! 더 강한 전사다!!” “베헬—라아아아아!!” 다행이다. 기운을 차려서. 아직은 줄어든 몸집이 어색하겠지만, 적응되면 아이나르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나?” “동감이에요.” 레이븐과 난쟁이놈의 대화는 대충 무시하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놈들을 조용히 시키려면 몬스터와의 전투밖에 답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탓이다. “어서 가자! 비요른! 너도 이걸 먹으면 나처럼 더 강한 전사가 될 수 있다!” 의욕을 되찾은 아이나르는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퍼억! 퍽 콰앙-! 서걱! 애석하게도 숭배실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사냥했음에도 정수는 추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아직 균열의 꽃, 수호자가 남았으니까. 이 정도로 운이 따르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행운을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던 때였다. “자네들과 나름 즐거웠네만, 이제 슬슬 끝이군.” 난쟁이놈이 플래그 같은 대사를 읊는다. 레이븐도 매한가지다. “뭔가 아쉽네요. 미궁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왜 선배들이 탐험가 일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아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 삶에서 이렇게 술술 풀렸던 적이 있던가? 음, 찾아보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항상 그 끝에 뭔가가 터져서 그렇지. 한껏 풀어진 머릿속 나사가 단번에 꽉 조여지는 한편,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그럼 들어가 보겠네.” 대체 뭐가 문제지? 만약, 지금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그게 무엇이지? 내분? 글쎄, 이건 아닌 거 같다. 전리품 분배도 조율이 된 마당일뿐더러, 그건 수호자가 죽은 다음에나 벌어질 일일 터. 끼이이익. 난쟁이놈이 석실 문을 여는 순간에도 나는 주변을 관찰했다. 분명히 무언가 사건이 벌어진다 확신한 채.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 하나하나까지 면밀이 살폈다. 또한 내가 아는 게임 속 ‘핏빛 성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렇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문! 문을 닫아라!” “그게 무슨 소리—” 제기랄, 이미 늦었나. 드드드드드드드! 문이 열림과 동시. 지면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넓은 석실 중심부에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로브를 벗으며 허여멀건한 얼굴을 드러낸다. 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마법사인 레이븐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균열의 수호자가 바뀌었다. 원래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핏빛 성채의 주인이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단독 활동을 하는 ‘보스’ 몬스터. 그럼에도 5등급의 난이도가 매겨진 몬스터. 육탄전은 물론이고, 흑마법에도 능통한 진정한 하이브리드 몬스터. 원래라면 6층이 넘어서야 희미한 확률로나마 만나 보는 게 가능했을 몬스터. “뱀파이어…….” 심지어 일반 뱀파이어도 아닌 상위 변이종. 쉽게 말해, 지성이 존재하며, 이름이 있고, 역사를 지닌 네임드 몬스터. 나는 저놈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생명체로군.”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 “자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나?” 얼어붙은 무리를 대표해 나는 입을 열었다. “튀어라.” 씨바,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게임에선 그렇게 나와라 나와라 노래를 불러도 안 나타나더니만. 33화 전사 (1) 몬스터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변이종. 고블린 궁수와 검사처럼 종족값은 같지만, 클래스가 다른 경우를 의미한다. 2. 상위종. 망자의 땅에서 만난 데스핀드가 이에 속한다. 참고로 이는 상대적인 분류법으로, 해당 층수의 평균 등급보다 등급이 하나라도 높다면, 이를 상위종이라 부른다. 3. 희귀종. 시체골렘처럼 특정 균열에서만 만날 수 있던가, 미믹처럼 일반 필드에서 만나기 극히 어려운 몬스터가 여기에 들어간다. 4. 상위 변이종. 개체 고유의 기억과 개별 명칭을 지닌 네임드 몬스터를 뜻한다. 가장 큰 특징은 ‘정수의 힘’을 가졌다는 것. 한마디로, 훨씬 더 세고 까다롭다. 그도 그럴 게 가죽이 두껍기로 유명한 ‘오우거’가 ‘트롤’의 재생 능력을 소유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친 괴물이 탄생한다. 그렇기에…… ***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대체 저놈은 뭐란 말인가! 대체 왜 뱀파이어가 이런 곳에…….” “징징거릴 시간에 뛰어라, 드워프.” 보스룸 입구에서 벗어나, “허억, 허억, 더 이상 뛸 수가…….”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븐 님.” 왔던 길을 따라 수도관을 지나쳐, “어차피 저놈을 잡지 못하면 이곳을 떠날 수 없네.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않겠나?” “적어도 햇빛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햇빛이라 해 봤자 그 시뻘겋던 하늘 아닌가!” “그래도 여기보단 낫겠지.” 미로 구조의 지하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도.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요!” 계속해서 전력 질주를 이어 가고 있다. 그야, 여긴 놈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으니까. 일단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다. “사, 상위 변이종이 수호자로 나오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에요.” 글쎄, 그건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3층의 ‘백색 신전’만 해도 상위 변이종이 수호자로 나온다. 심층으로 분류되는 8층부터는 모든 균열이 그런 케이스라 봐도 무방했고. 뭐, 1층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전례가 없다는 말도 틀리진 않겠지만. 누적 플레이 1만 번에 달하던, 9년 차 고인물인 나조차 ‘뱀파이어 공작’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어느 플레이어가 유일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린 녹화본을 보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을 뿐. “아, 맞다! 아까 비요른 씨는 어떻게 아셨던 거죠? 문을 닫으라고 하셨잖아요!” 저 빌어먹을 학구열은 이 상황에서도 발휘되는 건가? “거듭 말하지만, 그럴 시간에 뛰어라.” “하지만 저는 직접 뛰는 게 아닌걸요?” 그래, 너야 그렇겠지. 근데 나는 아니거든? “…그냥 그런 직감이 들었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대충 둘러대며 대화를 차단했다. 다만 속으로나마 대답해 보자면……. 이변을 눈치챌 수 있던 건, 문고리의 색상 덕분이었다. 그 유저가 올렸던 녹화본에서, 유일하게 평소의 핏빛성채와 다른 점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해당 유저와 같은 조건으로 수백 번을 트라이해도 뱀파이어가 출현하지 않자, 뭔가 특수 조건이 있을까 해서 녹화본을 돌려 보다가 겨우 찾아낼 수 있었던 그 작은 변화. 만약 연달은 행운에 들뜨지 않았더라면, 문을 열기 전에도 그걸 발견할 수도 있었을까? 글쎄,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예의가 없는 손님들이로군.” 지하 감옥 2층에 도달함과 동시에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솨아아아아-! 놈은 사람이 아닌 흑색의 안개 형태로 우리를 추격하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이능은 아니고, 소유했을 수십 가지의 흑마법 중 하나인 ‘원혼화’. 이래서 마법을 쓰는 몬스터가 싫다. 유틸성이 미쳤거든. “레이븐!” 나는 즉시 우리 쪽 마법사를 호출했다. 뱀파이어의 상극 중 하나인 태양 마법을 쓸 줄 아느냐 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괜한 참견이었을까. “다들 눈 감으세요!” 이미 마법사 아가씨는 캐스팅을 마친 상태였다. “아헤센베르트 투!” ‘휘광폭발’. 보통은 광역 블라인드 효과로 사용되는 지원계 주문. 눈을 감았음에도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번쩍이는 섬광이 여실히 느껴진다. 삐이이-. 귀에서 들려오는 이명을 무시하며 눈을 뜨자, 추격하던 흑색의 연기가 사라진 게 보인다. 다행이다. ‘원혼화’의 핵심 콤보 ‘본체화’는 쓰지 못하게 막아서. 최소 3분 이상을 벌었다 봐도 무방하다. 지금쯤 놈은 아까 그 숭배실에서 깨어났을 테니까. 하지만, 승전보는 언제나 비보와 함께 찾아오는 법이라던가? “비요른! 마법사가 당했다!” “뭐?” 아이나르의 말에 살펴보니, 운반꾼이 안아든 레이븐이 혼절한 게 보인다.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뭐지? 그 새끼가 뭔가 마법을 쓴 건가? ‘원혼화’ 상태에선 공격 마법을 쓰지 못할 텐데? ‘설마 정수의 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녹화본에선 뭘 할 새도 없이 전멸하는 바람에, 뱀파이어 공작이 어떤 몬스터의 정수를 추가로 갖고 있는지 확인이 불가했으니까. 다양한 가능성이 머릿속에 휘몰아치지만,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뭐 하나! 뛰지 않고?” “길을 알고 있는 마법사가 기절했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라.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 “…그걸 자네가 어떻게?” 의문이 가득한 난쟁이놈을 보며 나는 짧게 답했다. “외웠다.” “고작 한 번 와 본 걸로……?” 실제로는 수백 번이다. 뱀파이어 공작과 만나고 싶어서 여기는 진짜 오질나게 들락날락했거든. 모니터 너머가 아니라 여기서 그 얼굴을 볼 줄은 몰랐지만. “따라와라.” 더 이상의 질문은 불허하며 앞장서 달렸다. 나중에 마법사가 눈을 떴을 때, 내가 특이한 바바리안으로 보일 거라는 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자네, 정말로 길을 외웠군…….” 쉬지 않고 달려 지하 1층에 도달하자 난쟁이놈이 탄성을 내뱉는다. “자네들, 성인식을 마친 게 저번 달이란 말이 사실인가?” “물론이다! 말했지 않나!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라고!” “위대한 전사라… 정말로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난 고래가 아니다. 제발 그럴 시간에 제발 더 열심히 뛰어 줬으면 좋겠다. 지금 딱 2분 정도가 지난 거 같거든. 타다다닷. 좌, 우, 직진, 직진, 우, 좌, 직진, 직진.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쉬지 않고 내달리자, 마침내 출구가 시야에 들어온다. 시간은 이제 막 3분쯤 됐을까? 계단을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확인했다. “후욱, 후욱…….” 모두 호흡이 거칠었지만, 다들 기본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낙오자는 없었다. 문제는 그런 팀원들 너머로 씨커먼 연기가 따라오는 게 보인단 거겠지만. 솨아아아아-! 그냥 배낭을 전부 버릴 걸 그랬나? 그럼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릴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후회해도 변하는 건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타다다닷!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근데 ‘본체화’를 쓴 건가? 사가가각. 뒤에서 무언가 조립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이판사판. 나는 막판 스퍼트로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올랐다. 그리고……. “밖이다!” 마침내 지상으로 나왔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내심, 걱정, 했는데, 정말, 따라오진, 않는가, 보군…….” 난쟁이놈이 숨을 내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다만 그러면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시선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고정되어 있다. 하기야 자기도 눈이 있으면 알겠지. 결국 시간을 조금 더 벌었을 뿐이라는걸. 아직, 문제는 어느 하나 해결되지 않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난쟁이놈의 질문에, 나는 성벽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딱 봐도 얼마 남지 않은 건 알겠군.”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곧 있으면 저 검붉은 하늘은 아예 까맣게 변해 버릴 터. 그러니, 그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 “마법사의 상태가 정확히 어떻지?” “포션을 복용하셨으니 금방 정신을 차리실 거다.” “확실한가?” “…분명 그러실 거다.” 그건 네 희망 사항이고 새끼야. 후, 결국 이놈도 얘가 뭐에 당해서 이렇게 빌빌거리는지 전혀 모르는 건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엔 너도 한 사람분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여기서 전부 뒈지고 싶은 건가?” 때론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다. 어차피 우리가 다 죽으면 저놈 혼자선 마법사를 지킬 수 없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그리 묻는다면 사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단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각오를 되짚어 주고 싶었을 뿐. “마법사를 지켜라. 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물론이다.” 목소리가 제법 믿음직스럽게 변했다. 그러면 이제 이 새끼는 됐고. 남은 준비는 하나인가. “외성벽으로 이동하지. 엄폐물이 있는 편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나을 거다.” 나는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대며 일행을 외성벽으로 이끌었다. 사실 여기에 전부 내버려 두고 얼른 혼자서 다녀오는 게 베스트이긴 했지만……. 만약 그러던 와중에 놈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게임 오버일 터. “잠시 여기서 대기해라. 근처를 둘러보고 오겠다.” “흩어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네만!” 난쟁이놈이 뭐라 외쳤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달려가 일전에 눈여겨본 분수대로 향했다. 아까는 괜히 튀고 싶지 않아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예의 그 아이템을 입수하기 위해서. 콰앙! 부스스스. 메마른 자갈들만이 가득한 분수. 그 가운데 위치한 조각상을 깨부순 나는 파편을 뒤져 작은 상자를 꺼냈다. 「캐릭터가 [여신의 눈물]을 입수했습니다.」 확인해보니 내용물도 게임과 일치했으며……. 다른 희소식마저 겹겹이 이어졌다. “여긴…….” 준비물을 부츠의 홈에 갈무리하고 돌아오자, 레이븐이 정신을 차렸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어떻게 됐죠?” “어떻게든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해가 저물고 나면 나타날 거다.” “그렇군요.” 통증이 남아 있는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이쪽이 물을 차례다. “대체 뭐에 당한 거지?” 레이븐은 일단 운반꾼이 생수처럼 건넨 포션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반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끄윽, 확신하긴 이르지만… 아으으, 증상으로 보건대, 쓰읍… ‘고통분담’일 가능성이 높아요.” ‘고통분담’이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해당 스킬을 지닌 ‘나이트플라’는 8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기본 스탯이 낮은 축에 속했으니까. 만약 놈이 가진 정수가 6등급, 아니, 7등급만 됐어도 훨씬 더 난이도가 상승했을 것이다. “아흐… 하필이면 한 번 더 술식을 전개하려는 때 반동이 오는 바람에…….” 레이븐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부의 옷깃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제법 마음이 아팠다. 다시 제 역할을 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해서. “회복되려면 얼마나 걸리지?” “으으, 완전 회복은 무리예요. 회로가 완전히 꼬였어요.” “대강이라도 좋으니 수치로 말해라.” “20분? 그 정도면, 7등급 공격 주문을 5회까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될 거예요.” 화염세례급 마법 주문 다섯 발이라. 이거 진짜 큰일 났네. “달리 알고 있는 태양 마법이 더 있나?” “마법사에게 보유 스펠을 묻는 행위가 굉장히 무례하단 건 알고 계시나요?’ 물론, 세계관 설정상으로는 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왕 빼고는 모두에게 반말을 찍찍 뱉는 문화를 지닌, 무례의 극치 바바리안. 그게 뭐 어쨌냐는 눈빛으로 대응하자 레이븐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흑점구를 쓸 수 있어요.” “흑점구라…….” 기본 형태는 화염구와 비슷하지만, 불이 아니라 태양 속성을 쓰는 6등급 공격 주문이다. 이거 진짜 어떻게 비벼 볼 수도 있겠는데? “혹시 흑점구에 ‘속성 강화’ 주문도 같이 쓸 수 있나?” “…10분쯤 더 마력을 모은다면요.” “그럼 됐군.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 그러니 괜히 돕는다고 나서지 말고 마력을 아껴라.” “네, 그럴게… 잠깐, 근데 왜 얀델 씨가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마법사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다. 난쟁이놈은 내가 분위기를 주도하자마자 마냥 딸려오던데. “그럼 달리 할 사람이 있나?” 그녀는 운반꾼, 아이나르, 난쟁이놈을 순서대로 흘깃하더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건, 확실히… 네 그렇네요.” “흐하핫! 미안하네! 태생이 이런 걸 어쩌겠나?” 난쟁이놈이 무안하다는 듯 두툼한 뒷목을 긁적인다. 그리고 이를 본 아이나르가 이때다 싶어 대화에 껴든다. “바바리안이 드워프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인가!” “그건 아닐세! 다만, 바바리안 아가씨 말대로 여기 이 친구가 특별할 뿐이겠지. 잠깐이지만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네.” “특별……?”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자신이 있는 편이라 말일세.” 레이븐은 자신이 기절해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한 눈초리였지만, 애석하게도 귀중한 시간을 그런 데 쓸 수는 없다. “무라드, 소지한 정수가 몇 개지?” “네 개다.” “종류는?” 나는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질문을 토해내며 난쟁이놈이 가진 전력을 파악했다. 그가 가진 정수 중엔 승부를 뒤집을만한 핵심 카드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전략이 머리에 그려진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그 전략을 팀원들에게 공유할 시간이 부족했단 것이겠지. 솨아아아아아. 서늘하게 바람이 스치더니, 지면을 덮은 그림자가 한층 두텁게 어린다. 준비물이 갖춰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밤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러설 곳은 없다. 그저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34화 전사 (2) “비요른.” 아이나르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붉은 구름 속에 가려진 해가 완전히 등선을 넘어간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적색의 월광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묘하군, 참으로 묘해…….” 그는 폐허로 변한 시가지를 쓰윽 둘러보더니, 우리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자네들을 보고 있으면 살의가 끓어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군. 자네들은 혹시 그 이유를 아는가?” 이유라, 글쎄……. 알 리가 없지 않나.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는데.” 1분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벌겠다는 판단. 다만, 내 대답과 동시 놈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기엔… 너무도 참기 어려운 욕망이란 말이지. 크흐흐흣.” 솔직히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뱀파이어 새끼가 답정너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크흐흣, 크흣! 크하하하하!!” 사람 여럿을 앞에 두고서, 신내림이라도 받은 듯 실실 쪼개던 뱀파이어 놈이 어느 순간 정색하더니……. “캬아아아악!” 뭔 외계 생명체가 낼 법한 포효를 내질렀다. 채앵-! 이미 뱀파이어의 주무기인 손톱은 예리한 소리를 내며 길게 빠져나온 상태. 어느샌가 눈에도 광기만이 남아 시뻘건 안광을 자아내고 있다. ‘이런 건 또 게임이랑 똑같단 말이지.’ 생각해 보면 게임에서도 이랬다. 아무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지성이 있다고 한들,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해 봐야 인트로처럼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뿐. “이 정도 피어는 익숙하지.” 5등급 몬스터가 뿜어내는 살의는 살이 저릿할 정도였으나, 놀랍게도 난쟁이놈은 멀쩡했다. “다들 물러서게!” 나도 조금은 감탄했다. 시체골렘 때는 한심한 모습만 보이더니, 그래도 3년 차 탐험가라는 건가? 뱀파이어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 난쟁이놈이 앞으로 나가 버클러를 치켜올린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휘날리는 먼지 돌풍. 그 위력은 몇 걸음 뒤에서도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지만……. “하하핫! 역시 묵직하구먼!” 난쟁이놈은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놈의 스탯이 뱀파이어를 압도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모두 정수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균형추]를 시전했습니다.」 7등급 몬스터 ‘아이안트로’의 이능. 발이 땅에만 붙어 있으면 절대 넘어지거나 밀리지 않게 되는 ‘넉백 면역’ 스킬. 부가 옵션으로는 충격 흡수가 있다. “타르진, 너는 물러나 있어라!”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 나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곁눈질로 확인해 보니, 이미 운반꾼은 마법사를 안고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 잘 한 일이 분명한데, 왜 괘씸하지? 지금 느낀 감정은 추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며 나는 외쳤다. “아이나르!” “내가 우측을 맡겠다!” 하도 호흡을 맞췄더니 눈빛만으로도 뭘 원하는지가 전해진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뱀파이어의 좌측을 점한 뒤, 아이나르와 동시에 달려들었다. “캬아악!” 전투 관련의 지성은 남아 있는지 뒤로 물러나는 뱀파이어. 이와 동시 반쯤 구겨진 난쟁이놈의 버클러가 시간을 역행하듯 원상태로 복원된다. 버클러에 그런 기능이 딸린 건 아니었고……. 「히쿠로드 무라드가 [긴급복원]을 시전했습니다.」 리빙아머의 이능이다. 장비값을 아끼는 건 물론이고, 추후 마도구를 장착하면 그 성능이 확 증가하는 유용한 스킬. 순식간에 수리를 끝마친 난쟁이놈이 외쳤다. “정면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들은 옆에서 도와주게!” 이견은 없었다. 그나마 난쟁이놈 쯤 되니까 몇 초라도 버틴 것일 테니까. 냉정히 말하자면 여기서 내가 제일 도움이 안 된다. 아이나르는 이번에 정수라도 먹었지, 나는 현질한 ‘불사자 각인’을 제하면 뭣도 없은가. 뭐, 고기 방패 짓을 하는덴 도움이 되겠지만. “캬아아악!” 그 순간 멀리서 우리들을 보던 뱀파이어의 몸이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로 나누어졌다. 날개를 푸득이며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날아드는 까마귀 무리들.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이내 우리를 향해 날아든 까마귀들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폭발했다. 콰콰쾅! 쾅! 콰쾅! 폭발 위력 자체는 크지 않았다. 다만 온 사방으로 터지는 핏물을 피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제기랄.’ 물론 시체골렘처럼 피에 산성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뒤의 연계기를 감안하면 이게 더 골치 아프다. “비, 비요른! 이게 대체 뭔가!” 피에 흠뻑 젖은 우리들의 이마 위로 붉은 문신이 새겨지더니, 흩뿌려지는 선명한 빛. 「캐릭터가 제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반경 100m 내에 위치한 제물의 숫자만큼,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육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임 로그를 무시하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까마귀가 터지며 바닥에 고인 핏물들 사이로 뱀파이어 놈의 모습이 천천히 재생성되고 있었다. 버프까지 받았으니 앞으로는 더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질 터. ‘이제 3분은 지났으려나?’ 준비물이 갖춰지려면 한참이나 남은 상황.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버텨야 한다. 악바리 바바리안 근성으로. *** 버프류 스킬 ‘제물 각인’. 잃은 체력에 비례해 재생력이 대폭 상승하는 ‘영생자’. 직접 흡혈 시 대상자의 능력 일부분을 흡수하는 ‘피의 주인’. 뱀파이어가 지닌 세 개의 액티브 스킬은 하나하나가 육탄전에서 엄청난 위용을 보여 준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겠지만. 이 만족을 모르는 새끼는 이것과 별개로 각종 흑마법들까지 사용한다. “비요른, 또 까마귀가 날아든다!” 까마귀로 변해 폭발했다가, 연기로 변해 검을 피했다가, 흩뿌려진 피를 이용해 마물들을 소환하는 등. 뱀파이어 새끼는 고등급 몬스터가 지닌 사기적인 스펙을 몸소 보여 주었다. ‘이러니까 다들 6층도 못 가고 게임을 접지.’ 새삼 [던전 앤 스톤]의 미친 난이도를 실감하며 나는 방패를 치켜올렸다. 이미 방패는 손톱에 찢기고 파여 거의 고철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터. 까가각-! 나는 반동을 이용해 뒤로 튕겨져 나가며 최대한 충격을 흡수했다. 힘, 스피드, 스킬. 모든 면에서 압도하는 적과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잔재주. [5분만 더 버텨 주세요!] 그때 머릿속에 레이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귓속말을 보낼 마력을 아꼈으면 그 시간이 조금 더 단축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더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듯하— “히쿠로드가 당했다!” —기는 개뿔. 3년 차 탐험가의 노련함을 보여 주며, 뱀파이어를 밀착 마크했던 난쟁이놈이 쓰러졌다. 비록 근처에 있던 아이나르가 달려들며 뱀파이어가 난쟁이놈을 흡혈하는 건 막아 냈지만…….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순식간에 전세가 기울었다. 이미 나와 아이나르도 만신창이인 상태. 전투 중 5할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던 난쟁이놈 없이 둘이서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아이나르! 무라드를 데리고 뒤로 빠져라!” “하지만…….” “이놈은 내가 막겠다!” “아, 알겠다!” 아이나르가 무라드를 어깨에 둘러멘 순간, 앞으로 대쉬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억! 오랜만에 들어간 유효타. “아악!!” 공격이 성공한 반동으로 뇌가 욱신거린다. 전부 이 미친 새끼가 상위 변이종인 탓이다.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고통분담]을 시전했습니다.」 심지어 놈은 한 번 뒤로 물러나 숨을 돌린 것만으로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다. 제기랄, 나는 아직도 통증이 남아 있는데. 무슨 이런 개같은 새끼가 다 있지? “캬아아아아악!” 그래도 원하는 대로 어그로는 내게 끌린 상황. 나는 습관처럼 부츠 속에 숨겨둔 그 물건이 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이템 명은 ‘여신의 눈물’. 쉽게 말해 성물聖物이다. 일회용이긴 하지만 치료 용도로도 쓸 수 있고, 악 속성 몬스터들에 한해서 공격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지금이라도 이걸 써야 하나?’ 물론, 쓰는 것 자체는 아깝지 않다. 아무리 ‘특상급’은 붙여야 할 효능의 아이템이라고는 한들, 어차피 ‘핏빛 성채’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특수 아이템이니까. 난쟁이놈에게 쓴다면 즉시 전력이 회복될 것이고, 뱀파이어에게 쓴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 돼.’ 나는 무의미한 고민을 끝마쳤다. 지금까지 꿋꿋이 수비만 하며 버틴 이유가 뭔가. 공격은 딱 한 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면 오히려 우리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기회는 오직 한 번뿐. 그 한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우리들 다섯 명이 5등급 몬스터를 사냥해 내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다. 딸깍. 허리춤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보며 포션을 입에 털어 넣은 순간. 치이이이익! 전투를 치르며 쌓인 무수한 숫자의 잔부상들이 치유되며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손에 힘이 쫙 빠지고,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은 기분. 역시 포션을 먹고 전투를 행하겠단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상관은 없겠지.’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전투 같은 게 아니니까. 푸욱! 이내 뱀파이어의 손톱이 복부에 박힌다. 이 정도 판금 갑옷 따위는 있으나 마나라는 듯 아주 깊숙이. “……!” 생명의 위협을 느낀 신경들이 미친듯이 통증 신호를 뇌로 전달한다. 과부하라도 걸린 듯 백지로 변하는 머릿속. ‘씨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시체골렘 정수를 먹는 건데.’ 뒤늦은 후회를 뒤로하며 추가로 포션을 한 병 더 입에 털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불사자 각인과 포션의 치유 효과가 중첩되며 빠르게 치유되는 부상. “캬악—”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흠칫하는 뱀파이어 새끼를 보며 나는 읊조렸다. 솔직히 말해. 아파서 뒈질 것만 같지만……. “베헬—라다, 개새끼야……” 고통은 나를 죽일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게 그 증거다. ***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짓을……!” 멀리 떨어진 잔해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책을 통해 여러 탐험가들의 기상천외한 전략과 사냥법들을 보아 왔지만. 그중에서도 이런 건 없었다. 그냥 포션을 먹으면서 버티겠다니? “서, 성공할 리가 없어요. 주, 죽을 거예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녀도 몇 번인가 포션을 먹어 봐서 안다. 통증은 상상을 초월하며, 부상의 정도에 따라 통증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런데 지금 저 바바리안은 어떤가? 치이이이이익! 기포가 끓으며 수증기가 나는 게 아니라, 아예 몸 위로 연기가 펄펄 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녀조차 처음으로 보았다. 이 상태라면 부상이 문제가 아니라 쇼크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 실제로 포션을 복용하다 죽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일 아닌가. “어?” 그때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지금 저 바바리안이 느끼고 있을 통증은 그녀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상태로는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야 하는 게 맞다. 근데, 대체 이건 뭐지? 까가각-! 막았다. 바닥에 쓰러진 상황에서. 이젠 고철 덩이가 된 방패로. 바바리안은 위에서 아래로 찔려져 오는 뱀파이어의 손톱을 막아 냈다. 그것도 발버둥치다 우연히 얻어걸린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까가각-! 몇 번이나 계속해서. 물론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지금도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지는 손톱에 온몸이 난자를 당하고 있다. 하지만……. 까가각! 머리나 심장 같은 최중요 급소를 노리는 공격은 귀신처럼 방패를 들이밀어 막아 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고통 속에서 정확히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몸에 남은 전투 본능이 이를 가능케 하는지는 알 수 었었다. 다만, 오래전에 읽은 문헌이 돌연 떠올랐다. 바바리안의 진가는 탁월한 육체 능력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던가? ‘왠지 그 말을 이젠 알 것 같기도…….’ “레이븐 님, 지금이라도 여기서 벗어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때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타르진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벗어난다고 말은 했지만, 실상은 이들을 버리고 도망치자는 뜻. “이대로라면 제가 레이븐 님을 지켜 드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그만큼 위험합니다.” 정말이지, 기도 차지 않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여기 있는 줄 아나?’ 그녀도 할 수 있다면 이미 그랬을 것이다. 마법사치고 마음이 유하단 소리를 많이 듣던 그녀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면의 탐험가들을 위해 목숨을 걸 만큼 순진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제정신인가요? 벗어나다니? 대체 어디로요?” 도망칠 곳은 없다. 균열에서 나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수호자’를 처치하고 포탈을 통해 나가는 것뿐. ‘…그걸 알기에 저 남자도 저렇게 필사적인 거겠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갓 성인식을 끝낸 바바리안조차 냉정히 판단을 내리고,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는데……. 마법사인 나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비요른 씨가 죽으면 끝이에요. 어떻게든 살려야 해요.” 본디 마법사란 고위력의 마법만 뒤에서 쏴재끼는 존재가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해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팀에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길을 제시하는 것 또한 마법사의 일 중 하나. “…….” 레이븐은 다시 한번 현 상황을 점검했다. 3년 차의 드워프 전사는 전투 불능. 여바바리안은 그에게 포션을 먹이며 회복을 돕고 있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지만……. 마법사인 자신은 마력이 회복 될 때까지 숨어서 대기 중이며, 그 곁을 인간 검사가 호위하고 있다. 다시 보니, 이는 꽤나 낭비적이다. “타르진, 무라드 씨에게 가 보세요.” “예?” “저는 괜찮으니까. 적어도 당신이 저기 가서 저 여자 바바리안이라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란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배낭은 여기 내려두고 가시고요.”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에 타르진은 반문조차 뱉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그녀는 그런 뒷모습도 보지 않으며 즉시 아공간 배낭에 손을 넣었다. ‘시체골렘의 정수.’ 명확하게 이미지를 연상하자마자 손에 딱하고 잡히는 시험관. ‘조금… 아니, 많이 아깝긴 하지만,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레이븐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술식을 하나씩 전개해 나갔다. 후우웅! 명중률 보조. 투사체 사정거리 보조. 궤도 자동 조정. 여기서 술식 몇 개를 더 넣으면 직접 팔을 움직일 필요도 없겠지만……. ‘마력은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이내 술식을 완성한 그녀는 있는 힘껏 손에 쥔 시험관을 던졌다. 그리고……. 쨍그랑!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간 시험관이 목표물에 닿으며 깨지며 빛을 뿜어냈다. ...「캐릭터의 영혼에 [시체골렘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고통 내성이 +70 상승합니다.」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골강도가…….」 「…….」 「…….」 . . . 「비요른 얀델」 레벨: 2 육체: 111.4 (New +45.4) / 정신: 95.3 (New +55.3) / 이능: 23 (New +13) 아이템 레벨: 218 종합 전투 지수: 284.2 (New +112.7)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New) 35화 전사 (3) 머릿속은 하얗고, 눈앞은 흐릿하다. 통증? 말할 것도 없다. 마치 온몸이 난자당한 상태에서 소금물에 절여지고 있는 듯한 기분. 당장에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지만……. ‘지랄.’ 나약한 마음을 억지로라도 집어 던진다. 기로에 섰을 때, 인간은 선택해야만 한다. 무엇을 버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푸욱! 예리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깊이 찌른다. 괜찮다. 당장 목숨에 지장이 생길 부위는 아니니. 다만, 아무리 찢어발겨도 죽지 않는 사냥감을 보며 부아가 치밀었을까. “캬아아악!” 뱀파이어 새끼의 움직임이 더욱 포악해진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여전하다. 베이고 뜯겨져 나가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방패를 들어 올려, 급소만은 어떻게든 보호하는 것. 쩌거걱! 5등급 몬스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방패가 손잡이만을 남기고 뜯겨져 나갔다.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방패 대신 팔을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그 찰나. 쨍그랑! 손톱이 아닌 무언가가 내 머리 위에 부딪쳐 깨지더니, 날카로운 파편들을 쏟아낸다. 「캐릭터의 영혼에 ‘시체골렘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순식간에 무뎌지는 통증. 「고통 내성이 +70 상승합니다.」 한계에 치달은 몸에 깃드는 새로운 활력.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안개라도 낀 듯 흐렸던 눈앞이 개인다.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은, 머리를 감싼 팔 위로 휘둘러지는 뱀파이어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이를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통째로 베여져 나가는 나 자신의 팔이 상상됐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전혀 달랐다. 서걱! 손톱은 연약한 살을 너무도 쉽게 파고들었다. 다만, 거기까지가 허락된 전부였다. 카칵! 뼈에 가로막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손톱.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골강도가 +55 상승합니다.」 「 독내성이 +12 상승합니다.」 「인지력 -5 하락합니다.」 「식욕 +9 증가합니다.」 「체중이 +21 증가합니다.」 「패시브 스킬 [산성체액]으로 인해 캐릭터의 혈액이 산성을 품습…….」 안도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시체골렘의 정수를 먹인 건가…….’ 이걸로 인해 내 육성법은 엄청난 수정을 거쳐야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보자면……. 몹시 긍정적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타닷! 뒤로 바닥을 굴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 내성의 효과 덕분일까? 통증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니, 움직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근데 수호자의 정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시체골렘의 정수를 내가 먹었으니, 그건 무효로 되는 건가?’ 문득 스쳐간 생각은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런 거야 나중에 생각해도 될 노릇일 테니. “캬아아악!” 갑자기 싱싱해진 사냥감이 신기한지, 뱀파이어 놈이 열성적으로 달려든다. 이에 내 몸도 피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후 벌어진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야 7등급 정수 하나를 먹었다고, 5등급 몬스터를 압도한다던가 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누워서 처맞던 고기 방패가, 일어서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변한 건 딱 그 정도겠지.’ 자학적인 자기 평가를 내리면서도 나는 피식 웃었다. 푸욱! 서걱! 카칵! 손톱이 살을 헤집고, 내장을 찢어낸다. 미리 입으로 삼켜 위장에 보관 중이던 포션이 전부 소화됐는지, 재생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극적이던 마법사도 이제 슬슬 자기 목숨이 위험하단 걸 깨달았는지, 재산을 쏟아붓기 시작했으니까. 쨍그랑! 유리 병 하나가 날아와 깨지더니, 그리고 내용물을 내 몸 위로 쏟아붓는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설마 상급 포션일까? 암만 봐도 금발이 먹인 포션보다 성능이 좋다. 치이이이이익! 오히려 전보다 빠르게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나는 아예 적극적으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살이 베이고, 근육이 찢기면 어떤가. 어차피 몇 초면 다 낫는데. “캬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악!!!” 뱀파이어 놈에게 밀리지 않도록 함성을 내지른 나는 초접근전을 해나갔다. 그야 선택지가 없었다. 망치는 저 멀리 떨어져 있고, 방패는 고철 뭉치가 되어 버렸으니까. “캬, 캬악?!” 그라운드 기술을 쓰는 탐험가는 만나보지 못했는지, 매미처럼 등에 매달려 목을 압박하고 있자니 놈이 크게 당황한다. 음, 당황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건가? “캬아악!” 살이 맞닿은 부분에서 연기가 솟구친다. 치이이이익! 내 피의 묻은 산성이 놈에게 닿으며 생긴 연기인지, 포션으로 내 몸이 치유되며 생긴 연기인지는 정확히 구별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상관은 없다. ‘둘 다겠지 뭐.’ 그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포션 한 병이 더 날아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역시 포션과 산성은 한 끗 차이였구나. 포션이 깨짐과 동시, 목이 졸리던 뱀파이어가 더 큰 비명을 내지르더니 너무도 손쉽게 나를 내던졌다. 여실히 느껴지는 압도적인 근력 차. 하지만……. “씨바, 별거 아니네 새끼.” 슬슬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태, 즉, 바바리안 불사신 모드라면 이 새끼를 상대로 몇 분이고 버틸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든다. “비요른! 돕겠다!” 심지어 아이나르마저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무라드는?” “그 짐꾼이 돌보고 있다!” 아이나르의 합류는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포션을 먹으며 메인 탱커 역할을 맡고, 조금 위험할 때마다 아이나르가 대검을 휘둘러 숨 돌릴 시간을 만들어 낸다. 한층 더 수월해진 전투. “캬아아악!” “아이나르! 피해라! 곧 까마귀가 날아들 거다!” 내 외침에 아이나르가 뒤로 크게 물러난 순간. 놈의 몸이 수백 마리의 까마귀로 변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한발 먼저 움직인 우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역시 비요른은 대단하다! 이게 올 줄 어떻게 알았나?” 그야 이걸 쓰기 전에 놈이 항상 한쪽 눈을 찡그리더란 말이지. 뱀파이어가 지닌 종족적 특성이라기보단, 이놈에게만 통용되는 습관 같은 느낌으로. 정말로 끝이 보이는 듯하다. “면목 없구먼! 다들 잘 버텨 주었네! 흐하하핫!” 이내 포션으로 부상을 치유한 난쟁이놈까지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심지어 운반꾼 놈마저 이끌고 온 상황. “지금부터는 나도 돕겠다.” “우리가 옆에서 자네를 보조하겠네!” 메인 탱커 역할은 자연스레 내가 계속 수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다들 몸을 사리는 느낌은 아니고. 정말 그러는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3년 차 드워프 전사가 2개월 차 바바리안에게 말했다. “위대한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자네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네! 하하핫!” 제 딴엔 칭찬으로 하는 말인 듯하지만……. ‘마지막까지 개같이 굴러야 한단 뜻이군.’ 역시 나는 그냥 꿀만 빠는 건 평생 하지 못할 팔자인 건가?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마는. “베헬—라아아아아아!” 나를 중심으로 한 진형으로 넷이서 뱀파이어 놈을 상대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사무치게 기다려 왔던 그 기점이 찾아왔다. [다 됐어요.] 만약 저 다 됐다는 말이, 마력 회복을 끝마치고 ‘흑점구’의 영창마저 끝냈으며 ‘속성 강화’까지 완료했다는 뜻이라면……. 드디어 모든 준비물이 갖춰졌단 얘기겠지. 바꿔 말하자면, 이제 이 개같이 길었던 싸움을 끝내고 밖에 나갈 때가 됐단 거겠고.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어요.] 확답이 들려온 순간, 나는 우렁차게 외쳤다. “무라드! 지금이다! ‘전격 방출’을 써라!” 약속은커녕 한 번의 언급도 없던 지시. 다만 난쟁이놈은 가타부타 하는 일 없이 즉시 내 지시를 수행했다. 지지직, 지지직! 난쟁이놈의 망치 위에 노랗게 빛이 어리더니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7등급 몬스터 일라트렉의 이능. 효능은 신체 일부분에 강한 전류가 흐르도록 해 주는 것. 그 상태로 난쟁이놈이 망치를 낮게 들었다. 마치 올려치기를 하려는 듯한 자세. “다들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걸세! 하하핫!” 짧게 경고를 뱉은 난쟁이놈이 힘껏 망치를 허공에 휘둘렀다. 목표물인 뱀파이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방출]을 시전했습니다.」 [던전 앤 스톤]에서 드문 ‘변환계’ 이능 중 하나인 ‘방출’. 효과는 다른 이능을 통해 획득한 ‘기운’을 외부로 ‘뿜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 후우우우웅! 망치에 어려있던 전류가, 구체의 형태로 대포알처럼 쏘아지더니……. 단어 그대로 폭발했다. 콰콰쾅! 소리에 비해 물리적인 위력은 낮았다.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긴다거나, 맞은 뱀파이어 놈의 사지다 뜯겨져 나간다거나, 그런 건 일절 없었으니까. 다만…….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애초에 이 콤보의 핵심은 위력이 아니다. 순식간에 5등급 몬스터를 그로기 상태로 만든 난쟁이놈을 뒤로하고, 뒤쪽에 신호를 보냈다. 아주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레이븐——!!!!” 다행히 신호는 잘 전달됐는지, 즉시 200m가량 떨어진 지붕 위에서 세찬 빛이 응집된다. 나는 서둘러 부츠에 숨겨 둔 아이템을 꺼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보석 ‘여신의 눈물’. 그 많은 위기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아끼고 아껴온 그것. 타다닷! 그것을 꼭 쥔 채 달려나갔다. 그리고 놈의 아가리에 그것을 쑤셔 박은 뒤. 퍼억! 있는 힘껏 어퍼컷을 올려쳐 닫았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머지않아 놈의 입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 나왔다. 「여신의 눈물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 위치에 [은총]이 내려집니다.」 「[은총]에 의해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모든 저항력이 일시적으로 봉인되며, 큰 피해를 입습니다.」 뱀파이어 놈의 입가로 피가 미친 듯이 줄줄 흘러나온다. 겉으론 멀쩡하지만, 안으로는 씹창이 난 모양. 새삼 놀라웠다. 역시 이거 하나로는 안 뒈지는구나. 「강한 충격으로 인해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기절] 상태가 [마비]로 조정됩니다.」 기절이 끝났는지, 움찔거리는 놈의 손가락. ‘아직인가? 더 늦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뒤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공격 마법 [흑점구]를 시전했습니다.」 마치 새카맣게 일렁이는 눈부신 구체가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콰아아앙-! 아, 씨바 진작 튈걸……. *** 「캐릭터가 [흑점구]의 폭발에 휘말려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고통분담]을 시전했습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기절] 상태에 빠집……」 *** 삐이이이이-. 애국가가 끝난 지상파 채널처럼 쨍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리고 그 이명 소리를 뚫고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TV 속 만담과도 같은 말투의 대화. [정육점에서 구운 고기를 팔면 어떡합니까!] [아니에요! 이건 생고기예요!] [아니, 구웠는데 이게 어떻게 생고기야!]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눈을 떴다. [살아 있잖아요?]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코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느껴졌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인가? “거허얽…….” 입을 열자 바짝 마른 목에서 긁는 소리가 난다. 귀도 멀쩡하구나.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하기로 했다. “커허헉! 웩!” 화火 속성과 성聖 속성이 합쳐진 태양 속성을 지닌 공격 마법 ‘흑점구’. 당연히 위력은 동급인 ‘화염구’보다 약하다. 내게 있어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아니었으면, 진짜 그 자리서 뒈졌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흑점구’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기절을 했다. 그것은 명확했지만, 현 상황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나는 왜 아직 치료가 안 됐으며, 주변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 진물이 가득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억지로 눈에 초점을 잡으며 앞을 확인했다. 일단, 뱀파이어 새끼가 보였다. “씨발.” 저게 왜 살아 있어? 물론, 저 새끼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양팔이 뜯겨져 나갔고, 파헤쳐진 가슴 상단부로는 뼈가 보일 정도. 심지어 의식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 잃은 체력 비례임을 감안하면 가슴부의 살이 아물고, 뜯겨져 나간 양팔이 다시 자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 “니, 미…….” 주변을 보니 쓰러진 이들이 여럿 보인다. 난쟁이놈, 아이나르, 운반꾼 새끼. 왠지 저 멀리 지붕 위의 마법사도 똑같은 상황일 듯한데……. 혼란스럽다. 이게 뭔 지랄맞은 경우지? 다 잡아 놓고 왜 다들 기절해 있어? 정신을 잃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아하니 얼마 지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온갖 의문이 샘솟지만……. 나는 전부 집어 치우기로 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발을 내디뎠다. 터벅. 여전히 상황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너무도 명확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터벅.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마법사가 부자여도 포션이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상 아까처럼 포션으로 버티는 전략은 이제 못 쓴다 보는 편이 옳겠지. 터벅. 그래서 비틀비틀거리면서도 걸었다. 고통 내성마저 뚫는 통증? 못 느낀 척 무시하며 스테이크 냄새가 나는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터벅. 고통이란, 살라는 신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반대로 생각했던 시절도 없던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터벅. 가까이 오니 이 뱀파이어 새끼한테서도 구운 고기 냄새가 났다. 나는 무릎에 힘을 풀며 쓰러지듯 놈의 위에 올라탔다. “개, 조가트, 새끼…….” 뼈가 보일 정도던 가슴의 상처는 걸어오는 동안에 벌써 살이 꽤나 올라온 상태. 도무지 욕을 안 하곤 배길 수가 없다. 퍽! 그래서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내리쳤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심장이니까. 이 새끼들은 뇌가 부서져도 심장만 멀쩡하면 되살아날 수 있다. ‘아, 이 새끼 팔이 뜯겨져 나간 게 그래서구나. 팔로 ‘흑점구’를 막아서?’ 뒤늦게 내가 보지 못한 찰나의 상황이 그려지지만, 늘 그렇듯 그냥 흘려보냈다. 퍼억! 주먹을 또다시 내리친다. 어느 때보다 장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 삼켜야 하는 법. 퍼억! 메이스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방패는 진작에 폐기물이 되어 주변에 아무렇게나 투기했다. 물론 아이나르의 대검이나 난쟁이놈의 전투 망치가 바닥에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걸 주워 올 생각은 못 했네.’ 어차피 주울 힘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주먹을 내리치던 도중, 구겨지고 구멍 뚫린 하프 아머의 이음새가 뜯겨져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 36만 스톤…….’ 산성 피에 점칠 돼 여기저기 부식된 하프 아머를 보고 있자니 수리도 힘들 듯하다. 정말로 멘탈을 건드는 건 다른 부분이겠지만. “씨부랄.” 이건 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아무리 내리쳐도 변하는 게 없다. 갈비뼈가 뭐 이리 튼튼해? 계속 두들기다 보면 부러지면서 심장을 찌르지 않을까 했는데. ‘좋아, 이 계획은 포기하지 뭐.’ 나는 항상 플랜 B를 세우는 걸 좋아한다. 왜냐면 A가 성공해 본 적이 거의 없거든. 팔자가 기구해서 그런지, 뭘 하던 항상 마지막에 개같은 일이 터졌다. ‘그나저나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되나? 에르웬은 정확히 이미징하는 게 중요하다던데. ‘살점폭발.’ 음, 진짜 되네. 퍼엉! 놈의 가슴부에 올려둔 손이 폭발한다. 폭발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살점과 피에 섞여진 산성 물질로 인해 놈의 가슴부가 조금 파였다. 그마저도 빠르게 재생됐지만……. ‘어차피 한 번으로 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 연이어 [살점폭발]을 시전했다. 그렇게 한 열 번을 썼을 때일까? 퍼엉! 퍼엉! 퍼엉! 왼손이 아예 씹창이 났다. 골강도가 상승했기 때문인지 뼈대는 멀쩡하고 살점만 사라진 것이, 무슨 스켈레톤이라도 된 거 같다. 아무튼 이제 왼손은 못 쓰겠군. ‘그럼 이제 오른손 차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오른손을 놈의 가슴 부에 올린 뒤. ‘살점폭발, 살점폭발, 살점폭발…….’ 계속해서 터트렸다. 한도를 모르고 고점을 돌파하는 통증은 최대한 외면했다. 죽을 거 같지만, 죽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다. 퍼엉! 그렇게 한 8번쯤을 썼을까. 몸이 휘청였다. 딱 몇 번만 더하면 될 거 같지만…….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1% 미만입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캐릭터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정신력 따위로는 버틸 수 없는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이.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뱀파이어 새끼를 죽이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나 또한 죽게 된다. 그런 직감이 드는 한편, 이성은 판단했다. ‘어차피 그만둬도 죽는 게 똑같다면…….’ 멈춰선 안 된다.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겠다거나 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다. 퍼엉! 누군가에겐 이런 내가 미친 새끼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찰나의 순간 나는 확신했다. 오히려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이 길이 틀림없다고. 퍼엉! 한 번 더 살점을 터트린 순간.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0%에 도달했습니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온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그런 기분이라 해야 하나? 머지않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아, 이게 그거구나. 내가 회광반조回光返照라 불렀던 그거.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3/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0/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37/46)」 마치 사신이 등 뒤에 맞닿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나는 재차 살점을 터트렸다. 퍼엉! 한 번 더 놈의 가슴부가 움푹 패였다. 근데 이게 바바리안이 지닌 전투적 직감일까? 왠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이면 된다. 그러니까……. ‘살점폭발.’ 이제 살점이 거의 남지 않은 오른팔 대신, 내 가슴을 놈에게 딱 붙인 채, 한 번 더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와 동시.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뱀파이어 새끼의 몸이 빛의 입자로 화한다. 그래, 너도 죽기는 하는구나.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가슴이 벅차올랐다. 심리적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일전에 경험해 봤기에 나는 정확하게 현재 내 상황을 파악했다.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1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올랐다. 딱히 기쁘진 않았다. 그럴 때가 됐을뿐더러……. [던전 앤 스톤]은 레벨이 오른다고 피가 차는 그런 게임이 아니니까.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6/46)」 과연 내 목숨은 몇 초나 남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길어 봤자 5초 남짓일 것이다. ‘…결국 마지막은 운에 맡겨야 되는 건가.’ 역시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인게임에서 수호자가 균열에서 정수를 뱉을 확률은 약 33퍼센트.’ 33%.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도 낮은 가능성. 하지만, 0%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가능성. ‘다시 생각해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 미련을 털어내듯 나는 씨익 웃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쳤다. 그러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3/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0/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르며 점점 눈이 감긴다. ‘실패한 건가…….’ 실수로 인한 실패는 아니다. 단지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어쩌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흐름에 맡기듯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29세 회사원 이한수로 돌아가 있길 바라며. “킥.”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캐릭터의 영혼에 [뱀파이어의 정수-수호자]가 스며듭니다.」 「자연재생이 +45 상승합니다.」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5 상승합니다.」 「항마력이 +30 상승…….」 ...「패시브 스킬 [어둠의 근원]으로 인해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습니다.」 「캐릭터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1% 이상 회복됐습니다.」 「카운트다운을 종료합니다.」 「업적 달성」 조건: 카운트다운 후 생존.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비요른 얀델」 레벨: 3 (New +1) 육체: 199.1 (New +87.7) / 정신: 105.3 (New +10) / 이능: 152.4 (New +129.4) 아이템 레벨: 114 (New -104) 종합 전투 지수: 485.3 (New +201.1)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New) . . .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입니다.」 「관리자가 해당 캐릭터를 주시합니다.」 36화 길드 (1) “이봐요! 얀델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레이븐이 비요른의 어깨를 흔들던 차. 기절해 있던 동료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레이븐 양? 대체 이게 무슨 일…….” “비요른! 비요른이 죽은 건가?!” “아가씨! 무사하셔서 다행…….” 곳곳에서 피어나는 의문들. 답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레이븐뿐이었다. 그야, 그녀는 기절하지 않았으니까. “뱀파이어는 죽었어요. 얀델 씨는 살아계시고요. 타르진,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자꾸 소리치지 말아 줄래요?” “대단하군! 마법 한 방에 뱀파이어를 처치하다니!” 무라드의 감탄사를 들으며 그녀는 입술을 짓물었다. 왠지 모르게 분했다. 뱀파이어를 처치한 건 ‘흑점구’가 아니었다. 기여도로 따지면 그녀의 공로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제가 아니라 얀델 씨예요.” “무슨 뜻인가?” “뱀파이어를 처치한 건 얀델 씨라고요.” 무라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이 친구가?” 일전에 그를 보며 ‘특별’이니 ‘위대한 전사’니 뭐니 하며 추켜세우긴 했지만, 5등급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는 모양. 그 심정을 그녀라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다면… 아마 저도 마찬가지였겠죠.’ 먼 거리에 떨어진 덕분일까? ‘고통분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전말을 홀로 지켜보았다. 그래, 말 그대로. 지켜만 보았다. 마력이 바닥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었겠는가? “다들 얀델 씨한테 감사해하세요. 아마 이분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살아서 눈을 뜰 수 없었을 테니까.” “그, 그건 그러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소상히 말해 줄 순 없겠는가?” 그것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 싶던 차, 때마침 아이나르가 대화에 껴들었다. “그렇다면 비요른은 어떻게 된 건가! 어서 포션을 먹여야 하는 거 아닌가?” 즉, 포션이 있으면 달라는 뜻. 레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포션은… 의미가 없을 거예요. 보아하니 이미 몸은 대부분 회복된 거 같거든요.” 감히 예상해 보자면, 이 남자가 포션을 먹을 일은 앞으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지간한 부상은 금방 나아 버릴 테니까. “그럼 왜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건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그게 뭔가? 마법사! 어서 말해라!” 레이븐이 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아마… 탈진일 거예요.” “…탈진? 아까 몸은 전부 나았다고 했지 않나!” 아이나르가 흙과 꾸덕한 피로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표정. “뭐, 둘이 진짜 연인이라도 되는 거예요?” “아, 아, 아니! 갑자기 그게 왜 그렇게 되나!” “후, 아무튼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내가 무슨 사제도 아니고. 단지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몇 가지 알 뿐이죠.” “사례라니? 레이븐 양, 이런 일이 흔하다는 건가?” “흔한 건 아니지만… 간혹 있어요. 몸은 나았지만, 정신이 회복되지 못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요.”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말이지 모든 걸 쏟아부은 전투를 마친 전사들이 간혹 이런 상태에 빠진다. 이를 설명하자 아이나르가 목소리를 키웠다. “그런 건 들어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더더욱 말이 안 되지 않나!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라니? 비요른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나약하지 않다라……. 그 말엔 그녀도 극구 동의하는 바였다. 몇 시간 전이었으면 속으로 코웃음치며 넘어갔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도 그럴 게, 그녀만은 그가 뱀파이어를 상대로 투쟁하던 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았으니까.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생각이 굳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얀델 씨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가 정신적 탈진 때문이라고.” 지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이는 정신이 나약하고, 고강하고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러는 게 당연한 싸움이었다. ‘아마 그걸 직접 봤으면 이 여자도 내게 이런 말을 하지 못했겠지.’ 어쩌면 오늘, 자신은 엄청나게 귀중한 장면을 목도한 것일지 모른다. “마법사! 그럼 비요른은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것인가!” “글쎄요. 빠르면 하루, 늦으면 이틀 정도 걸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몇 시간이면 일어나겠군!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니까!”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레이븐의 심기가 또 한 번 불편해졌지만, 왠지 쏘아붙이거나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확히 그럴 기력이 없었다는 것에 가깝다. 사실 예전처럼 허황되게만 들리지도 않았고. “위대한 전사라…….” 무구한 역사 속에서, 공식적으로 왕에게 그 칭호를 받은 바바리안은 열 명이 채 안 된다. ‘뭐, 요즘 바바리안들 사이에서는 그냥 찬사처럼 쓰이는 모양이지만요.’ 그녀는 말을 잇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시체골렘의 정수와 뱀파이어의 정수. 그것도 수호자의 것을 먹은 바바리안. 성인식을 마친 게 지난달로, 이번이 두 번째로 미궁에 들어온 것이라던가? 세상 모른 채 잠든 바바리안을 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그렇게 되려면, 오늘 같은 위기를 수십 번 더 겪고서도 살아남아야 하겠지만. *** ‘살아남은 건가…….’ 눈을 떴을 때,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왜인지 아이나르가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요른!!!’하고 소리를 지르며 잠이 확 달아나도록 했다. “…다른 이들은 어딨지?” “전부 떠났다! 그보다 비요른, 너는 괜찮은 건가? 꼬박 사흘 동안 기절해 있어서 걱정을 했다!” 사흘이나 지났다고? 그럼 시간으로 치면 지금이 7일 차인 셈인가?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일단 현 상태를 확인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다. 배가 고픈 걸 제하면 건강 면에서는 대체로 양호하다. “그나저나 아이나르, 내가 입고 있는 이 바지는 뭐지?” 사실, 바지란 말도 순화한 것이다. 손수건에 쓸 법한 천때기가 내 하체에 빙 둘러져 중요 부위만을 가려 주고 있다. 정확히 분류하자면 바지보다 치마에 가깝겠지. 그것도 미니멀 사이즈의. “아! 그거라면 그 마법사가 남는 천을 준 것이다.” “…그, 그럼 네가 입힌 것인가?” “물론이다!” 왠지 수치심이 밀려들었지만, 아이나르가 별 내색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덜했다. 하긴, 전사들끼리 이런 부분에서 데면데면하는 것도 조금 웃기긴 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역시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더군!” 음, 그렇다고 성희롱을 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후로는 어떻게 된 거지?” 수치심을 잊으려 화제를 돌렸다. 내가 정신을 잃은 다음에 있었던 모든 일이 궁금했다. 특히 전리품과 관련해서 더욱더. “넘버스 아이템? 그건 무라드가 가져갔고, 균열석은 마법사가 챙겨갔다.” “뭐?” 시작부터 놀람의 연속이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건 놈의 정수를 흡수했다는 뜻일 테니… 이는 즉, 뱀파이어가 드랍템 세 개를 전부 떨궜다는 것 아닌가? 무슨 이런 축방이 다 있지? “아, 맞다! 균열석을 배분할 때 주사위를 굴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법사가 말하길 이거라도 챙겨가 손해를 메꿔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 탓에…….” 아이나르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무라드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법사가 이상한 말을 했다.” “이상한 말?” “어차피 비요른 너는 가장 큰 걸 얻어 갔으니, 자기가 균열석을 갖고 가는 걸로 뭐라 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듣자 하니 내가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은 건 그 여자만 알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 전리품 분배에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마법사는 시체골렘의 정수를 내게 먹였다. 추가로 내게 쏟아부은 포션 값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마법사는 거의 손해만 보고 간 셈. 거기서 균열석까지 욕심내면 그냥 도둑놈이다. 아이나르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 그래도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결정하자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한나절을 넘게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자 다들 저기 포탈을 타고 떠나 버렸다!!” “네가 자책할 필요 없다. 어쩔 수 없던 일 아닌가?” 솔직히 말해, 아이나르의 억지에 한나절 동안 잡혀 있던 이들의 표정이 상상 갈 정도지만……. 여기선 그냥 칭찬해 주는 편이 좋겠지. “고맙다. 네가 있어서 든든하군.” “…다, 당연한 일이다! 우린 동료 아닌가!” 나는 아이나르가 모아둔 것으로 추정되는 내 짐을 확인했다. 배낭, 메이스, 과거 나의 방패였을 고철 덩어리 몇 조각……. ‘그래도 가져다 팔면 철 값은 나오겠지.’ 일단 보이는 대로 전부 배낭에 챙겨 넣은 뒤, 식량과 수통을 꺼내 간단하게 주린 배를 채웠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20분. ‘층계가 닫히려면 1시간도 안 남은 셈이군.’ “비요른! 식사를 끝냈으면 어서 나가는 게 어떤가? 이제 시간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럴 수 없다.” 나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당장에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만큼 고생을 했는데,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보스 방도 한번 조사해 보고 싶고. ‘네크로노미콘은 마법사가 가져갔으니, 남은 건 한 개인가.’ 아무래도 서둘러서 움직여야 할 듯하다.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간만에 피부로 햇살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인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빠듯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외성벽 망루 천장에 숨겨진 아이템을 찾는 건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보스 룸까지 다녀오는 게 빡셌다. ‘…결국 헛걸음이었지만.’ 한나절 동안 기다려줬다더니, 사실은 마법사가 조사를 하는 시간을 의미했을까? ‘하긴 그 여자 성격에 그냥 지나쳐 나갔다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이곳저곳이 부서진 벽면. 뜯겨져 나간 액자. 열린 채 방치되어 있던 처음 보는 형태의 상자까지. ‘분명 뭔가 추가 보상이 있던 거 같은데, 그건 혼자 꿀꺽 삼켰다 이거지…….’ 전력으로 내달려 도착한 보스 룸에는 이미 한바탕 조사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먹튀를 당했다는 분노보다는, 그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마음이 컸다. 그도 그럴 게, 단 한 번도 클리어되지 않은 변종 균열 아닌가. 9년간 플레이를 해 온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요소라니?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이 무럭무럭 싹튼다. ‘달라고 한다고 줄 리는 없으니… 그냥 나중에 만나면 은근슬쩍 물어보든가 해야지.’ 아무튼 혹시 마법사가 놓치고 지나간 게 있을까 싶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더니, 시간이 굉장히 빠듯해졌다. 사실상 균열을 빠져나오자마자 층계가 닫혔으니 사실 아슬아슬했다는 말조차 모자랄 지경. 자칫했으면 보스 몹까지 잡아놓고 영영 그곳에 갇힐 뻔했다. “케닉의 넷째 아들 세룸! 흉터가 늘었군! 부럽다!” “별거 아니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 짧게 생각을 정리하던 차, 바바리안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다행히 아직 나는 발견치 못한 모양. 나는 눈에 띄지 않도록 허리를 숙이며 9등급 탐험가 전용 환전소로 향했다. 다행히 일찍 도착했는지 줄은 길지 않았다. 귀찮게 하는 바바리안들도 없었고. 마석을 건네자 공무원이 지난번처럼 기계같이 화폐로 바꿔 주었다. “231,520스톤입니다.” 23만 스톤. 내가 한 고생들에 비하면 한없이 적게 느껴지는 액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니까.’ 이번 탐사에서 두 개의 정수를 흡수했다. 게다가 현물들까지 처분하고 나면 마석의 몇 배는 될 수익을 올릴 터. ‘어찌 된 게 항상 마석은 주가 아니라 부가 되어 버리는군.’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씁쓸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집어 들려던 차였다. “9등급 탐험가라기엔 너무 많은 액수군요.” 공무원이 내려놓았던 주머니를 도로 가져가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등에 멘 배낭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뭐가 있냐고? 딱히 대답해 주지 못할 건 없지만……. “…그건 왜 묻지?” 왠지 뒷덜미가 서늘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 멀리서 경비병들이 빠르게 이쪽을 향해오고 있다. 은행 데스크 밑에 숨겨져 있다던 비상 호출 버튼 같은 거라도 누른 모양. “이자입니까?” “예.” 팔을 들어 공권력에 협조하겠단 의사를 표했으나, 공무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경비병들은 강압적으로 내 양팔을 포박했다. 씨바, 겨우 살아서 돌아왔더니 이건 또 뭘까. “바바리안, 잠시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하지.” 본능적으로, 뭔가 좆됐다는 게 느껴졌다. 37화 길드 (2) 의자에 앉아 있다. 특이하게도 팔과 다리 부분에 철제로 제작된 구속구가 옵션으로 달려있으며, 바닥은 아예 못으로 고정된 의자. ‘인간적으로 쉴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상황을 더 정리하자면,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탐험가 길드 지하에 위치한 취조실. 건너편에는 조사관이 앉아 있다.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특징으로는 고도 비만에 고압적인 말투를 쓴다는 것 정도. “이번 사건 조사를 맡은 콜도 비르만이다. 앞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할 텐데 협조적인 자세로 조사에 응해 주면 좋겠군.” “조사라니? 그전에 날 왜 잡아 왔는지부터 말해 주는 게 먼저 아닌가?” 나는 기죽지 않고 물었다. 무죄추정의 원칙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이 정도는 이 시대의 피고인으로서도 합당한 권리일— 퍼억-! 조사관 새끼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얼굴을 보니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능글맞게 쪼개고 있다. “규칙 하나,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면 된다. 알겠나?” “…알겠다.” “훗, 규칙만 잘 따른다면 아픈 일은 없을 테니, 그 부분은 안심해도 좋다.” 아프긴 개뿔. 미궁에서 그 지랄을 떨고 왔는데, 정강이 한 대 처맞았다고 간지럽기나 하겠냐? 이 새끼는 자기 직업에 뭔가 환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질문에 답해 주자면… 비요른 얀델. 너는 미궁 내 약탈 혐의로 이곳에 잡혀 왔다.” “…약탈 혐의?” 이건 또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일까 싶던 차. 조사관 새끼가 내 배낭을 거꾸로 집어 들고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휘유, 많기도 하군.” 횃불이나 침낭 같은 탐험 용품. 핏빛 성채에서 획득한 특수 아이템. 그 외 식량과 여러 잡동사니 중에서 조사관은 장비들만을 족족 꺼내 탁상에 올렸다. 대부분 망자의 땅에서 우리 뒤통수를 쳤던 4인 파티의 물건들. “네가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건 어디서 났지? 바바리안이 활을 쓰진 않을 텐데.” “그건… 날 먼저 죽이려던 놈들의 것이다.” “증거는?” 증거? 그런 게 있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를 취할 이유는 없다. 나는 반대로 물었다. “그럼 내 말이 진실이 아니란 증거는 있나?” “글쎄, 그건 지금부터 조사해 봐야겠지.” “고작 이것만으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조사를 한다고?” 현재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이건, 평소 탐험가 길드의 방식과는 다르다. 미궁 내에서 탐험가들이 뭘 갖고 나오던 증거 없인 무엇도 묻지 않는 것이 이 도시의 불문율. 따라서 길드도 신고나 증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결코 먼저 약탈자 색출을 하는 법이 없었다. 다만……. “며칠 전에 길드 내부 규정이 바뀌었다.” 이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겠지. 여긴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이니까. “약탈 행위를 억제할 수 있도록, 우선 9등급 탐험가들부터 적용하라는 게 공식 지침이다.” 한마디로 만만한 놈들부터 시범 운용을 해 보겠다는 뜻. 어딜 가나 신분이 낮으면 고생을 하는구나. 조사 대상이 되는 기준도 대강 예상이 갔다. 마석을 많이 모아왔던가, 배낭에 타인의 것으로 보이는 장비가 있다던가. 그런 거였겠지. 그럼 난 시작부터 투 스트라이크였던 셈인가? “자, 그럼 말해 봐라. 이 물건을 어디서 손에 넣었지?” 아무튼 처음의 그 태도는 단지 내 기를 죽이기 위함이었는지, 이후 조사관 새끼는 평범하게 조사를 이어갔다. 따라서 나도 최대한 협조적으로 당시 있던 일들을 얘기해 나갔다. 아, 물론 사이코패스 년 얘기는 뺐다. 그 얘기를 하려면 맹세에 관해서도 말해야 하는데, 맹세를 어긴 바바리안은 어딜 가나 이상하게만 보일 테니까. 살인 누명보다 악령으로 몰리는 쪽이 훨씬 위험하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는 부분에서 특히나 더. ‘괜히 신고했다가 그 여자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뒈질 수도 있고.’ 따라서 4인조의 약탈자 무리를 만난 일, ‘진압’ 상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놈들을 해치운 일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진술했다. 허나 조사관 새끼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뭐? 목이 찔리고도 살아남아? 어린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하는군.” “난 진실만을 말했다.” “그럼 목의 그 흉터는 어디 있지? 네 말대로라면 자국이 남았어야 할 텐데?” 나는 저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오돌토돌한 부분 없이 매끈했다. 이유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뱀파이어 정수를 먹고서 자연 재생력이 너무 높아져 흉터까지 치료되어 버린 것이다. ‘…왜 또 이렇게 일이 꼬이지?’ 내키진 않지만 결국 균열에 관한 얘기도 해야만 했다. 단 문제는, 조사관 새끼가 내 얘기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단 것. “푸하핫! 균열? 뱀파이어가 나와? 바바리안이라 그런지 말에 논리가 하나도 없군!” “맹세컨대 내 말은 모두 사실이다.” 아예 심증을 굳혔는지, 치트키처럼 매번 통하던 전사의 맹세조차 이번엔 소용없었다. “약탈자 짓이나 하는 놈에게 무슨 명예가 있다고?” 이쯤 되자 나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를 불러라! 마법을 통해 검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이렇게 길게 대화할 일도 없었다. 그냥 마법 한 방이면 진위가 가려지니까. 다만 조사관 새끼는 같잖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길드에 정식으로 검증 요청을 할 수 있는 건 7등급 이상부터다.” 제기랄, 이건 또 언제 변했대? 9등급 탐험가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구나. “내가 그 요금을 지불한다고 해도?” “네가 죽으면 국가에 환수될 돈이다. 의미 없는 곳에 낭비할 수는 없다.” 지랄, 삥땅칠 돈이 적어지니까 그런 거겠지. “자, 순순히 범죄를 인정해라.” 아무래도 무고를 증명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 15일간 이어진 미궁 생활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듯,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몸을 감싼다. 에르웬은 그 따스함을 즐기듯 잠시 서 있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 때문인지, 그간 있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3층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언니와 함께 진입한 3층. 생전 처음 겪어본 7등급 몬스터들의 강함. 비록 거의 언니 혼자 싸우긴 했지만, 마지막에 우연히 맞붙었던 6등급 몬스터까지. 정말이지, 처음으로 탐험 같은 탐험을 했단 느낌이 드는 여정이었다. 아저씨랑 함께했던 첫 번째 미궁 탐사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땐 살아남느라 급급해서 워낙 경황이 없었으니까. ‘아저씨한테 말해 주면 엄청 놀라시겠지?’ 어서 달려가 미궁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아저씨는 어땠느냐며 묻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지쳤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새로운 정수를 얻은 걸 말하면 또 저번처럼 그러시려나……?’ 그건 좀 걱정되지만……. 왜인지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볍다. 에르웬은 단걸음에 9등급 탐험가를 대상으로 한 환전소로 향했다. ‘이번엔 엇갈린 건가? 아저씨는 안 보이시네…….’ “184,100스톤입니다.” “우와아…….” “9등급 탐험가라기엔 상당히 많은 액수군요?” “언니랑 함께 다녔거든요!” “그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리아 위트엠버 디 테르시아요.” “네, 확인되었습니다. 가셔도 좋습니다.” 마석을 교환하고, 밖에서 언니와 만나 여관에 짐을 풀고, 세 시간에 걸쳐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곧장 비요른의 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매일 오던 그 요정 아가씨구먼. 근데 이걸 어쩌나? 302호라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으음, 그래요?” 비요른은 여관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보아하니 방값도 미리 지불되어 있고, 방 안에 다른 짐들도 남아 있는 모양인데……. “계속 기다리려는 건가?” “네! 금방 돌아오시겠죠!” “쯧.” 평소 친절했던 여관 주인은 왜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로 혀를 찼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졌다. 그것도 몇 시간 전에. “저기요, 왜 멋대로 아저씨 방에서 짐을 빼시는 거예요?” “거, 귀찮게. 이봐 아가씨, 서류라도 있나?” “서, 서류요?” “그 있지 않나. 아가씨가 그 바바리안이랑 동료라거나, 유품을 건네주기로 했다던가 하는 증서라던가 그런 거.” “그런 건 없는데… 아니! 그보다 유품이라니요!” “그럼 미궁이 닫히고 이만큼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돌아온 이유가 뭐겠나? 죽은 게지, 미궁 안에서!” 이를 끝으로 여관 주인은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내쫓았다. 에르웬은 시무룩하게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죽었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미궁 속에서 탐험가가 죽는 게 일상다반사라지만, 그가 죽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렇게 아침이 되고, 밤이 되고, 또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찾았잖니.” 그녀의 언니가 찾아왔다. 언니는 이틀이나 외박한 것에 대해 혼을 내지도, 달리 어떠한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에르웬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과 이것이 전혀 연관이 없단 것도 알지만. “언니, 나 강해지고 싶어.”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 두꺼운 철창 안에 갇혀 있다. 짐이란 짐은 전부 빼앗겨, 허리 아래로 돌돌 말아 묶은 천 쪼가리 하나만을 입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에 기대 서 있는 중이다. 그것도 이틀째. ‘씨바…….’ 첫날 이후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달았다. 내 거듭된 부정과 검증 요청에 조사관도 어쩔 수 없이 마법사를 불러주었지만……. 「캐릭터의 정신 수치가 90 이상입니다.」 「항마력 보정으로 정신류 마법에 저항합니다.」 길드 직원으로 일하는 9등급 마법사의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정신 방벽이 너무 두텁습니다. 아무래도 마탑의 마법사를 불러야 할 듯하군요.”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길드 입장에서도 내 사건을 종결하려면 고등급 마법사의 조력이 불가피한 상황. “고작 9등급 탐험가 사건으로 그분들을 부르기엔 수지가 맞지 않는군.” 그때부터 조사관은 내 자백을 얻기 위해 온갖 개지랄을 떨어댔다. 이게 훨씬 쉬운 길이라 생각한 거다. 하지만 내가 이깟 새끼에게 겁 먹어 거짓 자백을 할 리는 만무. 6등급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이나, 난쟁이놈의 이름을 대보기도 했지만 이 답답한 조사관 새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이 길어지던 차였다. “하하하! 비요른 얀델, 보아하니 약탈 행위를 저지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더군?” 이전 조사들과는 무관한, 아예 새로운 혐의가 씌워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놈과 관련해 조사하던 중 이게 발견됐단 말이지.” 조사관이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메시지 스톤이었다. “메시지 스톤에는 고유 번호가 있어 소유자가 기록되지. 그래서 네놈 배낭에 있던 걸 조회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죽은 탐험가의 것이더군.” 참고로 소유자의 이름은 아르토아 세르딘. “가입된 클랜이 있기에 문의를 해 봤더니, 네놈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낱낱이 증언해 주더군. 하츠 영이라는 자에게 상해를 입히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추적하던 이를 살해했다지?” 이 새끼는 자기가 추리물의 주인공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쓸데없이 말이 길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거두절미하고 본론만을 물었다. 여기서 뭔 말을 하던, 날 처리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 이 새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정황과 증언, 증거까지 나온 상황이기에 본 길드에서는 네놈의 검증 요청을 거절하고 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본 길드에서는 개뿔. 그냥 네가 내 요청을 거절한 거겠지. “…그래서 내가 받게 되는 형은?” “이상한 말을 하는군. 라프도니아 왕실 법은 단 한 번도 약탈자에게 관용을 베푼 적이 없다. 아, 바바리안한테는 너무 어려운 말이려나?” 조사관 새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형이란 뜻이다.” 여기까지가 바로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 참고로 오늘 아침에는 간수가 다녀가더니 내 사형 일자를 알려 주며,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고 묻고 갔다. 순간 실감이 확 났다. “…….” 가만있으면 뒈지게 생겼다. 그 말인즉, 가만 있어선 안 된다는 뜻. 이미 대화로 해결할 단계는 진작에 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철창을 부수고 나가봤자 탈옥한 약탈자밖에 되지 않을 터. ‘어찌 도시로 도망칠 수는 있어도 금방 수배범으로 전락하겠지.’ 잠시 고민해 봤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내 무죄를 증명하는 것. 물론 쉽진 않을 터였다. 나무를 보면 숲을 알 수 있다고, 한낱 조사관 새끼조차 이처럼 말이 안 통하는데, 다른 놈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죄가 있건 없건, 탐험가 길드 쪽에선 내가 사라져 주는 쪽이 더 쉽고 조용한 길이라 판단하겠지.’ 그런 전제를 깔아 두고 계획을 세우니 어느 정도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탐험가 길드가 나를 입막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그 방법에 대해서도 떠오르는 게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나게 귀찮은 일들을 겪어야 하겠지만……. 까드득-. 조사관의 면상을 떠올리며 나는 의욕을 끌어올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줄 줄 아는 되바라진 아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목숨 하나만 건지는 걸론 수지가 안 맞아.’ 기필코 이번 일의 대가는 받아낼 것이다. 「캐릭터가 [살점폭발]을 시전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톡톡히. 38화 길드 (3) [살점폭발] 캐릭터의 생명력을 코스트로 삼는 정신 나간 몇 없는 스킬들 중 하나.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전이라 그런지, 고통 내성을 뚫고서 통증이 피어났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치이이이익! 폭발과 함께 튄 피에 반쯤 녹아내린 창살. 옆으로 힘을 주자 창살은 쉽게 구부려졌다. “끄흐흐…….” 통증과는 별개로, 양손은 빠르게 아물었다. 불사자 각인만의 효과는 아니고, 이번에 얻은 뱀파이어의 정수 덕분이다. 이내 복도로 나가자마자 간수가 보였다. “뭐, 뭐야! 네놈은!” 아까 전에 특식을 묻고 갔던 그 간수. 뭔가 터지는 소리를 듣고 곧장 달려온 모양인데……. “히익! 타, 탈옥수! 탈옥수다!”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즉시 앞으로 대쉬해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맥없이 쓰러지는 간수. 신속하게 품을 뒤져 열쇠를 꺼내자, 철창 속에서 흥미롭게 상황을 관전하던 다른 죄수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대강 눈치를 챈 것이다. “어이! 바바리안! 진짜 하는 거냐고!” “키히히히! 생각보다 더 미친 새끼잖아!!” “나도! 나도 데려가!” 이곳이 탐험가 길드 아래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대부분 약탈자들일 터였다. 하지만…….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겠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불쌍한 바바리안은 그딴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전부 얼마 못 가 뒈질 테고.’ 착한 약탈자가 있다면, 그건 죽은 약탈자뿐.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며칠 차 만에 생긴 이 신념은 아마 평생토록 굳건할 것이다. “흐하하하! 자유다! 자유!” “밖으로 가자!!” 나는 같은 층에 있던 죄수들을 전부 풀어 줬다. 통제할 수 있는 새끼들이 아니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까. “와아아아아!!” 이후로는 딱히 내가 뭘 할 필요도 없었다. 광기가 전염되듯, 죄수들은 알아서 단결하며 위층으로 향하더니 간수를 제압했고, 획득한 열쇠로 더 많은 죄수를 석방시켰다. 물론 기껏 문을 열어 줘도 탈옥에 가담치 않는 자들도 꽤 있었다. 비율로 따지면 한 50% 정도.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라던가, 정말 나처럼 무고했다던가 하는 놈들이겠지.’ 혼란의 틈바구니 사이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자니, 한 지점 앞에 죄수들이 모인 게 보였다. 지난 이틀간, 수도 없이 들락날락한 취조실. 상황은 아주 심플했다. “어서 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해!! 지, 지금 돌아가면 없던 일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오들오들 떠는 간수들과 그 문을 뜯어내려는 죄수들. “위로 올라가려면 저놈들이 가진 열쇠가 필요하다!” “뜯어내!” 다만, 암만 흔들어 재껴도 저 두꺼운 철문이 뜯어질 것 같지는 않다. 후, 결국 또 그 지랄을 떨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전부 사형이다! 사형!!” 문 너머에서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그마한 창살 너머를 확인해 보니, 두 명의 간수들 사이에 낀 예의 조사관 새끼가 보였다. 이렇게 일찍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전부 비켜라!!” 기쁜 마음으로 죄수들을 밀치며 다가갔다. 그리고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왼팔을 연달아 터트렸다. ‘살점폭발, 살점폭발, 살점폭발…….’ 한 다섯 번쯤 반복하자 손잡이 부분이 녹아내리며 잠금장치가 무력화됐다. 오로지 내 살과 피, 고통으로 이뤄 낸 결과물. 죄수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아아!!” “바바리안! 바바리안!! 바바리안!!!” “그는 자유의 바바리안이다!!” 이후 취조실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조사관. “너, 너는! 대, 대체… 어, 어떻게……!” 하기야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 9등급 탐험가가 가진 이능이라 해 봐야 보잘것없는 게 대부분이니까. 창살 외에 별다른 구속구를 채우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고. 설마 이런 능력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어. 내가 해 줄 말은 이것뿐이다. “상상력이 부족하게 자랄 수밖에 없던 네 불우한 가정환경을 탓해라.” “나, 나는 멀쩡한 가정에서 자랐다!!” “거짓말까지 하다니, 아주 질이 나쁘군.” “뭐, 뭣! 커헉!” 참아왔던 분노를 담아 명치를 후려치자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조사관. 두껍게 쌓인 지방층이 충격을 흡수해 줬는지 의식은 멀쩡했다. “미, 미친놈…!” 이 가정 교육을 못 받은 돼지 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내게 온갖 악담을 퍼부어 댔다. “너는 죽은 목숨이다! 감옥 내에서 이능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걸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감당? “그건 이제 네가 생각해 볼 문제 같은데. 내 계획이 성공하기만 하면, 넌 좆될 거거든.” “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을 것 같냐!”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뭘 할 수 있냐고?” 심지어 그 질문조차도 글러 먹었다. “뭘 할 수 없느냐고 물어봐야지.” 나는 내 목숨이 달려 있다면, 그 어떤 미친 짓이든 할 수 있는 새끼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빈약한 이놈에게는 조금 안 된 일이 되겠지만— “그러니까 일단 자고 있어.” 눈을 떴을 땐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지옥에 가 있을 테니까. 퍼억-! 이내 포동포동한 몸뚱이 대신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자, 조사관 새끼가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간수가 내게 뭐라 외쳐온 것도 그때였다. “열쇠.”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거기서 가만히 있었으면 뒈졌을 텐데. 나는 그저 딱 한 마디만 했다. “열쇠.”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열쇠.” “여, 여기 있소…….” 열쇠를 집어 들고 뒤로 돌자, 마치 영화처럼 죄수들이 길을 터주었다. 터벅, 터벅. 그들 사이를 지나쳐, 지상으로 연결된 계단 앞에 선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판을 키워도 되나? 그런 걱정이 불현듯 피어났지만……. ‘내게 선택지를 주지 않은 건 그 새끼들이니까.’ 나는 열쇠를 돌리며 외쳤다. “가자아아아!!!!” 앞으로 벌어질 일은 모두 정당방위다. 무엇보다 소중한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 탐험가 지부의 감옥은 지하 깊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지상과 연결된 이중문은 엄청나게 두꺼웠기에, 사태가 이 지경에 치달을 때까지 지상의 사람들은 어떠한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나한텐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 철컥. 긴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지하 감옥과 달리 평화로운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행정 일을 하는 직원들과 카운터 앞에 바글바글한 탐험가들. “어, 당신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일반 탐험가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건물 내부에서 등장한 나를 본 직원 한 명이 묻는다. 물론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내 뒤에 열린 문을 확인한 직원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으니까. “타, 탈옥수다!!” 직원이 외침과 동시,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 순식간에 무겁게 내리 앉는 정적. 다만 임기응변으로 먹고사는 탐험가 놈들 중에서도 유독 판단이 빠른 새끼가 있었다. “직원 누님! 저거 잡아 주면 퇴근하고 나랑 같이 차 한잔하는 겁니다?” 여직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카운터를 뛰어넘더니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그때. “와아아아아아!!” “자유의 냄새다!!” 계단 아래서 죄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 어……?” “마, 막아!” “보상은 길드에서 치르겠습니다! 탐험가 여러분 힘을 빌려주십시오!” “아아아악!!” 맨몸뚱이로도 겁 없이 달려드는 죄수들과 제각기 무기를 꺼내 응전하는 탐험가들. “죽여!!” 평화롭던 탐험가 지부에서 때아닌 유혈이 낭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의 주동자인 나는, 전선에서 한발 물러나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아마 죄수들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5분도 채 안 될 것이다. 간수들에게 뺏은 곤봉 몇 개를 제외하면 무기랄 것도 없는 상황이니까.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선 나는 창밖을 확인했다. ‘역시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겠군.’ 벌써 소란이 밖에까지 전해졌는지, 대로변의 탐험가들도 관심을 갖고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 이 상태로 나가면 곧장 몰매를 맞고 다시 아래로 잡혀가겠지. 해답은 이 위에 있다. “너, 너는 누구냐!” 복도에서 조우한 직원들은 전부 두 주먹으로 기절시킨 뒤 난간을 통해 1층을 확인했다. 수십 명이 난투극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살점폭발.’ 손이 폭발함과 동시, 스프링클러처럼 쏟아져 내리는 산성 피. “아아아악!” 탐험가고 죄수고 나발이고, 내 피가 묻은 수십 명이 일제히 비명을 내지른다. 왠지 죄책감이 밀려났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 계획의 성공률을 올리기 위해선. 「캐릭터가 [제물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연계기를 발동하자, 내 피가 묻은 이들의 이마 위로 문신이 새겨지더니 붉은빛을 흩뿌린다. 「반경 100m 내에 위치한 제물의 숫자만큼 캐릭터의 육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제물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십 명. ‘이래서 선수들이 그렇게 약을 빨아대는구나.’ 온몸에서 힘이 들끓는다. 무심코 잡은 난간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파여질 정도. 내심 갖고 있던 불안감마저 싹 사라진다. 이거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으아아아악!!” 1층의 소란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금 계단을 올라 3층으로 향했다. ‘다행히 자리를 비우진 않은 모양이군.’ 문만 살짝 열어 확인한 3층은 아래층들과는 전혀 달랐다. 층 전체가 집무실로 만들어진 공간. 원목 가구들과 벽에 달린 훈장과 상패들이 아우러져 제법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대체 뭔가 이 소란은! 어서 자네가 내려가 확인해 보게!” “예! 지부장님!” ‘저놈이 지부장이군.’ 목표물을 확인한 나는 문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지부장의 지시를 받은 사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 콰직. 어, 뼈까지 부술 생각은 아니었는데……. 털썩. 지부장을 보좌하는 놈이니 제법 할 줄 알았는데,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사내. 이와 동시 지부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네놈은 누구냐!” 나? “억울한 바바리안.” 조금 덧붙이자면 무고함을 증명하려 왔다. 바바리안답게, 물리적인 방법으로. “아래 소란도 네놈이 벌인 일이겠군!” 지부장답게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사내가 즉시 벽에 장식돼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탐험가 출신인지 자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래 직원들은 그냥 다 먹물쟁이들이던데. 뭐, 이 경우를 예상하고 도핑까지 하고 온 것이니 상관은 없겠다마는. “아가씨, 어서 제 뒤로 오십시오.” “네, 네!” 이내 지부장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여자가 호다닥 그의 뒤로 숨는 것을 끝으로 양측 모두 싸울 준비가 끝났다.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보스전인 셈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놈을 제압해야 한다. 되도록이면 1층의 소란이 끝나기 전에. “베헬—라아아아!!” 수십 명을 대상으로 한 [제물 각인] 덕분일까. 지면을 박차는 순간, 폭발적인 가속도를 보이며 몸이 튕겨져 나간다. 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그 속도가 적응이 안 될 지경이었으나……. 지부장도 만만치 않았다. “허튼짓을!” 정확하게 내 움직임을 읽고서, 정밀한 궤도를 그리며 내 팔목을 파고드는 검. 다만, 초바바리안 모드인 나의 뼈까지 단번에 베어내긴 부족했다. 카칵! 어딘가 걸린 듯한 둔탁한 소리. 이어서 베인 상처에서 뿌려진 핏물이 지부장의 어깨를 적신다. 치이이익! “악! 아아악!” 예상치 못한 통증에 정신을 못 차리는 지부장. 이후로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했다. 그 틈을 타 주먹으로 놈의 목젖을 가격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커, 커헉!” 지부장이 헛구역질을 해대며 무릎을 꿇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너무도 순식간에 끝난 보스전이었지만……. 하긴 피에서 이딴 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겠지. 아무래도 탐험가 길드 놈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게 전통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네, 네놈……!” 나는 언제나 최악을 상상한다. 과거 탐험가였던 이놈이 어떤 정수를 갖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그대로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자, 그럼 일단 첫 번째 준비물은 마련이 된 셈. “사, 살려 주세요!” 근데 이 아가씨는 어떡하지? 지부장이 굽신거리는 걸로 보아 신분이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아, 아가씨는 지역장님의 자녀분이시다! 건드렸다간 결코 무사치 못할…….” 뭐야 이 아저씨, 어떻게 벌써 깨어났어. 퍼억! 전보다 힘을 실어 지부장을 기절시킨 나는 차분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지역장 딸내미라…….’ 아무래도 일이 좀 더 수월해질 듯하다. 아니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던가. ***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1층의 소란이 모두 정리되었는지, 직원 한 명이 이곳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올라왔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이미 지부장은 나의 애완 앵무새로 전직을 끝마친 상태였으니까. “괜찮다고 말해라.” “…나는 괜찮네. 그보다 아래는 어떻게 됐는가?” “일단은 전부 정리됐습니다! 몇몇 탈옥수들이 도시로 숨어들었지만,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아! 근데 로버트 보좌관님은 어디 계십니까? 함께 계실 줄 알았는데…….” 보좌관? 턱이 박살 난 채 장롱 안에서 쉬고 있다. 물론 지부장이 이를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대충 둘러대라.” “…시킬 일이 있어 외부로 나갔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내가 따로 부르기 전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주게.” “예!” 이내 직원이 떠나고 곧장 책상 밑에서 나왔다. 내 품에는 지역장 딸내미가 폭 안겨 있었다. 지부장이 콧수염을 바르르 떨며 나를 노려봤다.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자네 신상에 이로울 걸세.” “그렇군.” 지부장의 조언은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신상에 이롭기는 개뿔. 여기서 그만둬봤자 뒈지기밖에 더해? “잘 생각해 보게, 자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도울 방법이—” “그렇군.” 대답하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자, 지부장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알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오며 몇 번이나 들었더니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그래서 대체 뭐 어쩌란 말인가. 미친 짓을 하던가, 아니면 그대로 죽던가.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는데. “그렇군.” 다시 한번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지부장이 기도 안 찬다는 듯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렇군은 무슨 그렇—” “이만 닥치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지역장 딸내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불어넣는 척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지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 혈색이 돌지 않았다. 하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자기 지부에서 탈옥 사건이 벌어진 데다가, 함께 있던 지역장의 딸까지 인질로 잡혔으니……. 존나게 막막하겠지.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건, 이 새끼도 멀쩡하진 못할 테니까. ‘자업자득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인질로 잡혀 있던 여자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줄리안 어반스예요. 이 여자가 아니라.” 겁에 질려 있던 아까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 밀착한 몸에서 전해지는 심장의 박동 소리도 확인해 보니 꽤나 안정적이다. “원하는 걸 말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데는 전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나 같은 사람?” 내가 언제 이 여자를 본 적 있던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을 벌였으면서도 당신은 전혀 겁먹거나 한 얼굴이 아니에요. 호흡도 고르고 눈도 전혀 떨리지 않고 있죠.” “본론만.” “전부 계획한 거죠?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 하기야 했다. 한 30분인가 전에. ‘뭔가 해서 들어 봤더니, 시간 낭비였군.’ “어쩌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까지 알았을지 모르겠—” “조용히 해라.” “읍, 으읍!” 자의식 과잉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입을 대충 손으로 틀어막은 뒤, 지부장에게 앞으로 필요한 준비물을 요구했다. “날 담당했던 조사관, 1층에서 활동하는 ‘수정연합’ 클랜의 하츠 영이라는 놈, 마탑 소속의 마법사, 그리고 신전의 정식 사제를 데려와라.” 판은 깔릴 만큼 깔렸다. 그러니, 이제 슬슬 뒤집어 볼 차례다. 39화 길드 (4)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갑자기 저보고 길드에 다녀오라니요?” “찾는 사람이 있어서 한번 다녀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건 그렇지만…….” 마탑 소속 6등급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길드에 용무가 있는 건 맞지만……. 일단 한동안은 푹 쉰 다음, 이번에 얻은 그 ‘물건’을 대략적으로나마 연구한 이후에나 갈 계획이었다. “지부장이 공식으로 지원 요청을 했다. 듣자 하니 그쪽에서도 뭔가 큰 사건이 생긴 거 같던데, 용돈벌이 정도는 되지 않겠는냐?”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레이븐은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을 승낙했다. 길드라면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했을 곳. 지금 가면 소정의 금전 보상도 얻을 수 있다니, 귀찮다고 미루기엔 명분이 없다. ‘이번에 미궁에서 돈도 많이 썼고…….’ 게다가 그 바바리안을 좀 일찍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전례가 없던 변종 균열. 거기서 나온 수호자의 정수를 먹은 게 바로 그자 아니던가. 그 ‘물건’만큼이나 흥미로운 표본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 타르진도 데려가거라.” “됐어요. 그 사람 별로 쓸모도 없던데요.” 레이븐은 마탑 1층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해당 지부와 가장 근접한 곳으로 이동했다. 목적지까지는 걸어서 한 10분 정도 걸릴 거리. 이내 대로변으로 나온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리 사람이 많아?”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거 같다. 그리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발을 내디딜 수 없을 지경으로 사람들이 빼곡하다. 마치 여기서 큰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고 보면, 지부장이 공식으로 지원을 요청했다고 했지?’ 레이븐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약간의 용돈이나 벌어갈 셈이었지만, 어쩌면 그만큼 고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말씀 좀 물을게요.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레이븐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구경꾼 남성을 붙잡고 물었다. 그리고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 “지부에 갇혀 있던 약탈자들이 대규모로 탈옥했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탈옥 사건이 발발한 것으로 모자라 그중 몇몇은 도심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며……. 주동자로 추정되는 한 명은 우연히 지부에 들렀던 지역장의 딸을 인질로 삼았다고 한다. “뇌가 없는 분인가 보네요. 그런다고 길드에서 협상을 해 줄 리도 없는데.” 협상이고 뭐고, 애시당초 길드엔 권한이 없다. 라프도니아 왕가는 길드에게 미궁과 관련된 권한을 상당 부분 양도했지만, 약탈자를 사형하란 원칙은 철저하게 고수했으니까. 차라리 다른 수감자들처럼 밖으로 도망쳤으면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터. “근데 그게 좀 재밌게 됐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인질극을 벌이는 그놈이 자기는 누명을 쓴 것이라고 외쳐 대고 있거든.” “누명?” “그렇다네. 자기가 원하는 건 사건의 당사자들을 모아놓고 마법을 이용해 만인 앞에서 공정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뿐이라더군.” 면죄부를 달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인질범은 오직 ‘진실 규명’만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지켜보던 군중들 사이에서는 그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단 의혹마저 퍼지고 있는 상황.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죠?’ 물론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최초 원인은 일을 잘못 처리한 조사관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탈옥을 벌이고, 그사이에 지역장 딸내미를 인질로 잡다니? 제정신으론 결코 할 수 없는 짓임은 확실하다. “아무튼 그래서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걸세. 지부장이 마탑에 지원을 요청했다는데, 에잉 대체 언제 오려는 건지 쯧.” 혀를 차는 구경꾼을 보며 레이븐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그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마법사가 바로 자신이라는걸. 레이븐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스펠을 읊었다. “바투나 코르 비에르.” 발아래서 푸른빛이 피어나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몸. “아, 아가씨! 마법사였나?” 레이븐은 인파 위를 지나쳐 탐험가 길드 지부의 3층 테라스에 안착했다. 그리고 한 남자를 발견하곤 흠칫 굳었다. “비요른… 얀델?”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지? *** 지역장 딸내미가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일까? 모든 일처리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찾아오라하신 콜도 비르만입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아래에 기절해 있더군요.” “고맙네. 자네는 가 보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조사관 새끼였다. 참고로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 미관상 좋지 않았기에 일단 장롱 안에 놈을 쑤셔 박았다. 잠시 기다리자, 두 번째 배송물이 도착했다. “자, 잠깐! 아무리 길드라도 이렇게 강압적으로 해도 되는 거요?” 엉거주춤하는 자세로 걷는 이 20대 남성 탐험가의 이름은 ‘하츠 영’. 에르웬에게 뭔 짓을 해 보려다 남성성을 상실한 그 머저리 새끼. “묻지 않고 잘 처리해 줘서 고맙네. 그럼 자네는 이만 내려가 보게.” “예.” “지, 지부장님이십니까? 저, 저는 왜…….” 직원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 문 뒤에서 튀어 나가 놈의 상판대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한 방으로는 분이 가시질 않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에 조사관이 1순위 공로자라면, 2순위는 이 새끼였으니까. 이놈이 거짓 증언만 하지 않았어도, 조사관도 내게 사형을 내릴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아악! 무, 무슨 짓이냐! 너는 누군데—!” “됐고, 좀 맞자.” 한 대, 두 대, 세 대……. 면상에 연달아 주먹을 내리꽂자 머지않아 하츠 영이 피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이번에도 미관상 좋지 않았기에, 마찬가지로 장롱 안에 욱여넣었다. 비계덩어리인 조사관 덕에 조금 비좁아 보이긴 하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볼수록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니. 잠시 감상하고 있던 때, 지부장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대체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아, 그걸 아직 안 말해 줬구나. 하지만 굳이 두 번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다음 준비물들이 도착하고 나면 알기 싫어도 자연히 알 게 될 사실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나는 말을 아꼈다. 다만……. “지부장님! 아무래도 사제님을 모시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의 핵심 카드인 사제가 빠져버렸다. 이유는 이 지부와 연결된 정식 사제가 현재 부재중이라는 것. 다른 사제를 부르는 방법도 불가능했다. 아무리 탐험가 길드라고는 해도, 신을 모시는 사제를 무슨 동네 친구처럼 부를 순 없었으니까. ‘지부장의 요청이어도 최소 하루는 걸리겠지.’ 이 세계관에서 사제들은 귀족이다. 신분이 아니라, 하는 짓이 딱 그렇다. 문득 입맛이 썼다. ‘제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군.’ 되도록이면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지부장이 들었으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 그게 뭔 개소리냐고 소리쳤겠지만……. 탈옥은 ‘사고’라며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다. 그러나 길드가 무고한 9등급 탐험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어떨까? 이게 외부로 알려지는 순간 탐험가 길드의 위신은 그야말로 똥통에 처박힐 터. ‘일단은 꼴에 탐험가들을 보호하는 단체라고 표방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사제를 요구한 것도 그래서였다. 사제 앞에서 내 무고함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비교적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탐험가 길드 역시 감히 이번 일을 덮지 못할 터였고. 하지만 초장부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내려가 보게.” “예! 수고하십시오, 지부장님!” 멀어지는 직원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짧은 고민을 끝마쳤다. ‘사제에게 공증을 맡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아예 판을 더 키워 버리는 수밖에 없겠지. 그래야지만 탐험가 길드도 나를 죽여 입막음하지 못할 테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방법 중, 나는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것을 택했다. “꺄아아악!” “무, 무슨 짓인가!” 지역장 딸내미 목에 검을 겨눈 채, 테라스로 나가자 대로변에 사람들이 몰린 게 보인다. 아까 전에 있었던 탈옥 사건 때문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인 모양. “위에! 위에 괴한이 있다!!” 그들 중 하나가 날 발견하고 외친다. 순식간에 모이는 이목. “크흠흠.” 한 번 목을 가다듬은 뒤 타고난 바바리안의 목청을 이용해 외쳤다. “내 이름은 비요른 얀델! 길드가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 한 9등급 탐험가다! 신께 맹세컨대 나는 무고하다!”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뭐야 저놈은?” “탈옥수인 건가?” 저들이 내 말을 믿든 말든 상관없다. 떡밥을 던졌으니 궁금해서라도 사람이 더욱 모일 터. 아무리 탐험가 길드라 해도 만인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사건을 대충 파묻어 버릴 순 없을 것이다. 이제 마법사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고철 덩어리가 되어 없어진 방패 대신……. “으읍, 읍!” 지역장 딸내미 실드를 잘 활용해서. *** 탈옥 사건이 있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뭐예요? 왜 얀델 씨가 여기 있어요?” “설마 마탑에서 보낸 마법사가 그쪽일 줄이야.” 정체 모를 두 남녀의 대화를 들으며 콜도 비르만은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두웠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갇힌 건가? 대체 왜?’ 피어나는 두통을 뒤로하고 그는 기억을 되짚었다. 곧바로 떠오르는 몇몇 장면이 있었다. 감옥에서 탈출해 날뛰는 죄수들. 그들을 피해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근 취조실. 그리고 문을 박살 내며 들어와,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그 바바리안까지! ‘어, 근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다.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청각에 집중했다. “밖에서 상황을 들었다니 얘기는 빠르겠군.” “빠르겠군은 무슨 빠르겠군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얀델 씨는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알아요?” “몇 개나 됐으면 이런 짓은 안 했겠지.” 얀델 씨? 뭐지? 설마 밖에 그 바바리안이 있는 건가? “됐고, 어서 마법이나 써라.” “나중에 제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약속하면요.” “뭔진 몰라도 가능한 범위 내라면.”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데르테이 나르바스! 어, 어……? 왜 이게 안 되지? 얀델 씨, 혹시 정신 방벽류의 마도구라도 있어요?” “그런 게 없다는 건 내 꼴만 봐도 알지 않나? 후, 결국 이놈들을 깨우는 수밖에 없겠군. 혹시 ‘영상 기억’ 마법도 쓸 줄 아나?” “네. 지금부터 전부 기록하면 되는 거죠?” 대화를 들을수록 혼란만 가중되던 그때. “악! 아아악!”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린다. 털썩 소리를 내며 넘어진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도 몇 번 와보지 못한 3층의 지부장실. “뭐야, 이미 깨어 있었나.” 총 네 명의 인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바리안과 지부장. 마법사로 추정되는 여인과 꽤나 귀해 보이는 신분의 여성. 뭔진 모르겠지만 그는 일단 외치고 봤다. “지, 지부장님! 이놈입니다! 이놈이 탈옥을 주동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네.” “예, 예……?” 일시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범죄를 저지른 놈인 걸 알고 있다면, 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단 말인가? “자네가 이자의 조사를 담당했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그, 그렇습니다마는……?” 그제야 실내를 덮은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조사관 일을 하며 는 건 눈치뿐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의 공기가 결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 바바리안… 아니, 여기 얀델 씨는 자네가 확실치도 않은 정보로 자신을 약탈자로 확정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 말… 반드시 사실이어야 할 걸세. 고작 자네 한 명 옷 벗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작 9등급 탐험가 아닙니까!” “말 조심하게! 등급이 몇이던 길드에서 일하는 직원이 그런 소릴 하면 되겠나!!” “예, 예?” 천둥 같은 불호령에 비르만은 아예 얼이 나가 버렸다. 평소 하류 탐험가를 업신여기던 걸로는 제일가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러지? 마치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하듯이. ‘아! 그러고 보면 아까 ‘영상 기억’ 마법이니 뭐니 했지!’ 아무래도 지금 하는 대화가 저 마법사가 쥔 수정구에 기록이 되고 있는 모양. “크흠!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만큼, 길드의 행사는 신중하고 완벽해야 하네. 자네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말해 보게.”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지부장의 지시대로 조사 내용을 읊었다. 그것만이 살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 우선 첫 번째는 마석입니다. 검문소에 그는 9등급 탐험가의 평균 소득을 아득히 상회하는 마석을 내놓았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확인한 배낭에 빼앗은 듯한 장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결과, 이 부분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마법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얀델 씨가 약탈자라고 최종 판단을 내린 거지?” “별개의 사건 때문입니다. 소지 물품 중 메시지 스톤이 발견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원소유주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동일 클랜원에게서 비요른 얀델이 무고한 자를 살해하고 물품을 강탈했다는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 내용을 얘기함과 동시 그의 목소리에는 점점 자신감이 차올랐다. 왜 지부장이 질책하듯 자신을 대하는진 알 수 없지만, 뭔가 착오가 있던 게 분명하다. “지부장님, 제 판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거짓 내용을 말했을까 의심스럽다면, 마법을 통해 진위를 가려내도 좋습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하고 있어요. 일단 지금까지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네요.” 가만히 지켜보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때, 바바리안이 주제도 모르고 비아냥거렸다. “그래 봤자 같은 클랜원의 증언뿐이었지. 마법으로 확인되지도 않아 효력도 없는.” “얀델 씨의 말이 사실인가?” “그, 그, 그건 그렇습니다마는…….” “그 부분은 왜 확인을 하지 않은 건가?” 어느샌가 다시 차가워진 지부장의 목소리. 그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이 바바리안의 체질이 문제입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단 걸 아는지, 비협조적으로 거짓 진술만을 늘어놓더군요!” “거짓 진술이라니? 정확히 무슨 소리인가?” 비르만은 당당히 대답했다. “한 번은 자신이 목이 찔리고도 살아남았다 했습니다. 근데 흔적도 없기에 추궁했더니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나 원 참! 균열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어서 흉터가 사라졌다더군요?”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었다고?” “예! 지부장님!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1층 균열에서 뱀파이어가 나온다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바바리안은 횡설수설했다. “한 번 했던 거짓말을 감추려 새로운 거짓말을 뱉는 것. 범죄자들의 가장 흔한 진술 패턴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놈의 말만 듣고 귀한 마법사님들에게 헛고생을 시킨단 말입니까?” 물론 거듭된 무죄 주장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겠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게, 갓 성인이 된 순진한 바바리안 하나가 무고하게 죽는다고 무슨 일 생기겠는가? ‘…게다가 마법사를 부르면 내가 챙길 돈이 줄어들고 말이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1층에서 뱀파이어라니? 이 정도 허황된 진술을 했던 게 확인되면 자신의 판단을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는 될 터. ‘할 거면 좀 더 나은 거짓말을 했어야지!’ 이내 그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바바리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그거, 맞는데요?” 마법사가 툭 하고 뱉은 말에 그의 사고가 정지했다. “…예?” “하아,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거 어쩌죠? 마법을 나한테 쓸 수도 없고.” 이 마법사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지? 40화 길드 (5)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사님? 아무리 안면이 있는 자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감싸주시다간…….” 조사관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다라기보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 하나 그녀의 반응은 까칠하기만 했다. “지금,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거예요?” “아, 아니 바, 방금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대체 뭔데요? 쥐꼬리만 한 권한으로 탐험가들을 조사하다 보니, 이젠 마법사도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죠?” 마탑의 마법사는 준귀족에 가깝다. 학파는 여럿이지만, 크게는 하나의 집단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자신의 권익만큼은 철저하게 보호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말단 직원인 조사관 새끼가 감히 말의 진의를 의심했단 것부터가 문제인 셈. 보다 못한 지부장이 조심스레 껴들었다. “그만하는 게 어떻소? 마법사 아가씨도 알겠지만, 상황을 모른다면 얼토당토않는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녀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층 균열에서 뱀파이어가 목격된 전례가 없긴 하죠.” 조사관을 대할 때와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친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 “하지만 미궁이 탄생한 이래로 그곳엔 아직까지 온갖 미지로 가득 차 있어요. 한데 얼토당토않은 얘기라니? 탐험가 길드, 그것도 지부장이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시간 차를 두고 쏟아진 신랄한 비난. 과연 이게 마법사인가? 길드의 지부장이란 직위조차 그녀의 안중에는 없어 보였다. “…….” 그렇게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지부장이 입을 꾹 다문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요청의 노크는 아니었다. 들어와도 좋다고 누가 허락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자네가 그 바바리안이군?” “누구지?” “나일 어반스라고 하네.” 방에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사내였다. 단정한 턱시도가 인상적인 중년 남성과 그를 호위하는 듯한 젊은 사내. “지, 지역장님!” “아버지……?” 인질로 잡혀 있던 줄리안과 지부장이 동시에 입을 떡 벌린다. 나도 풀어지던 긴장을 다시금 조였다. ‘…결국, 지역장까지 왔군.’ 길드의 운영 체계는 간단하다. 도시 내 수백 개의 지부마다 지부장이 있고, 그 들을 총괄하는 13명의 지역장이 존재한다. 그 윗등급은 ‘길드장’뿐이니, 사실상 13명의 지역장들을 길드의 2인자들이라 볼 수도 있는 셈. 9등급 탐험가 신분으로는 멀리서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 거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조차 세상일은 제 맘대로만 돌아가진 않는 법. “자네, 웃기지도 않는 일을 벌여놨더군?” 불쾌함이 가득한 지역장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 “그래, 너희들 입장에선 그렇겠지.” 하츠 영이란 놈이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다면. 설령 그런들, 조사관이 욕심부리지 않고 제대로 된 절차로 일을 처리했다면. 아니, 애초부터 탐험가 길드가 공명정대하며 직원들을 잘 관리하는 그런 집단이었더라면……. 아마 내가 이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않았다. “너희들에게는 아주 작은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게 있어선 목숨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겐가?” “미친 짓?” 나는 반대로 물었다. “살려고 발버둥 친 게 미친 짓인가?” “후,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겠나? 자네는 일을 키워도 너무 키워 버렸어.” 다른 방법은 개뿔. 철창을 깨부수고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 지부장이란 놈은 본인 지부에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심증만으로 9등급 탐험가들을 조사할 수 있도록 길드의 내부 규정이 바뀌는 데 의사권이 있었을 이 지역장도 마찬가지.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했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비아냥을 담아 차갑게 중얼거린 것과 동시. “자네! 지역장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망발인가!” 지부장이 대화에 껴든다. 조사관 새끼나, 지역장의 호위도 무슨 이런 미친놈이 있는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긴, 이놈들에게 있어 나는 별종이나 다름없겠지.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꼴통 중에 꼴통. 이내 지역장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옮겼다. “마법사님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아루아 레이븐이에요.” “그렇군, 레이븐 양. 혹시 얼마를 주면 그 수정구를 내게 팔겠는가?” 더 볼 것도 없는 회유 제안. 설마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은 몰랐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으나…….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안타깝군.” “설마 억지로 빼앗으려는 그런 생각은 안 하시겠죠?” “하하! 그럴 리가 있나. 그랬다간 아가씨 학파의 마스터께서 가만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이내 지역장이 쾌활하게 웃었다. “다들 왜 이렇게 굳어 있나? 방금은 전부 농담이었네. 밖에 사람들이 저리도 모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농담은 지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 이래서 처음에 사제를 데려오려 했던 거다. ‘영상 기억’ 마법이고 뭐고, 마법사는 사익에 따라 얼마든지 매수될 수 있는 존재니까. 아마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면, 그래서 그녀가 지역장에게 매수됐다면……. ‘밖에 모인 군중이고 뭐고, 여기서 뒈졌겠지.’ 아무튼,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의를 지켜 주었고, 이로써 지역장도 감히 권력으로 일을 파묻을 수 없게 됐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나는 내가 무죄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된다는 뜻. 이러니저러니 해도 끝이 다가왔다. “됐고, 슬슬 끝내는 게 어떤가?” 나는 장롱으로 다가가 그 안에 잠들어 있던 하츠 영을 깨웠다. “뭐, 뭐야 내가 왜 여기…….” 주변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그럴만했다. 이놈이 거짓 증언을 했단 게 증명되는 순간. 이들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 *** “이 남자,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레이븐이 말을 뱉음과 동시.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지역장님?” “비요른 얀델이라고 했나? 자네는 무죄일세.” 지역장의 억지웃음을 보며 나는 답했다. “고맙단 말은 못 하겠군.” 이번엔 옆에서 듣던 지부장도 감히 내 말투에 사족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저 지역장의 눈치를 보며 오들오들 떨 뿐.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나?” “당연하지 않나. 처벌과 보상을 요구한다.” “그렇군.” 지역장은 속으로 계산기라도 두들기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넬 담당했던 조사관은 파면될 걸세.” “지, 지역장님! 저, 저는 하늘에 맹세코 규정대로 조사를 한 잘못밖에……!” “자네의 무능력을 길드에 전가하려는 건가? 자네가 내린 모든 판결에 철저하게 재조사가 들어갈 걸세. 그리고 만약 그 과정에 조금이라도 부정이 있을 시, 자네는 그만한 처벌을 받게 될 걸세.” “그, 그럴 수가!” 그토록 오만방자하던 조사관이 사색이 된 채 무릎을 꿇었다. 저리 두려워하는 걸 보니, 지금까지 청렴결백하게 살아오진 못한 모양. 뭐, 지난 행태를 보면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거기가 아니라 이쪽에 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번지수가 틀렸단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새끼였으면 이 지경까지 오는 일도 없었겠지. 원래 세상이란 게 그렇다. 그 어느 누구도 때릴 땐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는 건 언제나 대가를 돌려받을 때뿐. “그럼 이자는 어떻게 되지?” 이번 사건의 또 다른 공로자. 하츠 영을 바라보며 묻자, 지역장이 별 고민 없이 답하였다. “이자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거짓 증언으로 조사에 심각한 혼선을 주었지. 마찬가지로 처리하겠네.” “마찬가지라면?” “철저하게 조사를 한 뒤 형장에 올리겠네.” 지역장의 말에는 그만큼 무게가 실린다. 아직 재판은커녕 조사도 아직 들어가기 전이지만,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매한가지인 셈. “아, 안 돼…….” 이내 하츠 영이 눈을 까뒤집으며 실신했지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기왕이면 이놈이 속한 클랜도 조사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수정연합이라면 안 그래도 이런저런 말로 시끄러운 놈들이었지. 자네 말대로 해줌세.” 지역장은 내가 요구하는 족족 시원시원하게 승낙을 해 주었다. 제법 똑똑한 사람이다 싶었다. 달라는 대로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확실하게 인지했단 뜻이니까. “그럼 처벌은 이만하면 됐나?” “글쎄…….” 말꼬리를 흐리며 한 곳을 응시하자, 눈이 마주친 지부장이 황급히 시선을 피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바라면 과욕이겠지.” “이쪽 사정도 헤아려줘서 고맙네.” 고마울 거 없다. 이 부분은 다른 식으로 받아낼 생각이니까. “자, 그럼 처벌이 끝났으니 우리가 자네에게 저지른 실수에 대한 보상을 얘기해야겠군. 바라는 것이라도 있나?” “들어 보고 결정하지.” “우선 자네 등급을 7등급으로 상향 조정하겠네.” “등급 상향이라…….” 나쁘지 않다. 7등급 탐험가가 되면, 일단 환전소도 덜 붐비는 데다가 여러 다양한 혜택들이 있으니까. 만약 내가 9등급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조사관 새끼가 그토록 오만방자하게 굴지도 못했을 터. “지, 지역장 님! 고작 두 달 된 탐험가를 단번에 7등급으로 올린다니요!” 추후 형평성 문제로 야기될 문제가 걱정되는지 지부장이 첨언을 올렸지만, 지역장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지금 사죄를 하고 있는 걸세.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선 이견을 달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지역장의 태도는 마치 진정성 있게 사과하는 정치인처럼 보였다. 실속이 없다는 부분에서 특히나. “잠시만요. 듣자 하니 얘기가 좀 이상한데요?” 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차, 가만히 있던 레이븐이 한발 먼저 대화에 껴들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긴장하는 내색이 곳곳에서 보였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추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등급 상향이 보상이 될 수 있죠? 능력을 지닌 탐험가에겐 등급을 올려 혜택을 주는 건 그냥 길드의 업무일 텐데요?” “하지만, 방금 들었듯이 이자는—” “경력이 길지 않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만큼 전례가 없는—” “그야 전례가 없는 게 당연하죠.” 몇 번이나 지역장의 말을 끊어먹은 그녀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두 달 만에 5등급 몬스터인 뱀파이어, 그것도 균열의 수호자로 나온 놈의 정수를 먹고 돌아온 탐험가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레이븐 양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글쎄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생색내려는 게 조금 추하게 보였을 뿐이에요.” 이내 그녀가 나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차려진 밥상도 못 받아먹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기에, 나도 얼른 장단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진짜 보상은 기대해 봐도 되겠군.” “…무엇을 원하나?” 글쎄, 이 고생을 했으니 그만큼 돌려받는 건 있어야겠지. 무엇을 요구할까 싶던 차. 기다렸다는 듯 레이븐의 입이 또다시 열린다. “당연히 돈이죠. 탐험가 길드에서 해줄 수 있는 게 그거밖에 더 있어요?” 찾아보면 더 있기야 할 것이다. 결속 마법을 평생 무료로 받는다든가, 길드 내 게시판에 개인 공고를 올릴 수 있게 해 준다든가 등등. ‘결국 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뿐이군.’ 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역장이 한숨을 내쉬며 백기를 들었다. “얼마면 되겠는가?” 이제 백지수표에 액수만 적어 넣으면 되는 셈. 왠지 아까부터 믿음직스럽게 느껴진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합리적인 판단을 믿겠다는 뜻. 다행히 의미가 잘 전달됐는지,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래가 창창한 탐험가 한 명을 실수로 죽일 뻔했으니…….” 말꼬리를 흐리던 그녀가 툭 뱉었다. “적어도 500만 스톤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지역장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지불하겠네.” 그리 놀랍진 않았다. 500만 스톤이라면, 내가 예상한 맥시멈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선 액수지만……. ‘그건 내가 요구했을 때의 얘기니까.’ 아마 레이븐이 없었다면 이렇게 순조롭게 거래가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게 신분이 지닌 힘인가? 내심 그 위력을 실감하며 오늘 받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싶던 차. 레이븐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제 수고비는 100만 스톤으로 별도예요.” “수고비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지원비라면 마탑과 합의된 금액이—” “아까 지역장님이 하신 농담이 기록된 이 수정구 값 포함이에요. 아무리 농담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이 수정구를 갖고 싶어 하는 분들이 찾아보면 꽤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아가씨가 농담이 심하군.” “농담 아닌데요?” 그녀가 정색하자, 지역장의 표정이 굳다 못해 완전히 썩어 버렸다. 다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겠네…….” 이내 지역장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찌 보면, 아까 한 말실수 하나에 100만 스톤이 날아가 버린 셈. ‘…따로 수고비를 줄 필요는 없겠군.’ 이게 마법사라는 족속들인가? 순식간에 알아서 자기 밥그릇을 챙긴 그녀를 보며 감탄하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용돈 좀 챙겨가겠네요.] 그 음성을 들으며, 정말이지 간만에 타인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이면,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야지. 41화 마법사와 바바리안 (1) “아, 안 돼!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다들 뭐 하는가? 어서 저 둘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지 않고?” 우선 애걸복걸하는 조사관과 실신한 상태의 탐험가를 자리에서 치운 이후. 보상의 절차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이번 일을 거론치 않겠단 조건의 동의서에 서명한 즉시, 별도로 추가된 ‘수고비’를 포함해 도합 600만 스톤이 현찰로 주어졌다. 뭐, 그걸로 끝이 아니었지만. “자네 이름 앞으로 된 소지품 전 품목일세.” “어때요? 얀델 씨, 잘 확인해 보세요.” 되찾은 본인 배낭을 뒤적거리던 바바리안을 보며 마법사가 묘한 눈길로 말했다. “혹시 뭔가 없어진 물건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없어진 물건?” 바바리안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이해했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이제 보니 없어진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군?” “어머어머, 설마 누락된 물건이 있는 거예요?” “물건은 아니고… 현찰 100만 스톤 정도가 사라졌군.” 누가 봐도 연기톤인 목소리의 대화. 가만히 듣고 있던 지부장은 높이 치솟은 혈압 때문에 눈앞이 하얘질 지경이었다. 무슨 이런 연놈들이 다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요! 방금 미궁에서 나온 탐험가가 그런 거액을 갖고 다닐 리—!” “그럼 우리가 거짓말을 한단 거예요?” 마법사의 차가운 목소리에 지부장은 조건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 그, 그야 당연한 말—” “증거는요?” “그런 게 있을 리—” “어머나, 증거도 없이 우리를 사기꾼으로 모는 거예요? 얀델 씨, 이제 보니 여기 이 지부장님도 처벌 목록에 넣어야 할 거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군. 엄한 바바리안과 마법사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다니,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게 확실—” “그만하게.” 보다 못한 지역장이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없어진 돈에 대한 보상도 함께 해 드리지.” “당연히 해야 하는 보상이니 별다른 감사의 말은 하지 않겠어요.” 칼만 안 들었지, 이게 날강도와 다를 게 뭔가? 뻔뻔하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지부장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일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여기 100만 스톤일세.” “와, 소문대로 탐험가 길드는 돈이 정말 많나 보네요? 말만 했다 하면 그냥 바로 주머니에서 나오고.” “…지금까지 마탑에 대한 존중은 차고 넘칠 정도로 표했다고 생각하네. 이 이상 선을 넘지 말게.” “그러죠 뭐.” “그럼 이제 수정구를 이리 주겠나?” “아뇨. 이건 처벌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한 다음에 드리는 게 나을 듯하네요. 물론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할 것이네.”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아무튼 저희는 이만 가 볼 테니, 밖에 모인 분들은 알아서 잘 해결해 주시고요.” 그 말을 끝으로 바바리안과 마법사는 떠났다. 그리고 장내에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 결과적으로 길드는 100만 스톤을 더 빼앗겼으며, 그럼에도 수정구조차 당장 돌려받지 못했다. 또한 길드 앞에 모인 군중들은 물론, 이번 일에 얽힌 자들을 처리해야 하는 숙제 또한 남았다. 두 연놈 앞에선 억지로라도 웃음을 머금던 지역장은 이제 그냥 만년설처럼 차게 굳은 상황. 숨 막힐 정도의 오한을 느끼며 지부장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지, 지역장님……? 방, 방금은 감사했습니다…….” “감사?” “그, 그… 저를 지켜 주신다고 저 연놈들의 억지에 어울리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자네는 일단 내 사람 아닌가.” “크흡! 오늘 일을 잊지 않고 앞으로 평생 열심히—” “쳐 내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쳐 내야지.” 감격한 얼굴로 충성을 결심하던 지부장이 얼빠진 표정을 내지었다. “…예?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보니 자네도 제법 순진하군.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서 멀쩡할 줄 알았나?” “하, 하지만 저는 정말로—” “됐고, 이후의 일들은 전부 내가 처리할 테니, 목숨만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시선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 쉬는 것도 조심하게. 자네가 옷을 벗던, 저놈이 어디서 돌연사를 하던지 간에 이번 일과 전혀 무관한 사건이 되어야 하니까.” 뭔가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지역장이 등을 휙 돌며 딸을 응시했다. “딸아, 네가 오늘 왜 이곳에 왔는지는 나중에 들으마.” “…예, 아버지.” “그럼 이만 가자꾸나.”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집무실. 그 안에 홀로 남은 지부장은 생각했다. “하, 하하하…….” 전부 꿈일 것이라고. *** 하늘 높이 치솟은 흑색의 첨탑. 그 건물 31층에 있다. “어때요? 마탑에 처음 방문해 본 소감은.” “창문이 없어서 갑갑할 거 같군.” “어… 음,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 조건이 아니었으면 도시 내에 이런 고층 건물은 짓지도 못했겠죠.”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알테미온’ 학파 소속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의 개인 연구실. “자, 여기 앉으세요.” 의자 위에 마구잡이로 올려진 문서 더미를 치우고 앉자, 그녀가 마실 것을 내왔다. 삼각 플라스크 안에 담아서. “아, 컵이 없어서요.” 나는 잠시 그녀가 내준 마실 것을 요목조목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물이군.” “네, 그런데요? 바실리스크 액기스라도 타 드려요?” “아니, 이거면 충분하다.” 물론 마시진 않았다. 정말로 내용물이 물이란 건 알겠는데 그냥 먹기엔 찝찝하거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저 형형색색의 용액들이나 몬스터의 장기 표본 같은 게 들어 있었을 거 아니야.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중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역시 그것 때문이구나. 그땐 급해서 그냥 무작정 그러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이곳에 와 보니 후회가 된다. 생체 실험 같은 걸 하겠다고 그러진 않겠지? “그때도 말했지만, 가능한 범위 내라면.” “좋아요. 그 정도면.” “그래서 하려는 부탁이 뭐지?” “얀델 씨가 흡수한 정수에 대한 독점 연구를 하고 싶어요. 분명 얀델 씨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전례가 없는 만큼, 혹시 특이사항이 발견될지도 모르잖아요?”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지역장을 대할 때처럼 계산적인 눈빛에서, 지난날 균열에서 보았던 학구열적인 눈빛으로. 하기사,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이번에 겪은 변종 균열 외에는 뱀파이어가 수호자로 등장하는 균열은 전층을 통틀어 존재치 않았으니까. “근데 독점 연구는 무슨 뜻이지?” “아, 그거요? 쉽게 말해, 저한테만 표본을 제공한단 뜻이에요. 제 이름으로 된 논문으로 학계에 제출하고 싶거든요.” 이 세계의 마법사는 뭐, 대학원생 같은 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동기지만……. 원래 명예욕 하나만큼은 학자들이 가장 심하다고 들었다. 어, 아니 잠깐만. “설마 아까 뱀파이어 관련 기록을 지워 달라고 했던 것도 전부 이것 때문이었나?” 길드에서 동의서를 쓸 때, 그녀가 먼저 나서서 내가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었단 사실을 기록하지 말아 달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완벽한 비밀 유지가 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단 생각으로 나 역시 동의했다. ‘능력의 7할은 감추라는 말도 있고 말이지.’ 솔직히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손수 챙겨주는 걸 보며 고맙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녀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어, 음, 뭐… 아닌 건 아닌데…….” 부정의 부정이니, 결국 맞다는 뜻. 이내 레이븐이 대놓고 대화 화제를 돌렸다. “흐흠! 아무튼 많이는 바라지도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세 시간 정도만 도와주시면 될 거 같아요.” 일주일에 세 시간이라……. “총 기간은?” “음, 반년 정도면 충분할 것 같긴 한데…….” “3개월로 하지.” “알았어요. 그럼 제 부탁 자체는 들어주시는 거죠?” “그러겠다.” 이렇게 첫 번째 안건이 일단락되자, 레이븐이 곧장 다음 안건을 거론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계산부터 마저 할까요?” 계산? 그런 게 아직 남아 있나? 이게 뭔 개소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도 분위기를 새로이 재단장했다. 흡사 아까 지역장과 기싸움을 할 때처럼. “제 덕분에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총 600만 스톤을 공짜로 얻었잖아요? 제 몫을 주장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거 같은데요.” 하하, 그렇구나. 이제 마법사란 족속을 좀 알겠다. 내가 단순한 효율충이라면, 얘네들은 극한의 이득충이었다. 따라서 나도 마음가짐을 새로 하기로 했다. “돈을 달라니, 제법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 흡사 고블린의 대가리를 쳐부술 때처럼. *** 언쟁이 이어진다. 이전에 비해 한층 격양된 목소리로. “그건 네가 아니라 다른 마법사여도 마찬가지였을 일이다.” “글쎄요. 다른 분이었다면 아마 지역장이 제안하자마자 냅다 수정구를 팔았을걸요?”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이미 지역장에게 받았을 텐데? 그것도 무려 100만 스톤이나.” 오히려 내 덕분에 그만큼이나 벌었으니, 몫을 주장한다면 베헬라에게 맹세코 그건 나여야만 한다. “…그럼 적어도 마지막에 배낭으로 번 100만 스톤이라도 줘요. 그건 순전히 제 조언 덕분에 얻은 거잖아요.” 아까 친해지고 싶다고 했던가? 그 말은 취소하기로 했다. 바바리안이 호구처럼 보이나? “거절이다.” “알았어요. 연구도 도와주시기로 했으니 다 달라고는 안 할게요. 절반인 50만 스톤이라도 줘요.” “거절이다.” “후, 그럼 25만 스톤이라도—” “들어 볼 것도 없이 거절이다.” 나는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게 골손실을 입히려는 것들은 모두 씹새끼다. 그리고 나는 씹새끼와 협상하지 않는다. 도리어 받아냈으면 받아냈지.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뭐요? 내가 균열에서 당신 때문에 얼마나 큰 손실을 봤는지 알아요?” 이윽고 나는 결심을 마쳤다. ‘더 얕보이기 전에 한번 기를 죽여 놔야겠군.’ 솔직히 말해, 이번 일로 인해 고마운 마음이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장기적이면서도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놈인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앞에서 뭘 해도 하하호호 웃는 새끼는 착한 놈이 아니라 호구병신일 뿐이니까. ‘애초에 얘가 끈질기게 군 것도 정말 돈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내 기를 죽여 놓으려는 의도가 컸겠지.’ “됐고, 이쯤에서 다음 계산으로 넘어가지.” “다음 계산이라니요?” 짚이는 게 아예 없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바바리안답게 다이렉트로 말했다. “너는 나한테 오백만 스톤을 줘야 한다.” “오, 오백만 스톤? 대체 제가 왜요?” “그야 내 동의도 없이 내게 시체 골렘의 정수를 먹였으니까.” “뭐, 뭐요?” 그녀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허, 참나! 다들 갖고 싶어 하는 정수를 공짜로 줬더니, 역으로 돈을 달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같아요?” 된다. 단순한 억지가 아니다. 왜 이렇게 다들 상상력이 부족한진 모르겠지만, 사실 요목조목 따져 보면 모두 정론인 이야기니까. “왜 말이 안 된다 생각하지? 너는 네가 살기 위해 내 동의 없이 그 정수를 강제로 먹였다.” “다, 당신을 살리려 했다고는 생각 못 해요?” “글쎄, 그건 모르겠고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천만 스톤을 내게 지불해라. 신전에서 정수를 지우려면 그만큼은 필요하다고 들었—” “그 귀한 걸 왜 삭제해! 이 미친 바바리안아!” “내가 원하는 정수가 아니었으니까. 너는 나에게 심각한 손해를 입혔다.” 가격 협상 놀이를 하던 아까와 달리,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누가 봐도 억지처럼만 들리는데, 어떻게 보면 정론처럼도 들리니 빡이 치는 것이다. 한동안 ‘후우, 후욱’ 거친 숨소리만을 연신 내뱉던 그녀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탐험가들에게 정수는 없어서 못 구하는 것이라 들었어요. 그러니 이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돈을 받아야죠!” “그건 마법사인 너의 선입견 아닌가. 다른 탐험가에게 물어봐도 좋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정수를 먹었을 때 어떻게 생각할지.” “하! 제가 아는 탐험가가 없을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잠깐 기다려 봐요. 바로 확인해 볼 테니까.” 이내 그녀가 잔뜩 흥분한 상태로 책상 위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마치 전화번호를 누르듯 조작하더니 머지않아 연결이 되었다. “아, 파츠란 씨 맞으신가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오?] “안녕하세요. 알테미온 학파의 아루아 레이븐이라고 하는데요. 지난번에 스승님이랑 함께 뵀었죠?” [아! 레이븐 양! 기억하오.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일이신지……?]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만약 누가 동의 없이, 예정에 없던 정수를 파츠란 씨에게 먹인다면 어떨 거 같으세요?” [하하하! 왜 그런 괴상한 질문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답하자면… 굉장히 화가 날 것 같군.] “…네? 화가 나다니요? 마, 만약 7등급 정수. 그것도 균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정수라고 해도요?” [그렇다 한들 똑같소. 예정에 없던 정수라 함은 즉, 내게 있어 봤자 악영향만 끼치는 정수일 테니까. 레이븐 양은 잘 모르겠지만, 정수라고 아무거나 막 주워 먹으면 결코 위층으로 갈 수가 없소.]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한 탐험가의 친절한 답변을 듣고 난 그녀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럼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가정하에 얘긴데요…….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였다면 우선 현금으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오.] “그게 한 얼마쯤 될까요……?” [한 천오백만 스톤이면 적절하겠군.] “그, 그, 그렇게나 많이요?” [정수라는 게 지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비용이 비싸져서 말이오. 신을 모신다는 작자들이 어찌 그리 돈을 밝히는지 쯧…….] “아, 아아, 그렇구나아아…….” 이내 손에 힘이 풀렸는지, 그녀의 손에서 통신구가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 이를 집어 든 다음, 그녀의 손에 다시 쥐어줬다. “아직 물어볼 게 하나 남았지 않나.” 내가 귀에 속삭이자 10대 중후반의 외모를 지닌 금발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 마, 만약 돈으로 배상을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파츠란 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 글쎄? 그런 일이 벌어졌고, 당사자가 내 눈앞에 있다면…….] 통신구 너머의 사내가 호쾌하게 답변했다. [아마 모가지를 옆으로 꺾어 죽여 버릴 거 같군. 하하하!] 42화 마법사와 바바리안 (2) 뚝- 통신이 끊긴 후. 그녀의 실험실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하기야, 전혀 예상치도 못했겠지. 처음엔 돈을 조금 뜯어내려 했는데, 갑자기 오백만 스톤을 배상해야 되는 상황이 올 거라 어떻게 알았겠어. ‘여기 사람들은 다들 상상력이 부족하단 말이지.’ 사실 그녀가 논쟁에서 이길 방법이 없던 건 아니었다. 만약 하루 벌어 먹고사는 9등급 탐험가 중 아무나 붙잡고 같은 질문을 했으면, 감지덕지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을 터. 이렇게 논지가 격파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통신을 건 것은 딱 봐도 실력이 있어 보이는 탐험가였다. ‘스승이라면 마스터를 말하는 걸 텐데, 그런 사람이랑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평범한 탐험가일 리 없지.’ 이것이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이제 과실을 취할 차례— “껄껄껄! 마법사를 말로 이겨먹는 바바리안이라니, 듣던 것 이상으로 신기한 친구로구먼?”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선 것은 주름진 피부의 백발 노인이었다. 다만, 허리가 굽은 곳은 없고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정정해 보인다는 게 특징 아닌 특징. 갑작스런 개입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금방 이 노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아,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구먼. 노부로 말할 거 같으면, 방금 자네가 울린 숙녀의 스승일세.” “아, 안 울었거든요!” 레이븐의 스승. 즉, 마탑에서 무려 다섯 개의 층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거대 학파 알테미온의 마스터. 어찌 보면 아까 만난 지역장만큼, 아니, 어떤 면에선 더한 거물이라 할 수 있을 인물. “아무튼 둘이서 하는 대화는 잘 들었네.” “예? 들었다니요? 분명 방음 마법이 작동하고 있을—” “아, 그거라면 조금 더 보강해야 하겠더구나. 어찌나 그렇게 술식에 빈 부분이 많던지 쯧.” 말투만 보면 마치 동네 노인네를 보는 듯하지만 직위가 직위다 보니 왠지 위축이 됐다. 딱 봐도 소중히 여기는 듯한 제자에게 저지른 일도 있고. “하아, 제 마법진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셨네요. 제가 눈치도 못 채게 부수려면 아무리 스승님이어도 까다로웠을 거 같은데… 그렇게까지 해서 엿 들은 이유가 대체 뭐예요?” 노인이 껄껄 웃었다. “막내 제자가 처음으로 남자. 그것도 모처럼 살아 있는 상태의 바바리안을 데려왔는데 궁금하지 않겠더냐?” 그런데 뭔가 말이 이상했다. “살아 있는 상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노인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 대부분은 죽어서 오니까 말일세! 아니면 달랑 심장만 배달되던가!” “……?” “표정 피게나. 농담일세 농담!” 아, 그렇구나. 과연, 이게 마법사식 조크인가? 나 역시 제법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바바리안이기에, 정색하는 대신 호탕하게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하하하! 당신 대가리를 깨부수고 싶군!” 일명 바바리안식 조크. “…뭐, 뭐라?” 근데 왜 안 웃지? 아, 내가 그걸 안 했구나. “하하하! 농담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건 나중에 농담이라고 말만 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표정 피고 웃어라. 늙은이!” “느, 늙은이……?” “아, 그것도 농담이었다! 하하하!” “…….” 내 농담에 알테미온 학파의 마스터, 줄여서 늙은이가 심기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옆을 확인하니 레이븐은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입까지 떡 벌린 상황. “…얀델 씨, 혹시 미친 새끼세요?” 이건 정중한 표현일까, 아니면 그냥 쌍욕일까. 존댓말을 섞어서 한 탓에 헷갈리지만……. ‘방금은 내가 실수했군.’ 확실히 얘가 이러는 걸 보면 방금은 내가 좀 과하긴 한 거 같다. 하긴 당연한가? 좆밥 바바리안 주제에 마탑의 한 학파 수장 앞에서 이딴 미친 농담을 씨부렸으니. “하아… 길드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고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래도 조금 억울하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오늘 아침에 죽다 살아난 바바리안 앞에서 죽은 바바리안이니 뭐니 하는 농담을 하다니? “예민해져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 버린 거 같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정말이지 간만에 하는 구구절절한 설명이었으나, 레이븐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방어적인 태도예요!”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평생 품어온 내 지론이다. ‘그래서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지?’ 흘깃 살펴보니 늙은이는 아직도 멍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상태.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 만큼, 진심으로 내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꺼허허허! 이거이거 아주 물건인 친구로구먼!” 늙은이가 느닷없이 대소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상 나도 따라서 함께 웃었다. “하하하하!” “꺼허허허! 재밌는 친구야 아주!” 암만 봐도 늙은이에게서 억지로 대범한 척 웃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지만……. 잘만 하면 이대로 넘어갈 수도 있을 듯하다. “신경 쓰지 말게! 노부는 말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굴어대는 다른 쫌생이들과 다르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도 분함이 남았는지,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지만……. 이걸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대강 어떤 캐릭터인 줄 알겠네.’ 어찌 다뤄야 할지도 감이 온다. “하하! 당신은 무슨 바바리안의 핏줄인 것인가? 늙은이라는 말은 취소다! 우리 농담을 이렇게 시원하게 받아들이다니? 이런 호탕한 마법사는 생전 처음 본다!” 애초에 마법사를 본 것도 몇 명 없지만. 알 게 뭔가. “껄껄, 노부가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 왠지 자네와는 좀 통할 것 같군!” “동감이다!” 살벌한 공기가 감돌기도 잠시. 하하호호 웃기 시작한 우리를 보며 레이븐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내짓는다. “하아…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확신컨대, 저 늙은이도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를 게 분명하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위대한 마법사!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다!” “비요른 얀델이라! 쫌생이 같은 마법사 놈들이랑만 뒹굴다 자네를 만나니 속이 확 트이는 듯하군! 만나서 반갑네. 노부는 데이안 트베히리온이란 사람일세!” 왜인지 늙은이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다만 목 위로 핏대가 빳빳하게 돋은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건강을 염려케 할 지경이었지만……. 못 본 척하자. “대단하다! 사나이의 웅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다!” 나, 얀델 비요른. 그 정도 사회생활은 할 줄 아는 바바리안이다. *** “그래서 그때 내가 그 쫌생이들 한테 뭐라고 말했냐면—” “대단하다!” “응? 아직 아무런 말도—” “대단할 것이다!” 이후 이와 비슷한 접대식 대화를 몇 분간 이어나간 후. 본인 자랑을 하다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늙은이가 능구렁이처럼 슬며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자네, 아루는 어쩔 생각인가?” “아루?” “아, 우리 막내 제자의 애칭 같은 것일세.” 아루아 레이븐에서 아루만 떼온 건가? 이런 식의 문화는 어딜 가나 있는 듯하다. “아무튼 아까 그 오백만 스톤 말인데, 만약 노부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사회 생활 모드도 잠시. 내가 정색하고 말을 끊자 늙은이가 혀를 찼다. “에잉 쯧, 누가 주지 않겠다던가? 자네만 괜찮다면 노부가 다른 걸로 대신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 “무엇인가?” “바로 이걸세.” 늙은이가 입고 있던 로브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다만, 나는 상자보다 그가 입고 있던 로브에 관심이 더 쏠렸다. ‘설마 로브 자체에 아공간이 달려 있는 건가?’ 음, 저건 달라고 해도 안 주겠지? “뭐 하나? 어서 열어 보게.”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는 반지 하나가 보였다. “서리혼령 가락지란 이름의 물건일세.” “서리혼령 가락지?” 내 혼잣말에 늙은이가 반지에 대해 부연 설명을 이어 갔지만, 굳이 귀 기울여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비록 9천 번대이긴 하지만, 자네도 탐험가라면 알고 있을 걸세. 넘버스 아이템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넘버스 아이템. 오직 균열의 수호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으며, 그 하나하나는 고유의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 사실상 ‘제작’과 ‘발견’을 제외하면, [던전 앤 스톤]에서 장비 수급법은 넘버스 아이템이 유일한 셈. 당연히 번호와 무관하게 대부분 비싸다. 하지만……. “자네도 참 운이 좋군. 아마 자네가 맘에 들지 않았으면 절대 이 물건을 주지는—” “그래 봐야 아무도 안 쓰는 물건 아닌가.” No.9425 서리혼령 가락지. 3층 미만의 균열에서만 드랍되는 서리혼령 가락지는 딱 한 가지의 특이한 능력을 지녔다. 참고로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은 아니고, 착용자가 흡수한 정수 중 하나를 봉인시켜 준다. 물론 스탯은 그대로 적용되며, 봉인되는 것은 오직 스킬뿐이지만……. ‘그럴 바에 신전에서 정수를 없애는 게 싸게 먹히지.’ 생각해 보아라. 갈수록 레벨을 올리는 일은 천문학적으로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 반지를 끼면 기껏 얻은 정수의 스킬이 전부 먹통으로 변한다. 스킬 슬롯 하나가 아예 사라지는 셈. 미래를 생각하는 탐험가라면 이 반지를 끼기보다 신전에서 정수를 지우고 새 정수를 취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굉장히 유용한 물건임은 틀림없지 않나?” 음,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지. 초반에는 스킬의 조합보다 스탯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니까. 게다가 시체 골렘은 스킬이 구려도, 스탯치 자체는 꽤나 높은 편에 속하는 정수. ‘언제든 반지를 빼면 다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긴 하지. 그 자체로만으로도 말이야.’ 나는 속으로 계산을 끝마쳤다. 사실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그야 방금 정리한 능력들은, 이 반지가 지닌 진짜 가치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으니까. ‘몇 번 떠봤는데도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그 이벤트에 대해선 모르는 모양이군?’ 마법사는 이 세계관의 최고 지식인들이다. 하지만 ‘핏빛 성채’에서 레이븐은 석상 아래 숨겨진 ‘여신의 눈물’의 입수 방법을 모르던 걸 보면서 확신했다. 그래 봤자 내 눈엔 전부 뉴비나 다름없단걸. 어느 게임이던 뉴비만큼 등쳐먹기 쉬운 존재는 없다. “뭘 그리 고민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 반지엔 오백만 스톤의 가치가 없네. 하지만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그렇군.” 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도 경매장 가격은 150만 스톤가량에 불과했지만, 매물 자체가 없어서 이 반지를 입수하는 건 열에 한 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귀한 걸 이렇게 얻다니?’ 애초에 오백만 스톤을 전부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않던 상황. 사실 저 늙은이도, 대충 쓸모없는 물건 아무거나 쥐여줘서 보낼 생각으로 이걸 꺼낸 걸 거다. 아마 날 보며 속으론 멍청한 바바리안이라며 비웃고 있겠지. “덕분에 좋은 걸 얻었군. 잘 쓰지.”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 쌤쌤인가? “껄껄, 노부의 선물이라 생각하게.” 사람 좋게 웃는 늙은이를 보며 생각했다. 잘만 하면 앞으로도 등쳐 먹을 일이 많이 있을 거 같다고. 되도록이면 친하게 지내야지. *** “얀델 씨, 아무래도 오늘 당장은 좀 그렇죠? 그만한 일을 겪었으니 피곤하기도 할 테고, 나머지 얘기는 이틀 뒤에 다시 만나서 하는 걸로 할까요?” “바라던 바다.” 자세한 시간과 장소를 약식으로 정한 뒤, 비요른이 실험실을 떠났다. 이후 레이븐은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됐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던 물건이었으니. 저 바바리안 놈, 나중에 저 반지가 얼마짜린지 알면 속이 꽤나 쓰릴 게다.” “…그런가요?” 다행히 자신이 데려온 비요른 때문에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 이내 레이븐은 한결 편하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러셨어요?” 오늘 스승의 태도는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그는 무례한 이들을 싫어한다. 동료 마법사들을 쫌생이라며 비하하는 일도 일절 없었고. “아, 그거라면 확인할 게 하나 있어서 말이다.” “확인이라니요?”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느니라.” 그녀가 퉁명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비요른의 텐션에 맞춰 준 것에 모종의 의도가 있었다는 건 분명해졌지만……. 스승이 이렇게 나온 이상, 그 의도를 알 방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특이한 놈이더구나. 너무 특이해서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될 만큼. 부디 내 생각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럴 거예요? 알려 주실 거면 그냥 알려 주시던가요!”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주겠느니라. 아, 시간이 되면 저 바바리안 놈과 있었던 일을 소상히 적어서 내게 올리도록 하고.” “이유는 말 안 해 주실 거죠?” “확실해지면 말해 주겠느니라.” 이내 그녀의 스승이 평소처럼 점잖게 웃으며 실험실을 떠났다. 그 빈자리를 보고 있자니 왠지 찝찝해졌다. ‘대체 스승님은 무슨 생각인 걸까요?’ 괜히 비요른을 여기로 데려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승이 이렇게 관심을 지녔던 자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좋지 않았던 게 떠오른 탓이었다. ‘어, 근데 그건 얀델 씨도 마찬가진가?’ 9등급 탐험가의 몸으로, 길드를 쑥대밭으로 만든 그를 떠올린 그녀는 왠지 불안해졌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 마탑이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길드와 마탑은 엄연히 다르다. 바바리안 한 명한테 휘둘릴 만한 그런 집단이 아니다. 분명, 틀림없이. 43화 마법사와 바바리안 (3) “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마탑을 떠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바바리안들 전용 숙소였다. 그런데 이제 두 달 차가 되어서일까? 아는 얼굴들이 반 이상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신입 바바리안들이 채우고 있었다. 들어 보니 돈을 버는 대로 이곳을 떠나 자리를 비워 주는 게 암묵적인 전통이라고 하는데……. ‘아마 보이지 않는 놈들 중에선 이번에 죽은 놈들도 상당수겠지.’ 바바리안으로 태어난 이상 이건 숙명일지 모른다. 끈끈하게 위에서 끌어 주던 요정족과는 다르게, 한번 도시로 나오면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야 하는 게 바바리안의 방식이었으니. “혹시 아이나르가 안에 있나?” “아이나르라면 아침이 되자마자 성지로 떠났다!” 쩝, 왠지 그럴 거 같더라니. 미궁에서 나오고 이틀이나 얼굴을 비치지 않아서 일단 바로 오긴 했는데, 결국 헛걸음이었나. “아, 혹시 그 소식도 들었나?” “그 소식이라면?” “자유의 바바리안 말이다! 지금 온 도시가 그자로 인해 소란인데, 몰랐나?” 본능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저, 전혀 몰랐다. 혹시 이름도 알고 있나?” “글쎄? 모르겠다! 이상하게 그것만큼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더군!” 그래도 다행히 길드에서도 내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를 해 준 모양. “아무튼 우리 동족 중에서 그런 자가 나오다니, 그저 자랑스럽다! 단신으로 수백 명을 때려눕히고 길드 놈들이 씌운 누명을 당당히 벗었다는데, 굉장하지 않나?” “…수백 명을 때려눕혔다고?”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한 거라곤 그저 지역장 딸내미를 붙잡고 징징거리는 것뿐이었다. 한데 벌써 소문이 이렇게 와전되다니? 벌써부터 이후의 일이 걱정되지만……. ‘…금방 가라앉겠지. 길드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올 테니, 아이나르가 돌아오면 그렇게 말해 주겠나?” “그러겠다!” 이내 나는 발길을 돌려 내가 묵었던 여관으로 향했다. 근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자, 자네는……! 주, 죽은 게 아니었나?” 날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듯 식겁하는 여관 주인. 딱히 틀린 비유도 아니었다. 깊게 캐물을 것도 없이, 내가 죽은 줄 알고 방을 뺐다는 자백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안에 있던 내 짐은 어떻게 했지?” “전부 치웠네만…….” “분명 사흘 뒤까지 미리 값을 치러 놨을 텐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짜증이 실리자, 여관 주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걸 패 버릴 수도 없—’ 아니, 잠깐만.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 거지? 뒤늦게 느낀 위화감에 몸이 움찔했다. ‘…어쩌면 첫날부터였을지도.’ 사실 되짚어보면 모든 게 조금씩 이상했다. 눈을 뜨자마자 사람 목이 날아갔음에도 내 정신은 평온했다. 미궁에서 처음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그렇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손쉬웠다. 서서히 변해간 것조차 아니었다. 이 몸에서 깨어난 그날부터 나는 바바리안들처럼 과격했으며, 단순무식했다. ‘그건 오늘만 봐도 마찬가지일 테고.’ 탈옥을 하는 것? 물론 고민 끝에 같은 결론을 내렸겠지만, 정말 이상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 마탑에서 늙은이와 말싸움을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듣기 싫은 말 하나 들었다고 발끈한다고? 29세 회사원 이한수라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소심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범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는 의심이 많아서 뭐든 오랜 시간 관찰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근데 지금은 어떻지?’ 지금까진 특수한 환경에 놓이며 생긴 변화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점점 위화감이 커지고 있다. ‘확실해.’ 이내 나는 확신했다. 전투를 행할 때마다, 이 무식한 몸뚱이에 새겨진 본능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내 정신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니, 변화라기보다는 융화融和라고 하는 쪽이 맞겠지. “그, 그러니까 미,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제발 그만 노려보게!” 상념을 끝마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변했다. 이제야 눈치챈 게 이상하지만, 일단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이쪽이 나아.’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바바리안의 본능이야 앞으로 조금 더 주의해서 관리하면 될 테고. “…3만 스톤만 주면 그냥 넘어가겠다.” 따라서 여관 주인의 행태가 굉장히 괘씸했지만, 적당한 보상만 받고 끝내기로 했다. 없어진 짐이라 해 봐야 제일 비싼 게 2,500스톤 주고 산 옷일뿐더러……. 말다툼할 시간에 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3만 스톤이라니! 그까짓 잡동사니 몇 개 팔았다고—” “아까는 통째로 버렸다고 하지 않았나?” “…….” “됐고, 안 줄 거면 말해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한테 내가 겪은 일을 말할 테니까.” “…차라리 그 금액만큼 우리 여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어떤가?” “싫다.” 앞으로 이딴 여관을 이용할 생각은 없다. 죽은 탐험가의 물건을 빼돌리는 건 그러려니 해도, 최소 약속된 날짜까지는 기다리는 게 상도덕 아닌가. “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단 약속은 꼭 지켜 주게.” “물론이다.” 이후 3만 스톤의 부수입까지 챙긴 나는 이전에 눈여겨보았던 여관으로 향했다. 평균 식대도, 1박에 매겨진 비용도 2배가량 비싸긴 했지만……. 그만큼의 가치를 했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거 같군.’ 일단 방부터 기존보다 1.5배는 넓었다. 창문도 달려 있었으며, 심지어 욕실엔 개인 욕조까지 존재했다. 차원 광장까지 훨씬 가까운 건 덤이고. 약 한 시간에 걸쳐 빡빡 몸을 문질러 미궁에서 쌓인 오물을 씻어낸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했다. 사실 사람은 이 잠깐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그래서였을까? 돌연 미궁에서부터 시작해, 도시로 돌아와 겪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씨바.” 한 번 푹 쉬는 게 뭐 이리 어렵지? *** 아침이 밝자마자 문을 연 의복점 아무곳에나 들어가 일상복을 구매했다. 그리고 바바리안 전용 숙소를 향했다. “비요른!! 그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건가!” “일이 있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걱정?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 걸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비요른은 지옥에 던져져도 알아서 살아남아 돌아올 것이다!” 그래, 너한테 난 그런 이미지구나. 뭐, 나도 어설픈 신파극보다는 이쪽이 훨씬 좋긴 하지만. 서로 식전이었기에 일단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아, 혹시 그거 들었나?”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자마자 질문으로 운을 떼는 아이나르. 내심 예상했기에 이번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 자유의 바바리안 말인가?” “응? 자유의 바바리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 그걸 묻는 게 아니었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였나?” “아!” 다시 본래의 얘기로 돌아와, 아이나르가 몸을 숙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장로님께 들은 얘긴데 말이다… 누가 창세보구를 훔쳐 갔다더군!” “창세보구를?” 나는 진심으로 기함했다. 창세보구란, 여섯 개의 보물을 뜻한다. 참고로 게임에서는 드워프, 바바리안, 요정, 수인, 용인, 인간, 이렇게 여섯 종족이 나누어서 보관을 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게 없으면 마지막 층에 못 들어가잖아!’ 창세보구는 [던전 앤 스톤]의 키 아이템이다. 엔딩… 아니, 솔직히 이젠 정말 그딴 게 있기나 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심연의 문’을 열기 위해선 여섯 개의 창세보구를 모두 모아야 한다. 근데 그게 없어지다니? “대체 누가 그런 간 큰 짓을 벌인 건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성인식을 했던 날에 도둑을 맞았다는군. 장로님께선 어쩌면 다른 종족들도 비슷한 상황일지 모른다 하셨다.” “…그렇군.” 누군가 망치로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튄 기분이었지만, 나는 크게 내색치 않고 식사를 끝마쳤다. ‘씨바, 그럼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건가?’ 어찌 보면 방금 내게 있어 가장 희망적이던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애당초 창세보구가 내게 유의미해지려면 최소 수 년은 지나야 할 터. ‘…아직 3층도 못 간 주제에 생각할 일은 아니겠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여전하다. 언젠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끔 강해지는 것. 게다가 혹시 모르지 않나. 그러고 있다 보면 창세보구를 훔쳐간 도둑도 금방 잡힐지. “근데 아이나르, 오늘 시간은 괜찮나?” “괜찮다. 오늘은 성지에 가지 않기로 했다.” “잘됐군.” 간략하게 식사를 끝마친 뒤, 아이나르와 함께 상업 지구로 향했다. “여기가 컴멜비인가!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군!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컴멜비. 제1구역 황도 카르논을 띠 형태로 둘러싼, 2구역에서 5구역까지를 그렇게 부른다. 편하게 자유시장이라 부르는 이들도 많다. 그 정도로 도시 내에서 상업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다. 라프도니아의 중산층이 주거하며, 많은 장인과 가게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지난날 에르웬과 들렀던 것도 바로 이곳이고. ‘그나저나 걔는 잘 있으려나?’ 뒤늦게 에르웬이 떠올랐다. 그녀와의 만남은 항상 그녀가 먼저 내가 묵던 여관에 찾아오는 식이었다. 한데 이번에 그 여관에서 나왔으니……. 다시 만나기가 꽤나 어려워졌다. 일전에 한 번 가 보았던, 요정 전용 숙소도 정확히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고. ‘뭐, 찾으려면 찾지 못할 건 아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는가 싶다. 어차피 언니가 건재한 이상 함께 미궁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 솔직히 요즘 많은 일을 겪었더니, 에르웬에 대한 기억도 많이 희미해졌다. 애초에 그리 깊은 관계가 아니기도 했고. “오! 비요른 저기 봐라! 사람들이 구름을 꼬챙이에 끼워놓고서 먹고 있다!” 뭐? 솜사탕이 있어? 내심 신기했기에 하나 구매해 한 입 맛만 보고서 아이나르의 입에 물려 줬다. 참고로 진짜 솜사탕이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인간들은 모두 천재인 것인가? 이런 음식을 만들다니!” “그만 감탄하고 어서 따라오기나 해라.” “두, 두고 가지 마라! 혼자선 집까지 못 돌아간단 말이다!” 이후 속도를 올리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전에 장비를 처분했던 예의 무구점. 감옥에 갇힌 원흉이 되었던 장비들은 물론, 고철 덩어리로 변한 내 장비들까지 모두 처분했다. 판매가는 약 80만 스톤. 아직 균열에서 나오기 직전에 얻은 ‘그 물건’은 처분하지 않았지만……. ‘이건 넉넉히 50만 스톤 정도로 잡아서 계산하면 되겠지.’ “아이나르, 여기 네 몫이다.” “이, 이, 이렇게 많이 줘도 되는가? 덕분에 정수까지 먹었는데…….” “사양치 말고 받아라. 정당한 대가니까.” 참고로 비율은 약속했던 대로 8:2. 그래도 동기 바바리안들 중에서는 얘가 이번에 가장 많이 벌었을 것이다. “약속했지 않나. 나를 따라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래도 30만 스톤이라니! 너무 많지 않나! 이거면 아까 그 구름 과자가 대체 몇 개란 말인가!” 어느새 솜사탕이 아이나르의 또다른 금전 단위로 격상한 모양. “그나저나 슬슬 배가 고프군.” 시체 골렘의 정수에 ‘식욕 +9’가 붙어 있어서 그럴까? 체감상 공복 주기가 훨씬 빨리 찾아오는 듯하다. “벌써? 아직 3시간도 안 되지 않았나!” “그래서 안 갈 건가?” “당연히 간다! 오늘은 내가 고기를 사 주겠다!” 신속하게 장비 처분을 끝마친 우리는 근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했다. 그리고 슬슬 다시 나가려던 차. “비요른, 고맙다.” 아이나르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긴 했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평소와 달리 진중했다. 후, 얘가 이러면 괜히 내가 더 어색해지는데. “됐다. 아까도 말했듯이—” “돈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응? 그럼 뭔 얘긴데? “단지… 예전처럼 날 평범하게 대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뭔가 해서 들어 봤는데, 전혀 이해가 안 됐다. 다만, 그렇게 말하자기에는 아이나르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그래서 말없이 지켜봤더니,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알다시피 내 모습이 좀 많이 변하지 않았나. 내가 전사라 생각하지 않는지 다른 동족들도 나를 피한다.” “그건—” “심지어 요즘은 어딜 가도 자꾸 인간들이 내게 와서 치근덕거리기까지 한다! 예전엔 그럴 일도 없었는데……!” 확실히, 전사로서의 자긍심을 지닌 그녀에게 있어 심각한 고민거리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공감은 크게 되지 않지만. 그건 내 본질이 바바리안과 다른 탓이겠지.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이나르가 분통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비요른! 솔직히 말해 줘라! 내가 그렇게까지 못생겨진 것인가?” …뭐라고? “결심했다! 비요른! 앞으로는 너와 함께 미궁에 들어갈 수 없다!” 아니, 잠깐만.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건데? ***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내가 묵고 있는 여관 1층에 홀로 앉아서. “크으으…….” 어떻게 맥주가 이렇게 맛이 없을 수 있지? 아무래도 여관을 잘못 잡은 거 같다. 음식은 제법 잘하던데, 주인장이 이렇게 술을 못 담가서야. “후우…….” 쓴맛을 털어내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낮에 있었던 아이나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의 폭탄선언 이후 긴 대화를 이어 갔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또 혼자가 됐군.” 아이나르가 떠났다. 바바리안 특성상 말에 두서가 없었을 뿐, 들어 보니 비단 외모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어제 장로님께 후계자가 되어 보지 않겠냔 제안을 받았다.] 성지의 장로. 그중에서도 드물게 검의 달인으로 명망 높은 장로가 아이나르를 좋게 봐주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장로 밑에서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기로. [어차피 미궁에 들어가면 여기선 하루 아닌가?] 나는 물었다. 한 달에 딱 하루. 하루만 비워서 같이 미궁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이나르는 곤란해할 뿐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들어 보니 특별한 수련법이 있어서 여섯 달 동안은 성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고 한다.] 특별한 수련이라면, 설마 그건가? 그렇다면 여섯 달간 함께 미궁에 갈 수 없다는 말도 수긍은 간다.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일지도 알았고.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때가 되어 무조건 받아 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열심히 수련해 너의 발목을 잡지 않는 훌륭한 전사가 되어 돌아오겠다.] 따라서 나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탐사에서 그녀는 약탈자의 무력에 굴복해 억지로 맹세를 해야 했다. 또한 균열에서는 어땠던가? 마법사와 드워프, 심지어 동기였던 나조차 활약한 와중에 그녀는 무력하기만 했다. ‘사실 그게 결정적이었겠지. 이번 결정을 내린 데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바뀐 외모는 등을 떠미는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크으으…….” 왠지 모를 갈증에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식도에서부터 쓴맛이 올라왔다. ‘결국 또 새 동료를 찾아야 하는 건가.’ 이번엔 좀 쉬면서 느긋하게 준비하려 했는데. 왜 매일매일 퀘스트가 끊이질 않는 거지? 44화 선 (1) ‘근데 꼭 동료를 구해야 하나?’ 아이나르가 파티 탈퇴를 얘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두 달 전의 나와는 다르다. ‘지금이면 데스핀드 한 무리는 혼자서도 사냥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시체 골렘과 뱀파이어, 그것도 수호자의 정수를 먹었다. 근력을 포함해 기본 스탯 자체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재생 관련 스킬들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2층 수준에선 적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확실히 하려면 못할 건 없겠군.’ 불침번도 없다. 위급 시 등을 맡길 동료도 없다. 하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런 걸 모두 감안해도, 지금 수준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인 솔로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뭐, 그래 봤자 3층은 무리겠지만.’ [던전 앤 스톤]은 기본적으로 파티 플레이가 강제되는 게임이다. 캐릭터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 무쌍을 찍는 건 게임 구조상 불가능하다. 그만큼 역할군이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으며, 층을 올라갈수록 특정 역할군의 부재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탐색꾼이 필수였던 고블린 숲처럼. ‘탱커’ 포지션의 바바리안 혼자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에 3층부터는 몬스터가 나오는 규모 자체도 달라지고 말이지.’ 고민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비슷한 수준의 동료를 새로 구한다. 정 구할 수 없다면 그런 팀에라도 들어간다. 그리고 함께 더 높은 층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며 위를 노린다. ‘2층에서 혼자 노가다나 하며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그쪽이 효율적이야.’ 물론 이 또한 제법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단순히 전투력이나 멤버 구성만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놈들인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후우, 대체 그런 놈들을 어디서 구하지?’ 아무래도 이번 한 달도 꽤나 바쁠 듯하다. 에르웬과 아이나르를 제외하면 사실 이 세계에서 지인이랄 사람도 없는 실정 아닌가. “크으…….” 그렇게 남은 맥주를 몽땅 입에 털어넣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차. “이봐, 거기 바바리안 형씨!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까부터 옆 테이블에서 시끌벅적하게 술을 퍼붓고 있던 탐험가 일행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뜻이지?” “아, 듣지 못했나? 여기 이 어린 친구가 귀여운 소리를 해대서 말이지.” 음, 시비를 거는 건 아닌 거 같고. 한번 들어나 보겠단 제스처를 취하자, 이십대 중반 정도의 탐험가가 주절주절 상황을 설명했다. 대강 정리하자면 이랬다. 어쩌다 보니 자유의 바바리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당연히 탐험가들은 신나게 길드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때 한 어린 탐험가가 와서 그딴 헛소문을 믿냐며 길드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듣고 있던 탐험가들은 아예 대놓고 놀리며 비웃었고, 마침 지나가던 날 보고서 붙잡기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로 형씨 의견을 한번 들어 보고 싶었네. 어떤가? 형씨도 길드 놈들이 믿음직 하나?” 씨바, 그걸 말이라고. “그놈들을 믿을 바에 지나가던 똥을 믿겠다.” “으하하하하! 역시 형씨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네! 눈빛만 봐도 어중이떠중이랑 달라 보이거든!”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젖히는 사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앳된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다들 탐험가란 사람들이 왜 그래요? 길드가 없으면 이 도시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고마운 줄 알아야지!” 잠깐 이어진 정적. 머지않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고마워하라고? 푸하하하하하!” “꼬맹아! 네가 그러니까 어딜 가든 애송이 취급받는 거다!” 아무래도 탐험가들 사이에선 길드를 불신해야지만 어엿한 탐험가로 인정을 하는 문화가 있는 모양. “다들, 이쯤 하지? 얘도 좀 더 겪어 보면 깨닫지 않겠나? 본인 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다는걸.” “크으, 심금을 울리는 말이로군?”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하지!” 짧은 해프닝이 끝나자 탐험가들은 다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도 이만 자리를 떠나려 하는데,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사내가 친근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스일세.” “한스……?” “하하! 흔한 이름이지?” 잘은 몰라도 흔하긴 한 거 같다. 미궁에서 내가 처음 죽였던 아저씨의 이름도 바로 한스였거든.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렇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피곤한 게 아니라면 한 잔 더 하고 가지 않겠나? 물론 술은 내가 사지!”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탐험가들의 대화를 많이 엿듣긴 했지만,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형씨는 무슨 고민이 있어 혼자 그러고 있던 건가?”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나는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팀이 해체돼서 새로운 동료를 찾고 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진지하게 경청하던 한스가 ‘잉?’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문제라면 그냥 길드에 가면 쉽지 않나?” “길드?” “하하! 그놈들이 못 믿을 새끼인 건 맞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 세금에서 걔네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음,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탐험가란 길드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니까. 게임에서도 길드를 통하면 쉽게 동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 놈들을 믿을 수 있을지가 걱정된다.” “하하하! 보아하니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이용해 보지 못한 모양이군?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네. 하도 배신을 때리는 일이 많아서 영상 기록구 착용이 의무화됐거든.” 그래? 게임에선 그딴 거 없었는데. “날 믿고 한번 가 보게. 어지간하면 형씨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니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 다음 날 아침. 약간의 숙취와 함께 깨어난 나는 곧장 마탑으로 향했다. “방문증이 없으면 입장할 수 없습니다.” 있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냐? 아침 댓바람부터 종족 차별을 겪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지만, 레이븐이 준 패를 보여 주자 직원도 군말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띵—! 그렇게 도착한 31층. 이내 레이븐의 개인 연구실에 들어서자, 이틀 전보다도 부산스러워진 실내가 나를 반긴다. “아, 왔어요?” 분명 어지럽혀져 있던 책들이나 문서는 많이 치워진 거 같은데, 이를 대신해서 무시무시하게 생긴 장치들이 방 안에 가득하다. “…이건 어디에 쓰는 거지?” 그중에 가장 살벌하게 보이는 물건을 콕 짚어 용도를 물어보았다. “별건 아니고 혈액을 보다 쉽게 채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예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두 번 놀랐다. 사람 두개골을 깨부수는 용도가 아니란 것에서 한 번. 그리고 이 야만적인 형태의 장치가 마도구라는 것에서 두 번. “그럼 준비는 되셨나요?” “…아직 안 된 거 같다.” “에이, 엄살은요. 어서 이리 오세요.” “…그러지.” 처음에는 의심 반 걱정 반이었지만, 의외로 마도구를 이용한 검사들은 전부 꽤나 인도적이었다. 또한 과정이 아주 신속해서 전부 끝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검사 결과만 놓고 보자면……. ‘감옥에서 나 혼자 정리한 내용들이랑 다를 것도 없군.’ “일단 다른 수호자의 정수들과 크게 다른 특징이 발견되지는 않네요. 아, 지금 뭘 말하는지는 아시죠?” “알고 있다.” 수호자가 드랍한 정수에는 두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일단 첫 번째는 기본 스탯치가 일반 정수에 비해 1.5배 높다는 것. “알고 계시다니 이것도 그냥 직접 보시는 게 낫겠네요.” 그녀는 여러 마도구를 이용해 추정해 낸, 뱀파이어의 정수의 스탯치를 정리해 보여 주었다. 딱히 의미는 없었다. 예상대로 종이에는 (상), (중), (하)라는 주먹구구식의 수치가 적혀 있었을뿐더러……. 어차피 나는 일반 뱀파이어의 스탯에 1.5를 곱하는 것으로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 낼 수 있었으니까. [뱀파이어] 자연재생 +45 근력 +15 민첩성 +15 항마력 +30 물리내성 +12 영혼력 +21 마나감응도 +30 어둠 저항력 +12 태양 저항력 -12 누군가는 5등급 몬스터치고 스탯이 낮은 게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을 수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고작 7등급이었던 시체골렘의 정수엔 고통내성이 70, 골강도에 55란 높은 수치가 붙어 있었으니. 심지어 이 수치는 1.5를 곱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연재생에 항마력, 물리내성, 영혼력, 거기다 마나감응도까지…….’ 스탯의 귀함 정도가 다르다. 게임에서도 이런 귀한 스탯들은 대부분 수치가 낮게 측정되는 경향이 심했다. 그야 막 퍼주면 괴물이 탄생하니까. “다시 느끼지만, 얀델 씨도 정말 운이 좋네요. 일반 뱀파이어의 정수도 다들 귀해서 못 구한다고 하던데, 그걸 수호자한테서 얻다니.” 사실 운이 좋단 말로도 부족하다. 5등급 이상의 수호자 정수는 졸업 정수로 취급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니까. 여러모로 초반부에 입수할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닌 것이다. “다 봤으면 이것도 보세요. 혹시 모르실까 봐 이능들도 다 정리해 놨어요. 총 네 가지네요.” 새삼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가지라…….” 수호자의 정수가 가진 두 번째 특징이다. 보통의 정수는 패시브와 액티브, 이렇게 두 개의 스킬만이 붙는다. 하지만 수호자의 정수는 다르다. (P) 어둠의 근원 — 심장이 온전할 시 죽음에 저항합니다. 기본 패시브 스킬은 물론. (A) 제물 각인 — 피를 묻힌 생명체의 수에 따라 육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A) 영생자 — 잃은 체력에 비례해 일시적으로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A) 피의 주인 — 직접 흡혈 시 대상자의 스킬 중 하나를 일시적으로 흡수합니다. 붙을 수 있는 액티브 스킬이 전부 붙는다. 원래라면 [제물 각인]을 얻기 위해선 뱀파이어의 노랑 정수를, [피의 주인]을 얻기 위해선 빨강 정수를 먹어야 하지만……. 수호자의 정수엔 그딴 게 없는 것이다. 그만큼 입수 난이도가 높긴 하다마는. ‘불사자 각인에 이것까지 얻었으니, 사실상 재생력 세팅은 끝났다 봐도 무방한 셈인가?’ 십 년간 이 게임을 플레이해 온 나조차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빠른 성장 속도. 속으로 흡족해하고 있자니, 그녀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서 끝이에요. 고생하셨어요. 다음 주 편한 시간에 아무 때나 오세요. 어차피 전 여기 있을 테니까.” “근데 여기서 더 조사할 게 있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 정수가 학회의 공식 자료로 채택되려면 앞으로 반응 조사만 열 번은 더 해야 하는데.” …그렇구나. “잘 몰라서 물어본 거니 화내지 마라.” “화낸 거 아니에요. 아무튼 시간이 남으면 시체 골렘 정수도 살펴볼 생각이니, 중간에 도망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알았다.” 검사를 받느라 거의 알몸 상태였던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나 봤다. “레이븐, 혹시 앞으로 미궁에 들어갈 계획이 있나?” “글쎄요? 아마 한동안은 없을 거 같은데… 그건 왜요?” “크흠흠! 이왕이면 아는 사람끼리 함께하는 게 좋지 않겠나!” 나 스스로도 멋쩍었던 만큼, 그녀에게도 내 속이 훤히 보였을까.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기요,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됐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라.” “싫은데요?” 순식간에 까칠해지는 목소리. 그러고 보면, 얘 성격이 원래 이랬다. 평소엔 얌전하다가도, 간혹 삔또가 나가면 한도 끝도 없이 싸가지가 없어진다. “아니, 대체 절 어떻게 봤으면 바바리안 두 명밖에 없는 팀에 들어오라고 할 수 있어요?” 정정하자면, 두 명조차 아니다. 한 명은 어제 탈퇴했다. 말했다가는 분위기가 더 살벌해질 것 같지만. “…그러니까 못 들은 걸로 하자고 했지 않나!” “이미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하는데요?” 아니, 이게 그렇게 언성을 높일 사안인가? 그녀의 급발진에 어떻게 반응하는 게 나을지 고민하던 차. “하아…….” 참을 인을 마음속에 새기듯,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얀델 씨, 제가 아니더라도 마법사한테 그런 제의를 하라면 팀이라도 제대로 꾸려오세요. 음… 팀원들 전부 6등급 이상에, 신관까지 있으면 좋겠네요.” 니미, 그걸 누가 모르는 줄 아나? 그렇게 상황이 좋았으면 너한테 이딴 제안도 안 했지. “그, 그러겠다.” 하여간 마법사들 콧대 높은 건 알아줘야 한다. *** “그럼 이만 가 보겠다.” “아! 잠깐만요!” 레이븐이 떠나려던 비요른을 붙잡았다. 뒤늦게 물어보지 않은 게 떠올라서였다. “그때! 그때 그건 뭐였어요? 기절한 뱀파이어 입에 쑤셔박았던 거 있잖아요. 신성력이 느껴졌던 거 같은데…….” 스승에게 전해 주려 지난 일을 기록하던 중에 생긴 의문점이었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아무리 봐도 9등급 탐험가가 갖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니었는데. “글쎄, 뭘 얘기하는지 모르겠군.” “네?” “뭔가 착각한 거 아닌가? 워낙 정신없던 상황이었지 않나.” “착각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똑똑히 느꼈단 말—” “이만 가 보겠다.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저기요! 잠깐! 기다려—” 쾅! 뭐라 말을 더 이어 갈 새도 없이 문을 닫고 떠난 비요른. ‘그래, 뭔가 숨기는 게 있단 말이죠?’ 떠난 자리를 보며 인상을 쓰던 그녀가 씩씩거리며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두꺼운 서적 하나를 꺼냈다. [균열총해록 III] 균열에 대한 정보를 합하여 풀어낸 기록. 그런 심플한 제목처럼, 저자의 이름조차 쓰여 있지가 않은 낡은 고서. 어린 시절, 자유 시장에서 우연히 구매한 이 책에는 놀랍게도 학회에도 기록되지 않은 지식들이 담겨 있었다. “핏빛 성채가 몇 페이지였더라…….” 책장을 넘기던 그녀가 한 곳에서 손을 멈췄다. 지하 감옥 파트의 지도. 숨겨진 통로의 정확한 위치. 악마숭배실에서 ‘네크로노미콘’을 얻는 방법 등, 핏빛 성채에 대한 고급 정보들이 적힌 페이지. 애석하게도 읽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여신의 눈물] 입수처 : ——————. [황금 가면] ——— : ——— —. 세월의 풍화로 입수 방법이 지워져 미지로 사라져 버린 두 개의 아이템. 직접 찾아보려 이곳저곳을 뒤져 봤지만, 결국 발견해 낼 수 없었던 그것.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여신의 눈물이라면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대체 어디였을까. 흐릿한 기억을 되짚던 그녀가 종교 관련 서적 몇 권을 꺼내 하나씩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여신의 눈물]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소모성 성물. 파괴 시 해당 위치에 강력한 ‘은총’을 퍼트리는 효능을 갖고 있다. 150년 전, 차원붕괴 당시 안드로네 추기경이 교황을 구하기 위해 세 개를 모두 사용한 것을 끝으로 세간에서 사라졌다. “성물이라고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음 장에 그려진 그림까지 확인했다. 멀리서 봤을 뿐이라 섣불리 확신하기엔 이르지만, 대강 형태도 크기도 비슷한 거 같았다. 심지어 사용 방법과 효과까지도 말이다. “…….” 레이븐은 혼란스러워졌다. 암만 봐도 이게 단순한 우연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제 갓 성인이 된 바바리안은 어떻게 [여신의 눈물]이 숨겨진 위치를 알고서, 곧바로 사용할 생각까지 할 수 있던 것일까? ‘설마, 얀델 씨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그녀는 책을 쥔 그대로 눈을 빛냈다.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45화 선 (2)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배낭 정리를 하던 도중 고민에 잠겼다. 다름 아니라,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금속 재질의 투구 때문이었다. ‘이걸 팔아 말아?’ 이 투구의 게임 내 정식 명칭은 ‘황금 가면’. ‘핏빛 성채’의 보스를 처치한 뒤, 여러 특수 조건을 만족시키면 획득이 가능한 아이템. 효능은 간단하다. 착용자의 얼굴 외형을 커스터마이징 해 준다. 딱 30일간이란 조건이 붙긴 하지만. ‘심지어 사용 제한 횟수도 있는 소모성 아이템이었지.’ 아마 최대 5회까지였던가? 다 쓰고 나면 인벤토리에서 자연스레 사라졌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정확하진 않다. 그도 그럴 게, 처음 입수했던 회차를 제외하면 직접 써 본 적 없던 아이템이니까. 그다음엔 항상 거래소에 팔았다. 한 50만 스톤 정도에. ‘쩝, 그래도 고민된단 말이지…….’ 물론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이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꾸미기 아이템이라니? 2D 픽셀 그래픽의 캐릭터를, 그것도 30일이란 짧은 기간 동안 꾸며서 뭐 하겠는가. 시세가 1만 스톤이어도 파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틀림없는 현실.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일단은 갖고 있자. 당장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니까.’ 게임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다르다. 작금에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있지 않았나. 만약 이 도시를 적으로 돌려야 할 일이 생긴다면, 이 아이템은 더없이 큰 역할을 해 줄 게 분명하다. 어쩌면 다른 이유로 쓸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역시 돈이 최고야.’ 한 번의 고민을 끝내고 나니, 새삼 돈의 소중함이 와닿는다. 아마 이번에 큰돈을 번 게 아니었다면, 분명 나는 판매라는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면 알 수 있듯. 돈이 많으면 선택지가 늘어난다. 그것이 게임이건, 현실이건. 혹은 머나먼 이 세계든 간에. *** “이봐! 그거 들었나? 수정 연합이 해체됐다는군!” 식당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있던 은발의 요정. 다리아 위트엠버 디 테르시아가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관심이 있는 화제의 대화가 들려온 탓이다. “뭐? 수정 연합이 해체가 돼?” 수정 연합. 무수한 숫자의 메세지 스톤을 기반으로 광범위한 연락망을 형성해, 1층 탐험가들에게 다양한 편의성을 제공하며 근 10년 사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탐험가 클랜. “놀랍지 않나? 하룻밤 사이에 멀쩡한 탐험가 클랜 하나가 통째로 증발하다니?” “허! 멀쩡하기는 무슨? 어디 그놈들이 탐험가이기나 했던 적이 있던가?” 그녀가 듣기로, 수정 연합의 구성원은 대부분 세금의 압박에 못이겨 탐험가의 영역에 발을 걸친 일반인들이라고 그랬다. 도시 내에 본업이 따로 있고, 한 달에 하루만 시간을 내서 미궁에 다녀온다던가? 물론 그것만으론 딱히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취지만큼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세금을 내지 못할 위기에 빠져 있던 많은 일반인들이 이를 통해 구원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무튼 좋은 소식이로군! 안 그래도 꼴에 탐험가라고 어딜 가나 설쳐 대는 게 같잖았는데.” 작금의 수정 연합은 변질됐다. 세력이 커지며 외부인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아예 이를 등에 업고 초심자들에게 악행을 일삼는 일도 번번이 벌어졌다. 동생에게 있었던 일만 봐도 그렇다. 천인공노할 짓을 벌이려 한 것도 모자라,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 했지 않나. ‘인정하긴 싫지만, 아마 그 바바리안이 아니었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겠지.’ 안 그래도 그녀 역시 그 사건을 듣고서 언젠가 손을 봐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근데 들어 보니 이젠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됐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바바리안 덕분에. “그나저나 아직 그걸 묻지 않았군. 그래서 왜 갑자기 놈들이 해체가 된 것인가?” “아, 설마 그 소식도 듣지 못했나?” “그 소식?” “자유의 바바리안 말일세!” 이어진 이야기를 몰래 엿듣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탈옥까지 해 가며 직접 누명을 벗어던진 것도 모자라, 지역장 딸내미를 인질로 잡다니? “하도 일이 커지자, 이번 일로 9등급 탐험가들에 한해 적용하려던 약탈자 색출 법안도 흐지부지될 거란 말도 나오는 모양이더군.” 과연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만한 이야기다. 억지로 누명을 씌었다는 자는 벌써 형장에 올라 목이 매달렸으며, 그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수정 연합조차 지난 행태에 책임을 묻고 철퇴를 맞고 있다는 듯하니까. 다만……. “근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아나? 그 바바리안이 고작 9등급 탐험가란 것일세! 즉, 성인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지!” 성인식을 갓 마친 9등급 탐험가. 왠지 이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 명이 떠오른다.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바바리안. ‘설마, 그런 우연이 있으려고…….’ 그녀는 잡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가게를 떠나 숙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바바리안, 정말 죽은 걸까?’ 지금까진 정황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방금 들었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라면……. ‘그럼 이틀 동안 숙소에 돌아오지 못한 것도 설명이 되긴 하는데…….’ 이걸 과연 동생에게 말해 줘도 되는 걸까? 철컥. 그러한 고민 속에서 방문을 열자, 눈에 띄게 수척해진 동생이 보였다. 침대에 앉아 눈을 감고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꽃 세 개를 다루고 있었다. 미궁에서만 해도 두 개가 한계였는데……. “아, 언니, 왔어?”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령을 소환하고 있던 거니?” “응,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릇이 넓어지니까…….” 그 말에 그녀의 입매가 굳었다. 수련법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이는 그녀가 알려 준 것이었으니까. 다만, 동생은 지금까지 이렇게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인 적이 없었다. “있잖아 언니, 나 불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 “뭐……?” “이제야 알겠어.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 왜 그동안 내가 약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항상 어딘가 기죽은 듯한 모습으로, 말할 때 늘 시선을 피하던 동생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거야.” 갈라진 목소리에서는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나만큼은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기. 비로소 동생에게 가장 부족했던 한 가지가 채워졌다. 무엇이 변화의 원인인지는 분명했다. 그렇기에 다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설령 그 이야기가 사실이더라도… 지금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10년 전, 그때도 그러했듯이. 이는 모두 소중한 동생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 정오가 지난 시각. 마탑 근처 탐험가 길드에 방문했다. 솔직히 당분간은 근처에도 오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긋지긋한 일을 겪었지만……. 어제 새롭게 하달받은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수준에 맞는 동료를 찾고 있다.” “원하시는 형태가 있으십니까?” 쓸데없는 말없이 빠르게 본론만을 물어오는 길드의 행정원. 나는 고민 없이 답했다. “3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최소 4인 이상으로 이루어진 팀을 원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단순히 아이나르의 빈자리를 메꾸는 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오히려 7등급 탐험가로 승급한 걸 이용해, 최대한 실력 있는 팀에 들어가 효율적인 탑 공략을 해나갈 계획이다. ‘뭐, 괜찮은 팀이 있다는 가정하의 얘기지만.’ 이내 절차대로 미리 작성한 신상명세서와 함께 신분패를 내밀었더니, 졸린 눈빛이던 행정원이 흠칫했다. 그러곤 묘한 눈길로 몇 번이나 확인했다. “…별이 다섯 개?”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묘하게 기합이 들어간 듯한 행정원. 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말투가 친절해진 것 같기도 하다. “비, 비요른 얀델 탐험가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팀들 목록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5분도 되지 않아 모두 끝난 일 처리. “꽤나 적군?” “매, 맹세코 길드에 접수된 모집 공고 중에 조건에 맞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누가 뭐라던가? 그냥 그렇다고 한 건데, 왜 이런 거에 맹세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흐음.” 길드원이 뽑아 준 서류에는 총 열다섯 팀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일단 첫 번째부터 읽어 보자면……. [3층 탐사 - 엘런 보르네프] 선호 탐사 구역 : 황혼의 비탈길, 강철바위 언덕, 칠흑의 강어귀. 평균 등급 : 7등급. 현재 인원 : 근접 타격계 인간 전사 2인(7등급), 근접 타격계 수인 전사 1인(7등급), 근접 타격계 드워프 전사 1인(7등급). 모집 인원 : 근접 타격계 전사 1인. *균등 분배. *요정 사절. *전후 회식 참가 필수. *희망 시 탐사 중 음주 가능. 대체 뭐야, 이 팀은. 글자만 읽었을 뿐인데 벌써 땀내가 진동하는 거 같다. 식겁하며 다른 팀들의 모집문도 읽고 있어 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팀은 찾을 수 없었다. 멤버가 좋으면 배분비가 짜고, 배분비가 좋으면 팀 멤버 구성에 어딘가 문제가 있는 식. ‘…공고문에서도 그게 보일 정도면 실제로는 더 막장이겠지.’ 아마 내 경력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팀을 찾는 일이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최대 도달 층이 2층이라는 것. 흔히 말하는 초행자만 아니었다면, 선택 가능한 폭이 훨씬 넓어졌을 테니까. 이렇게 대놓고 낮은 배분비로 눈탱이 씌우려는 팀도 없었겠지. ‘귀찮게 됐군.’ 맘 같아선 차라리 직접 모집 공고를 올려서 멤버들을 구성하고 싶지만……. 그래 봤자 아무도 안 오겠지? 오는 애도 정상은 아닐 테고. ‘어차피 오늘 하루만에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치 않았으니까.’ “원하는 팀이 있으신지요?” “오늘은 딱히 보이지 않는군.” 고개를 내저으며 서류를 돌려주자, 행정원이 마치 NPC처럼 뇌까렸다. “저런, 그러십니까?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비요른 얀델 님의 정보를 다른 팀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그건 됐고, 다음에 다시 오지.” “아, 그러시겠습니까? 언제나 탐험가에게 친절한 길드원 테르베스였습니다.” 분명히, 그는 목소리도, 말투도, 행동도 전부 친절했다. 업무 수행 능력 역시 군더더기 없었고.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탐험가님!”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 왠지 모를 찝찝함을 뒤로하고 탐험가 길드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던 차. 골목 모퉁이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한 명의 바바리안 때문이었다. 탁. 덥수룩한 수염. 여기저기 헤지고 오물이 묻은 하의. 바바리안이란 종족 자체가 대부분 거지꼴을 하고 다니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골목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바바리안. ‘뭐지?’ 보자마자 딱 하고 위화감이 피어났다. 숙소는 따로 썼지만, 평소 바바리안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기에 느낄 수 있던 위화감. 아무 데나 자리 잡고 쉬는 건 바바리안이니 그러려니 하더라도. ‘대체 왜… 무기가 없지?’ 무기가 없다. 이는 아주 심각한 모순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배 고프고 추워도, 무기 하나만큼은 자기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바바리안이란 족속들이니까. 대부분의 호기심은 무시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봐.” “…힉, 히이익!” 벽에 기대 졸던 바바리안은 나를 발견하고는 크게 식겁하며 당황했다. 뭐,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건 생물로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타 생물 기준에서고, 용감무쌍한 우리 바바리안은 그딴 짓을 하지 않는다. ‘씨바, 이 새끼 설마…….’ 형체 없던 위화감이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심장이 덜컹했으나,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음, 우선 경계심부터 줄여야겠군. “겁먹지 마라 해치지 않으니.” 적이 아니란 증거로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강제로 손에 쥐어졌다. 바바리안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 물론 그는 받기만 할 뿐, 내가 보는 앞에서 육포를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적어도 눈빛에 새겨진 경계심은 조금이나마 허물어진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뭐, 이 정도면 대화는 가능하겠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던 거지?” “그, 그게 저기… 도, 돈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창기의 바바리안에게 돈이 없는 것. 이건 그럴 수 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무기는 어떻게 하고?” “파, 팔았습니다…….” 무기를 판 것도 모자라서 존댓말이라…….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리, 리옌의 아들 타, 타리칸이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그였지만, 그래 봐야 늦었다. 이미 나는 확신했다. “만나서 반갑다! 리옌의 아들 타리칸!” 이 녀석, 악령이다. 그것도 이 세계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46화 선 (3) 타리칸 리옌. 물론 이게 얘의 본명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우선 뭔가 입에 물려 주면서 얘기를 하는 게 좋겠군.’ 숙소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일단 그를 내 방으로 데려온 뒤 1층에서 밥부터 사다 먹였다. 참고로 메뉴는 300스톤짜리 요일 정식. 닭 스튜와 빵 몇 조각, 그리고 구운 채소 몇 가지가 식단의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더없이 감격해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이 은혜는 저, 절대 잊지 않겠다!” 후, 대체 이 어설픈 바바리안 말투는 뭐지? 그래도 이제 좀 정신을 차린 듯해서 다행이긴 한데, 이왕 할 거면 더 제대로 하던가. 자신감도 결여됐을뿐더러, 목소리도 작다. 우리 바바리안은 누가 먹을 걸 사 줬을 때 훨씬 더 힘차게 기뻐한단 말이다. ‘…그래도 밥은 잘 먹네. 많이 굶어서 그런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운 그를 보며 나는 남몰래 씁쓸하게 웃었다. 식사를 끝낸 이후에 나눈 짧은 대화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설마, 뉴비가 아니었을 줄이야…….’ 놀랍게도 이 남자는 나보다 선배였다. 고작 한 달 차이긴 하지만. 그는 내가 비요른의 몸에서 눈 뜨기보다 한 달 먼저 이 세계에 불려왔다. 참고로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서, 성인식? 아, 그때는 정말이지 놀랐다. 설마 우리 중에 아, 악령이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나?” ‘악령이 나왔다라…….’ 공교롭게도, 이 남자와 나는 시작이 비슷했다. 그의 성인식 때도 악령. 즉, 플레이어가 부족장의 손에 의해 처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드는 의문점 하나. ‘얘는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았지?’ 성인식 때는 이름을 호명한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악령은 이 몸뚱아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부족장이 호명할 때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속으로 숫자를 세야만 했다. ‘…근데 설마 그 지랄 안 떨었어도, 딱히 의심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건가?’ 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얘도 나랑 비슷한 공략을 써서 의심받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왠지 궁금해져서 은근슬쩍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조금 허무한 대답이었다. “성인식 때 몇 번째로 호명됐냐고?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지만…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렇구나. 마지막 순번이었던 거구나. 그럼 자기 이름이 뭔지 알 필요도 없었겠네. 남은 전사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운이 좋았단 생각밖에 안 들지만, 그는 본인의 운이 좋았다는 걸 인지조차 못하는 듯했다. 거 참, 얄밉게.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됐나?” “어, 어떻게 됐냐니? 그게… 왜 궁금한 것인가?” 왜긴 왜야. 나도 악령이니까 그러지. 자료 조사다, 자료 조사. “들어 보고 사정이 딱하면 내가 도와줄지도 모르지 않나.” 일부러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내가 도와주는 게 기정사실처럼 인식이 됐을까. “그, 그렇군! 그럼 한번 얘기해 보겠다!” 그는 기대에 찬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타리칸 리옌이란 몸에서 눈을 뜬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들어 보니 딱하다기엔, 자업자득인 면이 강했다. “…성인식을 마치고서 미궁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그, 그게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일단, 그는 미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렸단 변명을 대긴 했지만……. ‘그건 이쪽에서 걸러들으면 될 부분이겠고.’ 아마 괴물이랑 싸운다는 게 미친 짓처럼 느껴졌단 게 진짜 이유였겠지. 반면 잔뜩 흥분한 바바리안 무리에서 이탈하는 건 몹시도 손쉬운 일이었을 테고. 문제는 그다음이었겠지만. 도시에 남겨진 그는 돌빵을 먹으며 일주일을 버티며 일자리를 구하려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바바리안이란 이유로 그를 써주지 않았다 ‘사실상 바바리안의 최대 단점이지.’ 다른 이종족들은 겸업이 가능하다. 일례로 주점만 가봐도 서빙을 하는 수인이 있고, 대장간에 취직한 드워프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그들은 미궁이 열리는 날엔 마석을 캐고, 도시에서 보내는 한 달 동안에도 일을 하며 돈을 수급한다. 전투 외에는 선택지가 전무한 바바리안과는 다르게. “한데 그 사실을 몰랐나? 성지에서 전부 배우는 내용일 텐데?” “그, 그게… 그때 잠시 까, 까먹었다! 그리고 아, 아까 말했지 않나! 길을 잃어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니까, 그게 구라인 걸 아니까 그러지. 애초에 나도 성지에서 배우는 내용이니 뭐니 했지만, 게임을 해 봤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설정이 아니냐고 돌려서 물어본 거였다. ‘근데 이런 대답이라니…….’ 슬슬 의구심이 든다. 정말로 ‘악령’이란 마지막 층의 ‘심연의 문’을 연 존재들을 말하는 게 맞는 걸까? 그 정도 실력자라면, 당연히 바바리안의 설정도 알아야 했을 텐데. “…그래서 계속 얘기해도 되나?” “아, 미안하군. 계속해라.” 여하튼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그는 시작 무기를 5만 스톤에 판매했다. 구매자가 누군진 몰라도 참으로 약아빠졌다. 바바리안 시작 무기가 평균 15만 스톤은 하는 걸로 아는데. ‘뭐, 정말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겠다마는.’ 푼돈이나마 갖게 된 그는 어찌어찌 그걸 아껴가며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미궁 진입 시기. 다시 말해,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나 미궁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던 그날. “허! 그날에도 미궁에 들어가지 않았다니? 제정신인가?” “하지만 무기도 없이 어떻게 괴물과 싸운단 말인가!”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그냥 들어갔어야지. 당신도 명색이 ‘심연의 문’까지 도착한 플레이어였을 거 아니야. 그 정도 판단도 못해? “게, 게다가 그날은 뭘 잘못 먹었는지 배도 아팠다!” ‘이건, 진짜 할 말이 없게 만드네.’ 머리가 복잡해진다. ‘정말 그 게임을 플레이해 보긴 했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놈을 포함해 악령들이 전부 나와 같은 지구 출신인지도 잘 모르겠다. 몬스터가 존재하고,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 아닌가. 악령 중에 다른 외계 차원에서 불려온 자가 있다는 설정도 가능은 할 것이다. “아무튼 계속 얘기해 봐라.” 별다른 점은 없을 듯했지만, 일단 꾹 참고 남은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내 예상과 큰 차이는 없었다. 돈이 떨어지고, 여관에서 쫓겨나고, 굶주림과 추위, 병마와 싸우는 나날이 이어지고. 어느 날은 바바리안들이 모여 있는 숙소의 존재를 알고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한번 가 봤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배척당하고……. “그러고 보면 너는 참 특이하다! 다들 나를 이상하게만 보던데.” 솔직히 말하면, 난 얘가 더 신기하다. 어떻게 이리도 설렁설렁 행동해 놓고 세 달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아니, 바바리안인 척 연기해야 된다는 걸 혼자 깨달은 것만으로도 기특해해야 하는 건가?’ 그가 택해 온 선택지들 하나하나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피어났다. 만약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마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 그날, 싸우는 게 두려워 도망치길 택했다면. “…근데 여기는 하루에 얼마쯤 하나?” 지금쯤 나는 창문과 개인 욕조가 있는 여관이 아닌 길거리에서 자야 했을 것이다. 또한, 스프도 아닌 돌빵조차 먹지 못해 쓰레기통을 뒤적거려야 했을 것이며— “아, 아! 그래서 어땠나 내 이야기는? 딱하지 않았나?” 이처럼 스스로의 불우함을 토해 내며, 타인의 동정에 기대야 하는 일도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확실히 딱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도와주는 건가?” 순식간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낯빛. “무, 물론 은혜는 갚을 것이다.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는 미궁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나와 함께 다니면 너에게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도움이 될 거라고? ‘저리 말하는 걸 보니, 그래도 이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기는 한가 본데…….’ 그의 머릿속 희망 회로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까지 얼추 느껴진다. 분명 나와 함께 미궁에 들어가 한 팀이 되는 것까지 상상하고 있겠지. 제 딴에는 정말로 보답하겠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는 내 진짜 정체를 모르니까. 하지만 미리 딱 잘라 선을 긋자면— “내가 너와 함께 미궁에 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런 미래는 맹세코 없다. 내 코가 석자인데,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란 이유 하나로 짐짝을 달고 미궁에 들어가라고? 그런 미친 짓을 내가 왜 한단 말인가. “아까는 분명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약간의 울분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억지로 다시 삼켰다.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겠다.” “다른 방식?” “자, 여기 15만 스톤이다. 이걸로 무기를 사서 미궁에 들어가라.” 5만 스톤짜리 화폐를 3개 꺼내 손에 쥐여주자, 그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정말 이걸 그냥 주는 것인가? 고맙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정말 갚을 거라곤 기대도 않는다. 애시당초 이 돈이 있어 봐야 저 마음가짐으로는 오래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이니까. 내가 직접 겪은 미궁은, 단순히 게임 지식이 있다고 쉽게 헤쳐나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15만 스톤을 쥐여주었다. 그 행위가 내게 어떤 이익도 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그에게 돈을 건넸다. “그럼 피곤하니 이만 나가 보겠나?” “아, 그, 그런가! 알겠다! 다음에 다시 오겠—” “오지 마라.” 나는 그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끔, 목소리를 깔고 한 번 더 말했다. “리옌의 아들 타리칸, 돈을 날리든 잃어버리든 미궁에서 살아남든 돈을 많이 벌든, 설령 일이 잘 풀려 은혜를 갚을 여유가 생겼던—” 내가 다가가 어깨를 잡자, 그가 움찔했다. 당혹스러워하는 감정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외의 어떠한 이유든지 간에 마찬가지다. 오늘 이 방을 나가고서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그리고 이해했다면 대답해라. 알겠나?” “…알겠다.” 확답을 듣고 난 뒤, 반강제적으로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침대에 대자로 뻗어 방금 전 내 행동을 곱씹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건가?’ 어쩌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던 과거가 떠올랐던 걸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가 봐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했군.’ 분명 계산적인 누군가는 이런 날 보며 미련하다고 여길 것이다. 감정적인 누군가는 돕는다는 게 고작 이것뿐이냐며 약았다고 느낄 것이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선에서 멀찍이 물러날 냉정함도, 선을 넘어갈 무모함도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어진 선 위에서 우뚝 멈춰 버렸다. ‘분명 이런 게 위선이란 거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무리 오늘 한 내 행동이 위선에 불과하더라고 한들— “타리칸, 되도록이면 오래 살아남아라.” 이게 내 최선이었다. 돈조차 없었다면 결코 오늘의 내가 택할 수 없었을. *** 다음 날 아침. 어제 방문했던 탐험가 길드 지부에 한 번 더 방문했다. 아쉽게도 응대해 주는 직원은 달랐지만……. “별 다섯 개……?” 신분패를 확인한 여직원은 어제의 직원처럼 순식간에 낯빛을 달리하더니 친절하게 응대를 해주었다. 대체 뭐야 이거. 설마 지역장 내 신분패에다 뭔가 해 놓은 건가? 궁금해져서 직원을 캐물어봤지만, 확실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별이라니요? 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거,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는. 나도 더 깊게 캐묻진 않았다. 뭐, 길드에서만 사용하는 암호 같은 거겠지. VIP나, 진상한테 붙거나 하는 그런 거. 문득 어느 쪽 취급일지가 궁금해졌지만……. ‘어느 쪽이던 나야 이득이지.’ VIP면 어떻고, 특급 진상 취급이면 또 어떤가. 친절한 응대를 받을 수 있단 결괏값은 똑같을 텐데. “말씀 주신 조건에 맞는 팀 목록입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탐험가님?” 어제 조건 그대로 오늘 자 공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새로운 팀 몇 개가 추가된 걸 제외하면 거의 변함 없는 내용. ‘오늘은 좀 제대로 된 팀을 찾을 수 있으려나?’ 추가된 팀을 중점으로 서류를 살피던 나는 한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익숙한 이름이 보인 탓이었다. [3층 탐사 - 히쿠로드 무라드] 선호 탐사 구역 : 없음, 추후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 평균 등급 : 미정. 현재 인원 : 근접 방어계 드워프 전사 1인(7등급) 모집 인원 : 4인(역할군 무관, 팀원 구성에 따라 상이해질 수 있음) *균등 분배 ‘팀장 이름이 히쿠로드 무라드?’ 종족이 드워프인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동명이인은 아닌 듯한데……. ‘원래 팀은 해체된 건가?’ 이유야 어쨌든, 나쁘지 않다. 아직 멤버가 한 명도 없는 건 조금 그렇지만, 적어도 팀장은 제법 믿을 만한 자 아닌가. ‘핏빛 성채’에서 먹었다는 넘버스 아이템이 뭐였을지도 궁금하고. ‘일단 한번 만나 보기는 해야겠군.’ 이후 신청서를 짧게 작성해 행정원에게 제출한 뒤, 건물에서 나와 그 길로 상업 지구로 향했다. 아마 빠르면 내일, 늦어도 내일모레에는 만남이 주선될 터. ‘그럼 그전에 현질이나 좀 해 볼까.’ 나는 확신했다. 근래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어… 근데 즐거웠던 적이 있긴 한가?’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47화 동료 (1) 순수 마석 환전으로 23만. 노랑머리 4인 파티의 장비값이 80만. 길드에서 받은 합의금 500만에 추가 공갈로 얻은 100만. 거기에 여관 주인에게 받은 배상금 3만까지. ‘황금가면이 50만 스톤 정도 하긴 하지만… 이건 갖고 있기로 했으니까 패스하고.’ 이 값에서 아이나르에게 배분한 30만 스톤과 어제 땅에 버린(?) 15만 스톤을 빼면 현재 내 재산이 나온다. ‘661만 스톤이라…….’ 사실상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한다는 계산하에, 앞으로 3년은 미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의 거액. 물론 비교적 세금이 낮은 초반부이기에 가능한 계산이지만 아무튼. ‘여기서 한 달 생활비로 넉넉하게 7만 스톤을 더 빼면… 실질적인 총 예산은 654만 스톤 정도겠네.’ 전날 밤, 미리 작성해둔 쇼핑 리스트의 품목들을 떠올리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뭐, 정말 목적지까지 걸어갔다는 뜻은 아니고. “2구역으로 향하는 10인용 마차 맞으십니까?” “맞다.” 공용 승강장에 도착한 나는 500스톤의 요금을 지불하고 10인용 마차에 올라탔다. 원래 인당 요금은 250스톤이 정가지만……. 바바리안은 몸집이 커서 한 명이 더 탈 수 없다는 게 그 이유. ‘제기랄.’ 왠지 분했다.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는 이유라서 더욱더. “도착했습니다.” 좌석에 앉아 침 흘리며 자고 있자니, 상업지역 컴멜비의 북반구, 제2구역에 도착했다. 소요된 시간은 약 4시간. 만약 1구역 왕도 카르논을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면 절반으로 단축됐을 테지만……. ‘지금 내 명성 수치로는 택도 없겠지.’ 우선 근처 식당에서 대충 끼니부터 때운 뒤, 미리 구매한 도시 지도를 따라 목적지로 향했다. 찾는 건 생각 보다 더 쉬웠다. 얼마 걷지도 않아서 저 멀리 으리으리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알미너스 중앙 거래소] 게임을 할 때 가장 애용했던 시설 중 하나. 중앙 거래소. 직접 발품을 팔며 도시를 헤멜 필요가 없고, 특정 물품을 찾기가 편리하단 장점이 있다. 대신 이용료가 붙지만. “위탁 판매 등록이십니까?” “아니다. 물품을 검색하러 왔다.” 번호표를 뽑고서 잠시 기다린 뒤, 미리 작성한 서류를 거래소 직원에게 제출했다. “기준에 적합한 물품은 총 12개입니다.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참고로 품목 하나당 검색 이용료는 3천 스톤. 이를 지불하고 잠시 기다리자 직원이 몇 장의 서류를 꺼내서 가져다줬다. “내용을 확인하신 뒤 저쪽 직원에게 원하는 물품을 말씀하시면 실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게임에선 그냥 구매 버튼만 누르면 됐는데, 실제로는 이런 방식인 거구나. 이런 시스템이면 이용료가 생기는 것도 수긍이 간다. 인건비가 붙으니까. ‘아무튼 일단 확인해 볼까.’ 근처에 수두룩 빽빽인 다른 이용자들처럼, 빈자리에 앉아 서류를 확인해 보았다. 조건에 맞는 물건이 12개밖에 안 됐기에 전부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기 이 물건을 한번 보고 싶은데.” 목록 중에 가장 합리적인 가격인 물품을 선택한 나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보관소로 향했다. 그리고 하자가 있는지 여러 차례 확인을 한 뒤, 망설임 없이 현금으로 구매했다. [확장형 배낭] 수납 넓이 : 8급 형태 : 표준 중형 배낭 마법 부여 : 자동 정리, 개별 출납, 경량화(하) 판매가 : 250만 스톤 확장형 배낭. 흔히 말하는 아공간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현재 내 재산 수준에선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일단 수납 넓이가 8급만 돼도 내가 쓰던 특대형 배낭의 3배 사이즈는 될뿐더러……. ‘마법 부여 3종 세트가 다 붙어 있지.’ 따져보면 전부 그만한 가치를 한다. 넣은 물건을 최적의 형태로 보관해 주는 ‘자동 정리’는 백번 양보해서 뺄 수 있다고 한들. ‘경량화’는 필수 항목에 가깝다. 생각해 보아라. 공간이 아무리 넓어져 봤자 무게가 그대로라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개별 출납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편리하자고 구매한 확장형 배낭이다. 근데 ‘개별 출납’ 기능이 없으면 무조건 집어넣은 순서대로 후입선출 해야만 한다. ‘게임에서도 그렇게 불편했는데, 실제로는 장난 아니겠지.’ 뭐, 배낭 형태인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것일 터.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하며, 구매한 배낭을 짊어 메고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물품들도 검색했다. 이제 남은 예산은 약 400만 스톤. 「캐릭터가 확장형 배낭을 착용했습니다.」 「인벤토리가 크게 늘어납니다.」 이 정도면 편의성은 챙길 만큼 챙겼으니, 실질적인 무력을 올려 볼 차례다. *** 400만 스톤. 강철 재질의 판금 갑옷을 풀세트로 맞추고도 남으며, 불사자 각인을 받으면 한 번에 3단계까지 올릴 수 있을 만큼의 거액.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선택지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고르지 않았다. 그야,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P) 어둠의 근원 — 심장이 온전할 시 죽음에 저항합니다. 예정에 없던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난 심장만 멀쩡하면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즉, 불사자 각인을 강화하거나, 각반 같은 파츠를 맞추겠단 선택은 아무래도 금전 대비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셈. 심사숙고 끝에 나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차라리 장비의 티어를 올리자.’ 흔히 말하는 상위 티어tier. 즉, 1단계 금속인 강철 대신 2단계 금속을 소재로 한 장비를 구매하기로. 「캐릭터가 라이티늄제 흉갑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270 상승합니다.」 라이티늄. 일반 강철보다 2배가량 가볍고 단단하다는 성질을 가진 2단계 금속 중 하나. 특징으로는 금속이 하얗다는 것과 지랄맞게 비싸다는 것 정도일까. ‘흉갑 하나에 191만 스톤이라…….’ 거래소를 통해 구매한 흉갑의 형태는 고철값만 받고 팔아넘긴 강철제 하프 아머와 동일했지만, 값은 다섯 배 이상 비쌌다. ‘하긴, 4층 탐험가쯤 돼야 쓰는 게 2단계 소재이니 당연한 건가?’ 여러 부위의 장비들 중, 흉갑을 최우선으로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심장을 안전하게 보호할수록, 패시브 스킬 [어둠의 근원]의 이점이 극대화되니까. 이러나저러나 안전이 최고이기에, 여기까지는 어떠한 이견도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두 번째 장비는 구매를 확정하는 순간까지도 고민이 이어졌다. 「캐릭터가 라이티늄제 대형 전투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15 상승합니다.」 무기를 바꾸느냐, 아니면 고철값만 받고 팔아치운 방패를 새로 구매하느냐. 고심 끝에 210만 스톤을 주고 방패를 구매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핵심만을 꼽자면……. ‘이제 굳이 내가 딜을 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까진 2인 팀, 듀오로만 미궁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더 위층으로 향하려면 최소 4인 이상의 팀 플레이를 해야만 한다. 즉, 방패를 들고서 인간 장벽이 되어 동료를 지키는 쪽이 효율적이라는 뜻. ‘뱀파이어 정수가 딜러 포지션의 정수도 아니고 말이지.’ 무엇보다, 무기와 달리 방패는 ‘그 정수’를 얻고 나서도 계속해서 쓸 장비일뿐더러……. 이제 방패가 없으면 허전하다. 뭐, 대신 주머니가 텅텅 비긴 했지만. ‘음, 이제 슬슬 장비에 광이 나기 시작하는군.’ 왜인지 거울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풍족해졌다. 이것도 바바리안이 되며 생긴 변화일까? *** 「비요른 얀델」 레벨: 3 육체: 199.1 / 정신: 105.3 / 이능: 152.4 아이템 레벨: 699 (New +585) 종합 전투 지수: 631.55 (New +146.2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 합리적인 소비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시간대였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끼니를 한 번 더 때우고서 마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13구역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끝났다. ‘이동 시간이 이렇게 길어서야…….’ 나중에 정말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중심 구역 쪽으로 이사를 가든가 해야지. 외곽에 살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 좀 안쪽으로 오긴 했지만, 아직도 차원광장까지도 한참을 가야 하고. ‘결국 문제는 전부 돈인가…….’ 오늘 큰 소비를 한 만큼, 돈을 벌자는 각오를 다잡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당장 처리할 만한 건 끝냈으니, 슬슬 거기에도 다시 가 볼까.’ 성실한 바바리안답게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 남는 시간엔 노가다를 하는 게 한국 게이머들의 습성이다. 뭐,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기에 할 수 있는 노가다겠지만. 나는 아직 이곳의 상식과 지식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집을 구하게 되면 도서관이랑도 가까우면 좋겠네.’ 책은 영혼의 양식이다. 애초에 거래소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던 것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책 제목이 뭐였더라?’ 제목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10년간 거래소 물품 평균 거래가를 적어 둔 책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읽는 게 빡세긴 했지만, 시세를 익히기에 이보다 좋은 교과서가 없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자니,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와 변한 부분은 없었다. 건물 전체에서 진동하는 책 냄새도, 나보다도 일찍 도착한 수많은 안경 멸치도, 카운터에 앉아 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사서도. “오랜만이군.” 마지막에 봤을 때처럼 인사를 건네자, 사서가 나를 보더니 묘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곤 작게 한 마디를 중얼거린다. “…어떻게?” 아, 그걸 봐 버린 건가. “후후, 라이티늄제 갑옷과 방패다. 합쳐서 400만스톤을 줬지. 아, 그리고 등에 멘 이건 확장형 배낭이라는 건데—” “파르시티에브.” 음, 여전히 농담도 안 통하네. 마법만 걸어주고서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만성피로의 사서를 뒤로하고 도서관 안으로 향했다. 근데 좋은 장비를 껴서인가? 평소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대부분 경외의 시선이 담겨 있다. 확실친 않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창피해지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장비를 끼고 도서관에 온 건 역시 좀 그랬나?’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럼 또 어떤가. 나는 바바리안인데. 그냥 신경 끄고 내 할 일이나 하기로 하며, 키워드를 떠올린 채 책들을 한가득 뽑았다. [탐험가 길드의 설립과 발전] [약탈자 판결문 사례집 III] [법률 용어 사전 독해록] [모즐란의 탄생] [……] [……] 이번에 누명 쓰고 뒈질 뻔해서일까? 아무래도 탐험가 길드나 왕실 직속 기관, 법률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게임계에서도 유명한 격언이 하나 있지 않은가. 모르면 맞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배우는 수밖에. 꼬르륵-! 약 4시간 간격으로 밖에 나가 끼니를 챙겨 먹으며 책을 읽고 있자니 또다시 날이 저물었다. 아직 못 읽은 책은 내일 다시 읽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탐험가 길드. 내용으로는 히쿠로드 무라드가 나와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내일 도서관은 못 가겠군.’ 약 1시간 정도, 마른 천으로 방패와 흉갑을 닦은 뒤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 *** 일찍 일어나 봤자 시간이 뜨기에 간만에 늦잠을 잤다.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간단하게 몸을 씻고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딸랑-! 여관 겸 식당 겸 주점을 겸하는 가게. 1층 홀에 들어서자, 꽤나 많은 이가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게 보인다. 나는 한참이나 실내를 둘러본 끝에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하여간 난쟁이놈들은 원체 작아서 보이지가 않는다니까? 얘네들은 앞으로 그냥 서서 먹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닌가. “오랜만이군, 히쿠로드.” “하! 정말 자네가 맞았군! 7등급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긴가민가 했네마—”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난쟁이놈이 날 보고는 갑자기 흠칫한다. “아니, 자네 대체 그 장비는 뭔가?” 아, 역시 너도 봐 버린 거구나.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 이거? 이 하얀 광채를 보면 알겠지만, 라이티늄제 갑옷과 방패다. 그리고 등에 멘 이건 확장형 배낭이라는 건데, 별건 아니고 이번 기회에 하나 샀다.” 정말로, 별거 아니다. 48화 동료 (2) 잠시간의 침묵이 끝난 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난쟁이놈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군……?” 당혹스러우면서도 놀랍다는 듯한 반응. “뭘 그리 놀라나? 이런 건 너도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닌가!” “그건 그런데… 자네 성격이 원래 이랬나?” 글쎄, 얘가 나에 대해 뭘 아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주접질은 이만하면 됐겠지. 난쟁이놈 정도 짬이면, 슬쩍 흘린 이 정보만으로도 내 장비 수준에 대해 감이 올 테니까. ‘이 정도면 내 경력이 아무리 짧아도 배분비로 장난칠 생각은 못 하겠지.’ 물론 공고엔 분명 ‘균등 분배’라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핏빛 성채에서 전리품을 다 양보하는 대신 균열석만이라도 갖겠다 했을 때, 욕심을 부린다며 눈알을 부라리던 저 난쟁이놈의 표정을. ‘결국 아무리 사람 좋아 보여도 탐험가는 탐험가니까.’ 이런 자리에서 한번 얕보이면 밑도 끝도 없다. 따라서 앉아도 되냔 물음은 생략한 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툭 뱉었다. “히쿠로드, 술은 네가 사라. 내 덕분에 넘버스 아이템을 얻지 않았나.” 은연중 능력을 과시하며 빚을 되새기는 멘트. “뭣? 흐하하하핫! 그게 그렇게 되나?” 난쟁이놈도 크게 웃을 뿐 부정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핏빛 성채’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건 나였으니까.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술이야 얼마든지 사겠네. 밀린 얘기는 마시면서 하지!” “좋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려면 한참 걸릴 듯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먼저 나온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두를 뗀 것은 난쟁이놈이었다. “신청서를 낸 게 자네란 걸 알았을 때 엄청나게 놀랐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혹시 그 균열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던 건가? 분명 그 마법사 아가씨가 다 둘러봤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쏟아지는 질문들. 하기야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저게 당연한 질문이겠지. 솔직히 답해 줄 만큼의 의리는 없겠다마는. “뭐, 대충 그런 거다.” “그게 무슨 뜻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게!” “네 말대로 그곳에 보물이 있었다. 그게 끝이다. 더 이상은 묻지 마라.” 딱 잘라 선을 긋자 난쟁이놈이 입맛을 다셨다. 더 물어봤자 대답을 듣기 어렵다 판단한 모양. “대체 무슨 보물을 얻었는진 모르겠네마는, 자네도 참 운이 좋군.” 운이 좋기는? 애초에 ‘핏빛 성채’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돌아간 건 이놈이다. 나는 죽을 고생이라도 했지. 얘는 딱 1인분만 하고서 넘버스 아이템을 홀랑 챙겨 나갔지 않은가. ‘뭐가 드랍됐는지도 궁금한데… 그건 이따가 천천히 물어봐도 되겠지.’ 슬슬 주문했던 식사도 나왔기에, 나머지 이야기는 배를 채우면서 진행했다. 일단 시작은 이것부터. “그래서 팀원들은 좀 모였나?” “딱히 마음에 드는 자가 없어서, 만나 보는 건 자네가 처음일세.”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바바리안답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가 만들어진 진짜 목적. “그래서 어쩔 생각인가?” 히쿠로드 무라드는 과연 날 팀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음, 그게…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네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나왔던 게 크네. 팀원을 구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한 번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 아, 일단 3층이라 적어 두긴 했네만, 사람만 잘 모이면 4층까지도 올라갈 생각이어서 말이지…….” 쓸데없이 말이 길다. 처음엔 날 팀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단 말 한마디면 충분할 텐데. “그래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나?” 빤히 응시하며 묻자, 난쟁이놈이 엄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크흐흠, 그렇다고 할 수도 있네. 그도 그럴 게, 누가 지금의 자네를 보고 초심자라 생각하겠나? 애초에 초심자가 끼면 나머지 팀원을 구하기 어렵단 부분만 아니었어도, 고민하는 일조차 없었을 걸세!”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할 바에, 그냥 처음부터 이런 얘기를 안 했으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그런 약은 머리가 없는 것도 이 드워프란 종족의 매력 중 하나겠지.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하하핫!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이내 술잔을 들자, 난쟁이놈도 따라서 들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겠네.” 팀이 생겼다. 아직은 두 명뿐이지만……. 그거야 뭐, 앞으로 같이 상의하는 척하면서 내 입맛대로 잘 뽑으면 되겠지. *** “히쿠로드, 아까 몇 명이 신청했다고 말했지 않나.” “그랬네마는?” “어떤 자들이었나?” “그거? 자네가 신경 쓸 것 없네. 8등급에 고작 1년 차도 안 된 애송이들이었으니까.” 뭐지? 날 돌려까는 건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난쟁이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묻지 않았군! 자네는 어떻게 이리 빠르게 승급할 수 있던 건가? 시체골렘 정수 하나만으로 7등급을 받기는 어려울 텐데?” “시체골렘 정수 하나라니?” 중얼거리고서 뒤늦게 아차했다. 맞다, 그때 기절해 있어서 얘는 모르지, 내가 뱀파이어 정수를 먹은 거. 음, 근데 그 이야기를 그냥 해 줘도 되나? 내적 갈등이 깊어지던 때. “아하! 그렇군!” 돌연 난쟁이놈이 유레카를 외쳤다. “흐하핫! 내 생각이 짧았네! 하긴, 그 정도 장비면 7등급으로 승급할 만도 하지!” 아, 어, 음……. 나름 그럴듯한 추측이긴 한데……. “…뭐, 그런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이 사실은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아직 정식으로 팀이 꾸려진 것도 아닐뿐더러, 추후 어떤 놈이 팀원으로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나.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언젠가 이게 비장의 수가 될지 모른다. ‘재생력이야, 불사자 각인 덕분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고.’ 가장 중요했던 용건은 끝이 났지만, 이후로도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대화를 해 나갔다. 개중에는 어째서 난쟁이놈이 원래 있던 팀에서 탈퇴해 새 팀을 꾸리고 있는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이번에 잠시 팀에서 나왔지 않은가?” “그랬지.” 혹시 균열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무작정 팀에 휴가를 신청했다고 들었다. “근데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내 빈자리를 메우려 임시로 구한 전사가 더 마음에 든다는 거 아니겠는가!” 이어서 난쟁이놈이 분통 터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 동료들에 대한 울분을 토해 냈지만, 나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개인적인 이유로 팀에서 나온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 제일 큰 피해자는 전 팀장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이번에도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느닷없이 난쟁이놈이 한 번 쉰다고 하는 탓에 이리저리 바빴을 테니까. 근데 그 전사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모를까. 오히려 더 좋다? ‘내가 팀장이었어도 이런 제멋대로인 놈은 다시 안 받아 주지. 언제 또 이럴지 모르는데.’ 물론, 속으로만 간직한 생각이었다. “나참, 정말 의리 없는 놈들 아닌가?” “그렇다. 들어 보니 정말로 의리란 것을 모르는 자들 같다!” 이럴 땐 그냥 무조건적으로 긍정해 주는 거라고 배웠다. 대충 맞춰 주며 궁금했던 거나 물어보자. “그들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네가 이번에 얻은 게 뭔지 알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분명하다!” “이번에 얻은 것?” “넘버스 아이템 말이다!” “아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 나중에 만나게 되면 꼭 이에 대해 말해 주며 본인들이 얼마나 미련했는지를 알려 줘야겠어!” 이미 머릿속엔 그 상황마저 그려지고 있을까?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켠 난쟁이놈이 희희낙락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이 정도면 자연스럽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이번에 얻은 게 뭔가?” “음, 내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나?” “안 했다!”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드랍 가능한 넘버스 아이템은 전부 꿰고 있지만, 이번에 클리어 한 건 전례 없던 변종 균열 아닌가. 혹시 유니크한 아이템이 떴을지도 모른다. 레이븐이 보스 방에서 열어놓고 떠난 그 의문의 상자처럼. ‘그러고 보니, 거기 뭐가 들어 있었는지를 묻지 않았군.’ 다음 주에 만나면 그것에 대해서도 꼭 물어보기로 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난쟁이놈이 씨익 웃으며 도톰한 팔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바로 이 팔목 보호대가 거기서 얻은 물건일세.” 음, 일단 겉모습만 봐서는 감이 안 오는데. “이름이 뭔가?” “길드의 감정사가 말하길,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라는 이름의 물건—” “지랄?” 그게 나왔다고? “…으응? 알고 있는 물건인가?” “아, 아니다. 그저 이름이 멋있어서 놀랐다.” “흐하하핫! 역시 자네와는 통하는 게 있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네!” No.3112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 원래라면 4층 이상의 균열에서만 획득이 가능했을, 무려 3천 번대에 속하는 넘버스 아이템. 효과는 둘째치고, 이게 얼마쯤 하더라? “중앙 거래소를 통해 시세를 확인해 보니 5천만 스톤 정도 하는 듯하더군.” 니미. 이게 게임이냐? 거기서 이 난쟁이 새끼가 무슨 공을 그렇게 세웠다고? “하하핫! 그것도 예전 가격이고, 매물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더 비싸질 수도 있다고 하더군! 물론 팔 생각은 없지만 말일세!” “…….” “어, 자네 근데 왜 아까부터 말이 없나?” “별거 아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그래서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놀라서인지 간만에 술과 고기로 채운 배가 참을 수 없이 쓰려올 정도. “이해하네. 5천만 스톤이라니? 나도 처음 들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는데, 자네라도 그렇겠지.” 이게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건가? 이제 보니 아까 내가 부린 주접질은 이 난쟁이 새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부러워하진 말게. 계속 탐사를 해나가다 보면 자네도 언젠가 넘버스 아이템 하나쯤은 얻지 않겠나? 물론 내가 얻은 것만큼은 안 되겠지만! 하하핫.” 웃어젖히는 난쟁이 새끼의 시선을 피해, 나는 슬그머니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스르륵- No.9425 서리혼령 가락지를 끼고 있던 손이었다. *** 징벌의 보호대? 5천만 스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위장이 뒤틀리다 못해 자꾸 토가 나올 거 같단 사소한 문제야 어쨌든, 동료가 강하면 좋은 것 아닌가. ‘…팀 꾸리는 거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난쟁이놈의 탐험가 등급을 한 단계 위로 올리는 일이었다. 좋은 팀원을 구하고 싶다면, 우선 매력적인 팀처럼 보일 필요가 있으니까. 팀장이 7등급인 것과 6등급인 것에는 어떤 말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히쿠로드, 오늘 당장 길드에 가서 탐험가 등급부터 올려라.” “…갑자기?” “무려 5천만 스톤짜리 장비를 갖고 있지 않나. 심사를 신청하면 분명 길드에서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그래서 싫다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지금 가지!” 혹시 딴 길로 샐까 봐 함께 동행해 길드에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까지 지켜봤다. 참고로 심사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6일로, 예상 시일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다행히 승급에는 성공했다. 지원자들의 서류상 스펙이 눈에 띄게 상승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루에도 열 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 그리고 난쟁이놈과 지원자들의 스펙을 면밀이 검토하며 행복한 고민을 거듭하던 때. “마, 마법사?” 뜬금없이 마법사의 지원서가 도착했다. 물론 마탑 소속 마법사는 아니고, 길드나 공공기관에서 행정 업무를 하던 8등급 출신의 마법사였지만…….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 “저기 비요른,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이런 팀에 마법사가 지원을 하다니?”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군. 원한다면 우리보다 좋은 여건의 팀이 많았을 텐데.” “그,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미심쩍은 부분이 몇 있지만, 일단 만나 보기로 하며 길드에 연락을 전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비로소 약속 장소와 시간이 잡혔다. “자기 몫으로 절반을 떼 달라거나 하지는 않겠지? 마법사들은 전부 콧대가 높다던데…….” 나는 얘가 뭘 그렇게 초조해하는지 모르겠다. 마탑 소속이던 레이븐에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자기 몫을 주장했었으면서. “뭘 그렇게 걱정하나? 그런 요구를 하면 그냥 됐다고 하고 나오면 그만인데.” “그, 그렇겠지?” 팀장으로서 처음 만나는 마법사라서 그럴까? 오동통한 다리를 시도 때도 없이 떨어 대며 유난을 부려대는 난쟁이놈을 대충 다독여주며 기다리고 있자, 이내 로브를 입은 사내가 주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우릴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 바바리안! 드워프!” 씨바, 역시 지뢰인가? 어떻게 저 짧은 인사말만으로도 사람을 빡치게 할 수가 있지? 벌써부터 파국이 예상되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하핫! 반갑네, 자네가 오늘 만나기로 한 그 마법사인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마법사를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소이까?” 마법사 새끼의 되물음에 난쟁이놈이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 진짜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지? “…본인이 맞다는 뜻이다.” “여, 역시 그랬군! 하하핫!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나는 히쿠로드 무라드라는 사람일세!” “특이한 이름이구려. 나는 리올 워브 드왈키, 라프도니아 왕가 공인의 8급 마법사라오.” “…라, 라프도니아 왕가 공인?” 아니, 뭘 또 놀라는 건데. “길드가 아니라, 공기관에서 행정 일은 하는 마법사란 뜻이다.” “아아, 그, 그렇군?” 자꾸 헷갈리게 말하는 마법사 새끼도 문제지만, 하나하나 당해 주는 난쟁이놈도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다. “하핫! 바바리안인데도 식견이 넓군,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일단 앉아라.” 어지간하면 그냥 지켜만 볼랬는데, 답답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대화를 이끌기로 했다. 그 편이 피차 시간 아끼는 길일 테니까. “드왈키, 네가 보낸 지원서는 잘 읽었다. 근데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어 질문을 하려 한다. 괜찮나?” “물론이오.” “미궁 출입증은 있나?” “그게 없었으면 찾아왔겠소?” 거, 그냥 있다고 하면 될 것을. “한 가지 더, 도시에서만 지내도 충분히 돈을 벌텐데 왜 탐험가가 되려는 거지?” 8등급 마법사가 탐사에 나가는 일은 드물다. 간단한 이유다. 중층 이상에서 활동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저층에서는 탐사를 해 봤자 딱히 돈이 안 된다. 공기관에서 일하며 얻는 소득이 훨씬 큰 셈. 출입증을 발급 받기 어렵단 점과 위험 부담까지 고려하면 여러모로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흐음, 이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구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드왈키가 말을 이었다. “간단하오. 나는 위대한 탐험가가 되어 우리 마르토앙 남작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소.”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당당하게 밝힌 포부.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난쟁이놈이 식겁했다. “나, 남작가? 자네 설마 귀, 귀족이었나? 아니 귀족이셨습니까……?” 귀족. 사실상 일반인들은 평생토록 만날 일이 없는, 그야말로 라프도니아의 최고 권력자들. 난쟁이놈의 반응이 제법 만족스러운지, 드왈키가 웃음을 터트리며 자랑스레 입을 열었다. “후후후, 내 모친의 자매 분이신 엔카 이모님의 부군께서 바로 마르토앙 남작 부인의 셋째 동생이시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난쟁이놈이 실신할 듯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드왈키는 이해한다는 듯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너무 긴장치는 마시오. 나는 내 신분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할 생각이 없으니.” 이 새끼, 진짜 미친 새낀가? 49화 동료 (3) 반질반질한 외모와 곱상한 금발. 160 중반의 신장과 빼빼 마른 멸치형 몸매. 생활 및 행정 마법과 저주 계열 몇 가지, 그리고 냉기 마법을 다룰 줄 아는 8등급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는 대화를 나눌수록 사짜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사내였다. ‘씨바, 사실 마법사도 아닌 거 아니야?’ 돌연 그런 의심이 들어서 이것저것 확인해 봤지만, 놀랍게도 그는 정말 마법사가 맞았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이모부가 남작 부인의 셋째 동생이라고만 했지, 본인이 귀족이라고는 안 했으니까. 하긴, 지도 선은 아는 거겠지. 귀족 사칭은 즉결 처형 당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범죄라는걸. “그래서 어떻소? 합격이오?” 긴 고민 끝에 그를 팀에 넣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너는 우리 동료다.” “하핫! 잘됐구려, 초행이다 보니 최대한 전사가 많은 팀에 들어가고 싶었거든.” 허세와 허풍기로 가득 찬 성격. 그리고 아직 미궁 탐사 경험이 없는 것. 이 두 가지 부분이 하자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마법사이지 않은가. 배분을 늘려 달란 요구도 없고, 미궁에서 오더를 잘 따르겠다고도 하니 이 정도면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을 듯했다. ‘원래 싼 물건엔 다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팀에 마법사가 있단 게 알려지면, 지원자들의 스펙이 한층 더 상승할 게 분명했다. 그야 서류상에는 마법사의 성격 같은 건 안 나오잖아? “나머지 동료가 구해지면 그때 연락을 다시 주겠다.” “알겠소. 그럼 그때 봅시다.” 이후 드왈키가 떠나자, 대화 내내 얼어 있던 난쟁이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단하지 않나? 마법사, 그것도 귀족인데도 저렇게 겸손하다니…….”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히쿠로드, 정말 대단한 건 바로 너다.”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 이후의 도시 생활 루틴은 간단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레이븐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걸 제하면, 오전 7시에 기상해 대충 밥을 챙겨 먹고는 도서관으로 직행. “파르시티에브.” “그럼 수고해라.” “…….” 지난번까지 합치면 두 달째 거의 매일같이 눈도장을 찍는 중이지만, 아직 이 여자 사서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다. 꼬르륵-! 보통 4시간 간격으로 끼니를 챙겨 먹으며 책을 읽다 보면 폐관 시간이 된다. 하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기에 패스. 폐관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려는데, 느닷없이 사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지?” “당신은 도서관에 오면서 왜 매번 갑옷을 챙겨 입는 겁니까?” 아, 그게 궁금했던 거구나.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 “여관에 냅뒀다가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그런 이유라면야, 알겠습니다.” 답변이 끝나자마자 용건이 끝났다는 듯 눈을 감는 사서. “타인에게 아예 무관심한 줄 알았는데, 그래도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군?” 왠지 지는 느낌이라 말을 덧붙였더니, 사서가 희미하게나마 불쾌함을 표정에 띠운다. “다른 이용자들 사이에서 계속 민원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책을 읽지 못하겠다고.” “…그, 그랬군?” “예. 이곳에서 볼일이 끝났다면, 방해치 말고 어서 가주시겠습니까? 방해라니? 그래 봤자 내가 가면 곧바로 잘 거면서. 한마디 뱉고 싶지만, 괜히 귀찮게 했다가 출입 금지 처분이라도 당하면 골치가 아플 터.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때는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여기다! 비요른!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나!” “미안하다, 너무 작아서 못 찾았다.” “하하하! 농담이 늘었군! 어서 앉게!” 저녁에 난쟁이놈과 만나 술을 마시는 일이 늘었다. 횟수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물론 친목질이나 하자고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건 아니고, 항상 만나면 팀에 대한 의논을 나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자는 어땠나?” “진중하고 믿음직스러운 친구더군.” 아니, 그딴 거 말고. 실력이 어땠냐고. “아!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쁘지 않았네. 탐험가로 활동한 경력도 길고, 어느 상황이던 한 사람분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 같더군.” “그렇군.” “…해서 묻네마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이자, 난쟁이놈이 안색이 확 밝아졌다. “후, 다행이군. 이번에도 자네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지 않나.” 그 한숨 속에서, 사실상 바지 팀장이나 다름없었던 난쟁이놈의 고충이 느껴졌다. 하긴, 고생은 얘가 제일 많이 했지. 칭찬해 주자, 칭찬.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 “수고 많았다, 히쿠로드. 역시 너는 훌륭한 팀장이다. 너를 선택하기를 잘했다.” “하하핫! 그런가?” “당연하다. 너처럼 팀원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팀장이 어디 있나? 초심을 잃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라. 그럼 널 내쫓았다는 그 멍청한 놈과 달리 훌륭한 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핫! 이 친구도 참, 띄워 주기는? 이런 역할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자네가 있어서 다행일세!” 그 말에 돌연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번은 내 잦은 간섭에 불편함을 토로한 적도 있던 난쟁이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팀장이 되어 버리다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은 네가 사라!” “…또? 지난번에도 내가 사지 않았나!” “거듭 말하지만, 훌륭한 팀장이라면 이런 부분에서 인색해선 안 된다!” “이, 이건 내가 쪼잔한 게 아니라……!” 미궁이 열리기까지 정확히 일주일 남은 시기. “에잇, 그래 오늘은 내가 사겠네! 드디어 팀원이 모두 모였는데, 그깟 술값이 문제인가?” 마침내 팀이 완성됐다. ***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팀이 완성됐다고 그냥 미궁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별개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존재한다. 우선 팀원 모두가 모여 얼굴을 트고. 몇 층까지 갈 것인지, 주 사냥터는 어디가 좋을지, 돈의 화신인 탐험가답게 분배가 공평한지 한 차례 설전도 나눠 보고. 그러고 나서도 문제가 없으면 길드에 정식 팀으로 등록을 한 뒤, 최종적으로 매일같이 손발을 맞춰 보며 탐사 계획을 정리하는 등. ‘순식간에 지나갔군.’ 비요른 얀델의 몸에서 깨어난 이래로 가장 바쁜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영롱한 색채의 빛이 은은하게 감싸는 미궁 1층의 수정동굴. “오호라! 여기가 미궁이로군!” 혼자, 혹은 두 명뿐이었던 지난날들과 다르게 주변엔 나를 비롯해 5명의 남녀가 존재한다. 이번 여정을 함께하게 될 새 팀원들이다. 한 명씩 소개하자면— “리에이트!” “악! 씨발! 내눈!” 눈이 적응하기도 전에 눈뽕 마법을 시전한 이 금발 비실이의 이름은 리올 워브 드왈키. 줄여서 드왈키 새키. “이 새끼가 돌았—” 짜증이 치솟아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난쟁이놈이 선수를 가로챘다. “드왈키, 되도록이면 마력은 아끼게.” “음, 그렇지만 이렇게 어두운데?” “미궁에서 이 정도면 몹시 밝은 편이네. 정 어두우면 횃불을 켜면 되고.” “그렇다면야, 알겠소.” 시간이 흐르며 생긴 변화다. 난쟁이놈도 드왈키가 귀족이 아니란 걸 깨닫고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꽤나 친해졌다. 난쟁이놈 본인은 아닌 척 하지만, 드왈키 새키가 찐따 짓을 할 때마다 츤츤거리면서 챙겨주는 게 둘 사이의 특징 아닌 특징. “자네는 미궁에 오면서 뭘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왔나? 누가 초심자 아니랄까 봐, 어서 이리 주게, 내 가방에 넣어 줄 테니.” “그대의 세심한 그 배려, 사양치 않겠소.” 그렇게 난쟁이놈이 평소처럼 드왈키를 챙기며 이것저것 봐주고 있던 때. 하이톤의 명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팀장, 슬슬 움직여야 하지 않겠낭?” 미샤 칼스타인. 머리 위에 돋아난 세모귀를 보면 알겠지만, 수인족 탐험가다. 나이는 25세이며, 탐험 경력은 올해로 5년 차. 170 초반의 신장, 마르고 긴 체형, 거기에 도도한 인상이 합쳐져 차가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그만 놀고 어서 가장. 빨리 몬스터들 대가리를 족치고 싶당.” 얘는 말을 할 때 끝의 발음만 뭉개는 요상한 버릇이 있다. 본인은 수인족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발음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이렇게까지 발음이 안 좋은 애는 처음 본다. 아, 그리고 특징을 말하자면 한 가지 더. “하핫! 공주님의 명이신데 여부가 있겠나!” “이잇! 공주님이라 하지 말라고 했지 않낭!” “그래도 적묘족 부족장님의 따님이신데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죽인당! 난쟁이놈!” 미샤 칼스타인은 5대 부족 중 하나인 적묘족의 공주님이다. 열세 번째랬나, 열다섯 번째랬나. 세상에 나온 순서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특별 취급을 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인간 사회에 빗대서나 공주 신분인 거지, 얘가 진짜 공주인 건 아니니까. 오히려 조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무라드, 그만하시오. 장난이어도 본인이 저리 싫어하지 않소.” 브라운 로트밀러. 종족은 인간, 나이는 34세. 7등급이긴 하지만, 경력이 무려 8년이나 된다. 아무리 실력지상주의가 판치는 탐험가 업계라고는 한들, 우리 중에선 가장 경험이 많은 셈. 그래서인지 난쟁이놈도 그의 말에는 매번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 준다. “크흠, 조금 심하긴 했지? 앞으로는 자중하겠네.” “꼴 좋당, 난쟁이—” “칼스타인 양도 마찬가지네. 암만 화가 났기로서니 팀장에게 놈이니 죽이니 뭐니 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잘못했당.” 개인적으로 팀원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어찌보면 이 팀에서 유일한 정상인이거든. 뭐, 그런만큼 다른 팀원들과 달리 막 대하기 어렵단 단점이 있겠다마는. “무라드, 여정이 더 늦어지기 전에 슬슬 출발해도 되겠소?” “아, 부탁하겠네.” “이제부터는 다들 내 뒤를 잘 따라오시오.” 막 출발하려는 차에 드왈키가 입을 열었다. “잠깐, 그래도 비요른이나 히쿠로드가 앞장 서는 쪽이 낫지 않겠소? 명색이 전사인데…….” “3층부터는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혼자서도 괜찮네.” 솔직히 나는 얘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로트밀러는 전문 탐색꾼이다. 그리고 8년간 미궁에서 살아남았다. ‘기간 대비 탐험가 등급이 낮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한다. 8년이면 어지간한 일은 다 겪어 봤을 텐데, 아직 정정한 모습으로 살아 있지 않은가. 무력이 아니라, 본인의 다른 장점을 이용해서. ‘매사에 진지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도 저래서 생긴 거겠지.’ 이후 로트밀러의 인도 아래, 간간이 나오는 몬스터들을 박살 내며 나아가고 있자니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흔히 암흑 지대라 부르는 1층의 최외곽부. 헤매는 일 없이 최단 거리로 달려왔음에도, 포탈은 이미 다른 탐험가에 의해 개방된 상태였다. “역시 이번에도 선객이 있었구려.” “자책하지 말게. 자네는 충분히 잘해 주었으니까.” “무라드, 그게 노력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소. 스스로의 부족함에 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탐험가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것이니.” “그, 그런가?” 참고로 이곳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시간. 열정 넘치는 로트밀러 앞에서 말은 못 했지만, 일반 탐사팀에서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기록이다. 우리가 포탈 개방 경험치를 노리는 런닝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가 이렇게까지 수월하게 포탈을 찾아낼 줄은 몰랐다. ‘인도자도 아닌데 길 찾기가 이 정도라…….’ 아직 보지 못한 다른 능력도 기대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구석에선 이런 아쉬움도 피어난다. ‘아이나르나 에르웬이었으면 개방 경험치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차원불안정 현상. 줄여서 나 혼자 ‘버그’라 불렀던 그 방법을 이용하면 무조건적인 포탈 개방 경험치 수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약속’이나 ‘맹세’를 통해 보안 유지가 가능할 때나 쓸 수 있을 방법일 터. ‘그건 나중에… 정말 믿을만한 팀이 만들어질 때까지 아껴 두자. 어차피 지금 당장 경험치가 급한 것도 아니니까.’ 숨을 크게 내쉬며 남은 미련을 털어냄과 동시. 난쟁이놈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자, 그럼 어서 들어가지!” 난쟁이놈이 먼저 포탈로 발을 들이밀었고, 나 역시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제발, 이번엔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이건 너무 큰 바람이려나? 「2층 짐승의 소굴에 입장했습니다.」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50화 동료 (4) 동료를 구할 때 실력은 몹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 있다. 신뢰. 즉, 믿을 수 있는 놈인가. 물론 일이 술술 풀릴 땐 이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 그저 다 같이 하하호호 웃으며 행복해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을 때, 과연 그런 순간에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어쩌면 신뢰가 아니라 본성에 대한 문제일지도.’ 이러한 부분은 지원서를 몇 번 보고, 만나서 몇 번 얘기를 나눠 봤다고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기 마련이었으니. 되도록이면 그 본성을 서로 보여 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서로 그 편이 좋을 테니까. “이곳 냄새는 언제 와도 적응이 안 되는구만 그래! 하하핫! 드왈키, 자네는 괜찮나?” “…말 걸지 말아 주시, 웨엑!” 헛구역질을 해대는 드왈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일단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칼날늑대가 서식하는 1층의 동부 지대의 포탈을 통해 입장 할 수 있는 2층 구역. 짐승의 소굴.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 야수형 몬스터들이 주로 출몰한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오물 냄새가 심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로트밀러, 너는 괜찮은 건가? 후각 계열 정수를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걱정은 고맙네만, 나는 괜찮네.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군.” 이게 8년 차의 짬인가? 이 아저씨는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얘는 좀 더 봐야 알겠지만. “그나저나 우리 마법사는 언제 정신을 차리려낭? 빨리 돈 벌러 가야 하는뎅…….” 미샤 칼스타인. 동료의 고통에 전혀 공감치 못하고 자신의 이익에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임. 머릿속 인물 평가에 글귀 하나를 추가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음, 이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드왈키, 정신 차려라. 언제까지 우리 시간을 뺏을 셈이냐?” “맞당, 맞당. 겨우 이런 걸로 이러면 탐험가 일은 못한당. 마법사! 어른이 돼랑!” 내가 한 마디 쏘아붙이자, 옆에 있던 미샤도 깐족거리는 투로 즉시 동조해 왔다. 다만, 이를 듣고도 드왈키는 예상외의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맞는 말이오. 이제 나도 어른이 되어야겠지.” 어, 얘가 이런 성격이었나? 솔직히 말해서 되도 않는 변명이나 늘어놓을 줄 알았다. 아니면 역으로 화를 내던가. “어서 갑시다.” “하, 하지만 괜찮낭?” “물론 힘드오. 그러나 초행이라고, 꼴에 마법사라는 이유로… 동료의 짐이 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소?” “지, 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뎅…….” 예상치 못한 사과에 미샤가 당황하는 사이.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드왈키가 비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르토앙 남작가의 명예에 먹칠할 수는 없지.” “…이잇! 또 귀족인 척하는 거냥!! 이제 안 속는당!” “하하핫! 어서 갑시다. 나는 이제 정말로 괜찮소!”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해진 그를 보며 미샤는 또 당했다는 얼굴로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우리는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이곳부턴 다들 내 뒤를 잘 따라오시오. 평지처럼 보여도 구덩이가 많은 지형인지라.” “구덩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소만…….” “평소엔 오물로 가득 차 있어서 구별이 어려울 것이네. 잘 모르고 가다 보면 빠지기 십상이지.” “…로트밀러, 그대만 믿겠소.” 짐승의 소굴은 협곡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좁은 길목, 양쪽으로는 높이 치솟은 절벽이 자리해 있으며, 이곳을 지나치는 탐험가는 미로처럼 얽힌 절벽 틈 속을 헤매며 길을 찾아야 한다. ‘함정은 없지만 고블린숲보다 탐색꾼의 역할이 더 중요한 층이지.’ 참고로 출몰 몬스터는 칼날늑대, 벽두더쥐, 샤벨타이거, 웨어울프, 불카르 등으로, 대부분 절벽에 나 있는 동굴 속에서 서식한다. 사냥이 주목적인 탐험가들은 동굴 안에 들어가 몬스터 무리를 소탕하는 식의 전투를 하는 게 보통이다. 다만, 우린 3층으로 가는 게 목적이니 패스. 「거대칼날늑대를 처치했습니다. EXP+1」 「샤벨타이거를 처치했습니다. EXP +2」 「웨어울프를 처치했습니다. EXP +2」 「벽두더지를 처치했습니다. EXP +1」 동굴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만을 간간히 잡으며 신속히 이동하고 있자니, 슬슬 휴식을 취할 순간이 되었다. 때는 2일 차가 시작되기까지 3시간 남은 시각. [20 : 58] 오늘 하루 전부를 이동에만 투자했다. 다만 탐색꾼인 로트밀러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는 데 두 배는 더 걸렸겠지. “입구도 좁겠다, 야영지로는 여기가 좋겠군.” 우리들은 벽두더지의 소굴을 정리하고서, 이를 베이스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난쟁이놈, 로트밀러, 미샤. 수년 차의 탐험가가 셋이나 있었기에 야영 준비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식수를 만들어 내는 것 외에는 존재감이 없던 마법사도 이때 빛을 발했고. “알람 마법이 있으니, 불침번은 한 명이면 충분할 듯하군.” “불침번이 왜 필요하오?” “드왈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게. 알다시피 미궁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몬스터만이 아니지 않은가.” 제대로 된 탐험가가 되려면, 같은 탐험가를 몬스터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초번은 오늘 가장 고생한 로트밀러가 맡기로 하고, 그다음부터는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지.” “잠깐만, 나는 서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이런 건 우리에게 맡기고, 자넨 푹 쉬도록 하게나.” 마법사는 불침번 순서에서 제외됐다. 딱히 체력이 약하단 점을 배려해 준 건 아니고, 원래 이게 관례다. 논공행상에 예민한 탐험가들답게, 알람 마법만으로도 1인분을 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뭐, 실상은 그냥 마법사 비위를 맞춰 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관례겠지만.’ 아무튼 한 사람씩 2시간 교대로 불침번을 서니 믿을 수 없게 편했다. 하루에 6시간이나 잘 수 있다니? 둘이서 다니던 때에 비하면 거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물론 편한 만큼 몫을 나눠야 할 숫자가 늘어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거야 뭐 여럿이서 더 강한 몬스터를 더 많이 잡으면 되는 거니까. “나는, 위대한 마법사 리올…….” “잠꼬대는 그만하고 일어나랑, 마법사!” “…스릅, 벌써 아침이오?” “아침인 건 모르겠고, 일어날 시간인 건 확실하당.” 2일 차, 오전 5시. 내심 우려했던 첫날밤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몬스터가 알람 마법에 감지되며 네 번, 난쟁이놈 순번 때 탐험가 무리가 야영지 근처로 접근한 탓에 한 번 다 같이 깨긴 했지만……. 이 정도야 일상적인 일인 거니까. “드왈키도 적응을 했을 테니, 지금부터는 속도를 좀 더 올리겠소.” “흐음, 너무 급할 필요는 없지 않나?” “3층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야 야영을 할 때 편하오.” 2일차부터는 잡담도 최대한 줄이며 이동에만 집중했다. 물론 몇 분 간격으로 몬스터들이 길목을 막으며 방해해 오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환영인 일이었다. 「반달바위곰을 처치했습니다. EXP+1」 「벽두더지 여왕을 처치했습니다. EXP+1」 「핏빛칼날늑대를 처치했습니다. EXP+1」 그럼 이제 짐승의 소굴 9등급 몬스터는 전부 잡은 셈인가? 처음 와 보는 계층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제법 빠르게 쌓인다. 물론 따로 경험치 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잡은 몬스터들을 계산해 보면…….’ 딱 40이다.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랑 수호자 처치 보너스가 제대로 들어왔다고 한다면 44일 테고. ‘4레벨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군.’ 레벨이 오를 수록 필요 누적 경험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1레벨은 6, 3레벨은 30, 3레벨은 150. 물론 계속 5배씩 증가하는 건 아니지만, 체감 난이도는 그 이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몬스터는 등급이 하나 올라가 봤자 고작 +1씩 증가하는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사냥 가능한 몬스터가 없어지면 수급조차 불가능해지니까. ‘…쩝, 그래도 뭐 당장 레벨 업이 급한 건 아니니까.’ 현재 내 레벨은 3. 최대 3개의 정수까지 흡수가 가능하다. 즉, 아직 하나 더 여유 자리가 있는 셈. 물론 4레벨을 찍기 전에 정수가 나와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던전 앤 스톤]은 그런 착한 게임이 아니니까. ‘나는 왜 해도 하필 이런 게임을 해 가지고…….’ 뒤늦게 그런 후회가 밀려오지만 어쩌겠는가. 난이도가 괴랄할수록 희열을 느끼는 진성 변태가 그 당시의 나였을진대. “슬슬 긴장들 하시오. 이곳부터는 상위종들만 출현하는 데다가 개체 수도 확 늘어나니.” 그렇게 로트밀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반나절 정도를 이동했을 때였다. 지형, 정확히 말하면 절벽의 색이 바뀌었다. 적빛이 도는 갈색에서 흑색으로. ‘후반부에 접어든 셈인가.’ 여기부턴 9등급 몬스터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크게 긴장하거나 하진 않았다. “2층의 상위종이라 해 봐야 8등급 아닌강!” 우리 팀의 평균 등급은 7등급. 이전에 어느 팀에 있었던 최소 3층에서 활동했을 자들이다. 뭐, 나는 초행이긴 하다마는. 게임에서 오질나게 와 봤으니까 예외. “그러고 보니 비요른은 아직 3층까지 못 가봤다 했었낭?” “그렇다마는?” 시비를 걸려는가 싶어서 삐딱한 말투로 답했으나, 미샤는 정말이지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당. 나는 3층까지 가는 데만 1년이 걸렸는뎅!” 거, 사람 무안하게. “…운이 좋았을 뿐이다.” 오래 대화하고 싶은 주제는 아닌지라 짧게 얼버무리고 있자니 난쟁이놈이 대화에 껴들었다. “3층까지 1년? 그럼 4층까지는 얼마나 걸렸나?” “음, 2년? 그 정도 걸린 거 같당.” “나랑 비슷하군.” “이잇! 갑자기 조금 억울하당! 팀장은 나보다 연차도 적은데 6등급이라닝!” “대신 칼스타인 양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 않은가!” “이잇! 내가 집안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뎅!” 대화가 길어지며 또다시 티격태격할 조짐이 보이자, 길을 찾던 로트밀러가 끼어들어 둘을 말렸다. “둘 다 그만하시오.” 목소리도 말투도 표정도 이전과 똑같았다. 근데 이전보다 짜증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하긴, 혼자 열심히 일하는데 뒤에서 저러고 있으면 열불이 날 만도 하겠지?’ 나는 그렇게 무심코 넘어갔다. ***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 2일 차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로트밀러의 정확한 길 안내를 받은 우리들은 3층에 진입했다. 짐승의 소굴에서 사냥 가능한 8등급 몬스터 몇 마리를 잡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걔네가 꼭 2층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니까. ‘언젠가 잡을 기회가 또 오겠지.’ 못내 남은 아쉬움을 털어내며 나는 현 상황에 집중했다. “로트밀러! 뒤로 빠져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3층 ‘순례자의 길’. 개중에서도 짐승의 소굴 루트를 탔을 때의 스타트 포인트인 ‘강철바위언덕’에 와 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 7등급 몬스터 두 마리와 조우했다. “드왈키! 부식 마법을 쓰게나!” 개체명 ‘아이안트로’. 강철로 된 어금니를 지닌 멧돼지라 보면 쉽다. 덩치는 지리산 멧돼지의 5배 정도.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저주 마법 [부식]을 시전했습니다.」 가장 먼저 포탈을 타고 진입한 로트밀러가 몬스터를 피해 뒤로 물러서는 사이. 드왈키가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 즉시, 나와 난쟁이놈이 앞으로 대쉬하며 방패로 한 마리씩 도맡았다. 콰앙-! 전방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아마 예전 방패였다면 돌진을 막아 낸 순간 여기저기 찌그러졌겠지. 저기 난쟁이놈의 방패처럼. 「히쿠로드 무라드가 [긴급복원]을 시전했습니다.」 “비요른, 왜 갑자기 날 보나?” “부럽지 않다.” 정말이다. 애초에 단단한 방패를 쓰면, 매번 귀찮게 고칠 필요도 없잖아? “그게 갑자기 뭔 소리인가? 아무튼 비요른! 밀어낼 생각은 하지 말고, 뒤로 못 가게 막기만 하게!”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아이안트로의 액티브 스킬은 ‘균형추’. 넉백 면역의 효능을 지녔다. 난쟁이놈이 먹은 정수이기도 하고. 「히쿠로드 무라드가 [균형추]를 시전했습니다.」 대체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주력기조차 돌진이면서 이딴 스킬을 갖고 있는 멧돼지 새끼나, 그런 얘한테 밀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난쟁이놈이나. 바바리안의 몸에 내재된 분노가 차오른다. 그래서일까? “베헬—라아아아아!” 다른 팀원의 공격을 기다리는 대신, 나는 메이스를 휘둘러 아이안트로의 아가리를 후려쳤다. 카카칵-! 그렇게 [부식] 상태에 걸려 있던 강철 어금니가 맥없이 박살난 순간이었다. “정수야 나와랑!” 허락도 없이 내 등짝을 밟고 높이 도약한 미샤가 아이안트로의 정수리에 단검을 찍어 넣었다. 「아이안트로를 처치했습니다. EXP+3」 일단 한 마리는 잡았고. 이어서 다른 놈도 마저 처리하려 했지만,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지켜봤다. 드왈키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몇 안 되는 공격 주문 중 하나.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얼음 꼬챙이가 날아가 아이안트로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조준 위치를 머리나, 심장부로 했으면 한 방에 깔금하게 잡아 냈을 듯하지만……. 세세한 피드백은 나중에 따로 하는 걸로 하고. 푹-! 쓰러져 바둥거리는 아이안트로에게 다가간 로트밀러가 이마에 석궁을 대고 화살을 발사하는 것으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물론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다마는. ‘포탈 바로 앞에 몬스터가 있었다라…….’ 아무래도 씹새끼가 근처에 있는 것 같다. 51화 팀 반푼이 (1) “로트밀러, 혹시 근처에 누군가 있나?” 혹시 나와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었을까? 로트밀러는 군말 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타원형으로 수축된 동공으로 주변을 살폈다. 「브라운 로트밀러가 [체온색적]을 시전했습니다.」 리자드맨 척후병의 이능 ‘체온색적’. 기능은 현대의 열화상카메라와 비슷하다. 참고로 인게임에서도 나름 쓸모 있는 스킬이었다. 은신을 쓰던 뭘 하던 생명체기만 하면 이거 하나만으로도 전부 걸러지니까. “근처엔 아무도 없네.” 로트밀러가 이능을 해제하고서 짧게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냄새로 보아 얼마 전까진 누군가 있었던 것 같군.” 후각 스탯에 보정을 주는 정수를 두 개나 지닌 그의 판단인 만큼, 틀릴 가능성은 낮을 터. 나는 그에게 몇 가지 더 질문했다. “얼마 전이라면, 어느 정도를 뜻하지?” “오차 범위야 있겠지만, 이 정도 체취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분 안팎일 듯하네.” “즉, 우리가 사냥하는 걸 보고서 떠났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군?” “…그렇다네.” 로트밀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난쟁이놈이 기겁하며 끼어들었다. “잠깐만, 그럼 누가 우리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말인가?” “아마 우리를 콕 짚어 노리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오. 그저 아무나 걸리길 기다리고 있었겠지.” 로트밀러는 부정치 않았다. 그리고 포탈 앞에 몬스터를 유인해 놓는 것도 약탈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로우 리스크의 약탈법으로 통한다던가? ‘잔대가리 하나는 기가 막힌단 말이지.’ 몬스터를 이용해 기습한다. 그것도 포탈을 타고 막 넘어온, 탐험가들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을 노려서. 이에 전멸하면 더 없이 좋고, 하나둘 정도 다치면 평범하게 좋고, 멀쩡하게 버텨 내면 잠시 물러났다가 다음 사냥감을 기다리면 된다. “로트밀러! 이거 우리가 잡아서 족쳐야 하는 거 아닌강? 약탈자는 죽이면 돈이 되지 않낭!” “아마 그렇다 한들 찾기는 어려울 것이네. 계속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인 데다가…….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자칫했다가 역으로 누명을 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네.” “이잇,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낭!” 전말을 알게 된 미샤가 분한 얼굴로 쉬익쉬익 거렸으나, 난쟁이놈은 리더로서 냉정히 판단을 내렸다. “도의상 2층에 잠시 내려가 포탈 앞에 약탈자 주의 경고문만 써두고 떠나는 걸로 하겠네.” “옳은 결정이오.” 이후 우리들은 탐험가로서 최소한의 도리만을 지킨 뒤, 그길로 포탈 근처를 벗어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약탈자에 관한 화제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들을수록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로트밀러는 대단하당. 여태까지 나는 그런 수법이 있는지도 몰랐는뎅.” “나도 말로만 들었지, 이 수법에 당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 ” “하긴 약탈자를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니깡!” 어, 대체 뭐라는 거지 얘들은? 전혀 공감하기 어려운 탐험가 토크에 이질감을 느끼고 이것저것 질문을 해봤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나 말인강? 5년 동안 여덟 번 정도 만났낭? 한 번은 같은 팀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별거 아닌 놈들이었당!” 5년에 겨우 8번? 씨바, 원래 탐험가에게 있어 약탈자는 일상처럼 만나는 그런 게 아니었어? “확실힝… 한 150년 전쯤에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는 들었당!” 미샤는 불멸왕이라고도 불렸던 초대왕의 서거 이후, 여러 정책들로 인해 약탈자들의 수가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설명이 안 되니까. ‘수정동굴에서 한 번, 고블린 숲에서 한 번, 망자의 땅에서는 두 번 연속…….’ 오늘까지 합치면 최근 3개월 동안 5번에 걸쳐 약탈자와 조우했다. 그럼 나는 대체 뭔데? 의견을 얻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해주자, 로트밀러를 포함해 모두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요른은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른 건강?” “하하핫! 어쩌면 오늘 약탈자를 만난 것도 자네가 여기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군!” “…….” 할 말이 없다. 나는 대체 무슨 삶을 살고 있었던 거지?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아 침묵하며 말없이 걷고 있자니, 로트밀러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 놀리시오. 칼스타인 양은 유독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는 건 다들 알지 않소?” “아! 역시 그런 거였—!” “나 역시 3개월에 한 번 정도는 약탈자들을 만나는 편이네. 그러니 자네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아, 어, 음……. 위로해 주는 게 고맙긴 한데. 그래도 3개월에 다섯 번은 안 되는구나. *** 「웜스톤을 처치했습니다. EXP+2」 「아이언팔콘을 처치했습니다. EXP+2」 「강철언덕 수호병을 처치했습니다. EXP+2」 *** 3층 ‘순례자의 길’. 망자의 땅, 고블린숲, 짐승의 소굴 등 어느 루트를 지나쳤건 간에 결국에는 귀결되는 계층. 스타트 지점은 루트마다 다르기에, 사실상 다른 루트의 탐험가를 만나려면 4층 포탈이 있는 중심부까지 길을 따라 가야한다. ‘중심부까지 평균적으로 사흘에서 나흘 정도 걸린댔지…….’ 참고로 이는 이동에만 치중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다. 그 정도로 3층은 이전에 거쳐 온 층들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크기를 지녔다. 따라서 ‘순례자의 길’이란 계층 이름 외에도 몬스터의 서식지 별로 따로 이름을 부르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 ‘강철바위언덕’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하고, 내일부터는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소.” 하나의 지역이 끝나가는 경계선. 그 어중간한 위치에서 우리는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영역지가 겹치는만큼, 돌아다니는 몬스터가 비교적 적다는 것이 그 이유. “그나저나 드왈키, 자네는 괜찮나?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데.” 침낭을 바닥에 펼쳐놓는 것으로 잠 잘 준비를 끝마친 난쟁이놈이 드왈키에게 말을 걸었다. 이에 나도, 로트밀러도, 미샤도 아닌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야 궁금했거든. 이 말 많은 놈이 왜 계속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가. “…내가 그래 보였소?” “내 착각일 수도 있네마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네.” “그렇구려…….” 드왈키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알고 있소. 아마 그대들 입장에선 순진하고 어려만 보이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충격이었소.” “충격이라니?” “아니, 갖고 있던 환상이 깨졌다는 말이 옳을 것이오. 늘 어려서부터 탐험가에 대한 얘기를 들어오긴 했지만… 이런 얘기는 없었으니까.” 탐험가를 죽이는 탐험가. 반대로 그런 탐험가를 죽이면 돈이 된다는 탐험가. 확실히 꿈과 동심이 가득한 현실은 아니겠지. “이잇, 아까 그 말은 노, 농담이었당!” “농담이던 아니던 마찬가지라오. 아마 탐험가 일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사람을 죽이게 되지 않겠소?” 그 말에 일행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 “…….” 여기서 위로를 해 봤자 거짓말일 테니까. 난쟁이놈도, 미샤도, 로트밀러도, 나도 모두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드왈키도 계속 이 업종에 몸 담고 있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경험을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각오를 했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해서…….” 생각보다 훨씬 의연한 중얼거림에 나는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나? 할 수 있겠단 각오는 섰나?” “섰소. 하지만… 막상 그때가 온다면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드왈키의 각오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이쪽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뱉으며 그때 가서 못한다고 징징대는 머저리들보다는.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대화를 듣던 로트밀러도 한마디를 툭 뱉었다.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내 귀에는 할 수 있겠단 말보다 훨씬 더 듬직하게 들리는군.” “그, 그렇소?” 멋쩍은 표정을 짓는 드왈키를 보며, 로트밀러가 훈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마치 같은 길을 가는 젊은이를 바라보듯이. “자네는 해야 하는 일임을 알고 있고, 하겠다고도 마음을 먹었네. 그런 자네라면 분명 그때가 오더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구려…….” “하하핫! 이 친구야 기운 차리게!” 이내 난쟁이놈이 드왈키의 등짝을 후려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마무리됐다. 다만,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누우려는 차. “잠시만, 다들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돌연 로트밀러가 일행을 불러모았다.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게 팀에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소만, 한 가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소.” “무엇인가?” 내 물음에 로트밀러는 드왈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힘들고 끔찍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이내 로트밀러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야영지 근처로 절벽가로 이동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뒤를 따랐다. 보이는 것은 평소와 같은 어둠뿐이었다. 불빛마저 잡아먹는 미궁의 어둠은 늘상 탐험가의 시야를 방해하니까. “보여 줄 게 있다더닝?” “잠깐, 아주 잠깐만 기다리면 되네.” 시계를 보며 답하는 로트밀러의 모습에, 불현듯 짐작가는 바가 생긴 나는 시계를 꺼냈다. [23 : 59] 몬스터의 개체 수가 최고점을 찍는 3일 차가 시작되기까지 1분 전. 초침이 째각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10, 9, 8, 7, 6, 5……. 나는 시계를 닫고서 절벽 저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어둠 속 저 멀리에서 은색의 빛 구체가 보였다.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전부 땅에서 시작해 민들레씨처럼 나부끼며 하늘 위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어두웠던 미궁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있는 이 장소가 어째서 강철바위‘언덕’인지를 깨달았다. “일찍 도착한 탐험가들만 볼 수 있는 모습이지. 참 장관이지 않소?” 언덕. 즉, 이곳은 미궁 내에서도 고지대에 속하는 지형이다. 평소에는 어두워서 실감하기가 어려웠지만, 수많은 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나니 광활한 3층의 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들, 그 사이로 흐르는 강. 울창한 수풀림과 그 중심부에 우뚝 솟아 천장까지 이어진 드높은 첨탑. 평생 라프도니아의 성벽 안에서만 살아왔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그 광경. 멍하니 바라보던 드왈키가 중얼거렸다. “…탐험가들이 말하던, 세상이 넓다는 말을 이제 좀 이해할 것 같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막힌 천장이기야 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곳이 정말 하늘 같았다. 그것도 은하수가 펼쳐진 탁 트인 밤하늘. 물론 그 시간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땅에서 출발한 빛의 구체들이 천장에 도달하며 속속들이 그 모습을 감추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안팎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왜 3층에서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오.” 가설이야 많다. 3일 차에 접어들며 미궁 차원의 마력이 과포화되자 방출되는 것이라든가. 신이 내린 축복이라든가. 모두가 믿고 싶은 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로트밀러는 딱 잘라 말했다. “이유가 뭐든 한 가진 분명하오. 누구든 직접 이 광경을 보면 이유 따위야 궁금해지지 않는다는 것.” “맞는 말이당! 나도 말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당! 평소였으면 침낭에서 쿨쿨 자고 있었을 테니깡!” “하하핫! 왠지 저 친구 오늘 밤잠을 못 이룰 거 같은데?” 이후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평소와 같은 어둠이 미궁을 감쌌다. 초번인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모두 침낭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다만……. “…….” 드왈키의 침낭에서 숨소리가 들려온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 날이 밝았다. 진짜 주변이 환해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일단 시간상 그렇다. [08 : 10] 야영지를 정리한 우리들은 한참이나 내리막길을 걸어, 강철바위언덕을 벗어났다. 그리고 1차 목적지에 도달했다. “자, 여기부터가 오크 군락지오.” 오크 군락지. 3층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몬스터의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장소. 특징으로는 8등급 이상의 몬스터만 출현한다는 것이 있다. ‘곧장 4층으로 갈 게 아니면, 여기보다 좋은 사냥터는 없지.’ 난이도는 3층 지역 중 두 번째로 높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우리에게 있어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 조합이면 4층에서도 활동이 가능할 수준이니까. 마법사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원래 4층에서 활동하던 탐험가였지 않은가. “그럼 우선 한동안 이곳에서 손발을 맞춰 보고, 그다음은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해 보도록 하세.” 우선 진형을 재정비한 뒤 우리는 거대한 수풀림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뭐, 재정비라 해 봐야 로트밀러를 후방에 보내고, 그 자리를 나와 난쟁이놈이 대신한 게 전부다마는. “무라드, 1시 방향에 오크 한 무리가 오고 있소.” 몬스터 밀도가 높은 인기 사냥터답게, 외곽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걷고 있자니 오크 무리와 조우할 수 있었다. “취, 취이익—!” 오크 전사 넷에 궁수 하나, 주술사 하나가 섞인 기본 구성의 무리. “연습했던 대로만 하세!” 미리 손발을 맞춰 봤던 대로 진형을 잡았다. 이름하여 포메이션 A. 나와 난쟁이놈이 전방을 든든하게 막고, 근접 딜러 포지션인 미샤가 방패 벽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근접한 적부터 우선시하여 해치우는 진형.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오크에게는 딱히 저주 계열 마법이 필요 없기에 드왈키는 격수 역할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이는 로트밀러도 마찬가지. 그 역시 전투가 벌어지면 후방에서 석궁을 이용한 후방 지원에 집중한다. 단, 그에게는 한 가지 역할이 더 있다. 「오크 주술사가 [열광]을 시전했습니다.」 「오크 전사의 물리내성이 10초간 3배 상승합니다.」 혹여나 몬스터가 방패벽을 무시하고 후방으로 향했을 때, 일행 중 가장 취약한 드왈키를 지켜 주는 것. “열광 주술이네! 조심하게!” “드왈키! 내 뒤에 붙으시오.” “알겠소!” [열광] 상태에 돌입한 오크 전사 하나가 우리를 무시하고 드왈키에게 달려들자, 로트밀러가 방패를 꺼내들어 이를 막아 냈다. 물론, 탐색꾼인 그에게 오크 전사를 일대일로 이길 피지컬은 없지만……. “후우, 식겁했당!” 그의 주무기인 석궁, 버클러, 단검, 화염병 등을 이용해 잠깐만 시간을 벌어 주면 된다. 그럼 미샤가 지원을 하든, 드왈키가 마법을 써서 공격을 하든 할 수 있으니까. 「오크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EXP+2」 「오크 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2」 「오크 주술사를 처치했습니다. EXP+2」 그렇게 오크와의 첫 번째 전투는 무난하게 종료됐다. 총 걸린 시간은 약 8분으로, 부상은 없었지만 전투에 소모되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었다. ‘확실히 딜이 부족하긴 하네.’ 탐색꾼이 있는 데다가, 방패 전사가 둘이다. 그리고 오크는 8등급 몬스터들 중에서도 물리 내성이 제법 높은 축에 속한다. 물론 이 세계관에서 명실상부 최고존엄 딜러인 마법사가 팀에 있긴 하지만……. 드왈키는 마탑 출신이 아니다. 8등급 공격 주문이라 해 봐야 고작 단일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히는 [얼음창]이 전부. ‘뭐, 애초에 공격 마법보다는 저주 마법 때문에 데려온 거긴 하니까.’ 마법사의 가치는 고위력의 공격 마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탐험가와 몬스터 간에는 상성이란 게 있다. 다만, 팀에 마법사가 있다면 훨씬 다양한 상성의 몬스터들과도 능동적으로 전투가 가능하다. ‘그래도 속도가 느릴 뿐이지, 안정성 면에서는 높은 편이니…….’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팀이라 볼 수 있다. “그럼 더 깊숙이 들어가 보세.” 이후 우리들은 오크 군락지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며 전투를 치렀다. 그럴 수록 한 무리로 출현하는 오크의 개체 수도 늘어났다. 한 번은 7등급 몬스터인 ‘오크 대전사’도 섞여 있었지만……. 「오크 대전사를 처치했습니다. EXP+3」 이 역시 무리없이 사냥해 낼 수 있었다. 다만, 좆같은 일들은 언제나 모든 게 순조롭다 여겨질 때 나타나는 법.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정신없이 오크 무리들을 사냥하고 있던 때였다. “이헤느로 테운타인.” 돌연 멀리 떨어진 수풀 너머에서 중저음의 영창음이 들렸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앙-! 화염운석이 떨어져 우리가 사냥하려던 오크 무리를 터트렸다. “…씨발?” 이건 또 뭔 개같은 상황이지? 52화 팀 반푼이 (2) 화르륵-! 약 10m 거리에서도 후끈 전해지는 열기. 그리고 코를 간질이는 매캐한 탄내. 두근-! 뇌가 현 상황을 인지함과 동시에 심장이 꽉 조여왔다. ‘만약 이게 우리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아마 다 뒈졌겠지. “저, 전투 준비!” 갑작스러운 사태에 얼이 나갔던 난쟁이놈이 소리친 순간, 수풀가 쪽에서 탐험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총 다섯 명. 네 명이 마법사 하나를 호위하는 식의 진형을 하고 있었다. ‘씨바, 딱 봐도 3층 수준은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런 새끼들이 여기에 있지? 부디 약탈자만은 아니길 속으로 기도하고 있자니, 세모귀의 수인이 전투 태세를 갖춘 우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곳 오크 군락지는 드자르위 클랜의 영역이니, 다른 곳으로 떠나라.” ‘클랜?’ 어쩐지, 다들 똑같은 인장을 가슴에 차고 있더라니. ‘니미…….’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이놈들이 하고 있는 짓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3층에서 사냥터 통제라고?’ 씨바, 이거 원래 최소 5층부터 있는 콘텐츠 아니었냐고. *** [던전 앤 스톤]은 싱글 게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제 콘텐츠가 있다. 처음에는 메인 에피소드를 깨기 전에 맵간 이동을 막는 용도로 등장하지만, 추후 클랜을 창설하면 플레이어도 사냥터 통제를 할 수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막대한 인력이 들어가기에 몇몇 희귀몹과 보스몹 서식지가 아니면 손해다. ‘그런데 3층에서 통제를 한다고?’ 내 대가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야 7등급 몬스터를 통제해서 얻다 써먹느냔 말인가. 저 마법사만 봐도 그렇다. 저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고위 인력을 겨우 오크 잡는 데 쓰는 건 낭비다. “…드자르위라면 6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클랜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당신들이 왜 오크 군락지 같은 곳에?” 난쟁이놈 역시 이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인지 의아해하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싸늘할 뿐이었다. “너희들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아, 그러시구나. 나는 납득했지만 난쟁이놈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팀이 되며 푼수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 주긴 했어도 일단 이놈도 탐험가니까. 자기 이익이 걸린 일에는 민감하다. 하물며 그 원인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라면야 더욱더. “몇몇 클랜들 같은 경우엔 공적을 인정받아 왕가에서 미궁 내의 권리를 부여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소. 하지만 이곳이 드자르위 클랜의 영역이라고는 들은 바가 전혀 없소. 무엇보다 실제로 당신이 그들의 일원인지조차 알 수가 없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난쟁이놈도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의문점을 제시했다. 확실히 정론인 이야기였다. 장비와 방금 본 마법 수준만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상위의 탐험가들임이 분명했지만, 그들이 해당 클랜의 일원이란 증거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냥 튀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솔직히 나는 아닐 경우가 더 무섭다. 대형 클랜은 외부 시선에 눈치라도 보지, 사칭범 새끼들은 그런 거도 없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군.” 이내 수인놈이 불쾌하단 표정을 내지으며 눈알을 부라려댔다. 다만 난쟁이놈도 지지 않았다. “내가 그런 말을 자주 듣는 편이네.” 그렇게 무언의 기싸움이 길어지며 서서히 긴장감이 고조되던 때. 터벅. 뒤에서 무언가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미샤였다. 근데 얘가 갑자기 왜 이리 뒤에 딱 붙지? 마치 무언가를 피해 숨기라도 하듯이……. “…넌 설마, 반푼이?” 수인놈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묻자, 내 뒤쪽에서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뭐야, 진짜 숨은 거였어? “오, 오라버닝…….” 미샤가 말을 더듬으며 내 옆쪽으로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이에 수인놈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바깥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당.” “쯧, 반푼이 아니랄까 봐 말투 하고는.” 수인놈의 비아냥에 미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예상대로 서로 친해서 반푼이라 부를 수 있던 건 아니었던 모양. ‘그나저나 둘이 무슨 관계인 거지? 설마, 진짜 가족인 건가?’ 그런 의문이 피어나던 때, 뒤에서 무게만 잡던 상대측 마법사가 속 시원하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네마는, 저 숙녀분이 자네의 동생인가?” “예, 일단은.” 수인놈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반들반들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흐음, 칼스타인 경에게는 빚이 있지. 게다가 자네 동생이면 남이라 할 수도 없으니 이들만 특별히 예외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응? 하지만…….” 수인놈은 마법사의 배려를 다시 한번 단호히 거절했다. “아버님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이유는 집안 내의 일이기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완고함이 느껴지는 차가운 음성. “그렇게 말한다면야, 알겠네.” 마법사도 생각을 고쳐먹고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유 정도는 설명해 줘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보게나 자네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클랜 내부 사정으로 급하게 오크 대전사의 정수가 필요해졌네. 일이 잘 풀리면 다음 주기부터는 자네들도 여기서 사냥할 수 있을 테니, 이번만 다른 곳으로 가 주게. 음, 아니면 대전사가 나오지 않는 외곽으로 가거나.” 마법사 출신이라 그런지 수인놈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래 봤자 결국 우리 보고 꺼지라는 뜻이란 건 매한가지. “거절하겠소.” 난쟁이놈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은 예리한 말투로 상대를 비꼬았다. “보아하니 왕가의 공인도 없이 권리를 주장하는 듯한데, 우리가 당신네 클랜 사정을 봐줄 이유가 어디 있겠소? 그리고 애초에 지금 당신들이 하는 짓들이 불법이란 건 알고나 있소?” “…불법?” 유독 심기를 거스르는 단어였을까? “현명한 탐험가라면 말조심해야 할 때 정도는 구분할 텐데 말이지.” 온건하던 마법사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다만 추후 문제가 될 여지는 남겨 두지 않고 싶었을까. “그보다 우리가 언제 법을 어겼다는 건가? 단지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 자네들이 사냥할 몬스터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게 좋을 거라고 배려를 하는 것이다마는?” 돌려 말하긴 했지만, 해석하자면 우리가 떠나지 않을 시 전력으로 사냥을 방해하겠다는 뜻. 이를 알아들었는지 난쟁이놈도 분한 얼굴로 입술을 짓물었다. “제기랄…….” 강제로 내쫓거나 상해를 입힌다면 모를까. 이러한 부분들은 미궁법에 의해 딱 잘라 명시되어 있지가 않다. 즉, 법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한단 의미다. ‘애초에 법에 기대려 한 것부터가 문제지만.’ 어떻게든 우리 팀의 권익을 지키려 한 난쟁이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물러나고 싶었다. 본디 미궁이란, 힘 있는 놈이 법이 되는 곳 아니겠는가. 이를 망각하고 괜히 오기를 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다. ‘이쯤이면 얘도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란 것 정도는 깨달았을 테니, 슬슬 잘 구슬려서 물러나는 편이 좋겠군.’ 그렇게 상황을 지켜보며 이후 행동 방향을 결정했을 때. “그대들은 아무런 걱정들 마시오, 여기는 내가 잘 해결해 볼 터이니.” 느닷없이 드왈키가 끼어들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으면서. ‘해결하겠다고?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감히 짚이는 부분조차 없었다. 다만 말의 저의를 되물어 볼 새도 없이, 드왈키가 상대측 마법사를 향해 웃으며 다가갔다. “하하핫! 반갑습니다, 선배님.” “…선배? 혹시 우리가 만난 적 있던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마법이란 학문에 삶을 바치기로 한 동도로서—” “됐고, 그래서 자네는 대체 누군가?” 이런 매서운 반응은 예상치 못했을까? 드왈키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억지로 웃음 지으며 답했다. “하하하, 제 이름은 리올 워브 드왈키, 라프도니아 왕가 공인의 8급 마법사—” “뭔가 했더니, 역시 쓰레기였군.” “…예?” 마법사놈의 표정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아니, 내가 보기엔 ‘불법’이란 말이 나왔을 때보다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며, 마법사놈도 이번엔 그러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마법이란 학문? 삶을 바쳐? 꼴랑 기초 마법 몇 개 익혀 놓고 마법사라 뻗대며 저잣거리에서 잔재주나 부리며 먹고사는 쓰레기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 뻔뻔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니, 부디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날선 비난. ‘마법사라 그런가? 워딩부터가 장난 아니군.’ 마법사놈의 무호흡딜링에 감탄하는 한편, 드왈키가 걱정됐다. 면전에서 저런 말을 들으면 나라도 멘탈이 나갈 것 같은데……. “…꺼, 꺼허꺽!” 아, 이미 나갔구나. 옆을 확인해 보니,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눈만 꿈뻑이고 있는 드왈키가 보인다. 입만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모래밭에 던져진 물고기가 연상될 지경. 절친의 멘탈 붕괴 현상을 목도한 난쟁이놈이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보시오! 이건 좀 말이 심하지 않소!”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네마는?” “뭐? 사실만을 말해?” 난쟁이놈 목울대에 핏줄이 빳빳하게 섰다. 눈빛도 살기로 번들거리는 것이 영 심상치 않다. 그리고 이를 감지한 즉시. “보자 보자 하니—!” 난쟁이놈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다음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전투 망치를 압수했다. 그런데 역시 아니나 다를까. 치치칫-! 저린 감각이 손끝에서 전해져 온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씨발,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나는 분노를 최대한 삭히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신 차려라, 히쿠로드.” 방금, 우리는 전부 죽을 뻔했다. *** “좋은 동료를 뒀군. 평생 저 바바리안에게 감사하며 살게. 그가 자네들 모두를 살렸으니까.” “…….” 난쟁이놈도 슬슬 정신이 돌아왔을까? 녀석은 마법사의 비아냥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서둘러 팀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외곽 지역에 도달하자마자 우리에게 짤막한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가 이성을 잃고 흥분했네. 그자의 말대로 비요른이 아니었다면…….” 아마 전부 죽었겠지. 먼저 공격해 온 자들을 멀쩡히 돌려보내 줄 만큼 아량이 넓어 보이는 놈들은 딱 봐도 아니었으니. “방금 당신은 팀원 모두를 파멸로 이끌 뻔한 경솔한 행동을 저질렀소.” 로트밀러가 강한 어조로 질책했다. “…면목이 없네.” 제 잘못은 아는지, 난쟁이놈도 변명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로트밀러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강하게 탓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소.” 로트밀러는 군기반장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도 심성이 유했다. “그리고 경솔했다 뿐이지, 팀원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나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잘했다고 생각하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쌍욕을 퍼부어도 모자랄 상황인데 이 와중에 칭찬까지 해 줘? ‘적어도 분배를 깎고 이번 탐사는 무료 봉사를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에는 벌과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따라서 내심 그런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했던 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씨바, 내가 이상한 건가?’ 로트밀러가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이며 난쟁이놈을 용서하자, 주변 공기가 묘해졌다. 뭐라 형언키 힘든,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거북해 했던 그 분위기. “…나도 미안하당. 만약 내가 아니었으면 좀 더 좋게 풀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당.” 그 분위기에 제일 먼저 휩쓸린 건 다름 아닌 미샤였다. “어, 어디 그럴 리가 있겠소!” 두 번째는 드왈키였고. 미샤의 자책에 드왈키가 화들짝 놀라며 양팔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꿋꿋하게 얘기했다. “나, 나는… 물론 내 말이 늘 정답인 건 아니지만……! 나는 그대가 있었기에 이유라도 듣고 쫓겨난 거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리 멋들어진 위로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섞인 감정만큼은 모두에게 진실되게 전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집안 얘기를 왜 싫어하는지 아낭?” 미샤가 느닷없이 본인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당. 아마 어쩌면 그 이유를 짐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당.” 미샤가 눈치를 보며 우리 안색을 살폈다. 짐작하는 사람 중 일부였는지 로트밀러가 먼저 시선을 피했고, 따라서 나도 모르는 척 해 주었다. 요정은 정령을 다룬다. 무구의 축복을 지닌 드워프는 넘버스 아이템을 다룰 때 효율이 증가하며, 바바리안에게는 혼령각인이 있다. 이처럼, 수인족에게도 기본 민첩 스탯이 유별나게 높다는 것 외에도 종족적 특성이 존재한다. “나는, 우리 집 사람들 중 유일하게 ‘영혼수’와 계약하지 못했당.” 영혼수. 수인들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고대의 짐승들과 계약이 가능하다. 그리고 계약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다. 소환을 해서 함께 싸우거나, 강신을 해서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거나, 축복을 통해 짐승이 가진 특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거나. 물론, 모든 수인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몇몇 재능 있는 수인들만이 영혼수에게 선택을 받는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얘가 부족장 혈통이라는 거겠지.’ 부족장 가문인 칼스타인 가문의 직계. 즉, 순혈인 그녀가 ‘영혼수’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단순히 재능의 유무 문제가 아니라, 핏줄 자체에도 의심이 갈 만한 정황 증거가 되는 것이다. “어려서는 나도 형제들과 사이가 좋았당. 하지만 성인이 되고서도 영혼수와 계약하지 못하자 달라졌당. 다들 나를 반푼이라 불렀당. 피가 반만 섞였다공…….” 부정을 통해 낳은 자식. 모친은 일찍 별세한 터라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고, 미샤는 그런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오로지 무술에만 매진하며 탐험가로서 천천히 성장해 나갔다. “힘든 얘기를 꺼내줘서 고맙네.” 짧으면서도 긴 얘기가 끝나자, 난쟁이놈이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태도로 미샤를 쓰다듬었다. 미샤도 이전처럼 까칠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길들여진 고양이 같다 해야 하나? “히쿠로드는… 우리를 동료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화내 주었지 않낭.” 뭐야,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도무지 나 같은 비관론자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감정선이 거듭해서 이어진다. “하하핫! 그렇게 말해 주니 내 얘기도 해야겠군. 나는 대장장이가 되는 게 꿈이었네. 하지만 재능이 없어서 10년간 견습공 딱지도 떼지 못했지. 서른이 넘은 나이에서야 탐험가가 된 것도 그래서네! 그래도 돈은 벌어야겠고, 이때다 싶어 도망친 거지.” 미샤의 고백이 인상 깊었는지 난쟁이놈도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았고, 그다음은 드왈키였다. “재, 재능이 없기로는 나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오. 비록 집안 사정이 넉넉해 마법에 입문할 수 있었지만, 가진 재능이 미천해 마탑에 들어가지 못했소. 아마 내가 제대로 된 마법사였다면… 분명 그도 나를 조금은 존중해 주었을 테지.” 이어서 드왈키는 탐험가 일로 돈을 벌어 마법을 더 배우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리고 여기서 얘기가 끝나는가 했지만……. “지금껏 여러 팀에 몸담았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군.” 잠자코 있던 로트밀러가 피식 웃으며 꺼져가던 불씨를 살렸다. “내게도 사과해야 할 일이 있소. 지난날 무라드와 칼스타인 양이 연차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었소.” “그,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렇소. 내 추악한 시기심이 원인이었지. 각기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둘 다 운 좋게 이종족으로 태어났으면서 느리니 빠르니 투덜거린다 생각했었소.” 인간 탐험가에게도 장점은 있다. 일단 오러를 쓸 수 있고, 정령사가 될 수도, 마법사가 될 수도, 사제가 될 수도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몇몇은 바바리안만큼 커다란 체구를 갖기도 한다. 사실상 모든 종족의 장점을 갖고 있는 셈. 하지만 이는 결국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하핫! 그럼 우리 팀은 모두 반푼이가 모인 셈인가? 차라리 잘됐네, 우리는 앞으로 서로를 보며 괜히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이내 난쟁이놈이 어색하게 웃으며 가라앉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말에—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려.” 재능 없는 마법사 드왈키는 기뻐했다. “팀에 도움이 되도록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하겠당!” 또한 순혈로 태어나 영혼수를 못 다루는 수인은 감동했다. “첫 여정 3일 차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 팀은 되도록 오래갔으면 좋겠구려.” 평범함의 극치인 8년 차 인간 탐험가 로트밀러도 매한가지였다. 모두가 스스로의 결점을 인정하고 터놓고 말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직 무엇도 고백하지 않은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 “…….” 마치 너는 뭐 없냐는 듯한 눈초리. ‘어, 나는 그런 거 없는데…….’ 팀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일단 뭐라도 말해야 할 거 같긴 한데……. 모이는 시선에 당황한 나머지, 입이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뱉고 말았다. “나, 나는 엄마가 없다!” 53화 팀 반푼이 (3) 엄마가 없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끝난 뒤. “어, 어어…….” “그, 그랬군……?” 묘한 침묵이 감돌며 당황 어린 시선들이 내게로 날아든다. 나는 빠르게 부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내 어머니는 날 낳고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도 내가 어렸을 때 미궁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됐지만, 만나고 싶어도 그 둘을 만날 수 없다!” 참고로 방금 전 얘기는 아이나르를 통해 들은 내용으로 100% 실화다. “저런…….”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데 팀 내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갓 성인식을 마친 바바리안의 고백이었기 때문일까? 날 보는 시선에 동정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비요른, 그대는 우리 앞에서는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되오.” “미안하당. 너한테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집안 얘기를…….” “비요른, 내가 자네의 부모는 되어 줄 수 없겠지만 만약 자네만 원한다면—” 뭐래 이 새끼가. 난쟁이놈의 뒷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됐다.” 왠지 순식간에 이 중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 돼 버린 듯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진짜 엄마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는 얘들과 달리 3개월 차에 7등급 탐험가로 승급하며 초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먼치킨 바바리안. 언제나 제일 중요한 건 본질이다 본질. ‘음,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내가 제일 불쌍한 놈인 거 아닌가?’ 불현듯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팔자에도 없던 게임 속 세상에 끌려와 지금까지 죽을 위험을 수차례 넘겨야 했으니. 씨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쌍한 거지? “비요른, 표정이 좋지 않당! 혹시 엄마 생각이 난 건강?” “그래, 그런 거다…….” “가족이 그리운 거라면 날 누나라고 불러도 된—” 2절을 넘어 3절까지 하려는 고양이귀의 말을 끊으며,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건가?” 1차 목적지인 오크 군락지는 저 씹새끼들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다. 물론 놈들도 외곽부라면 OK라고 그랬지만, 거기서 이 속도로 사냥해 그걸 또 다섯 명이서 나누면 얼마나 남겠는가. “나는 일단 마녀의 숲으로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리더랍시고 난쟁이놈이 의견을 제시했다. 마녀의 숲이라면 4층과 연결된 포탈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숲을 뜻한다. 7등급에서 8등급의 몬스터들이 주로 출몰하며, 개중에는 물리 면역을 지닌 영체류 몬스터도 있다. “물론 근접 전사 계열이 많은 우리에게는 상성이 좋지 않네마는, 그래도 마법사도 있으니 나쁘지 않을 듯하네.” “흐음, 그럴 바에는 그냥 4층으로 올라가는 게 낫지 않겠소?” 경청하던 로트밀러가 새 의견을 제시했다. 나 역시 난쟁이놈 의견보다는 이게 더 나은 선택지 같았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에게 마녀의 숲은 어쩔 수 없이 거쳐가는 지역으로 인식될 정도로, 그곳은 주사냥터로서의 장점이 미미하니까. ‘나오는 정수 중에서 내가 먹을 만한 것들도 없고 말이지.’ 다만 문제는 난쟁이놈이 이 선택지를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단 것일까. “4층은… 아직 시기상조일 듯하네.” 나도 난쟁이놈이 뭘 걱정하는진 안다. 3층에선 7등급 8등급 몬스터가 주로 나온다. 그리고 이는 4층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둘 사이엔 아주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회의 때도 거듭 말했지만, 쉽게 생각하고 위로 올라갔다가 전멸하는 팀들을 많이 봐 왔네. 한 번은 내가 있던 팀이 그럴 뻔도 했고.” 6등급 몬스터의 유무. 4층부터는 희박한 확률로나마 6등급 몬스터가 출몰한다. 조우 빈도수로 치면 하루 온종일 돌아다녀서 사흘에 한 번 마주칠까 하는 정도지만……. 이는 결국 4층에서 활동 시 필연적으로 6등급 몬스터와 조우한다는 뜻이 되겠지. ‘그 한 번을 넘길 실력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게 참 애매하단 말이야.’ 실제로 게임을 할 때도 간당간당한 수준으로 4층에 진입했다가 피를 본 적도 많았다. 그러니 난쟁이놈 말도 일리는 있는 셈. “4층으로 향하는 건 적어도 며칠은 더 손발을 맞춘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번 사건으로 생긴 깊은 감정적 교류나 유대감 증가야 어쨌든. 우리는 이번에 처음 결성된 팀이다. 미궁에 진입한 지 이제 고작 3일 차가 됐을 뿐이며, 그만큼 아직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알다시피, 드왈키는 이번이 초행이지 않나, 비요른도 3층까지 온 건 이번이 처음이고.” 결론만 축약하자면, 4층에 가는 건 괜찮지만 너무 조급하진 말자는 게 난쟁이놈의 주장. “음, 그럼 그냥 3층의 다른 지역으로 가면 되지 않낭? 녹빛꼬리 습지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뎅…….” 머리 아픈 표정으로 논쟁을 듣던 미샤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곧장 로트밀러에게 빠꾸를 맞았다. “처음부터 그쪽 경로로 움직였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녹빛꼬리 습지로 가려면 엿새는 족히 걸릴 것이네.” 1층은 7일, 2층은 10일, 그리고 3층은 15일 차가 끝나는 순간 미궁이 폐쇄된다. 근데 이제 와서 7일이 넘는 시간을 이동에 또 투자한다? 이제 3일 차이니 당장 출발해 봤자 가서 5일밖에 사냥을 하지 못한단 뜻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철바위언덕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은 선택일 듯하군.” “그, 그런강? 맨날 따라만 다녀서 잘 몰랐당…….” 로트밀러의 전문가스러운 말에 미샤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쩝, 혹시나 해서 계속 대화를 들어 봤는데 별건 나오지 않는구나. 이제 슬슬 내가 나서서 정리를 해야겠다. “언제까지 서서 얘기만 할 건가? 이쯤 하면 됐으니 다들 모여 봐라. 어떻게 할지는 다수결로 정하자.” “다수결?” “왜? 로트밀러 너는 가위바위보 쪽이 더 좋나?”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내 물음에 로트밀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냐고 농담 식으로 말한 거였는데……. 바바리안이라서 그런가? 애석하게도 이게 농담이란 걸 눈치챈 녀석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수결로 정하잔 의견에 찬성이오.”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 “나는 뭐든 좋당!” 여하튼 다수결로 추후 행보를 정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가장 먼저 표를 던진 건 나였다. “나는 4층으로 올라가는 게 좋을 듯하다.” 앞에서 이러는 쪽이 조금이라도 더 여론 몰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 “…갑자기 4층이 위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당.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는 거 같달깡.” “어, 칼스타인 양도 그랬나?” “…….” 얘들 반응이야 어쨌든, 한 명씩 순번대로 의견을 말하니 금방 결론이 났다. “후우, 자네들 전부 같은 의견이라니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의미는 없겠지.” 우리는 이제 4층으로 간다. *** 난쟁이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결정을 밀어붙인 것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이번 결정은 다수결이긴 했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 만약 내가 4층 진입이 이르다고 판단했다면, 얘네들의 자존감을 다 개박살 내는 한이 있어서라도 3층에 처박혀 있도록 했을 테니까. “으응? 갑자기 조금 추워진 거 같은뎅……” “흐음, 벌써 말인가? 마녀의 숲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을 터인데…….”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 느낌인뎅, 뭐라 잘 말을 못하겠당.” 로트밀러의 인도 아래,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하염없이 헤쳐나갔다. 여전히 난쟁이놈은 찝찝한 표정이었다. ‘핏빛 성채에선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요즘 들어 과하게 신중해졌단 말이지.’ 처음 맡은 팀장이란 자리에서 팀원까지 직접 하나하나 만나 보고 뽑아서일까? 묘한 책임감이 늘 녀석과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 바지 팀장이니 그럴 필요 없는데……. ‘뭐, 내가 뱀파이어 정수를 지닌 걸 모르니 그럴 수도 있나?’ 난쟁이놈은 내 정확한 스펙을 모른다. 그렇기에 곧장 4층으로 올라가는 게 조금 더 불안했을 것이다. 본인이 지닌 넘버스 아이템 ‘수호자의 팔목보호대’가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 깨닫지 못한 것도 한몫했을 테고. “히쿠로드, 마녀의 숲에 들어서면 ‘그것’도 아끼지 말고 사용해 봐라.” 내 조언에 난쟁이놈이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하겠네.” No.3112 수호자의 팔목보호대는 무려 5천만 스톤의 가치를 지닌 고급 장비다. 그리고 견물생심이라고. 난쟁이놈은 자신이 이런 귀물을 지닌 걸 다른 팀원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써야 될 때 쓰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어차피 내가 주인인 것도 아니고. 방금 전까진 서로를 의지하네 마네 신파를 찍기도 했었잖아? “그것이라닝? 그게 뭔강? 왜 둘만 아는 얘기를 하낭!” “그때가 되면 알 거다.” 미샤의 호기심은 대충 무시해 주며 최종적으로 재점검을 해 보았다. ‘탱커 라인 스펙이 이 정도면 6등급 몬스터는 충분할 거 같고. 문제는 딜러 라인인가…….’ 스펙만으로는 조금 부실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오크 군락지에서 짧게나마 함께 사냥을 하며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앞 라인이 탄탄한 만큼, 이 멤버면 6등급 몬스터라도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뒤에서 트롤링 하며 먼저 뒈지는 것만 아니면 말이지.’ 게임을 할 땐 그런 NPC들이 참 많았는데. 얘내는 안 그러겠지……? ‘아씨, 갑자기 또 불안해지네?’ 뒤늦게 걱정이 피어나는 나와 달리, 미샤는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4층에 가는 건 오랜만이라서 조금 흥분된당!” 듣자 하니 1년 전에 있던 팀이 해체된 이후 처음 4층에 복귀하는 것이라는데……. 근데 고양이과라서 그런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릉그릉 소리가 나는 것도 같다. “슬슬 야영할 곳을 알아봐야겠구려.” 오크 군락지 외곽을 타고 쭉 움직이고 있자니, 이내 휴식을 취할 순간이 되었다. “로트밀러, 다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좀 더 이동하는 건 어떤가?” “이 지점보다 좋은 곳을 찾으려면 세 시간은 더 가야 하오.” “흐음, 그렇다면야 알겠네.” 참고로 이때의 시간은 약 오후 9시 경으로, 1일 차, 2일 차의 야영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솔직히 말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이게 실력 있는 탐색꾼이라는 건가?’ 로트밀러는 동선에 따라 야영 포인트를 생각하고, 그에 맞춰 이동 속도를 조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밤낮이 없는 미궁이라지만, 휴식은 일정한 시간에 맞춰 두는 게 좋으니까. “로트밀러, 내일은 일정이 어떻게 되지?” “아마 내일 점심에는 마녀의 숲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네.” 음, 그럼 4층에 진입하는 건 모레쯤 되겠네. 물어보면 버퍼링도 없이 대답이 딱딱 나오는 게 인간 내비게이션이 따로 없다. “비요른, 자네는 말번이었지? 내일 숲에 들어서고부터는 꽤나 시달려야 할 테니 오늘은 어서 쉬게.” “그러겠다.” 오늘의 초번은 난쟁이놈, 말번은 나다. 마녀의 숲은 근접 전사 계열이 가장 고생해야 하는 곳이기에 순번과 관계없이 그렇게 됐다. 뭐, 어차피 자면서 한두 번은 깨는 일이 생길 테지만. *** “비요른.”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일렁이는 횃불 조명 아래로 로트밀러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로트밀러가 바로 내 전 순번이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아직이네.” “근데 왜…….” 졸린 눈을 비비던 나는 흠칫 굳었다. 드왈키, 난쟁이놈, 그리고 미샤까지. 이미 나를 제외한 팀원 전부가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무장을 한 상태로. 나는 짧게 물었다. “몬스터인가?” “둘 다일세.” 몬스터와 탐험가라……. 거리는 얼마나 되냐고 물으려던 차, 저 멀리 어둠 너머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젠장!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도망쳐!” 정황상 몬스터에 쫓기는 탐험가들인 듯한데……. 로트밀러가 눈을 감고서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더니 이내 짧게 중얼거렸다. “이제 확실히 알겠군.” “무슨 소리지?” 얘가 이렇게 인상을 찌푸릴 땐 대부분 뭔가 일이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우리를 향해오는 자들 말일세, 강철바위언덕에 도착할 때 있었던 그자들이 분명하네.” 이거, 상황이 또 재밌게 돌아간다. 54화 마녀의 숲 (1) “그럼 저들이 그때 그 약탈자란 뜻인가?” 난쟁이놈의 물음에 로트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로써 상황이 명백해졌다. 3층에서 당당히 약탈을 벌이던 놈들이 공교롭게도 몬스터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우리 쪽으로 오게 됐다는, 그런 우연은 없을 테니까. “누군진 몰라도 우리를 콕 짚어 노리고 있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일세. 아마 쫓기는 척하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려는 거겠지.” 내 말에 긍정한 로트밀러가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떡할 건강!”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운 좋게도 로트밀러 덕분에 놈들의 수작을 일찍 알아챌 수 있지 않았나. “이 기회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군.” “이용하다닝?” 미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세세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어느새 저들도 도착한 모양이니까. “부, 불빛! 불빛이다!” 한 사내의 외침과 동시, 피땀으로 범벅된 세 명의 남녀가 우리 횃불 반경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연기에 자신이 없다면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라.” 속삭이듯 읊조리며 로트밀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아저씨랑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내심 걱정했던 난쟁이놈도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한 듯하고.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더 가까이 오지 마라.” 뛰어오는 그들을 보며, 나는 즉시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가 길을 가로막았다. “이, 이보시오! 일행이 전멸했소. 도와주시오! 사례는 할 테니……!” 절박하면서도 다급한 표정. 이 아저씨도 연기 잘하네. 하긴 약탈자면 당연한 건가? “무기를 내려놔라.” “하, 하지만 뒤에 몬스터가!” 삼십대 초반의 인간 아저씨가 뒤를 가리켰다. 횃불 반경이 너머에서 그들을 쫓던 오크 무리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 취이익!”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자 쉬이 접근치 못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러니 어서 우리들을 들여보내 달라. 그게 저 아저씨가 말하려는 바임은 자명했으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너희들 선택이다. 무기를 내려놓든가, 밖으로 꺼지든가.” 나는 다시 한번 완고하게 말했고,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기야 고민이 되겠지. “…….” 미궁에서 무기란 목숨과 동일하니까. 아마 우리가 눈치를 챈 건 아닐지까지도 속으로 의심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다. 쟤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우리가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내려놓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콧수염 아저씨가 무기를 바닥에 떨구자, 다른 두 명도 뒤따라 무기를 버렸다. ‘욕심을 부려 보기로 한 건가.’ 그 선택이 흡족스러운 한편,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정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우리를 노린다니? 짐작 가는 이유조차 없었다. “좋아, 그럼 그 상태로 천천히 와라. 되도록이면 모두 떨어진 상태로.”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리는 그저 도움을…….” “도움을 받고 싶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알겠다.” 이후 그들이 지시대로 한 명씩 도착하자, 로트밀러가 다가가 숨긴 무기들의 유무를 확인했다.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어 보이네.” “그렇군. 무라드, 너는 이들을 감시해라.” “아, 알겠네!” 난쟁이놈이 바짝 굳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북한군처럼 팔다리의 열을 맞춰 걸어갔다. 왠지 속에서 한숨이 밀려 나왔으나……. 다행히 놈들의 표정을 보니 그 행동에서 어색한 점을 느끼진 못한 모양. “취, 취이익…….” “취익, 취익, 취익-!” 이후 난쟁이놈에게 약탈자 삼인방을 맡긴 채, 오크 쪽을 경계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놈들이 등 돌려 떠났다. 오크 놈들도 이 많은 숫자와 싸우는 건 리스크가 크다고 여긴 것이다. ‘하여간 몬스터 새끼들은 하나같이 영악하다니까.” 뭐, 사람 새끼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하튼 쓸데없는 전투를 피한 건 우리에게 희소식이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문젯거리가 주어진 와중에, 오크와의 전투까지 신경 쓰려면 영 피곤할 테니까. “으아, 죽는 줄 알았다…….” 이내 오크 무리가 사라지자, 삼인방 중 홍일점인 여성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만, 뒤늦게 정신이 들었을까? 그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더니,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목례했다. “아! 저는 엘리사라고 해요. 저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찢어진 상의로 훤히 드러난 가슴골 때문일까? “크, 크흐흠. 히쿠로드 무라드일세.” 난쟁이놈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진한 연기를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고개는 돌아갔는데 시선은 여전히 한곳을 향하고 있는 걸 보면. “무라드 씨였군요! 그럼 이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실까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아, 그렇구나!” 엘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아까처럼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번에도 가슴골이 강조됐다. “하아, 진짜 덕분에 살았어요!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련지…….” 헐떡이는 숨을 토해 내며, 귓구멍을 간질이는 듯한 음성을 면전에 뱉어 준 것은 덤. 이제 보니 삼인방 중 얘만 상의가 유독 많이 찢어져 있던 것도 이를 위해서인 듯한데……. “비요른! 눈빛이 게슴츠레하당!” 미샤가 나의 진심을 오해하며 중얼거렸다. 다만 굳이 이 자리서 오해를 풀진 않았다. 곧 그럴 기회가 있을 테니까. “하나씩 이름을 밝혀라.” 일단 놈들에게서 의심을 지우기 위해, 간단히 호구 조사부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스스로를 소개한 것은 리더로 추정되는 콧수염 아저씨였다. “한스 아르고다.” 뭐? “…한스라고?” “흔한 이름이지, 동명이인이라도 있나 보군?” “아, 음, 뭐… 그런 거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A는 내 방패에 대가리가 찍혀 죽었다. 한스B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조언을 얻은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리고 오늘 만난 한스C, 그러니까 여기 이 콧수염 아저씨는 아무래도 A의 수순을 밟게 될 듯하다. 아무튼 얘는 이만하고 다음. “저는 이리타 테이슨이라고 합니다.” 훤칠한 체격의 금발 창술사, 테이슨. 나이대는 이십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별다른 특징은 못 찾겠다. 굳이 꼽자면, 예의가 발라 보인다는 정도? “여기까지인가 싶던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창잽이 테이슨이 허리를 90도로 숙이자, 엘리사가 특유의 천연스러운 말투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말이에요!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레아틀라스께서 저희를 보우하신 게 틀림없어요!” “레아틀라스?” 한 단어에 로트밀러가 흠칫 굳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엘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러니까 엘리사 양은—” “아, 제가 아직 성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저는 엘리사 베헨크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엘리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의 복장을 확인하더니 울상을 지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땀과 흙으로 점철된, 원래는 하얬을 의상. “…보시다시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레아틀라스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허!” “정말로 신관이셨군요.” 난쟁이놈은 그저 짧게 탄성을 토해 낸 반면, 로트밀러는 눈을 감고는 엘리사 앞에서 짧게나마 성호를 그렸다. 와, 이 아저씨 연기 잘하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예,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다 된 밥이라 여겼을까? 엘리사 역시 환히 웃으며 그를 마주보며 성호를 그려 주었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한순간에 경계심 어린 공기가 옅어졌다. 음, 적어도 저들에겐 그리 보였을 것이다. ‘얘가 진짜 신관일 리 없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으—’ “엘리사 님, 괜찮으시다면 제 상처 좀 봐주시겠습니까?” 뭐? “죄송해요! 그걸 먼저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설마, 사칭이 아니라 진짜 신관이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움찔하는 사이, 한스C가 상의를 걷어 찔린 자상을 보여 줬다. 그러자 엘리사가 기도주문을 외우더니,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손을 상처 부위로 가져다 댔다. 헌데 얼씨구? 솨아아아- 정말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의심의 눈길로 모든 걸 지켜봤음에도 이견을 낼 수 없는 진짜 신성력이었다.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하냐고? 일단 포션이랑은 아무는 소리부터가 달랐을뿐더러, 저기 저 한스C의 표정만 봐도 그렇다. 일말의 고통도 없는 듯 온화하지 않은가.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예상외의 전개였던 건 마찬가지였을까. 잠시 당황했던 로트밀러가 이내 정신을 되찾고는 연신 성호를 그려댔다. 마치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한 중생과도 같은 반응. 내 눈에는 좀 과해 보이긴 했지만, 사실 세계관 구조상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이종족들이 성지에서 자라듯, 대부분의 인간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신전을 통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아가니까. 신관이란 이름이 지닌 무게부터가 다른 것이다. “아! 그럼 이제 무기들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엘리사가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마치 이제서야 무기가 없단 걸 깨달았다는 듯한 말투. 아마 신성력을 보여 준 것도 이를 위한 포석이었겠지. 아까 과감하게 무기를 버린단 선택을 한 것도 바로 이걸 믿어서였을 테고.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럴 순 없다.” “네, 네?” 당황한 듯한 표정의 그녀를 응시하며, 나는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그야 벌써 정체를 알고 있단 걸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니까. “네가 진짜 신관이란 건 알겠다.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조상신을 믿는 바바리안이다. 딱히 신관들에게 받은 것도 없으니, 이렇게 반응을 해도 이상하진 않다. 이내 엘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간 출신인 로트밀러와 드왈키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 보려는 듯한데……. 나는 완고하게 여지를 거두었다. “무기를 돌려주는 건, 이들에게 보상금을 받은 뒤에 이들이 떠날 때다.” “보, 보상금요?” “뭘 놀라나? 네가 신관이건 뭐건 미궁에 들어온 이상 탐험가다. 관례를 따라야 한다.” “아, 네에… 그런 관례가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럼… 얼마쯤 드리면 될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한 뒤에 말했다. “200만 스톤 정도면 되겠군.” “…뭐, 뭐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묻는 엘리사.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닐 텐데?” 암, 이 정도면 양반이지. 심한 놈들은 살려 준 대가로 장비도 싹 털어간다고 들었으니까. “아까워하지 말고 목숨값이라 생각해라.” “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큰돈이 없는걸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다. 미궁에 들어오면서 현금을 갖고 다니는 놈들이 어딨겠는가? 예상한 답이 나왔으니 슬슬 다음 수를 둬 볼 차례. “값을 깎아 달라고는 안 할게요. 적어도 밖에 나가서—” “안 된다. 나는 동족의 말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정 돈이 없다면 현물로 지불해라.” “…현물이요?” “음, 저 남자가 지닌 갑옷 정도면 될 거 같군.” 검지로 한스C를 가리키자, 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엘리사와 몇 번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래 이 정도로 목숨을 건졌다 치면 손해는 아니겠지. 대신 조건이 있다. 우리 피로가 풀릴 때까지 오늘밤 신세를 지겠다.” “좋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셈은 훤히 보이지만, 뭐 어차피 진짜 지킬 약속도 아닌데 못 할 게 뭔가? “이리타, 나를 좀 도와주겠나?” “그러리다.” 옆에 있던 창잽이의 도움을 받아 중갑을 벗은 한스C가 장비를 로트밀러에게 건넸다. 좋아, 일단 한 새끼 갑옷은 벗겼고. ‘일단 이 정도면 뺏을 수 있는 건 전부 뺏고 시작하는 거 같은데…….’ “자, 그럼 대가는 치렀으니 어서 우리 무기를 돌려주겠나?”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해맑게 웃었다. 솔직히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왜 웃는 거지?” 한스C가 날 보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엘리사를 보던 내 눈빛이 게슴츠레하다던 미샤의 오해를 풀지 않았듯이. 말하지 않아도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저기 얀델 님? 여기서 더 요구하시면 저희도 곤란—” “아, 그럴 일은 없다.” 나는 그리 답하며 메이스로 엘리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억-! “에, 엘리사 님!!!” 어느 게임이던 힐러 대가리부터 깨부수는 건 국룰인 법이다. 55화 마녀의 숲 (2) 청초한 이목구비와 육감적인 몸매.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간드러지는 목소리. 엘리사는 대부분의 남성이 선뜻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적어도 1초 전까지는. “에, 엘리사 님!” 한스C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순간. 160cm가량의 가냘픈 체구를 지닌 여인이 바닥에 쓰러진다. 털썩. 움푹 파인 관자놀이. 과하게 튀어나온 안구. 귓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물총처럼 뿜어져 나오는 진홍색 선혈까지. 더 이상 어여쁜 모습의 엘리사는 없었다. “너희들 대, 대체 무슨 짓을……!” 그녀의 처참한 몰골을 목도한 한스C가 충격에 빠진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엘리사 님을 해친 거지! 우리가 뭘 했다고……!” 그래, 아직 한 거는 없긴 하지. 따라서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 미안하군. 실수였다.” 메이스가 무겁다 보니 손이 미끄러졌다. 정말이다. 그러니까……. “잠시 가까이 와 보지 않겠나? 실수에 대한 보상에 대해 얘기하지.” “이, 이런 미친 새끼가!” 역시 통하지 않는 건가. 하긴, 얘도 대가리가 있긴 하겠지. 이내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한스C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 안 돼… 다 죽을 거야…….” “알고 있다니 잘 됐군.” 나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이런 미친 새끼들 때문에…….” 두려움에 빠진 한스C를 보며 미소 짓기도 잠시, 형언키 어려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뭔가 해서 천천히 살펴보니, 이질감의 원인은 녀석의 시선에 있었다. ‘왜 우리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무서워 하는 거지?’ 나는 자연스레 한스C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그 끝에는 (구)엘리사가 있었다. 살아생전의 미모를 잃고 차디찬 시체가 된 비운의 여인. 근데 그런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을까? “기긱, 기깃, 기기깃…….” 진작에 신의 품으로 돌아갔어야 할 엘리사가 괴기한 소리를 뱉으며 경련하기 시작한다. 전깃줄이라도 만진 듯 역동적으로 꺾이는 사지는 마치 영화 속 좀비들이 추던 관절춤을 연상시켰다. ‘씨발, 이건 또 뭐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머리통을 후려쳤을 때, 분명 원샷원킬 특유의 손맛이 있었다. 근데 왜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지? 저런 소름 끼치는 소리까지 내면서? “기깃, 기기긱, 끼깃!” “비, 비요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나한테 묻지 마. 난쟁이놈아. 나도 존나 무서우니까. 이 몸으로 깨어나 사람 여럿 조져 봤지만, 시체가 되어 저런 춤을 추는 모습은 조상신께 맹세코 처음이다. 하지만……. 까드득. 긴장할 때 턱에 힘이 들어가는 이 버릇은, 내 육신이 용감무쌍한 바바리안의 것이라는 증거. “…내가 해결해 보겠다.” “해결해 보겠다니?” 대답 대신 앞으로 대쉬해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타격지는 엘리사의 안면부. 퍼억-! 데스핀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말랑한 두개골이 또 한 번 움푹 파였고, 이에 난쟁이놈이 까무러쳤다. “사, 사체 훼손을 하다니, 아무리 이들이 약탈자라고 해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다.” “뭐? 그게 무섭다는 자가 할 만한 행동—” 나는 놈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왜 이런 걸 여러 사람에게 거듭 말해야 되는진 모르겠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암, 그렇고 말고. 무서우니까 때려서 박살낸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정사정없이 적을 조져 나가는 것. 이것이 바바리안의 방식이다. ‘아, 이제 알겠군.’ 아이나르가 벤시를 무서워하던 것도 이래서였다. 영체류 몬스터는 때려 부술 수 없으니까. 물리 딜이 아닌 마법 딜이 필요하다. 새삼스레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다시금 (구)엘리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씁쓸하게 혀를 찼다. “제기랄, 아직까지도 춤을 추다니…….” 이제 완전히 안면이 함몰된 상태로도 엘리사는 연신 관절을 꺾으며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역시 마법 딜이 필요한 건가? “드왈키! 마법을 써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이런 애들은 좋게 말해 줄 필요가 없다. 강하게 말해야지만 말을 들으니까. “어서 써라!” 내 외침과 동시, 드왈키가 마법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 나는 죽을 수 없어!” 한스C가 등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미처 몇 걸음도 채 뛰기 전에, 로트밀러가 발사한 석궁 화살이 한스C의 등짝에 명중했다. 푸욱! 등 돌린 그대로 처참히 쓰러진 한스C. 그 비참한 최후를 보며 나는 짧게 중얼거렸다. “병신 새끼.” 그러게 갑옷이라도 안 줬으면 화살 한 방은 거뜬히 버텼을 거 아니야. 역시 지능이 낮으면 몸이 고생을 한다. 이내 나는 시선을 움직여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 창술사 테이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안 도망치나?” “그래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눈빛과 말투. 다만 내 전사의 피는 그 음성에서 한스C와 마찬가지로 묘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 느닷없이 한스C의 몸에서 흑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개쫄아서 일단 급하게 드왈키 뒤로 숨기는 했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다. 빛은 5초가량 뿜어진 뒤 사라졌고, 그제야 나는 웅크렸던 몸을 펼쳐 앞을 확인했다. “니미럴?” 이게 또 뭔 괴상한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빛을 뿜어낸 한스C의 몸은 마치 미라처럼 변해져 있었다.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잃고서 삐쩍 마른, 생기를 모두 잃은 육신. 자연스레 석궁을 쏜 로트밀러에게로 일행의 시선이 모였다. “로트밀러 자네 대체 무슨 짓을…….” “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소! 정말이오!” 알아, 이 아저씨야. 아마 이것도 분명 (구)엘리사랑 관련되어 있는 일이겠지. 애초에 저기 테이슨 저놈한텐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도 저꼴로 변해 버렸지 않은가. 마법사 드왈키가 다급히 소견을 내놨다. “저 둘에게서 뽑혀 나간 생기가 저기 저 여자 몸으로 흡수됐소!” 음, 대충 그런 느낌인 건가. 게임을 하도 했더니 어떤 타입인지 대강 감이 온다. 짚이는 게 하나 있기도 했고. “기긱, 기깃, 기기깃…….” 이내 엘리사가 관절춤을 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면부는 여전히 반쯤 짓이겨진 상태. 그 상태에서 엘리사의 입이 열렸다. “어, 떻, 게, 알, 았, 지?” “뭘.” “우, 리, 가, 적, 이, 라, 는, 걸.” “아, 그거.” 나는 개쫄은 상태로 애써 태연한 척 답했다. “씹쌔끼들은 하나같이 썩은 냄새가 나서 말이지.” 만족스러운 답변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머리가 반쯤 짓이겨진, 하프 헤드 엘리사가 이처럼 크게 웃는 걸 보면. “끼, 히, 히, 히, 히, 히, 히!!!” 씨바, 왜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내 인생은? “…….” 현 상황은 시체골렘전 때와 비슷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광경에 일행 모두가 바짝 얼었고, 이에 나는 그때처럼 고함을 내질러 넋을 잃은 팀원들을 깨웠다. “다들 정신 차려라!!” 자칫하면 전부 뒈지게 생겼다. *** 10년간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해 왔다. 대중적인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게임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끼, 히, 히, 히, 히, 히, 히!!!” “어, 어떻게 된 건가. 죽은 사람이 어째서…….” 시체가 부활했다. 그러나 내 지식에 따르면, 이게 탐험의 신 레아틀라스가 펼친 기적은 아닐 것이다. 그를 모시는 자들이 하고 다니는 짓이야 어쨌든 간에, 레아틀라스는 일단 선 성향의 신이니까. 나는 유추해 낸 결론을 짧게 말해 주었다. “카루이의 사제다.” 암흑신 카루이의 사제. 인간족으로 시작해 신관으로 전직했을 때만 선택이 가능한 일종의 히든클래스. 신성력과 암흑주문을 동시에 쓸 수 있단 강점을 지녔지만, 그만큼 패널티가 크다. “카루이의 사제라고!” “저 여자가 사악한 악신의 종속이었단 말인가!” 카루이의 사제로 전직 시, 클래스를 들키는 순간 형장으로 끌려간다. 때문에 악성향 NPC들을 종속으로 만들어서 팀을 꾸려야 하며,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칠 필요도 있다. ‘약탈자짓을 하는 것도 그래서겠네. 미궁에서 제물을 구하는 게 가장 안전할 테니까.’ 이로써 대부분의 인과가 풀렸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았다. 어째서 우리여야 했는가.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끈질기게 노려왔는가. 다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겠지. “당신, 때문에, 아까운, 종속을, 잃었어.” 한스C와 테이슨에게서 흡수한 생기를 모두 소화했을까?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엘리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짓이겨졌던 뇌가 회복되서인지 어휘도 이전보다 나아진 거 같다. 즉, 지능이 돌아왔다는 뜻. 하지만…….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은.’ 역시 지능과 인성은 별개라는 걸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 탓을 하다니, 너는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게 틀림없군.” “…뭐, 어?” 한스와 테이슨이 젊은 나이에 저리 참담한 모습으로 요절한 건 모두 이 여자의 탓이다. 그냥 대가리가 깨진 채 운명을 받아들였으면 이럴 일도 없었지 않나. 이내 나는 결의를 다잡았다. “한스와 테이슨의 복수를 해주겠다.” 그리고 갖고 있던 장비와 귀중품들을 모조리 털어가겠다. 뭐, 쉽지는 않겠지만. 언제는 내 삶이 쉬운 적이 있었던가? *** 「엘리사 베헨크가 [죽음의 부름]을 시전했습니다.」 “저, 저기 좀 보게!” 난쟁이놈이 기함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미라가 된 한스C와 테이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루이의 사제라면 몇 번 플레이해 본 적 있기에 놀랍지 않았다. ‘죽음의 부름.’ 해당 클래스의 기본이자 핵심이 되는 스킬. 원래는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를 소환할 뿐이지만, 시체라는 매개체를 이용시 보다 강한 하수인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지理智란 찾아볼 수 없는 저 눈이 증거. “그르르르…….” 머지않아 언데드로 전직을 끝마친 한스와 테이슨, 줄여서 ‘한슨’이 우릴 보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적들을, 해치워라, 나의 종들이여!” 엘리사의 명에 따라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한슨’의 돌진이 나와 난쟁이놈이 형성한 방패벽과 부딪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투.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이후 사용하는 액티브 스킬의 효과가 영혼력에 비례해 상승합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독성부여]를 시전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두들겨 맞는 사이, 미샤와 드왈키가 열심히 딜을 넣었지만 유효타는 없었다. 인간을 상회하는 근력, 메이스로 후려쳐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높은 수준의 물리 내성. 심지어 언데드화하며 독과 냉기에 내성까지 부여됐다. 아무래도 상성이 좋지 않은 셈. 쨍그랑! 화르륵-! 물론 언데드와의 전투 경험이 많은 로트밀러가 화염병들을 아낌없이 사용했지만……. “허튼짓을, 하는구나!” 「엘리사 베헨크가 [망자의 불]을 시전했습니다.」 허공 위에 흑색의 불길이 일렁이더니, 주변의 불들을 모조리 흡수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신성력 다음으로 언데드와 상극인 불이 통하지 않는다니. ‘결국 코어를 부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언데드들은 온몸이 도륙되어도 코어만 멀쩡하다면 죽지 않는다. 참고로 스켈레톤은 코어가 갈비뼈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데스핀드는 뇌였다. 그렇다면 암흑신의 권능으로 재탄생한 이 녀석들은 어떨까. 정답은 간단하다. “미샤, 저 여자를 죽일 수 있겠나?.” 소환수들의 코어는 보통 소환자에게 있다. 즉, 엘리사만 죽일 수 있다면 ‘한슨’도 광명을 찾고 진짜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 “으음…….” “죽일 수 없어도 된다. 피해만 입혀도 상황이 훨씬 좋아질 거다.” “해보겠당.” 이내 미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내 어깨를 밟고 높이 도약하며 엘리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요정도 한 수 접어 줄 만큼 민첩하고 유연한 움직임. 다만, 맥없이 당해 줄 상대가 아니었다. 「엘리사 베헨크가 [그림자 수호병]을 소환했습니다.」 땅에서 솟아난 그림자 형체의 병사들이 엘리사의 주변을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미샤라도 저들을 뚫고 엘리사의 모가지를 따는 건 단기간에 이루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못 갈 이유는 하나도 없지.’ 한슨의 손에 무기가 쥐어졌다면 모를까. 이미 압수해 놓은 상태였기에 언데드로 전직한 한슨은 크게 위협적이지 못하다. 사실상 난쟁이놈과 나, 이렇게 둘이서도 시간을 끌려면 얼마든지 끌 수 있는 셈. 판단을 마친 나는 인원을 재분배했다. “드왈키, 로트밀러 너희 둘도 미샤를 도와라.” “하지만…….” “괜찮다. 여긴 우리 둘이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 “알겠네! 그럼 부탁하지!” 이내 드왈키와 로트밀러가 가세하자, 전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물론, 그림자 수호병은 파괴되는 대로 재생성됐으며, 그래도 여력이 남는지 각종 저주들을 우리에게 뿌려 댔지만……. “슬슬 힘이 다 빠진 거 같군! 힘내세!” 한순간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소환되던 그림자 수호병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악한 악신을 모신다 해도 권능의 원천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런, 망할 것, 들이……!” 수세에 몰린 엘리사가 당황해하며 부들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생존을 위한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 수모는, 잊지, 않겠다…….” 약 20분에 걸쳐 숫자를 줄여간 그림자 수호병은 다섯 마리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뭘 하려는지 깨달은 나는 다급히 외쳤다. “뭐? 씨발, 안 돼!” 이제 거의 다 잡았는데, 어딜 도망가! 전투 내내 엉겨 붙어 있던 한슨을 밀치며 나는 온 힘을 다해 대쉬했다. 하지만……. 「엘리사 베헨크가 [영령화]를 시전했습니다.」 이내 엘리사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허공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우리를 쓱 한 번 둘러보고는. “너희는, 절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저 멀리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휘이이이잇-!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하게 그 방향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씨바…….” 다 잡은 보스몹이 탈주했다. 그것도 우리에게 앙심을 가득 품은 채. 56화 마녀의 숲 (3) 카루이의 사제. 최소 5층까지는 가야 전직이 가능하며, 일반 신관직과 달리 온갖 전투 스펠 및 저주 능력으로 떡칠된 일종의 히든 클래스. “이게 뭐냥! 도망쳐 버렸지 않낭!” 최악의 경우 전멸까지도 염두에 뒀으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번 위험을 피해 없이 물리쳐 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침착히 복기하자면 이유는 여럿 존재했다. “카루이의 사제라… 듣던 대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네. 비요른, 자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을 겪었겠군.” 일찍이 무기를 빼앗아 두었다. 검과 방패, 창, 그리고 엘리사의 지팡이까지. 당시엔 별생각 없었으나. 그때 지팡이를 뺏어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팡이가 없는 만큼 주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평소 같지 않았을 테니까. 뭐, 핵심 요인을 꼽자면 따로 있겠지만. “역시 듬직한 바바리안이 최고당. 나는 그 여자가 신관이래서 로트밀러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닌가도 싶었당. 근데 그냥 머리를 후려칠 줄이양!” “나, 나도 마찬가지오. 비요른, 그대가 무기를 휘두를 때만 해도, 어휴 어찌나 가슴이 철렁하던지…….” 적도 아군도 예기치 못한 때 가해진 일격. 이 한 방에 머리통이 깨진 엘리사는 동료의 생기를 흡수해 가며 부활해야만 했다. 다만, 멀쩡한 상태로의 부활은 아니었다. 그야 뇌가 박살 났다가 살아났는데 몸이 멀쩡할 리 있겠는가. ‘아마 병신같이 말을 뚝뚝 끊어 가며 했던 것도 회복이 덜 되었기 때문이었겠지.’ 여러모로 유리한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사실에 안도감이 피어나는 한편 아찔함도 인다. 만약 서로 100%인 상황에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글쎄, 승률은 반반 정도 됐을 거 같다. 어느 쪽이 이기던 최소 두 명쯤 죽는다는 가정하에. 분명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걸 아니까 놈들도 조난자 코스프레를 해 오며 수작을 부려 온 거였겠지. ‘그럼 오히려 전력이 비등비등했던 게 도움이 된 셈인가?’ 이번 사건의 복기를 끝마친 나는 간단하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더 볼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기력 저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기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감소합니다.」 「[하급 부패]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부상이 회복되는 속도가 감소합니다.」 「[추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위치가 시전자에게 전해집니다.」 「[원혼걸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이동시 미미한 고통이 발생합니다.」 「[정력감소]가 지속되고 있…….」 씨바, 돌아 버릴 거 같네. 눈도 뻐근하고, 머리도 약간 소금에 절여진 느낌이다. 왠지 아랫도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후, 씨발 걔는 대체 나 하나한테 저주 몇 개를 퍼부은 거야? 「경고: 캐릭터에게 중첩된 저주가 15개 이상입니다. 신성력 혹은 마법을 통해 치료받지 않을 시, 캐릭터의 신체 능력이 영구적으로 저하될 수 있습니다.」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총체적 난국이랄까. 솔직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말로 설명하기조차 힘들 정도.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 팀에는 마법사가 있으니까. “드왈키, 저주 해제 마법을 부탁한다.” “저, 저주 해제 말이오?” 아니, 왜 놀라는 건데. 사람 불안해지게. “저주 마법 쓸 수 있다고 했지 않나.” “그게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래서 뭐. 계속 말을 하란 의미로 빤히 바라보자 드왈키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주 마법을 몇 종 쓸 수 있다고 했지, 해제를 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았소만……?” 응?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지?” “마탑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독학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소. 탐사를 하면서 저주를 해제할 일은 거의 없다고 듣기도 했고…….” 드왈키가 구구절절 변명의 말을 이어 갔다. 짧게 줄이자면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돈이 없었단 뜻이군.” 바바리안답게 한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하자 드왈키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우선으로 익히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우리 이런 팀이었지. 이제 와서 무얼 탓하랴. 다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니 여기서 더 불평해 봤자 못난 사람만 될 뿐이다. 불가능한 것에 미련을 갖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자. “로트밀러, 그 여자를 추격할 방법이 있나?” “…애석하게도 없네. 아까부터 방도를 찾고 있었네마는, 건덕지조차 찾을 수가 없군.” 음, 역시 그렇구나. 조금… 아니, 이거 꽤나 골치 아프게 됐다. 아직 몇몇은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네 의견은 어떻지? 얼마나 위험할 거 같나?”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건 확실하네.” “떠난다라… 하지만 어디로?” “잠깐! 그대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오?” 로트밀러와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드왈키가 껴들었다. 마음 같아선 어른들끼리 얘기 중이니 잠시 빠져 있으라 하고 싶지만……. 얘도 일단은 마법사이지 않은가. 의논을 하다 보면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르니, 대충 설명해 주자. “아까 그 여자가 도망치면서 말했지 않나. 우리를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곧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게 분명하다.” “그거야 그렇소마는, 또 오면 지금처럼 상대하면 되는 것 아니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쉽겠냐고. 미궁에 들어온 게 처음이라 그런가? 얘는 마법사면서 오히려 미샤보다도 판단력이 떨어지는 거 같다. “확실히 큰일이긴 하당! 만약 몬스터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뒤에서 기습을 해 오면 난처해질 거당!”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무섭다는 건 만국 공통의 상식. 심지어 그녀가 복수하고자 찾아왔을 땐 힘도 거의 회복한 상태일 게 분명하다. ‘기습 타이밍도 그쪽에서 먼저 정할 수 있을 테고 말이지.’ 좀 전에 선빵필승의 전술로 이득을 본 나만 봐도 알 수 있듯, 원래 싸움이란 건 대부분 이니시에이팅하는 쪽이 유리한 법. 로트밀러가 이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자, 드왈키가 잔뜩 쫄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카루이의 사제가 어둠 속에서 우릴 노리고 있다니, 이거 아무래도 우리 여정에 큰 장애가 생긴 듯하구먼? 하하핫.” 바지 팀장인 난쟁이놈이 애써 태연한척 웃으며 굳은 드왈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지만……. 경직된 분위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기야, 방금 전에 1:5로 싸워 봤으니 본인들이 더 잘 알겠지. 카루이의 사제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새끼들인지. 서서히 불안이 가중되어 가던 때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빨리 마녀의 숲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한데.” 내가 현 상황의 유일한 대책을 제시했다. 로트밀러가 짧게 물었다. “이유는?” “거기까지 가면 우릴 추적하지 못할 테니까. 저주 문제도 해결될 테고.” 많은 것이 생략된 답변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표정을 보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전부 이해한 듯하니까. “마녀의 숲이 지닌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다라……. 합리적인 판단이네.” 로트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가지가 의문스러웠을까? “그런데 자네는 3층에 온 게 처음이라 하지 않았나?”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제발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착착 진행 좀 해 달라고 이 아저씨야.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도서관?” 내 변명 아닌 변명에 로트밀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때마침 바로 옆에 증인도 있으니까. “놀랍겠지만 사실일세. 비요른은 매일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읽네.” “우왕, 바바리안이 책을 읽는다공?” “어쩐지, 다른 바바리안들과 달리 말투부터 비범하더라니.” 별종을 보는 듯한 시선이 날아든다. 관심은 됐으니, 슬슬 결정을 내리고 할 일이나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자네 계획에 찬성일세.” 이후 로트밀러가 내 주장에 힘을 실어주자, 난쟁이놈과 미샤도 이어서 찬성표를 던지며 금방 결론이 났다. 다만 서둘러 자리를 뜨기 전에 해야 할 게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엘리사가 도주함과 동시에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진 ‘한슨’을 보며 나는 말했다. “다들 뭐 하나? 장비를 벗기지 않고?” 아무리 급해도 챙길 건 챙겨 가야지. 우리는 탐험가잖아? 약탈자와 몬스터를 해치우는. *** “전부 팔면 600만스톤은 훌쩍 넘겠군.” 3층 약탈자라 그런가? ‘한슨’이 뱉은 드랍템은 이전에 만났던 녀석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물론 여기서 5등분 하면 소득은 그때와 얼추 비슷하긴 하겠다마는. “진짜냥! 한 사람당 100만스톤 이상 챙겨갈 수 있단 거 아닌강! 안 그래도 올해 세금이 간당간당 했는데 다행이당!” “그 돈이면 스펠 몇 개는 더 익힐 수 있겠구려! 아, 내 반드시 이번엔 저주 해제 마법도 배워오겠소!” 순식간에 거금을 쥐게 된 드왈키와 미샤가 기쁜 마음으로 본인의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나와 로트밀러, 난쟁이놈은 그저 애매하게 웃으며 침묵했다. 그야, 미궁에서 얼마를 벌건 살아서 도시로 돌아가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전리품들은 추후 도시에서 전부 판매한 뒤에 정산을 하는 걸로 하겠네.” 참고로 여정 중엔 확장형 배낭을 지닌 셋이서 전리품을 나눠 보관하기로 했다. 사람 앞길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으니까. 탐사 중 누가 죽을 수도 있고, 배낭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만에 하나 갖고 튀려는 시도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는 살짝 놀랐다. ‘난쟁이놈은 알았는데, 미샤 얘도 확장형 배낭 오너일 줄이야…….’ 그간 보여 준 인상과 달리, 알고 보면 알뜰살뜰 돈을 모으는 스타일이었을까? 어쩌면 생각 외로 미샤는 경제적인 부분에선 똑 부러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만 출발하세.” 전리품을 챙긴 우리들은 야영지를 정리하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로트밀러가 앞장서서 길을 찾았고, 나머지는 혹시 모를 기습을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다. 몬스터의 전투도 로트밀러의 후각을 이용해 최대한 피하며 이동에만 집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경고: 캐릭터의 기력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조속히 해결하지 않을시 영구적인…….」 뒈질 거 같다. 저주를 주렁주렁 달고서 거의 뛰듯이 5시간가량을 이동했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아마 뱀파이어에게서 얻은 항마력, 어둠 저항력 등의 스탯이 아니었으면 아마 진작에 지쳐 쓰러졌겠지. “비요른, 자네… 괜찮나?” “버틸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마라.” 난쟁이놈의 걱정에는 괜찮은 척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괜찮지 않다. 꼴랑 저주 두세 개 달고 있는 얘네들과 달리, 그 미친년은 나한테만 저주를 수도 없이 던져 댔으니까. 심지어 이 저주는 나한테만 걸었다. ‘망할 기력 저하…….’ 기력 저하. 캐릭터가 움직이거나 액션을 취할 때마다 소모되는 스태미나 회복을 대폭 낮춰주는 개같은 스킬. 참고로 스태미나는 생명력과 별개이기에 자연재생력이 아무리 높아도 소용이 없다. ‘게임으로 치자면 한 30%는 남았으려나?’ 게임에선 스태미나 게이지가 10% 아래로 내려가면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NPC 같은 경우엔 차라리 죽여 달라는 대사를 날리며 징징거릴 때도 많았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미칠 듯 힘들기야 하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 아직까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니까, 아직 꽤 여유가 남았단 거겠지. 「업적 달성」 조건: 기력 수치가 5% 이하로 하락.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차라리 긍정적인 부분만 떠올리자. 조금 무리를 하긴 했어도 슬슬 목적지가 목전이지 않나. “흙이 습기를 머금은 걸 보니 10분만 더 가면 도착할 듯하오.” 약 5시간에 걸친 여정. 우려와 달리 한 차례의 습격도 없이 우리들은 마녀의 숲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이라는 건, 그년도 몸이 덜 회복되었단 거겠지.’ 무리하면서까지 서두른 보람이 있다. 적어도 나는 그년이 우리를 포기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도 그럴 게,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우리 앞에서 암흑신의 힘까지 꺼내지 않았던가. 목격자인 우리가 멀쩡히 살아 돌아가면 그년도 엄청나게 난처할 거다. “도착했소.” 로트밀러의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머릿속에 가득하던 상념을 털어냈다. 후, 역시 힘들 땐 딴 생각하는 게 최고다. 무려 10분이나 스킵할 수 있었잖아? “여기가 마녀의 숲……. 어째선지 오싹한 기분이 드는구려.” “왠지 이곳에 처음 온 마법사들은 전부 다 그런 말을 하더군.” “불길한 마력이 숲 전체에 진동을 하는 기분이오.” 메마른 가시나무. 그 위를 뱀이 똬리 틀듯 휘감은 덩굴. “자, 잠깐! 저기 나무가 움직였소!” 그 모든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곳. 마녀의 숲.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방향치]가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환청]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환각]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통각강화]가 부여됩니다.」 횃불에 의지하며 그곳에 발을 들이민 순간,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필드 효과를 제외한 모든 상태 효과가 효력을 상실합니다.」 하, 이제 좀 살 거 같다. *** 「비요른 얀델」 레벨: 3 육체: 199.1 / 정신: 106.3 (New +1)/ 이능: 152.4 아이템 레벨: 699 종합 전투 지수: 631.55 (New +1)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57화 마녀의 숲 (4) 주렁주렁 달고 있던 저주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저주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응, 안 죽어. [엄마 없는 놈!] 응, 현실에 엄마 있어. [끼히힣히히! 끼히힣!] 몇 초 간격으로 들려오는 환청은 대충 흘러넘기며 나는 미소 지었다. 조금 귀찮긴 해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저 환청일 뿐이다. 암만 저주해 봤자 실질적인 타격은 전무할뿐더러, 심지어 진짜 저주들은 얘네 덕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않은가? ‘애초에 정신 공격이랍시고 하는 멘트들도 싹 다 구리고 말이지.’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하던가. 참신함도 진정성도 없다. 뭐, 얘네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비요른! 너는 어떻게 이런 욕들을 듣고도 웃어넘길 수 있는 거냥! 혹시 미쳐 버린 거냥? 나는 아까부터 시끄러워서 머리가 아플 정도인뎅!” 마녀의 숲에 와본 경험이 있는 미샤, 난쟁이놈, 로트밀러 삼인방은 그나마 상태가 나았으나 드왈키가 문제였다. “…으읍, 으으으.” 눈도 흐리멍덩하고, 볼은 핼쑥해진 것이 금방이라도 속에 든 것을 게워낼 것만 같다. 하긴, 이런 환경이면 멀미가 날 법도 하지.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는데, 신기하네.’ [환각]과 [방향치]의 효과로 모든 것이 굴곡져 보인다. 분명 오른쪽을 봤는데 정면에서 봤던 것이 보이고, 거리감도 평소보다 흐릿하다. 마치 볼록거울을 통해 세상을 보는 느낌. “웍, 웨에엑!” 이내 드왈키가 참지 못하고 걸쭉한 위액을 토해 냈다. 왠지 걱정스러워진 나는 물었다. “그 상태로 마법은 쓸 수 있겠나?” “비요른은 못 됐당. 동료가 힘든데 그게 더 중요한 거냥!” 얘는 또 뭐래. 저번에 토할 때는 어른이 되라느니 뭐니 해놓고서. 후, 이래서 사람끼리 정을 붙이는 걸 자제해야 한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미샤, 너한테 물어본 게 아니다. 그래서 드왈키, 대답은?” “그, 그대는 모두 거, 걱정 마시오. 마법은 문제없이… 우웨엑!” 음, 일단 적응할 때까지 마법은 없다고 봐야겠네. 마법사들은 뭐 이리 비위가 약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혀를 차고 있자니, 로트밀러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인상 깊군. 아무리 정신이 강인한 바바리안이라도 초행에는 조금이라도 힘겨워 하는 법일진대…….” 글쎄, 그렇다고는 들었다. 근데 아까 전에 너무 힘들었어서 말이지. 대충 웃어넘기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난쟁이놈이 절친 드왈키를 위해 츤츤거리며 나섰다. “쯧쯧, 그러게 허구한날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니 몸이 그리도 허한거 아닌가.” “이보시오, 나는 그래도 마법사들 중에선 운동을 하는 편—” “됐고, 일단 적응이 될 때까지 잠시 쉬었다 가세. 지난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 않나. 피곤해서 더 그럴 것이야.” “그대의 배려… 내 잊지 않겠소.” 결국 우리들은 드왈키가 환경에 적응을 할 때까지 잠시 초입부에 머무르기로 했다. 나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에선 마법사의 유무가 중요할뿐더러, 나도 바닥난 기력을 조금은 보충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불침번은 내가 서지, 자네들은 모두 쉬게.” 난쟁이놈의 말이 끝남과 동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쉬었다. 침낭을 꺼내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비요른, 있지 말이네…….” 눈 좀 붙이려는데 난쟁이놈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을 걸어온다. “아까 그 엘리사 양 말일—” 잠이 확 깼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엘리사 양이 아니라 그년이다.” “어어, 그, 그래, 아무튼 그년 말일세. 암만 생각해도 예전에 한 번 만나봤던 사람 같아서 말이지…….” 뭐? 평소처럼 뻘 얘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제법 중요한 얘기 같다. 상체를 일으켜 경청의 자세를 취하자 난쟁이놈이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때 자네 조언으로 탐험가 등급을 올리러 길드에 갔지 않은가? 그때 신청서를 작성할 때 옆에서 누가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었네.” “피곤하니까 본론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게 그녀 같네.” 후, 간결하니 훨씬 좋다. 답답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겠다마는. 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왜 곧장 알아보지 못했지?” “그게… 도시에서와 달리 더러운 몰골이지 않았나. 오, 오, 옷도 여기저기 찌, 찢어져 있었고 말일세!” 아, 가슴을 뚫어지게 보느라 얼굴은 미처 제대로 확인을 못했단 거구나. 그래도 이제야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엘리사 일행이 왜 우리를 노렸는가. ‘전부 그 물건 때문이었던 거군.’ No.3112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 거래소에서 무려 5천만 스톤에 거래되는 고가의 넘버스 아이템. 승급을 위한 신청서였으니, 이에 대한 얘기도 적혀 있었을 터. 약탈자의 행동 동기로는 차고 넘친다.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럼 그때부터 표적이 되어 있던 건가…….’ 새로운 정보를 획득함과 동시, 내가 알지 못했던 인과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팀 내 회의는 대부분 술집에서 나눴다. 맘만 먹는다면, 우리가 짐승의 소굴 루트를 이용한단 걸 알아내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겠지. 먼저 도착해 덫을 놓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후, 보물은 늘 화를 부른다더니, 정말 그 말이 딱 들어맞기 짝이 없지 않은가?” 난쟁이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공감이라도 바라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보물이 화를 부르긴 개뿔? “엉뚱한 곳에 책임을 돌리지 마라. 전부 신청서를 다 보는 데서 쓴 네 잘못이지 않나.” “자, 자네 지금 날 탓하는 건가! 그때 자네도 같이 있지 않았나!” 그건 그런데, 설마 신청서 쓰는 것까지 내가 신경 써 줘야 하는지는 몰랐지. 내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난쟁이놈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에휴…….’ 나도 굳이 더 뭐라 그러진 않았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 아닌가.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게 더 합리적이다. *** 휴식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말 눈만 붙인 정도? 30분도 채 되지 않아 몬스터가 나타난 탓에 우리들은 단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아, 우리란 말은 좀 그런가? “자네, 정말 잘 자더군.” “어떻게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잘 수가 있낭?” 아무래도 꿈까지 꿀 정도로 깊이 잔 건 나뿐인 듯한데……. 다 얘네들 배가 불러서 그렇다. “됐고, 몬스터는 어디 있지?” “저길세.” 이내 난쟁이놈이 가리킨 곳을 확인하니, 날개 달린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참고로 사이즈는 손바닥 정도. “페어리군.” 9등급 몬스터 페어리. 참고로 스킬은 마약 물질이 섞인 독가루를 내뿜는 게 전부며, 게임 속에선 비선공 몹에 속했다. 다만……. “처음부터 골치 아픈 놈이 걸렸군.” 페어리가 저렇게 한곳에 몰려 있단 건 근처에 그놈도 있다는 뜻일 터. “싸울 건가?”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말일세. 드왈키, 저 친구도 이제 좀 괜찮아진 듯 보이고.” 싸운단 거구나. 뭐, 나쁘지 않다. 내 입장에선 아직 경험치 수급을 못한 몬스터 개체이기도 하니까. 혹시 정수라도 나와 주면 대박이기도 하고. 지금의 내게는 필요 없는 정수긴 하지만, 귀한 정수이니 우리 중 누가 먹든 높은 가격에 낙찰될 게 분명하다. “그럼 다들 준비됐으면 불러내 보도록 하겠네.” 간단히 전투 준비를 끝내자, 난쟁이놈이 전투 망치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인의 전매특허 콤보를 사용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방출]을 시전했습니다.」 이름하여 전격방출. 망치를 휘두름과 동시에 지직거리던 전류가 대포알 형태로 쏘아졌다. 그리고 물리 피해 면역을 지닌 페어리들을 인정사정없이 터트렸다. 「페어리를 처치했습니다. EXP +1」 딴 건 몰라도 이건 좀 부럽다. 나도 이런 원소 피해 스킬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끼에에에에엑-!!” 아무튼 열댓 마리의 페어리가 터져나간 순간, 저 멀리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짐승 수백 마리가 분노에 차 내질러 대는 듯한 포효. 머지않아 놈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에 걸맞게 육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쿠웅-! 7등급 몬스터, 하프 트롤.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진짜 트롤은 아니고, 인간과 트롤이 반쯤 섞인 듯한 느낌에 가깝다. 참고로 얘는 마녀의 숲에서만 등장하는 몬스터로, 페어리 무리를 스토킹하는 습성이 있다. 아쉽게도 그 이유까진 나도 모른다. 그런 설정은 게임 어딜 뒤져 봐도 안 나오더란 말이지. 아무튼,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고. “그르르르…….” 약 2.5m에 달하는 신장을 지닌 녀석이 경계하듯 자세를 낮추며 우리를 응시한다. 다만 본성에 충실한 몬스터답게 인내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카아아악-!!” 열심히 따라다니던 페어리 무리를 참살한 우리를 향해 하프 트롤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러 온다. 난쟁이놈도 옆에 있는데 하필 나한테. 쿠웅! 묵직하다. 체감상 강철바위언덕의 ‘아이안트로’보다 더. 하긴, 같은 7등급이라고는 해도 아이안트로는 무리 생활을 하는 개체니 당연한가? 이렇게 팔이 뻐근한 건 오랜만이다. 스르륵. 따라서 나는 방패를 비스듬히 틀어 하프 트롤의 몽둥이를 옆으로 흘려냈다. 그러자 자연스레 어그로가 나에게서 난쟁이놈으로 옮겨졌다. 팀에 탱커가 둘일 때만 쓸 수 있는 꿀팁이다. 그야 나 혼자만 힘든 건 억울하잖아? 힘든 건 나누는 게 동료라고 배우기도 했고. “카아아악-!!” 괴성과 함께 이어지는 두 번째 몽둥이질. 이를 조그마한 방패로 받아낸 난쟁이놈이 뼈가 시린 것처럼 작게 신음을 흘린다. 그제야 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끄윽…….” 아, 얘는 고통 내성이 없지. 마녀의 숲이 전사 계열에게 기피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전사란 가장 일선에서 두들겨 맞는 게 일상인 존재. 헌데 이곳에선 [통각강화] 때문에 통증이 몇 배나 더 증가한다. ‘그런 와중에 나오는 몬스터는 절반 이상이 물리 면역이고, 정신계 스킬까지 써대니…….’ 괜히 어젯밤에 로트밀러가 난쟁이놈과 내게 초번과 말번을 주려 한 게 아니다. 마녀의 숲에선 필연적으로 전사가 온갖 고생을 도맡을 수밖에 없다. 고통내성 스탯이 있는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겠다마는. ‘알고 보니 고통내성이 개사기였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란 걸까. 우연히 흡수한 시체골렘의 정수가 계속해서 큰 도움이 되어 주고 있다. 후웅-! 하프 트롤이 몽둥이를 또다시 휘둘렀다. 그리고 나와 달리 우직하게 힘 겨루기에 돌입한 난쟁이놈이 외쳤다. “마법은 아직인가!” 아직이다. 알다시피 쟤, 영창하는 속도가 느리잖아? “베헬—라아아아!!” 난쟁이놈이 제법 힘들어 보였기에 조금이라도 거들어 줄 겸 메이스로 하프 트롤을 후려쳤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퍽! 단단한 뼈와 근육은 메이스질 한 방에 끄떡도 없었을뿐더러, 하프이긴 해도 명색이 트롤 아닌가. 재생력이 아주 끝내준다. 그래봐야 뱀파이어에 비할 정도는 아니겠다마는.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보조 마법 [빙결강화]를 시전했습니다.」 「다음 빙결계 주문의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난쟁이놈과 사이좋게 어그로를 핑퐁하고 있자니, 마침내 마법 주문이 완성됐다. 드왈키의 필살기. 강화 얼음창. 피슈우웃-!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큰 크기의 얼음창이 날아가 하프트롤의 복부에 꽂힌다. 사실상 위력만 보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의 출력. 다만, 보는 입장에선 복장이 터진다. ‘얘는 언제쯤 센스가 생길련지.’ 지난번에도 조언을 해줬는데 또 창을 어중간한 데다가 꽂아 버렸다. 심장이나 대가리에 박았으면 한 방에 해치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낭비가 심하지? 조준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이내 하프 트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프 트롤이 [광분]을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통증이 사라지며, 육체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뱃구멍에 창이 꽂혔음에도, 도리어 물 밖에 나온 활어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하프 트롤. 하, 이래서 한 방에 잘 잡았어야 했던 건데. ‘…쟤도 언젠간 나아지겠지?’ 제발 그러길 빈다. 안 그러면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는 의미가 없으니까. “으앙! 조금 얕았당!” 흉포하게 날뛰는 하프 트롤과 대적하는 사이. 미샤가 독성부여한 단검을 심장부에 찔러 넣었으나, 애석하게도 두터운 근육을 꿰뚫기에는 짧았다. 탐색꾼인 로트밀러가 쏘는 석궁은 아예 가죽위에 촉만 겨우 박힐 정도였고. ‘결국 주문이 다시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왈키는 팀 내에서 가장 큰 위력을 뽐낼 수 있는 딜러. 새삼 우리 팀의 약점이 여실히 느껴진다. 탱커진은 하프 트롤의 [광분] 상태를 버틸 만큼 탄탄한데, 딜러진이 받쳐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 “다 됐소이다! 물러나시오!” 이내 10분 정도 더 차력전을 이어 간 끝에, 드왈키가 다시 한번 필살기를 꺼냈다. 다행히도 이번엔 머리에 명중했다. 「하프 트롤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머리가 통째로 날아감과 동시, 빛이 되어 사라지는 하프 트롤. 당연하게도 기대했던 정수는 없었다. 그저 주먹 크기의 마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떨어졌을 뿐. “아쉽게 됐군. 쉽게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는데.” 내심 기대를 했는지 미샤와 로트밀러가 입맛을 다신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나도 뱀파이어 정수를 먹기 전이었으면, 엄청나게 군침을 흘렸겠지. 7등급짜리 재생류 정수가 흔치는 않으니까. 뭐, 나는 이제 그런 거에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만. [07 : 13] 4일 차가 막 시작된 아침. 내일이면 4층에 도달할 테고, 그때부터 진짜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곳부터는 6등급 몬스터도 나온다. 더도 덜도 말고 딱, 6등급 정수 하나만 먹었으면 좋겠는데. *** “그럼 슬슬 이동하지.” 하프 트롤을 해치운 뒤, 우리들은 이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하룻밤을 꼴딱 지새운 탓에 다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마녀의 숲은 쉬기 좋은 환경이 아니니까. 하루 무리해서라도 4층까지 가는 시간을 줄이자는 게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다만……. “탐험가들이오.” 우리가 막 여정을 재개하려 했을 때. 어둠 속에서 낯선 탐험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신기해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녀의 숲이라 해도, 초입부에서 이만큼 죽치고 있었으면 새로운 무리가 진입할 때도 됐긴 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뭐야? 왜 여섯 명이야? 일반적으로 팀은 최대 5인으로 구성된다. 결속 마법이 다섯 명까지 밖에 안 되는 탓이다. 그런데 6인조 탐험가 팀이라고? 그 사실이 미심쩍어 낯선 탐험가 무리들 면면을 눈여겨보고 있자니, 왠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애석하게도 저쪽도 우릴 알아본 거 같았다. “…탐험가님들! 저들이에요! 저들이 제 동료들을 죽였어요!” 씨발…….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우리 팀 전부가 저 말을 듣고서 넋을 놓고 있던 때.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상대측 탐험가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성호를 길게 긋는다. 온몸에 레아틀라스교 굿즈를 덕지덕지 처발라 놓은 상태로 보건대, 저 새끼는 이 세계에서도 드문 진성 종교쟁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니미럴, 저 썅년은 운도 좋지. 대체 미궁에서 저런 애는 어떻게 찾았대? “신이시여, 저 사악한 종자들을 해치울 힘을 제게 주소서……!” 아무래도 대화는 통하지 않을 듯하다.58화 생존 수칙 (1) “저, 저 여자가 어떻게 따라온 거냥! 마녀의 숲은 안전하다 하지 않았낭!” 미샤가 질렸다는 얼굴로 외쳤다. “끈질긴 년!”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단순히 욕을 박는 것 말고 현 상황을 합리적으로 추측해 보자면……. 우리가 마녀의 숲에 들어가 버리자 저 썅년도 혼자서 추격할 수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용할만한 탐험가를 물색했겠지. 악독한 약탈자들에 의해 동료를 잃은 불쌍한 신관을 연기하며. “이보시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오. 저 여자는 카루이의 사제—” “뭣! 이제 보니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사악한 악신을 따르는 자들이었구나!” “아니,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아니라 저 여자—” “어서 목을 내놓고 신의 단죄를 받으라!” 이내 난쟁이놈이 대화를 시도했으나, 신의 가호 아래 뇌가 절여진 남성은 듣고 싶은 대로만 이해할 뿐이었다. “데이비스 님! 사악한 저들에게 신의 철퇴를 내려주세요! 그래야 구천에서 헤매고 있을 제 동료들도 원한을 내려놓고서 신의 품에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엘리사년의 외침과 동시에 상대측 탐험가 무리가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매한가지. 탐험가들끼리의 대화에선 간혹 말보다 주먹이 먼저일 때가 있는 법이다. “부상은 신경 쓰지 말고 적을 처단하는 데만 신경 써 주세요! 레아틀라스 님의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할지니!” 힐은 해줄 테니 개처럼 구르란 말에, 상대측 리더가 눈을 까뒤집으며 우리에게 돌진했다. 저 특유의 좆같은 구호를 외치며.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솔직히 말해, 이들이 왜 저렇게까지 하며 저년을 돕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독실한 신자로 보이는 얘는 알겠는데, 다른 동료들까지 저럴 필요는 없지 않은— “몸을 사리지 마라! 저들만 죽이면 우리 팀에도 신관이 생긴다!” “우오오오오!” 아, 그런 거였구나.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를 죽이려 하는 거구나. 이제 보니 보상이랍시고 저 썅년이 약속을 이것저것 해 둔 모양인데……. 오케이, 상황 파악은 어느 정도 됐고. 쿠웅-! 일단 리더 새끼의 도끼를 방패로 받아내며 나는 외쳤다. 일명, 분란의 씨 뿌리기. “병신들! 신관이 들어오면 누가 팀에서 나갈 거지?” 이 새끼들은 처음부터 5인 팀이었다. 즉, 신관이 들어오면 한 새끼는 팀에서 추방당해야 한다. 내가 초장부터 이를 짚고 넘어가자 리더 새끼가 당황해하며 외쳤다. “사, 사악한 말재간에 흔들리지 마시오!” 사악한 말재간은 무슨. 딱 보니까, 이 부분은 생각도 안 해봤던 거 같은데. “어, 어?” 이를 증명하듯 리더를 제외한 4인의 탐험가들이 잠시 멈칫했다. 애석하게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음, 근데 나는 아닐걸?” “훗,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 아닌가.” “오늘 우리 중 누구 한 명이 죽을 수도 있고.” “난 신관이고 뭐고 상관없다. 저 장비들만 팔아도 1년은 족히 놀 수 있을 테니.” 씨발, 누가 탐험가 새끼들 아니랄까 봐. 이유들 하나하나가 존나 사이코패스 같다. 아주 그냥 너네는 명분과 돈만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 오히려 한결같으니 좋네.’ 나는 본격적으로 난쟁이놈과 함께 방패 벽을 세우며, 상대의 전력을 분석했다. ‘근접 전사 셋에 원거리 둘, 그리고 코스프레 중인 신관이 하나라…….’ 마녀의 숲까지 온 탐험가들답게 우리와의 수준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심지어 인원수도 한 명이 더 많다. 이번엔 딱히 판단할 것도 없었다. 엘리사년이 코스프레를 하느라 악신의 힘을 꺼내지 못한단 걸 감안한들, 명백히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일단 전략이라도 세워 보자면……. ‘기습으로 일격에 해치우는 수밖에 없겠군.’ 따라서 나는 마법사를 호출했다. “드왈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10초! 10초만 기다리시오!” 이제 그래도 짬이 찼다고, 이름을 부르자마자 드왈키가 답변을 해 온다. 다만 짬밥을 먹은 건 저쪽도 매한가지란 걸까. “마법사다! 상대측에 마법사가 있다!” 저쪽에서도 드왈키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집중 공격을 해 온다. 근접 전사 셋은 나와 난쟁이놈이 커버할 수 있었으나……. 휘이이익-! 영창 중인 드왈키를 향해 날아든 화살과 투사체 계열 스킬을 막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우리도 일단은 탐험가 ‘팀’ 아니겠는가. 나 혼자서 다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으썅!” 날아오던 화살은 미샤가 단검으로 쳐냈고, 투사체 이능은 로트밀러가 방패로 막아 냈다. 그리고 이와 동시, 주문이 완성됐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강화 얼음창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상대가 대형 몬스터도 아니고. 이 정도면 맞는 순간 한 방에 신의 품으로 되돌려 보내 줄 수 있다. 물론, 급소에 명중한다는 전제하의 얘기지만. 휘이이이익-!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에게 마법을 쏠 각오. 그 각오를 발휘해야 할 시기가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과연 드왈키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콰앙-! 우려가 무색하게 얼음창은 엘리사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해서 쏘아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명중하지는 않았다. 몬스터보다 탐험가가 까다로운 이유였다. “후우, 위험했군. 괜찮으십니까?” “네, 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이 쏘아진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신관인 그녀를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따라서 막아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3층을 넘어 4층으로 향하던 탐험가에게 그 정도 피지컬은 있을 테니까. ‘…후, 역시 사람 새끼들이 제일 짜증난다니까.’ 쉽지 않다. 로트밀러와 미샤가 드왈키를 성공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듯, 상대 역시 우리 공격에 보란 듯이 당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슬슬 최종 판단을 내릴 시간이었다. 이쯤이면 간은 볼 만큼 봤으니……. “드왈키! 음성 제어 마법을 써라!” “아, 알겠소!”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명령하자, 드왈키가 이견 없이 주문한 마법을 영창한다. 음성 제어. 쉽게 말해, 팀 보이스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마법. 이제 우리끼리 말해도 저쪽에선 듣지 못한다. 나는 호전적으로 상대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무라드!” “왜 부르는가!” “튀자!” “으하하하!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다행히 긴급 시 오더권을 지닌 난쟁이놈도 내 판단에 동의해 주었다. 하긴, 얘도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이번 싸움에서 이겨도 상처만 남은 승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가 되면 저 썅년도 거리낌 없이 암흑신의 권능을 써 올 테고. 오기를 부려 봤자 암울한 미래만이 기다려 올 뿐이다. “미샤! 준비가 되면 네가 드왈키를 챙겨라!” “알겠당!” “히쿠로드, 너는 내가 신호를 주면 그 물건을 사용해라!” “그러겠네!” 미샤와 난쟁이놈이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로트밀러가 남긴 했지만, 그에겐 따로 지시할 필요가 없었다. 척하면 척이랄까. “내가 출발하면 다들 바짝 붙어서 따라오시오!” 역시 믿을 건 이 아저씨밖에 없구나. 여하튼 이 정도면 더 공지할 사항은 없는 것 같고……. “지금이다!” 내가 신호를 준 순간, 미샤가 체력이 약한 드왈키를 둘러메는 것으로 튈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난쟁이놈이 낀 팔목 보호대가 빛을 뿜어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를 사용하였습니다.」 No.3112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 일단 게임 속에선 상시 대미지 감소 5%가 붙어 있었으며, 감소시킨 데미지에 따라 위력이 증가하는 사용 효과가 있었다. 참고로 그 사용 효과란……. 「적들을 강하게 밀쳐내며, 일시적으로 아군에게 부여된 모든 해로운 효과에 면역을 갖습니다.」 광역 넉백 및 디버프 제거. 3천번대 넘버스 아이템답게 필드 효과보다 판정이 우선된다. 「상태이상 [방향치]가 해제됩니다.」 「상태이상 [환청]이 해제됩니다.」 「상태이상 [환각]이 해제됩니다.」 「상태이상 [통각강화]가 해제됩니다.」 붙어 있던 근접 전사 셋이 튕겨져 나간 순간. 굴곡져 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환하게 개인다. 물론 지속 시간은 길지 않다. 얘가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처맞았는진 알 수 없지만……. ‘길어 봤자 20초 정도겠지.’ 참고로 이 시간은 넘버스 아이템을 사용 시 효율이 1.5배 증가하는 드워프의 특성까지도 감안한 것.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에는. “뭐하나! 얼른 튀지 않고!” 후, 어찌된 게 탐사 내내 여기저기 쫓겨나디는 거 같네. *** 탐색꾼. 적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감지하며, 팀원들을 효율적인 동선으로 안내하는 존재. 그렇다면 탐색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그 답은 지극히 심플하다. ‘미궁에 대한 사전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된 데이터.’ 이 두 가지만 있어도 1층과 2층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지형지물이 변하지 않는, 일종의 오픈월드 형태인 3층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4층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음, 정확히는 4층 포탈이 있는 마녀의 숲부터라고 해야 하나? 「넘버스 아이템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의 사용 효과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부여됩니다.」 나침반은 먹통에, 사람의 방향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며, 지형지물이라고는 나무뿐인데 이 나무들조차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길을 찾는데 있어 특수 능력이 탐색꾼들에게 요구된다. “이쪽이오.” 로트밀러의 메인 능력은 ‘후각’이었다. 정수를 통해 후각 스탯을 맞춘 그는 이 괴랄한 숲속에서도 4층으로 향하는 길을 정확히 찾아냈다. 후각이 일정 선에 다다르면 마력의 향을 맡을 수 있는데, 그걸로 길을 찾는다던가? 잘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충 그런 원리였다. 다만……. “저쪽 탐색꾼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걸 보면.” 그럼에도 저 씹쌔끼들은 잘도 우리를 따라왔다. 물론 나로서는 기척조차 느낄 수 없지만……. 로트밀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결국 누가 4층 포탈에 먼저 도착하느냐가 관건인가…….’ 속으려 현 상황을 정리하고 있던 때. 같은 의견인지 로트밀러가 고지하듯 말했다. “지금부터는 속도를 올리겠소.”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전투를 생략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놈들이 그전에 우리를 따라잡는다? 그땐 정말이지 둘 중 하나가 뒈질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을 터. ‘문제는 다들 지쳤다는 건데…….’ 인생은 바라는 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그 사람이 지치고 힘든 상태라면 더욱더. “칼스타인 양, 그 친구를 이리 주게!” 난쟁이놈이 미샤를 배려해 드왈키를 넘겨받기로 했다. 그리고 사고는 여기서 터졌다. “악!”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뛰면서 드왈키를 난쟁이놈에게 건넨 것이 실착이었다. 미샤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드왈키는 난쟁이놈이 넘겨받아 짐짝처럼 둘러멘 이후였지만……. “쥐! 발에 쥐가 난 거 같당! 움직이지가 않는당!” 쥐가 나긴 개뿔. 딱 봐도 넘어지면서 발목이 나갔구만. “괜히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어라.” 나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미샤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깨에 둘러멘 순간이었다. ‘씨발? 이건 또 뭐야.’ 빛이 사라지고 깊은 어둠이 눈앞을 뒤덮는다. 분명 횃불을 달고 있던 난쟁이놈이 바로 앞에 있었을진데. “비, 비요른?” “…조용히 해라.” 일단 침착히 배낭을 열어 횃불을 꺼냈다. 그리고 손대중으로 불을 밝혀 투구의 홈에 끼웠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팀원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놓친 건강!” 미샤가 기함하듯 외쳤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런 거 같군.”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낙오되어 버렸다. “그럼 뭐 하냥! 당장 따라가지 않공!” 그 사실을 깨달은 미샤가 다급히 재촉했으나,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게, 걔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저쪽이당! 분명 저쪽으로 갔당!” 그거야 우리 눈에나 그럴 뿐이고. 마녀의 숲에서는 시각에 의존해선 안 된다. 괜히 엄한 데로 갔다가 팀과 멀어지기라도하면 시간 낭비만 하게 될 터.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동료를 믿고, 내 판단을 믿자. 로트밀러는 후각계 탐색꾼이 아니던가. 지금쯤 우리가 사라진 걸 알 테니, 금방 찾으러 돌아올 게 분명하다. “저기, 비요른……?” 아, 어, 음…….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낭?” 1분이 지나도 앞서 지나간 일행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제기랄, 뭐지? 일단은 더 기다려 봐야 하나? 고민이 깊어져 가던 찰나. “아악!” 어둠 속에서 짧은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비요른! 방금 소리 들었낭! 분명 무라드의 목소리였당!”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일단 그런 거 같긴 하다. 뭔가 또 다른 사고가 터진 게 아니라면 진작에 찾으러 돌아왔을 시간이니까. 다만…….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게 분명하당. 당장 도우러 가야—” “목소리를 낮춰라.” “어째서냥?” “우리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소리를 내는 건 좋지 않다. 아직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나. 단순히 몬스터와 조우한 거라면, 우리를 찾으러 올 여유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가 도우러 가야 하는 거 아닌—” 애초에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계속 일정한 크기의 소리가 들려온다면 모를까. 단말마 같은 비명 소리를 한 번 듣고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없다. 마녀의 숲은 그런 지역이니까. “읍읍!” 따라서 일단 미샤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청각에 집중했다. “…밀러 …년이 …있네.” “…틈을 벌…….” “하…… ……을 두고 …수는, 없……!” “적어… 탐색……도 해치… 야 …들이 도망칠 수……!” “………….” “…금이오! 도망……!” 이후로도 몇 번 더 단말마 같은 음성들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예 사라졌다. 잔바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숲속. “…….” 고요한 적막 속이 주변을 휘감았지만, 나는 5분가량을 더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놓친 일행이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섣불리 확신하기 일렀지만, 딱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 기다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인즉— “좆됐군.” 수인 여자애와 단둘이서 낙오됐다. 몬스터와 약탈자가 판치는 미궁 속. 그것도 탐색꾼 없인 되돌아 나갈 수조차 없는 이곳 마녀의 숲 한복판에서. 씨발. 59화 생존수칙 (2) 재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물? 식량? 체력? 도구? 글쎄, 전부 다 매우 중요한 항목들이지만……. 꼭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멘탈을 택하고 싶다. “안 됑…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없단 말이당! 내가 어떻게 악착같이 버텼는데, 이렇게 허무하겡……!” “미샤, 진정해라.” 좆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현실을 부정치 않고 냉정히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니까. 따라서 나는 모든 의문을 버렸다. ‘저쪽에서 뭔 일이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특이한 몬스터가 나왔을 수도 있고, 엘리사년 무리가 그 짧은 순간에 기막힌 방법으로 기습을 해 왔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전부 열려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건 그딴 게 아니겠지. ‘생각해.’ 나는 지금 무리에서 낙오됐다. 옆에는 수인 동료 한 명이 있다. 애석하게도 물리 딜밖에 없는 전사 계열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동료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한 없이 낮아 보인다. 그래, 한 마디로 좆됐다. 물리 면역 몬스터들이 판을 치는 이곳은 전사의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지역. 바바리안과 수인 전사 둘이서 헤쳐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와중에 우리를 노리는 추적자 또한 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만약 우리 둘이서 그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 즉시 게임 오버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혀 깨물고 뒈질 게 아니라면,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좆같은지가 아니라— ‘그래서 당장 해야 되는 게 뭐지?’ 앞으로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한낱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생존을 위해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 쉽게 말해, 지금의 최선이 무엇인가. “…움직이지.” “뭐라공? 하지만 그래 봤자—” “길을 찾지 못해도 이 자리는 떠나는 편이 좋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해야 할 것들이 보인다. 나는 그중에서도 우선 순위를 나눈 뒤, 중요도가 높은 순서대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일단 그 첫 번째. “여기는 위험하다.” 이 자리를 벗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난쟁이놈 일행이 이 근처에서 마주친 게 무엇인지, 우리를 데리러 오지 못했을 만큼 위험하단 것 외엔 전혀 정보가 없으니까. “만약 그년이 수작을 부린 거라면, 우리도 언젠가 찾아낼 거다.” “하지만 그랬으면 진작 나타났어야 하는 거 아닌강?” 글쎄, 어쩌면 단지 놈들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걸지도 모르지. 난쟁이놈이 반대로 도망치며 그쪽을 따라가야 했다던가 하는 이유로. 물론 길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온정과 배려 같은 무형의 가치들이니까. “그래서 어떡할 거지? 선택은 너의 몫이다.” 동료란 이유로 짐짝을 달고 다닐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딴 건 동료라고 볼 수도 없고.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내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는 따로 움직이지.” “무, 무슨 소리냥!” “대답해라.” 언쟁으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다. Yes인가 No인가. 말없이 내눈을 응시하던 미샤가 입술을 깨물며 선택했다. “…앞으로 네 말을 전적으로 따르겠당. 애초에 다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낭.” 질문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뱉은 훌륭한 답변.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눈치가 빠른 거 같다. 역시 평소엔 그렇게 보여도 5년 차 탐험가인 이유가 있구나. “그, 그래도 그런 말은 너무하당……!” 굳었던 표정을 풀자 미샤가 상처받은 듯 징징거려 왔지만, 이 정도야 뭐……. 아무래도 좋다. 내 말만 잘 따라준다면. “마셔라.” 포션 한 병을 까서 건네주자, 미샤가 마치 사약을 받드는 얼굴로 이를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신음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야릇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포션은 그럴 수가 없는 물건이니까. “히그그극, 끄으윽!!”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일단 포션은 잘 듣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미샤를 어깨에 들쳐멨다. 발목을 삔 정도니 5분이면 통증이 사라지고 걸을 수 있게 되겠지만……. 그 시간도 아낄 수 있으면 좋은 거니까. “우욱, 우에엑! 제, 발 천천히! 아니, 살살 좀 걸어랑!” 본격적으로 구보를 시작하자, 미샤가 곡소리를 내며 애원해 온다. 아무래도 멀미가 나는 모양. 다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힘들어도 그냥 참아라.” 미안, 지금 난 온정과 배려를 잊은 사이코 바바리안이라서 말이지. 생존에 경고등이 들어온 이상 효율이 먼저다. 멀미 좀 한다고 사람이 죽진 않잖아? 타다다닷-! 여하튼 그렇게 아무렇게나 숲을 헤집고 무작정 뛰고 있을 때였다. 어깨에 메달린 미샤가 등을 미친 듯이 두들긴다. “내려, 커엌! 내, 내려 줘랑! 다, 다 나았당!”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이당! 이, 일족의 수호신께 맹세코!” “흠, 그렇다면 왜 목소리에 힘이 없지?” 나는 미샤가 한 말의 논리적 허점을 짚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혼이 났다. “힘이 있겠냥! 이 무식한 바바리안노망!! 됐고, 어서 내려 줘랑!” “알겠다.” 등짝 스매쉬를 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움직일 정신머리는 있는 듯했기에 순순히 미샤를 내려줬다. “으앙, 진짜 죽는 줄 알았당!” 거, 엄살은. 일단 보기엔 멀쩡했지만 혹시 모르기에 물어는 봤다. “그래서 발은 이제 괜찮나?” “보는 대로당.” “제대로 말해라. 당장 싸울 수 있단 뜻인가?” “일단은… 그렇당! 근데 그건 왜 묻낭?” 그야, 싸울 일이 생겼으니까 그러지. “잘됐군, 저기 몬스터다.” 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미샤의 고개가 움직인다. 그 끝에는 거대한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린 채 움직이고 있었다. 8등급 몬스터 ‘스네트리’. 촉수처럼 구불거리는 가지들을 이용해 탐험가들을 습격하는 기분 나쁜 몬스터다. 참고로 얘는 하프 트롤과 더불어 마녀의 숲에 서식하는, 몇 안 되는 일반 몬스터 중 하나. 쉽게 말해, 물리 딜만으로도 사냥이 가능하다. “그런데 꼭 잡아야 하낭? 저놈은 이동속도도 느려서 따라오지 못할 텐뎅……. 아! 절대 네 말을 따르지 않겠단 건 아니당!” 음,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의문 자체는 합당했기에 짧게 답해 주었다. “혹시 정수가 나올지 모르지 않나.” “정수?” 쌩뚱맞은 단어를 들었다는 듯 미샤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만도 하다. 나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이딴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을 테니까. “마녀의 숲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전부 속성계 이능을 갖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프 트롤만 빼고. 뭐, 걔는 나와도 안 잡고 스킵할 거니까 예외. 이내 미샤가 내 계획의 요지를 파악하고는 흠칫 굳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얘를 잡겠단 거냥?” 응, 얘만이 아니라 보이는 족족. 어떻게든 속성계 이능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영체류를 피해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래서야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지 않은가. 뭐, 헤매다가 운 좋게 숲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게 된다면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일 터이나…….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나한테 벌어질 리 없지.’ 물론, 정수의 드랍률도 한 없이 낮기는 똑같다. 하지만 이건 어찌 보면 부가 퀘스트나 매한가지니까. 이 계획에만 목을 멜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오면 더 없이 좋고, 안 나와도 어쩔 수 없고. 딱 그런 정도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엘리사년 쪽에서 우릴 찾아오는 순간 전부 무의미한 짓이 될 테고 말이지.’ 저쪽 탐색꾼이 난쟁이놈을 처리하거나, 놓쳤다는 이유로 우리를 찾아나서는 것. 그때가 오면 지금의 이러한 노력은 하나마나한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게 발버둥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겠지. “아무튼, 싸울 준비나 해라.” “알겠당!” 이내 미샤가 무기를 꺼내 들었고. “글글글글그르르긁!” 뿌리째로 땅 위를 기던 스네트리에게 달려들었다. 생존 수칙 하나, 살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 *** 「스네트리를 처치했습니다. EXP +2」 *** 마녀의 숲을 탐색꾼 없이 걷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누군가 기분을 물어온다면, 나는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놀이공원에 있는 거울의 방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듯한 기분이라고. 참고로 이 거울의 방엔 상시 BGM도 있다. [그냥 죽여! 아니면 즐기던가! 왜 쓸모도 없는 년한테 그렇게 잘해 주는 거야?] [끼히히, 끼히히히!] [전부 네 탓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환청들이 점점 디테일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음, 그건 아닌 거 같다. 환각도 이전보다 선명해진 걸 보면. [한수야, 왜 너 혼자만 살아남은 거니?] 그저 괴물의 형체를 하고 있을 뿐이던 이전과 달리, 내 기억 속에 새겨진 인물들이 나타난다. 결코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아파! 아파! 아파!!] [그 여자애는 언제 죽일 거야? 그 여자애는 언제 죽일 거야? 그 여자애는 언제 죽일 거야? 그 여자애는 언제 죽일 거야?] 가끔씩 그 사람들이 환각의 형태로 등장해 내게 좆같은 소리를 씨부려댄다. 어느샌가 환각과 환청이 합쳐지기 시작한 셈. ‘필드 효과가 갑자기 강해졌을 리는 없고, 그저 내가 약해졌을 뿐인 건가.’ 나는 냉정하게 내 상태를 파악했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밤을 꼴딱 지새웠다. 그런 와중에 격렬한 전투를 펼쳤다. 저주에 걸려서 반쯤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으며, 현재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길을 헤매고 있다. 당연히 정신력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저 버티는 수밖에.’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며,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미샤, 단검 대신 이걸 써라.” “흐응? 창은 안 써 봤는뎅…….” 스네트리를 처치한 후,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며 확장형 배낭을 점검했다. 그리고 테이슨의 무기였던 창을 미샤에게 건넸다. 도시로 나가면 팔아서 분배하기로 한 물건이지만, 지금 그딴 걸 가릴 때가 아닐 테니까. “잔말 말고 쓰라면 써라.” “히잉, 알겠당…….” 그 동안은 한 사람의 개성과 그간 쌓아 온 경험을 존중해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고로 무기란 길면 길수록 실용적이라는 게 내 평소 지론. 실제로 아까 스네트리를 잡을 때도, 단검이 아니었으면 깊이 파고들어 한 번에 핵을 부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으으, 어색하당! 차라리 검을 주면 안 되낭?” 안 된다. 검과 창 중 뭐가 더 다루기 쉬운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창이 훨씬 더 길다는 건 확실하다. 내가 방패로 벽을 만들었을 때, 뒤에서 도와주기도 한결 수월할 것이다. “어차피 둘 다 다뤄 보지 않은 무기 아닌가. 그냥 그걸 써라.” “흐잉.” 흐잉은 무슨 흐잉이야. 자꾸 사람 기운 빠지게 앙탈 부리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네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로 여겨지지만은 않거든. 그래 봤자 결국 만난 지 2주도 안 된 사이다. ‘이건… 내가 쓰는 게 좋겠군.’ 장비를 업그레이드 한 것은 미샤만이 아니라 나도 매한가지였다. 「캐릭터가 강철 판금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5 상승합니다.」 우선 한스C의 각반을 종아리 위에 둘렀다. 안에는 가죽으로, 바깥으로는 강철이 둘러진 형태의 각반. 허벅지 파츠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난쟁이놈 배낭에 들어 있는 듯하다. 「캐릭터가 워 부츠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8 상승합니다.」 내친김에 신발도 새로 바꿨다. 마찬가지로 한스C가 신고 있던 것이다. 꽤 좋아 보이는 가죽 재질의 장화인데, 특이하게도 발등 부분에 철판이 덧대어져 있다. 그것도 뾰족한 스파이크 형태로. ‘탐험가 새끼들은 이런 데서만 실용적이란 말이야.’ 추가로 더 살펴봤지만, 장비 중에 미샤나 내가 쓸만한 물건은 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어? 비요른! 이거 혹시 성수 아닌강?” “…맞는 거 같군.” 악재가 연달아 겹치더니, 이제 슬슬 반등할 때가 된 건가? 장비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기뻤다. 그야 성수가 있으면, 무기를 인챈트 할 수도 있으니까. 「장비에 성스러운 기운이 스며듭니다.」 「악 속성 몬스터를 공격시 추가 피해를 부여합니다.」 성 속성의 추가 피해. 그 말인즉,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속성계 이능이 없어도 영체류 몬스터들을 후두려 팰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악 속성 한정이긴 하지만……. 마녀의 숲에서 나오는 영체류 몬스터는 대체로 악 속성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문제는 다섯 병밖에 없다는 건가.’ 성수는 지속 시간이 없다. 그저 정해진 추가 피해를 모두 가했을 때, 효과가 사라지게 된다. 과연 다섯 병으로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15일 차가 되어 3층이 페쇄될 때까지 아낌없이 쓰기는 턱 없이 부족할 것이다. ‘…어지간하면 아껴 쓰는 편이 좋겠군.” 그럼에도 간만에 희소식이다. 따라서 배낭을 한 번 더 세세히 뒤져 봤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탐험 용품 같은 것들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었으니까. 혹시 도움이 될 만한 게 더 나올지 모른다. “으응? 비요른! ” 가방을 하나씩 맡아 뒤적거리고 있던 때, 미샤가 나를 불렀다. “특이한 물건을 찾았는뎅, 이게 뭔지 아낭?” 특이한 문양의 팬던트였다. 그리고 나는 그 문양의 정체를 알았다. ‘이거 카루이교의 심벌 아닌가?’ 애석하게도 여기까지가 알아낸 전부였다. 카루이교와 관련된 것 외에는 이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물품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쯤이면 확인할 건 다 한 거 같고…….’ 꺼낸 물건들을 도로 담으며 배낭을 정리했다. 그리고 ‘성수’라는 변수가 생긴만큼 간략하게나마 세웠던 계획도 점검해 보았다. 일단 처음 떠올린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1. 우연히 마주친 탐험가에게 도움을 구한다. 마녀의 숲은 커다랗다. 그리고 지형적 특성상 다른 탐험가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조우하게 될 터. 보상으로 장비들을 준다고 하면 어느 탐험가들이라도 혹하기야 할 것이다. ‘문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거지만.’ 탐험가 새끼들 중엔 효율충들이 많다. 그냥 죽이고 뺏으면 그만인데, 왜 귀찮게 도와주기까지 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얘도 일단 여자고…….’ 배가 고파졌는지 육포를 까잡수고 있는 미샤를 흘깃하며 나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2. 숲 밖이나 4층 포탈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돌아다닌다. 오로지 운에만 기대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걸 최종 목표로 설정할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다. 좋으나 싫으나 숲속을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입장 아닌가. 바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다음. 3. 폐쇄일까지 생존에 주력하며 버틴다. 식량과 식수는 충분하다. 게다가 성수를 확보함으로서 당장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만약 도중에 속성계 정수가 나와주기라도 한다면, 이 빌어먹을 숲에서의 생존률도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전부 그 새끼들이 우릴 못 찾는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말이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미궁에 들어선 지 4일 차밖에 되지 않았다. 해온 여정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여정이 훨씬 더 많이 남았다는 뜻. 이번 나흘 동안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남은 나날들이 무난히 흘러가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정수가 나올 거 같지도 않고, 어차피 해 버릴 거면 지금 해 버리는 게 낫겠지.’ 따라서, 나는 결정했다. “미샤, 혹시 결혼은 했나?” “잉? 갑자깅?” 내 질문에 육포를 씹어먹던 미샤가 흠칫한다. 보아하니 이게 뭔 소린가 하는 눈치. 그래도 말을 잘 듣겠다더니 그 와중에 대답은 해 주었다. “일단 안 하긴 했는뎅…….” 오케이. 나는 재차 질문했다. 이번엔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외간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면 안 된다던가. 혹시 그런 신념 같은 걸 갖고 있기라도 하나?” “그, 그런 건 어, 없는 거 같기도 한뎅…….” “잘됐군.” “뭐, 뭐가 잘됐다는 거냥? 꺄악! 그, 그만! 가, 가까이 오지 마랑!” 내가 10년 가까이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해 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고르지 못했을 선택지. 그 물건을 벌써 써 버리는 건 아쉽지만……. 4. 미샤를 각성시킨다. 역시 이게 최선이다.60화 생존수칙 (3) 시간을 아낄겸, 곧장 반지부터 뺐다. No.9425 서리혼령 가락지. 알테미온 학파의 마스터, 늙은이를 등쳐먹고 획득한 넘버스 아이템. “자, 받아라.” “잉? 반지? 이건 갑자기 왜……?” 일단 무심코 넘겨받은 미샤가, 뒤늦게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당황해 했다. “이걸 줘도 될 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아껴 두려 했던 반지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주냥?” 그야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나는 짧게 답했다. “네 수호신께 맹세해라. 이걸 받는 조건으로 앞으로 나와 계속 함께하겠다고.” 서리혼령 가락지의 시세는 150만 스톤. 다만, 매물이 없기 때문에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이 반지의 진짜 가치가 알려진다면, 그 가격은 미친 듯이 급등할 터였고. “흐엑?! 비요른! 너 혹시 미친 거 아니냥?!” 미샤가 기겁을 하며 나를 매도해 왔으나, 현재 내 정신을 멀쩡했다. 그럼 이 물건을 그냥 주겠냐? 일단 생존을 위해 쓰기는 하겠다마는, 적어도 추후 계속해서 날 따라다니며 돕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물론, 이는 일방적인 계약이 아니다. “네가 이 반지를 받는 순간, 전사의 명예를 걸고서 앞으로 네 곁에서 너를 돕겠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 줬으면 한다.” “진심이냥……?” 이를 증명하기 위해, 미샤의 눈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나는 진심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윈-윈. 일종의 동료 서약이다. 그리고 이를 이해했을까. 미샤는 놀란 눈망울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이내 장난기가 싹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네가 날 놀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당. 솔직히 이런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라 기, 기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당!” “그렇다면 다행—” “하지만 비요른, 미안하당.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당.” “…무슨 뜻이지?” 미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빤히 응시하며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마른 남자가 취향이당.” “마른 남자……? 그게 뭔 소리냐?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이잇!! 너에겐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뜻이당!!” 순간 정신이 멍해진다. 이게 고백할 생각도 없었는데 차였다는 그런 건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뭔가 오해가 있군.” “그래, 그런 걸로 하장. 계속 같이 다녀야 하는데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뭐래, 얘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일까 싶어서 돕겠다느니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했는데, 그게 실착이었다. 바바리안에겐 바바리안의 방식이 있을진데. “내 말은 이 반지를 받는 대가로 동료 서약을 하란 뜻이었다.” “동료 서약……?” “물론 똑같은 반지를 구해 주든가, 그간 1,500만 스톤만큼의 이득을 내게 안겨줬다면 언제든 계약을 끝낼 수 있다. 자, 이해됐나?” “되, 될 리가 있겠냥?! 애초에 이 반지가 대체 뭐기에 1,500만 스톤이나 한다는 거냥!” “1,500만 스톤도 싸게 부른 거다.” “아니, 그러니까, 이 반지가 대체 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반지는 네 오랜 숙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 “…뭐? 숙원?” “예를 들자면, 이제 네 오빠도 너를 보며 반푼이니 뭐니 말할 수 없게 되겠지.” 역린과도 같은 이야기였을까. 미샤가 흠칫 굳는다. 다만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더니, 애써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에잉, 내가 그 말에 속을 거 같냥? 아무리 멋쩍어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을 하면 못 쓴—” “거짓말이 아니다.” 잠시간 대화가 끊기며 정적이 이어졌다. 어색하게나마 미소 짓던 미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건, 장난이 좀 지나치지 않냥.”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은 목소리. “나는 분명 한 번 웃으며 그만둘 기회를 줬다. 근데 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거냥? 내가 실실 웃으며 따라주니까 우스워 보였던 건강?” 미샤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짓문다. “…너한테 그 얘기를 해 주는 게 아니었는뎅.”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었으나, 사실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트라우마. 평생 동안 곪고 곪았을 상처는 누군가 건드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동반되니까. “네 상처를 헤집으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다. 나는 정말로—” “그런 게 있단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당. 우리 부족에서도 알지 못하는 걸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냥?” 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구구절절 말할 내용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짧게 끝내자. “미샤, 한 가지만 묻겠다.” “해봐랑.” “만약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아직도 장난을 치—!” 성을 내려는 미샤의 말을 끊고서 역으로 소리쳤다. “대답이나 해라!” 그저 질문에 대답이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Yes인가 No인가. 내가 소리치며 대답을 강요하자, 미샤가 흠칫 굳더니 다시금 입술을 짓물었다. “…만약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은인으로 모셔도 모자라지 않을 거당.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그럼 됐군.” 한 걸음 다가가며 미샤의 팔목을 잡았다. “미샤 칼스타인, 믿기 어렵겠지만 전사의 명예를 걸고 지금까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뭐, 뭣?” 미샤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한다. 이걸 보니 진작 전사의 맹세를 썼으면 쉽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뭐, 이젠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깨어나면 너도 그 말을 지켜라.” 미샤를 내쪽으로 잡아당긴 뒤,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콰직-! 반지에 달린 푸른색 유리 보석을 손아귀 힘만으로 박살 냈다. 「서리혼령 가락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빙하마수 스카디아가 봉인에서 깨어납니다.」 호수 위에 파문이 일듯. 냉기의 파동이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간다. 화아아악-! No.9425 서리혼령 가락지. 이 아이템이 파괴될 시 생기던 특이한 이펙트. 대미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사실상 무의미한 옵션이었지만, 나는 이런저런 시도 끝에 한 가지 발견을 해냈다. 「특수 조건이 충족된 상황입니다.」 만약 착용자가 수인이었을 경우. 파괴시의 이펙트와 별개로 이벤트가 발생한다. 「얼음마수 스카디아가 미샤 칼스타인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영혼수 계약. 수인이란 종족이 지닌 특수 능력을 강제로 각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계약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 태풍의 눈처럼 미샤 주위를 휘감은 냉기 돌풍. 이것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미샤가 눈을 떴다. 그녀의 적색 눈동자에선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기색이 존재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나는 대체 그동안 무엇 때문에…….” 두서 없는 말을 뱉던 미샤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배신감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비요른, 이 반지는 대체 뭐냥. 이런 게 있다면 왜 아버지는 내게 이런 게 있단 걸 알려 주지 않은 거냥!” 이 반지의 존재를 수인족이 인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얘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자면……. “아마 그도 몰랐을 거다.” “…몰랐다공?” “그래, 한 마법사가 오랜 시간 연구하다가 최근에나 알게 됐다는 듯하니까. 분명 널 자식으로 생각치 않아서 숨긴 건 아닐 거다.” 이쪽이 얘 멘탈에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내 답변에도 미샤는 궁금한 게 한가득인 것처럼 보였다. “잠깐, 그럼 그런 걸 너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냥? 이 반지는 어디서 손에 넣은 거고?” 설명해 주는 건 어렵지 않다. 미리 지어낸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할 것이 하나 있다. “일단 옷부터 입고 마저 얘기하는 게 좋겠군.” “…옷?” 미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으, 아? 으어? 내, 내, 내가 왜 옷을 전부 벗고 있는 거냥!!”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던 미샤가 소리를 내지른다. “전부 옆에 개어 뒀으니, 우선 입고서 얘기하지.” “아, 알겠당…….” 내가 잠시 뒤돌아 있는 동안, 미샤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도, 돌아봐도 된당.” “빠르군.” “그럼 느긋하게 하겠냥!!” 이내 뒤돌자 평상복을 입은 미샤가 보였다. 장비 안에 입고 있던 얇은 천옷. 몸에 딱 맞아서 그런지 굴곡진 선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났다. “장비는 안 입나?” “그 전에 이것부터 대답해라! 왜 내가 아, 아, 알몸이었던 거냥!” “그야 내가 벗겼으니까.” “버, 버, 벗겼다고?! 네, 네, 네가?!” “어쩔 수 없었다. 이 의식을 하면 장착 중이던 장비가 전부 날아간다고 들었으니까.” 참고로 이는 거짓말이다. 들은 게 아니라 직접 겪었다. 씨바, 열심히 키웠는데 장비가 전부 초기화되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게 되어 게임 오버를 당했지. “…자, 잠깐만! 설마 처음에, 그 질문도 그래서 했던 거였냥?” “그 질문이라니?” “결혼이니 뭐니 했지 않았냥.” 아, 그거.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자가 있다면 기분 나빠할 것 아닌가.” 나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교인이다. 남편까지 있는 여성의 옷을 벗기는 불손한 짓은 결코 할 수 없다. 다만 내 말에 미샤는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그런 걸 생각하는 놈이, 미리 말해 줄 생각은 못했던 거냥!”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근데 네가 내 말을 조금도 믿어 주지 않았지 않나.” “그, 그건 그런데…….” 묻는 것마다 따박따박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 미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따라서 슬슬 강하게 나가도 되겠지. “오히려 다급하게 벗겨야 했던 탓에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다. 쯧, 그렇게 안 봤는데 장신구가 왜 그렇게 많은 건지.” “…미, 미안하당.” “됐고, 사과하기 전에 할 게 있지 않나?” 에둘러 말하며 미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생색은 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내야 하는 법. “…고맙당.” “그게 끝인가?” 미샤가 잠시 고민하더니 재차 말했다. “…고맙습니당?”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않나.” “그, 그걸 꼭 내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거냥?” 부끄럽고 멋쩍다는 얼굴로 미샤가 내 시선을 피했으나, 그런다고 봐줄 내가 아니다. 이런 건 언제나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법. “물론이다.” 내가 완고하게 말하자, 이내 미샤가 눈빛을 달리했다. 장난스런 분위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처음부터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는 듯. 자세를 고쳐잡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비요른, 있지 말이당. 나는… 예전에… 죽으려고도 했던 적이 있었당.” 갑자기? 그런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진중한 목소리에 일단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날 발견하고 살린 게 아버지였당.” “아버지에게 고마워 해야겠군.”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얘기가 아니당.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말이 뭔지 아냥? 정 죽고 싶으면 미궁에 가서 죽으란 거였당. 얼마나 더 가문의 수치가 되어야 만족할 거냐면성.” 아, 어, 음…….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막장인 집안이었구나. 아까 한 말실수를 정정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미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미궁에 들어왔당. 물론 아버지 말대로 죽으려고 들어온 건 아니당. 단지, 그 집안에서 도망치고 싶었당. 영혼수가 없어도, 만약 내가 대단한 탐험가가 되어서 인정받으면, 아버지도 날 다시 봐줄까 싶은 기대도 있었공.” 감정이 절제된 음성. 그 힘겨운 음성에서는 그간 자라오며 느꼈을 온갖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이걸로 아버지가 날 인정해 줄지는 모르겠당. 하지만 어째선지…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당.” 이내 미샤가 날 보며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비요른. 이 은혜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며 갚아가겠당.” 언젠가 시간이 흐르며 희석될지 언정, 지금 미샤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신파극은 이제 됐으니. “수호신께 맹세코?” 경청하고 있던 나는 짧게 물었고. 미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신께 맹세코.” 오케이, 깔끔하니 좋구만. *** 소환계, 강화계, 이능계. 영혼수와 계약을 한 수인은 일반적으로 이 세 종류의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한다. 미샤는 강화계였다. 「미샤 칼스타인의 육신에 얼음마수 스카디아의 힘이 영구적으로 깃듭니다.」 육체 능력이 한 단계 도약한 것과 별개로, 빙결 속성이 상시적으로 부여된다. 방금 내가 얻어맞은 복부가 시린 것처럼. “아앗! 때리라고 해서 때리긴 했는데,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당. 괘, 괜찮은 거냥?” 동상이라도 걸린 듯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 이를 보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소환이나 이능이 아닌 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맞아 보니 더 확실하게 알겠다. 그간 바라고 바라던 속성계 공격수단이 생겼다. 이거면 이제 영체류 몬스터들 새끼도 후두려 팰 수가 있다. “으잉? 정신 차려라 비요른! 왜 그렇게 바보처럼 실실 웃는 거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이제 움직이지. 한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주변을 대충 정리한 뒤, 미샤를 데리고 이동했다. 그리고 도중에 만난 9등급 영체류 몬스터인 ‘레이스’와 시험 삼아 싸워 보았다. 「레이스가 [시체불꽃]을 시전했습니다.」 [시체불꽃]. 어둠 속성과 화 속성이 섞인 액티브 스킬. 위력은 9등급 스펠보다도 낮으며……. 뱀파이어 정수로 어둠 저항력이 있는 내게는 맞아 봐야 뜨끈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영체류 몬스터들은 대부분 등급에 비해 전투력이 낮다. 초반부엔 공격 수단이 없어서 까다로울 뿐이지. 「레이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1」 나는 성수를 뿌린 메이스로. 미샤는 서리가 깃든 두 주먹으로 열댓마리의 레이스를 후두려 팼다. “흐잉, 때릴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당…….” 창이 아니라 주먹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 1단계 각성이라 무기에는 적용이 안 되는구나.’ 바바리안의 혼령각인에도 단계가 있듯. 수인의 영혼수 계약도 서서히 성장을 시키는 방식이다. 그래도 미샤가 원래 무투가 클래스였던 게 다행이었다. 주먹으로만 싸우다가 한계를 느끼고 그나마 적응이 쉬워 보이는 단검을 쓰게 됐다던가? 「위치스램프를 처치했습니다. EXP +1」 「다이로우터를 처치했습니다 EXP +2」 「돌연변이 하급 정령을 처치했습니다 EXP +2」 아무튼 이후로도 계속해서 숲을 돌아다녔다.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보이는 족족 몬스터들을 해치웠다. 또한 기회가 될 때마다 최대한 쉬어 주며 체력을 비축했다. 「우드맨을 처치했습니다. EXP +1」 「호문쿨루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2」 「아울베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2」 그렇게 약 11시간이 흘렀다. 아직 7등급 몬스터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아래 등급 몬스터과의 전투는 딱히 어렵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 연출된 적도 없었고. 우려와 달리 아직 엘리사년들이 우릴 찾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놈들한테도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안일한 희망을 품기보단, 계속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자.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후, 역시 정수는 안 나와주는군.’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성수와 얼음마수 스카디아. 이 두 공격 수단을 통해 영체류 몬스터도 문제없이 사냥할 수 있게 된 우리였지만……. 그래 봤자 크게 변한 건 없다. ‘30%쯤 되려나.’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무사히 살아서 도시로 돌아갈 확률이 대충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 하고. 「마녀의 숲에 진입한 지 12시간이 지났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강화됩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부여됩니다.」 본격적인 생존은 이제부터다. 61화 생존수칙 (4) 7일 차 오후. 그러니까, 난쟁이놈 무리에서 떨어져 이 빌어먹을 숲에 조난된 지 80시간이 넘어가는 그 시각. “…….” 나는 아직 이곳에 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좆같은 환청과 환각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없이 숲을 헤매고 있다. 조난 1일 차가 지나며 생긴 변화다. “…….”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감정이 상했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뿐. 아, 변화는 한 가지 더 있다. “…….” 로프를 이용해 미샤와 내 몸을 이었다. 포승줄에 굴비를 엮은 듯한 모양새. 오랜 시간 마녀의 숲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노하우다. 이러면 누군가 한 명이 뒤쳐지거나 떨어져도, 줄에 의지해 서로를 찾을 수 있다. “비요른… 조금만 천천히, 천천히 가줘랑…….” “알겠다.” 나는 속도를 낮췄다. 오늘 아침, 급격히 미샤의 상태가 악화됐다. 병에 걸렸거나, 상처가 심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피로가 한계에 도달했을 뿐. 터벅, 터벅. 걸음을 늦췄지만, 자꾸만 허리에서 걸리는 느낌이 난다. 이 속도도 따라오지 못하는 건가? 짧은 고민 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업혀라.” “……?” “잠깐 눈이라도 붙이면 좀 나을 거다.” “하, 하지만…….” 미샤가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바라본다. 하기야 웃기기야 하겠지. 사실 겉모습만 보면 내가 얘보다 몇 배는 더 심하니까. ‘거지도 이런 상거지 꼴이 없군.’ 갑옷 안에 입은 천옷은 여기저기 구멍이 송송 뚫리고 헤져 있으며, 철제 장비들도 여기저기 부식된 자국이 남아 있다. 전부 미샤를 각성시킨 부작용이다. 서리 혼령 가락지를 빼며 봉인시켜 뒀던 ‘시체골렘’의 패시브 스킬이 활성화됐다. 그리고 몬스터와 전투 시 스치는 정도의 부상은 일상다반사, 그럴 때마다 산성 핏물이 튀다 보니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수리비만으로도 엄청 깨지겠군.’ 나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2단계 소재인 라이티늄제 흉갑과 방패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았지만, 그래도 순백의 미를 자랑하던 예전의 그 광채는 잃은 지 오래였다. 근데 그 웃음을 보며 뭔가 오해라도 했을까? 미샤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나, 나는 괜찮당. 차라리 네가 쉬어라. 내가 업겠당!” 말은 고맙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니? “됐고, 이리 와라.” 더 이상의 논쟁은 거부하며, 미샤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가벼운 체중에서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반항할 힘조차 없던 거구나. “문제가 생기면 깨울 테니, 그때까지라도 푹 쉬어라.” “그렇지만…….” “쓰읍.” “…고맙당.” 한쪽 어깨에 걸쳐진 미샤가 드디어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다만 곧바로 잠은 오지 않았을까?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비요릉.” “왜 부르나.” “…그거 아냥?” “말해라.” “힝, 좋은 냄새가…….” 좋은 냄새, 그래서 뭐. 말은 끝까지 해야 할 거 아니야. 문득 뒷말이 궁금해졌지만……. 뭐, 꿈이라도 꾸고 있던 거겠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채, 며칠을 씻지 않은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날 리는 없으니. 머지않아 들려오기 시작한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피식. 그래, 다 너희들 배가 불러서 그랬던 거라니까? 아무리 환각이 보이고 환청이 들려도, 진짜 피곤하면 어디서든 잠이 솔솔 온다. 사람 몸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거든. 어떤 환경에서든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럼 계속 가볼까.’ 미샤를 멘 채 계속해서 숲을 걸어나갔다. 얘를 옆에 내려놓고 같이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럴 순 없다. 「마녀의 숲에 진입한 지 84시간이 지났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강화됩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5단계로 격상됩니다.」 필드 디버프 [마녀의 눈]. 마녀의 숲이 거쳐 가는 지역으로만 인식되는 진짜 이유기도한 이것. 효과는 간단하다. 일정 시간 한곳에 머무르면 반드시 7등급 몬스터 ‘카니바로’가 등장하게 되며, ‘일정 시간’은 단계가 격상될수록 점점 줄어든다. 첫째 날은 1시간가량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0분 정도 되겠군.’ 사실상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두 명이라는 점이다. 카니바로가 등장해도 막아 줄 동료란 없으며, 이제는 걔가 나오는 순간 반쯤 뒈졌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체력이 있을 때도 놈을 잡는 데 15분이 넘게 걸렸으니까. 이론상 하나를 잡기도 전에 또 한 새끼가 나타나는 셈. 터벅, 터벅. 그게 바로 지금 내가 걷는 이유다. 피곤해서 뒈질 거 같지만, 그래도 걸어야 한다. 안 그러면 진짜 뒈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아직도 안 나타난 걸 보면, 이제 그놈들 걱정은 그만해도 되려나?’ 힘들 때는 딴생각을 하는 게 최고인 법. 한 번의 상념을 끝내고, 또 다른 화두를 꺼냈다. 마녀의 숲에 조난당한 지 오늘로 나흘째다. 만약 엘리사년이 우릴 찾을 수단이 있었다면 진작 찾아왔어야 할 시간. 이젠 슬슬 안심해도 좋을 거 같았다. ‘가장 큰 걱정 하나는 덜은 셈이군.’ 놈들이 우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대충 짐작이나 해 보자면……. 저쪽에도 뭔가 변수가 있었던 거겠지. 내가 지금 미샤와 단둘이 여기 낙오된 것처럼. 삶이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기에 더욱 개같은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잡몹들을 멀찍이 피해 가며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음, 적어도 한 시간은 된 거 같은데. [오빠, 왜 그냥 내버려 둬요?] 왠지 익숙한 환청에 고개를 들었다. [평생의 숙원도 풀어 줬겠다, 쟤… 오빠가 좀만 꼬셔도 홀라당 넘어올걸요?] 나무 옆으로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그리고 특유의 오만하면서 까칠한 말투. …내 전 여자친구다. [설마 또 버려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후, 씨바……. 이제까지는 대부분 환각인 티가 났는데, 얘는 그런 것조차 없다. 왠지 다가가 만지면 체온도 느껴질 것만 같다. [어머, 음흉하시기는.] 얘가 또 뭐래. 내 머릿속을 기반으로 해서 그런지, 하는 짓까지 걔랑 똑같다. 음, 그럼 그동안 내가 들은 모든 환청이 사실 내 무의식을 바탕으로 했다는 건가? [오빠는 그게 문제예요. 항상 전부 모든 걸 알려고만 하니까.] ‘그건 인정이지.’ 무지無知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이라면 모두 가진 본능이다. [그래도 너무하지 않아요? 자기는 아무것도 알려 주려 하지 않는 주제에.]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네? 오빠가 저에 대해 모르는 게 뭐가 있다고요? 온몸 구석구석까지,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면서?] 교태스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다. 시각적인 부분에서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 흰색 블라우스와 짧은 정장 치마. 여기까지는 이전과 변함없지만, 길게 뻗은 다리에 검은 스타킹이 신겨져 있다. 아까는 살색이었는데. [취향은 한결같으시네요.] 씨발, 이게 나란 인간인가? [저런 짐승 여자애는 버리고 이리 와요. 오빠는 그냥 나랑 있어야 돼. 다른 애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잖아?] 어, 그런가? 나도 모르게 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기분 좋게 해—] 모든 걸 포용해 줄 듯이 팔을 벌리며 배시시 웃던 전 여자친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묘사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퍼억-! 주먹이 꽂히며 찰떡처럼 뭉개지는 안면 근육. 왜인지 내 어깨에 있어야 할 미샤가, 내 전 여자친구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있었다. 민첩캐답게 연타로. 퍽! 퍽! 퍽! 퍽! 퍽! 뭐지? 이것도 환각인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감각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다만……. [끼야아아악!!!] 칠판 긁는 듯한 소리가 이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샌가 전 여자친구를 묵사발 낸 미샤가 돌아와 내 허리를 잡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괜찮냥! 비요른!” “어, 어어…….” “드라이어드는 내가 해치웠으니 어서 정신 차려랑!” 뭐? 드라이어드? 마녀의 숲에 굉장히 낮은 확률로 출몰하며 [매혹] 스킬을 쓰는 그 8등급 몬스터? 어쩐지, 환각이 훨씬 선명하더라니. 「드라이어드를 처치했습니다. EXP +2」 「상태이상 [매혹]이 해제됩니다.」 순식간에 상황이 이해됐다. 필드 효과가 아니라 스킬에 맞은 거였구나.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나는 순순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그 찰나. “헹, 이 정도야 당연한—” 미샤가 흠칫 굳으며 한 곳을 가리킨다. “어어? 비, 비요른? 크, 큰일은 이미 나 버린 거 같은뎅…….” 가리킨 곳을 확인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군.” [매혹]에 걸린 상태로 벌써 10분이나 지났을까. 저기 저 수풀가에서, 7등급 몬스터 카니바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죽, 인, 다…….” 살의로 희번뜩한 안광을 흩뿌리며. *** 카니바로. 마녀의 숲에서만 출현하는 7등급 몬스터. 인간형 언데드로 분류되며, 꽤나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 문제는 그 지능을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데만 쓴다는 것이겠지만. “피, 와, 살… 내, 놔, 라.” 카니바로가 우리를 보며 석궁을 겨눈다.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지 밖으로 돌출된 송곳니는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하긴, 얘는 몰라도 바바리안인 나는 제법 먹음직스러울 거다. 체지방량이 적어서 조금 질기기야 하겠지만. “미샤, 내 뒤로 와라.” “아, 알겠당!” 우선 미샤를 후방으로 보낸 뒤, 그 사이를 방패로 가로막았다. 한번 조우한 이상 튀는 건 불가능했다. 카니바로는 한번 정한 사냥감을 끝까지 따라오는 습성이 있으니까. 실제로 전투 방식도 사냥꾼과 비슷했다. 「카니바로가 [마력지뢰]를 시전했습니다.」 주변에 함정을 설치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으로, 근처에 다가간 순간 강한 폭발이 인다. 때문에 섣불리 거리를 좁히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카니바로가 [추격화살]을 시전했습니다.」 화살이 날아든다. 고블린 궁수의 것과는 비교도 불가한 위력을 지녔으며, 높은 수준의 명중률 보정이 들어간 화살. 따라서 피하는 것보다 막아내는 게 정석이다. 이렇게. 카앙! 직격으로 쏘아진 화살을 비스듬하게 받아내며 옆으로 튕겨낸다. 지난번엔 내가 화살을 막아내는 동안, 미샤가 주변에 돌멩이를 던져 지뢰들을 파괴하는 전술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겠지.’ 10분 안에 녀석을 해치워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다른 녀석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겠지. 우리가 뒈질 때까지. 따라서 이제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다. “미샤, 내 등 뒤에 업혀라.” “그게 무슨 소리냥?” 던질만한 돌멩이를 줍고 있던 미샤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다. “아무래도 이번엔 무리를 해야 할 거 같다. 그러니 어서 내 말대로 해라.” 강하게 말하자, 미샤가 등에 업혔다. 그 즉시, 나는 방패로 머리와 상체를 보호하며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콰콰쾅-! 근처에 쫙 깔려 있던 지뢰들이 걸음걸음마다 터져 나갔지만…….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냥!!” 그런 내 모습에 미샤가 기겁을 했으나, 사실 내 입장에선 딱히 유별날 것도 없었다. 바바리안의 몸에서 깨어난 이후로 대부분의 위기를 몸으로 때워서 넘겨왔지 않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고를 수 있던 유일한 선택지. 콰콰쾅-! 고통내성을 뚫고 피어나는 통증. 폭발음이 피어날 때마다 다리가 실시간으로 씹창나는 게 느껴진다. 「카니바로가 [하운드]를 소환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소환된 들개들이 달려든다. 그리고 팔, 어깨, 허벅지, 다리 등등. 온갖 곳에 이빨을 박아넣고는 턱을 흔들어 재낀다. 콰콰쾅-!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날아드는 화살은 쳐내고. 여기저기 매달린 들개 새끼들은 [살점폭발]로 떨어뜨려 내면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콰쾅-! 열 번째 지뢰가 터지며, 급격히 몸이 기운다. 다른 발을 내밀어 중심을 찾아보려 했으나, 곧 무의미한 짓임을 깨달았다. ‘존나 징그럽네.’ 내 다리 아랫부분은 더 이상 발이라고 칭하기 어려웠다. 뭉개진 고깃덩이라면 모를까. ‘뭐,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알아서 해 주겠지.’ 더 이상의 돌진은 불가능하단 걸 인지한 즉시. 내 위에 타고 있던 미샤를 멀리 집어 던졌다. “해치우고 와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공중에 도약한 미샤의 움직임이 그 대답이 되어 주었다. 푸욱-! 체공 상태로 민첩하게 공중제비를 돌던 미샤가, 카니바로의 머리가 아닌 어깨에 창을 꽂아넣었다. 푸욱-! 창의 숙련도가 떨어지다 보니 발생한 실수. 다만 미샤는 창대를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하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어 놈의 미간에 박아넣는 것으로 본인의 실수를 만회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5분은 절대 안 되겠지.’ 어쨌거나 이렇게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그 사실에 만족하며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 「경고: 캐릭터의 신체 일부분에 손실이 가해졌습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영구적인 상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전투가 끝난 뒤. 미샤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내게 소리를 질렀다. “비요른!!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냥!” 화를 내는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게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미샤가 해야 할 것은 나를 혼내거나 걱정하는 게 아니다. “설명이 됐으면, 이제 포션 좀 주겠나?” 발이 씹창난 채, 바닥에 쓰러진 내가 무심하게 오더를 내리자 미샤의 눈빛이 멍해졌다. 그러나 내 요구가 머리에 입력은 됐는지, 달달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부었다. 치이이이익. 한 병에 무려 20만 스톤이나 하는 상급 포션. 비싼 값어치를 하는 만큼, 사지 절단의 부상까지도 회복이 가능한 필수 소모품. 다만 미샤는 아직도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 이렇게 다쳐 버리면 포션으로도 전부 낫지 않을 거당…….” 글쎄, 그건 아닐걸. 「캐릭터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불사자 각인. 뱀파이어 정수의 높은 자연 재생력 수치. 그리고 액티브 스킬 [영생자]까지. 게임으로 치자면 내 자연 재생력 수치는 이미 150은 가뿐히 넘을 것이다. 포션 상급이 아니었어도 시간만 넉넉히 준다면 사지 절단의 부상까지도 회복이 가능한 레벨. 애초에 이게 아니었으면 나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했지. “뭐, 뭐냥! 저, 절대 이렇게 빨리 나을 리가 없는뎅…….” 포션의 효과까지 중첩되며 빠르게 상처가 재생되는 날 보며 미샤가 경악했다. 하긴, 얘는 내가 시체골렘 정수만 갖고 있는 줄 아니까 당연한 반응인가? 1분도 되지 않아 짓뭉개졌던 다리가 아물었다. 애석하게도 맨발이었다. ‘신발은 벗고 뛸 걸 그랬나? 팔면 15만 스톤은 했을 텐데.’ 상급 포션에 부츠까지. 7등급 몬스터 한 마리 잡은 것에 대한 투자라기엔 손해가 막심하다. 하지만 아쉬워 해 봤자 변하는 건 없겠지. 나는 배낭을 열어 원래 신고 있던 가죽 장화를 신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발가락 감각도 정상인 거 같고. “비요른, 너는 대체 뭐냥! 포션을 부었는데 아파하지 않는 것도 그렇공……!” “바바리안의 정신력이다.” 이건 진짜다. 아이나르도 포션을 먹었을 때 신음 하나 내지 않더라고. 나는 순전히 고통내성빨이긴 하지만. 뭐, 결과만 똑같으면 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62화 오두막 (1) “어서 움직이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야 그 개고생을 하면서까지 5분 안에 카니바로를 사냥했는데, 쉴 시간이 어디겠는가. “그래서 이젠 좀 괜찮나?” “조금 쉬었더니 그래도 살 거 같당. 고맙당. 근데 내가 얼마나 잔 거냥?” “3시간 정도 됐을 거다.” 개구라다. 사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시간 안팎일 것이다. 다만……. “그, 그렇게 오래 잤낭? 어쩐징…….” 전문 용어로 플라시보. 그렇게 믿는 쪽이 정신 및 육체 건강에 좀 더 도움이 되겠지. 뭐, 이제 문제는 나였지만. “비요른,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당.” 한숨 자고 일어난 미샤는 더 이상 이동을 할 때 뒤처지지 않았다. 다만, 오히려 내 속도가 늦춰졌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자연 재생력이 높다고 해서, 피로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내가 업어 줄 테니 좀 자는 게 어떤강?” 아니, 그러니까 말은 고마운데…….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됐다, 버틸 만하다.” 물론 힘들긴 하다. 당장 발 뻗고 누워서 눈만 감아도 1초면 잠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좀 더 속도를 올리지.” 이번에도 선택지가 없다. 현재 내 상태를 냉정히 분석한 결과. 악착같이 버텨도 앞으로 몇 시간뿐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다음에는 정신력이고 뭐고 몸이 버텨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속도를 올린다공?” “그래, 그 방법밖에 없다.” 체력이 버텨 줄 때 안전지대를 찾아야 한다. 일정 간격으로 마녀의 숲에 랜덤 생성되며, 8시간 동안 유지되는 그곳. 그곳에서는 필드 효과도 해제되며,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다. 즉, 안전하게 잘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 못 찾으면 어떡하낭?” 글쎄, 그러면 상황이 더 악화되겠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안전 지대를 발견한 게 이틀 전이었지 않나. 이쯤이면 슬슬 한 번 더 나타날 법도 하다. ‘나는 몰라도 얘는 운이 좋은 편인 거 같으니까…….’ 지난 번 안전지대를 찾았을 때만 봐도 그렇다.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잠깐 쉬었는데, 그사이에 바로 옆에 안전 지대가 만들어졌다. “미샤, 이제부터는 네가 앞장을 서 봐라.” “내, 내강?” “그냥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된다. 어차피 제대로 알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샤를 앞장세웠다. 그리고 마주친 선공몹들만을 해치우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어, 어? 비요른! 저기 좀 봐라! 그거 아닌강?” “…맞는 거 같군.” 이게 될놈될의 법칙이란 건가? 놀랍게도 30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특이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외형은 다른 나무들과 비슷했지만, 껍질에서 보라색 광채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전지대로 향하는 매개체란 증거. “잘했다. 미샤.” “후훗! 더 칭찬해도 좋당!” 얘는 또 뭐래. 대충 잘했다는 의미를 담아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어 준 뒤, 나는 나무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샤와 함께 껍질 위로 손을 포갰다. *** 「캐릭터가 마녀의 오두막에 입장합니다.」 *** 나무에 손을 올린 순간. 보라색 안개가 주변을 휘감는다. 머지않아 봄을 연상케 하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사방을 가리던 안개를 흐트린다. 솨아아아아-! 이윽고 안개가 모두 사라졌을 때. 우중충하고 음울하던 숲의 광경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들꽃이 만개한 잔디밭이었고. 썩은 덩굴만이 감겨 있던 빼빼 마른 가시나무들은 풍성한 이파리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비요른! 이것 좀 봐랑! 꽃이 참 예쁘지 않낭?” 어, 그래. 근데 그건 지난번에도 봤으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들어가서 쉬지.” “힝, 누가 낭만도 없는 바바리안 아니랄까 봐!” 낭만? 그런 건 일단 살 만할 때나 찾는 거다. 굶어죽기 직전에 낭만을 품어 봤자, 남이 보기엔 그저 궁상 혹은 자기기만일 뿐이니까. 끼이익-. 묘하게 텐션이 오른 미샤를 뒤로하고, 중심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책장 하나, 식탁, 카페트, 난로. 마녀의 오두막이란 이름과 달리, 실내는 크게 특별한 건 없었다. 누구던 떠올릴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오두막. ‘그래도 레이븐이나 드왈키가 있었으면 좋아했을 거 같은데 말이지.’ 마법사들은 이런 특이한 공간을 좋아한다. 책장에 책도 꽂혀 있으니 오자마자 저것부터 확인해 봤겠지. 하지만 나는 바바리안이다. 그것도 굉장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의. 털썩- 따라서 침대로 직행해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읊조렸다. “이번엔 네가 의자에서 자라.” “아, 알겠당! 지쳤을 테니 너는 어서 편히 쉬어랑.” 체력적으로 한계였기에, 미샤는 지난 번에 내가 잤던 흔들의자로 보냈다. 타다다닷, 타닷. 눈을 감으니, 난로 쪽에서 장작불 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미샤도 자리 잡고 앉았는지, 의자에서도 삐걱거리는 일정하게 났다. 끼익, 끼익. “…잘 자랑, 비요른.”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 많이 지친 상태여서 그럴까? 간만에 꿈을 꿨다. 나는 여느 날처럼 회사에 있었다. 행정 업무를 보는 중이었고, 퇴근하자 전 여자친구가 마중 나왔다.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아무튼, 내 자취방으로 가서 함께 치킨을 시켜먹은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는 게임을 했고. 그 아이는 한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그렇게 편안한 적막이 이어졌다. 어느덧 잘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를 끌어안고서 잠이 들었다. 그것이 꿈의 전부였다. 이 모든 게 한 번의 꿈임을 인지한 즉시, 나는 현실로 쫓겨났다. 마녀의 숲을 헤매다 찾은 작은 오두막. 그곳의 낡은 침대. 그 위를 가득 메운 거대한 바바리안의 육신. 단잠에서 깨어나면 이 괴물 같은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 진짜 괴물들과 대적해야 하는— 이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하자.’ 어차피 잠도 더 오지 않을 듯했기에 고개를 돌려 난로 쪽을 확인했다. 자기 전엔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힘을 잃고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즉, 이제 곧 이 오두막이 닫힌다는 뜻. 순수 수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도 확인해 보았다. ‘그래도 7시간 가까이 잔 셈인가.’ 조금 신기했다. 알람도 없었는데 이렇게 적당한 시간에 몸이 알아서 깨어났다는 게. “…….”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떠 천장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천천히 정신을 일깨우자니, 강한 두통이 후두부에서 피어난다. 마치 뇌가 더 자야 한다며 징징거리는 듯하다. 그런 나약한 마음에 동조하면 밑도 끝도 없기에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얘는 또 언제 올라온 거야?’ 미샤가 내 위로 몸을 포갠 채 허리를 베고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도 침까지 뚝뚝 흘리며. 꽤나 편안한지 그릉그릉거리는 숨소리도 일정하게 뱉어내는 중이다. ‘의자가 불편했던 건가?’ 미샤의 머리를 들어 대충 옆으로 굴린 다음, 침대에서 일어섰다. 얘도 미리 깨우는 편이 컨디션 조절에 도움이 될 테지만, 일단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자게 냅두자. 두두득, 뚜득- 기지개를 켜며 굳었던 몸을 풀었다. 그리고 오두막 바깥으로 나가 햇볕을 쬈다. 솔직히 말해, 꽤나 기분 전환이 됐다. ‘…미샤가 꽃을 보고 좋아하던 것도 그래서였나?’ 그리 생각하면 미샤의 감성도 나름 이해되지만, 여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잘못됐단 건 아니고, 단지 취향 문제다. 햇볕은 쬐고 있으면 비타민D가 합성되는 느낌이라도 들지, 꽃은 자가최면할 건덕지조차 없지 않은가. 플라시보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깨워 볼까. “미샤, 일어나라.” “으으잉, 5분만…….” “정신 차려라, 곧 있으면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니.” “그럼 그때까지라도옹…….” 뭐래, 얘가. 잠에 취해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기에, 강제로 허리를 안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악! 아악! 아, 알겠당! 일어났당! 그러니까 멈춰어!!” “그러지.” “무식한 바바리안노망!!” 그러게 깨울 때 일어났어야지. 씨익씨익거리는 미샤를 향해 수통을 건넸다. 어차피 한 번 툴툴거려 봤을 뿐, 진짜 화나서 저러는 건 아닌 듯하니까. “…아, 고맙당.” 슬슬 잠도 깬 모양이었기에, 미샤와 도란도란 앉아 빵과 육포를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자다 깬 직후라 입맛이 돌진 않지……. 나가면 편하게 먹을 시간도 없을 테니까. “다 먹었으면 몸 좀 풀고 있어라. 이제 몇 분 안 남았다.” “알겠당.” 이내 미샤가 국민 체조 비스무리한 것을 하며 몸의 감각을 천천히 깨웠다. 근데 민첩캐라 그런가? 몸이 엄청나게 유연하다. “저, 비요른…….” 남는 시간 동안 배낭 정리나 하고 있자니, 미샤가 스트레칭하던 상태로 말을 걸어왔다. “뭔가.” “그, 히쿠로드랑 드왈키랑 로트밀러 있지 말이당…….”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라.” “그 셋은 어떻게 됐을 거 같낭? 그래도, 살아 있긴 하겠징?” 음, 역시 그 질문이었구나. 슬슬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다. 사람이란 게 보통 몸이 살 만해지면 딴생각이 들기 마련이니까. 나는 고민 없이 답했다. “나도 모른다.” “그야 그렇지만, 예측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강.” 예측이 아니라 희망 사항이겠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기 전에 단호하게 대화의 여지를 잘랐다. “내 예측이 어쨌든 바뀌는 건 없다.” 그들이 죽었던, 살았던 의미 없다. 만약 그들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고 한들, 마녀의 숲에 조난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일단 살아남는 데 집중해야 한다. 어차피 결과야 도시로 돌아가기만 하면 자연스레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몸이 다 풀렸으면 장비라도 한 번 더 점검해라.”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타닷- 마지막까지 타오르던 장작불이 꺼졌다. 「마녀의 오두막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마녀의 숲으로 이동합니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다. ***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6단계로 격상됩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7단계로 격상됩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8단계로 격상됩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9단계로 격…….」 *** 미궁 진입 11일 차. 바꿔 말해, 마녀의 숲에 조난을 당한지도 어언 8일 차에 접어들었다. 「상태이상 [마녀의 눈]이 10단계로 격상됩니다.」 이제는 정말 한숨 돌릴 시간조차 없다. 계속해서 걸어나가야 한다. [마녀의 눈]이 최고 단계에 돌입했을 지금. 고작 3분만 한곳에 머물러도 카니바로가 튀어나온단 계산이 나왔으니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일단은 이제 여기서 더 나빠질 건 없다는 건가.’ 이후 또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단 가정하에는 그렇다. 물론, 변수가 긍정적인 변수일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자면 정수라든가, 정수라든가, 정수라든가……. ‘씨발.’ 마녀의 숲을 헤매며 우리는 의사와 관계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해야 했다. 하지만 정수는 떨어지지 않았다. 굉장히 애석한 부분이었다. 아무거나 나와주기만 하면 당장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갈뿐더러……. 몇몇 정수는 아예 이번 상황을 180도 바꿔 줄 만큼의 효능을 갖고 있었으니까. 대표로 꼽자면 바로 이 새끼처럼. “비요른! 저기 위치스램프다!” “서둘러 잡고 넘어가지.” 9등급 영체류 몬스터 위치스램프. 외형은 그냥 도깨비불처럼 생겼다. 전투력도 형편없어 원소 딜만 있으면 문제없이 처치 가능한 수준이었고. 액티브 스킬도 쓰레기나 다름없다. 마녀의 숲을 제외한 곳이라면. 「위치스램프가 [마녀의 등불]을 시전합니다.」 소환계 스킬 [마녀의 등불]. 놀랍게도 소환체는 ‘위치스램프’다. 그렇다, 이 새끼는 자기가 자기를 소환한다. 즉, 이놈 정수를 먹으면 위치스램프를 소환해서 부릴 수가 있다는 뜻. “정수야 나와랑!!” 미샤가 주문을 외우며 세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증식한 위치스램프를 순식간에 처치했다. 다만, 역시나 이번에도 정수는 없었다. 후, 이 새끼 정수만 나오면 이놈을 길잡이 삼아서 당장 여길 나가는 것도 가능할 텐데……. ‘결국 마지막 날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나?’ 현실적으로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긴 하다. 3층은 15일 차에 미궁이 폐쇄되니까. 앞으로 4일만 버티면 도시로 돌아갈 수가 있다. 문제는 그 며칠을 버티는 것조차 자신 있게 확신할 수가 없다는 거겠지만. “미샤, 체력은 어떻지?” “음, 힘들긴 한뎅, 그래도 얼마 전에 쉬어서 괜찮당.” 어제 저녁, 운 좋게 오두막을 한 번 더 발견하며 잠시간 쉴 수 있었다. 근 50시간 만의 발견이자 휴식이었다. 한마디로 그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이동하기만 했다는 뜻. ‘심지어 늦게 발견해서 4시간밖에 못 쉬었지.’ 오두막을 발견하는 것은 순전히 운이다. 따라서 운이 없으면 남은 나흘 동안 오두막을 한 개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위치스램프가 보일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사냥하는 이유도 그래서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는 쪽이 좋으니— “비요른.” 앞장 서 걷던 미샤가 걸음을 멈췄다. 이에 나도 상념을 멈추고 앞을 확인했다. “탐험가당.” 조난을 당하고서 처음으로, 몬스터가 아닌 존재와 마주쳤다. 그리고 아직까진 알 수 없었다. “바바리안과 수인? 설마 자네 둘뿐인 겐가?” 과연 이게 긍정적인 변수일지, 아니면 부정적인 변수일지. 63화 오두막 (2) 조난 8일 차. 마녀의 숲을 무작정 헤매던 우리는 놀랍게도 여태껏 탐험가 무리와 조우한 적이 없었다.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도 한 번쯤은 마주칠 법도 했으나……. 면밀히 따져 보면 그렇게 특이할 일도 아니었다. 일단 마녀의 숲은 넓다. 또한 주 사냥터로 쓰이지 않기에 상주인구 자체도 적다. 심지어 우린 무작정 헤매고 있었을 뿐, 중심부로 향해 가는 것도 아니었지 않은가. 아무래도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이 낮아진다. ‘무엇보다, 이쯤이면 지나갈 사람들은 이미 진작 다 지나갔을 시기고 말이지.’ 그래도 3층이 닫힐 시기가 되면 4층에 가려는 탐험가들이 좀 유입될 거라 생각했다. 보통 층수를 올릴 땐 그런 식으로 살짝 간부터 보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럼 저들도 이제 4층으로 올라가려는 자들인가?’ 음,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게 저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는 될 수 없겠지만. “바바리안과 수인? 설마 자네 둘뿐인 겐가?” 내가 그들을 보자마자 판단했듯, 그들 역시 우리를 파악했다. 하기야 신기하기야 하겠지. 1층 2층도 아니고 3층, 그것도 마녀의 숲을 돌아다니는 2인조 팀이라니. 5인 팀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결론을 내렸다. “…자네들, 혹시 팀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허장성세도 좋지만, 그것도 통할 건덕지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거지 같은 꼴로 아니라고 해 봤자 이상하게만 보일뿐더러, 아니라고 우겨서 뭘 얻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조심은 해야겠지만. “으아! 비요른! 설마 우리 이제 산 거냥?” “가만 있어라.”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어대는 미샤를 뒤로 밀어내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방패를 치켜들었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 행동에 상대 쪽에서 중년 인간 여성이 나서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지만……. “도시에 여러분만 한 아들딸이 있어요.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러지 말고 지쳤을 텐데 어서 이리—” “거절하지.” 아들딸이 있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오히려 더 위험해 보인다.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이 있음은 즉, 돈을 벌어야 할 동기가 더욱 명확하단 뜻 아니겠는가. “비, 비요른 왜 그러냥. 우릴 도와주실지도 모르는 분들인뎅…….” “조용히 해라.” 탐험가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선 그간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때 결론은, 일단 도움을 청해 보잔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보상을 약속한 뒤, 숲 밖으로만 데려가 달라고 한다면 저들에게도 합리적인 거래일 테니까. 다만……. ‘거래를 하려면 적어도 어떤 사람들인진 알아야겠지.’ 확인 작업이 먼저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경계심이 많은 친구로군. 한스 스토브라네. 팀에서는 탐색꾼 역할을 맡고 있지.” 내가 이름을 밝히자, 상대 측 리더가 나와 통성명에 응했다. 근데 문제는……. “이름이… 한스라고?” “하하, 흔한 이름이지?” “그러게 말이다.” 대체 세상엔 한스가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일단 이름이 불길하니 1점 감점. “저는 아누만 베이트라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남편과 잡화상을 하는데—” 개인 정보를 구구절절 읊는 아줌마의 말은 그냥 중간에 끊었다.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다.” 저 말이 사실인지 미궁에서 확인할 방법은 없을뿐더러,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도움을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그 어느 쪽을 택하든 빠르게 결단해야 한다. ‘전사 둘에 궁수 둘, 탐색꾼 하나.’ 그들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내리며 대략적인 전력 외에도, 그들의 얼굴, 표정, 말투, 분위기 등을 확인했다. 물론, 하나씩 면밀이 검토할 필요는 없다. 때론 직감이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때가 있으니까. 무의식에 쌓이고 쌓인 경험과 데이터. “미샤.” 이윽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게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 결정에 따라주겠나?”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많은 걸 생략한 내 물음에 미샤는 짧게 답했다. “물론이당.” 좋아, 일단 동의는 얻었고. “소개는 이만하도록 하지, 우리는 가보겠다.” “가보겠다니? 자네들,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었나?” 그건 그런데, 왠지 내 본능이 너희가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어서 말이지. “생각해 보니 필요 없을 듯하다. 자, 미샤 그럼 어서 가자.” “아, 알겠당!” “흐음, 자네들이 그렇다면야. 막을 이유는 없겠지. 어서 가보게나.” 오케이, 그럼 저쪽 양해도 구했겠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서, 여전히 눈은 상대방을 향한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휘이이익-! 익숙한 파공음이 들렸다. 그리고 뇌가 판단하기 전에 몸이 반응했다. 휘익-! 목을 옆으로 꺾음과 동시, 화살 한 발이 귀 옆을 스친다. 씨발,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날아온 방향이 뒤다. 분명 화살을 쏜 새끼들은 앞에 있을 텐데. “베이트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상대 측 일행 중 한 명이, 궁수인 아줌마를 보며 뭐라 외친다. 서로 합의되어 있던 건 아닌 건가? 우리만 한 아들딸이 있다던 아줌마는 더 이상 조곤조곤 말하지 않았다. “멍청이들아! 저놈이 가진 장비 못 봤어? 라이티늄제 장비라고! 팔면 얼만지 알기나 해?” “그, 그래도 같은 탐험가인데…….” “꼬맹아, 못 하겠으면 넌 빠져 있어라. 저기 저 배낭 보이냐? 확장형 배낭이다. 네가 1년 뼈 빠지게 벌어도 살 수 없는.” 남편과 잡화점을 한단 말이 사실이었을까? 이 아줌마 안목이 좋다. 칭찬할 배알까지는 내게 없었지만. “저, 저는 못 해요.” “그럼 빠질 사람은 빠지는 걸로 하지.” “나는 끼겠소. 이런 게 처음도 아니고. 굴러다니는 돈을 지나칠 정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서.” 원래는 탐험가였을 저들끼리 빠르게 합의가 이루어진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미샤가 걱정스레 내 옷깃을 잡아왔다. “비, 비요른… 도망쳐야 하지 않낭?” “기다려라.” 저쪽에는 탐색꾼이 있다. 이대로는 도망쳐 봐야 멀리 가지 못한다. ‘이제 곧 올 때가 됐는데…….’ “죽, 인, 다…….” ‘왔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내가 빠르게 결정을 내리려고 했던 유일한 이유. 어둠 속에서 카니바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를 노리려던 탐험가 무리가 흠칫한다. “카, 카니바로?” “저게 왜 두 마리가 동시에…….” 그야, 우리는 조난 8일 차거든. 너희는 이제 막 진입했을지 몰라도, 이미 우리는 [마녀의 눈] 10단계를 찍은 상태다. “미샤, 지금이다.” 나는 미샤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방패를 들고서, 뒤가 아닌 앞으로 돌진했다. 「카니바로가 [추격화살]을 시전했습니다.」 「카니바로가 [추격화살]을 시전했습니다.」 우측에서 카니바로가 화살을 시위에 거는 게 보였다. 그럴수록 박차를 가해가며 앞으로 대쉬했다. 휘이잇-! 이윽고 바바리안의 동체 시력이, 두 발의 화살이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졌음을 인식한다. 하지만 텅 빈 등 쪽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대신 막아 줄 것들이 있으니까. “아, 아앗! 막아!” “뭐, 뭐야 이놈들은!” 바바리안의 무식한 힘으로 상대 측 무리를 밀치며 파고든 순간, 옆쪽에서 비명이 들린다. 자긴 못하겠다던 꼬맹이의 것이다. “아악!” 음, 그거 네가 맞았구나. 원래 착한 사람들이 일찍 가더라고. 콰쾅-! “악! 씨발, 내 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카니바로가 있는 방향에서 폭발음이 피어났다. 살짝 확인해 보니 내 돌진에 당황해 거리를 벌린 한스D가 우연히 마력지뢰를 밟은 모양. “스토브 씨!!” 오케이. 이 정도면 어그로는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간 듯하고. “미샤, 이제 네가 뛰어라.” “아, 알겠당.” 나는 안고 있던 미샤를 내려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다들 뭐 하나! 저놈들은 됐으니까, 어서 몬스터들부터 처리—!” 이 정도면 한동안은 따라오지 못하겠지. *** [던전 앤 스톤]은 로그라이크류의 게임이다.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 캐릭터가 사라진다. 물론, 그래 봤자 결국 게임일 뿐이긴 하다. 캐릭터야 다시 키우면 그만이고, 장비야 새롭게 맞추면 될뿐더러……. 애초에 이전 회차에서 학습한 정보로 더 높은 층으로 향하는 게 바로 이 게임의 메인 콘텐츠. [던전 앤 스톤]은 죽음이 일상과 같다. 하지만 그 게임 속 세상이 현실이라면 어떨까? 캐릭터 재생성은 불가능. 이번 삶에서 그 무엇을 보고, 듣고 학습했건 죽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근데 비요른, 너는 대체 어떻게 안 거냥? 그 사람들이 그럴 거라공…….” “감이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순간의 무의식이 내린 판단을 따른 게 정답이 되었다. 실상을 깨달은 미샤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감이라공?” 어쩐지, 아까는 아무 질문 없이 내 말에 따르겠다고 하더니. 뭔가 명백한 근거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 “그쪽 대장 이름이 한스였지 않나.” “그런뎅?” “나는 그 이름이 싫다.” “…….” “아무튼 덕분에 무사히 도망쳤으니 잘된 거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한뎅…….” 어딘가 찝찝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리던 미샤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그 착해 보이던 아줌마가 그렇게 돌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당…….” 표독스럽게 우리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줌마가 떠올랐는지, 미샤가 미약하게나마 몸을 떤다. 아줌마의 빠른 태세 전환이 얘한텐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짧게 말했다. “아마 정말 착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응? 그게 무슨 뜻—” “우리가 약해 보이지 않았더라면.” 또 우리가 비싼 물건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만약 만난 곳이 미궁이 아니라 도시였더라면. 그 아줌마는 친절한 사람으로 우리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줌마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겼다. “약해 보여서 친절하지 않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당…….” “미샤, 너는 왜 미궁에 들어왔지?” “그야 돈을 벌어야 하니깡…….” “그들도 똑같은 거다.” 돈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다. 세금을 내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는 이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필시 그 아줌마한텐 지켜야 할 것이 본인 목숨 말고도 여럿 있었겠지. “…이번 탐사에서 많은 걸 깨닫는 거 같당.” “그럼 더 빨리 움직여라. 저들이 우릴 추적해 올 수도 있으니.” 이동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려와 달리 그들은 1시간이 넘어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선공을 받고 시작했어도 카니바로 둘한테 전부 당하진 않았을 테니… 뭔가 다른 문제가 생긴 건가?’ 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어쩌면 마력지뢰를 밟았던 한스. 즉, 탐색꾼인 그놈이 크게 다쳤거나 하는 이유로 추격에 지장이 갔을지도 모르고. 이유야 어쨌든, 한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셈. ‘제발,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리 바라면서도 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말자. 늘 그랬듯이. 제일 좆같은 건 방심했을 때 찾아오니까. *** 조난 13일 차. 시간은 오후 7시. 다시 말해, 미궁이 폐쇄되기까지 정확히 53시간이 남은 그 시각. “비요른, 찾았당!” 우리는 오두막으로 향하는 나무를 발견했다. 흘러나오는 빛이 약간 바랜 것을 보니, 입구가 형성된 지 꽤 시간이 흐른 듯했지만……. 이게 어딘가. ‘됐어.’ 최악의 상황만은 어떻게든 면했다. 네 시간 정도만 쉴 수 있어도, 남은 이틀은 어떻게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한마디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셈. 「캐릭터가 마녀의 오두막에 입장합니다.」 일분일초의 휴식이 귀중했기에 곧장 손을 얹어 오두막에 들어섰다. 그 너머의 풍경은 이전과 똑같았다. 한가득 맡아지는 풀과 꽃내음. 고요한 풀벌레 소리. 이파리가 흩날리며 내는 바람 소리. ‘니미럴…….’ 애석하게도 평화로운 풍경 속에 이질적인 것이 하나 끼어 있었다. 「현재 입장 인원: 5」 「입구가 폐쇄됩니다.」 선객. 즉, 우리보다 먼저 이 오두막을 발견한 자들. “비요른.” “쉿.” 나는 미샤의 입을 막으며, 눈으로만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침대에 하나, 의자에 하나, 잔디밭에 하나.’ 창문 너머로 확인한 실내는 각도상 보이지 않는 곳도 존재했지만……. 일단 총 세 명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오두막의 입장 제한은 5명까지니까. ‘골치 아프게 됐군.’ 나는 천천히 풀밭에서 자고 있던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때마침 잠꼬대라도 하는지, 사내가 등을 돌리며 우리쪽으로 몸을 틀었다. 나는 흠칫 굳었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64화 오두막 (3) 마녀의 숲에 조난당하고서 가끔 생각했다. 지금쯤 난쟁이놈 무리도 우릴 찾으려 숲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 우연히 재회하는 일도 정말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게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질없는 망상이었다. ‘아무렴 그럴 리 없지.’ 언제나 상상과 현실은 다른 법. 인원수가 셋인 걸 알고서, 혹시나 했던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기적 같은 일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비극이라면 모를까. “…비요른.” 미샤가 내 등짝을 타고 올라와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냥?” 글쎄, 고민 중이다. 나 역시 이 새끼들을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이름이… 데이비스 뭐시기였지.’ 일단 언제든 메이스를 내리쳐 대가리를 깨부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뒤, 곤히 자고 있는 사내를 세밀하게 살폈다. 데이비스. 목걸이고 팔찌고, 상의의 단추고 뭐고 레아틀라스교의 심벌로 덕지덕지 처바른 진성 종교쟁이. 쉽게 말해, 지난날 엘리사의 계략에 당해 우리를 공격해 왔던 탐험가 무리의 리더. ‘대체 왜 이 새끼가 여기 있는 거지?’ 이놈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의문만이 깊어진다. 얘가 왜 여기서 쉬고 있는 걸까? 엘리사년은 얻다 팔아치웠기에 셋뿐인 거고. 행색은 왜 우리처럼 거지꼴인 거지? “…….” 의문을 뒤로하고 일단 다시 창문 너머로 실내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른 두 명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쟁이 일행임을 알고 나니, 체형과 머리색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정체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그 활잽이랑 검잽이겠군.’ 덩치가 유독 컸던 방패 전사나, 붉은 머리의 궁수는 보이지 않는다. ‘…설마, 애네도 무리에서 떨어진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씨, 어쩌지? 왠지 불안한데 그냥 의문이고 뭐고, 일단 자고 있을 때 다 대가리를 박살 내놓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미샤가 속삭였다. “비요른, 잘하면 히쿠로드 쪽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당.” 음, 그건 맞지. 역시 대화를 해 보는 게 좋겠다. 그 전에 대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겠지만. “우선 전부 기절시킨 다음에 밧줄로 묶는 걸로 하지.” “좋은 생각이당.” 이후 합의를 마친 나는 미샤를 오두막 안으로 들여 보냈다. 혹시 깨어나면 그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제압해 버릴 수 있게끔. “…….” 그럼 이제 준비는 다 된 거 같고. 창문 너머로 미샤와 눈짓을 주고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이스를 머리 위로 치켜 들은 뒤. 퍼억-! 반쯤 힘을 빼고서 머리통을 내리쳤다. 예상대로 종교쟁이는 단말마의 신음도 내지 못하며 축 늘어졌다. 옷에 튄 피와 살점을 닦아내며 나는 숨을 길게 토해냈다. ‘휴우, 일단 하나는 기절시켰고.’ 이제 다음 놈을 기절시킬 차례. 살금살금 오두막으로 들어서자, 힘들었는지 떡실신한 채로 꿈에 젖어 있는 둘이 보인다. 그럼 둘 중 누구부터 먼저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한 놈이 몸을 뒤척이는 게 보였다. “으으…….” 그래, 두 번째는 얘가 좋겠네. 이어서 메이스를 내려쳐 기절시키려던 차. “기절시킨다고 했지 않냥!” 미샤가 다급하게 다가와 팔을 잡더니, 소리 죽여 외친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뒤늦게 미샤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격투 게임을 할 때도 낮게 점프하는 게 내 주특기였다. 그만큼 힘 조절은 자신 있다. 뭐,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 세상이잖아? 안 그래? 퍼억-! 이내 메이스를 내리친 순간. 흔들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사내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 “누, 누구—” 이번엔 소리를 들었는지 침대 위의 사내가 상체를 일으킨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깼든 자고 있든, 내 메이스는 평등하니까. 퍼억-! 살금살금 다가갈 것도 없이 앞으로 대쉬하며 반쯤 힘을 뺀 메이스를 안면부에 꽂아넣었다. 기절이 목적이었으니 기술명은……. ‘배쉬면 될 거 같군.’ 성공적인 ‘배쉬’로 1차적인 제압이 끝났다. 나는 미샤를 보며 말했다. “뭐 하나? 어서 밧줄로 묶지 않고.” 미샤는 피떡이 된 3인방을 보며 대답했다. “묶을 필요가 있는 거냥……?” 어, 글쎄……. 그래도 만사 불여튼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철저히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그게 내 철칙이다. *** “우왕, 진짜 살아 있넹…….” 메이스를 한 방씩 얻어맞은 3인방은 다행히 생존에 성공했다. “말했지 않나, 걱정하지 말라—” “근데, 금방 죽을 거 같당.” “…….” 다만, 전부 호흡이 들쭉날쭉하며 점점 옅어지는 게 금방이라도 명을 달리할 거 같다. 개중에도 안면부를 맞은 애가 가장 심했고. 하지만 살아만 있다면 문제는 없다. 이곳은 말 그대로 판타지한 세계 아닌가. “역시 있군.” 보이는 배낭 중 아무거나 골라 포션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기절한 이들의 머리통에 포션을 뿌렸다. 너무 팔팔해지면 안 되니 조금씩만. 치이이익-. 반응은 시간 차를 두고 나타났다. “아악!!! 아아아악!” “흐끄아아아!!” 깨진 머리통이 서서히 아물며, 3인방이 활어처럼 잔디밭 위에서 팔딱인다. 나는 흔들의자를 꺼내온 다음, 앉아서 그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무식한 바바리안놈…….” 미샤가 그런 나를 보며 매도해 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엘리사년에게 속았던 어쨌든 간에. 이들은 한 번 우리를 죽이려 했던 적이다. 그리고 비요른이 지닌 바바리안의 심장은 어지간해선 적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다. “너, 너희는……!” “그때 그 바바리안!” “오해다! 오해! 우리는 적이 아니야!” 이내 시간이 지나자 3인방이 정신을 차렸다. 근데 셋이 동시에 떠드니 정신 사납기 짝이 없다. “한 놈만.” 피 묻은 메이스를 천으로 닦으며 읊조리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굴비처럼 엮인 3인방은 서로를 보더니, 눈빛만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보시게나, 전부 오해요. 오해가 있소.” 대표로 낙점된 것은 리더, 종교쟁이였다. “내 잘 설명할 테니 이것 좀 풀—” “됐고, 뭐가 오해란 거지?” 내 물음에 종교쟁이가 억울하다는 듯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그년! 우린 그년한테 이용당했을 뿐이오. 그년이 저주받을 카루이의 종속인 줄도 모르고……!” 어, 그건 이제 알게 됐나 보네? 역시 뭔가 일이 있기는 했었구나. “그러니 일단 이걸 풀고서 천천히 얘기를 해 보는 게 어떠실련지…….” “그 얘기는 그만.” 지금 중요한 건 얘네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는지가 아니다. “얘기해 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도망친 다음부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인과의 확인. 오직 그것만이, 내가 ‘스매쉬’가 아니라 ‘배쉬’를 쓴 이유다. “어, 그게…….”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마라.” “아, 알겠소이다. 결국 그년을 믿은 우리의 실책이긴 하지만, 숨김없이 말해 드리겠소.” “숨겼는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종교쟁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전말을 구구절절 토해냈다. “우리가 그 사악한 악녀의 계략에 당해, 그들을 따라잡았을 때는 어째선지 셋밖에 없었소.” 그야 그랬겠지. 때마침 우리가 막 낙오됐을 때니까. 까드득. 정말이지 치가 떨린다. 어떻게 이딴 개떡같은 타이밍이 다 있지? “더 말하오……?” “물론이다. 계속해라.” “계속 도망치면 곤란하기에 일단 탐색꾼으로 보이는 사내를 기습해 상처를 입혔소.” “서, 설마 로트밀러를 말하는 거냥!” “이름은 나도 모르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그 정도 상처라면 살아 있을 테니까.” 여하튼 이후 이야기를 조합해 보자면 이랬다. 기습을 당하며 로트밀러가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난쟁이놈은 판단했을 것이다. 적의 탐색꾼을 해치워야지만, 자신들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뭔지는 몰라도, 그때처럼 빛이 뿜어지더니 우리를 뒤로 밀어냈소.” “정신을 차렸을 땐 앤더슨이 얼음창에 머리가 꿰뚫린 뒤였지.” “아, 앤더슨은 우리쪽 탐색꾼의 이름이라오.” “그런 거에 당할 친구가 아니었는데…….” “수적으로 유리해서 그랬는지, 방심하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것 같소.” 사족이야 어쨌든, 난쟁이놈이 시간을 번 순간. 드왈키가 상대 측 탐색꾼을 해치웠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부상당한 로트밀러를 이끌고 도망쳤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미샤가 내 등짝을 쳤다. “역시 히쿠로드 덕분이었당! 히쿠로드가 우리를 생각해 탐색꾼을 죽인 거당!” 글쎄, 난쟁이놈의 진심은 모르겠다. 하지만 놈의 활약 덕분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겠지.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앤더슨이 죽은 바람에 추격은커녕, 우리도 이 숲을 영락없이 헤맬 수밖에 없었소.” 신나서 우리를 쫓아오던 종교쟁이 무리는 탐색꾼이 사망하며, 우리와 비슷한 처지로 전락했다. 물론 그래도 우리보다는 조금 나았다. 인원이 다섯이나 되는 데다가 구성원 중에는 무려 신관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헤매기 시작하고서 이틀쯤 됐을 때였소.” 조난 2일 차. 불침번을 돌아서며 체력을 보충하던 어느 때. 엘리사년이 본색을 드러내더니, 다른 한 명을 죽였다. “생기를 빨려가며 삐쩍삐쩍 말라가던 그 친구를 보니 한눈에 알았소. 그년이 바로 사악한 카루이의 숭배자라는걸!” “됐고, 그래서 그년이 네 친구를 죽인 이유가 뭐지?” “그건… 나도 모르겠소. 그 사이하고도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 순간, 우리 셋은 이 자리를 벗어나 세간에 알려야 한단 생각밖에 하지를 못했으니까.” 지랄, 그냥 살고 싶어서 튄 거잖아. 동료까지 버려가면서. 여하튼 이후 이야기는 그냥 스킵했다. 숫자가 셋이라는 걸 제하면 미샤와 내가 겪은 일들과 하등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오해가 풀렸다면 어서 이것 좀 풀어—” “그 얘긴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벌써 세 번째나 되는 석방 요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요른, 이제 어떡할 거냥?” “크흐흠, 보아하니 피차 같은 처지 같은데 차라리 우리와 협력하는 게 어떻소?” “넌 입 좀 다물고 있어라.” 고민이 깊어진다. 물론, 저놈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은 이틀 동안 힘을 합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 그러고 보니 아직 사과를 안 했구려! 사과하겠소! 우리가 멍청해서 그년의 술수에 넘어가 버렸소. 미안하오!” 여지가 있다. 과연 이놈들을 ‘씹쌔끼’로 판정해도 되는 걸까? 물론 이놈들 때문에 개고생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누구도 죽지 않았지 않나. 일단 난쟁이놈 쪽도 전부 생존한 거 같고. “무, 물론 우리가 끼친 피해에 대해서도 보상하겠소!” 물질적인 보상까지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꼭 죽여야 하는 걸까? “비요른,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하겠당.” 지금까지 여럿을 죽였다. 하지만 그때는 목숨이 달린 상황이었고, 구제의 여지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그런데 이자들은 어떠한가. 애매하다. 그래, 아까도 말했듯 여지가 있다. 아직 때를 벗기지 못한 현대인의 정신머리가 선택을 유보하려 들고 있다. “뭘 고민하는 것이오! 시, 실수였소! 신관이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조용히 해라. 자꾸 그러면 실수로 네 머리를 부숴 버릴 것만 같으니.” “…….” 얕보이지 않도록 까칠하게 답변하면서도 속으론 고민을 이어갔다. 이들을 죽이는 게 옳은가? 마지막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고. 바바리안 전사 비요른 얀델은 답했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가? 죽이면 편한데, 어째서 우환을 남겨 둬야 하지?] 참으로 야무지기 짝이 없는 답변. 29세 서울 태생의 이한수도 목소리를 냈다. [병신아, 뭘 고민해? 실수했다고 죽이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지. 근데…….] 간만에 둘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얘기잖아?] 실수 한 번 했다고 죽이는 것. 역시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만약, 이곳이 내가 태어나 자란 그곳이었다면. 꽈악- 그렇기에 메이스를 쥐었다. 다만, 그럼에도 결심이 서지 않았을까. 무심코 묻고 말았다. “미샤, 네 생각은 어떻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을 미샤는 대답했다. “나는 이놈들을 못 믿겠당.” “그래서?” “실수든 뭐든 우릴 한 번 죽이려 했던 놈들이지 않낭. 그럴 땐… 절대 용서해 주면 안 되는 거라고,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배웠다.” 음, 역시 그렇구나. 그런 게 당연한 세상인 거구나. 안개가 개이듯, 머릿속이 선명해진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안 그러면 뒈질 수도 있으니까. 스르륵. 그렇기에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시, 실수였다고 했지 않소!” 바닥에 깔린 종교쟁이가 외쳤다. “실수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실수였을지 모른다. 근데 어째선지 난 너희가 이다음에도 또 실수를 해올 거 같단 말이지. 콰직-! 그렇기에 메이스를 내리쳤다. 망설임을 지우기라도 하듯, 온 힘을 다해서. 콰직-! 연달아. 콰직-! 메이스질 세 번에 주변이 적막해졌다. 「업적 달성」 조건: 살인 카운트 10회.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내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함정을 파두고 틈을 보인 뒤, 놈들이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렸겠지. 내가 죽인 새끼가 ‘씹새끼’일수록 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이제 그딴 건 버릴 때겠지.’ 애초에 이 몸에서 눈을 뜬 첫날. 그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요른 얀델.’ 앞으로 나는 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고. 아니, 이름뿐만이 아니라 완벽하게 이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고. 이곳에서 살아남을 길은 그것뿐이라고. 투둑- 메이스에 묻은 피와 살점이 떨어진다. “비요른… 괜찮은 거냥? 손이 떨린당.” 약하면 죽고. 실수해도 죽고. 운이 없어도 죽는 이 세상. “걱정 마라. 아무렇지도 않다.” 이내 손에 떨림이 멎었다. 나는 종교쟁이의 장비를 벗겼다. 그리고 속옷 차림이 된 시신을 질질 끌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엑? 뭐, 뭘 하려는 거냥!” 미샤가 질색하며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나는 망설임 없이 반쯤 꺼져가던 모닥불에 시신을 던졌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길이 살아났다. 동시에 역겨운 냄새도 났다. 아니, 사실 역겨운 냄새라고 생각만 했다. 비위 좋은 바바리안의 육신은 저것과 고기 냄새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화르륵-! 거세진 불길을 보며 나는 숨을 토해냈다. 역시 이것도 게임과 일치하는구나. 「새로운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마녀의 오두막의 유지 시간이 8시간 증가합니다.」 남은 장작이 둘이나 더 있으니, 최소 24시간 이상은 오두막에서 쉴 수 있단 계산이 나온다. “뭐 하나? 어서 가서 쉬지 않고.” 그리 말하며 나는 침대에 누웠다. 미샤가 뭐라 말을 했지만, 솔직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편하군.” 눈을 감고서, 무의미하게 1부터 숫자를 셌다. 노곤한 몸은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잠이 들었다. 타닷, 타닷, 타다닷-. 모닥불 타는 소리가 점점 의식에서 멀어진다. ‘역시 잠은 침대에서 자야지.’ 이젠 아이러니하지도 않았다. 현대인의 때를 벗으면 벗을수록. 이곳에선 좀 더 사람처럼 살 수가 있게 된다. 65화 필드 보스 (1) 무려 12시간을 내리 푹 잤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왜인지 이번에도 미샤가 내 배를 베고서 침 흘리며 자고 있었다. “…….” 아무튼 시간이 꽤 남기에 전리품을 정리했다. 배낭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3인방 중 나머지의 장비들도 벗겼다. 그리고 모두 확장형 배낭에 집어넣었다. 미샤도 확장형 배낭 오너여서 다행이다. 장비들을 하도 쑤셔 넣었더니, 경량화 마법이 있음에도 제법 묵직해졌으니까. ‘이 정도면 그간 고생한 보상은 톡톡히 돌려받은 셈인가?’ 자는 미샤는 내버려두고,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뭐, 얘도 자다 깨서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화르륵-! 식사를 끝마친 다음엔, 천을 물에 적셔 몸을 간단하게 씻었다. 아, 간만에 면도도 했다. ‘이제 좀 사람 같군.’ 벽난로에 남은 장작도 모두 지피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어졌다. 따라서 야외로 나가 흔들의자에 앉았다. 평화롭던 풀밭에선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났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흘려보내며 햇볕을 쬐고 있자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문득 수면 도중에 머리통이 부서진 종교쟁이가 떠올랐지만……. ‘이미 입구는 닫혔을 테니, 그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평화롭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한 나는 안전하다. 그래, 그거면 된 거겠지. “비요른, 일어나랑. 자도 먹고 자야지, 안 그러면 속이 탈난당!” 눈을 떴을 땐, 미샤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마지막에 확인한 이후로 14시간이 더 흘렀다. “자, 입맛이 없어도 일단 먹어랑, 얼른!” 미샤가 육포와 빵을 쪼개 내 입에 가져다 댄다. 나야 중간에 일어나서 먹긴 했지만, 또 배가 고팠기에 순순히 받아다 먹었다. “비요른은 더 잘거냥?” “아니.” “으음, 그렇구낭. 아, 맞당! 근데 사람을 집어넣으면 이곳에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건 어떻게 안 거냥?” “책에서 읽었다.” “…혹시 비요른은 똑똑한 여자가 좋은 거냥?” “그렇다.” 묻는 질문들에 대충 대답해가며 식사를 마친 후에는 벽난로를 체크했다. 화력을 보아하니,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듯한데……. 딸깍. 시계를 닫아 품에 잘 갈무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몸을 스트레칭하며 슬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아직 축배를 들긴 이르지만, 묘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로 이날이 오기는 왔군.’ 곧 있으면 15일 차가 시작된다. 즉, 오늘 하루만 버티면 이 개같은 숲에서 탈출해 도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마녀의 오두막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마녀의 숲으로 이동합니다.」 마지막까지 집중하자. 늘 그랬듯이. “비, 비요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냥?” “씨발…….”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 *** 「오두막에 다섯 번째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오두막에 여섯 번째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오두막에 일곱 번째 제물이 바쳐졌…….」 「특수 조건 - 일곱 명의 제물이 충족됩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층을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 오두막에서 나온 순간. 숲의 변화가 온몸의 모든 기관으로 체감된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해제됩니다.」 앞이 제대로 보인다. 환청도, 환각도 사라졌다. 또한 횃불 없이도 저 멀리까지 시야가 닿을 만큼 주변이 밝아졌다. “비, 비요른……?” 불길하리만치 시뻘건 빛을 뿜어내는 천장. 또한, 어딜 가나 숲에 한가득 보이던 영체류 몬스터들도 깡그리 모습을 감추었다. “…….” 마녀의 숲에 들어서고서 처음으로 마주한 정적. 허리를 굽혀 지면을 만져 보았다. 드드드. 손끝을 타고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따라서 더 이상 확인할 필요도, 애써 현 상황을 부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고 있다. “…계층군주다.” 계층군주階層君主. 일종의 필드 보스 역할을 하는 몬스터. 게임 내에선 플로어 마스터란 고유 명사로 표기됐으며, 층마다 각기 다른 이명의 군주가 한 명씩 존재했다. 참고로 몇몇 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트리거가 발동되면 소환이 되는 식이었는데……. “계, 계층군주라니, 노, 놀리지 마랑. 3층엔 계층군주가 없다고 들었당!!”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소환 방법이 비밀에 부쳐졌을 뿐.” 1층의 수정동굴 같은 경우. 3일 차 이후 5인 이상이서 움직일 시 일정 확률로 등장한단 것이 상식처럼 알려졌다. 다만, 3층의 계층군주는 다르다. 왕가와 길드에서는 소환법을 극비로 다루었으며, 사전 고지 없이 소환한 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법률까지 새로 만들었다. 책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길드에서 비밀로 부쳤다공? 대체 어째서?” “정신 나간 놈이 소환이라도 하면 몇 명이 죽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1층의 계층군주는 트리거를 발동시킨 탐험가만 죽이고 사라진다. 하지만 3층의 계층군주는 다르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침식이 시작되며 층 내의 모든 몬스터가 혼돈 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혼돈의 피조물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놈은 3층 전체에 영향을 끼칠 뿐더러…….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층을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 소환되면 죽을 때까지 미궁을 배회하며 학살을 벌인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층간 이동까지도 막힌다. 「침식으로 인해 포탈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됩니다.」 다른 층으로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뜻. 이를 설명해 주자 미샤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 그럼 이건 뭐냥. 비, 비밀로 다뤄졌다면 왜 지금 계층군주가 나타난 거냥!” 아, 어, 음……. 이걸 사실대로 말해 말아? 살짝 고민됐지만,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우리 때문일 거다.” 여기선 차라리 공범으로 만드는 게 좋겠지. 은인이고 뭐고. 그쪽이 비밀 유지에 더 효과적일 테니까. “우, 우리 때문이라닝? 이, 이해를 못하겠는뎅…….” “오두막에서 난로에 시체를 태워 넣었지 않나. 그게 조건 중 하나다.” 친절히 설명해 주자, 반응은 시차를 두고 튀어나왔다. “…그, 그게 소환법이었다고?!! 비요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냥!!” 아니,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고. 마지막으로 소환된 게 10년도 전이라던가? 그래서 3명쯤은 태워도 별일 없을 줄 알았지. ‘씨발, 근데 누가 먼저 4명을 태워놨을 줄이야…….’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에 욕지거리가 나온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결국 그 끝엔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지 못한 내 잘못이 있을진대.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샤, 나와 약속 하나만 하지 않겠나?” “약속?” “우리가 혼돈의 군주를 소환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거대 클랜에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소환한 게 아니다. 분명 수많은 탐험가가 뒈질 거다. 근데 만약 원인이 우리란 게 알려진다면……. ‘어떻게든 책임지고 대가를 물게 하겠지.’ 슬슬 처지를 인식했을까? “우, 우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시체를 태운 건 너지 않냐!” 미샤가 딱 잘라 선을 긋는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항상 뭉개지던 끝 발음이 정확하게 들릴 정도. 왠지 서운하다. 언제는 은인으로 모시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갚아가겠다더니. 아무튼,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선택지가 없다. 조금은 몰아세우는 수밖에. “길드에서 그 말을 믿을 거 같나? 아니, 믿어도 결과는 똑같을 거다. 그 분노를 잠재우려면 제물은 하나라도 많을수록 좋을 테니.” “으으…….” 음, 저 반응을 보니 거짓 증언을 해서라도 물귀신 작전을 하겠단 협박까진 안 해도 될 거 같고. “알겠으면 이제부터 정신 차려라. 도시로 돌아가서 죽는 것도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거니까.” “…알겠당.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낭?” 그 답은 간단하다. “뛰자.” 일단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일단 거기로 가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마녀의 숲을 떠날 시간이다. *** 이 지긋지긋한 숲을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태이상 [방향치]가 사라졌으니, 나침반을 보고서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면 된다. 다만 문제는, 3층 전체에 새로운 형태의 몬스터가 바글거린단 것이겠지. “비요른! 뒤에서 뭐가 따라온당!” “혼돈의 정령이다.” 참고로 등급은 없다. 마석도 주지 않으며, 정수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처리하고 가야겠군.” 혼돈의 정령은 선공 몬스터이며, 한 번 어그로가 끌리면 끝까지 따라온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끼리 잡을 수 있는 거냥?” 생전 처음 접하는 몬스터였기에 미샤는 불안해 보였다. 하긴, 이곳에서 무지란 죽음과 같다. 나 또한 게임 속에서 수없이 죽어가며 배웠고. “공격력은 높은 편이지만, 그게 전부다. 아마 속성 공격 한 방이면 사라질 테니 걱정마라.” “…확실한 정보냥?” “그래, 책에서 읽었다.” “알겠당.” 특징에 대해 말해 주자 안심이 됐는지, 미샤가 성수로 인챈트한 창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따라오던 혼돈의 정령을 향해 내찔렀다. 퍼엉-! 창질 한 번에 터져 나간 혼돈의 정령. 점액 같은 무언가가 바닥을 적시며, 땅을 검게 물들인다. 「혼돈의 정령이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위치가 침식됩니다.」 이제 저 땅 위에 올라가면 혼돈 속성의 지속 피해를 입겠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여기서 계층군주를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소환된 지 아직 하루도 안 됐지 않나. ‘오늘만 지나면 미궁이 폐쇄될 테니, 침식률은 그냥 무시해도 되겠지.’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다. 느닷없이 계층군주가 소환되긴 했지만……. [00 : 01] 이제 15일 차가 시작됐다. 앞으로 24시간만 버티면, 도시로 떠날 수 있— “이, 이보시오! 도, 도와주시오!!” 막 자리를 뜨려는 차, 저 멀리서 탐험가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동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가 혼자인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뒤에서 그를 뒤따르는 수십 개체의 혼돈의 정령들이 그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비, 비요른?” “뭘 고민하나. 뛰어라.” 움찔하는 미샤의 팔목을 쥐고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덕분에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그래서 뭐 어떡하겠는가. 저것들 어그로가 우리한테 끌리는 것보단 낫다. “악, 아악!” 이미 체력이 한계였을까. 짧은 비명에 뒤를 돌아보니, 넘어진 상태의 탐험가가 보인다. “사, 살려—!” 제기랄, 눈이 마주쳤다. “비, 비요른……?” “뒤돌아 보지 마라.” 미샤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다시 앞을 보며 뛰었다. “안 돼! 가, 가지 마!” 절망 어린 비명은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스스로에게 되뇌듯 짧게 읊조렸다. “마음 독하게 먹어라. 우리가 반대 상황이었으면 저놈이 도와줬을 거 같나?” “하지만……! 3층이 이렇게 된 건 우리 때문이 아니냥!” 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씨발…….’ 기분이 더럽다. 나란 인간의 면면이 낱낱이 파헤쳐진 듯해서. 하지만 이것도 결국 언젠가 돌이켜 보면 한순간의 감정이겠지. …해야 할 일을 하자. ‘이쯤이면 됐겠지.’ 한참 남쪽을 향하던 우리는,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했다. 숲 곳곳에 침식된 땅과, 탐험가의 시체들이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앞만 보고 내달렸다. 퍼엉-! 그렇게 우릴 따라오는 혼돈의 정령들을 터트려가며, 1시간가량을 움직였을 때였다. 숲이 끝나고. 시야가 탁 트인 평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어도 7시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있던 곳이 숲의 동쪽 외곽부였을까?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숲을 벗어났다. ‘운이 좋았군.’ 이내 우리는 빠르게 평원을 지나쳐 오크 군락지에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통제에 따라주시오!” 예상대로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 득실거리고 있었다. 66화 필드 보스 (2) 계층군주. 각층마다 존재하는 필드 보스격 존재. 부르는 명칭도 속성도 패턴도 제각기인 이 녀석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해당 층 탐험가 수준으로는 뭔 짓을 해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자면, 1층 계층군주를 토벌하려면 30인 이상의 원정대를 꾸려야 했다. 물론, 전원이 최소 4층 탐험가라는 가정하에. 정말 최소치로 잡은 인원이 그렇다. 때문에 나는 고민했다. 미샤와 나. 둘이서 우연히 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 게임 오버다. 일반적인 이동 속도로는 따돌린다거나 하는 게 불가능한 녀석이니까.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단순히 마주치지 않길 기도하며 벌벌 떠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을 높이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그 답은 오크 군락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탐험가가 그러했듯이. “비요른, 여기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냥?” “이곳에 드자르위 클랜이 있으니까.” 드자르위 클랜은 6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대형 클랜이다. 난쟁이놈이 말한 바로는 인원수가 백 단위는 된다는 듯했다. 그들 전부가 때마침 한곳에 모여 있었을 리는 없지만……. ‘최소 10팀 이상은 내려와 있었겠지. 3층이긴 해도 사냥터를 통제하려면 그 정도 인원은 필요하니까.’ 물론 이 정도 전력으로도 토벌은 어렵다. 뭐, 피해를 감수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전력이긴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된 공략법을 알고서, 몇 달을 공들여 준비했단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 ‘그래도 얘네들이랑 있으면 계층군주와 조우하더라도 도망갈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철저하게 실리에 따라 판단을 내린 나는 미샤를 이끌고 밀집된 탐험가들 사이로 향했다. 꽤나 신기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 이보시오! 당신들 중에 고위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소! 부디 나를 위해 차원문 마법을 써주시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 테니까……!” “너희지! 너희가 계층군주를 소환한 거지!!” “저, 저기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형 클랜인데, 설마 우리를 내쫓지는 않겠지요?” 간곡히 부탁하는 자. 현실을 외면하고 원망의 대상을 찾는 자. 침착히 현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하는 자. 다양한 이들의 아우성이 몰아치는 와중에, 드자르위 클랜의 간부가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이곳은 안전합니다. 저희 측 신관님께서 멸악선포를 하신데다가, 이미 저희 측 탐색꾼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 드자르위 클랜은 왕가와 길드와 협약한 규정대로,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최대한 많은 탐험가가 살아서 도시 땅을 밟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 측 통제에 따르지 않거나 분란을 조성하는 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니 추방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으니, 이 부분만 양해 바랍니다.” 구구절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나름대로 깔끔한 공지였다. 특히 마지막의 경고가 유효했는지, 제멋대로 소리쳐대던 자들이 싹 사라졌다. “일단 내쫓길 걱정은 덜었군.” “휴우, 다행이당…….” 잠시 주변을 살피던 나는 적당한 곳에 나무를 등지고 앉았다.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냥?”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나.” 쉴 수 있을 땐 최대한 쉬어야 한다. 추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진 아무도 모르니까. “흐음, 그건 그렇징.” 이내 납득했는지, 미샤도 내 옆에 홀라당 앉았다. “미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귀에 자신 있는 편인가?” “모르겠는뎅, 내 귀가 마음에 든다는 사람이 가끔 있긴 했당.” 얘는 또 뭐라는 거야. “멀리 있는 소리를 잘 듣는 편이냐는 뜻이었다.” “아, 그거라면 나름 자신 있당.” “그럼 저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 봐라. 티 나니까 빤히 바라보지는 말고.” “알겠당.” 내 지시에 미샤가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중하는지, 연신 머리 위에 솟아난 세모귀를 쫑긋거렸다. “음, 잘은 모르겠지만 싸우고 있는 거 같당.” “어떤 이유로?” “거리가 멀어서 그렇게 자세히 들리진 않는당. 한 가지 확실한 건 계층군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당.” 그야 그렇겠지. 이 사태에서 간부들이 다급하게 나눌 얘기가 그것 말고 더 있겠어? ‘여기서 더 가까이 가면 눈치를 챌 테니, 이 정도가 최선인가…….’ “우선 계속 엿듣고 있어라. 혹시 뭔가 특별한 게 있으면 그때 말해주고.” “알겠당.” 미샤는 일단 도청 모드로 돌려둔 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군중의 반응을 살폈다. 몇몇 불평불만이나, 불안 증세야 어쨌든. 대체로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쫓겨날 때만 뭔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나 싶었는데, 세상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려.” “그러게 말이오. 이렇게 광범위한 멸악선포라니, 저만한 클랜쯤 되니까 저런 신관도 함께하는 거겠지.” “신이 도왔단 말 밖엔 할 수가 없구려. 10년 만에 3층에 계층군주가 출현했는데, 때마침 3층에 이들이 내려와 있다니?” 드자르위 클랜이 오크 군락지를 점거하며 벌인 악행이고 뭐고, 대부분 현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했다. 뭐, 전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보게, 자네들은 둘 뿐인가?” 주변을 관찰하고 있자니, 어느 한 사내가 내게로 다가왔다. 여기서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용무지?” “별거 아니네, 그저 이런 때일수록 서로 뭉쳐야 하지 않겠는가?” “간단히.” “드자르위 측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같이 행동하겠나?” 음, 임시로나마 협력하잔 거구나. “이미 서른 명 정도가 모였네. 보아하니 자네도 이번 일로 동료를 잃은 듯한데, 잠시나마 의지할 곳이 있으면 좋지 않겠나.”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를 확인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넌 이름이 뭐지?” “잭 플리처일세.” 오케이, 한스만 아니면 됐다. “좋다.” 일단 알겠다고 해두자. 뭔가 잘못된 거 같으면 그때 입을 싹 닫으면 그만이니. 서류 같은 거에 서명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역시 바바리안답게 시원시원하군. 그럼 이만 가볼 테니 쉬게. 나중에 뭔가 일이 생기면 찾아오겠네.” “알겠다.” 이내 사내가 떠나고, 2시간가량 별다른 탈 없이 시간이 흘렀다. 상위 신관의 멸악선포 덕분에 혼돈의 정령들은 접근도 못 하는 실정이었고, 딱히 변수가 될 만한 것도 없어 보였다. 일단, 외부적인 요인만 보자면 그렇다. “미샤, 일어나라.” 도청 모드에서 수면 모드로 전환된 미샤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냥?” 아직은 없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는다면……. “곧 생길 거다.” “무슨 뜻이냥?” “주변을 봐라, 사람이 많아져도 너무 많아졌다.” 드자르위 클랜은 피난민들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 인원에 도달했다. 현재 멸악선포된 구역은 학교 운동장 2배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숲이라 공터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벌써 500명이 넘는 거 같다. “…저기, 더 이상 못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 이상 받아들였다간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할 것이오.” “만약 그 상태로 몬스터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기심은 늘 상황을 양분 삼아 꽃 피우는 법. 먼저 들어온 자들 사이에서 불안함이 감돌며, 그런 주장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비요른,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냥?” “글쎄, 드자르위 쪽에서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한계까지 수용하던. 여기서 수요을 멈추고 문을 걸어잠그던. 클랜 쪽에서도 선택하긴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로부터 머지않아 클랜 간부로부터 재공지가 있었다. “멸악선포로 인해 이곳은 3층 내에서 유일하게 안전지대의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실로 다시 없을 기적 같은 일이지요. 하지만…….” 잡설을 제하고 축약해 보자면 내용은 간단했다. “신관님께서 여러분일이 신께 공경을 표하길 원하십니다.” 공경. 참고로 그것은 기도나, 개종, 혹은 숭배 같은 비물질적인 가치를 뜻하지 않았다. “한 사람당 100만 스톤. 반드시 즉시 이 자리에서 지급해야 하며, 마석이나 현물로도 가능하다 하십니다.” 저게 신관의 요구라 믿는 놈은 없었다. 뭐, 둘 사이의 합의야 있었겠지만……. 먼저 제안한 건 틀림 없이 클랜 놈들이었을 터. ‘처음엔 왕가니 길드니 뭐니 하며 명예로운 척하더니, 결국에는 실익을 택한 건가.’ 난민의 입장을 막아봤자, 추후 그 선택으로 욕을 먹을 건 똑같다. 따라서 그럴 바엔 차라리 돈이라도 벌자고 판단한 모양. 당연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석이 그만큼이나 있을 리도 없고, 결국 이 상황에서 장비를 내놓으라는 건데, 이건 그냥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 아니오!” 가장 높게 목소리를 높인 자는 잭 플리쳐였다. “우리 100명의 결사대는 결코 당신들의 횡포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힘찬 외침과 함께, 잭 플리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눈치채고 일찍이 딴 곳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헌데 다른 100명의 결사대원들도 마찬가지였을까. “어, 어 어……. 다들 뭐라 말 좀 해보시오. 가만히만 있어서는 저들의 횡포에 맞설 수가……!” 잭 플리쳐가 당황해 하며 말을 더듬는다. 그것으로 짧았던 시위는 끝이 났다. “100만 스톤은 신에 대한 공경이자, 보호비입니다. 당장 장비 몇 부위가 없어지겠지만, 우리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당연히 걱정하지 이 새끼야. 멸악선포가 개사기 스킬이긴 해도, 계층군주한텐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속으로만 가진 불만이었다. 나는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바바리안이니까. “미샤, 포션 같은 소모품은 내버려두고 최대한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들만 꺼내라.” “알았당.” 다른 탐험가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서둘러 배낭을 뒤적거리며 현금화할 만한 것들을 추렸다. 일찍이 약탈자들에게서 루팅한 장비가 있기에 입고 있는 걸 벗을 필요는 없었다. ‘후, 흙바닥에서 쉬는 데 하루에 100만 스톤이라니…….’ 존나게 아깝긴 하지만, 멸악선포의 이용비라고 하면 충분히 지불할만하다. 더군다나 방금 지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보호비 또한 포함된 금액이라고. “저쪽에서 값까지 후려치는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충분할 거다.” 종교쟁이 파티의 장비 몇 점을 모은 우리는 상납 준비를 끝마쳤다. 다만, 모두 우리처럼 사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3층 탐험가이니만큼, 입은 장비를 건네면 100만스톤은 될 테지만……. “이게 없으면, 다음부터는 굶어 죽으라고?” “고작 하루만 버티면 되는데, 100만 스톤을 내라니, 기도 안 차는군.” 소수라기엔 꽤나 많은 이가 보호비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밖에 나가는 걸 택했다. 클랜에서도 그런 이들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도착하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보호비를 받았다. 적어도 삼백 명은 넘는 자들에게. ‘최소 3억 스톤을 번 건가. 그것도 고작 하루에…….’ 이건 뭐, 거의 돈이 복사되는 거나 다름없다. 씨발, 역시 힘이야말로 무적이고 신인 건가? 모르겠지만, 결국 이들도 하늘에 빌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만약 계층군주가 이곳에 당도한다면. 그 순간, 떡락장이 시작될 테니까. ‘애초에 그 상황을 가정한 게 아니었으면 보호비를 내는 일도 없었겠지만.’ 늘 느끼는 건데, 이곳 새끼들은 하나같이 상상력이 부족하다. 물론 놈들도 이 선택의 근거는 있을 것이다. 3층은 넓으니, 계층군주를 마주칠 가능성보다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여겼겠지. 오늘로 15일 차니, 마주쳐도 하루만 버티면 된다고 여겼겠지. 이 정도 전력이면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겠지. 최대한 좋은 쪽으로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하지만 이들은 알아야 한다. 애초에 계층군주가 소환되며, 층에 있는 탐험가 전부가 사냥을 멈추고 이런 상황에 부닥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적어도 나는 상상한다.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물론 이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질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지켜보면 알겠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폭풍전야와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19 : 07] 15일 차가 끝나기까지, 5시간이 남은 시각. 투둑, 투둑, 투두둑- 천장에선 흑색의 빗물이 나무 사이로 떨어지며 땅을 검게 적셨다. 「해당 위치가 침식되며, [멸악선포]가 해제됩니다.」 지면을 덮고 있던 순백의 문양은 순식간에 그 빛을 잃었다. 또한. [그오오오오오—!!] 숲 밖에서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67화 필드 보스 (3) 투둑, 투둑, 투두둑- 닿은 것만으로도 피부가 아려오는 흑색의 비.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안다. [절망의 비]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의 패시브 오오라 스킬. 「캐릭터가 혼돈 속성의 지속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경고: 혼돈 속성 피해에 지속적으로 노출 시,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혼란]이 부여됩니다.」 이 스킬은 광역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빗물이 닿은 지형을 침식지대로 만들며 모든 종류의 필드 효과를 제거한다. 그 말인즉. ‘니미럴…….’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와 버린 것이다. “노, 놈이다! 놈이 온 거야!” “이, 이봐! 뭣들 하나! 어서 놈을 막으러 가지 않고!” 보호비를 낸 3층 탐험가들 사이에서 패닉이 일어난다. 그리고 한곳에 시선을 모은다. “설마, 우릴 버리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지켜 준다면서 장비까지 가져가지 않았나! 책임을 져라!” 수십 명이 쏟아내는 감정적인 외침. 몇 번인가 군중 앞에서 대표로 공지했던 예의 간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는군.” 그의 현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보호비까지 받은 이상, 그들이 가진 선택지는 전력을 다해 계층군주와 맞서는 것밖에 없으니까. 다만……. “이번 원정은 손해가 막심하겠어.” 놀랍게도 간부의 얼굴에는 착잡함만이 감돌 뿐, 불안과 초조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내 숨을 가다듬은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왔다! 모두 준비했던 것들을 꺼내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지시. 이에 드자르위 클랜의 문양을 가슴에 새긴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각 팀들은 각 위치로!” 마법사와 신관과 원거리 딜러들은 중심부로. 근접 전사류 탐험가들은 외곽으로 향한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소모품을 망설임 없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상급 지구력 보조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력 재생 보조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넘버스 아이템 [태양 군주의 깃발]을 사용하였습니다.」 「에르시움의 빛이 무기에 깃듭…….」 「…….」 「…….」 각종 도핑형 마법 스크롤, 소모성 넘버스 아이템 및 여러 종류의 장비 보조 소모품들까지. 고작 1분도 안 되는 찰나. 최소 천만스톤 단위의 소모품들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물자는 충분하니 아끼지 마라!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돌아간다!” 그들을 과소평가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상상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서, 뒤로는 만반의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호비를 받은 건…….’ 말 그대로 그쪽에 판돈을 걸었을 뿐이겠지. 그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으니까. 피식- 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 세상엔 효율충이 너무 많단 말이지.’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이들 역시 수도 없이 목숨을 걸고 탐험가 짓을 해서 지금에 이른 자들일 터. 근데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게 운 따위였을 리가. “이 정도 물자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니…….” “역시 대형 클랜이다!” 괄시 보다는 언제나 경계를 해야 마땅하며. 질시할 바에는 보고서 조금이라도 배울 점을 찾는 쪽이 효율적이겠지. “비요른, 이제 어쩔 거냥?” “뭘 어쩌나? 일단은 지켜봐야지.” 애초에 그게 원래 계획이었다. 계층군주와 마주쳐 버린 이상,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니까. 뭐, 정 답이 없으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당장 튀어야 하겠지만……. ‘이 정도면, 버티는 것 정도는 충분하겠지.’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의 장벽이 원의 형태로 우리 주변을 감싼다. 정수의 스킬은 아니고 그냥 마법 주문이다. 「혼돈의 정령이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위치가 침식됩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이후.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한 혼돈의 정령은 불의 장벽을 뚫지 못하고 소멸됐다. 후우우우웅-! 또한 머리 위로 형성된 거대한 결계는 쏟아지는 빗물까지 막아 주었다. 뭐, 불의 장벽이나 결계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겠지만. “비요른, 저길 봐랑!” 미샤가 가리킨 곳으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키운다. 육중한 땅울림을 동반하며. 쿠웅-! 쿠웅-! 머리 위로 돋아난 뿔. 두껍고 거칠어 보이는 흑색의 가죽. 그 위로 일렁거리는 불길한 오오라. [구오오오오오—!] 거리 감각을 상실케 하는, 괴수 영화에나 나올 법한 크기의 짐승이 불의 장벽을 손쉽게 넘어서며 형체를 드러냈다. “저, 저게 바로…….” “호,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다!!” 그 모습에 군중이 겁에 질려 뒷걸음친 반면 클랜원들은 침착했다. “자리를 지켜라! 절대 뒤로 향하게 냅둬선 안 된다!” 대형 몬스터들과의 전투야 일상이라는 듯, 묵묵히 자리를 사수하는 전사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콰앙-!! 리아키스가 앞발을 내리찍는 것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 게임 속이 아닌 실제 레이드는 어떨까. 내심 갖고 있던 오랜 궁금증의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절대 막으려 들지 말고, 무조건 피해라! 알겠나!” 근접 딜러는 물론이고 탱커들조차 정면 승부를 철저하게 피하며, 휘둘러지는 꼬리나 내리찍는 발톱을 기민하게 피해 낸다. 하기야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아무리 몸이 단단하고 근력 수치가 높아 봐야 저런 괴물과 힘 싸움에서 상대가 될 리 없다는걸. ‘군주급과의 실제 전투는 이런 식인 건가. 흥미롭네.’ 언젠가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일까. 확실히 마법사나 그런 딜러 쪽 라인보다는 근접계 탐험가들의 전투에 시선이 간다. 보고 배울 점도 상당히 보이고. 아찔한 장면도 몇 번이나 있었다. 콰아아앙-!! 아무리 피하는 데 주력한다고 한들. 이런 고위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부상자가 없을 순 없다. 보통 저런 일격을 맞으면 부상이 아니라 즉사겠지만……. “저, 저걸 받아내고도 살아 있다니…….” “…정말이지 대단하군.” 수많은 정수로 스탯이 뻥튀기되고, 각종 스크롤 도핑에 신관 및 서포터형 탐험가의 지원까지 받는 그들은 이미 하나의 병기였다. “으아아아아아!!” “씨바아아아, 뒈질 뻔했네!” 온몸이 박살 난 상태에서도 힐을 받고 곧장 전선에 복귀하는 전사들.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제기랄, 이렇게 뒈질 새끼가 아니었는데…….” “한눈팔지 말고 전투에 집중해라!” 전투가 장기화하며 사망자도 발생했다. 근접 전사 한 명이 발에 짓눌려 즉사했으며, 리아키스가 뿜어낸 브레스에 뭉쳐 있던 원거리 딜러 세 명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다만 냉정히 현 상황을 분석해 보자면……. ‘아직까진 안정적이야.’ “버, 벌써 네 명이 죽다니… 위, 위험한 거 아니오?” 3층 탐험가들의 반응이야 어쨌든. 여전히 전사들은 전선에서 잘 버텨내 주고 있다. 마법사들의 합동 마법 또한 중심부로 다가오는 리아키스를 밀쳐내기에 위력이 충분했다. ‘암흑구체 패턴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거 같고 말이지.’ “이, 일단은 지켜봅시다! 그래도 명성 높은 드자르위 클랜 아니오! 어떻게든 해 주지 않겠소?” 침식된 땅에서 스멀스멀 올라와 리아키스에게로 향하는 흑색의 구슬.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근원의 힘을 끌어당깁니다.」 가장 걱정했던 이것들 역시 리아키스에게 흡수되기 전에 원거리 딜러들에 의해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공격 중지!!” “놈이 더 이상 위협을 느껴선 안 된다!” 또한 중간 중간 화력 공세를 멈추며 리아키스의 생명력 관리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 확실했다. 이들은 공략법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는 거겠지. 그 물건 없이 2페이즈에 돌입하면 끝장이니까.’ “왜 지금 공격을 멈추는 거지? 다 바보들뿐인 건가? 조금이라도 기세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0년간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한 고인물? 이 게임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다고?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건 그냥 오만이다. 수천 년 전부터 미궁은 존재했다. 게임 속 세계관 같은 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겐 그것이 현실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들어가야 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록으로써 후대로 대물림 됐겠지. ‘진짜 가치 있는 지식은 소수만이 독점하고 있겠지만.’ 물론,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게임에서도 유난히 발견하기 어려웠던 ‘숨겨진 요소’들은 이곳 사람들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 않나. 고인물로서의 지식은, 여전히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는 데 있어 가장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딸깍. 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22 : 37] 어느새 벌써 3시간도 넘게 흐른 시각. 길어진 전투에도 클랜원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서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다만……. ‘소모품을 저 정도 사용해서야, 보호비로 얼마를 챙겼든 이제 의미가 없겠는데.’ 문득 대형 클랜들이 공략법을 알고도 계층군주를 사냥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토벌 시 보상이 적은 건 아니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화. 정예 멤버가 죽을 수 있단 가능성. 게다가 만약에 실패라도 할 시 돌아오는 어마어마한 리스크까지. ‘영 수지가 맞지 않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콰아아앙-!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리아키스가 전사들을 무시하고 중심부로 돌진하더니 원거리 딜러 다섯 명을 순식간에 짓뭉개 버렸다. 레이드 도중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 다행히 전사들이 기를 쓰고 리아키스에게 달려들며 다시 원위치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근접계 딜러 2명이 즉사했다. ‘그래도 남은 시간은 충분히 버텨 주겠군.’ 나는 재차 전황을 분석했다. 현재까지의 사망자는 총 11명. 총 전력의 20%에 달하는 숫자지만, 남은 인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중이다. 약간의 공백은 생겼을지언정.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만큼은 절대 아니겠지. 문제는 그런 간단한 사리 판단도 못 하는 새끼들이 주변에 가득했단 거겠지만. “틀렸어! 이 무능한 새끼들!!” “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알아!!” 침식지대롤 밟고 [혼란]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닐 텐데, 군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패닉이 일어난다. 심리를 이해하라면 정 못할 것도 없긴 했다. 사망자 11명. 이건 실질적 전투 전력인 클랜원 기준으로 카운트 했을 뿐, 리아키스가 개지랄을 할 때마다 보호비를 냈던 탐험가들도 수없이 죽어 나갔으니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내가 보기엔, 바로 옆에서 레이드 중인데 병신같이 넋 놓고 있던 게 잘못이다. 그러나 그리 말해 봐야 처 듣지도 않을 터. “비요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당.” “알고 있다.” “우리라도 뭔가 해야—” “기다려 봐라. 생각 중이니.” 최대한 넓게 주변을 살폈다. 클랜측은 리아키스에게만 심혈을 기울이느라 아직 이러한 낌새를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한 사내가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혼란에 불을 지핀다.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소, 모두 살려면 힘을 모읍시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장비를 벗어서 보호비를 냈던 잭 플리처였다. “벌써 몇 명이 죽었는지 아시오? 이들은 우리를 지킬 수 없소.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야 하오!” “옳소!” “하지만 장비가 없는데 어떻게…….” “돌려받아야 하오! 어차피 저놈들도 약속을 제대로 못 지켰지 않소?” 그의 선동에, 지난번 그를 외면했던 결사대들도 힘을 거들며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는 짧게 읊조렸다. “미샤, 준비해라.” “준비하라니, 뭐를?”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난다.” 이미 이곳은 글렀다. *** 신속하게 배낭을 챙긴 즉시. 폭동이라도 일듯, 수많은 탐험가가 물자를 쌓아 둔 중심부로 달려든다. “다, 다들 진정하시오! 이러면 모두가 위험해질—” 그제야 클랜측도 사태를 인지했으나……. 이미 늦었다. “웃기지 마라!!” “내 장비를 돌려줘!” 이내 클랜의 마법사와 궁수들을 밀치며, 탐욕 어린 시선으로 손에 집히는 대로 물자를 챙기기 시작하는 탐험가들. “내, 내놔! 그건 내 거라고!!” “이, 이 상황에 그런 게 어딨소!” “당장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다!” “뭣들 망설이나! 이제부터 저놈들은 약탈자들이다! 전부 해치워라!” 어느샌가 혼란과 광기로 가득 찬 모습을 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마저 지웠다. “비요른…….” “구경은 이만하고 어서 가지.” “아, 알았당!” 미샤를 이끌고 리아키스의 반대쪽으로 달렸다. 머지않아 사방을 감싼 불의 장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건 어쩔 거냥!” 뭘 어쩌긴 어째. “뚫고 간다.” 바바리안답게 몸으로 때워야지. 화상이야 좀 입겠지만, 그런 거야 이제 침만 발라 줘도 낫는다. “지, 진심이냥?!” 아, 너는 아니겠구나. “악! 꺄아악—!” 양팔로 미샤를 집어든 뒤, 만세를 하듯 위로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내달려, 족히 5m 두께는 되는 듯한 불의 장벽을 순식간에 넘었다. 치이이익-! 은은하게 진동하는 고기 냄새. 고통내성을 뚫고도 피부가 살짝 아려온다. 나는 물었다. “미샤, 너는 괜찮나?” “…덕분에 나는 괜찮당. 그보다 앞에를 봐라!” 이내 미샤를 내려놓고서 앞을 보니, 혼돈의 정령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다만, 하나하나 처리하며 갈 시간은 없고. “뛰지.” “엑! 저 사이를?” “그럼 달리 방법이 있나?” 안 그래도 주변에서 하나둘 우리를 발견하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중이다. 따라서 더 어그로가 끌리기 전에 얼른 놈들 사이를 뚫고 내달렸다. 저쪽 상황을 모르니 최대한 빨리— ‘씨발.’ 전력 질주로 한 5분쯤 내달렸을까. 돌연,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비요른, 거기 있냥?!” “있다.” 다행히 목소리는 들려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냥?”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분석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상황은 명확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근원의 힘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경 5km에 필드 효과 [악의 틈새]가 적용됩니다.」 리아키스의 즉사기이자 전멸기 [악의 틈새]. 기어코 그 씹새끼가 구슬을 다 처먹어 버린 모양이다. 68화 바바리안 히어로 (1) [악의 틈새] 이는 리아키스가 구슬을 10개 이상 흡수했을 때 나오는 일종의 장판형 즉사기. 제한 시간 내에 빠져나가지 못하면 캐릭터를 얼마나 열심히 키웠든지 간에 사망한다. 게임 내 시간으로는 약 45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은……. 위치와 상관없이 전부 중심부로 끌려간단 거겠지. 후웅-! 눈앞에 드리운 어둠에 적응할 새도 없이, 온몸에 피어나는 쫙 잡아당겨지는 듯한 감각. “비, 요, 른……!! 이, 게, 어, 떻, 게—!” 왠진 몰라도 미샤의 목소리가 0.5배속으로 들린다. 따라서 나는 2배속으로 말했다. “걱정 마라,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 “그, 게, 무, 슨, 뜻—!” 미샤가 느릿느릿하게 외쳤지만, 외침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청각 자체가 사라진 것만 같은 완벽한 정적. 물론, 그 시간 자체만으론 길지 않았다. 「반경 내의 모든 캐릭터가 악의 중심부로 이동합니다.」 눈을 떴을 때, 그곳엔 빛이 있었다. “비요른!” 소리 또한 정상적으로 들려왔으며, 미샤 말고도 많은 인물이 곳곳에서 보였다. “여긴 대체……?” “뭐, 뭐야! 난 분명 도망치고 있었는데…….” 얼추 200명은 됨직한 숫자의 탐험가들. 불안한 얼굴로 내게 딱 달라붙는 미샤를 뒤로하고 한 곳을 확인했다. 드자르위 클랜의 문양을 지닌 이들이 신속하게 자기들끼리 모이며 진형을 잡고 있었다. ‘50명에서 벌써 이만큼 남은 건가…….’ 20명이 조금 넘는 숫자. 리아키스와 대적하던 3시간 동안 발생한 사망자가 11명이었는데, 불과 5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그 이상의 전력이 사라졌다. 대체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글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보시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다면—” “닥쳐라, 쓰레기들.” 한 탐험가의 질문에 분노의 음성이 터져 나온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 때문에… 대체 몇 명이 죽은 줄 아는 거냐!” “더 이상 가까이 온다면 즉시 공격하겠다.” 실제로 드자르위 클랜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채 누구도 접근치 못하도록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탐험가들도 당황했다. “그, 그게 왜 우리 때문이오!” “애초에 당신들이 우리 장비만 뺏어가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대형 클랜들은 긴급 상황 시 의무를 다하겠다고 길드와 왕가에 맹세한다고 들었소.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리고, 일단 지금은 다 같이 힘을 모으는 게…….” “저, 저는 들여보내 주세요! 애초에 가담도 안 했어요. 보호비를 더 내라고 하면 낼 테니까…….” 지금 본인들이 어떠한 상황에 부닥쳤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탐험가들은 제각기 아우성을 냈다. 하긴 지들도 아는 거겠지. 쟤들한테 버림받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걸. 그런데 이걸 어쩌나.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쓰레기들.” 드자르위 클랜의 뜻은 완고했다. “그, 그런 이기적인 말이 어디 있소! 그 말인즉, 우리들 보고 전부 나가 죽으라는 말 아니오!” “정확히 알아들었군.” “…뭐,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이자들이!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거 같소?” 최전선에서 선동을 일으켰던 사내. 잭 플리처의 외침에 수많은 탐험가들이 동조해 왔지만, 클랜 측은 같잖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거지?” “그야 우리가 힘을 합쳐 당신들을—” “미리 말해 두는데, 아까 전처럼 맥없이 휘둘릴 거란 기대는 버려라. 너희들 같은 쓰레기쯤이야 맘만 먹으면 이 자리서 전부 불태워 버릴 수 있으니까.” 허장성세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리아키스를 상대하느라 넓게 포진되어 있던 그때와 달리, 제대로 된 밀집 진형을 잡고 있다. 보아하니 언제든 마법을 날릴 수 있게 준비도 끝마친 듯하고. “제기랄!” “너희가 없다고 우리가 죽을 거 같은가!” 이내 탐험가들이 본인들의 현실을 깨달은 그때였다. “나, 나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소.” 키 160쯤 되어 보이는 인간 사내가 군중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시간 내에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거요. 한 고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소.” “…그게 정말인가?” 잭 플리처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숙맥처럼 보이는 사내를 대신해서 한 여성이 나섰다. “그건 제가 보증하겠어요!” “요정?” “저는 이분과 1년 넘게 팀을 이뤘어요. 그리고 믿기 어려운 여러 일을 겪었죠. 이분은 신비한 분이에요.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죠. 저는 이분의 말이 우리를 살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잭 플리처가 안색을 달리했다. “요정의 말이라면… 들어 볼 가치는 있겠군. 이보게 자네, 우리가 이곳을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 방법이랄 것도 않소! 어느 방향으로든 5km 정도만 쭉 가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고 드, 들었으니까…….” 놀랍게도 저 인간 사내의 말은 사실이다. 문제는 빛이 있는 이곳을 떠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리아키스의 분신들이 몰려온단 거겠지만. “모, 몬스터가 있다고 듣긴 했는데,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분명 해, 해낼 수 있을 것이오!” “흐음, 확실히 일리는 있군.” 지랄.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저기 클랜 쪽 애들이 먼저 튀었겠지. 똥 씹은 얼굴로 지들끼리 심각하게 얘기를 나눌 게 아니라. “비요른, 너는 어쩔 거냥?” “뭐?” “그렇지만 엘프가 인간을 상대로 저렇게 보증을 하는 걸 보면, 정말 뭔가 있긴 한 인간이란 거 아니겠냥.” 음, 그런가? 내 눈엔 그냥 병신처럼만 보이는데……. “저런 거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히 기다려라.” “알겠당!” 여하튼 이후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요정의 보증이 있긴 하지만, 저 사내의 말이 틀렸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소. 하지만! 이대로 죽음만 기다릴 바에는 이곳에 걸어 보고 싶소!” 이내 결정을 내린 잭 플리처가 다시금 선동을 시작하자, 서서히 여론이 움직였다. “그래,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저 새끼들이 우릴 도와줄 것 같지도 않은데, 달리 선택지가 있소?”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쉽게 될 거 같진 않은데…….” 미심쩍어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한번 모이기 시작하자, 남겨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는지 가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묻겠소! 우리와 함께할 자가 있다면 지금 나오시오!” 100명이 넘는 탐험가들이 한데 뜻을 모았다. 남은 자들이라고 해 봐야 나와 미샤를 포함해 마흔 명 안팎. 우리를 쭉 훑어보던 잭 플리처가 날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자네, 얀데레의 아들 비아그론이랬던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흠, 그랬었나? 아무튼, 자네는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셈인가?” 뭘 귀찮게 또 물어봐,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건 충분히 알지 않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바바리안 아니랄까 봐 멍청하긴, 후회할 걸세.” 씨발? 이건 또 뭐지? 그냥 알아서 자기 길 가면 되는 거, 왜 마지막에 이 지랄을 떨지? 영 이해할 수 없는 심리지만, 받은 만큼은 돌려주는 게 내 신념이기에 마찬가지로 덕담을 해 주었다. “뭐라는 거냐? 곧 뒈질 새끼가. 잔말 말고 빨리 뒈지러 꺼져라. 그게 세상에 도움이 더 될 테니.” “뭐, 뭣이?” “나와 싸우고 싶나? 그럼 이리 와라. 그 텅텅 빈 대가리를 부숴 줄 테니.” 그의 뒤에 있는 백 명의 탐험가고 뭐고 내가 메이스를 쥐고 앞으로 걸어나가자 놈이 고개를 픽 돌렸다. 그리고 자기 혼자 중얼거리며 떠났다. “나참, 생각해 줘서 말을 해 줬더니…….” “함께할 자는 더 없는 거 같으니 출발하겠소! 이런 데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으니!” 해프닝이야 어쨌든. 과반수가 넘는 인원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이럴 땐 사지에 제 발로 기어들어갔다는 게 맞나? 여하튼 그들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미샤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읊조렸다. “비요른, 우리는 어떡할 거냥?” “왜 맨날 나한테 그걸 묻는 거냐?” “그야… 지금까지 네 말이 항상 정답이었지 않낭. 나는 널 믿는당.” “그렇군.” 말은 고맙지만, 미샤의 말은 틀렸다. 내 선택은 정답이 아니다. 그딴 걸 한낱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단지 문제가 발생한 그 순간,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걸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터벅- 한창 토론을 벌이는 중인 드자르위 클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쯤이면 저쪽도 얼마큼 좆됐는지는 확실히 인지됐을 테니…….’ 이제 도박을 하러 갈 차례다. 여러 근거를 통해 내가 판단한, 그나마 가장 성공률이 높은 도박. “멈춰라, 바바리안. 더 가까이 오면—” 내가 다가가자 클랜 측에서 제지를 해 왔다. 공교롭게도 외침의 당사자는 우리와 구면인 자였다. “오, 오라버닝…….” “반푼이……? 네가 왜 여기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재회. 감동적인 남매 상봉은 없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둘 사이에 겨들며 능글맞게 물었다. “여, 오랜만이군.” “…뭐? 오랜만?” 미샤 오빠놈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긴, 우리가 이렇게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니지. 따라서 놈이 당황하는 사이 나는 즉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오크 히어로 정수는 나왔나?” “그야 운 좋게도 다행히—” 그래, 운이 좋았던 거구나. “잠깐만,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지?”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는 오빠놈을 보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도박이 성공했다. 일단 적어도 반쯤은. *** 드자르위 클랜의 부단장. 이라즈 맥그레인은 생각했다. ‘좆됐군.’ 총 사망자 27명. 비율상 드자르위 클랜 전체 전력의 20%에 달하는 숫자. 다시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가늠도 안 간다. ‘뭐, 우리라고 살아 돌아간단 보장은 없겠지만.’ 그는 눈을 떠 일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현재 생존한 클랜원은 총 23명. 인원수만 보면 절반가량의 전력이 생존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부관에게 물었다. “현재 전력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 “신관 셋에 마법사 여섯, 그리고 원거리 지원 계열이 열둘에… 근접 전사가 둘입니다.’ 참담한 목소리로 이어진 보고. 하기야 그럴 것이다. “근접 전사가 둘뿐이라…….” 기형적이란 말로도 부족한 인원 분포. 폭동이 일어났을 때, 지원을 받지 못한 전사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게 컸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부단장님의 판단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재정비할 시간도 벌지 못—” “그거야 살아 돌아간 다음에나 알 수 있는 얘기고.” 맥그레인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폭동을 잠재우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즉시, 그는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리아키스가 암흑구체를 흡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란 것이었다. 그 덕분에 피해를 최소로 줄이고, 시간은 버는 데 성공했다. ‘그래, 시간… 딱 시간을 번 정도겠지.’ “이보시오, 맥그레인 경! 이제 어쩔 생각이오? 그냥 모든 걸 포기한 건 아니겠지?” “생각 중이오.” “그렇다면 빨리 생각해야 할 것이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했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 테니까.” 날선 목소리로 말 뱉는 마법사를 보며 맥그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성호를 그리며 기도하는 신관 쪽은 그나마 나았지만, 이들에게 밉보인다면 기껏 살려 돌아가도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생각해라, 어떻게 해야 최대한 많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맥그레인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부단장님, 탐험가들 쪽에서 무리를 형성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이곳을 벗어나려는 모양입니다.” “간만에 희소식이군. 내버려 두게.” “예?” “미끼 역할은 해 줄 거 아닌가.” 긍정적인 변수는 철저히 이용하기로 하면서. 탈출 경로를 어떻게 할지, 이동 시 인원 배치나 최적의 진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답이 없었다. “명하신 대로 이동 시 진형을 숙지시켰습니다. 이제 언제라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따라준다는 가정하에, 최소 절반 이상은 죽겠군.’ 전사의 부재가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기껏 두 명으로는 길조차 제대로 뚫을 수 없는 데다가, 그 두 명조차 검사와 창술사다. 전문 방어 계열 전사. 즉, 수호자 포지션의 탐험가는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이 중요한 상황에 이들로만 길을 뚫어야 한다니, 미치겠군.’ 딱 한 명. 제대로 된 수호자 포지션의 탐험가가 딱 한 명만이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더 상황이 긍정적이었을 텐데……. “부단장, 탐험가들이 떠났습니다.” “어서 결단을!” 자신을 바라보는 클랜원들을 보며 맥그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100명도 넘는 숫자입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시선을 끌어줄 때 움직이는 게 아니면—”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침내 맥그레인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러니까 말했지 않나!! 내가 길을 열겠다—!!” 한 바바리안이 외쳤다.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의 고민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맥그레인은 홀린 사람처럼 부관에게 물었다. “이보게, 저 친구는 누군데 저러고 있는 건가?” “살짝 들어 봤는데 칼스타인 씨의 여동생분 동료라는 모양입니다. 부단장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 자네는 대답을 하게.” 이내 부관이 답했다. “저자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크 히어로의 정수?” “예, 그것만 있으면 자기가 길을 열 수 있다더군요.” 맥그레인은 그가 가진 이능 중 하나 [생존본능]을 활성화한 뒤, 다시금 바바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사람한테서 이렇게 강하게 빛이 나는 건 처음이군.” 수많은 위기 속에서 그를 구해 낸 그 이능이 말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볼 가치는 충분하겠다고. 69화 바바리안 히어로 (2) “지금쯤 길을 뚫을 놈이 없어서 한창 고민 중이겠지? 내게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넘겨라. 내가 가장 앞에서 길을 열겠다.” “이제 보니, 그냥 정신 나간 놈이었군.” 오빠놈이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제야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길을 뚫을 자가 없다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저기 마법사들이 보이지도 않나?” 이놈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다. 일개 단원에 불과한 이놈에겐 사리판단을 할 지식조차 없을뿐더러……. 현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단원들도 마찬가지. “반푼이, 너는 이쪽으로 와라. 동생을 사지에 남겨 두고 갔다는 오명은 짊어지고 싶지 않으니.” “비, 비요른……?” 좀 더 말이 통하는 놈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리아키스와의 전투를 진두지휘했을 위엣놈. ‘그놈이라면 말이 통하겠지.’ 다만, 친절히 요청한다고 해서 놈이 자기 상관을 데려올 거 같지는 않으니……. “크흠.” 우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바바리안답게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전부 뒈지기 싫으면 내게 투자해라! 내가 길을 열겠다—!!” 귓구멍이 달렸다면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을 외침.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한 사내가 나왔다. *** “자네,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이라즈 맥그레인, 일단은 드자르위 클랜의 부단장 직위를 맡고 있네.” 순식간에 통성명을 끝마친 그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해라, 비요른 얀델. 우리가 오크 히어로를 토벌했단 소식을 대체 누구에게 들었지?” 그래, 역시 그것부터인가. “유추했다.” “유추했다고……?” “그래.” 물론, 나도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왜 이런 대형 클랜이 오크 군락지 같은 걸 통제하겠다고 내려왔을까? 곰곰이 단서들을 조합해 보니 결론이 나왔다. “정말로 오크 대전사나 잡으러 내려온 거였다면, 그만한 전략 물자를 갖고 있을 리 없지 않나.” 대형 클랜이라고? 그래서 저 정도 소모품은 상시 갖고 다닌다고? 글쎄, 그럴 리가.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건 정도를 벗어났다.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다면 모를까.” 5등급 몬스터 오크 히어로. 군락지 중심부의 제단에 오크 대전사의 마석 777개를 제물로 바칠 시 소환되는 일종의 히든 보스. 분명 그놈이 목적이었겠지. 희박한 확률로 등장하는 ‘오크 로드’는 얘네가 뭔 지랄을 떨어도 잡을 수 없으니. ‘저만큼이나 물자를 갖고 있던 것도, 혹시 오크 로드가 나오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을 테고.’ “근데 보아하니, 오크 로드는 나오지 않은 모양이군?” “허, 그것까지 아는 건가?” 맥그레인이 묘한 탄성을 뱉었다. 다만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자, 그럼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한 근거를 설명해 보게.” 아직 그에게 남아 있을 여러 의문점과 호기심을 생략한 한 마디. 여기서 더 낭비할 시간은 없단 거겠지. 이 사내에게서 왠지 모를 효율충의 냄새가 났기에, 나 역시 곧장 본론으로 들어섰다. “내겐 불사자 각인과 뱀파이어의 정수가 있다. 참고로 균열 수호자에게서 나온 정수다.” “이능 세 개를 전부 다 쓸 수 있다는 거군.” 뱀파이어가 균열 수호자로 나온다는 말부터가 금시초문이었을 텐데, 맥그레인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넘어갔다. “그리고 또?” “시체골렘의 정수가 있다.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고통내성 수치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네. 포션을 먹으면서도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 “그래서 그게 끝인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효율충으로 의심되는 자답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확실히,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아니, 저 둘과 비교하면 더없이 훌륭해.” 이와 똑같은 얘기를 하였을 때, 미친놈처럼 바라보던 미샤의 오빠놈과는 전혀 다른 반응. 심지어 결론을 내리는 것조차 빨랐다. “좋네, 자네에게 투자하지.” “부단장님! 그 정수는 귀족가에서 의뢰한—!” 그 결정에 옆에 있던 미샤의 오빠놈이 뭐라 씨부렸지만……. “그만! 정수야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일세. 정수 하나로 몇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하지 않은가.” 그는 단숨에 반발을 묵살하고서 내게 말을 이었다. “물론 조건은 있네. 만약 살아서 이곳을 탈출한다면 우리 클랜에 들어오게.” 씨바, 어쩐지 너무 쉽게 승낙하더라니.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거절하지.” 클랜은 한번 들어가면 발 빼기가 어렵다. 못할 건 없지만,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 새끼로 낙인 찍힌다 해야 하나? 한 번은 ‘탈퇴비’를 안 내고 쨌더니 미궁에서 습격 이벤트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근데 하물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야. “왜지? 좋은 제안일 텐데.” “아직 누구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서.” 훗날 직접 클랜을 만든다면 모를까. 굳이 일개 단원으로 들어가며 앞으로의 행동에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뭐,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면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터였지만……. ‘선택지가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일종의 치킨 게임이다. 그것도 사실상 승자가 정해진. 나는 나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렸지만, 저쪽은 23명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거절이라니, 아쉽게 됐군.” “그래서 결정은?” “좋네, 자네에게 그 정수를 주겠네.” 기싸움 할 시간도 아깝다고 여긴 걸까? 맥그레인은 깔끔하게 미련을 지웠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 묘하게 긴장되네.’ 나는 애써 진정하며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딸깍- 마석으로 소환되는 오크 히어로는 셋이다. 참고로 하나하나가 고유 이름을 지닌 네임드. 즉, 상위 변이종으로 꽤나 골치 아픈 정수를 하나씩 갖고 있다. 그래서 5등급 몬스터임에도 공격대 단위의 공략이 필수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데니쉬? 벨타? 타루가스? 셋 중 누가 정수를 뱉은 거지?’ 내가 평소 오크 삼형제라 부르던 이놈들은 각 개체마다 정해진 색깔의 정수를 드랍한다. 데니쉬는 [열광의 함성]이 담긴 빨강 정수를. 벨타는 [투쟁의 깃발]이 담긴 파랑 정수를. 타루가스는 내 방패바바 육성법의 핵심이기도 한 그 스킬이 담긴 초록 정수를. 과연 셋 중 뭐가 나왔을까? “후우…….” 이내 상자를 열어젖힌 나는 투명한 시험관의 색을 확인했다. “녹색이군.” 운이 연이어 따라준다. 괜히 사람 불안해지게. *** 「캐릭터의 영혼에 [오크 히어로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근력이 +70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35 상승합니다.」 「투쟁심이 +40 상승합니다.」 「물리내성이 +20 상승합니다.」 「골강도가 +30 상승…….」 *** 변화는 즉시 다발적으로 찾아왔다. 아이나르 때처럼 외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꽈악- 육체 계열 정수답게 힘이 끓어 넘친다. 근력의 향상은 말할 것도 없으며, 민첩성의 증가로 체감 체중도 한결 내려갔다. 앞으로 뭘 하던 이전보다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투쟁심 때문인가.’ 평소 답지 않게 한시라도 빨리 이 힘을 휘두르고 싶단 욕망이 슬그머니 기어오른다. “일단 장비부터 벗게나.” 고양감을 억누르며 지시대로 장비를 벗었다. 그러고 있자니,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나? 우리가 의뢰를 받았다는 건.” “몰랐다.” “…몰랐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리 당당하게 정수를 달라고 한 건가?” 그야 얘네도 셋 중 어느 정수가 나올지는 몰랐을 거 아닌가. 일단 시험관에 담아서 추후 정수를 취할 멤버를 정하리라 예상했다. 이들에게 시험관값은 큰 부담이 아닐 테니까. “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물어볼 건 그게 끝인가?” “일단은 그렇네. 시간이 없지 않은가.” 벗은 장비를 배낭에 고이 담아 미샤에게 건네자마자, 맥그레인이 스크롤 한 다발을 내게 건넨다. 이게 무엇이냐고는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그저 통째로 손에 쥔 뒤 ‘지직!’ 한 번에 옆으로 찢어 버렸다. 「캐릭터가 물리 방어 보조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물리 내성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상급 지구력 보조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테미나 감소폭이 줄어듭니다.」 「캐릭터가 기력 재생 보조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테미나 재생력이 대폭 증가합…….」 각종 스크롤의 효과로 피부 위로 은은하게 빛을 내는 형형색색의 아우라. “자, 그럼 이것도 마시게.” 스크롤 다음은 각종 물약이었다. 「캐릭터가 근력 강화의 비약을 복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근력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정령의 눈물을 복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원소 저항력 수치가 +15 상승합니다. 「바실리스크 플라스크를 복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고통 내성 수치가 +15 상승…….」 씨바, 이게 현질의 힘인가? “솔직히 말해서, 도무지 적응이 안 될 정도군.” “흠, 이 정도로 그러면 곤란한데 말이지.” “…동감이다.” 아직 본격적인 도핑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맥그레인이 신호를 주자, 서폿형 탐험가들이 이능들을 시전했다. 「애런 디플레인이 [영령의 가호]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애런 디플레인이 [재생의 불꽃]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육체 재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타로테스 피안이 [희생의 관]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대폭 증가하며……」 새로운 종류의 힘이 몸에 깃들 때마다 알 수 없는 짜릿함이 느껴진다. 마치 황제라도 된 듯한 기분. 그렇지만 아직 부족하다. 리아키스의 분신체가 가득한 저 어둠 속을 뚫고 나가기 위해선, 황제 따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괴물이 되어야만 하니까. “자, 이제 자네 차례네.” 그가 눈짓하자 미샤의 오빠놈이 다가왔다. 부단장 앞이라 말은 못하지만, 어딘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 사실 그건 피차일반이었다. “어떤 이능을 흡수하건, 그의 것이 가장 도움이 될 걸세.” “그렇군.”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선 사적인 감정은 버릴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미샤의 오빠놈 목을 깨물었다. “크윽.”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캐릭터가 [피의 주인]을 시전했습니다.」 뱀파이어의 액티브 스킬 [피의 주인]. 효과는 간단하다. 「테일론 칼스타인의 패시브 스킬 [부정한 자]를 일시적으로 흡수합니다.」 입으로 직접 흡혈 시, 대상자의 스킬 하나를 무작위로 흡수할 수 있다. “눈 색이 바뀐 걸 보니 그것을 가져간 모양이군.”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부정한 자]. 정수 최대치가 -1로 줄어드는 대신, 모든 액티브 스킬의 성능이 1.5배 상승하는 패시브 스킬. “자네, 운이 제법 좋은 편이군.” 극구 동의하는 바이지만, 제발 그런 말 좀 안 해 줬으면 좋겠다. 나중에 그만큼 개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럼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이미징하며 스킬을 발동했다.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통해 얻은 그 스킬.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땅이 멀어지며, 주변 인물들이 조그맣게 변한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 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일명 바바리안 히어로 모드. 그 우람한 자태에 주변 모든 이의 시선이 모인다. “어, 어머나아…….” “저건… 그야말로 괴물이군.” 경외의 표시로 맥그레인이 본인의 망토와 부관의 것을 벗겨 내게 건넸다. “…일단 이걸로라도 가리는 게 좋겠군.” 동의하는 바였기에 나는 이를 얼른 받아 허리에 둘렀다. 이로써 출격 준비가 끝났다. “이제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군. 가능하겠나?” 가능하겠냐고? 나는 끓어 넘치는 힘을 겨우 주체하며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 지금의 내게 불가능은 없다. *** 「비요른 얀델」 레벨: 3 육체: 330.1 (New +131) / 정신: 168.3 (New +62)/ 이능: 152.4 아이템 레벨: 782 (New +83) 종합 전투 지수: 846.3 (New +1)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오크 히어로 - Rank 5(New) 70화 바바리안 히어로 (3)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다. 직경 5m에 달하는 실로 괴물 같은 거구를 이끌고서. 쿠웅! 쿠웅!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대형 몬스터나 낼 법한 발소리가 난다. “뒤처지지 말고 잘 쫓아가게!” 뒤에는 23명의 클랜원들과 미샤가, 그 뒤에는 잭 플리처의 선동에 휩쓸리지 않은 40명의 3층 탐험가가 있다. 그들이 함께하게 된 경위는 간단하다. [장비를 모두 내놓으면 데려가 주지.] 맥그레인이 조금의 손실조차 메꾸길 바라는 합리주의자였을뿐더러……. 「캐릭터가 [제물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반경 100m 내에 위치한 제물의 숫자만큼 캐릭터의 육체 수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제물은 하나라도 더 많으면 좋다는 판단. “베헬—라아아아아아!!” 힘이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힘만큼이나 참기 어려운 파괴 본능이 온몸을 지배한다. ‘이건, 역시 투쟁심 때문인 거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이 욕구를 참지 않아도 돼서. “캬아아아아악-!” 미니어쳐 사이즈로 변한 리아키스의 분신체들이 전방에서 날아든다. 미니어쳐라 해 봤자 2m는 넘는 크기지만……. 그래 봤자 조그만한 건 똑같다. 후웅! 사정없이 메이스를 휘두른다. 몸이 하도 커지다 보니 메이스가 아니라 숟가락을 휘두르는 기분이다. 뭐, 처 맞는 놈 생각은 다르겠지만. 퍼억-! 명치를 후드려 맞은 분신체 한 놈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원래의 나였다면 몇 대는 더 때려야 죽었겠지. 새삼 육체 스탯이 얼마나 뻥튀기됐는지가 체감된다. 다만, 문제는……. 콰아앙-! 한 놈을 박살 낼 때마다 폭발이 피어난다. 분신체가 죽은 자리에서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리아키스의 증오가 발동됩니다.」 「캐릭터가 혼돈 속성 피해를 크게 입습니다.」 [악의 틈새] 패턴에서 메인 탱커의 유무가 중요한 이유다. 이 자폭형 분신체들은 본인을 죽인 대상자에게 확정적으로 딜을 입힌다. 즉, 고명한 검사든, 명성 높은 신궁이든 딜만 높아 봤자 여기선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콰아앙-! 연약한 마법쟁이 새끼였다면 한 방에 그냥 골로 갔을 만한 수준의 대미지. 온몸이 저릿하다. 고통내성이 있어도 이 정도니, 원래였으면 한 번 터질 때마다 곡소리가 터져 나왔겠지. 치이이이이익-!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흑색의 액체가 연기를 내며 녹아내린다. 상태가 안 좋은 곳은 이미 근육이 흘러내리고 속의 뼈를 드러냈을 정도. 다만, 문제는 없다. 나는 뱀파이어의 유지를 이어받은 어둠의 바바리안이니까. 「패시브 스킬 [어둠의 근원]으로 인해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심장만 보호하면 된다. 뭐, 지금 상태면 그것도 시간문제처럼도 보일 테지만……. 쨍그랑! 분신체들을 가루로 만들며 길을 뚫는 그 순간순간에도 유리병들이 수없이 날아오고 있다. 또한, 부랴부랴 뒤따르는 신관들도 힘이 닿는 대로 힐을 쏟아붓고 있다. “방금은 위험했네! 한 번에 너무 많이 해치우지 말게!” “베헬—라아아아아!!” “내 말을 들었으면 대답을 하게!” 아니, 그게 쉽겠냐고. [거대화] 상태에서는 크기에 따라 위협 수치. 즉,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 확률이 상승한다. 근데 원래부터 몸뚱이가 큰 바바리안은 그 상승폭은 미친 수준에 가깝다. 사실상 상시 도발 모드나 다름없는 셈. 뒤따르는 탐험가들이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이것 덕분이었다. 전부 다 나한테만 몰려들고 있으니까. “이보게!! 내 말이 들리지 않—” “들린다.” 그래도 일단 맥그레인의 조언대로 페이스를 조절하자, 내 바로 뒤에 있던 미샤의 오빠놈과 다른 근접 전사가 분신체를 터트린다. 다만……. “신관! 신관은 뭘 하나! 어, 어서 치료를!” 꼴랑 두세 마리 잡고 저 지랄 떠는 게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신관의 힐이 분산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보다, 페이스를 조절하면 패시브 효과를 최대치로 터트릴 수가 없지 않은가. 「캐릭터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오크 히어로의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 생명력이 절반 이하일 때부터 발동되는 이 스킬은 모든 종류의 방어 수치를 증가시켜 준다. 그리고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20% 이하일 때 최대치 효과가 적용됐지.’ 애초에 오크 히어로 정수가 필요했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무슨 색 정수던지 간에 패시브는 똑같으니까. “됐고, 둘 다 뒤로 가라.” “뭐? 나는 아직 할 수 있—” 거, 어디 딜러 따위가 숭고한 탱커의 역할을 흉내 내려고. “뒤에서도 뭐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나.” 이내 나는 두 명의 딜러를 좋은 말로 달래서 후방에 보냈다. 뒤에서 지켜보던 맥그레인도 이번엔 별말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소리쳤을 뿐.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네. 앞으로가 중요하니 조금만 더 힘내 주게.” 그래, 거기서 응원이나 하고 있어. *** 5등급 탐험가 테일론 칼스타인. 그가 최전방에서 뒤로 물러나자 한 중년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오, 자네 이제 이곳에 있는 건가?” “예, 헤르네시온 님.” 이내 테일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속한 정규 7팀의 마법사 안톤 헤르네시온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래, 부단장이 잘 판단했군. 뒤에서 뭐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이쪽도 신경을 써 줘야지. 안 그런가?” “예, 그렇지요…….” 테일론은 씁쓸한 감정을 목안으로 뒤삼키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대화를 피하기라도 하듯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바바리안이 있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수도 없이 몰려드는 괴물들. 그리고 그 괴물들보다도 괴물 같은 모습으로, 함성을 내지르며 메이스를 휘두르는 바바리안. 콰아앙-! 벌써 몇 번째일지,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폭발 소리를 들으며 테일론은 입술을 씹었다. 까드득- 부단장이 잘 판단했다고? 뒤에서 뭐가 나타날지 모르지 않냐고? 그 질문에 모른 척 고갤 끄덕인 스스로가 역겨웠다. ‘제기랄.’ 진실은 간단했다. 애초에 뒤로 물러나라고 했던 건 부단장조차 아니었다. 저 바바리안이었다. 반푼이 동생이 속해 있었던, 그 동생에 걸맞은 반쪽짜리 마법사가 꼴에 마법사라고 있었던, 군락지에서 꺼지란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팀의 일개 전사라고만 여겼던 바바리안. [뒤에서도 뭐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나.]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한 그 말에, 텔리온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렸으니까. 콰아앙-! 무기를 한 번 휘두르면 그 즉시 끔찍한 고통이 돌아온다. 아무리 몸이 날쌔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사실이 몸을 둔하게 만든단 것이다.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상황임에도 손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참으로 한심하게도. “이봐, 너무 개의치 말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을까. 옆에 있던 사내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최전선에서 물러났던,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전사 중 한 명. “고통내성이 붙은 정수들은 대부분 평가가 좋지 않다고 들었네만, 이런 식의 전술이 가능하다면 재평가가 필요하겠군.” 사내의 위로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저렇게 포션을 퍼붓는 건 고통내성이 있어야지만 가능할뿐더러, 애초에 저 바바리안과 자신은 역할군조차 다르다. 전사로서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같지만……. 몸으로 받아내며 시간을 끄는 게 아니라, 찰나의 빈틈을 노려 적의 목에 일격을 꽂아넣는 것이 자신의 역할. 콰아앙-!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자괴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 저 커다란 뒷모습을 지켜볼수록 의문이 든다. ‘어떻게 저 지경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거지……?’ 폭발에 휩쌓인 살점이 물처럼 흘러내린다. 달려드는 짐승이 훤히 드러난 뼈를 이빨로 물어뜯는다. 근데 그런 와중에서도, 저 바바리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확히 무기를 휘두른다. 몸이 굳었던 자신과 다르게.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가고 있다. ‘근데 이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고통내성이 있다고 해서, 통증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들었을뿐더러…….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다. “용맹하기로는 바바리안을 따라갈 자가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마치 죽음이란 걸 모르는 자처럼 보일 정도네.” 포션이 있고, 신관이 있고, 뱀파이어의 정수가 있다고 해서 무적인 건 아니다. 어느 유명한 탐험가가 말했듯. 미궁 내에서 죽지 않는 존재란 없다. 이는 저 바바리안도 마찬가지. ‘더 이상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겠군.’ 아이러니하게도 인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것. 이 간단한 것조차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던가. 지금 저 바바리안이 해내고 있는 일은, 절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과 달라진 주변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부단장의 혜안이 실로 대단하군. 저자가 저렇게까지 저 임무를 잘해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건만.” “저 친구 이름이 뭐였는지 아는 자가 있나? 저런 자라면 분명 어느 정도 알려졌을 터인데…….” “아까 부단장과의 얘기는 어떻게 됐지? 저런 자가 클랜에 들어온다면 굉장히 든든할 거 같네마는…….” 고통내성 같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보고 있으면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바바리안이 본인들을 살렸다는걸. “저자가 없었다면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미샤 양이라고 했나? 저 친구는 대체 정체가 뭔가?” “어어, 모르겠는뎅…….” 누군가 반푼이 동생에게도 질문했지만, 애석하게도 제대로 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마법사, 헤르네시온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바바리안족의 영웅이라 불렸던 발칸이 살아 돌아온다면, 마치 저런 모습일 것만 같군…….” 저 바바리안의 이름이 무엇인지, 벌써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끝이다! 끝이 보인다!!” “속도를 올려라!” 머지않아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테니까. *** 「필드 효과 [악의 틈새]가 소멸됩니다.」 ***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순간. 후우웅우웅—!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굉음이 피어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천장에서 검붉은 광선이 어둠의 중심부를 향해 쏘아진다. 콰아아앙—!! 흡사 종말이 도래하는 듯한 광경. 이를 보며 맥그레인이 중얼거렸다. “아슬아슬했군.” “동감이다.” 안개처럼 사라진 어둠 너머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크 군락지가 있었을 그곳에 자리한 것은 오직 파괴된 대지의 흔적뿐. 전투의 흥분으로 달궈진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아마 조금만 빠져나오는 게 늦었다면……. ‘[어둠의 근원]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뒈졌겠지.’ 사실 아슬했단 말로 끝내는 것도 웃겼다. 막판에 들어서는 영혼력. 즉, MP가 바닥나며 [거대화]가 끊긴데다가, 반대쪽으로 간 탐험가들도 전부 뒈졌는지 분신체들이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제시간에 탈출한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상황. 그럼에도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진짜 기도를 해야 하는 건 지금부터겠지.’ 나는 빠르게 생존자의 숫자를 확인했다. 정확히 30명이었다. 막판에 장비를 대가로 주고 따라온 탐험가들이 대거 죽은 탓이다. ‘즉, 확률은 30분의 1. 아니, 미샤까지 더하면 15분의 1인 셈인가…….’ 낮기야 하지만 안심하기는 어려운 확률. 나는 긴장을 풀지 않으며 다른 이들의 변화를 살폈다. 그러던 때였다. “비, 비요른……?” 미샤의 음성이 옆에서 들려온다. 어딘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 “어, 어째선지 몸이 안 움직인당…….” 이내 고개를 돌려 미샤를 보자 빳빳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미샤 칼스타인이 [먹잇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행동불가 상태에 빠집니다.」 씨발, 실화냐? 맥그레인이 정체 모를 탄성을 자아냈다. “놀랍군. 설마 자네 쪽에서 그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왜, 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냥……?” 구구절절 설명해 줄 시간은 없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어나 봤다. 미샤의 오빠놈 눈을 정확히 응시하면서. “얘를 데리고 가 줄 생각은 있나?” “그, 그건…….” “그건 곤란할 거 같네. 우리도 더 이상의 희생은 감수하기 어려운 실정인지라.” 대답하기 힘들어 하는 오빠놈을 대신해 맥그레인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다만, 나는 재차 물었다. “네 생각도 같나? 관계가 어떻든 그래도 동생인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건가?” “비, 비요른……. 뭔진 몰라도 나는 괜찮으니 그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네 목숨이 달렸는데. “그래서 대답은?” 다시 한번 강하게 묻자, 놈이 맥그레인의 눈치를 보더니 짧게 답했다. “내겐… 가족보다 이쪽이 더 중요하다.” 지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하여튼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새끼다. “귀한 시간을 낭비했군.”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통나무화 된 미샤를 업어 들고서 천으로 동여맸다. 그리고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23 : 45] 미궁이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을 시간.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깨어납니다.」 아무래도 내 생에 있어서 가장 긴 15분이 될 거 같다. 71화 바바리안 히어로 (4) [먹잇감] 이것에 걸린 대상자는 행동불가 상태에 빠진다. 일종의 저주라고 보면 쉽다. 다만, 차이점은……. ‘리아키스의 어그로가 [먹잇감]에게 고정된다는 거겠지.’ 즉, 놈이 깨어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 둬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가능성이 올라간다. 따라서 서둘러 자리를 뜰 준비를 하는 차. 맥그레인이 미샤를 보며 툭 뱉듯이 묻는다. “버리지 않는 건가?” “물론이다.” 그걸 말이라고.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 웃자, 맥그레인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탐험가의 중요한 덕목이지. 자네, 정말로 클랜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없다.” “저 여성분을 우리가 함께 지켜 준다고 해도?” “…그래도 거절이다.” “흐음, 아쉽게 됐군. 만약 [먹잇감]으로 지정된 게 자네였다면 선택지가 없었을 텐데.” 그건 그렇지. 미샤, 얘 혼자 날 업고서 15분이나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진 않으니. 클랜에 들어가는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라도 살고자 했을 것이다. 근데 역시 탐험가라 이건가? 그걸 면전에다 대고 말하는 게 존나 싸이코패스 같다. “아무튼 거래는 여기서 끝이네. 우리는 이만 가 볼 테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도시에서 보세.”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글쎄, 다른 자라면 몰라도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할 걸세. 그런 직감이 드는군.” 후, 플래그 좀 제발 그만 꽂았으면 좋겠는데. 뭔가 도움이 될 제안이라도 하나 싶어 들어 봤는데, 결국 시간 낭비였— “자네의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겠네. 뭣들 하나! 어서 시작하지 않고?” 맥그레인이 클랜원들을 보며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니얼 카마인이 [바람의 가호]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이동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타로테스 피안이 [항해]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보다 빠르게 재생됩니다.」 「애런 디플레인이 [재생의 불꽃]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육체 재생력이 대폭 증가…….」 「…….」 「…….」 이게 의리라는 건가? 그곳에서 빠져나오며 본인들도 MP가 거진 바닥 났을 터인데,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다니. 미샤의 신변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야 어쨌든, 이럴 땐 순순히 고맙다고 하는 게 맞겠지. “…고맙다.” “고맙기는, 죽지나 말게. 자네들이 죽어 버리면 놈이 우리한테 오지 않겠나?” 실로 효율충다운 말을 뱉은 맥그레인은 이내 클랜원들을 이끌고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하긴 나야 얘를 짊어지고, 배낭이 떨어지지 않게 고정하는 게 끝이지만 쟤네는 아닐 테니까. “그럼 우린 먼저 가 보지.” “그러게나. 자네가 먼저 가면 우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겠네.” 정말 끝까지 합리적이구나 아저씨는. 더 이상 속상할 구석도 없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미샤를 업고서 한 방향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오오오오오오—!] 머지않아 저 멀리서 놈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 쫓기고 있다. 바바리안의 등 뒤에 짐짝처럼 매달린 채로.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인가 뭔가 하는 무서운 괴물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다. “후욱, 후욱, 후욱…….” 몸이 뜨겁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모닥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럼, 그가 질주하며 내뱉는 열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그오오오오오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뒤를 볼 순 없다. 하지만 들린다. 저 살 떨리는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따라서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듣지 못했는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크게 불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말해라.” “이제 그만해랑.” 나도 눈치가 있다. 저 괴물이 쫒아오는 건 비요른이 아니라 나다. 그래서 모두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던 거다. 심지어 피가 이어진 내 가족조차도. 존재 자체가 폐가 되니까. “무슨 뜻이지?” 그가 말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왜 괜한 질문으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느냐는 듯 평소와 같은 말투로. 따라서 나도 평소처럼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지 않냥. 이러다 너까지 죽을 거당.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지 않냥?”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크게 외쳤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당! 게, 게다가 마지막에 내 평생소원도 이뤘고!” 대답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 “웃기는군.” “…뭐?”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 어딘가 모르게 냉소적인 목소리. 무심코 실수를 한 듯해 나도 모르게 변명의 말이 나왔다. “마음에도 없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냥 버려질까 봐 무서운 거 아닌가.” 순간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목소리가 더 커졌다.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냥! 난 그저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고 싶을 뿐이당!” “그래서 그 감정이 네 목숨보다 중요한가?” “…….” 고작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 바바리안은 왜 이렇게 말재간이 좋은 걸까. 모르겠지만, 그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말한다. “괜히 돌려 말하면서 귀찮게 간 보지 말고, 살고 싶으면 그냥 살려달라고 해라. 그럼 적어도 살 가능성이라도 있으니까.” 바바리안다운 단조로운 어휘들. 그래도 뭘 말하려는지 알 것도 같다. 마녀의 숲에서 조난당하고서 지금까지, 그는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 주었으니까. ‘이런 내가 한심해 보였겠지…….’ 그는 항상 말했다. 살고 싶으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자포자기하며 도와주겠단 사람에게 우울함을 토로하는 건 아닐 것이다. “비요른.”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 슬슬 알 것도 같았다. 내가 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날 살려 주면 평생 널 따라다니면서 돕겠당.” 정말로 버려지는 게 무서웠다면. 버려지지 않도록 무언가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게 올바른 순서였다. 다만……. “그건 전에도 한 번 들었던 얘기 같은데.” 그의 대답에 실수를 깨닫고서 머리가 멍해졌다. 어, 그럼 대체 뭐라 말해야 하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살아서 돌아가면 이번 탐사에서 번 돈을 전부 너한테 주겠당! 이거면 어떠냥!”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한결 낫군.” *** “마,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당…….”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 나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며,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후, 이 정도면 멘탈은 케어된 거 같고. 얘도 생각이 있으면 더 귀찮게 구는 일은 없겠지. ‘문제는 지금부터인가…….’ 고개만 틀어 재빨리 뒤를 한 번 확인한다. 수백이 넘는 혼돈의 정령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게 보인다. 물론, 애네들은 크게 문제가 아니다. 한번 어그로가 끌리면 끝까지 따라온단 특징이 있긴 하지만, 이동속도는 느린 편이니까. 저 씹새끼와 달리. [그오오오오오오—!] 최소 3km는 거리를 벌려 두고 시작했을진대, 벌써 그 형체가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다. 이대로면 5분 이내에 따라잡힐 게 분명하다. 물론, 지금 속도가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바람의 가호]의 지속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항해]의 지속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광전사]의 지속시간이 종료되…….」 「…….」 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다. 드자르위 클랜 측에서 걸어 준 각종 버프가 순차적으로 종료되기 시작했다. 서서히 빠져나가는 몸에 깃든 활력. 어느샌가 스스로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느려진 걸음걸이. ‘길어 봐야 3분 정도겠군.’ 변수를 재고하며 계획을 수정한다. 물론, 크게 바뀐 건 없다. 결국,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뿐이니까. 최선을 다해 뛰는 것. 투둑, 투둑, 투두둑-. 예상대로 약 2분가량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놈이 바로 지근거리까지 왔다는 증거. 실제로 앞을 가로막는 혼돈의 정령들도 그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 그러나 구태여 뒤를 확인하진 않았다. 단지 그때가 왔음을 수긍하고 아껴 두었던 그것을 꺼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 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순식간에 불어난 근육과 골격. 이와 비례해 팔과 다리 역시 길어졌다. 또한 육체 수치가 상승하며 전반적으로 전투력 지수도 상승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동속도의 증가겠지. 쿠웅! 쿠웅!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묵직한 진동이 함께하는 대신, 보폭 자체는 이전보다 한층 넓어졌다. 다만 애석하게도 오랜 시간 유지는 못 한다. [악의 틈새]를 빠져나오며 영혼력, 즉, MP가 완전히 바닥났던 탓이다. ‘이 상태론 길어 봐야 2분 내지 3분 정도인가.’ 고인물로서의 지식을 총동원해 남은 시간을 유추한다. 영혼력 회복 속도가 증가하는 [항해] 버프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1분도 유지가 안 됐을 터. “미샤, 시간은?” 짧게 읊조리자, 미리 손에 시계를 쥐어놨던 미샤가 다급히 대답한다. “어어, 56분이당!” “정확히.” “196초 남았당!” 그래, 3분 조금 넘게 남았단 거구나. 이 빌어먹을 미궁이 닫힐 때까지. “심심하면 그거나 보면서 숫자나 세라.” “아, 알겠당! 백구십, 백팔십구…….” 미샤가 숫자를 세며 타이머 역할을 해 주는 사이, 나는 막판 스퍼트에 돌입했다. 이제는 입에 딱 달라붙은 기합을 뱉으며. “베헬—라아아아아아!!” 조상신이 내 등을 떠밀어 주듯, 빠르게 나아가는 육신. “백칠십, 백육십구…….” 초침이 딸깍일수록 떨어져 내리는 빗물의 양이 점점 많아진다. 또한, 앞을 가로막는 적의 숫자도 늘어난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하는 일도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무작정 돌진하며 놈들이 따라오든 말든 뛰는 데만 집중했지만……. 이제부터는 길까지 뚫어야 한다. “조금 따끔할 거다.”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을까? 아니면, 어찌 됐든 자기 역할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겼을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미샤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혼돈의 정령이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위치가 침식됩니다.」 성수를 바른 메이스에 얻어맞은 혼돈의 정령이 터져 나가며 점액을 흩뿌린다. 하나 피부에 닿았을 터인데도 미샤는 계속해서 숫자를 외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듯. “배, 백육십오!” 따라서 나도 내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혼돈의 정령들을 박살 내고, 때로는 거대한 육신을 도약해 머리 위를 뛰어넘는 등. [그오오오오오—!] 저 씹새끼와 거리를 벌리는 데 모든 사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백이십, 백십구, 백십팔…….” 하도 점액을 뒤집어쓴 탓인지 메이스를 쥔 오른팔이 저려온다. 씨발, ‘마비’ 판정인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방패와 메이스의 위치를 바꿨다. “구, 구십!!” 돌연 뜨거운 불길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브레스겠군.’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 패턴이 내 뒤로 떨어진 만큼 내게 어그로가 끌렸던 혼돈의 정령 중 상당수가 그대로 터져 나갔을 터. 하지만 순전히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놈이 브레스를 썼다는 말인즉, 내가 놈의 공격 범위 내에 들어섰단 뜻일 테니까. “칠십오…….” 남은 시간 1분 15초. 브레스에 이어 처음으로 직접적인 공격이 내게 가해졌다. 콰앙-! 내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는 거대한 앞발. 한껏 달궈진 바바리안의 전투 신경이 작동하며 제때 옆으로 피해 낼 수 있었지만……. “칠십사…….” 어느샌가 정면을 바라보니, 놈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 보인다. 직경 30m에 달하는 비대한 몸체. 보는 것만으로도 전의를 꺾는 그 거대한 형체엔 오크 히어로의 ‘투쟁심’도 소용이 없었다. 하기야 투쟁심이라는 것도, 어찌 비벼 볼 여지가 있는 놈에게나 의미 있지 않겠는가.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확실히 그럴 만도 하다. 고인물의 지식을 활용하고 뭐고, 지금 상태에서 저놈을 상대로 생존을 보장할 방법은 없다. 본능적으로 이를 느꼈는지, 미샤도 더 이상 숫자를 외우지 않았다. “비, 비요른. 이제 됐당.” 후, 또 시작인가. 징징거리는 건 졸업하기로 한 줄 알았는데. [그오오오오오—!!] 내 면상에 대고 포효를 내지르는 놈을 보며, 나는 즉시 방향을 틀어 뒤로 도망쳤다. 뒤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내 말이 안 들리냥! 어서 날 두고 너라도 도망치란—” 나는 단호하게 읊조렸다. “그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이제 와서 버리고 튀라고? 그럼 내가 투자한 서리혼령 가락지에 대한 값은 누가 치르는데? “내가 대체 뭐라고…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냥……?” 혼돈의 정령 한 무리를 뛰어넘으며 짧게 답했다. “이미 약속했지 않나.” 동료 서약. 서로가 서로를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적어도 반지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히 부려먹지 못하면 손해가 막심하다. “약속?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나랑 같이 죽겠단 거냥!” 미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지만……. “누가 죽는단 거냐?” 난 살 거다. 효율충답게 내가 챙길 수 있는 보상이란 보상은 전부 챙겨 들고서. 이 미궁 밖 도시로 돌아갈 거다. 물론, 개같이 힘들기야 하겠지만……. 딱히 유난스러울 것도 없다. 애초에 난 리스크 없이 원하는 것을 얻어 본 적이 없단 말— 콰앙-! 머리 위에서 거대한 앞발이 떨어진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조금 늦었다. “비, 비요른! 너, 팔이……!” 메이스를 쥐고 있던 팔이 뜯겨 나갔다. 발톱에 당했다거나 한 게 아니라, 정말 단어 그대로 뜯겨 나갔다. 다만, 지금 신경 쓸 건 다른 부분이겠지. “시간은?” “나, 나를 버려라. 안 된당. 너마저 죽을 게 분명…….” 패닉 상태에 돌입한 듯 떨리는 목소리.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리며 외쳤다. “미샤 칼스타인! 시간을 말해라!” “…60초! 60초 남았당!!” 그래, 1분만 버티면 되는 건가. ‘날로 먹는 건 여기까지겠군.’ 이내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저 거대한 씹새끼를 바라보았다. 본능은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판단했다. 이만큼 거리가 좁혀진 이상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자, 잘 생각했당. 내가 죽으면 저놈도…….” 도망쳐 봤자 결국 놈의 공격이 닿는 거리다. 방금 전만 봐도 그렇다. 만약 등 돌려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면, 팔을 잃지 않고서 피할 수도 있었을 터. 그렇기에 달려나갔다. “꺅! 무, 무슨 짓이냥!” “징징거릴 틈이 있으면 시간이나 세라.” 미샤의 투정을 일축한 채로. 조상신의 가호가 내 운명에 조금이라도 함께하기를 바라며. “베헬—라아아아아아!!” 저 거대한 씹새끼의 반대 방향이 아니라, 놈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찰나. “오, 오십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미샤가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또한, 저 거대한 씹새끼가 흉악한 아가리를 벌리며 불길을 토해냈다. 내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오십사…….” 만약 내가 본능에 이끌려 도망쳤다면. 그랬다면 내겐 미샤와 함께 통구이가 되는 미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 오십삼!!!” 제때 놈의 가랑이 사이로 슬라이딩하며 반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십이!!!” 슬라이딩한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놈이 무게 중심의 축이 되는 뒷발을 내리찍는다. 쿠웅-!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하지만 그 즉시 놈이 뒤로 물러나더니 앞발을 이용해 할퀴어 온다. “오, 오, 오, 오십…….” 고개 숙여 피했다. 그야 아까 드자르위 클랜이 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면서 공격 패턴은 숙지했거든. “사십구.” 내려찍기. 메뚜기처럼 옆으로 폴짝 뛰며 피한다. “삼십.” 할퀴기. 벌레처럼 바닥에 납짝 엎드리던가, 가랑이 사이로 굴러서 피한다. “이십육…….” 휘둘러지는 놈의 꼬리는 온 힘을 다해 점프. 드자르위 클랜의 전사들이 몇 시간 동안 놈을 상대로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다. 사실상 브레스나 암흑구체 등을 제외하면 놈이 가진 육탄 공격 수단은 이 셋이 전부. 뭐, [먹잇감]을 해치우고 나면 새로운 패턴을 꺼내게 되지만……. “이십.” 어림도 없지. [그오오오오오오—!] 놈이 세찬 포효를 내지른다. 화가 났는지 조금 더 공격이 흉포해졌다. “십칠.” 변칙적인 공격을 하고 싶었는지, 한 번 더 연속으로 꼬리를 휘둘러오는 놈. “십육.” 줄넘기를 하듯 위로 도약했다. 근데 높이가 조금 모자랐을까 퍼억-! 발목이 꼬리에 부딪히며 몸의 균형이 뒤틀린다. “십오… 꺄악!” 허공에서 회전하며 추락하는 신체. 어떻게든 바닥을 뒹굴며 기민하게 일어섰지만, 한쪽 발목이 완전히 아작났다. 그런 와중에, 놈이 앞발을 내려찍는다. “…….’ 한 번 더 옆으로 굴렀다. 그러면서도 직감했다. 한발 늦었구나. 이거 잘하면 뒈질 수도 있겠— 콰앙-! 씨발, 대체 뭐지? 놀랍게도 정말이지 간만에 불길한 예감이 빗나갔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때마침 절반으로 줄어든 육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거대한 족적이 코앞에서 보인다. 아마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내 머리통은 터진 수박이 되어 저기에 흩뿌려져 있었겠지. 타닷. 아찔함을 느끼며 신속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작난 왼쪽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야 무시하면 그만. ‘이제 10초인가.’ 아까 꼬리에 맞고 추락하며 기절한 듯한 미샤 대신 속으로 숫자를 셌다. ‘9.’ 상황은 좋지 않았다. ‘8.’ 어느샌가 이만큼이나 모여든 혼돈의 정령 새끼들이 내 행동반경을 좁히고 있다. 거기에 발목 다 아작나며 몸도 둔해졌고. 따라서— ‘7.’ 놈이 내리찍은 앞발 위에 올라탔다. ‘6.’ 다만 놈이 떨쳐내려고 개지랄을 떨어댈 게 분명했기에……. ‘5.’ 한짝 남은 팔과 바바리안 특유의 튼튼한 이로 놈의 가죽을 꽉 붙들어 맸다. 잘될 턱이 없었다. 콰앙-! 놈이 한 번 더 바닥을 내리찍자, 반동으로 인해 튕겨져 나가는 육신. 놀랍게도 놈은 체공 상태의 나를 다른 쪽 발로 기민하게 낚아챘다. 피쉬이이이이—. 마침내 사냥에 성공하자 기쁜 듯 콧김을 내뿜는 녀석. 벌어진 아가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저 흉악한 이빨로 꼭꼭 씹으면 라이티늄제 갑옷이고 뭐고 한 입거리 뚝딱이겠지. 하지만……. “늦었어 새끼야.” 여긴 미궁이 있고, 몬스터가 있으며, 죽은 몬스터는 드랍템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세계 아니겠는가.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눈앞이 아른하게 흩어진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어둠. 그 중심부로 희미하게 보이는 놈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확실히 게임 내에서 보여 주던 포스만큼이나 개같은 새끼였다. 2페이즈로는 넘어가지도 않았음에도, 현재의 나로선 신명나게 쫓기고 두들겨 맞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만약 다음에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오오오오오오—!!!!!] 그땐 다를 것이다. ***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눈을 떴을 때, 빛이 보였다. 흐릿한 날씨였지만, 그럼에도 미궁과는 비할 수 없는 찬란한 빛. ‘살았구나…….’ 빛의 온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미샤는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비요른! 비요른은 어떻게 된 거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바라본 차원광장에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신관! 신관을 불러줘라!!” “조, 조금만 버텨! 도시에 돌아왔다고!!” 여기저기에서 속출한 부상자. 그들이 부르짖는 도움 요청.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모르겠네, 길드 직원에게 물어봐도 바쁜지 대답도 안 해주더군.” 이번 사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웅성거리며 의문을 키운다. 그야 당연하다. 미궁이 폐쇄되며 극적으로 살아남는 경우는 흔하게 있지만, 한 번에 이렇게까지 많은 부상자가 속출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니까. “자네 들었나? 3층에 계층군주가 나타났나는 모양이더군.” “뭐? 계층군주?” “…그럼 저들은 전부 3층에 있던 탐험가들이겠군.” 미샤는 두통이 가득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보게! 자네도 3층에 있다가 온 모양인데, 가만히 앉아서 쉬—” 한 남성 탐험가가 다가왔지만, 미샤는 대답도 않고 그를 밀쳐내며 걸었다. “비켜랑.” 쉬는 것? 치료를 받는 것? 다 좋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다. 그래서 인파로 가득한 차원광장을 마냥 헤집으며 걸어나갔다. 그러던 때였다. “저 친구, 곧 죽겠군.” “아무리 바바리안이어도 저 상태로는…….” 바바리안. 돌연 근처에서 들려온 그 단어에 미샤는 홀린 사람처럼 그리로 향했다. 구경하듯 모인 인파를 밀쳐내며 중심부로 향하니, 그들 말대로 한 명의 바바리안이 있었다. “비요른…….” 미샤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뜯겨 나간 한쪽 팔, 기형적인 형태로 꺾인 왼쪽 발목. 그리고 온몸을 덮고 있는 검은 점액질. 자신이 기절한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분명 필사적으로 싸웠던 거겠지. 살기 위해서, 언제나 그래 왔듯이. “가까이 가지 말게! 신관이 오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다들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만 있는 이유를 알 거 같다. 미샤는 대답도 않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귀를 가져다 댔다. 점액들이 볼에 닿으며 쓰라렸지만……. 미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쌔액- 쌔액-. 단잠에 빠진 아기처럼 규칙적으로 뱉는 숨결. “하아, 그냥 자고 있던 거였냥. 놀랬잖냥…….”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진다. 하나 미샤는 힘을 내어 그의 몸에 묻은 점액들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냈다. 그가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신관이 오고 있다니까 걱정 말고 쉬어랑.” 이내 얼굴에 가득 묻은 점액들을 닦아내자, 비요른의 표정도 제대로 보였다. 무척이나 편안하게만 보이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마쳤다는 듯이. 문득, 한 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바바리안족의 영웅이라 불렸던 발칸이 살아 돌아온다면, 마치 저런 모습일 것만 같군…….] 비요른이 길을 열 때 옆에서 감탄하던 마법사가 했던 말이었다. 물론 미샤는 발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거 같당.” 영웅이 있다면, 분명 이런 모습일 것이다. 72화 고스트 버스터즈 (1) 낯선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 도시 특유의 음울한 하늘이었으니……. ‘여긴 임시로 만든 환자용 천막 같은 거겠군. 나 말고도 부상자들이 많았을 테니까.’ 실제로 옆을 보니 병상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상황을 파악했다. 정적이 감도는 천막 내부. 사용감 있는 병상은 대부분 비어 있다. 그 말인즉. ‘시간이 꽤나 지났나 보군.’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도 정해진다. 일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확인하는 것. 근육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는 차, 복부에서 묵직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정체를 깨닫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 갔나 했더니…….’ 미샤가 내 배를 베고서 자고 있었다. 그릉거리는 특유의 코골이 소리까지 내가며. 제 딴에 간호해 주겠다고 옆을 지키던 듯해 기특한 한편, 이래서야 뭔 의미가 있는가도 싶다. ‘하긴, 얘도 피곤했겠지.’ 카루이의 사제 엘리사. 마녀의 숲에서의 조난기.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와의 추격전. 그간 겪은 일을 떠올리면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하지만……. “미샤, 일어나라.” 지금 당장은 내 궁금증이 우선이기에 고민 없이 미샤를 흔들어 깨웠다. “응? 으응… 비, 비요른! 일어났냥! 몸은? 몸은 어때, 괜찮냥?” “보다시피 멀쩡하다.” 아작났던 왼쪽 발목도 잘 움직이고, 뜯겨 나갔던 팔도 원상태로 복구됐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질문. “설마, 최상급 포션을 사용했나?” “아니, 신관이 와서 치료해 줬당.” “치료비는?” “거, 걱정 마라. 기, 길드에서 재난 지원금이 나와서 얼마 안 한당…….” 아니, 네가 그러니까 걱정이 되는데. “그래서 얼마지?” “…30만스톤이당.” “그렇군.” 후, 그래도 최상급 포션보다는 훨씬 싸구나. 신관이래서 걱정을 했는데, 길드의 지원금이 나름 넉넉하게 나온 모양. “왜 그런 표정을 짓나? 잘했다.” “하지만 비요른은 돈을 좋아하지 않냥…….” 어, 확실히 그건 그런데. 얘한테 내 이미지는 대체 어떤 거지? “아무리 그래도 돈이 몸보다 중요할 리 없지 않나.” 고작 뭉개진 살점을 회복시킨 게 아니다. 잘려 나간 단면을 이어붙인 건 더더욱 아니다. 뼈째로 뜯겨 나간 팔, 그것도 미궁에 버려 두고 온 팔을 고치는 과정이었다. ‘분명 자연 재생력으로는 답도 없었겠지.’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지웠다. 지난날 레이븐과의 실험으로 재생력의 한계를 시험해 봤을 때, 잘린 손가락이 자라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지 않던가. 아무튼, 이쯤에서 두 번째 질문. “그래서 미궁에서 나온 지 얼마나 흘렀지?” “6시간 정도당.” 음, 어쩐지 천막 밖이 아직도 환하더라니. 하루가 통째로 지나가서 그런 건 아니었구나. “배낭은?” “멀쩡하당. 물론 그 안에 것도!” “마석은?” “내가 네 것까지 합쳐서 다 돈으로 바꿔 놨당.” “기절해 있는 동안 날 찾아온 자는 없었나?” “아, 히쿠로드네가 다녀갔었당!” “…난쟁이놈이?” 고개를 갸웃하자 미샤가 천천히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핵심만 말하자면, 한 5시간쯤 전에 혹시나 해서 이곳을 찾은 히쿠로드네 일행과 재회했다는 것인데……. “세 사람 다 멀쩡하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그들은 어디 갔지?”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며 지금은 피곤하다면서 자러 갔당.” “그렇군.” 서운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반대 상황이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어차피 여기 남아 있는다고 내가 빨리 깨어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밀린 얘기야 만나기로 한 이틀 뒤에 나누면 될 테고. “그럼 여기서 떠나려면 뭘 더 해야 하지?” “그냥 짐만 챙겨서 나가면 된당. 귀찮은 일들은 내가 미리 다 해 놨당.” “그렇군.” 이내 담요를 걷고 일어나려 하는데 미샤가 황급히 제지해 온다. “잠깐, 일어나지 마랑!” “……?” “우, 우선 이것부터 입어라…….” 별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 미샤가 등 돌려 딴 곳을 바라보는 사이, 탁자 위에 고이 개어져 있던 새 옷을 입었다. 그나저나 옷까지 미리 사다 주다니. 평소 칠칠맞아 보이는 것과 달리 섬세한 구석이 있구나. “옷은 잘 맞낭?” “잘 맞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많이 작지만……. 애초에 이 도시에서 맞는 사이즈의 옷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서. 여하튼 천막을 나섰을 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미샤, 넌 숙소가 어디지?” “8구역이당.” “그럼 같이 가면 되겠군.” 방향이 같았기에 같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자니, 새삼 주변과 우리의 행색이 대비된다. 무겁고 딱딱한 금속 갑옷이 아니라, 깨끗한 일상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비요른, 뭘 그렇게 보냥? 어서 가장, 피곤해 죽겠다.” 깨끗한 거리를 30분쯤 걸으니 숙소가 나왔다. 참고로 미샤의 숙소는 여기서 한 10분 정도 더 가면 있다는 모양. “생각보다 가깝군.” “그러게 말이당. 왜 예전엔 몰랐지?” “아무튼 이제 가 봐라. 너도 피곤할 거 아닌가. 오늘은 고마웠다.” “자, 잠깐만!” 빠르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여관에 들어서려는 차, 미샤가 내 팔목을 잡아온다. “내가 당장 알아야 할 게 남았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게 아니면 뭐. 어서 용건을 말하란 눈빛을 보내자 미샤가 피식 웃더니 내 팔목을 놓았다. “됐당, 어차피 해 봐야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하냐면서 혼낼 거 아니냥.” “똑같은 얘기?” “그럼 난 갈 테니, 내일 보장!” 뭐라 되물을 새도 없이 미샤가 달려서 사라졌다. “내일?” 다 같이 모이기로 한 건 내일모레 아니었나? 마지막 말이 조금 의문스럽지만, 생각하기 귀찮았기에 어서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충 몸을 씻은 뒤 1층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매번 그랬듯, 침대에 눕고서야 실감이 났다.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왔군.’ 살아서 돌아왔다. 씨발. *** 다음 날 정오.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지간하면 그냥 무시하고 자려 했는데, 하도 끈질겨야지. “…미샤?” “역시 자고 있을 줄 알았당.” “여긴 왜 왔지? 약속 시간은 내일 밤이었을 텐데?” 내 투정 섞인 질문에 미샤가 피식 웃더니 테이블 위에 보따리를 펼친다. 뭔가 해서 봤더니 음식이다. “빨리 와서 앉아라.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자면 몸 상한당.” 아니, 바바리안은 그딴 거 없는데?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응시하자, 미샤가 결국에 내 팔을 잡고는 끌어당겼다. “잔말 말고 와랑. 자더라도 먹고서 마저 자면 되지 않냥?” 한두 끼 거른다고 뭔 일이 생기겠느냐마는, 그래도 성의가 있기에 순순히 말에 따랐다. 메뉴는 달걀을 곁들인 볶은 채소와 구운 고기. “어떠냥?” “…맛있다. 설마 직접 한 건가?” “그럼 어디서 이런 걸 팔겠냥?” 거,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될 것을. 여하튼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설마 요리를 잘할 줄이야. “처음엔 돈 조금 아끼려고 직접 해먹었는데, 나름 재밌어서 아직까지 하는 중이당.” “음, 근데 여관에 묵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건 그런뎅, 어쩌다 보니 주방장이랑 친해져서 잠시 쓴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거든.” “그렇군.” “나중에 비요른도 기회가 되면 해 봐랑. 생각보다 돈도 많이 아낄 수 있고 좋당.” 요리를 하라고? 얘도 정말 바바리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니면 그냥 바바리안을 잘 모르는 건가? “요리를 하는 건 전사의 수치다.” “그, 그러냥?”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샤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제안을 해왔다. “정 그러면 내가 해줘도 되는뎅…….” 얘는 또 뭐래. “됐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그냥 사서 먹는 게 편하다.” “그, 그렇겠징?” “그나저나 호수는 어떻게 알았나? 거기까진 알려 주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아, 그거? 여관 주인한테 바바리안 어딨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알려 주던데?” “…그렇군.” 이후 잡담을 나누며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있자니 금방 그릇이 비었다. “그럼 어쩔 거냥? 더 잘 거냥?”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시 상업지구에 좀 다녀올까 한다.” 원래는 내일 밤까지 쭉 자려고 했지만, 다시 누워도 영 잠이 오지 않을 거 같다. 일종의 강박증이다. 당장 지쳐 쓰러질 거 같은 게 아니고서야, 해야 할 일들을 미뤄 두고 쉬는 건 스스로가 용납치 못한다. “차라리 잘됐다. 미샤, 너도 같이 가지.” “엥? 나도? 난 돌아가서 마저 자려 했는뎅…….” 미샤가 당혹스런 얼굴로 말꼬리를 흐린다. 경험상 이럴 땐 강하게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날 깨운 건 너 아니냐. 책임을 져라.” “히잉, 알겠당. 나도 어차피 장비를 맡기러 가긴 해야 했으니까…….” 어딜 도망가려고. *** 우선 획득한 장비를 싹 처분했다. 일찍이 드자르위 클랜에 200만 스톤 상당의 보호비를 장비로 지불한 터라 기대만큼 짭짤하진 않았다. ‘이 중에 한스 무리한테 얻은 건 따로 5등분을 해야 할 테고…….’ 그래도 종교쟁이 3인방의 장비와 각종 소모품을 팔고 나니 꽤나 많은 돈이 모였다. 셋 중 한 명이 확장형 배낭 오너였던 게 컸다. 뭐, 그만큼 낼 돈도 많았지만. “…수리비가 50만 스톤이라고?” “라이티늄제 장비잖소. 굽거나 휜 정도라면 모를까, 이렇게 부식이 심해서야 어쩔 수 없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합쳐서 400만 스톤짜리 장비를 수리하는데 50만 스톤을 달라니? 이거 바바리안이라고 호구 잡는 거— “비요른, 너무 억지 부리지 마라. 저분이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닌뎅…….” 속이 쓰렸지만 5년 차 탐험가인 미샤가 저러는 걸 보니 일반적인 가격이긴 한 모양. 따라서 그냥 지불했다. ‘…대체 골손실이 얼마인 거지?’ 효율충 게이머라면 근손실보다 무섭다는 것이 다름 아닌 골드 손실이다. 나는 하나씩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메이스는 팔 한쪽이랑 같이 미궁에 두고 왔고, 도중에 상급 포션도 한 번 쓴 데다가, 치료비로 30만 스톤에, 수리비가 50만 스톤…….’ 생각할수록 배가 아파온다. 보호비로 200만 스톤 상당의 장비만 안 넘겼어도 이 정도야 웃어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비요른, 너무 그러지 마랑. 돈이라면 내가 앞으로 열심히 벌어올 테니까…….”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사실 이번 탐사에서 두 번째로 큰 소득이 바로 얘 아니겠는가. 아, 물론 첫 번째는 오크 히어로 정수다. ‘포션 같은 소모품도 많이 얻었으니, 사실상 나중에 쓸 돈도 많이 굳은 셈이고…….’ “비요른, 뭐 하냥? 어서 들어가지 않고.” 이내 상념을 끝내고서 미샤와 함께 여관에 들어섰다. 미샤나 내 숙소는 아니고, 상업 지구 컴멜비에 위치한 한 여관. “설마 승강장의 마차가 끊겼을 줄이야.” “그러니까 내가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댔지 않냥?” “알았으니까 잔소리는 그만 좀 해라.” 여관에 들어선 나는 카운터에 방 두 개를 요구했고, 미샤한테 등짝을 맞았다. “미쳤냥! 하루에 얼만지 알고! 하나만 잡아랑.” “…하나만 잡으라고?” 보통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여기가 라비기온인 줄 아냥! 이런 데는 보통 하룻밤에 만 스톤이 넘는데도 많당!” “그렇군. 방은 하나면 될 거 같다.” 이제 보니 등짝을 맞을 만도 했다. 그나마 싸 보여서 왔는데 1박에 9천 스톤이라니? 도시 중심부라고 물가가 미쳤다. 지난번 내 한 달 치 식비가 다해서 2만 스톤이 조금 안 됐었는데. ‘얘가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래도 방 자체는 비싼 값어치를 했다. 내가 묵던 고시원 형태가 아니라, 거실과 침실, 그리고 욕실이 분리된 구조. 창문은 물론이고 거실엔 테라스까지 작게 딸려 있으며, 방에서는 은은하게 꽃향기도 난다. “비요른, 이것 봐라! 아르띠안 공방 비누당! 이런 걸 공짜로 쓰게 해 주다닝!!” 처음엔 쓸데없이 돈 낭비를 했다며 핀잔을 주던 미샤도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홀라당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왔을 땐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비요른, 우리 정말 앞으로 열심히 벌장.” 웬 호들갑이냐고 생각했지만, 널따란 침대에 몸을 뉘이고서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열심히 벌자.” 후, 침대가 이 정도는 푹신해야지. ‘언제쯤 매일 이런 침대에서 잘 수 있으려나…….’ 새삼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게 느껴진다.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도시. 이곳에서 지금보다 더 사람답게 살려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약탈자와 몬스터를 죽여야 하는 걸까. 드르렁! 깊게 고민할 새도 없이 스르륵 눈이 감긴다. *** 대부분이 잠든 그 시각. 오늘이 아쉬운 자들이 모인 술집은 여느 때와 같이, 아니, 어쩌면 평소보다도 시끌벅적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3층에 나타난 계층군주 얘기 말인가?” “그래, 그놈 때문에 드자르위 클랜에서 서른 명도 넘게 죽었다더군.” “서른 명이 뭐 대수인가? 내일이면 길드에서도 공표하겠지만 총 사망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데.” “그래서 계층군주를 소환한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은 건가?” 탐험가라면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을 안줏거리. 다만 모두가 아는 소식 외에도, 호사가들에 의해 서서히 알게 모르게 퍼지는 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 자네들 그거 아나? 내가 생존자 중 한 명한테 들은 얘긴데 말일세……. 드자르위 클랜에서 그만큼이나 살아남은 것엔 한 명의 활약이 유독 컸다더군?” “한 명이라면, 혹시 철사자 맥그레인 부단장을 말하는 건가?” “아닐세, 내가 듣기론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3층 탐험가라고 하더군.” “흐음, 3층 탐험가 중에 그럴 만한 자가 있던가? 그자의 이름이 뭐지?” “그게 말일세…….” 얀델의 아들 비요른. 고작 3개월 차에 3층에 진입한 바바리안. 그가 수많은 이를 위기에서 구해 내며 보여 준 믿기 어려운 용맹은 어떨 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어떨 땐 조금 과장기가 섞이며 퍼져 나갔다. 다만 그럼에도 각 이야기의 끝맺음은 한 가지로 귀결됐다. “얘길 들려주신 마법사님께서는 그 바바리안에 대해 이렇게 말하길 주저하지 않았네.” “뭐라고 말인가? “아직 나이가 어려 영웅의 위업을 이루진 못하였어도, 그 행적을 따르는 것만은 분명하니, 그 누구보다 용맹하고 위대했던 영웅의 이름을 빌려…….” 이명異名.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탐험가들만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이름. “작은 발칸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겠다고.” 그 이명만큼은 빠지지 않고 곳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경고: 캐릭터에게 특수 이벤트가 발생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73화 고스트 버스터즈 (2) 고즈넉한 어느 집무실. 한 사내가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작은 발칸이라…….” 간만에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그야 3개월 만에 이명을 얻은 탐험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적어도 그가 이 임무를 맡은 이후로 세 번도 채 되지 않는다. “재미있군.” 심지어 길드를 통해 확인한 정수 내역도 흥미롭다. 보통의 탐험가는 9등급 정수부터 채워 가며 천천히 단계를 밟는다. 하지만 이놈은 어떤가? 시체골렘, 뱀파이어, 그리고 이번에 먹었다는 오크 히어로의 정수까지. “이 정도면 운이 좋다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단 말이지.” 소위 말하는, 치트키를 쓴 것만 같은 수준. 뭐, 역사를 되짚어 가면 버금가는 발자취를 남긴 자들을 제법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엔 특별한 운명과 재능, 그리고 운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니까. “과연 이놈은 어느 쪽이려나…….” 그런 이들 중 대부분 영웅, 혹은 위인으로 후대에 기록되며 칭송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 바바리안은 어떨까. 적어도 지금까지만 보면 가능성만큼은 충분해 보인다. 물론, 그 전에 근본이 증명되어야 하겠지만. “더 약아지기 전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이번 일은 평소보다 한층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 룸 형식으로 된 여느 고급 주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드워프 전용 의자에 앉은 난쟁이놈과 드왈키가 반갑다는 듯 맞아준다. “오, 자네들 왔는가! 어서 앉게! 하하핫” “정말이지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오.” 일단 함께 온 미샤와 맞은편에 앉았다. “로트밀러는?” “아직일세. 곧 오지 않겠나?” 실제로 음식을 주문하고, 잠시 잡다한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로트밀러가 도착했다. 그때 시간은 저녁 8시.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오는 건 무슨 직업병 같은 건가? “비요른, 칼스타인 양. 무사해서 다행이네.” “아니당. 로트밀러야말로 무사해서 다행이당. 그때 도망치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뎅…….” “후, 그조차도 죄스러울 뿐이네, 만약 그때 내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자네들을 그곳에 두고 올 일도 없었을—” “그만.” 냅두면 한도 끝도 없이 궁상을 떨어댈 듯했기에 도중에 말을 끊었다. “일단 앉는 게 어떻나. 음식도 나왔는데.” “…그러지.” 이내 로트밀러까지 착석하자 정말이지 간만에 팀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팀이 미궁에서 분해되는 지랄이 났는데 전부 살아서 복귀했단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 “정말로 신께서 우릴 보호하신 게 틀림없네.” 로트밀러의 주책 어린 말과 함께 본격적인 대화가 진행됐다. 주된 주제는 당연히 서로의 근황이었다. “그래서 히쿠로드, 너희 쪽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 그거 말인가?” 내 질문에 난쟁이놈이 차근차근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순으로 설명했다. 우리와 떨어지자마자 기습으로 로트밀러가 당한 것. 그러나 회심의 역습으로 상대측 탐색꾼을 해치우고 도주에 성공했다는 것. 시작은 오두막에서 들었던 얘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대화의 주체가 난쟁이놈 본인인 만큼 자세한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긴급 복원]을 이용해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를 한 번 더 사용해서 틈을 벌었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 콤보를 썼던 거구나. “우와, 넘버스 아이템을 그런 식으로 이능과 연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당.” “하하핫, 어디 내가 잘났겠는가? 모두 선조들이 물려준 지혜일 뿐이네.” [긴급 복원]은 수리가 아니라 장비를 5분 전 상태로 돌려주는 판정의 스킬. 넘버스 아이템도 예외가 없다. 평소보다 많은 MP가 소모된단 단점이 있긴 하지만. ‘선조의 지혜라…….’ 넘버스 아이템이 중요한 드워프족답게 관련 꿀팁들이 종족 내에서 전수되는 모양. 여하튼 나머지 이야기들도 요약하자면 이랬다. “우선 멀리 도망친 다음 로트밀러를 치료했네. 그리고 자네들을 찾으려 했네마는…….” 거리가 너무 떨어진 탓에 로트밀러의 탐색 능력으로는 우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마녀의 숲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3일 차가 되었을 때, 그들은 엘리사와 마주치고 말았다. “뭐어? 그 미친 여자랑 또 만났다공?!” “그러네. 어떤 수를 썼는진 몰라도 숲속에서도 끈질기게 쫓아오더군?”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낭?” “하하핫, 뭘 어떻게 하겠나? 도망쳐야지!” 엘리사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포탈을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4층 [천공의 탑]은 스테이지형 구조이니까. 어찌어찌 첫 스테이지를 끝마친 그들은 미궁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 체류하는 것을 택했다. 다음 스테이지에서 6등급 몬스터가 나오기라도 했다간 전멸할 수도 있다는 판단. “무려 열흘이 넘게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꽤나 고역이었네만… 그래도 로트밀러와 드왈키 이 친구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네.” 고역은 개뿔. 그건 우리가 해야 하는 말인 거고. ‘하, 이래 놓고 피곤하다면서 그냥 갔던 거야?’ 왠지 벌써 아랫배가 살살 아파진다. 우리가 개처럼 구르고 있을 때 이들이 띵가띵가 쉬고 있었단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아, 그나저나 그걸 말하지 않았군. 신기하게도 첫 번째 시련에서 정수가 나오더군.” “정수가… 나왔다고……?” 씨발, 이게 게임이냐? 의사와 무관하게 마녀의 숲에서 수도 없이 몬스터와 싸웠음에도 나오지 않았던 정수. 그게 저쪽에서 툭하고 튀어나왔다. 그것도 7등급 몬스터 ‘미믹’. 정수가 뜨면 최소 중박은 터진다고 유명한 그 희귀종 몬스터에게서. “일단 로트밀러가 흡수한 뒤 [보물창고]를 열어 봤네.” [보물창고]는 미믹의 액티브 스킬이다. 전투계열은 아니고, 사용 시 개인 아공간 창고를 열 수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그래서? 뭐가 나왔지?” [보물창고]를 처음 열었을 때, 각종 아이템이 무작위로 들어 있다. 운이 없을 땐 상급 포션 몇 개 들어 있고 끝나는 일도 있다. 제발 얘네들도 그런 경우였음 좋겠— “200만 스톤가량의 마석과 최상급 포션 세 개, 그리고 넘버스 아이템 두 점이 들어 있더군.” “미친?”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나.” “미안하다, 너무 놀라서 그랬다.” 왠지 자꾸만 토가 나올 거 같았지만, 꾹 참고서 물었다. “그래서 몇 번대 아이템이던가?” “아쉽게도 하나는 8천대, 하나는 9천대일세.” 후, 그래도 천만 스톤은 훌쩍 넘게 벌었단 거네. 당연히 우리 둘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 자기들끼리 삼등분해서 나눠 가질 테고. 이 난쟁이놈 새끼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지? “알아보니 우리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인 거 같기에 일단 팔기로 했네. 정수를 흡수한 로트밀러는 거기서 그만큼 길드에 공시된 정수 표준가만큼 빼기로 했고.” “그렇군……. 축하, 한다…….” 로트밀러는 새로운 정수를 먹었고, 난쟁이놈과 드왈키는 돈벼락을 맞았다. 그래서일까? 어떻게든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넬 순 있었지만……. 빠직-! 손에 쥐고 있던 스푼이 반으로 휘어졌다. “비, 비요른? 왜 갑자기 멀쩡한 숟가락을 망가뜨리냥!” “오크 히어로 정수 때문에 힘 조절이 안 돼서 그랬다.” “엥? 어제까진 그런 일 없지 않았냥!” 그야 어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날먹충들……. *** 난쟁이놈 쪽 근황을 들었으니,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사실 우리보단 자네들 쪽이 궁금하네. 들리는 소문이 있어 어제 대충 듣기는 했네만… 정확히 자네들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미샤에게 맡겼다간 말실수를 할 수도 있기에 내가 나서서 짧게 요약했다. 조난당한 뒤의 생활. ‘우연히’ 있었던 미샤의 각성. “칼스타인 양,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인데…….” “아니당. 내가 뭘 한 게 있다공, 모두 비요른 덕분이당.” “…비요른 덕분이라니?” “아아, 아니! 비요른이 없었으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거란 뜻이당!” 잠시 딴 길로 빠질 때가 있던 거야 어쨌든. 오두막에서 만난 종교쟁이 3인방. 나왔더니 어째선지 계층군주가 돌아다니고 있던 것까지. 4층에서 시간이나 죽이던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다이나믹한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3인방은 집중해서 경청했다. “허, 거기서 오크 군락지로 갈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영리했군.” “나였으면 드자르위 클랜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을 것이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소?” 얘기할 맛이 나는 성실한 리액션. 그러나 괜히 들뜨며 부풀리기보다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만……. “후, 그 상황에서 보호비를 요구했단 말이오?” “둘이서 200만 스톤을 냈다니… 이거 면목이 없군. 이보게 로트밀러, 드왈키, 우리가 돈을 모아 둘에게 좀 보태주는 게 어떤가?” “좋은 생각이오. 우리 책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불쌍해졌을까? 보호비는 물론 몇몇 장비가 박살나고, 수리비로 50만 스톤이 나갔단 얘기에 3인방이 합쳐서 100만 스톤을 모았다. 솔직히 말해서 떨떠름했다. “…정말로 이걸 우리한테 주는 건가?” “물론일세. 이번에 큰돈을 벌었는데 자네들에게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나?” 뭐지 이건? 설마 난쟁이가 아니라 빛이였던 건가? “히쿠로드, 너는 정말 훌륭한 팀장이다…….” “하하핫, 칭찬은 고맙네만. 이야기나 마저 해 보게.” “알겠다.” 이런 훌륭한 난쟁이를 날먹충이라 비하한 나 자신을 반성하며, 남은 이야기는 좀 더 성의껏 이어 나가기로 했다. “허, 그 상황에서 계층군주가 나타났단 말인가!” 5시간 남은 시점에서 출몰한 혼돈의 군주. “그만한 물자들을 쏟아부었다니, 보호비를 받을 만도 했군.” 막대한 자원을 전제로 한 토벌전. 그리고 내부에서 발발한 폭동. 기어코 발동되고만 [악의 틈새] 패턴. “그렇군. 아까 오크 히어로의 정수니 뭐니 하기에 뭔가 싶었는데, 이걸 말한 거였군.” 탱커가 없는 드자르위 클랜과 협상을 통해 얻어낸 정수. 그리고 탈출극. 참고로 여기서 내가 뱀파이어 정수를 갖고 있었던 것까지 얘기를 했는데, 난쟁이놈은 의외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나만 해도 처음엔 넘버스 아이템의 존재를 말하기 꺼렸지 않던가. 우린 괜찮으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네.” 고개 숙이지 말라고? 음, 바닥에 음식을 흘려서 무심코 본 것뿐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겠지. “여하튼 축하하네. 벌써 5등급 정수를 두 개나 먹다니? 상위 탐험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다.” 이후로 [악의 틈새]에서 탈출한 뒤, 미샤를 업고 계층군주에게 쫓긴 것을 담담히 풀어내는 것을 끝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집중해 듣던 3인방은 제각기 감탄을 토해냈다. “흐하핫, 나는 진작 알아봤네. 이 친구가 아주 큰일을 해낼 거란걸.” “과연! 근래 들은 것 중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이야기였소. 내가 그 이야기에 끼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확실히… 이 정도 업적이라면 자네를 작은 발칸이라 부르는 것에 감히 누구도 이견을 내지 못할 걸세.” 유독 한 가지 귀에 걸리는 게 있었다. 로트밀러가 한 말이었는데……. “잠깐만, 작은 발칸이라니?”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난쟁이놈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설마 했는데,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군? 바로 자네의 이명일세!” 작은 발칸. 자유의 바바리안에 이어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다만,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명이라…….” 이게 추후 긍정적인 작용을 할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모임이 있던 다음 날. 아침 일찍 히쿠로드와 만나 길드에 방문했다. 엘리사 베헨크를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카루이의 사제 말씀이십니까?” 흔한 내용은 아니기에 접수를 받은 직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내 별 5개짜리 신분패와 난쟁이놈이 탐사 내내 머리에 달고 있던 영상기록구를 증거로 제출하자 안색을 달리했다. “이건… 제 선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닌 거 같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우리는 곧바로 지부장실로 불려갔고, 거기서 지부장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신전에까지 전해진 결과. 엘리사는 레아틀라스교에서 파문당했으며, 곧바로 최고 등급의 현상수배범이 되었다. “검문소 기록에 의하면 그 악녀가 도시로 돌아온 건 확실하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길드와 신전에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왠지 그년이 쉽게 잡혀 줄 거 같지 않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예감이 든다. ‘쩝, 괜히 찜찜하단 말이지.’ 따라서 엘리사에 관한 소식은 이후 신경 써서 확인하기로 하며, 이 안건은 일단락하기로 했다. 이제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기대하지도 않던 보상금도 나왔고. “하하핫! 그나저나 이거 생각지도 못한 소득을 올렸군?” “원래 정의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이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신전에서 300만 스톤가량의 포상금이 나왔다. 뭐, 여기서 다섯 등분을 해야 할 테지만……. ‘나쁘지 않군.’ 원래 이 정도의 행운이야말로 넙죽 받아먹기 딱 좋다. 그 이상이 되면 뭐가 돌아올지 몰라서 무서워지기 시작하니까. “후, 증언할 게 많아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뺏겼군. 그럼 이만 가보세.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걸세.” 엘리사 신고 건을 마무리한 우리는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협의하에 최종적인 분배를 끝마쳤다. “둘로 떨어지기 전까지 같이 획득한 것만 5등분 하기로 하세. 그 이후에 얻은 것들은 서로 알아서 조율하는 거로 하고.” 엘리사의 충실한 종이었던 ‘한슨’의 장비와 소모품, 그리고 4일 차까지 획득한 마석을 사람 수 대로 나눠 가졌다. 이때를 예상하고 보호비를 낼 때도 종교쟁이의 장비만 냈던 터라 계산이 복잡해질 일은 없었— ‘아, 신발.’ 뒤늦게 지뢰 때문에 날려먹은 한스C의 부츠가 떠올랐지만…….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다시 계산하기도 귀찮을뿐더러……. 어차피 놈들이 갖고 있던 성수나 포션도 펑펑 써 재꼈지 않던가. “드왈키?” “계, 계산 중이오. 아! 인당 122만 스톤씩 나눠 가면 되오!” 미샤와 내 몫을 합쳐 총 244만 스톤. 신전에서 준 포상금으로 120만 스톤. 그리고 3인방이 지원금이라고 적선해 준 100만 스톤. 종교쟁이 3인방의 확장형 배낭과 보호비로 내고 남은 장비를 판매한 값인 311만 스톤. 15일 치 마석이 약 80만 스톤. 쉽게 말해……. ‘도합 855만 스톤.’ 여기서 미샤와 나누면 427만 스톤이 내 이번 탐사 수익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 ‘약속’이 없었더라면. “으으…….” 미련이 뚝뚝 흘러내리는 듯한 미샤의 눈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번 수익은 전부 내 거다. 그런 약속이었다. 뭐, 당시에는 얘 마음 편하라고 제안을 승낙했던 게 크지만……. ‘차라리 내가 보관하고 관리하는 쪽이 낫겠지.’ 이제 미샤는 내 메인 동료다. 정수는 물론이고, 앞으로 낄 장비, 그리고 전체적인 육성법까지 내 손을 거칠 것이다. 당연히 돈 들어갈 일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미샤와 내 장비 수리비, 그리고 치료비 30만 스톤을 빼면…….’ 이번 탐사에서 얻은 순수익이 도출된다. 765만 스톤. 미궁에서 망가뜨린 부츠, 잃어버린 메이스 등등의 손해를 감안해도 터무니없는 이득을 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순히 사냥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금액은 한참이나 벗어난 셈이니까. ‘앞으로 쓸 돈을 생각하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왜 그렇게 보냥?” “아니다. 먹던 거나 마저 먹어라.” 상황이 변했다. 뱀파이어 정수에 이어 한참 후반부에나 얻으리라 여긴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먹었다. 또한, 함께 성장할 만한 동료를 구했다. ‘돌아가면 그것부터 해야겠군.’ 따라서 계획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74화 고스트 버스터즈 (3) 분수대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있다. 메뉴는 감자 스튜와 빵, 그리고 소고기를 곁들인 야채 샐러드. 옆자리엔 미샤가 앉아 있다. “비요른, 이거 좀 먹어랑.” “고기를 준다고……?” “나는 아까 만들면서 많이 집어 먹었당.” 그렇다면야 뭐. 미샤가 넘겨준 고기를 꼭꼭 씹어 삼킨다. 대체 얼마 만에 먹는 소고기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옆에서 날아드는 시선 때문에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단 거겠지. “방금 분명 비요른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저자가 작은 발칸이겠군.” “흐음, 겉보기로는 특별한 점을 못 찾겠는데…….” 언제부턴가 어딜 가던 간간이 나를 알아보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클랜 가입 권유, 팀 영입 제안. 이런 거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보게, 자네가 정말 작은 발칸인가?” 이렇게 괜히 와서 시비를 걸거나 그때 얘기를 해달라며 귀찮게 하는 놈들도 있다. 거, 사람 밥 먹고 있는 거 안 보이나? 마침 마지막 숟갈이었긴 했다마는. “미샤, 일어나라.” “응?” “다 먹었으니, 슬슬 가야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 뒤 분수대를 떠났다. 뒤에서 뭐라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따라오거나 하며 선을 넘진 않았다. 미샤가 뒤를 힐끗하며 중얼거렸다. “뭔가 신기하당.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런 건 진짜 대단한 사람들만 그런 건 줄 알았는뎅…….” 뭐지? 시비 거는 건가? 그래도 뭔 말이 하고 싶은진 알겠다. 주변 사람이 갑자기 유명해지니 어색한 거겠지. ‘작은 발칸이라…….’ 게임 내에선 명성 수치가 오르면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었다. 받을 수 없던 종류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게 된다든가, 뜬금없이 고액의 의뢰가 들어온다든가 했으니까. 무엇보다 명성 수치가 낮으면 제1구역 황도 카르논에 들어갈 수 없기에 게임 진행에 있어 명성 수치는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잘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악령으로 취급되며, 발견하는 족족 단두대에 올려 버리는 세계. 갑작스럽게 이름이 알려져 버리면 달갑지 않은 관심도 함께하게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던 거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얻었고, 목숨을 살렸으며, 그 외에도 여러 이득을 취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그럼 오늘 할 일은 다 끝난 거 같군.” 수리를 맡긴 장비를 돌려받고, 필요한 여러 물품을 사고, 이왕 온 김에 경매소도 들려서 살 만한 물건이 있나 둘러보고 나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가서 육성 계획이나 마저 짜야겠군.’ “나는 이제 돌아갈 건데, 너는 어쩔 건가?” 사실상 슬슬 돌아가자는 내용의 말. 다만 미샤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린다. “아, 그게…….” 뭐지? 괜히 사람 불안해지게. 어서 말하라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미샤가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잠시 가문에 좀 다녀오려 한당.” “가문?” “응. 어쩌면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거기 있을 예정이당.” “그렇군.” 왜 이런 걸 사람 눈치 봐 가면서 말해? 일정이 있으면 있는 거지. 집안사라니 내가 간섭할 영역도 아니고.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겠다마는, 얘가 알아서 잘하겠지. “힘내라.” 그래도 응원의 말 정도는 해 주기로 했다. 가문이 얘한테 어떤 존재인지는 아는 사이기도 하니까. 미샤가 피식 웃었다. “뭐, 조금 힘이 나는 거 같기도 하넹…….” 그래? 그런 거치고는 목소리에 매가리가 없는 거 같은데. 등을 떠밀어 줄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물론, 바바리안 식으로. 퍽-! “악! 이 무식한 바바리안노망!” 화들짝 놀란 미샤가 뭐라 소리친 거야 어쨌든. “한결 낫군.” “이씽, 아무튼 이틀 안에는 무조건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알아서 밥 잘 챙겨 먹고 있어라, 알겠냥?”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다.” 도시로 돌아온 다음에 생긴 변화다. 은인으로 모시겠다더니, 이런 의미였을까? 어째선지 요즘 들어 엄마처럼 군다. *** 미샤와는 마차 승강장에서 헤어졌다. 걔는 가문으로, 나는 숙소가 있는 8구역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삐그덕거릴 때마다 흔들거리는 몸. 마땅히 할 것도 없기에 파도에 몸을 맡기듯 눈을 감고 상념을 시작했다. ‘당분간은 이 팀에 더 있는 게 낫겠지.’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먹으며 단번에 스펙이 확 뛰었다. 사실상 신청서만 작성해 제출해도 6등급 탐험가로 승급은 떼어 놓은 당상. 작은 발칸이란 명성까지 있으니, 어쩌면 5등급까지 한 번에 승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맘만 먹으면 더 좋은 팀을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대신 미샤를 데리고 들어가긴 어렵겠지.’ 미샤의 전투력은 더도 덜도 말고 딱 7등급 탐험가 수준이다. 물론 상위 등급으로 갈 잠재력은 충분하다. 이번에 영혼수를 손에 넣었을뿐더러, 변환계 이능인 [강화]야말로 내가 얘를 동료로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 이유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단 첫 번째 과제는 미샤의 레벨업인가.’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마쳤다. 한동안은 미샤의 성장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리라고. ‘우선 영혼수 계약 레벨부터 올리고, 가능하면 다음 탐사지도 그쪽으로 해야겠군. 그 정수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 될 수 있으면 주 무기도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미샤의 육성 과정을 세세히 짜고 있자니 어느샌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 딴건 몰라도 나중에 숙소를 바꾸면 승강장 근처로 잡든가 해야지.’ 일종의 역세권이다. 그만큼 집값이 비싸기야 하겠다마는. 터벅. 마차에서 내린 나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 숙소로 향했다. 쭉 직진하다 사탕 가게에서 좌회전. 그러다 불멸왕의 동상이 나오면 오른쪽 갈림길. 한 5분 정도 더 가면 중앙광장이 나오는데……. “집행을 시작하겠다!” 씨발, 며칠 동안 잠잠하더라니. 평소엔 텅텅 비어 있는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보인다. 다들 고개를 높이 올려 단두대를 보고 있다. 서걱-! 이제 그리 끔찍하게 보이지도 않는 광경. 그러나 굳이 관심 두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따라서 섬뜩한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무의식은 주어진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이상한 부분을 감지해 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적지?’ 단두대 아래 모인 군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 처형될 예정인 사형수들. 수십 명씩 한 번에 형을 집행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고작 네 명밖에 되지 않는다. ‘왠지 오늘은 앞에서 피 찍어 먹으려 대기타는 놈들도 안 보이는 거 같고.’ 머리가 의문을 감지한 동시. 배경음처럼 흐릿하던 웅성거림이 정확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악령이라기에 기대했는데, 별거 없군?” “어머, 그러게요. 피도 빨가네요.” “역겹지 않나? 악령 주제에 사람 흉내를 내고 다닌다는 게.” 뭐, 악령? 나도 모르게 걸음이 뚝 멈췄다. 고개를 돌려 단두대를 확인하니, 벌벌 떨며 차례를 기다리는 사형수들이 보였다. 남은 건 세 명이었다. “나, 나는 아니야! 아니란 말이에요!” “뭐 하나? 재갈을 다시 물리지 않고.” 어린 외모의 요정 여자. 난쟁이놈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드워프 남성. 그리고— “읍, 으으읍!!”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바바리안. 서걱-! 요정의 머리가 굴러떨어져 비치된 통 안에 쏘옥 들어가며, 다음 순번인 드워프가 형장에 무릎 꿇려진다. 다만, 내 시선은 오로지 한 곳에 고정됐다. ‘리옌의 아들 타리칸.’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저기 겁에 질린 눈으로 벌벌 떨며 두려워하고 있는 저 바바리안의 이름은. ‘씨바, 하는 짓 보고 불안하긴 했는데…….’ 어색한 바바리안 식 말투. 겁 많던 성격.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던 약한 마음가짐. 짐작 가는 바가 너무 많아서인지, 뭘 잘못해서 정체를 들켰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한데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준 돈으로 무기를 사진 않은 거 같군.’ 근거는 없다. 그야 형장에 올리기 전에 무기는 빼앗아 뒀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그가 이번에도 미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대체 왜지?’ 근거 없는 직감의 원천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던 찰나. “읍, 으읍!!” 얌전히 벌벌 떨고만 있던 그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또한, 재갈이 물려진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며, 휘둥그레진 눈동자는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한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으읍! 읍으으으으읍!!” 설마 저 멀리서 날 알아본 건가? 하긴, 이 중에 바바리안은 나뿐이니 저 멀리서도 눈에 띄긴 했겠지. “뭐 하나! 어서 무릎 꿇리지 않고?” 이윽고 사람들에 의해 제압된 그가 단두대의 칼날 아래로 목을 들이밀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다. 군중들 틈에 섞인 나를 콕 짚어 바라보며. “읍, 으으으읍!!”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짓뭉개진 저 아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와 달라는 걸까? 음, 그렇다기엔 눈빛이 너무 표독스러운 거 같은데. “으, 으읍!!” 유언조차 남길 수 없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 약간의 안도감도 피어났다. ‘그때 딱 잘라 거리를 두기 잘했군.’ 만약 15만 스톤을 주고 끝낸 게 아니었다면. 판단을 달리해 같은 처지임을 밝히고 서로에게 의지했다면— “얀델의 아—!!” 저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서걱-! 마지막에 재갈이 끊어지며 그가 뭐라 외쳤지만, 싸늘한 칼날이 떨어지며 음성을 짓뭉갰다. 나는 즉시 등 돌려 가던 길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한 가지 교훈을 새겼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도 하지 말아야겠군.’ 더 조심해야 한다. 이 좆같은 세상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건 약탈자와 탐험가뿐만이 아닐 테니까. 과연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인가? 괜한 오지랖은 자중하며 앞으로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행동해야 한— “얀델의 아들 비요른, 맞죠?”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돌아보니 깔끔한 행색의 사내가 날 보고 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라.” 낯선 이가 말을 걸어오는 일은 근래에 많이 있었기에 대충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나도 비슷한 처지이니까.” 말하는 뉘앙스가 아주 묘하다.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사내를 바라보았다. “미국? 대만? 유럽? 그쪽은 어디에서 왔어요?” 씨발, 이건 또 뭐지? *** 명성을 얻은 후, 생각은 해 봤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머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는다. 물론 내가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놈이 진짜 플레이어건, 아니면 플레이어인 척하는 놈이건……. ‘어차피 변하는 건 없어. 준비했던 대로 하자.’ 나 외에도 악령이 존재한단 건 이 몸에서 깨어난 첫날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지난날, 나는 이미 한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들과 교류할 필요가 있는가?’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단연코, 그만한 가치는 없다고. 그야 플레이어와 만나서 뭘 하겠는가? 정보 공유? 어느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 낯선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따위가 전부일 터. 고작 마음 편해지자고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기에……. ‘그 누가 됐건 패를 보여 줄 필요는 없겠지.’ 세간에는 포커페이스라는 말이 있다. 이를 이용해 심리전을 걸 때도 있다지만, 결국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뜻한다. 그만큼 얼굴은 사람의 심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신체 부위. 하지만 나는 판단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무표정 따위가 아니라고. 놈이 질문을 끝마침과 동시에 나는 대답했다. “뭐라는 거냐?” 물론, 이것으로도 완벽하진 않다. 그렇기에, 바바리안스러운 말투로 답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나르라면 저 말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이었을까?’ 함께한 시간이 나름 길었던 만큼 답은 쉽게 도출됐다.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그래, 이거다. 바바리안은 모르는 게 많다. 그리고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또한, 낯선 상대가 인간이라면……. 약간의 경계심과 공격심도 내비친다. 따라서— 터벅. 조금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또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머리통을 깨트릴 것처럼 콧김을 내뿜는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에도 사내는 묘한 탄성을 뱉을 뿐이었다. “와, 속을 뻔. 진짜 연기 잘하시네. 3개월 차 아니었어요?” “연기? 어려운 말은 하지 말랬을 텐데?” “아, 경계하실 필요 없다니까. 저는 미국에서 왔어요. 그 빌어먹을 게임엔 손도 대는 게 아니었는데.” 회한과 설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그리고 플레이어가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을 내용의 정보들까지. 이로써 나는 어느 정도 확신했다. “아무튼, 대단하시네요. 3개월 만에 이명까지 얻으시고, 저는 3년도 넘게 걸렸거든요. 하필 인간이 걸려 가지고…….” 이 새끼, 플레이어가 아니다. 75화 고스트 버스터즈 (4) 판단의 근거는 여럿 존재한다. “저기, 왜 말이 없으세요?” 일단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정체를 토로한 적이 없다. 즉, 그 누가 됐건 간에 심증만이 있을 뿐. 내가 악령이라고 단정 지을 증거는 없다. 따라서— “말했잖아요. 미국에서 왔다고. 결국 우린 여기서 이방인 같은 존재인데, 서로 뭉쳐야 하지 않겠어요?” 이 행동은 명백히 이질적이다. 같은 플레이어가, 내가 플레이어라는 의심을 해서 나를 떠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이라고? 여러모로 말이 안 된다. 내가 현지인일 수도 있는데, 무슨 깡으로 자기 정체를 먼저 밝힌단 말인가. ‘악령인 걸 걸리는 순간 사형인 도시에서 말이지.’ 뭐, 1달 차면 또 모르겠다. 한창 순진할 시기이니까. 근데 방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 도시에 온 지 3년이 넘었다고. 저딴 식으로 행동하는데 3년을 생존했단 것부터가 넌센스일뿐더러……. “우리끼리 만든 ‘게임’ 협회 같은 게 있거든요? 얀델 님도 거기 추천해 드릴게요.” 무엇보다 ‘게임’이라는 고유 명사를 뱉을 때의 발음이 매우 심히 병신 같다. 마치 외국 영화에 나온 한국인 캐릭터처럼. ‘애초에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으면 영어로 말이라도 걸든가 했겠지.’ 아마 그랬으면 나도 의심을 조금 덜었을 거다. 한데 이 새끼는 가장 쉬운 방법을 두고서 뺑뺑 말을 돌리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주어진 근거를 통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저기, 이제 좀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 새끼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런데 플레이어인 척하며 날 떠보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현지인이 역으로 정체를 숨길 이유가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날 콕 짚어서 노리고 왔군.’ 하기야, 언젠가 오지 않을까 싶었다. 악령의 존재가 대중에게도 알려진 도시. 도서관의 그 어떤 책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악령들만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기관이 있을 터. ‘아직 의심하는 단계겠지. 물증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즉, 내가 해야 하는 일도 명확해진다. 의심을 벗어내야 한다. 지금은 잠깐 떠보는 정도겠지만, 언젠가 마법이든 뭐든 이용한 ‘조사’가 시작될 수도 있지 않나. 추후 그럴 생각도 못 하도록 사전에 싹을 완전히 잘라 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저 녀석들에게 내가 악령이 아니란 확신을 심어 주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터벅. 크게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다. “…갑자기 왜 다가오시죠? 너무 가까운—” “물어볼 게 하나 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나의 질문. 잠시 멈칫하던 녀석이 이내 잘됐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예, 무엇이든지요.” “그렇다면 편하게 묻지. 혹시 너는 악령인가?”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요? 맞습니다. 그러니…….” 오케이, 확답은 받아냈고. “됐다.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예? 그게 무슨 뜻—” “부족장이 그랬다. 악령은 보이는 족족 죽여야 한다고.” “예, 예……?” 당황감이 물씬 피어나는 얼굴. 나는 만천하에 울려 퍼지도록 크게 외치며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바바리안은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다. *** 관자놀이에 깔끔하게 적중한 주먹. 눌린 찐빵처럼 변한 놈의 눈빛에 당황, 의문, 두려움이 맺힌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봐도 소용없다. 딱히 사적인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닐뿐더러……. 따져보면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퍼억— 놈은 대놓고 정체를 드러냈다. 근데 여기서 모르는 척하며 도망친다? 괜히 의심만 받을 것이다. 바람직하게 자란 현지인 바바리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니까. 따라서— 콰앙! 균형을 잃은 놈의 목을 잡고는 연계기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뒤. 퍼억-! 퍼억! 퍽! 퍽! 퍽! 쉬지 않고 수박만 한 주먹을 연신 내려친다. 물리 내성 수치가 꽤 높은지 피부가 제법 단단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 근력 수치가 크게 증가한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아, 아니 잠깐……!” 고작 몇 대만에 피떡이 된 얼굴.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물론 놈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나, 나는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악령이 아니겠지. 근데 어쩌겠어. 나도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거짓말까지 하다니 너는 정말 사악한 악령인 게 틀림없군.” “아니, 그러니까—! 아악! 악!!” 그렇게 귀를 닫고 몇 대를 더 내리쳤을까. 갑작스런 난투극에 군중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것은 물론, 경비병들까지 몰려온다. 딱 내가 원했던 대로. “이봐! 뭐 하는 짓인가! 감히 도시 한복판에서 폭력을 사용하다니?” “놈을 떼어내라!” 나는 깔끔하게 주먹질을 멈추고 일어섰다. 근데 내가 입은 2단계 소재의 갑옷 때문일까? 이전에 길드에서 누명을 쓰고 포송될 때와 달리, 경비병들이 경계하며 신중히 거리를 좁힌다. 거, 안 그래도 되는데. 툭-! 나는 실신한 놈의 몸을 들어 올려 경비병 쪽에게 던졌다. 그리고 주변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이놈은 악령이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밝히며 내게 이상한 짓을 하려 했다!” “뭐? 악령?” 피해자라 생각하며 떡실신한 놈에게 가까이 가던 경비병들이 내 말에 움찔한다. 또한,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제각기 웅성거린다. 물론 걔중엔 의심 어린 목소리가 대다수다. “악령이라니, 저 바바리안이 뭔가 착각한 거 아닌가?” “…아무리 착각이었다고 해도,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돈 좀 깨지겠군. 저 친구.” 하기야 바바리안의 외침은 신빙성이 없겠지. 그렇지만 이건 어떨까?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전사의 명예를 걸고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요즘 도시에서 가장 핫한 이름. “작은 발칸?” “…그러고 보니 라이티늄제 흉갑을 입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저자가 정말로?” “만약 그렇다고 하면 믿을 만도 한데…….” “저렇게 유명한 탐험가가 저런 헛소리나 하며 엄한 사람을 두드려 팰 리 없지 않나.” 웅성거림이 이어지며 여론이 움직인다. 경비병들도 내 정체를 깨닫고는 이걸 어째야 하나 싶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던 때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신분 패를 확인할 수 있겠소?”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정중한 물음. 이내 신분 패를 건네자 확인한 그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이 그자로군. 일단 고맙다고 말하겠소. 내 동생이 미궁에서 당신 덕분에 살 돌아왔소.” “동생이 드자르위 클랜 측 사람인가?” “그럴 리가, 내 동생은 보호비를 내고서 당신네를 따라간 몇몇 중 하나였소.” 허, 걔네들 중 살아남은 게 열 명도 안 될 텐데.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 “그래서 저 악령놈은 언제 죽일 거지? 살려 두고 있자니 찝찝한데.” “그건 조사가 끝난 다음에야 결정될 것이오. 해서 일단 관할청까지 동행해야 할 듯한데 괜찮겠소?” “음, 배가 고픈데…….” “식사는 물론 드리겠소. 만약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도 있으니.” “큰 공이라…….” 평소와 달리 나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과연 바바리안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늘 그렇듯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게 뭔 뜻이지?” 그야말로 바바리안과 물아일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되물음. 경비대장이 피식 웃더니 답했다. “대단한 일을 하셨단 뜻이오.” “대단한 일? 그럼 고기반찬도 나오나?” 음, 아무리 바바리안이라도 이건 너무 갔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저 경비대장의 눈빛을 보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사비를 들여서라도 대접할 테니, 함께 가 주시오.” “그렇다면야.” 이후 나는 경비대장을 따라 중앙광장을 벗어났다. 그런데 어째선지……. “작은 발칸이 악령을 퇴치했다!” “이 얘기만 해 줘도 오늘 술값은 안 내도 되겠군.” 멀어지는 뒤쪽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자꾸만 들려왔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거진 임기응변처럼 쥐어짜낸 계획이었기에 내심 불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정말이지 술술 풀렸다. 치안부 직원이 떡실신한 놈의 품을 뒤져 보자 배지가 하나 나온 것이다. “어, 이건 악령사냥꾼의 증표인데?” 처음엔 치안부에서도 난리가 났다. 하기야 악령이라 의심을 받고 데려온 놈이 악령사냥꾼의 증표를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치안부도 일단 그쪽에 연락을 취했고, 머지않아 이놈의 상관으로 보이는 자가 방문했다. 그리고……. “어, 그러니까, 이자는… 저희 측 사람이 맞습니다…….” 처음엔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던 그가,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는 참담한 목소리로 의문의 답을 내놓았다. “이놈은 자기 입으로 악령이라고 밝혔다. 근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그게… 보통 단기간에 명성을 떨치거나 특출한 행보를 보인 인물들에게 관례로 행해지는 조치로…….” “그만, 어렵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저희 쪽에서 비요른 님을 의심했습니다.” “뭐? 나를 악령으로 의심했단 말인가? 누구냐! 나를 악령이라고 의심한 놈은! 설마 너인가!!” 모욕이라도 당한냥 노발대발하며 콧김을 내뿜자 상관이 곤혹스럽다는 듯 땀을 뻘뻘 흘렸다. “그건 아까도 말했듯이 관례적인 절차로…….” “쉽게 말해라!! 날 놀리는 건가!” “분명한 건 이제 이런 일은 없을 거란 겁니다! 그러니 제발 목소리 좀…….” 왠지 바바리안이 평소에 그렇게 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편하다. 곤란해하는 반응들도 제법 재미있고. “흐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저놈이 악령이 아니라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나는 졸려서 이만 가보겠다.” “예, 예? 아, 예… 그러십시오…….” 튈 수 있을 각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건물을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쟤들 앞에선 뻔뻔하게 나가긴 했지만……. 속으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니까. ‘씨바…….’ 솔직히 말해 진이 빠진다. 계층군주에게 쫓겼던 그때만큼이나. ‘이쪽에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을 줄이야.’ 미국이니, 유럽이니 뭐니. 심지어 게임에 관한 얘기도 있었을뿐더러, 말투 또한 지구 쪽 사람이라 생각될 만큼 자연스러웠다. 뭐, 영어 발음이 좆같아서 어찌 눈치를 챌 수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런 막돼먹은 난이도가 다 있단 말인가. ‘그래, 여기 새끼들도 다 병신은 아니라 이거지…….’ 타리칸 리옌이 단두대에 오른 것도 당연하다. [미국? 대만? 유럽? 그쪽은 어디에서 왔어요?] [와, 속을 뻔. 진짜 연기 잘하시네. 3개월 차 아니었어요?] [아, 경계하실 필요 없다니까. 저는 미국에서 왔어요. 그 빌어먹을 게임엔 손도 대는 게 아니었는데.]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 갑자기 누가 다가와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은 혹하는 게 일반적일 터. ‘니미럴…….’ 참 곱씹을수록 좆같은 세계란 생각이 든다. 갑자기 끌려와서 악령 취급받는 것도 서러운데, 뭐 하나 삐끗하면 이런 새끼들이 와서 미끼를 던져 대다니? 몬스터 새끼들은 걍 때려죽이면 그만인데 얘네는 그럴 수도 없으니 더 악질이다. “후우…….” 참아왔던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래도 일단 당장은 잘 넘긴 셈인가.’ 물론, 악령사냥꾼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이 정말로 내게서 의심을 지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니 조심하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바바리안스럽게 행동해야겠군.’ 추후 행동 방침을 재정비하며 나는 여관방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 침대에 우편 하나가 놓여 있다.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편지와 엄지손톱 크기의 알약 하나가 나왔다. ‘뭐지? 미샤가 편지라도 썼나? 아니, 그럴 시간은 없었을 텐—’ 이내 편지를 읽어 내리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This letter is a random letter sent to an explorer presumed to be a player. If you could read th…….] 영어로 작성된 편지. 순간 놀라서 집어 던질 뻔했지만, 우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이불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심스레 읽어 내렸다. 대충 해석해 보자면 내용은 이랬다. [이 편지는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탐험가에게 무작위로 보내지는 편지다.] [만약 네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절대 네가 플레이어란 사실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하지 마라.] [아, 그리고 악령사냥꾼에게 잡혀도 이 편지 내용을 해석해 주지 않기를 부탁한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에겐 철저하게 익명성이 보장된 커뮤니티가 있고, 동봉된 알약을 섭취 시 우리 커뮤니티에 입장할 수 있다.] [입장을 원치 않을 시에는 알약은 폐기해 주길 바라며, 당신의 생존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읽어 내릴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설마, 이것도 그 새끼들 수작인가? ‘씨바, 그렇다기에는 너무 그럴듯한데…….’ 되도록이면 쉬운 단어들만 쓰인 것? 영어권이 아닌 사람들을 배려했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애초에 영어만 지원하던 게임 아닌가. 이 정도면 누구나 읽을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나였어도 플레이어를 구별해서 섭외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썼을 거 같고.’ 흉내만 내던 악령사냥꾼 놈들과는 다르다. 이 편지는 철저하게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GHOST BUSTERS] 맨 위 칸에 적힌 커뮤니티 이름만 봐도 그렇다. 취조실에서 사형 직전의 악령을 시켜서 썼다기에는 너무도 위트 있는 이름 아닌가. ‘근데 그 새끼들이 이걸 썼다고?’ 물론, 시간 차 공격 같은 걸 수도 있다. 허접한 척하다 방심했을 때를 노리는 그런 거. 따라서 나는 이 편지의 발신인이 부디 플레이어이기를 바랐다. 커뮤니티야 딱히 필요치 않지만……. 만약 이게 악령사냥꾼 측에서 보낸 편지라면 나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그도 그럴 게. [P.S. Rafdonia’s king, Mother fucker] 이 정도로 악령 사냥에 진심인 새끼들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76화 고스트 버스터즈 (5) 라프도니아 왕가 직속 비밀 치안부. “뭐? 피떡이 돼서 돌아왔다고?” 부하의 보고를 들은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던 게 그 이유였다. “이것부터 말해 보게, 왜 그자와 접촉을 했지? 내가 명령한 것은 미행만 하라는 것이었을 텐데?” “…현장에서의 독단으로 사료됩니다.” “사료된다라니, 장난치나? 똑바로 말하게.” “3개월 차 바바리안이니 쉽게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내 사내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1년 차 미만인 악령들은 대부분 순진하기 짝이 없으니까. 슬쩍 다가가 같은 처지인 척하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정체를 토해낸다. 나머지 절반마저도 표정을 통해 정체를 내비치는 게 태반이었고. “그래서 그런 반응은 없었다고 하던가?” “예,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더니, 어려운 소리 말고 똑바로 말하라며 화를 냈다더군요.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실 듯합니다.” 부하가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냈다. 특수 제작된 영상기록구. 이를 책상 위 수정구에 가져다 대자, 당시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재현됐다. 사내는 바바리안의 표정 변화, 눈빛, 얼굴 근육의 움직임 등을 세세히 관찰하며 몇 번이고 기록을 돌려 봤다. [미국? 대만? 유럽? 그쪽은 어디에서 왔어요?] 이번에 실책을 저지른 그놈이 너무 안일하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반응은 확실히 특별하다. [뭐라는 거냐?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한 호흡의 시간 차도 없이 돌아온 대답. 보통의 악령은 당황하며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머리를 굴려댄다. 하지만 이 바바리안은 어땠던가? [와, 속을 뻔. 진짜 연기 잘하시네. 3개월 차 아니었어요?] [연기? 어려운 말은 하지 말랬을 텐데?] 어휘와 말투. [그렇다면 편하게 묻지. 혹시 너는 악령인가?]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요? 맞습니다. 그러니…….] 사고와 의문. [됐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 [예? 그게 무슨 뜻—] [부족장이 그랬다. 악령은 보이는 족족 죽여야 한다고.] 그리고 대처. 그 모든 것이 기존의 악령과는 명확히 다르다. 아니, 오히려 악령이 아닌 자들에게서만 나왔던 특유의 반응과 일치한다. “정체를 밝히기 싫어하는 놈들이라도 보통 저 상황에선 회피를 택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이 바바리안은 어땠던가?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정면 돌파를 택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야말로 바바리안답게.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최종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악령은 아닌 듯하군.” 비요른 얀델. 그 이름이 우리 눈에 들어왔듯이, 악령놈들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명성을 얻은 건 고작 며칠 전. ‘아직 ‘집회’도 열리기 전이니, 시기상 우리 수법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을 터…….’ 모든 정황이 그가 악령이 아님을 가리킨다. 애초에 비밀 치안부의 존재를 인지했다고 한들 저런 식의 반응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었고. 무엇보다 길드에서 있었단 사건이 인상 깊었다. 누명을 써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탈옥해 깽판을 쳤다던가? 암만 봐도 고상한 척하기 좋아하는 악령들이 할 수 있을 짓이 아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바바리안이라면 모를까. 따라서— “비요른 얀델은 무혐의다.” 사내는 보고서에 푸른색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보고서를 파일에 담아 벽장에 꽂았다. 이에 지켜보던 부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인 일이지. 악령한테 피떡이 될 때까지 맞고 돌아온 거였다면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하면 징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녀석은 미행 임무에서 독단으로 표적과 접촉했다. 3개월 면직에 이후 12개월 감봉, 그리고 이번 승급 심사를 내년까지 보류하는 걸로 하지.”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후 부하가 집무실을 떠나고, 사내는 홀로 앉아 잠시 상념에 잠겼다. ‘악령이 아닌데도 3개월 차에 이명을 얻었다라…….’ 이번 일과 무관하게 앞으로도 유심히 지켜볼 가치는 충분할 듯하다. ‘정말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자인가? 어쩌면 백작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도.’ 이 도시에 인재는 늘 부족하니까.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벌써 아침인가…….’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어젯밤에 발견한 편지 때문이다. 과연 이 편지의 내용이 진짜인가 아닌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고민을 거듭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진짜인 거 같긴 한데…….’ 직감에 불과할 뿐, 확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날이 밝자마자 대충 씻고서 밖으로 나왔다. 일단 이 알약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이었다. 물론, 이게 악령사냥꾼들의 수법일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알아보려는 행동을 보여 줘야겠지.’ 그도 그럴 게, 현지인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누군가 내 방에 침입해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담긴 편지와 알약을 두고 가다니? 그 정체가 궁금한 게 정상적일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존나 소름 끼치는 일일 테니까. “며칠 동안 안 오기에 약속을 까먹었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그런 이유로 마탑에 방문했다. 이 세계의 지식인인 마법사라면 혹시 뭔가 알 수도 있겠다는 판단. 실제로 그녀는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오, 그 알약이 온 걸 보니 확실히 이번에 명성을 얻긴 했나 보네요?” 레이븐에게 편지와 알약을 보여 주자 나온 반응이다. “명성?” “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원래 조금만 유명해지면 다 받는다고 들었거든요.” 이내 레이븐이 편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곧바로 나한테 찾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참고로 편지는 백지상태였다. 마법적인 무언가가 가미됐는지, 다 읽고서 10분도 안 돼서 글자가 지워졌거든. “얀델 씨도 궁금하지 않아요? 악령들이 대체 뭐라고 써서 편지를 써서 보냈을지?” “악령들?” “아,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구나. 그거 악령이 쓴 편지예요.” “나는 그게 편지인 줄도 몰랐다. 역시 너는 대단하군.” 자연스레 추켜세우는 말을 곁들이자 레이븐이 특유의 콧소리를 냈다. 그리고 평소처럼 TMI 모드에 돌입했다. “하긴 그러겠죠.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니까. 그 알약 좀 줘 보실래요?” “여깄다.” “이 알약이 뭔지 알아요?” “모른다.” “굉장히 실력 있는 마법사가 제작한 거예요. 그것도 정신계 마법과 차원계 마법, 그리고 연금술에 엄청난 지식을 가진.” “그래서 그 알약이 뭔가?” 내 짧은 질문에, 수많은 마법사가 노력해서 술식을 해석했다는 등 긴 서론을 마친 그녀가 마침내 본론에 들어섰다. “이 알약을 먹으면 특정 영적 세계로 들어설 수 있어요.” “영적 세계?” “아, 말이 조금 어려웠죠? 일종의 또 다른 차원이라고 보면 쉬워요. 몸은 잠들어 있는데 정신만 어디론가 이동이 되는 거죠.” 이후로도 레이븐의 설명은 계속됐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1. 이 알약을 먹으면 매달 15일, 자정에 특정 영적 세계로 불려간다. 2. 아마 악령들은 거기서 자기들끼리 정보 교류를 하고 있을 것이다. 3. 그래서 많은 이가 알약을 먹고 잠입했지만, 다음 날 아침 피를 토하며 죽은 몸으로 발견됐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잠깐 흠칫했다. “죽은 몸으로 발견됐다고?” “네. 그러니까 얀델 씨는 궁금하다고 해서 절대 먹지 마세요.” “잠깐, 그냥 독약 같은 거 아닌가?” “에이, 우리 마법사들을 뭐로 보시는 거에요? 맹세코 이 약에 그런 성분이나 술식은 없어요.” “그렇다면 죽은 이들은 뭐지?” “글쎄요, 여긴 많은 가설이 있는데……. 일단 가장 유력한 건 그들에게 악령이 아닌 자들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수법이 있단 거예요. 영혼과 몸이 분리되면서 육체가 사망에 이르는 거죠.” “…위험한 약이군.”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알약을 먹는 순간 그놈에게 내 목숨줄이 쥐어진단 것 아닌가. 물론, 약을 보낸 놈이 플레이어라는 건 이제 어느 정도 믿겠지만……. 그 플레이어가 어떤 놈인지는 정보가 없다. “아무튼, 독약 같은 건 절대 아니에요.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잡힌 악령이 이 집회에 대해서 진술했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누구든 먹으면 죽는 독약은 아니란 뜻이죠.” “그렇군.”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게 거기서는 영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실제로 그들이 누군지 전혀 분간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그리고 이로써 대부분의 의문도 해소됐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 건가? 만약 마법사와 인연이 없었다면 이런 얘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을 터. 다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이 알약을 먹은 자를 알아볼 수단은 없는 건가?” “절대요. 그랬으면 악령들을 다 잡았죠.” 그렇구나. 발신인이 커뮤니티에선 익명성이 철저하게 보장된다고 자신하던 이유를 알겠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알약은 제가 좀 연구해 봐도 될까요?” “오늘 하루 치를 그걸로 퉁치겠다면 상관없다.” “치사하게, 묻는 거에도 다 대답해 줬더니. 됐어요. 어차피 제가 연구한다고 뭐가 더 나올 거 같지도 않고. 자, 잡담은 끝났으면 여기 앉기나 해요.” 그녀의 지시대로 나는 의자에 앉았다. 구태여 이 의자가 사람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사형 도구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빨리 끝내 줘라.” 그야, 이제는 아니까. 지지지지지지직-!! 이 의자가 채혈을 위해 제작된 마도구라는걸. *** 오후 네시쯤 되자 하루 치 연구가 끝났다. 다음 주까지는 귀찮게 마탑에 와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뜻. “오, 저자가 바로 요즘 유명한 그자로군?” “작은 발칸이란 이명을 지은 게 헤르네시온 님이라던데…….” “그 깐깐한 분이 바바리안을 그렇게 좋게 봐줬다고? 신기한 일이로군.” 레이븐의 개인 연구실을 나서자, 로비에 마법사들이 모인 게 보인다. 다들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게 명성이 가진 힘인가? ‘지난번엔 주변에 굴러다니는 실험 재료 보듯 대하더니…….’ 새삼 이름값이 올랐단 게 체감된—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먹었다지?” “아루가 말하기를, 뱀파이어의 수호자 정수까지 갖고 있다던데?” “확실히… 이건, 귀하군요.” 평범한 실험 재료가 아니라, 아주아주 귀중한 실험 재료를 보는 듯한 시선. 하긴 이 새끼들한테 탐험가의 명성 따위가 눈에 차겠어? “이보게! 자네 잠깐만 이리 와보겠나?” “바빠서.” “아니, 아주 잠깐이면 되는—” “배가 고파서 안 된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거북한 시선들을 뚫고 도망치듯 마탑을 나섰다. ‘도서관을 가기엔 시간이 애매하니, 그냥 돌아가서 쉬어야겠군.’ 생각도 정리할 겸, 약 1시간에 걸쳐 여관에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알약을 꺼내 유심히 관찰했다. 정신이 침잠하듯 생각이 깊어진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커뮤니티라…….’ 내가 다른 플레이어와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리스크 때문이었다. 한 명이라도 알고 있다면,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니까. 그런데 레이븐의 말을 들어 보니 가상의 웹 공간이나 다름없는 곳 같다. 뭐, 예전엔 플레이어들과 접촉해 봐야 무슨 쓸모가 있겠냐 싶었으나……….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히 그쪽 사람들이라면 나보다는 아는 게 많기야 하겠지.’ 게임 내의 히든피스나 숨겨진 정보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남이 아는 거라면 내가 모를 리 없으니까. 하나 이곳은 십진법으로 이루어진 게임 속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 신분 노출의 리스크가 줄어든 이상, 장점이 이전보다 부각된다. ‘정확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한발 먼저 정보를 얻을 수 있단 점은 나쁘지 않아.’ 예를 들어, 악령사냥꾼들이 어떤 수법을 사용한다든가. 탐험가 길드에서 새로운 법을 만들며 시험 적용했다든가.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그런 최신 소식들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비밀스런 정보 수급처가 생기는 셈. ‘딱히 기대되진 않지만, 혹시 돌아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지 모르고.’ 그렇게 약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심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먹는 게 낫긴 하겠네.’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와 얻을 수 있는 리턴을 신중히 저울질해 가며 내린 결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먹을 생각은 없다. 또 다른 리스크가 없는지 확인할 시간도 필요할뿐더러……. ‘아무리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한들, 초대장을 보낸 놈은 있을 테니까.’ 생각해 보아라. 만약 초대장을 보낸 게 셋인데, 셋 다 커뮤니티에 가입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초대장을 보낸 자는 그 셋의 신분과 정체를 유추하는 게 가능해진다. ‘먹는다면 최소 3개월에서 반년쯤 지난 다음이 그나마 안전하겠군.’ 물론, 커뮤니티가 내가 생각한 형태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가정은 전부 무의미하다. 하지만……. ‘당장 정보가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늘 그래 왔듯이. 만사 불여튼튼이란 말도 있지 않나. *** 마탑 상층부의 어느 연구실. [00 : 01] 시계의 분침이 자정을 넘긴 순간. 의자에 누워있던 한 사내가 눈을 뜬다.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구를 통해 누군가와 연락을 취한다. “소울퀸즈 님, 이번에 신규는 어떻게 됐습니까?” 감춘다고 감췄지만, 목소리에서는 기대와 흥분이 훤히 드러났다. 하나 사내의 표정엔 머지않아 깊은 실망의 빛이 어렸다. [없었어요.] “후, 그럼 정말로 그자는 플레이어가 아닌가 보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이번 회차에 미발신 된 편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원래라면 이번 집회 전까지 보내졌어야 할 편지는 총 일곱 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직 한 명에게만 보내졌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억지 때문에 여기서 더 미뤄선 안 되겠죠. 이번에 보내지 못한 편지들은 다음 집회 전까지 순차적으로 발신해 주겠어요?” [네, 그렇게 전달할게요.] 짧은 대화는 이를 끝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어느새 정적으로 가득 찬 연구실. “성인식 때 방패를 골랐대서 기대했건만.” 사내가 숨을 토해내며 읊조렸다. “이번에도 ‘그분’이 아니었군.” 이쯤 되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도는 루머가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은 팬심으로 꾸준히 부정했지만……. ‘사실 그런 방대한 데이터를 혼자서 정리했단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지…….’ 정말로 ‘그분’이 실존하기는 하는 걸까? 많은 이들이 추측한 대로, 단순히 게임사 측 사람에 불과했던 걸까? 이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뜬 지도 어언 20년. 사내의 믿음에도 슬슬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77화 의뢰 (1) 미궁에서 살아돌아온 지도 벌써 15일 차. 다시 말해, 차원광장에 포탈이 열리기까지 약 2주일이 남은 시점. 잘 쉬었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고. 숙제하듯이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뭐, 바빴던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만. “하하핫! 이거 그 유명한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아니신가! 오늘 괜찮으면 이따가 밑에서 한잔—” “피곤하다.” 2주 내내 한량처럼 지낸 난쟁이놈을 제외한 팀 반푼이의 멤버들은 모두 바쁜 2주를 보냈다. 우선 로트밀러. “으음, 이제 좀 알 거 같네. 육감이란 능력치를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 탐사에서 미믹의 정수를 흡수한 그는 새 능력에 익숙해지려 매일같이 수련에 매진했다. 드왈키 역시 매한가지였다. “……아, 나 말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이틀 정도 잠을 못 잤을 뿐이니.” 금전적 문제가 해결된 그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마탑에서 새로운 스펠들을 익혔다. 한 번은 난쟁이놈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을 했지만……. “다음 탐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소? 준비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준비를 해놔야지.” 기특하다. 대체 얘가 언제 이렇게 의젓해진 거지? 이 팀에 남아 있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먹긴 했지만, 이렇게 전체적인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면 발목 잡힐 일은 없을 듯하니까. ‘다음 탐사부터는 4층에서도 아무런 무리가 없겠군.’ 성장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지난 2주 동안 나와 미샤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이루었다. 일단 나부터 말하자면……. “하하핫! 축하하네. 3개월 차에 이명을 얻은 데다가 6등급 탐험가로 승급하다니? 이러다 금방 뒤처지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군!” “걱정되면 노력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안 그래도 살 만한 보구가 없는지 찾고 있네!” 며칠 전에 6등급 탐험가로 승급했다. 기대와 달리 5등급까지 직행하는 건 무리였다. 5등급부턴 시험이 있는 데다가, 시험을 보려면 길드에 접수된 의뢰를 해결하며 일종의 공적치를 쌓아야 한다는 모양. ‘후, 게임에선 이런 거 없었는데.’ 사실 이젠 투정하는 것도 새삼스럽긴 하다.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의 시대.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 사회 시스템에도 무수한 업데이트가 있었겠지. 게임 내에선 건축 중이라고만 떴던 도서관처럼. “오, 그게 새로 샀다는 그 무기인가? 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하군?” 장비 부분에서도 살짝 업그레이드가 있었다. 우선 잃어버린 메이스를 새로 샀다. 참고로 값은 40만 스톤으로 이전에 쓰던 것보다 두 배 이상 비쌌다. 그야, 그만큼 강철이 더 들어갔으니까. 「종합 아이템 레벨이 +185 상승합니다.」 압도적인 크기와 중량. 다만 이번에 근력이 크게 증가한 만큼 실사용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나저나 칼스타인 양도 무기를 새로 바꾼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어떻게 됐소?” “아, 그거? 난 말하기도 싫으니 얘한테 물어봐랑.” 드왈키의 질문에 미샤가 나를 가리켰다. 음, 투덜대는 건 이제 끝내기로 한 줄 알았는데……. “쌍검을 샀다.” 며칠 전에 미샤의 무기를 바꿨다. 표준 장검 규격의 70% 정도 되는 리치의 쌍검. 히쿠로드가 알려 준 대장간에서 55만 스톤을 주고 구해 왔다. “쌍검?” 난쟁이놈과 로트밀러가 동시에 중얼거리자 미샤가 이때다 싶어 징징거렸다. “그렇지? 너희들이 들어도 이상하징?” “이상하다니?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군.” “으응?” “방금 내가 놀란 건 예전에 혼자 했던 생각이랑 똑같아서였네. 양손잡이라 양손을 활용하는 건 좋지만, 하필 단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도 싶었으니.” “……무슨 말이냥?” “사람이 상대라면 모를까. 우리가 주로 싸우는 건 몬스터 아니겠나. 이제부터는 대형 몬스터들도 많이 만나게 될 테고.” 한 마디로 예전에 짧은 단검을 쓰던 게 조금 아쉬웠는데 잘 됐다는 뜻. 기대하던 반응과 달랐는지, 미샤가 당황해하며 난쟁이놈을 바라봤다. 다만……. “쌍검이라…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어차피 최전선은 우리가 꽉 지키고 있을 테니 말일세. 하하핫!” 탱커 포지션인 난쟁이놈은 근접 딜러가 올공에 투자했단 말에 흡족할 뿐이었다. 그러던 때 드왈키가 나섰다. “내가 그쪽은 문외한이오만, 새로운 무기를 그것도 한 번에 두 자루나 다루려면 적응하는 게 어려울 거 같소만…….” “그렇지! 내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당! 이래서야 원, 다음 탐사 땐 고블린한테도 얻어맞을지 모른당!” 미샤가 드왈키의 동조에 힘을 얻고서 나를 힐긋했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내가 해 줄 말은 이것뿐이다. “그럼 더 연습해라. 고블린한테 얻어 맞지 않도록.” 거듭 말하지만, 편한 길은 느린 길이다. 지금이야 새로운 무기의 숙련도를 쌓는 게 어렵겠지만……. 게임 속에서 빙결 쌍수 검사는 후반부에 가장 강력한 근접 딜러였다. 왜냐면 개사기 넘버스 아이템이 하나 있거든. “후우, 알겠으니 잔소리 좀 그만해랑.” “잔소리가 아니라 네 미래를 위한 조언이다.” “그러니까, 그게 잔소리라는 거당.” 이내 미샤와 티격태격하고 있자니, 드왈키가 눈치없이 끼어들었다. “근데 그렇게 싫으면 그냥 무기를 안 바꾸면 되는 거 아니오?” “으응?” “아니, 그렇지 않소. 비요른이 그대의 부모도 아니고, 굳이 시키는 대로 할 필요가 있소? 솔직히 옆에서 보는데 선을 넘는 듯해 불편하더구려.” 선을 넘는다고? 뭐, 옆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얘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그,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당. 지금은 어렵긴 해도 확실히 단검을 쓸 때보다 좋은 점도 꽤 있고…….” “그, 그렇소?” “응, 그러니까 비요른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결정은 내가 한 거니까.” 나는 얘한테 그 어느 것도 강제하지 않는다. 단지, 합당한 근거를 통해 강하게 설득할 뿐. *** “그럼 다음 탐사부터는 4층 중심부까지 노려보는 거로 하면 되겠군. 하하핫” “될 수 있으면 2층을 지나갈 때 내가 아직 안 가본 곳을 지나가면 좋겠다.” “흐음, 공적치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쪽 경로도 다시 한번 점검을 해 봐야겠군.” 식사하며 탐사 계획을 정리하고 있자니 금주 정기 회담이 금방 끝났다. 사실 말이 회담이지, 그냥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근황을 얘기하는 자리에 가깝다. “비요른, 이번에도 둘이서 같이 가나?” “방향이 같지 않나.” “흐음, 요즘 들어 부쩍 친해졌단 말이지.” 글쎄, 내가 보기엔 너랑 드왈키가 더 친해진 거 같은데. 난쟁이놈의 주책은 대충 무시하며 미샤와 함께 주점을 나섰다. “아, 맞다. 비요른! 지난번에 주문했던 장비가 완성됐다고 찾으러 오라는뎅?”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찾으러 가면 되겠군.” “근데 대체 뭘 주문했기에 이렇게나 오래 걸린거냥?”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속바지다.” “으음, 속바지……?” 물론, 평범한 속바지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남성 탐험가들 사이에서 ‘에그 가드’란 은어로 불리는 장비 파츠. 쉽게 말해 낭심 보호대다. “마법 부여를 해야 되는 탓에 조금 비싸게 주고 샀다.” “에엑, 뭐, 그, 그런 거에 마법 부여까지 하냥!” “그런 거라니?” “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긴, 맞는 걸 구하기 어려웠을 테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긴 한데…….” 얘는 또 뭐래. “앞으로 몸이 커질 때마다 알몸이 될 수도 없지 않냐.” 원래 정수를 먹으면 그에 따라 장비를 세팅하는 게 플레이어의 역할. [거대화]를 대비해 원하는 형태의 옷을 만든 뒤, ‘자동 수복’과 ‘형상 변환’, 그리고 ‘산성 면역’ 인챈트를 했다. 그야 내가 원하는 팬티. 아니, 속바지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을 리 만무하니까. 참고로 여기에 들어간 돈이 약 90만 스톤. “아아, 그거 때문에 마법 부여를 한 거구낭. 나는 또…….” 오해가 풀렸는지 미샤가 숨을 크게 내쉰다. 그런데 뭔가 궁금한 점이 생겼는지 묘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저기… 그럼 이제는 미궁에선 그것만 입고 다니는 거냥?” “그렇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깐 설명할 단어가 없어서 속바지라고 했지만, 사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바지에 가깝다. 그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자주 입는 그거. 게다가 쫄쫄이 소재도 아니고 가죽 소재이니 창피해할 것 없다. 음, 아직 직접 입어 보지는 못했지만……. “…….”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바바리안 아니겠는가? 감성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 여하튼 둘이서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자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그럼 너도 어서 들어가서 자라.” “으응, 그래야징. 근데 내일 장비 찾으러 가는 거, 내가 같이 가 줄까……?” “꾀부리지 말고, 나 없는 동안에도 검이나 휘두르고 있어라.” “꾀부리려고 그런 거 아닌뎅…….”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게 아니어도 됐다, 어차피 내일은 혼자 갈 곳도 있으니.” “혼자서? 어디에 가는뎅?” 나는 짧게 대답했다. “성지에 간다.” 돈도 생겼고, 육성법의 핵심인 오크 히어로의 정수도 얻었다. 그러니, 슬슬 혼령각인 레벨도 올릴 차례다. *** 아침 일찍 일어나 한 번 더 가계부를 정리했다. ‘메이스, 속바지, 쌍검이 합쳐서 185만 스톤.’ 미샤의 영혼수 레벨을 올리려 구매한 [야수의 피]가 200만 스톤. 라이티늄제 흉갑과 방패에 ‘산성 면역’ 인챈트할 때 들어간 비용이 51만 스톤. ‘여기에 한 달 생활비로 9만 스톤을 빼면…….’ 벌써 370만 스톤밖에 안 남았구나. 물론 전부 필요한데 쓴 것이기에 아깝진 않다. [야수의 피]가 200만 스톤이나 했지만, 이게 없었으면 미샤가 무기에 빙결 속성을 실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한참 걸렸을 터. ‘…장비 인챈트도 진작 했어야 했던 거고.’ 장비를 샀을 땐 서리혼령 가락지가 있는 데다가, 수중에 가진 돈도 없어서 생략했었다. 그 결과, 수리비로 50만 스톤이 나왔다. 씨바, 딴 데서 아끼더라도 진작 할걸……. “얀델의 아들 비요른!” 대충 씻고 한참을 걸어 성지에 도착하자 부족장이 나를 반긴다. 조금은 흐뭇한 미소를 입에 걸친 채. “이제 어린 전사라고는 부르지 못하겠군. 작은 발칸이라는 이명을 얻었다지?” “그렇다!” 금의환향한 바바리안을 연기하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곳은 냉정한 바바리안의 세계. “그래서 이곳엔 어쩐 일인가!” 한두 마디 주고받은 걸 끝으로 부족장이 본론에 들어간다. 바바리안답게 서론이 지나치게 짧다. 솔직히 조금 더 감탄이나 칭찬, 혹은 격려의 말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뭐, 나도 이쪽이 시간 아낄 수 있고 좋으니까.’ 어쩌면 이 도시에서 가장 합리적인 종족은 바바리안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진지하게 곱씹으며 나도 즉시 용건을 말했다. “혼령각인을 받으러 왔다.” “그렇군. 주술사를 불러줄 테니, 그와 얘기를 해라.” 이후로도 속전속결이었다. 뭐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부족장이 떠났고, 주술사의 제자가 와서 천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에 들어서자 쭈글쭈글한 피부가 인상적인 주술사가 나를 반겼다. “크크크, 또 너로구나.”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그야 주술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전사는 드무니까.” 아니, 나는 안대를 쓴 채로 어떻게 알아봤냐는 뜻이었는데……. 괜히 다시 묻지는 않았다. 뭐, 주술사니까 신비한 구석이 있는 거겠지. “불사자 경로의 두 번째 각인을 받으러 온 것이냐?” “그렇다.” “비용은 100만 스톤이다.” 나는 흠칫 굳었다. “100만 스톤?” “설마, 준비가 안 된 것이더냐?” “……그렇지 않다.” 단지 가격이 게임이랑 똑같아서 놀랐을 뿐이다. 1단계는 게임보다 15만 스톤이나 더 비쌌는데. 짤그랑. 작은 의문이야 어쨌든, 일단 주술사가 시키는 대로 돈을 꺼내 앞에 위치한 항아리에 넣었다. 그러자 주술사가 끌끌거렸다. “이번엔 제대로 내서 다행이군. 지난번엔 5만 스톤이나 덜 받아서 골치가 아팠는데.” “…5만 스톤을 덜 받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어린 전사야,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모두 멍청한 부족장이 잘못한 일이니.” 아니,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니까? 뭔가 짚이는 게 있었기에 시키는 대로 담요 위에 엎드려 누우며 재차 질문했다. “주술사, 1단계 각인의 비용이 원래 얼마지……?” “55만 스톤이다.” “……그렇군.” 그 한 마디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때 부족장이 말한 비용은 70만 스톤이었다. 물론 그가 나를 등쳐먹으려고 그런 금액을 불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불사자 각인술에 들어가는 비용은… 음, 70만 스톤쯤 되겠군!] 부족장 역시 한 사람의 바바리안이었다. 글자와 숫자에 몹시 취약한. ‘후, 그래 놓고 20만 스톤을 깎아 주니 뭐니 했던 건가.’ 뭐, 결과적으로 5만 스톤을 아꼈으니 손해 본 건 없겠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기뻐했던 내가 병신같— “그럼 시작하지.”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순간 머릿속에 가득하던 모든 근심과 고민, 상념이 싹 사라졌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생생한 고통. “어린 전사여, 참지 말고 비명을 내질러도—” “끄아아아아아악!!” 씨바, 고통내성 덕분에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게 안 통할 줄이야. ‘……3단계는 내일 받아야겠군.’ 아무래도, 계획의 재점검이 필요할 거 같다. *** 「불사자 각인 2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지구력 및 항마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정신 수치가 + 30 상승합니다.」 「이능 수치가 + 60 상승합니다.」 *** 내 인생에서 가장 긴 15분이 될 거 같다고? 그때 그런 말을 했던 내가 미련했다. “자, 끝났다.” 1단계 때는 문신을 새기는 데 12시간이 걸렸으나, 2단계는 고작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12시간 동안 나눠서 느껴야 하는 고통이 압축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크크, 깨어 있는 놈을 보는 건 처음이군.” 반쯤 실신한 나를 보며 주술사가 사이코패스처럼 낄낄거렸다. 그러고는 내게 뭔가를 툭 내밀었다. “자. 하나 뽑아 보거라. 시간도 남으니 네 운명을 훔쳐봐 주마.” 뭐지? 점 같은 건가? 판타지 세계이니만큼 정확성도 높을 거 같은데……. “운명이라 해 봐야 거창한 게 아니니 어서 골라 봐라. 네놈의 앞날에 좋은 일이 생길지 아닐지 정도는 가려 낼 수 있으니.” 음, 그렇다면야.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통 안에 든 수십 개의 막대기 중 아무거나 뽑았다. 그러자 주술사는 잠시 침묵했다. 뭔데 괜히 불안해지게. “어린 전사야, 생년일시가 어떻게 되느냐?” 어, 설마 사주가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주술사가 다시금 낄낄거렸다. “크크크, 농담이었다. 전사가 어떻게 생년일시 같은 걸 알겠느냐?” “……그래서 훔쳐본 내 운명은 어땠나?” “특이하더구나. 많은 전사의 운명을 보았지만, 이렇게 액운이 낀 운명은 난생처음일 만큼.” 음, 옛날에 어머니를 따라서 갔던 무당과 똑같은 말을 하네. 역시 난 팔자부터 글러먹은 건가? “아마 너는 남들이 한 번 겪을 만한 고생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군.” 후, 점 같은 걸 보는 게 아니었는데. 내심 알고 있기는 했지만, 판타지 세계관의 주술사가 저리 딱 잘라 말하니 괜히 우울해진다. “너무 기죽지 마라, 어린 전사여. 너에게 액운이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 “나쁜 것만이 아니라니?” “너의 운명에는 액운뿐만이 아니라, 그에 뒤지지 않는 명운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액에 삼켜지지 않으면 액운도 결국에는 운으로 뒤바뀌는 법.” “무슨 말이냐? 쉽게 말해라.” 이번엔 바바리안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구든 이곳이든 이쪽 업계는 알아듣기 어렵게 말하는 게 관례인가? “크크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평생 한 번 일어날 만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을 운명이란 뜻이다.” 왠지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느낌이었다. “흔히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이 많이 갖고 태어나는 운명이지.” 솔직히 영웅은 잘 모르겠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인생에 좆같은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국에 나는 아직까지도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난 그게 악운이 강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근데 이제 돌이켜 보면 좆같은 일만 벌어졌던 것도 아니다. “크크,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핏빛성채 때만 봐도 그렇다.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나오며 거의 뒈질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놈의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난 계층군주? 온갖 개지랄을 떨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오크 히어로의 정수를 얻었다. “영웅의 운명이라면, 나는 그 무슨 일을 겪더라도 죽지는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주술사는 정말이지 순수한 어린 전사를 대하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근엄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읊조렸다. “누군가는 운명에 잡아먹히고, 누군가는 운명에 순응하며, 또 누군가는 운명을 극복해내지.” “알아듣기 쉽게.”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네게 달려 있다.” 후, 끝까지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구나. 됐다, 운명이고 뭐고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 무언가에 기댈 생각일랑 하지 말고, 언제든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하자. 그 무엇이 닥쳐오든 버텨 낼 수 있도록. *** 「비요른 얀델」 레벨: 3 육체: 330.1 / 정신: 198.3 (New +30)/ 이능: 212.4 (New +60) 아이템 레벨: 967 (New +185) 종합 전투 지수: 982.55 (New +136.2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오크 히어로 - Rank 5 78화 의뢰 (2) “혹시 근 시일에 닥칠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나?” “글쎄, 그런 건 나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한이 많은 자를 경계해라. 네 운명에는 그런 자들이 몰리는 운이 함께하고 있으니.” “쉽게.” “그들의 한을 푼다면 복이 될 거고, 풀지 못한다면 액이 될 거다.” 아니, 얘는 쉽게라는 말이 뭔지를 모르나? “배고프니 이만 나가 봐라.” “그러겠다.” 주술사의 축객령을 끝으로 천막에서 나왔다. 그리고 기력이 바닥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걷고 있자니 서서히 기운이 돌았다. ‘혼령각인 덕분인가.’ 불사자 각인의 1단계에서는 자연 재생력이, 2단계에서는 지구력과 항마력이 증가한다. 항마력은 말 그대로 마법 딜 관련 저항력이고, 지구력은 스태미나의 최대치와 재생 속도에 영향을 끼친다. 즉, 근력이나 민첩 같은 육체 수치와 달리, 눈에 띄는 능력치는 아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이런 부스탯들이 받쳐 주지 않으면 나중에 캐릭터가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 육성법의 핵심인 6단계 각인을 개방하려면 지금부터 천천히 올려 둘 필요가 있다. ‘3단계 각인부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제법 쓸만하고 말이지.’ 원래는 곧바로 3단계까지 뚫을 예정이었지만 그건 내일로 패스. 그럼 오늘은 시간이 남으니— “비요른!” 오늘 하루 계획을 재점검하는 차,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어딘가 속삭이는 듯한 외침. 순간 잘못 들은 건가도 싶었지만……. “비요른!” 이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확인하니, 흔들리던 수풀 속에서 사람 얼굴이 뾱 하고 튀어나왔다. “……아이나르?” “조용히 해라! 걸리면 큰일 난다!” 아이나르의 다급한 요청에 나도 모르게 수풀 앞에 쪼그려 앉아 목소리를 줄였다. “…네가 왜 여기 있나?” “장로님한테 네가 성지에 왔단 소식을 듣고 잠시 찾아와 봤다. 도시로 가려면 이쪽 길목을 지나쳐야 하지 않냐.” 음, 그렇구나. 근데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그래도 일찍 와서 다행이다. 안 그래도 다리가 저렸는데!” 그냥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구나. 역시 아이나르답다. “아무튼, 누가 지나갈지 모르니 어서 이쪽으로 들어와라.” 반가운 얼굴인 데다가, 근황도 궁금하던 참이기에 무성한 수풀을 넘어 그 사이에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그제야 아이나르의 몸이 제대로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야위었나?” 본나이트의 정수 탓에 170 중반대로 감소한 키. 그래도 근육이 있어서 작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아이나르가 씁쓸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후후후, 창피하니 너무 보지 마라. 볼품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아니까.” 고작 한 달 만에 울퉁불퉁하던 전사의 몸이 슬림한 마른 근육형 몸매로 변했다. “혹시 장로가 밥을 제대로 안 챙겨주나?” “그런 건 아니고, 매일같이 근육을 압축하다 보니 어느샌가 이렇게 돼 버렸다.” “압축?” “그런 게 있다. 나도 잘 모르니 자세히는 묻지 마라.” “그렇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떤 수련이기에 그 건강하던 얘를 이렇게 만들어 놔?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아이나르가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장로님한테 네 소식은 들었다. 작은 발칸이란 이명을 얻었다지? 역시 굉장하다 비요른!” “별거 아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네 이야기가 궁금하다.” 아이나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매일 수련만을 반복하다 보니 바깥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겠지. 왠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기에, 나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 히쿠로드와 같은 팀이 됐다고? 다행이다. 내가 빠지면서 불안했는데, 그라면 믿을 수 있다.” 히쿠로드와 팀을 이룬 일. 그리고 미궁 속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 다만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려던 찰나.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저 멀리서 포효하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온다. “또 도망친 거냐!!!!” “크, 큰일이다. 장로님이 내가 도망친 걸 눈치챈 거 같다.” 저 멀리서도 귀를 쨍하고 울리는 포효에 아이나르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은 건가?” “괜찮다. 오늘 수련이 두 배로 늘어날 뿐이다. 잠을 안 자면 되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니,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는데……. “안 그래도 심심해서 죽을 거 같았는데, 덕분에 재밌는 얘기도 듣고 좋았다. 그러니 다음에도 또 와 줘라.” “알겠다.” “그럼 난 가 보겠다!” 이내 아이나르가 등 돌려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도 슬슬 가던 길을 이어 가려던 차. “아, 맞다! 비요른!” 돌연 아이나르가 뒤돌아 나를 부른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말을 던졌다. “아까는 말을 못 했는데, 표정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표정이 좋다고?” “예전에는 좀 더 독기가 가득했다고 해야 하나? 뭐, 나는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조금 더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아마 새 동료들이 믿을 만한 자들이라 그런 거겠지!” 음,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이나르!!! 얼른 튀어 오지 못할까!!” “윽, 아무튼 나중에 보자!! 앞으로도 열심히 수련해서 더 믿음직한 전사가 되어 돌아갈 테니!” 이내 아이나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만 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독기가 빠졌다라…….’ 과연 이게 긍정적인 변화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변화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 혼령각인이 일찍 끝나며 시간이 꽤나 남았기에 마탑에 방문했다. 이번 주 연구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다. “어? 얀델 씨가 왜 오늘? 내일 오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내일은 할 일이 생겨서 오늘 왔다.” “아니, 선약이 있으면 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확실히 정론이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훌륭한 바바리안. 세간의 예의와 관례엔 구애받지 않는다. “선약이 무슨 뜻이지?” “어휴, 꼭 이럴 때만 이러지 진짜……. 됐고, 앉아서 좀 기다려 봐요. 하던 거만 끝내고 시작할 테니까.” “그러지.” 잠시 기다리자 오늘치 실험 준비가 끝났다. 참고로 오늘 실험 내용은 뱀파이어의 항마력이 정신 마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확인하고, 감소한 태양저항력의 정확한 수치를 재는 것이라는데……. “설명은 됐으니 알아서 해라.” “그렇다면야, 시작할게요?” 지지지지지직-!! 흉악한 실험 도구들에 몸을 맡긴 채 넋 놓고 있자니, 생각보다 금방 실험이 끝났다. 다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는 차. “저기요, 얀델 씨!” 레이븐이 급하게 나를 호출했다. 뭔가 연구 관련해서 할 말이 있나도 싶었지만…… “그래서 그건 언제 얘기해 줄 거예요.” “뭘 말인가.” “뱀파이어를 잡을 때 쓴 그 성물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여신의 눈물]이 거기 있는지?” 아, 또야? 이곳에 방문할 때면 매번 행해지는 대화다. “거듭 말하지만 그게 뭔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또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레이븐이 팔짱을 끼고는 나를 노려본다. 근데 쟤는 알기나 할까? 저 조그마한 키로 그래 봤자 그냥 시건방져 보일 뿐이라는걸.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루아 레이븐, [여신의 눈물]이 뭐기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건가?” 처음엔 날 악령으로 의심하는가도 싶었다. 그런데 이후 보여 준 행동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알약과 편지에 관해 묻던 때만 봐도 그렇다. 만약 날 악령이라 의심했다면, 대화 중에 분명 어떤 형태로든 티가 났을 터. “……그 성물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가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악령으로 의심해서 이러는 게 아니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가. 그 답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 성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 때문에 그러지.” “책?” “균열총해록이요.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죠?” 아니, 그렇게 쳐다봐도 진짜 모르는데……. “그 책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싶은 건 이해해요. 저도 그랬으니까. 원래 지식이라는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귀중해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만약 그 책을 갖고 있거나, 소재를 알고 계신다면 사고 싶어요. 제 거는 보관이 제대로 안 돼서 읽지 못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저 학구열 넘치는 눈빛을 보니 지어낸 말로 나를 떠보는 건 아닌 듯한데……. 정말 책 때문이었다고? “그게 목적이었으면 빙빙 돌릴 거 없이 처음부터 그렇게 물어봤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원래 협상이란 게 간절해 보이는 쪽이 지는 거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그녀가 허심탄회하게 속셈을 고백했다. “성물을 찾았단 사실을 인정하면, 그때 별거 아니라는 듯 협상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어요. 얀델 씨도 그 가치를 알고 있었는지 소용은 없었지만…….” “그래서 아예 정공법을 택했다는 거군.” “네. 그러니까 얀델 씨도 이제 그만 솔직히 말해 주면 안 될까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당시에 내가 쓴 아이템이 성물이라는 건 완전히 확신하고 있으니, 예전처럼 우기는 건 딱히 좋은 방법 같지 않다. 차라리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낫겠지. “그 [여신의 눈물]인지 뭔지 하는 물건은 분수대 앞에 조각상을 부수고 얻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끝이다.” “…네?”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빠르게 말했다. “너희들이 주변을 수색하고 있을 때, 심심해서 부쉈더니 나온 거였다.” “그럼… 책에 대해선 모른다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금방 이성을 찾고 쏘아붙였다. “잠깐만요. 모순이 있는데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뭔지도 모르는 걸 그 상황에서 쓸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나름 예리한 질문. 다만 이미 예상했던 것이기에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상자에 여신의 문양이 그려져 있어서 그쪽 물품이겠거니 싶었다. 실제로도 잘 통했고.” “……진짜예요?” “전사의 명예를 걸고 방금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이내 치트키나 다름없는 현대인의 맹세까지 해 주자 레이븐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럼 난… 대체 뭘 한 거야?” 혼자 쉐도우 복싱을 한 걸 알고 나니 자괴감이 밀려드는 모양. 미안한 감정이 드는 한편, 그런 생각도 든다. 플레이어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 나는 그곳의 최대 장점이 ‘정보의 교류’라고 여겼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한텐 아니었을지도.’ 나는 누군가에게 있어 플레이어고, 또한, 누군가에게는 악령이다. 그렇기에……. “배고프니 나는 이만 가보겠다!” 바바리안답게 문을 벌컥 열고 방을 나선다. 은인이라 따르는 미샤도. 날 친구처럼 대하는 난쟁이놈도. 위대한 전사가 될 거라며 매번 날 격려하고 우러러 보는 아이나르도. 모두 마찬가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 몸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진실해질 수 없다. 뭐, 이한수의 몸이라고 딱히 다를 거 같진 않겠다마는. *** 마탑에 나선 뒤, 곧바로 상업 지구로 가서 완성된 마법 팬티를 인수했다. 그러고 나서의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엔 조금은 애매한 시간. 따라서 노곤한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야 돌아가 쉬는 것보다 그쪽이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일 테니까. “파르시티에브.” 사서에게 마법을 부여받은 뒤 곧장 책장으로 향했다. 인사를 해 봤자 받아 줄 리도 없는 데다가, 오늘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당신, 유명해지셨더군요.” 평소 말 한마디 나누는 것도 귀찮아하던 사서가 웬일인지 말을 걸어온다. “어쩌다 보니.” 나는 대충 대답해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예전엔 마법사이니 친해지면 득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사실 이제 와서 그런 거에 연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6등급 탐험가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발칸이라는 이명도 얻었다. 마법사가 있는 팀에 들어가기 충분한 스펙일뿐더러, 현재 팀에도 마법사가 있다. 비록 마탑 출신은 아니지만……. ‘사서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얘도 마찬가지일 테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이유를 대 봤자 합리화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터벅- 오직 정당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근거. 결국 본심은 따로 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계산하며 타인에게 호의를 얻으려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그러기에 조금 피곤했다. 따라서— 터벅- 책장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외면하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이래서야 아이나르가 독기가 빠졌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겠군.’ 내게는 문제가 생겼다. 정신적인 문제다. 몸이 제법 살 만해졌는지 메마른 줄 알았던 감성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생존이 최우선인 내겐 좋지 않은 소식. 그렇다면 해결법은 무엇일까? ‘그건 모르겠고, 해야 할 일이나 하자.’ 등을 돌린다. 그리고 사서에게로 다가간다. “멀뚱히 보지만 말고, 하려는 말이 있으면 얼른 해라.” “…하려는 말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그냥 그런 눈빛이었다.” 몇 가지 근거가 있긴 한데, 설명하기 귀찮다. 그런 감정을 가득 담아 응시하자 눈치 빠른 사서가 간결하게 용건을 털어놓았다. “행정청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의뢰를 맡길 탐험가를 찾고 있다기에, 당신을 추천했습니다.” “날 추천했다고?” “엄밀히 말하면 추천한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대화 중에 당신 얘기가 나왔고, 그걸 들은 친구가 당신과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을 뿐. 물론 바쁘거나 싫다면 거절해도—” “좋다. 한번 만나서 얘기는 들어 보지.” 내 대답에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던 사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제 친구에게는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의뢰라……. 슬슬 그런 이벤트도 있을 때가 되긴 했지. ‘이제 도시에서도 돈을 수급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셈인가.’ 역시 들어 보길 잘했다. 79화 의뢰 (3) “비요른, 오늘도 성지에 가냥?” “어제 못 끝낸 게 있다. 저녁엔 돌아올 테니 요령 피우지 말고 수련이나 하고 있어라.” 날이 밝자마자 어제 못 받은 3단계 각인을 받으러 성지로 향했다. 비용은 게임과 동일한 200만 스톤. 혼령각인이 3의 배수인 단계를 거칠 때마다 특성부여를 할 수 있단 것도 일치했다. “크크크, 너처럼 돈 많은 바바리안은 처음 보는군. 너에겐 세 가지 갈림길이 있다.” 돈을 항아리의 집어넣자 주술사가 묻는다. “불꽃의 혼과, 강철의 혼, 그리고 야성의 혼이 있다. 전사야, 너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혹시나 해서 주술사의 설명을 들어 봤지만, 딱히 현실 패치돼 변한 내용들도 없는 듯했다. 따라서……. “야성의 혼을 택하겠다.” 고민 없이 야성을 택했다. 그야 이 특성들 하나하나가 내 방패바바의 핵심이기도 하니까. 「불사자 각인 3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물리 내성 및 화염 저항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육체 수치가 +56 상승합니다.」 「이능 수치가 +80 상승합니다.」 「야성의 혼이 육신에 깃듭니다.」 「캐릭터의 기본 위협 수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야성분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협 수치. 즉, 숨만 쉬어도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 확률이 높아졌다. 또한 [야성분출]을 통해 일시적으로 위협 수치를 3배 상승시키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보너스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원래는 대검바바를 키울 때만 가끔 썼었지.’ 초창기의 나는 바바리안의 부족한 생존력을 불사자 각인으로 자주 커버했다. 하지만 그때의 [야성분출]은 양날의 검이었다. 캐릭터가 강해지는 만큼, 적들이 몰려드니까. 물론 방패바바에게는 달랐다. ‘노 리스크 하이 리턴.’ 몬스터의 어그로가 끌리는 것? 탱커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근데 그 와중에 육체 수치까지 증가한다? 안정성이 더욱 올라가는 셈일뿐더러……. 위협 수치가 대폭 증가하는 [거대화]와 함께 쓰면 일시적으로나마 뽕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3개월 만에 [거대화]에 3단계 각인까지 끝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스스로의 성장이 흡족한 한편,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일기도 한다. 난 그저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을 뿐인데……. 어느샌가 이렇게 돼 버렸다. “피곤하니 나가 보아라.” 혼령각인을 받고 나오니 오후 다섯 시였다. 미샤가 소고기를 구워 준다고 약속했기에, 얼른 도서관에만 들려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런저런 실험 끝에 [야성분출]의 발동 조건을 알아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이런 식으로 쓰는 거구나. *** 「비요른 얀델」 레벨: 3 육체: 386.1 (New +56) / 정신: 198.3 / 이능: 292.4 (New +80) 아이템 레벨: 967 종합 전투 지수: 1118.55 (New +136)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오크 히어로 - Rank 5 *** 다음 날 점심. 혼자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게 이름이 ‘흐르는 물의 약속’이어서 뭘 하는 가게인가 싶었는데, 평범한 디저트 가게였다. 씨발. “……바바리안?” “뭐지? 주인장이 빚이라도 졌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이는 시선. 어찌 된 게 도서관보다 더 심하다.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비요른 님 맞으시죠! 여기에요!” 굳이 장소를 바꾸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기에 일단 자리로 가서 앉았다. “네가 의뢰인인가?” “네. 라비기온 행정청 7급 사무관 샤빈 에무어라고 합니다. 편하게 샤빈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지.” 샤빈 에무어. 종족은 인간. 친구라기에 나이가 어릴 줄 알았는데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첫인상은 제법 선해 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어떨지 대화를 나눠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주문을 안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맥주에 구운 고기로 하지.” “……네?” “없으면 됐다. 단 건 싫어해서.” “아, 네에…….” 왜 이딴 곳으로 불렀냔 무언의 항의는 이쯤이면 됐겠고…….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의뢰 내용이 뭐지?” “라그나에게 듣지 못하셨나요?” “라그나? 아, 그 사서를 말하는 건가?” 내 질문에 샤빈이 움찔하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름을 모르셨구나. 하긴…… 그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라고 해요. 나쁜 아이는 아니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노여워하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되뇌이듯 읊조렸다. “라그나 리타니엘 페프로크라…….” “리타니엘이 아니라 리타니옐이요.” 그래, 아무튼 그거. 이름이 뭐 이렇게 발음하기 어려워? “……설마 귀족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물었더니, 조금 묘한 반응이 돌아온다. “자세히는 말씀 못 드려요. 그 애가 알면 분명 화낼 테니까.” 그래, 뭔가 스토리가 있긴 있다는 말이지. “의뢰 내용이나 마저 말해 봐라.” “간단한 순찰 의뢰예요. 가끔 범죄자나 세금 미납자들이 하수도로 숨어드는 탓에 주기적으로 순찰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샤빈이 묘한 어조로 말꼬리를 흐린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 “…그런데?” 혹시나 해서 맞장구를 넣어 봤더니 샤빈이 옳다구니 하는 얼굴로 설명을 이어간다. “원래 순찰 의뢰를 맡기던 탐험가들이 이번에 미궁에서 돌아오지 못했던 거 아니겠어요? 비요른 님도 알다시피…….” “…시피?” “이번에 3층에서 큰일이 있었잖아요? 거기에 휩쓸린 모양이에요! 어쩜, 참 안타까운 사연이죠?” 안타까운 사연인 건 모르겠고, 얘한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알겠다. “그래서 그 의뢰를 나한테 맡기기로 했다는 거군.” “네. 행정청 공식 의뢰라서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적임자를 찾는 와중에 라그나가 비요른 님에 대해 말해 주더라고요!” “그렇군.” 대략적인 사정은 알겠다. 다만……. “왜 하필 나였지? 더 적당한 사람도 있었을 텐데?” 들어 보니 잡일에 가까운 의뢰다. 행정청에서도 하청 부리듯이 탐험가들에게 의뢰를 맡겨왔겠지. 보수도 그리 크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이 의뢰를 하겠다는 놈들은 도시에 널리고 널렸을 터. ‘악령사냥꾼 놈들이 보낸 건 아니겠지……?’ 내심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던 나지만, 그 해답은 허무하리만치 간결했다. “요즘 가장 화제이신 분이잖아요?” “뭐?” “솔직히 조금 궁금했거든요. 직접 만나 보고 싶기도 했고…….” 한마디로 사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정청 의뢰라는 명분을 뒤집어썼다는 뜻. “아, 이따가 여기서 쿠키 좀 포장해 갈 건데, 직장 동료들한테는 비요른 님이 선물해 준 거라고 자랑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저 해맑은 표정을 보니 연기를 하는 거 같진 않다. “그래서 어쩌시겠어요? 보수는 20만 스톤밖에 안 되지만, 비요른 님께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제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아휴, 또야? 그냥 제발 쭉 다이렉트로 말해 주면 안 되나? 이건 뭐, 사람 갖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영혼 없이 한 번 더 맞장구를 쳐주자, 샤빈이 뭐 그리 즐거운지 미소까지 띠며 말을 이어 간다. “행정청 의뢰를 받는다는 것 자체를 보상이라 여기는 분들도 있거든요! 저희 쪽 선정 기준이 조금은 까다롭다 보니, 다른 기관들에서도 검증된 인재라고 여긴다 해야 하나……?” 이번엔 어째선지 말꼬리가 올라갔다. 바바리안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려니 애매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모양인데……. “신뢰도가 올라간단 뜻이군.” 나는 현대인의 정신과 야만적인 육신을 겸비한 바바리안. 짧고 간결하게 정리하자 샤빈이 박수를 친다. “네! 쉽게 말하면 그렇죠! 으음, 뭐… 비요른 님 명성 정도면 그런 게 아니어도 여기저기서 의뢰가 들어오긴 하겠지만요.” “딱히 그렇지도 않더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발칸이란 명성을 얻고서 2주가 지났다. 그럼에도 의뢰 목적으로 내게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그 이유도 대강 짐작한다. ‘내가 무식한 바바리안이기 때문이겠지.’ 싸움을 잘하는 것과 일머리가 있는 건 다르다. 하지만 어쩌면 이 기회를 이용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또 너무 튀면 안 되겠지만……. “그 의뢰, 내가 하지.” 이내 나는 결정을 마쳤다. ***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의뢰의 상세 내용 설명이 끝나자, 바바리안이 미련 없이 장내를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샤빈은 싱긋 웃었다. ‘간만에 재밌는 사람이었네.’ 웬일로 그 아이가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이제 알 것도 같다. 오랜만에 순수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니 있자니 심적으로 편해진다고 해야 할까? 분명 그 아이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지나가는 식의 말이었다고 한들. 그 아이가 먼저 타인을 언급한 건 몇 년 만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래도 불안해서 직접 만나 봤는데 나쁜 사람인 거 같진 않네. 그 아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고…….’ 샤빈은 차를 홀짝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엔 우연을 가장해 셋이서 자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내버려 두면 둘이 친해질 일은 평생이고 없을 테니까.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에게도 친구가 생길 때가 됐다. *** 이틀 뒤. 미궁이 열리기까지 열흘이 남은 그 시기. 행정청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하수도 입구에 도착했다. 어쩌다 보니 팀 반푼이 멤버 전원과 함께. “……비요른, 이렇게 악취가 날 거란 말은 하지 않았잖소.” “이 정도인진 나도 몰랐다. 하지만 하수도라고 했으면 어느 정도 예상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건 그렇소만…….” 어제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의뢰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됐다. [의뢰비는 나눠주지 않아도 되네. 온갖 괴담이 나도는 하수도 탐험이라니? 하하핫! 그런 자리에 내가 어찌 빠지겠나?] [혹시 나도 따라가도 되겠소? 안 그래도 요즘 책만 읽다 보니 머리가 아팠는데, 조금 전환이 될 거 같구려.] [흐음, 하수도라면 길도 복잡할 테지?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해 보기 딱 좋겠군.]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라며? 혼자선 위험할지도 모른당.] 다들 매일같이 수련만 하느라 심심했는지 따라오겠다는 거로 결론이 나버렸다. 그래서 나도 그냥 그러라고 했다. 의뢰비도 나눠 주지 않아도 된다는데 공짜 인력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른 애들은 몰라도, 탐색꾼인 로트밀러는 적잖이 도움이 될 테고.’ 행정청 직원에게서 받은 지도를 로트밀러에게 건넨 뒤, 순찰 과정을 기록할 영상기록구를 투구의 홈에 끼웠다. 그럼 이제 준비는 끝. “슬슬 출발하지.” 앞장서 철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축축한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땐 빛이 거의 들지 않아 횃불을 켜야 했다. “생각보다 안이 넓군?” “그러니까 숨어 사는 놈들도 간간이 나오는 거 아니겠나. 하하핫!” 졸졸 흐르는 시궁창 물과 그 옆에 난 도랑. 횃불이 일렁거리며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를 뿌린다. “이쪽이네.” 로트밀러의 안내를 따라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며 도랑 위를 걷는다. 입구와 멀어질수록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주변. “그거 아나? 하수도에 끔찍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괴담인데 말일세…….”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난쟁이놈이 웃으며 루머를 퍼뜨린다. 미샤랑 드왈키는 그걸 또 진지하게 들었다. “드왈키, 진짜 괴물이 있을깡?” “마탑에서 나오는 폐기물들도 전부 하수도로 흘러간다고 들었소. 만약 시약이나 몬스터 사체가 무작위로 만나 어떠한 작용을 했다면, 그런 괴물이 만들어지는 것도 가능은 할 것이오.” “어, 역시 그런거냥?” 역시 그렇기는 무슨. 우리 전임자만 해도 회당 15만 스톤 받고 2년 동안 하수도를 들락날락하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게 있겠냐? 철퍽, 철퍽-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심히 발을 움직인다. 근데 난쟁이놈이 쉴 새 없이 떠들어 댄 괴담들 때문일까? 걸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다섯 명이서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던전에라도 들어온 거 같네.’ 씨바, 진짜 뭔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80화 하수도 (1) 주변을 경계하며 얼마나 하수도를 걸었을까. 난쟁이놈과 미샤가 학을 떼기 시작했다. “정말 이곳엔 아무것도 없군.” “그러니까 말이당. 슬슬 뭐라도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좋다고 따라오겠다고 하더라니. 얘네들은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그러니까 말했지 않나. 그냥 한번 쭉 돌고 나오면 끝인 의뢰라고.” 이번 의뢰는 간단하다. 빌린 영상기록구를 머리에 달고 정해진 루트를 한 바퀴 돌며 숨어 있는 자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끝. 뭐, 그 과정에서 전투가 생길 수도 있지만……. ‘전임자가 2년 동안 발견한 게 30명이 안 된댔지.’ 낯선 이와 조우하는 빈도수 자체가 낮다. 설령 마주친다 한들, 아득바득 쫓아가서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엥? 쫓지 않아도 된다고?” “잡아가면 추가 수당이 있다곤 들었는데, 거기 목 맬 필요는 없다.” “어째성?” 그야 내가 받은 의뢰는 ‘하수도 순찰’이니까. 처치나 체포는 추후 행정청에서 영상기록을 확인한 다음에서야 인력을 새로 보내는 식으로 처리한다고 들었다. “그렇구낭…….” 미샤에게 의뢰에 대해 대강 설명해 주고 있자니, 앞에서 일행을 이끌던 로트밀러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왠지 주변에 뭔가 있는 듯한 기분이군.” 감에 의지한 근거 없는 중얼거림. 다만 그 한마디에 일행 모두가 주변을 살폈다.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하수구이니 만큼, 후각계 스탯이 이전처럼 빛을 발하진 않겠지만……. 미믹의 정수로 육감 스탯이 +50, 행운 스탯이 +20 증가한 게 로트밀러였으니까. “어! 저, 저기 사람이당!” 그러던 때 미샤가 한 곳을 가리키며 외친다. 이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니 당황한 표정의 한 사내가 보인다. ‘허, 얘는 이걸 또 어떻게 봤대?’ 사람 몸 하나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틈. 사내는 그 사이에 난 구멍에 새우처럼 웅크려 몸을 숨기고 있었다. “히익!!” 손을 집어넣어 사내의 멱살을 잡고 꺼냈다. 키는 제법 크지만, 원체 말라 있어서 그런지 무슨 고블린을 집은 듯이 가볍다. 하는 짓도 고블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죽어!!” 딸려 나옴과 동시 손에 꼭 쥐고 있던 단도를 찔러오는 사내. 시도는 좋았다. 살려면 뭐든 해 봐야지 안 그래? “끄윽!!!!” 단도를 쥔 팔목을 붙잡은 뒤, 그대로 꺾어 버린 것을 끝으로 종료된 전투. “너는 왜 여기에 숨어 있었지?” 내 질문에 사내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사, 살려 주시오! 제발! 내, 내가 누굴 해치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돈이 없었을 뿐이지 않소?” 원하던 답변은 아니지만……. 굳이 해석해 보자면 세금을 못 내 도망쳤다는 뜻이 되겠지. 그 말을 믿는 놈은 아무도 없었지만. “옛 생각이 나는군! 예전에 대장간 일을 할 때도 이런 문신을 한 깡패 새끼들이 자주 찾아왔었는데. 하하핫! 기하학적인 형태의 바바리안 문신과는 다르다. 해골, 헐벗은 여성, 몬스터의 형상 등의 문신이 새겨져 있는 살가죽. 물론 나는 외면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요른, 이마에 새겨진 낙인을 보게. 하수도로 도망친 범죄자인 게 분명하네.” 두건 속에 감춰진 이마의 낙인은 ‘벌금’으로도 커버가 안 될 흉악 범죄를 저질렀단 증거. 동정의 여지는 없다. 뭐, 세금 미납자였어도 결과는 크게 다를 바 없었겠다마는. “비요른, 이제 그자는 어쩔 건가?” “글쎄.” “행정청에서 지침 같은 걸 미리 알려 줬을 거 아닌가?” 음, 확실히 조언 같은 걸 해 주긴 했다. 기본 방침은 일단은 잡아서 데리고 오는 것이지만, 영상만 제대로 찍었다면 죽여서 하수도에 버려도 문제는 없다던가? “죽여도 된다고? 만약 일반인이면 어떡하고?” “이런 곳에 우연히 들어온 일반인이 있을 리 없다더군.” “하하핫!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행정청답군!” 글쎄, 내가 보기엔 피도 눈물도 없는 탐험가들을 배려해 준 게 아닐까 싶다마는. 지금 고민할 건 그런 게 아니겠지. “그래서 자네는 어쩔 건가?” “일단은 데려가는 거로 하지.” 혼자였다면 모를까. 다섯 명이서 온 덕분에 손이 남는다. 무엇보다 살려서 데려가는 쪽이 추가 수당을 5천 스톤 더 주기도 하고.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시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 주면 되는 거 아니오.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다 먹고살려고—” “그만.” 구구절절한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세금 미납자든 범죄자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니 너를 데리고 간다. 판단은 그쪽에서 할 거다.” “……씨발! 개좆같은 새끼들아! 너희가 나랑 뭐가 달라!” 다르지. 같았으면 네가 나한테 이렇게 빌어야 하는 일이 있었겠어? “드왈키, 이놈 입 좀 막아 봐라.” “아, 알겠소.” 이후 드왈키가 새로 배운 [마비독] 주문을 사용해 사내를 조용히 시켰다. 뻣뻣하게 굳은 육신. 나는 쌀 포대 짊어지듯 사내를 어깨에 둘러메고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로트밀러,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낭?” “이제 절반 정도 왔네.” “엑? 아직 반이나 남았다공?” 미샤가 괜히 따라왔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고는 한 가지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연다. “근데 드왈키, 너는 왜 이렇게 멀쩡한 거냥? 지난번엔 토하고 장난 아니었으면서.” “후후, 그것 말이오? 사실 이번에 냄새를 못 맡게 하는 마법을 익혔소. 알고 보니 탐험가 생활을 해 본 마법사들 사이에선 필수처럼 여겨지는 마법이더구려.” “오오, 그렇구낭. 근데 그건 다른 사람한텐 못 걸어 주냥?” “어… 그게, 아직 술식 변형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랑하듯 새 마법에 관해 설명하던 드왈키가 말꼬리를 흐린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술식 변형’이야말로 마탑 마법사들의 밥줄이나 다름없으니까. 기본 스펠은 돈을 받고 가르쳐 줘도, 마법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주문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절대 외부로 노출하지 않— “거, 거래를 하자! 날 놓아 주면 정보를 주겠다!” [마비독]의 지속 시간이 끝났는지,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사내. “정보?” 다시 [마비독]을 걸려는 드왈키를 제지하고서 묻자 사내가 황급히 말을 잇는다. “그 미친년! 그 미친년을 잡아가면 나보다 훨씬 비쌀 것이오!!” “비요른, 뭘 듣고 있는 거냥? 어떻게든 살려고 발악하는 게 분명하당.”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단어가 유독 귀에 꽂힌단 말이지. “……미친년이라니, 자세히 말해 봐라.” 들어 볼 가치가 있었다. *** 협상.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설득하고 의논을 하는 행위. 이는 합리적이면서도 부조리하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결국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방식이니까. 바로 이렇게. “……얘기하기 전에 약속이 필요하오!” “드왈키, 그냥 다시 아까처럼 만들어—” “마, 말하겠소!!” 이대로 기회를 날려 버리기 싫었는지, 사내가 구구절절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하수도에는 나 말고도 많은 자가 살고 있소. 보통은 순찰자들의 경로들을 알아서 피하기에 잘 안 보일 뿐이지…….” “짧게.” “……며칠 전에 어느 미친년이 내 은신처를 빼앗았소.” 사내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하수도 아래서 나름 잘 지내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와서 집을 빼앗았다.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몸은 여리여리했지만 해골바가지들을 데리고 다닌 탓에 손도 제대로 못 쓰고 쫓겨나야 했다. “스켈레톤이라니, 그냥 네크라미아의 정수를 먹은 자인 거 아니냥?” 미샤가 7등급 몬스터 네크라미아를 예시로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사내는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모르오. 하지만! 미궁에 나오는 스켈레톤과는 엄연히 달랐소! 나도 한때 탐험가 생활을 한 적이 있기에 틀림없소!” “그래서 결론은?” “사악한 흑마술을 쓴 게 분명하오. 신전에 넘기면 분명 포상금이 나올 것이오. 나 따위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시기가 공교로웠다. 며칠 전에 하수도에 숨어든 사악한 흑마술을 쓰는 여성이라니……. “……설마 그 여자인 거 아닌가?” “엘리사 베헨크. 확실히 그 여자가 도망치려면 이곳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겠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로트밀러와 난쟁이놈이 침을 꿀꺽 삼키며 한마디씩 뱉는다. ‘씨발, 진짜 그년인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니까. “인상착의는 어땠지? 자세히 말해 봐라.” “로브를 입은 데다가 후드로 얼굴을 가려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소. 몸의 선이나 목소리로나마 여자란 건 알았지만, 그게 전부요.” “그렇군.” “아! 지금 생각났는데, 굉장히 특이한 형태의 목걸이를 하고 있었소…….” “어떤 형태였지?” “그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나는 얼른 배낭 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지난날, 한스의 배낭을 뒤지다가 발견한 카루이 교단의 심벌. “혹시 이 모양이었나?” “그렇소! 바로 이 모양이었소!”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그년일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어떻게 할 거냥?” “생각 중이다.” “하하핫, 뭘 고민하나! 당장 잡아가서 정의를 실천해야지!” 정의는 무슨, 포상금이 탐나는 거면서. 여하튼 난쟁이놈이 과격파라면 로트밀러는 온건파였다. “우선 행정청으로 돌아가 공식적으로 신고를 하는 게 좋을 거 같네. 아직 그 여자가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굳이 우리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나?” 확실히 두 의견 전부 옳다. 직접 잡아가면 포상금을 얻을 수 있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다면 신고하는 것을 끝으로 다른 자들에게 사건을 넘겨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만약 이 사내가 말한 미친년이 엘리사 베헨크가 맞다면, 이대로 돌아가는 건 특히나 찜찜하다. 엘리사 베헨크는 단순한 ‘씹새끼’가 아니다. 그 여자는 무려 내게 원한을 가진 씹새끼다. 때문에 음지에서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진 않을까 내심 불안했었다. ‘행정청이나 신전에서 협력해 사람을 보낸다 해도 며칠은 족히 걸릴 테고…….’ 혹시나 그사이에 그년이 도망쳐 버리기라도 하면, 난 계속 이 기분을 느껴야 하겠지. “한번 확인해 보는 거로 하고 싶은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 질문에 미샤는 곧바로 동의를 표했다. 중립 포지션이었던 드왈키도 절친 난쟁이놈의 결정에 따라 한 표를 던졌고. 걱정했던 로트밀러도 다수결에 순순히 따랐다. “네 명이 같은 생각이니, 나도 따라가겠소.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순찰 의뢰를 모두 끝내는 게 어떻겠소?” “네 말이 옳다. 그렇게 하지.” 이내 우리들은 좀 더 빠르게 이동하며 행정청이 지정한 루트를 순찰하는 걸 끝마쳤다. “네 은신처가 어디지? 안내해라.” “날 살려 주겠단 약속이 필요하오.” “만약 우리가 찾는 여자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널 살려 보내 주겠다.” “좋소, 따라오시오.” “잠깐, 이것부터 차라.” “응……?” 응은 무슨 응이야.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짓는 사내의 허리를 밧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길게 남은 밧줄을 개 목줄 잡듯이 손에 꽉 쥐었다. 그야 도망가기라도 하면 귀찮잖아? “자, 이제 됐으니 앞장서라.” “……지도에는 없는 길일 테니 잘 따라오시오.” 이내 사내가 본격적으로 이 미로 같은 하수도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인데 정말 구조가 복잡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궁창 물이 흐르는 큰길을 크게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벽처럼 보였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새 공간이 나오고, 중간에 무슨 갈림길도 있고, 천장에 구멍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럼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너는 왜 그런 곳에 숨어 있다가 걸린 거지?” “……새 은신처를 찾으려 돌아다니고 있었소. 그러다가 멀리서 당신들 소리가 들려서 급히 몸을 숨기느라 어쩔 수 없었지.” 그렇구나, 얘도 참 운이 없다. “도착했소.” 사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직경 2m반경의 구멍 하나가 나 있는 곳이었다. 무슨 용도로 설계된 지형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멍 밑의 길을 따라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는 모양. “지금부터는 다들 목소리를 줄여라.” “후후, 이거 제법 긴장되는군.” 어딘가 흥분한 기색의 난쟁이놈이나 약간 무서워하는 미샤와 달리 나는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우연히도 혼자가 아니라 다섯 명 전부 함께 하수도에 내려왔다. 또한, 모두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다. 만약 저 아래 숨어 있는 여자가, 엘리사 베헨크라면……. “이봐, 혹시 안에 도망갈 곳이 있나?” “이 구멍 말고 다른 출입구는 없소.” 이번에야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81화 하수도 (2) “로트밀러, 안에 누가 있는지 느껴지나?” “오물 냄새가 너무 심해서 분간이 불가능하네.” “그렇군. 그럼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 신호를 주면 따라와라.” 물탱크를 연상시키는 5m가량의 구덩이. 방패를 등에 걸고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사다리를 타고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수신호를 주자 나머지 일행들도 따라 내려왔다. “뭔가 으스스하군.” 횃불을 통해 시야가 밝혀지자 각도상 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통로가 보인다. “지금부터는 네가 앞장서라.” 소리가 울리지 않게 조용히 읊조리며 사내를 앞장세웠다. 그리고 밧줄을 쥔 채 통로를 나아갔다. 한 1분쯤 갔을까? ‘씨발…….’ 옷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이 보인다. 생기가 쪽쪽 빨렸던 ‘한슨’처럼 미라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수십 구의 송장. 어쩐지 썩은 내가 유독 심하더라니. “어, 어… 이게 무슨…….” 저 당황한 모습을 보니 원래 이곳이 이랬던 거 같지는 않고……. “조용히 하고 계속 움직여라.” 나는 멈춰선 사내의 등을 떠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뭔가 일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기에 반응할 수 있었다. 털컥.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쳇더미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옅은 빛. 그리고 통로를 울리는 중후한 음성. [사베움, 바니아, 하르티아] 뭔지 더 볼 것도 없었다. 카루이의 사제가 가진 트랩류 스킬 중 하나. 효과음이 독특해 평소 줄여서 ‘사바하’라고 불렀던 그것. 「캐릭터가 [악신의 부름] 반경 내에 들어섰습니다.」 씨발, 이걸 깔아놨다고? “뒤로 물러나라!!” 입으론 동료들에게 경고하는 한편, 손으론 밧줄을 당겨 사내를 끌어왔다. 간단한 이유다. ‘사바하’는 물리내성이나 라이티늄제 방패 같은 거로 막을 수 있는 그런 스킬이 아니니까. “에, 응?” 방패 대신 내 손에 쥐어진 사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는다. 그리고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벤시 비스무리한 수백의 망령들이 쏟아져 나온다. “악!! 아아아악!!!” 이를 본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나는 힘을 풀지 않고 사내 뒤에 최대한 몸을 숨겼다. 이 녀석 키가 큰 편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 정도 피해로 끝낼 수 있지 않았을 테니. 「캐릭터가 102마리의 망령을 흡수했습니다.」 「어둠 저항력이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효과가 30% 줄어듭니다.」 「캐릭터의 생명력 최대치가 일시적으로 29% 감소합니다.」 몸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빠져나가는 활력. 며칠간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피부가 바짝 마른다. 내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미샤였다. “비, 비요른 괜찮은 거냥!” 즉시 내게로 달려와 상태를 확인하는 미샤. 당장에 포션을 먹이려는 걸 제지하며 나는 웅크렸던 몸을 폈다. 바짝 긴장해서 그런지 근육이 아팠다. ‘씨발, 뒈질 뻔했네.’ [악신의 부름] 발동 시 수백의 영혼을 지정된 방향으로 쏟아내는 트랩류 스킬. 특징은 영혼에 가격당한 횟수만큼 생명력 최대치가 줄어드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최대치가 0이 되면 즉사다. 내 손에 매달린 여기 이 사내처럼. “다들 괜찮나?” “자네가 앞에서 막아 준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네. 그나저나 그자는… 죽은 건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남았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테니까. 이내 손에 꽉 쥐고 있던 사내를 내려놓자, 난쟁이놈이 아찔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그자를 앞장세우길 잘했군.” 동의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탐험가니까. “어떻게 할 건가? 이런 게 또 있다면 더 이상 가는 건 위험할 듯한데.” 나는 잠시 고민한 뒤 결정을 내렸다. “마저 가지.” [악신의 부름]을 설치하려면 여러 재료가 들어간다. 대부분은 사람의 생기다. 주변에 시체들이 많긴 하지만……. 그래 봤자 백 단위까진 되지 않으니, 분명 한 번 설치하는 게 고작이었을 터. ‘게다가 왠지 지금 조지는 게 아니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 같단 말이지…….’ 근거는 없지만 그런 예감이 든다. 이내 출발하려던 차, 난쟁이놈이 뭔가를 내게 건넸다. “별건 아니지만, 품을 뒤져 보니 이런 게 나오는군.” 미라로 변한 사내의 신분패였다. 탈주 범죄자가 왜 신분패를 들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추가 수당을 받을 때 행정청에 제출하면 되겠…… 아니,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신분패를 확인한 나는 흠칫 굳었다. [한스 마르콤] ……얘도 한스였어? 씁,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 스무 걸음쯤 걷자, 한스E가 말한 은신처가 나왔다.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었다. 침대 비스무리한 것도 있고, 먹다 남은 빵과 커피가 올려진 식탁도 있으며, 벽에는 촛대까지 걸려 있다. 다만……. “하하핫, 아무도 없군?” “흐음, 아예 이곳을 떠났거나,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둘 중 하나겠구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딱히 숨을 곳이 있는 것도 아닐진데. “방심하지 마라. 혹시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일단 주변을 경계하며 근방을 샅샅이 수색해 봤다. 침대 밑, 식탁 아래, 혹시 벽면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 건 아닌지까지. 약 5분에 걸쳐 세심히 관찰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드왈키가 한 가지 마법을 쓰기 전까진.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보조 마법 [마력감지]를 시전했습니다.」 [마력감지] 마법적인 무언가가 가미됐다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해 주는 탐색계 마법. “어떤가?” “애매하오.” “애매하다니?” “여기 바닥에서 뭔가 희미하게 마력이 감지되긴 하는데…… 너무 희미하오. 내가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내 나는 드왈키가 가리킨 바닥을 확인했다. 마법사가 아니기에 내게는 그 어떠한 이상한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미세한 흠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마법적인 무언가로 더 알아볼 방법은 없나?” “없소. 그래도 한 가지 추측을 하자면, 이 마법이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숨겨 주는 듯하오.” “그렇군.” 한마디의 질문을 마친 후, 나는 즉시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 날 보며 난쟁이놈이 물었다. “자네, 뭐 하나?” “내려친다.” “……내려친다니?” 난쟁이놈의 반문에 굳이 다시 대답해 주진 않았다. 그야 마법적인 수단이 막혔으니, 물리적인 수단을 쓸 차례 아니겠는가. 바바리안답게. 콰앙-! 가격도 크기도 이전보다 두 배가량 증가한 메이스가 바닥에 부딪친 순간 땅이 흔들린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비요른, 마법적인 장치는 그런 방식으로 열 수 없소.” 지켜보던 드왈키가 그럼 그렇지 하며 훈수를 뒀지만, 나는 묵묵히 메이스질을 이어갔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통짜 강철이라 그런지, 땅을 내려치는데도 멀쩡한 메이스. 물론 땅은 조금 패였을 뿐 변함없었다. 따라서— “그만하게. 드왈키도 말했지 않나. 그런 식으로는…….” 흉갑을 벗고, 신발을 벗고, 투구를 벗고,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는다. 다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눈빛이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몸이 두 배가량 커지며 그에 따라 솟구쳐 오르는 힘. 난쟁이놈은 여전히 기운 빠지는 소리를 뱉어댔다. “아무리 자네가 그래도 마법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는…….” 불가능할 거라고? 이 게임의 고인물이자 현직 바바리안 전사로서 여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힘으로는 부술 수 없다면— 콰아아아앙-!!!! 그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아, 물론 귀신류는 제외하고. *** “이게 되는구낭.” “드왈키, 어떻게 된 건가? 분명 안 된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나?” “어, 그게…… 나도 잘 모르겠소. 이게 왜 되는지…….” 저마다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바닥을 확인했다. 두어 번 내려치자 빛이 새어 나오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세 번째에서야 박살이 난 구멍 아래에는 놀랍게도 계단이 있었다. “이런 하수도에 숨겨진 계단이라니…….” 어찌나 깊은지 횃불을 아래 집어넣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지저 세계로 향하는 길목 같은 느낌. “설마 여길 내려가야 하는 거냥……?” 미샤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솔직히 나 역시 내키지 않았다. 은신처로 쓰던 곳이니, 기껏 해 봤자 몸 하나 숨길 만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었는데……. ‘근데 이건 또 뭐지?’ 왠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느낌도 드는 한편, 호기심도 살짝 생긴다. 그야 게임에서 하수도 자체가 출입 금지 구역이었으니까. 물론 호기심에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요른, 그 여자의 냄새가 이 아래에서 희미하게 나고 있네.” “뭐?” “이곳을 지나간 게 분명하네. 그것도 얼마 지나기 전에.” 씨바, 어떡하지? 그냥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서 이제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그럴까? 고민이 깊어진다. 따라서, 로트밀러의 의견도 한 번 물어봤다. “로트밀러,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대로 물러나는 게 좋다고 여겨지나?” “……조금만 확인해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네. 이 아래에서 그 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냄새는 일절 나지 않으니.” 살짝 의외인 대답이었다. 근데 그런 감정이 티가 났을까? 로트밀러가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덧붙인다. “어째선지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드네.” 음, 육감 스탯이 이유였단 말이지.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 ‘생각보다 적중률이 높단 말이야.’ 실제로 한스E가 숨어 있을 때, 로트밀러는 정확하게 그것을 감지했다. 은신처로 향하는 걸 꺼려했던 것? 만약 함정이 깔려 위험하단 걸 느낀 거라면 다수결 때 혼자 반대를 했던 것도 납득이 된다. ‘육감이라…… 이거 생각보다 좋은 스탯일지도 모르겠네.’ 이내 나는 결론을 내렸다. “로트밀러, 이제부터 네가 앞장서라. 뭔가 조금이라도 싸한 기분이 들면 당장 돌아가는 거로 하지.” 로트밀러의 감은 제법 믿을 만하다. *** “부단장님, ‘문’이 파괴됐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수천 년 전, 한낱 영주성이었던 라프도니아가 지금처럼 수도 없이 증축되기 이전의 그 옛날에 만들어진 지하 피신처. 그리고 그곳에 세워진 도시 ‘노아르크’. 이곳으로 향하는 입구 중 대부분은 단원들이 상시 경계를 서며 지키고 있다. 그런데……. “문이 파괴되다니? 설마 왕가의 공격인가?” “그럴 확률은 낮다고 판단됩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사내의 재촉에 부하가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확인해 보니 카루이교 사태 이후로 잊혀진 문입니다. 마지막 정찰 보고를 살펴보니 그 위에 부랑자 한 명이 은신처로 쓰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흐음.” 사내가 턱을 매만졌다.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왕가에서 이제 와서 우리를 건드릴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침입자인 건 분명하니 확인이 필요하겠군.” “예. 그럼 어느 부대에 연락을 취하겠습니까?” “굳이 부대를 보낼 이유가 있는가?” 사내는 그리 반문하며 옆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부하의 보고가 이어지기 전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성이었다. 예전에 살려 보내 준 바바리안이 도시에서 유명한 탐험가가 되었다던가? 간만에 흥미롭던 얘기가 도중에 끊기게 됐지만…… “아멜리아, 당신이라면 상대가 그 누구건 간에 조용히 처리할 수 있겠지. 우리를 대신해서 다녀와 주겠소?” 남은 얘기는 나중에 다시 이어 가면 될 것이다. 82화 하수도 (3)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횃불과 더불어, 빛구체 마법까지 활성화했음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마치 무저갱 속을 헤매는 듯하다. “조금 더 속도를 올리겠소.” 로트밀러의 판단 아래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를 올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허…….” “하수도 지하에 이런 드넓은 공간이 있을 줄이야.” “하하핫! 이만한 공사를 하려면 인간만으론 턱도 없지.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진 몰라도 분명 우리 선조가 만들었을 것이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탁 트인 공동이 나타난다. 천장만 해도 6m가 넘을 정도여서 지하라기엔 믿을 수 없는 개방감을 주는 공간. “일단 보이는 길은 하나구려.” 주변을 훑어보던 로트밀러가 한 곳을 가리킨다. 살펴보니 세월에 풍파 된 정체불명의 석상 뒤로 통로가 나 있다. “그 여자의 냄새도 이쪽으로 이어지고 있네. 내 예상이 맞다면 곧 만날 수도 있을 듯하군.” 좋아, 그렇단 말이지. “이제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일자형 통로인 만큼 진형을 교체했다. 내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로트밀러가 따르며 길 찾기에 도움을 준다. 난쟁이놈은 후방으로 보내서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 “드왈키, 옆에 잘 붙어 있어랑.” “그, 그러리다.” 미샤는 중심부에서 마법사를 보호하다 능동적으로 후방이든 전방이든 지원하는 것이 역할이다. “그럼 출발하겠다.” 이내 통로를 쭉 걸어 나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길은 모르지만, 문제는 없었다. 우리의 여정에는 개코 로트밀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저쪽으로 간 게 분명하네.” 냄새가 난다는 왼쪽 길을 택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이번에도 갈림길이군.” 한 번 더 갈림길이 나왔다. 이번엔 무려 선택지가 다섯 개다. “로트밀러?” “아, 조금 애매해서 그랬네. 헤매기라도 했는지 그 여자의 냄새가 모든 길목에서 나는군.”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다는 뜻인가?” “그런 건 아닐세. 저쪽으로 가세. 유독 잔향이 진한 거로 보아 가장 최근에 지나간 길인 듯하니.” “그렇군.” 길 찾기와 수색은 내 영역이 아니기에 순순히 전문가의 지시에 따랐다. 다만……. ‘뭐야 여긴.’ 머지않아 새로운 갈림길이 나왔다. 슬슬 이 공간이 어떤 형태인지 감이 잡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형태로 설계된 공간인지까진 알 수 없지만……. 이곳은 미로 구조를 하고 있다. “히쿠로드,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인지 알겠냥? 넌 드워프잖냥.” “하, 하핫! 드워프라고 모두 건축에 조예가 깊을 거라 생각하는 건 편협한 생각일세. 그래서… 드왈키, 어떤가? 자넨 마법사 아닌가?” “마법사가 무슨 전부다 진리를 깨우친 현자인 줄 아시오? 옛 사람들이 지하에 의도적으로 이런 공간을 만들 이유라니, 짐작가는 바조차 없소.” 일행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의문. 더 귀찮아지기 전에 미리 싹을 잘랐다. “잡담은 그만해라. 여기가 뭐 하는 곳이든, 우린 그년만 잡아서 돌아가면 끝이니.” “그건 그런뎅…….” “정 궁금하면 행정청에 물어보면 된다. 우리가 추측하는 것보단 그게 더 정확할 거다.” 내 말에 수다 떨던 삼인방이 입을 꾹 다물었다. 후, 대체 왜 바바리안인 내가 군기반장 역할을 해야 하는 거지? 역시 의지할 건 로트밀러밖에 없다. 언제나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건 이 아저씨밖에 없거든. “비요른, 멈추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냄새가 확 진해졌네. 이건 아마 잔향 같은 게 아니라…….” 돌연 말꼬리를 흐리던 로트밀러가 한 번 더 킁킁거리며 숨을 들이쉬더니 눈빛을 달리했다. “분명하네.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네.” 이내 로트밀러가 왼쪽에서 두 번째 갈림길을 가리켰다. 설마 저쪽에서 알아서 와 줄 줄이야. 조금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시간은?” “속도를 알 수 없어서 확실하진 않네.” “감이어도 좋으니 말해 봐라.” “……한 2분 정도 될 듯하네.” “저쪽에서 우리를 먼저 발견한 건가?” “그건 아닐 거 같네. 이건 추측이네만…… 왠지 길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 음, 확실히 그럴듯한 추측이다. 나는 우리의 대화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난쟁이놈을 대신해 계획을 세웠다. “다들 싸울 준비를 해라. 숨어 있다가 그년이 왔을 때 한 번에 덮치지.” 우선 옆 갈림길에 몸을 숨긴다. 로트밀러는 석궁을, 드왈키는 마법 캐스팅을 시작하며 기습을 준비한다. 이 과정을 끝마치기 무섭게— 터벅, 터벅. 저 멀리서부터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터벅-. 어느 기점으로 소리가 멈춘다. ‘어떻게 된 거지?’ 로트밀러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던 그 순간이었다. 타다다닷-! 다급한 발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진다. “비요른!” 미샤가 속삭이듯 외쳤고, 나는 눈을 감았다. 워낙 소리가 울리는 탓에 헷갈렸지만, 청각에 집중하니 알겠다. 우릴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군.” “우리가 숨어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네.” 로트밀러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야 멀쩡히 걷다가 갑자기 유턴해서 뛸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어떻게 할 건가?” “혹시 불안한 느낌이 드나?” “잘 모르겠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뭣하나? 어서 앞장서지 않고?” 마녀의 숲에서는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더 멀리 도망치기 전에 잡아 죽여야 한다.” 이제 술래가 바뀌었다. *** 카루이 악신, 혹은 암흑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그는 변덕스러운 만큼이나 합리적이다. 맹목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 [이 피와 살점과 영혼을 바치니, 부디 제게 길을 알려 주세요……!] 엘리사 베헨크. 그녀가 마녀의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신의 그러한 특성 덕분이었다.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탐험가 셋을 공양한 그녀는, 시체를 태우면 쉴 시간이 늘어난다는 조언과 [망자화]라는 새로운 권능을 얻었다. 그 권능을 사용하면 몬스터에게서도 선공을 받지 않았고, 마녀의 숲의 지역 효과도 면역이었다. 그렇기에— [어! 저 여자는……!] [뭣들 하나! 어서 도망치세!} 우연히 숲에서 드워프족 일행을 발견했을 때 끝까지 추격할 수 있었다. 그야 지역 효과만 없으면 평범한 숲이니까. 애석하게도, 추격은 실패로 끝났다. 놈들이 4층으로 올라가자 황급히 그 뒤를 따랐지만, 간발의 차로 포탈 색이 바뀌며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버렸다. 포탈 앞에 가득하던 몬스터? 열흘 내내 [망자화]를 써가며 버텼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왔다. [베헨크 신관, 어딜 가시는데 짐을 그리 챙기십니까?] 곧바로 필요한 짐만 챙겨 도망쳤다. 변절한 신관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그녀는 몇 번이나 봐왔으니까. 이제 그녀에게 있어 도시는 미궁보다도 위험한 장소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살길은 있다던가? 변덕스러운 악신의 조언도 있었다. 오물과 비루한 탈주자들이 가득한 하수도. 그 아래에 숨겨진 도시라면 자신을 받아 줄 것이라고 했다. [뭐야! 여긴 내 자리야! 저리 안 꺼져?] 이후 악신의 인도를 따르니 하수도 속에 감춰진 ‘문’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 먼저 자리 잡고 살던 부랑자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제물을 바쳐라.] 변덕스러운 악신은 ‘문’을 여는 방법까진 알려 주지 않았다. 따라서 하수도를 돌아다니며 수십 명의 제물을 모아 바쳤다. 그 대가로 문을 여는 방법을 알아내고서 지하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긴 대체 뭐야!’ 길이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다. 어둠 속에서 장장 몇 시간을 헤맸다. 변덕스러운 악신은 제물을 바치기 전까지 길을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와중에……. ‘……?’ 혹시 몰라 제물들의 남은 생기로 설치한 [악신의 부름]이 발동됐다. 그때부터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신전에서 보낸 추적자일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신중히 주변을 살피며 미로를 헤맸다. 그러던 때였다. [키히히히히히!!] 느닷없이 악신이 웃어 젖혔다. 불길해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보통 저럴 때면 위험과 고난이 가려던 길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추격자인가?’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청각에 집중했다. 정적 속에서 희미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가려던 그 길 너머에 있었다. 이를 눈치챈 동시, 그녀는 반대로 달렸다. 착각은 아니었는지, 머지않아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뭣하나? 어서 앞장서지 않고? 더 멀리 도망치기 전에 잡아 죽여야 한다.” 짧게 짧게 끝나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비요른! 조심해랑! 그 사악한 년이 뭔가 수작을 부려 놨을 수도 있당!” 이내 그녀는 저들이 누구인지까지 인지했다. 비요른 얀델. 신관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메이스로 후려치고 봤던 생각없는 바바리안놈과 그놈의 동료들. ‘신전에서 보낸 놈들이 아니라고……?’ 정체를 깨달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도를 줄였다. 저들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따라온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됐어.’ 이내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엔 놈들에게 패퇴해 도망쳐야 했으나, 그땐 부활하며 힘을 상당량 소모했기 때문 아닌가. 「엘리사 베헨크가 [마경의 문]을 소환했습니다.」 서로가 만전의 상태라면 질 리가 없다. ***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나 싶던 차. 타닷-!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던 뜀박질 소리가 끊긴다. 그리고 괴기한 소리가 통로 너머에서 울려 퍼진다. [끼야아아악—!] [게케에케케케케!!] 빠르게 다가오는 괴기한 소리. 어느덧 그 소리가 횃불 반경 안에 들어서며, 수십의 네 발 달린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망자의 문]이군.’ 나는 새삼 감탄했다. 부활하느라 힘을 쓰지 않아서지, 확실히 그때와는 다르다. 「엘리사 베헨크가 [그림자 수호병]을 소환했습니다.」 물량에서부터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하나? 몇 분간 괴물을 쏟아내는 [망자의 문]에 더불어 그림자 수호병까지 마구잡이로 소환해 대니, 그 기세가 실로 해일과 같다. 다만……. “뭐 하나? 어서 박살내러 가지 않고?” 쫄 필요는 없다.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까. “하하하! 바바리안 놈! 널 두고 가는 게 아쉬웠는데, 사지로 알아서 기어들어와 주다니!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지랄하네, 놓지지 않기는?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대가리를 터트려 주마!” 서로가 각자의 각오를 주고받으며 시작된 전투. 수십 분간 장기전을 치러야 했던 지난번과는 그 양상부터가 달랐다. 서걱-! 나름 높은 수준의 물리 내성을 지닌 그림자 수호병? 미샤가 망나니처럼 쌍검을 휘두를 때마다 속절없이 썰려 나갔다. “……이렇게 쉬웠낭?” 그야 이제 얼음 속성 보너스가 있으니까. 게다가 당시에 성가셨던 저주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엘리사 베헨크가 [하급 부패]를 시전합니다.」 「엘리사 베헨크가 [근력 저하]를 시전합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보조 마법 [광휘]를 시전했습니다.」 「파티원들에게 걸린 모든 악 속성 효과가 해제됩니다.」 이번에 돈벼락을 맞아서였을까? 저주 해제를 배워 오랬더니, 광역 정화 마법인 [광휘]를 익혀서 돌아왔다. “후후, 어떻소?” “대단하다.” 거들먹거리는 드왈키를 보며 대충 칭찬의 말을 던져 주었다. 왠지 저번에 내가 뭐라고 했던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거 같아서 말이지. 여하튼 슬슬 나도 전투에 가세했다. 방패벽을 세우고 앞을 막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분은 충분하겠지만……. 효율적이지 못하다. “베헬—라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음과 동시. 실제로 몸에 활력이 깃들기 시작한다.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통로가 좁아 [거대화] 연계까지는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효과는 충분했다. [그르르르르.] 위협을 감지하고 무작정 내게로 달려들기 시작한 소환수들. ‘이러니까 무슨 핵 앤 슬래쉬 게임을 하는 거 같네.’ 지난날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사이즈 업된 메이스를 미친 듯이 휘두른다. 퍼억-! 퍼억-! 퍽! 물리 내성이고 뭐고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터져 나가는 수호병들. 고블린 몇 마리와 사투를 벌이던 예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며 묘한 쾌감이 인다. 그래, 이 맛에 RPG를 하지. 푸욱-! “아악!!” 어그로가 내게 끌리며 수호병들이 분산된 틈을 타, 로트밀러가 석궁 화살을 명중시켰다. 또한, 난쟁이놈이 ‘전격 방출’ 콤보를 쓰며 일시적으로 길을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비요른, 혼자 가면 위험—”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통로를 가로 막고 있는 소환수들이고 뭐고,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드디어 엘리사 년의 표정이 제대로 보인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일방적으로 쳐 맞는 구도가 나올 줄은 몰랐나 보지? 나는 미리 외쳤다. “드왈키, 지금이다!” “지금……?” 드왈키가 의문스럽다는 듯 되물었지만……. 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엘리트 바바리안이라서 말이지. “어서!” “아, 알겠소!” 어느새 옆에까지 따라온 미샤와 난쟁이놈이 보조를 해 주는 사이. 나는 계속해서 길을 뚫었다. 30m, 20m, 10m…….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크게 도약하며 슬라이딩 하듯 엘리사 년에게 달려들었다. 다만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은 그 순간. 엘리사 년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며 허공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엘리사 베헨크가 [영령화]를 시전했습니다.」 [영령화]였다. 물리 면역 보너스에다가 활공까지 가능하게 해 주는 상급 이동기. “이놈들! 이 수모는 결코 잊지 않—” 잊지 않기는 뭘 잊지 않아. 도망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때의 우리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드왈키!” 내가 뒤에다 대고 외친 즉시. “다 됐소!!” 미리 주문해 둔 마법이 완성되며 쏘아진다. 이번에 드왈키가 무려 130만 스톤을 주고 마탑에서 배워왔다는 스펠.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저주 마법 [물질화]를 시전했습니다.」 [물질화]. 이 마법에 적중 시, 해당 적은 물리 면역 상태가 해제된다. 즉, 영체류 몬스터라도 맨몸의 전사가 후드려 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빗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리올 워브 드왈키가 9등급 보조 마법 [명중률 보조]를 시전했습니다.」 우리 드왈키도 이제 슬슬 반푼이 마법사는 벗어나는 단계라서 말이지. “으, 아! 꺅!” [영령화] 상태가 풀림과 동시. 뻗고 있던 손끝에 촉감이 전해진다. 고블린과 첫 전투를 치렀을 때와 비슷했다. 팔목인지 발목인지, 그도 아니면 목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옷깃인지 뭔지 잡힌 부분을 꽉 쥔 다음. 콰앙-! 바닥에 전력으로 패대기쳤다. 그리고 곧장 그년의 상체 위로 올라탔다. 그로기 판정을 넣기 충분한 대미지였는지, 경련하며 내게 눈알을 부라리는 엘리사 년. “으! 으, 아, 어어, 으……!” 뭔가 쌍욕을 박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병신 같은 그 말투는 아직도 못 고쳤구나. 물론 상대가 병신이라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머리가 짓이겨진 상태로도 어깨춤을 추며 좀비처럼 일어난 전력이 있는 게 바로 이년 아니겠는가. 스륵. 곧장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온 힘을 다해 내려치려는 찰나. “자, 잠깐!” 드왈키가 황급히 나를 부르며 제지한다. “보상금을 많이 타려면 살려 데려가는 편이 좋지 않겠소?” 음, 확실히 현상 수배단지에도 그렇게 써 있긴 했지만, 얘가 그런 걸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한 번 돈의 참맛을 봐서 그런가? 이제 얘도 정말 탐험가가 다 됐구나. “확실히, 죽이는 건 아깝군.” 나는 엘리사년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드왈키를 시켜 [마비독] 주문을 사용한 뒤. 퍽! 퍽! 퍽! 퍽! 사적인 감정 없이 엘리사의 팔과 다리를 한 번씩 메이스로 내리쳐 주었다. 깔끔하게 짓뭉개진 뼈와 살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난쟁이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글쎄……. “혹시 도망칠 수도 있지 않나.” 이런 부분에선 부족한 것보다 넘치는 게 낫다는 게 내 평소 지론. 그런 의미에서 불구가 된 엘리사를 로프로 바짝 동여맨 뒤,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맸다. “우리 많이 강해졌구낭. 이렇게 쉽게 이길 줄은 몰랐는데…….” 얼마 남지 않은 소환수를 마저 처리하고 돌아온 미샤가 고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야 전투 시작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비교적 최근에 싸웠던 적이니만큼 성장이 체감된다. 다만 서로 칭찬하며 덕담하는 건 나중에 술집에서 해도 늦지 않을 터. “로트밀러, 앞장 서라.” 그리 말하며 로트밀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하는 목적도 전부 이뤘겠다. 어서 이 으스스한 지하 공간을 떠날 차례— ‘응?’ 뭐야, 이건 또. 왜 사람이 불렀는데 미동도 없어. 나는 다시금 소리 내어 로트밀러를 불렀다. “……로트밀러?”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이변을 깨닫고서 서둘러 다른 동료들도 확인했다. “미샤? 드왈키? 히쿠로드……?” 누구에게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라도 좋으니까 투명인간 놀이였다고 해 줬으면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 어느샌가 날 둘러싼 숨 막히는 정적.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좆됐군.” 하,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리더라니. 83화 하수도 (4) 정확히 언제부터인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눈치를 챘을 때. “미샤? 드왈키? 히쿠로드?” 모두가 눈 뜬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대체 뭐지?’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미처 보지 못했던 정보가 눈에 들어온다. 아주 얇고 기다란 침. 그것이 동료들의 목에 하나씩 박혀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마 침이 박힌 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목 근육이 빳빳하다. 그리고 그 저린 감각이 점점 아래로 퍼지고 있다. 「캐릭터가 ‘바실리스크 마비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육체 수치가 300 이상입니다.」 「중독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위협을 감지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반면 뇌는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일. 스르륵- 우람한 팔은 방패를 들어 올려 상체를 가리고. 다리는 살짝 굽어지며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의 균형을 낮춘다. “…….” 목을 옥죄는 듯한 정적. 그 속에서 호흡조차 아끼며 소리에 집중한다. 똑- 똑- 또옥- 저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하지만 나는 의심치 않았다. 고블린 덫을 밟았을 때처럼. 분명, 적은 이 근처에 있다. “…….” 몇 초간 살 떨리는 고요가 이어진다. 마치 온몸의 모든 신경 세포가 곤두서는 듯한 느낌. 탓. 그때 아주 작게나마 기척이 들린다. 발걸음 소리라고 하기도 애매한… 마치 돌 부스러기가 바람에 굴러가는 듯한 소음. ‘……은신 계통 스킬인가?’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뭔진 몰라도 독이 점점 몸에 퍼지고 있다. 그러니 이럴 시간에 차라리…….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어떻게든 승부를 보는 게 낫겠지. 그게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 있을 테니. “베헬—라아아아아아!!!” 온 힘을 다해 함성을 내지른다. 물론 마물과 달리 사람에겐 ‘위협 수치’가 절대적으로 작용치 않지만……. 이 부분은 지난날 연구가 끝났다. [으음… 괴,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소. 머리로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단 걸 아는데, 몸이 막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달까…….] [야성분출]에 노출됐을 때, 기가 약한 자라면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오히려 ‘도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대상이 호전적인 자라면……. [왠지 빨리 해치워야 할 거 같은 기분이었당. 아, 물론 네가 커다랗게 변하기 전에 얘기당. 거대해진 다음엔 나도 드왈키랑 비슷한 기분이었으니.] 어느 정도 ‘도발’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정체불명의 적은 어떨까? “신기한 느낌이군, 바바리안.”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뭐, 신기하다는 말은 이쪽이 해야 할 대사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는데 목소리가 앞뒤에서 동시에 들린다. 다만 적의 위치를 알 수 없단 문제는 둘째치고. ‘잠깐, 뭔가 목소리가 익숙한데…….’ 나는 흠칫 굳었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조금 허스키하긴 했지만 그건 분명했다. ‘대체 누구지?’ 의문을 느낀 뇌가 키워드를 조합한다. ‘암살자’처럼 모습을 감추고 ‘마비 독침’을 쏘는 ‘여자’. ……기억이 났다. “너였군.” 망자의 땅에서 만났던 그 사이코패스 년. 그년이 틀림없다. *** 정체를 감출 생각은 없었을까? “…목소리만으로 구별해 낼 줄은 몰랐는데.” 이내 정면부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170이 조금 넘는 날렵한 체형. 타오르는 듯한 적발과 반쯤 잘려져 나간 오른쪽 귓등. 입고 있는 옷이 평상복이란 것만 빼면은 모든 게 그때와 일치했다. 터벅. 그런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디며 거리를 좁힌다. 솔직히 말해서 식은땀이 줄줄 새어 나왔다. 최근 폭발적인 성장을 하며 작은 발칸이란 이명까지 얻었다곤 하지만……. “많이 강해졌군, 바바리안. 그걸 맞고도 움직이다니.” 그래 봤자 아직 이년한테는 비빌 바가 아닐 테니까. ‘8층에서 활동하는, 오러까지 쓸 줄 아는 탐험가라…….’ 암만 봐도 혼자서는 답이 없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 줄 생각은 없다마는. 방패와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겁먹은 정신을 재무장한다. 그런 나를 보며 여자가 묻는다. “도망치지 않는 건, 동료 때문인가?” 거, 누가 사이코패스 년 아니랄까 봐. 그딴 걸 궁금해하는 감성부터가 존나 소름 끼친다. “질문은 나부터. 약속은 지켰을 텐데, 왜 이제 와서 나를 죽이고 싶어진 거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행동 동기가 궁금했다. 그야 그걸 알면 뭔가 다른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다만……. “죽이고 싶어지다니?”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먼저 문을 열고 침입한 건 너다, 바바리안.” “……문?” “말해라. 이곳에 대해선 누구한테 들었지?”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왠지 모르게 시작부터 대화가 엇돌고 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쉽게 말해라. 침입했다니? 여기가 어디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여자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야 이 대화에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 “……문은 어떻게 열었지?” “하수도에 있던 그 마법적인 무언가라면, 메이스로 내리쳐서 부쉈다.” “부쉈다고……?” “문제라도 있나?” 내 당당한 물음에 여자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최상위 탐험가인 만큼 드왈키나 난쟁이놈처럼 마법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진 않는 모양. 다만 이유만은 궁금했는지 질문을 해온다. “근데 어째서 부순 거지?” “이년이 여기로 도망쳤으니까.” 그제야 짊어지고 있던 엘리사를 자연스레 바닥에 내려놨다. 사실 아까부터 거슬렸거든. 그럴 틈조차 없어 짊어지고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방해가 될 게 분명하니까. “……얼마 전에 수배된 그 카루이의 사제군.”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오해가 풀렸나?” “오해는 풀렸다.” “그럼 다행이군. 만나서 반가웠다. 우린 이만 가보겠다. 아, 포션까진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그만, 이곳에 대해 알게 된 이상 그냥 보내 줄 수는 없다.” “……영상기록구를 파기하고, 맹세코 오늘 겪은 모든 일을 비밀에 부치겠다고 해도?”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씨바… 역시 안 되는 거구나. 나는 나약한 마음을 깔끔하게 지워 냈다. 저년 입으로 확답까지 들은 이상,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철컥. 입고 있던 갑옷을 벗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지?” 상대가 의문을 표하건 말건. 각반을 풀고, 투구와 신발도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이봐.” 말을 걸었다. 다행히 상대는 대화에 응해 줬다. “……?”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빛.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뭐?” “그 첫 번째는 중간에 말을 하다 마는 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나도 모른다. 아무도 그건 안 말해 줬거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전력을 다해 앞으로 대쉬한다. 조금이라도 저년의 신경이 분산됐길 바라며. 메이스를 쥔 팔을 어깨 뒤로 당긴다. 잠시 흠칫하던 여자는 뒤늦게 내 수작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군.” 하긴 이 거리에서 대쉬해 봤자 너한텐 그리 당황스럽지도 않겠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후웅-! 팔을 앞으로 휘두르며 메이스를 집어 던진다. 휙-! 역시 피하는구나. 날렵하게 몸을 틀어 메이스를 피한 여자가 이게 뭔가 싶은 눈치로 나를 바라본다. “……?” 바바리안이란 놈이 시작부터 무기를 던져 올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인데……. 나는 미련 없이 한 손에 남은 방패마저 던졌다. 휘익!! 쉬는 날 연습한 보람 있게 원반처럼 회전하며 날아가는 방패. 그 신속함은 메이스와 비교조차 불가하다. 다만……. “……!” 저 쓸데없이 유연한 년은 허리를 뒤로 꺾는 것으로 손쉽게 방패를 피해 냈다. 예상한 바였기에 아쉽진 않았다. 타닷-! 메이스와 방패가 벌어진 찰나를 이용해, 한 번 더 지면을 박차며 대쉬를 이어 간다. 어느덧 육체 수치가 일반인의 영역을 뛰어넘은 만큼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지금.’ 엘리사 년에게 슬라이딩할 때처럼 손을 앞으로 뻗는다. 저년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저 ‘요것 봐라?’ 하는 정도의 얼굴. 타닷- 실제로 저년은 뒤로 세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정확하게 간격에서 벗어났다. 이번에도 딱히 아쉽진 않았다. 애초에 그러라고 빤히 보이게 손을 뻗은 거니까. ‘역시 예상대로군.’ 폭이 넓다고 하긴 힘든 일자형 통로. 덩치 큰 바바리안이 앞에서 달려들면 피할 곳은 뒤밖에 없다. 물론, 확 뒤로 물러난다면 답이 없었겠지만……. 그때도 딱 피할 정도로만 움직이더란 말이지. 성격 문제라기보단 높은 경지를 추구하며 자연스레 갖게 된 효율충의 면모일 터. ‘플랜A로 가도 되겠군.’ 따라서 타이밍에 맞춰 [거대화]를 시전했다. 리아키스에게 극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영감을 받아 만든 연계기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몸이 불어나며 그에 맞춰 길어진 팔. 원래라면 세 걸음 정도 부족했어야 할 거리가 즉시 좁혀진다. “……!” 처음으로 저년의 표정에 당황의 빛이 어린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즉시 어깨를 잡아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긴다. 상당한 저항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너.” 힘에서조차 밀렸던 예전과는 다르다. 그야 그때의 나는 레벨 1에 정수 0개였던 초짜 바바리안이었으니까. “근력 좀 키워야겠군.” 시체골렘과 뱀파이어, 그리고 오크 히어로가 내게 남겨준 힘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끌려오는 상대. “큿!” 피할 수 없게끔 목을 꽉 쥔 채로 주먹을 안면부에 꽂아 넣는다. 퍼억-! 묵직한 소리와 손맛. 역시나 한 방으로 제압은 무리였다. 따라서— ‘한 번 더.’ 신속하게 회수한 주먹을 다시금 내리꽂는다. 그러나 그 순간. 극한까지 끌어 올려진 내 동체시력에 저년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단검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내 팔목을 통째로 자를 생각인가?’ 나는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다. 저년은 오러 유저다. 따라서 물리 내성이건 골강도건 항마력이고 뭐고, 크게 의미가 없다. 분명 저 단검은 내 팔이 상대에게 닿기 전에 베어낼 것이다. 그러니…… ‘플랜B로 가야겠군.’ 뻗던 주먹을 멈춘다. 이제 와서 몸을 사리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겼을 뿐. 다치는 건 전혀 두렵지 않다. 그게 살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살점폭발.’ 머릿속으로 이미징을 끝낸 찰나. 상대를 잡고 있던 손에서 강한 폭발이 인다. 퍼엉-! 터져 나가는 살점. 그리고 산성피. 치이이이익-! 저 독한년은 인상만 찌푸릴 뿐 신음 한 번 뱉지 않았다. 다만 고통 내성 스탯은 없었을까? 통증은 참아낸다 쳐도 아주 잠시간, 저년의 움직임이 경직됐다. ‘좋아, 그럼 다시 플랜A.’ 휘둘러지던 단검을 피해, 주먹을 복부에 꽂아 넣는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알기에, 이다음은 없다는 듯 계속해서. 퍼억-! 퍽! 퍽! 퍽! 종이몸이 특징인 딜러답게 머지않아 반응이 나왔다. “……!” 내장이 씹창났는지 입으로 새어 나오는 선혈. 이를 보자마자 눈에 압력이 느껴질 만큼의 엄청난 흥분이 머리로 쏠린다. 씨바, 정말 이년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건—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뇌가 희망을 감지한 그때. 돌연 본능이 경종을 울리며 경고를 보내왔다. 원인은 실로 간단했다. “바바리안.” ……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얘는 분명 여기 나한테 붙잡혀 있는데. 타다닷-! 인기척에 나도 모르게 주먹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똑같이 생긴 여성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씨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것은 딱히 궁금치 않았다. [자가복제]. 4층 균열인 ‘도플갱어 숲’의 수호자에게서만 획득 가능한 초레어 정수. “뱀파이어의 정수를 먹었다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게 잡혀 있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수라각]을 시전했습니다.」 여자의 분신체가 크게 도약하더니 허공에서 회전하며 내 안면부에 킥을 꽂아 넣었다. 콰아앙-!! 머리가 통째로 날아간 듯한 충격. 아니, 이거 설마 진짜 날아간 건가? 툭. 귀 옆에서 들리는 묵직한 충격음. 암전하는 시야. 배터리 빠진 휴대폰이 꺼지듯 의식이 멀어진다. “니, 미…….” 씨발. *** 「패시브 스킬 [어둠의 근원]으로 인해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습니다.」 「캐릭터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84화 하수도 (5) 툭. 바바리안이 먼지를 흩뿌리며 쓰러진 즉시.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녀가 이를 악 물며 허리를 움추렸다. ‘방심의 대가인가.’ 갈비뼈가 나갔다. 피를 뒤집어쓴 피부는 따가운 걸 넘어 쓰라리다. 장기도 많이 상한 거 같고. ‘이런 상황이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군.’ 몸이야 머지않아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통은 너무도 선명했다. 고통 하나만큼은 익숙하다고 자부했는데. 피식.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자만한 결과물이라고는 한들. 이 상황을 만든 게 3개월 차 바바리안이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기한 자란 말이지.’ 단순히 가진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순간의 판단, 그리고 이를 실행으로 옮길 과감성과 결단력. 무엇보다 삶을 향한 그 의지까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든다. ‘만약 다시 만나는 게 좀 더 나중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물론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 무려 2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미궁에 들락날락했던 게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부터가 문제겠지. 그만큼 위험한 자란 뜻이니까.’ 첫 만남이 있던 게 고작 한 달 전이었다. 미궁을 들어가도 한 번 정도밖에 더 들어가지 못했을 시간. 그런데 이 바바리안은 어떻게 변했던가.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던 그 바바리안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치이이익-! 목이 통째로 날아갔음에도 죽지 않고, 살을 수복하기 시작한 육체. 아멜리아는 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터벅-. [어둠의 근원]처럼 죽음 극복의 효과를 지는 이능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라고 무적이 된단 뜻은 아니다. 이 바바리안만 봐도 그렇다. 터벅- 머리가 통째로 박살나며,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다. [영생자]가 발동되며 빠르게 회복이 되는 것? 이 정도 부상을 복구하려면 굉장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영혼력이 바닥나면 그조차 불가능해진다. 그 말인즉슨. 죽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고민없이 단검을 집어넣고는 포션을 꺼냈다. 그 누가 뭐라고 한들, ‘왕가에서 보낸 자들은 아닌 건 확실하니,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살인귀가 아니다. *** 힌트는 있었다. 앞뒤에서 동시에 들려왔던 목소리. 만약 내가 좀 더 똑똑하고 침착했다면 [자가복제]란 변수를 알아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플랜A와 B도 조금 달라졌을 테고. ‘뭐, 그래 봐야 결과는 똑같았을 거 같지만.’ 조각 나 있던 정신이 조립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괴물 같은 재생력이군.” 가장 먼저 보인 건 싸이코패스 년이었다. “포션 한 병에 그게 전부 낫다니.” “포, 션……?” 갈라지는 목소리를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야 눈치챈 것인데, 머리 부분이 몹시 흥건했다. 보아하니 전부 피인 거 같지는 않고……. 설마, 이 여자가 나한테 포션을 뿌려 준 건가? “대체, 왜—” “죽이지 않았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아직 살아 있는 게 기쁘긴 한데……. 솔직히 의식을 잃는 그 순간에 죽었다고 확신했었으니까. 여자가 날 보며 짜증난다는 눈빛을 지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뭐……?” “그때도 그렇고, 왜 나만 보면 일단 달려들고 보는 거냐?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보통은 대화로 풀어갈 생각을 먼저 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 전부 언제나 최악의 경우부터 가정하는 내 버릇 때문이니까.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날 죽일 생각이라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을 때. 마비독이 조금이라도 몸에 더 퍼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여자는 짧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째서? 난 분명 지난번에도 널 살려서 보내 줬을 텐데?”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왠지 조금은 억울함이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정말 억울한 건 나였다.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지 않나. 이곳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보내 줄 수 없다고.” 그 말만 안 했어도, 목숨 구걸이라는 플랜C는 플랜A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라고 이런 괴물이랑 싸우고 싶었겠어? “분명 ‘그냥’ 보내 줄 순 없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거나 그거나. 왠지 아까부터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여자였기에 나는 좀 더 대담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날 어떻게 할 거지?” “죽일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어서 손이나 치워라.” 나는 슬그머니 메이스 쪽으로 움직이던 팔을 멈추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해다.” “오해?” “이걸로 널 기습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했다. 단지—” “내 마음이 바뀌었을 때를 대비하려 했을 뿐이라고?” ……음, 그래 그거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니까.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여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마치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하는 눈빛. “정말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리 말하며 여자가 바닥에 침을 퉷 뱉었다. 순간 껄렁대는 타입인가도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침이 아니라 피였다. 기절하기 전에 펼친 내 적극적 방어에 대미지가 없진 않았던 모양. “……넌 포션을 먹지 않은 건가?” “그런 체질이라서.” “그렇군.” 간략한 말로도 부족한 설명이지만 말을 아꼈다. 정수 중엔 포션을 먹었을 때 오히려 페널티를 입히게 만드는 것도 있으니까.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바바리안, 이걸 먹어라.” 여자가 품에서 환단 같은 걸 꺼낸다. 거무죽죽한 것이 무슨 고양이가 사료를 토한 듯한 모양새. “이게, 뭐지……?”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든 약이다. 복용 시 1시간 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 주지.” “기억을 지워 준다고……? 그렇다면 왜 망자의 땅에서 만났을 땐 이걸 쓰지 않은 거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애초에 이것도 혹시 모를 때 쓰라고 준 게 아니면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귀한 물건이란 거구나. 근데 여기서 또 의문점이 있다. 지금 내 처지에 할 말은 절대 아니겠지만……. “차라리 죽이는 편이 쉬울 텐데, 왜 그런 귀찮은 방법을 쓰지?” 사람 목숨보다 귀한 건 없단 말이 있다. 내가 예전에 살던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이곳엔 사람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게 수없이 존재하는 세계이니까. 그 일례로, 땅 위에서는 지금도 세금을 내지 못했단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런 와중에……. ‘귀중한 소모품을 써가면서까지 우리를 살려 보낸다라…….’ 나는 확신하듯 말했다. “뭔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거군.”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우리 다섯 명을 죽이면 장비만 해도 수천만 스톤은 될 테니까.” 내 예리한 지적에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곡이 찔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너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솔직히 말해도 되나 고민하고 있자니, 여자가 내 말을 끊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알 거 같으니까.” 자기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 하지만 굳이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을까? “됐다, 뭐가 됐건 마음대로 생각해라. 어차피 변하는 건 없으니까.” 여자가 허리를 굽혀 내 입을 강제로 벌리더니, 환단을 목구멍 안에 우겨넣는다. 나중에 토해 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환단. 화르륵! 머릿속에서 뭔가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아픈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 “……이봐, 진짜 기억만 잃고 끝인 거겠지?” “아니라면, 너한테 선택지가 달리 있나?” 어,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한데……. 말문이 막힌 날 보며 여자가 피식 웃었다. “부작용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자라, 바바리안.” 음, 그렇다면야. 솔직히 안심은 전혀 안 됐지만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여자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다른 하나는 뭐였지?” 응? 다른 하나라니?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말이다.” 아, 그거. “그건 바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캐릭터의 영혼에 레테의 축복이 스며듭니다.」 「축복이 불가한 영혼입니다. 영혼에 스며든 축복이 제거됩니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하수도에 있었다. 벗겨진 장비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나부라져 있었고, 이는 동료들도 매한가지였다 툭. 손을 지지대 삼아 오물 범벅이 된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그리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겨 입고 있자니, 동료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다들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어, 여긴 하수도……?” “대, 대체 무엇이오? 우린 분명 그 사악한 악녀를 뒤쫓아 가고 있었을 텐데…….” “영상기록구! 영상기록구를 확인해 보면… 제기랄, 부서져 있군!” 싸이코패스 년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료들. 얘기를 들어 보니 한스E를 따라 은신처로 가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모양인데……. ‘……나는 왜 멀쩡하지?’ 다시금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도, 의식을 잃기 전까지 있었던 일이 선명히 떠오른다. 대체 왜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던 찰나. ‘잠깐, 그럼 그년은 어떻게 된 거지?’ 뒤늦게 엘리사 년이 떠오르며 정신이 확 들었다. ‘……설마 그년이 살려서 데리고 간 건가?’ 일단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현상금이고 뭐고 그때 죽여 버리는 건— “다들 저기 좀 봐랑!!” “어? 저건 그 여자 아닌가?” 뭐? 즉시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오물이 덕지덕지 묻은 금발. 깨부숴 주고 싶게 생긴 앙증맞은 뒤통수. 엘리사 년이 틀림없다. “주, 죽어 있네!” 헐레벌떡 달려가 맥을 짚은 난쟁이놈이 사망 선고를 내린다. 이에 혼란이 가중됐다. “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려. 대체 우리는 왜 기억이 없고, 이 여자는 왜 죽어 있는 것인지…….” “드, 드왈키, 혹시 네가 말한 그 괴물이라도 나왔던 거 아니냥?!” 당혹스러운 음성과 함께 난무하는 온갖 추측.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던 로트밀러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았다. “…전부 이 여자의 짓이지 않았을까 싶네.” “뭐? 이 여자 짓이라공?” “아마 우리는 추격 끝에 이 여자를 찾아냈을 것이네. 그리고 아마 이겼겠지.” 로트밀러는 주장의 근거로 엘리사의 팔다리를 제시했다. 내 메이스 정도가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짓뭉개긴 어려울 거라던가? “그, 그러고 보니 내 마법의 흔적도 이 여자에게서 느껴지고 있소.” 이내 드왈키도 시체 속에서 [마비독]의 흔적을 찾아내며 심증을 굳혀 주었다. 그럼 이제 이들에게 남은 의문은 하나. “그렇다면 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거냥?” 어째서 기억을 잃었는가. “내 예상이 맞다면, 우리는 이 여자를 살려서 도시로 데려가려 했을 거네. 하지만… 그때 이 여자가 정신을 차리며 뭔가 수작을 부려오지 않았을까 싶군.”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분명 내가 기억을 잃었어도 그런 식으로 상황을 분석했겠지. “확실히… 알려진 바가 적은 악신의 힘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구려.” “하하핫! 그래도 이렇게 죽어 있는 걸 보면 우리가 어떻게 잘 해결하긴 한 모양이네!” “…비요른, 너는 어떻게 생각하냥?” “글쎄…….”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그들끼리 추측해 내고 납득한 결론은, 내가 기억하는 진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 “로트밀러의 말이 맞는 거 같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기억을 잃지 않은 게 알려지면, 그 싸이코패스 년이 언제 또 나를 찾아올 지 모르니까. “어서 밖으로 나가 신전부터 들러보세. 기억을 잃은 것만이 아니라, 뭔가 몸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않나.” 로트밀러의 걱정스런 말에 다들 서둘러 떠날 행색을 갖추었다. 따라서 나도 이만 상념을 끝냈다. ‘하수도 지하에 숨겨진 무언가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고인물로서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앞으로 하수도에는 얼씬도 말아야지.’ 호기심보다는 목숨이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85화 마르토앙 남작 (1) 하수도를 빠져나왔을 때. 날 반긴 것은 어느새 저문 하늘과 익숙한 두 명의 얼굴이었다. “비요른 님! 무사하셨군요!” “샤빈? 네가 왜 여기 있지?” “왜 여기 있냐니요! 몇 시간이 지나도 의뢰 보고를 하러 오지 않으시니까 걱정돼서 왔죠!” 음, 그렇구나. 직접 찾으러 와 줬다니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근데……. “둘이서?” 우리에게 정말 뭔가 일이 생긴 거라면, 날이 밝고서 다른 탐험가를 보내는 게 합리적인 판단 아닌가? 행정청 사무직과 도서관 사서로 이뤄진 파티를 직접 꾸릴 게 아니라. “뭐예요! 그 눈빛은? 라그나가 얼마나 실력 있는 마법사인데요!” 그제야 나는 함께 온 사서의 면면을 확인했다. 확실히 도서관에서 봤던 모습과는 행색부터가 달랐다. “흐음.” 광택이 나는 로브. 허리띠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스크롤과 물약. 그리고 손에는 상당히 비싸 보이는 마법봉을 쥐고 있다. 얼마나 실력이 좋은진 모르겠고, 일반적인 사서 월급으로는 엄두도 못 낼 장비임은 확실하다. 얘, 사실 부자였던 건가? “비요른, 이분들은 누구냥?” “샤빈 에무어. 이번 의뢰를 내게 맡긴 행정청 직원이다. 그리고 이쪽은… 라그나 리타니엘 페프로크.” “리타니엘이 아니라 리타니옐이요!” “아무튼 내가 다니던 도서관의 사서다.” “헤엥, 그렇구낭.” 미샤를 필두로 나머지도 간략하게 소개를 해 준 뒤, 나는 형식적인 말을 뱉었다. “이 밤에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 미안하게 됐군.”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맙다고 하지. 네가 여기까지 와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감사 인사는 샤빈에게 하세요. 저는 억지에 휘말렸을 뿐이니까.” 사서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린다. 왜 오늘따라 더 쌀쌀맞은 거 같지? 기분 탓인가 싶던 차, 샤빈이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라그나, 억지에 휘말리긴요? 자기도 엄청 걱정했으면서.” “거, 걱정?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수도 길이 복잡하니 길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샤빈, 날조는 그만두세요. 그건 단지 가능성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별일 아닐 거라는 의미로요.” “흐음, 그랬던가?” 곤란해하는 사서를 보며 샤빈이 씨익 미소 짓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둘이 어떤 관계인지 대충 알 거 같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만. “잡담은 이만하고, 의뢰 보고를 하겠다.” 오늘이 끝나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 쉬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 하수도 순찰 결과는 간단했다. 부랑자 1인 발견 및 사살, 그 외 이상 없음. 영상기록구가 박살 난 탓에 의뢰를 제대로 마쳤단 증거는 없지만……. 신분패를 챙겨 둔 게 도움이 되었다. “한스 마르콤. 기억에 있습니다. 강도살인으로 수배되었다가 도주 중인 범죄자네요. 의뢰비에 추가 수당까지 해서 18만 스톤입니다. 내일 행정청에 방문해 주시면 바로 지급해 드릴게요.” “영상기록구를 부순 건 물어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건… 제가 위에다 잘 말해서 해결해 보려고요. 아마 위에서도 괜찮다고 해 주실 거예요. 이번에 워낙 특수한 일을 겪으셨잖아요?” “특수한 일이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 부분까지 배려해 줄지는 몰랐다. 다만, 행정청이 길드와 달리 유연한 단체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샤빈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 줬다고 보는 게 맞겠지.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잠시 기다리자 샤빈이 연락을 보낸 신전에서 사람이 왔다. 일반 신관은 아니고……. 무시무시한 대검을 등에 달고 다니는 성기사였다. 그는 우리가 보여 준 시신을 요목조목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변절자 엘리사 베헨크가 맞군요. 본 교단에서는 이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오만한 기색 없이 친절하며, 우리에 대한 존중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잊지 않겠다니? 이건 좀 두루뭉술하지 않은가. “공이라면, 포상금을 말하는 건가?” 가식을 모르는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성기사는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현상금은 탐험가 길드에서 내건 것입니다.” “너희에게 넘기면 돈은 받을 수 없단 뜻인가?” “하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길드로 공문을 보낼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군.” 거, 사람 멋쩍어지게.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저기, 성기사님? 아까 그 여자랑 싸우다가 기억을 잃는 일이 있었는데… 혹시 다른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을깡?” “물론입니다.” 이후 성기사가 한 명 한 명에게 [상급 정화]를 써주고서 떠났다. 어서 이 시신을 신전으로 데려가야 한다던가? “저희도 이만 가 볼게요. 내일 쓸 보고서가 많을 거 같은데, 일찍 자기라도 해야죠.” 샤빈과 사서도 매한가지였다. 시간이 늦은 만큼 용무가 끝나는 대로 발길을 돌려 사라졌다. 음, 그럼 이제 당장 할 일은 다 끝마친 건가? “포상금 관련해서는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하는 거로 하지.” “으, 드디어 돌아가는 거냥!” “미궁에 다녀왔을 때보다 더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거 같구먼! 하하핫!” 우리도 이만 해산하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오후 열한 시 반. 당장에라도 쉬고 싶지만, 욕실부터 들어가 한참 동안 몸을 박박 문대며 오물을 씻어냈다. 그러고 나서야 침대에 누우니 실감이 났다. ‘힘든 하루였군.’ 왜 15만 스톤짜리 의뢰를 하러 갔다 와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왔다. *** 다음 날 아침, 모두 모여 포상금을 받으러 길드에 방문했다. 다행히 성기사 아저씨가 일을 빨리 처리해 줬는지, 신분패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수령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 금액은 무려……. “천만 스톤이라니, 믿기지 않는군. 하하핫!” 다섯으로 나눠도 200만 스톤이나 되는 거액. 아침에 만났을 때만 해도 아직 하수도 냄새가 안 빠졌다며 투덜대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인제 보니 비요른, 자네가 복덩이였구먼? 왠지 자네를 만나고서부터 돈이 그냥 하늘에서 쏟아지는 느낌일세!” 그래, 넌 그런 기분이겠지. 사이코패스 년한테 머리통이 터졌던 건 나였으니까. 로트밀러마저 한마디를 덧붙였다. “……미신은 믿지 않지만,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없겠군. 비요른, 자네의 여정에는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 게 분명하네.” 칭찬의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듣는 입장에선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개처럼 구르며 고생해 쟁취한 것이 왜 본 적도 없는 여신님 덕분이 된단 말인가.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응? 어딜 가나?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행정청에도 다녀와야 한다.” “아, 의뢰비를 받으러 오라 했었지. 우리끼리 마실 테니 그러면 잘 다녀오게나.” 음, 빈말로라도 같이 가 준단 말은 안 하는구나. “비요른! 내가 같이 가줄깡?” “됐다, 어제 고생했는데 너는 쉬고 있어라.” “으음, 알았당.” 포상금 분배를 마친 뒤, 그대로 행정청으로 향했다. 서울역 구청사를 연상시키는 5층 건물. 계단을 타고 올라가 3층 시설관리부로 향하니 어렵지 않게 샤빈을 만날 수 있었다. “비요른 님! 오셨군요!” 늘 그랬듯 제복 형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샤빈. 다만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딱히 튀는 느낌은 없다. 아니, 오히려 내가 튀려나? “헤에, 저 사람이 그 작은 발칸?” “그 이능을 쓰면 엄청나게 커진다던데…….” “다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어머어머, 망측해라아…….” 여초 직장이었던 걸까? 시설관리부에 들어서자마자 호들갑스러운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흡사 철창 속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 어서 용무만 마치고 떠나기로 했다. “자, 여기 지급 확인서에 서명만 해주시면 돼요. 등록된 서명이 없으시면 그냥 이름만 써넣으셔도 되고요.” “그러지.” 이내 돈을 지급받고 서류에 서명까지 마쳤다. 한데 등 돌려 떠나려는 차, 샤빈이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한 가지 말을 해 온다. “아! 맞다! 시간이 나시면 도서관에도 한번 들려주세요.” “도서관?” “라그나, 그 아이가 기특하게도 비요른 님을 위해 뭔가 준비했다지 뭐예요?” 걔가 그랬다고?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니, 어느 정도 걸러 들으면 될 듯싶지만……. “알겠다. 시간이 나는 대로 들르지.” “네! 꼭이에요 꼭!” 용건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니 한번 들르긴 해야겠다. *** 행정청을 나선 뒤, 일행이 있는 술집으로 돌아왔다. 더 볼 것도 없이 개판이었다. 아직 대낮이니 조금은 자제할 줄 알았건만. “아니, 사실이래도? 흐하하하하핫!” “거짓말 마라, 난쟁이노망! 어떻게 사람 이름이 딕 존슨… 냐핫! 냐하하하하핫!” 난쟁이놈과 미샤는 잔뜩 취해 대화를 나누며 대소하고 있었고, 드왈키는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서 혼자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크크, 나는, 위대한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로트밀러가 점잖게 나를 반겨 주었다. “아, 자네도 왔나? 어때, 별일은 없었고?”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 같은데. 왜 벌써 이 모양인 거지?” “이번에 쉽게 큰돈을 벌지 않았던가? 다들 기분이 좋았던 모양일세.” “……그렇군.” 나는 그리 답하며 미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쥐고 있던 맥주잔을 뺏은 뒤,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아악! 누, 누구……! 비요른? 언제 왔냥?” “방금 왔다. 그리고 그만 마셔라.” “…이익! 네가 우리 아빠냥?” 질색하는 눈빛으로 날 보며 반항하는 미샤. 더 기어오르기 전에 뭐라 한마디 해주려는데 미샤가 대뜸 웃음을 터트린다. “아! 맞다! 우리 아빠는 이런 거 신경도 안 쓰지? 냐하하하핫!” ……얘, 진짜 오늘 상태가 안 좋구나. 후, 오늘은 나도 그냥 좀 쉴라 그랬는데. “됐고, 심심하면 이거나 마시고 있어라.” “알았당.” 더 취하게 놔둘 순 없기에 토마토 주스를 주문해서 미샤의 입에 물려준 뒤 옆자리에 앉았다. 난쟁이놈이야 알 바 아니지만, 얘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면 내가 데려다줘야 한다. 같은 방향이 나밖에 없거든. “흐하핫! 자네 둘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뭔가 있어! 뭔가 있단 말일세!!” “헛소리 말고 취했으면 물이나 마셔라.” “크하핫, 자네도 아직 어리긴 어리군. 자네한텐 이게 맥주로 보이나? 내겐 그냥 물일세! 물!” “……알아서 해라.” 난쟁이놈에게선 신경을 끄기로 하며, 음식을 몇 가지 시켜 허기부터 채웠다. 그러고 있자니 술이 좀 깼는지 미샤가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날 빤히 바라본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있당!”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 뭔가 불안해졌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라.” 미샤가 취기로 달아오른 뺨을 두어번 치더니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너를 한번 데려오—” “오! 이게 누구신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아닌가!” “응? 저 사람은 누구냥?” 미샤의 말을 끊으며 큰 목소리로 날 불러온 사내. 기억에 있는 자였다. “넌…….” “그새 이름을 까먹었나? 한스일세! 한스 호지!” “……그랬지.” 이름은 바로 떠올랐는데, 순서가 헷갈렸다. 마른 멸치 몸매에 주근깨가 특징인 이 녀석의 한스 코드는 B. 참고로 아이나르가 파티를 떠났을 때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동료를 구하려면 길드에 가보라고 조언도 해 줬었지. ‘근데, 이 새끼가 나한테 무슨 용무지?’ 그때 이후로 많은 한스들과 조우해서 그럴까? 이놈이 말을 걸어오자마자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왠지, 좆같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달까. “앉아도 되나?” “아니, 너와는 할 말이 없다.” “흠,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 “금방 일어날 거다. 그러니 이만 가라.” “그, 그렇군. 나는 그냥 반가워서 그랬던 건데…….” 얽히지 않으려 철벽을 치고 있자니, 한스B가 시무룩해하며 등 돌려 떠난다. 근거는 없지만 한 번의 고비를 넘긴 듯한 기분. 그런 기분이 들던 순간이었다. 벌컥-! 1층 문이 열리며 동일한 가문의 문장을 가슴에 새긴 기사 무리가 술집에 들어선다. “모즐란이다!” 모즐란. 귀족 출신의 ‘기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 도시의 최고 무력 단체 중 하나. “저들이 이런 구석 술집에 대체 왜……?” 모즐란에게 잡혀가면 피와 죽음밖에 남지 않는단 악명답게,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의 이목이 쏠린다. 어느샌가 정적으로 가득 찬 술집. “저쪽이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한곳으로 이동한다. 애석하게도,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니미럴.’ 이번엔 또 뭐지? 혹여나 실수했던 게 있는지 최근 행적을 하나씩 되돌아보던 차. [언제 어디서든 한이 많은 자를 경계해라.] 부족의 주술사가 점을 봐주며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또한, 본래 자리로 돌아가던 중에 길을 내주며 복도에 바짝 붙은 한스B가 보인다. ‘잠깐만, 한이 많은 자라면…….’ 설마, 한스Hans를 말했던 건가? 확실히 얘네랑 얽혀서 잘 풀렸던 적이 없기는 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때였다. 철컥. 기사 무리가 우리 테이블 앞에 멈춰선다. 그리고 중후하고도 위압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보며 말한다. 나는 포크를 쥔 그대로 흠칫 굳었다. “리올 워브 드왈키, 너를 귀족 모욕죄로 체포한다.” 놀랍게도, 이번엔 내가 아니었다. 86화 마르토앙 남작 (2) 모즐란의 일처리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크크, 나는, 위대한 마법사… 으응? 당신들은 누구……?” “이자가 맞군, 어서 데려가지.” 엎드려 있던 드왈키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확인하더니, 신속하게 양팔을 구속하는 기사들. “저, 저기 무슨 일이신지…….” 취해 있던 난쟁이놈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해 보려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너희는 알 필요 없다.” “하, 하지만…….” “우리의 방식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면 함께 끌고 갈 듯한 기세. 나는 난쟁이놈의 입을 막으며 대신 대답했다. “없다.” “…네가 작은 발칸인가? 바바리안답지 않게 현명하군.” 칭찬으로 듣기는 어려운 말투와 눈빛. 이내 놈들이 만취한 드왈키를 데리고 술집을 떠나자 난쟁이놈이 야단법석을 부렸다. “비요른! 그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하네. 그, 그 친구가 절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않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귀족 모욕죄라고? 사칭이라면 모를까. 모욕죄라는 것은 솔직히 나로서도 납득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가 도와줘야 하네!” 공권력에 의해 끌려간 동료를 구하기 위해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눈을 감았다. “히쿠로드, 지, 진정해랑. 비요른이 저러는 건 뭔가 답이 있다는 거당!” 후, 오늘 하루는 그냥 쉬려 했는데……. 왜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 뭔가 해 보기에 앞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야 아직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까. 진짜 귀족을 모욕한 건지, 아니면 저들이 잘못 알았을 뿐인지, 누가 누명을 씌운 것인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어서 술집을 나서 모즐란의 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조사가 종결될 때까지 기다리시오.” 게임 내에서도 폐쇄적이고 오만했던 모즐란들은 그 어떠한 정보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샤빈을 찾아갔다. “그분이 모즐란한테 끌려갔다고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뭔가 알아낼 수 있다고 장담은 못 드리지만…….” “그 정도면 됐다. 고맙군.” “아니에요.” 샤빈은 그래도 일단 공무원이니, 맨땅 탐험가보다야 정보 접근이 수월하리라는 판단. “……살아는 있겠지?” “히쿠로드!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제발 부정 타는 소리 좀 말고 가만 있어랑!” “아, 알겠네.” 그렇게 샤빈의 회신을 기다리며, 온종일 모즐란 청사 앞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어, 어? 저거 드왈키 아니냥?” “맞는 거 같군.” 어깨를 축 늘어뜨린 드왈키가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난쟁이놈의 걱정과 달리, 고문받은 흔적은커녕 어디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였다. “자네! 괜찮은가? 조사는 어떻게 됐나? 아, 이렇게 나왔단 건 뭔가 잘못 알았단 뜻이겠지? 그래, 그럴 줄 알았네!” “아… 그게…….” 어째선지 우리를 보고도 기뻐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이는 드왈키. “……자리를 옮깁시다. 그다음에 모두 말해 주겠소.” 일단 드왈키의 뜻대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미궁 관련 회의를 할 때 종종 방문했던 룸 형태의 주점. 안주 몇 개와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드왈키가 참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팀을 떠나야 할 거 같소.” 에르웬과 아이나르에 이어서, 벌써 세 번째 듣는 종류의 말. 난쟁이놈이 기함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말해 보게!” “그게…….” 말꼬리를 흐리던 드왈키가 숨을 길게 토해 냈다. “이제 와서 숨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사실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밝히지 않았던 게 있소이다.” “밝히지 않은 거라니?” “내 형님께서… 마르토앙 남작이시오.” “뭐엉?” “그, 그럼 자네가 정말 귀족이란 말인가?” 미샤를 포함해 모두가 충격에 빠져 입을 떡 벌렸으나, 드왈키는 눈을 꾹 감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절반쯤은 그렇다오. 나는 전 마르토앙 남작과 저택의 시녀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니까.” 귀족가의 사생아. 현대에서 많은 막장 드라마를 접한 내게는 그리 낯선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이후 전개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가문의 치부였기에, 태어나자마자 남작 부인의 셋째 동생이신 티르바 양부님 아래로 입양되었소. 물론 형식적으로 그랬다뿐이지, 날 실제로 키운 건 내 친모이셨고.” 그래도 남작가에서 주기적으로 돈을 보내줬다던가, 덕분에 마법도 배우며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던가. 듣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가정사 이어졌다. 난쟁이놈에게 천천히 기다릴 여유는 없어 보였다마는. “그래서 그게 팀을 떠난다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년 전에 친부이신 마르토앙 남작께서 서거하셨소. 그리고 내 둘째 형님이 그 자리에 오르셨지.” “흠, 첫째가 아니라?” 중간에 끼어든 로트밀러의 질문. 드왈키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소. 차남이지. 그게 문제인 것이오.” “난 이해가 안 되는뎅, 그게 왜 문제냥……?” “전 남작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이가 죽었소. 첫째 형님부터 시작해 그 외에도 많은 방계들까지…….”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르토앙 남작가의 피 튀기는 권력 싸움이 이번 사건의 인과를 파악하는 것에는. “모즐란을 보낸 게 그 둘째 형님인가 하는 자의 짓이었군.” “그렇소. 아마 경고겠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살라는.”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탐험가가 된 것이 거슬렸던 것 같소. 근래 들어 이것저것 마법을 많이 배우기도 했고…… 팀에 유명한 사람도 있으니 신경이 쓰였겠지.” 아, 어, 음……. 여기서 내 탓을 한다고? 솔직히 이건 비약이 아닌가도 싶지만……. 나는 짧게 드왈키의 말을 정리했다. “아무튼, 둘째 형님이 무서워서 더 이상 미궁에 들어가지 못한단 뜻이군?” “그대는… 조금이라도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구려. 틀린 말은 아니오. 다만… 내 의지가 어떻든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무슨 뜻이지?” “그들은 귀족 모욕죄로 처벌하지 않는 대신, 내 미궁 출입 권한을 거둬갔소.” 쉽게 말해, 함께하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없어졌다는 뜻. “비요른, 뭔가 방법이 없을깡?” 미샤를 포함해 난쟁이놈의 간절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답이 나올 리 없는 문제의 답을 찾기보다는 오늘이 며칠인지를 생각했다. ‘후, 골치 아프게 됐군.’ 다음 미궁이 열리기까지 9일이 남은 시기. 과연 그 전에 새 동료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진짜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 “일단, 이 문제는 각자 고민해 보고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해 보는 거로 하지.” “그래, 자네라고 당장 마땅한 수를 떠올릴 순 없겠지. 그러세.” 다음 날 약속을 잡는 걸 끝으로 해산했다. 난쟁이놈과 드왈키는 조용한 곳에서 술 한잔 마시기로 한 모양이고, 로트밀러는 가정으로 복귀. 참고로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엥? 도서관에 간다공?” “그때 그 사서와 용무가 있어서.” “……이 늦은 시간에?” “얼른 가면 폐관 전에 도착할 거다.” “그렇구나…… 호, 혹시 내가 같이 가줄까?” 뭐래, 얘는. “됐다, 너는 가서 쉬고 있어라.” “아니, 돌아가도 딱히 할 것도 없는뎅…….” “할 게 왜 없나? 시간이 남으면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라. 오늘 통째로 놀지 않았나.” 끈질기게 따라오겠다고 하는 미샤를 보내고, 얼른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 오늘은 푹 쉬고 내일에나 가려 했지만……. 상황이 조금 변했다. *** “파르시티에…….” 도서관에 도착하자, 졸던 사서가 기계적으로 마법부터 걸려다가 움찔한다. “당신은…….”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통성명을 한 적 없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음, 그건 그렇겠네. 여하튼 그 대화 이후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얘랑은 뭔가 어색하단 말이지. “…곧 폐관 시간인데 들어갈 겁니까?” “아니, 오늘은 책 보러 온 게 아니다.” “…그럼?”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바바리안답게 그냥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그나 리타니엘 페프로크.” “그냥 편한대로 짧게 줄여서 불러도 됩니다.” “라그나, 넌 몇 등급 마법사지?” 시원시원하게 질문했건만,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이런 무례한 놈이 다 있냐는 듯한 눈빛. 하긴, 레이븐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일단 화부터 냈었지. “이것부터 묻겠습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진 겁니까?” 레이븐보다는 온화한 타입인지, 침착하게 이유부터 물어오는 라그나. 따라서 나도 숨김없이 대답했다. “팀에 있던 마법사가 미궁에 들어가지 못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말인데, 사서 일은 잠시 쉬고 같이 미궁에 들어가는 게 어떤—” “거절입니다.” 응, 그래 거절이구나. 단호한 음성에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지웠다. “그렇군. 미궁에 못 들어갈 정도로 등급이 낮다면 어쩔 수 없지.”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다면 실력은 충분하다는 거군.” 발끈하던 라그나가 떠보는 말이었음을 깨닫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당신… 설마, 그게 궁금해서?” “…무슨 소리냐? 아무튼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건 뭐였나? 샤빈 에무어, 그 여자가 이리로 오면 네가 날 위해 뭔가 준비해 놨을 거라던데.” “…뭐라고요? 당신을 위해 준비?” 난생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리던 그녀가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걸 또 그렇게 얘기한 거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라.” “미리 말해두는데,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라그나는 절대 오해하지 않겠다는 내 확답까지 듣고서야 구구절절한 속사정을 털어놨다. “샤빈이 당신 덕에 부서 내 입지가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답하고 싶다며 내게 의견을 구했고, 저는… 당신이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그뿐이었는데, 갑자기 제가 빚진 일을 언급하더니, 당신에게 대신 갚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당신한테 주는 게 아니라, 샤빈이 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이해했다.” 쉽게 말해, 날 위해 준비한 게 있단 거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기를 써가며 자기가 주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는진 모르겠지만. 나였으면 생색을 냈을 텐데. “정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습니까?” “맞다. 그래서 보답이라는 게 뭐냐?” “책입니다.” “……책?”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그나가 눈을 감더니 마법을 영창한다. “비에르도 파르시티에브.” 주문이 완성되며 내 몸으로 깃드는 찬란한 황금색의 빛. 영창음부터가 평소와는 좀 달랐던 거 같은데. “이게 뭐지?” 내 질문에 라그나는 평소와 달리 세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도서관엔 일반 [서적 탐지] 마법엔 반응치 않는 높은 보안 등급의 책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라던가? “…그런 게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원래는 귀족 혹은 허가받은 몇몇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 일종의 기득권층을 위한 비밀 도서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지만, 그만큼 얼떨떨하다. “그걸 나한테 해줘도 괜찮은 건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애초에… 제가 사서직을 맡은 이후로 이 마법을 쓴 것도 몇 번 없을 정도고.” 라그나가 약간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연 누가 이곳에 관심이나 두겠습니까?” 씁, 얘도 사연이 좀 궁금해진단 말이지. *** 또각, 또각. 구두 소리만이 적막하게 울려 퍼지는 텅 빈 도서관.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있다. 라그나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온 겁니까.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만 특별히 남아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폐관 시간이 되어 모든 이용자가 내쫓겼지만, 라그나는 책 정리를 하는 동안까지 남아 있도록 해 주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또각, 또각.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서 라그나를 힐끔 바라봤다. ‘어떻게 정리를 하나 했더니, 그것도 다 마법으로 하는구나.’ 지팡이를 슬쩍 움직일 때마다 알아서 빈 책장에 꽂혀 들어가는 책들. 문득 제자리를 알고 넣는 건가도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 도서관의 책들은 제자리가 필요 없었다. 마법만 걸어주면 알아서 원하는 책을 찾아주니까. 아니, 잠깐만. “라그나.” “말하십시오.”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다 읽은 책은 원래 자리에 넣으라 하지 않았나?” “보통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을 때 그렇게 말합니다. 마법이다 보니 쓸데없이 질문해 오는 분들이 많아서.” “……그렇군.” 바바리안으로서 굉장히 상처받는 말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다시 읽던 책들을 읽었다. 보안 등급이 높은 책이라서 그럴까? 확실히 내용부터가 티가 났다. [라프도니아 조직도] 이 도시에 존재하는 공공기관들을 다룬 책에는 비밀 치안부, 그러니까 악령사냥꾼이 포함된 그 단체에 대한 얘기도 있었을뿐더러……. [악령의 세계] 어느 책은 ‘고스트 버스터즈’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그들만의 영적 세계에 들어섰다가 반쯤 죽어 되돌아온 요원의 유언이 남아 있었는데……. ‘이런 시스템이면 딱히 내가 위험할 일은 없겠군.’ 덕분에 나중에 때만 되면 보관 중인 알약을 먹어도 되겠단 확신이 섰다. 그렇게 이후로도 책을 집중해서 읽던 때였다. 한 권을 마치고 다음 권을 짚으려던 찰나. [균열총해록 II] 제목을 읽음과 동시에 손이 흠칫 굳는다. 균열총해록이라고? 이거, 예전에 레이븐이 말했던 그 책 이름 아니야? 얼른 첫 장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 나는 머지않아 그녀의 태도를 이해했다. ‘……걔가 그렇게 집착할 만하네.’ 무슨 공략집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수도 없이 뻘짓과 실험을 해서 알아낸 히든 피스 요소가 빠짐없이 적혀 있다. 책이라는 물리적 한계상 설명된 균열이 총 네 개에 불과하긴 했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보물이나 다름없겠군.’ 나로서도 빈틈을 채울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된 내용들. 게다가 보관이 잘 되어서일까? 신원미상의 자가 쓴 책이라던 레이븐의 말과 달리, 저작자의 이름도 마지막 장에 적혀 있었다. “아우릴 가비스라고……?” 무심코 소리 내어 읽은 나는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미친, 이 새끼 이름이 왜 갑자기 여기서 나와?’ 아우릴 가비스. [던전 앤 스톤]의 게임 제작자의 이름이었다. 87화 마르토앙 남작 (3) 아우릴 가비스. 로딩 창 하단부에 상시 뜨던 제작자의 닉네임. 음, 닉네임인지 본명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이름이 여기에 왜…….’ 조금 갑작스럽지만, 가능성은 둘이다. [균열총해록 II] 이 책을 플레이어가 썼거나. 아니면 정말 본인이 썼거나. 만약 후자라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적어도 게임 제작자가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난 사건과 밀접한 연관을 지녔단 뜻이니까. ‘그 새끼가 정말 무슨 신적인 존재라도 되는 건가?’ 여하튼 단서를 얻은 것은 좋은 징조다. 아우릴 가비스. 이 이름을 조심스레 추적하다 보면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않나. 거듭 말하지만,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마지막 층에 도달해 다시 한번 심연의 문을 여는 게 귀환의 열쇠인지 아닌지조차.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가 피 볼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파보자.’ 그런 의미에서 책을 면밀히 훑어봤다.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맨 뒷장에 저작자로 추정되는 서명만 있을 뿐, 책이 쓰인 연도조차 적혀있지 않은 책. 주변에 라그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모퉁이 부분만을 조금 찢어내 가방에 슬쩍 넣었다. ‘이 책이 몇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만 알아내도 큰 소득—’ 뭐야, 벌써 아침이야? 이쯤에서 상념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스크로 가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그나가 보였다. 옆에 담요가 있기에 이거라도 덮어 주려는 차. “으음.”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난다. “왜 말하지 않았나. 시간이 이만큼 지난 줄 알았으면 진작 나갔을 텐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책 정리가 조금 늦어져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책정리가 조금 늦어졌다고? 보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도서관 문을 열 시간인데? “정말이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알겠다.” 일단 본인이 그렇다고 우겼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도서관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서기 전 문득 뒤를 확인해 보니 피곤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 그녀가 보였다. “뭐 합니까? 어서 가지 않고.” 얘 사실 착한 앤가? *** 아침이었기에 그냥 하루를 시작했다. 어차피 바바리안이라 씻든 안 씻든 똑같거든. ‘그래도 일단 밥은 먹어야겠군.’ 문을 연 근처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가 끼니만 대충 때우고서 곧장 마탑으로 향했다. “얀델 씨가 왜 이 시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빨리해요. 졸리니까.” “우리 팀에 마법사 자리가 비는데 혹시 네가 들어올 생각—” 덜컥. 씨발, 싫으면 말이라도 하던가. 역시 얘도 실패구나. 됐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 “잠깐! 다른 부탁이 있다!” 다급히 외치며 문을 두들기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틈이 벌어진다. “다른 부탁요?” “이 종이가 언제 만들어진 건지 알고 싶다.” “흐음? 어디 줘봐요.” 흥미가 동했는지 내가 건넨 종이를 요목조목 살펴보는 레이븐. 다만 마땅히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을까. “못할 건 없는데, 그게 왜 궁금한 건데요?” “그냥 해 주면 안 되나?” “뭐, 좋아요. 대신 공짜로는 안 되고, 뭔가 받아야겠는데…….” 말꼬리를 흐리던 레이븐이 적당한 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잇는다. “선배들이 얀델 씨한테 관심이 많던데, 가서 연구 좀 도와줘요. 얼마 전부터 자꾸 나한테 귀찮게 하거든요.” 지금 나보고 그 변태 새끼들한테 몸을 맡기라고? “…한 번이면 되나?” “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다음 주에 올 때까지 분석은 끝내 둘게요. 아! 맞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쑥 찾아오지도 마시고요.” “……그러지.” 용건을 끝마치고 마탑을 나왔을 때의 시간은 오전 9시. 조금 이르긴 하지만, 할 것도 없기에 약속 장소인 술집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나보다 먼저 온 이가 있었다. “비요른! 뭐냥! 숙소에 갔는데 없다고 하고!” “아, 도서관에 있었다.” “뭐, 뭐? 밤새도록……? 설마 볼일이라던 게 그런 뜻이었던 거냥?!” “뭐라는 거냐. 라그나가 배려를 해줘서 책을 읽다가 왔다.” 진실만을 말했을진대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미샤. 이건 뭐, 진짜 엄마도 아니고. “정말이냥……?”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나.” “그건… 그렇징. 알았당.” 의외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해주자 순순히 납득했다. 착한 아들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 그런 느낌인가? 여하튼 옆자리에 앉자 미샤가 먹던 음료를 건네왔다. “이것 좀 마셔봐랑. 토마토라는 과일을 갈아서 만든 거라는데, 되게 신기한 맛이당!” 신기한 맛인 건 모르겠고, 토마토 주스를 얘기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보다, 어제 하려던 말은 뭐였나?” 분위기상 뭔가 꽤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한스B가 끼어드는 바람에 미처 듣지 못했다. 다만……. “응? 그게 무슨 소리냥?” “설마 기억나지 않는 거냐?” “어, 어…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했었냥?” 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니 정말로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 평소 하려고 했던 말은 없냐고 캐물어도 봤지만, 딱히 소득은 없었다. “응? 그런 거 없는뎅?” “그렇군.” “…혹시 화났냥?” “아니다.” 이 세상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있지만, 나는 그런 거로 화내지 않는다. 애초에 얘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이후 한적한 술집을 카페처럼 이용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동료들이 도착했다. “오, 먼저 와 있었나?” “미안하오, 나 때문에 이렇게 아침부터…….” 언제나처럼 한 쌍으로 등장한 난쟁이놈과 드왈키. 조금 기다려 정시가 되자 로트밀러까지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작된 회의. 주제는 당연히 드왈키의 미궁 출입 금지 처분을 어떻게 풀 것인가였다. “그럼 각자 생각난 게 있으면 말해 보세. 처음은… 그래, 비요른 자네부터가 좋겠군.” 어, 나부터? 떨리는 자리가 아닐 수 없지만, 나는 솔직하고 간결하게 발표를 끝냈다. “새로운 동료를 찾는 게 나을 거 같다.” “……뭐?” “물론 마법사로 구하는 건 무리일 듯하다. 다른 마법사 두 명에게 권해 봤지만 단박에 거절하더군.” “……자, 자네 지금 뭐라는 건가? 다른 마법사를 이미 찾아갔었다고?” “문제라도 있나?” 나는 당당하게 되물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던 난쟁이놈에겐 이런 내 행동이 서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이기심과 이타심은 한 끗 차이인 법. 나는 최악을 가정하고서 팀을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해야 했던 말이다. 그렇지 않나 로트밀러?” “그건… 그렇네만.” 내가 콕 짚어서 의견을 구하자, 로트밀러가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난쟁이놈의 눈빛이 심각해졌지만……. “무, 무라드! 나는 괜찮으니 표정 피시오. 비요른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소?” 당사자인 드왈키마저 저리 말하니 난쟁이놈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그럼 내가 말해 보겠당!” “어, 어서 해보게 칼스타인 양.”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애써 밝게 손을 드는 미샤. 물론, 귀 기울여 들을 내용은 아니었다. “내가 알아봤는데 모즐란들은 뇌물에 약하다고 들었당. 우리가 돈을 모아서 조금 찔러 주는 게 어떠냥?” 순수한 목소리로 논하는 뇌물 청탁. 확실히, 마르토앙 남작인지 뭐시기도 돈을 주면서 드왈키를 조져달라고 청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스타인 양, 모즐란들은 절대 귀족이 아닌 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네.” 모즐란은 철저하게 평민을 배척한다. 그들 중 대부분이 작위 없는 자들이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겠지. “그, 그러냥……? 그건 몰랐당. 그러니까 다음은 로트밀러, 네가 해봐랑.” 미샤가 당황해하며 순번을 넘겼다. 로트밀러의 의견이었기에 나도 조금은 진지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다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귀족… 그것도 작위 귀족을 상대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 미안하오…….” 로트밀러 역시 마땅한 해답은 찾지 못한 모양. 다만, 나 때와 달리 난쟁이놈은 한숨을 내쉬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그게 어찌 자네 잘못이겠나? 사실… 그게 당연한 거지.” 아니, 당연한 걸 알면서 왜 나한텐 눈알을 부라린 건데?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자니, 난쟁이놈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젯밤 나와 드왈키, 둘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일세.” “간단하게 본론만.” “마르토앙 남작에게 직접 가서 말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싶네.” 한마디로 정면 승부를 보자는 뜻. 하지만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어떻게 그를 만날 거지?” 귀족들은 대부분 1구역, 황도 카르논에 거주한다. 그리고 그 지역은 우리 같은 하층 탐험가는 진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대화는커녕 사는 세계부터가 다른 셈. 다만 난쟁이놈은 이미 세세한 계획까지도 짜 온 거 같았다. “마르토앙 남작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찻집이 있네. 거기서 기다리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걸세.” 음, 그렇다면야. 확실히 나쁘진 않다. 남작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적다는 문제야 어쨌든, 시도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군. 둘이 다녀와라.” “그, 그게 무슨 서운한 소리인가! 함께 가주게!” 얘는 또 뭐라는 거야. “기껏해야 애원하러 가는 건데 뭐 하러 거길 다 같이 가나?” “…용기가 필요하네! 상대가 무려 작위 귀족 아닌가!” 둘이서 알아서 하란 말에 심할 정도로 징징거리기 시작한 난쟁이놈. 그 답 없는 태도에 벌써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도 함께 한 정이 있기에 실익을 계산해 보았다. ‘9일이 남은 상황에 마법사를 새로 구하는 건 무리겠고…….’ 아무 직업이나 구한다 쳐도 멀쩡한 놈이 아니라면 개고생을 하게 될 터. 역시 드왈키가 계속 이 팀에 남아 있어 주는 게 베스트이긴 하다. ‘얘네 둘이 가면 어버버거리기만 하다가 될 문제도 안 돼서 돌아올 거 같고 말이지.’ 암만 생각해도 내가 직접 가는 쪽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귀족이랑 만나는 건 껄끄러운데.’ 게임에서도 되도록 귀족과 얽히지 않는 게 철칙이었다. 그야 멀쩡한 놈이 없으니— “일이 어떻게 끝나든 30만 스톤을 주겠네! 그것도 인당으로!” 음, 이러면 좀 구미가 당기는데. 의리 페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귀족이야 한번 못 만날 것도 없지. *** “그렇다면야,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정말인가!” 내 승낙에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진 난쟁이놈. 다만 녀석의 주책에 휩쓸리기보다는 침착하게 알아야 할 것부터 확인했다. “그래서 언제 가면 되나?”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아무나 막 죽여 대고 그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하물며 나름 존중받는 탐험가라면야. 어지간하면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만, 이 몸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진짜 귀족을 만나는 것 아닌가. 나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 “오, 오늘일세.” “뭐……?” “오, 오늘이 아니면 다음 달이 되어서야 그 장소에 방문할 걸세.” 후, 어쩐지 거절하고 싶더라니. 그래도 일단 하겠다고 승낙은 했기에 다른 사항들도 하나씩 확인했다. 마르토앙 남작이 몇 살인지, 남자가 맞는지, 혹시 싫어하는 게 있다거나, 달리 알아 두면 좋을 게 있는지까지. 이것저것 숙지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어, 어서 가세. 자네 말대로 우연히 만난 척하려면 미리 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남작이 찻집에 방문한다는 시간은 보통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 따라서 2시부터 찻집에 도착해 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저, 저분이 내 둘째 형님이시오.” 마르토앙 남작이 시중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장이 직접 내린 차를 즐기려 직접 행차한다던가? 개인실로 들어가 버리면 말을 붙일 틈도 없어지기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웬 놈이냐!” 가까이 가자마자 앞을 막아서는 거구의 기사. 일단 계획대로 드왈키가 나섰다. “저, 마르토앙 남작님! 저입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 부디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조언해 준 그대로 굴복의 의미를 담아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드왈키. 이에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던 마르토앙 남작의 관심이 옮겨졌다. 다만 이어진 반응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드왈키……? 어딘가 익숙한데?”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단 느낌의 중얼거림.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귀에다 대고 첨언했다. “드왈키 가문은 전 남작님의 삼 부인이신 카를리나 님의 친가입니다.” “아아, 그랬지! 그래서 그쪽 사람이 내겐 무슨 볼일인가?” “저, 저… 그게, 그러니까…….” 사전에 짜둔 계획과는 초장부터 다른 전개에 어버버거리기 시작한 드왈키. 생각보다 이르지만 내가 나설 차례였다. “반갑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귀족이고 뭐고 일단 뱉고 보는 당당한 말. 다른 종족이면 그것만으로 귀족 모욕죄가 성립되지만……. 크고 소중한 바바리안은 제외다. 예전에 조상님이 아주 큰 공을 세워서 왕한테 그런 허락을 받아냈거든. “바바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군. 항상 신기한 기분이란 말이지.” 다행히 남작은 현 상황이 흥미로워 보였다. 하긴, 얘들이 언제 바바리안을 만나서 속 시원하게 반말을 들어 보겠어? “그래서 내게 무슨 용무인가?” “어제 모즐란에게 끌려간 이후로 이 녀석의 미궁 출입이 금지됐다.” “안 됐군.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나?” 그야 얘가 전부 네가 시킨 일이라고 했으니까. ‘뭐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인 거지?’ 처음엔 그냥 발뺌하는가 싶었는데, 이쯤 되자 나 역시 슬슬 의심이 차오른다. 그리고 그때. 집사가 다시금 남작에게 귓속말을 속삭인다. “흐음, 사생아? 그런 게 있었나? 그렇군. 자네가 했단 말이지…….” “예, 남작님께서 신경 쓸 사안이 아니기에 따로 보고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잘했네. 그런 작은 일이야 알아봤자 시간만 아까우니.” 이제 보니 남작은 이번 일에 전혀 몰랐고, 집사란 놈이 전부 처리했던 모양. “그런 작은 일……?” 드왈키가 심한 충격을 받은 거야 어쨌든. 결과만 보자면 나쁘지 않다. 저쪽에서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만큼, 우리 목표가 이뤄질 가능성도 높아졌단 뜻이니까. “혹시 미궁 출입 금지 처분을 물러줄 수 없나?” “음,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남작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여기서 짜증나는 건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단 거겠지.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빌어먹을 천룡인 새끼들…….’ 속으로 남작 새끼를 씹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던 때. 또다시 집사가 귓속말로 뭐라 속삭인다. 뭔 수법을 쓰는지 이번에도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어떤 내용일지 예상은 갔다. “응? 뭐라고? 이자가 그 바바리안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허어, 작은 발칸이라… 나 역시 이름은 들어 본 적 있네. 이틀 전 연회에서 백작님께서 흥미로운 탐험가가 나타났다 하셨었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작.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듯 두 눈에 생기가 어린다. “비요른이라고 했나? 자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네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아, 어, 음……. 이런 상황은 나도 예상치 못했는데……. “별거 아닌 부탁이네. 게다가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충분히 주겠네! 어떤가?”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의뢰를 받게 생겼다. 88화 마르토앙 남작 (4) 남작의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2달 뒤에 어느 백작님이 크게 연회를 연다던가? 거기에 자신을 따라서 참석만 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게 끝인가……?” “음, 사람들 앞에서 몇 가지 재주도 보여 줬으면 좋겠네. 강철을 맨손으로 구부린다든가 하는 그런 것.” 한마디로 연회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할 트로피처럼 나를 쓰겠다는 건데……. “할 수 있나?” 거, 바바리안을 뭐로 보고. “그 정도는 문제없다.” “그렇다면 됐군.” 참고로 의뢰 보상은 수고비 100만 스톤과 드왈키의 미궁 출입 금지 처분을 풀어주는 것. 후, 이게 귀족인가? 겨우 남들에게 보여 주려고 그만한 돈을 낭비하다니. ‘뭐, 나야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 되지만.’ 드왈키 문제가 아니더라도 가성비가 좋다. 그야 하루 동안 옆에서 비위 맞춰 주는 일에 100만 스톤이라니? 냄새나는 하수도 의뢰가 15만 스톤이었는데. “흐음, 좋아. 그럼 저 친구 문제는 바로 처리해 두지. 자네를 향한 내 호의라 생각해 주게.” 심지어 남작은 드왈키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는 배포까지 보여 주었다. 나중에 내가 의뢰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는 건가도 싶었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존재가 귀족이란 거겠지.’ 새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단 게 느껴진다. 어느 정도 무력을 만들었다. 알량한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슬슬 그쪽도 계획을 세워 봐야겠네.’ 권력을 가져야 한다. 게임에서도 그랬듯이. 그리고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도 그랬듯이. 내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은 미궁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니까. *** 다음 날 아침. 다시금 약속 장소에 모였다. 드왈키의 미궁 출입 허가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됐냥? 그 남작이 약속을 제대로 지켰냥?” “오늘 확인해 보니 문제가 없다고 하더구려.” “근데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냥?” “후후, 기분 탓이오…….” 기분 탓은 개뿔. 배다른 둘째 형님이자 마르토앙 남작이 본인을 경계하긴커녕 기억조차 제대로 못 했단 게 그토록 충격이었을까? 어제부로 드왈키의 멘탈이 완전히 나갔다. 뭐, 본인은 애써 티를 안 내려 하지만……. “하아…….” 하루에도 몇 번씩 상념에 잠겼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드왈키. 미궁이 열리기 전엔 정신 차렸으면 좋겠는데. “아, 그보다 자네들 이거 받게나. 그때 약속했던 보상일세.” “보상?” “남작과 담판을 지으러 같이 가 주지 않았나.” 히쿠로드가 대가랍시고 제시한 30만 스톤을 꺼냈다. 이건 받지 않기로 했다. “됐당, 우리 사이에 이런 걸 주고받냥?” “대가를 바라고 간 것이 아니오. 게다가 그와의 담판은 모두 팀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돈을 거절한 상황에서 혼자 받기엔 나라도 좀 그랬을뿐더러……. ‘지금 당장 30만 스톤이 없다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이번 건 빚으로 달아 두는 게 나을 것이다. 계속 미궁에 들어가다 보면 서로 주고받고, 때론 양보해야 할 일도 생길 게 분명하니. “여하튼 고맙네. 전사의 자존심을 굽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음, 글쎄……. 솔직히 저런 말을 들으면 멋쩍어질 뿐이다. 100만 스톤은 자존심을 신경 쓰기에 너무 큰 금액이었으니까.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고 갚아 나가겠네.” “아니, 그걸 왜 그대가 갚소? 비요른, 이 빚은 반드시 내가 열 배로 갚겠소.” “누구든 좋으니 알아서 해라.” “히힛, 비요른이 부끄러워 한당!” 뭐래,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 미궁이 열리기까지 남은 시일은 8일. 그간 내가 한 일들은 간단했다. 미샤의 수련을 돕거나, 도서관에 들러 숨겨진 책들을 읽는 등의 기본 일과를 제하고 큼지막한 것만 얘기하자면……. “150년 전에 만들어진 종이에요.” [균열총해록 II]의 제작연도를 알아냈다. 당시에 표준 규격으로 보급되던 평범한 종이라던가? ‘후, 150년 전에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게임이 시작되던 시간. 초대왕의 죽음. 그리고 이 책이 만들어진 때까지. 많은 의문점이 더도 덜도 말고 딱 150년 전과 자꾸만 겹치고 있다. ‘우연은 아니겠지.’ 위의 사건들이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 지금까지 알아낸 건 그게 전부지만……. 그래도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동력 정도는 되어 주었다. ‘150년 전 역사를 중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군.’ 플레이어들을 끌고 온 자는 누구인가. 무슨 목적이었으며, 아우릴 가비스는 대체 뭘 하는 놈인가. 계속해서 단서를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 비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쯤에서 두 번째. “어, 어… 그걸 하자공……? 아니! 나도 싫은 건 아닌뎅, 조금은 갑작스럽달까아…….” 알미너스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사망 시 재산 상속인을 서로로 지정했다. 앞으로 둘이서 번 돈 중 일부분은 이 계좌에 넣어서 공금처럼 사용할 계획.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번 200만 스톤은 전부 여기다 넣는 거로 하지.” “에엑? 그걸 전부?” “지금 당장 쓸데도 없지 않나.” “으으… 설마 나 몰래 이상한 데 쓰려는 건 아니겠징?” “날 대체 뭐로 보는 거냐?” 계좌에 200만 스톤씩 넣고 남은 90만 스톤가량의 현금은 그냥 킵해 두기로 했다. 당장 쓸 곳도 없는 데다가……. 하루 벌어 한 달을 겨우 먹고살던 시절은 벗어났으니, 슬슬 저축도 해야지. 아,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넌… 얀델의 아들 비요른?!” 길을 걷다가 동기 바바리안 한 명과 우연히 재회했다. 이름은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 별건 안 하고 서로 근황만 묻고 헤어졌다. 8등급 탐험가가 되어 2층에서 인간들로 이뤄진 팀에서 탱커 역할을 하고 있다던가? “다른 녀석들은 뭘 하고 있냐고? 대부분 죽었다. 아마 너와 아이나르, 그리고 나를 빼면 얼마 되지 않을 거다. 알다시피 만만한 곳이 아니지 않나.” 여하튼 인간과 팀을 이뤄서 그런지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훨씬 더 단순무식했던 거 같은데. “낡은 전통을 고집할 게 아니라 그곳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 줬으면 그렇게까진 죽지 않았을 텐데…….” 종족의 방식에 씁쓸함까지 표하는 걸 보니, 이게 과연 바바리안 전사가 맞나 싶을 정도. 솔직히 듣는 내가 다 안쓰러웠다. 뼛속까지 전사였던 녀석이 그렇게 변하기까지 정말 많고 많은 일이 있던 것일 테니까. ‘바바리안이라고 다 한결같은 건 아니구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바리안들도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글이나 숫자 같은 지식적 부분은 여전히 약할지 몰라도, 바뀐 환경에서 살아남다 보면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차쯤 된 선배 중엔 거의 인간처럼 성격이 변한 사람도 있을지—’ “비요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냥?” “아무것도.” 미샤의 음성에 상념을 끝냈다. 하긴,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서 갖다 줬는데 딴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좀 그랬겠지. “근데, 비요른… 너 키가 좀 더 큰 거 같당?” “뭐?”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는뎅, 여기 한번 서 봐랑!” ……귀찮은데. 그래도 일단 밥 먹다 말고 일어서서 키를 재봤다. 미샤는 자기 정수리부터 내 가슴팍까지 손날 베기를 시전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금 컸당! 한 요만큼?” “잘못 안 거 아니냐?”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여기서 키가 더 클 수 있단 건 둘째치고, 1cm도 되지 않아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한눈에 알아? “으음, 내가 원래 그런 쪽으로 눈썰미가 좋당. 그러니 믿어도 괜찮당.” “…그렇다면야.” 논박을 하기보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키가 컸을 수도 있지. 최근 고기반찬을 많이 먹기도 했고. ‘……만약 진짜 키가 큰 거면 앞으로 고기를 더 많이 먹어야 하나?’ 정말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다. 선천적으로 평균을 훨씬 웃도는 키. 내가 드워프가 아닌, 바바리안을 탱커로 채용한 결정적인 이유다. [거대화] 메커니즘 자체가 기본 신장에 곱셈을 하는 식이니까. ‘정확히 1.771배인가 그랬었지.’ 이로써 고기를 먹을 이유가 늘었다. “…고기만 집어 먹지 말고 골고루 먹어랑!” “…….” “쓰읍!” 식사를 마친 뒤에는 마지막으로 빠트린 게 없나 배낭을 점검했다. 그야 이제 곧 미궁에 들어가야 하니까. “어서 가장, 다들 기다리겠당.” 이내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자, 평소와 다른 복장을 한 동료들이 눈에 띈다. 셔츠가 아니라 중갑을 챙겨 입은 난쟁이놈. 기다란 양손 스태프를 쥐고 서 있는 드왈키. “어, 로트밀러! 너는 왜 무기가 없냥?” “걱정하지 말게. [보물창고] 안에 넣어놨으니. 익숙해지니 들고 다니는 것보다 그때그때 꺼내는 게 편하네.” “오, 그렇구낭.” 미믹의 이능인 [보물창고]. 평소 아공간을 대체하는 게 전부인 스킬이라 여겼지만, 어쩌면 석궁과 방패, 검 등의 여러 장비를 다루는 로트밀러에게는 여러모로 편리한 정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일단 내 옆으로 모여 주겠소? [결속]부터 맺으려는데.” 이내 드왈키가 영창음을 중얼거리자, 녹색 빛이 퍼져나가더니 각자의 몸 안에 스며들었다. 일종의 파티 결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마법이 있어야지만 여럿이서 미궁에 들어가도 같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가 있다. ‘예전엔 아이나르가 새벽부터 길드 앞에서 기다렸었는데…….’ 탐험가들이 괜히 마법사 마법사 거리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팀에 마법사가 있으면 아침 댓바람부터 길드에서 줄을 설 필요도 없을뿐더러……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메리트가 상당하다. 평균 6.5등급 탐험가 5인이 [결속]을 맺으려면 수수료로 10만 스톤은 내야 했을 테니까. “슬슬 이동하지.” 차원 광장을 향해 다 함께 걸어가고 있자니, 거리에 점점 탐험가들이 많아진다. 매달 마지막 날 밤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돌아왔을 땐 다들 거지꼴을 하고 있으니까. “정지!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그럴 수가! 우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미궁까지 가야만 한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바바리안들과 마주쳤다. 성인식을 끝내고 이제 막 미궁으로 향하는, 오직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맨몸뚱이의 어린 전사들. “…우리를 따라와라.”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종족의 사명감은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인가? 고맙다. 이름을 알려 주면… 뭐!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네가 그 작은 발칸이란 말인가!!! 존경한다!!” 어린 전사들의 과한 반응이야 어쨌든. 차원 광장까지 향하는 길에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었다. 바바리안의 심장이 비싼 값에 거래되니, 같은 탐험가… 그중에서도 인간을 특히 경계하란 것. 밤친구는 되도록 이종족으로 구하란 것. 덫을 조심하고, 빛이 있는 길로 다니란 것 등등. 내가 처음 미궁에 들어갈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지식을 아낌없이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너처럼 유명한 전사가 될 수 있나?”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오오! 그런가! 알겠다! 반드시 네가 말한 대로만 행동하겠다!” 이러는 편이 얘네한텐 더 좋겠지. 확실히 말해 줘야지만 알아먹는 녀석들이니까. 내 조언을 가슴에 새기며 포탈로 향하는 어린 전사들을 보며 난쟁이놈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자네… 동족들에겐 굉장히 친절하군?”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경험으로만 배워야 하는 건 가혹하지 않나.” “음, 그건 그렇지. 하하핫!” 그러한 잡담을 마지막으로 우리도 포탈이 열린 중심부로 향했다. 솨아아아아-!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며, 그 위를 뒤덮는 오색의 찬란한 빛. 불현듯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벌써 네 번째인가…….’ 첫 진입 때, 무수한 씹새끼들을 해치워나가며 2층에 도달했다. 두 번째? 강해져야 한단 일념하에 균열에 들어갔다. 근데 그게 변종 균열이었다. 그다음은 더 가관이었고. 팀이 생겼는데, 도중에 조난됐다. 마지막엔 계층군주가 날뛰기 시작한 탓에 정말 저승 문턱을 밟고서 겨우 돌아와야 했다. 그렇기에……. 번뜩-!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설마 별일 있겠어? 이런 생각은 들기도 전에 냅다 집어 던진다. ‘후, 이번엔 또 어떤 씹새끼가 나오려나?’ 분명 이번에도 뭔가 일이 생길 거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자.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 . 「TIP: 캐릭터의 소지 정수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몬스터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려 보세요!」 89화 플레이어 (1) “이름 이한수, 나이 29세, 무단결근이 한 달째 이어지자 회사에서 실종 신고를 했다라. 쯧, 가족은?” “친모 한 명입니다. 그런데 소식을 전했더니 연관되고 싶지 않다더군요.” 보고를 듣던 사내가 커피를 홀짝였다. 딱히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복잡한 가정사를 지닌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래서 박 형사, 실종 사건이 왜 우리 팀으로 온 건데?” “그게… CCTV에 집에 들어온 장면만 찍히고 나가는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창문들은 전부 잠겨 있었고요.” “확실히… 뭔가 구린내가 나긴 하네.” 사내는 커피를 내려놓고서 본격적으로 보고서를 읽어내렸다. 15년간 형사 생활을 하며 별꼴을 다 봤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침입 흔적도, 사라진 금품도 없다. 카드 사용 내역은 한 달 전이 끝. 무엇보다 침실에서 실종자가 입고 있던 옷이 방에서 발견됐다. 직접 벗은 게 아니라, 마치 그대로 몸뚱이만 사라진 듯한 형태로. “어떤 새끼인진 몰라도 완전 미친놈이군.” 이미 단순한 실종이 아니란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한 번 들썩일 정도의 강력 범죄일지도 모른다. “현장 보존은 했지? 우선 국과수에 의뢰부터 넣어. 감식 결과부터 보자고.” 사내의 지시에 박 형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팀장님… 그 전에 보여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왜 보고서에 넣지 않고? 그런 의문은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박 형사가 모니터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실종자의 방에서 발견됐던 모니터입니다.” “뭐? 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설마 멋대로 갖고 나온 건 아니지?” 기도 안 찬다는 듯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던 사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흠칫 굳었다. “잠깐만, 박 형사 어떻게 모니터가 켜져 있는 거야?”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검은색 배경의 모니터엔 글자들이 떠 있었다. 본체와의 연결선도, 심지어 전원선도 꽂혀 있지 않았음에도. 심지어 소리까지 나며 갱신되는 중이었다. 삐빅, 삐비비빅, 삑—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24 상승합니다.」 「비요른 얀…….」 「…….」 「…….」 계속해서 적혀 나가는 이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팀장님, 제가 좀 알아봤는데…… 해외에서는 비슷한 케이스가 몇 건 있었다고 합니다.” “뭐, 해외……?” 아직 그들이 정확히 알 방법은 없었다. ***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어둠이 물러가며 밝아지는 눈앞. 습관처럼 고개를 위로 향하니 여느 때와 같은 흐릿한 하늘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나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이번에도 살아왔군.’ 사실 살아 돌아왔단 말에도 어폐가 있었다. 반드시 뭔가 사건이 생길 거라며 매일같이 긴장의 나날을 보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연속해서. ‘음, 이번엔 정말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했다. 그야 이전 탐사가 너무 술술 풀렸으니까. 스타트 포인트가 잘 잡혀 준 덕에 고작 9시간 만에 노움 지구와 이어진 2층 포탈을 타고 ‘바위사막’에 도착했다. 뭐, 선객이 있어 포탈 공적치는 얻지 못했지만. 「타락한 노움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1」 「코볼트 방패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1」 「스톤골렘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거석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샌드맨을 처치하였습…….」 「…….」 노움의 변이종과 코볼트 3종 세트를 비롯한 다양한 9등급 몬스터. 그리고 스톤골렘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8등급 몬스터들까지. 내 부탁으로 모든 종류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지나쳤음에도, 4일 차에 3층에 올라설 수 있었다. ‘마녀의 숲까지 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지.’ 별다른 문제 없이 8일 차에는 마녀의 숲 중심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약탈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4층 ‘천공의 탑’에 들어선 다음부터는 아예 탐험가와 마주칠 일이 없었고. 「시련을 완수하였습니다.」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사냥의 시간.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며 몬스터들과 전투를 펼쳤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출몰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무작위로 무리를 지어 쏟아져 나왔고, 사흘에 한 번 꼴로 6등급 몬스터도 마주쳤다. 「비톨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3」 「리자드맨 척후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듀라한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3」 「벤시 여왕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3」 「일라트렉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3」 「용기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4」 「리빙 아머를 처치…….」 「…….」 4층이 폐쇄되는 23일 차까지 시간을 보냈다. 한때 그토록 염려했던 6등급 몬스터? 첫 전투인 탓에 몇 번인가 실수했던 적도 있지만, 전력이 확 상승한 덕에 큰 위기 없이 전부 물리쳐 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경험치가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고. ‘괜히 수련의 탑이라 부르던 게 아니라니까.’ 3층에 출현하는 몬스터가 모두 나온다. 6등급도 나오고, 그게 아니어도 이곳에서만 나오는 몬스터도 있다. 뭐, 그래도 4레벨로 가기엔 조금 부족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사냥에만 매진한 결과. “드왈키?” “그, 그러니까…… 한 명씩 나눠 가지면 72만 스톤 정도겠구려.” “78만 스톤이다.” “엥? 비요른, 무슨 소리냐 그게…….” “어, 어…… 다시 계산해 보니 비요른 그대의 말이 맞구려?” “뭐엉?!” 인당 78만 스톤씩 배분이 되었다. 그마저도 미믹의 패시브 스킬인 [탐욕] 덕분에 마석 드랍률이 30%가 상승했기에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60만 스톤 안팎이었을 터. “으음, 절대 적은 돈은 아닌데…… 뭔가 아쉽구려. 혹시 나만 그렇소?” “왠지… 나도 마찬가지인 거 같당.” “하하하핫! 하긴 그 전에 그렇게 벌어 댔으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나! 인제 보니 비요른, 자네의 그 터무니없던 운도 끗발이 다한 모양일세?” 운은 모르겠고. 힘든 일이 없었던 만큼 소득도 적었다. 약탈자들이 좆같긴 해도, 장비 하나는 야무지게 입고 다니니까. 사실상 마석 캐기보다 훨씬 더 돈이 되는 셈. ‘……어찌 된 게 처음 미궁에 들어갔을 때보다 적게 벌었군.’ 왜 약탈자 새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지 알 거 같다. 6등급 몬스터보다 사람이 더 잡기 쉽고 훨씬 돈도 된다. 그러니 불나방처럼 이끌릴 수밖에 없겠지. 본인을 효율충이라 여기는 놈이라면 더욱더.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사실 그동안이 너무 특별했을 뿐이고, 이게 평범한 거니까.’ 게임을 생각하며 겨우 미련을 지웠다. 들어가는 소모품값, 도시에서 드는 각종 비용. 원래 초반엔 큰돈을 못 만지는 게 당연하다. 뉴비들이 고작 100만 스톤이 없어서 1년 차, 2년 차도 못 넘기고 세금사를 해대는 것도 그게 이유였고. ‘……애초에 몇 달 만에 4층까지 온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속도긴 하지.’ 그리 스스로에게 말하며, 도시에서도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모여 팀원들과 친목 겸 탐사 계획을 세웠고, 매주 마탑에 방문하며 레이븐의 연구 약속도 횟수를 채웠다. “음, 이제 벌써 4번만 더 하면 끝이네요?” “그래서 그 선배라는 자는 언제 만나면 되나?” “아, 그게 좀 문제가 생겨서요. 얀델 씨만 괜찮으면 다음 달로 미루고 싶은데…….” “…그렇게 해라.” 수련, 도서관, 친목, 정보 수집. 정말이지 처음 겪어 보는 한가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 탓에 손발이 떨릴 정도로 불안했지만……. 다시 미궁에 들어갈 때까지 악령사냥꾼이고, 한스고 뭐고 내게 접근하는 놈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건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지.’ ‘고블린 숲’을 지나쳐 3층에 올라갔던 것. 덕분에 잡지 못한 몬스터들을 추가로 잡은 것. 그리고 결국 4층에서 보내던 나날 중에 레벨 업을 한 것. 지난 탐사와 달라진 점은 그게 전부다. “비요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냥? 어서 가야징.” 미샤가 허리를 흔드는 감각을 느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얼른 정신 차려라. 늦으면 엄청 기다려야 한당.” 엄청은 무슨. 9등급 하꼬 탐험가 시절이라면 모를까. 6등급 탐험가는 검문소 자체가 달라서 대기 시간이 반도 안 된다. 공무원들도 훨씬 정중하고. “자, 그럼 가보세! 하하핫!” 이내 우리는 각자의 검문소를 거쳐 나와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신속하게 배분을 끝마쳤다. “한 사람당 79만 스톤씩 가져가면 되오.” “비요른? 저게 맞는 거냥?” 미샤의 물음에 초조한 듯이 동공을 떠는 드왈키. 얘는 뭔 마법사가 이렇게 숫자에 약해? “나도 모른다. 맞는다면 맞는 거겠지.” 이번엔 계산이 정확했기에 딴지 거는 일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79만 스톤이 내 호주머니로 입금됐다. 역시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인 건가? 후, 쉽게 쉽게 간 만큼 벌어들인 돈도 지난번이랑 변한 게 없구나. “그럼 귀환주는 내일 따로 모여서 마시는 거로 하고, 오늘은 각자 돌아가서 쉬세!” “그러지.” 배분이 끝나자마자 해산해 숙소로 향했다. 근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오늘따라 이 방이 지저분하고 좁게만 느껴진다. 방이 커지고 창문이 생겼다며 좋아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털썩. 씻고 침대에 누웠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이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었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도 치밀었다. 이렇게 벌어서야 그때 그 여관 방 같은 곳으로 이사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최근에 성장도 거의 멈췄고 말이지.’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질수록 내 안에 자리 잡은 초조함이 크기를 키운다. 따라서, 나는 애써 웃었다. ‘…내가 봐도 복에 겨웠군.’ 이 몸에서 눈을 뜬 첫날. 적어도 몇 년, 어쩌면 평생까지도 가정하며 계획을 세웠다. 헌데 여러 우연이 맞물리며 최소 2, 3년은 시간을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풀리고 있다. 그러니까— ‘씨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힘껏 뺨을 내리친다. 짜악-! 잘 풀리고 있다고? 그럴수록 위험한 상황이다. 내 팔자에 언제까지고 잘 풀리는 나날만이 이어질 리가 없지 않나. 잊지 마라. 항상 좆같은 일은 방심했을 때 찾아왔다는걸. ‘악령사냥꾼? 길드? 모즐란? 귀족? 이번에는 누구지? 아니면 미궁에 들어갈 때까진 괜찮나?’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새겨진 경험들을 떠올리며 풀어진 나사를 조인다. ‘아니야, 그럴 리가.’ 멈춰선 안 된다. 계속해서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 누가 본다면 이런 내가 편집증 환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난 첫날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항상 최악을 생각하자.’ 어차피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면, 살아남은 미친놈이 되고 싶다. *** 「비요른 얀델」 레벨: 4 (New+1) 육체: 386.1 (New +56) / 정신: 198.3 / 이능: 302.4 (New +10) 아이템 레벨: 967 종합 전투 지수: 1128.55 (New +10)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오크 히어로 - Rank 5 *** “비요른?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냥?” “없다. 근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눈빛이 조금 사나워진 거 같아서…….” 다음 날, 미샤와 만나자마자 들은 말이다. 따라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사를 풀기로 했다. 뇌에 그 정도 여유 공간은 있어야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테니— “귀라도 만지게 해줄깡?” “…뭐?” 순간 내가 진짜 헤까닥해서 잘못 들었나도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 오라버니가 내 귀를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댔다. 아주 어렸을 때긴 하지만…….” 뭐? 그 싸가지 없는 새끼가 그랬다고? 아무리 어렸을 때라도 상상이 가지 않는데. “아, 참고로 큰 오라버니를 얘기하는 거당! 큰 오라버니는 아직도 내게 잘해 주거든…….” 잘해 줬건 아니건. 무슨 그런 변태 같은 새끼가 다 있지? 이래서 어렸을 때 가정환경이 중요한 거다. 저 봐라, 진짜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 뿐인 눈빛을.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거겠지. “미샤,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네 의도를 오해하고 이상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나도 미샤의 취향이 마른 남자인 걸 몰랐으면 방금 말을 듣고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혹시 얘가 꼬시는 건가 하는 그런 허튼 생각. “하지만 너는 아무나가 아니지 않냥? 거, 말대답은. “그냥 알겠다고 해라.” “…알겠당. 아무튼 이게 별로면 고기라도 구워 줄까?” “…그렇다면 고맙게 먹지.” 이렇게 아침 식사는 구운 돼지고기로 정해졌다. 아무리 직접 사다 먹어도 고기다 보니 한 끼로는 꽤 비싸지만……. 나는 나름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만약 이 고기를 먹어서 키가 조금이라도 큰다면 결코 손해는 아닐 터. “천천히 먹어랑! 나도 좀 먹자!!” “……고기는 싫어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이 섬세함이라고는 없는 바바리안노밍!!” 식사 중에 있었던 약간의 해프닝이야 어쨌든. 속도 든든해졌겠다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건 저녁이니……. “잠시 밖에 좀 다녀오지.” “오, 그럼 오늘은 나도 쉬어도 되는 거냥?” “심심하면 검이라도 휘두르고 있어라. 지난번에 검을 놓친 걸 보니까 아직 숙련도가 부족한 거 같더군.” “그건! 그냥 힘이 부족했던 거당!!” “그럼 운동을 해야겠군.” “이 근육 바보가!!” 여하튼 미샤를 내버려 두고 외출했다. “잘 다녀와랑! 될 수 있으면 늦게 오고!” 뭐, 얘가 정말 내 말대로 수련하며 시간을 보낼 거 같진 않지만……. 그거야 얘 선택인 거니까. 터벅, 터벅. 이내 튼실한 두 다리로 열심히 걷고 있자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언제나 시간이 남으면 오는 곳. 즉, 도서관이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보군요.” 이제 이름까지 트고, 이런저런 일도 있어서인지 오자마자 한마디 말은 걸어주는 라그나. 물론, 그렇게 친한 느낌은 아니다. “보다시피 없었다. 너는 잘 있었나?” “물론입니다.” “그럼 오늘도 부탁하지.” 간단하게 안부만 묻고 [상급 서적 탐지] 마법을 받으려는 차. 어째선지 라그나가 머뭇거린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해라.” “……대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냥 눈빛이 그렇다.” 내 솔직한 답변에 라그나가 자존심 상한 눈빛을 짓는다. 바바리안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제법 상한 모양. 다만 이쪽도 이성을 중시하는 지성인답게 사족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리 말해 두지만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탐험가이니 경고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고라고?” 전혀 예상에 없던 단어다. 하지만,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확실하진 않다고 보험을 깔긴 했어도, 얘 성격상 실없는 소리는 아닐 테니까. “뭐지? 어서 말해 봐라.” 내 재촉에 라그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근시일 내에 차원 붕괴 현상이 미궁에서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듣자마자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차원 붕괴dimension collapse. 계층군주 따위와는 견줄 수도 없는 미궁 속의 진짜 ‘재앙’. ‘요즘 왜 이렇게까지 잠잠한가 싶더니…….’ 과연, 이게 터지려고 그랬던 걸까? 90화 플레이어 (2)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짧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습관처럼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날 보며 라그나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생각보다 침착하군요. 역시 말해 봐야 믿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뭐래, 진짜 이걸 수도 있겠다 싶어 한숨 쉬었던 건데. “하긴 그냥 흘려듣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원 붕괴는 미리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는 재앙이니까요.”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다. 게임에서도 차원 붕괴는 언제나 불식간에 터졌다. 뭐, 게임 내내 안 터질 때가 더 많았지만. ‘100판에 한 번 터질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지.’ 물론, 터지기만 하면 재앙이 따로 없었다.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중후반부라면 모를까. 초반부면 그냥 ESC 키를 누르고 다시 시작하는 게 오히려 시간을 아끼는 길일 정도. “그래서 정보의 출처는 어딘가?” 나는 침착히 확인할 것만 확인했다. 직감상 불안의 원인이 이거다 싶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셔널 페르강이란 이름의 타루테인 학파 마법사입니다. 차원 붕괴 현상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했다더군요.” 한 마법사의 이름을 알려 준 그녀는 이를 끝으로 자신도 더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렇군. 이후로는 내가 알아보겠다. 아무튼 경고해 줘서 고맙다.” 이내 등 돌려 문 쪽으로 향하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그냥 가십니까?” 그야 새로운 퀘스트가 떴으니, 그것부터 하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오는 주점. 구석진 자리에 앉은 은발의 요정이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고민이 있을 때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하아…….” 예쁘고 착한 동생 에르웬. 석 달 전부터 그 아이는 달라졌다. 그토록 싫어하던 수련을 먼저 도와달라며 청해왔을뿐더러, 자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세웠다. 그리고, 조금 날카로워졌다. 피가 이어진 자신은 그나마 나았지만……. 타인을 대할 때의 말투도, 눈빛도, 행동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나쁜 변화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과도한 향상심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 미궁에 들어가는 것이 숙명인 탐험가로서 반길 만한 소양이다. 실제로 덕분에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사대정령과 모두 계약에 성공한 동생은 그중 셋을 개화開化시켜 자율 의지를 구축해 내는 데 성공했다. 어디 그뿐인가? 궁술과 체술, 단검을 이용한 근접 전투술도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이런 재능이 그간 꽃 피우지 못했나 싶을 정도. 다만 그녀가 한숨 짓게 하는 원인은 변화의 계기에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숨길 수 있으려나…….’ 아저씨라고 부르며 심적으로 의지하던 한 바바리안의 죽음. 사실 죽음이라 말하는 것도 웃기다. 정작 당사자는 멀쩡하게 살아 있을 테니까. 작은 발칸이라는 명성까지 얻은 채로.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나?’ 처음 그의 소식을 접했을 때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그다음은 불안감이었고. 이제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게 웬걸? 매일 방에 틀어박혀 수련에만 몰두한 에르웬은 아직까지도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자네들 그거 들었나? 칠흑검이 검공의 제자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더군!” “허,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는 퍼트리고 다니는 겐가? 검공, 그 고귀한 양반이 일개 탐험가를 제자로 받는 게 가당키나 한가?” 주점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은 다리아는 주변 탐험가들의 담소를 엿들으며 안도감을 얻었다. ‘확실히 이제 슬슬 소문도 잦아들었네…….’ 한때 이 도시 어디에서나 들렸던 이야기는, 새롭게 등장한 이야기에 묻혔다. 악령을 퇴치했느느니, 하수도로 도망친 카루이의 사제를 척살했냐느니. 다시금 그 바바리안의 이야기가 주점에 나돌 때는 조금 아찔했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거의 다 가라앉았다. ‘그래, 이대로 내버려 두자.” 이내 다리아는 결심을 끝마쳤다. 사실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탐험가로서 살아가길 택한 자로서, 과연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제 또 오겠는가? “어이, 요정 아가씨. 혹시 혼자 왔으—” “꺼져라. 이마에 구멍이 나기 싫으면.” 다가오는 취객을 밀쳐내며 다리아는 주점을 나섰다. 혹여나 바바리안이 또 뭔가 일을 벌여 화제가 되지 않을까 저녁이면 이곳을 찾았지만……. 이제 더는 오지 않을 셈이었다. 똑똑. 숙소로 돌아간 그녀가 동생의 방문을 두들겼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을까 싶어 열쇠를 밀어 넣었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이내 그 사이로 동생이 보인다. 동생은 사대정령을 모두 소환한 채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야 돼…….”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뭐라 중얼거리는 거 같다. 다리아는 숨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중얼거리는 내용이 보다 정확히 들렸다. “강해져야 돼. 강해져야 돼. 강해져야 돼. 그래야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어. 다 가질 수 있어…….” 스스로를 세뇌하듯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동생. “에르웬……?” 다리아는 서둘러 동생을 깨웠다. 놀랍게도 동생의 표정은 그저 평온할 뿐이었다. “아, 언니 왔어요?” “너… 괜찮은 거야?” “뭐가요?” “그… 혼자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 “네? 그냥 정령들이랑 얘기하고 있었을 뿐인데요?” 암만 봐도 정령들과 나눌 대화는 아닌 거 같았지만……. 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축객령이 내려진 탓이다. “지금은 수련 중이니까 이따가 다시 와 줄 수 있어요?” “그래…….” 다리아는 힘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본인의 방으로 돌아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그야 그 모습은 ‘열의’나 ‘독기’로 치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거의 강박 증세에 가까웠다. 10년 전, 그 사건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뭐가 문제지? 그 바바리안이 그 정도로 중요한 위치이진 않았을 텐—’ 다리아가 흠칫 굳었다. 최근 있었던 가장 큰 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아, 설마 그 정수를 먹어서인가?’ 다리아는 책장에 꽂힌 서적 한 권을 꺼냈다. 예전에 길드에서 꽤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하급 정수 총합본] 7등급부터 9등급 사이의 모든 정수들의 정보가 망라된 책. 일단 이번에 흡수한 정수부터 확인했다. ‘카니바로가 어디 있지……?’ 마녀의 숲에서만 등장하는 몬스터지만, 놈에게 쫓겨 숲 밖으로까지 도망치던 어느 탐험가를 구해 주는 과정에서 운 좋게 정수를 얻었다. ‘아, 찾았다.’ 책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가 불의 정령을 소환한 채로 글자를 읽어내렸다. [카니바로] 7등급. 민첩성(중), 어둠 저항력(하), 지구력 (하), 명중률(중), 육감(하), 청각(중), 집착(상). *이동 시 민첩성 및 감각 상승. *마력 지뢰(빨강) *하운드(파랑) *추격 화살(초록) 꼼꼼히 내용을 확인하던 그녀는 한 부분에서 그대로 굳었다. “집착이…… 상 등급이라고?” 문득 기시감이 피어난 그녀는 석 달 전에 흡수한 정수까지도 확인했다. [강철언덕 추격자] 8등급. 근력(하), 물리 내성(하), 각력(하), 도약력(중), 대지 저항(하), 인지 방해(하), 민첩성(중), 집착(중) *기습 성공 시 관통력 상승. *관통 화살(빨강) *지형 분출(파랑) *약점 포착(노랑) ‘대체 이게 무슨…….’ 이번에도 집착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중 등급을 받은. ‘설마, 그것도……?’ 내친김에 동생이 처음으로 흡수한 그 정수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블린 궁수] 9등급. 유연성(하), 후각(하), 독 내성(하), 인지력(하), 인지방해(하) 명중률(하) 시각(하) 민첩성(하), 집착(하) *활류 무기를 사용 시 마비독 부여. *도둑걸음 여기마저도 집착이 있었다. 이제야 다리아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전부 이 능력치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기껏 흡수한 정수를 돈까지 내가고 지울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마음이 무겁다. ‘대체할 만한 정수를 먹게 되면… 그때 지우게 하자.’ 고심 끝에 그녀가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새로운 의문과 마주하고 말았다. ‘어, 잠깐만.’ 만약, 그전에 바바리안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 능력치의 방향은 어디로 바뀌게 되는 거지? *** 차원 붕괴 소식을 듣고서 열흘이 지났다. 다만 이게 근거 없는 루머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놈의 착각인 건지. 꽤나 바쁘게 알아보러 다녔음에도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셔널 페르강?” 항상 질문거리를 들고 찾아가면 도움을 주었던 레이븐도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만나게 해 달라고 하셔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요. 애초에 타루테인 학파는 우리랑 딱히 교류라고 할 것도 없고.” “…그렇군.” “아무튼 다음 주에 올 때는 하루 통째로 비워 놓으세요. 뽑기로 당첨자가 나왔거든요.” “당첨자……?” “까먹은 거예요? 종이에 관해 알아봐주는 대가로 제 선배들 연구를 한 번 도와주기로 했잖아요?” 아니, 그건 기억하는데. 그걸 뽑기로 뽑을 줄은 몰랐지. ‘씁, 괜히 더 불안해지는데…….’ 살면서 뽑기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지. 여하튼 이후로도 셔널 페르강이란 마법사와 만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비요른! 그거 들었냥?! 곧 차원 붕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당!!” 간만에 옛 동료랑 만나러 간다더니 호다닥 돌아와서 유난을 떨기 시작한 미샤. 얘가 알 정도면 이미 다 퍼졌다고 봐야겠지. 실제로 저녁에 주점에 가 보니 다들 차원 붕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전부 그 출처조차 모른단 말이지.’ 누구의 입에서 나온 얘기인지. 또 근거는 무엇인지. 그러한 얘기는 일절 없이 다들 불안을 키우며 소문을 부풀리고 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보통 이렇게까지 널리 알려지려면 그럴듯한 근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지금에야 호사가들에 의해 여러 낭설이 근거로서 덧붙여지긴 했지만, 처음엔 그런 것조차 없었다. ‘설마 누가 일부러 소문을 키우고 있는 건가?’ 처음부터 사태를 유심히 지켜봤던 나는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암만 생각해도 현 상황은 조금 이상했으니까. ‘하, 이거 진짜 뭔가 있긴 한 거 같은데.’ 갑갑하다. 술집에서 오고 가는 게 아니라, 좀 더 은밀한 곳에서 소리 없이 오가고 있을 정보가 알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오직 전투만으로 명성을 쌓은 맨땅 바바리안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접하겠는가? ‘애초에 라그나가 아니었으면 셔널 페르강이란 이름조차 알지 못했겠지.’ 이윽고 나는 결단을 내렸다. 손에는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보낸 편지와 동봉되어 있던 알약이 쥐어져 있었다. 익명성을 철저히 하겠단 이유로, 원래는 최소 3개월은 있다가 먹으려 했던 알약이지만……. ‘한 달 정도는 앞당겨도 되겠지.’ 이내 나는 알약을 목에 넣고 삼켰다. 「캐릭터가 GB-027을 복용하였습니다.」 당장 영적 세계로 끌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야 레이븐 및 라그나가 열어준 비밀 도서관에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집회가 열리는 건 매달 15일 자정이었으니까. ‘사흘만 기다리면 되겠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정신이 몸에서 멀어지는 듯한 감각.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 우주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공간. 아마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조차 인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기 저 컴퓨터가 아니었다면. ‘뭐야, 이건 또.’ 예상과 전혀 다른 스타트였지만, 일단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로봇을 타고서 그걸 조종해서 걷고 있는 듯한 감각. 뒤뚱거리며 겨우 컴퓨터 앞에 도착한 나는 켜져 있던 모니터를 확인했다. [패스워드를 입력해 주십시오.] 검정색 도스 화면에 자리한 짧은 문장.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Rafdonia’s king, Mother fucker] 이거, 추신의 PS를 말하던 게 아니었구나. 91화 플레이어 (3) 이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어언 5개월. 미궁에서 보낸 일자까지 계산하면 체감 시간은 훨씬 더 늘어난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고, 괴물을 죽였다. 그 외에도 살아남기 위해 많은 야만스러운 일을 해왔다. 다만 현대인으로서의 본질은 그대로란 걸까? 타닥, 타다다다닥, 타닥, 탁! 패스워드 입력을 끝내자마자 새끼손가락이 자연스레 엔터를 누른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닫고 흠칫한다. ‘이건… 내 몸?’ 바바리안의 투박하고 굵은 손이 아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바위 같은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전사의 몸은 더더욱 아니다. 키 175에 평균 체중, 말랑한 살과 가죽을 가진 이한수의 몸. 이를 인지한 순간이었다. “악, 씨발!” 바닥이 확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사방이 캄캄했다. 미궁에서 자주 겪어 봤기에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으나……. 딸각.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다. 놀랍게도 나는 내 방에 있었다. 이곳에 끌려오기 전까지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나, 이한수의 방.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지?’ 일단 주변을 확인해 보았다. 책장, 컴퓨터, 조금 누레진 침대……. 나가서 주방 겸 거실, 그리고 화장실까지 살펴보니 모든 게 내 기억 속과 일치했다. ‘아, 그럼 설마 그것도……?’ 헐레벌떡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째선지 안에는 차갑게 식혀진 캔콜라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조화인가도 싶지만, 깊이 생각지 않았다. 그야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딸깍, 치이이잇- 듣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소리.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동안 이게 얼마나 그리웠던가. 혹여나 눈앞에서 사라질까 얼른 입 안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니미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목을 반으로 짜개는 듯한 아린 감각도 없다. 그저 무미무취의 액체가 목구멍으로 술렁술렁 넘어가는 듯한 느낌만 들 뿐. 실망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였다.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인터폰을 통해 확인해 보니 웬 금발 머리 백인 여성이 있다. 종교 권유는 아닐 테고. ‘너는 누구지?’라고 평소 말투로 말하려던 나는 실수를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말투를 듣고서 내가 바바리안임을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평범하게 말했을 뿐인데 목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다. 머지않아 인터폰 너머로 대답이 돌아왔다. [고스터 버스터즈의 안내역을 맡고 있는 소울퀸즈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음, 이런 시스템인 줄은 몰랐는데. 뭔가 밉보이기 전에 어서 문을 열어 주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저기, 왜 벽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 여기가 벽이었나요? 저한테는 그냥 흰색 공간으로만 보이거든요.” 아까 봤던 그 공간을 말하는 건가? 영적 세계라더니 이 공간에는 뭔가 미스터리한 규칙이 작용하는 모양. 대충 방향을 알려주며 거실로 안내하고 있자니 여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희미하게 형태는 보이기 마련인데.” “형태라니요?” “이곳 말이에요. 아마 그쪽…….” “그냥 계속 그쪽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그러시다면야.”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편지의 내용답게 여자는 내 완곡한 거절에도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이 공간은 그쪽이 상상한 모습이 구현화 된 거예요. 내면의 정신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 보통은 심리적으로 가장 편하게 느끼는 공간이 되죠.” “그래서요?” “보통은 타인한테도 보여요. 간혹 방어기제가 강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형체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본다. 호기심인지 경계인진 알 수 없으나, 일단 모순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아까 벨을 누른 건 어떻게 된 겁니까? 아깐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그게 그런 식으로 표현됐나 보군요. 저는 벨 같은 거 안 눌렀어요. 그냥 이 흰색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그쪽을 불렀을 뿐이죠. 이해가 되려나요?” 솔직히 말하면 뭔 소린지 대충 알겠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히 말씀해 주신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사실 마법사분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어떻게 설명할지 매번 난감하거든요.” 여하튼 안내역이라 본인을 소개한 여자였기에 마음 편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 근데 패스워드를 틀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야 눈치껏 알아챘지만, 패스워드를 적어 넣지 못하는 자들도 있을 터. “그거요? 별일 없어요. 그냥 눈속임용이죠. 애초에 그쪽처럼 제가 오기 전에 패스워드를 맞추는 분도 거의 없고.” “……?” “패스워드를 입력하든 말든, 어차피 제가 한번 와서 확인해야 하거든요.” 참고로 그녀가 말한 확인은 방식 간단했다. 그냥 딱 보면 구별이 된다던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도 싶었으나, 나는 현재 내 모습을 보고서 깨달았다. 몸에 착 붙는 남색 정장. 취직 기념으로 전 여자친구가 사준 옷이었다. ‘옷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건가…….’ 하긴 나도 이 여자를 보자마자 현대인이라는 걸 알았으니,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터. “와, 정말 눈치가 빠르시네요. 플레이어와 NPC는 여기부터 차이가 나요.” “NPC?” “현지인들을 부르는 은어예요. 아무튼 둘의 차이는 옷만이 아니라 여기 이 공간에 들어와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죠.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경우는 처음이지만…….” “보통은 방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거군.” “네. NPC들 방에 락스타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그럴 일은 없잖아요? 이해했다. 이런 방식의 검증이라면, 현지인… 그러니까 NPC들이 정체를 숨기고 들어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나는 통과인가?” “물론이죠.” 방어기제 때문에 방의 모습이 안 보인대서 내심 걱정했는데, 여자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서 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옷, 말투, 표정, 그리고 이 심상 공간. 이것들 말고도 NPC를 구별할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내게는 말하지 않는 건 보안 때문이겠지.’ “자, 이제 그럼… 그쪽도 정식으로 우리 고스트 버스터즈의 일원이 됐네요.” “근데 고스트 버스터즈란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있어요. 그런 사람이. 이런 구린 이름이 다 있나 싶죠? 제발 다른 이름으로 하자고 제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 나는 굉장히 센스 있는 이름이라 생각해서 물어본 건데……. “하아, 여기 오시는 분마다 다들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냐는 이야기부터 하신다니까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린 이름이란 감상엔 동의할 수 없지만, 동의하는 척은 할 수 있으니까. 예전부터 눈치껏 행동하는 게 내 주특기였다. “확실히… 특이한 이름이긴 합니다.” “그렇죠? 아, 어디까지 얘기를 했더라…….” 이내 여자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나갔다. “아, 이제 몰래 들어온 NPC처럼 강제로 영혼을 분리해서 죽이는 방법은 저희도 못 써요. 대신 다시는 이곳에 불려오지 못하게 추방 조치를 내릴 수는 있으니까, 시간이 남으면 규칙들을 꼭 숙지하시고요.” 이후 여자는 고스트 버스터즈란 커뮤니티를 이용하기 위한 기본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컴퓨터가 있나요? 있으면 앞으로 가 보세요. 없으면 상상해서 구현화 시켜야 하는데…….” “있습니다.” “시간을 아꼈네요. 어서 가서 켜보세요.” 시키는 대로 컴퓨터를 켜자, 익숙한 OS화면이 아니라 다짜고짜 창이 떴다. “아, 잠시만요. 그쪽 코드가…….” 이후 여자가 불러준 코드를 입력하니 닉네임을 지정할 수 있는 페이지로 창이 넘어갔다. “여기서 닉네임만 만들면 끝이에요. 한번 만들면 절대 바꿀 수 없으니까 신중히 하시고요.” 음, 뭐로 하지? 고민하는데 여자가 조언을 해줬다. “스톤 아이벤은 하셨죠? 보통 거기서 쓰던 닉네임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요. 제 소울퀸즈란 닉네임도 거기서 나왔고요.” 스톤 아이벤. 망겜 커뮤니티답게 메인 게시판 리젠율이 하루에 30건도 안 됐지만……. 그래도 이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니 한 번쯤은 이용해 봤겠지. 나도 마찬가지였고. ‘실명도 아니고 아이디인데 거기 닉네임을 써도 되겠지?’ 이내 나는 닉네임을 적고 엔터를 쳤다. 그런데……. [사용할 수 없는 닉네임입니다.] “아, 누가 그 닉네임을 쓰고 있나 보네요.” 뭐? 그 닉네임을 쓴다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스펠링 하나를 바꿔서 닉네임을 정했다. 여자는 내 닉네임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후후, 그분 팬이신가 보네요?” 팬?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자세히 물어보려는 차, 여자의 설명이 곧바로 이어졌다. 앞으로 커뮤니티를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에 관한 설명들. “자, 그럼 얼추 알려드릴 건 다 알려드렸네요. 이제 저는 가볼 테니 편하게 이용하세요.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1:1 문의를 해주시고요!” 이내 소울퀸즈란 닉네임의 여자가 떠났다. 어느샌가 다시 혼자 남은 방. 튜토리얼을 완료한 나는 어렵지 않게 커뮤니티를 둘러보았다. [20대, 30대 남자분만] [아메리카 연합] [수인족 모여라] [위자드리] [수다방] 현재 활성화 중인 채팅방은 여럿 있었다. 이 중에 아무거나 택해서 들어가면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던가? 미래적이면서도 판타지한 시스템이었다. ‘등급 제한이나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방도 있네.’ 일단 이곳에 익숙해질 겸, 시험 삼아 아무 방이나 선택해 들어갔다. [새내기방] 등급 제한이 아니라, 커뮤니티에 입장하고서 1년이 안 된 사람만 입장이 가능한 특이한 방.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을 거 같아서 골랐다. 따닥. 더블 클릭을 한 순간. 모니터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내가 게임 도중에 바바리안의 몸에서 깨어난 그날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한 공터에 와 있었다. *** 따닷, 따다다닷- 캠프파이어를 하듯 중심부에 모닥불이 세차게 일렁이고 있는 공터. 그 근처로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다. 전부 다 남자다. 하긴 이 변태 같은 하드코어 게임을 하는 여자가 얼마나 있었겠어. “오, 새로운 분이시네요!” 내 등장과 함께 모이는 시선. 백인, 황인, 흑인. 생각보다 인종이 다양하지만……. 이세계에서 몇 달간 살았더니, 결국엔 같은 고향 사람이란 동질감이 먼저 피어난다. 이는 저쪽도 마찬가지였을까. “어느 나라 분이신가요?” “아, 한국입니다.” “그렇구나! 환영합니다!” 쓱 둘러보며 전반적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인종차별적인 시선은 일절 존재치 않으며, 순수하게 신입을 환영하는 분위기. ‘머리 위에 저건 닉네임인가?’ 사람들 머리 위에는 반투명하게 글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때 깔끔하게 정장을 빼입은 흑인 남성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금 휑하죠? 꾸밀 만한 포인트가 안 모여서요. 방장인 다크맨입니다. 닉네임 공개 설정을 하고 간단하게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닉네임 공개요?” “이 방이 처음이신가 보네요. 그냥 그러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커뮤니티에서는 확실한 인지와 사고에 힘이 깃들거든요.” 확실한 인지와 사고라……. 그냥 액티브 스킬을 쓰듯이 하면 되나? ‘닉네임 공개.’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 머리 위로 향했다. 이제 저들에게도 내 닉네임이 보이는 모양. 그런데……. “안녕하세요. 엘프눈나입니다.” 어차피 익명 공간이라 생각하며 닉네임을 밝힌 찰나. “…….” “…….” 싸늘한 정적이 공터를 뒤덮는다. 그리고 잠시 후. “엘프누나?!” “미친, 스탯 정리본을 쓴 그 사람?” “어… 그 사람 게임사 측 사람 아니었어요?” “역시 그분은 한국인이었군!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저기요! 진짜예요? 진짜 그분이신 거예요?” 어째선지, 소란이 벌어졌다. 다만 사태를 파악하기에 앞서 나는 조용히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이건 또 뭐지? 92화 플레이어 (4) 닉네임 공개와 함께 술렁이기 시작한 공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황부터 파악했다. 일단, 이들이 말하는 엘프누나Elfnuna. 내가 쓰던 닉네임이 맞다. 별생각 없이 그때 내 캐릭터가 엘프여서 그렇게 지었다. 그리고……. ‘스탯 정리본도 쓴 적이 있지…….’ 한 3년 차쯤 되었을 때였나? 혼자 고생해서 정리한 게 아까워 저장 겸 게시판에 올렸다. 망겜 게시판답게 1년이 지나도록 조회수가 100을 안 넘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런데. ‘왜 다들 희귀 네임드 대하듯 바라보는 거지?’ 그러고 보면, 아까 그 여자도 나한테 그분의 팬이니 뭐니 했었다. 왜지? 마지막으로 그 커뮤니티에 들어갔던 게 5년 전인가 그럴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해졌다고?’ 원인이야 어쨌든,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유명해졌다. 유명해진 원인은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지금 당장 대처하기 위한 단서는 충분히 모였으니까. “아, 오해를 하셨군요.” 약 3초 안팎의 시간.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그분의 팬입니다. 닉네임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알 겁니다. 엘프누나가 아니라 엘프눈나입니다. 눈나.” 닉네임 중복 때문에 스펠링 하나를 다르게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쓸데없이 주목을 받는 건 질색이니까. “어, 그러고 보니…….” “닉네임이 다르네요.” 내 말에 다시금 내 닉네임을 바라보는 사내들. “Elfnunna네요! Elfnuna가 아니라!” “뭐야, 사칭이었나…….” “역시 그럴 리가 없지. 한국인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건만…….” 이내 그들이 허탈하다는 듯 숨을 내쉰다. 속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약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있다. “하하, 팬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방장 ‘다크맨’이 웃으며 분위기를 중재하더니, 방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몇 가지 알려 줬다. 반드시 서로를 존칭해서 불러야 한다던가? 분란성 어그로를 끌면 추방할 거란 것 외에는 딱히 기억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시면 됩니다. 언제 떠나든 상관없고요.” 신입을 반기던 분위기도 잠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여기저기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고 있자 한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핑크가이란 닉네임의 플레이어였다. “엘프눈나 님은 몇 년 차세요?” “아, 저는 1년 차입니다.” 사실 5개월 차지만, 너무 일찍 이곳에 들어왔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단 판단. 다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정말요? 편지 꽤 늦게 받으셨네요?” “예?” “그야 명성을 얻고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정말 일부고, 대부분은 티가 나는 초창기에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엘프눈나 님은 이제야 편지를 받은 걸 보니 그간 연기를 잘하셨나 보네요. 전 인간으로 시작해서 짐부터 나르고 있는데 편지가 왔거든요.” “아, 예…….” “아무튼 1년 차시면 그쪽에선 이제 70일 정도밖에 안 됐을 테니…… 요즘 일도 잘 아시겠네요? 그쪽은 어때요?” 말해 줄 만한 사건이 있는진 모르겠고, 나는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70일… 이라니요?” 나는 분명 방금 1년 차라고 말했다. 근데 어째서 70일 전이 되는 거지? 핑크가이가 아차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이번이 처음이면 그것도 모르시겠구나. 그쪽 세상이랑 이쪽이랑 시간의 흐름이 달라요.” “다르다고요?” “네. 지구에서의 1개월이 이곳에서는 5개월 정도 되거든요.” 쉽게 말해, 1:5의 시간비라는 뜻. 듣자마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한 달밖에 안 지났다니…….’ 시간이 덜 흐른 건 기쁜데, 실종 신고는 됐을지 궁금하다. 회사 말고 평소 날 찾는 사람이 있었어야지. 이후로도 핑크가이란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는 방법이요? 글쎄요. 많은 추측이 있기는 한데…… 아직 확실한 건 없다고 들었어요.” 훨씬 더 먼저 이곳에 온 플레이어들조차 귀환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것. 고스트 버스터즈의 창설인이 무려 20년 차의 고인물이라는 것. “5년 전에 그 게임을 클리어하다니,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들을수록 패배감이 엄습한다. 고인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기분이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여기 있는 모두가 나보다 먼저 심연의 문에 도달한 고수들이란 거 아닌가. ‘겉으로는 멍청해 보여도 사실 전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겠—’ “그래서 엘프눈나 님은 몇 배 모드로 깨셨어요?” 응? 몇 배라니?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사내가 말을 덧붙인다. “오리지널판을 깬 건 아닐 테고, 엘프눈나 님도 리메이크판을 깬 걸 거 아니에요. 몇 배 모드로 하셨어요?” 아니, 그렇게 말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리메이크라니? “불법 복제판이라고 말하면 아시려나? 그 있잖아요. 5년 전에 스톤 아이벤 게시판에 올라온, 경험치랑 드랍률을 조정할 수 있는 게임 파일.” 어……. 그런 게 있었어? 이내 핑크가이가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 자랑은 아니고 저는 50배로 깼어요.” 어떻게 이 게임을 깬 자들이 이토록 많을 수 있는가. 오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 [던전 앤 스톤]. 내가 무려 10년간 인생을 갈아 넣어서 겨우 최종보스 방에 입장할 수 있었던 그 게임. 플레이하면서도 무슨 이런 난이도의 게임이 있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다만……. ‘최대 경험치 백 배에 드랍률 백 배까지 설정할 수 있다고?’ 미친, 무슨 그런 사기 설정이 다 있어? 지금까지 난 만렙이 30인 줄도 몰랐다. 미궁에서 나오는 몬스터란 몬스터를 다 잡아도 11렙이 한계였으니까. ‘잠깐만, 만렙이 30이면 캐릭터 하나에 정수를 30개씩 먹일 수 있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 나로선 상상도 잘 안 된다. 이건 무슨, 뭘 포기하고 뭘 선택할 필요 없이, 그냥 다 쑤셔 박으면 되는 수준 아닌가. 정수 하나하나의 시너지를 생각하며 최고의 조합을 고민하던 내가 바보 같게 느껴질 정도. 심지어 들어 보니, 성장의 핵심인 균열도 원하는 타이밍에 열 수 있는 모양인데……. ‘드랍률 백 배면 넘버스 아이템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 수준이었겠지.’ 서른 개의 정수. 그리고 온갖 보구로 무장한 초 먼치킨 캐릭터. 그런 캐릭터가 5개 모여 파티를 이룬다? 수백 번의 트라이 끝에 잡아낸 태고룡이고, 파괴의 군주고, 레비아탄이고 뭐고 툭 치면 억하고 뒈졌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엘프눈나 님은 몇 배로 깨셨어요?” “……저도 50배입니다.” “아, 그렇구나. 어렵진 않으셨어요?” 어렵지 않기는 개뿔. 이 정도 조건이면 차원 붕괴고 뭐고, 어떤 좆같은 이벤트가 터져도 원트에 클리어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리 말해 봐야 내 손해겠지.’ 명성을 얻자마자 악령사냥꾼이 나를 찾아왔듯, 과도한 관심은 독이 되는 법. 누군가에게 으스대려 위험을 감수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튀는 짓은 하지 말고 알아볼 것만 알아보자. “이곳을 만든 분은 몇 배 모드를 했답니까?” “아, 그분이요? 듣고 놀라지 마세요. 무려 15배 모드로 클리어하셨어요. 오리지널 유져셨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15배… 그렇군요.” 놀라워야 하는 부분일 거 같기에, 같이 놀라는 척을 해주었다. 참고로 핑크가이가 말하길, 플레이들의 평균치가 60에서 80배라는데……. 그 말을 듣고서야, 멀리 떨어져 웃고 떠드는 자들의 대화가 귓가에 팍팍 꽂히기 시작했다. “하핫, 진짜 말도 안 되는 세계 아닙니까? 저는 아직도 균열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게임에선 그냥 클릭만 하면 됐는데.” “후, 그러게 말입니다. 균열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이렇게 힘들면 어떻게 마지막 층까지 가라는 건지…….” “이스터에그가 많은 게임이었다던데, 평소에 그런 것 좀 잘 알아봐 둘 걸 그랬습니다.” 자기가 해왔던 리메이크 버전과 현실을 비교하며 한탄을 해대는 플레이어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오리지널보다도 난이도가 올라간 현실 버전이니까. “후우…….” 진득한 허탈함이 밀려든다. 나보다 먼저 이 게임을 깬 선배들. 그리 생각하며, 어떻게든 깎아내리기보다는 배울 점을 찾자며 나 자신을 달래고 있었는데……. 이거야 원, 꼴이 우습게 됐지 않은가. “엘프눈나 님?” “죄송합니다. 생각 좀 하느라…….” 이후로도 한동안 핑크가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아는 게 당연한 상식과도 같은 것들을 알게 됐고, 이 커뮤니티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도 훨씬 자세히 숙지하게 됐다. 또한, 한 가지 의문도 풀렸다. ‘리메이크… 그러니까 복돌판이 돌면서 게임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내 닉네임도 유명해졌다는 건가…….’ 여러모로 핑크가이와의 대화는 유익했다. 나름 재미도 있었고. “하, 피자 한 판만 제대로 먹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엘프눈나 님은 먹고 싶은 음식 없습니까?” “콜라랑 국밥이요.” “국밥? 그게 무슨 음식입니까?” “제가 먹어 본 음식 중에 가장 효율적인 음식입니다.” 이런 대화를 해본 게 얼마 만이란 말인가? *** 다른 사람들과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뒤 뉴비방을 나섰다. 마지막에 핑크가이가 친구 추가를 해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았다. 잘해줘도 너무 잘해줬거든. 무슨 맘에 드는 이성이라도 대하듯. ‘아무튼 이제 알아야 할 건 다 안 거 같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게시판이나 공지를 읽으며 닥치는 대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룰 차례. ‘슬슬 차원 붕괴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키보드를 두들기며 나는 오른쪽 하단부에 적힌 타이머를 확인했다. 처음엔 12시간이던 게 벌써 7시간으로 줄었다. 따로 로그아웃을 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다하면 공간이 닫힌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다. [거래소] 마우스를 조작해 거래소 페이지를 열었다. 이곳에선 정보나 물품 등등을 고스트 포인트, GP로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쉽게 말해, GP를 이용해 재화를 얻거나 희귀한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도 가능한 셈. 다만……. ‘역시 이건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지.’ 되도록 이 기능은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물품 같은 경우 반드시 현실을 거쳐야 하니까. 아무리 복잡한 중개 시스템이 있다고 한들. 설령 그 시스템이 제법 안전해 보인다고 한들. 결국, 실제 물건이 현실에서 오가는 것이기에 바바리안으로서의 나와 접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소유 GP : 0] 따라서 현실의 돈으로 GP를 충전한단 선택지도 패스. 물론, 차원 붕괴에 대한 정보를 구매하려면 GP가 필요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서 자급자족하면 되니까. 딸칵, 따닥. 마우스를 조작해 거래소 물품 중 [정보] 필터를 씌운다. 그리고 [구매요청]으로 카테고리를 바꾼다. 그러자 무수한 질문 글이 뜬다. [20GP] 2층까지 쉽게 가는 법 없나요? [100~500GP] 근딜 육성 중인데, 초반부부터 센 육성법을 알고 싶습니다. 쉬운 질문은 그만큼 보상으로 제시된 GP도 적었다. 하지만……. [7,000GP] 4층 천공의 탑 계단별 특수 이벤트를 알고 싶습니다. [2,800GP] 패시브 스킬 ‘용의 주인’ 판정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름 심화된 질문들 경우엔 걸린 보상도 컸다. 따라서 높은 가격순으로 정렬을 시켰다. 그야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70,000GP] 1층 계층군주 공략법 삽니다. 장난 사절. [69,000 GP] 6층 해골 섬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 분만 대화 걸어주세요. 1층 계층군주? [TacitRonin님에게 1:1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소유 GP : 70,000] 6층의 히든피스 요소인 해골섬? [Bro_78님에게 1:1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소유 GP : 139,000] 이 게임에 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93화 플레이어 (5) “경찰에게 넘어간 컴퓨터는 제대로 수거했나?” “예, 기억은 물론 관련 흔적을 모두 지워놨으니 이전처럼 기사가 나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한 여성의 보고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에 놓인 서류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어느 사내의 일생을 요약한 서류. 한 페이지 내용을 모두 읽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악운에 강한 놈이군.” 짧게 감상을 읊조린 노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야.” 여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일생은 악운에 강하단 말이 부족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그 외에 특이점은 없었다. 직장도 보통, 학벌도 보통, 인간 관계도 보통. 모든 게 보통이었다. 이 게임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렇기에 더더욱 사내가 특이하게 느껴진다. 아우릴 가비스의 유산인 [던전 앤 스톤]은 실패작이다. 오랜 고심 끝에 모두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어떤 작품보다 그 세계를 잘 담아냈다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클리어가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5년 전에 폐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클리어한 자가 나올 줄이야. 설마 실패작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 읊조리던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령 클리어를 해낸다고 한들, 다른 작품들보다 좋은 결과를 내리란 보장은 없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지 않던가.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됐을지 조금은 궁금해지는군.” 이내 노인은 노트북을 열고, 사내의 이름을 입력했다. [이한수]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그의 유산을 클리어해낸 유일한 플레이어의 이름이었다. *** [소유 GP : 139,000] 1층 계층군주와 해골섬의 정보를 판매한 나는 더 이상 정보를 판매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한 건당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거래 내역이 없는 탓에 구매자가 날 미심쩍어한 탓이다. 뭐, 질문 몇 가지에 응해 준 것만으로 둘 다 믿고 정보를 사갔지만……. 나를 온전히 믿었다기보다는 이 커뮤니티를 신뢰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감히 사기를 쳤다가 커뮤니티에서 추방되기라도 하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그리고 두 번째. 사실 시간보다도 이 이유가 가장 컸다. ‘닥치는 대로 팔아재끼면 분명 눈에 띌 거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단 말도 있지 않은가. 그 누가 됐건 간에 관심을 받는 일은 줄이고 싶다. 당장 GP가 크게 필요한 것도 아니— 띠링-! 그때 쪽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인: Ghost master.] 공지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닉네임. 즉, 커뮤니티 관리자의 쪽지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심장이 덜컹했지만, 열어 보니 별 내용이 아니었다. [Elfnunna님의 거래 내역이 10회 이상입니다. EXP +10] [회원 등급이 조정됩니다.] [데드맨 -> 고블린.] 커뮤니티 등급이 오르면서 발송된 자동 쪽지. 등급이 높다고 큰 혜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올라서 나쁠 건 없었다. 가끔 등급 제한이 걸린 대화 방도 있으니. 타닷, 타다닷, 타닷. 일단 번 GP를 이용해 질문 글을 올렸다. 보상으로 내건 GP는 1~10만. 가치 있는 정보라면 그만큼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거래 글이 등록되었습니다.] 등록을 마친 후에는 웹서핑하듯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자유 게시판에서 오가는 드립이나 유머 글을 보고 있자면, 마치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 그러한 시간이 이어지던 때였다. ‘10만 포인트에 200만스톤이라고?’ 거래소를 둘러보다 GP의 현물 가치를 알게 되었다. 현재 내 소유 GP는 약 14만. ‘미친, 그럼 질문 두 개 답해 주고서 280만 스톤을 번 거야?’ 처음엔 입이 절로 떡 벌어졌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납득 못할 일은 아니었다. 판매한 정보에 그만한 가치가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정보만 팔아도 돈방석에 앉겠는데?’ 문득 더 이상 미궁에 들어갈 이유가 있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여전히 내게는 GP를 돈으로 바꾼다는 행동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진다. ‘욕심 부리지 말고 철저하게 정보만 얻는 곳으로 쓰자.’ 따라서 새로이 철칙을 정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마저 커뮤니티를 둘러보던 때였다. 띠링-! 알림음이 들린다.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Elfnunalove 님이 1:1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엘프누나러브. 나로선 뭔가 찝찝한 닉네임이었으나, 고민 없이 수락을 눌렀다. 그야 내게 연락이 올 만한 일은 하나뿐이니까. ‘걱정했는데 오늘 안에 나타났군.’ 드디어 정보 판매자가 등장한 거다. ***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서재. 은은하게 감도는 책 내음을 맡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되게 잘 꾸며놨네. 대체 얼마를 쓴 거야?’ 뉴비방의 배경이었던 공터나, 내가 대화를 걸면 베이스가 되던 황량한 들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시 적잖은 GP가 들어갔을 터. 다만 돈지랄이란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신뢰가 생기긴 하네…….’ 짧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백인 사내를 발견하고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엘프눈나 님 맞으시죠? 여기 앉으세요.” 이내 자리에 앉자 사내가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타루테인 학파, 셔널 페르강이란 마법사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차원 붕괴 현상. 이에 대해서만 물어본다면 상대가 거짓을 말하든 아니든 나로서는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셔널 페르강에 대해 묻는다면 다르다. 바로 이렇게. “정확히는 최근 그가 벌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흐음, 혹시 차원 붕괴 현상에 관한 소문 때문인가요?” 셔널 페르강이란 이름을 대자마자 곧장 차원 붕괴와 연관을 시키는 사내. 이후 나올 정보의 신뢰성이 한층 더 상승한다. 따라서 나도 툭 까놓고 물었다.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사내는 대답의 대가로 2만 GP를 요구했고, 내가 받아들이자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그런 얘기가 그의 입에서 나왔냐고 묻는 거라면 예, 맞습니다. 하지만 소문의 진위를 묻는 거라면…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텀을 갖더니, 딱 잘라 말했다. “차원 붕괴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단 뜻입니다.” “그리 말하는 근거는요?” “그게 고위 인물들과 정치 알력이 포함된 얘기인지라…….” 쉽게 말해, 2만 GP를 받고 알려 주기엔 고급 정보라는 뜻. “2만 GP를 더 드리죠.”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면야.”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타루테인 학파는 미궁학, 그중에서도 차원에 관한 마법 연구를 중점으로 둔 학파입니다. 그리고 그 마스터는 한 가지 실험을 하고 싶어졌죠.” “실험……?”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위험한 실험은 아닙니다. 그저 이를 위해 미궁에 들어가는 탐험가가 평소보다 적어야 할 뿐.” 그래서 타루테인 학파는 소속 마법사의 입을 통해 도시에 소문을 퍼뜨렸다. 차원 붕괴가 일어난단 소문이 돌면, 미신을 잘 믿는 탐험가들을 억제할 수 있으리란 판단. “……이런 얘기를 막 해줘도 됩니까?” “막 하고 다닌 게 아니라 GP를 받고 판매한 겁니다마는?”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저랑 상관입니까? 내가 그 학파의 마스터도 아니고. 게다가 머지않아 왕가에서 대대적으로 소문을 부정하는 공문을 붙일 겁니다.” “……왕가에서?” “그럼 라프도니아 왕가가 가만 있겠습니까? 탐험가의 입장이 적으면, 그만큼 수급되는 마석도 줄어든다는 건데.”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이후로도 짧게 얘기를 들어 보니 상황이 딱딱 맞아 들었다. 막힘없이 제시한 근거들도 납득되는 이야기였고.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도 않은 눈치. 이쯤에서 거래 완료를 하고, 남은 2만 GP는 따로 보낸다고 말하자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건 됐습니다. 그분 팬이신 거 같기도 하고.” 2만 GP면 40만 스톤인데, 같은 사람의 팬이란 이유로 그걸 안 받겠다고 하다니……. 일단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호기심이 피어난다. 이 사람은 과연 몇 년 차일까? ‘5년 차? 10년 차?’ 뭐가 됐건,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40만 스톤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몇 날 며칠 고생해도 몰랐던 정보의 속사정까지 전부 꿰고 있는 거겠지.’ 다시금 초심이 가슴에 새겨진다. 15배? 20배? 30배? 그도 아니면 100배? 글쎄, 그들이 어느 모드를 클리어했건 간에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이곳은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니까.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야만적인 섭리가 지배하는 엄연한 현실. ‘작은 발칸이니 뭐니 해봤자, 결국 여기선 내가 뉴비란 건가…….’ 새삼 지나쳐 온 길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멀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초심을 새긴 것이 겨우 방금 전이었을진대. ‘재밌네.’ 1층 계층군주 공략법을 사간 남자가. 해골섬의 정보를 원하던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내가 수년에 걸쳐 도달했을 그곳에. 피식. 내가 가지 못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 검정색의 도스 화면. 짧은 로딩이 끝나며, 비프음과 함께 해당 플레이어의 행적이 담긴 일지가 모니터를 가득 메운다. 삐빅, 삐비빅, 삐빅- 일지의 규칙은 간단하다. 이곳에는 오직 행동만이 기록된다. 그렇기에…….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습니다.」 성인식에서 방패를 택한 것. 「캐릭터가 고블린 덫을 밟았습니다.」 미궁에 들어가자마자 위기에 빠진 것. 고블린 덫을 밟았고, 몇 시간 동안 출혈 상태로 바닥을 기어간 것. 첫 날에 사람을 죽인 것. 우연히 만난 엘프와 동료 사이가 된 것.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시작해 첫 진입에 2층에 도달한 것. “미친놈이군.” 일지를 읽어내릴수록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히려 행동만이 기록되는 일지이기에 더욱 그랬다.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많은 플레이어의 일지를 보아왔던 노인은 이자가 순간순간에 내렸을 판단의 이유가 눈에 선했다. 그래야 하니까. 그게 맞는 선택이니까. 그래서 이 사내는 실행에 옮겼다. 마치 정말로 게임이라도 하듯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놓여 비상식적인 선택을 해왔던가. “……첫 진입에 2층까지 도달한 자가 몇이나 있었지?” “제가 알기로는 117명입니다.” 117명. 적다고 하기엔 꽤 많은 숫자. 하지만 노인은 확신했다. 117명의 플레이어 중 이렇게까지 악조건이 겹쳤던 플레이어는 없었을 것이라고. ‘신기한 놈이란 말이지.’ 이후로도 스크롤을 내리며 일지를 읽던 노인이 한 지점에서 흠칫 굳었다.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캐릭터의 영혼에 [뱀파이어의 정수-수호자]가 스며…….」 어느새 화면 속 일지는 최근에 도달해 있었다. 「비요른 얀델」 레벨: 3 (New +1) 육체: 199.1 (New +87.7) / 정신: 105.3 (New +10) / 이능: 152.4 (New +129.4) 아이템 레벨: 114 (New -104) 종합 전투 지수: 485.3 (New +201.1)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New) 몇 년 차라고 해도 믿기 어려울 캐릭터 정보. 낯선 몸에서 깨어나 고작 두 달만에 이뤄낸 것이었다. 물론 운도 어느 정도 따라줬을 터다. 하지만……. ‘운만으로 가능한 영역이었다면, 한 명이라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겠지.’ 통계란 그런 것이다. 표본과 데이터가 쌓일수록 경우의 수는 줄어들며, 불확실했던 정보는 보다 명확한 사실로 변해간다. 그런 과정을 거쳐 도출된 ‘확률’은 놀랍게도 표본이 얼마나 늘어나던 오차가 거의 없다. 즉, 통계에 있어 ‘운’이란 변수는 극히 미미하다. 그러나,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 최초.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지는 것. 쉽게 말해, 0이 1이 되는 것. 비교 표본 자체가 없기에 원인조차 규정이 불가한, 통계를 벗어난 이레귤러Irregular. 딸각, 딸각. 노인은 플레이어의 주시 등급을 최대치로 올렸다.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입니다.」 「관리자가 해당 캐릭터를 주시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모두가 실패작이라 입을 모았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난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뿐이라오. 평생 단 한 명에 불과할지라도, 제대로 완성시켜 보낼 수만 있다면 그쪽이 더 가능성 있으니까.] 어쩌면, 그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94화 바바리안 트로피 (1) 시야가 암전되더니 천천히 빛이 돌아온다. ‘내 방이군.’ 이한수가 아닌 비요른 얀델의 여관방. 시계를 확인해 보니, 그곳에 불려가고서 정확히 12초가 지나 있었다. ‘거기서의 1시간이 여기선 1초인 건가.’ 시간의 괴리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미궁도 그랬으니까. 며칠을 보냈든, 도시로 돌아왔을 땐 무조건 다음 날 정오였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편리한 현상이란 말이지.’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바꿔 말하면, 최대 12초간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뜻 아닌가. 물론 위급 상황이라면 곧장 로그아웃해서 나오면 되니 문제없겠지만…….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약, 그 12초 사이에 뭔가 일이 터진다면?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겠지.’ 뭐, 그렇다고 이런 이유로 커뮤니티를 이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다. 단지 이러한 위험성도 있다고 무의식에 인지시켜 놓을 뿐이다. 그래야지 막상 일이 터졌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판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 “후우…….” 기지개를 켜며 숨을 길게 내쉰다. 약간의 피로감이 감돌고 있었다. 육체가 아닌 정신적 피로감. ‘하긴 12시간이나 깨어 있던 셈이니까.’ 언젠가, 유독 이날에만 늦잠을 자는 자가 있다면 플레이어로 의심해 봐도 좋겠단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당장 자려는 건 아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앞당겨서 들어가길 잘했네.’ 고스트 버스터즈. 예상보다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곳이었다. 내가 바라던 정보의 수급처 역할을 하기에도 모자람이 전혀 없었고. 덕분에 나는 차원 붕괴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루머라…….’ 잘된 일이다. 그거 하나는 확실하다. 그런데 왠지 모를 허탈감과 불안이 동시에 형체를 키운다. 처음 들었을 땐 이거다 싶었는데. 이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터지려는 거지? ‘……더 조심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이튿날 아침. 마르토앙 남작과의 약속을 지킬 날이 밝았다. *** “잘 다녀와랑! 와서 꼭 얘기 들려주고!” 미샤의 배웅을 받으며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승강장에서 마차를 몇 번이나 갈아탄 결과. 마르토앙 남작가에 도착했다. “이리 오게. 시간이 없으니.” 드넓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화려한 방으로 끌려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오늘 있을 백작가의 연회에 참석하기에, 내 행색이 야만스럽지 못하다던가? ‘니미럴.’ 바바리안이다 보니 이런 일도 겪는구나. 보통이면 그 반대의 이유로 말끔하게 꾸며 줬을 텐데. “어머어머, 근육 좀 봐…….”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흉갑과 셔츠를 벗는다. 그리고 맨몸에 어깨보호대를 찬다. 한쪽은 가시가, 다른 한쪽은 짐승 두개골의 형태를 딴 디자인의 어깨보호대. 그걸 찬 상태에서……. “저, 조금만 몸을 낮춰 주시겠어요?” “그러지.” 발판에 올라선 시녀들이 낑낑거리며 배에 무언가를 감는다. 내 기준으로 한 뼘이 넘는 크기의 챔피언 벨트. 씨발, 이딴 걸 왜 차야 하지? 흉갑 하나면 몸통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데. “팔 좀 들어 주세요.” 이후로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각종 패션용 장비들이 내 몸에 추가됐다. 방어력보다는 위압감에 치중된 장비들. 무게 밸런스도 제멋대로라 동작 하나하나가 불편할 정도였으며, 시녀들이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자꾸만 흘러내리며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뭘 바라는지는 알겠네.’ 이내 거울을 봤을 때. 그 너머엔 용의 피로 목을 축이고 안주 삼아 오우거 고기를 뜯어 먹을 법한 바바리안 용사가 서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어력이나 실전성이 부족하면 어떤가. 씨발, 이 모습으로 다가가면 다들 오줌 지리며 도망치기 바쁠 텐데. 그 정도로 위압감 하나는 대단했다. 이름하여 쇼 윈도 (진)바바리안 모드. 한데 저놈 눈에는 이것도 부족했을까? “쯧.” 염소 수염의 비실이 한 명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 새끼 이름이……. 아직 듣지 못했구나. “이름이 뭐지?” 내 질문에 집사 새끼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답했다. “보좌관님이라 부르—” “그러지, 집사.” “……쯧, 무식한 바바리안 아니랄까 봐.” 집사는 여러모로 맘에 안 드는 놈이었다. 원래 없이 자란 놈들이 더한다던가? 시종일관 아랫것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나를 대한다. 정작 남작 새끼는 그딴 거 없었는데.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그래 봤자 지도 결국 평민이면서.’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집사 놈의 지시하에 신발 안에 깔창까지 집어넣는다. 과도한 디자인 욕심으로 무려 7kg의 무게를 갖게 된 판금 장화. 여기에 이물질까지 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지만……. “이제 그나마 좀 봐줄 만하군. 그 전에는 너무 작았어.” 뭐래, 좆만이 새끼가. ‘후, 하루만 고생하자.’ 어쩐지 일당으로 100만 스톤이나 주겠다더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수고비였다. 여하튼 싸가지 없는 집사에게 동선이라든가, 남작이 다른 이와 대화할 땐 어느 위치에 서야 한다든가. 그런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교육받고 있자니 출발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다 됐군. 어서 가지.” 궁전 같은 방에서 빠져나와 정문으로 향한다. 이미 호화스러운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아마 오늘 얼굴 한번 못 본 남작은 저기 타고 있겠지. “뭘 가만히 있는 겐가? 네 위치는 저기다.” 나는 마차 행렬의 가장 선두인 곳에 섰다. 내가 맨 앞에서 걸어 나가면 그 뒤를 따를 거라던가? “중요한 임무이니 남작가의 위엄이 서도록 반드시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자세는…….” 집사 새끼는 내가 못 미더운지 출발을 하기 전까지 잔소리를 해댔다. “출발!!” 머지않아 내 바로 뒤에서 말을 탄 기사가 깃발을 게양하며 외쳤고, 나는 적당한 속도로 행렬을 이끌었다. 터벅, 터벅. 정문을 벗어나니 넓게 포장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내 신분이었으면 들어오지도 못했을 제1 구역 황도 카르논의 거리. 상점 건물들조차 웅장했으며, 사람들 옷차림도 하나같이 고상하다. 또한, 내가 사는 곳에선 보이지도 않았던 황궁이 저 멀리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쩝, 여기도 빨리 뚫어야 천공 경매장을 쓰는데…….’ 집사는 앞만 보고 걸으랬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기저기 구경하며 걸었다. 그래서였을까? “정지!!” 길을 잘못 들며 행렬이 한 번 멈췄다. 집사 새끼가 사색이 된 채 내게 달려와 뭐라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귀를 후벼 팠다. 그러게 누가 바바리안한테 맡기래? *** 남작의 저택으로부터 오늘 연회가 열리는 백작가까지의 거리는 약 6km. 세 발로 기어서 그 이상의 거리를 이동했던 전적도 있는 나지만……. ‘니미럴.’ 비합리의 정수나 다름없는 장비를 풀세트로 입고 있는 것을 간과했다. 땀이 주룩주룩 흐른다. 마지막에 쑤셔 넣은 깔창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힘들 일은 없었을 텐데. “마르토앙 남작님께서 드십니다!” 집사 놈을 씹으며 걷고 있자니,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작가의 정문이 열리자마자 곳곳에서 날아드는 호기심의 시선들. 별의별 구경거리로는 성에도 안 찰 귀족들일 텐대, 아무래도 바바리안이 마차 행렬을 이끄는 광경은 또 처음인 모양. “바바리안을 앞세우다니, 그 일화에서 영감을 받고 따라 한 게 틀림없군!” “대단한 위압감이구려. 마치 거인이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었소이다.” “와아, 아버지 저희도 다음에 저렇게 들어오면 안 돼요?” 만찬이 깔린 야외 연회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한마디씩 감상을 뱉으며 분위기를 달군다. 마음에 드는 반응이었을까? 마차에서 내린 남작은 내가 본 적 없는 함박웃음을 연신 터트렸다. “입장만으로 이리 주목을 받아 본 건 처음일세. 내 돌아가면 사례는 넉넉히 하지.”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보너스까지 약속하는 남작. “백작님께 인사를 드리고 올 터이니, 그대들도 연회를 즐기고 있게.” 이내 남작이 몇몇 가신만을 대동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자연스레 흩어져 연회 속에 섞여든 기사들. 그제야 나는 눈치챘다. “…….” 이 넓은 연회장에 혼자 남겨졌단 것을. “어머, 저 투구에 달린 뿔 좀 봐요. 무서워라.” “마치 고대의 악마 파르세이라를 본 따 만든 것 같은 모습이네요!” 정장, 턱시도, 등이 파인 드레스. 찰랑대는 물결처럼 빛나는 귀금속들과 하얀 광택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갑주. 그 속에 홀로 야만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 이건 무슨 동물원 속 원숭이도 아니고. “어, 걸었어요. 어디를 가는 거지?” 한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극복한 줄 알았던 PTSD가 재발할 것만 같은 기분. 그때 한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수고 많았네.” 내 바로 후열에서 기수 역할을 하던 기사였다. “자네도 괴물이구려. 그걸 입고 이만큼이나 쉬지 않고 걸어오다니.” 내 고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기사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남작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저리로 가서 같이 쉬고 있는 게 어떤가.” 뭐지? 이 남자는 빛인가? “좋다.” 이내 기사를 따라 빈자리에 앉았다. 온갖 산해진미가 주변에 가득했지만, 식욕은 돌지 않았다. 이는 기사도 매한가지인지 가만히 앉아서 술로 목이나 축일 뿐이었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넌 저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나?” “가봐야 환영받지 못할 걸세. 나는 자네와 같은 탐험가 출신이거든.” 어쩐지 얘 혼자 싹수가 노랗더라니.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넌 이름이 뭔가?” “칼스 에리모어일세.” 간략하게 통성명을 한 뒤 대화를 나눴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칼스는 꽤 괜찮은 놈이었다. 탐험가 출신이라 말도 잘 통했고, 그래선지 기사 신분임에도 특유의 오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집사 새끼가 이런 걸 보고 배워야 할 텐— “지금 뭐 하는 겐가? 누가 앉아 있으라고 했지?” 남작과 함께 저택 내부로 들어섰던 집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단걸음에 달려왔다. 쉬고 있던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 “이보시게, 보좌관. 그만하게. 이 친구는 내가 잠시 쉬라고 했네.” “…그러십니까?” 보다 못한 칼스가 읊조리자 집사 놈이 흠칫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다 쉬었으면 일어나게. 바바리안이 앉아서 쉬고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쉬는구나?” “아니, 사람들은 자네가 그만큼 나약하다고 생각할 걸세. 그러니 일어나게. 자네의 본질이 어쨌든 자네는 오늘 철혈의 전사여야 하니까.” 집사의 다그침에 결국 얼마 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루만 고생하자.’ 남작가의 트로피처럼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기로 한 약속 아니었던가. 철저하게 놈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자. 물론, 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혈의 전사.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이 세계의 야만인. 바바리안. 그래, 그게 바로 나라고 한다면…….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마인드 컨트롤을 끝마치기 무섭게 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가, 갑자기 뭔 짓인가!” 오늘 내게 입힌 장비를 주문 제작하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아까 길을 잃었을 때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는 아냐느니.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던 집사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걸 보자니, 왜 이제껏 참았냐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바바리안 아닌가?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바리안스럽게 옆에 있던 고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토마호크 같은 건가? 고기에 손잡이처럼 뼈가 붙어 있다. “그래, 내가 바란 게 이런 것—” 야만인답게 맨손으로 고기를 뜯어 먹자 집사가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 뼈까지 아그작 씹어 먹는 날 보며 얼굴 표정이 굳는다. 그런 그에게, 나는 바바리안 전사로서의 체통을 지키며 정중히 말했다. “집사, 네 머리가 부수고 싶다.” “……뭐?” 그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을 종류의 말. 귀를 의심하는 표정의 집사를 보며 나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아그작, 아그작. 그리 말하는 동안에도, 내 입에선 어느 이름 모를 짐승의 뼈가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 “노, 농담이 심하군.” “농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집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 역시 바바리안이라는걸.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바바리안은 단순무식하다. 그리고 감정에 충실하다. 물론, 집사는 바바리안의 생리에 관한 지식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뒷조사를 해 봤다면, 길드에서 있었던 일도 알고 있겠지.’ 물론, 변명거리는 있다. 그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약탈 행위와 세금 미납, 그리고 귀족과 관련된 법 몇 가지를 제하면 대부분은 벌금으로 때울 수 있는 세상이니까. 약탈자가 아니란 사실만 증명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얘기다. 남들 눈에는 그냥 미친 새끼처럼 보였을 터. “……할 일이 있어서 가, 가 보겠네. 자, 자네는 쉬고 있게나.” 정말로 내 뒷조사도 해 보았던 것인지, 집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상황을 지켜보던 칼스가 크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하! 저 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는 난생처음 알았네!” 어째선지 조금 전 내 행동이 이 녀석에겐 좋게 보였던 모양. “근데 이는 괜찮나?” “괜찮다. 튼튼한 편이라서.” 선천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골강도 스탯이 상승하며 얻게 된 잔여물. 어째선지 입맛이 돌기 시작한 나는 본격적으로 음식을 덜어와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저것 좀 보세요!” “어머나, 야만스러워라!” 귀족 영애들이 처음 접하는 생물 대하듯 나를 바라봤지만,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야만인처럼 보이는 게 뭐 어떠한가. 수치심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편한 포지션도 없을 텐데. “베헬—라아아아아!” “자네 왜 갑자기 소리를 또 지르는가?” “맛있다!” 고상한 연회 분위기에 주춤하기도 잠시. 나도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95화 바바리안 트로피 (2) 고기를 뜯고, 술을 들이켠다. 더러워진 손은 대충 식탁보에 쓱쓱 문질러 닦는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토앙 남작이 바라는 거야 어쨌든, 이러는 게 나한테도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백작가의 연회장.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바바리안답게 행동하는 게 옳다. 야만스러운 소문이 쌓이면 쌓일수록. 언젠가 날 악령이라 의심하는 놈이 생겼을 때 방패가 되어 줄 테니. “저기요, 혹시 팔뚝 좀 만져 봐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꺄아! 진짜 만졌어!” 야만인에 빙의해 연회를 즐기고 있자니, 호기심 많은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댔다. 인형 탈 알바라도 하는 듯한 기분. “이보게, 한 번만 아까처럼 더 소리 질러 줄 수 있는가?” “베헬—라아아아아!!” “하하핫, 참으로 호쾌하군!” 남작에게 의뢰를 받은 만큼 프로 의식을 발휘하고 있자니, 점점 사람이 모였다. 그중에는 기사들도 있었다. 총 셋이었는데, 셋 다 아니꼬운 표정이었다. 내게 관심이 쏠리고 다들 호의적으로만 대하니 질투가 난 모양. “저래서야 작은 발칸이 아니라, 작은 광대라 불러야겠군.” “애초에 거기가 작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라던데?” “저렇게 알랑방귀나 뀌고 다니다니, 전사의 긍지도 이제 다 옛말인 듯하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고작 3층 탐험가 수준의 무력을 지닌 ‘견습 기사’ 새끼들이 저러는 게 같잖을뿐더러……. 괜히 분쟁을 만들어서 얻을 게 없지 않은가. “하하하, 자네 여기 있었나?” 이내 그렇게 배를 채우며 귀족들과 놀아주고 있자 마르토앙 남작이 돌아왔다. 그는 주변을 보더니 정말 기쁜 듯 웃었다. “분위기를 깨서 미안하구려. 소개시킬 분이 있어서 이자는 이만 내가 데려가겠소이다.” “아……!” 남작을 따라간 곳은 저택 내부 연회장이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야외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곳에선 악단이 흥겨운 곡을 연주하고 젊은 남녀들은 정원에서 춤을 추었지만, 이곳은 어떤가. ‘진짜 귀족들의 모임이란 건가.’ 정적이고 잔잔한 음악이 감도는 실내. 테이블에 앉아 담화를 나누는 이들도 무게를 잡으며 체통을 지키고 있다. “자, 이리 오게.” 남작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연신 주변을 구경했다. 실내 연회장에는 이백 명가량의 인물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 마르토앙 남작의 어린 아들내미 같은 직계 혈족들이거나, 은행장 혹은 길드 지부장처럼 사회적 위치가 있는 자들이었다. “앞으로 인사드릴 분 중엔 나보다 작위가 높은 분도 많으니, 되도록 무례한 짓은 삼갔으면 하네.” 이후 나는 남작을 따라 작위 귀족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마르토앙 남작! 오랜만일……. 이 친구는 누구인가?” “혹시 자작께서 들어 봤을지도 모르겠군요. 작은 발칸이라고, 요즘 탐험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자입니다.” “호오, 이자가? 들어 본 적 있네. 근데 어쩌다가 자네를 따라오게 된 건가?” 자작의 질문에 남작은 대답 대신 나를 보며 눈짓했다. 어서 준비한 대사를 하라는 의미.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남작이 나를 도와줬다. 그 답례로 당분간 그를 내가 지키기로 했다.” “허허허! 이렇게 강인해 보이는 바바리안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부럽구려!” “별거 아닙니다. 내 부담되니 그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남작이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또 바라본다. “……전사는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다.” “허! 참으로 진실하고 명예로운 신념일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라고 그랬나? 자네 이름은 기억해 두지.” 이런 식의 대화가 이후로 열세 번 이어졌다. 연회를 주최한 백작을 제외하고 작위 귀족이 열세 명밖에 안 된 탓이다. 하긴, 티끌만큼이라도 이 도시에서 봉토를 가진 작위 귀족은 게임에서도 희귀한 존재였으니. ‘어쩌다 보니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셈이 됐군.’ 원래라면 이런 연회에 참여하는 것도 명성 수치를 한참이나 더 올렸어야 가능했을 일. 다만 그만큼 조심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 참가하기에 자격이 부족하단 말인즉, 혹여나 작위 귀족에게 밉보였을 때 나를 지킬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럼 대충 인사는 끝났으니, 백작님께서 오실 때까지 내 옆에서 쉬고 있게.” 순회 인사가 끝난 뒤에는 남작의 곁에서 가만히 서 있으며 트로피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 근데 남작이 곁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 전의 경고가 통해서? “……쯧.” 모르겠지만, 집사는 눈미 마주치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릴 뿐 이전처럼 하나하나 트집 잡으며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이게 바바리안의 삶인가? ‘진작 이럴 걸 그랬네.’ 여하튼 이후로는 상당히 편했다. 작위 귀족인 마르토앙 남작은 먼저 몸을 일으키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얼굴이라도 트겠다며 찾아오는 자들 수두룩했고, 나는 가끔 남작이 원할 때마다 재주를 보여 주면 그만이었다. “오오!” “과연, 작은 발칸이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습니다, 남작님!” 준비해 온 강철봉을 맨손으로 구부린다든가, 팔씨름을 해준다거나 하는 것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때였다. 다가온 군중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반갑습니다. 마르토앙 남작님, 그리고…….”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하핫, 죄송합니다. 얀델 경, 제가 이름을 잘 외우질 못해서.” 내가 이름을 밝히자 백색 갑주를 입은 성기사가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지난날 하수도 의뢰를 끝내고 만났던 자였다. 밤늦은 시간, 엘리사 베헨크의 시신을 그에게 인도하며 짧게나마 안면을 텄었다. 이름이 분명……. “자네, 크로비츠 단장과 아는 사이였나?” 파알 크로비츠.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그런데……. ‘…단장이라고? 얘가?’ 남작의 말에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사내가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인다. “부족한 몸이지만, 운 좋게 기회가 닿아 제3 성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굉장히 떨떠름했다. 밤늦은 시간에 시신 수령 같은 잡일을 하러 왔기에 생각도 못 했다. 성기사단의 단장이라니? 8층 탐험가 이상의 무력을 지닌 괴물이란 뜻 아닌가. “만약 기댈 곳이 필요하면 본교를 찾아주십시오. 그때도 말했듯, 본교는 얀델 경의 공을 잊지 않고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입니다.” 음, 그때는 빈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무려 단장직을 역임 중인 남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중에 한번 들려 보기는 해야겠다. 혹시 모르지 않나. 지금은 무리여도, 좀 더 인연을 쌓다 보면 나중에 팀에 신관 한 명이라도 보내 줄지. “흐음, 공이라니? 크로비츠 단장, 그게 무슨 뜻인가?” 대화 중 남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껴들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하긴, 바바리안이 교단에 공을 세울 일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겠지. “아, 그걸 말씀해 드리지 않았군요.” 크로비츠는 남작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린아이들 동화책 읽어 주듯 이야기를 해나갔다. 요약하자면 별거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미궁에서 카루이의 사제를 발견한 것. 그것도 모자라 하수도에 숨어든 그 악녀를 찾아내 처단한 것까지. 고작 그게 끝인 이야기였지만, 크로비츠는 제법 입담이 좋았다. “허! 들어 본 적 있네. 악신의 권속이 한 명 나타났다고. 그런데 권속을 해치운 게 이자였을 줄이야.”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다더니 과연…….” 얘기가 끝나자 남작을 필두로 주변 사람들이 탄성을 뱉었다. “별이 내려준 선연이지요. 본교단에서도 얀델 경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그럼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이만…….” 마지막까지 내 얼굴에 금칠을 씌워주던 크로비츠는 용무가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자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자였군?” 날 바라보는 남작의 눈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 “오호라, 그런 일이 있었다고?” “사람 잘 보기로 유명한 크로비츠 단장이 그런 말을 했다니, 훗날 크게 될 자인 게 분명하군.” 크로비츠가 꺼낸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가고 있을 때. 백작이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됐다. “페르데힐트 백작님께서 드십니다!” 2층과 이어진 중앙계단. 모두의 시선 속에서 한 사내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내려온다. 그의 옆에는 십대 후반의 딸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연회의 주인공일 여자. “내 딸 아라벨라의 생일을 위해 이렇게 찾아주어서 모두에게 고맙소. 여러 여흥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늘은 고민 걱정일랑 내려놓고서 즐기다 가시길 바라오!” 백작의 말에 음악이 역동적으로 바뀌며 정적이던 내부 연회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곤조곤하던 목소리가 커졌고, 체통과 거리 먼 웃음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하긴, 슬슬 알딸딸한 취기도 올라오는 거겠지. 그 전부터 다들 술을 홀짝이고 있었으니. “레이디, 손등에 입을 맞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젊은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이성의 손을 잡고 야외로 나가 춤을 추었다. 나이가 있는 자들은 자리에 앉아 광대들의 쇼를 안줏거리 삼아 상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때였다. “우리도 슬슬 가보지.” 남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긴장한 듯한 표정. 행선지를 묻자 남작이 답했다. “자네는 아직 백작님을 만나 뵙지 못했지 않나. 아까 뵈었을 때 자네 얘기를 했더니, 꼭 만나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남작의 표정은 이전에 작위 귀족들과 인사를 하러 다닐 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마치 직속상관을 대하는 듯한 얼굴. ‘백작이라…….’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됐지만, 막상 만나 본 백작은 꽤나 호쾌한 사내였다 그리고, 내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하핫! 자네로군?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었네.” 인사를 하러 가자 무려 일어나서 내게 악수까지 청해오는 백작. “만나서 반갑다!” 바바리안스럽게 악수에 응하면서도 내심 이상하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확실히 최근 들어 유명해지긴 했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백작이 이럴 정도라고?’ 그렇게 묻는다면 글쎄. 내가 느끼기엔 절대 그렇지 않다. 그도 그럴 게, 이 드넓은 도시에서 백작 지위를 가진 귀족은 백 명도 채 되지 않으니까. 예전에 만났던 탐험가 길드의 지역장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갖춘 권력자. 게임에서도 백작 이상급 거물들은 극 후반부쯤 되는 게 아니면 이벤트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키가 크군? 이래서야 작은 발칸이 아니라 큰 발칸이라 불러야겠네. 껄껄!” 그런 백작이 나를 보며 칭찬한다. 마치 호감을 얻고 싶기라도 하듯. “그런데 그 무기는 뭔가? 원래 메이스를 쓴다고 들었는데.” 예전부터 관심을 두고 지켜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을, 계속해서 은근히 언급한다. ‘왜지?’ 이해가 안 됐다. 그가 바란다면 내 명성과는 비교도 안 될 7, 8층 최상위 탐험가들도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을 게 분명한데……. 왜 나에게 관심을 두지? ‘씨바, 괜히 사람 불안해지게…….’ 누군가는 백작 같은 거물이 관심을 주면 기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심지어 분명 근시일 내에 뭔가 터질 거라며, 노심초사하고 있던 때 아닌가. ‘……뭔가 일이 터진다면, 그게 뭐지?’ 학습된 불안감이, 자연스레 백작과 연관된 최악의 상황을 하나둘 가정하기 시작한 때였다. “갑자기 자네를 보니 재밌는 생각이 나는군.” 백작이 옳다구니 손뼉을 치며 날 바라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제안을 꺼낸다. “조금 이따가 견습 기사들끼리 대진이 있을 걸세. 자네도 거기 참가해 보지 않겠나?” “…기사들이 싫어하지 않겠나?”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네. 어떤가?” “생각해 보지…….” 나는 애매한 말투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야 면전에다 거절하는 것보단, 추후 남작을 통해 의사를 밝히는 게 문제의 소지가 작을 테니까. “흐음, 그렇다면야. 자네 편한 대로 하게나.” 백작은 딱 여기까지라는 듯 내게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남작과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었다. 서로의 처자식을 칭찬하고 가문의 미래를 축복하는 식의 얕은 대화. “하하, 대화가 즐거워 자네를 오래 붙잡아 뒀군. 자네도 그만 가서 연회를 즐기게.” “예.” 이후 백작의 곁을 떠나 원래 있던 테이블로 돌아오자 남작이 곧장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아까 그건 어떻게 할 셈인가?” “아까 그거라면……?” “대진 말일세!” 역시 그걸 말하는 거였구나. 나는 고민 중이라며 대답을 보류했다. 어차피 거절할 거여도, 그러는 쪽이 좀 더 성의 있어 보이리란 판단.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이번 일이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지 어찌 아는가?” 예상대로 남작은 토너먼트에 참가했을 때의 이점을 말하며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참가만 해도 따로 200만 스톤을 준다든가, 명성을 떨칠 좋은 기회라든가. 그도 아니면, 백작이 토너먼트 우승 상품으로 내건 것이 7천 번대 넘버스 아이템이라든가. “뭐? 가르파스의 목걸이?” “…왜 그렇게 놀라나? 아는 물건인가?” 탐험가가 아닌 남작은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가 탐험가였다면 내 반응이 더더욱 의문스러웠을 테니까. “흐음, 엘타 경에게 듣기로 그리 매력적인 물건은 아니라 들었네마는.”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5층 균열에서만 드랍이 되면서, 그 확률도 거의 극악에 가까워 입수 난이도가 극악에 달하는 물건. 여러모로 서리혼령 가락지와 비슷한 맥락의 아이템이었다. 낮은 숫자의 아이템 넘버. 개성이 강할 뿐 탐험가에겐 크게 값어치는 없는 아이템 효과. 그 탓에 희귀함에도 일종의 꽝 취급을 받는 것. 그리고……. ‘숨겨진 특수 이벤트가 있다는 것까지 말이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슬슬 뭔가 일이 터질 때가 됐다는 불길한 예감? 그러니 한동안은 몸을 사리자는 다짐? 피식.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만사에 신중하게 득과 실을 계산하되, 병신처럼 쫄아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선 주객전도나 다름없으니까. “하지.” “응? 방금 뭐라고 했나?” “백작이 말했던 대진, 내가 한번 나가 보겠다.” 96화 바바리안 트로피 (3) “하하! 바바리안답게 화끈하군!” 내 결정에 남작은 크게 웃었다. 바바리안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뱉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바바리안이라고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인 게 아니다. 지난날 아이나르가 말했듯. [우리들은 전사로 태어났다. 싸우지 못하면 죽는다.] 그들은 단지 두려움을 안고서 나아갈 뿐이다.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번 내 선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간 평온했던 만큼,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큰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것?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미래가 두려워 회피를 택한다면 그 끝은 파멸뿐이다. 그야 그런 정신머리로 앞으로 미궁엔 어떻게 들어갈 것이며, 이성적 판단을 내리겠는가? 애초에 그랬으면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작님께 말씀드리고 왔네. 크게 기뻐하시더군?”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금방 남작이 돌아왔다. 어지간히 내 선택이 흡족했던 모양. “아, 근데 그 목걸이가 그렇게 중요한 겐가?” 우승 상품이 내 결정의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신하는 듯한 질문. 나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넘버스 아이템은 팔면 비싸지 않나.” “흐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표정을 보니 내게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는 눈치였으나, 남작은 깊이 캐묻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물어왔을 뿐. “그나저나, 자네는 얼마나 강한가?” “……?” “자네 포부를 보니, 정말 우승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거 같지 않은가. 자네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나?” 나는 피식 웃었다. 얼마나 강하냐는 질문. 저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엔, 이 세상에 괴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우승까지는 사실 바라지도 않네. 하지만 만약 자네가 너무 쉽게 져 버리면 아무래도 내 체면이—” 그 앞에 ‘견습 기사’. 바꿔 말해, 3층 탐험가 수준이라는 전제를 붙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 그거라면 걱정 마라.” 나는 남작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이 부분에 대한 걱정은 없었거든. “10초면 충분하다.” “충분하다니? 고개를 갸웃하는 남작을 보며, 나는 단언했다. “어지간한 놈은 그 전에 다 머리통을 부숴놓을 수 있다.” 이는 과장하거나 부풀린 것 없는 진심이었다. 한데 그 진심이 밖으로도 전해졌을까? “히, 히익!” 문득 눈이 마주친 집사가 경기를 일으켰다. *** 기사. 중세 시대에도 그랬듯 이들은 이곳에서도 무력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물론, ‘견습’을 뗀다는 가정하에. ‘오러도 못 쓰는 게 무슨 기사야?’ 기사의 무서움은 오러에 있다. 방어력 무시 90% 항마력 무시 90%. 사실상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게 해주는 오러의 사기성과 체계적으로 발전된 실전 검술의 조합. 이것만으로도 실로 괴물 같은데……. ‘비약’으로 레벨을 올리고, 막대한 금력으로 고등급 정수까지 덕지덕지 처먹는다? ‘이러니 기득권이 인간에서 바뀌는 일이 없지.’ 이종족이 판치고,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 기사란 기득권을 수호하는 창이자 방패였다. 비약으로 올릴 수 있는 최대 레벨이 5라는 걸 감안한들, 제대로 된 기사라면 상위 탐험가 몇 명쯤 혼자서 썰어 버릴 수 있으니까. 그만큼 대인전에 특화된 게 기사란 존재다. 하지만……. ‘견습이면 기껏해야 레벨 3 이하. 정수래 봤자 7등급 이상은 없겠지.’ 이것도 최대치를 가정한 것이다. 아직 오러도 못 쓰는 놈한테 이 정도로 투자할 귀족은 거의 없을 테니까. ‘사실상 토너먼트는 문제가 아니긴 한데…….’ 그다음이 걸린다. 백작의 과도한 관심도 그렇고. 여기서 웬 야만인이 덜컥 우승해 버리면 기득권층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날 바라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미련은 사치일 터. ‘지금은 이거에만 집중하자.’ 이후의 걱정은 우승한 다음에 하기로 하며, 남작의 배려로 구석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너, 아까는 시건방진 소리를 하더군.” 기사 갑주를 입은 세 놈이 다가왔다. 전부 기억에 있는 놈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인연이었다고 해도, 오늘 본 얼굴이기에 잊을 리 없었다. “10초면 충분하다고? 멍청한 바바리안 답게 광대놀음에 몰입하다 보니 그만 자기 주제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일단 이놈. 야외 연회장에서 귀족들과 놀아주고 있을 때 작은 광대니, 뭐니 하며 조소하던 놈이었다. 쥐새끼 같은 앞니가 인상적이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바통 터치를 하듯 옆의 놈이 말을 이었다. “바바리안, 그대는 나와 만나지 않기를 그대의 조상신께 간절히 부탁해야 할 것이오. 단숨에 목을 베어내 줄 테니. 물론 10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외다.” 이름은 본인이 밝히지 않아 모르겠고. 알랑방귀를 뀐다느니 전사의 긍지가 옛말이냐느니 자기가 병신인 걸 티내던 놈이다. 말투를 보니 허세충 속성까지 지닌 듯한데……. “나는 널 만나면—” 다음 주자에게까지 바통이 넘어가려던 찰나,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끊었다. 되도록 적은 만들지 말자는 주의지만……. 이쯤 되니 나도 솔직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 혹시 머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나?” 그래도 나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너희 병신이니?’ 이렇게 물어보면, 혹여나 귀족모욕죄가 성립될 수도 있지 않은가. “뭐, 뭣?” “겁쟁이처럼 우루루 몰려와서 이러면 무서울 거 같나? 부족의 세 살배기 전사도 안 할 짓을 하는군!” “……겁쟁이라니, 감히 우리를 모욕—” “그게 아니라면 뭔가! 남작이 옆에 없으니 전엔 없던 용기가 갑자기 솟은 건가! 참으로 대단한 명예로군!” “그, 그건……!” 남작이 곁에 있을 땐 얼씬도 하지 않던 것. 그 점을 내가 짚고 넘어가자 기사 삼돌이가 금붕어처럼 끔뻑였다. 다만 나는 선입견이 없는 바바리안이기에, 놈들이 언어 장애가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저 당황했을 뿐이겠지. 내가 이토록 큰 목소리로 놈들의 추태를 까발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다! 기사라면 자긍심이 있는 존재라 들었다! 한데 ‘수적 우세’인 상황을 이용해 ‘같은 참가자’에게 이런 유치한 짓을 하다니? 머리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지 않나!” 놈들의 짓을 정확하게 고스란히 끼워 넣은 외침. “그, 그만! 그 주둥이를 닥치지 못할까!” 기사 삼돌이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추태고 뭐고, 이대로면 바바리안한테 머리에 문제 있다는 말을 들은 놈이 될 판이었으니까. 다만 더 대화를 나눠 봤자 소란만 커질 거라 판단했을까? “……두고 보자!” 삼돌이들이 분노를 삭이며 떠났다. 현지인이라 그런지, 상투적인 걸 넘어 오글거리는 대사를 남긴 것은 덤. 마음은 기특했기에 나도 화답해 주었다. “아무튼 너무 걱정 마라! 나중에 만나면 내가 반드시 너희 머리에 생긴 문제를 없애 줄 테니!” 과연 내 진심이 닿았을까? 빠르게 멀어지는 그들의 등만을 보고선 알 수 없었다. *** 잠깐의 해프닝이야 어쨌든. 여러 볼거리로 가득하던 연회는 어느새 절정. 즉, 백작이 준비한 토너먼트가 열리는 순간에 이르렀다. “낮에 봤던 그 바바리안이 나온다더군. 참으로 기대되지 않나?” “흐음, 나는 잘 모르겠소이다. 그래 봤자 탐험가 아니오? 최근 명성을 얻긴 했지만, 경력이 1년도 채 되지 않는다던데?” 장소는 야외 연회장에 잔디밭 위. 주변은 이미 인파로 빼곡했으며, 몇몇 귀족들은 잘 보기 위해 저택 2층 테라스에 아예 의자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준비된 막사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남작이 무슨 코치라도 되는 양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긴장도 안 되는가?” “안 된다.” “후우, 그야말로 강철로 이뤄진 심장이로군. 내가 이렇게 흥분될 정도인데.” 앞에 붙은 찬사는 모르겠지만, 뒤에 흥분했다는 말은 사실 같았다. 요구도 안 한 보너스를 약속해 오는 걸 보면. “자네가 만약 우승한다면 100만 스톤을 더 주지. 그러니까 힘내게. 자네에게 내 체면도 달린 것이니까.” “노력해 보겠다!” 느닷없이 금융 치료를 받아서 그런가? 갑자기 의욕이 샘솟는다. “세르피아 남작가의 사보안 경과 헨슬베니아 자작가의 아르페온 경은 자리에 서시오!”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첫 대진이 열렸다. 무대에 올라 결투의 맹세를 읊은 두 기사는 멋들어지게 검을 휘두르며 관중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야만적인 세상이란 말이지.’ 막사에서 몰래 나와 결투를 지켜보고 있자니 묘한 감상이 들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는 거 같달까? 사실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되도록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규칙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죽여도 문제없다는 뜻 아닌가. ‘하긴, 진검을 들고 싸우는데 사상자가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실제로 첫 대진임에도 불구하고, 과열된 열기 속에서 두 기사는 피 튀기는 결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격렬했던 것만큼이나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순간도 극적이었다. “승자는 헨슬베니아 자작가의 아르페온 경이오!” 검을 쥔 손이 통째로 베어져 나가며 결정지어진 승부의 향방. 물론, 신관에 의해 부상당한 기사의 팔은 금세 붙었지만, 분수처럼 흩뿌려진 핏자국은 무대 위의 장식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다만…….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열띤 함성을 듣고 있자니, 새삼 실감이 난다.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걸. 그리고 이미 나 역시 이곳에 속해 버렸다는걸. “후후, 피를 보니 자네도 흥분이 되나 보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이 바로 다음이 내 차례라는 건 안다. “헤센 남작가의 실베니아 경과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은 자리에 서시오!” 사회인의 지시대로 인파 속을 지나쳐 무대에 올랐다. 때마침 반대편에서도 기사 한 명이 오르고 있었다. 참 공교로웠다. 이름을 몰라서 대진표만으론 알 수 없었는데. “후후, 놀란 얼굴이군?” 나는 인정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첫 대진부터 기사 삼돌이 중 한 명이 상대로 걸리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그것도 제일 얄밉던 그놈이 말이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마지막에 바통 터치하려던 걸 끊는 탓에 저놈의 각오는 듣지 못했지만……. 어찌 저놈을 잊을까. [애초에 거기가 작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라던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낭설을 퍼뜨렸던 자였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것도 감히 인간 주제에. *** 결투가 시작되기 전. 놈이 결투의 맹세를 읊는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서 진지하게 결투에 임하며, 삿되고 부정한 수를 쓰지 않겠단 상투적인 맹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구구절절한 미사여구를 생략한, 단어 그대로 야만스러운 외침. 군중들의 열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와아아아아아!!” 이 와중에도 내가 더 주목받는 것이 열받는지, 한마디 중얼거리는 실… 뭐시기 경. “천박하고 상스럽긴.” 뭐래, 그럼 바바리안이 고상할 줄 알았나? 이내 사회자의 진행하에 가까이 다가가 서로의 무기를 맞대었다. 놈은 기다란 장검을, 나는 남작의 저택에 두고온 메이스가 아니라 거대한 양날전투도끼를 내밀었다. ‘……날붙이는 손에 안 익은데.’ 애석한 부분이지만 쓰는 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냥 평소대로 휘두르면 된다. 아마 결과도 비슷할 거다. 베였느냐, 통째로 터져 나갔느냐만이 다를 뿐. “하앗!” 결투가 시작됨과 동시, 실뭐시기가 민첩하게 지면을 박차며 내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말했던 10초의 약속을 역으로 갚아 주고 싶은 모양인데……. ‘신기하네.’ 나는 일단 뒤로 물러나 관찰의 자세를 취했다. 기사의 검술을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호기심도 일었을뿐더러……. 휘이익-! 견습 딱지를 붙였어도 기사랍시고, 검이 제법 매섭다. “죽어라!” 무슨 무협지의 초식도 아니고. 세 갈래의 환영을 보이며 쏘아지는 검격. 어떤 게 진짜인지 순간 고민이 됐지만,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떤 게 진짜인지 모른다면, 전부 쳐내면 그만 아닌가. ‘나도 바바리안이 다 됐군.’ 도끼의 날을 옆으로 세운 뒤, 최대한 넓게 휘두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캉! 강한 힘에 의해 검의 궤적이 틀어지며, 균형을 잃기 시작한 실뭐시기. 허나 놈은 그 충격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또한, 당황했을 법한데도 몸의 축을 틀며 연계기처럼 내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군.’ 마치 용오름처럼 하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검격. 인성이야 어쨌든 나는 상대를 인정했다. 과연 몇 대에 걸쳐 전수된 검술이란 걸까? ‘무기술은 나보다 몇 수는 더 위야.’ 만약 동일한 조건이었다면, 나는 분명 이놈을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이 녀석과 나는 같은 조건이 아니니까.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아직 10초가 지나려면 많이 남았다. 97화 바바리안 트로피 (4) [야성분출]을 사용 시 위협 수치가 상승한다. 다만, 이때 위협 수치는 마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도발’ 판정을 주지 않는다. 지난날 드왈키가 말했듯. [으음… 괴,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소. 머리로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단 걸 아는데, 몸이 막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달까…….] 겁이 많은 자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용맹한 자는 도리어 호승심을 내비친다. 그렇다면 이놈은 어떨까. “하앗!” 답은 후자였다. 면전에다 토해 낸 내 함성에 움찔하기도 잠시, 놈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검을 마저 휘둘러 왔다. 평소처럼 왼손에 방패가 있었다면 그냥 튕겨 내면 그만이었겠지만……. ‘이제 와선 별로 다를 것도 없겠지.’ 어차피 그게 그거다. 궤도에 오른 탱커의 육신은 오로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스륵. 도끼에서 떼어낸 한쪽 손을,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으로 이동시킨다. 그와 동시 뭉툭한 소리가 이어진다. 카각- 그 소리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놈의 눈빛에 의문이 어린다. 하긴 궁금했겠지. 날카로운 칼붙이와 맨몸뚱이의 팔. 그 둘이 맞닿았을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걸 언제 들어 보겠어? “……?” 답을 바라는 빛을 띄운 채 이동하는 초점. 놈의 시선이 그 종착지에 도착한다. “이해가 안 되나?” 내 물음에 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자신의 검이 피부를 베어냈지만, 뼈까진 베어내지 못했는가. 거기엔 많은 이유가 있다. 골강도, 물리내성, 선천적으로 커다랗고 단단한 골격, [야성분출]로 상승한 육체 수치 등. 오히려 놈이 단번에 내 팔목을 베어냈다면, 그게 더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구구절절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너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약하다.” 뱉고 나니 상당히 오글거리는 대사가 아닐 수 없었지만, 효과는 상당했다. 더없는 모욕이라도 받은 양, 팔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실뭐시기.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촤아아-! 칼날이 뽑혀져 나가며 흩뿌려지는 선혈. 치이이이익-! 이어지는 부식음. 그리고……. “끄아아아악!!!” 고통 어린 신음. “비열한 수를…….” 뭐래, 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역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했기에, 손을 내밀어 놈의 모가지를 부여잡았다. 그야 도망가면 골치 아프잖아? “커헉!” 뇌로 향하는 혈액이 차단되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 실뭐시기. 이미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모가지만 비틀어도 꽥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장비를 착용 해제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95 하락합니다.」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는다. 간단한 이유다. 카카캉! 집사가 오늘을 위해 비싼 돈 주고 사왔다는 양날전투도끼. 이걸로 대가리를 내리치면, 죽일 의도가 없었단 변명거리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약속했었지.’ 나는 기사 삼돌이에게 약속했다. 나중에 만나면 반드시 머리에 생긴 문제를 없애 주겠다고. 그렇기에……. 꽈악. 수박만 한 주먹을 쥐고서, 전력을 다해 관자놀이를 후려친다. 퍼어어억—!!! 머리에 문제가 있다면.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리를 없애면 된다. 그래, 바바리안이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 정적. 주변에 소리가 희미하거나 없는 상태. 그 상태가 잠시간 이어진다. “…….”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 심지어 축제가 한바탕 벌어지던 시기. 아무런 암묵적 합의도 없이, 수백 명이 입을 다물며 정적을 자아내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시, 신관은 어디 있나!!” 한 기사가 머리가 반쯤 짓뭉개진 실뭐시기를 업고서 달려 나가며 정적은 끝을 맞이했다. 따라서 나도 심판에게 다가갔다. “승자는 말해 주지 않아도 되나?” 내 질문에 심판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군중들에게 외쳤다. “스, 승자는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이오!” 처음엔 바바리안이라고 차별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군중의 반응을 보면 또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와아아아아!” “바바리안! 바바리안이 최고다!” “이런 호쾌한 결투는 난생처음이구려! 속이 뻥 뚫리는 듯하오!” “근데, 저 기사 죽은 거 아니에요?” “너, 너무 잔인해요. 저 여기 좀 만져 보세요. 심장 두근거리는 거 느껴지세요?” “어, 어…… 느, 느껴지는 거 같소…….” “결투 중 죽는 게 어디 한둘인가? 그리고 저 정도면 신관님께서 어련히 잘 치료해 주시려고.” 오히려 첫 번째 결투 때보다도 뜨거운 반응.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서비스겸 대충 함성을 터트려 주며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막사로 향했다. 남작이 기다리고 있을 곳은 아니라……. 실뭐시기가 치료받으러 이송된 막사. “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불호령이 터져 나왔다. 기사 삼돌이 중 남은 이인방의 것.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서 치료 중인 신관에게 다가갔다. “그는 죽었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신관은 대답해 주면서도 비호의적인 시선으로 나를 흘겨봤다. “조금 손속에 사정을 두시지 그랬습니까.” 신을 따르는 자가 저리 말하니 나라도 조금은 뜨끔했지만, 변명거리는 충분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 “무려 기사 아닌가! 도끼도 내려놓고 주먹으로 쳤을 뿐이다! 근데 그거 한 방에 기절할 줄 내가 어떻게 아나?” 내 당당한 대답에 기사 삼돌이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고, 신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기절… 말씀이십니까? 뇌수가 흘러나올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기절이라—” “살았으면 기절 아닌가!” 내게 바바리안의 삶을 알려 준 아이나르조차 한 수 접고 갈 만한 단어 선택. 이내 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대화해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막사에 감돌기 시작한 어색한 침묵. 그냥 나갈까도 싶었으나, 때마침 실뭐시기가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여긴 어디……?”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실뭐시기. 고위 신관이 뿜어낸 신성력은 이미 짓뭉개진 머리를 말끔하게 치유해 낸 상태였으나, 만능 치트키는 아니었다. “나는 분명 결투장에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의 중얼거림에 신관이 상황을 설명했다. 대진이 있었고 거기서 뇌를 크게 다쳤다. 하지만 금방 치료를 했으니 시간을 두면 기억이 돌아올 것이다. “그, 그렇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 신관의 친절한 브리핑에 감사 인사를 표하던 녀석이 날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 “네, 네가 왜 여기에…….” 당황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눈빛. 조금 의문이었다. 결투 중에 있던 기억을 잃었다면서,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지? “흐음,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나?” “아, 안 난다. 그, 그러니 나가 줘라.” 음, 거짓말하는 기색은 아닌데……. 그래도 일단 온 김에 확인할 건 확인하고 가야겠지. “한 가지만 해 준다면 바로 떠나 주겠다.” “……?” “별건 아니고, 그냥 내가 불러주는 대로 한 번 따라 말해 봐라.” 나는 놈이 이전에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들려준 뒤, 따라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그것만 하면 가주는 건가……?” “물론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실뭐시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내가 읊어준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한데……. “애, 애초에 거기가 자, 작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 어, 윽…….” 돌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더니, 머리를 쥐어 잡는다. “아아……! 기, 기억이 나……!” 과거를 상기하다 보니 일시적으로 상실됐던 기억이 돌아온 모양. “잘됐군. 계속해 봐라.” 이어진 내 재촉에 실뭐시기는 석상처럼 굳더니,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그만… 내, 내가 다 잘못했소. 그러니 제발…….” 사과를 하다니?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태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머리에 있던 문제는 사라진 모양이군.” “예. 그러니까 이만 나가 주시죠. 환자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신관의 말에 나도 미련 없이 막사를 나섰다. “여, 여기서 나갈 거야. 어, 어서 도망쳐야……!” 막사 너머에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란이 들려왔다. 듣고 있자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의사도, 신성력을 가진 신관도 아니다. 그저 이 야만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바바리안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역시 바바리안이 사기캐긴 하네.’ 바로 오늘. 난 신관도 고칠 수 없던 문제를 해결했다. *** “수고했네. 정말로 그렇게 빨리 끝내 버릴 줄은 몰랐네만……. 근데 어딜 갔다 온 건가?” 대기 막사로 돌아오자 남작이 날 반겼다. 실뭐시기의 상태가 궁금해서 한 번 보고 왔다고 얘기해 주자 그가 피식 웃었다. “자네도 참 특이하단 말일세. 그런 걸 신경 쓰면서 그렇게 사정없이 공격하다니.” 사정없이라니, 말이 조금 심하다. “미궁이었다면 도끼로 쳤을 거다.” “뭐, 그야 그랬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약할 줄 몰랐다. 몸이 느려서 튼튼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혹여나 문제가 됐을 때를 위해 내가 미리 준비했던 답변. 어째선지 남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그들이 평소에 수련을 제대로 안한 탓이지.” “근데 계속 이래도 괜찮은 건가? 견습 기사라지만 놈들도 일단 귀족 아닌가.” “허, 설마 뒷일을 걱정하는 겐가? 그렇다면 추호도 신경 쓰지 말게. 대진 중에 있던 일 아닌가?” “하지만 기사는 가문의 재산 아닌가.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작위 귀족이 날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어허, 걱정 말래도? 애초에 왜 이런 유희에 정식 기사가 아니라 견습이 나가겠는가? 설령 죽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일세.” 이어 남작은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과 얼굴을 붉히려 들 자는 없을 것이며, 행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이 막아 주겠다며 확답을 주었다. 정확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우승하는 데만 집중하게. 아까 보니까 사람들 반응도 좋던데, 자네가 날뛰면 날뛸수록 연회를 주최하신 백작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걸세.” 음, 그렇다면야. 걱정 없이 죄다 머리통을 부숴도 될 거 같다. 아까 보니까 신관의 능력도 장난 아니던데. “승자는 헨슬베니아 자작가의 틸롄 경이오!” 이후 남작과 함께 결투를 지켜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처음엔 제법 재밌었지만 머지않아 흥미를 잃었다. 너무 싸우는 방식이 똑같다고 해야 하나? 내 차례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했는지 알 것도 같다. ‘방계여도 귀족이라 이건가? 쇼맨십이 없단 말이지.’ 살짝 피곤했기에 남작에게 양해를 구한 뒤 구석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집사가 아주 조심스레 날 깨웠다. “…이, 이봐, 너, 널 찾는 사람이 있다.” “찾는 사람?” 조금 느닷없었으나, 집사는 뭐라 되묻기 전에 할 말만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일단 나가서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기사 삼돌이?’ 예의 삼인방 중 두 명이 서 있다. 또한, 뭔 용무냐고 말할 새도 없이 한 놈이 내 멱살을 덥썩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이름은 모르겠고. 작은 광대 어쩌구 날 비방했던 녀석이었다. “이 녀—!” 슬쩍 뒤로 물러나며 손을 피하자, 작은 광대가 무안한듯 흠칫 굳더니 말을 이어갔다. “크, 크흠. 이놈! 대체 실베니아 경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실베니아 경이라니?” 귀를 후비며 고개를 갸웃하자, 놈이 대노했다. “넌, 결투했던 자의 이름도 모르는 거냐!” 역시 걔 이름이었구나. 그러니까, 이름이……. “실… 메리아…….” “실베니아 경이다!!” “그래, 그자에게 문제라도 생긴 건가?” 내 질문에 이인방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말이라고……! 네놈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서 난리를 부린단 말이다!” “어찌 그리도 악독한 것이오?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한들,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그대에게는 자비와 명예 따위는 없는 것이오?” 자비와 명예? 10초 안에 내 목을 베겠느니 하던 새끼가 할 말은 아니다. 나는 최종 진단을 내렸다. “…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할 줄이야.” 빠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 “자네, 여기서 뭐 하나?” 마르토앙 남작이 막사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으로 소란은 끝났다.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인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부리나케 자리를 떠난 이인방. “…저들은 뭐였나?” “별거 아니다.” “그래, 아무튼 이리 와보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실제로 가능한지 궁금하단 말이지.” 이후 막사로 돌아가 남작과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어느덧 1회전이 종료됐다. 그리고 8강 토너먼트가 막을 올렸다. 한데 이게 주술사가 말했던 ‘영웅의 운명’이라는 걸까? “세르피아 남작가의 콰르테안 경과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은 자리에 서시오!” 놀랍게도 2회전에서 기사 삼돌이 중 한 명과 마주했다. 허세충 속성을 가진 그놈이었다. “이전과 같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시오.” 결투가 시작되었음에도 입을 나불거리며 뭐라 대사를 치는 녀석.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실베니아 경은 우리 중 최약—” 오히려 처음보다 쉬웠다. 중얼거리는 틈을 타서 앞으로 대쉬. 그리고……. “어, 어……?” 놈이 화들짝 놀라 검을 휘두르든 말든 손을 뻗어 모가지를 잡은 뒤. 그대로 관자놀이에 진심 펀치. 퍼어억-! 이내 머리통의 살과 뼈가 짓뭉개진 녀석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결투가 시작되고서 고작 3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만……. “와아아아아!” “다음에도 그렇게 으깨버려주시오!!” “기사 분쇄자! 기사 분쇄자다!!” 순식간에 끝난 결투였음에도, 관중들은 열광에 찬 함성을 터트려 주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사람 머리통이 박살나는 걸 보면서 이렇게 좋아하다니.’ 이래서야 누가 야만인인지 모르겠지 않은가.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98화 바바리안 트로피 (5) 애석하게도 4강전에서 마주한 상대는 기사 삼돌이의 마지막 1인이 아니었다. 그야 다른 한 명은 2차전에서 졌거든. 어째선지 일부러 진 듯한 낌새를 풀풀 풍기며. ‘결국, 한 놈은 물리 치료를 못해 줬군.’ 여하튼 굳이 머리를 노릴 필요가 없어졌기에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양날도끼로 검을 박살냈다. 한데 야만인에겐 지고 싶지 않던 것일까? “아, 아직이오!” 상대는 검을 잃고도 맨손으로 결투를 이어가겠단 의지를 보여 줬다. 따라서 나도 도끼를 버리고 달려가 척추를 꺾어 버렸다. “스, 승자는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이오!” 무혈로 이루어진 승리였으나, 관중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기사 분쇄자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아무래도 사람이 반으로 접히는 모습은 이들에게도 상당히 자극적이었던 모양. 그 감상은 남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질문을 던져오는 남작. “이보게, 그거 아는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네! 사람을 공중에 던진 뒤에 무릎으로 받다니,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건가?” 음, 굳이 답하자면 예전에 만화에서 봤다.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바바리안에겐 정말 불가능이란 없구나. “다음 대진까지 조금 쉬고 있겠다.” “응? 아, 그러게.” 남작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잠시 눈을 붙였다. 졸리거나 한 것은 아니고……. ‘이제 한 번 남은 건가.’ 고지가 눈앞인 만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기다렸던 결승전이 막을 올렸다. “페르데힐트 백작가의 알바트로스 경과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은 자리에 서시오!” 상대는 연회의 주최자이자 내게 토너먼트에 참가해 보라 권유했던 페르데힐트 백작 휘하의 견습 기사였는데……. 뒷일이라면 모를까. 결투 자체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야 앞선 경기를 보면서 상대에 대한 파악은 끝마쳤거든. “반갑소이다.” 거대한 대검을 들고서, 짧게 인사를 해오는 거구의 기사.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백작이 어떤 성격인지 알 거 같네.’ 기사는 탐험가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정수란 검술을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육체 수치와 관련된 정수를 선택하기 마련이었는데, 정수의 조합은 가문마다 달랐다. 체계적인 연구 끝에 효율적인 조합 몇 가지가 정석처럼 굳긴 했지만……. 캐릭터엔 ‘컨셉’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오크 대전사에, 자이언트 골렘, 그리고 사이클롭스라…….’ 상대는 전형적인 힘기사다. 신관을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 재생력보다는 물리내성에 비중을 두었고, 높은 수준의 근력을 이용해 2단계 소재인 라이티늄제 갑주를 풀세트로 맞췄다. 사실상 걸어 다니는 탱크나 다름없는 셈. ‘견습 기사한테 돈지랄을 어지간히 해뒀군.’ 백작의 취향을 짐작하면서도 재력에 또 한 번 놀란다. 7등급 하나에 6등급이 두 개. 시험관에 담긴 정수를 구매해서 먹인 걸 텐데, 대체 얼마가 들었을까? ‘입은 장비까지 더하면 사실상 3층 탐험가 수준은 아득히 넘어서겠군.’ 문득 백작이 내 우승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이놈의 수준은 독보적이었다. 참가자 중 대부분은 2레벨에, 정수라 해 봐야 7등급밖에 없었으니까. “장비는 어디에다 두고 맨몸인 것이오?” 여하튼 결투가 시작되기 직전, 서로의 무기를 맞대고 있을 때 상대가 질문을 해왔다. 이전 결투와 달리 도끼 한 자루만 들고 올라선 내 모습이 의아한 모양. 나는 짧게 답했다. “불편해서 말이지.” 괜히 모욕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무겁기만 한 판금장화, 과한 디자인의 투구, 벨트, 어깨보호대 등등등. 방어력을 기대하기 어렵단 것은 그렇다 쳐도, 움직이는 데 지장은 주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그렇구려. 하긴 그런 걸 입고서 평소처럼 싸우긴 어렵겠지.” 다행히 상대는 내 말을 곡해하지 않고 들었다. 하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너무 쉽게 끝날까 걱정했는데 진지하게 임하려는 듯해서 마음이 놓이는구려.” 저 여유로운 표정과 말투는, 내가 뭘하든 이기는 건 본인이 될 거라는 자신감의 표출이겠지. 굳이 말을 이어갈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니 잘 됐군.” 상대가 방심해 준다면 오히려 반길 일일 터. 스륵. 맞댄 무기를 떼고 거리를 벌린다. 이는 상대도 매한가지였다. 서로 간의 간격이 15m가량 벌어지자 심판이 깃발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제 서로를 공격해도 좋다는 뜻. “오시오.” 상대가 기수식을 취하고서 검을 까딱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가 바라고 있을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다. ‘기사 분쇄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던 야만인. 그런 야만인을 상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승리를 거머쥐는 진짜 기사. 관중의 환호와 주군의 인정. 탄탄대로처럼 펼쳐진 장밋빛 미래. 피식. 이 녀석이 얼마나 쉽게 살아왔는지가 느껴진다. 내 예상이 맞았든 아니든. 바라는 게 있다면 더욱 간절해야 한다. 일이 잘 풀렸을 때 얼마나 잘 될 수가 있는지가 아니라, 그 반대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방심해 주는 걸 보니,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길 잘했네.’ 백작이 주최한 토너먼트.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처음으로 그 콤보를 사용했다. ***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 [거대화]와 [야성분출]. 이 두 스킬을 같이 사용하면 위협 수치가 어마무시하게 상승한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 육체 수치도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야성분출]의 지속 시간이 30초밖에 유지가 안 된단 단점이 있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적어도 그동안은 미친 듯한 뽕맛을 느낄 수가 있는데. ‘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지만.’ 위협 수치가 과도하게 상승한 부작용일까? 호승심이고 뭐고, 위협수치는 대상자의 성격과 무관하게 작용했다. “어, 어, 어…….” 적에게 선사하는 압도적인 공포감. 쾅! 쾅! 쾅! 쾅! 대형 몬스터가 낼 법한 소리를 내며 대시하고 있음에도 기사는 얼이 나가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도끼를 아래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히, 히익!” 바닥을 구르며 회피한 기사는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나 이 좁은 무대에서 언제까지고 도망치는 게 가능할 리가 만무. 복싱 게임을 하듯이 능숙히 코너에 몰고서 녀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 장외요!” 녀석이 아예 밖으로 도망치며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결승전이 마무리되었다. ‘나야 편해서 좋긴 한데…….’ 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다행히 날 향한 비난은 없었지만, 명예롭지 못한 행위를 보여 준 기사에게는 정말이지 날 선 야유가 쏟아졌다. “아, 아니 이건 나도 모르게……. 다, 다시… 다시 하면 할 수 있소!” 뒤늦게 제정신이 들었는지 결투장 위로 올라온 그였지만, 죽은 자식 부랄 만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자네, 어디까지 날 망신시킬 셈인가?” 심판을 향해 번복을 요구하던 그는 백작의 차가운 한마디에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승자는 마르토앙 남작가의 비요른 얀델이오!” 쩝, [거대화]는 쓰지 말 걸 그랬나? 뒤늦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쉽게 이기긴 했지만, 이래서야 나도 찝찝할 정도였으니까. ‘어쩌다 보니 백작 심기도 건드리게 된 거 같고…….’ 사실상 토너먼트 우승보다는 뒷일을 걱정하던 나에게는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조금의 변수라도 없애고자 마지막까지 전력을 감췄던 행동이 이런 변수를 낳을 줄이야. ‘씨바, 설마 그렇게 밖으로 도망쳐 버릴 줄은 몰랐는데.’ 후, 이걸로 해코지하고 그러진 않겠지? 내심 걱정됐지만, 백작은 직접 무대 위로 올라 우승 상품인 목걸이와 트로피를 수여하면서도 호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오늘 일은 몹시 인상 깊었네.” 어깨에는 손이 닿지 않아 내 팔뚝을 툭툭 치며 격려를 하는 백작. 정말 앙심을 품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연기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긴가민가하며 눈치를 보던 때였다. 백작이 내게만 들리도록 읊조렸다. “자네가 더 준비되면 따로 부르겠네.” “…부르다니?” “자세히는 알 필요 없고. 자네는 그때까지 다른 귀족들이 부르면 그냥 무시하게. 알겠나?” 뭔 소린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눈빛 살벌한 거 하고는…….’ 싫다고 했다간 뭔 일을 벌일 기세였다. 여하튼 수여식을 끝으로 길었던 연회도 마무리되었다. 뭐, 남아서 새벽까지 자리를 즐기려는 자들도 많았지만……. 마르토앙 남작은 아니었다. “피곤하군. 슬슬 돌아가세.” 처음에 왔던 인원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간 나는 내 장비를 모두 돌려받았다. 그리고 약속했던 수고비까지 지급받았다. “오늘은 정말로 고생 많았네. 앞으로 몇 달은 자네와 내 가문의 이름이 사교계에서 화제가 될 게 분명하네. 그러니, 혹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주저 말고 날 찾아오게나.” 남작은 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빈말일지라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하긴 이만큼 해 줬는데 기뻐할 만도 하지.’ “그럼 이만 가보게나. 나도 피곤하군. 마차를 준비해 두라 해 놨으니, 그걸 타고 가면 될 걸세.” “고맙다!” 이내 황도 카르논을 떠나, 라비기온에 위치한 내 숙소에 돌아왔을 땐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몸도 정신도 피곤했지만…….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침대가 아니라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최종 정산을 시작했다. 처음 약속했던 수고비 100만 스톤. 토너먼트 참가비 200만 스톤. 우승 시 지급하겠다던 추가금 100만 스톤. 우승 트로피를 남작에게 양도함으로 받은 사례금 30만 스톤. ‘현금이 도합 430만 스톤.’ 돈 많은 귀족이 의뢰인이어서 그럴까? 하루 일당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거액을 손에 넣었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다. 기사 분쇄자라는 새로운 별명이야 어쨌든. ‘이걸 이렇게 초반부에 얻을 줄은 몰랐는데…….’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사실상 운이 나쁘면 후반부에 암만 노가다를 해도 얻지 못할 물건을 손에 넣었다. 물론 히든피스 각성을 시키려면 막대한 재화가 소모될 테지만……. 엄청난 행운임은 부정의 여지조차 없다. 따라서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행운 스택이 벌써 몇 개나 쌓인 거야?’ 앞으로는 진짜 숨 쉬는 것도 조심해야지. *** 연회가 있던 다음 날 아침. 의문 하나가 풀렸다. 적어도 반쯤은. ‘무슨 편지가…….’ 일어나자마자 우편이 쉴 새 없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전부 귀족들이 보낸 것이었다. 연회를 열 건데 참가해 줄 수 있냐는 편지. 참고로 편지엔 참가 시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단 언약도 적혀 있었다. 말이 소정이지, 앞으로 이 짓만 해도 평생 먹고살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백작이 말했던 게 이거였군.’ 준비되면 따로 부르겠단 말은 여전히 의미불명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부름을 무시하란 게 이걸 말했던 게 틀림없다. ‘후, 골손실이 대체 얼마야?’ 따라서 전부 거절의 말을 적어 회신했다. 그야 말없이 씹으면 자존심 강한 귀족들이 보복해 올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참가하면 백작의 분노를 살 거 같고. ‘대체 백작은 뭔 생각인 거지?’ 솔직히 난 그놈이 제일 무섭다. 계속해서 호의적인 태도로 날 대하긴 했지만, 이런 놈들이 한번 수틀리면 눈깔이 뒤집히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의도가 불분명하단 것도 꺼림칙했다.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바바리안 출신 탐험가에게 관심을 지닐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음에 커뮤니티가 열리면 백작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자.’ 새로운 퀘스트를 머리에 새겨넣으며,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탑으로 향했다. ‘정기 연구도 이제 이번 달이 마지막이군.’ 어느덧 레이븐과 약속한 3달이 끝나간다. 뭐, 오늘 방문 목적은 그것과는 관계없지만. “어, 오셨어요?” 레이븐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하자, 웬일인지 아침 댓바람부터 멀쩡한 상태로 그녀가 반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연구를 도와야 할 선배라는 자는 어디 있나?” “저, 그게…….” 레이븐이 말꼬리를 흐렸다. 겨우 그뿐인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오랜만일세.” 기다렸다는 듯 문 뒤에서 백발의 노인이 튀어나온다. 알테미온 학파의 마스터. 통칭 ‘늙은이’. “후우…….”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이해됐다. “분명 내게는 ‘선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죄송해요. 스승님이 하도 억지를 부리셔서…….” 그래, 억지로 바꿨다 이거지. 내가 힐끗 바라보자 늙은이가 자애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껄껄, 너무 긴장하지 말게. 그리 거창한 실험은 아니니 말일세.” 그거야 들어 봐야 아는 거고. 마저 설명하란 시선을 보내자 늙은이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제작한 마도구로 악령의 영혼을 구별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실험이라네!” 아니, 씨발. 이건 뭔데 또. 99화 소문 (1) 악령의 영혼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마도구?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상황에 빠질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뭐가 됐건 변하는 건 없어.’ 호기심만을 위한 의문을 지운다. 뭔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정말로 우연이 맞물렸을 뿐인가. 확신할 수 없다면, 최악을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을 터. 늙은이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도구?” 인상을 찌푸리며 늙은이를 바라본다. 악령이 아니라, 마도구라는 단어가 더욱 신경 쓰인다는 듯이. 조금 전의 짧은 정적도 모두 그것 때문이었다는 것처럼. “…안전한 건 맞겠지?” 불신을 담아 바라본다. 나는 마법에 무지한 바바리안이니까. 레이븐의 연구실에서 수상하게 생긴 마도구를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 ‘이게 맞는 반응이겠지.’ 찰나의 판단을 끝내고 액션을 취한다. 따라서 이제는 늙은이가 턴을 쓸 차례. “흐음.” 늙은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관찰하더니, 이내 표정을 달리하며 입을 열었다. “허허, 자네는 나를 못 믿는가? 알테미온 학파의 마스터인 나를?” 그걸 굳이 말해야 아냐는 듯 바라보자, 늙은이가 혀를 찼다. “쯧, 이 친구가 날 뭐로 보고. 걱정하지 말게. 그 마도구가 인체에 무해하단 건 아루가 증명해 줄 걸세.” “…네? 제가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지 않느냐.” “네, 뭐… 마도구에 무슨 술식이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것만이라면…….” 학파의 마스터와 3개월 된 인연의 바바리안. 레이븐이 어느 쪽을 우선할지는 명백하기에, 저 말은 신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하든 결국 수작에 넘어갈 뿐인 거겠지.’ 둘이 대화를 나누를 들으며 나는 확신했다. 대체 어디서 실마리를 남겼는진 모르겠지만, 늙은이는 날 의심하고 있다. 다행히 확신의 단계는 아닌 듯하다. 실존하지 않는 마도구로 날 떠보려는 걸 보면. ‘아마… 그런 마도구는 없겠지.’ 불안을 지우고,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근거를 종합한다. 악령을 판별하는 마도구? 수천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언젠가 그런 물건이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최초 제작자가 이 늙은이라는 건 말도 안 되지.’ 알테미온 학파는 정통 마법사 학파다. 차원이나 영혼 같은 마이너한 주제보단, 새로운 주문을 만들거나 하는 등의 연구를 주로 행한다. 한데 그런 마법사가 악령 판독기를 만든다? ‘애초에 정말 그런 게 있었으면 어떻게든 속여서 마도구 앞에 앉혔을 거야. 이렇게 떠보는 게 아니라.’ 이내 나는 최종 판단을 마쳤다. 악령 판독기는 없다. 늙은이는 그저 내 반응을 보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래서 어쩔 텐가? 위험할 일도 없을뿐더러, 시간도 얼마 안 걸릴 걸세.” “…얼마 안 걸린다고?” “한 5분 정도면 될 걸세.” “쩝, 그렇다면야.” 나는 늙은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 찝찝하지만, 빨리 끝나기만 한다면 나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한데 내 결정이 의외였을까? “…자네, 정말 괜찮나?” 늙은이가 도리어 내게 질문을 해 온다. 티끌만큼 남아 있던 불안마저 지워 주는 반응. 나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괜찮냐니?” “…아깐 위험할 수도 있다며 걱정하지 않았나.” “그거라면 얘가 확인해 준다고 했지 않았나!” “그건 그러네만…….” “어서 가자. 안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데, 돌아가서 잠이나 마저 자야겠다!” 씨발, 이 늙은이가 어디서 수작을 부리고 있어. *** “갔군…….” 비요른이 떠난 실험실. 왠지 허망하게 들리는 스승의 중얼거림에 레이븐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악령을 판별하는 마도구? 스승님이 그런 걸 연구하고 있단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을뿐더러……. “아까 그건 뭐였어요?” “…….” “그러고만 계시지 말고요. 정말 안 말해 주실 거예요?” 그녀는 스승님의 지시하에 이 마도구가 안전하다는 걸 비요른에게 증명해 줘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악령 판독기랍시고 스승이 꺼내 온 마도구에는 술식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냥 괴상하게 생긴 의자에 불과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맞춰 주거라.] 다만 그녀는 스승의 말에 따라 이러한 사실을 침묵했다. 그러니 이제 그 진상을 들을 차례였다. 물론 예상이 가는 건 있었다. 그녀라고 그 정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니까. “…설마 얀델 씨가 악령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미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던 것도 그래서고?” 스승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침묵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 될 때도 있는 법. “하아… 그래서 의심은 풀리신 건가요?” “…그래, 내 생각이 틀렸더구나.” “확실히 스승님 마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에요. 특이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이건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해요.” 재차 이어진 질문에 스승이 힘없이 되물었다. “…무엇이냐?” “왜 그러신 거예요? 악령이라 의심이 됐으면 그냥 비밀 치안부에 언질만 해 줬어도 알아서 했을 텐데—.” “그랬다간 죽지 않느냐.” 자그마한 중얼거림. “네? 그게 무슨 뜻—.” “됐다, 피곤하구나. 이만 가 볼 테니 뒷정리는 부탁하마.” 이내 스승이 자그마한 노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위축된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났다. 어느새 혼자 남게 된 실험실. 그녀는 스승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랬다간 죽지 않느냐니…….’ 바꿔 말하면, 살아 있는 상태의 악령이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는가. ‘스승님은 대체 뭘 원하시는 거죠?’ 그녀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털썩!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왠지 아침부터 진이 쫙 빠졌다고 해야 할까.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싶지만……. ‘갑자기 깜빡이 없이 훅 들어와서 진짜 놀랬네.’ 긴장한 몸을 풀며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딱히 실수한 건 없는 듯했다. 다시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대처였다. 최악을 가정하되, 주어진 단서를 통해 한도 끝도 없이 비약하는 일을 막았고, 그로 인해 최선의 정답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에 표정을 보니까 늙은이도 완전히 의심을 거둔 거 같고.’ 느닷없이 터진 사건이었지만 잘 풀렸다. 다만, 조금 석연치 않은 점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악령임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 늙은이는 어딘가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왜였을까? ‘…뭐, 그건 내가 신경 쓸 바 아니겠지.’ 잠시 고민해 보던 나는 깔끔히 상념을 비워 냈다. 답이 나올 리 없는 문제였을뿐더러, 그 이유가 뭐든지 간에 내 안전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네.’ 아침부터 좆같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번 사건이 묘한 안도감을 내게 선사했다. 이걸로 요즘 천정부지로 쌓이고 있던 행운 스택이 조금은 상쇄됐을 테—. “비요른! 일어나랑! 벌써 대낮인데 언제까지 잘 거냥!”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눈을 떠보니 미샤가 내 몸을 흔들어 대고 있다. 문을 열어 두고 잔 건 아니고, 얼마 전에 준 스페어 키를 써서 들어온 모양. ‘뭔가 일이 생겼을 때 쓰라고 준 건데…….’ “미샤, 여긴 왜 왔나? 오늘은 마탑에 갈 거라고 했을 텐데.” “어제 늦게 들어오지 않았냥. 혹시 자고 있으면 깨워 줄랬당!” 음, 그런 이유라면야. 스페어 키를 뺏는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든가 해야지. “아, 근데 어제 늦게 들어온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기다렸던 거냐?” “돌아와서 거기서 있던 일을 얘기해 주기로 하지 않았냥. 게다가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마랑.” 말은 저리하지만 밤늦게까지 날 기다리고 있던 게 틀림없다. 연회에서 있던 일이 그렇게 궁금한가? “자, 그럼 어서 말해 봐랑. 무슨 일이 있었냥?” 미샤의 재촉에 나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말해 줬다. 집사가 준비해 준 야만 용사 장비를 입고, 마차 행렬을 이끌며 연회 장소로 향한 것. 거기서 먹었던 음식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던 것까지. “엑, 정말 우승했다고? 그 많은 기사를 이기고?” “기사가 아니라 견습 기사다.” “그래도 일단은 기사 아니냥! 대단하당!” 대단하기는 무슨. 결승전에서 만났던 놈만 빼면, 나머지는 미샤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쉽게 이겼을 거다. 얘도 보면 체술 하나는 진짜 장난 아니니까. “됐고, 이거나 써라.” 여하튼 간략하게 있던 일들을 설명해 준 나는 미샤와 함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귀족들에게 보낼 답장이었다. 아침에 전부 써 놓긴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그새 또 늘었더라고. “…비요른, 정말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거냥? 귀족들 아니냥. 이러다가 뭔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당.” “괜찮다.” “음,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만…….” 미샤는 불안한 눈빛을 지으면서도 내가 불러 준 대로 편지를 작성했다. 거참, 걱정할 거 없다니까. 바바리안이 쓴 편지에 뭘 더 바라? 애초에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일뿐더러……. [바빠서 못 간다.] [그러니 다른 바바리안을 찾아 봐라.] [발신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암, 이 정도면 충분히 체통을 지킨 편이지. *** 귀족의 저택에 와 있다. 넓고, 반짝반짝이며,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 오는 곳. “세상이 넓다던 부족장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거 같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다. 사람들의 옷가지도, 말투도,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우리는 북을 치는 게 전부였는데……. “뭐 하나? 어서 이리 오게.” “아, 알겠다!” 한 달 전에 성인이 된 바바리안. 카펜의 아들 드카트는 의뢰인을 따라 연회의 중심부로 향했다. “쯧, 걸음걸이가 그게 뭔가? 좀 더 자신 있게 걷게!” 조금 억울했다. 자신 있게 걷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입은 장비들도 쓸데없이 크기만 해서 불편하다. 역시 그냥 맨몸이 편한데……. 불만을 토로해 볼까도 싶었지만, 두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난날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자는 더 커다란 걸 입고도 잘 다녔네마는?] 며칠 전, 큰돈을 주겠단 말을 듣고 귀족을 따라간 그는 이런저런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 연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내가 야만인이라서 이런 가당치도 않은 요구를 하는 걸까? 무시하는 건가도 싶었다. 하지만……. [그자라니! 그자가 대체 누구기에 이상한 걸 듣고서 자꾸만 내게 요구하 거냐!]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을 말하는 것이네만?] 그자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는 그저 모든 요구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귀족들의 연회에서, 기사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기사 분쇄자라는 멋진 이명까지 손에 넣은 전사 중의 전사. ‘역시 난 그처럼 되기엔 부족한 걸까…….’ 그의 일화를 전해 들은 두카트는 이번 연회에서 꼭 멋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부족장도 목이 터져라 칭찬했던 그 전사의 행동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까. 잘못된 게 있다면, 분명 내 쪽일 테니까. ‘전사’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다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행색을 한…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들 사이에 있자니 저도 모르게 위축이 됐다. 또한……. “마, 맛있다아……!” “더 크게 하게! 그자는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네!” “베, 베헬—라아……!!!” 솔직히 창피했다. 아무리 바바리안이라도 그렇지, 사람들 앞에서 음식에 감탄해서 소리 지르는 게 말이나 되는가? 뭐, 혼자였다면 몇 번이고 외쳤을 거 같지만. “고기만 먹지 말고 뼈도 씹게!” 아무튼, 이도 아팠다. “휴지를 달라고? 그게 왜 필요한가?” 음식을 집어 먹던 손이 끈적였다. “어허, 투구는 왜 또 벗는 것인가?” 목도 뻐근하고 어깨도 무겁다. 그런데 좀 있으면 바바리안 참가자만으로 구성된 대진에 나가야 한다. 과연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이런 걱정부터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자와 달리 상대가 기사인 것도 아닐진대. ‘고블린 트롤 쫓아가다가 머리통 부서진다더니…….’ 성인식을 끝마치고 도시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언젠가 유명한 전사가 되겠다는 포부로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하지만 이게 현실의 벽이란 걸까. 고작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모자람과 직면했다. “자네는 왜 그것도 못 하는가?” 두카트는 비로소 참아 왔던 말을 내뱉었다. “나는… 평범한 전사다.” 소리 지르고 싶을 땐 소리를 지르고. 부수고 싶은 게 있다면 박살을 내고. 옆에 누가 있든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강자,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지닌 진정한 전사에게만 허락된 권리일 터. “부탁이다. 더는 나와 그를 비교하지 마라.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는 나 따위와 견줄 수 없는 대단한 전사다.” “후, 역시 그자가 특별했던 거였나…….” 두카트의 고백에 귀족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아니, 어쩌면 그 한 사람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군. 그자가 아니면 안 되는 건가…….” “하긴, 그렇게 야만스러운 바바리안이 흔할 리가 있나.” “바바리안은 다 그자 같을 줄 알았거늘.”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자들이란 말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한 내용의 말이 연회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100화 소문 (2) 정기 회담이 있는 날. 간만에 파티원 전원이 술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평소에 모이던 그 술집은 아니었다. 그야, 난쟁이 놈이 질색을 했거든. [다른 곳으로 가세! 거긴 터가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니!] 뜬금없이 귀족 모욕죄로 모즐란들에게 잡혀가는 사태가 벌어진 곳이니 찝찝했던 모양. 미샤도 로트밀러도 옳다구니 그러자 했다. 탐험가들은 미신을 잘 믿는 편이니까. ‘뭐, 이해 못 할 건 아닌데…….’ ‘운’이 나쁘면 뒈지는 직업군이니만큼, 이런 종류의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자리 장소를 바꾼 건 아무래도 좋다. 귀찮긴 하지만, 그 선택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조금 전에 난쟁이 놈이 뱉은 폭탄 선언과 달리. “…왜 말이 없나?” 말없이 한숨을 내쉬자 난쟁이 놈이 꼼지락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 정도 양심은 남아 있다 이거지. “잠시 기다려 봐라. 생각 중이니.” “그, 그러겠네.” 술자리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정리를 해 보자면, 너희들은 이번에 탐사를 나가지 않겠단 거군.” 미궁이 열리기까지 열흘이 남은 시기.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려 모인 자리에서 난쟁이 놈이 탐사 불참을 선언해 왔다. 참고로 그 혼자만의 의견도 아니었다. 미리 대화를 나눴던 건지, 로트밀러와 드왈키도 같은 의견이었다. “크흐흠! 일단 연기가 났으면, 거기에 불이 있다는 말도 있지 않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한 달 정도는 쉬며 추이를 지켜보는 게 맞다고 판단했네.” 이건 뭐, 집단 보이콧도 아니고. 꼴랑 5명인 팀에서 3명이 불참 선언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곧 차원 붕괴가 있을 거란 소문이 하도 퍼지니 불안해진 거겠지. 사람 심리라는 게 그런 거니까.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해도, 주변 분위기가 그러면 쉽게 휩쓸린다. “예전에 함께했던 동료들 모두 이번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대도 그냥 쉬는 게 낫지 않겠소? 그대라면 내년 세금은 문제도 아닐 터인데…….”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게 터져 버리면 그걸로 끝 아니겠는가!” 처음엔 미안하다는 듯 얘기를 꺼내더니, 이제는 오히려 내 걱정까지 해 주는 삼인방. “…비요른, 어떻게 할 거냥?” 미샤가 조심스레 내 의사를 물어온다. 사실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알아 온 내용을 슬쩍 흘려 주며, 시간을 들여 설득해 가면 녀석들도 생각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다. ‘핏빛 성채’에 다녀온 지도 어느덧 세 달이 넘었으니까.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조만간 한번 이유를 대며 따로 미궁에 들어가려 했는데.’ 초반부엔 쿨타임이 될 때마다 1층 균열을 클리어해 주는 게 정석인 법. “너희들이 그런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군. 그럼 이번엔 우리 둘이서만 들어가겠다.” “엑? 나, 나도?” “그럼 나 혼자 보낼 생각이었나?” “으, 그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가기 싫단 표정이면서.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혼자—.” “으이구, 이 바바리안앙! 일단 부탁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먼저 아니냥? 평소랑 다르게 좀 더 예쁘게 말해 보기도 하면서!” 예쁘게? 음……. “…나와 같이 가 주겠나?” “쯧, 그럼 혼자 보내겠냥?” 뭐, 어쩌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럼 됐군.” 결정이 났다. 이번엔 균열에 들어간다. *** “호외요! 호외!” 공교롭게도 난쟁이 놈이 불참을 선언했던 바로 다음 날, 도시 전체에 공문이 붙었다. 왕가에서 정식으로 배포한, 차원 붕괴와 관련된 소문이 사실 무근의 낭설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 말했던 대로 됐군.’ 공문엔 타루테인 학파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연구에 눈이 멀어 의도적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던가? 조금 놀라웠다. 4만 GP를 내고 구매한 정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예견할 줄이야. “하하핫! 비요른! 그거 봤는가?” 아무튼 저녁이 되자 난쟁이 놈이 나를 찾았다. 그리고 기쁜 얼굴로 어제 했던 본인의 선언을 철회하며, 이제 미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근데 이걸 어쩌나. 난 이미 어느 균열에 들어갈지까지 다 결정을 해 놨는데. “뭐? 같이 들어가자고? 이미 의뢰를 받아서 그렇게는 못 한다!” “응? 의뢰라니?” 나는 준비했던 답변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미샤와 둘이서 사냥해 봤자 얼마 못 벌 게 분명했다는 것. 그래서 의뢰를 받았다는 것. 미궁 내 호위 의뢰라서 도시로 돌아올 때까지 옆에서 지켜 줘야 한다는 것까지. “혹시… 안 한다고는 못 하나?” “이미 선금까지 받았는데, 약속을 어기란 건가?” “그, 그건 아니네만…….” 교섭의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답변. 이에 난쟁이 놈은 그저 어깨를 내리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야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번 일의 원인은 결국 본인의 불참 선언에 있을진대. ‘쩝, 저러는 걸 보니 왠지 또 측은해지네.’ 이번이 아니었어도 결국엔 핑계를 대고 미샤와 둘이 빠져나왔을 것이다. 다섯이서 균열에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눠 먹을 게 늘어난단 건 둘째치고,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커진다. ‘그래도 이게 맞는 거겠지.’ 나는 애써 미련을 지웠다. 단순 동료를 넘어 신뢰 관계를 구축한 미샤라면 모를까. 다른 삼인방에게까지 ‘히든 피스’를 오픈하는 건 미련한 행동이다. 쿵. 이내 난쟁이 놈이 떠나고 문이 닫히자, 미샤가 쪼르르 달려왔다. “호위 의뢰라닝? 언제 그런 걸 받았냥?” “신경 쓰지 마라. 대충 둘러댄 거니까.” “둘러대다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미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음 탐사 땐 균열에 들어갈 거라고.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방법이 있다고. “설마 그것도 도서관에서 알아낸 거냥?” “뭐, 그런 거다.” “음… 근데 왜 히쿠로드한텐 비밀로 하냥? 같이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니냥?” 너무도 순수하게만 들리는 질문.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미샤, 서리혼령 가락지로 영혼수와 계약했던 일에 대해 누구한테 말한 적 있나?” “응? 안 했는뎅?” “정말 아무한테도?” “네가 비밀로 하랬잖냥.” “그랬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만약 히쿠로드였다면 어땠을 거 같나? 같은 부탁을 했을 때, 잘 지켰을 거 같나?” 미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히쿠로드라면 술 먹고 여기저기 나불거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당.” “드왈키나 로트밀러라면?” “음…, 왠지 드왈키는 맨정신으로도 말실수했을 거 같고, 로트밀러는… 잘 모르겠당.”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한 걸까? 미샤의 예상은 놀랍게도 내가 속으로만 했던 생각과 거의 일치했다. 로트밀러만 빼고. ‘사실 그 아저씨가 제일 알기 쉬운데 말이지.’ 로트밀러라면 비밀을 지켰을 거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고 있는지 혼자 고민하며 속으로 수상하게 여겼겠지. “아! 그래서 비밀로 한 거구낭!” 아무튼 이쯤 되자 미샤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듯했다. 다만,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겼을까? “그럼 나는? 왜 나한테는 말해 주는 거냥?” 이유는 여럿 있다. 미샤는 의외로 꼼꼼하고 입도 무겁다. 그런 주제에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 한다. 그래서 방금처럼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비밀이 퍼졌는지 아닌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마디면 충분하겠지.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히끅!” 미샤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 미궁이 열리는 날까지 앞으로 8일. 이번에도 역시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자니 빠르게 지나갔다. 짧게 요약해 보자면……. 첫날. 행선지가 균열이니만큼, 준비할 것들이 꽤나 있었다. 우선 장비. [장비를 또 산다고?] [사는 게 아니라 인챈트다.] 내 메이스와 미샤의 쌍검에 속성을 부여했다. 「장비에 뇌전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해당 장비로 가한 피해량의 일부분이 전격 속성으로 변환됩니다.」 비용은 합쳐서 60만 스톤. 고작 30일간 유지되는 기간제 인챈트지만, 둘이서 균열을 클리어하려는 거니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할 거면 영구 부여를 하면 안 됐냥?] [그랬으면 스무 배는 더 비싸다.] […….] 그리고 소모품도 몇 가지 구매했다. 천둥초, 라이트닝 스크롤 등 전격 속성과 관련된 물품들. 다 합쳐서 30만 스톤 정도밖에 안 됐지만, 수요가 많은 물품이 아닌지라 여기저기 발품을 팔러 돌아다녀야 했다. 아, 마지막으로 또. […이 비싼 걸 정말로 사는 거냐?] [확장형 배낭도 샀으면서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지?] [그렇지만 이건 소모품 아니냐! 쓰면 사라지는!] 고심 끝에 최상급 포션도 한 병 구매했다. 구매가는 103만 스톤. 다만, 최상급 포션은 균열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예전부터 한 병 비축해 두고 싶었던 걸 이제야 큰맘 먹고 질렀을 뿐. 신관 없이 돌아다니는 탐험가에게 최상급 포션은 또 하나의 목숨과 같다. [막상 쓸 일이 생기면, 돈이 아깝단 생각은 안 할 거다.] [음, 그건 그런데…….] [어차피 둘이서 내는 거니 그리 부담될 것도 없지 않나.] 참고로 여기까지 들어간 약 200만 스톤의 비용은 전부 공용 계좌에서 끌어다 썼다. [으으, 그럼 이제 돈 쓸 일은 끝난 거냥?] [일단 너는 끝이다.] [……?] 둘째 날. 아침 댓바람부터 성지로 향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부족장이 반겨 주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네 소문은 들었다! 참으로 대견하구나! 기사 분쇄자라는 멋진 이명을 새로 얻다니!] 짧게 지나쳤던 지난번과 다르게, 부족장은 한참 동안 나를 칭찬해 주었다. 성지에서도 이미 나에 관한 소문이 쫙 퍼져서 어린 전사들이 잔뜩 달아올라 있다던가? 여하튼 의미 없는 시간이었기에 대충 대답해 주고는 주술사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크크크, 전사야 수완도 좋구나. 고작 두 달만에 그만한 돈을 벌어 오다니.] 무려 400만 스톤을 지불하고서 불사자 각인 4단계를 활성화시켰다. 「불사자 각인 4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정신력 및 영혼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정신 수치가 +40 상승합니다.」 「이능 수치가 +40 상승합니다.」 이번에 남작과 얽히며 한탕 크게 번 것이 통째로 날아갔지만……. 결국 남는 장사긴 했다. 정신계 마법 혹은 상태 이상에 강한 내성 보너스를 주는 ‘정신력’은 둘째치고. MP 역할을 하는 ‘영혼력’은 레벨 업과 몇몇 정수를 제외하면 올릴 방법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 셋째 날. 거의 반죽음 상태로 숙소로 돌아와 기절한 뒤, 일어나자마자 MP 변화를 체크했다. [거대화] 유지 시간이 1.5배 늘었다. [아침부터 왜 나와서 그러고 있냥? 어서 씻고 와랑. 식사부터 하자.] 때마침 미샤가 도착했기에,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언제부턴가 매일 아침이면 있는 일상. [도서관에 간다고? 혹시 같이 가도 되냥?] [네가……?] [뭐냐, 그 표정은! 나도 가끔은 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당!] 식사를 마친 후에 미샤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파르시티에브.] 라그나는 일반 [서적 탐지] 마법을 써 줬다. [특수 서적 탐지] 마법이 아니라.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더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특별히’ 몰래 해 주는 것이니만큼, 남들 앞에서는 써 줄 수 없다던가? [음, 그럴 거면 나한테만 조용히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그러네요. 칼스타인 님이라고 하셨나요? 방금 들으신 건 부디 잊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뭐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미샤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넷째 날. 마탑에 방문해 레이븐의 연구를 도왔다. 참고로 이번이 마지막 협조였다. 그야 횟수를 모두 채웠거든. 이제 앞으로는 매주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 [고생하셨어요.] [알아주다니 고맙군.] [거, 진짜 말을 참……. 아무튼 죽지 마시고요.] 비즈니스 관계였던 만큼 작별 인사는 짧았다. 다만, 예상과 달리 레이븐은 내 마탑 출입증을 회수해 가지 않았다. [뭔가 일이 생기면 오세요. 아,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와서 귀찮게 하란 뜻은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얀델 씨는 왠지 특이한 일에 자주 얽히는 거 같으니까. 저도 근황이 궁금하긴 할 거 같거든요.] [알았다.] 참고로 나가는 길에 늙은이와 마주치는 일도 있었는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분노나 허무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그제야 한 가지 깨달았다. 이 늙은이는 첫 대면에서부터 날 악령이라 의심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때 괜히 친근한 척 굴었던 거구나.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일곱째 날. 이후로는 일상과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아침이면 미샤와 함께 밥을 먹었고, 낮에는 미샤와 대련을 하며 수련을 했고, 저녁엔 도서관에 가서 잠시 책을 읽었다. 그렇게 때는 흘러 바로 지금. “다들 물러나십시오!” 마침내 기다려 왔던 시간이 찾아왔다. 솨아아아아-! 수많은 탐험가가 자리한 차원 광장. 그 중심부에서 터져 나가기 시작한 눈부신 광채. “얀델의 아들 비요른! 오늘 해 준 조언은 고맙다! 먼저 들어가겠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도시와 미궁이 연결된 즉시, 지근거리에 있던 바바리안 무리가 포탈 속으로 달려 나갔다. 감사 인사까지 할 줄 알다니. 우리 바바리안은 왜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걸까? “하하핫! 자네처럼 좋은 선배를 두다니, 참 부러운 친구들이군.” “그저 길을 알려 줬을 뿐이다.” “거, 부끄러워하기는.” 참고로 현재 내 옆에는 난쟁이 놈과 로트밀러, 드왈키가 있다. 한 달을 꽁으로 날릴 순 없으니 세 명이서라도 들어간다는 모양. “조심해라. 누가 친절하게 굴면 그놈을 꼭 의심하고.” “하하핫! 자네는 내가 저 어린 바바리안들처럼 보이나?” …비슷해 사실. 뭐, 로트밀러가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마는. 이번엔 2층에서만 있을 거라니, 셋이서도 크게 위험한 일은 없겠지. “그럼 우리도 슬슬 들어가 봐야겠는데……. 자네들은 안 들어가나?” “아, 우리는 아직 의뢰인이 오지 않아서.” “그렇군. 그럼 내일… 아니, 나중에 보세!” 여하튼 짧은 인사를 끝으로 셋이 먼저 미궁에 들어섰다. 다만 나는 제자리에 머물며 사람이 빠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미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비요른, 우린 안 들어가냥?” “기다려 봐라.” “응? 언제까지?” 아, 거참… 이래서 뉴비들이란. 그냥 기다리라면 기다릴 것이지. 「1층 수정 동굴에 입장했습니다.」 그럼 경험치가 복사된다니까? *** 「비요른 얀델」 레벨: 4 육체: 386.1 / 정신: 238.3(+40) / 이능: 342.4(New +40) 아이템 레벨: 967 종합 전투 지수: 1208.55 (New +80) 획득 정수: 시체 골렘 - Rank 7 / 뱀파이어(B) - Rank 5 / 오크 히어로 - Rank 5 101화 소문 (3) 미궁 입장과 동시에 찾아온 어둠. 빠르게 횃불을 꺼내 주변을 밝힌 뒤, 코앞에 보이는 비석 위로 손을 가져다 댄다. 후, 이게 얼마만이지? 후우우웅-!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비석. 그곳에서 뿜어지는 오색의 광채. 그리고 왠지 심장이 쿡쿡 찔리는 듯한, 인생을 날로 먹을 때 특유의 감각까지. 「최초로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2」 어느새 구체의 형태로 변해 일렁거리는 빛무리를 보며 미샤가 중얼거렸다. “뭐, 뭐냥? 설마 방금 포탈을 연 거냥?” 하긴 이런 개꿀 버그가 있는 줄도 몰랐겠지. 나는 예전에 아이나르에게 해 줬던 설명을 그대로 반복했다. “차원 불안정 현상? 그걸 이용하면 이렇게 된다고?” 이해를 포기해 버렸던 아이나르와 달리, 제 딴에 이해라도 해 보려는 미샤. 물론 잘될 턱이 없었다. 제대로 된 원리는 나조차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단지 어쩌다 보니 알게 된 ‘현상’을 이용하고 있을 뿐. “…로트밀러가 불쌍하다.” “응?” “이런 방법이 있단 걸 알게 되면… 엄청 허무할 거당. 내가 그 반지로 영혼수와 계약하고서 그랬듯이.” 아, 그 소리였구나. 맥락도 없이 불쌍하다기에 뭔가 했더니. 확실히 로트밀러가 이런 날먹 버그를 알게 된다면 엄청난 박탈감을 느낄 게 분명하다. [지금은 아니어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내 손으로 포탈을 여는 날이 올 수 있지도 않겠나. 그게 탐색꾼으로서의 내 꿈일세.] 술자리에서 조심히 밝혔던 포부처럼, 그는 탐색꾼이란 직업에 진심이었으니까. 심지어 허튼 꿈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길 찾기 능력은 상당했으니까. 다른 층은 몰라도, 그가 미친 듯이 매달린 1층에서만큼은 상위권에 속한다. 아마 2시간 정도만 더 단축할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도 있겠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 일단 올라가지.”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미샤와 함께 포탈에 몸을 실었다. 「2층 바위 사막에 입장했습니다.」 발에 밀려 부스러지는 모래.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 칠흑 같은 어둠 속 일렁이는 횃불을 따라 음영을 드리우는 석조 잔해. “바위 사막이군.” 쩝, 왜 하필 여기래. 나는 미샤를 이끌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침반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정반대편이 걸렸으니 거의 이틀은 걷기만 하겠군.’ 아마 일반적인 방법으로 미궁에 진입했다면, 어느 목적지를 향하던 하루면 족했을 테지만……. 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겠지. 게다가 포탈 개방으로 획득 가능한 경험치는 2에 불과하지만, 영구적으로 중첩되는 종류의 것. 고작 하루 더 걷는 거로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이득이다. “으, 확실히 로트밀러가 없으니까 빈자리가 확 느껴지는 거 같당.” “…….” 약 세 시간에 걸쳐, 최외곽부인 암흑 지대에서 벗어났다. 나침반을 보고서 간다고 쳐도, 가끔 길을 잘못 들며 막다른 벽을 마주친 탓이다. “그래도 둘이서 걷고 있으니까 좋지 않냥?” “뭐라는 거냐.” “아니, 그냥… 다섯이서 시끄러운 것도 좋기는 한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뜻이당.” 처음엔 뭔 소리인가도 싶었지만, 듣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거 같다. 난쟁이 놈이나 드왈키는 말이 너무 많으니까. 솔직히 피식 웃을 때도 많긴 한데, 대부분은 듣고 있자면 진이 빠진다. “기긱!” 암흑 지대를 벗어난 뒤, 은은한 밝기의 수정 동굴 속을 걷고 있자니 계속해서 몬스터가 덤벼들었다. 서쪽 지구인 이곳의 출현 몬스터는 노움. 9등급 몬스터답게 퍽치면 악하고 죽었다. “긱……?!” 메이스 한 방에 곤죽이 되어 사라지는 진흙 인형. 잡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귀찮단 말이지. 노움의 액티브 스킬은 [일체화]. 은신계 스킬이라 반경 3m 내에 들어서야지만 그 모습이 보인다. ‘로트밀러가 있었으면, 알아서 보이는 족족 조져 버렸을 텐데.’ 5인 파티로 활동하다 와서 그럴까? 난쟁이 놈은 그러려니 해도, 그 아저씨는 조금 그립다. 항상 뒤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해 주는 척척박사 같은 포지션이라 해야 하나? 아, 드왈키도. 걔가 있으면 직접 마석을 안 주워도 되는데. “비요른, 저기 사람이 오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니, 미샤가 내 허리를 툭툭 치며 조용히 외쳤다. 기감이 예민한 수인족답게 나보다 먼저 인기척을 느낀 모양. “어쩔 거냥?” 뭘, 어쩌긴 어째. 이미 저쪽에선 한참 전에 우리를 인지했을 텐데. 철컥, 철컥. 머지않아 정면부에서 5인 파티 하나가 나타났다. 마법사와 신관이 존재하는 정규 파티. 고작 3시간만에 이곳까지 도달한 탐험가인 만큼 장비들 수준이 상당했다. ‘…적어도 6층은 되겠네.’ 그들이 어떤 정수를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배한 3등급, 4등급 소재의 장비들이 그들의 수준을 증명했다. 장비야말로 탐험가의 신분패 같은 것이니. 다만, 이는 저쪽도 매한가지였을까. “흐음.”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눈에 의문과 경계가 어린다. 그야 그렇겠지. 고작 2등급 소재의 장비를 입은 바바리안과 수인을 여기서, 정확히는 이 시간대에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후, 제발 그냥 지나가라.’ 다행히 그들은 대화를 걸어오는 일 없이 우리를 쓱 지나쳤다. 내 간절함 바람이 통했다기보다는……. 그저 그럴 시간도 없던 게 컸을 것이다. “레브론 씨, 속도를 좀 더 올리죠.” “그러리다.” 스피드 런 중인 자들이라 다행이었다. 뭔진 몰라도 우리가 여기서 나오니, 다른 경쟁자들은 더 빨리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거, 안 그래도 너네가 제일 빠른데.’ 포탈에서부터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얘네들이 가장 최선두에 있음을 알고 있다. 뭐, 그래 봤자 막상 가면 이미 열려 있는 포탈을 보게 되겠지만. “우와, 저 사람들은 진짜 뛰어서 다니는구나.” 스피드 런 중인 탐험가를 직접 본 건 처음인지, 미샤가 감탄을 토해냈다.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스쳐 지나치기까지 2초도 채 안 걸렸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인상적인 광경이었던 모양. “뭘 그렇게 보나? 언젠가는 우리도 해야 하는 건데.” “…우리가?” 미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실감 나지 않겠지. 영혼수 계약도 못 해서 가족들에게 반푼이 취급받던 게 바로 얼마 전이니까. “가만 보면 비요른 너는 진짜 포부가 큰 거 같당. 바바리안이라 그런가?” “…비꼬는 건가?” “바보야, 멋있다는 뜻이었당!” “크흠.” …얘는 가끔 너무 직설적일 때가 있다. 자기가 무슨 바바리안인 줄 아나? *** “아까 그 검사 아저씨가 낀 무기 봤냥?” “오리하르콘 소재의 그 검 말인가?” “그래, 그거! 역시 오리하르콘이 맞구낭. 그걸로 무기를 제작하려면 얼마나 할까…….” 이후로도 미샤는 아까 만난 파티에 대해 이야기를 해 나갔다. 얘는 상위 탐험가에게 동경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질시나 오만보다야 훨씬 긍정적인 감정이긴 하겠다마는……. 동경심만으로는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다. “얘기는 그만하고 발이나 움직여라.” “흥, 누가 들으면 내가 멈춰 있는지 알겠넹.” 여하튼 동쪽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자니, 점점 탐험가를 마주치는 빈도가 늘었다. 초반엔 아까 본 파티처럼 상위 탐험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준이 차차 내려갔다. 나는 시계를 꺼냈다. [18 : 57] 미궁이 열린 지 19시간이 되었다. 거의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어느덧 스타트 포인트. 즉, 1층 수정 동굴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따라서 상위 탐험가들과 마주치며 그들의 의심을 살까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후, 이건 또 생각 못 했는데.’ 막상 와 보니 이건 이것대로 눈에 띈다. “방금 봤소? 무슨 메이스 크기가…….” “배낭도 확장형 배낭인 거 같더구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탐험가들. 하긴 이상하게 보이겠지. 딱 봐도 훨씬 윗층에서 사냥해야 할 우리가 1층 중심부에 떡하니 있으니까. “저런 자들이 왜 아직 여기에…….” 슬슬 밤친구를 구해 휴식을 취할 저녁 시간. 3인, 4인으로 뭉친 탐험가들이 지나갈 때마다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 낸다.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처음 미궁에 들어섰을 때. 나도 저들처럼 밤친구를 구해 휴식을 취했다. 문제는, 처음 만났던 게 한스A였단 거지만. “갑자기 왜 웃냥?”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스A를 옆에 두고서 피곤해 뒈지겠는데도 아득바득 자는 척을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에르웬을 만나기 전까지 진짜 온갖 고생을 다 했었는데. ‘아, 걔는 어떻게 지내려나?’ 금수저 언니가 있으니 어련히 잘 지내겠냐마는 문득 궁금해진다. 일단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동료기도 하니까. 나중에 한번 찾아서 만나 보기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무렵, 한 사내가 시선에 들어왔다.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거, 눈 한번 좆같이 뜨네.’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야 하나? 날 바라보는 저 아니꼬운 시선에서 시기와 탐욕이 번들거리는 게 느껴진다. 다만, 왠지 또 웃음이 나왔다. ‘나도 진짜 많이 컸네.’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저 눈짓 한 번에 최악을 가정하며 속으로 긴장을 했겠지. 하나 그때와 나는 많이 달라졌다. 물렁해졌다기보다는……. 피식. 이제 와서 고블린을 보고 겁먹을 이유가 없다. 뭐, 얘가 고블린이라는 건 아니지만. 전투력만 본다면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 아무리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는 나라고 한들. 저 조잡한 칼에 찔려 죽는 내 모습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음,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왜 볼수록 좆같은 기분이 들지?’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너.” 돌연 발을 멈추고 녀석을 바라보자, 벽에 등을 기댄 자세에서 흠칫하며 일어선다. 아니꼽던 눈빛엔 오직 경계심만 가득하다. “나한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어, 없소만……?” “근데 왜 그렇게 쳐다보지?” “…미안하오.” 사내가 사과를 하자, 미샤가 내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비요른! 너 갑자기 왜 그러냥? 이 사람이 뭘 잘못했다고…….” 왠지 예전에 길가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도 같다. 양아치가 행인에게 시비를 걸자, 같이 있던 애인이 만류하던 그거. 아니, 근데 얘만 유독 눈빛이 좆같았다니까? “너, 이름이 뭐지?” “한스트 이반이오.” “한스트? 한스가 아니라?” 내 질문에 사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갑자기 웬 야만인이 와서 이름 갖고 장난치니 모욕적이었던 모양.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정말 한스트인 게 맞나? 잘못 알고 있던가 한 게 아니라?” “저, 정말 한스트요…….” 흠, 그럼 진짜 기분 탓이었던 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사내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워, 원래는 한스였는데, 너무 흔한 이름이라 바꿨소.” “…뭐?” 씨발, 어쩐지 기분이 엿같더라니. 그래도 개명까지 했다니 나도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가던 길이나 마저 가기로 했다. 아, 물론 그 전에 조언은 해 줘야겠지만. “절대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지 마라. 계속 한스트로 살라는 말이다. 알겠나?” “그, 그러리다.” 한스트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드드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듯,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현상에 미샤가 나를 바라봤다. “비요른?” 의문의 해답을 바라는 눈빛.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미궁에서 이런 현상을 동반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니까. “달려라!” 곧 균열이 열린다. 그것도 아직 1일 차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씨발.’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원래 균열은 ‘자연 생성’되려면 최소 3일 차가 되어야만 한다. 그 말인즉슨. ‘대체 어떤 새끼지?’ 누군가 선수를 쳤다는 뜻이다. 내가 하려던 방법을 사용해서. 102화 마피아 (1) “뭐, 뭐야! 갑자기…….” “지진……?” 땅을 타고 퍼지는 울림에 자고 있던 탐험가들이 깨어난다. 나는 깨달았다. 한 번 한스면 영원히 한스라는 것을. ‘설마 개명도 소용없을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쉬며 한스트……. 아니, 이젠 앞으로 한스G라 기억될 사내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나, 나는 아무짓도 안 했소!” 그래, 그렇겠지. 여기에 있는 네가 어떻게 균열을 열었겠어. 그저 내 운이 지랄 맞을 뿐이다. “비요른?” “달려라!” 나는 미샤를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그야 시간이 없으니까. 별다른 설명도 없었는데 미샤가 물었다. “…설마 균열이 열린 거냥?” “그래.” 내 인생이 그렇듯 또 좆같은 일이 터졌다. 물론 내 목숨을 위협하는 종류의 좆같음은 아니다. 하지만……. ‘니미럴, 내가 얼마를 썼는데.’ 입장할 균열을 선택하고, 그에 맞춰 물품을 구매했다. 신이 나서 뇌전 속성 인챈트까지 했다. 그런데, 어마나 세상에 이게 뭐람. “비요른! 저기!” 어느 놈인지 몰라도 내 계획에 똥을 뿌렸다. 플레이어일까? 아니면 단지 이쪽 세상에 지식이 많은 자? 그건 뭐, 들어가 보면 감이 오겠지. 후우우웅! 미샤가 가리킨 방향에 포탈이 형성됐다. 아마 지금쯤, 1층 전역에 수천 개는 족히 생성됐을 포탈. “미샤!” 혹시 떨어질 수도 있기에 미샤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포탈에 몸을 들이밀었다. *** 「캐릭터가 1층 균열에 입장했습니다.」 *** 콰앙-! 묵직한 소음을 내며 착지한 뒤, 안고 있던 미샤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곧장 주변을 확인했다. 겨우 막차를 탔던 것인지, 이미 균열 안에는 세 명의 남녀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우선 한 명씩 면밀히 살펴봤다. “오, 바바리안과 수인이라니 벌써 듬직하군요. 반갑습니다. 칼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일단 인간 남자. 키는 170 초반에 무기는 검이다. 첫인상을 동물로 표현하자면……. 음, 쥐새끼 정도면 적당할 거 같네. “…짐은 되지 않겠군. 아브만 우리크프리트다.” 두 번째는 수인족 남자. 머리 위에 돋아난 둥근귀로 유추하건대, 7대 부족 중 하나인 흑곰족 출신인 거 같다. 특징으로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 그리고 공성 병기를 연상케하는 초대형 석궁 정도겠지. “안녕하세요. 젠시아 네이프린이라고 합니다. 무기는 여기 이 검을 쓰고요. 폐가 안 되게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은 인간 여자. 키는 160 중반 정도에 곱상한 얼굴을 지녔다. 또한, 놀랍게도 흑발에 트윈테일이다. 안 어울리는 건 아닌데, 이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진짜 있을 줄이야. 아무튼, 이제 우리 차례였기에 내가 대표로 소개를 했다. “나는 토르의 아들 비욘, 여기는 미셸이다. 보다시피 일행이지.” “응?” 응은 무슨 응이야. 가만히 있으란 눈짓을 보내자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미샤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눈에 힘을 풀고서 허공을 바라봤다. …저게 얘의 포커페이스인가? 딱 봐도 이상했기에, 관심이 쏠리기 전에 대화를 주도했다. “나는 미궁 내에서 수호자 역할을 맡았고, 가장 자신 있다. 너희들은 뭘 잘하지?” 균열에 들어섰을 때, 서로 전력을 확인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절차. “저는 검이요! 아, 그리고 고블린 궁수의 정수를 먹었고, 어려서부터 탐색꾼 교육을 받아서 함정이나 기계 장치에는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요.” 젠시아란 이름의 여자가 본인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고블린 검사도 아니고 궁수의 정수? 듣자마자 뭐 이런 똥캐가 있나 싶었지만, 깊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내가 키우는 캐릭터도 아니고. 애초에 장비만 봐도 초짜란 건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저는 검과 방패를 주로 씁니다. 그… 비욘 씨? 아무튼 그쪽만큼은 아니겠지만, 일단 팀 활동을 할 땐 전위에서 공격을 받아 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검방 전사 칼슨은 젠시아보단 나았지만, 결국 비슷했다. 기껏해야 2층 중반 정도? 그래도 앞선 여자처럼 순진하게 정수를 밝히진 않는 걸 보니 경험은 위인 듯하다. 음, 아니면 못 먹은 걸 수도 있고. ‘전력 외 초심자가 둘이라…….’ 뭐, 나름 예상은 했다. 히쿠로드와 레이븐과 만났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균열이 열린 지 세 달밖에 안 됐으니, 미리 알고서 대기하는 방법도 불가능하다. 그마저도 1일 차에 열렸으니 이 정도지, 아니면 2층도 못 가 본 현지인들만 득실거렸을 터. ‘그런 의미에서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나는 마지막 순번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어서 소개하란 재촉으로 받아들였을까? “보다시피.” 마초, 턱수염, 근육 속성을 지닌 곰아저씨가 등에 멘 대형 석궁을 으쓱 흔들었다. 셋 중 유일한 중견 탐험가였다. 나는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느 정도로 믿을 만한지 확실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땐 본인이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 그건 그렇지. “나는 6등급, 미샬은 7등급 탐험가다. 원래는 4층에서 주로 활동했지.” “그렇군, 나는 5등급이다.” 씨바, 중견이 아니라 상위였구나. 통상적으로 6등급은 중견, 5등급은 상위, 4등급은 최상위 탐험가라 부른다. 그만큼 6등급부터는 길드에서 승급 심사까지 하는 등, 등급 간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니까. 쓰읍, 이거 더 의심스러워지는데. “6등급 탐험가나 되는 자가 왜 여기 있지?”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쩝, 무슨 아저씨가 한마디를 안 지냐. “…원래 팀으로 활동했는데, 사정이 생겨서 둘이 들어오게 됐다. 탐색꾼이 없다 보니 아직 2층으로 올라가지 못했는데, 균열이 열려서 들어오게 됐다.” 균열을 열었을 때, 혹시 의심스럽게 여기는 놈이 있다면 그때 들려주려고 준비했던 답변. 다만……. “우연이군. 나도 비슷하다. 뭐, 원래 팀에서 나온 지는 한참 되긴 했지만.” 후, 니미럴. ‘진짜야 구라야?’ 설마 솔플을 할 정도로 터프한 화살싸개가 정말 실존할까 싶으면서도, 막상 저 마초 아저씨의 얼굴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래도 일단 이 아저씨를 가장 조심해야겠네.’ 경계 대상 1호로 곰아저씨를 지정했다. 가진 무력도 무력이지만, 정황 하나하나가 전부 수상하거든. ‘애초에 이 아저씨가 아니면, 이 시간에 2층에 가서 8등급 마석을 캐올 만한 사람도 없고.’ 물론 일단 드러난 정황만 봤을 때의 이야기다. 칼슨과 젠시아. 이 둘이 실력을 감추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아, 근데 누가 가장 먼저 들어왔나?” 이내 나는 순전히 호기심으로 하는 질문인 양, 태연하게 물었다. 과연 누가 균열을 열었는가? 사실상 셋이 한통속인 게 아니라면, 이 질문 하나만으로 정체가 가려지리란 판단. 하지만……. “글쎄요? 다 같이 들어왔던 거 같은데…….” “너무 동시여서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마는.” “이상한 걸 신경 쓰는군.” 역시 날먹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단 걸까. 후, 씨발. 이건 뭐, 마피아 게임도 아니고. *** 정체 모를 누군가가 균열을 열었다. 이로써 내 계획은 많은 부분이 어긋났다. 일단 분배 문제부터 그렇다. “자, 그럼 결정됐군.” 의논 끝에 나와 미샤, 그리고 곰아저씨가 세 몫씩 갖고, 칼슨과 젠시아… 줄여서 ‘젠슨’이 한 몫을 나눠 갖기로 합의됐다. 탐험가의 세계는 비정한 법이니까. “그리 손해는 아닐 거다. 남는 정수는 전부 너희에게 줄 테니.” “예…….” 흔히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 핏빛 성채에서 내가 난쟁이 놈과 레이븐에게 당했던 짓이기도 했다. 참고로 나 역시 하려고 그랬고. 그야 이런 데서 양보와 배려를 해서 뭐가 남겠는가. ‘쩝, 생긴 거랑 다르게 인정이 많네. 난 마석도 안 줄라고 그랬는데.’ 내 계획은 3일 차쯤 균열은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1층 현지인들 사이에서 전부 독식하며 짬처리만 하게 하려 했다. 헌데 곰아저씨란 변수가 생겼고, 분배에서도 상당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수호자 정수는 미샤가 먹기로 했지만……. 넘버스 아이템 혹은 균열석이 드랍될 시, 나는 곰아저씨와 주사위를 굴려야 한다. ‘하, 주사위는 자신 없는데.’ 벌써 속이 쓰려 온다. 질 자신이 아니라, 이길 자신이 없거든. 그래서 주사위란 변수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그럼 슬슬 출발하지.” 애써 미련을 털어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내 뒤에는 양옆으로 ‘젠슨’이 있고, 그 뒤에는 곰아저씨가, 그 뒤에는 미샤가 있는 진형. 지직. 살얼음 위를 걷듯, 걸을 때마다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딱히 틀린 묘사도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얼어붙은 호수 위를 지나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부분이었다. ‘준비해 온 물건은 쓸 수 있겠군.’ 1층 균열은 총 네 개다. 타입에 따라 출현 몬스터, 난이도는 물론이고 보상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 고심 끝에 나는 한곳을 택했고, 공교롭게도 그게 바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이었다. [빙하굴] 2층 짐승의 소굴에서 출현하는 8등급 몬스터. 그 몬스터의 마석을 제단에 바치면 열리게 되는 균열. 참고로 선택 기준은 오로지 미샤였다. 뭐, 나도 이번에 4레벨이 되며 정수 자리가 하나 남긴 했지만……. ‘딱히 먹을 만한 게 없단 말이지.’ 균열이라고 해 봤자 1층 균열이다. 수호자조차 7등급에 불과하며, 내게 어울리는 정수를 뱉는 녀석들도 아니다. ‘애초에 이 아저씨가 정수를 흔쾌히 양보한 것도 그래서일 거고.’ 아무튼 그래서 당장은 미샤를 키우고, 이를 이용해 나중에 더 좋은 정수를 빈자리에 채워 넣는 쪽이 효율적이리라 판단했—. 어, 아니 근데 잠깐만. 왠지 지난번에도 이랬다가 아이나르가 성지로 떠났던 거 같은데……. ‘설마 이번에도 그러진 않겠… 지?’ “왜 갑자기 멈추나?” “아무것도 아니다.” 문득 피어난 상념을 털어 내며 주변에 집중했다. 그래도 일단 균열에 들어온 거 아닌가. 게다가 정체 모를 마피아도 있으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솨아아아아아-. 얼어붙은 설산. 위에서 흩날리며 뿌려지는 눈송이. 그리고 얼음에 반사되며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 빛. ‘맨날 어두컴컴한 데만 있다가 이런 데 오니까 낯설긴 하네.’ 약 30분쯤 걸어가자 호수 지대가 끝나고, 땅속으로 이어진 수상한 굴이 나타났다. 참고로 몬스터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오오오오!” 7등급 몬스터 예티. ‘빙하굴’에서만 출몰하며, 시작부터 등장하는 문지기급 정예 몬스터. 우리를 보자마자 위협적인 함성을 토해 내는 놈을 보며 젠시아가 중얼거렸다. “서, 설마 저걸 잡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걸까요?” 대답은 곰아저씨에게서 나왔다. “이곳이 어떤진 모르지만, 균열에선 대개 몬스터가 있는 곳이 길인 법이지.” 게이머로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답변. 왠지 더 수상해지는데……. “괜히 나섰다가 죽지 말고, 너희들은 뒤에 빠져 있어라.” “…정말 그래도 되나요?” 곰아저씨의 친절한 배려에 ‘젠슨’이 나와 미샤를 바라봤다. 하긴, 고작 10%의 마석 때문에 저런 놈과 목숨 걸고 싸우란 것도 양심 없긴 하지. 그래서 그냥 그러라고 했다. 애초에 옆에서 깔짝이고 있으면 불편하기만 할 거 같고. “내가 먼저 하지.” 이내 곰아저씨가 초대형 석궁을 처음으로 등에서 내려놨다. 그리고……. 후우우우웅-!! 화살을 쏘아 내며 전투가 시작됐다. 103화 마피아 (2) 사실 곰아저씨의 석궁을 봤을 때,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저걸 진짜 무기로 쓰는 게 가능할까? 놀랍게도 그 답은, 가능하다였다. 후우우우웅-! 의심이 무색할 정도로 능숙하게 석궁에 화살을 장전한 곰아저씨는 정확하게 머리를 조준하고 쏘았다. 다만……. “쯧, 역시 막는군.” 예티는 양손으로 화살을 막으며 즉사를 면했다. 물론 말 그대로 즉사를 면한 정도에 불과했다. 화살 한 방에 꼬치가 된 양손. 예티가 괴성을 내지르며 힘을 줬지만, 화살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딱히 화살이 특이했던 거 같진 않은데. ‘설마 [갈고리 화살]인가?’ 의심되는 스킬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지금 생각할 문제도 아니고. [끼이이이익!!]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예티의 거대한 형체. 양손이 봉인된 상태였기에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건 뭘까. “나머진 너희가 알아서 해라.” 곰아저씨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석궁을 등에 걸었다. 화살 한 발만 더 쏴도 끝일 텐데도 저러는 건, 공짜 노동은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 보는 게 옳을 터. ‘탐험가라 그런가? 계산이 진짜 칼같네.’ 추후 분배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도록, 나 역시 방패를 들고 달려 나갔다. “…저게 무슨!” 칼슨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바바리안이어도 저런 괴물을 정면에서 막는 게 불가능해 보였겠지. 하지만 그건 맨땅 바바리안일 때의 얘기. 방패로 벽을 세우며 예티의 돌진을 저지한다. 콰아앙-!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지만, 이 정도야 뭐. 오크 히어로 정수를 먹은 뒤론 힘에서 밀릴 일이 거의 없어졌다. 게다가 예티라고 해 봤자 나보다 고작 키가 1m 정도 클 뿐이고. 「캐릭터가 [오한]에 의해 냉기 피해를 입습니다.」 뼈가 시리긴 한데, 아픈 정도는 아니다. “미셸!” “아, 응!” 내가 외치자 잠깐 얼을 타던 미샤가 내 어깨를 밟고 도약했다. 그리고 이제 능숙하게 다루게 된 검으로, 푸욱! 예티의 양쪽 눈두덩이를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찔러 넣었다. 과거에 쓰던 단검이 아니었기에, 예리한 검날은 예티의 뇌까지 헤집기에 충분했다. 쿠웅-! 이내 육중한 소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진 예티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예티를 처치했습니다. EXP +3」 애석하게도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쩝, 나왔으면 바로 미샤한테 먹였을 텐데. ‘일단 시작은 꽝이군.’ 이제 미샤에게 먹일 만한 정수를 가진 놈은 수호자 제외 총 다섯 마리밖에 없었다. “응?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냥? 내, 내가 뭔가 잘못했냥?” …하나는 나와 주겠지? *** “너희 둘, 호흡이 좋군?” 곰아저씨의 짧은 감상을 끝으로 우리는 이동을 재개했다. 얼음 동굴 속으로 들어가, 진형대로 움직이며 9등급 몬스터 ‘서리 늑대’를 수도 없이 처치했다. 그야 이 구간은 얘네가 전부거든. 「서리늑대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아무튼 여기서 나와 미샤가 수고를 좀 했다. 뭐, 곰아저씨도 석궁으로 패며 늑대를 처치하긴 했지만……. 미샤나 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한 방은 세지만, 광역 딜은 없는 타입인가?’ 그렇게 차근차근 곰아저씨를 분석해 가며 동굴 속을 헤매고 있자니, 첫 번째 챕터가 끝났다. 참고로 여기까지 딱 6시간이 걸렸다. 그야 엄청 헤매야 했거든. ‘…여기서도 나타나지가 않는군.’ 사실 내가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1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챕터였다. 그야 핏빛 성채의 지하 감옥처럼 지형 지물이 똑같았으니까. ‘좌, 좌, 우, 우, 좌, 7연속 직진에, 좌…….’ 일정 간격마다 등장하는 기둥. 이를 통해 길을 찾으려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떠보려고 그러지 않았다. ‘균열 여는 법도 아는 얘가 이 쉬운 패턴을 못 외우진 않았을 거고.’ 아무래도 둘 중 하나인 거 같다. 마피아가 플레이어가 아니던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던지. ‘뭐, 계속 지켜보면 언젠가 틈을 보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어진 두 번째 챕터. “뭔가 기분 나쁜 동굴이네요…….” 동굴 끝에서 나타난 얼음 계단을 타고 더욱더 지하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도 나는 일행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여기에 히든 피스가 하나 있거든. 별건 아니고, 세 번째 기둥을 부수면 영약 하나가 나온다. 복용 시 1회에 한해서 냉기 저항력을 올려 주는 물건. ‘이것도 챙겨 가지 않는다라…….’ 포인트를 지나쳐 어느덧 계단 끝까지 내려왔음에도 이상 행동을 하는 자는 없었다. ‘하긴, 알아도 이렇게 티 나는 짓은 안 하겠지. 나중에 다 끝나고 혼자 와서 챙겨가면 되는데.’ 섣불리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자고로 적이란 강하게 상정할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엄청 내려온 거 같은데, 의외로 환하군요.” 칼슨이 내 뒤에서 중얼거렸다. 나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마치 동굴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이뤄진 것처럼 하얀빛을 뿜어내는 얼음벽들. “뭔가, 예쁘네요.” “응응,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당.” “어, 근데 저건 뭘까요?” 미샤와 공감키 어려운 주제의 대화를 나누던 젠시아가 한 곳을 가리킨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마주한 거대한 공동. 딱 봐도 눈에 띄는 토템 비스름한 것이 중심부에서 존재감을 비추고 있었다. “앗! 만졌더니 빛이 나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뒤로 물러나랑.” “아, 네!” 혹시 뭔가 잘못이라도 했을까 안절부절 못 하는 젠시아. 곰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뭘 놀라고 있나. 어차피 그게 열쇠일 거 같은데.” “열쇠요?” “뭐, 몬스터 몇 마리 나오고 그다음엔 길이 열리겠지.” 이번에도 역시나 게이머스러운 사고방식을 보여 주는 곰아저씨. 실제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정정할 부분이 몇 있기야 하겠다마는.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폭군이 깨어납니다.」 이 챕터에서는 몬스터 몇 마리 나오는 게 아니라, 아예 최종 보스 몹이 등장한다. 물론 그전에 잡몹들부터 쏟아내지만. 드드드드드드. 공간 전체가 진동하며 얼음 가루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막을 찌르는 하울링이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와아아아아아-!!] 위압감만큼은 계층 군주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포효. 「폭군의 존재를 감지한 고대의 마수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쨍그랑! 이내 사방을 에워싸던 얼음벽이 한 겹씩 벗겨지며 마수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르르…….” 갓 해동되어서 힘이 없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마수들. “어, 어떡하죠?” “허,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곰아저씨의 쿨한 중얼거림이야 어쨌든, 내가 오더를 내렸다. “계단 쪽으로 가자. 그쪽엔 벽이 없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곰아저씨도 내 의견에 수긍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 첫 번째 웨이브에서는 서리 늑대가 스무 마리가량 등장했고, 두 번째부터는 8등급 몬스터도 조금씩 등장했다. [캬아아악-!] 짐승의 소굴에서 이미 경험치 수급을 끝냈던 샤벨 타이거와 웜 스톤, 그리고 여기서만 등장하는 아이스 골렘. “왠지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거 같아요……!” “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시간이 갈수록 중첩되는 둔화 오라를 뿌려 대는 놈이기에 보이는 족족 메이스로 박살을 냈다. 「아이스 골렘을 처치했습니다. EXP +2」 애초에 미샤와 나 둘이서 클리어를 각오하고 온 균열이니만큼, 크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뭐, ‘젠슨’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겠지만. 그래도 다음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싹 정리할 수 있는 게 어딘가.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답도 없지만, 그 반대면 나름 무난한 챕터긴 하지.’ 약 30분에 걸쳐서 도달한 아홉 번째 웨이브. 여기서 예티가 한 번 더 출현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그땐 문지기급에 불과하다면, 이번엔 중간 보스급은 된다고 해야 할까? [크오오오-!!] 하급 몬스터들과 함께 등장한 예티. 그것만으로도 난이도가 몇 배 올라가는데, 이번에 나오는 얘는 ‘상위 변이종’이다. 쉽게 말해, 네임드라는 뜻. 참고로 네임드에게는 좀 더 높은 지능과 개별 명칭, 그리고 고유의 역사가 있으며……. 「설원의 군주 카툼바가 [진압]을 시전했습니다.」 몬스터 주제에 다른 개체의 이능을 사용한단 특징이 있다. “커헉! 뭐, 뭐야! 방금 왜 몸이…….” 이 예티가 가진 추가 스킬은 스톤 골렘의 [진압]. 예전에 약탈자 새끼들에게 당해 본 적도 있는 바로 그것. 파훼법은 간단하다. “커헉! 이, 이번에도 또……! 다들 조심하십시오! 저기 저놈이 뭔가 이상한 걸 쓰는 게… 크흑!” 저기 칼슨처럼 멈출 때마다 주변 잡몹한테 처맞든가. “으극.” 혹은 미리 알려 준 대로, 미샤처럼 혀를 씹어서 출혈 상태를 지속하든가. 그도 아니면……. 「캐릭터의 항마력이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해당 효과에 완벽하게 저항합니다.」 항마력 스탯을 챙겼든가. [진압]은 일시적 ‘행동 불가’라는 사기성 능력을 지닌 만큼, 파훼가 쉬운 편에 속한다. 하긴 그러니까 8등급 몬스터인 거겠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야성 분출]을 사용해 어그로 수치를 올린 뒤, 앞으로 뛰쳐나갔다. ‘젠슨’이 거의 반쯤 죽어 가는 거야 어쨌든. 다음 웨이브 전까지 얘를 처치하지 못하면 나라도 꽤 곤란해질 테니까. 「캐릭터가 [오한]에 의해 냉기 피해를 입습니다.」 내가 중심부에 서자, 예티… 그러니까 이름이 카툼바였던가? 아무튼 이 새끼를 필두로 온갖 잡몹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카툼바에게만 집중했다. 그야 9, 8등급 몬스터들이 물어 재끼고 해 봐야 이젠 간지러울뿐인데다가……. “혼자 또 그러케 가면 어뜨카냐!” 혀를 씹으며 발음이 더 구려진 미샤도 즉시 나를 뒤따르며 주변 몹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쌍검으로 저러니 무슨 칼춤 추는 거 같—. 「설원의 군주 카툼바가 [냉기 분출]을 시전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판 탓일까? 놈이 토해 낸 눈보라를 미처 피하거나 막아 내지 못했다. 냉기 저항이 없다보니 피부가 아려 왔지만……. ‘나머지는 멀쩡하네.’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몸뚱이다 보니 [동상] 판정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 나는 더더욱 적극적으로 예티 놈과 접근전을 펼쳤다. 그때였다. “죽기 싫으면 얼른 튀어라.” 곰아저씨가 내게 들리도록 읊조렸고,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이후 사용하는 액티브 스킬의 효과가 영혼력에 비례해 상승합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 물질]을 시전했습니다.」 어째선지 내 본능은 말했다. 저 아저씨의 경고를 듣자고. 타닷. 땅을 밀쳐 내며 뒤로 거리를 벌린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화살이 쏘아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예티의 머리통에 박힘과 동시에 불길을 토해 내며 폭발했다. 반경은 약 3m 정도. 레이븐이 쓰던 광역 마법에 비하면 그리 넓은 범위라 할 수는 없지만……. “무슨 화살이 저, 저러냥?!” 반경 내에 몬스터가 전부 죽었다. 따라서 나는 조금씩 수집해 가던 곰아저씨의 정보를 수정했다. 단일형 극딜러인 줄 알았는데…….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씨발, 너 있었구나. 광역기. *** 곰아저씨의 광역기. 사실 저게 광역기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전력을 발휘해 준 덕에 아홉 번째 웨이브는 쉽게 끝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저, 정수다!” 조금 일찍 정산 시간을 갖게 됐다. 마석이야 나중에 주워도 되지만, 정수는 아니잖아? “한 번에 두 개나 나오다니, 기운이 좋군.” 곰아저씨는 정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나눠 가지라던가?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적어도 반쯤은. “저기 빨간 거는 너희 둘이 알아서 해라.” 서리 늑대인지, 샤벨 타이거인지 모를 놈의 정수야 관심 없다. 하지만……. “대신 이건 우리가 갖겠다.” 예티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자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푸른색의 정수. 칼슨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게 그 예티의 정수입니까?” “그래, 불만이라도 있나?” “그, 그럴 리가 있나요. 아닙니다.” 욕심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칼슨이 과하게 손사래 치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 아쉽다는 눈빛이긴 했지만……. 뭐, 억울하면 강해져야지 안 그래? 힘이 무적이고, 신인 세상인데. “그럼 문제는 없군.” 이내 나는 미샤를 불렀다. 그런데 얘는 또 뭔가 오해라도 했을까? “축하한다, 비요른. 넌 더 강해지겠구낭!” “뭐라는 거냐. 이건 네 거다.” “으응? 이, 이걸 나한테 준다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던지던 미샤가 흠칫 굳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질문을 해 온다. “싫다는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갖고 싶은데……,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니 오해 말고 들어야 한당?” “해 봐라.” “…이거 먹으면 얼마를 내야 하는 거냥?” 얘는 무슨 나를 악덕 사장 같은 거로 생각하는 걸까? 104화 마피아 (3) 7등급 몬스터 예티. 이놈의 정수는 나름 준수한 능력치를 지녔다. [예티] 근력 +10, 민첩 +10, 골강도 +15, 냉기 내성 +25, 냉기 감응도 +15 일단 1티어로 치는 쌍스탯이 붙었고, 골강도와 냉기 내성도 상위 티어로 분류되는 수비 능력치다. 그런데, 여기에 냉기 감응도까지 붙다니? ‘이 정도면 몇 년은 족히 쓰겠군.’ 감응도 스탯은 미샤 같은 속성계 딜러의 핵심 능력치다. 근력이 높으면 물리 대미지가 상승하듯이. 감응도 수치에 따라 해당 속성의 위력에 보정이 들어가니까. ‘역시 얘는 운이 좋단 말이지.’ 마녀의 숲에서도 느꼈는데, 미샤는 나와는 정반대 타입이다. 뭘 해도 일이 술술 풀린다고 해야 하나? 예티의 정수가, 그것도 파란색으로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P) 오한 - 모든 공격 행위에 냉기 속성 추가 피해가 부여되며, 해당 피해를 입은 대상은 냉기 내성이 감소합니다. 패시브야 색과 무관하게 공통이니 제쳐두고. (A) 냉기응축 - 일시적으로 냉기 감응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예티의 액티브 스킬 중에서도 딱 원하던 게 드랍됐다. [냉기분출]도 나쁘진 않지만, 잠재력만 비교하면 이것만 한 게 없으니까. ‘쩝, 기본 스탯만 좋았으면 졸 정수로도 쓸 수 있을 스킬인데.’ [냉기응축]은 후반부로 갈수록 빛을 발한다. 뭐, 스탯 보너스가 너무 낮단 문제 때문에 후반엔 어쩔 수 없이 지워야 하겠다마는. ‘예티가 5등급 몬스터만 됐어도 훨씬 나았을 텐데…….’ 참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만 밸런스가 잘 잡힌 게임이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대, 대체 얼마기에…….” “응?” “대, 대체 얼마기에 그렇게 뜸 들이는 거냥!” 뭐야, 아직도 이러고 있었어? “너도 알겠지만 이번에 돈을 많이 써서 그렇게 많이는 없당…….” 이쯤 되니 얘가 왜 이러나도 싶을 지경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그만큼 탐험가의 정수 분배 방식은 비정하다. 정수가 드랍되면, 일단 먹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주인이 나오면, 길드에서 공시한 평균값을 토대로 파티원들에게 돈을 지급한다. 하지만……. ‘팀원 중 구매자가 없을 때가 골 때리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정수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구매자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나 그럴 경우에도 이들은 자연 소멸할 때까지 30분을 기다리고서 탐사를 재개한다. ‘남 좋은 일은 절대 공짜로 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게 탐험가란 족속들이다. 그러나, 미샤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돈 걱정은 하지 마라. 그런 분배는 몇 번 만나고 헤어질 자들끼리만 하는 거다.” “그, 그러냥?” 난 미래를 위해 투자할 줄 아는 바바리안. 내 안전한 탐사 라이프를 위해서 미샤는 더 훌륭한 딜러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그럼 먹겠당……?” “왜 자꾸 내 눈치를 보나. 어서 먹어라.” “으, 진짜 먹는당?” 거,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지. 탐험가 생활을 오래한 미샤는 무언가를 대가 없이 받는다는 게 어색해 보였다. “뭘 망설이나? 나는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준단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기는 한데……. 아아, 나도 모르겠다. 진짜 먹는당!!” 기세 좋게 외친 것과 달리, 미샤는 조심스레 정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샤 칼스타인의 영혼에 [예티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푸른빛을 뿜어내며 미샤의 몸속으로 휘감겨 들어가는 정수. “…2년 만이라 그런가? 느낌이 되게 이상하당.” “곧 적응이 될 거다.” 예티의 상세 정보는 이따가 시간이 나면 자세히 설명해 주기로 하고, 나는 등 돌려 ‘젠슨’ 무리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쪽도 상의가 끝난 모양인데…….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지?” 내 질문에 칼슨이 조심스레 답했다. “저… 이건 아무도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금 의외인 결과였다. 기껏 나온 정수를 버리겠다고? 그것도 초심자 새끼들이? “그게… 들어 보니 이 정수가 서리늑대에게서 나오는 모습을 젠시아 양이 봤다더군요.” “그래서?” “서리늑대라면…… 제게는 맞지 않는 정수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나는 칼슨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물었다. “혹시 서리늑대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9등급 몬스터 서리늑대. 등급은 낮지만, 균열을 제하면 6층에 도달하고서야 만날 수 있기에 이놈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1, 2층 탐험가가 이런 걸 알고 있다?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결코 흔한 경우는 아닐 터. “그…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9등급 정수이지 않습니까? 이따가 더 좋은 정수가 나올지도 모르고…….” “…그렇군.” 조금 미심쩍긴 하지만 대답만 보면 흠잡을 부분이 없었다. 바깥이었다면 모를까. 이곳은 정수 드랍률이 무지막지하게 상승하는 균열 속 아닌가. 정수 자리가 하나뿐인데, 9등급 정수를 채워 넣기엔 뭔가 아쉬웠겠지. “아, 물론 남는 걸 가져가겠다는 거지, 다른 뜻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으니 변명할 거 없다.” 칼슨의 인터뷰를 끝낸 다음엔 젠시아 차례였다. “너도 이 자와 마찬가지인가?” “네… 저도 한 자리밖에 없어서, 조금 신중히 하고 싶거든요…….” 신중히라. 고블린 궁수의 정수를 처먹은 검사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지만……. “그… 정수를 지우려면 돈이 엄청 들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지난 실수에서 교훈을 얻었다 이건가. 이러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죄송해요. 기껏 저희를 위해 양보해 주셨는데.” 결국, 두 사람의 인터뷰 모두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쩝, 한 명 정도는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원래 이 정수를 먹는 놈이 나오면, 그놈은 용의 선상에서 지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정수를 취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답변 역시 군더더기가 없었다. ‘씨바, 전부 다 한패인 건 아니겠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도 나는 이만 상념을 끝냈다. 그야 곧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될 차례니까. “그나저나… 이제 전부 끝난 걸까요?” 젠시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지직, 지직- 중간보스로 나온 예티를 일찍 처리하며 생겼던 자투리 시간이 끝나고, 두 번째 챕터의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됐다. 이미 아홉 겹의 얼음벽이 부서지며 이전보다 4배가량 넓어진 장내. “위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천장이 부서지며 직경 3m의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와아아아아아-!!] 가죽 위를 덮은 회백색의 털. 척추를 타고 올라가 목 주변을 덮은 갈기. 이족보행을 하며, 날카로운 손톱으로 적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게 주특기인 7등급 몬스터. “…라이칸스로프당!” 라이칸스로프. 미샤의 외침에 곰아저씨가 의문을 표했다. “라이칸스로프라기엔 덩치가 너무 크지 않나? 손에 저 몽둥이는 뭐고?” 합당한 의문이다. 저놈이 우리가 들어온 균열의 최종 보스. 빙하굴의 수호자, 폭군 타룬바스란 걸 알지 못한다면은. “조심하는 게 좋겠군.” 본능적으로 쉬운 적이 아님을 직감했는지, 곰아저씨가 처음으로 긴장하며 내게 조언을 해왔다. 물론, 나는 대충 흘려들었다. 그야 최종보스긴 하지만……. 이놈과 싸우는 건 좀 더 나중이 될 테니까. “엇, 조심해랑!”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놈의 등장에 다들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이후를 대비했다. 그리고 그때. 「침입자를 발견한 폭군 타룬바스가 크게 분노합니다.」 「폭군 타룬바스가 [얼음분쇄]를 시전합니다.」 놈이 맨바닥에 몽둥이를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온 사방이 진동할 만큼 커다란 충격. 이내 천장 때처럼 바닥에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더니……. “어, 어?” “비, 비요른!!” “…바닥이 무너진다!” 지면이 붕괴하며 우리는 추락했다. “으아아아아악!!” 세 번째 챕터로 넘어갈 차례다. ***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빙하굴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저체온증]이 부여됩니다.」 「민첩 수치가 대폭 하락하며, 받는 냉기 피해가 2배 상승합니다.」 *** “푸흡!”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며 그간 참아 왔던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지면을 향해 터덜더덜 걸어나가 바닥에 몸을 뉘인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빌어먹을 현실 패치.’ 게임 속에선 로딩창만 기다리면 되었다. HP가 상당량 깎이긴 했지만, 물가에 나온 상태에서 세 번째 챕터가 시작됐다. 한데 실제로는 어땠는가.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우리가 떨어진 곳엔 지하수맥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조류에 휩쓸리듯 여기저기 박아대며 급물살을 타야 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폭포 아래로 내던져지고 있었다. ‘HP가 깎이는 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커브 구간마다 꼬라박았더니 삭신이 쑤신다. 이대로 잠시만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역시 쉬는 건 내 팔자에 어울리지 않겠지. “비, 비요른! 괜찮냥? 정신 차려… 어, 어쩌지? 아! 그, 그게 있었지!” 왠지 시끄러워 눈을 뜨니, 코앞에서 미샤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끅! 뭔 짓이냥!!”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비요른이 아니라 비욘이다.” 미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읊조린 뒤, 주변부터 재빨리 확인했다. “으웩! 으에에엑!” 우선 헛구역질하며 물을 게워내는 칼슨이 보였다. “저, 괜찮으세요?” 그다음은 그런 그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주는 젠시아였다. 참고로 곰아저씨는……. “추워 뒈지겠군.” 언제 지폈는지 모를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곰아저씨가 손짓했다. “정신 차렸으면 이리 와라.” “신세 좀 지지.” “우와, 평소에 장작도 챙겨 다니냥?” “혼자 다니다 보니 이것저것 전부 챙길 수밖에 없어지더군.” 솔플을 한다더니 진짜였던 걸까? 모르겠지만 일단 모닥불로 가서 옷과 몸부터 말렸다. 그러고 있자니 머지않아 ‘젠슨’도 와서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혹시 아까 그 라이칸스로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십니까?” 칼슨이 추위로 달달 떨며 묻자, 곰아저씨가 퉁명스레 답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나? 미리 공부하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쉬는데 방해하지 마라.” “아, 예… 실례했습니다.” 이후로 정비 겸 휴식 시간이 이어졌다. 다들 옷과 장비를 벗어서 모닥불 근처에 늘어놨고,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다. 다만……. “이, 이상할 정도로 춥군요.” 몸이 얼추 마르고, 계속해서 모닥불로 몸을 데우고 있음에도 추위는 가시질 않는다. 홀딱 젖었을 때보다야 낫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따뜻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이내 곰아저씨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여긴 특수 지역인가 보군.” “특수 지역… 말입니까?” “아! 혹시 마녀의 숲 같은 곳을 말하는 거냥?” “그래, 추위야 어쨌든 몸이 이렇게까지 굳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니까.” “음, 그렇게 추운강? 나는 잘 모르겠는데…….” 모닥불 앞에서 벌벌 떠는 우리를 보며 미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만은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그야 냉기 내성이 우리보다 훨씬 높을 테니까. ‘패널티도 훨씬 적게 받았겠지.’ 미샤는 얼음마수 스카디아와 계약했다. 그것도 스탯 보너스가 가장 큰 ‘강화계’다. 한데 이번에 예티의 정수까지 먹었으니……. ‘냉기 내성이 40은 되겠네.’ [던전 앤 스톤]에선 40이란 낮은 수치가 결코 아니다. 내 고통 내성도 70밖에 되지 않으니까. 피해 감소량은 차치하고, 저 정도만 돼도 추위 같은 건 어지간해서 느끼지 못할 터. “……많이 춥냥?” “괜찮다. 춥긴 하지만 아프진 않다.”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뎅…….” 말 그대로의 의미다. 추워서 몸이 달달 떨리긴 하지만, 고통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그 대답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을까? “후우, 이 무식한 바바리안노망.” 미샤가 한숨을 내쉬더니 꼼지락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리는 중인 옷을 대신해 돌돌 말은 담요를 살짝 펄럭이며 가당치도 않은 제안을 해왔다. “이리 들어 와라, 그럼 좀 나을 거당.” ……뭐래 얘는. “휘유.” 곰아저씨가 휘파람을 부는 걸 보니, 역시 내가 이상한 건 아닌 듯했다. *** 정비 시간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옷과 장비를 전부 말리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 데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군.” 균열에 들어온 지도 벌써 12시간이 넘었다. 균열이 열린 게 19시경이었으니, 도합 31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뜻. “저… 이곳엔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 듯한데, 다 같이 좀 자는 게 어떻습니까?” 결국 칼슨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하며 짧게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따로 자겠다.” “추울 텐데?” “비상용 장작은 들고 다녀서 말이지.” “그렇다면야, 알아서 해라.” 한모닥불을 놓고 자는 건 못할 짓이었기에, 저 멀리 구석진 자리로 가서 새로 모닥불을 피웠다. 참고로 번갈아 가며 불침번도 서기로 했다. 그만큼 자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겠지만……. 죽어서 실컷 자는 것보단, 살아서 조금 자는 쪽이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비요른, 어서 먼저 자라.” “그 전에 잠깐만, 할 얘기가 있다.” “할 얘기?” 모처럼 둘만 있게 되었기에 잠을 뒤로하고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일단 첫 번째는 정수에 관한 것이었다. 본인이 뭘 먹었는지는 알아야 나중에 실전에서도 잘 써먹을 거 아닌가. “와, 그걸 다 외우고 다녔던 거냥?”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집중해서 들어라.” 이 세계 기준으로 정수의 정보를 읊어준 다음, 나는 더욱더 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 셋 중에 뭔가 수상한 행동을 한 자가 있었나?” 나는 일부러 미샤를 최후방에 보냈었다. 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뒤쪽을 경계해 달란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사실상 일행의 감시가 컸다. 맨 뒤에서 따라오는 만큼, 다른 이들의 행동도 잘 보이리라는 판단. “으음, 수상한 행동? 잘 모르겠는데.” “그렇군. 그거면 됐다. 가능하면 앞으로는 조금 더 유의해서 지켜봐 줘라.” “그러겠당.” 끝으로 대화를 마친 나는 모포에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칼슨과 젠시아, 곰아저씨의 말과 행동을 되짚으며 놓친 점은 없을까 되짚어 보았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계속 미끼를 뿌리며 단서를 모았다. 그 결과, 유력한 용의자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단 말이지.’ 마피아로 단정짓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딱 하나만 더 단서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점 정신이 수마에 빠져들던 어느 때였다. “저, 비요른.” 미샤가 내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피곤했지만 경청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잘했다, 미샤.” “오, 뭔가 도움이 된 거냥?” “물론이다.” 어디 도움뿐이랴. 드디어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곰아저씨의 모닥불 쪽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셋 중 누구일까 했더니.’ 역시 너였구나, 마피아. 105화 PK (1) 균열을 연 자. 즉, 마피아가 누구인가? ‘빙하굴’에 들어오고서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다. 마피아란, 내게 있어 ‘변수’였으니까. 긍정적인 변수일지, 부정적인 변수일지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곰아저씨를 마피아라 단정 짓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고 단서를 모았다. 그 결과. ‘그래 쟤였단 말이지.’ 마피아로 추정되는 자를 찾아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게 전부였다. 대체 이놈이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후, 저걸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속내를 알 수 없기에 더욱더 찝찝함이 커진다. 그도 그럴 게, 저놈이 마피아가 맞다면 추후 부정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으니까. 다만……. ‘일단 계속 지켜봐야겠군.’ 마피아는 한 명이다. 그리고 아직 놈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죽여 버리면 문제가 된단 뜻이다. 화르륵- 무고한 두 명도 ‘입막음’ 할 게 아니라면은. *** “미셸, 몸은 괜찮나?” “…나? 괜찮은데?” 미샤가 천연덕스레 답했지만, 사실 어제의 피로가 몸에 만연할 것이다. 젠슨이나 곰아저씨와 달리, 우린 불침번을 서느라 세 시간씩밖에 자지 못했으니까. “걱정 마라. 마녀의 숲 때보다는 낫지 않냥?” “그건… 그렇군.” 나는 피식 웃으며 걱정을 털어냈다. 하긴 그것도 버틴 애가 이 정도에 휘청이진 않겠지. “그만 꽁냥거리고 슬슬 출발하지?” 이내 곰아저씨가 한마디 뱉자, 미샤가 호다닥 뒤로 물러나 제 위치로 돌아갔다. 진형의 가장 뒤편. 혹여 누군가 허튼 짓을 한다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을 위치. 아마 얘가 없었으면 탱커 역할이고 뭐고 맨 앞에 서기 부담됐겠지. 터벅. 이내 첫걸음을 떼자, 속도에 맞춰 일행이 뒤따른다. ‘2D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런 느낌이구나.’ 어두컴컴한 얼음 동굴. 성에 낀 지면은 미끄럽고, 전반적인 지형 구조도 1층의 수정동굴보다 입체적이다. 급경사 구간은 물론, 도중에 길이 끊겨 로프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곳도 있었을 정도. 다만……. “그래도 길이 하나뿐인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탐색꾼 없이도 헤맬 일은 없었다. 중간중간 샛길이 없던 건 아니지만, 머지않아 막다른 길이 나타났으니까. 메인 통로를 타고 이동하기만 하면 됐다. 얼음벽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를 박살 내며. 퍼억-! 참고로 이곳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웜스톤, 샤벨타이거, 서리늑대, 아이스 골렘, 아울베어. 7등급 몬스터인 ‘본 나이트’가 출현하던 핏빛성채와 달리 8등급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실질적 난이도는 여기가 더 높지.’ 상태이상 [저체온증]. 냉기 내성이 없을 때 기준으로 민첩 수치가 최대 -30 하락하며, 받는 냉기 속성 피해가 2배 상승하는 디버프 필드 효과. “네이프린 양, 조심하십시오. 몸이 굳어서인지, 이 녀석들 공격이 예전보다 아픈 거 같습니다.” “아, 어쩐지……! 그래서였군요!” 여정이 이어질수록 내 양옆에서 2열을 맡고 있는 ‘젠슨’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저들을 배려한답시고 속도를 낮추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 어차피 저 둘의 지분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퍽. 사실상 나와 곰아저씨, 그리고 곰아저씨를 지켜주는 미샤. 이렇게 셋이서 길을 뚫고 있자니 슬슬 챕터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한 네 시간쯤 걸렸나? 구불구불한 통로를 걸으며,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고 있자니 드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휘유, 장관이군.”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얼음 기둥에 갇힌 세 마리의 몬스터. “피부색이 하얀 걸 보니, 아이스 오크군.” “…아이스 오크요?” “7등급밖에 안 되니 걱정 마라.” 아이스 오크가 쥐고 있는 무기는 모두 달랐다. 하나는 도끼를, 하나는 망치를, 하나는 주술용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상태. “……설마 저것들과도 싸워야 하는 걸까요?” “이유 없이 저것들이 여기 있진 않겠지.” 젠시아의 중얼거림에 곰아저씨가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찌지직- 아이스 오크를 가두고 있던 얼음 기둥이 일제히 금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거, 구경할 시간도 안 주는구먼?” 곰아저씨의 여유로운 반응이야 어쨌든. “당황하지 말고 진형대로 서라!” 안절부절못하는 젠슨을 향해 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야 진형대로 서야 미샤가 너희들을 감시하기 편하거든. “아, 네!” 이내 젠슨이 내 양옆으로 오고, 곰아저씨가 멀찍이 뒤로 물러나 저격 위치를 잡음과 동시. 콰쾅, 투두두둣. 얼음 파편이 떨어져 내리며, 아이스 오크 삼인방이 잠에서 깨어났다. 꼴에 중간보스라고 흉포한 콧김을 뿜어내며. [취이이이익-!] 주술사 하나에 전사가 둘. 꽤나 균형 잡힌 구성인 데다가, [저체온증]까지 있으니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다. 공략법을 모르는 상태라면. “후우…….” 숨을 길게 토해내며 방패를 들어 올린다. 제법 긴장이 됐다.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오크들이 아니라, 다른 부분 때문에. ‘뭔가 수작을 부릴 거라면, 지금이 적기겠지.’ 팀 내에 마피아가 있다. 물론 나는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단순히 균열을 깨고 싶을 뿐이고, 남을 해칠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콰앙! 공격보다는 수비에만 집중한다. 만일을 대비해 전력은 숨기는 게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샤에게도 괜히 나서지 말고 지켜만 보라고 지시를 내려둔 상태. “웬일로 애인한테 안 달려가고 아직도 여기 있나?” “뒤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지 않냥. 그리고 애인 아니당.” “뭐, 아직은 그래 보이더군.” 곰아저씨가 미샤의 포지셔닝에 의문을 표했지만, 납득가는 이유였는지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리고……. “쯧, 저놈들이야 있으나 마나니, 이번엔 내가 힘을 좀 써야겠군.” 여지껏 선보인 적 없던 능력을 꺼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철웅 이라둔을 소환했습니다.」 곰아저씨의 앞에 생성된 포탈을 통해 튀어나온 거대한 크기의 곰. 영혼수였다. ‘…이라둔이라고?’ 솔직히 조금 놀랐다. 수인족 출신 5등급 탐험가라서 영혼수 계약도 이미 맺지 않았을까 싶긴 했지만……. ‘설마 소환계였을 줄이야.’ 활잽인데도 솔플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겠다. 탱커 소환수가 있으면 굳이 팀을 고집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가아아아악!!] 소환된 곰새끼가 네 발로 빠르게 달려오더니, 내 옆에서 포효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익숙하게 전사 한 마리를 전담 마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플랜B로 가야겠군.’ 나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어차피 변한 건 없다. 전력을 감췄기에 곰아저씨도 지금까지 아껴왔던 영혼수를 꺼낸 것 아닌가. [취이이이익!] 그런 이유로 아이스 오크의 망치질을 허용했다. 몸에 맞으면 엄살 부리는 게 티가 날 테니, 그냥 머리로 헤딩하듯이 꼬라박았다. 콰앙-! 투구를 착용한 데다가, 골강도 스탯도 준수했기에 머리통이 박살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뇌가 흔들리며 조금 어지러운 정도. 그마저도 자연 재생력 수치가 적용되며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털썩. 나는 픽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야 너무 쉽게 오크 삼돌이를 잡아버리면, 마피아의 속내를 떠볼 수도 없게 된다는 판단. “괘, 괜찮으십니… 으윽!” 칼슨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달려와 어그로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스 오크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3.」 쏘아진 화살이 망치 오크의 머리통을 관통한다. 그로 인해 주술사의 어그로가 곰아저씨에게로 바뀌었지만……. 5등급 탐험가는 노련했다. 타닷. 190 초반의 거구로 날렵하게 주술을 회피하며, 석궁에 화살을 걸고 정확하게 쏘아내는 곰아저씨. 「아이스 오크 주술사가 [강철빙벽]을 시전했습니다.」 주술사의 방어 스킬도 저 무지막지한 화살 앞에선 의미 없었다. 7등급 몬스터가 저딴 걸 어떻게 막아. 콰아아아앙-! 얼음벽을 깨부순 화살이 주술사의 머리에 박히고서 폭발했다. 「아이스 오크 주술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3.」 이제 남은 오크는 단 하나. ‘이러다 화살 세 발로 전부 잡겠는데?’ 허탈감이 밀려든다. 전투가 너무 쉬우면, 어렵게 만들면 된다는 내 계획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구도가 나오고 있었다. ‘이게 5등급 궁수인가?’ 쩝, 바닥도 찬데 그냥 지금이라도 정신 차린 척 일어나?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누군가 읊조렸다. “영혼수가 그거였구나.” 차갑게 식은 목소리. “이제 계획대로 해도 되겠네.” 다음 화살을 장전하던 곰아저씨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털썩. 드디어 마피아가 행동을 개시했다. *** 마피아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성립되어야 할 전제가 몇 가지 있다. 균열을 여는 방법을 알 만큼 지식이 많을 것. 19시간 만에 2층에 다녀올 정도로 길찾기 능력이 뛰어날 것. 혼자서 클리어할 능력이 될 것. 이것만으로도 얼추 형체가 드러난다. 5등급 수준의 무력을 겸비한 탐색꾼. 이게 바로 마피아의 정체다. 문제는, 셋 모두 이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거겠지만. 1. 곰아저씨. 5등급 탐험가. 어딘가 플레이어와 닮은 사고방식 등등.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2. 칼슨. 유일하게 소개 때 이름만을 말했다. 소유한 정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저층 수준의 장비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마치 새것처럼. 혹시 위장용 장비였을까도 싶어 쭉 지켜봤는데, 서리늑대 정수도 이유를 대며 먹지 않았다.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뭐, 얘보다는 아니지만. 3. 젠시아 네이프린. 탐색꾼 교육을 받아서 조예가 있다고 말했다. 관찰이 특기라고도 말했다. 내가 보기엔 전부 보험이었다. 이후의 대사가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하기 위한. [서, 설마 저걸 잡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걸까요?] 동굴을 가로막은 예티를 만났을 때도. [앗! 만졌더니 빛이 나요.] 두 번째 챕터에서도. [왠지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거 같아요…···!] 중간보스가 [진압]을 시전했을 때도. [그나저나··· 이제 전부 끝난 걸까요?]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도. 얘는 계속해서 아닌 척 핵심을 짚었다. 마치 공략법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물론, 이 정도야 곰아저씨나 칼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발에 묻어 있던 흙만 아니었다면. 균열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바로 신발이었다. ‘빙하굴’을 열기 위해선 2층 짐승의 소굴에 다녀올 필요가 있으니까. 젠시아는 유일하게 신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 뭐, 도시에서 밟은 걸 닦지 않은 거라면 납득은 가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물에 빠지고 나서 젠시아의 냄새가 바뀌었다.] 미샤의 제보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로트밀러만큼은 아니어도, 일단 수인답게 후각 스탯 자체가 높은 편이니까. [원래 좀 더 구린 냄새가 났었다.] [짐승의 소굴처럼?] [아아! 이제 보니 그렇당. 왜 익숙한가 했더니!] 젠시아는 마피아다. 그것도 부정적인 변수가 될 여지가 다분한, 그런 악성 변수라고 나는 판단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미리 대비해 둘 수 있었다. 푸욱-! 젠시아의 검이 곰아저씨의 복부를 파고든 순간. 기다렸다는 듯 대시한 미샤가 약병 하나를 던져서 명중시켰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며 쏟아지는 내용물. “고마워, 3천만 스톤은 되겠— 꺄악!” 여유롭게 뭐라 씨불이려던 젠시아가 용액을 뒤집어쓰고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뭐, 뭐야! 너, 나한테 대체 뭘…….” 나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데 저년이 이때를 기습 시기로 정한 것에, 내 기절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뭐야, 뭐냐고…….” 젠시아는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함성을 내질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뭐긴 뭐야. 지금부터는 정당방위란 소리지. 106화 PK (2) 젠시아 네이프린. 약탈할 때 주로 쓰는 가명이지만 아무튼. 그녀는 홀로 ‘빙하굴’에 들어서면서도 딱히 걱정이랄 게 없었다. 다 죽이고서도 혼자 클리어할 자신이 있으니까. 이곳에서 ‘얼어붙은 숨결’이 드랍된다는 정보를 구매하며 그녀는 공략법 숙지까지 끝마쳤다. 하지만……. […짐은 되지 않겠군. 아브만 우리크프리트다.] 시작부터 일이 틀어졌다. [나는 6등급, 미샬은 7등급 탐험가다. 원래는 4층에서 주로 활동했지.] [그렇군, 나는 5등급이다.] 5등급 궁수와 6등급 바바리안, 그리고 7등급 수인. ‘왜 이런 놈들이 이 시간에 1층에 있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1일 차에 열린 균열이라곤 한들, 기껏해야 7, 8등급짜리가 한두 명 들어올 수도 있겠다 생각한 정도였는데. ‘아무튼, 그래서 이제 어쩌지?’ 원래 그녀는 대충 갖고 놀며 ‘취미 활동’을 즐긴 뒤, 혼자 수호자를 잡고 나갈 계획이었다. 그야 도시로 말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이미 그녀의 장비와 스킬, 그리고 인상착의는 길드에 알려졌다. 살아 있단 게 들키면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길 터. ‘혼자 등쳐먹기엔 너무 리스크가 큰데, 그냥 이번엔 조용히 있다가 다음번을 노려야 하나?’ 처음엔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점점 변했다. 삶이란 가끔, 위기가 기회로 작용할 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쓰읍, 3개월이야 못 기다릴 건 없는데, 역시 아쉽단 말이지?’ 풍부한 약탈 경험 덕분에 쓱 보는 것만으로 대강 견적이 나온다. ‘궁수새끼는 3천만, 바바리안은 600만, 저기 저 고양이년은… 음, 300만 정도 되겠네.’ 도합 3,900만 스톤. 미궁 내에서 이 정도 약탈을 하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녀처럼 홀로 다니는 약탈자라면 더더욱. ‘그래, 해보자.’ 이내 그녀는 다시금 계획을 짜내려갔다. 균열 속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한다면, 어떻게 각이 나올 거 같기도 했다. ‘문제는 이 궁수새끼인데…….’ 바바리안이나 수인은 등급도 낮은 데다가, 전사 계열이기에 딱히 겁나지 않는다. 탐지계 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설령 2:1 상황이 되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러나 한 놈은 달랐다. ‘뭐 이렇게 철저해?’ 놈은 상위 탐험가답게 노련했다. 초면인 자들 앞에서 어지간하면 능력을 숨기려 했고, 슬그머니 사각 지대로 빠지려 할 때마다 버릇처럼 시선을 자신에게 옮겼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궁수새끼는 벽을 등지고 앉았고, 시야 반경 안에 그녀와 칼슨이 있도록 했다. ‘하, 무슨 감시카메라도 아니고. 그 고양이년은 지 뒤에 있어도 신경도 안 썼으면서.’ 같은 수인족이기 때문일까? 궁수새끼는 유독 칼슨과 자신에게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뭔가 눈치챘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그냥 버릇에 가깝겠지. 경험이 쌓이다 보니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진. ‘……이래서 인간족이 구리다니까.’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리고 고블린 궁수의 정수를 먹었고, 어려서부터 탐색꾼 교육을 받아서 함정이나 기계 장치에는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요.] 처음 소개했을 때 밝혔던 대로, 초심자의 모습만을 연기하며 경계심을 흩트렸다. 그러고 있자니 그 순간이 도래했다. [이번엔 내가 힘을 좀 써야겠군.] 궁수새끼가 드디어 새로운 능력을 꺼냈다. 이미 놈이 가진 네 개의 정수는 얼추 확인이 끝난 상황. 드디어 가장 경계하고 있던 ‘영혼수’의 능력이었다. [가아아아악!!] 포효하며 네 발로 달려 나가는 회색곰. 보자마자 씨익 입꼬리가 휘어졌다. 궁수새끼는 소환계였다. 그것도 탐지계 능력을 지닌 게 아니라, 고기방패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탱커형 소환수. 또한, 하늘이 돕는 것인지. 콰앙-! 바바리안이 망치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6등급 탐험가라기엔 너무도 허무하게 당한 것 같지만, [저체온증]으로 민첩 수치가 줄어든 걸 고려하면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6등급이라던 것도 거짓말일지 모르지. 애초에 저 바바리안이야 크게 중요치도 않았다. 「캐릭터가 [무장변환]을 시전했습니다.」 스킬을 사용해 장비를 교체하다. 낡은 검 한 자루가 맹독이 발라진 보검으로, 그 외에 부위들도 그녀가 하나하나 모은 대인전 특화 장비들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캐릭터가 [야수걸음]을 시전했습니다.」 「상급 은신 상태를 얻으며 3초간 이동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은신을 활성화시킨다. 평소 ‘취미 활동’을 할 때 고블린 궁수의 정수라 소개하던 그것. 탓- 지면을 세게 내디디며 달려 나갔으나, 상급 은신의 보정으로 발소리는 극히 미세했다. 오크에게 한눈 팔린 궁수새끼는 아직 이쪽의 움직임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 「캐릭터가 [복수]를 시전했습니다.」 「최초 일격에 한해 관통력 및 절삭력이 대폭 상승하며, 상태 이상 ‘출혈’을 부여합니다.」 이내 그녀의 검이 목표물의 복부를 헤집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원래 찌르려던 것은 심장이었으니까. ‘그걸 반응할 줄이야.’ 물론, 유의미한 발악은 아니었다. 검끝으로 내장의 감촉이 느껴졌으며, 미리 맹독까지 발라 두었으니까. 변하는 건 없다. 그저 좀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됐을 뿐. “컥!” 그렇게 피를 토하는 궁수새끼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여운을 즐기려던 순간이었다. 쨍그랑! 머리에 무언가가 닿으며 깨지더니, 끈적이는 액체를 쏟아냈다. “뭐, 뭐야!”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고양이년의 짓이었다. “너, 나한테 대체 뭘…….” 뭔가 잘못됐단 생각에 일단 뒤로 물러나는 차. 기절해 있던 바바리안이 스윽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뭐야, 뭐냐고…….”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스킬을 사용하고 기습에 성공하기까지, 약 2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경험이 많은 그녀는 알고 있다. 기습에 당하면 대개 화들짝 놀라며 배신감에 찬 얼굴로 비명을 내지른다. 그게 보통의 반응이다. 한데 이 고양이년은 어땠는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병을 깨뜨렸을뿐더러……. 멀쩡하게 일어선 저 바바리안도 그렇다. 배신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이.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을 터트리며 달려들 뿐. 그 이질적인 행동을 통해 그녀는 한 가지를 유추해 냈다. 아니, 깨달았다고 말하는 편이 알맞겠지. ‘설마…… 내가 이럴 걸 알고 있었다고?’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 「캐릭터가 [야수걸음]을 시전했습니다.」 「위치스램프 용해액에 의해 은신 상태가 해제됩니다.」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 ***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 조상신을 부르짖음과 동시. 온몸에 활력이 깃들며, 칼슨을 두들겨 패던 아이스 오크의 관심이 내게 이끌린다. [취, 취익?] 물론, 문제 될 건 없었다. 아까 머리를 한 대 맞아 봤는데, 그냥 버틸 만하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타닷-! 오크는 무시한 채 대시. 굵게 뻗은 바바리안의 기럭지를 쉬지 않고 움직이자니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젠시아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하긴 이해가 안 되겠지. 누구보다 완벽하게 기습에 성공했는데, 설마 그전에 눈치챈 놈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어? 피식. 아마 나도 눈치채기 어려웠을 거다. 내가 연 균열에 이년이 들어온 거였다면, 그냥 평범한 저층 탐험가구나 싶었겠지. 신발에 묻은 흙이고 뭐고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뒤통수는 조심했겠지만. ‘이 세상엔 씹새끼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아, 얘는 여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나? 아지렁이처럼 피어나는 상념을 지우고서, 한 번 더 지면을 세게 박찬다. 그 순간이었다. “어……?” 젠시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아무래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은신 능력이 먹통 상태로 변했다는걸. “대, 대체 이게 왜…….” 아마 은신이야말로 비장의 무기였을 거다. 곰아저씨를 먼저 해치우고, 은신을 써가며 한 명씩 죽일 생각이었겠지. 마법사나 탐지 능력자가 없다는 가정하에, 중급 이상만 돼도 대인전에서 막대한 위력을 뽐내는 스킬이니까. 사실상 전사 계열이라면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능력인 셈.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병신년.” 그러게 정체를 감출 거면 입조심했어야지? 고블린 궁수의 정수를 먹었단 말만 나불거리지 않았어도 은신은 나도 몰랐을 텐데. 후웅-! 거리가 되자마자 메이스를 휘둘렀다. 한데 은신 하나만으로 날먹을 하려던 건 아니란 걸까? 젠시아는 기민하게 옆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내 공격을 피해냈다. 근데 이걸 어쩌나. 거긴 고양이가 있는 쪽인데. “이 망할년앙!” “읏!”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미샤의 칼질을 피한다고 젠시아년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왠지 동작이 큰 메이스질은 피할 거 같았다. 그렇기에……. 퍼억! 오랜만에 실드 스매쉬. 테니스공을 받듯 방패로 면상을 후려치자, 젠시아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간다. 한데 방어력에도 스탯을 투자했을까? 적당한 손맛이 있었음에도 기절은커녕 체공 상태에서 균형을 잡고 착지하는 젠시아. 주륵. 그녀가 쌍코피를 흘리며 짜증스레 외쳤다. “이 빌어먹을 NPC 새끼들이……!” 너, 정말로 플레이어였구나. 동향 사람과 만나는 건 타리칸 리옌 다음으로 얘가 처음이지만…….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플레이어든 그냥 약탈자든, 나를 죽이려고 한 놈들은 똑같은 ‘씹새끼’니까. “비요른! 조심해라!” 응? 한 번 더 대시해 이번에야말로 저년의 머리통을 박살 내려는 찰나. 미샤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오크가 보인다. [취이익!] 놈은 상황 파악도 못하고 내 머리통을 쪼개기 위해 도끼를 내리찍고 있었다. 머리로 맞기는 좀 그래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라이티늄제 흉갑의 어깨선에 박히는 거대한 도끼날. 카캉! 뼈가 조금 시리긴 하다마는, 유의미한 대미지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무시하고 대시를 이어갔다. 그야 얘가 죽으면 최종 보스가 튀어나오거든. 한데 오크 새끼의 공격에 꿈쩍도 않는 내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었을까? “베헬—라아아아아아!” 총탄을 튕겨내는 탱크라도 된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달려 나가고 있자니 젠시아가 다급하게 도망친다. 그것도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 방향으로. 뭔가 싶어서 따라가 보니, 머지않아 젠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어, 왜 벽이…….” 뭐지? 혹시 다른 요소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열심히 따라왔는데. 그냥 병신이었을 뿐인가? 피식. 왠지 우스웠다. NPC 거리더니 정작 플레이어라면서 이것도 모르다니. 원래 세 번째 챕터에 들어오면 천장이 무너지면서 길이 막힌다. 즉, 이년은 그것도 모르고 도망친다고 제 발로 막다른 길로 향한 셈. 고로 나 역시 속도를 줄였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 터벅. 방패로 상체를 가리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다. 사람 두세 명 지나갈 크기의 통로지만, 나는 크고 소중한 바바리안 전사. 뚫고 지나갈 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카캉-! 뭐, 이 와중에도 오크 새끼가 또 뒤통수를 후려쳤지만……. “비요른! 이놈은 내가 맡겠당!” 미샤의 외침이 들린 뒤로는 그럴 일도 사라졌다. “죽이진 마라.” “응? 일단 알겠당!”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이제 저년과의 거리는 고작 2m. 사실상 서로가 서로의 반경 안에 들어선 상황이었으나, 젠시아는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이미 마음속에서 서열 정리가 끝난 것이다. 터벅. 더욱 자신 있게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그제야 젠시아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 얘, 얘기를 해요! 오해가…….” 오해는 무슨 오해. 그냥 시간을 벌고 싶은 거겠지. 아까 칼이 빨갛게 빛나는 거 보니까 [복수]를 쓰는 거 같더만. ‘쿨타임이 3분이었나?’ 쿨감 세팅을 안 했단 기준하에 그랬다. 다시 말해, 앞으로 2분간 저년이 내 방패를 뚫을 방법이 없— 휘익! 애초에 시선 분산용 협상 시도였는지, 도중에 말을 끊고 검을 휘두르는 젠시아. 카칵, 퍼억! 신속하게 방패로 막아냄과 동시에 메이스로 팔목을 아작냈다. 손목이 기이할 정도로 꺾이며 바닥에 떨어지는 검. 차카캉. 일단 외통수처럼 보였다. 이년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스킬 혹은 장비 효과가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아직 확신은 할 수 없다. 그러니, 변수는 없애는 게 좋겠지. 자폭기 같은 걸 숨겨 뒀을 수도 있으니까. “오해라니, 자세히 말해 봐라.” “정말… 믿어 주실 건가요?” “그럴 이유가 있는 이야기라면.” 내 말에 젠시아의 눈빛이 멍해졌다. 아무래도 나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스토리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 아니, 설령 설득할 수 없더라도 그럴듯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끌어 보고 싶은 거겠지. “저… 믿으실지 모—” 젠시아의 입술이 열린 즉시. 나는 메이스로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제법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던 그녀였지만, 이번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털썩. 이내 젠시아가 몸을 경련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피식.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냔 거겠지. 나는 바바리안답게 솔직히 답했다. “그걸 믿다니, 혹시 머리에 문제가 있나?” 당연히 구라지. 107화 PK (3) 우선 통로 바깥을 확인한다. “아악!” “도망가지 말고 잘 버텨랑!” 미샤와 칼슨은 오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죽이고 끝이라면 금방 끝났겠지만, 내 지시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저쪽은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고.’ 나는 정신을 잃은 젠시아의 장비를 신속하게 벗겨냈다. 2티어 소재의 가죽 상의. 벗기던 도중에 칼날이 튀어나온 부츠. 홈이 있어서 눌러 보니 암기가 튀어 나가던 손목 보호대 등등. 살펴보니 장비 하나하나가 몬스터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닥치는 대로 배낭에 집어넣으며 쓰윽 살펴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몇 개는 그냥 미샤한테 줘도 될 거 같은데, 덕분에 돈이 굳었군.’ 젠시아의 장비는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개중에서도 화룡점정은 검이었고. 손잡이부터 시작해 비싼 느낌을 풀풀 풍기는 장검. ‘아니, 잠깐만… 이거 넘버스 아이템 아닌가?’ 배낭에 집어넣다 말고 검을 자세히 확인한다. 초록빛이 감도는 검신.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No. 5991 독사의 송곳니다. 사용 효과는 없지만, 관통력에 큰 보너스를 주며 검을 통해 입힌 중독 피해가 2배 상승하던 그것. 뭐, 감정을 받아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아무래도 귀한 걸 얻은 거 같네.’ 독사의 송곳니는 ‘코어 아이템’이다. 졸업 무기까지는 아니어도, 맹독 계열 트리를 탄다면 중후반부까지는 능히 쓸 만한 아이템. 당연히 번호와 무관하게 값이 비싸다. ‘정말 독사의 송곳니인 거면, 팔기 전까지 미샤보고 쓰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루팅도 끝냈겠다, 대화를 해 볼 차례였다. 그야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거든. 그전에 대화할 준비를 먼저 해야겠지만. 퍼억-! 메이스를 내리친다. 목표지는 발목. 돈이 될 만한 장비는 모두 챙겼기에 망설일 일은 없었다. “으, 끄으으윽!!!” 얇고 하얀 발목이 짓이겨지자마자 전기 충격을 당한 사람처럼 상체를 일으키는 젠시아. 나는 발로 가슴 상단을 짓눌러 고정시켰다. 그리고……. “아, 안 돼……!” 퍼억-! 나머지 한쪽 발목도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한쪽 팔목은 아까 조치를 해놨으니,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왼쪽 팔목 하나. 자세를 바꾸자 젠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을까? 그녀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는 거 같았다. “그, 그만… 제발… 그, 그러지 않아도 뭐든 할 테니까…….” 그래?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라. 마저 하고 얘기를 하지.” 나는 메이스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하, 하지 마……!!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말로—!” 거, 잠깐만 기다려 보라니까. 퍼억-! “끄아아아악!!!” 젠시아의 비명이 한 번 더 크게 울려 퍼지며 비로소 대화를 할 환경이 구축됐다. 사지가 짓뭉개졌고, 장비도 모두 벗겼다. 그러니 안심하고……. 아, 모두 벗긴 건 아닌가? “너, [무장변환]을 써라.” 초심자용 장비긴 하지만, 이년에게는 스왑용 장비가 남아 있다. 다만 내 요구에 젠시아는 고통 어린 신음도 멈추고 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단번에 장비를 싹 바꾸는 스킬이 그거 말고 더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젠시아의 안색이 보다 하얗게 질렸다. 알고 있는 거겠지, 이제 이걸로 짓뭉갤 만한 건 저 자그마한 머리통밖에 없단걸. “하, 할게요!” 이내 젠시아의 몸에 새로운 장비가 입혀졌다. 다 합쳐서 50만 스톤 정도 될 법한 평범한 장비. 마찬가지로 벗겨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 “물어볼 게 있다.” “뭐, 뭐든지요!” 나는 우선 젠시아에게 소유한 정수가 뭐뭐 있는지를 확인했다. 소유 정수는 총 네 개였다. 아이언 나이트의 [무장변환], 디닉티스의 [야수걸음], 세인트 어쌔신의 [복수]. ‘그리고 [독성부여]라…….’ 혹시나 자폭기일 수도 있겠다고 경계했는데, 마지막 정수는 미샤도 갖고 있는 홉 고블린의 [독성부여]였다. 종합해 보자면 6등급 두 개에다 5등급 하나, 그리고 7등급을 하나 먹은 셈. 제법 야무지게 키워놨다. 그래 놓고 하는 짓이 약탈이란 게 애석하긴 하다마는. ‘아니, 생각해 보면 자기 적성을 잘 찾아간 셈인가?’ 마물을 상대하는 탐험가 기준, 젠시아는 6등급 정도밖에 안 된다. 다만, 대인전 한정으로 5등급은 확실히 넘겠지. “저, 그게 끝인가요……? 그냥 물어봤어도 대답해 드렸을 텐—” 뭐래, 이제 시작인데. 나는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우리를 공격했지?” “탐험가 길드에 제 정보가 퍼져 있어요. 그래서 입막음을 하려고…….” “누가 들어오든지 간에 죽일 생각이었단 거군.” 젠시아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그냥 날 죽여라 하며 자포자기할 법도 한데, 그녀는 결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럼 균열을 연 이유는? 보아하니 남은 정수 자리도 없는 거 같은데, 애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입막음할 이유도 없지 않나.” “설원의 심장 때문이에요. 그 아이템이 여기서만 나온다고 들어서.” 아, 그거 때문이었구나. “게다가 입막음 부분은 걱정도 안 했어요. 기껏 해봤자 8등급 탐험가 정도일 거라 생각했—” 마지막 실타래가 풀리며 납득하면서 듣고 있던 때, 젠시아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내가, 균열을 연 것까지 알고 있었다고……?” ……방금 말실수를 했구나. “무슨 소리냐 그건?” 자연스레 답하며 한쪽 귀를 후볐지만, 젠시아는 속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을 이어간 끝에, 그녀는 마침내 해답에 도달했다. “설마… 당신도 플레이어?” 저 눈빛을 보니 부정해 봤자 의미는 없을 거 같지만……. 그렇다고 긍정할 필요는 없겠지. “플레이어라니, 넌 설마 악령인가?” 내 물음에도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는지 꿈틀거리며 내 다리 쪽에 얼굴을 갖다 댔다.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살려 주세요…….” 희망.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이런 데서 죽을 수 없다구요. 이런 좆같은 곳에선…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요. 네? 제발요…….” 울분. “아, 제가 사과를 안 드렸죠? 죄송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NPC라고 생각했어요.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을 거예요. 우, 우린 진짜 사람… 사람이잖아요? 그랬다간 살인이잖아요?” 절박함. “제발요…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네? 씨발! 말 좀 해보라고! 흐윽, 개새끼야…….” 좌절. 그 외에도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젠시아의 얼굴을 그저 계속해서 바라만 보았다. 두근. 놀랍게도 심장은 평온했다. 슬픔은커녕, 알량한 동정심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던전 앤 스톤]엔 PK가 없었다. 그야 온라인 게임이 아니니까. 대신 NPC를 죽이는 건 가능했다.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약탈자 플레이를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NPC라서 죽인 거라고?’ 여기는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믿지 않고는 못 배길 증거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아마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따라서, 나는 짧게 답했다. “너는, 악령이군.” 악령. 이세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 허나 살아남기 위해 몸도 정신도 영혼도 이곳에 속해 버릴 수밖에 없게 된 존재. 그래, 플레이어고 NPC고 무슨 상관인가? 역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수식어가 붙던 이 여자는 약탈자에 불과할뿐더러,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눈치챈 위험인물일진대. “개새끼야!!” 고로 메이스를 들어 올린다. 피차 이곳에 적응을 마친 사람답게, 분명 반대 상황이었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을 하며. 스르륵.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젠시아는 더 이상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악독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반드시 얼굴만은 기억해, 죽어서라도 저주하겠다는 듯이. “흐으, 흐읍, 하악…….” 거칠게 숨결을 토해낼 때마다, 봉긋한 가슴이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한다. 귀를 대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을지가 느껴졌다.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독기만 남은 듯 보이던 그녀였지만,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는 것을. 두려움. 이내 젠시아가 눈을 감았다. 증오를 버리고 비로소 평온을 찾기 시작했다. 과연 굳게 닫힌 저 눈꺼풀 너머로는 뭐가 보이고 있을까? “어, 엄마…….” 전부 듣기 전에 메이스를 내리쳤다. 퍼억-! 살점과 피가 튀었다. 쓰러져 있던 육신이 작게 경련할 때마다 코와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녀의 몸이 완벽하게 정지했다. 나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며 등을 돌렸다. 「업적 달성」 조건: 첫 플레이어 살해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처음으로 플레이어를 죽였다. 다만, 이에 대한 감상을 애써 지우며 걸음을 내디뎠다. 터벅- 그 행위가 쉬웠든 어려웠든. 피와 살점에 두려움이 아닌 흥분을 느꼈든. 그런 주제에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닫힌 눈꺼풀 너머로 보았을 그곳이기를 바라던 나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든. 그도 아니면, 이 야만인의 몸에 깃들어 점점 타락해가는 내 모습이 새삼 비참하게 보였든.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터벅- 해야 하는 일이었다. ‘…….’ 이 야만적인 세상에서 눈을 뜬 첫날. 내가 걸어나가기로 한 길은, 그런 길이었다. *** “뭐 하다 이제야 온 거냥!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당!” 젠시아의 주검을 뒤로하고 공동으로 나오자 미샤가 타박한다. 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온 건데. 시간도 3분 정도밖에 안 지났다. “도, 도와주시오!” 미샤가 한눈팔며 나를 보자, 칼슨이 오크에게 속절없이 밀려나며 다급히 외친다. 다만 나는 관전의 자세를 유지했다. “미샤, 이제 해치워도 된다.” “아, 그래도 되는 거냥?” “그래, 기왕이면 새로 얻은 이능도 써봐라.” “응? 아직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러니까 해보라는 거지. 이제 마피아도 없잖아? 아이스 오크면 딱 좋은 상대기도 하고. “으윽! 더, 더 이상은 못 버티겠… 흐읍!” 칼슨이 찌그러진 방패로 한 번 더 도끼질을 막아낸 사이. 미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했다. 「미샤 칼스타인이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손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빛. 7등급 몬스터 ‘비톨’의 액티브 스킬. 평소의 미샤였다면 여기에 [독성부여]를 쓰는 게 기본 콤보였을 테지만……. 「미샤 칼스타인이 [냉기응축]을 시전했습니다.」 공기 중에서 분리되듯 떨어져 나온 푸른색의 입자가 미샤의 몸으로 스며든다. 「냉기 감응도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뭔가 제대로 됐다는 느낌이 왔는지, 미샤가 눈을 떴다. 그리고……. 휘이익!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칼슨을 공격하려던 오크의 손목을 베었다. 서거컥! 단번에 뼈까지 베어 내긴 무리였을까. 도끼를 쥔 오크의 손이 반쯤 잘려 나가 덜렁거렸다. 다만 내가 집중한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취, 취이이이익!!] 예리한 칼날에 베이며 벌어진 손목부의 자상. 허나 피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상처 주위가 붉게 얼어붙으며 성에가 낀 탓이다. ‘동상 판정인 건가.’ 냉기 속성은 출혈을 막는다. 이것만 보면 단점 같지만, 재생 효과도 막기에 적의 유형에 따라 꽤나 쓸모가 있다. 행동에 제약을 준다는 점도 장점이고. [취, 취익!] 물론, 냉기 내성이 높은 아이스 오크는 손목 주변부만 얼어붙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일반 몹이라면 조금 달랐을 거다.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얼어붙었겠지. 음, 냉기 내성이 마이너스인 몬스터였다면 아예 ‘빙결’ 판정까지 받았을 수도. 아직 미샤는 세팅을 다 끝내지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샤, 이번엔 목을 노려봐라.” “으응? 알겠당!” 미샤의 검이 오크의 목에 틀어박혔다. 하긴 오크는 골강도 스탯이 높으니까. 단번에 베어내긴 어려웠겠지. 그러나 목 주변이 얼어붙자 오크는 동작을 멈추고 선 자세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뇌까지도 냉기가 전해진 모양. 콰직-!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기에 달려나가 오크의 머리통을 메이스로 깨부쉈다. 그와 동시에 공동이 흔들리며 천장부에서 얼음 가루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일전에 들었던 포효 소리가 진동했다. [그와아아아아아-!!] “뭐, 뭐냥?” 뭐긴 뭐야. 이제 네 번째 챕터란 소리지. 「오랜 잠에서 깨어난 폭군 타룬바스가 모든 힘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정에도 없던 PK도 했겠다. 이제 슬슬 보스를 잡고 나갈 차례다. 108화 아기 바바리안 (1) 일단 칼슨을 후방으로 보내고, 약간의 준비를 모두 끝낸 찰나. 콰아앙-! 정면부에서 얼음벽이 깨 부서지며 놈이 나타났다. 폭군 타룬바스. 7등급 몬스터 라이칸스로프를 기반으로 한 ‘빙하굴’의 수호자. [그와아아아아아-!!] 이 녀석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일반 라이칸스로프보다 1.5배는 큰 덩치. 기본적인 스킬 구성은 동일하지만, 2배가량 높은 스탯치. 무엇보다, 손에 쥐고 있는 저 얼음몽둥이까지. 「폭군 타룬바스가 [얼음분쇄]를 시전합니다.」 놈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몽둥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얼음분쇄]. 원래는 ‘동상’ 및 ‘빙결’ 상태의 적에게 대미지 보정을 주는 것이 전부일 스킬. 다만, ‘빙하굴’ 내에서는 좀 다르다. 콰아앙-!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가는 진동. 두 번째 챕터에서처럼 바닥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지만, 얼음벽이 한 꺼풀 벗겨지며 열댓 마리의 서리늑대가 깨어난다. “비요른! 이 녀석 보통 라이칸스로프와는 다르당!” 거, 비욘이라니까. 마피아도 죽었고 굳이 교정할 필요는 없겠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을 사용해 놈의 어그로를 끈 뒤. 날아드는 몽둥이를 방패로 받아냈다. 콰앙! 묵직한 충격과 더불어 뼈까지 전해지는 한기. 몽둥이를 받아낸 방패의 겉면 위로는 두꺼운 서리가 맺혔다. 라이칸스로프의 고유 능력은 아니고, 모두 저 얼음몽둥이의 효과다. [그르르르르!!] [컹컹!] 그런 와중에 정신을 차린 서리늑대들도 내게 달려들어 여기저기 할퀴고 물기 시작했다. [저체온증]을 감안해도 9등급 몬스터기에 대미지는 미미했다. 뭐, 두 번째 패턴이 시작되면 또 다르겠지만. 첫 번째 패턴에 끝낼 생각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지금이다!” 미샤에게 지시를 내리며 나 역시 벨트의 포켓에서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내 씹었다. 「캐릭터가 ‘천둥초’를 복용하였습니다.」 「10초간 전격 속성의 데미지가 소폭 상승합니다.」 천둥초.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모든 전격 속성 피해를 상승시켜 주는 도핑형 소모품. 유지 시간이 끝나기 전에, 이미 손에 쥐고 있던 라이트닝 스크롤을 입으로 찢어 효과를 발동시켰다. 지지직-! 가장 가까운 적에게 쏘아진 번개가 주변의 적들에게까지 연쇄한다. 값싼 하급 라이트닝 스크롤인지라 서리늑대도 한 방에 죽이기 어려운 대미지였지만……. 「폭군 타룬바스가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야 이놈은 전격 내성이 마이너스니까. 참고로 일반 라이칸스로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특징으로, 이놈만 유독 전격 속성에 약했다. 냉기 및 짐승 계열 몬스터가 왜 전기가 약점인지는 좀 의문이다마는. 「폭군 타룬바스가 [불굴]을 시전했습니다.」 이내 놈이 두 번째 스킬 [불굴]을 사용해 ‘행동불가’ 상태를 해제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면역이 아니라 해제에 불과하니까. 다시 하면 그만일 뿐. 퍼엉-! 이내 미샤가 던진 돌멩이가 터지며 폭발했다. 게임 내 명칭은 스톰 익스플로젼. 내가 평소 번개탄이라 부르던 그것. 「폭군 타룬바스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아낌없이 던진 일곱 개의 번개탄이 연달아 터지며 타룬바스가 아예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불굴]도 무용지물이다. ‘기절’은 석화, 마비, 빙결 같은 행동불가 상태가 아니라 정신계 상태 이상으로 판정되니까. 쿠웅-! 명색이 최종 보스라고 등장한 놈이 불과 3초 만에 무력화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다음은 실로 간단했다. 지난날, 데스핀드를 떡메질하던 때처럼 달려가 머리통을 내리치면 됐으니까. 퍼억-! 푸욱! 퍼억! 카칵, 콰직-! 미샤와 함께 전격 속성 인챈트를 한 무기로 무호흡딜링을 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놈의 육신이 잘게 쪼개져 입자의 형태로 흩날렸다. 「폭군 타룬바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3」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초. 놈이 사망하기 직전에서야 ‘천둥초’의 효과가 끝났으니 크게 오차는 없을 터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놈이 죽은 자리를 확인했다. “이 무슨…….”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던 칼슨은 깊은 탄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미샤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핏빛성채와 달리 균열석도, 넘버스 아이템도 나오지 않았지만……. “비요른… 이거 그거 맞징?’ 정수가 나왔다. *** “어, 이것도 내가 먹으라고……?” 뭘 또 이런 반응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곰아저씨와 분배비를 정할 때부터 수호자의 정수는 미샤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니, 그건 그런데… 나는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당. 우리 둘만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 아, 나중에 내가 뺏어갈 줄 알았단 거구나. ……대체 난 어떤 이미지인 거지 얘한테? “됐고, 사라지기 전에 얼른 먹기나 해라.” “꺗!” 길게 말하는 것도 귀찮았기에, 미샤의 등을 툭 쳐서 앞으로 밀어 버렸다. 그리고 미샤가 새로운 정수에 적응하는 사이.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인 채로 미동도 없는 곰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조금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면서도, 걔가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 ‘……뭐야.’ 자세를 낮추던 나는 흠칫 굳었다. “어으, 어…….” 놀랍게도, 곰아저씨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냥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의식도 확실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내가 다가오자마자 빳빳하게 굳은 몸으로도 뭐라 필사적으로 말을 하려 해 온 걸 보면. ‘4분은 족히 지났지……?’ 젠시아의 검이 ‘독사의 송곳니’인 걸 알았을 때, 이미 진작에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 대화를 들으며 확신을 했었고. [칼슨!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저 사람부터 확인해랑! 분명 가방에 포션이 들어 있을 테니!] [이, 이미 주, 죽었습니다!] 내가 젠시아와 면담을 하는 동안, 밖에서 그런 대화가 들렸다. 그래서 일단 오크부터 잡고, 최종 보스까지 잡고서 이곳에 왔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곰아저씨와 여정을 함께하며 그가 소지한 네 개의 정수는 얼추 확인을 끝냈다. 그중 두 개는 독 내성이 붙은 정수였다. 하지만 독이 아니어도 배가 저렇게 꿰뚫린 채로 이만큼이나 방치되면 보통은 죽는 게 당연한 일일 터. “포, 포션…….” 나를 보며 곰아저씨가 명확하게 말을 했다. 한데 그 작은 읊조림이 들렸을까. “어어? 살아 있었냥! 다행이당! 기다려 봐라. 얼른 편하게 해 줄 테니…….” 정수를 받아들이고서 여운을 느끼고 있던 미샤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그리고 곰아저씨의 가방을 뒤적여 포션을 꺼냈다. 상급 포션이었다.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걸 쓸 테니,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라?” “괜찮… 붓기, 나, 해…….” “알았당!” 미샤가 포션의 뚜껑을 따서 곰아저씨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다만……. 치이이이익! 상처 위로 가득 찬 피에서 기포만 들끓을 뿐,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참고로 [독성부여]에는 이런 효과는 없었다. ‘……칼에 뭔가 발라 뒀나 보군.’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치유와 재생을 막는 ‘상처 악화’ 계통의 독극물이었겠지. “어, 어? 이게 왜 이러지…….” “계, 속… 멈, 추지…….” “멈추지 말란 거징? 아, 알았당!” 곰아저씨의 요구에 미샤는 계속해서 상급 포션을 들이부었다. 허나 두 병째 부었음에도 본인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깨닫는 바가 있었을까. “해, 해독제… 노란, 송곳…….” “아, 이, 이거! 노란 병에 송곳니가 그려진 이거 맞냥?” “맞, 다…….” 곰아저씨는 미샤를 시켜 해독제를 복용했다. 솔플러답게 상비약을 많이 비축해 둔 모양. 다만……. ‘[독성부여]는 몰라도 악화 계통 독은 저걸로 안 풀릴 텐데.’ 내 예상대로 해독제를 마시고서도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아무는 상처. 그 와중에도 흘러나오는 검붉은 선혈. 치이이이익……! 두 병, 세 병, 네 병. 비워진 포션의 개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곰아저씨의 상태는 점점 악화됐다. 출혈을 막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피가 대량으로 빠져나가자 의식이 흐려졌는지 오더조차 내리지 못하는 곰아저씨. 그는 포션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브만? 정신 차려랑!” 미샤가 뺨을 툭툭 치고 어깨를 흔들었지만, 곰아저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 어쩌지? 아, 최상급 포션! 비요른, 그걸 쓰자!” 이제야 내가 사둔 최상급 포션이 떠올랐는지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미샤. 나는 미련 없이 최상급 포션을 꺼냈다. “비켜 봐라.” “아, 응!” 무려 한 병에 100만 스톤이 넘는 물건. 뭐, 이거로도 단번에 상처가 낫진 않겠지만, 출혈을 막을 정도는 되겠지. 치이이이익-! 사지절단까지 회복시키는 최상급 포션이 부어지자, 미미하게 회복되던 부상이 좀 더 유의미하게 아물기 시작했다. 출혈이 멎었고, 호흡이 안정됐다. 물론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기에, 계속해서 상급 포션을 퍼부었다. 치이이이익-! 한 병, 두 병, 세 병……. 참고로 내 것은 아니고 전부 곰아저씨의 가방에서 나온 포션이었다. 상급 포션은 열 개씩 들고 다니면서 왜 최상급은 안 갖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돈이 없어서는 아니었을 거 같은데.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군.” 추가로 상급 포션 다섯 병을 비웠을 때쯤, 상처가 3분의 2 이상 아물었다. 따라서 나도 치료를 중단했다. 이 정도면 목숨엔 지장이 없을 테니, 차라리 상처 악화 효과가 사라진 다음에 마저 치료하는 게 합리적이란 판단. “…….” 중간부터 신경 세포가 살아났는지,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던 곰아저씨는 기절한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칼슨이 내게 그런 말을 해왔다. 고생은 무슨. “그러고 보니 아직 배분을 하지 않았군.” 균열도 끝났겠다, 마석을 분배했다. “어, 계산이 이상한 거 같습니다마는…….” 우선 획득한 마석을 등급별로 나눈 뒤, 칼슨의 몫을 떼어주자 녀석이 조심스레 반문을 표했다. 얘도 이상한 놈이다. 조금 준 것도 아니고 많이 줬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그냥 갖고 가라. 정수도 먹지 못했지 않나.” 칼슨의 몫은 원래 5%에 불과했다. 뭐, 젠시아가 죽으며 10%로 늘어나긴 했지만……. 나는 20%의 마석을 지급했다. 입막음 비용이었다. “정 마음이 무겁다면, 오늘 일은 어디가서 말하고 다니지 마라.” “아, 예! 알겠습니다!” 정말 그 약속을 지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 터. “근데 저기… 그 젠시아 양은 왜 그런 짓을 했던 걸까요?” “약탈에 이유가 돈 말고 더 있나? 보아하니 이번에 처음도 아닌 거 같더군.” “그렇군요…….” 이내 정산을 받은 칼슨은 그 질문을 끝으로 포탈을 타고 균열을 떠났다. 하도 많은 일들을 겪었더니 여기에서는 조금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던 모양.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여긴…….” 곰아저씨가 정신을 차렸다. 109화 아기 바바리안 (2) “크윽.” “아직 움직이지 마라. 상처가 덜 아물었다.” “……날 살려 준 건가?” “최상급 포션까지 써가며 말이지.” 깨어난 곰아저씨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기쁘고 다 좋지만, 약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하긴 지도 알겠지. 만약, 자기가 죽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얼마나 컸을지. [고마워, 3천만 스톤은 되겠—] 3천만 스톤. 정확한 금액은 아니겠지만, 약탈 경험이 풍부했던 젠시아의 견적이니 얼추 맞을 터. 탐험가들의 생리에 빠삭할 곰아저씨가 조용히 읊조렸다. “…운이 좋았군.”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살리길 택할 탐험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최상급 포션에 대한 값은 지불하지.” 그거야 당연한 거고. “얼마면 되지?” “음, 500만 스톤이면 될 거 같군.” “…최상급 포션은 100만 스톤 정도일 텐데?” “그런가? 그럼 내가 상인들한테 덤터기라도 맞았나 보군.” 내 능글맞은 태도에 곰아저씨는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상황에 따라 물건값은 달라지기 마련이지.” 노련한 5등급 탐험가답게, 내가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모양. “500만 스톤이라…… 합리적인 가격이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너희 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냥?” 너는 가만히 있으렴. 지금 어른끼리 대화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큰돈은 없다. 500만 스톤은 도시에 돌아가서 지불하지.” “흐음.” “대신 이 물건을 맡겨 둘 테니, 도시에서 값을 지불한 다음에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이내 곰아저씨가 해골 모양의 팔찌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넘버스 아이템이다. 방금 한 번 쓰긴 했지만, 그래도 500만 스톤은 훨씬 넘을 물건이지.” 이후 곰아저씨가 물건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난 이미 이게 무엇인지 알았다. No. 7611 ‘시체술사의 기만’. 착용자가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받았을 때, 가사상태에 빠지며 일정 시간 피해 면역 효과를 갖게 해주는 물건. 참고로 3회를 사용 시 부서진다. ‘어떻게 살아 있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냥 500만 스톤 대신에 이걸 주는 건 어떻냐고도 물어봤지만, 곰아저씨는 담보로 맡기는 것일 뿐 나중에 돈으로 주겠다고 딱 잘라 선을 그었다. “혹시 갖고 튈 생각은 하지 마라. 얀델의 아들 비요른.” 뭐야, 어떻게 알았어. 내가 흠칫하자 곰아저씨가 피식 웃는다. “묘인족과 같이 다니는 바바리안에 대해선 들어 본 적 있으니까. 저 아가씨도 몇 번인가 네 본명을 말했고. ” “어엇, 내가 그랬었냥?” “걱정 마라. 괜히 주목받고 싶지 않은 기분은 이해하니.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니 다행이다. 딴 건 몰라도, 드왈키나 난쟁이놈 귀에 들어가면 조금 일이 귀찮아지거든. 의뢰를 받았다고 빠져나왔던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그 썅년은 죽었나? 수호자는 둘이서 해치운 거고?” 죽다 살아난 곰아저씨는 우선 목숨값에 대한 계산부터 끝마치고서 다음 상황을 물었다. 자세히 설명하기엔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탐험가로서의 예의를 아는 곰아저씨는 깊이 캐묻지 않았다.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부풀려진 얘기라 생각했지만, 오늘 일을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나 보군.” 젠시아는 그러려니 해도, 수호자를 둘이서 처리했단 부분이 놀라웠던 모양. 아무튼 추후 도시로 돌아가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아저씨 몫의 마석도 분배를 해주고 있자니 부상이 모두 아물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리고 미샤 칼스타인. 살려 줘서 고맙다. 오늘 은혜는 잊지 않겠다.” 아저씨는 그 말을 끝으로 홀라당 포탈을 타고 균열을 벗어났다. 마지막까지 정말 쿨한 아저씨구나. *** 곰아저씨가 떠나고 잠시 ‘시체술사의 기만’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3개의 보석 중 2개에서 빛이 났다. 즉, 사용 가능 횟수가 2번 남았단 뜻. ‘이건 그냥 끼고 있다가 돌려주자.’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일단 팔목에 착용했다. 꼭 잘 갖고 있다가 돌려줘야 한다는 곰아저씨의 말이 떠올랐지만……. ‘뭐, 잘 쓰고 돌려주면 되겠지.’ 여하튼 이 문제는 제쳐두고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500만 스톤이라…….’ 최상급 포션을 대가로 나름 괜찮은 보상을 얻었다. 뭐, 3천만 스톤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긴 하겠다마는. ‘나도 정말 야만인이 다 됐군.’ 솔직히 말해, 조금도 욕심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다. 곰아저씨가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으면, 혼령각인을 단번에 6단계까지 올리고도 남을 거액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구할 방법이 있으면서 돈 때문에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약탈자와 뭐가 다르냐는 철학적 고민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미샤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 보냥? 갑자기 또 불안해지는뎅.” “아무것도 아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내 윤리 수준이야 어쨌든. 앞으로 함께할 동료가 옆에 있는 와중에 할 짓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전부 끝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나 혼자였으면 어땠으려나.’ 단순히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돈이란 힘이고, 목숨과도 같다. 만약 미샤가 없었다면, 그 거대한 유혹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굳이 벌써 고민할 문제는 아니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탐험가 일을 해가다 보면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따라서 이만 상념을 끝내고 짐을 챙겼다. “응? 우리는 안 나가냥?” 나가긴 어딜 나가. 챙길 게 두 개나 있는데. 미샤를 데리고서 얼음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원래는 막혀 있었지만, 아까 전에 폭군 타룬바스가 등장하며 모습을 드러낸 통로. 이 통로를 따라 쭉 이동하면 아까 전에 있었던 두 번째 챕터로 이동할 수 있다. “와…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냥? 균열에 대한 정보는 엄청 비싸던데.” “라그나 덕분이다.” “아, 으응… 그 여자…….” 라그나가 오픈해 준 비밀 도서관 핑계를 대자 미샤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얘는 평소에 책을 읽지 않아서인지, 책에서 봤다고 하면 믿는 경향이 있다. 콰앙-! 두 번째 챕터에 도착한 다음엔, 계단을 역으로 타고 오른 뒤 위에서 세 번째 기둥을 박살 냈다. 마피아를 관찰하느라 챙기지 않고 지나쳤던, 복용 시 1회에 한해서 냉기 저항력을 올려 주는 물건. 「캐릭터가 ‘마력이 깃든 얼음 조각’을 복용하였습니다.」 「냉기 내성이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미샤야 냉기 내성이 충분했기에 내가 먹었다. 뭐, 그 다음 건 얘한테 줄 생각이다마는. 첫 번째 챕터를 지나쳐 나온 우리는 아예 빙하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쳐 시작 지점으로 향했다. 콰앙-! 스타트 포인트 근처의 작은 연못. 메이스로 깨부순 뒤, 얼음물 안으로 잠수해서 붉은색 얼음 구슬을 꺼냈다. “자, 먹어라.” “뭔지 알려 주는 게 먼저 아니냥?” 내가 너한테 나쁜 걸 먹이겠니? 그래도 일단 대충이나마 설명해 주자 미샤도 불안을 지우고 오독오독 씹어서 삼켰다 「미샤 칼스타인이 ‘빙정’을 복용하였습니다.」 「냉기 감응도가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사실 ‘빙정’이야말로 빙하굴의 시그니처다. 감응도를 올려 주는 데다가 세 번까지 먹을 수 있어서, 빙결 트리 육성을 할 때는 초반부에 항상 빙하굴부터 왔었다. ‘다음에도 쿨 돌면 여기부터 와야겠네.’ 잠수까지 하는 바람에 제법 쌀쌀했기에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말렸다. 미리 벗어서 개어뒀던 옷을 다시 입었다. “그럼 이제 끝이군.” “오, 드디어 나가는 거냐?” 뭐래. 나는 가방에서 모포를 꺼냈다. “……왜 모포를 까는 거냥?” “간밤에 불침번까지 서느라 얼마 못 자지 않았나. 잠시 쉬다 가자.” 사실 클리어된 균열만큼 안전한 곳은 이 미궁 내에 없다. 조금 춥긴 하지만……. 한숨 푹 자기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셈. “걱정 마라. 여기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으니.” “……그, 그렇구낭. 그럼 잠시만 쉬었다 가는 거당?” “그래. 추우니까 이리 와 봐라. 그냥 같이 덮자.” “…그, 그럴까앙?” 콧잔등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 모닥불의 온기. 밤 시간대가 되며, 하늘 위로는 검푸른 은하수가 늘어져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요른… 자냥?” 드르르르르렁! “자, 자는구낭?” 우린 잠시 눈을 붙였다.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 5등급 탐험가, 아브만 우리크프리트. 수정동굴에서 눈을 뜬 그가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제야 실감이 나고 있었다. ‘……살아 돌아왔군.’ 한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몸담은 팀에서 나오고 쭉 홀로 활동해 왔다. 그러면서 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야 이 미궁은 혼자서 돌아다닐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 위험한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운이 좋았어.’ 거듭 느끼지만, 운이 좋았다. 처음부터 약탈을 목적으로 정체를 숨기고서 균열에 들어온 미친년을 만난 거야 어쨌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을 살릴 만큼 선한 탐험가가 팀 내에 있었다. 그리고 그자에게 최상급 포션도 있었다. 과연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돌아가면 신전에 헌금이라도 해야겠군.’ 몇 번을 생각해도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잠시간 생존의 여운을 즐기던 그는 머릿속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라…….’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 이름은 도시에서 몇 번이고 들었다. 물론,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특이한 놈이 나왔구나 하는 정도? 5등급 탐험가인 그에게 이명을 가진 탐험가란 딱히 낯설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재밌는 놈이란 말이지.’ 그는 일반적인 바바리안과는 달랐다. 단순무식해 보일지언정 노련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협상에도 능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랜 기간 탐험가 생활을 이어 간 바바리안과 비슷했다. 순수하되 결코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눈치챌 수 있었던 거겠지. 자신도 몰랐던 그 여자의 검은 속내를. ‘3개월 차에 이명을 얻고 지금은 벌써 이 정도 노련함을 갖췄다라…… 분명 크게 되겠군.’ 그에 대한 악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감사의 마음만 일었다. 암만 돈을 좇는 게 탐험가의 숙명이라지만, 돈에 잡아먹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치료비랍시고 500만 스톤을 요구받은 것? 장비를 통째로 다 벗겨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탐험가로서의 도리를 지켰다고 볼 수 있었다. 뭐, 그 도리를 잊어버린 자들이 많기에 그 행동이 더욱 특별해 보이는 거겠다마는. ‘하긴, 그러니까 그 아가씨가 그렇게 따르는 거겠지.’ 아브만은 바바리안의 동료로 보였던 묘인족 아가씨를 떠올렸다. 바바리안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녀에게 예티와 수호자의 정수를 양보했다. ‘그 아가씨도 참 운이 좋단 말이지.’ 이런 동료를 가진 건 여간 복이 아닐 터. 후, 만약 예전의 팀원들이 그자의 반만 됐어도 이렇게 혼자 다닐 일도 없었을 텐— ‘아니, 잠깐만…….’ 처음엔 잠깐 스쳐 지나간 상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달리하고 아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확실히 이런 놈이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안 그래도 이번 일을 겪으며 홀로 다니는 것에도 회의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긴 나도 언제까지 혼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지. 마침 저쪽도 아직 두 명밖에 없는 듯하고.’ 이내 아브만은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그를 영입하려 했던 여러 클랜이나 정규 팀들이 알면 허탈해하겠지만……. 알 게 뭔가. ‘나중에 도시에서 만나면, 한번 말이나 꺼내 봐야겠군.’ 그는 이 바바리안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110화 아기 바바리안 (3) [00 : 51] 3일 차가 거의 막 시작되었을 무렵. 우리는 빙하굴을 떠나 수정동굴로 돌아왔다. 나름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이번 균열의 소득은 상상을 초월했다. 젠시아의 장비. 곰아저씨의 500만 스톤. 그리고 예티와 수호자의 정수까지. 1층 균열 클리어 보상이라기엔 터무니없는 이득을 보았다. 4층에서 5인 파티로 두 달 동안 번 돈이 200만 스톤이 안 됐는데. ‘니미럴.’ 새삼 깨닫는다. 역시 나는 좆같은 일을 겪어야만 이런 행운을 얻을 수 있구나. 서걱-! 이내 미샤가 새로 산 검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던 칼날늑대 한 마리를 베어내더니 감탄을 토해냈다. “오오!! 이 검 뭐냥? 진짜 좋당!” 어차피 원샷원킬인 건 같지만, 손맛에서부터 차이가 느껴졌던 모양. “자세한 건 감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넘버스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다.” “너, 넘버스 아이템이라고? 그, 그럼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냥?” 미샤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디 ‘독사의 송곳니’뿐이랴. 함께 건네준 가죽 경갑도 고가의 물건이다. 2단계 소재인 와이번 가죽제였으니. ‘이 정도 스펙이면 5층까지는 걱정없겠네.’ 한 가지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이번에 초중반 세팅은 끝났으니, 한동안은 추가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아도 한 사람 몫은 단단히 해줄 터. “그럼 이제 2층으로 가는 거냥?” “그래야지.” 나는 미샤와 함께 나침반을 타고 쭉 이동했다. 일단 이번에 미궁에 들어온 목적은 끝냈지만, 남은 시일을 놀다 보내는 건 아까우니까. ‘탐색꾼이 없긴 하지만… 잘하면 3층까지는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지도.’ 아무튼 이동하면서 만나는 몬스터들은 미샤가 전담해서 해치웠다. 검이 한 자루 바뀌었고, 스탯도 크게 올랐으니 새 감각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던 탓이다. “저, 비요른? 나 이제 다 된 거 같은뎅.” “확실하냐?” “어어… 그건… 아니당. 내가 그냥 계속 잡겠당. 근데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징?” “…날 의심하는 건가?” “아, 아니당! 절대! 그럴 리가 있냥!” 미샤의 합리적 의심이야 어쨌든. 나는 편하게 이동만 하며 미샤의 수련을 도왔다. 새로운 검도 검이지만, 정수의 능력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보고 있자면 절로 흐뭇했다. ‘정말 수호자 정수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빙결 트리에 한해, 라이칸스로프 정수는 예티만큼이나 성능이 좋았다. [라이칸스로프] 7등급 민첩 +10, 절삭력 +12, 냉기 감응도 +15, 냉기 내성 +10, 물리 내성 +7, 투쟁심 +10 일단 스탯치에 검사 계열의 핵심인 절삭력이 붙은 데다가. 패시브 스킬이 아주 사기다. (P) 설원의 피 - 냉기 감응도 수치가 1.5배 상승합니다. 냉기 감응도 1.5배 상승. 후반으로 갈수록 빛을 발할뿐더러, 예티의 [냉기응축]과도 시너지가 좋다. 액티브 스킬도 마찬가지였고. (A) 얼음분쇄 - ‘동상’ 상태의 적에게 주는 피해량이 소폭, ‘빙결’ 상태의 적에게 대폭 상승합니다. 일단 이건 효용성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니 패스. (A) 불굴 - 행동불가 상태를 해제합니다. 영혼력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불굴]도 CC기에 취약한 딜러의 안정성을 확 높여 주는 좋은 스킬이다. ‘무엇보다 이게 있으면 항마력 스탯을 그렇게까지 챙길 필요가 없어지지.’ 원래라면 이 스킬 중 하나만을 고를 수 있어야 했겠지만……. 미샤가 흡수한 건 다름 아닌 수호자의 정수. 두 가지의 스킬을 모두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스탯치도 일반 정수보다 1.5배가량 더 높다. “되도록 급소 말고 다른 데를 공격해 봐라.” “어, 그래도 한 방에 죽던데…….” “그럼 주먹으로 치면 되지 않나.” “알았… 응? 그래도 한 방에 죽는데?” [냉기응축]을 사용하고서 때린 주먹질 한 방에 꽝꽝 얼어붙은 칼날늑대를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9등급 몬스터라 그런가? [얼음분쇄]로 연계기를 넣기도 전에 빛이 되어 사라져 버리니 제대로 된 수련이 안 됐다. “나머지는 올라가서 해야겠군.” “……올라가서도 해야 하는 거냥?” 쯧, 어디서 쉽게 날로만 먹으려고. “거듭 말하지만—” “안다. 쉬운 길이 느린 길이란 거 아니냥.” 어, 음… 그렇지. 내 말문이 막히자 미샤가 싱긋 웃으며 앞장서 나갔다. 꼬리의 끝부분만 살랑살랑 움직이는 게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 ‘……뭔가 잘못했을 때 말싸움에서 져주는 척하면 쉽게 풀리겠군.’ 미샤 사용법 13번을 머릿속에 적어넣으며 텐션이 올라간 미샤를 뒤쫓아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균열에서 나온지도 어언 7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슬슬 암흑지대가 나올 때도 된 거 같은—’ 나는 걸음을 멈췄다. 후우우웅-! 지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동굴벽에 박힌 수정들이 영롱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광채의 색 역시 변했다. 은은한 보라색에서 강렬한 적색으로.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소환했나 보군.’ 1층에 계층군주가 소환됐다는 뜻이었다. *** “별거 아니니 계속 움직여라.” “별거 아니라닝? 난 저런 건 생전 처음 보—” “누군가 계층 군주를 소환했을 뿐이다. 딱히 여파가 올 일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말—” “뭐어? 계층 군주?!!” 어우, 고막이야. 3층에서 만난 계층군주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을까? 미샤가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내게 달라붙는다. 거, 그렇게 놀랄 필요 없는데. “미샤, 진정해라.” 1층 계층군주는 3층과 달리 얌전하다. 일단 소환법도 3일 차가 지나간 후, 5명 이상이 한군데 모여 있으면 확률로 등장하는 것인 데다가……. 소환됐다고 포탈도 닫히지 않고, 해당 층에 출현하는 몬스터도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리아키스는 한번 소환되면 죽을 때까지 필드 전역을 누비며 학살을 벌이지만, 이놈은 레이드에 실패하면 그냥 조용히 사라진다. “그, 그럼 우리는 괜찮은 거냥?”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라.”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자, 미샤도 마음이 놓였는지 숨을 크게 내쉬며 평정을 되찾았다. 근데 불안이 가시자 호기심이 피어났을까? “근데 대체 누가 실수로 소환을 한 걸까? 여기서 다섯 명 넘게 다니지 말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건뎅.” “글쎄, 어쩌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르지.” “실수가 아니라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아꼈다. 정황상 커뮤니티에서 1층 계층군주에 대한 공략법을 사갔던 자가 소환했을 확률이 크지만……. 그걸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지간히 성격이 급한 놈이군. 준비 기간이 2주 정도밖에 안 됐을 텐데.’ 음…… 달리 말하면 성급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모든 준비물을 갖출 만큼 세력이 크단 말도 되려나? ‘잘하면 그 유저가 누군지 알아낼 수도 있겠네.’ 추후 도시로 돌아가면 계층군주 사냥에 성공한 클랜, 혹은 파티에 대한 소문이 있는지 찾아보자 마음먹으며 나는 계속해서 여정을 이어갔다. 새삼 로트밀러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쩝, 거의 하루 가까이 걸릴 줄이야.’ 나침반이 보여 주는 방향 하나만으로 이곳저곳 헤매던 끝에 우리는 2층 포탈에 도달했다. 참고로 내가 고른 것은 남쪽, 구울 지구와 이어진 망자의 땅. 「2층 망자의 땅에 입장했습니다.」 습기에 차 질척거리는 흑색 대지. 2층 중에서도 유난히 좁은 가시거리. 그리고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벤시의 비명. “여기도 오랜만이군.” 왠지 땅을 밟자마자 그리운 마음이 피어났다. 아이나르랑 같이 스켈레톤도 뽀개고, 데스핀드로 떡메질도 치고, 신나서 돌아다니다가 그 사이코패스년을 만나서 뒈질 뻔도 하고……. ‘니미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갑자기 기분이 팍 식는다. “으, 여기는 올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나는 차라리 ‘바위사막’ 쪽이 좋은데.” “로트밀러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중심부여서 어느곳이든 갈 수 있었지만, 굳이 망자의 땅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2층들 중 3층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쉽다. 끝에서 조금 헤매기야 하겠다마는, 일단 북쪽으로만 나아가면 되니까. ‘게다가 모처럼 둘뿐이니, 데스나이트도 소환해서 잡고 가야지.’ 정수는 딱히 필요 없지만, 다섯 명이서 다닐 때는 잡기 어려운 놈이기에 지금 경험치를 수급해 두기로 했다. 몇몇 균열이 아니면 6층에 가서야 만날 수 있는 놈 아닌가. ‘6등급 몬스터니, 얘가 얼마나 세졌는지도 시험해 볼 수 있겠지.’ 물론 그놈을 소환하기 전에 미샤의 수련부터 완벽히 끝내야겠지만. “어서 가자.” 북쪽으로 이동하며 스켈레톤, 구을 등 9등급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을 빠르게 벗어났다. 한 5시간쯤 걸렸나? 어느새 축축한 늪지에서 딱딱한 돌바닥으로 바뀐 지형. [꾸오오오오옭—!!] 머지않아 데스핀드가 나타났다. 3일 차답게 네 마리씩 모여서 다니고 있는, 일명 ‘뉴비 절단기’ 새끼들. 지난날에 아이나르와 둘이서 한 마리를 잡는 데도 개고생을 했었더랬지. ‘뭐, 이제는 맞아 죽고 싶어도 안 죽는 몸이 됐지만.’ 데스핀드는 방어력이랑 재생력 특화 몹이다. 구울을 소환하긴 하지만, 9등급짜리한테 딜이 박힐 리도 없고. 쉽게 말해, 미샤가 새 스킬을 시험하기 딱 좋은 상대인 셈. “내가 관심을 돌리고 있을 테니, 너는 걱정 말고 새 능력을 써보는 데만 집중해라.” “알았당.” “베헬—라아아아아아!!” 이내 [야성분출]을 시전하자 횃불의 경계선에서 우리를 응시하던 데스핀드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꾸오오오오옭—!!] 일단 두놈은 방패로 돌진을 막았고, 한놈은 옆으로 피해서 흘려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콰앙! 그냥 귀찮아서 맞아 줬다. 내가 처음으로 사냥에 성공했던 8등급 몬스터라 그런지, 묘한 감회가 밀려온다. 예전에는 얘 한 마리한테도 힘에서 밀렸었는데. [꾸옭?!] 방패에 힘을 실어 밀치자, 속절없이 밀려나는 데스핀드 새끼들. “아직 멀었나?” “다 끝났당!” 이내 ‘강화냉기응축’을 끝마친 미샤가 독사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카칵! 데스핀드의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방패손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유의미한 방어는 아니었다. 평타 한 방에 팔꿈치까지 얼어붙은 방패손.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빙결’ 판정을 받은 부위에 미샤가 다른 쪽 칼을 휘두르자, 그대로 산산조각나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꾸… 옭?] 냉기 속성이기에 [육체보존]으로도 재생이 되지 않는 상처.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지, 데스핀드는 혼란스럽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뭐, 위험하단 건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지만. 「데스핀드가 [망자의 부름]을 시전했습니다.」 네 마리가 동시에 소환 스킬을 쓰니, 땅에서 기어나오는 구울의 숫자가 무려 마흔에 달했다. 물론 이 또한 크게 의미는 없었다. 예전에 저 손톱질에 쉽게 찢겨져 나갔던 몸은 이제 라이티늄제 흉갑에 덮혀 있을뿐더러……. [그르르르……?] 물리 내성이 높아지며 맨살도 제법 튼튼해졌다. 솔직히 말해, 그냥 쳐맞기만 해도 피까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을 정도. 설령 나오더라도 산성에 쥐약인 구울 새끼들 손이 녹아내렸다. 한데 그 와중에도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으니……. “비요른… 너는 무슨… 괴물인 거냥?” 사람을 보고 괴물이라니. 뿌듯한 마음을 감추며 툴툴대듯 대답했다. “구경 그만하고 어서 해치우기나 해라.” 거, 나중에 세팅이 전부 끝나면 사람 취급도 안 해주겠구만? *** 이후로도 북상하며 수련을 이어 갔다. 덕분에 미샤도 어느 정도로 얼어야 ‘동상’ 판정인지 ‘빙결’ 판정인지 감을 잡았다. 또한, 행동불가 스킬이 있는 키메라 울프를 만나며 [불굴]의 사용법도 완벽하게 터득했다. “으음, 글쎄? 그냥 힘을 빡 준다는 느낌으로 하니까 되던뎅?” 사용법을 알게 된 후에는, 영혼력이 많이 소모되는 편이니 꼭 필요할 때만 쓰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영혼력이 바닥나면 [강화]고, [독성부여]고, [얼음분쇄]고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니까. “너는 내가 어린애로 보이는 거냥?” ……틀린 말은 아니다. 그야 얘는 4렙을 찍을 때까지 스킬이 두 개밖에 없었으니까. 굳이 MP 조절을 할 것도 없이 바닥날 일이 없었을 거다. ‘……이건 백날 말해 봤자야. 직접 겪어 봐야 느끼는 게 있겠지.’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몰아부치듯 사냥을 해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괜찮다며 스킬을 펑펑 써재낀 결과, 마침내 영혼력이 바닥났다. “……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이당. 몸이 힘들 거나 한 건 아닌데, 몸이 텅 빈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잘 분배하라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당.” 미샤의 MP도 바닥나고, 마침 슬슬 쉴 때도 됐기에 아예 야영을 시작했다. 벽이 있는 건축잔해를 찾았고, 거기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 명씩 잠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하하,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 이 친구야.” 한 2, 30m 거리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탐험가인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대화음이 들려오는 걸 보니 우리가 근처에서 야영 중인 걸 모르고 자리를 잡은 모양. ‘뭐, 어차피 슬슬 미샤를 깨울 때도 됐으니까. 굳이 가서 꺼지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용히 남은 시간을 때우던 때였다. “그나저나 이 바바리안놈은 정말 세상모르고 자는군?” “조용하게, 그러다가 깰지도 모르니.” “푹 자게 냅두시오. 비싼 몸뚱이 아니겠소? 지금이라도 푹 쉬어야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르르르르렁-!! 이제 보니, 하이에나 같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아기 바바리안이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111화 아기 바바리안 (4) 바바리안이 인간과 팀을 꾸리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아무리 높은 육체 수치와 전투 감각을 타고난 그들이라고 해도, 2층부턴 동료가 필요하니까. 실제로 2, 3개월 차만 돼도 팀을 꾸려 2층으로 향하는 게 정석적인 루트였고. ‘문제는 제대로 된 놈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거겠지만.’ 요정, 드워프, 수인 등. 다른 이종족은 그나마 사정이 괜찮다. 성지에서 오직 ‘전투술’만을 갈고닦은 바바리안들 보다는 덜 순진할뿐더러……. 심장이 마법 재료로 고액에 팔리진 않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뭘 하고 있냐고? 대부분 죽었다.] 이미 나와 같이 성인식을 치른 바바리안들은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과연 그게 ‘몬스터’ 때문이었을까? ‘그럴 리가.’ 그런 합리적 의심 때문에라도 더욱 집중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하지만……. “그럼 이만 나도 쉴 테니, 잘 부탁하겠네.” “다음은 내 차례였지?” 다들 차례로 잠에 들며, 아기 바바리안에 대한 화제는 처음을 끝으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앞에 세 마디 대화만으로도 저 셋이 어떤 놈인진 대강 파악이 됐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오늘 일을 저지를 생각은 아닌 거 같고.’ 실컷 부려먹다 마지막 날에 죽여 버릴 생각인 거겠지.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어쩌지?’ 고민이 됐다. 일단 나 역시 한 사람의 바바리안인 자로서, 위기에 처한 아기 바바리안을 못 본 체하며 지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따라다니며 놈들이 야욕을 드러낼 때까지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냥 가서 전부 죽여?’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쉽고 편한 방법이긴 하지만, 최선은 아니다. 아직 저 셋이 약탈자란 증거가 없단 문제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럴듯한 말로 미샤나 아기 바바리안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겠지.’ 때론 직접 겪어 봐야지만 뼈저리게 깨닫는 부분도 있는 법. ‘어차피 수련이 주목적이었으니, 하루까지는 투자해도 되겠고…….’ 고민 끝에 한 가지 계획을 세운 나는 미샤를 깨웠다. “미샤.” “으응……?” 손 모양으로 조용히 시키고서 일단 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으로 이동했다. 그다음에 짤막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미샤는 눈을 비비면서도 잔말 않고 경청해 주었다. “으음… 그러니까, 저놈들이 약탈자일 거 같다는 거징?” “그래, 괜찮으면 잠시만 시간을 내서 확인했으면 하는데.” “난 상관없당. 바바리안이라면 남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남이 아니라니?”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어쩌면 나랑도 만났던 사람일 수도 있지 않냥.” 보아하니 내가 몇 달간 미궁에 진입할 때마다 어린 전사들의 안내인 역할을 해 줬던 걸 말하는 듯한데……. 음, 어쩌면 걔 중 하나일 수도 있겠네. 인간을 조심하라고 수없이 조언했지만, 겪기 전엔 크게 와닿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 됐군. 어서 옷이나 갈아입지.” 계획을 위해 준비할 게 있었다. *** 메이스, 그리고 라이티늄제 흉갑과 방패를 가방에 집어넣는다. ‘무기는…… 그냥 잃어버렸다 하면 되겠고.’ 채비를 끝낸 나는 마지막으로 현 상태를 점검했다. 투구를 제하면 철제 장비랄 것도 없는 완벽한 아기 바바리안의 모습. 번외로 옆에는 맨땅 수인이 있었다. “으… 이거 불편한뎅…….” 완벽한 계획을 위해, 기존 장비를 대신해 젠시아의 초심자용 장비 세트를 입혔다. 그런데 아까부터 미샤가 자꾸 가슴부를 만지작거린다. 거, 신경 쓰이게. “뭐 하나?” “응? 그냥 딴 건 몰라도 가슴 부분이 너무 갑갑해서…….” “가슴 부분?” 내가 힐긋 바라보자 미샤가 명치를 때렸다. 뼈까지 시린 걸 보니, 냉기 피해가 제대로 들어온 모양. “어딜 보는 거냥? 절대 내가 그 여자보다 살쪄서 그런 게 아니거든?” 아니,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애초에 생각지도 못한 불만이라서 쳐다봤을 뿐이다. 원래 입고 있던 경갑도 사이즈는 똑같았을 테니까. 내가 모순을 짚자 미샤가 태연히 대답했다. “아까 거도 작기는 했는데, 그건 그래도 철판 부분이 없지 않았냥.” 음, 그렇다면야. 젠시아와 미샤. 둘 다 민첩캐다운 몸매의 소유자였지만 잘 찾아보면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골격이라던가. 얘는 이래 봐도 제법 키가 큰 편이니까. 재보진 않았지만 170은 될 거다. 인상도 약간 차가운 편이라 처음엔 까칠 타입인 줄 알았었지. “그냥 가슴 부분만 꽉 조일 뿐이고 다른 데는 오히려 넉넉해서 남는당. 알겠냥?” “알겠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서 대충 대답해 주었다. 한데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미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그래… 네가 여자 몸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냥?”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자꾸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할 거냥?” “준비됐으면 어서 가지.” 시답잖은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그 대화를 끝으로 아까 전 장소로 이동했다. 일부러 소란스럽게 인기척을 크게 내며. “베헬—라아아아아아!!” “꺅!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냥!”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어?” 미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누, 누구냐!” 즉각적으로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외침. “어! 저기에 사람이 있다!” 나는 천진난만하게 외치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머지않아 미궁의 불가시 거리가 끝나고, 모닥불을 피워 둔 네 명의 탐험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 셋에 곤히 잠든 아기 바바리안 하나. “그만,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인간 셋은 이미 깨어난 채로 이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로이스, 어서 저놈부터 깨워라.” 로이스라 불린 활잽이가 발로 툭툭 쳐서 아기 바바리안을 깨웠다. “뭐, 뭔가? 몬스터인가?” “탐험가다.” “탐험가? 근데 왜 나를 깨우나? 잘 자고 있었는데…….” “지난번에도 말했지 않나. 몬스터만큼 탐험가들도 조심해야 한다고.” “아! 기억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 동족인데?” 활잽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아기 바바리안이 날 발견하고는 반가움을 담아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는 타르손의 아들 카론이다!” “토르의 아들 비욘이다!” 내친김에 아예 접근해서 악수를 한 뒤 어깨까지 부딪쳐 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훑어보니 다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인간 셋은 물론, 언질을 받았던 미샤까지. ‘이 바바리안 새끼들이 대체 뭔 짓거리를 하는 거지?’ 딱 이런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느꼈을까? 아기 바바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나를 보더니 동료들에게 말했다. “다들 무기를 내려라! 토르의 아들 비욘은 나쁜 탐험가가 아니다!” “그래! 나는 나쁜 탐험가가 아니다!” 우리 둘의 말에 활잽이와 창술사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 모였다. 아무래도 이놈이 리더인 모양인데…….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무기를 내렸다. 여기서 끝까지 경계하는 것도 우습게 보인다 여긴 모양. “그래서 바바리안—” “토르의 아들 비욘이다.” “그래, 토르—” “토르는 내 아버지의 이름이다.” “크흠, 비욘—”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진 않으니, 풀네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세 번 연속으로 말이 끊긴 리더는 상당히 빡쳐 보였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웃는 낯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토르의 아들 비욘?” “말해라.”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줬으면 하는데. 보다시피 쉬던 중이라서 말이지.” 리더의 말은 합당했으며 상식적이었다. 탐험가끼리는 어지간해서는 서로 접근치 않는 것이 예의고 관례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지금의 나는 그딴 걸 알 리 없는 크고 소중한 아기 바바리안. 오히려 잘됐다는 듯 외쳤다. “쉬고 있다니 우연이군! 우리도 마침 쉴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쉬자! 그, 밤친구? 그래, 그런 것도 있지 않나!” “밤친구?”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인간 셋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밤친구를 구하는 건 1층에 국한된 문화니까. 팀단위로 다니는 2층에서 웬 바바리안에게 밤친구 제안을 받을 거란 상상도 못 했겠지. “하아…….”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리더가 이마를 매만졌다. 한데 그 와중에. “오오, 그러면 되겠군. 이리 와라, 내가 누워 봤는데 여기가 조금 덜 딱딱하다.” 아기 바바리안이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 리더는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해, 탐험가들의 관례를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그러니까 너희 말은… 2층부터는 밤친구를 만들지 않는다는 거군?” “그래, 그렇지. 이해가 됐다면—” 글쎄, 이해는 할 생각이 있는 놈이 하는 거고. 나는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너무 멍청하다! 다 같이 자면 더 많이 잘 수 있지 않나!” “응?”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라. 너희가 네 명이고 우리가 두 명이지 않나. 일곱 명이서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맡으면 한 사람당………… 아무튼 좀 더 많이 잘 수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답이 없는 바바리안식 주장. 모두가 환청을 들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아, 한 사람만 빼고. “그건… 그렇군……! 왜 탐험가들은 진작 그리하지 않았지?” 내 주장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기 바바리안의 모습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함을 깨달았을까? “이보시오. 우리 쪽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그쪽은 그쪽네 거를 챙겨서 데려—” 리더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미샤에게 말을 걸더니, 돌연 멈칫했다. 이제야 얼굴을 확인한 모양. 짜증만 묻어나던 목소리도 어느새 변했다. “크흠흠, 그러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일단 그쪽 생각은 어떠시오?” 쓰윽 훑는 놈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미샤가 흠칫 굳었지만,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주자 표정을 달리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뎅……. 일단 그쪽에도 바바리안이 있으니, 위험한 사람들 같지는 않아 보이기도 하고…….” “하하,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이외다.” “아무튼, 얘가 무기를 잃어버려서 혼자 불침번을 세워 두는 게 불안하던 참이당. 그래서 그쪽만 괜찮으면 그냥 같이 하룻밤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저런, 무기를 잃어버렸다고?” 미샤의 말에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내. 이제야 내가 무기도 없는 맨손임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아, 무기? 몬스터와 싸우다가 실수로 놓쳤는데 없어져 버렸다!” “그렇군?” 대충 만들어 온 변명을 들려주자, 그냥 그러려니 납득을 하는 사내. 역시 바바리안이 사기캐이긴 하단 말이지. ‘아무튼 이쯤이면 미끼는 충분히 뿌린 거 같고…….’ 나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최종 제안을 했다. “그래서 밤친구는 할 거냐, 말 거냐? 빨리 결정해라. 점점 졸려지고 있으니까.” 참고로 만약 여기서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나는 그 길로 떠날 셈이었다. 이 정도로 했는데 거절을 한다면 내가 이 셋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으니까. 하지만……. “뭐…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리더가 말꼬리를 흐리며 인간 셋과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하니, 이대로 보내는 것도 너무 매정할 수 있겠지.” “그렇게 어렵게 말하면 이해할 수 없다.” “……원한다면 하룻밤 쉬고 가도 좋다.” 놈의 속내가 너무도 빤히 보이는지라 겨우 웃음을 참았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는 법이다. *** 어쩌다 보니 성립된 하룻밤 관계. 음,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일단 우리는 통성명부터 간단하게 했다. “여기는 로이스, 빅터, 나는 브리올이다.” 활잽이 로이스, 창술사 빅터. 그리고 리더 겸 망치 전사인 브리올까지. ‘……한스가 없다니.’ 설마, 가명인가? 아니, 가명을 썼으면 저기 아기 바바리안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나와 미샤는 근처 자리에 함께 누웠다. 모포라도 깔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랬다간 확장형 배낭을 쓰는 모습을 들키게 될 테니까. “자네들은 푹 쉬게. 마지막 순번으로 미뤄 줄 테니.” “오오, 너희들은 정말 착한 탐험가로군!” “하하하… 이 친구도 참.” 여하튼 눕자마자 미샤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요른.” “조용히 해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냥?” 일단 내 지시기에 따르기는 하지만, 미샤는 현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긴 암만 좆밥 새끼들이어도, 무방비하게 누워 있으려면 몸도 마음도 불편하겠지. 하지만……. “좀만 참아라. 나중에 원하는 걸 한 번 들어줄 테니.” “…정말이냥? 약속한 거당?” 나는 미샤에게 새 당근을 던져주면서까지 이번 계획을 고수했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 오늘로써 아기 바바리안 카론 타르손은, 한 사람의 전사로 거듭나게 될 테니까. 인간을 의심하며 약탈자를 해치우는. 112화 아기 바바리안 (5) 드르르르렁-! 아기 바바리안의 코골이 소리를 배경음 삼아 잠든 척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각, 사가각- 모닥불 방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들끼리 무슨 필담 같은 거라도 나누는 모양인데……. 대화 내용도 대충 예상이 갔다. [어떡할 거야?] [뭘 어떡하긴 어째, 지금 죽여야지.] [누구부터?] 누굴 먼저 해치울 건지나 작당하고 있겠지. 제대로 된 씹새끼라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 무려 두 배 이벤트 아닌가. 180만 스톤을 호가하는 바바리안의 심장을 두 개나 얻을 수 있는. [여자는 가장 나중에. 바바리안들부터 먼저 처리하는 거로 하지.] 내심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도 짐작이 됐다. 아마 놈들은 나 아니면 카론부터 죽이려 들 것이다. 따라서, 더욱더 청각에 집중한다. 터벅. 천천히 가까워지는 작은 발소리. 두 명은 이쪽으로, 다른 한 명은 카론이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인원이 나뉘기야 하겠지만, 동시에 기습하는 쪽이 되도록 변수를 줄이는 방법일 테니까. 그래 봤자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터벅. 두 명의 인기척이 바로 옆에서 멈춘 순간.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배고프… 응? 너네 거기서 뭐 하나?” “흐읍!” 어찌나 놀랐는지 헛바람을 들이쉬는 창술사와 오함마를 쥔 리더. 슬쩍 옆을 확인하니 잠든 아기 바바리안을 향해 시위를 겨눈 활잽이가 보인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며 태연히 물었다. “아, 혹시 너희도 배고파서 깬 거냐?” 이내 배까지 쓸어 만지자, 내가 활잽이를 보지 못했다고 판단했을까? 놈들이 잠시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그, 그렇네. 배가 고파서 말이지. 저기 가서 같이 식사나 하겠나?” “고기인가?” “…물론일세. 저기 내 배낭에 육포가 있네.” “육포!” “조용히 하게. 다들 자고 있지 않나.” “알았다…….”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앞장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퍼억-! 후두부에서 충격이 피어났다. 아무래도 리더가 망치로 내 머리를 후려친 듯한데……. “응?” 오크 전사의 도끼질에도 멀쩡하던 내 머리가 그걸로 터질 리가 없었다. “뭐냐?” 태연히 뒤를 돌아보자 멍하니 굳은 두 놈의 표정이 보인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머리를 망치로 후려쳤는데, 신음은커녕 휘청거리지도 않았으니까. “어, 어…….” 리더놈은 연타를 넣을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굳었다. 하긴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일단 정황상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고 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그렇게 믿자기엔 너무 절망적인 진실일 테니.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손이 미끄러졌나 보군?” “으, 으응?” “아무리 배고파도 그렇지,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대사였지만, 놀랍게도 리더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미안하네.” 미안하기는 개뿔. 진짜 바바리안이 병신으로 보이나? “내가 그만 실수를—” 퍼억-! “해… 버렸…….” 털썩. 메이스가 없기에 면상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꽂아 넣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 뼈가 함몰된 상태로 바닥에 쓰러지는 리더. “어……?” 옆에 있던 창술사 새끼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아, 나도 배고파서 손이 미끄러졌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말했지만, 저쪽에선 사과를 받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로이스! 뭐 하냐 어서 쏘지 않고!!” 기절한 리더 대신 지시를 내리는 창술사. 휘익-! 이내 활잽이가 시위를 겨눈 화살을 쏘았다. 근데 커뮤니케이션 오류라도 있었을까. 분명 나를 쏘라고 한 말이었을 것인데, 화살은 아기 바바리안 카론을 향해 쏘아졌다. 푸욱-! 다행히 창술사의 외침을 듣고 깨어난 카론이 몸을 비틀며 급소에 박히는 건 면했다. “크윽, 로이스! 무슨 짓이냐!” 어깨에 화살이 박힌 카론이 잽싸게 일어나며 활잽이의 모가지를 붙잡았다. “커, 컥!” “말을 해라, 말을! 왜 나를 쐈냐고 묻지 않나!” “컥, 그러니까… 이것 좀… 커컥!” “말하지 않을 건가!!” 이제 저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고. 창술사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슬그머니 어둠 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녀석이 보였다. 요지경이 됐음에도, 동료를 버리고 살길을 찾아 떠나려는 의지 하나는 칭찬해 줄 만도 했지만……. 아니, 그게 되겠냐고. “…진짜 약탈자였구낭.”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던 미샤가 칼등으로 놈의 목덜미를 내리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됐다. ***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카론이 혼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다만 목이 졸려 기절한 활잽이가 대답해 줄 리는 만무. “이놈들은 약탈자다.” 나는 바바리안의 심장이 고가에 판매되는 것부터 시작해, 이놈들이 의심스러워서 정체를 숨기고 껴들었다는 것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다만……. “뭐?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은 내 동료인데……!” 우리 순수한 아기 바바리안은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믿고 싶지 않았다 해야겠지. “타르손의 아들 카론, 어른이 돼라.” “…날 모욕하려는 것인가! 나는 이미 전사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지?” 내 물음에 카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본인도 아는 거겠지. 내 말이 모두 사실이리라는걸. “…….” 내가 본 바바리안은 딱히 지능이 낮은 종족이 아니었다. 단지 전투술 말고는 배운 게 없고, 성지에만 있다 보니 지나치게 순수했을 뿐. “저 야비한 활잽이놈이 네게 화살을 쐈다.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어깨가 아니라 목에 박혔겠지.” 나는 그리 말하며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통증이 상당할 터인데도 카론은 앓는 소리조차 뱉지 않았다. 따라서 나도 그냥 계속 말을 이었다. “이놈들은 약탈자다. 너를 죽이고 네 심장까지 앗아가려 한 미궁의 쓰레기들이지.” “……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싶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라는 희망이 남았을까. 카론이 삼인방과 대화를 요구했고, 나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무기를 빼앗은 뒤 한곳에 모은 놈들 중 하나를 깨웠다. “히, 히익!” 간택받은 것은 활잽이였다. 그야 목이 졸려 기절했을 뿐이었으니, 다른 놈들보다는 대미지가 적었으리란 판단. “사, 살려 주시오!”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는 활쟁이를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화를 원하는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로이스, 너는 정말 약탈자인 건가?” “카, 카론……? 오해가 있네. 다 설명할 테니 우선 이자를—”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내가 뭘 오해한 거지?” “그건…….” 활잽이는 카론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해가 아니었으니까. 시간을 아낄 겸, 놈들의 무기를 뺏던 중에 발견한 수첩을 카론에게 던졌다. “이게 뭐지?” “직접 읽어 봐라.” “나는… 글자를 못 읽는다.” 아. 그렇구나. “그럼 저놈보고 대신 읽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건… 그렇군.” 이내 카론이 내게 받은 수첩을 활잽이에게 건넸다. 우리가 자는 척하고 있는 동안 놈들이 조용히 나눈 필담이 적혀 있는 수첩. “…….” 이를 보자마자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활잽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체념의 단계에 이른 듯했다. 거, 누구 마음대로. “읽지 않는다면 죽여 주지.” “…….”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이, 읽겠소…….” 이내 활잽이가 떨리는 입술로 천천히 글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브리올, 어째서 저놈을 받아들인 거야? 설마 저놈도 죽이려고?”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격인데, 굳이 살려 보낼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저놈이 수상해. 2층에서 밤친구 타령을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저렇게 멍청할 리가?” “수상하기는, 난 찬성이다. 바바리안 새끼들을 그렇게 쳐 죽여놓고 아직도 모르나? 놈들은 그냥 걸어 다니는…….”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활잽이가 한 부분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따라서 놈의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보군.” “아아악!” “계속해라.” “노, 놈들은 그냥 걸어다니는 몬스터나 다름없어! 지, 지능도 비슷한 수준인 데다가, 먼저 잡아 죽이는 놈이 임자라는 점에서 특히나.” 한 문장을 마친 활잽이가 카론의 눈치를 봤다. 카론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건… 누가 한 말이었지?” “……빅터.” “그래, 그 녀석이… 됐으니 계속해라.” 창술사의 대사였음을 확인한 카론이 마저 이야기를 속행했다. “게다가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보상은 충분하지 않나. 바바리안 수준으로 멍청한 거 같긴 하지만, 어, 얼굴은……. 제, 제법 반반한 편이니…….” “계속.” “얼굴은 인정. 근데 바바리안이랑 뒹굴던 년인데 다른 쪽은 어떨지 모르—” “그만!” 미샤가 난입해 수첩을 빼앗았다. 그리고 빠르게 눈으로 읽어내리더니, 활잽이에게 물었다. “여기 이거랑 이거랑 이거. 누가 한 말이냥?” 실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활잽이가 바들바들 떨며 리더를 가리키자 미샤가 나를 보며 딱 잘라 말했다. “비요른, 이놈은 내가 죽일 거당.” “마음대로 해라.” 여하튼 미샤를 더 화나게 할 필요는 없기에 음담패설은 스킵하게 시켰다. 이후로는 누구를 먼저,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리고……. “카, 카론은 내가 처리하지. 궁수라고 나를 무시하는 게 짜, 짜증났거든. 사냥이 끝나면 뒈질 처지인 것도 모르고…….” 활잽이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필담은 끝났다. 잠시간 정적이 이어진 끝에, 카론이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의 첫마디는 의문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던 건가?” 그는 우선 자신의 잘못을 찾았다.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순수함을 간직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야만적인 세상이었을 뿐. “토르의 아들 비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렇군. 네가 바로 그 유명한……. 잘됐다. 말해 줘라.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런 놈들이 이 미궁에는 흔한 편인 건가?” “그렇다.” 성지에서는 알려 주지 않았던 미궁의 단면. 이를 처음으로 직시한 어린 전사가 내게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심으로 그 해답을 바란다는 듯이. 내가 그 길을 알려 준다면, 그 길을 반드시 따르겠다는 듯이. 따라서 나는 대답했다.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전부 의심해라. 내가 놈들을 속였듯, 순수함 속에 너의 도끼를 숨겨라. 귀찮고 조금 어려워도 항상 생각하고 행동해라.”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동심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법. “명심해라. 네가 한 명을 찾아내서 죽이면, 그만큼 어린 전사가 목숨을 건진다는 것을.” 내 말에 어린 전사는 입술을 짓눌렀다. “그렇군. 그래서 네가…….” 그는 이제야 내 행동이 이해되는 듯했다. “자, 이제 어떡할 거냐? 나는 네 선택에 따르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고. 꽈악. 어린 전사 타르손의 아들 카론. 그는 그저 도끼를 꽉 쥐었다. 그리고……. 서걱-! 비로소 한 사람의 전사가 되었다. *** 거친 단면을 그리며 활잽이의 목이 날아갔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리더는 미샤가 고간을 짓밟아 깨운 뒤에 목을 쳐버렸고, 남은 하나는 내가 목을 꺾었다. 뭐, 도중에 깨어나서 뭐라 애원을 해왔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갈 테니…….] [착한 약탈자가 되겠다는 뜻인가?] [차, 착한 약탈자? 아, 예예! 꼭 그러겠… 컥!]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착한 약탈자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니까. “자, 포션이다.” “고맙다.” 대강 정리가 끝나고서 포션을 건네자 카론이 어깨의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다만……. “왜 더 붓지 않지?” “그랬다간 완전히 아물지 않나. 흉터는 미숙함의 증거다. 잊지 않게 기억하고 싶다.” “그렇다면야.” 흉터를 훈장처럼 여기는 바바리안의 습성을 알기에 나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고맙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 좀 알겠다.” 이미 그의 눈빛은 이전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너만큼은 힘들겠지만, 보이는 족족…… 아니, 찾아내서라도 머리를 박살내 보겠다. 또한, 어린 전사를 본다면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말하며 조언을 해 주겠다.” 지금의 그라면, 어지간한 약탈자들에게는 똑똑히 알려 줄 수 있을 터였다. “오늘 네가 그러했듯. 동족을 위해서.” 이제부터. 아기 바바리안을 건드리면 좆된다는 것을. 113화 재회 (1) 우선 삼인방의 장비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카론에게 우선적으로 선택권을 줬다. “필요한 게 있다면 가져가라.”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사양하지 마라. 한 명은 네가 잡지 않았나.” “그리 말한다면야…….” 갖고 싶던 물건이 없던 건 아닌지, 카론이 모아 둔 전리품 중에서 몇 가지를 챙겼다. 양질의 가죽 가방과 포션 몇 병. 그리고……. “양손 망치? 그거밖에 안 가져가나?” “어차피 작아서 몸에 맞지도 않을 거 같다.” 음, 그건 그렇지. 이내 카론이 도끼와 대형 망치를 양손에 쥐고서 해맑게 웃었다. “도끼로 죽이기 힘든 놈은 이걸로 죽이면 될 거 같다!” 표현 방식은 세련되지 못했지만, 내용만 보자면 나름 합리적이었다. 스톤골렘 같은 타입의 몬스터에겐 둔기류가 더 효과적이니까. 무엇보다……. ‘암, 바바리안은 원래 쌍수가 국룰이지.’ 훨씬 더 그럴듯해진 카론의 바바리안룩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흐뭇했다. 따라서 장비 몇 점을 추가로 건넸다. “필요 없어도 갖고 있다가 팔아라.” “하지만……!” 거,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정말 바바리안들은 왜 이렇게 착한 거지? 인간이었으면 냅다 탐욕의 눈빛을 드러냈을 터인데. “네가 더 강해질수록 어린 전사들이 편해진다는 걸 잊지 마라.” “……알겠다. 이 물건은 꼭 팔아서 내게 도움이 될 장비로 바꾸겠다.” 사명감까지 불어넣어주면서 억지로 장비들을 건넨 이유는 간단했다. 뭐, 나 혼자 꿀꺽 삼켰으면 20만 스톤 정도 더 이득을 봤겠지만……. 길게 보자면 이쪽이 내게 이득일 테니까. “더 강해져라, 타르손의 아들 카론.” “그러겠다. 반드시, 동족을 위해서라도.” 여섯 종족 중 바바리안족은 가장 세력이 약하다. 개개인의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대부분 초반부에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얘 한 명이 바뀐다고 당장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진 않겠지만……. 얘를 시작으로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면? 그래서 어린 전사들이 조금이라도 살아남아 상위 탐험가가 되는, 그런 선순환이 이어진다면? ‘그럼 바바리안의 세력도 점점 커지겠지.’ 좋든 싫든 지금의 나는 한 사람의 바바리안. 친정의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낙수 효과를 누리게 된다. 마법사만 봐도 그렇다. 마탑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없었다면, 과연 그들이 그렇게까지 오만방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 슬슬 이동하지. 괜히 누가 우리 모습을 본다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카론을 1층까지 바래다주며, 남는 시간 동안 이것저것 조언해 주었다. 팀을 구할 땐 이종족이 한 명이라도 껴 있는 곳을 고르라던가. 친근하게 구는 놈이 있으면 더욱 경계하되, 겉으론 내색지 말고 빈틈을 보여 주라던가. “순수함 속에 도끼를 숨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좀 알 거 같다!” 오늘 내가 삼인방에게 보여 준 훌륭한 예시가 있기 때문일까? 카론은 내 말의 요점을 정확하게 캐치했다. “일부러 밤친구를 인간으로 구한 다음에 자는 척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꿍꿍이가 있는 놈이라면 분명 속내를 드러낼 테니까!” 아, 어, 음……. 이건 내가 얘기해 주지 않은 건데…….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동료에게 몬스터 취급을 받으며 배신당했던, 오늘 일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었던 걸까? 실로 무서운 응용력이 아닐 수 없었다. *** [23 : 49] 5일 차가 시작될 무렵. 카론을 1층에 데려다준 우리 둘은 다시 망자의 땅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조금 속도를 올려 수색에 집중했다. 의도치 않게 거의 하루를 써버렸으니까. 10일 차가 되면 2층은 폐쇄된다. 즉, 2층에서 이번 탐사를 끝낼 게 아니라면 좀 더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3층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도 있지 않은가. “으응? 데스나이트를 잡을 거라고? 그게 될까? 만나기 힘든 몬스터라고 들었는뎅…….” 6등급 몬스터 데스나이트. 2층 망자의 땅에서 아주 희박한 확률로 마주칠 수 있는 씹새끼 중의 씹새끼. 나 역시 이놈의 출현 조건을 알아내기 전까지 캐릭터를 몇 번이나 새로 키워야 했다. “염려 마라. 만나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테니.” 이제 이런 식의 대화도 익숙해졌을까. 미샤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냐며 구태여 묻지 않았다. 단지 다른 걱정을 표했을 뿐. “으음, 근데 그건 그렇다 쳐도 우리 둘이서 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당.” 이해 못할 불안은 아니었다. 6등급 몬스터야 4층에서 간간이 만났지만, 지금은 풀파티가 아니라 둘만 따로 떨어져 나온 상태 아닌가. ‘지금까지 8등급만 사냥했으니 본인이 얼마나 세졌는지 감도 안 올 테고.’ 미샤는 날 만나기 전에 정수 두 개로도 4층에서 활동했던 전력이 있다. 스펙은 딸리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얻어낸 무술 실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커버해 왔다. 한데 그 와중에 평생의 염원이었던 영혼수와 계약했고, 이번에 두 개의 정수를 얻었다. 심지어 하나는 수호자의 것이었다. ‘거기다 조합 시너지까지 합치면…… 사실상 몇 배는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는 게이머의 관점으로 냉정히 판단했다. 우리 둘의 전력이면 충분히 사냥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바바리안에겐 그에 알맞는 화술이 있는 법이니까. “미샤, 나를 믿어라.” “그렇게 말하면… 싫다고도 못 하잖냥.” “그럼 됐군.” 미샤의 동의도 얻었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주변을 수색했다. 데스핀드, 키메라울프, 구울로드 등. 보이는 족족 8등급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수색 반경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하고 야영을 해야겠군.” 아무런 성과없이 5일 차가 끝났다. 그다음 날인 6일 차도 매한가지였다. [22 : 40] 7일 차가 시작되기까지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은 시점. 나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설마 이틀이 넘도록 발견 못 할 줄은 몰랐는데.’ 미궁이 새로 열릴 때, 망자의 땅에는 무작위로 한 지점에 비석이 생성된다. 그리고 7일 차가 시작될 때 데스나이트를 소환한다. 즉, 비석만 찾으면 그 앞에서 대기 타는 것으로 쉽게 데스나이트와 조우할 수 있다. 하지만……. ‘후, 내가 그럼 그렇지.’ 이틀간 사냥도 설렁설렁해 가며 쌔빠지게 돌아다녔건만, 비석의 부스러기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야 2층이 아무리 넓다고 한들, 2층 전체도 아니라 8등급 구역만 수색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틀이면 충분히 발견해 내리라고 판단했다. ‘쩝, 데스나이트는 그냥 포기해야 하나?’ 지난 이틀간의 노력이 아까워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미샤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너무 상심치 마랑. 어디 책이라고 맨날 옳은 소리만 적혀 있겠냥? 망자의 땅에 커다란 비석이 있다니? 나는 지금까지 그런 얘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당.” 음, 일단 이것도 위로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러니까 허구한 날 도서관에 틀어박혀있지 말고, 나랑도 좀 놀러 가고 그래라.” “…그게 왜 그렇게 되지?” “그, 그건!  히쿠로드도 그랬당. 책 몇 권 읽을 시간에 술집에서 탐험가들이랑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이제 보니 난쟁이놈이 못된 것만 미샤에게 가르쳐준 모양인데……. 면박을 주기도 조금 그랬다. 사실 탐험가들 대부분이 저런 식이었으니까. 그들은 책을 읽는 것보다 술집에서 교류하며 정보를 습득하는 걸 선호한다. 오죽하면 술 마시고 노는 게 업무의 연장선이라 하는 녀석도 있으니 말 다 했지. “…왜 말이 없냥?”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그랬다.” “왜 할 말이 없었는데?” “이 얘기는 그만하고, 일단 계속 움직이지.” 의미 없는 논쟁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기에 다시금 이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23 : 59] 시계를 확인한 나는 미련을 털어냈다. 이제 곧 7일 차가 시작된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소환되자마자 이곳저곳 싸돌아다니기 시작하니, 사실상 이번 탐사에선 물 건너 간 셈. ‘애초에 경험치가 목적이었던 거니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오, 드디어 3층으로 가는 거냥?” “그래.” 무작정 주변을 돌아다니며 비석을 찾는 대신,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비요른?” “너도 느꼈나?” “으응, 뭔가 등골이 오싹했당.” 공기가 변했다. 뭐라 형언하긴 어렵지만, 변한 순간 몸이 먼저 반응을 해 올 정도로 뚜렷한 변화. ‘설마?’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미샤에게 칼을 빌려 손등에 상처를 냈다. 주륵. 칼날을 꾹 눌러서 아래로 긁자, 벌어진 이음새를 타고 흘러내리는 산성피. “악! 뭐 하는 거냥! 칼날이 상하지 않냐!” 미샤의 투덜거림이야 어쨌든. 나는 상처를 주시하며 시간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숫자가 늘어날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몇 초면 아물었어야 할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고 있다. 그 말인즉. 「캐릭터가 [원한]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리 찾아 헤매던 데스나이트가 근처에 있다. 「치유 및 재생 효과가 대폭 감소합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 ‘어쩐지 거의 다 뒤져 봤는데도 없더라니. 정말 이 근처였구나.’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곧이어서 깨달은 한 가지 정보 때문이었다. ‘[원한]이 이미 발동됐다라…….’ 저주형 오오라 [원한]은 액티브 스킬이다. 몬스터, 혹은 정수를 습득한 캐릭터의 의지하에 온-오프가 되는 형태의 스킬. 쉽게 말해, 평상시에는 쓸 이유가 없다. 전투 중인 게 아니라면. [00 : 00] 정황은 아주 명백했다. 소환된 지 고작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시점. 데스나이트는 눈 뜨자마자 전투에 돌입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탐험가가 휘말렸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 그런 기막힌 우연보다는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비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여기는 게 훨씬 합리적일 터. ‘설마 플레이어인가?’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경우의 수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대형 클랜으로 분류되던 드자르위 클랜은 무려 오크 히어로의 소환법까지 알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데스나이트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까지 고급 정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뭐, 정확한 건 가 보면 알겠지.’ 최종 판단은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나는 미샤와 함께 신속히 이동했다. 온 사방이 깜깜한 어둠이었지만, 방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콰앙-! 제법 화끈하게 싸우는 편인지 연신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한데 이 정황만으로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힌 것인지, 미샤가 내 팔목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비요른, 설마 데스나이트가 나온 거냥? 지금 이미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거고?” “그래.” “잠깐만, 멈춰 봐라! 가서 뭘 어쩌려고?” 뭘 어쩌긴 어째, 평타라도 묻혀서 경험치를 챙겨야지. “뭐? 그런 짓을 했다간 공격받을 수도 있당!” 앞으로의 계획을 이쪽 세계관식으로 번역해 들려주자 미샤가 기겁했다. 그녀로서는 합당한 우려였다. 약탈자만큼은 아니어도, 전투 중 난입하거나 사냥감을 가로채는 행위는 탐험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비매너짓으로 인식되니까. 하지만……. “괜찮다. 정수나 마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으니, 위험한 상황인 줄 알았다고 둘러대면 된다.” “으음, 그래도…….” “걱정 마라.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전부 내가 책임질 테—” “바보양! 내가 무슨 혼자 책임지라는 뜻으로 한 말인 줄 아냥? 으으, 진짜 어쩌다가 이런 놈이랑 엮여서… 됐다, 어서 가자! 나도 이젠 모르겠으니!” 음, 왠지 좀 억울해진다. 내가 나 혼자 잘 되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약탈은 몰라도,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라는 거군.’ 추가로 얻은 정보를 머리에 새겨넣으며, 나는 발길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한 10초쯤 흘렀을까? [캬아아아아악!] 검을 휘두르는 데스나이트의 뒷모습 너머로 4인의 탐험가가 보인다. “어?” 보아하니 저들도 우리를 본 모양. 따라서 뭐라고 제지해 올 새도 없이 메이스로 데스나이트를 후려치고 봤다. 퍼억-! 오케이, 이걸로 경험치는 들어올 테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대사를 외쳤다. “걱정 마라! 내가 너희들을 구해주마!” 바바리안이 사기캐인 이유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이라면 모를까. 이걸 보고도 설마 고의였다고 생각하겠어? *** 묵직한 일격을 맞고 휘청거리는 데스나이트. [캬악?!] 보아하니 이 녀석도 내 난입이 당황스러웠던 듯했다. 저기 눈을 동그랗게 뜬 4인 파티만큼은 아니겠지만. “무슨 짓이오!!”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인간 전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다음은 후열에 위치한 요정 궁수였다. “뭘 돕는다는 겁니까? 어서 물러나지 않으면 당신도 공격하겠어요.” 조곤조곤하면서도 한없이 날카롭게만 들리는 목소리. 나는 짐짓 당황한 척 외쳤다. “나, 나는 그저 도우려 했을 뿐이다!” “누가 도와달라고 했던가요?” “어? 아니었나? 들었던 것도 같은데…….” “……됐고, 뒤로 물러나기나 하세요! 같이 휘말려서 다치고 싶지 않으면!” “아, 알겠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몇 번이나 받아 낸 데스나이트의 검을 방패로 튕겨 내며, 미샤가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제기랄,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지, 인간 전사는 불만을 뱉으면서도 능숙하게 데스나이트의 어그로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재개된 전투. 나는 서툰 바바리안으로서의 면모를 싹 지워 내며 미샤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우려하던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비매너 탐험가로 내몰릴까 봐 걱정하던 미샤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조금 뜻밖이었다. “너어는 진짜…….” 내 연기가 인상 깊었는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미샤. “후…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냥. 다른 사람들도 네가 이런 놈인 걸 알아야 하는뎅.” “무슨 소리냐? 이런 모습은 너한테만 보여 주는 건데.” “으응? 그, 그것도 그렇지만? 아니, 그런강?” 여하튼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이어지는 전투를 관전했다. 그야 다른 팀의 사냥을 이렇게 가까이서 직관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풀파티는 아니지만, 밸런스는 나름 좋네.’ 혼자서도 탱킹을 잘 해내는 인간 전사. “한 방 더 갈 테니, 뒤로 물러서게!” 화염 마법을 펑펑 써재끼는 마법사와 요정 궁수로 이뤄진 딜러 라인. 그리고……. ‘소환술사는 여기 와서 처음 보는 거 같네.’ 소환계 이능으로 뽑아낸 마물들을 이용해 딜을 넣거나 버프를 주는 유틸형 포지션의 인간 남성까지. “비요른, 저 남자… 어딘가 익숙하지 않냥?” 문득 들려온 미샤의 말에 나는 다시금 소환술사를 확인했다. 160쯤 되어 보이는 왜소한 체형. 후드 때문에 음영이 지며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뭐지? 어디서 봤던 얘지? 소환술사를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낯이 익은 이유를 되짚던 순간이었다. “다. 다들 피하시오! 내가 말했던 그 공격이 오, 올 거요!” 소환술사가 더듬거리며 뭐라 지시를 내린다. 덕분에 흐릿하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이내 나는 사내의 근처에 위치한 요정의 얼굴까지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결론을 내렸다. ‘아, 그때 그 병신 새끼.’ 그놈이 틀림없었다. 114화 재회 (2) “비요른! 생각났다! 그때 그 사람이당!”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 나도 떠올랐으니.”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기억을 되짚었다. 시간은 어느덧 세 달을 거슬러 올라, 계층군주 리아키스의 즉사기 [악의 틈새]에 갇혔을 때였다.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쓰레기들.] 드자르위 클랜이 폭동을 일으킨 탐험가들을 배척하자, 탐험가들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그때 나타났던 게 이 남자였다. [나, 나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소.] 그는 어쩔 줄 모르는 탐험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물론, 순진하게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저는 이분과 1년 넘게 팀을 이뤘어요. 이분은 신비한 분이에요.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죠. 저는 이분의 말이 우리를 살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달리 방도가 없던 탐험가들은 그의 동료라던 한 요정의 보증만 믿고서 그 길을 따랐다.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기는 지랄.’ 전부 다 뒈졌다. 나중에 궁금해서 알아봤을 때 그런 소식만이 들렸기에,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늘 저놈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지로 백 명도 넘게 데려간 주제에 자기들만 살아남은 모양이군.’ 그리 생각하자 흥미로운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재수가 좋아서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건 아닐 테니까. 재주가 좋았다고 여기는 게 합당하겠지. 그땐 그냥 병신인 줄만 알았는데……. ‘설마, 사지인 걸 알면서도 데려간 거였을 줄이야.’ “지, 지금이오! 피하시오!” 데스나이트의 패턴을 예측해 지시를 내리는 사내를 보며 나는 눈을 좁혔다. 녀석의 소환수는 총 네 마리. 소환수 간 시너지는 좋은 편이지만, 정수의 등급 자체는 높지 않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평균 7등급 정도 되겠군.’ 놈은 뭣도 없는 하위 탐험가다. 금수저였다면 장비라도 때깔이 고왔을 테니. 그렇기에 더욱더 의문점이 커진다. 리아키스의 패턴과 데스나이트의 출현 조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경력도 짧은 탐험가가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 ‘……플레이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합리적 추론을 통해 최종 판단을 내렸다. 저 이름 모를 소환술사는 플레이어다. 왜 그런 놈이 인간으로 소환술사 같은 직업을 고르는 우를 범했는진 알 수 없지만. ‘쩝, 이것 때문에 조금 헷갈린단 말이지.’ 수인, 용인족, 드워프라면 모를까. 인간은 소환계통과 종족 시너지가 전무하다. 물론 이는 초반엔 미세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후반부로 향할수록 어마어마한 격차로 이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효율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셈. ‘어쩌면 그런 건 얘한테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캐릭터의 완성도야 어쨌든, 그냥 날먹 직업을 택하고 싶은 게 보통 사람의 심리일 테니까. 하긴 누가 맨앞에서 직접 싸우고 싶겠어? 바바리안으로 스타트했단 걸 알자마자 방패를 택한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데스나이트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몸에 깃드는 충족감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마법사가 내핵에 박아넣은 화염구를 끝으로, 데스나이트가 빛무리로 변해 흩날리고 있었다. 참고로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아쉽군. 혹시 몰라 시험관까지 비싸게 주고 사 왔는데.” “파, 파르테이안 님, 마, 말조심…….” “아, 그랬지.” 마법사가 입을 꾹 다물며 이쪽을 바라본다. ‘그럼 이제 우리 차례겠군.’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기도 잠시, 나는 다시금 순박한 바바리안의 탈을 뒤집어썼다. “오오, 대단하군! 마지막에 그건 대체 무슨 마법이었나?” “……우리가 그런 대화나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요?” 친근하게 마법사 쪽으로 다가서려 하자, 차갑게 말을 자르며 제지를 해오는 요정 궁수. “아까 그건 대체 무슨 짓이었죠?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쩝, 그때 사람들 앞에서는 되게 나긋나긋했던 거 같은데……. 전부 연기였나? 아, 요정이랑 바바리안은 사이가 좋지 않지. “아까 말했듯 도와주려 했을 뿐이다!” “이상하군요. 우리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데스나이트는 세다! 그래서 너희가 위험하다 생각했다!” 요정 궁수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아기 바바리안 모드를 보고도 저런 눈빛을 하다니, 요정들 사이에선 바바리안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 거야?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가요?” “그럼 뭐가 더 있겠나?” “일단 정수가 있겠죠. 당신은 몰라도, 옆에 계신 수인분께는 욕심나는 정수였을 듯한데요.” 요정의 날선 중얼거림에 미샤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오, 오해당! 검을 쓰기는 하지만, 어차피 나는 이미 정수 자리가 다 차서 먹지도 못한단 말이당!” “그게 사실인가요……?” “확인해 봐도 좋당!” 뭘 확인이야 확인은. 여기서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었으나, 요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넘어갔다. “그렇다면야, 믿겠습니다.” 보아하니 이 요정 궁수가 까칠하게 구는 건 바바리안 한정인 모양. “하지만 그래도 도와주려고 끼어들었다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군요.” “거, 귀쟁이들이란…….” “당신! 지금 뭐라 그랬죠?” 날카로운 고성에 나는 짜증을 담아 되물었다. “평소에 얼마나 음흉하기에 일단 의심부터 하는 거냐?” 정말로 화가 났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전투 중에 멋대로 난입한 것이 잘못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내가 바바리안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내 잘못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적반하장으로 세게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참된 바바리안의 모습일 터. “더 이상 나를 모욕한다면 나도 참지 않겠다! 귀쟁이!” 4:2 상황이고 뭐고, 전투를 불사하겠다는 듯 방패를 치켜드는 날 보며 요정이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으니 밝혀달란 거잖아요!” “석연치 않은 점이라니?” “정수가 목적이 아니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업혀서 공적을 공짜로 채워 가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음, 얘 진짜 예리하네. 사실상 진실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역시 문제될 건 없었다. “왜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이미 한 번 잡은 놈인데?” “……예?” 내 말에 요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납득이 안 되겠지. 6층까지 가기 전에는 마주치는 것부터가 힘든 몬스터니까. 나는 짧게 부연 설명을 이었다. “예전에 핏빛성채에 다녀왔었다. 이거면 설명이 되나?” 변종 균열이어서 데스나이트 대신 뱀파이어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알 게 뭔가. 여기서 진상 규명이나 할 것도 아닌데. 반쯤은 사실이기도 하고. “하, 하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죠?” “그렇게 따지면 뭘 말해도 믿지 못하는 거 아닌가? 싸우고 싶은 거라면 덤벼라, 귀쟁이.” “참아 주니까, 하라면 못할 줄 알고……!” 이내 분노를 터트리는 요정의 모습에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나섰다. “메이린 님. 그, 그만하세요! 저분 말은 아마 사, 사실일 테니!” “네? 그게 무슨…….” “이, 이제 기억이 났습니다! 저 바바리안… 그때 거기서 봤던 사, 사람이에요!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작은 발칸이란 이명을 얻은 그 탐험가!” 짧은 만남이었을 텐데 소환술사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내 마법사와 전사가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어쩐지, 말하면서도 데스나이트의 검을 쉽게 받아 내더라니.” “호오, 놀랍군. 메이린 양,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듯하네. 저렇게 유명한 자가 고작 공적치나 얻겠다고 그런 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슬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감지했는지, 요정 궁수가 입술을 짓눌렀다. “메이린 양의 심정은 이해하네. 인정하는 게 가장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말일세, 때로는 고집을 버리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하네.” “후우, 알겠어요…….” 동료들 전부가 내게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을 하자, 요정 궁수도 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후, 이래서 명성작을 해 둬야 하는 건가?’ 새삼 명성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깨달으며 나는 내게 다가오는 소환술사를 응시했다. “바, 반갑습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님.”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우습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놈도 보통 놈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자기 살자고 수백 명을 사지로 몰아 버린 전적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이,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녀석이 내게 조심스레 청했다. 내 이름이 궁금한 건 아닐 테니, 이건 단지 나와 친분을 쌓고 싶다는 의미로 보는 게 맞겠지. “좋다.” 나는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놈의 이름이 궁금해서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던 거였으니까. “알겠지만,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너는 이름이 뭐지?” 플레이어인 건 확실하니, 이름을 들어 두고 나중에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조금 궁금했다. 행적을 살피다 보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참고용 표본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스 크리센입니다.” 씨발,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는데. 한스의 몸에 빙의한 플레이어라니. 무슨 이런 개막장 속성이 다 있단 말인가?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치, 친하게 지—” 사람 좋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 오는 놈을 보며 나는 뒤로 물러섰다. “동작 그만.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다!” “…네? 그게 무슨—” “미샤! 뭐 하냐! 얼른 오지 않고!” “으응! 알았… 기다렷! 가, 같이 좀 가……!” 제기랄, 소금이라도 좀 챙겨올걸.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까, 벌써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 한스G의 정체를 알자마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이게 무슨 짓이냥! 뛰는 건 괜찮은데 제발 이유라도 좀 설명—” “…놈도 한스였다.” “으응? 그게 무슨 뜻—” “난 한스와 만나고 일이 잘 풀렸던 적이 없다.” 진심으로 걱정하며 한 말이었으나, 미샤는 도리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이구, 나는 또 뭐라고.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냥!” 아니, 이건 진짜 큰일인 건데? 한스라니까? 그것도 미궁에서 만난 플레이어 출신의? “가만 보면 너도 참 별난 구석이 있당. 이런 미신은 하나도 믿지 않을 거 같더닝.”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미샤를 보고 있자니 왠지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푸훗! 비요른 너어… 오늘따라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당?” 뭐래 얘가 진짜. 나는 내친김에 한스와 얽힌 사건을 하나하나 말해 주었다. 스타트를 끊은 한스A부터 시작해, 엘리사의 종속이었던 한스C, 그리고 마녀의 숲에서 만난 약탈자 무리의 리더였던 한스D. “그, 그러고 보면 그때도 한스란 이름을 싫어한다고 그랬지……?” “그래. 하지만 그땐 그냥 불길하다 여기는 정도였다.” 이내 드왈키가 모즐란에게 끌려가기 직전에 근처에 있었던 한스B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자 미샤도 안색을 달리했다. “뭐, 뭐냐! 대체 한스라는 놈은!!” 미신에 취약한 습성을 지닌 탐험가답게, 이쯤 되자 미샤도 뭔가 불안해진 모양. “그럼 어쩌냥? 이미 만나 버렸는데… 설마 또 큰일이 생기거나 하는 거냥?!” 글쎄, 그건 나도 모른다. 단지 앞으로 최대한 조심해야겠다 생각할 뿐. “일단 최대한 빨리 3층으로 가자.” “…1층이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나보다 더 심각해진 미샤가 의문을 표했지만, 그나마 이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일단 이게 미신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정말 존재한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한스의 저주가 사실인 거라면,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까. 좆같은 일은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터질 수 있지 않은가. 그냥 할 일이나 마저 하는 게 손해를 줄이는 길이다. “으으, 그런 거면 그냥 말하지 말지 그랬냥. 괜히 나까지 찝찝해지게…….” 음, 그건 그렇네. 아무래도 플레이어 출신 한스를 만난 탓에 이성적 사고가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느샌가 얘를 의지하게 됐던가. 기쁜 일은 잘 모르겠는데, 일단 힘든 일은 둘이서 나누면 확실히 반으로 줄잖아? “그게 할 소리냐! 이 미친 바바리안놈아!!!” “…농담이다.” “거짓말 마라! 네 눈빛은 진심이었당!” 사실대로 말하자 미샤가 크게 격분했다. 뭐, 그래도 나도 모르게 의지했다는 말 자체는 제법 흡족해한 것처럼 보였지만. “후! 아무튼 숨기지 않고 말해 준 건 잘했당.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털어놔랑. 일단 내가 연상 아니냥?” “아, 그랬지.” 미샤는 나보다 다섯 살이 더 많다. 물론, 비요른 기준으로의 얘기지만. “뭐냐 그 반응은?” “더 의지된다는 거였다.” “……그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피로감이 몸에 쌓인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슬슬 야영할 때가 됐다는 뜻. ‘그 이후로 거의 하루 정도 됐으니, 내일이나 모레에는 3층에 도착하겠군.’ 나 역시 제법 피곤했지만, 자리를 잡고서 일단 미샤부터 재웠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불침번을 서며 이런저런 상념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00 : 37]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오늘로 7일 차였으니, 1층 수정동굴은 이미 폐쇄되어 탐험가들을 도시로 뱉어냈다는 뜻. 뭐, 일찍 나가든 늦게 나가든 도시로 돌아갔을 땐 전부 동일한 시간대에 있겠지만……. ‘그 녀석은 잘 돌아갔겠지?’ 불현듯 1층에 데려다줬던 카론이 떠올랐다. [일부러 밤친구를 인간으로 구한 다음에 자는 척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꿍꿍이가 있는 놈이라면 분명 속내를 드러낼 테니까!] 녀석이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일까? 혹시 사고는 치지 않았을지, 괜스레 걱정됐다. ‘에이, 별일이야 있겠어?’ 어느덧 교대 시간이었기에, 미샤를 깨우고 나도 잠시 눈을 붙였다. *** 눈부신 빛. 군중의 소음. 그리고 폐부를 휘감는 도시 특유의 눅눅한 공기. 카론은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쾌하다고 해야 할까? 야만인을 바라보는 듯한 주변인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때는 저런 시선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카론은 변했다. 아니, 한꺼풀을 벗어냈다. 큰뿔조각벌레가 성충이 되기 위해 껍질을 부숴 내듯이. 이번 탐사에서 그는 진정한 전사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쯧, 꼭 저렇게 티를 내고 다닌다니까. 야만인들은?” “이봐, 듣겠네. 무작정 들이받는 놈들인데 조심해야지.” 저 깔보는 듯한 시선이 기분 좋은 자극으로만 느껴졌다. 그만큼 방심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지난 며칠간 그가 죽인 두 명의 밤친구처럼. ‘쉬웠지.’ 얀델의 아들 비요른. 모든 건 그가 말한 대로였다. 1층에는 본심을 감춘 쓰레기 같은 자들이 바글바글했고, 빈틈을 보여 주자마자 옳다구니 달려들었다. 그게 오히려 함정인 줄도 모른 채. 먹잇감이라고 업신여기던 놈들이, 역으로 당할 때 짓던 표정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희열을 선사할 정도였다. 절그렁, 절그렁. 등에 하나, 오른팔에 하나, 왼팔에 하나. 총 세 개의 가방을 멘 그는 위풍당당하게 검문소로 향했다. 9등급 탐험가 전용 게이트답게 줄은 길었다. 도착하자 곳곳에서 친분 있던 동족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타르손의 아들 카론! 대체 뭔가, 그 가방은?” “자, 장비가 가득 들어 있다! 설마 약탈이라도 한 건가?” 카론은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푸훗, 약탈? 그럴 리가 있겠나.” 이는 약탈처럼 역겨운 행위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동족을 지키는 숭고한 행위. 우려에 대해 딱 잘라 선을 긋자, 바바리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약탈을 안 하고도 그런 게 가능하다니!” “부, 부럽다! 그걸 다 팔면 돌빵이 대체 몇 개냔 말이냐?” 그와 함께 성인식을 마친 동기들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들이 어리게만 보였다. 그렇기에 그는 동족을 최대한 불러모았다. 한때 그들에게 경쟁 의식을 느낀 적도 있지만, 진정한 적은 따로 있었으니까. “후후, 부러워하지 마라. 방법만 알면 너도 이만큼 벌 수 있으니. 앞으로 평생 돌빵 같은 건 먹지 않아도 된다.” “뭣!! 그런 게 있다면 어서 알려 줘라!” “알려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 얘기가 있다.” 카론은 우선 이번에 미궁에서 겪은 일들을 순차적으로 말해 주었다. 함께하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던 것. 그 이유가 자신의 심장이었던 것. 그들이 우리를 쉽고 보상이 큰 몬스터로 여겼다는 것까지. “우리는 몬스터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전사다!!” 예상대로 동족들은 크게 분개했다. 그리고 그를 구해 준 게 ‘작은 발칸’이란 걸 듣고는 목소리 높여 칭송했다.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악랄한 약탈자의 생각을 읽어 내다니, 역시 그는 위대하고도 현명한 전사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분위기. 그 속에서 카론은 자랑스레 외쳤다. “그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전리품을 얻고 돌아온 것도 전부 그 가르침 덕분이다!” “오오!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다! 지금부터 너희에게도 그 가르침을 전해 주겠다!” 이윽고 카론은 비요른에게 배운 모든 것. 아니, 본인이 직접 고안해 낸 ‘그 방법’까지도 숨김없이 공유했다. 물론, 공은 전부 비요른에게 돌렸다. “밤친구를 인간으로 구하고 자는 척만 하면 된다니!!”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는 천재인 것인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런 위대한 전사가 한 말이라니? 나는 따르겠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동족을 보며, 카론은 확신했다. “쯧, 저놈들은 또 시작이군.” “맨날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왜 가만 내버려 두는지 몰라.” “심장을 떼다 팔아도 저 주둥이는 여전할 거 같단 말이지.” 그간 바바리안은 미궁의 최하위 피식자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얼마 전에 직시한 현실 속의 모습이 그러했다. 정면승부에선 강할지 몰라도, 놈들의 영악한 술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말했다! 이 모든 건 우리 모두를 위한 숭고한 첫걸음이 되리라고!!” “베헬—라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115화 재회 (3) 9일 차 오후.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망자의 땅 최북단부 주변을 하루 넘게 수색한 끝에 우리들은 포탈을 발견하고 3층에 도달했다. ‘……다음부턴 어지간하면 탐색꾼 없이 들어오지 말아야겠네.’ 망자의 땅 루트를 타면 우리 둘만으로도 3층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지만……. 그럼에도 탐색꾼의 부재는 크게 작용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탐험가 무리를 몰래 뒤따라간 게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 근처에서 헤매고 있었겠지. “으, 여기는 역시 언제 와도 기분이 나쁘당.” 여하튼 그런 고생 끝에 도착한 칠흑의 강어귀. 이곳은 망자의 땅 루트를 탔을 때의 스타트 포인트로, 수십 갈래로 흐르는 옅은 도랑이 특징인 필드다. 아, 참고로 시궁창 냄새는 덤이고. “그럼 가지.” 탐색꾼이 없기에 계속 나침반을 살피며 ‘북동’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있자니 금방 막다른 길목에 도착했다. 즉, 이제 저 시꺼먼 강물에 발을 담가 건너야 한다는 뜻. “…업어 주면 안 되냥?’ 쯧, 어디 편하게만 가려고. “…이번만이다.” “와! 진짜냥? 고맙당!” 미샤를 어깨에 들쳐매고서 강을 건넌다. 폭은 5m쯤 되며, 수심은 무릎 살짝 아래까지 오는 정도.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강을 건너자 다시금 축축한 지면이 길처럼 앞으로 이어졌다. 다만, 마저 나아가려던 찰나. [게륵! 게륵!] [겔겔겔-!] 강을 지나치는 소리를 듣고 따라온 듯, 몬스터가 슬그머니 기어나온다. “비요른, 저기 프로그맨이당.” 프로그맨. 개구리를 똑 닮은 외견을 하고서 이족 보행을 하는 8등급 몬스터. 참고로 작살 같은 무언가를 무기로 사용한다. 크기가 작아서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민첩 수치가 높은 개체인지라 방심했다가 순식간에 골로 가버리는 탐험가가 많다. 스킬도 좀 짜증 나는 편이고. ‘…귀찮게.’ 이 녀석들은 나와 상성이 좋지 않다. 내 메이스는 데스핀드의 머리통도 한 방에 터트릴 만한 위력을 지녔지만……. 맞히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후웅-! 허공을 밟고 한 번 더 도약하며 내 메이스를 쉽게 피해 내는 프로그맨. 즉시 대시해 방패로 후려쳐도 봤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썩은점액]에 의해 공격이 빗나갔습니다.」 방패가 놈의 몸뚱이와 맞닿았지만, 뭉특한 소리는커녕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지는 프로그맨. [겔겔!] 재밌냐? 니미럴. 이 녀석들은 둔기류 한정으로 절대적 회피 보정을 지녔기에, 내게 있어서는 등급과 무관하게 까다로운 적이었다. 뭐, 미샤가 있으니 문제는 없었지만. “냐핫! 비켜봐랑!” 프로그맨에게 농락당하는 날 보며 웃던 미샤가 본격적으로 검을 꺼내 들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게륵-!] 날붙이에도 상당한 회피 보정을 지닌 프로그맨이었으나……. 우리 검사는 빙결 검사라서 말이지. [겍?!] 허벅지가 베인 것도 모자라, 꽝꽝 얼어붙는 하체. 털썩. 천지 분간 못하고 뛰다니던 개구리 새끼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미샤, 잠깐만!” “응?” “내가 하겠다.” 퍼억-! 후, 스트레스 좀 풀리는 거 같네. 원래는 마법으로 잡는 게 정석인 몬스터지만, 수준 차이가 워낙 났기에 전투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겔겔!] [게르륵! 게륵!] 그렇게 프로그맨들을 잡으며 이동하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22 : 57] 시간을 확인한 나는 슬슬 야영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피로도 피로지만, 여기는 정해진 시간마다 강제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곳이니까. “비요른, 점점 물이 차는데?” “안 그래도 찾고 있으니 보채지 마라.” 한 30분쯤 주변을 탐색하자 휴식 포인트가 나타났다. 거무죽죽하던 강어귀와는 달리, 붉은빛이 감돌며 질척이지도 않고 보슬보슬한 둔덕. 근처 탐험가들이 전부 모였는지 이미 서른 명 정도가 포인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늦게 와서 안쪽 명당은 다 뺏겼군.’ 어쩔 수 없이 나는 시궁창 냄새가 직빵인 물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흙이 축축하진 않으니, 물이 여기까진 안 차오르겠지. 모포를 깔기 전에 우선 젖은 다리부터 말리고 있자니, 강 수위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00: 00] 오케이, 이제 자정이 됐으니 여기서 더 차오르진 않을 테고. 앞으로 6시간은 이 상태가 지속될 터이기에, 우선 미샤부터 재웠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불침번을 세우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팀도 여럿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노릇 아닌가. ‘며칠 전에 한스도 만났으니, 조심하자.’ 그렇게 군것질이나 하며 배를 채울 요량으로 배낭을 뒤적거릴 때였다. “하하핫! 이 친구야, 기운 차리게! 어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던가?”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그녀는—” “거, 다들 자는데 조용히 좀 하지?” “아하하! 미안하오! 앞으로는 조심하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직 잠에 들기 전이었을까? 모포를 돌돌 말고 있던 미샤가 벌떡 일어났다. “이건, 히쿠로드 목소린뎅……?” 똑같은 생각을 한 걸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듯한데……. 허,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 미궁에서 아는 사람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일단 각층마다 어마어마하게 넓을뿐더러, 미궁 내 어둠 때문에 불을 밝혀도 가시거리가 반경 10m도 되지 않는 탓이다. 뭐, 여러 파티로 나뉘어 입장하는 ‘클랜’이야 몇 층 어디에서 몇 시까지 모이자는 식으로 만나서 층을 올라가기도 하지만……. ‘설마 진짜 얘네들일 줄이야.’ 놀랍게도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은 난쟁이놈이 맞았다. 옆에는 드왈키와 로트밀러도 있었다. “히쿠로드? 히쿠로드 맞냥?” “…미샤? 비요른? 뭐야! 자네들이 왜 여기에 있나!” “와, 역시 우리 팀은 운명으로 이어진 게 분명하당!” 과연 아무 약속도 없이 따로 들어가서 우연히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의뢰는? 의뢰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건 어떻게 하고?” 기막힌 우연에 서로가 감탄하기도 잠시, 난쟁이놈이 의문을 표시해 왔다. 하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겠지. 호위 의뢰를 한다고 미궁에 따로 들어왔던 게 우리니까. 나는 미리 말을 맞춘 대로 둘러댔다. “아, 그거라면 이미 끝냈다.” “끝냈다니?” “볼일이 있던 건 1층이어서 말이지. 미궁이 닫히면서 의뢰인은 먼저 도시로 돌아갔다.” “오호라, 그랬군?” 납득이 갈 만한 이유였는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난쟁이놈.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였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왜 여기에 있나? 2층에서만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알기로, 이들 셋은 바위사막에서 간단한 수집 의뢰나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데 왜 3층, 그것도 생뚱맞게 망자의 땅과 이어진 칠흑의 강어귀에 와 있는 걸까? “아, 그게 스톤골렘의 내핵이 생각보다 일찍 나와줘서 말일세. 혹시 몰라 받아 둔 의뢰 하나를 더 하러 왔네.” 근데, 처음부터 3층까지 상정해 뒀으면 미리 말해 줬어야 하지 않나도 싶지만……. “하하핫! 그랬으면 자네가 못 하게 말렸을 거 아닌가!” 음, 그건 그렇지. 탱커1, 법사1, 탐색꾼1은 아무래도 조합이 좀 불안하니까. 탱커1에 근딜1로 3층에 온 우리가 할 말은 아니겠다마는. “…그래서 무슨 의뢰지?” “이번에도 수집 의뢰라네. 프로그맨 주술사의 눈알 두쪽만 구해 가면 끝이지. 이왕 여기서 만난 거, 같이하겠나?” “완수금이 얼마지?” “200만 스톤일세. 물론 자네들이 낀다면 완수금은 정확하게 다섯 등분으로 나눠 가질 거고.” 인당 40만 스톤이라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눈알 말고 다른 부산물들을 판매하면 수입은 더 증가할 테고. 물론 일반 프로그맨도 아니고 주술사라니, 의뢰를 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뭐, 그거야 운에 달린 거니까. “하지.” 안 그래도 한스와 마주친 뒤로, 둘이서 다니는 게 불안했기에 승낙했다. 어차피 둘이서 해 봐야 프로그맨 사냥밖에 더하겠는가? 만약 의뢰가 일찍 끝나면 다 같이 4층에 가자고 제의할 수도 있을 테고. “하하, 그럼 어서 자세. 여기서 더 떠들었다간 칼이라도 맞을 거 같군.” 곤히 휴식을 취하던 다른 팀들 사이에서 눈총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수다는 이만하고서 휴식에 들어갔다. ‘덕분에 다섯 시간은 자겠군.’ 인원수가 많을 때의 장점이다. 불침번 시간도 짧고, 잘 시간도 많아진다. [06: 00] 이후로 시간이 흘러 10일 차 아침이 밝자, 강의 수심이 내려가며 우리들도 휴식 포인트를 떠났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냥에 매진했다. ‘역시 탐색꾼이 한 명은 있어야지.’ 새삼 느끼는 것인데, 탐색꾼은 미궁 라이프의 질을 올려 주는 포지션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강이 나오니 이리들 오시오.” 지형 전체를 외운 듯이, 최적의 경로를 따라 안내를 하는 로트밀러. 그토록 오래 싸돌아다녔는데, 물가를 지나친 게 세 번도 채 되지 않았다. “흐음, 또 꽝이구려…….” 이내 네 시간 만에 주술사 하나를 더 처치한 우리들은 입맛을 다셨다.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사체. 수집 의뢰의 단점이다. ‘왜곡’ 마법을 몬스터에게 쓰면, 극히 낮은 확률로 몬스터의 사체를 온전하게 습득할 수 있게 되지만……. 정수와 마석이 드랍되지 않으니까. ‘후, 나중에 노가다할 생각하니까 벌써 막막하네.’ 장비나 소모품 제작 등등, 후반부로 갈수록 몬스터의 부산물이 필요한 일이 많아진다. 예를 들면, 혼령각인만 봐도 그렇다. 6단계까지는 돈으로 해결이 되지만, 그다음부터는 직접 재료를 모아가야 한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돈만 있으면 거래소나 의뢰를 맡겨서 수급하면 되니까.’ 여하튼 한결 편해진 이동만큼이나, 전투도 쉬워졌다. 로트밀러의 화살, 드왈키의 마법. 거기에 미샤의 얼음 칼질까지. “……아까부터 묻고 싶던 것인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얼어붙은 프로그맨을 보며 로트밀러가 의문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문제될 건 없었다. [냉기응축]이나 [얼음분쇄]는 그렇게 티가 나는 스킬이 아니니까. “아, 그거? 이번에 영혼수가 진화했당!” 미리 알려 준 대로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해 주는 미샤. “핫, 그게 정말인가? 이 정도면 6등급으로도 승급할 수 있겠는데?” “미, 미샤 양! 축하하오!” 미샤가 냉기 계열 영혼수와 계약했단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우리가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 자체를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겠다마는. ‘이 짓도 할 때마다 양심이 찔린단 말이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악령으로 살아가는 자로서의 숙명일진대. “로트밀러, 물이 차오르는 거 같은데… 괜찮냥?” “안전지대가 바로 옆이니 걱정 말게.” 어느새 10일 차도 끝나갈 때가 되어 슬슬 물이 차올랐지만, 근방 지형을 전부 외운 로트밀러 덕분에 시간을 꽉꽉 채워 마지막까지 사냥을 하다가 야영을 하러 이동했다. “어…….” “이거 맞징? 지금 된 거징?” “그, 그런 거 같소이다.” 탐사를 재개하자마자 마주친 주술사를 사냥한 우리는 그대로 흠칫 굳었다. 분명 목에 화살이 꿰뚫려 쓰러졌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사체. “여, 역시 미샤 양이 있으니까 우리 여정에 운이 깃드는 거 같구려!” “후후, 이 친구 콩깍지는. 내가 보기에 이건 미샤가 아니라 비요른 저 친구 덕분일세. 저 친구한테는 운이 따른다니까?” 드왈키와 난쟁이놈의 주책이야 어쨌든. 고작 이틀 만에 주술사의 사체를 획득했다. 음, 아직 획득했다고 하기엔 좀 그런가? “으음, 근데 이걸 어째야 하나?” “기, 기다려 보시오. 일단 마법을 쓸 테니.” 우선 드왈키가 ‘보존’ 마법을 사용해 시신의 부패를 막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사체를 통째로 가방에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미샤, 너는 칼을 쓰니 이런 것도 잘 하겠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난쟁이놈아! 나, 난 이런 거 해 본 적 없당! 오히려 너네가 해야징? 스톤골렘 의뢰도 했었다며?” “그, 그게… 스톤골렘은 그냥 내핵만 꺼내면 되는 거였던지라…….” 다른 부산물을 모두 버리고 눈알만 파간다 하더라도 해체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모두 경험이 없었다. 만능 일꾼 로트밀러를 제외하고는. “비켜들 보시오. 내가 할 테니.” 이내 로트밀러가 한숨을 내쉬더니, 조각칼 같은 걸로 능숙하게 주술사의 사체를 해체했다. 예전에 ‘수집팀’에 있을 때 이런 걸 자주 했었다던가? “역시 로트밀러, 네가 최고당!” “오오, 동감일…… 윽, 나는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겠네…….” 30분은 됐을까? 로트밀러의 능숙한 손길 아래 주술사의 몸이 근육과 핏줄 뼈, 내부 장기로 갈갈이 나누어져 상자에 담겼다. “그럼 이제 우리 뭘 하징?” 3층 순례자의 길은 15일 차가 끝나면 폐쇄된다. 즉, 아직 사흘의 시간이 남은 셈.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의뢰도 끝났겠다, 4층으로 가는 건 어떤가?” “으음, 확실히… 모처럼 팀 전원이 모였는데 3층에서만 끝내기엔 아쉽긴 한데…….” “로트밀러, 그대 생각은 어떻소? 시일 내에 4층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소?” 로트밀러는 시간이 필요한 듯 눈을 감았다. 하긴 사흘 안에 여러 지역을 거쳐, 마녀의 숲 중심부에 있는 포탈까지 가려면 나름 생각이 많겠지. “빠듯하지만, 어떻게 가능은 할 거 같소.” 조금 신기했다. 원래 균열만 깨고서 대충 몬스터나 잡다가 도시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역시 한 번도 계획대로만 되는 법이 없구나.’ 어쩌다 보니 4층까지 가게 됐다. *** 이어진 사흘간의 여정은 생각보다 빡셌다. 일단 잠자는 시간부터 확 줄었고, 남는 시간 전체를 이동하는 데만 투자했다. 심지어 이동도 경보 수준으로 했으니……. 날이 흐를수록 동료들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쌓여 갔다. 하지만 그래도 목표는 이룰 수 있었다.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부여됩니다.」 벌써 세 번이나 지나치는 마녀의 숲.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미샤와 단둘이 조난당하며 온갖 개고생을 했지만……. 로트밀러가 있는 이상 두려울 건 없었다. “다들 잘 따라오시오.”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로프로 서로의 몸을 잇고서 빠르게 마녀의 숲을 주파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 : 31] 3층이 폐쇄되기까지 3시간이 조금 넘게 남은 시점. “고생했다, 로트밀러.” 우리는 마녀의 숲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탑 앞에 섰다. 탑의 입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문 앞에 자리한 형형색색의 포탈. “지금일세, 들어가세!” 사고를 대비해 색이 바뀌길 기다렸다가, 동시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아, 아저씨?!” 멀리서 희미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16화 재회 (4)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그녀는 현재 마녀의 숲에 와 있었다. 그녀의 언니, 다리아와 함께. “으… 너무 어지러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란다. 그러니 적응이 되면 소리에 집중해 보렴.” 3층에서 언니와 함께 사냥을 하던 그녀가 마녀의 숲에까지 들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최근 들어, 탐색꾼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미궁이 닫히기 전인 마지막 날을 이용해, 마녀의 숲까지 들어온 것이다. “전문 탐색꾼이 되는 건 아니어도, 4층까지는 길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단다.” “으…….” 그녀의 언니는 숙련된 탐색꾼이다. 그래서 저층에서는 이미 혼자 길을 찾을 정도로 지식과 노하우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마녀의 숲은 달랐다. 오직 감각에 의존해서만 길을 찾을 수 있는 특수 지형. “어때, 들리는 거 같니?” 에르웬은 언니의 지시에 따라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다른 종족들은 후각이든, 시각이든 한 능력을 특화시켜야만 마녀의 숲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지만……. 두근-! 선천적으로 청각이 발달한 요정은 그럴 필요가 없다던가? 앞마당처럼 이곳을 돌아다니는 건 어려워도, 4층 포탈을 찾는 것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게 언니의 설명. 두근-! 이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평소에 듣지 못했던 작은 소리들이 인식됐다. 칼날과도 같은 바람, 흩날리는 가지의 파생음, 몬스터의 하울링, 날카로운 병장기의 마찰음 등등. 이를 하나씩 살피고 있자니, 명백히 이질적인 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두근-!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묵직한 소리. 이게 분명 언니가 말했던, 마력의 파동음이란 거겠지. “저쪽…….” 이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리키자 언니가 대견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잘했구나. 그럼 가 볼까?” 에르웬은 계속해서 소리에 집중하며 길을 찾았다. 너무 청각에만 집중하느라 몬스터가 다가온 것도 못 느낀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옆에서 언니가 도와줬기에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두근-! 마력의 파동음이 커졌다. 이제는 딱히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귀가 먹먹할 정도. 슬슬 소리에 신경을 꺼도 되겠다 싶던 찰나였다. [고생했다, 로트밀러.] 돌연 들려온 음성에 에르웬은 인상을 찌푸렸다. 로트밀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으응?” “갑자기 왜 그러니?” 고생했다 말하는 저 음성이 익숙했다. 까칠한 듯하면서도 온정이 느껴지는, 그녀가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르웬의 두 다리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으로. “에르웬? 어디를… 멈춰……!” 언니가 뒤에서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이를 듣지도 못한 채 홀린 사람처럼 나아갔다. 그렇게 1분쯤 지났을까? 드넓은 공터가 나타나며, 숲속에 감추어져 있던 거대한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는 한 탐험가 무리가 있었다. 드워프 하나, 인간 둘, 수인 하나. 그리고…… 바바리안. 물론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그 누군가와는 전혀 다른 행색이었다. 숙련된 탐험가처럼 번들거리는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방패도 훨씬 크고 고급스러웠다. 투구를 쓴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 아저씨?!” 에르웬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걸. “아저씨!!” 뒤늦게 숲 전체가 울려 퍼지도록 외쳤지만, 바바리안이 뒤돌아 보는 일은 없었다. 이미 봤을 때 포탈에 반쯤 몸을 실은 상태였던 그는, 그대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따라서 에르웬은 달렸다. 당장에라도 그 뒤를 따라 포탈에 몸을 실을 기세로. “에르웬!” 1층에 돌아다니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렵하게 달녀 나가던 그녀의 몸은, 머지않아 언니에 의해 제지됐다. “…놔요! 어서 들어가야—” “정신 차리렴!!” “저기 아저씨가…….” “자꾸 억지 부릴 거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면서?” 에르웬은 말문이 막혔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췄을지를 떠올린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요. 그냥, 알 수 있다니까요!” “만약에 아니면? 4층은 우리 둘이서는 위험한 곳이야. 게다가 먼저 들어간 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줄 알고?” “그, 그건…….”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이미 에르웬은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가슴속의 뚜렷한 울림을, 그녀의 언니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팔에 힘을 주며 풀어내려던 차. “아, 안 돼……!” 포탈의 색이 빨갛게 변하였다. 이제는 포탈에 들어가도 앞선 이들이 향한 곳과 같은 곳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 “왜! 왜 못 가게 했어요?!” “그게 당연한 거니까! 4층에 따라 들어갔다간 약탈자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알려 줬잖니?” “그렇지만… 아저씨였는데……!” 에르웬은 입술을 꾹 짓눌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화처럼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숨을 길게 토해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래, 괜찮아. 살아 있다는 건 알았잖아…….’ 일단,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만약 오늘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가 살아 있었던 거라면. ‘…곧 만날 수 있어.’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 뭐였지? 그 목소리는? 왠지 나를 부르는 거 같았는데……. ‘설마, 에르웬?’ 나는 흠칫 굳었다. 아저씨라고 나를 부를 사람은 그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말이 안 되긴 했다. ‘아니, 그런 우연이 있으려고.’ 이 넓은 미궁 속에서 동료와 재회한 와중에, 그런 우연까지 겹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냥 다른 탐험가들끼리의 대화였던 거겠지. 아무튼 지금 신경 쓸 건 아니다. “비요른, 자네 뭐 하나! 어서 움직이게!” 40평 남짓한 공간. 각 벽면마다 굳게 닫힌 문이 위치한 석실. 천공의 탑. 이곳은 입장함과 동시에 첫 번째 시련. 즉,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 [캬아아아악-!] 9등급 일곱, 8등급 셋, 7등급 하나. 3층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서식지와 무관하게 무리를 지어 우리를 공격한다. 내가 평소 이곳을 ‘수련의 탑’이라 부르던 이유다. 워낙 많은 종류의 몬스터가 나오는지라 경험치 수급이 수월한 데다가, 겪어 보지 못한 조합의 패턴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오크 주술사에, 스톤골렘, 리빙아머, 거기에 듀라한이라…….’ 시작부터 괴랄한 조합이 나와 버렸다. 「리빙아머가 [무장강화]를 시전했습니다.」 듀라한의 몸을 숙주 삼듯이 그 위로 입혀지는 리빙아머. 「오크 주술사가 [열광]을 시전했습니다.」 「듀라한의 물리내성이 10초간 3배 상승합니다.」 안 그래도 물리 내성이 존나게 높은 듀라한은 거의 돌덩이가 되어 버렸으며, 그 와중에 스톤골렘은 [진압]을 사용하며 디버프를 뿌려댄다. “베헬—라아아아!!” 미샤와 로트밀러가 9등급 잡몹부터 해치우는 사이, 나와 난쟁이놈이 방패벽을 만들며 듀라한을 막아냈다. 몰빵 조합이긴 했지만, 탱커가 두 명이니 버티는 건 수월했다. ‘물리 내성이 높아 봤자 우리한테는 딱히 의미 없기도 하고.’ 우리의 메인 딜러는 드왈키와 미샤다. 마법사인 드왈키는 말할 것도 없으며, 미샤도 빙결 검사 트리를 제대로 타며 냉기 대미지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 “음, 원래 이게 이렇게 쉬웠나?” 그냥 고기방패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전투가 끝나자 난쟁이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모두 강해진 거 아니겠냥!” “후후, 방금 쓴 거, 이번에 새로 배운 주문이었는데 어땠소?” 원래 탱커는 아무리 세봤자 티가 안 난다. 반면 딜러는 조금만 성장해도 확 티가 나는 직종이었고. 참고로 탐색꾼은……. “크흠흠.” 뭐, 애초에 거의 전력 외 취급이니까. 시간 내에 목적지에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탐색꾼을 할 일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4층에선 몬스터만 나오는 게 아니기도 하고. 「시련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내 몬스터가 모두 사망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각 문에는 고유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용기, 지혜, 운명, 인내. 평소였다면 용기의 계단을 열고서 무작위 몬스터와 싸웠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층수를 올리는 게 좋을 듯하오.” 우리는 일단 지혜의 계단을 택했다. 천공의 탑은 시련을 넘을 때마다 난이도가 증가하는데, 지혜의 계단은 한 번에 다 층씩 올라갈 수 있는 루트였으니까. 우리 전력이면 20층까지는 가야 사냥할 맛이 나기 시작한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 속을 걸어나갔다. 길도 복잡하고, 함정도 존재하며, 간간이 몬스터도 나왔으나, 전문 탐색꾼 로트밀러가 있는 이상 위험할 일은 없었다. 콰아앙-! 약 한 시간에 걸쳐 6층에 도달하자, 들어왔던 문이 굳게 잠기며 몬스터가 덤벼들었다. 1층과 다르게 7등급이 세 마리나 껴있었지만, 딱히 위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조합도 구린 편이었고. “흐음, 이번엔 지혜의 계단이 없구려.” 사냥을 마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용기의 계단을 택했다. 그야 운명은 변수가 워낙 많고, 인내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걸 할 바엔 몬스터랑 몇 번 더 싸우는 게 속 편하지.’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 패치가 된 이곳에서 인내의 시련은 모두 기피하는 시련이었다. 덥고, 춥고, 슬프고, 좆같은 기억도 떠오르고.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여하튼 계단을 타고 올라 7층에 도달했다. 몬스터가 등장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전투는 쉽게 끝났지만, 굳게 닫힌 문들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용기를 택하면 몬스터를 다 잡고도 4시간을 기다려야 되니까. “자, 그럼 쉬면서 용기나 다시 충전해 보세!” 난쟁이놈의 우스갯소리야 어쨌든. 마녀의 숲을 주파하며 지친 우리였기에, 별 아쉬움 없이 휴식 시간을 보냈다. 불침번은 딱히 필요 없었다. 몬스터는 리젠되지 않으며, 한번 포탈 색이 변하면 다른 탐험가들은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곳이었으니. “후우, 그럼 가보세!” 4시간을 자고 일어난 우리는 한 번 더 지혜의 계단을 택해서 탑을 올랐다. 층수로 따지면 어느새 12층까지 온 셈. 하지만, 이건 또 뭘까. [그아아앍!!] 석실 중심부에 떡하니 자리한 단 한 마리의 몬스터를 보며 우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쿠웅-! 4m가 넘는 거대한 체구. 입 밖으로 돌출된 거대한 송곳니. 우람한 근육 위로 덮혀진 회백색 가죽. 그리고 꼽추처럼 굽은 척추 뼈와 기형적으로 떡 벌어진 어깨 골격까지. “트, 트롤……?” “저놈이 왜 여기에…….” 트롤. 5등급 중에서도 최상급 씹새끼로 분류되는 몬스터. 데스핀드가 ‘뉴비 절단기’였다면……. 중견 게이머들을 상대로 ‘키보드 브레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 줬던 그 새끼. ‘이 새끼가 여기서 나온다고?’ 나 역시 한때 이 새끼 때문에 키보드로 샷건 소리를 냈던 기억이 꽤 있다. 한데 그 기억 때문일까? 욕지거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니미럴.” 어쩐지 한스를 만나고서도 일이 술술 풀리더라니. 전부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 ‘씨발, 이번엔 몬스터일 줄 몰랐는데.’ 미궁에서 경계해야 할 건, 약탈자만이 아니다. 117화 암운 (1) 5등급 몬스터의 피어가 인상 깊었을까? 드왈키가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쳤다. “처, 천공의 탑에서 왜 5등급 몬스터가…….”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천공의 탑에선 최대 6등급까지 출현하는 게 상식이니까. 하나 고인물로서 팩트만 정리하자면……. ‘5등급도 나오긴 하지.’ 천공의 탑에서도 5등급 몬스터가 등장한다. 정말 극악에 가까운 확률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한 일곱 번 정도 겪었나? 10년간 플레이타임을 전부 합치면 그 정도 빈도쯤 될 것이다. 다만……. ‘이걸 12층에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천공의 탑은 100층부터 난이도가 고정된다. 그리고 내가 5등급 몬스터를 만난 건, 전부 그 위에서 노가다를 하고 있던 때였다. 근데 그게 12층에서 나오다니? ‘빌어먹을 한스 효과.’ 한숨이 나오는 만큼이나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다들 정신 차려라!!” 한스든, 내 빌어먹을 팔자든 뭐든. 확률이나 따지며,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생각할 때가 아니다. 원인이야 나중에 생각해 봐도 될 문제일 터. 상황이 터졌으면, 행동하는 게 먼저다. 따라서— “베헬—라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을 시전하며 달려 나간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누구 하나 뒈지고서야 정신들 차릴 판이었으니. 후웅-! 높아진 위협 수치를 뿜어내며 달려들자, 트롤이 즉시 내게 주먹을 휘둘러왔다. 저 육중한 거구에서 저런 스피드가 나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다름 아닌 저 힘이다. 콰앙! 씨발, 방패 놓치는 줄 알았네. 정말이지 오랜만에 힘에서 밀리며 몸이 뒤로 밀려난다. “도, 돕겠네!” 이내 난쟁이놈이 합류하며 트롤의 다음 일격을 받아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균형추]를 시전했습니다.」 아이안트로의 스킬 덕에 뒤로 밀려나는 일도 없이, 충격 흡수 보정까지 받았지만……. 까가가각! 난쟁이놈의 버클러는 고철이 되어 버렸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긴급복원]을 시전했습니다.」 고작 한 방 받아냈을 뿐인데, 장비 수리 스킬까지 써야만 했던 난쟁이놈. 거, 그러게 방패 좀 바꾸라니까. [그아아앍!!] 재차 휘둘러오는 주먹을 받아내며, 메이스로 놈의 어깨를 후려쳤다. 퍼억-!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으나, 그게 전부였다. 뼈가 부러지기는커녕 끄떡도 하지 않고 주먹을 뻗어오는 트롤 새끼. ‘쩝, 나로는 딜도 안 박히는 건가.’ 입맛을 다시며 주먹을 피해 물러난다. 애초에 상처를 입혀 봤자 트롤에게는 의미도 없을뿐더러, 트롤 같은 몬스터와 힘겨루기를 하는 건 미련한 짓이란 판단. 후웅-! 트롤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지름과 동시. 딜러진도 정신을 차렸는지 지원을 시작했다. 우선 첫 타는 로트밀러의 석궁이었다. 휘이익! 틱! 기세 좋게 쏘아지더니, 돌벽에라도 처박힌듯 튕겨져 나가는 화살. 역시 트롤쯤 되니까 그냥 화살은 박히지도 않는구나. 쩝, 곰아저씨였으면 달랐을 텐데. 서걱-! 여하튼 기대했던 미샤의 칼질도 시원찮았다. 트롤의 두꺼운 가죽을 베어 내기는 했지만 깊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빙결 검사라서 다행인가.’ 서리가 낀 상처 부위를 보며 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5등급 몬스터답게 내성 수치가 워낙 높아서 ‘빙결’ 판정은 무리였지만, 이게 어딘가? 재생 능력을 조금은 막아 줄 것이다. “다, 다 됐소이다!” 드왈키도 영창을 끝내고 그의 전매특허인 ‘강화 얼음창’을 쏘아냈다. 조준 지점은 어느 몬스터든 약점이기 마련인 머리. 하지만……. 콰직-! 괴물 같은 육체 수치에 높은 항마력까지 겸비한 트롤 새끼는 그냥 맨주먹으로 얼음창을 깨부쉈다. 헌데 이 광경을 보고 나니 의지가 꺾였을까? [그아아앍!!] 드왈키가 두려움에 떨며 말을 더듬는다. “도, 도망쳐야 하오. 트롤은 이런 식으로 아무 준비 없이 상대할 몬스터가—” 그래, 그런 쉬운 몬스터가 아니지. 보통은 엄청난 준비를 하고 사냥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디로 도망칠 건데? “닥치고, 전투에나 집중해라!!” “아, 알겠소!” 후, 얘는 왜 소리를 질러줘야지만 말을 듣는 걸까? 아무튼, 얘는 이제 됐으니……. 콰앙-! 트롤을 저지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집중하며, 상황을 정리한다. 5등급 몬스터는 기본 스펙이 되어야지만 전투가 성립이라도 된다. 뭐, 6등급도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겠다마는, 5등급부터는 아예 궤를 달리한달까. ‘골치 아프게 됐군.’ 핏빛성채에서 만난 뱀파이어만 봐도 그렇다. 그때는 6등급 마법사인 레이븐이 존재했다. 마법사의 등급은 +1.5 해서 계산하니, 사실상 5등급 이상의 딜러가 팀 내에 있었다는 뜻. 또한, ‘여신의 눈물’이라는 사기성 아이템도 있었다. 데스나이트를 원샷원킬할 정도로 강한 능력을 가진 성물. 그 와중에 상극인 태양 속성의 공격 주문까지 퍼부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그런데도 한 방에 안 뒈졌지.’ 그게 5등급 몬스터의 위용이다. 포션빨로 버티고 버티다가 한 방에 모든 걸 쏟아냈음에도 놈은 살아 있었다. 재생력은 높아도 방어력은 낮은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음에도 그 정도였다. 반면 트롤 이 새끼는 어떤가. 최고 수준의 재생력과 방어력을 겸비했다. 쉽게 말해, 진입 장벽 역할을 톡톡히 하던 데스핀드와 비슷한 타입이다. 스펙이 안 되면 럭키 펀치의 가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부류의 몬스터.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 안쪽인가.’ 나는 우리의 전력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탱커인 난쟁이놈이나 나는 제외하고서, 오직 딜러만 생각했다. 과연 이 둘만으로 5등급 몬스터를 잡을 만한 딜이 나오는가? 답은 ‘나오긴 한다’였다. 드왈키의 마력을 모조리 ‘저주’에 몰빵하고. 탱커인 우리 둘이서 언제까지고 버티는 동안. 이번에 크게 성장한 미샤가 차근차근 딜을 넣는다면 가능은 했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 누구 한 명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겠지.’ 트롤이 가진 특성상, 스펙으로 찍어누르는 게 불가능하다면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투가 길어지면 사고가 터지기 마련. “미샤! 조심해라!!” 미샤에게 휘둘러진 주먹을 몸던져 막아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 고, 고맙당!” 힘든 전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한 명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투. 만에 하나 미샤나, 드왈키가 당한다면 그걸로 게임 오버일 상황이었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5분, 10분, 15분. 흘러내리는 땀 속에서 전투가 이어진다. 일분일초 매 순간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각기의 역할에 집중하며 모든 걸 쏟아붓는 시간이었다. 콰앙-! 우선 나와 난쟁이놈은 번갈아 놈의 공격을 받아내며 최대한 체력을 비축했고.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저주 마법 [악화]를 시전했습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9등급 저주 마법 [둔화]를 시전했습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저주 마법 [연화]를 시전했습니다.」 드왈키는 공격 마법 대신 저주 마법들을 뿌리며 서포터 역할에 매진했다. 재생력이 감소했으며, 동작이 느려지고, 물리 내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트롤. 서걱-! 미샤는 그런 트롤에게 열심히 칼질을 했다. 내가 오더한 대로 한곳만을 노려서. 서걱! 같은 지점에 칼질을 반복했더니, 어느새 반쯤 덜렁거리기 시작한 오른팔. [그아앍-!!] 로트밀러라고 놀지는 않았다. 하도 날뛰는 탓에 내가 부탁한 대로 눈에 화살을 꽂아 넣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탱커 입장에선 도움이 됐다. 놈의 신경이 분산되니까. “드왈키, 이리 안기시오!” 또한, 트롤의 어그로가 풀렸을 때 드왈키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로트밀러의 일이었다. 후, 무슨 살얼음 위를 걷는 거 같네. 콰앙-! 때마침 쿨타임이 돈 [야성분출]을 이용해 트롤을 원상복귀 시킨 나는 재빨리 눈가의 땀을 닦아냈다. 얼핏 잘 해내가고 있는 것도 같지만……. 매 순간이 위기였고, 자원의 소모였다. ‘수리비로 또 엄청 깨지겠군.’ 일단 비싼 돈 주고 마련한 라이티늄제 방패와 흉갑은 이미 여기저기 우그러졌다. 트롤 새끼의 주먹을 수도 없이 받아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3단계 소재도 아니고, 2단계 소재 아닌가. 5등급 몬스터의 공격에도 멀쩡하길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다. 애초에 수리비가 중요한 상황도 아니긴 하고. 「히쿠로드 무라드가 [긴급복원]을 시전했습니다.」 매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스킬을 써서 수리한 난쟁이놈은 이제 거의 MP가 바닥난 상태. 미샤도 매한가지였다. 재생을 조금이라도 더 막으려 [냉기응축]을 상시 유지하느라 MP가 빠르게 소모됐다. 뭐, 가장 심각한 건 드왈키였지만. “허억, 허억…….” 트롤은 항마력이 높은 개체기에, 저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쉬지 않고 저주를 영창한 그는 어느새 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이쯤에서 최종 점검. “마력은 얼마나 남았지?” “2분… 아니, 3분 정도는 더 쓸 수 있소.” “만약 ‘둔화’를 뺀다면?” “…7분까진 가능할 것이오.” “그렇군. 앞으로 ‘둔화’는 빼라.” 둔화 저주가 사라지면 트롤의 몸놀림이 더욱 포악해겠지만, 이건 뭐 감당해야겠지. 딴 건 몰라도, ‘악화’가 사라지면 기껏 반쯤 잘라 둔 팔이 몇 초 안에 다 나을 테니까. ‘7분이라…….’ 타임 리미트가 정해졌다. 7분. 그 안에 트롤을 못 죽이면 우리가 당한다. 따라서 슬슬 승부를 보러 갈 차례. “미샤, 아직 멀었나?” “으, 그렇게 말해도! 안 잘린단 말이다앙!!” 나는 내 계획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미샤의 검으로 트롤의 팔을 잘라내는 건 불가능했다. [악화] 저주에 동상 판정, 거기에 독사의 송곳니에 묻힌 산성피로 어떻게 재생을 막으며 근육은 베어냈지만……. 3단계 소재 뺨치는 강도의 뼈가 문제였다. 아니, 실제로 트롤 뼈는 3단계 소재이니 틀린 말이 아닌가? 아무튼, 큰 문제는 없었다. 계획대로만 됐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야지. ‘플랜B로 가야겠군.’ 플랜A를 파기하고, 새 계획을 꺼낸다. 지금 막 급조한 거지만 어쨌든. “히쿠로드! 지금부터는 네가 전담해라!” “알겠네! 근데 어쩌려는 것인가?” 나는 대답 대신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어디에든 적재적소가 있는 법. 애초에 칼은 뼈를 부수기 좋은 무기가 아니다. 듬직한 둔기류라면 모를까. 카칵! 메이스를 내리치자 좋은 울림이 전해졌다. 가죽과 근육으로 충격 흡수가 전혀 안 되는 트루 대미지! 「트롤이 [광분]을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통증이 사라지며, 육체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통 어린 괴성을 내지르던 트롤 새끼가 스킬까지 써가며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아, 아직 멀었는가!” 어찌저찌 저지에 성공한 난쟁이놈이 어느 때보다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될 때까지 하는 게 바바리안인데. “베헬—라아아아아!!” 바바리안의 근성을 가슴에 새기며, 쉬지 않고 메이스를 내리친다. 카칵-! 트롤 새끼가 멀쩡한 팔로 나를 밀쳐내려 했지만, 이는 난쟁이놈이 꾸역꾸역 막아냈다. 따라서— 철커컹. 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를 버린다. 그야 양손으로 치는 게 더 세잖아? 카카칵-! 양손으로 메이스를 쥐고서 후려치자, 조금 더 강한 손맛이 왔다. 예전에 뱀파이어 전때도 느꼈던. 앞으로 좀만 더 하면 될 거 같은 그런 감각.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야성분출]까지 써가며 조금이라도 더 육체 수치를 올렸다. 도발까지 걸리자 난쟁이놈도 트롤 새끼를 저지해내지 못했지만……. 퍼억-! 나도 단단한 건 자신 있어서 말이지. 트롤의 공격을 그냥 맨몸으로 받아내며 메이스질에 열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콰직-! 세 번째에서 뼈가 살짝 부서졌다. 그리고…….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콰직-! 여섯 번째에서 뼈가 조각나며 팔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그아앍-!!] 이쯤 되면 뒤로 물러날 법도 한데, 저만의 자존심이라도 있는지 계속해서 공격만 해오는 트롤 새끼. 퍼억! 나는 처맞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메이스를 꾸역꾸역 휘둘렀다. 그렇게 딱 열 번째가 되었을 때였다. 콰직-! 마침내 뼈가 완전히 박살났다. 힘줄에 몇 개에 의지해 덜렁거리기 시작한 팔. “미샤!” 내가 외치기도 전에 날아 들은 미샤가 검을 휘둘러 힘줄을 끊어냈다. 쿠웅-!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팔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졌다. 무려 이십 분간 온갖 지랄을 해서 얻어낸 첫 성과였다. 다만……. ‘이제 시작인가.’ 나는 이깟 걸론 만족할 수 없는 바바리안.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이제부터는 정말 시간 싸움이니까. 트롤의 액티브 스킬 [초재생]. 신체에 심각한 결손이 생기거나, 뇌가 다쳐 목숨이 위험할 때나 사용되는 그것. ‘씨발, 누가 트롤 아니랄까 봐.’ 그 스킬이 발동되자, 절단면에서부터 뼈가 자라나고 살과 근육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상처 악화 저주에, 빙결까지는 아니어도 동상 상태가 중첩됐는데도 저 정도라니. 참 가당치도 않은 회복 능력이지만……. ‘다 자라나려면 2분은 걸리겠군.’ 적어도 2분간은 놈도 [초재생]을 쓸 수 없다. 그냥 재생력이 확 상승하는 게 아니라, 부위를 지정해서 사용하는 스킬이니까. 다시 말해, 뇌가 터지거나 심장이 박살나도 저 팔이 다 고쳐지기 전엔 고칠 수 없다는 뜻. 그렇기에— 처커컥.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진다. 난쟁이놈이 미쳤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자, 자네 왜 갑자기 갑옷을 벗나?” 왜긴 왜야. 얘도 참 눈치가 없단 말이지.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몸. 4m 가까이 되는 트롤에 비하면 여전히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비빌 정도는 되겠지. 처커컹! 메이스와 방패마저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며, 트롤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양발로 트롤의 나머지 한 손을 포박했다. [그읅읅-!] 감히 자신에게 레슬링을 신청하는 탐험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까? 트롤 새끼가 크게 당황하며 손을 이리저리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변하는 건 없었다. 아무리 이 새끼 근력이 나보다 위라고 한들. ‘이 새끼도 머리에 문제가 있나 보군.’ 외팔이 새끼가 뭘 어쩌겠는가? “미샤, 일단 눈깔부터 찔러라!” 밥상은 얼추 차려졌겠다, 이제 승부를 볼 시간이다. 118화 암운 (2) 5등급 몬스터 트롤. 재생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놈이지만, 이놈도 심장이나 머리통이 터지면 뒈지는 건 똑같다. 하지만 나는 팀의 모든 전력을 퍼부어 놈의 ‘팔’을 잘라 내는 데 투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아앍-!!] 한 짝 남은 놈의 팔을 봉인시키며 무력화 상태로 만들었다. 즉, 미샤가 위험 부담 없이 딜만 욱여넣을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다는 뜻. 타닷. 트롤의 기다란 양팔을 경계해 거리 유지에 심혈을 기울이던 미샤가 처음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내 어깨에 안착하더니— 푹! 동시에 쌍검을 눈알에 쑤욱 박아넣었다. 물리 내성이 아무리 높아도 취약한 부분은 있기 마련. [그앍-!!!] 연약한 눈에 산성피로 인챈트 된 검이 꽂히자 트롤의 몸부림이 더욱더 심해졌다. 니미럴, 무슨 힘이……. “비, 비요른?” “여긴 걱정 말고 계속 쑤셔라!” 온 힘을 다해 놈의 팔을 허벅지로 조이며 외쳤다.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대답 대신 칼질에 집중하는 미샤. 첫 번째 변수는 여기서 발생했다. 푸욱, 푸욱, 푸우욱- 미샤가 연신 눈두덩이 속으로 칼을 쑤셔 박아 넣던 찰나. 칵! 카칵! 긁는 듯한 소리가 난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사람에게도 눈알 뒤에는 뼈가 있으니까. 하지만……. “…비, 비요른? 너무 단단해서 안 들어간당!” 뼈의 강도가 문제였다. 두꺼운 팔뼈면 몰라도, 이 정도면 금방 뼈를 부수고 뇌에 쑤셔 박을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그래, 쉽게는 안 뒈져 준다 이거지. “계속해라.” “알았당!” 이내 미샤가 ‘독사의 송곳니’를 역수로 쥐고서 계속해서 눈두덩이를 내리찍었다. 그러던 그때, 두 번째 변수가 발생했다. 쿵! 쿵! 쿵! 쿵! 시간이 지체되며 트롤이 날뛰기 시작했다. 시력을 상실한 녀석은 나를 떼어놓으려는 시도도 포기한 채, 유일하게 자유로운 양발을 이용해 한 곳으로 돌진했다. 문제는……. “드왈키! 드왈키를 노리고 있네.” 어찌 된 조화인지, 눈깔도 없는 트롤 새끼가 정확하게 드왈키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아아앍!!] 로트밀러가 드왈키를 끌어안고서 요리조리 피했지만, 앞이 보이기라도 하듯 난폭하게 추적을 해가는 녀석. “마력! 마력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네!” 이 현상에 대해서는 나도 알지 못했다. 정말 난쟁이놈 말처럼 본능적으로 마력을 감지하고 따라가는 걸까? ‘니미럴.’ 이유야 어쨌든. 다 된 밥이라 생각하던 차, 순식간에 상황이 좆같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터지고 불과 10초도 되기 전에, 드왈키와 로트밀러가 코너에 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자리에 있는 게 미샤였다면 모를까. 한 명을 안아들고서 5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로트밀러의 육체 수치는 높지 않았으니까. [그아아아앍-!!!] 이윽고 코너에 몰린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트롤. 난쟁이놈이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콰앙! 트롤의 발길질에 난쟁이놈이 축구공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때마침 MP가 바닥나며 [균형추]가 해제된 모양인데……. 제기랄, 하필 이런 순간에. “비, 비요른?” “아, 알았당!” 그래도 난쟁이놈이 벌어준 찰나의 틈을 이용해 로트밀러가 코너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잠깐의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한 3초쯤 됐을까? 쿵! 쿵! 쿵! 반대편을 향해 달려가던 로트밀러가 트롤에게 따라잡히며 발길질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이제 내 위치에선 둘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그런 상태에서 트롤이 발길질을 내리찍는다. “히, 히익……!” 열심히 구르고 있는지 사람이 짓밟히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이대로 좀만 더 트롤놈을 방치했다간, 분명 누구 하나는 죽을 것이다. 드왈키, 로트밀러.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쿠웅-! 선택의 기로였다. 미샤는 열심히 칼을 쑤셔 박느라 아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판단은 나의 몫이었다. 쿠웅-! 만약, 여기서 팔을 풀고 내려간다면 드왈키나 로트밀러는 지켜낼 수 있겠지. 하지만 결국 그 선택은 전멸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떨어지면 트롤 놈은 자유로워진 팔로 미샤를 공격할 테고…….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까. ‘제기랄.’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 버린다. 언젠간 겪을 일이었지 않냐고. 쿠웅-! [던전 앤 스톤]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모험을 추구하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동료의 죽음은 필연과도 같았고, 메인 캐릭터만 살아남는다면 모험은 계속됐다. 그래, 그런 게임이었다. 이 빌어먹을 게임은— 콰직-! 그때 아래서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 수도 없이 들었던, 살점과 뼈가 뭉개질 때 나는 소리. 이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미샤가 칼질을 멈춘다. 물론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다. “계속해라!!!” 내 외침에 미샤가 칼질을 재개했다. 카칵, 카칵, 카칵! 나는 이를 악물며 트롤의 남은 팔을 구속하는 데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던 때였다. 퍼억-! 트롤에게 걷어차여 나가떨어지는 드왈키가 시야에 들어온다. 척추가 꺾였는지 몸이 기형적일 정도로 휘어져 있다. 이로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리 알고 싶은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럼 아까 처음에 났던 소리는, 로트밀러의 몸에서 난 소리였겠구나. “……흐읍!” 우리 눈높이까지 떠올랐던 드왈키를 봤을까? 미샤가 잠시 움찔하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검을 연신 내리찍는다. “죽어랑! 죽어랑! 죽어! 이 괴물아! 죽으란 말이야!!!” 생존을 위해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으나, 상황은 최악으로 흘렀다. 드왈키가 당하며 저주가 해제된 것이다. [초재생]의 효과가 정상적으로 적용되며 빠르게 회복되는 팔.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아는지, 미샤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검을 내리찍었다. 그렇게 억겁과도 같은 일분일초가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카칵! 칵, 카칵… 콰직! 어딘가 청량한 충돌음이 들려옴과 동시. 온몸으로 붙잡고 있던 트롤의 몸체가 사라진다. 「트롤을 처치했습니다. EXP +5」 *** 사망에 이른 트롤의 육신이 빛으로 화해 사라지며, 미샤와 나는 바닥에 추락했다. 평소였다면 도중에 균형을 잡아 양발로 착지했겠지만, 우리 모두 그럴 기운은 없었다. 쿠웅! 바닥에 대자로 뻗어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자니, 주먹만 한 마석 하나가 내 머리 옆으로 떨어진다. 툭. 데구르르- 전리품은 그게 전부였다. 드라마틱하게 정수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새삼 이 순간이 현실임이 느껴졌다. 그래, 꿈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방금 내렸던 선택도. 그 선택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날아가던 드왈키의 모습도……. “로트밀러! 드왈키!” 쉬고 싶은 마음을 내던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이미 미샤는 쓰러진 동료를 챙기러 달려가고 있었다. “로트밀러! 정신 좀 차려봐랑!!!” “흐, 흔들지… 마……!” “미, 미안하당!” 놀랍게도 로트밀러는 살아 있었다. 한쪽 다리가 꺾이다 못해 짓뭉개졌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갈 부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도왔다. 머리나 상체가 짓밟혔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텐데. “나보단… 드, 드왈키를 먼저…….” “아, 알았당!!” 미샤가 드왈키에게 달려가는 동안, 나는 시선을 돌려 난쟁이놈을 확인했다. 큰 외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을 뿐인가…….’ 문제는 드왈키였다. “비, 비요른!! 어떡하냥! 드, 드왈키가 숨을 아, 안 쉬는데…….” “비켜봐라.” 미샤를 밀쳐내며 드왈키의 맥박을 짚는다. 호흡은 멈췄지만, 심장은 희미하게나마 뛰고 있다. 아직 되살릴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 치이이이익-! 일단 상급 포션을 한 병 꺼내 드왈키의 입에 흘려 넣는다. 임시 조치에 불과하단 건 알고 있다. 척추가 반쯤 접혔으며, 낙하 충격으로 다리도 꺾였다. 또한, 내장도 상했는지 코와 입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드왈키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것도 종이몸으로 유명한 마법사 직종의. ‘씨발.’ 나는 입술을 짓눌렀다. 이 정도 부상이면 상급 포션으로 살릴 수 있을지도 불분명할뿐더러……. “드왈키! 좀만 참아랑! 포션을 먹었으니, 금방 괜찮아 질 거당!” 살아도 분명 엄청난 후유증이 동반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거기서 최상급 포션을 쓰는 게 아니었는— “포, 션…….” 힘겹게 토해내는 로트밀러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자신에게도 포션을 달라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걸, 쓰게.” 로트밀러는 고통에 몸서리치는 와중에도 우릴 향해 물약 한 병이 뜬 손을 뻗고 있었다. “최상급, 포션이네.” 뭐, 최상급 포션? 그게 있다고……? “혹시 몰라 사뒀, 지. 이걸 그에게, 쓰게나…….”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미샤가 달려가 포션을 받아왔고, 나는 바로 입에 쏟아부으려는 걸 제지했다. “이대로 먹이면 영영 걷지 못할 거다.” “뭐?” 포션이라고 만능이 아니다. 뼈를 맞추지 않고 무작정 포션만 먹이면, 더 큰 후유증이 남게 된다. 따라서— 미샤가 포션을 조금씩 먹이는 사이, 나는 꺾인 다리와 척추를 제자리로 맞췄다. 제자리라 해봐야 대강 위치만 맞춘 수준이지만……. 남은 건 포션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잘린 팔도 낫게 해주는 최상급 포션 아닌가. “후우…….” 무거운 긴장 속에서 드왈키를 지켜보던 나는 참아 온 숨을 길게 토해 냈다. 호흡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려면 한참은 더 걸리겠지만, 창백하던 안색도 훨씬 더 좋아졌고. “……한시름 덜었군.” 나머지는 상급 포션 정도로도 어떻게든 될 터. 물론 가만히 앉아 쉴 새는 없었다. “가만 있지 말고 도와라.” “아, 알았당. 뭘 하면 되냥?” “히쿠로드를 데려와서 옆에 눕혀라. 혹시 모르니 하급 포션도 한 병 먹이고.” 미샤가 내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방치된 로트밀러의 다리 부상을 살폈다. “드왈키는, 어찌 됐나?” “걱정 마라.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너부터 걱정하는 게 어떤가?” “그것도… 그렇군. 후후후.” “꽤 아플 거다.” “그거야 알… 으윽! 끄으으윽!!” 이내 ‘포션’당한 로트밀러가 끙끙 앓다가 혼절한 것을 끝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끝났다. 이는 미샤 쪽도 매한가지였을까. “비요른…….” 미샤가 확인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 전부 살았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로…….” 몸에 힘이 풀렸는지 몸을 축 늘어뜨리는 미샤. 내 대답을 듣고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정작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데. ‘정말… 아무도 안 죽었을 줄이야.’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아니, 모두 살아남아서 더없이 기쁘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에는 꺼림찍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잘해서. 사전에 계획을 잘 세워서. 변수가 터져 나왔을 때 대처를 잘해서. 그래서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았어.’ 그저 운이 좋았다. 이를 인정하고 나니 그제야 나도 실감이 났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탐험가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오늘은 영화처럼 모두가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마… 계속 오늘 같지는 않겠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같은 놈에게 오늘 같은 행운이 몇 번이고 찾아 올 리가 없다는걸. ***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난쟁이놈이었다. “……그래, 전부 살았단 거군.” 모두의 생존 소식을 확인한 난쟁이놈은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지 않았다. 단지 기도하듯 같은 말만 반복할 뿐. “다행일세. 응, 그래… 정말로 다행이야…….” 하긴 탐험가 일을 몇 년이나 했으면 겪어 볼 일도 꽤 있었을 터였다. 동료의 죽음이란, 탐험가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트롤을 만나고도 모두 무사하다니, 돌아가면 신전에 헌금이라도 해야겠구려…….” 난쟁이놈 다음에 깨어난 것은 로트밀러였다.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변명 섞인 사과부터 뱉었다. “미안하다. 트롤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게 어찌 자네 잘못이겠나. 감사 인사는 우리가 해야지. 자네가 없었다면 이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걸세.” “하지만…….” “자네의 판단은 옳았으니, 자책하지 말게.” 이미 로트밀러는 내가 둘의 희생을 감수하려 했던 선택까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그렇게 계속하라고 소리를 쳤는데. “끄으윽, 으윽…….” 이후 시간이 지나자 드왈키도 신음을 뱉으며 눈을 떴다. “움직이지 말게.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 “다들… 괜찮은 거요……?” “우린 다 괜찮당!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랑!” “아… 미, 미샤 양… 무사해서 다행이오…….” “멍청아! 네가 할 소리냥?” “그, 그건……! 쿨럭! 그, 그렇구려……? 하하핫.” 가장 심각한 상태였던 드왈키가 깨어나며 한없이 무거워지던 분위기가 그나마 밝아졌다. “하핫, 우리 다섯이서 트롤을 잡다니. 이래선 자랑도 못하겠군.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난쟁이놈도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는 미샤도 매한가지였다. “으으, 정수라도 나왔어야 했는뎅! 왠지 억울하당. 그 고생을 해놓고서 얻은 게 아무것도 없지 않냥?” “목숨을 건졌지 않은가.” “로트밀러, 너는 가만 보면 욕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당.” “그래, 자넨 이번에 최상급 포션도 썼다면서? 아, 물론 걱정은 말게. 우리끼리 다 같이 모아서 값은 치를 테니.” “그렇다면 조금 마음이 놓이는구려.” “아, 근데 비요른. 이제 앞으로는 어쩔 거냥? 여기서 더 올라가려는 생각은 아니징?” “후… 너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히 한동안은 쉴 거다.” “아니, 미샤? 자넨 왜 비요른한테 의사를 묻는 겐가? 분명 팀의 리더는 나인데?” “아… 그랬징?” 난쟁이놈의 의문이야 어쨌든. 미궁이 닫힐 때까지 해당 층에 체류하자는 내 의견 자체는 누구의 반발도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야 탐사를 이어 갈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트롤과 격전을 펼친 그곳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휴식을 치렀다.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내 여섯 번째 탐사가 막을 내렸다. 119화 암운 (3) 결국 이번 탐사는 트롤전 이후로 올스탑됐다. 드왈키의 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은 탓이다. [포션을 더 먹어도 나아지거나 하진 않을 걸세. 사람들 몸이 다 자네처럼 튼튼한 건 아니니까.] 자연 재생력의 보정이 없다면, 상처가 모두 아물고서도 근육과 뼈가 제자리를 잡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우린 검문소를 지나쳐 신전부터 달려가야 했다. 로트밀러와 달리 드왈키는 시간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거든. “후, 이제야 좀 살 거 같소이다…….” 일주일 내내 일어서지도 못하던 드왈키가 ‘상급 치유’를 받고서 마침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후유증은 없나? 치료가 늦어져서 내심 걱정 했네만…….” “하핫, 걱정 마시오. 지금 당장 미궁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으니.” “그렇다면 다행일세.” 최상급 포션으로 초기에 진압을 한 덕분인지, 신성력 한 방에 평소처럼 팔팔해진 드왈키.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후유증이라도 남았다면, 다음 탐사부터 지장이 생길 테니까. “그럼 이틀 뒤에 다시 모이는 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세.” 사실상 팀 전원이 모이고서 획득한 마석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분배는 의뢰 완수금을 받은 다음으로 미루며 해산했다. ‘음, 인당 40만 스톤 정도 되려나?’ 정확한 건 나눠 봐야 알겠지만, 프로그맨 주술사의 부산물을 전부 팔아서 오등분하면 얼추 그쯤 될 것이다. 포션값으로 20만스 톤씩 떼어주기로 약속이 됐으니. ‘후, 빌어먹을 트롤 새끼.’ 이 새끼 때문에 골손실이 장난 아니다. 여기저기 구부러진 장비를 피려면 수리비도 꽤 나올 게 분명하고. 그 고생을 시켰으면 정수라도 뱉던가. 앞에 잔뜩 벌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고 돌아올 뻔했다. “비요른, 너는 이제 어쩔 거냥?” “일단 숙소로 가서 씻은 뒤 물건을 정리하러 갈 계획이다. 아, 물론 너도 같이.” “으응? 나도……?” “미궁에서 푹 쉬다 오지 않았나. 튈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생각 안 했거든? 아무튼 내 숙소까지 다녀오기 귀찮아서 그런데, 씻는 건 그냥 네 숙소에서 해도 되냥?” “물론이다.” 쓸데없이 동선 낭비를 할 필요 없기에 미샤와 함께 내 숙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후딱 씻고 나왔다. 마차가 끊기기 전에 상업지구에 다녀오려면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으니까. “엑? 벌써 다 씻었다고?” “너는 천천히 씻어도 괜찮다. 어차피 짐을 다 정리하려면 꽤 걸릴 테니.” “오, 정말이냥?” 이후 미샤를 욕실로 집어넣은 다음, 혼자서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을 쫙 늘어놓고 정리했다. 젠시아와 아기 바바리안을 노리던 삼인방을 해치우고 얻은 장비 및 소모품들. ‘이건 팔고, 이건 갖고 있다가 우리가 쓰면 될 거 같고…….’ 종이에 목록까지 써가며 잘 정리해 가고 있자니,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저, 안에 계십니까?” 처음 듣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뭔가 해서 문을 열어보니 탐험가 길드의 직원 배지를 찬 사내가 보였다. “비요른 얀델 님 맞으신지요?” “……맞다.” “혹시 함께 길드까지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씨발, 갑자기? 비슷한 말을 듣고 따라갔다가 감옥에 갇혔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좆같아졌지만……. 직원의 말투와 표정을 보니 그때와는 확실히 상황이 다른 듯하다. 경비 새끼들도 보이지 않고. 일단 침착하게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부터 말해라. 가고 말고는 그다음에 결정하지.” “아, 그걸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직원이 아차 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상황을 설명했다. “……증인?” “예, 얀델 님께서 자신이 약탈자가 아니란 걸 증명해 주실 거라고…….” 아기 바바리안이 위기에 빠졌다. *** “원래라면 이런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아시다시피 ‘그 사건’ 이후로 모든 관련 규정이 엄해져서……. 실례란 걸 알지만 확인차 방문을 했습니다. 만약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냥 거절하셔도 무방—” “가지.” “예?” “옷만 갈아입고 나올 테니 기다려라.” 일단 방문을 닫은 뒤 외투를 위에 걸쳤다. 그리고 샤워 중인 미샤에게 외출 사실을 알렸다. “미샤, 오늘 일정은 취소다.” “뭐? 갑자기 왜?” “카론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잠시 탐험가 길드에 다녀올 테니, 다 씻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든가 해라.” “뭐? 그게 무슨 말……! 아니, 좀 더 자세히—!” “기다렸겠군. 어서 가지.” “그게 그렇게 귀찮냐, 이 바바리안노망!!” 핵심을 찌르는 미샤의 외침이야 어쨌든. 밖에서 기다리던 직원과 함께 길드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도착한 곳은 내가 탈옥을 했던 그 지부였다. “여기도 오랜만이군.” “예? 아, 예에……. 들어가시죠. 지부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지부장이……?” 근처를 둘러보며 옛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직원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니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 카론이 보인다. 맞은편에는 콧수염의 지부장이 앉아 있다. 아주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오, 잘 지냈나?” “……덕분에.” 거, 퉁명스럽기는. 그래도 생각처럼 골치 아픈 상황은 아닌 듯하다. 카론이 정말 약탈자로 몰렸다면, 여기서 졸고 있을 게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테니. 드르르르르렁렁-! 일단 나는 카론부터 깨웠다. 아니, 깨웠다고 하기엔 좀 그런가? “카론, 자는 척 말고 일어나라. 여기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 내 말에 지부장과 직원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고, 그때 카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떻게 알았나?”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마지막에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사라졌으면서. “왠지 너라면… 그럴 거 같았다.” “한 사람의 전사로 인정해 준다는 뜻인가?” “그래, 그런 거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카론이 진심으로 기쁜 듯 웃으며 내게 어깨 인사를 했다. “아무튼 와줘서 고맙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당연한 일이다. 혹시 이들에게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나?” “그런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게. 그랬다면 이 친구가 여기에 있을 일이 있겠나?” 음, 그건 그렇지. 근데 난 너한테 묻지 않았는데. “카론, 대답해라.”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이래서 선례가 중요한 거다. 내가 그 지랄을 떨어 둔 게 아녔으면, 얘들이 이렇게 잘 대해 줬겠어? 털썩. 그런 의미에서 굳이 허락은 구하지 않으며 소파에 편히 앉는다. 혹시 지부장이 내가 어떤 놈인지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럼주로 하지.” “설마 내가 바바리안이라고 차별하는 건가?” 지부장이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후우… 술은 없네. 차라면 내어줄 수 있—” “찬물. 얼음 동동 띄워서.” “그러지…….” 역시 사람은 학습하는 생물이란 걸까? 지부장은 내 답도 없는 말투나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순순히 원하는 걸 내어줬다. 무지성 바바리안을 대하는 방식을 온몸으로 깨우친 거다. ‘바바리안이 진짜 사기캐긴 하단 말이지.’ 내친김에 비싸 보이는 탁상 위에 먼지투성이의 발을 올리자 카론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역시 넌… 대단한 전사다…….” 명색이 탐험가 길드의 지부장씩이나 되는 존재 앞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 뭐, 이는 지부장 쪽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기도 안 찬다는 듯 콧수염을 떨어 대는 걸 보면. “자네들은 정말…….”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없네.” 으르렁거리듯 되묻자마자 트집이라도 잡힐까 꼬리를 내리는 지부장. 피식. 내심 예상은 했던 반응이었다. 예전에 봤을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쥐뿔도 없던 그때의 9등급 야만인이 아니다. “자네 소문은 들었네. 작은 발칸이라고 불린다지?” 고작 몇 달 만에 6등급 탐험가가 되었다. 그것도 이명까지 얻은, 장래가 유명한 탐험가. 마르토앙 남작과 친분도 있으며, 백작이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또한, 나를 지켜봤다면 레이븐의 연구 때문에 매주 마탑에 들락날락했던 것도 알고 있을 터. 물론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여기 얼음물입니다…….” 나는 강해졌다. 1초만 줘도 이 지부장의 머리통을 터진 토마토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뭐, 폭력보다 법이 앞서는 도시 한복판이기는 하겠다마는, 알게 뭔가? 적어도 지부장놈은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새끼가 아니라고 생각할 텐데.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제 카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기껏 주문한 얼음물을 옆으로 쓰윽 밀어내며 묻자, 지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원한다면 저 친구는 이만 가봐도 좋네. 정당방위였다는 건 마법사를 통해 확인됐으니까.” “……뭐?” 예상치 못한 쿨한 대답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마법사한테 이미 확인을 했다고?’ 확실히 이상한 얘기는 아니었다. 얘는 나처럼 항마력이 높던 게 아니니까. 나를 부를 필요도 없이 마법 한 번이면 카론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말인즉슨. ‘카론이 아니라 나한테 목적이 있었던 거군.’ 나는 빠르게 파악을 끝냈다. 그래, 이래야 탐험가 길드답지. 이제야 조금 심장이 쫄깃해지기 시작했다. “카론, 너는 이만 나가 봐라.” “그래도 되나? 배가 고프긴 했는데…….” “끼니를 거르면 키 안 큰다. 어서 가라.” “알겠다! 다음에 보자, 얀델의 아들 비요른!” 우선 카론부터 내보냈다. 뭔진 몰라도 지부장도 듣는 사람이 적었으면 하는 낌새였으니. “오드리안 군, 수고했네. 자네도 내려가 있게.” “예, 지부장님.” 이내 나를 안내해 주고 얼음물까지 타다 준 직원이 떠나자, 지부장실엔 우리 둘만이 남았다. “…….” 누구도 말을 떼지 않으며 자연스레 침묵 상태가 이어졌다. 나는 재촉지 않고 그가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이유는?” “어반스 영애께서 자네와 만나길 바라시네.” “어반스 영애라니? 그게 누구지?”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응시하자, 지부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묻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자네가 인질로 잡았던 그분을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 지역장 딸내미. 씨바,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그래도 완전히 잊은 건 아닌가 보군?” “크흠, 아무튼 그래서 그 여자가 왜 날 만나려 하는 거지?” “글쎄, 그건 만나 보면 자연히 알게 될—” 뭐래, 어디서 떡밥질이야? “그렇다면 거절하지.” “뭐?” “매일 배고픈데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나?”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우자, 지부장이 다급히 말을 잇는다. “……길게는 말할 수 없네만, 절대 자네에게 해로운 일은 아닐 것일세. 오히려 도움이 됐으면 됐지.” 음,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더 해 봤자 다른 정보를 토해 낼 거 같지는 않고. ‘인질로 잡혔던 여자가 나를 만나 보길 원한다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싫다고 전해라!” 거,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 대낮의 거리 한복판. “하아, 하아, 하아…….” 에르웬은 인파를 헤치며 뛰고 있었다. 기껏 뽀송뽀송하게 씻은 몸은 물론, 간만에 꺼내입은 치마에도 벌써 땀이 새어들었지만……. ‘어…… 냄새가 나진 않겠지?’ 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습도 서로에게 보여 줬던 사이가 아닌가? 일단 그와 만나는 게 그녀에겐 더욱 중요했다. ‘……역시 살아 계셨어!’ 그 사실이 더없이 기쁜 한편, 자괴감도 들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처음으로 그녀에게 생긴 동료이자, 미궁에서 홀로 헤매고 있을 때 그녀를 구원해 준 바바리안. 은혜를 갚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져, 그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로 그 사람. 혼자 착각하고 방에 틀어박혔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설마 그렇게 유명해지셨을 줄이야…….’ 수소문하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도시로 귀환하고 몇몇 사람에게 물었을 뿐인데, 대부분이 그의 이름을 알았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그가 묵고 있는 숙소의 위치까지 알고 있었을 정도. ‘어, 잠깐만…… 그럼 왜 언니는 아무 말도 안 해 준 거지?’ 돌연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에르웬은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못 들은 거겠지. 언니가 일부러 숨겼을 리도 없고. 당장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으,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진 거잖아.’ 가슴이 쉬지 않고 콩닥거렸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 좋은 울림. 해가 뜨고 지는 걸 보기 싫어서 내내 커튼을 치고 살았건만, 피부에 와닿는 햇살은 오늘따라 따스하고 포근했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자. 분명 아저씨도 날 찾아다녔을 테니까. 아마 찾아오지 못한 건 우리 숙소가 어딘지 기억하지 못하셨기 때문이겠지.’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에르웬은 곧 있을 만남을 대비하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방문을 두드렸다. 터벅, 터벅. 안에서 걷는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서 아저씨와 만나 예전처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며, 웃고 떠들던 그때처럼. ‘내가 사대정령을 다 부리게 된 걸 알면 놀라시겠지? 어, 아니… 아저씨는 나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이런 거로는 자랑도 안 되려나?’ 약간 걱정은 됐지만, 그래도 결국엔 칭찬해 줄 것이다. 잘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저씨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히히…….” 그런 상상에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때였다. 벌컥. 마침내 문이 열렸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엥? 너는 누구냥?”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웬 수인 한 명이었다. 머리 위에 세모귀가 달린 묘족 출신의. 에르웬은 방문에 달린 번호를 확인했다. 201호. 잘못 찾아온 건 아니었다. 확인차 몇 번이나 되물었던 것이니, 잘못 들었을 리도 없었다. 그럼 혹시 알려준 사람이 뭘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음,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그래도 혹시 옆방일 수도 있으니까 한번 물어나 보자. 그렇게 유명해진 아저씨인데 같은 숙소 사람이라면 분명 알고 있겠지. “저 혹시 아저씨… 아니, 비요른 얀델이 어느 방에 묵고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응? 비요른 손님이었냥?”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비요른이라면 조금 전에 씻고 나갔는데,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겠냥?” 조금 전에 씻고 나갔다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이 여자 말이라면 여기가 아저씨의 방이 맞다는 거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지? “아니면, 누군지 말해줘랑. 이따 비요른이 돌아오면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주겠당.” 이래서야 마치 동거라도 하는 중인 거 같지 않나. 멍하니 고개를 든 에르웬은 수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뻤다. 요정족 출신인 그녀가 봐도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뚝뚝. 적색의 머리칼에선 뚝뚝 흘러내렸다. 방금 씻고 나온 듯이. “아저씨가 조금 전에 씻고 나가셨다고 하셨죠?” “응, 그런데 그건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답변에 에르웬의 입꼬리가 뒤틀리듯 휘어졌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뇨. 아무것도요.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요?” “어, 그래랑……?” 이내 그녀는 방 안에 들어섰다. 전리품들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 난잡했다. “좀 지저분하징……? 원래는 안 이러는데…….” “알아요. 이게 뭔지는. 저도 아저씨랑 해봤던 거니까.” “응? 해봤다고? 아아…… 너도 탐험가구낭?” “네.” “그, 그렇다고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랑? 이건 다 약탈자들한테 얻은—” “걱정 마세요. 오해 안 해요.” 에르웬은 수인의 말을 끊고는 가슴의 울림에 집중했다. 그리고 싱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의 걸 탐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지 않겠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이 어느샌가 차게 식어 있었다. 120화 암운 (4) 묵직한 나무 향이 감도는 집무실. 탐험가 길드 제7 지역장, 나일 어반스가 피식 웃음 지었다. 얼마 전에 딸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저는 남은 인생을 아버지의 인형으로 살아갈 생각이 없어요.] 탈옥 사건이 처음 벌어졌을 때. 그는 딸의 불온한 움직임을 눈치챘다. 그야 그때 지부장과 둘이 독대를 나누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사실이 못내 수상해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 보자 딸이 암암리에 길드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여자의 삶이 있는 것인데.’ 한때의 반항치고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내 딸이 맞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흐뭇한 마음도 일었다. 하지만……. ‘숨 쉬는 것도 조심하라 했건만.’ 그러한 야망마저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건 그 대상이 그의 딸이기 때문이다. ‘지부장, 결국 그놈이 내 딸을 택한 모양이군.’ 비요른 얀델. 언젠가 버릇을 고쳐 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성장을 거듭한 바바리안. 지부장이 오늘 그와 접촉을 시도했다. 딸이 그 바바리안을 이용해 뭘 꾸미려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부장이 딸의 휘하로 넘어갔음은 자명해졌다. 그 사실이 몹시나 불쾌했다. ‘감히 내게 반기를 들었단 말이지.’ 지부장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이미 그는 눈 밖에 났고, 그가 옷을 벗으면 그 자리에 앉힐 만한 인물도 이미 정해 두었다. 놈도 그걸 알았으니,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 보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른 단어인 법. ‘이번 기회에 둘 다 처리를 해버려야겠군.’ 나일 어반스가 차를 홀짝이며 눈을 빛냈다. 원래 바바리안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때의 굴욕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지만, 몇 달 사이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해 버렸으니까. 구태여 적을 한 명 늘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똑똑한 딸이 바바리안과 접촉을 하려 했던 것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 ‘……게다가 묘하게 자꾸 거슬린단 말이지.’ 나일 어반스는 결정을 내렸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치우면 그만이다. 나중에 더 큰 문제로 화하기 전에. *** 콰콰콰아앙-! 탐험가 길드를 나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숙소로 돌아가고 있자니,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며 장대비가 쏟아진다. ‘니미럴.’ 어느샌가 하늘 위를 뒤덮은 우중충한 먹구름. 그냥 맞고 갈까도 싶었지만, 소나기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근처 식당에 들어섰다. 어차피 끼니를 때울 시간이었으니, 식사라도 하며 잠시 추이를 지켜볼 요량이었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구운 고기와 호박 스튜, 그리고 호밀 빵. 속은 제법 뜨끈하고 든든하게 데워졌지만, 왠지 부족한 기분이 든다. 예전처럼 한 끼에 300스톤 하는 싸구려 식당에 들어온 것도 아닐진대. ‘확실히…… 고기는 미샤가 잘 굽는단 말이지.’ 내일 나가면 고기나 몇 근 사서 구워달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럼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가 그치거나 적어도 조금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미샤도 없을 거 아닌가. ‘아, 걔도 비 때문에 아직 거기 있으려나?’ 빗소리를 안주 삼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자니 이런저런 상념이 두서없이 이어진다. 고블린 덫을 조심하며 돌빵을 먹던 때가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반년이나 흘렀구나. ‘파전에 막걸리…… 파는 곳은 없겠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많이 옅어졌다. 그냥 모든 게 익숙해졌다. 삐걱대는 침대도, 화장실 한 칸 딸린 자그마한 단칸방도, 싸구려 맥주를 마시며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일상도. ‘나도 정말 많이 변했네.’ 이 세상의 좆같은 점을 대라면 온종일이라도 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엔 생존이 목표였지만, 점점 나 자신이 성장하는 모습에 게이머로서의 즐거움을 느꼈다. 동료들과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 생경한 기분이었다. ‘여기에 불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방구석에서 혼자 게임이나 하고 있었겠지.’ 29세 회사원 이한수의 인간관계는 극도로 좁았다. 물론 거기에 불만도 불편도 없었다. 노후 준비도 착실히 해가고 있었고, 타인을 의지하지 않아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었다. 동료가 강제되는 이 세상과는 다르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정이 들긴 들었나 보네.’ 설탕이라도 쳤는지 뒷맛이 쓸데없이 달달한 럼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드왈키, 로트밀러, 난쟁이놈. 이 셋을 떠올리면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졌다. ‘상층으로 가려면 역시 새 팀을 꾸리는 수밖에 없겠지.’ 5층부터는 지금 멤버로는 역부족이다. 성장 한계치가 뻔히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일단 드왈키는 마탑 출신도 아닌 데다가, 선천적으로 마력량이 적다는 중대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지금이야 곧잘 새 마법을 배워 오지만, 6등급 주문은 거의 못 쓴다고 봐도 될 테고.’ 로트밀러는 말할 것도 없다. 저층에서야 길만 잘 찾아주면 끝이지만, 상층에선 탐색꾼에게도 높은 수준의 전투력이 요구된다. 그야 파티의 최대 인원은 다섯 명이니까. ‘그 아저씨가 인도자 각성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4층이 한계겠지.’ 물론, 이 두 명과 달리 난쟁이놈은 장비만 잘 맞추면 상층에서도 활약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팀에 탱커가 둘일 필요는 없다. ‘……미샤의 스펙만 좀 더 오르면 새로 팀을 꾸리던가 해야겠네.’ 사실 이전부터 생각했던 문제였지만, 이제야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 있었던 트롤전이 크게 작용했다. 나는 계속해서 위층으로 올라갈 것이고, 그 목표는 이들과 함께 이룰 수 없다. 매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는 그들을 위한 결정이기도 하다. 상층엔 트롤보다 더한 괴물이 우글거리니까. 이번처럼 운 좋게 살아남는 일이 반복되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는 편이 옳— “얀델?” 어, 뭐야 갑자기.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자가 서 있었다. 곰아저씨. 아니, 그러니까……. “우락부라크?” “…우리크프리트다. 발음하기 어려우면 그냥 아브만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럼 그쪽으로 하지.” 마초스러운 외모의 곰아저씨는 얼굴값을 하려는 건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나도 자주 했던 짓이기에 딱히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설마 네가 손님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손님?” “아, 그걸 말하지 않았군. 여긴 내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다.” 사장님이라…….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지만, 크게 놀라거나 할 일은 아니었다. 5등급 탐험가쯤 되면 가게 하나 차릴 정도의 재력은 충분할 터. 놀란다면 차라리 다른 부분에서 놀라야겠지. “아내도 있는 놈이 혼자서 미궁에 들어가고 있던 건가?” “요즘 가게가 적자라서 말이야. 나라도 열심히 벌어야 하지 않겠나?” 음,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내가 오지랖 부릴 부분도 아니고. “아무튼 비를 피하러 온 곳의 주인이 너라니, 신기한 우연이군.” “신기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우연이지. 덕분에 확신이 생겼다, 비요른 얀델.” “확신이 생겼다니?” 곰아저씨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나를 네 팀에 넣어주지 않겠나?” 응? 이건 또 뭐지? *** 갑자기 동료로 받아달라니? 예상치 못했던 주제였지만, 마저 얘기를 들어 보니 납득은 됐다. 곰아저씨의 입장에서 나는 검증된 탐험가였다. “그 상황에서 생판 모르는 남을 살릴 정도면 뒤통수는 안 칠 거 아닌가.” 500만 스톤을 요구하긴 했지만, 외부와 차단된 균열에서 최상급 포션까지 써가며 자신을 구해 준 게 좋게 보였던 모양. ‘……이게 또 이렇게 되네.’ 탱커 보조 소환수와 강력한 원거리 물리 딜. 곰아저씨 정도면 5층 이상에서도 무리 없이 제 몫을 해 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뭔가 오해를 했나 보군. 이번에만 따로 들어갔을 뿐 고정 팀이 있다.” 나는 에둘러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분간은 드왈키 파티에서 있을 계획인데, 이 아저씨를 넣자고 다른 사람을 뺄 수도 없지 않은가. 의외로 곰아저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오늘 한 얘기는 나중에 자리가 비거나, 팀에서 나오게 되면 그때 다시 하는 거로 하지.” “자리가 비다니?” “너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 텐데?” 곰아저씨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끝으로 동료 건은 마무리가 됐다. 이후로는 500만 스톤을 언제 갚을 것인지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안 그래도 쓰지 않던 장비 몇 개를 거래소에 올려놨으니, 약속한 일자에는 줄 수 있을 거다.” 파리만 날리는 가게 내부를 보고 있자니, 제법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500만 스톤은 열흘 뒤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 담보와 맞교환하기로 얘기가 끝났다. “그럼 그때 보지.” “이거라도 입고 가라. 너한테도 맞을 거다.” 더 기다려도 비가 그칠 거 같지는 않았기에 곰아저씨에게 우비를 빌려 입고 숙소로 향했다. 쏴아아아아아- 무슨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내리는 장대비. 낯설 정도로 한적한 거리를 뛰어서 지나치고 있자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아, 비요른 왔냥? 여기 네 손님이당.” “으아아아앙! 아저씨……!!” 화창한 날씨에 쏟아진 빗줄기처럼, 예고 없던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1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을 절제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참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남의 걸 탐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지 않겠어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본심에 에르웬은 흠칫 굳었다. “으응? 너…… 생각보다 엄청 터프하구낭?” 다행히 저쪽은 방금 한 말의 진의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엄밀히 말하자면 빼앗긴 것도 아니다. 아저씨는 물건 같은 게 아니니까. 또한, 아저씨의 곁을 떠나 언니와 함께하겠단 선택을 내린 것도 그녀 자신이었다. 한데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까드득. 이상할 정도로 적의가 샘솟는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며 상대를 살피는 나 자신이 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는구낭. 나는 미샤 칼스타인이당.”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우와, 이름도 예쁘구나…… 에르웬, 만나서 반갑당.” “네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숨기며,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저 여자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었다. “칼스타인 씨는 혹시 교제 중이신 분이 있나요?” “교, 교제라니…… 이상한 소리 마랑. 나와 비요른은 그냥 동료다, 동료!” “흐음, 그랬구나.” 어째선지 분노가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교제 중인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바로 아저씨의 이름이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역시 아무래도 좀 더 확인해 봐야겠다. “죄송해요. 아까 같이 씻으셨다고 하시기에 제가 그만 착각을 했네요.” “가, 같이 씻다니 그게 무슨 말이냥! 잠깐 욕실만 빌렸을 뿐이당.” “외간 남자 방에서 욕실을 빌리시다니, 숙소가 여기서 되게 먼가 봐요?” “어, 딱히 먼 건 아닌데…….” “……아니시라고요?” 그 말에 에르웬의 눈썹이 휘어졌다. 아저씨는 아닐지 몰라도, 이 여자는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런 천박한 수법까지 쓸 만큼. “크흠흠! 그래서 너는 비요른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냥?” 본인에게서 화제를 돌리고 싶었을까?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 질문을 던져왔다. 에르웬은 솔직하게 답변했다. “아저씨와는 동료였어요.” “으응? 아저씨……? 비요른은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아, 저와 아저씨만의 애칭 같은 거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애칭…… 이라고?” “네, 문제라도 있나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자, 수인 여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당. 문제라니? 그럴 리가 있겠냥. 냐핫!” 입은 웃고 있지만, 꼬리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휙휙 움직이며 침대보를 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르웬은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 이어지기 전까진. “아저씨랑 저랑은 조금 특별한 사이거든요. 일단 첫 동료였던 데다가, 첫 귀환주도 함께—” “헤에, 근데 그런 건 너한테만 의미 있는 거 아니냥?” “……네?” “그도 그럴 게, 비요른이랑 같이 지낸 지 몇 달이나 됐는데, 너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거든. 냐핫!” 수인 여자는 해맑게 웃으며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에르웬은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한 가지는 알았다. “에르웬이라고 그랬지? 하는 짓은 뭐, 귀엽게 봐주려면 못 봐줄 것도 아니당. 그런데…… 적의를 이렇게까지 내비치면서 사람을 병신 취급하면 나도 짜증이 나지 않겠냥?” 미샤 칼스타인. 이 여자를 보자마자 적의를 느낀 건 당연한 거였다. “으음, 그래도 한 가지는 고맙당. 덕분에 이제 나도 헷갈리지 않을 거 같거든.” “헤, 헷갈리지 않는다니요?” “글쎄? 뭔 말인진 이미 알고 있지 않냥?” 이 여자는 적이다. 그녀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려 하는. 121화 암운 (5) 잠시 우두커니 서서 앞을 바라본다. 미샤도 돌아가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방엔 두 명의 인물이 존재했다. 미샤와 에르웬. ‘둘이 아는 사이일 리는 없으니, 에르웬이 날 찾아왔다가 우연히 만난 건가?’ 방에 들어섬과 동시에 나는 버릇처럼 주어진 정황을 통해 인과를 분석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콰콰쾅-! 비가 쏟아지며 눅눅해진 바깥 공기와 다르게, 왠지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나의 작은 단칸방. 이 방에는 의문점으로 가득했다. ‘뭐야? 얘는 왜 이렇게 빡쳐 있어?’ 몇 달간 거의 붙어 지냈더니 표정만 봐도 안다. 지금 미샤는 아주아주 화가 난 상태다. 고기만 다 집어 먹고 몰래 당근을 내다 버리다 걸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꼬리털까지 약간 부푼 것을 보아 경계심도 느끼고 있는 거 같은데……. 이상한 건 에르웬도 마찬가지다. ‘……얘 설마 우는 건가?’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애써 참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슬퍼서 운다기보다는 너무 분해서 치를 떨며 버텨내는 표정에 가깝다.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건가?’ 보이는 정보들을 토대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에르웬과 미샤가 싸운 거 같다.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둘 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립할 성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덜컥. 이내 방문을 닫자, 미샤와 에르웬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빗소리와 천둥 소리 때문인지 문을 닫고서야 인기척을 느낀 모양인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샤였다. “아, 비요른 왔냥? 여기 네 손님이당.” 미샤가 씨익 웃으며 평소처럼 나를 반겼다. 어째선지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앙! 아저씨……!!” 에르웬이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며 나를 향해 점프까지 해가며 달려든다. 일단 반사 신경으로 쓱 피했다. 한데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을까? 민첩캐답게 균형을 잡고 착지한 에르웬이 입술을 씹으며 내게 묻는다. “저 여자… 때문이에요?” 뭐래, 얘는. 왠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듯했지만……. 하긴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저 여자 때문이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둘이 대판 싸웠나 싶어 되묻자 에르웬이 움찔하며 고개를 휙휙 내젓는다. 그러고는 눈치를 보듯 한 곳을 쓱 바라봤는데, 그 시선의 끝에는 미샤가 있었다. “비요른, 왜 이제 왔냐앙?” 눈이 마주친 미샤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까 급히 나가더니, 별일은 없었고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비음 섞인 목소리. 왠지 소름이 쫙 돋았지만, 일단 묻는 말에는 대답해 주었다. “별일 없었다. 카론이 약탈자로 몰렸는데, 가서 몇 마디 했더니 모두 잘 끝났다.” “헤에, 그랬구나. 고생 많았당.” 미샤가 치사의 말을 해오며 내 뚝을 쓰윽 쓰다듬었다. 평소였다면 팔뚝이나 등을 툭툭 쳤을 텐데. 이쯤 되자 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왜 그러냐니?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거당. 바바리안은 남이라고 볼 수도 없잖냥.”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그걸 물어본 것도 아닐뿐더러……. 저 대답 자체도 모순이 가득하다. “왜? 바바리안이랑 수인은 사이가 좋잖냥?” ……그런가? 음, 원수지간인 요정보다야 낫긴 하겠다마는. “자, 여기 수건!” 뭔가 더 말을 걸려는데, 미샤가 점프해서 내 머리 위에 수건을 얹었다. “일단 머리부터 좀 말려랑. 감기 걸리겠다.” “아, 어…… 그러지.” 뭔가 미심쩍지만,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에르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손님인데 계속 방치해 둘 수도 없지 않나. “에르웬, 먼저 찾아와 준 건가?” “네? 아, 네에…….” 내가 말을 걸자 에르웬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피한다. 달려들 때는 언제고. 아, 그걸 피해서 거리감을 느낀 건가? “아무튼 잘 됐다.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가 볼까 싶었는—” “네? 찾으려 하셨다고요?” “……그런데?” “정말요? 기뻐요. 저, 저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몇 마디 대화만으로 뒤바뀐 분위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첫 미궁 탐사에서 만난 동료인데 잊을 리가.” “그, 그쵸? 그 일이 저한테만 의미 있었다니, 역시 그럴 리 없던 거였죠?” 응?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에르웬의 간절한 눈빛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네! 그런 거였군요 역시!”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 한마디에 안색이 확 밝아지는 에르웬. 사회생활은 이쯤 하면 될 테니, 나는 궁금했던 것부터 묻기로 했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간 어떻게 지냈나?” “저요?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럼 말해 드릴게요!” 이내 에르웬은 새가 조잘대듯 헤어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쉬지 않고 읊었다. 대부분은 미궁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언니와 함께 층을 오르고, 몬스터를 때려잡아 새로운 정수를 흡수하고. 아, 평소에는 방에 틀어박혀 주야장천 수련만 했다던가? “이거 보세요! 이제 사대정령 전부 다룰 수 있어요! 그중에 셋은 개화까지 끝냈고요!” “뭐? 셋이나?” “네! 엄청 엄청 노력했거든요!” 솔직히 나도 좀 놀랐다. 아무리 언니빨로 부캐 키우듯이 성장했다고 해도, 몇 달 만에 이뤄 낸 성과로 보기엔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이게 재능인가?’ 여러모로 나와는 경우가 다르다. 내가 고급 정수와 장비로 강해졌다면, 얘는 정말로 수련해서 능력을 꽃피운 것에 가깝다. ‘1년 차도 안 됐는데, 삼속성 개화에 성공한 활요정이라…….’ 이건, 확실히 귀하다. 사대 속성 전부 개화할 수만 있다면, 후반부에 ‘그것’이 가능해지니까. ‘쩝, 언니만 아니었어도 동료로 집어넣을 수 있었을 텐데.’ 왠지 인재를 놓친 듯해서 아쉬워진다. 다만 괜한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팀을 꾸릴 것도 아닌 데다가, 어차피 얘가 가족을 버리고 올 리는 없을 터. “아무튼 수련하느라 바빴던 거라서 다행이다. 나는 내가 숙소를 옮긴 바람에 찾아오지 못한 줄 알았는데. 하긴 너도 나보단 성장에 집중할 때긴 했지.” “아,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 비요른 말이 맞당. 아직 1년 차도 안 됐으면 자기 살길부터 찾아야징?” 이내 말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던 미샤가 일어서 에르웬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에르웬이 흠칫 굳더니— “네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샤 눈치를 보는 듯하던 건 기분 탓일까? 문득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의 분위기가 떠오른 나는 뒤늦게나마 물었다. “아,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 둘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사실 처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다만 내 질문에 미샤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이상한 질문이라도 들었다는 듯. “응? 아무 일도 없었는뎅?”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난 둘이서 싸우기라도 한 줄 알았는—” “냐핫! 싸우다니 그럴 리가 있냥. 우리가 얼마나 친해졌는데. 그렇지 에르웬?” “네, 칼스타인 씨…….” “칼스타인 씨가 뭐냥. 그냥 언니라 불러라 언니.” “네, 언니…….” 마치 일진 언니가 순진한 여학생을 골목으로 데려가는 듯한 모양새. 분명 뭔가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입을 닫는 이상, 캐묻는다고 원하는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다. ‘뭔 일이 있었는지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둘을 지나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느새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 젖은 거리에 햇빛이 비치며 반짝인다. 따라서 나는 이만 축객령을 내렸다. “비도 그쳤겠다, 그럼 이제 둘 다 나가 봐라. 나도 이제 씻고 좀 쉬어야겠으니.” 왠지 모르게, 피로가 몰려들고 있었다. *** 아저씨의 방에서 나선 뒤. 에르웬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엥? 너도 이쪽 방향이냐?” “네, 그런데요?” “그럼 먼저 가랑. 나는 조금 이따가 가겠당.” 수인 여자와 가는 방향이 같다. 뭐, 다행히 이 여자도 나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럼 그쪽이 먼저 가세요. 제가 나중에 갈 테니.” “싫다. 네가 먼저 가랑.” 이게 가장 큰 골칫거리다. 나중에 출발한다고? 그 말을 어떻게 믿는가. 왠지 사라지자마자 쫄랑 뒤돌아 아저씨의 방으로 갈 것만 같다. 보아하니, 이 여자도 자신과 똑같은 의심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하아…….” 에르웬과 미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같이 갈까요?”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당.” 돌아가는 동안엔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그저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아저씨에겐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던 건 아니니까. [글쎄? 뭔 말인진 이미 알고 있지 않냥?] 그 말을 들었을 때, 에르웬은 머리에서 나사가 띵하고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초조함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이 못된 고양이가……!] 살아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뱉은 욕설. 그것도 모자라, 정신을 차렸을 땐 손이 허리에 찬 단검에 닿아 있었다. 그때 에르웬은 알았다. [너, 혹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냥?] 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분명 정신을 차리는 건 단검을 휘두른 다음이었으리라는걸. 수인 여자는 강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선천적으로 기감이 예민한 요정은 타인의 영력을 느낄 수 있으니까. ‘나보다 두 배… 아니, 어쩌면 세 배일지도.’ 영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그만큼 고등급의 정수를, 더 많이 흡수했단 뜻이다. 또한, 내뿜는 기세나 자세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깨달은 순간 현기증이 밀려왔다. 미샤 칼스타인. 이 여자는 적이다. 하지만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그 말인즉, 빼앗길 것이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소중했던 무언가를. 그래, 빼앗긴다. 이성과 분리된 감정이 휘몰아쳤다. 뇌에 새겨진 어느 순간의 기억이, 에르웬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감정에 매몰되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빼앗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비참한 구걸.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 그런 말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뭐……?]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던 수인 여자도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에르웬도 머릿속으론 지금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기괴하게 비칠지 알았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있었다. 아니, 정말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무릎 꿇고 빌었을지도 모르지. 덜컥. 때마침 아저씨가 도착한 게 아니었다면. [으아아아앙! 아저씨……!!] 에르웬은 상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왜인지 아저씨가 관계되면 이성적인 생각이 어렵게 된다. ‘……이상한 여자처럼만 보였겠지?’ 밀려오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에르웬이 미샤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이제 저쪽인데, 너는 어디로 가냥?” “다행히…… 반대쪽이네요.” “으음, 그렇구나…….”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날 시기가 찾아왔지만, 둘 모두 가만히 멈춰서 서로를 바라보며 발을 떼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미샤였다. “너…… 혹시 내일도 올 거냥?” “그런데요.” “하아…… 내가 어쩌다가 진짜…….” 미샤는 이런 상황에 처한 거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에르웬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달려올 때까지만 해도, 그저 아저씨와 만나 즐겁게 웃을 생각뿐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가 보겠당. 너도 제대로 가라. 알겠냥?” “저기…….” “응?” 에르웬은 다른 쪽 갈림길로 향하려는 미샤를 붙잡았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고맙습니다.” “고맙다니……?” “아까 있었던 일, 아저씨한테 말하지 않아 주셨잖아요.” “칼 꺼내 들고 덤벼들려고 했던 거?” “네에…….” 에르웬이 고개를 푹 숙이자, 미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됐고, 한 가지 약속이나 하자.” “약속이요?” “어차피 오지 말래도 올 거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있는 일은 비요른한테 비밀로 하장. 그…… 너도 나랑 비슷하겠지만…… 괘, 괜히 이런 거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냥.” “……좋아요.” “그럼 난 가볼 테니까. 너도 꼭 제대로 집에 가야 한당?” “네.” 이내 에르웬은 미샤와 갈라져 숙소로 향했다. 꽤 먼 거리였지만, 하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니가 반겨주었다. 어딘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에르웬.” “언니이…….” 에르웬은 쓰러지듯 언니의 품에 안겼다. “그 사람…… 만나고 온 거니?” “으응. 정말로 살아계셨더라.” “그, 그래……? 잘됐네.” 그녀는 언니의 품에서 한참 동안 위로받듯 응석을 부렸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언니, 나 더 강해질 거야.” “강해진다고……?” “응. 뭐 이상해?” “아니, 이제 수련은 안 하겠다 싶어서…….” 언니의 의미심장한 말에 에르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신이 수련을 멈춘단 말인가. 뭐, 아저씨가 살아 있다는 걸 막 알아냈을 때는 방에서 처박혀 수련하던 세월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나 꼭 이겨야 하는 사람이 생겼어.” 에르웬은 오히려 이전보다 활활 타오르는 욕망을 느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많이 도와줘 언니.” 빼앗기는 쪽이 되기 싫다면. 빼앗는 쪽이 되면 그만이다. 122화 고인물 (1)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미샤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라, 일어나! 언제까지 잠만 잘 거냥!” 그때 시간이 오전 6시 30분. 컴멜비에 다녀오는 일정을 생각해도,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은 사 먹자. 일찍 일어나느라 도시락을 못 싸왔거든.” “그럼 우선 1층에서 아침부터—” “여기는 별로다 별로! 나가서 먹자. 응?” “배고픈데…….” “자자,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알겠징?” 미샤의 등쌀에 아침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도망치듯 마차를 타고 떠나 상업지구 컴멜비에 도착해서야 식사를 했다. 미샤가 맛집이라며 안내한, 공용 승강장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어느 식당. “어때, 맛있징?” “맛있다……!” 스튜에 무슨 짓을 한 건진 몰라도, 굉장히 익숙한 감칠맛이 난다. 기억해 놨다가 근처에 올 때마다 와야지. “만족한 표정이라 다행이당. 그렇게 마음에 들었냥?” “한 끼 가격이 비싸단 것만 빼면.” “그건 네가 네 그릇이나 먹었으니까 그러지, 이 바바리안 노망!”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자주 가던 무구점과 잡화점에 들려 전리품을 싹 처분했다. ‘300만 스톤이라…….’ 2층에서 만난 삼인방과 젠시아의 장비 및 소모품을 전부 팔고 얻은 금액.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리 크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독사의 송곳니나 2단계 소재의 가죽 갑옷까지 팔았다면 몇 배는 더 됐을 테니까. ‘뭐, 그거야 나중에 팔면 되는 거고.’ 이후로는 히쿠로드가 알려 준 대장간에서 장비 수리를 맡겼다. 트롤전에서 방패와 흉갑이 많이 찌그러진 탓에 수리비가 걱정됐지만……. “다 합쳐서 30만 스톤이오.” 생각보다 수리비가 저렴했다. 하긴 녹아내린 것보다는 찌그러지는 걸 피는 게 좀 더 쉽긴 하겠지. “혹시 가죽도 취급하냥?” “그렇소만, 혹시 맡길 게 있소?” “아, 여기 이거 가슴 쪽이 너무 답답해서…….” 온 김에 미샤도 갑옷 수선을 맡겼다. 가죽 갑옷인지라 괜히 손댔다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도 싶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이 정도면 새 소재를 덧댈 필요도 없겠구려. 갑갑한 부분만 연화제를 써서 살짝 늘리면 될 거 같소.” 수선 비용은 고작 5만 스톤 안팎. 히쿠로드 소개로 와서 그런지 덤터기도 없고, 아주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곳 같다. “사흘 뒤에 같이 오시오.” 대장간을 나선 다음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이번에 탐험 용품들을 구매했다. 은신계 카운터 소모품인 위치스램프 용해액을 보충했고, 추가로 생각난 물품 몇 개를 구매해 쟁여 놨다. 그리고……. “두 병 합쳐서 200만 스톤에 드리지.” 이전에 갔던 잡화점에서 최상급 포션 두 병을 재구매했다. 그야 한 병을 그렇게 빨리 쓸 줄은 몰랐거든. 지출이 상당했지만, 그래도 공금 개념으로 둘이서 부담하니 좀 나았다. “다행히 공용 계좌의 돈은 안 건드려도 됐군. 자, 여기 32만 5천 스톤이다.” 남은 돈은 미샤와 둘로 나눠 가졌다. 그럼 이제 오늘 일정은 전부 끝난 셈. “그럼 난 가 보겠당! 잘 자라, 비요른!” “너도 잘 자라.” 밤이 되어서야 라비기온으로 돌아온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이건 또 뭘까. 내 방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은발 요정이 보인다. “에르웬……?” “아, 오셨어요?” 날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반겨 주는 에르웬. 왠지 눈빛에 피곤해 보여 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거지?” “얼마 안 됐어요. 근데 두 분이서 외출하셨던 건가요?” “아, 컴멜비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말이지.” “역시… 그렇구나.”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냐?” 슬슬 씻고 잘 시간이었기에 용건을 물었지만, 에르웬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마치 뭔가 생각을 정리하듯이. 어딘가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에르웬은 평소처럼 활발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저씨, 저 이제 예전처럼은 자주 못 와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응? 아… 뭐,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한 달 된 풋내기 탐험가가 아니다. 뭐, 그래 봐야 1년 차도 안 되기는 했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는 걸 알 터. “네, 내일부터는 언니랑 특훈에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아마 일주일에 한 번? 그 정도밖에 못 올 거 같아요. 맘 같아선 더 자주 오고 싶지만… 그래선 한참 걸릴 거 같거든요.” “한참?” “…그런 게 있어요.” 이내 둘러대듯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뭐라 되물을 새도 없이 밝게 웃으며 사라졌다. “아무튼! 다음 주에 올 테니까, 그때 봐요. 아저씨!” “어, 그래라…….”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 다음 날 점심, 술집에서 팀 전원이 모였다. 그리고 귀환주를 마시며 이전 탐사의 전리품 분배 시간을 가졌다. “한 사람당 55만 스톤씩 나누면 될 거 같소. 프로그맨 주술사의 부산물이 생각보다 비싸게 팔리더구려.” “하핫, 전부 로트밀러가 잘 벗겨 낸 덕분 아니겠나.” “크흠,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그런 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로트밀러의 겸손한 말이야 대강 흘려 넘기며, 나는 이번 탐사 소득을 최종 정산했다. 균열 및 1층, 2층에서 획득한 마석이 40만. 장비들을 판 돈에서 소모품값을 빼고 남은 32만 스톤. 의뢰 완수금 및 부산물로 55만 스톤. 도합 127만 스톤. ‘그렇게 썼는데도 이만큼이나 벌었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4층에서 지난 두 달보다는 훨씬 많은 소득을 올렸다. 아니, 사실 미샤가 먹은 정수나 가죽 갑옷, 독사의 송곳니까지 고려하면 미친 이득을 봤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곰 아저씨한테 받을 500만 스톤도 있고. ‘이 기세면 6단계 각인도 금방 찍겠는데?’ 나는 씨익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미샤와 내 공용 계좌에는 아직 200만 스톤의 현금이 남아 있다. 그간 모은 개인 재산이 250만 정도 됐고. 지난 두 달간 성장이 거의 막히며 초조함도 일었지만, 통장 잔고를 보자 저절로 마음이 풍족해진다. “비요른! 자네 첫 잔을 혼자 마셔 버리면 어떡하나!” “응?” “다 같이 마시세! 아직 제대로 축하하지도 못했지 않나.”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트롤 새끼를 처단하고 모두 무사 생환한 것을 감사하며! 자! 다들 쭉 들이켜세!” 정산을 마친 후로는 다 함께 귀환주를 마시며 지난 탐사의 회포를 풀었다. 또 한 번의 위기를 다 함께 이겨 내서일까? 팀장인 난쟁이놈은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만, 술자리는 오히려 지난번보다도 빠르게 끝이 났다. “저…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당. 오늘 친가에 잠시 들러야 하거든.” 우선 미샤가 떠났고, 그 다음은 로트밀러였다. “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길드에 잠시 용무가 있네.” 뒤의 약속 때문인지 술에 입만 대며 분위기만 맞추던 둘이 떠났다. 로트밀러야 어쨌든, 미샤가 빠지자 시끌시끌하던 술자리가 조용해졌다. 여기서 나까지 빠지면 난쟁이놈이 삐질 것 같아서 남아서 술자리를 이어 가려 했지만……. 놀랍게도 난쟁이놈이 슬그머니 빠져 옆자리로 이동했다. “하하핫, 그렇다니까? 트롤 새끼도 별거 아니더군? 거, 거짓말? 그럴 리가 있나. 저기 옆에 저 바바리안이 보이나? 작은 발칸이라고, 들어 봤을지는 모르겠…….” 팀원을 내버려 두고 초면의 탐험가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떠들기 시작한 난쟁이놈. 따라서 나도 그냥 돌아가려는데, 드왈키가 나를 붙잡았다. “자, 잠시 얘기나 하는 게 어떻소?” “뭐?” “그, 그러고 보면 우리 둘이서만 조용히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 않소.” 음, 그건 그렇지. 로트밀러야 다들 취해서 잘 때 자주 수다를 떨었지만, 얘는 취해서 자는 쪽이었으니.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드왈키는 쭈뼛쭈뼛 술을 홀짝일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씨바, 그냥 갈걸.’ 시끌시끌한 주변과 달리 어색한 공기가 내 주위로 흐른다. 따라서 그냥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게 있었으니까. “몸은 좀 괜찮나?” “아, 괜찮소…. 솔직히 신관님께 치료받고도 조금 불편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나았소.” “다행이군, 그럼 이쪽은?” 내가 내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묻자 드왈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 반으로 접혔던 경험은 난생처음이었을 거 아닌가. 어때, 미궁에는 계속 들어갈 수 있겠나?” 마음이 꺾인 탐험가는 생각보다 흔하다. 때로 몸에 남은 잔혹한 기억은, 흉터처럼 뇌리에 강렬하게 남기도 하니까. “아, 그게…….” 내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드왈키가 대답하길 머뭇거렸다. 예상대로 아무렇지는 않을 순 없었던 모양. “후우… 솔직히 말하리다. 그날 이후로 잠을 도무지 제대로 자지를 못하고 있소. 미궁 안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도시에서도 똑같더구려.” 이내 드왈키는 술기운을 길게 토해 내며 미궁에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손이 떨려 온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마시오. 다들 겪는 일이고 극복해 내는 일 아니겠소? 나도 다음 탐사 전에는 괜찮아질 것이오.” 극복해 낼 수 있다라……. 눈빛을 보니 허투루 하는 말 같진 않다. 다만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 대부분은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서 탐험가 일을 이어 간다. 그야 이게 아니면 먹고살 길이 없으니까. 세금을 내야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도시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극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마법사인 드왈키는 다르다. “도시에서만 일을 해도 충분할 텐데, 왜 계속 탐험가 일을 하려는 거지?” 내 질문에 드왈키가 머뭇거리더니 맥주 한 잔을 원샷 때리고서 답했다. “그건… 즐겁기 때문이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즐겁기 때문이라고?” “물론 처음에는 다른 이유였소.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오?” “기억한다. 위대한 탐험가가 되어 남작가의 명예를 드높이겠다고 했었지.” “사실 전부 거짓말이오. 단지 내가 유명한 탐험가가 되면, 내 아버지… 아니, 전 남작님이 관심을 가져 줄지 모른다고 여겼을 뿐.” 드왈키는 귀족가의 사생아다. 그리고 으레 사생아들이 그렇듯, 혈족에게 깊은 애증을 느낀다. 미워하면서도,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순된 감정. “알다시피 전 남작님은 돌아가셨소. 그리고 그대도 보았다시피…그 자리를 물려받은 형님은 내 존재조차 알지 못했지.” 처음엔 허탈했다고. 한순간에 삶의 목표를 잃고서 온종일 물 위에서 떠다니는 기분이었다고. 당시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드왈키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겨 낼 수 있었소. 기댈 사람들이 주변에 넷이나 있었으니까.” “설마… 우, 우릴 말하는 건가?” “그럼 다, 달리 누가 있겠소? 처음엔 동료가 그런 존재인지 몰랐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넘어 가족… 그런 느낌이었소.” “그, 그렇군?” “그렇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매일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지만… 그대들과 탐험을 하고, 웃고 떠들 때면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소.” 지도 낯부끄러운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는지, 드왈키가 한 잔 더 주문한 맥주를 단번에 비워 냈다. “고맙소, 비요른. 그대들 덕분에 요즘은 하루하루가 즐겁소. 그러니까… 비록 이번에 그런 일을 겪었지만… 나는 이겨 낼 수 있소.” “…그렇군.” “그렇소.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시오.” “그러지, 그 부분은 이제 신경 쓰지 않겠다.” 이내 나는 깔끔하게 염려를 거뒀다. 동기가 무엇이든, 저 정도라면 드왈키의 멘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후후, 그대도 가만 보면 아닌 듯하면서도 참 정이 많단 말이지.” “됐고, 술이나 마시지.” 진솔한 대화를 한 덕분인지,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내 앞에서 쭈뼛거리던 드왈키는 신이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고, 나도 맞장구치며 들어주었다. 그러고 있던 때였다. “저기, 비요른… 그대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이다.” “말해 봐라.” “혹시, 미샤 양과는… 교제 중인 것이오?” 나는 대답 대신 드왈키를 빤히 바라봤다. 취기로 달아오른 낯빛에는 초조와 긴장이 가득했다. 그제야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쩐지 갑자기 둘이서 얘기하자 하더니.’ 얘, 이게 본 목적이었구나. *** “브라운 로트밀러. 나이 34세, 탐험가가 된지 8년이나 됐다지?” 집무실에 들어섬과 동시 경시의 시선이 쏘아진다. 이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로트밀러는 답했다. “…그렇소만.” 당혹보다는 의문이 컸다. 그는 오늘 아침에 탐험가 길드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그래서 동료와 회포를 풀던 와중에도 시간에 맞춰 길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직원을 따라 올라서니 이 방이었다.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사내는 로트밀러가 아는 얼굴이었다. ‘탐험가 길드 제7 지역장이신 나일 어반스. 이자가 대체 왜 나 같은 자를…….’ 의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사내의 설명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야 말실수라도 했다간 어떤 우환이 덮칠지 모르니까. “흐음, 마음에 드는군. 궁금할 텐데도 끝까지 기다리는 부분이 특히나.” “그럼 슬슬 용건을 말해 주실 수 있겠소?” 그의 요구에 지역장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곳에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당치도 않았다. “그 말인즉, 나보고 동료들을 배신하라는 뜻이오?” “그거야 자네 하기에 달렸지. 정확히는 그 바바리안 친구의 버릇만 고쳐 줄 수 있으면 되네.” 로트밀러는 이를 악물었다. 이 도시에 13명밖에 없는 지역장. 일개 탐험가쯤은 거슬리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불이익을 줄 수 있을 존재. 그렇기에 더더욱 용기가 필요했다. “그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소.” 주먹을 꽉 쥐고서 힘겹게 내뱉은 거절의 말. 이에 지역장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얘기가 끝났다면 이만 가 보겠소.” 로트밀러는 두려움에 잡아먹히기 전에 서둘러 방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였다. “동료를 소중히 하는 마음은 좋네. 참으로 멋진 신념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자네 동료일 거 같은가?” 이어진 음성에 로트밀러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자네 기록을 봤네. 제법 억울할 거 같더군. 자네는 8년이나 걸려서 겨우 7등급이 되었는데. 반면 어느 바바리안은 반년 만에 6등급이 되었지 않나.” “그런 감정은… 느껴 본 적 없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자네도 슬슬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 “자네 동료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갈 걸세. 자네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로트밀러는 입술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저 사내의 권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과연 그들과 얼마나 갈 거 같나? 세 달? 네 달? 음, 어쩌면 더 오래 갈 수도 있겠군. 그들이 자네를 불쌍히 여긴다면 말일세.” 로트밀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방문을 열고 나섰다.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인 지역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123화 고인물 (2) “미샤와 나는 단순한 동료 관계다.” “그, 그렇소? 아아… 역시…….” 역시는 무슨 역시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있자니, 드왈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퍽! 어쩐지 술도 잘 못 마시는 애가 몇 잔이나 원샷을 때리더라니. ‘니미럴.’ 여하튼 이로써 대낮의 술자리는 몇 시간도 이어지지 못하고 완전히 끝이 났다. 뻗은 드왈키는 절친인 난쟁이놈에게 맡기고 술집을 나서니 여전히 한낮이었다. 따라서……. ‘그냥 도서관이나 가야겠군.’ 집에 돌아가서 쉬겠단 계획을 철회하고서 행선지를 바꿨다. 아직 나는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거의 똑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단 말이지.’ 이번에 만났던 트롤만 봐도 그렇다. 눈을 찔러 장님을 만들었는데, 놈은 마력을 느끼고서 드왈키에게 달려들었다. 게임에서는 그런 설정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이 세계의 책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을 수도. 게임 내 지식으로만 만족할 게 아니라, 꾸준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아우릴 가비스. 어차피 그 이름에 대해서도 계속 알아봐야 하고.’ 어찌 된 게 문명사회에 있었을 때보다, 이쪽에서 책을 훨씬 더 많이 읽는 거 같다. “무사하셨군요.” 이후 도서관에 도착하자 라그나가 졸린 눈빛으로 날 맞아 주었다. 통성명을 한 뒤로도 몇 달 지나서일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친해졌다. 이제는 먼저 오지랖까지 부려 올 정도로. “이틀 전은 막 돌아왔으니 쉬었다고 해도, 어제는 왜 안 왔습니까?” “따로 할 일이 있었다.” “탐험가 일이 바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얘도 참 이상한 구석이 있다. 바바리안한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니. “알았다. 그럼 부탁하지.” “…비에르도 파르시티에브.” 짧게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는 평소처럼 [특수 서적 탐지] 마법을 받고서 관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몬스터와 관련된 내용을 위주로 살폈다. 원래는 게임 속 지식이 있어서 잘 찾아보지 않던 분야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슬슬 배고파서 가 봐야겠군. 수고해라.” “저기…….” “응?” “저도 아직…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는 날이 저물어 있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안녕하세요, 얀델 씨.” 나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내 방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장례식이라도 온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의상으로 도배한, 어딘가 고상함이 물씬 풍기는 외모의 여자. 그러니까, 얘 이름이……. “너는… 어반스?” “…줄리안이요. 줄리안 어반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페타 님께 듣기는 했지만, 정말 기억하지 못할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힘 빠지는 소리를 뱉으며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검지로 꼬았다. 단순 버릇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초조한 심경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걸 수도 있겠지. ‘표정은 안 그래 보이는데, 긴장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물었다. “그래서 페타는 누구지?” 내 질문에 어반스 영애의 눈이 떨렸다. 믿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페타 지부장님 이름도 모르시는 건가요?” “아.” 그 콧수염 아저씨 이름이었구나.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까지 통성명을 한 적도 없는데. 솔직히 무안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내색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이지? 그것도 혼자서.” “만나 주지 않으시니, 찾아올 수밖에요.” “분명 그 제안은 거절했던 거 같은데.” “그만큼 절박했다고 여겨 주실 수 없을까요?” 절박했다라……. 지역장의 딸내미가 이런 얘기를 할 정도니 사연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아마 남들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이겠지. 아니면 인질범 앞에 혼자서 올 리 없으니. 하지만, 나는 오지랖이란 걸 모르는 바바리안. “됐고, 돌아가라. 귀찮은 일은 사양이니.” 호기심을 싹 지워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만 문을 닫으려는 차. 칵! 어반스 영애가 잽싸게 문틈에 양산을 집어넣는다. 물론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쾅! 힘 좀 준 것만으로 양산을 박살 내며 굳게 닫힌 방문. “어?” 상황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어반스 영애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자, 잠시만요! 얘기만 해요! 길게 안 걸릴—” “그만하고 돌아가라.” “아니, 진짜! 궁금하지도 않아요? 제가 왜 이러는지?” “안 궁금하다.” “이잇!” 내 완고한 태도가 잘 먹혀 들었을까? 어쩌다 양산까지 박살 난 어반스 영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차더니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 다행히 잘 넘긴 모양—’ 또각, 또각. 그때 멀어지던 구두 소리가 다시금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도 포기를 못 한 걸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코골이 소리를 냈다. 드르르르르렁-! 더 대꾸해 줄 것도 없이 이거면 저쪽도 완전히 마음을 접으리라는 판단. “하아, 진짜 내가 왜…….” 한탄의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다만 이제 작전을 바꾸기로 했을까? “안 자는 거 아니까 듣기만 해요.” 어반스 영애가 문 너머에서 조용히 속삭이듯 말을 걸어온다. “브라운 로트밀러. 그 사람을 조심하세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오늘 저희 아버지랑 만났거든… 꺅!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떡해요!” …들어 볼 가치가 있었다. *** 야심한 밤에 한 방에 자리한 두 남녀. 그 안에 어색한 공기만 흐른다. 그야 당연하다. 기껏 문까지 열어 줬건만 알맹이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전부라고?” “네…….” 로트밀러가 지역장 집무실에 불려 갔다가 5분 만에 나왔다는 것. 어반스 영애가 전해 준 정보는 그게 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 열어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네 목적은 뭐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호기심이나 해결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더 궁금해졌으니까. 딸내미라는 얘가 왜 아버지까지 척을 져 가며 내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걸까? 어반스 영애가 비장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제 목표는 아버지의 몰락이에요.” “…응?” “어쩔 수 없어요. 이대로면 정말 인형처럼 살아가야 할 판이니까. 아무튼 이를 위해서 얀델 씨의 협력이 꼭 필요—” “나가라.” “네? 아니,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저를 도우면 얀델 씨한테도 엄청난 이득이—” 이득은 무슨 이득. 지역장이랑 척을 져서 얻을 게 하나도 없구먼. “꺄앗!”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여자가 얼마나 집요한 성격인지 알 수 있었기에, 아예 냅다 들어다 밖에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한데 내 한결같은 태도가 슬슬 먹혀든 걸까? “만약… 생각이 바뀌신다면 꼭 저를 찾아와 주세요. 아, 그리고 조심하세요. 아버지가 그 로트밀러라는 사람한테 뭔가 수작을 부렸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더 소란을 부리는 일 없이 어반스 영애는 떠났다. 따라서 나도 이만 몸을 씻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로트밀러라… 일단 지켜보기는 해야겠군.’ 이후로는 일상적인 시간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미샤가 구워 준 고기를 먹었고, 점심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겠다던 에르웬이 왔을 땐, 셋이 식사를 하며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아, 다음 탐사 계획을 짜기 위한 정기 회담도 한 번 있었다. [지난번에 4층에서 트롤이 나오긴 했지만, 들어 보니 우리만 유독 운이 나빴던 모양이오. 층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듯하니, 예정대로 가도 될 듯한데, 자네들 생각은 어떻소?] 회담 내내 로트밀러를 지켜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꼽자면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는 것 정도. 이 때문에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역장을 만나고 뭔가 얘기가 있었던 거라면, 회담에서 말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으니까. ‘…그냥 만나서 뭐 했냐고 툭 까놓고 물어봐?’ 정면 돌파란 선택지도 있지만, 일단 보류했다. 미궁이 열리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낫다는 판단. 아무튼 이후로도 시간은 흘러 사흘 전. [이걸로 빚은 다 갚았군. 어서 돌려줘라.] […그냥 이걸 주면 안 되나?] 곰 아저씨에게서 500만 스톤을 받았다. 그냥 팔찌를 주면 안 되냐고 찔러봤지만, 곰 아저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 어차피 원딜용도 아닌 거 가지고. 이 아이템은 재생력이 높은 캐릭터가 껴야 가장 효율이 좋다. 피해 면역 시간 동안 피가 쭉쭉 차거든. ‘나중에 동료가 되면 잘 꼬드겨 봐야지. 싼값에 넘겨 달라고.’ 그런 상념을 끝으로 나는 눈을 떠 시계를 확인했다. [23 : 59] 15일 자정까지 이제 막 10초를 남겨 둔 시각. 나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조금 특별한 일상을 보내러 갈 시간이었다. *** 비요른 얀델이 아닌 이한수의 방. 처음도 아니건만 새삼 신기하단 생각을 하며 우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역시 푹신함이 다르단 말이지.’ 확실히 문명의 격차가 느껴진다. 딱히 비싼 매트리스를 샀던 것도 아니었는데. 뭐, 이쪽 세계에서도 최고급으로 가면 조금 달라지겠다마는. 꾹. 침대에 누워 발가락으로 컴퓨터 본체를 켜자, 부팅 시간도 없이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따라서 나도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제한 시간까지 걸려 있는 공간이니까. 효율적으로 써야지. 딸깍, 딸깍. 우선 거래소부터 들어가 보았다. 대부분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동일했지만, 실시간으로 새로운 게시글들이 리젠되고 있었다. ‘여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확인해 보는 거로 하고…….’ 채팅방 목록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 기능을 느긋하게 이용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니까. [위자드리] [수인족 모여라] [엘프 오브 나이트] 쭉 살펴보니 10명 안팎이던 [뉴비방]과 다르게, 직업 혹은 종족 커뮤니티에 많은 인원이 몰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저런 곳을 가야 쓸 만한 정보를 얻기 쉽겠지. 육성법이라던가 그런 거. ‘근데… 왜 바바리안만 없지?’ 계속 스크롤을 내리던 나는 흠칫 굳었다. 캐릭터 선택이 차단된 용인족 빼고 모두 전용 채팅방이 있는데, 바바리안만 없다. 아니, 없는 건 아닌데……. [베헬라아아아!]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안에 사람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지막 접속 기록도 몇 달 전이며, 닉네임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 추방당했거나, 현실에서 사망했다는 뜻. 어째서 바바리안만 이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납득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나. 1, 바바리안은 매인 캐릭터로 인기가 별로 없었다. 나만 해도 방패 바바 육성법을 완성하기 전엔 수인이나 엘프를 자주 골랐다. 그도 아니면 후반 포텐이 좋은 인간을 택하거나. 2, 바바리안은 시작하자마자 무기를 들고 미궁에 들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굶어 뒈지니까. 괴랄한 난이도의 성인식. 그리고 눈뜨자마자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 하드코어한 성장 조건.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데, 그마저도 전부 초반에 뒈졌겠네.’ 왠지 모르게 공감성 수치가 올라가며 내가 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서 직업 커뮤니티라도 찾아봤다. [노블레스] - 21명이 접속 중입니다. [트레져 헌터] - 34명이 접속 중입니다. [소드마스터] - 17명이 접속 중입니다. 힐러, 궁수, 검사 등. 전부 접속자가 10명이 넘었다. 하지만……. [쉴더] - 3명이 접속 중입니다. 탱커는 고작 세 명밖에 안 된다. 종족 커뮤니티는 0명에 직업은 세 명. “…….” 나는 대체 무슨 길을 걷고 있던 걸까.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던지라, 이번엔 국가 커뮤니티라도 찾아보았다. 다행히 채팅방이 있기는 했다. [대한독립만세] - 1명이 접속 중입니다. 1명이지만 이게 어디야. 애초에 한글 번역도 없던 해외 게임이었는데. 솔직히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한국인이라…….’ 나는 고민 없이 마우스를 더블클릭했다. *** 놀랍게도 눈을 뜬 순간, 귀족가 저택 같은 방이 보인다. 공터나, 들판처럼 기본 스킨일 줄 알았는— “왔다아아아아아아!”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볼 새도 없이, 접속 중이던 플레이어가 격하게 소리치며 나를 반겼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짧은 머리의 사내. [Sergeant Lee] 닉네임까지 확인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이 병장이라니, 너 설마…….” “형님… 형님은 알아주시는군요. 제대한 날이었어요.” 무슨 이런 개같은 일이 다 있단 말인가! 124화 고인물 (3) 우선 간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비요른 얀델이 아니라, 이한수로서. “이한수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형도 저랑 같은 이씨네요. 이백호예요. 나이는 스물셋이었고요.” “스물셋이었다니?” “그게 사실… 여기 온 지 십 년도 넘었거든요.” “어, 그렇구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채팅방 스킨이 고급스러운 걸 보고 내심 예상은 했었지만, 이곳에 넘어온 지 십 년도 넘었다니? 이런 불쌍한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잠깐만, 그러면 네가 나보다 형인 거—” “형님! 그런 잣같은 소리 마십쇼! 전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현실 나이로 쳐야죠!” “어… 뭐, 그렇다면야.” 나이가 벼슬인 유교 국가의 일원으로서, 알아서 동생이 돼 주겠다는 걸 말릴 이유는 없었다. 후, 일단 족보는 정리가 됐고. “아무튼 형님, 저 죄송한데 한 가지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실례?” “그… 간단한 테스트 같은 겁니다. 일단 형님은 확실한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해 보긴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냥 제가 말하면, 형님은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걸 말씀하시면 돼요. 아, 괜한 걱정은 마시고요. 한국인이라면 틀릴 수 없는 문제니까.” 마저 들어 보니 일종의 한국인 테스트였다. 자기가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쪽에서 좀 잘나간다던가? 그것 때문에 한국인인 척하며 꿀 빨려는 놈들이 몇몇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야 뭐. “그럼 시작할게요……?” “그래라.”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심호흡하며 눈을 꾹 감았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얘가 이러니까 괜히 긴장된다. 물론 녀석 말대로 퀴즈 자체는 쉬웠다. “김치?” “…찌개?” “소머리?” “국밥.” “사우디?” “아라비아.” “복무신조.” “…우리의 결의. 그리고 나 공익이었어.” “아… 아무튼 이제 마지막이네요.” 이백호가 숨을 가다듬고 새삼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설마 앞에는 전부 농담이었던 건가 싶던 차. 이백호의 입이 열렸다. “이완용?” “개… 야, 이 미친 새끼야.”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온 그 순간. 묘한 기백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 어느샌가 차게 식은 이백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은 전부 연기였다는 듯. “믿겠다, 너는 한국인이 맞군.”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 이백호. 제대한 날 끌려와 십 년도 넘게 이 세계에서 살아간 한국 출신 플레이어. 착한 애 같기는 한데……. ‘얘도 머리에 문제가 있나?’ 나도 모르게 눈이 좁혀졌다. 다만 이어진 변명을 들어 보니, 정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아, 반말해서 죄송해요. 테스트 통과하는 사람이 나오면 하려고 준비한 대사였거든요. 설마 3년이 넘게 걸릴 줄은 몰랐지만…….” 이런 감정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나조차 이런 대화가 그리웠을 정도이니. 게다가 이 녀석이 처음 왔을 땐, 고스트 버스터즈 같은 커뮤니티도 없었을 거 아닌가. 사람의 인격이 망가지기 딱 좋았을 환경. “그래서 형 이름이 뭐에요?” “아까 말했잖아.” “그거 말고, 여기서 쓰는 이름요. 그걸 알아야 제가 도와주죠. 한국인은 의리랑 정 빼면 시체 아니겠습니까?” “마음은 고마운데, 됐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이백호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걸 왜 안 알려 줘요? 이름만 알려 주면 형은 세금 걱정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는데.” 녀석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이미 여기서 그 정도의 위치는 이뤘다, 이거겠지. 하지만, 그래도 내 답은 마찬가지다. “내가 반대로 제안하면, 너는 나한테 네 이름 말해 줄 거냐?” “어, 그건 아무리 형이라도 좀…….” “나도 똑같은 거다.” 이제야 내가 평범한 뉴비들과는 다르단 걸 깨달았을까? 이백호가 이전보다 훨씬 관심에 찬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형, 몇 배 깼어요?” “너는?” “10배요.” 10배라고? 고스터 버스터즈 창설인이 15배라던데? 내가 의외라는 듯 녀석을 보자, 녀석이 짧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10배여도 별거 없어요. 어차피 가라로 깬 거잖아요. 그래서 사실 10년이 지났는데도 모르는 게 많아요. 하, 이왕 이럴 거였으면 그냥 오리지널을 하는 건데.” 10년 넘게 이 세계에서 생존한 녀석이라 그런지, 확실히 뉴비방에서 만난 애들이랑은 마인드부터가 달랐다. “그래서, 형은요?” 나는 잠시 고민한 뒤에 답했다. “나도 10배짜리로 깼어.” “아, 정말요?” 내심 걱정은 했지만, 이백호는 순순히 내 말을 믿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한국인이지.” “뭐?” “원래 게임하면 한국인이잖아요?” 국뽕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지만……. 나는 굳이 말꼬리를 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불쌍한 녀석 아닌가. 나라도 마음으로 품고 보듬어 줘야지.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그렇죠? 하, 진짜 너무 아쉽다니까요. 한글 패치만 됐어도 오리지널판 깨는 사람이 최소 몇 명은 나왔을 텐데…….” 이백호는 아무래도 외국인들이랑만 있다 보니까 국뽕이 심해진 듯했다. “아, 형… 그럼 GP라도 좀 드릴까요?” “주면 좋긴 한데, 어차피 나도 현금화는 안 할 거라. 어차피 벌 방법도 많고.” “쩝, 형도 나처럼 GP가 계속 쌓이기만 하겠네요.” 성격을 뺀다면 나와 이백호는 여러모로 비슷했다. 섣불리 정체를 노출하지 않으려 했고, 경박한 성격과 달리 행동 자체는 신중해 보였다. 뭐, 그러니까 저리 오래 살아남았겠지만. “으음… 그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됐어, 애초에 뭘 바라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가끔 만나서 수다나 떨자.” “크흑… 형님……!” 내 말에 진짜 동포를 만난 느낌이었을까? 이백호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 내며 우는소리를 해 댔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형님,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주십쇼. 그 정도는 해 드려야 제가 면이 설 거 같아요.” 얘는 감정 기복이 뭐 이리 심하지? 도무지 텐션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일단 저리 말해 주니 궁금한 걸 전부 물어보긴 했다마는. “혹시 여기 운영자가 누군지 알아?” “아, 그건 저도 몰라요. 사실 알약도 초창기에 비밀 치안부 본진을 털다가 나와서 먹은 거라.” “그럼 그쪽도 네가 누군지 모르겠네?” “그래도 아마 예상은 할 걸요? 저도 어느정도 짚이는 놈이 있긴 하고…….” “세 명인데 전부 말해 드려요?” 이백호는 의심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주었다. 전부 마법사였고, 한 명을 빼면 나도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자들이었다. “형님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실 거 같지만, 여기서 정체 노출은 절대 하지 마세요. 제가 알기로 왕가에 붙어먹은 새끼들도 몇 명 있거든요.” 이백호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묻지 않은 조언까지도 해 주었다. 이곳이 100% 안전하다던 뉴비방 친구들과 달리 비관적인 시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 하나 더. “혹시 운영자 쪽에서 내 정체를 알아낼 방법이 있어?” “아뇨. 그건 힘들 걸요? 애초에 이 공간도 지들 힘으로 만든 게 아니라 개조를 한 거에 가까워서.” “개조?” “백 년도 전부터 이 도시엔 악령이 있었어요. 지구로 치면 20년도 더 전인 거죠. 그럼 걔들은 누구일까요?” 어… 솔직히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20년 전이면 [던전 앤 스톤]은커녕 LCD 모니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아닌가. “모르겠으니, 그냥 말해 봐.” “정답은 다른 차원에서 온 놈들입니다!” “다른 차원……?” “네.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는데, 제가 알기로 이 세상에 관해 기록된 책을 읽거나 하는 형태로 전이됐다고 하더라고요.” 참고로 당시의 악령은 정말 소수였으며, 하나같이 특이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이 이러한 공간을 창조했고, 지금의 운영자는 우연히 이를 물려받은 거로 추정된다던가? ‘뭔가 갑자기 엄청난 얘기를 들었네.’ 이쯤 되자 이백호의 정체도 궁금해진다. 얘는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알고 있는 걸까? ‘뭐, 나야 개이득이지만.’ 나는 마인드를 고쳐 먹고 이후로도 이백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 내며 의문을 해소했다. 하나 이 녀석도 만능은 아니었다. “아… 그게, 제가 사실 은둔 중이라 최신 정보는 좀 약하거든요?” “은둔 중이라고?” “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고. 최신 정보가 얻고 싶으면 채팅방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원탁의 감시자’라고… 중2병 걸린 새끼들이 만든 클럽 같은 게 있어요.” 이백호가 알려 준 채팅방은 비밀리에 운영되며 초대 코드가 있어야지만 입장이 가능한, 일종의 고인물끼리의 커뮤니티라고 하는데……. “거기 가면 닉네임도 얼굴도 다 가려지니까 걱정 마시고… 가서 아무것도 모르면 처맞다가 내쫓긴다고 듣긴 했는데, 10배짜리 깨셨으니 이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고…….” 녀석은 무슨 어린 자식 소풍 보내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꽤 길었지만 전부 쓸모 있는 내용인지라 도중에 끊는 일 없이 잠자코 들었다. “형, 그럼 저는 이만 가 볼 테니, 나중에 봬요.” “벌써 간다고?” “아, 그 얘기를 안 해 드렸구나. 제가 먹은 게 초기 알약이라 여기에 한 시간밖에 못 있어요.” …이게 세대 차이라는 건가? 갑자기 얘가 ‘나 때는 말이지’ 하며 푸념을 털어놔도 그냥 그러려니 들을 거 같다. 그야 얘는 딱 봐도 나보다 더 힘든 인생을 살아왔을 듯하니까. “형, 다음에도 꼭 와 주셔야 해요?” “그래, 다음에 보자.” “도시에서 못되게 구는 놈들 있으면 꼭 기억했다 말해 주시고요.” “그래…….” “아, 그리고 또—” “됐으니까, 이만 가라. 나중에 또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않냐.” “아, 그렇죠… 다음에 또… 네, 형! 다음에 봬요!”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순박한 미소를 내지으며 떠났다. 따라서 나도 이만 채팅방을 종료했다. 그리고 녀석이 일러 준 대로, 채팅방 검색창에 코드를 입력하고 ‘원탁의 감시자’에 입장했다. [입장 가능한 시간이 아닙니다.] [OPEN 03:00 ~ 03:10] 어, 백호가 이건 안 말해 줬는데. 일단 어쩔 수 없이 거래소나 다른 게시판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모니터 좌측 하단의 시계가 세 시를 가리켰을 때, 다시금 입장을 시도했다. [신규 회원임이 인증되었습니다.] [원탁의 감시자의 일원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 집회는 철저하게 익명이 보장되며…….] 이백호에게 들었던 내용들 담긴 메시지들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고, 이내 눈을 떴을 때. 번뜩-! 나는 커스터마이징 룸에 있었다. *** 온갖 의상과 치장용 악세서리가 가득한 방. 굳이 이한수의 몸으로 이렇게까지 정체를 감춰야 하는가도 싶지만……. 일단 규칙이 그러니 따르는 게 낫겠지. 쓱 훑어본 나는 코스프레라도 하듯 적당히 무난한 것들을 골랐다. 슬림핏의 남색 정장. ‘가면은 필수랬으니, 이건 꼭 써야겠고.’ 참고로 가면은 한쪽 벽면 가득 채워져 있을 만큼 다양했는데,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비어져 있는 곳이 많았다. 끼이이이익. 여하튼 대충 손에 집히는 가면을 뒤집어쓰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안내라도 하듯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 주변을 탐색하며 천천히 걷고 있자니, 커다란 원탁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좌석이 자리했지만, 착석해 있는 사람은 고작 넷뿐이었다. 툭. 서로 안면이 있는 듯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내가 도착하자 일제히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 무겁게 흐르는 침묵. 고인물 커뮤니티라더니. 거, 눈빛들 살벌하기는. 뉴비는 아끼고 보듬어 줘야 하는 존재인 것도 모르나? “오, 처음 보는 가면이네?” 노란 광대 가면이 운을 떼자, 여우 가면을 쓴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죠? 신규 회원을 안 받은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어,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서 말하세요. 당신이 누군지, 누가 당신을 추천해 줬는지.” 그래도 이번 건 준비해 온 질문이라서 문제는 없었다. “반드시 진실로만 대답해야 할 거예요. 여기는 그런 곳이니까.” 이 여자의 말대로 이 공간에는 특수 스킨이 적용되어 있다. 거짓말을 하면 가면이 부서지며 즉시 채팅방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엔 얼마든지 구라를 쳐도 된다는 것. ‘근데 다들 입 꾹 다물고 지켜만 보는 건, 다들 한통속이라는 거겠지. 아니면, 내가 어떤 놈인지 궁금할 뿐이던가.’ 첫 대면에 무조건 세게 나가라고 하던 말이 이해가 됐다. 뼈에 새겨진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었겠지. 따라서 내키진 않지만, 이번엔 그냥 이백호가 추천해 준 대사와 연출을 따르기로 했다. “아, 저, 저, 저요?” 일단 좆밥 연기를 해 준 뒤. “네, 당신 말이에—” 씨익 쪼개고 있을 때 카운터 펀치. “당신 엄마가 추천해 줘서 왔습니다마는?” 거참, 내가 이 병장한테 다 듣고 왔는데, 어디 뉴비 등쳐 먹으려고. 125화 고인물 (4) 흔히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누가 처음 말했는진 몰라도 참 적절한 비유다. 짐승만큼 원초적이진 않을지 몰라도, 사람 또한 첫인상을 통해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존중받기 위해선 얕보이지 않을 필요가 있다. 중간에 끼어든 전학생 포지션이라면 더욱더. “당신…… 지금 뭐라고……?” 여우 가면이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묻는다. 반면, 다른 가면들은 그저 흥미롭다는 듯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일종의 신고식이다. 여기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첫인상이 결정되겠지. 따라서— “당신, 한번 더 지껄여 봐.” 흉흉한 기세로 쏘아보는 여우 가면을 마주 보며, 착각하는 일 없도록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절 이곳에 추천해 준 사람은 당신 엄—” “무슨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미친놈, 정신 나간 새끼, 꼴통 등. 어떤 말을 듣던 간에, 나약한 이미지를 주는 것보단 나으리란 판단. 다만, 이것만큼은 나도 예상치 못했다. “이봐, 당신.” 여우 가면 틈새로 서슬 퍼런 안광이 뿜어진 순간. ‘……신기한 기분이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선명한 살의에 피부가 저릿하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심장이 쿵쾅대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물리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다행히 이 현상에 대한 정보는 있었다. ‘이게 그 기술이구나.’ 직접 당해 본 건 처음이지만, 아까 이백호가 알려 주었던 그 기술이 틀림없다. 뚜렷한 의지와 사고로 작동하는 영적 세계, 고스트 버스터즈 내에서만 쓸 수 있다던 그것. 딱히 쓸모는 없지만 뉴비들 겁주기로는 제격이라던 고인물들만의 잡기술. “한 번 더, 똑같이 말해 보겠어요?” 이내 여우 가면이 살기의 밀도를 올리며 다시 한번 내게 묻는다. 가면 너머로 차갑게 비틀린 조소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렇기에……. “저, 저, 저…….” 다시 한번 말을 더듬는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 가면이 아니라, 다른 놈들의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웬 뉴비 새끼가 깝치다가 꼬리를 내렸으니, 꽤 우스워 보였겠지. “왜 못 하겠어요? 아까는 잘만 날뛰더니?” 심기가 제대로 상한 걸까? 봐줄 생각은 전혀 없는지, 여우 가면의 살기가 더욱더 진해진다. 물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 아니…… 전, 그, 그게, 아니라…….” “말해요. 또박또박,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러지 뭐.” 병신 연기는 이쯤에서 집어치우기로 했다. “날 이곳에 추천해 준 사람은 당신 엄마다. 근데 뭐, 문제라도 있나?” “뭐…… 뭐요……?” 갑작스러운 내 태도 변화에 여우 가면은 몹시 당혹스러워 보였다. “아니, 분명 의념에 뒤덮인 상태인데? 대체 어떻게……?” 나는 대답 대신 일단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아까부터 간질거리던 귓구멍부터 후볐다. 보아하니 딴 놈들은 진작에 뭔 상황인지 전부 눈치챈 것 같았다. “이건, 확실히 흥미로운 상황이군요.” “신입, 장난은 그쯤 하지? 조금 과한데.”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런 태도는 적을 만들 수밖에 없소. 라이언.” 제각기 읊조린 감상평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놈, 건방진 놈, 한심한 놈. 들어 보니 딱 그 정도였다. 내 컨셉질에 대한 저들의 평가는. 거, 기껏 연출까지 해가며 이미지 메이킹을 했건만. ‘그래, 이 정도는 신기할 것도 없다 이거지.’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명색이 고인물 클럽 아닌가. 살기 한 방을 태연하게 버텨 냈다고 해서, 특별 취급을 받기는 요원한 일일 터. “감히 나를 우롱해……?” 뒤늦게 내가 병신 연기를 했다는 걸 깨달은 여우 가면이 그나마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 봤자 내 첫인상은 짜증 나는 놈 정도일 터. 따라서 나는 눈을 꾹 감고 이백호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살기 한번 쏴달라고요? 에이, 안 돼요. 제가 했다가 잘못하면 형 정신병 걸릴 걸요? 이게 의념을 이용하는 거다 보니 정신력이 강할수록 위력이 강해져서…….] 살기殺氣의 위력은 정신력과 비례한다. 참고로 여기서 정신력이란 수치가 아니라 진짜 정신력을 뜻한다. [고인물 전용이라 한 것도 그래서예요. 많이 죽이고, 사경도 밥 먹듯이 넘고 그러다 보면 정신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뭐, 그냥 타고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글쎄, 한번 시험해 보면 알겠지. 이백호의 시간이 없는 탓에 실제로 써보지는 못했지만, 크게 어려울 거 같지는 않으니까. [일단 쓰는 방법은 알려드릴게요. 아니, 사실 방법이랄 것도 없기는 한데…….] 이백호는 말했다. 살기를 뿜어내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 필요가 있다고. [적이라고 생각하세요. 반드시 죽여서 해치워야 하는 적.] 공교롭게도, 자가 최면은 내 특기 중 하나. “저기, 사람이 말하는…… 데…….” 눈을 뜨자 시선이 마주친 여우 가면이 흠칫 굳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친다. “하, 지금 그걸 복수라고.” 제대로 작동은 했지만, 위력은 강하지 않은 모양. 따라서 더욱더 의념에 집중한다. “유치하긴.” 이들은 고블린이다. 날 죽이려는 새끼들. 그래,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적. “사과만 해요. 먼저 떠보려고 한 것도 있으니 제대로 사과만 한다면, 이번 일로 악감정은 갖지 않겠어요.”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메이스로 머리통을 터트리는 상상을 하며,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 머리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피어난다. 통증과는 명백히 다른, 생전 처음 겪는 기묘한 감각. “아니, 자존심은 사과 한마디가 그렇—” 나를 훈계하듯 따지던 여우 가면이 돌연 말을 멈춘다. 그리고 돌처럼 굳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 하듯이. “……!”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에 맺힌 감정 또한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나의 적들이 마지막에서야 보였던 그것. 머리통을 내리찍는 메이스를 보며 짓던 그 눈빛. ‘어, 이렇게까지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확인을 위해 주변을 쓱 둘러봤다. 여우 가면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던 셋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분명한 반응을 보여 줬다. 스륵. 기둥에 등대고 있던 사슴뿔 가면은 원래라면 검이 있어야 할 허리춤으로 손을 움직였다. 날 건방지다 여기던 놈이었다. 휙. 초승달 가면은 시선을 피하듯 눈을 깔았다. 날 한심하게 바라보던 놈이었다. “……오우, 난 별말 안 했는데요?” 노란 광대 가면은 과장된 태도로 손사레 치며 뒤로 물러섰다. 날 재밌는 놈이라고만 여기던 자였다. ‘뭐지?’ 이만큼이나 격한 반응을 보이니,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의문이 커진다. 왜지? 왜 이렇게 효과가 좋은 거지? 차분하게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짓. 마치 뇌가 물수건처럼 쥐어짜이는 듯한 기분. 사흘 밤낮을 샌 듯한 정신적 피로가 느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바바리안 살기 모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초 남지 않았다는걸. ‘씨발, 이런 말은 없었는데.’ 나는 황급히 여우 가면을 응시했다. 여우 가면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만, 해 주세요. 더 이상은, 나도 위험…….” 아무런 말 없이 바라만 보자, 이내 그녀가 힘겹게 애원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살기 모드가 끝났다. “후욱……!” 물속에 파묻혀 있던 사람처럼 길게 숨을 들이쉬는 여우 가면.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는 그녀를 보니 나는 확신했다. ‘뭔진 몰라도 덕분에 잘 풀렸네.’ 뉴비를 배척하는 분위기인 걸 알자마자 내가 만들고 싶었던 이미지. 건드려선 안 되는 미친놈이 되는 데 성공했다. *** “……고작 한번 떠봤다고 이런 난리를 피우다니. 앞으로가 고달프겠군.” 사슴뿔의 읊조림을 시작으로 장내를 뒤덮던 정적이 가셨다. “피힛, 그래도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죽여야 저도 이런 게 가능해지려나요?” 광대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쓱 훑어보던 그때. 덜컥! 방과 이어진 네 개의 문이 일제히 닫혔다. 솔직히 존나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냥 입장 시간이 끝났을 뿐이었거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이번에도 우리 네 명… 아니, 이렇게 다섯 명이 끝이구려.” 다들 자리에 앉기에 일단 나도 아무 곳에나 착석했다. 다만,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날 향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까와 달리 정체를 떠보는 식의 질문은 아니었다. “라이언, 그대는 이번 집회가 처음일 것이오. 방금 전 살기를 보고 혹시 초창기 멤버인가도 싶었지만…… 사자 가면은 쭉 벽면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초승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도 없으니까. 차라리 쿨하게 인정하는 게 있어 보일 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혹시 마스터를 만난 것이오? 아, 대답하기 싫다면 그냥 싫다고 말해 주면 되오.” 미친놈 이미지가 유효했는지, 초승달의 말투는 공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이래서 사람이 망나니처럼 살아야 하는 건가? 바바리안이 되지 못했다면 평생 알지 못하고 살았을 깨달음. “만약 대가를 바란다면 드리리다. 그대가 만족할 만큼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됐고, 내가 마스터와 만났다 생각한 이유가 뭐지?” 나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야 난 마스터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그건…… 좀 이상한 말이구려. 마스터가 사라진 이후 1년 만에 들어온 신입인데,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그래서 여우 씨가 총대 메고 떠보려고 했다가 된통 당했지요 아마?” 광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여우 가면이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마스터가 이 집회 창설인을 말하는 거 같네.’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며 머릿속에 욱여넣고 있자니, 초승달이 재차 말을 이었다. “크흠, 아무튼 뿐만 아니라, 처음이라기엔 이곳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소.” 음, 그건 마스터가 아니라 이백호 덕분인데. 아니, 근데 걔는 대체 정체가 뭐지? 이백호 얘도 차차 정체를 알아보기로 생각하며 나는 상념을 끝냈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겠소? 언제 어디서 마스터를 마지막으로 만났는지만 말해 줘도 충분—” “답은 거절이다.” “후우, 그렇구려. 알겠소.” 초승달은 깔끔하게 미련을 접고 물러났다. 좆밥같이 보였으면 분명 귀찮게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그나저나 마스터야 아무래도 좋으니,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셋과 달리 마스터의 행적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지 광대가 대화를 정리하며, 집회의 시작을 알렸다. 규칙은 미리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런 질문을 했다간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다 깨질 게 분명하니까. “그럼 저부터 하죠.” 첫 번째 순번은 먼저 말을 꺼낸 광대였다. “라프도니아 왕의 병세가 악화됐답니다.” 원탁 중심에 박힌 보석에서 붉은빛이 켜졌다. 위 내용이 사실이며, 원탁에 자리한 이들 중 절반이 이 내용을 알고 있다는 뜻. “악화라니, 너무 포괄적인 정보 같네요.” “왕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아니오. 좀 더 쓸만한 얘기를 해보시오.” 여우와 초승달이 인상을 찌푸리며 광대를 타박한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난 몰랐는데…….’ 왕이 병에 걸렸다니? 금시초문이다. 도시에는 그런 소문 따위 일절 돌지 않았으니까. 뭐, 왕의 건강이 거리에서 회자되는 것도 웃기겠다마는. “후우,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다니. 한심하긴.” 광대가 여우와 초승달을 흘기더니, 이내 나를 쓱 바라본다. 당신이라면 뭔 뜻인지 알고 있겠지?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시선. “…….” 나는 그냥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중간은 갈 테니까. “장미기사단장이 어제 죽었습니다. 어때요. 이건 당신들도 인정하겠죠?” 이내 광대가 다시금 정보를 풀자 원탁 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왕궁에 피가 흐르겠구려.” “예, 저희도 준비를 해야겠네요.” 아니, 장미기사단장이 누군데 씨발. 아무튼 보석에서 초록빛이 켜졌기에 곧장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이번엔 여우 가면이었다. “쟈군 클랜이 1층 계층군주 토벌에 성공했어요.” “호오, 역시 그 친구였군?” “피싯, 거래소에서 구매 글이 사라졌더라니, 어디서 공략법을 얻은 모양이네요? 평생 못 잡을 줄 알았는데.” 나는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다.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니라, 저게 내 얘기라서. ‘잡은 놈들이 쟈군 클랜이었구나.’ 도시에선 암만 알아봐도 계층군주가 소환된 것 말고는 안 나오던데. ‘……들어오길 잘했네.’ 이번에도 보석에서 초록빛이 켜졌기에 다음은 초승달 차례였다. “후후, 아마 이건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할 것이오.” “그냥 말이나 하시죠?” “고요한 요정의 섬에서 히든피스를 발동 시 ‘라브가누스’가 세 마리까지 확정적으로 출현하오.” 초승달의 말에 여우와 사슴뿔이 크게 놀랐다. “라브가누스의 정수를 구하던 자에겐 좋은 소식이겠군.” “아니, 잠깐만. 그럼 히든피스는 뭔데요?” “한 번에 그것까지 바라면 양심이 없지 않소? 아무튼 그럼 이제 다음 차례겠구…… 응?” 자연스레 순번을 넘기려던 초승달이 흠칫 굳었다. 보석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온 탓이다. 익명성이 유지되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미 정보를 알고 있던 자를 유추하기는 쉬웠다. 앞선 두 명이 몰랐던 거라고 티를 냈으니까. “초승달 씨,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말한 거, 보통은 모를 걸요? 광대가 제 딴에 위로의 말을 던지자, 초승달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진 클라운만 모르면 됐는데, 이제 한 사람이 더 늘었구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누가 게임만 열심히 해도 알 수 있는 걸 말하래? “그 히든피스에 대해서 말해 주면 되잖아요?” “그건…… 아직 비밀로 부쳐야 해서 말이오.” “호오, 그럼 어쩔 수 없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추방되겠—” “하하,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그저 밑천을 드러내야 할 듯해서 난처하단 뜻이었소.” 이내 초승달이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정보를 꺼냈다. “요정족에서 ‘성물 탈취자’의 흔적을 찾았다고 하오.” 보석에선 초록빛이 들어왔지만, 여우가 눈을 좁히며 이의를 제시했다. “흔적이라니요? 너무 정보가 없지 않나요?” “아무도 단서도 없던 ‘성물 탈취자’에 관한 정보요. 이것만 해도 충분히 극비 사실이고.” “흐음, 좋아요. 인정할게요.” “초승달 씨는, 역시 넌 요정 출신이었군요?” 이의를 제기했던 여우가 물러남으로써 초승달의 순번이 끝났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사슴뿔이 남긴 했지만, 시계 방향으로 돌다 보니 자연스레 나부터 차례가 온 것. ‘왠지 긴장되네.’ 저 기대 어린 시선들 때문일까? 순번이 돌아가는 동안 쓸 만한 정보를 정했음에도 괜히 부담감이 커진다. 만약 전부 아는 정보이기라면 창피를 볼 터. ‘일단은 그냥 확실한 것부터 던져야겠네.’ 되도록 신비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던 나는 몇몇 정보 중에서도 남들이 알기 어려운 것을 선별했다. “반데몬은 세 명이서 잡으면 확정적으로 정수가 드랍된다.” 예상대로 원탁의 보석은 초록빛을 뿜어냈다. 다만……. “……반데몬을 셋이서 잡는다고?” 왜 그 부분에서 놀라는 거지? 치트 모드면 셋이서도 쉽지 않나? ‘심지어 공략도 쉬운 놈인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26화 고인물 (5) 3등급 몬스터 반데몬. 공략 난이도는 3등급 중 하위권에 속하지만, 몇 가지 출현 조건 때문에 마주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종의 ‘희귀종’ 몬스터. 그래서 첫 정보 공유 건으로 이걸 골랐다. 치트 모드 플레이어라고 한들, 반데몬의 처치 경험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걸 셋이서 잡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알아도 쓸모가 없지.’ 사실 이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 반데몬은 만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셋이서 놈을 처치하는 건 더 어렵다. 여긴 정수를 최대 30개씩 먹을 수 있던 치트 모드 속이 아니니까. 쉽게 말해, 막상 들어도 ‘그런 게 있었어? 신기하네’ 정도로 끝날 수준의 정보라는 뜻. 그래, 분명 그래야 했을 터인데……. “그게 정말인가요?! 아, 아! 의심한 건 아니에요. 정말요. 알죠?” 벌떡 일어나 질문을 던졌다가 황급히 변명의 말을 던지는 여우 가면부터 시작해, 다들 반응이 좀 묘하다. “……반데몬을 셋이서 잡는다고?” “반데몬이라면, 분명 3등급 몬스터일 터인데, 그게 가능하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순번을 넘겼다. 사실 내게 쏠린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였지만, 신비스러운 이미지 덕에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다행히 초록불이 켜졌군.” 이후 마지막 차례였던 사슴뿔까지 정보를 말하고 오케이를 받으며 한 바퀴가 끝났다. 입장했을 때 본 공지에 따르면, 이제부터는 참가자들끼리 협의해서 한 바퀴를 더 돌지 말지를 결정하는 식이라는데……. “나는 오늘 여기까지만 해 보겠소.” 별로 준비해 온 게 없던 초승달이 첫 바퀴를 끝내고 빠지겠다고 선언하자, 집회가 여기서 마무리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렀다. “흐음, 그럼 저도 여기까지요. 오늘 쓰려고 했던 건 아껴 놨다가 다음 집회에 써야겠어요.” “폭스가 빠진다면 나도 그만두겠다. 준비해 온 건 많이 있지만…… 저 두 사람이 모르는 정보라니, 영 자신이 없군.” 여우와 사슴뿔이 각기 다른 이유로 불참 의사를 표하자, 광대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본다. “수사자 씨는 어쩔 건가요? 저는 단둘이 집회를 이어 가도 좋은—” “나도 여기까지만 하겠다.” “예? 어째서입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아꼈다. 그야 나도 맘 같아선 몇 바퀴든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싶지만……. ‘둘이서 하면 들통날 위험이 있겠지.’ 리스크가 크다. 떠보기식 정보를 던졌는데, 초록불이 켜지면 내가 뉴비란 것도 탄로 날 수 있으니까. 정보 하나로 정보 하나를 듣는 것도 썩 효율적이지 못하고. “흐음, 아쉽군요. 처음으로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걸로 끝이라니.” 미련이 뚝뚝 흘러내리는 광대의 말을 끝으로 집회는 마무리 지어졌다. 한데 이건 또 뭘까. “…….” 집회가 끝났는데도 다들 채팅방을 나가지 않고 조용히 눈치만 본다. 아닌 척하지만, 그들의 관심이 내게 향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내가 뭔가 말이라도 한마디 남기리라 생각하는 모양새. ‘……그래, 오늘의 주인공은 나였다 이거지.’ 피식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 처음으로 참석한 집회. 오늘 나는 이곳에서 고인물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만한 ‘컨셉’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이 컨셉에 가장 적절한 행동은 무엇일까. “…….” 광대, 사슴뿔, 여우, 초승달. 나는 오늘 만난 네 명의 고인물을 한 명씩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겨우 이 정도인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 “갔네요…….” 수사자 떠남과 동시에 여우는 참아왔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폭스, 당신은 괜찮소?” 초승달이 그녀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주어는 빠졌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명백했다. 정말이지 아까는 위험했으니까. “……전 괜찮아요.” 살기殺氣.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념. 보통은 기감이 좋은 자가 아니면 느끼기도 어려운 무형의 것. 다만 정신과 정신이 맞물리는 이 특수한 공간에서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정말 괜찮은 것이오? 아까부터 손끝이 계속 떨리고 있는데.” 육체라는 거름망이 없기에, 살기에 노출된 순간 압도적인 공포가 뇌리에 새겨진다. 물론, 대부분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심할 경우 영체에 심각한 타격을 받으며, 현실 세계에서까지 그 후유증이 동반된다. “금방 멎을 거예요. 다행히 정신 오염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그리 말하면서도 여우는 아찔했다. 만약 수사자가 살기를 조금이라도 늦게 거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광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을 더듬는다거나 하는 정도의 언어 장애는 생겼을 수 있으니까. “대체 그는 누구일까요……?” 여우는 참아왔던 의문을 뱉어냈다. 마스터가 사라지고서 1년 만에 들어온 신입. 나름 정신 방벽이 높은 편이라 여겼건만 몇 초 버티는 게 고작이었던 살기.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인간의 정신력이 그런 영역에 이를 수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지만……. 정말 놀라운 건 따로 있다. “그 사람, 제가 한계란 걸 눈치채자마자 살기를 지웠어요. 그것도 한순간에.”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구려.” 옥죄던 살기가 1초도 안 돼서 사라졌다.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극한의 몰입을 통해 형상화된 의념을, 단번에 지워내다니? 사람의 정신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왜 하필 그때 내가 나서 가지고…….’ 여우가 경솔했던 행동을 후회하는 사이, 사슴뿔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아까 그 말은 어떻게 생각하지?” “반데몬 말인가요?” “그래.” “거짓말…… 일 리는 없겠죠. 일단 진실의 빛이 켜졌으니.” 물론 원탁의 보석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만약 말하는 이가 ‘진실’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면, 보석은 초록빛을 뿜어낸다. 하지만……. “왠지 그 사람이 잘못 알고 있을 거 같지는 않네요.” “그건…… 나도 동감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거고.” 수사자의 정보가 진실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를 만족하여야 한다. 세 명이서 반데몬을 처치할 것. “분명 게임 내 얘기기는 하겠지만, 내겐 너무 허황된 말처럼 들리는군.” “한 50배 모드 정도면 가능하지 않겠소? 뭐, 라이언이 그런 난이도로 클리어하고 왔을 거 같진 않소만.” 사슴뿔의 중얼거림에 초승달이 웃으며 대화에 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흐음, 여러분은 수사자 씨가 게임에서 알아낸 정보일 거라고만 단정 짓는군요?” 광대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며 일순 정적이 흘렀다. “…….” “…….”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세 사람 모두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클라운, 넌 항상 이상한 소리만 하는군.” 저 둘처럼 부정의 말을 뱉진 않았지만 여우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반데몬을 세 명이서 공략하다니, 게임에서도 힘든 걸 어떻게 이곳에서 해내겠는가. “쯧, 다들 상상력이 부족하시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광대가 혀를 찼다. “됐고, 다음에는 열심히 준비 좀 해 주시길 바랍니다.” “준비라니?” “정보요! 정보! 대체 이게 뭡니까? 기껏 저런 사람이 왔는데, 정보 몇 개가 없어서 바로 보내야 한다니. 그 사람이 이곳에 흥미를 잃으면 책임질 겁니까? 앞으로 어떤 걸 알려 줄지 모르는데?” “이보시게, 흥미를 잃다니 그건 너무 과장된 말—” “아까 그 사람이 한 말 못 들었어요? 딱 봐도 실망했잖아요, 실망!” “크, 크흠…….” “정 쓸 만한 게 없으면 자극적이고 재밌는 거라도 찾아오세요. 당신들 때문에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으니까. 알겠어요?” 광대의 비아냥에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어색한 침묵을 유지했다. 원탁의 감시자.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교류의 장. 세 사람은 이곳의 일원이란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이 정도인가.] 그 한마디에 모두 부서졌다. 차갑게 조소하는 듯한 시선에 모든 게 오만이었음을 깨달아 버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인정해 버렸다. 원탁의 감시자. 결국, 이 또한 누군가에겐 우물에 불과했다. *** ‘재미있는 곳이었네.’ 더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침대와 컴퓨터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한수의 방. 시간만 확인하고서 다시금 눈을 감았다. ‘원탁의 감시자라…….’ 이백호가 알려 준 이 커뮤니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익했다. 내게 가장 부족했던, 고급 정보의 입수처가 되기에 딱 알맞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든 망할 때까지 붙어 있어야지.’ 물론 이를 위해선 꾸준히 컨셉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뉴비인 게 들킨다고 당장 내쫓거나 하진 못하겠지만, 내 정체를 캐내려는 시도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변할 테니까. ‘아무튼 거기서 정보로 풀 만한 거는 내일 따로 정리해 두기로 하고…….’ 이내 나는 화제를 옮겼다. [Sergeant Lee] 이백호. 제대한 날, 휴가 때 못 깬 게임을 클리어하고 이곳에 소환된 불행의 결정체이자…… 고이다 못해 썩은 물 냄새를 풀풀 풍기는 플레이어. 솔직히 말해, 아직도 떨떠름하다. 이건 뭐, 소매넣기도 아니고. ‘다음에 만나면 백호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냥 한국인이 그리워서 들어가 봤을 뿐인데, 엄청난 인연을 만들어 버렸다. 물론,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로 남을 생각은 없다. 그런 관계는 내가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백호, 그 녀석도 마냥 호구 같은 놈은 결코 아닐 테니까. ‘암, 서로 웃을 때 알아서 선 넘지 않아야 관계가 오래가는 법이지.’ 이를 끝으로 상념을 마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커뮤니티 활동을 해갔다. 지난번과 달리 자잘한 정보들을 팔며 GP를 수급했고, 남는 시간엔 게시판이나 채팅방에 들어가 이곳 분위기에 적응했다. 그러다 보니 두 번째 커뮤니티 활동이 끝났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이한수가 아닌 비요른의 방. 일단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 ‘……피곤한 것만 아니면 최고일 텐데.’ 평소 자던 시간에 12시간가량을 더 깨어 있던 것인 터라 정신적 피로가 상당하다. 아니, 이건 그냥 살기를 남발한 탓인가? 원인이야 어쨌든, 내일 일정을 싹 비워 놔서 다행이— “비요른! 언제까지 잠만 잘 거냥!” 니미럴. 잠시 눈을 붙였다 뗐을 뿐인데, 미샤가 보인다. 벌써 아침이 밝았는지 창가도 환했고. “좀만 더…….” “에휴, 좀만 더는 무슨 좀만 더? 맨날 나한테 게으르다고 하더니. 혹시 이번에도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운 거냥?” “그런 건 아니다.” 끼니에 예민한 미샤였기에, 순순히 일어나 함께 밥을 먹고서 다시 침대에 뻗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슬며시 눈을 떠 창가를 바라보자 어스름한 주홍빛이 유리에 맺힌 게 보인다. “해가 질 때가 돼서야 일어나다니, 대체 어제 뭘 한 거냥?” “그냥 잠을 좀 설쳤다.” “……네가?” 저리 반응하니 좀 섭섭해지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자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즉시 잠이 오는 게 바바리안의 몸뚱이이었던지라. “근데…… 설마 지금까지 여기 있던 거냐?” “그럴 리가 있겠냥. 오전 수련을 끝내고 잠시 드왈키도 만난 데다가, 본가까지 다녀왔는뎅.” “뭐? 잠깐만, 드왈키를 만났다고……?” “응. 고민이 있대서 잠시 상담 좀 해줬다.” 미샤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 말했지만, 드왈키의 마음을 알고 있는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던전 앤 스톤]에서도 동료끼리 정분이 나는 건 유혈사태로 향하는 지름길이었으니. “그래서…… 무슨 고민이었나?” “으음…… 그래도 남의 고민인데…….” 어허, 바바리안 섭섭해지게. “우리가 왜 남이냐?” “하긴…… 뭐, 비요른 너라면 말해 줘도 되겠징.” 슬그머니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미샤가 술술 남의 고민을 털어놨다. 들어 보니 평범한 연애 상담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자기 마음을 밝힐지 말지가 고민된다던가? ‘이걸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일단은 확인을 위해 마저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나?” “응? 그냥 남자답게 고백하라고 그랬는뎅?” “그렇군…….”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흔한 연애 한 번 못해 본 미샤 아닌가. 평소 나한테 하는 행동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얘는 남녀 관계란 것에 관심이 없— “근데 그, 그래서 말인뎅…….” 그때 미샤가 돌연 내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묘하게 낯빛이 붉어 보인다. 뭐지? 석양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미샤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비요른, 혹시 괜찮으면 내일 우리 집에 같이 가 줄 수 있냥?” “……같이 가줄 수 있냐고?” 와달라는 게 아니라? 말에 맥락이 맞지 않는단 생각에 되물었지만 미샤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응응. 어떻게 안 될깡? 앞으로도 시키는 거 잘할 테니까. 응?”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의문을 품기도 잠시. 나는 머지않아 사태 파악을 끝냈다. 얘가 고작 자기네 숙소에 초대하면서 이러진 않을 테고. “설마 우리 집이라고 하는 게, 본가를 말하는 거냐……?” 내 질문에 미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손에서는 긴장한 듯한 떨림이 전해졌다. 또한, 어느새 해가 더 저물었을까? 창을 타고 미샤를 비추던 노을도 한층 진해져 있었다. 이내 미샤가 침을 삼키며 부연 설명을 더했다. “우, 우리 아버지가 너를 좀 만나 보고 싶대서 말이당……. 그래서 그런데…… 나랑…… 같이 가줄 수 있냥……?” 부모님의 초대라니. 당황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다.” “……뭐? 정말이냥? 진짜야? 와! 무르기 없당?” “됐고,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되나?”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다. 127화 칼스타인 (1) 미샤 칼스타인. 순혈 가문 출신이지만, 영혼수와 계약하지 못한 바람에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살아온 5년 차 탐험가. ‘얘 아빠가 날 보고 싶어한다라…….’ 어느 정도 예상가는 부분은 있다. 그간 미샤를 통해 적묘족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충분히 파악했으니까. “근데 넌 왜 말이 없나. 몇 시까지 가면 되냐니까?” “어, 그게…… 여, 역시 내일은 안 될 거 같당.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아버지한테도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하고.” “뭐? 그게 대체 뭔 소리냐? 내일 같이 가자고 한 건 너였을 텐데?”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미샤가 시선을 회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실은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지 몰라서…….” “그래서 내일 가자고 했다고?” “응, 네가 협상은 그렇게 하는 거라며?” “…….”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도 싶지만, 미샤의 계획은 나름대로 그럴듯했다.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약속을 미뤄 주는 척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었다던가? “으으, 나가서 놀자고 조를 때는 맨날 바쁘다고 하더니, 이번엔 대체 무슨 변덕인 거냥?” “네 아버지가 부른 거 아닌가. 당연히 찾아가 만나 봐야지.” “응? 그, 그, 그런가?” 대충 둘러댄 말에 미샤가 시선을 피했다. “너, 너도 참…… 무슨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다 한대냥?” 거, 언제는 수인과 바바리안이 남이냐더니? *** “약속이 잡히면 다시 알려 주는 거로 하고, 이만 가봐라. 난 더 자야겠다. 아, 그리고 내일은 오지 마라. 일찍 나가 봐야 하니.” “뭐? 온종일 잠만 자놓고 또 잔다고?” “자꾸 그러면 안 가는 수가—” “아니당! 귀찮게 안 할 테니 푹 쉬어랑!!” 미샤가 호다닥 방문을 열고 나간 뒤에는 잠시 끊겼던 잠을 이어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후,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무려 36시간을 통째로 자고서야 겨우 머리가 좀 개운해졌다. 앞으로 살기를 쓰는 건 자제하든가 해야지. 여하튼 간단히 몸을 씻고서 성지로 향하자 장로가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부족장은 대체 어디 가고? 못내 궁금해져서 슬며시 물어봤더니, 조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부족장이라면 잠시 일이 있어 도시에 갔다. 아마 내일이면 올 거다.” “부족장이 외출이라니 신기한 일이군.” “흔한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그쪽에 용건이 있던 거라면, 기다리면서 어린 전사들이라도 만나 보는 게 어떤가? 너라면 그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텐데.” 장로의 기대 어린 제안은 좋은 말로 거절했다. 어느새 바바리안족의 아웃풋 중 하나로 인정받은 듯해서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오늘 용무는 다른 쪽에 있으니까. “그럼 주술사를 불러주겠나?” 이후 잠시 기다리자 주술사의 제자가 와서 천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자글자글한 주름을 지닌 민머리 주술사는 입에 커다란 곰방대를 물고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키키킥, 전사야 또 왔구나. 참 재주도 좋지.” 왠지 오늘따라 하이톤인 목소리. 어딘가 발음도 조금 어눌한 게 무슨 약쟁이를 보는 거 같다. “오늘 혼령각인을 받을 수 있나?” “돈만 충분하다면, 키킥.” 아니, 그게 아니라 취한 거 같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거냐고 물어본 건데. 내심 걱정됐지만, 그냥 지갑을 열었다. 짤그랑, 짤그랑. 100만 스톤짜리 마석을 하나씩 집어넣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이걸로 이제 다시 빈털터리구나.’ 5단계 각인을 받기 위한 금액은 800만 스톤. 이걸 내고 나면 70만 스톤 정도밖에 수중에 남지 않는다. 뭐, 아직 미샤와의 공용 계좌에 200만 스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개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기금. “전사야, 하나가 부족하구나.” “……지금 넣을 생각이었다.” 이내 마지막으로 50만 스톤짜리 마석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계산이 끝났다. 쩝, 이번엔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도중에 뭔가 실수할 걱정은 접어도 되겠군.’ 되도록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며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끄으흐흐흐흐······.” “키킥, 전사야! 더 크게 비명을 내지르거라!” “끄아아아아악!!” 머지않아 한결같은 고통이 나를 덮쳤다. *** 「불사자 각인 5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기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정신 수치가 +80 상승합니다.」 *** [던전 앤 스톤]에서 기력은 중요한 스탯이다. 전투력에는 큰 영향이 없지만, 스태미나가 바닥나면 행동 불가 상태가 돼버리니까. 수 시간 단위의 레이드를 할 때도 ‘기력 재생 보조 스크롤’은 필수로 여겨지는 소모품이었다. 다만……. ‘실생활에서도 유용한 스탯일 줄은 몰랐네.’ 지난날, 마녀의 숲에서 피로도의 한계를 느껴 본 적이 있다. 또한, 어제만 해도 정신력이 고갈되며 반동면 상태에 빠졌다. 그렇기에 더욱더 여실히 느껴진다. 몸과 정신의 변화가. “키킥, 오늘은 제법 멀쩡해 보이는구나.” 원래라면 지금쯤 반송장이 돼야 했을 터인데, 오늘따라 정신과 육체에 누적된 피로가 한결 덜하다. 자세한 건 추후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 정도 효과면 이틀 밤을 새우고도 멀쩡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 800만 스톤의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겠다마는. ‘……역시 각인은 금액 대비 효율이 구리단 말이지.’ 돈보다 능력치가 귀한 중후반부라면 모를까. 초중반부에는 장비를 사거나, 차라리 정수를 돈 주고 사서 먹는 게 효율이 좋을뿐더러…….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해서 돈을 모아 각인을 올리는 게 성장 시간을 단축하는 길이다. 그래서 나도 원래 각인은 1단계만 찍고서 한동안 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일찍 [거대화]를 먹을 줄 몰랐으니까. ‘후, 그래도 각인에만 올인했더니 이제 진짜 한 단계만 남았네.’ 재산이 줄어들었다는 허탈함도 잠시. 새삼 뿌듯한 기분이 피어난다. 6단계를 찍는 순간, 지금까지 투자한 모든 비용의 보상을 몇 배로 되돌려 받을 테니. “전사야, 뭘 멍하니 있는 것이냐? 피곤하니 이만 나가 보거라.” 잠시 상념에 잠겨 있자니, 주술사의 축객령을 듣고서 천막을 나섰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아이나르가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수풀을 유심이 확인하며 걸었지만……. ‘없네.’ 어두컴컴한 숲길을 지나쳐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나르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슬슬 수련도 막바지니 바쁘겠지. ‘그러고 보니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네.’ 오늘따라 적적한 거리를 지나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시간이라는 거. 참 빠르면서도 느리구나. 가죽 장화가 없어서 덫 밟고 빌빌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 「비요른 얀델」 레벨: 4 육체: 386.1 / 정신: 319.3(New +81) / 이능: 345.4(New +3) 아이템 레벨: 967 종합 전투 지수: 1292.55 (New +84)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뱀파이어(B) - Rank 5 / 오크 히어로 - Rank 5 *** 사흘 뒤, 나는 미샤와 함께 13구역으로 향하는 대형 마차에 올라탔다. 그야 수인족의 성지는 우리가 거주 중인 7구역과 맞닿은 게 아니었으니까. “호, 혹시 목은 안 마르냥? 물 좀 줄까?” “괜찮다.” “배는? 배는 안 고프냥? 혹시 몰라서 이것저것 챙겨왔는데 먹을랭?” 미샤의 극진한 태도를 보며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만 좀 해라. 중간에 돌아가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그것보다 걱정이 돼서 그렇징. 너한텐 불편한 자리일 거 아니냥. 나 때문에 가는 거니 이 정도는 모셔야—” “됐고, 잘 테니 도착하면 깨워라.” “그, 그래…… 한 세 시간쯤 걸리니까 한숨 푹 자고 있어랑.” 더 귀찮아지기 전에 잔다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미샤가 말했던 대로 정오가 되어서야 마차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왕복 여섯 시간이라…… 얘가 괜히 한 번 가면 자고 오는 게 아니구나.’ 직선거리로 치면 그리 멀지 않지만, 통행금지 구역인 14구역을 빙 돌아가야 했던 탓에 생각보다 이동 시간이 길었다. ‘뭐, 얘가 여기에 터를 잡은 것도 그래서겠지. 집이랑은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을 테니.’ “비요른, 왜 가만 있냥? 피곤하냥? 업어 줄까?” “됐고, 앞장이나 서라.” “알았당!” 이후 이곳 토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샤의 뒤를 따르며 거리를 구경했다. 현재 거주 중인 7구역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냥 길이 조금 더 복잡하고, 수인과 드워프가 많이 보인다는 정도. 다만……. “자, 도착했당.” 이내 도착한 수인족의 성지는 바바리안의 것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듣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성지가 도시 바깥에 위치해 있단 건 같다. 하지만 공통점은 그게 전부다. 수풀에 판잣집 혹은 천막을 짓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석조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며 그 사이에 떡하니 도로까지 나 있다. 또한. “아빠, 저기 바바리안이에요. 바바리안!” 영업 중인 가게가 있고, 거리를 오가는 가족 단위의 수인도 여기저기 보인다. 마치 도시가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듯이. ‘우리는 성인만 되면 다 내쫓겼는데…….’ 수인의 성지는 말 그대로 수인족을 위한 도시 바깥의 마을 같았다. 다만 이를 멍하니 보는 내가 이상했을까? “왜 그러냥……? 문제라도 있냥? 아니, 있어도 돌아가면 안 된당?” “……그냥 신기해서 그랬다.” “응? 신기하다고?” 미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바바리안의 열악한 환경을 토로해 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 아니겠는가. 그냥 한 번 슬쩍 물어나 봤다. “원래 성지는 다 이런 건가?” “저기,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는뎅?” “수인이면 숲에서 동물도 키우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실제로 게임에서도 수인의 성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이지 아마? “아, 어, 옛날에는 전통을 지킨다고 그렇게 살았다고 들은 적도 있는 거 같은데……. 너무 옛날이라서 나도 잘 모른당.” “……그렇군.’ 후, 왜 바바리안만 그대로인 거지? 그런 불만을 속으로 삭히며 거리를 걷고 있자니 이내 거대한 저택이 우리 앞에 드리웠다. “자, 여기가 우리 집이당.” 니미럴. 우리 부족장은 여전히 천막에서 자는데.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자, 또다시 미샤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기, 긴장하지 않아도 된당. 별일 없을 거당.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잖냥? 우리 아버지는 유명한 탐험가를 좋아하니까. 응?” 미샤가 나를 달래듯 말했으나, 정작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야말로 좀 침착할 필요가 있다. 너희 집에 온 건데, 왜 네가 그러는 거냐?” “응? 나, 나는 멀쩡한데?” “그럼 문이나 열어라.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냐?” 내 말에 미샤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더니, 종을 쳐 사용인을 불러냈다. “저, 안에 좀 들어가려 하는데. 열어 줄 수 있겠냥?” 미샤의 요구에 대꾸도 안 하며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문을 열어 주고 떠나는 사용인. ‘뭐지?’ 무척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야 미샤는 반푼이 시절을 벗어났으니까. ‘영혼수와 계약한 건 분명 얘 아빠도 알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심결에 미샤를 바라봤는데, 때마침 얘도 나를 살피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눈에 담긴 감정은 내게 있어 익숙한 것이었다. 전 여자친구가 이런 눈빛을 자주 지었거든. 보이고 싶지 않던 걸 들켰을 때의 그 눈빛. “그…… 있잖냥, 비요른.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빨리 말해라.” 내 말에 미샤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내가 영혼수와 계약한 건 아직 아버지만 알고 있당. 그러니까, 안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았으면 한당. 알겠지?” “그건 어떤 일인지에 따라 다를 거 같은데.” “별거 아니당. 그냥 방금 본 저 사람보다 조금 더 심한 정도일 뿐이니까.” “좀 더 자세히. 그래야 나도 대응을 할 거 아닌가.” 내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미샤가 체념한 얼굴로 읊조리듯 말해 주었다. 형제들의 폭언이라든가,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이라든가, 다 들리도록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용인들의 태도라든가. 그렇게까지 심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나름대로 순한 맛 선별해 들려준 걸 테니까. 분명 실제로는 훨씬 더 심했겠지. “무, 물론 너한테 저러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왠지 입꼬리가 비틀리듯 휘어진다. “비, 비요른? 왜 웃냥? 우, 웃지 마라. 네가 그러면 무서워진단 말이당……. 나중에 아버지가 얘기를 밝히면 전부 끝날 일이지 않냥. 내, 내가 좀만 더 참으면 된당.” 미샤가 불안한 얼굴로 부친을 대변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비란 놈이 모든 걸 알면서 얘를 방치했다. 그 침묵에 납득할 이유가 있든 어쨌든. 본인 사정을 위해 자식의 고통을 내버려 두었다. 한데 그런 주제에, 이 집에 나를 불렀다. ‘날 아주 좆으로 봤나 보군.’ 갑자기 이 거대한 저택에서 음습한 악의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흡사 몬스터가 가득한 던전을 보는 듯한 기분. 그래서일까? “베헬—라아아아아아!!” 함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 목례 한 번 없이 휙 사라졌던 사용인도 다시 모습을 내비쳤다. “무슨 짓이오, 바바리안! 예의를 갖추시오!” “예의라…….” 나는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다가갔다. “너는 분명 머리에 문제가 있군.” 적에게 예의를 갖추는 바바리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128화 칼스타인 (2) 한때 영혼수와 계약만 하면 모든 고민 걱정이 사라질 거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빙하마수 스카디아구나.] 차가운 목소리와 타인을 대하는 듯한 부친의 시선은 여전했다. 단지 예전처럼 직접적인 말만 던지지 않았을 뿐. [이 사실을 혹시 누구에게 말한 적 있느냐?] [어, 없는데요…….] [잘했다. 당분간은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거로 하자꾸나.] 부탁이나 그런 게 아닌 통보의 말. [네, 네…….] 미샤는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찔리는 게 있었으니까. 그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약을 한 것이 아니다. 서리혼령 가락지라는 요상한 반지를 이용해서 꼼수로 계약에 성공했다. 만약 아버지가 이걸 알고 있다면……. ‘이런 대접도 당연한 거겠지.’ 물론 이를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언제 한번 그 바바리안을 저택으로 데려오겠냐는 아버지의 말에도 그러겠다고 했다. 뭐, 비요른에게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응, 이건 나 혼자 이겨내야 하는 문제니까.’ 이미 갚기 어려울 은혜를 받았지 않나. 더는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애써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했으나,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본심은 따로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히쿠로드, 드왈키, 로트밀러……. 그들 모두에게 들켜도 비요른에게만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도 자주 들렀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당. 오늘 친가에 잠시 들러야 하거든.] 애써 힘을 냈다. 왜 이렇게 자주 들르냐는 형제의 시선도, 사용인들의 멸시 어린 시선도, 저녁 만찬에 혼자 외딴 섬에 남겨진 듯한 외로운 공기도. 정면으로 마주했다. ‘더 이상 도망쳐서는 안 돼.’ 비요른에게 배웠으니까. 도망치는 것으로는 그 어떠한 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걸.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이 흘렀다. [그자는 아직인 것이냐?] 비요른을 데려오라는 아버지의 재촉이 심해졌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한다고 둘러댔지만, 아버지는 이미 거짓말인 것도 아는 듯했다. 이렇게 조건을 내민 걸 보면. [이번 달 안에는 데려오거라. 그럼 너에 대한 처우도 재고해 볼 터이니. 알겠느냐?] 쉽게 말해, 영혼수와 계약한 걸 가문 내에 알리고 제대로 된 자식 취급을 해주겠다는 뜻. 왜 이렇게까지 해서 비요른과 만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미샤는 비요른을 초대하기로 했다. 그를 이용하는 듯해 기분은 좀 그랬지만……. ‘내가 더 잘해서 갚으면 되는 거니까.’ 잘하면 앞으로 비요른에게도 당당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또한, 자신이 칼스타인가의 지원을 얻는다면 그의 행보에도 도움이 되겠단 일말의 계산도 존재했다. [좋다.] [……뭐? 정말이냥? 진짜야? 와! 무르기 없당?] [됐고,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되나?] 걱정과 달리 비요른은 흔쾌히 승낙했다. 하나 기쁜 마음도 잠시, 금세 불안해졌다. 저택에 가면 이제 숨길 수 없게 될 텐데. 그건 어떡하지? 만약 거기서 비요른이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이다! 과잉!’ 미샤는 피식 웃으며 불안을 지워냈다. 그야 비요른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울 땐 그 누구보다 차가워지는 전사니까. 타 종족의 성지. 그것도 순혈 가문의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가족처럼 피로 이어진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그 많은 대가를 감수하고서 칼스타인가와 척을 지는 선택을 할 리가 없다. ‘응응, 말도 안 되지. 내가 뭐라고…….’ 미샤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왠지 인정하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시렸지만,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이제는 그녀도 그것을 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귀가 아플 정도로 흉포한 함성 소리에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인은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은 눈치지만……. 그와 붙어 지내다시피 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너는 분명 머리에 문제가 있군.” 저게,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는 뜻이라는걸! *** “미, 미쳤냥! 하, 하지 마라!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냥!” 미샤가 화들짝 놀라며 내 팔뚝을 잡더니,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변을 훑는다. 혹여 누가 또 이 소란을 들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안쓰러웠다. ‘꼭 초등학생 때의 날 보는 거 같네.’ 양보와 배려. 남의 감정을 우선해 꾸역꾸역 스스로를 지워가는 것. 나 역시 한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왜 그러냐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뭐, 뭔 소리냐 그게!!” 나는 경기를 일으키는 미샤의 팔을 떼어내며 말했다. “미샤, 가끔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으, 응……?” “왜 참나? 참아 봤자 결국 전부 남 좋은 일일 뿐인데.” “나, 남이 아니라 가족이당…….” 가족은 무슨. 이제 보니 남이 아니라 놈이라 해도 되겠구만.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가족이 네 인생보다 중요한가?” 미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기야 본인도 머리로는 알고 있겠지. 화목한 가정을 갈구하며 주기적으로 가문에 들르던 그 노력의 원천이 무엇에 불과한지는. “…….” 전부 미련일 뿐이다. 갖고 있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효율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감정. “대답해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서 멈추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의사를 확인했고, 미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대답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그냥 지켜만 봐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 하지만 저 사람을 해쳤다간—” 그래, 난리가 나겠지.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성향으로 추정되는 칼스타인 가주의 분노를 받아야 할 거다. 그러나……. “미샤 칼스타인, 내가 언제 못 지킬 말을 한 적 있나?” “……없었당.” “그래, 그러니까 날 믿고 있어라.” 무작정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게 아니다. 무지성 바바리안 모드는 상황을 봐가며 온 오프를 할 때 그 빛을 발하는 법. 터벅. 미샤를 뒤로하고서 걸음을 내디딘다. 사용인은 여전히 기고만장했다. 따라서. “둘이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것이오? 아무리 예의를 못 배워먹었다지만—” 덥썩, 녀석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다. “예의가 없는 건 너 아닌가?” “커, 커컥!” “칼스타인가의 사용인인 주제에 감히 주인도 몰라보고 방자하게 굴다니.” “그, 그건……!” 놈은 괴로워 보였다. 또한, 믿기지 않는단 눈빛도 지었다. 하긴 이게 꿈인가 싶겠지. 여기가 어두운 뒷골목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저택 대문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 상상이나 했겠어? “노, 놓아…… 컥!” 상상력이 부족한 놈이라 그럴까? “이, 이런 짓을 했다간…….” 이런 짓을 했다간 큰일 날 거라고? 피식. 그걸 아는 놈이라면 이런 짓 안 한다. 만약 했다면, 그건 다 생각이 있단 뜻이라 보는 편이 옳을 테고. 한데 이 간단한 이치도 모르다니. “넌, 역시 머리에 문제가 있군.” 주먹을 꽉 쥐고서 적당히 힘을 불어넣는다. 그야 죽였다간 암만 나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터. “걱정 마라. 대부분 때리면 고쳐지니까.” “으, 으읍!!” 뭐라 말하려는 놈의 목을 꼬옥 움켜쥐어 조용히 시킨 뒤에 때리기 적당한 부위를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 꿀밤을 놓듯, 손목 힘으로만 후려쳤다. 퍼억-! 고작 한 방으로 몸에 힘을 빼며 기절한 녀석. 나는 물건을 보듯 목을 잡은 채로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뭉개진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이 정도는 해야 앞으로 본보기가 되겠지. “……이제 어쩔 생각인 거냥? 아버지가 알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거의 체념한 기색으로 지켜보던 미샤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믿으라 해서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모양. “지켜보면 안다.” 나는 기절한 놈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서 저택 입구로 향했다. 정원을 지나치고 있자, 주변의 사용인들이 보였다. 잔디를 깎던가, 어딘가로 짐을 나르는 사람들. “……히익! 베로스 님에게 어서 소식을 전해라!” 시선이 집중되며 몇몇이 도망치듯 저택 안으로 향한다. 나는 그들을 따라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멈춰라, 바바리안.” 열댓 명의 수인에게 포위됐다. 온몸을 무장하고 흉흉한 기세를 지닌 전투 인력들. 내가 멈춰서자 대장으로 보이는 빡빡이가 입을 열었다. 마치 명령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미샤 칼스타인 님,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 바바리안이 누군지, 왜 정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브란테가 저 지경인 것인지.” 얘 이름이 브란테였구나. “어, 그게…….” “미샤, 설명할 필요 없다.” 나는 이제 쓸모를 다한 브란테를 놈들 사이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며 녀석을 받아냄과 동시. “너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인가!!” 저택이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수인들은 전부 멍한 눈빛이었다. 이게 뭔 상황인지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나는 너희 가주가 초대해서 이곳에 왔다. 근데 이놈은 나를 모자란 바바리안이라며 욕보였다!” 이어진 내 외침에 미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어, 그런 말을 했던가?” 얘도 참 사소한 걸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일부러 머리를 때렸으니 기억 못 하는 거라고 박박 우기면 그만인 것을. “거짓말 마라! 브란테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내 외침에 당황하기도 잠시. 빡빡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을 해왔다. 내가 보기엔 제 무덤을 파는 격이었다. 무지성 바바리안은 논리 공격에 면역이니까. “거짓말이라니, 너도 날 모욕하는 것인가?” 당장에라도 덤벼들 기세로 걸음을 내딛자, 빡빡이가 뒤로 물러선다. 전투가 두려워서는 아닌 거 같고. 아마 내가 가주의 손님이라는 게 걸리는 모양.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수인들이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중앙 계단과 이어진 2층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지난날 3층에서 만났던 미샤의 오빠놈. 그러니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듣기는 했었나? 사소한 건 놔두고 당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설마, 아버지가 부른다는 손님이 너였을 줄이야.” “오랜만이군.” “인사는 됐고,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지?” 오빠놈이 눈매를 좁히며 나를 노려본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멀쩡히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거, 눈빛 한번 살벌하기는. 지난번에 내가 목숨도 살려 줬구만.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새끼라니까.’ 나는 앞서 문지기 브란테에게 모욕을 받았던 일을 똑같이 반복해서 설명해 준 뒤, 추가로 다른 얘기까지 곁들여 주었다. “만약 나 한 명이었다면 참았을 거다. 하지만 이 정신 나간 놈은 대체 뭐란 말이냐? 가문에 빌붙어 사는 주제에, 감히 미샤까지 모욕하다니?” 기절한 브란테를 가리키며 외치자, 오빠놈의 이마에 주름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외부인이 있을 땐 삼가라 했건만.” 조금 어이가 없는 반응이었다. 급조한 얘기였는데, 그냥 그러려니 한다고? 씨발, 여기 생각보다 더 막장이었구나.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던 일인 게 틀림없다. 나는 치솟아 오르는 역겨움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다 알면서도 이걸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가문 내부의 일이다. 너에게 설명해 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만 각자 자리로 가보아라.” “예, 테일론 님.” 이내 오빠놈이 경비를 물리더니, 고개를 휙 돌려 다시 나를 응시했다. “비요른 얀델, 이번 일은 우리 쪽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니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자가 널 모욕했던 게 사실이라면 적당한 벌도 내리도록 하지. 그러니 이걸로 만족해라.” “만족이라…….”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피식 웃었다. 버릇없는 놈을 참교육 해주고. 더 나아가 내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많은 이 앞에서 각인시켜 주는 것. 원래는 여기까지가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역시 플랜B로 가야겠군.’ 나는 씨익 웃으며 오빠놈에게 다가갔다. “혹시 너도 머리에 문제가 있나?” 언제나 계획은 변하는 법이다. 129화 칼스타인 (3) 칼스타인가의 가주가 나를 저택에 초대했다. 들어 보니, 세 달인가 전부터 계속해서.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 떠올린 것은 이거였다. ‘호기심.’ 단지, 딸의 동료인 나를 만나 보고 싶었다. 미샤가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만나 보고 내가 못미덥다면, 딸을 놓아달라는 식의 전개도 가능하다고 봤다. 가문의 자제들 대부분이 인맥이 닿는 대형 클랜에서 편하게 탐험가 활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내가 좀만 더 참으면 된당.] 알고 보니 미샤의 처지는 여전했다. 아비란 작자는 미샤가 각성한 사실을 비밀로 부쳤고, 가문 내 미샤의 위치를 개선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이 저택으로부터 음습한 악의를 느꼈다. 미샤뿐만 아니라, 나에게까지 향하던 악의. ‘이 지경인 걸 알면서 굳이 날 이곳으로 불렀다라…….’ 가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수단으로 무엇을 택했는지, 너무도 선명하게 와닿았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미친 새끼였군.’ 가주는 내게 원하는 게 있다. 그러나 정중하게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대신,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아마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계층군주에게서도 동료를 버리지 않은 전사. 어쩌면 그 동료와 연인 관계일지도 모르는 바바리안. 세간에 그렇게 알려진 내가 이 꼴을 본다면, 컨트롤하기 수월하겠다 싶었을 터였다. 미샤의 현 처지를 뒤바꿀 수 있는 건 가주뿐이었으니까. 다만, 이를 토대로 나는 판단했다. ‘딸까지 서슴없이 이용하는 날먹충 새끼라니, 한번 얕보이면 답도 없겠군.’ 플랜A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끝내 봤자, 그냥 평범한 바바리안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기에……. 터벅.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오빠놈을 응시한다. 놈은 나를 보면서도 전혀 겁 먹지 않았다. 그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을 뿐.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놈이군.” 놈은 내가 다른 걸 바라고 땡강을 부리는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뭐, 따져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겠다마는. “비, 비요른……! 그건 안 된당!!” 미샤가 황급히 내 팔목을 잡았고, 나는 그대로 멈추었다. 그야 정말로 이놈을 팰 생각은 없었으니까. 놈은 저택의 사용인이 아닌, 직계 혈족 중 하나. 무지성으로 팼다간 도리어 약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베헬—라아아아아아!!” 저택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함성을 내지른다. 그런 내 행동에 오빠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신 나간 놈.” 놈이 뭐라 하건, 내 외침은 기폭제가 되어 저택의 사람을 불러모았다. 1층과 이어진 복도 끄트머리에서 하던 일마저 내려놓고 이쪽을 구경하는 사용인들. 슬그머니 2층 쪽을 바라보니 양질의 생활복을 걸친 젊은 남녀들이 눈에 띈다. ‘미샤의 형제인가?’ 모르겠지만, 그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튼 관중 겸 증인은 이만하면 되겠고.’ 무대도 마련이 됐겠다, 슬슬 무지성 바바리안 모드를 끝내고 오빠놈에게 말을 걸었다. “탈론 칼스타인.” “탈론이 아니라 테일론이다.” “남자답지 못하게 사소한 거에 신경을 쓰는군.” “……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와 사내다움을 논하고 싶지는 않은지, 놈이 본론을 물어온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미샤가 가문 내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이유가 뭐냐?” “아까도 말했듯이 그건 가문의 일—” “미샤가 반푼이라서 그런 건가? 직계 혈족이면서 영혼수와 계약도 못 한?” 내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놈이 피식 웃으며 미샤를 보았다. 그런 얘기까지 이놈에게 낱낱이 털어놨냐는 멸시의 시선이었다. “알고 있다니 숨길 것도 없겠군. 그래, 네 말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 가문 사정엔 그만 관심을 거둬라.” 신경 끄라는 놈의 말은 나름 합당했다. 우리 바바리안 외에는 전부 핏줄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으니까. 이들이 미샤를 남 취급하는 것도 당연했다. 가주의 피를 물려받았다면, 여태껏 영혼수와 계약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정말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거다. 네 번째 부인이었던 얘 엄마도 미샤 말고는 자식이 없었던 모양이고. 하지만……. “만약 그게 너희들 오해였다면 어쩔 거냐?” 진실은 중요치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이미 미샤가 각성을 했고, 이 사실을 유용한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단 것이니. “만약 미샤가 영혼수와 계약한다면, 지금까지 저지른 짓을 사과하고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 건가?” “스물다섯이 됐는데,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대답해라. 이것만 대답해 주면 나도 더는 난리를 치지 않겠다.” 오빠놈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사과라면 얼마든지 해 주지.”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것도 마찬가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여기는지 고민 한 번 안 하고 대답을 하는 오빠놈. 나는 씨익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 “됐다니……?” 내 태도에 놈이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야 이제 내 역할은 끝났으니까. “미샤, 보여 줘라.” “어, 어……?” 갑작스레 화제의 중심이 되자, 당황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는 미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샤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나 했더니, 역시 예상대로 가주가 입막음이라도 해 둔 모양. 하지만 그렇기에 미샤가 힘을 내줘야 한다. 모두 앞에서 이 사실을 밝혀 버리는 건, 가주의 패가 하나 사라진다는 게 될 테니까. “걱정 마라.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요, 용서하지 않을 거당.” “그럼 뭐 어떤가. 잘못했다고 해라. 원래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니까.” “비요른, 어쩌면 너까지 잘못될 수도 있당.” “그러라지. 별로 안 무섭다.” 얘한테나 하늘 같은 아빠지, 나한텐 그냥 수인족 대장일 뿐이다. 그것도 다섯으로 나뉘어진. “대체 뭐가 그리 무섭나? 가족이 인생의 전부인 것도 아닌데. 난 그런 거 없이도 잘 살아왔다.” 이내 내가 귀를 후비며 말하자, 미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건 네가! 아니, 됐당. 이게 뭔 소용이냥?” “그래, 사소한 건 그냥 대충 무시해라.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 “으으, 나도 이제 모르겠당. 뭐가 맞는 건지.” 오케이, 이쯤 하면 설득은 다 된 거 같고. “미샤 칼스타인, 한 번쯤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이번엔 도와줄 동료도 옆에 있지 않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말미의 시간이 흘렀고, 이내 미샤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 상황이 제법 흥미로웠을까? 그 많은 이가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꿀꺽. 미샤가 침을 삼켰다. 그리고 결심을 되새기듯 입을 열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차가운 음성이 드넓은 주택을 가득 채웠다. 이에 미샤가 돌처럼 굳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 앞에 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다들 물러가라.” 사내의 한마디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어느샌가 짓눌리듯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사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소개 한 마디 없었으나, 나는 이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이놈이 그 미친 새끼란 말이지.’ 알브레니브 칼스타인. 대를 이어 적묘족의 부족장 자리를 역임한 칼스타인가의 가주.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나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맙다. 칼스타인.” 모두가 사라진 1층 로비 한복판에서 우리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눴다. “하하,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친구로군?” 놈이 사람 좋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악수 대신 아랫것을 대하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캐릭터가 [악몽의 군주]에 의해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천적을 만난 것처럼 몸이 굳는다. 또한, 생사의 경계를 오갈 때마다 느꼈던 뇌에서 저릿한 감각이 피어난다. 미샤가 왜 그토록 아버지를 두려워했는지, 처음으로 알 것도 같았다. 그러던 때였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한 건가? 버릇 없이.” 가주가 웃음기를 싹 거둬 내고 속삭인다. 참 개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이게 스킬의 힘이란 걸 알고 있는데, 몸이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 흡사 감각 기관이 망가지기라도 한 기분.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캐릭터의 투쟁심이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캐릭터의 정신력이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공포]가 상태가 해제됩니다.」 후, 씨바 드디어 풀렸네. “이보게—” 오만한 목소리로 뭐라 지껄이는 놈의 팔을 즉시 어깨에서 떼어냈다. “……?”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찌푸려지는 미간. 하긴, 이 상황을 예상했으면 방금처럼 병신 같은 말은 하지도 않았겠지. “왜 남의 몸을 만지나?” 나는 잡고 있던 팔을 옆으로 휙 던지며 말했다. “거, 버릇 없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다. *** “재밌군.”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 가주가 말했다. 입도 눈도 웃지 않으면서 저런 소리를 하니 소름이 끼쳤지만……. 기세 싸움에서는 질 수 없는 법. “취향 한번 특이하군. 난 하나도 재미가 없는데.” 애써 태연히 화답하며 석상처럼 굳은 미샤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에 가주의 시선도 미샤에게 옮겨졌다. “아, 아버지…….” “설마, 내게 반기를 들 줄은 몰랐거늘.” “그, 그게 아니라…….” “됐다, 어차피 넌 중요치 않으니.” 뭐라 변명하려던 미샤의 말을 끊고 나를 응시하는 가주. “원래 점심 만찬이라도 함께 나눈 뒤에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네.” 얘기를 나누긴 개뿔. 거기서 미샤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내게 보여 줄 계획이었던 거면서. 대꾸 없이 빤히 바라보자 가주가 말을 이었다. “거절하지.” “뭐?”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일그러진 표정을 내짓는 가주. 나는 그냥 노빠꾸로 말했다. “내가 왜 기다려야 하나?” 시간을 주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일단 미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의 계획에 없었을 테니까. 일단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부를 셈이겠지.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해라.” “……아무리 바바리안이라도, 이건 좀 예의가 없군.” “그 바바리안을 부른 건 너다, 수인.” 이름도, 부족장 혹은 가주란 지위도 아닌 수인이라 불릴 줄은 예상치 못했을까? 가주의 표정이 싹 굳어지더니,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이게 현실에서도 되는 거였어?’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여우 가면보다는 훨씬 약했다. 하긴 거긴 영적 세계였으니까. 출력에서부터가 차이가 나겠지.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귀를 후비자 가주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내가 듣기엔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냐고?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있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너는 별로 두렵지 않은 거 같다.” 이건 진심이다. 가주가 왕년에 8층 탐험가였다는 것? 그래서 사실 나와 붙으면 내가 개박살 날 거라는 것?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날 죽이면 우리 부족장도 가만 안 있을 텐데. “네가 날 죽일 수 있기는 한가?” 나는 그냥 이번에도 대놓고 물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나를 죽인다고? 그것도 최근 바바리안족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인 나를? 초대받아서 간 수인의 성지 한복판에서? 그 즉시, 십 년 전에 있었던 요정과의 전쟁이 반복되는 거다. 바바리안은 그런 종족이니까. “뭐? 하하하하핫!!” 가주가 애써 쿨한 척 웃었지만, 그 안에 깊은 빡침이 내게는 보였다. 하긴 답답하겠지. 체면상 인정하긴 싫은데, 일단 내 말이 사실이기는 하니까. 그냥 쪼개면서 넘기는 거다. “일이 틀어지는 것도 당연했군. 설마 이렇게 영악한 놈이었을 줄이야.” “칭찬은 고맙지만, 슬슬 배가 고파질 거 같으니 대답해라. 나한테 할 말이 뭐지?” 가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나를 바라만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난 네가 그 물건을 사용한 걸 알고 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서리혼령 가락지. 역시 이것 때문에 이 지랄을 벌인 거였구나. 130화 칼스타인 (4) 가주가 진정으로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 이 부분은 계속해서 의문이었다.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확신할 단계는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플랜B. 모두 앞에서 커밍아웃하는 계획을 짰다. 현 상황에서 가주가 가장 반기지 않을 일이니까. ‘암, 원래 견제는 상대가 하려는 걸 못하게 하는 거랬지.’ 가주는 미샤가 각성에 성공한 일을 내외부에 비밀로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플랜B가 성사되기 전에 호다닥 얼굴을 내비쳤다. 그리고 바바리안식 대화를 이어간 결과. 마침내 포장되지 않은 본심을 들을 수 있었다. “난 네가 그 물건을 사용한 걸 알고 있다.” 서리혼령 가락지. 히든피스를 발동 시, 빙하마수 스카디아와 확정적으로 계약을 맺을 수 있게 해 주는 넘버스 아이템. ‘부족장쯤 되면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애초에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경우의 수였다. ‘그 물건’을 썼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미샤를 남의 자식 취급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다만, 가주 또한 확신의 단계는 아니다. “그 물건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나이 스물다섯의 적묘족 수인. 이 조건으로 스카디아와 자연 계약하게 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울 테지만……. 가까운 것과 0은 엄연히 다르다. “흐음.” 그러니까 이렇게 떠보는 거겠지. 심증은 있어도 확증은 없으니까. “자네, 연기가 어설프군?” 어설프기는 개뿔. 지금까지 몇 명을 속여넘겼는데. “뭐라는 거냐. 알아듣게 말해라.” “빙하마수 스카디아와 계약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물건’을 말하는 거네. 절대 모른다고는 못할 텐데?”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 말라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가주. 바바리안이 병신으로 보이나? “그런 물건이 있다고? 그럼 왜 미샤에게는 주지 않았던 거냐?” “아주 가치 있는 물건이니까. 내 자식도 아닌 자에게 줄 리 없지 않나.” 그 말을 듣자마자 무심코 미샤부터 확인하게 됐다. 예상대로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다만, 달래주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바리안 연기를 이어 나갔다. “가치 있는 물건? 그럼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 물건을 어떻게 내가 갖고 있을 수 있지?” “글쎄, 어쩌면 자네가 자주 가던 그 마탑에서 우연히 얻었을지도 모르지.” 뭐야, 씨발. 진짜 다 알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래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아예 가주를 노려보기로 했다. “……내 뒷조사까지 한 건가?” 단순히 선 넘는 행동에 빡친 바바리안. 이거면 방금 행동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말했지 않나. 연기가 어설프다고.” 지랄, 나는 내 연기력을 믿는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으며 짜증 난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 그 물건이 뭔데? 뭐기에, 자꾸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가?” “그건 말해 줄 수 없네.” “뭐?” “자꾸 자네가 아니라고 하지 않은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물건이니까. 만약 인정한다면 그땐 나도 말해 주겠네.” 응? 뭐지? 가주의 말에는 모순이 없었다. 그냥 떠볼 뿐이라면, 그 물건의 이름까지 말해 주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니까. 하지만……. ‘대체 왜 이상한 거지?’ 위화감이 물씬 피어난다. 수도 없이 날 떠보려 했던 씹새끼들을 물리친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물건이 진짜 있기는 한 거냐? 사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따라서 나는 다시금 되물었다. 그리고 모든 신경을 쏟아부어 가주를 유심히 관찰했다. 찰나의 망설임, 안면 근육의 변화. 시선은 어디를 향하며 목소리는 어떠한가. “물론일세. 다른 목적이 뭐가 있겠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 짧은 말을 뱉는 모든 순간순간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가주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 그래 이거였구나.’ 덕분에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떠보는 건 다른 식으로도 가능했을 텐데. “솔직히 말해 주게. 이 아이가 걱정돼서 입을 다무는 거라면,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어째서 가주는 이런 모순적인 말까지 하는가. 모두 설명이 된다. 미샤가 아니라 ‘그 물건’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어쩐지 계속 ‘그 물건’이라고만 하더라니.’ 이윽고 나는 확신했다. 가주는 서리혼령 가락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딱 절반만큼만. ‘그런 물건이 있는 건 알지만, 정작 그 물건이 뭔지는 모른다는 거군.’ 드디어 상황이 머리에 그려진다. 가주는 나를 저택에 초대했다. 미샤가 친딸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자식에게 그리 열성적인 놈도 아닌 듯 보였으니까. 본 목적은 따로 있었다. 확정적으로 영혼수와 계약할 수 있는 물건. 만에 하나 정말로 내가 이 물건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면, 그걸 알아내고자 했다. 그야 수인에겐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중대한 정보였을 테니까. 그래서 내 아킬레스건이라 판단한 미샤의 비참한 처지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거래 혹은 협박 목적으로 쓸 생각이었겠지. 따라서……. “전사의 명예를 걸고, 나는 그런 물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아껴 왔던 회심의 수를 던진다. 내가 선정한 바바리안이 사기캐인 이유 1위에 빛나는, 바로 그 전사의 맹세. “…….” 가주의 눈빛에 당혹의 감정이 깊게 새겨진다. 이를 확인한 나는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마지막 한 방까지 욱여넣었다. “하지만 그 물건이 뭔지 반드시 알아오겠다. 그러니 기다려라.” 분노를 참듯이 읊조리며, 나는 가주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의 눈빛엔 진한 실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거, 연기는 지가 제일 못하는구만. *** “오늘 나눈 대화는 전부 잊어 주게.” 가주의 통보를 끝으로 칼스타인가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미샤는 아까부터 멍한 표정이었고,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게 있었으니까. ‘후, 그래도 최악까지는 안 갔네.’ 칼스타인가의 초대를 들었을 때, 내가 흔쾌히 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1. 미샤의 탈주. 만약 가주가 미샤를 대형 클랜에 넣으려는 거였다면 막아야 했다. 에르웬, 아이나르에 이어 겨우겨우 키워놓은 미샤까지 떠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닌가. 2. 악령 의심 방지. 미샤의 각성에 얽힌 비밀을 가주가 안다면, 제대로 둘러대기 위해서라도 한번 방문할 필요가 있었다. 설마 반만 알고서 그것 때문에 날 불렀을 줄은 몰랐지만. 끼이이익. 정원을 지나치자, 우리를 알아본 문지기가 대문을 활짝 연다. 아까 그 빡빡이는 치료받고 쉬러 갔는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저쪽은 나를 알아봤을까? “아, 안녕히 가십시오.” 눈이 마주치자 짧게 목례하며 배웅 역할까지 해 준다. 미샤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왔을 그 저택. 관리된 정원은 화사했고, 분수대는 화려하게 물줄기를 쏘아내며 반짝였다. 저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묵고 있는 여관과 다르게 건축물은 고풍스러웠으며 웅장한 멋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을 둘러싼 음습한 악의는 변함없었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때처럼, 몬스터가 가득한 던전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 새삼 실감이 됐다. 그래, 얘는 여기서 살아남았던 거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다.” 등을 툭 치며 말하자, 미샤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다. 고생은 네가 다 했지…….” 음,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제일 힘들었을 건 너 아니냐.” 나는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등을 쳤다. “악! 아프잖냥!” 그래, 이제 좀 평소 같네. “정신이 들었으면 이제 앞장서라. 나는 돌아가는 길 같은 거 모른다.” “하, 진짜……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냥?” “길을 모르는 곳에 안 왔겠지.” “……맞넹.”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수인의 거리를 걸었다. 이곳저곳에서 화목한 모습이 보였다. “아빠, 저기 아까 그 바바리안이에요!”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오듯 돌아다니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수인들. “비요른, 우리도 저거 먹장.” “웬일로 밖에서 사 먹냐?” “으음, 뭐…… 오늘 고생했으니까?” 이내 미샤와 함께 노점상에 들려 군것질을 사와 광장 벤치에 앉았다. 손에 들고 먹으면서 이동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있잔냥, 비요른.” “말해라.” “왜 너는 한 번도 안 물어보냥?” “뭐를?” 오가는 수인들을 보며 조용히 쉬기도 잠시. 미샤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해 왔다. “너는 궁금하지도 않냥?” “그러니까 뭐가.” “그…… 내가 진짜, 우리 아버지 자식이 맞는지…….”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거였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미샤를 바라봤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정작 질문을 한 미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안 궁금하다.” “정말? 하나도?”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와, 너 정말 나한테 관심이 없구낭…….” 뭐래, 얘는. 나는 등짝을 치려다가 멈칫했다. ‘아프다고 하지 말랬지.’ 만화처럼 머리라도 헝클어트려 볼까 싶었지만, 오글거려서 그만뒀다. 갈 곳을 잃고 다시 무릎 위로 올라온 손. 나도 딴 곳을 바라보며 미샤에게 말했다. 명색이 동료인데 오해는 풀어야지 않겠는가.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런 거다.” “응?” “7등급 탐험가 미샤 칼스타인. 그게 너지 않나. 네 부모가 누구인지는 관계없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와아…….” 미샤가 신기한 말을 들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런 말은 어떻게 생각한 거냥?” “……싸우자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제 쉴 만큼 쉬었겠다 슬슬 일어나려는데 미샤가 내 소매를 잡았다. “비요른.” “왜?” “이거 비밀인데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거당?” “됐고, 빨리 말해라.” “나…… 사실 반푼이 맞당. 엄마가 말해 줬거든. 돌아가시기 전에. 정말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아, 어, 음……. 뭐라 반응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그렇군.” “뭐야? 왜 안 놀라는 거냥?” 그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나도 몰랐지만.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으이구, 이 감정도 없는 바바리안앙!” 이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지를 떠나 도시에 들어섰고, 공용 승강장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다만 표를 끊고 마차를 기다리던 때. “아, 맞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냥? 아까 아버지 앞에서 맹세를 했었잖냥. 그거 분명…….” 미샤가 말꼬리를 흐린다.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얘가 너무 편해져서인지, 아니면 가주 앞이라 생각할 게 많아서였는지 생각도 못 했다. “그거…… 거짓말이었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와중에 뭘 숨기겠는가. 그저 잘 수습하는 수밖에. “그래, 거짓말이었다. 전사의 명예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그게 정말이냥?” “그래.” 미샤는 이후로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함으로 가득한 시간이 이어졌다. “…….” “…….”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숨 막힐 바에는 내가 뭐라도 먼저 말을 걸어 봐야겠다 싶던 순간이었다. “아!” 미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영문 모를 소리를 뱉더니. “나, 집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다녀오겠당!” “……뭐? 이제 곧 마차가 오는—” “먼저 타고 가랑!” 쏜살같이 사라졌다. ……뭐지? 설마, 나 좆된 건가? *** 스륵, 스륵. 알브레니브 칼스타인. 서재에 앉은 그는 조금은 급한 손짓으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찾던 부분을 발견했다. [No……] ……………………………시 빙하마수 스카디아와 계약을 할 수 있다. 완전히 찢겨 나간 탓에 오직 하나의 문장만을 읽을 수 있는 설명문. 모든 의심은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 [유물 총해록 VI] 이 책에는 수백 가지 넘버스 아이템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설명이 절대 틀리지 않는단 것이다. 총해록이라는 책은 그런 책이니까.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진리의 서. ‘만약 이걸 몰랐다면,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을.’ 그 아이가 각성을 했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기뻤다. 이제 가문의 치부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빙하마수 스카디아구나.] 계약한 영혼수가 문제였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어딘가 모르게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인나 그 아이를 떠보았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 아이는, 자연스레 각성한 것이 아니다. 예상이 맞았다면 도움을 받았다. 아마도 비요른 얀델이라는 그 바바리안에게. [비, 비요른과 관련된 일은 말할 수 없어요. 수, 수호신한테 맹세를 해서…….] 다만 그 아이는 수호신의 맹세를 거론하며 해당 대화를 거부했다. 강제성이란 존재치 않으며, 전통이 희미해진 작금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그것일진대.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그런 변명까지 해가며 거짓말을 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답변은 듣기 어려울 터. [차라리 그 바바리안을 캐보는 게 낫겠군.] 그는 추적의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의심스러운 정황이 계속 드러났다. 그 바바리안은 알테미온 학파의 마법사와 친했다. 아루아 레이븐. 공교롭게도 그가 기억하는 인물이었다. 또다른 ‘총해록’을 얻기 위해서 돌아다니다 만난 경쟁자였으니까. 그때 한 가지 가설이 생겼다. 만약 그 마법사가 ‘유물 총해록’을 얻었다면? 그래서 그걸 보고 바바리안에게 알려 줬다면? [훨씬 더 말이 되는군.] 당돌했던 마법사 아가씨보다는 바바리안을 노리기로 했다. 조사 결과, 거의 부부처럼 지내는 관계인 듯하니 그 아이를 이용하면 한결 편할 듯했다. 하지만……. ‘정말로 자연 각성이었을 줄이야.’ 맹세 같은 것에 믿은 게 아니다. 그 바바리안은 연기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었고, 그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재밌군. 그 하찮은 피에도 재능이 있었다니.’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보좌관 베로스였다. “미샤 칼스타인이 가주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어서 들여보내라.” 잠시 기다리자, 보좌관이 떠나고 그 아이가 들어왔다. “저…… 아까 못 한 말이 있어서—” “아,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약속은 지킬 테니까. 이제 그 누구도 널 우리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은 더 기뻐할 줄 알았건만. 그는 내친김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너는 내 딸이란 소리다.” 결핍을 느끼고, 애증을 느껴오던 그 아이가 가장 바라고 바랐을 말. 하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무런 말도 없느냐?” “그딴 걸 위해서 온 게 아니니까……!” “뭐?” 불손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당황해 버렸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변화는. 적응할 새도 없이 그 아이가 정면으로 자신을 마주 봤다. “아버지. 아니, 아버지도 아니징. 그거 아냥? 사실 우린 피 한 방울 안 섞였다는걸.” “뭐?”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몰랐던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줄 전혀 예상치 못해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해 줬당. 사실 난 칼스타인가의 핏줄이 아니라고.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 왔당. 당신이 밉지만…… 불쌍하기도 하니까.” 정말 단 한 번도 상상 못 한 모습이어서일까? 저 당돌한 말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그는 미샤의 친부가 누군지 알고 있다. 미궁에서 죽으면 전부 해결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널 정말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 생각이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이 주어졌는데, 왜 이 아이는 그것을 거부하는가. “왜지? 왜 기회를 제 손으로 버리는 것이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 아이가 등을 휙 돌려 문으로 향했다. 다만 마지막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고개만 빼꼼 돌려 그에게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거든!”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131화 팀 플레이 (1) 칼스타인가를 방문한 이후, 열흘이 흘렀다. 첫날은 미샤가 혹시 아버지한테 전부 일러 바쳤을까 봐 걱정도 됐지만……. [뭐어? 미쳤냥! 이 바바리안노망!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는 거냥!!] [그럼 가서 뭘 했던 건데?] [그건……! 넌 몰라도 된당!!] 괜한 불안이었다. 왜 비밀로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런 종류의 일이 없었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팀 내에 시한폭탄이 무려 두 개나 되지 않나. [드왈키, 얘기 좀 하지.] 칼스타인가에서 돌아온 다음 날, 곧바로 드왈키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에둘러서 말했다. [뭐? 사실이오? 미샤 양이 뚱뚱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래, 지난번에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그렇군. 말해 줘서 고맙소. 조, 조급해하다 실수를 할 뻔했구려.] 참고로 그 대화 이후 드왈키는 안주를 잔뜩 시켜서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욱여넣었다. 이로써 하나는 해결이었다. ‘어느 정도 살집이 붙기 전까지 고백은 하지 않겠지.’ 적어도 한두 달은 벌었다 봐도 무방하다. 드왈키 성격상 어지간히 살집이 오르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못할 테니까. 살집이 올랐을 땐, 미샤와 내가 팀에서 빠질 때쯤일 거고. ‘이러니까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얘 멘탈이 단단하면 또 모르겠지만, 만약 미샤한테 고백을 했다가 차이기라도 한다면? 미궁에서까지 정신을 못 차릴 거다. 이는 팀에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행위. ‘어, 근데 왜 나는 차인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거지?’ 돌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에 쌓인 데이터는 가끔 무엇보다 정확한 예측을 할 때가 있는 법이니. 아무튼 다음은 로트밀러였다. [조심하세요. 아버지가 그 로트밀러라는 사람한테 뭔가 수작을 부렸을 테니까.] 지역장 딸내미, 줄리안 어반스. 그 여자의 말대로 로트밀러가 지역장과 접촉했다면, 불온한 대화가 오갔을 확률이 높다. 지역장과 나는 악연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왜 몇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는 좀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의심하는 티를 내면 안 돼.’ 로트밀러의 경우, 드왈키와 다르게 시일을 두고서 조심스럽게 사안에 접근했다. 이 아저씨는 무섭거든. 화내는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지만……. 아니, 그래서 더 무섭다. 원래 이런 타입이 한번 틀어지면 그냥 끝을 보는 법이니까. [그럼 1층은 시작 지점에 따라 가장 가까운 곳을 목적지로 삼도록 하겠소.] [하하, 결혼이라니, 자네도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진정 한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진 가정을 이루지 않을 생각일세.] [자네가 안쪽에 앉게. 복도 쪽은 몸집이 커서 사람들과 자꾸 부딪칠 테니.] 정기 회담은 물론 단순 친목용 술자리에서도 계속해서 로트밀러를 관찰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평소처럼 말이 없었고, 진중했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것도 여전했다. ‘하, 이거 진짜 골치 아프네.’ 줄리안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로트밀러가 내 뒤통수를 치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의심을 하고 있으면 죄책감마저 피어날 정도다. 그도 그럴 게, 몇 달간 고락을 함께했다. 한데 외부인의 말 한마디에 휘둘려 믿지 못하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겠지.’ 곱씹을수록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과연 로트밀러는 그날 탐험가 길드에서 지역장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 ‘먼저 그 얘기를 말해준다면, 나도 미련 없이 의심을 지웠을 텐데.’ 로트밀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그를 따로 불러내어 대화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내일이면 미궁이 열린다. 그렇기에, 부딪친 술잔을 단번에 털어 넣고서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로트밀러. 지난번에 탐험가 길드에 갔었던 거, 무슨 일 때문이었던 거냐?”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로트밀러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짚이던 게 있었을까? 역시 뭔가 일이 있기는 했었던 거구나. “길드에 아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짧게 답한 뒤, 첫 질문의 대답을 마저 요구했다. 로트밀러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불러서 가 봤더니 방에 제7 지역장이 있었네. 나보고 자네를 배신하라며 보상을 제시하더군.” “그래서?” “못 들은 거로 하겠다고 말하며 나왔네. 어때, 대답이 됐는가?” 내색치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로트밀러는 내 질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감수하고서 재차 물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내게 말하지 않은 건가?” “말했지 않나. 못 들은 거로 하겠다 말했다고. 게다가 자네에게 말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지겠다 싶었네.” “그렇군. 대답해 줘서 고맙다.” 이를 끝으로 대화는 마무리 지어졌다. 더 몰아붙였다간 네 말을 못 믿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로트밀러의 진의가 뭐든지 간에 현명한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변하는 것도 없을 테고.’ 탐색꾼이 없이 미궁에 들어갈 수는 없다. 새로운 사람을 구한다는 선택지? 그쪽도 리스크가 있는 건 매한가지다. 길드를 통하지 않는다면 실력 있는 탐색꾼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한마디로 지역장이 이상한 놈을 팀에 끼워 넣기 딱 좋은 환경인 셈. 애초에 난쟁이놈이나 드왈키가 동의를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로트밀러가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이 거짓말인 거 같지도 않고. 이내 나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밤에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약속 장소에서 보지.” 변하는 건 없다. 이번 탐사에는 로트밀러도 함께한다. *** 다음 날 오후. 다시 말해, 미궁이 열리기까지 7시간가량 남은 시점. “아저씨, 그럼 다녀와서 찾아올게요! 꼭 건강하게 돌아오셔야 해요!” “그래, 너도 열심히 해라.” 아침에 언니와 결속 마법을 맺고서부터 쭉 내 숙소에서 노가리를 까던 에르웬이 떠났다. 그리고 때마침 미샤가 도착했다. “뭐야, 쟤가 왜 여기서 나오냥?” “인사차 들렀다는군. 어차피 결속 마법만 받고 나면 할 것도 없다면서.” “으음…….” “아무튼 시간 맞춰 잘 왔다.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얼마 전에 구입한 알람 시계에 타이머를 맞춰 두고서 미샤와 함께 수면을 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비요른, 일어나랑.” 우리는 간단하게 끼니만 때우고서 미리 정리해 둔 짐을 챙겨 나왔다. 조금 일찍 와서 그런지 약속 장소엔 아직 아무도 없었다. “흠, 둘은 아직인가?” 늘 그렇듯 정시가 되자 로트밀러가 도착했다. “응. 드왈키랑 히쿠로드는 좀 늦는가 보당.” “……새삼스럽지도 않다.” 저 두 놈은 일찍 오거나 늦게 오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우리들은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러던 때였다. “어, 비요른! 저기 봐라!” 미샤가 가리킨 곳을 확인하니 막 성인식을 끝낸 어린 전사들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따라서 나는 빠르게 다가갔다. 그야 이제 안 만나고 가면 서운할 정도거든. “길을 잃은 건가? 그렇다면 저기 탐험가처럼 보이는 자들을 따라가면 된다.” “넌 누군데, 그런 당연한 말을 하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뭐! 작은 발칸! 만나서 영광이다!” 일단 이름을 밝힌 뒤에 나는 물었다. “근데 당연한 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설마 길을 잃은 게 아닌 건가?” “물론이다! 성지에서 배운 대로 탐험가들을 따라만 가면 되는데 왜 길을 잃나?” “성지에서 그렇게 가르쳤다고? 그 이상한 지도를 보여 주고서 외우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지도? 우린 지도 같은 거 못 본다!” 어린 전사의 대답에 나는 멍해졌다. 이건 대체 뭘까? 그사이에 교육 방식이 달라지기라도 한 건가? 뭐,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지도를 외워서 가라는 것보다야 훨씬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니까. 다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내 얘기나 좀 듣다 가라.” “얘기?” “그래 도움이 될 얘기들이다.” 나는 예전 기수들에게도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인간을 조심하라고?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우리 심장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나.” 이 아기 바바리안 무리는 지금까지와 명백히 달랐다. 내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무슨 그런 당연한 얘기를 굳이 하냐는 듯한 반응. “와…… 바바리안이 진화했당.” 미샤도 저러는 걸 보니, 나만 이상하게 느낀 건 아닌 모양. 그럼 어째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성지에서 그걸 알려 준 사람이 누구였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고, 그대로 멍해졌다. “타르손의 아들 카론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아래에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만나서 영광이었다!”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아기 바바리안들은 어서 미궁에 들어가고 싶다며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기다리던 이인방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 늦어서 미안하오! 많이 기다리셨소?” “하하핫! 용서해 주게, 드왈키 이 친구가 배탈이 났지 뭔가!” “무, 무,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시오!” “거, 자네도 참. 부끄러울 게 어디 있나? 우리끼리인데.” “됐고, 우리도 어서 출발하지.” 이인방이 무려 20분이나 늦어 버렸기에 우리는 서둘러 차원광장으로 향했다. 포탈은 이미 개방된 상태. “자자, 그럼 가보세!” 드왈키를 통해 결속 마법까지 끝마친 우리들은 미궁에 들어섰다.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영롱한 빛이 감도는 수정동굴. 지난달에는 버그를 이용해 스킵했던지라, 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으나, 여유롭게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그야 이번엔 스피드런을 해 보기로 했거든. 로트밀러의 요구로. [자네들만 허락해 준다면,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소. 아마 공적치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내가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가 궁금하오.] 평소 탐사 계획에 있어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던 그였던 만큼, 모든 일행이 만장일치로 그러자고 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소.” 눈 뜨기 무섭게 벽이나 지면을 매만지며 현재 위치를 파악한 그가 곧바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보를 하듯 뛰기 시작했다. ‘실제로 해보니까 꽤 재밌네.’ 최전방에 로트밀러가 서서 길을 찾고. 그 바로 뒤에 미샤가 잡몹을 정리한다. 오직 이동만을 위한 진형도 참신했을뿐더러, 스타트와 동시에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니 이전엔 볼 수 없던 광경들이 보인다. “와, 저기도 뛰고 있당!”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탈을 찾기 위해 동굴 속을 내달리는 탐험가들. 느긋하게 움직였을 땐 보는 것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1층에서 왜 시간 단축이 어려운지 알겠네.’ 새로 깨닫는 사실도 있었다. 1층 동굴은 급커브 구간이 많다. 그래서 전력을 다해 뛰기가 어렵다. 즉, 일정 수준만 넘는다면 이동 속도는 모든 탐험가가 비슷한 셈. 탐색꾼의 능력이 더욱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음, 아니면 팀원들의 체력이던가. “후우, 후우…….”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체력을 갖게 된 우리지만, 그럼에도 몇 시간 단위로 구보를 하니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레 일행 사이에서 대화가 사라졌다. “히쿠로드, 괜찮나?” “괜찮네.” 민첩 및 지구력이 달리는 난쟁이놈은 거의 한계처럼 보였으나, 약한 소리를 뱉지 않았다. 하긴, 저런 로트밀러 앞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겠어. “이쪽이오.”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단 말이 사실이었는지, 로트밀러는 수 시간이 넘도록 집중력을 잃지 않고 길을 찾아냈다. 좋게 말하면 정열. 나쁘게 말하면 광기처럼 보일 정도의 열의. ‘이 아저씨가 이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나?’ 처음 보는 면모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06 : 12] 무려 6시간 만에 포탈에 도착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포탈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개방된 상태였다. “와, 이렇게 빨리 올 수도 있는 거였구낭.” 미샤가 감탄사를 뱉었으나, 나와 난쟁이놈은 로트밀러의 표정부터 살폈다. “제기랄! 왜 나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132화 팀 플레이 (2) 북해의 오로라처럼 일렁이는 포탈. 이를 앞에 두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미샤도 난쟁이놈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살 봤다. 그만큼 낯설었다. 로트밀러가 짓고 있는 지금 이 표정은. 까드득. 치가 떨린다는 표현처럼, 로트밀러의 굳게 다문 입가가 바르르 떨린다. 처음으로 그의 바닥을 본 기분이었다. 자제력과 올곧은 향상심에 의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왔을 그것. 열등감.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소.” 이내 침묵을 깨고 로트밀러가 입을 열었다. “세 팀이 먼저 지나갔소. 가장 앞선 팀이라고 해도 시간으로 치면 고작 30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지. 어서 따라간다면 2층에선 앞지를 수 있을지도 모르오.” 얼핏 들으면 논리정연하게 들리는 말. 다만 요목조목 따져 보면 모순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문제는, 이를 알면서도 모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겠지. “아, 아! 그러면 되겠넹. 나, 나도 이렇게 일찍 왔는데 그냥 포기하긴 조금 아쉬웠당.” “하, 하하핫! 그, 그래, 나만 아쉬운 게 아니었군?” “……나, 나도 찬성이오.” 사람 좋은 녀석들. 그렇게 포장해 주기엔 얘네들 생각이야 뻔하다. 싫은 소리를 대놓고 뱉을 바에는, 그냥 억지에 어울려주며 고생하는 게 낫다는 거겠지. “비요른…… 그대는 어떻소?” 아직 의견을 내놓지 않은 나를 향해 시선이 모인다. 하, 진짜 짜증 나게. 왜 항상 이런 역할은 내가 해야 하는 거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노빠꾸로 말했다. “너희 전부 머리에 문제 있나?” 1층에서 이미 30분 차이가 났다. 2층에선 더 격차가 벌어진단 뜻이다. 심지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 아닌가. “이 상태로 먼저 지나친 자들을 앞지른다고? 그런 게 정말로 될 거 같나?” 삼인방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따라서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로트밀러를 응시했다. “브라운 로트밀러, 억지는 여기까지다.” “…….” “1층이라면 언제든지 어울려주지. 하지만 2층은 우리로는 무리다. 네 고집 때문에 팀원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마라.” 로트밀러가 분한 듯 입을 꾹 다물었고,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좀 더 지나서였다. “미안하네. 내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군. 방금 한 말은 잊어 주게.” “이미 잊어버렸다.” 이내 로트밀러가 사과의 말을 꺼내고, 내가 쿨하게 흘려 넘기자 삼인방이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다툼 없이 상황이 잘 마무리됐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골치 아파졌군.’ 문제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탐색꾼. 시간 단축이 생명인 미궁 내에서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포지션. 전투력은 타 직업에 비해 부족하지만……. 그들의 배신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야 유일하게 외부 세력과 공조가 가능한 포지션이니까. ‘지역장도 그걸 아니까 로트밀러부터 회유하려 들었겠지.’ 탐색꾼은 미궁 내에서의 여정을 주관한다. 즉, 길 안내를 하는 척하며 지역장이 준비한 함정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셈. ‘……그냥 이번 회차는 쉴 걸 그랬나?’ 브라운 로트밀러. 그를 믿기로 한 건, 그의 평소 모습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대쪽같은 성격. 요행을 멀리하며 노력을 가까이하는 성실함. 그런 그라면 지역장이 뭔 수작을 부려오든지 간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오늘의 로트밀러는 어땠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일 만큼 이질적이었다. ‘아마 지역장 그 새끼 때문이겠지.’ 물론, 배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고 생각한다. 이 아저씨가 바보도 아니고, 정말 그러려고 마음먹었다면 평소처럼 행동했을 테니까. 다만, 최악을 가정하고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그러한 불안 속에서 탐사가 재개됐다. 다만 내 걱정과 달리 로트밀러는 평소처럼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 주며 무리를 이끌었다. 「2층 바위사막에 입장했습니다.」 나침반이 먹통인 사막에서 정확히 길을 찾았고, 2일 차 아침에 3층으로 향하는 포탈을 발견했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일찍 도착한 3층에서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최소한의 전투만을 해가며 마녀의 숲으로 직행했으며, 밤 10시가 되면 생체 리듬을 위해 휴식을 취했다. 3일 차가 시작되는 자정에도 마찬가지였다. “하하핫! 그동안은 왜 이걸 안 보고 잠만 잤는지 모르겠네!”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기 때문 아니겠소.” “드왈키, 너 방금 엄청 느끼했당.” 잠시 깨어나 다 같이 3층이 은색 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팀 반푼이만의 전통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먼저 그러자 한 것도 아닌데, 첫 탐사 이후로 무언의 약속처럼 늘 해오던 일이었다.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여하튼 이후로도 탐사는 별 탈 없이 진행됐고, 7일 차 저녁에는 4층에 도달했다. 이에 나도 긴장을 풀었다. 이제 로트밀러를 의심하며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니까. ‘정말 내 기우였나 보군.’ 4층은 독립적인 층이다. 한번 입장하고 약 5분가량의 시간이 흐르면, 그 어느 탐험가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된다. 혹여나 누가 입장하지는 않을까 전투 내내 뒤를 조심했지만, 첫 번째 층을 모두 정리할 때까지 입장하는 탐험가는 없었다. “비요른! 뭘 그리 열심히 생각하냥?” “어서 올라가세.” 따라서 나는 완전히 걱정을 털어내며 탐사에 집중했다. 음, 완전히는 아닌가? 이건 내 성격이라서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에 100%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니까. 하물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할 거 없는 탐사 중이라면야 말할 것도 없고.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무튼, 4층에 들어선 이후로 지혜와 용기의 계단을 번갈아 택하며 층수를 올리는 데 주력했다. 뭐, 도중에 모든 계단이 인내인 기막힌 상황도 있었지만……. 「인내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생각보다 무던하게 넘어갔다. 환각계 시련이었는데, 나름 버틸 만했다. 누가 나타나서 뭐라 지껄이던 그냥 한 귀로 흘려넘기면 그만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시련이 끝난 다음이 더 귀찮았다. “으아아아아앙, 비요른……!!” “그만 울어라. 다 끝났지 않냐.” “너까지 날 버리면 정말 혼자란 말이당!!” 대체 뭘 보고 들었는진 몰라도, 층을 지나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는 미샤. 난쟁이놈은 바닥에 무릎 꿇고 좌절 중이었다. “내가 만든 검은 고철보다 못해…….” 참고로 드왈키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봤고, 로트밀러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둘 다 어딘가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거, 신경 쓰이게.’ 그들이 정신을 차리는 동안에 층 중심부에 놓인 상자를 확인해 보았다. 인내의 시련을 택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보상. 여기서 운이 좋으면 넘버스 아이템이나 6등급 이하 랜덤 정수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림도 없지. 아니나 다를까, 7등급 마석 열댓 개만 들어 있었다. “다 쉬었으면 슬슬 다시 출발하지.” 무려 30분 가까이 멘탈을 추스르고서 탐사가 재개됐다. 그리고 이후로는 이렇다 사건이 없었다.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계속해서 층을 올랐고, 이내 탐사 12일 차가 되어서 100층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인 듯하구려.” 100층부터는 시련 난이도가 최고로 고정되며, 6등급 몬스터가 좀 더 많은 빈도로 출현한다. 다만 여기서도 크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우리의 메인 딜러 두 명이 그동안 많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공격 마법 [냉기폭풍]을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보조 마법뿐만 아니라, 7등급짜리 광역 냉기 주문까지 익혀 온 드왈키. 거기에 미샤가 합쳐지니 어지간한 6등급 몬스터를 상대로는 곤란할 일이 없었다. 2탱커에 딜까지 받쳐 주니 안정성이 확 올라간 것이다. 음…… 지난번처럼 트롤 같은 5등급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팀 공금으로 이것저것 준비해 왔으니 그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낫겠지.’ 사실 4층에서 5등급 몬스터를 걱정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오는 길에 한스를 만난 것도 아니지 않나. ‘로트밀러도 이제 아예 정신을 차린 거 같고.’ 불안하던 초반과 달리, 이번 탐사는 계속해서 순조롭게 흘러나갔다. 그리고 19일 차가 시작됐다. *** [06 : 32] 시계를 확인하고서 주변을 확인했다. 네 명 모두 제각기 자리 잡은 곳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었다. ‘혼자 깨어 있으니까 간만에 불침번 서는 거 같네.’ 다시 침낭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지만, 기력이 증가한 덕인지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미궁 폐쇄까지 벌써 4일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가? ‘뭔가 싱숭생숭하단 말이지.’ 요 며칠 사이 느낀 것인데, 팀워크가 상당히 좋아졌다. 이제 좀 합이 맞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내가 오더를 내리지 않아도 제각기 최선의 행동을 할뿐더러, 눈빛이나 몸짓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점점 제대로 된 팀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셈. ‘처음이랑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달라지긴 했어.’ 드왈키만 봐도 변화가 극명하다. 초심자 티는 이제 거의 나지도 않으며, 날이 갈수록 전투 센스도 늘고 있다. 다만……. 이 사실에 묘한 감회를 느끼면서도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인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에 휩쓸리지 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자.’ 이 낯선 세상에 떨어져 처음으로 만든 정규 팀. 최대한 이곳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한 나였지만, 사람인 이상 어디 그게 마음대로만 되던가. 아마 분명 이 팀은 나중에도 많이 생각나겠— 터벅. 상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돌연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로트밀러였다. “내가 깨운 건가?” “아니, 조금 전에 깼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이번에도 나 때문에 깬 줄 알았거든.” ‘이번에도’라……. 말 속에 뼈가 있는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음, 아마 아니겠지. 로트밀러 이 아저씨는 눈치가 좋은 편이니까. 그간 아닌 척해도 내가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걸 인지하고 있었을 터. “깬 김에 잠시 얘기 좀 하는 게 어떤가?” “……좋다.” 나는 침낭에서 나와 로트밀러와 함께 벽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 그날 이후로 둘이서 얘기한 건 처음이지? 왠지 숨이 막혀오는 듯해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쯔압, 쯔압, 쯔압. 그래, 이런 소리라도 나니까 좀 낫네. 대화를 청해온 로트밀러는 육포 하나를 다 먹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난 이번 탐사를 끝으로 팀을 나갈 생각일세.” “팀을 나간다고?” 느닷없긴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은 아니다. 이런 경우의 수도 생각은 했으니까. “나 때문이군.” 응? “그게 무슨 의미지?” “……그거, 나도 하나만 주게.” 육포 한 조각을 건네자, 로트밀러가 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은 긴 이야기였다. “이번 결정에 지역장의 제안이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네. 나라도 욕심이 생기지 않겠나? 대형 클랜의 탐색꾼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니.” “거짓말이리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더군. 그때 이 팀에서 나갈 때가 됐다고 처음으로 자각했네.”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사실 내겐 익숙한 일이니까. 이종족들… 아니, 재능을 가진 자들은 쉽게 쉽게 위로 올라가 버리지 않나.” “8년간 많은 팀에 있었고, 그들을 따라가지 못해 남겨진 일도 여럿 있었네. 때로는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더 비참해지기 전에 스스로 나오기도 했지.” “그게 나란 탐험가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네.” “하지만, 이번만은 쉽지 않더군.” “어째서지?” 나는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고, 로트밀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들을 아끼니까.” “……?”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는데도, 인정하기가 싫었네. 그래서 지역장과 있었던 일도 숨기고 이번 탐사에 따라오려 했지. 조금이라도 이 여정이 계속됐으면 했네. 하지만…….” 로트밀러가 천천히 씹고 있던 육포를 삼켰다. “모든 건 언젠가 끝이 있기 마련이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로트밀러는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정면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때였다. 알람이 울리며, 동료들이 하나둘 부스럭대기 시작했다. “다들 일어날 시간이 됐군. 이만 가볼 테니, 자네도 떠날 채비를 갖추게.” 로트밀러가 침낭을 정리하러 떠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08 : 00] 어느새 19일 차 여정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 로트밀러는 여러모로 나와 닮았다.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정을 느꼈고, 그럼에도 이에 휩쓸리지 않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다만 차이는……. ‘난 나를 위했을 뿐이고, 이 아저씨는 우리를 위했다는 거겠지.’ 내게도 이타적인 계산이 없던 건 아니다. 이들과 위층으로 간다면 누구 한 명 죽고서야 탐험 놀이가 끝날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 전에 내 손으로 끝내고자 했다. “비요른!” 솔직히 말해, 뒤통수가 얼얼하다. 설마, 로트밀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과연 그의 눈엔 내가 어떻게 비췄을까? 경계하듯 훑는 나의 시선을 느끼며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끊임없는 의문이 머리에 감돌던 그때였다. “비요른! 대체 정신을 어따 팔고 있는 거냥?” 미샤가 내 어깨를 흔들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만 노닥거리고 어서 정리나 해랑.”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서 야영지 정리에 동참했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계단을 타고 올랐다. ‘도시로 돌아가면 말하자. 어차피 우리 둘이 떠날 거니 굳이 빠질 필요 없다고…….’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 당장은 탐사만 신경 쓰기로 했다. 아직 4일이나 남지 않았나. 6등급 몬스터들도 거뜬히 해치울 수 있게 된 우리지만, 천공의 탑은 몬스터들 조합에 따라 난이도가 괴랄하게 올라가기도 하는 장소. 도시로 돌아갈 때까지 방심은 금물— 「시련을 완수하였습니다.」 아니,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 개 다 운명의 계단이군?” “어쩔 것이오? 저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소?” 와, 이게 진짜 뜨긴 하는구나. 133화 팀 플레이 (3) 4층 천공의 탑은 스테이지형 구조다. 시련을 완료하면 문이 열리고, 세 개의 계단 중 하나를 선택해 위 스테이지로 향하는 식의 형태. 참고로 계단의 종류는 총 네 가지였다. 용기, 지혜, 인내, 그리고 운명.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운명의 계단은 택하지 않았다. 일단 타 계단에 비해 출현율이 5%도 채 안 됐을뿐더러……. 운명의 계단은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 굳이 고를 필요가 없었다. 문 세 짝이 다 운명으로 나오기 전까진. “으음, 그냥 아무거나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냥? 예전에는 아무 일도 없던데. 그냥 평범하게 몬스터가 나오고 끝이었당.” 물론, 운명이라고 반드시 위험한 건 아니다. 방금 미샤가 말했듯, 대부분은 운명을 택해도 용기, 지혜, 인내의 시련을 겪는다. 다만……. “그건 미샤 양이 운이 좋았던 거 같소이다. 책에서 읽기로 어떤 시련이 나올지는 무작위라고 하더구려.” 문제는 20%의 확률로 세 종류 계단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시련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게임 내에선 총 32개의 타입이 존재했다. 1층으로 되돌아가거나, 5등급 몬스터가 나타나거나, 뜬금없이 밀실에 갇히거나 하는 등. ‘더럽게 힘들면서 보상도 짜고, 오히려 대놓고 엿 먹이는 것들도 많았지.’ 그래서 몇몇 특수 보상이 목적이라면 모를까, 사냥을 하러 온 거면 운명은 무조건 패스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음, 지금은 조금 경우가 다르겠다마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비요른, 자네는 왜 가만히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향후를 논의하던 팀원들이 내 의견을 물어온다. “일단 우리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는 게 낫다고 의견을 모았네. 이대로 남은 시일을 버리는 건 좀 아쉽지 않나.”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4층 후반부. 지금 사냥 속도면 나흘 동안 최대 30만 스톤은 캘 수 있다. 다섯으로 나누기 전이 아니라, 인당 기준으로. 미궁에 입장하고서 대부분을 이동 시간으로 소비한 만큼,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총소득에 크게 직결되는 셈.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얘네가 알 리 없으니.’ 4층에서 운명의 계단은 절대 세 개가 동시에 뜨지 않는다. 만약 떴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특수 스테이지에 도달했다는 것. 그래서 세 가지 타입의 히든 필드로 입장이 가능해졌다는 것. ‘……확률은 3분의 1인가.’ 나는 세 개의 문을 바라보며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도중에 무언가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미샤.” “응?” “어디로 들어갈지 한번 네가 골라 봐라.” 내가 고르면 될 것도 안 될 게 분명하다. *** 미샤가 의사를 묻듯 나머지 팀원을 바라본다. 다만, 셋 모두 미샤의 선택을 믿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할 뿐이었다. “아, 이런 거 부담스러운뎅…….” 결국, 한숨을 내쉬던 미샤가 나를 노려보더니, 열린 문 하나로 다가갔다. 우리가 타고 올라온 계단 기준으로, 정면부에 위치한 문. “미리 말해 두지만, 갑자기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도 난 모른당?” 미샤가 보험을 깔자 난쟁이놈이 낄낄거렸다. “하하핫, 그게 무슨 소린가? 책임을 피하려 하는 건가?” “……뭐? 이런 미친 난쟁이놈이!” “히, 히쿠로드, 그만하시오. 미샤 양이 곤란해하지 않소…….” 하루에도 세 번씩 반복되는 팀 반푼이만의 티격태격 패턴. 한숨을 내쉬며 옆을 봤다가 로트밀러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자자, 다들 그만하고 가보는 게 어떻겠나?” 로트밀러가 분위기를 정리하며 앞장서자, 다들 하던 대화를 멈추고 진형대로 섰다. 쾅! 문이 닫히며 어둠이 찾아왔다. 단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운 어둠. 용기, 탐사, 인내. 그 어떤 시련과도 다른 도입부에 모두가 당황하기도 잠시. 로트밀러가 짧게 읊조렸다. 낯선 상황에 부닥쳤을 때 가장 중요할 정보. “당장 적은 없소.” 적의 유무. 로트밀러는 이를 먼저 동료들에게 알리고서 마저 경고했다. “가만히 있으시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훌륭한 탐색꾼이다. 짧은 순간 판단한 거겠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론, 이는 난쟁이놈도 다르지 않았다. “비요른, 뒤는 내가 맡을 테니 앞만 신경 쓰게.” 웃음기를 싹 지운 진지한 목소리. 이 둘의 음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진 순간, 주변의 어둠이 걷혔다. 미로처럼 사방위로 갈라진 일자형 통로. 일정 간격으로 벽에 걸린 채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횃불. 나는 신속하게 주변을 확인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캐릭터가 라르카즈의 미로에 입장했습니다.」 라르카즈의 미로. 천공의 탑에 속한 세 가지 히든 필드 중 하나. 특징으로는 이 미로에서는 인도자조차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단 것. 그리고……. 「필드 효과 - 균형의 수호자가 부여됩니다.」 「입장자의 능력치가 균등하게 조정됩니다.」 캐릭터의 능력치 총합이 인원수에 따라 재분배된다는 것 “뭐, 뭐야! 이게 뭐냥! 설마 내가 잘못 고른 거냥? 로트밀러!” 주변을 확인한 미샤가 불안한 눈초리로 로트밀러를 보았다. 다만 그가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미안하네. 나도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네.” “나, 나도 마찬가지오. 운명의 시련 중에 이런 곳으로 탐험가를 이끄는 현상이 있다고는 전혀 듣지 못했소.” “으아, 위험한 건 아니겠지……?” 미샤의 말에 일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탐험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야말로 미지였으니까. “…….”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다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조금 전의 적막이 거짓말처럼 다급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녀석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건 어떻겠소? 4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버티면 될 것이오.” “우리는 아직 이 공간에 대해 모르네. 만약 균열과 비슷한 구조의 공간이라면…….” “그럼 4일 뒤면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된다는 거 아니냥!!” 온갖 추측과 불안이 쏟아진다. 하긴 정보 공유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5층이면 또 모르겠는데, 4층에서 이런 장소에 떨어질 거라 어떻게 알았겠어. “일단 우리 상태부터 확인해 보는 게 어떤가?” “응?” “미샤, 넌 어디 달라진 점이 없나?”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우선 컨디션부터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묘하게 좀 더 몸이 가벼워진 거 같기도 하고?” 미샤는 긴가민가한 반응이었다. “음, 나는 잘 모르겠네마는. 착각 아닌가?” 일행 중 딱 평균치 스탯을 보유했던 것인지, 난쟁이놈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로트밀러나 드왈키와 달리. “착각은 아닐 것이오. 이렇게까지 몸에서 활력이 넘치는데,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소.” “나, 나도 마찬가지오. 마력량이 훨씬 늘었소. 이 정도면 6등급 마법도 무리가 아닐 듯한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찌 된 일이긴 어찌 된 일이야. 전부 내 근육에서 빠져나갔다는 거지. 정수가 세 개뿐이긴 해도, 전부 깡스탯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정수들이었으니까. 빌어먹을 공산주의. ‘근손실이 대체 얼마야……?’ 나는 부쩍 무거워진 메이스를 바닥에 대며 무게를 분산시켰다. 이 행동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미샤였다. “비요른? 어디 아프냥?” “몸이 이상하다. 왠지 자꾸 힘이 안 들어간다.” “뭐어?” 미샤가 걱정스레 내게 다가오는 사이. 로트밀러가 추측을 내놓았다. “뭔가 조건이 있는 게 분명하네. 마냥 모두가 강해지는 공간은 아니란 거겠지.” “조건? 조건이 뭐기에 난 약해지고 너희들이 강해진 건가? 이건 불공평하다!” 되묻는 척 은근슬쩍 힌트를 던졌다. 그러자 예상대로 로트밀러는 제법 그럴싸한 가설을 만들었다. 아니, 이 정도면 가설이라 하기도 뭐한가? “어쩌면 우리끼리 능력치가 뒤섞인 걸 수도…….” “응? 그게 무슨 말이냥?”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 추후 정리가 되면 말해 주겠네.” 음, 저 정도면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알아서 얘네들한테 이게 뭔지 설명해 줄 거 같고. 나는 슬슬 다음으로 넘어갔다. 계속 노닥거리기엔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그럼 이제 어쩔 건가?” “비요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는 이곳을 탐험하고 나가는 길을 찾아내는 게 맞는 거 같다.” “이유는?”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이라면, 그만큼 보상도 크다는 뜻 아닌가.” “지극히 탐험가다운 관점이로군.” 로트밀러의 감상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뭔 말을 갖다 붙이던, 탐험가의 최종 목표는 돈 아니겠는가. 실제로 동기 부여도 확실하게 됐고. “하긴 나흘 뒤면 이곳에 갇힐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좀 그렇징……?” “하하핫, 우리도 명색이 탐험가 아닌가? 천천히라도 주변을 탐색해 보는 게 좋을 듯하네.”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삼인방의 눈빛에도 작게나마 열의가 맺혔다. 물론, 드왈키의 말이 결정적이긴 했다. “아, 아! 지금 막 들은 생각인데, 어쩌면 이곳이 최후의 대현자가 남긴 안배일지도 모르오!” “뭐?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말하는 거냥?”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을 듯하네. 운명의 계단이 세 개나 동시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이런 괴상한 현상도 그렇고.”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쉽게 말해, 내가 ‘히든 피스’라 부르던 그것을 이쪽 사람들이 지칭하는 말. 난쟁이놈이 포부에 차 외쳤다. “그래! 어차피 4층에서 들어온 곳 아닌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나타나진 않을 걸세!” 미궁 폐쇄까지 4일이 남은 시기. 그렇게 팀 반푼이의 마지막 탐사가 시작됐다. *** 라르카즈의 미로. 내가 미샤에게 선택을 맡겼을 때, 가장 원하던 타입의 히든 필드는 아니다. 그야 최종 보상은 셋 중 가장 좋지만……. ‘역시 4일 안에 깨기는 힘들겠지.’ 미로라는 필드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보스를 찾는 것도 찾는 건데, 우리 전력으로 놈을 처치하려면 많은 밑 작업이 필요한 탓이다. 따라서 나도 무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얘네들 걱정과 달리, 균열처럼 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갇히는 곳도 아닐뿐더러……. 굳이 클리어하지 않아도 나름 매력적인 보상이 이 미로 전역에 흩어져 있었으니까. “그럼 가보지.” 미리 정해 둔 대로 진형을 서고서 본격적으로 미로로 발을 내밀었다. “계속 가도 될 거 같네.” 내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로트밀러가 바짝 붙어서 뒤따르며 함정 같은 게 없는지를 살핀다. 아, 그리고 가장 뒤에는 난쟁이놈이 있다. 그야 여기는 앞에서만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 아니거든. “미샤 양, 걱정 마시오. 내가 옆에서 잘 지켜 주리다.” “무슨 소리냥? 내가 널 지켜 줘야지.” “후후, 그럼 서로 지켜 주는 거로 합시다.” “……뭐라는 거냥.” 아무튼 그런 곳이다 보니 우리 팀의 메인 딜러 두 명은 중심부에 위치했다. 가장 안전한 곳일뿐더러, 앞이든 뒤든 상황에 따라 지원을 해야 하니까. [메엑, 메에엑, 메엑!]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하고서 3분쯤 됐을까? 몬스터 한 마리가 갈림길을 타고 모습을 내비쳤다. 라르카즈 미로의 첫 번째 보상이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군. 비요른, 조심하게나.” 처음으로 만나는 몬스터.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단비와 같다. [던전 앤 스톤]은 4층 이하의 모든 몬스터를 전부 처치해도 아슬아슬하게 5레벨을 찍을 수 없는 게임이니까.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 6, 7등급 정수를 다섯 개는 먹어야 5층에서 안정적인 사냥이 가능한데, 5층에 가지 않으면 5레벨을 찍을 수 없다니. ‘이러니까 뉴비들이 안 생기지.’ 아, 5층까지 갈 정도면 뉴비는 아닌가? 나는 불필요한 의문을 지우며 방패를 양손으로 쥐었다. 메이스가 없으니 뭔가 어색하지만……. 지금 근력 수치로는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너무 무겁기에 그냥 배낭에 넣어놨다. 그냥 딜은 딜러에게 맡기는 게 낫다는 판단. [메에엑!!!] 멀리서 우리를 보고 주저하던 몬스터가 괴성을 내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드왈키가 외쳤다. “아, 책에서 봤소! 바이쿤두스요!” 6등급 몬스터 바이쿤두스. 이족보행을 하는 산양을 떠올리면 연상이 쉽다. 신장은 늠름한 뿔까지 합쳐서 2.5m 정도. 참고로 무기는 양손에 꼭 쥐고 있는 초대형 핼버드다. 콰앙-! 핼버드가 방패를 내리찍으며 육중한 무게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메이스를 포기하기를 잘했단 생각부터 들었다. 한 손이었으면 지금 상태로 버티기 힘들었을 거 같거든. ‘니미럴.’ 피 같은 육체 수치를 동료에게 나눠줘서일까? 체감상 6등급이 아니라 5등급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뭐, 전투 자체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보조 마법 [빙결강화]를 시전했습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내가 산양 대가리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드왈키가 단일 특화 공격 마법을 완성했다. “비요른!” 이내 드왈키가 나를 불렀고, 즉시 합을 맞춰 온 대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까지는 늘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체 뭘까. 피슈우웃-! 스쳐 지나가는 ‘얼음창’의 크기부터가 다르다. 뿜어내는 풍압도 피부가 서늘할 정도. 당연히 그로 인한 결과도 평소와 차이가 났다. 콰아아앙-!! ‘얼음창’이 아니라 ‘화염구’가 박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충돌음. “어?” 이후의 연계를 위해 때를 기다리던 미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뱉었다. 그럴 만했다. 명색이 6등급 몬스터인 바이쿤두스는 이미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바이쿤두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4」 거, 이상할 정도로 육체 수치가 감소했더라니. 전부 얘의 마력으로 변환돼서 그랬던 거구나. “이게 내 마법……?” 중얼거리는 드왈키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는 더 이상 반푼이가 아니다. 그 말인즉슨.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클리어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134화 팀 플레이 (4) 미로 속을 헤매고 있다. 비스킷이나 실뭉치는 없지만 괜찮다. 우리에게는 로트밀러가 있으니까. “잠깐, 혹시 모르니 이쯤에서 표식 하나를 더 남겨 두겠네.” 한때는 인도자도 길을 제대로 못 찾는 곳인데 탐색꾼이 뭔 소용인가도 싶었지만……. 모두 내 오만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로트밀러는 진정으로 다재다능한 사내였다. “지도 좀 봐도 되겠나?” “그러게.” 그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토대로 지도를 제작했다. 그것도 그냥 대충 만든 게 아니라 미니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정교한 지도를. 한 10분에 한 번꼴로 잠시 멈춰 쓱싹쓱싹하는 것만으로 만들어 냈다. “자, 다 됐으니 이리 주게. 지도도 갱신을 해야 하니까.” “어, 여깄다.” 거침없이 지도 위로 펜을 움직이는 로트밀러의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했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냐고는 묻지 않는다. 그야 이미 아까 전에 했거든. [이 정도면 그리 복잡한 편도 아니라서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외워지네. 거리 측정이야 걸음을 세어 뒀다가 그에 맞게 기입하면 되고.] 지도 제작이나 관측은 1층 수정동굴에서 몇 년간 해 왔기에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던가? 이 아저씨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조금은 안타까웠다. 재능이라기보다는, 재능이 없기에 자연스레 얻게 된 노력의 결과물일 테니.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어서 가세.” 약 30초간 멈춰서 있기도 잠시. 다시금 어두운 미로 속을 걷는다. 뒤에는 바짝 붙어 쫓아오는 로트밀러가 있다. 참고로 그의 손에는 석궁이 아니라 장검이 쥐어져 있다. 앞서 몇 번인가 전투를 하고서 생긴 변화다. [이 정도면 한 놈 정도는 충분히 붙들고 있을 듯하네.] 능력치가 상승한 로트밀러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으레 상위 탐색꾼들이 그러하듯이. 탐색 외에서도 한 사람분을 하려는 것이다. “이번엔 네 놈이네.” 후각이 발달한 로트밀러의 경고가 있고서 머지않아 전방에서 바이쿤두스 넷이 등장했다. 6등급 몬스터 네 마리라면 4층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규모의 무리지만……. 딱히 긴장하거나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겐 드왈키가 있으니까. 피슈우우웃-! 몬스터가 등장함과 동시에 쏘아지는 ‘강화 얼음창’. 다만 여기서도 예전과는 다르다. 이전보다 몇 배는 강해진 위력의 얼음창이 무려 두 개다. ‘설마, 더블 캐스팅을 할 줄 알았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몇 달을 함께했으면서 나는 이들에 대해 전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구나. ‘니미럴.’ 마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을 뿐. 드왈키의 마법 재능은 상당했다. 더블 캐스팅을 한 상태에서 추가로 보조 마법을 쓸 수도 있을 만큼.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보조 마법 [궤도 조정]을 시전했습니다.」 옆으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 것도 없이, 멀리서 쏘아진 대포알처럼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얼음창. 콰아아아앙-! 전투가 시작도 되기 전에 6등급 몬스터 두 마리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따라서……. “어서 해치우고 지나가세. 이번에도 한 놈은 나와 칼스타인 양이 맡겠네.” 내가 한 놈을 전담 마크하는 사이. 미샤와 로트밀러가 협동해 다른 한 놈을 상대한다. 그리고 미샤 쪽이 한 마리를 해치웠을 때쯤. 피슈우우웃-! 다시 한번 영창을 마친 드왈키의 얼음창이 나를 두드려패던 바이쿤두스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4분 안팎. “비요른, 뭐 하냥? 어서 안 가고.” 우리 팀 반푼이의 마지막 변화다. “후후후, 뭐가 나타나건 걱정 마시오. 무엇이든 나 리올 워브 드왈키가 처치해 줄 터이니.” 드왈키가 다시 재수 없어졌다. *** 균형의 수호자. 원래 이 필드 효과에는 마법사가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다. 마법사는 정수를 먹지 못하니까. 필연적으로 주스탯인 마력 수치가 뻥튀기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드왈키처럼 극단적인 사례는 나도 처음이다. 그러나 면밀이 따져 보면 납득 가능한 변화긴 하다. 내가 게임에서 데리고 다니던 마법사는 전부 재능충이라 마법 관련 스탯이 높았으니까. 전 반푼이 마법사 드왈키와 달리. “정말로 신비한 기분이오. 모든 족쇄가 풀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드왈키는 인간이다. 그리고 운동과 거리가 먼 육체를 지녔다. 게다가 평균은커녕 바닥을 밑도는 마력 수치까지 지녔으니……. ‘능력치만 보면 우리랑 거의 3배는 차이가 났겠지.’ 팀 전원이 인간이라면 모르겠는데. 나와 미샤, 그리고 난쟁이놈. 선천적으로 기본 스탯이 높은 이종족이 팀에 셋이나 존재한다. 로트밀러? 혜택을 받은 쪽이긴 하지만, 드왈키와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니다. 일단 정수 네 개를 꽉 채워 먹은 베테랑이니. ‘……어쩌다 보니 마법사한테 능력치가 몰빵된 셈인가.’ 오늘 하루를 쭉 지켜본 나는 팀의 전력 분석을 끝마쳤다. 가장 큰 손해를 본 건 나였지만…….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 있나?’ 팀 전체로 보자면 최소 2배는 강해졌다. [던전 앤 스톤]은 팀 단위 전투 게임이니까. 한 명만 특출난 것보다, 모두가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때야말로 최대 효율이 나온다. 조금 씁쓸하지만……. 그게 내가 팀 반푼이를 나가려 했던 이유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제대로 된 팀 플레이라는 건가.’ 로트밀러와 드왈키. 오늘 나는 그 둘에게서 보지 못했던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다. 많은 노력과 운이 따른다면, 그 둘이 오늘과 같은 수준에 오르는 일도 가능은 할 것이다. 다만……. ‘몇 년은 걸리겠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거기까지가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최종 지점일 테고. 그만큼 둘에겐 단점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로트밀러? 전투력이야 정수를 먹여서 채우면 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려면, 5층부턴 ‘인도자’ 능력을 갖춘 탐색꾼이 필요하다. 드왈키? 더블 캐스팅이고 뭐고, 결국 마법사의 가장 큰 자질은 마력 수치다. 그러니까 마탑에서도 안 받아 줬을 거다. 냉정한 말이지만……. 마탑을 기준으로 두면 드왈키의 재능은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었으니.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돌연 가슴이 시려왔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정말로. 「캐릭터가 냉기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부를 넘어 뼈까지 파고드는 냉기. 정신을 차려보니 미샤가 콧김을 뿜고 있었다. “야, 비요른!! 언제까지 내 말 무시할 거냥!!” “아, 뭐라고 했지?” “뭐라고 하긴! 이제 다들 잘 거니까 제대로 불침번을 서라고 말했당!” 화내며 내 가슴팍에 진심 펀치를 쑤셔 넣기도 잠시, 뒤늦게 걱정이 되었는지 미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괜찮은 거냥?” “괜찮다. 아직 시리긴 한데, 아프지는 않다.”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응. 뭔가 말로 설명하긴 그런데…… 아! 굳이 따지자면 내가 당근을 먹으라고 했을 때, 네가 짓던 표정이랑 비슷했당.” 어, 그러니까 더 모르겠는데. “됐고, 어서 자라. 불침번은 제대로 설 테니까 걱정 말고.” “으음, 알았당.” 이내 미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침낭에 쏙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다. “으, 오늘은 뭔가 되게 피곤했당.” “하핫, 그럴 만도 하지. 영문도 모를 곳에 끌려와 6등급 몬스터를 얼마나 해치웠는데?” “……그,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조금 즐거웠소. 처음으로 탐험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지금까지는 내가 동경했던 탐험과는 달라서 말이오.” “아, 무슨 말인지 알 거 같당.” “하핫,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지.” 하루를 끝내기 전에 누운 채로 나누는 몇 마디의 수다. 물론, 휴식을 위한 시간이니만큼 길진 않았다. “아, 맞다. 드왈키, 오늘은 정말 대단했당.” “그, 그게 어디 내가 잘난 덕분이겠소? 마력을 아끼려 술식을 거듭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냥 쏘아내면 그만이라니? 마,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능했을 일이오.” “어…… 그런강? 그렇게 말해도 나는 잘 모르겠는뎅. 아무튼 오늘 고생했고, 잘 자랑.” “미, 미샤 양도 잘 주무시오.”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온다. [01 : 04] 어느새 20일 차가 시작되고도 한 시간이 지난 시간. 나는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계획을 점검했다. ‘몇 시간만 더 가면 그 물건은 입수할 수 있을 테니, 이제 보스 방만 찾으면 되는 건가.’ 현재 우리 전력이라면 보스전은 크게 무리가 없을 듯했기에 큰 걱정은 없다. 다만 걸리는 점은 운이 나쁘면 시간 내에 보스 방까지 못 갈 수도 있다는 것. ‘일주일만 더 있었어도 챙길 건 전부 챙겨서 나갔을 텐데…….’ 그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그 순간이었다. 부스럭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침낭에서 몸을 일으킨 드왈키가 보였다. “저, 비요른…….” “잠이 안 와도 자라. 내일은—” “잠이 안 오는 게 아니오.” 응?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드왈키가 완전히 일어서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동료들이 깨지 않게 목소리를 죽였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어제는 로트밀러가 이렇게 오더니, 이번에는 얘 차례였던 모양. “……해 봐라.” “지난번에 미샤 양의 취향에 대해 말했던 것 기억하오?” “기억한다.” 나는 한번 뱉은 거짓말을 잊지 않는다. 그래야 나중에 구멍이 생기지 않으니까. 뭐, 지금 상황에선 의미가 없겠다마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빤히 바라보자 드왈키가 무언가 결심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했던 말이 사실이냐고 물으려 했소. 한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의미는 없겠구려.” 드왈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조금의 떨림도 없었고,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 역시 굳건했다. “그녀의 취향은 아무래도 좋소. 내 진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서, 진심을 바라는 건 비겁한 짓일 테니까.” “……무슨 뜻이냐?” “알고 있지 않소. 이미 그대도, 내가 그녀를 몰래 연모하고 있다는 것쯤은.” 적어도 도시로 돌아가서 말했으면 좋았을— “만약 이번에 무사히 살아서 도시로 돌아—” “그만.” 나는 다급하게 드왈키의 말을 끊었다. 그야 생각하는 것과 직접 말을 꺼내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으니까. 다만, 내 진심 어린 걱정을 오해라도 했는지. “역시 비요른, 그대도…….” 드왈키가 입술을 짓누르더니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확고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소.” “그만 말해라.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알겠—” “도시로 돌아가면 내 마음을 밝힐 것이오.” 아니, 그거 플래그라고. ‘니미럴.’ 갑자기 한스를 만났던 것만큼이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용건은 이게 전부요. 그럼 이만 가보리다.” 이후 드왈키는 도망치듯 뒤돌아 침낭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뱉었다. 괜히 이것 때문에 귀중한 휴식 시간을 뜬눈으로 보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늘 여정이 피곤하기는 했던 모양. ‘……그래도 청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괜찮으려나?’ 나도 애써 걱정을 지우며 불침번에 집중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고, 난쟁이놈을 깨워 교대하고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05 : 07] 출발 시간이 되었다. 그야 오늘 밤은 네 시간만, 그것도 난쟁이놈과 나만 둘이서 불침번을 번갈아 서기로 했거든. “둘 다 피곤할 텐데, 고생 많았당.” “하핫, 어쩔 수 없지 않나.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니.” “내일은 나랑 로트밀러 차례니, 오늘은 좀만 더 고생하고 이따 푹 쉬어랑.” 간단하게 야영지를 정리하고서 여정을 재개했다. 참고로 오늘의 목표는 명확하다. “비요른의 말대로 미로의 외곽면에 도달한 듯하니, 지금부터는 이 벽을 끼고 한 방향으로만 가 보도록 하겠소.” 정사각형 구조인 라르카즈 미로의 모서리. 여기서 중간 보스를 해치우고 숨겨진 보상을 얻는 것. 참고로 네 종류의 중간 보스 중 어떤 놈이 나올진 나도 모른다. 이것만큼은 게임에서도 무작위로 변했으니까. ‘사실 뭐든 지금 전력이면 쉽게 해치우겠지. 걔만 빼면 전부 약점도 확실한 편이니.’ [메에엑-!!!] 이미 수백 마리는 잡았을 바이쿤두스를 오늘도 수없이 해치우며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정수는 여전히 나올 기미가 없었지만……. 그 대신 마석이 엄청나게 쌓였다. “하하핫! 이거, 마석만 해도 꽤 짭짤하겠군?” 사실 이게 미로의 두 번째 보상이다. 6등급 몬스터가 잡기 편하게 단일 종류로 나오는 곳은 5층에도 없으니까. 4층이었다면 하루에 스무 마리도 마주치기 어려웠을 터. “……막다른 길?” 12시간가량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미로의 모서리에 해당하는 지점. “설마, 여기에 아무것도 없을 줄이양.” “다른 방향에 있는 걸 수도 있소이다. 아니면 아예 엉뚱한 위치에 있거나.” “하핫, 설마 나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을 것이오. 여기도 미궁이니까.” 막다른 벽에 도달한 일행이 한마디씩 뱉는 사이, 로트밀러가 벽을 유심히 관찰하며 뭐라 읊조렸다. “……잠시 기다려 보게, 뭔가 수상하군.” 솔직히 좀 놀랐다. 미믹의 정수에 붙은 육감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이 아저씨의 관찰력? 딸깍, 드르르르륵. 무언가를 건드리자,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공간을 드러내는 벽. “우왓, 문이 열렸당.” “위험할 수도 있으니 다들 물러나게!” 난쟁이놈이 앞으로 튀어 나가 방패를 치켜들었고, 나도 눈치껏 재빨리 그 옆에 함께했다. 물론, 몬스터가 덥석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군?” 그야 그런 곳이 아니니까. 벽 내부의 공간은 어둠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했다. 사실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내가 앞장서겠다.” “비요른! 위험할 수도 있당!” “괜찮다. 그게 내 역할이니.” 눈치를 보는 난쟁이놈 대신 탱커다운 말을 해 주며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걸린 횃불들이 일제히 켜지며 장내를 밝혔다. 나는 신속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여긴…….” 약 30평 정도 될 법한 석실.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 염소 머리가 효수된 장대가 그 위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까지. “뭔가…… 기분 나쁜 곳이넹.” “포탈은 보이지 않는데, 그냥 나가면 안 되오?” 불길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미샤와 드왈키를 보며 나는 몰래 미소 지었다. 하긴, 얘네는 모르겠지. 다른 방들에 비하면 이게 양반이라는걸. ‘아무튼 여기가 걸렸으니 보스 방 찾는 건 식은 죽 먹기겠네. 사용법이야 이전처럼 로트밀러한테 넌지시 단서를 주면 될 거 같고…….’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보스를 잡는 건 조금 어려워지겠지만, 운이 나쁘면 보스 얼굴도 못 보고 탐사가 끝나는 일도 가능했던 상황 아닌가. ‘그나저나 얘 소환은 어떻게 하지? 그냥 하면 영 수상하게 보일 텐데.’ 그런 기분 좋은 고민이나 하던 찰나였다. “어?” “……설마, 너도?” 나를 포함한 모두가 동시에 움찔했다. 역시 나만 변화를 느낀 게 아니었구나. “뭐지? 갑자기 마력이 엄청나게 증가했소.” “나, 나도 마찬가지당. 대체 몸이 왜 이러지?” 근력 수치가 감소하며 살짝 부담되던 중갑의 압박감이 사라졌다. 마치 코스프레용 스티르폼 갑옷을 입은 듯한 기분.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진실을 깨닫자마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씹…….’ 온몸에서 활력이 용솟음친다. [거대화]를 써도 느낄 수 없었을 수준의 변화. 이미 나는 그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다. “로트밀러.”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군.” 4층의 히든 필드, 라르카즈의 미로. 이곳에 다른 탐험가가 입장했다. ‘인원은 최소 한 명에서 최대 다섯 명.’ 상식적으로 5인 팀 단위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만, 아직 단정 짓기는 이르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하지만……. 적어도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 그놈이든. 아니면, 그놈들이든. 「필드 효과 - 균형의 수호자가 갱신됩니다.」 「입장자의 능력치가 균등하게 조정됩니다.」 까마득할 정도로 강하다. 135화 오르큘리스 (1) 균형의 수호자. 이 필드 효과에 대해선 일찍이 결론이 났다. 미로에 들어선 자들끼리의 능력치가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이라고. 내게서 여러 힌트를 받은 로트밀러가 내놓은 추측에 팀원 모두가 수긍했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쩌면 이 미로에 다른 탐험가들이 들어선 것일지도 모르오.” “다른 탐험가? 천공의 탑에선 다른 탐험가와 만날 수 없는 곳일 텐데?” 난쟁이놈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중얼거리긴 했지만……. “무라드, 당신도 알지 않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4층 천공의 탑은 독립된 공간이다. 진입 때 여러 팀이 동시에 들어선 게 아니라면, 아무리 싸돌아다녀도 다른 팀과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던 공간. “이곳에선 무엇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소.” 미지未知. 아직 알지 못함을 의미하는 단어. 이는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알겠네. 그렇지만 우리의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나? 단지 이 공간에 들어오면서 뭔가 다른 규칙이 적용됐을 수도—” 난쟁이놈이 내비친 또 다른 가능성을 일축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너무 비약인 거 같군.” 나한테 이곳은 미지의 공간이 아니니까.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빨리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편이 합리적일 터. “난 로트밀러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한다. 드왈키, 너는 어떻지?” “……나도 이쪽이 더 그럴듯하다고 보오.” “동의란 뜻이군. 미샤, 너는?” “어…… 나는 그냥 가만히 있겠당.” 미샤가 기권표를 던졌다. 다만 이미 다수결을 위한 세 표가 나왔기에 굳이 선택을 강요하진 않았다. “좋아, 그럼 결정이 났군. 일단 로트밀러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움직이도록 하지. 불만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없네.” 바지 팀장 난쟁이놈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나는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또 다른 탐험가가 미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놈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내 능력치가 체감상 2배는 상승했으니, 분명 최소 6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탐험가일 거다. 그것도 클랜이 아니라 팀 단위의. 하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던진 화두에 팀원들은 제각기 의견을 내놓았고, 나는 그 틈을 타 중간 보스를 소환하는 조건을 충족시켰다. 「미궁의 악마가 피를 감지합니다.」 오케이, 이건 이제 좀만 더 기다리면 되겠고. “음, 별로 상관없지 않냥? 오히려 힘을 합쳐 나가는 길을 찾으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떤 자들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이곳에 머무르는 게 어떻소? 미궁이 폐쇄되면 갇히게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하핫! 이 친구야, 뭘 그렇게까지 걱정하나? 아무리 우리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지 않나. 마주쳐도 쉽게 우리를 어쩌진 못할 테니, 그냥 하던 대로만 움직이세.”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그자들을 피하며, 나갈 방법을 찾는 게 좋을 듯하오.”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혹여나 쓸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기다리는 동안에 귀 기울여 들어 봤건만. 역시나 집단 지성은 크게 도움이 되진 못했다. 로트밀러는 그나마 나았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느낌이 강하지 최악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비요른,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의 질문에 시선이 모인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역시 우연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연이 아니라면?” “이 정도 무력을 지닌 탐험가가 이 시간에 4층에 있었다니? 뭔가 목적이 있어서 돌아다니던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나.” “애초에 저들 목적이 이곳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군.” “그래. 그리고 그렇다면 놈들도 지금쯤 우리의 존재도 알아챘겠지.” 그런 내 말에 드왈키는 부정을 표했다. “에이, 설마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이곳에 대해 미리 알다니.” 또한, 난쟁이놈은 웃어넘겼다. “하핫, 설령 그렇다고 한들, 자네는 마치 이미 그들이 약탈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로트밀러는 진지하게 재차 질문해 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나는 대답했다. 그들은 미지의 존재다. 따라서 모든 가능성을 내재한다. 이 변수는 행운이 될 수도, 혹은 나를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 고로, 이런 내 모습이 동료들에겐 이상하게만 보일지라도.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 두근-! 가슴속의 불길함을 외면치 않던 것. 그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던 비결이니까. *** 「바포메트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 미로를 내달리고 있다. 헤매는 게 아니라 제대로 목적지를 향해. “이쪽이네!” 내 뒤를 바짝 붙어 뒤따르는 로트밀러의 손에는 지도가 쥐어져 있다. 그동안 그가 열심히 만든 지도가 아니라, 이 미궁 전체의 길목이 소상히 그려진 지도. 당연히 보스 방의 위치도 적혀 있다. 중간 보스인 바포메트를 잡고서 획득한 전리품이니까. ‘그렇게까지 쉽게 잡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딱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환한 바포메트. 원래라면 약점을 공략하며 겨우 잡아야 했을 그놈과의 전투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딜로 찍어 누르는 게 가능했거든. 잘된 일이라고 하기엔, 조금 상황이 그랬지만. ‘대체 원래는 얼마나 강한 놈들인 거지?’ 정체불명의 불청객. 참고로 한 명일 수도 있단 생각은 집어 던진 지 오래다. 개인이 아무리 강해 봤자 한계가 있으니까. 타다다다닷-! 상념을 지우고 속도를 올린다. 다들 잘 따라오는 듯하니 괜찮으리라는 판단. 실제로 슬쩍 뒤를 살펴보니 지구력이 부족하던 난쟁이놈조차 드왈키를 업고서 잘만 뛰고 있다. 그러니 이 부분은 이제 그만 걱정하고. [메에엑-!!!] 정면부에서 튀어나온 바이쿤두스의 머리통을 메이스로 후려친다. 물론 크게 휘청거릴 뿐, 한 방에 죽진 않았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지 않고 휘청거리는 녀석을 지나쳤다. 잡몹 처리는 미샤가 도맡기로 했으니까. 서걱-! 피륙음이 들림과 동시에 흩날리는 빛무리. 다만 마석이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미샤가 공중에서 잘 낚아챈 모양. “왼쪽으로 가게!” 로트밀러의 지시를 따라 방향을 꺾는다. 그러자 바이쿤두스 네 마리가 멀리서 보인다. 사실 이제는 나와 미샤, 로트밀러만으로도 처치할 수 있겠지만……. 시간은 1초라도 아끼는 게 좋을 터. “드왈키!” 내 외침에 난쟁이놈의 등에서 내린 드왈키가 마법을 시전한다. 솨아아아아아-! [냉기폭풍]. 단일 딜은 낮은 대신 넓은 범위에 피해를 주는 7등급 공격 마법. 원래는 8, 9등급의 잡몹이나, 미샤와의 연계를 위해서나 썼던 그 마법 주문. [메에…… 엑?] 우박을 연상시키는 눈보라가 통로 저편으로 쏘아지며 네 마리의 바이쿤두스가 얼어붙는다. 6등급 몬스터가 마법 한 방에 ‘동상’을 넘어 ‘빙결’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만, 몇 초면 해당 상태가 풀리기에……. 콰아앙-! 서둘러 메이스로 박살 내며 이동을 재개한다. 그리고 휴식이 필요하단 판단이 들면, 잠시 통로에 널브러져 호흡을 가다듬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 번째 휴식을 취하던 때였다. “후욱, 후욱…… 비요른, 너무 급한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네마는…….” 난쟁이놈이 숨을 내몰아쉬며 참아왔던 불만을 조심스레 토해낸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자꾸만 그런 불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부탁하겠다.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 줘라.] 내가 처음으로 했던 부탁. 이것에 다들 억지에 맞춰 주기는 했다. 하지만……. [……뭐, 자네는 감이 좋은 편이니까.] [나, 나는 상관없소. 그리고 비요른, 그대는 이런 거로 내가 빚을 갚았단 생각은 마시오. 그 일은 나중에 제대로 갚을 생각이니.] 시간이 흐르며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나, 나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도 비약 같고…….” 우리처럼 우연히 이곳에 들어오게 됐을 확률이 더 높지 않나?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남겨 둔 표식이 걱정된 거라면, 이제 그만 천천히 가도 되지 않겠나. 설령 약탈자라도 이런 곳에선 우릴 찾지 못할 걸세.” 과연 그들이 정말 약탈자일까? 굳이 우리를 찾아내 해치려 들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망상에 가까운 일 아닐까? “사실 나도 자네가 왜 이곳으로 가면 탈출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는지도 잘 모르겠네.” 무엇보다 보스 방…… 아니, 보스 방이라고도 적히지 않은 그곳에 탈출 방법이 있으리란 보장은? “으음, 난 불만 없당. 알지? 진짜다? 응?” 전부 합당한 의문들이다. 얘네들은 나와 같은 경험을 못 해 봤으니까. 히든피스는 그렇게까지 특별하지 않다. 얼마 전에 ‘빙하굴’에서 만난 젠시아만 봐도 그렇다. 히든피스 요소를 이용해 균열을 열었다. 또한, 고스터 버스터즈에서는 매달 정보가 교류되며 히든피스에 대한 정보가 퍼져 나간다. “비요른, 오늘은 영 자네답지 않네. 설령 자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맞서 싸우면 되지 않은가?” 난쟁이놈이 설득하듯 말했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큰 문제였다. 균형의 수호자가 적용 중이라고?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다. 존나 처발릴 상황이, 그냥 평범하게 처발리는 상황으로 변한 것. 딱 그 정도겠지. 능력치가 똑같아도 정수의 스킬 등급이나 개수에서부터 차이가 나니까. 아이템까지 합쳐지면 차이는 더 벌어질 테고. ‘싸우면 무조건 진다.’ 이게 바로 내 불안함의 원천이었다. 두근-! 사자는 토끼를 앞에 두고서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끼는 어떤가. “이럴 시간이 없다. 다 쉬었으면 움직이지.” 사자를 만났으면 뛰어야 한다. *** 네 방향으로 길이 이어진 석실. 그 가운데에 선 사내가 읊조린다. “라르카즈의 미로…….” 사내는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으며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면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드디어 들어왔군.” 그의 입가가 뒤틀려 올라가며, 화상 자국이 남은 피부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이시여, 어찌 이리도 악독한 자에게 날개를 달아주시나이까……!” 이를 한탄하듯 검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눈을 감았다. 그게 진정 당신의 뜻이느냐고. 의미 없을 물음을 허공에 뿌리며 탄식하는 것. 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늙은이, 혀를 뽑아 줄까?” “어찌 두려우랴. 육신의 고통 따위—” “아, 물론 당신 손자의 혀 말이지.” “…….” 노인이 입을 굳게 다물자, 사내는 낄낄거리며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엔 새우처럼 구부러진 자세로 쓰러진 중년의 탐색꾼이 자리했다.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벌어진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끄으, 흐으윽, 끄흐흐…….” “거, 팔 하나 없어졌다고 엄살은.” 사내는 탐색꾼의 잘려 나간 어깨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과연 누가 알았을까? 1년 동안 찾아내지 못했던 이곳에,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고작 5등급 탐색꾼의 팔 하나를 바쳤다고 홀라당 길을 알려 주다니, 악신이란 놈도 참 웃긴 놈이란 말이지.” “그는…… 당신의 동료 아니었소?” “동료는 무슨. 그냥 쓸 만하니까 데리고 다녔던 거지. 이봐, 이제 그만 일어나지? 늦게 들어와서 시간이 없는데.” 사내가 탐색꾼의 허리에 발을 올리고 흔들자 노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만하시오. 신체 일부를 악신에게 바친 것 아니오.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할 것—” “늙은이, 그쯤 하지?” 사내의 차가운 음성에 노인이 움찔했다. 분함을 감추지 못하며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악행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비겁함이 역겹다. 그러나 노인에겐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아마 이 탐색꾼도 마찬가지일 테고. “저는 괜, 찮습니다…… 대신관님.” 탐색꾼이 텅 빈 어깨부를 잡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사내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꽈악- 그는 ‘균형의 수호자’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금 벌어진 몸의 변화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늙은이, 뭐 변한 거 없어? 신성력이라던가.” “……조금 줄어들었소.” “줄어들었다고? 늘어난 게 아니라? 확실한 거야?” “확실하오.” 사내가 고개를 휙 돌려 탐색꾼을 응시했다. “탐색꾼, 너는?” “영혼력을 포, 함해 전반적, 으로 육체 능력이 줄어들, 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통로를 응시했다. 대신관 출신인 노인은 그러려니 해도, 5등급 탐색꾼까지 힘이 줄어들 정도라니? “웬 쥐새끼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군.” 일렁이는 횃불에 비춘 그의 눈은 어느새 서늘한 안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136화 오르큘리스 (2) 감정이란, 전염의 성질을 띠고 있다. 가까운 누군가가 우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나도 슬퍼지고, 웃고 있으면 즐거워진다. 두려움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옆에서 계속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존재니까. “자네가 자꾸 그러니까 왠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지 않나.” “그,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듯하오…….” 웃음기를 싹 지운 내 모습에 동료들이 서서히 현실감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여기엔 로트밀러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여전히 머리로는 납득이 안 가네. 하지만 왠지 아까부터 자네 말을 따르지 않으면 굉장히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군.” 미믹의 정수를 먹은 로트밀러에게는 ‘육감’ 스탯이 있다. 그리고 우리 팀 반푼이는 그 스탯에 자잘하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한데 그런 그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한다? 말에 실리는 무게부터가 달라지는 것이다. “비, 비요른.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움직이장. 응?” “하, 하하핫! 그래! 그러는 게 낫겠네! 그냥 하루만 더 고생하면 되지 않나!”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내 말에는 그냥 기분 탓 아니냐며 뭐라 하더니, 로트밀러의 말 한마디에는 아주 꿈뻑 죽는구나. ‘뭐, 나도 이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해지긴 했지만…….’ 육감은 말 그대로 육감일 뿐이다. 하지만, 불청객이 들어서며 전반적으로 스탯이 엄청나게 상승한 상황 아닌가. ‘후,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군.” 베일에 싸여 있던 불길함이 한 꺼풀 벗겨지며 모습을 드러낸 기분이다. 최악을 가정하면서도, 내심 이게 다 내 기분 탓으로 끝나길 바랐건만. 역시 그럴 일은 없다는 거겠지. 두근-! 조금 더 심장이 바짝 조여온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다.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다시 움직이지.” 잠깐의 휴식을 끝나고 이동을 재개했다. 이전보다 더 속도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전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뒤따랐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미로를 내달리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요른 자네도 나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싶네.” 돌연 로트밀러가 말을 걸어왔다. “비슷하다니? 뭔 소리인가?” “나야 정수를 통해 이런 능력을 얻었지만, 선천적으로 감이 좋다던가 그랬을 수도 있지 않나.” 어, 그런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는데. 확실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던전 앤 스톤]은 캐릭터를 택하면 기본 수치가 기본값 내에서 랜덤으로 설정이 되던 게임. ‘육감의 기본값 설정이 0에서 50이었지 아마?’ 미믹의 정수에 붙은 육감 수치가 고작 50이란 걸 고려하면, 최대 기본값이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하는 스탯이었다. 근력 같은 주스탯이 아닌지라 굳이 육감을 올리겠다고 캐릭터를 다시 만드는 일은 없었지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자네는 늘 어딘가 예리한 구석이 있었지.” “맞당! 그때 엘리사년도 조져 버렸잖냥. 다들 신관이라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음, 그런가? 다들 이렇게 말하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까도 말했듯, 사람은 그런 존재 아닌가. 정말 비요른의 육감 수치가 선천적으로 높게 측정됐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신경 쓸 건 이런 게 아니겠지. “됐고, 잘 따라오기나 해라.” 이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길을 뚫는 일에 집중했다. 모든 일엔 우선순위란 게 있는 법이니까. 따라서……. 퍼억-! 메이스를 휘두르고. 피슈우우웃-! 얼음창을 쏘아내며. 서걱-! 목이 베어진 바이쿤두스를 헤치며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05 : 13] 21일 차가 시작되고서 벌써 이만큼이 지났다. 바포메트를 잡고서 무려 12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셈. “후우, 후우, 후우…….” 코와 입으로 뿜어지는 숨이 뜨겁다. 그리고 이는 얘네들이라고 다르지 않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동료들의 안색을 확인했다. 다들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하긴, 암만 능력치가 증가했더라도 이틀째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일 터. 하지만, 이제 그 끝이 보인다. “이쪽으로 꺾으면 이제 끝이네!” 길게 뻗은 일자형 통로를 내달린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갑갑했던 미로형 통로가 아닌 거대한 석실. 철컥-! 그곳에 들어선 순간 석실과 이어진 세 개의 입구에 쇠창살이 내려온다. “으악! 갇혔당!” “다들 정신 차리게! 뭐가 나올지 모르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모두 진형을 가다듬으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야 뭔가 튀어나올 곳은 저곳뿐이었으니까. “……막 4등급 몬스터가 나오고 그런 건 아니겠징?” 한쪽 면에 자리한 위압스러운 석문. 「미궁의 주인이 도전자를 감지합니다.」 머지않아 그곳에 음각된 기하학적인 문양이 빛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르르르르르륵. 4m가량의 커다란 신장. 그에 걸맞는 비대한 몸집. 머리 위로 돋아난 위협적인 모양새의 뿔. 혈관과 근육의 결을 고스란히 내비칠 만큼 짧은 갈색 털과, 우람한 허벅지를 지탱하는 다리의 발굽까지. 쿠웅-! 이내 완전히 개방된 석문 사이로, 한 괴수가 특유의 괴성을 내지르며 모습을 내비친다. [음무오오오오—!!] 라르카즈 미로의 최종 보스. “미노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당!” 미샤가 한눈에 알아볼 만큼 유명한 몬스터였다. *** 5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로스. 미샤가 우려했던 것처럼 4등급 몬스터는 아니지만……. ‘굳이 따지면 4.5등급 정도 되겠지.’ 이놈은 일반적인 미노타우로스와 다르다. 라르카즈란 고유의 이름을 지닌 네임드. 다시 말해, 다른 개체의 스킬을 보유한 상위 변이종. 쿠웅-! 놈이 우리를 보며 첫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모두가 그 이상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게, 어찌 모르겠는가. 딱 봐도 미노타우로스가 쓸 만한 스킬이 아닌데. [음머!] 놈이 짧게 기합을 뱉으며 팔을 위로 들어 올린 그 순간. 「미궁의 주인 라르카즈가 [불타는 가죽]을 시전했습니다.」 거대한 불길이 놈의 피부 위를 뒤덮는다. 화아아아악! 30m는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 이에 모두가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얘가 불도 다룰 줄 알았냥?”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책에서 그런 내용은 없었소.” “그럼 상위 변이종인 듯하군. 이 지도가 숨겨져 있던 그 방에서 만난 바포메트처럼.” “아! 그러고 보니 그 몬스터의 이능과 비슷하구려!”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의 드왈키는 신속하게 정보를 공유했다. “이프리트! 이프리트의 이능인 게 틀림없소!” 정답이었다. 몇 달 동안 미궁 관련 책만 엄청나게 읽는 거 같더라니, 이제 확실히 마법사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구나. 뭐, 칭찬해 줄 시간은 없었지만. [음무오오오오—!!] 얘네는 대체 뭐하는 새끼들일까, 딱 이런 표정으로 우리를 탐색하던 녀석이 달려들었다. 육중한 걸음 소리를 내며. 쿠웅-! 쿠웅-! 4m 크기의 괴수가, 온몸을 불태우며 다가오는 모습은 기괴하단 말로도 모자랐다. 다만, 역시 리아키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베헬—라아아아아아!!” 오히려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대시한다. 타닷.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놈의 공격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초거대 양날 도끼가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콰앙-! 음, 이 정도구나 역시.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무게감에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거대화]까지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예상대로 [불타는 가죽]도 버틸 만하고.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코앞에서 일렁이고 있음에도 큰 타격은 없다. 그냥 좀 화끈화끈한 정도? 모두 불사자 각인 3단계에 붙은 화염 저항력 덕분이다. 물론, 계속 이러고 있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속 시간에 따라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화염 피해는 중첩이 될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뜨듯한 물에도 며칠씩 고기를 넣어두면 익게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 하나 이 역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부여 마법 [냉혈]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화염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드왈키의 마력이 내 육신에 스며들며,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이 차갑게 식혀진다. 나는 조금 놀랐다. ‘설마, 내가 오더를 내리기 전에 알아서 마법을 쓸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학습한단 건가? ‘얼음창’ 하나 제대로 못 맞혀서 아등바등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나도 돕겠네!” “오, 이제 하나도 안 뜨겁당!”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주춤하기도 잠시, 이내 버프를 받은 난쟁이놈과 미샤가 전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독성 부여]를 시전했습니다.」 전기 충격을 가하고, 두터운 가죽을 검으로 난자하며 맹독 딜까지 욱여넣는 등. 명색이 최종 보스인 녀석을 손쉽게 농락한다. [음무오오오오—!!] 물론 놈도 발광하며 열심히 주먹과 발, 도끼를 휘둘러댔다. 또한, 고유의 스킬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놈은 여전히 미샤를 잡기엔 너무나도 느렸고, 나와 난쟁이놈을 찍어누르기엔 힘이 부족했다. 한데 그런 와중에, 마법 지원도 이어졌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저주 마법 [악화]를 시전했습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9등급 저주 마법 [둔화]를 시전했습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저주 마법 [연화]를…….」 원래라면 마력 부족으로 ‘냉혈’을 거는 것만으로 녹아웃이 됐을 드왈키의 마법 지원. 로트밀러는 만일을 대비해 드왈키의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오는 일은 없었다. 탱커 한 명도 제대로 못 뚫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겠어? 콰아앙-!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내 미샤가 놈의 아킬레스건을 베어내며 거대한 육신이 바닥에 처박혔고, 뇌까지 깊숙이 검을 박아넣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됐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어느새 빛무리로 화하며 흩날리는 녀석의 몸. 나는 일단 시간부터 확인했다. [05 : 21]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로부터 불과 10분도 흐르지 않은 시각. 왠지 그 사실에 묘한 아쉬움이 피어난다. ‘다들 나가서도 이 상태면 얼마나 좋을까.’ 팀 반푼이의 최종 형태가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안정성 높은 2탱커 구성. 그 안정성을 근거로 더욱 과감하게 움직이며 꾸준한 딜량을 뽑아내는 근접딜러. 높은 수준의 범위 딜과 단일 딜을 보유했으며 경우에 따라 서포팅도 가능한 마법사. 그리고 전투에서 짐이 되지 않는 탐색꾼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쓸데없는 감상은 나답지 않다. 진짜 문제가 무엇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잡념을 훌훌 털어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빨리 챙길 것만 챙기고 어서 떠나는 것.’ 그렇게 다시 한번 목표를 정리하던 때였다. 솨아아아-! 흩날리던 빛무리가 완전히 흩어지며, 모두가 저마다의 탄식을 토해낸다. “아…….” “이번에도 안 나왔넹.” 미노타우로스는 정수를 드랍하지 않았다. 하긴, 상위 변이종이긴 해도 균열에서 만난 보스도 아니니, 오히려 이게 현실적인 일이겠지. 쩝. 만약 노랑 정수가 나왔으면, 후반부까지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진짜 보상은 따로 있으니까.’ 애써 아쉬움을 지우며 주변을 확인한다. 철커컥-! 보스전이 끝났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통로의 창살은 다시 위로 올라가 있었다. “포탈은? 포탈은 왜 안 열린 거징?” “설마, 균열과는 다른 방식인 건가?” “어, 어쩌면 미노타우로스말고 다른 괴물이 더 있는 걸지도 모르오.”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여러 추측을 쏟아내는 삼인방. 내가 뭐라 말을 하려던 차에 로트밀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안에 뭔가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군.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소? 역시 이 아저씨, 천성이 탐색꾼이란 말이지. “아, 그랭! 저기가 남아 있었지?” “어서 가보세. 혹시 포탈이 열려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이내 우리들은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났던 문 너머로 들어섰다. 물론 스타트 포인트에 열렸을 포탈이 여기에 있을 리는 없지만……. 암만 급해도 이건 챙겨가야지. 돈 주고도 구할 수 없을 물건인데. “뭔가……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곳이군.” 문 너머 안쪽에 자리한 토굴. 예의 중간 보스방처럼 바닥에는 소환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이 물건에서 굉장한 마력이 느껴지오.” “그럼 일단 챙겨가는 편이 좋겠군.” 드왈키가 읊조림과 동시에 나는 마법진 중심에 박혀 있던 보석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되돌아 밖으로 향했다. 좀 더 조사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는 드왈키의 조언은 불길하단 말로 일축했다. 그야 여기 보상은 이게 끝이거든. “후, 골치 아프게 됐군? 설마 여기에도 포탈이 없을 줄이야.” “그러니까 말이당.” “로트밀러, 아까 그 지도의 중심부에 푸른색 점이 찍혀 있던 거 같던데, 혹시 거기에 포탈이 열렸을 가능성은 없나?” “사실 안 그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기는 했네.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기도 하고.” 과연 이게 육감형 탐색꾼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노타우로스가 갇혀있던 토굴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처음으로 듣는 남성의 목소리가 전면부 통로에서 나지막이 들려왔다. *** 최종 보스방은 미로의 무작위 위치에 생성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도를 획득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고, 고작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최종 보스를 처치했다. 하지만…….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중요치 않겠지.’ 이미 일은 벌어졌다. 우연히 돌아다니다 발견할 리는 없을 테고, 그런 종류의 능력이 있던 거겠지. ‘인도자’의 특성이 무용지물인 곳이라 해도 정수나 아이템, 그 외의 여러 능력들은 여전히 통용되는 곳이니까. 다만 그게 무엇이냔 의문은 잠시 내버려 두고. “봐 봐, 늙은이. 내 말이 맞지? 팔 하나 더 바친 게 아니었으면 놓쳤을 수도 있었다니까?” 눈앞에 집중한다. 두근-!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불청객의 존재를 처음 인지했을 때, 나는 판단했었다. 적이 다섯 명이라면 6층. 네 명에서 세 명이라면 7층. 만약, 그럴 리는 없지만 단 둘뿐이라면……. ‘8층.’ 이것이 내 스탯의 변화를 통해 도출해 낸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내 의사야 어쨌든,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어이, 바바리안. 고맙다고 해야지? 내 덕에 편하게 잡았을 텐데.” 얼굴은 물론이고 살짝 드러난 팔목까지 화상으로 뒤덮여진 사내. 한 명. “내 부탁하리다. 부디 원하는 물건만 얻고서 저들을 놓아 주시게.” 그런 사내를 향해 애처롭게 말하는 검은 사제복의 노인. 두 명. “…….” 어째선지는 알 수 없지만, 양팔이 잘려 나간 채 멍하니 그들을 따르는 중년의 남성까지. 총 세 명. ‘니미럴.’ 나는 만약 그들과 마주쳤을 때를 대비해 만든 계획을 모두 폐기했다. 플랜A부터 플랜D까지. “저기,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온갖 씹새끼를 만나며 단련된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게 통할 놈이 아니라고. 137화 오르큘리스 (3) 몸에 오한이 인다. “저기,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그저 그 한 마디에. 아직 제대로 부딪친 것도 아닐 진데도. 긴박한 울림이 고막에 맴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천적임을 직감한 전사의 심장이, 쉴 새 없이 펌프질하며 온몸으로 산소를 퍼 나르고 있다. 머리보다 먼저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스르륵. 내리 앉은 침묵 속에서 시선만 움직여 동료를 확인한다. 다들 걸어가던 그대로 굳은 상태다. 은연중에 느끼고 있는 거겠지. 저놈이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불길함을. “저기요?” 놈이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말을 걸어온다. 덕분에 머릿속이 조금 진정됐다. 골든타임. 이제부터 더없이 귀중해질 일분일초를, 멍하니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기에……. “정말 전부 그러고 있을 거야?” 귀를 열고, 눈으로는 상대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나칠 수도 있었을 정보를 신속하게 조합한다. [어이, 바바리안. 고맙다고 해야지? 내 덕에 편하게 잡았을 텐데.] 놈은 이 공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보스방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라.’ 지도를 획득한 우리와 비슷하게 도착하다니? 조금도 헤매지 않고 정확히 길을 찾아낸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슨 스킬이지?’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이 달라질 테니. 돌이켜 보면 이전 대화에 해답이 있었다. [팔 하나 더 바친 게 아니었으면 놓쳤을 수도 있었다니까?] 팔을 바쳤다. 누구의 팔인지는 자명하다. 필시 저 뒤에 있는 불쌍한 아저씨의 것일 터. ‘……카루이의 사제겠군.’ 저들 중 카루이의 사제가 있다. 불행 중 다행인 부분이다. 단순히 탐색꾼의 능력만으로 길을 찾은 거라면 앞으로 답도 없을뿐더러……. [내 부탁하리다. 부디 원하는 물건만 얻고서 저들을 놓아주시게.] 악신의 사제로 추정되는 노인 또한 저 사내와 그리 협력적인 관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설마, 신관을 납치해다가 강제로 전직을 시킨 건가? 팔을 바친 저 남자도 비슷한 상황인 거고?’ 숨을 세 번 정도 들이마실 시간. 침착하게 정황 분석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그야 이제는 시간이 없거든. “뭐, 됐다. 그냥 전부—” “설마, 이런 데서 탐험가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벙어리는 아니었네?” 침묵을 깬 내 대답에 놈이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오케이, 일단 시간은 벌었고. “혹시 넌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천연덕스럽게 아는 것을 질문한다. 좆밥처럼 보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방심해— “너…… 뭐냐?” 느닷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뭐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녹색도 아니고, 이런 병신 새끼들 때문에 노란불이 켜진다고?” 흥미나 호기심보다는 경계의 색이 짙은 눈빛. 나도 모르게 놈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시선이 움직였다. 내가 아는 한 넘버스 아이템과 비슷했다. 녹색, 적색, 황색의 보석이 박힌, 내가 평소 신호등 반지라 불렀던 그것. No.6111 운명 추적자. 녹색이 뜨면 긍정적인 이벤트가. 적색이 뜨면 부정적인 이벤트가. 황색이 뜨면 두 개가 섞인 이벤트가 근처에 있다고 알려 주던 그 아이템. 그 아이템에 황색불이 선명하게 켜져 있었다. ‘니미럴.’ 희비가 교차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을까. 황색이 떴단 건, 내가 놈의 꼴통을 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건 내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다. 나쁜 소식은, 그걸 얘도 알아 버렸단 거겠지만. ‘망했네.’ 강자의 방심을 노린다는, 약자로서의 유일한 이점마저 사라졌다. 저 빌어먹을 반지 하나 때문에. “너, 이게 뭔지도 아나 보네?” 설상가상으로 놈은 내 짧은 반응까지도 눈치를 채더니, 아예 본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스릉! 놈의 허리춤에서 뽑히는 청은색 빛의 칼날. 그 눈부신 광채에 전 대장장이 지망생의 입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 아크로 만든 검일세…….” 아크. 어지간한 넘버스 아이템은 그냥 씹어먹는, 사실상 이 세계에서 최종 단계로 치는 6단계 소재의 금속. 차라리 적의 숫자가 많길 내심 바라던 이유다. 고층 탐험가일수록 정수의 등급 및 개수뿐만 아니라, 장비에서 극심한 차이가 나 버리니까. ‘최소 9층.’ 다만, 나는 외면치 않고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십 명 단위의 클랜이 아니다. 실력이 장비를 따라간다는 가정하에, 놈은 5인 기준으로 9층에서 능히 활동이 가능한 강자다. 정수도 최소 여덟 개는 되겠지. 그것도 전부 5등급 이상으로. “바바리안.” 사실상 이쯤 되면 능력치고 뭐고 무의미하다. “안에서 얻은 물건을 내놔라.” 신관 도움 없이도 혼자서 우리 다섯 명을 전부 썰어 버릴 수 있을 레벨. “죽기 싫다면.” 하지만, 나는 판단했다.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따라서……. “아, 이걸 말하는 건가?” 보스방에서 획득한 보석을 꺼내서 손에 쥔다. 원래는 이게 플랜D였다. 요구하는 걸 전부 내주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 “역시 갖고 있었군. 자, 그걸 이리 건네라. 그럼 살려서 보내 주지.” “…….” 나는 말없이 놈을 응시했다. 침묵이 길어지며 동료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당. 그냥 줘랑. 어차피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지 않냥.” “나 역시 찬성일세. 될 수 있으면 싸움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나.” 들을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다. 이 보석이야말로 아직 우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이니까. 신관을 납치한 뒤 개종시켜서 데리고 다니는 미친놈과 신용 거래를 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배가…….” 내가 조심스레 입을 떼자 시선이 주목된다. 놈 또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가 보였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미소. 따라서 나도 씨익 웃었다. “이런! 배가 고프군!!” “……뭐?” 기습적으로 내지른 괴성에 놈이 당황한 순간. 나는 주저 없이 보석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꿀꺽-! 억지로 삼켰다. 귤만 한 크기의 보석을 힘으로 쑤셔 박다 보니 식도가 쓰라렸지만, 알게 뭔가. 그 정도야 몇 초면 낫는데. “꺼억-” 구토감을 참아내다 보니 나온 트림 소리. 그제야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놈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물었고.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이후로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 “…….” 놈은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음, 우리 팀 멤버도 크게 다르진 않나? 아무튼 상관없다. 남의 시선을 귀지만큼도 신경 쓰지 않으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것. 그게 바바리안 일족의 전통 아니겠는가. “바바리안,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놈이 바닥을 박차며 내게 쏘아진다. 동일 능력치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 수욱-! 비싼 값을 하는지, 놈의 장검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내 방패를 파고들었다. 놈의 생각이야 뻔했다. 분명 나를 죽이고 배를 갈라서 보석을 꺼내갈 속셈이겠지. 하지만……. ‘그래서 뭐, 지가 어쩔 건데.’ 나는 방패에 힘을 줘 파고드는 검날의 위치를 조정했다. 바깥쪽이 아니라, 내 위장이 있는 쪽으로. “……!!” 내 속셈을 깨달았는지, 놈이 다급하게 검을 뽑았다. 자기도 아는 거겠지. 내가 삼킨 이 보석의 내구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설마, 이럴 생각으로?”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폐기한 모든 계획을 대신할 플랜E. “꺼억—!” 배 째, 씨발. 이제 정말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 놈의 눈알이 굴러간다. 틈틈이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단숨에 내 머리를 베어 낼 수 있다면, 그다음엔 정말 배를 째고 가져가면 되니까. 하지만……. ‘어림도 없지.’ 수박만 한 주먹으로 배를 두드린다. 퍼억! 퍼억! 내 손이 휘둘러 질 때마다 움찔하는 놈의 눈가. 혹여나 내 뱃속에 있을 물건에 금이라도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게 얼굴에 훤히 보인다. “아, 그냥 속이 더부룩해서 말이지.” “……미친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을철에 낙엽을 피해 걷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오물은 어떤가? 실수로 밟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보고서 밟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퍼억-! 배를 두드리는 짓을 멈춘다. 플랜E의 핵심은 넘을 듯 말 듯 선을 넘지 않는 것에 있으니까. 경고도 이미 충분히 전해진 듯하고. “원하는 게 뭐냐?” 놈이 대화를 시도했다. 나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지 이미 검까지 허리춤에 집어넣은 상태. ‘그래, 이 정도로 이 물건이 너한텐 중요하다 이거지.’ 맘 같아선 인성질을 하며 놀리고 싶지만, 나는 동료들과 함께 놈의 반대쪽 통로로 슬금슬금 이동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루. 딱 하루만 시간을 줘라.”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놈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자들은 전부 저런 식의 말을 놈에게 뱉어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하루만 시간을 줘라.” 하루의 유예. 이 정도가 놈이 허락할 수 있는 최대한도라고 판단했다. “그럼 나도 이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 “널 어떻게 믿고?” 내 최종 제안에 놈은 짧게 되물었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준비해 온 패를 꺼냈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우리는 며칠째 잠도 못 자서 지친 상태다. 하지만 딱 하루만 기다려준다면, 나도 정정당당히 맞서 싸우겠다.” 처음부터 그러고 싶었다는 듯이. 애초에 이런 비겁한 수는 나도 내키지 않았단 듯이. 투쟁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쏘아보자, 긴가민가하던 놈이 조용히 되묻는다.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피식 웃었다. 이길 수 있냐고? 글쎄, 여전히 그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게 포기할 이유가 되는가?” 연기할 것도 없이 진심을 입에 담아 뱉었다. 놈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열두 시간.” 협상의 여지가 느껴지지 않는 완고한 목소리. “열두 시간을 주지.” 놈이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때가 되어서도 똑같은 수작이 통할 거라곤 생각지 마라.” 차라리 아이템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결코 우리를 놓아 줄 수는 없단 의지가 놈의 눈빛과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따라서 나는 참아왔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05 : 40] 내게 가장 절실했던, 시간을 얻었다. *** 미로 속을 달리고 있다. 진형은 평소와 조금 다르다. 전면부에는 로트밀러와 난쟁이놈이 위치했고, 나는 최후방에서 그들을 뒤따르고 있다. 간단한 이유다. “정말로 따라오지는 않는 듯하네.” 로트밀러는 그렇게 말했지만……. 놈이 언제까지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 아니겠는가. 내 뒤통수는 내가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가?” 로트밀러가 최선두에서 길을 열며 물었다. 아니,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비요른…… 정말 싸울 거냥?” “조, 좋은 선택 같진 않네. 자네도 아까 봤지 않는가. 자네 방패가 무슨 진흙처럼 썰려나가는걸.” 참아왔던 의문과 우려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일단 아까는 내게 모든 걸 일임했지만,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한 거겠지. 하지만, 오늘부로 민주주의는 끝났다. 모두의 의견을 종합하고 설득하면서, 일을 진행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까. “히쿠로드, 미샤, 로트밀러, 드왈키.” 나는 네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부탁했다. “앞으로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거나, 지시를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믿고 따라줄 수 있나?” “물론이당.” 미샤를 제외한 셋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몇 달이란 시간 동안, 그들에게 보여 준 내 모습을 믿고 말없이 기다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난쟁이놈이었다. “핏빛 성채에서 자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몸이겠지. 자네의 판단을 믿겠네.” 두 번째는 드왈키였다. “나, 나도 마찬가지오. 비요른, 그대가 지닌 영웅의 운명을 믿어 보겠소.” 영웅의 운명. 작은 발칸이라는 내 이명이 도시에 퍼져나갈 때 조미료처럼 곁들여졌던 그 추측이자, 주술사가 내게 말하기도 했던 그것. 초면의 대중들이라면 모를까, 얘가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하니 뭔가 좀 이상했지만……. 뭐, 지금 상황에선 잘된 거겠지. “그와 마주쳤을 때 두려움에 떨기만 할 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마지막은 로트밀러였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믿고 따르겠네.” 그의 짧은 한마디에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다만 감상에 잠길 새도 없이 로트밀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일단 자네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네.” “뭐지?”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로 위험한 자네.” “설마, 정보가 있는 건가?” 나는 반색하며 되물었고, 로트밀러는 답했다. “오래전에, 아크제 장검을 사용하는 한 탐험가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네. 풍문에 따르면 그는 용의 저주를 받아 온몸이 화상으로 뒤덮였다더군.” 아니, 그래서 그게 누군데. 오히려 의문을 키우는 나와 달리, 삼인방은 이미 짚이는 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용의 저주라니? 설마…….” “용살자! 로트밀러, 자네 지금 용살자를 말하는 건가?” “그, 그, 그렇다면 그자가 오르큘리스의 일원이란 뜻이오……?” 다급한 삼인방의 외침을 듣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용살자란 놈이 누군진 몰랐다. 하지만……. ‘오르큘리스.’ 마녀의 눈을 뜻하는 이 세계의 고대어. 이를 이름으로 쓰는 집단에 대해서는 일찍이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 바가 있다. ‘왕을 죽이는 게 목표라고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미친놈들의 모임.’ 다만 단순히 미친놈들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런 미친 짓을 하고서도 수십 년간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 그들 한 명 한 명의 강함을 증명하는 일일 테니까. 왕가에서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었음에도, 지금까지 고작 일곱을 처치한 게 전부라던가? ‘생각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새끼한테 걸렸군.’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과 별개로, 한 가지 생각이 보다 뚜렷해진다. 역시 도망치는 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다.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자, 그럼 어쩌면 좋겠나?” 이내 로트밀러에게서 지도를 넘겨받은 나는 목적지를 지정했다. “우리는 이곳으로 간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138화 각성 (1) 용살자, 리갈 바고스. 부족장 역할을 하는 일족의 태고룡을 살해 후 용의 저주를 받은 용인족龍人族. 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으나 약 10년 전, 홀로 요정족의 성지에 테러를 감행하며 오르큘리스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개시한 씹새끼. 주무기는 용살검이란 별명이 붙은 아크제 장검 한 자루이며, 여태 확인된 정수는 총 여섯이라고 하는데……. ‘5등급 셋에 4등급 둘, 3등급 하나.’ 알려진 정수만 보면 전형적인 깡스탯 검사에 가깝다. 스킬 전부가 스스로를 강화하는 형태이기에 장비만 받쳐 주면 상성이랄 게 없는 클래스. 뭐, 10년 전 정보이니 어느 정도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범죄자 새끼가 어떻게 정수를 지우겠어? ‘그러니까 이 물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거겠고.’ 참고로 가장 걱정했던 용언. 즉, 용인족만의 고유 스킬은 ‘용의 저주’로 인해 봉인된 상태라고 한다.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솔직히 용인족인 걸 알고 존나 쫄았거든.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일세.” “그렇군, 고맙다. 크게 도움이 됐다.” 로트밀러를 통해 적의 정보를 숙지한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 물론 목적지를 향해 뛰면서. 타다다닷-! 일단 용살자, 리갈 바고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었다. 아마 ‘균형의 수호자’가 아니었으면, 보석이고 뭐고 인지도 하기 전에 목이 베어져 나갔을 터. 타다다닷-!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며 시간을 확인한다. [08 : 57] 놈과 마주친 이후로 세 시간가량이 흐른 시각. 즉, 이제 9시간 뒤면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물론, 놈이 약속을 제대로 지켜 준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아무튼. ‘열두 시간이라…….’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전사의 맹세에 곁들여진 내 당당한 태도. 이에 놈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혹은 밑져 봐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거래에 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반지만 아니면 쿨하게 하루를 기다려줬을지도 모르는데.’ 24시간과 12시간은 너무나도 다르다. 준비물은 준비물대로 챙기고 말미의 휴식도 취할 수 있었을 만한 시간. ‘후,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군.’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의지를 다잡는다. 고블린 덫, 싸이코패스년, 핏빛 성채, 마녀의 숲, 계층 군주 등등등. 절망적이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잡념을 지우고,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그 자리에 아로새긴다. 살아남는다. 가능하다면, 모두 다 함께. 반드시. “비요른, 도착했네.” 상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로트밀러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샌가 앞에는 막다른 길이 자리했다. 보스방이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11시 방향의 모서리 지점. 쉽게 말해, 두 번째 중간 보스가 있는 장소. 딸깍, 드르르르륵. 로트밀러가 기계장치를 조작하자 벽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공간을 드러낸다. 화르륵. 발을 들이밀자 횃불이 켜지며 밝아진 석실. ‘바포메트’가 나왔던 7시 모서리와의 차이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으으, 차라리 그때 거기가 더 나은 거 같당.” 염소 머리 대신 눈알이 뽑힌 시체 더미가 산처럼 쌓인 석실. 나는 악취를 뚫고 나아가 마법진 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미궁의 악마가 피를 감지합니다.」 오케이, 일단 하나는 얻었고. *** 「아르고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 라르카즈의 미로에는 중간 보스방 외에도 많은 숨겨진 공간이 존재한다. 보상은 제각기 다르다. 일회성 소모품이 숨겨져 있을 수도, 희귀한 몬스터가 출현할 수도 있다. 뭐, 내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지만. ‘이번에도 꽝인가.’ ‘아르고스’를 처치한 우리들은 그 주변을 수색하며 숨겨진 방들을 찾는 데 주력했다. 다른 중간 보스를 잡으러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을뿐더러……. 내 계획을 위해서는 ‘그 방’을 찾아내야 한다. ‘후, 그래도 나름 잘 찾아내고 있기는 한데.’ 로트밀러를 앞세우고서 작정하고 숨겨진 방을 찾으니, 두 시간에 한 번꼴로 발견이 됐다. 용살자 파티가 입장하며 확 올라간 육감 스탯 덕분이었다. 이전까지는 지나치면서도 무심코 지나갔을 그것을, 로트밀러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방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단 거겠지만. [05 : 30]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놈과 약속한 12시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잠깐, 멈춰 보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로트밀러가 일행을 멈춰 세우더니, 주변의 벽을 탐색해 숨겨진 방을 찾아냈다. 스르르륵. 몬스터도, 숨겨진 보물도 없는 서너 평짜리의 석실. 내부만 확인한 나는 도로 석실을 닫았다. ‘찾았군.’ 마침내 계획의 첫 번째 준비물이 전부 모였다. 따라서 나는 일행을 멈춰 세우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들 잠시 쉬고 있어라.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쉬라니? 이 방이 대체 뭐기에…….” “살아나가면 전부 설명해 주겠다. 그러니 일단 내 말을 따라라.” “……알겠네.” 내 단호한 음성에 난쟁이놈도 의문을 버렸다. 아니, 의문을 버렸다기보다는 당장은 날 믿고 캐묻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깝겠지. “후…….” 피곤에 찌들어 있던 동료들이 눈을 붙임과 동시에 나는 숨을 길게 토해냈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쳐도, 로트밀러에게 둘러댈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 핏방울을 마법진 위에 떨어뜨려 중간 보스를 소환한 것부터 시작해 지금 이 순간까지. 책에서 봤다고 하기엔 납득되지 않을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아무튼,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숨을 한 번 더 길게 들이마시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지운다. 둘러대는 거야 어떻게든 될 거다. 그래,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중심부에 포탈이 있을 것 같다면서? 거기는 가지 않는 건가?] 포탈로 향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12시간 동안 거기에 놈이 있을 테니까. 괜히 갔다가 도망친다고 생각해 버리면, 기껏 얻은 12시간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터. 그 시간에 준비를 하는 쪽이 옳다 판단했다. 하지만……. ‘놈도 슬슬 우리를 찾으러 출발했겠지.’ 이제 약속한 12시간이 끝났다. 다행히 일차 준비는 제때 끝났고, 덕분에 놈이 도착할 때까지 일말의 휴식이라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암울하다. ‘성공률은 10% 미만.’ 냉정히 점쳐 본 가능성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놈이 가진 정수 중에 알려진 것은 고작 여섯 개뿐이다. 베일에 싸인 두세 개의 정수가 변수로 남아 있으며, 카루이의 대사제라는 가장 큰 걸림돌도 변함없다. 그렇기에……. 꽈악. 찬란하디만치 붉은 보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꿀꺽 삼키며 인질로 삼기는 했지만, 안전이 확인되자마자 [거대화]를 사용해 토해낸 그것. 라르카즈 미로의 최종 보상이자, 용살자란 이명을 지닌 최악의 범죄자가 간절히 바라며 찾아 헤매 왔을 바로 그 아이템. ‘절제된 소망.’ 가능하다면 지금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템은 4등급 수호자 정수에 발라야지만 최대 효율이 나오니까. 그러나 어차피 죽으면 쓰지도 못할 물건. ‘역시 쓰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치달을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물건은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다. “…….” 폭풍전야와도 같은 이 고요 속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이 찾아올 터. 할 수 있는 준비는 미리 해두는 편이 좋다. 그때 가서는 쓰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콰직-! 찬란한 적광을 뿜어내며 쪼개지는 보석.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때. 「캐릭터가 ‘절제된 소망’을 사용하였습니다.」 「캐릭터가 균형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 화르륵-! 불꽃 하나가 떠오르며 공간을 밝힌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터벅. 천공의 탑을 연상시키는 석실. 허공에 떠오른 불길이 파르스름하게 일렁이며 가장자리의 석문 세 개를 비추고 있다. ‘신기하네.’ 실제로는 이런 식이었구나. 게임에선 키보드를 조작해 뭘 고를지 선택만 하면 끝이었는데. 「교체를 원하는 정수를 선택하십시오.」 나는 각 석문에 그려진 고유의 벽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채색까지 된 건 아니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터벅. 썩어 문드러진 팔과 다리들이 오밀조밀 뭉쳐 움직이는 끔찍한 괴물. ‘이게 시체골렘이겠고.’ 시뻘건 보석으로 붉은 안광이 표현된, 뾰족한 송곳니와 날카로운 손톱을 지닌 사람 형태의 무언가. ‘이건 뱀파이어.’ 거대한 깃발을 바탕으로,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근육질의 전사. ‘이게 오크 히어로겠지.’ 각 문은 내가 지금까지 흡수한 세 개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었다. 어떠한 안내 문구도 없지만, 뭘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원하는 문을 열어젖히면 해당 정수가 교체되는 방식이겠지. ‘절제된 소망’은 그런 아이템이니까. 4등급 이하의 정수를 동급의 무작위 정수로 바꿔 주는 가챠형 아이템. 터벅. 나는 고민없이 문 하나를 향해 나아갔다. 그야 뭘 고를지 이미 정해 뒀거든. ‘오크 히어로.’ 물론, 이건 아니다. 5등급이긴 하지만, 내 최종 조합에도 속한 코어 정수이니까. ‘시체골렘.’ 고통내성은 의외로 쓸 만했지만, 사실 능력만 보면 내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중에 정수가 다 차면 그때 지우려고 아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패스. ‘절제된 소망’을 7등급 정수에 바르다니,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뱀파이어.’ 이내 그 몬스터의 형상이 그려진 석문 앞에 선 나는 그 앞으로 손을 뻗었다. 탱커와 어울리는 스킬셋과 능력치. 게다가 균열 수호자를 잡고 얻은 물건인지라 스킬 세 개가 전부 붙은 희귀 정수. ‘절제된 소망’에도 숨겨진 요소가 존재하니까. 「뱀파이어의 정수를 선택했습니다.」 「수호자의 정수입니다.」 「선택 가능한 정수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수호자의 정수를 제물로 바칠 시, 고를 수 있는 정수의 등급이 상승한다. 쉽게 말해, 4등급 수호자의 정수를 바치면 3등급 정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한 셈. ‘아마 그 새끼가 이 케이스겠지. 이 물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나도 게임을 할 때 그랬다. 등급은 높지만 내 캐릭터에는 맞지 않는 수호자 정수를 먹었을 때, 라르카즈의 미로를 찾아 가챠를 노렸다. 한데 5등급 수호자. 그것도 내게 쓸 만한 정수로 이 아이템을 쓰게 될 줄이야. “후우…….” 애써 미련을 지우며 열린 문 너머로 나아갔다. 몇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일자형 통로가 끝났고, 불꽃이 타오르며 세 개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륵! 균형이 컨셉인 아이템답게 세 개의 석문에는 육체, 정신, 이능 타입의 몬스터가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뭘까 이건. 「현재 그 누구도 보유하지 않은 정수입니다.」 「균형의 수호자가 희소성을 인정하며, 가치에 맞는 선택지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벽화를 면면이 살펴보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일단 첫 번째 선택지는 이것이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붉은 보석이 담긴 함을 쥐고 있는 해골 마법사. 4등급 몬스터, 리치. [영혼의 함]이라는 패시브 스킬과 파괴적인 액티브 스킬을 여럿 소유한 전형적인 ‘이능계’ 몬스터. 여기까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문 위에 박힌 보석이 납득되지 않을 뿐. ‘……무지개색?’ 앞서 시체골렘은 흑색의 보석이, 오크 히어로는 녹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게 정수의 색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한데 무지개색이라니? 수호자 정수였던 뱀파이어의 문 위에 박힌 보석과 똑같은 색 아닌가. ‘그럼 진짜 수호자의 정수가 떴다고?’ 나는 신속하게 나머지 문도 확인해 보았다. 4등급 몬스터, 영혼의 거신병. 근력이나 민첩 같은 스탯이 전무한 대신, 정신 계열의 스탯이 몰빵된 영체류 몬스터. 마찬가지로 보석의 색은 수호자를 의미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운’이라 넘어갈 수도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수호자 정수가 선택지로 뜬 적도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이게 우연일 리는 없겠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지. 육체 타입의 몬스터를 확인한 나는 인정해 버렸다. 이는 결코 ‘운’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아직 이 게임에도 내가 모르는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을 뿐. 화르륵-! 일렁이는 불꽃에 비친 보석은 적색이었다. 즉, 수호자의 정수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터벅. 나는 홀린 사람처럼 문을 향해 걸어갔다. 믿기지 않지만, 문에 그려진 벽화는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터벅. 3등급 몬스터. 그것도 단독 활동을 하는 보스급 몬스터. 쉽게 말해, 3, 4등급 탐험가로 이뤄진 레이드를 펼쳐야 처치가 가능한 몬스터. 육탄 능력만큼은 지상계 몬스터 중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던, 바로 그 몬스터. ‘오우거.’ 나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할렐루야. 139화 각성 (2) 「캐릭터의 영혼에 [오우거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근력이 +140 상승합니다.」 「항마력이 +80 상승합니다.」 「물리 내성이 +40 상승합니다.」 「모든 내성이 +10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40 하락합니다.」 「인지력이 -20 하락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일단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시간은 거의 흘러 있지 않았다. 쩝, 혹시나 해서 급하게 해치우고 나왔건만. “…….” 동료들이 자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톱질을 하듯 손등 위를 그었다. 사각사각사각. 힘을 꽉 주고서 한 열 번쯤 왔다 갔다 하니 한 방울 찔끔하고 흘러나오는 피. 재생되지 않는 상처를 보고 있자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캐릭터의 컨셉이 한순간에 바뀌었구나. 꽈악. 허공에 주먹을 쥐어 본다. 육신의 변화는 명확하게 인지가 가능했으나, 오크 히어로 정수를 취했을 때만큼 극명하지는 않았다. 납득 못할 건 아니다. 뱀파이어 정수가 사라졌을뿐더러, ‘균형의 수호자’는 여전히 적용 중이니까. ‘근력이 정확히 얼마나 늘었는지는 밖에 나가고서야 확 체감이 되겠고.’ 횃불로 밝혀진 통로 저 너머를 경계하며 잠시 손익을 계산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우거라…….’ 오우거. 탱커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스탯과 스킬을 보유한 3등급 몬스터. 다만 이놈의 정수는 내 최종 조합에 들어 있지 않았다. 부적합 판정이라기보단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안 그래도 잡기 어려운 3등급 몬스터. 게다가 7개나 되는 액티브 스킬 중에 원하는 색깔이 나오기까지 해야 하다니? 입수 난이도가 너무 높을뿐더러……. ‘방어력’만이라면 이놈보다 효율이 좋은 4등급 몬스터 ‘강철거인’이 존재한다. ‘대신 강철거인은 무기를 못 쓰게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결국, 이쯤 되면 취향의 문제였다. 딜까지 챙기냐, 조금 더 탱에만 집중하냐. 두 정수의 성능 차이는 미세했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에서는 대부분 극탱을 택했다. 차라리 오우거 정수를 먹을 노력으로 딜러를 키우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판단. 실제로 그 판단은 옳았다. 그 결과, 나는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오리지날 버전의 ‘심연의 문’을 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오우거 쪽이 좀 더 좋기는 하지.’ 육성법을 유동적으로 바꾸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이고, 플레이어의 실력이기도 하다. 애초에 최종 조합이라고 해서 뭐는 뭐고 이거는 이거, 이런 식으로 딱 정해졌던 것도 아니었다. 핵심 정수를 제하면 전부 공백. 역할별로 비슷한 성능의 후보를 서너 개는 정해 두고, 먼저 나오는 것을 취해 그다음으로 넘어갔다. 내가 원하는 건 게임의 클리어지, 메인 캐릭터 하나만의 완성이 아니었으니까. ‘노랑 정수가 아닌 건 좀 아쉽긴 해도 육성법 전체를 바꿀 정도는 아니겠고…….’ 조금 얼떨떨하다. 분명 제일 좋은 경우의 수로 ‘강철거인’을 기대하며 뱀파이어 정수를 갈아 넣었는데,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고 해야 하나? ‘대체 조건이 뭐지? 뱀파이어 수호자 정수면 수호자 확정에 2단 승급까지 가능해지는 건가?’ 순수한 의문.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이 샘솟지만, 애써 사고를 억누른다. ‘이 정도면 30%. 아니, 40%도 되려나?’ 변한 상황에 맞게 생존율을 재고하며, 새로운 전투 방식을 머릿속으로 세세하게 그린다.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을 올리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갑옷은 차라리 벗고 있는 게 낫겠네. 놈이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 줄 리도 없으니.’ 결전을 앞둔 검사가 전날 밤에 칼을 벼리듯. 계획을 가다듬으며 보다 나은 선택지를 찾아낸다. ‘인지력 하락도 생각만큼 페널티가 심하지 않아. 근력 비율이 이 정도면 힘으로 밀리는 일은 없겠고.’ 계획의 세세한 조각이 하나둘 맞물리며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 다만, 그럴수록 심장이 세차게 뛴다. 두근-! 미래는 깨진 유리와 같다. 그 누구도 그 결과를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계획이 얼마나 완성도 있든 간에, 분명 변수는 수도 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아마 그때부턴 전부 임기응변으로 헤쳐나아가야 하겠지. 계층군주가 소환됐던 그때처럼. 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두근-! 할 수 있는 준비가 더 있는지.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인생이 달린 시험지를 대하듯, 타협하지 않고 고민을 거듭한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비요른.” 로트밀러가 깨어나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른다. “무언가 오고 있네.” 시간이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서둘러 동료들을 깨운 뒤에 시계를 확인했다. [09 : 47] 휴식을 취하고서 약 4시간이 흐른 시각. 바꿔 말하면, 미궁 폐쇄까지 38시간가량이 남은 그 시각. “예상보다 빠른 속도네. 역시 그자들에겐 우리를 추적할 방법이 있는 게 분명하네.” 로트밀러의 조언은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을뿐더러……. 현재 내가 머리에 새겨넣어야 할 정보가 있다면 그런 게 아닐 테니까. ‘그래, 거기서 여기까지 4시간이 걸리는구나.’ 뉴 플랜A를 위한 전제가 모두 충족됐다. 그러니……. 터벅. 이제 주사위를 던져 볼 수밖에. *** 「비요른 얀델」 레벨: 4 육체: 424.4(New +38.3) / 정신: 319.3 / 이능: 496 (New +150.6) 아이템 레벨: 967 종합 전투 지수: 1481.45 (New +188.9)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New) *** 터벅, 터벅. 일정 간격으로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발소리. 그것이 목을 옥죄듯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터벅- 머지않아 가시 범위 안으로 놈이 들어섰다. 참고로 동행자는 예의 불쌍한 아저씨 하나. 우리를 찾으며 또 제물로 바쳐졌는지, 찡그린 한쪽 눈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너무 잔인하당.” “저자는 대체 왜 동료에게 저런 짓을…….” 그 기괴한 광경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 역시 그 노인네는 포탈 앞에 두고 왔구나. 만약, 같이 왔으면 답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나 속으로 하던 차였다. 터벅- 놈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찾아온 무거운 침묵. “뭐야, 전부 살아 있네?” 놈이 경박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내심 예상했던 놈의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짜고짜 배때기에 검부터 찔러 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건만. 뭐지? “갑자기 힘이 돌아오길래 분명 누구 하나 죽은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모든 위화감이 해소됐다. 이래서였구나. ‘어쩐지 묘하게 얌전하더라니.’ 아직 놈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절제된 소망’을 꿀꺽했다는 사실을. 뭐, 듣고 보니 저놈 입장에서는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다 싶기는 했다. 뒤에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아, 그래. 바이쿤두스 정수라도 먹었나 보지?” 이 와중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녀석.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 새끼도 답정너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무려 3등급 정수다. 균형의 수호자 때문에 8명이서 수치를 나눠 가진다고 해도, 바이쿤두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상승폭. 이놈도 그걸 분명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갖다 붙이고 있는데 정답에 도달할 리가 있나. ‘용살자, 리갈 바고스.’ 나는 머릿속에 놈에 대한 글귀 하나를 추가로 적어넣었다. 의외로 이놈은 긍정적인 녀석이었다. 다만, 내 웃음에 뭔가 불길해졌을까? “……바바리안, 맹세는 잘 지켰겠지?” 놈이 여유로운 태도를 지우고 내게 묻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놈을 응시했다. 굳이 말해서 뭐하냐는 의미의 표현. 한데 이걸로도 놈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물건은, 그 물건은 어디 있지?” 놈이 또다시 내게 묻는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 있다. 매몰 비용 때문에 애써 부정했지만, 본인도 서서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농락당했을 수도 있다는 진실을. “……설마, 이미 쓴 거냐?” 마지막으로 놈이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아, 고의는 아니었다.” “……뭐?” “미안하다. 그냥 심심해서 만지작거리는데 부서지지 뭐냐?” 내 진심 어린 사죄에도 놈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놈도 슬슬 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사의 맹세. 명예 하나뿐인 야만인들이 제 목숨을 헌신짝처럼 여겨가며 지켜왔던 그것. 그것에 자신이 속아 넘어갔다는걸. “처음부터 맹세를 지킬 생각이 없었군.” 저릿한 살기가 피부를 통해 와닿는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온 K-바바리안답게 당당히 어깨를 폈다. “아,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않—” “죽어라.” 음성이 들렸을 땐, 이미 지근거리에서 검이 보였다. 그 짧은 순간에 이만큼의 거리를 좁힌 것. 놈을 도발하면서도 속으로는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제때 반응할 수 있었다. 스르륵. 방패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막는 것이 아니라……. 콰앙-! 있는 힘껏 검면을 후려친다. 남는 시간 동안 놈과의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며 만들어 낸 대응법이다. 명색이 아크제 장검 아닌가. 막아 봤자 방패에 구멍만 뚫릴 게 분명할 터. “드왈키!” 넘치는 근력으로 놈을 밀쳐내며 소리친 즉시. 미리 브리핑해 둔 마법이 쏘아진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공격 마법 [냉기폭풍]을 시전했습니다.」 다행히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끌던 동안에 마법 주문을 다 완성해 두긴 한 모양. 솨아아아아아-! 예리한 얼음 파편이 휘몰아치며 통로를 가득 메운다. 벽에 바짝 달라붙어 범위에서 벗어났음에도 오한이 피어날 정도의 냉기.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눈보라가 향하는 그 끝에선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다.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리갈 바고스가 [용광로]를 시전했습니다.」 [용광로]. 4등급 몬스터 용암거인의 이능 중 하나. 활성화 시 냉기와 화염 피해에 면역이 되며, 육체 수치가 크게 증가하는 버프형 스킬. 10년 전 정보래서 그래도 좀 걱정했는데. 역시 아직 갖고 있었구나 그거. 찌이이익-! 나는 미련 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중간 보스 중 하나인 ‘아르고스’를 해치우고서 획득한 것이자, 정석대로라면 미노타우로스를 잡는 데 쓰였어야 할 그 물건. 「탐욕의 불꽃이 반경 내 화염 계통 스킬을 감지합니다.」 「대상 지정 완료.」 「리갈 바고스가 소지한 ‘용암거인의 정수’가 48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스크롤이 불타 사라짐과 동시에 통로 저편의 열기도 끝이 났다. 오케이, 4등급 정수 하나는 짤랐고. 과연 놈은 어떻게 됐을까. 솨아아아-! 이내 통로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 눈보라가 걷혔다. 놈은 멀쩡히 서 있었다. 아무런 피해도 없이, 유리창처럼 반투명한 흑색의 장막 뒤편에서. “고작 이걸 믿은 거냐?” 놈이 우리를 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번 기습이 회심의 수였다고 생각했다면 이해 못할 건 없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설마,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방금 놈이 쓴 스킬은 [암흑장막]이다. 그리고 이 스킬은 로트밀러가 말해 준 놈의 정수 리스트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경계하던 변수 중 하나가 확인된 셈. ‘남은 미확인 정수는 이제 하나 아니면 둘.’ 물론, 다른 넘버스 아이템을 갖고 있을 수도 있기에 그것도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 휘이익-!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다시금 놈의 신형이 나를 향해 쏘아진다. 이전처럼 방패로 검면을 후려치려 했지만, 놈 또한 학습을 하는 지성체. 후웅-! 방패가 허공을 가른다. 인지했을 땐 어깨 부위에서 미세한 고통과 함께 이물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서걱! 확인해 보니 라이티늄제 방패를 두부처럼 썰던 아크제 장검이 팔뚝을 파고든 상태였다. 한 3cm 정도. “……?”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놈의 눈에 맺힌 당혹감이 보였다. 팔을 통째로 베어낼 생각이었는데, 어째서 이 정도밖에 박히지 않았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거, 지금 내 물리 내성 수치가 몇인데.’ 오우거의 패시브 스킬 [무쇠가죽]. 물리 내성 수치가 2배 상승하며, 베기 공격에 한하여 추가로 물리 내성이 2배 더 상승하는 미친 성능의 그 스킬. ‘균형의 수호자’로 스탯이 비슷한 상태라면, 아크제 장검이라도 버틸 수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쩝, 이렇게 일찍 보여 줄 생각은 없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올 때까지. 가능하면 방패로 검을 막으며 감추고 싶었다. 그러나 얘 정도 수준이면 이것만으로도 이게 무슨 정수의 능력인지 유추해 내는 게 가능할 터. ‘머리.’ 이내 화상으로 뒤덮인 정수리를 보며 나는 결정을 내렸다. 오우거의 빨강 정수가 가진 액티브 스킬이자, [살점폭발] 같은 공격기밖에 없던 나에게 생긴 제대로 된 첫 공격 스킬. 숲의 폭군이라는 별명까지 가진 놈의 스킬명이 왜 이따구인진 모르겠지만······.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뭐, 효과만 좋으면 된 거겠지. 후웅! 나는 있는 힘껏 메이스를 휘둘렀다. 140화 각성 (3) [휘두르기]. 그저 강하게 휘두를 뿐이기에, 타 스킬과 달리 빡세게 이미징을 할 필요도 없는 그 스킬. 후웅-! 이 스킬엔 무기 위로 빛이 어린다든가, 돌풍이 뿜어진다든가 하는 흔한 이펙트조차 없었다. 게임을 할 땐 이 부분이 조금 불만이었다. 스킬이란 고등급으로 갈수록 화려해지고 멋진 이름이 붙기 마련인데, 왜 이 스킬만 이따위인가. 나는 오늘 그 해답을 깨달았다. ‘오우거도 효율충이었구나.’ 실제로는 이펙트 같은 건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된다. 괜히 눈에만 띄며, 견문이 넓은 적에게는 내 정보만 노출하는 꼴이 되니까. 오히려 이쪽이 실리적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리갈 바고스가 [암흑장막]을 시전했습니다.」 놈이 방어계 스킬을 사용한다. 정확히 무슨 근거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그래서 물러나기보다는 거리를 유지한 채 급소에 검을 찔러넣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콰지직! 4등급 스킬 [암흑장막]은 내 메이스와 닿는 즉시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난다. 당연한 일이었다. [땅울림]이나 [화신의 격노] 같은 거창한 이름은 갖지 못했을지언정, [휘두르기]는 3급에서도 상위 티어에 속하는 공격 스킬이니까. “……!” 그제야 사태를 인지하고 몸을 비트는 녀석. 거, 그럴 거면 처음부터 피했어야지. 퍼억-! 노렸던 정수리는 아니지만, 내 메이스는 놈의 어깨 위를 내리찍는 데 성공했다. 유효타인지 짧은 신음을 내며 급히 거리를 벌리는 녀석. 타닷. 탈골된 어깨가 기형적일 정도로 축 쳐져 있다. 놈이 재빠르게 검을 입에 물고, 남은 손을 포켓으로 움직인다. 아마 아공간이겠지. 꺼내려는 건 포션일 테고. ‘누굴 병신으로 보나.’ 회복 시간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드왈키! 음성제어를 써라” 일단 사람이 상대이니만큼 팀 보이스부터 켜놓고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신속히 오더를 내렸다. “히쿠로드, 로트밀러! 너희 둘은 드왈키를 지켜라. 미샤, 넌 내 뒤에 바짝 붙고!” 물론 당장 길게 말할 시간은 없기에 우선 기본 진형부터 다시 잡은 뒤. 차근차근 세부 사항을 지시했다. 다행히 동료들은 어떠한 군말도 없이 각자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시작은 드왈키였다. 후웅-! 놈이 민캐다운 움직임으로 내 메이스를 피한 순간. 저주 마법이 놈의 육신에 스며든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9등급 저주 마법 [둔화]를 시전했습니다.」 사실 드왈키는 이것만으로도 1인분은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굳이 따지자면 저놈은 민첩 특화 계열이니. “버러지 같은 것들이……!” 놈이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본격적으로 전력을 발휘했다. 5등급 정수인 [상급 가속]에 [잔상]까지. 순간적으로 곱절은 민첩 수치가 증가했을 터. 타닷-! 떨어진 인지력 때문인지,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눈이 뻐근할 정도다. ‘스탯 보정에 둔화까지 걸렸는데 이 정도라니.’ 새삼 괴물 같은 놈이란 생각이 들지만, 나는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팔이 안 낫는 걸 보니 재생 계열 정수나 넘버스 아이템은 없는 거 같고.’ 새롭게 얻은 정보로 말미암아 경우의 수를 좁힌다. 그리고 내게 부여된 역할에 집중한다. 아, 물론 내 역할이란 간단하다. 서걱-! 카칵, 푸욱! 통로 가운데를 떡하니 막아선 채 신명나게 처맞는 것.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놈이 차가운 비소를 내게 날린다. 확실히 놈이 전력을 발휘하니 내 민첩 수치로는 피하거나 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크제 장검을 방패로 막는 것도 사실상 의미가 없을 터였고. 그래서 그냥 몸으로 때운 결과. 치이이이익-! 순식간에 온몸이 난자되며 벌어진 살가죽으로 산성피가 흘러나온다. 뱀파이어 정수가 사라진 탓에 이전처럼 가만히 놔둬도 낫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 될 일은 아니다. 언제는 이가 멀쩡해서 적을 씹어 삼켰던가? 쨍그랑! 뒤에서 석궁으로 적을 견제하던 로트밀러가 내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보물창고]에서 꺼낸 포션을 던진다.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재생됩니다.」 일명 바바리안 초심 모드. ‘이 짓거리도 오랜만이네.’ 묘한 감회가 차오르는 나와 다르게, 녀석의 눈엔 어린 감정은 불신이었다. 다만 내 표정을 확인하고서, 내가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님을 깨달았을까? 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읊조린다. “……미친 새끼.” 기나긴 세월 동안 미궁에 드나들었을 터인데도 나 같은 새끼는 아직 마주쳐 보지 못한 모양. ‘어쩌다 보니 극찬을 받았군.’ 물론, 보답은 메이스다. 후웅! 놈이 날렵하게 피함과 동시에 난쟁이놈의 지원이 이어진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방출]을 시전했습니다.」 허공에 떠올랐을 때 절묘하게 쏘아진 전기 구체. 놈이 벽을 밟고 재도약하며 이를 피해 냈다. 다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애초에 난쟁이놈의 진짜 역할은 이게 아니니까. 내가 난쟁이놈에게 당부한 건 딱 세 가지였다. “버러지들이 모였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전격방출’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보조할 것.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드왈키를 지킬 것. 그리고……. 「리갈 바고스가 [공포각인]을 시전했습니다.」 타이밍에 맞춰 아이템을 쓸 것. 「히쿠로드 무라드가 [수호자의 팔목 보호대]를 사용하였습니다.」 4등급 몬스터 나이트메어의 이능 [공포각인]. 일시적으로 적에게 강한 공포심을 불어넣고, 그 크기만큼 육체 수치로 되돌려 받는 그 스킬. 「적들을 강하게 밀쳐내며, 일시적으로 아군에게 부여된 모든 해로운 효과에 면역을 갖습니다.」 스킬이 제대로 활용될 새도 없이 돌풍이 일며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예상대로 ‘균형의 수호자’는 풀리지 않았다. 그야 해로운 효과가 아니니까. “베헬—라아아아아!” 뒤로 밀려난 녀석을 향해, [야성분출]까지 써가며 빠르게 달려든다. 그리고 메이스를 내리찍는다. 후웅-! [휘두르기]는 쓰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게 분명하니까. 타닷-! 몸을 옆으로 틀며 내게 검을 휘둘러오는 녀석. 그러나 그때, 내 등 뒤에 바짝 붙어있던 미샤가 놈의 옆구리를 노린다. 푸욱! 얕지만 확실하게 피부를 파고든 검날. 놈이 움찔하며 즉시 미샤를 노려왔으나, 미샤는 재빠르게 움직여 내 뒤로 숨었다. ‘나이스.’ 딱 내가 기대했던 대로의 움직임. 놈이 이를 악물며 읊조린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또다시 극찬이 터지는 걸 보니 다행히 내 전술에 다른 문제는 없던 모양. 따라서 현 상태를 유지했다.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재생됩니다.」 내가 고기방패 역할을 도맡고. 드왈키, 로트밀러, 난쟁이놈은 원거리 지원. 그리고 미샤는 놈이 감전되거나 내 공격을 피하는 등. 틈이 나올 때마다 튀어 나가며 검을 찔러 넣는다. 카칵, 서걱, 푸욱! 전투가 장기화되며 착실히 쌓여 나가는 대미지. “네놈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결국 놈도 도시에 알려지지 않은 정수와 다른 넘버스 아이템도 사용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포션을 써야 하는 빈도가 늘었을 뿐, 전세를 역전하기엔 모자랐다. 거, 입만 살아가지고. ‘……아무튼, 역시 9레벨이었구나.’ 놈이 지닌 아홉 개의 정수가 밝혀졌다. 혹시나 했던 3등급 정수는 알려져 있던 것 하나가 끝이었다. 하긴 3등급쯤 되면 8층 수준이어도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당연한가? “비요른! 또 그 빛나는 칼날이 온당!!” 나는 슬슬 승부를 볼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약 30분에 걸친 전투로 놈이 가진 패가 모두 확인됐지 않나. 이대로 가다간 놈이 잠시 물러서 사제를 이끌고 다시 오는 일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지금.’ 전투가 길어지며 현 상황에 익숙해졌을 지금. “……!” 전력으로 대시하며 손을 뻗는다. 타닷. 놈은 살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예의 사이코패스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는 것. 이건 뭐, 강자들만의 습관 같은 거라도 되나? 참 고맙게도 말이지.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몸이 불어나며 그에 맞춰 길어진 팔. 나는 놓치지 않고 놈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 놈의 표정엔 처음 보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하긴 [거대화]가 있는 줄은 몰랐겠지, 일부러 지금까지 계속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여태까지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 ‘빨강 불이군.’ 슬며시 확인해 본 놈의 신호등 반지에는 적색의 보석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메이스를 들어 올리며 참지 않고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묵묵히 때를 기다려왔던 회심의 한 수. 오늘부로 나의 초필살기가 될 바로 그것. 이름하여, 야성분출로 스탯이 뻥튀기된 거대화 상태에서 있는 힘껏— ‘휘두르기.’ 정말 온 힘을 다해 놈의 머리를 향해 메이스를 내리쳤다. 이 한 방만 맞히면 전부 끝이라는 확신이 내게는 존재했다. 그렇기에, 볼 수 있었다. “나운데즈 아운조.” 놈의 입술이 열린 순간에 벌어진 모든 변화를.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또한, 순식간에 눈높이가 내려가며 시야가 좁아진다. 콰앙! 메이스는 평범하게 휘둘러지며 바닥을 강타했고. “케헤헥.” 어느샌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놈이 피 섞인 토를 게워냈다. 그리고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이 망할 새끼가. 지금 대체 뭘 한 거지? 정답은 금방 나왔다. ‘니미럴.’ 용인족이라면 무릇 갖고 태어나는 고유 스킬. ‘용의 저주’를 받아 놈이 절대 쓸 수 없다고 알려진 그것. 「리갈 바고스가 [용언: 영혼의 침묵]을 시전했습니다.」 용언龍言이었다. *** ‘균형의 수호자’. 이 필드 효과는 기본 스탯의 총합을 동등하게 만들어 준다. 한데 그 와중에 일 대 다수로 싸워야 한다. 4등급 정수 하나도 봉인됐다. 가장 까다로웠던 아크제 장검도 오우거 정수 덕분에 공략법이 생겼고, 숨겨진 방에서 얻은 여러 소모형 아이템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타이밍을 노린 필살기까지. 8층 탐험가여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고 여겼다. 참 한심하게도. 절망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요컨대, 한창 뛰어놀 어린 나이에 희귀한 병에 걸리는 일도. 모처럼 놀러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는 일도. 얹혀살게 된 친적집에 크게 불이 나는 일도. 내일은 같이 있을 거라던 어머니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는 일도. 모두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비가 오든 화창한 날씨든. 부지불식간에. 그것은 누군가에게 찾아가는 성질을 지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퉷.” 놈이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는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아크제 장검을 줍는다. 다만……. 파치치칫-! 그의 손길을 거부하듯 검에서 스파크가 튄다. 놈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검을 쥐어들더니 아공간 속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터벅.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메이스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메이스가 철근처럼 무거웠다. 터벅. 머리를 싸맬 것도 없이 이 현상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캐릭터가 영혼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영혼탈진. 영혼력이 0%가 되면 걸리는 상태이상. 게임 내에서도 이것에 걸려 본 일은 손에 꼽았다. 스킬을 암만 난사해도 영혼력이 0%까지 하락하는 일은 없으니까.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70% 감소합니다.」 나는 깨달았다. “갑자기, 다들 조용해, 졌군?” 뉴 플랜A는 실패다. 그리고 그 대가는……. 글쎄, 지금부터 알게 되겠지. 퍼억-! 놈의 발길질에 신형이 뒤로 크게 밀려난다. 일단 양팔로 막기는 했지만 뼈까지 울려 퍼지는 충격. “비요른……!” 미샤가 황급히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놈에게 닿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아악!” 마치 체술의 달인처럼, 놈이 미샤에 손목부를 팔로 감싸며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년.” 미샤의 복부를 걷어차며 저 멀리까지 날려 버렸다. 로트밀러가 때마침 쏜 석궁? 닿기도 전에 검에 베여 두 동강이 났다. “고작, 이까짓 것들 때문에…….” 놈이 우리를 바라보며 차갑게 읊조린다. 그 한마디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다만 이 와중에도, 습관처럼 머리는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했다. “아마, 너네는 모르겠지.” 놈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앞서 피를 토한 것이야 어쨌든, 놈이 100%의 상태였다면 내 팔은 이미 부러져야 했을 테니까. 보아하니 검도 쓸 수 없는 상황인 거 같고. “내가 지금,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땅에 처박아 버렸는지.” 긍정적인 부분은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 비할 바는 아닐 터. “미, 미샤 양! 정신 좀 차려 보시오!” 뒤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놈이 한 걸음 더 내게로 다가왔다. “바바리안, 영면 따위는 바라지 마라. 죽음마저 널 구원할 수 없을 테니까.” 단순한 겁주기용 멘트가 아니다. 나는 저놈이 가진 유일한 3등급 정수가 뭔지 알고 있으니까. 터벅-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면 도망치는 것도 힘들 텐데. 그런 생각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채워진 그 순간이었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이전과 변함없는 위력을 가진 얼음창이 쏘아진다. 그것도 두 개나. ‘궤도 조정’까지 끝마친 상태로. 피슈우우웃-! 놈이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검으로 겨우 밀어내어 피했다. 평소였다면 [암흑장막]으로 막아 내거나 검으로 손쉽게 박살냈을 녀석이. 이토록 힘들게 마법을 막아 냈다. “……!” 이에 나는 깨달았다. 왜 이걸 곧바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이지만……. 마법사는 영혼력을 쓰지 않는다. 즉, 영혼탈진으로 인한 디버프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그래, 너부터 죽여야겠군.” 드왈키를 지켜야 한다. “다들 정신 차려라!!!” 살고 싶다면. 141화 각성 (4) 헥터 루드위그. 레아틀라스교의 존경받는 대신관이었으나, 말년에 용살자에게 납치당하며 강제로 악신의 종속이 되고 만 비운의 노인. “황혼에 뜬 별이 저들을 인도할지니…….” 그가 습관처럼 성호를 그리다가 멈칫한다. 머릿속에 울려 퍼진 악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위선자여,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헛된 희망이며, 위선에 불과하다는걸. 어떤 변명을 갖다 붙이던 이 모든 것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만약, 그날…….’ 악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설화 속 나오는 위인들처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모든 희생을 짊어졌다면. 사내가 이곳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많은 이가 절망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질 일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 만난 탐험가들도 별일 없이 탐사를 끝마치고 도시로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꽈악. 루드위그는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의미 없는 가정이었으며 후회였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분명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내릴 테니까.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후우우웅-! 그는 지금도 일렁이는 포탈 앞에 서 있다. 용살자가 내린 단 하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정확히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손자를 지키기 위해. 혹여나 그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를 대비해 이곳을 지키는 중이다. 속으론 고작 이런 생각이나 하며. ‘부디 그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기를.’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희망이었다. 소박하단 말도 부족할, 그야말로 부스러기와도 같은 희망. 다만 악신은 이조차 만족하지 못했다. [더욱 여물어라.] 오랜 절망 속에서 웅지는 깎여 나갔고, 이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노예가 오늘 매질을 한 대밖에 맞지 않았다며 기뻐하듯, 비참한 현실에 체념했다. 차악을 택하며 그게 최선이었다 자위했고. 자신에게 이 모든 걸 끝낼 수단이 있음을 애써 외면했다. 한데 아직 부족하다는 듯, 악신은 말한다. [위선자여, 지켜보아라. 너로 인한 절망이며, 너로 인한 고통일지니.] 뇌에 새겨지듯 울려 퍼지는 하나의 음성. 머지않아 굳게 감긴 그의 눈꺼풀 너머로 하나의 광경이 드리웠다. 한 명의 바바리안과 그의 동료들이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승산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베헬—라아아아아!!] 운명에 순응한 자신과는 다르게. *** “그래, 도망치지 않는 건가.” 놈이 날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기세 싸움에서부터 밀릴 생각은 없기에 나도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거, 도망치면 곱게 보내 줄 것도 아니면서. 현 상황은 지극히 간결하다. [영혼 탈진 상태가 끝날 때까지 마법사를 이용해 살아남으십시오.] 만약 친절한 게임이라면, 이런 식의 메시지가 떴겠지. 영혼 탈진의 지속 시간은 약 20분. 그때까지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아, 참고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등을 보인 사냥감만큼 물어뜯기 좋은 건 없을 테니까. “드왈키를 지켜라!!” 있는 힘껏 외침과 동시. 타닷!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놈이 지면을 박찬다. 순식간에 가속하는 신형. 손에는 미샤에게서 빼앗은 독사의 송곳니가 쥐어져 있다. 쩝, 뺏어가도 어떻게 그걸 뺏어가지? 쓰린 감정을 지워 내며 마지막까지 놈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콰앙-! 메이스로 검을 막아 내며 판단한다. 주르륵, 발이 뒤로 미끄러졌다. 이는 가장 자신 있던 힘에서 밀림을 의미한다. 휘익!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재차 휘둘러지는 검.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만, 놈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에는 모자라다. 이는 민첩 역시 놈이 우위에 있음을 뜻한다. 서걱. 벌어진 살가죽에서 산성피가 튀었다. 역시 [무쇠가죽]도 안 통하는 거구나. 아크제 장검을 못 쓰는 거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래, 물리 내성이 높을수록 효율이 상승하는 스킬이니까. 후웅-! 불평불만을 지우며 메이스를 휘두른다. 서걱. 놈에게 닿기는커녕 상처가 늘었다. 그러나 또다시 메이스를 휘두른다. 맞고 또 맞으면서 동료에게 시간을 주는 것. 그게 내 역할일 테니까. “드왈키, 마법은 언제냐!” “준비됐소. 하지만, 둘이 너무 가깝—” “됐으니 쏴라!” 마침내 기다렸던 얼음창이 쏘아진다. 예상대로 놈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나와 같이 처맞으면 손해라고 판단했겠지. 참 고맙게도. 타닷. 나 역시 뒤로 물러서며 얼음창의 반경에서 벗어났다. 다만 숨 돌릴 틈 없이 얼른 등 뒤로 손만 뻗어 배낭에서 방패를 꺼냈다. 어차피 [거대화]도 쓰지 못하는 마당 아닌가. 아크제 장검만 아니면 방패가 있는 쪽이 훨씬 전투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맘 같아선 흉갑도 입고 싶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주지 않겠지.’ 애써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지운다. 체념이 아니라, 더욱 절실한 것에 모든 걸 집중하기 위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만을 취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정보 하나. “미샤는 어떻게 됐지?” “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을 찌른 모양일세. 포션을 먹였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네.” 그래, 그때까지는 1:4로 싸워야 한다 이거지. 냉정한 말이지만, 빠진 한 사람이 드왈키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만약 당한게 드왈키였다면 승산조차 없었을 테— “조심하게!” 또다시 놈이 달려든다. 느긋하게 기다려줄 시간은 없다는 거겠지. 일단은 긍정적인 요소다. ‘그래, 급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구나.’ 내심 예상은 했지만 이로써 확신에 이르렀다. 놈은 단기적인 상태 이상에 걸린 게 아니다.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이 달려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칵! 영혼 탈진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보기 위해 놈도 무리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 20분만 버티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는 뜻. 하지만……. ‘20분이나 버텨야 한다니 돌겠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놈이야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에게 포션은 네 병밖에 남지 않았다. ‘최상급을 제외하면, 중급 하나 상급 하나.’ 지금 구도로 간다면 몇 분도 채 되기 전에 전부 소모될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베헬—라아아아아!!”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지르며 방패를 밀친다. 그리고 재빠르게 대쉬해 메이스를 휘두른다. 드러눕는 플레이로는 절대 20분을 버텨내지 못하리라는 판단. 물론, 처음의 몇 분 동안만. 타닷. 놈이 거리를 벌리면 즉시 따라붙는다. 그리고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한다. 로트밀러의 화살 지원이 날아오든 말든. 드왈키가 마법을 쏘아내든 말든. “……같이 죽겠다는 거냐.” 동귀어진을 노리는 사람처럼 바짝 달라붙어 메이스를 휘두른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물귀신 모드. 모순적이지만 이 전술을 오히려 부상을 줄여주었으며, 감히 놈이 드왈키에게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걸 증명하듯이. “칫.” 놈이 내게 검을 내찌르다 말고 얼음창을 피해 몸을 비틀었다. 애석하게도 석궁이 쏘아진 지점을 향해. 푸욱! 기념비적인 첫 명중. 물리 내성 때문에 깊이 박히진 않았지만, 일단 허벅지이니 기동성에 조금은 제약이 생겼을 터. 다만, 놈도 슬슬 뭔가 깨달았을까? ‘날먹은 여기까지겠군.’ 이를 기점으로 눈에 담긴 기세가 변한다. 따라서 나도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포기하는 법을 배운 놈은 그 어떤 분야든 위험한 법이니까. “끈질긴 것들……!” 휘둘러진 검에서 진득한 살기가 묻어난다. 마치 족쇄를 풀어낸 것만 같다. 수비를 위해 공격로를 제한했던 녀석의 검이 한 가지 목적만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린다. 뭐,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겠지만. 휘익-! 화살이 어깨를 스쳤음에도 놈은 끄떡도 않으며 나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결과. 푸욱! 몇 차례의 공방 끝에 놈의 칼날이 내 복부를 깊숙이 관통했다. 자연 재생이 사라진 덕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을 부상.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재생됩니다.」 로트밀러의 판단 아래 포션 한 병이 더 사용됐다. 이제 남은 건 상급 하나와 최상급 둘.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닷. 놈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무슨 곡예라도 부리듯, 휘둘러진 메이스를 즈려밟고 나를 뛰어넘는 놈. ‘니미럴.’ 재빨리 뒤돌아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한 번 더 지면을 박찬 놈이 순식간에 뒷진영을 향해 거리를 좁힌다. “뒤로 가게!” 난쟁이놈이 드왈키 앞을 막아섰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저 괴물을 정면에서 어떻게 막겠는가. 핵심 스킬인 [균형추]도 없는 상황에서. 콰앙! 발길질 한 방에 방패를 쥔 채 축구공처럼 날아가는 난쟁이놈. 로트밀러가 석궁을 버리고서 검을 휘둘렀다. 물론, 통할 리가 만무했다. 푸욱! 놈은 너무도 쉽게 로트밀러의 검을 쳐내며 복부에 초록빛 칼날을 쑤셔 박았다. 하나 놈이 검을 빼내려는 찰나. “이건, 우리 물건이오.” 로트밀러가 놈의 손을 잡으며 이를 저지한다. 피슈우우웃-! 다행히 제때 얼음창이 쏘아지며 놈이 검을 놓고서 뒤로 물러났다. 털썩. 이내 지지대를 잃은 로트밀러가 힘 없이 바닥에 너브러졌다. 다만 복부에 꽂혀 있던 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영혼력 소모가 없는 미믹의 스킬 [보물창고]. 저놈이 사용할 수 없도록. 조금이라도 이 팀에 도움이 되도록. ‘포션만 제때 먹이면 살릴 수 있어.’ 동료의 부상에도 나는 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너, 로트밀러를……!!” 벽에 기대 회복 중이던 미샤가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놈에게 검을 휘두른다. 닿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드왈키한텐 못 간…… 끅!” 놈의 발에 채인 미샤의 신형이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하나 놈은 드왈키에게 직행하지 않고 기절한 미샤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려는 짓이야 뻔했다. 결정타를 꽂아넣고 하나 남은 검마저 훔쳐갈 생각이겠지. 이 빌어먹을 도둑놈의 새끼가. “말했지 않나. 우리 물건이라고.” 날파리를 쫓아내듯 휘두른 메이스질에 놈이 미련없이 미샤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바바리안, 설마 아직도 해볼 생각인 거냐?” 뭐래, 병신 새끼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놈은 가뿐히 뒤로 물러나 피하며 말했다. “설마 저딴 쓰레기를 믿고 있는 거냐? 저주 몇 개를 빼면 얼음창에 냉기분출이 끝인 놈을?” 물론이다. 하위 공격 주문인 게 어떻단 말인가. 대가리에 꽂히면 뒈지는 건 똑같을진대. 딱 한 번, 럭키펀치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놈에게 맞힐 수 있으면 된다.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 “드왈키!!” 슬슬 마법이 날아올 타이밍이란 생각에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한데 이건 또 뭘까. ‘니미럴.’ 마법이 날아오지 않는다. *** 왕가 공인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가 굳이 전사 두 명뿐인 팀에 입단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곳을 골랐다. 전사가 둘이라면 마법사가 더 귀중해 보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본질이 들통나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하하하, 제 이름은 리올 워브 드왈키, 라프도니아 왕가 공인의 8급 마법사—] [뭔가 했더니, 역시 쓰레기였군.] 쓰레기. 같은 마법사에게 마법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 [하하핫! 그럼 우리 팀은 모두 반푼이가 모인 셈인가? 차라리 잘됐네, 우리는 앞으로 서로를 보며 괜히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그럼에도 이들은 괜찮다 말해 주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이해해 주었다.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25년간의 삶은 전부 이들과 만나기 위해서 존재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설마 저딴 쓰레기를 믿고 있는 거냐? 저주 몇 개를 빼면 얼음창에 냉기분출이 끝인 놈을?]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활약해야 할 순간이 왔음에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마력이 아무리 고강해져도. 자신은 반푼이 마법사였다. 소중한 동료들의 기대에조차 부응하지 못하는 반푼이 마법사. 한데, 그런 주제에. [뒤로 가게!] 친우에게 지켜졌다. [이건, 우리 물건이오.] 검이 박힌 채 웃는 동료를 구해내지 못했다. [드왈키한텐 못 간…… 끅!] 연모하던 여인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사실에 머리가 하얘졌다. 더없는 무력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놈은 이미 포기한 모양이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 남았다면 모를까. 아직 소중한 동료가 싸우고 있지 않은가. 홀로,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서. “바바리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미 모두 끝났다는걸.” 놈의 조소에도 묵묵히 메이스를 휘두르고, 입에 머금은 피를 놈의 얼굴에 뿜어내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응전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 얼굴이 밝아졌군. 그렇게 동료들이 마음에 드는가?] 영창을 시작하며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트롤전을 겪고난 직후, 마탑 교습소의 사범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뭐? 트롤을 잡을 수 있는 마법을 알려달라고? 음, 뭐…… 없는 건 아니네마는.] 그날 드왈키는 사범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한 가지 마법을 배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조합’을 익혔다. 사범은 일단 알려는 주되, 절대 쓰지 말라고 몇 번이고 그에게 당부했지만……. ‘사고가속.’ 인지력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마력증폭.’ 심장이 내재된 마력을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출력을 높인다. ‘심장촉진.’ 심장 박동수를 강제로 높이며 마력이 전신으로 퍼지게 만들며, 그 외에도 부작용이 막심하기로 유명한 정신 감각계 마법들을 중첩시킨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전신에 마력을 회전시킨다. 반면 정신은 어느 때보다 개운하며 눈앞은 선명하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이름이 뭐냐고? 정확한 명칭은 없네.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는 조합이라 말이지. 다만, 굳이 붙여나 보자면…….] [음, 글쎄. 희생은 뭔가 어감이 좀 그렇고.] 드왈키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고작 그랬을 뿐인데. [그래, 각성 정도면 적당하겠군.] 기초 공격 마법 마력시. 수십 개의 화살이 빛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142화 각성 (5) 드왈키의 마법 지원이 끊긴 지 3분이 지났다. 음,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체감상으로는 10분은 족히 지났을 것 같은 시간. “인정하지, 바바리안. 너 같은 놈은 살다 살다 처음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놈의 이간질이든 아니든. 실제로 드왈키가 멘탈이 나가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지라도. 변하는 건 없다고 판단했다. 한데 그런 내가 재미없게 느껴졌을까? “네 영혼은 내가 좋은 곳에 잘 써주지. 그러니, 이만 죽어라.” 유희는 여기까지라는 듯. 놈이 허리춤에서 꺼낸 단도를 내게 찔러온다. 너무도 절묘한 각도로 들어온지라, 막거나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기껏해야 차악을 택하는 정도. 최대한 몸을 비틀어 심장 대신 폐를 내어주자. 치명상에 가까운 부상일 터이나, 아직 최상급 포션이 남아 있지 않나. 이를 마시며 치료한 뒤. 어떻게든 버티자. 미샤도, 난쟁이놈도 곧 깨어날 테니까. 또한, 영혼 탈진도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찰나 동안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려는 차였다. 등 뒤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린 것은. 솨아아아아아-! 새하얀 광채를 뿜어내며 휘어지는 수십 발의 마력시. 마치 폭우와도 같은 그것에 놈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선다. 하나 놈에게 맞서는 난쟁이놈이, 로트밀러가, 그리고 미샤가 그러했듯이. 유의미한 대응은 아니었다. 휘이이익! 빛의 화살은 한 발 한 발이 제각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휘어지며 놈을 추격했다. 이에 놈도 도망치는 걸 멈추고 작은 단검을 이용해 화살을 하나하나씩 쳐내기 시작했다. 바가지 하나로 강물을 퍼내리는 형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미친.’ 놀랍게도 놈의 행동은 통했다. 비록 빛의 화살에 온몸이 꿰뚫린 고슴도치 상태가 되기는 했으나, 급소만큼은 보호하는 데 성공한 녀석. 터벅. 돌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고,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내 뒤에는 드왈키가 서 있었다. 쉽게 말해, 방금 전의 마법도 얘가 썼다는 뜻.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결심을 하는 데 좀 오래 걸리고 말았소.” “결심?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그건…… 일단 저자를 해치우고서 얘기하는 거로 합시다.” 드왈키가 대답을 피하듯 시선을 돌렸다. 이러는 걸 보니까 확실히 딴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력 적성이 0인 바바리안조차 느껴질 만큼 밀집된 마력이,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나만 궁금한 게 아니었는지. “마법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온몸으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놈이 묻는다. 거, 내가 쟤였으면 일단 튀고 봤을 거 같은— “그대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묻는구려.” 뭐? 알고 있다고? 드왈키가 놈을 보며 차게 읊조리자, 놈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야, 정말 쟤는 알고 있는 거야?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미안하게 됐소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나부터가 알아서.”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니, 그보다 얘가 이렇게 똑 부러지는 얘였나? 머리가 현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판단이 된다. 내게 있어 몹시도 긍정적인 변수라는걸.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나중에 들어 보면 되겠고…….’ 상황에 집중한다. 타닷. 그리고 드왈키는 내게 말했다. “뒤로 물러나시오. 다칠 수도 있으니.” “아, 어. 그러지.” 캐릭터 변화가 적응이 안 될 정도지만, 일단 녀석이 말하는 대로 따랐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리올 워브 드왈키가 8등급 공격 마법 [얼음창]을 시전했습니다.」 얼음창이 쏘아진다. 통로 절반을 메울 만큼 거대한 얼음창이. 연달아서 두번이나. 피슈우우우욱-!! 실로 압도적인 풍압을 뿜어내며 놈을 향해 쏘아진다. 하나 이런 규모의 마법에 경험이 많은 걸까? 놈은 침착하게 얼음창을 응시하더니, 신속하게 아공간에서 아크제 장검을 꺼냈다. 파치치칫-! 놈의 손길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스파크를 내뿜는 검. 다만 놈은 목줄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를 기어코 쥐고서 휘둘렀다. 콰아앙-! 마법의 카운터 성질을 지닌 아크제 장검답게, 거대한 얼음창은 검과 맞닿는 것만으로도 산산이 조각나며 마력으로 흩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타닷. 놈이 재차 지면을 박차며 거리를 좁혀온다. 드왈키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 걸 보니, 역시나 이것까지는 녀석에게도 예상외 상황이었던 모양. 다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리올 워브 드왈키가 7등급 공격 마법 [냉기폭풍]을 시전했습니다.」 1초도 되지 않는 동안에 영창을 끝마치고 시전된 마법. 솨아아아아-! 이쯤 되면 얼음 파편이 아니라 작은 얼음창들이 쏟아지는 격이지만……. 이번에도 저 썩을 아크제 장검이 문제였다. 눈보라 너머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놈의 형체.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졌을 때에는 검으로 커다란 얼음덩이들만 쳐내며 전진하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마지막까지 쉽게는 안 간다 이거지.’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이후 벌어질 일을 대비했다. 딱히 유별날 건 없었다. 내 삶은 날먹과 거리가 멀었을뿐더러……. 딜러를 지키는 건 탱커의 숙명 아니겠는가. “베헬—라아아아아!!” 선빵필승. 놈이 눈보라 속을 빠져나오는 순간을 노려 메이스를 휘두른다. 하나 그 와중에도 나까지 신경 쓰고 있었을까. 나름 회심의 기습이었음에도 놈은 기민하게 반응하며 검으로 메이스를 막아냈다. 1단계 소재 강철과 6단계 소재 아크의 격돌. 서걱-! 두께나 밀도와는 관계없이 메이스가 두부처럼 잘려나간다. 하나 놈은 이것에 만족지 않으며 내 목을 노려왔다. 다만, 그 순간. 파치치칫-!! 검에서 스파크가 미친 듯이 튀어 오르며 놈이 움찔한다. 벌겋게 달아올라 김까지 피어나는 손. 온몸이 화상으로 뒤덮인 것도 저 검과 관련이 있는 걸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놈은 더 이상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검을 아공간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타닷. 재차 단검을 뽑아들며 내게 달라붙었다. 놈이 원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래, 왜 이렇게 아득바득 마법을 뚫고 달려오나 싶었는데, 이걸 노렸던 거구나. “비요른, 놈과 떨어지시오!” 아까 전에 내가 썼던 바바리안 물귀신 모드와 비슷한 맥락의 전략이다. 나를 방패 삼아 드왈키의 마법을 억제하는 것. 후, 이걸 내가 당할 줄은 몰랐는데. 「리올 워브 드왈키가 9등급 저주 마법 [둔화]를 시전했습니다.」 공격 마법을 대신해 저주 마법이 놈에게 중첩됐지만,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단검을 휘둘러 대는 탓에 떨쳐내는 게 여간 쉽지 않다. 따라서. ‘그래, 한번 해보자.’ 죽창처럼 변한 메이스를 찔러 넣는다. 꼭 마법에 맞아야지만 뒈지는 건 아니지 않나. 푸욱. 한층 위력이 강화된 ‘둔화’ 덕에 아까만큼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또한, 드왈키도 얼음창이나 냉기폭풍 대신 소량의 마력시를 세세하게 컨트롤하며 지원하고 있다. 명백히 나에게 유리한 상황.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바짝 정신이 든다. ‘과연 그걸 얘가 모를까?’ 놈은 드왈키가 대답을 피한 현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달려들었다. 어째서였을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나부터가 알아서.] 답은 시간이다. 드왈키가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적다. 어쩌면 드왈키가 아는 것보다, 이 녀석이 남은 시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 “드왈키, 냉기폭풍을 써라!” 나는 결단을 내렸다. “……!” 놈의 표정을 보니 정답이었다. 다만, 드왈키가 망설였다. “하지만……!” 좀 변하긴 했어도 드왈키는 드왈키구나. “난 신경 말고 어서 써라!!” 다시 한번 다그치듯 외침과 동시 드왈키가 마법을 시전했다. 드왈키의 손아귀 위로 소용돌이치는 냉기. “추운 건 잘 참나?” “정신 나간 놈.” 거, 또 극찬을 해주네. 나는 방패를 들어 올리며 놈과 거리를 벌렸다. 방패로 얼음 덩어리들을 막아내며 어떻게든 버틸 작정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이내 눈보라가 우리 둘이 위치한 통로를 가득 메웠고, 피부가 바짝 얼어붙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눈보라를 뚫고서 놈이 단검을 찔러온다. 푸욱! 폐부를 깊이 찌르며 비집고 들어온 약 20cm의 검신. “커허컥!”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얼음 덩이들이 날아와 내 몸을 강타하고 있다. 얼음창처럼 예리한 결정들은 내 피부를 스치고 지나쳤다. 하지만 당하고만 살 수는 없는 법. 푸욱! 몸이 먼저 반응하며 메이스였던 단창을 힘껏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솨아아아아- 눈보라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며 시야가 돌아온다. 나는 신속하게 주변 공간부터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순간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세 가지나 터져 있었다. “…….” 눈코입은 물론 귀에서까지 피를 쏟아내며 무릎을 꿇은 드왈키가 첫 번째였고. “…….” 아무렇게나 찌른 단창이 놈의 심장부를 관통했다는 게 두 번째. 「리갈 바고스의 [두 번째 심장]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놈이 아직 쓰지 않은 넘버스 아이템이 하나 더 존재한다는 게 세 번째였다. 하, 진짜 어지간하면 이런 쌍욕은 이제 안 하려고 했는데. 「캐릭터의 심장이 회복될 때까지 절대적인 보호를 받습니다.」 이런 개씨발 미친 호로새끼가. *** 근육을 연상시키는 붉은색의 무언가가 놈의 육신을 뒤덮는다. 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 새끼는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 걸까. 정말 죽기는 하는 존재인가? 모르겠지만, 일단 피를 토해냈다. “쿠에에엑! 켁, 케헤엑!” 산성피를 뒤집어썼음에도 부식음조차 내지 않는 심장 형태의 껍질.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No.3120 두 번째 심장. 심장에 즉사 판정 대미지가 들어왔을 때 발동되는 소모품형 넘버스 아이템. 지금 내 수준으로는 뭔 수를 써도 저 방어막을 부술 수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일부터 해치워야겠지. 터벅, 터벅.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다. 드왈키가 냉기 속성 마법사라 다행이다. ‘동상’ 판정이 아니었다면, 이미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을 테니. “드, 왈키.” 무릎 꿇은 채로 의식을 잃은 드왈키의 상태는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맥을 짚자 녀석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제한 속도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 발…… 버텨라.” 일단 외상은 보이지 않기에 입안으로 최상급 포션을 흘려 넣었다. 딱 절반만큼만. 지금 죽어 가는 사람은 또 있으니까. 터벅, 터벅.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내디딘다. 걸을 때마다 속이 뒤틀리며 숨이 막혀오지만, 단창을 지팡이 삼아 도리어 속도를 높인다. “로트, 밀러…….” 다행히 살아 있었다. 그래,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는 드왈키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희미하게 뛰는 심장. 남은 최상급 포션을 전부 상처 부위에 뿌렸다. 치이이이익-! 부글부글 끓으며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그의 옆에 기대앉아 호흡에 집중했다. 자꾸 잔기침이 나며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참아내며 로트밀러가 회복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야 남은 포션 두 병은 전부 이 아저씨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로부터 한 1분쯤 흘렀을까? “비, 비요른……!” 벽에 대가리를 박고 기절한 난쟁이놈이 정신을 차렸다. “드왈키는? 드왈키는 어디 있나?” 거참, 나도 죽어가고 있구먼. 일단 자기 절친이 먼저라 이거지? 말할 기력도 없어 드왈키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놈이 호다닥 달려가 드왈키의 상세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업어서 우리 쪽으로 실어 왔다. 그러던 때였다. “끄으…….” 내가 기댄 벽에서 4m가량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던 미샤가 힘겹게 고개를 든다. “……비요른.” “살아 있다.” “다행, 이당…….” 그래, 역시 너밖에 없구나. 미샤가 부러진 갈비뼈 부근을 매만지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로트, 밀러는……?” “포션, 커컥…… 먹였다.” 후, 이건 뭐 병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가만히 좀 쉬려는데 드왈키의 수송을 끝마친 난쟁이놈이 내게 다가와 부상 부위에 붕대를 여미어준다. “비요른, 어떻게 된 건가! 저기에 있는 이상한 껍질은 또 뭐고?”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고,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호흡에 집중하며 눈을 감는다. “미안하네. 자네도 힘들 텐데, 쉬게.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네.” 난쟁이놈이 사과하며 다시 드왈키에게 상세를 살피러 돌아갔다. 그렇게 1분쯤 더 흘렀을 때였다. 「영혼탈진 상태가 해제됩니다.」 드디어 스탯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조금은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자연 재생력이 없더라도, 육체의 내구도 자체가 달라지는 셈.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보게! 이 친구야, 힘을 내게!” “비, 비요른……? 로트밀러가 바들바들 떠는데, 괘, 괜찮은 거겠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143화 각성 (6) 생존에 있어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 난제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풀어 갈수록 생존율은 상승한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컥, 커헉!” 부상자 셋과 최상급 포션 한 병. 사실 최선의 수는 로트밀러에게 한 병을 전부 먹이는 거였다. 그를 조금이라도 빨리 살려내 [보물창고]에 들어 있는 포션을 꺼내야 했다. 그래서 상급 포션으로 나를 치료하고, 남은 최상급 포션 하나를 드왈키에게 먹이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랬으면 드왈키가 죽었겠지.’ 이성적인 선택이 어려웠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육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절반분의 포션을 드왈키에게 먹였다. 그 결과. “둘 다 부디 버텨 주게! 이 빌어먹을 곳에서 모두 살아나가잔 말일세!” 확정된 미래가 사라졌다. 드왈키를 포기하지 못했기에 로트밀러의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바로 먹였다면 포션 반병으로 충분했겠지만, 너무 늦게 먹인 게 문제였다. 쉽게 말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팀 전원이 살아남기를 바랐기에, 팀 전원이 죽을 수도 있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비, 비요른…….” 나는 로트밀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맥을 짚고, 호흡을 확인했다. 부디 버텨 주기를 바랐다. 이 아저씨가 이대로 죽으면 우리 다섯 명 모두 죽는 셈이니까. ‘10분.’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용살자 새끼도 깨어날 거다. 그리고 지금 당장 멀쩡한 것은 난쟁이놈밖에 없다. 만약, 난쟁이놈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인 상황. “아, 그래! 석실! 비요른, 그 석실은 뭐였나!” 드왈키의 옆을 지키던 난쟁이놈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가 12시간 동안 미로를 수색해서 겨우 찾아낸 석실의 정체를 묻는다. 본인의 희망을 듬뿍 담아내어. “엘릭서? 포션? 뭐, 그런 게 들어 있는 건가? 아아, 그런 거라면 챙겨놨을 테지? 그럼 혹시 치유의 샘이나 그런 류인 건가?” “……저 석실의 용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가!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녀서 찾아낸 곳이잖나! 분명 뭔가 있을 거 아닌가!” 난쟁이놈이 하나의 답을 바라며 질문한다. 이런 식의 질문엔 답하지 않는 게 최선이란 걸 알지만……. 나는 잠깐의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저 석실은 함정방이다.” “함정방……?” “그래, 상자를 열게 되면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만약 놈과 사제가 동시에 등장한다면 플랜A를 즉시 폐기하고 이를 이용해 포탈을 타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땐 무슨 짓을 해도 승산이 없으니까. “그, 그래! 그럼! 어서 이걸 타고 돌아가세! 그러면 되겠군!” “히쿠로드 무라드, 정신 차려라. 설령 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탑에 간다고 포션이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애초에 돌아가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 빈집털이를 노리는 거라면 모를까. 부상까지 입은 상태로 포탈을 향하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대신관급의 신성력을 갖고 직업을 변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카루이의 사제가 그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 그래! 사제! 그쪽 일행에 사제 같은 노인이 있지 않았나? 그자를 찾아보세.” “그만해라.” “내가 보기엔 그자도 분명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를 따르는 모양이었네. 만약 그게 맞다면—” “그만해라, 히쿠로드.” “어떻게 그만하란 말인가! 두 명 다 죽어가고 있는데,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절규하듯 난쟁이놈이 소리쳤고,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정말…… 정말 그것밖에는 없는 건가?” “그래.” 나올 수 있는 숫자는 셋이었다.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혹은 누군가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거나. 억겁과도 같은 일분일초가 흘렀다. 그리고……. “그자는…… 어떻게 됐소…?” 드왈키가 의식을 되찾았다. *** “드왈키! 말하지 말게!” “그래, 가만히 있어라. 로트밀러가 깨어나면 곧바로 포션을—” 여러 말을 쏟아내는 우리를 보며 드왈키는 재차 물었다. “그자는…….” “……?” “어떻게 됐소?” 자신의 목숨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는 듯. 눈을 뜨자마자 그것만을 연달아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을 말해 줘야 하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죽진 않았다.” “아…….” “그렇지만 네 덕분에 당장의 위기는 넘겼다. 이후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쉬어라.” “그, 그럴 수는 없소.” 드왈키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저었다. “시, 시간이…… 없단 말이오.” “방금 말 못 들었나? 로트밀러가 깨어나면 포션을—” “이, 이건 포, 포션으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군.” 드왈키가 어떤 방법을 쓴 건진 모른다. 하지만, 현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드왈키의 말이다. 그 누구보다 삶을 갈망할 드왈키의 말이다. 그러니 부정하는 건 의미 없겠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최, 최상급 포션이네!” “그래 맞당! 너도, 알지 않냥. 이게 어떤 물건인지. 그,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말고—” “미샤 양.” 드왈키가 눈을 떠 우리를 응시했다. “히쿠로드, 그리고…… 비요른.” 겨우 한 명씩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수많은 죽음을 접한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드왈키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말해라. 로트밀러에게는 내가 전해주겠다.” “……고맙소.” 심지가 다한 촛불이 일렁이는 것.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듯이. 기억이라도 되고 싶듯이.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빛을 뿜어내는 것. “그대들에게 해야 할 말이 있소.” 이내 드왈키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멎었다. *** 어머니께서는 바다를 좋아하셨다. 본 적도 없으면서, 얘기로만 들었던 바다라는 미지의 것을.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점점 크며 알게 되었다. “가질 수 없기에…… 더욱 갖고 싶어지는 게 있소.” 세상에는 간혹 그러한 것들이 있다. 알지 못하기에,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에. 더욱더 눈부시게 보이는 그것. “내게 그런 존재가 그대들이었소.” 운이 좋았다. 분에 넘칠 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탐험을 하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결코 채워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텅 빈 자리가 비로소 채워졌다. 그렇기에, 꼭 말해야 했다. “모두, 내 동료가 되어 주어서 고맙소.” 그동안은 멋쩍단 이유로 하지 못했던 말. 항상 나중을 기약하며 미뤄 왔던 말.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가슴속에 묻힐 말. 스르륵. 드왈키는 흐릿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앙! 그런 말 하지 마라! 응? 드왈키, 제발…….” 연모하던 여인은 울고 있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스르륵. 시선을 옆으로 움직인다. “나야말로…… 내 친구가 되어 주어서 고맙네. 내가 만든 팀에…… 들어와 주어서 고맙네.” 소중한 벗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웃어 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언젠가, 꼭 대장간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그 약속도 못 지키겠구나. 스르륵. 또다시 시선을 움직인다. “리올 워브 드왈키.” 마지막은 연적이자 동경하는 동료였다. 겁쟁이인 자신과 다르게, 항상 마지막까지 투쟁하며 모두를 지켜내 온 전사.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사과하지. 내가 너를 잘못 봤다. 너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마법사였고, 동료였다. 그리고 네가 내린 선택은 숭고하고 고귀했다.” 언제나 칭찬에 인색했던 사내가. 입에 발린 말은 결코 담지도 않던 그 전사가 말한다. “그런 너와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이었다.” 더 없이 벅차올랐고, 어딘가 후련했다. 처음으로 그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야기 속 영웅처럼 살아가던 위대한 전사에게 영광이라는 말을 들었다. 반쪽짜리 마법사에 불과하던 내가. 그가 밟아갈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정도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래, 분명 그랬어야 할 터인데……. ‘나는 왜…….’ 분하다. 억울하다. 두렵고. 허무하다. ‘어째서…….’ 그게 죽음이었다. 누군가의 다음 페이지에서 지워지는 것. “더 남길 말이 있지 않나. 바란다면 자리를 비켜 주겠다.” 이내 전사가 말하였고, 그제야 드왈키는 이 감정의 이유를 깨달았다. “으아아앙! 드왈키! 죽지 마라! 제발, 응?” 세상에는 간혹 빛이 나는 사람이 있다. 내게는 그 사람이 당신이었다. 그 말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욕심이겠지.’ 애써 이기심을 지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음을 알지만. 그녀의 여정은 오늘로 끝이 아닐 테니까. 앞으로도 이어질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선 안 된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한다면 그게 올바른 일이다. 그렇기에, 드왈키는 입을 열었다. “비요른.” “……내게 할 말이 있는 건가?” “그렇소.” 떠나가는 자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대는, 눈치가 빠르지 않소. 더는 외면하지 말아 주시오.” 전사는 되묻지 않았다. 이미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알고 있는 거겠지. 야만인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똑똑하며 현명한 자니까. “대답, 해…….” “알겠다.” 기어코 대답을 받아낸 드왈키는 진심으로 환히 미소 지었다. 다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라는 걸까. “……놈이 깨어났다.” 전사의 눈이 차갑게 식는다. 이에 멎어가던 심장이 두근거린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응전했으나, 그로서는 결코 이겨내지 못한 존재. 다만……. “이길…… 수 있소?” “걱정 마라. 반드시 모두 살려서 돌아가겠다.” 그 한마디에 드왈키는 모든 불안을 거뒀다. 의미 없는 죽음이 되리란 걱정도 지워냈다. 이 믿음직한 전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 그렇게 되리라. 그러니, 이만 전부 내려놓고……. 스르륵. 눈을 감는다. 소리가 멀어지고, 어둠이 깊어진다. 서서히 무뎌지는 사고 속에서 생각한다. 내가 영웅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그래서 내 삶이 짧게나마 책에 기록된다면. 그 마지막에 적힐 문장이 무엇일까. 제법 그럴듯한 글귀가 떠올랐다. 마법사의 최후라기엔 그리 어울리는 표현은 아닐 테지만……. ‘나쁘지 않구려.’ 팀 반푼이의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오르큘리스의 일원 중 하나인 용살자 리갈 바고스로부터 소중한 동료를 지켜낸 뒤— 장렬히 전사. *** 「업적 달성」 조건: 첫 동료 캐릭터 사망.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놈에 대한 정체를 알게 되면서 이 생각은 점점 더 굳어졌다. 오르큘리스라는, 왕조차 우습게 보는 집단의 일원 아닌가. 통성명은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놈이 보복하고자 한다면, 도시라고 해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뉴 플랜A. 놈을 해치우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균형의 수호자’가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던가. 두근-! 전사의 심장이 낮게 울린다. 뉴 플랜A는 실패했다. 놈과의 전투는 남았지만, 모두 살려내지 못했다. 맞서 싸운 곳에도 낙원은 없었다. 모르던 건 아니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허울 좋은 곳이 존재할 리 만무하니까. 두근-! 낮게 뛰는 나의 심장과 달리, 이제 이 녀석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하지만……. “히쿠로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알고 있네.” 메이스를 지팡이 삼아 일어선다. 남겨진 자에게는 남겨진 자만의 할 일이 있을 터이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통로 너머를 응시한다. 꽃잎처럼 활짝 벌어진 껍질 사이로 놈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시간이었다. 144화 위대한 유산 (1) 두근-! 머리를 울리는 심장 소리에 리갈 바고스는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두웠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피부로는 질척거리는 점액질들이 느껴졌다. 마치 양수 속에 몸을 웅크리기라도 하듯이. ‘그래, 이것까지 쓴 건가…….’ 아깝다는 감정은 없다. 찔린 게 심장이 아니라 머리였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틀림없이 그대로 절명하였을 터. 단지 한 가지가 궁금할 뿐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왠지 옛 동료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아직 그가 천륜을 저버리고 지독한 저주를 몸에 달기 전에 있었던 대화였다. [네가 왜 매번 돈을 잃는지 알려 줄까? 너는 딱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걸면서 따라가. 승부가 필요한 순간에서도.] 물론, 카드 게임과 싸움은 다르다. 게다가 말 자체도 현 상황에 대입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맥락은 비슷하다. 다섯 장의 카드가 모여 완성될 때까지,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두근-! 쉽게 말해, 각오가 부족했다. 하나씩 내어주다가 여기까지 왔다. 1년 가까이 찾아 헤맨 그 물건 때문에 시간을 주었고. 용언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 끈질긴 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1년은 정양할 각오로 용살검을 몇 번이고 휘둘렀지만, 놈들은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째 심장마저도 사용됐다. 두근-! 리갈 바고스는 마침내 인정했다. 적을 얕보았기에, 호적수를 대하듯 모든 걸 걸고서 대적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재생된 심장의 박동 주기가 짧아지고 빛이 돌아온다. 그는 몸에 달라붙은 점액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통로 너머로 바바리안이 보였다. 놈은 이미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폐부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입에선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상태로. 옆에 위치한 드워프 전사의 부축조차 받지 않은 상태로. 터벅, 터벅. 처절하게 걸어온다. 오직 한 가지의 목표. 적을 죽이기 위해서. 스윽. 허리춤의 단검을 움켜쥐던 그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판단을 재고했다. 용언을 쓰며 저주가 발동된 심장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 저주가 남긴 잔재는 그대로지만, 신체 능력도 일정 수준까지 돌아왔으며 이능도 쓸 수 있게 됐다. 힘의 근원이 심장에 위치한다는 용인의 특성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결과물.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두 번째 심장’이 실제로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기쁜 오산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승산이 훨씬 올라갔다. 터벅. 물론 놈들도 영혼 탈진 상태가 끝난 듯하지만,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다. 드워프 전사만 해치우면 끝이다. 아무리 저 바바리안이라도 이런 부상을 몸에 달고서 홀로 자신을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놈의 눈빛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무슨 불사신이라도 보는 거 같군.’ 그는 단검 대신 아크제 장검을 움켜쥐었다. 심장에 남은 저주의 잔재로 쥐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덮쳤다. 여기서 더 썼다간 영영 한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 직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저 지긋지긋한 놈을 죽이려면, 나도 각오를 해야겠지.’ 팔 정도는 포기한다. 적을 죽이기 위해. 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와라, 바바리안.”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그는 끝마쳤다. ***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고 있다. 옆에는 난쟁이놈이, 뒤에는 자신도 싸우겠다며 억지를 부리던 미샤가 남아 있다. “잘 생각했네.” 난쟁이놈은 미샤를 걱정해서 두고 온 것처럼 말했지만, 전부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아직 로트밀러는 깨어나지 않았다. 혹시 잠시라도 깨어난다면 포션을 꺼내서 내게 던질 사람이 뒤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 저놈이 드왈키를…….” “히쿠로드, 분노를 삼켜라. 네가 죽으면 우리 모두 끝이다.” “……그러겠네.” 난쟁이놈이 애써 타오르는 감정을 뒤삼켰다. 본인도 아는 거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터벅. 걸음을 내디디며 거리를 좁힌다. 머지않아 서로의 표정까지도 확인할 수 있을 거리가 되었다. 서로 간에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와라, 바바리안.” 지겹지도 않은지 아크제 장검을 또 들고서 우리를 응시하는 녀석. 니미럴, 대체 조건이 뭐기에 자꾸자꾸 필요할 때면 꺼내서 쓸 수 있는 거지?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뱉을 시간은 없었다. 타닷. 우리가 오지 않자 먼저 달려드는 놈. 근데 이건 또 뭘까. 처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움직임이 빨라졌다. 즉, 몸 상태도 제법 회복이 됐다는 뜻. 어째서지? 분명 단기적인 부상이 아니리라 여겼건만. 시작부터 변수가 속속들이 나타난다. 서걱! 두부처럼 베어지는 방패. 내 앞을 막아선 난쟁이놈의 것이다. 나는 단창으로 변한 메이스를 찔러 놈을 쫓아낸 뒤, 미련 없이 라이티늄제 방패를 녀석에게 양도했다. “이걸 써라.” 내 방패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지만, 강철제 버클러보다는 나으리라는 판단. 카카칵! 이어진 놈의 공격이 방패 깊숙이 틀어박힌다. [긴급복원]을 통해 즉시 수리가 됐지만, 갓 영혼 탈진이 해제된 만큼 몇 번이고 쓰지는 못할 터. ‘정말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놈이 예상보다도 일찍 깨어났다. 그것도 심장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까지 회복이 된 채로. 아까는 쓰지 못했던 스킬까지 쓴다. 「리갈 바고스가 [상급 가속]을 시전했습니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듯이 찰나를 가로질러오는 칼날. 방어 대신 회피를 택한 난쟁이놈이었지만, 거리가 멀다. 따라서 어차피 방패도 없는 왼팔을 희생했다. ‘살점 폭발.’ 놈을 향해 뻗은 손이 폭발하며, 수십 조각의 살점을 쏟아낸다. 그러나 놈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치이이이이익! 산성피에 뒤덮여 신음을 흘리면서도, 녀석은 끝까지 검을 휘둘러 난쟁이놈의 허벅지를 깊게 베어냈다. 퍼억-! 난쟁이놈은 그 와중에도 전투 망치를 이용해 놈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대미지가 없지 않았는지 경직되는 놈의 육신. 즉시 앞으로 뛰어들어 어깨를 붙잡으며 굴렀다. 그리고……. ‘살점 폭발.’ 이미 무용지물이 된 왼팔을 벌어진 아가리에 욱여넣고 다시금 터트렸다. “카아악!”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곧바로 내 목에 검을 찔러 넣음과 동시. 쨍그랑! 유리병이 내 뒤통수에 맞고 깨지며 내용물을 쏟아냈다. 「회복(최상급) 효과로 인해 신체가 매우 빠르게 재생됩니다.」 이 통증, 최상급 포션이다. 아니, 그보다 로트밀러도 살아남은 거구나. 찰나처럼 뇌리에 스치는 잡념을 털어내며 뒤로 물러선다. 푸욱! 목을 관통했던 검이 빠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놈은 그 잠깐의 빈틈조차 용납하지 않는 씹새끼였다. “쥬, 거라!” 순식간에 복부를 꿰뚫고 내장을 헤집는 검. 나는 난쟁이놈의 의지를 이어받아 도리어 한 걸음 전진하며 단창을 찔렀다. 탓. 놈이 황급히 검을 뽑아내며 거리를 벌렸고, 나는 망설임 없이 [거대화]를 사용했다. 씨발, 어딜 도망가려고. “카학!” 어깨를 찔린 놈이 피 분수를 입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이 새끼도 엘리전을 각오하고 온 걸까. 놈도 오히려 한 걸음을 내디디며, 또다시 검을 휘둘러온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씹창난 팔을 이용해 검을 붙잡는다. 뼈가 드러난 손가락이 날아갔고, 팔목 뼈에서 걸리는 감각이 피어나며 검이 멈췄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무쇠가죽]과 [영웅의 길]의 시너지 효과. 나는 놈의 어깨에 박힌 단창을 들어 올리며 이리저리 흔들었고, 놈은 참아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힘겨루기. 애석하게도 승자는 녀석 쪽이었다. 「리갈 바고스가 [신성한 칼날]을 시전했습니다.」 이내 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놈의 검이 그대로 내 팔꿈치까지 사선으로 베어냈다. 쿵. [거대화] 상태의 팔이 지면에 떨어졌고, 나는 산성피를 뿜어내는 팔의 단면을 놈의 얼굴에 지졌다. 치이이이익! “카아아아악!!” 거, 고통 내성도 없는 새끼가. 어딜 악으로 버티고 있—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안 그래도 영혼력이 부족했던 탓에, 몇 초도 못 가서 몸이 원상태로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허공에 떠올랐던 놈의 발도 지면에 닿았다. 다만 내가 이놈의 각오를 얕봤던 걸까. 타닷. 놈은 물러나는 대신 검을 한 번 더 찔러왔다. ‘니미럴.’ 8층 탐험가란 놈이 무슨 배알도 없나? 왜 이렇게 개싸움을 잘하는 거야. 이대로 가면 머리가 꿰뚫릴 판이기에 잽싸게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단창. 아니, 전 메이스였던 꼬챙이를 잃어버린 것은 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의 재생이 멈추었다. ‘좆됐군.’ 암만 최상급 포션이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먹은 것도 아니고 뿌려졌을 뿐 아닌가. 팔이 날아가고 장기가 조각나는 마당이니 피가 차기는커녕, 현상 유지만으로도 벅찬 것이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내, 스리…… 다!” 놈이 달려든다. 실로 절망적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최악의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피할 수 없는 죽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체념하고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뜬 채로 놈의 검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가선 순간 옆으로 굴렀다. 이어질 공격에 무방비해지든 어쨌든,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쿠웅. 바닥을 구르며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놈의 아크제 장검이 눈앞에서 거대하게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 보이지 않는 힘이 뒷덜미를 잡아끌듯이, 놈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해답을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느, 그이! 이게 무스, 지시냐!!” 저 멀리서 검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보였다. ***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럼에도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지. [그래, 도망치지 않는 건가.] [드왈키를 지켜라!!] 처음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고역스러웠다. 무의미한 저항은 더 큰 절망과 괴로움을 낳을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어째서 저들은…….” 그들의 처절한 싸움이 이어질수록, 루드위그는 발견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자기 자신을. [이건, 우리 물건이오.] 어째서 굴복하지 않는가. [으아아앙! 드왈키! 죽지 마라! 제발, 응?] 예견된 결과를 외면하고서, 헛된 희망을 가슴에 품었기에?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길···… 수 있소?] [걱정 마라. 반드시 모두 살려서 돌아가겠다.] 아직도 저리 찬란하게 나아갈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그들은 강했다. 희생을 짊어질 용기가 없던 자신과 다르게. “…….” 루드위그 역시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라던 날은 오지 않음을. 손자와 함께 도시로 되돌아가는, 그런 희망찬 미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을 뿐. “황혼에 뜬 별이 나를 인도할지니.” 루드위그는 짧게 성호를 그렸다. 뜨여진 그의 눈은 더 이상 두려움으로 떨리지 않았다. 그저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의 뜻을 따르리라.” 별의 여신, 레아틀라스. 모험과 인연을 주관하는 세 명의 신 중 하나. 한때나마 그를 모시고 따르던 자로서 어찌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겠는가. 용기를 저버린 자신의 앞에. 저토록 찬란한 빛을 품은 이들이 나타난 것은, 헤매던 종속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혜이다. 그렇기에……. “비록 당신 품에 안기지 못할지라도.”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다. “카루이여, 나를 바치겠다.” 그의 말에 변덕스러운 악신은 즐거이 웃었다. 그가 하려는 걸 모를 리가 없을진대. 마치 기다려 왔던 순간이기라도 하듯이.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저곳으로 보내다오.” [너의 손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심장이 움찔했다. 그러나 나약함을 덜어낸다. 전부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는 타협 또한 버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느 미로에서 만난 젊은 마법사에게 배웠지 않나. 언제든 숭고해지고 고귀해질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바란다면. 145화 위대한 유산 (2) 고대의 악신 카루이. 세계에 남은 세 명의 신과 달리, 그 종속들에게 무한한 대가를 요구하는 존재. 그는 자애롭게 모든 걸 내어주지는 않는다. 단지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 줄 뿐. 선과 악의 구분 없이. 그 대가만 충분하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허락하노라.] 마침내 기다려 온 대답이 들려온 순간. 공간을 찢으며 나타난 마수의 팔이 루드위그의 팔을 뜯어 가져갔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바라만 보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로 악마와도 같은 힘이며 권능이었다.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내, 스리…… 다!” 그가 결심을 하는 순간에도 처절했던 전투는 그 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루드위그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져가겠노라.]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엇을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 악신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느, 그이! 이게 무스, 지시냐!!” 바바리안 전사를 향해 검을 찌르던 용살자의 몸이 세찬 저항을 받으며 뒤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지직-! 두 귀가 뜯겨져 나갔다. 악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그 어떤 신성력이나 포션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영구적 부상. 화마에도 비할 수 없는 통증이 피어난다. 그러나 루드위그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했다. 그래, 저자들은 이런 고통 속에서도 싸우고 있었구나. “느그니. 나르, 치료해, 라.” 용살자가 검은 안광을 내뿜으며 명을 내린다. 이에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홀리듯 움직였다. 놈에게 영혼까지 사로잡힌 손자와 별개로, 그가 가진 이능 중 하나 [권속화] 때문이었다. 그 저주받은 이능이 옭아매는 한, 자신은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열을 세겠다.] 거대한 마수의 발톱이 한 짝 남은 팔마저 뜯어냄과 동시, 의지와 관계없이 나아가던 몸이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아직 바라는 것은 많고, 바칠 것 또한 많이 남았다. 다리, 눈, 심장, 폐. 무엇이든 좋다. 비루한 육신의 전부를 바치겠다. 황혼에 이르른 몸으로, 젊은 영웅들이 나아갈 길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지친 삶을 끝내고 그분의 품에 안겨 쉬고 싶다는 소망마저도 내어주겠다. 그러니……. “저자를 죽일 힘을 다오.” 루드위그는 말하였고, 악신은 답하였다. [불가하다.] 거절이 아닌 불가. 아무리 그가 ‘자의적인’ 희생을 가장 큰 가치로 둔다고 한들, 이 정도로는 대가가 충분치 않단 뜻이었다. 하나 루드위그는 모든 미련을 털어냈다. 매일 같이 해 왔던 체념과는 달랐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을 버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은 게 바로 이전 아닌가. 악신이 그에게 허락한 자유는 고작 10초뿐. 절망 따위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지킬 수 있게 해다오.” 루드위그는 재차 말하였고, 악신은 웃었다. 그리고……. [허락하노라.]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마수의 팔이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 집어삼켰다. *** 순간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의문이 피어난다. 카루이의 사제가 어떻게 4시간 거리를 뚫고 이곳에 당도하였으며, 왜 용살자에게 해가 될 일을 하는가. 뭔가 다른 계획이 있어서? “느, 그이! 이게 무스, 지시냐!!” 용살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쉽게 말해, 저놈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는 뜻. 그러나 긍정적인 변수로 보기는 어려웠다. “느그니. 나르, 치료해, 라.” 검까지 놓친 채 뒤로 나둥그러진 놈의 눈에서 흑색 안광이 피어난다. 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권속화]. 놈이 가진 3등급 정수의 이능. 죽은 자에게 쓴다면 영혼을 흡수해 스탯이 증가하며, 몇몇 사용 조건이 있지만 산 자에게 쓴다면 대상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기 스킬. 터벅. 이내 사제가 홀린 듯 걸음을 내디딘다. 다만 모든 게 끝이라고 여겨지던 그 순간. 드드득. 사제의 남은 팔 한 짝이 뜯겨져 나간다. 어둠 속에 숨은 악신에게 제물이라도 바치듯. 터벅. 홀린 듯 나아가던 사제가 걸음을 멈춘다. 그의 모습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두 귀와 양팔이 짐승에게 물어 뜯겨져 나간 듯한 형상. 하나 그 형상으로 사제는 말한다. “저자를 죽일 힘을 다오.” 그제야 나는 정확하게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름 모를 사제가 누구와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거래를 하였는지. 전부 내 예상이 맞다면 살아날 길이— [불가하다.] 사제의 요구에 관한 답은 거절이었다. 이곳에 자리한 모두에게 말하듯이 통로 전체를 울리는 음성. 이에 희비가 교차하며 용살자의 눈에 짧게 이채가 감돈다. 그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지킬 수 있게 해다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어진 사내의 요구. 이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허락하노라.] 사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가 뜯겨져 나갔으니까. 그러나 악신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는 모순적인 존재. 후우우웅-! 그 대가로 포탈이 열렸다. 통로 중심부에 생겨나 흑색의 빛을 흩뿌리며 휘몰아치는 포탈. 광채의 색은 달랐지만, 그것은 차원문이었다. 미궁에서 도시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최상위 마법. 휘이이이이익! 이내 거대한 마력이 뿜어내던 차원문이 그 너머의 모습을 드러냈다. 익히 알던 회색 도시 라프도니아가 아니었다. 어두컴컴하고 우중충한 지하 요새의 모습. “느, 그니! 머 하느 지시냐, 다자 머처……!” 보이지 않는 돌풍이 밀어내기라도 하듯, 용살자의 몸이 서서히 밀려난다. 포탈이 있는 곳을 향해. “네 소자가 어떠케 대도—”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이오.” 용살자가 분노하며 뭐라 외쳤지만, 사제는 너무도 완고하게 답할 뿐이었다. “씨바아아아아아!!!” 놈도 슬슬 사제의 결심을 막을 방법이 없음을 받아들인 것인지, 노성을 터트리며 나를 보더니 시선을 움직여 한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손을 길게 뻗었다. 스르륵. 그러자 주인 없이 떨어져 있던 아크제 장검이 지면을 긁는다. 자성에 이끌리기라도 하듯이 놈을 향해 움직이는 은빛의 장검. 뭘 하려는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갈 땐 가더라도 이건 챙겨가겠다 이거겠지. ‘빌어먹을 검 성애자 새끼.’ 비틀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몸을 내던진다. 양심 없는 용살자 새끼가 아니라. 놈을 향해 당겨지는 검을 향하여. 쿠웅. 너덜너덜한 몸이 바닥에 처박힌 충격에 머리가 어질했지만, 손을 뻗어 검을 쥐었다. 파치칫-! 주인 각인이라도 돼 있는지, 손길이 닿자마자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검. 고통 내성 덕에 아픔은 버틸 만했다. 하나 손이 마비되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여실히 느껴진다. 이대로 몇 분만 더 쥐고 있어도 영영 팔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이놈은 계속 이 상태로 검을 썼던 건가?’ 뇌리에 스친 불필요한 의문은 즉시 지워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니까. “이노!!” 버텨낸다. 지면에 체중을 싣고 바닥에 이를 박아서라도. 언젠가 나를 향할 칼날이 놈의 손에 다시 쥐어지지 않도록. 나의 동료를 해치지 못하도록. 카카칵! 일순 끌어당기는 힘이 급격히 강해졌다. 마찰력을 잃은 것처럼 미끄러지기 시작한 육신. 이 속도라면 검과 함께 통째로 포탈에 빨려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니미럴, 지금이라도 놓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서서히 떠오르려던 찰나였다. “커, 커허!” 놈이 피를 토해내며 저항감이 사라졌다. 그래, 너도 이 이상은 무리라 이거지. “바바리아…….” 이내 놈이 나를 부르더니 짧게 읊조렸다. “다시, 마나게 되 꺼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도망치는 삼류 악당이 할 법한 대사를, 미샤도 창피해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말하였다. 심지어 그 뒤에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두근-! 그 한마디에 심장이 진동한다. “…….” 어깨에 찔린 꼬챙이가. 반쯤 짓뭉개진 턱주가리가.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살기가. 시뻘겋다 못해 까맣게 물들어 김을 피워내는 녀석의 오른팔이 말해 주고 있다. 그날이 온다면, 오늘 같은 요행은 없으리란걸. 수백 마디 저주의 말보다도 선명하게 나에게 전달하고 있다.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꽈악. 오르큘리스의 일원? 용살자란 이명의 8층 탐험가? 다음엔 ‘균형의 수호자’ 따위 없으리란 것? ‘그쯤이야 이미 알고 있어.’ 그래, 당장은 놈을 이길 수 없겠지. 뭔가 수작을 부려온다면 오늘처럼 처절하게 발버둥쳐야만 하겠지. 하지만······. 솨아아아아아아-! 살아남을 거다.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매일매일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강해질 거다. 그래서 언젠가 요행 따위가 필요 없어질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용인.” 나는 놈을 찾아갈 것이다. 오늘 무언가를 잃은 건, 너만이 아니니까. *** 솨아아아아아-! 탐욕스레 벌어진 포탈이 놈의 몸을 뒤 삼키며 소멸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몸에 따스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 모두에게. ‘……신성력?’ 나는 멍하니 손을 바라봤다. 느릿하지만 착실하게 상처가 재생되고 있었다. 포션과 달리 아픔은 존재치 않았고, 오직 포근함만이 가득했다. 스르륵.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뒤를 확인했다. 갈가리 찢겨져 나간 사제의 육신이 보였다. 아니, 이제 저걸 육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팔과 다리가 없다. 파여진 눈두덩이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며, 전쟁터의 시체처럼 코가 베어졌다. 또한, 세로로 길게 베어진 복부 안에는 응당 있어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노인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것을 바친 걸까. 그것도 생면부지인 우리를 위하여. “편지……. 품에…….” 그때 희미하게 소리가 들렸다. 사제가 뱉은 소리였다. 믿기진 않지만 재빠르게 다가가 로브를 뒤져 보았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낡은 편지 한 장이 나왔다. “레아, 트…….” “걱정 말고 쉬어라. 이 편지는 꼭 레아틀라스 교단에 전해주겠다.” “고맙…….” 이내 사제가 눈을 감았다. 온갖 곳이 피투성이였으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만큼은 너무도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어떻게 이 상태로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을 놓치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 “……왜 우리를 구한 건가?” 그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글쎄, 이런 의지를 품은 자라면 진작 해방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었는가. 단순히 우연은 아닐 터였고, 나는 그 속사정이 너무도 궁금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이미 죽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서던 차에 사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마, 법…….”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군, 알려 줘서 고맙다.” 나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왠지 노인이 이미 이곳을 떠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잠시 멈춰서 귀를 기울였다. 어색하리만치 이질적인 정적. 이 정적의 여운을 즐기듯 속으로 읊조렸다. ‘살아남았구나.’ 살아남았다. 난쟁이놈도, 미샤도, 로트밀러도. 누구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래서야 약속을 지켰다고는 못하겠군.’ 나는 통로 너머로 보이는 동료의 시신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길…… 수 있소?] [걱정 마라. 반드시 모두 살려서 돌아가겠다.] 당당하게 그리 말하였건만. 정작 우리를 지켜 낸 건 녀석이었다. 우리 모두가 살아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란 말로도 부족한, 신이 내린 기적과도 같던 그것은. [마, 법…….] 단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146화 위대한 유산 (3) 파치칫. 잠시 내려놨던 검을 집어 들고서 동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단 내려놨던 가방에 검을 집어넣었다. 암만 봐도 평범한 아크제 장검은 아닌 듯한데, 이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미안하네. 나는 이번에도…….”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이는 난쟁이놈의 말에 그저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뭐라고 그에게 말을 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살아남은 건 내 덕분이 아닐진대. “비요른.” 미샤가 처연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살아서…… 다행이다. 정말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다. 그야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살아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분명 녀석도 이 기쁜 순간을 함께하길 바라였을 터인데. “로트밀러.” 미샤의 자그마한 손을 포옥 감싸 조심스레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한 로트밀러에게 다가가 들려주었다. 드왈키가 남겼던, 고작 몇 마디의 유언. “그렇군. 그가…….” 얘기를 모두 들은 로트밀러는 드왈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렸다. 그리고 혼자만 전하지 못한 작별의 말을 그 앞에 흩뿌렸다. “자네가 처음 미궁에 들어왔을 때가 떠오르네. 세상이 넓다는 말을 이제 좀 이해할 거 같다고 말했지.” 3층 순례자의 길에서 있던 일이었다. 탐험을 하면서 힘들고 끔찍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며, 로트밀러는 우리를 높은 언덕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빛으로 물든 광활한 자연을 함께 보았고, 드왈키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설레며 기뻐했다. “자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로트밀러는 담백하게 말을 마쳤다. 하나 남은 이들에게도 아직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걸까. 미샤와 난쟁이놈도 무릎 꿇고 앉아 속에 담긴 말들을 토해냈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으아아아앙! 내, 내 잘못이당 내, 내가! 내가 그 문을 고르지만 않았어도……!” “아닐세. 내 잘못이네. 나만 믿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 나라고 이 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던 결국 그 끝은 자책으로 이어질 터. 드왈키라면, 이런 모습을 바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곳은. 언제까지 쓰러져 있어도 좋을 만큼 상냥한 세상이 아니니까. [메에에에엑-!] 통로 저편에서 나타난 바이쿤두스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해라.” “…….” “적이다.” 기억하되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그 정도일 테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 바이쿤두스와의 전투는 생각 외로 고됐다. 간단한 이유다. 이 드넓은 미로에 이제 네 명만이 남게 되며 능력치가 대폭 하락했을뿐더러, 아직 부상도 전부 낫지 않았다. 애초에 6등급 몬스터를 그토록 쉽게 잡을 수 있던 것은 드왈키 덕분이기도 했고. “간단히 챙길 것만 챙겨서 돌아가지.” 전투를 끝마친 다음에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처절했던 사투로 바닥 여기저기 떨어진 장비. 아니, 장비의 잔해를 수거한 뒤에 사제의 품도 제대로 뒤져 보았다. 건진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목걸이 하나였다. 아티팩트인지 장식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야 우리 중에 사물에 깃든 마력을 감지할 수 있던 건 드왈키뿐이니까. “여기도 별거 없는 듯하네.” 전투에 휘말려 일찍이 사망한 중년 탐색꾼도 루팅을 해 봤으나 이렇다 할 건 없었다. 하긴 웬만한 건 전부 그 새끼의 아공간에 들어 있었겠지. “……모두 자네가 바라는 곳에 전하겠네.” 지팡이 한 자루와 그가 매고 다니던 확장형 배낭. 부츠나 로브도 벗겨서 팔면 돈이 되겠지만, 그것은 일체 손대지 않고 남겨두었다. “드왈키는 내가 업겠다.” 이후 우리는 함정방을 통해 포탈로 향한 뒤, 그대로 천공의 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각기 널브러져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는 드왈키의 앞에 앉아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고, 누군가는 벽에 등을 기대고 흐느꼈다. 거짓말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이 도리어 자각하게 한 것이다. 틀림없는 현실이며, 꿈 같은 게 아니라는걸. “비요른, 드왈키를 도시로 데려갈 방법은 없는 거냥?” “……없다.” “그래, 그렇구나…….” 이토록 현실은 잔혹하다. 우리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쳤건만, 도시로 데려가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죽은 게 마법사였으니까. 미궁에서 발생한 시신은 사물로 분류가 되며 ‘왜곡’ 마법이 없는 이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바바리안의 심장이 특별한 거였고. 마법 없이도 도시로 갖고 돌아갈 수 있다니? 마법사들도 그 부분에 주목해 마법 재료로서 연구를 시작했을 테지. “미샤, 너도 쉬어라.” “나는 좀 더 여기에 있겠당. 우리가 떠나고 나면…… 혼자 외로울 거 아니냥.” “……그래.” 숨 막히는 공기를 뒤로하고서 나는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10 : 31] 미궁 폐쇄까지 하루하고 절반이 더 남은 시각. 왠지 입맛이 씁쓸했다. ‘……한 시간도 안 지났다니.’ 정말로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 체감상 며칠 밤낮으로 놈과 싸운 거 같다. 그런데 수습을 모두 마치고 돌아왔음에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나 하자…….’ 사제가 남긴 편지를 꺼낸다. 오랜 세월 품에만 지니고 있었을, 여기저기 때 묻고 주름진 한 장의 편지. 편지에는 빼곡한 글씨로 노인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경위가 적혀 있었다. 쭉 읽어내리던 나는 한 곳에 집중했다. ‘지하 도시 노아르크.’ 노인이 어린 손자와 함께 용살자에게 납치된 곳의 이름이었다.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든 약이다. 복용 시 1시간 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주지.] 예전에 사이코패스년에게서 언급된 적이 있기도 한 도시의 지명이자, 도서관에서 아무리 정보를 찾아도 나오지 않던 그것. 그래, 그 하수도 아래에 그런 게 있단 말이지. ‘설마, 그 여자도 오르큘리스의 일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를 쭉 읽어내렸다. 노인이 남긴 편지에는 지하 도시 노아르크와 오르큘리스는 협력 관계란 것 외에도 한 가지 놀라운 정보가 쓰여 있었다. ‘……포탈이 거기에도 있을 줄이야.’ 라프도니아라는 도시가 유지될 수 있는 근간. 미궁과 이어진 포탈이 지하에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지하의 탐험가들은 정체를 숨기고 마석을 캐와서 그것으로 도시를 세운다는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세웠다. ‘노아르크.’ 나는 머릿속에 그 이름을 새겨넣었다. 앞으로 이곳과 얽힐 일이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고 있었다. ‘나가면 여기도 더 조사해 보자.’ 그런 생각을 끝으로 편지를 다시 품에 넣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편지를 전해준다고 내게 해가 될 일은 없을 듯했다. 적의 적은 동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럼 아무튼 이제 이 문제는 여기서 끝. “…….” 길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는다. 휴식이 간절했으나, 온갖 잡념이 떠오르고 지워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괴롭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터무니없는 강적이 생긴 이상, 도시라고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동료와 함께 미궁에서 나를 해치려 들 수도 있고. ‘니미럴.’ 그 때문일까? 놈이 살아서 돌아간 사실이 새삼 아쉽다. 날 치료만 해주었어도 직접 놈을 끝장낼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미련을 털어냈다. 세상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선택지가 없었던 거겠지. 악신이란 놈은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대가를 받고 소망을 이뤄주되, 결코 최상의 결과는 내주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불행도 함께 주는 원숭이 손처럼. 언제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는 존재. ‘……이 새끼도 묘하게 자꾸 나랑 얽힌단 말이지.’ 조사 목록에 악신 카루이도 추가하며 나는 잡념을 털어냈다. 이만 나도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었다. 도시보다 안전한 곳이 이곳일뿐더러, 밖에 나가면 해야 할 일도 많지 않은가. “…….” 물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침낭을 펴고서 안에 몸을 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이틀을 밤새며 그토록 처절한 싸움을 하였을진대. 한참 동안 잠에 들 수 없었다. ***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눈꺼풀 위를 콕콕 찌르는 햇살.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검문소를 지나 마석을 환전했다. 그리고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차원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탐험가 길드 지부. 그 앞에 도착하니 나와 비슷한 꼴을 한 자들이 한 무더기였다. “…….” 수십 명이 모였다기에는 이질적인 침묵. 다들 엄숙한 표정으로 동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도시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이곳부터 찾을 이유는 단 하나뿐이니까. 동료의 죽음. “다 왔으면 들어가지.” 이내 동료들이 모두 도착하고서 우리는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사망 신고를 하며 수습한 드왈키의 장비와 배낭까지 통째로 맡겨 버렸다. “……고인께서 좋은 동료를 두셨군요.” 직원이 우리를 보며 묘한 눈빛을 지었다. 하기야 흔치 않을 것이다. 도시의 재산은 몰라도, 이런 부분이야 꿀꺽 삼켜도 아무런 탈이 없을 테니까. 대부분은 사망 신고만 하고 끝이겠지. 하지만……. “왕가 공인 8등급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사망 신고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아깝다는 감정은 없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녀석이 미궁에 처음 들어서기 전에 썼던 유언장의 내용을 알고 있다. [하하, 유언장이라니. 정말로 탐험가가 된 게 실감 나는구려.] [무슨 말을 써도 상관없지만, 재산 상속은 제대로 명시해라. 안 그러면 전부 탐험가 길드로 넘어가게 되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이미 정해뒀소이다.] 녀석은 어느 신전 산하의 고아원에 재산을 기부하기를 바랐다. 자세한 사정은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다. 난쟁이놈이 말하길. 어린 시절 그곳에 맡겨져 잠시 생활했던 적이 있다던가? 녀석의 재산은 녀석이 바라는 곳에 쓰여야만 한다. 우린 이미 더없이 큰 것을 받았으니까. “정말로 끝났군……. 자, 그럼 이제 가세.” 여하튼 이로써 도시로 돌아와 해야 할 첫 번째 일, 드왈키의 사망 신고가 끝났다. 그것은 놀라우리만치 간단했다. 서류를 작성하는 데 1분, 직원이 검토하는 데 2분. 한 사내가 짊어져 온 25년간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에는 고작 3분이면 충분했다. ‘그만큼 죽음이 흔한 세상이란 거겠지.’ 씁쓸함을 뒤로하고 길드를 나선다. 그리고 레아틀라스교의 대신전으로 향한다. 이미 떠나 버린 망자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고작 그것뿐이니까. “너희들은 돌아가서 쉬고 있어도 된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나. 생명의 은인이신데.” “나도…… 나도 따라갈 거당. 쉬는 건 안에서 충분히 했으니까…….” 하루 종일 우느라 쉬지도 못했던 미샤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게 분명할 터이니. “…….” 다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머지않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듯한 순백의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견습 신관이 치료를 바라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루드위그 대신관의 부탁으로 방문했다고 말하였다. “루, 루드위그 대신관님이요……?” 감히 신이 거하는 곳에서 거짓을 뱉으리란 생각은 못 하였을까. 앳된 얼굴의 신관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장 안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는군요.”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익숙한 얼굴이 마중을 나왔다. 제3 성기사단의 단장, 파알 크로비츠. “몇 년 전에 실종된 루드위그 대신관님의 부탁을 받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마는. 혹시 증거가 될 물건이 있으신지요?”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본교에 있어 무척이나 예민한 사안이라며, 부디 양해를 바란다고도 말하였다. 도시 전역에 내건 포상금 때문에 크게 경을 쳤던 사건이 몇 번이나 있었다던가? “포상금?” “예.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삿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더군요.” 포상금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다. 하나 엘리사년을 해치우고 거액의 포상금을 받은 전적이 있는 나는 무심코 묻고 말았다. “대체 얼마나 큰돈이기에?” 속물적인 질문에 미샤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난쟁이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자네라도 이건 좀 그렇군.” 탐험가이자 레아틀라스 교인이기도 한 로트밀러 역시 그리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크로비츠는 별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공한 정보, 성물의 유무에 따라 액수가 다르긴 하지만…….” “하지만?” “재무청에서 최대 7천만 스톤까지 내건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답변에 모두 그대로 굳었다. 147화 위대한 유산 (4) 7천만 스톤. 듣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의 거액. 다만 애써 진정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기뻐하는 건 그 돈이 내 손에 쥐어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이 편지면 증거가 되겠나?” 편지를 건네받은 크로비츠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내리더니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 죄송합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본교에는 정말로 중대한 사안입니다. 얀델 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잠시 안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파알 크로비츠는 신전 내부의 응접실 같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다급한 기색으로 자리를 비웠다. 상부에 알리기 전에 필적을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거 같다던가? “설마…… 뭔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징?” “하하, 그럴 리 있겠나. 단지 저쪽도 확실하게 검증을 한 뒤에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거겠지.” “무라드의 말이 맞네. 자네들도 읽어 봤겠지만, 편지의 내용이 내용 아니던가.”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도 서서히 다른 추측이 나오기 시작할 때. “사죄드립니다. 부득이하게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였군요.” 파알 크로비츠가 돌아왔다. “자, 가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를 따라간 곳은 2층의 예배당이었다. 일반 신도들이 아니라 신관이 된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 “여긴 교단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들었소만…….” “여신께서 인연을 이어주셨는데, 어찌 여러분을 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로트밀러의 질문에 답하는 크로비츠를 보며 불안을 지웠다. 만약 편지가 가짜라고 판단한 거라면 저런 태도를 취할 리 없으니까. 끼익. 이내 크로비츠가 문을 열며 예배당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으나, 그 안에 자리한 사람은 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나는 흠칫 굳었다. ‘미친.’ 백작가 방문 이후 교단의 직위에 관한 책을 여럿 정독했기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갑옷을 입고 있는 두 명의 남녀. 갑옷에 박힌 문양은 각기 달랐으나, 테두리를 장식한 은색의 실은 그들이 성기사단의 단장임을 의미한다. 파알 크로비츠까지 합치면 교단에 단 셋뿐인 단장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셈. 한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두 명의 대신관과 한 명의 추기경. 그리고 그들의 보좌를 받듯 중심에 서 있는 노령의 사내. “……별을 따르는 종이 영성대주교님을 뵙습니다.” 로트밀러가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렸다. 그럴 만도 했다. 가톨릭에 덧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교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니까. ‘근데 저 어린애는 누구지?’ 화려한 라인업에 묘한 압박감을 느끼기도 잠시, 나는 교황 앞에 자리한 꼬마를 응시했다. 열 살쯤 됐음직한 작은 남자아이. 이제 보니 모두가 그 아이를 지키듯이 진형을 잡은 것 같았다. 심지어 아이에 바로 뒤에 서 있는 교황마저도. 대체 뭐 하는 꼬마일까. 이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교황이 먼저 성호를 그리자, 모든 구성원이 우리를 보며 묵례를 취했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도이기도 한 로트밀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처럼 굳어 버릴 만큼. “…….” 현재 자리한 곳이 예배당이기 때문일까? 묘하게 신성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가 공기 중에 흐른다. 잠시간의 침묵이 끝나고 교황이 입을 열었다. “루드위그 대신관은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었소. 편지를 전해준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오. 혹시 어떻게 이 편지를 얻게 된 것인지를 물어도 되겠소?”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삼대 종교 중 하나의 최고 권력자인 자가, 4층 탐험가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정중했으며 조심스러웠으니까. ‘항상 이러는 건 아닐 테고.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나 보군.’ 이내 나는 천천히 말문을 뗐다. 그리고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데 이게 성직자식 사고방식일까? “황혼의 별이 길 잃고 헤매던 그에게 그대들을 보내주었구려. 그의 영혼을 구해주어서 고맙소. 비록 사악한 악신에게 사로잡혔을지언정, 그의 혼은 어둠 속에서도 영원히 빛을 이어갈 것이오.” 약간은 듣기 거북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와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들이라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예로부터 나는 종교인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의 유품이다.” 이내 나는 대신관이 끼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이게 성물이라면 포상금을 받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을 테지만……. 도리를 지키는 것이기에 아깝진 않았다. 그 대신관에게는 빚을 졌으니까. “고맙소. 찾던 물건은 아니지만, 이걸로 그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겠구려.” 그래, 성물은 아니었던 거구나. 하긴 그런 게 있었으면 전부 그놈이 빼앗아갔겠지. “그레이온드 추기경, 이들에게 돌아갈 포상금이 얼마요?” “성물은 되찾지 못하였으나, 자필 편지에 적힌 내용의 중요성과 그의 유품,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을 전해준 바를 고려하건대, 재무청에서 지정한 7천만 스톤을 모두 지급해도 부족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구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성물이 없어서 반 토막 나겠다 싶었는데, 그걸 전부 주겠다니. 그들의 말을 거북하게 들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이들은 정말로 훌륭한 종교인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 보시오.” 첫 단락이 끝났기에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포상금보다 중요할 이것.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 어쩔 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소?” “루드위그 대신관을 납치한 범인을 찾았지 않나. 혹시 복수하려는 건지가 궁금했다. 어쩌다 보니 나도 휘말리고 말았으니까.” 질문을 하면서 자연스레 너희에게도 책임이 있단 식으로 암시를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애매모호했다. “그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확답할 수 없소.” “그렇군.” 쩝, 얘네들이 복수한다고 설치면 당분간은 날 건드릴 여력이 없으리라 여겼건만. 정말 나 혼자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없나?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위대한 전사님.”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꼬마 아이가 입을 엶과 동시. 솨아아아아아-! 너무도 찬란한 은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굵은 손가락에는 세 줄기로 얽힌 덩굴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었으나……. 이어진 추기경의 외침을 듣고서 깨달았다. “신탁……! 신탁이 내려왔다……!” 게임 내에서도 NPC들 대화로만 들었지, 실제로 겪어 본 일은 없던 그것. 신탁이었다. ‘니미럴.’ 그것도 들어 보니 무척이나 오랜만에 내려진. ***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교황이라는 자가 저토록 어린아이를 신줏단지 모시듯 대하고 있었는가.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설마, 성녀일 줄이야.’ 아니, 남자애니까 성자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가끔은 그의 힘을 품어낼 수 있는 그릇. 그 그릇의 자질을 가진 아이가 말한다. “방금 여신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반지가 강하게 이어진 악연을 세 번까지 막아 줄 거라고.” “악연이라면, 용살자 리갈 바고스를 말하는 건가?” 보통의 점쟁이였다면 이런 물음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했을 것이다. 하나 신탁은 달랐다. “네. 오직 그와의 악연만을 막아 낼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그 반지의 줄기가 모두 끊어질 때를 대비해 운명을 이겨 낼 준비를 하셔야 해요.” 마치 내가 마왕을 무찌를 용사라도 된 기분.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엘리사년을 조지고, 대신관과의 일도 있었기로 하거니, 여신이 이런 선물을 왜 준단 말인가. 심지어 악령이라 불리는 자에게. ‘뭐지?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문득 이 꼬마애를 이용해 다 같이 사기를 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손에 끼워진 반지가 그 의심을 지워주었다. 경악으로 물든 표정들도 연기라기에는 너무나 신실해 보였고.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순리대로 흘러갈지어다.” 이 세계의 최상위 종교인인 그들이 일제히 나를 보며 성호를 그린다. 나는 동료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비요른, 너 정체가 뭐냥!!” “정말로, 운명을 타고난 자였나!”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오. 어, 어떻게 바바리안이 인간의 신에게 선택을…….” 아니, 그렇게 쳐다봐도 나도 모르는데. 그제야 나는 단순히 기뻐할 일이 아님을 깨닫고서 꼬마애를 응시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다만……. 털썩. 신탁을 받은 대가인지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 교황이 아이의 몸을 잡아들었고, 그것으로 오늘의 만남은 끝이 났다. “크로비츠 경, 이분들을 밖으로 안내해 주게.” “아니, 잠시만! 아직 물어볼 게…….” “부디 양해해 주기를 바라오. 추후 다시 만나 모두 설명하리다. 그때까지 오늘 일은 비밀에 부쳐주기를 바라오. 어쩌면 그대에게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니.” “뭐, 재앙?”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거 같지만,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자세한 건 크로비츠 경이 설명해 줄 것이오.” 교황의 완고한 태도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내쫓겼다. 그리고 파알 크로비츠의 인도 아래에 일단 아까 대기하던 응접실로 향했다. “크로비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대체 무슨 뜻으로 이종족에게 신탁을 내렸는지.” “……이종족에게 신탁을 내리는 일이 없나?” “예, 제가 알기로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그자들은 어떻게 됐지?” “기록에 의하면 종족 내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내쫓긴 것으로 압니다.” 하,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악령에 이어 자살 버튼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해야 하나? “비밀로 부치라고 한 이유를 알겠군.” “예, 아무래도 알려지면 득보다 실이 많을 테니까요.” 바바리안의 성장 핵심은 혼령각인이다. 그런데 부족에서 내쫓긴다? 그날부로 나는 망캐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 바바리안 주술사는 성지에만 존재하니까. “그래도 저희 측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먼저 흘러나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며 크로비츠가 동료들을 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 따라서 나도 동료들을 보았다. “아! 나, 나는 입 꾹 닫는당! 진짜로? 믿지? 비요른?” “걱정 마시게. 오늘 나는 무엇도 듣지 못했으니.” 미샤는 두말할 것도 없고, 로트밀러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일단 이 아저씨는 레아틀라스 교도이기도 하니까. 다만, 문제는……. “자, 자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나?” “몰라서 묻나?” “……앞으로 술을 끊겠네.” 낙심한 표정으로 고개 숙이는 난쟁이놈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여기를 다 같이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여기 신들은 다 이런 식인가? 가슴을 짓누르던 가장 큰 돌을 가져간 대신, 그보다 작은 돌을 새롭게 얹어준 느낌이다. ‘그래도 얘가 그 정도로 입이 가벼운 건 아니니까…….’ 다만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기로 했다. 만약 이 반지가 정말로 용살자와 마주치는 이벤트를 막아 준다면, 이 정도 리스크는 리스크라 부를 수도 없지 않나. 득실을 논하자면 무조건 이득이다. 가장 간절했던 시간을 번 셈이니까. ‘신탁을 통해서 성물을 먹는 건 또 처음이네.’ 신이 내린 물건을 성물이라 부른다. 대부분 사기적인 효과를 지녔다. 그렇기에 나도 반지의 성능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세 가닥이 다 끊어지기 전까지는 놈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얼마나 늦게 끊어지냐는 거겠군.’ 2년? 3년? 갓 나온 따끈따끈한 성물이니만큼 그 정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일단 최대한 짧게 잡고 준비하는 편이 옳을 터. 최소 반년에서 일 년을 생각하기로 하며 마음 정리를 끝마쳤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지지직. 얽혀 있던 덩굴 하나가 끊어졌다. “어, 비요른? 방금 하나가 끊어진 거 같은뎅.”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침을 바른 손가락으로 끊어진 덩굴을 새끼줄 꼬듯이 비볐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현실은 냉정했다. “자, 봐라. 딱 달라붙어 있지 않나.” 보란듯이 반지 낀 손을 내밀은 순간. 솨아아아-! 끊어진 덩굴이 은색 빛을 뿜어내며 흩날린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의 가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148화 위대한 유산 (5)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순간의 변덕이 예기치 않은 행운으로 이어지는 날.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녀에게는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과연 누가 알았을까. 갑갑한 마음에 발길 닿는 대로 올랐던 성곽 위에서 이놈을 만날 것이라고. “리갈 바고스.” 이 저주받은 도시를 양분한 오르큘리스의 일원이자……. 그들 중에서도 특히나 죽여 버리고 싶던 그놈. 그놈이 바닥에 기절해 있다. 이 외진 곳에서 여기저기 성하지 않은 몸으로, 그것도 혼자. ‘……설마 차원문을 열고 도망친 건가? 그래서 광장이 아니라 여기로 떨어진 거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그것이었다. 용살자의 팀에 마법사는 없지만, 항상 데리고 다니던 그 불쌍한 노인을 희생시켰다면 가능한 일이긴 하니까. 다만……. ‘대체 안에서 어떤 적과 마주쳤기에…….’ 아멜리아는 떠오르는 의문을 지웠다. 누가 이놈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차려진 밥상이 눈앞에 있단 게 중요할 뿐. 일단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맥부터 확인했다. ‘아직 살아 있군.’ 미궁이 닫힌 지 약 2시간 안팎. 정황상 놈은 지금까지 기절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이라면 버티기 어려울 시간이지만, 이놈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아마 어깨에 박힌 꼬챙이가 출혈을 막아 준 것도 한몫했을 테고. “넌…….” 그때 놈이 힘겹게 눈을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인기척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모양. 놈이 뭐라 말하기 전에 아멜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살자, 포션은 갖고 있나?” “허리…….” “그렇군.” 이내 아멜리아는 놈의 허리춤에 멘 포켓을 풀어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포션을 부으려는데 박힌 걸 뽑아도 되겠나?” “어서 해라…….” 놈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는 꼬챙이를 뽑았고, 다시금 출혈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리 용살자라 한들 틀림없이 사망에 이를 터. 아멜리아는 가만히 선 채 지켜만 보았다. “뭐 하느……. 어서 포셔늘…….” 그제야 위화감을 느낀 놈이 물었고, 그녀는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계야글…… 해쓰테데……?” “아, 계약을 말하는 건가?”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오래전, 그녀는 노아르크의 성주에 의해 한 가지 계약을 했다.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알 만큼 유명한 계약이다. 노아르크 내에서 그녀는 살인을 할 수 없다. 육신에 새겨진 계약으로 어기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 하지만……. “꼬챙이를 빼달라고 한 건 너지 않나.” 그녀는 그저 말하는 대로 들어주었을 뿐이다. 물론 그녀도 이런 식의 기만은 처음인지라 긴가민가했지만, 계약 위반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행동을 할 수도 없었을 터. “망…… 하련…….” 아멜리아는 놈에게서 획득한 포켓을 통째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장비들도 빼앗았다. 허리춤에 걸린 단검은 물론이고 손에 낀 반지, 팔목 보호대와 목걸이 등등. 전부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것들이었다. “여기에 떨어져 줘서 고맙다. 이것들은 잘 쓰지. 아, 근데 대체 누구한테 당한 거지?” 그녀의 조소 어린 물음에도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분한 듯 눈깔을 위로 부라릴 뿐. 아멜리아도 굳이 길게 말을 이어나가기보다는 성벽 위에 등을 기대고 놈을 지켜보았다. 혹시 모를 우환을 대비해 놈이 죽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고서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한데 이놈의 명줄이 아직 더 남았던 걸까. 터벅, 터벅. 머지않아 멀리서 성곽의 순찰자들이 내는 인기척이 들려온다. 아멜리아는 빠르게 판단했다. 순찰자들이 보고 듣는 것은 전부 성주에게 전해지니까. 들켰다가는 끝이다. “운이 좋군, 용살자.” 그녀가 씁쓸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놈이 죽으면 오르큘리스의 세력이 그만큼 줄어들었을 터였거늘. “너느, 가다하 수 업슬거다.” 살았음을 깨달은 놈이 이를 악물며 읊조렸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겠노라고. 그러나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머?” 그녀는 환단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노아르크의 한 연금술사가 개발한 ‘레테의 축복’이라는 명칭의 환단. 악령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먹이기만 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편리한 기능을 가진 그것. “제기라!! 으읍, 읍!!” 아멜리아는 발버둥 치는 놈의 턱주가리를 꽉 잡고서 목구멍에 환단을 욱여넣었다. 참고로 방금 쓴 것은 보급품용이 아니었다. 영혼의 격이 높을수록 효율이 줄어들기에 혹시 몰라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썼다. 연금술사가 말하길, 일반인이라면 일주일까지 기억을 잃을 수 있다던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확실한 편이 좋겠지.’ 그리 아깝단 마음은 없었다. 얻고 싶다고 해서 다시 얻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오늘 얻은 것들을 생각하면 손해는 아닐 터. 게다가 기억은 오래 잊힐수록 유리했다. 미궁 내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설마 이 지하 도시에서 털렸단 생각은 못할 것 아닌가.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워해야겠군.’ 점점 가까워지는 순찰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멜리아는 신속하게 성곽을 벗어났다. *** 최대 세 번까지 리갈 바고스와 관련된 데드 플래그를 막아주는 반지의 사용 횟수가 하나 줄었다. 고작 10분도 채 되기 전에. ‘설마, 하루에 한 번씩 횟수가 까이고 그러지는 않겠지?’ 문득 피어난 불안은 애써 지운다. 불평불만은 그때가 되어서 늘어놓아도 늦지 않을뿐더러, 정말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명색이 여신이 한 말 아닌가. [그 반지의 줄기가 모두 끊어질 때를 대비해 운명을 이겨 낼 준비를 하셔야 해요.] 여신은 그릇을 통해 나에게 준비하라 말했다. 나와 놈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알 터인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설마 꼴랑 한두 달 주고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겠지. ‘……그래,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덩굴이 언제 끊어지냐는 거니까.’ 조삼모사의 격언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에 몇 개를 주던 뭐가 중요하랴. 중요한 건 도토리의 총 개수. 즉, 이 반지에선 총 기간이 얼마냐는 것일 터.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있자.’ 그런 의미에서 간략하게 포상금 얘기만 하고서 신전을 벗어났다. 포상금은 내일 다시 방문하면 그때 지급을 하겠다던가? “그럼 오늘은 돌아가서 각자 쉬고 내일 다시 만나는 거로 하지.” 이내 약속 장소를 정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 차, 난쟁이놈이 조심스레 우리를 붙잡았다. “저기, 이런 말을 하면 자네들이 어떤 생각을 할진 모르겠네마는. 포상금을 받으면 드왈키의 몫을 떼서 고아원에 기부하는 건 어떤가?” “나는…… 그래도 좋당. 드왈키가 아니었으면 받지 못했을 돈이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오. 사실 내가 이 큰돈에서 한몫을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이니.” 쉽게 말해, 인당 350만 스톤씩 떼서 고아원에 기부를 하자는 제안. 별 고민없이 이를 승낙한 동료들과 달리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니까. 용살자라는 거대한 적까지 있는 와중 아닌가. 드왈키의 유지를 이어가려는 거라면, 이 돈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우리가 안전해지는 편이 옳다. “……비요른, 너는 굳이 안 해도 된당. 우리랑 달리 거기서 제일 고생한 건 너 아니냥.” “마, 맞네. 우리야 죄책감에 그러는 것이니, 자네는 너무 부담 갖지 말게나.” 내가 침묵하자 동료들이 눈치를 보며 그런 말을 해왔다. 여기서 고개만 끄덕이면 이 제안은 끝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다음에 만나서 제대로 말해 보는 거로 하지. 아직 돈을 받은 것도 아니지 않나.” 나는 일단 선택을 보류했다. 분명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하는 제안이었는데, 도무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 이래서 사람 간에 정을 조심해야 한다.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우니까.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내일 보장!” 이내 우리는 헤어져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나 역시 한 시간가량 평화로운 거리를 걸어 여관에 도착했고, 피와 땀으로 물든 몸을 깨끗한 물로 씻어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에르웬이었다. “저기, 아저씨? 계세요?” 문을 열어 주자 그사이에 씻고 몸단장까지 다 했는지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은 그녀가 있었다. 뭔가 용무가 있나 해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주된 이야기는 본인이 미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는 수다에 가까웠다. 그래, 예전에는 이게 일상이었지. 평소였다면 흥미롭게 들었을 터이나, 오늘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에르웬,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네?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재밌어지는 부분인데…….” “다음에, 다음에 마저 듣겠다. 오늘은 피곤하니 그만 돌아가라.” “네에…….” 완고하게 축객령을 내리자 에르웬이 뾰족한 귀를 축 내리며 돌아갔다. 이내 자리한 침묵. 그 속에서 나는 한참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야 문제가 생겼으면 고쳐야 하니까. ‘살아남는 것.’ 이 몸에서 눈을 뜬 이래, 내게 주어진 가장 큰 목표였으며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문제다. [······바바리안, 맹세는 잘 지켰겠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전사의 맹세를 어겼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팀을 이끌며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행동을 수도 없이 했다. 그땐 생존이란 말로 모든 걸 합당화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국 그 모든 행동의 근원에는 신뢰가 있었다는걸. 만약 날 악령이라 의심하는 놈이 있었다면 곧 죽어도 그런 짓은 안 했을 터. [……이보게! 이 친구야, 힘을 내게!] 최상급 포션을 로트밀러와 드왈키에게 나눠 먹인 것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를 넘어서 나 자신을 위협하는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아까 전의 고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350만 스톤이라…….’ 슬슬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나약해졌다. 원인은 간단하다. 타인에게 정을 붙였기 때문에. 내 최대 장점이었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큰 문제가 생겨 버렸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라면 모를까. 살아남는 것인 최우선인 나에겐 좌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렇다면 해결법은 무엇일까? “…….” 나는 잠드는 그 순간까지 그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탐험가 길드의 어느 행정 지부. 내용은 리올 워브 드왈키의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이 됐으니 방문해 수령해가란 것이었다. *** “자네도 받았나?” “으응, 역시 너도?” 다음 날, 동료와 만나 가장 먼저 나눈 대화다. 아무래도 우리 네 명 모두 길드의 편지를 받은 모양인데……. 분명 드왈키가 지정한 건 고아원이었다. 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끼리 얘기를 나눌 게 아니라, 직접 길드에 방문해 물어보는 게 좋을 듯하네.” 난쟁이놈의 말대로 다 함께 길드에 방문했다. 그리고 관련 부서에서 세세한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행정 착오나 그런 게 아니었다. 드왈키는 유서를 갱신하며 상속인으로 우리 네 명을 지정했다. 그것도 지난달, 그러니까 다시 말해……. “……트롤과 싸우고 난 다음이군.” 트롤에게 죽을 뻔한 드왈키는 도시로 돌아와 가장 먼저 유서부터 갱신을 했다. 녀석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최악의 최악을. 그 긍정적이고 희망차던 녀석이. “…….” 이내 길드에 넘겼던 드왈키의 장비와 배낭은 고스란히 돌려받은 것은 물론, 그가 살아생전에 소유했던 한 채의 집까지 소유권을 양도받은 우리는 패잔병처럼 건물을 나섰다. “그에게 진 빚을…… 살아가며 갚을 수나 있을런지 모르겠구려.” “드왈키라면, 우리가 갚기를 바라지 않았을 거당.” “그래, 그 친구라면 분명 그랬을 걸세. 그러니 그가 남긴 돈은 각자 원하는 곳에 쓰기로 하세. 그 친구의 유일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일 테니.” 이후 우리들은 신전으로 향해 포상금까지도 수령했다. 교황은 바쁜지 만나 볼 수 없었고, 모든 업무는 크로비츠를 통해 진행됐다. 나는 다들 먼저 술집에 가 있으라 한 뒤에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모두 비밀로 해 줄 것을 약속해 줄 수 있나?”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신의 뜻에 반하지 않는다면, 은인의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겠다 맹세할 터이니.” 신의 뜻에 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조금 거슬렸지만 나는 별 고민 없이 아크제 장검을 꺼내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용살자의 검이군요.” “어찌 된 일인지 우리가 사용하려고 하면 거부 반응이 인다. 원인을 알고 있나? 만약 저주 때문이라면 해제도 부탁하고 싶은데.” “그 물건에 깃든 힘은 저주가 아닙니다.” 크로비츠는 이 검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설명을 술술 이어 나갔다. 긴 이야기였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이 검의 원래 이름은 용검龍劍이었다. 단지 리갈 바고스가 수호룡을 살해하고 도망치며 용살검이란 이름이 붙었을 뿐. “고대부터 이 검은 오직 용인들만이 사용하고 다룰 수 있었습니다. 대대로 수호룡이 물려받으며 영생에 가까운 삶을 누렸지요.” “하지만 그놈은 이 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아, 그것은 용의 저주 때문입니다.” 수호룡은 죽기 전에 저주를 남겼다. 그로 인해 리갈 바고스는 용인이되 용인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용인의 특성인 용린龍鱗은 불에 타 벗겨졌고, 힘의 근간인 심장마저 인간에 가깝게 변하였다. 검을 갖기 위해 일족을 배신하는 업보를 저질렀지만, 정작 그 물건은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저주를 벗어낼 방법을 오랜 시간 동안 찾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얀델 님의 말을 들어 보니, 완전하게 저주를 극복할 방법은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무튼 저주가 걸린 건 이 검이 아니라 녀석 쪽이었다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이후 나는 우리가 쓸 수도 없는 이 검을 어떻게 처분하는 게 좋을 거 같냐고 물었고, 크로비츠는 짧게 답했다. “용인들에게 그 검을 돌려주고, 마땅한 보상을 받는 게 현명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래, 역시 그 방법뿐이구나. 용인족만 사용 가능한 검이니, 장물로 파는 것도 어렵겠지. 이 부분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렇군. 조언해 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얀델 님은 본교의 은인이십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방문해 주십시오.” “아, 그럼 혹시 앞으로 축복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하하, 그건 좀…….”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크로비츠는 어색하게 웃으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맘 같아서는 해주고 싶지만, 오늘 아침에 신탁이 한 번 더 있었다던가? “황혼의 별께서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터이니, 자신의 뜻을 곡해해 이를 거스르려 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왠지 여신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성물 하나 내준 거로 빚은 갚았으니, 뭔가 더 뜯어낼 생각하지 말라고. “그래도 고민을 들어주는 정도는 언제든 가능하니 편하실 때 찾아와 주십시오.” 크로비츠의 종교인다운 말을 끝으로 나는 신전을 떠났다. 그리고 미리 말해 둔 주점으로 향했다. “아, 자네도 왔나? 앉게나.” 셋 모두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평소 탐사를 마쳤을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도 달랐다. 웃고 떠드는 일 없이, 그저 술을 마셨다. 새삼 실감이 났다. 우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소득을 올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잃었다. ‘창가 자리가 비어 있군.’ 다섯 명이서 오던 술집의 그 테이블. 그러나 다시 채워질 일 없는 빈 의자. 하나 우리는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으며 현실의 대화를 나누었다. “포상금을 비롯해 남은 돈들도 전부 정확히 넷으로 나누는 거로 하지.” “그러세.” 처음엔 다섯으로 나누어 고아원에 기부하자던 난쟁이놈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제안이 나온 이유부터가 드왈키의 뜻을 존중하고자 했던 거니까. 그가 남긴 소중한 재산을 우리가 써주기를 바라였다면, 그 뜻을 따를 뿐이다. 난쟁이놈을 비롯해 모두가 조용히 드왈키를 추모하며 술을 마셨다. 그래서 나도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갈 친구가 아니었는데…….”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던 난쟁이놈이 먼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이에 로트밀러가 그를 데려다주겠다며 떠났고, 나와 미샤만이 남았다. “비요른, 우리도 돌아가장…….” 늘 그랬듯이 우리 둘은 함께 걸어 숙소로 향했다. 과음한 탓에 미샤가 휘청거렸다. “기대라.” “아, 고맙당.” 아직 해가 쨍쨍한 오후. 우리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북적이는 거리를 나아갔다. 평소처럼 내 숙소가 먼저 나왔고,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문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 “…….” 취기 때문인지 묘하게 공기가 뜨거웠다. 그래, 평소였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쪽이 훨씬 더 편하니까. 내 주제에 맞는 일이니까. 눈치 없는 척 바바리안스럽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 나, 나는 이만 가보겠당. 쉬어—” “미샤 칼스타인.” 먼저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리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야 녀석과 약속을 했으니까. [그대는, 눈치가 빠르지 않소. 더는 외면하지 말아 주시오.] 녀석은 외면하지 말라고 하였다. 미샤에게 마음을 밝힐 수 있었을 그 소중한 시간에, 녀석은 내게 그러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으응?” 부딪칠 차례겠지. 내게 손목을 붙잡힌 미샤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취기를 한 번 빼낸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넌 혹시 나를 남자로서 좋아하고 있나?” 로맨틱한 대사도 아니었으며, 그리 낭만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저 바바리안답게 툭 뱉듯이 물은 말. 그러나 미샤는 화내지 않았다. 무슨 이상한 소리냐며 웃어넘기지도 않았다. 잠시 움찔하더니 내 눈을 피해 땅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만 발로 땅을 몇 번인가 질질 끌던 미샤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봤다. 그리고 작게 대답했다. “……응. 좋아한당. 남자로서.” 149화 바바리안 로드 (1) 지난날, 미샤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마른 남자가 취향이당.] [이잇!! 너에겐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뜻이당!!] 마녀의 숲에서 조난당했을 때, 내 동료 계약 제안을 고백으로 오해하고서 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안심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토록 취향이 명확하다면 오래 붙어 지내도 불편할 일 없이 동료 관계로 남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빨리 와서 앉아라.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자면 몸 상한당.] 날 대하는 미샤의 태도는 점점 변해갔다. 굳이 매일 아침마다 들러 나를 깨웠고, 손수 만든 요리를 함께 먹었다. 심지어 고기반찬도 양보해 주었다. 솔직히 동료가 아니라 무슨 여자 친구라도 생긴 듯한 기분. 처음엔 목숨 바쳐 구해줬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은혜를 갚으려는가 싶었지만……. “……응. 좋아한당. 남자로서.”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구나. “혹시 알고 있었냥?” “확신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이유로 외면해 두고 있었다. 직접 언급한 것도 아니지 않나. 모든 게 내 착각일 수도 있다며 이 문제를 직면하지 않았다. 알게 되면 선택지가 하나뿐이니까. “그, 그랬구낭…….” 떨면서도 나를 마주하는 미샤를 보고 있자니, 새삼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가 느껴진다. 진작 이 문제를 마주했다면 다른 방식의 해결도 가능했을 것이다. 에두른 말로 진작에 밀어낼 수도 있었겠지. 드왈키가 외면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미샤의 감정이 커지기 전이라면. 그래, 분명 그렇게 됐겠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냥?” 이제 선택지는 둘이다. 몸을 들이밀어 타오르는 불을 지피든가. 아니면, 더욱 커지기 전에 불을 끄던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악령이고 플레이어인 존재다. 비요른 얀델도 아니며, 집으로 돌아가겠단 소망도 아직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없기에. 진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서 진심을 바라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드왈키도 말했기에. 나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너를 소중한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샤의 대답은 약간의 텀을 두고 돌아왔다. “그래…… 나로는 안 되는 거구낭?”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않나. 게다가 나는 성인식을 끝마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생존이 최우선시 돼야 할 시기다. 그리고 미샤는 나와 계속 탐험을 해야 한다. 남녀의 감정이 얽히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질 터. 이는 우리 둘 모두에게 위험을 초래할 거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동료로만 여겨 줬으면 한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서로를 위한다는 말로 암만 포장해 봤자 그 본질은 이기심이었을까. 미샤는 단호하게 내 제안을 거절했다. “싫다!” “……뭐?” “내가 왜 그래야 하냥? 애초에 나는 오늘 내 마음을 밝힐 생각도 없었단 말이다, 이 나쁜 바바리안노망! 이 사기꾼! 받아 줄 것처럼 물어봐 놓고서!!” 미샤가 짜증 난다는 듯 소리치며 내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심장까지 시려오는 냉기 대미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미샤가 이어서 소리쳤다. “누가 먼저 날 받아 달랬냥? 나도 안다. 네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근데! 좋아하지도 말라니,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냥!” 퍽! 퍽! 퍽! 퍽! 빠르게 중첩되는 냉기 대미지. 뭐라 말을 하던 차, 미샤가 힘없이 내 명치에 손을 내려놨다. “나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단 말이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분에 넘친다 생각한당.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안 하면 안 되냥? 응? 왜 나한테 그것까지 빼앗아가려는 건데…….” 미샤와 이어진 곳으로부터 떨림이 전해졌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위로의 말과 행동도 할 자격이 없다 생각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고, 이내 떨림이 멎었다. “…….” 미샤가 뒤로 물러서더니, 벌겋게 부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내일 밥은 없을 줄 알아라.” 표독스레 그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망부석처럼 남아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끼익. 여관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은 주인아저씨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오늘은 자네가 잘못했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터벅, 터벅.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었다. 여전히 좁디좁은 비요른 얀델의 방. 왠지 텅 비어 있던 이한수의 방이 떠올랐다. 이제 그만 인정할 때였다. “…….” 정을 붙였기에 나약해진 것이 아니다. 나약하단 걸 알기에 정을 붙이지 않으려 했을 뿐. *** 다음 날 아침. 내일 밥은 없다고 말했던 미샤가 방문해 나를 깨웠다. 당근으로 가득한 웰빙 도시락을 들고서. “꼭꼭 씹어 먹어라. 알겠냥?” 지은 죄가 있기에 전부 씹어서 삼켰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먹으니 오래 걸리진 않았다. 다만 식사가 끝나고 뻘쭘하게 눈알을 굴리는 날 보며 미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 않냥.”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네 결정권은 없당. 그러니까 부담 갖지도 마라.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일 뿐이니까.” 집으로 돌아가 하룻밤 동안 내렸을 결론. 내가 뭐라 간섭할 여지는 없었다. 미샤는 나보다도 어른스러웠다. 이렇게 의연하게 말하는 것도 이 관계가 더 불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거겠지. 뭐, 드왈키가 바란 건 이런 애매한 입장 정리가 아니었을 테지만. “알겠다.” “그래, 그럼 앞으로 이 얘기는 금지다. 알겠지?” “그러겠다.” 이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전과 변한 게 없지만 아무튼. “씻고 나와랑. 슬슬 나가야지.”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간단하게 몸을 씻고서 미샤와 함께 외출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해 동료들과 만나 다 같이 컴멜비로 향했다. 마차에서의 분위기는 꽤나 무거웠다. “이렇게 모두 함께 온 건 처음인 거 같군?” 난쟁이놈이 애써 밝게 말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두 함께 온 건 아니니까.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어서 볼일만 마치고 돌아가세.” 이후 컴멜비에 도착한 후에는 그나마 나았다. 장비를 수리하고 판매할 건 판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앙 행정청에 들러 드왈키가 남긴 집을 난쟁이놈에게 양도하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난쟁이놈이 사겠다고 했거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드왈키도 분명 그렇게까진 바라지 않을 텐데.” “하하! 원래 내 집을 갖는 게 꿈이었네. 이번에 이렇게 목돈도 생기지 않았나.” “자, 걱정은 이만하면 충분하니 어서 받고 서명이나 하게나.” 행정청 직원이 공증하는 앞에서 서명을 적어 넣었고, 이로써 드왈키의 집은 난쟁이놈 소유가 되었다. 참고로 행정청을 통해 확인한 집의 감정가는 2,400만 스톤. 다만 경매로 매각 시 20%는 싸게 팔린다는 말을 들었기에, 인당 500만 스톤씩만 받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용무를 마치고 거주 구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주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최종 정산을 했다. 마석을 포함해 모든 소득을 넷으로 나누었다. 장비 수리비라든가, 미궁에서 사용된 소모품값이라든가. 그러한 이유로 제각기 미세한 오차는 있겠지만……. ‘2,500만 스톤이라…….’ 막대한 거액이 손에 쥐어졌다. 난쟁이놈이야 집을 사느라 천만 스톤밖에 안 남았겠다마는. 아, 참고로 용살검이나 미궁에서 내가 사용한 ‘절제된 소망’은 내 몫으로 인정하기로 합의됐다. “뱀파이어 정수가 사라지고 오우거의 정수가 생겼다니, 과연 그런 자가 찾아 헤맬 만큼 중한 보물임은 틀림없네. 다만, 우리를 살리려다가 생긴 일 아닌가.” “거기까지 욕심을 낼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소. 용살검 또한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자가 갖고 돌아갔을 물건이고.” 나로서는 너무도 고마운 얘기였다. 이것들을 돈으로 환산해서 넷으로 나누려면 파산을 몇 번 해도 모자랄 테니까. “자, 그럼 이제 마시세.” 이후 술잔이 몇 번 더 오가고 난 뒤에 나는 슬며시 운을 뗐다. “이제 슬슬 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듯한데.” 팀의 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다만 나는 그 자리를 메울 계획이 아니라, 미샤와 함께 팀을 떠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 모두에게 할 말이 있네.” 나보다 난쟁이놈이 한발 빨랐다. “나는 탐험가 일을 그만둘 걸세.” “뭐?” “이런 때에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하네. 다만 어제 온종일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니, 부디 이해해 줬으면 하는군.” 난쟁이놈의 선언에 로트밀러가 물었다. “이 일을 그만두면 앞으로는 뭘 할 생각이오?” “대장간을 차릴 걸세. 그 친구의 집을 구매한 것도 그래서고.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쩐지 드왈키의 집을 사겠다더니만. 거기를 개조해서 대장간을 차릴 계획이었던 거였구나. “탐험가가 된 건 현실을 피해 달아난 것에 가까웠네.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당장 먹고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꿈을 접었지. 그렇기에 후회할 일을 하고 싶지 않네. 그건 그 친구에 대한 모욕일 테니까.” 난쟁이놈의 단호한 말에 누구도 감히 만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단지 그의 앞날을 응원할 뿐. “……꼭 꿈을 이루길 바라겠소.” “오, 대장간이라니 이제 사장님이 되는 거냥? 나중에 꼭 놀러 가겠당.” “대장간에 갈 일이 있으면 앞으로 네 가게로 가면 되겠군.” “그래, 그러면 되겠군!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즐거울 것 같네! 하하핫!” 난쟁이놈의 탈퇴가 기정사실이 된 후, 대화를 이어받은 건 로트밀러였다. “무라드, 그렇다고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어차피 나도 이번 탐사가 끝나면 팀을 떠날 계획이었으니까.” “뭐? 자네가? 대체 왜?” “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소. 단지 그뿐이오.” 짧은 답변에 난쟁이놈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다만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을까? 로트밀러는 별 내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비요른에게는 미리 말해 뒀소. 설마 이런 식으로 끝날 거라고는 그땐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모처럼 큰돈도 생겼겠다, 나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셈이오.” “……자네의 성실함과 끈기라면 그 목표가 무엇이든지 언젠가 이룰 수 있으리라 믿네.” 난쟁이놈의 진심 어린 말을 끝으로 둘의 시선이 나와 미샤에게 모였다. 우리는 어쩔 것인지가 궁금한 거겠지. 나는 짧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 둘은 새 팀을 만들 거다. 그리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거다.”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칼스타인 양이 고생하겠구려.” “……뭐, 내 업보 아니겠냥. 이것 말고는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없고.” 우리들은 다 같이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팀 반푼이로서 함께하는 마지막 술자리.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고 응원하며 추억을 안주 삼아 이별의 시간을 보냈다. 늘 그렇듯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만 갔고, 이내 난쟁이놈과 미샤가 만취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슬슬 자리를 끝내야겠군.” 나는 로트밀러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술자리 마지막에 이르러 언제나 수습하는 건 우리 둘이었으니까. 마지막까지 팀 반푼이다운 마무리답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며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비요른,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평소와 달리 로트밀러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나를 부른다. 마치 둘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말해 봐라.” 나는 묘한 압박감 속에서 그를 응시했고, 로트밀러는 약간의 텀을 두고서 내게 되물었다. “혹시 자네는 악령인가?” 팀 반푼이의 안전 해체를 위해서는 가장 큰 숙제가 남아 있었다. 150화 바바리안 로드 (2) 로트밀러는 미샤와 난쟁이놈과는 다르다. 탐색꾼답게 주의력도 좋고 눈치도 빠르며, 밑바닥부터 시작해 여러모로 잔뼈까지 굵다. 쩝, 그래도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볼 줄은 몰랐건만. ‘……내 업보이니 감당해야겠지.’ 당장 떠오르는 선택지는 하나다. 악령임을 인정하고 정에 호소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니, 모욕을 당했다고 노발대발하며 머리통을 부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단순히 정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다. 나는 로트밀러에 대해서 잘 안다. 만약 내가 악령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을 거다. 굳이 따지자면 초식 동물 같은 사람이니까. 쉽게 말해, 이는 로트밀러도 자기 말에 확신이 없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왠지 악의도 느껴지지가 않고. 나는 신속하게 포지션을 정했다. ‘역시 일단 우기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제일 낫겠군.’ 물론, 아니라고 변명하며 믿어달라고 애원할 생각은 없다. 그건 상남자 바바리안의 길이 아니니까. 약 3초간의 침묵을 깨고서 나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로트밀러, 네가 날 모욕하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기를 바란다.” 네가 나의 소중한 동료이기에, 한 번은 참고 이유를 물어봐 주는 거라는 식의 말. 사실 따져 보면 거짓말도 아니었다. 로트밀러가 아니었다면, 내 주먹은 진작에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을 테니. 다만, 이 아저씨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아마 진심으로 분노했다고 생각했을 걸세. 내가 자네에 대해 잘 알기 전이라면.” “뭐?” “맹세라든가, 명예라든가. 자네는 허례허식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감정에 휘둘릴 만큼 인내심이 적지도 않고.” 연기로 밀어붙이자기엔 로트밀러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치트키와 같던 전사의 맹세 역시 통하지 않을 테고. 따라서 나도 조금은 포지션을 바꾸었다. “……동료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라도 기분이 나쁘다.” “음, 그건 그렇겠군.” 로트밀러가 어깨를 으쓱하며 남아 있던 술을 들이켰다. 이전보다는 훨씬 더 누그러워진 분위기. “하지만 자네는 너무나 특별하네.” 로트밀러는 말을 이었다. 책을 읽는 바바리안.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바바리안. 명예보다도 다른 걸 더 소중하게 여기는 실리적인 바바리안. 대부분 특출났다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점들이었다. 마지막 것만을 뺀다면. 1년 차도 안 된 전사가 결코 알 수 없는 정보를 알고 있는 바바리안. “그때, 미로에서 자네는 계시를 들었다고 했지.” 천공의 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의문을 품은 동료들에게 조상신 베헬라의 계시를 들었다고 했다. 일단 신이 실존하는 세계 아닌가. 미샤와 난쟁이놈도 그냥 그렇구나 했다. 걱정했던 로트밀러도 별말 하지 않았기에 그땐 다행히 잘 넘어갔다고 여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해 봐야 과연 누가 믿겠나? 나 역시 믿지 못했네. 자네가 악령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였고.” 그래, 뒤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기야 나를 악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전부 설명이 됐겠지. 애초에 그게 진실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몹시도 긍정적이었다. “그래서였다니,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내 질문에 로트밀러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읽은 책에서 악령은 세상 사람들 모두를 꼭두각시처럼 여기는 존재라 묘사됐네. 하나 자네는 그렇지 않았지.” 명예의 가치를 낮게 두되, 앳된 전사들에게 조언하며 이끌어 줄 만큼 동족을 아꼈다. 동료의 죽음에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다. 보통의 악령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위. 어쭙잖게 변명할 것도 없이 내가 걸어온 길이 나를 지켜 주는 방패가 되었다. 뭐, 로트밀러의 의심을 완전히 거둬낸 건 다른 부분이었던 것 같지만. “게다가 별의 여신님께서 자네에게 신탁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찌 의심하겠나.” 별의 여신 레아틀라스가 내린 신탁. 하루 만에 덩굴이 끊어진 것 때문에 툴툴대기도 했는데, 이게 정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달았네. 자네를 악령이라 여긴 건 범인의 눈으로 자네를 보았기 때문일세.” 아니, 제대로 본 거기는 한데……. 나는 꿈틀거리는 양심을 꾹꾹 누르며 로트밀러의 말을 마저 들었다. “세상엔 신들에게 유독 사랑을 받는 자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네. 그리고 역사는 영웅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지.” “……너무 과하다.” “후후, 자네가 그리 말할 줄 알았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네.” 뜬금없는 로트밀러의 칭찬 폭격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렇지 하고 인정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나는 멋쩍음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근데 그러면 왜 그런 말을 꺼낸 건가?” 로트밀러는 나를 악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다. 하면 왜 악령이냐고 돌직구를 날리는 강수를 뒀을까? 그 해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네에게 경고 겸 조언을 해주고 싶었네.” “경고 겸 조언?” “그래, 자네는 현명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또 어리숙하니까. 아무리 동료를 믿어도 자신을 숨길 필요가 있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새 팀을 꾸릴 것 아닌가. 자네의 특별함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없을 걸세. 어쩌면 나처럼 자네를 재단하는 자도 나올 수도 있겠지.” 로트밀러는 말했다. 신탁에 관한 걸 말하고 다닐 수 없는 이상, 최대한 자기 자신을 감추라고. 이것이 혹시 모를 우환을 막아 줄 것이라고. “평범한 일생을 살아온 자로써, 자네에게 이 말을 자네에게 꼭 해주고 싶었네.” “……그렇군. 고맙다. 네가 해준 조언은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겠다.” “음,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군. 이만 자리를 끝내세. 무라드는 내가 업겠네.” 그렇게 팀 반푼이의 마지막 술자리가 끝났다. 평소와 달리 우리는 다음 약속을 기약하지 않으며 헤어졌다. “자네가 걸어갈 길에 빛이 가득하길 바라네.” 팀 반푼이. 나는 여기서 정말 많은 걸 받고 가는구나. *** 로트밀러와의 대화는 유익했다. 그가 해준 조언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내게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비록 이번에는 잘 넘어갔지만……. ‘언제라도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지.’ 다음에도 이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생각해 보았다. 동료가, 그것도 내가 정을 붙인 존재가 나를 악령이라 확신한다면. 심지어 그 증거마저 갖고 있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구태여 그 정답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나는 끔찍한 인간이 되어서라도 살아남고자 할 것이다. ‘……더 조심해야겠군.’ 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하기로 했다. 처음 이 낯선 세계에 떨어졌을 때처럼. 믿을 건 나뿐이란 생각으로 더욱 철두철미하게 계산하고 움직이자. 정말로 그들을 아낀다면. 그게 옳은 일이니까. “비요른, 무슨 생각하냥?” “별거 아니다.” “혹시 내가 어제 취해서 이상한 소리 하고 그런 건 아니지……?” 팀 반푼이의 마지막 회식이 있고서 다음 날 아침. 나는 미샤와 함께 외출해서 대신전으로 향했다. 꼭 같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어차피 이따 같이 컴멜비도 또 들러야 하니까. “또 뵙는군요.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크로비츠를 불러냈다. 불과 이틀 만에 재방문한 날 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 성기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고민이 있는 건 아니고, 부탁할 게 있다.” “부탁이라……. 일단 들어는 보지요.” 용살검. 아니, 용검이 귀중한 보물이긴 하지만, 갖고 있어 봐야 똥만 된다는 판단. “황혼의 별이 우리를 인도할지니. 그들에게 몹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공익을 위한 일이라고 판단했을까? 크로비츠는 흔쾌히 승낙하며 그들과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한시름 더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6등급 바바리안이 용족의 수뇌부를 만나는 것부터 고된 일이었을뿐더러……. ‘신전을 통해 만나는 거니 보상을 후려치거나 다짜고짜 빼앗아 갈 생각은 안 하겠지.’ “시일이 정해지면 남겨준 주소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끝났고. 나는 미샤와 함께 신전을 나와 컴멜비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중앙 거래소로 향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일단 혼령각인부터 올려야지.’ 신탁을 받은 게 알려지면 부족에서 내쫓길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그 전에 6단계는 찍어놔야 한다. 6단계부터는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재료가 필요하고. “위탁 판매 등록이십니까?” “찾는 물건이 있어서 왔다.” 나는 그리 말하며 미리 작성한 서류를 직원에게 제출했다. 불멸의 심장. ‘왜곡’ 마법을 통해 획득한 트롤의 부산물에서 극히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소재. 비싸긴 하지만, 돈만 충분하다면 사는 게 훨씬 이득이다. 트롤만 전문적으로 잡는 놈들도 몇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아이템이니까. “기준에 적합한 물품은 총 1개입니다.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검색 이용료는 3천 스톤을 지불하고 확인한 가격은 1,800만 스톤. 후, 지난번에보다 100만 스톤이나 올랐네. “……구매하지.”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냥 쿨하게 구매했다. 거래소 전체에 한 개밖에 없을 만큼 물량이 없는 물품 아닌가. 이게 팔리면 언제 또 들어올지 기약이 없다. ‘6단계가 이 정도면 7단계부터는 거의 직접 구해야 한다고 봐도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물품 보관소에 도착한 나는 물건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을 한 뒤에 물품을 수령했다. 이걸로 오늘 내 목적은 끝났고. 그다음은 미샤 차례였다. “이번에 네 검도 바꾸는 거로 하지.” “……이래서 날 데려온 거였냥?” 그걸 왜 네가 결정하냐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던 미샤였지만, 큰 반발은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얘도 슬슬 강철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을 테니. “이번에 새로 만들 팀에서는 6층까지 가는 게 목표이니, 돈 아낄 생각은 마라.”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미샤가 쓸 무기이기에 의견을 들어가며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 미스릴과 강철을 섞어 만든 3단계 합금 아이릴제 장검으로 구매하는 것은 합의됐지만, 디자인을 고르는 게 문제였다. “아, 그러니까 예쁜 걸 고르는 게 아니라고!” “그래, 그런 거로 하지. 아무튼 어서 고르기나 해라. 참고로 나는 이게 좋아 보이는데.” “아으, 누가 바바리안 아니랄까 봐. 진짜 그냥 무겁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지?” 툴툴대면서도 미샤는 신중히 검을 골랐다. 검의 중량 배분, 리치 같은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던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유명한 대장간 이름도 달달 외우기에 꽤 놀랐다. 얘도 탐험가구나. “와, 내가 한 자루에 1,200만 스톤이나 하는 검을 쓰는 날이 오는구낭…….” “마법 부여만 뺐어도 400만 스톤은 아낄 수 있었을 거다.” “그래도 이왕 살 거면 좋은 거로 사야지! 평생 쓸 거다!” 보관소에서 물품 수령까지 끝마친 미샤가 아기 다루듯이 검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으, 남은 돈은 진짜 아껴 써야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돈을 아껴 쓰냐? 필요한 돈만 남겨두고 남은 건 전부 ‘야수의 피’를 사서 먹는 데 써라.” “……응?” 바바리안에게 혼령각인이 있다면, 수인에게는 영혼수가 있다. 영혼수는 시간이 흐르며 성장을 하지만 ‘야수의 피’를 먹으면 그 시간이 단축된다. “아까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돈 아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진짜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거냥?” “막 쓰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다.” 미샤는 그러면 차라리 정수를 사 먹는 게 낫지 않냐고도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리 합리적이지 못했다. 5등급 이상 정수는 대부분 수천만 스톤을 호가하니까. 그 아래는 굳이 사 먹을 필요도 없고. “아직 네 영혼수의 권능도 개방하지 못했지 않나. 지금은 거기에 집중하는 게 맞는 거 같다.” 결국 내 강한 설득에 미샤는 비상금을 빼고 남은 모든 재산을 ‘야수의 피’ 구매로 사용했다. 복용은 이따가 집에 가서 하겠다는데……. 권능 중 하나라도 발현이 될지는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터. “그럼 슬슬 돌아가자.” 몇 시간 동안의 재산 탕진을 끝마친 우리는 거주 구역으로 돌아왔다. 때는 오후 8시경. 슬슬 날도 저물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시간. ‘혼령각인은 내일 아침에 성지로 가서 받으면 일단 끝이고…….’ 나는 다음 미궁이 열릴 때까지 해야 할 일들을 한 번 더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세 개였다. 1. 용인족과 만나 용살검을 돌려주기. 2. 오르큘리스 및 노아르크에 관한 정보 얻기. 3. 새로운 팀 꾸리기. 아, 그러고 보니 이걸 얘한테 안 물어봤구나. 생각이 난 김에 곧장 물어봤다. “미샤, 혹시 동료를 구할 때 특별히 원하거나 하는 게 있나?” 일단 남은 세 자리를 어떤 구성으로 채울지는 대충 정해 두었다. 그러나 미샤의 말도 한번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일단 명색이 원년 멤버이기도 할뿐더러……. 탐험가 경력도 나보다 훨씬 길지 않은가. 혹시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조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어…….” 미샤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요, 요정은 아니면 좋겠당.” 생각지도 못한 요구 사항이었다. 151화 바바리안 로드 (3) 탱커인 나와 냉기 속성 근딜인 미샤. 이제 여기서 조합에 맞게 세 명의 팀원을 더 영입해야 한다. ‘신관 하나, 마법사 하나, 그리고 궁수 겸 탐색꾼 하나.’ 가장 먼저 떠오른 구성은 이것이었다. [던전 앤 스톤]의 근본 조합이라고 해야 하나? 뱀파이어 정수도 사라졌기에 신관의 존재는 팀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신관은 깔끔하게 포기.’ 사실 포기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혹시 신관을 소개해 줄 수 있냐고 크로비츠한테 물어보기도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거든. 팀에 5등급 이상이 최소 셋은 있어야 하며, 해당 신전에 공적치도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한다던가? ‘기본 영입 조건이 게임보다 더 빡세졌단 말이지.’ 아쉬운 부분이긴 해도,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신관이 있으면 팀의 안정성이 확 올라가기는 하지만, 그만큼 딜이 부족해진다는 단점 때문에 일부러 빼고 다니기도 했으니까. ‘슬슬 어떻게 짜야 할지 감이 오네.’ 미샤가 종족 차별주의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저녁. 생각 정리를 끝마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기억해 둔 주점으로 찾아갔다. 딸랑-! 문을 열자마자 우람한 떡대를 자랑하는 흑곰족 사모님이 보였다. 혼자냐고 묻는 말에 곰아저씨 이름을 댔더니, 사모님이 입맛을 다시며 한쪽을 턱짓해서 가리켰다. 5등급 탐험가인 곰아저씨가 앞치마를 메고서 술과 음식을 손님들에게 나르고 있었다. “거, 손님도 없는데 맨날 친구만 불러대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애써 한 귀로 흘리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곰아저씨가 막 한 번의 서빙을 끝냈을 때, 조용히 손을 들어 불러냈다. “아, 잠깐만요. 금방 가겠……. 비요른 얀델?” “잠깐 얘기 좀 하지.” 내 말에 곰아저씨는 눈알을 살살 굴리며 카운터 쪽 눈치를 봤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잡혀 살고 있었구나. 짧게 이야기만 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냥 안주 두 개와 술 두 잔을 주문했다. 이러면 나도 저 아저씨도 눈치가 좀 덜 보이리라는 판단. “……크흠흠.” 이내 술과 안주를 가져온 곰아저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 늘 이런 건 아니다. 알지? 그냥 요즘 가게 일이 많이 바빠서…….” 바쁜 것치고는 제법 한산해 보이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가정적으로 살아가는 게 뭐 창피하단 말인가. 이내 곰아저씨가 화제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여기 찾아왔다는 건, 원래 있던 팀에서 나왔다는 뜻이겠지?” “……팀은 해체됐다.” “표정을 보니 누구 한 명을 잃었나 보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침묵이 대답을 대신하기 충분했을까. 곰아저씨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더니, 술을 쭉 들이켰다. “참 엿 같은 일이지.” “그래, 참 엿 같은 일이더군.” 나도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뒤, 추가로 두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몇 명이나 모였나?” “아직 두 명뿐이다.” “너와 그 적묘족 여자겠군.” “그래서 대답은?” “좋아, 함께하지.” 곰아저씨는 일단 시원하게 승낙을 하고 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다. 몇 층이 목표이고, 분배는 어떤 식인지. 그리고 남은 두 명은 어떻게 채울 것인지. 나는 간략하게 생각하고 있는 구도를 말했다. “일단 마법사는 무조건 넣을 거다. 그리고 남은 한 자리는……. 어쩔 수 없이 탐색꾼으로 채워야겠지.” 사실 궁수 자리에 곰아저씨 대신 에르웬을 넣는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다만, 탐색꾼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얘가 얼마나 잘 해줄지도 미지수. 게다가 탱커 소환수가 있는 곰아저씨는 신관의 부재를 어느 정도 커버하는 게 가능했기에 위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인도자가 구해질 때까지는 고용하는 식으로 탐색꾼을 쓸 거다. 탐색꾼을 제외한 나머지는 균등 분배를 할 생각이고.” 곰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툭 뱉듯이 물었다. “혹시 내가 인도자면 분배를 더 늘려줄 수 있나?” “뭐?” “말 그대로의 의미다.” 대체 이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자기가 인도자라고 한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지난번에 1층에서 19시간 동안 헤맸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시간까지 말해 줬던가?” “균열이 열렸을 때가 1일차 19시 경이었다.” 그 시간에도 곰아저씨는 수정동굴을 배회하고 있었다. 2층으로 가는 포탈을 찾지 못해서. 미궁 어느 위치에 있든 포탈이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인도자가 그 시간까지 1층에 남아 있다니? 로트밀러의 최단 기록이 6시간임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 그게…… 수정동굴은 길이 좀 복잡하지 않냐.” “응?” “포탈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는데, 찾아가는 게 매번 힘들더군.” 곰아저씨는 방향만 알려 주고 길을 찾는 건 다른 동료들이 했다고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쉽게 말해, 인도자이긴 하지만 길치라는 뜻인가?” “크흠! 예전 동료들은 그리 말하더군. 솔직히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뭘 인정하기 어려워. 평범한 사람도 나침반만 보고서 하루면 충분히 찾아가는 게 2층 포탈인데. ‘인도자인데 길치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싶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분배는 생각해 보겠다. 나중에 들어올 사람들 의견도 들어 봐야 하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얘기가 끝났군.” 첫 번째 동료가 생겼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 탱커 소환수를 지닌 5등급 궁수이자, 탐색 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인도자.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스펙만 훨씬 올랐다 뿐이지, 벌써부터 팀 반푼이의 재림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 동료가 된 기념으로 술잔을 부딪치기도 잠시. 사모님이 우리를 향해 눈총을 주었다. “당신, 언제까지 놀 거예요?” “여, 여보? 아니, 이건 노는 게 아니라오.” 곰아저씨는 헐레벌떡 일어나 사모님에게 향하더니 뭐라 뭐라 들리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처음엔 혼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어머어머,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우리 남편 동료 될 사람이라니.” 뭔가 잘 얘기가 됐는지 사모님이 먼저 다가와 사근사근하게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작은 발칸이라고 이명도 있다죠? 키도 크고 든든하니 저도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그, 그렇다니 다행이군.” “네. 사실 바로 이전 동료들은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어떻게 반년 넘게 팀을 하면서 한 번도 얼굴을 안 비춰?” 응? “……바로 이전 동료?” 이 아저씨는 솔플을 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슬며시 곰아저씨를 확인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지난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내도 있는 놈이 혼자서 미궁에 들어가고 있던 건가?] [요즘 가게가 적자라서 말이야. 나라도 열심히 벌어야 하지 않겠나?] 열심히 버는 건 좋지만, 설마 아내한테 구라를 치고 솔플을 뛰고 있는 것일 줄이야. 길치에 이어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다. 곰처럼 든든하면서도 현명한 동료가 되겠거니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오늘만 사는 아저씨였구나. “아무튼 오늘 드신 건 제가 대접했다고 여겨 주세요. 그리고 부족한 남편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남의 가정사에 껴들었다가 새우 등 터질라, 도망치듯 주점을 떠났다. 그리고 이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어, 아저씨. 술 드셨어요?” 에르웬이 음료 한 잔을 시켜 두고서 1층 로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못다 한 수다라도 마저 떨러 온 건가도 싶었지만……. “죄송해요!” 뭐라 말을 걸 새도 없이 에르웬이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죄송하다니, 무슨 말이냐?” “전 아저씨 동료분한테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줄도 모르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때 아저씨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다른 동료분한테 여쭤봤어요.”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자, 난쟁이놈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내 예전 동료라고 말하자 의심 없이 드왈키 얘기를 해 줬다는 듯한데……. 그래도 다행히 신탁이나 용살자 관련 얘기는 싹 빼놓고 해준 모양. “괴로우셨죠? 저도 알아요. 무언가를 잃는 기분이 뭔지.” 에르웬이 울먹이며 내 손을 매만졌다. 뭔가 굉장히 창피한 기분이었다. 세 살배기 어린애가 위로해 주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뒷북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나도 마음 정리가 다 된 상황이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지. 아무튼 잘 왔다. 할 얘기가 있었는데.” “할 얘기요? 어, 아직 할 게 남았는데…….” “할 게 남다니?” “……아니에요.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요?” 나는 아예 에르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새 팀을 만들 건데, 혹시 들어올 생각이 있나?” 원래는 에르웬을 넣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미샤의 요구 때문은 아니다. 단지 고민 끝에 궁수는 곰아저씨로 낙점됐고, 남은 자리가 없었을 뿐. 다만, 곰아저씨가 인도자라는 걸 알게 되며 상황이 변했다. 탐색꾼으로 채우려던 자리가 비게 되었다. ‘당장 전투력은 딸리지만, 잘 키우면 무조건 1인분 이상은 할 테고.’ 언니에게 탐색꾼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도 굉장한 가산점이었다. 곰아저씨랑 같이 길을 찾으면 딱이라고 할까. “저…….” 에르웬은 오랜 시간의 침묵 끝에 어렵사리 답을 내놓았다. “제안해 주신 건 정말 기뻐요. 그러니까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음, 일단 거절인 거구나. “언니 때문인가?” “아뇨. 저 때문이에요. 아직 언니한테 배울 게 많이 남았거든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뭐, 납득이 가지 않은 건 아니겠다마는. 확실히 지금은 언니랑 붙어 다니는 쪽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 탐색꾼 수업을 받은 지도 아직 몇 달 안 됐고, 정령술 같은 부분은 내가 알려 줄 수 없으니까. “그렇군. 알았다.” “저…… 화나신 거 아니죠? 네?” “그럴 리가. 훌륭한 판단이다. 너도 이제 탐험가가 다 됐군.” “아, 오랜만에 받는 칭찬…….”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에르웬이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 년만 기다려주세요. 딱 반년만 지나면 언니한테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워서 아저씨네 팀으로 갈게요.” 어, 마음은 고마운데……. 이러면 내가 무슨 산업 스파이라도 보낸 것만 같지 않은가. 어째선지 언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씻지도 않고 성지로 향했다. 어차피 바바리안만 득실거리는 곳에 가는데 굳이 씻을 필요는 없다는 합리적 판단. ‘고향이라도 온 거 같군.’ 내가 진짜 바바리안인 것도 아닐진대, 이곳의 녹색 수풀을 보면 뭔가 편한 기분이 든다. 한때는 부족장이 무서워서 불편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래서일까? ‘니미럴.’ 돌연 신탁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불운으로 단련된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열 명이 넘게 알고 있는 비밀이 언제까지고 지켜질 리 없다고. ‘일단 6단계는 오늘 끝마친다고 해도 9단계를 찍으려면 몇 년은 더 걸릴 텐데…….’ 구시대의 전통을 버린 다른 종족들과 달리 바바리안은 고집이 미친 수준에 가깝다. 조상신이 아닌 별의 여신에게 신탁을 받았단 사실이 알려지면, 슈퍼 루키고 뭐고 부족장이 나서서 나를 추방하려 들 터. ‘이 부분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수풀을 걸어 성지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러고 있자니 텅 빈 공터에 모여 있는 어린 전사들이 보였다. 성인식 날만을 기다리며 성지에 틀어박혀 무술을 연마하는 작은 전사들. 이곳에 올 때면 늘 보았던 모습이지만……. ‘저건, 카론……?” 어린 전사들 사이로 익숙한 바바리안의 얼굴이 보인다. 타르손의 아들 카론. 한때 세상 물정 모르던 아기 바바리안이었으나 세상의 어둠을 받아들이고 어엿한 전사로 거듭한 그 바바리안. 그가 어린 바바리안들 앞에 서 있다. 마치 훈련 교관이라도 된 것처럼. “다 함께 복창한다. 인간은?” “적이다!” “심장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세뇌에 가까운 주입식 교육이었지만, 이것만 해도 저들의 생존율이 훨씬 올라갈 터. 나는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근데 저건 뭐지?’ 타르손의 아들 카론과 그를 따라온 것처럼 보이는 선배 바바리안 몇 명의 행색이 이상하다. 어째선지 배낭을 서너 개씩 메고 있다. 바바리안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이라도 되나 싶었지만……. “교관! 근데 그 가방들은 뭔가?” 내 눈에만 이상하게 보인 건 아닌지, 어린 전사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묻는다. 카론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잘 물어봤다. 어린 전사야! 이건 로버트고, 이건 존, 이건 에이든…….” 좌우는 물론이고 앞뒤로 멘 배낭을 하나씩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주는 카론. “하하하! 그러니까 무슨 사람 이름 같다!” 아기 바바리안이 꺄르르 웃었다. 하지만……. “그야 사람 이름이니까.” 카론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충격을 받은 아기 바바리안들에게 카론은 그 배낭을 얻게 된 경위를 아주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금 정신 교육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복창한다. 인간은?” “적이다!!!!!” “심장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152화 바바리안 로드 (4) 아, 어, 음……. 광기 어린 세뇌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마을이란 말에도 어폐가 있기는 했다. 바바리안의 성지는 야영지 형태에 가까웠으니. 네 땅 내 땅 구분 없이 아무 데나 쳐진 천막들. 그 사이를 지나친 나는 곧장 주술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위치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굳이 부족장을 통해 만날 필요 없다는 판단. ‘뭐야, 아무도 없네?’ 주술사의 천막을 쓱 들춰 보니 텅 비어 있다. 결국 하는 수없이 부족장의 천막에 가 보았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부족장의 천막에도 아무도 없다. 부족장이 없어도 장로가 돌아가며 자리를 지키던 곳인데. ‘뭐지?’ 가만히 그 앞에 서성이고 있자니,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 있던 장로가 나를 발견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너도 장례에 참석하러 온 건가?” 누구의 장례냐고, 따로 물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나르가 성지에 틀어박힌 지 딱 반년이 지나간 시점이었으니까. “……벌써 그날이었군.” “후대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지.” 나는 장례가 치러지는 곳의 위치를 물은 뒤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음산할 정도로 적막한 숲속. 한 30분쯤 나아가자 그 깊숙한 곳에 엄숙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바바리안들이 보였다. 주술사와 부족장은 물론이고, 안면 있는 장로들도 자리해 있었다. 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다른 사람이었지만. “아이나르.” 아이나르가 위태롭게 서 있다. 굵직한 나무에 등을 기댄 스승의 시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비요른?” 나를 부르는 아이나르의 눈빛은 그저 멍했다. 이내 내가 조금 더 다가가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 몰랐던 거구나. 나는 당연히 얘기를 해 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비요른, 너는 알고 있었나?” “그래.” 아이나르가 6개월간 해 온 수련을 바바리안들 사이에서는 ‘담금질’이라 부른다. 육체를 단련해 그릇을 만드는 과정. 게임 내에서는 ‘담금질’을 마치면 육체 수치가 대폭 증가하며, ‘영혼계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물론 ‘담금질’만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 장로는 지병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아이나르를 후계자로 삼은 장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들었던 나는 이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아하니 얘는 이것도 금시초문인 듯했지만. “그런……. 나는 몰랐다!” “그 장로가 너를 많이 아꼈나 보군.” 영혼계승. 혼령각인과 더불어 바바리안족만이 가능한 고유 주술 중 하나. 이 의식을 통해 바바리안은 후대에게 보유 정수 중 하나를 넘길 수 있다. 참고로 받는 것은 단 한 번만 가능하며……. 계승하는 자는 반드시 목숨을 잃는다.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건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당장 그만뒀을 텐데.” 아이나르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깊은 후회와 자책이 어린 목소리. 이에 가만히 지켜보던 부족장이 입을 열었다. “키두바는 겁쟁이였다.” “그를 모욕하지 마라! 키두바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다!” “그럼 네가 겁쟁이여서 그랬나 보군. 키두바가 영혼계승에 대해 설명해 주지 못한 건.” “나는 겁쟁이가—!” 발끈하는 아이나르를 보며 부족장이 단칼에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그만 징징거려라. 네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자 한다면, 그의 죽음을 더 모욕하지 말고 지켜봐라. 전사야.” “…….” “세상에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이를 딛고 마주하며 나아가라. 그게 전사의 길일지니.” 이내 아이나르가 입을 꾹 다물었고, 부족장도 더 이상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장례가 이어서 치러졌다. 나무에 기댄 시신에 다가간 주술사가 얼굴에 피를 묻혔고, 방울을 흔들었다. 그리고 벌레들이 시신을 갉아먹지 못하게 주변에 용액을 뿌렸다. 바바리안들은 정적 속에서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으며, 이내 시간이 흘러 주술사가 장례의 끝을 알렸다. “토하르의 세 번째 아들 키두바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숲에 깃들었다.” 이제 숲에 남은 시신은 썩어 백골이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주술사의 손에 뼈마저 잘게 부서져 숲에 흩뿌려질 것이다. 순서대로 시신 앞에 선 전사들은 머리카락을 자르던가, 손에 상처를 내어 시신 주변에 피를 뿌리고서 자리를 떠났다.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 이제 남은 건 나와 아이나르뿐. 내가 먼저 시신에 다가가 나이프로 머리카락을 잘라 그 주변에 흩뿌렸다. “이제 네 차례다.” 아이나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더 재촉하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이니 만큼, 혼자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 “끌끌, 올 줄 알았다. 전사야.” 이내 숲을 벗어난 나는 곧장 주술사의 천막에 들어섰다. “재료는 가져온 것이더냐?” “그래.” “한번 꺼내 보아라.” 나는 주술사의 지시대로 배낭에 고이 모셔둔 ‘불멸의 심장’을 꺼냈다. 상자 속 천 위에 놓여 두근두근하며 얕게 뛰고 있는 트롤의 심장. “직접 구했느냐?” “아니, 거래소에서 샀다.” “얼마 주고?” 그게 왜 궁금한진 모르겠지만 일단 답해 주자, 주술사가 낄낄거렸다. “어찌 이런 놈이 나왔을까. 재복 하나는 정말 타고났구나, 전사야.” 주술사와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지만, 오늘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복이니 뭐니 하지 마라.” 내 말에 주술사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흐음,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너 자신의 문제는 아닐 테고……. 무언가를 잃었나 보군?”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 “전사야, 소중한 것을 잃을수록 너는 강해질 거다.” 아주 악담을 퍼부어라 싶지만, 나는 그냥 말을 아꼈다. 왠지 이 할아범이랑은 얘기할수록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니까. “됐고, 오늘 혼령각인을 받을 수 있나?” “물론이다.” 주술사는 내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주억였다. 장례를 치르느라 지쳤다거나 할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짤그랑. 이후 주술사가 요구한 부재룟값 100만 스톤을 항아리에 집어넣고 바닥에 엎드렸다. 어느덧 도달한 불사자 경로의 여섯 번째 각인.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길이 있다.” 간략하게 설명을 들은 뒤에 한 가지를 택했다. 고민의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이거 하나 보고서 초반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각인에 꼬라박은 거니까. “무구의 혼을 택하겠다.” “크크, 나중에 바꿔 달라 해도 못 바꾼다.” 이내 주술사가 내 몸에 바늘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선명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 다만 이전보다는 버틸 만했다. 고통의 강도와는 무관한 정신적 이유다. 너무나도 큰 과실이 이 뒤에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불사자 각인 6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영혼 재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이능 수치가 +240 상승합니다.」 입수 난이도가 최상인 스탯. MP 재생력이 대폭 상승했다. 쉽게 말해, 이제 [거대화]를 더 자주 쓰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뜻. 뭐, 메인 디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무구의 혼이 육신에 깃듭니다.」 「고유 효과 [합일]에 의해 캐릭터의 능력치와 비례해 장비의 성능이 강화됩니다.」 [합일]. 액티브였던 [야성분출]과 상시 적용되는 형태인 패시브 스킬.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성능을 지녔지만……. 이 스킬에는 한 가지 숨은 요소가 들어 있다. 무구와 한 몸이 된다는 콘셉트 때문인지, 이게 있으면 [거대화]를 해도 장비가 파손되지 않는다. 즉, 이제 번거롭게 장비를 벗을 필요 없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초거대 메이스와 방패로 적을 때려 부수는 것도 가능해졌다! “끄흐흐흐흐. 베헬, 라아아…….” 육신에 남은 고통 속에서도 흐느끼듯 웃는 나를 보며 주술사가 읊조렸다. “끌끌, 역시 제정신은 아닌 놈이란 말이지.” 바바리안답게 타인의 평가는 한 귀로 흘려 넘겼다. *** 「비요른 얀델」 레벨: 4 육체: 424.4 / 정신: 320.3(New +1) / 이능: 736 (New +240) 아이템 레벨: 197(New -770) 종합 전투 지수: 1529.95 (New +48.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여섯 번째 각인이 끝나고 얼마나 흘렀을까. 천막 너머가 여전히 환하다. 나는 침탁에 놓인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서 물었다. “설마 하루가 지난 건가?” “크크크, 내 앞에서 힘들었다고 울기라도 할 셈이냐?” 거, 그냥 ‘그렇다’ 한 마디면 되는걸.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화술이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음, 정확히는 그럴 힘이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배낭부터 챙기던 차였다. “전사야.” 이맘때면 늘 피곤하다며 어서 꺼지라고 말하던 주술사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어쩌다 인간의 신에게 신탁을 받게 된 것이더냐?” 심장이 철렁하기도 잠시. 나는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이미 다 알고서 묻는 게 분명하니,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을 터. “대체 누구에게 들은 거지? 아니, 지금 그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지금 끼고 있는 그 반지가 네 운명에 그토록 얽혀 들었는데 모르겠느냐. 크크, 걱정하지 마라. 다른 놈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주술사는 눈이 있어도 옹이구멍과 다를 게 없으면 무슨 의미겠냐며 비웃었다. 이를 통해 깨달은 것인데, 묘하게 주술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부족장에게 말할 건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낡은 전통일 뿐이다. 어제 내가 저 숲에서 한 일과 같지. 수천 년도 전에 우리는 고향을 떠나 이 도시에 속하게 됐다. 그로 인해 신이 실존함을 알았고, 참된 의미에서의 문명을 배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선조의 혼을 의지하고 따르되, 실존하며 삶에 이익이 되는 존재를 어째서 부정하고 증오해야 하나? 이는 아둔한 고집에 불과하다. 야만인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지.” 주술사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괜히 알아듣기 어렵게 말한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물론 약점이 제대로 잡힌 이상 심기를 거스를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부족장은 어떨 거 같나?” “네가 신탁을 받은 걸 알게 되면 말이냐?” “그래.” 주술사는 낄낄거리며 웃더니 대답했다. “이미 아는 것을 왜 묻느냐? 그 망나니 놈이면 당장 너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내쫓을 것이다. 킥! 어쩌면 목을 쳐내 불태워 버릴지도 모르고.” ……역시, 그런 거구나. 니미럴, 그냥 혼령각인을 끝마칠 때까지 마음 졸이면서 사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주술사가 말을 이었다. “전사야,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구나.” “쓸데없는 고민?” “수인도, 드워프도, 요정도 모두 낡은 전통을 버린 지 오래다. 그게 왜 그랬을 거 같으냐?”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지구의 역사도 그런 식이었으니까. 개혁. 새로운 사상과 관념이 필요해졌을 때, 언제나 낡은 시대를 등지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후대는 그들을 위인이라 불렀다. ‘이 미친 할아범이…….’ 이내 나는 깨달았다. 주술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쫓겨나는 게 걱정인가 전사야? 그렇다면 그 고민의 답은 실로 간단하다.” 결국 할아범도 한 명의 바바리안이었다. 아니면, 이딴 해결 방안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 문제가 생겼으면, 그 문제를 박살내 없앤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네가 부족장이 되면 된다.” 쫓겨나기 전에 바바리안족을 접수한다. “어떠냐, 이게 훨씬 전사다운 길 아니냐?” 전사다운 길인지는 모르겠고. 나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1년 차도 안 된 바바리안. 그것도 사실은 악령인 존재. 한데 그런 나보고 바바리안 로드가 되어서 이 종족을 입맛대로 바꿔 버리라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주술사.”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나름 합리적이란 점에서 특히나 더. 153화 바바리안 로드 (5) 부족장이 되었을 때의 이점은 크게 셋이다. 일단 신탁을 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수십 년간 쇠퇴를 거듭하던 바바리안의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있을뿐더러……. ‘추후 바바리안의 창세보구를 되찾았을 때, 내 마음대로 쓰는 게 가능해지지.’ 참고로 이는 부족장이라서 괜찮은 게 아니다. 단지 그 전에 종족의 방침을 바꾸면 되는 문제일 뿐. 실제로 바바리안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종족이지만, 몇몇 부족장에 의해 조금씩이나마 진보를 해왔다. 왕에 한하여 경어를 쓰고 예의를 갖춘다든가.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체를 대신전으로 보낸다든가. 애초에 전사들이 성지가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게 당연시된 것도 긴 역사에 비춰 보면 얼마 안 됐다. 한 600년 정도 됐나? ‘옛날에는 신전에서 정수를 지우는 것도 종족 차원에서 못 하게 했댔지.’ 사실 수천 년간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바뀐 게 참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족장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기보다는, 그럴 인물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다. 부족장은 종족의 대소사에 있어 압도적인 권한을 지녔을뿐더러, 전사들도 부족장의 말은 대부분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으니까. 부족장이 자기보다 똑똑하다 생각하거든. 뭐, 그럼에도 개혁이 시작되면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거야 충분히 시간을 들여 하나씩 물들이면 되는 부분. ‘나쁘지 않네.’ 주술사의 말이 가당치도 않게 들리기도 잠시. 하나하나 따져 볼수록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문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족장이 되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릴 거라는 거겠지만. ‘지금 부족장이 옛날에 8층 탐험가였댔지.’ 정확히 몇 등급 탐험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력적인 부분에서 그를 따라가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꼭 8층까지 갈 필요는 없어.’ 커트라인은 6층 정도로 잡으면 될 것이다. 역대 부족장들이 전부 지금처럼 강했던 건 아니니까. 무력이 부족해도 리더십이나 판단력이 좋으면 부족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일단 지금부터 지지 세력을 만들어 놔야겠네. 굳이 부족장이 되는 게 아니더라도, 종족 내에서 영향력이 있으면 반드시 도움이 될 테니.’ 그렇게 어느 정도 생각 정리가 끝나갈 때였다. “전사야,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배고프니 이만 나가라.” “아, 어…… 그러지. 밥 맛있게 먹어라.” 주술사가 축객령을 내렸다. 거, 사내의 가슴에 불을 지펴놓을 땐 언제고. 꼬르르르륵-! 그보다 나도 배고픈데……. *** 오전 9시경. 주술사의 천막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한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찌 된 게 올 때마다 하루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거 같네.’ 그래도 아예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그런지, 밤에 깨어났을 때보다는 몸은 개운하다. 이 정도면 그냥 오늘 하루를 시작해도 될 정도. 그런 의미에서 일단 지나가는 장로 한 명을 잡고 물었다. “혹시 아이나르가 어디 있는지 아나?” “어제 전사의 숲에서 보고 못 봤다.” 음, 설마 아직도 거기에 있는 건가? 조금은 걱정됐기에 일단 어제 장례가 있었던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수풀에 누워 있는 아이나르가 보였다. “츄릅! 비, 비요른?” “여기서 잔 건가?” “자, 잘 생각은 없었는데…….” 자고 있던 게 부끄러웠는지 손등으로 침을 박박 닦아내며 시선을 돌리는 아이나르. 애석하게도 그 끝에는 키두바가 있었다. “아…….”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듯 아이나르가 짧게 탄식을 뱉어냈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을 이어간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비요른…….” “말해라.” “먹을 것 좀 있나?” 그래, 이래야 우리 바바리안답지. 나는 피식 웃으며 배낭을 내려놨다. 그리고 미궁에서 먹던 보존 식량을 꺼내 함께 끼니를 때웠다. “이제 좀 괜찮은 건가?” “조금 짜증 나긴 하는데,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짜증?” “날 속인 거 아닌가. 솔직히 말했으면 그런 꼴사나운 모습도 안 보여 줬을 텐데. 키두바는 모두 앞에서 날 겁쟁이로 만든 거나 다름없다.” 짜증이 난다는 말이 정말인지 분한 콧김을 뿜어내는 아이나르. 조금 신기했다. 고작 하루 만에 슬픔을 이겨내고 이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 “그보다 비요른, 너도 뭔가 일이 있었나?” “무슨 뜻이지?” “그냥 느낌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표정도 어두운 것 같고. 만약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표정이 어둡다라……. “……너 때문이 아니니 걱정 마라.” “나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인가?” “그건…….” 그냥 둘러댈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아마 동료가 죽어서일 거다.” “……그런 일이 있었군. 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괜찮나?” 나는 이번 탐사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평소와 달리 아이나르는 중간중간 호들갑을 떨거나 하는 것 없이 조용히 얘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전부 얘기가 끝났을 때. “리올 워브 드왈키…….” 아이나르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하기라도 하듯 조용히 곱씹더니, 짧게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전에 한번 만나 봤으면 좋았을 것을…….” 아이나르와 드왈키라…….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은 쉽사리 연상되지 않지만, 난쟁이놈과도 절친을 먹었던 게 드왈키 아닌가. 의외로 둘이 잘 맞았을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그래 봐야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보다 비요른, 한번 싸워 보지 않겠나?” 이내 아이나르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느닷없는 제안을 해왔다. “네 발목을 잡지 않을 만한 전사가 됐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만들 팀에 들어오고 싶단 뜻인가?” “네가 생각하기에 자격이 된다면.” 역시 바바리안답다고 해야 하나? 친분에는 일절 기대려 하지 않는 모습이 제법 듬직했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 “아이나르, 마법사 자리를 빼면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도 마법사를 넣을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라.”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고, 아이나르는 대답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어느새 손에 쥐어진 대검이 내 목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 탱커, 근딜, 원딜, 마법사. 이미 필수 포지션은 전부 정해졌다. 다만 곰아저씨가 인도자인 덕분에 탐색꾼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일종의 보너스 자리. 그 자리에 어떤 직업군을 넣느냐에 따라 내가 만들 팀의 정체성이 정해질 것이다. 2법사의 순간 화력이냐, 2원딜의 지속 딜이냐. 그도 아니면 2근딜로 안정성과 사냥 속도를 챙기느냐. 나는 고심 끝에 2법사로 가닥을 잡아 두었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 아이나르와의 대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고민이 커졌다. ‘……확실히 엄청 강해졌네.’ 반년간의 검술 수련. ‘담금질’로 인한 스탯 상승. 거기에 장로에게 물려받은 4등급 정수까지. ‘설마 그 정수를 계승했을 줄은 몰랐는데. 애도 참 운이 좋단 말이지.’ 일단 무력 면에선 당장 미샤와 견주어도 크게 손색이 없을뿐더러, 정수가 고작 두 개라는 걸 감안하면 후반 잠재력도 상당하다. 다만 걸리는 부분은 오직 하나. ‘이렇게 되면 너무 근딜 위주인데…….’ 오우거의 정수 덕에 나 역시 딜이 가능해졌다. 즉, 아이나르까지 합류하면 3근딜이 되는 셈. “그만, 여기까지 하지.” “……나는 아직 더 할 수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더 해봐야 의미가 없을 듯하군.” “……내게는 자격이 없는 건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장비를 걸치지 않은 상태라 해도, [거대화] 상태인 내게서 피를 보게 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합격이다. “그, 그럼 다음 탐사 때 따라갈 수 있는 건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겠나?” “아아! 알겠다! 그, 그래야지. 1분이면 되나?” “……1분은 너무 짧고, 3분으로 하지.”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인내심이 강한 편이니!” 아이나르가 은근슬쩍 어필한 장점은 대충 한 귀로 흘리며 눈을 감았다. 내심 결정을 내린지라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단지 한 번 더 점검하고 싶었을 뿐. 이내 나는 눈을 뜨고서 아이나르를 응시했다. 내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는 없지만…….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자, 잠깐. 그 말은…….”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합격. *** 아이나르를 합격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데스핀드를 조지던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떠올라서는 아니고……. 조금 더 미래를 보고서 결정했다. ‘어차피 6층부터 팀을 두 개는 굴려야 하니까.’ 6층에선 단일팀보다는 소규모 클랜 형태가 이상적이다. 몬스터 규모도 탐사 방식도 다섯 명이서 감당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미샤든 아이나르든 다른 쪽 팀에 보내는 식으로 배치하는 게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성장 가능성 하나는 확실했으니. “아이나르, 혹시 각인은 받았나?” “아직이다. 너도 알다시피 돈이 없어서…….” “그렇군. 잘했다.” 각인은 나중에 경로를 세세하게 알려주기로 하고……. 이쯤에서 나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이나르는 짐을 챙긴다고 장로의 천막으로 향했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마법사 한 명인가…….’ 사실 팀 창설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이었다.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콧대가 높으니까. 콧대가 낮으면 제대로 된 마법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후, 발품 팔 생각하니 벌써 한숨부터 나오네.’ 새삼 2법사 구도로 안 가기를 잘했단 생각이 든다. 레이븐과 라그나. 친분이 있는 마법사가 둘이나 되지만, 둘 다 내 제안을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성지를 구경하며 둘을 설득할 계획을 가다듬던 때. 한 바바리안이 나를 발견하고 크게 불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타르손의 아들 카론?” “만나서 반갑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냐!” 용건이 있어서 왔다고 말해주자, 카론이 잘 됐다며 혹시 어린 전사들에게 몇 마디 해 줄 수 있냐고 부탁해 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러겠다고 답했다. 부족장 자리를 진심으로 노려보기로 한 와중 아니던가. 지지 세력을 만들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아이나르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고. “정말인가! 어린 전사들이 기뻐할 거다!” 이내 카론을 따라서 도착한 공터. 이미 어린 전사들이 수십 명 모여 있었고, 내가 이름을 밝히자마자 열띤 함성이 터져나왔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위대한 전사!” “와아아아아아!!” 카론의 세뇌 덕분이란 걸 알면서도 느껴지는 묘한 뽕맛.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내란 건가? “베헬—라아아아아아!!” 왠지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기 바바리안들이 뒤따라 후창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아이나르가 팀에서 떠난 후로 느껴 볼 일이 없었던 종류의 희열. 크, 그래 이거거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애써 감추며 본격적으로 초청 강사의 역할을 해나갔다.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바바리안답게 서로 싸우게 시킨 뒤,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의 머리통을 부수기 위한 꿀팁들을 무제한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카론식 교육의 부족한 점을 채웠다. “돈이 생기면 영상 기록구부터 사라. 너희가 약탈자로 누명을 썼을 때 도움이 될 거다.” 카론이 만든 돈복사 버그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봐도 참 과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약탈자 새끼들 아닌가. 조금이라도 죽어 없어지는 게 세상에 이로운 일이 될 터. “자, 그럼 다 함께 복창한다. 착한 약탈자는?” “죽은 약탈자뿐이다!!!” “탐험가 길드는?” “믿지 않는다!!” “미궁에서 한스를 만났을 땐?” “안 된다! 저리 가라! 뒈지기 싫으면!” 그렇게 한창 바바리안 탐험가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아로새겨 주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살기?’ 이내 나는 교육을 중단하고 뒤로 돌았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의 바바리안이 귀신처럼 내 바로 뒤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얼굴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흉터. 길게 땋은 턱수염. 며칠은 안 씻은 듯한 특유의 땀내까지. “얀델의 아들 비요른.” 부족장이었다. “최근 길드에서 연락이 많이 오더라니. 전부 네 짓이었군?” 슬쩍 눈알을 굴려 카론을 확인했다. 부족장이 훈련 시간에 찾아올 리 없다던 카론은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서 설명해라. 내가 널 오해하기 전에.” 아, 어, 음……. 니미럴. 154화 바바리안 로드 (6) 부족장 손에는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성인식 때 옆에 있던 아저씨의 목을 벴던 바로 그 도끼. “괴물이 아니라 사람을 죽여 돈을 벌라니, 너는 이게 전사로서 옳은 행위 같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 아니, 언젠가 마주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오늘이 될 거라고는 미처 몰랐던 그 상황.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신속하게 판단했다. 그리고……. 1.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2. 변명으로 무마한다. 두 가지의 선택지를 즉시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야 난 바바리안이 어떤 종족인지 아니까. 보통 사람 눈에는 그쪽이 더 쉽고 합당해 보일지라도,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된다. 돌파구는 단 하나뿐이다. “부족장, 원래는 네가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냥 바바리안답게 들이받는 것.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부족장의 입가가 뒤틀렸다. “말해 봐라, 그게 무슨 뜻이지?” 입을 뗀 순간 도끼가 휘둘러질 것만 같은 기분. 그러나 나는 떳떳하게 어깨를 폈다. 잘못이란, 인정하려 했을 때 잘못이 된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신념이 된다. 본질이야 어쨌든, 그렇게 포장될 가능성이라도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거고. “말 그대로다. 오늘 내가 한 건 네가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사욕이 아닌 대의를 위해서. 부족장 앞에서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인다. “부족장! 너는 매달 미궁에서 몇 명이 죽어 나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기나 한가?” “죽음을 두려워해선 전사가 될 수 없다.” 신념과 신념의 격돌. 일족을 위하는 한 명의 젊은 전사로서, 부족의 미래를 위해 분노를 터트리며 읍소하는 것. 오히려 이게 더 안전한 길이라 판단했다. 부족장은 전사를 아끼니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너라면 알지 않나. 살아남은 전사만이 강한 전사가 된다.” 정말 부족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라 여겼는지, 부족장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죽도 밥도 안 될 터. 나는 되물었다. “살아남은 전사만이 강해진다고?” “네가 그 증거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첫 진입 때 반이 죽는다. 그다음번에 또 반이 죽고. 그렇게 해서 성인식이 끝나고 반년이 지났을 땐 총 9할이 죽는다. 적자생존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기형적 구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지고 싶지 않아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족장, 네가 처음 전사가 됐을 때도 이렇게 많이 죽었나?” “그렇지 않다.” 예상한 답변이었다. 딱히 과거 기록을 공부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이딴 구조가 십 년 만 더 이어졌어도 바바리안은 성인식 때 무기도 못 쥐여 주는 처지였을 테니까. “그럼 우리가 그들보다 약해서 이렇게 많이 죽는 건가? 부족장, 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불리한 진술을 피할 법도 한데, 부족장은 솔직하게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주었다. 하긴 지도 알고 있겠지.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결정적인 원인이 뭔지. “미궁 안에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들이 있다. 놈들은 우리를 고블린처럼 취급한다. 왜 그런 거 같나?” “마법사들이 우리 심장을—” 부족장이 말했고.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아니!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종족이었다면, 심장을 거래하지 못하게 왕가에 요청해 법률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족장은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적자생존이라는 전통을 방패 삼아. 종족이 몰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적어도 위험을 알려 줬어야 했다! 미궁에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말해 주고 대비를 시켰어야 했다!” “머나먼 선조 때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그걸 내가 바꿀 수는—” “선조는 우리가 강해지길 바랐다!!” 부족장의 결정은 섭리에 따른 거라고조차 볼 수 없다. 광활한 자연 어디에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짐승은 없으니까.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 진화를 택한다. 하지만 그 당연한 걸 부족장은 하지 않았기에. “부족장! 지금 우리 모습을 봐라! 미궁에서 우리는 고블린만큼이나 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단지 괴물만이 적이라고 배웠으니까! 근데 이걸 선조들이 바랐다고?” “……흥분을 가라앉혀라.” “내가 너였다면 가죽 장화라도 하나 신겨서 보냈을 거다. 마석을 담을 주머니도 줬을 거고. 나침반을 쓰는 방법도 미리 알려 줬을—” “내가 지금 진정하라 했지 않나!!!” 아, 조금 선을 넘었나? 1년 차도 안 된 전사에게 팩트로 두들겨 맞은 부족장의 외침이 숲을 진동시켰다. “속 시원하게 말해라! 그래서 너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기엔 열불이 치솟는 모양. “네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지막 대사를 이었다. “내가 할 거다, 부족장.”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바바리안족을 위해서. *** 내가 당당하게 포부를 밝힌 후. 부족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 정리라도 하듯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대뜸 도끼를 휘둘렀지.’ 일단 뒤로 물러나 도끼를 피했다. [거대화] 상태로 손을 뻗어 도낏자루를 잡았고,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부족장의 압승이었다. 3m가 훨씬 넘는 거구가 도끼에 매달려 허공에 떠올랐다. 따라서 도끼를 놓고 부족장에게 달려들었다. 음, 그다음에는……. ‘주먹.’ 그래, 주먹을 부족장 얼굴에 쑤셔 박았다. 다만 평소 같은 묵직한 손맛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때 부족장의 커다란 주먹이 눈앞에서 보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그럼 여긴 부족장의 천막이겠네.’ 일단 차분하게 상황 정리를 끝마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예상대로 천막이었고, 부족장이 보였다. “일찍 깨어났군.” “……부족장, 코가 들어갔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래? 어쩐지 숨이 잘 안 쉬어지더라니. 침을 삼킬 때 피맛이 나는 것도 같고. 침상 옆에 놓인 내 배낭을 열어 포션 한 병을 꺼내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남은 걸 부족장에게 건넸다. “너도 먹어라.” “……됐다. 아깝게 포션을 왜 먹나? 내버려 두면 내일이면 낫는다.” 뭐, 그렇다면야. 나는 손으로 코 뼈를 대강 맞춰 준 뒤, 코 풀듯 고여 있던 핏물을 닦아내 침상에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이것. “화는 다 풀렸나?” “……처음부터 화 안 났다.” “그럼 왜?” “조금 건방져서 한 대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뿐.” 여하튼 이제 화는 다 풀린 듯하기에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을 테니까. ‘다행히 잘 풀렸네.’ 부족장 앞에서 부족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흥분해서 되는 대로 말을 뱉거나 한 건 아니다. 단지 이것 때문에 부족장이 날 죽이거나 할 리는 없다고 예상했을 뿐. “그렇게 내 자리가 탐이 나느냐?” “그래.” 바바리안에게 야망과 포부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신념과 대의가 얽혔다면 더욱더 그렇다. “역시 넌 다른 전사들과 다르군.” “무슨 뜻이지?” “다른 전사들은 명예를 위해 부족장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너는 우리 부족만을 위한다.” 다행히 악령 의심은 아닌 거 같고. 이런 내 모습이 부족장은 그리 싫게만 보이지 않는 듯하다. 분명 팩폭을 좀만 덜했어도 처맞는 일도 없었겠지. 아무튼 부족장도 변명거리는 있었을까? 그가 조금은 뜬금없을 얘기를 꺼냈다. “굳이 따지면 전대 부족장이 너와 비슷했다. 우리 부족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섰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아나?” “성물 전쟁을 말하는 건가?” “그래.” 성물전쟁. 10년 전, 요정과 있던 전쟁에 붙은 이름이었다. 한 바바리안이 미궁에서 요정족의 성물을 우연히 주움으로써 시작된 비극. 요정족은 성물을 지닌 바바리안을 포박해 심문했고, 바바리안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죽었다. “왕가에서 중재에 나서기 전까지, 우리들은 1년이 넘게 요정족과 싸웠다. 전대 부족장도 그 전투에서 죽었지.” 성물 전쟁은 바바리안의 세력이 이렇게 약화된 것에 가장 큰 원인이었다. 후대를 이끌어야 할 전사들이 수없이 죽었다. 그 와중에 마탑에서는 바바리안의 심장이 마법 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발표를 했다. “탑주와도 만났었지만, 놈들은 자신들이 왜 우리를 위해 마법 재료를 포기해야 하냐더군.” 음, 정말 아무 노력도 안 한 건 아니었구나. “하지만 마탑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래, 확실히 네 말대로 어린 전사들에게 위험을 알려 주고 가르쳐줬으면 지금보다는 나았겠지.” “뭐?” 내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흠칫하자 부족장이 피식 웃었다. “아직 어리구나 전사야, 이번에 네가 한 짓은 전사들에게 인간을 향한 증오를 심어주는 행동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약탈자다.” “그게 정말 구분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내가 널 잘못 봤군.” “……근데 왜 인간을 증오하면 안 되지?” 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고, 부족장은 잠시 텀을 두고서 대답했다. “그들을 증오하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없으니까.” “라프도니아 왕가가 두려운 거였군.”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왕가가 가진 힘이 얼마나 막대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부족장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그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존재가 어디 있을까. 만약 네가 그자를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왕가 산하의 군대가 아니라. 왕, 그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듯이. *** 이후 대화는 짧게 마무리됐다. [네가 전사들에게 약탈자에 대해 가르치는 건 눈감아주겠다. 하지만 더 나아갔다간 좌시하지 않을 거다. 전사들이 인간을 향해 큰 증오를 품게 하지 마라.]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아니지만, 내 야망을 인정하고 부족 내 영향력을 키워도 묵인해 주겠단 뜻이었다. 뭐, 선을 지키라는 경고를 받긴 했지만……. 잘못을 인정하거나 변명하느라 급급했다면 얻지 못했을 보상. [내 자리가 탐난다면 더욱 강해져라 전사야. 그리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라. 내가 널 지켜볼 것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먹이 제법 맵더군.] 거, 누가 할 소리인데. 부족장의 칭찬 아닌 칭찬을 마지막으로 천막을 나섰다. 성벽 너머로 해가 저무는 시간대. 천막 주변에는 바바리안들이 가득했다. 모두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기 바바리안부터 시작해, 젊은 시절에 제법 날렸을 장로들조차도. “멀쩡하군.” “부족장은 코피가 났다던데…….” “그렇다면 정말…….” 천막에서 사지 멀쩡하게 살아돌아온 나를 보며 진득한 호기심을 풍겨오고 있다. 나는 대충 배낭 위치를 한 번 정리하고 그들 사이를 걸었다. 그들은 바라볼 뿐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부족장에게 밉보였다고 생각한 모양. 그렇게 몇 걸음 더 나아가던 때였다. “비요른!!” 아이나르가 내게 다가왔다. “괜찮나! 부족장이랑 싸웠다고 들었는데!” “아, 나는 괜찮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 부족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다면서?” 아이나르가 돌직구로 묻는 그 순간. 백 명 가까이 되는 바바리안들의 귀가 동시에 쫑긋했다. 여기서 그냥 사라지는 것도 못할 짓일 터.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더욱 강해져 자격을 증명하라고 했다.” 즉시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놀라는 자도 있었고, 아무리 나라도 불가능할 거란 자도 있었다. 의외로 현실적인 근거를 대며 몇 년은 족히 걸리리란 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아마 부족장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비요른, 너는 뭐라고 대답했나?” 그때 나는 대답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그래, 그렇게 대답했다. *** 아이나르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던 중에 카론을 만났다. 그리고 확실하게 못을 박아 두었다. 아기 바바리안에게 가르칠 때 인간을 너무 미워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 하지만! 인간은 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모두가 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게 된 격이지만, 드왈키의 얘기를 해 주자 카론도 수긍했다. “그래, 인간 중에도 그런 숭고한 사내가……. 혹시 이 얘기를 다른 전사들에게 해 줘도 되나?” “드왈키에 관한 얘기를?” “아주 좋은 예시가 될 거다! 우리는 그런 전사를 아주 좋아하니까!” “내 말 못 들었나?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다.” “하하!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는데 어째서 전사가 아니냐?”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데……. 그냥 그쯤에서 논쟁을 끝내고 대화를 마쳤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보겠다.” “그래! 다음에 보자, 얀델의 아들 비요른! 훗날 우리를 이끌 위대한 전사!” 왠지 수식어가 또 길어진 기분이지만……. ‘그래도 잘 끝난 셈인가.’ 참고로 돈복사 버그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부족장도 증오가 심화되는 걸 염려했을 뿐, 여기까지는 허용 범위 내라고 해줬으니까. 애초에 돈복사 버그도 몇 달이면 막힐 거다. 약탈자들이 그토록 바바리안을 노린 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서 그랬던 거니. ‘우리가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목숨 걸고 덤비려는 새끼들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3등급 몬스터라면 어떨까? 제정신이 박힌 새끼라면 보자마자 튈 터. 드르르르륵! 이내 성지를 벗어난 나는 아이나르를 이끌고 내 숙소로 데려왔다. 그리고 1층에서 눈물겨운 식사를 끝마친 후, 때마침 비게 된 옆방을 잡아 줬다. “저, 정말 이런 데서 자도 되는 건가……?” “물론이다. 나중에 갚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이 정도는 별거 아니—” “비요—르으으으으으은!!! 평생 널 따르겠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성지가 아니다.” “아, 그랬지?!” 그렇게 아이나르에게 주의를 주던 때였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내 방문이 안에서 열렸다. “……비요른? 옆에 그 여자는 누구냥?” “아, 와 있었나?” 앞으로 함께 할 팀원이기에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었다. 예전에 몇 번인가 서로에 대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반갑다! 미샤 칼스타인!! 얘기는 많이 들었다! 비요른의 동료는 나의 동료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동료와 첫 대면이라 긴장했는지, 아이나르가 거의 악쓰듯이 소리치며 손을 내밀었다. 당황한 건 미샤도 매한가지였다. “아, 어……. 반갑당…….” 거의 홀린 사람처럼 아이나르와 악수를 해가던 미샤가 정신을 차리고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얘, 얘가 정말 네가 말했던 그 아이나르라고? 그때 분명 바바리안이라고 했지 않냥!!” “그런데?” “얘가 어딜 봐서 바바리안이냥!!” 누가 봐도 바바리안 아닌가? 처음엔 이해가 안 됐지만, 생각해 보면 놀라는 심정도 이해가 됐다. 바바리안이라 말하면 대부분 기본으로 2m는 깔고 상상하니까. 문제는 그걸 아이나르가 들었단 거겠지만. “미샤 칼스타인!! 키, 키가 작다고 나를 모욕하는 건가!!! 나는 너를 소중한 동료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는데……!!” “아악! 아니당. 잘못 들은거당!” “나는 귀가 좋다!!” “미, 미안! 그, 그런 뜻이 아니었당. 응?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응! 그래서 그랬더 거니—” “뭐어엇!! 미샤 칼스타인, 너는 나를 얼마나 더 모욕할 셈이냐? 결투! 결투를 신청한다!!” 트라우마 버튼이 눌리자마자 소리를 치기 시작한 아이나르와 이를 진정시키는 미샤. 지켜보고 있자니 두통이 강하게 피어났다. “윽…… 머리가…….” 부족장에게 맞은 머리가 아직 다 낫지 않은 게 틀림 없었다. 음, 아무렴.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아직 팀원 다섯 명이 모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시밭길이 눈앞에 아른거릴 리 없지 않나. 155화 수사자 (1) 녹차 비스무리한 차를 마시고 있다. 장소는 행정청 근처의 어느 다과점. 함께하는 멤버로는 행정청 7급 사무관 샤빈과 그녀의 절친 라그나가 있다. 참고로 처음 있는 모임은 아니고……. 하수도 의뢰로 인연을 맺게 된 후, 가끔 샤빈의 주도하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빈도로 따지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참! 이따가 돌아가시면 동료분들한테 이것 좀 나눠주세요. 저희 행정청 근처에 새로 생긴 쿠키 가게에서 파는 건데, 요즘 엄청 인기예요.” “……그러지. 챙겨줘서 고맙다.” 이처럼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시답잖은 잡담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이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간혹 쓸모 있는 것들이 나온다. “아, 맞다! 제가 그 얘기를 했던가요? 이번에 마석 환전 수수료를 연차에 따라 감면해 주던 제도가 없어질 거 같아요.” “얼마나 확실한 거지?” “저희 사무장님은 거의 통과될 거라고 보시더라고요.” 니미럴. 아직 1년 차도 안 된 나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식. “시행은 언제부터 될 거 같나?” “음, 빠르면 내년, 늦으면 내후년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군.” 늘 그랬듯 쓸모 있는 얘기가 끝나면 일상적인 이야기가 반복됐고, 내가 지루하다고 느낄 새면 어김없이 샤빈의 입에서 유익한 정보가 뱉어졌다. 우연이 아니란 건 두 번째 모임에서 깨달았다. ‘무슨 조련당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샤빈은 알고 있었다. 이런 미끼라도 없으면 내가 이 심심한 모임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는걸.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역시 얘 때문이겠지.’ “어때요? 라그나? 요즘에는 별일 없어요?” 도서관의 사서,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 처음에는 몰랐는데 얘는 사회성이 거의 바닥을 긴다. 그래서일까? 샤빈은 내가 얘랑 사이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거, 자기가 무슨 엄마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별일 없습니다.” “그렇구나. 비요른 님한테 하고 싶은 말은요? 아까부터 혼자 너무 조용히 있는 거 같은데.” “하고 싶은 말……. 어쩌면 하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속 시원하게 해 보세요. 이미 두 분은 친구잖아요?” 그리 말하며 샤론이 나를 보았고,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친구 아닌가.” 첫 모임에서 악수를 나누며 했던 친구 약속. 사실 그게 무슨 의미인가도 싶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행정청에서 일하는 샤빈은 내게 도움될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끔 하수도 제외 개꿀 의뢰를 주기도 하니 그저 잡힌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수밖에. “친구…….” 내 말에 용기를 얻었을까? 대화 내내 가만히 있던 라그나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훈계하듯 읊조렸다. “비, 비요른 얀델. 책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아, 요즘에 바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다. 미궁에서 나오고서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을 정도니까. “그럼…… 내일은 오는 겁니까?” “오늘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용살검이 남기는 했지만, 이거는 크로비츠가 약속을 잡아오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은 없을 터. 마법사 구인 건만 마무리되면 나도 한동안은 좀 편히 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그나 리타니엘 페프로크.” 슬슬 본론을 꺼낼 차례가 됐다. 바쁜 와중에도 모임에 참가한 건 사실 이 목적 때문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십시오. 속 시원하게. 우리는 치, 친구 아닙니까.” “암, 그럼요!” 라그나가 먼저 ‘친구’란 단어를 꺼내자 샤빈이 흐뭇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오케이, 이 정도면 판은 깔렸고. “혹시 탐험가가 될 생각은 없나?” “……그때와 똑같은 제안이군요.” “그래.” 예전에도 한 번 했던 제안이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우리 팀은 훨씬 더 구색이 잡혔으며, 이제 명색이 ‘친구’ 아닌—. “아, 안 돼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라그나의 답변을 기다리던 차에 샤빈이 발작 버튼이 눌린 것처럼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라그나? 거절할 거죠? 당연히 그래야죠. 미궁이 어떤 곳인데!” 착오였다. 샤빈이라면 탐험가 일도 사회 경험이라며 날 도와줄 거라 여겼다. 알고 지내는 탐험가만 해도 수십 명은 되는 모양이니까. 탐사에 대한 거부감도 적으리라 판단했다. 애초에 셋이 함께 있을 때 얘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였고. 한데 얘가 먼저 나서서 초를 칠 줄이야. “……샤빈, 너무 겁 먹지 마세요. 저는 아무 데도 안 가니까.” 이내 라그나가 샤빈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러자 이성을 되찾았는지 무안한 얼굴로 다시 착석하는 샤빈.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내 제안은 거절이라는 뜻이군.” “예. 저는 도서관 일이 마음에 듭니다.” 사서 일이 마음에 든다라……. 순순히 믿기에는, 과연 누가 이곳에 관심이나 갖겠냐며 먼 곳을 바라보던 기억이 선명하다. 차라리 뭔가 이유가 있어서 떠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 터. ‘결국, 얘는 실패군.’ 내심 아쉬웠다. 몇 번인가 모임을 하면서, 얘 마법사 등급이 엄청 높다는 걸 알았거든. 최소 5등급 이상인 마법사. 그런데 나이도 젊어서 추후 성장의 여지까지 있다니? ‘하긴, 그런 얘가 도서관 사서나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사정이 있단 거겠지.’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지웠다. 아쉬운 인재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지금 정도의 친분으로는 사연이 뭐냐고 물어봐도 순순히 답해 줄 거 같지 않고. “어, 근데 비요른 님 팀에 마법사가 있지 않았어요? 그 행정 마법사 출신의…….” 이내 평소 상태로 되돌아온 샤빈이 물었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녀석은 죽었다.” “아…….” 그것으로 오늘 모임은 끝이었다. *** ‘친구모임’을 끝낸 뒤, 나는 마탑으로 향했다. 약 2달 만의 방문이었다. 와, 연구 협조가 끝난 지 벌써 그만큼이나 지났구나. “어? 얀델 씨?” “오랜만이군. 들어가도 되나?” “뭐, 그러세요.” 오래간만에 찾은 레이븐의 개인 연구실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산처럼 쌓인 문서더미와 마구잡이로 널브러진 각종 마법 재료들. 좀 치우고 살면 안 되나도 싶었지만……. “아무 데나 놓지 말고 이리 줘요. 놓은 위치를 까먹으면 안 돼서.” 음, 어디다 뒀는지 다 기억을 하니까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커니즘인 건가? 어쩌면 나름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두 달간 코빼기도 안 내비치더니.” 의자 위에 있던 문서를 레이븐에게 건넨 뒤 자리에 앉자마자 날아온 물음이었다. 처음엔 플라스크에 물이라도 담아서 가져다 주더라니. 이제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라 이건가? 뭐, 서론이 짧은 건 반길 일이었다. 어차피 앞에서 암만 밑밥을 깔고 아부를 해도 결정에 영향을 줄 여자가 아니니까. 결과가 정해졌다면, 시간이라도 아껴야지. “너에게 제안할 게 하나 있다.” “말해 봐요.” “새로 만들 팀에 마법사 자리가 빈다.” “한마디로, 이번에도 영입 제안인 거네요?”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정색했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 하긴 그땐 작은 발칸이라는 이명도 얻기 전이었으니까. “얀델 씨, 그때 제가 말했던 거 기억하세요?” “팀원들 전부 6등급 이상에, 신관까지 있으면 좋겠다고 그랬지.”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나는 솔직하게 멤버 소개를 했다. 일단 신관이 없다는 것부터 해서 시작은 7등급 근딜인 미샤였다. “흐음, 7등급이요?” “어차피 이번 달 내에 6등급으로 승급이 될 거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라.” 왠지 못미더운 표정이라 내친김에 미샤가 가진 정수의 등급만 읊어주자, 얘도 표정을 풀었다. “그렇다면야.” 그다음은 아이나르 차례였다. 핏빛 성채를 같이 클리어한 사이였기에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당당히 말해 놓고 9등급? 아니, 그보다 왜 아직도 9등급인 건데요? 그때 본나이트의 정수를 먹었잖아요?” “미샤 칼스타인과 마찬가지다. 승급 신청을 할 시간이 없었다.”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지금쯤 어제 대판 싸웠던 둘이서 탐험가 길드에 방문해 승급 신청을 했을 터. 최소 7등급은 받을 것이다. 7등급 정수 하나에 무려 4등급 정수를 보유 중인 상황이니까. “4등급 정수를 계승했다니……. 그렇다면 말이 또 달라지긴 하네요.” “말이 7등급이지, 6등급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부분은 내가 직접 싸워 보고 판단한 거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고요. 그래서 마지막 한 사람은요?” “아브만 우리크프리트. 흑곰족 출신의 5등급 탐험가다. 무기로는 대형 석궁을 쓰지.” 이내 탱커 소환수에 대해서도 말해 주자 레이븐이 조금 표정을 달리했다. “그 정도면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거 같은데, 어쩌다가 얀델 씨 팀에 들어갔대요?” “인연이 있었다. 적어도 동료 뒤통수는 치지 않을 거 같다더군.” “확실히……. 그런 쪽으로는 믿을 수 있기는 하죠.” 의외로 쉽게 납득하고 넘어가는 레이븐. 다만 멤버 구성을 모두 듣고 나니 이런 의문이 들었을까? “그런데 탐색꾼은요?” 마침내 기다려 왔던 질문이 나왔다. 사람이란 연출에 따라 정보의 인상을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하니까. 나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툭 뱉었다. “아, 그 말을 하지 않았군. 우리크프리트는 인도자다.” “……그게 정말인가요?” “맹세라도 해 줘야 믿겠나?”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피식 웃으며 당당히 어깨를 폈다. 그리고 조금씩 꿈틀거리는 양심의 가책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래,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곰아저씨는 인도자다. 단지 길치일 뿐. 아무튼 곰아저씨가 인도자란 걸 밝힌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자존심을 부리고 싶은지, 고민하는 척하긴 했지만…….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다. 맨날 돈이 부족하다고 구시렁거리지 않았나. 일단 6층까지 가는 게 목표이니, 본격적으로 탐사가 진행되면 돈은 부족하지 않을 거다.” “으음.” “팀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아무 마법사로는 안 된다. 너처럼 실력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으흠?” “아, 그리고 하나 더. 인도자가 있으니, 균열에 들어가거나 미궁에 숨겨진 공간을 찾아내는 일도 몇 번은 있을 거다. 너처럼 제대로 된 마법사가 이 가치를 모르진 않을 테지?” “흐으으음.” 조금 더 설득하는 식으로 나서자 레이븐도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간절히 말씀하신다면야.”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그야 영입 제안을 듣고서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탐사에 관한 생각 자체가 없었다면, 내 말을 이만큼이나 들어주지도 않았을 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라.” “저한테 탐사는 언제나 2순위예요. 1순위는 제 마법 연구가 될 테고.” “간단하게.” “뭔가 연구할 주제가 생기면 한두 달 정도는 쉴 수도 있어요. 어쩌면 아예 빠질 수도 있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 얀델 씨가 이해해 줬으면 해요.” 내심 긴장했지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우리가 무슨 정규 클랜인 것도도 아니고. 급작스럽게 결원이 생기는 건 이쪽 업계에서 흔한 일이다. 하물며 콧대 높은 마법사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래, 이 정도면 양반이지. “좋다. 대신 미리 말해 줘라. 아예 나가는 거면 새로운 마법사를 구해야 하니까. 한두 달 정도면 용병을 쓰면 그만이고.” “네. 그러면 됐네요.” 그렇게 마지막 멤버가 정해졌다. 아루아 레이븐. 알테미온 학파 소속의 6등급 정통 마법사. “그럼 이제 진짜 동료가 됐네요?” “잘 부탁한다.” 영입 성공. *** 이후로 우리는 짧게 대화를 나눴다. 팀이 만들어질 토대가 잡혔을 뿐, 아직 팀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나. “다 같이 모여 길드에 팀 등록도 하고, 분배 관련 얘기도 나눠 볼 참인데 언제가 좋겠나?” 사실상 미팅 단계에서 팀이 엎어지는 일도 허다하기에 되도록 일찍 만남을 갖고 싶었다. 새 멤버를 구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판단.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종 미팅은 일주일이 넘게 딜레이 됐다. “뱀파이어 수호자 관련 논문이 막바지 작업 중이라서요. 다음 주에는 학회에 등재되는 것까지 전부 끝날 거니, 그때쯤에 모였으면 좋겠네요.” 되도록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다음 달에 끝나는 거였다면, 내 제안을 들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여러모로 시기가 좋았다. 얘 정도 스펙이면 솔직히 우리보다 좋은 팀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었을 테니. “그럼 17일 날 만나는 거로 하지. 장소나 시간은 일행과 상의해 보고 우편을 보내겠다.” “그러면 고맙죠.” 그 대화를 끝으로 마탑에서 나온 나는 미샤와 곰아저씨를 순서대로 만났다. 그리고 장소와 시간을 정한 뒤 숙소로 돌아와 푹 쉬었다. 그다음 날은 도서관에 방문했고, 이후로는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무난한 일상이 이어졌다. “우와아아!! 그렇게 거대한 메이스는 처음 본다!!” 아이나르와 대련을 하며 (진)거대화 모드를 연습한다든가. “솜사탕도 사줬으면서 이것까지 사준다고? 비요른, 너는 무슨 주술사의 항아리라도 되는 것인가?” “사주는 게 아니라 투자……. 아니, 빌려주는 거다. 나중에 돈을 벌면 다 갚아야 한다.” 미샤까지 셋이서 컴멜비에 방문해 아이나르의 장비를 업그레이드한다든가. “원래 숙소는 어쩌고? 요리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곳은 얼마 없지 않나.” “됐다. 이제 전부 사 먹을 거당. 어차피 맨날 쟤가 다 뺏어먹지 않냥!!” 때마침 비게 된 옆방으로 미샤가 이사를 온다든가. “당신, 그동안 혼자서 미궁에 들어갔으면서 나를 속인 거야?” “여, 여보. 자, 잘못했소. 살려 주시오……!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셋이서 다 같이 방문한 곰아저씨네 가게에서 미샤가 눈치 없이 입을 놀렸다가 곰아저씨가 죽을 뻔한다든가. 그런 잔잔한 일상으로 이뤄진 날들이 흘렀다. 그리고……. [23 : 59] 15일 자정까지 1분을 남겨 둔 시각. 나는 편하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시간이 왔다. 156화 수사자 (2) 악령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 미샤와 아이나르는 알지 못하는 나만의 정보 수급처. ‘좋아, 해 보자.’ 푹신푹신해 보이는 이한수의 침대를 애써 외면하며 일단 컴퓨터부터 켰다. 이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12시간. 그 안에 반드시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으니까. ‘오르큘리스, 노아르크, 용살자.’ 예전에는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나의 생존과 밀접한 연관을 띄게 된 그것들. 도서관의 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단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최신 정보에 느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 [1~140,000GP] 오르큘리스에 관련된 모든 정보. 일단 거래소에 정보 구매글부터 올린 뒤에 채팅방을 열었다. 어쩌면 거래소보다 이쪽이 훨씬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 [대한독립만세] - 1명이 접속 중입니다. 이백호는 커뮤니티가 열리자마자 채팅방부터 들어간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도 로그아웃하면서 엄청 아쉬워했었지. 혹여나 다음에 내가 오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마치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후, 그래도 쉽게 볼 수 없는 얘란 말이지.’ 왠지 입맛이 썼다. 제대 날에 끌려온 불행의 아이콘이자, 10년 가까이 생존한 이 세계의 고인물. 이백호는 내게 큰 호의를 갖고 있지만……. 나는 녀석을 완전히 신용할 수 없다. [아…… 그게, 제가 사실 은둔 중이라 최신 정보는 좀 약하거든요?] 그때 녀석은 은둔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최신 정보에 약하다며 ‘원탁의 감시자’를 소개해 주었다. 지난번엔 스치듯 넘겼지만……. 혹시 얘가 오르큘리스나 지하 도시 노아르크의 일원이거나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터. ‘같은 한국 사람이니 뭐니 해 봤자, 이곳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일 뿐이란 말이지.’ 이내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백호와의 관계 유지는 실보다 득이 많다. 그러니까 녀석의 정체를 살살 파보기는 하되, 무리하지는 말고 오르큘리스의 관한 정보들이나 티나지 않게 떠보자. 그렇게 마우스를 더블 클릭한 순간이었다. “혀어어어엉!!!” 귀족가 저택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방. 제대로 둘러볼 새도 없이 이백호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아, 한수 형! 왜 이제야 왔어요!” “아니, 바로 온 건데…….”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진짜 빈말을 하는 건 아닌지, 왠지 눈빛도 살벌하고 머리도 쥐어짠 것처럼 부스스하다. 커뮤니티가 열리고서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대체 얘는 얼마나 정에 굶주려 있던 걸— “형, 아직 죽으면 안 돼요! 아직 아이돌 얘기도 못 했고, 정치인이나 군대 욕도 못 했잖아요. 그건 형밖에 같이 해 줄 수 없는데……! 던파 얘기도 해야 하는데!” 아, 어……. 그게 문제였던 거구나. 하긴 여기서 10년이나 살아남은 얘한테 보통 사람의 감성을 바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만해라. 안 죽으니까.” “넵. 그럼 무슨 얘기부터 할까요? 아, 러블러블 3집 정규 앨범? 역시 그게 제일 좋겠죠?” 아니, 러블러블이 누군데……. 연예계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왠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정색할 거 같거든. “……군대 얘기로 하자.” “크, 좋죠! 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형 공익 아니었어요?” “그래도 훈련소는 다녀왔어 인마.” “으음…….” 훈련병 시절의 이야기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걸까? 이백호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형, 역시 그냥 던파 얘기나 하는 게…….” “그거 안 해 봤어.” “네에에에에?!! 공익이라 하지 않으셨어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까무러치는 이백호. 다만 뒤늦게 정신이 들었을까? “아아! 죄송해요. 형.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알죠?” “……그래, 그런 거로 하자.” “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이백호는 어딘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볼을 긁적였다. 심리를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해서 막 기뻐했는데, 사실 공통점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은 거겠— “푸흣! 푸흐흐흐흐…….” “왜 웃냐?” “아니, 형. 그래도 뭔가 웃기지 않아요? 방금 우리가 나눴던 대화.”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재밌었는지. “잘은 설명할 수 없는데, 왠지 방금은 정말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기분이었어요.” 아, 그거. “……그거라면 나도 알 거 같네. 대충 어떤 느낌인지.” “그렇죠?” 이내 이백호가 피식 웃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억지로 주제를 만들고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눴다. 원래 무슨 일을 했냐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결국 어쩌다 보니 군대 이야기까지 오게 됐다. “훈련소도 웃기긴 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에 미친놈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니까요?” “아무래도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까. 다들 밖에 나가서는 평범해져.”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우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아마 돌아가면 정신 병원부터 가야 할걸요?” “이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뇨. 형은 생각 안 해 봤어요? 방해가 되면 죽이고, 의심 돼도 죽이고, 새로운 누구를 만나면 쟤가 날 해치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고. 사람 목숨이…… 그냥 게임 캐릭터처럼 느껴지고.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요?” 낄낄거리던 조금 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금방 적응할 거다. 이곳에 왔을 때처럼.” “……그렇겠죠?” “그래.” 이후로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백호였다. “아무튼, 그래서 형이 고마워요. 솔직히 요즘 굳이 돌아가야 하나 생각했거든요. 여기가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알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래.” “형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저한테는 동기부여가 돼요. 여기서 낄낄거리고 있으면 돌아가서도 그럴 수 있을 거 같다는 믿음이 생기거든요.” 믿음이라……. 그 단어에서 이유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직 뭐라 확신할 단계도 아닌 데다가, 괜히 건드려서 이득을 볼 게 없다는 판단. “아, 그보다 오르큘리스라는 얘들 좀 아냐?” 나는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그저 무거운 분위기를 끝내는 게 목적이라는 듯 별거 아니라는 투로. 툭 던지고서 이백호의 표정 변화에 집중했다.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다만……. “오르큘리스? 걔네가 왜 궁금한데요?” 이백호가 이유를 먼저 묻는다. 이전까지는 뭘 물어보든지 간에 그냥 술술 대답해 줬으면서. 점점 더 의문이 커진다. 대체 얘는 정체가 뭘까? *** “마지막 층에 가려면 창세보구가 필요하잖아. 혹시 걔네가 훔쳐 갔나 싶어서. 아, 너도 누가 훔쳐 갔다는 소식은 알지?” 잠깐의 정적도 없이 내가 준비해 온 대사를 치자, 이백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네. 알죠. 근데 그래서 물어보신 거구나……. 안심했어요.” “안심하다니?” “아, 별거 아니에요.” 이백호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형도 용케 거기까지 생각하셨네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네. 이런저런 방법을 써서 확인해 봤는데, 역시 아닌 거 같아요. 그도 그럴 게, 창세보구가 싹 다 털린 게 반년 정도 전이잖아요?” “싹 다 털리다니?” “아, 그건 모르셨구나. 여섯 종족 전부 다 털렸어요. 그것도 똑같은 날에.” 후, 장로가 다른 종족도 비슷한 상황일지 모른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구나. “현실적으로 말이 안 돼요. 다른 종족이면 몰라도 용인이나 인간들 것까지 훔치다니? 암만 걔네가 날고 기어도 그렇게는 못 해요. 뭐, 혹시 몰라서 조사해 보기는 했는데, 이렇다 할 단서는 안 나왔고요.” “그럼 너도 누가 훔쳐 갔는지 모른단 거네?” “네. 형도 혹시 흔적을 알게 되면 제발 귀띔 좀 해 주세요. 알다시피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역시 그것밖에 없잖아요?” 오르큘리스가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얘도 창세보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어쩌면 얘가 최종 흑막일 수도 있다는 망상도 잠시 했었건만. “형, 딴생각하는 거 아니죠? 경쟁자라던가 그런 거. 어차피 다섯 명까지는 같이 문을 열 수 있잖아요. 제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있던 생각을 면전에다 대고 할 수는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그냥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이상해서. 너도 못 찾은 흔적을 내가 어떻게 찾아?”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근데 왠지 형은 좀 특별하단 생각이 들어요.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나야말로 네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에이, 형도 10배짜리 깼다면서요? 10년쯤 지나면 저랑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사실상 저는 이제 더 강해질 구석이 거의 없어서…….” 강해질 여지가 없다는 말은 둘째치고. 아무렇지 않게 툭 뱉는 목소리에서 이백호의 정신력이 느껴졌다. 얘는 이미 창세보구를 찾는 데 10년은 더 걸릴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근데도 포기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다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집념일까. “맞다. 재밌는 얘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아마 형도 몰랐을 거예요. 게임에서는 없던 설정이라.” “뭔데?” “하수도 아래에 엄청 큰 지하 도시가 있어요. 노아르크라고.” “……노아르크?” 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해야 할까? 설마, 얘가 이 얘기를 먼저 꺼내 줄 줄이야. “네. 오르큘리스하니까 떠올라서요. 사실 여기가 걔네 본진이기도 하거든요. 형도 오르미 혁명단은 아시죠?” 조금 뜬금없는 명칭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오르미 혁명단이라니. “가끔 이벤트로 나오던 애들이잖아. 명성 좀만 얻으면 와서 같이 세상을 뒤집자고 말하던.” 참고로 그 이벤트를 승낙 시 항상 데드 엔딩이 따랐다. 숨겨진 조건이 있을까 봐 수없이 트라이해 봤지만, 게임 구조 자체의 문제인지라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노아르크도 그 새끼들이 만든 거예요. 반역에 실패하고 아래로 다 도망쳤거든요.” “신기하네. 아무튼 그래서?” “그게 전부예요. 목적이 서로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둘이 거기서 짝짜꿍하면서 협력하고 있다더라고요.” 노아르크와 오르큘리스의 협력 관계. 여기까지는 루드위그 대신관이 남긴 편지로 나도 알아낸 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야 용살자에 대한 정보를 의심받지 않고 물어볼 수 있을까. 이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형, 혹시나 해서 말해드리는 건데, 나중에 왕가나 길드에서 뭔가 의뢰가 내려와도, 이쪽 관련으로는 얼씬도 마세요.” “이유를 먼저 들어야 할 거 같은데.” “아, 이러면 또 말이 길어지는데…….” 이백호가 날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용살자라고 있는데 그 새끼가 이번에 완전히 뻘 짓을 했어요. 대신관을 납치해서 데리고 다니다 놓쳤나 봐요. 누가 우연히 편지를 주워서 신전에 갖다 준 거 같다나 뭐라나.” 나는 침을 꾹 삼키며 되물었다. “……대체 어쩌다가?”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기억을 잃어서 지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른다던데요?” 기억을 잃었다니? 설마, 덩굴 하나가 끊어진 거랑 연관이 있나? 좀 더 자세히 캐묻고 싶지만, 이백호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로 말을 끝마쳤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걔네가 먼저 협정을 어긴 거라 토벌군이 꾸려질 수도 있으니까 절대 참가하지 말란 거예요.” “…….” “걔네가 그 아래에서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아니거든요. 괜히 끼었다 형만 다쳐요. 알았죠? 아씨, 벌써 시간이 다 됐네. 형! 다음에 또 봐—” 이내 이백호의 음성이 짓뭉개지며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니미럴.” 로그아웃. 즉, 시간이 다 되어 튕겼다는 뜻이었다. *** 이백호가 사라진 후.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이 했던 한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기억을 잃어서 지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른다던데요?] 그때 싸이코패스년이 내게 먹였던 알약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근데 문제는 이게 팩트인지를 모르겠다. 오르큘리스 측에서 만들어 낸 소문을 듣고서 이백호가 그걸 내게 전해 줬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덩굴이 끊어진 것도 말이 되긴 하네.’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한다. 이 반지는 놈과의 악연을 끊어 주는 게 아니다. 단지 미뤄 줄 뿐. ‘결국,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는 거군.’ 편지를 누가 전해줬는지부터 추적을 해 온다면 언젠가 나에 대해 알아낼 것이다. 용살검 처분 문제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노아르크에 기억을 복원할 수단이 있다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일은 변함없겠지.’ 다시 컴퓨터에 앉아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정보 판매 글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면 만나서 적당한 가격에 구매했다. 굳이 용살자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도 가리지 않았다. 놈들 전체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정보를 모으고 또 모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03: 09] 원탁의 감시자가 오픈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부러 입장 가능 시간이 1분 남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비밀 채팅방에 입장했다. 그야 컨셉질의 묘미는 디테일에 있으니까. 끼이이익— 테이블에 올려진 수사자 가면을 뒤집어쓰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원탁이 있는 방까지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 이번에는 안 오려는 걸까요?” “이상한 일은 아닐 거 같구려. 그자 정도면 굳이 우리가 필요할 리 없으니.” “아니,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다들 그래요?” 중간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껴 있었다. 그때는 참석하지 않았던 회원인 듯한데…….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군.” “괴짜에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만나면 꼭 말조심하세요. 안 그러면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까.” 선배의 경험 어린 충고에 뉴비는 말했다. “하,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다들 놀리는 거죠? 물리력도 안 통하고 내 정체를 아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 “피시싯. 딱 하나, 살기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살기가 아무리 세 봤자 우리 정도 되면 충분히 방어가 되잖아요?” 뉴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따라서 나도 멈춘 걸음을 이어 가며 인기척을 냈다. 터벅. 크게 난 걸음 소리에 원탁에 앉은 회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나는 조용히 그들 뒤를 지나쳐 지난번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수사자 씨.” 광대 빼고는 내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다만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뉴비가 늅늅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어……. 지, 진짜 신입이 있기는 했네요? 하핫.” 나는 조용히 뉴비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간 열심히 연습한 살기를 개방했다. “……!!” 암, 뉴비가 왔으면 기선 제압은 해야지. 그게 여기 전통이잖아? 157화 수사자 (3) 고블린 가면을 쓴 뉴비. 엄밀히 말하자면 내 쪽이 뉴비고, 저쪽은 복귀 유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미안, 그래도 오랜만에 왔으면 뭐가 바뀐지는 알아야지? 아니면 선배들이 말해 준 패치 노트를 주의 깊게 듣던가. “그, 그만…….” 고블린이 힘겹게 입을 뗀 순간 나는 즉시 살기를 지웠다. 다만, 이대로 끝내면 나는 그냥 성격 나쁜 새끼로만 인식이 될 터. [겨우 이 정도인가.] 지난번에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오늘의 대사를 정했다. 컨셉질에서 중요한 건 일관성인 법이니까. “새로운 자가 왔기에 혹시나 했건만.” 이내 실망감을 담아 짧게 읊조린다. 새로운 자가 있기에 조금은 기대했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는 듯이. 그냥 괴롭힌 게 아니라 수준을 알아보려 한 것이라는 듯이. “재미없군.” 딱 그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고블린 가면에게서 시선을 뗀다. 그리고 광대를 비롯해 여우, 초승달, 사슴뿔을 한 명씩 쓱 훑는다. 오늘도 재미없는 얘기만 나오면 실망이 커질 거라는 의미를 담아. “피시싯, 걱정 마십시오. 수사자, 이번엔 당신도 흥미를 느낄 만한 걸 가져왔으니까.”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괴고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며. ‘광대, 얘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중요한 정보겠는데?’ 역시 이래서 다들 그렇게 아랫사람들을 굴리는 건가? 애써 무심한 척하던 때였다. 덜컥. 시간이 되자 원탁의 방문이 닫혔다. 이제 더 참가할 멤버는 없다는 뜻. 다만 본격적으로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고블린, 정신 차리시오.” “이 사람도 웃기네요. 맨날 그렇게 대단한 척하더니.” “피싯, 그때에 비하면 수사자 씨도 배려를 해 준 건데도 이런 꼴이라니! 하아! 당신 때문에 저까지 수치스러워지지 않습니까.” 광대의 말에 여우와 사슴뿔이 동의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때만큼은 아니었지.” “네. 이번에는 저도 버틸 수 있을 정도였어요.” 봐줘서 고맙다는 것처럼 내게 살짝 눈짓하는 둘을 보며 조금은 뜨끔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그게 최대 출력이었는데…….’ 자유롭게 껐다 킬 수 있는 살기는 이게 최대다. 칼스타인 가주가 현실에서 살기를 쓰는 걸 보고 수없이 연습했지만, 한번 진심 모드로 들어가면 내 마음대로 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알아서 배려라고 해석해 주니 잘된 일이겠다마는. 이래서 사람이 일단 있어 보여야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여하튼 슬슬 고블린도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얘는 다른 네 명에 비해 떨어지는 거 같네.’ 여우 가면만 봐도 그렇다. 얘는 내 진심 살기를 훨씬 오래 맞았는데도 나를 경계하며 조심할 뿐 저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럼 누구부터 할까요?” 이내 여우가 운을 떼며 광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는 건 마지막에 즐기는 거잖아요? 고블린 씨부터 하는 게 어떻습니까?” “크흠, 그러죠 뭐.” 이내 고블린이 조금 전 추태를 만회하겠다는 듯 목을 가다듬고 정보를 뱉었다. “다들 별의 대신관 루드위그가 실종됐던 건 알 겁니다.” “그래서요?” “범인은 오르큘리스였습니다. 납치를 해서 부리고 있었다더군요.” 설마, 이 새끼 신관인가? 그래서 알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원탁의 보석이 뿜어낸 빛은 적색이었다. “피싯, 아무래도 절반 이상이 아는 얘기인가 보군요?” 왠지 입맛이 씁쓸했다. 편지를 가져다준 지 아직 보름도 채 안 됐건만. 이백호도 그렇고, 이미 알 만한 자들은 대충 소식이라도 들은 상황인 거구—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저 두 명을 만족시키려면 보통 정보로는 안 되니까.” 응? “나는 몰랐던 얘기오. 어쩌면 이번 일로 신전이 왕가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구려.” 여우와 초승달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저 둘은 알지 못했던 정보인 듯하다. ‘그럼 적색불이 켜진 건 나랑 광대, 그리고 사슴뿔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쯧하고 혀를 찼다. 한데 여태 나만 지켜보고 있던 걸까? 광대가 내 눈치를 보며 일어서더니 다른 세 사람에게 짜증을 냈다. “저기, 이제 암묵적인 룰 같은 건 없는 겁니까? 이렇게 대놓고 나는 몰랐던 얘기였다고 하는 건 하지 않기로 했던 거 같은데.” “미안해요. 고블린이 왠지 안쓰러워서.”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근데 새로운 분도 있잖아요? 이제 다들 조심 좀 합시다. 예?” “그, 그러겠소.” 아, 원래 이런 룰이 있던 거구나. 하긴 자꾸 이런 식이면 누가 아는 정보가 누가 모르는 정보인지가 알려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간 이 부분이 내심 걸렸는데, 광대가 나서준 덕분에 잘 풀렸다. ‘근데 왠지 꼭 나 때문에 나선 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지난번 집회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다. [초승달 씨,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말한 거, 보통은 모를걸요?] 그때는 광대가 먼저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방금 정보가 자기 정체를 유추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한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다만,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광대는 신관 쪽 사람이거나, 지하 도시 쪽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겠네.’ 후자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광대가 신전에서 일하는 건 상상이 안 가거든. 뭐, 얘도 나처럼 일부러 컨셉질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지.’ 이내 나는 집회에 다시 집중하며 고블린이 이어서 공개한 정보를 경청했다. 앞의 정보에서 붉은빛이 뜬 게 충격이었을까? “별의 여신이 신탁을 내렸습니다.” 다음 정보에서는 바로 초록불이 떴다. 다만 이는 광대도 알지 못하는 얘기였을까? “누구한테 신탁을 내렸는지 정보를 사고 싶은데.” “그건 저도 몰라서…….” “피싯, 성기사도 모르는 얘기라니. 신전에서 정말 꽁꽁 감추고 있나 보군요?”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이런 실례. 근데 어차피 다 아는 얘긴데 뭐 하러 그렇게 예민하게 굽니까?” 그 말에 고블린 가면이 나를 슬쩍 바라봤고, 광대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었다. “그가 당신을 신경이나 쓸 거 같아요?” 불쾌하다는 듯 씩씩거릴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는 고블린 가면. 나는 무심하게 머릿속에 메모했다. [고블린 가면 = 성기사.] 여하튼 이후로도 집회는 계속 진행됐다. 고블린 다음 차례는 옆자리에 있던 여우였다. “다음 달에 천공 경매장에 더블 넘버스가 올라올 거예요.” 더블 넘버스. 그러니까 다시 말해, 11번부터 99번 사이의 넘버스 아이템이 경매에 나온다는 뜻. 근데 룰을 지키자는 광대의 말이 유효했을까? 정보가 뱉어지고서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지만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서로를 경쟁자처럼 바라보듯이. ‘후, 나도 얼른 천공 경매장을 뚫어야 하는데.’ 천공 경매장은 황도 카르논에 있다. 그리고 황도 카르논에 들어가려면, 지금보다 더 명성을 얻거나 탐험가 등급을 올려 공적치를 쌓아야만 한다. 적어도 1년은 족히 걸릴 일. ‘애초에 더블 넘버스를 살 돈도 없고. 이번에는 포기해야겠네.’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접었다. 정확히 무슨 아이템인지도 모를뿐더러, 어차피 그 정도 목돈이 생기면 백작가의 연회에서 얻은 ‘가르파스의 목걸이’부터 사용하는 게 옳을 터. “왕가에서 노아르크 토벌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우에 이어서 사슴뿔이 정보를 말했고, 초록불이 떴다. 토벌군이 꾸려질 거라더니, 이백호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조언대로 그쪽엔 얼씬도 말아야지. 다음은 초승달 차례였다. “오르큘리스의 일원 중 하나인 용살자의 장비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암시장에 올라왔소. 비록 용살검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뭔가 그에게 변고가 있었던 게 틀림없소.” 이번에도 한 번에 초록불이 켜졌다. 나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암시장에 올라왔다고? 나는 용살검 하나만 뺏어왔는데?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상황이 그려졌다. ‘백호가 한 말은 사실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용살자는 기억을 잃었다. 아마 그때 그 약에 의해서. 남은 장비를 싹 수거해서 암시장에 팔아 버린 건 그 약을 먹인 사람일 테고. ‘이제 드디어 광대 차례군.’ 고블린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니 어느덧 광대의 순서가 왔다. 앞에 밑밥을 깔아 둔 만큼 모인 시선에서 기대감이 전해져 왔다. “흐음, 수사자 씨 먼저 하시겠습니까?” “제법 자신 있나 보군.” “그럼요. 여기서도 다 아는 지루한 얘기를 하면 수사자 씨가 다음에 안 올 수도 있잖아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같잖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으니, 그냥 원래 순서대로 하라는 뜻.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수사자 씨가 들려줄 얘기가 더 즐거울 수도 있고!” 광대가 경망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기괴할 정도로 몸을 꺾으며 기지개를 켜며 툭 던졌다. “3년 안에 여섯 명까지 가능한 결속 마법이 만들어질 겁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뱉은 말에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원탁 중심으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불이군…….” 광대의 말이 진실이라는 뜻. 아니, 적어도 광대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친,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길드도, 왕가도, 클랜도……. 모든 게 바뀔 거예요.” 광대가 언급한 암묵적인 룰이고 뭐고, 제각기 경악을 토해내는 회원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이는 기본적인 팀 구성부터 시작해, 탐험가의 활동 반경이 훨씬 넓어진단 말일뿐더러……. ‘마지막 층에 여섯 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이는 게임 클리어 가능성이 몇 배는 상승한 거나 다름없다. 다섯 명과 여섯 명은 엄연히 다르니까. 10배 모드든, 100배 모드든 기존 게임에서는 불가능했던 조합과 시너지도 가능해진다는 뜻. 다만, 그 속에서 광대는 오직 나만을 응시했다. 다른 회원들의 반응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자, 어떻습니까?” 작은 구멍 속에 감춰진 눈이 나와 마주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도 명확했다. ‘이건 뭐,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컨셉질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솔직하게. “이건, 좀 흥미롭군.” 칭찬 스티커 하나 적립.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단 말이 있다. 뭐, 채찍질도 수백 대 맞으면 춤을 추기야 하겠지만……. 효율 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다. 진실로 사람을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은 미래.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던 보상이니까. “흠흠, 그럼 이제 수사자 씨 차례군요?” 칭찬 스티커를 받은 광대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모이는 시선. 광대가 앞에서 폭탄을 터뜨린 덕분에 다들 눈이 초롱초롱하다. ‘……고민되네.’ 사실 오늘 여기서 풀 만한 정보들은 미리 몇 가지 정도 준비를 해 뒀다. 하지만……. ‘정보의 질이 너무 올라갔단 말이지.’ 지난번에 내가 남겨 둔 말 덕분인지, 다들 밑천을 꺼내는 느낌이다. 광대의 경우는 아예 작정을 했고. 6인 결속 마법에 관한 정보라니? 신비주의 컨셉을 잡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결과물. ‘후, 잘된 일이기는 한데…….’ 한층 부담이 커진다. 대체 뭘 얘기해 줘야 하지? 물론, 저 하늘까지 올라간 기대감을 충족할 정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남들이 알면 나도 영향이 올 텐데.’ 반데몬처럼 알아도 쓸모가 없을 만한 정보를 고르는 게 문제다. 게다가 다들 바깥 얘기를 하는 와중에 미궁 얘기를 꺼내는 것도 뭔가 흐름상 이상할 터. ‘음, 역시 그게 제일 낫겠네.’ 이내 나는 이 정보가 불러올 파장을 면면이 계산해 본 뒤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 신탁에 대해서 궁금해했지.” 광대를 응시하며 말한다. 그나마 네가 날 재밌게 해 줬으니 보상을 주겠단 듯. “그 이유에 대해선 말할 생각이—” 내 의도를 곡해한 광대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읊조린다. “성물이 함께하는 신탁이었다.” “예?” “별의 여신이 내린 신탁으로 새로운 성물이 세상에 나왔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잠시 멍해졌던 광대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초록불이 켜진 보석을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성물인지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장난스럽던 평소 말투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래, 너한텐 성물이 뭔지가 중요한 거구나. 신탁을 누가 받았는지가 아니라.’ 나는 즐거이 웃으며 답했다. “또 재밌는 걸 가져온다면.” “피시싯, 그래도 또 오시겠다니 다행이군요.” 이내 광대가 평소처럼 경박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다음번에 왔을 때 더 재밌는 정보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걸. 그게 무엇일지는 상상도 안 되지만…….. “기대하지.” 그때가 온다면, 아마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잼이었다고. 158화 수사자 (4) 모임에서 성물을 거론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와 밀접한 정보라 조금 맘에 걸린단 부분만 빼면, 장점이 훨씬 많으니까. ‘일단 신비주의 컨셉질에 도움이 되지.’ 광대가 한껏 분위기를 끌어 올린 직후 아닌가. 느닷없이 미궁 관련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그럴듯해 보인다. 아까 네가 궁금해했던 정보였지? 자, 알려 줄게. 상이야. 이런 식으로 툭 뱉으면, 무슨 정보를 들려줄까 기대하던 회원들도 할 말이 없어지리란 판단. 실제로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실망은커녕 오히려 나를 향한 기대치가 더욱 커진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혹시 당신은 마스터가 어디 계신지도 알고 있나요?” 여우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재밌는 걸 가져오면 알려 주지 못할 건 없다는 뜻.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여우가 자그마한 손을 꽉 쥐었다. 언젠가 꼭 듣고야 말겠다고 결의라도 하듯이. ‘어차피 뭘 갖고 오든 노잼이라 할 건데…….’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금방 털어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만나는 비즈니스 관계 아닌가. 철저하게 내 이득만을 신경 쓰는 게 옳을 터. ‘그래도 일단 동기부여는 잘된 거 같네.’ 내가 판단한 두 번째 장점이었다. 원탁의 감시자는 구조상 완벽한 익명성 보장이 어렵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 자체가 그 정보에 접근 가능한 신분임을 의미하니까. ‘초승달은 요정 얘기를 많이 했고, 여우는 히든 피스보다는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최신 정보에 빠삭한 것처럼 보였지.’ 물론, 성기사라는 신분이 들통난 고블린과 달리 다른 가면들은 선을 지키는 듯했다. 하지만 재밌는 정보를 가져오기 위해선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이 컨셉을 잘만 이용하면 정체를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광대 얘는 정체가 좀 궁금하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는 좋은 기회였다. 내 정체가 궁금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 상황상 앞으로도 쭉 미궁에 관한 정보밖에 풀 수 없으니, 있어 보이는 척 할 수 있는 찬스를 놓쳐선 안 된다. 처음 몇 번이면 모를까. 계속 그런 식이면 게임 정보만 많이 알고 있지, 사실 좆밥인 거 아니냔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아무튼, 이쯤에서 세 번째 장점. [누구한테 신탁을 내렸는지 정보를 사고 싶은데.] 광대는 이미 신탁에 관해서 강한 흥미를 보였고, 어차피 알려질 정보라면 이렇게라도 쓰는 게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물론, 녀석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는 나도 확신하기 어렵다. 신전 쪽 사람들의 입이 얼마나 무거울지는 나도 모르니까. 하지만……. ‘오히려 얘를 통해서 확인할 수도 있겠지.’ 원탁의 감시자에서도 하이레벨로 취급받는 광대가 알아내지 못한다? 그땐 나도 안심을 할 수 있다. 그만큼 비밀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뜻일 테니. 그렇게 턱을 괸 자세를 유지한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차였다. “자, 그럼 한 바퀴를 더 돌아볼까요?” 여우의 주도하에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스타트는 고블린이었는데, 시작부터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적색불을 받고서 다음 시도에 초록불을 겨우 받아냈지만……. 회원들이 일제히 이의 제기를 한 것. “성자의 본명이라니.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군.”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이런 걸로 넘어가긴 어려울 걸세.” 결국 고블린은 회원들이 인정할 만큼 유익한 정보를 새로 꺼내야 했고, 어렵게 다음 순번으로 차례를 넘겼다. 아, 참고로 정보는 역시나 신전 관련 정보였다. ‘제2 성기사단장이라면 그때 신탁이 내렸을 때 크로비츠 옆에 있던 그 여자지? 설마 그 여자가 동성애자일 줄이야.’ 스캔들에 가까운 정보였지만, 의외로 회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충 생각들은 알 거 같았다. 증거만 잡는다면 제2 성기사단장의 약점을 쥘 수 있을 귀중한 정보라 판단한 거겠지. 동성애가 몹시 큰 죄악으로 구분되는 세상이니까. “자, 그럼 저네요.” 다음 차례였던 여우 가면은 천공 경매장에 나올 더블 넘버스 아이템이 무엇인지를 얘기했다. “정보 하나로 두 번을 쓰는군.” 사슴뿔이 불만을 털어놨지만, 이의 제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본인도 알기는 하는 것이다. 더블 넘버스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걸. 아무튼 이후로도 차례는 계속됐고, 회원들의 입에서 비밀스러운 정보들이 나왔다. 사슴뿔은 왕가 정치 관련 정보를, 초승달은 요정족의 후계자가 대죄를 저질러 직위가 박탈된 얘기를 거론했다. “흐음, 이제 제 차례군요?” 6인 결속 마법이라는 폭탄을 터뜨렸던 광대도 이번에는 조금 힘을 빼고 평범한 정보를 풀었다. 음, 평범하다기엔 조금 그런가? “사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가면은 아무거나 고른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이죠?” “마스터가 말하길, 처음 가면을 고를 때 자신의 운명과 가장 닮은 걸 고르게 된다고 하더군요.” 상당히 흥미로운 말이었다. 유용한 정보라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고블린 씨가 저한테 얕보이는 것도 그래서죠. 약한 주제에 적당히 약삭빠른 운명이란 뜻이니.” 광대의 노빠꾸식 예시의 표적이 된 고블린 가면이 부들거렸다. 한데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였을까? “고블린은 모르겠고, 클라운. 네가 재수 없는 이유는 알 것도 같군.” 사슴뿔이 광대에게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다만 광대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피시싯 소리를 내며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중요한 정보 같지는 않구려.” “네. 마스터가 그렇게 말했다니,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좀 더 도움이 될 얘기를 꺼내라.” 세 명의 반발에 광대가 혀를 찼다. “쯧, 기껏 운명에 관한 단서를 줬건만. 이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걸까요?” 그리 중얼거리면서 나를 쓱 바라보는 광대.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침묵은 언제나 중간은 가는 법이니. “그럼 수준에 맞는 얘기를 해줘야겠군요.” 이내 광대가 새롭게 정보를 꺼냈다. 탐험가 길드에 관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이의 제기 없이 통과가 됐다. 그렇게 다시 오게 된 나의 차례. 나는 미리 골라온 정보 중에 하나를 풀었다. 고급 정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고급이라 알아도 쓸모가 없을 만한 정보. “소생의 돌은 실존한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원탁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보석이 초록빛을 뿜어낸 그 순간. “…….” “…….” 정적이 찾아왔다. *** “저, 소생의 돌이 뭡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고블린이었다. 눈치 보며 묻는 그의 질문에 여우가 답했다.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아이템이에요. 아니, 그렇게 알려진 물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소생의 돌’은 게임 내에서도 소문으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있던 아이템이다. 그럴 만했다. 이걸 먹기 위해선 천운이 따라주는 환경에서 미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니까. 처음 먹은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고, 그다음엔 입수 조건을 알면서도 구하지 못했다. 근데 치트 버전을 깨고 온 얘들이 알 턱이 있나. “그, 그게 있으면 정말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오?” 이내 초승달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못내 감추지 못한 흥분이 물씬 피어났다. 혹시 살리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 오늘 유익한 정보를 여럿 들은 대가로 조금은 서비스를 해주었다. “소생의 돌이 있으면 사자부활이 가능하다.” 복잡한 요구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효과 자체는 밖에 알려진 그대로라 봐도 무방하다. 한데 이걸로 만족할 수 없었을까? “그럼 혹시 그 물건을 누가—” “그만.” 나는 초승달의 말을 차갑게 끊으며 읊조렸다. 더 듣고 싶다면 그럴 가치가 있는 정보를 들고 다시 오라는 뜻. 이내 초승달도 정신을 차렸다. “그럼 관심사가 무엇인지라도 알려 주시오. 나는 그 물건이 꼭 필요하오.” 음,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만사가 따분하고 무료한 괴짜이자, 재밌는 게 있을까 이런 집회에까지 참가한 수사자 가면. 과연, 그라면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였을까? 머지않아 적당한 대사가 하나 떠올랐다. “나도 모른다.” 수사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내가 뭐에 관심이 있는지.” 조금 중2병스러운 설정이지만, 그것만 제하면 나름 괜찮은 컨셉이다. 이런 식으로 둘러대면 알아서 광범위하게 쓸 만한 정보를 가져올뿐더러……. 뭘 말하든 노잼 판정을 내리기가 쉬워질 터.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구려. 당신 같은 자를 즐겁게 하려면.” 이내 초승달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눈에는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왠지 양심이 찔려서 턱을 괸 채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한데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을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며 침묵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흠흠!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다들 괜찮으면 한 바퀴 더 돌아볼까요?” 이내 여우가 사회자 역할을 자처하며 대화를 주도했고, 고블린이 손을 들었다. “저는 이쯤에서 빠지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을 만족시킬 만한 정보가 없는지라.” “그럼 나도 빠지지. 혹시 몰라 여럿 더 준비를 해왔지만, 오늘 수준을 보니 영 자신이 없군.” 고블린에 이어 사슴뿔도 불참을 선언하자 자연스레 집회가 마무리되는 거로 결정됐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하, 이번에도 또야?’ 다들 나가지 않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저번 집회에서도 그랬다. 다들 아닌 척하지만 내 평가를 궁금해한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지난번엔 자존심이 좀 상했을 거다. 그땐 겨우 이 정도냐면서 실망한 기색을 풀풀 풍겼으니까. ‘……그럼 이번엔 뭐라 하지?’ 잠시 고민해 보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가지각색의 가면들을 한 명씩 쓱 훑어본 뒤 피식 웃었다. 노력은 가상했다는 듯. “다음을 기대하지.” 덕분에 개꿀 정보 잘 얻고 갑니다. *** 수사자가 떠나간 원탁의 방. 고블린은 멍한 목소리로 참아왔던 물음을 토해냈다. “……저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건 분명하지.” 사슴뿔이 짧게 혀를 차며 답변했고, 고블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냥 같이 유추나 해보자고 해본 말이었는데. 왜 나는 항상 이런 취급이지? 이내 고블린은 혼자 생각하고 있던 바를 털어놨다. “……어쩌면 우리 쪽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피싯,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고블린?” “신탁에 대한 정보를 알던 건 본교단에서도 열 명이 채 안 됩니다. 한 명 한 명이 최소 대신관, 단장급의 인사였고요. 만약 저자가 그들 중 한 명이라면 전부 설명이—” “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광대가 대뜸 말을 끊더니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이러니까 당신이 맨날 얕보이는 겁니다. 왜 이렇게 생각이 단순해요? 저 남자가 추기경? 단장?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될 거 같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됩니다. 신탁이 내려온 지 아직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쯧, 한심하긴. 그중에 사람의 손발 중 하나가 있었으리란 생각은 못합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블린은 얼토당토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신전의 고위급 인사들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알고 있다. 절대 외인의 아래에 들어갈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잠깐만,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니까요.” “솔직히 말해 독불장군 같은 부류일 줄 알았소.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라…….” “어쩌면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거물과 인연이 닿은 걸지도 모르겠군.” 이쯤 되니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정말로 교단의 핵심부까지 그 사내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아직까진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블린은 이어진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남는 시간 동안 같이 머리나 맞대보죠. 정체까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좋은 생각이구려. 어쩌면 그가 뭐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오.” 여우의 제안으로 집단 지성을 통한 추리가 시작됐다. 목표는 수사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일단 저부터 할게요. 그 사람, 더블 넘버스에 관심도 갖지 않았어요. 아마 그런 물건은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하단 거겠죠.” “노아르크 토벌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듣고서 미동도 않더군. 왕가의 중추부에도 눈과 귀가 있는 게 분명하다.” “피시싯,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수천 명은 죽여 봤을 겁니다. 자기가 뭐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다니, 그렇게까지 망가진 인간은 저도 몇 명 못 봤다고요?” 한 명씩 관찰한 점을 얘기할 때마다,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화룡점정은 초승달의 추측이었고. “어쩌면…… 그자는 우리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크레센트?” “소생의 돌 얘기를 처음 꺼낼 때,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소. 마치 내 사연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고블린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비약 아닌가? ‘우연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데……. 애초에 앉은 자리도 딱 정면 쪽이었잖아?’ 물론, 속으로만 한 생각이었다. 초승달의 말을 다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흐음, 갑자기 그가 왜 소생의 돌 얘기를 꺼냈는지가 조금 의문이었는데, 그렇다면 설명이 되는군요.” 광대는 아예 납득을 해버렸고, 다른 이들 또한 가능성만큼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슬슬 고블린도 혼란스러웠다. 똑똑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같은 소리를 해대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아!” 그때 여우가 손뼉을 치며 크게 외쳤다. “가면! 가면이 있잖아요.” “가면…… 말이오?” “네. 그 가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광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어떤 성향인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수사자라…….” 이내 회원들은 하나씩 차례대로 수사자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얘기했다. “음, 저는 사자 하면 태어나자마자 절벽에 새끼를 떨어뜨린다던 얘기가 먼저 떠오르네요.” “살아남는 놈만 키운다는 그것 말이오? 그거 전부 루머요. 뭐, 그 정도로 강해지려면 절벽에 떨어지는 것보다 혹독한 일을 겪었을 테지만.” “피싯, 백수의 왕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군요. 혹시 수사자 씨가 언젠가 왕이 되리란 의미일까요?” “흐음, 확실히 누구 밑에서 움직일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소.” “동양권에서 사자가 제왕의 상징으로 쓰였단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제왕의 상징이라니! 이건 좀 흥미롭군요!” 고블린은 그냥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자는 일부다처제라던데……. 그냥 여복이 많을 팔자라는 뜻일 수도 있지 않나?’ 물론, 이번에도 속으로만 한 생각이었다. 말해 봤자 한심하게만 쳐다볼 게 뻔하니까. 159화 협상 (1) 17일 저녁. 새롭게 만들어진 팀의 전원이 모임을 가졌다. 참고로 모임 장소는 얼마 전에 오픈한 3층짜리 주점. 원래는 곰아저씨네 가게에서 만나려 했는데 곰아저씨가 거절했다. 그것도 아주 단칼에. [흠, 우리 가게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기 좋지 않은데.] [괜찮다. 어차피 이번엔 탐사 계획보다는 분배 관련해서 주로 대화를 나눌—.] [그만, 아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하지.] 거, 매출이라도 좀 올려 줄까 했건만. 질색하면서까지 싫다고 하는 건 무슨 유부남의 습성 같은 건가? 이 아저씨도 참 웃기단 말이지. “제가 마지막이네요?” 이후 레이븐이 도착하며 전원이 모였다. “미안할 것 없으니 어서 앉아라.” “정시에 왔는데 제가 왜 미안해해요?” 어, 그건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지? 아, 기선 제압 때문에 그러는 건가? 일단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니까? ‘얘도 참 이런 데서 야무지단 말이야.’ 어쩌면 일부러 정시에 온 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직 도장을 찍기 전 아닌가. “그럼 간략하게 서로 소개나 하지.” 이후 요리 몇 가지와 술을 주문한 뒤, 얼굴을 트는 시간을 가졌다. 시작은 아이나르였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다! 만나서 반갑다!” “저기, 아이나르? 너무 짧은 거 같은뎅…….” “더, 더 해야 하나……? 미안하다. 이런 자리는 내가 처음이라…….” 며칠 사이 부쩍 친해진 미샤의 지적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안해하는 아이나르. 다만 그 모습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아이나르는 팀 전원과 안면이 있거든. 레이븐과는 핏빛성채를 함께했고, 곰아저씨는 며칠 전에 가게에 방문했다가 안면을 텄었다. “아이나르 씨는… 정말 여전하시네요.” “칭찬 고맙다. 마법사, 너도 여전한 거 같다.” “…….” 여하튼 결국 내가 아이나르를 대신해서 소개를 했다. 얘가 몇 등급 탐험가이고, 팀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등등. “그럼 검사가 둘인 셈이군?” 내 브리핑이 끝나자 곰아저씨가 짧게 감상을 뱉었고, 내가 이에 대해 답하려던 찰나. 아이나르가 오류를 지적하듯 끼어들었다. “우락부라크, 나는 검사가 아니라 전사다.” “내 이름은 우리크프리트……. 아니, 그때도 말했지만, 제발 아브만이라고 불러 주면 안 되나?” “……노력은 해 보겠다. 발음이 어려워서.” “발음이, 어렵다고?” “그런데 문제라도 있나?” 곰아저씨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냥 한숨을 푹 내쉬는 거로 대화를 끝마쳤다. 바바리안과 대화하는 법을 슬슬 깨달은 모양. 대화를 안 하는 게 베스트다. “그쪽이랑만 초면이군. 얘기는 비요른에게 많이 들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다.” “아루아 레이븐이에요. 인도자시라죠?” “아, 나는 미샤 칼스타인이당.” 이후 남은 세 사람은 알아서 인사를 나누며 프로답게 각자의 역할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걸로 일단 첫 미팅의 절반은 끝난 셈. 때마침 주문했던 요리가 나온 터라, 그 다음은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기, 제법 깔끔하고 음식도 맛이 있네요.” “우리 아내가 이만큼만 요리를 했어도…….” “우리크프리트 씨는 결혼을 하셨나요?” “아, 그걸 말하지 않았군. 이제 3년이 됐다.” “비요른, 이거 오징어라는데 한번 먹어 볼래? 식감이 엄청 특이하당.” 전반적인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식사가 얼추 끝나 가며 미궁에 관한 화제가 나오기 전까진. “그나저나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비요른, 전리품 분배는 어떻게 할 건가?” 돈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다들 눈빛을 달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나르만 빼고. “그냥 비요른이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이나르 씨야 그렇겠죠. 근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서요.” 계산에 빠른 마법사와 지켜야 할 가정이 있는 곰아저씨. 둘 다 사석에서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때가 오자 노골적으로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샤는 그렇다 쳐도, 아이나르까지 같은 비율을 받는 건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우리 중에 가장 뒤떨어지지 않나.” “우락부라크…! 너, 넌 나를 그렇게 보고 있던 거냐! 미, 믿었는데!!! 나는 널 소중한 동료라고 생각했—!!!” “조용히 해랑. 비요른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착하지?” “으으……!” 아이나르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옆에 있던 미샤가 다행히 제때 입을 막아 조용히 시켰다. 다만 저렇게 슬퍼하니 곰아저씨라도 조금 입을 열기 힘들어졌을까. “크흠…….” 곰아저씨가 헛기침을 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때, 레이븐이 자연스럽게 바통을 넘겨받고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저는 아이나르 씨든, 칼스타인 씨든 크게 상관 안 해요. 전 일단 마법사잖아요?” “……말해 봐라.” “제가 있으면 정수를 시험관에 담아서 팔 수 있어요. ‘상위 왜곡’도 익혔으니까 혹시 부산물이 목적이라 해도 훨씬 더 쉽게 얻을 수 있겠죠.” “분배를 올려 달라는 뜻인가?” “네. 30%는 받아야겠어요.” 후, 시작부터 빡세구나. 드왈키는 균등 분배도 하하호호 웃으면서 받아들였건만. “……30%는 너무 많다.” “많기는요. 선배들은 다들 그만큼 받는다고 하던데.” 거, 어디서 호구를 잡으려고. 확실히 미궁에서 마법사는 대우를 받는다. 서로가 동급이라는 가정하에. “그 선배란 자들, 아무래도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팀에 들어갔나 보군.” “음, 저는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레이븐은 6등급 마법사이니, 5등급 탐험가로 대우하는 게 마땅하다. 나와 미샤가 6등급, 아이나르가 7등급이란 점을 고려하면 명백히 더 윗등급인 셈. 하지만……. “그거야 탐사를 해 보면 알겠지.” 나는 자신 있다. 등급이야 어쨌든, 우리가 일방적으로 캐리를 받는 구도는 절대 나오지 않을 터.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팀에 들어오려 한 것 아닌가?” “음, 그건 그렇긴 하죠.” 의외로 레이븐은 쉽게 인정했다. 하지만 이는 전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초석이었을까. “그래도 칼스타인 씨나 아이나르 씨는 우리 셋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게 맞잖아요?” “금방 한몫을 하게 될 거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 년……. 아니, 빠르면 몇 달 안에 한몫을 하게 되겠죠. 그런데 왜 제가 그때까지 손해를 봐야 하죠?” 레이븐은 훗날 두 명이 당당히 제 몫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다시 비율을 정하자고 제안을 했고, 나는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비율은 똑같이 20%로 한다. 대신 마법으로 획득한 특수 전리품은 40%를 주지.” “좋아요.” 균등 분배에 마법 전리품 한정 비율 보너스. 그렇게 결국 레이븐은 5인 팀에 속한 마법사가 통상적으로 받는 조건을 챙겨갔다. 일단 한 명은 끝난 셈. 이제 남은 건 곰아저씨였다. “아이나르에게서 5%를 떼서 네게 주겠다.” 사실 인도자라는 걸 생각하면 10%를 더 줘도 부족하지 않지만……. “아직 첫 탐사도 안 했으니까. 일단은 그걸로 만족하지.” 곰아저씨는 순순히 납득했다. 하긴 당당히 주장하기는 자기도 좀 멋쩍겠지. 인도자긴 하지만 탐색 능력이 제로 아닌가. “그럼 이 문제는 일단락됐군.” 그렇게 최종 분배 비율이 정해졌다. 나 20%. 미샤 20% 아이나르 15% 레이븐 20%(특수 전리품 40%) 곰아저씨 25% 아, 참고로 이는 일반 전리품 한정이다. 약탈자를 해치우거나 하는 식으로 얻은 것들은 균등하게 분배하기로 합의를 했다. ‘후, 아까워 죽겠네.’ 탐험가들이 왜 승급에 그렇게까지 목을 매는지 알 거 같다. 얼른 5등급을 찍던가 해야지. 만약 우리 셋 다 5등급이었으면 쟤내가 분배 갖고 얘기를 꺼낼 일도 없었을 텐데. ‘……뭐, 이 정도면 예상했던 범위 안이네.’ 술 한 모금 들이켜며 아쉬움을 지웠다. 내심 둘이서 더 크게 욕심을 부리는 경우까지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들 선을 지켜 줬지 않나. 내가 리더인 게 아니라, 다른 팀이었으면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이득을 챙기려 들었을 터. ‘일단 가장 중요한 고비는 넘은 셈인가.’ 분배비 협상이 끝난 이상, 팀 창설은 확정이 된 거나 다름없다. 이후로도 논의할 사안들은 수없이 남아 있긴 하겠다마는. “맞다, 팀은요? 팀은 언제 등록할 거예요?” “내일 할 거다.” “그럼 저는 못 가겠네요. 이럴 거 같아서 위임장을 써 왔어요. 저 빼고 가서 해 주세요.” “……그러지.” 간단한 행정 업무부터 시작해 온갖 사안들을 다 함께 논의해야 했다. “팀 공금은 따로 거둘 거예요? 아니면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거둬서?” “매달 일정 금액씩 거두는 식으로 할 거다.” “얼마나요?” 팀 공금을 얼마로 하느냐. 만약 공금이 부족할 땐 어떻게 충당할 것이냐. 균열에 들어가거나 미궁에서 신비한 보물을 발견하거나 했을 때도 지금의 분배비를 쓰느냐. 개인의 능력으로 얻은 걸 인정하느냐 마느냐. 인센티브는 있느냐 등등등등등. ‘팀 반푼이 때는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나와 레이븐만 둘이서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드르르르르렁-!! 아이나르는 아예 목을 꺾은 채 졸았고. 곰아저씨는 오래간만에 얻은 자유를 즐기듯 혼자서 술만 들이켰으며, 미샤는 수첩을 펼쳐 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메모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단순히 취미다. 요리를 못하니 왠지 손이 자꾸 근질거린다던가? 며칠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뭘 그린 거냐?” “아, 아무것도 아니당.” “오크?” “푸후훗!! 그래, 오크당. 오크. 크크큭.” 뭔가 기분 나쁜 반응이었지만, 자세히 되물을 새도 없이 레이븐이 나를 불렀다. “저기 얀델 씨, 아직 얘기 중인데…….” 아, 그랬지. 몇 시간은 족히 머리를 썼더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중요한 논제면 모르겠는데, 하도 잡다한 걸 시시콜콜 정하고 있자니 더 그렇다. 이내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하지.” “네? 그치만 아직 정리해 온 게 남았는데.” “……정리?” “팀을 만들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요. 오기 전에 미리 정리를 해 뒀거든요.”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자 레이븐은 서른한 개의 항목이 남았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한 게 반도 안 된다고?’ 남은 논제들을 생각하니 왠지 벌써 심심해서 죽고 싶어질 지경이었지만, 얘 성격상 일단 해 두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부분들일 터. “그래도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만나서 하기로 하지.” “그래요.” 이틀 뒤로 약속을 잡고서 자리를 파했다. 왠지 몸도 정신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사실 마법사들과 비슷한 성격 유형이리라 생각했건만. ‘……진짜를 보니 확실히 알겠네.’ 바바리안을 골라서 다행이다. *** 첫 모임이 있던 다음 날 아침. 넷이 모여서 탐험가 길드에 방문했다. 그리고 어제 받은 위임장까지 제출하며 정식으로 팀 등록을 끝마쳤다. “팀 이름이 비요른이라니.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냐?” 아이나르가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냥 관례대로 했을 뿐이다. 팀 반푼이의 정식 이름도 그냥 ‘무라드’였고. 원래 대부분 그냥 리더의 성이나 이름을 쓴다. “나중에 적당한 게 생각나면 바꾸면 되니, 너무 실망하지 마라.” “호, 혹시 나도 생각해 봐도 되나?” “안 될 건 없지.” “정말인가! 열심히 생각해 보겠다!!” 저래봤자 몇 시간이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까먹을 게 분명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팀 이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브만, 너는 어쩔 거냐?” “가게로 돌아가 봐야 한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 “그렇군.” 팀 창설이 끝나자마자 곰아저씨가 떠났고, 우리는 간단하게 밖에서 외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야 이제 셋 다 여기에 살거든. 내가 201호고, 아이나르가 202호. 미샤가 바로 건너편인 207호다. “어, 비요른. 너 우편통에 뭔가 들어 있는데?” “우편?” 미샤의 말에 안을 확인해 보니 편지가 들어 있었다. 레아틀라스교의 인장이 찍힌 편지. ‘설마 용인족이랑 약속이 잡힌 건가?’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내용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그가 당신을 부를 거요.] 열어 보니 오직 딱 한 문장이 적혀 있다. ‘제2 성기사단장 파알 크로비츠’라는 발신인의 수식어가 내용보다 더 길 정도. ‘뭐지?’ 고개를 갸웃하던 차, 편지가 화르륵 타오르며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당부한 대로 보안에 신경 써 준 건 고맙긴 한데……. 이래서야 나도 알아듣기가 어렵지 않은가. “…….” 일단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파알 크로비츠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용인족의 수장, 태고룡을 말하는 거겠지. 다만 한 가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나를 부를 거라니?’ 차라리 접선 시간과 장소만 적어 뒀다면 알기 쉬웠을 거다. 최대한 비밀스럽게 약속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 건 나였으니까. ‘대체 어떻게 부른단 거지? 다시 찾아와서 약속을 잡는단 건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침대에 풀썩 눕던 때였다. 나무로 된 방바닥에 푸른빛의 마법진이 그려진 것은. “응?” 이게 뭔가 판단할 새도 없이, 마법진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무슨 이세계 소환도 아니고.’ 나는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장소는 거대한 기둥으로 받쳐진,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 ‘용의 신전이군.’ 나는 빠르게 현 상황을 정리했다. ‘공간이동 계열의 용언인 건가? 편지가 매개체 역할을 한 거고?’ 정황은 대충 파악이 됐다.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식이면 보안 유지가 한층 더 수월할 테니. “놀라지 않는군.” 이내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피부에 돋아난 비늘과 파충류를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 용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사내가 옥좌에 앉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고로 옥좌 뒤는 안개로 둘러싸인 상태였는데, 그 너머에서 수십 개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설마 전부 용인들인 건가? 그럼 대체 몇 명을 불러 모은 거야? ‘……거, 눈깔들 하고는.’ 살기와는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전해진다. 천적. 다시 말해 결코 이길 수 없는 또 다른 종을 맨몸으로 마주한 듯한 기분. ‘드래곤 피어’다. 용인이라면 패시브로 장착하고 있는 그것. ‘그거를 나한테 쓴다라…….’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야 얘네들 의도가 뭔지 알 거 같거든. “알고 있나? 이곳에 방문한 바바리안은 그대가 처음이 아니라네. 하지만…….” “…….” “살아 돌아간다면, 자네가 처음이 되겠군.” 일종의 기선 제압이다. 얘네 종족 성격상 정당한 보상 없이 은인에게 용살검을 빼앗아 가는 일은 없을 터이나, 그래도 기를 죽여 놓을 필요는 있다고 판단했겠지. 바바리안인 내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 올지 모르니까. “…….” 드래곤 피어가 한층 강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땀이 조금 난다고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경우 없이 자라진 못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기싸움을 좋아하는 거지?’ 덕분에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통성명도 하기 전에 이것부터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서 알려 주는 편이 시간 아끼는 길일 것이다. 드래곤 피어를 이용한 기선 제압이든 뭐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전부 헛수고라는 걸. 160화 협상 (2) 기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으면 이유라도 좀 물어보는 게 매너 아닌가도 싶지만……. 용아저씨는 내가 함성을 내지른 이후로 그냥 입을 꾹 다물고서 무게를 잡고 있을 뿐이다. ‘거, 사람 무안해지게.’ 슬슬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른 건가?” 갈색 머리의 용아저씨가 드래곤피어를 지우며 묻는다. 파충류과 눈이라 감정은 읽기 어렵지만, 일단 순수한 호기심인 듯하다. 그래, 아저씨도 궁금하기는 했구나. 나는 고민 없이 답변을 들려줬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문제라도 있나?”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을 때, 모든 행동에 붙일 수 있는 바바리안만의 치트키. 용아저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 문제는 없네. 듣던 대로 바바리안은 참 흥미로운 종족이로군.” 위엄 넘치는 중후한 목소리. 이내 그가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솨아아아아아. 돌풍이 피어나며 싹 가시는 안개. 그 너머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야 아무도 없었으니까. 안광이 번들거리기에 용인족이 바글바글한 줄 알았는데. 내가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보자 그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미리 말하겠네마는. 나는 이런 유치한 짓에 반대하는 쪽이었네.” “반대라니?” “아, 그게 첫 대면에 기를 팍 죽여놔야 협상이 쉽다지 뭔가?” 쉽게 말해, 안광은 전부 환영이었다는 뜻. 사실 차분히 생각했다면 미리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가 크로비츠에게 가장 당부했던 게 ‘비밀 유지’였을뿐더러……. 용인족은 개체 수가 극도로 적은 종족이니까. 상식적으로 나 하나 꼽주자고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일 리가 없다. “아무튼 그대에겐 미안하게 됐네. 쯧, 그깟 돈 몇 푼이 아깝다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도리를 잊고서 은인에게 그런 식으로 굴어선 안 된다고 내 그렇게 말했건만.” 목소리는 여전히 중후했으나, 말투나 풍기는 분위기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 아까는 연기고 이게 본 모습인 건가? 이런 식이면 제법 말이 잘 통할 거 같은데. 그래도 방심하지 말자. 이 모습조차 연기일 수도 있으니. “일단 확인부터 하지.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네가 용인족의 족장인가?” “족장이라……. 일단 그대들 식으로 말하면 그렇겠지. 자리를 계승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얼마 안 됐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용살자가 태고룡을 살해 후 저주를 받은 게 30년도 더 전이라고 들었는데……. “시간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 아니겠는가.” 아, 용인족에 수명이 길다는 설정이 있었지. 사실상 게임에서 유의미한 정보는 아니었기에 잠시 까먹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니니까 슬슬 본론으로. “족장.” “편히 피르세아라이도르무스라고 부르게.” 그걸 편히 부르는 게 가능은 한가? 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할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용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가명을 밝혔다. “농담이었네. 그냥 ‘라피르’라고 불러주게. 대외적으로 쓰는 내 두 번째 이름일세.” 참고로 두 번째 이름은 용인들만의 문화다. 진명이 워낙 길다 보니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편의상 두 번째 이름이 필요해졌다. 아마 ‘리갈 바고스’도 본명은 훨씬 길겠지. ‘후, 그래도 다행이네.’ 나는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단 공적인 자리 아닌가. 만약 저 긴 본명을 다 불러주기를 요청했다면 굉장히 귀찮았을 것이다. “라피르. 너도 길면 얀델이든 비요른이든 발음이 편한 쪽으로 불러라.” “얀델이란 어감이 더 마음에 드는군.” 아무튼, 이제 통성명은 끝났고. 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차, 용아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용검부터 볼 수 있겠나? 레아틀라스교를 통해 전말을 듣기는 했네마는,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네.” 왠지 듣자마자 쓴웃음이 나왔다. 조금 부드럽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상 내용은 너무도 노골적이었으니까. ‘면전에 대고 못 믿겠다라…….’ 뭐,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오르큘리스의 일원이자 수억 스톤 상당의 현상금이 걸린 거물 범죄자 아닌가. 4층 탐험가인 내가 놈을 두드려 패고 검을 뺏어왔다는 설명을 순순히 납득하기 어려웠겠지. 푸욱!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가 없기에 배낭에서 용살검을 꺼내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오, 따가워.’ 3초 정도 쥐었을 뿐인데, 벌써 벗겨진 살가죽. 이내 용아저씨가 옥좌에서 내려오더니 검을 뽑아내서 쥐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말이었군.” 그 짧은 한 마디에서 복잡한 감정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사뭇 비장하면서도 쓸쓸해 보인다 해야 하나? 하기야 이 검에 얽힌 스토리를 생각하면 감상이 남다를 터. 그렇게 한참 동안 검을 쥐고 가만히 서 있던 용아저씨가 검을 도로 꽂아 넣고서 질문을 던졌다. “……그 녀석은 어땠던가? 가장 최근에 그 녀석과 만나지 않았나.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네.” 나는 불리할 수 있는 부분들만 빼고서 그날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얘기했다. “그렇군. 그 녀석이 결국 그렇게까지……. 말해 줘서 고맙네. 그대의 부탁대로 용검이 돌아왔단 얘기는 비밀로 부치겠네.” “그자와 친했나?” 내 물음에 용아저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은…… 내 동생이라네.” “뭐?” “그래서…… 내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지.” 좀 더 대화를 나누며 용살자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었으나, 용아저씨는 언급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아직 하지 않았군.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 검을 돌려줘서 고맙네. 그대가 요구하는 보상과 별개로, 우리는 그대를 은인으로 생각할 걸세.” 빈말로 하는 게 아니란 건 눈빛에서 느껴졌다. 음, 파충류 특유의 눈이라 헷갈리지만 아무튼. 오직 보상만을 생각하고서 이번 결정을 내렸던 나로서는 제법 민망한 상황이지만……. ‘굳이 은인 대접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구체적으로 은인 대접에 어떤 혜택이 있는지는 이따가 따로 물어보기로 하고. 나는 현재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사실상 이번 만남의 핵심이기도 한 이것. 그간 많은 고민을 했다. 6단계 소재로 만들어진 무기이자, 용인들에게 성물과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검을 돌려주고 무엇을 요구하느냐. “무엇을 줄 수 있지?” 일단 물어나 보았다. 혹시 내 생각을 바꿀 만한 제안이 있을지도 모른단 판단. 용아저씨도 몇 가지 준비를 해 왔는지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재물일세.” 돈.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남아 있던 세 가지의 후보 중 하나니까. 5단계 무기들도 전부 억 단위에서 시작한다는 걸 고려하면, 필시 온몸을 상위 장비로 두를 수 있을 만한 금액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돈은 필요 없다.” 대답에 용아저씨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모양. “흐음, 아마 그대가 얼마인지 몰라서 그러는 듯한—”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돈이 아니다.” 금액이 얼마든지 간에 중요치 않다. 어차피 용검보다는 값비싸지 않을 테니까. 다른 걸 받는 게 낫지. 그런 내 의지를 느꼈는지, 용아저씨가 더 말하지 않고 다음 보상안을 꺼냈다. “두 번째는, 동료라네.” “동료?” “크로비츠 경에게서 그대가 새 팀을 꾸리는 중이라 들었네.” “본론만.” “일족 중 한 명을 2년간 붙여주겠네.” 정말이지 생각조차 못 한 보상이었다. 보상으로 동료를 주겠다니? 역시 본인 가치를 참 잘 알고 있는 종족이란 생각이 든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하네.’ 용살자와의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듯. 용언은 그 어떤 마법사도 신관도 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만든다. 또한 용인족인 기본 스탯이 높아 근접전에 알맞은 데다가, 특별한 몇몇은 인간만이 가능한 마법을 쓸 수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대답은 변함없었다. “동료는 이미 모두 구했다.” 역시 2년 있다가 떠날 동료를 보상으로 받는 건 내키지 않는다. 내가 최종으로 원하는 건 하나로 결속된 팀이니까. “굉장히 어여쁜 아이네만.” 음, 그래서 어쩌란 거지? 그런 심정을 담아 빤히 바라보자 용아저씨가 겸연쩍게 헛기침을 뱉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제안이군.” “말해 봐라.” “내년에 탄생할 아크제 무구를 주겠네.” 그래, 역시 마지막은 이거구나. 내심 예상한 바였다. 아크라는 금속 하면 용인일 정도로, 그 둘의 관계는 밀접하니까. 아크는 용인만이 다룰 수가 있다. ‘의식을 통해 매년 하나씩 만들 수 있다는 설정이었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보상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었다. 쓰지 못할 아크제 장검을 주고 쓸 수 있는 아크제 무구를 얻는다. 그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그냥 돈으로 받았겠지.’ 이번에도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것도 별로인 거 같다.” 설마 이 제안도 거절당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용아저씨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뭘 제시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는 듯한데……. 따라서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그런 건 됐고, 문신이나 하나 해줘라.”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뱉은 말. “문신?” 고개를 갸웃하던 용아저씨의 눈동자가 가로로 확장된다. 뒤늦게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를 깨달은 모양. “설마, 용의 축복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아저씨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얀델, 대체 그걸 어디에서 들었지?” 후, 이제부터가 진짜구나. *** 용의 축복. 용언과 더불어 용인족을 사기캐 반열로 올려 주는 바로 그것. “장로들 말이 맞았군. 그대들은 너무 욕심이 과해.” 용아저씨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리고 아까 전에 비활성화한 드래곤 피어를 다시금 뿜어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거늘.”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과연 이게 진심 모드라는 건가? 유치한 짓에 반대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아까와는 강도부터가 다르다.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네.’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다. 살 떨릴 정도로 무섭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조상신이 함께하는 한, 바바리안은 기싸움에서 지지 않는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함성을 토해내며 굳은 목을 풀자, 용아저씨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무슨…….” “뭐 문제라도 있나?” “……바바리안들은 전부 자네 같은가?” 어느새 거둬진 드래곤 피어. 그래, 진심 모드를 쓰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짜증 나서 그런 건 아닌 거구나. “후우…….” 용아저씨가 정색한 표정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크제 무구에 보상금도 두둑이 얹어주겠네. 그건 어떤가?” 채찍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 여겼는지, 새롭게 건네진 당근. 참고로 나는 당근을 싫어한다. “거절하겠다!” “아니, 그대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건 자네에게도 독일세. 자네 동족들이 알면 배신자 취급을 받을 걸세.” 이미 신탁도 받았구만 새삼스레 뭘. “그러니 흥분은 좀 가라앉히—” “라피르! 너는 용의 후손이지 않냐! 쩨쩨하게 굴지 말고 해 줘라! 은인이라면서 이것도 못 해주는 거냐? 정말 치사하다!” 협상 테이블에서 무지성 ‘해줘!’ 전술에 당한 건 처음인지 멍하니 나를 바라만 보는 용아저씨. 나는 그 타이밍을 노려 아킬레스건을 찔렀다. “별의 여신이 말했다. 리갈 바고스와 내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강한 악연이 이어져 있다고.” “……별의 여신이? 그게 사실인가?”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네 동생에게 또다시 동료를 잃지 않으려면.” 내가 생각해도 참 비열한 말이었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원래 협상이란 지저분한 카드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놈이 승리하는 법이다. 애초에 따져 보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라피르, 아까 네 힘으로는 동생을 막을 수 없었다고 했지? 내게 투자해라. 네가 하지 못한 일을 내가 대신 해주겠다.” 나는 그 대사를 끝으로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용아저씨는 다시 생각 모드로 접어들었고, 그 시간은 꽤나 길었다. “……어쩌면 이 역시 내 업보겠지.” 탄식을 하듯 토해낸 읊조림. “해주겠단 뜻인가?” “……우선 신전을 통해 신탁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봐야 하네. 그다음에 다시 그대를 부르지. 이 문제는 나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네.” 그렇다면야. “얼마나 걸릴 거 같나?” “모르겠네. 한 달? 두 달? 최대한 빨리 답을 내서 알려 주겠네.” “그때까지 이건 내가 갖고 있지.” “그러게.” 생각보다 훨씬 더 쿨한 승낙. 이내 나는 용살검을 뽑아 배낭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추후 다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과 더불어 몇 마디 궁금했던 점을 묻고는 오늘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메시지 스톤일세. 내가 연락을 보내면 그때 지금 준 종이를 찢게. 그럼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 수 있을 걸세.” “그러지.” 이내 용아저씨는 다시금 공간이동 계열 용언을 사용해 나를 여관방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역시 용언들은 전부 사기란 말이지.’ 그런 감상을 하며 장비를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워 잠시 쉬려던 차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낯선 사람의 방문이란 뜻이었다. 미샤라면 그냥 문을 열었을 테고, 아이나르면 ‘똑똑똑’이 아니라 ‘쾅쾅쾅’ 소리가 났을 테니. “반가워요.” 이내 문을 열자 익숙한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줄리안 어반스?” 통칭 지역장 딸내미. 본인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아버지의 몰락을 바라는 진정한 패륜아. “그래서 생각은 바뀌셨나요?” “무슨 소리냐 그게?” “확인해 보니까 팀이 해체됐다면서요. 그 마법사도 죽었고. 로트밀러 그 사람이 뭔가 한 것 아니에요?” 아, 그래서 지치지도 않고 또 찾아온 거구나. 확실히 밖에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 마법사가 아니라 리올 워브 드왈키다. 그리고, 네 아비가 수작을 부린 건 사실이지만 로트밀러는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일단 팩트만을 정확히 짚었다. 다만, 그러고 나니 이 문제도 슬슬 해결해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금 수작을 부려온다고 한들, 곰아저씨나 레이븐이 홀라당 넘어갈 것 같진 않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더 귀찮은 문제로 변할 터. ‘생각난 김에 그냥 바로 해야겠군.’ “네 아비는 지금 어디 있나?” “어, 글쎄요. 이 시간이면 아마 7구역 본점에 계시지 않을까요?” 어반스 영애에게 필요한 정보만 수급한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너는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 찾아오지 마라. 너네 집안 사정에 얽히는 건 사양이니.” “네? 그게 무슨 뜻…….” “말 그대로다.” 처음 얘가 찾아왔을 땐 그냥 탈옥 건으로 내게 악감정을 품은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시기가 공교로웠다. 지역장이 몇 달 만에 갑자기 내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원인은 분명 얘였을 터. “그때도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니까요?” “됐고, 나가라.” 이내 강제로 어반스 영애를 내쫓은 나는 벗어던진 장비를 다시 챙겨 입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나서자, 앞에서 서 있던 어반스 영애가 보였다. “혹시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그래. 만나서 따질 거다.” “근데 왜 무기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따지러 가는데 왜 무기를 두고 가? 161화 협상 (3) 도심 속을 빠르게 걷고 있다. 가볍게 흉갑만 걸친 도시 모드가 아니라, 방패에 메이스까지 꺼내든 상태로. “아니, 잠시만요!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뒤에서는 어반스 영애가 거의 뛰듯이 따라오며 나를 말리는 중이다.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지금 그렇게 하는 건 얀델 씨한테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 “제, 제가 해결할게요. 물론 얀델 씨의 도움이 있어야겠지만……. 얀델 씨가 힘을 빌려주고, 저는 머리를 쓰는 거죠. 어때요? 우리 꽤 잘 맞는 조합 아니에요?” 뭐래, 자꾸. 재잘거리는 말은 대충 무시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다.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은 어반스 영애가 내 앞을 막는다든가 팔을 잡는다든가 하는 강수를 뒀지만……. 아니, 그게 되겠냐고. “아, 진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질질 끌려가게 된 어반스 영애가 신경질적으로 들고 다니던 양산을 바닥에 던졌다. 다만 한순간의 화풀이였을까? 3초 안에 다시 양산을 집어 들더니, 다시금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저기, 그…… 미, 미안해요.” “……?” “얀델 씨한테 불똥이 튄 거,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제가 접근하지 않았으면 아버지도 그냥 내버려 두셨을 수도 있겠죠.” “알고 있다니 그래도 염치는 있군.” 솔직한 사과에 나도 처음으로 답을 해 주었다. 물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 애초에 그렇게 진심인 거 같지도 않고. “아니, 사과도 했는데!!” 오히려 속도를 올리자 딱 봐도 곱게 자랐을 어반스 영애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열심히 뒤를 따랐다. 아직 설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 “후욱, 후욱, 후우……!” 거친 숨결을 토해내면서도 어반스 영애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바로잡을 기회를 주세요. 제가 말해도 양심 없는 말인 건 알지만요. 아, 아버지 자리를 제가 물려받게 되면, 몇 배로 갚을 테니까……!” 슬슬 체력적 한계였을까? 점점 어반스 영애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속도를 살짝 낮췄다. 물론 얘를 도와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건 아니고……. ‘지역장과 만날 때 얘가 옆에 있는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다시 생각해 보니, 얘의 리액션을 이용해 내 결백을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너무 느리게 가면 옆에서 시끄럽게 굴게 분명했기에, 일정 거리를 벌리고서 그 상태가 유지되게끔 속도를 조절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탐험가 길드 제7 구역 중앙지부.] 도시의 각 구역마다 자리한 본점. 지나가다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여타 지부들에 비해 훨씬 더 크다. 본점에서만 가능한 업무가 있다 보니 탐험가들도 많이 보였고. 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고민했다. ‘이걸 부숴, 말아?’ 다만 내 모습이 망설임으로 느껴졌을까? 거의 땀으로 목욕을 한 꼴이 된 어반스 영애가 재빨리 말을 붙인다. “그래요. 아직이라면 늦지 않았으니…….” 뭐래. “좋아, 결정했다.” “네?” “부수기로.” 역시 이쪽이 마음에 든다. *** 콰아앙! 온 힘을 다해 닫혀 있는 문을 발로 찬다. 막나가는 바바리안의 모습을 보여 줘야 저쪽도 생각을 고쳐먹을 거 아니야. 아, 얘를 건드렸다간 정말 좆될 수도 있겠구나. ‘어차피 얘기가 잘 끝나면 수리비를 달라고도 못 할 테고.’ 그게 아니어도 수리비쯤은 낼 재력이 된다. 한데 본점이라고 문에도 좋은 나무를 썼을까? 생각처럼 시원하게 박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꺄악!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어반스 영애가 뭐라 하든 말든. 문을 관통한 다리를 도로 빼고서 침착하게 메이스를 쥐었다. 그리고 문짝을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콰직! 콰직! 콰직! 바람이 솔솔 통하고 내부 공기가 좀 더 순환이 잘 되는 형태로 진화한 개방형 정문. 그 너머로 직원과 탐험가들의 시선이 보인다. “……강도?” “아니, 강도라면 은행에 가지 여기를 왜…….” 합리적인 의심을 뱉는 자부터 시작해, 마냥 멍하니 넋을 놓은 자. 단순히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자. 끝으로, 약삭빠른 탐험가답게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기는 자까지. “아가씨, 저거 해결해 주면 공적치 좀 주나?” “네? 네! 그런 내규가 반년 전쯤에 만들어졌던 거로 기억해요!” “잘 됐군.” 여직원 옆에 서 있던 대머리 아저씨가, 몸을 풀듯 팔을 돌리며 내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도 이런 놈이 있었다. 그러니까, 반년 전 내가 자유의 바바리안이 되었을 그때. ‘……설마 5등급 탐험가가 바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본점이라 방문자 수준도 높은 건가?’ 빡빡이 아저씨는 자랑스럽게 허리에 걸고 있는 증명패는 5등급 탐험가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꿇릴 이유는 없겠지만. 오히려 내 전투력을 측정하기 딱 좋은 상대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나는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비켜라.” 이 세계에 얼마 안 되는 현대인으로서,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굳이 탐험가와 싸울 이유는 없다는 판단. 그러나 빡빡이 아저씨는 공적치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어이, 바바리안. 뭔가 길드에 불만이 있어서 이러는 모양인데, 그럴 거면 정식으로 절차를 받고 항의를 했어야지?” “항의?” “아, 절차가 뭔지도 모르나? 야만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야만인이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바리안들조차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우리뿐이다. 근데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다니! “……넌, 머리에 문제가 있군. 아마 대머리가 된 것도 그래서겠지.” “뭐? 이 새끼가……!” 역시 탈모 때문에 머리를 밀었는지, 빡빡이가 분개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던 차였다. “그, 그만들 하세요!!” 어반스 영애가 나와 빡빡이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민간인을 다치게 둘 순 없는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빡빡이. “비키시오. 저자는 감히 길드에서 난동을 부린 범죄자라오. 아가씨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함부로 저자의 편을 들었다간—” 빡빡이가 어반스 영애를 보며 위협적으로 콧김을 뿜어내던 그때였다. “……어반스 아가씨?” 한 직원이 그녀의 신분을 알아보며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뭐? 어반스? 그럼 지역장의 딸?” “그런 여자가 왜 저런 야만인을…….” 신분을 알아채고서 뭔가 잘못됐다 여겼는지, 일단 뒤로 쓰윽 물러나는 빡빡이 아저씨. 5등급이라 그런가? 역시 판단이 빠르다. “아버지는 위층에 계시나요?” “네? 네! 그렇습니다마는…….” “함께 올라가도록 할게요. 그래도 괜찮죠? 여기는……. 알아서 잘 수습해 주세요.” “예! 물론입니다!” 어반스 영애의 신분 덕분에 1층의 소란은 어찌 잘 무마하고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삐걱, 삐걱. 중장비를 걸친 바바리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목재 계단.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방금은 왜 도와준 거지?” “어차피 생각을 바꾸진 않으실 거잖아요.” 어, 그건 그런데…….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 아군으로 포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왜 나를 도와주려 한 걸까? “제 제안이 얀델 씨에게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원하지 않으신다니, 이게 맞겠죠. 괜히 저희 집안일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해서 죄송해요. 들어가서도 아버지께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음, 이번에는 아까보단 진정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군.”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에? 이게 끝?” 그럼 뭐, 내가 마음이라도 돌릴 줄 알았나? “네 야망은 네 손으로 이뤄라.” 귀찮은 일은 딱 사양이다. 아버지에게 자유를 박탈당한 딸이란 포지션도 솔직히 공감이 안 가고. 진정 독립을 바랐다면 전부 포기했으면 됐다. 지역장 딸이란 신분에서 오는 권리도, 의무도 전부 다. “아가씨?” 이내 지역장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그 앞을 막아선 가드가 보인다. “옆에 있는 그자는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찾아오신 손님분이세요.” 가드가 업무적으로 물었고, 어반스 영애는 일단 얼버무렸다. 똑똑, 문을 노크한 가드가 지역장에게 사정을 알리자 머지않아 승낙의 말이 돌아왔다. “들어오라 하라.” “무기는 갖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이내 나는 가드의 지시를 따르듯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콰직! 내 힘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 개방형으로 진화한 집무실의 문짝. 그 너머로 들어서니 탁상에 앉은 지역장이 펜을 쥔 채로 굳어 나와 어반스 영애를 번갈아 응시한다. “이 무슨……!” 잠깐의 정적을 끝마치며 가드가 몸을 움직였고 그때 지역장의 입이 열렸다. “그만, 자네는 나가보게.” “하지만…….”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니니까.” “예, 그럼.” 평소 교육을 잘 시켰는지, 그 한마디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는 가드. 물론, 문을 닫을 필요는 없었다. 그야 이제는 없어졌으니까. “후…….” 복도에서 서성이며 얼타던 가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 지역장이 탁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따라서 나도 정면부에 착석했다. 푸지이익. 중갑 무장 바바리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푹 꺼지는 소파. 바바리안답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소파가 낡았군.” 지역장의 이마에 혈관이 새파랗게 돋아났다. 그러나 소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판단했을까? “……됐고, 용건이나 말해보게. 내 딸과 손을 붙잡고 찾아와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저, 아버지 그게…….” “너한테 묻지 않았다.” 그 한마디에 어반스 영애가 돌처럼 굳었다. 대담하게 패륜 계획을 세우면서도 아버지는 또 무섭긴 했던 모양.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너네 집안일은 둘이서 알아서 해결해라.” 내가 오늘 이곳까지 찾은 첫 번째 이유였다. “그 말은, 딸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배신이고 뭐고, 손을 잡은 적도 없었다.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테고.” 지역장은 진의를 가리기라도 하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판단은 얘의 몫일 테니까. “그럼 딸과 함께 온 이유는?” “자꾸 와서 귀찮게 굴기에 그냥 너한테 직접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따라오더군. 고블린처럼 쫄래쫄래.” “그, 그건 얀델 씨가 사고 치기 전에 어떻게든 막으려고……!” 고블린이라는 단어에 어반스 영애가 발끈하며 입을 열었고, 예상대로 그 리액션이 도움이 됐다. “그렇군. 자네 말은 믿겠네.” 오해를 풀겠단 첫 번째 목적은 해결이 된 셈. “한데 그게 목적이라면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건가?” 이내 지역장이 박살난 문을 보며 물었다. “내 감정과는 관계없네. 부서진 저 문을 보며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나?” 글쎄, 직원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감출 일이 없는 청렴결백한 대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하려는 말이 뭔지는 알겠다. 내가 자기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거겠지. “당장 자네를 체포해 구금해도 어느 한 명 뭐라 말하지 못할 걸세.” 틀린 얘기는 아닌데, 무섭진 않다. 어차피 못 할 걸 아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막 나가는 거고. “한번 체포해 봐라. 네가 한 짓도 전부 세상에 밝혀질 테니.” “……그 탐색꾼 친구를 믿는 건가?” “그럴 리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로트밀러를 이 사건에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카드도 있고. “예전에 탈옥했을 때 네가 마법사를 회유하려 했던 영상의 복사본이 있다.” “알테미온 학파의 그 아가씨가 내게 거짓말을 했군.”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고 했지, 사본을 만들지 않겠단 말은 안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고서 말을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우리 팀 마법사로 합류했지.” 쉽게 말해, 레이븐을 회유할 생각은 버리란 뜻. 지역장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이제 나는 처음 만났을 때의 좆밥 바바리안이 아니다. “바바리안족의 후계자를 누명 씌워 죽이려 한 지역장이라니. 내년에 선거가 있을 거라던데, 물어뜯기 딱 좋은 구설수겠군.” “……후계자?” “아직 정보가 느리군. 얼마 전에 그렇게 됐다.” 지역장이 입을 꾹 다물더니, 약간의 텀을 두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완전한 항복 선언. 슬슬 이곳에 방문한 두 번째 이유로 넘어갈 차례였다. 지역장은 로트밀러를 이용해 나를 해치려 들었다. 원래라면 머리통을 부숴도 세 번은 부술 만한 대죄. 물론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선 나역시 수없이 귀찮은 일들을 겪어야 하며, 이후로는 지역장과 완전히 원수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경고로 끝낸다. 용살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하지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기든,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서든 상관없다. 만약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한다면…….”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대화는 안 해.” 살기를 개방하며 지역장을 노려보자, 녀석이 흠칫 굳는다. 고스트 버스터즈에서만큼 극적인 반응은 없지만, 이 정도면 경고 정도로는 충분히 와닿았을 터. “…….” 용건을 끝마치자마자 미련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역장이 툭 뱉듯이 물었다. “대답은 듣지 않는 건가?” 글쎄, 대답을 들어 봤자 의미가 있을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지지지직! 나와 지역장 사이에 있던 탁자 끝을 양손으로 잡고 팔 힘만으로 접어 버렸다. “탁자도 많이 낡았군.” 오늘의 협상은 이걸로 끝이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럼 이만 난 가보겠다. 배가 고파서.” 이놈이 잃는 건 문짝이나 탁자 따위가 아닐 것이다. 162화 탐험 (1) 지역장과의 협상이 있었던 다음 날. 팀 전원이 모여 2차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지난번에 마무리 짓지 못한 서른한 개의 논의를 모두 끝마친 뒤, 다 함께 탐사 계획을 세웠다. “흐음, 5층까지 가려면 준비할 물건들이 많이 있겠네요.” “그 부분은 네게 맡겨도 되겠나? 영수증을 정리해 오면 공금으로 처리하겠다.” “좋아요. 어차피 컴멜비에 들를 일이 있어서.” 참고로 이번 회담에서 팀 이름도 결정됐다. 나는 ‘팀 비요른’이면 충분하다 여겼지만……. 팀명에 로망을 가진 사람이 아이나르 말고 한 명 더 있었거든. “저기…… 제가 이름을 한번 생각해 봤는데. ‘나라크’라는 이름은 어때요?” “나라크?” “고대어로 어둠을 걷는 자들이란 뜻이에요. 꽤 괜찮지 않아요?” 괜찮은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스물넷 먹은 마법사의 오른손에 흑염룡이 살고 있었단 건 알 거 같았다. 어둠을 걷는 자들이라니……. “너도…… 취향이 참 독특하군.” “……지금 저 놀린 거죠?” 아무튼, 팀 비요른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보다는 백배 낫다는 레이븐의 주장에 팀명을 낙점하려던 그때였다. “아, 안 된다!! 팀명은 내가 정했단 말이다!” 졸고 있던 아이나르가 다급하게 대화에 껴들었다. “네? 아, 뭔가 좋은 게 있는 거예요?” “우리 팀 이름은 애플파이로 할 거다!” “애플파이요……? 후식으로 나오는 그거?” 레이븐은 반쯤 멍한 표정으로 이유를 물었고, 아이나르는 고민 없이 답변을 해 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까!’ 라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될 건 뭔가!!” 아이나르의 억지에 레이븐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수결로 하자고 말을 꺼냈다. 우리가 절대 저런 이름에 힘을 실어줄 리가 없다고 확신한 모양, 다만……. “그런 거야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으니, 너희 알아서 해라” 곰아저씨는 기권표를. 의외로 미샤는 찬성표를 던져 주었다. “음, 나는 애플파이도 괜찮은 거 같은데……. 달달하고 맛있지 않냥.” “그런! 야, 얀델 씨는요? 설마, 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쓰려는 건 아니죠?” 솔직히 고민이 됐다. 내가 레이븐의 편을 들면 일단 2:2로 무승부가 되니까. 맘 같아선 아이나르의 손을 들어주고 이 안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지만……. 팀장으로서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면 마법사의 감정이 상할 터. 어쩔 수 없이 중재안을 내밀었다. “그냥 합쳐서 애플 나라크로 하지.” “…….” “아, 나라크 파이 쪽이 좋나?” “……앞에 거로 할게요.” “아이나르, 너는?” “나도 그게 더 괜찮은 거 같다! 어감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공식 팀명이 ‘애플 나라크’로 정해진 것으로 2차 회담은 끝. 이후로는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매일 아침 팀 전원이 모여 미리 합을 맞쳐 보는 등의 반복적인 일상. 아, 돌연 난쟁이놈이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하하핫! 오랜만일세. 아이나르! 레이븐 양!] 팀이 모여 세 번째로 합을 맞춰 보던 날이었다. 미샤에게 이쪽 소식을 전해 듣고는 흥미가 생겨 찾아온 듯한데……. 대충 근황 관련 잡담이나 나누다가 헤어졌다. 대장간으로 개조하는 공사는 이미 맡겼고, 요즘에는 대장장이를 스카우트하러 다니느라 바쁘다던가? [오, 아내분께서 주점을 하신다고? 나중에 한번 들러 봐야겠군.] [그래, 와서 벌꿀주는 꼭 마셔 봐라. 아내가 직접 담근 건데, 우리 가게만의 별미지.] 둘 다 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곰아저씨랑도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음, 나중에 새로운 절친이 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시간들이 계속 이어져 어느덧 그날이 찾아왔다.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겠군.” 오늘은 미궁이 열리는 날이다. *** “비요른, 준비 다 됐냥?” “아, 좀만 기다려라.” 오랜만에 장비를 풀로 착용하고서, 어제 미리 싸둔 배낭을 어깨에 멘다. 끼이익. 방문을 열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미샤와 아이나르가 보인다. “혹시 빠트린 건 없나?” “없다!!” 내 물음에 우렁차게 답하는 아이나르. 옆에 있던 미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없을 거당. 어차피 중요한 건 다 내 배낭에 들어 있으니까.” “그렇군.” 근래 들어 부쩍 강해진 생각인데, 정말 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혼자였으면 훨씬 피곤했을 거 같거든. “어, 비요른. 우편통에 뭔가 와 있는데?” “응?” 슬슬 방문 앞을 떠나려는 차, 미샤가 문 앞의 우편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통을 열어 보니 편지가 들어 있었다. ‘발신인이…… 나일 어반스?’ 지역장이 보낸 편지다. 대체 언제부터 들어 있던 거지? 지이이익. 일단 뜯어서 내용을 쭉 읽어내렸다. 아니, 읽어내렸다고 하긴 좀 그런가? [청구비는 묻지 않겠네.] 딱 한 줄뿐인 문장. 왠지 지역장의 프라이드가 느껴졌지만……. 나름 화해의 제스처였다. 조금이라도 나와 기싸움을 하려 했다면, 벌금 고지서나 청구서가 함께 날아왔을 테니까. ‘역시 부수길 잘했군.’ 사실 뭘 원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보상을 요구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다만, 나는 보상이란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서 깡패처럼 문짝을 박살 냈다. 그야 녀석의 머릿속에 아로새기고 싶었거든. 내게 실수를 저지르면, 대가를 치러야 한단걸. 그리고 그 대가는 돈 같은 게 될 수 없다는걸. ‘그럼 이 부분은 이제 크게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거 같고…….’ 딸내미와 손을 잡지도, 앞으로 잡을 생각도 없다는 걸 밝혔다. 그리고 나를 적대시하면 아주 귀찮은 일이 생기리란 것도 암시했다. 그런데도 분노의 눈이 멀어 수작을 부린다? 적어도 내년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무슨 편지인데 그러냥?” “아, 신경 쓸 거 없다.” 나는 편지를 박박 찢은 다음 나가는 길에 1층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7구역의 중앙 광장. 모임 장소로 많이 쓰는 곳답게 동료를 기다리는 탐험가들이 바글바글하다. “1분 지각이네요?” 3시 방향 길목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보고 씨익 웃는 레이븐. 다만, 우리 지각에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어서 벌금 내요. 약속했잖아요?” “아, 그래. 벌금…….” 참고로 벌금은 2차 회담 때 있었던 31개의 논제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였더라? “1분당 1천 스톤이요. 세 분이니까 3천 스톤을 내면 되겠네요.” 나는 순순히 지갑을 열어 세 명분의 벌금을 냈다. 편지를 읽느라 시간만 낭비하지 않았어도 늦지 않았을 테니까. “근데 레이븐, 가방은 어디 갔나?” 벌금을 넘겨주면서야 깨달은 점인데, 레이븐은 등에 아무것도 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차 물었더니 묘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 그거요?” 레이븐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빛을 내며 허공에 열리는 작은 포탈. “아공간……?” “네. 미궁에서 지내려면 필요할 거 같아서요. 필요없는 물건들을 싹 정리하고, 그 돈으로 큰맘 먹고 샀어요.” 그래, 큰맘 먹으면 바로 살 수 있는 거였구나. 아공간이라는 게, 너한테는. 짤랑. 레이븐은 보란 듯 벌금을 아공간에 집어넣고서 문을 닫았다. 왠지 가슴이 저릿했다. 이게 바로 박탈감이라는 건가? 허구한 날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더니……. 나는 정말로 돈이 없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나저나, 아브만이 늦넹?” 애써 부러운 감정을 지우고 있자니, 어느새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그러게요. 설마 안 오거나 하진 않겠죠?” “난 걱정 안 한다! 오다가 잠깐 길이라도 잃은 거겠지!” 아이나르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 레이븐. “인도자가 길을 잃는 게 말이나 돼요?” “우음, 안 될 건 없지 않냥? 도시에서는 쓸모 없는 능력이라고 들었는뎅.” “하지만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인데요?” “그건…… 음, 확실히 그러넹. 그럼 왜 늦는 거지?” “호, 혹시 배탈이라도 난 거 아닌가?!” 세 명의 여자가 곰아저씨의 지각을 주제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닥치고 있었다. 곰아저씨의 길치 속성은 미궁에 들어가서 밝힐 계획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붐비던 광장이 한산해지며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될 때쯤에 곰아저씨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하군. 오래 기다렸나?” “일단 벌금부터 내요. 딱 45분 늦으셨네요.” “아, 그런 게 있었지…….” 미궁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려 4만 5천 스톤을 벌금으로 빼앗긴 곰아저씨. “근데 왜 늦은 거예요?” “밤에 오는 건 또 처음이라. 왠지 분위기가 낯설더군.” “네? 그게 무슨 소리—” “됐고, 어서 가지. 자칫하면 늦겠다.” 나는 얼른 끼어들어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결속 마법만을 걸고서 차원광장을 향해 무리를 이끌었다.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고, 포탈은 서서히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기다리면 경험치 복사 타이밍이 오지만……. ‘이걸 알릴지 말지는 이번 탐사를 끝내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포탈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이제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 돼버린 수정동굴. 눈을 뜨자마자 아이나르의 외침이 메아리치며 고막을 강타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꺅! 노, 놀랐잖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는 레이븐의 질문에 아이나르는 대답했다.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암, 알지 그 기분.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6개월 만의 복귀 아닌가. 천생 바바리안인 아이나르로서는 굉장히 감상이 남달랐을 터. “그래, 바바리안이 정말로 한 명 더 늘어 버린 거구낭…….” 나와 아이나르를 번갈아 보던 미샤가 한숨을 푹 내쉰 반면, 곰아저씨는 의외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조용한 것보다는 낫군.” 혼자 다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런 느낌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은 모양. 아무튼, 잡담은 여기서 끝이다. “아브만, 어디가 제일 가깝지?” 내 질문에 곰아저씨가 한 곳을 가리켰다. 나침반과 대조해 보니 남쪽이었다. 한마디로 이번 스타트 포인트는 구울 지구라는 뜻. ‘하필 이번에도 반대편이 걸렸네.’ “고블린숲으로 간다고 했으니, 이리로 가면 되겠군. 그럼 앞장 서지.” 곰아저씨가 나침반을 집어넣고는 앞장을 섰다. 그냥 방향만 말해 주고 내가 길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그래,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곰아저씨가 어느 수준의 길치인지를 알아야 나도 판단을 할 수가 있다. 후천적 노력으로 교정이 가능한지, 아닌지. 정 답이 없으면 앞으로는 곰아저씨를 나침반 삼아 내가 길을 찾을 생각이다. 평소에 로트밀러를 보고 이것저것 배웠거든. “리에이트.” 여하튼 남쪽에서 북상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1층의 최중심부를 지나치게 됐다. 네 종류의 몬스터가 모두 나오는 암흑 지대. 횃불을 꺼내들 것도 없이 레이븐이 빛구체 마법으로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후우웅-! 음침한 적광의 횃불과 달리 새하얗게 주변을 비추는 빛. 도시에 있는 것처럼 눈이 편하다. 다만, 한 가지가 염려스러웠을까? “1층이지만, 그래도 마력은 아끼는 편이 좋지 않냥?” “이 정도는 괜찮아요. 차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아, 어…… 그, 그렇구낭?” “네. 그리고 걱정 마세요. 이걸 켜둔다고 다른 마법을 쓰는 데 지장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니.” “…….” 이내 미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드왈키가 씁쓸한 목소리로 수없이 말했던, 진짜 마법사들의 위용을 여실히 느낀 모양. “차는 속도가 더 빠르다니, 신기하군. 예전에 같이 있던 마법사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곰아저씨가 중얼거리자, 레이븐의 콧대가 빳빳하게 세워졌다. “흠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마력에는 자신 있는 편이라서요. 동급에서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호오, 그래? 이제 보니 굉장한 마법사셨군?” “과찬이에요. 우리크프리트 씨야말로 5등급 탐험가이시면서 인도자시잖아요?” 그렇게 둘이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며 동굴 속을 걷던 때였다. 반경 30m가량의 공동이 나타났다. “어, 여기는 그때 균열……!” “아이나르.” “…….” 짧게 호명하자 손으로 입을 꽉 막는 아이나르. 괜히 더 수상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다행히 이목은 공동 중심에 세워진 기념비로 쏠려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마법사답게 지적 호기심을 느끼며 기념비로 다가서는 레이븐. 5년 차 탐험가답게 미샤도 식견이 있었다. “이게 그거지? 미궁을 처음 발견한 대마법사를 기리려 불멸왕이 세웠다는.” “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일반적으로라닝?” “요즘 학계에서 도는 가설인데, 미궁을 발견한 게 아니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아, 쉽게 말하자면……. 대현자는 다른 차원의 좌표를 관측해 포탈을 구축한 게 아니라, 이 미궁 차원 자체를 창조해 냈다는 가설이죠.” 설명충 속성을 지닌 레이븐답게 길어진 말. 아이나르는 아예 듣지 않았고, 미샤도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나는 흥미가 생겼다. “마법사들이 그리 생각한 근거는?” “바로 이 기념비예요.” “기념비?” 추임새를 넣어주자마자 옳다구니 설명을 이어가는 레이븐. “미궁은 항상성을 지녔어요. 지형이 파괴돼도 다음에 포탈이 열렸을 땐 멀쩡하게 돌아와 있죠. 그래서 차원 이동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 좌표도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는데…….” “윽, 머리가…….” 자꾸만 어려운 단어가 연속해서 들려오자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나르. 레이븐이 뾰로퉁하게 입술을 쭉 내밀며 짧게 축약했다. “이 기념비는, 미궁이 처음 발견됐을 시대에 지금보다 최소 몇 배는 더 시공 마법이 발달했단 증거예요. 지금으로는 불가능한 공간 창조도, 어쩌면 그땐 가능했을지 모르죠.” 들어 보니 축약조차 길었지만……. “그렇군.” 대충 이해는 됐다. 정리하자면, 수천 년 전 마법사들은 차원 마법에 능통했단 거 아닌가. ‘대현자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어.’ 어쩌면 ‘심연의 문’ 말고도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얘기는 다 끝났나?” “아, 그래. 출발하지.” 이런 쪽엔 별 관심이 없는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곰아저씨가 재촉을 해왔고, 다시 탐사가 재개됐다. 그리고……. “어, 기념비당!” 우리는 약 15분에 걸쳐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 왔다.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던 나로서도 대체 이 아저씨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길을 찾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우리크프리트 씨?” 곰아저씨를 탐색꾼으로 키워 보겠다는 계획은 즉시 철회했다. “아, 실수다. 왠지 저쪽으로 가면 좀 더 빨리 갈 거 같았는데…….” 그런 걸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163화 탐험 (2) 아루아 레이븐. 찰랑찰랑거리는 금발. 150이 조금 넘는 작은 신장. 거기에 빼빼 마른 체형까지 덧붙여져 얼핏 보면 꼬맹이 같기도 하지만……. 얘가 정색하면 그렇게 무서운 게 또 없다. 바로 지금처럼. “얀델 씨는 알았어요?” 아, 어…….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솔직하게 대답하자 레이븐의 눈매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다만, 나는 바바리안답게 목덜미나 긁적였다. 이미 미궁에 들어왔는데, 지가 어쩔 거야? “앞으로 길은 내가 찾겠다. 아브만, 넌 포탈이 어디 있는지만 계속 알려 줘라.” “……그러지.” 레이븐의 눈빛에 쫄은 건 마찬가지였는지, 곰아저씨도 긴말 않고 핸들을 내게 넘겼다. 자, 그럼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하, 진짜…….” 표정을 보니 사기를 당했다는 걸 깨달은 듯하지만, 레이븐은 일단 한번 지켜나 보자는 심정으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니 이번 탐사에서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인도자가 길치여도 탐사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는 걸. 저 조그마한 입에서 쌍욕이 날아들기 전에. “그럼 출발하지.” 곰아저씨를 나침반 삼아 빠르게 길을 찾는다. 뒤에서 레이븐의 못 미더운 시선이 피부로 전해졌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동서남북 방향만 알아도 2층까지 찾아갈 수 있는 게 바로 1층 아닌가. ‘갈래길에선 통로가 더 넓은 곳으로만 가도 반 이상은 간댔지.’ ‘둔덕진 곳은 막다른 길일 가능성이 높으니 피하라 그랬고.’ ‘외곽에서 부터는 무조건 수정이 덜 박힌 어두운 길 쪽으로.’ 순수 노력파 길잡이 로트밀러와 함께하며 곁눈질로 습득한 여러 꿀팁들. 이를 활용하며 막다른 길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등의 동선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리고 그 결과. “오, 생각보다 빨리 왔는뎅?”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최외곽부 암흑지대에 도달했다. 아,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훨씬 쉬웠다. 원래라면 나침반에 의지하기보다는 주변을 수색하며 포탈을 찾아야 했겠지만……. “저쪽이다.” 우리에게는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포탈의 위치를 인지할 수 있는 인도자가 있다. 따라서 그냥 그 방향으로 따라가면 끝. 물론 포탈은 한참 전에 다른 탐험가에 의해 개방되어 있었다.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2층에 도달한 이후로는 레이븐의 표정도 제법 누그러졌다. “2층까지 12시간이라……. 나쁘지는 않네요.” 그래, 세이프인 거구나. 하긴, 애초에 탐사 계획 단계에서 1층 돌파를 13시간으로 잡았으니 따질 명목이 없을 터. “어쩐지 인도자가 있는데 넉넉하게 잡더라니.” 당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기던 레이븐이지만, 의외로 뒤끝은 없었다. 설마 얘, 결과만 좋으면 OK인 타입인가? ‘합리적이군.’ 그런 의미에서, 2층에서도 미리 세워둔 일정이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비록 24시간 내에 주파한단 타이트한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아브만, 방향은?” “저쪽이다.” 고블린 숲에는 포탈 비석이 8개 존재한다. 다만, 한 개가 개방되고 나면 남은 비석은 그냥 돌덩이로 변한다. 따라서 후발 팀들은 최외곽부를 크게 빙 돌면서 포탈을 수색하는 게 정석이었다. 아, 참고로 평균 2, 3일이 걸린다고 들었다. 팀에 인도자가 없다는 가정하에. ‘인도자가 있으면 하루로 충분하지. 굳이 빙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나침반을 꺼내 들 것도 없이 우리들은 포탈이 개방된 방향으로 직행했다. “레이븐, 빛구체 마법을 늘릴 수 있나?” “세 개 정도는 부담 없어요.” 전문 탐색꾼의 부재가 문제 될 일도 없었다. 덫이 숲 전체에 깔린 필드라는 것? 대낮처럼 온 사방을 밝게 비춰 버린 이상, 이는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뭐, 빛을 보고 고블린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긴 했지만……. “그륵—!!” 이제 고블린은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덤벼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 지경이라 말이지.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겠다.” 오후 9시쯤 야영을 준비했다. 장소는 홉고블린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고블린 숲 외곽부. “……원래 탐험가들은 이렇게 강행군을 하는 건가요?” 제대로 된 첫 탐사가 처음인 레이븐에게는 꽤 힘든 하루였을 터이나, 원래 생체 리듬은 체력 여유가 있는 첫날에 제대로 맞춰 줘야 하는 법. “어지간하면 계속 이 시간에 야영을 할 거니, 내일부터는 조금 더 편할 거다.” “……뭐, 진짜 탐험을 하는 느낌이라 흥미롭긴 하네요.” “그만 떠들고 얼른 잠이나 자라. 내일도 계속 이동을 해야 하니.” “네. 일이 생기면 깨워 주세요.” 관례대로 레이븐은 불침번에서 제외됐다. 알람 마법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1인분을 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 “저기, 비요른……. 아이나르 말인데, 이따가 혼자 세워 둬도 괜찮은 거냥?” 미샤가 자기 다음 순번인 아이나르를 보며 조심스레 걱정을 내비쳤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괜찮다. 졸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이나르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선 믿을 만하다. 인간 불신이라는 특성도 있고, 바바리안 자체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걸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둘이 다닐 때도 불침번은 잘만 섰다. 그땐 불침번도 네 시간씩 서는 데다가, 잠도 얼마 못 자서 훨씬 더 피곤했을진데도. “으음, 그렇구낭……. 내가 좀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레이븐을 제외한 넷이서 2시간씩 교대로 불침번을 선 8시간의 야영을 끝낸 뒤에는 이른 아침부터 탐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기 전에 포탈을 발견했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3층에 도착한 후로도 탐사는 순조로웠다. 전투는 실전 연습도 안 될 만큼 손쉬웠으며, 길 찾기도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곰아저씨도 1층이나 도시처럼 길이 없는 곳에서는 길을 잃지 않았으니까.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부여됩니다.」 내심 걱정했던 마녀의 숲도 마찬가지였다. 굴비처럼 몸을 밧줄로 이은 뒤 곰아저씨를 앞세우고서 따라가는 방법으로 쉽게 클리어가 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바로 지금. “오오, 탑이다! 비요른! 정말 숲 한복판에 탑이 있었다!!” “후후,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않냥? 미궁엔 신기한 것들이 많다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래, 왠지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던 거지?” 우리는 4층 포탈 앞에 도달했다. 그것도 고작 8일차 오후가 되는 시각에. ‘이 정도면 로트밀러가 있을 때랑 거의 비슷한 속도네.’ 그 사실이 흡족스러운 한편으로는, 왠지 씁쓸하기도 했다. 역시 노력으로는 재능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얀델 씨, 무슨 생각 해요?” “아, 별거 아니다.” “그, 그럼 얼른 들어가면 안 돼요? 숲 전체에 불길한 마력이 진동을 해서 속이 울렁거리는데.” 타고난 마력 감응도가 뛰어난 탓일까? 먹은 걸 토해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레이븐은 드왈키보다도 심하게 멀미를 했다. 그래서 나도 어서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조금 기다려라, 포탈 색이 바뀌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아, 맞다. 들어 봤어요. 다른 팀이 먼저 들어가 있을 수도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거랬죠?” “안 그러면 약탈자로 오해받고 공격 당할 수도 있으니까.”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 군말없이 인내하는 레이븐. 머지않아 포탈의 색이 변하였다. “자, 그럼 어서 들어가지.” 이제 본격적인 등반을 해 볼 시간이다. ***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 천공의 탑. 매 스테이지마다 무작위 조합의 몬스터 무리가 출현하는 독특한 형식의 계층. 평소 수련의 탑이라 부르던 곳이니 만큼, 나는 이곳에서 제대로 합을 맞춰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전력 차면 의미가 없겠네.’ 첫 전투를 치른 후 나는 깨달았다. 팀 반푼이와는 전투력 수준 자체가 다르다. 4층에서는 전력을 다해 합을 맞춰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합일]에 의해 크기뿐만 아니라 성능까지 크게 증가한 초거대 메이스. 공격기인 [휘두르기]까지 합쳐지니, 7등급 몬스터가 정말이지 고블린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핵심은, 메인 딜러가 따로 있다는 것.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물질]을 시전했습니다.」 원샷 원킬을 넘어, 주변 일대를 쓸어버리는 5등급 궁수인 곰아저씨의 막강한 딜과 ‘철웅’이란 이름의 상급 탱커 소환수.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공격 마법 [화염세례]를 시전했습니다.」 거기에 4대 속성 공격 마법은 물론, 백여 종 이상의 저주 및 보조 마법을 보유한 정통 마법사 레이븐의 미친 유틸성까지. ‘그래, 캐리할 수 있는 포지션이 팀에 세 명은 있어야지.’ 팀의 완성도가 확 올라갔다. 6등급 이하라면 어떤 괴상한 조합으로 무리가 출현하든지 간에, 3분 내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공략이 가능할 수준. ‘우리 셋에 비해 부족할 뿐이지, 아이나르나 미샤도 한몫은 제대로 하고 있고……. 역시 지금 상태로도 5층은 무리가 없겠군.’ 따라서 굳이 손발을 맞추며 연습하기보다는 천공의 탑을 오르는 것에만 주력했다. 다만, 생각처럼 속도는 붙지 않았다.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전투 속도 자체는 팀 반푼이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지만……. 우리 팀에는 전문 탐색꾼이 없으니까. ‘다 좋은데, 지혜의 시련을 클리어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쉽네.’ 지혜의 시련은 일종의 지름길이다. 함정과 몬스터로 가득한 미로를 지나쳐야 하는 대신, 한 번에 5스테이지를 스킵하게 해 줬다. 뿐만 아니라, 용기의 계단과 달리 다음 계단을 택하기까지 4시간의 쿨타임도 없었는데……. 로트밀러는 클리어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지금 우리는 딱 그 다섯 배 정도가 소요됐고. “비요른, 그냥 몬스터랑만 싸우면 안 되나?” 갑갑한 건 나도 아이나르와 마찬가지였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용기만 골라서 100 스테이지까지 도달하려면 16일이 넘게 걸리니까. 미궁 폐쇄 전까지 4층을 돌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군. 이만 쉬고, 내일 마저 올라가겠다.” 탑에 들어와 지혜의 시련을 한 번 깼을 뿐인데, 벌써 오후 10시가 넘은지라 야영을 준비했다. 물론, 평소의 야영과는 사뭇 날랐다. 불침번 순서를 정할 것도 없이 각자 원하는 자리에 침낭을 까는 것으로 끝. “미궁인데 불침번을 안 서도 된다니!! 미샤, 나 지금 머리가 띵하다!!” “후후,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당.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쉽게 적응이 안 돼서 잠이 잘 안 왔—” 드르러러러러렁-! “야, 사람이 말을 하는데……!” 아이나르는 침낭에 눕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고, 미샤는 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물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잘 준비를 시작했다. “비요른, 왜 자꾸 이쪽을 힐긋힐긋 보냥?” “안 봤는데.” “자자, 어서 고개 돌려랑. 우린 동료 아니냐, 동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 없당?” 아니, 그러니까 안 봤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메이스에 묻은 피를 닦는 일에 집중했다. 다만,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을까? “칫.” 나 보고 들으라는 듯 미샤가 입맛을 다신다. 우리 여관으로 이사를 오고서 생긴 변화다. 없던 일처럼 지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장난스레 그날의 일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뭐, 그렇다고 불만은 없지만. ‘……차라리 이런 게 나을지도.’ 미샤는 내게 마음을 밝혔고,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아무리 없던 일로 하고자 해도 없던 일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얘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 거겠지. 매번 그 일을 의식하며 말조심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덜 어색하니까. “그럼 나는 먼저 잔당.” “그래.” 이내 미샤도 침낭에 들어가 눈을 붙였고, 옆을 확인해 보니 곰아저씨도 구석에 침낭을 펼쳐놓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드르러러러러렁-! 장비를 정비하는 김에, 아이나르의 대검도 집어다가 대충 닦아 줬다. 그러고 있자니 레이븐이 슬며시 다가왔다. “할 말이라도 있나?” “네.” “말해 봐라.” “제가 계산을 해 봤는데, 오늘 같은 속도로는 5층에 도착해서도 얼마 못 있어요.” ……그걸 계산을 또 해 본 거구나. 쩝,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물론, 얘의 걱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여기서 낭비한 시간만큼 5층에서 활동 가능한 시간도 줄어들 터. “그만큼 다른 팀에 비해 소득도 떨어지겠죠.” “……이번이 첫 탐사 아니냐. 지금이야 전문 탐색꾼이 없어서 시간이 걸리지만, 점점 더 빨라질 거다.” “그렇다면야.” 레이븐은 이를 끝으로 아무런 말도 않고 본인 침낭으로 돌아갔다. 내 말을 전부 납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 계속해서 오늘처럼 지혜의 시련을 넘는 데 5시간씩 걸린다면 그때 다시 찾아올 터였다. 극단적인 해결법을 들고서. ‘……됐고, 이만 잠이나 자자.’ 잘 닦은 대검을 아이나르의 옆에 내려놓고서 내 침낭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눈을 붙이고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씨, 가만히 듣기만 하세요.] 레이븐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잠에서 깼다. ‘전음’ 마법이었다. 다만, 굳이 마법까지 써가며 자던 나를 깨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몸을 씻다가 뭔가 싸해서 탐지 계열 마법을 써봤는데…….] [여기, 우리 말고 한 명이 더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 사정은 실로 간단했다. 어떻게 이리도 침착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 지금 바로 제 뒤에 있거든요.] 자칫하면 우리 마법사가 뒈지게 생겼다. 164화 탐험 (3) 자다 깬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과열이 심한 작업을 하려 할 때 냉각팬이 먼저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원리. ‘쥐새끼가 있다라…….’ 심장이 낮게 뛰며 사고가 가속한다. 천공의 탑은 독립 계층이다. 포탈의 색이 한번 변하고 나면 누구도 뒤따라 들어오는 게 불가능. 내가 아는 어떤 아이템이나 히든피스 중에도 이를 뚫을 방법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포탈의 색이 바뀌기 전에 들어온 건가.’ 처음부터 놈은 우리와 함께 입장했다. 물론 우리도 이 경우를 대비해 잠시 대기하며 따라 들어오는 자가 없단 걸 확인하고, 출발 전에 은신 능력을 대비해 탐지 마법을 돌렸지만……. ‘2등급 이상의 은신기라면 들키지 않는 것도 가능해.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탐지가 안 되니까.’ 물론, 이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했을 뿐. 이놈이 정말 2등급짜리 정수를 가진 거물일 가능성은 적다. 결과적으로 탐지 마법에 걸렸지 않나. 차라리 첫 입장 때만 아이템이든 기술이든 사용해서 탐지 마법을 피했다고 보는 게 옳을 터. ‘애초에 지금까지 간만 보며 따라온 것부터가 전투력에 자신이 없단 증거겠지.’ 좋아, 갑자기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레이븐 역시 차분히 상황을 브리핑하는 걸 보니 그렇게 겁먹진 않은 듯하고. 자,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볼까. [당장 저를 해치진 않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결할 건지 잘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해 주세요. 얀델 씨 손에 제 목숨이 달렸—] 금방 답이 나왔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재빨리 일어선다. 그리고 곧장 레이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미친!!] 레이븐이 경악하며 내 머릿속에 다이렉트로 소리를 질렀지만……. 이게 최선이다. 괜히 수작을 부리다가 얘가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로 골치가 아파지니까. 게다가 쟤는 우리가 눈치챈 걸 모르잖아? 원래 사람이란 게 너무 크게 놀라면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는 법. “레이븐! 괜찮나!! 꿈에서 네가 나왔다!!” 달려가며 적당한 대사도 날려줬다. ‘어? 들킨 게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놈이 아주 잠시라도 하게끔. 희망 회로를 열어 준 것이다. 물론, 놈이 찰나에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지만……. “꺅!” 레이븐 앞에 도달할 때까지, 놈은 은신을 풀지 않았다. 참 고맙게도. “무슨 일이냐!!! 적이냐!!!” “……뭐야, 잘 자고 있었는데.” 야밤에 벌어진 소란에 삼인방도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내가 조상신을 외치며 기대했던 두 번째 효과. 이로써 쥐새끼가 다른 동료를 기습하거나 인질로 잡으려 해도 대비가 가능해졌다. 다만 잠결에도 내 외침을 정확히 들었을까? 나와 눈이 마주친 미샤가 고개를 푹 숙인다. 심장에 화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꿈에서 나오다니…… 두, 둘이 그런 사이였던 거구낭……? 나, 나는 모, 몰랐네. 그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냐하, 하하, 핫…….” 뭐래, 얘는 또. 나는 거두절미하고 그냥 외쳤다. “전투 준비! 이 안에 쥐새끼가 있다!” 탐험가답게 ‘전투 준비’란 말은 절대적이었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일단 무기를 꺼내들어 밀집 대형을 갖추며 주변을 경계하는 삼인방. 나는 신속하게 그들 주변으로 이동했다. “비요른, 쥐라니? 4층에서 쥐도 나오나?” “……우리 말고 다른 탐험가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그, 그렇군? 나는 정말 쥐인 줄 알고 놀랐다!” ……쥐가 아닌 쪽에서 놀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꾹 참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니까. “레이븐, 놈은 어디 있지?” “어, 없어졌어요. 탐지 마법에 잡히지 않아요.” 그래, 또 탐지 무효화 모드라 이거지. 아이템인지 기술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패시브가 아니라 발동식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유지 시간이 있을 터. “계속 써라. 놈이 나타날 때까지.” 품에 안은 레이븐을 내 등 뒤로 보내며 재차 오더를 내렸다. “은신 능력이 있는 놈이니 집중해라. 공격을 할 땐 반드시 모습이 드러날 테니.” 슬슬 사태 파악이 끝났는지,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는 팀원들. 그 상태로 정적이 몇 분간 이어졌다. “…….” 놈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 존버할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딱히 답은 나오지 않겠다마는. “얀델 씨…….” “초조해하지 마라. 시간은 우리 편이니.” 네 개의 문 모두가 굳게 닫힌 석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운명의 계단이라도 있으면 변수를 만들어 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나와라. 아프지 않게 죽여 주지.”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리던 그때였다. “탐지가 됐어요!” “놈이 어디 있지?” “저기 문쪽이요!” 그래, 거기 있던 거구나. “해제도 가능한가?” “대상자가 특정됐으니 가능해요.” “걸리는 시간은?” 레이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에 쥐고 있던 완드를 앞으로 뻗을 뿐. 「아루아 레이븐이 8등급 보조 마법 [색출]을 시전했습니다.」 완드 끝에 박힌 보석이 빛났다. 그리고……. 솨아아아-! 파란 빛무리가 투명한 무언가에 달라붙으며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다. 이내 빛무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은신 중이던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딱 쥐새끼 같은 차림새군.” 몸에 딱 달라붙는 암행복을 입은 가면의 괴한. “베헬—라아아아아!” “……!”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대시하던 순간이었다. 덜컥. 뭔가 결심이라도 끝마친 양, 놈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계단을 타고 올랐다. “비요른! 놈이 도망친당!” “당황하지 말고 일단 짐들부터 챙겨라.” 나는 바로 추격하기보다는 바닥에 너부러진 짐부터 수습했다. 그야 남은 사람이 없으면 문이 닫히니까. 그럼 다시 짐을 챙기러 내려올 수 없다. 뭐, 한 명을 이곳에 두고 간단 선택지도 있겠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다. 놈이 열고 올라간 곳은 다름 아닌 용기의 계단. 우리가 다 올라갈 때까지 몬스터는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이미 독 안에 든 생쥐인 셈. “다 챙겼다.” “그럼 어서 가지.” 침낭을 비롯해 전부 배낭에 쑤셔 박고서 놈을 추격했다. 전원이 들어서자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석문. 나는 방패로 앞을 막은 채 선두에서 계단을 타고 올랐다. ‘눈빛을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위로 도망친 건 아닌 것 같던데…….’ 조금은 긴장이 됐다. 놈이 대체 뭘 노리는 걸까? 당장 짚이는 부분이 전혀 없기에 더욱 주변을 경계하며 위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계단이 끝났고. 열린 문 너머로 텅 빈 다음 스테이지가 보였다. 아니, 텅 비어 있다고 하기엔 조금 그런가? ‘씁, 이건 예상 못했는데…….’ 약 40평 규모의 석실. 그 중심부에서 시체 한 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 콰앙! 일행 모두가 석실에 진입하자 문이 닫혔다. 그리고 몬스터 무리가 소환됐다. “탐지 마법에는 안 잡히나?” “네.” “근처에 놈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싸워라.” 우리는 일단 수비 진형을 유지하며 몬스터들을 정리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6분 안팎. 전투가 종료되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비요른, 저 시체…….” 미샤가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는 알 거 같았기에 문제는 없었다. 진짜냐는 거겠지. 나는 전문가를 호출했다. “레이븐.” “가짜 같은 게 아니에요. 마력의 잔재가 느껴져요.” “쉽게.” “방금 죽은 시체란 뜻이에요.” “혹시—” “다른 사람 시체일 리도 없어요. 희미하지만 마력이 뿜는 파장이 완벽하게 일치해요.” ……그래, 그런 거구나. ‘니미럴.’ 놈이 자결했다. 서로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그 사실이 나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보면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비밀 집단에 소속된 대원이 포로가 되기 전에 독약을 먹는 그거.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생각도 못했네.’ 지금껏 많은 씹새끼들을 만났지만, 다들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 했다. 이렇게 곧장 도망쳐서 자결한 케이스는 처음. 심지어 제대로 된 싸움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일단 확인을 해봐야겠군.” 나는 천천히 다가가 가면을 벗겨냈다. 다만, 성별도 종족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얼굴 근육이 전부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던 탓이다. 이건 뭐 달걀귀신도 아니고. “얀델 씨, 혹시 옷도 벗겨 볼래요?” 일단 마법사의 지시대로 시신의 옷을 벗겼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한 광경이 드러났다. “역시 몸 전체가 녹아내렸네요. 산성이나 그런 건 아니에요. 옷은 멀쩡하고…….” 레이븐은 서슴없이 다가오더니 쇠막대기 같은 거로 시체를 쿡쿡 찌르며 여기저기 확인했다. “뼈도 제대로 붙어 있네요. 머리카락도 이상은 없고요. 단백질만 분해하는 성분 같은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시체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너, 괜찮은 건가?” “네? 뭐가요?” “그때 시체골렘을 보고 토를 했던—” “아악! 그건 갑자기 영창 중에 썩은 내가 확 풍겨서 그런 거고요. 실험을 하다 보면 더 역겨운 것도 많이 봐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그렇군.” 참 외모랑 다른 성격을 지녔단 생각이 든다. 10년 차 탐험가인 곰아저씨도 고개를 돌릴 정도인데. “……얀델, 놈이 죽은 게 확실한가?” “일단은 그런 거 같은데.” “그럼 나는 저기 가서 쉬고 있지. 치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치즈?” “더 보고 있으면 치즈를 못 먹게 될 거 같다.” 나름 합당한 이유였기에 그러라고 해주자, 아이나르와 미샤도 비슷한 이유로 자리를 떴다. “치, 치즈? 그게 뭔진 몰라도 맛있을 거 같다.” “비요른? 나는 있어 봐야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뎅…….” ……그래, 고생을 여럿이서 할 필요는 없겠지. “둘 다 가서 쉬어라.” 나는 레이븐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독을 먹은 건가?” “네. 어느 연금술사가 만들었는진 몰라도, 굉장히 특이한 독이네요. 먹자마자 약의 성분이 땀샘을 통해 배출되면서 피부가 녹아내리는 방식이에요.” “자결하기 딱 좋은 독이군.” “그렇죠. 정체를 숨겨야 한다면 더욱더요.” 한결 더 찝찝함이 커진다. 이 새끼는 대체 뭐 하는 새끼였던 거지? 암만 봐도 단순 약탈자는 아닌 거 같은데. 철컥. 나는 놈이 입고 있던 장비를 벗겨냈다. 일단 전리품일뿐더러…… 혹시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신분패가 없군.” “……이상하네요.”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신분패가 없으면 도시로 나가서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으니까. ‘설마, 진짜 용살자가 보낸 새낀가?’ 지하도시에서 온 새끼라면 신분패가 없는 것도 설명이 된다. 그런 생각까지 하며 나는 놈의 확장형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나온 물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몇 가지 탐험 용품과 식량. 그리고……. “와, 이 사람 전문가인가 봐요. 무슨 수면초에 바실리스크 마비독에 별의별 게 다 있네.” 나머지는 전부 대인전용 소모품들이었으며, 그중에는 레이븐이 탐을 낼 만큼 희귀한 것들도 껴 있었다. ‘진짜 죽일 생각밖에 없는 새끼였구나.’ 대화 한 번 나눠 보지 못한 가면남이었지만, 괜히 소름이 돋는다. 4층의 특수성을 이용한 간악한 약탈 수법. 레이븐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을 치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데, 넌 그 시간에 뭘 하고 있던 거지?” “……간단하게 몸을 씻고 있었어요.” 아, 그랬댔지 참. “왜 다 깨어 있을 때 하지 않고?” “……저기요, 저 미궁에 들어온 거 이번이 두 번째거든요? 우리크프리트 씨는 만난지 한 달도 안 됐고.” 그래, 적응하는 기간이라는 거구나. 너무 똑 부러져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야 자기 모습을 인지했을까? 얇은 원피스 비스름한 옷을 입고 있던 레이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아공간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다음부터는 말해라. 천막이라도 쳐주던가 할 테니.” “됐어요. 이제 탐험가가 됐잖아요? 그런 거로 유난 부릴 생각 없어요.” “그렇다면야.” 이후 레이븐과 시체를 조사하며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눠 봤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따라서 푸딩이 된 가면남 위에 천을 덮은 뒤, 다 같이 한쪽 구석에 모여서 잠이나 마저 잤다. 아, 물론 혹시 모르기에 불침번은 서기로 했다. 첫 번째는 나였고. “…….” 정적 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고 있자니,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븐이 있는 침낭이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깨워 줘야 하나 싶던 차에 레이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얀델 씨.” “깼나? 걱정 말고 마저 자라. 여긴 내가 지키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해보라고 말하자, 레이븐이 약간의 텀을 두고서 겨우 운을 뗐다. “제가 그때 탐지 마법을 안 썼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평소의 당당하던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나는 깨달았다. 암만 침착하게 행동하고, 그다음에도 감정을 잘 추스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들.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솔직한 대답을 원하나?” “네.” “운이 나쁘면 전부 죽거나, 운이 좋으면 한두 명 죽고 끝났을 거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원래…… 탐험이 이런 거예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어디서 좆같은 놈을 만날지 모르는 것. 내 목숨이 어느 날 사라질 수도 있는 것. 그게 바로 탐험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 마라. 매번 힘들고 끔찍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날 팀 반푼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처음 약탈자와 만나고 풀이 죽었던 드왈키. 그런 녀석을 위해 로트밀러가 보여 주었던 3층의 아름다운 풍경. “선배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마력 과포화 현상이라고 하던데.” 레이븐이 피식 웃으며 짧게 읊조렸다. 이게 정통 마법사의 감성인가도 싶지만……. “그래도 다음번에는 저도 꼭 보고 싶네요.” “그래, 다음엔 12시가 되기 전에 깨워 주마.” 머지않아 레이븐의 침낭에서 조금은 편안해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8일 차 날이 저물었다. 165화 탐험 (4) 200만 스톤 상당의 확장형 배낭. 강철제 단검 및 잡다한 장비. 몬스터보다는 사람에게 효과적일 소모품이 한 보따리. 그리고……. “그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돌처럼 내리앉은 찝찝함 한 스푼. 이름도 알 수 없는 가면남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평범한 약탈자는 아닌 거 같당. 혼자 다니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에 그것도 그렇고…….” 상황이 불리해지자마자 자결을 택한 가면남. 그 누가 봐도 일반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그만 신경 써라. 이제 와서 궁금해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이미 진실은 어둠 속에 파묻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챙길 걸 챙겨 가던 길을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게 탐험가란 족속이잖아? “비요른. 이거면 솜사탕이 몇 개냐?” 아이나르가 군침이 싹 도는 눈으로 물었고, 내가 대답하려는 차 레이븐이 입을 열었다. “다 합치면 350만 스톤 정도가 되겠네요.” “……이런 쪽에도 식견이 있나?” “정확한 건 도시에서 팔아 봐야 알겠지만, 오차는 얼마 안 될 거예요. 예전에 일반 감정사 자격증을 따뒀거든요.” 음, 그런 것도 있구나……. 자세히 물어보니 특수 감정사랑은 다른 거였다. 스킬이 아니라 순수 지식만으로 가치를 판별할 수 있어야 딸 수 있다던가? “얀델 씨도 나중에 시간 나면 공부해 보세요. 이것만 보여 줘도 괜히 기싸움 하면서 흥정할 필요가 없거든요. 거래 중개인 자격증은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괜찮다. 나는 기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어서.”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기 전에 말을 끊고 탐사를 재개했다. 진행 방식은 팀 반푼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혜의 계단을 1순위, 용기의 계단을 2순위로 택하며 탑을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으, 또 온종일 미로에서 헤매는 거냥?” “전문 탐색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 지혜의 계단을 택할 때마다 길을 찾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으나,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야 시어머니가 옆에 붙어 있거든. “4시간 34분.” “4시간 11분. “3시간 59분.” 미로가 끝날 때마다 시간을 재는 레이븐. 그래도 다행히 위로 올라갈수록 기록은 차차 줄어들었다. 길잡이 역할도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긴 덕분이다. 뭐, 로트밀러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4시간 35분. 이번에는 갑자기 확 늘었네요?” “……아이나르가 함정을 밟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참작.” 9일 차, 10일 차, 11일 차……. 이후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12일 차부턴 우리도 그냥 불침번 없이 잠을 잤다. “오늘도 불침번을 정할 거냥?” “……낭비일 거 같군.” “후, 그 망할 놈 때문에 이게 뭔지 진짜. 이건 너무 선 넘는 짓 아니냥?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서 기습이라니…….” 성역이 침범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개하는 미샤. 사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던 게 여기였는데. ‘니미럴.’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탐사는 무탈하게 진행됐고, 16일 차가 되었을 땐 100스테이지에 도달했다. 이제부터는 5층으로 향하는 포탈을 수색하는 것도 가능해진 셈. “2시간 41분이라……. 진짜 많이 빨라졌네요.” 매일 시어머니처럼 굴던 레이븐도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참고로 이는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사실 나는 알고 보니 길잡이 천재였던 건가?’ 죽을 둥 살 둥 해도 3시간의 벽은 두터웠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서 마의 구간을 넘어 기록을 단축할 수 있었다. 함정은 부수는 쪽이 쉽고 빠르다. “아 참, 얀델 씨. 팀에 전문 탐색꾼이 있을 때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다고 했죠?” “12일 정도가 걸렸다.” “나흘 차이면 나쁘지 않네요. 탐색꾼이 빠진 조합인 만큼 5층에서는 훨씬 편할 테니.”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탐색꾼의 부재로 나흘을 손해 봤지만, 우리는 팀원 전부가 전투 캐릭인 구성 아닌가. 전투에서 만회하면 된다. 하지만……. ‘후, 그냥 좀 칭찬해 주면 안 되나?’ 그런 불만이 속에서 맴돌던 때였다. 미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비요른, 고생 많았당. 진짜 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마 바바리안이 길잡이를 하는 팀은 우리밖에 없을걸?” 역시 너밖에 없구나……. “크흐흠.” 미샤의 말에 왠지 뜨끔했는지, 곰아저씨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인도자면서 바바리안에게 길잡이 역할을 맡긴 게 스스로도 무안했던 모양. “그럼 이제 내가 나설 때군.” 나는 순순히 핸들을 넘겼다. 5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순서대로 문을 열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어느 문을 열면 되나?” “저쪽 문이다.” 인도자가 사기인 이유다. 감각계 스탯이 일정 수치를 넘기지 않더라도, 타고난 재능 하나로 포탈의 마력을 인지할 수가 있으니.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 그렇게 곰아저씨를 나침반 삼아 탑 어딘가에 숨어 있을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문을 열고 시련을 깨고의 반복. 그렇게 하룻밤을 더 보내고 탐사를 이어가 도합 10개의 문을 더 열었을 때였다. “드디어 마지막 문이다.” 우리는 포탈이 있는 스테이지 앞에 도달했다. 어느덧 17일 차의 끝을 바라보는 시각. 곧 야영을 할 시기였기에, 일단 쉬었다 내일 문을 열고 들어갈까도 싶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이 더 집중이 잘될 거 같은데요.” 아침에 취약한 레이븐의 특성을 배려해 오늘 진행을 하기로 했다. 포탈방은 보스방이기도 하니까. 마법사의 컨디션이 좋을수록 좋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는 무조건 5등급 몬스터가 나온다.” “그 뱀파이어 같은 몬스터 말인가.” 아이나르가 흥분과 기대로 가득한 눈빛으로 대검을 쥐었다. 무력했던 그때와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어서 확인하고 싶은 듯하다. 피식. 왠지 웃음이 나왔다. 원래는 긴장을 풀지 말라고, 여기까지 도달한 졸업 지망생들의 생환 비율이 5할도 안 된다고. 그런 말을 덧붙일 생각이었지만……. “저기,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딱히 의미는 없겠지. 바바리안답지도 않을 테고. “까먹었다.” “네?” “얼른 조지러 가자.”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다음 스테이지로 향했다. 중심부에 익숙한 비석 하나가 박힌 석실. 다섯 명 모두가 안에 들어서자 문이 닫히며 몬스터가 소환됐다. [그아아앍—!!]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나왔다. 과연 어떤 놈이 나오려는가 싶었는데. “트롤이당!” 그래, 얘 정도는 나와 줘야 졸업하는 기분이 들지. *** 트롤. [던전 앤 스톤] 1년 차쯤 됐을 때 내 키보드를 박살내게 만들었던 녀석이자……. 팀 반푼이 시절 우리를 전멸 위기로 몰아넣은 전적이 있는 바로 그 새끼. “왜곡 마법부터 걸까요? 트롤의 부산물들이 그렇게 비싸다던데.” 거, 얘도 간담이 참 세다니까. 5등급쯤 되면 피어도 상당할 텐데. “됐다. 어차피 비싼 건 정수도 마찬가지니.” “그렇다면야.” 나와 레이븐이 짧게 말을 주고받던 그때. 쿠웅-! 트롤이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발을 뻗었다. 따라서 나도 탱커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지면을 박찼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한순간에 줄어든 체급 차이. 이내 거리마저 줄어들자 트롤이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거대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근데 오우거 정수를 먹고 와서 그런가? 영 시원치가 않다. ‘방패도 멀쩡하고 말이지.’ 주먹을 받아낼 때마다 우그러졌던 라이티늄제 방패 역시 이번에는 끄떡도 없다. 6단계 각인 효과 [합일] 덕분이다. 이제 내가 걸친 장비는 스탯의 총합에 비례해 성능이 강화되니까. 그래, 이걸 찍으려고 내가 얼마를 처발랐는데! “베헬—라아아아아아!!” [야성분출]로 스탯을 뻥튀기한 뒤, 메이스를 힘껏 내리쳤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목표 타격 지점은 대가리. 다만 놈이 몸을 비트는 탓에 거대 메이스는 놈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까직! 듣기 좋은 타격음을 내며 기형적으로 내려앉은 어깨. 고작 한 방에 탈골이 된 것이다. 예전엔 살을 다 발라놓은 관절을 부수는 데만 여섯 번을 내리쳐야 했건만. [그아아앍—!!] 물론, 치유력의 대명사인 트롤답게 몇 초도 안 돼서 뼈가 도로 붙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내 전투력 측정은 끝났고. ‘한번 봐볼까.’ 나는 방어에만 전념하며 팀원들을 관찰했다. 일단 원년 멤버인 미샤부터. 그때 이후로 새로운 정수를 흡수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서걱-! 휘둘러진 검이 트롤의 가죽을 너무도 쉽게 베어낸다. 현질의 힘이다. 무려 1,200만 스톤이나 주고 구매한 아이릴제 장검 아닌가. 이 정도도 못 해주면 가서 환불 받아야지. “베헬—라아아아아!!” 아이나르가 내지른 함성이었다. 먼저 활약한 미샤가 부러웠는지, 즉시 전열에 참가해 대검을 휘두르는 아이나르. 후우웅-! 검의 궤적에 따라 강한 풍압이 일며, 잔상이 피어난다. 아, 잔상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아이네르 프넬린이 [거듭베기]를 시전했습니다.」 장로에게서 계승 받은 4등급 정수의 액티브 스킬. 효과는 간단하다. 한 번 벴을 때, 두 번 벤 효과를 입힌다. 서걱! 서걱! 아, 물론 트롤을 상대로는 효과가 미미했다. 월등한 근력에 대검의 무게가 더해졌음에도 3cm 가량밖에 파고들지 못한 대검. 아이나르의 스킬이 [거듭베기]뿐인 탓이다. 평타로는 제성능을 내기 어려운 스킬이니까. “이놈 피부가 질기…… 아악!” 아이나르가 트롤의 주먹을 허용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금방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입가에서 피가 흘러 내린다. 장기가 다친 모양. “베헬—라아아아아!!” 다만 아이나르는 포션을 먹고 뒤에서 쉬는 대신 재차 달라붙어 대검을 휘둘렀다. 고집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번엔 대검에 붉은빛이 어려 있었으니까. 핏빛성채에서 얻은 본 나이트의 액티브 스킬. 「아이네르 프넬린이 [생기흡수]를 시전했습니다.」 「생명체에게 피해를 입힐 시 일시적으로 재생력이 상승합니다.」 아이나르는 적을 때리면 피가 찬다. 서브 딜탱으로 두기에 더없이 훌륭한 자질. [생기흡수]에 [거듭베기]를 같이 쓰니 칼질 몇 번에 아이나르가 원상태를 되찾았다. ‘미샤보다 딜을 낮지만 탱킹은 훨씬 잘 된다 이거지.’ 둘의 전투를 잠시 지켜보던 나는 장점과 단점, 그리고 앞으로 보충해야 할 점들을 체크했다. ‘아이나르는, 얼른 쓸 만한 공격기부터 하나 구해다가 먹여야겠네. 미샤는 짐승의 피를 더 먹여서 영혼수 레벨부터 끌어 올려야겠고.’ 그런 생각을 하며 트롤을 대충 상대해 주고 있던 때였다. 곰아저씨가 뒤에서 물었다. “우리도 이제 껴도 되나?” “아, 설마 기다려주고 있던 건가?” “저기 두 아가씨가 얼마나 잘 싸울지 궁금해서 말이지.” “나는 아가씨가 아니다!!!” 아이나르의 외침이야 어쨌든, 내가 승낙의 말을 하자 곰아저씨도 참전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철웅 이라둔을 소환했습니다.」 다만, 앞 라인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라 판단했을까? 곰아저씨는 영혼수를 보디가드처럼 뒤에다 소환한 뒤 본격적으로 석궁을 쏘았다. 푸슉! 푸슉! 푸슉! 한 번 쏘아질 때마다 거대한 파공음을 내며 트롤의 몸 깊숙이 박히는 화살. 명중된 부분에서도 노련함이 느껴진다. 팔꿈치나 무릎 같은 관절에 박아 행동에 제약을 주는 공격 방식. 서걱-! 미샤와 아이나르가 힘을 합쳐 트롤의 팔을 베어냈다. 그리고 시작된 [초재생] 패턴. 레이븐이 미리 ‘악화’ 마법을 걸어뒀기에 재생 속도는 느릿했다. ‘이제 더 볼 것도 없겠군.’ 내가 메이스로 트롤의 머리를 뽀개려던 차. “그만!” 곰아저씨가 나를 제지했다. “세 번째 아가씨도 활약은 해야지.” “……아가씨라고 하지 말아 주실래요?” 이내 레이븐이 툴툴거리며 완드를 휘둘렀다. 드왈키처럼 피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배려가 없다기보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에 가깝다. 「아루아 레이븐이 5등급 공격 마법 [뇌창]을 시전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위치를 지그재그로 피해가며 쏘아진 백색의 번개. 눈앞이 번뜩였다. 소리가 들려온 건 그다음이었고. 콰콰콰쾅-!! 인지를 했을 땐 이미 트롤의 머리통이 날아가 있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지는 트롤. 아, 물론 이번에도 정수는 없었다. *** 트롤을 처치했다. 그것도 가지고 놀듯이 아주 쉽게. 물론, 그렇다고 5층에서 위험할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5등급 몬스터가 여럿이서도 나오는 게 그곳이니까. 후우우웅-! 트롤이 사망하면서 개방된 포탈. 그러나 우리는 당장 5층에 올라가지 않고 야영을 했다. 어차피 올라가서도 자야 할 시간이니 하루라도 더 편하게 자는 게 낫다는 판단. ‘이제 진짜 시작인가.’ 불안과 기대로 잠시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확히 말하자면 18일 차 오전 7시경. “와, 정말 내가 5층에도 가보는 구낭…….” 짐정리를 끝마친 우리들은 포탈에 들어섰다. 「5층 대마경에 입장했습니다.」 이로써 초반부는 졸업을 한 셈이니. 진짜 탐험을 하러 갈 시간이다. 166화 대마경 (1) 5층 대마경. 서서히 팀 단위에서 한계가 오며, 클랜 규모의 사냥이 원활히 이뤄지는 계층.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어? 비요른, 너도 느꼈나? 영혼의 격이 올라간 거 같다!” 아이나르가 곧바로 유난을 떨어왔지만, 레벨 업은 아니다. 단지 영혼력이 증가했을 뿐. 「업적 달성」 조건: 5층 도달. 보상: 영혼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20 상승합니다. 근데 이게 되는 거면, 그동안 조건을 만족한 다른 업적들도 전부 깨진 건가? 그럴 거 같기는 한데, 확신은 못하겠다. 거, 스탯 창을 볼 수가 있어야지. 정신력이란 게 확 체감되는 스탯도 아니고. “진정하세요, 아이나르 씨. 승격은 아니고, 세례라고 불리는 현상이에요.” 아무튼, 설명을 좋아하는 레이븐이 나 대신 아이나르에게 친절히 알려 줬다. 그것도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이곳까지 도달한 탐험가에게 미궁이 축복을 내려주는 것. 세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마법사들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오, 그렇군! 뭔가 낭만적이다!” 미신을 좋아하는 아이나르는 마법사들 생각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 다만 듣고 있던 미샤 쪽에서 궁금증이 생겼을까? “그럼 정수를 못 먹는 마법사들은 세례를 받아 봤자 의미가 없는 거 아니냥?” “아뇨. 우리는 마력이 증가해요. 지금 보니까 그 양이 상당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들 말대로 진작 와보는 건데.” “으응, 그렇구낭…….” 미샤가 말꼬리를 흐렸다. 다만, 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항상 마력이 부족했던 드왈키가 떠오른 거겠지. “아, 신관은 신성력이 늘어난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드리자면—” 레이븐의 설명이 끝없이 길어지기 전에 나는 말을 잘랐다. “그것보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네?”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갸웃하는 레이븐. 반면 5층에 자주 와봤던 곰아저씨는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군.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그래, 역시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거구나. 나는 쓱 주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5층 대마경의 스타트 포인트는 안전지대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캠핑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텐트가 뭐 이리 많아?’ 이쯤 되면 거의 하나의 마을 규모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꽂힌 깃발들을 보니 반 이상이 클랜에 속한 탐험가들인 듯한데……. ‘뭐지? 왜 얘네가 여기 머무르고 있는 거지?’ 이곳을 베이스로 삼는 탐험가들은 대부분 팀 단위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해야 하나? 인원수가 많은 클랜은 5층 한복판에서도 알아서 자기들끼리 잘만 야영을 한다. 그런데……. “비요른, 다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거 같은데……. 괜찮은 거냥?” 5층 탐험가. 그것도 클랜에 속할 정도로 수준 있는 탐험가. 그들이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쑥덕인다. 텃세라도 부리려는 건 아닐 테고. 진짜 뭐지? 그 이유를 고민하던 때였다. “어이!” 저 멀리서 한 사내가 손을 흔들며 이리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브만! 자네, 맞지?” “……카르알?” “반갑네. 드디어 생각을 고쳐먹고 팀을 구한 모양이지?”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 그나저나 너는 아직도 거기에 몸을 담고 있는 거냐?” “남자는 의리 아닌가. 뼈를 묻어야지.” 꽤나 친분이 깊은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곰아저씨. 이내 내 시선을 깨닫고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쪽은 카르알 라르베거. 동료였었다. 날 버리고 지 혼자 클랜에 쏙 들어가기 전까진.” “내가 자네를 언제 버렸다고? 같이 가자고 그렇게 간청했지만 무시한 건 자네 아닌가.” 우리를 대할 때보다 가벼운 말투를 쓰는 곰아저씨를 보니 친한 사이긴 한 모양. 마침 잘 됐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오호라, 자네가?” 작은 발칸이란 이명을 들어 봤는지, 흥미롭단 눈빛을 하는 카르알. “아직 1년 차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왠지 오늘따라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군.”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가 궁금한지는 알 거 같네. 왜 한창 위로 향하고 있어야 할 우리가 여기 남아 있는지 알고 싶은 거지?” 음, 정확히 말하자면 왜 멀리서 꼬나보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네. 우리만 해도 합류하기로 한 이들 중 절반이 넘게 올라오지 못했거든. 일정 전체가 중단된 셈이지.” 절반이 올라오지 못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직감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던 차였다. “그래서 묻겠네마는.” 카르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꺼냈다. “혹시 자네들도 4층에서 습격을 당했나?” 그 가면남 새끼……. 우리한테만 나타난 게 아니었구나. ***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솔직하게 습격을 받은 일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카르알이 그때의 상황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우리는 솔직히 대답해 주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래, 탐지 마법으로 발견했단 말이지…….”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처음에 탐지 마법을 돌렸을 때는 아무것도 없다고 나왔거든요.” 이후 정체가 발견되자 가면남이 자결을 택한 것까지 말해 주자 카르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허, 자결이라니 이 무슨…….” “혹시 짚이는 놈들이 있나?” “아직은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라는 것밖에. 여하튼, 얘기해 줘서 고맙네.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다면…… 아브만을 통해 소식을 전해주지.” 이내 카르알은 클랜에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떠났다. 따라서 우리도 잠시 대화 시간을 가졌다. “……역시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었네요.” 가면남은 여럿이었다. 그리고 4층 이상의 탐험가들에게 무차별적인 테러를 가했다. 습격을 받고서도 살아서 올라온 팀은 우리가 세 번째라던가? 확실히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천공의 탑에서까지 불침번을 세우는 자들은 없으니까. “우리 정말 운이 좋았던 거구낭…….” 실제로 살아남은 이들도 팀원이 죽거나 크게 다치고 겨우 가면남을 해치웠다고 한다. 미리 발견을 해서 자결까지 몰고 간 케이스는 우리가 최초. 우리를 향하던 시선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처음엔 오매불망 기다리던 자기네 일원인가 기대하며 쳐다봤을 것이다. 그다음엔 우리도 습격을 받았을지가 궁금해졌을 테고. “얀델 씨, 아까 그분이 한 말이 정말일까요? 이번 습격으로 최소 300명 이상이 죽었을 거라는 거…….” “글쎄, 정확한 건 도시로 돌아가 봐야 알겠지. 살아남았지만, 탐색꾼이나 인도자가 죽어서 4층에 체류한 자들도 있을 테니까.” “아, 그렇죠…….”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큰 의미는 없다. 수백 명의 탐험가가 죽었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것도 1층, 2층에서 사냥하는 하위 탐험가가 아니라 십수 년간 탑을 오른 베테랑 탐험가들이. “후우…….” 이 거대한 불씨가 두렵게 느껴지면서도 조금은 안도감이 생겼다. 그래도 용살자가 보낸 건 아니었구나. 지역장 새끼나 용인족에서 보낸 암살자일지 모른단 망상까지 했었는데. “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인 걸까요…….” 나는 이쯤에서 말을 아꼈다. 왕가에서 노아르크 토벌 계획을 세우고 있단 것은 아직 공표되지 않은 정보. ‘역시 이번 일은 그에 대한 선전포고 같은 거겠지.’ 나는 내심 확신했다. 이번 테러의 범인이 노아르크의 탐험가들일 거라고. ‘이거 아무래도 일이 커지겠는데.’ 두통이 밀려든다. 왕가와 노아르크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벌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토벌이 실패로 끝났을 때.’ 노아르크가 문을 걸어 잠그며 전쟁이 장기화 됐을 때. 그때는 나도 좆된다. 분명 그다음 전장은 필시 미궁이 될 테니. ‘노아르크든 라프도니아든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석이 필요하니까.’ 니미럴. 왜 나는 하필 이런 시기에 게임 속으로 끌려온 걸까. 차라리 1년 정도만 빨리 왔으면 더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어……. 근데 내가 신전에 대신관 할아버지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으면 전쟁도 안 벌어진 거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털어냈다. 이게 왜 내 잘못이야. 전부 용살자 그 새끼 잘못이다. 원래는 삼대 종교 모두가 왕가를 견제하려 중립 기어를 박고 있었지 않은가. 그러게 누가 대신관을 납치해서 노예로 부려 먹으래? “비요른?” “아, 잠깐 생각 좀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냥?” 상념을 끝냈을 땐 팀원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야 아직 얘네들은 단순 테러로만 보고 있으니까. 나만큼 머리가 복잡하진 않을 것이다. “예정에 변동은 없다. 탐사를 재개한다.”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고, 레이븐이 조심스레 우려를 표했다. “그런 놈들이 미궁에 와 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다. 클랜이 이렇게 모여 있는데 생각이 있으면 여기서 뭔 일을 벌이진 못하겠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가장 안전하다. 다음 달에는 5층에서도 땅굴 새끼들이 활개를 쳐댈 수도 있으며……. 어쩌면 미궁 출입이 막히는 일도 가능할 터. “자, 그만 생각하고 우리는 돈이나 벌러 가자.” 30일 차가 끝나면 5층도 폐쇄가 되니, 바짝 벌어둬야 한다. 앞으로 몇 달 쉬게 될지도 모르지 않나. *** 5층 대마경의 구조는 간단하다. 쟁반 모양의 넓적한 바위 하나 떠올린 다음, 네 갈래로 뻗은 미끄럼틀을 상상하면 된다. 문제는 그 미끄럼틀이 수십 갈래로 나눠지고, 중간에 끊어져 다른 길목과 이어지는 등의 지랄이 나있단 거겠지만. 화르륵. 이내 정육점처럼 빨간 조명이 내리쬐던 스타트 포인트를 벗어나자 미궁의 어둠과 후끈한 열기가 우리를 반겨왔다. 네 가지 길목 전부가 이런 건 아니고……. 우리가 택한 루트의 특성이다.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지옥불 협곡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잿불낙인]이 부여됩니다.」 「모든 소모 값이 1.5배 상승하며, 화염 내성이 -30 하락합니다.」 모든 소모 값. 쉽게 말해, 영혼력이든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기력이든 평소보다 1.5배의 양을 소모한다는 뜻. 그래도 나쁘진 않다. 다른 루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니. 「아루아 레이븐이 8등급 부여 마법 [냉혈]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화염 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냉기의 마력이 혈관에 스며들며, 달아오르던 몸이 차갑게 식혀진다. 그 상태로 우리는 천천히 탐사를 이어갔다. 아직 몬스터와는 조우하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걷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굉장했다. ‘이건 뭐 구름다리도 아니고.’ 약 10m 정도 너비의 길. 시야를 가로막는 미궁의 어둠. 그리고 강한 열기를 뿜어내는 낭떠러지. “아이나르, 아래는 그만 내려다봐라.” “나, 난 그냥 아래엔 뭐가 있을까 싶어서…….” “용암이 흐른다고 들었어요.” “용암? 그게 뭐냐?” “어,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이나르의 호기심에 또 착실하게 대답해 주는 레이븐. 아이나르는 어려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경청했다. ‘이런 면에선 죽이 잘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팀장으로서 나름 흐뭇한 광경이었으나, 그저 지켜볼 수는 없었다. “아이나르, 레이븐은 그만 귀찮게 하고 앞을 제대로 봐라.” “아, 알았다!” 풀어지는 긴장을 재차 조여주며 경사진 길을 내려간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왔고, 수첩을 꺼내 도량법을 무시한 지도를 그렸다. 안전지대를 베이스 삼아 근처에서 깔짝거리며 탐사를 이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혹시 뭔가 일이 생겼을 때 돌아올 수는 있어야 한다는 판단. 그렇게 세 번의 갈림길을 지나쳐, 로트밀러의 위대함을 몸소 깨달아 가던 찰나였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흔들리는 지면. 이내 용오름친 불기둥이 우리의 옆을 스쳤다. 그리고……. 투두두둑. 작은 불씨들이 흩날리며 앞으로 떨어지더니, 오밀조밀 뭉쳐 형상을 갖췄다.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불로 뒤덮인 짐승. “이프리트네요.” “시작부터 5등급 몬스터가 둘이군.”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레이븐이 ‘냉기부여’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프리트는 영체류라 물리 딜 면역이거든. 「캐릭터의 무기에 냉기 피해가 추가됩니다.」 메이스 위로 감도는 서릿빛. 나는 거대화를 한 상태로 달려나가 한 놈을 메이스로 후려쳤다. 손맛은 시원찮았다. 퍼억-! 트롤의 어깨를 일격에 박살냈던 메이스인데, 끄떡도 않는 이프리트. 이래서 영체류가 싫다. 아예 물리력을 동급의 타속성으로 바꿔 주는 ‘성질변환’ 마법이면 모를까. ‘냉기부여’는 추가 피해량만큼의 대미지밖에 줄 수가 없으니까. “아이시르 파이스트.” 레이븐의 6등급 저주 마법 ‘급속냉동’. 그리고 미샤의 [얼음분쇄] 콤보. 결국 이번 전투는 내가 버티는 사이 미샤와 레이븐 둘이서 캐리하는 구도로 흘렀다. 「이프리트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곰아저씨는 철웅을 소환해 탱커 보조라도 했지만, 아이나르는 그냥 지켜만 봤다. 물리 전사의 숙명이었다. 데구르르. 이프리트가 사라진 자리에 마석이 떨어졌다. 역시나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1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드디어 5레벨이 되었다. 이것도 정수가 나와줘야 의미가 있겠다마는. [끼에에에엑!!] 그럼 이제 남은 몬스터는 하나. 소중한 동료를 잃은 불꽃의 짐승이 우리를 보며 포효한다. 그 찰나였다. “……이프리트네요?” 맞은편에서 5인조 탐험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을 끝마치고서 안전지대로 향하는 자들인 듯한데……. 이건 또 어디서 배워먹은 개매너일까. “딱 봐도 5분은 넘게 걸리겠네.” “아,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우리가 잡죠?” 거대한 물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이프리트의 몸을 적셨다. 순식간에 잦아진 불길. “이게 무슨 짓—”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이어서 쏘아진 화살이 이프리트의 머리를 관통했다. 솨아아아아. 빛이 되어 사라지는 마지막 한 마리. 이내 녀석이 세상에 남기고 간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수당!” 5등급 몬스터의 정수가 나왔다. ‘니미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왜 하필 이럴 때만? 167화 대마경 (2) 붉은빛의 정수가 둥둥 떠오른 그 순간. 얼른 돌아가서 쉴 생각으로 가득하던 맞은편 탐험가 무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마치 거울과도 같았다. 지금 우리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 잠시간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피차 이런 쪽으로 판단이 빠른 탐험가답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상대 쪽 망치 전사. “우리가 잡은 몬스터에게서 정수가 나왔군?” “저기, 넬보 씨…….” “마법사님은 가만 있으쇼.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라니까.” 그래, 이 새끼가 리더인 거구나. 놈은 이번 사태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할지 이미 가닥을 잡은 모양이었다. 정수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피식.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고작 몇 분을 못 기다려 전투에 끼어든다는 비매너짓을 했던 새끼들 아닌가. 나는 짧게 읊조렸다. “전투 준비.” 팀원들보다는 상대 쪽에 하는 말에 가깝다.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린다면 피를 볼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 “저, 얀델 씨…….” 레이븐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비쳤다. ‘저기, 넬보 씨…….’ 라며 망치 전사에게 뭐라 말을 붙이려던 저쪽 마법사와 비슷한 상황. 확실히 마법사들은 이런 쪽에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다들 유복하게 자랐을 게 분명해서 그런가? “당황하지 마라. 인간형 몬스터가 다섯 마리 더 나왔을 뿐이니.” 나는 한마디로 상황 정리를 끝냈다. 그러자 저쪽도 내가 리더임을 인지했을까? 망치 전사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넌, 그때 그놈……?” “날 아나?” 망치 전사는 대답 대신 투구 뚜껑을 위로 올렸다. 근데 문제는, 그래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내가 얘를 만나 본 적이 있던가? 저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눈썹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 영문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흘기자, 망치 전사가 답답하다는 듯 투구를 아예 벗었다. 번뜩-! 허공에 떠 있는 빛구체 마법에 의해 반짝이는 새하얀 두피. 그제야 기억이 났다. “……빡빡이!” 지난날 지역장과 협상을 하러 갔을 때, 만났던 그 녀석이다. 나를 잡아다 공적치 파밍을 하려 했었지. 설마, 투구를 써서 위장하고 있을 줄이야. “푸훕!” 왠지는 몰라도 상대측 팀원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수치스러웠는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민머리. “……죽고 싶나, 야만인?” 빡빡이가 다시금 투구를 쓰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널 지켜 줄 지역장은 없으니까.” 얘는 또 뭐래. 지역장 새끼랑 내 관계를 알면 이런 소리는 절대 못 할 텐데. 뭐, 상관은 없다. “너야말로 이쯤하고 꺼지는 게 좋을 거다. 그 머리통마저도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래, 해보겠다 이거군?” 내가 한 걸음 내딛자, 빡빡이도 지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디딘다. 정수를 사이에 두고 좁혀지는 거리.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협곡의 열기조차 식힐 수 없는 냉기가 감돈다. 지이익. 앞에선 빡빡이네 궁수가 시위를 당겼고. 철컥. 뒤에선 곰아저씨가 석궁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 “…….” 팽팽하게 당겨진 실과도 같았다. 실이 툭하고 끊어지는 순간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겠지. 그걸 나도 이 빡빡이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빡빡이, 지금 물러나면 마석 정도는 주겠다.” “야만인이라 셈이 어둡군. 몬스터를 잡은 건 우리다. 당연히 마석도 정수도 모두 우리 거지.”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 5층까지 올라온 상위 30%의 탐험가 팀. 정수를 얻는다 한들, 그 과정에서 팀원 중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게 더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꽈악. 무기를 쥐며 오히려 거리를 좁혀간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대머리 새끼가 욕심만 많아 가지고.’ 관례상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는 게 맞다. 아마 놈도 처음엔 그 관례를 따를 생각이었을 거다. 마석 하나야 쿨하게 넘겨주려 했겠지. 전투에 끼어든 것도 애초에 그저 빨리 쉬러 가고 싶던 마음의 발로였을 테고. 문제는 거기서 정수가 나왔단 거지만. ‘……진짜 싸우는 수밖에 없는 건가?’ 슬슬 나약한 마음을 버리고 최악을 가정했다. 현재 구도는 일종의 치킨 게임과 비슷하다. 먼저 물러나는 쪽이 패배. 모두가 승자가 되고자 한다면 파국뿐이다. “빡빡이, 마지막 경고다.” 말만 씨불이는 건 그리 선호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했다. “거, 너무 무서워서 지리겠는데?” 돌아온 대답은 거절. 이로써 나는 결심을 끝마쳤다. 정 원한다면 그 끝을 두 눈으로 봐주는 수밖에. 그 정도 각오조차 없으면 이 비정한 탐험가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렇게 된 거, 일단 정수는 내가 먹어야겠네.’ 원래 이프리트의 정수는 시험관에 담아 판매할 계획이었다. 나도 미샤도 아이나르에게도 그리 잘 어울리는 정수는 아니니까. 하지만. 터벅. 정수야 먹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 것. 역시 저 새끼한테 줄 바엔 내가 먹는 게 낫다. 아직 정수를 지우는 비용도 얼마 안 하니, 뽕 뽑을 때까지 쓰다가 버리면 그만. 그러니, 정수를 먹은 다음에는……. ‘밀어서 떨어뜨리는 식으로 싸우자. 장비는 못 건지겠지만, 지금은 이기는 게 먼저니.’ 좋아, 얼추 생각 정리가 얼추 끝났다. 그럼 이제 실행으로 옮길 차례. 슬그머니 발을 떼며 각을 재던 차였다. “그만들 하시죠!” “그래요. 얀델 씨. 일단 무기 좀 내려놔요.” 돌연 양측의 마법사가 나서며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마법사님? 가만 있으라고 했을 텐데?” “넬보 씨, 이제 그 말투 좀 그만해요. 그런다고 별로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까.” “…….” “대답.” “…….” “자꾸 이런 식이면 다음부터는 같이 미궁에 안 들어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앳된 소년처럼 보이는 마법사의 한 마디에 즉시 꼬리를 마는 빡빡이. 어쩐지 최고존엄까칠 마법사가 계속 가만히만 있더라니. 그냥 컨셉에 맞춰 주고 있던 거였구나. 나는 혐오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빡빡이에 가오충이라니…….’ 이제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을 지경. 아무튼, 빡빡이가 무기를 내리고서 물러선 이후로는 긴장감이 옅어졌다. “로브에 그 문양. 알테미온 학파, 맞죠?” “네. 그쪽은 역시 와르톤 학파?” “후후, 맞습니다.” 와르톤 학파라면 나도 알고 있는 곳이다. 꽤 커다란 학파인 것도 있지만…… 수 속성 마법에 몰빵한다는 특이점 때문에 더욱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에프레인 벨로입니다.” “아루아 레이븐이요.” 일단 마법사들끼리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무기부터 꺼내들던 탐험가와 달리, 둘은 간략하게나마 서론 시간을 가졌다. “알테미온 마스터께선 잘 지내시죠? 1년 전에 학술회에서 뵀는데…….” “뭐, 스승님이야 평소랑 똑같으세요. 와르톤 마스터는요? 여전히 그 연구 중?” “하하, 물론입니다. 우리의 비원이니까요.” 흡사 ‘우리가 남이가!’ 하는 느낌의 대화. 마치 상류 사회를 보는 듯하다. 어차피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이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잔 거겠지. “그래서 이제 어쩔 거예요?” 이내 레이븐이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사냥 중이던 몬스터의 정수를 달라니, 억지 주장이라는 건 그쪽도 알고 있죠?” “흠, 완전히 억지는 아닌 거 같습니다마는. 관례는 결국 관례일 뿐. 일단 우리가 관여한 건 명백하니. 위원회도 탐험가 간의 개인적 분쟁이라 인정할 가능성이 큽니다.” 짐승처럼 싸우려던 우리와 달리, 대화를 통해 문제의 해결을 통해 달려가는 마법사들. “관례는 관례일 뿐이라지만, 어긴 사람을 좋게 보긴 어렵죠. 근데 고작 정수 하나로 위원회까지 가겠다니, 역시 그쪽이 포기하는 게 합리적일 거 같은데요?” “그건…….” 상대측 마법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우리 마법사가 논쟁에서 승리했다는 뜻이었다. “네, 그렇죠. 그래서 그냥 포기할 셈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짓은 마음에 안 들었고.” 이게 이렇게 풀릴 수도 있는 거구나. ‘역시 난 바바리안을 할 팔자인가?’ 나는 쥐고 있던 메이스를 내렸다. 오늘은 아니었지만, 요긴하게 쓸 날은 반드시 올 것이었다. 미궁은 그런 곳이니까. *** “베, 벨로 님?” “계속 구질구질하게 굴 거예요?” “그, 이쪽 업계에선 이쪽에 맞는 방식이 있는 건데…….” 빡빡이가 결정을 재고해 달라는 듯 쳐다봤지만, 마법사의 권위는 굳건했다. “그럼 제가 넬보 씨를 잘못 봤네요. 이건 우리 권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욕심이잖아요?” “…….” “그동안 리더로서 존중은 충분히 해드렸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래서는 약탈자들이랑 다른 게 뭐죠?” 마법사의 타당한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는 빡빡이. 별로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저 반짝거리는 머리를 박살 낼 때 손맛이 어떨지가 내심 궁금했는데. “얀델 씨, 정수는 어떻게 할 거예요?” 빡빡이가 마법사에게 혼나는 사이, 우리는 정수의 처분을 논의했다. “크흠!” 아이나르가 ‘날 좀 보소’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지만 결정은 이전과 같았다. “시험관에 담은 뒤 도시에서 판매한다.” “좋네요. 깔끔하고.” 아이나르는 추후에 더 좋은 정수를 먹일 거다. ‘애초에 당장은 정수를 먹일 돈도 없고.’ 통상적으로 팀원이 정수를 취할 시 판매가의 절반 정도를 값으로 지불한다. 뭐, 나나 미샤의 몫이야 빚으로 달아 두면 되겠지만……. 곰아저씨나 레이븐이 그러라 해줄지는 미지수. “아이나르, 기운 내랑. 저거 하나 팔면 솜 사탕이 수만 개는 될 테니까. 응?” “수, 수만 개!!?” 압도적인 단위에 아이나르가 휘청거리더니, 기운을 되찾았다. 이쪽도 나름 괜찮단 생각이 든 모양. ‘……그래 봤자 내가 빌려준 돈부터 갚아야 할 텐데.’ 아무튼, 정수의 처분 논의가 끝나자 레이븐이 시험관에 이프리트의 정수를 담았고, 우리는 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다만 여기서 그냥 지나가면 끝일 터인데. “너, 이름이 뭐냐?” 빡빡이가 내 앞에 멈춰서 묻는다. 뭐지? 밤길 조심하라는 그런 건가? 내가 쓱 내려다보자 녀석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이름 정도는 알고 지내도 되지 않냐.” 인연은 개뿔. 그래도 이름은 알려 줬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빡빡이. 녀석도 이름을 밝혔다. “멜타슨 넬보다.” 그래, 한스 넬보는 아니었구나. 덕분에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그럼 어서 가라.” 이제 와서 악수라도 하며 화해하는 것도 웃기기에 대화를 끝냈다. 씁쓸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기는 빡빡이. 놈을 시작으로 놈의 동료들도 한 명씩 우리 옆을 지나쳤다. 방패수, 검사, 마법사, 궁수 순. “…….” 내 앞을 지나치던 궁수가 날 보더니 멈칫했다. 간단한 이유다. 내가 존나게 노려봤거든. [아,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우리가 잡죠?] 이 새끼만 아니었어도 시작부터 이런 개지랄을 떨 일은 없었을 텐데. 어떤 면에선 빡빡이보다 이 새끼가 더 얄밉— “한스! 뭐 하나. 어서 오지 않고?” 이내 궁수가 내 시선을 피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나는 망부석처럼 그대로 굳었다. “…….” ……한스가 있었다. *** 21일 차 날이 밝았다. 5층에 진입한지도 벌써 나흘이나 됐다는 뜻. 그간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타고 내려가며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러는 도중에 아이나르도 4레벨이 되었고. ‘……그럼 얘는 미궁에 세 번 들어와서 4렙을 찍은 셈인가?’ 어떤 면에선 나보다도 더 한 초고속 성장. 누가 나도 버스 좀 태워 주면 좋겠는데. 아무튼, 몬스터들과 싸우며 몇 번인가 난처한 상황에 빠진 적은 있지만 탐사 자체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한스 때문에 뭔가 벌어지는 건 아닌가 했는데. ‘어쩌면 정수가 나온 거로 끝난 걸지도…….’ 희망 섞인 관측. 하나 조목조목 따져 보면 나름 그럴듯하다. 비록 다행히 잘 넘기긴 했지만, 자칫하면 5:5 캐삭빵을 뜰 뻔했지 않은가. 그러니까 쉽게 말해, 한스 효과로 정수를 드롭한 거로 끝일 가능성도 충분……. 아니, 내가 대체 뭔 생각이래? ‘빌어먹을 새끼들.’ 원래 나는 징크스를 믿지 않는다. 정말로, 한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얀델 씨, 이제 그거 그만해도 되지 않아요?” 이내 잠시 멈춰서 지도를 갱신하고 있던 차. 레이븐이 조심스레 내게 말을 던졌다. “그만하라니?”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어차피 그거 보고서는 되돌아가지도 못할 걸요?” 노력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마법사다운 대사. “…….”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걸 보고 원래 있던 곳까지 돌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그만큼 대마경의 길은 복잡했다. 단순히 여러 갈래 길만 나오는 게 아니라, 길이 끊겨서 로프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곳도 있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늘 거다. 다음에 왔을 때는 더 나아져 있겠지.” 팀 애플 나라크의 길잡이는 나다. 바바리안 전사로서 살아가고 싶었으나, 냉정한 현실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다. 따라서 이쪽도 연습을 해야 한다. 로트밀러도 처음부터 그렇게 잘했을 건 아닐 게 분명하니. “어, 그렇다면 할 말은 없는데……. 근데 안 힘들어요?” “글쎄, 귀찮기는 한데. 나름 재밌는 부분도 있다.” 재밌는 부분이 있다는 것. 대충 둘러댄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일단 이것도 스펙이라 볼 수 있기에, 성장하는 느낌이 들거든.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언젠가 마녀의 숲 때처럼 조난당하는 일이 또다시 생긴다면, 지금부터 갈고닦을 이 능력이 날 도와줄 터. ‘무엇보다, 길잡이가 되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팀을 이끄는 게 자연스러워지지.’ “그래서 오늘도 계속 내려가기만 할 거예요?”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 오크 군락지, 마녀의 숲, 강철바위언덕 등등. 3층이 여러 필드들로 구성되어 있듯, 5층에도 이름이 붙은 필드는 존재한다. 이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목들 사이에 스타트 포인트처럼 넓은 원반 형태의 지형이 나타난다. 절벽에 난 동굴을 통해 입장하는 곳도 있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필드를 세 곳 발견했다. 뭐, 세 곳 모두 임자가 있었지만. ‘사냥터를 통제하는 클랜이 게임보다 훨씬 많은 거 같단 말이지.’ 이제 막 5층에 진입한 입장으로써 굉장히 짜증 나는 부분이다. 몬스터를 잡을 능력이 안 돼서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성장이 더뎌지다니. ‘망할 현실고증 게임.’ 필드에서만 나오는 몬스터를 잡으려면 자리를 선점한 클랜에 값을 지불해야 한다. 참고로 값을 내도 경험치 수급을 위한 일회성 사냥이 전부라는데, 역시 게임으로 사람의 본성을 담아내는 건 무리가 있었을까? 게임보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몇 배는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걷어차 보라지. 그런다고 내가 이 위로 못 올라갈까 봐? 10년간 한 게임만 파며 온갖 꼼수와 숨겨진 요소를 섭렵했다. 특히 5층은 1년 넘게 진행이 막힌 적도 있기에, 구석구석까지 모르는 게 없을 정도. ‘……이만큼 내려왔으면 슬슬 그게 보일 때도 됐는데.’ 강해질 방법은 차고 넘친다. 168화 대마경 (3) 탐험가. 미궁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고 마석을 캐오는 직업군. 일반인들은 몬스터와의 전투가 이 직업군의 가장 큰 고충이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탐험가들에게 물어보면 전혀 다른 대답들이 나오죠.” 빛의 부재.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는 것. 사료 같은 식사와 쌓이는 성욕. 땀으로 찌든 몸과 더러운 잠자리. “탐사 기간이 적은 저층에서는 그나마 덜해요. 하지만 상층 탐험가일수록 전투보다 이런 부분이 더 힘들다고 답하는 비율이 높았어요.” “음, 그렇군.” “네. 대형 클랜들도 7층부터는 한 번의 원정을 끝내면 도시에서 한 달은 휴식 기간을 가지는 게 일반적일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일단 이 직업군에 속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22일 차 오후. 정확히 말하자면, 식사 시간이 되어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 잡수려던 차에 이런 말을 해오는 저의가 뭘까. 얘가 목적 없이 이러지는 않을 텐데.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해라.” 본론을 말하란 눈빛으로 응시하자, 레이븐이 어딘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은 좀 제대로 된 걸 먹죠. 육포 말고 불을 쓰는 요리로요.” 후, 그래 이게 목적이었구나.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오늘은 좀 맛있는 게 먹고 싶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짧게 고민하고서 대답했다. “좋다, 그러지.” “아무리 얀델 씨가 리더여도 팀원들의 의사는 물어봐야 하는……. 네? 뭐라고요?” “좋다고 말했다.” “어, 정말요?”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레이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긴 자기도 억지 주장인 건 알았겠지. 이곳은 4층이 아니다. 거기서야 매일 요리를 해서 먹고, 어떨 땐 보존 마법을 걸어둔 고기까지 구워서 먹었지만……. 5층 대마경은 오픈월드 구조의 계층. “진짜 그래도 돼요? 냄새가 퍼지면 몬스터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할 공산이 큰데?” “넌…….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아, 아니…… 생각해 보니까 마법으로 냄새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이제 보니 그냥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 아무튼, 요리를 해먹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초조하게 대화를 엿듣던 아이나르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마법사……?” 말 몇 마디로 내 허락을 받아낸 게 인상 깊었던 듯한데……. ‘이제 5층이니 이쪽도 개선하기는 해야지.’ 사실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제 총 탐사 기간이 한 달이나 되지 않나. 팀원의 스트레스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예민해지면 별거 아닌 거로도 날을 세우게 되니까. “그럼 칼스타인 씨, 부탁할게요. 물이라든가 불이라든가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으음, 그럼 불 좀 키워줄랭?” “이 정도면 됐나요?” 이내 우리팀 공식 요리사인 미샤가 레이븐의 도움을 받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메뉴는 고기를 잔뜩 집어넣은 토마토 스튜. “오늘도 너무 맛있다!!! 미샤!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면 안 되나?” “무슨 소리예요. 아이나르 씨, 칼스타인 씨는 제가 데리고 살 거예요.” “어, 맛있게 먹어 준 건 기쁜데, 둘 다 그건 좀…….”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힐긋 바라보는 미샤. “…….” “…….” 참고로 식사하는 동안 나와 곰아저씨는 보초를 섰다. 셋이 그릇을 전부 비울 때까지 몬스터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흐음, 정말 냄새가 거의 안 나는군? 이게 무슨 마법인가?” “공기 제어 마법이랑 연소 마법을 응용했어요. 냄새를 한곳에 모아서 불태워 버리는 거죠.” “으음, 그렇군.” 곰아저씨는 5층에서도 사람다운 식사를 할 수 있겠다며 희희낙락했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육포는 이제 정말 신물이 나거든. “자, 그럼 어서 두 분도 드세요. 이제는 저희가 보초를 설게요.” 이내 우리 둘도 자리에 앉아 그릇에 스튜를 덜어 먹었다. 바바리안과 흑곰족 마초 아저씨답게 5분이면 충분했고, 이번에도 식사를 마칠 때까지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냄새 제거 마법의 효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몬스터 수가 줄었단 말이지.’ 며칠 동안 느낀 것인데, 5층의 몬스터 수가 게임보다 월등히 적다. 물론, 짐작 가는 원인은 있다. ‘망할 클랜 새끼들.’ 대마경은 각 필드마다 자리한 거울에서 몹이 리젠 되며 협곡으로 풀려나는 구조다. 근데 클랜들이 그런 사냥터를 독점하며 리젠 되는 족족 사냥을 해대니, 밖으로 기어 나오는 몬스터가 적을 수밖에. ‘……뭐, 그 덕분에 일찍 찾기는 했지만.’ 나는 길모퉁이에 자리한 이끼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지나가며 본 여타 이끼들과는 다르다. 적색 이끼와 녹색 이끼가 반반 섞여 있다. 그리고 두 이끼가 만나는 지점에 생긴 구슬만 한 크기의 흑색 이끼. ‘문제는 이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유도하냐는 건데…….’ 고민하던 차 정면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6등급 몬스터인 ‘헬 하운드’가 여덟 마리. 호랑이 크기의 눈 넷 달린 들개를 생각하면 쉽다. 온몸이 검은 불꽃에 휩싸인 건 덤이고. [크르르르르-!!] “전투 준비.” 며칠간 지긋지긋하게 잡은 몬스터이기에 뭔가 브리핑할 것도 없이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 종료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분. “그럼 이제 더 내려갈 거예요?” 레이븐이 계획을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야영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각. 어떻게 해야 위화감 없이 이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쩝, 냄새 제거 마법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몬스터랑 싸우고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시던 순간이었다. ‘……어?’ 모퉁이에 자리한 흑색 이끼가 사라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집어가기라도 하듯이. ‘……그놈이 벌써 왔다고?’ 나는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레이븐, 뭔가 우리 곁에 있는 기분이다.” “네? 그게 무슨—” “탐지 마법을 한번 써 봐라.” 4층에서 가면남에게 한 번 크게 홍역을 앓은 덕일까? 직감을 기반으로 한 지시에도 레이븐은 반문치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디레 타니브 카르사치.”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의 파동. 이내 레이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있어요. 무언가가 저기 앞에.” “사람인가?” 나는 짐짓 모른 척 물었고, 레이븐은 대답 대신 ‘색출’ 마법을 사용했다. 후우웅-! 점토처럼 허공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빛무리. 이내 머지않아 빛이 잦아들며 몸을 숨기고 있던 녀석의 형체가 드러났다. “……으응?” 그것은 다람쥐였다. 크기는 예닐곱 살 아이 정도. 이끼 앞에 오므려 앉은 채 흑색 이끼를 앞니로 갉아먹고 있었다. [뀨우?]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다람쥐. “읏……! 귀, 귀엽당!” “맛있을 거 같다!” 미샤와 아이나르가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레이븐이 흥분해서 소리친 건 그다음이었고. “밀라로든이에요! 어서 죽여야 돼요!!” 그래, 너는 알아주는 거구나. 얘가 얼마나 만나기 힘든 놈인지. “아아, 그치…… 얘도 몬스터니까…….” 어딘가 슬픈 얼굴로 검을 치켜드는 미샤. 반면 곰아저씨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석궁에 화살을 장전했다. 가치를 알아본 건 한 사람만이 아닌 것. “운이 좋군. 첫 탐사에 밀라로든을 만나다니.” “자, 잠깐만요. 왜곡! 왜곡 마법을 아직 안 썼어요!” 레이븐이 곰아저씨를 만류하고서 재빠르게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냥 왜곡도 아닌 ‘상위 왜곡’ 마법. 이제 해당 몬스터를 처치 시 좀 더 높은 확률로 시체가 온전하게 남게 된다. [뀨, 뀨웃-!!] 왜곡 마법을 맞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는 밀라로든. 어쩌면 DNA에 새겨진 본능일지도 몰랐다. 선조들 대부분이 이걸 맞고 뒈졌을 테니까. “아브만!” 내 외침과 동시에 석궁 화살이 쏘아졌다. 다만 미궁에 몇 없는 초식 몬스터답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이를 피하는 녀석. 나는 즉시 앞으로 대쉬해 꼬리를 움켜잡았다. [삐이! 삐이이! 삐잇!!] 녀석이 발버둥치며 연약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러고 있자니 새삼 동물을 해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자연의 섭리인 것을. 스르륵. 그렇게 머리를 터트려 죽일 요량으로 손을 뻗던 차였다. “잠시만요!” 레이븐이 나를 만류했다. “최대한 온전하게 죽이면 안 될까요? 가죽도 제법 비싸게 팔린다고 들었는데.” 합리를 추구하는 마법사다운 말. 나 역시 순순히 동의하며 밀라로든의 목과 꼬리를 잡아 포박했다. 그리고……. “미샤.” “어, 어? 내, 내가 해야 하는 거냥?” “네 검이 제일 얇지 않냐.” 아이나르는 대검을 쓰고, 곰아저씨의 화살은 화살이라기에 너무 크다. 내 메이스는 두말할 것도 없고. 얘도 명색이 몬스터인지라 일반 나이프로는 깔끔하게 찔러 죽이기 어려울 터. “미간을 찔러라.” “으으…….” 왠지 꺼림칙하다는 표정의 미샤였지만, 결국 검을 뽑아 안식을 선사해 주었다. [뀨우…….] 전원이 내려가듯 축 늘어진 밀라로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숫자를 셌다. ‘1초, 2초, 3초…….’ 원래라면 사망 판정을 받고서 빛으로 사라졌을 그 시간. “비요른!! 고기가 나왔다!” 시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 7등급 밀라로든. 등짝에 거울을 달고 다니는 다람쥐. 미믹과 같은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놈이다. 만나기가 더럽게 힘들거든. “후후, 얀델 씨 덕분에 굉장히 귀한 몬스터를 잡았네요. 우리크프리트 씨는 경험이 있으세요?” “나도 처음이다. 그 정도로 귀한 놈이니까.” 5층에서 오래 활동했던 곰아저씨조차 이번이 첫 사냥일 정도. 하긴 얘 습성을 따져 보면 이해는 된다. 상시 은신 능력을 지닌 비선공 몬스터. 한데 탐지 마법을 돌리고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서지도 않는다니? 사실상 천운이 따라줘야만 만날 수 있는 몬스터인 셈이다. 물론, 검은 이끼에 대해 모른다는 가정하에. ‘여기서 대기하다가 탐지 마법 한 방이면 무조건 잡을 수 있는데 말이지.’ 물론 말이 쉽지, 나도 5층에서 1년 넘게 막힌 다음에서야 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온갖 히든 피스가 가득한 게임 아니던가. 밀라로든의 출현 조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념하에 녹화 파일을 전부 돌려봤고, 녹화 파일 하나에서 지형에 있던 이끼가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때는 버그인가도 싶었지만……. ‘진성 변태 게임.’ 확인 결과, 버그가 아니라 숨겨진 요소였다. 이끼가 사라지자마자 탐지 마법을 돌리면 100%의 확률로 밀라로든이 출현했다. 물론 왜곡 마법이 성공하냐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초행자의 운이 따라주는 모양이군. 왜곡 마법까지 한 번에 성공하다니—” “상위 왜곡이요. 그냥 왜곡이 아니라.” “아, 어. 그래 상위 왜곡…….” 게임에서 밀라로든의 왜곡 성공률은 20%. 상위 왜곡이라 해도 3할이 채 안 된다. 그래서 서너 마리는 잡아야 나올 줄 알았건만. “아무튼, 이리 줘보실래요?” “도축도 할 줄 아나?” “견습 시절에 매일 하던 일인데요.” 축 늘어진 사체는 레이븐이 쥔 도축칼에 의해 순식간에 가죽, 내장, 뼈로 해체됐다. 로트밀러보다도 훨씬 빠르고 정교한 솜씨. 와, 전문가는 또 다른 영역인 거구나. “근데 얘는 어디가 그렇게 비싼 거냥?” “가죽은 희소성 때문에 수요가 있고, 힘줄은 마법 재료로 쓰여요. 하지만… 진짜 값어치가 나가는 건 따로 있죠.” 이내 레이븐은 등가죽에 달라붙어 있던 거울을 칼로 도려내는 것으로 도축 과정을 끝마쳤다. “바로 이 거울이에요.” “거울?” “네. 도시로 갖고 나갈 수는 없지만, 안에서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가 있거든요.” 이후 레이븐은 거울의 용도를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이래서 팀에 마법사가 있어야 하는 건가?’ 진행이 한결 편하다. 예전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설명해 줘야 했는데. 후, 나도 이제 평범한 바바리안처럼 지낼 수 있는 건가? “근데 얀델 씨도 감이 좋은가 봐요.” “응?” “밀라로든의 기척을 느꼈을 리는 없고.” 레이븐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4층에서 본인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 오케이, 그럼 이 부분은 됐고. “그래서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 게임에서 거울은 그냥 마법사에게 장착한 후 버튼 하나 클릭하면 끝이었다. 그렇다면 현실판에서는 어떨까. “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응? “책에서도 거기까지는 안 적혀 있어서. 마력을 밀어 넣으면 작동하지 않을까요?” “……한번 해봐라. 아, 잠깐 그 전에 결속 마법부터 맺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일단 결속 마법을 다시 맺은 뒤, 레이븐이 거울을 쥐고서 눈을 감았다. 마력을 흘려 넣는 거 같기는 한데……. 마력 재능이 전무한 바바리안이기에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다만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번뜩-! 거울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우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캐릭터가 불의 거울에 진입했습니다.」 우리는 어둠으로 가득하던 미궁에서 벗어나 드넓은 황야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공간이 변하니, 균열에라도 들어온 거 같군!” 곰아저씨의 감상평. 다만 이곳은 균열과 엄연히 다르다. 일단 수호자도 없고, 던전의 형태도 아니다. 단지 몬스터가 득실거릴 뿐인 오픈월드형 구조. 그러니까, 다시 말해……. [다른 곳으로 가라, 바바리안. 이곳은 우리 클랜의 영역이다.] 클랜들이 죽치고 앉아 나오는 몬스터를 받아먹던 그 거울 너머의 세계. 나는 평소 이 히든 필드를 이렇게 불렀다. “비요른!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전투 준비!” 버닝존. 「필드 효과 - 이면세계가 부여됩니다.」 「마석 드롭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정수 드롭률이 소폭 증가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정수 두 개만 띄워 보자. 169화 버닝 (1) 거울 너머의 이면세계. 라르카즈의 미로와 같은 일종의 히든 필드. 이곳은 입장한 직후의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다. 그야 시작부터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니까. “비요른! 또 온다!!” 한 번의 전투를 마치기 무섭게 또다시 밀려드는 몬스터 무리. 규모부터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7등급 야수종 플레임 울프가 여덟. 6등급 자연종 샐러맨더 다섯. 그리고 5등급 식물종 레드우드가 셋. “레이븐, 마법은 멀었나!” 내 외침과 동시에 레이븐의 완드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르아 브리지아누 툰!” 5등급 광역 빙결 마법 [얼음비]. 게임 내 영문명은 블리자드라 부르던 그것. 쿠우우웅-! 하늘 위에 형성된 회색 구름이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송곳들을 쏟아낸다. 콰콰콰쾅!! 마법 한 방에 반파된 절반 이상의 몬스터. 물론, 5등급 몬스터는 이런 광역기에서도 멀쩡했다. “베헬—라아아아아!!” [야성분출]과 [거대화]의 연계. 높아진 위협수치 덕에 딱히 뭔가 하지 않아도 몬스터들이 내게로 모여든다. 이곳에서 탱커가 마법사만큼이나 중요한 이유. [가아아아악!] 레드우드가 휘두르는 줄기 채찍을 방패로 막아 내며 나는 수비에만 집중했다. 일명 바바리안 거북이 모드. [휘두르기]를 쓰면 한 마리는 정도는 혼자서도 잡을 수 있겠지만……. 영혼력은 아끼는 편이 좋다. [거대화]가 풀리면 위협 수치가 떨어지니까. “일단 샐러맨더부터 처리해라!” 내가 레드우드 셋을 맡고 있는 사이, 마법사는 다음 웨이브를 위해 마법을 준비했다. 따라서 이번엔 나머지 딜러들이 활약할 차례. 콰아아아앙-! 곰아저씨의 원거리 지원을 받으며 아이나르와 미샤가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을 잡아나갔다. 잡몹 정리에 걸린 시간은 3분 안팎. ‘근딜이 두 명이니 잡몹 정리가 빠르네.’ 이후로는 다섯이서 힘을 합쳐 5등급 몬스터를 해치웠다. 다만 쉴 시간은 없다. “……또 오는군.” 한 번의 전투를 끝내기 무섭게 소리를 듣고서 찾아온 몬스터 무리. 우리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했고, 한 열 번쯤 더 전투를 치렀을 때였다. “얀델 씨, 이제 마력이 얼마 없어요.” 광역기를 펑펑 썼던 레이븐의 마력이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물론, 큰 문제는 없었다. 초반 웨이브는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으니. “공격 마법은 쓰지 말고 지원하는 쪽으로 도와라.” “네!” 이후 레이븐의 남은 마력은 적에게 저주를 걸던가, 팀에게 버프를 거는 식으로 운용했다. 그쯤에 내 [거대화]도 끝났다. 폭발 화살을 남발하던 곰아저씨 쪽도 이제 영혼력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 “베헬—라아아아아!!!” 우리 셋의 활약이 어려워질수록 아이나르와 미샤. 줄여서 근딜 자매의 중요성이 커졌다. 평타 DPS는 역시 근딜이지. “우오오오오!! 내가 원했던 전투가 바로 이런 것이다아아!!!” 수도 없이 몰려오는 적들과 상대하다 보니 흥분도가 극에 이른 아이나르. 전투 종족이라 불리는 바바리안답게, 흥분 상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잘 싸웠나?’ 투박하게 대검을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피할 건 전부 피한다. 무슨 각성제라도 빤 것만 같은 전투술. ‘하긴, 거기서 검술도 수련했다고 했지…….’ 전투 감각 자체는 미샤보다도 월등한 듯하다. 아무튼, 슬슬 전투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진형을 바꿨다. “아브만, 이제 녀석을 이쪽으로 보내라!” 우리 팀의 탱커 조무를 맡고 있는 철웅 이라둔. 줄여서 웅이. [우웅-!] 후방에서 원딜을 보호하던 웅이까지 전열에 참가하며 앞라인에 힘을 실었다. 그야 정말 이제 다들 한계인 거 같거든. 마법사의 마력도 아예 바닥이 나서 지원마저도 끊긴 상황이고. 콰직! 콰직! 휘유우우웅! 메이스와 검, 대형 석궁 화살. 정말이지 오랜만에 한계까지 몰려, 스킬이 담기지 않은 평타만으로 남은 몬스터를 정리한다. “이제 끝인 거 같네요…….” 불타는 해골을 메이스로 박살내는 것을 끝으로 전투가 종료됐다. 바닥에 깔린 수백 개의 마석. “근데, 마석 색이 원래 이렇게 진했낭?” “이곳 공간의 특성이에요. 밀도가 두 배 정도 더 높죠.” 쉽게 말해 두 배 이벤트가 적용 중이라는 뜻. 레이븐이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수거하는 것에만 몇 분가량이 소요됐다. 아, 정수도 하나가 나왔다. “그거라면 내가 봤다! 사람 머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놈이 죽은 자리에서 나왔다!” “헤드헌터 말이군.” 화염 계통 언데드 7등급 몬스터. 따라서 쿨하게 버렸다. 먹으면 나름 유용하게 쓰기야 하겠지만……. 이제 5등급도 매일같이 사냥하는 마당에 굳이 이걸 먹을 이유는 없을 터. “으음, 버린다고……?” 내 결정에 아이나르가 사탕을 흘린 아이처럼 미련 넘치는 눈으로 날 응시했다. 거, 그래도 안 된다니까. 떼끼. “네게 좋은 정수는 아니다. 그러니 아쉬워도 참아라.” “……알았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나중에 지워야 돼서 괜히 돈만 더 나간다. 한데 전리품을 버린다는 게 맘에 걸렸을까? “근데 그 시험관에 담아서 팔면 되지 않나?” 유레카를 외치며 새 제안을 꺼내는 아이나르. 우리 마법사 선에서 정리가 됐다. “안 돼요. 6등급 아래로는 시험관 값도 안 나오거든요. 애초에 여기서 갖고 나갈 수 있는 물건은 하나뿐이라고 들었고.” “응? 하나뿐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냥?” “이유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여기서 획득한 물건은 ‘왜곡’ 마법을 써야지만 갖고 나갈 수 있고, 딱 하나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레이븐이 몰랐다면 내가 설명해 줬어야 할 필드 특성. “뭘 갖고 나갈지는 신중하게 골라야 해요. 정수도 정수지만……. 여기서 굉장히 귀한 물건을 얻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 있거든요.” “귀한 물건이라…….” 어차피 갖고 나갈 물건은 정해두었다. 하지만 제법 호기심이 생긴다. 그 물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 걸까? 자세히 물어봤지만, 레이븐은 자기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라며 선을 그었다. “이런 쪽 정보는 책을 통해서 알아내기가 어려워요. 애초에 저도 건너 건너 들었던 거고.” 하긴 5층부터는 고급 정보로 분류가 되니까. 사소한 성과조차 지적 재산 취급받으며 쉽게 공유되지 않는다. 클랜 같은 경우엔 미궁 내에 일을 아예 언급도 못 하게 하는 곳도 있을 정도. 괜히 얘가 균열총해록에 목 매던 게 아니다. “일단 다들 쉬어라. 보초는 내가 서겠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만큼 휴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현재 상황을 점검했다. “레이븐, 마력이 전부 차려면 얼마나 걸리지?” “명상을 하거나 잠을 잔다고 하면 12시간. 아니면 하루는 더 걸려요.” “그렇군.” 5층 한정으로 마법사보다 근딜이 좋다고 말한 것도 이래서다. 마법사는 마력이 차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니까. “이제부터 너는 어지간하면 마력은 아껴라.” “이대로 계속 탐사를 진행하려고요?”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나. 최대한 탐사를 해봐야지. 네가 말했던 그 귀한 물건을 찾게 될 수도 있고.”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해요.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이 문제는 끝. 15분간 체력만을 보충한 뒤 우리는 탐사를 재개했다. 강행군이지만 불만을 뱉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쏟아지던 마석과 정수를 보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아내에게 어깨 좀 펴겠군.” 곰아저씨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참 가정적인 양반이다. “아브만, 혹시 포탈이 감지되는 곳이 있나?” “저쪽 아주 멀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군.”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는 필드. 인도자 능력을 이용해 방향을 잡았다. “……반대로 갈 거면 왜 물어본 거지?” 내가 가려는 곳이 그쪽이니까.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포탈은 출구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대쪽으로 가야 뭔가 나오지 않겠나.” 대충 갖다 붙인 그럴듯한 이유. 다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금방 레이븐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맞아요. 거울 속에 나가는 포탈이 있다고 봤어요.” 후, 이래서 적당히 똑똑한 캐릭터가 있어야 돼. “자, 그럼 어서 가지.” 22일 차, 오후 7시 경. 이제 하루도 거의 끝나가니 이제 약 일주일이 남은 시점. 뽕을 뽑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 불의 거울. 이 필드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바로 몬스터가 리젠되는 데 하루가 걸린단 것. 덕분에 한 번 사냥이 끝난 자리는 일시적으로 안전지대가 된다. 여러모로 다행인 부분이다. 매번 몬스터가 수백 마리씩 몰려드는 곳이면 잠조차 제대로 잘 수가 없을 테니. 「지옥 수호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4」 「그렘린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둠 워리어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혼돈충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파멸불꽃 요정을 처치…….」 필드를 통제하던 클랜들 탓에 사냥하지 못했던 각종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사흘에 걸쳐 스타트 포인트이던 황야를 벗어났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딘 진척도. ‘맵 크기도 크기인데, 몬스터가 너무 많아.’ 한번 전투가 벌어지면 그 소리를 듣고서 주변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모인다. 물론, 사방에서 모여들던 극초반보단 낫다. 전방에서 오는 적만 신경 쓰면 되는 데다가, 여차하면 뒤로 후퇴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다만, 강행군이 이어질수록 체력도 MP도 바닥나며 사냥 속도 자체가 느려졌다. 그 탓에 위험할 뻔한 적도 몇 번 있었고. 결국 주기적으로 휴식을 해줘야만 했다. ‘그래도 마석 벌리는 속도가 미치긴 했네.’ 괜히 내가 버닝존이라 부르던 곳이 아니다. 마법을 활용한 대규모 전투. 거기에 마석 2배 이벤트까지. 여기 오니 정말 마석으로 돈을 번다는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대박이라 하면 전부 약탈자를 잡고 얻은 장비였는데. ‘역시 사냥은 몰이 사냥이지.’ 26일 차 오전. 앞에서 야영을 끝낸 우리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필드로 들어섰다. 화르르륵! 불타는 숲. 그 이름처럼 나무들이 흑색 불꽃에 휩싸여 365일 내내 타오르고 있는 필드. 다만, 화염 피해는 미미하다. 나무마다 간격이 제법 넓은 편인 데다가, 화염 내성을 올려주는 [냉혈]까지 두른 덕분. 참고로 이곳을 고른 이유는 총 셋이다. 일단 전투 난이도가 가장 낮다. “음, 생각보다 별게 없네요?” “응, 약간 불안했는데, 이 정도면 전에 있던 곳보다 쉬운 거 같당. 5등급 몬스터도 안 나오고.” 개체 수 자체는 많은 편이나, 그래 봤자 6등급, 7등급이 전부. 물론, 쉽다는 건 보상이 적다는 뜻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면 나오는 잿빛산맥과 용암호수는 아직 우리로 공략하기엔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포탈이 있는 망자의 제단은 먹을 게 없고. 그런 의미에서……. 둘, 우선 그걸 얻어야 앞으로 편해진다. 불타는 숲 중심부에 숨겨진 아이템이다. 이게 있으면 추후 다시 이곳에 왔을 때 다른 쪽 필드를 공략할 수 있을뿐더러, 6층의 그 섬에도 입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너무 긴장을 놓지 마라. 뭐가 나올지 모르니.” 습관처럼 경고의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나도 숲에 들어선 이후로 속도를 확 올렸다. 예상보다 시간을 소요한 터라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가 아슬한 상황. “여기는 나무가 다 탔네요?”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지.” 온종일 전투와 이동만을 반복하던 우리는 날이 저물 때쯤 야영 포인트에서 침낭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드디어 나왔군.’ 한 몬스터와 조우했다. “아루아! 쟤는 이름이 뭐냥?” “어,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평생 책만 읽고 살아온 레이븐조차 그 이름과 등급을 알지 못하는 몬스터. 불타는 숲에 단 한 마리만 존재하는 몬스터. 이 숲과 이어진 5층의 필드를 통제하는 클랜도 1년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하는 희귀 몬스터. [그오오오오오-!!] 5등급 희귀종 베르타스. 내가 불타는 숲을 고른 세 번째 이유였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이놈은 정수를 확정 드롭한다. 170화 버닝 (2) 붉은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거울. 그 아래에 서른 명가량의 탐험가가 모여 있다. 각 가슴에 새겨진 푸른 늑대의 문양은 그들이 하나의 클랜 소속임을 의미했다. “교대 시간이다!” 한 사내의 외침에 거울 앞에 포진해 있던 팀 중 하나가 휴식을 끝마친 인원과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기계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5층 탐험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봤을 광경. “……다른 곳으로 가지.” 우연히 이곳에 도착한 탐험가들은 그런 이들을 보고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미 익숙한 것이다. 5층 전체가 이런 식이었으니까. “정지! 이곳부터는 우리 네비스울프 클랜의 영역이니 다른 곳으로 가주시오.” 일반적인 팀이라면 반발 자체가 불가하다. 5층의 대형 클랜들은 대부분 6층에서도 활동 가능한 실력자들인 게 보통이기 때문. 참고로 그런 실력자들이 5층에 죽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6층은 더 큰 클랜들이 독점을 하고 있으니까. 이쪽이 훨씬 더 돈이 되는 것이다. “부단장, 오늘 총 수급량이 얼마지?” 24시간 교대로 사냥을 하며 마석을 수급하며, 불만을 갖는 자들은 무력을 앞세워 내쫓는다. “파멸불꽃 요정의 정수가 나왔다. 혹시 구매할 자가 있는가!” 5등급 정수가 나오면 시험관에 담아 도시에서 판매하고, 그 아래로는 근처에 있던 탐험가들에게 저렴한 값에 넘긴다. 경험치 수급을 바라는 탐험가? 그조차 손님으로 받으며 이익을 극대화한다. “결속 마법을 걸어 드릴 테니, 전투에는 끼지 말고 잠시 뒤에 가 있으시오.” 그렇게 오늘도 미궁의 과실을 취하며 반복적인 사냥을 해 가던 때였다. “단장님! 베르타스입니다!” “뭐?” 뒤에서 쉬며 클랜을 지휘하고 있던 사내가 얼른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그 너머로 한 몬스터가 보이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 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뿔. 3m가 넘는 근육질 체형과. 상체를 뒤덮는 흑색 날개와 네 개의 팔을 지닌 악마형 몬스터 베르타스. “오늘은 운이 좋군.” 사내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무려 1년 만에 만나는 녀석이었다. ‘지난번에 팔았을 때 얼마였더라?’ 5등급이지만 희소성이 인정되어 마탑에 상당히 비싼 값에 팔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 그래도 이번 탐사 중에 마석 소득량이 기준 미달이었는데, 이거 하나면 손실을 메우고도 제법 남을 터. “각자 진형대로 서라!” 사내는 오랜만에 직접 무기를 꺼내 들고서 앞에 섰다. 그리고 베르타스가 거울 너머로 완전히 빠져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온다!” 서서히 문 너머로 내디뎌지는 거대한 발. 클랜원들의 눈빛에 기대가 어렸다. 전투를 걱정하는 자들은 없었다. 마법사들은 최고 화력의 주문을 완성한 상황. 희귀할 뿐이지 결국 5등급에 불과한 몬스터니, 등장하는 순간 전투는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베헬—라아아아아아!!] 거울 너머에서 사람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깥으로 발을 내딛던 놈이 등 돌리며 발을 쏘옥 뺐다. “……뭐야, 저놈들은!” 그는 도무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 “베헬—라아아아아아!” 온 힘을 다해 [야성분출]을 터트림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베르타스. 이내 놈의 발밑에 형성됐던 거울이 사라졌다. 다행히 어그로가 잘 끌린 모양. ‘후, 놓치는 줄 알았네.’ 이면세계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은 저 거울을 통해 미궁으로 들어선다. 쉽게 말해, 조금만 늦었어도 저놈을 잡는 게 우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뜻. [그오오오오오-!!] 방패를 치켜들기 무섭게 놈이 달려들었다. 콰앙-! 체감상 근력은 트롤보다 아래. 역시 얼굴값을 못 하는 몬스터 1순위다. 생긴 건 무슨 3등급 저리가라인데. “얀델 씨, 괜찮아요?” “버틸 만하니, 나는 신경 쓰지 마라!” “일단 얀델 씨 빼고 전부 물러나세요. 일단 능력이 뭔지부터 알아야 해요!” 처음으로 조우한 정체를 모르는 적. 레이븐이 당황하며 처음으로 오더를 내렸다. 거, 그렇게 조심할 필요는 없는데. ‘……여기서 아는 척하면 이상해 보이겠지.’ 1:1 구도라면 몇 시간이든 붙잡고 있을 자신이 있기에 별말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솔직히 조금 궁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마법사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마르데 구아르주르.” 레이븐이 가장 먼저 사용한 마법은 ‘마력 측정’이었다. 검문소에서 마석을 환전할 때 쓰던 바로 그거. “다행히 5등급 정도 수준이에요!” 일단 해당 몬스터의 위험도가 측정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알아낸 건 겨우 그뿐. 나머지는 실전을 통해 유추해야만 한다. 콰쾅! 이내 놈의 주먹과 내 방패가 맞닿으며 폭발이 피어났다. [폭발의 상흔]. “기운이 움직인 흔적은 없었어요. 아마 체화 이능인 거 같은데…….” 일단 패시브인 건 맞췄다. 그렇다면 그 발동 조건은 무엇일까. 콰앙! 쾅! 콰쾅! 내 방패 너머로 폭발이 연달아 이어지는 사이, 레이븐은 멀찍이 뒤에서 전투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같은 지점! 같은 지점을 타격했을 때 폭발이 피어나는 거예요!” ……정답이다. 설마 이걸 이렇게 빨리 맞힐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언제까지 지켜만 볼 거냐?” “어……. 혼자서도 괜찮아 보이는데, 일단 관찰을 더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칼스타인 씨나 아이나르 씨가 크게 다칠 수도 있잖아요.” 음, 나는 크게 다칠 일이 없다는 건가? 왠지 탱커로서의 서운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피어난다. “혹시 위험하면 바로 포션 던져 드릴게요!” “상급?” “네, 상급!” 그렇다면야. 기분 탓인진 모르겠는데,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상급이 그나마 제일 통증이 약했다. 고통 내성이 있어도 안 아픈 건 아니니까. “오, 날개깃을 화살처럼 쓰기도 하네요? 기운이 움직이거나 하진 않은 걸로 봐서 그냥 개체 특성인 거 같아요!” 아무튼, 우리 수준에서 크게 위험한 적은 아니라 생각됐는지 레이븐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얀델 씨, 한 번 메이스로 때려 보실래요? 혹시 맞아야 발동하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처음 본 몬스터를 분석한다는 사실이 제법 즐거운 모양. 우리 마법사가 이렇게 신나 하는 건 처음인 듯해서 순순히 지시에 따라 주었다. 콰직-! 이내 [휘두르기]로 네 팔 중 하나를 내리치자, 기형적으로 관절이 꺾였다. 그 즉시 펼쳐지는 날개. “이능이에요!” 베르타스의 세 가지 액티브 스킬 중 하나. [탐욕의 날개]. 솨아아아-! 배수구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주변 공기. 3초가량의 흡기가 끝나자 날개가 촥 소리를 내며 접히더니, 부러졌던 팔이 전부 나았다. “재생 계통 이능이네요!” 구경은 하되, 손가락만 빨 생각은 없는지 즉시 ‘악화’ 마법을 걸어 주었다. ‘후, 제발 이게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진짜 가치는 패시브에 있지만, 기왕 먹을 거면 액티브도 쓸 만한 걸 뽑는 게 좋다. 「베르타스가 [증오의 군단]을 시전했습니다.」 「베르타스가 [파멸광선]을 시전했습니다.」 역시 바바리안한테 악마 소환이나 광선빔은 좀 그렇잖아? 후우웅-! 시전 시간이 무려 3초나 되는 ‘파멸광선’을 쉽게 피해 내 준 뒤, [거대화]를 시전했다. 그야 이제 허락이 떨어졌거든. “이제 이능은 전부 확인된 거 같아요!” “어, 그럼 이제 나도 가서 싸우면 되는 거냥?” 기다려 왔던 처치의 순간. “베헬—라아아아아!!” 아이나르가 대검을 쥐고서 소환된 악마들을 박살 내는 동안, 곰아저씨와 레이븐이 필살기를 꺼내 정조준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물질]을 시전했습니다.」 「아루아 레이븐이 5등급 공격 마법 [뇌창]을 시전했습니다.」 생존력의 대명사인 트롤조차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던 우리 팀의 최강 딜링기.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피어나며 베르타스의 육신이 빛무리로 변했다. 「베르타스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까만 연기와 함께 흩날리는 빛 입자. 그 결과가 궁금했는지, 레이븐이 바람 마법을 써서 연기를 거둬 냈다. 그러자 보이는 백색의 정수. “저, 정수당!!” 내심 바랐던 [탐욕의 날개]가 떴다. 고작 33.3%의 확률을 뚫은 것뿐이지만……. ‘정말 한 번에 뜨다니.’ 갑자기 조금 불안해진다. *** 5등급 몬스터의 정수가 떴다. 따라서 선택지는 두 가지다. 시험관에 담아서 팔거나, 팀원 중 한 명이 돈을 지불하고 흡수하거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건 아이나르가 갖는 게 좋을 거 같군.” “엑? 나!!?” 아이나르의 호들갑은 모두 깔끔하게 무시했다. 비록 이번 일의 당사자이긴 하지만……. 나는 훗날 바바리안 로드가 될 사나이. 쉽게 말해, 모든 바바리안을 대변할 수 있다. “흐음……. 어떤 정수인지 아직 제대로 확인을 못 했는데도요?” 스킬은 전투를 통해 확인했다. 하지만 이 정수가 어떤 스킬을 담고 있는지는 먹어 봐야만 안다. 게다가 스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정수에 붙은 기본 스탯이기도 하고. “그걸 감안해서 조금 싸게 해 줬으면 하는군.” “얼마나요?” “1,600만 스톤.” 내가 선제시를 하자 아이나르가 까무러쳤다. “1,600만 스톤?!!” “아이나르,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응? 비요른이 얘기하고 있잖냥.” “아, 알았다!” 잠깐 대화가 끊기긴 했지만, 레이븐은 피식 웃지도 않으며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넷으로 나누면 제가 갖는 건 400만 스톤밖에 안 되네요.” 음, 역시 안 통하는구나. 그래서 1,600만이라 한 건데. “금액이 너무 낮은 거 같아요. 제가 몰랐을 정도로 희귀한 몬스터잖아요? 무엇보다 시험관에 담아 팔면 40%가 제 몫이기도 하고.” “……대신 연구를 하게 해 주겠다.” “나, 나를 마법사한테 파는 거냐!!” “흐음, 예전에 얀델 씨가 했던 것처럼요?” 이건 제법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 역시 마법사한테는 돈보다 연구가 짱이구나. 기세를 잡은 김에 간 볼 것 없이 준비해 둔 패를 연달아 꺼냈다. “게다가 시험관에 담아서 왜곡 마법을 쓰면 이제 더 못 쓰지 않나.” 한마디로, 만약 보물을 발견하면 그땐 여기에 왜곡 마법을 쓴 게 아쉽지 않겠냐는 뜻. 레이븐도 욕심이 있었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며칠 안 남기는 했지만……. 확실히, 아직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긴 하죠.” 좋아, 이쯤이면 얘는 설득이 끝난 것 같고. 다음은 곰아저씨 차례였다. “우리크프리트 씨는 어쩌고 싶으세요? 저야 연구로 손해를 메운다 쳐도…….” “나는 상관없다. 이미 충분히 벌 만큼 벌지 않았나. 애초에 여기 들어온 것도 비요른이 놈을 발견한 덕분이고.” “음, 그건 그렇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이게 얼마에 팔릴지는 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상관없다고 하지 않나. 바바리안 아가씨가 강해지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좋아, 그럼 얘기가 끝났군.” 이제 아이나르는 도시로 나가서 곰아저씨와 레이븐에게 400만 스톤씩 지불해야 한다. 이번에 잔뜩 벌기는 했지만, 다시 빈털터리 신세로 돌아간다는 뜻. “자, 어서 사라지기 전에 먹어라.” 그래도 새 정수란 게 기뻤는지, 아이나르는 아무런 반발 없이 정수를 취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영혼에 [베르타스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피부와 접촉하자마자 순식간에 스며드는 흑색의 빛무리. 레이븐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자, 어떠세요?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어…… 힘이 세진 거 같은데…….” “음, 애매하네요. 능력치 부분은 추후 도시로 돌아가서 연구해 봐야 할 거 같고. 일단 이능부터 써 보실래요?” “이, 이능?” “아, 상상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이내 레이븐은 아까 베르타스가 선보였던 세 가지 능력들을 떠올리면서 영혼력을 사용하라고 팁을 주었다. “대사를 입으로 내뱉는 것도 좋아요. 원래 마법을 처음 배울 때도 그렇게 하거든요.” “어, 어… 한 번 해 보겠다.” 레이븐의 지시하에 베르타스가 지닌 액티브 스킬을 하나씩 순서대로 써 보기 시작한 아이나르. “나, 나와라! 악마 놈들아!!” 소환기 [증오의 군단]. “끄으으읏!!” 원거리 공격기 [파멸광선]. 그리고……. “날개!!!” [탐욕의 날개]. 촤악-! 등 뒤로 펼쳐진 빛의 날개가 퍼덕였다. 이름하여 바바리안(여) 발키리 모드. “나, 나는 발키리가 된 것인가?!” 두리번거리며 자기 모습을 훑어보던 아이나르가 더없이 기쁜 얼굴로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171화 버닝 (3) [탐욕의 날개]가 당첨됐단 사실이 밝혀진 이후. 레이븐은 아이나르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성능을 검사했다. 일단 가장 중요했던 것. “나, 날 수 없는 건가……!!” 날개를 이용한 비행은 불가능. 또한 빛으로 이뤄진 날개인지라 이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도 불가능할뿐더러, 본인 의사로 날개를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기분에 따라서 움직이는 날개. 푸득, 푸드득! 저런,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다. 근데 밸런스도 생각을 해야지. 이거 하나로 비행이 되면 개사기잖아? “……그래도 굉장히 잘 어울리긴 하네요.” “응응, 진짜로 엄청 강해 보인당.” “정말인가?!” 강해 보인다는 한마디에 다시금 푸득푸득 대기 시작한 날개. 푸득-! 음, 이건 딱 봐도 기분이 좋은 거겠고. 하긴, 내가 봐도 날개의 간지가 상당하다. 회복이 될 때마다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이펙트도 제법 화려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얀델 씨가 가지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을 거 같은데, 아쉽진 않으세요?” “응?” “뱀파이어 정수가 없어져서 이제 체력 재생 관련 이능이 없잖아요.” 아, 그 말이었구나. 근데 나한테 어울리는 정수는 아니라서. 일단 패시브가 탱커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재생력이야 스탯만으로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고, 훨씬 좋은 게 널렸는데 굳이? ‘무엇보다 아이나르와 궁합이 좋지.’ [폭발의 상흔]의 효과는 간단하다. 동일 부위를 두 번 가격 시 폭발. 게임에서는 크리티컬 비슷한 느낌이었다. 명중률을 올리거나 둔한 몬스터를 상대로는 조금 더 잘 터지는 정도? 하지만, [거듭베기]와 함께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럼 마저 이동하지.” 탐사를 재개하고서 머지않아 몬스터 무리가 등장했고, 아이나르의 성장을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콰앙! [거듭베기]를 쓰자마자 터지는 폭발. 7등급 몬스터의 머리통이 즉시 터지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지켜보던 레이븐조차 당황할 정도의 위력. “……설마 이걸 생각하고 아이나르 씨한테 정수를 먹인 거예요? 내가 말했던, 같은 지점을 타격했을 때 폭발한다는 추측 하나 때문에?” 음, 나한텐 추측이 아니거든.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없기에 대충 둘러댔지만. “너는 우리 팀의 마법사다. 당연히 네 판단을 믿는다.” “어……. 그건 고마운데요…….” 역시나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무는 레이븐. 그 와중에도 아이나르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며 몬스터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베헬—라아아아!!!!”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어나는 폭발. 콰앙! 콰앙! 베르타스의 정수에 붙은 쌍스탯(근력과 민첩) 덕분에 움직임도 이전보다 훨씬 매끄럽고 힘차다. 물론, 내가 앞에서 어그로를 끌고 있지 않기에 계속해서 부상이 몸에 쌓였지만……. “날개!!!” [생기흡수]와 [탐욕의 날개]를 함께 시전하니 금방 부상이 나았다. ‘이 정도면 캐릭터 컨셉은 잡힌 셈인가.’ 이름하여 광전사 바바리안. 나는 흡족함을 감추지 않으며 아이나르의 전투를 지켜봤다. 조금은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나도 방패바바를 알기 전까지는 항상 저런 식으로 캐릭터를 육성했었다. 호쾌한 전투는 남자의 로망 그 자체니까. ‘……근력 수치를 더 올려서 쌍수대검을 쓰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양손에 거대한 대검을 쥔 채,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전장을 누비는 바바리안 전사. 그런데 뒤에 빛의 날개 스킨까지 있다? 오우쉣. ‘개멋있네.’ 어쩌면 대리만족이 가능할지도. “비, 비요른!” “알았다. 이제 도와주지.” 다만 아직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캐릭터의 완성도가 낮았기에, 나도 슬슬 끼어들어 전투를 끝마쳤다. 한데 그것만으로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을까? “와, 정수 하나로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거구낭…….” 미샤가 조금 부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하긴 얘는 아직 5등급 이상 정수가 없으니까. 4등급에 5등급 정수를 먹은 아이나르를 보면 박탈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나와 같은 0년 차 탐험가이기도 하고. “걱정 마라. 너도 더 강해질 거다.” “으응…….” 갑자기 풀이 죽은 미샤지만, 이것 말고는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일단 지옥불 협곡에서 얻을 걸 다 얻은 후에야 그 정수를 구하러 갈 생각이니까. 한 반년쯤 걸리려나? 빙결쌍수검사의 핵심인 그 검은 습득하려면 몇 년은 잡아야 할 테고. ‘5층에 올라오니까 할 일이 태산이구만.’ 이후 마석만을 수거한 뒤 탐사를 이어나갔다. 나무들이 활활 타오르며 황폐미를 뿜어내는 거대한 숲.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나아가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30일 차 날이 밝았다. [08 : 10] 미궁 폐쇄까지 고작 16시간을 남겨둔 시각. ‘드디어 도착했군. 아슬아슬했네.’ 나무 사이로 거대한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멈춰요!” “어, 함정인 거냥?” “몰라요. 하지만 그럴 수도 있어요.” 인공 조형물을 보자마자 일단 경계부터 하는 레이븐. 참 바람직한 자세이긴 하지만……. ‘그냥 비석일 뿐인데.’ 게임 내에서 저 비석은 아무런 기능도 없었다. 참고로 이쪽 말고 다른 방향의 필드로 가도 똑같은 비석이 존재하며, 일종의 랜드마크 같은 기능을 했다. 여기가 중심부라는 표지판 같은 존재. 뭐, 단지 내가 알아내지 못한 숨겨진 요소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나도 수상해서 온갖 개지랄을 다 해 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일단 전투 준비부터 하고 계세요. 반경 안에 들어가면 뭔가 소환되는 종류일 수도 있으니.” “그러지.” 이 상황에서 마법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기에, 순순히 지시를 따랐다. 다행히 레이븐은 신중하되 의미 없이 시간만 날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천천히 다가가 볼게요.” 이내 서서히 거리를 좁혀 비석 앞에 섰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얀델 씨, 한번 비석을 만져 보실래요?” 그래, 이런 건 무조건 나를 시키는 거지? 안전하단 걸 알기에 그냥 손을 댔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는 비석. “잠시 머물면서 이것저것 확인해 봐도 될까요?” “원한다면은.” 레이븐의 요청에도 그냥 그러라고 했다. 그래도 현실 버전이니, 게임에서는 알아내지 못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레이븐, 그만하고 가지.” “아, 안 돼요! 이런 숲에 떡하니 자리한 인공 건축물이라니? 뭔가 사연이 있을 게 분명해요!” 보아하니 얘도 나와 같은 굴레에 빠진 듯했다. 내가 그 생각으로 대체 몇 달을 날렸었더라? “으, 조금만 더 하면 알아낼 것도 같은데…….” 조금만은 무슨 조금만이야. “시간이 얼마 없지 않나. 정 궁금하면 나중에 나가서 관련 기록을 찾아보든가 해라.” 딱 잘라 선을 긋자 레이븐도 애써 미련을 접고 내 말을 따라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얘는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쉽게 말해, 다루기 쉽다. “자, 그럼 가지.” 이후로는 비석을 중심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혹시 근처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 바로 그 이유. 어차피 남은 하루 동안 가봐야 얼마 가지도 못하기에 다들 군말 없이 동의했다. ‘이만큼 뒤졌으면 나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약 두 시간가량을 수색에 매진했을 때였다. “비요른! 저기, 저기 좀 봐랑!” 미샤가 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집?” 사방이 불타며 몬스터가 즐비한 숲속 한복판. 2층 구조의 벽돌집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휴, 다음에 또 오진 않아도 되겠네.’ 바로 내가 찾던 그곳이었다. *** 검게 그을린 나무 문이 힘없이 열린다. 끼이익. 거, 소리 하고는. 왠지 거슬렸기에 그냥 잡아뜯어 바닥에 버렸다. “저기, 아무거나 부수지 말아 주실래요?” “……잔소리는.” “아니, 잔소리가 아니라—” “알았다. 조심하지.” 문짝 하나 부순 거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뭔가 으스스한 곳이당.”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 내부. 마법을 이용해 몬스터가 없다는 건 확인했지만 혹시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우리는 신중하게 안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파고 외벽이고 뭐고 전부 불에 타 뼈대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순식간에 1층 수색을 끝마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실이었을 것 같은 공간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레이븐! 네가 좋아하는 책이다!” 서랍 내부에 있어서인지 비교적 멀쩡한 책. 물론 겉은 전부 시꺼멓게 불에 타 있었지만, 안에는 제법 멀쩡한 페이지도 있었다. ‘……이런 것도 있었나?’ 게임 내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던 아이템. 레이븐이 눈을 빛내며 아이나르에게서 책을 건네받고 조심스레 펼쳤다. “고대어로 적혀 있네요.” “읽을 수 있는 건가?” “네. 이런 쪽이 제 주특기라. 아무튼, 보니까 일기 같네요.” 이내 지식을 뽐내기라도 하듯 소리를 내어 책 내용을 읽어내리는 레이븐.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192일, 오늘도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원정대원은 우리 셋뿐. 타르비앙이 집을 짓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나도 그러자고 했다. 오늘도 악마 고기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271일, 제법 그럴듯한 집이 완성됐다. 셋이서 아껴 둔 와인을 마셨다. 이렇게 웃고 떠들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일까? 제기랄, 제피로스가 취해서 이상한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도 기분이 끝내줄 텐데.] [세상이 멸망한 판에 살아서 뭐 하냐니?] [모든 곳이 불타 사라져도 희망은 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467일, 타르비앙이 아이를 임신했다. 과연 누구의 아이일까? 나도 제피로스도 묻지 않았다. 아아, 타르비앙. 누구보다 현명하면서 불쌍한 여인. 오늘따라 술이 간절하다.] [672일. 아니, 673일인가? 모르겠지만, 큰일이 생겼다. 불의 보주가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미 외벽은 점점 불에 그을리는 중이다. 고칠 수 있는 건 오직 마법사인 타르비앙뿐. 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바쳐 기간을 연장한다 해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711일 차, 정말이지 오랜만에 제피로스와 의견이 일치했다.] [오늘 우리는 죽는다.] [만약 마녀의 손에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고, 언젠가 누군가 이곳을 찾는다면, 지하에 있는 그 물건을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해 주기를.] 화자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일기. 그것도 멀쩡한 페이지는 고작 네 장뿐. 다만 마지막에 적힌 내용을 읊조리던 레이븐은 그대로 충격에 사로잡혔다. “마녀라니…….” “왜 그렇게 놀라냥?” “고대어로 쓰인 것 때문에 혹시나 했는데……. 이 일기를 쓴 사람, 우리 차원의 사람이에요!” “으응?”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눈빛을 짓는 미샤. 하나 레이븐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정신이 없었다. “뭐지? 아, 이곳이 다른 차원이라서? 그래서 그때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가? 아니,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로 넘어온 거지?” 생각을 정리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레이븐. 그러나 의외로 그 시간을 짧았다. “지하실! 일단 지하실부터 가봐요! 이 내용이 사실이면 그 아래에 뭔가 있을 테니까.” “좋은 생각이군.” 1층으로 다시 내려가 무너진 가구들을 치우니 지하로 향하는 길이 드러났다. 제법 어두웠기에 빛구체 마법을 썼다. 터벅, 터벅. 아래로 내려가니 3평짜리 작은 공간이 나왔다. 식량이나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던 곳인 듯한데…….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상자가 있었다. “내가 열겠다.” “아, 그러실래요?” 그래, 앞에 이런 일을 도맡았던 게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자연스러웠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구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레이븐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손부터 가져다 댔다. 「불의 보주의 사용자로 등록되었습니다.」 이거, 귀속템이거든. 172화 버닝 (4) 솨아아아-! 사용자 등록이 되며 빛을 뿜어낸 불의 보주. 다만 그 후로는 뭘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따라서 이리저리 만져 보던 레이븐도 백기를 들었다. “이건…… 도시로 돌아가서 특수 감정가에게 의뢰를 맡겨 봐야 할 거 같네요.” “이걸 가져가는 건가?”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너라면 그 책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사적 가치가 어마어마한 책이라든가 그런 말을 하면서.” “어, 확실히 저도 책에 욕심이 안 생기는 건 아니긴 해요.” 화를 내기보다는 쉽게 수긍하는 레이븐. “하지만 일기를 쓴 사람도 말했잖아요? 이걸 가져가서 사용해달라고. 분명 일기보다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일 게 분명해요. 게다가 일기 내용도 이미 전부 머리에 기억해 놨고. 혹시 몰라서 영상 기록도 떠놨거든요.” “어……. 그렇군?” “네. 그러니까 그 부분은 염려치 마세요.” 이내 레이븐이 불의 보주에 ‘왜곡’ 마법을 사용했다. 이제 귀속된 게 들통나도 무를 수 없다는 뜻. ‘이걸 사용하는 건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겠네.’ 역시 그 편이 나을 거 같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철저하게 사고인 거다. 비록 양심이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애초에 나 혼자 좋자고 구한 물건도 아니고.’ 불의 보주는 팀 전원을 위한 아이템이다. 따라서 혜택은 모두가 같이 누릴 수 있다. 그래, 우리 팀을 탈퇴하기 전까지는. “……딱히 별건 더 없는 듯하네요.” 이후 30분가량 더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으나,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혹시 일기처럼 게임에선 등장하지 않은 요소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건만. “자, 그럼 어쩔까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나? 계속 사냥을 이어가야지.” “……그럴 줄 알았어요.” 돈에 환장하는 탐험가답게, 우리는 알뜰하게 남은 시간마저 몬스터를 사냥하며 보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귀환의 시간이 찾아왔다. *** 무려 한 달 만에 보는 햇빛. 광합성을 하듯 잠시 포근함을 만끽한 다음에 발길을 옮겼다. 6등급 이상 중견 탐험가를 위한 검문소. 잠시 기다리자 곰아저씨를 제외하고서 모두가 모였다. “우락부라크는 왜 안 오는 건가?” 글쎄, 굳이 그걸 물어봐야 아나? 방금까지 사냥을 하던 터라, 대답할 기운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곰아저씨가 도착했다. 옆에는 이름 모를 한 탐험가가 있었다. “여기요.” “아, 고맙군. 덕분에 쉽게 찾아왔다.” “후후, 덕분에 이상한 경험을 다 하는구려.” 그런 감탄 아닌 감탄을 끝으로 자기 팀이 있는 곳으로 쿨하게 향하는 탐험가. 곰아저씨가 멋쩍게 웃으며 우리 사이에 꼈다. “하하, 줄이 꽤 길군?” 그야 너 때문에 늦게 섰으니까 당연하지. 봐도 봐도 한숨이 나오지만, 굳이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이 팀의 리더 아닌가. 사람은 모두에게나 장단점이 존재하는 법. 결점도 보듬어 안고자 노력해야 한다. 팀 반푼이에서 어느 정도 면역력을 키우기도 했고. ‘싸우는 거 하나는 기깔나게 하는 아저씨니까.’ 아무튼, 다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자 미샤가 곰아저씨와 수다를 떨었다. “다 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출세했다는 기분이 든당.” “후후, 그럴 수도 있겠군. 팀 등급이 인정되는 건 6등급 이상부터니까.” “응응. 이제 정말 제대로 된 탐험가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 되게 묘하넹…….” 사실 나도 느끼고 있던 점이었다. 예전에는 각 등급에 맞는 검문소를 통해 밖에서 만나야 했었으니까. 아무튼, 6등급 전용답게 줄은 빨리 사라졌다. 여길 통과하는 인원은 9등급 검문소보다 훨씬 적지만, 담당하는 인원은 두 배가 넘는 덕분. 심지어 검문대도 방의 형태라서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 “팀 애플 나라크…… 맞습니까?” 우리 팀 등록증을 확인하고는 표정 관리를 하는 행정 직원. 간단한 행정 절차를 밟은 뒤에 우리는 그간 모은 마석을 보따리 채로 넘겼다. 한 일곱 개 정도. 전부 묵직한 걸로다가. “……!” 보따리를 전부 풀어 안에 마석이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한 직원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 시간은 짧았다. 어느샌가 얇게 휘어진 의미심장한 눈매. 왠지 길드 감옥에 끌려갔던 지난날이 떠올라 PTSD가 올 거 같지만……. 대화주의자인 레이븐 선에서 처리가 됐다. “전부 정당하게 몬스터를 처치하고 획득한 마석이에요. 이를 증명할 영상 기록도 있고요. 뭐, 확인을 하신다면, 저희 성과를 공개한 것에 대해 적당한 보상을 해주셔야겠지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합니다.” “그럼 어서 환전이나 해주시겠어요?” 피곤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직원의 눈길이 아니꼬웠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까칠해진 말투. 뭔가 싸한 걸 느꼈을까? 직원이 빠릿하게 움직여 금방 환전을 끝냈다. “2,519만 스톤입니다.” 사실상 클랜 규모에서나 나올 법한 액수. 다섯 명이서 나누면 무려 500만 스톤이다. 매달 이렇게 벌면 연봉이 무려 6,000만 스톤! ‘역시 버닝존답군.’ 전투 한 번에 수십 마리씩 몬스터를 잡는다 해도 마석 두 배 이벤트가 없었다면 이만큼 버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허…….” 입에서 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묘한 기분이었다. 첫 진입 때 18만 스톤을 환전하고서 동기들의 우러름을 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그럼 솜사탕이 대체 몇 개인가?” “어……. 매일 10개씩 먹어도 평생 모자라는 일이 없지 않을깡?” 약탈자의 장비나 그런 게 아니라, 순수 마석 소득이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뭐, 매번 이렇게 벌기는 어렵겠지만. ‘이번에는 되게 일찍 찾은 편이니까.’ 흑색 이끼를 예정보다 일찍 발견했다. 게다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밀라로든이 출몰했다. 더군다나 왜곡 마법까지 한 번에 성공. 다음 탐사에서도 이렇게 잘 풀리리라 기대하긴 어려울 터. “……정산은 내일 하실 거죠?” 이내 검문소를 나오자마자 레이븐이 물었다. 눈빛을 보니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묻는 거였다. “아예 내일모레에 하는 거로 하지.” 어차피 나도 오늘 할 생각은 없었다. 잠까지 줄여가며 사냥을 했을뿐더러, 마지막 날은 아예 12시까지 깨 있었지 않은가. 야영 루틴이 오후 9~10시 사이인 걸 감안하면, 이미 잘 시간조차 오버를 한 셈. “내일모레요?” “그래, 장비나 부산물도 팔아야 하니까.” “아, 그거……. 혹시 얀델 씨가 저 대신 팔고 오면 안 되나요? 진짜 진짜 내일은 못 일어날 거 같은데.” “감정사 자격증이 있으니 이 부분은 맡겨도 된다면서?” 레이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예전에 자랑하듯 뱉은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듯한데……. “장비만이면 모르겠는데, 마법 재료도 껴 있지 않나. 이건 마법사인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얀델 씨도 같이 가요. 짐 들어주는 건 바바리안도 할 수 있잖아요?” 짐꾼은 개뿔. 아공간 반지를 들고 다니는 주제에,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으나……. 나는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마법사의 판매 루트도 내심 궁금했기 때문. “그럼 그때 보는 거로 하지.” 간단하게 약속 시간을 정한 뒤에 각자 흩어져 숙소로 향했다. “하암, 전 먼저 가볼게요.” 레이븐은 개인 연구실이 있는 마탑으로. “아브만,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겠냥?” “걱정 마라. 검문소에서부터 집으로 가는 길은 잘 아니까.” “음, 그래도 집은 찾아가는구낭?” 곰아저씨는 아내가 기다리는 주점으로. “자, 이제 우리도 가장.” “미샤, 그 전에 뭔가 먹으면 안 되나? 너, 너무 배가 고픈데…….” “식사는 일단 씻고서 다 같이 하는 거로 하지.” “윽, 한번 버텨는 보겠다.” 우리는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보금자리로. *** 다음 날 오후 1시. 미샤와 아이나르가 숙소에서 늦잠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외출을 준비했다. 레이븐과 전리품을 팔러 가야 했던 탓. [아, 그럼 내 장비도 수리점에 좀 맡겨줘랑.] [……나도 부탁해도 되나?] 참고로 배낭에 두 사람의 장비도 담아왔다. 따라오겠단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래, 팀장이니까. 팀을 위해서 이 정도는 고생하는 게 맞겠지. “1분 늦었어요.” “지각비라도 낼까?” “제가 거지로 보여요?” 얘는 또 왜 이렇게 까칠해? ‘아, 잠을 더 못 자서 그런 거구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얘는 팀장인 것도 아니고, 그저 마법사란 이유로 끌려나온 거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단 거 좋아하려나? 이따 하나 먹여 보든가 해야지.’ 전 여자친구에게 배운 처세술을 떠올리며 우리는 컴멜비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가는 동안에 오순도순 대화하는 일은 없었다. 둘 다 실신해서 잤거든. “하암, 잘 잤다…….” 눈떠 보니 도착해 있는 마차. 이른 아침부터 만난 게 아니기에 조금 서둘러서 움직였다. 아, 우선 단 것부터 입에 물리고. “으음, 단 거는 실허하눙뎅…….” “눈에 초점부터 잡고 말하지?” “아, 자존심 상해.” 여하튼 오늘 일정은 간단했다. 밀라로든의 부산물을 마법 상점에 판매. 중간에 대장간에 들러 무기 수리 및 가면남의 장비를 땡처리. 확장 배낭과 이프리트 정수는 거래소에 등록. 그리고 거래소에 들른 김에 특수 감정사를 불러내어 불의 보주까지 감정을 끝마쳤다. “이건…… 귀한 물건을 얻으셨군요. 대형 클랜 중에서도 가진 곳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이게 뭔데요? “불의 보주입니다. 발동 시 영혼력을 소모하는 대신, 반경 15m 내에 화염 피해를 줄여주는 마도구죠.” “발동 조건은요?” “시동어가 있습니다. 여기에 적어드릴 테니, 잊지 않도록 하시고요.” 참고로 특수 감정 비용은 무려 30만 스톤. 듣자마자 배가 살살 아파왔다. 진짜 얘네들은 앉아서 돈을 쓸어담는구나. “그래서 감정가는 얼마죠?” “아, 제가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불의 보주는 최초 습득한 분만이 사용이 가능합니다.” “네? 뭐라고요?” 레이븐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근데 이제 와서 뭐 어쩔 거야. 그건 사고였어, 사고였다고. “후우…….” 뭔가 많은 감정이 함축된 듯한 한숨. 용무도 마쳤겠다 슬슬 나가려는데 감정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아, 혹시 입수처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뇨. 저희 성과를 공유할 생각은 없어서요.” “생각이 바뀌시면 찾아주십시오. 불의 보주를 입수한 클랜에서도 다들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지라.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이내 거래소를 나서며 오늘의 일정이 전부 끝났다. 체계적인 동선을 따라 움직인 탓인지 막차가 끊길 때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는 상황. 우리는 승강장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레이븐, 미리 말하지만 나는 이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누가 뭐래요? 뭐, 내가 돈으로라도 배상하라 할 줄 알아서?” 어, 아니야……? 당연히 그게 나올 줄 알았는데. “됐어요. 아까 감정사도 말했잖아요? 개인 물품이라기보단 공공자산 같은 느낌으로 활용되는 마도구라고.” “그래, 나도 팀을 위해서만 쓰겠다.” 내심 걱정했던 고비가 쉽게 풀린 셈. 따라서 나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하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제안은 왜 거절했던 거냐?” “입수처를 알려달란 거요?” “그래, 말하는 것만 보면 넉넉하게 챙겨줄 것 같던데.” “넉넉하긴요. 알려 주면 이걸로 우리한테 준 돈보다 몇 배는 더 이득을 볼걸요? 그건 또 제가 용납 못하죠.” 음, 유통업자가 꿀 빠는 건 어디든 마찬가지 아닌가 싶지만……. “무엇보다 입수처가 밝혀지면 그 책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늘어날 거잖아요? 그건 안 돼요. 나중에 제가 제대로 파헤쳐서 학계를 아주 뒤집어 놓을 거니까.” 이제 보니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놈의 명성이 대체 뭐라고.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동기지만, 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갑자기?” “왠지 마녀와 얽힌 고대의 비밀이 미궁 속에 숨겨져 있는 거 같거든요. 저는 그걸 찾아보기로 했어요.” “으음,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요? 계속 탐험가를 해보겠단 거죠. 얀델 씨 옆에서.” 아니, 그래도 내 옆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내가 빤히 바라보자 레이븐이 싱긋 웃었다. “핏빛성채 때도 느꼈지만, 얀델 씨는 이런 쪽으로 타고났어요. 앞으로도 이번처럼 특이한 일을 자주 겪을 거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옆에 있으면 특이한 일을 자주 겪을 거 같다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믿어도 좋아요. 마법사의 직감은 생각보다 잘 들어맞거든요.” 성능 확실하긴 하네. 그 마법사의 직감이란 거. 173화 선택 (1) 레이븐과 함께 컴멜비에 다녀온 다음 날. 팀 전원이 주점에 모여 최종 정산을 했다. “진짜 엄청나게 벌어왔군.” 마석 소득 2,519만. 확장형 배낭과 잡다한 장비가 301만. 이프리트의 정수가 시험관 값을 빼고 900만 밀라로든의 부산물이 75만. 그러니까 모두 합쳐서……. ‘총 3,795만 스톤.’ 물론, 공평하게 5등분을 하는 건 아니다. 마석은 아이나르가 15%, 곰아저씨가 25%를 챙겨가기로 합의가 됐을뿐더러……. 정수와 밀라로든의 부산물은 특수 전리품이라 레이븐이 40%를 먹는다. ‘어디 보자 그럼 내 몫이…….’ 710만 하고도 2,500스톤. 참고로 미샤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금액. “아이나르 씨는 584만 3천 스톤이네요.” “오오!!” “그럼 정수 값은 어떻게 하실 거죠?” “어, 정수……? 그게 얼마였지?” 터무니 없는 정산금에 기뻐하기도 잠시, 금방 혼란스러운 표정을 내짓는 아이나르. “……그거라면 내가 같이 내지.” 나는 내가 받은 몫에서 215만 7천 스톤을 떼어 레이븐에게 건넸다. “칼스타인 씨 몫은요?” “아, 그거라면 나중에 아이나르에게 받기로 했당.” “음, 그렇다면야. 어… 잠깐만, 그럼 아이나르 씨는 오늘 정산 받을 게 하나도 없네요?” 정산 받을 게 없다는 게 문제일까. 미궁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빚만 늘었다. 미샤에게 400만. 나한테는 저번 달에 사준 장비 값까지 합쳐서 750만. 도합 1,150만 스톤. “그, 그럴 수가……!!! 정산금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이, 이건 뭔가 잘못됐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당. 그래도 정수를 먹고 더 강해지지 않았냥.” 말로 위로하는 미샤와 달리 나는 실질적인 보상을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슬슬 아이나르의 분배도 올렸으면 하는데.” 5등급 정수를 먹었다. 사실상 이제 아이나르의 전투력이 평균 아래라 보기는 어려운 상황. “아, 저는 상관없어요.” “……다음부터는 나도 20%만 받는 거로 하지.” 곰아저씨도 군말 없이 인정하며, 아이나르의 마석 분배비가 20%로 인상됐다. 이제야 균등 분배가 된 셈. ‘후, 맘 같아서는 특수 전리품 비율도 새로 맞추고 싶은데……. 얘가 노발대발할 게 분명하니 이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사실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하다. 탱커에, 리더에, 팔자에도 없던 길잡이에……. 게다가 히든 피스들도 다 떠먹여주잖아? 내가 한 30%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럼 이제 다들 팀 공금만 내시면 오늘 할 일은 전부 끝이네요.” “공금이 얼마였지?” “인당 30만 스톤이요. “또 뺏어가는 거냐……!!” 아이나르의 빚이 30만 스톤 더 늘어났다. 뭐, 어차피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마당에 빚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 최종 정산을 끝내고서 사흘 뒤. 아이나르의 6등급 승급 신청을 위해 미샤가 함께 외출한 동안,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벌써 또 천만 스톤이나 모였네.’ 아이나르에게 빌려준 돈이나 미샤와의 공용 계좌 안에 든 것은 제외한 금액. 역시 5층에 오니까 성장에 가속이 붙었다. 주도적인 플레이가 가능해진 덕에, 게임 내 지식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하나? ‘1년.’ 나는 대략적으로나마 계획을 세웠다. ‘딱 1년만 5층에서 토대를 잡고 6층으로 뜨자.’ 물론, 6층부터는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투력만으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한 계층이니. 6층부터는 기나긴 시간 싸움이 될 터. ‘……그래도 6층에 가면 그 정수를 먹을 수 있으니까.’ 용살자라는 강적이 내 목을 노리는 이상, 나는 한시라도 빨리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 시국을 보면, 지금 상태로는 답이 없을 거 같고.’ 최근 도시 분위기가 매우 무겁다. 정확히 말하면 탐험가 업계가 그렇다. 다들 날이 서 있고 긴장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럴 만도 하다. 이번에 그런 사건이 터졌으니. ‘471명.’ 4층에서 그만큼의 인원이 사망했다. 그것도 이번 회차에서만. 이는 지난번 3층 계층군주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몬스터가 아닌 약탈자. 그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미궁을 들락날락한 베테랑 탐험가들을 목적으로 한 거대 집단의 대규모 테러. “비요른!!”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길드에 갔던 미샤가 돌아왔다.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채, 무척이나 다급하게. “이, 이것 좀 봐랑!! 왕가에서 탐험가들 상대로 공고를 내렸당!” 얼른 종이를 넘겨받아 읽어내렸다. 왕가 주도로 토벌 계획을 세웠고, 6등급 이상 탐험가면 참가 시 보상을 주겠다는 내용의 공고. 토벌 대상은 노아르크였다. ‘……난리가 나겠군.’ 지하 도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99%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집단. 한데 왕가 공문을 통해 그 집단이 언급됐다. “비요른, 너는 어떻게 할 거냥?” “글쎄.” 보상은 제법 매력적이다. 개인당 측정된 금액은 물론이고, 3년간 세금과 환전 수수료 면제. 게다가 공적에 따라 왕가가 소유한 정수까지도 하사한다고 하니, 혹하는 자들이 상당할 터. ‘이미 초대형 클랜들 섭외도 끝난 거 같고 말이지.’ 공고에는 참여하기로 한 클랜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아마 훨씬 큰 보상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일종의 선전용 섭외라고 해야 하나? 내로라하는 대형 클랜들이 참가한 것만으로도 일반 탐험가들의 신뢰도가 수직 상승할 터. 아니, 오히려 개꿀 기회라며 토벌에 참가하지 않는 걸 미련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참가하지 말란 거예요.] 이백호의 조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참가하지 않는다.” 고래 싸움에 껴서 등 터지는 일은 사양이다.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잘 성장하고 있지 않나. 굳이 토벌에 참가해야 할 메리트도 딱히 느끼기 어렵다. “그렇구나…… 다행이당.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일단 혹시 모르니, 레이븐과 아브만을 만나서 얘기를 해둬야겠군. 아참, 아이나르는 어떤 반응이었지?” “명성을 올릴 기회라고 기대하고 있당. 그래도 걱정 마라. 내가 잘 얘기해 둘 테니.” “그럼 그쪽은 맡기지.” 미샤와 대화를 끝내고 일단 마탑으로 향했다. 과연 마법사의 관점은 어떨까? 그 답은 실로 간단했다. “아, 그 공고……. 저도 어제 저녁에 들었어요. 안 그래도 물어보려 헀는데, 참가하지 않겠다니 다행이네요.” “너도 반대하는 쪽인 건가?” “네. 지하 도시에 대해서 궁금하기는 하지만, 일단 말이 토벌이지, 전쟁이잖아요? 그런 이권 다툼에는 끼고 싶지 않아요.” 왕가가 제시한 보상이고 뭐고, 레이븐은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여러모로 다행인 부분. 이후 들린 곰아저씨네 주점에서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온종일 주점에서 다들 그 얘기만 하고 있는데, 나는 뭔가 석연치가 않더군. 뭐, 보상은 욕심이 나지만…….” 곰아저씨는 아마 솔로 플레이 중이었다면 토벌에 참가했을 거 같다고 말했다. 하긴, 이 아저씨는 거의 마흔 살 가까이 됐으니. 3년치 세금 면제면 어마어마하다. 일단 아내 몫 세금까지 거의 혼자 도맡고 있는 양반 아닌가. “후후, 그리고 내년엔 아이도 태어나지 않나. 출산 혜택으로 20년간은 세금이 감면될 테니, 그렇게까지 급할 이유는 없지.” “그렇군.” “너희가 불참한다면, 나도 낄 생각은 없다.” 오케이, 그러면 토벌은 패스하는 거로 결론이 났고. ‘……자세한 정보는 커뮤니티가 열리면 거기서 알아보기로 하자.’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따라서 슬슬 숙소로 돌아가 이번 달에 도시에서 해야 할 일들이나 점검하려던 차. 곰아저씨가 뜻밖에 제안을 해왔다. “얀델, 이따가 술 한잔 어떤가?” “술?” “이제 넌 한 팀의 리더 아니냐. 보아하니, 이쪽 관련으로는 인맥이 없는 거 같던데.” “그래서?” “5층 탐험가들의 모임이 오늘 저녁에 있다. 괜찮다면 한번 같이 가보는 게 어떠냐는 말이다?” 음, 친목질이라……. 솔직히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탐험가들은 동업자들끼리 만나서 놀며 정보 교류를 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 한 번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긴 원탁의 감시자에서는 너무 고급 정보만 나와서 이런 쪽으로는 알기 어려우니까.’ “좋다. 그럼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전해 들은 다음엔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때웠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반겨주는 라그나. 다만, 도서관에만 있었으면서 언제 이 소식을 들었을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혹시……. 토벌에 참가합니까?” “아니, 우리 팀은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안색이 확 밝아진 라그나. 왠지 그 사실이 미심쩍었기에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다행이라니, 노아르크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나?”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왕가가 어떤 부류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분명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겁니다.”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하는 라그나. “왕가?”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십시오.” 이내 라그나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철회했다. 나도 굳이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왕가의 험담을 늘어놓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이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걱정…….” 그 단어를 곱씹듯이 읊조리는 라그나. 다만, 조금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평소처럼 걱정한 게 아니라며 한사코 내 말을 정정할 줄 알았건만. “네.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어…… 그렇군.” 이렇게 나오면 도리어 이쪽이 무안해진다. 하지만 막상 뱉고 나니 본인도 창피한지 라그나의 목이 살짝 빨개졌다. 따라서 나도 그냥 모른 척했다. “……그럼 마법을 걸어주겠나? 이제 책 좀 읽으려는데.” “아, 네. 마법. 그렇지요.” 여기서 더 어색해지고 싶진 않으니. *** 오후 10시. 평소라면 몸을 씻고서 슬슬 침대에 누웠을 그 시간. 처음 와보는 술집에 와 있다. 그것도 내가 거주 중인 7구역이 아니라, 장벽 하나를 넘어가야 하는 8구역에 위치한 어느 술집. “아브만! 오랜만일세! 잘 지냈나?” “나야 잘 못 지낼 게 뭐 있나. 그러는 너는?” “하하! 나야 매일 죽지 못해 살고 있지!” 개인 룸으로 들어서자 모여 있는 열댓 명의 탐험가가 보였다. 여기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주최자인 모양. “옆에 그 친구는?” “우리 팀의 팀장이다.” “오호, 자네를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그 행운아가 바로 여기 있었군?”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최자의 주도하에 간단한 소개 시간을 가졌다. “나는 페르페 데르베스. 편한 쪽으로 부르게. 그냥 페페라고 불러도 좋고. 친한 사람들만 쓰는 별명일세.” 페페라니……. 수염 난 아저씨한테는 지나치게 귀여운 별명. “……데르베스로 하지.” “그러게나.”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비요른이라 불러도 되겠나?” “마음대로.” 탐험가답게 신속하게 끝난 호칭 정리. “잠깐, 비요른 얀델? 어딘가 익숙한데?” 그때 탐험가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뒤늦게 어디서 들어 봤는지 떠올랐을까. “아, 작은 발칸! 3층 계층군주 때 이름을 날린 그 바바리안! 맞나?” “맞다.”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날 바라보는 데르베스의 눈빛도 조금은 변했다. 놀라워하면서도 어딘가 의문스러운 시선. “오호, 그럼 아직 1년 차도 안 됐단 뜻인가?” “그 부분은 걱정 마라. 안 그래도 이번에 5층에 다녀왔으니.” 곰아저씨가 어시스트를 해주자, 의문은 싹 지워지고 감탄만이 남았다. “1년도 안 돼서 5층까지 진출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이후 데르베스는 참가한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었다. 작은 발칸이라는 유명세. 거기에 폭발적인 성장력을 알기 때문인지, 다들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딱 한 명만 빼고. “5급 클랜 네비스울프 소속의 잭 존슨빌이다.” 어딘가 공격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금발 태닝 인간 아저씨. ‘왜 눈깔을 저따구로 뜨지? 뒈지고 싶나?’ 바바리안화 된 사고방식에 벌써 몸이 근질거리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이 세계의 몇 없는 현대인 아닌가. 그래, 내가 이해해야지. “하하, 그럼 술이나 마시지.” 싸한 공기를 느꼈는지, 데르베스가 건배를 외치며 분위기를 풀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 혹은 업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가? 괜찮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곰아저씨. 나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탐험가 모임이라기에 트래쉬 토크만 잔뜩 하고 가는 건 아닌가도 싶었는데, 이 정도면 꽤 괜찮다. 뭐, 물을 흐리는 새끼가 한 명 있긴 했지만. “다음엔 이런 낡은 술집 말고 다른 곳에서 모이는 게 어떻소?” 잭 존슨빌. “우리 클랜 산하의 주점이 있는데, 술이 아주 끝내주지. 물론, 여기보다 훨씬 비싸긴 하지만. 하하하!” “토벌? 당연히 참가해야지. 아, 여러분은 팀 단위라 조금 두려울 수도 있으려나?” “그래도 열심히 해보기는 하시오. 혹시 모르지 않소?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클랜에 가입할 수 있을지.” 이 모임에서 유일하게 클랜에 소속된 놈이자, 그 사실을 아닌 척 계속 자랑만 해대는 놈. 심지어 이 새끼는 내게 관심이 쏠릴 때마다 나서서 초를 쳐댔다.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 없군. 얀델, 자네의 비결은 뭔가? 어찌 그렇게 빨리 올라올 수 있었지?” “딱 봐도 뻔하지, 팀을 잘 만난 거 아니겠나.” “…….” “……하하, 좋은 동료를 두는 것도 실력이지.” 정적이 찾아올 때마다 애써 포장하며 분쟁을 없애려 노력하는 데르베스. “그, 그나저나 비요른. 자네는 어떤가? 우리 모임에 처음 참가한 소감을 들어 보고 싶은데.” 이걸 솔직히 말해, 말아? 잠깐 고민이 됐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음에 든다.” “풋, 마음에 들 수밖에. 이제 막 5층에 도착한 햇병아리니까.” 나는 현대인의 정신과 유교의 이념, 그리고 야만인의 대범함을 겸비한 K-바바리안. 참아야 할 땐 기필코 인내한다. 이보다 더한 모욕도 웃으며 감수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자꾸 뭐라고 씨불이는 거냐, 이 병신 새끼가.” “뭐, 뭣?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그럼 여기에 병신이 너 말고 더 있나?” 참을 필요가 없으면 참지 않는다. 그게, K-바바리안이니까. 174화 선택 (2)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순서가 있음을 의미하는 유교의 삼강오륜 중 하나. 그러나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란 말이 있다. ‘여기는 나이가 의미 없는 세계지.’ 라프도니아는 개개인이 지닌 힘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는 약육강식의 도시. 쉽게 말해, 강약유서強弱有序. 오직 강하고 약함만이 순서를 나눈다. 그리고 그 법칙에 의하면, 지금 내가 참아야 할 이유는 제로. “……햇병아리가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군.” “햇병아리한테 처맞고 싶나?” 내가 슬그머니 일어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뭣?” 이렇게까지 나오는 경우가 처음인지 당황하는 금발 태닝. 곰아저씨가 슬그머니 내 팔에 손을 댔다. “얀델.”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의사 표시. 이에 잔뜩 쫄아 있던 금발 태닝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되찾았다. “동료 말을 듣는 게 어떤가? 지금이라면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으로 봐주지.” 뭐래, 이 새끼는 또. 나는 그냥 맞짱을 신청했다. “됐고, 결투나 하자.” 도시에서 허락한 유일한 개인적 분쟁 수단. 합의가 됐고, 공증인이 있는 곳에서 정당한 결투를 한다면 그것은 폭력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죽이면 또 일이 골치 아파지지만. 그거야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면 되는 부분. “……결투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의미는 무슨. 그냥 네 머리통을 부수고 싶을 뿐이다.” “미친놈…….” 이렇게까지 야만적인 탐험가는 처음인지, 금발 태닝은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표정이었다. 하긴, 가오나 잡으려고 온 모임에서 맞짱 신청을 받을 줄은 몰랐겠지. “뭘 그리 생각하나? 햇병아리한테 처맞을까 봐 겁이라도 나는 건가?” “……미친놈을 상대해 줄 필요는 없지.” 금발 태닝이 코웃음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런 전법을 쓰기로 한 거구나. 미친놈과는 어울려 주지 않겠다는 식의 정신 승리. 파훼법은 간단하다. “쫄았네.” 한 마디에 금발 태닝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그러나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을까? 괜히 옆에 있던 데르베스에게 화풀이를 했다. “페페, 자네도 사람 좀 가려서 받아야겠군. 이런 야만인과 어울려서는 자네의 수준도 덩달아 떨어지지 않겠나.” 데르베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할 시간도 없었단 게 맞다. 제 할 말만 하고서 등을 휙 돌리며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금발 태닝. 터벅, 터벅. 허리는 꼿꼿했으며 걸음걸이도 당당했다. 하지만 나는 금발 태닝이 이 상황에서 수치와 모멸을 느끼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브만, 보이나? 쟤 얼굴 빨개졌다.” “그러게, 창피한 줄은 아는가 보군.” 처음엔 말리던 곰아저씨도 나와 함께 놈을 패는 데 주저치 않았다. 피하지 못했으니 즐기겠다는 마인드. 내 동료로서 아주 바람직하다. 다만, 이 모욕을 마냥 참기만은 힘들었을까. 터벅. 이내 금발 태닝의 발이 출입구 앞에서 멈췄다. “어, 멈췄다. 결투라도 받아 주나?” “그럴 리가 있겠나. 딱 봐도 클랜 이름값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인데.”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금발 태닝.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꼬나보자, 놈이 이를 악물며 읊조렸다. “바바리안, 알량한 명성을 운 좋게 얻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군.” “응, 그래서?” “그딴 식이면 5층 위로는 못 올라갈 거다.”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었다. 얘는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천천히 걸어나가며 말했다. “몇 년 차인진 모르겠지만, 그 나이 처먹고 1년 차도 안 된 나한테 쫄은 병신. 클랜 없인 5층에서 사냥도 못 하고, 앞으로도 평생 5층에서 월급처럼 콩고물이나 주워 먹을 너.” 그리고. “8개월 만에 5층에 도착. 누구와 달리 이명도 있고, 더 위로 향하기 위해서 직접 팀을 꾸린 나. 바바리안족 내에서도 이미 잠재력을 인정받아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나.” 이내 놈의 앞에 선 나는 어깨를 툭툭 쳤다. “자, 그럼 몇 년 뒤에 더 위층에 있을 사람이 누구지?” 금발 태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균 신장이 170인 인간 남성답게 그저 나를 올려다볼 뿐. 나는 친히 허리를 굽혀 얼굴을 내렸다. 그리고 놈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럼 어서 꺼져라. 클랜에 이르든가 말든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이내 문을 열어주자 금발 태닝이 멍하니 밖으로 나갔다. 콰앙. 즉시 문을 닫았다. 등을 돌리니 모두가 날 보고 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툭 뱉었다. “자, 문제는 내가 해결했으니 이제 술이나 마저 마시지.” 이상하게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 거, 사람 무안하게. 대화로 해결하는 바바리안 처음 보나? *** 정적도 잠시였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랐던 마음이 잦아들며 우리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당연히 잭 존슨빌. 쫄아서 빤스런한 놈에 대한 것이었다. “하하핫, 결투하자고 했을 때 그놈이 짓던 표정 봤나?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걸세.” 의외로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하긴 처음 본 내 눈에도 밉상이었는데, 애네는 오죽했겠어. “근데 왜 계속 끼워 줬던 건가?” “거들먹거리긴 해도 클랜의 일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를 주절대 줬으니까.” 음, 입이 싸단 부분에서 나름 쓸모가 있었단 거구나. 그렇다면 왠지 미안하게 됐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요즘에는 잘 안 받아 줬더니 오는 빈도가 줄더군. 아마 얼마 안 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걸세.” “그렇다면야.”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네. 클랜에서도 말단인 녀석이라, 자네에게 보복하거나 하는 건 꿈도 못 꿀 테니까.” “하핫, 페페. 어디 말단인 게 문제인가? 그놈 성격이면 위에다가 창피해서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할걸?” “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하긴, 그런 얘기를 해봤자 클랜에서도 머저리 취급만 받을 테니.” 그야말로 깔끔 그 자체. 역시 참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애초에 클랜에서 보복한다고 해도 지들이 뭐 어쩔 건데?’ 미궁에서 우리를 기습하는 것? 대형 클랜이 그딴 짓을 했다가 걸리면 그날로 철퇴를 맞는다. 일개 말단을 위해 그딴 선 넘는 짓은 절대 하지 못할 터. ‘해봤자 경험치 통제가 전부겠지.’ 해당 지역의 경험치 수급을 못 하게 하는 갑질. 한 지역만이라면 모르겠지만, 5층 클랜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블랙리스트에 등재되면 레벨링에 있어 엄청난 제약이 올 수밖에 없을 터. 아, 물론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 애초에 돈 내고 경험치를 챙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거울 안에서 사냥하면 그만인데 왜 돈을 내? “자자, 그럼 마시세!” 술자리가 이어지며 금발 태닝에 대한 얘기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를 대신한 주된 화제는 노아르크 토벌 건. “비요른, 자네 팀은 참가하지 않는다고?” “그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데르베스, 너는 어떻게 할 건가?” “우리는 이미 한 발 걸치기로 결정을 내렸네. 어차피 위험한 건 미궁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군.”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이 그럴 걸세. 보상이 제법 매력적이지 않나.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1년 넘게 탐사를 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일세.” “무탈히 돌아오기를 기원하지.” “하하, 고맙네.” 굳이 그 선택에 대해 뭐라 첨언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보다 탐험가 경력이 적은 자는 한 명도 없으니까. 초면인 내가 훈수를 둔다고 선택을 바꿀 리 없을뿐더러, 예의에도 어긋난다. 아무리 바바리안이어도 지킬 건 지켜야지. “그럼 이제 시간이 늦었군. 슬슬 해산하세. 아브만, 자네도 어서 가지 않으면 부인께 혼나지 않겠나.” “……얀델과 같이 간다고 해서 괜찮다.” “호오? 부인께서 이 친구를 아주 괜찮게 봤나 보군?” 새벽 두 시가 넘어서 모임이 끝났다. 사실 그 전부터 한두 명씩 이유를 대고 빠져나가긴 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다음에도 또 올 건가?” “불러준다면.” “그래, 그럼 아브만을 통해 얘기를 전하지.” 당장 유익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평범한 탐험가들의 사고방식과 상식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 그러나 다음에도 이곳에 참가할 생각이다. 이들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가정하에. 토벌이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하니까. “크으, 덕분에 오랜만에 잘 마셨군!” 이내 거리로 나오자 쌀쌀한 밤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초봄 정도였는데.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서 가자.” “흐하핫! 그래, 가야지!” 술을 거의 들이켜듯 마셔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업 된 상태의 곰아저씨. 사실 멀쩡하게 서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음주량이었으나, 정신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뭐, 그런다고 집에 찾아갈 수는 없겠지만. ‘왠지 이 아저씨랑도 좀 더 친해진 기분이네.’ 마차도 끊긴 시간이기에 7구역까지 한참을 걸어 곰아저씨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잠깐 쉬었다 갈래요? 숙취에 딱 좋은 게 있는데.” 이번에 탐사로 돈을 잔뜩 벌어서인지 내게 한없이 자상한 곰사모님. 뜨듯한 꿀물을 대접받고서 나도 집으로 향했다. ‘집이라…….’ 이제 그 정도로 입에 붙어 버렸구나. 덜컥. 잠긴 문을 열자, 동시에 뒤쪽 방문이 열렸다. 207호. 미샤의 방이다. “으음, 이제 왔냥?” “아, 깨 있었나?” “왜 이렇게 늦었냥? 술 냄새는 대체 뭐고?” 잠시 복도에 서서 곰아저씨와 모임에 참가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래, 거기에……. 고생 많았당. 이제 진짜 팀장 같네.” 이런 교류가 탐험가의 업무이기도 한 세상. 미샤는 고생했다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근데 그 손에 종이봉투는 뭐냥?” “오는 길에 야시장이 있어서 사과 꼬치를 몇 개 사 왔다.” “응? 넌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냥?” “너희 둘이 좋아하지 않냐.” 내 말에 피식 웃는 미샤. “냐핫, 그러니까 무슨 아빠 같당.” 이내 미샤가 봉투에서 꼬치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내일 아이나르나 줘야지. 덜컥.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고 대충 몸을 씻었다. 적당히 날아간 취기와 창문을 타고 솔솔 들어오는 시원한 밤공기. ‘나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부쩍 드는 어느 날이었다. *** 모임이 있던 날 이후. 조금은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돈이 생겼으면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잖아? “아이나르, 성지에 가서 각인을 받아라.” “돈이 없는데?” “빌려주겠다.” “……그, 그런!!” 처음 돈을 빌릴 땐 꽁돈을 받은 것처럼 굴던 아이나르는 점점 액수가 늘어날수록 빚의 무게를 알게 됐다. “나는 언제까지 돈을 벌 수 없는 건가!!” 글쎄, 아마 1년은 그러지 않을까? 사실 그다음에도 큰돈의 사용처는 내가 하나하나 정해줄 생각이고. 아무튼, 3단계 각인을 찍는 데 사흘이 걸렸다. “생각보다 멀쩡하군. 아프지 않았나?” “아팠다!” “근데?” “강해지기 위해서 아픈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어, 그래…… 그런 거구나. 역시 바바리안은 일반인과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 참고로 아이나르가 받은 각인은 ‘학살자’. 각종 전투 수치에 보정을 주는 전형적인 전사용 각인이다. 3단계 각인 스킬은 [포식]을 골랐다. 몬스터를 처치 시 일정량의 영혼력이 회복되는 좋은 성능의 패시브 스킬. ‘일단은 3단계만 찍고 돈이 생기면 한 번에 6단계까지 올리자.’ 아, 그동안 미샤의 성장도 있었다. 아이나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강해지자 조금 조급해졌을까? 미샤는 이번에 번 돈 중 대부분을 ‘야수의 피’를 현질하는 데 꼬라박았다. 그리고 그 결과. “비요른!! 드디어 성공했당!” 마침내 영혼수 1차 각성을 이뤘다. 새롭게 얻은 권능은 [빙하의 축복]. 냉기 관련 스킬이나 아이템을 쓸 때 자원 소모 값을 절반 줄여주는 씹사기 권능. ‘설마, 그 검보다 이 권능이 먼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지난 고생들의 대가일까? 5층에 올라선 후부터 일이 술술 풀린다. “근데 너는 그 장비를 계속 쓸 거냥?” “5층에서는 이걸로도 무리 없다.” 그렇다고 나도 돈을 안 쓴 건 아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확장형 배낭을 팔아치우고 갖고 있던 돈 거의 전부를 들여 아공간 반지를 구입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확장형 배낭도 슬슬 불편한 게 느껴지더라고. ‘어차피 나중에 바꿀 거, 미리 사두는 게 낫지.’ 미궁에서 개인 배낭은 필수품이다. 언제 팀과 떨어지게 될지 모르잖아? 무엇보다 아공간에는 신선 제품들도 넣고 다닐 수가 있다. ‘정말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라니까.’ 앞으로도 잔뜩 벌자고 의지를 다잡으며 외출을 준비했다. 로트밀러와의 만남 약속 때문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정시에 왔군.” “이제 나도 길잡이니까.” “후후, 아주 마음에 드는 자세일세.” 며칠 전부터 로트밀러와 매일 만나며 길잡이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중세의 대장장이 같은 전문직들이 그러했듯, 이런 기술을 그냥 가르쳐달라는 건 거의 날도둑이나 다름없으니까. 매일 상당한 수업비를 내고 있다. “5층은 나도 가보지 못해서 말해 줄 수 없네. 하지만 그곳에 대해서도 공부는 많이 했으니,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군. 아, 지도 제작도 배워 두면 크게 도움이 될 걸세.” 탐색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지식. 그리고 몇 가지 재주와 실무자만이 해 줄 수 있는 노하우. 거기에 방향 감각을 키우는 특수 수련 등등. 나는 로트밀러가 수년간 노력하며 정립한 모든 것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자네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아예 교습소를 차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드는군.” “좋은 생각이다. 너라면 분명 배우겠다고 다들 모여들 게 분명하니.” “하하, 금칠은…….” 이후 로트밀러와의 수업이 끝나고서는 숙소로 돌아와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 오늘은 에르웬도 함께했다. “어떻게 매번 여기 있을 줄 알고 찾아오는 거냐? 혹시 외출했을 수도 있는데.” “으음…… 왠지 저는 알 수 있겠더라고요. 요정의 촉이라고 해야 하나?” “흥, 촉은 무슨. 그냥 만날 때까지 찾아오는 거면서.” “미샤 말이 맞다! 이 허풍귀쟁이!!” “……둘 다 그만해라.” 에르웬이 올 때면 두 사람 다 퉁명스럽게 변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바바리안은 원래 요정을 싫어하고, 미샤는 그냥 요정을 싫어하니까.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내가 무리한 기대를 하는 걸까? ‘어쩌면 에르웬을 동료로 넣는 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도.’ 식사를 하면서 에르웬의 근황도 들었다. 이번에 언니가 아는 클랜에 용병 형식으로 몇 달간 들어가기로 결정됐다던가? 다음부터는 5층에서 사냥하게 될 거라 그랬다. 거, 금수저의 삶이란. “전 그럼 가볼게요! 다음 주에 봬요!” 식사가 끝나고서는 방에 올라가 씻고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늦은 시각이었으나 굳이 잠은 자지 않았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오늘이 그날이거든. 175화 선택 (3) 더블 사이즈 침대와 장롱. 그리고 컴퓨터 책상 하나가 놓인 이한수의 방.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일단 컴퓨터부터 키고서 채팅방에 입장했다. 지난번에 몇 분 늦게 들어갔다고 죽은 줄 알았다며 유난을 부리던 녀석 아닌가. ‘무엇보다 1시간밖에 같이 못 있고 말이지.’ 이번에는 제법 큰 사건이 있기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이백호에게서 떠볼 생각이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왔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배치된 드넓은 방. 소파에 앉을 새도 없이 이백호가 뒤따라서 로그인을 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형!” 근데, 이건 또 뭘까. 딱 봐도 표정이 무척이나 다급하다. “지금 제가 전투 중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나가 봐야 해요.” “뭐?”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이 없어요.” “아니—” “토벌전 소식은 들었죠? 나중에라도 절대 참가하지 마세요. 그거 말해드리려고 온 거니까.” “그게 무슨 뜻—” “다음 달에 봬요!” 그게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몇 초도 되지 않아 휙 하고 사라져 버린 이백호. “……뭐야?”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다만, 침착하고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전투 중이라고?’ 커뮤니티에서의 1시간은 현실에서 1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나간다? 그만큼 강한 적과 싸우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1분 정도 있어 봤자, 바깥에서는 고작 0.02초가량이 흘러 있을 뿐이니까. 그 시간조차 낭비할 수 없는 적이란 방증. ‘얘는 대체 뭐랑 싸우고 있는 거야?’ 모르겠다. 확실한 건 오직 하나. 얘가 노아르크 토벌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뿐. ‘이 새끼, 역시 지하 도시에 있던 건가?’ 야심한 밤. 그것도 미궁에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닌데, 적과 싸우고 있다니, 역시 노아르크 토벌 말고는 다른 경우의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토벌대가 출정한 게 바로 어제였으니까. 왕의 군대와 탐험가 연합, 거기에 신전에서 지원을 보낸 성기사단들까지. 줄지어 하수도로 들어가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 ‘마지막에 남긴 말은……. 역시 토벌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한단 뜻이겠지?’ 나중에라도 절대 참가하지 말라는 것. 이를 해석하면, 첫 토벌이 실패하고 2차 토벌군이 만들어지리란 말이 된다. ‘아, 진짜 답답하게…….’ 일단 여기 있어 봤자 나오는 것도 없기에 방으로 돌아갔다. 원탁의 감시자가 열리기까지도 무려 3시간이 남은 시각. 할 것도 없기에 웹서핑을 시작했다. 처음엔 거래소부터 확인했고, 그다음엔 입장 제한이 없는 채팅방들을 순회했다. 전부 한결같았다. 모두가 노아르크 토벌전에 관한 얘기만 하고 있다. ‘……이미 아래는 난리가 났구나.’ 플레이어 중에서 토벌에 참가한 자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그리고 그들 말을 들어 보자면……. “저는 후방에 있어서 잘 모르는데, 분위기가 진짜 심상치가 않습니다. 앞에서 계속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지휘관 새끼들은 입 꾹 닫고 아무 설명도 안 해 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참여 인원이 적죠? 설마 전부 죽었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다는 듯하다. 얼마나 격렬한지는 솔직히 상상도 안 간다.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이 게시글을 보면은 더욱더 그렇다. [이제 곧 죽는데 질문받음.] -목에 칼 맞았는데, 눈 떠보니 여기였음. -12초는 살아 있겠지? -씨발. [EdwardBless77: 영원한 꿈이 아니기를. 눈을 뜬 곳이 너의 집이기를 빌게.] [└글쓴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godFLEXyou: 고생했다. 그만 쉬어라.] [└글쓴이: 위로 고마워.] [stevencastle: 전방 부대였나 보네. 거기가 지금 생지옥이라던데. 오르큘리스도 만나 봤어?] [└글쓴이: 몰라. 누가 왔다고 소리치는 건 들었는데 기억 안 나. 어쩌면 걔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흑마법사 새끼들 때문에 1m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상황이었어.] [teckmonkey: 뭐가 제일 하고 싶어?] [└글쓴이: 번식.] [└teckmonkey: 어, 음…… 말 줄일게.] [tunaboot: 어디 출신이야?] [└글쓴이: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네. 지구면 캐나다. 여기를 말하는면 아리베텐 클랜, 일단은 간부급이었어.] [└tunaboot: 당연히 고향을 말한 거였어. 근데 아리베텐 클랜 간부라니, 너 거물이었구나.] [└1spring: 그럼 뭐 해, 이제 죽는데. 굿바이] [└ionboii: 와, 여기서 이 정도로 커밍아웃 하는 걸 보니 어그로 끄는 건 아닌가 본데?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수고 많았어. 그리고 위에 헛소리해대는 놈은 그냥 무시하길 바랄게.] 그 아래로도 수십 개가 넘게 달린 댓글들. 실시간으로 댓글 수가 늘어나는 와중에도 글쓴이는 하나하나 답변을 해주었다. 무언가 홀린 것처럼 위에서부터 쭉 읽어가던 나는 댓글을 하나 달았다. [Elfnunna: 왜 벌써 포기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로그아웃하고 살려고 노력해야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있다. 한없이 0에 가까울지 몰라도, 0은 아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다. 다만, 막상 달고 나니 너무 실례인 것도 같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Elfnunna: 나도 목에 칼을 맞았던 적이 있어. 게임에 있던 카운트다운 비슷한 상태에 돌입한 적도 있고. 그래도 몸이 움직이더라. 결국 적을 죽인 다음 포션을 먹고 겨우 살아났었어. 그러니까 너도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망자의 땅과 핏빛성채에서 있었던 경험. 이것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글쓴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나는 궁수라서 말이야. 네가 말한 방법은 못 쓸 거야.] 돌아온 답변은 완벽한 체념이었다. [└Elfnunna: 그래도 시도는 한번 해 볼 수 있잖아?] 나는 무언가 홀린 듯이 댓글을 달았고. 금방 답변이 달렸다. [└글쓴이: 미안, 어차피 죽는다면 나는 나로서 죽고 싶어.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낳아주신 나로서 말이야.] 보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과연 여기서 뭐라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래 봤자, 진짜 몸이 아니지 않냐고? 어차피 네가 생각하는 정체성이 발현된 것일 뿐이라고? 글쎄, 그 누구도 글쓴이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될 터였고. “…….” 나도 모르게 장롱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옆에 위치한 거울을 봤다. 이한수가 보였다. 타다다닷- 나는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편히 쉬길 바란다거나, 원래 세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던가. 그런 위로의 말들을 수없이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쉽게 엔터 키를 누를 수 없었다. 타다다닷- 그렇게 한참이나 키보드를 두들기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와중에도 플레이어들의 댓글은 계속해서 달렸다. 글쓴이는 그 하나하나에 대답을 해주었고. [branbran_helmet: 개쓰레기 좆망겜.] [└글쓴이; 그러게, 이 개쓰레기 좆망겜!] 그 댓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나는 새로고침을 눌렀다. 어느새 최상단에 적혀 있던 글쓴이의 닉네임이 블러 처리가 되어 있었다. “…….” 사망했다는 뜻이었다. ***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얼굴도 모르고,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눈 적도 없다. 그런데 자꾸만 심장이 거칠게 뛴다. 두근두근. 이 세상에서 눈을 떠 수없이 보았던 죽음. 그 죽음의 무게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드르륵- 답을 찾기라도 하듯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다시 한번 쭉 읽어내렸다. 많은 사람이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물었던 덕분에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일생을 엿볼 수 있었다. 드르륵- 그는 캐나다 출신이었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맥 데이비스. 첫 키스가 17살 때였다. 상대는 여자친구의 베프였다던가? 골 때리는 놈이란 생각이 들지만, 죽을 잘못을 하고 살아온 건 아니었다. 드르륵- 꿈은 수의사였다. 어렸을 때 키우던 개가 토를 하다 목에 걸려 질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게 계기였다. 하지만 공부 머리가 없어서 실패. 결국, 부모님 농장 일을 도우면서 가끔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드르륵- 그래, 평범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착하고, 때론 뭔가 어긋나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하는……. 그런,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 드륵. 이내 나는 한 지점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다시 확인해 보니 내가 남겼던 댓글에 새롭게 달려 있는 댓글이 있었다. [└글쓴이: 네가 남긴 말이 자꾸 기억에 남네. 왠지 너는 강한 사람일 거 같아. 꼭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게. 물론, 네 선택이겠지만 말이야.] 고작 몇 문장뿐인 위로의 말을 적지 못해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고 있던 때, 그가 나에게 남긴 응원의 말. “…….”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에서 그가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이었는지가 느껴진다. 타다다닷- 키보드를 두드려 새로운 댓글을 작성했다. 어차피 이제는 볼 수도 없겠지만……. [└Elfnunna: 만약, 돌아가게 되면 네가 위에 적어 둔 주소로 꼭 편지를 쓸게.] [└Elfnunna: 고생 많았어.] 의미 없을 댓글을 남기고서 게시글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이런저런 상념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03 : 07] 원탁의 감시자 입장 마감까지 고작 3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끼이이익- 허겁지겁 들어온 원탁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 초승달도, 고블린도, 여우도, 사슴뿔도. 그리고 광대도 없다. 오직 나만이 자리한 원탁의 방. ‘……설마, 전부 토벌전에 참가한 건가?’ 역시나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커뮤니티 내에서 3시간. 밖에서는 고작 3초밖에 안 되는 그 시간. 그 3초가 없어서 여기에 오지 못할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설마, 여기서도 바람맞을 줄은 몰랐는데…….’ 이백호에 이어 연달아 맞게 된 바람.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번뜩였고,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최소 인원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본 회차의 집회가 종료됩니다.] 모니터에 떠오르는 메시지. 그래, 아무도 없이 입장 마감 시간이 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커뮤니티 활동의 알맹이가 쏙 빠져 버린 셈. ‘그래도 계속 둘러보다가 가든가 하자.’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웹서핑이나 하며 자잘한 소식을 체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종료 시간이 되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익숙한 비요른의 방과 비요른의 몸. 다만 오늘따라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 그냥 피곤한 탓인가? ‘이제 잠이나 자자.’ 나는 머리를 싹 비우고서 침대에 누웠다. 삐걱. 늘 그랬듯 앓는 소리를 내며 푹 꺼지는 침대. 이로써 또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사흘 뒤. “비요른! 어, 어서 나와 봐랑! 지하로 내려갔던 토벌대가 귀환했당!” 노아르크로 향했던 군대가 돌아왔다. 딱 3분의 1 정도만 살아서. “…….” “…….” 축 늘어진 어깨로 말없이 길을 지나치는 군대.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뻔했다. ‘정말 실패했구나.’ 일이 골치 아파졌다. 176화 도플갱어 (1)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단발. 눈 밑에 새겨진 문신. 170이 조금 넘는 키에 마른 근육형 체형. “…….” 거울 앞에 선 아멜리아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자, 반쯤 잘려 나간 귀의 흉터가 드러났다. 여인의 삶을 바란다면 분명 결점이 될 상처. 그때는 포션 한 병을 살 돈이 없어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의 그녀라면 깔끔하게 치료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거의 다 왔어.” 이 상처는 항상 일깨워 준다.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성주께서 부르신다.” 그녀는 미리 정리해 둔 가방을 메고서 밖으로 나섰다.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오르큘리스의 일원.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가장 이름이 알려진 악령이자, 세간에선 시체수집가란 이명으로 불리는 거물 범죄자. “워낙 상황이 급하다 보니.” “얼마나 나쁜 거지?” “왕가에서 초강수를 뒀어. 설마 그 미친놈을 감옥에서 풀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설마, 그가 밖에 나온 건가?” 언제나 무표정이 베이스이던 아멜리아도 이번만큼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시체수집가’가 대중에 알려진 악령이라면, 그 남자는 반대였으니까. 이름을 아는 자는 거의 없지만……. 그 정체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에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 그놈이 왔어. 덕분에 일이 좀 꼬였지. 지금 우리 쪽도 엄청나게 죽어 나가고 있거든.” 안경을 낀 사내가 싱긋 웃으며 아멜리아의 등을 탁탁 쳤다. “그러니까 어서 갑시다. 다들 이미 모였고, 이제 누나만 오면 끝이라니까?” “…알겠다. 어서 이동하지.” 이내 아멜리아는 사내를 따라 걸었다. 빠른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적막한 복도. “혹시 용살자도 전투에 참가했나?” “응? 아, 걔…… 팔 병신이 됐는데 뭘 하겠어? 아마 지금도 방에서 쉬고 있을걸?” “……그렇군.” 아멜리아는 조심스레 한 가지 질문을 추가로 던졌다. “차도는 좀 있던가?” “그게 왜 궁금해?” 뚝 발걸음을 멈추며 뒤를 도는 사내.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자이니만큼, 어쩌면 용살자의 장비가 암시장에 풀린 사건과 자신을 연관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수를 했군.’ 뒤늦게 조급했단 생각이 들지만, 아멜리아는 최대한 태연하게 답했다. “쓸모가 없어졌으면 죽여 버리려고.” “……응? 걔랑 악연이라도 있어?” “눈이 마음에 안 들어.” 아멜리아의 답변에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길지는 않았다. 즐거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폭소하는 사내. “아하하핫! 하긴! 그 뱀눈깔이 조금 짜증 나긴 하지. 지 주제도 모른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멈춰졌던 사내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참아줘. 몸은 반년에서 일 년 정도면 낫긴 한다는 모양이니까.” “용살검은? 그게 없으면 그놈도 딱히 쓸모가 없지 않나?” “아, 그거. 찾아봐야지. 연금술사 할아범이 말하길, 기억을 복원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렇군.” 기억을 복원할 방법이라니. 그게 뭐냐고도 묻고 싶지만, 애써 참았다. 평소 타인에 관심이 없던 자신이 아닌가. 이 눈치 빠른 놈이면 분명 위화감을 느낄 게 분명하다. ‘이 부분은 추후 따로 알아봐야겠어.’ 이후로 한 3분쯤 복도를 지나치자, 거대한 문이 눈앞에 드리웠다. 성주의 대전으로 향하는 백색의 문. 안으로 들어서자 옥좌에 앉은 성주가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왔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약식으로 경례를 취한 아멜리아는 대전 안에 있던 다른 네 명의 인물을 살펴보았다. 세 명은 안면이 있었고, 한 명은 처음 보는 자였다. “오르큘리스 쪽의 탐험가일세. 다만 시간이 없으니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이만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그녀도 호기심을 지우고 성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들을 부른 것만 봐도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만은 않네.” “헤헤, 들었어요! 그 미친 아저씨가 여기까지 내려왔다면서요?” “그렇네. 카르밀라 양. 지금은 단장이 그를 상대하고 있지만, 오래 버티긴 어렵다 하는군.” 성주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도시 봉쇄를 하게 됐다는 것. 그래서 2년간은 그 누구도 밖에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리라는 것. “자네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는 즉시, 봉인 마법진을 발동할 걸세. 혹시 궁금한 점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2년 뒤에 봐요! 잘생긴 성주 오빠!” “카르밀라, 성주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뭐래, 냄새나는 아저씨가.”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서 아멜리아는 네 명의 동료와 함께 바닥에 비밀 통로로 이동했다. 머지않아 붉은 깃발이 박힌 지점이 나왔다. [도착했습니다.] [무운을 빌지.] 메시지 스톤을 통해 연락을 취함과 동시에 거대한 마력이 도시 방향에서 뿜어졌다. “와, 신기하다. 진짜 못 넘어가네?” 푸른빛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벽. ‘이런 식으로 이 도시를 떠날 줄은 몰랐건만.’ 아멜리아는 묘한 감흥을 애써 지우며 이번 임무를 상기했다. “언니, 그쪽이 지휘관이라면서요. 이제 우리는 뭘 하면 돼요?” 임무는 실로 간단하다. 라프도니아에서의 정보 수집. 이것이 주임무이며, 가능하다면…….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한 명의 탐험가를 죽이는 것. 성주가 지시한 두 번째 임무를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호선이 길게 그려졌다. *** 도시에는 정말이지 온갖 소문이 돌았다. 토벌 실패는 왕가가 의도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음모론부터 시작해, 노아르크와의 전쟁으로 도시가 궤멸할 것이란 종말론까지. ‘이런 건 이쪽 세상도 다르지 않구나.’ 나는 며칠간 주점을 순회하며 그런 허황된 얘기들을 끊임없이 듣고 또 들었다. 지루하면서도 스트레스가 따르는 작업. 다만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원탁의 수사자 가면이라면 모를까. 맨땅 바바리안이 뭘 어쩌겠는가. 몸으로 직접 뛰는 수밖에. “비요른, 오늘도 술 마시러 가냥?” “그래, 늦을 테니 먼저 자라.” 미궁 진입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기. 오늘도 날이 저물자마자 어김없이 거리로 나가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고만 있어도 알아서 정보가 들려왔다. “사망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다음 달로 미뤄질 거라더군.” “하긴, 그만큼이나 죽었으면 왕가도 감당이 안 되겠지.” “하핫, 그 반대일세. 돈은 충분한데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집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더군.” 어찌 보면 초창기 때와 비슷했다. 뭐, 그땐 돈이 없어서 주점은 못 오고, 식사할 때 귀를 열어 두는 정도였지만. ‘오늘도 별건 없군.’ 토벌 실패 이후, 왕가가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탓에 루머는 단어 그대로 복사가 되듯이 무한하게 재생성 됐다. 하지만 그나마 팩트에 근접한 것들만 정리를 해 보자면 이렇다. 1. 노아르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패퇴 직전에 봉쇄라는 초강수를 두며 구사일생했다. 이 부분은 증인들이 많기에 확실하다. 아무리 입단속을 시켜도 참가했던 인원이 몇인데, 그게 숨겨지겠어? 2. 왕가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탐험가가 존재한다. 술 취한 생환자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그때 모임에서 만난 데르베스 아저씨가 어떻게 잘 살아서 돌아왔거든. 오르큘리스의 단장과 대등하게 싸웠다던가? 하긴 명색이 왕가인데 그런 고수가 한 명쯤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아무튼, 이쯤에서 다음. 3. 이번 토벌에서 십대클랜 셋이 해체됐다. 사실 해체가 아니라 궤멸이다. 생존자가 1할도 채 되지 않아 복구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 참고로 십대클랜뿐만 아니라, 5, 6층 수준의 중소 클랜들도 절반 이상이 공중분해됐다. ‘그래도 덕분에 사냥터 통제는 좀 덜해지겠네.’ 현 시국의 유일한 긍정적 요인이다. 기뻐하기엔 반대급부로 딸려온 사안이 너무 심각하단 거겠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결국 미궁에서 승부를 보게 될 수밖에 없겠군.’ 전쟁의 징조가 보인 때부터 걱정하던 점이다. 솔직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무한 PK 콘텐츠라니…….’ 원작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콘텐츠 아닌가. 미궁이 전쟁터로 변해 버리면, 거기서 돈을 벌고 성장해야 하는 나는 휘말릴 수밖에 없다. ‘마석 수급이 적어지면, 인플레이션도 시작될 게 분명하고.’ 애석하게도 이런 고민에 대한 얘기는 싸구려 주점에서 듣기조차 힘들었다. 하긴, 벌써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 탐험가가 있다면 악령 의심부터 해 봐야겠다마는. ‘이제 나도 결정을 내려야겠네.’ 슬슬 결단의 때가 찾아왔다. 진정될 때까지 탐사를 멈추느냐, 아니면 그저 평소처럼 미궁에 진입하느냐.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역시 들어가는 게 맞겠지.’ 언제 이 혼란이 끝날지 기약조차 없는 상황. 마냥 쉰다는 건 악수에 가깝다. 용살자 새끼와의 악연은 끝난 게 아니니까. 덩굴 반지가 끊어지기 전에 최대한 강해져야 한다. 그것만이 살 방법이다. ‘어차피 나중에 강제 징집이라도 하면, 결국 전쟁에 참가해야만 할 테고.’ 무엇보다 이번 전투에서 노아르크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쉽게 말해, 그쪽도 정비 시간이 필요할 터. 설령 아니라고 한들, 우리는 다른 탐험가보다 사정이 낫다. 그도 그럴 게, 1층은 버그로 뚫을 수 있다. 4층은 독립 차원이니 논외, 5층에서도 일단 거울을 타고 들어가기만 하면 PK에서 해방된 사냥이 가능하다. ‘문제는 둘을 어떻게 설득하냐는 건데…….’ 마법사 레이븐과 10년 짬밥의 곰아저씨. 그 둘이 과연 미궁에 들어가겠다고 말해 줄지는 아직 모르겠다.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결정이 끝나자마자 술잔을 비우고서 주점을 나섰다. 바바리안에게는 바바리안만의 방식이 있는 법. “죄송한데, 오늘은 장사 끝났…… 어머, 얀델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이 때문에?” “아브만은 있나?” “술에 절어 퍼질러 자고 있을 거예요. 잠깐 기다려 봐요. 얼른 깨워서 대령할 테니까.” 이번에 금융 치료를 제대로 받아서 그런가? 예전보다 몇 배는 더 친절해진 듯한 곰사모님. 덜 치워진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니, 머지않아 곰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끌려왔다. “얀델, 오밤중에 대체 무슨 일이냐?”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흐음, 그래? 잠깐 술 좀 깨고. 여보?” 곰아저씨가 호출하자 사모님이 기다렸다는 듯 꿀물을 내줬다. “쭉 마셔요.” 저 극진한 대접을 보니, 어느새 가장의 권위를 되찾은 모양. “크으, 그래 이거지. 그래서 하려는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번에 탐사에 참가할 건가?” “흐음,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너는 이미 마음을 정했군?” “나는 들어갈 거다.” 이리저리 간 볼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곰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나도 끼지.” “결정이 빠르군.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닌데, 일단 우리는 팀 아니냐. 리더가 정했으면 믿고 따라가야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종류의 대답이었다. 설마 리더의 권위를 존중해 줄 줄이야! 이 아저씨, 사실 이런 쪽으로는 보수적이었던 거구나. “그럼 이 얘기는 끝이군.”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고 가지?” “됐다. 네 아내도 쉬어야지. 너야말로 일어난 김에 청소나 돕고 자라.” 순식간에 대화를 끝마치고서 주점을 나섰다. 방금 멘트로 점수를 좀 땄는지, 곰사모님의 눈빛이 한결 더 부드러워진 건 덤. [03 : 24]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마탑으로 향했다. 어차피 얘네는 지금이 낮이나 다름없으니까. 실제로 레이븐도 한창 연구실에 짱박혀 뭔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응? 얀델 씨? 이 시간엔 왜?”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다.” “그래요? 일단 하던 것만 끝내고. 아무 데나 앉아서 잠시 기다려줘요.” 야밤에 이게 뭔 결례냐며 한소리 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별말은 없었다. 동료가 되어서인가? 그래도 이제는 남 취급은 안 하는 듯하다. “그래서요? 물어볼 게 뭔데요?” 잠시 기다리자 레이븐이 주변을 정리하고 앞에 앉았고, 나는 이번에도 그냥 툭 까놓고 말했다. “미궁, 들어갈 거냐?” “아, 그거……. 하긴 그것도 얘기하기는 해야 했죠. 나머지는 어쩐다는데요?” 가장 마지막에 자신에게 물어보러 왔을 게 분명하다는 말투. 왠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너 말고는 모두 들어가기로 합의를 했다.” “그래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결정이 빠르군.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나는 곰아저씨에게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고, 그때와는 다른 대답을 들었다. “네.” “……뭐지?” “별건 아니고, 이번에 왕가에서 마탑에 공문을 안 보냈어요.” “공문?” “원래 뭔가 위험한 일이 있으면 최우선적으로 마탑에 언질이 오거든요. 이번에는 들어가지 말라든가 그런 식으로.”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납득은 됐다. 일종의 VIP 대우라고 해야 하나? 최고급 인력으로 분류되는 마법사이니, 무려 왕가에서 직접 안전을 신경 써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토벌을 주도했던 게 왕가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공문이 없다? 사실상 왕가에서는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단 뜻이거든요.” “……그렇군. 그런 게 있으면 미리 좀 말해 줘라.” “리더님이 원하신다면야.” 나를 놀리는 듯한 미소를 끝으로 마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고 있던 미샤와 아이나르를 깨웠다. “아, 뭐냥. 자고 있었는데.” “윽, 술 냄새!! 또 나만 빼고 마시러 간 건가!” “됐고, 이거나 먹어라.” 포장해 온 닭다리를 하나씩 물려주고 결과를 통보했다. “우리는 미궁에 들어간다.” 아이나르는 뭐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반응이었고, 미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럴 줄 알았다. 이 겁대가리 없는 바바리안노망.” 후, 팀원 전부 얘네 같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그게 끝이냥?” “그래, 끝이다. 어서 가서 자라.” “아, 진짜 이런 건 그냥 내일 말하라고…….” 미샤가 투정을 부리며 방으로 돌아갔고, 이는 아이나르도 마찬가지. “잘 자라! 비요른!” 나도 열쇠를 꺼내 홈에 끼웠다. 다만 옆으로 돌려 잠금쇠를 풀려던 찰나. 또각, 또각.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관임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백색 소음. 한데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그 소리가 귀에 팍팍 꽂힌다. 또각. 결국 무심결에 등을 돌려 계단 쪽을 확인했고, 그 덕분에 올라오던 인물과 눈이 딱 마주쳤다. 치마를 입은 탓에 착각했나도 싶었지만……. 아무렴, 그럴 리가 없지.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망자의 땅에서 한 번, 하수도에서 한 번. 도합 두 번 내게 벽이란 것을 느끼게 해줬던 지하도시 출신 8층 탐험가. 통칭 싸이코패스년. 꿀꺽. 뇌리에 각인된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목을 집어넣고 침을 삼켰다. 근데 당혹스러운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을까? “설마, 여기서 날 아는 자와 만날 줄이야.” “…….” “이건, 좀 곤란한데.” 여자가 날 보며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한쪽 발을 뒤로 쭉 빼며 자세를 취했다. 얘는 이미 해결책을 강구해 낸 거 같았다. “뭐, 그때처럼 두들겨 패고 기억을 지우면 되겠지.” 제기랄. 177화 도플갱어 (2)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하는 것. 이곳에 온 첫날, 아이나르에게 해주었던 조언. 그때도 마냥 빈말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좌우명은 지금까지 수없는 역경 속에서 내 목숨을 살렸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기랄.’ 짧은 넋두리를 끝으로 현 상황에 집중한다. [설마, 여기서 날 아는 자와 만날 줄이야.] 일단 첫 대사로 알 수 있는 정보 하나. 적어도 날 노리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정보 둘. 얘도 이 상황을 나만큼이나 난감해하고 있다. 다만, 뉘앙스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정체를 들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하나 더 있는 듯한 느낌. ‘노아르크는 봉쇄됐다고 하던데……. 그럼 얘는 뭐 스파이 같은 건가? 봉쇄되기 전에 미리 밖으로 빼돌린?’ 글쎄, 아직은 확신하기 어렵다. 뭔가 숨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터. 당장 확실한 건 오직 하나뿐이다. [뭐, 그때처럼 두들겨 패고 기억을 지우면 되겠지.] 얘는 이 와중에도 날 죽일 생각이 없다. 쉽게 말해, 그쪽만큼은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뜻이다. ‘실수로 지뢰만 밟지 않으면 말이지.’ 기억 제거 알약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 들통나지 않게 조심하면 된다. 그럼 최악의 경우까지는 가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내가 취해야 할 기본 스탠스도 정해졌다. 순순히 알약을 먹고 무력화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보험은 들어놔서 손해 볼 게 없으니까. ‘하수도에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몇 달 전 일이긴 했지만, 금방 기억이 났다. 하수도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 나는 분명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했다. “……왜 이제 와서 내가 죽이고 싶어진 거지? 약속은 지켰을 텐데?” 망자의 땅에서의 기억이 마지막이라면 할 수밖에 없는 질문.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짓하자 여자가 고개를 젓더니 지 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표정이 훨씬 더 여유로워졌어.” 피식 웃고 말았다. ‘여유로워졌다라…….’ 그게 그렇게 티가 났을 줄이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맹세는 아직 유효하다. 못 본 척하고 갈 생각은 없나?” “그럼 이걸 먹어라.” 여자가 포켓에서 알약을 꺼내 내게 던졌다. 전체적으로 거무죽죽하고 껍질도 뭔가 축축한 환단. “기억을 없애 주는 약이다. 그것만 먹는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게 되겠지.” 문득 약을 먹는 게 가장 깔끔하게 현 상황을 해결할 방법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널 어떻게 믿지?” 역시 그건 최후의 보루다. 알약을 먹으면 정신을 잃게 되니까. 그때 만약 이 여자가 내 장비에 욕심을 내면? 그냥 호기심으로 열어 봤다가, 혹여나 내 아공간 반지에서 용살검이라도 발견한다면? 결국, 그것도 지뢰인 건 마찬가지. “네게는 달리 방법이 없을 텐데?” “왜 방법이 없다고 하는 거지?” 망자의 땅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수백 배. 하수도 시절로 따져도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무엇보다, 이곳은 도와줄 이 하나 없는 깜깜한 지하가 아니다. 법과 사회가 기능하는 지상의 도시. “내가 소리만 한 번 질러도 동료들이 깰 거다. 너 혼자는 감당하지 못할 텐데?” 굳이 이 여자에게 지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이제 보니 여유가 아니라 건방이었군.” “확인해 보시던가.” 내 호기로운 말에도 여자는 침묵했다. 시건방지다 말하긴 했지만, 본인도 알고 있는 거겠지. 이전과는 상황이 너무도 다르다는걸. “…….” 텅 빈 새벽의 복도에 때아닌 무거운 정적이 내리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상대 쪽이었다. “바바리안.”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나를 부르는 여자. 나는 대답 대신 뒤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타닷! 둘로 늘어난 여자의 분신이 보였다. 도플갱어의 이능 [자가복제].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수라각]을 시전했습니다.」 소리 없이 뒤에서 나타난 분신이 도약하며 체중을 실어 발을 휘둘러온다. 지난번에 내 머리통을 통째로 날렸던 그것. 나는 즉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콰앙! 손목을 타고 저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다만, 그게 전부다. ‘지금 내 물리 내성이 몇인데.’ 뭐, 뼈에 실금 정도는 간 것 같지만…….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 정도는 고통 내성 때문에 아픈 느낌도 들지 않아서. “베헬—라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수박만 한 주먹을 분신의 안면부에 내리꽂았다. 퍼엉-! 타격을 허용한 즉시 폭죽처럼 연기를 피우며 사라지는 분신체. 합공에 대비해 서둘러 본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아, 내가 이걸 막을 줄 상상도 못 했던 거구나. 나는 순순히 대답해 줬다. “소리.” 어느새부터인가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야심한 밤이라지만 명백히 이질적인 현상이다. 아이나르의 코골이 소리는 나무 문짝 따위 가볍게 통과하니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얘가 기습을 하려고 한단 걸 깨달았고, 한 걸음 내딛는 걸 보고 수단까지도 눈치를 챘다. 그때 한 번 당하기도 했던 [자가복제]. ‘분신 소환이 가능한 반경은 5m.’ 내 뒤에 소환하려면 살짝 거리가 안 됐을 게 분명하다. 두 번이나 싸웠던 적이었기에, 이렇게 카운터치는 것도 가능했던 셈. “아까 내가 한 제안은 유효하다. 못 본 척하고 그냥 네 할 일이나 하러 사라져라.” 나는 다시금 아까 한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이전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널 어떻게 믿지?” 나는 씨익 웃으며 똑같이 돌려주었다. “네게 달리 방법이 있나?” 뭘 썼는진 몰라도 지속 시간이 짧은 편인지, 몇 초 전부터인가 다시 아이나르의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소리만 질러도 동료가 나온단— 끼이익. 그때 문이 열렸다. “비요른? 대체 누구랑 그렇게 얘기를…….” 졸린 눈을 비비적대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미샤. “이따가 설명해 줄 테니, 일단 들어가라.” “악!” 다 열리기 전에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야이! 미친놈아!!” 머리를 찧은 미샤가 광분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야! 열어! 열라고! 밖에 여자지! 에르웬? 설마 걔가 또 온 거냥!!” 나는 몸으로 문을 틀어막고는 조용히 여자를 응시했다. 눈빛에 담은 말은 지극히 간단했다. ‘자, 이제 어쩔래?’ 대답은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서 돌아왔다. “돌아가겠다고 하면, 믿을 건가?” 쉽게 말해, 보복이 걱정되지 않느냐는 뜻. 나는 조금도 주저 않고 대답했다. “믿는다.” 어차피 예전에도 맹세 하나만 믿고서 나를 살려 줬던 여자 아닌가. 실제로 나는 이 여자를 신고하지 않았다. 방금은 미샤를 온몸으로 막기까지 했고. “이만하면 너도 알 거 아닌가. 네가 뭘 하고 다니든지 상관없다. 나는 너랑 얽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렇겠지.” 여자가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은?” “돌아가겠다.” “다시 날 찾아오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찾아온 게 아니다. 하지만…… 원한다면 그것도 약속하겠다.” 그 말에 나도 조금은 긴장을 낮췄다. 한낱 약속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니까. [되도록이면 바바리안은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지 않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망자의 땅에서도 누군가의 약속 하나 때문에 나를 살려 주었던 여자다. 약속의 무게도 남다를 터. ‘그땐 싸이코패스라고 불렀지만, 사실 알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지…….’ “그럼 가봐라, 인간 여자.” “…….” 내 말에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안도감이 피어났다. 싸우지 않고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오러를 버텨 내기에는 세팅이 전부 끝나지 않았으니까. 도시고 동료고 뭐고, 진짜 끝장을 보려고 했다면 나도 피를 봐야 했을 터. “후…….”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봐야 제대로 잘 수 있을 거 같았기에, 계단으로 향했다. 또각. 여자는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1층으로 내려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꼈을까? “……인간 여자가 아니다.” 여자가 휙 하고 등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한마디를 남기고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이 무슨…….” 이러면 나중에 또 만날 거 같지 않은가. 똑똑. 일단 아이나르의 방에 노크했다. 코골이 소리만 들려올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노크하기 무섭게 열린 미샤의 방문과 달리. “야! 밖에 그 여자는 누구였냥!” “잡상인이다.” “뭐?” “됐고, 잠이나 자자. 피곤하다.” “어? 어어? 어어…… 어? 자? 여기서? 왜?” 나는 베개 하나를 바닥에 깔고서 맨바닥에 누웠다.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그렇지. 피, 피곤하면 어쩔 수 없지. 오, 오, 올라와서 자랑. 그러지 말고…….” “그래도 그건 좀……. 그냥 여기서 자겠다.” “응? 그럼 여, 여긴 왜 온 건데?” 어……. 오늘은 왠지 혼자 자기 무서울 거 같거든. *** 시간은 흘러 미궁 입장 날이 되었다. [10 : 30] 포탈이 열리기까지 1시간 30분이 남은 시각. 약속 시간이 되자마자 레이븐이 도착했다. 이걸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셈. “다행히 이번엔 아무도 안 늦었네요?” 일단 결속 마법부터 걸고서 다 함께 이동했다. 참고로 출발 장소는 곰아저씨의 주점이었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릴 바에는 그냥 여기서부터 데려가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판단. “……확실히 평소보다 사람이 적네요.” 차원 광장으로 가는 길목은 이질적일 만큼 한산했다.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었다. 시국이 시국이니, 다들 한 번은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려 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건 뭐지?’ 차원 광장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한산했던 길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다들 줄을 서 주십시오!” 평상시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공무원. 그리고 군대가 보인다. 기사 한 명에 병사 넷이 모인 구성이 수백 개의 조를 이루어 여기저기 포진해 있다. ‘……설마 미궁 진입을 통제하려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자, 받으십시오.” 길게 이어진 줄 끄트머리에 서자 얼른 다가와 두 가지 물품을 내미는 공무원. 하나는 영상 기록구였고, 다른 하나는……. 음,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이 목걸이는 뭐지?” “우리 쪽 탐험가라는 인식표입니다.” “인식표……?” “예.” 공무원은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공식 행정답게 사설이 길기는 했지만, 해석해 보자면 아주 간단했다. ‘잃어버리면 좆된단 거네.’ 이 인식표가 없다면 척살 대상이 된다. 반대로 인식표가 없는 자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 ‘잠잠하더라니 이런 걸 꾸미고 있었구나.’ 미궁이 열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말을 해 주는 걸 보니, 정말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던 모양. 라프도니아의 주민인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비, 비요른…… 우리 괜찮은 거냥?”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냐? 미궁에서 군대가 우리를 지켜 준다는 뜻인데.” “아, 그런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요. 지하도시에 포탈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자, 5분쯤 지나 포탈이 열렸다. 우선 군대가 가장 먼저 안으로 진입했고, 그다음은 줄을 서서 기다리던 탐험가들 차례였다. “……이거 잘하면 못 들어갈 수도 있겠군.” “에이, 우리크프리트 씨도 참.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레이븐은 그럴 리 없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이 굳었다. 줄어드는 줄과 비례해 작아지는 포탈.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이 기꺼웠다. ‘음, 이러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는데?’ 원래는 지난날의 일화를 고백하고 경험치 복사 버그를 쓸 생각이었다. 한 달간 지켜본 곰아저씨는 신의를 큰 가치로 두는 사람이었고, 레이븐은 다른 의미로 믿을 만했으니까. 특수 감정사와 있었던 일이 주요했다. [알려주면 이걸로 우리한테 준 돈보다 몇 배는 더 이득을 볼걸요? 그건 또 제가 용납 못하죠.] 얘는 남 좋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방법을 공유하고, 이번 진입부터는 공짜 경험치를 계속 적립하려 했다. 하지만……. “뭐 하는 거냐! 빨리 들어가!” “안 들어갈 거면 저리 비켜!” 지금 상황이면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유도하는 것도 가능할 거 같다. 내가 봐도 아슬아슬한 상황이니까. 막상 군대를 보자 겁이 났는지 앞에서 길을 막고 우물쭈물하는 탐험가들이 꽤 있던 게 컸다. “여기까지입니다! 다들 물러서 주십시오!” “뭐!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는데!” 대기열이 10쯤 남았을 때 입장이 종료됐다. “우, 우리 이대로 집에 가는 건가!!” “허, 진짜 못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우리크프리트 씨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렇잖아요.” “……이걸 내 탓을 한다고?” “후, 됐고. 그럼 이제 다들 돌아가죠?” 다들 현실에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 듣는 바바리안 섭섭하게. 고작 이런 걸로 포기하고 그래? “비요른, 뭐 햐냥? 계속 앞에만 보고.” “지금이다.” 이윽고 포탈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곧 게이트가 폐쇄됩니다!’ 같은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을 타이밍. “다들 업혀라.” “응?” 설명할 시간은 없었기에 일단 [거대화]부터 켰다. 순식간에 커지는 육체. “무, 무슨 짓이에요! 지정되지 않은 장소에서 이능을 발현하는 건 불법—!” 벌금이야 내면 그만이다. 얼마 하지도 않았다. 상해를 입힌 것만 아니면 30만 스톤 정도. ‘이건 공금에서 까면 되겠고.’ 나는 즉시 네 사람을 양팔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거기! 무슨 짓입니까!” “멈추십시오!!” 공무원들의 말뿐인 외침은 싹 무시했다. 어차피 이것도 끽해 봐야 벌금 조금 나오고 끝날 테니까. 역시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5층에서 하루만 사냥해도 그게 얼만데! “꺄악!” “너, 설마! 그냥 들어가려고?” “베헬—라아아아아!” 내 외침이 대답이 되었을까? 왼팔에 낀 아이나르가 꺄르르 웃었다. “하하핫! 역시 비요른이다!!! 위대한 전사!!” 그래, 이래야 우리 바바리안답지. 쿠웅! 쿠웅! 나는 흡족한 미소를 내지으며 텅 빈 광장을 빠르게 질주했다. 솨아아아아- 사람 크기 정도로 줄어들어 불안하게 흔들리는 포탈의 빛. 이내 그 빛이 번뜩이며 우리를 보듬어 안았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세이프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178화 도플갱어 (3)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레이븐이 빛구체 마법을 시전했다. “리에이트.” 눈뽕을 당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 내게로 레이븐이 물었다. “얀델 씨, 지금 뭐 하세요?” 슬며시 눈을 떠보니, 평소와 달리 희미하고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빛구체가 보인다. 이거, 밝기 조절도 되는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다.” 머쓱함을 뒤로하며 둘러대자, 레이븐이 핀잔을 주었다. “그나저나 이런 짓을 할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세요. 놀랐잖아요.” “맞당. 나가서 경비병한테 잡혀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거냥?” “벌금이나 좀 내면 될 거다.” “설마, 공금으로 낼 생각은 아—” “팀을 위한 일이었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레이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만 거기서 별말은 하지 않았다. 딱히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지금 중요한 것도 그런 게 아닐 테니까. “이상하지 않나? 시작부터 암흑지대라니.” “그냥 암흑지대가 아니에요. 저기 보여요?” 곰아저씨의 중얼거림에 레이븐이 한쪽 벽면에 자리한 비석을 가리켰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 “계층비석이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나?” “차원불안정 현상인 거 같아요.” “……그게 뭐지?” “포탈도 결국 차원 마법의 일종이잖아요? 가끔 이런 일이 생길 때가 있다고 들었어요. 시작 좌표 입력에 오류가 생기는 거죠.” “……그럼 그냥 우연이란 건가?” “글쎄요. 포탈이 소멸되기 직전에 차원불안정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측 기록이 있기는 해요.” 어, 그거 왠지 나도 읽었던 책 같은데. 왠지 입이 근질거리지만 그냥 닥치고 있었다. 어차피 얘가 알아서 다 설명해 줄 건데, 괜히 나서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비요른, 이건 그때…….” 내가 눈짓을 보내자 미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말실수를 대비해 아이나르 옆으로 다가갔다. 오케이, 그럼 이 부분은 끝났고. “흐음, 그럼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게 원인이란 소리군?” 곰아저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탐험가답게 경험치 복사 버그가 가진 사기성을 깨달은 모양. 다만, 레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조금 애매해요.” 응? 대체 뭐가? 나는 참지 못하고 대화에 껴들었다. “애매하다니, 무슨 뜻이지?” “아무리 좌표 입력에 오류가 발생해도 이렇게 최외각부로 떨어지는 일은 없어요. 그랬으면 다들 늦게 들어가지 뭐하러 빨리 들어가겠어요?” 음, 그것도 그렇긴 하지. 사실 나도 이 부분이 의문이었다. 차원불안정 현상은 의외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한데, 왜 이 개꿀 버그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는가. “차원불안정 현상이 제대로 알려진 건 130년 전이에요. 그 시기에 차원 마법진에 큰 문제가 생겨서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거든요.” “그래서?” “마탑에서 왕가의 의뢰를 받고 차원 마법진을 보수했어요. 안정화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불안정 현상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됐고요.” 쉽게 말해, 백 년간은 늦게 들어가도 경험치 복사 버그를 쓸 수 없었다는 뜻. “그렇다면 지금 이건 어떻게 된 거지?” “……다시 보수를 해야 할 시기가 됐다는 게 아닐까요?” 그럴듯한 추측을 내놓은 레이븐은 조심스레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일은 비밀로 하죠.” “좀 더 자세히.” “지금 차원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 현상이 심해지면 다른 탐험가들도 겪을 정도가 되겠죠.” 가만히 듣던 곰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진 우리만 알고 쓰자는 거군.” “네. 탐사 시간도 줄이고 공적치도 쌓고, 얼마나 좋아요?” 내가 껴들었다. “잠깐, 마법사는 공적치가 의미 없지 않나?” 마법사는 정수를 못 먹는다. 그래서 경험치를 먹어도 쓸모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걸까. 레이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기거든요. 아직 사람 손을 안 탄 계층비석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열어 봐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븐이 비석에 손을 댔다. 후우우웅-! 오색의 광채를 뿜어내며 열리는 포탈. 레이븐은 손끝의 감각과 공기 중의 마력흐름에 집중하기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짧게 읊조렸다.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네요.” 마력 재능이 제로인 바바바리안인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감각. 다만, 그런 나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최초로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2」 크, 이거거든. 날로 먹는 이 감각. *** 「2층 짐승의 소굴에 입장했습니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일단 올라만 가봤다가 바로 1층으로 내려왔다. 그야 짐승의 소굴은 우리로 답이 없거든. 갈림길이 워낙 많은 곳이라 로트밀러 정도의 탐색꾼이 아니면 오히려 시간만 지체된다. ‘로트밀러도 짐승의 소굴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고 그럴 정도였지.’ 인도자가 있으니 길을 아예 못 찾을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길로 가는 게 더 빠른데 굳이 이곳을 통할 이유는 없을 터. “그럼 슬슬 우리도 움직이지.” 나침반을 꺼내 한 손에 쥐고서 길을 찾았다. 일단 암흑지대를 벗어났고, 그다음에 북서 방향으로 나아갔다. 길을 헤매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도 1층에서 길찾는 법은 로트밀러에게 제대로 학습을 했으니까. 물론, 그래도 아직은 미숙하지만……. “아브만, 포탈 위치는?” “저쪽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북쪽으로만 가도 되겠군.” 팀에 인도자가 있는 덕분에 나침반 하나로도 최적의 동선을 밟는 게 가능하다. 부족한 실력을 치트키로 메우고 있는 셈. 그렇게 미궁 진입 후 3시간쯤 되었을 때였다. “정지.” 외곽에서 외곽으로 이동하던 우리의 경로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나타났다. 왕가의 문장을 가슴에 새긴 기사와 네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무리. “인식표는 있소?” 우리를 멈춰세운 기사가 짧게 묻는다. 이미 그들은 몇 번인가 전투를 치렀는지 무기와 갑옷에 피가 묻어 있다. 몬스터의 피는 아니다. 1층에 붉은 피를 흘리는 몬스터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물으리다. 인식표는?” “아, 여기 있다. 너희도 어서 꺼내라.” 기사가 뿜는 위압감에 주춤하기도 잠시, 모두 도시에서 받은 인식표를 꺼내서 보여 줬다. 그러자 기사가 막고 있던 길을 터줬다. 한 가지 조언까지 해주면서.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벌써 눈치 빠른 몇몇은 인식표를 노리고 돌아다니는 듯하니.” 그래, 그렇구나. 하긴 걔네가 바보도 아니고, 살려면 그것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겠지. 나는 옆을 지나치며 궁금한 걸 물었다. “혹시 빼앗은 인식표를 구별할 방법이 있나?” “없소.” “그럼 우리는 왜 의심하지 않지?” 내 질문이 조금 귀찮게 느껴졌을까? 기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질문에 대답은 해주었다. “피.” “……?” “빼앗은 거면 사람 피가 묻어 있었을 것이오. 무엇보다 당신 얼굴을 알기도 하고.” 응? “나는 페르데힐트 백작가의 기사요.” 아, 연회 때 나를 봤구나. 그나저나 백작 이 양반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준비가 되면 나를 따로 부르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뭐, 나야 무소식이 희소식이겠다마는. “흐음, 유명인이랑 다니니까 편하긴 하네요?” “놀리지 마라.” “네? 놀리는 거 아닌데요?” 후, 얘는 진짜 내가 바바리안인 줄 아나. “입꼬리나 내리고 그러지?” “……진짜 눈치만 빨라가지고.” “아무튼, 이제부터는 속도 좀 올리지. 힘들면 말해라.” “말하면 어떻게 해 줄 건데요?” “아이나르가 널 업어줄 거다.” “엑? 내가?” 아이나르도 레이븐도 싫은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야 사람을 덜 마주칠 거 아니야. “……아이나르 씨, 업어주세요.” 속도를 올리고 30분쯤 지났을까? 방구석 마법사 레이븐이 체면을 버리고 등에 업히기를 택했다. 덕분에 속도가 한결 올라간 건 덤. 업혀만 있으니 심심한지 레이븐이 아이나르의 몸을 여기저기 주물렀다. “마, 만지지 마라!” “우와, 아이나르 씨는 생각보다 몸이 말랑하네요?” “……놀리는 건가! 그럴 거면 내려라!”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싫어하는 아이나르. 슬슬 레이븐에게 주의를 줄까 싶던 차, 나는 앞을 가로막은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발을 멈췄다. “비요른, 왜 멈추냥?” “시체다.” 총 다섯 구의 시체였다. 남자 넷 여자 하나. 장비가 싹 털렸는지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출혈 상태로 보니 시간이 제법 흐른 듯했다. “아이나르 씨, 내려주실래요?” 레이븐도 탈것에서 내려 시체를 살폈다. “기사한테 당한 건 아닌 듯하네요.” “근거는?” “상처요. 한 명은 둔기, 한 명은 화살. 그리고 나머지는 불에 당했어요. 마법은 아닌 거 같고, 아무래도 이능이겠죠.” 기사는 검을 쓴다. 오러를 가장 활용하기 좋은 무기라서 그렇다. 그런데 검상이 하나도 없다라……. “노아르크의 탐험가였던 거 아닐까? 인식표가 없는 걸 보고 다른 탐험가가 해치운 거지.” 미샤의 말에 레이븐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죠.” “반대라닝?” 대답은 곰아저씨가 했다. “아까 만난 기사도 말했잖나. 인식표를 얻기 위해 다른 탐험가를 노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 “게다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놨어요. 보통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진실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체는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이른 시간에 1층 외각에 도달한 탐험가 아닌가. 스피드런을 할 수준의 탐험가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궁이 열리고 몇 시간도 되기 전에, 1층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죽었다. “……진짜 긴장해야겠는데요?” “얀델, 보아하니 이놈들도 고블린 숲으로 간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 “다른 쪽이라고 해서 차이는 없을 거다.” “후, 그것도 그렇긴 하군.” 결국 우리는 일정의 변동 없이 고블린 숲을 향해 나아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는 2층 포탈 앞에 도달했다. [06 : 47] 바로 이전 탐사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빠른 시간대. 로트밀러와 타임 어택을 했을 때와 견주어도 30분밖에 차이가 안 난다. “얀델 씨는 이제 진짜 탐색꾼으로 전향해도 되겠는데요?” “냐핫, 바바리안 탐색꾼이라니.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거당!” “비요른은 바바리안의 희망이다!” 다들 시간을 확인하고서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지만, 사실 내 능력이라 보긴 어렵다. 이번 탐사는 출발 선상이 달랐으니까. 외곽에서 외곽을 향해 움직인 거니 아무래도 시간 절약이 훨씬 될 수밖에. “……됐고, 어서 올라가기나 하자.” 나는 짧게 일축하며 포탈 앞에 섰다. “부끄러워 하는군.” “응응, 그러넹.” 뭐래, 얘네들은. ***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 7일 차 오전. 로트밀러가 있었을 때보다도 오히려 하루가 더 빠른 시각. 우리는 4층에 도달했다. ‘이 정도면 탐험가 중에서도 선두겠는데?’ 인도자 능력에 내 일취월장한 길잡이 능력이 합쳐지며 벌어진 결과. 실제로 탐사 중에 탐험가들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대규모로 움직이는 클랜 둘에, 5인 구성 팀은 한 10팀 정도 됐나? 전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상태로 멀리서 인식표만 확인하고 헤어졌다. 후, 진짜 미궁 분위기가 살벌해졌단 말이지. “레이븐, 결과는?” “없어요.” 첫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자마자, 지난번 가면남 사태를 의식해 약 1시간 동안 탐색 마법만 계속 돌렸다. ‘진짜 그 새끼들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솟지만, 뭐 어쩌겠는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냥 우리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당연하게 지혜의 관문을 택했다. 함정과 몬스터로 가득한 미로. 이 부분에서 로트밀러에게 가장 많은 훈련을 받았기에, 클리어 타임이 40분 정도 줄었다. “레이븐, 얼마나 걸렸지?” “1시간 58분이요.” 처음에 5시간이 걸렸단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빨라진 셈.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지혜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용기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련을 깨며 층수를 올리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7일 차가 슬슬 끝나갈 시각. ‘첫날에 27스테이지라…….’ 사실상 하루 만에 탑의 사분지 일을 클리어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지혜의 계단이 연달아 등장하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속도. “좀 이르지만, 오늘은 좀 일찍 쉬지.” 마지막으로 클리어한 용기의 계단은 4시간을 대기해야 다음 문을 열수 있기에, 그냥 야영을 준비했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 거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불침번은 세우지 않았다. 오늘 하루 탐사를 하는 내내 주기적으로 탐지 마법을 사용했지만, 다른 탐험가는 감지되지 않았거든. “하긴 누가 숨어 있다고 해도 불침번은 의미가 없긴 하겠네요. 탐지 마법도 안 통하는데, 뭐 달라지는 게 있기야 하겠어요?” “딱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그럼 자기 전에 식사나 하죠?” “좋지.” 모두 모여 간단하게 요리를 해 먹은 다음에, 각자 자리로 가서 몸을 뉘었다. 4층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한 잠자리. 음, 분명 그랬어야 할 터인데……. ‘니미럴.’ 가면남 사건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안 온다. 결국, 나는 한참이나 뒤척이고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 깨어나야만 했고. 드드드드드드-! 등을 붙인 지면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 탑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궁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이유는 단 하나뿐이니까. “얀델 씨, 이 현상은 설마…….” “그래,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4층에 균열이 열렸다. 179화 도플갱어 (4) 균열. 핏빛성채와 빙하굴과 같은 각 계층에 존재하는 인스턴트 던전. 균열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다. 정수 드롭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것. 그리고 수호자라 불리는 특수한 몬스터가 일반 필드에서는 얻을 수 없는 특별한 보상을 준다는 것. “아브만, 균열의 위치는?” 내 질문에 곰아저씨가 감각에 집중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저쪽. 멀지는 않은 거 같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입장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졌다. 첫날 지혜의 계단이 무려 다섯 개나 나와준 덕에 벌써 27스테이지까지 온 우리 아닌가. [23 : 45] 아직 7일 차도 채 끝나지 않은 시각. 경쟁자 자체가 몇 안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4층의 균열은 25스테이지 이상에서만 만들어지니까. 그런데 마침 근처에 생겼다? “얀델 씨, 당연히 찾아보실 거죠?” “물론이다.” 균열은 미궁의 꽃이다. 탐험가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 자다 깬 우리는 만장일치의 동의하에 신속히 야영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브만이 가리킨 방향의 문 앞에 섰다. 후웅-! 몇 분쯤 기다리자 석문에 음각된 문양에 빛이 들어왔다. 4시간의 대기 시간이 끝나고, 이제 문을 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 “으, 이건 싫은데…….” “제발 환각 쪽만 아니면 좋겠군.” 해당 시련에 경험이 있는 미샤와 곰아저씨가 한마음으로 곡소리를 내뱉었다. 반면 레이븐과 아이나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차라리 환각계였으면 좋겠네요. 거기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한테는 별 효과가 없다고 들었거든요.” “하하핫! 그럼 나도 문제가 없겠군!!”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이번이 처음이겠구나. 나도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마법사와 두려움을 모르는 바바리안 전사. 이 둘은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그걸 안다면 내 경우가 특이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인내의 계단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저 길게 이어졌을 뿐인 100m가량의 복도. 그 안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동료의 모습이 사라지며 새로운 배경이 나타난다. 내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소아병동. 창문 너머의 하늘은 화창했고, 침대에 몸을 뉘인 아이의 얼굴 또한 해맑았다. ‘환각계네.’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자 주변이 바뀐다.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한 창문 너머. 침대 앞에는 젊은 대학생이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다. 한때 내가 부모보다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하, 또 이것부터 시작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러자 아이와 대학생 간의 대화가 시작됐다. 함께 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는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안 되냐 물었고, 대학생은 거절했다. 어쩌면 거기서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렸다.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자 결국 대학생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무언가 폭발하듯이 벌떡 일어나 폭언을 퍼부었다. 그땐 그 어떤 병원 치료보다도 아팠던 말들. 터벅. 대충 한 귀로 흘리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상처 받지 않는다. 그날, 그 형한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화살을 내게 돌리지도 않는다.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일 수도 있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었다. 겨우 그뿐이다. 터벅. 사고 나기 직전의 차 안. 시뻘겋게 타오르는 아파트. 혼자 남은 놀이공원. 직장인이 되고서 생긴 나의 자취방. 터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이 바뀌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인물도 변했다. 터벅. 엄마, 아빠, 삼촌, 그리고 전 여자친구. 각 장소마다 새로운 사람이 나와 내게 깊은 흉터를 남겼던 말들을 던져 댔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전히 쉽네.’ 굳이 환각으로 보여 주지 않아도, 머릿속으로도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고통에도 내성이 있는 법이니까. ‘뭐야, 이건.’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자니, 예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했다. [아! 비요른, 왔냥!] [하하, 왜 이렇게 늦은 것이오!] 팔짱을 끼고서 행복한 미소를 그리는 미샤와 드왈키. 반겨 줄 땐 언제고, 한 걸음 더 다가서자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너만 없었어도, 모두 행복할 수 있었당.] [나 대신 살아남으니 좋소?] 만화나 영화에서 많이 보던 패턴이다. 거, 좀 더 참신한 건 없나? ‘응, 내 잘못 아니야. 신한테 따져.’ 나는 둘의 시선을 외면치 않으며 묵묵하게 걸음을 이어 나갔다. [위대한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내 친구의 몸을 돌려줘라!!] 그다음에 등장한 아이나르 외에도, 비요른 얀델로서 맺게 된 인연들이 연달아 등장하며 내게 이상한 말들을 해댔다. 전부 내 기억엔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언젠가 한 번씩은 해 보았던 생각이니까. ‘응, 그래도 안 통해.’ 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귀를 막거나 눈을 감지도 않았다. 「시련을 완수하였습니다.」 머지않아 환각이 끝났다. 문 앞에 있던 나는 어느새 복도 끝에 도달해 계단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동료들도 매한가지. “비, 비요른……!” “또 울면 진짜 버리고 간다.” “히잉.” 울먹이는 미샤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머지를 확인했다. 곰아저씨는 무던한 표정이었다. 불쾌하다는 눈빛을 짓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 아이나르도 의외로 멀쩡했다. “괜찮나?” “아, 어…… 그냥 좀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바바리안들은 하나같이 멘탈이 강하다. 도망치는 법보다 싸워서 이겨내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게 바바리안이라는 종족이었으니. 그렇다면 마법사는 어떨까. “…….” 마지막으로 확인한 레이븐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얘는 대체 뭘 본 걸까?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답해 줄 거 같지도 않고. “이제 다 끝났다.” “아…… 네. 그렇죠…….”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레이븐이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올라가서 잠시 쉴 테니, 좀만 더 힘내라.” “네…….” 동료들을 잘 추슬러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10분가량 휴식을 취했다. 사실 게임에서도 이런 이유로 인내의 계단은 잘 택하지 않았다. 스태미나가 대폭 깎여 버리니까. 설마, 그게 이런 이유였을지는 몰랐지만. “아브만, 여기서는 어디로 가야 하지?” “저쪽이다.” 휴식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탐사를 재개했다. 당장은 균열이 최우선이라는 판단. 다음으로 택한 건 지혜의 계단이었고, 2시간에 걸쳐 미로를 클리어했다. 그렇게 나온 다음 스테이지. “포탈이다!!” 텅 빈 석실에는 균열이 열려 있었다. 참고로 세차게 일렁거리는 포탈의 색은 초록. ‘도플갱어 숲이라…….’ 핏빛성채, 빙하굴에 이어 내가 세 번째로 탐사하게 될 균열의 이름이었다. *** 「캐릭터가 4층 균열에 입장했습니다.」 *** 4층 균열은 두 가지 타입이 존재한다. 돈이 쏟아져 나오는 황금 유적과 도플갱어 숲. ‘……황금 유적은 아니구나.’ 애써 아쉬움을 지우며 마법사를 호출했다. “레이븐.” “리예이트.” 이내 빛구체가 허공에 떠오르자, 우리를 둘러싼 새로운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거대한 철창 속에 갇혀 있었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미궁의 어둠으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 상황. “비요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음, 내가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레이븐이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세요. 시간이 되면 알아서 열릴 테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더 자세히 말해 봐라!” “아직 입장 인원이 다 차지 않아서 그래요. 여기는 최대 세 팀까지 들어올 수 있거든요.” 1층 균열과의 차이점이다. 도플갱어 숲은 총 세 개의 포탈을 통해 최대 15명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이전이 개인과 개인의 협력이었다면, 여기는 팀과 팀의 협력이 되는 셈. “혹시 이곳에 대해서도 그 책에 적혀 있었나?” “네. 운이 좋네요. 황금 유적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거든요.” 음, 균열총해록을 봤다니 히든피스는 얘보고 알아서 챙기라고 하면 되겠고. 아니, 그냥 공략까지 전부 다 맡겨 버려? 고민은 짧았다. “잘 됐군. 그럼 이번에는 네가 지시를 내려라. 전부 따르겠다.” “리더 역할을 하라는 거네요?” “이런 곳에선 마법사의 말에 따르라는 격언도 있지 않나.” “후훗, 좋아요. 이번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살짝 띄워주자 레이븐은 어깨를 활짝 펴며 귀찮은 일을 모두 도맡겠다고 선언했다. 참 다루기 쉬운 성격이란 말이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나서든가 하자.’ 새 팀에서는 되도록 특별함을 숨기라던 로트밀러의 조언대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예전처럼 설치면 레이븐이나 곰아저씨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할 게 분명하니까. “그럼 지금부터 주의하실 점을 알려드릴게요. 일단 여기서 만날 몬스터는 대부분 도플갱어일 텐데…….” 이후로는 레이븐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아이나르 빼고는 다 열심히 들었다. 나야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정정하거나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단 생각으로 경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 정도면 될 거 같군.” “네? 아직 여기서 나오는 약초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했는데…….” “그건 진행하면서 해도 되지 않나. 일단은 쉬는 게 먼저다.” 끝도 없이 길어지는 레이븐의 설명을 중간에 끊고 휴식을 취했다. 인내의 시련을 겪은 데다가, 균열이 열리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지 않나. 본 게임을 위해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다. 드르르르르렁-! 아이나르가 기다렸다는 듯 코골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미샤와 곰아저씨도 철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레이븐은……. “뭔가 신기하네요. 첫 탐사에서 거울을 얻고, 두 번째 탐사에서 균열이라니…….” 왜인지 내 옆에 와서 재잘재잘 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균열에 입장하고 나니 흥분이 가시질 않는 모양. “이런 걸 보면 저도 참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저번에 핏빛성채에도 들어갔잖아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지금 저 놀린 거죠.” “그럴 리가.” “입꼬리나 내리고 그런 말씀하시죠?”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기는. “됐고, 나도 쉴 거니 너도 어서 쉬어라.”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고 눈을 붙였다. 그렇게 어느새 시간은 흘러 8일 차 오전. [07 : 11] 달리 말하자면, 균열에 입장한 지 한 5시간쯤 지난 시각. 철컹-! 굳게 닫혀 있던 창살이 올라갔다. 입장 정원이 전부 찼다는 뜻. “자, 그럼 가보자.” 내가 먼저 철창에서 나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됐다. “리예이트.” 레이븐은 시야 확보를 위해 빛구체 마법을 세 개로 늘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동굴의 형태가 드러났다. 이에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숲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까 설명해 드렸던 거 같은데요.” “아, 미안. 전혀 안 들었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답변. 레이븐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숲이 나오는 건 이 동굴이 끝난 다음. 그러니까 입장한 팀이 모두 한곳에서 합류한 다음부터예요.” “그렇군!” “…….” 그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레이븐. 왠지 그 모습에 감정이입이 절로 되지만……. 지금의 나는 오더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노말 바바리안 모드. 그래,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얀델 씨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계셨던 거죠?” “……출발이나 하지.” “아, 그렇죠. 어서 가요. 시간이 없어요.” 레이븐의 지시에 맞춰 조금은 빠른 속도로 길을 따라 이동했다.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플갱어 숲의 첫 번째 챕터는 그림자 동굴. 각기 다른 위치에서 시작해 중심부에서 다른 팀들과 만나는 형식이다. “최대한 빨리 중심부까지 가야 해요. 그래야 다른 루트의 보상까지 챙길 수가 있어요. 늦으면 그 반대가 될 거고요.” 결국 구조상 최종 보스는 같이 잡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경쟁이나 다름없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겨서 나가느냐. 그건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앞에 뭐가 있다!” 일자로 쭉 뻗은 통로를 달려가고 있던 때, 곰아저씨가 인기척을 느끼고 일행을 멈춰 세웠다. 잠시 기다리자 어둠 속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 아무렇게나 기른 갈색 머리. 부스스한 수염. 2m가 넘는 근육형 몸집에 걸쳐진 라이티늄제 흉갑. 그리고 거대 방패와 메이스까지. “비요른이다!!!” 아이나르가 둘로 늘어난 나를 번갈아 응시하더니 혼란에 빠졌다. 그 모습에 레이븐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도플갱어라고 했잖아요!!!” “도, 도플갱어?!” “아, 진짜! 이제 됐으니까, 전투 준비!!” 얘가 이렇게 소리치는 건 처음인 거 같다. 역시 바바리안을 말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던 찰나였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도플갱어가 감히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에 풍선처럼 부푸는 몸체. 조금은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도플갱어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도플갱어가 [야성분출]을 시전했습니다.」 나, 제법 세거든. 180화 도플갱어 (5) 쿠웅! 쿠웅! 쿠웅! 전투 함성을 내지른 도플갱어가 땅을 박차며 달려든다. 지난날, 체면이고 뭐고 장외로 도망친 견습 기사의 심정이 이해됐다. 나, 저렇게 생겼구나……. ‘도망치는 것도 당연하네.’ [야성분출]로 올라간 위협 수치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거대한 체격과 합쳐져 나오는 실로 폭력적일 정도의 위압감. 우선 체급을 맞출 필요가 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맞춰지는 눈높이. 단전에 힘을 팍 주고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도플갱어 따위는 따라올 수 없는 오리지널 전투 함성. 방패로 상체를 가리며 앞으로 대시한다. 참고로 이는 도플갱어도 마찬가지. 이내 방패가 맞닿으며 덤프트럭끼리 부딪친 듯한 굉음이 피어났다. 콰아아앙! 도플갱어답게 힘의 차이는 제로. 그다음 행동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도플갱어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데칼코마니처럼 교차하는 메이스. 콰아아앙-! 한 번 더 폭발음이 일며 땅이 진동했다. 이건 뭐, 대형 괴수들끼리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싸우면 하루 종일 승부가 안 날 듯하지만, 이놈과 나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동료다. ‘게임에서는 팀운도 실력인 법이지.’ 오더를 할 것도 없이 곧 마법 지원이 이어졌다. 시전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저주가 주를 이뤘다. 불과 몇 초 만에 근력, 민첩, 물리 내성 등의 수치가 깎여 나간 또 하나의 나. 당황한 도플갱어가 더듬거리며 내게 말했다. “네, 엄…… 마!!” 어, 여기서 패드립을 한다고? 예상치 못한 대사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콰앙-! 정신을 차렸을 땐 도플갱어의 메이스가 방패에 맞닿아 있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으면, 내 머리에 박혔을 터. “이 미친 도플갱어 새끼가!” 서둘러 이성을 되찾고 응전했다. 아무래도 불리할수록 야비해지는 버릇까지도 닮은 모양인데……. 역시 방심할 수가 없는 상대다. 나라는 녀석은. 휘이이익! 놈이 방패로 곰아저씨의 화살을 막는 틈을 이용해 메이스로 어깨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놈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혀를 씹은 건가?’ 거, 고전적이기는. 내심 예상했던 패턴 중 하나였기에 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야 나라면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불리한 상황이라면 더욱더. 치이이익. 허무하게 땅에 뿌려져 부글부글 끓는 산성피. 그 모습에 미샤가 감탄사를 토했다. “와, 어떻게 너랑 하는 짓이 똑같냥?” 뭐래. “구경만 하지 말고 어서 돕기나 해라.” “알았당.” 이내 미샤와 아이나르가 전선에 참가했다. 따라서 나도 시간을 아낄 겸 놈의 메이스를 쥔 채로 놈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제 행동이 제약된 놈의 머리에 칼만 쑤셔박으면 끝나는 상황. “끼예에에에에에엑-!!!” 도플갱어가 내 얼굴을 하고서 칠판 긁는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이에 미샤가 흠칫 굳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다만,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고 검을 찌르던 그 순간. “베헬—라아아아아아!!!” 뒤에서 전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나르의 것은 아니다. 아무리 걔 목소리가 굵은 편이라고 해도 진짜 남자와는 차이가 있으니까. “비요른!!! 비요른이 셋으로 늘어났다!!!” 아니, 왜 내 도플갱어만 나오는 건데. *** 이미 [거대화]를 사용한 두 번째 도플갱어는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서 짐승처럼 달려들어 진형을 붕괴했다. 이름하여 (진)쉴드차지. “막을 생각 말고 피해라!” 내 진심 어린 조언을 들은 미샤와 아이나르는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당장 얘를 끝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뭐, 어쩌겠는가. 오우거 정수를 먹으며 딜탱이 되어 버린 나의 업보일진데. 「도플갱어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대검으로 메이스를 막은 아이나르의 몸이 저 멀리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야말로 여포나 다름없는 기세. 지금이라도 껴들어야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됐지만……. “얀델 씨는 그놈만 계속 맡아 주세요! 이쪽은 저희가 알아서 해볼 테니!” 일단 레이븐의 오더를 따르기로 했다. 설마 1:4인데 지진 않겠지. 따라서 원래 싸우고 있던 도플갱어만 전담 마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하, 진짜 짜증나네. 뭐 이리 단단해?’ 저주 마법 덕에 훨씬 유리한 상황이긴 했으나. 단시간에 승부를 내고 도우러 가긴 어려웠다. 아무리 딜탱이어도 일단 나는 탱커니까. 트롤끼리 싸움을 붙이면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 ‘이렇게 된 거 구경이나 해야지.’ 나도 반쯤 체념하고서 관전 모드로 들어섰다.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아씨, 왜 칼이 안 박히는 거냥!!” “역시 비요른이다!! 위대한 전사!!!” 혼자서 근딜 두 명을 압도한다. 곰아저씨의 원거리 지원? 초대형 석궁의 미친 장력으로 쏘아낸 화살조차 방패를 뚫지 못했다. 레이븐의 마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고. 촤아아아아-! 근딜자매가 뒤로 물러난 사이에 뿜어진 화염세례.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던지라, 도플갱어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 오히려 불길 속을 가로지르며 달려와 메이스를 휘두르는 또 다른 나. 마법을 잘못 골랐다. 물리 내성 다음으로 높은 게 화염 내성인데, 거기에 이미 항마력 세팅도 어느 정도 끝냈거든. “……설마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곰아저씨가 탄식 아닌 탄식을 토해냈다. 내내 같이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직접 상대해 보니 느낌이 또 다른 모양. 이는 레이븐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사람이 아직도 6등급인 건데요!” 5등급부터는 길드 공적치를 쌓아야 되거든. 동료가 당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어깨가 슬슬 올라간다. 나, 정말 강해졌구나. “얀델 씨, 보지만 말고 말 좀 해봐요. 약점 같은 거 없어요?” 약점이라기는 그렇지만, 노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비요른 얀델 상대법이라고 해야 하나? 마크 중인 도플갱어와 레슬링을 이어나가며 핵심만을 짚어주었다. “미샤, 아이나르! 베지 말고 무조건 찔러라!” [무쇠가죽]은 베기 공격에 한해서 물리 내성이 네 배 증가한다. 사실상 비슷한 수준에선 면역이나 다름없는 셈. “아브만, 너는 무조건 다리만 노리고!” 또한, 상체보다는 하체가 취약하다. 아직 하부 장비를 못 맞췄거든. 팔도 맨살이 훤히 드러난 세팅이긴 하다마는, 상체는 방패로 커버하는 게 쉽다. “발부터 묶으라 이건가. 정말 대형 몬스터라도 사냥하는 것 같군.” “그래. 재생력이 없으니 한 번에 죽일 생각 말고 장기전으로 가라. 레이븐, 너는 화염 마법 말고 번개 마법을 쓰고!” 냉기는 출혈을 막고, 바람과 땅은 물리 피해 판정인 마법이 많다. 반면 번개는 원소 피해인 데다가 관통력과 순간 화력에 집중된 게 많아서 가장 적당하다. ‘……내 입으로 내 상대법을 동료에게 말하는 상황이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조언이 효과적으로 먹혔는지, 서서히 전세가 기울어지며 도플갱어가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는 석궁 화살이 일곱 개나 꽂힌 상황. “……그야말로 괴물이군.” “동감이당.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승기를 굳혔음에도 동료들은 진저리가 난 듯 몸서리쳤다. 듣고 있는 내가 괜히 다 뜨끔할 정도. 저런 반응에는 도플갱어가 내 성질까지도 닮은 게 컸다. 진짜 미친놈처럼 싸웠거든. “저거 봐요. 지금도 일어나려고 하네. 무슨 사람이 이래?” 피가 나면 피를 뿌리고, 양손이 막히면 이로 물어뜯고, 교환각이 나오면 귀신같이 캐치하고 달려들어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등. 놈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했고, 이는 현재 진행 중이었다. “미…… 샤…….” 도플갱어가 애절한 눈빛으로 미샤를 바라본다. 싸워서 이기는 게 불가능하니, 이제 다른 쪽에 마지막 수를 던져 보겠다는 수작.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니, 이놈아 그게 통하겠냐— “어, 으응?” “널…… 좋, 아, 한다…….” “저, 정말이냥?” 어, 통하는구나……. 미샤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한 한 수. 나는 마크 중인 도플갱어의 목을 꽉 조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뭘 고민하냐! 어서 죽여라!” “자, 잠깐만! 물어볼 게 있당!” 미샤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더니 진지하게 도플갱어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가지를 물었다. “그, 그, 근데 그때는 왜 거절한 거냥……? 날 좋아한다면서.” 질문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바닥만 보는 미샤. “어머어머!” 느닷없이 전개된 치정극에 레이븐이 눈을 빛냈다. 한데 이에 또 어그로가 끌렸을까? 도플갱어가 대답 대신 레이븐을 바라봤다. “레, 이븐…….” “뭐야, 이번에는 나야? 할 말이 뭔—” “좋, 아, 한다…….” “……?” 두 번째 사랑 고백에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레이븐의 표정. “저기, 얀델 씨……?” 자괴감이 밀려왔다. 대체 나는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 거지? “……무시해라. 살고 싶어서 하는 소리다.” “그러니까 얀델 씨는 살고 싶으면 아무한테나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어, 그건 아닌데……. 아니, 맞나? 그냥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거 같다.” 차라리 인정하는 쪽이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리라는 판단. 다만,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도플갱어 새끼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곰아저씨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 아브, 마안…….” 이런 미친 도플갱어 새끼가! “조, 좋아—” 다행히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곰아저씨가 석궁으로 미간을 꿰뚫었거든. 푸욱-! 내 마지막 남은 존엄을 지켜 준 최후의 일격. “방금 건 못들은 거로……. 아니,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곰아저씨와 나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 첫 도플갱어전이 종료됐다. 하나를 처치한 다음에 다 같이 다구리를 쳐서 남은 놈을 죽였다. 아, 참고로 막타를 친 건 미샤였다. [미…… 샤……?] 궁지에 몰린 도플갱어 새끼가 이번에도 똑같은 수작을 부렸지만, 분노로 물든 미샤의 정신 방벽은 굳건했다. [죽어라, 망할 바바리안노망!!!] 나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의 면상에 검을 박아 넣고는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미샤. […….] 나는 그냥 닥치고 있었다. 따져 보면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원래 느낌이 이상할 땐 닥치고 있는 게 최고다. 그럼 적어도 지뢰를 밟는 일은 없거든. 전 여자친구와 사귀면서 학습한 생존 방법 중 하나. [우락부라크!! 마석이 없다!!] 장비와 함께 빛이 되어 사라진 도플갱어는 마석을 뱉지 않았다. 도플갱어 숲의 도플갱어는 최종 보스로 나오는 그놈 딱 한 마리뿐이니까. 지금 우리가 잡은 놈들은 전부 [자가복제]로 소환된 하위 개체에 불과하다. [그럼 계속 이동하지.] 이후로도 도플갱어를 사냥하면서 탐사를 이어 나갔다. 보통은 한 마리에서 두 마리. 딱 한 번은 세 마리가 동시에 출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처음보다 쉬웠다. 내가 아예 없었던 덕분이었다. [드디어 갈림길이 나왔네요.] 그렇게 반나절가량을 이동했을 때, 일자 통로 패턴이 끝났다. 다섯 갈래로 나눠진 길목. 이는 마침내 중심부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이제부터는 다른 팀들과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돼요.]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기부터는 우리 모습으로 변신한 도플갱어만이 아니라 다른 팀의 도플갱어도 만날 수 있다. 난이도가 확 상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보를 모르는 적만큼 껄끄러운 상대도 없으니. ‘……제발 우리 수준이면 좋겠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븐이 선택한 갈림길을 통해 나아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애석하게도 찾아 헤매던 히든피스 방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대신 낯선 탐험가 한 명과 조우했다. 신장 160 안팎의 왜소한 체형을 지닌 사내. “이름을 밝히세요. 아니면 도플갱어라 여기고 처치하겠습니다.” 레이븐의 요구에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거리가 있고 주변이 어두워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보자마자 기시감이 들었다. 이유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진 건 덤이고. ‘왜지?’ 고민하던 차 사내의 입이 열렸다. “…스, 크리… 센…….” 도플갱어 특유의 뚝뚝 끊어지는 병신 말투. 혼자 있는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이로써 정체 확인이 끝났다. “이번 건 얀델 씨가 혼자 상대해 주세요.” “분석 목적인가?” “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일지는 모르잖아요? 미리 파악을 해 둬야죠. 위험하면 바로 도울게요.”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그 와중에도 도플갱어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는…… 도플갱, 어가…… 아닙, 니다…….” 나는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천천히 다가섰다. “크, 크리… 센.” 일단 눈에 띄는 무기는 없었다. 사제는 아닐 테고, 이능 지원 계열인— “한, 스… 크, 리센…….” “……뭐?” “그, 게… 내 이름… 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81화 징크스 (1) 한스 크리센. 어딘가 귀에 익숙한 그 이름. “어어! 비요른! 저 사람 분명 그때 그……!” 미샤가 말하지 않아도 기억이 났다. 안 그래도 놈의 주변에서 각종 소환수가 소환되고 있었으니까. “소환술사예요!” 공격형 하나에 지원형 셋으로 이뤄진 평균 7등급의 소환수들. 그 개체까지도 하나하나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더라니.’ 이로써 닮은 사람일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한스G. 리아키스의 패턴과 데스나이트의 출현 조건을 알고 있는 것을 근거 삼아 ‘플레이어’라고 판단한 그놈. ‘제기랄.’ 그때 이놈을 만나고 어떻게 됐더라? 4층에서 트롤이 나와 전부 뒈질 뻔했다. 플레이어고 뭐고, 이 세계의 한스는 역병과도 다름없는 존재. 터벅. 심장이 차게 식는다. 죽여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얀델 씨? 왜 아까부터 가만히—” 그 어느 때보다 전력으로 대시한다. 잠시 멈춘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듯. 쿠웅! 딱딱한 지면에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나간다. 한스G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다. [캬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불길을 뿜어내는 도마뱀. 정확히 말하자면, 나임피라는 이름을 가진 화염 속성 공격형 소환수였다. 화아아아아악-!! 7등급 소환수답게 불길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지원계 소환수들의 버프가 이어지며 화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치이이익! 피부를 달구는 뜨거운 열기.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 상체는 방패로 커버. 나머지는 그냥 화염 내성으로 때우며 불길을 뚫고 달려나간다. 이걸로 살가죽이 좀 벗겨지긴 하겠지만, 모든 일엔 우선순위가 있는 법. 콰직-! 오우거의 힘을 고스란히 담아 넣은 메이스가 좋은 소리를 자아냈다. 그와 동시 머리가 터져 쓰러지는 한스G. 즉사 판정인지 땅에 육신이 닿기도 전에 빛이 되어 사라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약속과 전혀 다른 행태에 레이븐이 소리쳤다. 화를 내는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나, 설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터. “다가오지 마라!!” 나는 권위적으로 외치며 동료 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리고 참아왔던 숨을 들이켰다. “후웁!” 됐다. 한스를 만나긴 했지만, 오염된 공기는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아니, 괜찮아야만 한— “설마, 독이에요?” 어, 그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일단 이쪽 길은 포기한다.” “네? 아니, 진짜 독이라고요? 그런 낌새는 아예 없었는데…….” “됐고, 어서 오기나 해라.”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팀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근데 그런 내 모습이 낯설었을까? 일단 군말 없이 졸졸 따라오는 레이븐이 왠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쯤 왔으면 됐겠군.” 한 5분쯤을 걸은 뒤에 나는 이동을 멈췄다. 한데 등 돌려 방금 일을 설명하려던 차. “어엇!” 삐죽 튀어나온 돌멩이에 발이 걸려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찌 중간에 균형을 잡고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조차도 우연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설마, 한스 효과가 시작된 건가? 그래, 본체도 아니고 도플갱어였잖아? 어쩌면 이 정도의 불행으로 끝날 수도— “얀델! 앞에 뭔가 더 있다!” 곰아저씨의 외침에 나는 얼른 다시 정면을 확인했다. 두 마리의 도플갱어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보자마자 도플갱어라 확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놈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기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앞에 드리운 광경은 변함없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인가? “나는… 크, 크리… 센.” “한, 스… 크, 리센…….” 한스가 복사되고 있다. *** 이번에도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한층 강해진 불길이고 뭐고, 당장 달려들어 대가리를 깨부쉈다. 그러는 동안에 호흡을 멈춘 것은 덤. “다들 숨을 참아라. 돌파한다!” “아니? 뭐?” “설명할 시간이 없다!” 돌아갈 길이 없기에 숨을 참고 통로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이젠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이윽고 발길을 멈추고 동료들을 확인했다. “비요른, 눈이 무섭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설마 아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내 이질적인 행동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는 동료들. “그래. 아는 놈이었다.” 나는 애써 진정하며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아까 만난 도플갱어의 이름이 한스라는 것. 그리고 내가 한스와 만나기만 하면 벌어졌던 안 좋은 사건들까지. “크, 큰일 아닌가!!! 근데 어떡하지? 나는 숨 쉬었는데!!” 내가 바바리안에게 해준 ‘한스 교육’을 알고 있던 아이나르는 그 숨은 이야기까지 듣고는 초조해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순히 기분 탓으로 끝낼 일은 아니군.” 미신을 잘 믿는 탐험가답게 곰아저씨도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이븐은……. “네에? 기분 탓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뇨?” ‘다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크게 웃어젖혔다. “푸흣, 푸하하하핫!” 얘, 싸이코패스인가? 어떻게 이 분위기에서 웃을 수 있는 거지? “이런 걸 보면 얀델 씨도 바바리안이 맞기는 하네요.” “종족 차별적 발언이다.” “아, 그렇게 들렸으면 미안해요. 그치만…… 푸, 푸하하핫! 정 걱정되면 마법사의 가호라도 내려줘요?” 마법사의 가호? 그딴 건 게임에서도 없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븐이 어린애를 대하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좀 못사는 동네에 마법사가 가면 꼬마들이 달라붙어서 행운을 넘겨달라고 빌거든요. 그게 마법사의 가호예요.” ……그러니까 말뿐인 가호라는 거지? “필요 없다.” “왜요? 적어도 안정은 찾을 수 있잖아요?” 깔깔거리던 레이븐은 마냥 농담으로 한 소리는 아니라며 한 가지 연구에 대해 얘기를 해줬다. 무언가를 강하게 믿으면 그게 육체에도 영향을 끼친다던가? 아무래도 플라시보 효과를 말하는 듯한데……. 거, 바바리안을 뭐로 보고. “해줘라.” “네. 진짜요? 아, 이게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잠깐 몸 좀 숙여 볼래요?” 아예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레이븐이 나름 경건한 표정으로 기사 서임을 하듯 내 어깨 위로 손을 번갈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얘답지 않게 따스한 말도 덧붙였다. “다 잘 될 거예요. 내 행운을 넘겨받았으니.” 행운은 잘 모르겠고. 그래도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결국 징크스일 뿐이다. 어디 용살자를 만났을 땐 한스가 있던가? “아, 진짜! 어서 정신 안 차려요? 얀델 씨는 우리 팀의 리더잖아요!” 레이븐의 말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설령 한스 효과가 실존한다고 한들, 균열에 들어온 이상 한스의 본체와 만나는 건 기정사실. 그저 평소보다 더 조심하는 수밖에. “나도!! 나도 해 줘라!!” “그다음엔 나도…… 괜찮겠냥?” “크흠, 나도 부탁하지.” 한결 나아진 내 표정 때문인지, 동료들도 아기 새처럼 레이븐 앞에 모였다. “하아……. 알았아요. 다들 차례대로 서 봐요.”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 명, 한 명 축복의 말까지 덧붙여가며 가호를 내려주는 레이븐. 얘가 이런 성격이었나? 왠지 의외의 일면을 엿본 기분이다. “그럼 이제 말해 봐요. 얀델 씨가 대책 없이 그냥 죽였을 리는 없을 테고. 이미 잘 알고 있는 거죠? 그 한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가호가 끝난 뒤에는 내가 아는 정보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스 크리센이 무슨 정수를 지녔는지. 그리고 놈의 동료들이 누구인지. “요정 궁수에 인간 전사, 그리고 마법사라 이거죠?”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랬다.” “네 명밖에 안 되네요?” “균열에 들어왔으니 지금은 5인 팀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남은 자리에 인도자를 넣었겠지.” 4층 균열은 25층 이상의 스테이지 중 한 곳에 열린다. 인도자가 없으면 정원이 차기 전에 균열을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겠네요.” 이후 놈의 동료들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해 주자 레이븐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인진 알 거 같았다. 그간 큰 변화가 있던 게 아니라면, 한스G의 팀은 우리보다 명백히 실력이 떨어지니까. “그 사람들이 분배 갖고 장난질 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장난질은 우리가 해야지.” “상황이 되면요. 아직 다른 한 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잖아요?” 한스 팀에 대한 정보 공유는 이쯤에서 끝내고 탐사를 재개했다. 다행히 놈과 거리가 벌어졌는지, 이후로는 계속해서 우리의 도플갱어만 나타났다. ‘쩝, 나머지 한 팀도 미리 알아보고 싶었는데.’ 동선이 겹치지 않는지, 나타날 기미가 없는 정체불명의 한 팀. 다만 아쉬워해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터. “오! 이번에도 마석 상자다!” 우리들은 하루 종일 동굴을 돌아다니며 가끔씩 나타나는 상자를 열었다. 첫 번째 챕터, 그림자 동굴의 주요 보상이었다. 도플갱어는 아무리 잡아도 마석과 정수를 뱉지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밸런스를 맞추는 셈. ‘그래도 좀 이상하긴 하네.’ 게임에서는 그냥 이런 시스템이라 여겼다. 근데 막상 현실에서 겪으니 이질감이 생긴다. 진짜 게임 같다고 해야 하나? [요즘 학계에서 도는 가설인데, 미궁을 발견한 게 아니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어쩌면 예전에 레이븐이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든다. 누군가 만들었다면, 이런 구조라는 것도 설명이 되니까. ‘애초에 이 세상은 대체 뭐지?’ 게임일까, 아니면 진짜 또 하나의 세상인 걸까. 이 몸에서 깨어난 첫날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지만, 여태 그랬듯이 고이 접어 다시 한구석에 파묻었다. 아직 내가 가진 단서로는 답이 안 나오니까.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이제 다 열린 상자들뿐이네요. 도플갱어도 거의 안 나오고. 어쩌실 거예요?” “여기서 판단은 네가 하기로 하지 않았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결정권을 레이븐에게 넘겼다. 어차피 얘가 할 말이 내가 할 말일 테니까. “음,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가 일어나서 최중심부로 가는 게 좋겠네요.” 옳지. “이유는?” “최중심부에는 아무래도 다른 팀들이 벌써 모여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굳이 모여서 야영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마법사다운 안전지향적 판단. 타인에 대한 불신이 기본으로 깔렸다는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뭐, 제 결정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전혀.” “음, 눈빛이 이상한데…….” “팀에 너 같은 마법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진심이었다. 얘가 팀에 들어와서 내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얘는 절대 모를 거다. “……아부 떨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요.” 뭐래, 이미 어깨가 귀까지 올라갔구만. 이후 간단하게 야영 준비를 끝낸 우리는 차례대로 불침번을 서며 8일 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시작된 9일 차. [05 : 07]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깨어난 우리는 동굴의 최중심부로 향했다. 길을 헤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상자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었을 뿐이지, 찾아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니까. 잡초가 나는 통로를 따라가면 된다. 터벅, 터벅. 최중심부로 향할수록 벽면에 자리한 풀떼기나 이끼가 많아졌고, 머지않아 드넓은 공동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지각쟁이들이 왔군!” 이미 그곳엔 열 명의 탐험가가 모여 있었다. “어! 오, 오셨군요! 얀델 씨!” 아, 당연히 그 중엔 한스G도 있었다. *** 이쪽은 여기서 하룻밤을 보냈던 걸까? 우리가 도착했을 때 탐험가들은 부산스러운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나는 일단 싹 스캔부터 했다. ‘한스G 팀은 짐작했던 그대로.’ 팀원 교체는 없었는지 네 명 모두 그때 봤던 그 탐험가들이었다. 저기 처음 보는 여자는 신입일 테고. ‘저쪽은…….’ 잘 모르겠다. 드워프와 수인, 그리고 인간 셋으로 이뤄진 구성. 장비는 그럭저럭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특이점으로는 다들 예민한 눈빛이란 것 정도. 사실 균열이란 환경임을 고려하면 특이하다 할 부분도 아니긴 하다. “그쪽은 리더가 누구지?” 이내 드워프가 다가왔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지각쟁이라며 면박을 줬던 놈이다. “아, 아마 얀델 씨가 리더일 거예요. 저번에 말했던 그, 그분요.” “작은 발칸이라던?” “네, 네.” 이미 인사를 나눈 상황일까? 한스G가 드워프에게 뭐라 말을 하더니, 나를 보며 친한 척을 해왔다. “바, 반갑습니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이야. 야, 얀델 씨의 도플갱어를 마, 만났을 땐 어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만.” “……네?” “그만 다가와라.” 목소리를 내리깔며 한스의 접근을 막았다. 내가 보기엔 우리는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마스크도 없는 세상이잖아? “인식표는?” 이내 한스G에게서는 관심을 떼고 드워프에게 말했다. 근데 어째선지 한스G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아, 하하! 인식표라면 제, 제가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아, 않으셔도—” 그래? 네가 그러니까 난 더 불안해지는데. “인식표.” 한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재차 읊조리자 드워프가 피식 웃으며 역으로 요구했다. “너희 먼저 꺼내라.” 기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딱히 피할 마음은 없다마는, 신원 확인이 먼저였기에 목걸이를 꺼내서 보여 줬다. “그럼 너희 차례다.” 내 요구에 드워프 쪽도 목걸이를 꺼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자, 됐나?”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머릿속에서 레이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밀하게 말을 전할 때 사용되는 전음 마법. [얀델 씨.] 그래, 너도 눈치챈 거구나. [이 사람들, 도시 사람이 아니에요.] 지하에서 온 새끼들이다. 182화 징크스 (2) 미궁 입장 전에서야 받을 수 있었던 인식표. 사실 말이 인식표지, 그냥 왕가의 문양이 찍힌 강철 펜던트라 보면 된다. 참고로 일반 감정사 자격증을 보유한 레이븐의 예상 생산 단가는 3,000스톤 미만. [정말로 평범한 목걸이란 뜻이군.] [아무리 왕가여도 그 짧은 기간에 마도구 같은 걸 만들어 배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죠.] 심지어 인식표엔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았기에 누가 이를 빼앗아도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유심히 살펴본 결과. 인식표엔 숨겨진 트릭 하나가 존재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걸 나눠준 공무원도, 1층에서 만난 기사도 모른 척 말해 주지 않았던 그것. [여기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고대어네요.] 왕가의 문양 사이에 고대어로 된 숫자가 작게 적혀 있다. 우리가 받은 인식표에 적힌 숫자는 2. 나와 레이븐은 이에 대해서 여러 추측을 했고, 다양한 탐험가의 인식표와 비교하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아까 만난 클랜 쪽 인식표에는 전부 3이라 적혀 있었어요.] 이 고대어 숫자는 탐험가의 수준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몇 등급인지를 나타낸 건 아니고, 1은 하위, 2는 중견, 3은 상위를 나타내는 식. [나눠줄 때 왜 등급을 물어보나 했더니, 이런 게 숨겨져 있었군.] [근데 왜 나눠줄 때 말해 주지 않은 거냥?] [노아르크 측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물론, 고대어를 읽을 줄만 알아도 우리처럼 추측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허술한 장치긴 하다. 다만, 가성비 면에선 나쁘지 않다. 문양을 찍을 때 숫자 하나 더 넣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지금 이걸로 덕을 보기도 했고. ‘후, 빌어먹을 한스 효과.’ 나는 표정 관리에 유의하며 방패를 쥔 손에 힘을 불어 넣었다. 조금 전에 드워프 팀이 보여 준 인식표에 적힌 숫자는 1. 인식표를 뺏은 노아르크 출신이란 뜻이다. 입은 장비로 보나 뭐로 보나, 저놈들이 절대 하위 탐험가일 리는 없으니. ‘자, 이제 어떡하지?’ 당장 조져 버려? 가장 먼저 떠오른 선택지였으나, 조목조목 따져 보면 최악의 수였다. 레이븐도 비슷한 생각인 것처럼 보였고. [저쪽은 아직 정체가 들통난 줄 몰라요. 그러니까 일단은 우리도 모른 척하고 탐색부터 해 보죠.] 그래, 역시 이게 최선이다. 전음 마법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드워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흘겼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없다. 통성명이나 하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너는?” “쟈구르스 마르탄.” 드워프식 이름이긴 하지만, 역시 가명일 게 뻔하겠지. “아! 저는 하, 한스 크리센입니다.” 이내 한스G도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리더 간의 통성명이 끝났다. “인식표는?” “아, 여기 있습니다. 다들 뭐 하십니까? 얼른 꺼내서 보여 드리지 않고.” 혹시 모르기에 한스G 팀의 인식표도 확인했다. 1이 적힌 신입 한 명을 제하고는 전부 2였다. “저기…… 이, 이제부터는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다른 분들도 소개를 하는 건 어, 어떨까요?” “흐음, 같이 움직여야 한다니? 혹시 이 균열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예, 책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요.” 드워프의 물음에 한스G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있자니 왠지 웃겼다. 책에서 봤다니? 내가 평소에 자주 쓰던 그 변명이지 않은가. “설명해 봐라.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되지?” “모두 모였으니 다 같이 손을 대면 길이 열릴 겁니다. 그 길을 따라 나가면 숲이 나올 거고요.” “……넌, 쓸모가 있겠군.” “하하…… 도움이 되겠다니 다, 다행이군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 뭘 잘하는지, 서로에 대해 아는 시간을 갖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후 한스G의 제안하에 간단히 서로의 구성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한스G 팀] 소환술사, 마법사, 둔기 전사, 인도자, 요정 궁수. [드워프 팀] 드워프 전사, 수인 검사, 술법사, 궁수, 신관. “오! 신관 분께서 계셨군요!” 드워프 팀의 구성을 들은 한스G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앞으로 레이드를 뛰어야 하는 만큼, 신관의 존재가 반가웠던 모양인데……. 그래 봤자 어차피 카루이의 사제일 게 뻔하다. “저기, 그럼 분배는 어떻게…….” 균열에서 만난 탐험가답게 소개가 끝나고서는 곧바로 전리품에 관한 논의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잡몹은 해치운 팀이 습득. 함께 사냥해서 얻은 전리품은 주사위를 굴리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단, 공평한 주사위는 아니었다. “더 많이 기여한 쪽이 더 많이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크리센 씨라고 하셨죠? 딱 봐도 그쪽이 우리 중에 제일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데.” “아, 아까도 말했듯이 저희는 이 균열에 대한 정보가—” “도플갱어 숲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아는데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상대를 농락하는 레이븐의 협상 모드. “잠시만요.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중간에 한스 팀의 요정 궁수가 발끈했으나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메이린 님, 그만하세요. 트,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세. 아까 저 바바리안 친구의 도플갱어 하나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공평함을 요구하는 건, 저들에게 불공평한 일일세.” “…….” 리더와 마법사가 같은 말을 하자 분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요정 궁수. 이내 한스G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나온 주사위 눈금에서 무조건 1을 빼겠습니다.” “2를 빼요. 대신 10짜리 주사위를 쓸게요.”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저희가 고, 공을 세운다면 늘려주십시오.” “합리적인 제안이네요. 아예 내친 김에 그걸 규칙으로 하는 것도 좋겠어요. 어느 팀이든 실수를 하면 눈금에서 1을 빼고, 그 반대일 땐 더하는 거죠. 어때요?” 레이븐은 정확히 드워프를 보면서 말했고, 드워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 없지.” 어차피 뒤통수를 칠 거니까. 그런 뒷말이 들린 건 기분 탓일까? *** 공동 중심부에 위치한 제단에 다 같이 모여 손을 올리자, 통로를 막고 있던 덩굴이 옆으로 밀려나며 오르막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먼저 가겠다. 대신 너무 가까이에서 따라오진 않았으면 하는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팀끼리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통로를 나아가니 머지않아 숲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는 셈.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도플갱어 숲이 부여됩니다.」 「상태이상 [불신]이 부여됩니다.」 「원정대원을 공격 시 피해량이 2배 증가합니다.」 이번 챕터의 내용은 아주 심플하다. 숲을 돌아다니며 중간 보스 셋을 처치하고, 어딘가에 있는 제단을 찾아내면 끝. “그럼 어느 팀이 앞장서죠?” “돌아가면서 하는 게 좋을 거 같군.” ‘불신’이 패시브인 탐험가답게, 전원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보다는 각 팀이 나눠진 진형으로 이동했다. 위에서 보면 이등변삼각형처럼 보이는 구조. 각 방향의 몬스터를 알아서 해치우고, 만약 위험하다면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음성 제어 마법부터 켜라.” 다른 팀들과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지만, 일단 팀 보이스 마법을 켰다. 그리고 몇 분 간격으로 나오는 도플갱어를 해치우며 탐사를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냐핫! 뭐냐, 그 드워프! 무게는 엄청 잡더니, 막상 싸워 보니 별거 없네!” 우리는 자연스레 나머지 멤버의 도플갱어들도 사냥하며 정보를 획득했다. 한스G 쪽은 예상했던 대로 쉬웠으며, 드워프 팀도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5등급 정도 되겠군.’ 내심 용살자급 강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열어 뒀던 내게는 더없이 기쁜 소식. “레이븐, 음성 제어를 켜라.” “네? 이미 쓰고 있는데요?” 아, 내가 그걸 안 말했구나. “너와 나만 되게.” 그만큼 예민한 주제다. “응? 왜 둘이서만…….” “나중에 다 설명해 주겠다.” 대놓고 따돌림을 당한 셋이 의문을 표했지만, 내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어요. 근데 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으려고요?” “세 사람 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을 거 같아서.”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우리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이나르에게 모였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지.” “네. 그게 좋겠어요.”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저쪽이 어떻게 나올 거 같나?” “반반이에요. 저쪽도 그냥 평화롭게 탐사를 마치고 떠나길 원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욕심을 부릴 수도 있겠죠.” 조금 의외인 답변이었다. “반반이라고?” 얘라면 당연히 욕심 부릴 가능성을 더 크게 볼 줄 알았는데. “일단 우리보다 숫자가 적잖아요. 막상 상대해 보니 우리보다 세지도 않고.” 음, 그건 그렇긴 하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욕심을 부려도 지금 당장은 아니란 거예요. 아마 수호자까지 처치한 다음이 되겠죠.” 이 부분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도플갱어 숲은 15인 정원의 균열이다. 어지간히 실력 있는 게 아니라면 단일팀으로 클리어하기 어렵다는 뜻. “아시죠?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도 수호자를 잡기 전까지 먼저 저쪽을 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는 거.” “그래, 알고 있다.” 현 상황에서 제일 엿 같은 부분이다. 삭주굴근削柱掘根. 자고로 화근이란 한 번에 뽑아야지만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일진대, 선제공격을 할 수가 없다니! 메이스가 근질거려서 미칠 것만 같다. “그럼 저쪽은 어떻지?” “한스란 사람이 있는 팀이요?” “그래. 뭔가 수상한 점은 못 느꼈나?” “잘 모르겠어요. 좀 어수룩해 보이긴 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라…….”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악의 틈새]에 갇혔을 때 자기들 살자고 백 명도 넘는 탐험가를 사지로 이끈 놈이 바로 한스G라는걸. 마냥 병신으로만 볼 수는 없는 놈이다. 일단 플레이어이기도 하고.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스G도 모자라 노아르크 탐험가 팀이라니. 왜 균열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드 모드가 열리는 거지? “비요른, 도플갱어당!” “……드워프 쪽 말고 저쪽도 유심히 지켜봐라. 혹시 이상한 걸 느끼면 바로 말해 주고.” “알았어요.” 이쯤에서 레이븐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탐사에 집중했다. 예상과 달리 우리가 나눈 대화를 깊이 캐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고……. 단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리라 믿고 기다려 준 거라고 보는 게 맞겠지. ‘……거, 사람 미안해지게.’ “지,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한스G 팀에서 가끔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을 제하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덧 밤 시간이 되었을 때. 세 마리의 중간 보스 중 하나를 발견했다. “마, 만티코어입니다!” 이번 균열의 몇 안 되는 도플갱어가 아닌 개체 중 하나이자, 부산물이든 정수든 가성비가 좋기로 소문이 난 그놈. 「만티코어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레이븐과 한스G의 정보 덕분에 공략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아니, 문제라고 하기는 조금 그런가? “동작 그만!” 정수가 드롭됐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드롭된, 내가 먹을 수 있는 정수였다. “레이븐, 어서 주사위를 꺼내라!” 반드시 이겨야 한다. 183화 징크스 (3) 만티코어. 사자의 몸뚱이에 인간의 얼굴을 가진 기분 나쁜 외형의 5등급 몬스터. 이 녀석의 정수는 상당히 특이하다. [만티코어] 분별력 +40, 식욕 +30, 도약력 +30. 스탯은 사실상 도약력 +30이 전부. 어찌 보면 9등급 몬스터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패시브가 스탯과 관련되어 있다. (P) 유전 — 마석을 섭취 시 영구적으로 스탯이 증가합니다. [유전]. 마석을 먹으면 능력치가 상승하는 스킬. 내용만 보면 치트급 스킬로 보이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흡수 가능 능력치의 총합이 200인가 그랬지.’ 스킬로 획득 가능한 스탯의 총합은 200. 때문에 처음엔 나도 뭐 이런 폐급 정수가 다 있나 싶었다. 5등급 중엔 총합이 300을 넘는 것도 많으니까. 근데 당연히 붙어야 하는 수준의 기본 스탯을 패시브까지 이용해가며 얻어야 하다니? 심지어 액티브 스킬이 확 좋은 거도 아니었다. 만티코어의 핵심 능력인 ‘무작위 스킬 난사’를 주면 모르겠는데, 그건 개체의 고유 능력이어서 정수로 획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작 그만!” 이 정수가 나온 순간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너희도 이 정수의 진가를 알고 있는 거구나. “레이븐, 어서 주사위를 꺼내라!” 내가 소리침과 동시에 드워프가 으르렁거렸다. “그 전에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먼저일 거 같군, 바바리안.” 뭐, 설마 주사위에 지면 내가 무작정 먹기라도 할까 봐? 기도 안 차지만, 당장 분란을 만들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터. “……다 같이 동시에 물러나는 거로 하지.” “좋다.” “예, 예!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를 시작으로 모두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정수가 유지되는 시간은 평균 30분이니까. 그러니, 일단 아까는 미처 묻지 못한 이것부터. “입찰을 포기할 팀은 있나?”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한스G와 드워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한마디씩 뱉었다. “저, 저희는 참여하겠습니다. 마법사와 신관을 제하면 모, 모두 쓸 수 있는 정수 아닙니까.” 이래서 플레이어 새끼들이란. 만티코어의 정수의 진가는 신전에서 이를 지운 다음에 있다. 삭제해도 추가 능력치의 20%가 남아 있거든. 보너스 스탯이 40이나 되는 영약이나 다름없는 셈. “이 비싼 정수를 포기할 리가.” “……비싼 정수? 설마 팔 생각인가?” “우리는 정수 자리가 없어서 말이지.” 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돌연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맞다, 이 새끼들 지하도시 출신이지?’ 노아르크의 탐험가들은 신전에서 정수를 지우는 과정이 까다롭다. 도시가 봉쇄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갖고 있다가 나중에 봉쇄가 끝나면 몰래 파는 쪽이 합리적일 터. 다만, 가장 큰 의문이 남았다. “……너희는 마법사가 없을 텐데?” 드워프 팀엔 마법사가 없다. 공격형 정수에 몰빵한 술법사가 화력 면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그 유틸성까지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 드워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너희 쪽에 있지 않나. 시험관 값에 수고비도 두둑이 얹어주지.” 거,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우리 둘 다 거절한다면?” 욕심 부리지 말라는 내 제안에 드워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주사위는 굴릴 거다. 그리고 우리가 이긴다면 정수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겠지.” 직역하자면, 자기들이 먹지 못한다면 방해라도 하겠다는 뜻. 왠지 입맛이 썼다. 역시 지하나 지상이나 탐험가는 탐험가구나. 이런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그냥 여기서 기습해서 죽여 버려?’ 문득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도 떠오르기도 했지만, 애써 침착을 되찾았다. 레이븐의 도움이 컸다. “얀델 씨, 어쩔 수 없어요.” 그래, 아직 주사위를 굴리기도 전이니까. [거대화] 정수 같은 핵심 정수도 아니지 않나. 어차피 3등급 정수 수급이 가능해지면 지워야 한다. 대체 정수 중에 더 좋은 게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거지?” 드워프의 채근에 나도 정신을 차렸다. “대표로 한 명씩 나오는 거로 하지.” 이내 한자리에 모인 각 팀의 리더. 나는 짧게 룰을 설명했다. “한 명씩 던지고 가장 눈금이 높은 자가 전리품을 갖는다. 단, 동일한 눈금이 나올 경우, 그 두 사람만 다시 굴려 승부를 낸다.” “주사위는 저 마법사의 것을 쓸 건가?” “탐험가 길드 정품 주사위예요. 제 거를 쓰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요. 물론 그 전에 제가 한번 확인을 해야겠지만.” “그래? 그럼 상관없다.” 드워프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한스G 팀의 마법사가 나와 레이븐의 주사위를 살펴보는 것으로 준비는 끝. “한스, 너는 약속대로 나온 눈금에서 2를 뺄 거다. 그러니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저, 저희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하겠습니다.” “그럼 됐다. 자, 누구부터 할 거지?” 선공이냐, 후공이냐. 사실 여기에 뭔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의외로 먼저 나선 것은 한스G였다. “제,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주사위를 집어든 한스G. 눈금 마이너스 2라는 핸디캡까지 있지만, 놈의 동료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응원의 말을 던졌다. “크리센 님, 힘내세요……!” “한스, 제대로 못 굴리고 오면 엉덩짝 맞을 생각하고 있어라?” “크리센 군, 져도 괜찮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신입 인도자부터 시작해 인간 전사, 그리고 중년의 마법사까지. 그들 한 명 한 명을 마주 보던 한스G가 요정 궁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요정 궁수. 누가 봐도 둘 사이는 굉장히 특별해 보였다. ‘거, 무슨 소년 만화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인도자로 새로 들어온 신입 여자가 그 모습을 보고서 분하다는 듯 입술을 씹고 있었거든. “그럼…… 하겠습니다!” 한스G가 기세 좋게 주사위를 굴렸다. 데구르르르. 마른 흙 위로 굴러가며 각 면에 적힌 크고 작은 숫자를 차례대로 보여 주는 주사위. 툭. 정적 속에서 주사위가 멈췄다. [10] 눈금에 적힌 숫자는 무려 10. 주사위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숫자. “꺄아아아악!” “미쳤군! 미쳤어!!” “표준 시가! 파르테이안 님, 길드에 적힌 표준 시가가 얼마죠?” 동료 쪽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고, 반대로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모습이 아니꼽다는 듯 나서는 드워프. “꼭 벌써 자기 거라도 되는 듯 말하는군. 설마 눈금에서 2를 빼야 한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뜨겁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지만, 한스G 팀은 여전히 축제 느낌이었다. 하긴, 8이면 충분히 높은 숫자니까. “다음은 내가 하지.” 한스G에게 다가가 휙 하고 주사위를 낚아챈 드워프. 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인상을 팍 쓰고서는 대충 주사위를 바닥에 던졌다. 데구르르르. 몇 번인가 구르지도 않고 머지않아 움직임을 멈춘 주사위. [9] ……실화인가? “아아아아아아아악!” “씨바아아알!!” “믿고 있었다고! 개자식아!!” 드워프 팀에서 짐승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반면 한스G 팀은 전부 표정이 굳어서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 “킥.” 이내 드워프가 나와 한스G를 쓱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평생 내가 가장 적게 뱉었을 1순위의 대사까지 입에 담았다. “운이 좋군.” 대체 이 새끼는 인성이 어떻게 된 거지? 압도적인 절망감이 나를 감싼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으니까. “얀델!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냐? 너답지 않군.” “나는 믿는다! 비요른!! 넌 할 수 있다!!” “응응, 비요른! 너는 뭐든 해내는 사람이지 않냥!” “확률 얘기는 안 할게요. 어차피 얀델 씨한테 그런 건 의미 없잖아요?” 여전히 나를 믿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내가 있다. 그렇기에……. 꽈악. 주사위를 쥔다. 피식. 그런 나를 보며 드워프는 오만하게 비웃는다. 꽤 익숙한 상황이다. 한스의 숫자는 8. 드워프의 숫자는 9. 여기서 내가 10을 뽑으면 된다. 확률은 그저 확률일 뿐, 무의미하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허구한 날 나오는 극적인 전개 아닌가. 그래, 전개상 이건 된다……! 아니,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비요른의 눈빛이 변했당.” 그런 묘한 확신이 손에 감돌았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기라도 한듯한 느낌. 그 감각이 떠나기 전에 주사위를 던졌다. “가라! 위대한 전사아아아아!!!” 아이나르의 외침 속에서 굴러가는 주사위. 놀랍게도 이를 바라보는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두근. 낮게 뛰는 심장. 피부를 감싼 공기는 적당히 서늘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라도 하듯 1초 1초의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진다. 그리고 그런 기분 좋은 감각 속에서, 툭. 주사위가 멈췄다. 그 즉시 공기가 바뀌었다. “…….” 차갑게 내리 앉은 정적. 나는 주사위 대신 사람을 보았다. “미친…….” 오만하게 웃던 드워프 녀석도. 나를 믿고 지켜봐 준 동료들도. 심지어 이미 패배가 확정된 한스G조차도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정말로 된 건가……?’ 나는 주사위를 확인했다. [1] ……미샤보고 던지라 할걸. *** 패자는 말이 없다. 모두 변명에 불과하니까. 그저 묵묵히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푸하하하핫! 저 표정으로 1이라니! 봤나? 봤어? 나는 진짜 쫄았다니까? 너무 확신하는 눈빛이어서.” 드워프 팀에서 날선 조롱이 터져 나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뒤덮는 모멸감. “묻고 싶을 정도군. 대체 어떻게 그런 눈빛을 지을 수 있는 건지! 크하하하핫!” “비요른을 놀리지 마라!!” “가라아아앗! 위대한 전사아아아! 푸흐, 푸흡! 푸하하하하!” “……죽인다!!!” 당장에 튀어 나가려는 아이나르를 붙잡았다. “그만.” “하지만! 대가리를 터트리지 않으면……!!” 그래, 저 주둥이를 닫게 할 수 없겠지. 그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건 저쪽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너희도 그만해라.” 내가 가만히 응시하자, 드워프도 자기 팀원을 제지하며 더 이상 깝죽거리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승자는 정해진 상황. 나도 미련을 접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를 줄 거지?” “시험관 값으로 1,500만 스톤.” 이건 딱 정가고. “수고비는?” “500만 스톤을 주지.” 마법 한 번 써주는 데 500만이면 남는 장사 그 자체다. 하지만……. “700만.” “욕심이 많군.” 드워프가 한스G 팀의 마법사를 흘겼다. 마법사가 두 명이니 저쪽에 부탁을 해도 된다는 뜻. “저, 저희는 시험관이 없습니다.” 뭐? 원래 저쪽이랑 수고비를 나눠 갖겠단 명목으로 더 높은 가격을 불렀던 건데……. 이러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 “700만을 주지.” 한스G의 말에 드워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제안에 응했다. 그러나 이미 열차는 떠난 상황. “늦었다.” “……?” “방금 1,500만으로 올랐다.” 사실상 수고비가 시험관 가격과 동일해졌다. “억지 부리지 마라, 바바리안.” 드워프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읊조렸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키가 작다 보니 아무래도 세상을 넓게 보기 어려웠겠지. 수요와 공급으로 이뤄진 시장의 기본 원리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억지? 이 정도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희가 거부하지 않을 거란 점에서 특히나 더.” “……1천만 스톤.” “흥정은 없다. 싫으면 마라.”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바바리안. 이 돈을 바닥에 버리겠다고?” “네 선택이다. 그냥 정수를 버리든가. 아니면 우리한테 돈을 주고 시험관에 담아가 팔던가.” 나는 철저하게 배짱 장사로 밀어붙였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이 악랄함을 떨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딴 식으로 장사를 해도 장사가 되니까. “……제기랄.” 드워프가 부들부들 떨더니 입을 열었다. “1,500만 스톤을 주겠다.” “그래, 잘 생각—” “너희가 아니라 저쪽에게.” 드워프가 한스G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돈을 지불한다면, 너희에게 이 정수의 소유권을 넘기겠다.” 현장 판매라…….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이성을 포기한 감성적인 선택. 순간 아차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저, 저희는 당장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돈이 아니라 현물로 지급해도 된다.” “잠시 의논을 좀…….” 한스G가 팀원들과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입만 뻐끔거리는 걸 보니 팀 보이스 마법을 켠 모양.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결론 역시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여, 역시 아무리 그래도 장비는 좀…….” 한스G 팀의 장비 수준으로는 3명 이상은 주요 장비를 털어내야 그 돈을 맞출 수 있다. 그런데 균열에서 장비를 주고 당장 쓸모도 없는 정수를 얻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그래서 말인데…… 도시에서 돈을 지불하는 건 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된다.” 지하 도시 출신인 이놈들이 한스G에게 외상을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 외통수에 몰린 드워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날 보며 정말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바리안, 네가 말한 가격에—” “2천만 스톤. 방금 또 올랐다.” “이런 씹…….” “아니면 우리가 천오백만 스톤을 주고 정수를 사는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하겠나?” “……2천만 스톤을 내겠다.” 드워프가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결과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저 돈을 내고 정수를 가져가도 결국에는 남는 장사니까. 한 천칠백만 스톤 정도. ‘아니, 잠깐만. 그럼 우리가 더 이득을 본 셈이네?’ 과연, 이게 독과점의 달콤함인가? 주사위 숫자는 1로 가장 적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챙긴 건 우리가 됐다. 참 모순적이게도. *** 협상이 끝나고서는 시원시원하게 진행됐다. 우선 드워프에게서 2천만 스톤 상당의 현물을 지급받았다. 그야 이만한 돈이 있을 리 없으니까. 참고로 얘네들은 장비를 주려고 했지만, 이건 내가 거절했다. 기다렸다는 듯 쓰지 않는 장비들을 배낭에서 무더기로 꺼냈거든. 대체 약탈을 얼마나 해댄 거야? “현금화하기 쉽게 포션으로 줘라.” “……포션으로 그렇게 많은 금액은 지불할 수 없다.” “그럼 남는 만큼만 장비로 받는 거로 하지.” 이유까지 대가며 최대한 포션을 요구했다. 이놈들과 전투를 하게 될지 모르니, 그전에 최대한 전력을 줄여야 한다는 판단. 쩝, 착용 중이던 장비를 현물로 받았으면 훨씬 더 상대하기 수월해졌을 텐데. “최상급 포션 일곱 병에 상급이 열한 병. 나머지 장비까지 더하면…… 얼추 맞네요.” 일반 감정사 자격증을 갖춘 레이븐의 도움으로 이렇다 할 다툼 없이 현물 거래가 마무리됐고, 이후로는 적당한 곳에서 야영지를 꾸렸다. 아, 불침번은 세 팀에서 한 명씩 차출해 총 세 명이서 번갈아 섰다. 초번은 한스G와 드워프, 곰아저씨. 그다음 순서는 나였다. “얀델, 이제 네 차례다.” “별일은 없었나? 둘이서 뭔가 수상한 대화를 나눴다든가 하는.” “한스라는 놈이 혼자 떠드는 식이었다. 차라리 혼자 서는 게 더 편하고 즐거울 거 같더군.” “그래, 고생했다. 어서 가서 쉬어라.” 내 불침번 메이트는 메이린이라는 이름의 요정 궁수와 드워프 팀의 백랑족 수인 전사였는데……. 여러모로 불편한 시간이었다. ‘왜 혼자가 편할 거 같다고 했는지 알겠네.’ 말이 없는 백랑족 전사. 그리고 불침번 내내 아니꼬운 시선으로 자꾸만 나를 흘기는 요정 궁수.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다들 자는데 조금은 조용히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래서 귀쟁이들이란. 대체 왜 우리처럼 착한 바바리안을 싫어하는 거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 에르웬은 빼고. ‘됐고, 경계나 서자.’ 나는 몬스터의 기습보다 이놈들의 변절을 더욱 경계했다. 그야 우리 뒤통수를 칠 확률이 훨씬 올라갔으니까. 한스G는 모르겠는데, 드워프놈은 아마 속에 칼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현물을 순순히 지급한 것도 그래서겠지.’ 독과점임을 감안해도, 2천만 스톤은 억지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한데 놈은 나름 쿨하게 이를 지불했다. 마치 돌려받을 방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나는 아직 시험관에 들어간 정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미샤, 일어나라. 교대 시간이다.” 불편하단 말로도 부족했던 불침번 시간이 끝난 뒤엔 미샤와 교대하고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탐사가 재개됐다. 식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이동에 할애하며 숲을 뒤졌고, 그 결과 남은 두 마리의 중간 보스를 찾아서 해치울 수 있었다. 「이각수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큘베스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애석하게도 정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 저거 아니냥? 너희들이 말했던 그거!” 하루는 더 걸리리라 예상했던 세 번째 챕터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캐릭터가 그림자 제단에 진입했습니다.」 제단을 발견함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감쌌다. 어느샌가 우리 주변으로 형성된 거대한 결계. 이번 챕터의 컨셉만큼이나, 내가 해야 하는 일도 명확하다. 「봉인되어 있던 강탈자가 원정대원 중 한 명의 몸에 깃들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정치를 시작해 보자. “드워프, 뭔가 표정이 이상하군. 혹시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닌가?” 일단 이 새끼부터. 184화 징크스 (4) 세 번째 챕터, 그림자 제단의 규칙은 간단하다. 도플갱어가 깃든 원정대원을 찾아서 제단에 바치면 끝. 정답이라면 몸에 깃든 도플갱어가 제거된다. 반대로 오답일 땐? ‘균열이 클리어 될 때까지 행동 불능 상태가 되지.’ 다시 말해, 이를 잘만 이용하면 방해될 놈을 견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드워프, 뭔가 표정이 이상하군. 혹시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닌가?” “흐음, 시작부터 나를 몰아가는 걸 보니, 네 쪽이 더 수상한데 말이지.” 첫 표적이 된 드워프는 당황치 않고 역공을 가해 왔다. 역시 만만한 놈은 아니구나. 하지만, 진짜 공격은 지금부터라서 말이지. “수상하다니? 이상하군.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분명 이곳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 말했다. 근데 지금은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요?” 레이븐이 동조하자 한스G 팀의 일원들도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곳에 방금 도착했고, 아직 세 번째 챕터가 어떤 건지 말하기도 전이었으니까. 하면 드워프는 어떻게 알고 반격을 했던 걸까? “그건…….” 드워프는 잠시 고민하더니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툭 하고 뱉었다. “한스 크리센에게 들었다.” “……위기를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는군.”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알려드렸어요.” 때마침 나서서 드워프를 어시스트하는 한스G. “알려 줬다니, 대체 언제?” 여정 내내 둘을 주시했던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 “어, 어제 불침번을 설 때였습니다.” 확실히 그때는 내 시야 반경에 놈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대비해 곰아저씨를 옆에 붙여 뒀었다. “아브만, 사실인가?” “그럴 리가. 저 둘은 그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같이 있던 아브만이 그렇다고 말하는군. 한스 크리센. 너는 왜 드워프를 감싸주는 거지?” 위협적으로 한 걸음 내딛자, 한스G가 격하게 손사래를 쳐댔다. “가, 감싸주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때 마도구를 이용해 대, 대화를 나눴어서……. 그래서 우리크프리트 씨는 알 수 없었던 겁니다!” 마도구를 이용한 대화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니미럴, 얘네 둘은 대체 언제 또 저렇게 사이가 좋아진 거야?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네. “무슨 대화를 나눴지?” 그 내용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 그건…….” 의도적으로 살기까지 흩뿌리자, 그 압박감에 못 이겨 말꼬리를 흐리는 한스G. 이제 좀만 더 하면 되겠다 싶던 순간이었다. “그걸 왜 우리가 말해야 하지?” 한스G를 보호하는 것처럼 드워프가 나선다. “사적인 대화였다. 그리고 이 정도면 내가 이 제단에 대해 알고 있던 것에 대한 의문은 풀린 것 같군.” 노련한 솜씨로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단호하게 해당 화제를 끝내 버리는 드워프. 물론, 아직까진 내 계획에 지장은 없었다. 이게 아니어도 이놈들을 공격할 거리는 수없이 많으니까. “지금부터는 서로에 대한 얘기를 꺼내 보도록 하지.” 드워프는 노아르크의 탐험가이며, 한스G는 이 세계에서 악령이라 불리는 존재다. 이 부분을 공략하면 답변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을 터. “드워프, 너는 몇 등급 탐험가지? 가족은? 혹시 형제는 있나?”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거절이라는 거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침묵은 자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본인의 몫이 된다. 지금 이곳에는 모든 질문에 대한 명분이 존재하니까. “저기, 너무 그러지 말고 얀델 씨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우리 팀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일단 여기에 도플갱어가 숨어든 건 맞잖아요?” 논리정연한 말로 지원 사격을 해 주는 레이븐. 또한, 이 방법이 옳다고 여겼는지 한스G 팀의 마법사도 우리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러세. 무턱대고 아무나 제단에 바치고 볼 수는 없지 않나. 다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눠 보세. 그럼 누군지 알 수도 있겠지. 도플갱어라고 해도 찾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기우는 여론. 결국, 드워프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드워프의 물음에 답한 것은 한스G였다. “아무래도 역시 검증 마법이 제일 좋겠죠?” 플레이어답게 기다렸다는 듯 가장 정석적인 공략법을 제시하는 녀석. 그때 한스G 팀 소속, 둔기 전사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의문을 표했다. “저기, 검증 마법이 안 먹히는 사람도 꽤 되는 거로 알고 있소만?” 흔하게 생긴 것과 달리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실제로 검증 마법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바로 그렇다. 지난날, 길드에서도 통하지 않았거든. 레이븐이 말하기로는 항마력도 항마력이지만, 선천적으로 정신 방벽이 두텁다는 듯했다. “안 통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도플갱어도 통하지 않는다고 들었고요.” “예, 예! 맞습니다! 적어도 용의자 숫자는 줄일 수 있을 거 아닙니까?” “하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긴 하겠구려.” 탐사 내내 브레인 역할을 했던 레이븐과 한스G가 의견을 모으자 더 이상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색출 작업. “자네는 남자인가?” “……그건 왜 묻는 거요?” “허허, 마법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일 뿐이니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하면 되네.” “보는 대로 남자요.” “진실이군.” 두 명의 마법사가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검증 마법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 “……아홉 명이네요.” 검증 마법이 통하지 않는 아홉 명이 추려졌다. [한스G 팀] 한스G, 마법사, 요정 궁수. [드워프 팀] 드워프, 궁수, 술법사, 신관. [비요른 팀] 나, 레이븐. 참고로 내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다. 항마력 및 정신력 수치가 높은 마법사나 술법사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여기서 더 있다고? 다들 나름 중견에 접어든 탐험가라 이건가? ‘설마, 전체 인원 중 반을 넘을 줄이야…….’ 덕분에 나도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도플갱어입니까?” 우리는 일단 검증 마법이 통한 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모두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용의 선상이 확 줄어들었다. “그럼 우리 아홉 명 중에 도플갱어 새끼가 숨어 있다는 거군?”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나로서는 나쁠 것 하나 없는 분위기. “그럼 나부터 시작하지.” ‘아니오’라 답한 자들이 제외되자마자 나는 망나니처럼 칼을 휘둘렀다. 내 표적은 오직 두 명. 각 팀의 리더이기도 한 드워프와 한스G다. “배낭에 있던 장비들은 어디서 얻었지?” “그걸 왜 묻는 거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말하지 않겠다.” 묵비권 행사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한스 크리센, 너는 이 숲에 대해 잘 아는 거 같던데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나?” “채, 책에서 읽었습니다.” “책 제목은?”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쌓이는 노코멘트 스택. 내가 의도한 부분이었다. 면밀히 따져 보면 도플갱어와는 상관없는 질문이지만, 무언가 숨기는 듯한 모습은 사람들 눈에 분명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아무리 검증 마법이 안 통한다지만, 제대로 답하는 놈이 한 명도 없군?” 내가 의미심장한 투로 중얼거리자, 드워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너는 다를 거 같나?” 아무래도 어그로가 제대로 끌린 모양. 네거티브 전략에 한껏 두들겨 맞던 드워프도 더 이상 참지 않고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정수는 뭘 갖고 있지?” “……말할 수 없다.” “네가 도플갱어라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드워프가 사격을 개시하자, 리더가 두들겨 맞는 걸 보기만 했던 놈의 팀원들도 합세해 나를 공격했다. “그러고 보니,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몰아가기 시작한 것도 저 자식이었지.” “마치 누구든 좋으니 저 제단 위에 넣고 싶다는 것처럼 말이야.” “뿐만 아니라, 행동도 바바리안답지 않게 너무 논리적이었다.” 여러 공격들 속에서 나는 가만히 두들겨 맞기만 했다. 그러자 한스G 팀에서도 하나둘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다. “도플갱어는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망자의 땅에서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죠?”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흐음, 까먹었단 말인가요?” “……나는 바바리안이다.” “풋, 그거 참 편리한 종족이네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한껏 비아냥거리며 조소를 흘리는 요정 궁수. 아무래도 아까 한스G가 내게 공격당한 게 짜증 났던 모양인데……. 거, 이래서 초보들이란. “나, 나를 몰아가는 걸 보니 네가 도플갱어인 거군! 미샤! 아이나르,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어, 으응…….” “위, 위대한 전사 비요른의 말이니까 맞을 거다!!” 누가 봐도 억지나 다름없는 모습에 팀원들조차 애매한 반응을 보이며 동조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향한 시선이 싸늘해져 갔고.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 도래했다. [00 : 00] 시계의 침이 모두 겹쳐진 그때, 중심에 있던 제단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실의 돌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번 챕터 공략을 위한 핵심 아이템. 내가 딱히 말할 것도 없이 레이븐이 알아서 설명을 해 주었다. “진실의 돌이에요. 단 한 번, 반드시 진실만을 얘기하도록 할 수 있죠. 설령 도플갱어일지라도.” “……혹시 또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매 자정마다 나온다고 들었어요. 대신 이걸 쓸 때마다 도플갱어의 힘이 점점 강해지죠.” “신중하게 써야 한다는 뜻이구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고, 그러던 중 드워프와 눈이 마주쳤다. “투표로 정하지. 나는 저 바바리안을 뽑겠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단 말이지.” 씨익 웃으며 내게 엿을 먹이는 드워프. 투표함을 만들 것도 없이 여러 사람들이 손을 들며 순식간에 8표가 모였다. 과반수가 넘었다는 뜻. “……다시 생각해 봐라. 나는 도플갱어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조언했지만, 놈들은 내 조언을 싹 무시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아, 이렇게 쓰는 건가?” 드워프가 이리저리 만지던 진실의 돌이 백색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놈이 물었다. “바바리안, 너는 도플갱어인가?” 도플갱어냐고? “난 도플갱어가 아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파치짓. 효력을 다한 진실의 돌이 부서졌다. “마법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긴 뭐예요. 사실만 말했다는 거죠.” 원하는 걸 얻었으니 슬슬 병신 연기는 이만 집어치우도록 하고. 나는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목 근육을 풀었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라 하지 않았나.” 계획을 위해 필요했던 시민권을 얻었다. 쉽게 말해, 지금부터는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의심하거나 공격할 수는 없다는 뜻. 그러니……. “드워프, 왜 나를 도플갱어로 몰은 거지? 혹시 네가 도플갱어인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할 차례다. *** “그건! 네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해서……!” 드워프가 변명하듯 외쳤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먼저 닥치는 대로 공격한 것도 나고, 여러모로 허술한 모습을 보여 줬던 것도 다름 아닌 나니까. 하지만, 그게 녀석을 봐줄 이유는 안 된다. “어떤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거지? 나는 너희가 묻는 질문에 모두 답했는데.” “……정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잖냐!” “너는 무슨 다른 세상에서 온 것만 같군. 탐험가에게 어떤 정수를 가졌냐고 묻는 게 얼마나 실례되는 일인지 모르는 거냐?” “그럼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아까 요정이 물었던—” “그거라면 말했지 않나. 까먹어 버렸다고.” 나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아니, 바바리안님이 까먹었다는데 지가 뭐 어쩔 건데? “……!” 그제야 내 수작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는지 드워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리더가 수모를 겪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게 힘들었을까? “그쯤 해라, 바바리안. 네가 충분히 수상해 보였다는 건 투표 결과가 말해 주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 무지성 바바리안한테 말로 처맞는 말! “그건!! 전부 너희들이 나를 몰아가서 그런 거 아니냐!!” 쩌렁쩌렁 울리는 억울한 바바리안의 포효. 드워프 쪽 궁수가 뭐라 말을 했지만, 전부 내 압도적인 목청에 파묻혔다. “제대로 설명할 시간은 줬나? 레이븐이 쥐고 있던 걸 뺏어가서 돌을 쓴 게 누군데!” “아니, 그건—” “나는 너희가 의심스럽다!! 책임지고 제단에 들어가라!!” “그러니까, 뺏어 간 게 아니라—” “책임지고 제단에 들어가라!!” 그제야 중얼중얼 거리던 궁수가 악을 쓰듯 있는 힘껏 소리쳤다. “우리도 내일이 되면 진실의 돌을 쓰겠소!! 그럼 되는 것 아니오!!” 슬슬 이놈들도 진실의 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깨달은 듯하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이미 늦었는데. “그래, 너구나!!!!” 기다렸던 대사가 나옴과 동시, 나는 흥분을 지우지 않으며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살벌해지는 분위기. “다시 말해 봐라 궁수!! 나한테 낭비한 것도 모자라 진실의 돌을 또 쓰겠다고? 혹시 네가 도플갱어인 건가?” 나는 타깃을 드워프에게서 궁수로 변경했다. 이게 원래 내 계획이었다. 어차피 암만 떼를 써도 드워프나 중요 전력일 신관을 제단에 넣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고 보면 너였다! 내가 뭔 말을 할 때마다 비아냥거리며 드워프를 살살 꼬드겼지!!” “그건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책임지고 제단에 들어가라!! 죽는 것도 아니지 않냐!! 궁수 한 명 없어도 균열을 깨는 것엔 문제없다!!” 이성적 사고를 어렵게 만드는 광폭한 외침. 갑자기 불똥이 튄 궁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을까? “확실히 돌을 쓰는 것보다는 그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구려.” “……어차피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한스G 팀의 몇몇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보다 못한 드워프가 나섰다. “그래, 제단에 넣지.” “네? 그게 무슨 소리—” “됐고, 이번엔 내 말을 들어라. 네가 도플갱어인 게 아니라면 말이지.” 리더의 권위가 센 편인지, 궁수는 드워프의 말에 꼼짝도 못 했다. “마르탄! 정말 그 녀석을 제단에 넣으려고요?” 동료의 불안한 눈빛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드워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걸로 여론을 뒤집으려는 거겠지.’ 내가 했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거다. 내 주장으로 궁수를 제단에 집어넣었는데 도플갱어가 아니다? 이제 공격권은 저쪽으로 넘어간다. ‘……나는 공격할 수 없으니, 아마 레이븐을 노려오겠군.’ 궁수를 버리고 중요 전력인 우리의 마법사를 제단에 넣는다는 전략. 저쪽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득이라 볼 수 있다. 마법사 또한 PK에서 미친 성능을 발휘하는 클래스니까. ‘병신들.’ 손해 볼 게 없는 선택이라 여겼을 거다. 만약, 궁수가 도플갱어라면 그것대로 충분히 좋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아니, 도플갱어가 미쳤다고 제 발로 제단에 가겠냐고.’ 나는 애써 미소를 감추며 궁수가 리더의 손에 의해 제단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 걱정 마라. 수호자를 처치한 다음에는 멀쩡히 풀려날 테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윽고 제단 앞에 선 궁수. 모두가 침묵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솨아아아-! 궁수가 결의에 찬 얼굴로 손을 대자 제단에서 검은색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정대원 아르카 페트레이의 영혼이 봉인됩니다.」 궁수의 몸에서 뽑혀져 나온 영혼이 제단과 이어진 채로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과 몸짓. “마법사. 아니, 한스 크리센. 지금 이건 무슨 뜻이지?” “……도, 도, 도플갱어가 아니란 뜻입니다.” 드워프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리 자기 선택이라 해도 저 모습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생기긴 한 모양.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했을까? “바바리안, 네 말에 책임질 준비는 됐나?” 드워프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따라서 나도 즉시 대답해 주었다. “아니,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지?” “그야… 네놈 때문에… 내 동료가 저 꼴이 됐으니까! 네놈 논리대로라면 이제 네놈들 쪽도 확인을 해야지!” 쯧쯧. 나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뭐?” “너한텐 도플갱어를 찾는 일이 장난인가? 감정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 내 천연덕스러운 말에도 드워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긴, 방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던 바바리안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겠지. “어른이 돼라, 드워프.” 뭐, 그래 봐야 키는 그대로겠지만. “이런 씨발!!” 욕지거리를 뱉는 드워프를 보며 나는 침착하게 손을 뻗어 제지했다. “잠깐만, 나를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도플갱어인 게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절대 없을 텐데?” 드워프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도 이쯤에서 인성질을 끝냈다. “동료 일은 유감이다. 설마 그 녀석이 그렇게 갈 줄이야. 좋은 녀석 같았는데…….” “그만.” “……?” “됐으니, 본론을 말해라.” “나도 흥분해서 실수를 했다. 하지만 지난 일은 잊고 균열을 깨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어떤가? 여기서 전력을 더 잃으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참고로 이는 내가 이렇게 마음 놓고 깝칠 수 있는 이유였다. 암만 화가 나도 드워프 새끼도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 우리끼리 붙으면 파멸뿐이라는걸. “……그래서 어떻게 찾을 셈이지?” “난 아무래도 너희 쪽 신관이 조금 수상—” “그만들 하게!” 그때 한스G 팀의 마법사가 외쳤다. 이름은… 파르테이안. 나름대로의 중년미를 간직한 남자. “이쯤에서 의미 없는 소모를 끝내세. 내게 도플갱어를 찾을 방법이 있으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 “방법이 있다고?” 저 결연한 표정을 보니 농담일 리는 없고. “말해 봐라.” 내가 재촉하자 마법사는 아공간에서 한 가지 물품을 꺼냈다. 나침반 크기의 작은 원판이었다. 보자마자 어떤 물건인지 감이 왔다. No.7234 어긋난 신뢰. 발동 시 반경 10m 내에서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하는 횟수 소모형 아이템. “그, 그런 것도 가, 갖고 계셨습니까……?” 플레이어 출신인 한스G가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오직 나만이 100% 공감 가능할 감정. “어지간하면 쓸 일이 없는 물건 아닌가. 뭐, 그래도 살다 보니 몇 번인가 쓸 일이 있기는 했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지. 진작 꺼내지 않아서 미안하네.” ‘……아직 사제 새끼를 처리하지 못했는데.’ 나는 깔끔하게 아쉬움을 지웠다. 우리의 상잔을 보다 못한 마법사가 아껴왔던 아이템을 꺼냈다. 한데 여기서 안 쓴다고 빼는 것도 이상할 터. 어차피 도플갱어를 일찍 찾아내면 그것만의 장점도 있으니, 나로서는 나쁠 것 하나 없다. “좋다.” “……나도 마찬가지다.” 드워프도 나를 향한 적의를 잠시 접어두고,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래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한데……. “잘 생각했네. 그럼 다들 이리 모여 보겠나?” 아직 용의를 벗지 못한 모두가 중심부에 모이자 마법사가 ‘어긋난 신뢰’를 사용했다. 효력이 이어지는 시간은 고작 10분뿐. “그럼 누구부터 하겠는가?” “나부터 하지.” 시작은 드워프였다. 정말 도플갱어가 아닌지 한 치의 불안도 보이지 않는 표정. 다만, 이는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다. “그럼 일단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묻겠네.” 마법사는 물었다. 아까 검증 마법을 할 때 ‘여자입니까?’ 같은 확인용 질문을 했던 것처럼.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자네는 어느 도시에서 왔는가?” 지뢰를 밟았다. ‘니미럴.’ 드워프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만무. “…….” 차가운 정적이 감돈다. 드워프의 휘어진 입꼬리는 관리가 전혀 안 된 상태로 경련했다. 근데 그제야 이를 눈치챘을까? “왜 대답을 안 하나? 어디 문제라도…….” 마법사가 말을 끊고서 입을 다물었다. 왜 대답을 못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자네, 설마……!” 마법사가 입을 떡 벌린 순간. 나는 있는 힘껏 외쳤다. “전투 준비!!!” 좆됐다. 185화 징크스 (5) 차에 치여 본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것은 찰나에 이루어지며, 결코 되돌릴 수도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전투 준비!!!” 내 외침이 정적을 가로지름과 동시. 쏜살같이 휘둘러진 드워프의 도끼가 마법사의 어깻죽지를 깊이 파고든다. 콰직-!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는 섬찟한 피륙음. 그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을 때, 내 몸은 이미 힘껏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타닷. 목표는 레이븐의 구출. “꺅!” 신속하게 거리를 좁힌 나는 레이븐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서 빠르게 후퇴했다. 참고로 이는 한스G 팀의 탱커도 마찬가지. “둘 다 정신 차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둔기 전사가 요정 궁수와 한스G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이뤄진 포위 진형. 숫자로도 질적으로도 우리가 유리하다. 그렇다면 드워프는 이 불리한 형국을 어떻게 풀어나가고자 할 것인가. 모두가 그의 귀추를 주목하는 가운데. 푸슉. 드워프가 마법사의 어깨에 박힌 도끼를 뽑아내며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한스 크리센!!”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모이는 이목. 다만, 한스G는 아무런 말도 않고 벌벌 몸을 떨어 댈 뿐이었다. 그러자 다그치듯 드워프가 다시 외쳤다. “네 비밀이 알려져도 좋은 거냐!!”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한스G의 비밀이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으니까. “좋아, 원한다면 네가 있을 곳을 없애 주지. 한스 크리센은 악령이다! 내 배낭에 그 증거가 있—” “너희! 그놈에게서 떨어져라!” 일단 경고를 하고 봤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드워프에게 있는 거라면, 한스G의 배신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는 판단. 하지만……. “아, 악령? 그런 걸 내가 믿을—” 한발 늦었다. 화아아아아아앗-! 한스G가 소환한 도마뱀이 둔기 전사를 향해 세찬 불길을 쏟아냈다. “어… 째, 서…….” 불길에 휩싸인 채로 바닥에 쓰러지는 둔기 전사. “미, 미안해요.” 한스G가 눈을 질끈 감으며 드워프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해 못 할 말을 뱉었다. “뭐, 뭐 해요! 메, 메이린 씨도 어서 이쪽으로 와요!” “……무, 무슨 소리예요, 그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고서 나한테 오라니!” “서, 설마 이렇게 날 버릴 생각은 아니죠? 우,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잖아요. 어, 어디든 같이 가야지! 위, 위험한 건 그동안 내가 다 했는데!!” 너무도 갑작스러운 내용의 대화. “하, 이 망할 꼬맹이 새끼가 진짜!” 요정 궁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순간, 모든 정황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설마, 두 새끼 다 플레이어일 줄이야.’ 드워프조차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놈도 이거까지는 몰랐던 거 같다. 그냥 어쩌다 증거를 잡아서 불침번 때 한스G를 협박한 게 전부였겠지. “난쟁이! 노아르크로 데려다준다고 얘한테 한 약속, 꼭 지켜야 할 거다!” “……아무렴! 어서 나를 도와라!” 한스G의 물귀신으로 선택지가 사라진 요정 궁수가 짜증 난다는 듯 소리치며 드워프 쪽으로 이동했다. ‘꼬여도 정말 제대로 꼬였군.’ 두통이 밀려온다. 분명 방금까진 수적으로 우리가 우세했건만. 이제는 우리가 한 명이 더 모자란 상황이 됐다. 한스G 팀의 인도자는 이미 충격으로 실신한 상태이며, 깨어나 봤자 전투 능력이 0이니까. 심지어 이 악조건 속에서 저들을 물리쳐도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다음엔 우리 다섯이서 보스전을 치러야 하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씨발, 애초에 이 중에 도플갱어 새끼도 숨어 있잖아?’ 첩첩산중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도무지 욕을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한스 효과라 해도 이건 심하지 않나?’ 볼멘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해보는 수밖에. *** 서로 간에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대화로 해결할 수준은 진작에 지났으니까. 쿠웅-! [거대화]를 활성화하며 달려나간 순간. 회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내 몸을 덮었다. 솨아아아아아-! 술법사가 가졌을 여러 공격 스킬 중 하나. 물리 피해가 아닌 만큼, 나라도 맨몸으로 버티면 부상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쪽도 일단 팀이라서 말이지. “테이룬 쉐아르디엠.” 내 피부 위를 뒤덮는 마력의 장막. 게임 내에선 편하게 ‘마나실드’라 부르던 그것. PK에서 마법사가 중요한 이유다. 마력 효율이 너무 구려서 사냥 때 쓰는 건 낭비에 가깝지만, 사람을 상대로는 아니니까. 서로 소모 값이 큰 건 매한가지. 후우우웅. 시야가 밝혀졌을 땐 눈앞에 드워프가 있었다. 쿠웅. 짧은 두 다리로 높이도 점프해 내 얼굴을 방패로 후려치는 녀석. 피해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거대화] 상태인 내 몸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놈이 가진 스킬 [양극성 방패] 때문이었다. 밀어낼 땐 넉백 보너스를, 막을 때는 충격량을 감소시켜 주는 스킬. 주르륵. 긴 족적을 그리며 밀려나기 무섭게, 수인 검사가 내게 검을 찔러왔다. 예상 지점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나의 두 눈. “어딜!” 내 등 뒤에 가려져 있던 미샤가 튀어나와 수인 검사의 검을 쳐냈다. 오케이, 그럼 쟤는 미샤한테 맡기고. 휘이이익!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 내며, 막 땅에 착지한 드워프의 정수리를 향해 메이스를 내리쳤다. 그런데 이건 뭘까. 까앙! [휘두르기]까지 곁들인 일격이었다. 아무리 방패를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고 해도, 통째로 찌부러지는 게 맞았다. 실제로 도플갱어를 상대할 때도 그러했고. 왜지? 근데 왜 방패가 멀쩡한 거지? ‘니미럴.’ 그 원인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방패와 마찬가지로 빛을 자아내는 귀걸이. ‘……No. 2988라고?’ 도플갱어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넘버스 아이템은 복사를 하지 못하니까. 저런 고급 템이라면 거의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할 터. 콰앙! 그때 드워프의 후방 진영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곰아저씨가 쏜 폭발화살. 소환술사인 한스G의 ‘어스버그’가 제때 벽을 소환하며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두드드드! 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레이븐의 마법 요격이 이어졌다. 콰쾅-! 하늘에서 수십 갈래로 나뉘며 떨어지는 ‘낙뢰’. 그중 하나에 맞은 한스G가 픽 쓰러졌다. 물론, 그 순간이 길지는 않았다. 저쪽에는 일단 사제가 있으니까. 화아아아아앗-! 몇 초 만에 의식을 회복한 한스G가 소환수를 이용해 불꽃을 내뿜었다. 목표 지점은 우리의 뒷라인. 레이븐은 마법을 막 쓴 직후였고, 각도상 내가 막아 줄 수도 없었기에 곰아저씨의 탱커 소환수 웅이가 그냥 몸으로 때웠다. [우웅!!] 이 정도는 끄떡도 없다는 듯 울부짖는 웅이. 소환계 영혼수는 항마력이 높은 편이다. ‘후, 이쯤 되니까 팀전도 스케일이 다르구만.’ 이후 카루이의 사제도 준비를 끝마쳤는지 본격적으로 소환물을 뽑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허공에 생성된 불길한 빛깔의 포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언데드 군단. 공교롭게도, 딱 맞는 상대가 있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지시를 내릴 새도 없이 달려나가 대검을 휘두르는 아이나르. 쾅! 콰쾅! 콰앙! [거듭베기]를 쓸 때마다 폭발이 일며 불꽃이 튀었고, 혹여 부상이라도 입으면 [탐욕의 날개]로 자력 재생을 했다. 물론, 이렇게 스킬을 펑펑 쓰면 MP가 남아돌지 않겠지만……. 「아이나르 프넬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포식]이 발동되며 영혼력이 회복됩니다.」 아이나르가 받은 ‘학살자’ 각인은 양학 특화 각인이라서 말이지. 콰앙! 드드드드드! 후우우우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다양한 스킬과 그로 인한 파생음. 개인전처럼 각자가 각자의 상대만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다들 어느 때는 잠시 물러나 동료를 돕는 등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누가 승기를 잡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가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그거 아나?” 내 면상에 넉백실드를 박아 넣은 드워프가 전투 중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무시할까도 싶었지만, 그냥 받아주었다. “네가 곧 뒈질 거란 거?” “아니, 네 팀의 핵심이 너란 거.” 뭔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나는 틈만 나면 여기저기 달려나가며 진형을 붕괴하고 적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내 경로를 지나치는 화살과 마법은 모조리 방패로 쳐냈다. 반면 드워프가 한 건 그런 나를 따라다니며 너무 날뛰지 못하게 억제한 정도에 불과했다. “즉, 너와 내가 동시에 사라지면 우리가 훨씬 유리해진다는 거지.” “……뭐?” 드워프가 씨익 웃으며 외쳤다. “재이넌! 지금이다!” 재이넌. 팀 보이스 마법이 없는 드워프가 오더를 위해 몇 번이고 부르고 불렀던 카루이의 사제의 이름. 「캐릭터가 특수 지형 [운명의 교차점]에 진입했습니다.」 불꽃놀이라도 하듯 이것저것 터지던 주변이 캄캄해졌다. 또한, 격렬한 전투음도 사라져 고요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뭘 하려는가 했더니……. ‘운명의 교차점을 쓴 건가.’ 드워프 새끼, 내가 만만해 보이나? *** 운명의 교차점. 카루이의 사제만이 쓸 수 있는 이 권능의 효과는 간단하다. 지정한 두 대상을 외딴 공간에 보내 버리는 것. 참고로 이 스킬은 두 대상이 서로 적대 관계일 시에만 가능하며, 둘 중 한 명이 승리하거나 외부에서 권능을 끊어야지만 외부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딸깍. 스위치 눌리는 소리가 나며 주변이 밝아졌다. 나는 수십 층 빌딩 크기의 석상 위에 서 있는 중이었다. 음, 정확히 말하면 그 석상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해야 하나? 고개를 들면 이쪽을 내려다보는 석상의 얼굴이 보였다. 책에서만 보던 악신 카루이의 얼굴. “의외로 당황하지 않는군?” 내게서 1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드워프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결국, 나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날 여기에 데려온 거냐?” “……여기에 대해서 아나?” 알다마다. 이곳은 일종의 결투장이다. 외부 환경과 단절된 곳에서 개인 기량으로만 싸워야 하는 그런 장소. 근데 나를 여기로 데려온다고? “어이가 없어서.” 내 표정을 본 드워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군, 바바리안.”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버티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두기만 하면 밖에서 이겨서 내보내 줄 거라고. 피식. 뭐라 말을 해 볼까도 싶지만, 시간이 아까웠다. 굳이 그럴 이유도 찾지 못했고. 행동으로 증명하면 그만이다. 바바리안답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문답무용. 잡담을 끝내고서 적에게 돌진한다. 타닷! 작정하고 드러눕기로 한 건지, 뒤로 물러서는 드워프.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저 짧은 다리로 튀어 봤자 얼마나 튀겠어? 실제로 드워프도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얼마 못 가 방패를 들었다. 후웅. 나를 밀쳐낼 요량으로 휘둘러지는 방패. 근데, 내가 아까 그거에 맞던 건 네 동료들이 계속 주의를 끌어줘서거든. 휘익. 몸만 살짝 틀어 피한 뒤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까앙! 드워프가 머리 위로 올린 방패에서 청명한 타격음이 피어났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까앙!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까앙!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까앙! 아니, 이러니까 무슨 두더지 잡기라도 하는 거 같네. 몇 번을 내리쳐도 드워프의 방패는 견고했다. “그러니까……. 말했지 않냐, 버틸 수 있다고.” 그런 거치고 숨이 거칠어졌는데. 아무튼, 역시 이걸 믿고 있던 거구나. 왠지 미안하게 됐다. 방심하라고 해 준 거에 진짜 낚일 줄이야. 까앙! 그렇게 열세 번을 더 내리쳤을 때였다. 후웅-! 나는 메이스를 내리치는 척 페이크를 준 다음, 잽싸게 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 놈의 귀걸이를 잡아당겼다. 뭐, 넘버스 아이템이 이 정도 완력으로 파손될 리 없지만……. 살점은 넘버스 아이템이 아니지 않은가. 드드득. 연약한 귓볼이 찢어지며 귀걸이가 떨어져 나왔다. ‘No. 2988 수호병단의 징표.’ 별다른 스탯이나 사용 효과는 없지만, 착용 시 방패에 충격 흡수 옵션을 무려 50%나 붙여주는 개꿀템. 이 코어템을 이렇게 먹을 줄은 몰랐는데. “……내놔라!!” 드워프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미친놈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물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크고 단단한 메이스질뿐이었다. 콰앙-! 반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한 방패에서 피어나는 호쾌한 굉음. 후, 그래 이거거든.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콰앙-!! 반쯤 우그러진 방패를 쥔 채로 크게 휘청거리는 드워프. 콰직-! 가드가 풀린 틈을 타 메이스로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그것을 끝으로 바닥에 쓰러진 드워프. 다만, 공간이 붕괴되지 않는 거로 봐서 즉사는 아닌 듯하고. ‘기절한 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몸뚱이 하나는 제법 단단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잘 됐네.’ 나는 드워프의 가방을 뒤져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다름 아닌 만티코어의 정수가 담긴 시험관. 이를 보고 있자니, 돌연 주사위를 굴리던 때 이놈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운이 좋군.] 내 인생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대사 1순위. 조금은 아이러니했다. 그때 그런 말을 했던 이놈은 곧 뒈질 운명에 처했고, 나는 그 반대 입장에 섰다. 어쩌면 행운이란 불행의 징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확장형 가방에 들어 있던 시험관이 안 깨지고 멀쩡하게 있어 주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운이 좋군.”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노력해서 쟁취해낸 것들이니까. 「캐릭터의 영혼에 [만티코어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시험관에 담긴 정수를 원샷 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드드드드드드! 공간 전체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걸 맞고도 살아 있다 싶더라니. 이제 죽은 거구나. ‘어차피 시체는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니 수습은 차차 하는 거로 하고…….’ 이내 눈을 감았다 뜨니, 익숙한 숲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그곳에 끌려간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 콰아앙! 콰지지지직! 퍼엉! 여전히 전투는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다만 내가 빠지며 후퇴를 거듭했는지, 전장의 위치가 조금 옮겨졌다. 여기서 한 7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척 보기에도 고전 중인 팀원을 돕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음, 이 정도면 거리는 딱 적당한 거 같고.’ 따라서 나는 새롭게 얻은 이능을 발현했다. 만티코어 노랑 정수에 담긴 액티브 스킬. ‘도약.’ 왠지 모르게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단발적으로 도약력 수치가 10배 상승하며 착지 시 주변에 강한 충격을 입힙니다.」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내 몸뚱이가 운석처럼 드워프 잔당들 중심부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드디어 내게도 이동기가 생겼다. 186화 템빨 (1) 드워프는 말했다. 나만 없으면 자기들이 훨씬 유리하다고. 이제 보니 아예 허튼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파바바바바밧-! 공기 저항을 받으며 대포알처럼 쏘아지는 육신. 높은 곳에서 보니 한눈에 전황이 들어온다. “얀델 씨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지만, 동료들은 고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벽 역할을 하던 내가 빠지자 동료들의 부담이 몇 배로 증가한 상황. 웅이는 소환 해제가 된 반면, 카루이 사제가 소환한 언데드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친다. “어?” 그때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칼스타인 씨! 지금 어딜 보시는…… 어?” 추가로 레이븐과도 눈이 마주쳤다.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입이 떡 벌어진 것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왜 바바리안이 날고 있지? 한 가지 정정하자면, 나는 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지. 이름하여 바바리안 메테오. 콰아아아아아아앙-! 허리에 힘을 빡 주고서 균형을 잡아 두 발로 착지한 순간, 크레이터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족적이 지면 깊숙이 새겨진다. 그리고……. 지지짓. 다리에서 전기가 통하는 감각이 피어났다. 이거, 골강도를 맞춰 둔 게 아니었으면 뼈가 박살났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후우우웅-! 착지 지점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링 형태의 먼지. 이동기로 쓰이는 도약의 부가적 효과다. 「단발적으로 도약력 수치가 10배 상승하며 착지 시 주변에 강한 충격을 입힙니다.」 주변에 입히는 범위 데미지. 물론, 그 피해량은 미미한 정도다. 괜히 내가 이동기라 분류했겠어? 내가 깔아뭉갠 좁은 범위라면 모를까, 광범위 피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솨아아아아아-! 풍압에 밀쳐지듯 나가떨어지는 언데드 군단. 드워프 잔당들은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했을 뿐,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멀쩡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캐릭터의 총중량이 500kg 이상입니다.」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이 피해 범위에 추가로 적용됩니다.」 미안, 내가 [거대화] 상태라서 말이지. 쿠웅-! 번개가 치고서야 천둥소리가 들려오듯. 풍압이 사라지기 무섭게 땅이 꿀렁이며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것을 튕겨낸다. “꺄악!” “뭣……!” 허공에 떠오른 수백의 언데드들과 드워프 잔당. 그 압도적인 뽕맛에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다행히 무게가 됐나 보네.’ 내심 걱정했었다. [합일]로 장비들도 [거대화]가 적용됐지만, 아직 맞추지 못한 파츠의 장비가 많으니까. 뭐, 이게 아니어도 [도약] 스킬 최대 장점은 따로 있겠다마는. 「일시적으로 위협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착지 후 잠시간 부여되는 위협 수치 보너스. 이것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거대화]에 이어 위협 수치의 고정 값을 올릴 수 있는 기술이 하나 추가됐단 뜻이니까. “저, 저놈이 여기 있다는 건…….” “나, 난쟁이 새끼! 그 새끼는…… 죽은 거야?!” “버티는 건 할 수 있다면서!!” 내 등장에 이미 전의가 꺾인 듯한 드워프 잔당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의 발동 조건이기도 하니까. 「일시적으로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위협 수치와 비례하는 육체 보너스. 그래, 이거거든. 내가 정말로 오우거라도 된 듯한 기분. [그륵!] 몬스터 판정을 받는 소환수들이 미친놈처럼 내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반면, 지성인들은 달랐다. “후, 후퇴! 후퇴해라!” “도, 도망쳐!” 상태이상 ‘공포’에 걸린 것처럼 진형을 버리고 도망치는 녀석들. 음, 이건 위협 수치라기보다는 그냥 합리적인 판단이려나? 콰앙! 콰앙! 후우웅! 퍼억-! 초거대 메이스와 방패. 그리고 이미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두 다리로 언데드 소환수들을 짓이기고 쳐내며 드워프 잔당을 추격했다. 쿠웅! 쿠웅! 쿠웅! 달릴 때마다 대형 괴수의 발소리가 들린 것은 덤. “막아요! 막으라고! 네가 전사잖아!!” “미친, 저걸 무슨 수로 막—” 튀던 요정 궁수가 수인 검사의 허벅지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아악! 망할 년이……!” 관성에 의해 바닥을 구르는 수인 검사. “어, 어……?” 이내 놈이 내 손에 쥐어졌다. 사람 머리를 한 손으로 쥐고도 넉넉한 손아귀. “……하, 항복. 항복하겠—” 천천히 힘을 불어넣었다. 근데 [야성분출] 때문인가? 얘도 물리 내성이나 그런 걸 찍었을 텐데. 콰직-! 체감상 수박보다 물렁한 거 같다. ‘그럼 다음.’ 머지않아 [야성분출]이 끝나며 미친 듯이 들끓던 활력도 사라졌지만, 추격엔 문제없었다. 애초에 아직 세 번째 챕터도 안 끝났으니까. 반경 500m가 결계로 가로막힌 상황. 게다가 이제 이동기도 생겨서 말이지. 콰아아앙-! [도약]을 써서 놈들의 앞을 가로막자 드워프 잔당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차라리 자비에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뭐,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수, 수호자를 잡으려면 우리가 피, 필요할 거예요. 그렇죠?” 이 부분은 좀 고민해 봐야겠는데. 일단 뒤따라 도착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잔당 무리를 무장 해제 시켰다. 그럼, 이제 [거대화]는 꺼도 되겠고. “비요른! 아까 그건 대체 뭐냐!! 나도! 나도 하고 싶다!!!” 바바리안의 본능일까? [도약]을 목도한 아이나르의 눈에 강한 탐욕이 어렸다. 솜사탕을 보던 눈빛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탐욕. 나는 흐뭇함을 감추지 않으며 약속했다. “후후, 나중에 비슷한 걸 찾아주겠다.” “정말인가!! 약속한 거다!!” “그래, 약속이다.” 아이나르의 육성 트리에는 [도약]과 비슷한 게 있다. 3등급 정수라서, 구하는 데 몇 년은 걸릴 테지만. 암, 바바리안이면 점프 정도는 해야지. “저, 저기! 도, 도와주세요!” 응? 드워프 잔당의 장비를 벗겨내고 있던 때 들린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여자가 보였다. ‘아, 얘도 살아 있었지…….’ 한스G 팀의 신입 인도자. 그러니까 이름이……. 물어보긴 귀찮으니 인도녀로 하자. “포션! 제발, 포션 좀 빌려주세요. 일단 제가 갖고 있는 걸 먹이기는 했는데…….” 인도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자, 바닥에 쓰러진 둔기 전사가 보였다. “살아 있는 건가?” “네, 네!” 희망을 엿본 듯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인도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포션을 쓰는 건 낭비일지도 모른다는 고민. 이윽고 나는 카루이의 사제를 손에 쥐었다. “히, 히익!” 거, 쫄기는. 누가 죽인대? 사제를 쥐고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나는 놈을 둔기 전사 앞에 내려놨다. “치료해라.” “예, 예!” 악신을 모시기는 하지만, 카루이의 사제는 일반적인 신성력도 사용이 가능하다. 하긴, 이것도 못하면 위장 자체가 불가할 터. 솨아아아. 신성력이 깃들자, 둔기 전사의 몸에 가득하던 화상이 천천히 지워졌다. 어느샌가 훨씬 안정적으로 변한 숨소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그보다 마법사는 어떻게 됐나?” “도, 돌아가셨어요.” “확실한 건가?” “네. 제, 제가 확인했을 땐 이미 심장이…….” “그렇군. 저쪽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줘라. 이놈도 혼란스러울 테니.” “네, 네! 감사합니다……!” 동료가 있는 장소로 돌아오니, 어느덧 드워프 잔당의 포로화 작업이 끝나 모두 속옷 정도만 걸쳐 입고 있는 상태였다. “……재갈은 어디서 나서 물려 둔 거지?” “제가 갖고 다니던 건데요?” 뭐? 재갈을 왜? 정말 순수 호기심으로 이유를 묻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제가 이쪽에도 관심이 있어서요.” “어…… 그, 그렇군?”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이 레이븐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터. “그래. 그런 것도……. 나, 나쁘지는 않지?” 오해 없도록 부정적 의견이 없음을 피력했다. 근데 이건 또 뭘까. “나쁘지 않다뇨? 얀델 씨도, 마물학에 관심이 있어요?” “마물학?”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븐도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혹시…… 재갈이 마물용이냐?” “네, 그런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마리쯤 생포해서 연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럼 얀델 씨는 이걸 누구한테 쓴다고…….” 말꼬리를 흐리던 레이븐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붉어졌다.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요.” “얼마나?” “1m.” “……알겠다.” 그렇게 반농담식의 거리두기 합의가 끝나고, 나는 포로 무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스G의 재갈을 풀었다. 궁금했던 게 있거든.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아, 예! 뭐, 뭐든지요!” “드워프에게는 어쩌다 악령인 걸 들켰지?” “……네?” 한스G는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나를 보았다. 다만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서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 진실은 실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그 사람도 프, 플레이어……. 아니, 아, 악령이었습니다.” 드워프도 지구 출신이었다. 그래서 한스G의 행동만 보고서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말해 봐라.” 나는 좀 더 자세한 정황을 들었다. 자꾸 말을 더듬는 것만 빼면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드워프는 불침번 때 마도구를 통해 한스G에게 대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구 출신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얘기를 하며 커밍아웃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를 인정한 한스G.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드워프가 쓴 것은 대화가 기록되는 마도구. 이를 약점으로 잡힌 한스G는 수호자를 잡고 나서 크게 한탕 하자는 협박성 제안을 잡았다. 참고로 채찍 말고 당근도 있었다. 공평하게 전리품을 나누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지고 노아르크로 데려다주겠다던가? “저, 저는 거, 거절했습니다. 그, 그런데…… 으, 읍!” 구차한 변명이 이어질 게 뻔했던지라, 대화를 끝내고 재갈을 입에 물렸다. 어차피 궁금한 건 다 풀렸으니까. ‘무슨 열다섯 명 중에 플레이어가 넷이야?’ 요정 궁수, 한스G, 드워프, 그리고 나까지. 기도 차지 않지만 결국 최종 승자는 나였다. ……아직 최후의 전투가 남긴 했겠다마는. 그런 의미에서, 어서 새 안건으로 넘어갔다. 일단 팀 보이스부터 킨 다음에. “너희 의견을 물어보고 싶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말이죠?” “그래.” 다수결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내가 결정을 내리면 팀원은 모두 내 의견을 따라줄 테고. 하지만, 그 전에 의견을 듣고 싶다. “우리를 공격한 놈들이다! 당연히 죽여야 한다!” “으음, 나는 모르겠당. 우리만으로 균열을 깰 수 있으면 당연히 죽이는 게 맞기는 한데…….” “저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협력을 할까요?” 의견은 대부분 비슷했다. 신뢰하기가 어렵다는 것. “믿을 수 없는 아군은 오우거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도 있지.” 같이 싸운다 쳐도 놈들의 배신을 우려해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면 본말전도일 터. “그래도 노아르크 쪽은 그나마 나아요.” “낫다니?” “균열에서 나가는 순간, 우리랑은 다시 마주칠 일이 없잖아요? 목숨은 살려 준다고 하면 차라리 그쪽에 걸어 보려 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레이븐의 시선이 요정 궁수와 한스G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저 둘은 달라요.” 악령. 어찌 보면 지하 도시의 탐험가들보다도 더욱 사악하고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그 존재. “맞다! 족장도 그랬다! 악령은 발견한 즉시 죽여야만 한다고!” “응…… 예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일을 겪으니 확실히 알겠당. 왜 사람들이 악령을 믿지 말라고 했는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지. 기회가 왔을 때 처치하는 게 현명하다. 악령을 믿었던 자가 어떻게 됐는지, 그 결과가 바로 저기 있으니까.” 한마디, 한마디 들을 때마다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만약 내 정체가 들킨다면, 얘네는 어떨까. 그때는 나도 이런 눈빛으로 볼까? “그래서 얀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의미 없는 상념을 털어내며 내가 내린 결론을 얘기했다. “지금 죽이는 게 나을 거 같다.” 애초에 살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지금 죽이냐, 아니면 수호자를 처치한 다음에 죽이느냐의 고민이었을 뿐. 나는 이미 이 세상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우리끼리 수호자를 처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해 봐야지.” 대책 없는 말처럼도 들리지만, 아주 근거 없이 한 말은 아니다. 우선 둔기 전사가 살았지 않나. 전력이 여섯 명으로 늘었다. 또한, 이번에 획득한 수호병단의 징표처럼 전리품 중에서 당장 쓸 만한 것들도 더 있을 터. 무엇보다, 내 예상이 맞다면 마법사도 한 명 더 늘어날 테고. “그럼 이제 도플갱어만 찾으면 되겠군.” “네. 진실의 돌이 나오려면 멀었고, 협력도 안 하기로 했으니 전부 죽이면 될 거 같아요. 제단에 바친 상태가 되면 나중에 풀려나잖아요?” “음성 제어 마법을 꺼줘라.” 레이븐에게 부탁해 팀 보이스 마법을 끈 다음, 포로 무리에게로 다가갔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묘한 열기가 감도는 침묵. “…….” 희망과 불안이 공존한 의문의 눈빛이 내게로 주목됐다. 하긴, 지들도 눈치가 있으면 알겠지. 회의가 끝나고 결정이 났다는걸.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아프진 않을 거다.” 아마도. “읍, 으읍! 으읍!!” 내 입이 열리길 기다리던 포로들이 몸부림치며 뭐라 말을 해댔다. 삶을 갈구하며 흔들리는 촛불처럼. 나는, 주저 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일단 시작은 맨 끝에 자리한 카루이의 사제. 콰직-! 그다음은 술법사. 콰직-! 한스G. 콰직! 그리고 요정 궁수까지. 도플갱어가 깃들었어도 즉사를 할 만큼 힘껏 머리를 내리쳤다. 콰직. 이 모든 과정에 소요된 시간은 고작 5초 안팎. 그 이전까지만 하여도 어느 누구보다 격하게 몸부림치던 이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짓이겨진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네 구의 시신. 이를 보며 나는 딱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재갈, 채워두길 잘했네. “얀델 씨! 그냥 그렇게 후려치면 어떡해요!” 응? “아무리 마물용이라고 해도 그렇지, 자칫하면 망가진다고요!” 아…….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침착하군.” “네? 그게 무슨…….” “이제 도플갱어 후보가 너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이지.” 검증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아홉 명. 그중에 멀쩡히 서 있는 건 나와 레이븐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진실의 돌을 썼으니까 제외. 뒤늦게 현 상황을 깨달았을까? “아……!” 레이븐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전 아니에요! 내가 왜 도플갱어!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뭔가 착오가…….”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레이븐이 도플갱어다. 다들 물러나라!” 내 외침에 레이븐 곁에 있던 삼인방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떨어졌다. “서, 설마 네가 도플갱어일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당.” “아루루를 돌려줘라!! 인간에 마법사지만! 그래도 소중한 내 동료란 말이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근딜 자매. 그리고……. “지, 진짜 아니라고요. 믿어 줘요. 내일 진실의 돌이 생성되면 바로 써서 확인할 테니까! 네?” “모든 게 끝난 와중에도 진실의 돌을 소모하게 만들려 하다니, 정말 영악한 몬스터군.” 조용히 석궁을 들어 올리며 경계 태세에 들어간 곰아저씨. 레이븐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 아니에요…….” 얘가 이런 얼굴을 할 수도 있구나. “지, 진짜 아니란 말이야!!!” 그러고 보면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건…… 귀하군.’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닌지라, 왠지 욕심이 생기지만……. 더 했다가는 진짜 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난은 이쯤에서 끝. “이제 남은 건 너뿐이다. 근데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지?” “그, 그건……!” “제단에 바치지 않아도 숙주가 사망할 시, 도플갱어가 풀려난다고 한 건 너였을 텐데?” 몰아세우는 척 넌지시 힌트를 주었다. 우리 마법사라면 이것만으로도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리라는 판단. “어, 어쩌면!! 누군가 살아 있을 수도 있어요!! 도플갱어는 죽은 척하는 게 특기라 했으니까!” 기다렸던 대사였다. “누군가 살아 있다라…….” “어, 어딜 가는 거죠?” 내가 걸음을 옮기자 당황하며 외치는 레이븐. 터벅. 이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드워프에게 어깻죽지가 날아간 비운의 마법사. 파르테이안이 몸을 뉘인 그 자리였다. 일단 몸을 굽혀 맥을 잡아 보았다. “……사, 살아 있나요?” “조용히 해 봐라.” 심장이 뛰지 않았다. 호흡도 멈춰 있는 상태였고. 툭툭. 나는 일어나 발로 상처 부위를 찼다. “…….” 미동도 없었다. 음, 이 정도는 참는 건가? 포션 한 병을 꺼내 부었다. 치이이이이이익. 부글부글 기포가 끓으며 아무는 상처. “끼예에에에에엑—!!” 그래, 너도 포션은 못 참는구나. 187화 템빨 (2) 그림자 제단. 이 챕터에서 도플갱어는 철저하게 두 가지 목표만을 위해 행동한다. 원정대가 진실의 돌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 그게 안 된다면, 원정대원의 숫자가 줄도록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유력 용의자가 한 명 있었다. [자네는 어느 도시에서 왔는가?] 카일먼 파르테이안. 말 한마디로 원정대를 반쪽 내버린 한스G 팀의 마법사. 나도 처음엔 우연히 지뢰를 밟은 줄 알았다. 한스G를 포함해 마법사 팀은 드워프 무리가 노아르크 출신인 걸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하지만……. [드워프, 혹시 네가 도플갱어인가?] 나는 드워프 무리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배낭에 있던 장비들은 어디서 얻었는지. 인식표를 받을 때 공무원이 정확히 어떤 말을 했었는지 등, 놈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수없이 날리며 수상하게 보이도록 유도했다. 다만. 그땐 미처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도플갱어가 보기에, 저 쉬운 질문에 쩔쩔매는 드워프가 어떻게 보였을까? ‘이상해 보였겠지. 그다음엔 왜 그런가 의문을 품었을 테고.’ 모처럼 들어간 똑똑한 마법사의 몸. 도플갱어는 드워프가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통해 노아르크라는 진실에 도달했을 것이다. 아마 욕심도 났겠지. 때마침 숙주로 삼은 몸에 적당한 아이템도 있었을뿐더러……. 잘만 이용하면 정체를 숨기기도 쉬워지니까. [도, 돌아가셨어요.] 도플갱어 새끼는 죽은 척을 할 줄 안다. 게임에서도 몇 번이나 당했다. 확실하게 즉사시키는 게 아니라면, 이 망할 새끼는 동면 상태로 돌입해 생명 유지를 하며 플레이어를 농락했다. 바로 이렇게. “끼예에에에에엑—!!” 포션이 퍼부어지기 무섭게 발작하는 도플갱어. 아마 내가 이 요소를 몰랐다면 남은 후보를 다 때려죽이고서도 레이븐에게 진실의 돌을 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플갱어예요!!!” 마침내 누명을 벗게 된 레이븐이 어느 때보다 기쁜 목소리로 외쳤고, 도플갱어 놈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일단 부정하고 봤다. “아, 아니! 야! 나, 는! 끼예에엑!!” 대체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지만, 몬스터에게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 그냥 모가지를 잡고 제단으로 걸어갔다. 제단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몸부림이 심해졌다. “어, 떻, 게……!!” 마침내 변명을 포기하고 의문을 내비치는 놈.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기라도 똑바로 하던가.’ 마법사의 최대 약점은 근접전이다. 그런데 놈은 머리를 쪼갤 기세던 드워프의 도끼를 피해 어깨로 받아 냈다. 기습을 예측한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애초에 그걸 맞고 즉사했다는 것도 웃기다. 과다 출혈로 죽은 거면 모르겠는데, 인도녀가 포션을 먹이기도 전에 숨이 멎었다고? 「원정대원의 몸에 깃든 강탈자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내 도플갱어의 머리를 제단에 박아넣자,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는 숲. “끼예에에에엑-!!” 정수리에서부터 뽑혀져 나온 그림자 형태의 무언가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나무 사이를 쏘다녔다. 그리고……. “어! 도망간다!!” 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어느덧 세 번째 챕터가 끝났단 뜻이니까. 「사용된 진실의 돌은 1개입니다.」 「봉인 해제율 10%.」 「강탈자가 봉인된 힘을 되찾기 전에 서둘러 추격해 처치하십시오.」 이제 마지막 보스전을 치르러 갈 차례. “비요른, 어서 따라가자!!” “멈춰라. 그 전에 할 게 있다.” 일단 아이나르를 진정시키고 파르테이안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아, 물론 내가 아니라 레이븐이. “어떻지?” “부상은 얼추 나았으니, 곧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요?” “그렇군.” 내가 부르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파르테이안을 살펴본 레이븐이 그제야 축 늘어졌다. 가출했던 멘탈이 돌아오며 힘이 풀린 모양. “후아…….” 근딜 자매와 곰아저씨가 멋쩍은 얼굴로 다가와 제각기 한마디씩 읊조렸다. “우와, 정말 이 사람이 도플갱어였구낭…….”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전 아니라고!” “크흠,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군? 그 상황에 누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다니.” “하, 진짜 제가 아니면 어쨌으려고…….” “아루루! 알지? 난 널 믿고 있었다!” “믿기는 무슨…… 아니, 그보다 아루루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건데요?” “어엇?! 설마 아루루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상처받은 것처럼 낙심하는 아이나르. 물론, 그런 게 통할 레이븐이 아니었다. “그럼 그게 마음에 들겠어요? 아루아 레이븐! 성이든 이름이든 제발 똑바로 불러주세요. 제가 이런 건 딱 질색—” “이,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만 발음이 어려워서 그랬던 건데…….” 아이나르가 고개를 푹 숙이자, 신경질을 내던 레이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넌 인간에 마법사지만, 소중한 동료니까.” 바바리안답게 낯부끄러운 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내뱉는 아이나르. “하, 진짜 그놈의 발음…….” 레이븐은 기도 안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됐어요. 알아서 불러요.” “그게 정말인가!!” “네. 어차피 학파에서도 비슷하게 불리는데 괜히 화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고맙다! 아루루!” 한 번의 역경을 이겨 내며 동료 간의 우정이 돈독해지는 훈훈한 광경. 이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얘,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런 쪽에 약하구나. ‘나도 나중에 뭔가 잘못했을 때 써먹어야지.’ 머리에 메모를 해 둔 뒤, 짧은 대화를 끝내고서 정비 시간을 가졌다. 보스전을 하려면 할 게 산더미니까. “둘 다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라.” 우선 인도녀와 의식을 회복한 둔기 전사를 불렀다. “상황은 들었겠지?” “……그렇소.” 한스G와 요정 궁수가 악령이었단 것에 충격이 컸는지 눈빛이 멍하다. “정신 차려라. 남은 건 살아나가서 해도 늦지 않으니.” “뭘 하면 되오?” “뭘 할 수 있는지부터 말해라.” 나는 둔기 전사의 전투력부터 확인했다. 무슨 정수를 먹었고, 어떤 형태의 전투가 가능한지 등등. 원래라면 외부인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을 개인 정보들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둔기 전사는 아주 저자세로 내게 협력해 왔다. “그렇군, 그럼 너는?” “저, 저는 길을 찾는 걸 빼면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죄송해요.” 6등급 전사 하나에 무등급 인도자 하나. “그래도 파르테이안 님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무려 5등급 마법사시거든.” “뭐? 5등급?” “그렇소. 공격 마법보다는 다른 쪽에 특화됐긴 하지만. 평소 팀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하시던 분이시지. 자세한 건 깨어나면 직접 듣는 게 좋을 듯하오.”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야 레이븐이 아직 6등급 마법사이니까. 한스 새끼는 대체 어떻게 구슬렸기에 이런 고급 인재를 데리고 다니던 거지? ‘그럼 5등급 마법사까지 해서 총 일곱 명으로 수호자를 잡아야 된다는 건데…….’ 아직은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원하는 걸 그려 넣기엔 물감이 부족하다. 따라서 파르테이안이 의식을 회복하는 동안 드워프 잔당이 남긴 전리품을 샅샅이 뒤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해라. 뭔가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레이븐한테 검사를 맡고. 쓸 수 있는 게 있으면 전부 써야 하니까.” 한스G, 요정 궁수, 수인 검사, 드워프, 술법사, 카루이의 사제. 제단에 바쳐진 궁수는 영혼 상태로 변해 버려서 균열을 클리어한 다음에나 깔 수 있을 테니 패스. “아루룽! 이건 어떠냥?” “마력이 느껴져요. 하지만 술식을 읽을 수는 없으니 마도구는 아닐 테고……. 넘버스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아요.” “오오! 이 신발! 나한테 딱 맞는다!” “하프트롤의 가죽으로 만든 부츠네요. ‘가속’ 마법 부여도 돼 있고요. 비싼 거니까 조심해서 신으세요. 나중에 정산할 때 넣어야 하니까.” 하나하나가 중견 탐험가에 접어든 자들답게 가방 하나를 열 때마다 쓸 만한 것들이 나왔다. 무슨 보물창고라도 연 듯한 기분. “레이븐, 이것도 한번 확인해 줄 수 있겠나? 라이티늄제인 건 알겠는데, 왜 이걸로 목걸이를 만든 거지?” “마력 전도성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마법을 부여해도 효율이 달라지거든요. 그러니까 어디 보자, 이 목걸이는…….” 레이븐은 제 적성을 찾은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각종 아이템의 가치를 판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어느샌가 파르테이안도 깨어났다. “어, 어…….” 동료들의 시체, 그리고 각종 장비로 가득한 숲을 보며 혼란에 빠진 중년 마법사. 둔기 전사를 보내 설명을 대신하게 했다. “내, 내 몸에 도플갱어가 들어왔었단 말인가?” “노아르크……. 그래, 어쩐지 가방에 안 쓰는 장비들로 가득한 게 수상하더라니. 그곳에서 온 자들이라면 납득이 되는군.” “크리센 군과 메이린 양이 악령……?” 설명이 이어질수록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마법사. 한데 마법사의 기질인지, 그 상황에서도 그는 내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걸세.” “고마우면 가서 레이븐을 도와라. 느긋하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 “그러겠네.” 파르테이안이 합류한 다음에는 속도가 확 붙었다. 의외로 그가 이런 류의 전문가였던 덕이다. “……감정 마법? 나르망 학파 출신이셨어요?” “그러고 보니 서로 소개도 하지 않았군. 맞네.” “알테미온 학파 소속의 아루아 레이븐이라고 합니다.” “하하, 알고 있네. 로브에 그런 멋진 문양을 새겨놓는 곳은 한 곳뿐이니까.” “마스터가 좀 주책이라서요…….” 특수 감정이 가능한 나르망 학파의 마법사. 파르테이안이 합류하며 넘버스 아이템은 물론이고,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물품들도 분류가 가능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쓸 만한 건 다 나온 거 같으니, 이제 그만하고 다들 모여라.” 분류 작업을 끝마친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 임시 정산을 시작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지금 가져간 물건은 전부 적어 놨다가 나중에 제대로 정산을 할 거다. 계속 쓰고 싶으면 그때 값을 내고 사야 한다. 알겠나?” “알겠다!” “그럼 아이나르, 이리 와라.” 나는 정리된 목록을 보며 획득한 물품을 한 명 한 명에게 양도했다.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 누가 썼을 때 가장 좋은 효율이 나오는가였다. “신발, 벗어서 미샤에게 줘라.” “그, 그럴 수가! 어차피 발에 맞지도 않을 거다!!” “걱정 마라. 치수 조절 마법이 부여 되어 있단 걸 확인했으니까.” 다소 독단적일 수도 있는 결정에 군소리가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리더의 권위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 터. “아이나르.” “알겠다. 주면 되지 않냐…….” 아이나르를 필두로 나머지 동료들도 쓸 만한 장비들을 챙겨갔다.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네다섯 개까지. 저걸 다 팔면 얼마야? 탐험가와 싸운 다음이면 항상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끼고 만다. 왜 그렇게 다들 약탈을 하고 사는지. “그럼 됐군.” 남은 전리품들은 나와 레이븐의 아공간에 나누어서 보관했다. 안전상의 이유만은 아니었다. 양이 하도 많았어야지. 씨익. 새롭게 추가된 나의 장비들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과연, 이게 바로 한스 반작용의 법칙인가? 「캐릭터가 No. 2988 수호병단의 징표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48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No. 8667 황야의 무법자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1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아이디움제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00 상승합니다.」 도플갱어 새끼, 뒈졌다 진짜.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555(New +5) / 정신: 198(New +15) / 이능: 191 아이템 레벨: 3,068(New +2,200) 종합 전투 지수: 1,731 (New +570)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New) 188화 템빨 (3) 어두운 숲속을 걷고 있다. 그림자 제단에서 도플갱어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하염없이. “…….” 경직된 공기 속에서 발을 옮기는 중이다. 참고로 진형은 내가 최선두에 있고, 나머지는 몇 미터가량 뒤에 떨어져 따라오는 식. 일반적인 진형이라기엔 거리가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바로 캐리형 탱커의 삶일진데. “전투 준비!” 전방에서 인기척을 느낀 순간. 빛구체 마법이 닿지 않던 어둠 너머에서 수십 마리의 도플갱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번째 챕터에 접어들게 되면 생기는 변화다. 도플갱어의 봉인이 풀린 다음부터는 필드에 깔린 분신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제국, 제국의…… 적……!” “죽…… 여라!!” 더는 우리의 모습으로 변신하지 않는다. 적어도 본체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게임을 할 땐 그냥 그러려니 했던 부분이니까. 뭐, 이제는 찾아보면 이 현상에도 분명 뭔가 숨겨진 배경이 있지 않을까도 싶지만……. 지금 생각할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캐릭터가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거리가 더 좁혀지기 전에 냅다 뛰어 놈들의 한복판에 착지했다. 콰아아앙-! 착지하기 무섭게 땅이 꿀렁거리며 이어지는 특수 지형 효과 [반동]. 수십 마리의 도플갱어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오른다. 콰직-! 일단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한 놈을 후려치며 [야성분출]을 시전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3배로 뻥튀기 된 위협 수치. 병사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들이 눈 돌아간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몬스터인 이상 도발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제국을, 위…… 하여……!” 병사로 둔갑한 도플갱어는 스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까다로운 적이었다. 깡스탯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방패병이 내 메이스질을 버텨 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탯만 본다면 하나하나가 최소 아이나르 이상. 또한 활, 창, 검, 마법, 석궁, 방패 등의 다양한 병과로 이뤄졌다는 것도 전투 난이도를 올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콰직! 콰직! 막을 것은 막을지언정, 결코 피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사방이 적이었으니까. 그저 탱커답게 처맞으면서 동료의 지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아루아 레이븐이 5등급 공격 마법 [낙뢰]를 시전했습니다.」 머지않아 고대하던 마법이 완성됐다.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번개. 「카일먼 파르테이안이 5등급 보조 마법 [주문강화]를 시전했습니다.」 파르테이안의 보조 덕분인지 위력이 평소의 2배가량 증가했다. 따라서 마법에 휩쓸리지 않게 일시 정지. 콰콰콰콰콰쾅-!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낙뢰’가 내리친 시간은 약 5초 정도였지만, 도플갱어 군단을 반파 상태로 만들기 충분했다. ‘역시 사냥은 몰이사냥이지.’ 남은 잔당들은 멀찍이 물러나 있던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들여 처치했다. 그렇게 끝난 한 번의 전투. 둔기 전사가 무기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읊조렸다. “……파르테이안 님, 사르만 양은 괜찮겠지요? 자꾸 걱정이 됩니다.” “자네도 보지 않았나. 제단 근처로 도플갱어가 얼씬도 못 하던 걸.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걸세.” “그래도 데려오는 게 낫지 않았을지…….” 둔기 전사는 안전지대에 두고 온 인도녀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플갱어의 특성상 인도녀를 활용할 방법이 아예 전무한 건 아닐 테지만……. 이는 일회용 버림 패로 썼을 때의 이야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함께한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더 크다. “그만하세. 사르만 양도 동의한 부분 아닌가. 어차피 우리가 실패하면 전부 죽을 걸세.” 파르테이안이 내 눈치를 보며 이쯤에서 대화를 끝냈고, 나도 그냥 별말 않고 탐사를 재개했다. 시간을 낭비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드드드드-! 이후 몇 번인가 더 전투를 치르며 어두운 숲속을 나아가고 있자니, 발아래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봉인 해제율이 20%가 됐단 뜻이다. 하긴 10분에 1% 정도가 올라가니, 슬슬 그럴 때가 됐긴 했지. “얀델 씨,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그러지.” 시간에 쫓기듯 이동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도착했네요.”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이전에 중간 보스를 찾느라 숲을 헤맬 땐 보지 못했던 싱크홀. 이제 이 아래로 내려가면 보스전이 시작된다. 다만, 그 전에 일단 이것부터. “잠시 이 근방 좀 수색하고 넘어갈게요.” 레이븐의 지시하에 우리는 싱크홀 근처를 돌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책 내용대로네요. 반드시 입구 근처에 하나가 숨어 있을 거라더니.” 음산한 소리를 뿜어내는 백색의 비석. 게임 내에서는 ‘봉인석’이란 고유 명사로 명명되던 그것. 다만 이 자체로 히든 피스라 하기엔 그렇다. 네 번째 챕터가 되면 이 숲 전체에 다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일뿐더러……. “책 내용대로라니?” 봉인석에 대한 정보는 세 번째 챕터가 끝나면 그림자 제단에서 생성되는 [제물의 수기]를 통해 자연스레 알 수 있다. 뭐, 그래 봤자 그냥 찾아서 활성화하란 식의 정보지만. “그 수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네만.” “수기 말고 다른 책이요.” 레이븐은 마법사 파르테이안의 의문에 자세히 답하지 않으며, 봉인석 위로 손을 올렸다. 솨아아아아-! 기둥 형태로 하늘 위로 쏘아지는 흑색의 빛. 「봉인석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봉인 해제율 10%.」 이로써 도플갱어의 봉인 해제율 10% 줄었다. 물론 우리 전략대로라면 이 수치가 크게 의미 있진 않겠다마는,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스킵 할 이유는 없을 터. “그럼, 여기서 할 수 있는 준비는 끝났네요.” 이내 우리는 다시 싱크홀 쪽으로 돌아왔다. “다들 준비 됐나?” 보스전을 치를 차례다. *** 「캐릭터가 강탈자의 은신처에 진입했습니다.」 *** 균열의 꽃이나 다름없는 보스전. 다만 ‘도플갱어 숲’의 보스전은 조금 특이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단 원정대가 둘로 나누어져야 한다. 한 팀은 보스전을 치르고. 다른 한 팀은 도플갱어 병사로 가득한 숲에서 봉인석을 찾아 봉인 해제율을 관리해 주는 식. [제물의 수기]에도 적힌 정석 공략법이다. ‘컨셉 한번 짜증난단 말이지.’ 이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제 역할을 해야지만 깰 수 있다. 아마 우리도 각 팀에서 두세 명씩 적정 멤버를 차출해 두 팀으로 나눠 보스전을 치렀을 것이다. 그 지뢰가 터지지만 않았더라면. [이제 그 방법은 쓸 수 없어요. 지금 우리는 고작 일곱 명뿐이니까.] 원정대가 반쪽 나며 일이 꼬였다. 팀을 나누기엔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드워프 및 한스G 팀이 남긴 전리품을 확인한 나는 일찍이 답을 내렸고, 레이븐에게 힌트를 줘 같은 답에 도달하도록 유도했다. 올인. 안 그래도 적은 인원을 둘로 나눠 이도 저도 아니게 될 바에, 한곳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 단기전을 노리는 것. 쉽게 말해, 고인물식 공략법.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데, 다들 괜찮겠어요?]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 그렇게 전략의 토대가 잡혔다. 내가 점친 성공 확률은 90%. 물론 확률은 숫자에 불과하기에, 이게 제대로 통할지는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삶이란 게, 어디 플랜A로만 되던가? 쿠웅-! 바바리안답게 먼저 땅굴 아래로 뛰어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위로 신호를 보내자, 나머지 인원들도 하나씩 내려왔다. “공기가 으슬으슬하군.” 서늘한 온도의 동굴. [끼야아아아아아악-!!] 안쪽에서도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괴한 하울링을 터트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는 바바리안의 역할 중 하나다. “뭘 얼어 있나? 조지러 가자.” 팀원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장서 일직선 통로로 나아가자, 위축됐던 몇몇도 정신을 차리고서 그 뒤를 따랐다. 터벅, 터벅. 그렇게 한 마흔 걸음쯤 걸었을까? 동굴 전체에 흩뿌려져 있던 안개가 걷히며 보스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공동. 장난감처럼 여기저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진실의 돌과 그 중심부에 등을 돌린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 형태의 무언가.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 “너, 희도…… 날 죽이러, 온 거야……?” 무언가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응시했다. 드러난 얼굴은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꼬마였다. 눈코입이 상하 반전된 모습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 는데…….” 억울하다는 듯 우리를 노려보는 꼬마. 이내 눈빛에 담긴 감정이 분노로 변한다. 흔하디 흔한 보스전의 인트로다. “나, 도 너희와 똑같—!” 따라서, 다음 대사를 치기 전에 스킵. “베헬—라아아아아!!” ‘도약’을 쓰기 좋은 환경은 아니기에, 그냥 대시하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억-! 앉아 있던 그대로 머리가 짓뭉개진 꼬마. 그러나 평소와 같은 손맛은 없다. 마치 물로 가득 찬 샌드백을 때린 것만 같은 감촉. [끼예에에에에엑!!] 어디서 나는지 모를 비명 소리가 동굴 전체를 가득 채움과 동시, 꼬마가 검은 점액질의 형태로 변했다. 부글부글부글! 성게 가시처럼 올록볼록하게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검은색의 무언가. ‘시작은 나인가.’ 그 과정이 끝났을 땐, 또 하나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태擬態. 정수를 취해도 얻을 수 없는 도플갱어만의 고유 스킬. 다만 필드에서와는 조금 달랐다. “끼예에에에에엑!!” 놈은 더 이상 내 말과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름 없는 강탈자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단순히 흉내내기로만 끝내지 않고, 원래보다 더 강해진다. 5등급 몬스터의 능력치에 의태 대상이 가진 스탯과 스킬이 추가된다고 보면 쉽다. 괜히 4등급 판정을 받은 몬스터가 아닌 셈. 후우우웅-! 일단 시험 삼아 뒤로 물러나 피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메이스가 바닥에 처박혔고. 콰아아아아앙-! 크레이터를 남기며 동굴 전체를 진동시켰다. 근력이 200은 더 증가해야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위력. 내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뿌듯한 감정이 생길 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겠네.’ 딸리는 능력치는 템빨로 커버하면 그만. 마구잡이로 메이스를 휘두르는 놈이 동료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방패를 들고서 저지한다. 콰아앙-! 기대했던 청명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방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도 상상 이상이었고. 이게 50% 감소한 충격량이라고? “레이븐!!” 졸렬한 탐험가답게 지원 핑을 찍었다. 그 즉시 날아오는 마법. 고등급 몬스터가 상대인 만큼, 시작은 공격 마법이 아닌 저주 마법들이었다. 콰앙-! 조금 더 버티기 수월해진 놈의 공격. 그러나 이는 공략을 위한 첫 번째 전제가 충족됐을 뿐. 본격적인 첫 페이즈는 지금부터다. 「이름 없는 강탈자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내 모습을 한 도플갱어의 몸에서 검은 점액이 무차별적으로 튀며 바닥에 떨어졌다. 숫자를 세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작은 알갱이들. “이헤르노 하인다르!” 레이븐의 지팡이가 불길을 뿜어내며 알갱이를 녹였지만, 전부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꿋꿋하게 바닥을 기어 뭉쳐진 알갱이는 일련의 변신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모습으로 의태하기 시작했다. “총 넷이에요!” 레이븐이 침착하게 정보를 내게 전달했고.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분신체이기에 이놈들은 본체와 같은 성능은 내지 못한다. 따라서, 계획은 속행.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놈들부터 해치워라!” 분신체들은 동료에게 맡기고, 본체를 상대하는 것에만 집중하려 마음먹던 그때였다. “전부 한스 크리센이에요!” 추가로 이어진 레이븐의 브리핑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뭐?’ 두 귀를 의심하며 전투 중임에도 주변을 확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레이븐이 내게 잘못된 정보를 전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니미럴.’ 어떻게 전부 다 한스G로 뜰 수 있는 거지? 죽었든 살았든, 15명 중에 한 명으로 변신하는 패턴 아니었나? 그럼 대체 확률이 몇인 거야? 내 속도 모르고 레이븐이 외쳤다. “분신체 중에 얀델 씨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서둘러 정리하죠!” 마치 희소식을 전하는 듯한 목소리.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한스G는 우리 중에서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편일뿐더러, 소환술사가 넷이면 조합적으로도 구리니까. 확실히, 우리에게는 잘 된 일이다. 하지만…….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189화 템빨 (4) 도플갱어의 분신체는 본체와 다르다. 오직 의태 대상의 능력만을 사용할 수 있으며, 보스방에서 갓 소환된 놈들은 지능도 떨어진다. 아니, 숙련도라고 해야 하나? 전투 시작과 동시 소환수를 일제히 뽑던 진짜 한스G와 달리, 버벅거리며 한 마리씩 소환을 하는 분신체들. “일단 한 놈.” 분신체들이 뭔가 하기도 전에 곰아저씨의 석궁이 한 놈의 미간을 꿰뚫었다. 나머지 놈들도 곧이어 비슷한 수순을 밟았고. “전부 해치웠어요!” 30초도 채 되기 전에 들려온 승전보. 한스가 넷이기에 뭔가 개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불안했지만, 당장은 쉽게 풀렸다. 따라서……. “다들 지금이에요!” 놈이 다시 분신체를 소환하기 전에, 서둘러 본체에게 딜을 욱여넣어야 한다. 뭐, 쉽지는 않겠다마는. “끼예에에에엑!!” 모두의 딜이 집중되자, 본체가 괴성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도약], [휘두르기], [거대화]. 그리고……. 「이름 없는 강탈자가 [살점폭발]을 시전했습니다.」 재생력을 잃고서 잘 쓰지 않게 된 그 스킬까지. 내 신체 능력에 5등급 몬스터의 평균 스탯을 추가로 지닌 녀석은, 보스몹답게 실로 괴물과도 같은 위용을 뽐냈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결국, 레이븐이 근딜 라인을 뒤로 빼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2법사에 1궁수로 이미 딜은 충분한 상황.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근딜을 최전선에 내몰 이유가 없다. 애초에 도플갱어가 내 모습을 하는 중에는 물리 딜의 효율이 떨어지기도 하고. “세 분은 우리를 지켜 주세요!” 미샤, 아이나르, 둔기 전사. 세 근딜이 딜러 호위로 포지션을 변경하자, 팀의 후열도 더욱더 마음 놓고 원거리 포격을 가해왔다. ‘거, 어딜 가려고.’ 고위력의 원거리 딜이 이어지자 본체도 나를 무시하고 뒤로 달려들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야성분출]로 위협 수치를 관리하며 어그로를 끌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파치치칫-! [살점폭발]을 연사하며 몸이 너덜너덜해진 놈의 머리에 ‘뇌창’이 꽂히며 도플갱어가 흑색의 점액질로 모습을 바꾸었다. ‘일단 첫 고비는 잘 넘긴 셈인가.’ 물론, 아직 첫 번째 페이즈가 끝나려면 멀었다. 첫 번째 페이즈는 보스방에 들어온 캐릭터들이 전부 순서대로 변신한 다음에서야 끝. 하지만……. “어! 이번엔 나다!!” 우리 중 누가 나오든 나처럼 어렵진 않을 터. 실제로 다음 순번으로 지정된 아이나르와의 전투는 분신체 소환 패턴을 두 번도 겪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이제 근딜이 뒤에만 있을 필요가 없어졌거든. “끼예에에에엑!” 그렇게 아이나르로 변한 도플갱어를 처치했을 때였다. 드드드드-!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며 동굴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 그렇다고 필살기 패턴이거나 한 건 아니고. 봉인 해제율이 10% 상승했단 뜻이다. 「봉인 해제율 20%.」 보스전이 시작되고 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지만……. 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봉인이 해제되는 속도가 확 올라가는 탓이다. ‘분신체 소환 10마리당 5% 정도였지.’ 이번 공략에 가장 엿같은 부분이다. 뭔 짓을 해도 소환 패턴을 사전에 막는 것은 할 수 없기에 봉인 해제율의 증가는 필연적이다. 뭐, 밖에 봉인석을 활성화시켜 줄 제2의 팀이 있다면 부담이 좀 덜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든 그 전에 끝내는 수밖에.’ 100%가 돼서 봉인이 해제되면 게임 오버다. 그야 그때부터는 분신체 하나하나가 본체처럼 강해지거든. 심지어 분신체가 [자가복제]로 증식까지 한다. “이번엔 저네요.” 다음 순번은 레이븐이었다. 의외로 이때 조금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마법에는 캐스팅 시간이 필수인지라, 속사포로 끝장낼 생각이었지만……. 중간에 소환된 분신체가 문제였다. 네 마리 중에 두 마리가 나였거든. “베헬—라아아!” “베헬—라아아!” 도플갱어가 무슨 마법을 쓰려 했는진 모른다. 그러나 마력의 응집을 느낀 레이븐이 이러다간 다 죽는다고 소리칠 정도였으니, 만약 마법이 완성됐다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뭐, 그 전에 머리통을 터트리긴 했지만. 콰직! 이후 도플갱어는 미샤, 둔기 전사, 파르테이안, 곰아저씨 순으로 변신을 했고, 우리는 전력을 다해 최대한 빠르게 처치했다. 마침내 첫 번째 페이즈가 끝났다는 뜻. 드드드드-! 페이즈를 끝내기 무섭게 빛이 한 번 더 들어온 마법진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첫 페이즈에 봉인 해제율 40%라…….’ 딱 예상했던 수치이긴 했다. 쩝, 그래도 줄일 수 있으면 최대한 줄이고 싶었건만. “다들 말했던 진형대로 서라!” 아쉬움을 지우고서 오더를 내렸다. 첫 번째 페이즈를 끝마친 도플갱어는 동굴 중심부에서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변신을 하고 있는 상황. “어, 느 누구도, 모르는 거, 짓이라면…….” 도플갱어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서 울렸다. 곧 다음 페이즈가 시작된단 뜻이었다. “그게, 진실과 다를, 게 뭐지?” 이내 도플갱어가 변신을 끝마쳤다. 「이름 없는 강탈자가 [바꿔치기]를 시전했습니다.」 두 번째 페이즈를 시작할 차례다. *** 도플갱어의 이능 중 하나 [바꿔치기]. 효능은 실로 직관적이다. 이 스킬은 [자가복제]로 생성한 분신체와 본체의 위치를 바꿔 준다. 하지만……. 그건 전부 정수로 스킬을 얻었을 때의 이야기. “……왜 시작부터 저인 거죠?” “……왜 시작부터 저인 거죠?” 레이븐이 둘로 늘어났다. 얼굴도 똑같고, 말투나 표정에서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참고로 위치로 분간하는 건 불가능. ‘예전에 이것 때문에 열심히 키운 마법사가 죽었지.’ 아마 [던전 앤 스톤]을 하면서 처음으로 영입에 성공했던 마법사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 충격이 굉장히 컸었지. 스윽. 나는 시선을 움직여 바닥에 장난감처럼 굴러다니는 ‘진실의 돌’을 훑어봤다. 원래는 이걸 사용해 도플갱어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게 공략법의 정석이다. 뭐, 그 대신 봉인률이 상승하긴 하지만. 외부 지원이 없는 우리로서는 절대 이걸 써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를 가려 낼 것인가. 피식. 나는 웃으며 두 명의 레이븐을 응시했다. 처음엔 대사까지도 일치했으나, 여기서 둘의 말과 행동이 나뉘었다. “쏘, 쏘지 마요!” “다들 뭐 해요! 쟤가 가짜잖아요!” 한쪽은 수비적인 대사를, 다른 한쪽은 다소 공격적인 자세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다. 나는 짧게 읊조렸다. “뭐 하나? 어서 쏘지 않고.” 철컥, 곰아저씨가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 퍼엉! 공성병기나 다름없는 대형 화살이 쏘아져 레이븐의 작은 머리통을 아작냈다.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조그마한 육신. “어, 설마…… 진짜 아루루였던 거냥……?” “살인자!!! 네가 아루루를 죽였다!!!” 미샤를 포함해 모두가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다들 진정해라.” 머지않아 바닥에 쓰러진 레이븐의 몸이 검은 점액질로 변하며 허공에 떠올랐다. 정답을 맞혔다는 뜻. 아, 참고로 공격형 레이븐이 진짜였다. “자, 그럼 너는 어서 남는 자리로 가라.” 나는 도플갱어와 자리가 뒤바뀐 레이븐을 벽면으로 보낸 뒤, 변신 중인 점액질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너군.” 메이스를 치켜들고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도플갱어가 변신을 끝마쳤다. “히익! 그, 그거 내려놔라 바바리안노망!” 뭐래. 퍼억-! 더 볼 것도 없이 메이스로 머리를 후려쳤다. 이번에도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정답.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도플갱어는 넘버스 아이템까진 복사하지 못하니까. “어, 그래도 난데 조금은 고민해도 되는 거 아니냥……?” 미샤는 No. 5991 독사의 송곳니 보유자다. “칼스타인 씨도 참, 바바리안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레이븐은 횟수가 다한 ‘어긋난 신뢰’를 파르테이안에게 넘겨받은 뒤 보스전 내내 한쪽 손에 쥐고 있는 상태였고. “드디어 나군. 내가 처리하겠다.” 곰아저씨는 ‘시체술사의 기만’을. “베헬—라아아아아!!” 아이나르는 요정 궁수에게 얻은 ‘여우불꽃 매듭’이란 반지를 끼고 있다. 쓸 만한 옵션은 아니라 나가서 팔게 되겠지만. 콰직-! 이처럼 도플갱어의 두 번째 페이즈는 템빨만 된다면 날먹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이제 깨달았을까? 「이름 없는 강탈자가 [바꿔치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 전사로 변신한 도플갱어는 구차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즉시 기습을 해 왔다. 목표는 방어력이 가장 떨어지는 마법사. 만약, 이전처럼 밀집 대형이었다면, 저 공격을 피하는 게 어려웠을 테지만……. “내가 막겠다!!” 우리는 두 번째 페이즈에 접어들자마자 각자 거리를 두고 떨어져 벽면에 붙었다. 쉽게 말해, 기습에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단 뜻. 콰앙-! 아이나르의 대검이 도플갱어의 둔기와 맞닿으며 폭발했다. 그 틈에 미샤가 뒤에서 검을 찔렀고. 이후 곰아저씨와 레이븐의 요격으로 마무리. “각자 자리로 가라!” 한 번의 턴을 끝낸 다음엔 도플갱어가 한 차례 변신했던 팀원들을 한곳에 모아 밀집 진형을 갖추게 했다. “뭐 하나, 안 가고?”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둔기 전사. 신발에서 어스름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풍요의 발자취’란 이름의 저렴한 9천 번대 넘버스 아이템이다. 전사에게 나름 괜찮은 옵션을 지녔다. 전리품으로 얻은 걸 빌려준 건 아니고,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이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샀다던가? 「이름 없는 강탈자가 [바꿔치기]를 시전했습니다.」 아무튼, 다음은 중년 법사 파르테이안이었다. ‘어긋난 신뢰’를 레이븐에게 빌려준 그였지만,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이 아저씨가 들고 다니던 마법 지팡이가 넘버스 아이템이니까. 콰직-! 의태 대상이 마법사였기에 변신을 끝낸 놈을 해치우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오직 나뿐. “파르테이안 씨.” “그것 말이지? 바로 준비하겠네.” 일찍이 나로 변신한 도플갱어에게 큰 곤욕을 치렀던 마법사들은 이미 가장 강력한 마법 주문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 “베헬—라아아아아아!!” 도플갱어가 변신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방패로 놈을 밀어붙였다. “뒤쪽에 있는 게 가짜예요!” 순식간에 판별을 마친 마법사들이 준비해 둔 마법을 일점사했다. 물론, 탱커답게 한 방에 죽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페이즈에서는 소환수가 없기에, 도중에 마법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파치지짓! 콰앙! 퓨수우우욱-! 단어 그대로 퍼부어지는 고위력의 공격 마법. 이윽고 놈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항마력 세팅도 어서 해야겠네.’ 탱커로서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 도플갱어의 세 번째 페이즈. 그러니까, 어느덧 마지막 페이즈에 도달했다. “다들 이리 오세요!” 내가 오더 할 필요도 없이, 레이븐이 재빨리 사람들을 이끌고서 새로이 진형을 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듯 동굴이 격하게 흔들렸다. 부스스,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 알갱이. “끼히히, 히히, 끼끽, 끼히히히!” 슬라임과 비슷한 형태로 돌아간 도플갱어가 기괴한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이젠 소름 끼치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냥 이런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대체 주둥이도 없는데 어디로 말하는 거지? “조심하세요! 얀델 씨가 당하면—”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으니까.” 레이븐의 불안은 짧게 일축했다. 완벽하게 승리를 확신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나 또한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혹시 모를 변수를 경계하는 건 나의 오랜 버릇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때로는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팀을 이끄는 것도 리더의 자질일 터. 꽈악. 딱 몸을 달굴 정도만의 긴장을 유지하며,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마지막 페이즈는 일종의 ‘광폭화’. 지금부터는 일분일초가 중요하다. 첫 번째 페이즈와는 비교도 안 될 규모의 분신체들을 소환하니까. 퍼엉-! 보는 이로 하여금 한계란 생각이 절로 생길 만큼 팽창했던 검은 점액질이 폭발했다. 동굴 전체에 퍼져 나간 흑색의 알갱이들. 마법사 둘이서 기다렸다는 듯 불길을 뿜어내 이를 지워냈지만……. 절반도 채 지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폭발은 거듭되고 있었고. 「이름 없는 강탈자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이름 없는 강탈자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이름 없는 강탈자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알갱이들이 모여 형체를 이루며, 이내 우리의 모습으로 의태한다. 척 보기에도 수십은 될 법한 숫자. 한스G는 물론이고, 요정 궁수, 드워프 등 오늘이 지나면 다신 볼 일 없을 놈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넓디넓던 동굴이 한순간에 꽉 찬 상황.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기서 나오는 분신체는 이전처럼 강하지 않으니까!” 레이븐의 말대로 얘네들은 아까 보던 놈들보다 훨씬 약하다. 아마 내가 한두 대만 쳐도 펑펑 터지면서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다만, ‘광폭화’ 상태의 무서운 점은 따로 있다. 「봉인 해제율 50%」 「봉인 해제율 60%」 연신 빛을 뿜어내며 해제율이 갱신됐음을 알리는 바닥의 마법진. 이대로 가면 몇 분도 채 되기 전에 봉인이 풀리고 도플갱어가 온전한 힘을 되찾을 것이다. 따라서, 슬슬 그걸 꺼낼 차례였다. 「캐릭터가 [황야의 무법자]를 사용했습니다.」 「인간형 몬스터의 숫자에 비례해, 일시적으로 근접 물리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도플갱어 새끼를 조질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심어 준 물건이자……. 「현재 증가율 112%.」 「현재 증가율 157%.」 「현재 증가율 278%.」 「현재 증가율 342%.」 「현재 증가율 4…….」 무려 승산 90%를 점칠 수 있게 해준 그것. “베헬—라아아아아!!!” 아이템도 실력이다. 190화 템빨 (5) No. 8667 황야의 무법자. 드워프 팀의 수인 검사가 차고 있던 넘버스 아이템으로, 하위 번호답게 스탯은 붙어 있지 않으며, 값도 비교적 저렴한 편에 속한다. 사용 효과가 조금 애매한 탓이다. 인간형 ‘몬스터’를 상대로 근접 물리 피해량이 증가하며, 그 숫자에 따라 증가율이 늘어나다니? 탐험가 사이에서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미궁의 인간형 몬스터라 해봤자 얼마 안 되며, 그조차도 이렇게 떼로 몰려다니는 일은 없으니까. ‘거기다 쿨타임도 하루나 되지.’ 사실상 도플갱어나 5층의 그놈을 공략하려는 게 아니면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물건. 이 물건을 얻은 덕에 승산이 확 뛰었다. 이게 없었으면 한 반반 정도였으려나? 「봉인 해제율 70%」 그때 마법진이 한 번 더 빛을 뿜어내며 봉인 해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10마리당 5%가 상승하니, 계산대로라면 벌써 소환된 분신체가 60마리가 넘었다는 뜻. 「현재 증가율 401%.」 하지만, 아직 멀었다. 따라서 우리는 계획대로 벽면에 붙어 밀집 대형을 갖추었다. 그리고……. “바르하툰 위아르.” 레이븐의 마법으로 석벽을 소환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버티겠다는 판단. 다만 그렇다고 벽을 세워 전부 막은 건 아니고, 한쪽에 사람 두셋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틈을 남겨뒀다. 레이븐의 아이디어였다. 완전히 막혔다면 부수려 들 테지만, 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고자 할 거라던가? ‘진짜 되네.’ 나는 유일한 길목을 막아선 채 버텼다. 지금 상태에서 메이스로 후려치면, 내 모습을 한 분신체고 뭐고 다 한두 방에 뒈질 테지만……. 애써 욕구를 억눌렀다. 우리 목적은 분신체 사냥이 아니니까. 콰앙-! 시위라도 하듯 서로를 밀치며 내게로 달려드는 분신체들. 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저쪽에 구멍이 났당!!” 석벽을 부수고서 길을 개척하는 분신체. 잠시 고개만 돌려 확인해 보니, 하필 내 모습을 따라한 분신체였다. “얀델 씨는 그쪽에 집중하세요! 여기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근딜 라인과 곰아저씨가 소환한 철웅이 서둘러 인간 장벽을 형성하며 분신체들을 막아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아주 큰 패널티가 있었으니까. “앗! 죽이면 안 돼요!” 공격하지 않고 막아내기. 전문 탱커가 아니라면 수행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그 조건. 뒤쪽에서는 힘겨운 전투의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러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괜히 돕겠다고 갔다간 일만 틀어질 터. 드드드드-! 그렇게 2분 정도 흘렀을 때, 또다시 동굴이 진동했다. 「봉인 해제율 90%」 마침내 승부를 볼 시간이 도래했다는 뜻. “얀델 씨!” 천장이 높지 않기에 나는 아주 살짝만 힘을 줘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이른바 전문 용어로 ‘낮점’. 「캐릭터의 총 중량이 500kg 이상입니다.」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이 피해 범위에 추가로 적용됩니다.」 동료를 포함해 분신체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따라서 착지한 즉시, 분신체들을 밟아가며 빠르게 돌진했다. 「일시적으로 위협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높아진 위협 수치 덕분에 분신체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며 좀비처럼 달려들었고, 곧 방패 너머에서 엄청난 저항감이 전해졌다. “베헬—라아아아아아!!” 그로부터 한 10초쯤 지났을까? 불도저처럼 전부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 나는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퍼엉! 퍼엉! 연신 몸을 터트리며 [자가복제] 중인 본체. 더 볼 것도 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억! 마치 두부를 후려친 것만 같은 손맛. 그러나 피해를 입혔다는 판정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끼예에에에에엑!!” 무한 [자가복제]를 끝내고 나로 변신한 본체. 광폭화 모드인 만큼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어깨 위에 돋아난 머리가 두 개다. ‘나, 아이나르…….’ 빌어먹을, 하필 얘야? 내가 가진 스킬에 더해 아이나르가 가진 정수까지 사용하는 도플갱어. 「이름 없는 강탈자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이름 없는 강탈자가 [거듭베기]를 시전했습니다.」 충격량 자체가 다르다. 수호병단의 징표가 아니었으면 분명 뒤로 나가떨어졌겠지. 심지어 사방에서 소환된 분신체들이 나를 옥죄며 공격해 오고 있다. 하지만……. 후우웅-! 깡그리 무시하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본체의 목에 달린 두 명의 바바리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되겠냐는 의미가 담긴 웃음. 나도 그냥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현재 증가율 771%.」 버프를 받은 건 너만이 아니라서 말이지. 이름하여 극딜 바바리안 모드. 콰아아아아앙-!! 전력을 다해 [휘두르기]를 시전하자, 평소처럼 방패로 막은 도플갱어의 몸이 휘청인다. 그로 인해 드러난 빈틈. 시간을 주지 않고 재차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직-! 단 한 방에 아이나르의 머리가 짓이겨졌다. 머리가 두 개였기에 이걸로도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문제 될 건 없었다. 한 방 더 박아 넣으면 그만이었으니. 콰직-! 두 개의 머리를 모두 잃은 도플갱어는 그 즉시 다시금 점액질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도플갱어가 [결정화]를 시전했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꺼내는 최후의 발악이다. 뭐, 발악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패턴이긴 하겠다마는. 「마법 피해량이 99% 감소합니다.」 「물리 피해량이 90% 감소합니다.」 마법 피해는 사실상 면역. 물리 피해는 9할을 떼 가는 씹사기 스킬. 한데 시간 안에 못 부수면 다시 처음부터 이 짓을 반복해야 한다. 우습지만 그게 원래 공략법이다. 대량 소환, 변신, 결정화. 이 순서를 거듭하며 ‘결정’에 데미지를 누적시켜 박살 내는 것이 클리어 방법. 콰아아아앙-! 다만 우리는 이 한 번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래서 분신체도 안 잡고 내버려 둔 것이고. “레이븐!!” 내가 소리치자 레이븐과 파르테이안이 즉시 마법을 사용했다. 공격 마법은 아니었다. 아까 드워프 팀과 PK를 하던 때 사용하기도 했던 ‘마나 실드’. 레이븐이 다급하게 외쳤다. “얼마 못 버텨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분신체가 몇인데. 안 그래도 소모 값이 큰 마법인 만큼, 1분도 지나기 전에 두 마법사의 마력이 바닥날 것이다. 그렇기에……. 콰아아아아앙-! 살갗 위에 두껍게 어린 마력을 믿고서 결정 상태의 도플갱어를 박살 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콰아아아아앙-! ‘황야의 무법자’가 없었으면 결코 쓰지 않았을 전술이었다. 아마 분신체를 미리 정리하고서 다 같이 딜을 넣든가 했겠지. 혹여나 딜이 모자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카지직! 네 번째 [휘두르기]에서 처음으로 결정에 흠집이 생겼다. 새삼 신기했다. 몇 번인가 겪어 본 [결정화] 패턴이지만, 벌써 이 정도라니. 지금 대체 딜이 얼마나 나오는 거지? 수치로는 알 수 없지만, 실로 놀랍다. 아직 쓰지 않은 게 남았거든. 「캐릭터가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다시 한번 ‘낮점’. 「일시적으로 위협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 곧바로 [야성분출]. 「일시적으로 캐릭터의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강대한 힘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다. 물론 이 뽕맛이 유지되는 기간은 아주 잠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판단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위협 수치가 근력으로 변하고, 근력이 둔기의 파괴력으로 변하는 기적의 교환 법칙. 「현재 증가율 771%.」 근데 여기에 ‘황야의 무법자’까지 더해진다? 90%의 물리 면역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수준이나 다름없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금 내 데미지는 복사가 되니까. *** 「도플갱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6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 귀신 들린 사람처럼 결정을 메이스로 내려치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마나 실드’도 끝나서 내 몸에 부상이 빠르게 쌓이기 시작한 그쯤. 콰지지직-! 깨진 거울처럼 균열이 생긴 결정이 이윽고 수류탄 터지듯 산산조각 났다. 아슬아슬했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다. ‘1분 정도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부서졌다. 내심 다 제쳐두고 모두 모아서 딜을 쑤셔 박는 그림까지도 염두에 뒀건만. 막판에 변수가 생겨 플랜B를 쓸 일도 없었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기쁜 한편으로는 왠지 씁쓸한 감정이 인다.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가 터지지 않았다고 그걸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아니야, 아직 안심하긴 일러.’ 잡념은 이만하고 정신을 차렸다. 보스전이 시작된 직후에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서 한스G 네 명이 등장했지 않나. ‘핏빛 성채’처럼 변종 균열일 가능성도— 솨아아아아-! 그때 산산조각 난 본체의 파편이 빛무리로 변하며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이는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신체들 또한 마찬가지. 후우우웅-! 또한, 중심부에 4층과 이어진 포탈도 열렸다. 정말로 균열이 클리어 됐다는 뜻. “엇! 뭐냐! 해치운 건가?!” “으아, 죽는 줄 알았당. 아루루, 포션 좀 줄 수 있냥?” “그건 나중에요. 큰 부상도 아니잖아요? 일단 그것부터 확인해야죠! 정수? 넘버스 아이템? 균열석? 뭐가 나왔—” 아, 그래 그것도 확인해야지. 혹시 뭔가 또 일이 벌어질까 주변을 경계하던 터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럼 이제 균열의 꽃이나 다름없는 수호자의 보상을 챙겨 볼 차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도플갱어가 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 “…….” 그곳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이게 한스 효과?’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뭐든 한스 핑계를 대는 것은 좋지 않다. 정수 혹은 넘버스 아이템의 드롭률은 33%에 불과하니까. 뭐, 66%나 되는 균열석까지 안 나온 건 조금 마음이 아프지만……. ‘……흔한 일이지.’ 원래 게임에서도 자주 이랬다. 죽을힘 다해 균열을 깼는데,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하는 것. “……얀델 씨, 정신 차려요. 그럴 수도 있죠.” “그, 그래! 이미 이것저것 많이 얻지 않았냥.” 내가 가만히 굳어 있자 눈치가 보였는지, 동료들이 위로의 말을 던져왔다. 쩝, 화나거나 한 건 아닌데. ‘……결국 PK로 얻은 보상이 전부인가?’ 조금 허무했지만, 따져 보면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우스웠다. 장비를 다 팔면 얼마일지 상상도 안 가니까. 이미 역대 최고 소득을 갱신하는 건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고, 만티코어의 정수까지 먹지 않았나. ‘……그래, 이것만 해도 사실상 도플갱어 정수가 나온 급이긴 하지.’ 음, 근데 이게 긍정적 사고의 효능인가?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미샤, 다친 건 괜찮나?” “어? 으응. 그냥 스친 정도당. 스친 정도!” “일단 포션부터 먹어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료들을 챙기며 전투의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런 날 보며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리더답긴 하네요.” “놀리는 거냐?” “아뇨, 이번엔 진심이었는데요?” “…….” “아루루, 너무 그러지 마랑. 그러면 비요른이 부끄러워 하니까.” 뭐래. “그럼 이제 다시 올라가야겠군.” 얼추 수습이 끝난 다음에는 무리를 이끌고 숲으로 돌아왔다. 이미 위쪽에도 도플갱어들은 전부 사라진 상태.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르만 양.” 제단에 남겨 뒀던 인도녀를 픽업해 둔기 전사에게 양도했다. 참고로 제단에 바쳤던 드워프 팀의 궁수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근데 이 남자는 어쩌다가……?” “어, 그게… 깨어날까 봐 걱정이 돼서…….” 기절 상태이던 놈이 깨기 전에 처치했단 모양. 조금 인상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얘도 탐험가구나. 혹시 몰라 궁수의 장비나 배낭을 확인했지만, 인도녀가 뭔가 몰래 챙겨 간 건 없는 듯했다. 그럼 이걸로 우리 사이에 용건은 끝. “아, 이거 받으셔야죠. 잘 썼어요.” “그건 자네가 갖게.” “정말요?” 파르테이안은 빌려줬던 ‘어긋난 신뢰’를 레이븐에게 선물로 주었다. 비록 횟수를 모두 소모하긴 했어도, 무가치한 선물은 아니었다. 횟수를 충전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냥 팔아도 수십만 스톤은 할 거다. “우리를 구해줘서 고맙네. 내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좋으니 나를 찾아주게.” 반면 나는 공치사의 말이 전부인가 싶던 차. 파르테이안이 나르망 학파의 문양이 적힌 방문증을 내게 주었다. 음, 진짜 빈말은 아니었나 보네. 갖고 있다가 필요할 때 바로 찾아가야지.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서브 퀘스트를 깬 거 같은 기분이네.’ 이후 둔기 전사, 인도녀와도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을 포탈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근데 자네들은 안 나가는가?” “모처럼 들어온 균열이잖아요? 조금 더 둘러보면서 연구를 해보려고요.” “흐음, 그렇군?” 파르테이안이 대충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븐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가보겠네.” 이내 그들이 포탈을 타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저분들…… 괜찮으시겠죠?” “너답지 않게 뭘 걱정하는 거냐?” “마법사끼리는 원래 서로 걱정하고 챙겨주고 하는 거거든요?” “그 뜻이 아니라, 괜한 걱정을 한단 뜻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4층이지 않냐.” 한스G와 요정 궁수가 죽긴 했지만, 천공의 탑은 원한다면 존버가 가능한 계층. 아마 저들 셋은 예전의 우리처럼 시간을 때우다가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우리는 포탈을 뒤로하고 다시금 숲으로 올라왔다. 아직 챙길 게 남아 있거든. 191화 비프론 (1) 미궁 진입 11일 차 오전 7시. 세 사람을 균열 밖으로 떠나보낸 우리들은 숲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기, 뭐 좀 먹고 하는 게 어떠냥?” “그러는 게 낫겠군.” 그제야 공복을 느끼고 다 같이 모여 요리를 해 먹었다. 근데 배가 부르면 졸음도 밀려오는 게 사람의 성질인 법.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하죠.” 피로를 확 느낀 우리들은 야영지를 꾸리고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들었다. 그야 단순히 하룻밤을 샌 게 아니니까. 세 번째 챕터에서의 마피아 게임을 하며 심력을 낭비했고, 다대다 PK를 펼쳤다. 그리고 이어진 도플갱어 보스전까지. 드르르러러렁-! 눈을 감자마자 몰려오는 수마. 이내 다시 눈을 떴을 땐 하루가 통째로 지나가 있었다. [07 : 12] 오전 8시가 넘어서 잤는데, 시계를 확인하니 시침이 한 시간 뒤로 움직여 있다. 근 24시간을 잤다는 뜻. “어, 일어나셨네요?” “…왜 안 깨운 거냐?” “저희도 이제 막 일어났거든요.” 나를 배려해 주거나 한 건 아니었구나. 수통을 꺼내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니, 근처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잠 깼으면 와서 그릇 꺼내고 앉아랑. 아, 그전에 아이나르도 깨워서 데려오고. 그래도 네가 깨우면 잘 일어나지 않냥.” 이후 아이나르까지 깨워서 다 같이 식사를 했고, 그 다음에는 숲을 배회하며 챙길 것들을 챙겼다. “그냥 따라오지 말고 밑에를 잘 확인하세요. 이거 한 뿌리에 1만 스톤이거든요.” 도플갱어 숲에 자생하는 약초. “얀델 씨.” 콰아앙-!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봉인석을 부쉈을 때 일정 확률로 드롭되는 ‘봉인된 악의 조각’. “이건 값이 얼마지?” “하나당 100만 스톤 정도 할걸요.” “그렇군. 다섯 개까지는 나오는 대로 내가 사겠다.” 최종적으로 획득한 일곱 조각 중 다섯을 내가 먹었다. 그 다음부터는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 「캐릭터가 ‘봉인된 악의 조각’을 복용하였습니다.」 「항마력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참고로 남은 두 조각은 미샤가 사서 먹도록 했다. “에? 내가?” “어차피 돈도 많이 벌었지 않냐. 아끼지 마라.” “아니, 아까운 건 아닌데…….” 어딘가 미안한 눈치로 아이나르를 보던 미샤. 얘도 참, 탐험가면 좀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좋을 텐데. 어차피 아이나르는 추후 먹을 정수에 항마력이 많이 붙어 있기에, 미샤가 먹는 게 합리적이다. 애초에 돈을 안 내는 것도 아니고. “후, 근데 아무리 찾아도 그게 안 보이네요.”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 더 찾아보도록 하지.” 몬스터는 없었지만, 숲이 하도 넓다 보니 이걸 찾는 데만 하루가 지났다. 다만 우리는 그 다음 날까지도 투자해 숲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수색했고, 이내 찾던 것을 발견했다. “다들 귀 막고… 아니다. 그냥 다들 멀리 떨어져 계세요. 이건 제가 뽑을 테니.” 엘릭서의 재료 중 하나인 만드라고라. 레이븐이 마법으로 스스로를 보호한 채, 이를 땅에서 뽑아내는 것을 끝으로 ‘도플갱어 숲’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끝났다. 하지만……. “정말 죄송한데,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곳을 더 둘러보고 싶어서요.” “어째서지?”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레이븐의 요청으로 우리는 좀 더 이곳에 잔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의외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균열총해록? 그 책을 썼다는 사람도 전부 아는 건 아닐 거 아니냥!” “잘하면 뭔가 더 발견할 수도 있겠군.” 팀원들의 눈에 깃든 혹시 모를 기대. 뭐, 나야 내가 알지 못하는 히든 피스가 더 존재하며 그걸 지금 찾아낼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이렇게 말해 주는 게 어디야.’ ‘핏빛 성채’에서 처음 만났을 땐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그냥 난쟁이놈과 나를 부리며 본인 연구를 돕게 했었다. “그럼 어디부터 둘러볼 거지?” “일단 처음에 있었던 그 동굴부터요.” 우리는 첫 챕터인 그림자 동굴부터 보스 방인 강탈자의 은신처까지 놓치는 곳 없이 꼼꼼히……. 그러니까, 수상한 건 전부 박살 내며 수색했다. 역시나 숨겨진 방이나 아이템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문과 조우했다. “왜 하필 철창이었을까요?” “다른 팀이 다 입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러면 그냥 시간을 맞추는 게 합리적이죠. 우리가 미궁에 들어오고 나갈 때처럼 말이에요.” 어째서 ‘도플갱어의 숲’은 철창에 갇힌 상태로 시작되는가. 제단에서 획득한 [제물의 수기]는 또 무엇이며, 왜 ‘제물’이란 명칭을 썼는가. 세 번째 챕터를 끝낸 다음 이후로는 어째서 분신체들이 제국 병사로 변했는가. 아니, 애초에 ‘제국’이란 무엇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쉽네요. 어눌해도 말을 할 줄 알았잖아요? 잡아다가 뭔가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레이븐이 던진 화두에 팀 전원이 함께 의논도 해 봤지만,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있던 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균열 탐사는 이쯤에서 종료. “다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틀이나 의미 없이 날렸네요.” “사과하지 마라. 넌 우리 팀의 마법사 아니냐. 정당한 요구 사항이었다. 수색에 동의했던 것도 우리고.” “그래 맞당. 그리고 나는 진짜 탐험을 하는 느낌이라 재밌던뎅? 그치 아이나르?” “어? 나는 지루했는데?” “제발, 눈치 좀 챙겨라. 응?” 최근 언니처럼 따르던 미샤가 핀잔을 주자 시무룩한 표정을 내 짓는 아이나르. 지켜보던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다들 고마워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미안할 것까지는 없던 거 같긴 해요. 만드라고라 한 뿌리만 팔아도 며칠 동안 사냥한 값은 충분히 하잖아요?” “드디어 우리 마법사가 원래대로 돌아왔군.” “원래대로라니요? 우리크프리트 씨, 그게 무슨 뜻이죠? 곰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회피했고, 레이븐도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을 뿐 깊이 캐묻지 않았다.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14일 차 오후, 보스 방의 포탈을 통해 미궁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저 탐사를 이어 갔다. 5층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일은 약 6일. 그다음엔 원래 계획대로 ‘지옥불 협곡’ 루트를 타고서 사냥에 매진하는 척 ‘밀라로든’를 찾는 것에 몰두했다. 아, 참고로 검은 이끼를 찾기만 하면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먼저 탐지 마법을 써 보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 탐사에서 재미를 본 레이븐이 탐사 내내 5분 간격으로 탐지 마법을 썼기 때문. “…또 안 나왔네요.” 그 결과, 총 세 마리의 밀라로든을 사냥할 수 있었지만 모두 꽝이었다. 사실 이게 일반적인 일이긴 하겠다마는. 왜곡 마법이 성공해서 밀라로든의 시체가 남을 확률은 20%. ‘이번엔 물 건너갔다고 봐야겠군.’ 폐쇄까지 5일 남은 시점에선 굳이 밀라로든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가 봐야 별거 못 하고 나올 테니까. 쩝, ‘불의 보주’도 얻었겠다 전에는 가지 못한 지역을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스톤번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4」 「불의 망자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2」 「레드머드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3」 「헬 플레임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5」 그래도 사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노아르크 토벌전 실패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필드를 점거하던 클랜이 9할 이상 사라짐으로 5층 전체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다. 물론 이 상황이 오래 이어지진 않을 거다. 몇 달이면 피해를 복구한 클랜도 나올 것이며, 애초에 정세가 불안하단 이유로 입장하지 않은 클랜도 꽤 될 테니까. 이내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고.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귀환의 날이 밝았다. *** 따스하게 피부를 감싸는 햇빛. 늘 그랬듯 잠시 그 포근함을 만끽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탐험가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자, 그럼 가 볼까.’ 이내 우리 등급에 맞는 검문소로 향하니, 먼저 와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딱 한 명만 빼고. “아브만은 아직인가 보군.”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볼 때마다 신기한 광경이다. 아무리 광장이 넓다고 하거니와 어떻게 여기서 길을 못 찾을 수 있는 거지? “하하, 이번엔 줄이 얼마 안 되는군?” “빨리 오셔서가 아니라, 이번엔 미궁에 입장한 탐험가가 적어서 그런 거 같은데요.” “크흠, 누가 뭐랬나?” 아무튼, 다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자 금방 우리 차례가 왔다. 마석 환전 소득은 이전보다 훨씬 적었다. “708만 스톤입니다.” 다섯이서 나누면 인당 141만 스톤. 지난번과 거의 4배 가까이 차이 나는 소득.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면 세계에도 입장을 못 했고, 시간을 투자한 도플갱어 숲도 특성상 마석을 얻기 힘들었으니. “그럼 끝인가?” “예, 이번에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터무니없이 많은 소득을 올린 것도 아니기에, 직원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일도 없었다. 다만, 환전을 끝마치고 떠나려는 차. “아,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응? “…뭔가 문제라도 있나?” 직원이 다급하게 우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팀 애플 나라크, 그리고 팀장인 비요른 얀델. 맞으십니까?” “그런데?”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같이 계신 팀원분들도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때처럼 경비병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와 나를 포박한 건 아니었으나,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이는 우리 팀의 마법사도 마찬가지였을까? “저기요,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PTSD가 올 거 같던 나를 대신해 레이븐이 공격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때. “검문관, 이자들인가?” “아, 예예! 그렇습니다!” 한 명의 기사가 검문소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모즐란이 여긴 왜?” 모즐란. 귀족 출신의 기사로만 구성된 집행 기관이자, 여러 악명이 자자한 그 단체. “비요른.” 예전에 눈앞에서 드왈키가 체포당하는 걸 보기도 했던 미샤도 달달 떨었다. 그러나, 의외로 기사는 친절했다. 적어도 그때 봤던 고압스러운 새끼들보다는. “반갑네. 모즐란 집행부 소속 엘메라스네.” 비록 상전처럼 편하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이건 귀족 특징이니 당연한 거고. 이 정도면 부드러운 편에 속한다. 무엇보다, 편하게 악수까지 건네고 있지 않나. 일단 우리에게 그리 적대적이지는 않다는 뜻.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악수에 화답했다. 다만 모든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검문관은 우리를 왜 붙잡은 거고, 모즐란은 어떤 용건으로 우리를 찾은 것인가. “안녕하세요.” “흐음, 아가씨는?” “알테미온 학파 소속 아루아 레이븐이라고 해요. 엘메라스 경이 저희를 찾은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레이븐의 질문에 기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검문관이 탐험가를 붙잡을 이유는 하나뿐이지. 자네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다름없는 소식. “네? 그게 무슨…….” “너무 놀라지들 말게. 징계 내용을 보니 그리 심한 건 아닌 듯하니까.” “아니, 그것보다 무슨 이유 때문인 건데요?” 기사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도시 내에서 이능 발현. 그리고 관리인들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미궁에 입장한 죄.” 아, 그거……. 레이븐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궁에서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그만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에 벌금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었거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 정도면 벌금형에 처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 나도 모르게 조금 따지듯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배령까지 떨어질 이유가 없으며, 모즐란이 끼어들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단순 경범죄로 취급할 게 아니라 왕가의 지시를 어겼다고도 해석이 될 수 있는 사항이네.” 그래, 그런 거구나.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됐다. 보아하니 레이븐도 마찬가지인 듯했고. “…탐험가들의 고삐를 잡겠단 거네요.” “마법사 앞에서 뭘 숨기겠나? 그 말대로네. 고작 하루밖에 안 됐지만, 벌써 자네들 얘기가 탐험가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고 있거든.” “우리 얘기가요?” “자기들도 지시에 따를 게 아니라 그냥 무작정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기다린 게 바보 같다더군. 위에서는 단순 벌금으로 끝나면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네.” 쉽게 말해, 일벌백계.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백 명의 마음속에 경각심을 심어 주는 것. “지금 탐험가들의 통제가 느슨해지면,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이해해 주게.” 왜 나를 택했는지도 알 거 같았다. 나름 유명세를 얻은 데다가, 무단 진입으로 화제까지 됐으니 쉽게 이야기가 퍼져 나가리라 판단한 거겠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기사는 답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네들이 아니라, 자네라네.” 처벌을 받는 것은 오직 나. 나머지는 벌금으로 끝날 거라고 한다. 정황을 들으니 휘말린 쪽으로 보이는 데다가, 어차피 보여 주기 식 처벌인데 다 같이 고생할 필요는 없다던가? “오오, 합리적! 그래, 합리적인 얘기다!!” 기뻐하는 아이나르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레이븐도 부당하다며 나서지 않고 있었고. 곰아저씨는 아내에게 맞지 않겠다며 안도하는 중이었다. 역시 나를 대변할 사람은 나뿐인 건가? 그런 인간 불신적 사고가 머릿속에 맴돌던 때였다. “저기, 기사님? 어차피 보여 주기 식이라면 그 벌이라는 거, 내가 대신 받아도 되냥?” 유일하게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미샤. “뭐라는 거냐.” 나는 피식 웃으며 미샤를 밀어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게 될 리가 만무하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일의 주범도 나였고. 게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처벌도 그리 심한 건 아닌 듯하니……. “됐다.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니까 어서 말해 봐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기사가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뱉었다. “비프론에서 20일만 살다 오게.” 기간제 유배형이었다. 192화 비프론 (2) 라프도니아. 한때 일개 영지에 불과했지만, 종말이 도래한 후 대륙 각지의 생존자들이 모여들어 인류 마지막 보금자리로 탈바꿈한 세계 유일의 성채. 이 성채는 14개의 구역 도시로 이뤄졌다. 우선 1구역 황도 카르논. 왕가를 비롯해 귀족 및 기득권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입장 권한을 얻지 못하면 평민은 들어설 수조차 없다는 게 가장 큰 특징. 2~5구역 컴멜비. 흔히들 자유시장이라고 부르는 상업구역이다. 황도 외곽에 위치했으며, 장인이라 부를만한 전문가들이나 매출이 잘 나오는 가게들은 전부 여기에 몰려 있다. 7~13구역 라비기온. 도시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며, 도시 인구 중 무려 70%가 거주하는 구역.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매달 포탈이 열리는 차원 광장이 각 구역마다 존재한다는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14구역 비프론. 도시 설계 당시부터 특별 지역구로 분류됐던 6구역 노움트리와는 여러모로 경우가 다르다. 원래는 ‘라비기온’에 속했으나, 지금은 통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며 이제는 차원 광장까지도 사라진 그곳. 드르르르륵-! 그곳의 성문이 열린다. 한 명의 수감자를 더 집어넣기 위해서. “뭐 하나? 어서 들어가지 않고.” “……그게 끝인가?” “설명은 이미 듣고 왔지 않았나. 탈출하려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뭘 해도 상관없네.” 날 이곳까지 데리고 온 기사는 조금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지 등을 돌렸다. 쿠웅! 머지않아 성문이 닫혔고, 그제야 나는 등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수용소라…….” 그런 별명이 붙은 곳인 만큼, 다른 평범한 도시 구역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내가 거주 중인 7구역이 백 년 넘게 방치되면 딱 이런 느낌으로 변할까? 낡은 건물들은 관리가 전혀 안 된 채 여기저기 부서진 상태였으며, 외벽에는 오물 자국과 낙서가 가득하다. 거리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폐자재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쩝, 여기서 20일을 보내야 하는 건가.’ 마냥 성문 앞에 가만히 있기도 뭐 해서 일단 무작정 길을 걸었다. 곳곳에서 경계의 시선이 느껴졌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삐쩍 마른 몸에 허름한 옷을 걸친 이 구역의 주민들이 보낸 시선이었다. 아니, 수감자라고 해야 하나? 피식. 왠지 웃음이 나왔다. 21세기 현대인 이한수였다면 어땠을까? 분명 시선만으로도 절로 위축되었을 것이다. 낯선 사람을 배척하는 걸 넘어 탐욕이 가득한 눈빛이었으니까. 분명 말 한마디 못 하고서 숨을 곳을 찾기 급급했을 거다. 하지만……. “뭘 꼬나보나?” 지금의 나는 2m가 넘는 근육질 몸을 중갑으로 무장한 이 시대의 바바리안. 저딴 비실이들이야 수십 명이 덤벼도 몇 분 안에 수박죽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런 자신감을 담아 [야성분출]까지 터트리자, 숨어서 날 지켜보던 주민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깔고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괜찮다! 안 잡아먹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과장스러울 정도로 깔깔 웃으며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저, 저자는 갑자기 왜 소리를…….” “……이곳까지 기어온 놈이니 정상인은 아닐 테지.” “미친놈이군. 역시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좋겠어.” 곳곳에서 그러한 말들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딱 내가 바라는 반응이었다. 괜히 파리가 꼬여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니까. ‘거, 이러니까 초보자 필드에 온 기분이네.’ 무법 지대라 불리는 곳이라 상당히 걱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미샤가 그랬다. 그러나 지금 확신이 들었다. 무법 지대라 함은 본래 힘이 센 놈이 갑이며, 때에 따라 법이 존재하는 사회보다 편할 수도 있는 곳인 법. ‘그냥 푹 쉬고 간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섭리에 민감한 바바리안의 육체는 이미 눈치를 채 버렸다. 이곳에서 내가 불편할 일은 얼마 없으리란걸. * 그렇게 하염없이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던 때였다. “저기요. 신입 아저씨!”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내 앞을 당돌하게 막아섰다. 나는 일단 확인차 물었다. “성문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아뇨? 방금 봤는데요?” “근데 내가 신입인 걸 어떻게 알았지?” “오늘 처음 봤으니까요. 아저씨 같은 사람은 오자마자 소문이 쫙 돌거든요.” 주변에 가득한 비실이들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답변. “용건을 말해라.” 주변을 의식해 목소리를 깔으며 말했다. 다만 꼬마는 기가 센 편인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했다. “첫날이면 아직 잘 곳도 못 구했죠? 제가 안내해 줄게요. 이래 봬도 제가 여기서 나고 자란 토박이거든요.” 쉽게 말해,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뜻.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고작 봉사나 하겠다고 용기를 내서 거구의 바바리안 앞에 서진 않았을 테니까. “보수는?” “100스톤만 주세요.” 0하나를 빼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푼돈. “좋다. 안내해 봐라.” 쿨하게 승낙하자 꼬마가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곳에 데려다준다며 앞장섰다. 나는 꼬마를 따라가며 이것저것 물었다. 비프론에 관해 적힌 책 몇 권을 도서관에서 읽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곳에 대해 다 안다는 건 오만일 테니까. 우선은 개인적인 호기심부터. “넌 여기서 태어난 건가?” “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그게 아니라, 부모도 너처럼 여기서 태어난 자였나?” 꼬마는 대답하기 싫은 눈치였지만, 자본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100스톤을 더 주지.” “……어머니만요. 아버지는 밖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무슨 죄로?” “……불온서적 소지 및 유포 죄요. 분명 또 물어볼 거 같아서 미리 말하는데, 왕가에 내는 세금이 정당한가에 대한 책이었대요.” “사상가였군.”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비프론에 붙은 ‘수용소’란 별명 자체가 왕가에 부정적인 말을 퍼뜨리는 자들을 추방하면서 생긴 것이니까. 그렇게 불만이 많아? 그럼 가호가 닿지 않는 곳에서 한번 살아 봐. 대충 이런 논리의 추방인데, 왕가 입장에서는 굉장히 영리한 수였다. 반동분자를 쫓아내면서도 왕가의 정당성을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으니. 교수형보다 훨씬 더 얻는 게 많은 셈. “몇 살이지?” “열한 살요.” “3년 뒤면 나갈 수 있겠군.” “자격 증명에 성공하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격 증명? 열네 살이 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반만 제대로 들으셨네요.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건 어느 분야든 자질을 보인 극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예요. 어느 분야라 말은 했지만, 사실 대부분 탐험가 쪽을 노려요. 그게 훨씬 더 쉽기도 하고, 많이 뽑으니까…….” “너도 탐험가 쪽을 노리는 건가?” “아뇨. 저는 학자요.” 학자라……. 어쩐지 얘가 말을 되게 조리 있게 하더라니, 이 환경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모양. “아저씨는 탐험가죠? 여긴 어쩌다가 오게 된 거예요?” 이내 꼬마가 내게도 질문을 던졌다. 보아하니 자기만 답변하는 게 공평하지 않다고 느낀 듯했다. “100스톤을 덜 받는다고 하면 말해 주마.” “그리 큰돈도 아니면서…….” “적은 돈도 손해 보지 않는 게 탐험가다.” “오, 역시 탐험가는 맞다는 뜻이네요?” 당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귀여운 장난. 다만 뒤늦게 내게 해코지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꼬마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아요. 덜 받을게요. 그러니까 왜 여기에 왔는지 말해 주세요.” “도시에서 가벼운 잘못을 저질렀다. 20일만 여기에서 살다가 오라더군.” “20일…….” 평생을 이곳에서 자란 얘 입장에서는 한없이 짧은 기간이었을까? 꼬마가 입술을 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아저씨는 몇 등급이었어요?” 별로 대답해 주고 싶지는 않은 개인 정보. “질문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100스톤은 됐다. 그러니 앞으로 묻는 거에나 잘 대답해라.” 비겁한 어른답게 단호히 일축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비프론의 물가, 사회 구조 등등 책만으로는 체감하기 어려운 그런 부류의 화제들. 꼬마는 토박이답게 묻는 것마다 큰 어려움 없이 대답해 주었는데, 그중에 조금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식량의 출처. “왕가에서 매달 식량을 배급해 준다고?” “네. 그래 봤자 힘 있는 놈들이 전부 가져가서 권력처럼 사용하지만요.” 꼬마가 말하는 깡패 집단이야 아무래도 좋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바닥에도 위아래가 생길 수밖에 없는 법. 내 관심을 끈 건 다른 부분이다. “생각할수록 모순적인 곳이란 말이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왠지 비프론에 대한 흥미가 조금 더 생긴다. 게임에서는 멀쩡했던 도시 구역 중 하나가 이꼴이 난 것에 뭔가 더 재밌는 속사정이 숨겨져 있을 거 같은 느낌이랄까? “도착했어요.” 이후 좀 더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자니, 꼬마가 말한 여관에 도착했다. 1층은 주점, 2층은 숙박을 겸하는 이 도시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가게. 보통 이런 가게들은 깡패 무리가 점거하고서 영업을 한다던가? ‘제일 좋은 곳이라더니.’ 나는 피식 웃으며 벌레가 득실거릴 것만 같은 여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이익. 의외로 안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서 술을 마시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와 여인들. 딸랑. 녹이 슨 종이 뭉툭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자, 실내의 모든 이가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다양했다. 경계, 당혹, 호기심, 탐욕. 일단 싹 무시하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주인장, 여긴 하룻밤에 얼마지?” “50스톤이오.” 역시나 이번에도 0이 하나 빠진 듯한 가격. “한 끼 식사는?” “250스톤.” “250스톤이라…….” 내 입장에서는 둘 다 푼돈이나 다름 없으나, 실제로 겪으니 새삼 바깥과의 차이가 느껴졌다. 식비가 주거 비용보다 5배는 더 비싸다니. 주거난이 극심한 라프도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가. “오늘 하루 묶고 가지.” “식사는?” “바로 내줘라.” “선불이오.” 이내 방값까지 합쳐서 300스톤을 지불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저씨.” “아직 돈도 안 받았는데?” “아, 맞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꼬마에게 나는 천 스톤을 주었다. “저, 거슬러 드릴 돈이 없는데…….” “잔돈은 됐으니, 와서 옆에 앉아라.” “네?” “식사가 나올 때까지 말동무나 해줘라.”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꼬마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묻는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변을 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주문한 음식이오.”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고기는 아예 없고 빵과 허연 국물 같은 스프가 전부인 식단. “저는 그럼 이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꼬마를 붙잡았다. “앉아라.” “네? 분명 음식이 나올 때까지만이라고…….” 거, 바바리안이 진짜 병신으로 보이나? 나는 살기까지 담아 고압적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앉아라.” 무겁게 변한 공기를 느낀 꼬마가 입을 꾹 다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닌 척하지만 멀리서도 떠는 게 느껴졌다. 나는 스프 한 숟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먹어라.” “네?” “먹으라고.” “가, 감사하지만, 저는 배가 안 고파서…….”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먹으면 1만 스톤을 주지.” 나는 꼬마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 답은 실로 간단했다. “……사, 살려 주세요.” 지랄맞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꼬마답게 눈치가 빨랐다. *** 꼬마의 수작을 간파할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성문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아뇨? 방금 봤는데요?] 첫 번째, 꼬마는 확인차 물어봤던 질문에 태연하게 거짓말로 답했다. 뭐, 거짓말이야 티 나지 않게 잘했지만……. 내가 기억력엔 조금 자신이 있는 편이라서. 성문이 처음 열렸을 때부터 녀석은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100스톤만 주세요.] 두 번째, 돈을 너무 양심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참 이상한 일이다. 관광지만 가도 등 처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게 보통이지 않은가. 근데 이 꼬마는 물론이고 여관 주인조차 내게 바가지 씌울 생각을 안 했다. 물론,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사, 살려 주세요.” 꼬마는 음식을 먹는 대신 무릎을 꿇었다. 내심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놀랍진 않았다. 이쪽 사람들의 수작에 참신함이 부족하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거, 사람 뒤통수를 칠 거면 좀 티라도 안 나게 치던가.’ 나는 줘도 안 먹을 밥상을 엎으며 일어났다. 원래는 공범이 누구냐고 캐물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하니까. “동작 그만.” 출입문을 향해 슬금슬금 걸어가는 놈들을 보며 말했다. 모처럼 해보는 친절한 대화 시도. 다만 애석하게도 주인장을 포함한 네 명의 남녀는 오히려 부리나케 속도를 올려 도주하기 바빴다. “제길!” “튀어!!” 그 뒤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아니, 그게 되겠냐고. “아악!” 일단 꼬마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밖으로 나와 일련의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거대화]를 킨 뒤 지면을 박차며 높이 [도약] 했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가로질러 지면에 내리꽂히는 육체. [반동]의 효과로 튀던 남녀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이어서 [야성분출]까지 써주자 몸을 일으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네 명. 콰직. 도망치지 못하게 네 명 다 한쪽 발을 분질렀다. 백주대낮. 그것도 거리 한복판에서 벌인 일이었지만, 알 게 뭔가. 어차피 이곳은 무법 지대 아닌가. 애초에 이능을 썼다고 달려올 경비병도 없다. “악, 아악!!!” 그제야 정신이 들었을까? 네 명 중 쥐새끼를 닮은 인상의 사내가 매크로처럼 외쳤다. “우, 우리는 서부연합의 일원이다!” 서부연합이라면, 비프론을 갈라먹은 네 개의 깡패 집단 중 하나다. 두목 새끼가 탐험가라던가? 그러니까 등급이……. “야, 얌전히 우리를 놓아 준다면 이번 일에 대한 보복은 하지 않—” 뭐래. 콰직. 시끄러웠기에 나머지 한쪽 발도 짓뭉개 줬다. 그러자 더욱더 절박해졌을까? “우, 우리 보스는 6등급 탐험가 출신이다!!” 고통스레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놈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로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보스? 그게 무슨 소리지?” 따지듯이 묻자 이번엔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 나는 친절히 웃으며 허리를 굽혀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부터 네 보스는 나다.” 안 그래도 한 번쯤은 부하가 갖고 싶었다. 193화 비프론 (3) 팀 애플 나라크가 매번 모이던 주점의 3층. 레이븐은 때아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불참하게 된 한 명의 존재 때문이었다. “일단 약속대로 모이긴 했는데, 이래서는 정산도 제대로 하지 못하겠네요.” 도시로 복귀한 지 어느덧 사흘째. 레이븐은 부재중인 리더를 대신해서 홀로 컴멜비에 다녀와 전리품들을 전부 판매했다. 그 값이 무려 1억 5천 240만 스톤. “어, 억?! 생전 처음 듣는 단위의 숫자다!!” “우와, 우리가 가져간 장비들 없이도 정말 그 가격이 나왔다고?” “일단 중견급 탐험가 7명의 장비를 전부 모아서 판 격이니까요. 심지어 넘버스 아이템인 ‘여우불꽃 매듭’은 거래소에 올라가기만 하고 아직 팔리지도 않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기가 막힐 정도군.” 금액을 듣자마자 모두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딱 기대했던 느낌의 반응. 근데 왜 이렇게 어딘가 아쉬운 것일까. 레이븐은 저도 모르게 비어 있는 자리를 한번 힐긋했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까 왠지 심심하네.’ 얀델의 아들 비요른. 팀 애플 나라크의 수호자 역할군을 맡고 있는 바바리안 전사이자 팀장. 아마 그가 있었다면 지금쯤 분배 비율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을 터였다. [특수 전리품이니 만티코어의 정수 값 중 40%를 네 몫으로 달라고? 이상한 계산법이군. 그날 주사위에서 이겼다면 모르겠는데, 이건 드워프에게서 얻은 것이니, 균등 분배를 하는 게 맞다.] [그럼 수고비로 받은 2천만 스톤은요?] [네가 쓴 시험관 값은 당연히 네게 주겠다. 하지만 수고비 중 40%를 달라고? 특수 전리품에 대한 분배 계약 중 이러한 수고비에 대한 내용은 없었을 텐데?] 대충 이런 느낌의 대화가 있었을 테고, 그럼 자신도 늘 그랬듯이 피식 웃으며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땐 이익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수도……. “아루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이븐은 잡념을 훌훌 털어 내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혹시 당장 급전이 필요한 분이 없으시면, 우선 이 돈은 얀델 씨가 올 때까지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 “응응. 그래랑. 아이나르는 내가 돈을 빌려주면 되니까.” “또!! 빌려야 되는 건가!!” “어차피 갚을 돈도 많지 않냥. 괜히 미리 땡겨 가면 계산만 복잡해져서 아루루가 힘들어진당.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라. 알았지?” “알았다!” “흐음, 20일이라고 했었지? 이제 보름 좀 넘게 남았군.” 레이븐은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이긴 하다. 하지만 억이 넘는 재화를 홀로 보관하겠다는데 이렇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정상적인가? 그리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레이븐은 마법사답게 생긴 의문을 참지 않고 입 밖으로 뱉었다. “다들 걱정도 안 돼요? 제가 보관하겠다는데.” “으응?” “걱정? 그런 걸 왜 하나!” 마치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듯한 반응. 더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나쁜 기분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뭐라고 딱 잘라서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은 그래서 그때 각성 마법을 썼던 걸까…….’ 예전엔 비요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순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 마탑의 마법사라면 절대 안 할 짓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많이는 아니고, 한 1% 정도는. “아무튼, 그럼 오늘 안건은 끝이네요.” 모임의 목적을 끝마친 이후에는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의 화제가 자리를 비운 팀장에 관한 것이었다. “아루룽, 비프론은 어떤 곳이냥?” “……기분 나쁜 곳이죠. 고결했던 사람도 그곳에 가면 추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가난과 굶주림이란 그런 것이지.” “우리크프리트 씨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3년 차 때 장비를 전부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때 1년 내내 돌빵만 먹으며 돈을 모아 겨우 재기했지. 세금도 엄청 아슬아슬하게 냈던 거로 기억한다.”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 미샤가 조심스레 걱정의 말을 꺼냈다. “비요른은, 잘 지내고 있겠지?” “칼스타인 씨는 뭘 그렇게까지 걱정해요? 돈도 많겠다, 힘도 세겠다. 거기서 어려울 일이 뭐 있다고? 아마 지금쯤 휴가라도 온 것처럼 푹 쉬고 있을걸요?” “으음, 그러면 좋겠는뎅…….” 레이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 봤자 귀에 들어오겠냐마는, 그 모습이 굉장히 어여쁘게만 보였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 어째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연 나도 저런 얼굴을 짓게 되는 날이 올까? 지금으로선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는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미샤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엄한 아이나르의 허리를 꼬집었다. “아이나르, 고기 좀 그만 먹고 너도 말 좀 해 봐랑. 너는 비요른이 안 걱정 돼냥?” “…응? 비요른? 비요른을 왜 걱정하나?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다! 법이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다!” 그야말로 바바리안 같은 답변. 평소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한 소리씩 해 댈 타이밍이었지만, 의외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 정말 그럴 거 같았거든. 법이 있을 때도 교묘하게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하고 싶은 걸 다 하던 사내 아니던가. *** 소리친다.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현재 내가 자리한 곳은 14구역 행정청의 구관사 4층 테라스. 참고로 지상에는 총 514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줄을 맞춰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하나다. 내가 선창을 했으니, 후창 하는 것. “베헬—라!” 이곳에 온 지 3일 차 만에 거둔 성과다. 비프론의 서부지구를 점거하던 ‘서부연합’의 보스가 되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무력이 법이 되는 것이 순리이며 이치일 테니까. 아, 그냥 쳐들어가서 다 때려 부쉈단 소리다. “목소리가 작다!” “베헬—라아아아!” “더 크게!!!” “베, 베헬—라아아아!” 부하가 생긴 김에 바바리안식 전투 함성도 가르쳤지만, 영 시원치가 않다. 이 많은 사람 중 바바리안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가? 만족스러워지려면 시일이 걸릴 듯하다. 애초에 왜 가르치고 있냐고, 누군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면 내가 해 줄 대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홍익인간 정신을 이어 받은 K-바바리안. 당연히 좋은 건 나눠야지. “베헬—라아아아아!!!” 왠지 마음에 안 들어 메이스를 꽉 쥐어 봤더니 목소리가 커졌다. 오케이, 이 정도면 합격. “그럼 오늘은 끝이다! 돌아가서 놀아라! 아, 남한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고!” “예!!” 오늘부터 시행된 정기 아침 집회를 끝내고서 부하들을 해산시켰다. 다리가 분질러져 목발을 짚은 자들이 꽤 됐지만, 다들 동료의 도움을 받으며 무사히 장내를 벗어났다. 그럼 나도 슬슬 아침을 시작할 차례. “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실내로 들어가자 정수리가 벗어진 해파리컷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브런치를 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부연합의 보스였던 놈이다. 참고로 원형 탈모가 심해서 평소엔 가발을 쓰고 다녔는데, 앞으로는 벗고 다니라 했다. 감히 부하가 두목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 “차와 빵이라…….” 탁상에 차려진 아침 식사를 보며 나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장난하나? 술과 고기를 가져와라.” “예? 아, 예!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평소 먹던 대로—.” “이런 걸로 아침을 먹으니까 나이도 젊은데 머리가 다 빠지지.” “이, 이건 마녀의 독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뭐래. 정말 그랬으면 여기 사람들 전부 탈모였겠지. “추하게 변명하지 마라.” “…….” 이내 잠시 기다리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로 밥상이 차려졌다. 나는 평소처럼 그냥 맨손으로 뜯어 먹었다. 손 가죽 자체도 두꺼운 데다가 화염 내성도 높은 편이라 뜨거운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야 물어보질 않으셨…….” 반역인가? 그런 생각이 들려던 차, 녀석이 실수를 깨닫고 재빠르게 말을 정리했다. “징카사르 펠쟈인입니다.” “특이하군. 어디 쪽 이름이지?” “남중부식 작명입니다.” 아, 선조가 사막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피부가 까무잡잡하더라니. “흐음.” 나는 잠시 녀석을 보며 고민했다. 징카사르 펠쟈인이라니. 발음하기 너무 귀찮은 이름 아닌가. 실리성을 위해 조금 줄일 필요가 있다. 그래, 일단 징 씨니까……. “징징. 그래, 징징이로 하는 게 좋겠군.” “…예?” “앞으로 너를 징징이라고 부르겠다.” 대답은 한참 뒤에서야 돌아왔다. “………………예.” “뒤에 보스도 붙여야지.” “예, 보스…….” 징징이는 부여받은 새 이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지만, 근데 지가 어쩔 건데? 꼬우면 이기든가. 아니면, 부하 관리를 잘해서 나한테 시비 거는 일이 없게 하든가 했어야지. “물.” “예?” “물.” “아, 예!” 식사를 마친 후에는 기사에게 받은 해독제를 물과 함께 삼켰다. 성분을 알 수 없어 찝찝하지만, 레이븐이 안정성은 보장했으니 괜찮겠지. ‘애초에 안 먹는 쪽이 더 찝찝하기도 하고.’ 비프론은 ‘수호 마법진’이 망가진 구역이다. 세상을 종말로 몰아넣은 ‘마녀의 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새어 들어오고 있고, 이곳 거주민들은 모두 이에 노출된 상태. 참고로 마녀의 독은 방사능이라 보면 쉽다. 판타지한 세상답게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이 있지만. ‘15세 전까지는 발현이 안 되고, 그 이후에는 노출된 시간에 따라 발현될 확률이 커진댔지.’ 조금 더 게임틱하게 설명하자면, 비프론은 확률형 즉사 장판으로 뒤덮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의 경우 추방 후부터 기대 수명은 8~9년. 그나마도 ‘수호 마법진’이 반쯤은 작동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성벽 밖으로 나가면 하루 안에 사망한다. ‘뭐, 밖에 나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도시 바깥의 세계는 내게도 미지의 공간이다. 게임에서도 아예 시스템으로 막혀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배도 부르겠다, 산책이나 가지.”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징징이를 이끌고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한쪽 방향으로 무작정 걸으며 이것저것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나름 한 집단의 수장이었던 만큼 첫날 길 안내를 해 줬던 꼬마보다 아는 게 많았으며, 조금 이상할 수 있는 질문에도 성심껏 답변을 해 줬다. 영혼 바쳐 대장 놀이에 맞춰 주고 있는 것이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십시오, 저 징카사르 펠쟈인이 전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뭐, 저리 납작 엎드리는 속내야 빤하긴 했다. 20일 있다가 갈 놈이니 그 동안만 맞춰 주면 된다고 여겼겠지. 괜히 뒤통수를 쳤다가 실패라도 하면 뒈질 게 분명하니까. ‘그 꼬맹이한테 고맙다고라도 해야 하나?’ 비프론으로 추방되며 서부연합을 손에 넣겠단 계획 같은 게 있었을 리 없지만, 마냥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다. 좋든 싫든 20일간 머물러야 하는 곳 아닌가. 차라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두는 게 귀찮은 일이 덜하리라고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생겼고. 뭐, 심심했단 이유가 없던 건 아니겠지만. “근데 보스, 어디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이미 동부 쪽 영역까지 들어왔습니다마는.” “따라오기나 해라.” 아침 산책이 두 시간 넘게 이어지자, 징징이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가면 성벽뿐인데…….” “거기가 목적지다.” 아무것도 없는 성벽은 대체 왜? 그런 눈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징징이는 여기서 또 질문을 던져 오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나와 대화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터벅. 그렇게 도착한 성벽 근처의 거리. 나는 그나마 높아 보이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 성벽을 바라봤다. ‘이건 여기도 똑같네.’ 다른 구역과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항상 이게 궁금했다. 병사들은 어째서 바깥이 아니라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일까? “글쎄요. 혹시 누가 밖으로 나가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징징이게도 물어봤지만 그런 답변만 돌아왔다. 사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애초에 다들 그렇게 알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굳이 비프론에서도 이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왕가 입장에서는 사라져 주는 게 좋은 사람들이다. 아니, 오히려 성벽을 넘다가 ‘마녀의 독’에 의해 사망하면 왕가의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모순이었다. 비프론은 ‘수호 마법진’이 고장 났다. 그래서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세울 때 병사에게 해독제까지 먹여야 한다. 근데 자원 낭비까지 해 가며 보초를 세운다? ‘뭔가 있어.’ 그런 직감이 섰다. 수많은 히든피스를 발견하게 해 줬던 바로 그 직감. 다만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암만 생각을 정리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은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만 돌아가지. 배가 고프다.” “예.” 이내 성벽에서 시선을 떼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저기 아래 길목에서 수십 명으로 이뤄진 무리가 보였다. “동부 놈들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왔단 소식을 듣고 몰려온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 자체는 의사를 묻는 듯했으나, 징징이의 눈빛에선 내가 저쪽도 똑같이 때려 부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묻어났다. 거, 속 보이기는. “됐다. 우리 구역으로 돌아갈 테니 안내해라. 되도록이면 저놈들과 마주치지 않—.” 그렇게 슬슬 발걸음을 떼려던 차, 나는 돌처럼 굳고 말았다. 동부 놈들 속에 낀 한 명의 얼굴 때문이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194화 비프론 (4) 망자의 땅에서 한 번. 하수도 밑에서 한 번. 노아르크가 폐쇄되고 우리 여관 앞에서 우연히 한 번. ‘오늘까지 카운트하면 총 네 번.’ 이쯤 되면 질긴 인연이라 하기도 뭣하다. 따라서 슬슬 이 여자를 대하는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안 가십니까?” “그래, 생각이 바뀌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동안은 괜히 얽히고 싶지 않아서 애써 관심을 지우며 피해 다니기만 했지만……. [……인간 여자가 아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어쩌다 보니 서로 이름까지 아는 사이가 됐다. 더는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 ‘이제는 좀 알아봐야겠어. 이 여자가 대체 뭐 하는 여자인지.’ 집 주변을 자꾸만 알짱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어떤 사람인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 경찰에 신고해 내쫓아야 될 사람인지. 아니면, 집을 버리고 튀어야 할 만큼 무서운 사람인지. 그걸 알아야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으니까. “징카사르 펠쟈인!!” 잠시 기다리자 옥상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들어온 것은 검은 안대를 쓴 빡빡이였다. 아무래도 얘가 동부 쪽 세력의 리더인 듯한데……. “감히 우리 구역에 언질도 없이 들어서다니, 각오는 된 거겠……. 근데 너, 머리가……?” 기세 좋게 등장한 빡빡이가 말꼬리를 흐렸다. 해파리 컷을 한 징징이의 모습이 충격이었던 모양. “……설마, 가발이었던 거냐?” “…….” 징징이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때아니게 잠시간 이어진 침묵. 하지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기엔 서로에게 쌓인 앙금이 많았을까? 잠시 중단됐던 상황이 다시 전개됐다. “그, 그런다고 내가 불쌍해서 봐줄 거 같나! 오늘로서 너와의 악연을 끝내 주마!” “푸, 푸하하핫! 미궁에 가 본 적도 없는 샌님 주제에 숫자가 많다고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나? 그것도 6등급 탐험가인 나를?” 선전포고를 하는 빡빡이와 어색할 정도로 과장되게 웃으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징징이. 팩트를 짚고 넘어가자면 6등급도 아니다. 너무 약해서 추궁했더니, 사실 7등급이었다고 고백했던 징징이니까. ‘그런 얘가 수십 명을 상대로 이렇게 여유로울 리는 없고, 날 믿어서 저리 기세등등한 건가?’ 왠지 웃기지만 빡빡이는 새삼 진지했다. “그래, 네가 6등급 탐험가였던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대단한 분을 모셔왔지.” “……?” “얘들아 길 터라!” 빡빡이가 말하자 뒤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똘마니들이 물러나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노아르크 출신의 8층 탐험가. “바바리안? 네가 여기 왜…….” 귀찮은 표정으로 사내들 사이로 모습을 내비친 그녀는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살짝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나도 처음에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다. 대체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아멜리아는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씹었고, 그때 우리 둘을 보던 빡빡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바바리안과 아는 사이십니까?” 이 여자만 믿고 왔는데, 나와 친분이 있어 보인 게 걱정이 됐던 모양. “조용.” 아멜리아가 짧게 읊조리자 빡빡이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약 3초간의 시간이 흘렀다. “비요른 얀델, 옆에 있는 그자를 내게 넘겨라.” 생각 정리를 끝냈는지, 대뜸 그런 요구를 해오는 아멜리아. 물론, 내가 이에 응할 리 만무했다. “이놈은 내 부하다.” 바바리안은 부하를 버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럴 이유가 없다면은. “……보스!!” 내가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하자,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징징이. 반면 아멜리아는 이해가 안 된단 눈치였다. “……부하?” 탐험가 업계의 떠오르는 신성인 내가 왜 여기 있고, 어째서 깡패 집단의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나는 짧게 읊조렸다. “내게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그렇군.” 아멜리아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볼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건 아마 얘 성격이 그런 거겠지. “그렇다면 힘으로 데리고 가겠다.” 교섭이 결렬되자 즉시 단검을 꺼내며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아멜리아. 얘는 무슨 지가 바바리안인 줄 아나?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잠깐, 일단 얘기 좀 하지.” “얘기?” “그래.” 여관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도와줄 동료도 없으며, 비프론은 힘이 곧 법인 무법 지대. 당연히 대화로 해결하는 게 옳다. 난 아직 오러를 막아 낼 세팅을 못 맞췄으니까.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기하군. 네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는데. 설마 기습을 하려는 건가?” “기습? 나는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모욕적이라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하수도에서야 말을 걸던 중에 메이스부터 집어 던지며 달려들었지만,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의 내 기억은 지워졌다. 적어도 얘 입장에서는. “……웃기지도 않는군.” 뭐라 따지고 싶어도 따지지 못하는 상황. 다만, 아멜리아는 답답한 기색도 없이 한마디로 넘어갔다. 여전히 몸은 기습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어엿한 적수로 인정해 주는 건가? “우선 얘네부터 물리지.” “좋다.” 짧게 합의를 끝내고 쓱 쳐다보자 빡빡이가 먼저 눈치껏 똘마니들을 데리고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다음은 징징이 차례였고. “저…….” “걱정 마라. 널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예!” 불안한 눈치였지만 나를 믿고 아래로 내려가는 징징이. 이제 옥상에는 우리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차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넌 여기에 어쩐 일이지?” “그걸 왜 답해 줘야 하지?” “애들 싸움에 어른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웃기지 않나.” “……넌 이제 스무살이었을 텐데?” 거, 알 만한 사람끼리 사소한 거 가지고. 나이야 징징이나 빡빡이 쪽이 많겠지만, 이쪽 업계는 원래 힘 센 쪽이 형인 법. “아무튼, 대답은?”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부터 말해라. 대체 왜 네가 비프론에 있는 거지?” “도시에서 이능을 썼다가 잡혔다. 벌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20일간 살라더군. 오늘로 사흘째다.” “부하라는 건?” “저놈이 나를 털어먹으려 하기에 역으로 때려 부수고 접수해 줬다.”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넌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사는군.” 비아냥거리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선망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하나? “네 차례다. 너는 왜 여기에 왔지?” 벌써 몇 번이나 다시 묻는 질문. 아멜리아 역시 마침내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들려주었다.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한 탐험가를 찾고 있다. 그래서 녀석들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한 가지 일을 도와주기로 했지.” “그렇군.” 얼추 상황 파악이 됐다. 처음엔 왜 굳이 약한 놈들과 ‘거래’ 따위를 하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처럼 일을 벌이면 말이 새어 나갈 수밖에 없을 테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던 차였다. “미리 말하지만, 약속을 어기려던 건 아니다.” 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멜리아가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나도…… 여기서 너를 만날 줄은 몰랐다.” 아, 그거.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그걸 먼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약속’에 무슨 강박증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 마라.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진 않으니.” “그런가…….” 얼추 상황 파악도 됐겠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그래도 다행이군. 이 문제라면 우리가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자를 내어주겠단 뜻인가?”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너는 부릴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닌가. 내 부하를 빌려주겠다.” “서부연합은 이곳에서 가장 세력이 작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빠삭하군.” “여기 온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으니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멜리아의 말대로 서부연합은 소수 정예다. 정예라 하기엔 너무 약해빠지긴 했다마는. 적어도 사람 찾는 일은 동부 놈들이 더 잘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적은 건 신경 쓰지 마라.” 여전히 문제는 없다. 오히려 얘가 왜 이처럼 간단한 걸 떠올리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부하의 숫자가 적다고? 왜 그런 거로 쓸데없는 고민을 한단 말인가. “오늘부터 동쪽도 내 구역이니까.” 부하야 복사하면 그만이다. *** ‘약속’을 중시하기에 융통성 없는 여자인가도 싶었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나와 같았다. 아멜리아도 효율의 민족이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동의한다는 뜻인가?” “그 전에 이것부터. 나를 도와서 네가 얻는 게 뭐지?” “……나중에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줘라.” “그렇다면 거절하겠다. 왠지 너는 감당 못할 부탁을 할 거 같아서.” 쩝, 이건 안 통하는구나. 뭐, 됐다. 중요한 건 부탁 같은 게 아니었으니. “그럼 그냥 봉사로 치지. 괜히 너와 싸워서 힘을 빼는 것보단 나으니까.” 납득이 가는 변명이었는지, 그제야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합의에 동의했다. 따라서……. “그, 그분은 어찌 됐지?” “됐지는 반말이고.” 1층으로 내려가 징징이와 어색한 대치를 하고 있던 빡빡이의 배를 걷어찼다. 자고로 ‘등용’에는 기선 제압이 중요한 법. “커억!” 명치를 맞은 빡빡이가 그대로 바닥에 자지러졌다. “이 자식!!” 이를 기점으로 1층에 가득하던 동부 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검, 망치, 창, 꼬챙이……. 손에 쥔 흉기를 무자비하게 사방에서 찔러대는 녀석들.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이게 왜…….” 피부가 드러난 곳을 노렸음에도 살갗조차 베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무기들. 예견된 일이었다. 징징이 하나를 잡겠다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서 온 놈들인데, 그게 박히겠냐고. 내 물리 내성이 몇인데. “다 끝났나?” “……아니요.” “베헬—라아아아아아!!!”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야성분출]로 공포를 심어 주고, 시범 삼아 몇 놈을 짓뭉개 준 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압도적인 무력 차에 감히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십 명의 장정. 나는 빡빡이를 멱살 잡아 들어 올렸다. “너는 이름이 뭐지?” “피, 필립 라제르입니다!” “앞으로 너를 빡빡이라 부르겠다.” 오케이, 그럼 이제 통성명은 끝났고. 다음 수순을 밟으려는 차에 빡빡이가 멍하니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일단 오류를 정정했다. “당신이 아니다.” “……?” “네 보스다.” “보스……?” 혼란스러운 눈빛을 짓던 빡빡이가 구석에 숨어 있던 징징이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 모양이었다. 그래, 쟤도 이렇게 당했어. “마침 잘 왔다, 포션 한 병만 줘 봐라.” “……포션?” “부하가 다쳤는데, 치료는 해 줘야지 않겠나.” 아멜리아는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나를 쓱 훑더니 포션 한 병을 꺼내서 건넸다. 치이이이익- 이내 포션을 먹여 주자 빡빡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꿈틀거렸고, 잠시 기다리자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채찍은 충분한 거 같으니 당근도 줄 차례. “나는 17일 뒤면 떠날 사람이다.” “예?” “그냥 그렇다고.” 쉽게 말해,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그동안만 버티라는 뜻. 이후 나는 빡빡이와 징징이에게 돌아가서 사람을 전부 모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람이 많으니 차원 광장이면 되겠군. 다섯 시간 정도면 되겠나?” “그, 그런 터무니없—” “예! 충분합니다!” 빡빡이의 말을 끊으며 호기롭게 소리치는 징징이. 역시 선배답다고 해야 하나? 어떤 말에도 ‘YES’를 답하는 것은 부하로서의 가장 큰 덕목이다. 상사가 바바리안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럼 됐군, 어서 나가 봐라.” 시간이 촉박한 만큼,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빠르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그 모습이 제법 흡족스러웠다. ‘이래서 다들 그렇게 권력에 목매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아멜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일부러 관심 없다는 듯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말해 봐라. 누구를 찾으면 되지?”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었다. 얘는 일단 노아르크 출신이니까.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노아르크의 지시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란 가능성도 존재할 터. ‘이 시국에 지하 도시에서 사람까지 풀어 찾는 사람이라…….’ 어쩌면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야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되니까. 내게 관련 없는 정보라면 추후 원탁에서 있어 보이는 척하는 데 써도 될 테고.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것은 없다는 판단. 하나 그런 내 기대와 달리 아멜리아는 인물의 특징만을 답했다. “노인의 모습이되, 변장을 했을 수도 있다.” “외모로 분별할 수 없단 뜻이군. 그럼 어떻게 찾지?” “등에 새겨진 문신. 그것만은 어떤 마법으로도 숨기는 게 불가하다고 들었다.” 흐음, 그럼 보이는 족족 등짝을 확인해야 하는 건가? “도움이 될 만한 다른 특징은?” “없다.” “이름도 모르나?” “……어차피 가명을 썼을 테니 의미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한번 말이나 해 봐라.” 슬쩍 물어보자 아멜리아는 고민하는 듯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말해 봤자 모를 거라 판단했을까? 이내 한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아우릴 가비스.” 뭐? “아우릴 가비스라고?!” “……그를 아는 건가?” “아니, 그냥 한번 아는 척해 봤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야 당연했다. 아우릴 가비스라니? ‘총해록’ 시리즈의 저자이자, [던전 앤 스톤]을 만든 제작자의 이름 아닌가! 195화 비프론 (5) 아우릴 가비스. 최소 150년 전 사람이다. 지난날, 레이븐에게 연도 특정 의뢰를 했을 때 ‘균해록’에 그 시절 종이가 쓰인 거로 나왔거든. 그렇기에 더더욱 놀랍다. ‘……그 새끼가 살아 있다고?’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에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던전 앤 스톤]의 제작자이며, 나를 비롯해 수많은 플레이어를 이쪽 세계로 보내 버린 원흉일 가능성이 가장 큰 작자인 데다가……. 이곳은 단어 그대로 판타지한 세계 그 자체. 당연히 살아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용인족만 해도 수백 년을 살지 않던가. 두근! 이를 깨달았을 때 심장이 크게 격동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경악이 아닌 기대의 의미를 담은 울림. 두근! 정말로 그 새끼가 살아 있다면. 그래서 놈을 찾아내 만날 수만 있다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막연했던 ‘귀환’의 실마리가 처음으로 눈앞에 나타난 셈, ‘……진정하자.’ 애써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냉정을 찾았다. 그야 기대감을 부풀리며 희망 회로를 돌리는 건 나중에 자기 전에 해도 되는 거니까. 지금은 지금에 집중하는 편이 옳다. “바바리안, 넌 확실히 특이하단 말이지.” 아멜리아가 날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순간 ‘그냥 한번 아는 척해 봤다’라는 말이 구라란 게 들통난 건가도 싶었다. 하지만……. “간담이 크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일을 겪고도 내 앞에서 농담을 던질 수 있다니. 넌…… 내가 무섭지도 않나?” 이제 보니 그냥 이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평생 이런 사람을 못 만나 봐서 이런 식의 대화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던가. 중요한 건, 다행히 잘 넘어갔다는 것. 이래서 평소에 미친놈처럼 살아야 한다. 그럼 뭘 하든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니까. “뭐라는 거냐, 인간 여자. 나는 바바리안이 아니라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래, 비요른 얀델.”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내게는 그게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사인처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질문. “근데 그자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남자다.” “여자로 변장했을 수도 있나?” “글쎄, 아마 그러진 않았을 거다. 기록에서는 남성우월주의가 심했던 사람이라 적혀 있었으니.” “능력과 무관하게 그런 짓은 안 할 거란 거군. 그럼 어린아이로는? 그런 식으로도 위장할 수 있나?” “……너무 어린아이로는 하지 않을 거다.” “근거는?” “체면을 중요시하던 인물이니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너는 그자를 왜 찾는 거지?” 당연히 대답할 수밖에 없는 쉬운 질문을 끝마친 다음에 이어서 한 질문. 어떤 책에서 봤다. 이런 식으로 질문하면 대답을 들을 확률이 커진다던가? 물론, 실전에서 통할지야 미지수였지만……. 그렇다고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대답도 머지않아 들려왔고. “……개인적인 용건이다.” 개인적인 용건. 보통은 말하기 싫거나, 그럴 사이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때 현대인들이 자주 쓰던 그 말. 대충 둘러대고 싶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얘가 이렇게 말하니 또 모르겠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왜 답해 줘야 하지?] 이런 식으로 대답 자체를 거부하기는 해도, 얼버무리려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노아르크의 지령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개인적인 용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뭐, 이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아우릴 가비스. 만약 놈이 정말 비프론에 있는 거라면,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 대화가 끝난 후, 아멜리아는 도시에 들렀다가 밤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오후에는 그쪽에 볼일이 있다던가? 처음엔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잠깐만, 도시는 어떻게 가겠단 거지? 경비병 눈을 피할 방법이라도 있나?” “하수도 아래에 비밀 통로가 있다.” 다시 붙잡고 묻지 않았으면 아쉬울 뻔했다. 도시와 이어진 비밀 통로라니! “그거, 혹시 나한테도 알려 줄 수 있나?” “흐음.” “뭘 고민하냐? 내가 감당 못할 부탁이라도 한 것처럼.” “……좋아, 알려 주겠다.” 내가 ‘아우릴 가비스’ 수색을 돕는 중이란 입장을 넌지시 언급하자, 아멜리아는 흔쾌히 비밀 통로를 알려 줬다.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이걸로 이제 빚은 없다는 건가? ‘덕분에 좋은 걸 얻었네.’ 나중에라도 원할 때 비프론에 올 수 있는 일종의 통행권. 물론 유배 기간 동안 이 통로를 쓸 생각은 없다. 나도 내가 눈에 띄는 편이란 건 아니까. 괜히 나갔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날 들여보낸 기사도 유일하게 경고했지 않나. 뭐든 해도 좋지만 탈출만은 하지 말라고. “그럼 다녀와라.” “다녀오라니?” “이따 밤에 다시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랬지…….” 비밀 통로의 위치를 전달 받을 겸, 함께 하수도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그 앞에서 아멜리아를 배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집결 지시를 내린 지 벌써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한테 길을 물어가며 슬그머니 집결 장소로 향했다. 한때 탐험가들로 북새통을 이뤘을 차원 광장. “이봐, 혹시 아는 게 있나? 보스는 왜 갑자기 우리를 다 부른 거지? 저기 서부연합 놈들은 또 뭐고?” “나는 ‘이봐’가 아니다.” “……?” “네 보스다.” “그게 무슨 말—” “반문은 허하지 않는다.” 나는 인파를 뚫고 중심부로 나아갔다. 중간중간 서부연합의 일원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충!!!” 그래, 이거거든. “뭐지……?”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서부연합원들과 아리송한 표정만 지어대는 동부 놈들. 그래도 눈치껏 길을 터주었기에, 중심부까지 가는 게 보다 수월했다. “오셨습니까. 저기 오르시지요.” 중심부에 도달한 후엔 재회한 징징이의 보좌 받으며 단상으로 향했다. 필요할 거 같아서 미리 준비를 했다던가? ‘거, 일 한번 잘하네.’ 왠지 밖에 데리고 나가서 집사 일을 시켜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비밀 통로도 있겠다, 여기서만 데리고 다니기 아깝잖아? 경비병한테 걸리면 벌금으로 안 끝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단상 위로 오르려던 때였다. 콰지직. 나무판자로 이뤄진 계단이 박살 났다. 이런 얇은 판자때기로는 나와 장비의 무게를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징징,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합니다.”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즉각 뱉어진 사죄. 조금은 마음이 풀렸지만……. 이 단상을 만든 놈은 바바리안 혐오자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바바리안도 오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설계를 했을 테니까. 그래, 그 말인즉슨. “이 단상은 해로운 단상이다.” “예. 지금 당장 불살라 버리겠습니다.” 징징이가 횃불을 가져와 단상에 불을 붙였다. 기름으로 추정되는 액체까지 위에 부어주자 확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순식간에 불에 뒤덮인 3층 높이의 단상. 이러니까 무슨 캠프파이어를 하는 거 같네. 화르르르륵-!! 따뜻한 불길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땐 내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가. 천 명이 넘는 부하가 함께하지 않나.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창단식은 그대로 속행한다.” “창단식……. 예, 그랬군요. 그래서 전부 한곳에 모으라고…….” “당연한 건데, 몰랐나?” “죄송합니다.” 나는 용서한다는 의미로 징징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높이 [도약] 했다. 목적지는 근처에 있던 4층 건물의 옥상. 콰아앙-! 옥상 바닥에 실금이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왠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점프해서 바닥을 뚫고 떨어졌으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품위를 유지하려 한다. “크흠흠.” 아무튼, 난간 쪽으로 향하니 광장에 빼곡하게 자리한 인파가 한눈에 들어오며 장관을 이루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창단식을 시작할 차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선창했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하루 선배인 서부연합원들이 즉시 후창했다. 동부 놈들은 눈만 깜빡이며 바라만 봤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광경인가 하는 눈초리.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쯧.” 아직 가르쳐야 할 게 많구나. *** 새 보스의 얼굴을 조직원들에게 각인시키는 창단식이 끝난 후, 나는 징징이와 빡빡이를 불러내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비프론에 있는 모든 이의 등짝을 확인해라. 그리고 문신이 있는 놈은 전부 내게 데려와라.” 아, 물론 여자와 ‘자격 증명’도 치르지 못한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제외였고, 첫날이 다 가기 전에만 총 37명의 용의자가 내 앞에 끌려왔다. 하지만……. “이 문신이 아니다.” 밤에 돌아온 아멜리아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는 안 된다 이거지. 나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베헬-라 연합’의 부단장인 징징이와 빡빡이를 갈궜고, 2일 차 3일 차에는 훨씬 많은 용의자가 잡혀왔다. 물론, 이번에도 찾던 놈은 없었다. 심지어 양이 늘어난 대신 질도 낮아졌고. “이건 문신이 아니라 반점인 거 같은데.” “그렇다는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시정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도 효율을 위해 아랫놈들을 갈구겠다는 뜻. 다행히 잘 갈궜는지, 다음 날부터는 되도 않는 걸 문신이랍시고 데려오는 일이 적어졌다. 4일 차, 5일 차. 그렇게 이틀이 더 흘렀다. 역시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아우릴 가비스’ 같은 거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도 우습긴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거라도 해 봐야지.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라 한들, 그 바늘이 날 집에 돌려보내 줄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는 해 보는 게 마땅하다. 따라서, 나는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나갔다. 물론 조금 방식을 바꾸기는 했다. 별건 아니고, ‘보상’을 추가했다. “매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자는 그날 밤 정신 교육이다.” 이게 어떻게 보상이 되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의 행복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 쉽게 말해, 남들보다 잘 살면 그게 보상이다. 날고기를 먹고 동굴에서 맨몸으로 잠을 잔다고 원시 시대에는 행복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6일 차, 7일 차, 8일 차……. 이후로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다만 아우릴 가비스는 나타날 기미가 없었고, 나도 슬슬 어느 정도 기대를 접었다. 처음으로 얻은 귀환의 단서였던지라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애초에 얘를 도우려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러니 그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름 아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이 여자는 대체 뭐 하는 애일까? ‘아우릴 가비스’를 접점으로 매일 만나게 된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캐냈다. 의외로 얘는 묻는 것에 잘 대답해 주었다. 중요성 낮은 정보들에 한해서이긴 했지만. “밀이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는다. 왠지 피부가 가려워져서.”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든가. 취미가 있다면 독서 정도라든가. 그런 것은 어려움 없이 대답해 준 반면, 예전에 빚을 졌다던 바바리안이 누구이며 무슨 일이 있던 거냐는 물음에는 답변을 피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하지만 궁금하단 말이다. 너 같은 여자가 쩔쩔매다니, 위대한 전사였을 거 아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라도 말해 봐라!” “……굳이 따지자면 너와 조금 비슷했다.” 얘답지 않게 뒤에 군말을 붙이긴 했지만, 유의미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야 같은 바바리안 아닌가. 닮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아무튼, 그런 자연스러운 잡담이 이어지며 얘도 허들이 조금 내려갔을까? “약탈은 왜 하고 다니는 거냐? 솔직히 말해서 너랑은 영 어울리지 않는데.” “어울리지 않는다고?” 조금 예민할 수 있을 질문에도 화를 내기보단 의문을 내비치는 아멜리아. 나는 어렵지 않게 준비한 대사를 쳤다. “그때 이후로 너 말고도 약탈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고 나니 좀 더 확실해지더군. 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다.” “……웃기는군.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모른다. 하지만, 너 정도 수준이면 약탈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 방법이 많다는 건 알지.” “…….” 아멜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게 사정을 밝혔다. “……평소에는 하지 않는다.” “그럼 그때는?” “그놈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였단 뜻인가?” “그래.” 먼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아멜리아. 그 너머의 깊은 사정이 궁금해졌지만, 어떠한 원한인지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 아멜리아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별거 아닌 거로 유난 떨지 마라. 어차피 며칠 뒤면 헤어질 사이 아니냐. 남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도 있는 거다.” “남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라…….” 그 말이 인상이 깊었는지 한 번 내 말을 곱씹던 아멜리아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었군. 이만 나는 가보겠다.” “내일도 이때 오나?” “아마도.” 왔을 때처럼 기척 하나 내지 않으며 눈앞에서 사라진 아멜리아. 쩝,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잠시 기분 전환이나 할 겸 테라스로 나갔다. 비프론의 야경은 바깥의 도시 구역들과는 전혀 달랐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둠으로 파묻힌 거리와 건물. ‘이제 정말 며칠 안 남았네.’ 테라스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며 어둠을 바라봤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서 침실로 향했다. [23 : 57] 슬슬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었다. 뭐, 잠이 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리겠다마는.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오늘은 다들 접속했겠지? 196화 마스터 키 (1) 커뮤니티에 입장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서 채팅방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흠칫 굳었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왜 두 명이지? 혹시 이번 기수에 다른 한국인이 들어온 건가? 아니, 그래도 신입이 이렇게 빨리 채팅방을 찾아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딸깍딸깍.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마우스를 조작해 방 제목을 더블 클릭 했다. 그러자 평소와 다르게 메시지가 출력됐다. [일시적으로 참가 제한이 걸린 방입니다.] [남은 제한 시간 9분 51초.] 이건 또 뭐지?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머지않아 얼추 사태가 파악됐다. 참가 제한을 걸거나 하는 건 채팅방을 개설한 방장의 고유 권한 중 하나다. 다시 말하자면 그 뜻은……. ‘커뮤니티가 열리자마자 누군가 이백호를 찾아왔고, 이백호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다.’ 역시 이렇게 보는 게 타당하겠지. 아마 그 누군가는 이백호의 지인일 것이다. 모르는 사이였다면 문을 잠그는 게 아니라 강퇴를 했을 테니까. ‘이백호의 지인이라…….’ 괜히 궁금해진다. 이백호는 초창기 알약을 먹어 1시간밖에 커뮤니티를 이용하지 못하는 올드 유저. 이 커뮤니티에 들어온 지 십 년은 훌쩍 넘었을 거고, 그만큼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상대도 이백호처럼 이곳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이겠지.’ 애초에 ‘원탁의 감시자’에 입장할 수 있는 초대 코드를 알려 준 것도 이백호였다. “쩝.” 채팅방 안에 접속한 사람의 닉네임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줄어드는 시간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인원이 한 명으로 줄어들었다. [대한독립만세] - 1명이 접속 중입니다. 확인해 보니 참가 제한도 풀린 상태. 왔던 사람이 벌써 나간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채팅방에 들어선 찰나였다. “백호 씨가 말하던 고향 사람?” 씨발, 뭐야 이거. 낯선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백인 사내가 서 있다. 아니, 처음은 아닌가? [Elfnunalove] 사내의 머리 위에 뜬 닉네임을 확인한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놀랍게도 나와 인연이 있던 자였다. ‘차원 붕괴’ 루머를 듣고서 ‘셔널 페르강’이란 마법사에 대해 캐고 다니던 때, 내게 정보를 판매해 주었던 유저. [생각해 보니까 그건 됐습니다. 그분 팬이신 거 같기도 하고.] 보상으로 약속했던 2만 GP를 사양하는 걸 보며 나는 내가 여기서 뉴비라는 걸 실감했다. 금방 위로 올라가겠다고 다짐도 했었고. 그런데, 설마 이 사람이 이백호와 알고 지내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아니, 근데 이백호는 어디 간 거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안 그래도 상대 쪽 또한 내 닉네임을 보더니 묘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음, 그때 봤던 분이시네요?” 그래, 너도 날 알아본 거구나. ‘Elfnunalove’라는 기분 나쁜 닉네임을 쓰는 자인만큼, ‘Elfnunna’라는 내 닉네임이 기억에 남았던 모양. “예, 여기서 또 보네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일단 말을 아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가기도 하니까. 일단 저쪽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 실제로 잠시 기다리자 엘프누나러브, 줄여서 엘럽이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뭔가 죄송하게 됐네요.” “뭐가 말입니까?” “모처럼 만나셨을 고향 친구분을 제가 빼앗아 간 느낌이라서요.” “…백호를 말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엘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다시피 이곳에 한국인은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동향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데요. 빼앗아 갔다니……?” 이번엔 딱히 뉴비인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이백호가 채팅방에서 나간 게 얘 때문인 건가? 아니, 하지만 어떻게? 분명 이 채팅방의 방장은 이백호였을 텐데? 온갖 의문이 머리에 맴돌던 차. “말 그대로예요. 앞으로는 이곳에 오셔도 백호 씨는 못 만날 겁니다. 열쇠 역할을 해 주실지도 모른단 생각에 지금까진 내버려 뒀지만…….” 백인 사내가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큰 잘못을 저지르셨거든요.” “……?” “원래 그냥 나가려고 했는데, 괜히 기다리면서 시간 낭비하실까 봐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럼 이만, 즐거운 시간 되시길.” 내가 뭐라 더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채팅방에서 나가 버린 엘프누나러브. 나는 멍하니 그 빈자리만을 바라봤다. ‘니미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 어느새 혼자 남게 된 텅 빈 방. ‘잘못을 저질러? 여기에 못 온다고?’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엘프누나러브는 대체 뭐 하는 새끼인가? 차근차근 방금의 대화를 복기하고 있자니 금방 결론이 나왔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일단 고스트 버스터즈의 관리자인 건 확실해.’ 관리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던 ‘소울퀸즈’처럼, 뉴비를 안내하고 커뮤니티가 난장판이 되지 않게 이곳을 관리하는 존재. 그게 아니면 이번 사태는 설명이 불가하다. [이번에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셨거든요.] 엘프누나러브는 방장도 아닌데, 이백호를 방에서 내쫓았다. 아니, 방에 참가 제한을 걸었던 것도 이백호가 아니라 얘였겠지. 적어도 게시판 내에서는 상당한 권한을 지닌 게 관리자니까. 애초에 커뮤니티에서 영구 추방을 때리는 건 관리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것도 보통 관리자가 아니라 분명……. ‘…잠깐만.’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나는 서둘러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른 컴퓨터를 조작해 쪽지함을 열었다. [Elfnunna님의 거래 내역이 50회 이상입니다. EXP +50] [회원 등급이 조정됩니다.] [오크 -> 트롤] [발신인: Ghost master.] 고스트 마스터. 커뮤니티의 유저들이 GM 혹은 운영자라고 부르는, 그 누구도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고스트 버스터즈의 최고 관리자. 돌연 이백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혹시 여기 운영자가 누군지 알아?] [아, 그건 저도 몰라요. 사실 알약도 초창기에 비밀 치안부 본진을 털다가 나와서 먹은 거라.] [그럼 그쪽도 네가 누군지 모르겠네?] [그래도 아마 예상은 할걸요? 저도 어느 정도 짚이는 놈이 있긴 하고…….] [누군데?] [세 명인데 전부 말해 드려요?] 그때 내 질문에 이백호는 총 세 명의 용의자를 말했다. 전부 마법사였고, 한 명 한 명이 도시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만큼 유명했다. 이백호의 추측이니 영 신빙성 없진 않을 터. ‘GM은 마법사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그 전제를 깔고서 엘프누나러브와 처음 만났을 때를 상기해 보았다. […이런 얘기를 막 해 줘도 됩니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그 학파의 마스터도 아니고.] 차원 붕괴 루머를 퍼트린 타루테인 학파의 속사정을 술술 털어놓는 그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 사람, 말하는 게 뭔가 마법사 같다고.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나만의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가 내린 결론이 사실이라면. “미친.” 나는 방금 GM과 만났던 걸지도 모른다. ***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에 쫙 흐르기도 잠시. 나는 금방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엘프누나러브가 GM이라고 한들, 내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라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음, 그 닉네임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일단 적대 관계라거나 한 건 아니지 않나. 내 정체가 밝혀진다고 목을 따러 온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 일단 그것부터 지우자.’ 나는 게시판에 들어가 이제 블러 처리 되어 버린 캐나다 친구의 글에 남긴 댓글을 삭제했다. 이것만으로 나를 특정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이나,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판단. 지우는 김에 내가 이곳에 와서 남긴 모든 흔적을 삭제했다. 유머 글에 남긴 댓글 몇 개를 제하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차원 붕괴 루머가 퍼졌을 때 한 번. 용살자와의 전투 후 오르큘리스에 관한 정보를 모으느라 거래소에 구매 글을 올렸던 게 전부. ‘그럼 백호는 이제 못 만나는 건가…….’ 흔적 지우기를 끝마친 다음에는 이백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뭔가 아쉬웠다. 더 이상 얘를 통해 고급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건 둘째치고, 솔직히 얘랑 노는 것도 나름 재밌었는데. ‘근데 얘는 대체 뭘 했기에 관리자가 와서 직접 밴을 때리는 거지?’ 지금으로선 그 진상을 파악할 길이 없지만, 노아르크 토벌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근에 있었던 큰 사건이라면 그것뿐이니까. 타다다닷-. 이후로는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이 단순 웹 서핑에 가까웠다. 엘프누나러브가 남긴 게시글이 있는지 확인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 흔한 댓글 하나 없었거든. 아, 참고로 이건 이백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어지간하면 앞으로 눈팅만 해야지.’ 원래 진짜 고인물은 커뮤니티를 멀리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는 법. 나는 이번 사건을 본보기 삼아 커뮤니티 이용 철칙을 새롭게 하나 추가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03: 03] 원탁에 입장 가능한 시간이 되었다. 다만 이번엔 굳이 폐쇄 직전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입장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집회 전에 나누는 잡담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란 판단. ‘…이번에는 다들 있겠지?’ 평소처럼 커스터마이징 룸에서 시작한 나는 서둘러 내내 입었던 남색 정장을 걸치고, 얼굴에 수사자 가면을 썼다. 끼이이이익. 치장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고, 카펫을 따라가니 커다란 원탁이 나타났다. 먼저 반겨 준 것은 광대였다. “이번엔 일찍 오셨군요, 피시싯.” 한 달을 건너 뛴 바람에 무려 두 달 만에 듣는 특유의 웃음소리. 나는 앉던 자리로 다가가며 인물을 살폈다. ‘초승달, 사슴뿔, 여우.’ 광대와 나를 포함하자면 이번 집회에 참가한 총 다섯 명이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여우가 눈을 돌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고블린 씨가 늦네요?” “피싯, 죽은 거 아닙니까? 이번에 성기사단 쪽 피해가 막심했다던데.”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죠.” 예상대로 회담 전부터 주된 화제를 이룬 것은 지난 토벌전이었다. “나는 이만큼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놀랍소. 지옥이 있다면 그곳인가 싶었으니까. 별생각 없이 참가했던 나 자신이 너무 후회되더군.” “…공감해요. 설마 노아르크에 그런 전력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처음 토벌대가 구성됐을 때만 해도 이 전력이면 왕궁도 공략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피싯, 그런데 전부 보기 좋게 당했다죠?” “광대, 너는 무슨 남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럼 남 얘기가 아니면 뭡니까? 몇 명이 죽든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수사자 씨?” “글쎄, 관심이 없어서.” 나는 지루하다는 듯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귀만 쫑긋 세워 대화를 듣기만 했다. 노아르크의 흑마법사. 카루이의 사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대형 클랜의 속사정과 다른 종족의 이야기 등등. 회담에서 꺼내기에는 부족한 희소성을 갖춘 정보들이 잡답이란 이름하에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찍 들어오길 잘했군.’ 그렇게 애써 흡족한 미소를 숨기며 그들이 논하던 최근 정세에 관한 견해를 경청하던 때였다. “오, 고블린 씨!” 열린 문 너머로 고블린 가면이 등장했다. “살아 있었군.” “아, 예. 정말이지 위험했습니다마는. 정말이지 신이 도왔지요.” 이 세상 사람도 아닐진대, 자연스럽게 신을 논하는 고블린. 광대가 조롱하듯 웃었다. “신은 무슨. 보나마나 뒤에서 고블린처럼 숨어 있던 거 아니겠습니까? 피싯.” “아니, 광대 당신은 왜 저한테만 그래요?” “그야, 만만해서?” “…….” 대놓고 무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고블린은 그저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자기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쫄았네.’ 처음에는 고블린이 저자세를 취하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성기사라는 신분이 노출된 고블린 아닌가. 딱 봐도 강해 보이는 광대와 대놓고 척을 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쿵! 이내 고블린이 자리에 앉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굳게 닫혔다. 슬슬 집회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 “라이언, 그때 약속은 유효한 것이오?” 차례를 정하기도 전에 초승달이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 왔다. 주어는 빠졌지만 이해에는 문제없었다. 재밌는 얘기를 갖고 오면 ‘소생의 돌’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던 약속을 말하는 거겠지.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초승달이 결의에 찬 눈빛을 내지었다. “피싯, 표정을 보니 이번엔 정말로 자신 있나 보군요?” “그저 간절할 뿐이오. 내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물건이니까.”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반드시 ‘소생의 돌’에 대해 알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답변. “그럼 누구부터 시작하겠소?” 그렇게 누가 먼저 스타트를 할지를 정하기 위해 눈치 게임을 시작하던 찰나였다. 끼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있었던 적 없는 현상. 뭐지? 다른 회원? 아니, 한번 회담이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도중에 들어올 수 없는 거 아니었나? 분명 규칙상 그랬을 텐데? “……?” 다들 의문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이 현상을 나만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닌 모양인데……. 쿠웅. 이내 두꺼운 나무 문이 활짝 개방됐고, 그 너머로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백색 가면을 쓴 사내였다. 유일하게 피부가 드러난 손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껄껄, 여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온 노인의 목소리. 잠시 침묵이 장내를 짓눌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여우 가면이었다. “마스터……?” 그 중얼거림을 통해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마스터. ‘원탁의 감시자’를 만든 사람이란 뜻이었다. “근데 처음 보는 가면이 있군? 자네는 누군가?” 마스터의 물음에 내게 몇 번인가 낚여서 파닥인 적 있던 여우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스터가 초대하신 분 아니었어요? 분명 이분도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착각하도록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했을 뿐. 하지만,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겠지. ‘니미럴.’ 어떻게 하지? 자칫하면 컨셉질이 들통나게 생겼다. 197화 마스터 키 (2) 원탁의 감시자. 좀 더 양질의 정보 교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커뮤니티.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기존 회원들은 나와 마스터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간단한 이유다. 쪽지 기능으로 회원을 영입하던 마스터가 종적을 감춘 뒤 벌써 1년이 지났으니까. 회원들은 내게서 마스터의 근황을 들을 수 있겠다 여겼으며, ‘수사자’의 컨셉이 자리 잡은 이후에는 아는 사이이라는 게 정론으로 굳혀졌다. 관련 질문에 전부 노코멘트로 일관했거든. [답은 거절이다.] 안다고 답하기엔 뒷일이 걱정되고. 모른다고 하기엔 신비주의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내린 판단. 근데 나도 모르게 욕심이 들었을까. [……혹시 당신은 마스터가 어디 계신지도 알고 있나요?] 두 번째 집회에서 나는 여우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해 버렸다. 너도 재밌는 걸 가져오면 알려 주지 못할 건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서 절대자라도 된 것처럼 여유를 부렸다. 명백하게 착각을 의도한 셈. “……마스터가 초대하신 분 아니었어요? 분명 이분도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실제로 그 의도가 잘 통했는지, 여우 가면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목소리였다. 다른 가면들도 이게 뭔 상황인가 하고 있었고. “흐음, 내가 초대를 했다고?” 마스터가 전혀 모르겠단 눈치로 턱을 짚었다. 이에 다른 가면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의문, 그리고 내 정체에 관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 “마스터가 아니라면 저분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죠?” “예전에 받았던 초대 코드를 이제 사용한 거 아닐까요?” 여우의 중얼거림에 고블린이 한 가지 추측을 내놨고, 이를 광대가 반박했다. “멍청하긴. 초대 코드는 딱 한 달만 지나도 만료가 돼서 쓰지 못한단 것도 모릅니까?“ “……저게 정말입니까, 마스터?” “광대의 말은 사실일세.” “그럼…….” 마스터가 수긍하자 나를 향하는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수사자 씨는 왜 마스터와 아는 사이라고 절 속이신 거죠……?”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질문을 건네오는 여우 가면. 나는 호흡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마스터의 등장이라는 돌발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평정을 잃어서야 될 일도 망치게 되는 법. 신속하게 내가 취할 포지션을 정했다. “속이지 않았다.” 내 입으로 직접 아는 사이라고 으스댄 적은 없지 않은가. 그냥 너희가 착각한 거다. 그렇게 밀고 나가면 얘네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터. ‘뭐, 조금은 위화감을 느끼기야 하겠지만…….’ 반쯤 얻어걸린 살기부터, 이런저런 정보까지. 지금까지 보여 준 게 어디 한두 개던가? 어차피 이거 가지고 내가 사이버 깡패라는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할 거다. 그래, 그러니까……. “속이지 않았다니요?” 뻔뻔하게 나가자. 애초에 ‘수사자’는 그런 캐릭터잖아? “말 그대로다. 귀에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살기를 뿜지도 않았음에도 눈이 마주치자 크게 당황하는 여우 가면. 나는 소리 내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해한 건 너희 쪽이라며 준비한 대사를 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다들 그만하게나.” 마스터가 날 보며 말했다. “자네들끼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네.” ‘……응?’ “이제야 알겠네. 자네가 누군지.” 일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물론, 그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내가 누군지 안다고? 말도 안 된다. 마스터라고 해봤자 결국 비공개 채팅방의 방장일 뿐인데 그걸 어떻게 안단 말— “껄껄. 자네라면 호랑이 쪽일 줄 알았네마는.” 마스터의 웃음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곡을 찔려서가 아니라,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저 침묵을 택했다. 말만 아껴도 최소 반은 간다는 판단. “군인이라든가 말일세.”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군인이라…….’ 이제 알겠다. 지금 이 노인네가 나를 누구로 착각한 것인지. *** Sergeant Lee. 직역하자면 이 병장이자……. 전역날 이 세계로 끌려온 비운의 플레이어, 이백호의 닉네임. “껄껄, 아닌 척해도 소용없네. 만료 기한이 없는 코드를 준 건 자네밖에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마스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오해였다. 그야 이백호가 내게 양도한 초대 코드 아닌가. 가면까지 쓰고 있는 와중에 나와 이백호를 구별해 낼 수 있을 리가 만무. ‘……이걸 잘 됐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직은 감이 오지 않는다. 이백호가 마스터와 얼마나 친한 관계였는지가 관건일 듯한데……. “설마 자네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네. 처음 찾아갔을 때만 해도 한심한 짓거리를 한다며 내게 면박을 주지 않았던가.” “…….” “조금 궁금하군. 어쩌다 생각이 바뀐 건가?”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결론이 나왔다. ‘안 친했구나.’ ‘면박’이란 표현이야 아무래도 좋다. 세상엔 티격태격하면서 친한 관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 그 얘기를 안 해드렸구나. 제가 먹은 게 초기 알약이라 여기에 한 시간밖에 못 있어요.] 이백호는 이곳에 한 시간밖에 못 있는다. 그래서 입장 시간이 3시부터 3시 10분 사이인 이 집회에는 애초에 참가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걸 모른다고? 나한테는 첫날 만나자마자 말해 줬던 그걸? ‘슬슬 견적이 나오네.’ 마스터는 이백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즉, 내가 이백호인 척 연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단 뜻. “먼저 제안했던 내가 할 말은 아니네만, 자네 정도라면 여기 참가해 봤자 얻을 게 없지 않은가.” 이어진 마스터의 말에 광대가 툴툴거리듯 중얼거렸다. “……피싯, 얻을 게 없다니. 마스터는 우리를 너무 애처럼 보는 거 아닙니까?” “아,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정말 그만큼 대단한 친구라서.” “흐으으음, 그렇단 말이지요…….” 마스터의 극찬에 눈을 빛내는 광대. 나는 빠르게 다른 가면도 살펴봤다. 광대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그저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어쩌면 ‘소생의 돌’ 같은 고급 정보를 뱉었을 때보다 더. “마스터께서 저런 평가를 하는 사람은 처음인 거 같구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늘.” 연신 탄성을 토해 내는 초승달과 어딘가 분한 표정인 사슴뿔. 아, 참고로 여우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의심했던 게 걸렸던 모양. ‘어떡하지?’ 이 모습을 보니 고민이 더 깊어진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벌써 달라진 회원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백호인 척 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앞으로 컨셉질을 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늙은이를 통해서 이백호가 어떤 애인지 알아볼 수도 있을 거 같고.’ 리턴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리스크는 어떨까? ‘……딱히 리스크라고 할 게 없는데?’ 생각해 보니 안 통하면 그때 이백호 친구라고 사실을 밝히면 그만이다. 유유상종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마스터가 대단한 사람이라 언급한 이상, 그 친구인 나도 이백호와 동급으로 보일 터. ‘그래, 질러 보자.’ 이내 결정을 끝마친 나는 오랜 침묵을 깨고서 마스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선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응?” “평소처럼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왜 안 되나. 그냥 그때처럼 영감이라 하게. 그 이상한 경어도 집어치우고.” “그러지, 영감.” 자연스레 태세를 바꾸면서도 아찔했다. ‘시작부터 조질 뻔했네…….’ 설마, 반말을 하는 사이였을 줄이야.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이백호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유교인이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에게 반말을 조지다니? ‘친한 사이가 아닌 걸 넘어서 아예 사이가 안 좋았나 보네.’ 대충 어떤 느낌으로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힌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레 말을 덧붙이며 방금 전 실수를 만회했다. “취향 참 이상하군. 면을 살려 주려 해도 그걸 싫다고 하다니.”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의 말. 제대로 통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마스터는 기껍다는 듯 웃어 젖혔다. “껄껄! 그래, 이래야 자네답지. 아무튼, 이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세. 오랜만에 자네를 봐서 반갑지만, 시간이 없거든.” “……마스터, 시간이 없다니요?” “사정상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돼서 말이네.” “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만.” 마스터가 짧게 읊조리며 의문을 일축했다. “여우 양이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으리라는 건 이해하네. 내가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건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뭔가 싶겠지. 하지만 말해 줄 수 없네.” “그렇게 시간이 촉박한 건가요?” “아니, 시간과는 전혀 무관한 얘길세.” 딱 잘라 선을 긋는 마스터의 말에 여우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만 더 물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오시나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하지만 1년 뒤에는 또 오겠네. 그 전에 뭔가 알릴 일이 생기면 더 빨리 올 수도 있고.” “피시싯, 그 말은 오늘도 뭔가 급히 알릴 일이 있어서 왔다는 뜻이겠군요. 마스터.” “광대, 자네 말대로일세.” 마스터의 충격 선언에 내게 쏠려 있던 관심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나로서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다. 심지어 그 내용 자체도. ‘1년 뒤에 다시 온다라…….’ 쉽게 말해, 매 집회마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 다만, 당장은 그런 안도감보다 호기심이 컸다. ‘시간이 없다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 거지? 급히 알려야 할 정보는 또 뭐고?’ 많은 의문 속에서 귀에 신경을 집중한 채 마스터를 응시했다. 비단 나만이 아니라 모든 가면이 그러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기묘한 침묵. “껄껄, 너무들 긴장하지는 말게나. 오히려 좋은 소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니.” 무거워진 공기를 환기하듯 손사래를 치던 마스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2년 안에 최대 여섯 명까지 가능한 결속 마법이 만들어질 걸세. 심연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여섯으로 늘어난다는 거지!” 정적이 장내를 짓눌렀다. 회원들은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힐끗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마스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다들 표정이 왜 그러나? 훨씬 더 놀랄 줄 알았네마는…….” 그거, 뒷북이거든. *** 6인 결속 마법이 생기리라는 것. 알려지는 순간 도시 전체가 최소 몇 달은 진동할 만큼 귀중한 정보이리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자네가 먼저 이 소식을 밝혔다고? 에잉, 어쩐지 다들 심심한 반응이더라니.” 광대가 지난 회담에서 얘기한 내용임을 알게 된 마스터가 입맛을 다셨다. “근데 조금 의외로군. 광대, 자네가 이곳에서 그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는데. 이제 조금은 여기 사람들이 마음에 든 겐가?” “피시싯,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놀라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한 사람이 생겨서 말이죠.” 특유의 웃음소리를 뱉으며 나를 보는 광대. 그 시선을 따라 마스터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쓱 훑어본다. 뭔가 말이라도 걸려는가 싶어 긴장이 됐다. 하지만……. 치지지짓. 그때를 기점으로 마스터의 몸이 홀로그램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벌써 떠날 시간이 다 됐군.” “마스터!” 여우가 아쉽다는 듯 소리쳤지만 그럴수록 일렁거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 상황에서도 마스터는 오직 나만을 보았다. 굉장히 불쾌하면서도 꺼림칙한 시선이었다.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 내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영감,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 [영감이 아니라 늙은이네.] 전음 마법처럼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나를 그렇게 불렀네.] 제기랄. 어쩐지 너무 쉽게 넘어가는 거 같더니만.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고?’ 나도 모르게 몸이 살짝 경직됐다. 물론, 육안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했으며 그 시간도 찰나에 가까웠다. 하지만……. [흠, 사실 그래도 너무 반응이 자연스러워서 지금까지도 헷갈렸네마는. 심장 박동이 확 증가한 걸 보니 정말로 그 꼬맹이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니, 그냥 떠봤던 거였어? [걱정 말게. 자네가 여기서 뭘 하든 내가 이를 방해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으니.] “…….” [단지 궁금할 뿐이네마는, 애석하게도 오늘은 시간이 없군. 자네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만나면 그때 다시 얘기하도록 하세.] 그 말을 끝으로 마스터의 육신이 안개처럼 눈앞에서 흩어졌다. “하.”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이 세상엔 정말 만만한 새끼들이 없구나. 198화 마스터 키 (3) 마스터. 원탁의 감시자라는 비공개 채팅방을 만든 장본인.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회원들이 일제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후, 정말 가버리셨군.” “……채팅방을 나갈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예, 마치 로그아웃을 할 때와 같은…….” 이들의 목소리에는 오직 의문만이 가득했다. 뭐, 그 심정은 나도 크게 다를 바 없겠다마는. “로그아웃은 방으로 돌아가야지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남기신 말씀을 들어 보니 튕겨져 나가는 느낌에 가까워 보였소만.” 이백호와는 여러모로 경우가 다르다. 걔는 처음부터 ‘초기 알약’을 먹어서 제한 시간이 1시간이었다. 반면 마스터는 어떤가? 원래는 멀쩡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것도 현실이 아니라 ‘고스트 버스터즈’란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그런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마스터께서는 도대체 어떤 일을 겪고 계신 걸까요…….” “피싯, 뭔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군요.” “확실하다니요?” 여우의 물음에 광대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1년간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게 GM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충격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제각기 생각을 하느라 생겨난 정적. 대체로 그의 추측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역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겠네요.” “그렇지만 모순이 있소. 만약 마스터가 정말로 GM의 제재를 받은 거라면, 어떠게 다시 이곳에서 모습을 내보일 수 있단 말이오?” “워낙 신비한 분이잖아요.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니, 마법으로 무언가 해답을 찾아낸 것 아닐까요?” “그, 그, 그럼 이 커뮤니티를 만든 GM보다 더 실력 있는 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우리 마스터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지요. 피싯.” 이후로 회원들은 온갖 추측을 주고받았고, 그 내용이 제법 흥미로웠던 나는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물론, 그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저기, 수사자 씨는 혹시 아시는 게 있나요?” 머지않아 자연스레 내게로 이목이 모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백호인 척하며 이들 앞에서 영감이니 뭐니 했던 나 아닌가. 뭔가 아는 게 있을지 모른다 싶었겠지. 하지만……. “글쎄.” 나라고 알 턱이 있나. 그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게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거, 모양 빠지게. “네, 그렇군요. 역시 수사자 씨도…….” ‘수사자’에게 모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느낌이라면 모를까. “짚이는 것 정도는 있다.” 나는 여우의 말을 끊고서 짧게 읊조렸다. 그러자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던 여우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갔다. “짚이는 것? 그, 그게 정말인가요! 아니, 이건 수사자 씨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어느새 가면 틈새로 드러난 여우의 동공에는 기대감이 물씬 피어나 있었다. 참고로 이는 다른 가면들도 매한가지. ‘……사실 짚이는 것도 없는데.’ 아직 남아 있던 현대인의 양심이 꿈틀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또다시 여우의 말을 끊었다. “어, 어서 알려 주세요. 마스터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 “그만.” “……에?” 당연히 내가 말해 줄 거라 생각했는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우. 다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어깨를 살짝 으쓱하는 거면 충분했다. 여기서 이 제스처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으니. “재밌는 걸 가져오라는 뜻이군요. 피시싯.”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걸 가져와야 한다. 그게 ‘수사자’가 원탁에서 세운 철칙이다. 그렇다면 ‘여우’는 어떤 대답을 내릴까? “……좋아요.” 예상대로였다. 유독 마스터의 근황이나 그런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 바로 ‘여우’였으니까. “그래도 저는 조금 허들이 낮겠죠? 확실한 것도 아니고 짚이는 것 정도인데…….”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이내 여우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성물’이란 떡밥을 문 광대와 ‘소생의 돌’에 눈이 돌아간 초승달에 이어 자신까지 이런 처지가 될 줄은 몰랐던 모양. “왠지 동지가 늘어난 기분이구려. 앞으로 여우 양도 고달파지겠소.” 초승달이 건넨 위로의 말에 여우는 체념하듯 쓴웃음을 내지었다. 앞으로 정보의 질이 더 올라가리라는 뜻. ‘남은 건 사슴뿔과 고블린 정도인가…….’ 나는 흡족한 마음을 뒤로하고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지루하군.” “…….” “잡담은 이만하면 됐지 않나?” “예, 슬슬 집회를 시작하죠.” 떡밥은 이만하면 됐으니, 수확을 할 차례다. *** 아무도 없던 3회차에 이은 어느덧 4회차 집회. 시작은 고블린이었다. “마탑에서 머리를 맞대고 노아르크의 결계를 뚫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처음 그 말을 했을 땐, 다들 얘가 뭔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반응이었지만 고블린의 부연 설명에 다들 납득했다. “참고로 그 과정에서 신성력이 일정량 이상 필요한 모양이고, 적어도 결계가 해제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줄일 수 있을 거 같다더군요.” “어느 정도 연구 성과가 있었다는 뜻이구려.” “예, 그렇지요.” 정리하자면, 노아르크를 지켜 주는 마력 장막이 금방 벗겨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뭐,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다마는. ‘레이븐은 2년 정도 걸릴 거라고 봤었지…….’ 이후 마탑에선 6개월까지 줄이는 걸 목표로 정했다는 말을 끝으로 고블린의 턴은 종료됐다. 그다음 차례는 사슴뿔. “왕가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식표를 제작했다. 위조가 불가능한 각인 형태의 마도구지. 준비는 예전부터 한 모양인데, 다음 주에는 탐험가들에게 보급이 시작될 거다.” “다음 주부터라……. 너무 도움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미리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종류의 정보도 아닌데.” “그럼 한 가지 더. 왕가에서 몸을 사린다고 탐사를 멈춘 클랜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눈여겨보고 있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분위기를 보니, 모르긴 몰라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상당한 불이익이 주어질 거 같더군. “……그렇군요.”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듯 보였지만, 여우는 사슴뿔의 정보를 듣고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따라서 나도 그 반응을 머릿속에 기억해 뒀다. ‘여우, 얘는 클랜 소속일 확률이 높겠네. 일반 단원은 아닐 테고, 설마 클랜 마스터이려나?’ 물론 아직은 추측의 단계에 불과하기에 다음 순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여우 차례였거든. “대형 클랜들끼리 대규모 보이콧을 준비하고 있어요.” “보이콧이라면?” “뭐겠어요. 단체로 미궁에 들어가지 않는 거죠. 안 그래도 지난 토벌전 때문에 불만이 많은 상황인데, 최근에 불을 지피는 사건도 있었고요.” “아, 그거 말이지. 뭔지 알겠소.” 초승달이 아는 이야기라는 것처럼 껴들었다. “비요른 얀델, 맞소?” 응? 왜 여기서 내 이름이 나와? “네. 맞아요. 원래라면 벌금으로 끝날 일 갖고 멀쩡한 탐험가를 비프론에다 추방해 버렸죠.” 아, 그거……. “집행이야 그쪽 영역이지만, 대부분의 클랜은 이걸 우리에게 하는 경고라고 해석했어요.” “여론이 좋지 않겠구려.” “네. 여기서 더 물러났다간 다음번엔 강제로 징집이 될지도 모른단 얘기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니까요.” 내 이름이 언급된 순간 손이 굳고 입술이 싹 메말랐지만, 다행히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자는 없는 듯했다. 비요른 얀델에 흥미를 갖는 놈도 없어 보였고. ‘후,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무튼, 사슴뿔의 질문에 여우가 몇 가지 추가 답변을 해 준 것을 끝으로 세 번째 턴도 종료됐다. “자, 그럼 다음은 누가 하실래요? 계속 시계 방향으로?” “……클라운, 그대부터 해도 되겠소?’ “뭐, 원한다면야.” 초승달의 요구에 광대는 군말 없이 네 번째 순서를 맡았다. 내심 가장 기대하던 자의 순서. 하지만 이번에는 ‘재미있는’ 정보를 구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수사자 씨가 흥미를 느낄 얘기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일단 해보기는 하겠습니다.” 결속 마법을 얘기할 때와 달리, 광대는 그저 턴을 넘기겠다는 듯한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노아르크에서 봉쇄 직전에 몇 명을 지상으로 올려다 보냈습니다. 목표는 한 명의 탐험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는군요! 놀랍죠?” “암살자라……. 타깃이 누군지도 알고 있소?”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피싯!” 진의를 알아보기 힘든 미소를 마지막으로 네 번째 순서도 종료. 광대는 재밌었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하긴 얘 입장에서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 들은 것 중에 이게 가장 흥미로웠다는걸. ‘노아르크에서 보낸 암살자라…….’ 듣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설마, 얘가 위로 올려보냈다는 암살자 중 한 명인 걸까? 능력치를 보면 얘가 딱이긴 할 거 같은데. ‘그럼 죽이려는 목표는 아우릴 가비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그건 또 아닐 거 같았다. 개인적으로 찾는 것이라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거든. 아무튼, 일단 이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이제 내 차례구려.” 대망의 다섯 번째 순서가 시작됐다. 이번 턴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소생의 돌’을 바라는 초승달. 약속이 유효하냐고 묻던 걸 보면 꽤 자신이 있던 거 같던데. 과연 어떤 걸 준비해 왔을까? “다들 예전에 내가 ‘성물 탈취자’의 흔적에 대해서 말했던 걸 기억하오?” “물론이에요.” 초승달이 슬그머니 운을 떼자 나머지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고블린만 빼고. “예? 성물 탈취자라니요?” 당시에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고블린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뭐죠? 이번에도 창세보구와 관련된 정보인가요?” 여우가 호기심을 전혀 숨기지 않으며 말했고, 초승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세보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소.”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 창세보구. 심연의 문이 자리한 마지막 층으로 가기 위한 열쇠이기도 한 그것. “……창세보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확실한 정보인가? 너 혼자 그렇게 믿는 게 아니고?” “피싯, 이건 좀 충격이군요.” “어, 어, 어떻게 그게 없어질 수가 있습니까?” 모두가 귀환을 바라는 플레이어들인 만큼, 장내에 혼란이 가득 차기까지 잠깐이면 충분했다. 다만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을까? 초승달은 그저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을 마저 이어갈 뿐이었다. “나도 내 착각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오. 창세보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소.” “파, 파괴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소.” “하, 하지만 그건 파괴불가 템인데요!!” 충격이 컸는지 고블린이 징징거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때. 솨아아아아. 원탁 중심에 박힌 보석에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위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 “그래, 정말로……. 창세보구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거군.” 사슴뿔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이를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초승달이었다. “그래서 어떻소? 재미는 있으셨소?”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떻게든 노잼이라고 하려 했지만……. ‘아니, 여기서 어떻게 노잼이라고 해.’ 정보를 읊는 내내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던 초승달이다. 분명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가 흠칫 굳었던 것까지도 캐치를 했을 터. ‘어떡하지?’ 짧게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노잼이라 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니까……. “재주도 좋군.” 차라리 인정할 건 인정한다. 대신 다른 쪽에서 손해를 줄이자. “그 말은…….” ‘소생의 돌’이 목전에 다가왔다 생각했는지 초승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짧게 읊조렸다. “솔직히 말해서, 제법 인상 깊었다.” 물론, 이를 인정하면 잃는 게 많다. ‘소생의 돌’에 대해서도 알려 주는 건 둘째치고, 원하는 걸 얻은 초승달은 지금처럼 의욕적으로 정보를 물어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만든 수사자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공들여 준비한 ‘수사자를 웃겨라’ 코너가 첫 트라이에 클리어가 되다니? 영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씨익. 문제는 없다. 지금의 나는 비요른 얀델이 아니라 수사자’ 가면을 뒤집어쓴 고인물 아닌가. ‘오케이, 대사는 이 정도면 될 거 같고.’ 머릿속으로 최종 점검을 끝마친 즉시. 나는 초승달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가 놀랐던 건 창세보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라도 되듯이. 정확히 말하자면……. “창세보구가 사라진 걸 아는 자는 몇 안 될 텐데.” 아쉽지만,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다는 듯이. “……!” 뉘앙스를 눈치챈 초승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내가 사기를 치고 있단 것까지는 눈치채기 어려웠을까. 초승달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그대는 알고 있던 거였구려.” 그저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안 되면 대체 뭐로 만족을 시켜야 하지? 그런 절망감이 공기를 타고 내게 전해질 정도. 내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피시싯…….” 어색하게 웃는 광대만 봐도 그렇다. 이는 떡밥을 물은 모든 회원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피식.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소생의 돌은 9층에서 얻을 수 있다.” 장려상 정도는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솔직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199화 마스터 키 (4) 소생의 돌이 9층에 있다는 것. 사실 이 단서만으로 소생의 돌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 초승달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이 변태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던 유저이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단비나 다름없었을까. “어, 어째서…….” 초승달이 기쁨을 뒤로하고서 내게 묻는다. “어째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오?” 그는 못내 그 이유가 궁금한 듯했지만……. ‘수사자’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그러는 쪽이 재밌을 거 같으니까.” 초승달은 내 말의 저의를 곱씹듯이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대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구려.” 응? 갑자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가만히 턱을 괸 채 초승달을 바라봤다. 그러자 뒤늦게 실수했단 생각이 들었을까? “……방금 말은 잊어주시오.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구려. 그대가 어떤 자이든 상관없소. 그 물건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으니.” 결의를 하듯 읊조린 초승달이 자조 섞인 말을 끝에 덧붙였다. “뭐, 그런 내 사정쯤이야 그대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얘는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한 거지?’ 원탁에서 있었던 일들을 한 번 복기해 봤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이번에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늘 그랬듯, 그러면 절반은 가니까. “역시……. 정말 알고 있던 것이구려.”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조금 웃기지 않은가. 그저 관심 없는 얘기라는 듯 화제를 돌렸다. “이제 내 차례군.” 운을 떼자 가면들의 이목이 모였다. 과연 내가 이번엔 어떤 걸 말해 줄까 기대하는 눈치. 나는 왠지 모를 멋쩍음을 느끼며 준비해 온 정보 중 하나를 던졌다. ‘반데몬’처럼 들었을 때 신기하긴 하지만, 막상 알아도 쓸모가 없는 그런 정보. 심지어 ‘소생의 돌’처럼 임팩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피싯, 이번엔 저도 알고 있던 거군요.” 원탁의 보석이 초록빛을 자아냈음에도 어딘가 아쉬운 눈초리를 보내는 광대. 물론,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애초에 광대도 날 탓하기보다는 재밌는 걸 갖고 오지 못한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듯했고. “괜찮으면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데, 다들 어떠세요?” 한 번 쉬었던 만큼 준비해 온 것이 많은지, 한 바퀴를 끝낸 다음에도 집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초지일관 비슷한 류의 정보만을 뱉으며 턴을 넘겼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세 번째 바퀴가 시작됐다. “저, 저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빠지겠습니다.” 첫 순번이었던 고블린은 네 번이나 적색불을 받으며 힘겹게 턴을 넘기더니, 결국에는 백기를 꺼내들었다. 다만 고블린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밑천이 떨어진 사정은 비슷했을까? “흐음, 그럼 저도 여기까지만 해야겠네요.” 여우마저 기권 선언을 하며 자연스레 이번 바퀴를 끝으로 집회를 마무리 짓기로 결정됐다. 딱히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대충 들을 만한 건 전부 들은 거 같네.’ 노아르크와 왕가의 대립 이후 정세가 어떻게 흐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 슬슬 감이 잡힌다 해야 하나? 도시에 퍼진 소문이랑은 정반대였다. ‘역시 왕가 쪽이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구나.’ 이번에 토벌이 실패하며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는 지하도시 쪽도 마찬가지. 얘들 말만 들어 보면 노아르크의 도시 봉쇄는 마지막 발악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복제 불가능한 인식표도 제작이 됐다고 하니, 크게 계획을 수정하거나 하진 않아도 되겠네. 딱히 당장 위험해 보이는 이슈도 없는 것 같고.’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움직여 원탁을 보았다. 방금 전 초승달이 꺼낸 오르큘리스에 관한 정보에 녹색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 수사자 씨만 남았군요?” 자연스레 회원들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됐다. 왠지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쩝, 괜히 부담스럽게.’ 툭툭,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고민해 보았다. 과연 피날레는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이미 내정해 둔 게 있었지만, 지금 분위기에 더 알맞은 게 있을지 몰랐다. 실제로 머지않아 적당한 게 떠오르기도 했고. 툭. 나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멈추었다. 여기서 쓰려고 미리 준비해 왔던 정보들 중에 하나는 아니지만……. “고블린.” “예, 예?”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크게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는 고블린. 나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런 얘기를 했었지. 그 ‘영감’이 이 커뮤니티를 만든 GM보다 더 실력 있는 마법사일 수도 있다고.” ”아, 아! 예. 그랬습니다마는…….” 고블린은 내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말꼬리를 흐린 반면, 여우는 화색했다. “설마, 마스터에 관한 정보인 건가요?”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는 듯한 고블린보다는 낫지만……. “틀렸다.” 나는 여우를 싹 무시하며 고블린에게 말했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지만, 너희들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는 듯이. “이 커뮤니티는 GM이 만든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있던 곳을 지금의 형태로 개조한 것에 가깝지.” 예전에 이백호에게 들었던 정보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뱉었다. 그와 동시에 회원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원탁의 중심부에 박힌 보석. “……녹색이네요.”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놀랍진 않았다. 내가 직접 확인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이 정보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고 있지 않거든. “……GM이 만든 게 아니었을 줄이야.” “피시싯, 저도 이건 처음 알았군요.” “그럼 여기는 대체 누가 만든 거죠?” 의문을 쏟아내던 회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또다시 한곳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 의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존재. ‘오케이, 이 정도면 어그로는 잘 끌린 거 같고.’ 한껏 달아오른 정적 속에서 나는 말했다.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다음번에는 좀 더 재밌으면 좋겠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래야 더 쓸 만한 걸 갖고 올 거 아니야. *** “갔네요…….” 수사자가 떠난 원탁의 방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실로 간단한 이유였다.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한마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목소리에 실려 있던 감정. “……저희에게 화가 난 걸까요?” 여우의 중얼거림에 광대가 코웃음쳤다. “피싯, 여우 씨는 우리를 너무 높게 치는 거 같군요. 그 사람에게 우리가 화를 낼 가치라도 있을 거 같아요?” “그건…….” 뭐라 반박하려던 여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마스터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자네 정도라면 여기 참가해 봤자 얻을 게 없지 않은가.] 일반 플레이어는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 집회. 여우는 그동안 이곳에서 얻은 정보를 유익하게 사용해 왔다. 그렇기에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마스터의 말까지 들은 이상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수사자에게 이곳은 어떠한 메리트도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하기는 그런가?’ 여우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내지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재밌으면 좋겠군.] 재미. 조금이라도 무료함을 달래 줄 수 있을 무언가. 쉽게 말해, 심심풀이. 수사자가 이 집회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오직 그것 정도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어땠던가? 그것조차 제대로 못했다. 한데 그런 주제에 마냥 알려달라고 기대하기만 하다니……. “……한심하게 보였겠네요.” “그랬겠지. 그 남자는 마스터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니까. 조금 닮기는 했어도.” 여우는 사슴뿔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닮았다니요?” 그녀의 말을 받은 건 초승달이었다. “적어도 그가 이곳에 온 다음부터는 마스터의 빈자리를 느낄 일이 없지 않았소.” 슬슬 그녀도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마스터는 원탁에서 그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지금의 멤버를 모은 것도 그였으며,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귀중한 정보와 지식을 가르쳐줬던 것도 바로 그였다. “차이가 있다면, 수사자 씨는 마스터처럼 자원봉사나 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란 거겠죠. 피싯.” “자원봉사라니…….” “왜,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아니면 여우 씨는 정말로 마스터가 정보를 얻으려고 이런 장소를 만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여우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모두 광대의 말대로였으니까. 마스터는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낌없이 이를 알려 줬다. 마치 학생이 모인 교실 속 교사라도 된 것처럼. “피싯, 애초에 여우 씨가 마스터를 그렇게 따르는 것도 그래서지 않습니까.” 이번엔 여우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분을 은인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겠죠.” 이 집회가 유지되던 건 모두 마스터의 덕이다. 얼마 전 모습만 봐도 그렇다. 수사자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정 멤버는 넷이 전부였다. 마스터가 사라지자마자 회원들의 참석률이 확 줄어든 탓이다. 나머지 회원들은 고블린처럼 가끔가끔 들어와 마스터가 돌아왔는지나 확인하고 돌아가던 실정 아니던가. ‘아마 나머지도 이런 사람이 새로 들어온 걸 알면 계속 참가하겠지. 고블린 씨가 그랬듯이.’ 어째선지 기분이 묘했다. 다만 여우는 그런 감정을 뒤로하고 남은 회원들끼리 나누고 있는 대화에 집중했다. 화제는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던 마스터.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마스터와 친분이 있는 듯하던 수사자에 관한 대화였다. “분명 수사자는 우리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 본 사람일 것이오. 마스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라면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 “하긴, 그 악명 높은 ‘시체수집가’도 어린애 취급하시던 분이시니.” “어린애……. 예,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죠. 피시싯.”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추리의 시간. “마지막에 말한 정보도 의, 의미심장합니다. 이 커뮤니티를 만든 게 GM이 아니라니…….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수 있죠?” “글쎄, 어쩌면 GM과 아는 사이일지도.” “……그 소문만 무성한 GM과 말입니까?” “우리에게야 그렇겠지만, 마스터를 영감이라 부르던 자 아니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는 거겠지.” “그렇군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듯한 고블린의 모습에 광대가 물었다. “근데, 오늘은 왜 그러는 겁니까? 지난번엔 무슨 말을 하든 비약하는 것처럼 여기더니.” “……그때는 제가 그자에 대해 잘 모르던 때 아닙니까.” “피시싯, 그래도 달린 두 눈이 옹이구멍은 아니었군요?” 광대의 비꼼 아닌 비꼼에 고블린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사슴뿔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나만 느낀 건가?” “뭘 말하는 겁니까?” “마스터가 떠날 때, 의념을 느꼈는데.” “아, 그거 말이라면 저도 느꼈습니다마는.” “둘 다 잠시만요. 의념이라니? 그럼 ‘전언’을 썼다는 건가요?” 여우는 진심으로 놀랐다. ‘전언’이란, 영적세계인 이 공간에서만 쓸 수 있는 능력을 칭하는 말로, 일종의 텔레파시다. 원리는 살기와 비슷하다. 의념을 언어의 형태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 “그건 마스터도 쓰기 어려운 거라고 했던 건데…….” “후후, 여우 씨는 뭘 또 놀라는 겁니까? 그럼 수사자 씨가 그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 왠지 짜증나는 말투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광대의 말대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만한 살기를 뿜어대던 사내 아닌가. ‘전언’을 못 쓴다는 게 이상할 터. “아무튼, 그럼 떠나기 전에 마스터와 수사자 씨가 대화를 나눴다는 뜻이네요?” “예. 분명 둘이서 남몰래 할 얘기가 있었던 거겠죠.” “어떤 대화인지는 광대 씨도 모르고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마스터나 수사자 씨나 괴물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여우는 미련을 감추지 못하며 입맛을 다셨다. 둘의 대화를 알 수만 있다면, 마스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단서가 됐을 수도 있을 텐데……. “킥,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던 건 아닙니다.” “네? 소득이라니요?” 이어진 광대의 말에 여우는 정신을 차렸다. 귀를 쫑긋 세운 그녀의 자세가 마음에 드는지 광대가 피시싯 웃었다.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발, 조금만 더 설명을 곁들여 주실래요?” “수사자 씨의 의념 말입니다! 정말 심혈을 기울였는데 조금도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희미하게라도 느낄 수 있던 마스터와 달리.” ‘전언’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여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한들, 그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으니까. “잠시만요. 그 말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여우를 대신해 광대가 오늘 얻어낸 ‘소득’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예. 어쩌면 수사자 씨는 마스터보다 더한 괴물일지도 모릅니다.” 실로 충격적인 추측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묵. “저…….” 그때 고블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마스터만 말하고 갔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광대 씨가 의념을 느끼지 못한 것도 설명……. 아, 아니,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해본 말입니다. 해본 말. 진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이후로도 침묵은 한동안 계속됐다. 200화 마스터 키 (5) 닉네임 ‘Elfnunalove’. 공적으로는 ‘Ghost master’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그 정체에 대해 소문만 무성한 플레이어. 그가 천천히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다. “…….” 딱 자정을 넘긴 시각. 장소는 마탑 상층부에 위치한 개인 연구실. 늘 그랬듯 그는 잠시간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그자는 어떻게 나오려나?’ 오늘 그는 커뮤니티에 입장하자마자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영구 출입 금지 제한을 걸었다. 그 대상은 ‘Sergeant Lee’. 이병장이라는 특이한 닉네임을 쓰는 한국 출신의 유저였다. ‘지금쯤 분명 날 찾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을 텐데.’ 그 역시 ‘이병장’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병장’은 가장 ‘열쇠’에 근접한 자일뿐더러, 누구보다 강한 무력을 소유한 플레이어이기도 하니까. ……지구 출신 중에서는 말이다. ‘……말로 해서 들어먹지 않은 건 그쪽이니까.’ 잠자던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은 됐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영구 벤을 때리기 전에 했던 마지막 회유. 이를 거절한 건 이병장 쪽 아니던가. 물론 그쪽 사정을 이해하기에 지금까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언제까지고 배려해 줄 수만은 없는 법. 이제 그 역시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한텐 좀 미안하게 됐네.’ 상념을 이어가던 그의 사고가 자연스레 한 사내에게로 이어졌다. ‘Elfnunna’란 닉네임을 쓰던 한국인 유저. ‘그 사람도 그분의 팬인 거 같던데.’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 유저와 마주쳐 본 그는 알고 있다.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적은지. 플레이어 중 한국인의 비율은 1%도 안 된다. 동향 사람을 애타게 찾던 ‘이병장’이 마지막에 제발 몇 마디 말이라도 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을 하던 것도 괜한 일은 아닌 셈. ‘이렇게 생각하면 참 웃긴 사람이란 말이야. 그렇게 동향이 그리우면 다 같이 협력해서 게임을 깨고 돌아갈 생각을 해야지.’ 사내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그의 수정구가 진동이 울리며 연락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먼저 연락이라니, 뭔가 그쪽에서도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소울퀸즈 님.” [네.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접속 기록이 발견돼서요.] “이상한 접속 기록?” 사내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자신만큼이나 이 공간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그녀의 말이니, 분명 시답잖은 이현상은 아닐 터. [접속 기록은 있는데 누구인지도 나와 있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접속 시간이 3시경으로 나와 있어요.] “중간에 커뮤니티에 입장했다는 뜻이군요.” [네. 그래서 저도 그게 너무 이상해서…….] “잠시, 생각할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사내는 통화를 유지한 채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사고가속’에 몇 가지 술식을 덧붙여서 만든 그만의 조합 마법 ‘명상’. 금방 한 사람이 떠올랐다. “원탁의 감시자.” [아! 1년 전에 벤 처분을 내린 그 수상한 사람!] 닉네임 ‘0720’.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다. 신입의 커뮤니티 입장을 돕는 안내역 모두에게서 입장을 도왔던 기억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추후 그의 내면에 들어섰다가 이곳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수상해서 벤을 때렸다. 보통은 현대의 옷을 입고 있으니까. 어디서 알약을 구해 몰래 이곳에 침입한 왕가의 스파이라 판단했다. 그도 아니면, 지구가 아닌 다른 곳 출신의 플레이어든가. ‘……무엇보다 노인의 모습이었고.’ 플레이어들은 대체로 젊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이런 변태 같은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 아닌가. 아무래도 70이 넘는 고령의 노인이 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모습은 쉬이 연상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원탁의 감시자가 우리 눈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그들의 모임 같은 걸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때 남은 회원들은 정상이라고 판단하시지 않았어요?] “예. 그때는 그랬죠. 하지만 혹시 모르니 소울퀸즈 님이 저 대신 들어가서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거기는 비공개 채팅방일 텐데요.] “초대 코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몇 달쯤 걸리긴 하겠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네, 그렇다면야…….] 이내 소울퀸즈가 그러겠노라 대답하였고, 이를 끝으로 사내 역시 통화를 끝내려 했다. 더 자세한 건 다음 달에 들어가서 재차 확인을 해봐야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니까.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소울퀸즈 님, ‘Elfnunna’라는 플레이어를 기억하십니까?” 왠지 그 닉네임이 떠오른 사내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 그분요? 몇 달 전에 들어오신 분인데, 특이해서 확실하게 기억해요. 닉네임도 그렇고, 무엇보다 다른 쪽도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인상 깊었다면?” [내면세계의 공간이 하나도 안 보였거든요. 이 일을 하면서 그렇게까지 정신방벽이 두터운 사람은 난생처음이었죠.] “……그렇군요.” 사내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정신방벽이 유난히 두텁다는 거야 개인에 따른 편차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소울퀸즈는 안내역으로 활동한 기간이 짧기도 했고. 하지만,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명상’ 상태에서는 ‘직감’ 수치도 상승하기에 사내는 그 감정을 기분 탓으로만 치부하지 않았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사내는 양해를 구한 뒤 머릿속에 기록한 활자를 확인했다 정확히는 소울퀸즈가 말한 엘프눈나의 입장 시기에 편지를 발송했던 자들의 내역이었다. ‘전부 뉴비들이군.’ 혹시 알약을 나중에 먹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3개월 단위로 확대를 해 봤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5층 이상까지 간 플레이어도 없었다. 근데 그렇게까지 정신방벽이 높을 수가 있나? “……비요른 얀델?” 범위를 더 넓혀 확인을 해가던 사내의 눈에 한 이름이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드물게도 방패를 고른 바바리안. 그래서 혹시나 ‘그분’일까 봐 편지를 보냈지만,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의심을 거뒀던 탐험가. “소울퀸즈 님.” 사내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엘프눈나라는 유저에 대해서 조사해 보세요. 게시글은 뭘 남겼고, GP는 얼마이며 어떤 정보를 구매했는지. 삭제된 걸 전부 복원을 해서라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 커뮤니티가 열린 다음 날 아침. 아멜리아가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아침? 이미 정오는 됐다마는.” 거, 바바리안이 늦게 일어날 수도 있지. 텁텁한 목에 물 한 컵을 털어 넣으며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보통 아멜리아가 출몰하는 시간은 저녁이었다. 어제 헤어질 때도 그 시간쯤에 보기로 했고. 그런데 왜 이런 대낮에 날 찾아온 걸까?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실로 간단했다. “왠지,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떠난다는 뜻이군.” “그래, 그러니 수색은 이제 그만해도 좋다.” 말투를 보아하니 ‘아우릴 가비스’를 찾았기에 떠난다는 건 아닌 듯한데……. 나는 자연스럽게 떠보았다. “뭔가 할 일이 생겼나 보군.”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매일 도시에 가서 뭔가 바쁘게 움직이던 여자 아닌가. [노아르크에서 봉쇄 직전에 몇 명을 지상으로 올려다 보냈습니다. 목표는 한 명의 탐험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는군요! 놀랍죠?] 어쩌면 광대가 말했던, 암살 작전이 오늘 시작되려는 걸지도 모르지. 괜히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나중에 또 와서 그를 찾을 건가? 필요하면 이쪽에 말을 해 둘 수도 있는데.” 나는 선의의 제안을 꺼냈다. 그야 얘는 은원에 민감한 타입이었으니까. 일단 빚을 지워두면 도움이 되리란 판단.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런 방식으로 그를 찾아내는 건 어려울 거 같으니.” “그렇군.” 아멜리아의 거절에 굳이 다시 제안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끝난 대화. “그럼 다음에 또 보지.” 나는 짧게 작별의 말을 던졌고, 아멜리아는 그런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다음에 또 보자니, 그건 무슨 뜻이지?” 아, 그게 궁금했던 거구나. 하긴, 제발 앞으로 얽히는 일이 없게 하자며 학을 떼던 게 나니까. 얘로선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을 거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왠지 너와는 또 만날 거 같아서.” 우연히 마주친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분명 한 번은 더 마주칠 일이 있을 것이다. “……이상한 녀석.” 아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평소처럼 눈앞에서 쓱 사라졌다. 그럼 이제 나도 오늘 하루를 시작할 차례. 띠잉-!! 우선 침대 옆에 만든 호출벨부터 세게 눌렀다. “부르셨습니까.” 오른팔답게 1분도 되지 않아서 등장한 징징이. 일단 수색 중지 명령부터 내린 뒤, 점심 식사만 간단히 하고서 함께 외출했다. 매일 하던 식후 산책이다. 비프론에선 달리 할 게 없거든. “배급소로 가지.” “배급소…… 말입니까?”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가까운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오늘 산책의 목표지는 비프론에 총 12개 있는 배급소 중 하나. 도착하니 길게 선 줄이 보였다. 매일 아침 도시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배급받기 위한 줄. 며칠 전만 해도 보기 어렵던 모습이었다. 원래는 각 세력들이 배급소를 점거하고서 이를 독점했었거든. “말씀대로 적어도 미성년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게 했습니다.” “좋아, 계속 이렇게만 하도록.”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줄을 흐뭇하게 보던 나는 이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며 도시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낯익은 꼬마가 보였다. 비프론에 도착한 첫날 길안내를 해준다며 그 여관으로 데려갔던 바로 그 꼬마. “이리 와라.” “옙!”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던 꼬마가 내 앞에 다가와 차렷 자세로 섰다. “어딜 가는 길이지?” “배, 배급소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때보다 조금 더 살이 쪘군.” “네에…….” 사실상 비프론의 1인자가 되어서일까? 그날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뭔가 해코지를 한 적 없건만 꼬마는 몸을 벌벌 떨었다. 쩝, 그냥 반가워서 불렀던 건데. 이게 바로 절대자의 고독함인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 “나, 남는 시간엔 책을 읽어요. 야, 얀델 님이 만들어 주신 그 도서관에서…….” 내가 만든 도서관은 아니고, 먼지만 쌓여 가던 도서관을 다시 활성화시킨 것에 가깝다. 불쏘시개로 쓰인 책이 하도 많아서 아직 빈 책장이 훨씬 많기는 하다마는. 책이란 책은 다 모아서 채워 넣으란 지시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매, 맹세코 그때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노역소에 등록을 해서 착실하게 벌고 있고요!”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불안해졌는지,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변명을 시작한 꼬마. “그러고 보면 꿈이 학자랬지.” “네, 네!” 나는 피식 웃으며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계속 그렇게만 살아라. 남들 뒤통수치면서 돈을 벌다 머리에 문제가 생기고, 그럼 언젠가 없어지는 날이 오고야 마니까.” “……네?” “머리가 없으면 학자는 못하지 않나.” “네? 아, 네에…….”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으나, 나는 구태여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꼰대 바바리안이 되는 건 사양이니까. “가지.” 이후 징징이와 함께 산책을 마저 이어갔다. 배급소, 도서관, 주거 시설, 노역소 등. 아우릴 가비스를 찾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이것저것 불합리한 부분들을 손댔더니, 확실히 처음 왔을 때보다는 도시에 활기가 돌았다. 각 세력의 횡포가 사라진 게 가장 컸다. ‘뭐, 내가 없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징징이를 이끌고 하수도로 향했다. “저, 여기는 왜…….” 묘한 목소리로 몸을 떨며 나를 보는 징징이. 거, 누가 보면 내가 널 죽이고 여기다 묻으려는 줄 알겠네. “잠시 도시에 다녀올 건데,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예?” 어지간하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할 일이 없던 징징이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도, 도, 도시에 다녀온다니요……?” “아, 말하지 않았나? 도시와 이어진 통로가 있다.” “그, 그, 그, 그, 그, 그, 그…… 그럴 리가?” “왜 말을 더듬나?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가?” “아닙… 니다.” 며칠 뒤면 해방된다는 생각뿐이었을 징징이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만 뒤늦게 블러핑이란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필요한 게 없다니—” “아뇨!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징징이는 도시로 간다는 내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9구역에 있는 어느 가게의 꼬치였다. “갖고 왔을 때쯤이면 다 식어 있을 텐데?” “그건 괜찮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뭔 생각을 하는지야 빤했다. 정말 도시에 다녀올 수단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겠다는 거겠지. “그럼 너는 이만 돌아가 봐라.” “예, 알겠습니다.” 이후 나는 징징이를 보낸 후 하수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알려 준 비밀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차였다. 지이이잉. 혹시 몰라 아공간이 아니라 늘 품에 갖고 있던 메시지스톤이 울렸다. 용아저씨에게 받았던 그것이었다. 지난날, 용살검을 대가로 요구한 ‘용의 축복’을 내게 해 줘도 될지 결정이 나면 연락을 하기로 했었다. ‘한두 달쯤 걸릴 거라더니, 딱 두 달이 걸렸네.’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하단부에 튀어나온 버튼을 누르자, 그 너머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줬던 종이를 찢게.]. “그보다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한데.” [장로들이 자네를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했네.] “그렇군.” 나는 지시대로 아공간에 쑤셔 박아 뒀던 종이를 찢었다.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라…….’ 기대했던 ‘YES’는 아니었지만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설령 안 된다고 해도 되게 만드는 것. 그것이 K-바바리안의 정신이니까. 201화 축복 (1) 하수도 바닥에서 피어난 마법진. 그곳에서 뿜어진 빛을 가만히 맞고 있자니 어느새 퀴퀴한 오물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왔군.” 그때도 왔었던 용의 신전이었다. 맨 앞에 용아저씨가 보였고, 그 뒤에 서 있는 여섯 명의 용인족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이 아까 말한 장로들일 터.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 눈이었지만, 저들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한 번 전투 함성. “베헬—라아아아아아!!!”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기에 [야성분출]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그로가 끌렸을까. 장로들이 인상을 팍 쓰며 나를 응시한다. 흡사 이게 뭔가 하는 표정. “아, 미안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하자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에 대한 경험이 있던 용아저씨가 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이건, 칭찬이겠지? 자기소개용 함성도 마쳤겠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냐?” 용의 축복을 바바리안인 내게 해줘도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용아저씨는 장로들이 나를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얼굴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닐 터. 이들은 과연 내게 어떠한 ‘검증’을 하려는 걸까. “별거 아니네.” 용아저씨가 말했다. “최종적으로 의견을 모아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장로들이 돌아가며 자네에게 한 가지 질문, 혹은 요구를 할 걸세.” “질문은 알겠는데, 요구는 무슨 뜻이지?” “글쎄,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군.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거절해도 된단 것만 알아주게.” 거절해도 되기는 개뿔. 그럼 좋다고 반대표를 날릴 게 뻔하구만. ‘용의 축복이라 그런가? 더럽게 깐깐하게들 구네.’ “어떤가? 하겠는가?”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용살검까지 돌려주는 마당에 원하는 게 많단 생각은 들지만……. 단언컨대, 용의 축복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 “좋아, 그럼 결정이 났군. 괜히 시간 끌 것도 없으니 바로 시작하겠나?” “좋다.” 내 대답에 용아저씨가 뒤에 있던 장로를 힐끗 바라봤다. 슬슬 ‘검증’을 시작하라는 뜻.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두 명뿐인 여성 용인 중 한 명이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용인족 특성상 외모로 나이를 짐작하는 건 무의미했지만, 말투나 눈빛이 주는 분위기는 이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젊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당신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이죠?” 그 질문을 듣자마자 이 청문회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정말 단어 그대로 검증이었다. ‘용의 축복’이라는 용인의 비술을 타 종족에게 전수하기 전에 어떤 인물인지를 확인하는 것.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구로의 귀환? 그래 봤자, 결국 부차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살아남는 것.” 내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서는 조금 바뀌었다. 생존이 최우선인 것은 다름없으나, 한 가지 덧붙일 게 생겼다. “가능하다면 내 동료들과 함께.” 그리 답하면서도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이 낯선 세상에 떨어지고서,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답변에 대한 피드백은 어떨까. “……그렇군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보던 용인 여성은 한 가지를 추가로 물었다. “당신의 희생으로 동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질문이나 요구는 하나씩만 한다고 하지 않았나?” “원한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용인 여성은 정말 그래도 상관없다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고, 나는 이번에도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팀 반푼이의 마법사였던 리올 워브 드왈키. 과연 내가 녀석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역시 이 대답뿐이다. 그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 그 어떤 말과 다짐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아니까. 죽음은 언제나 인간을 시험대에 앞에 세운다. “하지만, 그때가 오면 나는 내가 해야 되는 선택을 할 거다.” “……그냥 그럴 거라고 답해도 됐을 텐데요.” 용인 여성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짧게 일축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런 짓은, 그 녀석에게도 예의가 아닐 테니까. 내게 있었던 일을 알 리가 만무한 용인 여성은 잠시 날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뒤로 물러났다. “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 없는 표정.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음 차례가 시작됐다. “게오르나베하누테르스다.” 내게 밀리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체격을 소유한 중년 사내는 질문 대신 한 가지 요구를 해 왔다. “나랑 한판 붙자.” 드래곤 피어까지 슬그머니 뿜어내며 건넨 제안. 나는 순간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좋다.” 바바리안 전사로서 저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 게다가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용인족 장로라면 7층쯤은 될 것 아닌가. 죽을 걱정 없이 싸워 볼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판단이었으나……. “그만들 하시게.” 도중에 용아저씨가 끼어들었다. “그런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지 않나.” “주먹을 맞대는 것보다 확실한 게 어딨다고? 그렇지 않나? 바바리안 전사여?” 어, 난 메이스를 쓸 거였는데……. 장비도 실력이라 생각하는 나지만, 일단 그의 말에는 긍정을 해주었다. “물론이다.” “하하핫! 마음에 드는 놈이라니까!” 그런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대차게 웃어 젖히는 마초 용인. “……설마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대답할지는 몰랐습니다마는.” 다른 장로도 이 상황이 흥미로운 눈치였다. “그래서 어쩔 거지?” “그럼 나도 질문이나 하나 하고 넘어가지.” 마초 용인이 아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바바리안, 네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이냐?” 처음 떠오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첫 질문과 동일한 대답을 하는 건 여러모로 면접에 있어 좋지 않을 터. 나는 이를 조금 더 구체화해서 대답했다. “나보다 강한 자와 싸우는 것이다.” “…뭐?”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마초 용인. 다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설마 넌 내가 너보다 약하다 생각한 거냐?” 마초 용인이 조금은 화난 것처럼 물었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너는 방금…….” “너는 날 죽일 생각이 없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나는 말을 끊으며 짧게 읊조렸다. “두렵기에 싸워야 한다. 더욱더 많이.” 누군가에겐 바바리안답지 않은 말로 들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바바리안의 본질일 터인데. 다행히 내 말의 뜻은 잘 전달된 듯했다. “두렵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그 순간을 준비한다라…… 실로 합리적인 답이군.” 마초 용인이 피식 웃었다. “재밌군. 바바리안은 전부 너 같은가?” “비슷하다.” 실제로 내게 ‘전사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 준 것은 아이나르였고, 그때 해준 조언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렇군. 내 질문은 여기까지다.” 이내 마초 용인이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자리로 돌아갔다.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일단 한 표는 확실히 얻었네. *** 세 번째도 요구가 아닌 질문이었다. 그것도 꽤나 이상한 질문. “당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없다.” “대답이 조금 늦었어. 생각난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네.” 어딘가 졸린 눈을 한 여성 용인은 추가로 더 묻는 일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네 번째 차례. “나는 자네의 통찰력을 시험해 보겠네.” 백발이 무성한 할배 용인이 내게 한 물건을 건넸다. 뭐 하는 용도의 물건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고리 퍼즐. “자, 이걸 모두 분리해 보게.” 허, 설마 이런 미션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도움을 주자면 정확한 순서, 정확한 방법을 사용해야지만 모두 분리할 수 있을 걸세.” 이내 고리 퍼즐을 넘겨받자 할배 용인이 씨익 웃으며 힌트까지 주었다. 아마 절대 내가 풀지 못하리라 여긴 모양. 거, 내가 진짜 바바리안인 줄 아나. 고리 퍼즐이라면 어렸을 때 병원에서 많이 갖고 놀았던 것이다. “시간은 원하는 만큼 주겠네. 때로는 끈기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법도 있는 법이니.” 나는 고리 퍼즐을 잡고서 일단 상하좌우로 살펴보며 구조부터 확인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결코 풀지 못할 리가 없다. 음, 분명 그랬어야 할 터인데……. “후후, 5분 지났네.” 니미럴. 이거 대체 뭐야? “10분 지났네마는. 아직 멀었는가?”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시간을 더 준다고 해서 뭔가 답이 나올 거 같지 않다는걸. 따라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거대화.’ 순식간에 부푸는 몸체. 나는 더욱 커다래진 양손으로 고리를 잡고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콰직. 마침내 일곱 개의 고리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무, 무슨 짓인가!!!” “분리했다.” “……그, 그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부수지 말라는 말은 없었지 않나.”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야 이 퍼즐의 함정은 이미 눈치챘으니까. 처음에 이 할배는 지성이 아니라 통찰력을 시험하겠다고 말하였다. 끈기를 통해 도달하는 진리라는 힌트도 줬고. 그 말인즉슨, 이 고리 퍼즐은 애초에 푸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마 이걸 나한테 준 건 답이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려고 했던 거겠—’ “이, 이렇게! 이렇게 하면 풀리는 건데……!” 할배 용인이 멍하니 주저앉아 몇 피스가 더 늘어난 고리 퍼즐을 조물딱거리며 읊조렸다. 어딘가 굉장히 슬픈 눈빛이었다. “크흐흠.” “다,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건데…….” “다음은 누구지?” 애써 할배 용인을 무시하며 장로들을 보았고, 이로써 검증이 다시 재개됐다. 다섯 번째는 내 행적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대는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는가?” 나는 머릿속으로 그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린 뒤 정확한 숫자를 말해 주었고, 장로는 왜 죽였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답변은 어렵지 않았다. 죽인 방법은 여럿이었으나, 이유를 찾아보면 결국 하나였다. “날 죽이려 했으니까.” “그렇군.” 질문을 던졌던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난 것으로 다섯 번째도 끝. 어느덧 청문회도 마지막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잘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저 퍼즐을 줬던 노인네는 반대하는 쪽일 거 같고…….’ 마초 용인은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나머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럼 이제 제 차례군요.” 이내 20대 중후반의 외모를 지닌 잘생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한 가지를 물었다. “당신은 진실만을 얘기했습니까?” 마치 진위를 가릴 능력이라도 있는 듯한 말투. 못내 그것이 찜찜하기는 했으나, 나는 여태껏 모든 질문에 사실로만 대답했다. 만약 탈락한다면 그때 K-바바리안, 줄여서 KB식 협상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 “그렇다.” “자, 그럼 끝이군.” 아무튼, 이로써 청문회가 끝났다. 마지막 차례였던 사내와 눈빛을 주고받던 용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끼리 좀 더 얘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으니, 자네는 잠시 쉬고 있게.” “오래 기다려야 하나?” “글쎄, 보아하니 한 시간이면 끝날 거 같군.” 음, 그 정도라면야. 이후 나는 첫 질문을 했던 용인 여자의 안내를 받아 신전 내부로 향했다. 그리고 방 하나에 도착했다. 쉬라면서 안내하기에 당연히 손님을 위한 접객실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쪽이 오늘 오기로 했다던 그 바바리안?” 방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십대 초반의 외견을 가진 어느 이름 모를 용인족 꼬마. 꼬마가 날 보더니 꺄르르 웃었다. “와, 더럽게 못생겼다!” 대체 뭐지? 이 되바라진 꼬맹이는? 느닷없는 선빵에 머리가 멍해졌지만, 어른답게 태연히 웃어넘겼다. “하하, 그러는 너는 엄마가 없는 모양이군?” “……에?”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그런 이상한 거짓말은 할 리가 없지 않나!” 비요른 얀델은 남자답게 생긴 것이지 결코 못생기지 않았다. 202화 축복 (2) 복수의 길을 떠나려면 두 개의 무덤을 파라. 공자가 한 말이다. 다만 내가 본 책에는 그 문장만 적혀 있을 뿐,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하면, 공자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각오의 중요성? 아니면, 단지 복수가 얼마나 자기파멸적이며 위험한 선택인지? 21세기의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기에 그냥 좀 더 가슴에 와닿는 쪽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래, 공자는 알았던 것이다. 사람을 패려고 할 땐, 자기도 처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걸. ‘근데 그런 것도 몰랐던 모양이군.’ 나는 입맛을 다시며 꼬마를 응시했다. 초대면부터 인신공격을 꼬라박았던 꼬마는 넋을 잃고서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방금 한 말······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되는데······.” 어려운 단어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된다는 건 ‘말’이 아니라 이 ‘상황’ 자체를 뜻하는 거겠지. 음, 아닌가? “왜, 왜 내가 엄마가 없어!!” 꼬마가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고, 나는 짧게 되물었다. “그럼 있나?” “아니, 돌아가시기는 했는데······.” 꼬마가 움찔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조금 당황했다. 설마, 이 질문에 ‘Yes’가 나올 줄이야. 물론, 문제는 없었다. “역시.”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엄마가 없는 것?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엄마 없이 자란 건 비요른 얀델도 마찬가지. 더군다나 용인족 특성상, 얘도 외모만 어리지 실제 나이는 얘가 나보다 많을 것이다. 선제 공격에 대한 응징을 멈출 이유가 없는 셈. “그,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티가 난다.” “티가··· 난다고?” “그래,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꼬마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패드립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가족과 관련된 말은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어, 이것도 아닌가? “사과해, 바바리안! 거짓말이라니?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했어!” 어느 정도 멘탈을 회복한 꼬마가 ‘거짓말’로 몰아간 것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렸다. 왠지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시큰했다. 저렇게까지 전력으로 부정하다니. 더럽게 못생겼단 말이 그만큼 진심이었다는 뜻 아닌가. 비요른 얀델이었다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는 없었다. 되로 받으면 말로 되돌려 주는 한국의 정을 지닌 K-바바리안. 그게 바로 나니까. “거짓말을 한 것도 모른다라······.” 나는 동정의 눈으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저런, 설마 아빠까지 없었을—” “있어! 아빠는 있다고! 이 미친놈아!!” 내 말을 끊으며 소리치는 꼬마. 따라서 나도 이쯤에서 인성질을 끝냈다. 이 정도면 바바리안한테 함부로 까불었다가 큰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깨달음은 전해졌을 터. 게다가 일단 이곳은 용인의 홈그라운드— ‘어, 근데 장로는 왜 가만히 있지?’ 그제야 이질감을 느낀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흥미롭다는 듯 나를 관망하고 있는 용인족 장로가 보였다. “굉장하시군요.” 응? “페니타스에아우로스 님을 저렇게 화나게 만든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인 꼬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쉬익쉬익 숨을 거칠게 뱉으며 나를 꼬라보고 있다. 다만, 나는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님?’ 장로가 이름 뒤에 존칭을 붙였다. 그 말인즉슨, 이 꼬마의 신분이 용인족 내에서 상당한 위치라는 뜻. 아니, 잠깐만······. “설마, 얘가 무녀인가?” 용의 무녀. 바바리안족에 하나뿐인 주술사와 비슷한 느낌의 포지션. 쉽게 말해, ‘축복’은 얘만 쓸 수 있다. “아, 모르셨나요?” “······.” 말해 줬어야 알지. 이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꼬마가 이전과 달리 기세등등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제라도 사과할 생각이 들었어?” 입가에 맺힌 것은 명백한 조소. 잠시 고민한 나는 결국 태도를 그대로 이어나가기로 했다. “꼬맹이,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너, 축복을 새기고 싶다고 했다면서?” 그건 그렇다. 하지만 무녀라고 해도 족장인 용아저씨보다는 아래 아닌가. 저쪽에서 OK가 나오면 얘도 어쩔 수 없이 내게 축복을 새겨줘야 할 터. “그건 태고룡이 결정할 문제다.” 내 말에 꼬마가 씨익 웃었다. “아, 우리 아빠?” “······.” 나는 웃고 있던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아니, 용아저씨 딸내미였냐고······. *** 일족의 무녀이자 태고룡의 딸. 실로 어마어마한 신분이 아닐 수 없다마는, 이제 와서 사과한다는 선택지를 머리에서 지웠다. 그건 바바리안답지 않다. 무엇보다, 사과를 하면 내가 더럽게 못생긴 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기도 하고. “······뭘 쳐다보나?” “아닌데? 안 쳐다봤는데?” 꼬마의 충격적인 신분 공개 이후, 나와 꼬마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미묘한 기싸움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두 분 다 그쯤 하시죠.” 장로가 화해를 주선했다. 아니, 정확히는 둘 다 혼냈다는 게 맞다. “비요른 얀델, 아까 무녀님께 한 발언은 몹시 무례했어요. 당신이 서 있는 이곳은 우리의 영이 깃든 신전. 아무리 바바리안이라고 한들, 존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내 잘못을 지적한 장로는 남몰래 웃고 있던 꼬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잘못한 건 무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비요른 얀델은 태고룡의 손님이며, 일족의 은인이에요. 초면에 외모를 갖고 품평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때로는 침묵해야 할 순간도 있는 거예요. 설령 그게 진실일지라도.” 꼬마가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고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뭐지? 돌려까는 건가?’ 진실일지라도 침묵하라니? 더럽게 못생겼다는 말엔 자기도 동의하지만, 그걸 말한 게 잘못이라는 뜻 아닌가. “그럼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저는 이만.” 이내 장로는 뼈가 욱신욱신한 나를 내버려두고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마냥 서 있기도 그래서 대충 바닥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숨 막히는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꼬마 쪽이었다. “얘기나 해봐.” “······?” “탐험가였다면서? 재밌는 이야기 없어?” “······내가 왜 해줘야 하지?” 내 질문에 꼬마가 짜증난다는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리고 난 그 힘의 성질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해가 안 되는데.” “아, 그러니까 당신이 가진 파장에 익숙해져야 이따가 축복을 새기든 할 거 아니야. 아마 아빠도 그래서 당신을 일찍 이리로 보낸 걸 테고.” 말에 깃든 힘이나 파장에 관한 설정은 처음 듣는다. 다만 그런 것보다 더 내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이미 결정이 났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거절이었다면, 당신이 이 방에 오는 일도 없었을걸.” “그럼, 저쪽에서 하고 있는 회의는 뭐지?” “글쎄? 그냥 해주기에는 너무 쉬워 보인다고 생각했나 보지.” 음, 왠지 정말 그랬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무튼, 그러니까 아무 말이나 해 봐. 계속 대화를 나눠야 파장을 읽을 수가 있어. 그래야 축복을 새길 때 당신 몸에도 부담이 조금이라도 덜할 테고.” 첫 대면과 달리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었기에 적응이 안 됐지만, 나는 순순히 요구를 따랐다. “특히 궁금한 부분이 있나?” “왜 탐험가가 됐는지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들은 전사로 태어났다. 싸우지 못하면 죽는다.” “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됐다는 거야?” 뭐, 풀어서 말하면 그렇지. “우리는 너희처럼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 “아, 그렇구나······.” 용인족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이종족들은 매일 세금에 허덕이는 실정이고. “보통 종족 차원에서 세금 낼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바바리안은 아니야?”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한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는 아니다.” 드워프는 대장장이가 되면 세금이 감면된다. 수인과 요정은 고유 능력으로 ‘노움트리’에서 농축산 일을 돕기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래서 2년 차까지는 무이자로 대출을 해줘서 어지간하면 세금사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바바리안은? 무기 하나 주는 게 끝이다. ‘내가 부족장이 되면 기부금부터 받아서 전부 뜯어고쳐야지.’ 냉정하게 바바리안은 가장 뒤처졌다.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근데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였을까? “······이건 됐으니까, 그럼 그 얘기해 줘.” 꼬마 쪽에서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기?” “숙부······ 아니, 용살자랑 싸웠다면서?” 아, 그거. 그나마 꼬마와 내 유일한 접점이라 할 수 있기에 나는 당시 있었던 일을 살짝 각색해서 설명했다. 별건 아니고 불리할 수 있는 부분들을 뺐다. 오우거의 정수를 얻은 방법이나, 악령으로 의심받을 수 있을 만한 그런 것들. 그걸 빼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리올 워브 드왈키······. 왠지 한동안 계속 기억이 날 거 같은 이름이네.” 이 얘기를 들었던 모두가 그러했듯, 꼬마는 드왈키 파트를 가장 집중해서 들었다. 사실 이런 반응이 있을 때면 내심 뿌듯했다. 그 녀석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정받는 기분이라서. “검······. 그런 식으로 얻어냈던 거구나. 당신, 진짜 무식하기 짝이 없네. 아무튼,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용살자 얘기가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동료를 구하는 파트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조금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됐다. “그거 알아? 어쩌면 우리 언니가 그 팀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거.” 용아저씨가 제안했던 2년 계약제 ‘동료’를 말하는 듯한데······. “언니는 어떤 사람이지?” “착해. 바빠서 자주는 못 보지만.” 아니, 성격이 아니라 얼마나 강한지를 물어본 거였는데. 내심 궁금했던 부분인지라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보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방문이 열렸거든. “다퉜다더니, 사이가 좋군?” 안으로 들어선 용아저씨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우리를 보고 씨익 웃었다. 덕분에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아까 그 장로, 내가 얘한테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전하지 않았구나. 가정 교육 얘기를 들었으면 저런 표정은 절대 짓지 못했을 텐데. “그래서 결과는 나왔나?” “나왔네.” 거, 그럼 그냥 결과부터 말해 주면 될 것을. “어떻게 됐지?” “자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꼬마를 힐끗 쳐다봤다. 얘가 했던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 있었다. 결과는 나왔고, 회의를 한 시간이나 하는 건 그냥 자존심 때문이라던가? ‘애초에 이상한 질문을 하던 것도 이런 이유였던 거 아니야?’ 그런 합리적인 의심까지 생겨나던 때였다. 용아저씨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조건?” “자네가 신탁을 받은 것은 레아틀라스교를 통해 확인했네. 자네는 아마 언젠가 분명 리갈 바고스··· 용살자와 재회하게 되겠지.” “알겠으니, 어서 말이나 해 봐라.” “그때 녀석을 죽일 수 있다면, 심장을 가져다주게.” “······심장? 그건 왜 필요한 거지?” 의미심장한 조건이기에 일단 이유부터 물었다 그러자 대답은 꼬마에게서 들려왔다. “나 때문이야. 그 일이 있었을 때, 숙부한테 저주를 건 게 나였거든.” “저주라면······.” 용인이되 용인이 아니게 되는 저주였다. 그래서 리갈 바고스는 용언을 쓰는 데 제약이 생겼고, 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얻어낸 용살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잠깐만, 근데 그건 전대 태고룡이 남긴 저주 아니었나?”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네마는. 실제로 그 저주를 건 것은 우리 딸이었네.” “······그랬군.” 용인족의 비화를 듣는 기분이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그래서 심장이 필요한 이유랑 저주가 무슨 상관이지?” “저주를 건 대가로 내 시간은 그때 그대로 멈췄어. 평생 이 신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도 없는 몸이 됐고.” “녀석의 심장이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건가?” 내 물음에 꼬마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용아저씨가 쓸쓸히 중얼거렸을 뿐.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 2년제 동료를 내게 넣어주겠다고 했던 것도 이게 이유였지 않았을까. 내 옆을 따라다니다가 용살자가 나타나면 죽이고 심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근데 그럼 얘는 대체 몇 살인 거지?’ 처음엔 몇 살 정도 더 많겠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몇 살 정도가 아닌 듯하다. 전대 태고룡이 죽은 게 30년도 더 전에 일이었으니까. 뭐, 별개로 말이나 행동이 나이와 맞지 않게 어려 보이지만······. ‘······신전에서만 살았다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어떡하겠나?” “좋아, 만약 용살자를 죽이게 된다면 반드시 심장을 떼어내 가지고 오겠다.” “그렇다면 됐군.” 별반 어려울 조건도 아니기에, 추가 협상은 생략하고 제안을 승낙했다. 그러니 이제 보상을 선결제 받을 차례. “그럼 축복을 새기는 건 언제 가능하지?” “원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할 수 있어.” 내 물음에 꼬마가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역시 이것부터 물어야겠네. 당신은 어떤 축복을 받고 싶어? 그걸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거든.” “축복에는 어떤 게 있지?” 일단 나는 확인차 물었다. 혹시 게임과 현실에서는 다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몰랐어? 당연히 알고 있어서 이걸 요구한 줄 알았는데.” “정확하게 아는 건 하나밖에 없다.” “그래? 그럼 나머지도 설명을 해 줘야겠네.” 꼬마는 귀찮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세세하게 하나씩 설명을 해주었다. 들어 보니 게임과 딱히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첫 번째는 대지룡의 축복이야.” 대지룡의 축복. 이 축복을 몸에 새길 시, 정수로 획득한 추가 능력치가 20% 상승한다. 깡스탯이 중요한 나와도 시너지가 아주 좋다. 사실 여기서 시너지가 안 좋은 타입이 어디 있겠냐마는. “두 번째는, 화산룡의 축복.” 화산룡의 축복. 첫 번째가 스탯이었다면, 이건 모든 스킬의 성능이 증가하는 계열이었다. 내 기억상 수치는 약 30%가량. 즉, 이걸 선택 시 [거대화] 상태의 크기도 더욱 커지며, [무쇠가죽], [휘두르기]의 성능도 크게 증가한다. “마지막으로 해룡의 축복이 있어.” 해룡의 축복. 이는 다른 축복과 달리 유일하게 고정 수치가 증가하는 방식의 축복이었다. 효과는 영혼력 +100. 5렙까지는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영혼력이 10씩 증가하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감이 올 것이다. 아마 이걸 택하면, [거대화] 유지 시간이 단숨에 몇 배는 늘어나게 되겠지. 아마 핵심 정수 몇 개를 더 먹기 전까진 MP가 부족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 설명은 끝났어. 그럼 뭐로 할래?” 셋 중 어떤 걸 고를 것인가. 이후 꼬마는 시간이 필요하면 더 줄 수 있다고 배려를 해줬지만, 나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이거로 하지.” 이미 정해 둔 게 있거든. 203화 축복 (3) 용의 축복. 용인족을 사기 종족으로 만든 몇몇 특성 중 하나. 다만 용언과 달리 이 축복은 다른 종족도 새길 수가 있다. 다만 게임에서 이걸 받은 건 열 번도 안 된다. 용족과 우호도를 일정량 쌓은 상태에서 히든 퀘스트까지 깨야지만 뚫을 수 있었으니까. ‘사이가 안 좋은 드워프를 고르면 시도조차 못 했지.’ 물론 나야 드워프가 아니라 바바리안이지만, 사실상 ‘축복은’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히든 퀘스트’의 조건 자체도 미친 수준인데, 알아본 결과 현 시대에는 ‘히든 퀘스트’ 자체가 사라졌으니까. 게임 세계관에서 150년이 지난 시대. 역사서에는 용인족의 골칫거리였던 그 문제가 한 영웅에 의해 이미 해결됐다고 적혀 있었다. ‘잠깐만, 이걸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으면 다른 것들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란 소리 아닌가?’ 나는 이미 막혀 버린 몇몇 히든 피스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다른 루트로 그것들을 챙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게임에서는 아예 시스템으로 막혀 있던 것. 예를 들자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여러 개를 고른다거나 하는 건 안 돼. 바바리안인 너로서는 몸이 버티지 못할 거야.” “몸이 못 버틴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죽어.” 음, 이건 안 되는구나. 정 억지를 부리면 시도는 해 줄 거 같지만, 그런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 대가가 내 목숨 아닌가. 용인족 중에서도 두 개 이상의 축복을 새긴 건 용아저씨 제외 몇 명 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간다는 뜻. “그래서 결정은? 원한다면 시간을 더 줄 수도 있는데.” “아니, 됐다. 이거로 하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씨익 웃었다. 그야 결정이야 오기 전에 내린 상태니까. 해룡의 축복. 일단 이건 당연히 아니다. MP가 중요 자원이긴 하지만, 잘 배분하며 사냥하면 모자람을 느낄 일이 없다. 애초에 내가 술법사인 것도 아니고. 딱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화산룡의 축복. 이건 나쁘지 않다. 스킬 간의 조합을 맞춘 만큼, 성능 강화는 30%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보여 줄 거다. 하지만. “대지룡의 축복을 받겠다.” 스킬보다는 스탯을 올리는 게 낫다고 나는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간단한 이유다. 어차피 내 스킬들은 스탯을 계수로 하는 게 많거든. 스탯이 20% 상승하면 스킬 성능도 그만큼 강화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터. “좋은 선택이군. 역시 그 녀석을 의식한 건가?” 내 선택에 용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용살자를 의식해서 이것을 택했다고 여긴 모양인데, 나도 그냥 그렇다고 해주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니까. [영혼의 침묵] 용살자, 리갈 바고스가 가진 이 씹사기 용언은 MP를 제로로 만들어서 스킬을 쓰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도 맨몸으로 놈과 싸워야 했다. 다만, 이게 선택의 주요 요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대지룡에는 숨겨진 효과가 있거든. ‘근데 그걸 얘네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나는 용아저씨와 꼬마를 보며 눈을 좁혔다. 딱히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타 종족인 내게 그것까지는 말해 줄 의리는 없을 테니까. 애초에 그런 배려야 내겐 필요치도 않고. “그럼 됐군. 자리를 비켜 주겠네.” 결정이 끝나자 용아저씨가 자리를 비켜 줬다. 흐뭇한 미소를 내지으며. “내 딸과 좋은 시간 보내게.” 아니, 그러니까 이상하게 들리잖아. *** 용아저씨가 떠난 후. 나와 꼬마는 밤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지금까지 있었던 나의 탐사 내용들이었다. “꼭 내 얘기를 해야 하나?” “그러는 편이 좋아. 아까도 말했잖아?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고. 당신이 걸어온 길인 만큼, 나도 당신의 파장을 느끼기가 쉬워.” “그렇다면야.” 나도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편할 거 같았기에, 어느 정도 거를 것은 걸러가며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탐험가가 된 지 1년도 안 됐지만, 생각보다 할 얘기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이제 슬슬 날도 저물 시간인데, 아직 멀었나?” 도중에 식사까지 해가며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덧 저녁이 됐다. 다만 아직 축복을 새길 정도는 아니었을까? “……아직이야. 당신 파장은 묘하게 읽기가 어려워서. 응, 그래… 그러니까 얼른 하던 얘기나 마저 말해 봐.” “어디까지 말했지?” “도플갱어 숲. 다른 탐험가들이랑 마주치고서 그중에 지하 도시 출신이 있는 걸 눈치챈 것까지 말했어.” 대낮에 이곳에 와서 하루 종일 얘기를 했더니 벌써 최근의 여정까지 도달했다. 이게 끝나면 이제 할 얘기도 없는데. 조금 걱정이 됐지만, 솔직히 말했더니 다행히 더 파장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모양이었다. “음,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그 말은?” “따라와. 이제 당신 몸에 축복을 새길 거야.” 꼬마를 따라서 실내 안쪽으로 가보니, 얇은 천 뒤에 가려진 동굴이 보였다. 건물 벽에 이어진 동굴이라……. ‘이러니까 무슨 탐험이라도 하는 거 같네.’ 이내 동굴 너머를 몇 분쯤 걷자, 열 평쯤 되어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침대와 가구 몇 가지가 들어선 공동. 천장에 박힌 보석이 은은한 빛과 연기를 자아내며 주술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자, 여기 누워.” “내가 눕기엔 침대가 너무 작은데.” “…….” “그냥 바닥에 눕지.” 바바리안답게 쿨하게 바닥에 눕자, 꼬마는 피식 웃더니 축복을 내 몸에 새길 준비를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문신의 형태를 취하기는 하지만, 결국 축복의 핵심은 무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니까. “어디에 새겨 줄까?” “크기가 얼마나 되지?” “이 정도.” 꼬마가 손바닥을 활짝 펼쳐 내개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 “위치는 상관없나? “응, 그건 상관없어. 근데 왜?” “평소엔 보이지 않을 곳에 새기고 싶어서.” 일단 타 종족의 축복 아닌가. 부족장이 되어 보수적인 일족의 규율을 바꾸기 전에 바바리안들에게 걸리면 큰일 난다. “……보이지 않을 곳?” 무언가 떠오른 듯 꼬마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 거긴 좀 힘들 거 같은데…….” 꼬마의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나는 진심으로 까무러쳤다. 아니, 미친. 누가 거기에 문신을 새겨? “……어, 엉덩이 정도라면 해 줄 수 있어.” 뭐래. “됐다, 여기에 해줘라.” 나는 처음부터 생각했던 부위를 말했다. “발바닥?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은 서양식 문화에 가깝다.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기에 어지간하면 발을 벗을 일이 없다는 뜻. 납득한 표정을 짓던 꼬마가 의문을 내비쳤다. “근데 그냥 문신들 사이에 작게 새겨넣으면 안 돼? 별로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위에 항상 갑옷도 입고 다닌다며?” “주술사는 눈치챌 거다.” “아, 그렇겠네.” 물론 주술사의 성격을 보면 이것 가지고 뭐라 하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되도록 숨기고 싶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주술사는 묘하게 뭔가 수상하거든. “그럼 됐네. 슬슬 시작해도 될까?” “물론이다.” “꽤 아플 거야.” “괜찮으니, 빨리 끝내 줘라.” 꼬마의 경고에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혼령각인만큼 아프려고? 설령 고통 내성이 안 통하는 부류라고 한들, 두렵지 않다. “나는 바바리안이다.” 바바리안. 언제나 투쟁 끝에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 “흐음, 그래?” 꼬마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이내 검지 위로 새하얀 불길을 뽑아냈다. 그리고……. 치이이이익! 불길을 내 발바닥으로 지지며 말했다. “소리내도 돼.” 아, 그래? 「캐릭터의 영혼에 대지룡의 축복이 깃들었습니다.」 「모든 추가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나는 있는 힘껏 외쳤다. “끄아아아아아악!!” 바바리안 체면이나 신경 쓸 때가 아니다.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516.48(New +86.08) / 정신: 427.56(New +71.26) / 이능: 937.2(New +171.2) 아이템 레벨: 2,867 종합 전투 지수: 2,597.99 (New +328.54)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대지룡의 축복을 발바닥에 새기는 과정 자체는 짧았다. 한 3분 정도 걸렸나? 많게는 몇 시간씩 걸리던 혼령각인에 비하자면 찰나에 불과하다 말해도 될 수준. 다만, 결국 소모된 시간은 비슷했다.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었거든. “일어났어?”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벽을 기댄 채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꼬마가 보인다. “……잠깐 잠들었나 보군.” “기절한 게 아니라?” “…….” “웃겨 진짜.” 나는 꼬마의 조소를 뒤로하고 우선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전 9시. 어느덧 새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마셔.” 꼬마가 준 물을 들이켠 뒤 몸을 일으켰다.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피로했으나, 몸에서는 큰 활력이 느껴졌다. 하기야, 능력치가 20%나 상승했는데 체감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을 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시체골렘을 빼면 5등급 이상 정수는 고작 세 개인 상황 아닌가. 이 자리를 마저 채우기만 해도 상위 등급 정수 하나를 먹은 것만큼 많은 능력치가 증가할 터. “꼬맹이.” “페니타스에아우로스야.” 꼬맹이라 불리기는 싫다 이건가? “그래, 페니타사우로스.” 원하는 대로 이름을 읊으면서도 뭔가 묘했다. 이건 뭐, 사람 이름인지 공룡 이름인지……. “……그냥 펜이라고 불러.” “그러지, 펜. 그나저나 이제 다 끝난 건가?” “응. 다행히 잘 끝났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와. 다른 종족에 해준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라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 “그래, 시간이 나면.” “내서라도 와. 아빠한테도 이미 말해 뒀어.” 대충 알겠다고 해준 뒤, 펜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 용아저씨의 위치를 물었다. “아빠는 처음 왔을 때 거기로 가면 있을 거야. 안내라도 해줄까?” “혼자 찾아갈 수 있다.” 로트밀러에게 길잡이 교육을 받은 이후로, 길을 외우는 건 자신 있다. 따라서 슬슬 이곳을 떠나려는 차. “미안.”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응?” “미안하다고. 어제……. 못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이게 사과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 시비를 거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어른답게 팩트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못생긴 게 아니다.” “뭐?” “나는 남자답게 잘생긴 거다.” 펜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래도 세상의 때가 묻기 전에 올바른 미의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모양. “다음에 보자. 그때 또 새로운 얘기를 해 줄 테니.” “……응.” 이후 펜과 작별하고서 용아저씨를 찾았다. 그리고 용검을 전해준 뒤에 용언을 통해 원래 있던 하수도로 돌아왔다. 밥맛이 싹 사라지는 익숙한 오물 냄새. 그냥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도시랑 이어져 있구나.’ 아멜리아에게 들은 대로 비밀 통로를 타고 가자 도시와 이어진 출구가 나타났다. 내가 거주 중인 7구역 옆에 위치한 8구역. 원래는 미샤와 아이나르를 만나 근황이나 듣고 가려 했지만……. 그것까지 하기엔 피로가 상당하다. ‘어차피 며칠 뒤면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준비한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서 징징이가 주문했던 꼬치만 산 뒤 다시 돌아왔다. “네가 말했던 가게의 꼬치다. 사내답게 가장 매운맛으로 달라 했다.” “…….” “왜 말이 없지? 기쁘지 않나?” “……기쁩니다.” “소리가 작군.” “기쁘나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 온 보람이 있도록 크게 기뻐하는 징징이. 이를 보며 나도 한시름 덜었다.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경고는 됐으니, 내가 없다고 비프론이 하루아침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우냐?” “꼬치가 매워서… 그렇… 습니다.” “쯧. 그렇게 쉽게 우니까 머리가 빠지지.” “예…….” “이제 나는 잘 거니 깨우지 마라.” 돌아오자마자 거의 하루 전부를 자면서 보낸 나는 이후로도 마지막 휴가를 즐기듯 푹 쉬면서 지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짧은 듯하면서도 길었던 유배의 끝. 전부 모인 조직원들의 열띤 배웅을 받으며 나는 도시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징징이와도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가끔 찾아오겠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첫날과 달리 멘탈을 많이 추스른 듯해 보이는 징징이. 비밀통로에 관해선 둘만 알고 있으라고 재차 강조해 둔 뒤 나는 성벽의 경비를 불러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확인됐소.” 이내 검문소로 들어가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를 밟았고, 그게 끝나자 경비가 이중문 구조의 반대편 성문을 열어주었다. “모즐란의 기사님께서 남기신 전언이 있소. 다음부터는 사고 치지 마시라는군.” 사고는 무슨. 지들 사정 때문에 벌금으로 끝날 문제로 내가 여기에 갇혔구만. 툴툴대며 도시로 나온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딘가 공기부터가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묘하게 오늘따라 햇빛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근데 왜 아무도 없지?’ 20일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온 나는 잠시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도 동료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쩝, 마중 정도는 나와 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하긴, 나오는 시간을 몰랐을 테니까.’ 나는 서둘러 마차를 잡고 여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미샤의 방을 노크했다. 쾅쾅! 몇 번을 노크해도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안에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고. ‘뭐지? 외출한 건가?’ 어쩌면 나를 마중 나온다고 갔다가 길이 엇갈린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벌컥. 방문이 열렸다. 미샤가 아닌 아이나르의 방이었다. “비요른……!!!!” 이제 막 깨어난 모습으로 다급하게 나를 맞이하는 아이나르. 왠지 이질감이 피어났다. ‘뭐지?’ 처음엔 무의식의 발로였지만, 나는 머지않아 이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었다. 미샤가 나를 마중나간 거라면, 아이나르 혼자 여기에 남아 있을 일은 없다. 같이 데리고 왔을 테니까. “왜……!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 “일단 진정하고 말을 해봐라.” 덩달아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우선 자초지종을 물었다. “미샤가……! 미샤가 납치 됐다!!” 내가 없는 사이 뭔가 문제가 생겼다. 204화 축복 (4) 미샤가 납치됐다. 그것도 도시에서. 이 말만 들어서는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진 것 같지만, 침착하게 나머지 사정부터 확인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아이나르가 방에서 태연히 자고 있던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납치됐다니? 제대로 설명해 봐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래, 벌어진 게 언제였는지부터.”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사건 발생은 고작 하루 전. 아이나르와 미샤는 그날 밖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 와보니 이게 웬걸? 검은 옷을 입은 수인들이 미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들어 보니까 미샤의 본가에서 왔다는 듯했다!” 본가라면, 역시 가주가 보낸 놈들일 테고.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냐! 수인 녀석들이 미샤한테 뭐라고 속삭이더니 억지로 데려가 버렸다!” 음, 그걸 억지로 데려갔다고 할 수가 있나? 일단 확인차 물었다. “미샤가 너에게 아무 말도 안 남겼나?” “오늘 밤에는 돌아올 테니 하루만 혼자 잘 지내라고 그랬다. 아! 비요른 마중도 나가라고 했었는데…… 걱정돼서 잠을 설쳤더니 늦잠을 자버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늦잠을 잤단 뒷말이야 어쨌든, 떠나기 전에 말도 남겼는데 이게 왜 납치란 말인가. 그리 묻자 조금 인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나한테 그 말을 하는 미샤는 한사코 가기 싫은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납치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을 데려갔으니 납치라니, 흔한 바바리안식 논리다. 다만, 나 역시 한 사람의 바바리안. “그래, 미샤는 납치당한 게 맞군.” 납치인지 아닌지로 바바리안과 말다툼을 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 어제 놀라서 아루루한테도 가봤는데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해서 속상했다!” “레이븐이 뭐라고 했는데?” “비요른, 네가 올 때까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치안청에 신고도 아직 못한 상황이다!” 오케이, 잘 대처했네. 바바리안은 바바리안에게 맡기는 게 베스트다. 그게 안 된다면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최선이고. “그래서! 어떡할 건가 비요른! 당연히 그쪽에 쳐들어가야겠지? 미샤는 우리 동료 아니냐!!” 거기 쳐들어갔다가 무슨 사고가 날 줄 알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미샤도 전사다. 혼자 힘으로 해낼 때까지 시간을 줘야 한다.” “그건……. 그렇군!” “오늘 돌아온댔으니, 밤까지는 기다렸다가 오지 않으면 내일 나 혼자 찾으러 가보겠다.” “알겠다!” 바바리안스럽게 잘 돌려서 말하자, 고집을 부리지 않고 쉽게 수긍한 아이나르. “근데 아침인데 배는 안 고프나?” “당연히 고프다!” 우선 아이나르를 데리고 아침 식사부터 했다. 그러면서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했다. 딱히 이렇다 할 건 없었다. 그냥 수련, 밥, 집으로 반복이 된 나날들. 레이븐과 곰아저씨까지 모여 주기적으로 행하던 정기 회담도 내가 나올 때까지 스킵하기로 했다는 모양이다. “아, 그때 미샤가 역시 비요른은 대단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닌 거 같아도, 비요른이 팀의 중심이라 없으면 서로 뭉칠 수가 없다고!” “어…… 그랬군.” 어딘지 모르게 몰려오는 부끄러움. 뭐, 뒤에서 험담을 한 것보다야 백배는 낫겠다마는……. 나는 화제를 돌렸다. “미샤가 식비는 주고 갔나?” “어, 근데 다 써버렸다.” “……돈은 두고 갈 테니 이거로 밤까지 잘 챙겨 먹어라.” “나가는 건가? 미샤를 기다리지 않고?” “집에만 있어도 변하는 건 없지 않나. 나는 내 일을 해야지. 미샤도 그러기를 바랄 거다.” 이후 식사를 끝낸 뒤에 아이나르를 방에 집어넣고서 외출했다. 일단 첫 목적지는 마탑이었다. “아, 나왔어요? 몸은 어때요?” “모즐란에서 준 해독제 덕분인지 이상은 없는 거 같다.” “잘 됐네요. 고생 많았어요. 아무튼, 칼스타인 씨 얘기는 들었죠?” “그래. 오늘까지 안 오면 내가 확인하러 가 볼 생각이니, 너는 걱정하지 마라.” “처음부터 걱정한 적 없는데요? 아이나르 씨가 이상한 거지, 본가에 간 건데 왜 그렇게 유난을 떤데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레이븐과 달리 나는 미샤와 본가에 얽힌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그보다 내가 없어서 정산을 못했다면서? 내일 만나는 거로 하지.” “칼스타인 씨가 늦으면요?” “그때는 다시 와서 말해 주겠다.” 이후로는 짧게 근황을 물은 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서 헤어졌다. 그다음 향한 곳은 곰아저씨의 주점. “오, 드디어 돌아왔군. 고생 많았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딱히 말할 만한 건 없다. 근데 그건 내 쪽에서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비프론에서 지내는 동안 괜찮았나?” “나쁘지 않았다. 살기 편한 곳이더군.” 레이븐 때와 마찬가지로 곰아저씨와 간단히 근황 얘기를 나누고서 장소와 시간을 알려 주며 약속을 잡았다. “이제야 그 돈을 나눠받겠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먼저 받아갔어도 됐을 텐데.” “아니, 이런 건 확실하게 다 있는 자리에서 해야지 분란이 안 생긴다. 게다가 네가 놀겠다고 못 오던 것도 아니고.” “이해해 줘서 고맙군. 그럼 난 가보겠다.” 주점에서 나온 뒤엔 조금 고민됐다. 저녁까지 시간은 꽤 남는데 이제 뭘 해야 하려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간 때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찾기 어려울뿐더러……. 생존 신고를 해야 할 사람도 있으니까. “……비요른 얀델.” 이내 도서관에 도착하자 라그나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흠칫 굳는다. “오랜만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20일 동안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라그나의 입이 열렸다. “들었습니다. 도시에서 이능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통제를 어기고 미궁에 들어간 죄로 비프론에 유배됐다지요.” 어, 알고 있었구나. 하긴, 원탁에서 들어 보니 정치적인 징계였던 만큼 꽤 유명해진 이야기라고 하니까. “무사히 돌아온 듯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사과.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그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혹시 도울 수 있을까 집사님에게 여쭤봤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만 해서…….”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사과는 왜 하는 거고, 집사는 뭔데? 내가 이에 대해서 다시 묻자, 라그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나도 깊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에 대해서 말해 줄 리가 없으니까. ‘……일단 자기네 집안 얘기를 하는 거 같긴 한데.’ 라그나에 관해 식어가던 관심이 다시금 솟는다. 최소 5등급 이상인 20대의 마법사. 옷과 지팡이에서부터 티가 나는 부자의 향기. 거기에 방금 언급한 집사까지. 사서를 하고 있어서 긴가민가한 적도 있지만, 내가 봤을 때 얘는 영락없는 귀족이다. 하지만……. ‘그것도 좀 이상하단 말이지.’ 예전에 호기심이 생겨 알아본 적 있다. 페프로크라는 성을 쓰는 귀족가는 없다. 그렇다면 얘는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책은 읽고 가실 겁니까?” “아, 그래. 그럴 생각이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라그나가 화제를 돌렸다. 따라서 나도 그냥 책이나 읽으러 들어갔다. ‘뭐, 기회가 되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 얘가 나한테 뭔가 피해를 준 것도 아니지 않나.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가정사를 타인인 내가 파헤치는 것도 좋지 않을 터. 얘가 뭐든 간에 지금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나저나 총해록 시리즈는 오늘도 못 찾았네.’ 창문 너머가 어둑해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나는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지난날, 우연히 이곳에서 총해록을 발견한 뒤 가끔 찾아봤지만 역시 이번에도 찾지 못했다. “가십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군요.” 이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나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 뭘 했냐고 물었다. “오늘? 낮잠 좀 자다가, 심심해서 성지에 다녀왔었다.” “성지에?” “어린 전사들을 가르치는 건 즐겁다.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 얘는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뭐, 전투력만은 엄청나게 상승했으니까. “다음에는 같이 가자. 다들 널 보고 싶어 한다. 벌써 20일이나 안 가지 않았나.” “그래, 다음에는 같이 가지.” 부족장이 되겠다는 선언을 한 뒤로, 틈틈이 성지에 들려 조기 교육을 행하던 나기에 큰 고민 없이 승낙했다. 부족 내 지지도는 미리 올려 둬야지. “후후, 어린 전사들이 기뻐하겠군.” 피차 바바리안이었기에 그 정도 대화를 나눴을 땐 이미 식사가 끝나 있었다. 다만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식당을 겸하는 1층에 대기했다. 아직 미샤가 돌아오지 않았거든. ‘정말로 뭔가 크게 문제가 생긴 건가?’ 밤이 무르익어 갈수록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한 시간쯤 지나자 미샤가 나타났다. 화사한 색을 선호하던 평소와 달리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 비요른?” “미샤다!! 미샤가 돌아왔다!!” 당장에 달려가 미샤를 끌어안는 아이나르. “앗! 하지 마랑. 그럴 기분 아니니까!” 미샤가 한숨을 내쉬며 아이나르를 떼어냈다. 그리고 내 앞에 와서 앉았다. “……미안하당. 원래는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됐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보다 그쪽은 어떻게 됐나? 아이나르에게 들어 보니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던데.” “아, 그거…….” 말꼬리를 흐리며 아이나르를 힐긋 바라보는 미샤. “아이나르, 너는 올라가서 자라.” “엑? 어째서?” “쓰읍.” “알았다! 자러 가면 되지 않냐!!” 우선 아이나르를 올려보낸 후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본가에서 널 부른 이유는? “그게…… 오빠 중 한 명이 죽어서 참석해야 했당. 일단 아직 그쪽 집안 사람이긴 하니까.” “장례 때문이라는 거군.” 걱정과 달리 정말 강제로 데려가고 그런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 “좀 이상하군. 이 시기에?” 미궁이 닫힌 직후가 아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장례라니? 도시에서 죽을 만한 사건이 생겼다는 뜻 아닌가. “이상한 걱정은 하지 마랑. 그 사람, 원래 몸이 안 좋았거든. 맨날 신관을 불러서 치료를 해야 했던 사람이당.” “계층군주 때 그놈은 아니란 소리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누구냐?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평소에 잘 챙겨줬다는 그 큰 오빠?” “……아마 너는 모르는 사람일 거당.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서.” “그래?” 얘기를 하지 않았단 걸 보면, 똑같이 미샤를 괴롭히고 무시했던 놈 중 하나일 것이다. 하면, 얘는 왜 이렇게 침울한 얼굴인 걸까. “이제 보니 장례만이 아니라, 거기서 뭔가 또 일이 있었군.” “……그건 어떻게 알았냥?” 뭘 새삼스럽게. 얼굴만 봐도 훤히 보인다고 하면 화를 낼 거 같아서 살짝 돌려 말했다. “장례 때문인 거면 아이나르를 보낼 이유도 없지 않나.” “너는 진짜 왜 이런 데만 눈치가 빠른 거냥?” “……말이나 해봐라.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그게…….” 미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아니, 그 인간이 또 너를 데려오란당.” 왜 다들 나를 가만히 못 둬서 안달이지? *** 칼스타인의 가주가 나를 보고자 한다. 혹시 서리혼령가락지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 단서를 얻어낸 건가도 싶지만……. “아무튼, 그건 그거고. 네가 거기 갈 필요는 없당. 내가 이미 딱 잘라 거절해 뒀거든.” 이미 미샤 선에서 정리가 됐기에 이 문제는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만나고 싶으면 날 시키지 말고 직접 찾아오라 말했다던가? 소식이 없으면 별일 아니었다는 뜻일 터. ‘만약 정말 찾아오면……. 그건 그때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자. 괜히 갔다가 귀찮은 일만 생길 거 같으니.’ 그럼 이걸로 이번 안건은 마무리. “아악, 생각할수록 열받는당. 그 인간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제 장례든 뭐든, 불러도 다시는 안 갈 거당.” 이후로는 다시금 독립에 대한 결의를 불태우는 미샤와 20일간 밀린 얘기나 좀 나누다가 방에 들어가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정말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네요. 다들 잘 지냈어요?” 팀 애플 나라크 전원이 한곳에 모였다. 장소는 첫 미팅부터 계속 모임을 해왔던 예의 그 3층짜리 주점. 목표는 아직까지 하지 못한 최종 정산이다. “그때 듣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총 소득이 얼마지?” “며칠 전에 판매된 ‘여우불꽃 매듭’까지 합쳐서 1억 5천 900만 스톤이에요.” “놈들에게 받았던 수고비까지 합친 금액인 건가?” “네. 생각해 봤는데, 결국 그쪽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렸잖아요? 이제 와서 그 전에 수고비로 받은 걸 제몫이라 주장하는 것도 웃기더라고요. 그래서 시험관 값만 제 몫으로 미리 빼뒀어요.” 하긴, 그게 아니었어도 전투 후에 우리 손에 들어왔을 전리품이니까. ‘그래도 의외네. 솔직히 자기 몫이라고 주장할 줄 알았는데.’ 얘도 좀 유해진 거 같다.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아무튼, 여기 최종 결산 내역을 정리해 왔어요. 다들 이걸 보면서 얘기하면 편할 거예요.” 레이븐이 영수증까지 첨부해 만들어 온 서류를 보며 본격적으로 정산을 시작했다. 마석 소득은 균등 분배. 탐험가와 전투 소득도 균등 분배. 다만 도플갱어 숲에서 캤던 약초는 특수 전리품으로 분류해서 레이븐이 40%. 포션은 판매하지 않고 공용 물품으로 구분. 서류로 보기 쉽게 정리된 만큼, 복잡한 정산이 시원시원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3천만 스톤이라…….”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인당 3천만 스톤이라는 거액이 손에 쥐어졌다. 가히 역대급이라 해도 될 만한 소득. 다만 지금부터는 토해낼 시간이었다. “자, 그럼 개인 획득 전리품 정산만 남았네요. 사실 요즘 시간이 남아서 이것도 대강 정리해 왔어요. 관례대로 평균 시세의 70% 정도로 책정했으니, 사는 것보단 훨씬 저렴할 거예요.” 레이븐이 한 명씩 순차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칼스타인 씨부터. ‘가속’에 ‘치수 조절’ 마법이 부여된 하프트롤 가죽 장화가 210만. ‘냉기 강화’가 각인된 라이티늄제 목걸이가 270만. 합쳐서 480만이네요. 근데 여기서 칼스타인 씨 몫은 빼야 하니……. 384만 스톤만 내시면 돼요.” “으으…….” “아이나르 씨는 확장형 배낭이 150만……. 이게 끝이네요. 120만 스톤만 내세요.” “크윽.” “우리크프리트 씨는 아공간 화살통이 210만. 강철제 대형 흉갑이 55만……. 근데 흉갑은 왜 챙긴 거예요?” “……치수 조절 마법을 부여해서 철웅에게 입혀 줄 거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매번 소환을 할 때마다 입혀 주려면 귀찮을 거 같긴 하지만. 아무튼, 212만 스톤을 내시면 돼요.” 따로 개인 전리품을 택하지 않은 레이븐을 제외한 모두가 군말 없이 정해진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대망의 내 차례가 왔다. “드디어 얀델 씨네요.” 과연 나는 대체 얼마를 토해내게 될 것인가. “우선 아이디움제 각반 310만 스톤. No. 8667 황야의 무법자가 330만 스톤.” “잠깐만, 황야의 무법자는 빼라. 이건 내 개인 전리품이 아니라 팀 공용 물품으로 남겨 둘 생각이니.” “……팀 공용 물품요?” “5층의 그놈을 만났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 아니냐. 그때를 위해서 갖고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흐음.” 레이븐은 탈세자 보는 국세청 직원처럼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YES’. “납득할 만한 얘기긴 하네요. 왠지 뭔가 당하는 기분이지만.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돈을 굳혔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븐이 마지막 내용으로 넘어갔다. 이번 정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그것. “만티코어의 정수. 그리고 No.2988 수호병단의 징표.” “······.” “일단 만티코어 정수의 거래소 평균가는 5천만 스톤 정도지만, 이미 시험관 값은 뺐고 값도 길드 공시가로 계산을 했어요.” “그래서, 공시가가 얼마지?” “3,200만 스톤이요.” 니미럴. 그럼 여기서 관례대로 70% 할인을 붙이고, 또 어차피 돈을 낸 다음 내 몫으로 20%를 돌려받을 거니까 5분의 1을 빼면……. “만티코어 값으로는 1,792만 스톤을 내시면 되겠네요.” 그럼에도 여전히 비싸다. “……수호병단의 증표는?” “거래소 평균가로 5천 200만 스톤이요.” 이건 게임 시세랑 크게 달라진 게 없구나. 마찬가지로 할인을 붙이면 최종적으로 2,912만 스톤이라는 값이 나온다. “그럼 여기에 아이디움제 각반까지 합치면, 총 4,877만 6천 스톤이 되겠네요.” 레이븐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소에 돈은 좀 모아 두셨어요?”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나르를 바라보았다. “응? 왜 갑자기 나를 보나?” “아이나르, 내게 빌렸던 돈이 얼마였지……?” “빼, 뺏어가는 거냐……!!” 아니, 돌려 받는 건데. *** 실로 기록적인 소득을 올린 이번 탐사. 다만, 낼 걸 다 내고 나니 오히려 지금까지 모은 돈을 다 털어내고도 부족했다. 아이나르에게 빌려준 돈을 합쳐도 전부 내기엔 금액이 너무 컸으니까. 물론, 문제는 없었다. “아이나르, 돈 갚는 김에 좀 더 빌려줘 봐라.” “으, 응……? 동료끼리는 돈 거래는 하는 게—” “아, 갚는다고.” “아, 알았다…!” “미샤, 너도 좀 빌려주면 좋겠는데.” “으이구, 얼마나 모자란뎅?” 부족했던 1,300만 스톤은 아이나르와 미샤에게 받은 신용대출로 메웠다. 결과적으로 빚쟁이가 되어 버린 셈. 이거, 대체 언제 갚지? 미궁에서 약탈자라도 만나기를 바라야 하나? “나는 이제 부자다!!!!” 내게 돈을 빌려주며 의기소침하기도 잠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활비도 없어서 미샤와 내 케어를 받았던 아이나르는 정말이지 돈을 펑펑 쓰면서 다니기 시작했다. 음, 펑펑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아낌없이 군것질을 사먹긴 했지만, 값이 워낙 저렴하기에 아무리 먹어도 눈에 띌 만큼 소비하긴 어려웠다. “비요른, 이 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갖고 있어라. 다음에 돌아와서 장비를 새로 맞출 거니.” “응.” “어! 나도! 나도 장비를 새로 맞출 거다!” “이번 달은 참아라. 몇 개는 제작을 할 건데, 어차피 미궁이 열리기 전까지는 완성이 안 될 거다.” 정산이 늦어진 만큼, 본격적으로 돈을 쓰는 건 다음 달로 미루기로 했다. 모처럼 거금이 들어왔으니, 파츠 한두 개를 맞추더라도 7층까지는 쓸 수 있는 거로 구할 계획이었다. 물론, 거기에만 다 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이 벌었으니 너무 아끼지 말고 하고 싶은 곳에도 써라. 그러려고 번 돈 아니냐.” “응? 그래도 되, 되는 거냥?” 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성장이 중요하긴 하지만 일상 전체를 포기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던 모양이군?” “으응.” “왜 눈치를 보냐? 네 돈을 네가 쓰는 건데.”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 내가 의문의 시선을 보내자 미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참에 이사 가면 안 되냥?” “……뭐?” “이제 돈도 잘 벌겠다, 좀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는 요리도 못 하지 않냥. ” 흐음, 어쩐지 우리 눈치를 보더라니.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그러자고 했다. 안 그래도 이 여관이 슬슬 좁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참이었으니까. 게다가, 미샤 밥이 식당 밥보다 훨씬 맛있다. 건강하기도 하고. “그럼 이사 갈 곳은 차차 알아보기로 하지. 당장은 미궁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응!!” 그 이후로는 오래간만의 일상이 이어졌다. 모여서 탐사 계획을 세우고, 다시 로트밀러를 찾아가 중단됐던 길잡이 수업을 받고, 가끔 상업 지구에 들러 구매할 물건이 있는지 체크를 하는 등의 평화로운 시간. 늘 그랬듯 그러한 나날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다들 모였으면 슬슬 출발하지.” 우리는 지난번처럼 곰아저씨의 주점에서 모였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미궁에 들어갈 시간이다. 205화 찰나 (1) 노아르크 성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느 대전. 한 남자가 수정구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 탐험가는 찾아냈나?” [아직입니다. 성주님.] “그렇군…….” 도시 봉쇄 이후로 받는 첫 정기 보고. 벌써부터 성과가 있을 리 없으나, 성주는 저도 모르게 침음에 잠겼다. 다만, 그런 그에게 비보가 다시금 전해졌다. [그보다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말해 보게.” [이번 달부터 왕가 측에서 특수하게 제작된 인식표가 탐험가들에게 보급될 거라고 합니다.] “……마도구인가?” [예.]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자네라면 이미 알아서 더 알아봤을 거 아닌가.” 이후 성주는 아멜리아를 통해 왕가에서 배포할 예정인 ‘인식표’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암울한 내용이었다. 왕가의 대마법사가 직접 설계한 인식표라니. “우리 쪽에서 비슷한 걸 만들어 내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리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자네는 이쪽 일엔 신경 쓰지 말고 임무에 집중하게. 다음 달에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을 종료한 성주는 눈을 감고 깊게 침잠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 왔는가.” 재무관을 불러낸 성주는 우선 노아르크의 재정 상황부터 확인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것을 물었다. “재무관, 우리가 미궁에 들어가지 않고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지금처럼 지낸다면 세 달입니다.” 지난 전투의 여파로 사정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가 그들보다 앞섰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익숙한 일이다. 선조들이 해왔던 것이기도 하고. “굶주리고 굶주리며 버틴다면? 그럼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최대 일곱 달 정도입니다.” “그런가…….” 성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보좌관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미궁을 봉쇄하고 어느 누구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라.” “……반발이 심할 겁니다. 언제까지일지라도 알 수 있을련지요?” 성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왕가에서 만든 인식표를 따라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그 전에 들어가면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버티고 버텨서 놈들이 방심하였을 때까지.”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반드시 올 것이다. 모든 것을 바꿀, 단 한 번의 기회가.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516.48/ 정신: 427.56/ 이능: 1657.2(New +720) 아이템 레벨: 3,367(New +769.01) 종합 전투 지수: 3442.99(New +84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닫힌 눈꺼풀 위로 서서히 빛이 깃든다. 느긋하게 눈을 뜨니 오랜만에 화창한 하늘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이 휘감는 후끈한 도시의 공기. 새삼, 시간의 흐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벌써 6월인가…….’ 비프론에 유배됐던 그날로부터 벌써 여섯 달이 흘렀다. 한국에 비하면 장난 같았던 겨울은 진작에 그 끝을 고했으며, 이제는 짧았던 봄마저 저물어 가고 있는 상황. ‘신기하네.’ 이 세계에 왔을 때가 3월이었다. 정말 이곳에 온 지도 1년이 넘은 거구나. 1년 차 세금을 냈을 때도 그랬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여전하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지구에서의 내 생활이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다. 그야 당연하다. 미궁에서 보낸 시간까지 합치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2년에 달할 테니까. “이봐, 바로 숙소로 돌아갈 건가?” “일단은. 씻고 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돌아왔다아아아아!!” 평소와 다름없는 주변을 확인한 나는 짧았던 상념을 흘려냈다. ‘이번에도 별일 없었구나.’ 혹시 다른 층계는 어떨까 싶었는데, 주변 반응을 보니 역시 별다른 사건 사고는 없었던 듯하다. 거, 괜히 불안해지게. 솨아아아아. 나는 고개를 내려 손목을 확인했다. 도시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손목에 문신처럼 새겨 넣은 인식표가 빛이 되어 흩뿌려지고 있었다. 매번 들어갈 때마다 새로 받아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빼앗으면 그만이던 예전 인식표와는 그 성능부터가 다르다. 공교롭게도, 이게 나온 시기부터 지하도시 새끼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지만. ‘……슬슬 나타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구와 이곳은 엄연히 생태계가 다르다. 흐르는 강물도, 농사를 지을 비옥한 땅도 없는 세계. 노아르크도 라프도니아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미궁에서 나온 마석으로 식량을 창조해야 한다. ‘근데 벌써 6달째 감감무소식이라…….’ 지난달 원탁에서 여우에게 대형 클랜들이 노아르크의 기습을 대비해 연합을 꾸렸단 말을 들었기에 괜스레 더 불안해진다. 얘네는 다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마석 외에 식량을 수급할 방법이 생긴 것도 아닐진대. “얀델 씨!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산책이라도 하듯 생각을 정리하며 걷고 있자니 멀리서 레이븐이 손을 흔들었다. 항상 지각하던 곰아저씨조차 먼저 와 있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흠, 그런 건 여기 와서 줄을 서는 동안 하셔도 됐을 텐데…….” 쩝, 효율만 따지기는. 아무튼, 지각한 건 내가 맞기에 순순히 사과를 하고서 줄을 섰다. 줄이 다 줄어드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그야, 여긴 5등급 검문소거든. “5등급 팀 애플 나라크, 맞습니까?” 지난 여섯 달 동안 있었던 많은 변화들 중 하나다. 나, 아이나르, 그리고 미샤가 5등급으로 승급하며 팀 등급도 한 단계 상승했다. 5등급이 되려면 길드 의뢰를 깨야 했기에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세 달 전에 다 같이 의뢰를 깼다. 등급이 낮으면 얕보일 수밖에 없고, 얕보이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이쪽 업계라는 판단. “와, 여긴 사탕도 주넹. 비요른, 너는 알았냥?” “몰랐다.” 나는 미샤가 까서 건네준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빨아먹었다. “달군.” 약자에게 한없이 비정한 도시 라프도니아. 이제 슬슬 여기서도 어딜 가나 대접받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정산은 내일 하실 거죠?”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나?” “오오! 그럼 어서 가자! 집으로!!!” 간단하게 마석만 환전한 뒤 도시로 나왔다. 정산은 5등급 검문소부터는 편의를 위해 목욕 시설도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쓰지 않았다. 집에 가서 씻으면 되는데 굳이? “그럼 내일 거기서 보지. 여보, 내가 왔소!” 미아 방지겸 곰아저씨의 주점 앞에서 해산한 우리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상업 도시 컴멜비와 고작 10분 정도 떨어진 7구역 내곽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1층 2층은 우리가 쓰고, 3층 4층은 다른 탐험가 부부가 쓰고 있다. 입구가 달라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마는. “으아, 집이다아앙!” 단칸방 살림이던 이전 숙소와 달리, 모든 부분에서 월등한 새로운 집. 사실 이사를 오게 된 건 두 달밖에 안 됐다. 정말 마음에 드는 매물이었는데, 전에 살던 사람이 그때 나간다고 했던 게 그 이유. 아, 당연히 월세로 들어왔다. 매매는 가격이 미쳤거든. “우린 씻는데 오래 걸리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먼저 먹어랑!” 아이나르와 미샤가 욕조가 있는 1층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2층에 있는 작은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작다고는 했지만, 전에 있던 숙소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 비누로 몸을 칠하던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일지도.’ 주방이 딸린 넓은 집. 양산품 비누가 아니라 공방에서 파는 비누. 큰맘 먹고 구매한 고가의 침대까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아득바득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의 삶의 질도 개선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걸 비효율적인 행동이라 여기고 싶진 않다. 앞으로 여기서 몇 년이 걸릴지. 아니, 창세보구도 없어졌다는 마당에 돌아가는 게 가능하기는 한지도 이젠 잘 모르겠으니까. ‘애초에……. 꼭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약한 의지를 털어내듯 수건으로 머리에 물기를 닦아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촤아아아아아-! 보아하니 아래는 아직도 씻고 있는 것 같고. 배가 고프긴 하지만, 미샤가 해 준 밥이 훨씬 맛있기에 그냥 소파에 앉아 잠시 졸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잘 일어났당. 어서 와서 먹어랑.” 식욕이 돋는 냄새에 주방 쪽을 보니 식탁에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다. 바바리안이 두 명이니만큼 대부분이 고기로 이뤄진 밥상. 식사를 하면서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 맞다. 장비는 오늘 맡길 거냥?” “그래야지. 관리를 잘 해야 오래 쓰니까. 이따 다 먹고 모아서 줘라. 나 혼자 다녀오겠다.” “응. 근데 대장간은 이번에도 히쿠로드네로?” “우리라도 자주 이용해야지 않겠냐. 무구 점검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며 난쟁이놈도 대장간을 오픈했다. 이제 세 달쯤 됐는데, 원래 단골 장사가 기본인 업종이라 그런지 적자를 면치 못하는 듯하다. 뭐, 점점 나아지고 있는 거 같긴 하다마는. “근데 히쿠로드 말이당……. 가게가 망하면 다시 탐험가를 하러 돌아오겠지?” “그 말…… 그 녀석 앞에서는 하지 마라.” “에이, 미쳤냐 내가? 나도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이당. 그냥 조금 걱정이 돼서 그렇지.” “후후, 미샤 너는 뭘 그리 걱정하냐. 망하면 우리 집사로 쓰면 되지 않나!” “집사……?” “히쿠로드는 재미있지 않냐!” 얘는 집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지만, 바바리안이 한 말을 진지하게 받는 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일 터. 그런 것도 재밌을 거 같다며,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우리는 한참 동안 키득거렸다. “그럼 나는 대장간에 다녀올 테니, 먼저들 자고 있어라.” “같이 가줄까?” “됐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하러 간다고.” 애들은 먼저 낮잠을 재워둔 뒤 정리한 장비를 챙겨 난쟁이놈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검 및 수리를 맡긴 뒤 나도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무려 35만 스톤이나 주고 구매한 특대형 침대. ‘그래, 이거거든.’ 변함없는 푹신함에 흡족하며 눈을 감았다.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막차가 끊겨서 미샤와 컴멜비에서 묵었을 때였나? 그땐 언제쯤 매일 이런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 갈 길이 멀다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 이 도시에 온 지도 어언 1년이 넘은 시기. 더 이상 몸에 피가 튀어도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피가 묻지 않은 나날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며,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해치고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게 된 이 시기. 잠들기 전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사람답게 살 게 된 걸까? *** 다음 날 아침까지 쭉 이어진 낮잠은 미샤의 방문으로 끝이 났다. “이따가 나간다며? 일어나야지!” “아, 고맙다.” “식사는? 챙겨줄까?” “아니, 만나서 같이 먹기로 했다.” “아, 그랬었낭?” 간단하게 몸을 한 번 더 씻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자니, 1층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아이나르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 아, 참고로 미샤와 나는 2층에 있는 방을 하나씩 쓰고 있다. 1층에도 방이 두 개이긴 하지만……. 드르르르르렁-! 얘는 나보다 코고는 소리가 심하거든. 1층에 남은 방 하나는 그냥 공용 창고로 쓰는 중이다. “그럼 이따가 주점에서 보자.” “응, 잘 다녀와랑!” 미샤에게 인사만 하고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10분 거리의 컴멜비로 향했다. 성문을 넘고서 한 30분쯤 더 걸으니 만나기로 한 공용 승강장이 나타났다. 레이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늦었어요. 마차에서 내린 지가 언젠데.” “……오늘은 그냥 네가 일찍 온 거 같은데?” “눈치만 빨라서. 자, 어서 가요. 아주 배고파 죽겠으니까.” 레이븐과 합류한 이후에는 자주 가던 가게에서 식사부터 끝낸 뒤, 잡화점 및 거래소를 돌며 지난 탐사에 벌어들인 전리품을 처분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짭짤했다. 밀라로든을 잡고 들어간 거울 속 이면세계에서 5등급 정수가 나와준 덕분. “판매될 때까지 좀 걸리긴 할 거 같은데, 일단 제 돈으로 분배하고 나중에 받는 거로 할게요.” “그럼 우리야 좋은데, 너는 괜찮은 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모여서 나누면 괜히 번거롭기만 한데.” 그건 그렇지만, 우리들은 지금까지는 계속 그 방식을 고집해 왔다. 그게 가장 문제 될 여지가 적다는 판단. “……뭐예요. 그 눈빛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네 착각이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많이 변한 거 같다. 아직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났네요. 먼저 주점에 가 있죠.” 전리품 판매를 끝마친 우리는 약속 장소인 주점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직 아무도 도착해 있지 않은 상황. “차라리 잘 됐네요. 지난번엔 정리할 시간도 없었는데.” 음료만 주문한 레이븐은 종이를 꺼내더니, 거기에 오늘 정산할 내용을 미리 적어두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맨날 물어볼 땐 별거 아니라고 하더니. “고맙다.” “……음, 갑자기?” “항상 우리 팀을 대신해서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주고 있지 않냐.” “저 말고 이런 걸 할 사람이 딱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안 했겠죠? 돈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하시던가요.” “좋아, 주지. 얼마면 되냐? 아마 다들 흔쾌히 그러자고 할 거다.” “……됐어요. 그 돈 받아서 부자라도 될까 봐?” 얘도 참, 툴툴거리는 저 말투만 아니면 훨씬 더 인기가 많을 거 같은데. “오, 내가 가장 늦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곰아저씨가 도착했고, 머지않아 근딜 자매도 왔다. 그렇게 시작된 정산의 시간. “인당 850만 스톤이네요.” 밀라로든이 거울을 뱉어줬던 만큼 목돈이 손에 쥐어졌다. 이미 빚은 두 달 전에 다 갚았기에 이 소득 전부가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상황. “그럼 이제 다른 일 얘기나 해보죠.” 정산을 끝마친 후에는 편하게 술과 음식을 먹으며 다음 탐사 계획을 세웠다. 음, 정확히는 공지했다는 게 옳으려나? “이제 지옥불 협곡은 가지 않을 생각이다.” “네? 왜요?” 우리는 반년 동안 지옥불 협곡에서 사냥을 하며 거울을 통해 총 세 번 이면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에는 공략하지 못한 ‘잿빛산맥’과 ‘용암호수’의 탐사를 끝마쳤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화염 피해를 막아주는 ‘불의 보주’에다가, 우리 전투력도 처음 그곳에 입장했을 때보다 훨씬 상승한 상태였으니까. “우리랑 가장 상성이 좋은 곳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있을까요?” 지옥불 협곡에서 재미를 보고 있던지라, 레이븐이 내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 “언제까지 5층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이제 다른 곳도 탐사할 차례다.” 지옥불 협곡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다. 그러니 슬슬 다음 챕터로 향할 차례.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서리 협곡이다.” “어, 서리 협곡이라면…….” 미샤가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힐긋했다. 지옥불 협곡과 달리 본인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필드임을 아는 것이다. 뭐, 틀린 추측은 아니다. 서리 협곡에서는 얼음 속성인 미샤와 시너지가 좋은 정수가 여럿 드롭되니까. 실제로 내가 노리는 것도 그중에 하나이고. ‘그 정수만 먹으면 서리 협곡은 끝.’ 그다음엔 ‘대마경’의 남은 두 필드에서 경험치만 수급한 뒤 6층으로 가는 길을 뚫을 계획이다. 뭐, 거기까지 가는 데만 1년은 더 걸릴 테지만. ‘그래도 많이 왔어.’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손에 끼고 있던 덩굴 반지에서 빛이 뿜어졌다. “비요른, 그거 설마…….” 첫 번째와 달리, 나는 애써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다시 이어붙이겠다며 침을 묻혀 덩굴을 꼬듯이 비비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별의 가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용살자와 관련된 데드 플래그를 막아 주던 두 번째 덩굴이 끊어졌다. 제기랄. 206화 찰나 (2) [오랜만일세, 레인웨일즈 양.] 수정구를 통해 도시로부터 연락을 받은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에 자리한 성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탓. “…연금술사 할아범?” [껄껄, 목소리를 듣고 알아봐 주다니 영광이구먼.] “…어떻게 연락망을 할아범이 쓸 수 있게 된 거지?” [성주님께 부탁을 했네. 자네에게 부탁할 물건이 있는데 직접 말하게 해 달라고. 그게 서로 편하지 않은가? 겸사겸사 목소리도 듣고.] “그랬군.” 납득 못 할 일은 아니다. 연금술사는 노아르크에서 성주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니까. 할아범이 부탁을 한다면 성주로서는 들어줄 수밖에. 아멜리아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부탁할 물건이란 건 뭔데?” [아, 별건 아니네. 그보다 잘 지내고 있나?] “…그런 말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 텐데.” [아직도 떨쳐 내지 못한 건가?]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어 대답을 피했다.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할아범은 그녀의 속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 [레인웨일즈 양, 이번 임무를 수락한 이유에 대해선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네. 하지만, 슬슬 떨쳐 내게. 분명 언니도 복수 같은 것보단—.] “그만.” 아멜리아가 차갑게 읊조리며 말을 끊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용건만.” 남겨진 자에겐 남겨진 자만의 할 일이 있다. 그것에 대해선, 아무리 할아범이라고 해도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 […알겠네. 그럼 용건으로 넘어가지.] 이후 연금술사는 몇 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쭉 읊었고, 아멜리아는 잊지 않게 종이에 기록했다. 대부분 마법 시약 같은 연금술 재료들이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폐쇄된 노아르크에서는 수급이 어려워진 것들. [전부 구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며칠이면 충분해.” [그래? 그럼 혹시 그중에서 잠들이꽃 가루만 조금 일찍 구해다 줄 수 있겠는가?] “그거라면 지금 당장 보내 줄 수도 있는데.” [오, 혹시 갖고 있는 게 있었나?] “…알고 있었으면서 그러는군.” 잠들이꽃 가루에는 수면제 효과가 있다. 효과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독 내성을 뚫는단 특성이 있기에 그녀는 이를 자주 사용했다. 적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연락이 끝나면 바로 양방향 아공간에 넣어 주겠다.” [껄껄, 그럼 오늘 용건은 벌써 끝이군?] 어딘가 아쉬운 듯한 투로 웃음을 짓는 할아범. 그대로 연락을 끊으려던 아멜리아는 문득 피어난 의문 하나에 손을 멈췄다. “근데… 잠들이꽃 가루는 어디에 필요한 거지?” 아멜리아는 그리 물으면서도 그런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묻지 않았을 질문이니까. 그녀는 타인에게 먼저 질문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게 단순 호기심이라면 더욱더 그러했고. 하지만……. “잠들이꽃 가루가 들어가는 연금술식은 거의 없을 텐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아, 그거?] 머지않아 할아범의 목소리가 수정구를 통해 흘러나왔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그 친구를 치료하는 데 쓸 걸세. 아, 약을 만드는 데 쓰는 건 아니고 그 전에 재우는 게 편할 듯해서.] “…설마 기억을 되돌릴 방법이 생긴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일단 망가진 몸부터 치료할 생각이네. 알다시피 조금이라도 힘이 필요한 상황 아닌가.] “그렇군.”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뱉었다. 기억이 되돌아오는 것만 아니라면, 녀석이 회복을 하든 말든 자신에게까지 그 여파가 올 일은 없을—. [껄껄, 그래도 망가진 몸이 회복되면 잊어버린 기억도 되돌려 볼 생각이네.] 아멜리아는 흠칫 굳었다. [방법이 하도 과격해서 지금 몸으로는 무리가 있었거든. 뭐, 표본이 너무 적은지라 성공률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겠네마는.] 50%의 성공률. 운에 맡겨 보기에는 한없이 적은 그 가능성.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아멜리아는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양방향 아공간에 잠들이꽃 가루를 집어넣었다. 복용시 생체 조직을 파괴하는 극독을 발라서. *** 두 번째 덩굴이 끊어졌다. 한동안 잠잠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더니만. ‘대체 이 새끼는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어딘가 모르게 조급함이 몰려온다. 그야 아직 놈을 만날 준비가 덜 끝났으니까. 많은 부분에서 성장을 이루긴 했으나, 그래 봤자 4층 탐험가에서 5층 탐험가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벌써 하나만 남다니. ‘6층. 최대한 빨리 6층에 가야 돼.’ 6층에 가면 그 정수를 먹을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다. [거대화]에 이은 내 두 번째 코어 정수. 그것만 얻으면 어떻게든 놈과 비벼 볼 수 있—. “아저씨!” 응? “아까부터 뭔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에르웬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평화로운 시간이 워낙 길었어서일까? 마지막도 아니고 두 번째 덩굴이 끊어졌을 뿐인데, 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한 상상이 피어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미안하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얘기가 아니라, 뭘 주문할지 제가 물어보고 있었는데요…….” “아, 그랬지.” 대충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적당한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근데 여기는 하나도 안 바뀌었네요.”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직원을 보며 에르웬이 읊조렸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엄청 바뀌었는데.” 현재 내가 있는 곳은 파이든푸스라는 이름을 가진 주점으로, 에르웬과 만났던 첫 탐사를 끝내고 귀환주를 마셨던 곳이다. 그러니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밤친구가 없어서 1층에서 온갖 고생을 했던 바바리안은 도시에서 꽤 유명한 탐험가가 됐다. 명성을 얻은 건 아니지만, 에르웬도 1년 차를 끝낸 직후라기엔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고. 바뀐 장비만 봐도 그 변화는 명확하다. “술까지 마시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죠?” “아, 1년 차 세금을 냈을 때?” 참고로 그때는 막 이사를 마친 직후였다. 그래서 어디서 만날까 고민하다 이곳에 왔다. 집에 초대하면 미샤가 싫어할 게 분명했거든. 일단 세 명이 함께 사는 공용 공간이기에 내 멋대로 할 수 없다. “이번 탐사에서는 별일 없었고?” “…네, 뭐 전이랑 똑같죠.” 술과 안주가 나오고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된 화제는 서로의 근황이었다. 매일같이 놀러 오던 예전과 달리 접점 자체가 줄었다 보니 이젠 이거 말고 공통된 화제가 없거든. “소속 클랜 쪽 분위기는 어떻지? 그쪽도 좀 궁금한데. 뭔가 새로운 소식 같은 건 없나?” “글쎄요? 있어도 저희한테까지는 안 알려 줘서…….” 언니와 함께 아는 클랜에 용병 형식으로 참가했던 에르웬 자매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미궁 탐사를 해 가는 중이었다. 참고로 활동 구역은 5층. 다만, 우리는 지옥불 협곡에서만 사냥을 했기에 아직 미궁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짜증나 죽겠어요. 그 예전에 말했죠? 자꾸만 우리 언니한테 치근대는 사람이 있다고. 요즘은 저한테까지 그런다니까요?” “고생이 많군.” “네, 간부급이라 미간에 화살을 박아 넣을 수도 없고……. 그냥 참아야죠. 얻을 거 다 얻고 나갈 때까진.” 대화를 나눌수록 얘도 많이 변했다는 게 실감 난다. 탐험가가 된 지 이제 1년이 좀 넘은 시간. 하지만 예전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느낌은 싹 지워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궁에서 1년이면 온갖 꼴을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 “그나저나 이제 말해 봐라. 할 말이 있다더니?” “아, 그거요…….”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었다 여겨져 본론으로 들어가자 에르웬이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억하세요? 아직 언니한테 배울 게 많이 남았다고 했던 거…….” “기억한다.” 반 년 안에 전부 쪽 빨아먹고 내 팀에 들어오겠다고도 했었다. 뭐, 이미 그때로부터 반 년도 더 넘었지만. 굳이 내가 먼저 언급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 팀에 자리도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기에 생각이 바뀐 줄 알았는데.” 어영부영 끝난 얘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을까? 에르웬이 전력으로 내 말을 부정해 왔다. “에,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는 첫 밤친구인데!” 엄밀히 말하면, 내 첫 밤친구는 한스A였다. 얘는 하츠 영인가 뭔가 하는 그놈이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뜻이지?” “다, 다들 5등급이시잖아요? 지금의 저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달까……. 사실 이제는 영 가망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아, 아니 지금은 아예 한 집에서 가, 같이 살잖아…….” “뭐라는 거냐? 웅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내 말에 에르웬이 잔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회돼요. 그때… 아저씨가 제안했을 때 왜 승낙하지 않았을까. 금방 차이를 좁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 벌어지기만 하고…….” 용건이라기에는 한풀이에 더욱 가까운 말. 다만,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거 같다.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은데, 그중에 한 명을 빼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던 거겠지. 현 멤버보다 스펙이 좋은 것조차 아니니까. 음, 그래도 일단 생각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단 거네. “아무튼. 그래서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만.” 나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우선 한 가지 풀어야 할 오해가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너를 지금 팀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 “…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멍하니 허공에 고정된 에르웬의 동공에 의문이 어린 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분명 그땐 아무런 말도 안 하셨잖아요? 저, 저는 그게 긍정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멘탈이 나간 듯 에르웬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흔들렸다. 쩝,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딱 잘라 말했다. “에르웬, 나는 클랜을 만들 거다.” “크, 클랜을요?!” “물론 지금은 아니고, 몇 달은 더 걸릴 거다. 그래도 괜찮다면 네가 들어와 줬으면 하는—.” “좋아요!! 들어갈래요!!” 말을 끝마치기 전에 들어온 대답. “아니, 그래도 일단 자세한 설명을—.” “괜찮아요! 어차피 들어갈 거니까!” “…그렇다면야. 아무튼, 이 얘기는 비밀이다. 아직 우리 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거든.” “어, 그럼 이 제안을 한 것도 제가 처음……?”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클랜을 만든다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제안을 해. 애초에 미샤와 아이나르는 의사를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사이다. 마탑 소속인 레이븐은 아마 거절할 거 같고. 곰아저씨는 잘 모르겠다. ‘클랜에 좀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 같았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후힛, 후히히힛!!” 에르웬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초저녁부터 시작된 에르웬과의 술자리는 예상보다 길게 이어졌다. 원래는 날 불러낸 용건에, 추가로 근황 정도만 듣고서 자리를 파할 생각이었지만……. “뭐? 클랜 마스터가 대머리라고?” “네, 그렇다니까요. 사냥을 하다가 가발이 벗겨졌을 때 웃음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오늘따라 에르웬과의 대화가 재밌었다. 술을 워낙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기지? ‘아, 집에서 애들이 기다릴 텐데…….’ 도중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에르웬이 흥미로운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일어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돌아갈 시간. “저, 우리 이만—.” “아, 맞다!” “응?” “제가 이번에 정수 새로 먹은 거, 얘기했던가요?” 뭐? 정수를 먹었다고? 이건 또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 아닌가. “되게 특이한 능력이에요. 저랑도 잘 맞고요.” “그만 뜸 들이고 어서 말해 봐라. 뭘 먹었는데?”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에르웬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일단 5등급 정수였다. 베테랑인 언니가 추천해서 먹은 정수인 만큼, 활 요정인 얘와도 무척이나 잘 맞았고. ‘이건 나중에 지우지 않아도 되겠네.’ 돌아가면 에르웬의 육성 루트도 어느 정도 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얘가 이번에 습득한 정수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와, 그거 알아요? 아저씨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졌어요.” 그야 당연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이 게임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플레이어. “워낙 특이하다고 말이 많은 정수 아니냐. 실제로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할 수밖에.” “그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하네요. 직접 보여 줄 수도 없고…….” 음, 그건 그렇지. 내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차였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힐긋했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위층에서 잠깐 이능만 보고 갈래요?” …어떡하지? 207화 찰나 (3) 이 도시의 주점은 대부분 숙박 시설을 겸한다. 그 말인즉슨. “위층에서 잠깐 이능만 보고 갈래요?” 이는 방을 잡고 이능을 보여 주겠다는 뜻이다. 사실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거 같군.” “……네?” 당황하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내비췄다. “늦었지 않나. 집에 가봐야 한다.” 날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가 있어서 말이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 줘라.” “아…… 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이 세계에 누구보다 흥미가 많은 게이머로서 그 이능을 봐버렸다간 내일 아침까지 이것저것 실험하느라 날을 샐 게 자명할 터. “아, 왔냥?” 이내 에르웬과 헤어져 집에 도착하자 거실에서 요리 책을 읽고 있던 미샤가 다가와 킁킁거렸다. “생각보다 얼마 안 마신 모양이넹?”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서.” “흐음, 그래?” 죄를 지은 것도 아닐진대, 왠지 모르게 시선을 마주하기가 불편하다. 에르웬을 만난다고 말하지 않아서 그런가? 음, 역시 그게 이유인 듯하지만, 만난다고 말했으면 싫어했을 거 같으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이나르는?” “방에서 자고 있당.” “……그렇군. 너도 얼른 자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내고 위층으로 향하던 차, 미샤가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저기 가서 앉아 봐라.” 설마 들킨 건가? “자기 전에 속 풀고 자는 게 몸에 좋당. 별건 아니고 간단하게 스튜나 좀 끓여줄게.” “아… 고맙다.” 일단 시키는 대로 부엌 식탁에 앉았다. 미샤는 앞치마를 걸쳐 입고 요리를 시작했고, 난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꼬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다는 듯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늘, 에르웬을 만나고 왔다.”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래?” 대답이 좀 늦긴 했지만 놀란 거 같지는 않은 목소리. “……혹시 화났나?” 내 물음에 미샤는 피식 웃었다. “……화는 무슨. 그런 것도 상대가 돼야지 하는 거지.” 미샤는 그리 말하며 스튜가 가득 담긴 냄비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 “그건 왜……?” “아, 간이 안 맞더라고.” “그, 그렇군?” “기다려 봐라 다시 끓여줄 테니.” 이내 미샤는 새로 스튜를 끓여서 식탁에 내줬다. 그리고 조금 피곤하다면서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일단 그릇에 담긴 스튜를 먹었다. 늘 그랬듯 내 입에 딱 알맞게 만들어진 스튜는 반찬 없이도 쑥쑥 들어갔다. 이런 미샤가 간을 맞추는 걸 실패했다고? ‘그럴 리가.’ 식사를 끝마친 나는 대충 그릇을 정리해 둔 뒤 쓰레기통을 열었다. 그리고……. “…….” 쓰레기통 뚜껑을 쥔 채로 멍하니 굳었다. ‘……솔직히 말하길 잘했네.’ 쓰레기통에 들어간 스튜에는 당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얘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내 옆에 다가와 킁킁거렸을 때부터,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나고 온 것인지까지 전부 다. *** 시간은 유수와도 같다. 손을 뻗어 막을 수도 없으며, 이미 흘러간 것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삶이라는 조각배를 타고서 어떻게든 목표를 향해 노를 저어가는 것. ‘그래, 오늘도 시작해 보자.’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잠시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 의욕을 부여하는 시간을 가졌다. 게이머로서의 노하우다. 이런 거라도 해야 반복 퀘스트에 안 질리지. “비요른……. 어, 일어났넹? 그럼 나 대신 네가 아이나르 좀 깨워라.” “알았다.” 반복 퀘스트라고 할 만큼, 그동안의 내 하루 일과는 매일 똑같았다. 오전 7시에 기상해서 아이나르와 함께 미샤가 해준 밥을 먹으며 외출 준비. “오늘도 도서관이냥?” “왜 같이 가려고?” “아니, 됐당. 나는 이따가 아이나르 데리고 훈련소에나 다녀오려고.” 아침 식사가 끝나면 미샤와 아이나르는 월 이용권을 끊은 훈련소로 가서 몸을 풀고, 나는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오늘도 그 책을 보러 오신 겁니까?” “아,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후후, 고마워하십시오. 그럴 거 같아서 미리 빼뒀습니다.” 최근에는 초장편 소설 시리즈를 읽고 있다. 라그나가 추천해 준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미궁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내용도 알차고. ‘뭐, 등장인물들이 다 착하기만 해서 현실성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설이라 생각하고 보면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괜찮은 오락거리잖아? 이 세상은 술 먹고 노는 걸 제하면 즐길 만한 취미가 너무 없는 게 문제다. “그럼 수고해라.” 늘 그랬듯 1시쯤 되면 읽던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와 점심 식사를 한다. 메뉴는 미샤가 싸준 고기고기 도시락. 분수대에 앉아 대충 까먹고 있으면 로트밀러와 만날 시간이 된다. “오늘은 늦었군. 30초 정도.” “…….” “훌륭한 길잡이가 되려면 시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오늘은 늦은 만큼 곧바로 수업을 시작하겠네.” 로트밀러에게 탐색꾼 교육을 받은 지도 벌써 일곱 달째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한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로트밀러의 지식은 바다와 같아서, 배워도 배워도 아직 알지 못하는 게 계속해서 나온다. “자네도 이제 기본기는 다 갖춘 거 같으니, 슬슬 심화 과정으로 넘어가 보겠네.” “그보다, 어제 내가 한 말은 어떻게 됐나?” “교습소를 차려 보라던 것 말인가?” “그래.” 교습소를 처음 언급했던 건 로트밀러였다. 하지만 이 아저씨한테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교습소를 차리면 대박 날 거 같단 예감이 든다. 요정처럼 귀가 좋지 않아도, 수인처럼 코가 좋지 않아도, 인도자 능력을 타고나지 않아도 익힐 수 있는 길잡이 기술. 노력의 대가였던 로트밀러의 정수. 이것만으로도 매력적인데, 심지어 이 아저씨는 워낙 바닥부터 시작해서인지 가르치는 실력까지 일류다. ‘근데 이 아저씨는 자기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지. 솔직히, 왜 아직도 안 하는지가 의문이다. 난쟁이놈의 대장간과 달리, 초기 자본도 거의 없다시피 하잖아?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너도 그때부터 몇 달을 넘게 놀고만 있지 않나.” “노는 게 아니라, 그동안 하지 못했던 수양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네만.” “그렇다면 더욱더 하는 게 낫지 않나. 때로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건…… 부정하기 어렵군. 실제로 자네를 가르치며 나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꽤나 있으니.” “그래서 대답은?” “아직은 내키지가 않네.” 나는 티 안 나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로트밀러는 현역에서 물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데……. “그래? 결정이 되면 말해 줘라. 내가 돕겠다.” “아무튼, 말이라도 고맙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다.” 사실 이미 대강 계획도 짜뒀다. 일단 초창기엔 훈련소를 대여해서 교습소로 쓰며, 탐험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인간 아이들을 타깃으로 마케팅. 조금 자리가 잡히면 탐험가 길드에도 광고를 넣으며 탐험가 전용 클래스를 따로 운영한다. 아무래도 그쪽이 좀 더 돈이 될 테니까. 물론 자리를 잡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로트밀러는 인간이지.’ 인간은 세금이 적다. 일단 자리를 잡고서 이후로 일정량의 수익만 나와줘도 평생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을 터. ‘그래 봤자 이 아저씨가 안 한다고 하면 끝이지만.’ 자본이 문제인 거면 내가 어느 정도 투자할 의향도 있다. 주식 개념은 아직 생소하지만, 이 세상에 아예 없는 개념인 것도 아니니. 재테크를 하기도 딱인데……. “오늘 가르칠 내용은 전부 끝났군.” 아무튼, 이후로 몇 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있자니 오늘 수업도 끝이 났다. 그때의 시간이 약 8시. 심화 과정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설명이 길어서 한 시간 정도 더 늦게 끝났다. “그럼 내일……. 아니, 내일은 오지 못하겠군.” “넉넉히 잡아 사흘 뒤에 보는 거로 하지.” “그러세. 이번에도 몸조심히 다녀오고.” 아무튼, 정해진 하루 일과는 여기서 끝. 저녁은 난쟁이놈이나 곰아저씨가 소개시켜 준 탐험가와 술을 마시며 업계 동향을 듣거나, 팀 전원이 모여 친목 시간을 가질 때가 많지만……. 오늘은 아무 약속도 잡히지가 않아서 말이지. 15일 자정마다 겪는 나만의 특별 일과도 이미 치렀으니, 이 다음 스케줄은 완전히 비어 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주어진 나만의 시간. ‘다시 도서관이나 갈까? 아니면 훈련소에 가서 몸이나 풀어?’ 약간 고민이 됐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아무 주점에 들어가 혼자 술을 주문했다. 그래,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크으.”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켜며 머릿속에 떠다니는 상념을 정리했다. ‘요즘엔 정말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이 무료하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서 편안하며 즐겁다. 하지만, 반대로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진다. 꿈같은 나날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리가 없단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으려나? 원탁에서도 별말은 없었고.’ 2주일 전에 참석한 원탁 집회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상이었다. 평소처럼 무게 잡으며 정보를 뱉으니 다들 우와우와하며 경외의 시선을 보냈고, 나는 지루한 척 회원들이 말하는 정보들을 경청했다. 그게 그날 있던 사건의 전부였다. 누군가 내 흥미를 끌 만한 재밌는 정보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집회 자체도 두 차례만에 끝나 버렸다. ‘아. 이상한 게 아예 없던 건 아닌가?’ 그래도 이번 집회에서 있었던 특이점을 굳이 뽑자면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광대. [그럼 다음 달에 뵙죠. 피시싯.] 집회가 끝날 때 광대가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회원들에게.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투로. ‘다음에 봤을 때는 뭔가 재밌는 일이 있을 거란 뜻이려나?’ 글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다. 애초에 광대가 그런 캐릭터인 데다가, 내가 뭐 예언자나 독심술사인 것도 아니지 않나. ‘슬슬 일어나 볼까.’ 약 1시간 정도 혼자 주점에 앉아 궁상을 떨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이미 근딜 자매는 훈련소에서 돌아와 투닥거리고 있었다. 음,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혼난 것에 가깝지만. “아이나르! 빨랫감은 제대로 한곳에 모으라고 했지 않냥! 이래 놓고 네가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거 같냥?” “그……. 이따가 하려고 했다! 진짜 안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귀찮아서는 더더욱 아니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터 또 이러면 네 건 네가 알아서……. 어, 비요른. 이제 왔냥? 저녁 식사는?” “아직이다.” 술은 마셨지만, 일부러 안주도 시키지 않았다. “그래? 금방 차려줄 테니 먼저 가서 씻고 있어랑. 야! 아이나르! 지금 어디 가는 거냥!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쳇! 들켰나!” 이후 미샤에게 마저 혼나는 아이나르를 뒤로한 채 욕실로 가 씻고 나오니, 상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이렇게 차려 먹기 힘들 테니, 평소보다 신경을 좀 썼다던가? “항상 고맙다. 미샤.” “뭘 새삼스럽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미샤가 시장에서 사온 카드 게임을 하며 늦은 새벽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야 어차피 오늘은 늦게 자는 편이 좋으니까. “슬슬 해가 뜨는군.” “다음에는 우락부라크랑 아루루도 불러서 같이 놀면 좋을 거 같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냥? 아루룽은 몰라도 아브만은 집에 있어야지. 아내도 있는데.” “그럼 아내도 같이 오라고 하면 되지 않나!” 뭐래, 애는. 내버려 두면 쓸데없는 언쟁이 시작될 듯했기에 내가 나서서 정리를 했다. “됐고, 이제 자러 가지. 웬만하면 최대한 늦게 일어나라.” 내일 밤, 미궁이 열린다.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미궁에 막 들어선 것을 고려하면 명백한 이현상일 테지만,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이후로 벌써 몇 번째 겪는 일이니까. “리에이트.” 은은한 밝기의 빛구체가 머리 위로 떠올라 시야를 밝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막다른 벽면에 위치한 계층비석이었다. “이번에도 제대로 도착했네요. 이 정도면 특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는데요?” 성공 확률 100%에 빛나는 차원 불안정 버그. 늘 그랬듯 레이븐이 먼저 다가가 비석 위에 손을 올렸다. 포탈이 생성될 때의 마력흐름 구조가 너무 독특해서 한두 번으로는 감이 안 온다던가? 물론 그걸 알아서 어디다 쓸지는 나도 모른다. 쓸데가 있기는 한가? 「최초로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2」 아무튼, 포탈 너머로 들어서자 특유의 칙칙한 공기와 지면이 우리를 반겼다. 제기랄. 「2층 짐승의 소굴에 입장했습니다.」 하필 걸려도 여기가 걸리냐. “얀델 씨, 어떻게 할 거예요?” “……다시 내려간다.” 반 년 넘게 로트밀러의 수업을 들었던 나지만, 그럼에도 여기는 답이 없다. 갈림길이 워낙 많고 규칙도 복잡하거든. 여기는 로트밀러도 후각 스탯을 이용해 뚫었을 정도이며, 내게도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말까지 해주었던 계층. “그럼 이번에도 역시 고블린 숲?” 말해 뭐하랴. 1층으로 도로 내려온 우리는 가장 많이 애용한 고블린 숲으로 향했다. 망자의 땅이나 바위사막도 길을 찾는 건 크게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이 루트가 가장 빠르거든. “어쩌면 그쪽도 포탈 개방 공적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빠르게 이동할 거니 잘 따라와라.” 나는 본격적으로 나침반을 꺼내들고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암흑지대를 벗어났고, 그다음에도 암흑지대와 일반구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단 루트로 이동을 했다. 곰아저씨에게 포탈 방향을 묻는 일도 없었다. 이제 수정동굴은 마스터했으니까. 터벅. 그렇게 미궁 진입 후 2시간이 조금 넘게 흘렀을 때였다. “얀델 씨.” 레이븐이 아이나르에 탑승한 채로 나를 멈춰 세웠다. “뭐, 뭔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중심부에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어요. 마치 수십 명이서 합동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합동 마법이라면, 고위 마법을 쓰거나 특정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마법사끼리 고유 마력을 링크하는 방식을 뜻한다. 참고로 대규모 레이드에서 자주 쓰인다. 그런데 그게 1층에서 사용된 것도 모자라……. “……흑마법. 저주받은 마력의 기운도 느껴져요.” 흑마법까지 사용되고 있다니. 사태가 심상치 않다. “……역시 노아르크 쪽이겠지?” “네. 노아르크 측에 붙어먹은 흑마법사가 상당하단 건 상식이니까요.” “잠잠하다 싶더니만 골치 아프게 됐군.” “어, 어떡하실 거예요?” 작금의 사태가 두려운 건지 레이븐이 평소답지 않게 멘탈이 흔들린 모습을 내비쳤다. 그래, 이럴수록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변하는 건 없다. 앞으로는 더 속도를 올리지. 최대한 빨리 1층에서 벗어난다.” 나는 신속히 오더를 내린 뒤, 즉시 멈췄던 이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한 5분쯤 흘렀을까. “뒤쪽에서 뭔가 와요!” 돌연 레이븐이 목 터지랴 소리친 그 순간. 후웅-! 뒤쪽 통로에서부터 붉은색의 빛무리가 순식간에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피하고 자시고 할 순간도 없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모, 모르겠어요. 일단 마력 같긴 한데…….” 불길해서 미칠 것만 같다. 레이븐도 모르는 종류의 마법이라니. “저기, 비요른……. 일단 계속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냥?” 미샤의 조언대로 우선은 다시금 앞장서 길을 뚫으며, 이 사태에 대해 분석을 시작했다. 마땅히 나오는 해답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괜찮겠죠?” 이럴 때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 속. 딱 한 가지만큼은 너무도 자명했다. 축복과도 같았던. 그래서 더욱 찰나처럼 느껴졌던. 평화롭던 나날은 오늘로써 끝을 고했다. 208화 리더 (1) 천천히, 사방을 경계하며 나아가고 있다. 몇 분 전부터 우리에게 생긴 변화다. 2층을 향해 뛰는 걸 멈추고, 안전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동굴 전체를 메웠거든. “……이건 들어 봤어요. 흑마법이에요. 예전에 토벌전에서 흑마법사들이 썼다던.” 심장이 낮게 뛴다. 두근-! 레이븐이 풍속성 마법으로 안개를 거둬 내고 있음에도 가시거리는 고작 반경 5m가량. 이런 환경에선 위험에 대처하기 어렵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단순히 HP/MP로 이뤄진 게임 속이 아니니까. 단 한 번의 실수가 사망으로 이어지고. ‘다시하기’ 같은 버튼은 없는 세상. 두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누구도 잃지 않고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선. “얀델 씨…….” 지난날의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에 너무도 연약했다. 그렇기에 동료를 잃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헤쳐나갈 수 없는 위기였다. 하면, 이번엔 어떨까. ‘그래, 그때보다 많이 강해졌으니까…….’ 긴장으로 몸이 굳지 않도록 긍정적인 부분을 머리에 아로새긴다. 그때였다. “얀델 씨!” “소리 지르지 마라.” “그럼 한 번에 대답하든가요.” “그래서 하려는 말은?” 아이나르에 탑승한 레이븐이 조심스레 물었다. “2층으로 가는 게 올바른 선택일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왕가의 기사단들도 엄청 많이 들어왔잖아요. 대형 클랜들도 많이 있을 테고. 차라리 그쪽에 합류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아예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우리가 스타트 포인트 근처였던 거라면 분명 나도 그 선택지를 골랐을 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글쎄……. 딱히 좋은 선택지로는 안 보인다. 한 가지 정정할 부분도 있고. “레이븐, 대형 클랜들 중 절반 넘게 미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탁에서 여우 가면에게 들은 것이다. 왕가에 불만을 품은 대형 클랜들이 대규모로 보이콧을 시작했다. 뭐, 왕가가 그런 클랜들을 살생부에 적어 두고 있단 걸 눈치챈 몇몇은 발 뺀 모양이지만……. 그래 봤자 그 숫자는 많지 않을 터. “……하필 이런 때에.” 그게 아니라, 이런 때이니까 일을 벌인 거겠지. “아브만, 방향은?” “저쪽이다.” 곰아저씨에게 포탈의 위치를 확인하며 계속해서 길을 찾았다. 이 또한 안개가 동굴을 뒤덮은 후부터 생긴 변화다.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포탈만 찾으면 괜찮아질까요?” “2층이라고 안전하진 않겠지. 하지만 4층까지 가기만 하면 된다.” 천공의 탑은 독립 계층이다. 거기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 전란 속에서도 무사히 도시로 돌아가는 게 가능해질 터. 역시 그게 현재 우리로서는 최선— “아뇨. 제 말은 포탈 쪽에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냐는 거였어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제가 노아르크 측 전술가라면 2층으로 향할 방법을 없앨 수단부터 찾았을 거 같거든요.”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 차원 불안정 현상을 이용한 덕분에 우리는 이미 최외곽부에 있는 상황 아닌가. “만약 2층으로 가는 게 불가능해진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예요?” 평소와 달리 내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오는 레이븐. 이런 걸 보니 얘도 불안하구나 싶기는 하다. 하긴, 의존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적을 테니까. “그땐 네 말대로 도시 쪽 사람들과 합류할 거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고.” 나는 애써 침착히 말했다. 이게 정말 가장 좋은 방법인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명쯤은 그래야 하니까. “설명이 됐으면, 계속 이동하지.” “네…….” 그렇게 2층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나아가고 있던 때였다. “드디어 사람을 만나는군. 혹시 너희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나?” 탐험가와 조우했다. 인간 셋에 수인 둘로 이뤄진 탐험가 팀. 장비 수준은 우리와 비슷하거나 위다. 하긴, 이 시간대에 여기까지 온 놈들이니 저층 탐험가일 리는 없겠지. 만약 합류한다면 전력이 크게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일단 인식표부터.” 과연 믿을 수 있는 새끼들인가. *** “진짜군.” “그럼 가짜겠나?” 우리는 마주치자마자 손목에 새겨진 인식표를 통해 서로가 도시 측 사람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원래라면 인식표 확인이 끝나는 대로 서로 갈 길을 갔을 테지만……. 지금은 명백한 비상 상황. “혹시 아는 게 있나?” “많지는 않다. 노아르크 측에서 뭔가 일을 벌였단 것 말고는.” “노아르크라……. 역시 그랬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측 리더를 보며 나는 눈을 좁혔다. “너희 쪽엔 마법사가 없나?” 노아르크 쪽에 일반 마법사가 적다는 건 익히 알려진 이야기. “보다시피.” 다만 상대측은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공적치를 노리는 팀이라서. 마법사가 있을 이유가 없지.” 씨바, 이거 말이 또 되기는 하네. 스피드런을 할 때 마법사는 어지간하면 참가하지 않는다. 이동속도가 느려서 짐만 될뿐더러, 마법사는 스피드런을 해봤자 경험치를 못 먹으니까. 따라서 통성명부터 해보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내게 작은 발칸이라는 이명이 있듯, 저쪽도 명성이 있다면 내가 이름을 들어 봤을 수 있다는 판단. “한센 켈더스다.” “한센?” “오, 혹시 나를 아나? 어쩌면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일 수도—” “그럴 일은 없을 거 같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감이 불길해서 흠칫했을 뿐, 이름 자체는 처음 듣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 한센이 동료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작은 발칸? 아! 그 계층군주 때의 바바리안!” 저 중에 내 이명을 알고 있던 자가 있던 모양. 한센의 시선이 조금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이제 보니 유명한 녀석이었군? 이렇게 된 거 같이 움직이는 게 어떻나? 피차 탐사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한센 측에서 먼저 건넨 합류 제안. “잠시 시간 좀 주겠나?” “몇 분 정도라면. 계속 한자리에 있기에는 영 불안해서 말이지.” 나는 한센의 양해를 구한 뒤 동료들과 의논의 시간을 가졌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혹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이질적인 부분을 얘네가 발견했을지 모른다는 판단. “나는 잘 모르겠당. 사람이 늘으면 안전하긴 할 거 같은데……. 그래도 비요른,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당.” “나도 미샤랑 똑같다!” 우선 근딜 자매는 철저하게 내 선택을 따르겠단 의사를 내비쳤다. 곰아저씨는 반대하는 측이었고. “뭔가 이상하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분명 이름이 알려졌을 법도 한데,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니? 지하도시 출신은 아니어도, 약탈자일 가능성이 있다.” 이건 좀 신경이 쓰인다. 우리 중에서 곰아저씨는 발이 가장 넓으니까. “레이븐, 네 생각은 어떻지?” “이, 이상한 건 없는 듯해요. 그러니까 그냥 합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인식표도 멀쩡했고.” 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심 레이븐을 가장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할 거 같다. 이런 사태가 처음이라서 그런가? 얘도 평소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네. “인식표는 신경 쓰지 말고 철저하게 사람만 봐라.” “네? 그게 무슨 뜻…… 아!” 레이븐이 내 말의 진의를 깨닫고 입을 벌렸다. 상황이 이 지경에 온 이상, 인식표만 믿는 건 미련하다. 짝퉁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니까.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짝퉁을 못 만들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을 벌였든가. 아니면, 만들어 냈기에 그걸 믿고 과감히 수를 던졌던가. 아직 나는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감을 믿고 선택을 내려야 한다. 한 번 죽으면 게임 오버인 [던전 앤 스톤]을 할 때처럼.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얀델 씨가 결정을 내려주세요.” 레이븐이 혼란스럽다는 듯 내게 모든 걸 일임했다. 대체 얘는 왜 이렇게까지 멘탈이 나간 거지? “레이븐, 정신 차려라. 천공의 탑에선 은신 중인 암살자가 옆에 있을 때도 멀쩡했지 않냐.” “그, 그때랑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제가 실수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잖아요.” 아, 그런 거였구나. 레이븐에 대해서 새롭게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설마 책임질 게 늘어나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스타일일 줄이야.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내 판단에 누군가 죽는다. 그 부담을 이겨내고 결단을 내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될 수 없다. 이곳은 게임 속이 아니니까. 단순히 키우던 캐릭터 하나가 죽고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제기랄.’ 결국, 결정은 내 손에 달렸다.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거리를 두고서 떨어진 한센 무리를 응시했다. 만약 저들 중 마법사가 있었다면. 그게 아니라도, 이름을 들어 본 탐험가라거나 유명 클랜 소속 팀이었다면. 그랬다면 조금은 쉽게 믿음을 가졌을 텐데. ‘그 어느 쪽도 아니라니.’ 애석하게도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결정은 내렸나?” “그래.” 이내 나는 고민을 끝마쳤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방금 한 제안은 거절하겠다.” 괜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최종 선택이었다. “그래? 아쉽게 됐군.” 의외로 한센은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녀석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까지 이해한 듯했다. “신중한 녀석이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너희는 어쩔 거지?” “일단 2층으로 갈 거다. 거기도 멀쩡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보다야 낫겠지.” “그렇군. 기회가 되면 도시에서 보지.” “뭐 하냐? 어서 이동하자.” 짧았던 대화가 끝나고, 한센 무리가 먼저 길을 떠나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피식. 나는 의심과 불안을 지우듯이 억지로 웃었다. 언제는 결과를 알았기에 선택을 했던가. “우리도 슬슬 출발하지.” 그저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 한센 무리와 헤어지고서 5분 정도 흘렀을 때, 우리는 다섯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먼저 갔던 한센 무리의 것은 아니었다. 장비가 싹 털려 벌거벗은 상태였으나, 신원을 확인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기사네요.” “……기사라고?” “네. 여기 목뒤에 있는 문신. 테르텐 자작가의 문양이거든요.” “가문의 문양을 찍다니, 마치 낙인 같군.”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도 되는 거 같다. 그래서일까? 괜히 입맛이 씁쓸해진다. 기사조차 소모품 취급을 받는 세계라는 게 더없이 피부로 와닿아서. “……모든 귀족가가 이런 건 아니에요.” 변호라도 하듯 읊는 레이븐을 뒤로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기사 하나와 병사 넷의 시체. 그리고 전투 흔적이랄 게 없는 주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괴물 같은 놈이 있군.” “네. 상처를 보니까 전부 일격에 끝냈어요. 상흔이 똑같은 걸 보니, 여럿이서 공격한 것도 아닌 듯하고요.” 오러를 쓰는 기사는 대인전의 최강체이며, 마법과 이능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기득권을 수호하는 칼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다니. 새삼 폭풍의 눈 속에 들어섰다는 게 실감 난다. 한평생 검을 잡고 휘두르며, 막대한 권위를 누렸을 기사가 엑스트라처럼 죽었다. 아니, 지금도 죽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몇 달 전 지하에서 벌어졌던 노아르크 토벌전 때처럼. “사망 시각은?” “20분쯤 됐어요.” 그래, 아주 근처에 있다는 건 아니구나. 긍정적인 단서였으나,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지금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놈들은… 진짜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곰아저씨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사의 시체를 보고 나니 현재 상황이 어떤지 온몸으로 와닿은 모양이었다. 하긴, 우린 아직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으니.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벌일 셈이 아니다. 아브만.” “…….” “이미 전쟁 중인 거다.” 우리는 운 좋게도 최외곽부에 있다. 그래서 아직은 그 여파를 직접 겪지 않았다. 뭐, 이제 그것도 시간문제겠지만. “어떡하실 거예요?” 레이븐의 물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1층에 내려오고서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쪽 방향에는 포탈밖에 없어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 기사를 죽인 놈이 그리로 갔을 거란 거 아니냐.” 내가 판단한 유일한 탈출구 2층 포탈. 그곳에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발길을 돌려도 상황이 암울한 것은 마찬가지다. 중심부에서 시작된 전투는 머지않아 1층 전체를 뒤덮을 터. ‘씨발, 짐승의 소굴이고 뭐고 1층으로 내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를 안 할래도 후회가 된다. 설마 그 사소한 선택이 이런 엿 같은 상황에 나를 처박아 버릴 줄이야. 마치 비정한 세상이 나를 시험하는 것만 같다. 어떤 선택을 하든 좋아. 근데 그 책임은 모두 네 몫이야. 나도 모르게, 동료들에게 시선이 갔다. “…….” 미샤, 아이나르, 레이븐, 곰아저씨. 그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듯. “……돌아가지.”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앞에 있는 게 누구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오르큘리스의 일원일 수도 있겠지. 이 정도의 강자는 노아르크에도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던 차였다. “하, 정말 그냥 돌아가는 겁니까!” 안개 너머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터벅. 걸음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고. 솨아아아아! 그 즉시 레이븐이 돌풍을 보내 안개를 거뒀다. 드러난 것은 한 명의 사내였다. 장비랄 것도 없이, 간소하게 흑색의 한 벌 옷만을 입고 있는 사내. 얼굴에는 해골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무슨 바바리안이 그렇게 숫기가 없어요? 예?” 그 음성에 덜컥 몸이 굳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피싯.” 어딘가 익숙했다. 209화 리더 (2) 우연이다. 그저 웃음소리가 비슷할 뿐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비슷한 버릇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겠어?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기시감을 느낀 즉시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광대.’ 원탁의 감시자의 회원 중 하나이자, 그중에도 가장 아는 게 많고 실력도 좋아 보였던 그놈. 그게 바로 저 사내의 정체다. ‘노아르크 출신인 건 짐작했지만,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토록 궁금했던 광대와의 대면. 다만 반갑다는 마음은 일절 생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좆됐네.’ 어떡하지? 딱 봐도 존나 세보이는데. 수사자라고 밝히면 그냥 보내 주려나? ‘그럴 리가.’ 문득 피어난 나약한 생각은 집어던졌다. 이는 내가 악령이라는 걸 커밍아웃하는 것이나 다름없을뿐더러……. 광대가 존중하는 건 수사자다. 이런 좆밥 바바리안이 아니라. 내 정체가 까발려진 순간, 광대는 나에 대한 흥미를 잃고 분노하겠지. 따라서, 나는 외쳤다. “전투 준비!” 정면 돌파. 두려움만 이겨 낼 수 있다면, 언제 어느 순간이든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그것. “이제 좀 바바리안답군요!” 놈이 그런 나를 보며 즐겁다는 시선을 보낸다. 근데 덕분에 얘도 정신이 들었을까? 레이븐이 즉시 영창을 외웠다. “데르바 티무네스.” 팀 보이스 마법이다.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 상대이니만큼, 전투 준비 소리를 듣자마자 이것부터 켤 생각을 했던 모양. “쯧, 재미없게.” 즐길 콘텐츠가 사라진 광대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내가 신경 써 줄 부분은 아니겠다마는. “전부 내 뒤로 물러나라!” 신속하게 오더를 내림과 동시에 ‘거대화’를 사용해 통로를 막았다. 1층 수정 동굴의 이점이다. 통로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철컥. 대부분 좁다. 거대 바바리안 하나로 틀어막을 수 있을 만큼.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두려움을 떨쳐내듯 조상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방패를 높이 든 뒤, 놈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두근-! 딱 적당한 속도로 뛰기 시작한 전사의 심장. 뜨듯하게 달궈진 피가 빠르게 순환하며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적어도 싱겁게 죽지는 않을 것만 같은 기분. “얀델 씨, 이러면 저희도 공격을 할 수가 없어요!” 마법사의 걱정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하지 마라.” “네?” “정체를 모르는 놈이지 않나. 일단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다. 그전까지는 절대 먼저 나서지 마라.” 대인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보다. 오만 가지의 이능과 아이템을 어떻게 조합하여 어떤 컨셉의 클래스로 캐릭터를 키웠는가. 그걸 알지 못한다면 올바른 대응이 어렵다. “그런……! 기사를 죽인 괴물이에요. 근데 얀델 씨 혼자 알아내겠다고요?” 그럼 어쩔 건데. “이게 제일 효율적이다.” 나는 탱커다. 그래서 모르는 공격을 처맞아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얘네는 아니다. 대비치 못한 일격에 당하는 순간 게임 오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을 터. “뭐라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재미가 없군요.” 작전을 더 의논할 새도 없이, 광대가 싸늘한 목소리로 손을 옆으로 뻗었다. 어느샌가 그 손에는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미스릴제네.’ 청은색의 빛을 뿜어내는 송곳. “그냥 죽어.”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눈앞에서 광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놓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래 봤자, 일자형 통로 아닌가. ‘어디서 시야 플레이를.’ 방패를 살짝 내리자, 가려진 시야각에서 동작을 취하는 광대가 보인다.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나는 금방 공격 지점을 특정했다. ‘허벅지라…….’ 전투에서는 모든 것이 정보로 이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무기를 휘두를 레벨은 진작에 끝났고, 동작 하나하나에는 근거와 의도가 담기기 마련. 하면, 녀석은 어째서 허벅지를 노렸을까? ‘역시 암살자 계열인 건가.’ 상성상, 놈은 방패를 뚫기 성가시다고 여겼을 것이다. 7개월간, 빚을 갚고서 모은 돈으로 가장 먼저 업그레이드한 게 바로 방패니까. ‘대가리가 있으면 보자마자 알았겠지.’ 4단계 금속 월광석으로 제작한 대형 방패. 아크제 검이라 하더라도 몇 번은 버텨낼 수 있을 정도의 내구도를 지녔다. 그 말인즉슨. 칵! 5단계인 미스릴 무기로는 뚫는 것이 불가능. 카칵! 방패로 막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는 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밀려나는 놈의 육신. 나는 머릿속에 정보 하나를 더 입력했다. 뭐, 사실 이거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근력은 내 아래.’ 역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7개월 전이라면 모를까. 나는 장비부터 시작해 많은 부분에서 성장을 거듭했다. 보아하니, 용살자급은 아닌 거 같고. ‘뭐, 얘도 아직 전부 보여 준 건 아니겠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며 뒤로 물러선 광대를 응시했다. 첫 공격은 막아내긴 했으나, 한 번이라도 허용한다면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야 ‘죽어’라고 당당히 말했지 않나. 허벅지를 노리면서 할 대사는 아니었다. ‘그럼 역시 독인가.’ 무기에 독이 발라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능도 독과 관련된 계열일 수도 있겠고. 다만, 아직 확인된 게 없기에 추정을 하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었다. ‘슬슬 쓸 때가 된 거 같은데.’ 아직 간단하게 육탄 능력으로 수 교환을 한 번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게 막혔으니, 스킬을 쓸 차례. “아, 정말! MP는 어지간하면 아끼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특유의 과장스러운 말투야 어쨌든 간에. “……얀델 씨! 저 사람 악령이에요!” MP라니. 이 미친 새끼는 플레이어인 걸 숨길 생각이 없구나. ‘노아르크 출신들은 다 이런가?’ 하긴, 이미 왕가랑 척을 졌는데 악령인 걸 감출 이유가 없을 것……. “아니, 잠깐만요. 악령이라면 설마…….” 그 말에 괜히 내 몸이 몸이 움찔했다. 레이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노아르크 출신이자. 기사를 홀로 죽일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악명 높은 플레이어. “시체 수집가……?” 레이븐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 이름을 뱉은 순간이었다. “꺄앗.” 나는 서둘러 고개만 돌려 뒤를 확인했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뒤쪽에 널브러져 있던 기사와 병사의 시신이 몸을 일으켜 레이븐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니미럴, 진짜였네.’ 더 이상의 부정은 의미가 없었다. 시체 수집가의 캐릭터 컨셉은 유명하니까. 나도 몇 번인가 플레이했던 좋은 직업이었다. 저주 및 소환에 특화됐으며, 취약한 근접전을 대비해 민첩 스탯에 상당한 비중을 둔……. ‘민첩독넥.’ 민첩 독 네크로맨서. 지금부터 내가 싸워야 할 적의 직업이었다. *** 송곳 같은 무기를 들고서 급소를 노려오기에 암살자인 줄 알았건만. ‘네크로맨서라…….’ 명백한 오산이었다. 나를 만만하게 보고서 평타를 치려 했을 뿐. 진짜 주특기는 따로 있었다. ‘우연히 근처에 있던 게 아니라, 우리를 찾아온 거구나.’ 정체를 알고 나니 방금까지 서 있던 주변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놈은 일부러 시체를 내버려 뒀을 것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시체인 척 버려 두면 CCTV처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이제 와서 그게 뭐 중요하겠냐마는. ‘탐색전은 필요 없겠네.’ 나는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용살자와의 전투 이후 오르큘리스에 정보를 모았던 나는 ‘시체 수집가’에 대해서도 꽤나 자세히 알고 있다. ‘알려진 정수는 총 6개.’ 물론 미확인 정수가 3개는 될 것이며, 이놈의 악명을 떠올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클래스 확인은 끝났다. “다들 싸우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 나는 서둘러 오더를 내렸다. 일반적인 소환술사와의 전투라면 소환물을 먼저 해치우는 게 정석이지만……. “싸우지 말라니?” “거리를 벌리는 게 우선이다!” 독 네크는 소환물 하나하나가 자폭 병기에 가깝다. 거리를 벌리는 게 공략의 기본이라는 뜻. “아루루, 이리 와라!” “네!” 그렇게 아이나르가 레이븐을 챙기며 뒤로 물러설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번뜩-! 가면 틈새로 회색 안광이 터져 나왔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돌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발에서부터 무뎌져가는 신경 감각. 무슨 스킬인지는 당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4등급 몬스터, 메두사의 정수. 타닷. 나부터 죽이겠다는 건지 놈이 재차 송곳을 들고서 내게 달려든다. 확실히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주변에 전투 흔적이 없던 것도 이 스킬 때문이겠지.’ 암만 기사라고 해도 4등급 정수는 버티기 어려웠을 거다. 평기사 정도면 레벨 5인 게 보통이니까. 아무래도 항마력은 챙기기 어려울 수밖에. ‘뭐, 나는 아니지만.’ 만티코어의 패시브 스킬 [유전]. 지난 7개월간, 나는 이 패시브의 스탯 200개를 전부 항마력으로 채워 넣었다. 보통은 잡스탯도 같이 오르지만, 항마력의 경우엔 편법이 있거든. 아무튼, 그 결과.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내 전투 함성은 ‘불굴’ 스킬을 대체할 수 있게 진화했다. 「캐릭터의 항마력 수치가 400 이상입니다.」 불사자 각인 2단계에서 +20. 오우거 정수에서 +80. 만티코어 패시브 스킬 [유전]으로 +200. [거대화]와 [야성분출]로 증가하는 항마력이 40 정도. 여기에 대지룡의 축복으로 20%가 추가 상승까지 합치면……. 「캐릭터에게 제압 면역 효과가 부여됩니다.」 일시적으로 항마력이 400을 초과하며 제압 계통 스킬에 면역이 되는 것이다! 「상태 이상 [돌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발에서부터 시작된 마비 감각이 싹 사리진 즉시, 나는 방패를 들고 달려나갔다. 상대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음, 정확히는 어이없어 했다는 게 맞나? “하! 제압 면역? 항마력에 대체 얼마나 투자를 한 겁니까!” 거, 극찬은. 애초에 그 비싼 돈을 주고 만티코어의 정수를 먹은 것도 전부 항마력 때문이었다. 지웠을 때 능력치가 남는 점이고 뭐고. 항마력 +200만으로도 후반부까지 뽕을 뽑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존나 빠르네.’ 탱크처럼 밀고 나갔으나, 놈은 민첩독넥답게 가뿐히 뒤로 거리를 벌렸다. 이 새끼들이 까다로운 점이다. 무릇 소환술사란 본체가 약점이기 마련인데, 얘넨 본체를 잡기가 아주 빡세거든. 그래도 암살자는 아니어서 다행이다마는. “레이븐!! 시체를 얼려라!” “네? 네!!” “그리고 아브만, 너는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큰 걸 한 방 날려라! 도망갈 틈을 만들 수 있게끔!” “…도망친다고? 그게 가능하겠나?” 글쎄, 확률은 반반이다. 하지만 해봐야지. 싸워서 이길 확률보다 그게 훨씬 높을진대. “한 방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겠군. 알겠다!” 다행히 곰아저씨는 순순히 오더에 따랐다. 시체 수집가란 이름을 듣자마자 어느 정도 직감한 것일 터였다. 싸워서 이길 확률은 희박하며, 그마저도 필히 희생이 뒤따르리라는걸. ‘하필, 시체 수집가라니.’ 오르큘리스의 멤버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놈이다. 당연히 용살자보다도 위로 친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기회가 있어.’ 네크로맨서는 직업 특성상, 추격에는 그리 능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놈은 자원 소모를 아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미궁이 닫힐 때까지 전투를 치러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낭비를 줄이고 싶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빠르게 백스텝을 밟고 있던 때였다. 솨아아아-! 뒤에서 냉기가 전해졌다. 시체를 얼리기 위한 냉기 마법을 쓴 모양. “얼렸어요!” 오케이, 확인까지 됐고. “아브만!” “아, 언제든 말만 해라!” 곰아저씨도 준비가 끝난 듯하다. 나는 기습 신호를 짧게 읊어준 뒤, 레이븐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레이븐, 음성 제어 마법을 꺼라.” “네?” “어서.” “껐어요.” 팀 보이스 마법이 비활성화되자마자 나는 놈을 보며 말했다. “이봐.” “호오?” 뭔가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나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글쎄요? 처음 듣습니다마는?” 이래서 외국 놈들이란. 역시 모를 줄 알았다. “그 첫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다.” “그렇군요. 다른 하나는 뭡니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광대. “그건…….”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거대화]를 해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물질]을…….」 곰아저씨의 모든 스킬이 집약된 화살이 넓어진 통로를 가로지르며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지진이라도 난듯 흔들리는 동굴. 화르르르륵!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로 가로막힌 반대편을 보며 나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외쳤다. “뭐 하냐! 어서 튀지 않고!” 210화 리더 (3)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은 두터운 뼈. 「아벳 네크라페토가 [뼈갑옷]을 시전했습니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뼈에 옮겨붙은 불은 금방 꺼졌으나, 통로에 남은 불길은 벽이 되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흐음, 도망칠 줄은 몰랐는데.” 따라갈까? 타오르는 불길 너머를 보며 고민하던 사내는 이내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 그 두 번째가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단장님, 기사의 시체입니다.] [역시 이곳에도 손을 써뒀다는 거군. 지금부터 다들 경계해라. 분명 근처에 적이 있을 거다.] 2층 포탈과 이어진 다른 통로에서 탐험가들이 때마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숫자는 약 20명. 같은 문양의 표식을 상의에 달고 있는 걸 보니 소규모 클랜인 듯한데……. “쯧.” 사내가 불만스레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번 거사에서 맡은 임무는 2층 포탈을 타고 도망치는 자를 막는 것. 원래라면 용살자가 맡을 예정이던 임무였다. “하여간 그 뱀눈깔 새끼는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아마 놈이 제때 몸만 회복했더라면, 자신은 예정대로 중심부에서 주특기인 대량 학살에 힘을 실을 수 있었을 터. “뭐, 도망간 놈이야 저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역시 굳이 튄 놈을 쫓아가 죽일 이유는 없다. 생각만 해도 벌써 귀찮은 짓이니까. 나야 그냥 내 일만 하면 그만. 그런 마음으로 2층 포탈을 향해 이동하던 때였다. 지이이잉. 주머니에서 메시지 스톤이 진동했다. [네크라페토, 그쪽 상황은? 목표 지점에는 잘 도착했나?] “오, 부단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착은 한참 전에 했고, 지금은 쥐새끼 하나 도망가지 못하게 잘 틀어막은 상황입니다. 피시싯!” 당당히 말했건만, 대답은 한참의 간격을 두고서 돌아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답조차 아니었다. [……뭐지, 그 말투는? 그 이상한 웃음소리는 또 뭐고?] “이상한 웃음소리?”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던 사내였지만, 이내 말의 의미를 깨닫고서 피식 웃었다. “아, 그냥 버릇이니까 부단장은 신경 쓰지 마.” [버릇?] “어, 가면을 썼을 때면 나오는 버릇.”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뭔가 이상이 생긴다면 즉시 연락해라.] 이를 끝으로 연락은 끊겼다. 사내는 보급품이랍시고 받은 해골 가면을 검지로 툭툭 쳐보았다. 불현듯 원탁의 회원들이 떠올랐다. ‘일단 여우랑 고블린은 무조건 들어왔을 텐데.’ 과연 다음 집회 때 몇 명이나 멀쩡히 살아서 참석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다. 혹여나 놈이 쫓아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허억, 허억.’ 그렇게 통로를 내달리고서 10분이 넘어가던 때였다. “따돌린 건가…….” 곰아저씨가 중얼거렸다. 플래그 같은 대사라 일순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했으니까. ‘정확히는 따돌린 게 아니라, 놈이 쫓아오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숨 돌렸다는 건 분명한 사실. “지금부터는 속도를 낮추지.” “……더 도망가지 않고?” “조심해야 할 건 그놈만이 아니니까.”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안개로 자욱한 수정동굴. 너무 속도를 올려 버리면, 예기치 못한 위험에 제때 대처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1층 전체가 지뢰 밭이라 봐도 무방— “비요른, 역시 싸우는 게 옳지 않았나?” 응? “그게 무슨 뜻이지, 아이나르?” “시체 수집가라니. 네 이름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근데 그 기회를 두고 도망치다니!” 그래, 어쩐지 내내 조용히만 있더라니. 이게 마음에 안 들던 거였구나. 얘는 나를 무슨 고대의 영웅 바바리안처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명성을 얻을 기회는 무슨. ‘아무도 안 다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구만.’ 네크로맨서의 진가는 아공간에서 시체를 꺼낼 때부터 발휘된다. 또한, 시체 수집가에게는 그 명성을 만들어 준 넘버스 아이템도 있다. 용살자의 용살검과 비슷한 느낌의 시그니처. 만약 놈이 그것까지 꺼냈다면 분명 우리 중 몇 명은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나르, 억지 부리지 마랑.”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미샤가 싸늘하게 일침 하자 아이나르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괜찮다……! 그래도 어른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걸 어린 전사들에게 뭐라 말을 한단 말이냐……!” 아, 이제 보니 그게 진짜 문제였구나. 아이나르는 성지에 가서 매번 나와 함께 있었던 탐사에 대해 얘기를 한다. 거의 신격화하는 듯한 내용이라 낯이 뜨거울 정도였으나, 부족 내 지지도를 올리는 거라 생각해서 그간 내버려두었다. “그냥 대충 둘러대면 되는 거 아니냥.” “그런! 전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읍! 계속 말대꾸할래?!” 미샤가 강하게 타이르자 아이나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축 가라앉은 어깨가 왠지 내 맘을 아프게 했다. 바바리안은 늘 당당한 게 매력일진대.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아이나르, 우린 지금 도망친 게 아니다.” “응?” “놈이 우리를 보고 도망친 거다.” 흔한 바바리안식 정신 승리.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놀리지 마라……. 나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다!” 음, 그건 몰랐는데. 나는 정색한 표정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놀리는 게 아니다. 아이나르, 현명한 전사는 싸울 장소를 고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우리에게 유리한 전장에 서기 위해 뒤로 돌진했더니, 놈이 그걸 알고 도망친 거다.” 아이나르는 고뇌하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통한 모양. 이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아이나르가 다시 평소처럼 밝아졌다. “얀델 씨는…….”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에요. 그냥… 리더는 역시 이런 사람이 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묘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내젓는 레이븐. 실의에 빠진 아이나르를 위로하는 내가 제법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그럼 계속 이동하지.”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통로를 나아갔다. 목적지는 1층의 중심부. 지금쯤 한창 피바람이 불고 있으리라 판단한 바로 그곳. “차라리 다른 쪽 포탈을 뚫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그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2층으로 향한단 선택지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블린 숲으로 가는 길목에 시체 수집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았던가. ‘아마 포탈을 막으려는 거겠지.’ 내 예상대로라면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다른 쪽 포탈에도 대기 중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야, 네 판단을 따르지. 얀델, 넌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까.” 그렇게 안개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철컥, 철컥. 정면부에서 10명가량의 인물이 나타났다. 인기척을 느꼈을 땐 이미 서로가 시야 범위 내에 들어선 상황. 다행히 적은 아닌 듯했다. “……기사군.” 전원이 기사 갑주를 입었을뿐더러, 갑옷마다 소속된 가문의 문양도 박혀 있다. 뭐, 이것도 맘 먹고 위장을 하려 한다면 못할 건 아니지만……. “탐험가, 인식표가 보이도록 손목을 들어라.” 저 오만한 말투를 보니 역시 오리지날 같다. 따라서, 일단 지시대로 손목의 인식표를 보여 주며 물었다. “인식표가 의미 있는 상황인가?” 내심 내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던 그 정보. 기사는 짧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우리 쪽 인식표를 갖고서 기습을 해온 자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도 꽤 피해를 봤지.” “그렇군.”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무기를 내리고 벽에 붙어라.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이후 기사가 위압적으로 말했고, 나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진짜 분위기가 살벌했거든. 여기까지 오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른 것인지, 기사들 전부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물어볼 건 더 물어봐야겠지만.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말해 줄 수 있나?” “……수상한 질문이군.”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2층으로 달렸던 상황이라 말이지. 안쪽에는 정보가 없다.” “흐음.” 걸음을 멈춘 기사가 나를 응시한다. 내 말이 진짜인지를 판별하는 듯한 시선. 그 꺼림칙한 눈빛에 괜히 물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차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알테미온 학파 소속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입니다.” 레이븐이 본인 신분을 밝히며 앞으로 나섰다. “저희 신분이 의심되는 거라면 마법을 써서 증명할 수—” “그만, 더 다가오지 마라. 죽고 싶지 않다면.” “아니, 저는—” “노아르크에 마법사가 없을 거 같나?” 기사가 살기 어린 음성에 레이븐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 “…….” 어느샌가 장내에 감돌기 시작한 무거운 침묵. “가르피젤 경, 그들이 노아르크 측 인물일 리는 없으니 그 부분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후열에 있던 기사가 껴들며 상황이 반전됐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보장하지?” “꽤 유명한 탐험가니까요.” “흐음, 이자가?” 리더로 보이는 기사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내 질문을 받은 기사가 투구 앞면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기억에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름이……. “칼스 에리모어?” “기억해 주다니, 이거 영광이군. 오랜만일세” 칼스 에리모어. 백작가에서 만났던 마르토앙 남작가의 기사다. 견습이긴 했지만 아무튼. 흔치 않은 탐험가 출신이라 나와도 제법 잘 어울렸었다. 그나저나 얘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이자는 누구인가?” “이름은 비요른 얀델, 도시에선 작은 발칸이란 이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칼스와의 인연을 통해 내 신원이 증명되자, 나를 보는 기사의 눈빛도 바뀌었다. “작은 발칸이라……. 나도 지나가며 들어 본 적 있다. 사교계에선 기사분쇄자란 웃긴 이름으로 불린다지?” 그의 시선은 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래도 적이란 의심만은 사라졌으니 이전보다야 훨씬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 터. “그래서, 이제 상황이 어떤지 들을 수 있겠나?” 기사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미궁에 진입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노아르크 측 탐험가들이 공격을 해왔다는 것. 그중 인식표를 지닌 놈도 숨어 있어서 초기에 피해가 상당했다는 것. 안개가 생겨난 뒤로는 중심부의 암흑지대에 군집해 탐험가를 보호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단 것까지. “중심부의 암흑지대라면, 그 기념비가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곳으로 가라. 거기까지 도착할 수만 있다면 안전할 거다.” 듣던 중 다행인 소식. 나는 당장 떠나려는 녀석을 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너희는 혹시 포탈로 가는 건가?” “……그걸 왜 궁금해하지?” 거, 까칠하긴. “우리가 거기서 오는 길이라서 말이지.” “흥미롭군.” 나는 관심을 보이는 기사에게 아는 정보를 말해 주었다. 그야 일단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개죽음을 당하게 둘 수는 없지. “포탈 근처에 시체 수집가가 있다. 그러니 통로에 시체가 보인다면 경계해라. 그놈도 너희를 발견했단 뜻이니.” 의외로 기사는 내 말을 경청하더니 반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에는 정보 하나하나가 귀중한 법이지. 시체 수집가라……. 말해 줘서 고맙다.” 놀랍게도 감사 인사까지 입에 담으며 내게 반지 하나를 건네는 기사. “만약 기사가 너를 의심하면 이걸 보여 주고 내 얘기를 해라. 그럼 신원이 보증될 거다.” “……이건 잘 쓰지.” “그럼 이만, 시간이 없어서.” 냉큼 반지를 건네받자마자 기사는 무리를 이끌고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전처럼 얄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제 보니 도리를 아는 녀석이었으니까. ‘사이즈 조절 마법은 안 박혀 있나 보네.’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보려 노력하던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미샤에게 주었다. “에? 나? 내가 끼라고?” “내 손에는 맞지 않아서.”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징?” 이내 다소곳하게 왼쪽 손을 내게 내미는 미샤. 뭐지? 끼워달라는 건가? “크흠…….” 나는 손등이 아래를 향하도록 손을 뒤집은 뒤 그 위에 반지를 올려 주었다. “네가 껴라.” “치, 부끄러워 하기는.” ……뭐래. *** 기사단을 만난 후로 우리는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외곽에서 벗어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피 냄새가 진해졌다. “여기에도…….” “그만 보고 계속 움직여라.” 어디를 가든 몇 분 간격으로 보이는 시체. 거진 전부가 벌거벗은 상태였다. 이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가는 거구나. 뭐, 피차일반이니 뭐라 할 말은 없겠다마는. “얀델! 기습이다!!” 이곳까지 오며 전투도 꽤 있었다. 이번 거로 한 아홉 번쯤 되려나? 한 번은 인식표를 확인한 후 뒤를 돌았을 때 불시에 덮쳐들었고, 나머지는 전부 마주치자마자 무기를 꺼내들고 덤벼왔다. 대부분 우리와 같은 5등급 수준이었지만…….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평균을 놓고 보면 우리는 꽤 강한 편이니까. 슬슬 6층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한 데다가, 전문 탐색꾼을 두지 않았기에 전투력도 높은 편이다. “비요른, 도망친 두 명은 어쩔 거냥?” “냅둬라. 그럴 시간까지는 없으니, 장비만 어서 챙기고 다시 이동하겠다.”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아공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장비들. 무한 PK 컨셉의 던전에 들어온 기분이다. ‘1층에서 이런 박진감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서서히 불안감이 커진다.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나아가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게 지속될까? “비요른…….” “걱정 마라.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애써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며 계속해서 팀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정지.” 여러 갈림 길로 나뉘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낯선 탐험가 무리와 조우했다. 숫자는 무려 서른 명가량. 고된 전투를 끝내고 쉬는 듯하던 그들은 우릴 보자마자 경계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만약 얘네가 노아르크 쪽 무리라면 우리는 좆된 거나 다름없— “어……! 아, 아저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11화 리더 (4) “아저씨!!!!” 탐험가 무리 속에서 튀어나온 에르웬이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엄청 걱정했어요!!” 허, 설마 여기서 얘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나쁘단 얘기는 아니다. 나는 조금은 긴장을 풀고서 주변을 확인했다. 보니까 옆에 얘 언니인 다리아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부 같은 클랜원은 아닌데…….’ 처음엔 에르웬이 용병 형식으로 들어갔다는 그 클랜인 걸까도 싶었다. 근데 살펴보니 그건 또 아닌 듯하다. 클랜 마크를 달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또한, 클랜 마크도 제각기 다르다. 하면, 여긴 대체 어떻게 이뤄진 집단인 걸까. “에르웬 양, 그분은?” 삼십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인간 여성이 무기를 내리며 묻자, 에르웬도 그제야 팔을 풀고서 등을 돌렸다. “걱정 마세요. 저랑 아는 사람이에요! 아, 저희 언니랑도요! 그렇지, 언니?” “…맞아요. 신원은 확실하니 노아르크 측일 염려는 안 해도 될 거예요.”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군요.” 다리아의 말까지 들은 여인이 경계 중인 탐험가들에게 무기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흠, 이 여자가 여기 총책임자인 건가? “만나서 반가워요. 라레르 클랜의 부단장, 베르실 고울랜드에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작은 발칸……?”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여자는 뭔가 반갑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거, 굉장히 대단한 분이 오셨네요.” 자연스레 나를 올려 주는 식의 칭찬. 평범한 바바리안이었다면 여기서 어깨를 한껏 올리며 거들먹거렸을 것이다. 이게 리더의 대화법인가? “대단할 것까지야. 그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나는 짧게 대답하며 여자를 응시했다. 방금 한 말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었거든. “라레르 클랜이라면, 꽤 큰 클랜으로 알고 있는데.” 10대 클랜까지는 아니지만, 대형 클랜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한 클랜이었다. 특이점으로는 클랜원의 80%가 여성이란 것. “그곳의 부단장이라…….” 의외의 곳에서 상당한 거물을 만났다. 그렇다고 친목 놀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마는. “그래서 너희는 여기 모여 뭘 하고 있던 거지?” “설명해 드릴게요.” 라레르 클랜의 부단장, 베르실은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이곳의 사정을 간략히 말해 줬다. 들어 보니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다. 이들은 미궁에 진입하자마자 2층으로 가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베르실은 팀을 이끌고 다시 스타트 포인트로 돌아왔다. 다만, 그곳은 이미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임시 방편으로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근처에서 만난 분들이에요. 신원은 확실하고요.” “확실하다니?” “제가 전부 아는 분들은 아니지만, 한 다리 건너 다들 친분이 있는 사이에요. 안타깝지만, 이 방법을 쓰지 못하는 경우는 철저하게 배제를 했으니 안심해도 좋아요.” 그래, 인식표를 믿지 못하니 그런 방법을 쓴 거구나. 에르웬이 나를 보증했던 것처럼.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증하며 최소한의 신뢰를 형성한 집단이었다. “저희 목표는 간단해요.” 집단에 대해 설명한 베르실은 이어서 집단이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힘을 합쳐 우리를 지키는 것. 최종적으로 적을 뚫고 안전지대까지 다다르는 것.” “안전지대라면, 중심부의 암흑지대를 말하는 건가?” “네, 알고 계시다니 얘기가 빠르겠네요. 얀델 씨도 저희와 함께하시겠어요?” 잘나가는 클랜의 부단장이나 돼서일까? 확실히 말투 하나하나에서 사람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단 느낌이 든다. 성격도 제법 신중해 보이고. ‘부단장쯤 되면 실력도 상당하겠지.’ 짧은 고민을 끝마치고서 나는 베르실의 영입 제안에 승낙했다. “좋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혼란한 시국 속. 잠시나마 머물 둥지가 생겼다. *** “보초는 서실 필요 없으니 잠시 쉬고 계세요. 곧 출발할 텐데 그때 말씀드릴게요.” 베르실의 배려는 고맙게 받기로 했다. 안 그래도 휴식이 간절하던 상황이었으니까. 시야를 가리는 안개. 몬스터가 아닌 사람과의 전투.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혼란한 정세. 육체의 피로도 피로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뭐 하나, 이리 와서 쉬자.” 낯선 탐험가들이 어색한지 쭈뼛쭈뼛 굳어 있는 팀원을 이끌고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휴식. “그래도 정말 잘됐당. 이런 사람들을 만나다니 그냥 죽으란 법은 없구나…….” 뒤늦게 긴장이 풀렸을까? 처음엔 주변을 경계하느라 여념 없던 동료들도 안도하는 표정으로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그러던 때였다. “아저씨, 잘 생각하셨어요. 저기 저 부단장이란 분, 엄청 강하시거든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눈치껏 언니 옆에 가 있던 에르웬이 자연스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나저나 진짜 저희가 인연이긴 한가 봐요. 막 아저씨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거든요. 근데 진짜 나타났어요! 히히히.” “쯧.” 평소에 에르웬을 좋지 않게 봤던 아이나르나 미샤도 살짝 인상만 찌푸릴 뿐, 괜히 먼저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았다. 본인들도 아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사적인 감정으로 분란을 만드는 게 얼마나 미련한지를. “근데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요정과 바바리안은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초면인 레이븐이 호기심을 내비치며 대화에 껴들었다.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알아요! 아저씨한테 자주 얘기를 들었거든요. 엄청 대단한 마법사님이 팀에 들어오셨다고…….” “…얀델 씨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음,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에르웬도 사회생활을 하는 거라 생각하기로 하며 별말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라고 합니다. 아루아 레이븐 씨 맞죠?” “씨는 무슨. 그냥 레이븐이라고 불러요.” “그럼 저도 그냥 에르웬이라고 불러 주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통성명을 끝낸 에르웬은 자랑이라도 하듯 우리가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등을 벽에 붙인 곰아저씨도 나와 얘의 관계가 궁금했는지 아닌 척 열심히 듣고 있었다. “첫 귀환주를 같이 마신 사이가 이런 예쁘장한 요정이라……. 얀델, 넌 보면 볼수록 여복이 많단 말이지.” 뭐래, 이 아저씨는. “우리크프리트 씨라고 하셨죠? 히히,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브만이라고 불러라.” “네, 아브만 씨!” 막내 티를 풀풀 풍기며 순식간에 일행들과 친분을 만들어 낸 에르웬. 솔직히 제법 인상 깊었다. “근데 이 석궁은 어떻게 쓰는 거예요? 장력 때문에 보통 사람은 당기지도 못할 거 같은데.” “아, 이거?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한번 당겨 볼 텐가?” “그래도 돼요? 으읏… 와아! 제 활이랑은 진짜 차원이 다르네요.” “후후, 트롤의 힘줄을 썼으니 그럴 수밖에.” 얘가, 이렇게까지 사회생활을 잘했던가? 무슨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리는 것—. ‘아,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겠네.’ 그러고 보면 클랜을 만들 거라 했었다. 당연히 레이븐과 곰아저씨는 영입 1순위 후보. 언젠가 같은 클랜에 속하게 될지 모르니, 미리 잘 보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뭐, 다른 두 명에게는 밉보이고 있었다마는. “우락부라크. 입꼬리 내려라. 지금이 웃을 상황인가!!” “…어?” 생에 최초로 아이나르에게 선빵을 맞은 곰아저씨가 멍하니 굳었다. 다만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을까? 곰아저씨가 변명하듯 알기 힘든 말을 뱉었다. “아, 아! 나는 물론 고양이 파다.” “그렇지? 의심할 뻔했지 않나! 그러니 이만 이리로 와서 내 대검이나 봐라. 활 같은 얘기는 해 봤자 재미도 없다!” “어… 재미없나?” “당연하다!!” 납치를 하듯 곰아저씨를 잡아끌고 옆에 앉히는 아이나르.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던 때였다. “에르웬.” “아, 언니.” 떨어진 곳에서 유심히 우리를 지켜보던 다리아가 다가왔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어, 아저씨랑?” “응.” 나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아가 이를 제지했다. “굳이 쉬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그래? 그렇다면야. 하려는 말은 뭐지?” 내 물음에 다리아가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나를 응시했다. 어째선지 나를 대하는 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너, 5등급… 탐험가가 됐다면서?” 내가 알기로 다리아도 5등급 탐험가였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어땠는가? 당시 9등급 초짜였던 나는 고작 1년 만에 한 팀을 이끄는 5등급 탐험가로 성장했다. 그러니 껄끄러울 수밖에. “그런데? 하려는 말은 그게 다인가?” “…제안할 게 있어.” “해 봐라.” “당분간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어때?” “좀 더 자세히.” 내 말에 다리아는 철저하게 공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우리까지 총 7개의 팀이 모였지만, 그래 봤자 결국 남일 뿐이라던가? 실제로 대부분의 팀이 제각기 친분 있는 팀과 뭉쳐 다니는 형태라고 한다. “만약 네가 동의한다면 이동할 때 우리 두 팀의 진형은 딱 붙어 있게 될 거야. 뭔가 일이 생겼을 때 바로 힘을 합칠 수 있도록.” 사람이 모이면 어디든 파벌이 생기기 마련. 다리아는 내게 동맹을 제안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제안 자체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래, 딱 한 가지 조건만 충족이 된다면. “근데 너희 쪽 리더 허락은 받은 건가?” 다리아는 푸른 장벽 클랜 4팀에 용병 형식으로 들어간 멤버. 당연히 팀장은 클랜의 간부 중 한 명이다. 과연 얘기는 다 끝마치고 온 걸까? “그 남자는……. 걱정하지 마. 내가 설득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좋다.” “그래, 그럼 이따가 다시 올게. 에르웬, 너도 일단 같이 돌아가자.” “으응…….” 이후 다리아가 동생을 이끌고 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왠지 묘한 감회가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치기 어린 바바리안 취급이나 받았다. 동생 곁에서 알짱거리는 놈 취급도 받았고. 근데, 먼저 저런 제안을 받게 될 줄이야. “개인 정비는 슬슬 끝내고, 이만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분 더 쉬고 있자니, 베르실로부터 출발 공지가 떨어졌다. 아, 참고로 이때 우리 팀이 이동 시 서야 할 진형도 알려 줬는데, 앞에서 세 번째에 속하는 위치였다. 바로 뒤는 에르웬이 속한 팀이었고. ‘이거, 뭔가 당한 느낌인데.’ 기차놀이를 하듯 각 팀이 뒤따르는 구조. 물론 여기엔 아무런 불만도 없다. 수정 동굴 특성상 이동 시에 일렬로 이동하는 진형이 당연할뿐더러, 최선두에서 길을 뚫는 건 가장 무력이 강한 베르실의 팀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리아와 에르웬에겐 얘기를 들었네. 작은 발칸이란 이명으로 불린다지? 잘 부탁하겠네.” “그래, 뒤는 맡기겠다.” 하필 왜 우리가 얘네보다 앞일까. 과연 이게 우연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 앞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나 비슷할지 몰라도, 앞쪽이 좀 더 위험한 건 당연한 사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우리가 손해를 본 건 맞다. 레이븐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고. “저기,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요.” “응? 어떤 부분이 말인가?” “진형이요. 계속 이대로 가는 건 아니겠죠? 앞이든 뒤든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레이븐의 이의 제기에 에르웬네 팀의 리더, 줄여서 주걱턱이 사람 좋은 웃음을 내 지었다. “하하, 우리 쪽에는 원거리 계열이 많고, 자네들 쪽에는 근거리가 많지 않은가. 합리적인 배치일 뿐이네마는.” “그건—.” “애초에 우린 가장 안전한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았나. 그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레이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주걱턱. 합리주의자인 레이븐도 뭐라 말을 못 했다. “…….” 이 자리를 따온 게 정말 얘 공로인 거라면, 한 게 없는 우리가 앞에 서는 게 형평성에 맞는다고 생각한 거겠지. 우리는 오히려 덕을 봤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중소 클랜의 일개 팀장 새끼가 대형 클랜의 부단장한테 입김을 넣을 수 있다고?’ 암만 들어도 개소리 같아서 말이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자,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어서 가지. 앞은 이미 출발한 모양이네.” 거, 재촉하기는. 나는 미심쩍음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터벅, 터벅. 그렇게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됐다. *** 일단 여정 자체는 무난했다. 우연히 이들과 마주쳤고, 그 안에 내 신원을 보증해 줄 에르웬이 있던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단장! 흑마법사입니다!!” “시간을 끄세요. 제가 곧 처리하겠습니다.” 대형 클랜의 부단장이 속한 팀의 전투력은 실로 대단했다. ‘주로 7층에서 활동하는 클랜이랬지.’ 그런 그들이 앞에서 길을 뚫어 주니 뒤를 따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도 편했다. ‘이게 버스를 타는 기분인가?’ 사실상 샛길에서 가해진 몇 번의 기습을 제하면 메이스를 휘두른 것도 손에 꼽을 지경. 그렇게 한 시간가량 여정이 이어진 때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부단장 베르실이 이동을 멈추고 우리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은 거의 다 도착했다는 거예요. 뛰어서 20분이면 암흑지대에 들어설 수 있어요.” 그래, 이건 나도 알고 있던 거고. “나쁜 소식은 뭡니까?” 한 탐험가의 되물음에 베르실은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는 듯 읊조렸다. “모두가 같이 갈 수는 없어요.” 싸늘한 정적이 동굴 속을 뒤덮기 시작했다. 212화 버림패 (1) 정적 속에서 한 사내가 외쳤다. “모, 모두가 같이 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혹시 이 개꿀파티에서 버려질지 모른단 불안이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 “설명할게요.” 부단장 베르실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탐색꾼이 말하길, 암흑지대에 이어진 모든 통로에 노아르크 측 탐험가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해요. 밖으로 나갈 수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병력이 이 앞에 진을 치고 있다. 그 말에 또다른 사내가 외쳤다. “……이제부터는 길을 뚫으려면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의 진의. 나 역시 저 사내와 비슷한 해석을 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왠지 씁쓸한 듯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읊조림을 듣는 순간. 두근-! 심장이 불온하게 뛰기 시작했다. 부단장 베르실은 시간을 끌 것 없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잡다한 변명은 빼고 딱 결론만. “다중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거예요.” 매스 텔레포트. 몇몇 특정 학파 출신의 4등급 이상 마법사만이 사용 가능한 고위 특수 마법. 이제야 이해가 갔다. 모두가 함께 갈 수 없단 말을 왜 한 건지. “…….”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깊은 침묵이 장중을 짓누른다. “비, 비요른? 순간이동 마법을 쓰면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니냥? 근데 왜 다들 표정이…….” 이유는 간단하다. “……다중순간이동 마법은 최대 스무 명까지밖에 쓸 수 없어요.” 현직 마법사인 레이븐의 말했듯. 메스 텔레포트는 최대 20명까지 가능한데, 현재 우리는 총 35명이다. 그 말인즉슨. ‘15명.’ 쉽게 말해, 총 3팀이 버려지게 된다. 중심부의 안전지대를 코앞에 남겨둔 상황에서. “이, 이렇게 마지막에 버릴 거라면 힘을 합치잔 말은 왜 한 것이오!” 누군가는 분노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다만 베르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짧게 사과할 뿐이었다.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해요. 저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여지를 주지 않는 음성.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유형에게 설득은 의미가 없다. 아마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저 여자가 결정을 바꾸는 일은 없겠지. “그래서 버려질 15명은 어떻게 뽑을 거지?” 내가 묻자 베르실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바바리안이 특이했던 모양. “각 팀별로 제비 뽑기를 할 거예요.” “너희 팀을 제외하고 모두가?” “아뇨. 한 팀 더 제외하고요.” 베르실은 그리 말하며 한쪽을 응시했다. 여정 내내 그들의 바로 뒤에서 함께 전투를 치르며 길을 뚫은 팀이 있는 곳이었다. “미안하게 됐구려. 베르실 부단장과는 오랜 인연이 있는지라.” 해당 팀의 리더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 것처럼 놀란 기색 없이 우리에게 유감을 표했다. 그래, 사전에 약속이 됐다 이거지. 이상할 건 없다. 쟤네도 일단 대형 클랜 출신 팀이긴 하니까. 다만……. ‘니미럴.’ 일순 두통이 밀려온다. 이제 남은 텔레포트행 티켓은 고작 2장. 반면 낙오자 티켓은 3장이다. 제비 뽑기로 가면 이곳에 버려질 확률이 더 큰 상황이 되었다. 한데 그걸 알기 때문일까? “우리를 데려가주시오.” 남겨진 팀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아주 필사적으로. “한 사람당 500만… 아니, 천만 스톤을 내리다.” 누군가는 돈을 제시했고. “우리는 푸른 장벽 클랜 산하의 팀입니다. 만약 저희를 데리고 가주신다면, 마스터께서 분명 큰 보상을…….” 누군가는 세력을 통해 미래를 약속했으며. “저, 저희는 아직 소속 클랜이 없어요. 마침 모두 여성이고요. 지금은 5층에서 활동하지만, 원래는 6층에서 있었습니다. 라레르 클랜도 최근 전력이 줄어 클랜원을 모집 중이라고…….” 누군가는 자기 본인을 거래의 도구로 올렸다. 어느 하나 순순히 제비 뽑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운에 맡기고 싶은 놈은 없을 테니까. “얀델.” 곰아저씨가 무거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우리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냔 거겠지. 다만 나는 일단 지켜보았다. 뭔가 제시를 하는 건, 베르실 고울랜드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보고서 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을 듯하군요.” “그, 그말은……!” “예. 나머지 분들은 공평하게 제비 뽑기로 정하겠습니다. 부디, 제 결정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약속해 둔 딱 한 팀만을 예외로 정한 베르실은 처음 말했던 대로 원리 원칙을 고수했다. “라레르 클랜의 부단장, 베르실 고울랜드. 딱 들었던 대로의 사람이네요.” 레이븐이 그 고고함에 감탄하듯 읊조렸지만, 나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없었겠지.’ 정말 공명정대한 자라면, 애초에 다른 저 팀을 제외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놈들이 어떤 상황에 처할지 뻔한 와중이라면 더욱더. ‘아무튼, 뽑기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거에서 당첨을 뽑아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야 말이지. “그럼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해 보죠.” 이후 베르실이 돌 다섯 개가 들어간 주머니를 만드는 것으로 제비 뽑기를 할 준비가 끝났다. 규칙은 실로 간략하다. 하얀 돌 두 개는 당첨. 검은 돌 세 개를 뽑으면 얄짤없이 이곳에 버려진다. “어느 팀이 먼저 하시겠어요?” “나부터 하지.” 처음으로 나선 건 인당 천만 스톤을 내겠다던 팀이었다. “내 운명이 저딴 돌 따위에 달리게 되다니.” 화려한 장비를 입은 드워프 전사가 긴장한 모습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하, 하하핫……. 됐어!!” 첫 트라이에 성공했다. 드워프가 있던 팀에는 웃음꽃이 퍼졌고, 반면 다른 팀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이리로 오세요. 그럼 다음 차례는?” 희비가 교차하는 상황 속에서 먼저 나서는 팀은 없었다. 이제 당첨 티켓은 하나인 상황이니까. 세 개는 지옥행 티켓이다. “얀델 씨, 기다려야 돼요. 확률상 지금 뽑으면 하얀 돌을 뽑을 가능성이 더 커요.” 당첨 25%. 낙첨 75%. 그러나 늘 그렇듯 확률은 무의미했다. “후, 그냥 우리가 먼저 할게요.” 어정쩡하게 눈치만 보던 중에 한 팀이 나섰다. 전원이 여성으로 이뤄진 팀이었고. “꺄아아아악!!!” 하나 남은 하얀 돌을 뽑았다. “…….” 제기랄. *** “그럼 전부 끝났군요.” 단 두 번의 뽑기로 다섯 팀의 운명이 모두 정해졌다. 나머지 세 팀에게는 운명을 운에 맡길 기회조차 없었다. “꺄아아아아악!!” 저 여자 팀이 흰 돌을 뽑는 동안에 내가 한 것? 미샤, 아이나르, 레이븐 이 셋 중에 누구보고 뽑으라 할지 고민하는 거였다. 정말 두 번 만에 끝날 줄은 몰랐거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차, 베르실은 보란 듯이 주머니를 뒤집어 흑색 돌 세 개를 바닥에 뿌렸다. 여기에 어떠한 부정도 없었단 걸 증명하듯이. “그럼 모두 모이세요. 준비를 마치는 대로 마법을 사용할 테니.” 베르실의 말에 선택받은 이들이 신속하게 한곳에 모였다. 그때였다. “자, 잠깐만!” 이 상황에 멘탈이 나가 있던 세 팀 중 하나. 에르웬이 속한 팀의 리더, 주걱턱이 다급하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저, 저희도 데려가주십시오! 제발, 뭐든지 할 테니!” 비굴한 애원. 하나 그런 게 통할 여자가 아니었다. “이미 자리는 모두 찼어요.” 베르실의 무감정한 목소리에 주걱턱은 애원의 방향을 돌렸다. “자리를 내게 양보한다면, 천만 스톤! 아니, 이천만 스톤을 내겠다!” 돈을 주고 자리를 사겠다라……. 이제 보니 심히 추하기까지 하다. 팀원 얘기는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자기 혼자라도 살고 싶다는 말 아닌가. “…….” 일단은 같은 팀 멤버인 다리아가 벌레라도 보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주걱턱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말하는 것도 모자라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모조리 외면당했다. “저, 정말 없는 건가?” 너 같으면 그게 되겠냐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 받고 자리를 파는 순간 동료들과 떨어지는 게 되는데. “얘기가 끝났으면 물러나 주시겠어요?” “…….” 베르실이 짧게 읊조리자 주걱턱이 힘없이 등을 돌려 팀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해프닝은 끝. 베르실 측의 마법사는 메스 텔레포트를 쓰기 위해 마법진을 바닥에 그리는 중이었다. “비요른…….” “얘기는 나중에.” 나는 미샤의 부름을 뒤로하고 부단장에게 말을 걸었다. “베르실 고울랜드.” “네. 말씀하세요.” 친절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랄 게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 동정도 호기심도 없다. 음, 어쩌면 내가 주걱턱처럼 구질구질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피식 웃으며 한 가지를 물었다. “이동할 때, 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가운데 진형에 배치한 거냐?” 베르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까진 딱히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냥 원하는 대로 대답을 해줬다. “제비를 뽑았어요. 공평하게끔.” 그래, 이 새끼가 했던 말은 다 구라였구나. 예상은 했지만 우리가 가운데 진형에 배치된 건 주걱턱 덕분이 아니었다. ‘오케이, 얌체 같은 새끼란 건 확인 됐고.’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 버려진 세 팀과 함께해야 할 터. 주걱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보다 선명해진다. “질문은 그게 끝인가요?” “아니, 한 가지 더.” “해보세요.” “통로에 놈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했지? 그걸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배치는 어떻고, 전력이 얼마나 되지?” “……설마, 당신들끼리 뚫을 생각이신가요?” 그럼, 그냥 여기서 죽을 줄 알았나? “필요하다면.” 애초에 이들과 만나며 잠시 편하게 이곳까지 왔을 뿐이지, 처음부터 내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그러니 변하는 건 없을 터. “그래서 대답은?” 내 재촉에 베르실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정말 소문대로인 사람이네요. 좋아요. 제니아?” “네. 부단장님.” “가서 궁금한 걸 전부 알려 주세요.” “예.” 이후 베르실이 본인 팀에 속한 탐색꾼을 내게 보냈고, 나는 그 여자에게 대략적인 주변 정보를 청취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흘렀을까? “제니아, 이리 오세요.” 마법 사용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고, 부단장 베르실은 우리를 보며 딱 한마디만을 남기고서 떠났다. “부디 원망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우리 힘만으로 헤쳐나가야 한단 뜻이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마는. *** “……정말 갔군.” 반절이 넘는 인원이 사라지자, 그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글쎄, 허탈한 감정을 곱씹으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얀델 씨,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잠시 생각 좀.” 선택지는 두 가지다. 베르실이 포기했던 루트를 뚫고 원래 예정지인 중심부로 향하든가. 아니면 발을 돌려 다른 곳을 찾든가. 후자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외곽에서만 머물면 버틸 수 있어.’ 중심부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최외곽부에는 노아르크의 최강자들이 길목을 막고 있는 상황이고. 반면 외곽엔 비교적 사람이 적을 것이다. 면적도 넓으니 잘 피해 다니며 숨어 있으면 어떻게 버틸 수는 있을 터. 하지만…….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게 돼.’ 이게 가장 큰 단점이다. 일분일초가 다르게 흐르는 이 혼란스러운 시국. 숨어만 있으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게다가……. ‘3일 차가 되면 계층군주가 나오고.’ 1층 계층군주는 우리끼리 해치울 수 없다. 만약 존버 중에 소환이라도 됐다간 분명 전멸하게 될 터. “일단 전력부터 확인해야겠군.” “네?” “다들 모여 보겠나?” 나는 우선 판단을 보류하고 같은 처지인 다른 두 팀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즉시 본론에 들어갔다. “한 명씩 돌아가며 탐험가 등급, 먹은 정수, 특기를 말해라.” “밑천을 전부 까라고?” “이 와중에 그게 중요한가? 이렇게 된 거 힘을 합쳐야 할 거 아닌가.” “마치 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내 제안에 주걱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얘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내가 자연스레 리더처럼 말하는 게 달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거, 귀찮게. “대장이 누군지가 중요한가? 이 상황에서도 그딴 거나 신경 쓰다니 별 병신을 다 보겠군.” “……뭐, 뭣? 자네 지금 대체 무슨—” “그리 원한다면 대장부터 정하지. 뭐, 투표라도 하면 되겠나?” 나는 자연스레 투표로 주제를 이끌었다. 그야 이곳에는 에르웬이 있으니까. 다른 팀 멤버인 얘가 한 표를 내게 던지면, 나는 절대 투표에서 질 수가 없게 된다는 판단. 다만 상황은 조금 의외의 방향으로 흘렀다. “굳이 투표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하구려.” “……?” “만약 투표를 한다면, 우리 팀은 당신에게 한 표를 던질 테니까.” 남은 한 팀의 리더인 사내가 한 말이었다. “그럼 그쪽 팀까지 합쳐서 벌써 10표가 되는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소.” 음, 이게 이렇게 된다고? 솔직히 말해 조금 당황스럽다. 다만 이는 주걱턱도 마찬가지였는지, 기특하게 나 대신에 먼저 이유를 물어봐 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바리안을 리더로 삼겠다니? 제정신인가?” “일단 내가 누구를 이끌고 하는 데는 소질이 없어서.” “그렇다면 바바리안이 아니라 당연히 나를—” “아무래도 둘 중에 고른다면 이쪽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구려.” 대충 어떤 생각인진 알 거 같다. 팀을 버리고 혼자만 살려고 했던 주걱턱보다는 내가 더 낫다고 여긴 거겠지. 들어 보니 다른 이유도 있기야 했다마는. “무엇보다, 모두가 현실 부정만 하고 있을 때 그 여자에게 정보를 물었던 건 이 남자뿐이었지.” ……이거 뭔가 부끄럽네. “이름은?” “타켈란 아르베논이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타켈란과 형식적으로 통성명 정도만 끝낸 후, 나는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럼 결정이 났군. 이제 한 명씩 돌아가며 탐험가 등급, 먹은 정수, 특기를 말해라. 그래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지 판단을 내릴 수—” “잠깐, 누구 맘대로 결정이 났단 건가?” 하, 이 새끼가 자꾸. “불만이라도 있나?” “그야 당연히—” “그럼 꺼져라. 우리 두 팀이서만 함께 움직이면 되니까.” 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던 나는 놈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기랄.” 주걱턱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쥘 뿐, 우리 옆을 떠나지 않았다. 하긴, 얘가 이 와중에 어디를 가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놈에게 말했다. “한 번 더 내 말을 끊거나 지시를 어기면 그땐 끝이다. 알겠나?” “…….” “대답해라.” “……알겠네.” 오케이, 그럼 서열 정리는 끝났고. 이후 나는 신속하게 원래 하려던 일을 마무리했다. 누가 어떤 포지션이며 무슨 정수를 지녔는가. ‘흐음, 조금 애매한데.’ 대략적인 전력을 확인했으나 내 고민은 더더욱 깊어졌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추가로 확인 과정을 거쳤다. “일단 서로 통성명이나 하지. 위급할 때 부를 순 있어야 하지 않나.” 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전부 들었다. 솔직히 전부 기억하긴 어려울 터지만……. ‘그래도 한스는 없네.’ 다행히 한스는 없었다. 제법 긍정적인 지표였다. 이는 추후 어떤 결정을 하든 조금 더 가능성이 올라갔다는 뜻이니까. “이제 어떡할 거예요?” 레이븐의 물음에 14명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만 할 시간. 나는 내 선택에 대한 의심을 지워 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안전지대로 향한다.” “가능성은 얼마나 될 거 같소?” 타켈란의 물음에는 그저 썩은 미소로 답했다. 가능성이란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바로 전에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성공한들 모두가 살아남진 못할 것이다. ‘절반쯤 죽으려나.’ 누군가는 마법 한 방으로 쉽게 넘어간 그곳에 가기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213화 버림패 (2) 안개가 서린 1층 수정동굴. 시체가 너부러지고 비릿한 혈향이 가득한 그곳에서 한 사내는 낄낄 웃으며 동료와 수다를 떨었다. 대화 내용은 별거 없었다. 아까 죽인 여자가 예쁘지 않았냐느니, 그래서 조금은 아깝냐느니 하는 식의 추잡한 대화. 그 끝은 어김없이 불만으로 이어졌다. “쯧, 여기에만 있으려니 도통 재미를 볼 일이 안 생기는군.” “하하, 다르게 생각하면 덜 위험해서 좋다는 뜻 아닌가.” “……넌 쓸데없이 긍정적이란 말이지.”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뭐, 그건 그렇지만…….” 사내는 불만을 삭히며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일개 말단이나 다름없는 그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먹는 고기였다. 7개월이나 미궁에 들어가지 못한 탓에 그가 속한 노아르크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는 상황이었으니까. ‘……이길 수 있겠지?’ 문득 피어난 불안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다.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설령 그곳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의 도시일지라도. “렉스, 임무에 집중해라.” 벽에 등을 기대고 쉬고 있던 사내는 대장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쳤다. “불만이라도 있는 표정이군.” 사내는 솔직히 말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안 보이는 중 아닙니까.” “그래서?”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거란 얘기죠. 이미 안으로 들어갈 새끼들은 다 들어갔고, 아닌 새끼들은 다 뒈지거나 멀리 튀었으니까.” 심지어 그들이 배정받은 이 지역은 중심부 암흑지대로부터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 안에서 나온 놈들과 마주칠 일도 없다는 뜻.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계속 주변을 경계해라.” “예예.” 고지식한 대장의 말에 사내는 대충 대답하며 갈림길 중 하나에 섰다. 안개 때문에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감은 없었다. 저 너머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나중에 노아르크로 돌아갔을 때 들고 갈 전리품이 좀 더 늘어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대장! 인기척입니다!” 다른 쪽 갈림길에 보초를 서고 있던 동료가 외쳤다. 사내는 일단 무기를 챙겨들고서 그쪽으로 이동했다. ‘진짜 누가 왔다고?’ 조금 의외긴 했지만 역시나 불안하진 않았다. ‘이곳 상황을 아예 모르는 놈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곳 사정을 안다면 여길 뚫고 지나갈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분명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이쪽으로 길을 잡은 거겠— “어?”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의문 어린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쿠웅! 쿠웅! 쿠웅!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발소리?” 누군가 짧게 읊조렸지만, 이 또한 설명이 되진 않았다. 이게 어떻게 사람 발소리란 말인가.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라면 모를까. ‘어, 하지만 1층에 그런 몬스터는 없는데?’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내는 무기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때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뿌연 안개 너머로 광폭한 외침을 토해내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이 새끼는!!” “막아라!!” 그것은 한 명의 바바리안이었다. 아주 거대한 몸집을 가진. *** 생존이란, 덜어냄을 뜻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버릴 것인가. 이 과정은 철저하게 우선순위에 의거하여 진행된다. 인간은 합리적인 짐승이니까. 두근-!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나. 헬기가 날기 위해, 혹은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 적의 추격에서 도망가기 위해 짐을 버리고 또 버리는 장면. 많은 것을 버릴수록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두근-! 엄연히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 상냥하지만은 않다. 삶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짐 따위가 아닌 다른 무언가. 두근-! 아마 베르실은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리를 버리고 떠났겠지. 고작 이런 한마디만 남기고서. [부디 원망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물론 나는 원망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판단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녀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과감하게 덜어냈다. 바로 지금의 내가 그러했듯이. “베헬—라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발끝에 힘을 불어넣는다. 양손으로 꼭 쥔 방패에선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저항감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방패 하나로 해일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기분. 음, 어쩌면 그리 틀린 묘사는 아닐지 모른다. 과장이 조금 섞이긴 했어도. “뭐, 뭐야! 이 새끼는!!” “막아라!!” 최선두에서 길을 뚫고 있다. 뛰어서 20분이라는 거리를 지나치기 위해서. 득실거리는 적들을 밀어내는 중이다. 마치 전쟁터의 탱크처럼. “비요른!!!” 바로 뒤에서는 미샤가 뒤따르고 있다. 역할은 간단하다. 내 돌진에 옆으로 밀려난 적들을 해치우는 것. 서걱-! 한 방에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놈들의 숫자를 줄이는 게 아닐뿐더러……. 그 뒤에도 전력이 배치되어 있으니까. “이, 망할 년이—!” 미샤가 1차 거름망이라면, 2차 거름망은 아이나르에게 업힌 레이븐과 곰아저씨다. 콰아아앙-! 미샤가 처치하지 못한 적에겐 어김없이 일어나기도 전에 석궁 화살과 마법이 날아든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도 문제는 없다. 거름망은 뒤에도 많이 남아 있으니. “에르웬, 조심하렴!” 에르웬과 다리아 자매로 이뤄진 원딜 자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따르는 평균 5등급인 타켈란의 팀과, 최후방에 위치한 주걱턱 팀까지. 흡사 중세의 기병대와 같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목표는 오직 돌진. 선두에서 해치우지 못한 적은 뒤따르는 후방에 의해 처리된다. 마지막 거름망에서도 살아남는 적이 있다고 한들 상관은 없다. 그건 최후방이 알아서 할 문제 아니겠는가. ‘자업자득이지.’ 이 전략을 내세우고 진형을 짤 때, 주걱턱은 원딜 요정 자매를 우리에게 주면서까지 최후방에 있기를 고집했다. 생각이야 뻔했다. 돌진하는 형태이니 최선두가 가장 위험할 거라고 판단했겠지. 혹시 모를 사고가 터지면 발을 뺄 수도 있다고 여겼을 테고. 용병 출신인 에르웬네를 버림패 취급한 거다. ‘병신 새끼.’ 이 전략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곳은 역시 최후방이다. 지금이야 앞에서 전부 처리가 되며 꿀을 빨 수 있겠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리는 없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 고비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마는. 쿠우웅-!! 방패 너머로 전해지는 육중한 충격. 발끝에 힘을 실어도 앞으로 밀려나지가 않는다. 살짝 방패를 내려 전면의 시야를 확인했다. “별 미친 놈을 다 보겠군.” 곰아저씨와 같은 흑곰족 출신의 전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체구는 [거대화] 중인 나에 비해 1.5배는 작았다. 하지만……. ‘니미럴.’ 얘는 근력이 대체 몇인 거야? 새삼 노아르크 측 탐험가 수준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바바리안, 너는 네가 무슨 이야기 속 영웅이라도 되는—” 곰새끼가 지껄이는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뒤에다 외쳤다. “레이븐, 지금이다!!” 나는 만인지적의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다들 물러나세요!!” 레이븐의 경고음이 들려옴과 동시, 등 뒤에서 폭발적인 충격이 밀려들었다.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보조 마법 [산소폭발]을 시전했습니다.」 무려 6등급의 풍속성 보조 마법. 그걸 내 뒤에다가 터트린 이유는 간단하다. 딜은 낮지만 상급 넉백 판정이 붙어 있거든. “으읏! 이 무슨……!” 팽팽하던 힘겨루기를 끝내고, 돛이라도 된 것처럼 바람을 동력 삼아 적을 밀쳐낸다. 그리고……. “아, 안 돼—!” 콰직. 균형을 잃고 뒤로 자빠진 곰새끼의 얼굴을 제자리 [도약]으로 짓밟으며 앞으로 대시. 뭐, 놈도 탱커인 듯하니 고작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만……. 푹! 머지않아 뒤에서 파육음이 들려왔다. 거, 무슨 두부라도 찌르는 거 같네. 근력은 높아도 물리 내성은 낮은 모양이지? “베헬—라아아아아아!!!” 곰새끼에게 잠시나마 이동이 저지되며 뒤에 적들이 모인 상황이었기에, [야성분출]로 육체 수치를 도핑하며 다시금 돌진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더 빨리 움직여야 해요!!” 전처럼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는 아주 큰 문제였다. 기병대의 약점 중 하나는, 돌파가 저지됐을 때 포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니까. “이, 미친 새끼들이!!” “죽여!!” 돌진에 밀려나 쓰러진 적들이 좀비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동료들에게 달려든다. 지금까진 일방적으로 길을 뚫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이 난전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 셈. 서걱, 푸욱, 콰직-! 콰아아앙! 뒤에서 격렬한 전투음이 겹쳐져 들려온다. 당연히 나는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직 앞만을 바라보았다. “비요른, 뒤는 신경 쓰지 마랑!!” 물론 걱정이야 된다. 사람 목숨이 파리와 같은 전쟁통 아닌가. 혹여 눈 먼 칼에 누군가 크게 다치지 않을까 불안하다. 서걱-! 저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누구의 몸에서 난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혹시 미샤는 아닐까. 아이나르는 아닐까. 레이븐은, 곰아저씨는 아닐까. 부정적인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나 어쨌단 말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 여기서 멈추면 더욱더 상황은 악화될 뿐. 미처 버리지 못한 두려움을 안아들고서 내게 부여된 역할 하나에만 모든 걸 집중한다. “무, 무슨 힘이!” 그저 길을 여는 것. 동료에게 뒤를 맡기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며,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그것. [좋은 소식은 거의 다 도착했다는 거예요. 뛰어서 20분이면 암흑지대에 들어설 수 있어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다. 땀과 피, 그리고 비명이 공존하는 동굴 속. ‘3분 정도 지났나.’ 체감상 한 시간은 족히 흐른 듯하나, 실제로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이제 1층은 벽만 봐도 어디쯤인지 위치를 알 수 있으니까. ‘니미럴.’ 마치 시간 개념이 뒤틀린 동굴에 갇힌 기분. 나는 실시간으로 내 위치를 확인하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유추했다. 4분. 5분. 6분. 그리고……. ‘7분.’ 처음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카이옌!! 카이옌이 다쳤어요!! 도와줘요. 가, 같이 부축을 해야……!” “놔라, 레나.” “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죽었다.” “…….” “녀석은 이곳에 두고 간다.” 카이옌은 타켈란의 팀에 속한 궁수였다. 아는 건 그 정도뿐이지만, 통성명을 할 때 제법 좋은 인상이었지. ‘8분.’ 누군가 소환한 장벽에 의해 길이 가로막혔다. 즉시 옆에 나 있던 갈림길을 타고 경로를 수정했다. 로트밀러에게 길잡이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하지 못했을 임기응변. ‘도착까지 3분은 더 걸리겠군.’ 악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9분.’ 또 한 명이 죽었다. 이번엔 최후방에서 우리를 뒤따르던 주걱턱 팀의 멤버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비요른, 미샤가 다쳤다!!” 미샤가 부상을 당했다. “부위와 정도는?” “외, 왼쪽 흉부 아래! 내장은 안 다친—” “포션은 달리면서 먹이고. 아이나르, 네가 미샤까지 업어라!”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레이븐을 업은 상태로도 한 손으로나마 전투를 돕던 아이나르는 이제 운반책 역할만 하게 되었다. ‘10분.’ 어김없이 뒤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얀델 씨! 뒤에 그 사람들이 없어졌어요!!” 최후방을 맡고 있던 주걱턱 팀이 도망쳤다. 앞에서 죽어가는 걸 보고 이건 안 되겠다 싶었던 듯한데……. 내 오판이었다. ‘이 정도로 대가리가 없는 새끼일 줄이야.’ 설마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지 혼자 탈출하는 게 가능하다고 여길 정도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씨발, 자살할 거면 우릴 위해서 죽어 주지. 아무튼, 이 새끼들이 빠지며 타켈란 팀의 부담이 훨씬 커졌다. 그래서일까? ‘13분.’ 이번엔 두 명이 죽었다. 타켈란 팀의 소속 마법사와 그를 업고 뛰던 전사였다. “제기랄! 고작 고블린 때문에……!” 1차 사망 요인은 리젠된 고블린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고블린이 얼굴에 날아들어 시야를 가렸고, 그 찰나에 얼음계 술법사가 쏘아낸 스킬에 맞으며 얼음 석상이 되었다. ‘15분.’ 샛길에서 튀어나온 흑마법사가 광역 마법을 터트렸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언니!!” 중심지에 있던 에르웬을 보호하려 몸을 날린 다리아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즉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얼 타지 말고 움직여라. 네 언니는 내가 업을 테니!” 아브만이 다리아를 업으며 전력이 하나 더 줄어들었다. ‘17분.’ 능력치 뻥튀기를 위한 제자리 [도약] 남용. 그리고 한 번도 해제하지 않은 [거대화]로 인해 MP가 바닥났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예정대로 공백이 생긴 옆자리는 곰아저씨의 탱커 소환수 철웅으로 틀어막았다. ‘18분.’ 철웅이 역소환됐다. 하지만, 포션을 먹었던 미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전장에 복귀했다. ‘19분.’ 희망이 보인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비록 절반 가까이 죽기는 했어도, 살리기로 마음 먹은 이들 중에 사망자는 아직 없다. ‘20분.’ 최소 4등급으로 추정되는 상위 탐험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클래스는 검사. 5단계 금속인 아다만티움으로 된 대검을 무기로 들고 있었으며……. “넌, 베는 맛이 있겠군.” 오러를 사용했다. 214화 버림패 (3) 오러를 쓰는 4등급 탐험가. 실로 좌절적인 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예전의 나였다면. 후우우우웅-! 물론 아직 오러 세팅은 끝내지 못했다. 5단계 금속 아다만티움 대검에 오러라니? 월광석 방패 따위야 순식간에 고철덩이로 변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넌, 베는 맛이 있겠군.” [던전 앤 스톤]은 단순히 HP/MP나 아이템 레벨로 하는 게임이 아니다. 4등급이고 검사고 3등급 탱커고 나발이고. 한 번의 판단 미스가 캐릭터의 사망으로 이어지던 하드코어한 게임. “베는 맛은 지랄.” 얼마나 강하든지 간에 치명타를 입으면 뒈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와라.” 이기지 못할 상대는 결코 아니다. 뒤에서도 적이 몰려들고 있기에 단기간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패널티가 있다마는. 이 또한 무언가를 버리면 될 문제. “바바리안 새끼들은 하나같이 주제를 모른단 말이지.”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부디, 저놈에게 각오가 되어 있지 않기를. 탐색전을 통해 스킬, 장비를 알아내는 등 안전하게 공략할 여유는 없다. 생자와 사자는 찰나에 정해질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베헬—라아아아아아!!” 두려움을 버린다. 타닷. 그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휘익-! 통로를 가득 메운 안개 속으로 인간 주제에 190이 넘는 체구를 가진 놈이 달려든다. 후우우우웅! 휘둘러지는 대검. 타닷. 방패로 막기보단 다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비싼 돈 주고 산 방패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단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버린다면, 얻는 것이 있어야지. 이렇게. 서걱-! 왼쪽 팔꿈치 위를 찍어내린 대검. “야, 얀델 씨……!!” 순식간에 나는 외팔이가 되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전 이후로 두 번째 겪어 보는 경험. 딱히 우울하진 않았다. 사지 멀쩡하게 승리하겠단 안일함은 놈을 마주친 순간 버렸으니까. 치이이익. 잘려나간 팔죽지를 놈에게 겨냥해 분수처럼 치솟는 산성피를 뿌린다. “아아아아악!!” 운 좋게도 눈에 명중. ‘개이득이군.’ 팔을 대가로 놈의 시야를 봉쇄했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을 터이나……. “레이븐, 용암분출을 써라!” 이어서 오더를 내리며 놈에게 착 달라붙는다. 대검을 무기로 쓰는 놈이니, 이 거리면 오러로 나를 해칠 수 없다는 판단. 아마 시야를 막지 못했다면 접근하는데 더 큰 무언가를 바쳐야만 했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얀델 씨도……!” “괜찮으니까 어서 써라!!” “알겠어요……!” 다급하게 호흡을 끊고서 근육에 힘을 불어넣는다. 4층에서 트롤과 레슬링하던 때와 비슷하다. “이 망할 새끼가!!” 격렬한 저항. 놈의 몸에서 비늘이 돋아난다. 육체 수치가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실험체]의 이펙트 중 하나. 오러를 쓰기에 예상은 했는데. ‘역시 깡스텟파구나.’ 공교롭게도 나도 비슷한 타입이라서. “가만 있어.” [거대화]를 다시 사용했다. 몇 분 안 썼으니, 30초 정도는 쓸 MP가 회복됐으리란 판단. “으윽.” 순식간에 늘어난 중량에 놈이 힘겨운 소리를 뱉으며 허리를 굽혔다. 후웅, 후웅! 놈이 나를 업은 상태로 무작정 대검을 주위로 휘둘렀다. 통로의 벽이고 뭐고 무참히 썰고 지나가는 오러. “앞이 안 보이니 무서운가?” “죽여 버리겠다!!!” “다들 물러나라!!” 놈이 칼춤을 벌인 탓에, 미샤를 비롯해 모두가 추가타를 넣기 위해 접근하지 못했다. 다만, 오히려 내게는 좋다. 놈의 발버둥 덕분에 적들도 쉽사리 녀석을 돕기 위해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 “병신 새끼.” “아아아악!!” 놈이 업어치기를 하듯 상체를 기울였다.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변태처럼 적에게 달라붙는 건 탱커의 기본 소양 중 하나. 쿠우웅-! 우리 둘의 몸이 쓰러지며 포개어졌다. 로맨스 영화의 어느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스릴러 영화의 마지막 개싸움이라면 모를까. 퍼억! 퍼억! 퍼억! 마침내 놈이 대검을 손에서 놓고 주먹으로 내 귓방망이를 연신 쥐어박았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너, 손으로는 오러 못 쓰잖아. 퍼억! 퍼억! 퍼억! 물리 공격이야 물리 내성으로 버티면 그만. 뭐, 아다만티움 대검을 쓰는 놈인 만큼 근력이 상당한지 뇌가 자꾸 흔들리긴 하지만……. 잘려나간 팔에 비하면 잔부상이나 마찬가지. “케시알 님!!” 놈의 무지성 칼춤이 타의에 의해 종료되자, 다가오지 못했던 적들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 진짜 쏴요……?!” 한발 늦었다. “뭘 묻고 있는 거냐!!” 마법이 완성됐다. “……이헤르노 와투레 툰바르!” 4등급 화염 속성 공격 마법 ‘용암분출’. 화르르르륵!! 레이븐의 지팡이에서 뿜어진 검붉은 용암이 우리를 향해 덮쳐온다. 나는 즉시 자세를 고쳤다. 놈을 위에서 짓누르며 목을 조르던 자세에서 내가 땅에 가고 놈이 위로 올라오도록. “놔라, 이 바바리안…!” 시야가 돌아왔는지, 놈이 소리친다. 우리를 덮쳐오는 용암을 본 모양. “왜 뜨거운 건 싫은가?” 그럼 화염 내성을 올려뒀어야지 새끼야. “안 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화아아아악-! 모든 걸 녹여낼 듯한 열기가 느껴졌고. “아아아아아악!” 동시에 무언가 흘러내리는 게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흘러내리는 무언가는 빠르게 식으며 굳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불사자 각인 3단계에 붙은 화염 내성. 만티코어의 항마력. 불의 보주. ‘그런데도 이 정도라…….’ 온몸이 후끈하고 간지럽다. 마치 포션을 마신 것만 같다. 고통 내성을 뚫고서 피어나는 고통.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프지 않고 싶단 것? 내가 패시브처럼 버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상냥한 세상이 아니니까. ‘……’냉혈’도 걸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돌연 피어난 나약함은 마저 치웠다. 안 그래도 레이븐의 마력이 간당간당한 상황 아닌가. 자원은 아껴야지. “커허헉.” 숯덩이로 변한 놈을 밀쳐내며 일어선다. 내장이 익어서 순대로 변한 듯한 기분. 반면 몸을 움직일 때면 바삭바삭한 무언가가 후두두 떨어진다. 이게 겉바속촉인가? “야, 얀델 씨? 괘, 괜찮아요?” “……조금 탔을 뿐이다.” “조, 조금 타다니…….” 오러를 쓰는 새끼를 단시간에 잡아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게다가 팔꿈치에서 나던 출혈도 멈췄다. 화염 마법에 맞아서 지혈까지 된 것. 여러모로 개이득— “크으윽.” 씨발, 이 새끼가 왜 살아 있어. 설마 화염 내성도 있던 건가? 나와 마찬가지로 일어서는 놈을 보며 다급하게 몸을 틀어 진작에 집어 던진 방패를 향해 하나 남은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거대화]가 풀리며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운다. 동시에 방패에 근접했던 손이 멀어진다. 두근-!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상황에도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여기서 놈이 대검. 아니, 단검이라도 꺼내들어 내 목을 쑤시면 그걸로 게임 오버. 최악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커, 커헉.” 쓰러지는 몸을 틀어 황급히 뒤를 확인했을 때. 놈은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속도로. “…….” 그 예상치 못한 장면에 몸이 굳기도 잠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군.’ 놈은 오만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료가 있음에도 혼자 나를 막았다. “허억, 허억, 흐윽…….” 이후 기회가 있으리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놈은 살고자 도주를 택했다. 그 심정이야 이해는 됐다. “조, 가튼 바바리안, 새끼…….” 놈에게 있어 나와의 전투는 생존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서 싸울 이유란 없었다. 그래서였다. 지금 놈과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건. “어디, 가냐?” 나는 방패 대신 놈이 두고 간 대검을 손에 쥐었다. 오우거를 통해 얻은 근력은 아다만티움 대검을 한 손으로 다루기에 충분했다. “……마, 막아라!” 나는 서둘러 놈을 추격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몸의 대미지가 컸는지 걸음걸이에 영 힘이 없었으니까. 머지않아 검이 닿을 거리가 되었다. “목은, 두고 가야지.” 검사도 나쁘진 않네. 서걱-! 검끝에서 느껴진 손맛에 미소 지으며 나는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살아남았다. 일단 당장은. *** 4등급 오러 유저를 만나고 목을 따버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분 안팎. 원래 전투란 그런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다. 한 평생을 단련해온 기사도. 미궁에 수없이 들락날락했을 상위 탐험가도. 찰나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 바로 이 세상. “아이나르!!” 승리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쥐고 있던 대검을 아이나르에게 던졌다. “어? 어?” 뭘 당황하고 있어. 챙길 건 챙겨가야지. 딱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아깝네.’ 다시 비게 된 손으로 방패를 집어든 나는 놈의 사체로부터 애써 시선을 돌렸다. 후, 더 루팅하면 쓸 만한 게 나올 거 같은데. ‘그럴 시간은 없겠지.’ 욕심을 버리고 앞을 응시한다. “케시알 님이 당했다!!” “죽여라!!” ‘용암분출’ 때문에 멈칫했던 적들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덤벼드는 상황.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내 역할이니까. 실드차지. 하나 남은 팔로 방패를 쥐고서, 어깨로 체중을 실으며 달려나간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라서 그런지 바깥쪽보다 탐험가들 수준이 훨씬 높다. 방금 전 오러잽이 새끼도 그렇고. 이쪽이 최전선이라는 거겠지. 쨍그랑. 오더도 없었는데 포션이 날아와 깨진다. 상처 부위를 송곳으로 쑤신다기보다는 살을 불로 지지는 듯한 부드러운 통증. “얀델 씨가 좋아하는 상급 포션이에요!” 그래, 어쩐지. ‘기운이 나는 것도 같네.’ 힘내서 다시 한번 가보자.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잖아? 고지가 코앞이다. “지금부턴 나도 돕겠다!” 아이나르가 내 옆에 섰다. “레이븐은?” “우락부라크에게 맡겼다!” 좋은 판단이네. 아마 레이븐이 그러자고 했겠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지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왔는지 확인하는 짓은 그만뒀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한다. “미샤! 내 뒤에 딱 붙어라!” 조금만 더 가면. “에르웬! 지금이다! 그걸 써라!” 그래, 조금만 더 가면. “케헥! 아, 안 돼. 지금은…….” “얀델! 레이븐의 마력이 떨어졌다!” 그때 곰아저씨에게 업혀 있던 레이븐의 마법 지원이 끝났다. 가끔 길이 막히거나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산소폭발]로 억지로 길을 뚫어내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뜻. “아, 안 돼! 레나……!” 속도가 줄어들며 또 한 명이 죽었다. 타켈란 팀의 술법사였다. 방어 및 지원이 특기인 서포터 계열 술법사라 뒤를 든든히 지켜주던 여자였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앞으로는 더 힘들어지겠군. 이를 악물며 양심의 가책을 밀쳐낸다. “제기라아아아알!!” 귀를 막을 여유는 없다. 설령 있다 한들 그래서도 안 될 테고. 나의 결정이었다. 선택과 집중. 버려야 하는 것. 그리고 버릴 수 없는 것. 내가 지키고자 한 것. “…미샤!” “걱정 마라! 아직 싸울 수 있으니……!” 누구 한 명 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열한 전황 속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길을 뚫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쪽이다!” 마침내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보이자마자 즉시 방향을 꺾어 통로 너머로 들어섰다. “에르웬, 시야를!” “네, 네!” 마력 소진 상태인 레이븐을 대신해 에르웬이 불의 정령을 소환해 주변을 밝혔다. 무채색의 수정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통로. 도시 측 탐험가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비요른! 놈들이 안 따라온다!!” 여기부터가 기점이라는 듯 추격이 멈췄다. 그래, 여기를 경계로 구역이 나뉘었단 말이지. “방심하지 말고 계속 움직여라.”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쉬고 포션을 먹고 정비하는 건 안전이 확보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 그로부터 한 3분쯤 흘렀을까? 우리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리와 조우했다. “정지.” 기사로 이뤄진 열 명의 무리. 주변에는 벌거벗겨진 상태의 시체들이 가득했다. 아마 노아르크 측 놈들의 것이겠지. 역시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오기를 잘했다. 얘들이 우리 편이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 ‘응?’ 눈이 마주친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검에는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우린 적이 아니다! 여기 인식표도 있—” 아, 내 팔…… 거기 두고 왔지. “나는 없지만, 다른 자들은 모두 있다!” 서둘러 말을 이어붙였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하다하다 이제는 같잖은 수작까지 부리는군. 그쪽은 노아르크 놈들에게 점령당한 길목이다. 근데 거기서 나타나 놓고 인식표?” 후, 안 믿기기는 하겠네.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인 것도 스파이로 안에 침투하기 위해 위장한 것으로 보일 터였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발칸이라는 이명을 대면 믿어 줄까?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미샤, 반지를 빼서 보여 줘라.” 공교롭게도, 이럴 때 쓰라고 받은 물건이 있었다. 215화 버림패 (4) 이 반지를 준 기사는 말했다. 이걸 보여 주고 자신의 얘기를 하면 그 즉시 신원 보증이 될 것이라고. 그래, 딱 그렇게만 말했다. “전언 반지로군. 그것도… 2층 포탈로 수색을 나간 가르피젤 경의.” 누가 준 반지인지 말하기도 전에 한 기사가 이 반지를 알아봤다. 그리고 내 반응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전언 반지……?” “보아하니 이게 뭔지도 몰랐던 거 같군. 잠시 기다려라. 너희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제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내 기사가 반지에 낀 보석을 옆으로 돌리자 푸른빛이 새어 나오며 기사의 몸에 흘러들어갔다. “…….” 여운이라도 즐기듯 눈을 감고서 침묵을 이어나가는 기사. 그의 입이 열린 건 3분쯤 지나서였다. “포탈 근처에 시체 수집가가 있다라…….” 그 한마디에 모든 인과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씨바, 그래서 ‘전언’ 반지였구나. 어쩐지 먼저 보상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손에 쥐어주더라니. ‘왜 줬는지 알겠네.’ 가르피젤이란 이름의 기사는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다. 우연히 만난 나를 이용해서. 분명 이곳의 정보를 준 것도 그래서겠지. [중심부의 암흑지대라면, 그 기념비가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곳으로 가라. 거기까지 도착할 수만 있다면 안전할 거다.] 전달이 되면 좋고, 안 돼도 손해는 없다. 그래도 그냥 솔직히 말해 줬어도 됐을 텐데. 이러니까 진짜 당한 기분이네. ‘이 세상엔 왜 이렇게 사람 갖고 장난 치는 새끼들이 많은 건지.’ 절로 입맛이 씁쓸해지지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 반지가 신원 보증만큼은 제대로 해줬단 것일까.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통성명을 한 적도 없는 기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이제 의심은 풀린 건가?” “노아르크 측 인물이 아니란 건 확실한 거 같군. 고작 너희로 어떻게 저 길을 뚫었는지는 조금 의문이지만…… 들어와라. 자세한 얘기는 중앙 임시 본부로 가서 나누지.” “듣던 중 다행이군. 혹시 신관도 있나?” 신관이 없을 리 없지만 그렇게 돌려서 말했다. 다행히 기사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눈치챈 듯했고. “그래, 일단 치료부터 받아야겠군.” 우리 꼴을 보던 기사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의외였다. 조사가 먼저라며 융통성 없게 굴 줄 알았— “네 동료들은 임시 치료소로 데려다 주겠다.” “……나는?” “조사가 먼저다.” 에휴,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양반인가? “난 버틸만 하니 먼저 가서 쉬고 있어라.” “하지만……!” 내 결정에 미샤가 반발했지만, 나는 말없이 한 곳을 응시했다. 팔 한쪽 없어진 나보다 중한 환자가 있는 곳. “다리아는 괜찮나?” “자, 잘 모르겠어요. 레이븐이 저주 해제 마법을 써주긴 했는데, 아직 의식을…….” “신관에게 보이면 나을 거다. 그러니, 어서 가봐라.”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나는 피식 웃으며 죄라도 지은 듯한 에르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레이븐에게 다가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없을 땐 네가 리더다. 마력 탈진 때문에 힘든 건 알겠지만, 부탁하지.” “……팀은 걱정 마요. 내가 잘 책임지고 있을 테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얀델 씨만 하겠어요?” 음, 외팔이 새끼가 할 말은 아니었나? “다 됐으면 너는 날 따라와라. 동료들은 내 부하가 치료소까지 데려다 줄 거다.” “알겠다.” 이후 나는 일행과 헤어져 기사를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색다른 광경이었다. 원래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지대는 이미 설치된 횃불 덕분에 모든 통로가 밝혀져 있었다. ‘무슨 임시 피난소 같네.’ 외곽이 보초를 서는 듯한 기사, 탐험가들로 이뤄졌다면 안쪽은 조금 달랐다. 좁은 통로에 끼여 앉거나 누워 쉬고 있는 탐험가들. “그나저나 여기엔 안개가 없군?” “방어용 마법진을 쳤으니까.” “방어용 마법진……?” “아, 밖에서 왔다면 아직 모르겠군. 그 안개는 독계열의 암흑주문이다. 범위를 넓게 설정한 탓에 위험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안개 형식의 암흑주문이라……. 그럼 역시 [악의 만찬]인가? 숨 쉬는 데 문제도 없고, 범위도 1층을 전부 다 덮을 정도라 당연히 시야 가리기용 안개 마법일 줄 알았는데. ‘대체 흑마법사 몇 명을 갈아넣은 거야?’ 등골이 오싹하다. 만약 인적이 드문 외곽으로 가서 우리끼리 버티잔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좆될 뻔했네.’ 아무리 위력이 낮아도 며칠이나 노출되면 그 증세가 나타날 터. 아마 그제서야 나는 이 안개의 정체를 깨닫고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늦은 만큼 선택지는 줄어들어 있을 테고. “거기 너, 쉬는 건 좋지만 방해가 되니 벽에 붙어라.”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좁은 통로를 헤치며 20분가량을 이동했을 때였다. 드디어 중심부의 공동이 나타났다. 아니, 이 정도면 광장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마법사를 이용해 근처 외벽을 전부 무너뜨려 공간을 넓혔다. 그 좁은 곳에 모두를 수용할 수는 없으니까.” 허, 이게 군대식 토목 공사인가? 사람이 이만큼 모이면 못 할 게 없어지는구나. 반경 30m 정도였던 공동이 수백 배 이상의 크기로 확장이 됐다. 넓어진 지형에는 각 클랜 문양이 박힌 막사들이 쳐져 있었고. “들어와라.” 기사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최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막사였다. 입구엔 라프도니아 왕가 깃발이 꼽혀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니 원탁 하나를 두고 회의를 나누는 이들이 보였다. ‘수뇌부 회의라 이거지…….’ 왕가의 막사지만 기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유명 클랜 마크를 단 탐험가들도 참석해 뭐라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참고로, 그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어, 당신은……!”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는 여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또 보는군, 베르실 고울랜드.”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날 줄은 나도 몰랐다. ***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혹시 순간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를 찾아낸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대답 대신 팔꿈치만 남은 팔을 휘적였다. 표정을 보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전해진 듯했다. “정말 그 길을 뚫고 왔다고……?” 베르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들이 포기한 루트를 우리가 정면돌파했고, 또 성공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양. “대체 어떻게 한 거죠?” 글쎄, 자랑스럽게 말할 건 아니다. 나도 얘가 한 거랑 비슷한 방법을 썼으니까. 우선순위에 따라 버려야 할 것을 버려냈다. “사담은 거기까지.” 베르실과 해후를 나누던 때, 한 사내가 껴들며 정적이 찾아왔다. 그래, 이 아저씨가 여기 대빵이란 말이지. “전선에 있어야 할 에르고스 경이 여긴 무슨 일인가? 옆에 저 바바리안은 누구고?” “우선적으로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서 잠시 이탈했습니다.” “말해 보게.” “가르피젤 경의 전언 반지를 입수했습니다.” “……가르피젤 경의?” “예. 그리고 이 자는 비요른 얀델이란 이름의 탐험가로, 반지를 제게 전해준 자입니다.” 이내 기사가 전언 반지를 건네자, 사내가 반지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제3 왕실기사단의 단장을 역임 중인 마르코 엘번일세.” 사내가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걸어온다. 이제야 뒤에 있던 내게도 관심이 생긴 모양. “자네에게 몇 가지 질문할 텐데, 솔직히 대답해 주겠나?” “……그러지.” “일단 첫 번째, 이 반지에 담긴 내용대로라면 고블린 숲과 이어진 북쪽에 ‘시체 수집가’가 배치되어 있다는 뜻이 되네.” 그 말에 몇몇 탐험가들이 ‘시체 수집가!’ 하며 탄성을 내뱉긴 했지만, 대화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신경 쓸 사안도 아니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확실한 정보인가?” “확실하다. 도망치긴 했지만, 잠시나마 싸웠으니까.” “싸웠다라, 자네 팀의 등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나?” “……5등급이다.” 등급을 밝히자 기사단장이 묘한 표정을 내지으며 턱을 짚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가 자네를 놓아 줬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아마 그렇겠지.”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실제로 놈의 관심은 2층 포탈을 틀어막는 것에만 있는 듯 보였다. 그게 아니었으면 도망치는 데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을 거고. “질문은 이게 끝인가?” “아니, 한 가지 더. 방금 전 얘기를 들어 보니 자네는 에르고스 경이 맡은 길목으로 진입한 듯하네마는,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군. 혹시 놈들을 피해 이동할 방법이 있는 건가?”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이 꼴이 됐을 거 같나?” “……그것도 그렇군. 그럼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 자세한 내용을 말해 주겠나? 전략에 참고가 될지도 모르니.” 내가 노아르크 측 탐험가가 아니란 건 진작에 증명이 된 듯하지만, 굳이 이를 거절하며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을 터. 20분간의 혈투를 짧게 간추려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처절한 길을 달려왔는지 전해졌을까? “인상 깊은 이야기였네.” 기사단장의 시선이 좀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함께 내 얘기를 듣던 클랜의 탐험가들도 날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자네에겐 지휘관의 자질이 보이는군.” “자질이 있었다면 반이나 죽진 않았겠지.” “그래서 자질이 보인다고 말한 걸세. 자네의 동료들은 전부 살았지 않나.” “…….” “훌륭한 지휘관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자가 아닐세. 해야 하는 선택을 하는 자지.”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다. 칭찬이라고 해도 딱히 기쁘지도 않고. 나는 화제를 돌렸다. “궁금한 게 더 없으면 슬슬 가보고 싶은데.” “사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네. 마지막에 만났다는 그자, 혹시 턱에 흉터가 있지 않던가?” 흉터라…….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단장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다만티움 대검을 썼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뱀의 기사였군.” “뱀의 기사?” “섬기던 주군의 자식을 칼로 찌르고 달아난 녀석이지. 나름 유명한 녀석인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모르나 보군?” 어쩐지 오러를 쓰더라니 기사 출신이었구나. 주변 탐험가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나름 명성이 있던 놈이긴 한 거 같다. “아무튼, 축하하네. 그런 자를 죽였으니 자네 명성이 더 올라갈 거 아닌가.” “명성이라…….” “왜, 바바리안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닌데, 난 보통 바바리안이랑 달라서 말이지. 물론 명성이 올라간다고 나쁠 건 없기야 하다. 황도 카르논의 입장 권한도 얻기는 해야 하니까. 하지만……. “살아서 돌아간다면 말이지.” 그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직 미궁이 열린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 “아, 다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군. 어서 가서 쉬게. 이곳에서의 규칙은 에르고스 경이 알려 줄 걸세.” 이를 끝으로 막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기사의 안내를 받아 임시 치료소로 이동해 동료들과 합류했다. “아저씨!!!” “다리아는?” “신관님께 정화를 받고 다 나았어요. 지금은 피곤한지 자고 있지만……. 아무튼,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언니도 치료를 받고 나니 여유가 생겼는지 다시 이전처럼 활발해진 에르웬. 미샤가 다가와 에르웬을 떼어냈다. “야! 그만 귀찮게 하고 저리 떨어져랑.” “네?” “네는 무슨. 비요른 다친 건 안 보이냥?” “아…….” “어디 봐라. 괜찮냥? 따로 아픈 데는 없고? 그 와중에 불려 다녀온다고 고생 많았당. 어서 가서 신관님한테 팔부터 보여 주자.” 일단 부상은 전부 치료된 듯하기에, 미샤를 따라 신관에게 가서 치료부터 받았다. 아, 참고로 비용은 없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까. 모든 탐험가들은 왕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애초에 여기 치료소부터가 원래는 다른 팀 소속인 신관들을 징집해 모아둔 걸 테고. “하루 정도는 평소보다 힘이 안 들어가고, 이질감이 들 겁니다. 그럼 환자가 많아서 이만. 태양의 광휘가 함께하기를.” 힐 한 방에 몇 분도 채 되지 않아서 자라난 팔. 새삼 신관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최상급 포션이었다면 두세 병은 부어야 했을 거다. 잘린 팔을 이어붙이는 것도 아닐뿐더러……. 신체 능력이 올라갈수록 포션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게 되는 탓이다. ‘클랜을 만들면 무조건 신관부터 한 명 구해야지.’ 치료를 받은 뒤에는 다시 동료들과 합류해 대화를 나눴다. “레이븐, 이곳 사정은 들었나?” “지역 배정을 받으면서 대충은요.” “지역 배정?” “우리가 앞으로 자야 할 곳이요. 같이 받은 지도를 보니까 하필 외곽 쪽 통로더라고요. 너무 늦게 와서 그런가 봐요. 안전한 안쪽은 이미 포화 상태라는 거 같아요.” 레이븐의 말에 나는 말없이 웃었다. 최중심부에는 대형 클랜의 막사들만 있던데, 과연 걔네는 빨리 와서 그쪽에 배정된 걸까? “아무튼, 어서 그리로 이동해요. 내일부터는 순번에 따라 교대 경계 근무도 서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거, 무슨 군대라도 들어온 거 같네. 경직된 분위기인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근데 타켈란은 어디 있지?” 타켈란 아르베논. 사실상 이번 계획의 유일한 생존자라 할 수 있을 5등급 탐험가. “…….” 타켈란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동료들이 싹 굳었다. “아, 그분요…….” 레이븐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역 배정을 받자마자 그리로 갔어요. 혼자거나 2인 이하인 탐험가는 결원이 생긴 팀에 보충되는 식으로 처리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근데 그냥 우리 팀에 붙으면 되지 않나? 클랜은 다 같이 다니는 거 같던데. 애초에 지나가다 6인 이상으로 팀을 꾸린 무리도 상당히 많았고. 그런 의문을 내비치자, 레이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인이 원했어요. 그러니까 얀델 씨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다면야.”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뭔가 일이 있었군.’ 사건이 있었다. 그걸 왜 나에게 숨기는진 모르겠지만. 이거야 나중에 아이나르나 미샤에게 슬쩍 물어보면 될 테고……. “에르웬, 너는 푸른 장벽 클랜에 합류한다고 그랬지?” “네에……. 저는 시, 싫은데 언니가 꼭 그래야 한다고……. 나중에 계약 때문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대요.” 글쎄, 계약도 계약이지만 그쪽이 훨씬 더 안전할 거라 여겼을 거다. 푸른 장벽은 무려 6개의 팀을 운영하는 클랜이니까. 뭐, 그중에 하나는 여기 오면서 사라졌지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너도 언니가 깨어나면 잘 챙겨라.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네……!” 이후 에르웬과 헤어진 우리는 배정받은 지역으로 향했다. 외곽에 위치한 통로였고, 바로 옆에 위치한 팀과 거리가 2m도 채 되지 않았다. “1층에서 자는 건 진짜 오랜만이넹…….” 다만 우리는 탐험가답게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바닥에 침낭을 깔고 따닥따닥 붙어 누웠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라는걸. 드르르르러렁!! 눕기 무섭게 아이나르가 코를 골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듣고 있자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오늘 얻은 전리품도 확인하고, 용암에 뒤덮였던 장비도 점검하고, 피와 땀으로 절여진 몸도 닦아야 한다. 아, 타켈란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봐야지. 할 일이 산더미다. 그렇게 많은 걸 했는데. ‘아, 몰라 내일 해.’ 눈을 감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마치 물에 가라앉는 것만 같다. 그렇게 의식이 서서히 수마에 잠겨들던 때, 옆에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요른, 고생 많았당.” 다른 쪽에선 레이븐의 목소리도 들렸다. “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아브만도 멋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쉬어라, 얀델.”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드르르르러렁!! 유난히도 길었던 1일 차가 마침내 끝났다. 216화 버림패 (5) 오르큘리스. 왕가의 반기를 든 유명 범죄자 집단. 불과 만들어진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은 이 집단은 그동안 수많은 테러와 범죄를 저지르며 그 악명을 떨쳐왔다. 왕가에서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고 사냥을 시작했지만,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지금까지 고작 일곱을 처치한 게 전부. “그런 놈들이 일곱이나 왔다라…….” 제3 왕실기사단 단장, 마르코 엘번은 부하의 보고를 듣고서 침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기민하게 대응하며 중심부에 안전지대를 형성한 그는 전시 상황을 선포하며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정보 수집이었다. 곧장 돌파구가 될 수 있을 2층 포탈을 향해 수색대를 보냈고, 오늘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전선에서 들려오는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 결과, 7명의 오르큘리스 단원이 포착됐다. 절규의 마녀, 검은 발톱, 등대지기. 이 셋은 안전지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학살을 벌이는 중이었고, 나머지 넷은 2층 포탈 앞을 막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 엘번은 갑갑함을 내비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앞에 말한 셋도 셋이지만, 이 넷이야말로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악령이란 것보다 그 기괴하고 잔혹한 행적 때문에 더욱더 악명이 높은, 시체 수집가. 한때 거대 학파의 수장이었으나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대고 범죄자로 전락한, 파멸학자. 비프론 태생의 병사로 시작해 전대 제1 왕실기사단장을 죽이며 명성을 얻은 혈기사. 마지막으로……. ‘반역자.’ 그 미친놈들을 모아 오르큘리스라는 집단을 만들고 무수한 악명과 학살의 역사를 제 손으로 만들어 낸 그놈까지. ‘그 집단’을 대표하는 넷이 모두 이곳에 왔다. 한데 경계할 것은 오르큘리스만이 아니다. 노아르크로 도망친 거물 범죄자들도 수없이 많으며, 이들을 합치면 사실상 전력으로 붙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 이윽고 엘번이 긴 침묵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놈들을 뚫고 2층으로 올라간단 계획은 철회하겠네.” 그 말에 더한 침묵이 장중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한 기사가 힘겹게 말을 올렸다. “……곧 3일 차가 시작됩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파멸학자까지 온 게 확인된 이상, 어차피 포탈은 이미 무용지물인 상태가 됐을 가능성이 높네.” “하오면…….” 엘번은 잡념을 털어내듯 눈을 감았다 떴다. 지휘관이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 “최대한 은밀하게 차원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를 모으게.” 해야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어떤 희생이 따를지라도. ***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한다. [00 : 17] 어느새 하루가 더 지나 3일 차가 되었다. 어제는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오는 길에 얻은 전리품을 확인하고. 수리 관련 이능을 가진 탐험가를 찾아 망가진 장비를 고치고. 팀 단위로 서는 교대 경계도 서고. 경계 근무가 끝나자마자 근처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아, 타켈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어, 그 사람 말이냥?] 열심히 미샤를 공략해 입을 열 게 했지만, 막상 들어 보니 별 얘기 아니었다. 멘탈이 나가서 잠시 이성을 잃었다던가? 녀석은 모두 살아남은 우리를 보며 공격적인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못했다. [그때 아루루가 진짜 장난 아니었당. 막 네가 저꼴을 하고서 치료도 못 받고 불려간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따박따박 소리치는데……. 아휴, 듣고 있는 내가 막 식은땀이 났다니까?] 음, 얘가 화나면 살벌하긴 하지. 아직도 그 쪼그만 몸에서 어떻게 그런 기합이 나오는지 미스터리다. [아무튼, 그게 전부당. 막 아이나르도 화가 나서 검을 뽑아들려 하던 중에 그냥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당.] 나를 위해 나서준 동료의 행동은 고맙지만, 사건의 전말을 들을수록 입가가 굳었다. 그야 얘네들은 모른다. 내가 일부러, 우리가 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그들을 뒤에 배치했단 사실을. [응? 왜 그런 표정이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배가 고파서.] 타켈란의 분노가 정당하다. 효율만을 생각해 진형을 짰다면 더 많은 숫자가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후방에 더 적절할지라도 비교적 안전한 나의 뒤쪽에 전원을 배치했다. 아마 타켈란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런 행동을 했을 테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게 낫겠지.’ 잠시 잠에서 깨는 시간을 가진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침낭을 정리했다. 충분히 바쁘게 지나가기는 했지만. 2일 차는 치열했던 1일 차에 비하면 평온했다. 다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으응, 얀델 씨……?” 인기척에 깼는지 레이븐이 눈가를 비비며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나 때문에 깼나? 미안하군.” “아뇨,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예요…….” “더 안 자나?” 내 물음에 레이븐은 아예 침낭에서 상체를 꺼내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는 얀델 씨는요? 더 안 자요?” “나도 잠이 안 와서.” “그래서 혼자 보초라도 서려고 하던 거예요?” 나는 피식 웃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서로 상황이 똑같은데 아니라 하는 것도 웃겼다. “벌써 3일 차네요…….” 3일 차부터는 계층군주가 소환된다. 조건은 5인 이상이 뭉쳐 있는 게 전부. 물론 일정 확률인 데다가, 이미 만 명이 넘는 탐험가가 1층에 모여 있기에 우리 앞에 소환될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 모르니까.’ 나는 이 팀의 탱커다. 혹시 눈앞에 계층군주가 떨어져도 동료들이 달아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 후우우웅-! 그때 지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동굴벽에 박힌 무채색의 수정이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광채의 색은 피처럼 시뻘건 적색. “얀델 씨, 이건……!” 어딘가에 계층군주가 출현했다는 뜻이다. “뭐, 뭐냐!” 아이나르를 비롯해 자고 있던 동료들이 차례차례 일어났다. 이는 근처에서 자고 있던 다른 조의 탐험가들도 매한가지. 나는 침착하게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너무 놀라지 마라. 다행히 이쪽 근처에 소환된 건 아닌 듯하니까.” 1층 계층군주가 있는 곳엔 필연적으로 큰 소리가 난다. 한데 그런 소리는 일절 없으니,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라 봐도 무방할 터. “다들 마저 자라.” “하지만…….” “일이 생기면 깨워주마. 경계 근무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지 않나.” “피곤한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냥.” “나는 그때 조금 졸아서 괜찮다.” 바로 잘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동료들을 억지로 침낭에 눕혀 눈을 감게 했다. 체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 그렇게 한 20분쯤 흘렀을까? 후우우우웅…….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주변을 밝히던 수정이 꺼진다. 계층군주가 처치되었단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최소 몇 달에서 수년이라는 긴 리스폰 시간을 가진 상층의 군주와 달리 이놈은 몇 번이고 재소환이 되니까. “앞으로도 괜찮겠죠……?” “걱정 마라. 제대로 된 탐험가 30명이면 잡는 게 1층 계층군주니까. 지금 상황이면 어디에 나타나든 금방 처리가 될 거다.” 사실 이게 그 처절했던 길을 뚫고서 왕가 측 세력에 합류하려 한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이곳에 있으면 계층군주로부터 안전하다. 설령 코앞에 나타난다 해도, 내가 조금만 버티면 금방 지원이 올 테고. “그럼 여기는 부탁하지.” “어디 가세요?” “혹시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인력 낭비다. 영 잠이 안 오면 옆에서 불침번이나 서줘라.” 첫 번째 계층군주가 처치되자마자 나는 배정지에서 벗어나 중심부로 이동했다. 계층군주의 리스폰 시간은 여섯 시간. 그 동안 돌아다니며 뭔가 특이점은 없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으니까. [북172-21] 지형을 구분하기 위해 왕가 측에서 벽에 그려둔 표식을 길잡이 삼아 나아가면서도 주변 탐험가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자네, 들었나? 남쪽 통로였다더군.” “계층군주가 나온 곳 말인가?” “그래, 지원이 올 때까지 스무 명쯤 죽었다고 하네.” “제기랄, 나올 거면 지하 도시 새끼들이 있는 쪽에서 나올 것이지.” 나와 비슷한 처지의 탐험가들이 나누는 대화기에 신뢰성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수준의 정보들. 그래도 여론을 알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일세. 지난번 연설에선 금방 2층 포탈로 가는 길을 열 거라더니. 벌써 3일 차네.” “놈들이 조용하니 도리어 불안해지는구려.” 예상대로 탐험가들은 첫날 이후로 별다른 공지가 없는 수뇌부 측에 불신을 보이고 있었다. 참고로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슬 결정을 내릴 때가 됐을 텐데.’ 6시간마다 계층군주가 처치된다고 계산하면 이틀이면 총 여덟 마리의 계층군주가 처치된다. 즉, 5일 차에는 반드시 그게 나타난다는 뜻. ‘대형 클랜에 왕실기사단장까지 있는데,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액션이 없을까. 이곳에 왔던 날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던 그 막사에서의 대화가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 ‘분명 노아르크가 노린 게 그거란 것도 알 수 있을 텐데…….’ 왜 계속 여기서 버티고만 있는 걸까? 당연히 어느 쪽이든 길을 열어 2층으로 나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터벅, 터벅. 고민이 깊어질수록 걷는 속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배낭 복사 버그를 처음 발견하고 부족 내에 이를 널리 퍼뜨린 그 녀석. “카론……?” “위대한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내가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걸자, 카론이 즉시 일어나 격하게 내게 달려왔다. “여기서 만나다니!! 역시 너는 우리를 이끌 운명인 것이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단 반갑긴 했기에 바바리안 식으로 대충 인사를 받아줬다. 그리고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옆에는 누구냐?” “이곳에서 만난 전사들이다!!” “이곳에서 만났다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바바리안의 배낭 복사 버그는 이미 진작에 막혔다. 그 수법이 탐험가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있지만, 일종의 마도구인 인식표가 생긴 뒤에 저층 탐험가의 씨가 마른 게 컸다. 인식표 한 번 받는 데 7만 스톤이나 하거든. 그래서 분명 카론도 얼마 전에 3층짜리 팀에 들어갔던 거로 아는데……. “있던 팀은 어디 가고?” “아, 녀석들이라면 여기 오는 동안 죽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나처럼 혼자 남은 전사들을 소개해 줬다!” 망할 병사 새끼들. 바바리안 전사 5인 파티라니……. 그냥 귀찮다고 얘네끼리 팀을 만들어 준 게 틀림없다. “저, 정말 작은 발칸인가! 만나서 영광이다!! 나, 나는 베록스의 두 번째 아들 드반이다!!” “어, 그래. 나도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을 듣고 흥분한 바바리안들의 인사를 대강 받아준 뒤, 카론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못 봤다면 모를까. 어디 보고도 두고 갈 수 있어야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쪽에 합류하는 건 어떤가?” “그, 그래도 되나?” 7만 스톤을 내고 인식표를 받은 것, 그리고 입고 있는 장비. 이것만으로도 일단 이들이 3층 이상의 전사임은 알 수 있다. 있으면 무조건 내게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도 있고. “안 될 게 뭐 있나?” 나는 황송해하는 카론에게 우리 팀이 배정된 지역을 알려 줬다. “행정병에게는 내가 가는 길에 말해 둘 테니, 너희끼리 먼저 거기에 가 있어라. 마법사를 보면 예의바르게 내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고.” “알았다!” “아, 가는 길을 모르겠으면 주변 탐험가에게 어디로 가면 될지 물어봐라. 소리치면서 못 자게 하면 귀찮아서라도 대답해 줄 거다.” “오오!! 과연!” 그렇게 카론 일행을 보내고 마저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비요른 얀델.” 낮게 울리는 남성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서 있었다. “타켈란 아르베논.” 녀석은 처음 보는 탐험가들과 모여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이곳에 오는 길에 동료를 모두 잃었으니까. “…….” 침묵 속에서 타켈란이 나를 응시해 온다. 미세하게 떨리는 턱가는 그가 무언가를 힘겹게 참아내고 있음을 증명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있었던 일은 들었다.” “…….” “나를 원망하나?” 타켈란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버텨내듯 서 있을 뿐. 그의 대답이 돌아온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아니, 널 원망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대답. 타켈란이 감정을 토해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왜 나는 이렇게 됐을까. 레나가 죽었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다행이라며 웃을 수 있는 걸까. 만약 그 새끼들이 중간에 도망치지 않았다면 레나는 살지 않았을까.” “…….” “아니, 무엇보다…….” “…….” “정말 너는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그래서 결론은 나왔나?” “모르겠다. 실제로 가장 많이 다친 것도 너고. 가장 어려운 일을 한 것도 너고. 네 동료들이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을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보장이 되는 상황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할까? 나는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우리가 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것. 그렇기에……. “널 따라가면 안 됐다.” 날카로운 칼붙이가 내 안에 남은 무언가를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타켈란이 말을 이었다. “널 따라가기로 했던 건 나였지.” “…….” “네가 리더가 되는 편이 좋다고 표를 던진 것도 나였고.” “…….” “그 여자가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쓴다고 했을 때, 아무런 제안조차 못 해보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도……! 바로 나였다.” 자기혐오. 결국 책임의 모든 소재를 자신에게 돌린 그를 보며 나는 형언키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나는 널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군.” 이런 상황에선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설픈 위로의 말조차 던질 수가 없었다. 다만 그런 내 망설임이 전해졌을까? “날 동정하지 마라.” 타켈란이 대화를 끝내며 다시 원래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젠가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 날이 올 테니.” 더 이상 녀석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을 향했다. 나는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가 모두 끝났음을 직감했다. 터벅, 터벅. 따라서 다시 가던 길을 이어나갔다. 타켈란이 도중에 내게 말을 걸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통로가 넓어지고 확장된 중앙 공동이 나왔다. 나는 우선 행정병을 찾아 카론 일행이 우리와 합류하기로 한 것을 알렸다. “팀 애플 나라크……. 아, 북부지구 외곽 통로군요. 확인 됐습니다.” 이로써 해야 할 용건은 끝. 다만 막 뒤로 돌았을 차였다. 철컥, 철컥. 막사에서 나온 기사가 아까 나를 도와준 행정병이 있는 곳으로 향하더니 나를 힐끗했다. 그리고 총 여섯 개의 학파에 이름을 댔다. “아, 예. 그쪽 학파 소속 마법사 말입니까? 일단 명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신관도 모자라 마법사도 징집하려는 건가? 처음엔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데르타, 스페리스, 쟈카드…….’ 기사가 말한 학파를 가만히 곱씹어 본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차원문 마법.’ 해당 학파의 4등급 이상 마법사는 최대 30명까지 사용 가능한 ‘차원문’을 열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두근-! 심장이 불온하게 뛰었다. 또한, 머릿속에선 얼마전에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부정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훌륭한 지휘관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자가 아닐세. 해야 하는 선택을 하는 자지.] 놈이라면 주저 않고 버릴 것이다. 우선순위가 낮다고 판단한. 그 모든 것을. 217화 군주 (1) 차원문. 몇몇 학파에서만 다뤄지는 일종의 고유 마법. 온갖 전멸 플래그가 가득한 이 게임에서 이 마법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미궁이 폐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도시로 귀환하는 게 가능해지다니? 이거야말로 무적의 생존기 아닌가. ‘뭐, 제약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몬스터가 아니라 대인전에서는 카운터 치는 방법이 널리 알려졌기에 전투 중 탈출기로 쓰기가 쉽지 않다. 또한, 최대 30명밖에 이용하지 못한다. 상층의 원정대 중 대부분이 30명 단위로 구성되는 것도 이게 이유였고. ‘무엇보다 한번 쓰면 마법사가 다시는 그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지.’ 참고로 이는 게임과 다른 점이다. 원래 게임에선 1등급에 도달한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차원문’ 마법은 쓸 수가 없었다. 만약 쓸 시, 반드시 그 마법사가 죽었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 속 시간대보다 150년이 흐른 미래의 세계. 차원문 마법의 술식을 소유한 여섯 학파는 합동 연구 끝에 낮은 등급의 마법사도 차원문 마법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고, 그 마법사의 인생에 있어 단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한 방법이란 것만은 알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차원문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버티는 마법사는 없을 테고…….’ 그럼 과연 몇 명이나 미궁에 들어왔을까. 음, 일단 꽤 되긴 할 것이다. 대형 클랜들에서 최우선시해서 영입하는 게 차원문을 쓸 수 있는 마법사이며, 해당 학파들 또한 아직 ‘차원문’ 횟수가 남은 마법사들이 탐사 지원에 나가는 것을 권장하는 기조니까. 하지만……. ‘영혼까지 끌어모아 봤자 150명도 안 되겠지.’ 현실적으로 차원문을 타고 이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건 4,500명 미만. ‘왕가의 정식 기사. 마법사를 데리고 있었을 대형 클랜의 정예를 빼면……. 사실상 나머지는 전부 버려진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숫자가 구체화될수록 새삼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는 건지 느껴진다. 3층 계층군주 사건과는 그 숫자부터 다르다. 최소 만 단위의 탐험가가 죽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 이런 선택을 했다라…….’ 아득해지는 기분을 뒤로하고 애써 차분하게 추론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지금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이것. 왜 기사단장은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2층으로 가는 길이 막혔거나, 적어도 다를 바 없는 상태라고 판단했겠지.’ 1층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할지 몰라도 ‘차원문’으로 소수만 도망치는 것보다 더 많은 희생이 따를 거다. 그래서 기사단장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 여긴— “또 보는군.” 돌연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몸을 휙 틀은 나는 그대로 굳었다. 후, 깜짝이야. “비요른 얀델이라 그랬지?”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기사단장이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마르코 엘번.” “바바리안치고는 기억력이 좋군.” 평소였다면 지지 않고 한마디 쏘아붙였겠지만, 나는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칭찬 고맙군.” 녀석은 일단 이곳의 최고 권력자 아닌가. 짧게나마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천운의 기회. 몇 번이나 고민을 거듭한 나는 놈에게 물었다.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차원문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를 찾고 있던데, 도망칠 생각인가?” 일단 사실 여부 확인이 가장 중요할 이 질문. 이 질문을 듣자마자 녀석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이런 면에선 바바리안 같군. 다른 자였다면 눈치를 챘어도 내게 직접 물을 생각은 못 했을 텐데.” 보다시피 바바리안이라서 말이지. 가만히 눈을 마주하자 녀석이 되물어왔다.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 사실인 거구나. 정말 혹시나 다른 전략이 있는 건 아닌가도 싶었는데. “아까 기사가 행정병에게 지시를 내리는 걸 들었다.” “……주의력이 떨어지는 자로군. 아니면 바바리안이라 생각해 방심했거나.” 저 눈빛을 보니 그 기사도 곱게 넘어가기 어려울 듯하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마저 본론을 이어가려던 차였다. “음, 자네가 생각보다 더 영리한 자였다는 경우도 있겠군.” 녀석이 묘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말하겠네. 자네가 속한 팀의 구성은 행정병을 통해 들었네.” “……내 뒷조사를 했다고?” “왠지 관심이 생겨서 말일세.” 관심이라……. 이건 긍정적인 변수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결과만 말하자면 둘 모두였다. “자네와 마법사를 데리고 가줄 수 있네. 딱 1년만 왕가군에 봉사하겠단 약속을 한다면.” 녀석이 내게 차원문 티켓을 권했다. 문제는, 그게 2장뿐이라는 거겠지. “나머지는?” “자네는 알고 있지 않나. 해야 하는 선택이 어떤 것인지.” 씨발, 기준 미달이라는 거구나. 나름 몇 달간 잘 키워냈다고 생각했는데. “자, 어쩔 텐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지금 답해 줬으면 하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나와 동료 한 명의 목숨인가. 아니면 모두의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인가. [이길… 수 있소?] [걱정 마라. 반드시 모두 살려서 돌아가겠다.] 언젠가 나누었던 찰나의 대화가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주저않고 대답했다.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머리까지 바바리안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 「두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되었습니다.」 「세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되었습니다.」 「네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 「…….」 *** 시간이 흐른다. 나는 기사단장과 나눴던 대화를 철저하게 함구했다. [차원문에 관한 얘기는 자네만 알고 있게. 동료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녀석의 협박도 협박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이 일은 금방 퍼져나갈 테니까. 실제로도 그러했고. “얀델 씨, 들었죠? 그 얘기.” 수천 명의 입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하나로 똘똘 뭉친 집단이 아니라면야 더더욱. 기사단장의 차원문 도주 계획이 알음알음 퍼졌고, 레이븐의 귀에 닿는 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그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역시 얀델 씨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해요?” 레이븐의 물음에 곰아저씨와 미샤의 시선이 내게로 모인다. 내게 말하기 전에 이미 셋이서 의논을 해봤던 거구나. 하긴, 이 동굴 속에 감도는 살기를 느끼지 못한 건 저들 정도뿐일 테니. “카론, 고작 그 대검도 못 들다니! 그래서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나!!” “드, 들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자, 봐라!” “오호! 그럼 반쯤 사나이인가!” 아다만티움 대검 하나를 돌려가면서 무려 한 시간째 잘 놀고 있는 바바리안. 때론 그들의 무신경함이 부럽기도 하다. 의심없이 나아갈 수만 있으니. “저기요, 얀델 씨……?”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군.”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레이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소문은 걱정하지 마라! 다 잘 될 테니까!” 잘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얘들은 의심없이 나아가기만 했으면 좋겠다. 앞에 어떤 함정과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할 테니. “아니,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긍정적인 건데요!” “그게 리더라는 거다.” “아, 알았으니까 어깨 좀 그만 쳐요!” 나는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짓고서 다시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최근 내 모든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어떻게 해야 다 함께 살아 돌아갈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수천 번의 고민을 거듭했고, 수많은 계획을 세웠다가 폐기했으며,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서도 변수는 없는지, 잘못 판단한 오류는 없는지를 수없이 검토했다. ‘완벽해야 돼.’ 플랜 A가 안 되면 플랜 B.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플랜 C. 지금처럼 시간이 날 때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며 내가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을 상정한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후우우우웅! 조금 더 임계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듯, 지면에서 약한 진동이 피어난다. “벌써 여덟 번째네요.” 이로써 여덟 번째 계층군주가 소환됐다. 며칠 동안 반복되던 일이기에 레이븐을 비롯한 모두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야 얘네는 모르니까. 아홉 번째 계층군주가 처치됐을 때 어떤 이벤트가 발생하게 되는지.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도 아직 시위 같은 것도 없는 건 그래서겠지. 대부분은 헛소문일 거라 생각할 테니까.’ 보통 사람의 관점에선 수뇌부가 차원문을 타고 도망갈 이유가 없다. ‘그것’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 근처인 거 같네요…….” “혹시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 다들 긴장하고 있어라.” 우리는 만일을 대비해 경계 태세를 갖추며 계층군주가 처치되기까지 기다렸다. 그러던 때, 뒤쪽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잠시 지나갈 테니, 다들 벽에 붙어주시오!” 구급차가 긴급 출동을 하듯 좁은 통로의 탐험가들을 밀어내며 빠르게 이동하는 무리. 이내 벽에 붙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에라멜의 별 클랜이네요.” 나름 이름이 알려진 대형 클랜의 무리.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보니, 계층군주를 처치하러 이동 중인 듯하다. “지원대가 갔으니 금방 다시 어두워지겠군.” 1층 계층군주는 7층 탐험가 30명이면 충분히 잡는다. 공략법이 있으면 훨씬 적은 전력으로도 가능하고.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다 버리고 갈 거면서 계층군주는 왜 꼬박꼬박 잡으러 가는지 모르겠네.’ 1층 계층군주는 이렇다 할 전리품이 없다. 정수도 나오지 않고, ‘왜곡’ 마법으로 획득 가능한 부산물의 가치가 높은 편도 아니다. 처치 시 유일한 보상은 본격적으로 혜택이 주어지는 4등급 클랜으로 승급할 수 있다는 것뿐. 그래서 놈은 대부분 검증 역할로만 쓰였다.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통과의례처럼, 한 번씩만 처치하고 넘어가는 몬스터 정도. ‘혹시 죄책감 같은 건가? 마지막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같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클 거다.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하는 듯 보여야, 버려질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캬아아아아아악—!!] 20분쯤 더 흐르자, 멀리서 거대한 괴성이 들려오며 붉게 달아오른 수정이 빛을 꺼트렸다. 계층군주의 처치가 끝났다는 뜻. “내일부턴 5일 차니, 이제 이틀 정도만 더 버티면 되네요.” 나는 간간이 시간을 확인하며 계속해서 계획을 점검해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흘렀을까. [22 : 07] 여덟번 째 계층군주가 처치된지도 어느덧 두 시간가량 흘렀을 무렵. 아니, 다시 말해……. “제기랄!!” 지옥도가 펼쳐지기까지 4시간이 남았을 시각. “다들 안으로 뛰어!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왕가 새끼들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려 한다!! 막아라!!” 동굴 안쪽에서부터 소란이 번져왔다. *** 그 시각, 대형 클랜과 왕가 소속 기사들의 막사가 있는 중심부. “이 개새끼들아!! 비켜, 비키라고!!” “물러나라 탐험가, 더 다가온다면 베겠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 서걱-! 툭, 데구르르. 한 탐험가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다. “더 올 자가 있나?” 기사의 살기 어린 말에 주춤하기도 잠시. “뭐 해, 밀어붙여!!” “나는 나갈 거야! 나갈 거라고!!” “아악! 팔! 팔이……!” 삶에 눈먼 탐험가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중심부와 이어진 모든 통로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진짜 적은 저 밖에 있건만, 기어코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자 하는구나.” 제3 왕실기사단장이자, 지금의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장본이기도 한 사내. 마르코 엘번은 혀를 차며 부관에게 물었다. “현재 진행률은?” “절반이 조금 넘는 인원이 빠져나갔습니다.” “절반이라……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일제히 차원문 마법을 쓰고 단번에 도시로 탈출했다면 이런 소란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차원문 마법 특성상, 순차적으로 마법을 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곧 저희 차례입니다. 이곳은 남은 기사들에게 맡기고 이만 가시지요. 단장님.” 마르코 엘번은 부관을 따라 중심부로 이동했다. 마침 새로운 차원문이 열리며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마르코 엘번은 모든 미련을 지워내며 서서히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발, 나도 데려가!!” “아아아아악!”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절규와 병장기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철컥, 철컥. 마르코 엘번은 포탈 앞에서 잠시 멈췄다. 돌연 이틀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나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여러모로 인상 깊은 자였다. 바바리안다우면서도 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자네를 잘못 봤군. 그런 틀린 선택을 할 줄이야.] 그는 바바리안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애초에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한데 그 행운조차 잡지 않을 줄이야. [차원문에 관한 얘기는 자네만 알고 있게. 동료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는 입막음용 협박만 하고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죄책감을 느끼는군.] 바바리안이 묘한 말을 뱉었다. [죄책감……?] [그래서겠지. 내가 제안을 거절하니까 실망을 한 건.]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차가운 음성이 그의 귀에 내리 꽂혔다.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나를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 아닌가?] 마르코 엘번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기사,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 네 감정을 덜어내려 하지 마라.] 바바리안과의 대화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아마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눌 일은 영원히 없겠지. “단장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마르코 엘번은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이 어두운 미궁과 달리 밝게 빛나는 도시의 모습이 포탈 너머로 보였다. 저주받은 세계의 유일한 도시.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내야만 하는 그곳.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를 위해서.” 그는 포탈 너머로 몸을 들이밀었다. 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결국, 결행의 순간이 왔다. 그러니……. ‘해야 하는 일을 해.’ 눈을 뜬다. “다들 따라와라. 중심부로 이동한다.” “네? 가서 뭘 어쩌시려고요?” 뭘 어찌긴 어째. 도착했을 때쯤이면 여러 집단에서 버려진 온갖 인재들이 절망에 허덕이고 있을 터. ‘일단 체급부터 맞춰야지.’ 세력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살길이다. 218화 군주 (2) “안 돼! 나도 데려가……!” “……죄송합니다.” 한 탐험가가 눈을 질끈 감고 차원문에 들어선 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료됐다. 간단한 이유다. 아직 통로 곳곳에 기사들이 건재하게 탐험가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투항하세.” “예? 하지만 아직 저희가 타고 나갈 차원문 마법이 준비되지…….” “차원문은 방금 게 마지막이었네. 자네들에겐 미안하게 됐군.” “대, 대장님 그게 무슨 소리—! 아아악!!” 한 기사가 검을 내림과 동시에 탐험가들이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기사를 짓밟고 주먹으로 후려쳤다. “말해! 방금 무슨 소리야! 마지막 차원문이라니!!” 기사는 모든 폭력을 그저 감내했다. 또한 이가 날아가고 눈의 핏줄이 터지면서도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말 그대로일세.” “미, 미친 새끼! 그럼 너는 버려질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누군가는 남아야 하니까. 자네들의 분노는 정당하네. 그러니 부디 내게 토해 내게. 이 몸에 아직 그 정도의 가치는 남아 있을 터이니.” “죽여 버리겠어!!” “라프도니아를, 위… 하여……!” 어느 기사는 투항했고, 어느 기사는 끝까지 검을 휘두르며 항전했다. 하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탐험가들은 숫자로 밀어붙이며 그들의 전선을 무너뜨렸고, 이내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절망과 분노를 토해냈다. 물론, 탐험가들도 알고 있었다. 저 기사들도 같은 처지이며, 소중한 전력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다만 순간의 감정을 풀어낼 존재가 필요했다. 그렇게 이와 비슷한 광경이 중심부 곳곳에서 벌어지던 때였다. “아악! 뭐야 넌! 밀지—!” 한쪽 통로에서 바바리안이 빼곡한 인파를 너무도 쉽게 밀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기, 기사.” 기사를 구타하던 탐험가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죽이는 것.” “이, 이거 안 놔?!” “곤란.” “뭐! 우릴 버린 새끼들이라고, 설마 너도 이놈과 한패—!” 그 순간 격하게 반발하던 탐험가의 안면부에 바바리안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퍼억-! 이내 탐험가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곤란, 하다고, 말했잖아.” 바바리안이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 더 이상 기사에게 덤벼들 탐험가는 없었다. 적어도 그 주변에는. *** 중심부의 상황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설마 기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기쁜 오산이다. 그들이 내 밑으로 들어와 명령을 듣는 일은 없을 테지만, 일단 고급 인력인 건 여전하니까. 그냥 숨 쉬면서 이 동굴 속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내 입장에선 좋은 미끼가 되어 줄 터. “얀델 씨!” 한 타이밍 늦게 동료들이 내가 밀쳐내며 연 길을 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아, 왔으면 여기 좀 부탁하지.” “네?” “죽지 않게 잘 좀 지켜 주란 뜻이다.” 나는 반쯤 뒈져가는 기사들을 동료에게 맡긴 뒤 통로에서 벗어나 공동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아악! 그, 그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대부분 기사의 것이다. 그래, 너희도 사람이구나. 다구리 맞으면 뒈질 것처럼 아픈. “……제기라아아알!!!” 사무친 분노가 터져 나온다. 반면 폭력의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 멍하니 주저앉은 채 좌절해 있는 자들도 보인다. 분노조차 무의미하게 느낀 자들이다. “저, 전부 죽을 거야.” “세실리아……. 미안해, 나는…….”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자들. 그들 중에는 대형 클랜의 마크를 달고 있는 자도 있다. 팀 단위이기도 했으며, 한 명 내지 두 명이 모여 있기도 했다. 하긴, 대형 클랜이라고 전원을 챙겨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사조차도 버려지던 와중 아닌가. 우선순위가 낮은 단원부터 추려졌겠지. 티켓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만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변하는 건 없지 않습니까! 저희와 똑같은 처치인 분들이에요!” 간혹 분노를 잠재우려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경우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철저하게 감성에 의지하며 도덕과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자. 그리고……. “다들 단체로 미친 거냐! 이러면 결국 우리 모두 다 죽는다고!”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자. 분노의 감정을 뒤로하고 이성적으로 이들의 만행을 멈추려는 자. 어찌 보면 내가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현 상황에서 내게 가장 힘이 될 자들이기도 하고. 터벅. 이윽고 걸음을 멈춘다. 앞에는 몇 번이고 보았던 기념비가 있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의 업적을 칭송키 위해 세워진, 미궁의 단 하나뿐인 건축물. [그 위대한 첫걸음을 기리며] 이 기념비에는 히든피스가 있다. 1층 균열을 열게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균열에 들어가 전란을 피하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8등급 마석도 없을뿐더러……. 있어도 소용없다. 마지막으로 균열이 열린 건 1달 전이니까. 5층 탐사를 진행하는 쪽이 이득이라 생각해 굳이 가지 않았더니 자연 발생으로 열렸다. 뭐, 아쉬워한다고 바뀌는 게 있겠냐마는. “크흠크흠.” 기침을 하며 목을 푼다. 그러면서도 딱히 걱정은 않는다. 뛰어난 육체 수치 외에도 바바리안에게 특출난 특징이 있다면,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일 테니까. “그마아아아아아아아안———!!!!!” [거대화] 상태로 내지른 일갈. 그 외침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일순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이목을 모았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뭐야, 저놈은?’ 이런 눈빛으로 잠시 쳐다보다 관심을 끄는 탐험가들. ‘그래,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지.’ 사실 크게 기대는 안 했다. 그런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있겠냐고. “나는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무시를 당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소리치며 외침을 이어나간다. 바바리안 수칙 하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면, 그건 목소리가 더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아는 동족이 있다면,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해라!!!” 지원을 요청한다. 여기 있는 바바리안은 나 하나만이 아니니까. “작은 발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위대한 전사!” “차대 족장의 지시다!! 따라야 한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카론과 아이나르의 외침을 시작으로 동굴 곳곳에 퍼져 있던 바바리안들이 기다렸다는 듯 함성을 내지른다. 우리 바바리안들은 내가 소리쳤을 때부터 계속 나만 보고 있었거든. 내가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일단 동족이니 도와야 한다고 여겼겠지.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내가 외치자, 후창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이에 또다시 군중이 행동을 멈추고 이목을 내게 모았다. 혼자서 목이 부서져라 소리쳤다면 모를까. 안내 방송이라도 나오듯 곳곳에서 똑같은 외침이 반복되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던 것. “네가 뭔데 멈추라 마라냐!!” “전부 이 새끼들 때문에 이 꼴이 났는데, 참으라고?!” 다만 아직은 부정적인 시선이 더 크다.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기사들을 두들겨 패는 놈도 상당수였고.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단순무식한 바바리안답게. 우직하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내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끝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외친 횟수가 한 열 번쯤 됐을 때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누가 저 새끼 입 좀 막아!!” 토해내도 토해내도 줄어들지 않는 분노의 화살이 이윽고 내게로까지 옮겨진다. “왕가 편을 들을 거면 너도 죽어라!!” 나를 향해 달려드는 탐험가도 있었다. “차대 족장을 지켜라!!” 이를 본 바바리안 전사들이 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다만, 나는 그런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 우리끼리 싸워선 안 된다!!!” 순박한 바바리안들은 내 외침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달려들던 탐험가는 아니었다. 휘익. 흡사 원수를 대하듯 검을 휘두르는 탐험가. 카칵! 장비를 보고서 대충 예상했지만, 역시나 내 몸에는 기스 하나 나지 않았다. 아니, 일반 철검이 박히겠냐고. “어, 어…….” 막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처음 그 자세를 유지하며 몸으로 받아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나는 실력 차. 뒤늦게 아차 싶었을까? “…….” 흥분이 가시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는지, 나를 두려워하듯 녀석이 뒷걸음질 친다. 거, 어디를 가려고. 나는 놈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물었다. “살고 싶나?” “……?” “살고 싶냐고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왜 도망치는 거냐!!” 윽박을 지르듯 소리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탐험가. “말해라, 살고 싶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압박을 못 이긴 탐험가가 내 눈을 보며 소리쳤다. “누, 누가 죽고 싶겠어 그럼!” 듣고 싶던 대사였다. 안 그래도 이놈의 돌발 행동 때문에 다들 이쪽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탐험가의 어깨를 놓아줬다. “그럼 도망가라. 그래서 살 수 있을 거 같다면.” 몸의 자유를 얻은 탐험가였으나, 녀석은 뒤돌아 도망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는 탐험가. 그러나 아직도 기운이 남았을까? 놈이 울분을 털어내 듯 소리친다. “그럼 뭘 어쩌라는 건데!” 뭘 어쩌긴 어째.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했구만.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다시금 주변을 보며 외쳤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바바리안으로서의 삶이 가르쳐주었다. 미련이란, 언젠가 끈기가 된다. 먼저 지쳐 포기하지 않는다면. ***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정적이 찾아왔다.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저 바바리안이 한 일은 그저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폭력을 쓰지도 않았으며, 묵묵히 외치기만 하였다. 처음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몇 번을 외쳐도 작금의 혼란이 잠식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사들이 전부 죽고 나면, 그제야 다들 이성을 찾고 대책을 강구할 것이라 판단해 지금껏 클랜원들과 함께 사태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놀랍군.” 기사에게 가해지던 일방적인 폭력이 거의 멈추었다. 한 명의 바바리안이 만들어 낸 결과. 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그 자세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단지, 추측해 볼 뿐이다. 흔히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듯. 저 바바리안의 말에는 더 큰 힘이 실려 있던 게 아닐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뇌리에 깊게 새겨지듯. 저 바보 같은 우직함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피식. 아니, 어쩌면 그저 바보 같은 짓을 몇 번이고 보고 있자니 이성이 돌아온 걸 수도 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누군가 실 없는 소리를 하면 분위기가 바뀌는 그런 것. 물론 이는 추측일 뿐. 실제 원인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저 바바리안이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지가 궁금해진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 바바리안은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5등급 탐험가, 작은 발칸. 분명 가진 무력도, 이끌고 있는 세력도 자신에 비하면 훨씬 미비함에도. 그는 해냈다. “부단장.” “예, 말씀하십시오.” “지켜만 보는 건 이제 끝이다. 만약 근처에서 기사를 공격하거나 하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막아라.” 사내는 부단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단장님, 어디 가십니까?” “한번 들어나 보려고, 저 바바리안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 짓거리를 했는지. 그냥 바보인지, 아니면…….” “……?” 부단장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사내는 말을 아꼈다. 뭔가 스스로도 웃겼던 것이다. 하지만……. “다들 그만두세요! 저분 말이 맞아요. 일단 멈춰요! 그리고 같이 차분히 머리를 맞대봐요!” 지금 자신이 그러했듯. 통로 곳곳에서 방관만 하던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인다. 두근-! 왠지 심장이 뛰었다. 사내는 기념비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바바리안은 여전히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를 지지하는 동족들은 따라서 후창하고 있었고. “모두 멈추세요!” 이제는 그와 관계없는 이들도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생각해 버렸다. “지금부터 분란을 야기하는 자들은 적으로 간주하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이.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설화 속 어느 영웅의 이야기 속 한 장면 같다고. *** 한 사람이 다가온다.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다. 만약에 뭔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는 거라면 듣고 싶은데.” 그다음은 한 여자였다. “헤인델 교의 레이시 나레트입니다. 이 참극을 막아주신 데 감사를 표하러 왔어요.” 세 번째는 마법사였다. “라프도니아의 종군 마법사일세. 아, 참고로 난 버려진 게 아니라 내 의지로 남았다네. 그 단장 녀석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그다음에도 계속해서 사람이 모였다. 신관, 마법사, 클랜장, 부단장, 팀의 리더, 혹은 개인. 집단에 속해 있었으나 버려지거나 자의로 남은 자들. “이제 그만 외치셔도 되지 않을까요? 이제 모두 당신이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말해 보시오. 정말 뭔가 방법이 있소? 그냥 기사들이 불쌍해서 죽이지 말라 한 건 아닐 것 아니오!” 역시 바바리안식 ‘해줘!’는 무적인 건가? 원하는 바를 이룬 나는 무지성 무한 반복 재생 모드를 껐다. “다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마침내 대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 219화 군주 (3) 광장처럼 넓어진 중심부의 공동. [거대화]를 종료하기 전에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다. ‘이러니까 무슨 광화문 광장 같네.’ 수천 명을 가뿐히 넘을 숫자의 탐험가들이 빼곡히 선 채 이곳을 응시하고 있다. 과연 정확히 몇 명이나 될까? 어림 잡아 세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중심부의 인파 때문에 아직 통로 너머에 있을 자들까지 합치면 실로 까마득한 숫자가 될 터. 새삼 실감이 난다. 말로 듣거나 글로 읽은 숫자와, 직접 두 눈으로 본 숫자는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걸 봤으면 그 새끼도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금세 지웠다.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지금 해야 할 고민 또한 아니었고. “베헬—라아아아아아!!” “……얘기를 해보랬더니,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는 것이오?”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쯤 모이면 나도 긴장이 돼서 말이지. 그래도 소리를 질렀더니 조금은 나아졌다. 나는 바바리안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하지 못할 일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잘 들어라!” 이토록 많은 이가 모였다고 믿기 어려운 정적 속에서, 내게로 이목이 모인다. 거, 부끄럽게. “다 같이 머리를 맞대보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똑똑한 사람이 있을 거 아닌가!” 나는 철면피를 깔고 마저 말을 이었다. 이미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세워두기는 하였지만, 이토록 많은 이들 앞에서 그 모든 걸 꺼내 보이면 수상하게 보이리라는 판단. “에?” “그게 끝……?” 숨소리도 죽여가며 귀를 기울이던 이들이 멍한 표정을 내짓는다. 몇몇의 얼굴엔 실망감도 배어 있다. “나는 대체 뭘 기대한 거지? 바바리안한테?” 바바리안의 유일한 단점이다. 지능캐의 면모를 보이며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 수 없다. 뭐, 바바리안이 아니었으면 방금처럼 싸움을 멈추는 일은 불가능했겠지만. “그, 그럼 아까는 왜 그렇게 열심히 소리친 거요!” “현명한 전사는 올바른 곳에 분노를 토해내는 법이니까.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진 알겠는데…….”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탐험가들. 나는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단 기사를 살린단 목표는 이뤘으니까. 아니, 어디 그뿐인가? 모두가 모여 대화를 할 환경을 만드는 것도 성공했으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첫 번째 목표는 전부 달성한 셈. “틀린 말은 아닐세. 제각기 그마다의 역할이 있는 것 아니겠나.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걸 막고,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게 해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친구는 누구보다 큰 소임을 다 해낸 걸세.” 종군 마법사라고 소개한 중년 사내가 나를 두둔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무래도 나를 좋게 봐준 모양. “역할이라……. 그걸 들으니 군주론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군주의 역할은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울 의지를 갖게 만드는 것이라는.” “하하, 그 책을 읽은 친구가 있을 줄이야. 반갑네. 나르텔 클랜의 멜터 펜드랬지?” “예, 카일 님.” “호오, 나를 알고 있나?”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까요.” 두 사람이 짧게 대화를 나누며 호의적인 시선을 주고받는다.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친목질을 할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을뿐더러, 한 번 수뇌부에게 버림받았던 탐험가들 아닌가. 우리끼리만의 유대가 생기는 걸 보면 불안한 생각이 먼저 들 게 분명하다. “됐고, 슬슬 얘기나 해보자! 혹시 뭔가 모르는 정보를 가진 자가 있나?” 나는 눈치 없는 척 껴들며 대화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유도했다. 내 계획을 위해서 이들은 토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찍이 내가 내린 결론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내 입장에선 조금 번거로울지라도. “우선 그것부터 알아내야겠군. 왕가 측에서는 대체 왜 어떤 이유로 우리를 버린 것인지.”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멜터 펜드가 입을 열어 화두를 던졌다. “맞소! 버티는 것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놈들은 대체 왜…….” 현 상황에 자리한 가장 큰 모순. 버려졌다는 것에 분노했던 이들이 이성을 되찾고 의구심을 내비친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만큼 답은 금방 나왔다. “아마 계층군주 때문일 걸세.” 종군 마법사 카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계층군주?” “하지만 계층군주라면 지금까지 잘 막아내고 있지 않았소!” “지금까지는 그랬지. 아마 단장은 아홉 번째 계층군주가 처치되면 나타날 그것을 두려워했을 걸세.” “……그것?”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계층군주일세.” 대부분은 처음 듣는 명칭이라며 혼란스러워했고, 카일은 그런 그들에게 심연의 군주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해주었다. “공포의 군주를 처치하기 전에 반드시 길드에 보고를 하고 승낙을 받아야 하는 것도 바로 다 이 녀석 때문일세. 그만큼 재앙과도 같은 놈이지.” “수백 명의 기사, 그리고 대형 클랜들이 힘을 합쳐도 처치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까?”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닐세. 하지만…….” 카일은 말꼬리를 흐리며 먼 곳을 응시했다. “이 동굴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노아르크와 라프도니아. 그리고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까지. “지휘부에선 판단했네. 베르자크와의 전투가 벌어지면 노아르크 측에서 우리를 방해할 게 분명하다고.” “그러고 보니, 첫날 이후부터는 이렇다 할 습격도 없었지…….” “젠장, 왜 그런가 했더니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군!” 일종의 엘리전이다. 베르자크를 이용해 서로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양자파멸의 전략. 그래서 기사단장은 후퇴를 택했다. 상위 탐험가와 기사는 단기간에 메우기 어려운 귀중한 전력이니까. 그것만이라도 확실히 지키려 한 것이다. 그 빌어먹을 왕가를 위해서. “잠깐! 그렇다면 좀 이상하지 않소? 그토록 위험한 게 나온단 걸 알았으면, 어째서 그 전에 2층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한 탐험가가 모순을 짚었다. 이 또한 나 역시 깊이 고민해 본 문제였다. 하지만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그건 제가 답해드릴 수 있을 거 같군요.” 이번에 나선 건 헤인델교의 여신관이었다. “미궁에 들어선 첫날, 2층 포탈로 수색대가 꾸려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살아 돌아온 수색대의 기사분을 치료하다 들은 정보입니다.” “빨리 말해 보시오!” “서쪽, 바위사막과 이어진 포탈은 애석하게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니?” “파멸학자. 그 저주받은 마법사가 포탈을 부숴 버렸다고 하더군요.” 오르큘리스의 간부급이라 할 수 있을 범죄자. 파멸학자의 이름이 언급되자 한바탕 동요가 일었다.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을 갈무리했다. ‘서쪽이라…….’ 그럼 이제 확률은 3분의 1인가? 귀중한 정보를 얻었네. “서쪽이 막혔다면 다른 포탈로 가면 되지 않소!” 인파 속의 어느 누군가가 소리쳤으나, 그 말에 호응을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야 당연한 인과니까. “다른 포탈은 확인치 못 했으나, 기사분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파멸학자가 다녀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럼…….” “예, 완전히 이곳에 갇혔다는 뜻이지요.” 여신관의 말이 끝난 후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아르크 놈들이 정말 작정을 했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이오?” “그 베르자크란 괴물이 아니더라도, 핵심 전력이 사라진 걸 들키면 놈들이 쳐들어올 게 분명한데.”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가하는 탐험가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그야 아직 대책을 마련하기까지 충분한 단서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다들 너무 좁게 보는 것 아닌가? 숙달된 전사는 늘 적의 다음 움직임까지도 예측하고 행동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간간이 끼어들어 단서를 줬다. “오늘을 위해 몇 달을 준비한 녀석들이 과연 우리가 차원문을 열고 도망칠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나는 예상을 했다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소만.” 음, 그건 그렇지. 확실히 보통 사람으로선 생각도 못할 미친 짓이긴 하다. 하지만……. “그 말은 일리가 있군. 어쩌면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전부 차원문을 쓰게 만들려던 목적이었던 걸지도 모르네. 종군 마법사 카일을 비롯해 몇몇은 내가 한 말을 우습게 듣지 않았다. “예. 그럼 진짜 전쟁은 이번이 아니라 다음일 수도 있겠군요. 도시에도 차원문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이제 얼마 없을 테니까.” “왕가와 탐험가들 사이의 내부 분란을 노린 전략일 수도 있네. 이 일이 도시에 퍼져나간다면 안 그래도 깔려 있던 왕가를 향한 불신이 폭발할 것은 자명하니. 뭐, 그것도 우리가 살아서 돌아가야 의미가 있겠네마는.” 전부 내가 한 번씩 품었던 의문이었다. 그 어느 것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되는 상황. “대체 놈들이 노리는 바가 뭔지 모르겠군.” 그렇기에 마땅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종군 마법사 카일이 내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자네 생각이 중요할 것 같네.” “무슨 뜻이지?” “방금도 핵심을 짚지 않았던가. 자네가 가진 전사로서의 직감이 궁금하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간 많은 의문과 추측을 행했던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물론 이게 옳을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우리가 목표였을 거라 생각한다.” “호오, 기사와 대형 클랜이 아니라?” 카일은 흥미롭다는 듯 맞장구를 쳤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군. 차원문을 쓸 걸 알았다면, 왜 이런 전략을 쓴단 말인가? 알짜배기는 다 도망친 상황에서 우리와 공멸한다면 놈들 입장에서는 손해일 텐데.” 토론 내내 다른 실력자들에게만 사근사근하게 굴고 내게는 유독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놈의 말이었다. 나한테 왜 저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런가?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같이 죽으려 한다고 생각하지? 놈들 입장에선 위층으로 올라가면 그만인데.” “아까 말했듯이—” “포탈 한 개를 남겨두고 거기를 통해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야 어딜가나 효율충들이 깔린 세상 아닌가. 내가 적측의 수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니 이것밖에 없었다. ‘놈들 입장에선 이게 가장 이득이니까.’ 일단 백 명이 넘는 고위 마법사의 차원문을 소모시키며 다음 번을 기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왕가의 영향력을 낮출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알맹이는 빠졌을지라도 만 단위의 탐험가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쓸어버리는 게 가능하다. 핵심 전력이 빠져나간 이상,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베르자크’를 처치할 수 없으니까. 다만 그걸 인정하기 어려웠을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일 리가 없—” 잠시 말문이 막혔던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서 무지성 반박을 해왔다. 아니, 정확히는 하려던 찰나였다.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군.” 종군 마법사 카일이 고개를 주억였다. ‘뭐야, 생각해 둔 게 있으면서도 내게 물어본 거였어?’ 어딘가 찝찝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쩝, 이래서 너무 튀지 않으려 한 건데. 그래도 나를 의심한다기보다는 능력을 시험해 봤다는 뉘앙스인 것이 위안거리였— “……?” 그때 바깥쪽에서부터 소란이 전해졌다. 멀어서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그 소식이 전해지는 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단장님!” “무슨 일인가?” “통로를 막고 있던 노아르크 놈들이 싹 사라졌다고 합니다!” 카일이 나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네와 내 생각이 맞은 모양이군.” 이제 정말로 서둘러야 한다. *** 노아르크의 계획을 알게 된 이상 대책을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령 그게 완벽한 대책은 아닐지라도.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진 것이다. “우리도 2층으로 올라가야 하네.” “하지만 어딘지 알고요?” “적어도 서쪽은 아니란 게 확인됐지 않나. 세 곳을 나눠서 찾아보세.” 무리를 셋으로 나누어 2층 포탈로 달린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올라가도 문제입니다! 분명 그곳에 놈들이 있을 텐데……!” 산 넘어 산이라고. 그다음에도 역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다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이제 앞으로는 각자의 선택일세.” 카일은 냉정하게 말했고, 남겠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는. “그럼 전력은 어떻게 나눌 겁니까?” 한 탐험가가 세부 전략을 물어왔다. 어느샌가 대화를 주도하며 리더 느낌을 풍기던 카일이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껴들었다. “300명 정도로 나누는 게 나을 거 같다.”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데 300명이라니, 그게 무슨—” 하, 이 새끼는 또 지랄이네. “사람이 많아 봤자 제대로 힘을 합쳐서 싸우기 어려운 지형이지 않나. 차라리 그쪽이 낫다.”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뜻.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 속에 담긴 뜻까지도 잘 이해해 주었다. “흐음, 일리는 있군. 전투도 전투지만, 여럿으로 흩어지는 만큼 살아남을 사람도 많아질 걸세. 아무래도 그 괴물의 신경이 분산될 테니까.” “어차피 놈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 죽을 테니, 서로가 서로의 미끼가 되어 주면서 각자 살아남잔 뜻이군요.” 실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전략. 다만 모두가 이견 없이 납득했다. 탐험가란 업종의 좋은 부분이다. 인정 같은 걸 논하며 시간 낭비하는 일이 없다. “그럼 구성은 어떻게 하겠나?” “그건 알아서 합시다. 난 누구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거든.” “그래, 시간도 없는데 그러세.” 대충 계획이 정리되자 한 탐험가가 가장 먼저 대화를 마무리하고 떠났다. 어느 이름 모를 중소 클랜의 리더였다. 이를 기점으로 난리판이 벌어졌다. “붉은 빛 클랜이다. 나와 함께 이 빌어먹을 곳에서 벗어날 자를 구한다! 6등급 이상이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좋다!” 누군가는 함께할 동료를 모집했고. “팀원 중 한 명이 7등급이오. 그런데 어떻게 안 되겠소?” 누군가는 자신이 들어갈 만한 둥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런 소란 속에서. “카일 님, 홀몸이신 거로 아는데, 저희 클랜과 함께하시겠습니까?”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는 즉시 마법사 아저씨부터 영입하고자 나섰다. 쩝, 내가 먼저 나서 보려고 했는데. 아까 둘이 시시덕거리면서 얘기를 잘 나누는 걸 보니까 저 아저씨가 거절하진 않을 거 같다. ‘전부 채가기 전에 나도 어서 움직여야겠네.’ “그럼 나도 이만 가보지. 살아서 보자.”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일단 인파 속에 있을 동료들에게 돌아간 뒤, 서둘러 인재를 모아 볼 생각이었다. 좆밥 바바리안으로 300명을 모으려면 꽤나 힘든 일이 될 터. 그런 일념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잠깐,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종군 마법사 카일이 나를 붙잡았다. “자네라면 역시 머리가 되려는 쪽이겠지?” “물론이다.” “그럼 나도 데려가주게.” 응? “어째서지?” “그저 감을 따를 뿐이네. 자네에게는 사람이 모일 거 같거든.”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감을 따른다고?” 앞서 그에게 영입 제안을 했던 멜터 펜드를 힐뜻하며 묻자, 카일이 웃으며 답했다. “스스로 원해서 이 난장판에 남은 마법사가 제정신일 리는 없지 않나?” 어, 그것도 그렇긴 하네. “좋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상위 마법사가 생겼다. 몹시나 긍정적인 지표다. 이를 이용하면 더 좋은 멤버를 모을 수— “우리를 데리고 가주시오.” 한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기사 무리가 내게로 다가왔다. 가장 앞에 선 기사의 얼굴이 익숙해 살펴보니, 처음 왔을 때 체념한 표정으로 처맞고 있던 자였다. “정규 기사 넷과 견습 기사 여섯. 그대가 어딜 가든 발목 잡는 일은 없을 것이오.” 뭐, 은혜라도 갚겠다는 건가? 나야 개이득이다. “좋다. 따라와라.” 내 뒤에 기사 무리가 섰다. 다만 또 한 걸음도 채 옮기기 전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잠깐.”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였다. 뭐지? 설마 마법사 아저씨를 눈앞에서 뺏긴 것 때문에 그런 건가? 그런 좀생이처럼은 안 보였는데……. “어느 방향으로 갈 거지?” “동쪽이다.” 서쪽이 막혔으니, 동쪽이 좋다. 첫 시도가 무산돼도 상황에 따라 북쪽이든 남쪽이든 이동을 재개할 수 있으니까.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방향이군. 같이 가는 게 어떤가?” “난 네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걱정 마라. 네 지시에 따르지.” “뭐?” 이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얘도 누구 밑에 들어가거나 할 인물이 아닐 거 같았는데.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그래서 대답은?” “……내 명령을 제대로 따라주겠다면.” “그럼 결정이 났군.” 이내 멜터 펜드와 그의 클랜원이 내 뒤에 섰다. 솔직히 말해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영입 제안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명을 모은 거야? “베헬—라아아아아아!!!” “차대 족장을 따라라!!” 또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바바리안들이 내게 달려와 뒤따랐다. 음, 이건 당연한 거고. “아저씨!!” “에르웬? 네 클랜은 어디 가고?” “언니가 이쪽이 더 안전할 거 같대요! 저희 둘도 데려가 주실 거죠?” “물론이다.” 근처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는지 요정 자매도 합류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괜찮다면 당신 밑으로 들어가고 싶소.” 6층에서 활동 중이던 4등급 팀. “당신이라면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남았다는 여신관. “하핫, 이런 때엔 의리 있는 놈이 최고로 믿음직하지. 우리도 데려가 주게.” 도시에서도 꽤 유명한 드워프 클랜까지.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 수많은 이가 나를 찾아와 함께 가기를 청한다. “이거 보게, 내가 말했지 않나. 자네에게는 사람이 모일 거 같다고.” “…….” “마법사의 감은 잘 맞는 편이라네.” 카일이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220화 군주 (4) 팀 애플 나라크의 마법사 레이븐. 그녀는 남겨진 동료들과 함께 통로 근처에 있었다. 간단한 이유다. 기사를 향한 공격이 멈췄을 때 그녀도 팀의 리더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수천의 인파가 빽빽하게 모이는 바람에 지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이나르 씨, 부탁 좀 할게요. 여기서는 잘 안 보여서.” 키 150을 조금 넘는 신장. 인간 여성의 평균 키에서도 한참 밑을 웃도는 그녀는 아이나르의 어깨 위에 앉아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닿기엔 먼 거리였으나 문제는 없었다. 그건 마법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니까. “뭐라고 하고 있냥?” “거의 다 끝났어요. 300명 단위로 나눠서 각자 길을 뚫자는 거 같아요.” 레이븐은 중심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동료들에게 전해줬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자리한 수많은 팀들이 그러고 있었다. 마법이든, 청각강화든, 그런 능력쯤은 한 명씩 갖고 있는 법이니까. “비요른은? 비요른은 뭐라고 하는뎅?” “어, 그게……. 일단 이리로 오려는 거 같아요. 아, 그리고 마법사가 말을 걸었는데, 역시 얀델 씨는 팀을 모으려는 쪽인 거 같네요.” “으음, 그래 그렇구낭…….” 레이븐의 말에 미샤가 어딘가 걱정스러운 눈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갈 것이오!” “나와 함께 떠날 자가 있는가!” 수많은 클랜, 팀에서 이미 동료들을 구하려 연신 외치는 중이다. 그중에는 널리 이름이 퍼진 유명한 탐험가도. 명성을 가진 클랜의 단장도. 벌써 그런 클랜이 셋이나 모여 연합을 꾸린 곳도 있다. 그러나 레이븐은 애써 밝게 말했다. “다들 뭘 걱정해요? 얀델 씨도 어디서 명성으로는 꿀리지 않는 거 알면서?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300명은 다 모을 수 있을 거예요.” 평소와 명백히 다른 행동이었다. 원래의 그녀는 사태를 분석해 사실 그대로만 말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얀델 씨라면 아마 이렇게 했겠지.’ 그 바바리안을 따라다니며 배운 게 있다. 리더란,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만은 안 된— “어?” 레이븐은 저도 모르게 흠칫 굳었다. “왜 그러냥? 또 무슨 일이 생긴 거냥?” “그 마법사가 얀델 씨를 따라가겠대요.” “와, 정말이냥? 엄청 대단한 마법사라면서?” “네, 그건 그런데…….” 레이븐은 얼떨떨했다. 기쁜 소식이기는 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너무도 찜찜했던 것이다. ‘저 사람 정도면 훨씬 더 좋은 곳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마법사가 우리에게 붙겠다 했을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동료에게 솔직하게 속내를 터놓고 의견을 물었다. “흐음, 그 마법사가 얀델에게 사람이 모일 거 같다고 말했다고? 왠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도 같군.” “알 것 같다니요?” “얀델, 그 녀석은 특별하니까. 그건 레이븐 너도 알 텐데?” “저도 안다고요?” 레이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던 순간, 아이나르가 크게 외쳤다. “비요른 얀델은 위대한 전사다!!” 위대한 전사. 왠지 듣자마자 핏빛성채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무구한 역사 속에서, 공식적으로 왕에게 그 칭호를 받은 바바리안은 열 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생각했다.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잠들듯이 기절한 2개월 차의 바바리안을 보며. 언젠가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너도 그래서 이 팀에 들어온 거 아닌가?” “……맞아요.” 레이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크프리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 바바리안에게 어떠한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녀가 이 팀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거다. “사람을 이끌리게 하는 묘한 힘을 갖고 있는 녀석이지.” 레이븐은 동료와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금 고개를 들어 얀델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닐진대. [괜찮다면 당신 밑으로 들어가고 싶소.] [당신이라면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하핫, 이런 때엔 의리 있는 놈이 최고로 믿음직하지. 우리도 데려가 주게.] 어느샌가 수많은 탐험가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데 우리크프리트의 말을 들어서일까? 더 이상 그 광경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또한, 가장 먼저 따라가겠다고 나선 마법사의 저의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세상엔 간혹 따라가고 싶어지는 등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거 보게, 내가 말했지 않나. 자네에게 사람이 모일 거 같다고.] [마법사의 감은 잘 맞는 편이라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적어도 그 정도는 걸릴 거라 예상했었다. 알맹이가 전부 차원문을 타고 도망쳤다고 해도 나보다 뛰어난 탐험가들은 많았으니까. 그들과 경쟁하며 원하는 수준의 세력을 일구려면 부리나케 발품을 팔아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마 이 아저씨 때문이겠지.’ 지식과 무력, 그리고 사람을 자연스레 이끄는 카리스마를 지닌 종군 마법사 카일이 내게 합류하며 상황이 반전됐다. 3등급 탐험가 멜터 펜드가 본인의 클랜을 이끌고 통째로 내 휘하로 들어왔고, 이는 군중심리를 자극했다. 헛소문에 사재기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다 하면 나도 그래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잖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바바라안의 희망!” “위대한 전사를 따라라!!” 이 상황에 잔뜩 흥분한 바바리안들의 열띤 함성은 대충 한 귀로 흘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나도 데려가주시오! 발목은 절대 잡지 않을 테니!” 공항에 도착한 슈퍼스타의 기분이 이럴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팀과 클랜, 혹은 본인에게 자신이 있는 개인이 다가와 스스로를 어필한다. 따라서 나는 기준을 높였다. 간단한 이유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기본 시장 원리에 따르면, 지금의 나는 갑이니까. “역할군과 등급을 말해라.” “5등급, 지금은 혼자지만 원래 있던 팀에선 수호자 역할을 맡고 있었소.” 수호자는 최전위에 서는 전사 역할군을 뜻한다. 5등급이면 실력은 괜찮을 테고. “이름은?” “펠 아카버드요.” 합격. “만나서 반갑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내 뒤로 와라.” 나는 이동하면서도 철저하게 필요한 사람들만 뽑아서 세력을 불렸다. ‘신관은 거의 다 차원문을 타고 나가서 영 보이지가 않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직업군을 전사와 마법사로 채워 보는 수밖에. 아, 기사면 더 좋고. “……칼스 에리모어.” “혹시 나와 내 동료들 자리도 있겠나? 견습 기사 셋에 정규 기사가 하나일세.” 인연이 있는 자가 모습을 내비치는 일도 있었다. “설마 너도 버려졌을 줄이야.” “탐험가 출신 견습 기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거겠지.” 백작가에서 만났던 마르토앙 남작가의 기사. 인성도 나쁘지 않고, 탐험가 출신이니 한 사람 몫은 해내겠지. 게다가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도 한 명 있고. “따라와라.” “고맙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뒤따르는 숫자가 늘어난다. 나를 따르기로 한 바바리안들만으로도 300명이란 정원을 넘긴 지 오래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캐스팅했다. ‘어차피 300명씩 나누면 그만이니까.’ 같은 루트로 이동을 한다면, 위급시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설마 그게 가능할 정도로 사람을 모으는 게 가능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좋아, 잘 풀리고 있어.’ 그렇게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타켈란.” 녀석은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군가처럼 팀을 구하지도 않았고, 팀을 만들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어쩌면, 그냥 전부 포기한 걸지도 모르지. “…….”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시선을 피했다. 딱 봐도 내가 모른 척하고 지나쳐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바바리안 일족.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말했다. “따라와라.”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입 밖으로 말이 먼저 나왔다. “어서, 살고 싶다면.” “내가… 살고 싶어 할 거 같나?”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읊조리는 녀석. “레나는 나의 아내였다.” 그래, 그랬구나. “근데 어째서 내가 살아야 하지?” 나는 대답했다. “소식을 전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본심은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모두가 가슴 한구석 깊은 곳에선 삶을 갈망한다. 실제로 타켈란도 동료를 모두 잃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달려 우리를 뒤따라왔다. 그땐 과연 이유가 있어서였을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 그게 있었지…….” 이유가 있다면 사람은 더욱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정신 차렸으면 뒤로 와라.” “……왜 굳이 내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지금의 너라면 내가 필요하지도 않을 텐데.” 나는 이기적일 정도로 솔직히 답했다. “네가 살아남는다면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테니까.” 타인을 이용해 나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 어찌 보면, 기사단장놈과 비슷한 행위다. 유일한 차이는 나는 나 스스로가 얼마나 비겁한지 알고 있다는 것뿐. “…….”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타켈란은 그 대화를 끝으로 내 뒤로 가서 무리에 꼈다. ‘의도치 않게 시간을 많이 썼네.’ 나는 계속해서 무리를 이끌고 이동했다. 머지않아 통로 쪽에서 동료가 보였다. “비요른!!” 거리가 되자마자 달려와 격하게 나를 반겨주는 미샤와 아이나르. 대충 밀어내며 레이븐과 대화를 나눴다. “레이븐, 별일은 없었나?” “네…….” “다행이군. 안에서 하던 얘기는 들었고?” “네, 들었어요…….” 오케이, 같은 설명을 또 할 필요는 없겠고. “근데 왜 자꾸 눈을 피하냐?” “아뇨? 안 그랬는데요? 자, 봐요!” 흐음, 그런가? 왠지 묘하게 나를 어려워하는 눈치였는데. 아, 뒤에 모인 사람들 때문인가? 하긴, 군단장 바바리안 모드는 내가 봐도 위엄이 쩔긴 한다. 내가 놀리자 정신이 들었는지, 레이븐이 평소 모습을 되찾고 말했다. “아무튼, 이 정도 규모면…… 인원 파악만 하고 바로 출발해도 되겠네요. 정말 잘 됐어요. 안 그래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었는데.”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어쩌면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그것. *** 카일 페브로스크. ‘철의 마도사’라는 이명을 지닌 3등급 종군 마법사. 그가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뭘 하려는가 했더니…….’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었다. 이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서 가장 먼저 하는 게, 고작 통성명이라니. “이름은?”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이름을 들은 뒤, 짧게 악수를 한다. “만나서 반갑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누군가는 그런 바바리안에게 묻기도 했다. 시간도 없는데 통성명은 왜 하는 거냐고. 그때 나온 대답이 실로 가관이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자도 많지 않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 “내겐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라.” 바바리안은 정말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통성명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은 그 행동을 의미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나름의 경험과 식견을 가진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의미라도 있는 걸까요?” 은근슬쩍 다가온 그의 물음에 카일은 웃었다. “멜터 펜드, 자네는 왜 그를 따라오기로 했나?” “그건…….” 멜터 펜드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카일 님이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래, 그것도 이유이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걸세. 자네는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혹시 제 사정을 알고 계신 겁니까?” “우연히 들었네. 그 단장놈에게 제안을 받았지만, 남은 클랜원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을 했다지?” “이거, 뭔가 부끄럽군요.”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신의 있는 선택이라 생각하네. 하지만, 그렇게까지 지키고자 했던 클랜원들을 단순히 남의 선택을 보고 따라서 움직인다라…….” “제가 봐도 납득 안 될 이유긴 하군요.” 멜터 펜드가 멋쩍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왠지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저 등 뒤에 서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다는…….” “직감을 따랐다라…….” “이쪽 업계에서는 제법 흔한 일입니다. 결국 운이 없으면 죽는 곳이니까요.” “탓하려는 게 아닐세. 사실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자네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예?” 멜터 펜드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일은 영문 모를 말을 뱉을 뿐이었다. “그저 지켜보세. 저게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곧 알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바바리안을 관찰했다. 그는 아직도 한 명씩 돌아가며 이름을 묻는 중이었다. “……한스라고?” “아뇨, 한버스입니다.” “아, 그래? 만나서 반갑다! 잠깐이겠지만 잘 부탁하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름을 묻고 짧게 인사를 나누는 과정. 겨우 그뿐이었으나, 어딘가 처음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테테루드라. 만나서 반갑다. 도끼가 멋지군.” “하핫, 드워프에겐 최고의 칭찬이지.” “이따가 뒤를 부탁하겠다.” “암, 걱정 말게나.” 점점 분위기가 유해진다.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가시가 돋친 듯하던 이들의 입가에 근육이 풀린다. “잠깐, 나는 왜 그냥 지나치는 것이오?” “넌 처음에 만나자마자 물어봤지 않나. 다베르스였지?” “허, 그걸 전부 기억한단 말이오?” “함께 싸워야 할 동료이니까.” 그제야 멜터 펜드는 이 변화의 원인을 알았다. 저 바바리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많은 사람에게서 신뢰를 얻어내고 있었다. 고작 이름을 묻는 것만으로. “얀델의 아들 비요른. 설마 정말로 이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들을 생각인가?” “그런데 문제라도 있나?” “아니, 정말 우직한 놈이란 생각이 들어서. 난 험블 엘버틴이다. 만약 나가면 술이나 한잔하지.” “험블 엘버틴, 기억했다.” “그런 자리에 내가 빠질 수 없지. 나도! 나도 껴주시오!” 심지어 신뢰가 쌓이는 것은 비단 통성명을 나눈 저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름을 말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는 다른 이들에게도 들렸으니까. “더 이상…… 남이 아니게 되었군요.” 멜터 펜드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어쩔 수 없이 한 집단에 속했으나, 오늘까지 타인이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서로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안다. 짧게나마 엿들은 대화로 어떤 사람인지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저 바바리안과 개인이 나눈 관계가 공통점이 되어서. 거미줄처럼 얽히고 얽혀 유대를 형성한다. “비요른 얀델, 그는……. 설마 이렇게 될 걸 전부 계산하고서……?” “글쎄, 그건 아닐 걸세.” “그렇다고 하기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보통은 이유 없이 저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요.” 카일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보통은 그렇다. 보통은 똑같은 일을 해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이해하려 하지 말게. 역사 공부를 해봤다면 자네도 알 것 아닌가. 모든 시대에는 그런 자들이 있기 마련이란 것을.” 범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며 결과이기에. 그들은 위대히 여겨지는 것이다. *** 길었던 통성명 시간이 끝나고. 카일의 조언하에 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셋으로 나누는 것까지 끝마친 그 순간.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나는 조상신의 가호에 경의를 담아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허허…… 이보게. 이번엔 또 왜 소리를 지른 건가? 자네가 그러니 다른 바바리안들도 같이 소리를 지르지 않나.” 어, 그건 미안한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많은 사람 중에, 한스가 없다니.’ 이거야말로 조상신의 계시 같은 게 아닐까? 221화 불꽃처럼 (1) 3등급 탐험가 하나. 4등급 탐험가 아홉. 오러 사용이 가능한 정규 기사 열넷. 그리고……. ‘3등급 마법사가 하나.’ 이번 계획에서 핵심이 되어 줄 멤버들이다. 뭐, 닥친 위기가 위기인 만큼 이 숫자로도 아직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겠다마는. ‘그래도 이만큼이나 모인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긴 하지.’ 알맹이는 진작 차원문을 타고 빠져나간 상황. 아무래도 최상위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야 이 사람들처럼 생존 티켓을 거부하고 자의로 남은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적으로 이게 그들의 전부라 봐도 과언이 아닐 터. ‘나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옆을 흘긴다. 로브를 입은 40대 검은 머리 백인 아저씨가 서 있다. 내가 가장 의문스럽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카일 페브로스크. 왕가 소속 3등급 종군 마법사. 이 사람의 등급을 알고서 나는 정말 놀랐다. 이쪽 업계에서 마법사의 등급이 +1 취급받는 게 관례다. 물론, 마법사를 향한 예우 같은 건 아니다. 실제로 레이븐은 6등급에 불과하지만, 팀 내에서 나 다음으로 많은 일을 해내고 있으니까. 등급을 세는 기준이 다르다 보는 게 옳다. 그런데, 3등급 마법사라니? ‘2등급 탐험가면 사실상 준최강자 라인이지.’ 솔직히 기사단장놈이 이 아저씨를 왜 이곳에 혼자 내버려 두고 갔는지를 모르겠다. 3등급 마법사쯤 되면, 암만 가기 싫다고 빽빽 소리를 질러도 필히 데려가야 할 정도의 최고급 인력이지 않은가. ‘아니, 그 정도 되니까 기사단장놈도 억지로 데려가지 못한 건가?’ 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왕가 입장에선 수천 명의 탐험가보다 이 아저씨 한 명이 죽는 게 더 큰 손실일 테니. 단장놈도 어떻게든 데려가려 했지만, 해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터. ‘역시 원한인 거겠지?’ 나는 출발 직전에 카일을 향해 왜 이곳에 남은 건지를 물었고, 그는 날이 선 목소리로 차갑게 대답했다. [놈을 두고 도망치는 짓은 할 수 없지. 얼마나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아쉽지만, 놈이 누구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나 더 캐물을 분위기도 아니며,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나한텐 잘 된 일이었기에 곧장 여정을 출발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지금. “…….” 달리고 있다. 수백 명의 사람들 중 가장 최선두에 선 채. 철컥, 철컥. 진형은 간단하다. 천 명이 되는 탐험가를 셋으로 나눈 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따라오는 구조. 전력은 적당하게 나눴지만, 앞서 말한 핵심 전력은 대부분 최선두 그룹에 끼워 넣었다. 후열 그룹의 반발은 없었다. 그들도 납득을 한 것이다. 놈이 출현하면, 온갖 위험 속에서 길을 뚫는 건 이쪽이 되리라는걸. “…….” 그렇게 뛰는 소리를 제하면 비장하리만치 경직된 침묵만이 이어진다. 평소였다면 동료와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며 긴장을 풀었을 테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우리 팀 멤버는 다른 곳에 있거든. 철컥, 철컥. 내 뒤에는 나와 똑같이 중무장을 한 전사와 기사만이 자리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이들의 임무는 오직 하나. 일이 벌어졌을 때, 반드시 길을 열어내는 것. 당연히 가장 위험한 자리다. 그래서 동료를 뒤로 보냈다. 여러모로 예전과는 경우가 다르니까. 인원이 많기에 뒤쪽이 훨씬 안전하다. [거기 뭔가 이상한 건 없나?] 그렇게 내달리던 때, 허리춤에 매단 메시지 스톤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온다. 한 70m쯤 뒤에 있을 카일의 것. 참고로 우리 팀 멤버는 전부 그의 근처에 배치했다. “없다.” 대답을 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하다. 다수가 이동하며 지형을 넓게 쓸 수밖에 없기에 이런 방식의 의사소통은 필수지만……. 팀 단위일 때는 해본 적이 없거든. 언젠가 클랜을 만들고 나면 이런 방식에 나도 익숙해지려나? [알겠네, 뒤쪽에도 그렇게 전하지. 뭔가 이상이 생기면 바로 말해 주게. 이제 곧 시작될 테니 말일세.] “그러지.” 연락을 끊고서 정면을 응시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욱하던 안개는 싹 사라졌으며, 노아르크 측 탐험가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른 흔적의 혈흔과 시체만 가득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이 불온하게 뛴다. 그야 당연하다. 대망의 아홉 번째 계층군주가 출현하며, 동굴 벽면의 수정들이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30분이 넘었으니까. “이쪽이다.” 불현듯 갈림길이 나와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와 동시에 내 뒤에서 따르던 전사 한 명이 그 벽면에 표시를 남겼다. 내가 최선두를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길잡이 능력을 지닌 전위는 어지간하면— “정지.” 나는 잡념을 지워내며 모두를 멈춰세웠다. 새빨간 빛을 자아내던 수정이 빛을 잃고 검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렇게 3초쯤 지나자 통로 전체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화르륵. 나는 미리 준비해 둔 횃불을 켜며 말했다. “다들 지금부터는 마음 단단히 먹어라.” 왠지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세계 3차대전 때 무슨 무기가 사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4차대전에선 돌이 될 거라던가? 물론 이 말은 현재 내 경우를 표현하기에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딱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특수 조건 - 아홉 개의 공포가 충족됩니다.」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가 층을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갈 순간이다. *** 「필드 효과 - 심연의 안개가 적용됩니다.」 「모든 사용 효과가 비활성화 됩니다.」 「마력 효율이 4분의 1로 감소합니다.」 「심연의 안개에 노출된 마물이 보다 월등한 존재로 진화합니다.」 *** 딸깍. 투구에 달린 홈 위에 횃불을 끼워 넣는다. 일명 바바리안 캔들 모드. 오랜만에 꺼내는 모드지만, 딱히 창피하거나 하지는 않다. 어차피 다른 전사들도 똑같거든. “후후, 횃불을 쓰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려.” “동감이다.” 모두가 투구에 횃불을 꽂으며 시야가 다시금 확보됐다. 그러자 우리를 둘러싼 검은 안개가 보다 선명히 느껴졌다. 2층부터 생기는 미궁의 어둠과 같다. 빛을 잡아먹는 어둠. ‘가시거리는 약 2m.’ 생각보다도 더 짧다. 하긴, 게임에서는 베르자크를 잡을 때 항상 대마도사를 몇 명씩이나 대동했었으니까. 만반의 환경을 구축한 뒤 소환했기에 이런 상황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위험하겠군.” 숙달된 전사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피어난다. 그만큼 시야는 전투에 있어 중요하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21피트(6.4m)를 범인과의 이상적인 대치 거리로 권장하고 있다. 그 이하는 범인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을 때 제대로 대처하기가 어렵다던가? 참고로 ‘총’의 경우가 그랬다. 풀파워 대시를 꼬라박는 ‘인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데까지 그 거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2m라니……. [서둘러 이동해야 하네.] 멈춰서 마음 준비를 하기도 잠시. 메시지 스톤에서 카일의 재촉이 이어진다. “횃불을 끼우느라. 이제 출발하겠다.” 나는 전사들에게 고지를 하듯 말한 뒤, 방패로 상체를 막은 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철컥, 철컥. 조금씩 걷는 속도를 올린다. 현 상황이 골 때리는 이유 중 하나이며, 내가 최전방을 튼튼한 전사와 기사로만 구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시거리 2m에서 달려야 한다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두려움을 집어 던지듯 함성을 내지르며 발을 박찬다. 천천히 걸어서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겠는가. 그래, 위험한 건 이미 알았잖아? “가, 가자!!” 내가 먼저 어둠 속으로 뛰어들자, 전사들도 용기를 내고 뒤를 뒤따랐다. 하긴, 내가 앞에서 시야를 밝히는 중이니 쟤들은 좀 더 나을 것— “캬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짐승이 울부짖으며 달려든다. 1층에서 나온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크다. 뭐, 내가 평소랑 달리 [거대화]를 쓰지 않는 중이란 것도 원인이겠지만. 퍼억! 방패로 짐승의 턱주가리를 후려친다. 그 즉시, 내 우측에 있던 전사가 양날도끼로 놈의 목을 내리찍는다. 카칵! 가죽을 파고들었지만, 뼈에 날이 걸렸다. 새삼 입맛이 씁쓸해진다. 방금 도끼를 휘두른 저 드워프는 4등급 출신의 전사였다. 그것도 수호자가 아니라 근딜 포지션을 맡고 있던 전사. 그럼에도 원샷원킬이 안 된다라……. “캬아아아악!” 목에 깊은 자상이 새겨졌음에도 팔팔하게 다시금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짐승. 나는 메이스로 대가리를 후려쳤다. 퍼억-! 아마 이거로도 뒈지진 않았을 거다. 유일한 공격기인 [휘두르기]를 쓴 것도 아니었으니. 음, 정확히 말하자면 쓰지 못했다. 「모든 사용 효과가 비활성화 됩니다.」 ‘심연의 안개’에선 액티브 스킬이 봉인된다. 시체골렘의 [산성체액]은 그대로지만 [살점 폭발]은 쓰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지금 내가 [거대화]를 못 쓰고 있는 이유도 그거고. ‘진짜 옛날로 돌아온 거 같네.’ 묘한 상실감이 온몸에 감돈다.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가 떠오른다. 아마 다른 전사들이 유독 어둠 너머를 겁내는 것도 그게 큰 이유겠지. 가장 큰 무기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다들 뭐 하냐! 어서 따라오지 않고!” 정수가 남긴 깡스탯은 그대로다. 패시브도 쓸 수 있으며, 우리에겐 열심히 돈을 벌어 맞춘 장비도 있다. 뭐, 장비의 사용 효과나 스크롤 같은 건 사용할 수 없게 되지만……. 수호병단의 징표가 가진 ‘충격 감소 50%’ 같은 상시 옵션은 적용이 된다. “죽이지 못한 놈은 뒤에 맡겨라!” 우리는 놈을 무시하고 재차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하나 잡다가는 절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판단. “캬아아아악!” “컹! 컹!” 몇 걸음 간격으로 짐승들이 무리 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사자의 1.5배는 되는 크기. 다만 형태 자체는 1층의 동쪽 지구에서 흔히 출몰하는 칼날늑대와 같다. 그 힘은 천지 차이겠다마는. 「심연 칼날늑대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무려 트롤과 같은 난이도인 5등급 몬스터. 우리는 액티브 스킬 없이 이놈을 처치하며 길을 뚫어야 한다. 내가 전사 위주로 영입한 것도 그래서다. 술법사, 소환술사, 네크로맨서처럼 스킬 의존도가 높은 계열은 이 이벤트에서 쓸모가 없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반면 전사는 대부분 깡스탯이 높기 마련. “아악, 팔이……!” “신관, 어서 치료해라!” 그럼에도 길을 뚫을수록 부상자가 속출한다. [거대화]를 잃은 내 전투력이 급감한 것처럼, 다른 탐험가들도 현재의 자신에 익숙하지 않은 것. 아, 심연 칼날늑대의 스킬도 한몫했다. 「심연 칼날늑대가 [내면의 광기]를 시전했습니다.」 심연의 안개로 진화한 칼날늑대가 갖게 되는 액티브 스킬 [내면의 광기]. 효과는 간단하다. 시전자의 방어 관련 스탯이 전부 사라지며, 그 수치만큼 절삭력, 파괴력, 관통력 등 공격 행위에 관련된 스탯에 보너스가 붙— “캬아아악!” 잡념을 털어내며 얼른 방패로 얼굴을 가린다. 카카칵! 발톱을 막아낸 방패 너머에서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난다. 다만, 수리비 걱정보다 몸 걱정이 된다. 4단계 금속인 월광석이 이 정도라니. ‘나도 이건 맨몸으로 버티긴 힘들겠네.’ 부상자가 속출하는 게 당연하다. 2단계 금속 정도는 종잇장처럼 찢어내는 게 놈들의 발톱이었으니. ‘후, 만약 정수가 나오면 바로 먹어야지.’ 원래 이 이벤트를 열 때는 극후반부에 접어들 때라 이놈들의 정수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다르다. 일단 깡스탯도 5등급치고 높을뿐더러……. 스킬도 제법 괜찮다. 이 스킬 하나면 일시적으로나마 극탱에서 극딜러로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으니까. 뭐, 지금 상황에선 쓸 수 없는 스킬이지만. ‘그래도 얘네 깡스탯 하나는 엄청 높았지.’ 조금이라도 스탯이 늘면 큰 도움이 될 터. 정수야 나중에 신전에서 지우면 그만이다. 이제 100만 스톤은 그리 비싸게 느껴지지도 않으니. “베헬—라아아아아아!!” 사기가 오르길 바라며 기합을 내지른다. 비단 이 행위는 나뿐만이 아니다. 각자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저마다의 믿는 것을 부르짖는다. “라프도니아를 위하여!” 충성스러운 기사는 질리지도 않고 자기들을 버린 왕가를. “아일리!!” 누군가는 아내의 이름을. “별빛이 나를 인도할지니!” 누군가는 그가 믿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교대 시간일세.] 카일의 음성이 메시지 스톤을 통해 전해지고, 후열로부터 체력을 비축 중이던 전사와 기사들이 최전방과 자리를 교대한다. “……당신은 괜찮겠소?” 내 옆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드워프 전사가 걱정스레 내게 물었다. 물론 솔직히 답하면, 나도 쉬고 싶다. 다만……. “앞에서 길을 찾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나.” “그건 다른 탐색꾼을 불러서 시켜도 되는 것 아니오.” “다른 탐색꾼이라…….” 불현듯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탐색꾼들은 대부분 전투 능력이 뒤떨어진다. 그런데 중무장한 전사와 기사들도 자칫하면 살이 찢겨나가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여기로 부르라고? “걱정 마라. 나는 괜찮으니.” “……금방 다시 오겠소.” 거, 잠깐 같이 싸웠다고 의리 있기는. “기다리고 있지.” 이후 드워프 전사까지 뒤로 물러나고서, 새로운 인물들이 내 뒤, 혹은 옆으로 채워진다. 낯설지는 않다. 출발 전에 이미 통성명을 한 상황이니까. “엘버틴, 다베르스, 카르킨, 잘 왔다. 옆을 부탁하지.” “하하, 얼마나 됐다고 꼴이 말이 아니군.” “뒤에서 쉬는 게 어떻소? 지금부터 길은 우리가 열 테니.” 넝마가 된 장비와 아직 굳지도 못한 채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배려를 해오는 전사들. “아직은 버틸 만하다. 그때 말하지.” “미련하기는.” “그런 자니까 이렇게 많은 이가 모인 거 아니겠나.” “제기랄, 저놈들은 인사를 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를 않는군.” 잠깐의 잡담을 끝마칠 새도 없이 앞에서 나타난 짐승에 의해 우리는 다시금 서둘러 이동을 재개해야 했다. “평범한 칼날늑대와는 많이 다르니 다들 조심해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샛길에서 오죽 튀어나와야지.” “여기만큼은 아니지만, 저쪽도 치열했네. 벌써 많이들 죽었지.” 뭐? “죽었다고……?” “그쪽엔 신관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래, 그렇구나. 신관은 최전선에 모두 배치했다. 다만, 그렇다고 이곳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망자가 나오던 전투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신성력도 모두 바닥나겠지.’ 신성력을 아끼기 위해 어지간하면 부상자는 뒤로 빼내서 포션을 쓰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일 터. 그럼 이곳은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미샤는…….’ 나는 고개를 털어냈다. 뒤에 있는 동료들이 걱정됐지만, 뭔가 일이 생겼더라면 메시지 스톤을 통해 연락이 왔을 터.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상념을 지우고 방패를 어깨에 붙여 체중을 싣는다. 필요하다면, 메이스를 휘두른다. 때론 함성을 내지르고, 균형을 잃어 바닥에 쓰러졌다가도 냉큼 굴러 일어난다. 퍼억! 퍼억! 서걱! 콰아앙! 둔기, 검, 혹은 기사가 뽑아낸 오러에 베여 검은 피를 뿜어내는 짐승들. 놈들의 체액이 내 몸을 덮고 또 뒤덮는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다. “허억, 허억.” 육체 수치에 몰빵한 전사들이 거친 호흡을 내뱉고 신음을 흘린다. 그런 전투였다. 온갖 개난장판을 겪어왔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 그래서일까? 정신을 차려 보니 왼쪽 자리에 다른 전사가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다베르스, 엘버틴은 언제 뒤로 갔나?” “…….” “죽은 건가?” “그래.” ……그렇구나. 술, 나중에 같이 마시기로 했었는데. “베헬—라아아아아아!!” 연료를 부어넣듯. 찰나의 감정조차 태워가며 나아간다. 또한, 신관에게도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주로 힐을 넣으라고 오더를 내렸다. 고통내성이 있으니 포션이면 될뿐더러……. 피식. 아니, 솔직히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도 싸워대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아니면, 옆에 전사들만 있다 보니 육신에 새겨진 바바리안의 본능이 깨어나기라도 했나? 이름을 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글쎄, 어쩌면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누군가에게 나는 버림패였고. 나 역시 다른 누군가는 버림패였다. 그것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분하지도 불합리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게 세상이었고, 나는 순응하길 택했다. 그런데……. 두근-! 이 기분은 대체 뭘까.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근-! 뜨겁게 달궈진 심장. 머리. 흘러내리는 피의 온기. 끈적거림. 두근-! 그래, 제정신이 아닌 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 “으아아아아아아아!!!” 이유를 찾는 건 그만뒀다. 어째선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이 하나씩 죽어갈 때마다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욕망이었다. 두근-! 나를. 동료를. 그리고 내 뒤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을. 두근-! 살려 돌아가고 싶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의 상승량이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내 모든 것을 태워서라도. 222화 불꽃처럼 (2)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하면, 원래의 나는 어땠을까.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던 꼬마 이한수는 평범한 아이였다. 영웅을 동경했고. 언젠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 믿었다. 다만, 그랬던 꼬마는 살아가며 배웠다. 감정은 감정일 뿐. 결국, 끝에 가서도 웃으며 살 수 있는 놈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인 녀석들이다. 그렇기에……. ‘미샤, 아이나르, 레이븐, 곰아저씨.’ 나의 우선순위를 다시금 머리에 새긴다. 무슨 일이 생기든 이들만큼은 내가 살려서 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의를 하면서도. 카캉! 방패를 들어 동료를 노리던 짐승의 발톱을 막아낸다. “괜찮나?” “아, 아! 고맙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는, 내 심장과 머리를 뜨겁게 달군 이 욕망을 놓고 싶지 않다. 머리가 뜨겁다. 지금 내가 토해내는 숨결만큼이나. 내가 이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다베르스, 힘들면 뒤로 가서 쉬어라.” “……그럴 일 없다.” “……?” “네가 쉬러 가기 전까진.” 전사들은 왜 다 하나같이 미련한 걸까. 이럴 거면 이름을 물어보지 말 걸 하면서도, 통성명을 해둬서 다행이라 여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따라서 의문을 버린다. 후회도 버리고. 내가 정말로 게임 캐릭터가 된 것처럼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한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패 바바. 그 육성법을 그대로 따른 비요른 얀델. 그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여전히 포션만으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넝마 꼴을 유지한다. 신관의 케어를 받으면 훨씬 내가 안전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포션 대신 힐을 넣어달라 요구하지 않는다. 생명력이 감소할수록 방어 스탯이 상승하는 오크 히어로의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 “베헬—라아아아아아!!” 내 생명력을 불태울수록. 나는 더 단단해진다. 그럼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고, 살아남은 그들은 앞으로 남은 난관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거의 다 왔다!!”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믿고 나아가자. *** 중심부를 벗어난 지 약 9시간이 흘렀다. 처음 두 시간은 스피드런이라도 하듯 있는 힘껏 내달리던 시간이었고, 남은 일곱 시간은 ‘심연의 안개’를 뚫으며 길을 열어내야 했다. 많은 피해가 있었다. 단순히 몇 문장으로 끝내기 어려울, 그런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도착했다.” 결국 우리는 첫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래, 첫 목적지에. [어떤가, 포탈은 열려 있나?] 나는 침음을 삼키며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아니, 포탈은 파괴된 상태다.” 수많은 시체와 피를 넘어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를 반긴 것은 파괴의 현장이었다. 비석이 있고 포탈이 열려 있어야 할 그곳엔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꽈악. 정말이지 오랜만에 부조리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많은 전사가 죽었건만.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가족이 있고, 버림패가 될 수 없을 소중한 것을 품은 존재였건만. [헛걸음이었군.] “…….” [정신 차리게. 아직 두 개의 포탈이 남아 있지 않은가. 어디로 갈지 선택을 해야 하네.] 흘러 넘치는 감정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최대한 머리를 식힌다. 그리고 생각한다. 북쪽인가, 남쪽인가. [되도록 빠르게 결정을 해주게.]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이 시간에도 전투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니. “얀델, 부담 갖지 마라. 그걸 어떻게 고르냐? 그냥 운이지.” “하핫, 원래 전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판단하는 법일세!” “어느 선택을 해도 우리는 따라갈 거다.” “설령 그것이 틀린 선택이라 한들, 그 어느 누구도 널 탓하진 못한다. 만약 그런 새끼가 있다면 내 도끼로 머리를 쪼개주지.”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사선을 몇 번이나 넘어온 전사들이 내게 위로의 말을 해온다. 참 신기한 녀석들이다. 다들 그 모양 그 꼴을 하고서 웃을 수 있다니. 피식.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기회는 한 번뿐.’ 현실적으로 포탈 세 개를 전부 확인하는 건 불가능. 우리는 시간상으로도 전력상으로도 2번까지 기회가 있으리라 판단했고, 동쪽을 첫 목적지로 정했다. 이유는 여럿 있었다. 1. 동쪽을 택할 시, 첫 기회가 날아가더라도 북쪽과 남쪽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일단 원정 도중에 새 정보를 얻는다면 루트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며. 2. 심연 칼날늑대는 다른 몬스터에 비해 덜 까다롭다. 피해가 가장 적은 길이기도 하다. 또한……. 3. 짐승의 소굴이라면, 노아르크 놈들이 포위 진형을 구축하기 어렵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쪽이 좋다고 여겼다. 세 방향에 벽을 등지면서 버티고 버티다, 7일 차가 끝날 때 1층으로 내려간단 전략을 쓸 수가 있으니까. ‘……제기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뒤늦게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처음부터 글러먹은 판단이었군.’ 내 입장에선 동쪽을 택하는 게 합당했다. 하지만 상대 측에서는 어떨까? ‘생각이 짧았어.’ 나는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계획을 세웠다.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내게 가장 베스트니까. 최선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행동했다.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게 분명함에도. ‘놈들이라면 어디를 골랐을까?’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었다. 노아르크에게 가장 유리한 포탈은 어디일까. 그 답은 금방 나왔다. ‘북쪽.’ 고블린 숲. 암만 생각해도 놈들 입장에서 이곳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다. 근거는 총 셋이다. 1. 심연 고블린은 1층의 네 몬스터 중에 제일 까다롭다. 이 길을 타고 넘어가려면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으며. 2. 벽 역할을 할 지형지물이 없기에 포위가 가능하다. 심지어 전투도 유리하다. 무엇보다……. 3. 고블린 숲은 3층과 가장 거리가 짧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7개월간 미궁 탐사를 멈췄던 놈들은 식량난에 허덕이는 중일 터. 이번 작전이 끝나면 위층으로 올라가 마석을 캐려 했을 것이다. 그야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효율충 아닌가. ‘멍청한 새끼.’ 식량난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2층 앞에 대기 중인 인력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도 여겼다. 그래서 그걸 믿고 이 계획을 세웠다. 다만, 그걸 고블린 숲까지 연관 짓지 못했다. 그토록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렸음에도. ‘셋 중 하나는 무슨. 그냥 쉬운 길이었으면 했던 거겠지.’ 나 자신의 우둔함에 욕이 나온다. 그러나 더 자책하기보다는 메시지 스톤을 꺼내 손에 쥔다. 꽈악. 혼자 무너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그러니, 이제 중요한 건 그다음의 대처일 터.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메시지 스톤을 통해 결정을 통보하자,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 숲이라…….]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니, 사실 자네가 무엇도 고르지 않으면 내가 먼저 그곳을 추천할 생각이었네. 지금에야 든 생각이지만, 그쪽이 의심스럽거든.] 그래, 아저씨도 나랑 같은 생각이 든 거구나. 조금만 더 깨닫는 게 빨랐으면 좋았을 것을. 나도, 이 아저씨도. ‘됐어, 투정은 여기까지.’ 나를 믿고 이곳까지 온 무리를 이끌고 이동을 재개했다. “준비해라. 이만 다시 출발하겠다.” 목적지는 북쪽의 고블린 숲. “하, 휴식도 이제 끝이구먼.” “가보자고. 쉬는 건 나가서 해도 충분하니.” 진형을 무너뜨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방향을 틀어 우회하듯 움직였다. “그르릉……!” “캬아아아악!” 포탈 근처를 벗어나자 어김없이 나타나는 짐승 새끼들. 놈들과 다시 피 터지게 싸워가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륵, 그르륵!!” 서서히 심연 고블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날늑대가 출현하는 동쪽지구에서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는 뜻. “그르륵.” 평소와 다름없는 왜소한 체구. 그러나 피부만큼은 불길할 정도로 검게 물든 고블린이 나를 응시한다. “크륵, 크르륵!” 놈은 웃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동굴에 떨어졌을 그때처럼. “전투 준비!” 지금부터 우리는 어려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 9등급 몬스터 고블린. 이 새끼들은 별거 없다. 덫만 조심하면 그만이고, 그 덫조차 제대로 된 장화 하나면 무력화된다. 하지만……. 「심연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EXP 5」 앞에 심연이 붙은 5등급 고블린은 다르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은 트롤보다도 까다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심연 고블린이 [무작위 덫]을 시전했습니다.」 액티브 스킬 [무작위 덫]. 효과는 간단하다. 철컥. 밟았을 시, 5등급 이하의 랜덤 스킬이 대상자에게 시전된다. 아, 참고로 버프 같은 건 제외다. 발동되는 건 오직 공격 및 저주 계열 스킬뿐. 화르르르륵-! 덫이 발동되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전사 한 명의 몸이 불길에 뒤덮였다. 뭔지는 보자마자 알았다. [멸화] 5등급 스킬 중에서도 단일 딜로는 최상위에 속하는 그것. “제기라아아알!! 신관! 신관, 신과아안—!” 그토록 부르짖던 신관은 불길이 일자마자 힐을 넣는 중이었으나 소용없었다. 털썩. 무려 2시간 넘게 최전선에서 길을 뚫던 전사가 새까맣게 타서 쓰러졌다. 실로 허무한 죽음. 심연 고블린의 지랄맞은 점이다. “크륵, 크르르륵!!” 어떤 육성법을 취하든 카운터 속성은 있기 마련인데, 무작위 공격이라니? 운이 나쁘면 한 방에 골로 갈 수밖에 없다. 한데 그런 와중에……. “씨발, 미치겠군.” 심연 고블린의 덫은 육안이나 마법으로 미리 탐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냥 밟는 수밖에 없는 것. “나,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소. 미안하오.” 칼날늑대에게 팔이 뜯겨져 나가고도 웃으며 치료받고 돌아왔던 전사가 뒷걸음질 쳤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내가 약해서, 적의 공격을 피하지 못해서 다쳤다면 모를까. 그냥 운이 나쁘면 죽을 수 있다니? 숯한 역경을 넘어온 전사라도 심리적 공포를 이겨내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먼저 가겠다.” 먼저 나아간다. 나라고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를 위해 웃으며 희생할 만큼 숭고한 마음가짐을 지닌 것 또한 아닐 테지만. “너희들은 내 뒤를 따라와라.” 전부 겁먹어서는 답이 없다. 결국 그 선택은 나를 포함한 모두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필요하다. 철컥. 공포를 이겨내고 첫걸음을 내딛는 자가. 그래, 한 명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두려움을 이겨내고 속도를 올린다. 철컥. 스무 걸음 간격으로 덫이 발동했다. 「캐릭터의 기력이 크게 감소합니다.」 저주 계열 디버프. 「캐릭터의 몸이 뜨겁게 불타며 재생 능력이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지속형 화염 공격 [거머리불꽃]. 「캐릭터가 입는 냉기 피해가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합니다.」 물벼락과……. 콰콰쾅! 진짜 벼락. 온갖 종류의 스킬들이 내게 중첩된다. 그러나 나는 나아갔다. 만티코어로 맞춘 +200의 항마력을 믿으며. 내가 내디딘 첫걸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철컥. 계속해서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샌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 나는…….” “추태는 그만두고, 뒤로 물러나시오. 그다음은 내가 갈 테니.” “제기랄, 나는! 나는 왜…….” 멈춰서고 넘어진 이들을 지나친 이들이 내 뒤를 따른다. “우리는 위대한 전사를 따라간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시작은 바바리안. “하핫! 자넨 가족이 있다고 했지 않나. 이런 건 나처럼 홀몸인 사람이 가야지.” 팀을 잃은 리더. “……이 또한 왕가의 책무를 다하는 것일 터. 그다음은 내가 서리다.” 버려진 기사. “돌겠군. 이런 적은 처음이라.” “하, 진짜 여기서 어떻게 내빼란 거야?” “아까부터 느꼈지만, 진짜 미친놈이군.” 웅성임이 커지고. 바로 뒤에서는 동료의 존재가 느껴진다. 다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필요한 자는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자가 아니다. 묵묵히 나아가는 자. “다, 다들 미쳤어! 그런다고 누가 인정이라도 해줄 거 같아!! 어? 영웅이라고?” 그대로 주저앉은 자를 탓하지 않으며. “니미럴……. 그래도 나는 가련다. 결국 누구는 해야 할 일이니까.” 다시 일어난 자와 함께. 철컥. 나아간다. 더 이상 무언가를 버리지 않기 위하여.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이나르에게 업혀 있었다. 하나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덫을 밟고 밟고 또 밟다가 못 버티고 기절한 것도. “얼마나 지났지?” “제발… 좀 더 쉬어랑, 비요른……. 응?” 미샤의 걱정을 뒤로하고 아이나르에게서 내린다. 카일이 보였다. 이 아저씨라면 말해 주겠지. “얼마나 지났나?” “앞으로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걸세.” “그래, 그렇군.” 30분 정도 기절해 있었던 거 같다. 신관의 신성력은 진작에 바닥이 난 상황. 과연 내가 없는 동안 앞에서는 얼마나 또 죽었을까. “아저씨…….”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에르웬이 내 팔목을 잡는다. “안 가면 안 돼요……?” “…….” “어차피 지금은 다른 분들이 길을 열고 있잖아요. 네?” 지독히 이기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말. 또한, 예전의 나였으면 합리적이라 생각했을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누군가 죽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내게는 높은 수준의 항마력이 있다. 그래서 수백 번 덫을 밟고도 기절에 그쳤다. 고작해야 5등급 스킬 아닌가. [거대화]가 없어도 내 몸은 몹시 튼튼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인데, 적어도 나는 이 미친 짓에서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비켜라.” 에르웬을 밀어내고 전방으로 향한다. 더 이상 동료들도 날 붙잡지 않았다. 이내 속도를 더 올리자 금방 최전방 측에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또 왔군.” 거진 200에 달하는 전사로 막힌 통로. 3분의 1로 나눈 그룹 구분 없이 전사를 닥치는 대로 모았더니 이렇게 되었다. 여긴 칼날늑대 지구와 다르니까. 덫만 앞에서 밟아 준다면, 샛길에서 나오는 적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조건은 5등급 이상. 그중에서도 방어 수치가 높을 것. 아, 근딜형 전사도 받기는 했지만, 전사가 아닌 직업군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심연 고블린의 특징은 덫 하나가 아니니까. 놈들은 투척 무기를 쓴다. 명칭은 ‘괴물주머니’. 던졌을 때 터지며 5등급 이하의 무작위 몬스터가 출현한다. 그것도 코앞에서. 거리 조절이 생명인 연약한 주문쟁이나 활쟁이들로서는 버틸 수 없는 환경인 것. “……저기 업힌 건 신관인가?” “아,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까. 자꾸 신성력을 쓰다가 기절하지 뭔가.” 참고로 업힌 건 신관만이 아니다. 중상을 입고 뒤로 물러나 포션에 헐떡이는 전사들이 전사들 어깨에 둘씩 업혀 있다. 아마 정신을 차리면 일어나 그놈이 다른 전사를 또 업겠지. “그렇군. 일어나면 억지로라도 막아라. 정말로 필요해질 때를 위해 아껴야 하니까.” “하지만 이 여신관님은 어찌나 고집이 센지, 도무지 우리 말을 안 듣는데?” “그럼 그 전에 기절을 시키면 되지 않나?” “오, 그것도 그렇군.” 신관을 향해 불경을 저지르란 말임에도, 전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란 거겠지. “그럼 먼저 가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전사들이 어깨로 나를 밀쳐낸다. 잠깐만, 나 지금 어깨빵을 당한 거야? 이 몸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있는 경험.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묻자 전사들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줄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암만 네가 대장이라 해도, 지킬 건 지켜야지.” “비요른 얀델, 너는 무슨 자기가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뭐? 아니, 대체 이게 뭔 개소리야? 어처구니가 없지만 전사들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조금 더 쉬어라, 얀델.” “넌 그럴 자격 있으니까.” 허,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중. “저, 정지!!” 앞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멈춘다고?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비켜라.” 나는 다급히 전사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엔 당황한 전사들도 막지 않았다. “어, 어?” “잠깐!” “얀델? 네가 왜 여기에?” “분명 쉬게 두자고 했었는데…….” 최선두에 도달하자 낯이 익은 탐험가들이 나를 반긴다. 하지만 그들의 의문보다 먼저 해결할 것이 있었다. 대체 무슨 소란이었는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답은 눈앞에 있었다. “아무튼, 잘 왔다. 얀델, 저게 그 마법사님이 말한 그거 맞지?” 통로 너머. 빛을 잡아먹는 어둠 속에서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 “그래, 맞는 거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해서 뭘 어쩌랴. 저 눈과 마주친 이상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와 마주치는 게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지금까지 안 만난 게 기적이긴 했지. “자, 이제 어쩔 거지?” 뭘 어쩌긴 어째, 계획대로 해야지. “다들 물러나라.” 나는 메이스를 들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무기를 들고 접근하고 있음에도 저 거대한 눈은 끔벅끔벅거릴 뿐 물러나지 않았다. 꽤나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따라서……. ‘거, 바바리안 처음 보나?’ 있는 힘껏 눈깔에 메이스를 처박아주었다. 콰직-! 9등급 토큰 몬스터답게 평타 한 방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눈동자. 「심연의 감시자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가 당신에게 강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후,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고생하겠네. 나는 메시지 스톤을 꺼내 카일에게 사후 보고를 했다. “방금 심연의 감시자를 죽였다. 이제 어서 너도 이쪽으로 와라.” 플랜 B로 갈 차례다. 223화 불꽃처럼 (3)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3층의 리아키스보다 실질적인 무력은 낮지만, 공략 난이도는 몇 배쯤 더 높은 계층군주다. 그야 ‘심연의 안개’가 사기거든. 액티브 스킬 및 각종 사용 효과 봉인. 마력 효율 4분의 3 감소. 공략 내내 잡몹으로 등장하며 방해를 해대는 5등급 심연 몬스터들. 이런 악조건 때문에 후반부가 아니면 이놈을 잡겠다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공략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게 너무도 많은 탓이다. 사용 효과가 아니라, 상시 효과로 이루어진 상위 넘버스 아이템. 단독으로 홀딩이 가능한 최상위 탱커. 오러를 쓸 수 있거나, 그에 준하는 딜러. 많을수록 좋은 신관. 4분의 1 효율로도 위력적인 마도사 여럿. 참여 인원 모두가 최소 5티어 이상의 장비를 갖추는 게 권장되며, 그럼에도 몇 가지의 특수 소모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피해가 커진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갖추고서도. 7일 차가 되면 아예 실패라고 봐도 된다. 그때부터는 페이즈와 관계없이 추가 패턴이 개방되니까. 쉽게 말해, 지금 우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놈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결국 놈의 눈에 우리가 들어왔군. 금방 가겠네.]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할 수 있겠지. 카일이 합류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확인했다. [19 : 34] 5일 차, 오후 7시. 치열하게 길을 뚫었던 우리는 동쪽의 포탈을 확인했고, 이제 고블린 숲까지 2시간가량만을 남겨 두었다. 전사들의 희생으로 이뤄 낸 값진 결과. 다만 거기에 약간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얀델, 괜찮나?” “안 괜찮을 게 뭔가. 어차피 한 번은 마주칠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마주친 거야말로 요행에 가깝다. 아마 우리 대신 다른 방향을 택한 원정대에서 극심한 피해가 나오고 있었겠지. “…….” 얼마나 많은 이가 또 허무하게 죽어갔을까. 불현듯 머리가 차갑게 식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피차 똑같은 상황이니까. 서로가 서로의 미끼가 돼주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놈과 일찍 마주쳤다면, 반대로 다른 원정대들이 좀 더 수월하게 길을 뚫을 수 있었을 터. “기다리게 했군.” 이내 5분쯤 지나자 카일이 플랜 B를 위한 전력을 대동하고 도착했다. 5등급 마법사 여섯. 기사 셋, 전사 셋. 빠르게 전력을 훑은 나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왜 숫자가 이것밖에 안 되지?” 마법사의 숫자는 변동이 없지만, 그 외에 숫자가 극히 줄어들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머지는 모두 죽었네.” 그래, 뒤에서도 마냥 놀고 있던 건 아니지. 여섯 명이 모자라다. 하면, 그 빈자리를 누구로 채워야 할까. “아, 참고로 자네 동료들이 따라오겠다고 했네마는, 못하게 막았네. 나중에 쓴소리 좀 들어야 할 거야.” 쓴소리라……. 근데 그래도 여섯은 안 되지 않나? 아, 어쩌면 요정 자매도 따라오겠다고 나선 걸지도 모른다. “……고맙다.” 나는 카일에게 감사를 전한 뒤 주변에 자리한 전사들을 쓱 훑었다. 그리고 애써 밝게 입을 열었다. “다들 들었겠지만, 여섯 명이 부족하다. 전부 꼴이 말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함께 갈 자가 있는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누군가 대답했다. “내가 가리다. 당신을 따라서.” 5등급 전사, 알렉산드로 벨. 대형 클랜 소속이었으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이곳에 버려진 자였다. “덫이나 밟는 것도 지루했는데, 잘 됐군!” 티온의 세 번째 아들 카르킨. 10인 규모의 클랜에서 전사로 활동하던 삼십대의 바바리안 전사였다. 4등급이나 되는 동족은 처음이라 신기했었지. “자네, 나가면 술 산단 약속은 꼭 지키게!” 밀튼 테테루드. 드워프로만 이뤄진 클랜의 수장이었다. 그렇다고 탐사를 함께하는 건 아니고, 보통은 연계된 팀에 클랜원들을 용병 형식으로 빌려준다던가? 차라리 길드에 가까운 느낌의 클랜이었다. “…….” 고맙단 말이라도 해야 할 타이밍이었으나,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야 지금까지와는 경우가 다르다. 포탈이 있는 곳까지 이제 겨우 2시간. 절망에 닿은 순간 꺼질 희망일지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길을 뚫던 그들이라 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적지는 않을 터. 고작 잡몹과 싸우는 동안에 이만큼 피해를 입었는데, 보스 몹의 미끼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자는 거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는가. “오호라, 저기 따라가면 나도 그 술자리에 낄 수 있는 것이오?” “난 그보다 다른 게 끌리는군. 한 번만 딱 눈 감고 따라가면,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수 있을 위업이 생길 거 같단 말이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날 데려가주시오. 베르자크인가 뭔가하는 그놈, 안 그래도 상판대기가 궁금했거든.” 수많은 탐험가가 소리를 내며 자원한다. 그저 카일과 내가 짠 계획을 믿기 때문에? 아니면, 이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린 뇌가 엔도르핀을 막 분비하고 있어서? 글쎄, 그것도 이유이긴 할 것이다. 다만, 설령 그렇다 한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들…… 머리에 문제가 있군.” 제정신으로 할 수 있을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틀린 말은 아니구려. 밖에서 이 얘기를 하면 다들 그런 말을 할 거 같으니.” 누군가는 납득을 했고. “하지만 근데, 그게 당신 입에서 나와?” 누군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딱히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얘네도 마찬가지라는 건가.’ 정말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심장이 뜨겁게 일렁인다. 그러나 머리는 차가워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많은 자원자 중에서 여섯 명을 골랐다.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누구를 데려갔을 때 가장 합이 잘 맞는가. 하루 종일, 지겨울 정도로 함께 싸워온 전우였기에 고르는 건 문제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전투 스타일은 대강 아니까. “자네! 왜 나를 두고 가는 건가!” 이내 결정을 끝마쳤을 때, 드워프 클랜의 리더 테테루드가 반발했다. “설마, 내가 발목이라도 잡을까 봐?” “그럴 리가.” “그럼 어째서인가. 이유를 말할 때까지는 보내 주지 않겠네!” 거, 쪼그마한 게 고집은. 카일 쪽을 보니 슬슬 마법진도 완성되는 듯했기에, 짧게 사정을 설명했다. “내가 없어도 이곳을 이끌 자가 필요하다.” 테테루드는 4등급 탐험가다. 실력도 좋고, 클랜을 이끄는 놈이라 사람을 다룰 줄 안다. 최전선을 맡긴다면 이놈이 제격인 셈. 실제로 내가 기절했을 때마다 이 녀석이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들었다. “……쯧.” 불만스럽긴 하지만 납득은 됐는지, 녀석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얀델, 준비가 끝났네. 슬슬 놈이 찾아올 시간도 됐고.” 후, 그렇구나. 마법진 설치가 끝났다는 카일의 말이 들려온 즉시, 나는 그들을 떠나보냈다. “이만하고, 너희는 출발해라. 카일이 데려온 이 탐색꾼이 길을 알려 줄 거다. 나름 단단하다고 듣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 죽지 않게 잘 지키고.” “무슨 애 아빠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됐고, 우리는 가겠네. 나중에 보세. 꼭이네. 알겠는가?” “너야말로 애 아빠라도 되는 거 같군.” “도시에 애가 있기는 하지. 자, 가자!” 길을 막지 않게 벽에 붙어서자, 테테루드가 선두에서 다시 덫을 밟으며 길을 열었고, 전사들은 그 뒤를 따랐다. 다들 지나치면서 한마디씩 던졌다. “죽지 말게.” “흠, 난 이상하게 자네가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든단 말이지. 좀 이따 보세!” 대부분 격려와 응원의 말이었다. 그런 말들은 전사 그룹이 지나간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누군가는 감사하단 말을 하였고, 누군가는 사죄의 말을 던졌다. 한두 번이 아니라 끝없이 그게 반복됐다. “다들 왜 저러는 거지?” 내 물음의 카일이 피식 웃었다. “그야 자네 메시지 스톤은 계속 켜진 상태 아니었나. 앞쪽의 상황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네.” 그래, 그런 거구나. “비요른…….” 행렬이 이어지며 팀 애플 나라크 멤버도 모습을 드러냈다. 내 꼴을 본 미샤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이었다. 레이븐이나 곰아저씨도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였고. “궁상 떨지 말고 어서 가라. 너네가 길을 막으면 뒤에 사람들이 못 가지 않냐.” “진짜…… 어디 다쳐서 돌아오면 가만히 안 둘 거당.” 음, 탱커한테 다치지 말라니, 그건 절대 가만 안 두겠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만 말을 삼켰다. ‘나쁘지 않네.’ 좀 혼나면 뭐 어떤가. 이 모든 짓거리가 그 일상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일진대. “부탁한다.” “네, 걱정 마요. 얀델 씨가 없어도 우리 팀은 제가 반드시 지켜낼 테니까. 자, 아이나르 씨? 어서 가죠?” “윽, 아, 알았다! 머리 잡아당기지 마라!” 이후 레이븐이 자기도 따라가면 안 되냐며 억지를 부리던 아이나르를 타고 떠났다. 그러고서도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마치 전쟁통에 땅굴을 타고 도망치는 피난민 같았다. 화르륵. 타오르는 횃불. 동료의 등에 업힌 부상자가 내는 신음. 부서진 장비. 핏자국. 눈동자에 떠오른 슬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뒤따르며 떨궈낸 땀방울. 구태여 카일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게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그들에게도 오늘 하루가 유독 길었으리라는걸. “자, 그럼 모두 갔군.” 내가 속한 선두의 1그룹은 물론, 통로에 남긴 표식을 따라오던 2그룹과 3그룹도 전부 우리를 지나쳤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 구보 수준이라도 뛰고 있었으니까. 숫자가 처음에 비해 많이 줄기도 했고. “어딘가 음산해졌구려.” 모두가 떠나자, 주변이 확 어두워졌다. 행렬이 우리를 지나칠 때만 해도 일렁이는 횃불이 사방을 밝혀 주고 있어서일까? 새삼 그 대비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외딴 세상에 우리만이 남겨진 듯한 기분.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나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통로 너머를 응시했다. “왔군.” 가시거리 2m. 그 너머에 자리한 미궁의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눈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놈이 왔다. *** 처음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이 있다면, 역시 아무래도 베르자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백 명의 인원으로 이 새끼한테 도망치는 건 불가능. 조우한 순간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뭐, 산개해서 도망치면 어그로가 이리저리 튀어서 꽤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뿔뿔이 흩어져서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2층에서의 전투는커녕, 잡몹들을 뚫고 포탈에도 도착 못 할 게 분명하다. 따라서……. “마법진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우리는 플랜 B를 만들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이 전략을 쓸 수 있는 건 단 한 번. “마법진은 몇 번이고 확인을 했으니 걱정 말게.” 플랜 B가 실패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고. 성공한다 한들, 한 번 더 심연의 감시자와 마주친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 참고로 이는 포탈 수색의 최대 횟수를 2번으로 가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시간대면 수많은 원정대가 사라졌을 터. 한 번은 어찌 넘긴다 해도 또다시 베르자크와 재회할 확률이 너무 높다고 판단했다. “전투 준비.”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모두가 무기를 꺼내 들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카일의 설명을 들어 아는 것이다. 이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 이 실체가 없는 눈들은 베르자크의 주변에 생기는 이펙트다. 참고로 게임 내 설정상 반경은 약 2km. 그렇다고 단순한 배경 화면 같은 건 아니다. 이 눈들 전부가 놈과 시야를 공유한다. 즉, 이미 베르자크는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다들 알겠지만, 우리 목표는 최대한 버티는 것일세. 다른 탐험가들이 놈의 시야 바깥까지 도망칠 때까지.” 카일도 긴장이 되는지, 몇 번이고 했던 설명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우리를 무슨 바보로 아시오? 전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소. 당신 예측이 맞다면, 10분 정도 버티면 될 거라고도 했지?” “그렇군. 미안하네. 근데 하나만 더 말하겠네. 아까 깜빡하고 말하지 못했네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얀델, 이 친구만큼은 지키게.” “응? 얀델? 그러리다.” “이유는 묻지 않는 건가?” “말 안 해도 다들 알거요. 이놈이 살아남아야 우리도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란 것 정도는.” 한 전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심연의 감시자를 처치한 얀델이 죽으면 놈이 본대를 목표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려 한 것이네마는…….” 카일이 무안하게 웃으며 말을 줄였다. “뭐, 됐네. 어차피 말해 봤자 크게 의미는 없을 듯하군.” “하핫! 그래, 이유가 뭐가 됐건 간에 결과만 똑같으면 되는 거 아니겠소?” “실로 옳은 견해일세, 한데 이런 면에서는 전사들과 마법사들도 다른 게 없는 거 같군?” 가벼운 대화가 경직된 분위기를 좀 더 유하게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휘이이이익! 송곳처럼 날카로운 형태로 쏘아진 그림자. 콰앙-! 방패로 막은 순간, 손등에서 통증이 인다. 깊지는 않다. 그저 살갗이 조금 찔린 정도. ‘후, 이렇게 준비 안 된 상태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 딜계산이 안 되네.’ 설마, 평타에 월광석 방패가 뚫릴 줄이야. [거대화]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가? 내 구멍난 방패를 본 전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카일이 사기를 불어넣듯 읊조렸다. “……10분만 버텨보세.”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그럼에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자네, 왜 웃나?” “원래 전사는 힘들면 웃는다.” 앞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후반부에나 공략이 가능한 보스 중 하나. 지금의 우리로서는 처맞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괴물 중의 괴물.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 그래 봤자 이놈도 한 번의 고비일 뿐이다. 유난히 길었던 오늘 하루를 끝내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224화 불꽃처럼 (4) 고작 몇 걸음만 내디디면 닿을 어둠. 일렁이는 횃불에 의지하며 밀집 대형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는 불쾌한 시선만이 가득하다. ‘거, 꼬라보기는.’ 어둠 속에서 피어난 수백의 눈동자. 암울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특징인 잔혹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하다. 물론 분위기만 그럴 뿐. 결과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역경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희망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무너진다면 그저 잔혹할 뿐인 얘기로 남겠지. 휘이이익! 방패에 박혔던 송곳 형태의 그림자가 뽑혀져 나가 어둠 속으로 회수된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이 새끼는 초면이라 낯을 가리는지 멀리서 평타만 쳐대고 있었으니까. ‘시간을 끄는 입장에선 잘 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장비의 상태를 점검한다. 여기저기 송송 구멍이 난 방패. 옆에 있던 전사가 중얼거렸다. “자네 나가면 방패부터 새로 사야겠군.” 기본적으로 살아 돌아간다는 전제가 깔린 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새로 사야지.” 우리는 살아나간다. 한 사람이라도 더. 스으으윽. 4연 평타를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그래, 간보기는 끝났다 이거지? 스으윽. 이내 음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은 2m 정도. 망자들이 입을 법한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걸쳐 입은 복장에 무구랄 것도 없다. 윤곽선도 기본적인 인간의 형태. 다만 영체류 몬스터라도 되는 것처럼, 옷 밖에 드러난 부분에는 검푸른 연기만이 일렁거린다. 또한……. 번뜩-! 목 위에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 후드를 뒤집어써 그늘진 그 자리엔 시뻘건 안광만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의 구조와는 명백히 달랐다. 일단 빛을 뿜어내는 눈동자는 단 하나. 그마저도 우측 혹은 좌측이 아니라 얼굴의 중심부에 위치해 비례가 맞지 않을뿐더러……. 거대하다. 마치 머리 전체가 거대한 눈알로 이뤄진 듯. “되도록이면 놈과 눈을 마주치지 말게.” 모습을 확인한 즉시, 놈의 어깨로 시선을 고정했다. 간단한 이유다. [두려워하지 마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일정 확률로 상태 이상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나를 보아라.] 공포가 아홉 번 중첩되면 영구적으로 해당 캐릭터는 심연의 군주의 부하가 된다. 미궁에 자리한 수많은 몬스터처럼. 적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지랄맞은 패턴이었지.’ 사실상 조건부 즉사기라 봐도 무방하다. ‘괴수화’는 보스 공략이 끝나도 풀리지 않으니까. ‘뭐, 우리야 공략이 목표도 아니고 딱 10분만 버티면 되는 거지만…….’ 10분 안에 ‘괴수화’에 이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니까. 공포 관련 세팅은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상태 이상 ‘공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셈. “끄윽…….” 옆에 있던 전사 한 명이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아무래도 그새 놈과 눈이 마주친 모양. 공포에 걸렸다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든 우리를 공격하든 했을— “비요른!” “조심하게!” 잠깐 동료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베르자크의 흉부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왔다. 몇 번이고 내 방패를 가격했던 예의 송곳. 다만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패턴이었다. 휘이이익. 매섭게 날아오던 송곳이 중간에 수십 개로 갈라지며 나를 덮친다. 마치 그물망 같다. 착. 문어 빨판처럼 달라붙어 몸에 감기는 그림자. 전신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의도는 명확했다. 평타만 치면 오래 걸릴 거 같으니, 어둠 속으로 날 끌고 가겠단 거겠지. 허, 우리가 그 정도까지 좆밥은 아닌데. “에코비르 이헤란 아이포운.” 카일이 미리 캐스팅해 둔 마법을 시전했다. 7등급 보조 마법 ‘속성부여’. 참고로 속성은 어둠 계열 몬스터와 상극인 태양 속성. 화르륵-! 불과 성 속성이 합쳐진 새하얀 불꽃이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의 무기를 뒤덮는다. 기사에게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서걱-! 오러가 있으면 ‘속성부여’ 없이도 놈에게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하니까. “비요른을 구해라!” 내 몸이 그림자에 속박된 즉시, 전사들이 달려 불길에 휩싸인 무기들로 이를 베거나 박살냈다. 순식간에 자유로워진 육신. 다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수십 개의 그림자가 또다시 놈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휘이이이이익! 이번에도 이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놈이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노린다. 나는 서둘러 방패를 고쳐잡았다. ‘이제부터인가.’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할 차례다. *** 내가 아까 죽인 눈깔 몬스터. ‘심연의 감시자’는 베르자크가 한 번의 전투를 끝내고서 다음 희생양을 정할 때 쓰는 소환 스킬이다. 시전 시 동굴 전역에 소환이 되며, 감시자는 돌아다니며 제물을 찾는다. 참고로 한 번 마주쳤다면 그걸로 끝. 어그로를 푸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눈깔을 터트려 죽였다. 누군가 메인 어그로를 끌지 않으면, 놈을 유인해 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지금만 봐도 알겠지만, 동료들이 날 구하려 먼저 공격하기 전까지 놈은 오직 나만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근데 그럼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희생하는 게 낫지 않겠소?] 계획을 세울 때 누군가 그런 의견을 내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누가 그 역할을 맡겠냐는 물음은 제쳐두고. 베르자크의 시야 반경은 약 2km. 적어도 놈의 시야에서 원정대가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10분.’ 카일은 그 시간을 10분가량으로 예상했다. 그 전에 쓰러지면 놈은 다시 원정대를 추격할 것이고, 이내 규칙 없는 학살을 자행할 것이다. 그렇기에……. 쿠웅-! 버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를 따라온 마법사와 전사들과 함께. “베헬—라아아아아아!!” 불타는 무기를 휘두르며 어둠에 저항한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휘이이이익-! 관통력이 높은 송곳 형태의 평타. 평소였다면 어렵지 않게 반응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버텨줄진 몰라도 일단 방패로 막기만 하면 크게 다치진 않으니까. 하지만……. ‘빌어먹을 게임.’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문제다.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야를 아래로 내리고 있으니, 제때 반응하지 못하는 일이 자꾸 생긴다. 참고로 실제 게임에서도 이랬다. [베르자크의 눈을 마주보지 않는다.] 이 지시를 캐릭터에게 적용시키면, 민첩 수치가 아무리 높아도 회피율 및 방어 성공률이 급감했다. 바로 지금처럼. 푸욱-! 어깨 깊숙이 파고든 그림자.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포션을 먹어도 먹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어그로가 분산되긴 했어도, 메인 어그로는 나에게 쏠려 있는 상황이니까. 한데 그런 와중에. “아, 아악!!” 단순히 찔러대는 것만이 아니라, 그물 형태로 날아와 동료를 어둠 속으로 끌고간다. 지금까진 열심히 그림자를 베어내며 막아내긴 했지만……. ‘제기랄.’ 언제까지고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실리안!!” 실리안 네르프. 오늘 일을 나중에 술자리에서 풀면 멋질 거 같단 이유로 따라온 녀석이었다. “아아악! 아악! 악!!” 녀석이 끌려간 어둠 속에서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게임에선 그저 분위기를 살리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 분노가 들끓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니까. “멈춰라.” “하지만!” “가면 너도 죽는다.” 이미 빨려들어간 이상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의 우리 수준으로는. “제기랄!” 한 전사가 분노를 토해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함께 싸워온 전우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어둠 너머의 소리만을 들었을 뿐. 무기력하다. 오늘만 해도 수없이 느낀 감정이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거나 말거나,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베르자크도 스킬을 썼다. [심연의 부름]. 놈의 시야 반경 내에 있는 잡몹을 한곳으로 집결시키는 스킬. “그륵! 그르륵!” 부름을 받은 심연 고블린이 괴물보따리를 풀어 몬스터를 소환하고, 멀리서 덫을 뿌렸다. 이것 때문에 한 명이 죽었다. 푸슉. 덫이 발동되고, 괴물보따리에서 튀어 나온 몬스터가 활개를 치는 난투전. 송곳 형태의 그림자가 동료의 몸을 꿰뚫었다. 틈틈이 마나실드를 써서 치명상을 막아주던 마법사들도 반응하지 못했다. 털썩. 그렇게 한 명이 더 죽었다. “카일! 얼마나 남았나!” “4분.” 뭐, 3분? “4분이 지났네.” 후, 잠깐 설렐 뻔했— 콰직-! 그때 첫 번째 변수가 생겼다. “트롤이다! 밀어내!!” 한 명이 더 죽었다. 사인은 바로 코앞에서 소환된 트롤. 문제는 트롤이 아니라, 사망자가 마법사란 것이었다. ‘니미럴.’ 전사의 죽음은 불가피한 일이라 여겼으나, 마법사는 다르다.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가운데 배치했다. ‘이렇게 되면 마력이 빨리 오링날 텐데…….’ 최악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5분 남았네.” “4분!” 사기를 불어넣기 위함인지 카일은 1분이 지날 때마다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이제 3분만 버티면 되네!” 마법사가 죽은 이후로 희생자는 없었다. 베테랑 탐험가들답게 슬슬 전투 숙련도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8분이 되었을 때였다. “이제 더 이상 마법은 쓸 수 없네. 부여마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고작일세.” 카일이 고지하듯 통보했다. ‘마법사의 지원 없이 2분을 더 버텨야 한다라…….’ 예상보다 이르지만 어쩔 수 없다. 마법사 한 명이 죽어 버렸으니까. 저 마법진을 발동시킬 마력을 남겨 놓으려면 달리 선택이 없었으리라. “키예에에엑!!” 마법사의 광역 마법이 멈추자, 보따리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점점 쌓여간다. 줄어든 인원. 마법의 부재. 부담이 한층 커진 상황에서 베르자크는 쉬지 않고 멀리서 그림자를 화살처럼 쏘아냈다. 푸슉-! 그렇게 또 한 명이 더 죽었다. ‘약속은 못 지키겠군.’ 이런 격렬한 전투 중에 유언은 남길 수 없다. 적이 몬스터든 사람이든. 그럴 시간을 줄 정도로 상냥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미리 얘기를 나누었다. [장비를 챙겨갈 수 있으면 챙겨서 동료에게 전해 줘.] 방금 쓰러진 녀석이 남긴 유언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말했지만 역시 그럴 여유는 생기지 않을 거 같다. “아악! 도, 도와줘!” 내 바로 옆에 있던 녀석이 그림자에게 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악! 아아악!!” 연신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질끈 씹었다. [내 아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게. 자네라면 분명 나갔을 때 유명해져 있을 거 같거든. 그 아이가 좋아할 걸세.] 이건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이제 마법진을 사용하겠네!” 목표로 한 10분까지 1분을 남겨둔 시각. 마법사들이 미리 그려둔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나는 정신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방패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아까 이걸 어따 쓰겠냐며 던졌었지. 어차피 수리도 안 될 거 아깝진 않다. “얀델, 이리 오게!” 어, 벌써 된 건가? 이내 바닥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경계심이 생겼는지 베르자크도 뒤로 공격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봤다. 이는 다른 몬스터들도 마찬가지. “…….” 찰나에 불과하지만 전투가 멈추었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모든 시신이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어둠 속에 끌려간 것도 있으니까. ‘분명 근처에 있을…… 아!’ 빛이 끝나는 끝자락에 찾던 시신이 있었다. 잽싸게 다가가 검과 방패를 회수했다. 제법 힘을 줘야만 했다. 녀석은 쓰러져서도 눈을 뜬 채, 무기를 쥐고 있었다. “비요른!” 누군가 외쳤고, 나는 바닥을 구르며 마법진 내부로 들어섰다. 전사들은 대체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그래, 그런 약속이 있었지.” “동료들이 고마워 할 걸세.” 이내 잽싸게 일어서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마법진이 뿜어낸 빛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게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는군!” “이봐, 마법사님! 슬슬 가야 할 거 같은데?” “조금이면 되네!” 나는 정면부를 응시했다. 베르자크, 놈이 보였다. [내가 너를 보았다.] 보긴 뭘 봐 씨발. 나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망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실리안 네로프. 닐 페이메즈. 바울 아그머스. 가르펜 굴런. 맷 엘반즈. 레프리 시아베루스. 총 여섯 명. ‘그래, 언젠간 너도 또 보게 되겠지.’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용살자 리갈 바고스. 그리고 베르자크까지. 「카일 페브로스크가 4등급 공간 마법 [다중 순간이동]을 시전했습니다.」 부디 이 새끼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언제까지고 도망치지만은 않으리란걸. *** 눈을 떴을 땐 주변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래, 제대로 온 거구나. “놈과 거리를 얼마나 벌린 거지?” “글쎄, 3km는 될 걸세.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우릴 따라오진 못하겠지. 아, 또 심연의 감시자를 만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일세.” 나는 홀린 사람처럼 뒤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는 그 좆같은 눈깔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그 먼 거리를 텔레포트하는 데 성공했단 뜻. “대단하군.” “대단하기는. 좌표 지정 매개체를 이쪽에 맡겨두지 않았다면 나라도 이 먼 거리는 무리였을 걸세. 아,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도 공유 받았고 말일세.” 글쎄, 겸연쩍게 말하긴 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다른 도움이 있었다 한들. 마력 효율이 4분의 1로 감소되는 이런 곳에서 저런 마법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럼 먼저 가지.” “쉬지 않고?” “가면서 쉬면 된다.” 나는 포션 한 병을 까서 머리 위에 부었다. 그리고 다른 전사들이 치료받는 동안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찾던 사람들이 보였다. 가르펜 굴런의 동료들이었다. 왜 앞에 나가서 괜히 개고생을 하려는 거냐며 최전선까지 와서 녀석을 데려가려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었지. “그쪽은…….” 그들도 나를 알아봤다. 그리고 흠칫 굳었다. 시선은 내가 쥔 검과 방패에 있었다. “받아라.” “……죽은 건가요?” 한 여성 탐험가가 울먹이며 물었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그녀의 입이 열린 건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건… 받을 게요. 하지만 이건 가져가세요.” 여성이 검을 집어든 뒤, 방패를 내게 건넨다. “필요하실 거, 같아서요.” “……고맙게 받지.” 사양하지 않고 방패를 받기로 했다. 안 그래도 쓰던 방패를 잃어버렸으니까. 여기서 거절하는 쪽이 더 상처를 후비는 일이 될 거 같기도 했고. “그럼 이만 가보겠다.”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동료들이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내가 없는 동안 다친 곳은 없었나?” “…….” 아무도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날 바라볼 뿐. 미샤는 손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아, 다쳤다고 혼 내려는 건가? 얼른 도망쳐야지. “안 다쳤으면 됐다. 그럼 먼저 가겠—” “멈춰랑.” “…….” “제발, 그만하고 좀 쉬어랑. 이만하면 됐지 않냐. 응?” “네, 얀델 씨. 칼스타인 씨 말대로 해요. 이대로 앞에 가봤자 도움도 안 될 거예요. 이따가 크게 싸울 수도 있을 거라면서요.” 이내 나도 고집을 털어냈다. 레이븐의 말이 옳다. 그토록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게 좋겠지. 터벅, 터벅. 최전선에서 다른 전사들이 길을 뚫는 동안, 나는 동료들 곁에서 행렬을 따르며 체력을 회복했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정지!] 메시지 스톤에서 행렬을 멈추는 지시가 떨어졌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포탈은, 포탈은 열려 있나?] 카일의 음성이 들렸고, 그다음은 최전선을 맡긴 드워프 클랜의 리더 테테루드였다. [열려 있소.] 그래, 제대로 찾아온 거구나. 왠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만약 여기도 박살 나 있었다면 진짜 멘탈이 나갔을 텐데. “레이븐, 이쪽은 부탁하겠다.” “네, 가보세요. 어차피 말려도 갈 거잖아요?” “…….” 나는 탐험가들을 제치고 최전선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테테루드가 날 맞이했다. “자, 이제 어쩔 건가. 바로 들어갈 생각인가?” “뒤쪽에서 준비가 다 끝나는 대로.” “이번에도 자네가 앞장을 서려고?” “의미가 있나? 어차피 너희도 바로 따라 들어올 거면서.” “하핫, 그건 그렇지?” 이내 나는 포탈 앞에 섰다. 한 10분쯤 흐르자 메시지 스톤을 통해 카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준비는 끝났네. 이제 들어가도 좋네.]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게 나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긍정적인 면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을 수도 있어.’ 노아르크 입장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살아 올라온다고 해도 소수일 거라고. ‘차라리 우리가 도시로 돌아가 왕가가 한 짓을 증언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게 저쪽에선 이득이야.’ 물론,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병력을 배치하고 소수의 생존자마저 철저히 마무리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 많이 남겨두진 않았겠지.’ 1층에서 장비를 얼마나 먹었든, 그걸로 먹고살 수는 없다. 핵심 전력들은 곧장 위로 올라가 마석을 캐고 있을 거다. ‘니미럴.’ 그리 생각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나는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확신이 제대로 있던 적이 얼마나 있던가?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봤자, 심연 고블린에게 시달리며 전력만 줄어들 뿐. 그러니까……. 터벅. 한 걸음 더 내디뎌 포탈에 몸을 들이민다.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시야가 잠시 까맣게 물들었다. 머지않아 몸이 체공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초록색 숲이 보였다. “니미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었다. 일단 좋은 소식은, 근처에 병력이 많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나쁜 소식은……. ‘씨발, 이 새끼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핵심 전력이 위로 올라가 마석을 캐고 있으리란 내 예상은 빗나갔다. 착. 균형을 잡아 지면에 착지한 나는 숲에 자리한 세 명을 관찰했다. 인상착의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적어도 두 사람은 말이다. “첫 번째 생존자로군.” 포탈을 다 개박살 내버린 장본인. ‘파멸학자.’ “하하, 제가 분명 기다리면 누구 한 명쯤은 올 거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어이, 바바리안! 축하해. 오는 동안 고생 많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인. 그리고……. “호오,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여전히 그때 그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사내. “아무래도 우린 인연인가 봅니다?” 시체 수집가. “피싯.” 놈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225화 역전 (1) 고블린 숲은 2층들 중에서 밝은 편이다. 어둡긴 하지만 하늘을 수놓은 별빛들이 어느 정도의 광원 역할을 해준다. 뭐, 암만 그래도 이만큼은 아니지만. 후우웅! 허공에 떠올라 있는 수십 개의 빛구체가 주변을 대낮처럼 환히 비춘다. 조명이 켜진 야밤의 경기장을 보는 듯하다. ‘대체 마력이 얼마나 남아도는 거야?’ 이것만으로도 수준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져 가슴이 옥죄어 오지만……. 지금 생각할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얀델, 저놈들은…….” “파멸학자와 시체수집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도 모르겠다.” 뒤따라 포탈에 진입한 전사들에게 간단히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정면을 응시한다. “오, 역시 혼자 온 건 아닌가 보네?” 아직 정체를 유추하지 못한 수인 사내가 낄낄 웃었다. 녀석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거 셋이서 나눠도 꽤 벌어가겠는데?” 놈의 탐욕 어린 시선이 우리를 쓱 훑는다. 마치 개꿀 사냥터의 잡몹A라도 된 듯한 기분. 하, 축하한다고 해서 그냥 살려 보내주는 건 아닐까 기대도 했건만. “저급하긴.” 백발을 한 초로의 마법사, ‘파멸학자’가 맘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왜요? 그쪽도 이것 때문에 굳이 남겠다고 한 거 아닙니까?’ 수인이 물었으나 파멸학자는 귀찮다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시체 수집가가 웃으며 껴들었다. “피싯, 당신은 아직도 저 노괴를 모릅니까? 전리품이고 뭐고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일 걸요?” “흐음, 그런가? 그럼 우리 둘만 저급한 인간이 되겠군.” “하, 뭐라는 겁니까? 당신은 내가 장비 몇 개 얻자고 남은 거 같아요?” “……그럼 뭔데?” 시체 수집가. 아니, 광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수인. 나 역시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 남은 개개인의 동기와 목표를 알면 혹시 선택의 폭이 늘어날지도 모른단 판단. 음, 그래, 그랬으나……. “당연히! 재밌을 거 같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광대가 원탁에서처럼 과장스럽게 소리쳤다. “티끌 같은 희망 하나만으로 그 험난한 길을 겨우 뚫고서 여기에 도착한 탐험가를 죽일 수 있다뇨! 이거야말로 최고 아닙니까?” 파멸학자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그 말투는 뭔가? 갑자기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아, 그거 말입니까? 혹시 운이 좋으면 이 중에 아는 사람도 있을 거 같아서 말이죠! 피싯.” “아는 사람……?” “쩝, 그런 게 있습니다. 예전부터 다들 죽이고 싶었는데, 그냥 죽이면 재미없잖아요? 적어도 죽는 쪽에서라도 제가 누군지 아는 게 재밌지 않습니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알아서 하게. 난 마저 쉴 테니.” 파멸학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으나 나는 달랐다. ‘이 미친 싸이코 새끼.’ 놈은 우리 중 원탁의 멤버가 있다면 자신을 알아봐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가면까지 쓰고 자기를 드러냈다. 어찌 보면 놈의 각오를 보여 주는 제스처였다. 여기서 그 누구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흠, 근데 생각보다 숫자가 훨씬 많군?” 실시간으로 동료들이 포탈을 통해 진입하는 와중임에도 태연히 수다를 떨어대던 수인이 의문을 표하며 우리를 응시했다. 다만 긴장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왕가의 핵심 전력이 버려두고 간 떨거지. 그런 놈들이 몇이 되건 간에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단 거겠지. ‘오히려 좋아.’ 되도록이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놈들이 작정하고 2층으로 오자마자 일점사를 해댔으면 훨씬 더 상황이 암울했을 터. 적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피싯, 더 오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끝인가 보군요?” 저게 오만이든, 오만이 아니든 간에. 우리는 그걸 이용하면 될 뿐이다. “그래도 더 있었으면 곤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잘 됐군.” “피싯, 곤란은 무슨.” 일인군단이라고도 불리는 고위 네크로맨서. 광대가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후우웅-! 허공에서 거대한 아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어어어어어!] 수백이 넘는 시체군단을 쏟아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그토록 바라고 바라왔던. 마지막 전투를 시작할 차례다. *** 정면에서 시체군단이 몰려온다. 열심히 모은 시체들인지 장비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시체들. 위압감이 상당하다. 하지만……. “어이, 이번 전투만 이기면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지?” 도망치는 자는 없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후,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겠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전사들이 웃으며 무기를 꺼내든다. “드디어 나도 좀 면이 서겠어. 내가 자네보다 등급도 하나가 더 높은데 말이야.” 1층에서 길을 뚫던 때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검, 망치, 도끼, 메이스, 철퇴 등의 여러 무기가 밝게 빛을 뿜어낸다. 「알렉산드로 벨이 [불의 격노]를 시전했습니다.」 「랄프 켈이 [질풍검]을 시전했습니다.」 「밀튼 테테루드가 [투쟁의 깃발]을 시전했습니다.」 「전투 중 기력 소모가 대폭 감소합니다.」 그간 필드 효과 때문에 꺼내지 못한 스킬들. “와아아아아아!!” “가자아아아!!”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아낌없이 이를 꺼내며 전사들이 시체군단을 향하여 달려든다. 나도 [거대화]를 사용하며 그 대열에 꼈다. 그래, 우리가 체력이 없지 MP가 없냐? 콰아아앙-! 시체군단과 선두가 부딪치며 폭발음이 인다. 탐험가의 전투라면 응당 따라야 했을 소리. [그으으으으…….] 시체군단의 돌격이 저지된 즉시, 후방에서도 지원이 이어졌다. 날아드는 화살. 다양한 속성의 공격 마법. 그리고 원거리 계열 이능. 물론 저쪽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돌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전투 중에 몸이 석상으로 변하고. 「아벳 네크라페토가 [시체폭발]을 시전했습니다.」 자폭을 위해 개조된 시체가 난입해 살점을 터트린다. 퍼엉-! 폭발의 위력은 6등급 화염 마법 정도. 액티브 스킬을 사용하며 보다 단단하고 날렵해진 전사들을 즉사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치이이익. 독넥이 다루는 시체답게, 가까이서 핏물을 뒤집어쓴 이들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아아악!!” 그런 와중에. “어이, 바바리안! 네가 여기 대장이야?” 삼인방 중 하나인 수인이 크게 도약해 내 앞에 착지한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외형이었다. 삐죽 튀어나온 흉포한 송곳니. 온몸을 뒤덮은 털과 푸른색의 갈기. [거대화] 상태인 나와 비등한 신장과 골격. 놈은 라이칸스로프를 연상케 하는 짐승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어쩐지 장비랄 게 없더라니.’ 나는 놈을 훑으며 신속하게 분석했다. ‘강화계인가.’ 수인의 고유 능력인 ‘영혼수’. 아무래도 이 녀석은 미샤와 같은 강화계인 것으로 추정된다. 영혼수 레벨을 올리고 올려서 획득한 권능 중에 변신기가 있었겠지. ‘그렇다면 정수는 뭘 처먹었으려나?’ 자연스레 알 게 될 궁금증을 뒤로하고 방패로 얼굴을 가렸다. 놈이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오고 있었다. 콰앙-! 뼈를 울리는 묵직한 충격. ‘근력은 나보다 위.’ 역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후우웅-! 힘싸움을 피하며 뒤로 물러나던 찰나, 한 자루의 검이 휘둘러졌다. 내가 아닌 저 늑대놈을 향하여.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넌 뒤로 물러나라!”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였다. “네가 맡겠다고?” “카일 님의 지시다.” 그렇다면야. 나는 순순히 녀석에게 상대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났다. 적재적소란 말도 있지 않던가. 멜터 펜드는 우리 원정대의 유일한 3등급 탐험가다. 2층에서의 전투를 위해 지금까지 단원들과 힘을 비축하고 있기도 했고. ‘예전에 견습 기사로 지낸 적도 있댔지.’ 대인전은 나보다 녀석이 훨씬 잘할 것이다. [얀델, 들리는가?] 멜터에게 늑대놈을 맡기고 뒤를 돈 순간, 메시지 스톤에서 카일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린다.” [미안하네. 잠시 병력을 나누느라 연락이 늦었군.] “사과는 됐으니, 본론만.” [자네는 사람들을 이끌고 시체 수집가와 맞서는 것에만 주력하게. 푸른갈기는 멜터 펜드와 그의 동료들이 도맡기로 했으니.] “푸른갈기?” [아, 몰랐나? 노아르크 토벌전 때 이름을 알린 자일세. 청랑족의 후계자였지만,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후로 노아르크에 숨어 있었던 듯하더군.] 음, 오르큘리스 단원은 아니었구나. 어쩐지 보자마자 떠오르는 애가 없더라니. “알았다. 나는 이쪽을 맡지.” [든든하군. 그럼 나는 저 늙은이를 막는 데만 모든 걸 쏟아붓겠네.] 늙은이라면, 역시 파멸학자를 말하는 거겠지? 어쩌면 카일이 말했던 복수의 대상자가 저 늙은이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쪽은 믿고 있겠다.” 나는 대화를 끝내듯 말하며 사방에 가득한 시체들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때 또다시 음성이 들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 [곧 자네 동료들이 도착할 걸세.] “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콰직-! 그렇게 방패로 머리를 보호하던 시체를 방패째로 짓뭉개던 찰나였다. 서걱-! 내 측면을 노리던 시체의 관자놀이에 아다만티움 대검이 틀어박혔다. “지금부턴 우리도 돕겠다!!” 아이나르. 그리고……. “비요른!” 미샤. 근딜 자매가 자연스레 내 양쪽 후면에 서서 전투 자세를 취했다. 평소 팀 애플 나라크가 싸울 때 애용하던 진형이었다. “이번에도 혼자 싸우겠다고 억지 부릴 건 아니죠?” 돌아보니 곰아저씨의 소환수인 웅이를 타고 있는 레이븐이 보였다. ‘아니, 잠깐만 웅이가 여기 있다는 건…….’ 근처를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곰아저씨도 함께 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후방에 있지 왜 너희까지 이곳에…….” 근딜 자매는 그렇다 쳐도, 이 둘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뒤쪽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할 텐데. 곰아저씨가 대형 석궁에 화살을 걸며 대답했다. “곡사는 내 특기가 아니라서 말이지.” 음,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그게 진짜 이유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나중에 6층으로 올라가면 [도약시]부터 먹이든가 해야지.’ 곰아저씨에게 추후 먹일 정수를 생각하며, 메이스를 휘두른다. 다만 닿기도 전에 시체가 쓰러졌다. 화르륵! 미간에 꽂힌 불의 화살. “아저씨!!” 그래, 너도 온 거구나. 보니까 옆에 언니인 다리아도 같이 있다. 얘 데리고 몸을 사리려고만 하는 거 같더니 갑자기 심경이 바뀌기라도 했나?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다. “단장님을 지켜라!” 멜터 펜드와 그의 단원들은 전장 내에서도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서 늑대놈을 열심히 때려잡고 있다. “이 떨거지들이……!” 극찬이 터져나오는 걸 봐서 순조롭게 공략을 해가고 있는 듯하다. 아직까지 파멸학자가 조용한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믿자.’ 뭔가 일을 벌이면 카일이 알아서 막아주겠지.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따라서……. “…….” 넓게 전방을 싹 훑는다. [거대화] 상태이기에 멀리 있는 광대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은 거대한 시체괴물 위에 앉아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즐거운 구경이라도 하듯이. ‘거,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용살자 그 새끼도 처음 만났을 땐 저런 눈빛이었는데. “미샤, 아이나르. 지금부터 길을 뚫는다.” 나는 본격적으로 시체군단을 뚫고서 앞으로 진격했다. 목표는 시체 수집가. 목적은 놈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뇌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 “얀델! 얀델이 또 뭔가 하려 한다!” “설마, 시체 수집가를 노리는 건가?” “위대한 전사를 따르라!!” “가자아아아!!” 나를 중심으로 탐험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26화 역전 (2) 최악은 면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고인물이 남기는 했으나, 수많은 병력이 기다리던 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고작 셋뿐. 심지어 놈들은 자신감의 발로인지 우리가 포탈을 타고 올라와 진형을 갖출 때까지 일점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긍정적인 건 아니다. 지금은 어찌 밀리지 않고 싸운다고 한들, 이 전투는 장기화될수록 우리에게 불리하다. 네크로맨서는 그런 존재니까. [그어어어어어어!] 실시간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대규모 전투. 시체군단의 손에 살가죽이 찢기고, 목이 베인 동료의 시신이 일어나 우리를 덮친다. 콰직-!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시체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있기야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결국 수적 열세에 처하는 건 우리가 될 터. ‘하, 조합이 무슨.’ 도무지 안 할래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고작 셋뿐이지만, 그 셋의 밸런스가 너무 좋다고 해야 하나? 시체 수집가의 물량. 푸른갈기의 대인전투. 광역기와 압도적인 변수 창출 능력을 지닌 최상위 마법사 파멸학자까지. 그냥 싸움만 잘하는 고인물만 셋이었으면 훨씬 더 승산을 높게 점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이 조합이니까 셋만 남겨두고서 다 위로 올라간 거겠지.’ 짧게 스친 아쉬움을 털어낸다.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없듯. 꼭 모든 부분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가 시체 수집가이기에, 내게 유리해진 부분도 없잖아 있다. 「캐릭터가 [황야의 무법자]를 사용했습니다.」 도플갱어 숲에서 얻은 이걸 여기서 또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전선의 최선두에서, 오늘 하루 동안 수없이 반복해 온 일을 또 한 번 행한다. 길을 뚫는 것. 콰지지직-! 콰아앙!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각종 장비까지 챙겨 입은 시체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간다. 간단한 이유다. 황야의 무법자는 네크의 극카운터 아이템 중 하나거든. 「인간형 몬스터의 숫자에 비례해, 일시적으로 근접 물리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숫자 비례 근접 물리 피해량 상승. 모르긴 몰라도 이미 증가율은 최대치를 찍었을 게 분명하다. 음, 그러니까 최대치가……. 「현재 증가율 1,000%.」 10배였지? 콰직-! 삼국지의 여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대충 휘두른 메이스질에 펑펑 터져 나가니 [휘두르기]를 쓸 필요조차 없다. 뭐, 쓰면 도움은 더 되겠지만……. 한정적인 MP는 아껴서 [거대화]에 투자하는 게 올바른 판단일 터. “허, 무슨 5등급 탐험가가…….” “위대한 전사다!!” “뒤를 따르라!” 무지성 돌격을 시작한 내 뒤로 탐험가들이 따르며 자연스레 돌파 진형이 갖춰진다. 오케이, 이럼 뒤에서 칼 맞을 일은 없겠고. “자폭병이다!” 초기에 무수한 피해를 입힌 [시체폭발]도 이제는 슬슬 대처가 되기 시작했다. 그야 공략이 일상인 베테랑 탐험가들 아닌가.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상대법을 터득한 것이다. “마법사!” “데르투 테이란!” 8등급 보조 마법 ‘돌풍’. 콰쾅-! 자폭병의 몸이 부풀기 무섭게 넉백 효과를 지닌 마법, 혹은 스킬로 멀리 밀쳐낸다. 물론 그럼에도 간간이 진형 내에서 터지며 피해가 발생했고, 그중에서도 많은 타격을 입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치이이이이익-!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자폭병의 독액. 다만, 그렇게까지 따갑지만은 않다. 독 내성은 그리 올려 두지 않았지만……. [던전 앤 스톤]은 팀 게임 아닌가. 「아루아 레이븐이 7등급 지원 마법 [중화]를 시전했습니다.」 독딜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버프 마법. 「레베카 아이젤이 [분담]을 시전했습니다.」 스킬을 건 대상이 입는 피해의 3분의 1을 대신 받는 액티브 스킬. 「칸 알곤이 [집단면역]를 시전했습니다.」 적아 구분 없이 반경 15m 내의 모든 이에게 본인의 내성 수치 절반을 공유하는 오오라형 스킬. 「폴튼 카셀이 [피의 샘]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피해를 입을 시, 재생의 구슬이 생성됩니다.」 심지어 내가 피해를 입으면 몸에서 치유 토큰이 터져 나오며 주워 먹는 동료들의 피가 찼다. 평균 5등급 탐험가가 수백 명이 모이니 말 그대로 없는 스킬이 없는— 후우웅-! 그때 고블린 숲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십 개의 빛구체가 일제히 사라지며 주변이 어두워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심하게, 곧 놈이 움직일 걸세.] 파멸학자. 그래, 얘도 언제까지 구경만 하진 않겠지. 화르르륵-! 일식이라도 찾아온 듯 캄캄해진 하늘. 그 위에 시뻘건 구체가 생겨나며, 급속도로 크기를 키운다. [파멸의 구일세.] 파멸의 구. 게임 내에선 듣도 보도 못했던 공격 마법.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저 소환 마법은 파멸학자가 술식부터 모든 걸 새로이 만든 시그니처 마법이니까. ‘2등급 마법이랬지.’ 심장이 콱 조여온다. 최상위 공격 마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위력을 지녔는지 나는 알고 있다. 물론, 크게 의미는 없다. 몰랐어도 대강 짐작은 했을 테니까. 저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 미친 늙은이가!! 나까지 죽일 셈이냐!” 하늘에 뜬 저것을 보자마자 몸서리치며 이곳을 뜨려는 늑대놈. 저 멀리 보이는 광대도 다르지 않다. 당황한 얼굴로 뭐라 소리치고 있다. 소리까진 들리지 않지만 내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외각에 위치한 시체군단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으니까. ‘니미럴.’ 파멸학자의 동료인 그들은 판단했다. 저 마법이 떨어지면 적이고 아군이고 뭐고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고.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내가 막을 테니, 자네들은 나아가게!] 불안을 이겨내고 당장은 길을 뚫는 것에 집중한다. “뭐 하나! 굳지 말고 계속 움직여라!” “하, 하지만 저게 떨어지면……!” “도망가면 어디로 갈 건데? 싸워라!” 이젠 내가 먼저 뭘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독려하며 전의를 다잡는 탐험가들. “온다……!” 누군가의 읊조림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하늘 전체를 메울 만큼 비대해진 불길한 구체가 이윽고 지상을 향해 수직 낙하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카일 페브로스크가 3등급 공격 마법 [꿰뚫는 강철]을 시전했습니다.」 그 순간 파멸학자를 마크하겠다던 카일의 마법이 완성됐다. 솨아아아아-! 이때를 대비해 마법진까지 미리 그려 뒀는지 후방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회색의 빛. 번뜩-! 찰나 동안 점멸한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거대한 화살이 거대한 운석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충격음. 솨아아아아아-! 세찬 바람이 불어오며 지상을 휘몰아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피, 피해!!” 수백으로 쪼개진 크고 작은 조각들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비처럼 쏟아진다. 탐험가들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났으나, 실상 지상에까지 닿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카일의 공이었다. 쾅! 콰쾅! 콰콰콰쾅! 쏟아지는 수백 개의 조각이 반투명한 결계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폭발하며 소멸한다. 아무리 3등급 마법사라도 이렇게 넓은 범위에 보호막을 펼치는 게 가능할 리는 없으니……. ‘……전부 컨트롤 한 건가?’ 조각들의 경로를 읽고,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해 하나하나 막아냈다. 그게 합리적인 추측이겠지. 실제로 레이븐은 입을 떡 벌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게, 가능하다고……?” 마법사인 만큼 더욱 여실히 느끼는 것이다. 방금 한 기교가 얼마나 수준 높은 일인지를.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대 마법사 역시 보통의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파멸학자는 카일보다도 윗줄로 여겨지는 오르큘리스 소속의 대마도사. [젠장 맞을 늙은이.] 쏟아지던 운석들이 변화구처럼 궤도를 틀어 결계를 피해 지상을 강타한다. 쿠웅-! 운석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광대가 풀어 놓은 시체군단의 중심부, 나의 뒤 혹은 옆에 떨어지며 동료를 짓뭉갰다. 그리고 골렘의 형태로 변하여 일어섰다. ‘5등급 소환 마법 불거인.’ 레이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페브로스크 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분명 소환 술식은 없었는데……!” [놈이 잔여 마력을 이용해 남은 조각들에 새롭게 술식을 짜서 부여했네.] “그 짧은 순간에, 5등급 마법을… 그것도 수십 개나요……?” 레이븐의 경악 섞인 감탄 중얼거림. 다만 카일에게는 친절히 대답해 줄 틈은 없는 듯했다. [얀델! 나는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 하니, 뒤를 부탁하겠네!] 급하게 끊긴 연락. 후, 파멸학자는 자기가 맡겠다고 하더니. 결국 뒤처리는 내 몫이구나. ‘하긴, 아무리 이 아저씨여도 저딴 괴물을 혼자 맡는 건 불가능하겠지.’ 심지어 카일은 1층에서 메스 텔레포트를 쓰느라 마력도 부족한 상황. 새삼 아직은 우리가 불리하단 게 느껴진다. 푸른갈기를 맡고 있는 멜터 펜드. 파멸학자를 전담하기로 한 카일. 수백의 탐험가를 이끌고 시체 수집가를 조지기로 한 나까지. 어느 한쪽이라도 패하는 순간 게임오버다. 아슬아슬했던 균형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모두가 쓸려나가겠지.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스르르륵. 어느새 완전히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는 불거인을 향해 달려든다. 손에 거대화된 메이스를 꼭 쥔 채. 타닷. 높이 [도약]해. ‘휘두르기.’ MP까지 써가며 메이스를 내리찍는다. 딱 한 방이면 충분했다. 5등급 소환물 불거인의 핵을 박살내는 것은. 콰아아아아앙-! 마력 입자로 변해 휘날리는 불거인. 나는 그 너머로 보이는 정면부를 응시했다. 저 멀리 광대가 보이고 있었다. ‘아직도 처웃고 있네.’ 놈만 죽일 수 있다면, 유리해진다. *** 한 걸음씩, 느릿하게 나아가고 있다. 깨부수고, 짓밟고, 때로는 시체를 방패로 밀쳐서 내던지며. 콰직-! 삶을 위한 길을 열어내고 있다. 솨아아아아-! 하늘에서는 파멸학자가 쏘아낸 불의 비가 쉼없이 내리는 중이다. 콰콰쾅! 카일이 열심히 수비 마법을 펼치며 치열하게 응전했으나 모두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다. “아아아악-!”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처절하게 삶을 갈구해 여기까지 다다른 그들의 몸이, 새카맣게 불에 타 축축한 지면에 쓰러진다. 그리고…….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켜 우리를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각하고 만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콰앙-! 저 멀리에서는 시체더미가 대포알처럼 날아와 진형을 무너뜨렸다. 몇 분 전부터 있던 변화다. 시체 수집가가 아공간에서 소환물들을 더 꺼내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제 거의 다 왔다 싶었는데. ‘대체 비축을 얼마나 해둔 거야?’ 욕지거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이미 본대에서 한참 떨어져 시체군단 무리 속에 포위된 상황이지만, 앞을 향해 달려 나간다. 몇 명이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많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헬—라아아아아아!” 아이나르가 시체를 베어내며 외치자, 뒤에서 옆에서 후창이 이어진다. “그래, 베헬라다아아아아!!!” 바바리안의 것이 아니다. 인간, 드워프, 혹은 수인. 그래, 이게 중독성이 또 있긴 하지. 쿵-! 시체더미 하나가 날아와 내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섯 개의 시체가 합쳐진 형태의 모습. 그 기괴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나는 그 시체더미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한센 켈더스.’ 1일 차에 통로를 헤매다 만났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도 몰랐을 때고, 광대를 만나기도 전이었다. 그때 녀석은 우리에게 합류 제안을 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신중한 녀석이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녀석은 거절당하고도 웃으며 떠났다. 그리고……. [그어어어어어…….]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다. ‘……진짜 우리 쪽 사람이었던 거구나.’ 이한수였다면 보는 것만으로 속에 든 것을 게워냈을 끔찍할 몰골. 이를 향해 메이스를 휘두르며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저 녀석을 믿었다면. 그래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면……. 적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싸우고 있었을까? 콰직-!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정확한 건 단 하나다. 그때의 내가 틀렸다. 최선의 선택조차 아니었다. 타인이란 이유로 노력하지 않았다. 분명 좀 더 노력했다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 시체더미를 밟으며 앞으로 대시한다. 그러면서 짧게나마 생각한다. 과연 이 녀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뭘 할 수 있던 녀석일까? “…….” 이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 내게 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드왈키도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처음엔 그냥 이상한 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던가? 녀석은 우리 중에 가장 다정했으며, 내가 본 어떤 그 누구보다 대단한 마법사였다. [얀델, 아직 멀었나?] 카일의 음성에 잡념을 덜어낸다. “얼마 안 남았다.” 정말로 이제 머지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광대, 저놈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 민첩독넥이라 근접전도 만만치 않겠다마는. 그래 봤자 네크의 약점이야 뻔하지. 심지어 이만한 대군을 소환했으면 놈이라도 MP 소모가 장난 아니었을 터. 카일이 파멸학자를 견제하고, 멜터 펜드가 그 늑대놈만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딱히 변수는 없— [좀 더 서둘러 주게.] 응? [뭔가 느낌이 좋지 않네.] 느낌이 좋지 않다니? 이것도 마법사의 감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메이스를 휘두르던 차였다. [그어어어어어……!] 입 냄새를 풍겨대는 시체들 사이로 처음 보는 탐험가 무리가 나타났다. 한 팀, 두 팀, 세 팀……. 하나씩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숫자. “무슨 소란인가 싶어 와봤더니, 이게 무슨…….” “이제 저희도 돕겠습니다!” “라프도니아 잔당들이다! 죽여라!!” “와아아아아아아!!” 2층에서 사냥 중이던 노아르크 측 탐험가였다. 227화 역전 (3) 타켈란 아르베논.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검을 휘두른다. 육신에 남겨진 모든 힘을 다해, 적을 죽이기 위해 팔을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째서?’ 무엇보다 소중한 아내가 죽었다. 한데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바바리안은 대답했다. [소식을 전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그래, 그게 있었지…….] 자포자기 상태이던 타켈란은 그의 말을 듣고서 이 험난한 여정에 발을 올렸다. 동료의 유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란 걸 그 스스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모든 걸 지켜 낸 바바리안.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미련하리만치 우직한 목소리로 광기에 빠진 참극을 막아 내고.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다.] [헤인델 교의 레이시 나레트입니다.] [라프도니아의 종군 마법사일세.] 명망 높은 탐험가들의 인정을 받으며. [베헬—라아아아아아!!] 그 험난했던 여정을 가장 위험한 최선두에서 이끌며 목적지까지 인도한 위대한 바바리안. 이 남자는 타고난 리더다. 자신이 처음 그에게 끌렸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대단한 사내가 소중한 것을 잃고서 절망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거 같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런 남자도 해내지 못했잖아? 내가 녀석들을 지켜 내지 못한 건 당연해. 불행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역겨운 동기로 그는 이 여정을 따라왔다.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서걱-! 검을 휘두르고 있다. 나만이 아닌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아, 고맙네. 타켈란이라고 그랬지?” “…….” “과묵한 친구란 말이야.” 수년을 함께한 동료를 잃은 주제에, 처음 본 사람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타켈란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서걱-! 나는 왜 아직 싸우고 있는가. 저 바바리안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 그렇다면 어째서. “후, 이 상황에서 증원이 오다니.” “아마 우리는 죽겠지?” “하, 미치겠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잡담은 그만하고, 싸우기나 해라!” “그래, 억울해서 그냥은 못 죽지!” 이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직감하고서도 마지막까지 항전하고 있는가. “와아아아아아-!” 탐험가들의 눈빛을 훑던 타켈란은 머지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콰아아아앙-! 연신 폭발음이 피어나는 저 너머. 수많은 적이 몰려오는 그곳에서. 거대한 등을 지닌 사내가 싸우고 있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아직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으며. *** 상황은 암울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긍정적인 면을 떠올린다. ‘장비는 딱 2, 3층 수준.’ 숫자는 제법 되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상당히 뒤떨어진다. 하기야 실력이 좋았으면 진작에 위층으로 올라가 사냥을 했겠지. 실제로 노아르크 잔당이 시체 군단에 뒤섞여 우리를 공격해 왔지만, 당장 우리에겐 큰 차이가 없었다. 우리 수준에선 광대 놈이 소환한 시체 한 구가 더 위협적이었으니까. ‘문제는… 길을 뚫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단 것 정도.’ 사실 이게 가장 골치 아픈 점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최대한 서둘러 광대를 조지고, 늑대놈 혹은 파멸학자를 다구리 쳐야지만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 그런데 노아르크 잔당 새끼들이 나타나다니. ‘이렇게 되면 뒤쪽 진형도 무너질 텐데…….’ 더욱더 시간이 없어졌다. 조급함이 치밀어 오를수록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이 담겼다. 콰직-! 이번에도 역시나 한 방에 죽었다. 다만, 내가 적을 해치우는 이 순간에도. “아아악!” 아군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누구보다 진실됐다. 누군가는 가족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사랑을 고백했고, 왕에게 쌍욕을 던지기도 하였으며, 단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을 스스로의 정체를 세상에 말하기도 하였다. “표정… 하고는. 야, 나 악령이야.” “…뭐? 그, 그게 무슨!” “속여서, 미안…. 지금까지, 고마웠… 커헉! 이제, 드, 디어 집에… 아, 아아, 엄마……. 많이 늦, 었…….” 그래, 이 많은 사람 중에 플레이어가 한 명도 없을 리 없지. 두근-!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많은 역경을 이겨 내고서 이곳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꺾이는 건 쓰러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아직 팔과 다리가 움직이지 않나. 숨이 멈추고 피가 식기 전까진,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치는 게 옳다. 그래, 그러니까……. 콰직-! 메이스를 휘두르며 생각한다. 이곳에 왔던 첫날처럼.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이 뭐지? 음, 일단 파악부터. “카일! 그쪽은 어떻지?” [아직까진 겨우 버티고 있지만 좋지 않네.] 마법사, 궁수 등의 원거리 포지션이 모인 후방도 역시 피해가 큰 모양이다. 하긴, 당연한가? 노아르크 탐험가들이 덮쳐 온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테니. 대부분의 전사가 이쪽에 있으니 대처하기가 어려웠겠지. ‘사방이 포위된 셈인가.’ 다만 놀랍게도 도주로는 있다. 우리가 타고 올라온 포탈. 카일도 사기를 위해 말만 하지 않았지, 그걸 타고 1층으로 도망친 놈도 분명 있을 것이다. 도주란 언제나 매력적인 선택지니까.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면 더욱더. “…얀델, 내려가 정비를 하는 건 어떤가!” 한 전사가 내게 조언하듯 외친다. 근데 이게 메시지 스톤을 통해 카일에게도 들렸을까? [절대 안 되네. 어차피 결국 놈을 피해 다시 올라와야 할 텐데, 그땐 놈들도 우리가 진형을 잡을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을 걸세.] 허튼 생각일랑 하지 못하도록 카일이 강하게 말한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어차피 그쪽은 생각도 안 했으니까. 0과 1은 다르다. 그리고 나와 카일의 판단이 옳다면. 아무리 봐도 1은 이쪽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렇기에. “멜터 펜드는 어떻지?” 변수가 될 수 있을 또 하나의 전장에 대해 묻는다. 다만, 이번에도 긍정적인 답변은 없었다. [잘 붙잡고는 있지만 단시간에 승부가 나기는 어려울 듯하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비요른!!”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니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한 자폭병이 보인다. “데르투 테이란!” 다행히 제때 레이븐이 ‘돌풍’ 마법을 사용해 자폭병을 밀어냈다. 퍼엉-! 소리 내며 체액을 터트리는 자폭병. 같은 시체들은 별 타격이 없었으나, 증원을 온 노아르크 탐험가들은 달랐다. 치이이이익-! 근처에 있던 자는 그냥 흘러내렸고, 딱 한 방울이 튄 자들조차 얼굴이 하얗게 변해 몸을 비틀거렸다. 왠지 입맛이 썼다. 라프도니아든 노아르크든, 사람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건 똑같구나. “그렇다면 파멸학자는 어떻지?” 한숨 돌릴 새도 없이 하던 대화를 이어 갔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정보. “죽일 수 있나?” [이제 마법진도 완성됐으니, 시도는 해 볼 걸세. 하지만…….] 카일이 말꼬리를 흐린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미안하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보다 더 차이가 벌어져 있더군.] 딱히 뭐라 할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이 아저씨가 차원문 타고 도망쳤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터. 게다가 파멸학자는 내가 봐도 미친 수준의 마법사였다. [그래도 아까 말했듯 시간은 벌 수 있을 걸세. 그 안에 어떻게든 한 방 먹여 보겠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의 말에 문득 드왈키가 떠올랐다. “혹시 그 각성 마법을 말하는 건가?” […비슷한 걸세.] “괜찮겠나?” [대가가 두려웠다면, 이곳에 남았을 리 없지 않은가. 내가 간절히 바라 왔던 순간일세. 그리고 오랜 시간 개량을 했기에 꼭 목숨을 잃는 것만도 아니고.] “…그렇군.” 나는 빈말로라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거야 말로 가식일뿐더러……. “아아악!!” 지금 이 자리에 목숨 바쳐 싸우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나조차 그러고 있다. 그 일례로 만약 당장 내가 쓰러지더라도, 사람들은 슬퍼할 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전투였으니까. [그럼 이제 자네는 어쩔 텐가?] 카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웃었다. 이 아저씨는 무슨 질문을 해도 이런 걸 하지? [차라리 이쪽으로 돌아와 함께 싸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됐다.” 나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노아르크의 탐험가들이 증원을 오면서 이제 물량에서도 밀리게 됐지만……. “변한 건 없다.” 카일 페브로스크는 파멸학자를. 멜터 펜드는 그 늑대 놈을. “우리는 시체 수집가를 맡는다.” [그럴 줄 알았네.] 메시지 스톤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웃지? 우리가 못 할 거 같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세. 아까 전에 자네가 한 말이 떠올라서 그러네.] 내가 한 말? [전사는 힘들면 웃는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거기에 마법사도 껴 주게.] 음, 우리 전사들은 좀 더 호쾌하게 웃는데 말이지. “다음에 더 남자답게 웃는 걸 보여 준다면.” [다음이라…….] 아, 이 상황에 농담으로는 조금 그랬나? 약간 후회가 됐으나, 머지않아 한결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다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거 아나? 난 돌아가게 되면 책부터 쓸 걸세. 내 일생을 담은 그런 책. 어릴 적부터 꿈이었지.] “기회가 되면 읽어 보지.” [영광이군. 혹시 책을 쓰게 되면 자네가 한 말을 글귀로 써서 넣어도 되겠나?] “글귀?” [전사는 힘들면 웃는다는 거 말일세. 묘하게 자꾸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돈단 말이지.] 어, 그거 그냥 대충 던진 말이었는데. 저리 진지하게 받으니 어딘가 창피하다. 하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을 허락해 주지 않으랴. “쓰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내 대답에 카일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런가? 그럼 이제 문제없겠어.] 아까보다 훨씬 더 호쾌한 웃음이었다. *** 현재 전투 구도는 조금 복잡하다. 일단 포탈을 중심으로 원정대의 원거리 딜러 라인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전사들이 막고 있다. 원래는 정면의 시체 군단만 막으면 됐지만, 뒤에서도 노아르크 탐험가가 덮쳐 오는 바람에 이렇게 돼 버린 것. ‘저쪽도 죽을 맛이겠네.’ 전열을 가다듬는 와중에 멜터 펜드와 그의 클랜원들은 늑대 놈 레이드를 뛰던 그대로 전장 한복판에 남겨져 버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만큼 힘들 거다. 우리 역시 시체 수집가 놈을 잡으러 가기 위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상황이니까. 일종의 별동대라 할 수 있다. 음, 그런 의미에서 한번 중간 점검. “레이븐! 인원은?” “네? 아, 40명 정도 되는 거 같아요!” 후, 진짜 그 사이 많이도 죽었구나. 처음엔 백 명은 훌쩍 넘었던 거 같은—. 솨아아아아-! 그때 돌연 지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순간에 전장 전부를 뒤덮은 거대한 적색 마법진. “…공간 마법 술식이에요!” 레이븐이 가장 먼저 술식을 읽었다. 다만 그녀가 알아낸 건 딱 거기까지. 메시지 스톤으로 카일의 침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놀라지 말게. 때가 온 것뿐이니.] “그럼 계획에는 이상 없는 건가?” [그래, 그 늙은이라면 분명 이 마법을 쓸 거라 생각했지.] 그 말에 나도 안도했다. 파멸학자가 공간 마법 술식을 쓰면, 녀석의 마력을 역으로 이용해 다른 마법을 쓸 거라던가? 대충 그런 계획이었는데, 난 마법사가 아니라 자세한 원리까지는 모른다. 게임에서도 이런 건 구현이 안 됐었다. 2D 게임이란 포맷이 가진 한계였겠지. 하지만……. ‘슬슬 나도 준비해야겠네.’ 제대로 통할 거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게 아니면 답이 없으니. 솨아아아아아-! 이내 마법진에서 뿜어진 빛이 극한에 이르며 눈앞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녀오겠네.] 카일의 음성이 한 번 더 들려왔고. 번뜩-! 눈부신 섬광이 전장을 뒤덮었다. 「카일 페브로스크가 2등급 시공 마법 [평행계]를 시전했습니다.」 귓가를 통해 울리는 이명. 눈을 떴을 땐 흐릿한 시야로 변한 것 없는 전장이 보인다. 나는 짧게 읊조렸다. “카일, 성공인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말인즉, 마법은 성공했다는 거겠지. 지금쯤 카일은 고블린 숲을 바탕으로 한 가상 공간에서 파멸학자와 1:1을 뜨기 시작했을 거다. 부디 이기고 돌아왔으면 하지만……. ‘아닐 때도 대비해야겠지.’ 카일은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다고 여겼다. 그 안에 이쪽에서도 뭔가 해내야 한다. “뭣들 하나! 달려라!” 새하얀 섬광에 걸음을 멈추기도 잠시, 다시금 별동대를 이끌고 돌파를 이어 나갔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던 파멸학자의 견제가 없어지니 진군은 한결 수월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쯤이면 되겠네.’ 이내 목표 거리에 도달했다. 더 이상 목숨을 건 돌파는 필요 없다. 따라서 나는 함께 길을 뚫던 테테루드에게 별동대를 맡겼다. “테테루드, 이제 너는 남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라.” “그럼 놈은 맡기겠네.” 이미 길을 뚫으며 의사소통은 끝난 상황. “자, 들었지? 우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간다!” “근데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뭐, 이쪽은 얀델이 알아서 해 주겠지!” “가자!!” 이내 테테루드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회군하여 멜터 펜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본대까지는 무리여도 저기는 가겠지. 일단 도착하기만 하면 늑대 놈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자, 다들 어서 올라타라.” 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미샤가 잽싸게 점프해 [거대화] 상태인 내 어깨에 앉았다. “진짜 우리끼리 가는 거냥?” 그 다음은 아이나르. “오! 아루루가 왜 날 타고 다니는지 알 거 같다!” 어깨에 올릴 사이즈는 아니라 왼팔로 허리를 감아 안아들었다. “실례할게요.” 소환 해제된 웅이에서 내린 레이븐은 미샤의 무릎 위에. “…이거, 굉장히 기분이 이상하군.” 덩치가 가장 큰 곰아저씨는 내 목을 조르며 뒤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러니까 정말 한 팀이 된 거 같네요!” 마지막으로 에르웬이 내 오른쪽 어깨에 앉았다. 허, 이러니까 진짜 이동 수단이 된 거 같네. 그렇게 막 출발하려던 차. “잠깐만.” 다리아가 나를 붙잡았다. 왠지 짐작 가는 말이 있어 미리 못을 박았다. “미리 말했지만, 에르웬은 못 보낸다.” 아무리 언니의 지위를 이용해서 뭐라 해도 줄 수 없다. 이번 전략의 핵심은 바로 에르웬이니—. “그게 아니야. 나도 가겠어.” “뭐?” 그래, 너도 염치는 있다는 거구나. “…그 눈빛은 뭐지?” “별거 아니다. 이리 와라.” 나는 남은 한 팔을 얼른 뻗어 다리아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그으으으으……!] “죽여라! 저놈만 죽이면 끝이다!” 광대 놈이 소환한 시체를 비롯해, 노아르크의 2층 좆밥 탐험가들이 실시간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전방을 확인했다. 광대놈과 나 사이에 백이 넘는 노아르크의 탐험가들이 있고, 그 이상의 시체 군단이 즐비하지만……. ‘한 60m 정도 되겠네.’ 거리 체크만을 한 번 더 끝마치고 용수철을 누르듯, 무릎을 더욱 굽힌다. 그리고……. “꽉 잡아라.” 이번엔 낮게 점프가 아니라 있는 힘껏 점프. 「캐릭터가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몸이 날아오르며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난다!! 날고 있다!!” 포위 진형을 갖추고서 늑대놈을 레이드하고 있는 멜터 펜드. 그쪽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테테루드. 중심부의 본대. 화룡점정으로는 저 멀리 안전한 곳에서 나를 보며 쪼개고만 있던 광대 새끼까지. “어, 어…….” 이내 최고 높이에 도달한 순간.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거, 나중엔 갑옷에 잡을 거라도 만들어야 하나? “꺄아아아아아아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몸이 빠르게 추락한다. 시체 괴물 위에 앉은 광대가 날 보더니 소환수를 후진했다. 아니, 이제 와서 그걸로 되겠냐고. 이왕 카이팅을 할 거면 더 빡세게 하든가. 콰아아아아아아앙-! 대포알처럼 지면에 처박히는 몸뚱이. 「캐릭터의 총 중량이 500kg 이상입니다.」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이 피해 범위에 추가로 적용됩니다.」 [반동]에 의해 광대 주변에 있던 노아르크 잔당과 시체 군단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아, 광대가 타고 있는 시체 괴물은 제외였다. 중량이 500을 넘는지 끄떡도 안 했다. 물론 사소한 문제였다. “만티코어의 정수를 먹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피싯!” 여전히 여유로운 눈으로 날 보는 광대.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 맘 같아서는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고 싶지만 나는 서둘러 [거대화]를 종료했다. 단기간에 줄어드는 육신. “꺅!!” 매달려 있던 동료들도 모두 나가떨어졌고, 그런 날 보며 광대가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이런이런! 설마 MP도 다 쓴 겁니까? 겨우 힘내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아깝게.” MP를 다 쓰기는 지랄. 뭐, 직접 처맞아 보면 저 병신 같은 말투도 언젠가 관두겠지. “에르웬.” “아, 네!”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에르웬이 이능을 사용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정령화]를 시전했습니다.」 [정령화]. 5등급 몬스터 에반의 이능이자, [던전 앤 스톤]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컨셉을 갖고 있던 스킬. 효과는 간단하다. 시전자는 영체 상태가 되어 물리 피해 면역 상태가 된다. 그리고…….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캐릭터에게 ‘계약’을 제의합니다.」 한 명과 계약을 맺어 일시적으로 여러 힘을 공유한다. [아저씨, 손 잡아 줘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음성. 나는 홀린 사람처럼 에르웬이 뻗은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세찬 불길이 피어나며 온몸을 보호하듯 집어삼킨다. 이름하여, 엘리멘탈 바바리안(불) 모드. “에르웬, 불 꺼라.” […네? 아, 맞다!] 그제야 내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을까? 에르웬이 빠르게 속성을 변경했다. 지지지직. 안 그래도 두툼하던 피부가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지며 더욱 두꺼워졌다. 「캐릭터의 육신에 대지의 정령이 깃듭니다.」 「화염 속성 받는 피해가 절반 감소합니다.」 「물 속성 받는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중독 면역 보너스.」 「둔기류 무기를 사용 시 파괴 행위에 강한 보정이 추가됩니다.」 「물리 내성 수치가 대폭 상승…….」 「…….」 암, 남자는 바위지. 228화 역전 (4) [던전 앤 스톤]엔 특정 종족 특화 정수가 몇 가지 있다. 방금 에르웬이 쓴 [정령화]가 대표적이다. 다룰 수 있는 정령이 없는 인간이 사용하면 무 속성의 영체 상태가 되는 게 전부. 심지어 스킬 계수부터가 정령을 다루는 데 쓰이는 자원인 엘리멘탈, 자연력으로 붙어 있다. 사실상 요정 전용 정수라 볼 수 있는 셈. 부스스스. 팔을 움직일 때마다 흙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마치 암석 거인이라도 된 기분. 아, 거인이라고 하기엔 그런가? ‘후, [거대화] 마렵네.’ 그 웅장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 타닷. 미련을 지우며 앞으로 대시한다. [구웨에에에엑!] 그 찰나 광대놈이 타고 있던 시체괴물이 입으로 독액을 뿜어냈다. 방패를 들 것도 없이 몸으로 받아 냈다. 엘리바바(땅) 모드는 독 계열에 면역이니까. “아, 그런 효과였죠?” 역시 이 새끼도 치트 버전을 깨고 왔는지, 직접 보고서야 내 상태를 깨달았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래, 머리 좀 썼네. 피싯.” 메인 딜인 독이 차단당했음에도 웃는 광대. 하기야 그럴 것이다. 녀석은 그냥 독넥이 아니라 민첩독넥이니. 타닷. 놈이 타고 있던 시체괴물에서 내리며 뒤로 물러선다. 나 역시 전력으로 달리는 중이지만, 실시간으로 멀어지는 거리. 엘리바바(대지)에 붙은 패널티 때문이다. 「민첩 수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체감상 2배는 느리게 움직이는 몸뚱이. 사실상 현 상황에선 물 속성 피해가 곱절로 들어온다거나, 항마력 수치가 대폭 감소하는 것보다 이게 가장 큰 패널티였다. “왜? 이건 예상 못했습니까?” 독이 막히자마자 접근전을 포기하고 거리 조절을 시작한다. 자존심 강한 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 하지만……. ‘내가 [거대화]를 왜 껐는데.’ 시체 수집가라는 이명을 지닌 최상위 탐험가가 5등급 바바리안을 상대로 튄다고? 그럴 줄 알았어 새끼야. ‘도약.’ 스킬명을 속으로 읊조리며 지면을 박찬다. [꺅!] 영체 상태로 변해 내게서 5m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에르웬이 머리채 잡히듯 딸려온다. 왠지 미안하게 됐지만……. ‘최대 거리는 30m 정도로 보면 되겠네.’ 침착하게 현 상태를 파악한다. [거대화] 중에도 70m를 뛰었던 걸 생각하면 턱없이 줄어든 거리. 새삼 이 몸뚱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졌다. 아마 [거대화] 중이었다면 반도 안 됐겠지. 그래도 속력 자체는 비슷했다. “베헬—라아아아아!!” 이동기답게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콰아아아앙-! 착지 지점을 중심으로 땅이 일렁인다. 이펙트 자체는 이전과 동일했으나, 아까와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다. 끄떡도 않았던 육중한 몸집의 시체괴물이. [구웩?] 버티지 못하고 위로 떠오른다. 「캐릭터의 총중량이 1,000kg 이상입니다.」 그래, 이제 내가 너보다 무거운가 보네. 딱 봐도 비실비실한 광대놈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 백스텝을 밟던 자세로 떠오른 육신. 땅에 내려오기 전에 뒤뚱뒤뚱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자세를 취했다. 그때 허공에 뜬 놈과 눈이 마주쳤다. 암만 봐도 웃고 있는 거 같진 않았다. 거, 사람 서운하게. “쪼개 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나라도 쪼개는 수밖에. 후우웅! 타이밍에 맞춰 놈의 대갈통을 쪼갤 기세로 메이스를 휘두른다. 그때 놈의 피부 위로 두터운 뼈가 돋아났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뼈갑옷]을 시전했습니다.」 [뼈갑옷]. 처음 만났을 때 곰아저씨의 초필살기를 별 피해 없이 막아 냈던 그것. 다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직도 작동 중인 황야의 무법자. 엘리바바(땅)의 둔기류 무기 파괴 보정. 게다가 오우거의 혼이 담긴 [휘두르기]까지. 암만 시너지를 맞췄어도 4등급 스킬로 이걸 막는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콰지지직-! 메이스가 닿은 순간 망치로 호두를 까듯, [뼈갑옷]이 부서진다. 그리고 그 너머로 드러난 야들야들한 속살. “에르웬!” 영체 상태로 날아다니던 에르웬이 불화살을 쏘았다. 목표 지점은 언제나 그랬듯 미간. 콰아앙-! 놈의 가면에 박힌 불화살이 폭발했다. 하지만, 저 가면도 일단은 장비였을까. 첫 유효타는 가면에 가로막혀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탁. 물리력 관성에 의해 날아가던 광대가 균형을 잡으며 착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투두두둣. 거미줄처럼 실금이 퍼져 나가던 가면이 이내 산산조각 나며 부서진다. 나는 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 그런 얼굴이었구나. “더럽게 못생겼군.” 용꼬맹이 펜이 봤다면 식겁을 했을 면상. 근데 이게 놈의 역린이었을까? “병신 같은 NPC 새끼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극찬이 터져 나왔다. *** 놈은 더 이상 광대놀음을 하지 않았다. 특유의 과장된 연기톤 말투를 버리고, 평범한 쓰레기 탐험가처럼 얘기했다. “고작 죽는 거로 끝날 거란 생각은 마라.” 음, 그거 용살자 새끼가 했던 대사인데. 죽음도 날 구원할 수 없을 거라니 뭐니 지껄였었지.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안겨주마.” 오르큘리스에선 이런 쪽 대사가 유행인가? 모르겠지만, 연신 극찬이 터져 나오는 만큼 전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네크의 진가는 물량전에 있다. 그런데 시체군단의 대부분이 본대와 전투 중이며 그마저도 엄청나게 죽었다. 아마 이 새끼는 이제 MP도 얼마 없을 거다. 무엇보다 내가 훨씬 유리한 상성이기도 하고. 「아벳 네크라페토가 [돌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돌진을 막는 저주기? 스킬 속성이 땅인 이상 의미 없다. ‘응, 나 엘리바바.’ 패널티로 항마력이 아무리 급감했더라도, 대지 저항력으로 가뿐하게 면역 판정. 「아벳 네크라페토가 [뼈갑옷]을 시전했습니다.」 [뼈갑옷]은 [휘두르기]로 카운터. 콰지직-! 껍질을 벗길 때마다 영체 상태로 내 곁을 따라다니는 에르웬이 화살을 박아 넣는다. 푹-! 전투가 이어지며 착실하게 쌓이는 대미지. [그어어어어!] 광대놈도 개별 전투력이 높은 정예시체를 아공간에서 꺼내 에르웬을 위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에르웬이 일정량 이상 피해를 입으면 엘리바바 모드도 해제가 되니까. 그때부턴 내게도 독딜이 들어온다. 하지만……. ‘오케이, 메이지는 없다 이거지?’ 놈의 소환수들은 철저하게 ‘독 + 물리딜’ 위주였다. 따라서 물리 피해 면역 보너스를 얻는 에르웬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 뭐, 간간이 속성 무기를 든 정예시체들이 보였으나……. 콰직-! 접근하기 전에 내가 박살낸다. 물론 나 혼자 전부 막기는 어려웠다. 근데, 여기에 나만 온 게 아니라서 말이지. “데르투 테이란!” 돌풍 마법으로 적을 밀쳐내거나, 그게 안 될 땐 마나실드를 전개해 에르웬을 지켜내는 레이븐. ‘역시 유틸은 마법사지.’ 참고로 나머지 멤버들은 멀리서 뒤따라오며 레이븐을 지키는 것에만 주력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이상적인 팀워크.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놈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극찬을 토해냈다. 다만, 마냥 웃자기엔 너무도 뼈가 실린 극찬이었다. ‘……미꾸라지 같은 새끼.’ 전투 자체는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했지만, 정작 급한 건 우리 쪽이다. 에르웬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한다고 한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엘리바바 모드도 끝나니까. 게다가 카일이 얼마나 버텨 줄지도 모르겠다. ‘후, 파멸학자가 오기 전에 끝내야 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함이 커진다. 땅 속성 바바리안이 되며 물리 내성이 대폭 상승했으나, 이와 비례해 항마력이 감소했다. 제대로 된 마법 한 방이면 에르웬이고 뭐고 내 본체부터가 버티지 못한다. 피해량 2배인 수 속성이면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파멸학자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백 명이 넘는 별동대를 꾸릴 것도 없이 우리 팀만을 이끌고 진작 이곳까지 왔을 터. “……시체들이 물러나고 있어요!” 설상가상으로 놈이 주변의 시체들을 하나둘 아공간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는 아주 큰 문제였다. 뭐, 덕분에 나를 뒤따르던 동료들의 부담이 훨씬 적어지긴 했지만……. 콰칵! 한 번에 박살나던 [뼈갑옷]이 두 대까지 버텨낸다. ‘황야의 무법자’로 인한 피해량 증가율이 감소한 탓이다. “그래,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 하, 이래서 플레이어 새끼들이란. 빛도 안 새어나가게 감췄는데 그걸 눈치채네. 광대놈의 눈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웃지 마라. 못생겼으니까.” “……다 끝나면 그 혓바닥부터 뽑아주지.” 해보시던가. “베헬—라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더 거칠게 놈을 몰아붙인다. 저항은 격렬하다. 나를 적수로 인정했는지,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정수까지 활용하는 녀석. 「아벳 네크라페토가 [찰나의 불멸]을 시전했습니다.」 3등급 몬스터 데스로드의 스킬. 화르륵! 흑색의 불길에 뒤삼켜진 놈의 옷, 그리고 피부가 태워지며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한다. 마치 리치와도 같은 몰골. ‘어쩐지 방어구랄 게 없더라니.’ 혹시나 했지만 정말 이 스킬까지 갖고 있을 줄이야. [찰나의 불멸]의 효과는 실로 간단하다. 뭔 짓을 해도 1분 동안 죽지 않으며, 정신 및 이능 수치가 육체 수치로 전환된다. ‘육체 수치로 몰빵된 최상위 탐험가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태연히 말했다. “훨씬 잘생겨졌군.” 놈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짜증난다는 듯 뼈만 남은 턱을 딱딱 거리며 달려들었다. 콰앙-! 단순한 밀치기. 겨우 그것뿐인데 시체괴물조차 [반동]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던 몸이 뒤로 밀려난다. 후, 근력이 대체 얼마나 올라간 거야? 그래도 다행인 건 물리 내성 수치로 인해 피해는 없다는 것이지만……. ‘니미럴.’ 내 동료들은 다르다. 저 괴물같은 몸뚱이로 평타만 날려도 픽픽 쓰러질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렇기에……. “다들 뒤로 물러나라!”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도망치는 놈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이제 내가 놈을 막아야 한다. 타닷. 나를 옆으로 밀쳐내며 무지성 돌진을 시작한 광대놈. 정말 아차하는 순간에 거리가 벌어진다. 이건 뭐 만렙 스켈레톤도 아니고. 타닷. 얼른 [도약]으로 따라붙었다. 콰앙-! 착지하며 [반동]으로 인해 놈이 공중에 떠올랐으나, 시간벌이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추락하는 타이밍에 맞춰 꽉 끌어안았음에도 1초만에 가뿐히 풀어내고 돌진을 이어가는 놈. 사고가 벌어지는데는 찰나면 족했다. “아이나르 씨!!” 놈의 주먹을 막아낸 아이나르가 아다만티움 대검을 쥔 채로 나가떨어지며 곰아저씨와 부딪쳤다. 그리고……. 콰앙-! 복부를 얻어맞은 미샤가 바닥에 쓰러졌다. 레이븐이 다급히 마법으로 돌벽을 일으켜 세웠지만 주먹질 한 방에 박살났다. 놈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남은 시간 동안 가장 까다로웠던 마법사부터 해치우려는 거겠지. “레이븐을 지켜라!!” 뒤따라 [도약]하며 외치기 무섭게, 놈이 기절한 미샤를 무시하며 또다시 대시한다. 쿠웅! 주먹질 한 방에 탱커 소환수 철웅이 역소환 됐다. “꺅!” 철웅을 타고 있던 레이븐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휘둘러지는 주먹. “……!” 곰아저씨가 제때 레이븐의 뒷덜미를 잡아 채고는 뒤로 당겼다. 그 순간. 콰아앙-! 내 몸이 착지하며 놈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사이 나는 [거대화]를 사용하며 쓰러진 동료들 위로 엎드렸다. 뭘 하려는지 이해했는지, 냉큼 안으로 들어오는 곰아저씨와 다리아. 콰앙! 콰앙! 이내 바닥에 착지한 놈이 통째로 짓뭉개 버릴 듯이 내 등을 내리쳤다. 얘네들, 괜찮으려나? “끄윽…….” 아니, 안 괜찮은 거 같다. 솔직히 이거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플랜B.’ 5초도 채 되기 전에 생각을 고쳐먹은 나는 잽싸게 일어나 놈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는지, 그 좋은 피지컬로 얻어맞고서 뒤로 나가떨어진 놈. 그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지. 나는 다이빙하듯 놈의 몸 위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 압도적인 중량으로 찍어누르며 존버. 놈도 거대 엘리바바의 중량은 부담스러운지 몇 초나 걸려서 힘겹게 나를 떨쳐냈다. 근데 그럼 이제 얼마나 남은— “……망할 바바리안놈.” 그래, 이제 끝난 거구나. 하, 진짜 다 죽는 줄 알았네. 뼈 위로 살점이 붙으며 알몸 상태가 된 놈을 노려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작군.” 동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그게 참작의 여지는 되지 않는다. 타닷. 나는 즉시 앞으로 대시해 놈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역시나 터져 나오는 [뼈갑옷]. 콰직-! [거대화] 상태라서 그런지 단 한 방에 박살났고, 에르웬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 머리를 노렸지만 민첩캐답게 굴러서 피한 녀석. 다만, 화살이 다리에 명중했다. ‘나이스.’ 다리에 구멍이 뚫렸으니 바퀴벌레 같던 저놈도 이제는 좀 느려질 터. 재빨리 또 한 번 대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MP가 바닥나며 몸이 줄어든다. 하긴 그럴 때가 됐긴 했지. [도약]이랑 [휘두르기]를 엄청 썼으니까. 물론 문제는 없다. 보아하니 이 새끼도 마나가 거의 다 떨어진 거 같거든. [아저씨, 포탈 쪽 시체들이 전부 쓰러졌어요!] 우리와 싸우면서도 [꼭두각시] 상태를 유지했던 시체군단. 근데 그걸 껐다? 그만큼 놈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다. ‘앞으로 몇 번이면 되겠네.’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약]은 없었지만 계속 있던 전투와 비슷했다. 도망치다 잡히면 [뼈갑옷]. 몇 번이고 메이스로 내려쳐서 부수면 에르웬이 화살을 쏜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MP통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이번에도 겨우겨우 뛰어서 잡아 [뼈갑옷]을 활성화한 놈을 메이스질하던 때였다. [아아, 얀델. 들리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번에 찾아왔다. [푸른갈기는 처치했다. 곧 도우러 가겠다.] 멜터 펜드와 그의 클랜원들이 기어코 늑대놈 레이드에 성공했다. 아마 시체군단이 사라진 게 큰 이유였겠지. 더없이 기쁜 소식이다. 다만…….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무래도… 카일 님이 패하신 거 같다.] 카일이 패배했다. [조심해라. 파멸학자가 너에게 갈 수도 있으니.] 멜터 펜드의 경고는 의미가 없었다. 그야 이미 와 있는 상태니까. “허허, 네크라페토 군, 자네도 꼴이 말이 아니구만.” 니미럴. 229화 역전 (5) 콰지직-! [뼈갑옷]이 또 한 번 벗겨지고서 드러난 놈의 면상대기. 그 얼굴에는 당황만이 가득하다. 경험상 이 표정은 이 길었던 싸움도 끝이 다가왔음을 알려 주는 징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어서 메이스를 힘껏 내리치려던 그 순간. 휘익-! 측면에서 어딘가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허용량을 초과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령화]가 해제됩니다.」 불식간에 가벼워지는 몸뚱이. 어느새 바위 같던 피부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경각을 느낀 동물이 귀를 쫑긋 세우듯 예민하게 달궈진 청각. 털썩. 뒤에서 뭔가 쓰러진 소리가 들렸고. “에르웬!!” 머지않아 다리아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 현 상황을 유추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에르웬이 누군가에게 당했다. 그래서 엘리바바 모드가 끝났다. 하면, 대체 무엇 때문에? 처음 바람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전부 틀기도 전에 해답이 보였다. “허허, 네크라페토 군, 자네도 꼴이 말이 아니구만.” 무성한 백발과 하얗게 새어 버린 수염. 인자해 보이는 이목구비. 마법사의 표본과도 같은 외견을 지닌 초로의 마법사. ‘파멸학자.’ 놈이 이곳에 왔다. ‘어떻게 벌써? 카일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사실을 직시한 순간 수많은 의문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스윽. 애써 의문을 지우고서 팔을 마저 움직인다. 찰나 속에서 무의식이 내린 판단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엘리바바 모드는 이제 끝. 더는 독딜을 막을 수 없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광대와 저 늙은이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그러니까……. “급하군.” 니미럴. 왼팔의 힘이 빠지며 쥐고 있던 메이스가 땅에 떨어진다. 쿵! 어느샌가 팔목을 꿰뚫고 지나간 적색의 빛. 진짜 돌아 버릴 거 같다. ‘미친, 무슨 평타가…….’ 캐스팅 시간이 없었다. 방금 쓴 마법이 파멸학자에게는 기초 공격 마법인 ‘마력시’와 다를 게 없다는 뜻. 그런데 평타에 몸이 뚫린다고? 엘리바바 모드도 끝나서 항마력도 돌아왔을 텐데? ‘아니, 생각은 나중에.’ 또다시 의문을 지운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니까. 메이스를 놓쳤다고? 그럼 방패로 조지면 그만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 삼키는 게 바로 K-바바리안의 정신 아닌가. 퍼억. 메이스를 놓친 그 즉시, 방패로 광대놈의 안면부를 내리찍었다. 한 번으로는 안 뒈질 테니 연달아. 퍼억-! 두 번으론 안심이 안 되니 한 번 더. 후웅-! 그렇게 세 번째 내리찍으려던 차였다. “재밌는 친구로군.” 몸이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엄청난 압력으로 전신을 찍어누르는 듯한 감각. “말했지 않나. 급하다고.”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려 옆을 보았다. 파멸학자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는 왠지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마치 호기심이 생기는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이름이 뭔가?” 그래, 내가 궁금해진 거구나. “네크라페토 군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이름 없는 탐험가는 아닐 것 아닌가.” 악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설마 그자가 벌써 거기에……!] 그때 메시지 스톤에서 멜터 펜드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대화를 방해 받은 파멸학자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분명 그랬을 뿐인데. [좀만 기다려라. 어서 가겠—!] 허리춤에 달린 메시지 스톤이 폭발했다. 퍼엉! 아니, 이게 무슨 마법사야. 지팡이나 완드를 휘두른 것도 아니고, 마력을 움직이는 특유의 손동작조차 없었다. 대체 이 할배는 몇 등급 마법사인 거지? 추방되기 전에 3등급이었다고 하는 걸 듣긴 했는데. “대답하지 않을 건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얼른 대답부터 하고 봤다. 멜터 펜드가 곧 본대를 이끌고 올 테니 그동안 대화라도 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판단. “이명은?” “작은 발칸.” “흐음,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럼 등급은 어떻게 되나?” “……몇 달 전에 5등급으로 승급했다.” “5등급이라, 좀 더 흥미가 생기는군.” 파멸학자는 날 보며 눈에 이채를 띄우더니, 마력을 움직이듯 손을 흔들었다. 솨아아아아-! 땅에서 피어오르는 형형색색의 빛. 아, 이건 나도 아는 마법이다. 5등급 고유 마법 ‘땅의 기억’. 해당 지역에서 있었던 일들을 리플레이 해서 보여 주는 마법. ‘아예 다른 학파의 고유 마법도 그냥 막 쓰는구나.’ ‘땅의 기억’은 어스린 학파의 고유 마법이다. 그리고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파멸학자가 추방되기 전까지 몸 담았던 학파는 전혀 다른 계열의 마법을 추구했던 학파. “풋.” 리플레이를 감상하는지 허공을 바라보던 파멸학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더 재미난 친구였군. 네크라페토 군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런 말이라……. 외모를 말하는 건지, ‘작다’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근데 뭐,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카일은 어떻게 됐지?” 저쪽에서 대화를 원하는 듯하기에 나도 내가 궁금했던 걸 물었다. 예상외로 그는 순순히 답해줬다. “그 친구라면 살아있네. 여기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친구라서 말이지.” “……일부러 죽이지 않았단 뜻인가?” “그 친구는 복수라는 감정으로 많은 성취를 이뤘네. 만약 인간의 감정마저 버릴 수 있다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겠지.” 마법사답게 발음은 유창하고 정확했지만, 도무지 듣고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게 왜 죽이지 않은 이유가 돼? 적의 잠재력이 뛰어나면 더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 입 밖으로 내뱉진 않은 말이었다. 하나 눈빛으로도 그런 내 의문이 전해졌을까. “개인이든 집단이든, 적이든 아군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파멸학자가 말했다. “마법의 끝을 보려는 자로서 궁금할 뿐일세. 그 친구가 경지에 다다랐을 때 과연 어떤 마법을 세상에 남길지.” “그게 너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걱정 말게. 경지에 오른다는 건 불필요한 모든 걸 버리고 또 버려낸다는 것. 어차피 그땐 그 친구도 인간의 감정 따위는 남아있지 않을 걸세.” 그냥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마법에 미쳐 인간이 아니게 된 늙은이라더니, 정말로 그랬다. 사고방식이 아예 다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자, 그럼 대화는 여기서 끝내지.” 혹시나 하는 기대도 든다. 저 사고 방식이 오늘의 내 목숨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미약한 희망. “오늘은 조금 무리를 해서 말일세.” 그제야 깨달은 것인데, 파멸학자의 수염에 핏자국이 보였다. 닦는다고 닦았지만 흔적은 남은 모양. ‘……이 새끼도 몸상태가 정상은 아니라는 거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긍정적인 요소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던 때였다. “오랜만에 즐거웠네.” 파멸학자가 작별 인사를 하듯 말했다. “네크라페토 군은 아직 내게 필요해서 이만 데려가겠네.” 방패로 얻어 맞고 반쯤 정신이 나간 광대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 탓에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진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됐는데.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니, 그래도 이대로 우리를 보내주려는 거면 충분히 남는 장사일 수도— “그럼 이제 죽게나.” 그래, 아무렴 그럴 리 없지. 스르륵. 이내 파멸학자가 나를 향해 손을 펼쳤고, 그 위에 불길할 정도로 시뻘건 마력이 맺혔다.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비워냈다. 이제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 싸워야 한다. 살기 위해선.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다시 한번 크기를 키우는 전사의 육신. 콰직, 콰지지직, 지직. 발에 힘을 불어넣자 내 몸을 뒤덮은 무형의 마력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대충 예상했다. 효율의 대명사인 마법사 아닌가.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딱 필요한 만큼만 마력을 썼겠지. 타닷. 마침내 자유를 얻은 몸뚱이. 지면을 박차며 대시했다. 적의 반대편. “얀델! 얀델이 보인다!” 저 멀리 아군이 달려오는 그곳이 아니라. 탓! 적이 있는 곳으로. “흐음.” 파멸학자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봤다. CC기도 풀었는데 왜 도망치지 않냔 거겠지. 근데 그건 저놈 입장에서만 그럴 뿐이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회복한 MP로 얼마나 버티겠는가. ‘넉넉히 잡아도 20초.’ 그 정도면 [거대화]도 끝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탓! 거리를 좁혀 딸려가는 광대놈의 몸에 바짝 붙는다. 그야 간단한 이유다. 마법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한 저 늙은이는 방금 전에 말했다. [네크라페토 군은 아직 내게 필요해서 이만 데려가겠네.] 광대가 아직 필요하다고. 바꿔 말하면, 바짝 붙으면 마법을 쓸 수 없다. 애초에 일단 광대부터 땡겨서 가져가려 한 것도 그게 이유일 테고. “현명하군.” 파멸학자의 손에 맺힌 붉은빛의 마력은 여전했으나 나를 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버리기엔 마력이 아깝군.” 펼쳐진 손바닥이 다른 곳을 향했다. 내가 아니라, 동료들이 있는 곳. 번뜩-! 섬광이 일며 손바닥에서 붉은색의 구체가 쏘아졌다. 그 순간이었다. “바르하툰 위아르.” 그 경로를 따라 십여 개의 돌벽이 세워졌다. 레이븐의 마법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말이 없더라니, 몰래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 하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쾅! 쾅! 쾅! 쾅! 너무도 손쉽게 돌벽들을 무너뜨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적색 구체. “엎드려라!” 내가 아까 했던 것처럼, 곰아저씨가 동료들 위를 몸으로 덮고 그 위에 추가로 흑웅까지 소환했다. 그리고 그 찰나. 콰아앙-! 구체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수천 개로 나눠진 불길을 토해냈다. 나와 떨어진 동료들 사이의 딱 중간 지점. 아니, 정확히는. “안 돼!” [정령화]가 해제되며 쓰러진 에르웬이 있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노린 건 그쪽이었다는 듯. 퍼어어어엉-!! CG로 제작된 폭죽처럼 수많은 불꽃들이 튀며 폭발에 폭발을 거듭한다. 후우웅-! 뜨거운 바람이 강하게 내 피부를 스쳤다. 그 와중에도 파멸학자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가 자네 다음으로 많은 운명을 타고났더군.” 뭔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말로 에르웬을 노렸던 거구나. 까드득. 턱이 아프다. 누군가 거대한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만 같은 기분. 에르웬은 정말 죽은 건가? 두근-! 심장에 피가 모이며 이성이 마비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만을 생각한다. 남은 이들이라도 지키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어도 이 새끼는 죽여야 해.’ 광대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파멸학자는 곧 도착할 아군들이 어떻게든 해주리라 믿고서. 이놈만큼은. 퍼억-! 광대놈의 면상에 한 번 더 방패가 꽂혔다. 한데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었을까? “푸우웃!” 광대놈이 고여 있던 핏물을 뱉듯 내 얼굴에 피를 토해낸다. 치이이이익! 타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은 없었으나, 무뎌진 감각 속에서도 뭔가 자꾸만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어떻게든 눈을 떴으나 앞은 흐릿했다. ‘베놈 하이드라.’ 놈의 패시브 스킬이다. [산성체액]과 비슷한 효과이나, 성능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아마 자폭병 시체들도 지 피를 이용해서 개조를 했던 거겠지. 물론 중요치 않다. 어두워진 시야 너머로 손을 뻗는다. 꽈악. 운 좋게 머리채를 쥐었다. 오케이, 이럼 놓치진 않겠네. 까드득. 구멍이 뚫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팔 대신 이를 사용해 짐승처럼 놈을 물어뜯는다. “아아아악!!” 물렁물렁한 연골이 씹혔다. 이건 귀인가? “퉷.” 뱉고서 조금 더 턱을 아래로 내린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목덜미. 뇌로 가는 혈관을 다 끊어먹으면 아무리 이 새끼라도— “정말로 짐승 같군.” 불쾌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 서걱-! 예리한 무언가가 내 오른팔을 베고 지나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아팠다. 그래서인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바리안들을 왜 야만인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네. 다들 하나같이 어딘가 단단히 망가졌단 말이야.” 파멸학자가 물었다. “자네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 놈은 바바리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이를 이겨내고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을 뿐. 선택지가 없었기에. 웃으며 하나뿐인 선택지를 택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은 야만인이라 불렀고. 그들은 그런 스스로를 투쟁하는 자. 전사戰士라고 말하였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때마침 [거대화]가 끝났다. “커헉!” 붙잡을 게 사라진 몸이 뒤로 밀쳐졌다. 빙글빙글 몸이 굴렀다. 개싸움을 많이 해서인지, 앞이 안 보여도 자연스레 일어서는 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잃어버린 방향 감각. “인상적이군.” 그래, 거기구나. 타닷.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진했다. 푸욱! 무언가 내 복부를 관통했다. 다만 그 순간. 솨아아아아-! 따스한 기운이 나를 보듬어 안았다. 신성력이었다. “얀델! 얀델을 구해라!!” 아까 전에 멜터 펜드를 도우라고 보낸 드워프 테테루드의 목소리도 들렸다. 상당히 가까웠다. [벨베브 루인제네스!!] 마법으로 증폭된 카일의 목소리도 들렸다. 분노의 감정을 가득 실어 파멸학자의 본명을 부르짖고 있었다. 콰앙-! 무언가가 내 앞에서 폭발했다. 한데 피하느라 뒤로 물러난 걸까? “결국 저 친구까지 와버렸군. 이럴 줄 알았으면 대화를 하지 말 것을.” 파멸학자의 음성이 조금 더 멀어졌다. “그거 아나? 여유를 부리려던 건 아닐세. 단지 오랜만에 내 계산이 빗나갔을 뿐. 그 시간이면 충분하리라 여겼건만.” 여전히 놈의 말투는 평온했다. “하긴 첫 등장부터 그랬지. 난 아무도 올라오지 못할 거라 여겼으니.” 놈의 목소리는 더욱 멀어져 희미했다. “축하하네. 유일한 승리자가 된 것을.”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를 기점으로, 뿌옇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망막으로 희미한 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 감각. 툭.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이 느껴졌고, 무심코 잘려나간 팔을 휘둘러 공격했다. 탁. 중간에 가로막혔다. 다만 걱정했던 반격은 없었다. “나일세.” 드워프 테테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친구야… 전부, 끝났네…….” 아. “그러니까… 이제 쉬게.” 아아……. ‘에르웬은 어떻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털썩. 너무나도 길었던 오늘 하루. 그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230화 역전 (6) “정신이 드나.” 혀끝에 남은 포션 특유의 잔맛을 느끼며 미샤 칼스타인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아브만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냥? 이긴 거냥?” 미샤는 눈을 뜨자마자 그리 물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레이븐을 지켜라!!] 해골의 모습으로 변해 달려드는 시체 수집가. 그놈에게 한 번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 그리고……. 콰앙! 콰앙! 천둥 같은 소리가 나서 눈을 떴더니, 비요른이 땅에 엎드려 힘겹게 우리를 지켜내고 있던 것.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긴 건 모르겠고, 적어도 당장은 안전하다. 적들은 모두 물러갔으니.” “그래? 다행이다. 근데 주, 죽은 사람은……?” “…….” 아브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다만 자신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을까? 아브만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우리 팀은 모두 살아남았으니까. 죽은 건 요정 쪽이다.” “요정……?” 그 말에 심장이 움찔했다. “설마 에르웬이?”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암만 포장해도 좋은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슬픔이 전해진다. “아니, 죽은 건 그 언니 쪽이다. 마지막에 동생의 몸을 끌어안고 폭발 속에서 동생을 지켜냈지.” “……그럼 에르웬은?” “조금 늦었다면 같이 죽었을 거라더군. 다행이라 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다. 깨어났을 때 제정신을 지킬 수 있을지가 걱정이군.” “그렇구낭…….” 미샤는 나머지 동료들의 상태도 들었다. 레이븐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었고, 조금 일찍 깨어난 아이나르는 비요른에게 갔다던가? “너는 가지 마라. 나도 옆에 있으려 했는데 여신관이 방해된다고 쫒아냈……. 말해 봤자 듣지 않겠군. 저쪽이다.” 미샤는 아브만에게 방향을 물은 뒤, 그곳으로 이동했다. 전투가 끝난 고블린 숲은 곳곳에서 피어오른 불길로 무척이나 환했다. 터벅, 터벅. 미샤는 탐험가들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맨 바닥에 앉아 쉬는 탐험가가 보였고, 우는 탐험가가 보였다. 기뻐하며 피범벅인 손으로 술을 들이켜는 자도 있었고, 움직임을 멈춘 시체군단을 옮겨 불길 속에 집어넣느라 바쁜 이도 있었다. “오! 얀델 팀의 고양이 아가씨군!” 가만히 걷고 있자니 그녀에게 탐험가들이 말을 걸어왔다. “얀델을 만나러 가는 건가? 저쪽에 있을 걸세.” “흐음, 가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네마는.” “그래, 동료니까 걱정이 되겠지.” 그들은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반면 마냥 가볍게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 걱정 말게. 설마 그 친구가 죽기야 하겠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불사신이다!!” “이번에 시체 수집가도 반쯤 죽여놨다면서? 듣자 하니 파멸학자만 아니었어도 이겼을 거라던데. 나가면 엄청나게 유명해질 거야.” 비요른의 대단함을 인정하는 탐험가들. 그럴수록 미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머지않아 천막 하나가 나왔다. 앞에는 탐험가들이 또 여럿 모여 있었다. “아, 칼스타인 양도 왔군.” 가장 먼저 보인 건 카일 페브로스크 앞에서 뭐라 따지고 있는 아이나르였다. “앉아서 맞는 건 양해해 주게. 사실 깨어 있는 것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건가!” “말했지 않나. 여신관 님께서도 목숨을 걸고 살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이만 목소리 좀 낮추게. 진정 그를 돕고 싶은 거라면.” “하지만……!” “아이나르, 그만해랑!” 미샤는 얼른 다가가 아이나르를 말렸다. 뭔진 몰라도 저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미, 미샤! 깨어났나!” 아이나르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으나, 미샤는 카일에게 비요른의 상태를 물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얼굴 전체에 독이 흩뿌려져 눈이고 뭐고 다 녹았다던가? “독이 뼈를 녹이고 뇌에도 조금 흘러 들어간 모양일세.” 숨이 막혔다. 현기증이 일었고, 술을 마신 것처럼 세상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여신관이 창백한 안색으로 천막에서 나왔다. 미샤는 감사 인사도 못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비요른…….” 침낭 몇 개를 겹쳐 깔은 임시용 침상 위에 잠든 그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얼굴에 화상 같은 흉터가 남기는 했지만, 적어도 심각해 보이는 곳은 없다.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회복될 거예요. 거기까지는 제 힘이 부족해서…….” “정말……. 고맙당…….” “아니에요. 이분이 하신 일에 비하면,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튼, 그럼 저도 쉬어야 해서 이만…….” 여신관이 떠나고, 미샤는 비요른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왠지 3층에서 계층군주에게 쫓기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그때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편히 잠들어 있었다. 그걸 보며 그녀는 그가 영웅 같다 여겼다. 그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비요른은 수많은 일들을 해냈고, 그만큼 새로운 이들의 인정을 받았다. 내심 그게 뿌듯하고 자랑스럽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지금 그의 얼굴은 어떠한가. 슬프고 괴로워 보인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하기도 했다. 꽈악. 미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 표정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 온 남자이니까. ‘에르웬…….’ 분명 자기 때문이라 여긴 거겠지. 스르륵. 미샤는 비요른의 몸에서 손을 땠다. 의식을 차린 것도 아닌데, 피부가 손에 닿을 때면 그의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 강철 같던 남자가 이럴까. “이제는…….” 미샤는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동안 신께서 기도를 들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손을 모아 빌고 빌었다. 이 남자가 인정받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 눈을 떴을 때 팀 전원이 모여 있었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여신관이 들어왔고, 몸 상태를 체크했다. 앞도 잘 보이고. 후각도 정상. 근데 몸이 잘 안 움직인다. 감각은 살아 있지만 팔과 다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고, 억지로 힘을 주면 부들부들 떨린다. “뇌가 다쳤을 때 흔히 있는 현상이에요. 한 달 정도 정양하시면 괜찮아 질 거예요.” “그렇군. 고맙다.” “아니에요. 깨어나셨으니 페브로스크 님을 모셔올게요.” 여신관이 카일을 데리러 떠난 사이, 동료들에게 내가 쓰러진 이후의 상황을 전해들었다. 이제 7일 차가 끝나기까지도 1시간도 채 안 남았다던가? “습격은 없었나?” “없었어요.”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파멸학자와 살아서 돌아간 광대놈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한다. 하긴 걔네끼리 뭘 어쩌겠어. 회복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거고, 광대놈이 남기고 간 시체군단도 전부 불태웠기에 물량에서도 밀린다. 또한, 지원을 부르는 것도 힘들다. 여기서 3층에 올라가는 데만 하루는 걸리니까. 올라갔다가 다시 오는 데만 해도 이틀이다. ‘애초에 파멸학자, 그 새끼 성격이면 광대가 억지를 부려도 안 간다고 하겠지. 복수심 같은 거로 움직일 놈이 아니니.’ 아니, 잠깐만.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내가 왜 이걸 지금까지 기억 못했지? “아! 에르웬, 에르웬은 어떻게 됐지?” 다급히 묻자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굳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동료들. “그래, 죽은 거군.” “아니, 죽은 건 언니 쪽이다.” “언니 쪽이라니?” 나는 곰아저씨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폭발하기 직전에 단거리 순간이동 스킬을 써서 동생을 대신해 희생했다는 짧은 이야기. 새삼 죽음의 무게가 와닿는다. 실로 가볍고도 가벼운 세상이었다. “…….” 정말 아차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 하나 막을 수 없었으며, 다리아는 죽는 그 순간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미리 들어두기를 잘했네. “에르웬은 지금 어디 있지?” “……그 자리에 있어요.” “그 자리?” “네. 그 자리요.”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몸이 기운다. “팔 이리 줘라.” 결국 곰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겨우 천막을 나갔다. 때마침 카일이 와 있었다. “일어났군.” 카일과 대화를 나누며 그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된 거지?” “전투가 끝나고서 올라온 자들일세. 총 네 개의 무리로 합쳐서 천 명쯤 되네.” “천 명이나……?” “우리가 가는 길에 표식을 남겨뒀지 않았나. 인원이 꾸려지자마자 우릴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그걸 쭉 따라왔다는군.” 그랬구나. 조금만 더 일찍 와주지. 그랬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쉬움과 원망을 털어내며 계속해서 걸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해서 무엇하랴. “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카일과 걷고 있자니, 나를 알아본 탐험가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중에 나가서 술을 마시자든가. 어디 클랜의 리더인데, 빚은 꼭 갚겠다든가. 누군가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오겠다며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그중에 위로의 말은 없었다. “……너무 나쁘게 보지 말게. 영웅은 위로받지 못한단 말도 있지 않나?” 그런 속담이 이 세상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저들도 많은 희생을 치렀으니까. 힘들기에, 웃으며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저씨…….” 목적지에 도착하니 에르웬이 보였다. 여기저기 불에 타서 딱딱하게 굳은 언니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에 묻은 피와 땟국물 위로 무언가 흘러내린 얼룩이 가득했다. “이리 와라.” 에르웬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내려갈 시간이다. 여기에 혼자 남을 거냐?” “혼자… 아니에요.” 아브만에게 올린 팔을 떼고서 비틀거리며 에르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등을 툭 쳤다. “내 말 들어라. 이제 내가 네 보호자니까.” “……네?” 나는 다라아에게 들었던 유언을 얘기했다.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만약 자기가 죽는다면 동생을 부탁한다 했다. 참고로 왕가에서 차원문을 타고 도망치기도 전에 내게 했던 말이었는데, 어쩌면 그 여자는 직감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걸. “아저씨…… 언니가, 언니가……! 이제 안 움직여요. 말도 못해요. 차갑고, 딱딱해요.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이내 에르웬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동생한테는, 그 어린애한테는 이걸 뭐라고 말해요? 엄마에 이어서 언니까지 죽었다고? 그, 그것도 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선 채 토해내는 말들을 들었다. 너 때문이 아니라든가, 그 여자가 선택한 일이라든가 하는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이제 가야 한다.” 1층으로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에르웬과 함께 언니의 시신을 수습했다. 드왈키 때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지금은 ‘왜곡’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으니까. 도시에서 장례는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집으로.” 나는 에르웬을 이끌고 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이가 좋지 않던 미샤와 아이나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위로라도 하고 싶으나 그게 상처가 될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 ‘아이나르가 저러는 건 또 처음이네.’ 이내 고블린 숲 정중앙에 추우리는 포탈 앞에 섰다. [23 : 50] 시계는 그토록 길었던 여정의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돌아가자!!” “와아아아아!!” 중심부에 서 있던 팀들부터 시작해 하나둘 1층으로 내려갔다. 베르자크가 무섭긴 해도 10분 안에 튀어나오진 않겠지. “얀델! 그럼 도시에서 보자고!” “제 이름은 기억하시지요? 한번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내 앞에 있던 탐험가들도 포탈에 들어갔고, 그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전보다 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굴. 이어서 다른 탐험가들이 내려올 수 있도록 앞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23 : 59] 미궁 폐쇄까지 고작 1분이 남은 상황.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끝인 건가? 두근-! 그래, 끝인 거겠지. 이제 1분인데 베르자크가 튀어나와도 뭘 할 수 있겠어. “빌어먹을 왕가 새끼들.” “돌아가면 그쪽으론 오줌도 안 눌 걸세.” 생존을 확신한 탐험가들의 입에서 왕가를 향한 분노가 터져나온다. 거, 아무리 그래도 입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너넨 돌아가서도 이상한 말 하지 마라.” 혹여라도 사람들 앞에서 왕가 욕을 하지 않도록 팀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던 때였다.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새하얀 빛이 눈꺼풀 너머로 깃들기 시작한다. 그토록 바라왔던 바깥의 빛. 두근-! 이윽고 빛이 사라지며 청명한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쓱 훑어봤다. ‘진짜 다 죽었구나.’ 늘 북적거렸던 차원 광장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후, 대체 얼마나 죽은 거지? “와아아아아아아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레 한곳을 응시했다. “차원문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차원문이 열리는 광장의 중심부. 그곳에 수백 개의 차원문이 열리며 우리를 버리고 떠났던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그때 그 모습이었다. 하긴, 차원문을 타고 나와도 나오는 시점은 동일하게 맞춰지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저놈들은 상상도 못하겠지.’ 너무도 멀쩡한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투정이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아-! 차원문이 열린 광장의 중심부에 거대한 마법진이 피어났다. “어, 어?”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럼에도 ‘그것’은 찰나에 벌어졌다. 두근-! 당황한 기사와 클랜의 정예들. 뭔가 이질적인 걸 감지하고 신속하게 거리를 벌리는 탐험가.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 솨아아아아아아아-! 바람에 실린 불꽃이 휘몰아치며 나를 밀친다. 바닥에 쓰러져 얼른 고개만 들어 보니, 하늘까지 치솟은 시뻘건 불기둥이 보였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문득 머릿속에 음성이 재생됐다. [축하하네. 유일한 승리자가 된 것을.] 파멸학자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231화 뉴에이지 (1) 초대왕이자 불멸왕이라 불렸던 절대 군주. 라비기온 3세. 수천 년간 라프도니아를 통치했던 그의 서거 이후 즉위한 개벽왕은 도시에 뿌리깊게 내린 선왕의 잔재를 털어내고자 많은 정책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역법 개정이 있었다. 1년, 13개월, 365일. 미궁이 열리는 주기를 보다 편하게 계산하기 위해 한 달을 30일로 고정했고, 남은 일자를 맞추기 위해 5일뿐인 13월을 만들었다. 또한, 포탈에 손을 대 한 해의 마지막 미궁 주기를 35일로 바꾸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은 있었다. 직관성을 위해 매해 5일을 낭비하는 게 실리적이지 않다는 것. 하나 개벽왕은 꿋꿋이 매년 13월마다 성대한 축제를 벌이며 민심을 샀고, 해가 거듭될수록 바뀐 역법에 적응되며 논란은 잦아들었다. 아, 연호도 두 번이나 바꾸었다. 처음엔 개벽왕의 이름을 땄으나, 길고 발음이 어려운 탓에 민중들은 왕의 별명을 써서 불렀고, 자연스레 왕가에서도 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개벽 154년, 5월 2일. 각 차원 광장에서 뿜어진 일곱 개의 불기둥이 라프도니아 상공을 뒤덮었다. 서기관의 손으로 역사서에 적혀 오래도록 기록될 참사였다. *** “니미럴.” 손으로 옆을 잡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침대맡에 세워 둔 목발을 짚으며 방을 나선다. 아오, 빌어먹을 계단. “비요른! 일어났으면 부르지, 왜 혼자 낑낑대냥.” 1층에서 요리 중이던 미샤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부축을 해주었다. 이러니까 진짜 환자라도 된 거 같네. 아, 환자 맞나? 한 달은 정양해야 할 거라더니, 아직도 팔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가 않는다. “자, 앉아랑. 나오고서는 이게 제대로 된 첫 식사지? 오랜만에 신경 좀 써봤당.” 미샤가 아이나르를 데리러 간 사이, 나는 숟가락을 쥔 채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사흘이나 지났네.’ 그날로부터 3일이 지났다. 물론 실감은 거의 안 난다. 돌아온 첫날은 생존자들 전부가 피곤한 와중에도 왕가에 끌려가 미궁에서 있던 일을 진술해야 했고, 그다음 집에 돌아온 뒤부터는 계속 잠만 잤으니까. ‘……미친 새끼들.’ 불기둥이 터져 나오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설마 빈집털이를 노렸을 줄이야. 차원문이 열리는 광장 중심부에 트랩을 설치해 뒀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것도 일곱 개나 되는 모든 광장에. ‘……앞으로는 진짜 어떻게 되는 거지?’ 정상적으로 미궁이 폐쇄되며 나온 우리들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으나, 제3 왕실기사단을 비롯해 수많은 대형 클랜이 말 그대로 소멸한 상황. 물론 그중에도 생존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중심부에서도 외각에 차원문이 형성된 몇몇은 마법진이 빛을 뿜자마자 즉시 물러나며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한 백 명 정도 된다던가? 아, 참고로 이는 일곱 개의 차원 광장 전부를 포함한 숫자.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훌륭한 지휘관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자가 아닐세. 해야 하는 선택을 하는 자지.] 해야 하는 선택을 한 자들은 죽었고. 버려진 자들은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싸운 끝에 살아남았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입장. 만약, 그때 내가 놈의 제안을 듣고서 동료를 버리고 빠져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죽었겠지.”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뱉은 순간, 뒤에서 미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근데 아이나르는?” “등짝을 내려쳐도 아예 꿈쩍도 안 한당.” “많이 피곤했나 보군.” “응. 그냥 나중에 잠깐 일어나면 그때 한 번 더 차려 주려고.” 거, 피곤한 건 자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미샤는 우리가 잠만 자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깨어나 밥을 차려오는 등, 정말 잠만 자며 쉴 수 있게 도와줬다. 그 와중에 목발도 어디선가 구해와서 챙겨주었고. 여러모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동료. “안 먹고 뭐 하냥?” 멍하니 미샤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힘들었던 하루가 끝났음을 말해 주는 듯한 맛. “……에르웬은 어떡할 거냥?” 식사가 거의 끝마쳐질 무렵 미샤가 물었다. 에르웬은 첫날 조사를 끝마친 뒤, 언니의 시신을 이끌고 요정족의 성지로 향했다. “글쎄, 장례가 끝나면 찾아오기로 했으니, 그때 자세히 얘기를 나눠 볼 생각이다.” “으음, 그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미샤가 툭 하고 말했다. “그냥 아예 이 집으로 데려오는 건 어떠냥?” 뭐지? 떠보는 건가? 아니면 단지 미리 안 된다고 선긋기? 일순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으나, 암만 봐도 그런 말투는 아니다. “무슨 뜻이지?” “그… 언니랑 같이 지냈다고 했지? 거기에 계속 있으면 더 힘들 거당. 그렇다고 혼자 나와 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걱정되고.” “그래서?” “여섯 명이서 미궁에 들어갈 순 없으니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추스를 때까진 보살펴주는 게 맞는 거 같당.” 아, 그래 이런 여자였지. 왠지 기특하기도 해서 농담하듯 놀렸다. “요정은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이익, 날 대체 뭐로 보는 거냥? 기껏 열심히 차려서 먹여놨더니, 방금 먹은 것들 다 뱉어라. 다 뱉어!” 툴툴거리며 나를 흘기는 미샤.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는데. “왜 웃냥? 사람 기분 나쁘게.” “그냥 고마워서 그랬다.” “…………아오, 또 갑자기.” 짜증난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미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사실 머리 위에 돋아난 귀와 꼬리만 아니면 그냥 평범한 인간 같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조금 더 자란 적단발. 오뚝한 코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몇 마디 말만 나눠 봐도 푼수데기란 걸 알 수 있지만, 처음 얼굴만 봤을 땐 엄청 까칠하고 도도할 줄 알았는데. “…….” “…….” 뒤늦게 주변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주방. “저…….” 미샤가 뭐라 입을 열러던 찰나였다. 똑똑똑.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 보지.” “……응, 난 식탁 정리나 좀 해야겠당.” 목발을 짚으며 걸어가 현관문을 여니 반가운 인물이 서 있었다. “카일 페브로스크.” “하하, 반갑네. 그간 잘 쉬었나?” “오자마자 잠만 자다 이제 일어났다.” “그럼 잠깐 얘기를 나눌 시간은 되겠군?” “물론이지. 들어와라.” 이내 옆으로 비켜주자 카일이 집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식탁을 치우던 미샤와 인사를 나눴다. “어! 카일 님?” “미안하네, 칼스타인 양. 내가 찾아와서 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거 같은데.” “이익, 놀리지 마랑! 나랑 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흐음, 아니라고? 그렇다면 실례했군.”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사과하는 카일. 미샤가 눈치를 주듯 나를 한 번 보더니, 휙 고개를 돌려 마저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도 거실 소파에 앉았다. “사실 더 일찍 찾아오려 했네마는, 알다시피 나도 일이 많아서 말일세.” “이해한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래, 그렇지…….”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생긴 불편한 정적. 이내 미샤가 예전에 사둔 쿠키를 소파 탁상에 올려두고는 편히 얘기를 나누라며 방으로 돌아갔다. “오, 라느머스 제과점의 거군?” “그래? 유명한 곳인가 보군.” 덕분에 전환된 분위기. 나는 좀 더 편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넉넉하면 처음부터 듣고 싶은데.” “이후 일정까지는 꽤 시간이 있네마는, 처음부터라니?” “파멸학자 말이다. 그때 그 늙은이랑은 어떤 일이 있던 거지?” 궁금했지만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깨어났을 땐 7일 차가 끝나기 직전이었고, 그마저도 에르웬을 보살펴야 했으니까. 도시로 돌아온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고. 그날의 차원 광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아, 그거 말인가…….” 카일이 쿠키를 베어 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사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여럿 있었으나, 핵심만 논하자면 간단했다. 일대일에서 졌다. 수년간 준비했던 ‘각성’은 제대로 쓰기도 전에 압도적인 마법 연계로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비완성 상태로 마법을 활성화하며 피해를 입히기는 하였으나……. “그토록 노력해 겨우 따라잡았다 여겼건만, 모두 내 착각이었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차이가 더 벌어져 있는 듯하더군.” 카일은 벽을 마주했다. 어떻게 해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더욱 굴욕적인 건 그럼에도 그가 살아남았단 것이다. “……재능이 아깝다고 했네. 웃기지 않나? 나는 그의 적수조차 되지 못한 걸세. 아마 날 살리려 했던 게 아니었다면, 그 정도 피해조차 입히지 못했겠지.” 이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카일의 표정에는 그림자가 가득했다. “꺼내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을 텐데, 얘기해 줘서 고맙다.” “자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어쩌면 이번 일로 그들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니까.” 후, 역시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번 일로 왕가에서는 파멸학자의 위험도를 한 단계 격상했네. 단장의 바로 밑이지. 솔직히 직접 그를 겪은 나로서는 단장과 같은 급으로 쳐도 무방하다 생각하네마는……. 몇 번을 말해도 다들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더군.”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르니까.” 내가 겨우겨우 맞춘 항마력 세팅을 평타로 뚫는 마법사. 과연 그런 괴물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만약 서로가 정상인 상태에서 우연히라도 미궁에서 만나게 된다면 몇 분 안에 전멸을 면치 못하리라. “아무튼, 그래서 조심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네.” 음, 그래도 파멸학자 새끼 성격상 귀찮게 복수를 하러 오진 않을 거 같은데. 광대놈이라면 모를까. “시체 수집가는 어떻게 됐지?” “아직 소식이 없네. 떠나기 직전에 자네에게 치명상을 입었다고 듣기는 했네마는, 아마 살아 있겠지.” “……그렇군.” 그나마 광대는 낫다. 이번에 천 단위의 시체군단을 잃었으니까. 복구하는 데 엄청난 시일이 필요할 터, 적어도 성장할 시간은 있다. “아, 그래서 생존자가 얼마나 되나?” “차원문을 타고 나간 그들을 말하는 거겠지?” “물론이다. 백 명 정도 살았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내 말에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는 103명일세. 그걸 살아 있다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네마는.” “무슨 의미지?” 카일은 이번에도 마법사만의 전문 용어들을 써가며 뭐라 뭐라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그러니까 흑마법이 가미된 특이한 마법이라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제대로 안 됐단 말인가?” “그러네. 지금은 전부 의식이 없는 상태지. 언제 깨어날지. 아니, 깨어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네.” “거, 아주 지랄맞군.” 생존자 얘기가 끝난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어떻게 벌어진 일인 것인가. 왕가의 나름 고위층이라 할 수 있는 카일은 숨김없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 적어도 몇 달은 준비해야 겨우 작동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마법인데 어떻게 하루 만에 광장에 그런 걸 준비한단 말인가?” 그날, 나를 포함한 모든 탐험가가 가졌던 의문.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알고 보니 눈을 피하기 위해 하수도에 마법진을 그렸더군.” 땅굴에 사는 놈들답게 아래에서 일을 벌였다. “조사 결과, 노아르크 측의 결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네. 즉, 놈들에게는 외부로 나올 수단이 있거나, 미리 빼돌려 둔 인력이 있다는 뜻이지.” 그의 추측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미리 빼돌려 둔 인력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멜리아.’ 도시에 잠입한 노아르크 출신의 스파이. 지금까진 딱 잘라 적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그들의 증오는 왕가를 향했을 뿐이지, 나를 향한 게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적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 여자는 계속 노아르크의 밑에서 일을 할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나는 그 일로 인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내가 노아르크로 들어갈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현재 도시 쪽 상황은 좋지 않네. 이 도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인력들이 대거 죽었으니. 이대로 가면 경제부터 무너지겠지.” 이는 나도 예상하던 바였다. 탐험가들은 미궁에서 자원을 캐오는 광부다. 기사들이 강하긴 해도 이것만큼은 탐험가들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한데 상위 탐험가들이 깡그리 죽었다. 뭐, 보이콧을 하던 몇몇 대형 클랜. 그리고 인식표가 생기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상황을 지켜보던 상위 탐험가들이 상당수 남아 있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아마 그들은 더 이상 미궁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걸세. 적어도 미궁이 안전해졌다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는.” 안전하지 못한 미궁. 참 웃긴 표현이다마는, 이해는 된다. 이번 회차에 미궁에 들어가 살아 돌아온 게 이천 명도 채 안 되는 상황. 과연 이 상황에 누가 미궁에 들어가 마석을 캐려 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금까진 인식표, 그리고 제3 왕실기사단의 존재가 탐험가들을 안심시켰지만, 이젠 그 실상이 까발려졌으니.” 미궁에서 노아르크로부터 우리를 지키겠다던 기사들은 대형 클랜들과 작심해 차원문을 열었다. 그리고 만 단위의 탐험가를 버리고 도망쳤다. “부끄럽네마는, 누군가 회의 중에 그런 말도 하더군. 차라리 생존자가 아예 없었던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카일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잔인한 세계란 생각이 든다. 뭐, 투정을 부린다고 변하는 게 있겠냐마는. “그래서 이제 나는 파멸학자, 시체 수집가에 이어 왕가까지 조심해야 하는 건가?” “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농담과 진심 섞인 내 우려에 카일은 손사래를 쳤다. “자네는 집에만 있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지금 자네는 왕가에서 몹시나 중요한 존재가 되었네.” “……자세히.” “지금 이 순간에도 그날 여정을 함께했던 생존자들 입에서 자네 얘기가 퍼져 나가는 중이네. 며칠만 더 지나도 아마 이 도시에서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자는 없어지겠지. 무려 혼자서 시체 수집가를 그 지경으로 만든 신성 아닌가!” “……혼자라니, 부탁이니 제발 어디 가서 그런 헛소문은 퍼뜨리지 마라.” “이 친구도 참 겸손은.” 아니, 겸손이 아니라 진짜 내가 부담된다고. 그냥 누구보다 열심히 앞에서 구른 착한 놈. 그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이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명성이다. 혼자 싸웠다고 한다면 오히려 광대 쪽이니까. 놈은 우리 팀과 싸우는 와중에도 수많은 시체군단으로 중견 탐험가 수백 명으로 이뤄진 본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걔도 진짜 괴물이란 말이지.’ 나는 짧게 스쳐 지나간 상념을 정리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게 왕가랑은 무슨 관계지? 나 정도 수준인 탐험가는 왕가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하지만 자네처럼 상징적인 탐험가는 얼마 없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안 그래도 왕가를 향한 불신이 생기고 있지 않나. 이번 일이 기폭제가 되리란 건 자명한 사실. 왕가는 판단했네. 혹여 자네가 그들의 구심점이 된다면 자칫 큰 불길로 번질 수도 있…….” 니미럴. “……응?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왠지 날 제거하겠단 말로밖에 들리지 않아서.” 순도 100%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껄껄 웃었다. “걱정일랑 말게. 자네에게 어떤 처우를 취할지는 이미 회의를 통해 확정이 났으니까.” 확정이 났다고? 아, 그래서 왕가는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건가? “그만 뜸들이고 어서 말해 봐라. 이제 보니 오늘 온 것도 그것 때문인 거 같은데.” 내가 재촉하자 카일은 자기가 더 뿌듯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하하네. 머지않아 자네에게 아주아주아주 큰 보상이 있을 걸세.” 왕가에서 내게 당근을 주기로 결정했다. 232화 뉴에이지 (2) 왕가에서 주는 아주아주아주 큰 보상. 자세한 내용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벌써 군침이 싹 돌기 시작한다. 다만 경험상 이럴 때가 가장 위험했다. 선물을 받았으면 언젠가 선물을 되돌려주는 게 세상의 암묵적 규칙 아닌가. 삼켜도 될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보상이 정확히 뭐지?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뭐고?” 카일은 내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히 답해 줬다. 보상이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 게다가 보상을 받는 것도 나 혼자만이 아니라 그날의 생존자들 전원이라고 한다. 조만간 왕성으로 불러 위로연을 열 거라던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논공행상이 있을 거고 자네의 공을 가장 크게 치사할 거란 걸세.” “그렇군.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없는 건 아니네마는…….” 카일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자신만의 의견임을 감안하고 들어 달라며 예상 보상을 하나씩 읊어 주었다. “첫 번째는 작위일세.” 귀족 작위. “물론 작위까지 수여될 가능성은 아주 적네. 아마 내려온다 해도 계승 작위는 아닐 테고. 봉토도 없겠지.” 나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 세계의 귀족이란 그런 거니까. 한두 번 공을 세웠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 예상해 보자면 기껏해야 황도에 입장이 가능해지는 게 고작 아닐까. “두 번째는 정수일세. 왕가에서 금혼보고까지 연다고 했으니 자네라면 기대해도 될 걸세.” 금혼보고라면 3등급 정수까지 보관된 왕가의 보물창고. “세 번째는?” “장비일세.” “가장 전형적이군.” 세 번째 예상 보상은 상위 소재의 장비 혹은 넘버스아이템이었다. 네 번째는 그냥 돈이었고. “아마 작위를 빼고 나머지는 공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높네.”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 거 같다. 공이 적은 사람은 대충 돈을 쥐여주고 끝. 적잖이 공을 세운 자들은 장비 혹은 5등급 정도의 정수를. ‘공에 따라 최대 3등급 정수까지라…….’ 이거, 군침이 더 흐르기 시작했다. 3등급 정수는 7, 8층에는 가야 정상적으로 파밍이 가능해지는 상위 정수. 근데 심지어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다니? 한동안 멈췄던 내 성장에 속도가 확 붙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왕가에서 내게 바라는 게 뭐지? 아직 그걸 말하지 않았는데.” 제일 중요한 정보를 듣지 못했다. 이 선물의 답례로 내가 뭘 줘야 하는가. 분명 머지않아 왕가도 노아르크를 조지며 민중의 신뢰를 되찾으려 할 터. 내가 군에 입대해 그때 전투에 참가하길 바란다면 아무리 보상이 매력적이어도 거절하는 게 옳다. “딱히 크게는 없네. 그저 논공행상 때 자네가 왕가에 우호적이란 것만 보여 주면 끝이니. 나머지는 왕가에서 알아서 할 걸세.”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탁이군.” 내 대답에 카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자네 눈엔 왕가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좋게 보겠는가. 다른 대책을 더 찾아보려 노력하지도 않고 쉬운 길을 찾아 떠나갔다가 결국엔 다 뒈졌는데. “그래도 그날 있었던 일이 모두 왕가의 뜻이 아니란 것만 알아주게. 왕실기사단장들 간에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니까. 분명 다른 단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걸세.” 카일이 옹호하듯 말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찝찝한 감정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책임감일지도 몰랐다. 왕가에서 버려진 뒤 함께 싸웠던 그들을 배신하는 것만 같달까. 강점기 때의 앞잡이로 전직하는 듯한 기분. 나는 조심스레 하나를 물었다. “……혹시 너는 왕가를 어떻게 생각하지?” 자칫하면 불경이 될 수도 있을 질문. 카일이 흠칫 굳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네.” 괜히 내 앞이라고 맞춰 주는 거 같지는 않다. 애초에 이 아저씨가 그런 성격도 아니고. 그래도 3등급 종군 마법사가 사석이라도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왕가는 이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네. 뭐, 사욕을 위해 마탑을 등지고 군에 입대한 내가 할 말은 아니네마는.” “사욕?” “자네라면 이미 눈치챘지 않나. 파멸학자, 그 늙은이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음, 그건 그렇긴 한데. “좀 더 자세히 물어도 되겠나?” “그는 내 스승의 원수일세. 어느 날 함께 연구 중이던 그분을 해하고 기어코 그 금지된 마법을 완성했지.” “그래서 복수를 위해 군에 입대한 건가?” “맞네. 그자가 오르큘리스에 몸을 의탁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더군. 혼자선 어쩔 도리가 없었네.” 젊은 날의 카일은 복수를 위해선 군과 왕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왕가 아래로 들어갔다. 적의 적은 동료라는 판단. “그러니 자네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뭐 어떤가? 이용할 부분이 있다면 이용하는 게 합리적일세.” 카일의 조언은 백번이고 옳았다. 현실적으로 내가 왕가와 척을 져서 뭐 하겠나. 왕가에 악감정을 지닌 다른 생존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고생을 했는데 뭐라도 건져야지. “조금은 표정이 나아졌군.” “덕분에.” “슬슬 다음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군. 이만 일어나 보겠네.” “와줘서 고맙다. 몸이 이래서 혼자 나가라.” “하하, 그럼 설마 배웅까지 해주려던 건가? 됐네, 쉬게나. 앞으로 바쁠 테니.” “바쁘다니?” 내 물음에 문가로 향하던 카일이 뒤돌았다. 그리고……. “곧 알 걸세.”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 *** 카일이 떠난 다음 날, 방문객이 있었다. 레이븐과 곰아저씨였다. “다들 다 쉬었으면, 이제 전리품 정산이나 하죠.” “몸은 괜찮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닌가?” “딱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뭘. 그리고 그렇게 무식하게 몸을 굴려 놓은 건 자기면서, 우리가 걱정까지 또 해줘야 해요?” 어, 그런 건가……? 왠지 탱커로서 서운함이 몰려오지만, 이어진 말에 싹 가셨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다쳐요.” 까칠하게 툭 뱉은 말. 다만 막상 해놓고 부끄러운지 말을 이었다. “칼스타인 씨가 무슨 죄예요? 맨날 뒷수발은 혼자 다 하는 거 같은데.” “어, 나? 나는 괜찮은데……. 음, 그래도 안 다쳤으면 좋겠긴 하지만…….” “칼스타인 씨는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요? 저 남자 저대로 냅두면 제 명에 못 죽을 걸요?” “……됐고, 용건부터 해결이나 하지. 전리품 정산이라니? 혹시 장비들을 전부 팔고 온 거냐?” “네. 진짜 피곤해 죽겠는데 악쓰면서 억지로 참고서 팔고 온 거니까 고마워 하세요.” 들어 보니 레이븐은 도시 복귀 1일 차. 그러니까 조사가 끝나자마자 돌아가 쉬지 않고 곧장 전리품을 판매했다는 모양이다. 무리하면서까지 급하게 판 이유는 간단했다. “그야 빨리 팔아야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 거 아니에요.” 전체 탐험가 인구에서 막대한 손실이 생겼다. 수요가 줄어들었으니 장비 값이 떨어지리란 건 자명한 사실. 게다가 생존자들이 갖고 돌아온 전리품들의 99%가 장비이니 공급 과잉이 될 거라던가? “고맙다. 나도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그 상황에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으면 얀델 씨가 초인이지 바바리안이겠어요?” 거, 그냥 ‘별말씀을요’ 한 마디면 될 것을. “아루루! 그게 무슨 말이냐! 비요른은 초바바리안이 맞다!!” 뭐래 얘는 또. 이번 탐사가 너무 우울한 분위기였어서 그럴까? 이런 일상적인 시끄러움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럼 모두 앉기나 하지.” 서론이 더 길어지기 전에 정리하고 동료들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전리품 정산을 시작했다. 레이븐이 전부 착착 정리해 온 덕분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냥 정산 내역을 듣고 돈을 지급받으면 끝. 정산은 순식간에 끝나고 서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곰아저씨가 새 화제를 꺼냈다. “아, 그나저나 계속 집에만 있었다니 그건 들었나 모르겠군. 얀델, 너한테 이명이 새로 생겼다.” “오, 진짜냐!” 잔뜩 흥분한 아이나르부터 시작해 미샤는 물론이고 레이븐까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븐도 몰랐던 걸 보니 아직 널리 알려진 건 아닌 듯한데……. 술집 사장님답게 이런 정보가 빠른 모양. ‘새로운 이명이라…….’ 그럼 이제 나도 작은 발칸을 벗어나는 건가? “뭔데 빨리 말해 봐랑.” “후후, 뭐일 거 같나?” 관심을 즐기듯 대답을 아끼는 곰아저씨. 동료들 사이에서 다양한 추측이 오갔고, 이내 곰아저씨는 내게도 의견을 물어봤다. “너는? 얀델, 너는 생각나는 게 없나?” “글쎄, 제발 큰 발칸만 아니면 좋겠군.” 내 반응이 뭔가 아쉬운지 곰아저씨가 입맛을 살짝 다시며 내 새로운 이명을 말해 주었다. “거인巨人.” “응?” “거인이다. 네 새로운 이명은.” 음, 생각보다 심플하네. 그럼 이제 자이언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된 셈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있자니, 미샤가 감상평을 읊조렸다. “어울리는 이명이넹. 비요른이 가진 정수 중 하나인 [거대화]도 나타내 주고.” “암, 나도 듣자마자 이거란 생각이 들더군. 아! 근데 왜 전에는 그런 이명이 붙었지? 혹시 그땐 그 정수가 없었나?” 흐뭇하게 웃던 곰아저씨가 의문을 내비쳤다. 대답을 해준 건 레이븐이었다. “아뇨. 그때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변했었을 걸요?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때 나는 뱀파이어의 스킬인 [피의 주인]으로 미샤의 오빠놈이 가진 [부정한 자]를 빌려 지금보다 1.5배는 더 컸었다. 하지만 결국 붙은 이명은 ‘작은 발칸’이었지. “흐음, 더 컸다고? 그럼 그땐 왜 그랬지?” 납득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곰아저씨. 이번에도 답변은 레이븐에게서 나왔다. “왠지… 전 알 것도 같네요.” “응? 알 거 같다고?” “네. 분명… 그때는 이렇게까지 사람들 눈에 커 보이지 않았던 거겠죠. 얀델 씨의 등이.” 듣는 내 얼굴이 다 후끈했다. 다들 진지하게 납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몸은 작아졌지만 더 크게 보였다라……. 그래, 그래서일 수도 있겠군.” “응, 무슨 말인지 알 거 같긴 하당.” “비요른은 위대한 거인이다!! 분명 언젠가 이 세상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기겠지!” 아, 제발 이런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카일과 나눴던 대화였다. 왕가와 관련된 주제인 만큼 아이나르 빼고 모두가 ‘거인’이란 새 이명을 잊고서 흥미롭게 말을 경청했다. “위로연이라……. 과연 몇이나 참가할지 모르겠군.” “우리크프리트 씨도 순진하네요. 몇이나 참가하지 않을까 세는 게 훨씬 빠를 걸요?” “뭐?” “뒤에서 욕할 뿐이지, 현실적으로 왕가와 척을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심지어 고생한 보답도 해주겠다는데.” “그, 그래도 탐험가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얀델!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사실 나도 레이븐과 같은 생각이다.” “……뭐?” “그야 노아르크로 넘어갈 게 아니라면, 당연히 챙길 건 챙기는 게 맞지 않나.” 탐험가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탐험가들은 대부분 손해에 아주 민감하다. 아무튼, 나눌 얘기는 다 나눴기에 다 같이 식사나 한 다음에 자리를 파했다. “그럼 가보지.” “다음에 봐요.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레이븐과 곰아저씨가 떠났다. 아이나르는 성지에 다녀오겠다며 외출했고, 미샤도 장을 보겠다고 떠났다. 어느샌가 적막해진 집 안. 그러나 머지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테테루드……?” “하하! 아직도 빌빌대고 있다기에 왔지. 어때 술은 마실 수 있지?” “……미샤한테는 비밀이다.” 대낮이었지만, 반가운 얼굴이었기에 녀석과 함께 따라온 클랜원들을 안에 들여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나갈 차. “오, 그쪽도 와 있었군?” 또 다른 방문객이 있었다. “멜터 펜드.” “그냥 편하게 멜터라 불러라. 오랜만이다, 비요른. 원래 진작 찾아오려 했는데, 죽은 단원들의 장례를 치르느라 늦었다. 아, 들어가도 되지?” “물론이다.” 테테루드와 클랜원들은 이후 약속이 있는지 잠시 함께하다 떠났고, 이후로는 멜터와 독대를 했다. 주된 이야깃거리는 늑대놈과의 전투. 거기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다. “오러를 각성했다고……?” “하하, 각성한 것까지는 아니고, 잠깐 길이 보이며 얇게나마 쓸 수 있던 정도다.” 한때 탐험가 출신 견습 기사로 지낸 적 있던 그가 전투 중에 오러를 발현했다. 뭐, 아직은 불안정해 보이지만……. ‘오러를 쓰는 3등급 탐험가라니.’ 멜터의 이름이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다. 상위권 탐험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간 상황 아닌가. 쾅쾅쾅! 아무튼, 방문객은 멜터로 끝나지 않았다. “얀델! 안에 있나!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면서?” 그날 인연이 있었던 전사들. 혹은 감사 인사를 하러 온 탐험가들이 줄줄이 내 집을 찾았다. 술을 마셨고. 미샤가 식사를 대접했으며. “엘버틴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때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비단 방문객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여, 거인이라 불린다지? 이런 난쟁이는 서러워서 살겠나. 하하핫!” 내 소식을 듣고 온 난쟁이놈과 로트밀러. “도서관에는 한동안 못 오시겠군요……. 다음에 올 땐 읽을 만한 책 몇 개를 갖고 오겠습니다.” 친구 모임의 멤버 라그나와 행정원 샤빈. “큰일을 치렀다지? 네가 자랑스럽다.” 성지를 벗어나 이 멀리까지 찾아온 부족장. 아, 참고로 부족장은 위로연에 대해서도 아는지 한 가지 경고를 해주었다. “왕의 웃음에는 독이 있는 법. 왕가와 너무 친해지지 마라.” “새겨듣겠다.” “그럼 됐군. 술이나 마시자!” 그런 방문들이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아, 재방문도 여럿 있었다. 얼마 전에 왕가에서 위로연에 관한 초대장이 일괄 발송된 탓이다. “……맞서 싸울 건가?” “맞서 싸워야지!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결국 언제까지고 놈들의 발아래에 있을 뿐이네!” 찾아와 함께 왕가에 맞서자는 자도 있는 반면, 진지하게 충고를 해주는 자도 있었다. 아니, 비율로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많았다. “분노는 잠시 미루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제일 고생한 건 그대 아니오. 그대가 보상을 받는다고 과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소?” “만약 논공행상 자체가 무산된다면, 죽은 탐험가들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걸세. 그들의 유가족도 생각을 해야지.” “냉정히 말하면 이건 자네에게 큰 기회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이건 정말로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그들과의 대화는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제 내 선택이 나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영향을 끼치게 됐구나. 그런 책임감으로 그들이 말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경청했다. 아, 미샤가 폭발하기 전까지만. “야! 이제 그만 오라고 좀 해라!! 아니, 그냥 아예 나가서 만나!!” 화날 만했다. *** 5월 10일. 참사가 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넘게 흐른 아침. 이른 새벽부터 깨어난 우리는 치장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 위로연이 있는 날이거든. “악! 더, 더 조여랑!” “그, 그러다 죽는다 미샤!” “괜찮으니까 어서… 읏!”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아이나르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착용한 미샤가 방에서 나왔다. 어딘가 모르게 창피한 얼굴로. “……그, 이, 이상하냥?” “………아니, 하나도. 잘 어울리는군.” 진심 100%의 말이었다. 평소에 입던 쫙 붙는 바지나, 너풀거리는 특색 없는 단색 치마와는 전혀 다른 화려한 드레스. 흰색 바탕에 붉은색이 포인트로 들어가 있으며, 치마 길이는 무릎 정도여서 꼬리가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수인족인 것까지 고려해 준 건가?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 그만 봐랑.” “아, 미안하다.” “그래서 그게 전부……?” 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머리에 달린 핀이 예쁜 거 같다.” “음, 목걸이는?” “그것도.” “흐음, 그랭?” 통과인지 별다른 말을 안 하는 미샤. 왠지 공기가 불편해 말을 돌렸다. “아이나르는?” “맞다, 아이나르! 안 나오고 뭐 하냥. 어서 나와랑!” “하, 하지만……! 나도 부끄럽단 말이다! 그냥 갑옷을 입고 가면 안 되나?” “왕궁으로 가는 거라 무기나 갑옷은 못 입는다고 말했지 않냥! 어서 나와라. 하나도 안 이상하구만!” 결국 아이나르가 미샤의 손에 의해 끌려 나왔다. 참고로 얘는 드레스가 아니었다. 맞춤 제작이라도 된 것처럼 딱 맞는 슬림핏의 남성 정장. ‘제복 같네.’ 딱 붙는 흰색 바지에 셔츠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고급 원단의 코트를 걸쳤다. 다만 코트나 셔츠에 이런저런 휘장이나 자수가 가득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여, 역시 이상한 건가?! 그래! 이, 이런 옷은 나 같은 전사랑 어울릴 리가—”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러나.” “으, 놀리지 마라…….” 얘가 이러는 건 또 오랜만이네. “놀리긴 뭘 놀리나? 나도 비슷한 옷인데.” 참고로 나도 아이나르와 비슷한 형태의 옷을 선물받았다. 남색이 베이스이며 내 머리색과 같은 갈색이 포인트로 들어가 있다. 다만 배색이나 자수의 형태, 휘장 같은 것이 아이나르 것보다 훨씬 남성적이다. 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겠다마는. “갑갑하군.” 나는 꽉 끼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잠시 거울을 확인했다. 이름하여 연미복 바바리안 모드. 어떤 면에서는 갑옷을 입은 것보다 훨씬 더 위압적으로 보인다. 원래 정장이 이렇게까지 근육을 돋보이는 옷이었던가? 이건 뭐 깡패도 아니고. “비요른! 밖에 마차가 서 있당!” “그래? 그럼 어서 가지.” 이내 외출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서자, 대기 중이던 마부가 극진하게 인사를 해왔다. “반갑습니다. 비요른 얀델 님, 미샤 칼스타인 님, 아이나르 프넬린 님. 왕궁까지 모시는 영광을 얻게 된 잭 헤인스입니다. 불편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편히 줄을 잡아당겨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이지 뭐라도 된 기분. “와, 이게 개인 마차라는 거구나…….” “오오! 사탕! 사탕이 공짜다!!” 데구루루, 바퀴가 도로 위를 구르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프도니아의 최중심부. 왕이 기거하는 그곳을 향하여. 233화 뉴에이지 (3) 고서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서재. 안경을 쓴 중년 사내 앞에서 바짝 긴장한 청년이 보고를 올리고 있다. “최종 분석 결과, 벨베브 루인제네스가 마법진을 설치하고 리란느 비비앙이 작동시켰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말은 둘 다 도시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군?” “예. 노아르크의 수호 결계가 정상 작동하는 것으로 추정컨대, 역시 라프도니아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장 하나는 기가 막힌 놈들이란 말이지.” “지긋지긋한 놈들이지요. 그럼 이어서 오늘 아침 집계된 사상자 통계 보고드리겠습니다. 청년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번 사건의 총 피해 규모까지 보고했다. 다만 중년 사내는 감흥 없이 들을 뿐이었다. “그래, 많이도 죽었군.” 4층 이상의 탐험가 중 70%가 죽었다. 살아남은 건 버림패로 남은 1,600명 남짓의 탐험가들과 처음부터 미궁에 진입하지 않았던 반동분자들뿐이라고 한다. 사실상 차원 붕괴에 준하는 막대한 피해. “차라리 잘 됐어.” 라프도니아의 재상, 테르세리온 후작은 한 귀로 흘려내듯 피식 웃었다. 이에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할 게 있으니, 그럼 나가 보거라.” “……쉬십시오, 아버님.” “궁 내에서는 직위로.” “예, 재상님.” 이내 사내가 손을 젓자 청년이 예의 바르게 목례하며 서재를 떠났다. ‘슬슬 마탑에도 연락을 넣어야겠군.’ 사내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오늘 있을 행사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솨아아아.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힘차게 불어왔다. 햇살은 따스했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국왕 폐하께서 좋아하시겠어.” 새 시대를 시작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 황도 카르논. 평민은 허가받지 못하면 들어설 수조차 없는 특수 지역. “오오, 저게 왕궁인가!!” 왕가의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성문 너머로 들어서자 왕궁까지 쭉 뻗은 도로가 나타난다. 바닥에는 뿌려진 꽃잎이 한가득. 대로변엔 퍼레이드를 구경하듯 모인 인파가 곳곳에서 보인다. 물론 귀족은 거의 없다. 귀족 도시라 불리는 황도라 한들, 결국 인구의 9할은 이곳으로 출근하거나 숙식하는 사용인들로 이뤄져 있으니까. “와아! 영웅들의 행차다!” “꽃잎을 뿌려라!” 알바비로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용인들이 대로변에 수없이 늘어져 격하게 우리를 반겨줬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도착했습니다. 여정 중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이내 마차가 왕궁의 외벽 앞에서 멈춰섰다. 비단 우리가 타고 온 것뿐만 아니라 다른 수백 대의 마차도 마찬가지. “그럼 내리지.” “어, 잠깐만! 잠깐 숨 좀 돌리고, 응?” 이제 와서 긴장이 되는 건가? 하긴 얘는 황도에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니까. “……준비되면 말해라.” “으으, 된 거 같당.” 마차에서 내리자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지난 참극 때 함께 사선을 넘었던 생존자들. 다만 서로 거리도 있기에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으로만 인사를 나누었다. “금일 영웅들의 안내역을 맡은 페르트입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성문 앞에서 간단하게 신분 확인만을 끝내고 안내인을 따라 왕궁으로 들어섰다. 정식 명칭은 영광의 궁. 연회를 열거나 왕가의 행사를 진행될 때 내빈을 맞는 용도로 사용되는 궁전. “비, 비요른…….” 왕궁이란 이름에 걸맞게 너무도 화려한 내부에 아이나르가 기죽은 듯 내 눈치를 봤다. 거참, 얘는 이상한 데서 항상 이러네. “어깨 펴라. 손님으로 왔는데, 네가 그러면 더 이상하지 않냐.” “…아, 알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스무 평 남짓의 개인 접객실이었다. “영웅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들어서자마자 시녀들이 달라붙어 머리를 세팅해 주거나 단정하지 못한 옷매무새를 대신 정돈해 주었다. 또한 전담 안내인은 그러는 동안에도 간단한 예절들과 오늘 연회의 진행 순서들을 우리에게 알려 줬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얀델 씨!” “오호, 그렇게 꾸미니 다들 못 알아보겠군?”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던 레이븐과 아브만이 우리의 접객실을 찾아왔다. 그들 역시 평소와는 복장부터 달랐다. 땅에 질질 끌리는 기장의 정통 드레스를 입은 레이븐과 깔끔한 슈트를 입은 곰아저씨. “핫, 조금 어색하지?” 곰아저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인다. 나름 아내의 도움을 받아 차려 입고 왔는데 여기서 기를 쓰고 갈아입혀 줬다고 한다. 용케 사이즈가 맞는 게 있었다 싶지만……. “내빈을 위한 연미복은 모두 마법 부여가 된 의상입니다.”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체격 구분 없이 착용 가능한 마법옷이 수천 벌가량 있다는 듯하다. ‘의상에 마법 부여라니.’ 얼핏 합리적이면서도 터무니없는 낭비다. 우리처럼 연회복이 없는 내빈들이 왕궁에 방문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 레이븐, 너도 여기서 옷을 갈아입은 건가?” “아뇨, 저는 제 걸 입고 왔는데요?” “……그렇군.” 상류층에 속하는 마법사답게, 이런 격식 있는 옷이 한 벌쯤은 그녀에게 있던 모양. “와아, 예쁘당. 이런 건 얼마나 하냥?” “어……. 글쎄요. 사실 예전에 스승님에게 선물 받은 거라서.” “아, 정말? 아무튼, 그런 옷까지 입으니까 정말 요정 같당. 그 요정족이 아니라, 동화책에 나오는 옛날 요정.” “페어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응. 그거 그거.” “흐음, 지금 키 작다고 놀리는 건 아니죠?” “아니, 그럴 리가 있냥! 진짜 예쁘다니까?” 어느샌가 시작된 미샤와 레이븐의 걸스 토크. 나와 곰아저씨, 아이나르는 뒤쪽으로 물러나 다른 대화를 나누었다. “이봐, 얀델. 보상에 대해서는 더 들은 것 없나? 예전부터 갖고 싶던 4등급 정수가 있는데 혹시 가능할까 싶어서 말이지.”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들은 게 없어서.” “그보다 비요른, 배고픈데 밥은 언제 주나?” “못 참겠으면 육포나 먹고 있어라.” “오, 갖고 온 게 있나?” “나도 하나만 줘라. 입이 심심하군.”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자니 잠시 떠났던 안내인이 돌아왔다. “입장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인파로 북적이는 접객실 밖 복도. 안내인들은 그런 그들을 질서정연하게 줄세웠다. 참고로 우리의 위치는 맨 앞 중심부였는데, 좌측으로는 멜터 펜드가, 우측으로는 카일 아저씨가 자리했다. “아, 자네 왔나?” “그런 옷도 제법 잘 어울리는군.” “자, 여기 이쪽에 서게.” ……거, 부담스럽게. “왜 하필 내가 가운데냐?” “허허, 다른 사람이 서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여기 모인 모두가 자네 등만을 보고서 따라갔던 사람들인데.” 어, 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이 아저씨는 나를 너무 높게 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그래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려던 차였다. “시작하려나 보군. 앞을 보게.” 카일이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고. “영웅들이 입장하십니다!” 누군가가 웅장한 외침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뿌우우우우우-! 우렁찬 나팔 소리를 기점으로 시작된 경쾌한 연주. “어서 가게.” 카일의 독촉에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내딛자, 그 뒤로 수많은 탐험가들이 따라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문 너머의 공간은 직사각형 구조의 홀이었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텅 빈 왕좌가 있는 곳까지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나는 카펫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목발 없이 걸으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바바리안의 자존심을 위해 안간힘을 써가며. 터벅, 터벅. 걸음을 내딛는 동안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어 경의를 표했고, 신관들은 신성력을 펑펑 써가며 축복을 내렸다. 아, 귀족들은 저 멀리서 박수를 쳐줬다. 1년 차가 좀 넘은 탐험가가 받기에는 너무도 망극한 대접.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마 그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이건 뭐 구경거리도 아니고.” 아, 구경거리 맞나? 탓. 이내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탐험가들도 줄지어 멈춰 섰다. 군인의 질서정연함과는 차이가 있었다. 제식을 배우지 않았기에 오와 열이 제대로 맞지 않고, 복장도 중구난방이라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근데 그게 우스꽝스러웠을까? “풋.” 멀리서 어느 귀족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퍼져 나갔다. 동시에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도 났다. 꽈악-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훑어보니 한 탐험가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와 함께 동굴에서 길을 뚫던 전사였다. 참나, 몬스터들 대가리를 부술 땐 그렇게나 눈에 뵈는 게 없더니. ‘생각보다 숫기가 없구만.’ 그때는 알지 못했던 전사들의 또 다른 면모. 왠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드넓은 공간에 메아리치는 함성. 의도한 건 아닌데 후창이 이어졌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많지 않은 바바리안을 비롯해 우리의 전투 함성에 중독된 전사들이 토해낸 외침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왕궁에서까지…….”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아연한 표정을 짓거나 기도 안 찬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반면 귀족들은 조금 달랐다. 이게 약속된 퍼포먼스라고 생각했을까? 순간 놀랐다는 듯 정적을 뽑아내던 귀족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렀다. ‘얘네도 진짜 웃긴 새끼들이네.’ 뭔가 웃기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좋아졌다. 화려한 왕궁, 보기 힘든 귀족들의 수많은 시선, 어색한 연미복 등등. 이 자리를 거북해하던 탐험가들이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았다. ‘암, 다들 뻔뻔한 탐험가들이면 이래야지. 거기서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카일이 씨익 웃었다. “말했지 않나. 자네가 아니면 과연 누가 이 앞에 서겠느냐고.” 글쎄,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걸 바바리안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 “저, 정숙! 정숙해 주십시오! 라프도니아의 재상이신 아게니 로튼 테르세리온 각하께서 납십니다!” 그렇게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재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견. 희끗희끗한 머리에 선한 인상. 왠지 교장 선생님을 떠오르게 하는 재상은 텅 빈 왕좌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가벼운 농담부터. “하하, 미안하오. 내가 너무 늦었구려. 부디 영웅들은 너무 노여워 마시오. 참 좋은 날이지 않소.” 자연스레 날씨 얘기로 이어진 연설은 또다시 물 흐르듯 다음 주제로 연결됐다. 딱히 거창한 내용은 없었다. 우리들의 노고를 하나씩 읊조리며 치사하고, 이번에 우리를 부르게 된 이유를 귀족들에게 설명한다. “왕가의 기사는 물론이고, 이름난 클랜들도 하지 못한 일을 이들이 해냈소. 아마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을 터.” 노아르크의 정보를 갖고 생환한 것. 명목상 이게 우리의 공훈이었다. 그야 탐험가들의 반발을 억제하려고 당근을 준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나 아게니 로튼 테르세리온은 병상에 계신 국왕 폐하를 대신해 그 공을 치하하는 바요!” 길었던 연설이 끝나고 재상은 탐험가들의 공훈에 따라 보상을 정리했다. 일단 생존자 전원에게 1,000만 스톤과 황도 카르논의 출입 권한을 주며, 활약에 따라 추가 보상이 있을 거라던가? 참고로 공표 순서는 우리가 먼저였는데…… “나르텔 클랜의 단장 멜터 펜드는 나오시오.” 첫 번째는 멜터였다. “그대는 고블린 숲 전투에서 청랑족 출신의 범죄자 푸른갈기를 처치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하였소.” 이미 정보 수집이 끝났는지 구체적으로 공적을 언급하는 재상. “그대에겐 은혼보고를 개방하겠소. 원하는 정수 하나와 물건 하나를 고를 수 있소. 또한, 2,500만 스톤의 포상금을 내리겠소.” “감사합니다.” 멜터 펜드는 4등급 정수와 그와 비등한 값어치의 장비가 보관된 보물창고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 ‘……내 차례를 기대해 봐도 되는 부분인가?’ 사실 우리 셋 중 공적으로 따지면 멜터가 가장 낮다. 애초에 늑대놈을 처치할 수 있던 것도 다 따져 보면 내가 시체 수집가를 녹다운 시켜서 가능했던 거니까. ‘후…….’ 애석하게도 다음은 카일 아저씨였다. “철의 마도사, 카일 페브로스크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상.” “그간 정무로 바빠서 이제야 찾아뵙는 걸 용서하시오.” 재상이 말한 카일의 공은 세 가지였다. 가진 지혜를 활용하여 원정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 메스 텔레포트로 베르자크를 따돌려낸 것. 그리고 고블린 숲 전투에서 파멸학자를 상대로 시간을 끌고 피해를 입힌 것. “오래전부터 금지된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을 원했다지요? 오늘부로 그대는 라프도니아 왕가의 자랑스런 왕실 마도사요.” “제게 얼마나 기쁜 말씀인지 재상은 모르실 겁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카일은 왕실 마도사로 승진했다. 모든 종류의 마법을 마음껏 익히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 “바바리안 일족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나오시오.” 드디어 내 차례였다. 다만 원래부터 명성이 있던 멜터나 카일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여서일까? 재상은 조목조목 뜯어 보듯 나를 응시하더니, 내 공훈을 하나씩 읊었다. “그대의 공훈은 이와 같소.” “숭고한 의지로 내분을 멈추고 보다 많은 기사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것.”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누구보다도 용감히 싸우며 귀감이 된 것.” “탐험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끼가 되어 베르자크에게서 시간을 벌은 것.” “이계의 저주받은 영혼, 아벳 네크라페토를 몰아붙여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별일 없던 거 같네.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던 차였다. “고작 이 정도로는 그대가 해낸 노고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왕가를 대표해 그대의 공을 치하하는 바!” “…….” “그대에겐 금혼보고를 개방하겠소. 원하는 정수 혹은 물품 하나를 선택해 고를 수 있으며, 5,000만 스톤의 포상금을 하사할 것이오. 또한!” 재상이 말을 마저 이었다. “그대에게 준남작 작위를 수여하겠소.” ……응? 234화 뉴에이지 (4) 준남작. 일반 기사들 바로 위에 속하는 그 작위. “이 무슨…….” “준남작이라니!” 재상의 폭탄 선언에 귀족들이 까무러쳤다. 그럴 만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오! 바바리안에게 계승 가능한 작위를 내리다니!” 준남작은 작위를 물려줄 수 있다. 영원히는 아니고 딱 아들에 손자까지만. 어찌 보면 당대에 한해서만 작위가 유지되는 명예 남작보다도 좋다고 볼 수 있는 셈. ‘작정하고 귀족 루트를 탄 것도 아닌데 작위를 얻게 될 줄은 몰랐네.’ 솔직히 약간 어안이 벙벙하다. 게임에선 후작 이상의 대귀족과 관련된 퀘스트를 깨며 공적치를 쌓아 귀족이 될 수 있었다. 혜택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루트였다. 귀족이라지만 실상은 대귀족의 가신 같은 느낌이라 플레이에 몇 가지 제약이 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제약은 어떻게 되지? ‘……근데 어차피 왕이 뭘 시키면 평민이든 귀족이든 거절 못 하는 건 똑같으니,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음, 일단 그런 거 같긴 한데……. 그때 재상이 소리쳤다. “다들 정숙하시오!” “하지만…….” “폐하의 말씀이오.” “…….” 쉽사리 가라앉지 않으리라 여겼던 혼란은 왕의 지시라는 말 한마디에 잠잠해졌다. 이 나라에서 왕의 이름이 지닌 무게였다. “작위 수여 일자는 추후 정해지는 대로 알려 주겠소.” 아무튼, 그것으로 내 논공행상은 끝. 재상은 내가 작위를 받아들이겠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런 경우는 생각도 못 해본 거겠지. 뭐, 애초에 거절할 생각도 없긴 했다마는. 이곳은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다. 즉, 귀족이 되면 온갖 편의를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플레이도 늘어나는 셈. “나르텔 클랜의 포트얀 미리언트는 나오시오!” 내 차례가 끝난 후 다른 이들의 전과에 따라 보상을 공표하는 과정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때 내 동료들도 차례차례 앞으로 나갔는데, 다들 나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보상을 챙겼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미샤, 아이나르, 곰아저씨는 포상금 천만 스톤과 5등급 정수 혹은 그에 준하는 장비를 선택해 고를 수 있게 됐다. 또한, 마법사인 레이븐은 재상에게 요청해 일반적인 보상 대신 왕실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에르웬의 경우 4등급 정수 혹은 그에 준하는 물품으로 동료들 중 가장 보상이 컸다. 시체 수집가와의 전투에서 두 번째 공로자로 인정된 데다가, 다리아의 사망으로 인한 유가족 보상도 합쳐져서 매겨진 것. 비록 이 자리에는 불참했으나, 어차피 공표만 오늘 했을 뿐 보상은 나중에 지급된다고 하니 이 부분은 문제 없었다. “얀델 씨, 그럼 에르웬은 아직도 성지에?” “듣자 하니 장례는 진작 끝난 거 같은데, 아직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렇구나…….” 에르웬의 안부를 물어본 레이븐이 말꼬리를 흐린다. 혹시 걔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참으로 멋진 날이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새 시대의 주역들과 함께 이 자리를 즐겨주시오!” 길었던 논공행상의 시간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됐다. ***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연회는 두 공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논공행상이 있었던 거대한 내부 홀과 어느새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야외 정원. 강제적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야외에서 연회를 즐겼다. 그야 분위기가 그랬거든. 고아한 음악이 흐르고 정적인 분위기인 실내. 절반 이상의 귀족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기를 택했기에 탐험가들 입장에선 남아 있기 거북했으리라. “얀델 씨는 어떡할 거예요?” “당연히 밖으로 나가야지.” 우리 또한 야외를 선택했다. “여기 있으면 인맥을 넓힐 수 있을 텐데요.” 어차피 준남작 수여도 확정됐기에 인맥이 목적이라면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니었으면 했다. “얀델! 얀델이 왔다!” “뭐야? 귀족이 된다면서 여긴 왜 와?” “하하하! 얀델이 어디 그럴 놈인가!” 귀족 작위가 수여된단 말에 어딘가 거리감을 느꼈던 건지, 내가 나오자 격하게 맞이해 주는 탐험가들. 후,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놈들 보다는 이 녀석들과의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들 자네만 보는데 뭐라고 한마디 해주는 게 어떤가? 안에서 지긋지긋하게 듣기는 했지만, 자네가 하는 말은 또 다르게 들릴 것이네.” 함께 따라온 카일이 옆에서 말했다. 그래, 짧게 축배사 같은 거라도 하라 이거지.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이 됐지만……. ‘그냥 바바리안답게 가자.’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나. 미사여구가 붙은 치하의 말은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그러니……. “다들 고생 많았다!!” 오늘은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자,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난 외침. 태생적으로 긴 말을 선호하지 않는 바바리안들이 화답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이는 탐험가들도 마찬가지. “살다 보니 왕궁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 다 오는군!” “준남작이 될 얀델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마음 놓고 놀아보자!” “와아아아아아!!” 탐험가들도 왕궁이라는 불편함을 내려놓고서 마음껏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는 우리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와, 비요른! 이것 좀 먹어 봐라! 무슨 고기인진 몰라도 뼈가 아삭아삭해서 맛있다!” “어, 그거 뼈까지 먹는 음식이 아닌데…….” “응? 어째서?” “아녜요. 맛있으면 된 거죠…….” 미샤가 해주는 집밥과는 또 다른 맛이 있는 기름진 음식. 깔끔하게 넘어가는 술. 힘들었던 지난 경험들을 안주 삼아 떠들 수 있는 수많은 전우들까지. ‘이러니까 무슨 뒤풀이라도 하는 거 같네.’ 연회에 걸맞은 즐거운 시간이 이어진다. 가끔 죽은 동료의 얘기가 나오거나 할 때면 분위기가 어두워졌으나, 다 같이 짧게 묵념을 하고 다시 원래 분위기를 찾았다. 그런 시간이 이어져 서서히 날이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재밌어 보이는군?” 실내에서 귀족들과 연회를 즐기던 멜터가 밖으로 나왔다. “안에는 재밌었나?” “그럴 리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걸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너도 참 고생이 많군.” 실내에서 귀족과 연회를 즐긴 멜터의 입장은 이해가 됐다. 일단 얘는 클랜을 이끌고 있으니까. 귀족과 인맥을 쌓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언젠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자, 왔으면 여기 한 병 받아라.” “한 병……?” “귀찮게 잔을 쓸 필요가 있나?”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나올 걸 그랬군. 근데 자네 동료들은 어디 갔나?” “아브만 빼고는 다들 재미없다면서 다른 데로 갔다.” “그래? 그 바바리안 아가씨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아, 걔는 술이 약해서.” 정확히 말하면 약한 건 아닌데, 분위기에 취해 계속해서 병나발을 불더니 얼마 못 가 뻗었다. “얀델, 뭐 하나 병이 비었는데. 설마 취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멜터도 왔겠다 나는 주변의 전사들과 함께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비요른 얀델의 몸이 가진 장점 중 하나다. 술이 엄청나게 세다. “으, 술 냄새…….” 이 몸으로 깨어난 뒤 처음으로 죽어라 마시고 있자니 미샤가 다가왔다. “아, 미샤. 잘 놀았나?” “응. 저쪽에서 공연 같은 걸 하던데 재밌더라고.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그럴 일이 또 있겠지. 근데 레이븐은?” “취해서 마법사들이랑 어려운 얘기만 하면서 놀고 있당.” 취해서 어려운 얘기를 하다니, 역시 마법사는 멀리해야 할 존재인가? “잠깐 걷고 오겠다.” 나는 멜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잠시 술자리에서 벗어나 미샤와 정원을 산책했다. 내가 있던 전사들의 술자리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시끌벅적하게 잘 놀고 있었다. 곳곳에서 귀족들도 보였다. “오호라, 수천에 이르는 시체병단이라니 쉬이 상상도 되지 않는구려.” “그러게요. 정말 무서웠겠어요. 대단하세요.” 예전 백작가 연회에서 내가 인기 스타였던 것처럼, 탐험가들에게 먼저 다가가 관심을 표하는 귀족들. 하긴 전부 작위 귀족들처럼 엉덩이가 무거운 건 아니니까. 젊은 방계 귀족들은 사실상 중산층 평민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응? 근데 왜 우리한테는 아무도 안 왔지?’ 뭔가 이상했지만, 금방 납득이 됐다. 우락부락한 전사들 수십 명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어떻게 오겠는가. “비요른, 좀 앉아서 쉴까?” “그러는 게 좋겠군…….” 그렇게까지 취한 건 아니지만, 지난 전투의 후유증이 아직 다 낫지 않았기에 오래 걷는 게 힘들었다. “……왜 바닥에 앉냥? 옆에 앉지 않고?” “부서질 거 같아서.” 미샤는 벤치에, 나는 그냥 잔디밭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그냥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술을 하도 마셔서일까? 시끄러운 연회의 소음이 배경음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고, 머릿속엔 이런저런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얀델! 이번에 준남작 작위를 받게 되신 비요른 얀델 님 맞죠?” 그렇게 편안한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몇몇 귀족들이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나저나 얀델 님이라니……. 벌써 귀족 취급을 해주는 건가?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다가오는 자들은 잘 말해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방식을 쓸 순 없었다. “하하, 자네 여기 있었군?” 방계가 아닌 작위 귀족. 껄끄러운 관계가 되면 앞으로의 일들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을 그런 존재이자……. 드왈키의 배다른 형. “……마르토앙 남작.” “사실 아까 몇 번 만나 보려 나왔네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해 가까이 가지 않았네.” 거, 변명은. 그냥 전사들 사이를 뚫고서 나한테 오지 못한 게 뻔하구만. “배려해 줘서 고맙군.” “하하, 아닐세. 자네야말로 이번 연회의 주인공 아닌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뒤에 잠깐 동안 마르토앙 남작과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유익한 대화였다. 보통 평민 출신 귀족이 탄생하면 무릇 텃세가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좀 다를 거라던가? “어째서지?” “그야 국왕 폐하께서 내린 작위 아닌가. 무려 그분께서 유심히 지켜보는 탐험가인데, 감히 누가 자네를 건드리겠나? 다들 친해지고 싶어 안달일 걸세.” 왕이라……. 항상 느끼지만, 왕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부족장이 했던 말도 그렇고. ‘어쨌든 이 말이 사실이라면…….’ 왠지 장난기가 돈 나는 마르토앙 남작의 옆에 자리한 집사놈을 보며 인사를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집사.” 내 인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집사놈. 하긴, 두려울 것이다. 머리통을 부숴버리며 뼈를 아그작대던 그때 그 바바리안이 이제 대단한 명성과 권력마저 갖게 됐으니. “그, 그때는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가 씨익 웃으며 바라보자 집사가 바들바들 떨며 사과의 말을 해왔다. 딱히 통쾌하지는 않았다. ‘쩝, 이러니까 진짜 약한 애를 괴롭히는 거 같네.’ 샌드백도 적당히 타격감이 있어야 패는 맛이 있는 법. 집사놈을 놀리는 건 이쯤에서 관두고, 마르토앙 남작과 마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드왈키도 언급됐다. “그나저나 내 동생은 어디 갔나?”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그땐 쓰지도 않던 ‘내 동생’이라 표현을 하는 마르토앙 남작. 나와 미샤가 동시에 굳었다. ‘씨발, 뭐지?’ 지금 장난치는 건가? “어디 갔냐니……?” 겨우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묻자 집사놈의 표정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 하나. 보아하니, 얘는 사정을 아는 거 같았다. 그리고 둘. “남작님, 전에도 말했지만 리올 워브 드왈키는…….” 남작도 이 사실을 알았다. 단지, 한 번 듣고서도 까먹었을 뿐. “아, 그랬지. 참, 사람이 늙었더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단 말이야. 하하.” 무안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남작. 술을 몇 병이나 퍼마시고도 멀쩡했던 속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꽈악. 정신을 차려 보니 미샤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꼬옥 쥐고 있다.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로 손등을 툭툭 친 뒤 손을 떼어냈다. 그야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내가 아니니까.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졌다. 따라서……. “그래, 이해하니 걱정하지 마라. 나이가 들면 머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응? 아, 뭐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군? 하하하.” 나는 손을 내밀어 남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갈 곳이 있어서 이만해야겠군. 만나서 반가웠다.” “그래? 아쉽게 됐군. 나중에 또 보세.”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내 악수에 응하는 마르토앙 남작. 놈이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아, 근데 어디를 가는 건가?” 나는 마르토앙 남작과 악수했던 손에 뭔가 먼지라도 묻은 것처럼 털어내며 대답했다. “아, 갑자기 손을 씻고 싶어져서.” 더러운 건 씻어내야지. *** 마르토앙 남작은 눈치가 느린 편이었다. “……그래? 아무튼, 추후에 내가 부를 테니 거절치 말게. 자네도 귀족이 됐으니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게 많지 않은가.” 별다른 내색없이 날 보내주는 남작. 어쩌면 문제는 나한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바바리안이 이런 식으로 돌려까기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바바리안의 몇 없는 단점일지도.’ “잘 참았당.” 내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미샤. 슬슬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 쪽으로 향했다. 손을 씻는 거야 지나가는 마법사를 붙잡고 부탁해도 되겠지만, 화장실도 가고 싶었거든. “같이 안 가줘도 되겠냥?”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는 거냐?” 미샤와 헤어져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 나와서 다시 연회장에 돌아가려던 차. 날 알아본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해왔다. “오, 여기 있었군?” 지난번 참가했던 연회의 주최자 페르데힐트 백작이었다. 우승 상품인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를 수여하며 이상한 말을 했었지. [자네가 더 준비되면 따로 부르겠네.] 결국 오늘까지 따로 부름을 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날 찾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그야 그게 사실이니까.” “만난 김에 저리로 가서 술 한잔하지 않겠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그렇다면야.” 마르토앙 남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권력을 지닌 자였기에 순순히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받게나.” 테이블에 앉자 백작이 술을 따라서 건넸고, 나는 그대로 원샷했다. “동료가 기다려서 그러는데, 용건을 먼저 들을 수 있겠나?” “하하, 물론일세.” 다행히 백작은 이해한다는 듯 전혀 기분 나쁜 기색없이 본론을 꺼냈다. “내 막내딸 아라벨라일세. 자네도 전에 한번 본 적 있지?” 이거 느낌이 이상한데……. “어때? 예쁘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백작이 옆에 있던 딸내미의 어깨를 감싸며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 아라벨라입니다…….” 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백작의 딸은 날 보며 벌벌 떨며 이름을 밝혔다. 하, 살다 살다 이런 일까지 겪게 될 줄은 몰랐건만. “어떤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인지라 뇌가 멈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근데 그게 고민 중인 거로 보였을까? “아, 혹시 교제 중인 여인이 있다면 너무 걱정 말게. 어차피 첩으로 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 “……첩?” “아, 몰랐나?” 내 중얼거림에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많은 후손을 두어 이 나라의 보탬이 되는 것도 귀족의 의무 중 하나. 귀족이 되면 정실 외에도 세 명까지 첩을 둘 수 있네.” 의무는 개뿔. 왠지 또다시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235화 뉴에이지 (5) 내 딸을 정실로 두고, 애인은 첩으로 들여라. 그런 뜬금없는 제안을 해 온 백작은 이어서 말했다. “최초로 10층에 도달했던 심연 수색자 리메닌, 드넓은 6층의 모든 지역을 탐험하고 지도로 제작한 위대한 항해사 피크마, 철의 영웅 저거너트.” “…….” “말고도 수많은 영웅들이 존재했네. 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그들의 여정엔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것이지.” 결국 나는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나를 후원해서 그쪽이 얻는 게 뭐지?” “이 도시에는 항상 인재가 부족하지. 딱히 이번 일이 아니어도 자네를 후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네.” 그냥 빈말로 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정확히 무슨 뜻이지?” “귀족들이 유망한 탐험가를 후원하는 일은 흔하네. 그게 가문의 명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이건 아는 얘기긴 하다. 상류층의 고상한 취미라고 해야 하나? 현대에 빗대자면 슈퍼카를 모으거나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건 몰랐다. “때로는 그게 가문의 세력을 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하네. 후원하는 탐험가가 없으면 없는 대로 업신여겨지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것대로 또 안목이 없다며 평가를 당하지.” 이제 보니 단순한 취미의 영역을 넘었다. 귀족에게는 사교계가 정치의 장이고 타인의 평가는 곧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할 터. “우리 페르데힐트 백작가의 재력은 어느 대귀족에 못지않네. 기사단 또한 마찬가지고. 하지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지.” 백작가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뭔지는 알 거 같았다. “많은 공을 들였음에도 오랫동안 이렇다 할 탐험가가 나오지 못했네.” “나중에 준비가 되면 따로 부르겠다는 것도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군.” “뭘 숨기겠나? 그때는 자네에게 확신이 없었기에 그리 말했네. 혹시 후원한 탐험가가 얼마 안 가 죽기라도 하면, 그게 우리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이 되기도 하니.” 그럼에도 뺏기기는 싫어 다른 귀족의 초대에 응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일종의 침 바르기 행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망설이지 말고 자네를 후원할 걸 그랬네.”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만약 그랬으면 지금쯤 올라간 내 주가만큼 백작가의 명성도 수직 상승했겠지. 이렇게 딸을 내놓아야 할 일도 없었을 테고. “이제는 의심하지 않네. 자네는 더 크게 될 인물일세. 수많은 탐험가들이 죽었으나 어디 이게 끝이겠나? 어느 때처럼 시간이 지나며 빈자리들이 채워지겠지. 자네는 분명 새 시대를 이끌 주역이 될 걸세.” “……평이 과하군.”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겠지. 아무튼, 내가 얻는 이득은 이만하면 모두 설명이 된 듯하군. 그럼 대답을 해 주겠나?” 나는 잠시 침묵하며 고민했다. 정확히는 고민하는 척을 했다. 곧장 거절하면 분명 마음 상할 게 뻔했으니. “미안하지만, 그런 관계는 힘들 거 같군.” 최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 거절. “잘 생각해 보게. 다들 자네와 좋은 관계를 가지려 하겠지만, 과연 혈연까지 맺고자 하는 자가 있을지. 난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해 줄 수 있네.” 백작과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딸과 한 번 더 짧게나마 인사를 나누고 야외로 돌아왔다. 나가기 무섭게 미샤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비요른! 어디 갔었냥! 하도 안 와서 찾으러 갔는데 보이지도 않고!” “아, 잠깐 귀족이 붙잡아서.” 굳이 방금 있던 일을 말할 필요는 없을 터. 대충 둘러댄 뒤 있던 곳으로 돌아가 마저 술을 마셨다. 웃고 떠들수록 백작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자네는 분명 새 시대를 이끌 주역이 될 걸세.] 그렇게 연회가 끝났다. *** 연주가 끝나고, 시끌시끌한 소음이 멈춘다. 지긋지긋한 연회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씹새들.” 처음엔 저게 어떤 연회인지 몰랐다. 그야 유일한 정보 수급처가 먹통이 된 이후로 장님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으니까. 외부와 연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오랜만이구려.] 조금 전에 다녀간 재상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알게 됐다. 이번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노아르크놈들이 이번에 수작을 부렸소이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 많은 피해. 대체 얼마나……? 사내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애써 감추며 물었고, 재상은 대답했다. [그대가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으로.] 4층 이상의 탐험가 중 7할이 죽었다. 물론 그에게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7층 이상의 탐험가. 등반을 멈춰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음에도 심층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를 가다듬던 여러 대형 클랜들. 그들 역시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과연 이 피해를 복구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하, 존나 빡도네 진짜. 그냥 그때 대갈통을 터트렸어야 하는데.” 사내가 이를 갈았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했다’였다. [일부러…… 노린 거냐?] 그는 살기를 겨우 억누르며 물었고, 재상은 웃으며 답했다. [이번 일은 우리도 알지 못했소. 원한다면 그 능력을 통해 진실인지 확인해 봐도 좋소.] 몰랐단 말은 사실이었지만……. 저 교묘한 화법에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랄.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결국 이렇게 됐을 게 뻔한데.] [글쎄, 어땠을 거 같소?] [개수작 부리지 마. 지난 토벌전 때 내가 놈들을 다 죽이게 내버려 뒀으면 이런 일은 절대 없었을 테니까.] 비로소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토벌전 당시 전황은 라프도니아 측이 훨씬 유리했다. 피해는 컸지만 좀만 더 몰아붙인다면 확실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왕가는 그러지 않았다. 시간을 주었고, 결국 노아르크 측은 고대 결계를 활성화시키며 성문을 걸어 잠갔다.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처음부터 나와의 약속은 지킬 생각이 없었다고.] [무엄하구려. 국왕 폐하께서 왕가의 명예를 걸고서 직접 행한 약속이오. 이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니 의심하지 마시오.] [의심하지 말기는 지랄.] 사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니, 이제서야 인정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이 새끼들은 우리를 보내 줄 생각이 없다. ‘아마 내가 도망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시건방지게 구는 거겠지.’ 그 대화를 끝으로 재상은 떠났다. 머리통을 터트리지 않고 보내 준 이유는 간단하다. 밤이 되어야 했으니까. ‘하, 이제는 또 어딜 파 봐야 하지?’ 왕가의 단서가 있으리라 여겼지만, 단서는 찾지 못했다. 아니, 이쪽엔 답이 없다는 것만 알게 됐다. 이 판단으로 적어도 10년은 날렸다고 봐도 무방할 터. 하지만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 갈 곳이 없으면 노아르크라도 가지 뭐.’ 왕가에 비하면 세력은 약할지라도, 그쪽은 클리어에 대한 의지는 있을 것이다. ‘아, 몰라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사내는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미징을 시작했다. ‘별의 소멸.’ 어둠의 군주 데드레드의 스킬. 마지막으로 미궁에 입장했을 때 얻은 그 정수이자, 목격자가 없어 왕가조차 그가 소유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것. 지직—. 사내의 손 위에 암흑의 구체가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마력을 흡수했다. 그가 위치한 방에 새겨진 봉인 마법진 역시 마찬가지. 지지지직. 이윽고 마법진이 깨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암흑구체가 폭발하며 반경 100m 내의 모든 것이 소멸했다. 댕! 댕! 댕! 폭발과 동시에 종이 울려 퍼지며 주변에 배치돼 있던 기사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 반응 한 번 빠르기는. “타, 탈출이다!” “막아라!!” 사내가 씨익 웃었다. “야, 지금 오면 뒈질 텐데?” 그가 내뿜은 살기에 기사들이 움찔 굳었다. 매일 왕이니 충성이니 뭐니 광신도처럼 외쳐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 모양.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병신 같은 새끼들.” 사내는 조소를 날린 채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 자유를 만끽하듯 ‘공간간섭’을 사용해 허공을 밟으며 너무나도 쉽게 왕궁을 벗어났다. 불과 1분도 되기 전에 도달한 수백 미터 상공. 이 빌어먹을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창살처럼 사방을 옥죄는 드높은 성벽들. ‘아, 잠깐. 근데 노아르크는 결계 때문에 당장 들어갈 수가 없네?’ 한참을 이동하던 사내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허공에 멈춰서 고민을 시작했다. ‘……비프론으로 갈까? 거기가 숨어 있기 딱 좋은데.’ 역시 이게 제일 나을 거 같다. 하지만……. ‘일단 마탑부터 들르자.’ 몸을 숨기기 전에 먼저 갈 곳이 있었다. 정보 수급 루트는 다시 복구를 해야 은거 상태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 거 아닌가. ‘그 형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말이지.’ ……살아 있겠지? 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타인을 상대로는 아주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내, 이백호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연회가 끝나고 닷새가 흘렀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냥 집에 박혀서 몸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고, 조금 더 살만해진 어제는 혼자 외출해 한 가족을 찾았다. 그야 약속했었으니까. [내 아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게. 자네라면 분명 나갔을 때 유명해져 있을 거 같거든. 그 아이가 좋아할 걸세.] 열 살배기 꼬마와 젊은 부인이 있는 가정. 녀석의 말과 달리 꼬마는 나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마차를 타고 네 시간을 넘게 이동해서 왔으나 결국 부인이랑만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다. 유가족 보상금이 들어와 그거로 가게를 차릴 계획이라던가? 원래 부부끼리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만약 아이를 키우거나 생활을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 부담 없이 찾아와라.] [왜…… 그렇게까지 잘해 주시는 거죠? 당신과 그이는 그날 처음 본 사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 테니까.] [그랬…… 군요…….] 남겨진 아이를 위해 열흘 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스스로를 추슬렀던 억척스러운 여인이 조용히 눈물을 떨궜다. [어려서부터…… 꼬마 같은 면이 있던 사람이에요. 항상 영웅 같은 사람을 동경했죠. 정말, 정말로 고마워요. 그이도 기뻐할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기억해 준다면…….] 나 같은 사람이 뭐기에.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참아 냈다. 진실이야 어쨌든, 되어야 했다. 그들이 그것을 바란다면. 그것 또한 내가 해야 하는 일일 테니까. “비요른!” 조용히 생각을 되짚고 있자니, 미샤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에르웬! 에르웬이 왔당!” 그래, 얘도 드디어 정리가 된 거구나. 어서 내려가 보니 거실에 멍하니 서 있는 에르웬이 보였다.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있는 재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툭 뱉었다. “잘 왔다.” 좀 더 제대로된 삶을 살아왔다면 이럴 때 좀 더 멋진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었으련만. “네…….” 그늘진 표정의 에르웬을 보며 괜히 미샤가 허둥지둥하며 다가갔다. “시, 식사는? 배는 안 고프냥?”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칼스타인 씨.” “씨는 무슨! 그냥 언니라고 불러…… 앗!” 아……. 미샤가 지뢰를 밟았다. “아니아니, 그래! 미샤면 충분하니까…….” 빠르게 호칭을 정정하는 미샤. 이에 에르웬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뜨며 힘겹게나마 미소를 내지었다. “그렇게 배려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마음은 고맙습니다. 언니…….” “아, 으응……. 맞다. 이리 와 봐랑. 혹시 네가 올지도 몰라서 이쪽에 방을 비워 놨는데…….” “네? 방을 비워 두셨다니요?” “어디 갈 곳도 없지 않냥. 언제까지 머물러도 되니까 다 추스를 때까지 여기서 지내랑. 혼자 지내면 괜히 더 힘들어지기만 하니까…….” 미샤의 말에 에르웬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대도 않았던 제안을 들은 것처럼. “그, 그래도 되는 건가요……?” 이내 에르웬이 내 의사를 묻듯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지 않나. 네 언니가 부탁했다고. 이제 내가 네 보호자다.” 에르웬이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억지로 토해 내듯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 배려, 감사히 받을게요. 정말, 이제…… 저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없기는. 미샤, 얼른 데려가서 방 좀 안내해 줘라. 가구들은 네가 채웠으니 나보단 더 잘 알 거 아니냐.” “아! 알았당!” 이내 미샤가 에르웬을 데려가 집안 구조나 그런 것들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다만 그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을까? 에르웬은 잠시 쉬겠다며 침대에 눕더니 그대로 잠에 들었다. “…후, 차라리 몬스터랑 싸우는 게 속 편할 거 같당.” “동감이다…….” 이후 미샤가 차려 준 밥을 둘이서 먹었다. 그야 아이나르는 오늘 성지에서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거든. 아무튼, 저녁 식사를 끝낸 후에는 미샤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자정 무렵이 됐을 때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23 : 59]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과연 몇 명이나 참가를 했을까? 아니…….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광대, 그 씹새끼는 왔을까? 제발 왔으면 좋겠는데. 236화 송곳 (1) 어둑한 실내. 하얀 빛이 스며드는 우드톤 블라인드. 200불짜리 싱글 매트리스와 노트북이 올려진 작업용 책상. 벽면에 딱 붙어 의자 하나만 놓인 1인용 티 테이블. 그 좁은 방 안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여긴…….” 모르는 곳은 아니다. 취직하며 뉴욕으로 상경해 처음 계약했던 임대 아파트이자, 몇 년째 매달 15일 자정마다 불려오던 그곳. “내가 왜 여기에…….” 여자는 두통을 느끼며 기억을 되짚었다. 서서히 하나씩 떠올랐다. [흑마법사입니다!!] [시간을 끄세요. 제가 곧 처리하겠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미궁에서의 1일 차. 다중 순간이동마법으로 도착한 안전지대. 길었던 수뇌부 회의 끝에 결국 내려야 했던 비정한 선택. [왕가 새끼들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려 한다!! 막아라!!] 기사들이 탐험가를 상대하는 사이에 차원문 너머로 달려가던 자신과 클랜원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 지면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불기둥. “서, 설마…….” 그제야 이해가 됐다. 막 차원문을 타고 도시로 복귀했던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가. “15일이 지난 거야……?” 여자는 황급히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게시판을 둘러보며 정확히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를 알아봤다. 평소 이런 일을 자주 해봤던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얻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차원문을 타고 나온 탐험가들 중 생존자는 고작 103명. 전원 의식불명이며, ‘대리인’이란 이명을 지닌 토베라교의 대신관조차 지금으로선 고칠 방도가 없다며 포기한 상태라던가? “아, 안 돼…….” 라레르 클랜의 부단장, 베르실 고울랜드. 현실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컴퓨터가 켜지자마자 일단 채팅방부터 확인을 했다.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이백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고스트 마스터가 직접 벤을 때렸으니 암만 얘라도 별다른 수가 없었겠지. 후, 얘가 있었을 때가 확실히 좋긴 했는데. ‘결국 고급 정보는 원탁의 감시자에서 얻는 수밖에 없나…….’ 아쉬움을 애써 지우며 마우스를 움직인다. 원탁은 커뮤니티가 열리고 세 시간이 지나야 열리니까. 그때까지는 눈팅이나 하며 이곳의 분위기나 볼 생각이었다. ‘역시 플레이어들도 엄청 죽었구나.’ 원래 커뮤니티가 열리면 이 시간을 기다렸던 플레이어들에 의해 거래소, 자유 게시판 등에서 폭발적으로 글이 게시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가. ‘거의 3분의 1 정도.’ 게시판뿐만 아니라 채팅방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50명 이상 상주하던 대형 채팅방조차 고작 열 명이 좀 넘는 인원이 입장해 있다. “하…….” 이런 변화들과 마주칠 때면 한숨이 나온다. 무슨 ‘대홍수’가 세상을 뒤덮은 거 같달까. 어디를 가든 다 쓸려나가서 정상인 곳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여기도 새 뉴비들로 다시 채워지려나……?’ 음,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전쟁 직후에 그 무엇도 남지 않았지만, 결국엔 지금에 이르지 않았던가. 아마 그때가 오면 이제 나도 뉴비가 아니라, 나름 상위권의 플레이어가 되겠지. 아, 지금도 상위권은 들었으려나?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 작위까지 먹은 애들은 얼마 없을 거 같은데. 딸깍, 딸깍. 이런저런 생각을 해가며 웹서핑을 하듯 각종 게시판들을 순회했다. 어느 게시판을 가던 대부분 이번 사태에 대한 얘기들만 가득했고, 둘러 보니 내 이야기들도 간간이…… 아니, 상당한 빈도로 나왔다. [비요른 얀델, 얘 대체 뭐냐?] -5등급 탐험가래서 30대쯤 될 줄 알았는데 성인식 끝낸 지 이제 1년 지났다네? -난 5년 동안 뭘 한 거지? 3층 계층군주 때도 몇 번인가 언급된 적은 있었지만, 지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내가 주제인 게시글의 등록량도 엄청난데, 그 하나하나에 댓글도 수십 개씩 달리고 있다. [these99: 애초에 5등급도 아님. 그 사람이 어떻게 5등급임? 길드 공적치만 아니었으면 이미 4등급은 그냥 찍었을 듯.] [└글쓴이: 와, 그 정도야? 겨우 1년 됐는데? 더 자괴감이 드네.] [└NExtlevEL: 4등급이라니 과장이 심하네. 글쓴이도 자괴감 가질 거 없음. 5등급이야 원래 정수만 잘 나오면 1년 안에 찍는 게 기본이니까.] [└NExtlevEL: 아, 그리고 정수 가진 것도 얼마 안 되는 거 같던데? 내가 봤을 땐 5등급도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이야.] [└these99: 1년 안에 5등급이 기본? 뭐 혼자 게임 하세요? 5등급 턱걸이란 개소리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이미 진작에 시체 수집가 개처바르고 증명했는데?] [└NExtlevEL: 혹시 미국인이야? 딱 봐도 영웅 만들기 중인데 그걸 믿네. 그리고 진짜로 이겼어도 그게 걔 혼자 한 거겠냐? 다 팀빨이지.] [└Pnec: 얘 말이 맞다. 시체 수집가는 수백 대 일로 싸웠는데 어떻게 그걸 개처발렸다고 하지? 병신인가?] 연예인을 두고 인터넷에서 갑론을박을 하듯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플레이어들.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댓글도 여럿 있었다. [fliccolo: 내가 봤을 때 걔도 플레이어임.] [└글쓴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단기간에 명성을 갖게 되면 나올 수밖에 없는 의문. 그래도 내가 걸어온 길이 도움이 되었다. [└arolf5205: 플레이어는 무슨. 너희가 한 번이라도 직접 봤으면 그런 말은 절대 못할 텐데 ㅋㅋㅋ.] [└stevencastle: 이런 말 하는 애들은 전부 운 좋게 미궁 안 들어간 애들임. 마지막에 실명 상태에서 시체 수집가 귀 물어뜯는 거 봤으면 플레이어란 말 같은 건 절대 못 함.] [└cherylvander: 상남자 그 자체.] [└Ykbell: 고블린 덫 밟으면서 소리 지를 땐 나까지 뜨거워지더라. 1년 차고 뭐고, 현대인은 절대 낼 수 없는 감성이었다. 그때 있던 사람들은 다 공감할 거임.] [COOOOL75: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나에 대한 비방성 글 혹은 찬양성 글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화제가 될 정도로 성장을 했구나. 뜨거운 관심이 부담스러운 한편, 결국 더 위로 나아가려면 지나쳐야 할 길이란 생각이 든다. 그야 나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갈 거니까. 층수와 명성이 비례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슬슬 시간이 됐네.’ 그렇게 한참 동안 게시판을 둘러보고 있자니 커뮤니티에 입장하고서도 세 시간이 지났다. [03 : 01] 예전엔 조금이라도 주목을 끌려고 최대한 늦게 들어갔지만, 이번엔 그냥 시간이 되자마자 입장했다. 본집회 전에 나누는 잡담도 궁금했으니까. ‘설마 광대 빼고 다 죽거나 한 건 아니겠지?’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뒤로하고서 마우스를 빠르게 더블클릭했다. 번뜩-! 잠깐 눈앞에서 빛이 점멸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익숙한 커스터마이징 룸이었다. 매일 입던 정장에 수사자 가면만을 얼른 걸치고서 원탁이 있는 메인 룸으로 이동했다. 끼이이이익. 그곳엔 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고블린, 여우, 사슴뿔. ‘광대놈은 아직인가 보네.’ 이내 내가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셋이 날 쓱 보더니 묘한 탄성을 내뱉는다. “아…….” “다행히 오늘도 왔군.” 얘들은 항상 올 때마다 이러네. 나는 수사자 가면에 빙의해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내 전용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이러고 있으면 알아서 지들끼리 놀거든. 그냥 눈 감고 듣기만 하면 된다. “그나저나 생존자가 벌써 넷이군요.” 정적인 공기가 거북한지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뱉는 고블린. “신기하군. 다른 자들은 몰라도 너는 위험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지?”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다. 몇몇 신관을 제하고 종교 쪽 인물들은 대부분 차원문을 타고 나갔으니까. 즉, 거의 다 뒈졌다는 뜻이다. 그럼 고블린은 어떻게 된 걸까. “글쎄요. 제 신상과 관련된 이야기인지라. 그냥 운이 좋았다고만 해두겠습니다.” “칫,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고블린이 얼버무리며 잘 빠져나가자 사슴뿔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둘이서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이상하게도 여우는 대화에 참가하지 않았다. 근데 그걸 둘도 느꼈을까? “여우,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군.” “예. 아까부터 그냥 멍하니…….” 사슴뿔과 고블린이 여우를 보며 의구심을 내비쳤고, 여우는 한 템포 늦게 흠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이거 봐, 영 이상하다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면 말해 주시죠. 제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우 씨는 열심히 도와드릴 수 있는데…….” 이때다 싶어 치근대는 고블린. 여우가 숨을 길게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써 준 건 고마운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관심 꺼주세요.” “아, 예. 그러시다면야…….” 왠지 평소보다 훨씬 더 까칠한 말투에 고블린이 무안한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른 분들이 안 오는군요?” 이제 남은 입장 가능 시간은 고작 5분. 아직 참가하지 않은 멤버는 둘이다.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광대놈과, 소생의 돌을 간절히 바라는 초승달. “설마 둘 다 죽은 건 아니겠지요?” “흠, 초승달은 몰라도 광대 그놈이 죽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그렇겠죠? 아무래도?” 고블린이 어딘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복도쪽 커스터마이징 룸이 열리며 인기척이 들려왔다. ‘광대려나?’ 나는 애써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려 그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 고블린이나 사슴뿔과 마찬가지로 굳었다. 그야 예상했던 가면이 아니었거든. ‘여왕?’ 화려한 보석들이 조화롭게 박힌 가면. 여러 금붙이들로 눈가를 화장하듯 장식이 되어 있었고, 이마 부분은 왕관의 형태다. 그리고 선택한 의상도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 ‘복귀 회원인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여왕 가면이 우아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아님을 깨달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제가 처음이라 잘 모르는 게 많겠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신입 회원이었다. *** 내가 온 이후로 처음 있는 신규 회원. 당연히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건 여우였다. “처음요? 대체 어떻게 들어왔죠? 설마 당신도 마스터를 만난 건가요?”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있던 조금 전과 다르게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는 여우. “네, 뭐……. 그런 거겠죠?” 여왕 가면이 반쯤 긍정하듯 말하자 여우의 목소리에 어린 흥분이 더 커졌다. “그분! 그분은 어디 있죠? 아니, 만나기라도 하면 돼요. 꼭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 “저런, 죄송해요. 그 부탁은 들어드리지 못할 거 같네요.” 여왕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웃으며 신입 회원답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를 주도했다. “아무튼, 그럼 서로 통성명이나 할까요?” 초면부터 자기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여왕. 사슴뿔이 못 마땅하다는 듯 답했다. “이름은 쓰지 않는 게 규칙이다.” “그렇군요! 그럼 이쪽은 고블린, 저분은 여우, 여기는 사자. 흠, 그럼 그쪽은 어떻게 불러야 하려나요?” “사슴뿔.” “그냥 사슴이 아니라요?” “네 가면에도 이름이 적혀 있었을 텐데?” “아! 그랬죠. 그럼 저는 여왕이 되겠네요? 후훗.” 그렇게 여왕에게 관심이 쏠려 회원들과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녀를 계속 관찰했다. 가면 하나로 전부 가려지는 건 아니니까. 고블린은 피부가 구릿빛이다. 그래서 동남아 아니면 남미 쪽 출신이겠거니 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어떨까. ‘일단 서양인은 확실하네.’ 푸른 눈에 찰랑거리는 금발. 피부색은 백인의 그것처럼 아주 하얗다. 물론 외견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이고, 그마저도 이쪽 세상에서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기시감.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무튼 여우 님, 너무 반가워요. 알다시피 여성 유저는 얼마 없잖아요? 아, 그리고 고블린 님은 목소리가 굉장히 좋으세요. 사슴뿔 님도 굉장히 친절하신 거 같고요.” 사람 기 빨리게 하는 텐션을 가진 여왕이 날 응시하자, 여우가 재빠르게 말을 붙여 경고했다. “수사자 님은…….” “저기.” “네?” “당신이 어떤 스타일인진 알겠는데 그래도 저 사람한테는 너무 친한 척 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네? 왜요?” 여왕이 고개를 갸웃하자 여우가 내 눈치를 보며 난감해했다. 고블린 때처럼 기선 제압을 할 거라 생각한 건가? 뭐, 평소였으면 했을지도 모르겠다. 살기 한 방으로 저 악마적인 텐션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개이득일 테니까. 하지만……. “으음, 수사자 님은 굉장히 과묵하시네요. 나중에 친해지면 얘기 많이 나눠봐요!” “…….” 나는 그냥 말을 씹을 뿐이지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간단한 이유다. 기운을 아껴둬야 하거든. ‘마침 왔나 보네.’ 입장 마감까지 1분 정도 남은 시각. 끼이익, 소리를 내며 복도의 문이 하나 더 열렸다. “오, 다른 회원분도 더 있나 보네요?” 여왕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기도 잠시. 인기척이 들린 방향으로 회원들의 시선이 이동했다. “이야! 많이들 살아남았군요!” 저 멀리서부터 특유의 좆같은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광대. “솔직히 고블린 씨는 그냥 죽……. 응?” 광대가 여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광대 님이라 부르면 될까요? 왠지 굉장히 재밌는 분일 거 같아서 굉장히 흥분되네요!” “……뭡니까? 이 경박한 여자는? “신입 회원이다. 아마 마스터의 추천을 받고 들어온 거 같더군.” “흐음……. 그렇습니까?” 관찰하듯 여왕을 바라보던 광대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관심을 지우고 내게 말을 걸었다. “피싯, 수사자 씨는 잘 지냈습니까?” 늘 있던 레퍼토리다. 이 새끼는 항상 나한테 친한 척을 해댔다. 마치 이 자리에서 자신과 대등한 사람은 나 한 명밖에 없다는 듯이. “기대하십시오. 이번에는 꽤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가져왔으니까.” 뭐래, 병신이. “…….” 나는 천천히 살기를 끌어올렸다. 원래라면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했으나, 이번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이 새끼만 아니었으면.’ 다리아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탐험가들이 살아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끼는 지금 어떠한가? “피싯, 초승달 씨가 없는 걸 보니 그쪽은 죽었나 보네요?” 평소처럼 해맑게 쪼개고 있다. 그래, 그러니까……. “근데 수사자 씨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으십니까?” 오직 한 가지의 의념만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눈을 뜬다. 이름하여 진심 살기. “혹시 어딘가…… 읍!” 서로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광대가 목을 양손으로 틀어잡았다. 그리고 진공 상태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괴로워하더니, 이내 바닥에 픽 쓰러져 꿈틀거렸다. “……!”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고 당황한 회원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광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다음 위에서 아래로 놈을 내려다보았다. “그, 그, 만…….” 조금 웃겼다. 뭐라도 된 것처럼 항상 병신 같은 말투로 사람을 병신 취급 하더니. “마치 벌레 같군.” 넌 앞으로 친한 척 금지야 새끼야. 237화 송곳 (2) 살기殺氣.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념. 보통은 그저 오싹하고 끝나는 게 전부지만, 심상세계인 이곳에서는 그 효과가 수십 배로 증폭된다. 육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에, 심할 경우 영체에 극심한 충격을 받으며 현실에서도 영구적인 후유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정신 오염.’ 플레이어들은 이 현상을 그렇게 명명했다.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대상자는 영구적으로 말을 더듬거나 하는 등의 언어 장애가 생기고, 심한 경우 정신이 붕괴하며 분열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마치 벌레 같군.” 더욱더 의념을 실어 광대놈을 응시한다. 광대놈은 침을 흘리면서도 물었다. “어, 어째서…….” 이유는 간단하다. 광대는 네크로맨서다. 이번 전투에서 잃은 소환수들을 복구하려면 한 세월이 걸릴 거며, 노아르크의 결계가 풀리기 전까진 도시로 나와서 내게 해를 입히지도 못한다. 하지만……. ‘오르큘리스.’ 드왈키를 죽인 용살자가 속한 집단. 결국 이놈도 언젠가 해치워야 할 적이다. 미리 조져놓을 수 있으면 당연히 조져놓는 게 합리적일 터. “……으, 헙!” 살기 방출이 장기간 이어지며 후두부에서 쨍한 통증이 일었다. 정신력을 코스트로 쓰는 기술인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마 내일 하루 종일 잠만 자야 되겠지. 음, 어쩌면 이틀을 내리 자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압박을 높였다. 이 새끼라면 지금쯤 ‘비요른 얀델’을 원수로 여기고 복수할 궁리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여기서 조져놓는 게 베스트야.’ 이놈은 용살자보다도 위험한 새끼다. 기억을 잃은 그놈과 달리 ‘비요른 얀델’에게 선명한 적의를 갖고 있다. 만약 이번에 해치우지 못한다면 언젠가 나를. 내 동료를 다치게 만들 것이다. “……!” 대상자인 광대만이 아니라, 이곳에 자리한 모든 회원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진득해진 살기. ‘제기랄.’ 단어 그대로 살기 어린 시간이 이어지며 돌연 뇌가 뻐근한 감각이 피어났다. 이전에 겪어 본 경험이었다. 살기를 사용하기 위한 정신력이 모두 소진된 것. “그, 그만. 제, 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았는데.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마지막까지 살기를 쥐어 짜낸다. 그렇게 몇 초를 더 버텼을까. “……허업!” 물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광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콜록대며 위액을 토해냈다. “켁, 케헥, 으으읍……!” 비루한 꼴을 하고 있는 광대였으나, 나라고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눈만 감아도 기절할 수 있을 거 같은 감각. “왜……. 대체 왜…….” 정신이 돌아왔는지 광대놈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내 눈을 바라본다. 호흡이 조금 거칠 뿐, 언어 기능에 문제가 생기거나 한 건 아닌 듯하다. 그래, 정신 오염 근처까지도 못 간 거구나. ‘후,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나름 예상한 결과이기는 했다. 지난날, 여우에게 살기를 뿜어냈을 때도 그 지경에 가기 전에 내 정신력이 바닥났으니까. 수없이 사람을 죽여댄 광대라면 아무래도 여우보다 정신 방벽이 두터울 가능성이 높았다. ‘쩝, 살기만 보면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은데 그래도 안 되네.’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광대놈의 눈을 세심히 관찰했다. 떨리는 동공에서는 원망보다 의문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내 행동의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그곳에서 피어나는 두려움. “…….” 나는 바들바들 떠는 광대놈을 계속 응시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은 일절 존재치 않았다. 다짜고짜 쳤던 선빵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뭔가 납득할 이유가 있어야 할 거라고? 쓸모없는 고민이다. 그야 나는 비요른 얀델이 아니라 수사자니까. “고작 이 정도인가.” 정신 고갈로 살기 모드가 종료된 게 아니다. 불쌍해서 내가 끝내 준 거다. 그렇게 자가 최면을 걸며 이제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등을 돌린다. 그리고……. “쯧.” 짜증난다는 듯 툭 하고 뱉는다. “소문대로면 조금은 쓸 만할 줄 알았는데.” 마치 한번 시험해 보기라도 한 것처럼. *** 광대놈을 살기로 조지겠단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크게 미련을 갖지는 않았다. 이 경우에도 이 경우만의 장점은 존재하니까. 예로부터 적은 최대한 가까이에 두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두고두고 빨아먹는 거로 해야겠네.’ 광대는 범죄 집단 오르큘리스의 간부다. 노아르크를 본진으로 두고 있는 만큼, 잘만 이용하면 도움될 고급 정보가 계속해서 나오겠지. “저기…… 괜찮아요?” 숨죽인 채 상황을 관망하던 여왕이 조심스레 광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근데 그게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탓. 광대가 화풀이를 하듯 그녀의 손을 쳐내더니, 의자를 잡으며 제 발로 일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다른 회원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오직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수사자, 당신이 혹시 ‘그’입니까?” 응? ‘그’가 뭔데.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는 캐릭터도 아니고. “…….” 전혀 알 수 없기에 그냥 닥치고 있었다. 늘 그랬듯 이러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판단. 실제로 잠시 기다리자 광대놈이 생각을 정리하듯 읊조렸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군요. 당신은 그가 아닙니다.” 사슴뿔도 아는 게 있는지 뭐라고 말을 했다. “그래, ‘그’는 제약 때문에 집회에는 참가할 수 없는 몸이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여왕도 굳이 말을 아낄 필요 없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이곳 수준이 높네요? 네. 그는 절대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이 채팅방은 세 시가 돼야 열리니까.” 세 시라서 안 된다고……? 잠깐만, 왠지 이거 아는 놈 얘기 같은데. ‘……설마, 이백호를 말하는 건가?’ 불현듯 그런 가설이 떠올랐으나, 사실인지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수사자의 몇 없는 단점이다. 궁금한 게 있어도 절대 먼저 물을 수가 없다. 다들 아는 하급 정보라면 더욱더. 거, 수사자 가오가 있지. ‘아무튼, 이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슬슬 끼어들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다들 아니라는 걸 아는데 굳이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피식 웃으며 툭하고 뱉었다. “그래, 나는 ‘그 녀석’이 아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너희가 귀여워서 상을 주기라도 하듯이. ‘그’가 아닌 ‘그 녀석’. 누군진 몰라도 그와 나를 은연중에 동급으로 올려 두는 단어를 선택해 말했다. 근데 이 전략이 유효했을까? “당신은 대체…….” 선빵을 맞고 그꼴이 되었음에도 광대놈이 나를 보며 경악한 눈빛을 보인다. 원망의 기색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마 적대할 마음도 들지 않은 거겠지.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내 물음에 광대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는지 곧바로 움찔했다. 아, 그렇다고 대답을 정정하는 일은 없었다. 한 번 처맞고 나니 내가 누군지가 정말로 궁금해진 듯한데…….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신규 회원인 여왕을 제하면 모두가 알 수 있을 제스처. “……저게 무슨 뜻인가요?” 여왕의 물음에 광대가 수하처럼 답했다. “재밌는 정보를 가져오면 알려 줄 수 있다는 걸 겁니다.” “아, 그러고 보면 이 비밀 채팅방 콘셉트가 그런 거였죠?” “예, 그렇지요. 그래서 말인데, 아까 다들 말하던 ‘그’가 대체 누굽니까?” 고블린이 은근슬쩍 물었으나 여왕은 듣지 못했다는 듯 무시했다. 그때였다. “정체를 알려 주겠다니 진심이십니까……?” 광대가 멍하니 되물었고, 나는 구태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광대를 응시했다. 그것이 설령 내 신상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날 ‘재밌게’ 해준다면 알려 주지 못할 건 없다는 듯이. 그 상황조차도 내겐 즐거울 거라는 듯이. “몇 달을 봐왔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사슴뿔이 나를 보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네가 이 세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졌군. 그런 식이면 결국 돌아가서도 제대로 된 삶은 살 수 없을 거다.” 여기서 남 인생 걱정을 해주다니, 생각보다 스윗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들은 체도 안 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자, 사슴뿔이 분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여왕이 나선 것도 그때였다. “그나저나 이건 좀 흥미롭네요. 혹시 제가 정보를 가져와도 당신 정체를 들을 수 있나요? 저도 좀 궁금해졌거든요.” “날 재밌게만 해준다면.” 내 답변에 여왕이 싱긋 웃었다. “기대하세요. 이래 봬도 재밌는 이야기들은 꽤 많이 알고 있는 편인지라. 후훗.” 음, 저리 말하니 좀 기대가 되긴 한다. 이 여자도 정체불명인 건 마찬가지니까. ‘일단 이 시국에 들어온 거면 나랑 다르게 마스터 추천으로 온 거 같긴 한데…….’ 처음엔 광대놈을 참교육하느라 깊게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유심히 살펴봐야 할 듯하다. “저, 그럼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떨지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자리한 침묵. 이내 고블린이 먼저 입을 열며 혼란했던 상황이 얼추 정리됐다. “하긴, 이미 문도 진작에 닫혔는데 언제까지 이럴 수만은 없지. 결국 초승달은 끝까지 참석을 안 했군.” “이 시기에 오지 않았다는 건 역시 변을 면치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역시 다들 초승달이 이번 사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흐음, 이 중에 가장 적극적인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먼저 할 겁니까?” 평소였으면 여우가 사회자 역할을 자처하며 집회를 진행했겠지만, 상태가 이상한지라 고블린이 주도하게 되었다. “저는 나중에 할게요. 처음이라 조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서.” “그렇게 하십쇼. 그럼 누가 할까요?” “아무도 없다면 내가 먼저 하겠다.” 집회의 첫 순번은 사슴뿔이었다. “아까 ‘그’의 얘기가 나온 김에 이거로 하지. 그자가 닷새 전에 세상 밖으로 풀려났다.” “예? 그자가 말입니까……?” 전혀 몰랐던 이야기라는 듯 광대가 놀랐다. “저기……. 공평하려면 ‘그’가 누군지부터 말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닐련지…….” 고블린은 이게 뭐냐는 눈치였고, 여우는 눈빛에 변화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듣기는 한 건가? 후웅. 아무튼, 원탁의 보석은 초록불을 자아냈다. 위 정보가 사실이며 이 자리의 절반 이상이 이 정보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뜻. “근데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 귀한 정보를 이렇게 풀어도 되는 겁니까?” 광대의 물음에 사슴뿔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어차피 일주일이면 알 만한 자들은 대부분 알게 될 테니까. 이렇게라도 써야지.” “그럼 다음은 제가 해봐도 될까요?” 여왕이 손을 살짝 들었다. 원래는 첫 시작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게 국룰이었으나, 다들 그러라며 허락해 주었다. 그야 궁금한 것이다. 과연 이 여자는 어떤 정보를 뱉을지. “후후,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왠지 조금은 긴장되네요.” 그런 것치고 전혀 긴장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왕은 주목된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마탑에 있어요.” 그의 현재 위치 정보. ‘후, 또 이거야?’ 애초에 ‘그’가 누구인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기에 듣고서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만 이 둘은 달랐을까? 여왕이 정보를 뱉은 순간, 광대와 사슴뿔의 눈이 원탁의 중심부로 향했다. 진위 여부를 가려 줄 보석이 있는 그곳. “진실이군…….” “세상에 나오자마자 간 곳이 마탑이라니, 갑자기 관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가 누군지 꼭 좀 알아봐야 할 거 같다. 얘들이 이럴 정도면 진짜 대단한 사람 같으니. ‘……만약에 진짜 이백호인 거면, 걔는 대체 뭐 하는 애인 거지?’ 그런 딴생각이나 하고 있던 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여왕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으나, 그녀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수사자 님은 이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으시네요? 마치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그냥 걔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어디 있든 크게 상관이 없던 건데. “마탑에도 사람이 있으신가 봐요?” “글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여왕이 슬그머니 나를 떠보았고, 나는 귀여운 수작이라는 듯 대충 넘어갔다. “다음은… 제가 할게요.” 이후 순번은 여우였다. 집회가 시작되고서도 이렇다 할 말이 없던 여우는 세 번 연속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처음 두 번째는 최신 정보였으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정보라고 다들 판단한 것. “엘카파드 클랜의 마스터가 플레이어였다니, 이건 좀 신기하군. 근데 이건 너무 쓸모없는 거 같은데? 그놈은 분명 이번에 차원문을 넘자마자 죽은 거로 기억하는데.” “……가치는 상대적이죠. 그 일례로 저나 고블린 씨는 ‘그’가 누군지도 몰라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얘기였단 거죠.” 여우의 논리도 나름 일리가 있었으나, 이곳은 다수결이 지배하는 원탁 앞. “그래도 세상에 그런 자가 있다는 건 알게 됐지 않습니까? 피싯.” “……다들 똑같은 의견인 거예요?” 모두가 그녀의 물음에 침묵했고, 그 침묵은 무엇보다 좋은 대답이 되었다. 결국 여우는 네 번째 트라이를 해야 했다. “테버른 클랜의 마스터가 넘버나인을 갖고 있어요.” 무려 싱글 넘버스 아이템에 관한 정보. “테버른의 클랜마스터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채워둔 격이군요. 피싯.” 이내 원탁의 보석이 초록불을 자아냈고, 당연히 이번엔 이견을 내는 자도 없었다. 싱글 넘버스에는 그 정도 가치가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 아껴 뒀던 정보를 이제서야 풀었단 생각마저 들 정도. “이번엔 제가 하지요.” 다음 차례는 고블린이었다. 그는 성기사 출신답게 이번에도 종교 쪽과 관련된 정보를 풀었다. “결국 모든 교단에서 왕가에 관한 지지를 철회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뒤면 아마 다시금 예전처럼 내외하는 사이가 되겠지요.” 종교 쪽 핵심 인물이 아니면 알 수 없었을 정보였기에 당연히 단번에 합격 판정. “피싯, 그럼 제 차례군요.” 광대는 자기 순서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충격 선언을 했다. “저는 노아르크에 살고 있답니다.” 이 새끼 대체 뭐지? 살기를 처맞더니 대가리에 문제가 생겼나? *** 무려 본인의 신상을 까발리는 정보.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를 포함해 모두가 흠칫 굳었다. “……!” 아, 정확히는 여왕을 제외한 모두였다. “노아르크라니, 광대 님도 굉장히 재밌는 분이셨네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광대에게 말을 거는 여왕. 다만 광대의 시선은 내게서 고정되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악령 사냥꾼이 떠올랐다. 그때 그 새끼도 미끼를 던져 놓고 내 표정을 저렇게 살폈었는데. ‘설마, 내 정보력이 어느 정도인지 떠보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광대놈의 눈깔을 유심히 살폈다. 어딘가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놀라신 걸 보니 제가 누군지는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피싯.” 뭐래, 미친놈이. “초승달 씨는 수사자 씨가 우리 정체를 다 알고 있는 거 같다고 했는데. 그건 역시 아닌가 봅니다.” 일종의 간보기다. 수사자가 대단한 놈인 건 알겠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인물인가. 개인의 무력만인가. 아니면 막대한 세력과 정보까지 겸비한 그런 절대자인가. “어때, 이건 좀 재밌으셨으려나요?” 추가로 재미 스택까지 챙길 수 있다니, 나름 효율적인 한 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재밌는 수작이었다.” 그 순간 초록불이 들어왔던 보석이 빛을 꺼트리며 순번이 넘어갔음을 알렸다. 그럼 이제 기다려 왔던 나의 차례. 뱉을 정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광대는 시체 수집가다.” 어디서 깝치고 있어 새끼가. 238화 송곳 (3) 내가 말을 뱉은 순간. “……!” 광대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면으로는 절대 감춰지지 않을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 반응만으로도 진위 여부는 얼추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을까. “시체 수집가라고……?” 회원들이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다급하게 한곳을 응시했다. 원탁의 보석이 있는 그곳. 머지않아 보석이 빛나며 색을 뿜어냈다. 너무도 선명한 녹색의 빛이었다. “……사실이었군.” 이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이동했다. 쓸모를 다한 보석이 있는 지점이 아니라, 뇌 정지가 온 듯한 광대가 있는 방향. “…….” 경계심, 혹은 적대심이 가득한 시선에 광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저들의 시선이 불편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놈이면 지가 먼저 노아르크 출신임을 밝히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단 것에 놀란 거겠지.’ 원래 나도 이를 티 낼 생각은 아니었다. 뭐, 고작 이거로 ‘비요른 얀델’을 특정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야 하겠지만……. 굳이 밝혀 봤자 손해가 더 크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판이 알아서 깔릴 줄이야.’ 먼저 정체를 밝혔다면, 광대는 내가 최근에 그 정보를 얻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초승달 씨는 수사자 씨가 우리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건 역시 아닌가 봅니다.] 광대놈이 도발을 하며 자연스러운 구도를 만들어 주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이놈은 심지어 제 입으로 노아르크 출신임을 밝혔다. 쉽게 말해, 정체가 까발려져도 집회에서 떠나거나 할 놈이 아니라는 것. ‘하긴 어차피 플레이어인 게 온 세상에 다 알려진 새끼니, 다른 애들처럼 신상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겠지.’ 덕분에 거리낄 게 없어졌다. 신상을 까발려 엿을 먹이면서도, 옆에 두고 최대한 정보를 캐겠다는 플랜B는 유지할 수 있다니? 심지어 부가적인 이득도 여럿 있다. 노아르크 출신인 게 밝혀졌으니, 회원들도 대놓고 그쪽 정보를 기대하게 될 터. 또한, 수사자 캐릭터를 회원들 앞에서 더욱 공고하게 구축하며, 신입인 여왕에게도 착각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역시 내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수사자가 고인물처럼 보일수록 나를 비요른 얀델과 연관 짓기 어려워질 테니까. 실로 개이득을 본 셈. “……시체 수집가가 있는 비밀 채팅방이라니, 역시 들어오길 잘했네요.” 여왕이 중얼거리며 짧았던 침묵이 끝났다. “……피시싯, 이거 한 방 먹었군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광대가 여유를 잃지 않은 척 억지웃음을 내지었다. “…….” 고블린은 ‘시체 수집가’란 말을 듣고서부터 광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고, 여우와 사슴뿔은 광대보다 나를 더욱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정말 다 알고 있었군요.” “대체 당신은 누구기에…….” 크, 그래. 이거거든.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고정시키며 최대한 무심한 척 말을 씹었다. 그러고 있자니 다시금 관심이 광대에게로 모였다. “자, 그럼 정체가 까발려진 소감이라도 말해 보는 게 어떠냐? 시체 수집가.” 사연이라도 있었는지 공격적인 어조로 뭐라 말을 거는 사슴뿔. 다만 광대놈도 전혀 지지 않았다. “……피싯, 글쎄요? 소감이라니. 수사자 씨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 “끝까지 여유로운 척을 하는군.” “쯧, 이래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니까. 내가 당신들 신경이나 쓸 것 같아요? 당신들처럼 꽁꽁 숨어서 지내던 것도 아닌데?” 딱히 틀린 것은 없는 광대의 말. 다만 뉘앙스에서 뭔가를 느꼈을까. “……설마, 이 지경이 됐는데도 집회에 계속 남아 있을 셈이냐?” “그럼요. 아, 그렇다고 제가 당신들 때문에 남는다고 착각하진 않았으면 하는군요. 제가 남으려는 건 모두 수사자 씨 때문이니까.” 솔직히 이런 반응은 조금 신기했다. 살기에 이어 신상 공개까지 연타로 명치를 꽂아 버렸는데 아직도 내게 친한 척을 하다니. 이 새끼는 무슨 샌드백이라도 되는 건가? 속으로 감탄하는 동안에도 사슴뿔과 광대의 기 싸움은 이어졌다. “그나저나 사슴뿔 씨는 주둥이를 조심하는 편이 좋겠군요. 혹여나 제가 찾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럴 걱정은 없을 거 같군. 너처럼 함부로 정체를 노출시키고 다닐 만큼 멍청하진 않아서.” “피싯, 정말 그럴 거라고 자신합니까? 나만 해도 짐작 가는 놈이 넷 정도 있는데? 전부 다 죽여 버리면 그중에 정답이 있지 않을까요?” “풋, 올 테면 와 봐라. 내가 무서워할 것 같나? 바바리안한테 죽도록 처맞은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오만한 성격은 아직도 그대로인가 보군.” “당신…… 정말 죽고 싶습니까?” 극찬이 터져 나온 걸 보니 승자는 사슴뿔이었다. 이내 광대가 살기를 뿜어내며 사슴뿔을 압박했으나, 서로 비슷한 수준인지 사슴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때였다. “자자, 그만들 하세요. 회원들끼리 친하게 지내야죠. 네?” 여왕이 나서며 둘의 싸움을 중재했다. 조금 웃겼다. 이게 무슨 신입 회원이란 말인가? “그러지 말고 얼른 다음 바퀴나 돌아봐요. 해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여왕의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인싸력이 인상 깊었는지, 둘의 기 싸움이 멈췄다. 다만 다음 바퀴로 가려는 찰나. “……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여우가 기브 업을 선언했다. 앞에서 몇 번이나 트라이를 하더라니, 쓸 만한 정보가 없는 모양.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릴게요.” 여우는 채팅방에서 나가는 대신, 방문을 열고 나가 대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회원이 되고 처음 있는 경우였다. “끝나면 꼭 시간 좀 내주세요. 수사자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게 할 말이라……. 아까부터 멍하니 있던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어쩌면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요.” 이내 여우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떠났고, 곧바로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됐다. *** 첫 순번은 여왕이었다. 이 집회의 시스템이 제법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정보를 꺼냈다. “다들 GM은 아시죠? 근데 이건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후훗! 많이 오해들 하시는데, 사실 이 커뮤니티는 GM이 만든 게 아니랍니다?” 프리패스를 의심하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당연히 보석이 뿜어낸 빛은 적색. “에…?” 당황한 여왕을 보며 사슴뿔이 읊었다. “예전에 수사자가 말했던 정보군.” 이미 한 번 내가 집회에서 꺼낸 적이 있던 정보. “……수사자 님이 이걸 알고 계셨다고요?” 여왕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진 듯하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마는. ‘얘는 진짜 누구지?’ 회담에서 누구도 몰랐던 고급 정보였는데, 이걸 알고 있다니. ‘어쩌면 커뮤니티 운영진 쪽 사람일 수도 있겠…….’ 불현듯 그런 생각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만.’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이 커뮤니티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내게 이것저것 알려 주며 안내인 역할을 해 줬던 여자. ‘그러고 보면 닉네임도 소울퀸즈였지.’ 마침 저 여자가 고른 것도 여왕 가면이다. 광대가 말하길, 가면은 보통 자신과 가장 닮은 걸 고른다던데……. 과연 이게 우연일까? 그것도 머리도 똑같은 금발에 백인인데? ‘……듣다 보니 목소리도 비슷한 거 같고. 왜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 따져 보면 당연한 일이다. 코 하나만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인상은 확 변하는 법이니까. 아마 ‘여왕’이라는 포인트가 없었다면, 무의식중에 ‘소울퀸즈’를 떠올리지는 일조차 없었겠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그쪽이라고 생각해 두는 편이 좋겠네.’ 그렇게 가능성을 정리하는 동안, 여왕은 새로운 정보를 뱉었고 또다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음,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최신 정보로 가는 편이 좋겠네요. 수년 내로 6인 결속 마법이 보급될 거예요. 아예 탐험 구조가 뒤바뀌는 거죠. 어때요. 대단하지—.” 하, 이거는 대체 몇 명이 뒷북을 치는 거야? “어라?” 적색 불이 켜진 보석을 보며 여왕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이미 한 번 언급됐던 정보다. 반 년 정도 지났으니 결속 마법이 나오려면 이제 1년 반쯤 남았겠군.’ “와, 기간까지? 여기 진짜 수준이 높네요?” 여왕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뱉자 광대가 오만하게 웃었다. “피싯, 그냥 그쪽 수준이 낮은 거 아닙니까?” 아마 놈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닐 거다. 여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 줬으니까. ‘그런데도 저러는 건 그냥 더 귀한 정보를 풀어 줬으면 하는 거겠지.’ 아, 참고로 고블린은 ‘수준’ 얘기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리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 아닐 수 없다. “흐음, 이건 좀 곤란한데…….” 여왕은 전혀 곤란하지 않다는 느낌으로 그리 말하며 세 번째 트라이를 했다. “왕이 병에 걸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응? *** 여왕의 말에 보석은 초록불로 반응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큰 혼란이 원탁을 덮쳤다. 간단한 이유다. 이와 정반대 되는 정보가 일찍이 광대의 입을 통해 언급됐던 적 있으니까. [라프도니아 왕의 병세가 악화됐답니다.] 어찌 보면 원탁의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100% 확신을 하고 있다면, 보석은 초록 불을 켜 준다. 사실 여부가 아닌 진위 여부만을 가리는 것. 하긴, 애초에 그게 아니었다면 이 시스템을 이용해 온갖 정보에 접근했겠지. “골치 아프게 됐군.” “네? 골치 아프게 됐다니요?” 사슴뿔이 한숨을 내쉬며 이러한 사정을 여왕에게 설명했다. “흐음, 거짓말을 한 사람은 없지만, 둘 중 하나는 잘못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요?” “정확하다.” “그럼 제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왕이 아프다는 거야 아는 사람이야 다 아는 거지만, 그걸 알면서도 거짓말이라고 확신한 사람은 제가 유일하잖아요?” “피싯, 어디서 이상한 걸 듣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흠, 이게 시체 수집가의 수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여왕의 도발에 광대가 발끈했다. 다만 여왕은 능글맞게 되받아칠 뿐이었다. “그럼 광대 님은 어디서 들은 정보인데요? 저는 직접 왕과 만나봤어요. 그런데 저보다 확실한가요?” “……그런 소리는 누구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시체 수집가가 이런 쫌팽이일 줄이야. 자, 보석에 손을 대고 말할 게요. 그럼 됐죠?” 이내 여왕은 왕과 만나 봤다는 것을 말했고, 보석은 초록빛을 자아냈다. “…….” 이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 광대. 얘가 어쩌다 이런 캐릭터가 된 거지? 오늘 종일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기만 하네. “수사자에 이어 또 괴물이 들어왔군. 왕과 접촉이 가능한 플레이어라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저 그럴 기회가 한 번 있었을 뿐.” 여왕은 그 가면에 걸맞게 첫 집회에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회원들에게 각인시켰다. “왜 자꾸 이런 사람들만 늘어나는 거지……?” 신입의 활약에 고블린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덤. “그럼 이 문제는 됐으니,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죠! 이번엔 고블린 님이 하세요!” “제, 제가 말입니까?” “네!” 여왕은 자연스럽게 아우라를 뿜어내며 자리를 주도했다. 이에 고블린은 거절치 못하고 순순히 다음 차례를 맡았다. “어제 마탑에서 노아르크의 결계를 뚫을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는 모양이더군요. 아, 대신관급이 서른 명 모여서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요.” 그래, 드디어 방법이 생긴 거구나. 어쩌면 근시일 내에 2차 토벌대가 꾸려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는군, 시체 수집가.” “뭘 당신이 으스대고 있습니까? 아까 들어 보니 신전은 왕가에 지지를 철회할 거라던데.” “진심으로 종교 세력 따위가 왕가에 반항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 “이제 왕가에는 ‘그’도 없지 않습니까?” “제기랄, 네놈이 그쪽 놈들인 걸 알았으면 그 얘기는 하지 않는 건데.” 이때다 싶어 투닥거리기 시작한 사슴뿔과 광대. “저… 이번엔 안 말리십니까?” 고블린이 여왕에게 눈치를 줬으나 여왕은 그저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왜요? 이제 보니 이것도 하나의 재미 포인트 같은데.” “그, 그렇군요?” 여왕마저 둘의 기 싸움을 방관하며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했으나, 의외로 승자는 금방 정해졌다. “아, 맞다. 축하한다. 이번에 새로운 이명이 붙었다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처음 듣는다는 반응의 광대. “호오, 모르는 건가? 장난감 수집가라는 새 이명을?” “어머나, 망측해라.” 여왕은 아는 게 있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고, 사슴뿔은 웃음기를 감추지 않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장난감 수집가. 네가 꼭 아기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 “내가 아기 같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치인 광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사슴뿔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닌가? 비요른 얀델이 술자리에서 매일 같이 말하고 다니는 거로 유명한데?” “그, 그놈이……?” 슬슬 짚이는 게 있는지 광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마무리 일격을 가하기 딱 좋은 타이밍. “너, 작다면서?” 사슴뿔은 고인물답게 그틈을 놓치지 않고 심장에 비수를 찔렀다. 까드드득. 광대의 입가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속으로 사죄의 시간을 가졌다. “…….” 아, 미안미안. 꼭 좀 비밀로 해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말이야. “푸흡.” 이게 이렇게 돼 버렸네? 239화 송곳 (4) “푸흡.” 고블린이 웃자 광대의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큼, 크흠흠!” 웃은 게 아니라 기침을 한 것이라는 듯 목을 가다듬으며 눈을 피하는 고블린. 사슴뿔이 끼어들어 그를 두둔했다. “왜 엄한 고블린을 괴롭히나? 네가 작은 몸에 들어간 게 저 녀석 잘못도 아닌데.” 그 비아냥거리는 말에 광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모멸감에 치를 떨며 그들을 바라볼 뿐. ‘얘, 이러다가 다음부터 안 오는 거 아니야?’ 문득 그런 걱정도 들었지만, 다행히 광대는 일류였다. “……피싯.”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 상황에서도 억지로나마 웃음 짓는 광대. “유치한 수작을 부리긴.” 왠지 뭘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일방적으로 딜교환을 당하는 상황을 역전할 유일한 방법. “어차피 제 몸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한다고 타격이라도 있을 거 같습니까?” 정신 승리. ‘얘도 참 골때리네.’ 광대의 대사는 시원시원했으나, 목소리에선 뜨거운 울분이 넘쳐흘렀다. 반면 사슴뿔은 어떤가. 눈빛에는 오직 즐거움만이 가득하다. 사실상 승자가 누구인지는 정해진 상황. 하지만, 사슴뿔은 승자의 아량 따위는 없는 무자비한 사내였다. “흐음, 작은 건 인정한다는 거군?” 이 남자는 악마인 걸까? “…….” 마지막까지 명치를 처맞은 광대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말을 더 나눠 봤자 상처받는 건 자신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진짜 사내들이란.” 상황이 종료되자 여왕이 피식 웃었다. 왠지 내가 다 낯부끄러웠다. 하긴, 다 큰 성인 남자가 이런 거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으면 한심하게 보이긴 하겠지. 아무튼, 잠깐의 해프닝은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금 집회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샜군. 그럼 나부터 이어서 하지.” 사슴뿔이 집회의 재개를 알리며 자기 차례의 정보를 풀었다. “사흘 전에 왕가에서 노아르크의 염탐꾼을 사로잡았다. 결계를 활성화하기 전에 몇 명을 위로 빼돌린 모양이더군.” 사로잡힌 염탐꾼이라……. 혹시 그게 아멜리아일까도 싶지만, 왠지 그 여자는 아닐 거 같다. 쉽게 잡힐 거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서. “얻을 정보를 다 얻어내면 죽일 생각이다. 아, 물론 죽고 싶어질 만큼 고문을 한 다음에.” 이내 사슴뿔이 노아르크 출신인 광대를 보며 약올리듯 말을 이었다. ‘일단 사슴뿔은 왕가 소속인 게 확실한 거 같고…….’ 광대와의 대립이 불러온 또 하나의 성과. “피싯, 순진하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 버러지 한둘 죽는다고 제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습니까?” 그런 거치고 목소리에 불쾌감이 가득했다. 아마 염탐꾼의 목숨과 관계 없이, 사슴뿔이 기세등등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그럼 제 차례군요.” 사슴뿔의 턴이 끝나자마자 광대가 곧바로 반격하듯 말했다. “곧 비요른 얀델에게 암살자가 갈 겁니다.” ……응? 갑자기? “한창 영웅으로 올려치기를 하고 있다죠? 귀족 작위를 받자마자 뒈지면 참 재밌겠군요. 왕가의 위신이 아주 하수구로 처박힐 테니 말입니다!” 하, 이게 새우등 터진다는 그건가? 느닷없이 내가 언급되며 당황하기도 잠시, 짜증이 밀려온다.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암살자라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소식을 미리 알 수 있게 된 거다. 그리고 이는 사슴뿔도 마찬가지였을까? “멍청하긴.” 사슴뿔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해 적에게 친절히 경고까지 해주다니, 정말 아기가 따로 없군.” “쯧,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어느새 또다시 시작되려는 둘의 기싸움. 처음에야 재밌었지만 이제 슬슬 질리는 감도 없잖아 있기에 내가 끼어들어 끝냈다. “이제 내가 하지.” 오랜만에 입을 열자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장내. 나는 한 번 회원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여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만든 건 다른 세계의 악령이다.” 쩝, 이건 아껴 두려고 했는데. *** 사실 일종의 선점이었다. 원래는 누군가가 ‘재밌는’ 얘기를 해주면 그 보상으로 해주려고 아끼던 것이지만……. [이 커뮤니티는 GM이 만든 게 아니랍니다?] 이 정보를 알던 여왕이라면 커뮤니티를 만든 존재가 이계의 악령이란 것도 알고 있을 터. 똥이 되기 전에 쓰는 게 낫다고 여겼다. 슬슬 수사자로서의 위엄을 세울 수 있을 만한 카드들도 점점 떨어지는 와중이었— “다른 세계의 악령이 만들었다라…….” 응?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군요.” 보석이 초록불을 자아내자, 무언가 막혔던 것이 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여왕. 뭐야, 얘 설마 모르고 있던 거야? ‘……운영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설마 ‘소울퀸즈’가 아니었던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아직 확실한 건 없다. 어쩌면 마스터가 얘한테 거기까지는 말을 안 해준 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자, 잠깐만! 다른 세계의 악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요? 지구 말고도 플레이어가 있다는 뜻입니까?” 잠깐의 공백 끝에 고블린이 놀라며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해석은 네 몫이다.” 정 내 입을 열게 하고 싶으면 재밌는 걸 갖고 오면 된다. 그래 봤자 노잼 판정을 내리겠다마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했거늘.”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하던 사슴뿔도 놀라운 비사를 들었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백호가 대단하긴 해.’ 이번 정보도 그렇지만, 지금의 수사자를 만든 일등공신의 정보들은 대부분 이백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싯, 역시 남아 있기를 잘했군요.” 집회 내내 두들겨 맞았던 광대도 내 정보가 흥미로웠는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철면피 깔기를 잘했다고 여기는 모양. “……이거 더 흥미가 생기네요.” 여왕이 열의에 찬 눈으로 한 바퀴 더 집회를 이어가자며 제안했으나, 애석하게도 이번 집회는 이걸로 끝이었다. 그야 고블린도 백기를 들었거든. “저는, 더 말할 게 없어서 이만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여기까지 하지. 우리 넷 전부가 모르는 정보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이내 사슴뿔도 이어서 불참을 선언했고, 자연스레 집회는 마무리되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보통은 남아서 회원들과 잡담을 나누는 듯하던 광대는 집회가 끝나자마자 떠났다. 하긴, 전부 까발려진 마당에 남아서 얘기를 나누는 건 조금 불편하겠지. “피싯, 그럼 다음엔 꼭 재미난 걸 갖고 오도록 하지요.” 그렇게 당해 놓고도 끝까지 친한 척을 해대는 광대. 솔직히 말해 조금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강약약강의 자세만큼은 본받을 만했다. 역시 오래 살아남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럼 나도 먼저 일어나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텅 빈 복도 벽에 멍하니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여우가 보였다. “아, 끝난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우가 나를 한 곳으로 안내했다. 원탁이 있는 메인 방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작은 접객실. 오, 여기에 이런 방도 있었구나. “…….” 마주 보는 형태의 소파에 앉자 기묘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다만 여기서 먼저 입을 여는 건 하수가 할 짓. 느긋하게 기다리자 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일단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론만.” 내가 짧게 읊조리자 여우가 ‘읏’ 소리를 내며 움찔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수사자 씨는 오늘 제가 부른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물론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히 대답하는 것 또한 하수나 하는 짓일 터. “떠볼 생각인가.” 나는 차갑게 읊조렸다. “저,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아직 그리 급하지 않은가 보군.” 그리 말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했다. 그야 급한 건 이쪽이니까.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그건 확실하다. 아니었으면,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었을 터. ‘분명 수사자의 힘이나 정보가 필요한 일이 생긴 거겠지.’ 여우 건에 관해선 원탁이 진행되는 동안에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를 잘만 이용하면 여우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면, 실제로는 어떨까. “제발, 부탁드릴게요. 만약 제 사정을 알고 계신다면 도와주세요.” 여우가 간곡히 애원을 해왔다. 다만 그것에서도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심리가 전해졌다. 알고 계신다면이라니……. ‘역시 내가 광대놈 정체를 알고 있던 걸 보고서 나한테 도움을 청하려 거구나.’ 이미 정체를 들킨 거라면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도움을 받고, 아니면 좀 더 고민해 보겠단 뜻이다. 거, 영악하기는. “끝까지 나를 능멸하려 드는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내가 정체를 아는 건 광대뿐이니까. 여우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너는 아직 간절하지 않군.” 나는 말한다. 수사자에게 부탁하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더 간절해졌을 때, 다시 나를 찾아와라.” 이내 완전히 일어나 방문으로 향하자 여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냥 말해 주시면 되잖아요! 제 사정을 알고 계신지, 아닌지만이라도!” 어딘가 억울함이 묻어나는 음성. 생각지도 못한 순수함에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건—” 나는 여우의 대답을 불허하며 말했다. “그러는 쪽이 재밌을진데.” 암, 이게 수사자지. *** 호텔의 스위트룸을 방불케 하는 드넓은 방. “그 둘은 지금쯤 또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나?” 침대에 누워 있던 한 사내가 혼잣말을 뱉으며 일어났다. “에이, 궁금해해서 뭐 해. 어차피 맨날 나한텐 알려 주지도 않는데.” 사실 사내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친구들 사이에서 겉도는 일이 잦았으니까. 뭐, 그래도 운이 좋기는 했다. 그냥 심심해서 사둔 가상화폐가 대박이 나며 이런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니.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후, 이제 다섯 시간도 안 남았네.” 시간을 확인한 사내는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렇게 가상 공간에서 떠들고 있으면 마치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니까. “비요른 얀델이라…….” 그가 들여다보는 게시판에는 거진 한 사내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래, 오늘은 이 떡밥이 메인이란 말이지? [비요른 얀델 귀족 된다는 거 들음?] -진심 부럽다. 플레이어라는 말이 많던데, 사실 그게 뭔 상관? 그쯤 되면 플레이어든 아니든 그냥 여기서 살고 싶을 듯. 사내는 여러 게시글에 댓글을 남기며 여가 시간을 보냈다. [Bling0_0: 인정. 귀족이면 부인도 여럿 둘 수 있을 텐데. 나라도 여기 살지. 걔 들어 보니까 동료들도 엄청 예쁘다던데.] [└arolf5205: 정실은 미샤다. 멀리서 봤는데 걔 진짜 귀엽더라.] [└Ykbell: 나는 에르웬? 그 요정이 마음에 들던데.] [└cherylvander: 상남자한테는 당연히 그 바바리안 여자 아니냐?] 대충 조회수 높은 글에 가서 어그로를 끌자 수두룩하게 달리는 대댓글들. 쭉 읽어내리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Pnec: 병신. 그딴 좆밥 바바리안을 부러워하는 걸 보니 네 수준도 알 만하네.] 오케이, 오늘은 이놈이구나. 사내는 씨익 웃었다. 그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교육 못 받은 놈들일수록 타격감이 좋다는걸. ‘그러고 보니, 그쪽 욕이 잘 통하는 거 같던데.’ 아까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린 사내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댓글을 남겼다. [└Bling0_0: 응, 네 거기 3cm. 비요른의 10분의 1. 부러워서 지금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죠?] 띠링! 머지않아 대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떴다. [└Pnec:……씨발, 너 누구냐?] 조금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Bling0_0: 뭐야? 설마 진짜 3cm?] [└Pnec: 진짜 이상한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지? 그냥 꺼져라.] [└Bling0_0: 응, 안 꺼지죠. 꺼지는 건 나중에 널 만날 아내죠. 아무리 착한 여자도 3cm는 못 참고 도망가 버리죠. 그래서 귀족 돼도 첩 하나 못 두죠.] [└Pnec:……야, 너 어디 사냐?]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나오는 극찬. 사내는 씨익 웃으며 쉬지 않고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비록 상대방도 중간부터 어떻게든 인신공격을 해왔지만……. [└cherylvander: 알림 계속 떠서 뭔가 했는데, 얘네 둘이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ㅋㅋㅋㅋㅋㅋㅋ] [└Ykbell: 다들 그만해라. MIT 공대를 나온 내가 봤을 때 이건 3cm의 완패니까.] [└1spring: 근데 말하는 거 보니까. 얘 진짜 3cm인 거 같음.] 불구경하듯 싸움판을 지켜보던 유저들이 조리돌림에 참가하더니, 어느덧 상대방이 댓글을 전부 삭제한 채 튀었다. ‘새끼, 추하기는.’ 승리를 거머쥔 사내는 개운함을 느끼며 기지개를 활짝 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커뮤니티가 닫힐 시간이 찾아왔다. “파라브 님, 파라브 님!” 눈을 떴을 땐 옆에 앉은 사제 한 명이 조용히 외치며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아, 죄송합니다…….” 사내는 빠르게 사과한 뒤 강단에 선 주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는 척을 했다. 이곳은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커뮤니티 속 세상이 아니니까. 신실한 성기사의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하, 이렇게 빡셀 줄 알았으면 다른 직업을 고르는 건데.’ 이후 한 시간쯤 더 흐르자 오늘의 밤중기도가 끝났다. 다만,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내는 동료들과 수다를 떨며 잠깐 교우 관계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 다녀와서일까? 피곤해서 말하기보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더니 동료가 걱정스레 물었다. “파라브, 괜찮은 건가? 안색이 좋지 않은데.” “설마 그 일 때문인가? 이만 떨쳐내라. 그날 네가 배탈이 나서 미궁에 들어가지 못한 게 어디 네 잘못이냐?”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신께서 도우신 게지.” 동료들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떨쳐내야지.” 사실 배탈이 났던 것도 아니다. 단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냥 한 번 쉬려고 핑계를 댔을 뿐. 다음 날 차원광장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을 때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자네는 먼저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떤가?” “아니, 옆에 있겠네. 차라리 그쪽이 나을 거 같군.” “……그렇다면야.” 이후로도 동료들의 수다는 이어졌다. 여기서도 그 바바리안의 얘기가 화제였다. “그 친구, 귀족이 된다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날 함께 있었던 신관님께 들어 보니 실로 고결한 자더군.”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종교인들답게 사내의 동료들은 시기하거나 의심하는 마음 없이 새로운 영웅을 칭송했다. ‘거, 진짜 재미없다니까.’ 역시 커뮤니티에서의 자유분방함은 찾기가 어렵다. 왠지 갑갑해진 사내는 저도 모르게 뱉었다. “그자, 조금 수상하지 않나?” “수상하다니?” “1년 차에 그런 명성을 쌓다니,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긴 하네마는.” “어쩌면 그자는 악령일지도?” 말은 농담처럼 했으나 실은 진심이었다. 커뮤니티에서도 여론은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는 했지만……. 플레이어가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면, 동료들의 의견은 어떨까. “…….” 사내의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물론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하하하하핫!” 동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악령이라니, 어디 그럴 리가 있겠는가.” “크로비츠 단장님께서 마음에 들어 한 친구일세. 그런 의심은 좋지 않아.” “동료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희생할 줄 아는 악령이 어디 있겠나.” “이 친구, 오늘따라 농담이 과하군!” 사내는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물론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이런 식으로 놀림을 받으며 무리에서 겉돌았으니까. ‘그래, 이번에도 그냥 내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방으로 돌아갔다. 늘 있는 일이었다. 240화 송곳 (5) 책 내음이 은은하게 감도는 서재. “그곳은 어땠습니까?” 사내의 물음에 금발 머리의 여성, 소울퀸즈는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던데요.”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시체 수집가가 일개 회원으로 있으며, 그런 자조차 전혀 맥을 못 추는 장소라니? 커뮤니티 내에 이런 채팅방이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이런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시겠죠?” 소울퀸즈는 그를 놀리듯 웃었고, 사내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야 그녀를 ‘원탁의 감시자’로 잠입시킨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어쩌면 원탁의 감시자가 우리 눈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그들의 모임 같은 걸 수도 있겠군요.] 왕가에서 보낸 스파이. 혹은 이계의 플레이어. 두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내는 그녀를 그곳으로 보냈다. 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 소울퀸즈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러브 님의 촉이 이번에도 맞은 거 같네요.” “어느 쪽으로 말입니까?” “역시 원탁의 감시자는 이계의 플레이어가 만든 곳인 듯해요.”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소울퀸즈는 천천히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던 수사자. 시체 수집가라는 정체가 들통난 광대. 왕가 측으로 추정되는 사슴뿔과, 평범하기에 더욱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고블린. “음, 여우 님은 잘 모르겠네요. 말이 없는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이번엔 딱히 대화를 나눠 보지 못해서.” 그럼에도 여우는 주의할 만한 여자였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마지막에 수사자에게 대화를 청했으니까. 만약 그게 일종의 ‘접선’인 거라면? “수사자라는 회원이 의심되는 거군요.” “네, 만약 이계의 플레이어가 그들 중에 섞여 있는 거라면 그 남자 말고는 없어요.” 이후 사내는 근거를 물었고, 소울퀸즈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시체 수집가인 그를 살기만으로 정신 오염 직전까지 몰고 갔어요. 딱 한계치에서 살기를 거두는 걸 보면 그러고서도 한참 여유가 있던 거 같더라고요.” 이것만으로도 명백하다. 보통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 년도 전에 이 세계에 떨어져 생존해 온 또 다른 차원의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심지어, 근거는 이것만이 아니다. 두 번째 바퀴에서 수사자는 말했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만든 건 다른 세계의 악령이다.] 커뮤니티를 만든 게 GM이 아니라는 자신의 말에, 극소수밖에 알지 못하는 정보를 장난처럼 꺼냈다. 마치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때 그녀는 확신했다.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군요.] 안 그래도 위험해 보이던 이 남자는 역시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시체 수집가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했지요?” “네, 참고로 회원들은 수사자가 자기들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것참 수상하군요.” 커뮤니티 내의 보안은 절대적이다. 관리자 권한을 넘겨받아 지금의 고스터 버스터즈를 만들어 낸 그조차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 “그는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알았을 거라 생각하세요?” “글쎄요, 만약 정말로 알고 있던 거라면 가능성은 둘이군요.” 소울퀸즈의 질문에 사내는 총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내놓았다. “하나, 수사자가 이 아공간을 창조한 이계의 대마법사에 준하거나 그런 존재를 동료로 두고 있을 경우.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수사자가 원탁의 감시자를 만든 그자와 한패일 경우, 맞죠?” “예, 맞습니다. 일단 지금 회원들은 전부 그 ‘마스터’라는 자가 모은 것이니, 귀뜸을 받았다면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한번 미끼를 던져 보세요. 정말로 그 남자가 소울퀸즈 님의 정체를 아는 건지, 아닌지.” “그럴게요.” “아무튼, 그럼 이제 마스터에 관한 정보가 중요해지는군요. 혹시 알아낸 게 있습니까?” “마스터는 아직 못 만나 봤어요. 하지만 그때 이상한 접속 기록이 있던 날, 이곳을 방문했다는 건 집회가 끝나고서 고블린 님한테 들을 수 있었죠.” “그럼 그날 커뮤니티에 몰래 들어왔던 자가 닉네임 ‘0720’가 맞단 뜻이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는데, 아직 고블린 님도 저를 경계하는 거 같아서…….” 이후로도 둘은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비단 ‘원탁의 감시자’에 관한 이야기만을 주제로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있었던 사건. 너무도 많이 죽어 나간 플레이어. 앞으로 신규 회원 영입을 늘리려면 어떤 방식이 가장 효율적일지. 그리고……. “이백호 님은 어쩌실 거예요? 러브 님을 찾겠다고 마탑을 뒤집고 다니는 중이잖아요. 지금에야 러브 님도 여러 용의자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언제까지고 정체를 숨기긴 어려울 거 같은데…….” 최근에 있었던 가장 골치 아픈 사건까지. “백호 씨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일단 정황상 왕가와 적대 관계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신중해야 하니까요.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네, 그 부분은 러브 님께 맡길게요.”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차였다. “엘프눈나, 그 사람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죠?” “게시글이 다 지워져서 복구하는 데 조금 많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그래도 GP는 꽤 많더라고요.” “백호 씨한테 받은 겁니까?” “아뇨, 거의 전부 첫날에 벌었어요. 몇 가지 고급 정보들을 팔아서요.” 이어 소울퀸즈는 게임을 어느 정도 했으면 알 수 있는 그런 정보였으며, 그가 남긴 게시글과 댓글은 전부 삭제되어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부연해 설명했다. “흐음, 그렇군요…….” 사내는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팔걸이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엘프눈나’의 뒤를 캔 이유는 하나였다. ‘비요른 얀델’과 ‘엘프눈나’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으니까. 비요른 얀델. 역대급의 성장 속도를 보여 준 바바리안. 그는 특이하게도 성인식 때 방패를 택했다. 엘프눈나. 커뮤니티 내에서 게임 내 정보를 팔아 GP를 쉽게 획득했다. 또한, 이백호가 형으로 따르는 ‘한국인’이다. 이는 사내에게 몹시나 중요한 점이었다. 만약 둘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분’일 가능성이—. ‘…잠깐만.’ 불현듯 뇌리에 스친 생각에 사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소울퀸즈 님.” “네, 말씀하세요.” “아까 그 수사자, 동양인이라고 했던가요?” “네, 가면은 그렇다 쳐도 피부색은 숨길 수가 없으니까요.” 서구권 게임답게 플레이어 중 아시아계 비율은 굉장히 적다. 이백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을 기다리며 채팅방을 열었지만, 동향 사람을 만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동향 사람이 ‘엘프눈나’. ‘비요른 얀델’과 동일 인물로 의심받는 중인 바로 그였다. “수사자가 확실하게 언급한 건 광대의 정체 하나, 맞습니까?” 사내가 자세를 고쳐 잡고 물었다. “어, 이번이 첫 방문이라 확답하긴 그렇지만 분위기상 그랬던 거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요…….” 사내가 말꼬리를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게, ‘비요른 얀델’은 가장 최근에 ‘시체 수집가’와 전투를 펼쳤으니까. 정말로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물론 ‘엘프눈나’와 동일인인지도 알아 내지 못했기에 아직은 터무니없는 비약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비요른 얀델의 작위 수여식이 언제죠?” “사흘 뒤인 거로 기억해요.” “사흘 뒤라…….” 이내 사내는 결정을 내렸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겠군요.” 백날 고민만 할 바에야 직접 만나나 보자고. *** “야, 일어나랑, 일어나! 일어나라고오!”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미샤의 등짝 스매시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살기까지 쓰고 왔더니 정말 피곤해 뒈질 거 같았지만……. “어제 뭐 했기에 이렇게 아침부터 비실거리는 거냥!”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에는 무리해서라도 제때 일어나는 편이 좋다. 이곳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면, 이날에만 늦잠을 자는 내 모습조차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날 보는 시선도 많아지기도 했고. ‘빌어먹을 암살자 새끼도 올 거랬지…….’ 어제는 지쳐서 그냥 쓰러졌지만, 앞으로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잘 거 같다. 하, 진짜 짜증 나게. ‘왜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지금 몸 상태로는 평소처럼 싸울 수도 없을 텐데.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얼른 세수만 하고 1층으로 내려가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조금은 낯선 광경이었다. 그야 평소의 아침 식사에 새로운 인물이 한 명 더 늘었으니까. “이, 일어나셨어요?” “그럼 일어나지.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아라. 음식 식겠다.” “네, 네!” 어딘가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 깨작깨작 밥을 먹는 에르웬. “…….” 평소와 달리 어색한 침묵이 식탁 위에 감돌기 시작한다. 다행히 그 공기를 느낀 미샤가 먼저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떠냥? 내 음식은?” “마,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랑. 이따가 저녁에 해 줄 테니까. 아, 그리고 못 먹는 재료가 있으면 이따가 알려 주고.” 늘 그렇듯 세심한 부분까지 먼저 챙겨 주는 미샤. “당근! 나는 당근을 못 먹는다!” 아이나르가 이때다 싶어 껴들었다가 등짝을 맞았다. 후, 그게 되겠냐고. 나도 열 번은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우린 맨날 고기만 먹으니 이런 거라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던가? ‘마음은 고마운데 말이지…….’ 쩝, 바바리안에겐 바바리안의 삶이 있는 것일진대. “서,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식사가 끝난 후에 아이나르는 늘 그랬듯 외출해 성지로 떠났고, 남은 셋끼리 시간을 가졌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서열 정리가 완벽하게 끝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에르웬, 이제 여기 와서 앉아 봐랑. 우리도 얘기 좀 해 봐야지.” “네, 네!” “이런 걸 묻는 게 조금 이를지도 모르겠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냥? 일단 우리 팀은 이미 꽉 찼는데.” “그건…….”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본다. 클랜 관련 얘기를 해도 되냐는 거겠지. 뭐, 하면 안 될 이유는 없지만……. 당장 긴 얘기를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일러도 너무 이르다, 미샤. 어차피 우리도 다음 달에 미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아니냐.” “그건… 그렇긴 하지.” 솔직히 말하면, 이번 사태가 끝나는 게 아닌 이상 미궁 탐사는 잠시 스탑하는 게 현명하다. 당장 금전적인 문제는 없으니까. ‘…도시라고 안전한 건 아니라는 게 제일 짜증 나는 부분이지만.’ 용살자. 시체 수집가. 노아르크의 암살자.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왕가의 행보까지. 하루빨리 강해져야 할 이유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는 추이를 지켜보는 게 낫겠지.’ 나는 애써 조급함을 지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부분은 나중에 레이븐을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보든가 해야겠네.’ 아무튼, 이후로도 셋이서 다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기가 잔뜩 죽은 표정으로 불편해하던 에르웬이었으나, 미샤가 다정하게 대해 주자 의외로 금방 안정을 찾았다. ‘그래도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언니에 대한 마음 정리는 어느 정도 끝내고 온 모양이네.’ 덕분에 나도 한결 부담을 내려놨다. 앞으로 살아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에르웬은 제힘으로 일어섰다. 그러니 분명,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응? 동생이 있다고?” “네, 아직 어려서 성지에서 지내고 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면… 제가 어떻게든 챙겨야 하겠죠. 언니가 저한테 해 준 것처럼…….” “냐핫, 너무 걱정 마랑. 아직 많이 남았지 않냐? 그때면 너도 훨씬 더 여유가 있어질 거당.” “그럴까요……?” 의외로 훈훈한 대화를 나눠 가던 에르웬과 미샤. 다만 에르웬이 느닷없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그때 사과를 제대로 안 드렸죠? 죄, 죄송해요, 그때는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사과는 무슨. 됐당. 차라리 그 일 덕분에 잘된 것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라니? 둘이 만나서 사과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그, 근데 언니는 괜찮으신 거예요……?” “안 괜찮을 건 뭐냥? 나도 그때랑은 생각이 좀 많이 달라져서… 애초에 나한테 그런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말하며 나를 흘기는 미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현관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지.” 얼른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평소였다면 벌떡 문부터 열었을 테지만, 어제 암살자가 올지도 모른단 정보를 들었던 상황. 일단 누구냐고 정체부터 물었다. “제2 왕실 기사단의 평기사 레이먼 케플로라고 합니다.” 준남작 작위를 받을 예정이라 그런지 공손한 말투로 신분을 밝히는 기사. 외시경을 통해 확인해 보니 갑주도 제대로인 데다가 뒤에 다른 기사들도 우르르 몰려와 있다. ‘이 정도면 거짓말은 아닌 거 같고.’ 짚이는 부분도 있었기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그들이 찾아온 용건을 확인했다. 오래간만에 희소식이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지시라면?”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불온한 자들로부터 얀델 님을 보호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래, 사슴뿔이 움직인 거구나. 241화 분기점 (1) 내 보디가드로 파견된 기사는 총 12명이었다. 그중 여덟 명은 집 외부에서 보초를 섰고, 셋은 실내로 들어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 나머지 한 명은 집 안에서도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며 밀착 호위를 했다. “레이먼 케플로라고 그랬나?” “예, 그렇습니다.” 뭔 말을 하든 예의를 갖추며 답하는 기사. 낯설기는 하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곧 있으면 작위 수여를 받을 신분이니 미리 대접을 해주는 것일 터. ‘왕실기사단이면 작위를 가진 기사도 꽤 있을 텐데, 전부 이런 얘로 보내 줬다는 건…… 역시 배려라고 보는 게 맞겠지.’ 일단 사슴뿔은 섬세한 사람일 거 같다. 뭐, 정확한 건 이제 더 알아봐야겠지만. “아까 상부의 지시라고 했는데, 정확히 누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거지?” 내 물음에 케플로는 대답했다. “그건… 사실 저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대답하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래도 대충 둘러대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좀 더 캐물어 보니 그의 직속상관에게서 상부의 지시라고만 듣고 파견을 나왔다는 모양. ‘그래, 생각이 있으면 정체를 감추려 했겠지.’ 조금 아쉽다. 만약 왕가에 줄이 더 닿아 있던 거라면 이거로 사슴뿔의 정체까지 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잠깐만.’ 불현듯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한창 영웅으로 올려치기를 하고 있다죠? 귀족 작위를 받자마자 뒈지면 참 재밌겠군요. 왕가의 위신이 아주 하수구로 처박힐 테니 말입니다!] 너무도 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기에 그때는 그저 감정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라 여겼다.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해 적에게 친절히 경고까지 해주다니, 정말 아기가 따로 없군.] 실제로 사슴뿔 역시 광대의 그런 행동을 이렇게 인식했다. 하지만……. ‘설마 그 새끼,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광대가 바란 건 사슴뿔의 신상을 캐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보석에 초록불이 들어왔으니 ‘암살자’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이걸 미끼로 써서 사슴뿔에 관한 단서를 캐낼 수만 있다면 손해는 아니라고 판단했겠지.’ 역시 이쪽이 더욱 말이 된다. 원탁에서 두들겨 맞기만 한 광대였지만, 사실 그놈도 이 세계의 거물들 중 하나 아닌가. ‘실수’조차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슴뿔도 그런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뒀으니 최대한 은밀하게 사람을 보낸 걸 테고.’ 하, 진짜 만만한 새끼들이 없네.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반면, 앞으로도 계속 정신을 바짝 차리자는 동기 부여가 된다. 예로 오늘만 봐도 그렇다. 만약 졸리다고 늦잠을 퍼질러 잤다면, 이걸 보고받은 사슴뿔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수도 있으니. “기사님, 이리 와서 이것 좀 마셔랑.” “민간인에게 사적인 접대를 받을 순—” “에이, 이게 무슨 접대냥? 비요른 지킨다고 고생할 건데.” 미샤가 안주인처럼 기사들에게 차를 내줬다. 얘는 밀착 호위가 무슨 작위 수여의 서비스 중 하나라 생각하는 걸까?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암살자에 대한 얘기는 모를 테니까. “레이먼 케플로 님이라고 그랬지? 얼마나 오래 같이 있을진 몰라도, 그동안 편하게 지내랑.” 기어코 케플로를 탁상에 앉혀 차를 마시게 하는 미샤. “……칼스타인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응? 그냥 미샤면 되는데, 뭐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어쩔 수도 없는 거지마안…….” 이내 미샤는 곧 작위가 수여될 내 위세를 빌려 자연스레 케플로에게 존칭을 이끌어 냈다. 물론, 의도한 거란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어쩌다 보니 저렇게 된 거겠지.’ 아무튼, 미샤는 케플로에게 에르웬을 비롯해 오늘 자리에 없는 아이나르까지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주었다. “테르시아 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어, 어……. 그건…….” 기사에게 존칭을 듣는 게 어색한지 말꼬리를 흐리는 에르웬. 불편한 걸 아는지 미샤가 옆에서 도와줬다. “테르시아 님은 무슨. 얘 불편해하는 거 안 보이냥? 그냥 에르웬이라고 불러라.” “네,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럼 호칭은 그렇게 하는 거로 부하들에게도 말해 두겠습니다.” 신속하게 끝난 호칭 정리. 그때였다. 똑똑. 이른 아침부터 현관문에서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요른 얀델 님의 동료분께서 오셨습니다.” 무슨 사용인이라도 된 것처럼 방문객을 알려오는 기사. 이래서 다들 권력에 목을 매는 건가? “동료라면 누구지?” “아루아 레이븐이라는 마법사입니다.” 이내 케플로가 눈빛으로 내 의향을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끼이익. 마중 나간 케플로의 손에 의해 열리는 문. 나는 소파에 앉은 채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왔나.” 이름하여 노블레스 바바리안 모드. 그 격식 넘치는 인사에 레이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아, 왔나는 무슨.” “차라도 한 잔?” “홍차로요.” 레이븐은 내 뒤에 보디가드처럼 선 케플로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데요?” “보는 대로다마는?” “……저, 화내요?” 거, 쪼그만 게 화내면 뭐 어쩌겠다고. 나는 신속하게 대답했다. “작위 수여 전에 뭔가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왕가에서 호위로 기사들을 붙여줬다.” “음, 그럴 만도 하네요. 얀델 씨는 의외로 적이 많으니까.” 순순히 납득하는 레이븐. 하긴, 시체 수집가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도시에서 유명한 얘기기는 하니까. 대형 클랜들도 아니꼽게 보는 눈치고. 하지만……. “레이븐, 내 적은 네 적이기도 하다.” “……뭐라는 거야 아침부터 자꾸.” 평소 활동 시간대가 아니라 아침이라 그런지 저기압인 모습을 보여 주는 레이븐. “자, 여기 홍차. 설탕은 어딨는지 알지?” 이내 미샤가 차를 한 잔 타주자, 레이븐이 이를 홀짝이며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르웬이 있는 곳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레이븐 씨…….” “아, 네에…….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서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나? 분명 그랬던 거 같은데.” “얀델 씨는 그냥 가만 있어요.” “…….” 이내 내가 입을 꾹 닫자 레이븐이 연장자답게 뭐라뭐라 대화를 이끌었다. “요즘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쪽이 마음이 편하다면 그럴게요. 근데, 그래서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시려는 건가요?” “네에…. 다행히 언니가 허락해 주셔서…….” “흐음, 그래요? 신기하네.” 둘의 대화는 몇 마디 더 이어졌고, 이후 에르웬이 조금 피곤하다며 방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종료됐다. “……저기 케플로 씨는 계속 거기 서 계실 건가요?” “이런 임무는 익숙하니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대화 나누십시오.” “그렇다면야…….” 말은 그리했으나 레이븐의 표정에는 불편한 감정이 가득했다. 먼저 입을 열 기색은 없다. 따라서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있을 바에 그냥 내가 궁금한 거나 묻기로 했다. “근데 방금 그건 뭐였냐?” “제발, 주어 좀 써줄래요?” “에르웬 말이다. 네가 이제 와서 걔랑 낯을 가리고 그러진 않았을 텐데.” 나는 둘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느꼈다. 레이븐은 에르웬을 굉장하게 어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에르웬이 최근에 가족을 잃었기 때문은 아닌 거 같다. 하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라도 있나?” “아, 진짜 이상한 데서만 눈치가 빨라서.” “그래서 대답은?” 레이븐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좀 그래요……. 내 탓인 거 같기도 하고.” “네 탓이라니?” “드왈키란 마법사가 썼던 그 마법요. 사실은 저도 쓸 수 있어요.” 이어진 레이븐의 말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파멸학자가 나타났을 때, 레이븐은 직감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마법사로서의 기량 차이. ‘각성’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술식도 마력에도 문제가 없었는데, 도무지 영창이 안 나오더라고요.” 이해는 한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을 쉬운 난이도의 마법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니니까. “그렇게 망설이던 찰나였어요.” 파멸학자의 마법이 쏘아졌고, 레이븐이 세운 마력의 돌벽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박살났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끔 텅 빈 연구실에서 혼자 생각해요. 만약, 그때 내가 바로 그 마법을 썼다면, 그 언니분도 살았지 않았을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설마 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얀델 씨나 우리 팀의 다른 동료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칫하면 전부 죽을 상황이었죠. 근데 그걸 알면서도 저는…….” 자꾸 뭐라는 거야 얘는. 흔하디 흔한 자기 혐오 패턴이 나오기 전에 나는 말을 잘랐다. “됐다. 그만 말해라. 에르웬은 안됐지만, 결국 우리 중에 죽은 사람은 없지 않냐?” 조금은 냉정할 수도 있을 말. “그랬죠.” 레이븐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르웬과 다리아와는 지낸 시간이 짧은 만큼 동료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던 것. “하지만 그런 결과가 나왔던 건, 제가 하지 못한 걸 얀델 씨가 했기 때문이에요.” “하하, 그거야 내가 일단은 리더 아니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농담투로 말했다. 다만 레이븐은 또다시 작게 한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 때문이라고…….” “응?” “……그냥 이렇게 감상적인 건 원래의 나답지 않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얘도 처음 만났을 땐 지금이랑 이미지가 완전히 딴판이었지. 여하튼, 이 주제로 더 길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은지 레이븐이 다른 화두를 꺼냈다. “얀델 씨, 에르웬은 어떻게 할 거예요? 팀은 꽉 차서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 “고민 중이다.” “그럼 미궁은요? 들어갈 거예요?” “일단 지켜보려고 한다. 계속 지금 같은 상태라면 역시 들어가긴 어려울 테니.” “……그렇긴 하죠.” “그래서 오늘 온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 “아뇨, 용건은 따로 있어요. 얀델 씨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주의였기에, 그런 레이븐의 말은 내 불안 센서를 작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페브로스크 님에게 수업을 받기로 했어요.” “뭐? 설마 수업을 듣는다고 팀에서 잠시 나가 있겠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네? 그럴 리가.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야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있었으니까. “근데 수업이라면 뭘 배운다는 거냐? 너는 학파가 있을 텐데?” “알테미온 학파에서 왕실 마법을 배울 수는 없으니까요. 아, 얘 이번에 보상으로 왕실 마법을 배울 자격을 얻었지. “기반이라도 다져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는데, 다행히 페브로스크 님께서 승낙해 주셨어요.” 이후 레이븐은 당분간 마탑이 아니라 왕궁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지낼 거라며, 혹시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찾아오라 말했다. “용건은 이게 끝이네요. 이만 가볼게요. 그럼 그때 봐요.” 정말 이 말을 하려고 방문했던 것인지, 레이븐은 미샤가 내어준 차를 다 마시자마자 떠났다. *** 5월 18일. 레이븐을 제외한 팀 애플 나라크는 다시금 왕궁에 방문했다. 작위 수여까지 아직 이틀이 남긴 했지만, 뭘 보상으로 받을진 미리 와서 정해두라던가? ‘하긴, 다들 보는 곳에서 주는 게 훨씬 그림이 좋겠지.’ 연회가 있는 건 아니기에 지난번처럼 격식 있게 꾸미고 올 필요는 없었다. 뭐, 그래도 장비 착용 불가인 건 마찬가지라 깔끔한 평상복을 입기는 했다마는. “오, 얀델! 너도 오늘인가?” 왕궁으로 들어서자 안면이 있는 탐험가들이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이 보상 지급 일자로 정해진 자들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순차적으로 부르고 있댔지.’ 금전적인 보상은 이미 진작에 일괄적으로 지급됐지만, 정수나 장비를 택할 기회를 얻은 자들은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비요른! 그럼 우리 먼저 다녀오겠당!” 왕궁에 도착한 다음에는 동료들과 헤어졌다. 그야 얘네들은 나랑 받는 보상이 다르니까. “저, 저희 둘만 남았네요…….” 호위 기사와 왕가의 안내인, 그리고 에르웬만이 자리한 대기실. “아저씨…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네가 안 받으면 누가 받겠나. 자신감을 가져라. 공이 없는 사람한테 포상을 줄 정도로 정이 많은 곳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얘도 참 여기까지 와놓고서 이러네. “더 강해져야 한다. 너도 나도. 그래야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 “……네, 그렇죠.” 의지를 다잡듯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웬. 사소한 잡담들을 나누고 있자니, 안내인이 한 명 더 도착해 에르웬을 데리고 갔다. 4등급 정수 혹은 그에 준하는 아이템이 보관된 은혼보고. ‘얘한테도 금혼보고가 열렸으면 바로 졸업 정수부터 먹이는 건데…….’ 역시 다시 생각해도 조금 아쉽다. 4등급 정수 중에 활요정의 코어 정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등급이 하나만 더 높았어도 그 정수를 먹일 수 있었건만. ‘이번이 아니어도 언젠가 먹게 되겠지. 이제 슬슬 6층으로 올라갈 때도 됐으니까.’ 나는 애써 아쉬움을 털어냈다. 이번 보상을 받고 나면 전력이 확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5층에서 뺑뺑이를 돌며 빌드업 기간을 갖출 필요가 없어졌다. 문제는 노아르크 새끼들이지만. 왕가 새끼들이 하는 걸 보면 얘네들도 뭔가 대책이 있는 거 같기는 하다. “비요른 얀델 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내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내 전담 안내인이 도착해 나를 금혼보고로 이끌었다. 그곳은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지하였다. 다만 환한 불빛이 여기저기에 가득했기에 어둡다는 느낌은 일절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내려온 걸 보면 지하 5층은 더 될 것도 같은데…… 이쪽 세상도 건축 기술이 이상할 정도로 발달했단 말이지.’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굉장한 기세를 지닌 기사가 나를 맞이했다. 참고로 옆에는 마법사도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간단한 안내를 해주었다. 제한 시간은 3시간. 원하는 정수 혹은 물품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무언가를 훔치려는 시도를 하거나 물품을 망가뜨릴 경우 엄벌에 처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거, 살벌하기는.’ 이후 설명이 끝나자 거대한 철문이 무중력 속에서 움직이듯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오우야…….” 시험관에 담긴 채 유리관에 전시 중인 수천 개의 정수가 나를 반겨주었다. 하나하나가 ‘오우거’와 동급인 정수들. 비록 갖고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이러니까 무슨 치트키를 쓴 거 같네.’ 자, 강해질 시간이다. 242화 분기점 (2) 금혼보고에 들어와 보니 확실히 알겠다. 왜 이종족들이 왕가 앞에서 힘을 못 쓰는지. 왕가의 저력이 느껴진다 해야 하나? 그 귀한 3등급 정수가 드넓은 보고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심지어 딱 한 개씩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구하기 쉽고 잘 안 쓰이는 정수는 일고여덟 개씩 있네.’ 대부분의 것은 여유분까지 있다. 균열 내에서만 획득이 가능해 높은 획득 난이도를 가진 정수조차 색깔별로 한 개씩은 꼭 비치되어 있고. ‘미친, 니바로크의 정수까지 있어?’ 균열에서만 나오는 희귀 몬스터의 정수다. 바바리안 전사가 쓸 만한 옵션은 아니다마는. 그래도 획득 난이도만 따지면 2등급 정수 저리 가라일 텐데……. ‘이걸 어떻게 다 모아 둔 거지?’ 주변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하나의 왕가가 수천 년씩 이어지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축재가 가능해지는 건가? ‘게임을 할 땐 게임이니까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혹여나 왕가가 노아르크에게 당해 무너질지 모른다는 조금의 걱정마저도 버렸다. 그야 이걸 보고 어떻게 질 생각을 하겠는가. 수천 개에 달하는 3등급 정수. 당장의 전력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왕가는 마음만 먹으면 미친 수준의 군대를 찍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한테 3등급 정수를 다섯 개씩 처먹이면…….’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다. 어디 3등급 정수만인가? 한 등급 더 높은 보고에는 2등급 정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1등급도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무서운 건, 정수만이 끝이 아니다. 넘버스아이템도 있다. ‘금혼보고에 트리플 넘버가 있으니, 위에는 더블 넘버, 싱글 넘버가 있겠지…….’ 정수에 비해 우선순위는 낮지만, 성장치가 한계선에 도달했을 때 스펙업을 하기 위한 가장 쉬운 수단. ‘……갖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정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 음, 그래도 구경이나 해볼까? 시간도 남겠다 금혼보고 내부를 돌아다니며 흥미롭게 물품들을 감상했다. 뭐, 어차피 옵션이야 다 아는 것들이라 금방 흥미가 식기는 했지만……. “저, 만지는 건 조금…….”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 장비들을 만질 때마다 감시인이자 안내인 역할로 따라 들어온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나름 재밌었다. ‘그럼 구경은 여기까지.’ 슬슬 결정을 내릴 때였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최종 점검을 해보았다. 어떤 정수를 취할지 이미 정해두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래, 그럼 일단 이것부터. ‘벨라리오스.’ 동양계의 용. 이무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지닌 몬스터로, 사실상 만티코어의 상위 호환 버전이다. 항마력에 치중된 기본 스탯. 그리고 스탯을 쌓을 수 있다는 특이한 형태의 패시브 [순환의 고리]까지. ‘뭐, 패시브는 지금 먹어도 스탯 쌓기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순환의 고리]는 3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 가능한 수준에 올라야지만 효과가 있다. 애초에 코어 정수가 된 건 액티브 덕이지만. [탐욕의 비늘]. 이 스킬을 사용 시 일시적으로 피부에 비늘이 돋아나며, 항마력에 비례해 ‘마법 저항력’이 상승한다. 참고로 항마력이 1,500을 넘기면 마법 면역 보정을 얻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마법사는 그냥 지나가던 지렁이처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바바리안 드래곤 모드가 가능해지는 것. 하지만……. ‘원래는 지금 당장 먹을 만한 정수가 아니지.’ 사실 파멸학자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까지 우선순위가 높아지는 일도 없었을 거다. 탐사만이면 ‘만티코어’로도 충분하니까. 언젠가 먹어야 한다고 한들, 어떤 걸 먼저 먹느냐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진다. 아무튼, 그럼 이쯤에서 두 번째 선택지. ‘볼-헤르찬.’ 온몸이 껍질로 뒤덮인 초대형 몬스터. 그 외형적인 특징만 봐도 알겠지만, 방어에 특화된 스킬을 지녔다. 패시브는 [무쇠가죽]과 시너지를 이룰 것이고, 액티브는 ‘오러’마저도 버티게 하는 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쉽게 말해, 오러 대비용 정수라는 뜻. 아직 내가 갖추지 못한 세팅의 정수다. 만약 이게 있었다면, 오러를 쓰던 노아르크 탐험가에게 팔이 잘리는 일도 없었겠지. ‘아멜리아, 그 여자도 오러를 썼지…….’ 광대놈이 암살자를 보낸다고 했기에, 이 정수의 우선순위는 조금 더 높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는 암살자 중에 그 여자가 제일 무서우니까. ‘게다가 앞으로 사람이랑 싸울 일도 많아질 거 같고.’ 아, 그렇다고 몬스터에게 쓸모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오러’에 대응이 가능한 건 부가적일 뿐이니. 무엇보다, 근력 수치도 엄청 높게 붙어서 후보군 중엔 공수 밸런스가 가장 잘 맞는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바이욘.’ 대형 괴수들이 판치는 3등급 중에서 유일하게 소형으로 구분되는 놈이다. 몇 없는 ‘인간형’ 몬스터이기도 하며……. 동시에 ‘언데드’. 즉, 불사종이다. 게임 내 설정으로는 죽어서 되살아난 고대의 영웅들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굉장히 특이한 설정을 지녔다. 얘는 탐험가들처럼 정수를 써서 싸운다. 참고로 정수의 조합은 개체마다 다른데, 여기에 공통적으로 한 가지가 추가 된다. 바로 놈이 뱉는 정수의 능력. [초월]. 특이한 게 얘 정수를 먹으면 스킬이 딱 이거 하나다. 패시브와 액티브가 공용인 셈. 아, 기본 스탯으로는 초희귀 스탯인 영혼력이 붙어서 MP 걱정이 한결 덜해진단 장점도 있다. ‘그럼 뭐로 할까…….’ 어떤 정수든 언젠가 먹기는 해야 한다. 단지, 뭘 먼저 취하냐의 문제일 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을 거듭한 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역시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이거지.’ 작위 수여 날이 기다려진다. *** “흐음, 이 정수를 말입니까.” 정수를 고르자 내내 뒤따르던 마법사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좋은 정수기는 하지요. 그럼 재상님께는 그렇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아, 혹시 넘버스 아이템도 하나 끼워줄 수 있나? 보니까 먼지만 쌓이고 있는 거 같던—” “안 됩니다.” 거, 정색하기는.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이후 추가적인 몸수색을 마치고서 아까 있던 접객실로 돌아오자, 먼저 와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금혼보고라 그런지 오래도 걸리는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나를 맞이하는 곰아저씨. “정수는 뭘 골랐나?” “음, 그냥 네가 말해 준 그거로 했다. 나쁘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일단은 비전이라면서?” 비전祕傳. 쉽게 말해, 보증된 정수의 조합을 뜻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이나 위대한 탐험가가 가졌던 정수 같은 것들. 물론 그런 자들은 잘 알려지긴 했으나 대부분 상위 정수의 조합이라 수준에 오른 탐험가가 아니면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잘한 꿀조합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난쟁이놈만 해도 [긴급복원]을 이용해 넘버스 아이템의 쿨타임을 초기화하는 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드워프 사이에 도는 비전 중 하나였을 것이다. “돌아가면 훈련장부터 끊어야겠어.” 내 추천으로 정수를 택한 곰아저씨는 얼른 왕궁을 떠나 새로 얻은 스킬을 써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거야 다들 마찬가지긴 하겠다마는. “비요른, 어서 돌아가자! 전사의 힘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다! 빨리 터트려 줘야 한다!” 나와 달리 5등급 정수를 얻은 세 명이었지만, 이거 하나는 좀 부럽다. 후, 난 작위 수여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으이구, 좀 참아라. 아직 에르웬이 안 왔으니까.” “그 요정이야 그냥 혼자 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야, 너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그랬지?” “시, 실언이다. 그러니 당근 스프만은 제발…….” 아이나르를 혼내며 에르웬을 두둔하는 미샤. 역시 큰언니가 지지해 주니까 든든하네. 이후 잠시 기다리자 에르웬도 정수 선택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늦었군. 혹시 문제라도 있었나?” “아뇨. 아저씨가 골라 준 거로 잘 골랐어요. 근데 먹고 나니까 잠시 적응이 안 돼서 조금 쉬었다 오는 바람에…….” 음, 하긴 그럴 것이다. 상위 정수는 대부분 먹자마자 몸의 큰 변화가 찾아오니까. “죄,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하기는, 문제없었으면 됐다. 자, 그럼 돌아가자.” 이후 우리들은 왕가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서 이제 고향처럼 느껴지는 7구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도시 내에서 이능 사용이 허락된 유일한 공간. “그럼 나부터 해보지.” 곰아저씨가 철웅 이라둔을 소환했다. 그리고 훈련장 입구에서 구입한 돼지 한 마리를 표적대에 세웠다. “도저히 내 손으로는 못하겠군. 미샤, 네가 해줄 수 있겠나?” “나? 으으…… 알았당.” 이후 미샤가 검을 이용해 웅이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거로 준비는 끝.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굶주린 발톱]을 시전했습니다.」 이내 붉은 빛을 자아내기 시작한 화살. 곰아저씨는 이를 시위에 걸고서 돼지의 허벅지를 겨누었다. 푸욱-! “뀌이이이익!!!” 말 그대로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발광하는 돼지. 다만, 그 기운이 줄어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털썩. 급소를 맞은 것도 아닌데 돼지는 머지않아 쓰러지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흘러나오는 피는 없었다. 그야 틀어박힌 화살이 피를 흡수하는 중이었으니까. 솨아아아아아-! 지금 이 순간에서도 돼지에 박힌 화살은 생기를 뽑아내 곰아저씨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조합의 시너지가 나온다. 「아브만 우리크프리트의 생명력은 현재 최대치입니다.」 「영혼이 연결된 대상에게로 잔여 생명력을 전이합니다.」 흡수된 생기는 곰아저씨를 거쳐 다시금 웅이에게로 전해졌다. “우웅?” 어느샌가 부상이 전부 다 나은 웅이.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영혼수가 회복됐군.” “네가 다쳤을 땐 네가 우선이라고 책에 적혀 있었으니, 그 점은 주의해라.” 말은 그리 했지만, 원거리인 곰아저씨가 다칠 일은 거의 없으니, 탱커 라인이 더 단단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뭐, 장점은 그게 끝이 아니지만. 화살이 박히고 3분쯤 지나자, 미라처럼 삐쩍 말라 버린 돼지의 사체. ‘지속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게다가 곰아저씨에게는 [갈고리 화살]도 있어서 박힌 화살이 잘 뽑히지도 않는다. 한번 박아 넣기만 지속딜과 피흡이 계속해서 중첩된다는 뜻. ‘나중에 [이타심]을 얻으면 철웅만이 아니라 우리도 저거로 치료할 수가 있고.’ 물론 그렇게도 빌드업이 된다는 것뿐, 곰아저씨를 힐러로 전직 시킬 계획은 없다. 그야 정수 한 칸이 얼마나 귀한데? 힐은 그냥 전문 힐러한테 맡기는 게 최고다. ‘슬슬 사제도 구해야지…….’ 아무튼, 다음 차례는 아이나르였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야성제어]를 시전했습니다.」 어차피 5등급은 졸업 정수로 쓸 게 없어서 당장 효과가 좋으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쓸 수 있는 걸 골라줬다. 「다음 공격의 조건부 발동 효과가 모두 절삭력으로 변환됩니다.」 동일 지점을 타격 시 폭발이 일어나는 [폭발의 상흔]과 그저 타격 시 재생력이 상승하는 [생기 흡수]. [야성제어]를 쓰면 이제 이 두 효과는 모두 절삭력으로 변환된다. 바로 이렇게. 서걱-! 아무리 아다만티움 대검이라고 한들,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반으로 베어진 강철봉. “혹시 다른 검으로 해봐도 되겠나?” “안 될 이유야. 마음껏 해봐라.” 돼지와 달리 강철봉은 무료니까. 마법으로 수복이 되는 것들이다. “그럼…….” 아이나르는 긴가민가한지 훈련장에 비치된 싸구려 철검으로 다시 한번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서걱- 일합에 베어져 나가는 강철봉. ‘좋아, 이렇게 되면 선택지가 늘어나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땐 폭발과 피흡을 적용하고, 단일 강적을 상대할 땐 절삭력을 올리는 식으로 전투를 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이제 양학 원툴 바바리안이 아니게 된 셈. “그럼 이번엔 내 차례냥?” 이후로는 미샤도 새로 얻은 정수를 시험했고, 그다음은 에르웬이었다. 둘 모두 기대 이상의 시너지를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바바리안 서럽게.’ 왜 나만 아직도 새 정수 없어? *** 이틀 뒤, 나는 또다시 왕궁에 방문했다. 솔직히 이젠 처음처럼 긴장도 되지 않았다. 이번 달에만 대체 몇 번째야? 물론 오늘은 지난 방문과 몇 가지 차이가 있기야 했다. “키가 워낙 훤칠하셔서, 조금만 숙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일이 선물한 연회복조차 성에 차지 않는지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옷을 입혀주고 한껏 치장을 해준다. 또한, 주위에는 동료들도 없다. 그야 오늘 초대받은 건 나 한 사람뿐이니까. 작위 수여에는 아무리 고명한 인사더라도 귀족이 아니면 참가할 수 없다는 게 왕가의 오랜 전통이라는 모양이었다. ‘저쪽은 벌써 시끌시끌하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이전에도 한 차례 왔던 영광의 궁. 내부 홀이 있는 곳에서 악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연회가 시작된 모양. 아마 우리가 입장할 때가 연회의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다. “오호라, 그렇게 입으니 훨씬 더 인물이 사는군.” 그렇게 치장을 하며 대기하고 있던 때, 페르데힐트 백작이 찾아왔다. 예의 그 막내딸과 함께였다. “아, 아라벨라 페르데힐트입니다.” 여전히 내가 무서운지 눈도 못 마주치는 영애. 오늘 같은 날에도 굳이 정략결혼 얘기를 꺼내며 귀찮게 굴 생각은 없는지, 백작은 단순히 잡담이나 하다 돌아갔다. 음, 정확히는 경고라고 해야 하나? “오늘 작위를 수여 받는 자는 자네까지 총 셋이네. 하나는 자작가고 하나는 후작가지.” 이건 들었던 얘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쪽은 나와 달리 수여보단 계승이 올바른 표현일 테지만. “자작가는 아무래도 좋네마는, 쿠도 가문의 예비 후작은 성질이 사납고 승부욕이 강한 거로 유명하지.” “한마디로 철이 안 들었다는 거군.” “……정확한 표현이군. 그러니 조심하게. 한 번뿐인 날 아닌가, 자네에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겼다 생각할 수도 있네. 아, 혹여나 그쪽에서 자네를 도발하거나 해도 어지간하면 참고. 자네도 이제 이쪽 사람이 되었으니,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만은 없지 않나.” “조언은 기억해 두겠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럼 이만 나는 귀찮게 하지 않고 가보겠네. 이따가 보세.” 이후 백작은 정말로 쿨하게 딸을 데리고 떠났다. 아무래도 정말 나와 친분을 나누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모양. ‘정치라…….’ 왠지 도플갱어 숲에서 있던 일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과연 귀족 사회에서 바바리안식 정치가 통하려나? 그런 실 없는 망상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와, 이 좁은 대기실에 진짜 열 시간을 넘게 있던 거야?’ 이후 레드카펫이 깔린 통로로 나가니, 먼저 와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작위 수여의 날을 맞아 한껏 꾸민 사내. ‘저기 쪼그만 게 자작가일 테고…….’ 나는 인간치고는 제법 체격이 좋은 사내를 응시했다. 딱 봐도 눈매가 사나운 게 이쪽이 후작가인 거 같았다. “반갑소. 이번에 준남작의 작위를 수여받게 될 거라지? 참으로 축하하오. 그대 같은 영웅이 우리의 일원이 된다니, 왕가에도 축복 받을 일일 것이오.” 예비 자작은 빈말로라도 여러 미사여구를 던져대며 인사를 청해왔으나, 예비 후작은 그런 것도 없었다. “…….” 나 같은 평민 출신 야만인과는 말조차 섞기 싫다는 듯 한 번 힐끗하고 코웃음 치는 녀석. ‘뭐, 저래 주면 나야 편하지.’ 어차피 나도 관심은 없다. 정치나 하며 허송세월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3등급 정수와 귀족이라는 편리한 감투뿐. “오늘의 주역들이 입장하십니다!” 이내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문이 열렸다. ‘그러고 보면 여길 지나가는 것도 이번 달에만 두 번째네.’ 딱히 긴장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카펫을 따라 걸었다. 가운데는 예비 후작이 있고, 왼쪽엔 내가 우측엔 예비 자작이 있는 배치. 터벅, 터벅. 그렇게 귀족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아간 우리는 이내 왕좌 앞에 멈춰 섰다. 텅 빈 왕좌에는 재상이 서 있었다. 재상이 우리를 보고 뭐라뭐라 행사용 멘트를 던졌고, 우리는 약식대로 한쪽 무릎만을 굽혀 예를 취했다. 그 순간이었다. ‘응?’ 쪼그려 앉으려는데 예비 후작 새끼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뭐지? 균형이라도 잃었나?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어 잡아 주려 했으나, 곧 그런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악의. 무의식적으로 그 움직임에서 어두운 감정을 캐치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래도 실수인 척 나를 밀어 바닥을 뒹굴게 하려는 듯한데……. ‘……미친 새낀가?’ 명실상부 왕가의 2인자인 재상은 물론, 수많은 귀족의 이목이 깔린 이곳에서 이딴 추잡한 짓을 벌인다는 건 둘째치고. ‘그게 되겠냐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법.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놈과 나의 몸이 충돌했다. 퍼억-! 물리 법칙에 의한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악!!”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튕겨져 나간 예비 후작이 카펫 위를 한 바퀴 크게 구른다. 빳빳하던 정장이 전부 구겨진 건 덤. “…….” 그 소름 돋는 추태에 일순간 음악이 끊기고 정적이 찾아왔다. 불현듯 백작의 조언이 떠올랐다. “…….” 아, 맞다. 참으랬었는데. 243화 분기점 (3) 예비 후작의 몸이 비요른 얀델을 향해 기우는 순간,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피식 웃었다. ‘소문이 진짜였네.’ 망나니라는 말로도 부족한 놈이다. 재상이 보는 자리에서 저딴 수작을 부리다니. ‘아니, 어쩌면 재상이나 다른 귀족들도 자신을 탓하지 않을 거라 믿는 걸지도.’ 음, 따져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곧 후작이 될 귀족과, 이제 준남작 작위를 다는 탐험가 출신의 바바리안. 그 차이도 명백할뿐더러……. 텃세가 심한 귀족 사회 특성상, 이보다 더 노골적이 괴롭힘도 지끔껏 자주 있었고, 이는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일종의 길들이기다. 하지만……. ‘그래도 대담함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예비 후작은 기사가 아니다. 단지 위압적인 풍채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정수를 먹었을 뿐. 한데 시체 수집가를 상대로 이겼다고 알려진 탐험가에게 육탄전으로 시비를 건다라……. ‘아, 그러고 보니 부상 중이랬지?’ 뒤늦게 사내는 비요른 얀델이 지난 전투의 후유증을 앓고 있음을 떠올렸다. 뇌까지 독기가 침투했었다던가? 지난 위로연에서 평범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뻘뻘 땀을 흘렸더랬다. 아마 후작놈도 그래서 저딴 짓을 했겠지. ‘……기분만 잡치겠군.’ 이내 떠오르는 앞날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귀족의 악의. 그것에 만인 앞에서 수모를 겪는 영웅. 오랜만에 행한 외출에서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 “응?”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 탓이다. 예비 후작의 수작에도 바바리안의 육신은 꿈쩍도 안 했다. ‘……벌써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건가?’ 잘 됐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천으로 제작한 의류 따위로는 감출 수 없는 바바리안의 어깨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악!!” 반작용이라도 온 것처럼 뒤로 나가떨어지는 예비 후작. “…….” 음악마저 끊기며 정적이 찾아왔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여기서 후작 새끼를 밀쳐낸다고?!’ 뒷감당을 생각했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 왠지 모르게 공감성 수치가 올라간 사내는 자기가 더 아찔해졌다. 몸 상태가 호전되어 저열한 수작질에 당하지 않은 건 기쁜 일이었으나……. ‘그냥 모른 척 버텼어야지.’ 만약 사내였다면, 차라리 ‘하하, 다리에 힘이 풀렸나? 운동을 좀 해야겠군’ 같은 말을 하며 나중에 돌려깠을 것이다. 그러는 쪽이 리스크가 없으니까. 뭐, 바바리안답다면 바바리안다운 행동이긴 했다마는. ‘……진짜 그분이라면 이런 식으로는 안 했겠지.’ 그럼 역시 토종 바바리안인 건가? 사내는 실망하면서도 상황을 주시했다.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이 또한 하나의 큰 그림일 수도 있으며……. 그분이 아닐지라도 마찬가지다. 비요른 얀델은 워낙 특출한 성장세를 보이며 플레이어로 의심되고 있는 자 아니던가. ‘일단은 지켜보자.’ 그런 마음으로 눈에 힘을 빡 주고 있던 때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재상이 곤란한 목소리로 바바리안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거였다. 예비 후작의 수작질은 물론, 그 수작질에 이 바바리안이 어떤 대응을 하였는지도. ‘자,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거지?’ 사내는 마지막까지 반전을 향한 기대를 놓지 않으며 바바리안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얼마 걸리지는 않았다. 이내 바바리안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나, 나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어떠한 논리적 방어도 없는 항변. “진짜다! 난 가만 있었는데, 쟤가 나를 이용해 앞구르기를 했을 뿐이다!” 심지어 대놓고 후작의 책임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사내는 어딘가 허탈해졌다. “후작! 너도 말해 봐라! 그냥 앞구르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던 거라고!” 커뮤니티 내에서 비요른 얀델이 플레이어일 수가 없다고 말하던 얀델 경험자들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들이 한 말이 이해됐다. ‘이딴 게 현대인……?’ 바바리안을 보던 사내의 눈이 싸늘해졌다. *** 작위 수여식이 끝났다.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지루했거든. 재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뭐라뭐라 연설을 했고, 왕가를 대신해 작위를 수여한다, 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 나라의 어엿한 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연회. ‘니미럴.’ 이전의 위로연과는 다르다. 그때는 여러 귀족들이 나와 친분을 나누거나 단순 호기심으로 나를 찾아왔지만……. “…….”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마르토앙 남작은 물론, 정략결혼을 추진하려 했던 백작조차도 멀리서 보고만 있다. 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저쪽의 후작이나 자작과는 전혀 다른 대접. 하긴,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나는 이번 일로 후작에게 제대로 찍혔으니까. ‘하, 진짜 뭔 이상한 새끼 하나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편하게 고기 하나를 손으로 잡고 뜯으며 아까 있던 일을 회상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재상마저도 질책하듯 보는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그때 내가 내린 답은 이거였다. 언제나 곤란할 때면 나를 찾아와 큰 도움을 주었던, 무지성 바바리안 모드. [……나, 나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 어차피 귀책사유가 후작 새끼에게 있다는 건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을 터.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애초에 정치적인 대사는 바바리안한테 그리 어울리지도 않고. [진짜다! 난 가만 있었는데, 쟤가 나를 이용해 앞구르기를 했을 뿐이다!] 예상대로 재상은 내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앞구르기?] 원래 책상에서 펜만 잡던 놈들이 이렇다. 아무리 똑똑하고 임기응변에 강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화에는 경험이 없기 마련. [후작! 너도 말해 봐라! 그냥 앞구르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던 거라고!] 내 행동을 도전처럼 받아들이던 귀족들도 무지성 바바리안 모드가 이어질수록 그 태도를 달리했다. 깨달아 버린 거다. 말 그대로, 바바리안은 아예 다른 종족이란 것을. [……카리오트 쿠도는 말하시오. 저 말이 사실이오?] 이내 재상이 차가운 시선으로 후작을 보며 말했고, 후작은 기겁하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바바리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를 밀—] [그만.] [……?] 말이 끊기자 당황한 후작놈을 보며 재상은 아무런 말도 없이 푸근한 웃음을 내지으며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예, 맞… 습니다…….] 결국, 후작놈은 앞구르기를 하고 싶었단 말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저 행동은 재상이 이번 사건에서 내 손을 들어줬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귀족인 이상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것이다. ‘……재상, 이 아저씨도 어딘가 찜찜하단 말이지.’ 아무튼, 그러거나 말거나. 작위 수여식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재개됐고, 이틀 전에 정한 정수를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아 내게 전달하는 것으로 그 끝을 알렸다. 그리고 지금. ‘그냥 돌아갈까…….’ 넓은 원형 테이블에 혼자 앉아 고기만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귀가 욕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음, 그래 그럼 한 접시만 더 먹고 가자.’ 이후 결정을 마친 나는 테이블마다 붙은 사용인에게 고기만 꽉꽉 채워서 한 접시를 더 갖다 주기를 부탁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응?’ 다가온 인기척에 시선을 돌려보니, 기다리던 고기 접시가 아니라 한 사내가 보였다. “하하, 반갑습니다. 얀델 준남작님.” 철저하게 왕따당하던 이번 연회에서 먼저 다가온 첫 귀족. 눈을 마주친 즉시 바바리안의 직감이 말했다. 뭔가 수상하다고. 아니……. “아이프레이아 남작가의 한스라고 합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 한스 아이프레이아. 줄여서 한스I. “……생각보다 과묵하신 편이군요?” 남작가의 막내라 작위는 없지만 그럼에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귀족 특성을 가진 ‘한스’라니? 여태까지 보지 못한 타입의 한스 아닌가!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일단 대충 통성명만 한 뒤 바쁘다며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헉헉, 여기 있습니다. 얀델 준남작님.” 미리 주문했던 고기 접시가 도착했다. 오늘 보여 준 내 식성을 고려했는지, 접시 세 개에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가져온 사용인. “……고맙다.” 나도 모르게 감사의 말이 나왔다. 근데 이건 또 뭘까. “처음… 입니다…….” 사용인이 어딘가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 일을 하면서 그런 말을 들어 본 건…….” 하, 진짜 귀족 새끼들이란. 이내 사용인은 시킬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개의치 말고 말해 달라며, 내 뒤에 기립해 다음 요청을 기다렸다. ‘……그냥 갈랬는데.’ 왠지 그랬다가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거 같다. 그래서 한 손으로 고기를 쥐었다. “아직 식사 중이셨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같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보통 귀족이었다면 이런 요청을 흔쾌히 허락하거나, 돌려 말하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의 바바리안. “그건 좀 불편한데.” 노빠꾸로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스I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흠,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과 눈빛이다. 따라서 나는 묻고 말았다. “다르다니?” “아, 이런 실언을. 단지 이런 거로 불편해할 분은 아니라고 여겼던지라.” 뭐지, 이 새끼는? 작위도 없는 남작가의 막내 주제에 묘하게 여유롭다. 이름이 한스인 것도 그렇고. ‘……대체 왜 나한테 접근한 거지?’ 한번 떠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잠깐의 고민을 끝낸 나는 자연스레 말했다. “너도 한 접시 먹든가 해라. 나 혼자 먹고 있는 건 조금 불편하니까.” “아하, 그런 의미였군요.” 내 말에 한스I가 사용인에게 원하는 취향의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생겨난 둘만의 시간. “만나서 반갑다. 안 그래도 계속 혼자라서 심심했는데.” 나는 고기를 쥐고 있던 손을 닦지도 않은 채 녀석에게 내밀었고, 한스I는 잠시 주춤하면서도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거, 싫은 표정 하고는. ‘후, 이러니까 더 수상한데.’ 육즙이 가득 묻은 손과 악수를 하면서까지 이 자리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씹고 있던 고깃조각들이 녀석의 얼굴에 튀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만큼 크게. “그래! 한스 아이프레이아라고? 마음에 들었다! 친하게 지내자!!” “…….” “왜 친해지기 싫나?” 내 물음에 녀석은 얼굴에 묻은 고깃조각을 손으로 하나하나 떼어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마음에 드는군!” 머지않아 녀석이 주문한 식사도 도착했고, 우리는 함께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작위를 얻은 걸 축하한다든가. 오늘 날씨가 좋다든가. 대부분이 그런 별 내용 없는 잡담이었고, 언제부턴가 한스I는 접시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야 내 입에서 튄 고깃조각이 쟤 접시에 다 들어갔거든. “왜 안 먹냐?” “……속이 좋지 않군요.” “흐음, 나 혼자 먹으면 불편한데…….” 목적이 있으면 빨리 꺼내고, 아니면 꺼지라는 의미의 말. 그렇다면 이 녀석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불편하시다니,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한스I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즐거운 식사 되시길.” 즉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얘는 뭐였지?’ 설마 진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온 건가? “…….” 그냥 가버리니 역으로 이쪽이 더 찝찝해졌다. *** 슬슬 날이 저물기 시작한 초저녁. 한스I를 떠나보낸 후 나는 도망치듯 왕궁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야 한스를 만났지 않았던가.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 있다가 어떤 사건에 휘말릴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일단 정수부터 먹자.’ 나는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밀착 호위를 시작한 케플로에게 양해를 구한 뒤, 시험관 병을 땄다. ‘그러고 보면 깨지 않고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네.’ 시체골렘, 오크 히어로, 만티코어. 정수를 먹게 된 상황은 전부 달랐지만, 결국 모두 시험관을 깨트린 뒤에 정수를 취했다. 어차피 그러거나 말거나 재활용은 안 되니까. 후욱. 시험관 입구에 코를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안에 담겨 있던 정수가 연기처럼 체내로 흡수된다. 「캐릭터의 영혼에 ‘바이욘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3등급 몬스터 바이욘. 최종적으로 이놈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사실 당장은 ‘볼-헤르찬’의 정수를 취해 오러 대비 및 전투력 증강을 하는 쪽이 더 유리하지만……. 아무래도 입수 난이도가 크게 차이가 나니까. ‘이걸 이렇게 먹었으니, 나중에 ‘불멸의 땅’은 경험치만 챙기고 스킵해도 되겠네.’ 볼-헤르찬은 군집 개체이며, 필드에 가면 만나기도 쉬운 반면 ‘바이욘’은 만나기도 힘들며 나오는 필드의 특성도 굉장히 까다로운 편. 이번 정수 선택은 좀 더 미래를 내다봤다. ‘정수의 특성이 다를 뿐이지, 스펙상으로는 그렇게 유의미한 차이도 없고 말이지.’ 게다가 다음 혼령각인의 효과까지 염두에 두면 역시 이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다. 「영혼력이 +100 상승합니다.」 「영혼 재생력이 +30 상승합니다.」 「근력이 +25 상승합니다.」 「…….」 「…….」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듯한 충만함. 자잘한 육체 스탯이 전해주는 새로운 활력. 그 여운을 잠시 즐기다 눈을 뜨니, 케플로가 웃으며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훈련장은 내일에나 갈 수 있겠네.’ 당장 새로 얻은 힘을 써볼 수 없음에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끼이익. 돌연 거리 한복판에서 마차가 멈추었다. 바퀴라도 빠졌나? 그리 생각하며 눈을 뜬 찰나. “아래에서 마력이 느껴집니다!” 바바리안과 달리 마력에 재능을 가진 인간 출신의 기사, 케플로가 소리쳤다. 그리고……. “어서 내리셔야—!” 거대한 폭발이 일며 사방이 불꽃에 휘감겼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조각난 마차. 삐이이이이이이-! 귀에 맴돌기 시작한 이명 사이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암살자! 암살자가 왔다!!” 빌어먹을.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560.88(New +44.4) / 정신: 463.56(New +36) / 이능: 1972.2(New +315) 아이템 레벨: 2,567(New -800) 종합 전투 지수: 3,638.39(New +195.4)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New) 244화 분기점 (4) 한스 아이프레이아. 정확히는 그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 작위 수여식에 참가한 사내는 찬물로 얼굴을 세수했다. 촤앗! 물이 닿을 때마다 피부에 붙은 고기 조각이 씻겨 배수구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보고 있자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 ‘…이렇게 비위가 상하는 건 오랜만이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상에 떨어져 구르고 구르던 초창기에야 더한 일도 숱하게 겪었지만, 이미 그러한 시절은 너무도 오래전 일이 되었다. ‘…굳이 접근할 필요 없이 멀리서 지켜보는 거로만 해야겠어.’ 이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사내는 아까 그 바바리안과 대화를 나눴던 테이블을 확인했다. 어째선지 텅 비어 있었다. 사용인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나눠 보니 이미 그는 마차를 타고 떠났다는 모양. ‘…이대로 마탑에 돌아가는 건 영 내키지 않는데.’ 사내는 잠시 고민한 뒤 왕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투명 마법과 부유 마법을 동시에 전개해 도시 위를 날았다. 이름하여 스텔스 비행 모드. ‘저기 있군.’ 수십 미터 상공에서 아래를 쓱 둘러보던 그는 머지않아 비요른 얀델이 탄 마차를 발견했다. 말을 탄 호위 기사들이 주위에 있는 걸 보니 마차를 착각했을 리는 만무. ‘집으로 가는 모양이군.’ 마차의 방향을 통해 목적지를 유추한 사내는 이내 마차를 따라 이동했다. 뭐, 저 바바리안이 찾던 사람일 거란 기대는 많이 옅어졌지만……. ‘어쩌면 연기일 수도 있어.’ 아직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뇌 없이 행동하는 바바리안은 그조차도 처음이었으니까.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지는 부분도 있는 것. ‘…그분의 게임 이해도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금방 알아채고 누구보다 ‘완벽하게’ 움직이셨을 테지.’ 긍정이든, 부정이든 끼워 맞추려면 어느 쪽으로든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좀 더 정보가 필요하다. 비요른 얀델은 어떤 자인가. ‘여자 세 명이랑 동거 중이랬던가…….’ 왠지 모를 부러움을 외면하며 사내는 마차를 열심히 뒤쫓았다. 동거 중이라면 보통 사이는 아닐 터. 집에서 보내는 그의 일상을 엿보면 좀 더 확실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념으로 간격을 두고 따라가던 차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마차가 폭발했다. *** 그날의 불기둥을 떠올리게 하는 폭발. 다만, 그 위력은 그때 그것에 하등 비할 게 아니었다. 참 다행스럽게도. 「캐릭터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열기에 망막이 상했는지 시야가 흐릿하다. 또한,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가 벗겨지며 온몸이 간지럽고 욱신거린다. 근육도 많이 상한 거 같다. 하지만……. “암살자! 암살자가 왔다!!” 한 방에 뒈지진 않았다. 그리고, 몸도 움직인다. ‘빌어먹을.’ 치솟는 욕지기를 참아 내며 재빠르게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퇴궐할 때 돌려받은 아공간 반지를 활성화했다. ‘후,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장비부터 입을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나는 우선 방패부터 꺼내 팔뚝에 착용했다. 그때 무언가가 터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연막탄 같은 건가?’ 시각이 차단되는 일은 여러 번 있었기에 당황치 않고 서둘러 청각에 집중했다. “꺄아아아악!”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답게 곳곳에서 민간인들의 비명이 들렸다. “무엄한!” “사악한 역도들을 처단하라!” 기사들이 응전하며 병장기 소리도 났다. 다만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온갖 소음들 속에서 내 목숨을 위협할 그것을 구분해 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타닷. 그래, 바로 이런 거. 소리가 들린 즉시, 해당 방향으로 몸을 틀며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콰앙! 방패 너머로 충격이 전해진다. 후, 너희는 연기 속에서도 내 위치가 보이는 거구나. 가만히 닥치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케플로! 살아 있나!!” 있는 힘껏 외치며 폭발 직전까지 바로 옆에 있었던 그의 안위를 확인했다. 대답은 없었다. 죽은 건가? 아니면 그냥 기절? 스윽. 일단 재빨리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메이스를 꺼냈다. 그때 또다시 파공음이 들렸다. 후웅! 경험상 이런 소리는 보통 ‘베기’에서 났지. 무의식이 내린 판단을 믿고 방패를 사선으로 비튼다. 쿠웅! 머지않아 방패의 좌측면에서 충돌이 일었다. 이렇게 되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문제없다. 후웅-! 적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메이스를 휘두른다. 콰직-! 손맛이 났다. 음, 이걸 맞아 주네. 암살자라기에 민첩캐일 줄 알았는데. “커헉!” 연기 속 무언가가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멀리 날아가 처박힌다. 그때였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누가 봐도 인위적인 돌풍이 휘몰아치며 검은 연기를 밀어냈다. ‘마법? 누구지?’ 우리 쪽에 마법사는 없었다. 그렇다고 암살자 측에서 연기를 치워 줄 일은 없을 테고. 하면, 누가 쓴 마법인 걸까? 짧은 의문을 뒤로하고서 주변을 확인한다. “얀델 님! 무사하십니까!” 멀쩡히 서 있는 기사의 숫자는 고작 넷. 반면 산산조각 난 마차의 잔해 주변을 둘러싼 복면인들은 눈대중으로도 서른은 넘는다. ‘아멜리아는… 없는 건가?’ 나는 복면인들을 쓱 훑어보며 아멜리아와 비슷한 체형을 한 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후보가 셋 정도 됐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없었지 않나!” “뭘 망설이나! 어서 죽여라!” 연기를 몰아낸 마법에 당황하기도 잠시, 암살자들은 습격을 재개했다. 본인들도 아는 것이다. 대로 한복판에서 행한 기습이니, 서둘러 끝내지 못하면 곤란해진다는 걸. “얀델 님을 지켜라!!” 각개 전투를 펼치고 있던 기사들도 내 위치가 확인되자 서둘러 내게 다가오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 귀족들이 왜 그렇게 기사 양성에 목을 매는지 알 것도 같다. 이 얼마나 충직하며 믿음직스러운 자들인가. ‘아무래도 갑옷까지 입을 여유는 없겠네.’ 주변 상황을 파악한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지우고 이능을 발현했다. 원래는 내일 훈련장에 가서나 써 보리라 여겼던 바로 그것. ‘초월.’ 바이욘의 이능 [초월]. 패시브이자 액티브인 독특한 스킬이다. 비활성화 시 모든 패시브 스킬의 성능을 1.5배 강화해 준다. [산성체액]은 좀 더 위력적이게 변하고. [영웅의 길]이나 [무쇠가죽]은 수치 증가 폭이 상승하며, 만티코어의 [유전]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스킬이다. 하지만…….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이 스킬의 진가는 액티브로 썼을 때에 있다. 「다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이 강화됩니다.」 단순한 강화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추가되는 각 스킬마다의 고유 추가 효과.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방패 바바의 핵심이 5등급 [거대화]인 이유도 바로 이 스킬에 있다. 「근력에 비례해 체격이 커집니다.」 고정값이 아니라 근력에 비례해서 적용되는 체격 보너스. ‘5m쯤 되려나.’ 일명 거대화(초월) 모드. ‘이 정도면… 그때 리아키스전 때랑 얼추 비슷하겠네.’ 평소와 다른 눈높이를 토대로 새 사이즈를 어림짐작해 본다. 미샤의 오빠 놈이 갖고 있던 [부정한 자]로 1.5배 더 커졌던 그때와 비슷한 수준. 오우거의 정수가 있긴 하지만, 아직 세팅이 전부 끝나지 않아서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훨씬 더 강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 신장에 비례해 육체 수치 및 위협 수치가 증가하는 [거대화]. 그리고 위협 수치에 따라 육체 수치가 또다시 증가하는 [야성분출]. 두 가지가 동시에 적용되며 힘이 들끓는다. 따라서……. ‘도약.’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예상 낙하지점은 저 멀리 활을 들고서 이쪽을 겨누는 중인 복면인이 있는 방향. 콰아아아앙-! 지면에 땅이 닿는 순간, 복면인이 활을 든 채로 높이 떠올랐다. 「캐릭터의 총 중량이 500kg 이상입니다.」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이 피해 범위에 추가로 적용됩니다.」 다행히 키가 커지며 무게가 충족된 모양이다. 갑옷을 안 입어서 걱정했는데. “어?” 무슨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르는지, 허공에서 얼빠진 소리를 내뱉는 복면인. 왜, 이쪽에서 먼저 올 줄은 몰랐나 보지? 야구 배트처럼 메이스를 휘두르자 놈의 목이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꺾였다. 콰직. 오케이, 일단 하나……. ‘응?’ 다음 표적을 찾으며 고개를 틀려던 차, 우측 하단에서 복면인 한 놈이 튀어나왔다. 원래였다면 사각이었을 절묘한 각도. 다만, 나는 이를 정확히 보고서 회피했다. 새 정수의 기본 스탯 덕분이었다. [바이욘] 영혼력 +100, 영혼 재생력 +30, 근력 +25, 고통내성+ 30, 골강도 +30, 항마력 +20, 시야 +25 시야 +25. 이 스탯은 시력이 아니라 시야각을 넓혀 준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회피율 같은 세부 스탯에 보너스가 있었다. 콰직! 대충 튀어 오르는 놈의 복부를 발로 후려차 준 뒤, 다시금 도약 자세를 취했다. 한데,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을까? 호위 대상인 내 돌발 행동에 기사들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이리 오십시오!” 거, 누가 누구를 지켜 주겠다고. 나는 못 들은 척 무시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은 콤보로 한 명씩 해치워 나갔다. 이렇다 할 강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콰직-! 아까 연기 속에서 한 놈을 조질 때 느낀 거지만, 이상하게 수준이 낮단 말이지. ‘진짜 아멜리아급은 없는 건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도약]을 써서 멀리 튈 생각까지 했던 나지만, 이내 그러한 불안마저도 사라졌다. 직접 상대해 보니까 더 잘 알겠다. 처음의 그 폭발만 아니었으면, 기사들만으로 충분히 해치울 만한 수준이라는 걸. 그런데 이건 또 뭘까. “…기, 기사만 상대하면 된다고 했잖아!” 내가 날뛰기 시작하고, 기사들도 각개 전투를 하며 압박을 가하자 복면인들 사이에서 내부 분열이 시작됐다. “처음에 그 폭발 한 방이면 죽을 거라면서!” “나는 이만 돌아가겠어. 이놈이 이렇게까지 잘 싸운단 말은 없었지 않나!” 한두 명이 몸을 사리며 전장을 이탈하자, 이를 기점으로 모든 복면인이 도주를 택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지 얘네는?’ 목표 의식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 ‘…정말 노아르크에서 보낸 게 맞나?’ 그런 의심조차 피어나기 시작했으나, 일단은 열심히 몸을 움직여 튀는 복면인 새끼들을 생포했다. 잡아 낸 숫자는 총 넷. 애석하게도 나머지는 전부 도망쳤다. “…고생하셨습니다.” 호위 대상인 귀족이 캐리하는 일은 처음인지 어색하게 내게 와서 경례를 하는 기사. “아, 너희도 수고했다. 혹시 죽은 자는 없나?” 내 질문에 기사는 세 명이 죽었다고 답했다. 다행히 케플로는 그 안에 껴 있지 않았다. 나와 함께 최중심부에서 폭발에 휘말렸지만, 그래도 그 정도 내구도는 있었던 모양. 제때 포션을 먹였으니 좀 있으면 얘도 정신을 차리겠지. ‘그럼 취조나 해 볼까.’ 전투도 끝나고, 슬슬 경비 대원들도 뛰어오고 있겠다, 생포한 놈들 중 한 명을 쥐어 들고서 복면을 벗겨 보았다. 너머에 감춰져 있던 것은 초면의 남자였다. “…흣!” 좆 됐음을 직감한 듯 벌벌 떨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사내. 일단 손을 뻗어 놈의 입에 쑤셔 박았다. “커, 컥, 커헉!” 열심히 뒤적거려 봤지만 독단 같은 건 없었다. 음, 역시 만화랑 현실은 다른 건가? 아니, 암살자면 당연히 하나쯤 물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애초에 그 정도 의지가 있는 새끼들이면 도망치는 일도 없었을지도.’ 진짜 얘네들은 진짜 뭐 하는 새끼들일까. 입에 쑤셔 박느라 손에 묻은 침을 놈의 옷에 박박 닦아 내며 물었다. “너는 누가 보냈지?” “…….”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좀 패면 알아서 입이 열릴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치켜올리던 그때. 번뜩-! 시꺼먼 하늘에서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쿠우우우우웅-!! 무언가가 운석처럼 날아와 지면에 처박혔다. 처음엔 암살자 새끼들이 도망쳐서 투석기라도 쏜 건가 싶었지만……. “커헉…!” 그것은 한 명의 사내였다. 구체 형태의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얼굴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야 바로 전에 만났던 새끼니까. “한스 아이프레이아……?” 아니, 대체 뭔데. 얘는 또 왜 하늘에서 떨어져.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기도 잠시. 타닷, 타닷, 타닷. 한스I가 떨어진 상공에서부터 또 다른 사내가 폴짝폴짝 뛰며 내려왔다. 그리고 내게는 관심도 주지 않은 채 한스I에게 다가갔다. “…….” 그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물론이고 어떤 기사도 감히 한마디 말조차 뱉지 못했다. 저 사내가 당도한 순간 변해 버린 공기가,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아재, 그냥 쉽게 쉽게 가요. 예?” “말했지 않소, 사람 잘못 봤—.” “하, 구라 쳐도 나한텐 안 된다니까?” 이내 사내가 손을 뻗자 한스I의 주변에 있던 보호막이 무력하게 찢겨 나갔다. 지지지직.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한스I. 사내가 무뚝뚝하게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역시 너 맞잖아. GM.” “…….” “빨리 벤 풀어. 안 그러면 진짜 여기서 넌 뒈지니까.” 245화 분기점 (5) 고스트 마스터. 커뮤니티의 운영 권한을 가진 관리자임과 동시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고인물로 여겨지는 존재. “역시 너 맞잖아. GM.” 일순간 숨이 탁하고 막힌다. ‘한스I가 GM이라고……?’ 혼란스럽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GM씩이나 되는 거물이 왜 정체를 감추고 내게 접근했던 거지? 요즘 유명하니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아니, 그럴 리가.’ GM은 나를 ‘플레이어’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연회 중에 접근해 나를 떠봤고, 그것도 모자라 미행까지 했다. 역시 이게 좀 더 그럴듯한 가설이다. 그것이 내게 그리 달갑진 않을지라도. ‘그럼 아까 그 돌풍 마법도 얘가 쓴 거겠네.’ 가설이 세워지자 자연스레 의문이 풀린다. 미행 중에 갑자기 마차가 폭발하고 연막탄도 터져 시야를 가리니 내 생존여부가 궁금했겠지. ‘이건 나중에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가장 중요한 논제로 다시 돌아왔다.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져 한스I를 GM이라 부르며, 기사들도 벌벌 떨 정도의 포스를 흩뿌리는 사내. 이 사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 “빨리 벤 풀어. 안 그러면 진짜 여기서 넌 뒈지니까.” ……응? ‘벤을 풀라고?’ 나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내가 아는 인물 중에 GM에게 그런 요구를 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자랑스러운 대한건아. ‘이백호.’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기야 하다. GM이 벤을 때린 게 어디 한두 명이겠어? 원한을 갖고 찾아와 저렇게 떼쓰는 일도 있을 만하다. 하지만……. “아재, 내 말 안 들려요?” 어째선지 자꾸 백호의 모습이 보인다. ‘……진짜 걔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다시금 저 녀석의 인상착의를 한 번 더 머리에 새겼다. ‘키는 170 중반 정도.’ 장비랄 것도 없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며, 변장을 한 게 아니라면 종족은 인간. 피부색은 하얗고, 눈에 띄는 흉터는 없다. 머리는 포마드 스타일로 쫙 넘긴 백금발. 누가 봐도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특유의 눈빛 때문인지 귀공자보다는 악동에 가까운 분위기를 내뿜— “얀델 님.” 녀석을 관찰하고 있자니, 기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절대 도망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지?” “그런 게 가능할 상대가 아닙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설마 얘는 쟤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저 남자는 누구지?” 서둘러 의문을 토해냈다. 그리고……. “저자는—” 기사가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아, 너희도 있었지?” 놈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하, 진짜 귓속말 수준으로 말했는데 그걸 그 거리에서 들은 거야? “비요른 얀델.” 내 이름을 정확히 읊조리는 걸 보니, 놈도 내가 누군지 아는 듯했다. 다만 그리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을까? “이번에 그 중2병 새끼를 조졌다며? 그것도 겨우 1년 차에.” 한스I의 모가지를 단단히 부여잡은 녀석이 나를 보며 호기심을 내비친다. 마치 우연히 재밌는 걸 발견한 듯한 표정. “진짜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내 놈이 내게 물었다. “너 플레이어냐?” 하, 어쩐지 내 이름을 아는 순간부터 어딘가 불안해지더라니. 이런 종류의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구나. 내가 해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악령이었군.” 무슨 소리냐며 모르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악령’이라 부르며 선을 긋는 것. 이 녀석이 이백호든 아니든 관계없다. 그야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달리 뭐라고 대답하겠어? “흐음, 이상하네. 네가 이름을 날리긴 했어도 GM놈이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놈은 ‘플레이어인 게 아니라면 말이지…….’ 라고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눈을 좁혔다. 그리고……. “야.” 입은 웃고 있으나 딱히 감정이랄 게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대답하지 마십… 커헉!” 뭐라 조언을 하던 기사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복부를 얻어 맞고 날아갔다. 누구의 짓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 사람이 많아서 신경 쓰여? 걱정 마. 만약 네가 플레이어라면, 다 죽여서 없애 줄 테니까. 암, 내 궁금증을 푸는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지.” 놈이 씨익 웃으며 다시금 내게 선택을 강요한다. “맞아, 아니야.” 그렇지 않다, 라는 대답을 겨우 참아냈다. 그야 질문 자체가 미심쩍었으니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며 똑같은 질문을 던지다니? 마치 진실을 분간해 낼 능력이라도 있는 거 같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정수가 있기도 하고.’ 정보가 없으니 일단 다 조심하는 편이 현명할 터. “싫으면 그냥 아니오라고 해.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다니까? 진짜 궁금해서 그래.” 놈이 ‘대답’에 집착할수록 그런 의심은 커져갔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선택은 단 하나. “질문은 나부터.” 마냥 침묵하는 대신 주제를 돌린다. 적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기고 싶지 않다는 듯한 뉘앙스로. “악령, 너도 암살자와 한패인 건가?” GM이 뭔지도 모르는 바바리안이 할 법한 말을 던진다. 기사든, 이놈이든 내 침묵은 양쪽 모두에게 의문스러운 점을 남기고 말 테니까. 물론 이놈도 만만치 않았다.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 했을 텐데?” 놈이 말을 뱉는 순간 공기에 무게가 실린다. 천적을 만난 것처럼 굳어 버린 육신. ‘설마, 살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커뮤니티 내에서도 아니고 바깥에서 이런 농도의 살기를 뿜어내는 게 정말 가능한 건가? 모르겠다. 지금 당장 확실한 건 오직 하나뿐. “이야, 잘 버티네?” 놈은 마치 폭군과도 같다. 변덕스러우면서도 원하는 건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부 이뤄내고 마는, 그런 폭군. “슬슬 대답하지?”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그때 원탁에서 광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호흡이 멈추며 뇌로 향하는 혈관이 막힌 듯 눈앞이 흐려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약한 정신에 깃드는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정말 얘가 이백호인 거면…… 그냥 정체를 밝혀도 되는 거 아닌가?’ 어쩌면 그쪽이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일단 같은 한국인 출신이지 않나. 커뮤니티에서 보여 준 모습이 진짜 놈의 성격인 거라면 진짜 형처럼 대해줄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내 대답 여하에 따라 이백호에게 쩔을 받고, 힘을 키워 언젠가 둘이 함께 이 세상을 탈출하는 미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떠올린 순간. “……비요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일단 아직 이백호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또한, 내가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이곳에 자리한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말 못 하는 시체로 변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미샤?” 소리 난 방향을 확인하니 헐레벌떡 달려오는 미샤가 보인다. 하긴, 여긴 집 근처였으니까. 소란을 듣자마자 혹시나 하고 찾아왔겠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오, 네 여친?” 사내가 미샤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마치 좋은 약점이 생겼다는 듯한 표정. 일시적으로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사라지며,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따라서……. 타닷. 즉시 몸을 날려 미샤의 앞을 가로막는다. 혹시 있을 놈의 기습에서 미샤를 지키기 위한 행위. “확실히 적묘족이 귀엽긴 하지.” 놈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해.” 어째선지 내가 아닌, 미샤를 향해. “적묘족, 너 플레이어냐?” “으응? 프, 프레이아?” “악령이냐고.” “아, 아, 아닌데요……?” 갑작스레 말을 받은 미샤가 당황하며 답하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대답해 줄 거 없다. 미샤, 내 뒤로 와라.” 나는 얼른 미샤를 내 등 뒤로 감추었다. 그런 내 행동을 보며 놈이 피식 웃었다. “하, NPC를 챙기는 걸 보면 플레이어는 아닐 거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대체 왜 대답을 안 하지?” 아까부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대답을 하면 거짓인 게 들통나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것대로 수상하게 보이는 상황. “적이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가 있나?” 일단 바바리안스러운 이유를 갖다 붙이며 철저하게 대답을 피했다. “오, 그건 맞지.” 놈은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난스레 되물었다. “근데 너, 진짜 내 적이 되려고?” 하, 눈깔 한번 살벌하게 뜨기는. 이게 그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단 그건가? “대답 안 하면, 그 적묘족 죽인다?” 이내 놈이 외통수를 던졌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란 건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지만 도통 적당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순간이었다. [……백호 씨.] “엉?” [다음에 봐요.] 내내 멱살이 잡힌 채로 가만히 눈알만 그리던 한스I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 “하, 이런 씹…….” 이백호는 욕지기를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산뜻한 과일 향을 품은 드넓은 농장. 어디에 떨어진 건지 인지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이런 농가가 있을 곳은 딱 하나뿐이다. 라프도니아의 제6 구역, 노움트리. “아, 진짜 짜증나네. 그 새끼 이제는 절대 먼저 마탑 밖으로 안 나올 텐데…….” 이백호는 순순히 놈을 놓친 것을 인정했다. 어차피 지금 바로 달려가 봤자 거기에 남아 있는 건 아무도 없을 터. 명백한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 마법사이니만큼 텔레포트를 사용한 도주는 경계하고 있었다. 영창조차 못 하게 모가지를 부여잡은 것도 그래서고. 한데, 무영창 텔포라니?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을 대상으로? “그래, 자기도 한가락 한다 이거지?”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조금 후회는 됐지만 그는 금방 훌훌 털어냈다. 그야 이미 벌어진 일 아니던가. 지나간 것에 후회하는 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다 소득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고. 그 새끼가 GM인 건 알아냈다. ‘남는 게 시간이니 좀 더 뺑뺑이치면 되겠지.’ 이백호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이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결국, 끝까지 대답은 못 들었네.” 비요른 얀델. GM을 쫓던 중에 우연히 만난 바바리안. “……뭐, 됐나.” 이백호는 그 바바리안이 플레이어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것을 그만뒀다. 일단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았을뿐더러……. 이미 그 바바리안에 대한 흥미가 팍 식었다. 이제 와서 진짜 플레이어라고 해도 딱히 관심이 생길 거 같지도 않았다. 이쪽 세상에 만족하며 NPC나 빠는 새끼들은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 털썩. 이내 이백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그리고 [공간간섭] 스킬을 활용해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따서 입에 넣었다. “크, 역시 포도는 자연산이지.” 공기도 좋고, 맛난 것도 많고. 어차피 GM놈도 당분간 마탑에 짱 박혀서 나오지도 않을 테고. ‘비프론까지 가기도 귀찮고.’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 그 일이 발생한 지 이틀이 흘렀다. 작위 수여에, 암살자에, GM에, 이백호까지. 하루 만에 정말이지 많은 일이 벌어졌고, 지난 이틀은 그 뒷수습의 시간이었다. 일단 ‘암살자’부터 정리해 보자면……. [이들은 저희가 데려가 심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생포한 암살자들은 모즐란으로 호송되었다. 오늘 기사에게 소식을 전해 듣기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청탁을 받았다던가? 참고로 기사 셋을 즉사시켰던 그 폭발물도 그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받은 지령은 얀델 님을 죽이고 하사받은 정수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수상한 점이 꽤 많았다. 정수야 그러려니 한다. 시험관이 담긴 상자가 워낙 단단했어야지. 기습해서 날 죽이고 가져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먹었으면 어쩌려고?] [저희도 그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청부인은 내 목에 포상금까지 크게 걸었다고 한다. 정수는 구실일 뿐이란 의미였다. 아니면 날 죽이는 데 돈을 걸 이유가 없으니. 그래서 모즐란 측에선 청부인을 노아르크일 거라 추측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럼 대형 클랜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모즐란은 이번 일의 범인을 대형 클랜들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렸다. 노아르크 측이었다면 더 확실한 놈들을 보냈을 거라던가? 이런 식의 ‘의뢰’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다. 무엇보다 동기는 그들에게도 충분히 있었고. [예. 아마 얀델 님을 해한 뒤, 저희 왕가 측에 덮어 씌우려는 속셈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날 밤 몇몇 주점에서 그런 수작질이 몇 번 발견되기도 했고 말입니다.] 납득할 만한 추측이었으나, 의문점은 있었다. 그럼 광대놈이 했던 말은 뭐지? 이 정보를 미리 손에 넣어서 그렇게 말한 건가? ‘하긴, 그때도 암살자가 갈 거라고 했지. 노아르크 측에서 보낸다고는 말 안 했지…….’ 어차피 자기들이 보낸 암살자도 아니니 미리 말해 줘도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진짜는 아직 오지도 않은 걸 수도?’ 왜인지 자괴감이 밀려온다. 후, 나는 왜 도시에서도 이렇게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무튼, 암살자는 이만하고 그다음. ‘GM.’ 결과만 말하자면 GM은 한스I가 아니었다. [그날 보았던 한스 아이프레이아는 누군가가 변장한 게 틀림없습니다.] 자택을 덮쳐 보니 진짜 한스 아이프레이아는 기절해 있던 상황. 혹시 몰라 마력 조사도 해보았으나, 진짜 한스I에게는 한 줌의 마법 재능도 없었다. 쉽게 말해, 누군가 그의 신분을 빌렸단 뜻. ‘쩝.’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혹시 이거로 GM의 정체를 알아낸 건가도 싶었건만. ‘그래도 아무런 소득이 없던 건 아니니까.’ 몇 안 되는 위안거리다. 일단, GM 쪽에서 나를 플레이어로 의심하는 중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적어도 대비를 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대답을 안 하는 걸 봤으니 의심은 더 깊어졌겠지. 아마 다음 커뮤니티가 열릴 때를 노릴 가능성이 높아.’ 다행히 이 부분은 짐작가는 바가 있다. 그래서 대처할 방법도 하나 만들어 두었고. 아무튼, 이쯤에서 다음. ‘이백호.’ 일단 그놈은 이백호가 맞았다. 그야 GM이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으니까. [……백호 씨. 다음에 봐요.] 모가지가 붙잡힌 상황에서 육성이 아니라 마법을 이용해 했던 말이었다. 음, 크게 의미는 없겠다마는. [그자는……. 죄송합니다. 제 권한으로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때 그 기사에게 이백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런 대답만이 돌아왔다. 이래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건가? 그때 이백호가 말만 안 끊었으면 그대로 말해 줬을 거 같은데. ‘역시 위험한 놈이란 말이지…….’ 나중에 이백호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때처럼 친하게 지내긴 어려울 거 같다. 성향이 완전히 다르단 걸 알았다 해야 하나? 커뮤니티에서 보여 준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본모습일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진짜 망나니 그 자체였지…….’ 아무튼, 이백호도 여기서 끝내고 다음. ‘미샤.’ 사실 이게 가장 골치 아프며 내 숨이 턱하고 막혀오게 하는 부분이다. “비요른, 진짜 진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랑?” “…….” “너, 너는 갑자기 어디로 안 사라지지? 그, 그렇지이……?” 미샤가 나를 불안하게 보기 시작했다. 246화 분기점 (6) 대체 어떤 실수를 저질렀기에 얘가 저러는가.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미샤는 가장 오랫동안 나를 옆에서 지켜봐 왔다. 책을 읽는 바바리안. 탐색꾼 역할을 할 줄 아는 바바리안. 무식한 척하지만 사실은 영악한 바바리안. 남들이 모르는 걸 항상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던 바바리안. 그간 수상한 점은 많고 많았을 것이다. 뭐, 지금까지야 그냥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며 넘어갔겠지만……. 그날의 일로 확 와닿았겠지. 얘는 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으니까. [적이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가 있나?] 바바리안스러운 이유를 붙여 계속 대답을 피했으나, 미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거다. 내가 고집스럽게 변하는 건, 그럴 이유가 있을 때뿐이라는 걸 적어도 얘는 아니까. [대답 안 하면, 그 적묘족 죽인다?] 심지어 백호놈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어쩌면 미샤는 이조차 느꼈을지 모른다. 내가 막다른 길에 몰려 필사적으로 대답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사라진다니, 그게 뭔 소리냐?” 모두가 잠에 든 한밤중. 조심스레 찾아와 불안을 내비치는 미샤를 보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내가 갑자기 왜 사라져?” “아, 아니, 그게……. 응, 그냥 악몽 때문에.” 미샤는 꿈을 이유로 대며 말을 돌렸다. 속에 있는 불안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꿈? 정 무서우면 옆에서 자도 된다!” “그, 그 정도는 아니거든? 치, 됐당! 장난칠 거면 어서 잠이나 자라, 이 바바리안노망!” 이내 미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방에서 나갔고,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갑갑했다. ‘갑자기 사라진다라…….’ 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알고 있다. 그야 어제 얘 방에 몰래 들어가 책상에 있던 책을 읽어 봤으니까. 예전에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이었다. 악령들이 보이는 몇 가지 패턴과 습성들이 정리되어 있는 책. [악령들은 연기에 능숙하며 영악하다. 또한, 인연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정체가 탄로날 만한 위기가 생길 시, 그들은 모든 인연을 끊고 모습을 숨기는 방식을 택한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구절이었다. 정체가 들키면 파멸밖에 없는 운명 아닌가. 일단 최대한 주변인들과 거리를 두고, 그래도 안 된다면 결국 신분을 바꾸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지조차 막힌다면……. ‘노아르크로 가겠지.’ 실제로 노아르크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다. 라프도니아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범죄자 혹은 악령은 하수도로 숨어들고, 노아르크는 그런 그들을 거둔다. ‘광대놈만 해도 악령인 걸 들키자마자 오르큘리스에 입단한 거로 유명하고.’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내가 악령인 걸 들킨다면…….’ 과연 녀석들은 어떤 반응일까? 속았다며 배신감과 분노를 느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적어도 미샤는 내가 악령일지라도 옆에서 사라지는 걸 더욱 불안해하고 있었다. ‘망할 백호 놈.’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그들에게 내 실체가 탄로 나는 게 두렵다. 끌려가게 될지 모를 단두대보다도.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게 더 두렵다. 그게 설령 모래성 같은 것일지라도. 후웅. 나는 아공간에 있는 마도구를 꺼냈다. 남들 몰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 [좋아, 원한다면 네가 있을 곳을 없애주지. 한스 크리센은 악령이다! 내 배낭에 그 증거가 있—] 참고로 녹음 기능도 딸려 있었기에, 도플갱어 숲에서 만난 드워프놈은 이를 이용해 한스G를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딸깍. 이내 마도구 아래에 자리한 홈을 누르자, 그때 그 둘이 나눴던 대화가 생생하게 재생됐다. [뭘 그리 고민해? 어차피 NPC들이잖아.]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한 동료—] [웃기고 있네. 걔들이 네 정체를 알아도 그런 생각을 할 거 같나?] 드워프놈의 말에 한스G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야 알고 있는 것이다. [네 동료들이 친구라 생각한 건 진짜 한스다. 그리고 알다시피 진짜 한스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 우리들은 악령이다. 이곳에서 어떤 인연을 쌓든, 거짓을 기반으로 세워진 위태로운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저는 그들이 진짜 제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한스G는 그날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어땠던가. [어··· 째, 서······.] [미, 미안해요.] 위기에 빠진 드워프놈이 강제로 놈의 정체를 드러내자, 한스G는 전사의 몸에 불길을 쏟아낸 채 드워프놈에게 붙었다. 사실은 본인도 알고 있던 것이다. 더 이상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단걸. 한때 소중했던 그 동료는 이제 자신을 ‘적’으로 여기리라는걸. 딸깍. 나는 다시금 버튼을 눌러 소리를 껐다. 문득 타켈란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 날이 올 테니.] 녀석의 말은 틀렸다. 만약 나에게도 그러한 절망의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더욱 끔찍하고 비참한 말로일 것이다. *** 또다시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에도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이번 암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됐던 대형 클랜에 대한 단서가 더 나오지도 않았고, 결국 그날의 사건은 꼬리자르기 식으로 유야무야 끝났다. 더 이상 파고들 건수가 없던 것. 아, 그래도 덕분에 호위 기사들은 늘었다. 왕가에 악의를 갖고 나를 노리는 세력이 있단 게 증명되면서 추가로 전력을 투입했다. 음, 조금은 과할 정도로. ‘하, 이러니까 어딜 나가지 못하겠네.’ 밀착 호위만 벌써 셋. 물론 집 안에서만 그럴 뿐이고, 밖에는 서른 명도 넘는 기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또한, 외출을 한다 하면 그 인력이 전부 나를 따라온다. 아, 심지어 기미상궁까지 붙었다. “혹시 독이 들었을지 모르니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매 끼니 때마다 독 내성을 전문으로 올린 기사가 먼저 맛을 본다. “구,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냥! 내, 내가 비요른을 해칠 일이 어디 있다고오…….”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음, 맛있군요. 역시 칼스타인 님께선 솜씨가 참 좋으신 거 같습니다.” “그, 그렇게 말해도 위로 안 되거든!” 매 식사 때마다 기미상궁이 저러니 미샤의 기분은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융통성 없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다. ‘노아르크 쪽에서 암살자를 보낸다 해도 이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이후 아침 식사가 끝나자 아이나르는 성지로, 에르웬은 동생을 만난다며 외출했다. 그리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 “……나간다고?” “이제 슬슬 나도 일을 해야지.” 그간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열심히 힘을 내서 미룬 일들을 하러 갈 차례다. “일이라면 뭔가 또 사러 가는 거냥?” “아니, 이번에는 다른 용무다.” “으음?” 보통 정비 시간에는 쇼핑 시간을 가졌지만, 오늘은 그런 목적이 아니다. 이번에 돈을 잔뜩 벌기는 했지만……. ‘가만 있으면 가치가 쭉쭉 오를 텐데 굳이 지금 쇼핑할 이유가 없지.’ 일단 벌써부터 장비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메인 고객층이던 탐험가들이 대거 죽으며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반면 식량값은 올랐다. 다음 달부터 마석 공급이 줄어들지 모른단 우려로 사재기가 시작된 것이다. ‘일단 현금은 되도록이면 쓰지 않고 갖고 있기로 하자.’ 이곳에서의 화폐는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다. 실질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야 연금술사의 손에 의해 철이 되고 밀이 되는 만능 물질인 마석으로 먹고사는 세계니까.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일은 없다. 노동력의 가치가 바닥을 친다면 모를까. ‘히쿠로드는 괜찮으려나……?’ 문득 난쟁이놈이 떠올랐다. 최근에는 그래도 대장간 영업이 나름 잘되는 거 같던데, 지금 시국엔 파리만 날리겠지? 왠지 짠하다. 재산을 전부 꼬라박아 가게를 열었는데, 그런 일이 터지다니. ‘얘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가 보는 거로 하고…….’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미샤와 함께 나왔다. 밖에는 기사들이 준비한 마차가 서 있었다. 참 과분한 대접이란 생각이 들지만……. “타시지요.” 이젠 익숙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쪽이 호위하기 훨씬 편해서 그러는 거라는데 어쩌겠는가. “어디로 모실까요?” “레아틀라스교의 대신전으로.” 이내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마차가 출발했다. “……레아틀라스교? 거긴 갑자기 왜 가는 거냥?” 미샤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심정이 이해는 됐다. 이쪽의 종교 세력은 악령의 천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쩝, 아직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닌가 보네.’ 하루 이틀은 악령 관련 책을 읽으며 내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했던 미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것들이 싹 없어졌었다. 그래서 그저 기분 탓일 뿐, 내가 정말 악령일 리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줄 알았건만. ‘……이럴 땐 내가 뭔가 하기보다는 그냥 자극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낫겠지.’ 따라서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혹시 남는 신관이 있으면 달라고 할 생각이다.” “……남는 신관이라니? 호, 혹시 팀을 나, 나가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하지만, 신관이 와봤자 우리는 이미 다섯 명인…… 아! 설마 누구 한 명을…….”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팀을 나가는 일도, 다른 누가 내 팀에서 나가는 일도 없다.” “응? 그럼 신관은 왜…….”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지 말꼬리를 흐리는 미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이제 6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으응, 6층? 그래, 그렇구나. 근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뎅?” “클랜을 만들 거다.” 5인 팀은 졸업할 때가 됐다. *** 소규모일지라도 5인이 넘는 이상 클랜으로 분류가 된다. 반드시 2팀 이상으로 인원이 나뉘어야 하기 때문이다. “클랜? 그럼 앞으로는 10명이서 움직이는 거냥?” 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 거 같긴 한데. 당장은 아니다. ‘에르웬이 탐색꾼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당장은 신관 한 명 정도면 되겠고.’ 6층부터는 특수 포지션의 탐험가도 한 명 더 영입을 해야 한다. 그러면 일단은 총 여덟 명. ‘지금 우리 수준이면 넷씩 나눠도 5층까진 문제없이 올라오겠지.’ 뭐, 사실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정 안 되면 2층에서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니까. 시작 위치에 따라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4층에서 인원 페널티가 걸리며 또 느려지게 되겠지만……. ‘우리가 대형 클랜인 것도 아니고.’ 사냥터 통제가 목적인 게 아니라면, 하루 이틀 차이는 소규모 클랜에게 유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부분이다. ‘미궁은 언제쯤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만약 각이 나오지 않으면 몇 달은 더 존버할 계획이다. 애초에 6층으로 갈 준비를 마치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도착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마차가 대신전 앞에서 멈추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마차에서 대기. 밀착 호위 셋과 미샤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로비츠 단장님께서는 일이 있어 외출하신 상태이십니다.” 인연이 있는 파알 크로비츠가 아니라, 다른 성기사가 나를 맞아 주었다. 이름은 스벤 파라브. 레아틀라스교의 제2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라던가?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 오늘은 어떤 용무로 본교단에 방문하셨을까요?” 나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짧게 말했다. 클랜을 만들 계획이며, 가능하다면 신관을 한 명을 데려가고 싶다는 내용의 말. 결과만 말하자면, 단번에 거절당했다. “흐음, 아무리 준남작님이셔도 그건 조금 곤란하겠군요.” 근래에 얻은 ‘거인’이라는 명성도, 준남작이란 귀족의 지위도 교단에선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기본 조건이 될 뿐. 신관 영입을 위해선 공적치가 필요했다. ‘후, 이렇게 융통성 없는 건 왜 게임이랑 똑같은 건지.’ 예상 범주 내에 있던 일이기에, 나는 공적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고 상세한 대답을 들었다. ‘몇 개 빼면 전부 게임이랑 비슷하네.’ 결국, 답은 노가다밖에 없을 듯하다. 쩝, 미리 해 둘걸. “파라브라고 했나? 오늘은 고맙다. 다음에 다시 오지.” “예, 언제든 영웅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지요.” 짧은 용무를 마친 나는 파라브와 인사를 나누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별의 가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용살자와의 악연을 막아 주던 마지막 덩굴이 끊어졌다. “…….” 제기랄. 진짜 산 너머 산이구나. 247화 노움트리 (1) 연금술사. 마석을 물질로 바꿀 수 있는 존재. 라프도니아에서도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에 최중요 자원으로 여겨진다. 훨씬 열악한 노아르크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좋은 아침이에요, 마를린 님!” “연금술사님의 심부름이십니까? 무거워 보이는군요. 제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마를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녀는 단 하나뿐인 연금술사의 제자니까. 언젠가 지식을 전부 물려받고 나면, 그때부턴 그녀가 이 도시를 책임져야 한다. ‘할아버지도 슬슬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 거 같고…….’ 솔직히 말해 이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그녀 말고 달리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책임감을 갖고 힘을 내는 수밖에. 마냥 의무만 있는 자리도 아니지 않던가. “할아버지!” “스승님이라 부르래도.” “알았어요. 스승님! 그래서 그 물건은요? 왔어요?” “암, 여기 있다. 숫자가 꽤 되던데, 알아서 찾아가려무나.” 이내 연금술사가 양방향 아공간을 툭하고 던졌고, 마를린은 이를 받아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주문했던 것들이 들어 있었다. “꼭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마를린은 휘파람을 불며 물품들을 개인 가방에 옮겨 담았다. 명백한 특혜였다. 연금술사의 제자란 자리가 없었다면, 전략 물품인 양방향 아공간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을뿐더러……. 애초에 도시로 나간 잠입자들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았을 터. “우와, 할아버지!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 집 쿠키 엄청 잘하네!” “스승님이라 부르래도. 아, 쿠키는 맛있구나.” “근데 그거 뭐예요? 외형적 특징은 엘릭서와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럴 리는 없겠고…….” “하하, 네가 잘 봤구나.” “예에? 진짜 에, 엘릭서예요?” 별생각 없이 쿠키를 집어먹던 마를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게, 엘릭서라니? 워낙 재료들이 비싸고, 제작 과정도 난이도가 높아서 그녀의 스승조차 한평생 다섯 병밖에 만들지 못한 그것 아닌가. ‘두 병은 이미 썼다고 그랬지…….’ 이제 노아르크에 남은 엘릭서는 고작 셋뿐. 한데 그중 한 병이 지금 스승의 손에 쥐어져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마를린이 호기심으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스승이 웃으며 사정을 알려 줬다. “너도 옆에 따라와 배워야 하니 알고나 있거라. 오늘 용살자 리갈 바고스에게 엘릭서를 먹이고, 회복 정도에 따라 기억을 되돌리는 시도를 해볼 것이다.” “리갈 바고스, 그 아저씨한테요……?” 마를린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마음에 들지 않더냐?” “……그냥 무섭게 생겨서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거라. 부상 때문 아니더냐. 화상을 입기 전에는 제법 훤칠한 얼굴이라 하더구나. 뭐, 별개로 나도 그 녀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마는.” “그, 그렇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허허, 너는 항상 듣고 싶은 내용만 골라 듣는구나.” “그야 저도 그냥 외모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그 아저씨는 너무 불친절해요. 할아버지한테 반말하는 것도 그렇고…….” “녀석.” 잠시 멋쩍은 침묵이 이어졌고, 이후 마를린은 스승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그 용인에게 귀하디 귀한 엘릭서가 전해지게 된 이유는 참으로 간단했다. 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이번에 시체 수집가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며 보충할 필요가 생겼다더구나.” “그 아저씨가 그렇게 세요? 저주를 받고 약해졌다면서요.” “그래도 그자의 용언은 특별하니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엘릭서까지 먹으면 한두 번은 더 쓸 수 있을 상태가 될 거라 예상하더구나.”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성주에게 직접 엘릭서를 요청했고 성주는 이를 윤허했다. 일방적인 요구이긴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용인이 그렇게 된 것엔 이쪽 책임도 있으니까. 치료를 하려 했는데, 어째선지 용인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쯧, 아직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구나. 분명 그렇게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거늘.” “제가 봤을 땐 다 연기예요, 연기! 어떻게든 우리한테 누명을 씌우고 기선 제압하려고!” “……연기는 아닌 거 같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구나. 성주도 언제까지 그들에게 휘둘려선 안 될 텐데.” 오르큘리스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다.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자, 그럼 준비는 끝났으니 어서 가보자꾸나.” 이후 마를린은 스승을 따라 용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어어어어…….” 침대에 누운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지가 빳빳하게 굳은 상태로 눈알만 굴릴 뿐. “청각엔 문제없는 거로 아니 나 혼자라도 말하겠네. 자네에겐 기쁜 소식이겠군. 성주께서 자네를 위해 엘릭서를 하사하셨네.” “그어어…….” “그럼 바로 시작하지.” 참고로 치료 과정은 이렇다 할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엘릭서가 어디 보통 물건인가?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엘릭서를 먹이는 것이 과정의 전부. “…….” 복용이 끝나고 십 분가량을 기다리자, 용인은 직접 몸을 일으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다만……. “제기랄, 너네 대체 전에 뭘 했던 거야?” 그가 가장 먼저 말한 대사는 이것이었다. “아니, 뭔 개짓을 했기에 치료를 받았는데 그 상태가 되냐고!!” 마를린은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오기 전에 스승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겨우 참았다. “허허, 그래서 이렇게 엘릭서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자네가 너그러이 여겨주게.” “하, 진짜 연금술사만 아니면…….” “자, 그럼 몸은 얼추 다 나은 듯하니 다음으로 넘어가세.” “다음?” “그때 하려고 했던 것 말일세. 그땐 갑자기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못했지만, 이제라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거, 문제는 없는 거겠지……?” “실패는 할 수도 있지만, 그거로 몸에 이상이 생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걸세.” “……믿어 보겠어.” 용인은 상전이라도 되는 듯 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못내 불쾌한 마를린이었으나, 스승이 가만 있는데 뭐라 나설 수도 없었다. “먹게. ‘레테의 저주’라 불리는 비약일세. 아, 그리고 조금 아플 수는 있지만, 지금 자네 몸이면 충분히 버틸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이내 용인이 못 미덥다는 시선으로 약을 받아 들더니 꿀꺽 삼켰다. “……쓰군.” “곧 통증이 올 테니 이리 눕게나.” 용인은 순순히 지시를 따라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끙끙 앓던 용인이 다시 눈을 떴다. “어떤가? 기억은 돌아왔나?” “……모르겠어. 날 것도 같은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네.”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야.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그런 종류의 약이니까.” “그보다 좀 달달한 거 없나? 입가심할 게 있으면 좋겠는데…….” 용인의 요구에 스승이 마를린을 바라봤다. 뭔가 있으면 내놓으라는 뜻. “……가져올게요.” 마를린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아까 두고 간 쿠키를 가져왔다. 다만 돌아왔을 때 스승은 없었다. “네 스승이라면 성주가 불러서 잠시 갔다. 그래서 먹을 건?” “여기요…….” 마를린은 몇 개 안 남은 쿠키를 건넸다. 내키진 않지만 어쩌겠는가. ‘아멜리아 님이 주신 건데…….’ 이 용인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하나로 만족을 못 하고 여러 개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윽…… 머리가!!” 돌연 용인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마치 잊고 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하듯이. “그, 그래……! 그, 놈이야……!” 이내 용인이 허공을 보며 깊이 환호했다. 다만 그 기쁨의 시간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커, 커헉!” 괴로운 표정으로 크게 기침하는 용인. 딱 봐도 뭔가 목에 걸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느새 화상으로 울긋불긋한 용인의 피부가 기이할 정도로 부어오르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는 이런 부작용이 있다고 안 했는데?’ 미리 전해듣지 못한 상황에 마를린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너!!” 돌연 용인이 마를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명백한 적의가 담긴 손길. 평생 연금술만 배우고 살아온 마를린은 그 움직임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큭!” 그 손길이 그녀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던 용인이 균형을 잃고 침대 아래로 쓰러진 탓이다. “커헉!” 크게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피도 섞여 있는 듯했다. 하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너… 쿠키에 뭐, 뭘 섞은…….” “네, 네? 그냥 평범한 쿠키인데…….” 마를린은 당황하며 대답했고, 이를 기점으로 용인이 완전히 바닥에 쓰러졌다. “……마, 망할 년.” 그 와중에도 용인은 목에는 핏대를 세우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길게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풀썩. 이내 용인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요, 용혈은··· 계피와 상극······.” 계피 알레르기였다. *** 「별의 가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세 번째 덩굴이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짐작을 해보자면, 지치지도 않고 또 사악한 계획을 세우다가 신벌이 내려갔든가 했겠지. 일단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이니까. 아무튼, 신경 써야 할 건 이유가 아니다. ‘제기랄.’ 이제 용살자 새끼가 언제든 나를 노려올 수 있다. 앞으로 경계해야 할 게 더욱 늘었다는 뜻. ‘두 번째 덩굴이 끊어진 게 겨우 지난 달인데.’ 어떻게 이리 되지?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게, 아직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놈 한 명이면 어떻게 잘 조질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문제는 놈이 단신으로 내게 복수하러 올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광대놈과 함께 찾아온다면? 그게 아니라도, 수많은 부하들을 대동한다면? ‘보아하니 결계도 곧 뚫릴 거 같고.’ 심지어 왕가 측에서는 노아르크의 결계를 박살 낼 수단조차 손에 넣었다. 지상과 지하의 왕래가 가능해지면, 미궁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 용살자와 만나는 일도 가능해지는 셈. 물론, 이조차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왜 하필 여기서…….’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쓱 훑었다. “비요른, 그건 설마……!” 이 덩굴 반지가 뭘 의미하는지 아는 미샤는 그저 경악하고 있었다. 반면, 기사는? “……?” 그냥 이게 뭔 해괴한 일인가 하는 눈치다. 다만, 성기사는 달랐다. “……본교의 성물이군요. 그것도 처음 보는 형태의.” 스벤 파라브. 레아틀라스의 제2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란 지위를 가진 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종교인답게 이게 성물이라는 걸 눈치챈 것. “설마 지난번에 내려온 신탁이…….” “그만.” “아… 죄송합니다.” 내가 중간에 말을 자르자, 성기사가 실수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이미 늦은 상황. “그럼 그때 그 신탁의 주인공이…….” “……호위 임무의 기본은 기밀 유지이니 너무 우려하지 마십시오.” 우려하지 말기는 개뿔. 기밀이라 해봤자 자기들 상관한텐 홀라당 일러바칠 거면서. ‘……하, 짜증나네.’ 기사 셋과 부단장 한 명. 비밀이 알려진 건 고작 넷뿐이지만, 그 숫자가 앞으로 점점 늘어나리란 건 자명한 사실. 과연 부족장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진짜 부족에서 내쫓거나 하지는 않겠지?’ 글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귀찮은 일이 생길 건 분명했다. 부족장은 내가 귀족이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 않은가. 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설득하는 것도 일이었다. ‘……9단계 각인까지 찍으려면 한참은 더 걸릴 텐데.’ 갑갑하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특히. 비밀로 해달라고 해봤자 내 앞에서는 다들 그러겠다 하겠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따라서 나는 그냥 별말 않고 대신전에서 나왔다. 어차피 벌어진 일 어쩌겠어? ‘최대한 빨리 부족을 접수하는 수밖에.’ 내가 부족장이 되어 부족의 전통을 바꾸면 전부 해결되는 문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샤, 너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으응?” “성지에 좀 잠시 들르려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않던가. 곧바로 미샤와 헤어져 성지로 향했다. 기사들은 성지 입구까지만 함께하고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바바리안족은 다른 종족의 출입을 금지한단 전통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던 탓. “그럼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녁쯤에는 나올 테니, 근처에서 쉬고 있어라.” “예.” 이내 열린 성문 너머로 들어서자 도심에선 보기 힘든 숲 지형이 나타났다. 한데 전사의 몸에 남은 잔재일까? 어째선지 커뮤니티가 열릴 때마다 가는 이한수의 방보다도 이곳이 더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이쪽 공기가 좋기는 해.’ 포장된 도로는커녕 잡초가 무성한 길을 걷고 있자니, 금방 성지의 주거 구역에 도착했다. 이렇다 할 규격 없이 막 지어진 움막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조상신의 가호를 받은 전사이며 무적이다!” “신이고 무적이다!” “자, 앞으로는 비요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악령 시체 수집가를 해치운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경청해라!” “겨, 경청? 그게 무슨 뜻인가!” “귓구멍 열고 들으란 뜻이다!” 근처 공터에서는 조기 교육을 받고 있는 어린 전사들이 보였다. 참고로 교관은……. ‘아이나르.’ 아이나르는 바깥에서와 조금 달랐다. 미샤 앞에선 펴질 줄 모르던 어깨가 활짝 벌어졌고, 표정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배낭을 네 개나 메고 있었다. 그야 이제 바바리안족에서 배낭의 개수는 성공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후배들 앞에서 멋 좀 부리고 싶었겠지. 저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즘은 맨날 아침마다 성지로 출근하는 게 일상이다. ‘……얼른 지나가자.’ 아이나르에게 인사라도 하고 갈까 싶었지만, 왠지 기가 다 빨릴 거 같아서 그만뒀다. 오늘 성지에 온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힘은 아껴둬야 한다. 촤악. 이내 부족장의 집에 도착한 나는 천막을 활짝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바바리안의 장점 중 하나다. 노크를 할 필요가 없다. “오, 몸은 다 나았나 보군?” “그렇다.” “찾아온 용건은?” 바바리안족의 정점에 선 사내답게 긴 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부족장. 여긴 언제나 시원시원해서 좋다. 나도 꺼릴 게 없어지니. “할 말이 있다.” “해라.” 정직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야만인의 사회. “부족장 자리를 계승하러 왔다.” 나는 그냥 노빠꾸로 말했고. “계승이라…….” 부족장은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도끼를 꺼내 들며 대답했다. “어려운 말 말고, 덤벼라.” 248화 노움트리 (2) 그날 부족장은 내게 말했다. [내 자리가 탐난다면 더욱 강해져라 전사야. 그리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라. 내가 널 지켜볼 것이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이 자리를 내게 물려주겠노라고. 하면, 증명은 어떤 식으로 되는가. 나는 굳이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바바리안이라면 단 하나뿐이니까. “잠깐, 자리를 옮기지!” “……역시 넌 현명한 전사다.” 실내에서 벌어질 뻔한 전투는 내 통찰력에 의해 야외의 공터로 옮겨졌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을 내지르며 시작된 전투. 콰아아아앙-! 부족장은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목을 베었던 도끼를 인정사정없이 휘둘렀고, 나 역시 습득한 스킬들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응전했다. 다만, 결과만 말하자면……. “내가 이겼다.” 약 한 시간의 전투 끝에 패배했다. 패배의 요인은 스펙 부족이었다. 그야 부족장은 나와 비슷한 타입이니까. 아예 포지션이 다르다면 변수가 계속해서 나왔을 텐데, 힘에서 밀려 버리니 이변이 생기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역시 아직은 안 되는구나.’ 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물론 대련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련에서 [산성체액]을 눈깔에 뿌리거나, 헛소리를 지껄여 정신을 산만하게 한 뒤의 기습 같은 야비한 수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라운드전에서 손발이 봉인됐을 때 이로 목을 깨물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필살기를 봉인하고 싸운 셈. 그렇다면 ‘증명’은 어떻게 됐을까. “아직 너는 모자라다.” 이내 부족장이 내게 말했다. “내 자리가 탐난다면 더 강해져라.” 쩝, 커트라인은 6층 정도라고 여겼는데. 이미 그 정도는 된 거 아닌가? 설마 자기를 이겨야지만 부족장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 “나 같은 늙은이는 상대도 안 될 만큼.” 하, 혹시가 역시나였구나. 8층 탐험가를 상대로 이기라니……. ‘좀 더 시간이 걸리겠군.’ 나는 조급함을 버렸다. 이 또한 바바리안족이 가진 장점 중 하나다. 계승에 실패해도 딱히 잃을 게 없다. 아니, 오히려 얻는 것만 잔뜩이라 해야 하나? 승부가 끝나자마자 포션을 몇 병이나 까먹을 만큼 몸이 작살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따라잡았어.’ 주먹 한 방에 기절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무려 한 시간에 가깝게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낸 정수가 여섯 개.’ 부족장의 정수를 여럿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싸울 때의 습관 같은 것도 어느 정도 눈에 익혀 두었고. 다음에는 훨씬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또한. ‘바바리안이 잘 싸우긴 한단 말이야.’ 체득하려면 앞으로 더 싸워 봐야겠지만, 한때 전사로서 8층까지 올라간 부족장의 감각을 전투 중에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 부족장을 상대로 한 시간이나 싸우다니!” “봐라! 저 짠돌이 부족장이 포션을 먹는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거겠지. 역시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 대련이 끝났을 때, 한가득이던 동족들도 딱히 내 패배에 실망하는 눈치는 아니다. 하긴, 이제 난 1년 차잖아? “적어도 5년은 더 걸리리라 여겼건만.” “음, 어쩌면 훨씬 더 일찍 부족장이 바뀔지도 모르겠군.” 장로들조차 흡족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이는 중이다. 따라서, 나는 졌지만 많은 걸 얻었다. 반면 부족장이 얻은 건 딱히 없다. ‘응,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이긴 거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정신 승리를 하고 있자니 의욕이 돌아왔다. 이내 나는 일어서서 부족장을 응시했다. 부족장은 내내 말없이 있던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혹시 좌절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한 번 더.” 아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는 상대가 흔한 건 아니잖아? *** 이후로 부족장과 총 세 번을 싸웠고, 모두 내 패배로 끝이 났다. 다만 횟수가 늘어갈수록 대련 시간이 길어졌다. 비요른이 아닌 이한수의 장점 덕분이다. 난 자가 피드백이 잘 되는 편이다. 그야 살아오며 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때마다 내게 간절했던 건 실패의 이유였으니까. 이유를 찾는 건 내 특기나 다름없다. ‘확실히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잔기술이 많아.’ 부족장과의 내 차이는 스펙만이 아니었다. 전사로서의 기교. 경험으로 체득한 상황 판단. 생각하고 반응하면 늦어 버리는 전투 속에서도 귀신같이 빈틈을 캐치하는 본능적인 직관력. 모두 내가 배워야 할 부분들이었다. 오우거의 정수도 먹은 작금에서 고기방패 역할에만 만족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니까. 더 잘 싸울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는 동료들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아군이 위험하다면, 위험하지 않도록 적을 해치우면 그만.’ 그것은 마치 숙명과도 같았다.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탱커로서의 새로운 숙명. “……뭔가 깨달은 얼굴이군.” “아아, 고맙다. 많이 배우는군.” “하하, 그게 부족장이란 자리인 거다!” 뭐래, 이 아저씨는. 안 그럴 거 같으면서 은근히 칭찬에 약하네. “다음에 또 와도 되나?” “언제든지.” 서서히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 부족장과 나의 대련이 완전히 끝나자, 좋은 구경을 끝마친 바바리안들도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비요른! 집에 가냐!” “바로는 아니고. 잠깐 근처 좀 둘러볼 생각이다.” “그래? 따라가도 되나?” 뭐, 안 될 이유는 없겠지. 대련을 끝마친 후, 아이나르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정확한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시가 있는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군.” 야영지에서 벗어나자 정리되지 않은 울창한 수풀이 우리를 반겼다. 아이나르에게 ‘영혼계승’의 의식을 행한 장로를 비롯해 수많은 전사의 영혼이 뛰어놀고 있을 예의 그 숲. 다만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가면 결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가는 거냐?” “갑자기 그 결계란 게 궁금해져서.” 조금 속도를 올려 한 시간가량을 걷자, 이내 내가 원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툭. 여기까지가 허락된 마지막이라는 듯 나타난 보이지 않는 벽. 그 너머로는 여전히 숲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엑! 비요른! 지, 지금 뭐 하는 거냐! 자칫 수호 결계가 망가지기라도 했다간 진짜 큰일 난다!” 손등으로 노크하듯 벽을 두드리자 아이나르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만류했다. 하긴, 이게 없으면 다 죽는단 세계관이니까. ‘그래, 일단 알려지기로는 말이지.’ 비프론에 다녀온 다음에 생긴 의문이었다. 이 바깥 세상은 정말 왕가에서 말한 그 상태인 걸까? 그런 고민을 하던 때였다. “크크크, 전사야 오랜만이구나.” 뒤에서 난 인기척에 등을 돌리니, 안대를 쓴 노년의 바바리안이 보였다. “주술사!!” “그래, 너도 오랜만이다. 프넬린의 두번째 딸 아이나르.”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눈이 없는데 저렇게 잘 싸돌아다니지? “여긴 웬일이냐? 이렇게 깊은 곳까지 찾아오는 전사는 거의 없는데.” “그냥 심심해서 와봤다.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크크크, 주술사가 숲에서 할 일이 달리 뭐가 있겠냐.” 그리 말하며 주술사가 하얀 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손을 보여 줬다. 다시 보니, 뼈 가루였다. 그것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의. “장례 중이었군.” 숲에 방치된 시신이 백골로 변하면, 주술사가 그 뼈를 잘게 부숴 드넓은 숲 곳곳을 돌아다니며 흩뿌리는 게 장례의 마지막 과정. “호, 혹시 오늘이 토하르의 세 번째 아들 키두바의 차례였나?” “그 녀석은 아직 숲으로 돌아가기까지 멀었다.” 쉽게 말해, 아이나르의 스승 역할을 했던 그 장로의 시신이 백골이 되려면 더 기다려야 한단 뜻. “……그렇군.” “슬슬 돌아갈 건데, 어때 너희도 같이 갈 테냐?” 이내 주술사가 우리에게 물었고,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답했다. “그래? 원한다면야.” 주술사가 주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 “전사야, 아직 그 너머를 궁금해할 시기가 아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떠났다. *** “후후, 그러고 보면 단둘이 있는 건 아주 오랜만이군?” “그런가?” “오래간만에 한판 어떠냐? 요즘은 몸이 안 좋다고 나랑 잘 안 놀아주지 않았나.” 아, 대련을 말하는 거구나. 아무래도 아까 부족장과의 대결이 얘한테도 호승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인데……. 하여간 이놈의 바바리안들이란.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하자.” “좋다. 너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나는 제법 인내심이 강한 편이니.” 어, 그래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다시금 수호 결계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술사가 하고 간 말 때문인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무. ‘후, 바바리안이 아니라 마법사였으면 뭔가 발견할 수 있었으려나?’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수호 결계가 있는 곳부터 성벽까지 꽤 많은 거리가 있었으나,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래 봬도 아이나르는 수다쟁이니까. 특히 바바리안 토크를 아주 좋아한다. 장비 얘기, 누가 누구랑 싸워서 이긴 얘기, 요즘 어디 배낭이 투박하고 멋있게 잘 나온다는 얘기. 혹은……. “아, 그거 들었나? 카론이 곧 애 아빠가 될 거라는 거?” “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대체 어떻게? 아니, 애초에 미궁에서는 그런 말 없었는데?” “후후, 3층에 들어가자마자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모양이더군. 아, 그리고 임신한 건 며칠 전에서야 여자 쪽한테 들은 거라, 너한테 말할 시간도 없었을 거다.” 이어서 아이나르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상대측 여자는 부족의 여전사 중 하나. 뭐, 이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바바리안을 낳을 수 없으니까. 혼혈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결국 종족값은 인간인 아이가 나온다. 애초에 바바리안들은 동족을 선호하고. 매력을 느끼는 이성관 자체가 타 종족들과는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임신했을 때 이념 문제가 없지.’ 인간 사회에서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다만, 바바리안 사회엔 그게 없다. 아이는 성지에서 키워주며, 여자 쪽도 아이를 낳는 걸 긍지 높은 일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혜택도 있다. 인간에 비하면 적기는 하지만, 왕가에서 2년간 세금 감면을 해준다. ‘게다가 임신 기간도 짧고.’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출산까지 평균 4개월이 걸리며 회복도 굉장히 빠르다. 아마 바바리안 여성이 출산에 관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 출산에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어디 출산이 마냥 숭고하기만 한 과정이던가? 긍지고 뭐고, 경제적인 면이 해결되지 못하면 결국 저출산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고 보면, 비요른 너는 생각이 없나?” “……응?” “자식 말이다. 안 그래도 부족 내 여전사들이 널 노린다고 들었는데…….” 아, 그게 노리는 거였구나. 어쩐지 뭐만 하면 몸이 좋다며 여기저기 꾹꾹 눌러 보더라니. 난 진짜 내 근육을 칭찬하는 줄 알고 힘 빡 주고 있었는데……. “아직은 생각 없다.” “호오, 어째서?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는 늦은 편이다. 우리보다 늦은 기수 중에 출산을 끝낸 여전사도 있으니!” 이런 토크는 처음이라 그럴까? 왠지 이 몸에 들어온 이래 최초로 무서워졌다. 바바리안이라는 종족이. “…….” 티 나지 않게 노력하며 몰래 바들바들 떨고 있자, 아이나르가 옳다구나 하며 말했다. “아! 설마 미샤 때문이냐? 걱정 마라! 미샤는 이해해 줄 거다. 우린 바바리안 아니냐? 어차피 걔는 수인밖에 못 낳는다!” 왠지 아이나르가 낯설다. 곰아저씨 앞에선 고양이파니 뭐니 하더니,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난 됐다. 그러는 너는?” 거북한 주제인지라 화제를 돌렸다. 무협식으로 말하자면, 적의 힘을 이용해 맞받아친다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 “나, 나 말인가!” 막상 자기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아이나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나, 나처럼 왜소한 여자를 좋아할 전사가 어디 있겠나…….” 거, 빌어먹을 미적 기준. 본의 아니게 아이나르의 역린을 비수로 찌른 격이 되어 버렸다. 다만, 이에 대해 사과하려는 찰나. “그리고… 나도 생각이 없다.” 응? “그, 그도 그렇지 않냐!! 너랑 지내다 보면 다른 동족들은 전부 어리고 남자답지 못해 보인단 말이다!”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아이나르. 덩달아 나도 당황해 그럼 연차가 쌓인 동족 중에 상대를 찾아보면 되지 않냐고 했으나……. “난 연상이 싫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연상도 싫고, 또래는 남자답게 느껴지지가 않는다니…….’ 꽤나 골치 아픈 취향이 아닐 수가 없다. 다만, 냉정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갑자기 얘가 임신해서 몇 개월 동안 미궁에 못 들어가면 그 여파는 내게도 전해지게 되니까. ‘어, 근데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된 거지?’ 29세의 이한수는 이쪽 세상에서 한 살을 더 먹어 30세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튼,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내가 좋은 여전사를 소개해 줄 테니!” 역시 이런 이야기는 거북하다. *** 이틀 뒤. 나는 아침 식사 및 아이나르와의 몸풀기 식 대련을 끝마치고 홀로 외출했다. 아, 홀로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매장 내부의 수색은 끝났으나 혹시 모르니 주의해 주십시오.” 이제는 익숙해진 기사들의 극진한 호위. “그래, 고맙다.” 대충 공을 치사하며 마차에서 내린 나는 약속 장소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한 세 번 정도 방문했던 다과점. “오, 비요른 님! 여기에요, 여기!” 모서리 쪽에 자리 잡은 7급 사무관 샤빈 에무어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옆에는 사서 라그나가 과묵하게 앉아 있었다. 이내 나까지 자리에 앉자 정기적으로 있었던 친구 모임의 멤버가 모두 모였다. “일단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번에 준남작 작위도 얻으시고, 이렇게 불러내도 될지 말지 정말 고민했었거든요.” “이상한 걸 다 신경 쓰는군.” “맞습니다, 샤빈. 이 남자가 귀족이 됐다고 변할 사람 같습니까?” 으스대는 투로 말하며 차를 홀짝이는 라그나. 이번만큼은 얘 말이 맞았다. 귀족 작위로 뻗대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 준남작 작위는 딱히 부담스럽게 느낄 일도 없다 이거지?’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얘가 얼마나 좋은 집안의 딸내미인지가 드러난다. 뭐, 정확히 어떤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 쫙 깔린 기사들을 보면서도 딱히 별다른 내색을 안 하는 걸 보면……. ‘더 궁금해지네. 대체 어디지?’ 이내 나는 시선을 돌려 샤빈을 응시했다. 라그나와 달리 얘는 아닌 척 살살 기사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긴, 불편하긴 하겠지. 그냥 빨리 본론이나 들어가자. “그래서 오늘 부른 용건은?” “헤에, 어디 저희가 용건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였나요?” “넌 거짓말을 할 때 코를 찡끗하는 버릇이 있다.” “어? 저, 정말요? 저 처음 알았어요!” 그야 당연히 처음이겠지. “거짓말이었다.” “아……!” 순간 벙찐 표정을 내짓는 샤빈을 보며 라그나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런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든 건데.” “그건 너한테나 그렇겠지. 바바리안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내가 본격적으로 바바리안질을 시작하면 대개는 저런 표정을 짓는다. “됐고, 그래서? 얼른 용건이나 말해 봐라.” 이내 내가 다시 말문을 트자 샤빈도 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꺼냈다.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께 행정청을 대표해서 한 가지 의뢰를 드리고 싶어요.” 흐음, 아르바이트라……. 당장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의 돈이란 건 얼마를 가지고 있든 간에 항상 부족한 것. “말해 봐라, 무슨 의뢰인지.” 일단 들어는 봐야겠다. 249화 노움트리 (3) 샤빈이 말한 의뢰의 내용은 참으로 간단했다. “이 서한을 네르토빈 남작님께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임무는 편지 전달. 보수는 300만 스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아, 참고로 이 서한은 반드시 남작님께서 노움트리를 떠나기 전에 본인에게 직접 전해 주셔야 합니다.” 고작 전달뿐인 의뢰에 300만 스톤이란 거액이 붙은 이유였다. 노움트리에 입장이 가능한 탐험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사실상 농가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면, 오직 귀족만이 입장 가능한 구역. “일단 의뢰 내용은 알겠다. 그러니 자세한 사정을 알려 줬으면 하는데.” 개꿀 의뢰의 향기가 벌써 풍겨왔지만, 나는 설레발치지 않고 침착하게 확인할 사안들을 체크했다. 이 편지는 무엇인가. 나중에 남작이 도시로 돌아오면 그때 편지를 부쳐도 될 텐데, 이런 거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왜 의뢰를 맡기는가. 샤빈은 내 질문에 숨김없이 답해 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리고 이런 의뢰를 맡기는 이유는, 자택으로 편지를 부쳐도 남작님께서 저희 편지를 읽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행정청은 남작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남작이 이를 무시하는 상황. 그래서 행정청은 남작이 노움트리에서 휴가를 즐기는 중이란 정보를 얻고서, 직접 그의 손에 편지를 쥐여주는 방법을 고안했다. “노움트리는 귀족들의 휴양지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동반 가능한 호위의 숫자도 셋밖에 되지 않죠. 그냥 자연스레 다가가 서한만 전해주면 되니 비요른 님께도 부담이 덜할 거예요.” 음, 그건 그렇지. 나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도시에서 귀족이 귀족의 자택에 방문하는 일은 번거롭다. 저녁 식사도 같이 해야 되고, 가족들과 인사도 나눠야 한다. 잠깐 만나서 편지만 주는 건 불가능한 셈. ‘그럼 노움트리 내에서 전해주라는 조건은 날 위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날 위한 배려를 ‘조건’으로까지 두진 않았을 테니. “자, 그럼 어쩌시겠어요?” 이내 샤빈은 내게 결정권을 넘겼고, 나는 조금 더 고민을 하는 척하다 답했다. “받아들이지.” 돈 나올 구석이 없는 요즘 시국에 편지 하나 전달해 주고 300만 스톤이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노움트리는 한번 방문해 볼 생각이기도 했고.’ “아, 미리 말하지만 나는 남작이 그걸 읽든 말든 편지만 전해주고 끝이다.” “네. 의뢰 내용만 잘 지켜주신다면 보수 지급엔 아무런 이상도 없을 테니, 그 부분은 염려 마세요.” 오케이, 그렇다면야 마지막 걱정도 덜었고. 나는 샤빈이 가져온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서 의뢰 물품인 편지를 전달받았다. 그것으로 공적인 용건은 끝. 이후 사적인 잡담들이나 한 시간 정도 나누다 친구 모임을 파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샤, 짐 싸라.” “응?” “놀러 가자.”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 기간은 2박 3일로 잡았다.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못할 거리는 아니나, 거기서 남작을 찾아다닐 시간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들러봐야 할 곳도 있고.’ 사실 맘 같아선 5박 6일 정도로 여유롭게 일정을 잡고 싶다. 하지만, 이제 곧 미궁이 열린다. 뭐, 이번엔 스킵하기로 동료들과 다 합의가 끝나긴 했지만……. ‘이번에 왕가에서 얼마나 전력을 투입했는지 같은 건 직접 보는 편이 훨씬 좋겠지.’ “노, 노움트리!! 와! 내가 결국 거기에도 가보는 날이 다 오는구낭!!” 뜬금없는 여행 제안이었으나 미샤는 목적지가 ‘노움트리’라는 것을 알고서 신나하며 짐을 쌌다. 참고로 대동 가능한 인원은 셋. 그래서 아이나르에 에르웬까지 데리고 다 함께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 곳에 제, 제가 껴도 되는 건가요?” “뭐라는 거냐. 싫으면 마라.” “안 싫어요! 가서 짐 쌀게요! 얼마나 있다가 온다고 하셨죠?” 사양하는 척하다가도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싸러 방으로 들어간 에르웬. 오래간만에 얼굴이 밝아 보인다. 하긴, 즐거울 만한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는 했지 최근에. “야!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챙기랬지?” “장난 친 거 아닌데…….” “달랑 속옷만 챙기면 끝이냥? 칫솔은? 수건은? 어? 그때마다 나한테 빌려달라고 할 거야?” 이내 미샤가 아이나르의 짐싸기까지 도와주며 여행 준비는 문제없이 진행됐고, 그다음 날 이른 새벽.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호위 기사들의 극진한 모심을 받으며 우리는 노움트리를 향해 이동했다. 도착한 것은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각.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 확인되었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성문 앞에 선 우리는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만 밟고서 그 너머로 들어섰다. 아, 호위 기사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노움트리엔 호위를 셋까지만 허용한단 룰이 있는 탓이다. ‘왠지 미안하게 됐네.’ 사실 기사 측에서는 세 자리 모두 자신들로 채우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완고하게 거절하며 그 자리를 미샤, 에르웬, 아이나르로 채워 넣었다. 기사가 있으면 자유롭게 운신하기 힘드니까. 애초에 암살자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될 곳이기도 하고. “혹시 내부에서 신변에 위협이 될 일이 생긴다면 주저 말고 그 호루라기를 사용하십시오. 노움트리의 자경단이 도우러 올 것입니다.” 노움트리는 이 도시에서 왕궁 다음으로 치안이 삼엄한 구역이기에, 기사들도 아쉬움만 내비칠 뿐 강제로 이번 일정을 취소하거나 하진 않았다. “와아…….” 그렇게 이중 문을 넘으며 들어선 노움트리의 경관은 나조차 넋을 잃을 만큼 대단했다. 일자로 쭉 뻗은 도로. 양옆으로는 속이 탁 트이는 초록빛 경관이 펼쳐져 있으며 부드럽게 몸을 휘감는 바람에는 여물지 못한 곡식과 과일의 내음이 실려 있다. “오! 저기 봐라! 요정들이당!” 우리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계속해서 주변을 구경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농작을 하고 있는 요정들이었다. 그야 얘네는 농사의 스페셜리스트들이니까. 요정족은 특수한 정령술을 익힌 요정들을 노움트리로 파견해 막대한 지원금을 받는다. ‘거, 부럽게…….’ 노움트리에서 오는 막대한 재화. 그들이 바바리안과 달리 부족원들에게 무이자 세금 대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르웬, 너네는 몇 년까지 빌려주냥?” “저희는 3년이요.” “우와, 부럽네. 우리는 2년 차까지였는데. 막 갚으라고 독촉하진 않는데, 그다음부터는 죽든 살든 전부 알아서 해야 한당.” 참고로 이런 세금 대출 정책은 바바리안과 인간을 제외하면 전부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건 요정만이 아니거든. 드워프는 그들만의 건축 기술과 야금술을 인정받아 왕가와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아마 저기 보이는 풍차나 물레방아들도 다 게네가 만들고 관리 중일 테고. 아, 그리고 수인은……. [음머—!] “미, 미샤! 저 이상하게 생긴 괴물은 대체 뭔가!” “아, 너는 처음 보겠구낭? 소라는 동물이당.” “소?” “네가 제일 맛있다고 했던 그 고기 말이당. 아, 나도 자연산은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수인은 축산 쪽에서 활약한다. 태생적으로 동물과 교감을 잘할뿐더러, 이능계 영혼수 중에 가축의 성장과 번식을 늘려주는 개체가 있는 덕분. ‘그래 봤자 진짜 돈을 버는 건 용인들이지만.’ 다른 종족들이 모두 노동 계층이라면, 용인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땅을 가진 귀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노움트리라는 농경구역부터가 용인족의 성지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왜 바바리안만 아무것도 없어?’ 정리를 할수록 다시 한번 박탈감이 오지만, 뭐 어쩌겠는가. 싸우는 거 하나가 종족 특성의 전부인 것을. 드르르륵. 이내 노움트리 중심부에 위치한 산 근처에 도착한 마차는 주위를 빙 돌아서 동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도착했습니다.” 노움트리 성문에서 부쳐준 마부가 목적지에 다 왔음을 알렸다. ‘키아르비스’란 이름의 주거 구역이자, 150년 전 세계관인 게임 내에서도 존재했던 유서 깊은 귀족들의 휴양지. “이리로 오시지요.” 마부 겸 안내인 역할을 맡은 사내의 도움을 받아 일단 숙소로 향했다. 미리 행정청에서 잡아 둔 곳이었는데……. ‘좋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다. 일단 별채 하나를 통으로 쓰는 데다가, 사용인도 무려 다섯 명이나 붙었다. 여긴 1박에 과연 얼마나 하려나? “식사부터 드시지요. 준비해 두었습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기에 우선 밥부터 먹었다. 그리고……. “온천이 있다고……?” 야외 온천이 있다는 사용인의 말에 즉시 그곳으로 가 여독을 풀었다. ‘크, 그래, 이거거든.’ 나중에 겨울이 되면 사비로라도 다시 한번 또 오든가 해야지. 이후 한 시간 정도 온천을 즐기다 나오니, 아이나르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요른, 씻는데 뭐 그리 오래 걸리나!” “미샤랑 에르웬은?” “둘은 아직도 거기 안에 들어가 있다.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 내가 보기엔 그냥 따뜻한 물이던데…….” 온천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나르. 후, 이래서 야만인들이란. “됐고, 대충 쉬고 있다가 걔네 나오면 같이 놀고 있든가 해라.” “어? 너는?” “나는 슬슬 일을 하러 가봐야지. 왜 같이 가려고?” “아, 아니… 난 여기서 쉬고 있겠다!” 일을 하러 간다는 말에 학을 떼며 물러났고, 나는 피식 웃으며 숙소에서 나왔다. 그리고 우선 주변을 돌아다녔다. ‘진짜 사치 그 자체네.’ 애초에 귀족의 휴양지로 설계된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사치스러운 시설들이 가득하다. 온천, 승마장, 낚시터 등등. 현대였다면 이게 왜 사치스럽냐고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느낌이 다르다. ‘자연산 고기를 처먹는 것만 아니라, 그걸 갖고 논단 말이지…….’ 이 도시의 99%는 마석으로 만든 고기와 빵을 먹는다. 아이나르만 봐도 알겠지만, 여기 오기 전까지는 진짜 소를 본 적도 없을 정도. 그런데 이곳은 어떤가. 꿩이나 사슴 같은 걸 풀어놓고 사냥 놀이를 하는 곳까지 있다. ‘음, 그럼 이 정도면 구경은 다 했고…….’ 나는 편지를 들고서 목적지로 이동했다. 어느 숙소에 묵고 있는지 알아내려 발품을 팔 필요는 없었다. 나처럼 빌린 숙소에서 지내는 작위 귀족은 이 도시에 없으니까. 대부분은 구매한 별장에서 휴가를 보낸다. “들어오시랍니다.” 이내 별장에 도착해 기별을 올리자, 머지않아 출입 허가가 떨어졌다. 후, 다행히 꺼지라고는 안 하는구나. “안 그래도 한 번쯤 말을 나눠 보고 싶었네만 잘 됐구려. 하하, 반갑소. 얀델 준남작. 근데 갑자기 날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일이오?” “아, 전해줄 게 하나 있다.” “전해줄 것?” 이내 준비한 편지를 전달하자, 남작은 즉시 편지를 까서 읽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행정청 놈들이 아주 달아올랐구만?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할 정도면.” “글쎄, 난 자세한 내용을 몰라서.” “흐음, 그럼에도 이 부탁을 들어준 거요? 그대 같은 자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리는 남작. 솔직히 답하자면, 의뢰비로 300만 스톤을 준대서 냉큼 승낙한 것이지만……. 모양이 빠지는 거 같아서 대충 둘러댔다. “그쪽에는 빚진 일이 있어서 말이지.” “하하, 그런 거야 나중에 모른 척하면 그만인 것을.” 와, 이게 귀족의 마인드인가? 나쁜 의미로 감탄이 나오지만, 면전에다 대고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전사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흐음… 그것도 그렇구려? 하핫! 재밌소. 신의 하나만큼은 보증된 귀족이라니? 어쩌면 그대와 친하게 지내려는 귀족들이 많아질 수도 있겠소.” 이후 편지 전달이 끝나고, 남작은 식사나 함께 하자며 권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나왔다. 좁디좁은 귀족 사회에선 아무나 친하게 지냈다가 여파가 오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의뢰는 이거로 끝.’ 고작 이거로 300만 스톤을 받아도 되는 거냔 의문이 들 정도로 쉽게 끝이 났다. 그럼 이제 남은 시일 동안은 자유. ‘거기는 이따가 날이 더 저물면 가보기로 하고…….’ 나머지 일정을 점검하며 숙소로 향했다. 그러던 때. 귀족 도련님들을 따라다니는 기사들 중에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보자마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이프레이아 남작가.’ GM이 나를 만나기 위해 손수 기절까지 시켜가며 얼굴과 신분을 빌린 ‘그’가 있는 그 가문. ‘……아니겠지. 막내라며? 형 쪽일 거야.’ 설령 내 기대가 빗나갔더라도 마찬가지다. 양자역학적으로도 증명됐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안에 고양이가 있을지 뭐가 있을지는 ‘관찰’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증명이 되는 것. 다행히 나는 아직 상자 안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른 가자.’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는 속도를 올린다. 그 순간이었다. “자, 잠깐! 거기 혹시 얀델 준남작님 아니십…….” 기어코 나를 알아봤는지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잠시 멈춰 주십시오! 저, 저로 위장한 그 사악한 마법사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꼭 사과를 드려야…….” (진)한스 I였다. 250화 노움트리 (4) 처음엔 또 GM인 건가도 싶었다. 하지만 GM이라면, 한 번 썼던 얼굴을 또 빌려 내게 접근하진 않았을 터. 또한, 주변에 있는 호위 기사나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같은 게 완전히 다르다. 쉽게 말해 이놈은……. ‘(진)한스 I.’ 한스I인 척하던 GM이 아니라 진짜 한스 I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 호흡을 멈추고. “꼭 사과를 드려야······.” 이를 악물며 놈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한다. 그리고……. 타닷. 달린다. “왜, 왜 도망가는 것……!” “우오! 갑자기 뛰고 싶은 기분이다!!” “그, 그런……!” 무지성 뜀박질을 시전하자, (진)한스 I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에 내가 발을 멈출 리는 만무. “베헬—라아아아아!” 금세 놈과 나의 거리가 벌어졌고, 놈 역시 나를 뒤따라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그 정도의 근성은 갖고 있지 않던 것. ‘……피했나.’ 단걸음에 숙소 앞까지 도착한 나는 애써 뛰는 심장을 달랬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며 숨도 꾹 참았기에 공기 감염의 가능성도 적다. ……이 정도 했으면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다. “오셨습니까.” 숙소 앞에서 숨을 돌리고 있자니,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사용인을 따라 실내로 들어서자. “냐핫, 비요른 와았냐아!” 잔뜩 상기된 표정의 미샤가 나를 반긴다. 이름하여 하이텐션(알코올) 모드.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에르웬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저씨……… 흐힛, 흐히힛!” 우중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다가 어딘가 소름끼치는 웃음을 내뱉는 에르웬. ‘뭐야, 여긴.’ 주변에는 빈 술병들이 가득하며, 거실 전체에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중이다. ‘내가 나간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그동안 여기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탐정에 빙의해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나는 그제야 자리에 아이나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나르는?” “여전사님께서는 진작 술에 취해 주무시고 계십니다.” 내 물음에 답해준 건 별채의 사용인이었다. 위치를 물어보자 방이 아니라 별채 중앙의 마당이 나왔다. 드르르르르르러엉-!! 하, 진짜. 나는 일단 아이나르를 들어다가 방 침대에 던져놓은 뒤 다시 내려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샤가 병나발을 부는 중이었다. “크으……!” 왠지 모를 살벌함을 감지한 나는 조심스레 미샤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다 같이 하는 술자리에서 깨작깨작 마시다 취하는 일은 있었어도, 이렇게 죽어라 퍼붓는 광경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 냐핫, 일은 무슨!” “근데 술을 왜 그렇게…….” “그냥 기분 좋아서 마셨당!” “그, 그렇군?”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셨다니.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거 같다. 온천욕으로 몸도 개운하겠다, 옆에서 좋은 술도 공짜로 갖다 주겠다. 오히려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 처음에는 말이지.”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쓰윽 닦으며 정색하는 미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소파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은 에르웬이 눈에 들어왔다. 참고로 얘는 혼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히히히히…….” 뭐가 그리 웃긴지 자꾸만 히죽거린다. 취하면 웃는 게 얘 주사인가? “야, 비요른.” 그때 미샤가 내 팔목을 쥐며 말을 걸었다. “어, 말해라.” “그날 날 거절했던 거.” 어…… 그 얘기를 지금 한다고? 거북한 주제였으나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다. 이내 입 닥치고 기다리고 있자, 미샤가 입술을 짓누르며 물었다. “내가 바바리안을 못 낳아서 그런 거냥?” 응? 뭐야? 아이나르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순간 머리가 굳었지만, 바바리안의 육체는 위기에 능했다. “그럴 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리는 입.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내가 미샤를 거절한 건, 얘한테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도 수인이어서도 아니니까. 나 혼자만 품고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진위 여부를 가리기라도 하듯 내 눈을 빤히 응시하던 미샤는, 이내 새로운 술병을 까서 입에다 처박았다. 그리고……. “그럼 역시…….” 내 눈을 보았다가 피했다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하며 자그맣게 말을 이었다. “네가…… 언젠가, 사라질……. 사라질…….” 말꼬리를 흐리던 미샤가 고개를 픽 떨궜다. “냐하앙…….” 어쩐지 한계 주량은 한참 넘은 거 같더라니. 나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며 미샤를 안았다. 그리고 방에 데려다가 침대에 눕혔다.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땐 에르웬이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모두… 잠들었어…….” 뭐래, 얘는. “취했으면 잠이나 자라.” ‘넥 슬라이스.’ “……꼑.” 대충 기절시킨 뒤에 미샤 옆에 던져놨다. *** 서서히 자정이 다가오는 늦은 시각.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정리할까 고민됐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기가 우리 집인 것도 아니고. 이따 자리를 비켜주면 알아서 치우겠지. “하아…….” 내게는 조금 비좁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마지막에 미샤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네가…… 언젠가, 사라질……. 사라질…….] 듣지 못한 뒷말이 무엇인지야 뻔하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냐고 물으려 했겠지. 물론 내가 악령이란 걸 확신한 건 아닐 거다. 아니, 오히려 아닐 가능성을 더 높게 여기고 있겠지. 내가 신탁을 받는 것도 직접 봤으니까. 일단 악령은 신의 적이라 알려져 있는 도시. 근데 신이 악령을 도와 성물까지 내리다니? 세계관 통념상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지, 뿌리내린 씨앗처럼 머릿속에 남은 한 줄기 불안이 술김에 입 밖으로 나왔을 뿐. ‘……그래도 다행인 건, 설령 내가 악령이라고 해도 적대할 거 같진 않다는 건가.’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고마움도 느꼈으며,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뿌듯함도 일었다. 하나 가장 큰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나는 대체 뭘 바라는 거지?’ 비요른 얀델의 몸에서 깨어났을 때 최우선 목표는 나의 생존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세상에 적응을 한 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나? 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나? 오히려 거기서는 좋은 일이 더 드물었잖아?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왠지 플레이어들이 왜 그렇게 현주민들을 NPC라 부르며 구분 짓는지 알 것도 같다. 선을 그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속한 세상이 아니라고.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그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고를 억지로 멈췄다. 집으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이곳에 남는가. 어느 결정이든 아직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세금을 못 내 죽는 사형수들을 보며 결심했지 않나. 적어도 6층까지는 가서 결정을 하기로.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봐야 의미 없어.’ 비단 세금만이 문제가 아니다. 용살자, 광대, 노아르크, 왕가. 내 목숨을 위협할 만한 것들이 잔뜩인 세계. 좋든 싫든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뭘 하고자 하든 일단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야밤에 어디를 나가십니까?” “아, 잠깐 산책 좀 하려고. 기다릴 필요는 없다.” 사용인에게 말을 전해두고서 숙소를 나선다. 슬슬 인적이 없을 시간이 됐거든. [02 : 37] 실내에서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가 폐부를 휘감는다. 근데 산 바로 아래라 그런가? 약간 쌀쌀한 거 같기도 하고. 터벅, 터벅. 예상대로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으나, 아예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환하게 불 켜진 도박장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며 왁자지껄한 소음을 흩뿌린다. 뭐, 크게 의미는 없었다. 지금 내가 가려는 건 이 마을 바깥에 있으니. ‘어둡네.’ 마을 밖으로 나오자 미궁에 준하는 어둠이 내 앞에 펼쳐진다. 한국에서도 시골이 딱 이랬는데. 불빛이 있는 곳에서 좀만 멀어지면 음산한 자연이 나를 반겼다. ‘그나저나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횃불이라도 켤까 싶었지만, 혹시 모른단 생각에 그냥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숙소에 비치되어 있던 약도에 적힌 예의 동굴이 나타났다. 일단 이곳의 관광 명소이기도 한 그곳. ‘……지키는 사람은 없구나.’ 이내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점차 주변이 밝아졌다. 그야 여기는 1층이랑 비슷하거든. 벽면에 수정이 가득하며 푸른빛을 자아내는 신비한 분위기의 동굴. 나는 주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샛길이 나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게임에선 입구부터 쭉 직진만 하면 됐거든. 후우우웅-! 실제로 머지않아 드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 중심부에는 일정 주기로 진동하는 바위 하나가 있었다. ‘리그나라시아.’ 명칭의 기원은 고대어로, 직역하자면 ‘땅의 축복’이라고 팸플릿 같은 느낌의 약도에 적혀 있었다. 만지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던가? 아마 미신일 것이다. 진짜 히든피스 요소가 있는 건 저 바위가 아니었으니. 스르륵. 아공간 가방을 열어 메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중심부의 바위를 지나쳐, 벽화가 그려진 벽면 부위에 상호 작용 버튼을 클릭. 아, 있는 힘껏 내리쳤다는 뜻이다. 콰아아아앙-! 오우거의 힘이 담긴 메이스질에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리는 벽면. 다만 걱정은 않는다. 이 동굴에는 자가 수복 마법진이 적용되어 있으니까. 5분 정도만 지나도 알아서 고쳐질 터. ‘그럼 가볼까.’ 이내 나는 무너진 벽면 너머로 드러난 통로에 몸을 들이밀었다. 그 안에는 게임에서도 그랬듯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숨겨둔 걸 보면 아마 밖에 있는 거는 가짜고 이게 진짜겠지.’ 나는 중심부에 있는 바위에 손을 올렸다. 바깥 것과 달리 일정 주기로 떨리거나 하며 신비한 느낌을 주지도 않는 평범한 바위. 다만 시간이 흐르자 느낌이 왔다. 「대지룡의 기운이 깃듭니다. (1/3)」 손끝을 타고 몸에 흘러드는 듯한 충족감. 「영혼력이 +10 증가합니다.」 「대지 저항력이 +20 증가합니다.」 나름 개꿀인 히든피스 중 하나였다. 귀족이 되어서 노움트리 구역에 왕래가 가능해야 한단 조건이 붙지만, 거의 공짜로 30이나 되는 스탯을 준다. ‘아마 오리지널 판을 조금이라도 해본 놈이면 대부분 알겠지. 어딜 가든 상호 작용 키를 눌러댔을 테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이 히든피스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는 꽤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이거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영혼에 각인된 축복이 반응합니다.」 「추가 능력치 상승폭이 30%로 증가합니다.」 대지룡의 축복을 받았을 시, 스탯 증가율이 20%에서 30%로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것. ‘설마 이 해금 조건을 가장 먼저 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정상적인 플레이와 거리가 멀다. 겨우 5레벨에 귀족이 되다니? 만약 게임이었다면 나는 분명 버그를 썼다고 생각했겠지. ‘아무튼, 슬슬 돌아가 볼까.’ 챙길 것도 다 챙겼겠다, 이내 출구 쪽으로 등을 돌린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부스스스스. 시간을 역행하듯 수복되기 시작한 벽면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야, 진짜 플레이어였네?” 이백호였다.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607.62(New +46.74) / 정신: 502.19(New +38.63) / 이능: 2175.55(New +203.35) 아이템 레벨: 2,567 종합 전투 지수: 3,927.11(New +288.72)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 ***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 이백호, 이놈이 왜 여기에 있을까. 그날 이후로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더니. 설마 계속해서 내 뒤를 밟고 있던 건가? 그 해답은 실로 간결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묘해? GM놈이 또 변장한 건가 싶어서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네가 나타날 줄이야.” 이번에도 한스였다. 이백호는 노움트리에서 우연히 한스 I를 만났고, 미행하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계속 나를 따라다녔겠지.’ 사건의 개요가 얼추 그려진다. 하면, 이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결정은 이미 나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또 그 소리군. 질리지도 않나?” 역시 이백호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 척 보기에도 변덕스러운 놈이니까. 친하게 지내다가도 뭔가 하나만 수틀리면 칼을 빼들며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 고양이는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던데? 역시 죽이는 게 낫지 않아?” 그래, 바로 이런 거. 외통수에 몰린 기분이지만, 나는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왜 족장이 악령들을 사악한 존재라 말했는지 알 거 같군.” “키야, 그래도 정신머리 하나는 괜찮네. 이 상황에서도 발뺌을 하는 걸 보면.” “이 상황……?” 혼신의 힘을 다해 의문 어린 눈빛을 내지었다. 다만, 이백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킥킥 웃을 뿐이었다. “그래, 이 상황.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부터가 플레이어라는 증거잖아? 아니면, 이런 게 여기 숨겨져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오케이, 그거 물어볼 줄 알았어 인마.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교묘하게 진실만을 섞어서. “나는 용족의 은인이다. 지난날 용검을 일족에 돌려주고서, 태고룡 ‘라피르’와는 막역한 사이가 됐지. 용족의 무녀인 그의 딸도 나를 아주 잘 따를 정도다.” 이 정보도 그들에게 들었음을 암시하는 답변. 이백호는 이를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 뭐야. 진짜네?” 아무렴, 진짜겠지.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으니까. “그럼 그 용잽이 새끼 조진 것도 너였어? 와, 이거 진짜 대박인데?” 이건 좀 재밌다는 듯 탄성을 뱉는 이백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비록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내 숨겨진 정보를 오픈한 격이지만……. ‘그래, 어차피 반지도 끊어졌잖아?’ 따져보면 그렇게까지 손해는 아니다. 이번에 성물의 효과도 끝났겠다, 좋든 싫든 곧 있으면 놈과 재회할 날이 올 터. 전처럼 죽을둥살둥 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긴 해. 그래, 그 정도 공적이면 그쪽에서 이런 것도 알려 줄 수도 있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 말은, 통했단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아직 안도하긴 이르다. 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며 놈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그렇게 1년 같은 몇 초가 흘렀을 때였다. “근데 있잖아.” 놈이 내게 물었다. 씨익 웃으며. “왜 이렇게 잘 대답해 줘?”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저번에 플레이어냐고 물어봤을 땐 이 악물고 대답 안 하더니.” “…….” “갑자기 되게 친절해졌네?” 빌어먹을 새끼. 251화 노움트리 (5) 더 이상 변명하는 것은 의미 없다. 그 어떤 교묘한 말로 속여 넘기려 해도 녀석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확실한 대답을 하려 들겠지. ‘니미럴.’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불쾌함과 별개로, 머리는 이미 내게 주어진 선택지들과 그 여파를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정하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이 내게 있어 최선인가? “저기요? 말 안 해요? 왜 친절해졌냐니까요?” 하, 새끼 보채기는. 맘 같아서는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문제라도?’ 같은 대사를 치며 무지성 바바리안 모드로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진짜 뒈질 수도 있겠지.’ 나는 놈보다 약하다. 따라서 놈이 끈질기게 의구심을 내비쳤을 때,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며 메이스를 휘두른다는 콤보가 불가능하다. 머리통이 깨지는 쪽은 내가 될 테니까. “하, 새끼 금세 또 불친절해진 거 보소?” 이백호가 답답하단 듯 한숨을 내쉬며 시퍼런 눈깔로 나를 쏘아봤다. “왜 자꾸 묻는 거냐? 어차피 믿어 줄 생각도 없으면서.”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한데 답답한 건 이백호도 매한가지였을까? “아니, 그건 그런데 네 입으로 듣는 거랑은 좀 느낌이 다르다니까?” 그래, 뭔 말인지는 안다. 내가 끝까지 감추려 했던 것도 그 이유고. ‘그래,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 이거지.’ 그만 인정할 때였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이미 많은 부분이 어긋났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데.” 의심은 여러 번 샀더라도, 지금까지 단 한 번 실토한 적 없는 나의 정체라든가. “응?” 느닷없는 태세 전환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내짓는 이백호. 결심을 끝마쳤기에 걸릴 건 없었다. “야, 그냥 이쯤했으면 그냥 모른 척하고 가는 게 예의 아니냐?” “뭐야? 진짜? 진짜로 플레이어였어?” 막상 내 입으로 진실을 전해 듣자 신기한지 이백호는 눈을 빛냈다. ‘그래, 넌 진짜 호기심 때문이었던 거구나.’ 울화통이 치민다. 과연 얘는 알기나 할까? 내가 비요른 얀델의 몸으로 이런 말투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그래도 어딘가 속이 시원하기는 하네.’ 나는 묘한 해방감과 울분을 동시에 느끼며 놈을 째려봤다. 한데 이 새끼는 공감성 수치가 작살났을까? “와, 그나저나 그 영화 보셨구나!” 이 와중에도 지가 흥미를 느끼고 얘기하고 싶은 주제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얘는 진짜 사회성이란 게 없는 건가? “……사과가 먼저일 텐데.” 바바리안이 인간에게 사회적 상식과 도의를 논하는 기괴한 광경. “아, 미안요. 근데 그 영화를 봤다니 갑자기 남 같지가 않아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거든요.” 이백호는 영혼 없는 사과를 뱉더니 조심스레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런데 2편도 봤어요?” 대체 뭐 하는 새끼지 이건? 이 정도면 거의 바바리안들도 울고 갈 불통 능력 아닌가? “……봤지.” 일단 대답은 해줬다. 그야 그냥 씹었다가 언제 또 태세 전환할지 모르— “근데 왜 저한테 반말해요?” 응? “아니, 왜 아까부터 반말하냐고. 상호 존중 몰라? 같은 플레이어끼린 배때지에 칼 박아도 안 뒈지기라도 하나?” 갑자기 뭐가 그리 빡쳤는지 정색을 하고서 살기를 표출하기 시작한 이백호. 정신이 나갈 거 같다. “……존대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 서양 쪽 사람이었구나!”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구나. 바바리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그럼 서로 말까자. 좋지?” 이백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얼핏 보면 조울증 환자처럼 보이지만……. ‘정신이 확 드네.’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졌다. 어쩌면 이게 이놈의 화술일지 몰랐다. 가진 무력을 베이스로 주도권을 잡은 채 혼을 쏙 빼놓고 생각할 틈이 없도록 하는 것. ‘설마 영화 2편 얘기를 한 건 내가 온 시기를 알아내려고, 방금은 내가 동양 쪽 사람인지를 확인하려 한 건가?’ 어쩌면 단순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역시 이한수인 건 숨기자.’ 사실 이 부분이 마지막까지 고민이었다. 어차피 플레이어인 걸 오픈한다면, 차라리 그것까지 밝히고 친하게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때문에 그 결정을 보류했다. [그 고양이는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던데? 역시 죽이는 게 낫지 않아?] 아까는 단순한 조언일 뿐이었다. 그냥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 오지랖 부리는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하나 내가 이한수인 걸 밝히는 순간. 이 문제는 이제 녀석의 일이 될 것이다. 녀석은 이한수를. 아니, 이 낯선 세상에 몇 없는 ‘한국인 출신 플레이어’를 아꼈으니까. “근데 내가 플레이어라는 건…….” “아, 걱정도 참! 아무한테도 말 안 해. 내가 그 정도 매너도 없는 사람처럼 보여?” ‘응’이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참아냈다. 대화를 해보니까 더 잘 알겠다. 이백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 따라서 절대 엮이면 안 된다. 적어도 놈을 컨트롤 할 수 있단 자신감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나저나 그쪽이 솔직히 답해 줘서 정말로 다행이네.” “……?” “이번에 귀족도 됐다며? 또 만난 김에 진짜 NPC면 왕가에 붙기 전에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뱉은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뭐?” “왜 놀라? 나라고 PK를 막 즐기고 다니는 건 아닌데. 뭐, 운명을 타고난 NPC만 아니면 됐어. 걔네는 나도 좀 골치 아파서.” 뭔 소린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 조금 궁금해져 넌지시 물어봤으나, 이백호는 그냥 그런 게 있다며 에둘러 선을 그었다. 쩝, 서양 출신 비요른 얀델이라서 그런가? 한국인 이한수였으면 답해줬을 거 같은데.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한 가지 더 조언해 줄게. 이미 귀족이 된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왕가랑 너무 깊이 엮이지 마.” “이유는?” “왕가는 ‘심연의 문’을 여는 데 관심이 없어. 아니, 오히려 방해하는 데 진심이지. 창세보구가 없어진 것도 그 새끼들 짓일 수도 있고.” 왕가에서? 대체 왜? 세간에는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 이 세상을 구원할 열쇠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역시 그건 다 구라였나? 궁금한 것만큼이나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다만 뭐라 물어봤자 이백호는 귀찮은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알아서 뭐 어쩌려고?” 이런 느낌이면 GM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도 대답해 줄 거 같진 않다. 따라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때. “그래서 너는 역시 그쪽?” “그쪽이라니?” “그 있잖아, 여기서 그냥 살려고 하는 애들. 그때 NPC한테 목숨 거는 걸 보고서 그쪽이겠네 싶긴 했는데, 또 성장 속도만 보면 그게 아닌가도 싶어져서. 대체 어느 쪽이야?” “만약 남고자 한다면 어떡할 거지?” “뭘 어떡하긴 어떡해. 그런 새끼도 있는 거지.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니까? 날 방해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나는 조용히 이백호의 눈을 응시했다. 딱히 의미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저 시퍼런 눈깔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냥 떠보는 거 같지는 않긴 한데…….’ 잠시간의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처음엔 돌아가는 게 목표였는데, 요즘은 꼭 목숨을 걸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 적묘족 때문에?”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로도 충분했을까? “예전의 날 보는 거 같네.” 이백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싹수는 있는 거 같아서 말해 주는데, NPC한테 많은 걸 바라지 마.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까.” 웃는 목소리 속에 숨겨진 싸늘한 감정이 느껴지며 돌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얘한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토록 망가지며 ‘귀환’만을 바라는 괴물이 되었을까. 그것은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럼 궁금한 건 다 풀렸으니 이제 난 간다?” 이내 이백호는 용건이 전부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가 수복을 마친 벽을 손짓 한 번으로 무너뜨렸다. 아니, 저걸 무너뜨렸다고 볼 수가 있나? 부스스스슷- 아예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벽의 잔해. 이백호가 한 번 더 손짓하자 그 먼지조차 바람에 실려 싹 사라졌다. ‘……무지성 모드는 쓰지 않길 잘했네.’ 먼지가 되는 게 내 머리였을 수도 있단 생각에 아찔했다. 그렇게 이백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때. “아, 맞다.” 이백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못 다한 마지막 말을 내게 전했다. “참고로 다음에 만났을 땐 남이다 우리?” “그게 무슨 뜻이지?” “혹시 우연히 만나도 친한 척하지 말라고.” “…….” “난 이쪽 세상에서 정 같은 거 안 쌓으니까.” 거, 새끼. 매정하기는. *** 이백호가 떠난 뒤, 정말이지 뒤도 안 돌아보고 동굴을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으으, 아저씨… 저 죽겠어요…….” 숙취로 고생 중인 삼인방과 오전을 통으로 쉬면서 보냈다. “비요른……. 근데 넌 언제 들어왔냥? 어제 하려던 일은 잘 했고?” 참고로 미샤는 어젯밤 일을 전부 잊었는지, 내가 숙소로 왔던 기억 자체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가 바바리안을 못 낳아서 그런 거냥?] 어제 내게 이런 말을 한 걸 알았다면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기 어색했을 테니까. “의뢰도 다 끝냈으면, 오늘부터는 아무 걱정 없이 놀아도 되는 거냥?” “물론이다.” 혹시 몰라 2박 3일의 일정을 짰지만, 첫날에 노아르크에서의 모든 용무가 끝났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모두 프리. “오오오! 놀러 간다!!” 결국 2일 차는 밤늦은 시간까지 다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꽤 즐거운 하루였다. 음, 마지막에 물에 빠진 거만 아니었다면. “아이나르!! 내가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낚시터에서 있던 일이었다. 밤에 등불을 밝혀두고서 낚시 중이었는데, 아이나르가 물고기에 물려 발작을 하는 바람에 배가 뒤집혔다. 문제는 수영이 가능한 사람이 없었단 것. 하긴, 이렇게 수심이 깊은 곳에 와본 애들이 얼마나 있겠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알게 됐다. 예전에 ‘빙하굴’에서 물에 빠졌을 땐 갑옷 때문에 가라앉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바리안은 수영을 할 수가 없다. 기교의 영역이 아니라,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탓이다. 뭐, 거대화(초월) 모드를 쓰니 머리가 밖으로 나와서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마는. ‘돌아가면 수영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발품 좀 팔아 봐야겠네. 아이나르나 나는 몰라도 얘네는 할 줄 알아야지.’ 아무튼, 그렇게 2일 차가 지나가고 다음 날. 밤새 술을 마시다가 잠든 우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깨어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에 몸을 실었다. “으아,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진짜 이렇게 떠나는구낭.” “동감이에요. 아저씨는 집에서 술을 잘 안 마시니까…….” “오오! 미샤! 저기 말이 달리고 있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자연의 경관을 구경하며 마차가 움직이길 몇 시간. 이내 우리는 서남쪽 출구에 도착했고, 출입할 때 받은 호루라기도 반납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언제 어디서 불든, 부는 순간 노움트리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자경대가 달려온다는 그 호루라기. 이백호 때 이걸 불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래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겠지. 놈이면 그럴 시간을 주지도 않았을 거 같고. “그럼 나는 쉴 테니까, 이따가 배고프면 말해랑.”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었고, 이는 다음 날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평온한 휴식의 시간. 이러한 시간은 늘 그랬듯 쏜살같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 마침내 그날이 되었다. [22:10] 미궁이 열리는 자정까지 2시간이 남은 시각. 나는 외출 준비를 끝내고 차원 광장으로 향했다. ‘왕가에서 칼을 갈고 있댔지.’ 소문에 의하면 왕가는 군대를 꾸리고 있다. 한 방 제대로 맞았으니, 이번에 미궁에서 한판 제대로 붙으며 갚아 주려 한다던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야 이번엔 예전 토벌 때처럼 클랜에 협조 요청 공문조차 가지 않았단 모양이니까. 철저하게 왕가의 힘으로 처리하려는 거다. ‘광장에 도착하면 얼추 감이 잡히겠지. 왕가 전력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나처럼 동향을 살피기 위해 광장으로 향하는 탐험가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다들 궁금한 거다. 말만 무성했지 그 누구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왕가의 진짜 저력이. “오, 비요른! 너도 광장으로 가냐?”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도중에 아는 얼굴이 몇몇 보여서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나를 비롯해 이곳에 온 모든 탐험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아무도 없을 줄이야.” 아무도 없는 건 아니다. 치안청 소속 경비대들이 광장을 점거한 채 탐험가들이 진입하는 일이 없도록 막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군대는?” 어딜 보나 소문의 군대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이 친구야, 그럴 리가 있나. 이제 5분 뒤면 미궁이 열리는데. 아직도 없으면 그냥 군대가 없었다는 게 맞겠지.” “김 빠지는군. 설마 한판 붙는다는 게 헛소문이었다니.” 광장 근처에 모인 탐험가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하나둘 자리를 벗어났다. 이는 이곳에 오며 만난 탐험가들도 매한가지. “얀델, 자네는 안 가나?” “나는 조금 더 지켜보다 가겠다.” “흐음, 그럼 먼저 가겠네.” 나는 혹시 모른단 생각으로 포탈이 열리고서 시간이 지나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결과만 말하자면, 정말 군대는 없었다. ‘뭐지? 오늘이 아니라 다음을 노리는 건가?’ 의문점들이 가득했으나, 당장 여기 있다고 변하는 건 없을 터. 나도 이만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붕괴음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드드드드드드드-! 머지않아 발을 맞댄 지면이 흔들렸다. “뭐, 뭐야. 지진?” 주변에 가득하던 공무원과 경비원들이 당황한 얼굴로 가만히 멈춰섰다. 하지만……. “…….” 광장에 있는 몇 없는 기사는 달랐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기에, 더욱더 비장하게 느껴지는 그런 얼굴로 그들끼리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었다. 드디어 시작될 게 시작됐다는 듯이. ‘그래, 이런 거였다 이거지.’ 이내 나는 시선을 돌려 땅을 내려다봤다. 왠지 왕가의 군이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지금 내 눈앞에선 보이지 않을지라도. ‘빈집털이.’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252화 오픈월드 (1) 미세한 지진이었다. 테이블이 부르르 떨렸으나, 서 있던 컵이 넘어지는 일도 없었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테이블에 쌓인 칩이 무너진 정도. “지진?” 예고 없이 찾아온 자연 현상에 놀라기도 잠시. 흔들림이 멎자 실내에 있던 귀족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평소처럼 도박을 즐겼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이보게, 공자 어디를 가나!”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오. 이번 판은 그냥 죽지.” 사내는 쥐고 있던 카드를 뒤집어 내려놓고는 칩만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 채 즐길 수 있는 도박장이란 컨셉은 제법 재밌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지진은 아니었단 말이지.’ 밤거리로 나온 이백호는 가장 먼저 보인 벤치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귀족들은 실내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한 듯했으나 그는 분명히 느꼈다. 땅 아래에서 전해진 거대한 기운의 파동을. ‘마력이랑 신성력이 섞인 듯한 기운이었지.’ 마법사는 아니지만 기감 스탯이 높고, 마력 관련 재능도 꽤 있는 편이었던 그였기에 잘못 느낀 것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호 결계를 깨부순다 깨부순다 말만 많더니 진짜 깨부수고 쳐들어간 거구나.’ 머지않아 이백호는 진실에 도달했다. 참 지독한 새끼들이 아닐 수 없었다. 미궁이 열리는 자정쯤을 결행 시기로 잡은 게 우연은 아닐 테니까. ‘빈집털이라…….’ 지금은 왕가에서 떠났기에 자세한 사정까진 모른다. 다만 노아르크 쪽은 단단히 준비해서 미궁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쓸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겠지. 설마 지들이 썼던 수법을 똑같지 돌려받을 거라 상상도 못한 채. ‘……이거 잘하면 아래 새끼들 전부 뒈지겠는데?’ 이백호에게 있어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추후 정 선택지가 없으면 노아르크 놈들과 게임 클리어를 하는 것까지 생각 중이었으니까.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내려가서 도와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났지만, 이백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그건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쪽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면 왕궁 쪽도 텅 비었겠네?’ 이내 이백호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 제1 왕실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왕가의 수호자이자, 빛의 기사라 불리우는 그의 미간에 때아닌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조금 전에 전달 받은 소식 때문이었다. “왕궁이 공격받고 있다고……?” 처음엔 노아르크 측의 반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미궁이 목적지인 척 병력을 소집했고, 출정 두 시간 전에서야 진짜 목표가 노아르크 본성임을 알릴 만큼 보안에 신경을 썼을뿐더러……. 애초에 수호 결계가 부서진 건 바로 전이다. 왕궁을 타격할 만큼의 전력이 빠져나갈 시간은 없었다는 뜻. “회군 명령은 떨어졌나?” “아직입니다.” “그렇다면 계획에 변함은 없다. 출정을 계속 이어간다.” 제롬은 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하수도 아래로 이동했고, 시간이 흐르며 왕궁을 습격한 무리의 정체에 대해서도 소식이 전해졌다. ‘……설마 무리가 아니었을 줄이야.’ 감히 왕궁을 습격한 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 최근 위험도 단계가 격상한 파멸학자의 단독 범행인가도 싶었으나, 그런 그의 예상조차도 빗나갔다. “이백호.” 한때는 그 누구보다 촉망받는 탐험가였지만, 악령임이 밝혀지고서 그 참사를 낳은 존재. 물론 그 참사에 대해서 아는 자는 극소수다. 능력을 아깝게 여긴 왕가의 자비로 그 참사는 철저하게 은폐됐으며, 그놈 또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됐으니까. ‘골치 아프군. 그놈이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나까지 출정으로 자리를 비웠으리라는걸?’ 그가 알기로 이백호는 현재 정보를 얻을 만한 수단이 없다. 예전에야 악령 집회에서 외부의 협력자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현재 그는 집회에서 추방당한 상태다. 이 또한 왕가에서 손을 쓴 일이었다. GM이라 불리는 악령에게 은근슬쩍 이백호의 정체를 흘리고, 그럼에도 추방할 기미가 없자 그를 노아르크로 보내 척을 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냥 혼자 추측한 건가?’ 제롬은 침음에 잠겼다. 수호 결계를 부순 여파로 지상에 지진이 발생했단 소식은 들었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지진을 통해 이 상황을 유추하는 것? 이 정도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실행에 옮기는 건 또 다른 영역의 문제. 만약 예측이 빗나간다면 도로 붙잡히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도박 같은 짓을 한다고? ‘……그자라면 그럴 수 있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제롬은 납득하고 말았다. 이백호는 흡사 짐승과도 같은 자다.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적을 물어뜯고, 자신이 물어뜯길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필 장미기사단장 자리도 공석인 이때…….’ 지상의 상황이 걱정됐으나, 아직 회군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왕가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 “도착했습니다.” 이내 지하 미로를 통과한 군대는 노아르크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 고대의 마법이 수십 가지나 들어간 석문. 지난번 토벌 때는 이 문을 부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던가? “다행히 아직 제대로 고치지 못한 모양이군. 시작하라.” 제롬의 명이 떨어지자, 마법사단은 바닥에 거대한 팔방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콰아아아아아앙-! 마법진이 강한 빛을 흩뿌리며 석문을 향해 순수한 마력의 파동을 쏘아냈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 먼지구름 너머로 지하 도시의 경관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자, 가자. 사악한 역도 무리를 토벌하고 이 도시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아 올 시간이다.” 제롬은 왕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그 너머를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 “라프도니아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그의 걸음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포탈이 닫힌 차원 광장. 다만 이후로도 한참이나 그곳을 서성였다. 혹시나 저 기사들에게서 쓸 만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쩝, 시간만 날렸네.’ 기사들은 사소한 잡담조차도 나누지 않았으며 광장의 정리가 끝나는 즉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따라서 나도 이만하고 광장을 떠났다. 곧장 숙소로 가기보다는 주점이라도 들러 다른 탐험가들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볼 계획이었다. ‘기왕이면 곰아저씨네로 갈까?’ 음, 역시 그게 좋겠다. 일단 탐험가들이 자주 오는 주점이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칸막이나 룸 형태도 아니라서 대화를 엿듣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이런 말을 앞에서 하면 분명 화내겠지만. “오, 얀델.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미샤도 없이.” “그냥 나온 김에 조금 심심해서. 오늘 꽤 바빠 보이는데 난 신경 쓰지 마라. 조용히 구석에서 마시다 갈 테니.” “……그냥 불러주면 안 되겠나? 네 말이라면 아내도 분명 괜찮다고 해줄 텐데.” 주점에 도착해서 만난 곰아저씨는 농땡이를 피울 각을 보고는 내게 그런 요청을 해왔다. 거, 만삭인 아내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오늘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렇다면야. 안주랑 술은 적당히 내주면 되지?” “아, 그럼 고맙지.” 이내 텅 빈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곰아저씨가 고기로만 구성된 술상을 차려줬다. 참고로 술은 이 집의 시그니처인 소금 벌꿀주. ‘처음엔 진짜 이상한 맛이었는데, 먹다 보면 묘하게 술술 들어간단 말이지.’ 아무튼, 이곳에 온 본 목적은 이게 아니다. 술을 홀짝이며 귀를 열고 있자니 주변 탐험가, 혹은 일반 도시민들의 대화들이 들려왔다. 소문이 빠른 주점의 특성상 대부분의 화제는 왕가에서 꾸린 군대에 관한 얘기였다. ‘딱히 건질 만한 건 없네.’ 왕가에서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렸다느니. 노아르크를 겁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느니. 정보의 소스가 본인의 뇌인 알맹이 빠진 정보들뿐. 뭐, 술집에서 원탁의 정보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기에 실망하진 않았다. 애초에 여론 조사 정도가 목적이었다. ‘요즘은 탐험가만이 아니라 도시민들도 왕가를 좋게 보지를 않네.’ 이후로는 귀를 닫고 술이나 마시며 혼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좀 일이 한가해졌는지 곰아저씨가 다가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얀델, 넌 어떻게 생각하냐?” “군대 말인가?” “그래, 이런 쪽으로는 네 감이 또 기가 막히지 않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군대가 지금 ‘빈집털이’ 중일지 모른단 내 추측을 말해 주었다. 그야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베테랑 탐험가인 곰아저씨의 의견은 어떨까 싶었다. “……과연 아까 그 지진이 그래서였나.” “믿는 건가?” “오히려 그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나? 왕가에서 노아르크를 겁낸다는 헛소리 보다야.” 왕가의 보고에 한 번 들어선 적이 있어서인지 곰아저씨는 납득이 빨랐다. 왕가가 지닌 저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단 걸 아는 것이다. “……어쩌면 다음 번에는 미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내 곰아저씨는 이 냉전기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마무리될지 모른단 기대를 내비쳤다. 그리고 도시의 경제 문제도 걱정했다. “얀델, 이렇게 되면 현금을 아껴둘 게 아니라 이번에 써야 되는 거 아닌가? 미궁이 안정되면 다시 물가도 원래대로 돌아올 텐데.” 그 말에 조금은 감동했다. 지킬 가정도 있는 베테랑 탐험가라 그런가? 아이나르나 미샤는 이런 쪽으로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던데. “일단은 지켜봐라. 어차피 내일이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테니.” “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군.” 이후로는 이 주제에서 벗어나 곰아저씨와 대작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던 때였다. 댕-! 댕-! 댕-! 댕-! 바깥에서 경종이 울렸다. 1년 넘게 이 도시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지난번에 내 마차가 폭발하고 GM과 이백호가 난장을 부렸을 때도 경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게 울리다니? 처컥, 처컥, 처컥. 이내 서둘러 바깥으로 나오자 군화 소리를 내며 한곳으로 달려가는 치안청 소속 경비들이 보였다. 나는 아무나 붙잡고 사정에 대해 물었다. 민간인에게 말해 줄 수 없다던 경비였으나, 내 신분을 밝히자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왕가에서 준남작 작위를 하사한 정식 귀족이다. 그러니 어서 답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저희도 잘 모릅니다. 단지 카르논 쪽으로 지원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동료들 얘기를 들어 보면 크게 화재가 났다는 거 같습니다.” 이 시기에 황도 카르논에서 대형 화재라……. ‘우연일 리는 없겠지.’ 그럼 설마 노아르크 놈들이 쳐들어온 건가?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능하긴 한 일이다. 왕가의 빈집털이 계획을 미리 알아챘더라면, 이런 식의 엘리전도 전략으로 쓸 수 있을 테니. ‘하, 왕가 새끼들은 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옆에 있던 곰아저씨가 툭 하고 말을 뱉었다. “황도에서 화재라니,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한데…… 레이븐은 괜찮을지 모르겠군.” 응? 레이븐? 갑자기 걔는 또 왜. ‘아, 걔 지금 마법 배운다고 왕궁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지내고 있댔지.’ ……니미럴. 지금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인지하자마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런 예감은 대부분 빗나가는 법이 없었기에 그 불안의 정도가 더했다. “부디 단순 화재로 끝이었으면 좋겠—” “아브만, 난 이만 가보겠다.” “이 와중에 대체 어딜? 얀델, 내 말 들어라. 이런 때에는 그냥 집에 있는 게 최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곰아저씨가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방 찾아서 데려올 테니.” “그렇다면 나도 같이—”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아내랑 있어야지.” 곰아저씨에게는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 있으라고 말했다. 미샤 쪽도 내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소식은 전해야지. 팀원끼리 다 모여 있는 게 안심되기도 하고. “……조심해라.” 이후 곰아저씨와 헤어져 황도 카르논으로 향하는 군용마차 지붕에 올라탔다. 아래 타고 있던 병사들이 뭐라뭐라 난리를 쳤지만, 내 신분을 밝히니 다들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준남작님! 곧 카르논에 도착합니다!” 이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 한밤중임에도 하늘은 시뻘겋다. 깨끗하게 관리된 높은 성벽엔 검은 재들이 묻어 더럽혀져 있으며, 주변엔 안개라도 낀 것처럼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다. 또한. 저 뜨거운 불길 너머, 혹은 불길 바깥에서, 악을 쓰는 괴성과 비명이 겹쳐져 들려온다. ‘미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귀족들의 도시, 카르논이 불타고 있었다. 253화 오픈월드 (2) 마력막 주위로 피어오르는 세찬 화마. 비명과 절규. 잃은 자의 비탄. 그 모든 것을 멍하니 눈으로 담으며 네바르체 그린홉은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더 볼 것도 없었다. 시작은 용살자 리갈 바고스였다. 노아르크 측의 만류에도 기어코 대신관을 납치해 노예처럼 부리더니, 결국 그 악행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며 왕가에서 칼을 뽑아 들게 만든 장본인. 하지만……. ‘……나인가.’ 네바르체는 책임을 돌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오늘을 모면하기 위해 과거를 향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종국엔 오르큘리스를 받아들인 노아르크의 전대 성주까지 책임을 묻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된 거 같은가?” 받아들이자. 오늘 이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나라는 사실을. “바짝 붙게.” 네바르체는 뒤처져 마력장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끔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는 숨 쉬듯이 편안하게 부유 마법을 사용 중인 노인이 있었다. ‘벨베브 루인제네스.’ 말년에 ‘파멸학자’란 이명이 붙은 노인. 한평생 배움을 갈구한 마법사이자, 그 귀한 지식들로 수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아간 존재. 아멜리아에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단 말을 듣고서 갑갑한 마음에 그를 찾아간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때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대의.’ 왕가는 잘못됐다. 그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지상과 지하가 하나가 된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일이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뜨, 뜨거워…….” “제발, 살려 주시오. 돈이라면 얼마든…….” 생명이 산 채로 불태워져 쓰러진다. 그럴 때마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신념 역시 서서히 바스러졌다. 과연 이게 올바른 일인가. 대의를 위한다며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갖지 못한 자들을 유린하는 것이. 진정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인가. “그만…….” 네바르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마치 이상한 소리라도 들었단 사람의 표정을 하고서. “그만이라니? 나 역시 지금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아 이곳에 오긴 했지만, 먼저 도와달라 한 건 자네였지 않은가? 지금 멈추면 노아르크로 향한 군대는 절대 회군하지 않을 걸세.”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소.” “그래? 그럼 뭘 바랐는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파멸학자’라 불리는 이 시대의 악인을 찾아가며, 과연 나는 무엇을 기대하였는가. “다신 없을 절호의 기회라네. 나조차도 그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군. 그자가 왕궁에서 시선을 끄는 이상, 우리가 위험해질 일은 없네.” “누가 내 목숨이 아까워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시오! 나는 단지…… 단지……!” 네바르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러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매정하게 등을 돌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힘들어 보이는군.” 그 순간에도 그의 손에 맺힌 수백 개의 불길이 파괴만을 목적으로 무차별하게 날아가 도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감정을 버리고 목표만을 생각하게.” “…….” “둘 다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지극히 마법사다운 계산적인 말. 화아아앗-! 이내 노인의 걸음을 따라 마력장이 멀어지며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네바르체는 무심코 멈춘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에는 오직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 엄마… 수, 숨이, 아, 안 쉬어…….” “괜찮아, 아가……. 엄마가 옆에 있을게. 끝까지.”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걸까. *** 밤비가 내린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해낸 일이다. 촤아아아아-! 도시 전역에서 지원을 나온 경비원들도 쉬고 있지는 않다. 우물가부터 길게 세워진 줄. 쉴 새 없이 양동이를 넘겨가며 불길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다. 아니, 어디 경비만일까. “힘들면 괜히 뻐팅기지 말고 나오쇼! 괜히 오기 부려 봤자 해만 되니까!” 그중엔 근처에 살던 탐험가도 있고, 소식을 듣고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인 시민들도 있다. 눈앞의 재난을 극복하려 모인 사람들. “아이고, 이러다 우리 집까지 다 타겠네!” “어이, 형씨! 그게 지금 할 소리요? 지금 저 안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둘 다 싸울 힘이 있으면 양동이나 날라!” 물론 모두가 숭고한 마음으로 힘을 보탠 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고. ‘레이븐.’ 막상 카르논에 도착하니 눈앞이 막막하다. 현대에서 공장 몇 개가 불탄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화재. 과연 레이븐은 잘 버티고 있기는 한 걸까. 아니, 어쩌면……. ‘어쩌면은 무슨.’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내리쳐 정신을 깨운다. 퍼억! 처맞은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고민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다. 일단 레이븐은 마법사가 아닌가. 걔 성격이면 지금쯤 주변 사람까지 챙기며 잘 버티고 있을 거다. 그래, 아예 운 좋게 마탑에 잠깐 들렀다가 이번 사태를 빗겨갈 수도 있고. “거기, 마법사.” 나는 한창 화재 진압 중인 마법사에게 다가가 내 신분을 밝혔다. 바쁜 와중에 말을 건 것임에도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거기, 마법사라니. 그런 식으로 불린 건 정말 오랜만이구려. 껄껄!” 귀족 작위와 별개로 내 이미지가 좋았던 모양. “그래서 그 비요른 얀델이 그런 마법사에겐 무슨 일이오?” “혹시 냉혈 마법을 쓸 수 있나?” “그걸 못 쓰는 마법사도 있소?” 내 요구에 마법사는 껄껄 웃으며 마법을 걸어줬다. 「캐릭터의 화염 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후, 이제 좀 덜 뜨겁네. “저곳에 들어갈 생각이오?” “안에 동료가 있어서.” 내게 마법을 걸어준 마법사가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웃었다. “근데 그럼 고작 그런 거로 되겠소?” 응? 뭐지? 지금 날 비웃는 건가? 일순 그런 생각도 피어났으나, 이어진 상황에 상당히 무안해졌다. 딸깍. 마법사가 메시지 스톤을 꺼냈다. 그리고……. “아, 다들 들리시오? 바쁜 와중에 미안하지만 한 가지 부탁 좀 드리겠소. 비요른 얀델이라고, 다들 알고 계실 그자가 저 불꽃 속으로 동료들을 구하러 가야겠다는구려.” 어딘가에 연락해 부탁을 해줬다. “화염 내성에 도움이 되는 아티팩트나 약물 같은 게 있으면, 내 개인 연구실 지정 좌표로 좀 보내주시오. 내가 알아서 이쪽으로 소환할 테니.” 뭐, 마법사끼리의 단톡방 같은 건가?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기에 일단 가만히 닥치고 기다려 보았다. 머지않아 하나둘 회신이 왔다. [비요른 얀델이라면, 귀족 작위도 받았으니 신용에는 문제가 없겠군. 하지만 그래도 만약 파손이 생긴다면 자네에게 청구할 테니, 알고 있게.] 깐깐해 보이는 노인의 음성. [좋아요. 제자들 대부분이 카르논으로 지원을 나가서 없지만, 남은 제자들한테 물어보고 있는 건 전부 보낼게요.] 젊은 여성의 음성. [아끼는 제자가 이번에 그자 덕에 살아서 돌아왔지. 스크롤을 보낼 건데, 값은 지불할 필요 없다고 전해주게.] 어딘가 인자하게 들리는 사내의 음성. [비요른 얀델이라, 이 기회에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혹시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게 아니라면 대신 말 좀 해주게. ‘화룡의 반지’를 보내준 건 우리 ‘이오니’ 학파이니 기억하고 있으라고.] 계산적인 성격이 묻어나는 음성 그리고……. [아루? 설마 동료라는 게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 귀에 익숙한 음성까지. ‘이 목소리는…… 늙은이?’ 내 기억이 맞다면, 통칭 늙은이. 거대 학파인 알테미온의 마스터이자, 레이븐의 스승이기도 한 그의 목소리다. “음, 일단 맞는 거 같소. 고개를 끄덕이는군.” [지금 당장 있는 걸 전부 보내겠네.] 이를 끝으로 모든 연락은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대체 이 상황은?’ 그냥 ‘냉혈’ 마법 정도만 받으려고 그나마 가장 만만해 보이는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영 심상치가 않다. 단톡방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말하는 뉘앙스가 한 학파의 수장이라도 되는 듯했으며, 실제로 멤버 중엔 알테미온의 마스터인 늙은이도 껴있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얘도 평범한 마법사는 아니란 거겠지.’ 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감출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는지, 그가 웃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구려. 나는 레벤 아르페건이란 사람이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다만 그가 이어서 밝힌 학파는 알았다. 마탑에서 중위권에 속하는 학파였다. 그런데 설마 그 학파의 마스터가 이렇게까지 젊었을 줄이야. “이 빚은 언젠가 꼭 갚지.”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야.” 이내 몇 분쯤 흐르자 메시지 스톤을 통해 물품을 옮겨놨다는 회신이 차례로 도착했고, 레벤 아르페건은 마법을 통해 좌표에 있는 모든 물품을 이곳으로 소환했다. ‘진짜 화룡의 반지네.’ 상위 넘버스 아이템부터 시작해 각양각색의 희귀 물품들로 가득했다. 하나씩 살피면서도 정말이지 기분이 묘했다. “천운이 도왔군.” 사실 운이 좋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우연히 말을 건 마법사가 한 학파의 수장이며, 개인 단톡방까지 사용해 도와줄 만큼 내게 호의적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 “운이라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려.” 응? “저자들이 생판 남인 사람을 돕겠다고 이렇게 발 뻗고 나서는 건 난생처음 봤소. 그대는 이게 그저 운이 좋아서 가능한 일 같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레벤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료를 구하겠단 그대의 말에, 그들이 무엇을 보고 흔쾌히 도우려 나섰는지는 나도 모르오. 하지만…….” “…….” “이 모든 건 그대가 이뤄낸 것이오.” 마법사답게 장황한 말이긴 했으나, 전하려는 바는 알 거 같았다.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하니 멋쩍긴 하다마는. 쓰윽. 민망함을 숨기며 재 묻은 코를 닦아내자, 레벤이 웃으며 비실이 같은 팔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니 운이 좋았단 말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시구려. 서둘러 동료를 구해야 하지 않소.” 그래,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지. “고맙다.”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 소환된 물품들을 착용, 혹은 복용했다. 「캐릭터가 영원의 잿물을 복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내성이 +5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정령의 눈물을 복용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원소 저항력 수치가 +1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순수한 불꽃을 복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받는 화염 피해가 10% 감소하며 화염 감응도가 +15 증가합…….」 「…….」 「…….」 우선 도핑계 포션을 마시고. 지지직. 스크롤을 찢는다. 그리고……. 「캐릭터가 No. 4819 용암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98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No. 760 화룡의 반지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 「…….」 트리플 넘버스 아이템을 비롯한, 다양한 화염 특화 아티팩트들을 몸에 찬다. 화르르릇-! 더 이상 뜨겁단 감각조차 피어나지 않는 공기. 시험 삼아 불길을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시원하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물론 한국인이 아닌 레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다. “흐음, 아무리 내성이 올라도 그런 감각이 느껴지진 않을 터이네만…….” “그냥 그렇다는 기분이었다.” 대충 둘러대며 나는 여전히 잦아들 기미가 없는 불길 속을 응시했다. 그리고 레벤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넌 나한테 무엇을 봤었나?” 좀 전에 레벤은 말했다. 무엇인진 알 수 없지만, 다들 내게서 무언가를 보았기에 선뜻 돕고자 했을 거라고. 하면, 얘는 도대체 무엇을 본 거였을까. “소문이었소.” 그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소문?” “그대에 대해 들었던 모든 소문 말이오. 오늘 처음 봤지만, 딱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겠더구려. 그게 모두 사실이었단걸.” 해석의 여지가 많은 중의적인 대사. 자세히 물으려던 차에 레벤이 멸치 같은 팔로 내 등을 밀었다. “……무슨 사람 몸이 철근 같군.” 레벤은 끄떡도 않는 내 몸을 보며 멋쩍게 웃더니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하지 않았구려. 만약 동료를 구하고서도 힘이 남는다면, 다른 이들도 구해주시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오케이, 접수.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 “그대가 그리 말하니 아주 믿음직스럽게 들리는군. 아무튼, 더 이상 붙잡지 않을 테니 어서 가보시오.” 이내 나는 예전에 획득한 ‘불의 보주’까지 활성화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냈다. 「불의 보주를 활성화했습니다.」 「반경 15m 내에서 파생된 모든 화염 계열 지속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소방관 모드.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출격. 254화 오픈월드 (3) 불꽃 속을 내달리고 있다. “후욱, 후욱.” 코로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쿠웅! 쿠웅! 불에 타다 못해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를 전력질주하는 중이다. 아, 발소리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간단하다. 조금이라도 화염 내성을 올리려고 [거대화]를 켰거든. ‘지금 내가 얼마나 온 거지?’ 뛰면서 어떻게든 정확한 위치를 유추해 보려 했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언제나 이 도시에 왔을 때 거리 감각을 주었던 왕궁은 연기 때문에 보이지도 않으니. 그저 일단은 계속 뛰는 수밖에. 화르르륵-! 아무튼, 그런 시간이 이어지길 약 한 시간. 그동안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일단 첫 번째. 화아아아악-! 사방에서 휘감겨 오는 이 불길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화재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옮겨붙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정 주기로 폭발을 거듭하는 불꽃이라니? ‘역시 마법이겠—’ 콰아아아아앙-! 잠시 생각을 멈추며 잽싸게 폭발이 피어난 방향으로 방패를 움직인다. 암살자 소식을 듣고서 기사단에게 임시로 빌린 방패와는 가격부터가 다른 붉은색 방패. 「용암방패가 불꽃을 흡수했습니다.」 「흡수량에 비례해 캐릭터의 영혼력이 회복됩니다.」 No. 4819 용암방패. 소지 시 화염 내성 +30이라는 패시브 스탯 때문에 들고 왔지만, 지금 가장 요긴하게 쓰고 있는 아이템. ‘하, 그냥 들어왔으면 진짜 큰일났겠네.’ 인생사 유비무환이라던가. 공격 스킬과 마법에만 반응하는 아이템이라서 ‘영혼력 회복’ 옵션은 쓸 일 없을 줄 알았건만. 이게 아니었으면 [거대화]를 아껴 뒀을 거다. 그럼 이쯤에서 두 번째. “…….” 어디를 가든 조용하다. 건물이 무너지고, 불꽃이 휘몰아치며 도시를 태우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 맴돌지만……. 지금까지 마주친 생존자는 0명. 구조 요청은커녕 비명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체들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거겠지.’ 참고로 마주친 시체들은 대부분 내 반대편을 바라보며 쓰러져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시작된 화재를 피해 안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곳엔 왕궁이 있기도 하니까. ‘레이븐이 거기까지 무사히 잘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부디 이번 사태를 잘 비껴갔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불길을 헤집고 달려나갔다. 그야 혹시 아닐 수도 있으니까. 경비의 말에 따르면 카르논의 남부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레이븐의 숙소가 있는 곳은 남부의 최중심부. ‘슬슬 나올 때가 된 것도 같은…….’ 툭. 나는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뿌연 연기들 사이로 석조 건축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되는 폭발에 성한 곳은 없었으나, 워낙 큰 건물인지라 형태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도 카르논의 제3 공용 승강장. 재빨리 주변을 쓱 훑은 나는 그대로 멍해졌다. ‘니미럴.’ 레이븐이 말했던 주소는 이곳의 바로 근처다. 물론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동서남북 어디를 보든 멀쩡한 곳이 없는데. “…….” 잠시 숨도 참으며 소리에 집중해 봤으나, 여전히 빌어먹을 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면, 레이븐은 어떻게 됐을까. 바라던 대로 제때 잘 피신을 간 걸까? “아루아 레이븐—!!!” 혹시 모르는 노릇이기에 있는 힘껏 소리쳤다. 만약 주변에서 구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다만 몇 번의 외침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따라서 나도 이만 왕궁 쪽으로 마저 이동을 재개하려던 찰나. [……얀델 씨?]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사라면 기본적으로 다 할 줄 아는 ‘전음’ 마법. [뭐야? 얀델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진짜 이 근처에 있던 거구나. 이대로 그냥 떠났으면 어쩔 뻔했대.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다급히 외쳤다. “어디냐—!!” [승강장 반대편 길을 타고 조금 더 오세요, 그럼 제가 보일 거예요.] 이내 레이븐의 지시대로 움직이자, 광장이 나타났다. 레이븐은 중앙 분수대 쪽에 있었다. 열댓 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스윽. 불길을 막아주는 마력장 너머로 들어서자, 레이븐이 쪼그만 몸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얀델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음, 일단 좀 반겨 줄 수는 없는 건가? 역시 현실이랑 영화는 다르구나. 영화에서는 이럴 때 달려들어 안기거나 하던데. “설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 불길을 뚫고?” 뭐래. “산책 중이었다.” 왠지 무안해진 나는 툭하고 뱉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 “그나저나 왕궁 근처도 아니고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냐? 화재가 났으면 당장 도망쳤어야지? 넌 정신머리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레이븐과 합류한 후, 일단 얘한테서 사정을 청취했다. 어째서 왕궁 쪽도 아니고, 아직도 집 근처에서 이러고 있었는가.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그게…….” 레이븐은 숙소에 마련한 임시 연구실에서 새로 배운 지식들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재가 났을 때 제때 듣지 못했다. “숙소가 승강장 근처라 편한 점도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시끄러워서요. 평소에는 소음 차단을 해두고 지내는 바람에…….” 레이븐이 이변을 눈치챘을 땐 이미 사방이 불길로 뒤덮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예 늦은 시기는 아니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제가 그냥 갔으면 다 죽었을 거예요.” 아이를 안고서 거리에 쓰러진 여인을 본 순간 레이븐은 이곳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야 얘는 판단 자체는 냉정해도, 힘이 닿는 한에서 최대한 도의를 지키는 성격이니까. 아마 그때는 안일하게 생각했겠지. 조금만 버티면 금방 화재가 진압될 거라고. 이렇게까지 심각한 사태로 번질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일단 사과는 할게요. 얀델 씨가 저 때문에 이렇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거, 산책 중이었다니까. “사과는 무슨.” 키도 쪼그마한 게 어른인 척하고 있어. “잘했다.” “……네?”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생존자들을 보며 말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야지.” 아무리 봐도 나는 저들이 그냥 NPC라고만 느껴지지 않는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설령 저들이 나 같은 자들을 ‘악령’이라고 부를지라도. ‘그나저나 귀족은 없는 모양이네.’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나는 대부분이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황도 카르논이라고는 해도, 인구의 9할은 결국 평민들이니까. 귀족들의 편의를 위해 이쪽에서 주거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 “저기, 근데 그 장비들은 어디서 났어요?” 슬슬 상황이 정리되자 레이븐은 용암방패를 비롯한 내 소방관 에디션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마법사라 그런가? 이 와중에도 자기 호기심이 먼저네. 나는 입은 장비의 출처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레이븐의 눈길이 조금 이상해졌다. “진짜 신기하네요. 스승님은 그러려니 해도, 다른 분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누구인지 말도 안 했는데 아는 거냐?” “대충은요. 마법사 사회는 넓은 듯하면서도 좁아서 누가 누구랑 친한지 다 알거든요.” 응, 그렇구나. 근데 언제까지고 이런 얘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래서 이 결계는 어떻지? 이동하면서도 쓸 수 있나?” 본론으로 들어가자 레이븐도 표정을 달리하고 진지하게 답했다. “쓸 수는 있어요. 훨씬 약해지긴 하겠지만.”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떠냐? 버틸 수 있을 거 같나?” “지금 ‘불의 보주’를 쓴 거죠? 여기에 제가 ‘냉혈’ 마법까지 걸면 어떻게 버틸 수는 있을 거 같아요.” “마력은 괜찮고?” “……그건 해봐야 알 거 같아요.” 레이븐은 마법사답게 빈말로라도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만큼 아슬아슬하다는 뜻. 다만 우리 둘 중에 어느 누구도 이들을 버리고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들 얘기는 들으셨죠? 이제부터 이동할 건데 반대 의견이 있다면 지금 말해 주세요.” 이내 레이븐이 생존자들에게 계획을 다시금 설명했고, 당연히 반대 의견을 내는 이는 없었다. “그럼 출발하지.” 레이븐이 결계를 이동형으로 바꾸는 준비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불길 속으로 나왔다. “다들 어떠세요? 괜찮아요?” “버, 버틸 만합니다. 마법사님.” 땀을 뻘뻘 흘리긴 하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진 않아 보이는 생존자들. 연기 때문에 호흡이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레이븐이 중간중간 바람 마법을 사용해 연기를 밀어내고 산소를 보충해 주었다.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와라.” 불의 보주의 범위는 반경 15m. 그 바깥으로 생존자들이 낙오되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며 구보를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앞에서 터지는 폭발은 내가 막았고, 뒤는 레이븐이 전담해서 맡았다. “마력은?” “아직 거뜬하니 신경 쓰지 마요.” 레이븐의 마력이 실시간으로 소모되는 중이란 것만 빼면 나름 안정적인 이동이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불길이 확실히 약해졌어요.” “이제 곧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인가?” “제 예상이 맞다면요.” 오랜만에 듣는 긍정적인 소식. 체력적으로 한계에 봉착했던 생존자들도 희망을 품고서 근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희소식은 비보와 함께 온다던가. “……앞에 마력이에요!” 대화를 나누던 중인 레이븐이 돌연 다급하게 외쳤다. 이에 나도 서둘러 정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니미럴.’ 거대한 불덩어리가 눈앞에 보였다. 일단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막았으나……. 「단일 흡수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흡수량에 비례해 영혼력이 크게 소모됩니다.」 회복은커녕 역으로 기운이 크게 빠져나가는 감각이 피어난다. ‘미친.’ 용암방패로 못 막는 화 속성 공격이라니. ‘대체 어떤 새끼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주변에 떠오른 건물 잔해들이었다. 부스스스스. 불타는 돌덩이들이 오밀조밀 뭉쳐지며 골렘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뒤에서 레이븐의 넋 잃은 음성이 들려왔다. “얀델 씨. 이 마법은…….” “그만, 말하지 않아도 안다.” 5등급 소환 마법 불거인. 일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마법이었다. ‘……어쩐지 불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더라니.’ 나는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정면을 계속 응시했다. 터벅, 터벅. 걷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불길 너머로 한 명의 노인과 그를 뒤따르는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자네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마는.” 이내 초로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운이 좋군.” 그래,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 파멸학자, 벨베브 루인제네스. ‘놈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벌써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게 됐다. ‘역시 노아르크 새끼들 짓이 맞았구나.’ 이번 화재의 범인은 이놈들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하다. 도시에서 이렇게 깽판칠 놈들이 달리 어디 있겠어? “레이븐.” 일단 다 제쳐두고서 오더부터 내렸다. “너는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나 없이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거, 말대꾸는. “내 말 들어라. 언제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나?” 잠깐의 정적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육성이 아니라 전음으로.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데려올게요.] 이후 레이븐은 바람 마법을 사용해 불꽃을 밀어내 길을 만들어 그곳으로 생존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의외로 파멸학자는 그걸 보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뭔가 수작을 부리면 즉시 막으려고 준비하고 있었건만. ‘그래, 너도 내 쪽에 마법사가 없어지는 편이 상대하기 쉽다는 거지?’ 대충 저쪽의 생각은 예상이 갔다. 어딘가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순순히 보내 줄 이유가 없다는 판단……. “언제부터였는가?” 응? “자네는 왕궁에 있다고 들었네마는. 대체 언제 여기 온 건가?”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래? 고개를 갸웃하기도 전에 그 답이 눈앞에 나타났다. “방금.”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20대의 남성. “야, 틀.” “……틀?” “누가 맘대로 불 지르래. 내 허락도 없이” 이백호가 파멸학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255화 오픈월드 (4) 탐험가의 노화는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다. 그야 상층으로 갈수록 미궁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니까. 한 번의 탐사가 두 달이 넘게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젊은 거지?’ 포마드 스타일로 쫙 넘긴 백금발의 사내를 보며 의문을 가져보기도 잠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젊은 외모의 비결을 궁금해하는 것보다 먼저 정리해야 할 정보들이 있었다. [자네는 왕궁에 있다고 들었네마는. 대체 언제 여기 온 건가?] 도시가 불탈 때 이백호는 왕궁에 있었다. [누가 맘대로 불 지르래. 내 허락도 없이.] 불을 지른 것은 파멸학자가 맞으며……. “뒈질래?” 이백호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하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정작 분노의 대상자인 파멸학자조차 짐작 가는 게 없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왜 나를 적대하는 건가? 내 덕분에 편해진 건 자네도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편해지긴 개뿔. 여길 불태운다고 왕 새끼가 밖으로 나가주는 것도 아닌데.” “호오, 정말로 왕이 목적이었던 건가?” 이 와중에도 미끼를 던졌던 건지, 파멸학자가 이백호의 대답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뭐? 왕이 목적?” 이백호는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다. “할배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뭐, 됐어. 설명하기도 귀찮으니까.” 날파리를 쫒아내듯 훠이훠이 손을 움직이는 이백호. “……듣던 것 이상으로 교양이 없는 친구군.” 이런 대접은 난생처음인지 파멸학자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물론 이백호는 눈 하나 까딱 안 했다. “응, 교양이 없는 건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쉰 내 풍기는 그쪽이고요. 하, 진짜 틀니 좀 새로 사든가 하쇼. 썩은 내가 여기까지 진동을 하네.” “뭐, 뭣이……?” 한마디 툭 뱉었다가 명치를 얻어맞게 된 파멸학자. “이런 고얀…….” 수염을 파르르 떨며 극찬을 뱉는 걸 보니 이미 승자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긴, 저 늙은이가 K-게이머의 정신을 계승한 이백호를 말로 이기는 장면은 상상이 안 되긴 하지. “자, 그럼 이제 슬슬 본론.” 이백호는 파멸학자의 빡침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내 국밥집. 너 때문에 불탔잖아.” 녀석이 빡쳐서 달려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쿠, 쿠빱……?” 파멸학자는 뭔 소린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이백호는 아랑곳 않고 분노를 토해냈다. “NPC긴 했지만, 말한 것만 듣고서 가장 그럴듯하게 만들던 놈이었다고. 하, 나중에 깍두기도 만들어 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카르논에 연금술 공방이라도 있던 건가?” “연금술은 니미.” 이백호가 불량스럽게 침을 바닥에 퉷 하고 뱉었다. “이래서 NPC 새끼들이랑은 대화를 못하겠네. 한수 형이었으면 같이 화내 줬을 텐데.” 뜬금없이 내 얘기가 나오자 몸이 움찔했지만, 아마 같이 화내긴 했을 거다. 설마 이 도시에 국밥 제조가 가능한 장소가 있었다니? ‘……그런 데가 있으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아직 먹어 보지도 못했는데!’ 둘 모두를 향한 분노가 샘솟는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바바리안인 척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그래서 바라는 게 뭔가? 자네와는 척을 지고 싶지 않네. 만약 이번 일로 자네 공방에 피해를 입히거나 한 거라면 보상을 하지.” 이내 파멸학자가 협상을 시도했다. 조금 놀라운 광경이었다. 카르논의 남부 전체에 불을 지른 미친놈이 온건파처럼 대화로 해결하려 들다니? 이백호의 위상이 어느 정도기에 이 할배가 이러는 걸까. 아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틀니 뽑아.” “……?” “보상하겠다며? 진짜 미안한 거면 네 손으로 그 썩은내 나는 틀니 다 뽑아. 그럼 봐줄게.” 적일 때는 그 무엇보다 까다롭지만, 아군일 땐 더없이 든든한 존재였다. 이백호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네마는, 이건 틀니 같은 게 아니—” “아니긴 지랄.” 협상 결렬을 알리듯 이백호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이건 뭔데.”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말. 다만 아주 잠깐이면 충분했다. 타닷. 가볍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고. 휘잇. 그 즉시 이백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민첩 수치가 대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체시력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순간순간의 단편적인 장면들뿐이었다. 주먹을 말아 쥔 이백호. 당황한 표정의 파멸학자. 그리고……. 솨아아앗-! 그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 마력의 장막. 로그라이크 세계관에서 마법사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인 그 연계 마법, ‘위험 감지 보조’와 ‘보호막’의 조합이었다. 보랏빛인 걸 보니 마력의 밀도는 거의 최상. 저 정도면 오우거의 주먹질도 한 번은 버틴다. 하지만……. 콰지지직-! 이백호의 주먹은 버티지 못했다. “……!” 이내 유리 파편처럼 깨져 나가는 마력 장막. 대신 상쇄되듯 이백호의 주먹에 어린 푸른빛의 기운도 빛을 잃었다. 파멸학자에게 유의미한 성과는 아니었다. 맨주먹으로도 증명하기엔 충분했으니까. 퍼억-! 찰나에 이루어진 수교환이 끝나며, 이백호의 주먹이 파멸학자의 턱주가리에 꽂혔다. 동시에 피와 함께 하얀 무언가가 튀었다. “봐, 역시 거짓말 한 거 맞았잖아.” 이백호는 허공에서 그것을 낚아채고는 혀를 찼다. “틀니가 아니면 왜 빠지는데.” 내가 봐도 이 새낀 미친놈이었다. *** “자네, 정말 끝을 보겠다는 건가?” 의외로 한 방 처맞은 파멸학자는 금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별다른 감정 없는 눈으로 이백호를 봤다. “더 하겠다면 피하지 않겠네.” “와, 법사 새끼가 근접전에서 이딴 말을 하는 건 또 처음이네?” 이백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었으나, 이와 별개로 상대를 쉽게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야 부상이 있던 건 이백호도 마찬가지니까. ‘얘는 왜 다친 거지?’ 아직 이해가 안 됐다. ‘위험 감지 보호막’이 깨진 뒤에 파멸학자는 추가로 보호막을 썼고, 이백호는 그것조차 맨주먹으로 깨뜨리며 강냉이를 털었다. 그리고 내가 본 수교환은 여기까지가 전부. “퉷.” 이백호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물었다. “방금 마지막에 그건 뭐냐?” “간단한 저주 마법일세.” “저주 같은 거에 걸릴 리가 없는데?” “자네 정도면 아는 수법일 텐데? 일시적으로 몸이 닿지 않았던가. 그때 회로를 연결해 자네의 육신을 매개체로 마법을 완성했네.” “아, 그래서 내 항마력이 안 통했구나.” 납득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이백호. 이제 보니 이쪽 세상의 고인물 마법사들은 대부분 쓸 줄 아는 수법인 모양이었다. 하, 게임에 저딴 사기 응용법은 없었는데. “근데 이것도 말이 안 돼. 그 잠깐 동안에 그걸 했다고? 다른 애들은 연결하는 데만 몇 초 이상 걸리던데?” “이 응용 술식을 만든 게 나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와, 이 지랄맞은 기술 만든 게 그쪽이었어?” 적수를 인정하듯 파멸학자를 노려보는 이백호. 그것은 파멸학자 쪽도 매한가지였다. “자네의 사정은 알고 있네. 몸 담고 있던 왕가에서 나온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고.” “그래서?” “기왕 만난 김에 자네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하지.” “뭔데, 말해 봐.” 이백호도 호기심이 생긴 듯 되물었다. 국밥집 NPC의 복수보단 이쪽이 더욱 궁금해진 모양. 왠지 기류가 묘해서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일단 저 친구부터 마무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나?” 파멸학자가 그리 말하며 내게 시선을 옮겼다. 하, 이런 전개는 또 예측 못 했는데. ‘니미럴.’ 가슴이 콩닥인다. 파멸학자 하나로도 목숨이 간당한데, 여기서 이백호까지 거든다면 나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한수’임을 밝히고 정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그건 안 돼.”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뒀던 나지만, 다행히 이백호는 파멸학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죽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든가 하는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럼 내가 네 의도대로 움직이는 거 같잖아.” 단순한 주도권 잡기였다. 한데 그런 태도가 갑갑했을까. 파멸학자가 다루기 힘든 애를 설득하듯 말했다. “저자는 이제 귀족일세.” “근데?” “자네가 왕가와 틀어진 이상 결국 잠재적 적이란 말일세.” 내가 듣기에도 제법 합리적인 말이었다. 다만, 다행히 이번에도 이백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얘는 내가 알아서 컨트롤할 자신이 있으니까 신경 꺼.” 저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진 뻔했다. 얘는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왕가랑 얼마나 친해지든 한순간에 병신을 만들 자신이 있는 거겠지.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정체가 들킨 게 좋은 쪽으로 작용한 셈인가……?’ “그렇다면…… 자리를 옮겨야겠군.” 결국 파멸학자도 이백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날 조지겠다는 욕심을 내려놨다. 하긴, 놈 입장에선 아무래도 나보단 이백호가 훨씬 중요할 터. “아, 미리 말하지만 텔포는 안 탄다?” “텔포……?” “순간이동 말이야. 차라리 네가 앞장 서. 내가 따라갈 테니까. 헛짓거리는 해도 좋은데 그땐 꼭 뒈질 각오는 하고서 하고.” “……그럼 먼저 움직이지.” 이내 파멸학자가 뒤에 있던 시종 같은 사내와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유 마법이었다. “뭘 봐? 알아서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이내 파멸학자가 이백호를 몇 초간 빤히 바라보더니 불길 너머로 사라졌다. 이거로 한 번의 위기는 넘긴 셈. 다만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이백호의 특징 중 하나는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니까. “야.” “……왜.” 나는 쫄은 티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백호가 피식 웃더니……. “너 내가 한 번 살려준 거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왠지 머리가 멍해졌다. ‘날 죽이지 말라고 했던 거, 그냥 주도권 잡기가 아니었던 건가?’ 글쎄, 아직도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감동일지도.’ 나는 재 묻은 콧등을 손으로 닦아냈다. “쓰읍.” 거, 새끼. 정 같은 거 안 쌓는다고 하더니만. *** 이백호와 파멸학자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븐이 도착했다. “얀델 씨!” 파멸학자의 이름값 덕분인지 레이븐의 뒤에는 기사단 일개 대대와 종군 마법사들까지 상당수 섞여 있었다. “구하러 왔……. 어? 왜 아무도…….” 파멸학자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표정을 내짓는 레이븐. 뒤따른 왕가 측 병력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나는 오해를 사기 전에 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 그 암살 사건 때 나타난 ‘그자’가 와서 파멸학자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갑자기 둘이서 싸우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혹시 그자가 파멸학자를 적대하던 이유도 아시는지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최대한 사건을 간소화한 이유는 하나였다. 혹여나 이 정황만 갖고 이백호가 날 도와준 거라 생각할 자도 있을지 모른단 판단. “정말로 운이 좋으셨습니다.” 워낙 거물들이 얽힌 사건이다 보니 기사들은 내 진술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는 먼저 나가 보지.” 이후 왕가 측 병력은 주변을 조사하기 위해 남았고, 나와 레이븐은 잠시 이를 지켜보다 바깥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우릴 반긴 것은 먼저 나와 있던 생존자들이었다. 나와 레이븐이 고생해서 살린 열댓 명의 목숨. 다들 시커멓게 재 묻은 얼굴로 나에게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물론 그 시간은 짧았다. 그야 감사 인사 하나 안 받는다고 사람이 죽거나 하진 않잖아? “어? 어딜 가요?” 내가 발길을 돌리자 의문을 표하는 레이븐. 솔직히 말해서 방금 일로 진이 다 빠져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약속을 했었다.” “……약속이요?” 불 속성 장비와 소모품을 받는 대신, 레벤 아르페건이란 마법사에게 나는 말했다. 여력이 된다면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고. 레이븐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내지었으나, 나를 말리거나 무의미한 짓이라며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사람들을 돕고 있을게요.” 뭐,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런 건가? 나는 기특하다는 듯 레이븐을 한 번 내리깔아 봐준 뒤 불길 너머로 다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약 12시간 뒤, 홍수라도 날 것처럼 비가 쏟아지며 화재가 진압되기 전까지. 솨아아아아아아-! 총 17명의 목숨을 더 구해냈다. 영화나 만화에서는 메인 에피소드로 쓰기도 어려울 만큼 초라한 숫자였지만…….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그게 내 최선이었다. 256화 오픈월드 (5) 파멸학자의 시그니처인 화염 마법은 놈이 지닌 악명만큼이나 지독했다. 도시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력으로도 고작 불길이 더 이상 옮겨붙지 않게 하는 것이 전부. 결국 화재가 진압된 건 일곱이나 되는 학파의 마스터가 협심해서 마법을 펼친 다음이었다. 솨아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비. “와아아아아아!” 힘을 잃고 꺼져가는 불길을 보며 누군가는 환호를 내질렀고, 누군가는 조용히 안도했으며, 어느 누군가는 소리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참고로 나는 가장 후자인 경우였다. “……니미럴.” 드디어 끝났네. 뜨겁게 달아올랐던 육체가 빠르게 식으며 덩달아 긴장도 풀린다. 나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하.” 미적지근하게 식은 지면. 밤새 흩날리던 재가 빗물에 섞여 끈적거린다. 사람이라면 불쾌함을 느끼지 않기가 어려울 환경. 다만, 다시 일어나긴 귀찮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나 있었을까. “아오, 놀래라! 다치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 눈을 떠보니 위로 레이븐이 보인다. “……근데 진짜 어디 다친 건 아니죠?” “그냥 지쳐서 쉬는 중이니 말 걸지 마라.” “쉴 거면 차라리 돌아가서 제대로 씻고—” “조금만 이따가.” “그래요. 고생했으니까…….” 이후 몇 분 정도 더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야 어느새 물이 귀까지 차올랐거든. 여기 배수가 잘 안 되는구나. “……너도 꼴이 말이 아니군.” “얀델 씨가 할 말은 아닌데요?” 우리는 시커멓게 잿물이 흐르는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 멀쩡한 도시 구역 쪽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보였다. 잃어버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자도 있었고, 혹여나 생존자가 있을까 잔해를 뒤적이는 자도 있었다. 모두 우리와 비슷한 꼴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이 몇 시지?” “곧 정오예요.” 2일 정오라……. 조금 웃기다. 원래는 이 시간대에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건 탐험가들밖에 없었는데. “비가 멈췄네요.” 마법사들이 마법을 해제했는지, 하늘을 가득 메우던 먹구름이 흩어지며 따스한 빛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비요른!!” 저 멀리서 미샤가 보였다. 아이나르와 에르웬도 옆에 있었다. 밤중에 소식을 듣고 얘네도 와있던거구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꼴인 걸 보니, 얘네도 밤새 불을 끈다고 악전고투를 했던 모양. “……어디 다친 덴 없는 거징?” 잔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미샤는 별말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야, 얀델 준남작님……!” 지난밤 내게 구조되었던 몇 안 되는 생존자들. 하긴, 이들 앞에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을 수는 없었겠지. “왜 아직도 이 근처에 있는 거냐? 쉬러 가지 않고.” 내가 이해 안 된다는 듯 말하자, 생존자들이 우물쭈물하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떠났다. 뭐야, 진짜 저 몇 마디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그럴 거면 귀족이라고 무서워하지나 말든가.’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불에 집어삼켜지지 않았던 멀쩡한 동부 구역이 나타났다. 일단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꼴로 마차를 타고 집에 갈 수는 없지 않나. 애초에 집까지 몇 시간은 더 걸릴 텐데, 당장은 쉬고 싶다. ‘카르논은 1박에 얼마려나…….’ 명색이 황도이니 상업지구 컴멜비보다 훨씬 비쌀 것이 예상되지만, 오늘은 그 가격을 알 수가 없었다. 무료였거든. “지배인님께서 오늘 하루는 누구에게든 돈을 받지 말라고 지시를 하셨습니다.” 근처의 모든 숙소가 화재를 막으려 유입된 도시민들과 탐험가들을 위해 돈을 받지 않고 방을 내주고 있었다. “올라가시기 전에 이쪽에서 명부 작성을 먼저 해주셔야…….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 “그런데.”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그 누구보다 가장 노고가 많으셨다고……. 이 도시를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귀족 작위 덕인지 명성 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카운터를 보던 직원은 남은 객실 중 제일 넓은 걸 통째로 내게 배정해 주었다. 다른 쪽은 열댓 명이서 하나를 쓴다던가? 거실 하나에 방 세 개, 욕실도 두 개나 됐기에 다섯이서 한 객실을 쓰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일단 욕실 하나는 비요른 네가 써랑. 나머지는 우리가 돌아가면서 쓸 테니까.” “고맙다.” 팀원들의 배려를 사양치 않으며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최대한 빨리 씻었는데도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빌린 장비들은 나중에 깨끗하게 씻어서 돌려주기로 하고…….’ 벗어둔 장비를 방 한구석에 모아서 정리만 해둔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황도 카르논의 객실답게 푹신한 침대.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들었다. ‘그나저나 미궁 쪽은 어떻게 됐으려나? 군대는 이겼으려나? 그쪽도 궁금한데…….’ 뭐, 그건 내일 차차 알아봐도 되겠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수마가 찾아왔고, 이내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군이다!!” 지하로 내려갔던 왕가의 군대가 복귀했다. 덕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창문으로 내려다본, 도로를 타고 왕궁으로 향하는 그들에게서 전투의 흔적은 눈을 씻고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 만 단위의 인파가 횃불에 의지하며 줄줄이 걷고 있다. 모두 노아르크 출신들로……. “이쪽일세.” 최선두에는 의문의 노인이 앞장 서고 있으며, 도시의 통치자인 성주는 그 바로 뒤에서 노인을 따라가는 중이다. “성주님, 정체도 모르는 자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향해야…….” “말조심하게. 지금 우리에게 믿을 건 저자뿐이니.”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이런 샛길을 알고 있다니요? 너무 수상합니다. 어쩌면 왕가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일지도—” “그만.” 성주는 단호하게 신하의 말을 잘랐다. 노인을 수상히 여기는 건 이해한다. 강한 불안을 내비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왕가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이건 너무 심한 비약이다. 그야 저 노인이 아니었다면 이미 자신들은 노아르크라는 도시와 함께 사라졌을 테니까.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믿어보세.” 성주는 무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성주님, 왕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군대가 들이닥친 건 자정이 막 지났을 때였다. 딱 도시의 모든 전력이 미궁에 들어간 시기. 왕가의 군대는 그동안 이 도시를 지켜주던 결계를 박살내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도시민들을 모두 데리고 피난처로 향한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으나, 성주는 도시에 남은 모든 이를 이끌고 성채 아래의 피신처로 숨었다. 수천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피신처로 머나먼 과거에 왕가가 건축한 곳이었다. 성채 노아르크는 한때 왕성으로 기능하기도 했었으니까. 마녀의 저주가 세상을 멸망시킨 그 무렵. 대륙 각지에서 모인 인류는 땅 아래에 도시를 세웠고, 수호 결계를 확장해 지상으로 나가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곳에서 역사를 연명했다. 미궁 포탈이 존재하는 것도 그래서고. [예, 광장에서 진을 치고서 움직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포탈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다행이라 할진 모르겠으나, 왕가는 피난처에 숨어든 그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였다. 포탈이 열리면 탐험가들이 나올 테니까. 일단 왕가 측에선 탐험가들을 해치우는 게 급선무다. 피난처야 그다음에 부숴도 문제 없을 테니. [지상에 연락을 보내라.] 결국 성주는 지상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파멸학자가 황도를 불태우며 시선을 끌어줬다. 하지만……. [지독한 놈들.] 군대가 도시로 회군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 희망이었던 파멸학자도 무슨 일인지 언제부턴가 연락이 아예 끊겼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11 : 41] 포탈이 열리고 미궁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던 전력이 돌아오기까지 20분을 남겨둔 시각. [제군은 들어라.] 성주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 사람의 심정으로 남은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나마 당시에 그가 할 수 있던 최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유일한 활로. [개문하라!!] 시침이 정오를 가리키기 직전, 성주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피난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앞에서 대기 중이던 군대를 필사적으로 뚫으며 광장으로 향했다. 직접 그 광경을 보니 더 절망적이었다. […….] 기사만 무려 수천 명에 병사는 그 이상. 마법사와 신관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되돌아가긴 늦은 상황. [포탈이 열린다!!] [준비하라!!] 이내 광장 중심부에 푸른빛이 모여들며 포탈이 열리더니 탐험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왕가! 왕가의 군대다!] [젠장! 어쩐지 안에 아무도 없더라니!] 탐험가들은 도시로 돌아오자마자 자신들을 반기는 군대에 당황했지만, 미궁에서도 어느 정도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납득이 빨랐다. [뭐 해! 이대로 죽을 거야?] [어서 칼 꺼내 들어 새끼야!] 탐험가들은 곧장 무기를 꺼내며 응전할 태세를 갖추었고, 성주 역시 병력을 이끌며 외곽에서 최대한 시선을 끌었다. 그러면서 내린 명령은 오직 하나였다. [도망쳐라! 지상으로!] 그가 선택한 최선의 계획. 각자도생. 조금이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 하지만 그 모습이 눈에 띄었을까? [과연, 무엄한 반역도의 수장은 이런 얼굴이었구려. 생각보다 멀쩡해서 놀랐소.] 머지않아 한 명의 기사가 그의 앞에 당도했다. 누군지는 그 기사의 검에 맺힌 눈부신 오러가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빛의 기사……!] 제1 왕실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왕가의 수호자라는 또 다른 이명이 있을 정도로 이 왕국에서 큰 의미를 가진 실력자. [걱정 마시오. 그대가 이곳에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일단 혹시 모르니 사지부터 자른 뒤 잘 살려서 데려가드리리다.] 빛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기껏해야 이십대에 몇 년 정도 탐험가 생활을 하며 5층까지 올라갔던 성주로서는 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후우우웅-! 검의 궤적을 따라 섬광이 피어나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번뜩-! 찰나의 섬광이 잦아들고, 눈을 떴을 때. “……?” 성주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팔도 움직이고, 땅에 붙은 두 다리도 멀쩡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런 의문을 품던 그때. [그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네.] 그 노인이 수십 미터 상공에서 나타났다. 어느샌가 주변의 전투는 멈춰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빛의 기사가 성주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손목을 바르르 떨고 있듯, 이곳에 자리한 어느 누구도 남을 해치기 위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마치 그게 이 공간의 규칙이라도 된 것처럼. [그럼 슬슬 다 모였겠다, 이만 가보세.] 이내 노인이 손짓하자, 도시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웅혼한 마력. [다행히 이것도 아직 잘 작동하는구만 그래.] 노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 성주는 어두운 지하 통로 속에 와 있었다. 비단 성주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노아르크 측의 모두가 함께였으며…….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중순간이동? 아니, 이렇게 많은 인원을 옮기는 게 가능할 리가……] 극소수이지만 같이 딸려온 기사들도 존재했다. [한 번에 하도 많이 옮기다 보니 약간은 오류가 있었나 보군. 아, 일부러 데려온 건 아니니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죽이게.] 성주는 홀린 사람처럼 노인의 말대로 지시를 내려 기사들을 해치웠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냐는 물음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걷기 시작한 노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까?” 한 사내의 음성에 성주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놀랍게도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노인에게 먼저 존칭을 써가며 말을 걸고 있었다. “글쎄, 의문이 없다면 답도 없는 법이지.” “알아서 생각하란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노아르크의 세력을 양분하며 많은 부분에서 대립했던 단장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 모습이 이질적인 한편. 성주는 이 노인에 대한 의문을 더욱 키웠다. ‘대체 이자는 누구지?’ 단장에게 가서 물어볼까도 싶었다. 순간이동이 되자마자 단원들에게 경거망동치 말고 가만 있으란 지시를 내린 것도 그 아닌가. 뭔가 아는 게 있으니 그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자가 순순히 말해줄 리가 없겠지.’ 성주는 단장에게 정체를 캐묻는 대신,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까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의외로 노인은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아, 그 순간이동 말인가? 도시에 있던 고대 마법진의 힘을 빌린 것뿐이니 그리 대단하게 보진 말게. 일시적으로나마 전투를 멈출 수 있던 것도 마찬가지고. 그만큼 노아르크는 잘 설계된 도시니까.” “전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마는…….” “껄껄, 그걸 아는 게 이상한 거니 낙심하지 말게. 그래서 궁금한 건 그게 전부인가?” 성주는 노인에게 이것저것 질문하였고, 노인은 목적지가 어디냐는 질문 외에는 잘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자, 도착했군.” 좁았던 통로가 점점 넓어지더니, 경사가 진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여긴 대체…….” 언덕을 타고 오르니 바깥이 나왔다. 성주는 단언코 처음 보는 광경이라 말할 수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 숲, 흐르는 개울과, 지저귀는 새, 촉촉한 땅 위로는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벽이 없어……?” 어디를 보든 마땅히 보여야 할 성벽이 없다. 쉽게 말해, 최후의 성채라 불리는 라프도니아 내부가 아니라는 뜻. “여,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성주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노인이 있는 곳으로 되돌았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턱가로 노인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축하하네. 자네들은 이제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도시 밖에 나온 사람으로 기록될 걸세.” 개벽 154년, 8월 2일.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시대가 마침내 끝을 고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이었다. 257화 클랜 (1) 왕가의 군대가 복귀한 뒤. 사람들은 군대가 실존했고, 차원광장에서 보이지 않던 이유는 빈집털이를 하러 지하로 내려갔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다만……. ‘어떻게 된 거지? 그 결과까지 아는 자는 없었다. 따라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겼는지, 졌는지부터 시작해 실은 왕가가 지하도시와 싸우는 척만 하는 거라는 근거 없는 음모론까지. 매일 아침 호사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설들이 생겨났고, 결국 그로부터 며칠 뒤 왕가에서는 정식으로 도시 곳곳에 대자보를 붙였다. 내용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랬다. 개쩌는 우리는 승리했고, 노아르크마저도 정복했어. 그러니까 걱정 좀 그만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대자보가 어느 정도 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가정하에, 몇 가지 빠진 점을 보충해 보자면……. ‘확실해. 일단 전투는 없었어.’ 왕궁으로 복귀하던 기사들의 모습에서는 전투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 노아르크놈들이 도망친 거겠지.’ 하면, 그들은 어디로 도망을 쳤을까? 사방이 성벽으로 가로막힌 세계. 지상으로 숨어들었단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만한 인원이 땅 위로 올라오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면 아직 이 아래에 있다는 건데…….’ “비요른! 그만 놀고 얼른 와서 이것 좀 날라라!” 그래, 짐이나 옮겨야지. 백날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겠어? 광대가 멤버로 있는 원탁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 따라서 상념을 끝마치고서 몸을 움직였다. “아, 침대는 이쪽에 놔주시겠어요?” 현재 내가 있는 장소는 레아틀라스 교단 산하의 어느 고아원으로, 이삿짐센터 직원에 빙의해 철거 예정인 건물에서 짐들을 꺼내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공적치를 쌓아야 하니까. 가끔 교단에서 할 만한 의뢰들이 뜨면 시간이 남는 사람들끼리 가서 해치우고 있다. “아이나르! 몰래 쉬고 있으면 안 들킬 줄 알았냥!” “쉬, 쉰 게 아니라 꼬맹이들과 놀아준 거다!” “으아아아앙! 이 언니가 내 인형을 부쉈어!! 인형을 죽인 살인자!!” “그건… 사람의 급소를 알려 주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기는 했으나, 한두 시간쯤 지나자 짐 옮기기가 모두 끝났다. 따라서 오늘 의뢰도 이쯤에서 종료. 이후로는 교단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는데, 그때 미샤에게서 신기한 사실을 들었다. “그거 아냥? 오늘 간 그 고아원이 거기인 거?” “거기라니?” “그 있지 않냥. 드왈키가 어린 시절에 잠시 지낸 적 있다던. 내일 철거 예정이라던 그 오래된 건물이 그곳이었당.” “……그랬군.” “아무튼, 그냥 그렇다공! 나는 간당! 아, 그리고 오늘은 좀 늦으니 저녁은 각자 알아서 챙겨먹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해산했다. 미샤는 옛 동료 중 하나와 약속이 있다며 떠났고, 아이나르는 성지로 향했다. 그리고……. “후후, 이제 저희 둘만 남았네요?” “나도 들를 곳이 있으니 먼저 집에 가 있어라.” “……에?” 별다른 일정이 없던 에르웬은 집으로 보낸 뒤, 홀로 길드를 찾았다. 한때 매일 같이 붙어다니던 호위 기사는 없었다. 그야 지난달을 끝으로 다들 떠났거든. 상부에서 이만하면 됐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던가?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아마 노아르크 공략전 때문에 불러들인 거였겠지.’ 만약 노아르크놈들이 다들 멀쩡히 도망쳐 이 지하 어딘가에 있는 거라면, 다시 기사들을 보내주진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크게 기대하진 않기로 했다. 그래도 한 달간 붙어 지낸 정이 있다고, 기사 중 한 명이 떠나기 전에 말해주지 않았던가.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만약 암살자들이 다시 온다면 그때도 노아르크보다는 대형 클랜의 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상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게 호위를 붙인 ‘사슴뿔’은 광대가 말했던 ‘암살’이 대형 클랜의 짓을 뜻한 거라고 여긴 듯했다. 하긴, ‘곧’ 암살자가 간다고 하기엔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으니까. [근데 그러면 더 옆에서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대형 클랜의 목표는 왕가일 텐데?]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왕가에선 대형 클랜이 다시 여론전을 펼치려 해도 피해 없이 막아낼 준비를 모두 끝마친 듯했다. 그러니 이제 날 지켜줄 필요가 없단 거겠지. ‘뭐, 나도 없는 쪽이 편한 부분도 있으니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하며 이동하고 있자니, 어느새 탐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다만 이전처럼 번호표를 뽑고 기다릴 필요는 없다. 애초에 탐험가들도 얼마 없을뿐더러…….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 신분 확인이 모두 끝났습니다. 지부장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기껏 얻은 귀족 작위인데 이런 식으로라도 혜택을 누려야지. “지부장이 아니라 지역장실로.” 직원이 혹시 선약을 잡고 온 것이냐 물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이야 귀족의 권력으로 찍어 눌렀다. “너희는 반역도인가?” 말이 안 통하는 바바리안과,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귀족이 합쳐진. 이름하여 바바리안 노블레스 모드. “……얼른 모시겠습니다.” 이내 4층으로 올라가자 직원이 노크를 하며 내 방문을 알렸고, 머지않아 안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나는 즉시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탁상에 발을 올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인사.” “…….” “안 하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무용 탁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을 지역장이 일어나 인사를 해왔다. “얀델… 준남작님… 오셨습니까…….” 거,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그래, 앉아라.” 내가 앉는 걸 허하자 그제야 지역장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벌써 몇 번이나 있던 일이지만 아직도 짜릿하다. 이게 권력의 참맛인가? “……오늘은 무슨 용무이신지요?” 탐험가 길드의 7지역장, 나일 어반스. 나와는 과거부터 이런저런 악연이 있었던 놈이 과거와 달리 정중한 말투로 내게 물어온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원래는 내게 하오체를 쓰며 맞먹으려고 했으나 귀족 모욕을 하는 것이냐며 내가 노발대발하자 결국 이런 말투를 쓰게 됐다. “모집 공고에 응한 탐험가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 “그런 건 아래 지부장실에서도 충분히…….” 이 아저씨는 또 뭐래. 내가 굳이 7구역 본지부까지 오는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인데. “귀족한테…… 말대꾸?” “……얼른 확인하겠습니다.” “혹시 옛날처럼 실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네가 직접 해라. 사람 시키지 말고.” “예…….” 이후 지역장이 내가 지시한 일을 행하기 위해 아래로 향했고, 나는 탁상에 비치되어 있던 과자들을 씹으며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여기 있습니다.” 지역장이 서류 몇 장을 쥐고서 다시 올라왔다. 고생했단 치사의 말도 없이 얼른 낚아채서 읽어 보니, 이틀 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지원자가 딱 한 명 늘었는데, 그 한 명마저도 별로군.”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윗사람으로서의 아량도 가끔씩 보여주며, 나는 다시금 서류를 읽었다. 며칠 전에 올린 동료 모집 공고에 지원한 탐험가는 오늘까지 정확히 31명.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지원자가 적다. 요즘 시국에 미궁에 들어가려는 탐험가 숫자가 얼마 안 되는 탓이다. ‘그래도 클랜들이 워낙 박살나서 이것보단 더 많이 지원할 줄 알았는데.’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류를 내려놨다. 서류상이긴 하지만 면접 단계까지 갈 만한 탐험가는 없었다. 찾던 ‘특수 직업군’도 아직 보이지 않았고. 결국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저 그런데…….” “질질 끌지 말고 말해라.” “혹시 특별히 원하시는 직업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런 건 딱히 없고, 능력만 좋으면 된다. 근데 그건 왜?” “지원자 이름 중에 유명한 이름이 보여서 그랬습니다.” 이후 지역장은 그 탐험가가 얼마나 능력이 좋고, 신의가 넘치며, 장래가 유망한지에 대해서 말했다. 아무래도 놈은 빨리 내게 동료를 찾아주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만!!” 나는 서류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지역장실을 박차고 나섰다. 아무리 스펙이 휼륭하다고 해도 그렇지.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한스를 팀에 넣으라니 미친 건가? *** 화재가 발생하고서부터 이 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한 일들은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신전 공적치 노가다. 성지에 들러 부족장과 대련. 상업도시 컴멜비를 돌아다니며 물가 체크. 그러다가 사흘 간격으로 길드에 가서 지역장을 쪼으며 스트레스 해소. 나름 생산적인 일정들을 보냈으나, 당장 이렇다 할 성과가 난 쪽은 없었다. 화폐 가치는 한동안 계속 오를 듯하니 일단 킵. ‘신관도 최소 공적치 도달까지 두세 달 정도는 더 걸릴 거 같고…….’ 동료 영입 쪽도 마찬가지다. 6층에서 꼭 필요한 특수 직업군은 나타날 기미가 없으며, 10명을 채우기 위해 남은 두 자리도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 전에 미궁이 개방되면 그냥 여섯 명이서 올라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보통 팀을 두 개 이상으로 나눌 시에는 5층에서 만나는 형태를 취한다. 인원이 5인을 초과할 시 4층을 지나치는데 상당한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탓이다. 시간이 금인 탐험가에게는 뼈아픈 손실. ‘……그래도 셋셋으로 나눠서 올라가기엔 아직 불안한 점이 많으니까. 그냥 2층에서 만나서 안전하게 올라가는 게 맞겠지.’ 물론 조금 이른 고민이기는 하다. 어차피 미궁 진입이 몇 달 더 미뤄지면 전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중요한 건 정세가 언제 다시 안정화가 되냐는 것. ‘잘하면 오늘 알 수도 있겠지.’ 고스트 버스터즈가 열리는 15일. 나는 아침부터 커뮤니티에 입장할 준비를 하며 성지로 향했다. 이번엔 그냥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GM.’ 무려 GM이 나를 악령으로 의심 중인 상황. 아무래도 GM은 오늘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 분명 내가 녀석이라면 그랬을 테니까. 커뮤니티에서 보내는 12시간. 바꿔 말하자면, 현실에서의 12초. 항상 생각했지만, 이 짧은 순간은 커뮤니티 이용자에게 있어 매우 큰 약점이다. 12초간 현실과 차단이 되니까. 칼로 목이 찔려도 일어나지 않기에, 이 순간을 잘만 이용하면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역시 들어가지 않는 건 하책이야.’ 나는 커뮤니티에 입장하기로 결정했다. 왕가와 노아르크 사이에 대형 사건이 있었던 만큼 나올 정보들도 많으리라는 판단. 게다가 지난번에 GM의 오른팔인 ‘소울퀸즈’도 신입으로 원탁에 들어왔지 않은가. ‘수사자’가 불참한 것으로 말미암아 추후에 나와 수사자까지 연결 짓는 일도 가능해질지 모른다. ‘……라는 건 좀 비약이려나?’ 아무튼, 논지는 이것이다. 인생사 유비무환이라고. GM이 그 12초를 노려서 확인을 하려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를 안 할 이유는 없는 것. “비요른, 나를 불렀다고?” “아,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이걸 얼굴에 써보겠나?” 성지에 도착한 나는 카론을 불러 예전에 핏빛 성채에서 얻은 숨겨진 아이템, ‘황금 가면’을 건넸다. “이게 뭐냐? 반짝여서 맘에 들긴 하는데…….” “30일 동안 얼굴을 바꿔주는 마도구다.” “응? 근데 그런 걸 왜 나한테?” “네가 나랑 가장 체형이 비슷하니까.” 이후 나는 카론에게 내일 아침까지 내 얼굴을 한 채로 도시에서 술을 마셔 주길 부탁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대체 왜 그런 귀찮은 짓을?” “밤중에 잠시 동료들 몰래 갈 곳이 있다.” “……그 수인이 너를 잘 이해해 주지 못하는 모양이군.” 응? 여기서 수인이 갑자기 왜 나와. 무슨 말인가도 싶었으나, 이어진 뒷말에 바로 이해가 됐다. “자손을 낳고자 하는 건 전사의 본능이지. 오늘 성지에 온 것도 그래서인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준비해 둔 변명보다 이쪽이 훨씬 더 비밀 유지가 잘 될 듯해서였다. “아무튼, 이 부분은 걱정 마라! 그 수인 여자가 와도 의심 못하게 잘 해보겠다!” 아니, 걔가 오면 무조건 걸릴 건데. 그래서 그냥 밤새 밖에서 술이나 마시라 한 거고. “믿겠다. 너는 나 다음으로 현명한 전사니까.” “여, 역시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기쁘다!” 이후 주의 사항들과 이동 동선에 대해 고지를 한 뒤, 나로 변한 카론에게 내 장비를 입혀 도시로 내보냈다. 그리고……. 「캐릭터가 ‘황금가면’을 사용했습니다.」 「30일 동안 캐릭터의 외형이 변화합니다.」 나도 한 번 가면을 얼굴에 썼다가 떼며 카론의 얼굴로 바꿨다. 그야 내 얼굴로 성지에 있으면 눈에 띄니까. 두 장소에서 목격담이 나오기라도 하면 오늘 한 일은 전부 의미가 없어질 터. ‘일단 나도 도시로 돌아가긴 해야겠네.’ 혹여 성지에 있다가 카론의 지인들에게 내 정체를 들킬 수 있기에, 얼른 카론의 장비를 입고 수풀에서 나와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숙소나 잡아 방에 틀어박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후, 제발 내 얼굴로 이상한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는데. 258화 클랜 (2) 이한수의 방. 이젠 올 때마다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다. 그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한때 내 보금자리였던 이 방도. 딸깍- 우선 본체 전원을 눌러 커뮤니티를 켰다. 그리고 글들이 올라오기를 잠시 기다렸다. 원탁이 열리는 3시까지는 할 게 그런 거밖에 없으니까.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이번에도 이백호는 없었다. 후, GM한테 벤을 풀라고 협박하는 걸 보면 어떻게든 돌아올 방법을 찾고 있긴 한 거 같던데 아직인가 보네. ‘얘는 귀환이 최종 목표랬지…….’ 과거에 이백호가 밝힌 포부를 떠올리며, GM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봤다. 과연 GM의 목표는 무엇일까? 역시 귀환이려나? ‘……근데 그러면 이백호는 왜 벤을 한 거지?’ 음…… 잘 모르겠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아무튼, 헛고생한 것만 아니면 좋겠네.’ 부디 이번에 카론을 대역으로 삼은 계획이 잘 통해서 의심이 풀리기를 바라며 나는 GM에 대해 알고 있는 점들을 정리했다. 몇 개 되지 않았다. 일단 마법사라는 것. 그리고 ‘엘프누나러브’라는 닉네임을 커뮤니티 내에서 쓸 정도로 ‘엘프누나’의 팬이라는 것. 아니, 잠깐만. ‘……내가 그 사람인 걸 알게 되면 어쩌려나? 막 이것저것 도와주고 그러나?’ 문득 이걸 이용해 든든한 후원자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의 끝은 결국 원점이다. ‘절대 안 돼.’ 어찌 보면 이백호에게 내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으려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GM의 의도를 모른다. 심지어 GM은 이미 한 번 ‘비요른 얀델’에게 커뮤니티 입장 알약을 보낸 적도 있지 않은가. 쉽게 말해, 플레이어면 커뮤니티에 초대하려고 접근한 것도 아니라는 뜻. 따라서 철저하게 내 모습을 감춰야 한다. 설령 좋은 의도란 걸 알게 돼도 마찬가지다. 사람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나. 누군가에게 내가 악령임을 밝히는 건 스스로 내 목줄을 건네주는 행위나 다름없다. 안 좋은 사례를 직접 본 적도 있고. [좋아, 원한다면 네가 있을 곳을 없애주지. 한스 크리센은 악령이다!] 과연 한스 G가 당한 걸 내가 똑같이 당한다면, 나는 그때 어떤 선택을 내릴까? 강요된 선택을 거부할 수 있을까? 딸각, 딸각. 이만 상념을 지우고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꽤 시간이 흘러서인지 각 게시판들에서 여러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웹서핑을 하듯 눈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커뮤니티가 열리고 30분쯤이 지난 시각이 되었을 때였다. [노아르크 출신인데, 너희한테 한 가지 알릴 게 있어.] 그 글이 올라왔다. *** 게시글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됐다. -혹시 노아르크 출신이라고 벤을 때리는 건 아닐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이건 지상이든 지하든 진영과 상관없이 다 알아야 한다고 해서 글을 남겨. -지금 우리는 바깥에 있어. -성벽 안이 아니라 진짜 바깥 세상 말이야. 세계관의 근간을 부정하는 충격적인 내용. -아마 너희는 이게 말이 되는가 싶겠지? 근데 사실이야. 우리는 왕가를 피해 바깥으로 나왔고,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 -시간이 지나며 마녀의 저주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건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 -지금 바깥은 정말로 멀쩡해. 식물들도 자라고 가까이 다가가면 풀잎을 먹는 벌레들도 보여. 야생동물들도 마찬가지고. 글 작성자는 이어서 바깥이 어떤지에 대해 많은 글자를 할애해 적었고, 그다음에는 일지 같은 식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서술했다. 나는 천천히 그 긴 글들을 전부 읽어내렸다. 그리고 첫 감상은 이거였다. ‘암만 봐도 어그로 끌려고 개소리 하는 거 같진 않은데…….’ 단순한 장난 같지는 않다. 하긴 애초에 벤 당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올린 글이 장난일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댓글 창은 난리가 났다. [Brutalizer X: 옜다, 관심.] [arolf5205: 뭔 글인가 싶어서 왔다가 위에만 보고 바로 쭉 내림. 설마 이거 믿는 저능아는 여기 없지?] 관종이 대충 지어낸 거짓말로 치부하는 최상단의 댓글들을 시작으로……. [ryanzeus31: 근데 이게 진짜면, 왕가는 좆된 거 아님? 정말 마석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바깥에 있는 거라면 이 병신 같은 도시가 유지될 리 없잖아.] [└furryking1955: 어쩌면 그래서 감춘 게 아닐까? 걔네가 이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글의 내용을 어느 정도 믿으며, 그 이후의 일을 우려하는 자들. 그리고……. [Gareth: 와, 그 노인네가 나타나서 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바깥으로 나간 거였어?] 무언가 아는 게 있다는 듯 댓글을 남기는 자들. [└NIKAMOTO: 노인네? 그게 뭐죠? 정중하게 정보 공유 좀 부탁드립니다.] [└Gareth: 노아르크 새끼들이 나오면 다 썰어 버리려고 포탈 앞에서 대기 중인데, 갑자기 노인 한 명이 나타나더니 텔포타고 싹 데리고 튀었음] [└Kni8htofroom: 구라 칠 거면 제발 조금은 공들여서 해라. 메스텔포로 그 인원을 어떻게 이동시켜?] [└Gareth: 몰라,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나 이제 어쩌냐. 하, 왕가 쪽이 편할 거 같아서 기사 트리 탔는데. 이제 왕가 망하는 거?] 참고로 이 댓글을 시작으로 여론은 서서히 움직여 게시글이 사실이라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토벌전에 참가했던 왕가 측 병력들이 하나둘 나타나 증언을 시작한 것이다. [└amulet: 믿기 어렵겠지만, 순간이동으로 도망친 건 사실입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이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kongkong2: 이분 몇 년 전부터 기사단 쪽 글만 쓰던 분인데? 그럼 이게 다 진짜라고?] 게시글이 인기 게시글로 등록되며 왕가 측 목격담이 쏟아져 나왔고, 거기에 이어 노아르크 출신들도 하나둘 모습을 내비쳤다. [EXBlunt: 캬, 바깥 공기 좋네. 진작 아래로 내려간 우리가 승리자인가?] [xxfblz: 응, 우리는 마석 없이도 잘 살아. 너흰 세금 내면서 개고생해.] 슬슬 나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깥이 멀쩡하다는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벽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를 보며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납득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이걸 왜 말해 주는 거야?’ 커뮤니티에 노아르크 출신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왜 자기들 상황을 공유한단 말인가. 그게 같은 플레이어들을 위한 도리라 여겼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정말 그랬다면 내가 1층에 갇혀 죽을 고생하며 길을 뚫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놈들은 철저하게 침묵했다. 기습 계획을 장난식으로라도 발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상의 탐험가들 대부분이 작살 났다. 그중엔 당연히 플레이어들도 상당수였고. ‘……그럼 노아르크 쪽에서 지시한 일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놈들 입장에선 그럴 만한 동기도 있다. 아예 바깥으로 도망쳤다고 구라를 쳐버리면 왕가의 추적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테— ‘근데 바깥이 멀쩡한 게 아니라면 어차피 왕가에서 속을 일은 없지 않나?’ 이내 금방 모순과 부딪힌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 진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댓글을 남겼다. [Elfnunna: 노아르크 출신들한테 질문 하나만 할게요. 정말 바깥이 멀쩡하고, 정말 지금 거기에 가 있는 거면 왜 이걸 여기서 말해 주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내내 가만히만 있다가.] 머지않아 대댓글이 달리는 알림음이 떴다. 다만……. [└FIREWORK:└ 와, 진짜 엘프누나임? 저 불이능궁수 키우는 중인데 조언 좀 해주세요. [└bigfisher: 저걸 낚이네. 엘프누나가 아니라 눈나인데.] [└Bling0_0: 근데 어쩌면 진짜 본인일 수도 있음. 원본 닉네임은 초창기에 누가 먹고 죽은 바람에 이제 못 쓴다고 들어서.] 실속 있는 댓글은 없었다. 거, 노아르크 애들한테 물었는데 왜 이런 거만 달리는 거야. ‘쩝.’ 나는 입맛을 다시며 시간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원탁이 열리기까지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실시간으로 댓글들이 계속 갱신되다 보니 이것만 읽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 ‘그래, 여기라면 뭔가 쓸 만한 정보가 나오겠지.’ 나는 댓글 읽는 걸 멈추고 잠쉬 침대에 누워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마자 원탁에 입장했다. ‘설마 안 오거나 하진 않겠지?’ 지난번 집회 내내 두들겨 맞은 광대가 혹여나 불참하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 녀석은 꿋꿋한 녀석이었다. “수사자 씨도 오셨군요, 피싯.” 또 친한 척하네 이거. 나는 대충 한 귀로 인사를 흘리며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현재 참가자는 고블린, 사슴뿔, 광대, 소울퀸즈로 어찌된 일인지 여우는 없었다. “이상하군요. 늘 가장 먼저 오시던 분인데.” 고블린이 의문을 표하며 내 눈치를 봤다. 하긴, 마지막에 여우랑 따로 나가서 대화를 나눴던 게 나니까. 뭔가 일이 있는가 싶은 거겠지. “…….” 하지만 나도 여우가 아직 안 온 이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곧 집회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고, 그때까지 여우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호오?” “초승달 씨는 죽은 게 아니었군요?” 지난 집회에 불참하며 많은 추측을 낳았던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불참한 여우에게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그에게 옮겨졌다. “새로운 분이시네요. 반가워요. 저는 지난번에 처음 왔었는데, 아직 배울 게 많네요.” 타고난 인싸답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는 소울퀸즈. 다만 초승달의 상태가 이상했다. “…….” 그 역시 초면인 소울퀸즈에게 흥미가 생길 법도 한데 그는 그저 대꾸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피싯, 무게 잡기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거나 말해 봐요. 다들 궁금해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이내 광대가 물었고, 다른 회원들은 그런 광대의 무례한 행동에 별말 하지 않았다. 그들도 궁금한 것이다. 대체 초승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땐 그럴 기분이 아니었소.” 그런 관심이 불편했는지 초승달이 짧게 사정을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없었으나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였으니까. 착 가라앉은 저 목소리도 그렇고. “누군가를 잃은 모양이군.” 사슴뿔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고, 초승달은 이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이에 고블린이 광대와 초승달을 번갈아 보며 좌불안석한 모습을 보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 왔다. 어쩌면 여기에 네 원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소리오……?” 지난 회차에 불참한 초승달은 모른다. 광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광대가 시체 수집가다.” 사슴뿔이 악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그때 밝혀진 정보를 내뱉자, 초승달이 멈칫했다. 그렇게 잠시 이어진 침묵. “그렇구려. 광대가……. 그래, 바로 네가…….” 이내 초승달이 광대를 응시했다. 한데 정말 노아르크 세력에 의해 무언가를 잃은 것일까? 그 시선에서 제법 저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나 더한 경험도 해봤던 광대는 그저 평소처럼 웃을 뿐이었다. “피싯, 그래서 누구 죽겠습니까?” 초승달은 가만히 광대를 노려보다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어느새 살기 또한 사라져 있었다. 초승달 본인도 아는 것이다. 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건 없다는걸. “언젠가 내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오.” 덤덤하고 정제된 목소리. 광대는 잠시 간격을 두고서 조소했다. “……피싯, 기대하고 있지요.” 아무튼, 이거로 둘 사이의 개인적 대화는 끝. “자, 이제 문도 닫혔는데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저 한 달 동안 엄청 기대했거든요!” 이내 소울퀸즈가 억지로 텐션을 높이며 집회를 주도했다. 그렇게 시작된 순번 정하기 시간. “자자, 그럼 오늘은 제가 먼저 하지요.” 광대가 첫 순번을 자처하고 나섰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놈의 입에서 나올 내용을 어느 때보다 기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거, 좀 흥분될지도요?” 광대는 우리를 보며 그리 말하더니, 이내 초승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를 찾아온다고 하니 하는 애긴데, 대체 어떻게 찾아올 생각입니까?” “…….” “다들 게시판은 봤죠? 바깥 세상이 멀쩡하고, 노아르크에 살던 사람들 전체가 바깥으로 나왔단 그거.” 이내 광대가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짧게 읊조렸다. “그거 전부 사실이랍니다?” 이를 증명하듯 원탁의 보석이 초록빛을 자아냈다. 259화 클랜 (3) “…….” “…….” 보석의 빛이 꺼졌음에도 정적이 이어졌다. 그 게시글이 과연 사실일지 긴가민가하던 중에 광대의 입을 통해서 진위가 확인되니 이번 사건의 무게가 확 와닿은 것이다. ‘그래, 바깥은 정말로 멀쩡했던 거구나.’ 과연 커뮤니티 활동이 끝난 다음에 이 도시는 어떻게 될까? 분명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텐데. ‘망할 노아르크 새끼들.’ 광대의 입을 통해서 이쪽의 진실을 들으니, 새삼 노아르크 측의 의도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 게시글은 개인적 일탈성 고백이 아니다. 커뮤니티를 이용해 이 정보를 도시 내부에 퍼트리겠다는 계획적인 공작이었다. ‘그러니까 광대 새끼도 이렇게 쉽게 말해 주는 걸 테고.’ 광대는 늘 경박한 가면 뒤에 숨어서 감정적인 목소리를 내뱉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멍청한 놈은 아니다. 그 일례로 예전 사건들은 모두 침묵했다. 오르큘리스의 수뇌부이니 당연히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정보로 쓰는 일이 없었다. [곧 비요른 얀델에게 암살자가 갈 겁니다.] 가장 최근에 말한 이 정보도 비슷한 케이스다. 노아르크 측에서 암살자를 보내는 뉘앙스로 말을 했으나, 사실은 대형 클랜의 암살 모의를 말했던 거였다. 참고로 이를 통해 얻은 대가는 간단하다. “그나저나 사슴뿔 씨도 참 열심이시더군요?” 광대는 현실에서의 사슴뿔이 액션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피싯, 설마 기사들을 그렇게 보내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놈 입장에선 사슴뿔의 정체를 역으로 추적할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운 셈. 아마 그때 녀석은 판단했을 것이다. 비요른 얀델을 향한 암살이 실패하더라도, 이게 더 중요하다고. “재수 없는 놈.” 어쩌면 사슴뿔이 도중에 기사를 회수해 간 것도 뒤늦게 광대의 목적을 눈치챘기 때문일지 모른다. 꼬리가 길어지면 잡힐 가능성도 늘어나니까. “둘이 싸우는 것도 재밌긴 한데 그건 나중에 따로 하시고요! 저기 광대 님, 혹시 괜찮으면 제가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내 광대와 사슴뿔이 기싸움을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소울퀸즈가 능숙하게 분위기를 바꾸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노인은 누구예요? 메스 텔레포트로 만 명도 넘는 인원을 한 번에 데리고 사라졌다던. 들어 보니까 바깥으로 안내한 것도 그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건…….” 이내 광대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피싯, 비밀입니다. 그냥 말해 주면 재미가 없잖아요?” 딱 봐도 정체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 거, 아는 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건만. 수사자 짬밥이 쌓일 대로 쌓인 나는 귀신같이 각을 보고 한마디 뱉었다. “그 노인네가 자기 정체를 밝혔을 리 없지.” 같잖은 수작을 부린단 눈빛으로 광대를 하찮게 바라봐 주는 것은 덤. 광대는 구라가 들통난 사람처럼 움찔했다. ‘어떻게 그런 거까지 알고 있지?’ 하는 거 같다. 반면 소울퀸즈는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흐으음, 그 말은 수사자 님은 알고 계신단 뜻이려나요? 그 정체불명의 노인이 누구인지.” 아니, 그걸 내가 알 리가. 나는 시선을 마주한 채 아무 대답도 않았다. 듣고 싶은 게 있다면 재밌는 걸 갖고 오라는 수사자만의 시그니처 제스처. 소울퀸즈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치, 그럼 뭐에 관심이 있는지라도 말해 주면 안 돼요?” 어허, 그럼 정보의 다양성이 떨어지건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했었던 바로 그 대사. “나도 모른다.” 수사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내가 뭐에 관심이 있는지.” 그런 나의 말에 소울퀸즈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는 눈빛이었다. ‘오케이, 그럼 이걸로 오늘 할당량은 어느 정도 채운 거 같고…….’ 나는 뒤에 이어지는 대화에 관심 없는 척 귀를 기울였다. 잠시 중단됐던 집회가 재개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하겠습니다.” 두 번째 순번을 이어받은 건 고블린이었다. 참고로 이번에도 고블린이 꺼낸 건 종교 쪽 관련 정보였는데……. “몇 달 전에 신탁이 내려오는 일이 있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마침내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냈습니다.” 뭐? 갑자기? 그게 여기서 등장할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애써 평정심을 지켰다. “오랜만에 쓸모가 있군요. 피싯, 그래서 누굽니까? 받은 성물은 뭐고?” 당시 신탁과 성물에 강한 흥미를 보였던 광대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한데 이런 적은 여태 처음이었을까? 고블린은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간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비요른 얀델. 그때 신탁을 받은 건 최근 도시에서 ‘거인’이라 불리는 그 바바리안입니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 *** “비요른 얀델.”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최근 들어 가장 핫한 그 이름. “신탁을 받은 게, 그놈이라고……?” 내 본캐에 당한 게 많은 광대놈은 어이가 없단 듯 웃음을 흘렸다. “이봐요, 이 정보 확실한 게 맞습니까? 그놈은 인간도 아닌데 신탁을 어떻게 받아요?” “그게……. 저도 그게 이상해서 찾아보니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더군요. 실제로 과거에 신탁을 받은 이종족은 몇 존재했습니다.” “대부분이 역사에 크게 이름을 남겼지.” 사슴뿔이 고블린의 설명을 보충하듯 말을 거들었다. “그러니까 뭣도 모르면서 고블린을 의심하는 건 그만둬라. 애초에 보석도 초록빛을 냈지 않나?” “그건…….” 항상 정확하지만은 않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분명했으나, 광대는 뒷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사례의 표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자자, 그만들 하시죠. 광대 씨도요. 이번 건 그때 광대 씨와 다르게 100% 확실한 정보이니 걱정할 거 없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확인했어요.” 응? 직접 보고 확인을 해?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는데. 처음에는 고블린이 퍼져나간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봤다니? ‘……그럼 그중에 있었다는 거네?’ 세 번째 덩굴이 끊어졌을 때, 내 주변에는 총 다섯 명이 있었다. 호위 기사 셋과 미샤. 그리고……. ‘스벤 파라브.’ 레아틀라스의 제2 성기사단의 부단장. 자연스레 용의자가 한 명으로 좁혀진다. 고블린이 성기사 출신이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으니. ‘진짜 신기하네. 얘가 걔였을 줄이야.’ 원탁에서 고블린의 이미지와 그때 그 중후한 성기사 사이의 괴리가 상당했다. 뭐, 그래 봤자 나보다 심하진 않겠지만. ‘……오히려 잘 된 건가?’ 광대와 소울퀸즈에 이어 고블린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쩌면 언젠가 이 정보가 크게 쓰일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성물은 뭐였습니까? 별의 여신이라면 역시 운명과 관련된 성물?” “사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여기저기 막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이내 고블린은 성물이 지닌 능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걸 고백하며 차례를 끝냈다. 그다음은 소울퀸즈였다. “영광의 궁에서 살아 귀환한 탐험가들에게 논공행상을 하던 날, 왕궁에서 마탑에 공문을 보냈어요.” “공문?” “네. 미궁 포탈의 수리 요청이었죠. 확인해 보니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이를 끝으로 소울퀸즈는 입을 다물었고, 머지않아 보석에서 빛이 뿜어졌다. 통과를 의미하는 초록불. 하지만 회원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번이 두 번째라지만,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피싯, 그런 쓰레기 정보를 누가 쓴다고?” “글쎄요? 각자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수리가 좀만 늦었으면 차원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건데?” 광대의 비아냥에도 소울퀸즈는 끄떡도 안 하며 말로 받아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슴뿔조차 광대를 두둔했다. “곧 차원 붕괴가 일어날 거다도 아니고, 수리가 끝났다는 정보는 조금 그렇긴 하군.” 하기야, 그들이 이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나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지만. ‘……수리가 끝났다니 경험치 복사 버그는 막혔다고 보는 게 맞겠네.’ 쩝, 그럼 포탈 개방 경험치를 얻으려면 이제 나도 스피드런을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건 다음 미궁 진입 때 한 번 더 확인만 해보기로 하고. “제가 할 말은 더 없어요. 저는 진심으로 이 정보가 오늘 들은 정보들에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내 소울퀸즈는 회원들의 이의 제기에도 꼿꼿한 모습을 보여줬고, 기어코 통과를 받아냈다. “어, 저렇게도 할 수 있었구나…….” 그동안 많은 빠꾸를 맞았던 고블린은 이런 방식이 가능하단 것에 감탄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 고블린이 저래 봤자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을 거다. 바바리안식 억지 부리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내가 최고란 자신감이 깔려 있어야만 한다. ‘이 여자도 진짜 특이하단 말이지.’ 아무튼, 소울퀸즈 다음은 사슴뿔 차례였다. 사슴뿔은 카르논이 화재로 뒤덮였을 때, 왕가의 보물 중 하나가 도난당했다 말하였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얘네들 반응을 보니 꽤 중요한 물건인 듯했다. 그러니 이건 나중에 나가서 알아보도록 하고. “이제 너다 초승달.” 비로소 초승달 차례가 됐다. 집회 내내 과묵하게 말을 아끼는 등, 평소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줬기에 어떤 정보를 뱉을지 적잖게 기대가 됐다. 하지만, 들어 보니 딱히 별거 없었다. “요정족에서 일족 내 사정으로 다음 순혈자를 다른 이로 교체하기로 했소. 적당한 후보자를 새로 찾는 중이지.” 일단 여섯 종족 중 하나의 내부 사정이니, 정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딱 거기까지가 끝인 보통의 정보. 다만 나는 초승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야 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거든. “다음에는 좀 더 재밌는 걸 가지고 오리다.” 이번에는 쓸 만한 게 없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소생의 돌’을 포기한 건 아니라는 의지의 표출. 나쁘지 않다. 사실 나한테는 오늘 정보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거든. ‘근데 순혈 후보자를 아예 새로 뽑는 거면, 에르웬한테 먹일 수도 있으려나? 그것만 먹일 수 있으면 진짜 대박인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 이제 내 차례구나. 나는 준비해 온 몇 가지 정보 대신 다른 것을 꺼냈다. “소생의 돌을 이용하면 최대 2명까지 되살릴 수가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 소생의 돌. 내가 입에 담기 전까지는 전설 속 존재로만 여겨졌으나, 이제는 현실이 되어 버린 그 아이템. 당연히 이 아이템에 관한 정보는 값지다. 다만 소생의 돌이 간절하지 않은 회원들 입장에서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고 여겼다. 획득 방법에 관련된 정보도 아니고, 최대 2명까지 살릴 수 있단 단편적인 정보 아닌가. 심지어 이걸로 우려먹은 게 벌써 세 번째다. 그러나……. “…….” “…….” 회원들은 불만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야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두 명… 그래, 그렇구려…….” 얼마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듯한 초승달은 내 말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목소리에서는 커다란 열망이 전해져왔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이거야 원, 초승달 씨 때문에 오늘 한 번의 기회를 날렸군요?” 광대는 내 순서가 ‘소생의 돌’로 낭비된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 바퀴로 넘어가자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 준비해 온 게 없어서. 이만 끝내리라. 애초에 수사자 당신이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초승달은 광대는 쳐다보지도 않고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곧장 원탁을 떠났다. 사정이 비슷했던 건 고블린도 매한가지. “어, 저도 궁금했던 건 다 풀려서……. 딱히 쓸 수 있는 것도 없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내 고블린도 떠나자 사슴뿔도 네 명이서 이어가는 건 조금 부담스러운지 여기까지 하겠다며 떠났다. 하긴, 4인부터는 집회가 좀 빡세긴 하지. 말하는 사람 1명을 제하고 셋 중에 둘이 모르는 정보를 뱉어야만 통과를 받을 수 있다. 한데 정보 하나를 제공하고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개수는 줄어든다. “그럼 어떻습니까? 셋이서 해보는 건?” “저는 상관없어요.” 광대와 소울퀸즈는 더 하면 더 하겠다는 포지션을 취했다. 결국 선택은 내 몫에 달린 셈. ‘이렇게 셋이서 돌리면 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올 거 같긴 한데…….’ 욕심은 생기지만 무리하진 않기로 했다. 자칫하면 내가 사실 속 빈 강정이라는 걸 들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집회는 첫 바퀴에서 끝. “재밌는 게 있다면 진작 나왔겠지.” 수사자 콘셉트를 따라 오만하게 말하며 등 돌려 이한수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게시글들을 눈팅하며 시간을 보낸 뒤, 폐쇄 시간이 되어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아, 우리 집 아니지.” 카론의 얼굴과 이름을 빌린 7구역의 여관방. 눈을 뜨자마자 잠시 내버려 뒀던 걱정들이 몰려왔다. ‘카론은 잘 하고 있으려나?’ 카론은 나의 알리바이다. 만약 GM이 정말로 오늘을 노린 거라면 지금 카론을 멀리서 지켜보며 플레이어인지 확인하고 있겠지. “쓰읍.” 어떻게 됐을지 얼른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카론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는 괜히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았다. 그리고 거의 뜬눈으로 지샌 다음 날 아침. “비요른!” 약속대로 카론과 성지에서 다시 만났다. 외형 변경의 지속 시간은 30일이기에 우리는 다시 가면을 써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후후, 눈밑이 시커먼 걸 보니 아주 끝내주는 밤을 보낸 모양이군?” 아, 그런 핑계를 댔었지. “……덕분에.” 나는 대충 둘러대며 카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전부 캐물었다. 나중에 내가 기억 못하는 일이 생겨선 안 된다는 판단. ……사실 그냥 궁금해서 미칠 거 같았다. 맡기긴 했지만, 괜히 불안해져서 밤중에 오만가지 상상을 했던 나니까. “아, 어제 말인가?” 과연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을까? 260화 클랜 (4) 성지에서 막 나선 바바리안 전사. 비요른 얀델을 보며 한 사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바로 나왔군.” 만약 성지에서 하룻밤 지새고 오려는 거였다면 다음 달 15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몸으로 성지에 잠입하는 건 아무래도— 삐끗. 비요른 얀델을 따라 몸을 틀던 사내가 균형을 잃고 몸을 크게 휘청였다. 처음 감각을 연결해 본 골렘이라 그런지 조작이 낯설었던 탓. “저기, 괜찮으세요?” 이내 사내의 몸이 기괴한 자세로 균형을 잡은 채 가만히 멈춰서자,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괜, 찮습니다.” 사내는 묘한 수치심을 느끼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날 듯한 걸음걸이로 비요른 얀델을 뒤따랐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이백호, 그자만 아니었어도.’ 현재 그가 멀쩡한 몸을 두고 익숙지도 않은 골렘과 링크한 건 전부 이백호 때문이었다. 그야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아무래도 진짜 몸으로 마탑 밖에 나가기에는 우려되는 부분이 많던 것.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거지?’ 아직 하늘이 시퍼런 이른 아침, 사내는 비요른 얀델의 뒤를 따라서 계속 걸었다. 그리고……. ‘이 아침부터 술을 마신다고?’ 이내 도착한 곳은 7구역의 유명한 주점이었다. 직원들을 3교대로 돌려가며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그 술집. “저자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 “호오, 저자가?” “운이 좋군. 소문만 무성하던 그를 직접 보게 되다니.” 비요른 얀델이 주점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이제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자가 나올 정도의 유명세를 갖게 된 것. 씨익. 본인의 유명세를 즐기기라도 하듯, 비요른 얀델은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내짓더니 정중앙 테이블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술을 시켜서 퍼마시기 시작했다. “저, 손님 주문은 어떻게…….” 덩달아 주점에 들어와 테이블 하나를 잡은 사내는 대충 음식까지 주문하고서 비요른 얀델의 동태를 살폈다.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크으으으으……!” 술을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의 반복. 혼자였던 테이블에는 어느새 술냄새를 맡고 몰려온 술꾼들로 가득했다. “하핫! 그 독한 술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리다니, 실로 거인 같은 사내로군!” 처음엔 유명인을 보고서 말이라도 붙여보려 왔다가 생각보다 재밌어서 눌러앉은 자들. 아, 그중엔 여인들도 꽤 있었다. “저기, 팔 만져 봐도 돼요?” “……무, 물론이다!” “와아, 진짜 강철 같아! 아, 저는 에이미예요.” 유명 탐험가의 등장에 흥미를 느끼고 다가온 여인들은 아닌 척 하며 바바리안 전사를 유혹했다. 될 리가 없었다. 그야 비요른 얀델은 벌써 애인이 세 명이나 있으며, 그 세 명을 끔찍이 아낀다고 알려져 있— “나는… 야,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만나서 반갑다……!” 응? “크흠……!” “어머어머, 남자다워라.” 여인들의 손길이 더욱더 은밀하고 대담해지는 와중에도 아무런 제지를 않는 바바리안 전사. “허벅지도 만져 봐도 돼요?” “크흐흠! 원한다면야…….” 못 이기는 척 허락하지만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그 역시 즐기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게 영웅……?’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곳 사람들은 전혀 그 행동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딱히 윤리적으로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술자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술을! 술을 더 갖고 와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정에 가까워질수록 사내는 비요른 얀델이 플레이어가 아니길 바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팔씨름을 하다가 테이블을 부수고, 돈이 많다며 돈으로 해결하고, 워낙 시끄럽게 떠든다고 눈총을 준 한 취객을 힘으로 위압하는 등. 이건 단순히 ‘완벽하게’ 바바리안을 ‘연기’하는 레벨을 아득히 넘어섰지 않은가. 그야말로 뇌 없는 바바리안 전사 그 자체. ‘이게……. 이게 엘프누나 님일 리 없어…….’ 사내는 그리 여기면서도 자정까지 기다렸다. 마지막 확인도 하지 않고 가기엔 오늘 하루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23 : 59] 커뮤니티가 열리기까지 이제 1분이 남은 시각. 저 바바리안은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술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커뮤니티의 유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째깍. 이내 분침이 움직이며 자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회차에는 커뮤니티에 들어가지 않도록 미리 설정해 둔 사내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비요른 얀델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니었군.’ 비요른 얀델은 자정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아무리 빨리 로그아웃을 하고 나와도 잠깐의 경직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적어도 커뮤니티 소속은 아니라는 뜻. ‘예전에 그 편지를 보냈는데도 회원이 아니란 건……. 역시 플레이어도 아니란 거겠지.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면 아직도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내 사내는 후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요른 얀델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래, 역시 이딴 게 현대인일 리 없지.’ 왠지 모를 안도감도 피어났다. *** 카론이 말한 어제 하루 일과는 간단했다. 그야 아침부터 주점에 처박혀 하루 종일 술만 퍼마셨으니까. ‘어쩐지 술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니.’ 물론 이거로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술을 마시라 지시한 건 나니까. 주점이라면 사람들 시선 때문에라도 놈이 대놓고 수작을 부릴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거? 말하자면 긴데……. 아주 재밌었다!” 주점에서 만나 친구가 된 취객의 사연이나, 잘못하고 테이블을 부숴 돈을 물어주게 됐던 얘기들은 빠르게 스킵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테이블 값이나 술값이야 아깝지 않다. 내가 원했던 부분만 제대로 해결됐다면. “술집에 이상한 놈이 없었냐고? 흐음…….” 카론은 술로 절여진 뇌를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이상한 비실이 한 명이 구석 자리에 있었다. 술도 음식도 안 먹으면서 계속 주문만 하는 이상한 놈이었지.” 듣자마자 딱 이놈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지?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나?” “아니, 그럴 리가. 어딘가 정신적으로 모자란 놈 같아서 먼저 가서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그자가 언제까지 술집에 있었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자정쯤이었던 거 같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 종일 술집에 있다가 자정이 되자마자 자리를 떠났다니? 아무래도 내 계획이 통한 거 같다. 카론이 취객들과 놀던 모습을 들어 보면 나를 향한 의심은 싹 거두었겠지. 그럼 이번 계획은 무사히 끝난 셈인— “응, 그래. 자정이 맞을 거다. 그 수인족 여자를 만난 게 1시쯤이었으니.” 응? “……수인족 여자라니?”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불안감. 역시나 그 예감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 칼스타인의 딸 말이다!” 내 모습을 한 카론이 미샤와 만났다.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지?” 다급하게 이후 사정을 캐묻자, 카론이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수인이지만 제법 사나운 여자더군. 왜 네가 좋아하는지 알 거 같다.” 미샤는 여자들 사이에서 시시덕거리던 카론의 멱살을 잡고서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단둘이서 짧게 대화를 나눴고……. “미안하다. 아무리 둘러대도 안 통하더군.” 얼마 못 가 카론의 정체가 들통났다. 하긴, 얘가 걔한테 어떻게 그걸 숨기겠어. 다만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원래 너는 뭘 하고 있느냐기에 그냥 솔직히 말했다.” “……솔직히 말했다고?” 내가 이를 악물며 되묻자 카론이 움찔했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을까? “비요른, 너는 우리 일족의 영웅 아니냐. 그저 의무를 다할 뿐인데, 왜 그걸 숨겨야 하냐?” “…….”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비요른은 동족 여전사들과 함께 의무를 다하는 중이니 방해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 “후후, ‘의무’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기에 내가 자세히 설명도 해줬다. 그러니까 다행히 이해를 했는지 알겠다며 떠나더군?” “…….” “넌 나한테 고마워 해야 한다! 이제는 언제든 성지에 가서 의무를 다할 수 있지 않나!” “…….” “근데… 왜 아까부터 말이 없나?” 이내 카론이 조심스레 물었고, 나는 여전히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제기랄,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지? 카론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타르손의 아들 카론. 전사의 맹세를 해라.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철저하게 함구하겠다고.” “맹세? 네가 원한다면 백번이라도 하지.” 이내 속으로 끙끙 앓으며 맹세를 요구하자, 카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를 응해줬다. 내가 이 녀석에게 화를 낼 수 없는 이유였다. “아, 근데 함구가 무슨 뜻이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란 뜻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나는 원래 일족 내에서도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전사다!” 그래, 얘한테 화를 내서 뭘 어쩌겠어.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던 일이라 여기는 게 옳다. 비가 내린다고 먹구름한테 화내는 사람은 없잖아? 카론은 이미 할 일을 다 해주었다. 덕분에 GM은 성공적으로 속이지 않았나. ‘이제 뒷감당은 내가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이후 카론과 헤어진 뒤 집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평소와 달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 집에 도착했을 때 미샤는 소파에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소파에 앉은 상태였는데,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왔냥?” 미샤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다만 늘 깔끔하게 정리돼 있던 손톱은 까끌까끌했고,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밤새 소파에서 저러고 있던 건가? “어, 어…….” 심장이 꽉 조였다. 그래서 준비해 온 대사 중 어느 것도 뱉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때. “그럼 됐당. 가서 자라.” 말할 시간이라도 주듯 가만히 날 바라보던 미샤가 이내 등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난 그걸 바라만 보았다. “…….” 그야 뭐라고 하겠는가. 카론이 한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걸 설명하려면 GM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물론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도 가능이야 하겠지만……. ‘자칫하면 더 악화될 수도 있어.’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미샤는 내가 악령일 수도 있다고 의심 중이다. 따라서 그런 쪽으로 의심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낫다. 종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니? 적어도 악령 같지는 않지 않은가. 이게 최선이다. ‘……는 개뿔.’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미샤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랑은 말하기 싫은 건가? “열겠다.” 바바리안답게 상대편의 의사는 무시하고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콰직-!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는지 쉽게 뜯겨지며 열렸다. 침대 위에 이불을 뒤집어쓴 미샤가 보였다. “…….” 그래, 얼굴도 보기 싫은 거구나. 역시 따라오기를 잘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 탱커는 동료를 지키는 존재지, 상처를 입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말하기 싫으면 그냥 듣기만 해라.” 나는 말했다. 아직까지도 악령임을 밝힐 용기는 없기에. 바바리안의 몸을 빌려 요령 없이. “성지에선 아무런 일도 없었다.” 내 말에 미샤가 이불을 조금 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믿고 자시고 변명할 이유도 없다는 뜻.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와 미샤는 동료일 뿐이니까. 보다 긴밀한 관계가 될 기회가 있었으나, 그걸 밀어낸 것은 나였다. 남녀의 감정이 얽히면 훗날 선택의 기로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여겼다. 하지만……. “비요른, 내 마음이 불편할까 봐. 그래서 신경 써주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된—”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드왈키와 달리, 이기적인 놈이니까.” 나는 미샤의 말을 끊고 말했다. “미샤, 지난밤에 성지에서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고, 나는 네가 그 일로 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이불 밖으로 드러난 미샤의 눈동자에는 한 가지 기대와 열망이 묻어났다.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종류의 것. 잠시 숨을 고른 뒤, 나는 말을 이었다. 비록 내가 비요른 얀델의 몸에 깃든, 사악한 악령에 불과할지라도. “이제 네가 동료로만 여겨지지 않으니까.” 언제까지 부정할 수만은 없는 사실이었다. 261화 클랜 (5) 지난날, 나는 미샤에게 말했다. 너를 소중한 동료라 생각하고 있다고. 비겁한 말로 선을 그었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옳은 일이 맞았다. 당시의 나는 ‘귀환’에 대한 의지를 여전히 불태우던 상태였을뿐더러……. 그 선을 넘어갈 자격도 없었다. 나는 ‘악령’이니까. 비요른 얀델의 몸으로 애정을 속삭여 봤자, 결국 이는 상대를 기만하는 일이 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무, 무슨 뜻이냥? 도, 동료로만 여겨지지 않는다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미샤의 되물음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라면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번에 커뮤니티에 다녀오며 확실히 알게 된 점이다. 어둡고 캄캄했던 이한수의 방보다. 나는 지금 서 있는 이곳을 훨씬 더 나의 집처럼 느끼고 있다.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는데…….” 내 눈을 피해 벽을 보던 미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냥……?” 어쩌면 이백호가 경계한 게 이걸지도 모른다. NPC와 깊이 관계를 맺는 순간, 이곳에 남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진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미샤 칼스타인, 네가 좋다.” ‘귀환’이야 이젠 아무래도 좋다. 남녀 관계가 되면 미궁에서 합리적인 판단이 힘들어진다는 것? 이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미샤를 포함해 내 팀원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오직 나만을 최우선 순위로 둘 수 없게 되었다. ‘드왈키.’ 녀석이 유산으로 내게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그야 그런 모습을 보이고 떠나 버리면, 나라고 뭘 어쩌겠어. 도무지 NPC처럼 여길 수가 없는데. “…….” 하면, 미샤의 대답은 어떨까. 나는 오랜만에 초조함을 느꼈으나, 괜히 이를 내색해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정적의 시간이 흘렀고. “비요른.” 이내 미샤가 긴 침묵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어느새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에서 빠져나와 내 앞에 선 상태였다. “……우리, 나가자.” 미샤가 내 손을 쥐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 것이냐 묻지 않았다. “…….” 서서히 사람들이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이른 아침. 외투도 걸치지 않고 나온 미샤와 나는 30m 떨어진 곳에 있는 여관방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 서로를 꼭 끌어 안았다. “비요른, 살살…! 너무 세게 안으면 아프니까…….” 혹여나 다칠까, 나는 투박한 바바리안의 몸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정말 괜찮겠나……?” “……너라면 뭐든지.” 미샤는 서투르지만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며 꼭 끌어안은 시간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꼬리, 이렇게 되어 있었구나.’ 그동안 항상 궁금했던 부분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하지만, 행복이란 찰나의 허상과도 같다던가. “비요른.” “왜 더 자지 않고? 아이나르랑 에르웬은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잘 있을 거—” “그게 아니라 해야 할 말이 있당.” “……응?” 갑자기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기 무섭게, 이내 미샤가 침대 위에 자세를 고쳐 앉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너랑은 그냥 동료 사이로만 지내는 게 좋을 거 같당.” 차인 것이다. *** 꿈을 꾸는 거만 같았다. [미샤 칼스타인, 네가 좋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온 세상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래서였다. [……우리, 나가자.] 미샤는 비요른을 이끌고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그야 불안했으니까.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비요른, 비요른, 비요른……!] [어디 안 가니까 걱정 마라.] 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둘은 각자의 온기를 상대에게 전했고, 때로는 지쳐서 쉬며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때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순간들을 얘기하며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토해냈다.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고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잠깐, 잠든 거구나…….’ 꿈은 언젠가 깨어나야 하기에 꿈인 것이다. 미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는 어두컴컴해진 하늘이 보였고, 옆에는 그토록 원하던 남자가 누워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깊은 행복을 느끼기도 잠시. ‘…….’ 세상이 현실의 색으로 물들며 정신이 확 들었다. ‘역시 비요른은…….’ 악령이다. 미샤는 그 숨겨진 뒷말을 속마음으로도 뱉지 못하고 삼켰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으니까. “흐읍…….” 숨이 막혀왔다. 그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의심은 하였으나 정체를 확신한 것은 오늘이었다. 그야 어제 카론에게 ‘의무’가 무엇인지 듣고서, 아이나르에게 이것저것 확인을 해봤으니까. 바바리안을 낳을 수 있는 건 바바리안뿐. 이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연애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핫,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는 건가! 당연히 할 수 있지. 내가 알기로 그런 동족들도 꽤 된다!] 바바리안도 결국 사람이다. 도시에서 지내고, 성지의 동족들보다 다른 탐험가들과 팀을 꾸리며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가치관은 서서히 변화한다. [부족장 말로는 몇 년 정도 도시에서 살다 보면 어떤 전사라도 조금씩은 변하게 된다더군. 아, 부족장은 그걸 ‘도시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저 마음이 예뻐서. 성격이 잘 맞아서. 오랜 시간 지내보니 정이 쌓여서. 그 대상의 종족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 바바리안들은 분명히 이 도시에 존재한다. 다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그래도 상대를 구하는 게 어렵다고 듣기는 했다. 대부분은 ‘의무’를 이해해주지 않으니까.] 그런 그들도 자식을 낳고자 한다. 아이나르는 그것이 영혼에 각인된 종족적 사명이라고도 말하였다. 그래서, 미샤도 이해하려 했다. 갑갑한 마음에 눈도 붙이지 못하고 아침까지 기다렸음에도 별말 않고 방으로 올라간 것도 그래서였다. 한데……. [미샤, 지난밤에 성지에서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고, 나는 네가 그 일로 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해하지 말란 말을 들었다. [이제 네가 동료로만 여겨지지 않으니까.] 그런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는 행복함에 젖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정신이 들고 나니 모순이 가득했다. 물론 성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은 믿는다. 하지만……. ‘그럼 왜 카론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비요른은 어째서 카론에게 ‘의무’를 하러 간다고 말한 걸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답은 간단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의무를 다하지 않는 바바리안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초년차의 전사들뿐. ‘거인’이란 이명까지 얻은 전사가 의무를 내팽개쳐두는 건 여러모로 이상하다. 그래서 비요른은 카론을 이용했다. 어제 카론이 했던 말이 그 증거다. [비요른은 지금 여전사들과 성지에서 의무를 다하는 중이니, 방해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깊게 캐물을 것도 없이 카론은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비요른이 정말 그 일을 비밀로 하고 싶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분명 맹세를 시켰을 테니까. 평소 그의 철두철미함을 생각하면 의도한 부분이라 보는 게 더 타당했다. 카론이 바바리안 사회에 소문내길 바란 거다. 비요른 얀델은 ‘의무’를 다하는 중이라고. ‘그럼에도 굳이 서로 모습을 바꾸는 귀찮은 일을 해야 했던 건…….’ 이내 미샤가 푹 고개를 떨궜다. ‘나, 나를…… 좋아하니까…….’ 비요른은 원했다. 동족들에겐 의무를 다하는 바바리안으로 비춰지되, 자신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기를. 실제로 그날 밤 싸한 느낌이 들어 주점에 들른 것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자신은 그냥 비요른이 밤새 술만 먹다 온 줄 알았을 것이다. 남한테 물어봐도 그런 대답이 들렸을 테고. ‘나는 이제…….” 모든 일의 진상을 알게 되자 손발이 떨렸다.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다. 다만 그를 향한 마음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그야 당연하다. 자신이 반한 건 ‘비요른 얀델’이 아니라, 그 몸에 깃들어 자신을 구원해 주고, 지금까지 많은 여정을 함께한 그 남자였으니.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역시 악령인 건 중요치 않다. 만인이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 삿대질한다고 한들, 그에게 배운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 들통날 거야…….’ 사랑은 이성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미샤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비요른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의무’를 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하는 게 훨씬 더 정체를 숨기는 데 유리했다. 한데도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이었다. ‘그래, 나 때문에…….’ 이내 미샤는 결심을 내렸다. 이 관계가 이어지면 오늘이 아니어도 비요른은 뭔가 더 큰 실수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참으면 돼…….’ 역시 이게 최선이다. 상상한 것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그래도 참는 건 자신이 있으니까. 비요른 얀델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비요른.” 그녀는 잠든 정인의 이름을 불러 깨웠다. 그리고……. “왜 더 자지 않고? 아이나르랑 에르웬은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잘 있을 거—” “그게 아니라 해야 할 말이 있당.” 애써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다. 설령 그 길에 아픔만이 가득하다고 한들. “역시……. 너랑은 그냥 동료 사이로만 지내는 게 좋을 거 같당.”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이 남자를 위한 일이라면. *** [너, 너는 조금 있다가 집에 들어와랑. 애, 애, 애들한테는 내가 알아서 잘 둘러댈 테니까……. 알았지?]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머리가 사건의 개요를 전부 이해하기도 전에 미샤는 떠났다. 그리고……. “…….”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망부석 모드. “차였다고……?” 머리가 띵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오늘 실수라도 한 게 있나? “…….” 한참을 되짚어 봤지만 온갖 망상들만 떠올라서 그냥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그래, 속으로 끙끙 앓을 거 뭐 있나.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치면 되는 거고. “아, 왔냥? 와서 식사나 해랑.” 이내 집에 돌아오자 미샤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반겨줬다. “오셨어요, 아저씨.” “비요른, 외박하고 이제야 들어오다니? 다음에 술을 마실 땐 나도 데려가라!” 에르웬과 아이나르는 내가 아예 지금 집으로 돌아온 줄 알고만 있는 상황. 일단 다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아까 한 말에 대해서 당장 캐묻고 싶었으나, 여기서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 그럼 나는 피곤해서 먼저 쉬러 간당!” 식사가 끝나자 미샤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에르웬, 오늘 미샤가 이상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걷는 것도 그렇고.” “글쎄요. 저도 언니가 왜 저러는진 모르겠네요. 뭔가 느낌이 안 좋기는 한데…….” 미샤의 행동에 의문을 갖는 둘에게는 어딘가 아픈 거 아니겠냐며, 상태 좀 보고 온다고 하며 나도 얼른 뒤따랐다. “비, 비요른……?!” 그렇게 드디어 다시 둘만 있게 된 시간. 나는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며, 왜 동료로 지내자고 한 것인지 다시 물었고, 돌아온 답변은 전과 똑같았다. “그, 그냥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하자. 그게 더 나을 거 같당.” 이유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 완고한 거절. 일단 지금은 때가 아니라 판단해 오늘은 한 걸음 물러나 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 미안하당! 지금 갈 곳이 있어서!” “아이나르! 빨래! 빨래 널러 가자!” “……오늘은 피곤해서.” 미샤는 이후로 둘만 있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피했으며, 어떻게 자리를 만들어 캐물어도 항상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나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군. 그럼 그날 일은 없던 일로 하지.” 아무리 나라도 상대가 저러는데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건 강요일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였다. ‘와, 담배 피우고 싶어지네.’ 이렇게까지 멘탈이 나가는 게 과연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블린 덫을 밟고 동굴을 기어갈 때도, 광장에 불기둥이 터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그래, 내 할 일이나 하자.’ 언제까지 넋을 잃고 지낼 수만은 없기에 나는 최대한 미샤와의 일을 잊고서 일에 집중했다. 다행히 신경 쓸 것들은 그것 말고도 여럿 있었다. “아저씨, 그 소문 들었어요? “바깥이 멀쩡하다는 그거 말인가.” “네. 요즘 어딜 가도 그 얘기뿐이에요.” 커뮤니티에서 처음 공개된 성벽 너머의 정보가 도시 전체에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뭐, 아직은 그냥 루머 취급에 가깝지만……. 날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왕가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예상과 달리 왕가에서는 아직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내 할 일을 하면서. “그나저나 오늘은 알지?” “이따가 오후 3시에 7구역 본지부에서 만나는 거 맞죠?” “그래.” 점심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먼저 외출해서 탐험가 길드로 향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서류들을 미리 작성했다. 클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조금 고민해 보겠다던 레이븐이랑 곰아저씨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거든. 내가 만든 클랜에 들어오겠다고. “레이븐?” 그렇게 서류를 적고 있자니, 약속 시간이 되기도 전에 레이븐이 나타났다. “중요한 일인데 얀델 씨한테만 맡기기에는 좀 그래서요.” 못 미덥다는 듯 말했지만, 실상은 조금이라도 도와주려 일찍 왔다는 뜻. “어디까지 했어요? 줘봐요.” 이내 레이븐은 서류 몇 장을 가져가더니, 펜을 휘갈기며 필수 조항들을 빠르게 적어 내렸다. 내가 하던 것보다 세 배는 더 빠른 거 같다. 실수도 훨씬 덜한 듯하고. “내규 쪽이 애매하네요. 이런 건 확실하게 정해둬야 해요. 탈퇴 관련 조항도 마찬가지고요. 예외는 두되, 그 예외를 누구로 할 건지 제대로 명시해야 해요.” “그, 그렇군……?” “이미 한 것도 내놔봐요. 왠지 다 뜯어고쳐야 할 거 같은 기분이니까.” “여깄다.” 아무튼, 레이븐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거의 다 작성할 때쯤 되니 나머지 인원이 도착했다. “클랜을 직접 만드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군. 이건 레이븐, 네가 다 한 건가?” “네. 여러분은 여기에 서명만 하면 돼요. 그 전에 서류들을 읽어 보려면 읽으시고요.” “하핫, 됐다. 네가 어련히 잘 했으려고.” 이내 곰아저씨를 필두로 나머지 멤버들도 서류에 서명을 했고, 그 서류를 직원에게 건네는 것으로 클랜 창설 접수가 끝났다. 아마 내일쯤 정식으로 길드에 등록이 되겠지. ‘그럼 일단 이 문제는 끝났고…….’ 클랜이라는 울타리는 우리를 하나의 집단으로 결속시키는 걸 넘어 더 멀리까지 우리를 보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다들 시간은 비워 놨지?” 우리는 길드를 나서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여섯 명에 불과하지만, 팀 단위가 아닌 클랜 단위의 첫 모임. 술과 안주만 간단히 시키고서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음, 정확히는 통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이번에 미궁에 들어간다.” 이제 어엿한 클랜도 만들었겠다, 다시 달려볼 때가 됐다. 262화 버그 (1) 미궁에 들어간다는 말에 레이븐은 조용히 내게 물었다. “얀델 씨는 그 소문을 믿는 쪽인가 보네요?” 믿고 자시고, 나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안다. 바깥세상이 멀쩡하고, 노아르크 세력은 지금 전부 그쪽으로 떠나간 상황이다. 하지만…….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보의 출처가 악령 커뮤니티이기에 너무 확신하는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말했다. 예전에 비프론에 갔을 때 성벽 안쪽을 보는 경비들을 보며 위화감을 느꼈던 일을.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만약 그 소문이 진짜라면 설명이 된다.” “흐음, 사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미심쩍게 본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에요. 마탑만 해도 창문이 하나도 없잖아요?” 마탑은 성벽보다도 높이 솟은 고층 건물이다. 그리고 왕가에서는 건축을 허가하는 대신, 창문을 만들 수 없도록 요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탑에서 왕궁이 내려다보이게 둘 수 없다는 것. “뭐? 잠깐만… 그럼 진짜 바깥이 멀쩡하다는 거냐?” “아직은 그냥 가능성의 이야기일 뿐이에요.” 곰아저씨의 호들갑에 레이븐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기 쉬웠다. 정말 가능성만 믿고 미궁에 들어갈 거냐는 거겠지. 나는 준비해 온 답변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본다.” “이유는요?” “왕가에서 노아르크성을 점거한 건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니까.” 놈들이 바깥에 있든, 아직 지하 아래에 숨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미 군대는 포탈이 있는 노아르크의 성채를 점거하고 있다. 안에서 노아르크 놈들과 만날 걱정은 없단 뜻. “저랑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좋아요. 저는 찬성이에요.” 레이븐도 내 의견이 궁금했을 뿐, 실은 지금을 기회로 보는 건 같았는지 동의 표를 던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작된 투표 시간. “뭐, 너희 둘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나는 따라가겠다.” “오오, 드디어 다시 미궁에 들어가는 건가!” 마냥 신난 곰아저씨와 아이나르는 물론, 미샤와 에르웬도 이번 미궁 일정에 동의했다. 그럼 이제 다음 순번으로 넘어갈 차례. “그래서 인원 문제는 어떻게 할 셈이죠? 에르웬까지 합치면 이제 여섯 명인데.” “셋셋으로 나눠서 2층에서 만날 거다.” “흐음, 그럼 4층에서 시간이 꽤 소요되겠네요?” 레이븐의 되물음에 에르웬은 사색이 되어 얼른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민폐를 끼쳐서…….”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정말로요.”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괜히 더 어색해지기 전에 내가 나섰다. “그래도 생각처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에르웬은 나와 달리 제대로 된 길잡이니까. 어쩌면 전체적인 시간은 비슷할 수도 있다.” “오, 그렇다면 문제없군.” 이로써 에르웬에 대한 이야기는 끝. 그다음엔 앞으로의 탐사 계획을 얘기했고, 만장일치로 결정이 났다. “네,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기는 하지만…….” “우리도 이제 많이 강해졌으니까 말이당.” “후후, 슬슬 준비는 해야지. 거길 가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겠군.” 목표는 6층이다. *** 클랜 모임이 끝난 다음에도 나름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묵혀둔 돈을 푸는 나날이었다. “다들 사고 싶은 장비나 물건이 있다면 지금 사라. 아이나르 너는 뭔가 사기 전에 일단 나한테 상의부터 하고.” “와아… 말은 들었는데, 이 정도로 심했구낭. 라이티늄제 장비가 70만 스톤이라니…….” 식료품이나 생활에 필수로 쓰이는 용품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폭등한 반면, 탐험 관련 및 장비 소모품은 말 그대로 폭락했다. 수요층의 70%가 날아간 탓이다. 탐험가들 대다수가 죽으며 도시에 남아 있던 관련 용품들은 악성 재고가 되었다. ‘그래도 아마 지금이 최저점이겠지.’ 그간 모은 돈과 더불어 왕가에서 받은 돈까지. 가만히만 있어도 가치가 오른단 이유로 그 많은 돈을 지금까진 묵혀두기만 했으나, 이제 풀 때다. 미궁이 정상화되면 서서히 오를 테니까. “준남작님이 요청하신 최근 거래 내역입니다.” “아, 고맙다. 얼른 보고 돌려주지.” 실제로 최근 중앙 거래소의 시세를 보면 거의 변동이 없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폭락을 거듭하고 있었건만. 나처럼 슬슬 돈을 푸는 애들이 생긴 것이다. 곧 시세가 회복될 거라는 판매자들의 기대도 어느 정도 영향은 있을 테고. ‘몇 달만 더 이 상태가 유지됐으면 거래소 템은 졸업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매일 팀원들과 함께 거래소에 출근하며 합리적 쇼핑을 반복했다. 그리고 총 세 개의 물품을 구매했다. 「캐릭터가 아다만티움제 대형 전투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750 상승합니다.」 일단 지난번 전투에서 박살이 났던 방패. 이왕 사는 김에 5단계 소재로 새로 맞췄다. 믿기 힘들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주문 제작이 아니었던 것도 있지만, 오히려 4단계 소재인 월광석 방패보다 쌌을 정도였으니. 「캐릭터가 No. 8,820 철벽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10 상승합니다.」 두 번째 물품은 강철 부츠였다. 사용 시 3초간 물리내성 및 항마력이 2배 상승하는 아이템으로, 내 방패 바바와는 시너지가 잘 맞는다. 아, 물론 졸업 템이란 뜻은 아니다. 상위 넘버 중에 훨씬 좋은 장화가 있으니까. ‘장화도 이 정도면 후반부까지는 충분하겠고.’ 마지막으로 구매한 아이템은 재료였다. 이름은 ‘망자의 영혼’. 혼령각인의 7단계를 받기 위해서 쓰이는 재료로 구매한 물품들 중에 가장 비쌌다. 이건 연금술이나 마법 재료로도 쓰이거든. 값이 폭락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 폭이 비교적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값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재료들은 장비보다 구하기 어렵다. 매물 자체가 적기 때문. 그런 이유로 보이자마자 구매를 결정했다. ‘암, 이걸 직접 구할 바에 돈 주고 사는 게 백배는 낫지.’ ‘망자의 영혼’은 4등급 몬스터인 리치에게 ‘왜곡’을 걸고 사냥하다 보면 일정 확률로 드랍이 되는 아이템이다. 직접 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뜻. 그 시간이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비요른, 그럼 나는 훈련장으로 가보겠다!!” 아무튼, 거래소에서 퇴근할 시간이 되자 오늘도 아이나르는 훈련장으로 뛰어갔다. 이번에 구입한 2개의 넘버스 아이템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 “미샤, 너는?” “나는 집에 가야지.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럼 아브만을 데려다 주는 건 네가 하면 되겠군.” “응? 넌 집으로 안 가냥?” “오늘은 성지에 잠깐 들르려고. 어쩌면 오늘 못 들어올 수도 있다.” 내 말에 미샤는 잠시 움찔하더니, 나를 빤히 바라봤다. “성지라면……?” 아, 이 키워드 때문이었구나. 나는 서둘러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재료를 샀지 않냐. 혼령각인을 받으러 갈 생각이다. “아, 응. 그렇구나. 응, 그렇지…….” 그날 이후, 간혹 이런 식으로 어색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었다. 서로 없던 일로 하기로 했지만, 어디 그게 쉽겠는가? “그, 그럼 잘 다녀와랑. 애들은 내가 잘 챙기고 있을 테니까.” “그래… 부탁하지.” 이후 나는 미샤와 헤어져 성지 근처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저쪽은 마차가 아직인지 의자에 앉아 대기 중인 미샤가 보였다. “…….” “…….” 눈이 마주치자 미샤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보며 뻣뻣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 진짜 불편해서 죽겠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달린 커튼을 쳤다. 뒤늦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자괴감이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거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그렇게 되겠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내 마차가 움직이며 승강장을 벗어났고, 대충 눈을 붙이고 있자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지와 가장 가까운 7구역 외곽의 승강장. 성문을 넘어 숲길을 쭉 걷고 있자 바바리안들의 야영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대련인가?” 일단 부족장의 천막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나눴다. ‘후, 다행히 아직 신탁 얘기는 못 들었구나.’ 고블린 새끼가 원탁에서 신탁 얘기를 하는 바람에 조금 걱정했으나, 다행히 부족장의 귀까지 들어가거나 하진 않은 듯하다. 뭐, 그것도 시간문제겠다마는. “주술사를 만나러 왔다.” “주술사? 그럼 시기가 안 좋군. 지금 주술사는 못 만난다.” “어째서지?” “녀석은 지금 ‘혼받이’를 치르는 중이다.” “혼받이……?” 게임 내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고유 명사. “설마 모르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부족장의 눈이 좁혀졌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한 상식인데 나만 또 모르는 건가 하며 움찔했을 테지만……. “까먹었다.” 바바리안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깨달았다. 상식의 부재는 바바리안에게 있어서 이상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군.” 예상대로 부족장은 쉽게 납득하며 ‘혼받이’가 무엇인지 짧게 설명해 주었다. “혼받이는 주술을 부리기 위해 몇 년마다 해야 하는 의식이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월초에 의식을 시작했으니, 다음 달에는 만날 수 있을 거다.” 흐음, 다음 달이라……. “알겠다. 그럼 그때 다시 오지.”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 「비요른 얀델」 레벨: 5 육체: 607.62 / 정신: 502.19 / 이능: 2175.55 아이템 레벨: 4,627(New +2,060) 종합 전투 지수: 4,442.11(New +51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 *** 거리 곳곳에 취객들이 보이기 시작한 늦저녁. 곰아저씨의 주점에 집합했다. 아, 참고로 오늘은 휴업 팻말을 내걸었기에 가게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만삭임에도 주점 일을 할 정도로 건강했던 곰사모님이지만, 이제는 정말로 출산 예정일이 임박했거든. “정말 괜찮겠나? 옆에 있지 않아도.” “걱정은, 하루 다녀오는 건데 별일 있겠나. 곧 애가 나올 텐데 더 열심히 벌어야지. 이건 아내도 동의한 일이니 괘념치 마라.” “그렇다면야.” 반쯤 빈말이었기에 더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정말로 곰아저씨가 이제 와서 빠진다고 하면 곤란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그럼 우선 결속부터 맺을게요.” 곰아저씨네 주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레이븐이 세 명씩 나누어 결속 마법을 걸었다. 팀 분배는 간단했다. 나, 곰아저씨, 레이븐이 A팀. 에르웬, 미샤, 아이나르가 B팀이다. 어차피 1층에서만 따로 움직이고 2층에서 만날 거라 큰 의미는 없겠지만. “슬슬 시간도 됐으니 출발하지.” “아, 잠깐만요.” 이내 준비를 끝마치고 차원 광장으로 향하려는 때, 레이븐이 우리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어딘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공간에서 자그마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그… 이제 클랜이잖아요? 요즘 시간이 남아서 문장을 한번 만들어 봤어요.” 앰블럼이었다. 그 있지 않은가. 클랜이 있는 탐험가면 항상 갑옷에 붙이고 다니는 그거. “만들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니까 클랜 문장은 상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얀델 씨의 이명을 빌려 거인으로 해봤는데…….” “근데 이건 거인이 아니라 오우거 같은데?” “아, 싫으면 이리 주시고요!” “싫다고는 안 했다. 내일 돌아오면 길드에도 클랜 문장으로 정식 등록하지.” 내 장난에 정색하기도 잠시, 클랜 문장으로 등록하겠다고까지 말하자 레이븐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대했던 모양. “자, 다들 이리 와보세요. 제가 붙여드릴게요.” 이내 레이븐이 동료들 장비에 손수 마법으로 앰블럼을 붙여주었다. 막상 붙이고 나니 나름 멋이 살았다. 진짜 잘나가는 탐험가가 된 거 같달까? “고맙다, 레이븐. 말도 안 했는데 이런 것까지 챙겨줘서.” “……일단 내 클랜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고맙다는 거다.” “빈말은. 됐고 얼른 가기나 해요. 이러다 늦겠어요.” 거, 부끄러워하기는. 이후 앰블럼 장착까지 끝마친 우리는 서둘러 차원 광장으로 향했다. 주변엔 구경하러 온 자들의 숫자가 꽤 됐다. 광장에서 멀리 떨어져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 “야, 저기 비요른 얀델도 왔는데?” “그 일을 겪고서도 벌써 또 들어가려는 건가.” “클랜을 만들었다더니 숫자가 여섯이군.” “근데 저 문장은 뭐지? 오우거인가?” “아마 그럴 걸세, 비요른 얀델의 정수 중 하나가 오우거이니.” 광장 주변은 예상보다 많은 인파로 북적였으나 막상 입장 대기 인원은 얼마 안 됐다. 고작해야 삼사백 명 정도? 그마저도 돈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장비를 챙겨 입고 나온 저층 탐험가들이 대다수였다. ‘다른 광장들도 다 이런 상태면, 상층은 거의 텅텅 빈 상태겠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탐사 계획을 점검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고, 머지않아 광장 중심부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포탈이 열렸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이번엔 미궁에서 할 일이 제법 많았다. 263화 버그 (2) 벽면에 다닥다닥 붙은 수정이 영롱한 빛을 자아내는 동굴. 벌써 몇 번이고 온 곳이지만 오늘따라 낯설다. 뭐, 실제로 두 달 만에 입장한 것이니 그런 게 당연한가도 싶지만……. ‘다른 이유도 한몫했겠지.’ 나는 주변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일단 평소와 다르게 세 명뿐이다. 또한, 대낮처럼 밝지는 않으나 횃불이 따로 필요할 정도로 주변이 밝다. 쉽게 말해……. “암흑 지대가 아니네요.” 경험치 복사 버그가 막혔다. 이제 차원 불안정 현상을 이용해 2층 포탈 입구에서 시작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 “아는 게 있나?” 모른 척 묻자 레이븐이 조심스레 한 가지 추론을 내놨다. “왕가에서 최근에 마탑으로 큰 의뢰를 넣었다고 듣기는 했어요. 요즘은 내내 밖에서 지내느라 상세 내용은 몰랐지만……. 지금 보니 포탈 안정화 작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후, 정말 그것 때문에 버그가 막힌 거구나. 그래도 소울퀸즈 덕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미련을 접는 것은 빨랐다. 뭐, 어쩌겠어. 이제부터는 클래식하게 가야지. 몇 달 동안 제대로 꿀 빨기는 했잖아? “슬슬 이동하겠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주변 지형을 둘러보기도 잠시, 나는 신속하게 나침반을 꺼내 들어 방향을 찾았다. 그야 이번엔 입장 인원도 얼마 안 되지 않은가. 잘만 하면 버그 없이도 포탈 개방 경험치를 수급하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 “아브만, 철웅을 소환해라. 평소보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니.” 이내 곰아저씨가 소환수를 뽑자, 레이븐은 익숙하게 그 위에 올라탔다. “아이나르 씨도 이렇게 푹신하면 좋을 텐데…….”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항상 탈것 생각밖에 안 하지? “우우우우웅-!” 아무튼, 내가 선두에 서서 달리자 그 뒤를 레이븐과 곰아저씨가 따랐다. 원딜치고는 단단한 몸체를 지닌 곰아저씨가 후방에 자리한 진형. 고블린 정도야 이젠 위협거리도 안 되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노릇이니까. 언제나 미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람이었다. ‘일단 노아르크 새끼들은 없는 거 같고…….’ 처음엔 긴장하며 동굴을 내달렸으나, 머지않아 경계도를 한 단계 낮췄다. 속도를 올리며 여러 탐험가를 마주쳤으나, 그들 대부분이 하위 장비들을 낀 저층 탐험가였다. 그마저도 숫자는 얼마 안 됐고. ‘어쩌면 진짜 포탈 개방이 가능할지도?’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점점 생겨났으나, 이는 암흑지대 초입부에 도착한 순간 박살났다. “아무래도 선객이 있는 거 같네요.” 우리가 가려는 길목에 떨어져 있는 9등급 마석. 미샤 쪽 팀이 먼저 지나간 것일 리는 없었다. 에르웬은 몰라도 미샤와 아이나르는 내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으니. “……그걸 왜 주워요?” “9등급 마석도 마석이다.” 이 기나긴 통로를 세 발로 기어서 횡단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석을 버리고 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그때 이 작은 마석은 나의 희망— “아니, 제 말은 제가 마법으로 회수해도 된다는 뜻이었어요.” 음, 그것도 그렇네. 아니, 그럼 여길 지나간 팀에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다는 건가? 이 속도면 분명 최상위 팀일 거라 생각했는데. “리에이트.” 횃불 대신 라이트 마법으로 어둠을 밝히며 다시 뜀박질을 이어갔다. 약 40분가량이 흐르자 포탈이 나타났다. 기대를 하진 않았으나, 역시나 포탈은 이미 누군가 개방한 상태였다.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포탈에 몸을 실었다. 누가 먼저 도착하든 위에서 기다리자는 게 약속이었으니까. “……아까 동굴에서도 그랬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네. 그때는 그렇게 치열했었는데.” 노아르크 놈들과 라프도니아의 탐험가들 사이에서 치열한 혈전이 있었던 그 고블린 숲. 주변은 적막했고,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미샤 쪽은 아직인 듯하니 잠시 기다리지.” 이후 자유롭게 쉬는 시간을 가지며 나는 주변을 둘러봤고, 근처에서 사람이 있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 건가 보네요. 근데 왜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어요?” “그냥 왠지 신경이 쓰여서.” “어, 얀델 씨가 그런 말하면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뭐래, 얘는. “다들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조금 쉬어라. 저쪽 팀에서 언제 올지 모르니.” 이내 우리도 아공간에서 각자의 개인 의자를 꺼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혹 멀리서 고블린들이 접근했으나, 휴식을 방해받을 일은 없었다. 그 정도는 철웅 선에서 해결이 됐으니까. *** “저기요오…….” 은은한 달빛이 내리앉은 숲.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투정을 부리듯 입을 열었다. “이제 2층도 올라왔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우리 용용이 좀 소환하면 안 될까요?” “안 된다. 그 덩치로는 분명 흔적이 남을 테니까.” “에이, 언니. 그러지 말고요. 어디 소환술사가 한둘인가? 네에?” “카르밀라, 그만둬라. 레인웨일즈 님께서 안 된다고 했지 않냐.” “저기, 아저씨는 가만 있지?” “가만히 있어도 되게 굴든가 그럼. 애초에 너는 대체 뭐가 힘들다고 그러는 거냐? 1층에서도 계속 내 어깨에만 앉아 있었으면—” “아니, 아저씨한테는 홀아비 냄새가 난다고요. 옷에 밴다고. 코에 해롭다고!” “……뭐?” 날 선 매도에 여인을 태운 전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끝낼 뿐이었다. “그래,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처음부터 하지 마, 그러면!” “카르밀라, 요즘 예민한 건 알겠는데, 계속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진짜, 훈계는…….” 카르밀라라 불린 여성은 그리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이 상황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우리가 임무를 해야 하는 거예요? 다들 우리만 버리고 바깥으로 도망쳐서 소식도 없는 와중에, 그 탐험가를 죽인다고 바뀌는 게 있기는 해요?” “……그쪽도 사정이 있겠지. 실제로 며칠 전에 연락이 오기도 하지 않았소.” “아, 네. 그 자기들 할 말만 하다가 10초 만에 끊긴 그 연락 말이죠?” 카르밀라는 비꼬듯이 말했고, 이에 궁수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그쪽에서도 양해를 구했지 않소. 결계 때문에 길게 연락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그래도 우리를 데리고 나올 방법은 있다고 하는 모양이니 우리는 우리 일만 열심히—” “순진하긴. 거짓말일 거란 생각은 안 해요?” “……그럼 카르밀라 양은 대체 왜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오? 도시에 있지 않고?” “그건…….” 카르밀라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술을 씹었다. 그도 그럴 게, 어찌 말하겠는가. 가기 싫다고 땡깡을 부렸다가 저 여자가 어찌 나올지 몰라 무서워서 따라왔다고. ‘아, 진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왠지 신경질이 난 그녀는 궁수에게 다시금 날카롭게 말했다. “그나저나, 네바르체. 그래서 그 파멸학자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게 당신이잖아요.” “말했지 않소. 파멸학자는 ‘그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다들 그만.” 이내 선두에서 길을 열던 여인이 멈춰 서자 궁수도 하던 말을 끊고서 표정을 달리했다. “아멜리아, 뭔가 문제라도 생기셨소?” “포탈 근처에 설치한 함정이 사라졌다.” “누군가 2층으로 올라왔다는 뜻이구려. 시간을 보아하니 상위 탐험가 같은데……. 어쩌면 우리 예상보다 많은 탐험가들이 입장한 걸지도.” “네바르체, 짐작 가는 팀이 있나?” “모르겠소. 하지만 대형 클랜 소속은 아닐 것이오. 확신 없이 움직일 자들이 아니니까.” “그렇군.” 둘의 대화에 카르밀라가 툭 뱉었다. “근데 누구인지가 중요해요? 나는 왜 그걸 궁금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그녀의 말에 아멜리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여.” “네? 뭐라고 했어요?” 아멜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움직이지.” *** “아저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죄송해요. 하필 남쪽 구역에서 시작해서 조금 시간이 걸렸어요.” 숲에 도착해 약 2시간 정도를 기다리자 미샤 쪽 팀이 2층에 도착했다. 따라서 얼른 이동을 재개했다. 그야 기다리는 동안에 이미 열 개도 넘는 팀이 여기를 지나쳐 갔거든. ‘생각했던 것만큼 빈집인 건 또 아니란 말이지.’ 이후 도착한 3층 포탈은 당연하게도 진작에 개방된 상태였고, 이는 6일에 걸쳐 도착한 4층도 매한가지. “그래도 이제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겠군.” 밥도 제대로 안 먹으며 일정 내내를 뛰면서 보냈던 우리는 체력을 보충하며 시련을 클리어 해나갔다. 평소와 달리 총 6인 파티였으나 속도는 오히려 더 느렸다. 6명부터는 시련 난이도가 상승하는 탓이다. 몬스터가 늘어난 건 아무래도 좋지만, 미로를 지나쳐야 하는 지혜의 시련 같은 경우에 맵이 더 커지는 바람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도 종족값 덕분인가? 확실히 나보다는 길을 잘 찾네.’ 언니에게 탐색꾼 교육을 받은 에르웬은 내 기대 이상으로 길을 잘 찾았다. 내가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면, 에르웬은 감각에 의지해 길을 찾는 타입에 가까웠다. 밤눈도 훨씬 좋아서 함정도 멀리서 발견하는 게 가능했고. “여기서부터는 아브만 씨가 없어도 알겠어요. 이쪽 문 맞죠? 문 너머에서 마력의 파동음이 들려요.” 심지어 얘는 인도자 재능 없이도 5층과 이어진 포탈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감각 수치가 높았다. 먹은 정수들에 청각이 따로 붙진 않았을 텐데. ‘그냥 타고난 건가?’ 아무튼, 5층 포탈 앞에 도착한 것은 19일 차가 막 시작될 즈음이었다. ‘평소보다 하루 정도 더 늦은 셈인가.’ 만약 7인이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거다. 그때부터는 매 시련마다 존재하는 대기 시간 자체가 늘어나 버리니까. 아, 참고로 이는 사람 수에 비례한다. 대형 클랜이 괜히 다들 다섯 명씩 팀을 나눠 5층에서 만나는 걸 택하는 게 아닌 것. “아루루, 근데 왜 저층에서는 우리처럼 2층에서 만나서 사냥하고 그런 걸 안 하는 거냐?” “한 사람 몫을 더 분배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층에선 단가가 안 맞으니까요. 게다가 팀을 둘로 나누려면 양측에 길잡이가 한 명씩 있어야 한다는 점도 크고요. 저층 탐험가들 중에는 비전투 인원이 많잖아요?” “음! 그렇군!” “저… 이제 알겠어요! 지금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고개만 끄덕인 거 맞죠?” “오, 역시 마법사다!” “둘 다 장난은 그만하고 어서 자기나 해라.” 어차피 야영을 해야 할 시간이었기에, 안전한 4층에서 휴식을 취한 뒤 이른 아침에 다 함께 5층에 진입했다. 「5층 대마경에 입장했습니다.」 오랜만에 도착한 5층은 시작부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딱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한적하니 아주 좋군.” 어딜 가든 항상 먼저 도착해 자리 잡고 사냥터를 통제하던 클랜들이 보이질 않는다. 또한……. “어! 저기 저기! 이스톨토스당!” 예전에는 클랜에 돈을 내는 게 아니면 구경도 못했던 몬스터들이 자유롭게 필드를 돌아다닌다. “원래는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 곳이었군.” 이를 보며 곰아저씨가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하긴, 이 아저씨는 한참 전부터 5층에서 활동했으니까. 클랜에 악감정이 많았던 만큼 기분이 이상하겠지. “얀델,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역시 계속 이 상태가 이어지진 않겠지?” “그래, 아마 얼마 못 갈 거다.” 나는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다음 달만 되어도 대형 클랜들이 하나둘 미궁에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만들어진 클랜이 다시 빈자리를 다 채우게 되겠지. “그러니까 구경은 이만하고 슬슬 이동하겠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니까.” 이번이 아니면 잡기 어려울 몬스터가 있었다. 264화 버그 (3) 흔들리는 협곡 위를 걷고 있다. 선두에는 내가, 후방에는 탱커조무사인 철웅이 위치하고서 나머지는 중심부에 똘똘 뭉친 진형. [끼예에에에에엑-!] 걸을 때마다 어둠 너머에서 망령 계열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6층과 이어진 네 가지 루트 중 하나, ‘망령의 협곡’이 가진 특징이다.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망령의 협곡이 부여됩니다.」 몇 분 주기로 세차게 흔들리는 땅. 망령들이 내뱉은 음산한 배경음. 그리고……. 「상태이상 [지박령]이 부여됩니다.」 「어둠 내성 및 물리 내성이 -100 하락합니다.」 어딘가 살가죽이 얇아진 것만 같은 이 기분 나쁜 감각까지. ‘탐험가들이 안 보이니까 더 을씨년스러운 거 같네.’ 망령의 협곡에 진입한 지 벌써 하루가 흘렀건만 아직 동종업계 사람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간 마주친 건 오직 몬스터들뿐. 「커스스톤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4」 「타락한 피조물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2」 「혈원귀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다키리온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5」 「고대 땅거미를 처치…….」 뭐, 그래도 이건 장점에 가깝다. 이 루트에서 수급 가능한 경험치 중 대부분을 이번 탐사 한 번으로 획득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는 한 번 정도 더 지나가면서 못 잡은 놈만 따로 잡으면 될 거 같고…….’ “아래로 떨어지는 일 없게 조심해라.” 땅이 흔들릴 때마다 잠시 멈춰서는 것을 제하면 모든 시간을 전투와 이동에 투자했다. 휴식은 야영을 할 때가 전부. 조금 빡센 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4층에서 꽤 체력을 비축했으니 며칠간은 무리 없겠지. “조금 신기하네요. 다음 지역은 서리 협곡이 될 줄 알았는데.” “그때는 6층으로 넘어갈 준비가 안 됐으니까. 6층에 가려면 이 경로가 제일 가깝다.” “음, 그렇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런 이유면 초행인 이곳보다 익숙한 지옥불 협곡을 지나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거기는 이제 공적치를 다 모았지 않냐.” 레이븐에겐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서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사실 이 루트를 타기로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서리 협곡에서 먹을 정수는 이미 얻었으니까.’ 원래 미샤에게 먹이려 했던 그 정수는 왕가의 보상으로 획득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곳에선 ‘그놈’이 나오지.’ 6층으로 진입하고자 한다면 꼭 잡고 넘어가야 할 몬스터가 이 루트에서 출현한다. 물론 이놈이 목적이란 말은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어떻게 이놈을 찾을 거냐는 말에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마땅한 핑계가 없었거든. 역시 그냥 운이 좋았다로 퉁치는 게 최고— “아저씨.” 응? “이번엔 이쪽으로 가셔야 해요.” 상념을 끝내고 앞을 바라보니 세 갈래 길이 우리를 막아서고 있었다. 사실 세 갈래 길이라고 하기엔 애매했지만. “이번엔 반대편까지 거리가 조금 있군. 내가 먼저 넘어가서 밧줄을 던지겠다.” [도약]을 이용해 30m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은 나는 미리 준비한 로프를 반대쪽 절벽으로 던졌다. 5층 대마경의 재밌는 점이다. 이처럼 캐릭터의 능력에 따라 선택 가능한 루트가 늘어난다. “설치 끝났어요! 이제 넘어갈게요!” 로프 설치가 끝나자, 팀원들이 순서대로 로프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경사가 있는 덕에 끙차끙차 땀 흘릴 일은 없었다. 밧줄에 고리를 걸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끝. “그럼 다시 다녀오지.” 이동을 끝마친 다음에는 다시 [도약]을 통해 건너편으로 넘어가 밧줄을 회수했다. 그야 일회용으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길이로 로프를 특수 제작하려면 값이 얼만데. “에르웬, 지금 우리가 얼마나 내려온 거지?” “7분의 1 정도요.” “일주일 뒤에는 6층에 도착할 수 있단 거군.” “네. 지금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요.” 이후로도 에르웬의 길 안내를 받으며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탐색 방식이 달라 나처럼 지도를 만드는 일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빙빙 돌며 헤매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요정 아가씨가 길을 아주 잘 찾는군.” “6층까진 못 가봤지만, 클랜에서 지낼 때 네 가지 경로 모두 경험해 보기는 했거든요. 그리고 아브만 씨가 포탈이 있는 방향을 알려주시는데 이것도 못하면 안 돼죠!” “빈말은. 5층에서 포탈 위치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넌 좀 더 당당해져도 될 거 같다.” 원래도 나쁘게 보던 건 아니지만, 에르웬이 본인 능력을 검증하며 동료들의 시선도 더 좋게 변했다. 요즘은 미샤랑도 사이가 꽤 좋아진 듯하고. “언니! 좀 더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바깥쪽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응, 고맙당.” 아무튼, 에르웬의 길 안내를 따라 최단 루트로 이동하고 있자니 어느덧 야영지를 찾아 휴식을 취할 시간이 다가왔다. “여기가 좋겠군.” 내가 야영지로 정한 장소는 절벽가였다. 일단 한쪽만 경계하면 되는 데다가, 혹여나 뭔가 잘못되더라도 5m 정도 떨어진 옆길로 뛰어넘어 가면 그만인 곳. 아, 물론 불침번 순서는 크게 의미 없었다. “비요른, 일어나랑.” “또 몬스터냐?” 평균 20분 간격으로 몬스터가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는 자다가도 깨어나 무기를 들어야 했다. 이는 체력이 부족한 레이븐도 매한가지. 작은 규모는 가급적 깨우지 않고 마무리했으나, 몬스터가 수십 마리씩 밀려들면 어쩔 수 없이 깨워야만 했다. “……하암, 전 다시 잘게요.” “그래, 고생했다.” “…….” 대꾸도 없이 작게 코고는 소리를 내는 레이븐. 보고 있으면 조금 웃기다. 얘도 진짜 탐험가가 다 됐구나. “큭, 이젠 어지간한 소리에는 깨지도 않넹.” “아니,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기는 하는 거 같다. 뭐, 큰일이 아닌 거 같으면 다시 바로 잠드는 거 같긴 하지만.” “좀 신기하당. 사실 그게 제일 어려운 건데.” “어려워도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됐긴 하니까.” “응, 그건 그렇지……. 다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니까…….” 마치 미샤와 나의 관계 같다. 처음엔 미궁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어색했지만 지금은 별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듯, 시간이 지나면 전부 익숙해진다. “아무튼, 너도 이제 자라.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까.” “네 차례까진 아직 몇 분 남았을 텐데?” “잤다가 다시 일어나는 쪽이 더 귀찮다.” “으음, 그래도 미안한데…….”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어차피 20분 뒤면 또 싸우느라 깨울 텐데. *** 이후로도 탐사는 이어져 5층에 진입한지도 어느덧 열흘이 흘렀다. 다만 우리는 아직도 5층에 있었다. “6층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하루 정도면 될 거 같아요.” “지금 속도라면 말이지?” “네.” “넉넉히 이틀쯤 걸린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애석하게도 탐사가 진행될수록 이동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서서히 체력이 한계에 가까워진 탓이다. 하긴, 잠도 제대로 못자고 하루 종일 싸우고만 있는데 멀쩡한 게 이상하지. 탐험가는 초인이 아니다. 단지 일반인들보다 훨씬 뛰어날 뿐. ‘뭐, 그래도 어제 그놈은 잡았으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이 더뎌졌으나, 이번 탐사의 부가 목표 중 하나는 달성했다. 5등급 희귀종 소울이터. 여러모로 굉장히 유니크한 몬스터다. 미궁이 열렸을 때 딱 한 마리만 출현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소울이터를 처치했습니다. EXP+177」 일단 경험치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처음엔 경험치 로그를 보고서 버그인 줄 알았다. 설마 첫 사냥 시 경험치를 최소 100에서 최대 200까지 무작위로 주는 몬스터가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얼마가 들어왔으려나?’ 앞으로는 정확하게 경험치 계산을 할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없다. 이거로 드디어 6레벨을 찍었으니.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3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시체골렘, 오크히어로, 오우거, 만티코어. 그리고 이번에 왕가 보상으로 얻은 바이욘의 정수까지. 총 다섯 개의 정수로 칸이 꽉 찼음에도 시체 골렘을 지우지 않고 미궁에 들어온 이유였다. 그간 경험치 복사도 꽤 했으니 얘를 잡기만 하면 레벨 업을 할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아무리 탐험가들이 적다고 해도, 그놈을 마주칠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운이 좋았군.” “후후,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이 팀에는 운이 따른다고.” 운은 무슨. 너희 모르게 출현 조건을 채운다고 내가 어떤 노력을 했는데. “아루루, 이제 팀이 아니라 클랜이다!” “아, 네……. 그래요, 그래.”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해라.” 팀장. 아니, 이제는 클랜장으로서 집중이 너무 풀어지지 않도록 조절해가며 이동을 이어나갔다. 일정이 지체된 걸 제하면 순탄하게 탐사가 진행되는 듯했지만, 아찔한 상황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왕가 보상 덕분에 전력 자체는 5층 수준을 넘어섰지만, 이 세상이 어디 스펙만으로 다 되는 곳이던가? “미샤 씨, 갑옷은 나가자마자 수리해야겠네요.” “아, 응……. 하, 진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아까워 죽겠당.” 소울이터가 소환한 영혼기병의 창에 미샤가 정통으로 맞는 일이 있었다. 물론 부상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샤, 넌 대체 뭐가 아깝단 거냐? 그게 아니었으면 어제 넌 죽었다.” 창날은 미샤의 갑옷을 깊이 꿰뚫었다. 심장이 있는 부위였다. 딱 손가락 마디 하나만 더 들어갔으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을 상황.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기 그지없다. 만약 첫 PK 상대였던 젠시아를 죽이고 얻은 2단계 소재의 가죽 갑옷을 아직도 걸치고 있었다면 그만큼 버티지도 못했을 테니까. ‘이번에 4티어 가죽이 아니라 돈 좀 더 써서라도 5티어 가죽 갑옷을 맞춘 게 정말 천만다행—’ “아니,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허,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됐고, 넌 앞으로 장비에 돈 아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응…….” 이래서 물리 내성이 낮은 것들은 안 된다.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으니까. “크흠흠, 보기 좋기는 한데 슬슬 움직이는 게 어떤가?” “…….” 미샤를 타이르며 잠시 멋쩍은 시간이 생기기도 잠시, 우리는 다시금 탐사를 재개했다. 거의 하루 정도 지나니 망령의 협곡을 전부 내려와 바닥 지형이 나왔고, 거기서 한나절을 더 이동하니 포탈이 나타났다. “와, 진짜 6층이구낭…….” “나도 여기까지 와본 건 처음이군.” “왠지 굉장히 흥분되네요. 워낙 이곳에 대해서 들은 게 많아서.” 새로운 층에 들어서는 순간답게, 모두가 각기 말을 뱉으며 감상을 토해냈다. 아, 물론 감회가 남다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6층까지 왔네.’ 광장에서 세금 미납자들의 처형식을 처음 본 날. 그날 나는 생각했었다. 부엌이 있는 집에서, 아플 땐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쉰 살부터는 일을 그만두고서도 강아지 한 세 마리쯤 여유롭게 키우며 보낼 수 있으려면 최소 6층까지는 가야 한다고. 거기서도 은퇴 전까지 죽어라 모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선, 그다음에나 제대로 생각해 보자고. ‘……설마 2년도 되기 전에 도착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예상했던 것보다 최소 3년은 이른 시기. 다만 운이 좋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몸에서 눈을 뜬 지 어언 16개월.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내게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열심히 발버둥을 쳤으며. 그럼에도 누군가를 잃었고. 그 유산을 통해 지금의 나로 성장했다. “비요른.”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네가 먼저 들어가라.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너니까.” 이내 곰아저씨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네. 맞아요. 얀델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미궁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걸요?” 레이븐이 지팡이로 내 허리를 쿡쿡 찔렀다. 거, 보채기는. “그럼 들어가지.” 나는 포탈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6층 대해大海에 입장했습니다.」 그래, 정말 여기까지 온 거구나. *** 「비요른 얀델」 레벨: 6(New +1) 육체: 607.62 / 정신: 502.19 / 이능: 2,214.55(New +39) 아이템 레벨: 4,627 종합 전투 지수: 4,481.11(New +39)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 *** 푸른 하늘과 내리쬐는 태양. 바람에 실린 소금의 짠내. 그리고 철렁이는 파도의 소리. 솨아아아아-! 허공에서 균형을 잡고 착지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드넓은 모래사장이었다. 모래는 백색에 가까웠으며, 물에 젖은 진흙 너머로는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와…….” 모두가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며, 바다를 처음 본 이들과는 다른 의미의 감동이 있었다. “…….”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하염없이 수평선 너머를 보았다. 사실 나야 한참 전에 정신이 들었지만……. ‘굳이 이 순간을 방해할 필요는 없겠지.’ 바다 쪽에서 시선을 떼고서 주변을 쓱 둘러보며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6층의 스타트 포인트인 ‘시작의 섬 라이미아.’ 게임에선 늘 사람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 시간이면 이미 다 출항했을 테니까.’ 이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향했다. 그리고 미샤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미샤.” 짧게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 응. 맞다. 그래, 그것부터 해야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 미샤는 여태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물품 하나를 꺼냈다. 이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병 안에 담긴 그건 또 뭐예요? 탐험가 패 같은데…….” “탐험가 패 맞다.” “아, 설마…….” “그래, 드왈키의 것이다.” 우리끼리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르며 드왈키의 물품들 대부분을 불에 태웠지만, 이것만은 남겨 두었다. 난쟁이놈의 부탁이었다. [그곳은 참으로 신비해서 미궁인데도 시간이 따로 흐르고 계절도 있다지? 꼭 좀 부탁하겠네. 분명 고마워 할 걸세.] [……하지만 그 녀석은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그러니까, 좋아할 걸세. 그 녀석이라면 분명.] 과연, 어떠려나. 잘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곳에 왔다. “잠깐 기다려 주겠나?” “얼마든지요. 다녀오세요.” 레이븐은 별말 않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미샤.” “으응.” 나는 미샤와 함께 모래 사장을 지나 바닷가로 나아갔다. 촤아아아아-! 두근거리는 심장처럼 차올랐다 빠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의 경계선. 미샤가 허리를 굽혀 바다에 손가락을 적셨다. “생각보다 차갑네…….” “그렇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3층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그렇게 어린애처럼 좋아했던 녀석이니까. [……탐험가들이 말하던, 세상이 넓다는 말을 이제 좀 이해할 것 같소.] 조금만. 조금만 더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막힌 천장에 펼져진 은하수가 아니라, 탁 트인 진짜 밤하늘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줘봐라.” “응? 하지만…….” “여기서 내려놔봤자 내려올 게 뻔하지 않냐.” “아, 그것도 그렇겠구낭…….” 과학적으로 설명할 것도 없이 미샤는 파도를 보고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따라서 미샤에게 특수 제작한 유리병을 넘겨 받은 뒤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얕았던 수심은 서서히 깊어졌고, 나는 최대한 섬에서 멀리 떨어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거대화]를 썼음에도 목아래까지 차오른 수심. 나는 최대한 멀리 유리병을 던졌다. 풍덩! 머지않아 물에 빠진 유리병이 수면 위 떠올라 물결을 타고서 섬 반대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케이, 첫 트라이에 성공했네. 안 됐으면 나중에 배 타고 나가서 하려 했는데. “아무튼, 미샤랑은 잘 해보려 했는데 안 됐다.” 나는 떠내려가는 유리병을 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조금 웃겨 피식 웃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쉬어라.”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말이라 생각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삼키고 등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만약 드왈키라면 지금의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기뻐해 줬겠지.’ 설령 이게 남은 자들을 위한 행위라고 한들. 녀석은 웃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릴 위한 것이기에 더 좋아했겠지. 태생이 그런 놈이었으니까. 촤아아아아-! 등을 떠미는 파도를 느끼며 나는 다시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짧게 기도했다. 저 유리병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지만. 촤아아아아-! 철렁이는 이 파도가 부디. 녀석이 바라는 곳으로 이끌어 주기를. 265화 버그 (4)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다.” 일단 돌아와서 짧게 사과부터 했다. 그야 얘네는 드왈키와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개인적인 일로 탐사 시간을 뺏었으니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물론, 동료들의 반응은 너그러웠다.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우리를 뭐로 보고.” “그래, 레이븐 말이 맞다. 이상한 걸 다 신경 쓰는군. 언젠가 우리가 그 친구의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어,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레이븐이 나를 대신해서 곰아저씨에게 말해 줬다. “……우리크프리트 씨, 부정 타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줄래요?” “레이븐, 너는 미신 같은 건 잘 믿지도 않으면서.” “이제 저도 탐험가잖아요.” “아, 그랬지.” 곰아저씨가 키득키득 웃으며 조금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의도하고 농담을 한 건가?’ “뭘 봐요?” ‘……아니겠지.’ 레이븐의 시건방진 눈빛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쉴 만큼 쉬었으면 이제 섬 구경이나 하지.” 탐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 시작의 섬 라이미아. 5층에서 어느 경로를 택했든 처음에 도착하게 되는 섬. 다만 라이미아가 시작의 섬이라 불리는 것은 이런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엔 6층 탐사를 위한 기초 재료가 있다. 음,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이미 다 털렸네요.” 섬의 중심부에 떡하니 자리한 산. 그 정상지까지 등반한 우리는 허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이곳에는 특수한 나무가 자란다. 3단계 금속 정도의 경도를 지녔으며 가벼워서 물에도 잘 뜨는 성질을 지닌 나무다. 하지만……. “하긴, 나무가 아무리 빨리 자라도 한 달 만에 다 자라지는 않겠지.” 정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릴 반긴 것은 수천 개의 그루터기들뿐이었다. 뭐, 어느 정도 자란 나무가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못 쓰겠군.” “그래도 쓸 수 있을 만큼 자란 나무가 없는 건 아니네요. 이거라도 가져가죠.” 이내 우리는 준비해 온 도끼를 꺼냈다. 그리고 소재로 가공이 가능할 사이즈를 지닌 나무들만 골라서 베며 차곡차곡 아공간에 챙겨 넣었다. 시간은 한 30분쯤 걸렸나? “잘하면 다음 달에도 이 정도는 챙겨갈 수 있겠군.” “네. 그때도 이번처럼 사람이 없으면요.” 후, 6층도 매달 리셋됐으면 좋았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1층부터 5층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다음 달에 미궁이 새로 열리면 전부 리셋이 되지만, 6층만큼은 그렇지 않다. 이곳은 고유의 시간이 연속해서 이어진다. 저기 저 커다란 바위에 이런저런 자국들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와, 바위에 뭐라고 적혀 있다! 글씨 같은데……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매일 글을 배운다고 성지에 가던 거 아닌가?” “하하, 그건 진작에 포기했다!” 쓸데없이 유쾌한 아이나르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기도 잠시, 나는 바위 근처로 다가가 적힌 글자를 읽어내렸다. 대부분이 그냥 뻘소리들이었다. 누구누구 다녀감,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누구야 내가 많이 좋아한다 등등. ‘여기 사람들도 낙서를 하는 건 다 똑같구나.’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 나무는 얼마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높은 곳에 올라와서인지 밑에선 보이지 않았던 섬이 시야에 잡혔다. “오, 저기가 파루네 섬인가 보네요.” 시작의 섬 북부에 위치한 두 번째 섬 파루네. 우리가 이 섬 다음으로 가게 될 장소이기도 한 그곳. “아브만, 혹시나 해서 묻는데 포탈 위치는 느껴지나?” “아니, 이 섬에 있는 것만.” “그렇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븐이 곰아저씨를 비호하듯 입을 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워낙 층이 넓다 보니 생긴 일이니까. 포탈 근처로 가면 그때부터는 다시 위치를 느낄 수 있댔어요.” 거, 실망은 무슨. 애초에 저층과 달리 인도자가 6층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6층에 막 진입한 타이밍이라면 더욱 더. “아무튼,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이만 내려가겠다.” 정상지에서의 용무를 마친 나는 동료와 함께 다시 해안가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까 정상에서 보았던 섬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시작의 섬에서 몇 번 더 나무 루팅을 해서 배를 만드는 게 기본 공략이지만……. ‘원래 노가다는 현질로 스킵할 수 있는 게 국룰이지.’ 이내 나는 아공간에서 준비해온 배를 꺼내 물에 띄웠다. 길드 창설을 하자마자 일정량을 공금으로 거둬 마련한 배였다. 공금 대부분을 쓰긴 했지만……. ‘요즘 시국이 아니었으면 이 가격에는 절대 못 구했겠지.’ 여러모로 시기가 좋았다. 앞으로 획득할 나무들은 배를 업그레이드 하거나 원목으로 팔아서 더 좋은 배를 살 때 보태면 될 테고. “비요른…… 이, 이거 가라앉지는 않겠지?” 거 참, 지난번에 노움트리에서 배 띄워놓고 낚시도 했었으면서. ‘……아 그때 배 뒤집어졌었지.’ “걱정마라. 이미 도시에서 성능은 다 시험해 봤으니까. 지난번처럼 너무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하, 하지만…… 으악! 흐, 흔들린다!! 배, 배가 이상한 거 아니냐! 그때랑은 너무 다른데!!” “그때는 호수였고 지금은 바다니까.” 사실 배가 그때 탄 것보다 2배는 작은 게 제일 큰 문제긴 하겠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소란이 끝에 우리는 차례로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자. 출항이다!” 도시에서 맨땅에 두고 연습했던 대로 열심히 노를 저어 파도를 거슬러 나아갔다. 그야 우리 배에는 돛이 없거든. 만약 돛이 달린 걸 샀으면 좁아서 네 명도 못 탔을 거다. 큰 걸 사자기에는 돈이 부족했고. 원래 뉴비 시절엔 뉴비만의 낭만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배, 배가 뒤로 가는 거 같은뎅……?” “기분 탓이다! 열심히 노를 저어라!” “하나, 둘. 하나, 둘!” 실전에서 노를 저어 본 건 처음이기에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으나, 안 되는 건 악으로 해내는 탐험가들답게 금방 적응해냈다. “오, 섬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항해 콘텐츠가 나름 감성을 자극했는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평소답지 않게 반응하는 레이븐. 다만 그 고양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근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구나…….’ 정상지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멀게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으니 나아가는 속도가 거의 굼벵이 수준이다. 아니,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설마 6층에 진입하고서 이렇게 빨리 고비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우욱.” “비, 비요른? 왜 그러냐!” “머, 멀미…….” 비요른 얀델은 바다 체질이 아니었다. *** 바다 멀미로 죽어가는 날 보며 미샤가 걱정스레 물었다. “머, 멀미? 그건 마차 탈 때나 있는 거 아니냥?”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는 건가도 싶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만 그런 거겠지. 평생 성벽 안에서만 살아왔으면 그럴 만하다. 레이븐도 지식으로만 아는 것 같았고. “멀미는 시각과 평형감각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어지럼증을 뜻해요. 마차를 탈 때만 생기는 게 아니란 거죠.” “아, 그렇구낭…….” 미샤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나도 아까부터 속이 조금 메스껍더, 라니…….” 그나마 미샤는 나았지만, 모태 바바리안 전사 아이나르는 나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비, 비켜라! 우으으읍!!” 노 젓는 것도 잊은 채 난간을 잡고 속에 든 것을 게워내기 시작한 아이나르. “꺄악!” “그, 그만! 아이나르 씨!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어찌나 격하게 토를 하는지 몸의 흔들림에 배가 연신 이리저리 기운다. 정말이지 이러다 배가 뒤집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하게. “웁, 우우우욱!” “……그, 그만!” 제대로 일어나 걸을 공간도 없는 비좁은 배인 만큼, 물리적으로 아이나르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수영을 못하는 인원은 넷. 에르웬과 미샤를 빼면 전부 수영을 못한다. 섬에서도 꽤 멀어졌으니 [거대화]를 써도 지난번처럼 땅에 발이 닿는 일은 없을 테고. 아니, 이거 진짜 위험한 상황 아닌가? “레이븐! 마법으로 기절 시켜라!” “아, 네!” 해프닝으로 넘길 게 아니란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신속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오더를 내렸다. “세레타라 바이르온!” “으, 우읍, 으응……? 흐으응…….” 다행히 아이나르는 항마력 세팅을 제대로 갖추기 전인지라, 마법 한 방에 얌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저, 저기 아저씨……. 저, 죽을 거 같아요.” “어, 나도. 나도 해야겠다.” 아이나르란 격랑을 버티지 못한 동료들이 하나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래도 우리크프리트 씨는 의외로 멀쩡—” “…웁, 우에에에엑!!” “어, 어… 얀델 씨는 괜찮—” 아니, 괜찮을 리가. “우어어어어어억!!” 최대한 조심스레 난간을 잡고 토를 하고 있자니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리 중에는 멀쩡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죠?” 놀랍게도 레이븐은 멀미를 안 했다. *** 6층의 계층 콘셉은 간단하다.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다양한 섬들을 지나 7층으로 향하는 것. 그러다 보니 이 계층부터는 ‘항해사’가 필수적이다. 배 조종부터 시작해 항로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항해에 도움이 될 정수를 먹은 6층 특화 전문 인력. ‘뭐, 이건 배만 제대로 갖춰져도 지원자가 몰려들 테니 급할 필요는 없겠고.’ 뱃머리에서 내린 나는 손으로 직접 배를 끌고 해안가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잃어버릴 일 없게 아공간 가방에 넣었다. 작은 배를 모는 지금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무풍지대, 빙해 등등 온갖 지랄맞은 바다를 건너려면 점점 큰 배가 필요할 수밖에 없으니까. ‘애초에 그게 6층부터 클랜 규모가 권장되는 이유기도 하고.’ 배가 워낙 비싸다 보니, 팀 규모로는 아무래도 6층 탐사는 부담이 크다. “후, 지상이다! 지상!!” 저 멀리 석양이 지기 시작한 시간. 그제서야 반쯤 죽어가는 모습으로 파루네 섬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서 곧장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해 지는 게 저런 모습일 수도 있구나…….” “정말요. 저 오늘 처음으로 탐험가가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성벽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는 것만 보았던 동료들은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며 굉장한 여운을 느꼈다. 사실 이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냥 모래사장에 이러고 있으니 정말 지구의 어느 섬에 온 기분이다. 음, 실제로 이런 섬에 놀라와 본 적은 없지만. ‘왜 진작 안 가봤을까…….’ 처음으로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후회됐다. 그때의 나는 분명 성벽이 없는, 더욱 넓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터인데. “아이나르 너는 얼른 자랑, 이따가 마지막에 깨워줄 테니.” “그, 그래도 되나?” “일단 네가 제일 고생하기는 했으니까…….” “고맙다, 미샤!” 뱃멀미로 고생한 아이나르를 말번으로 정하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두 명씩 서지는 않아도 될 듯해요. 이 섬에선 8등급 이하로만 나온다고 들었거든요.” “응, 그래. 한 명씩 돌아가다가 뭔가 일이 있으면 깨우는 거로 하장.” “저기, 근데 이럴 거면 원래 있던 섬에서 자고 오는 게 낫지 않았나? 거긴 몬스터가 안 나오는 거 같던데.” “그땐 이렇게 늦게 도착할지 몰랐으니까.” “그것도……. 그렇겠군.” 날은 적당히 따뜻했기에 대충 침낭 하나만 모래사장에 깔고 누웠다. 여기서부터는 비도 가끔 내려서 텐트도 챙겨 오기는 했지만……. “예쁘넹.” “네, 그러게요.” 온 사방에 펼쳐진 은하수를 보며 만장일치로 그냥 하늘을 보고 자는 거로 결정됐다. “……아내도 이걸 보면 좋아했을 텐데.”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죽은 사람 말하는 거 같잖아요. 이거 아내분한테 말할 거예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타, 탐험가 일을 그만둔 게 아쉽다는 뜻이었다! 나는!”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자라.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섬을 탐사할 거니.” 6층에 도착한 첫날밤이라 그럴까?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동료들은 한참이나 지나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단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해안선을 따라 쭉 둘러볼 생각이다.” 일찍 깨어난 우리는 야영지를 정리하고서 섬 한 바퀴를 쭉 돌았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과연 게임과 현실 사이에서 크기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예상했던 것보다 섬이 훨씬 크네.’ 그런 생각을 하며 섬을 반 바퀴 정도 걸었을 때. “어, 비요른! 저기 배다!” 우리는 해안가에 정박된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대형 범선급은 아니지만, 일단 우리 것보다 사이즈가 세 배는 컸으며 알뜰하게 있을 건 다 있는 배였다. “이거면 무풍지대는 물론이고 빙해도 끄덕 없겠는데요? 아, 물론 소유자 각인도 되어 있고요.” “어, 그럼 못 주워간다는 뜻인가?” 레이븐의 설명에 아이나르가 순수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때. “거기, 바바리안. 지금 우리 배 앞에서 뭐 하는 거지?” 섬 안쪽에서 배 주인이 나타났다. “아니, 잠깐만 너는 그때 그 바바리안?” “오랜만이군.”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266화 버그 (5) 오랜만이라는 나의 말에 놈은 웃었다. “설마, 날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내가 자신을 알아본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만큼 짧은 만남이기는 했지. 통성명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정신머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지.” 아무렴 어떻게 잊을까. 씹창난 한쪽 발로 피를 질질 흘리며 세 발로 어두운 동굴 속을 기어가던 그 시절을. [파츠란. 포션을 하나 주겠나?] [신성력을 쓰지 못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만?] [어차피 많이 갖고 있잖아. 값은 나가서 따로 치를 테니까.] [쳇.] 날 구해줬던 팀의 검사였던 이 녀석은 리더의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포션을 휙 던졌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굴욕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는 일이 살면서 얼마나 되겠어? “확실히 바바리안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은 좋군. 은혜는 잊지 않는 게 전사의 철칙이랬지?” 내 말을 듣고 싶은 대로 이해한 녀석이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나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뭐, 고마움을 느낀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좀 신기하군. 나야말로 네가 날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 몸뚱이로 그만한 거리를 기어서 갈 수 있는 놈은 흔치 않으니까.” 놈은 그리 말하며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봤다. “그나저나 네가 정말 그 비요른 얀델일 줄이야.” 통성명을 할 것도 없이 내 인상착의를 통해서 이미 정체를 유추해 낸 모양이었다. 쩝, 이걸 장점이라 할지 단점이라 해야 할지. 피식 웃고 있자니, 뒤에서 레이븐이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파츠란 씨.” “누구……. 아, 레이븐 양?” 당황한 검사놈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래… 그렇지. 그 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예전에 들었소.” “이제는 팀이 아니라 클랜이에요. 그나저나, 와! 설마 얀델 씨랑 파츠란 씨가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이게 인연인가?” “인연은 무슨,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내가 대화에 껴들어 툭 뱉자, 검사놈이 피식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말멀른 파츠란이다.” “발음이 이상하군.” “아직도 중부식 작명을 고집하는 중인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라서. 파츠란이라고 불러라.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가문? 혹시 귀족이었나?” “귀족은 무슨. 적어도 수천 년 전에나 그랬겠지.” 무슨 뜻인지는 단번에 이해됐다. 간혹 이런 케이스가 있었으니까.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일국의 귀족 혹은 왕족이었으나. 이 도시에 들어선 후로는 일개 평민으로 전락한 자들. 작위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당주를 정해가며 정통성을 유지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 배 앞에서 뭘 하고 있던 거지?” 이내 통성명까지 끝나자 파츠란도 슬슬 본론에 들어갔다.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니기에 솔직히 말했다. “그냥 한번 섬 전체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렇군.” 내 명성도 명성이지만, 레이븐과 아는 사이인 파츠란은 우리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며 납득했다. 그리고……. “네르비오 페르티아.” 배에 각인된 마법진을 작동시켜 정박된 배를 역소환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근데 그때 같이 있던 팀은 어디 있지?” “섬 안을 탐사하는 중이다.” “찾는 게 있는 모양이군?” “글쎄, 그런 걸 얘기할 사이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거, 뭘 했다고 벌써 까칠해지긴. 딱 잘라 선을 긋는 답변이었으나, 그래도 대강 사정은 짐작이 갔다. ‘일단은 해안에 대놨다가 이제 와서 한 명만 따로 보내 집어넣었다라…….’ 분명 찾는 게 있어서 그랬을 거다. 소환 각인 대부분엔 쿨타임이 존재하니까. 만약 찾는 게 없다고 판단이 되면 곧장 배를 타고 나가려고 했겠지. ‘소환 해제를 했다는 건, 찾던 걸 찾았다는 뜻이 될 테고.’ 그렇다면 과연 저쪽에서 찾던 게 무엇일까? 이 또한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만 해도 그걸 노리고 이번에 6층까지 달린 거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면서도 쓰린 속내가 티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했다. 근데 이건 상대도 마찬가지였을까. “얀델, 그래서 너희는 언제까지 이 섬에 머무를 거지?” 파츠란이 은근슬쩍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새끼, 떠보기는. “아마 계속 있을 거 같다.” “계속? 여기에는 별게 없을 텐데.” “우린 이번이 초행이라서 말이지.” “흠, 그래도 다음 섬까지는 가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뭐, 됐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겠지.” 희망 사항을 듬뿍 담아 말하던 파츠란은 문득 이건 좀 선을 넘었다 여겼는지 말을 고쳤다. 그래, 우리가 어디로 갈지를 네가 뭔데 정해. “아무튼, 이 섬에 계속 있겠다면 몇 번 더 만날 수도 있겠군. 그럼 나중에 또 보지, 얀델.” 이내 파츠란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속내야 뻔했다. 어서 우리의 존재를 동료들에게 얘기하고 상의를 하고 싶겠지. “잠깐.” 내가 짧게 읊조리자, 파츠란이 뒤돌았다. 왜 갑자기 자기를 불렀는지가 궁금한 눈치. 역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사실 이건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그냥 얀델이 아니라 준남작이다.” “……뭐?” 잘못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 주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준남작이라고 말했다.”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친구를 먹으려고. 아직도 내가 그때 그 맨땅 바바리안인 줄 아나. *** “그럼 나는 가보겠소. 크흠! 야, 얀델 준남작…….” 이내 파츠란이 호다닥 뛰어서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이븐이 한숨을 내쉬었다. “……얀델 씨, 꼭 그러셔야 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야 뻔했다. 너무 심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극존칭까지 바란 건 아니지 않나.” 얀델 준남작’님’이라 부르게 한 것도 아니고, 말투도 하오체를 쓰게 하는 것으로 봐줬다. 근데 꼭 그래야 했냐니? “레이븐, 나는 오히려 네가 이해 안 된다. 대체 이렇게 관대한 귀족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지금까지는 이런 적 한 번도 없잖아요. 대체 둘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레이븐은 사사로운 복수라 여기는 듯했으나,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애초에 나는 살려준 고마움이 훨씬 컸으니까.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 “레이븐, 내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서 그러는 것과 말도 안 했는데 먼저 말을 까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내가 귀족이 되고서도 동료와 지인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그야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한데 파츠란은 어땠던가? 바바리안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보자마자 자연스레 말을 깠다. “에휴, 그래서 귀족의 위엄을 위해서 그랬단 거예요? 이제 아주 귀족이 다 됐네요?” 뭐래, 얘는 또. “귀족이 아니라, 클랜장이다.” “……네?” “이제 어디를 가든 내가 너희를 대표한다는 거다. 근데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탐험가를 배려한다고 그냥 웃으며 넘어갔어야 하나? 네가 아는 사람이란 이유 하나 때문에?” “그건…….” 무엇보다, 저쪽 팀은 우리와 목적이 겹치는 듯했으니 앞으로 마주칠 일이 더 있을 터. 노블레스 바바리안 모드를 킨 것도 그래서다. 시작부터 얕보이는 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비아냥거려서 죄송해요. 이번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내 레이븐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를 했다. 얘의 장점 중 하나였다. 실수한 게 확실하다면 그냥 인정하고 솔직히 사과를 하는 것. “그거면 됐다. 이제 잊었다.” 나는 바바리안답게 호쾌하게 이번 일을 넘긴 뒤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근데 몰랐는데, 레이븐 너는 귀족을 싫어하는 편인가?” “아뇨? 전혀 안 그런데요?” 음, 그래? 그런 거치고는 날카롭게 비아냥거리던데. 아, 혹시 아까 그자와 절친한 사이였던 건가? 그래서 내가 갈구는 걸 보고 화가 난 거고? 나름 그럴듯한 추측이란 생각에 다시 한번 물어봤지만 레이븐은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어, 그건 확실히 아니에요. 애초에 파츠란 씨도 연회에서 몇 번 만나 본 게 전부고…….” “흐음, 근데 그러면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냐?” “화낸 건 아닌데요…….” “그래도 평소랑 달랐던 건 사실이지 않냐.” 내 질문에 레이븐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말하기 껄끄럽다기보다는 본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냥 조금 그랬어요.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얀델 씨는 안 그랬으면 좋겠달까……. 아니, 내가 뭐라는 거지?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혼란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레이븐.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 같아서였다. 나라도 아이나르가 갑자기 돌변해서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면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이다. 암, 돌처럼 순수한 뇌야말로 바바리안의 매력이니. “아아, 둘 다 그만해랑! 대체 뭐냐 그 이상한 분위기는!” 어색한 공기가 싫었는지 미샤가 대화에 껴들며 자연스레 화제가 바뀌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냥? 아직 섬을 다 둘러보려면 많이 남았는데.” “아, 섬 구경은 이만 끝낼 생각이다.” 어차피 이 정도면 섬의 사이즈 측정은 대충 끝났을뿐더러……. 우리 말고 사람이 있단 것도 확인이 됐다. 어쩌면 같은 목적으로 이 섬에 방문했을지도 모르는 경쟁자들. “그럼 이제 어쩌려고요?” 레이븐의 물음에 나는 짧게 답했다. “섬 안으로 들어간다.” 경쟁자가 있다고 그냥 물러나서는 탐험가 일을 할 수가 없다. *** 파루네 섬. 시작의 섬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이 섬은 나름 인기 있는 사냥터다. 몬스터야 8등급 이하가 전부지만……. 곤충형 몬스터가 대량으로 나온단 점에서 수익적 이점이 상당하다. 그래, 수익만 본다면 말이다. “에르웬, 불! 불! 불! 얼르은!!” “네, 넷!” “퉤, 퉤, 퉤엣!! 으아아아아! 입에 들어간 거 같다!!” “아이나르 씨! 방금 입에서 마석이 나왔어요! 설마 씹어서 죽인 거예요?!” 사람 얼굴보다도 큰 형체를 지닌 8등급 곤충형 마물 ‘크룽비’. 그리고 그놈이 소환하는 벌레 떼들. 화아아아악-! 불의 정령을 다루는 에르웬이나 레이븐의 광역기가 펼쳐질 때마다 마석이 쏟아졌지만, 밝은 표정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는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징그럽긴 하네.’ 비위가 제법 강한 편이라 여겼음에도 힘들다. 온몸을 뒤덮은 진득한 체액. 불길에 휩싸인 벌레가 구워지는 역한 냄새. 후, 이런 냄새가 세상에 존재한단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이 정도까지 몬스터가 많다고는 못 들었는데, 확실히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까……. 꺄악!” “말하지 마라! 입에 들어… 으읍!” 동료들은 실시간으로 인생 최악의 순간을 갱신하면서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아무래도 비요른 네 말이 맞는 거 같군.” “네. 섬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아니면 배도 좋은 걸 타고 다니는 분들이 이 섬에 왔을 리가 없으니까.” 물론 그들을 미행하면서 그게 뭔지 알아내잔 날먹 마인드는 아니다. 이미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을뿐더러……. 애초에 그런 계획에 동의할 정도로 도의를 모르는 애들은 우리 클랜에 없다. 따라서 우리끼리 열심히 찾아보기로 했다. 무언가 이 섬에 숨겨져 있으리란 가정하에. ‘덕분에 나중에 그걸 찾아내도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거 같고…….’ 문제는 파츠란 팀이다. 이 섬의 히든피스는 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종류의 이벤트니까. ‘일단 우리 말고 더 인원이 없다면 총 11명.’ 아직 최고 난이도 개방 조건인 15인은 넘지 않았지만, 11인이면 충분히 부담되는 난이도다. ‘걔가 우리를 내쫓으려 한 것도 그래서겠지. 우리가 없으면 훨씬 더 편하게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조금은 궁금해진다. 과연 녀석은 이 히든피스를 어떻게 알았을까. 팀 멤버들 중에 플레이어가 있는 걸까? 아니면 본인이 플레이어? ‘그거야 나중에 만나 보면 좀 감이 오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동하던 때였다. “아저씨.” 에르웬이 무리를 멈춰 세웠다. “저쪽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어요.” 가리킨 방향은 숲 중심부. 우리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청력을 지닌 얘의 말이니 잘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파츠란 씨네 팀이 사냥 중인가 보네요. 흐음, 여기서 마주치면 따라온 거냐며 괜히 오해를 살 거 같은—” “아뇨. 사냥 중인 게 아니에요.” “네? 사냥 중인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 에르웬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있는 소리예요.” PK가 벌어지고 있단 뜻이었다. 267화 파루네 섬 (1)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있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안일해졌던 걸지도 몰랐다. 두근-! 노아르크의 탐험가들이 없다. 아니, 애초에 탐험가 자체가 몇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미궁 속의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정보 확인부터. “총 몇 명이지?” “최소 여덟 명이요.” 내가 목소리를 깔고 묻자, 에르웬이 찰나의 간격도 없이 즉답했다. “최소 두 팀이 싸우는 중이라는 뜻이군.” “일단 정황상은요.” “달리 내가 알아야 할 특이점은?” “……없어요.” 음, 말투가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이런 걸 그냥 지나치는 건 좋지 않다. 영화에서도 그렇잖아? “달리 내가 알아야 할 특이점은?” 나는 한 번 더 강하게 물었고, 이내 에르웬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그래, 그렇구나.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말꼬리를 흐리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미안할 거 없다.” 실은 나도 그랬거든. 탐험가끼리 PK 중이란 말을 듣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의 결정을 고민하던 차였다. “얀델,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이번에도 구할 거냥……?”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도라니?” “저번에 1층에서도, 황도에 불이 났을 때도 그랬지 않냥. 너는 사람을 구하는 걸 좋아하니까…….” 뭐라는 거야 얘는. 그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황도에서는 그저 그럴 여력이 있었고, 여력이 남으면 꼭 돕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그리고 1층에서는……. “뭘 착각하는지는 알 거 같지만, 지금 기회에 확실히 말하겠다.” 결과적으로 나는 수천 명의 탐험가를 이끌고 활로를 열며 가당치도 않게 영웅 취급을 받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어딘가 뜨거워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진정으로 구하려던 건 너희였다.” 여전히 우선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나와 내 사람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 말은…….” “예감도 좋지 않은데 굳이 휘말릴 필요는 없지. 이대로 섬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건가? 저쪽이 어떤 사정인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수도 있다.” 곰아저씨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 캐릭터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1층에서 느낀 영웅 뽕맛에 아직도 취해 있는 모양. “저들도 탐험가다. 그 정도 각오는 했으니까 이 일을 하고 있겠지.” 나는 리더의 권위를 담아 딱 잘라 말했고, 곰아저씨도 군말 않고 납득했다. 하지만 뒤늦게 한 가지가 걱정됐을까? “레이븐, 너는 괜찮나? 아까 만난 그자와 친분이 있던 거 같은데.” “파츠란 씨요? 음, 저쪽에서 싸우고 있다면 역시 그분이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곰아저씨의 우려에 레이븐이 말을 흐렸다. 그리고 우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니?” “어차피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도 아닌걸요. 만약에 도우러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지극히 탐험가스러운 이기적인 답변. 다만 이어진 뒷말에 우리는 모두 말을 삼켰다. “……저한텐 우리 팀이 더 소중해요.” 거, 저런 말을 눈 하나 안 돌리면서 하네. 얘도 나이가 한 살 더 먹더니 뻔뻔해졌다. 생긴 건 아직도 꼬맹이구만. “그럼 결정 났군.” 결정이 내려지기 무섭게 우리는 걸음을 돌려 해안가 쪽으로 달려나갔다. 도착 예상 시간은 약 1시간. 그리 큰 섬은 아니기에 얼른 빠져나가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히든피스를 두고 가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거야 우선 섬을 벗어났다가 나중에 상황을 보고 다시 노려봐도 될 터. ‘그래, 불안할 땐 일단 튀는 게 상책이지.’ 나는 마지막 미련마저도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다예요!” 이내 해안가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러 배를 꺼내 파도 위에 띄웠다. 그리고 차례차례 올라타 노를 저으며 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조금은 마음이 놓여가던 찰나였다. “비, 비요른!” 용맹한 바바리안 여전사 아이나르가 두려운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소리쳤다. “어, 어떻게 된 거냐! 바, 바다가……! 바다가 높아진다!!” 잠잠했던 바다가 순식간에 돌변하더니 격하게 일렁이며 배를 흔들기 시작했다. 「파루네 섬의 공물이 파괴되었습니다.」 「바다의 분노가 섬을 뒤덮습니다.」 니미럴. *** 파루네 섬의 히든피스는 간단하다. 섬 중심부에 숨겨진 ‘공물’을 파괴 시, 바다의 분노라는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 일종의 디펜스 이벤트다. 해안가에서 바다 괴수가 섬을 향해 몰려오고, 우리는 내륙에서 이를 막아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노린 것은 이벤트 보스의 정수. 4등급 몬스터 엘프로트. 미샤나 에르웬이 먹는다면 후반부까지 쓸 수 있을 정수다. 뭐, 드롭이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할 주제는 아니다. ‘저쪽에 최소 8인. 그리고 여기가 6인…….’ 사실상 최대 난이도의 이벤트가 개방됐다. 히든피스야 어쨌든 일단 이 섬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뜻. “이,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파도가 이렇게 치다니,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노! 어서 노를 저어라!!” 아무도 이 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에 당황하기도 잠시, 우리는 서둘러 노질을 시작했다. 그야 거의 바깥까지 나와 있던 상황 아닌가. ‘조금만 더 가면 아예 벗어날 수 있어.’ 실제로 게임에서도 이벤트가 발생한 다음에도 섬을 탈출하는 게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던 건 아니다. 어지간한 배로는 얼마 못 가 침몰해서 그렇지.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외치며 영차영차 배를 이끌고 파도를 넘는다. 하지만……. ‘돈 좀 더 써서 좋은 배를 살걸.’ 도무지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제자리걸음을 넘어, 있는 힘껏 노질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점점 섬 쪽으로 밀려나는 듯한 기분. 기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비, 비요른! 서, 섬이 가까워지고 있는뎅?”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려 해도 뒤로 밀려나는 배. 괜스레 입맛이 쓰다. 배에 마공학 추진 장치 정도만 달아놨어도, 어떻게든 뚫고 나갈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비요른! 배에 물이 찬다……!!” “어, 어떡하죠? 어디 부서진 거 아니에요?” 이내 배에 물까지 차기 시작하자, 일행들 사이에서 패닉이 번져나갔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 “섬에서 벗어나는 건 포기한다.” 찰나의 고민을 거듭한 나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등 돌려 앉아라! 파도를 타고 최대한 섬을 향해 나아간다!” 여섯 명이 정원인 소형배의 장점이다. 배에 앞뒤 구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렇게 파도가 거칠게 배를 밀어내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무거운 장비는 전부 아공간에 넣고!” 이내 배의 무게를 줄이는 것에 더불어, 전복 사태를 대비해 장비들도 벗게 시켰다. 오케이, 그럼 이제 할 수 있는 밑준비는 끝. “오른쪽!!” 노는 배를 움직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배가 균형을 잃고 뒤집히지 않도록만 사용했다. 그렇게 한 3분쯤 흘러, 저 멀리 보이던 섬이 확연히 가까워졌음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 저기……!” 시도 때도 없이 통통 튀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배가 큰 파도에 휩쓸렸다. 그리고……. “꺄아아아악!!” 완전히 뒤집혔다. “푸훕!” 순식간에 물에 잠긴 육신. 일단 어떻게든 뒤집힌 배를 잡고 버텼다. “다들 괜찮나!!” “어, 일단은!” “나도 무사하다!” 내가 외치자 여기저기서 생존 신고를 해왔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레이븐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대로 휩쓸려 간 건가? “푸흡, 여기! 여기 있어요!” 후, 놀랬네. 뒤집힌 배를 꼭 잡고서 둥둥 떠다니며 우리는 빠르게 의견을 나눴다. “그럼 이제 어쩌죠?”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냥?” “어, 일단 잘 가고 있기는 한 거 같은데…….”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었다. 강한 부력이 특징인 특수 나무로 제작된 배답게 뒤집힌 상태에서도 가라앉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배에 타고 있던 때보다 안정적인 거 같기도 하고…….’ 파도가 섬으로 밀려들고 있기에, 딱히 우리가 조종을 하지 않아도 배는 해안가로 향할 것이다. “다들 꽉 잡아라!” 이내 우리는 파도에 나가떨어지지 않게 배 손잡이를 꼭 잡은 채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1분가량 흘렀을 때였다. ‘어, 이건 생각 못했는데…….” 우리는 새로운 위기 앞에 놓였다. “저기, 바위! 바위당……!” 해안가에 가까워지며 우뚝 솟은 암초가 배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 이제 와서 경로를 틀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다. “흩어지게 되면 섬 중심부로 와라!!” 나는 다급히 최악을 가정해서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앙-! 배가 암초에 부딪쳤다. *** 촤아아아아-! 거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이물질이 낀 것처럼 앞은 흐리게 보였고, 입에선 바다 특유의 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카칵, 카칵, 카카카각. 무언가 갉아먹는 소리가 났다. 다름 아닌 내 발치에서. “……?” 뭔가 싶어 겨우 고개만 들어 하체 쪽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대형견 크기의 가재 괴물이 내 발을 어떻게든 씹어 먹어 보려고 아등바등 하는 중이었다. “지랄을 한다.” 아니, 그게 되겠냐고. 내 물리 내성이 몇인데. 퍼억-! 일단 자유로운 한쪽 발을 이용해 스터렙을 밀쳐냈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손으로 쥐고 있던 판자때기로 가재 괴물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스터렙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1」 9등급 몬스터답게 고작 한 방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가재 괴물. ‘근데 뭐야, 이 판자때기는…….’ 그제야 눈치챈 것인데 나는 눈을 뜬 순간부터 웬 판자때기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나온 물건일까.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배가 박살났지…….’ 배가 암초에 부딪치며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나는 가장 큼직한 판자때기를 잡고서 꽉 끌어안았다. 이거면 바바리안 몸뚱이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덕분에 산 건가…….’ 이내 파악을 끝마친 나는 신속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모래사장에는 그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괜찮으려나…….’ 일단 레이븐은 괜찮을 것이다. 수영은 못하지만 마지막에 부유 마법을 쓰며 공중에 떠오르는 걸 봤으니까. 미샤나 에르웬은 수영을 할 줄 아니 걱정이 좀 덜하고. 문제는 수영을 못하는 아이나르와 곰아저씨. ‘후, 제발 무사히 해안가로 떠밀려왔으면 좋겠는데.’ 암만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꾸 걱정이 된다. 다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아공간에 넣어둔 장비를 꺼내 걸쳐 입었다. 곧 몬스터 떼가 섬에 몰려올 테니까. 스터렙 정도나 돌아다니는 걸 보니, 다행히 이벤트가 시작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인 듯하지만……. 대비를 해야 한다. ‘탐험가끼리 싸우고 있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상황이었기에 이 이벤트를 연 거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지만, 지금으로선 해결이 불가능한 종류의 것. 하,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도우러 갈걸. 그랬으면 무슨 상황인지는 알았을 텐— 터벅. 해안가를 떠나 숲 안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수풀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린 탓이다. 타닷, 타닷, 타닷. 누군가가 달리는 소리. ‘몬스터는 아니야.’ 파루네 섬 내부에 있는 몬스터는 모두 활공이 가능한 비행형 곤충이다. 몬스터가 달리는 소리는 아니라는 뜻. 또한, 흩어진 동료도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숲 안쪽이었으니까. 반대 방향으로 달릴 이유가 없다. ‘그럼 아까 싸우고 있다는 탐험가들 중 한 명이려나?’ 나는 천천히 메이스를 들어 올리며 인기척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굳이 기다린 이유는 간단했다. 들린 걸음 소리는 한 명이었지 않은가.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일대일이면 적어도 몸을 뺄 자신이 있다. 따라서 접촉해 정보를 얻는 것이 먼저다. ‘지금.’ 뛰는 소리를 통해 거리를 재던 나는 타이밍이 되자마자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허억, 허억. 꺄아, 읍—!” 순식간에 제압당한 사냥감이 허공에 떠올라 발버둥 쳤다. “가만히 있어라. 안 해치니까.” 원래 계획은 이어서 메이스를 휘둘러 확실히 제압 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는 보류하기로 했다. 일단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뭐, 상대 쪽은 기억이 안나는 모양이지만. “풀어줄 테니 조용히 해라.” “다, 당신은 누구…….” “조용히 하라고 했지 않나.” 이내 사나운 목소리로 다그치자 새하얀 법복을 입은 여신관이 파르르 떨었다. 후, 이러니까 나쁜 사람이 된 거 같네. “난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다.” “아……!” 일단 이름부터 밝히자 여신관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정체를 의심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파츠란에게 내 얘기를 들었던 모양. “그러니까 진정해라, 에르시나. 난 너의 적이 아니니.”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어떻게 알기는. 예전에 한 번 만나 봤으니까 알지. 거듭 말하지만 잊기 어려운 기억이었다. [에르시나 사제님. 혹시 이자를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절하겠습니다.] 이 여자가 내 치료를 거부했을 땐 정말이지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는데. 쩝, 됐다.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서 설명해 봐라. 숲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268화 파루네 섬 (2) 토베라 교단의 정사제, 라이린 에르시나. 그녀가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섬 중심부에서 탐사를 하고 있던 때, 정체불명의 팀이 갑자기 저희를 공격해 왔습니다.” 기습이 있었다. 총 다섯 명으로 이뤄진 팀. 한 명 한 명이 적어도 7층급의 무력을 지닌 강자였고, 이들은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전멸 위기에 처했다. 마법사를 잃고 시작한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뭐, 들어 보니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열심히 분전은 한 듯한 모양이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됐고, 결국 보다 못한 드로우스 님께서 결단을 내리셨지요.” 끝내 팀원 중 한 명이 결단을 내렸다. 스스로를 희생해 동료들을 살려내기로. 다만, 드왈키 때와는 엄연히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 동료가 시간을 버는 사이에 너희는 도망쳤다고?” 내가 기도 안 찬다는 듯 묻자 여신관이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저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절대 혼자 두고 갈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뭐래, 이 여자는. 정말 가슴 깊이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면 여기서 나랑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만. 설명은 됐으니, 핵심만 얘기해라.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지?” “……드로우스 님이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머지않아 추격자가 붙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동료들과도 떨어지게 됐고요.” 어쩐지 동료는 어디 가고 신관 혼자 헐레벌떡 뛰고 있더라니. 이제 대략적인 상황은 알겠다. 그러니 이제 디테일한 부분들에 집중할 차례. 그래, 일단은 이것부터. “근데 드로우스라면 누굴 말하는 거지?” “가드위버 드로우스. 그날 당신을 구해 주고 포션을 줬던 금발 머리의 검사입니다.” 아, 걔 이름이 드로우스였구나. 1년도 넘게 지나고서야 알게 된 금발의 이름이었으나, 여운을 느낄 틈은 없었다. “습격했다는 그 녀석들은 어떤 놈들이었지? 자세히 말해 봐라.” 이내 나는 정체불명의 5인조 팀에 대해서 캐물었고, 여신관은 본인이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모든 걸 말해 주었다. 전투 중에 드러낸 능력들이나 인상착의. 그리고 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명칭들까지. 이 정보들이 날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던 나는 한 부분에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잠깐만, 붉은 머리의 여자?” 한 명의 인상착의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예. 그 여자가 그들 무리의 수장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니미럴, 당연히 문제 있지. 사용 무기는 단검에 오러를 쓰는 적발 인간 여성이 이 도시에 몇 명이나 되겠어. 심지어 자세히 물어보니 문신의 위치나, 오른쪽 귀가 반쯤 잘려 있었단 특징까지도 일치했다. 그저 비슷한 사람일 가능성조차 없다는 소리.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또 이 여자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갑갑함이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는 노아르크 출신. 지금 같이 있다는 다른 네 명도 그곳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해……. ‘일단 단순한 약탈 사건은 아니라는 거네.’ 쓰읍, 이거 왠지 진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여신관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여자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까?” “어쩌면.”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대충 얼버무린 뒤 몇 가지를 추가로 물었다. “이 부분은 됐으니 하던 얘기나 이어가지. 에르시나, 그들에게 특이점은 없었나?” “특이점이라 하심은…….” “뭔가 좀 이상했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왜 그놈들이 너희를 기습했는지, 그런 거에 대해선 아예 짚이는 게 없나?” “그건…….” 여신관은 길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잠시간의 고민을 끝내고 말을 이었다. “그땐 경황이 없어서 깊게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했던 점이 있습니다.”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 “드로우스 님이 시간을 끌겠다고 나서면서 했던 말입니다. 내 책임이라며, 우리가 휘말릴 이유가 없다고 어서 가라고 하셨지요. 그때는 단지 리더로서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지만…….”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군.” “예. 게다가 기습을 해온 사람들과도 아는 사이인 거 같았습니다. 처음 기습을 해오면서 드로우스 님에게 배신자이니 뭐니,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이해 못 할 말을 하기도 했었고…….” 뭐? “그걸 왜 이제 말하나?” 누가 봐도 이게 습격 당한 원인 아닌가?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자 여신관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듯 변했다. “그, 그때는 저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여신관의 답답한 면모야 어쨌든. 슬슬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진다. [노아르크에서 봉쇄 직전에 몇 명을 지상으로 올려다 보냈습니다. 목표는 한 명의 탐험가를 죽이기 위해서라는군요! 놀랍죠?] 지난날, 원탁에서 광대가 했던 말에 따르면 아멜리아를 비롯한 소수의 잠입자들은 암살 임무를 부여받았다. 물론 지금까진 그 대상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쩌면 그 대상이 이 녀석이었을지도.’ 그렇다면 드로우스란 놈은 대체 뭐 하는 녀석인 걸까. 이에 대해 고민해 보던 찰나였다. “근데 얀델 님은…….” “준남작이다.” “아, 예……. 아무튼, 얀델 준남작님은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시던 겁니까?” 내내 대답만 하던 여신관이 처음으로 물었다. 뒤늦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생긴 모양. “섬을 떠나려다가 배가 가라앉아서 동료들과 흩어졌다.” “예?” 네는 무슨 네야. 한동안은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뜻이지. *** “일단 이동하면서 얘기하지.” “예? 그게 무슨 말씀……. 설마 안으로 들어가신단 겁니까?” “동료들과 헤어지기 직전에 흩어지면 중심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저쪽에는…….” 내 말에 여신관이 거부감이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뻔하다.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기분이겠지. 근데 동료들과 헤어진 건 얘도 마찬가지 아닌가? ‘거, 신관이라는 애가 지 걱정만 하네.’ “싫으면 마라. 나 혼자 갈 테니.” 나는 정중한 설득 대신 강경하게 말했고, 이에 여신관도 어쩔 수 없이 내 의견에 따랐다. 그도 그럴 게, 신관 혼자 뭘 어쩌겠는가. 수중에 배도 없을뿐더러, 배가 있다고 한들 바다가 저 상태인데. “……근데 왜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건지는 아십니까? 갑자기 폭풍우라도 오기 시작한 것처럼.” 글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모르겠지만, 몬스터들이 해안가에서부터 모여들고 있다.” “……그렇군요.” 드로우스가 뭐 하는 새끼였냐는 것만큼이나 내게 있어서 의문인 점이다. 기습이 있던 건 알겠다. 근데 섬의 이벤트를 누가, 왜 발동시킨 걸까? 발동 조건을 아는 놈이면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도 알았을 텐데. ‘뭐, 차차 알게 되겠지.’ 좋으나 싫으나 나는 이 섬에 갇혔다. 아멜리아든 그 여자의 동료들이든 결국 만나긴 하게 될 터. ‘당장은 동료들과 합류하는 것만 신경 쓰자.’ 나는 최대한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내며 여신관과 함께 섬 안으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내가 앞장서고 여신관이 뒤에서 따르는 형식이었으나……. “이래서야 몇 시간은 걸리겠군. 이리 와라.” 너무 이동속도가 느리다는 문제 때문에 중간부터는 여신관을 업고서 내달렸다. 도중에 마주친 몬스터는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나 혼자라면 맨몸뚱이로 지나쳐도 무사할뿐더러……. 신관에게는 이 스킬이 있으니까. 「라이린 에르시나가 [불가침]을 시전했습니다.」 7등급 이하 몬스터에 한하여 선공을 받지 않게 해주는 버프형 신성 주문. 조금 웃기긴 했다. 라프도니아에 자리한 세 개의 교단 중 하나, 토베라 교단에는 특이한 규율이 하나 있으니까. 다름 아니라, 바바리안에게는 신성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지랄맞은 규율. ‘거, 신이란 놈이 쪼잔하게.’ 수천 년 전에 바바리안 중 한 명이 술 먹고 토베라의 석상에 오줌을 눴다던가? 내가 알기로 그런 역사 이후 생긴 규율이었다. 아마 세 발로 동굴 속을 기던 시절의 나를 치료해 주지 않았던 것도 그 규율 때문이었을 테고. “태양신도 이런 때에 규율을 어기는 건 이해해 주는 모양이군?” “얀델 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모욕하지는 말아주시겠습니까?” 내가 비꼬자 여신관도 조금은 날카로운 말투로 받아쳤다. “……규율을 어긴 것은 저만의 문제입니다. 탓할 게 필요하다면 차라리 저를 탓하십시오.” 거, 정색하기는. “오해가 있군.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암, 네가 살기 위해선 써야지. 아무리 신이 좋아도, 이렇게까지 일찍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을 거잖아? “만약 그때 일이 상처였던 거라면…….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규율을 고집했던 건 포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뿐, 정말 모른 척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음, 그렇다니까 좀 풀리는 거 같기도 하고. “됐다, 네 상황도 이해하니까.” 나는 짧게 답하며 조금은 남아 있었을 앙금을 털어냈다. 집단에서 정한 걸 개인이 어떡하겠는가. “아무튼, 이 얘기는 그만하는 거로 하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예.” 잡담은 그쯤에서 멈추고 이동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여, 여깁니다. 이곳에서 그 약탈자들이 우리를……” “……조용히 해라.” 이내 우리는 목표로 하던 섬 중심부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전투의 흔적 정도가 전부. “……일단 신성력은 거둬들여도 되겠군.” 우선 여신관의 신성 주문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수색했다. 내가 가장 먼저 도착했는지, 먼저 와 있는 동료는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군요…….” 팀의 리더이자 스스로 희생을 택한 팀의 리더 드로우스는 물론이고, 기습이 시작되며 당했다는 마법사의 사체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럼 이제는 어쩌실 겁니까?” 이내 여신관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기다린다. 적이든 동료든, 누군가 이곳에 올 때까지.” “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예상과 달리 여신관은 내 결정을 토 달지 않고 납득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저도 제 동료들과 만나야 하니까요.” “무슨 뜻이지?” “어차피 섬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 아닙니까. 만약 도망친 제 동료들이 해안가에서 얀델 님의 동료들과 마주쳤다면, 지금쯤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너도 너 딴에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날 따라온 거구나. “에르시나, 너는 동료들이 전부 죽었을까 두렵지 않나?” 나는 무심코 질문했고, 여신관은 답했다. “당연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믿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 얘 신관이었지. 일순간 괜한 걸 물어봤다 싶었지만……. “저희에게 허락된 것은 그 정도가 전부이니까요.” 여신관의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제발,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 촤아아아아-! 귓가를 파고드는 거친 파도 소리. “웩, 우에에엑……!” 미샤 칼스타인은 위장에 찬 바닷물을 게워내며 눈을 떴다. 그리고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아, 아이나르!” 심장이 철렁했다. 그야 배가 좌초된 다음에 가장 마지막까지 옆에 있던 게 아이나르였으니까. 수영을 못하는 아이나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그 거친 격랑 속에서 꽉 붙들어 매고 있었건만. “놓쳐 버린 거구낭.” 온갖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나르는 괜찮을까? 나중에 비요른을 만나면 뭐라 말하지? 아니, 애초에 비요른은……. 찰싹-! 미샤는 양손으로 본인의 두 뺨을 내리쳤다. 정신이 확 들었다. “좋은 생각, 좋은 생각…….” 자신만 해도 정신을 잃었음에도 해안가에서 멀쩡히 눈을 떴지 않은가. 다들 괜찮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흩어지게 되면 섬 중심부로 와라!!] 미샤는 마지막에 비요른이 남겼던 외침을 상기하며 손과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숲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였다. 탓.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이나르? 아이나르냥?” 미샤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열심히 외치며 소리난 방향으로 뛰었고, 이내 낯선 인물과 마주쳤다. “너.” “으, 으응?” “비요른 얀델의 동료로군.” 오른쪽 귓등의 절반이 잘려나간 흉터가 있는, 적발의 인간 여성이었다. 269화 파루네 섬 (3) 한 여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한 곳을 응시한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사내의 주검이 있었다. 가드위버 드로우스. 새 이름으로 본인이 저지른 업보에서 도망쳐 두 번째 삶을 살아가려 했던 쓰레기.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얘 동료들이 도망쳐서 그래요?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나머지 둘이서 찾으러 갔잖아요? 금방 잡아올 거예요.” 여정 내내 투정만 부리던 철없는 동료마저 그녀의 눈치를 볼 정도였으나, 막상 아멜리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책임이야. 너희가 휘말릴 이유는 없어. 그러니까 어서 가!] 녀석이 동료를 위해 희생을 하는 모습이 계속 눈가에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이놈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를 배신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것도 정작 본인이 어떤 인간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을 위해서? 까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놈이었다면, 왜 우리에겐 그러지 않았던 건가? “그래도 물건은 탈환했잖아요? 설령 놈들이 살아서 도망쳐도 우리 임무는 성공이에요.” 그제야 아멜리아는 상념을 지우고서 손에 쥔 보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현자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자, 오랜 시간 노아르크의 성주들이 보관해 왔던 보물. 그러고 보면 이것도 어딘가 찝찝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물건을 놈에게서 빼앗으며 들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멜리아, 이거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어.] 이 물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 아멜리아는 갖고 있던 독을 이용해 사내의 시체를 녹여 없앴다. 그리고 쥐고 있던 보석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노아르크의 수뇌부들은 전부 바깥세상으로 떠나서 연락도 제대로 안 되는 판국 아닌가. 앞으로 한동안은 그녀가 보관하게 될 터. 급하게 행동할 것 없이 나중에 돌아가서 이 보석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세월 품어온 숙원의 끝이 다가왔다. 그런 일념으로 아멜리아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냈다. 그때였다. “근데 언니.” 팀의 소환술사 겸 6층에서의 이동수단을 가진 여인, 카르밀라가 그녀에게 슬쩍 다가와 붙었다.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게 진짜 그 물건이 맞는 거예요?” 저 감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노아르크 내에서도 전설처럼만 전해지던 물건이자, 어느 면에서는 ‘소생의 돌’보다도 더 허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니까.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나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며, 방금 아공간에 넣은 이 물건은 틀림없는 진품이라는 것을. 하지만 견물생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괜히 그런 얘기를 해서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둔한 일일 터. “에이, 그러지 말고요. 언니는 저 남자랑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잖아요.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거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나도 모른다. 그리고 이게 진짜 그 물건이든 아니든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임무는 놈이 갖고 있던 걸 탈환해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아멜리아는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 그리고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 “뭐야, 이런 반응을 하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카르밀라가 씨익 웃었다. “와, 이게 정말로 실존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보면 철없는 농담처럼도 들릴 말. 다만 살아오며 온갖 못 볼 꼴을 봐온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단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푸욱-! 등에서부터 피어나는 후끈한 감각. “죄송합니다, 레인웨일즈 님.” 카르밀라만을 경계한 것이 실착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전사의 검이 배를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멜리아는 실수를 돌이킬 시간에 바로 판단했다. “아저씨, 잘했어!” 칼날이 파고든 곳은 늑골 아래. “언제쯤 오라버니라고 불러줄 거냐?” 장기가 상하긴 했으나, 즉사를 할 만한 부상은 아니다. 따라서……. “뭐래, 피도 반만 섞인 게…… 읏!” 단검을 뽑아 잽싸게 앞으로 내찌른다. 목표물은 카르밀라. 평소에도 몇 번이나 죽여 버리고 싶었던 그 여자. 휘익-! 애석하게도 조금 짧았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예전에 바바리안과 싸우며 익히게 된 잡기술이 있으니까. 후우우웅! 칼끝에 오러를 불어넣은 즉시 부족했던 거리가 메워진다. 푸욱-! “아악!!” 단검의 끝이 카르밀라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깝군.” 좀만 더 깊었으면 뇌까지 쑤실 수 있었을 텐데. 피슉-! 아쉬움을 느끼기 무섭게 배에 박혀 있던 칼이 뽑혀져 나갔다. 그 반동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쉴 시간은 없다. “제기랄!” 곧바로 급소를 향해 휘둘러지는 전사의 검. 피하기는 어려울 듯해 아멜리아는 팔을 뻗었다. 그야 팔은 급소가 아니니까. 서걱-! 날카로운 장검이 팔죽지를 베어냈다. 목숨은 구했으나, 전투에 있어서는 크나큰 손해를 본 셈. 이번에도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본체가 망가졌으면 분신체를 써서 싸우면 그만이니까. 타닷. 아멜리아는 도플갱어의 [자가복제]를 이용해 전사의 바로 뒤편에 분신체를 생성했다. 그리고 곧장 머리통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대부분의 적은 대응도 하지 못했던 연계. “뒤, 뒤에!” 이내 분신체의 발이 상대에게 닿으며 폭발음이 피어났다. 콰앙-! 목표로 했던 머리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크윽!” 발이 닿은 곳은 전사의 어깨. 제때 날아든 경고에 전사가 몸을 옆으로 틀은 것이 요인이었다. 푸욱-! 공격이 실패한 대가로 전사의 검이 복부를 한 번 더 헤집었다. 비록 분신체를 이용한 견제로 전사도 급히 몸을 빼느라 깊이 박히진 않았지만……. ‘잘못하면 죽겠군.’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아멜리아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찰나였다. “뭐 해, 얼른 팔 챙겨!” 전사가 바닥을 구르며 잘려져 나간 팔을 주워 들었다. 아공간 팔찌가 채워진 팔이었다. 낭패감을 느낀 아멜리아는 분신체를 이용해 빠르게 전사를 뒤쫓았다. 하지만……. “용용아, 가자!” 세 걸음이 부족했다. [크와아아아아-!] 카르밀라가 소환한 드레이크 위에 전사가 올라타는 게 먼저였다. 후웅! 후웅! 순식간에 하늘 위로 떠올라 버린 드레이크. 세찬 날갯짓 소리에 파묻힌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정말 무시무시한 여자군. 설마 저 지경에서도 저렇게 위협적일 줄이야.” “됐고, 포션부터 줘!” “우선 얘기부터 나누고. 이제 어쩔 거지? 제대로 죽이지 못했는데.” “아씨, 그게 뭔 상관이야! 어차피 죽을 텐…….” 그녀의 발달된 청각으로 들을 수 있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완전히 하늘 위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빌어먹을.” 아멜리아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은 오로지 행동뿐. 터벅. 아멜리아는 멀쩡한 분신체를 이용해 본체를 업었다. 그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저놈들이 확인 사살을 위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가는 정말로 끝이라는 판단. 터벅, 터벅. 아멜리아는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영혼력이 바닥나 [자가복제]가 해제되고서도 꾸역꾸역 일어나 앞으로 걸음을 내딛던 때였다. 탓. 옆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몸이 굳었다. 만약 저들이 추격을 하러 간 동료들이라면 살 것이고, 그 반대라면 죽을 것이라 여겼다.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양자택일의 상황. 하지만……. “……아이나르? 아이나르냥?” 놀랍게도 아멜리아의 예상은 빗나갔다. “너.” “으, 으응?” “비요른 얀델의 동료로군.” 고개를 들어 확인한 측면부. 털썩-! 그곳에 있던 것은 고양이였다. *** “으아, 얘는 또 뭐냥!” 미샤는 혼란스러웠다. 그야 당연하다. 갑자기 눈앞에서 팔이 잘리고 배에 구멍이 난 여자가 나타나 쓰러지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어, 어…… 그 싸우고 있었다는 그 탐험가들 중 한 명인 건가?’ “포, 포션. 그래 일단 포션부터…….” 정체불명의 여자였으나, 미샤는 우선 물에 젖은 확장형 배낭을 열어 포션부터 꺼냈다. 이 여자가 착한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아니, 애초에 착한 쪽이 있기는 했을지 아직 아무것도 정보가 없지만……. [비요른 얀델의 동료로군.] 여자가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애 주었다. 그래, 비요른과 아는 사이일지 모르지 않나. 우선은 치료부터 하고 보자. 뽕-! 포션의 마개를 딴 미샤는 서둘러 여자의 상처에 부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드드드드드. 포션 특유의 물 끓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치 찬물을 부은 것처럼 상처 사이로 흘러가기만 하는 포션. “엑? 공인 잡화점에서 산 건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초창기에 짝퉁 포션을 샀던 경험이 있는 미샤는 가방에서 다른 포션을 꺼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 이게 왜 안 되지?’ 설마 이것도 가짜였다고? 이내 미샤는 실험 삼아 물에 빠지며 몸에 났던 생채기에 포션을 조금 부었다. 치이이이익-! 미칠 듯이 가려운 걸 보니 포션은 멀쩡했다. 근데 왜 이 여자한테는 통하지 않는 걸까. 알 수 없지만, 미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게 바바리안의 정신이라고 비요른에게 배웠으니까. ‘이걸 쓰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미샤는 약초와 붕대를 꺼냈다. 언젠가 포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 쓰려고 쟁여둔 구급용품. “조금 따가울 거당……. 아, 어차피 안 들리겠구나.” 우선 소독약으로 상처 부위를 씻어낸 미샤는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모포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눕혔다. 이거로 임시 조치는 끝.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나머지는 이 여자의 의지에 달렸다. “……숨은 잘 쉬넹.” 잠시 상태를 지켜보던 미샤는 호흡이 안정된 걸 보고서 모포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 이걸 이렇게 두고 갈 수도 없고…….” 그냥 기절을 한 거면 업고서라도 움직이거나 했겠지만, 상태가 너무 중하니 그런 방법을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요른이 기다릴 텐뎅…….” 이내 미샤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이 여자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 상태로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끼끽, 끽, 끼기긱! 어딘가 기분 나쁜 파생음에 미샤는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건 또 뭔뎅…….” 해안가에서 몬스터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 탁, 탁, 탁, 탁.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내 손에서 나는 소리다. 도무지 몸을 가만히 냅둘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자꾸만 애꿎은 손가락만 까닥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2시간.’ 중심부에 도착한 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내가 빨리 도착했다고 해도, 동료 중 한 명쯤은 진작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믿음을 가지려 해도 자꾸만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메운다. 미샤는, 레이븐은, 곰아저씨는, 아이나르는, 그리고 에르웬은……. 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중심부가 아니라, 해안가 근처를 쭉 돌아보는 건데……. “계속 이곳에 있을 생각이십니까?” 가만히 불안에 떨고 있자 여신관이 조심스레 물음을 던져왔다. 내가 보기엔 존나 사이비 같았다. 아니, 아까는 믿음을 가지라며. “넌 신관이면서 뭐 이리 포기가 빠르나?” 툴툴거리듯 말했으나,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신관이라는 직업을 감안해도 저런 반응이 이상하지 않다는걸. 끼끽, 끽, 끼기긱! 그 증거로 지금은 이벤트가 발생 시에만 등장하는 해양 몬스터들이 이곳에서도 간간이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사람의 보행속도에 절반도 안 되는 걸음걸이로 어느새 여기까지 걸어온 것. ‘좀 있으면 더 센 놈들로 가득 차겠지. 이미 해안가는 그런 애들이 널려 있을 테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도착하지 않았다. “에르시나.” “예, 말씀하십시오.” “이동한다. 기다리는 건 역시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지.” “믿음은 여전하신가 보군요.” 뭐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며 말할 땐 언제고. “만약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얀델 님은 훌륭한 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 종교인은 개뿔. 현대의 자랑스러운 무신론자로서 기분이 묘했지만,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감탄사에 가까운 뉘앙스라 별말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라.” “예.” 여신관을 일으켜 세워 채비를 갖췄다. 그리고 막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였다. 터벅. 근 2시간 만에 마침내 방문객이 찾아왔다. 애석하게도 우리 팀원 중 한 명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고된 전투를 치렀는지 잔부상이 가득한 삐쩍 마른 몸매. 어깨에 걸친 한 자루의 장궁. 흙이 잔뜩 묻은 녹색 머리카락까지. “……얀델 님.”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너희들, 레인웨일즈 님을 어떻게 한 거지?” 참 공교로웠다. 사실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생겼는데. 나는 귓가에 맴도는 이명을 무시하며 물었다. “야, 왜 네가 레이븐의 아공간 반지를 갖고 있는 거냐?” 잘 대답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진짜 뒈지니까. 270화 파루네 섬 (4) 세찬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현재 아루아 레이븐은 그 위를 날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크프리트 씨! 힘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육지예요!”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위에는 판자 하나에 의지해 이리저리 휩쓸리는 아브만이 있었다. 높은 파도가 그 위를 덮칠 때마다 심장이 쫄깃해졌지만, 그녀가 따로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상황. ‘아브만 씨라도 내가 잘 챙겨야 돼…….’ 배가 좌초됐던 순간 다른 동료들은 전부 흩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나마 주변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게 아브만이었다. 그래서 위치를 놓치지 않도록 계속 따라가고 있었지만……. “어?” 판자를 놓치고 말았는지, 아브만의 몸이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레이븐은 다급하게 고도를 낮추었다. 하나 그럼에도 아브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크프리트 씨! 우리크프리트 씨!!” 한참 동안 주변을 돌며 소리를 질렀으나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오한이 일 듯 몸이 떨렸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다만 그 떨림을 억지로 가라앉힌 레이븐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해안가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찾았다!” 해안가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파도에 떠밀려온 아브만은 모래사장 위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휴우.” 숨도 제대로 쉬었고, 체온도 그렇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화염 계통 보조 마법을 이용해 아브만의 젖은 옷과 몸을 말린 그녀는 옆에서 기다리며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던 때였다. “찾던 쪽은 아니지만…….” “…….” “이쪽도 나쁘진 않겠군.” 한 남자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머리에 피가 쏠린다. 왜 이 녀석이 레이븐의 반지를 갖고 있는 걸까. 도무지 좋게 생각하려 해도 긍정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야, 왜 네가 레이븐의 아공간 반지를 갖고 있는 거냐?”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묻는다. “설명해.” 부디 내가 모르는 어떠한 오해가 있기를 바라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질문은 나부터.” 대화의 주도권을 줄 생각이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시기를 잘못 골랐다. “그래?” “다시 묻겠다, 너희들 레인웨일—” “그럼 죽어.” 지면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간다. 질문이야 서열 정리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 “……!” 높이 [도약]한 몸이 [거대화]를 통해 순식간에 부풀자, 놈이 백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근데 이걸 어쩌나. 「캐릭터의 총중량이 500kg 이상입니다.」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이 피해 범위에 추가로 적용됩니다.」 그 정도 물러나서야 이건 못 피하는데. 콰아아앙-! 낙하지점으로부터 퍼져 나가며 꿀렁거리는 지면. “읏……!” 활쟁이답게 홀쭉한 몸을 지닌 놈이 용수철처럼 위로 튕겨져 오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대시했다. 그리고 바바리안 특유의 우악스러운 손을 재빨리 앞으로 내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네바르체 그린홉이 [비상탈출]을 시전했습니다.」 놈이 신기루처럼 바로 코앞에서 사라졌다.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3D 게임의 카메라를 움직이듯 재빠르게 전방위로 주변을 쓱 훑자, 20m 떨어진 곳에서 놈이 보였다. 그래, 역시 블링크 계열이었구나. 멀리는 못 갔네. 타닷. 나는 허공에서 자세를 고쳐잡았다. 저쪽도 상위 티어의 궁수라 그런지 이미 화살이 날아오는 중이었다. 휘이이익-! 하얀 빛이 화살촉에 감도는 걸 보니 스킬까지 쓴 화살인 듯한데……. 문제는 없었다.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왕가 보상으로 획득한 바이욘의 이능. 「다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이 강화됩니다.」 애초에 [거대화]랑만 연계하려고 얻은 정수가 아니라서 말이지. 「캐릭터가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줄여서 초월도약. 효능은 실로 간단하다. 「공중에서 사용이 가능해지며…….」 일단 에어본 상태에서도 시전이 가능해지며 유틸성이 확 증가한다. 그리고……. 「이동 시간이 대폭 단축됩니다.」 빨라진다. 그것도 아주 많이. 번뜩-! 발로 허공을 밀어찬 순간. 이미 나는 놈의 앞에 와 있었다. [도약]이 가진 모든 효과를 몸에 지닌 채. 콰아아아아앙-!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로 떠오르는 녀석의 몸. 잽싸게 손을 뻗어 놈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컥!” 놈이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했다.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원거리 계열은 거리 조절이 생명 아닌가. 그걸 제대로 못했으니 뒈져야지. “죽어.” 모가지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도망칠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일단 블링크 계열은 대부분 쿨타임이 상당히 긴 편일뿐더러……. 다른 스킬로 도망쳐도 또 잡으면 되니까. “끄흣……!” 놈의 몸부림이 격해졌다. 아마 여기서 더 힘을 주면 그대로 꺾일 터. 그때 정신이 들었다. “야.” 이대로 모가지를 꺾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하니까. 그리고 만약 내가 바라던 이야기가 아니라면, 모가지를 꺾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테니까. 털썩. 모가지를 쥔 손에 힘을 풀자 놈의 몸이 바닥에 쓰러진다.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복부를 즈려밟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놈의 팔목을 잡은 뒤……. 빠각-! 목 대신 놈의 팔목을 잡고 꺾었다. 레이븐의 반지가 끼워진 손의 팔목. “……!” 커다란 고통에 놈이 신음조차 못 뱉고 눈알을 뒤집었다. 내가 신경 쓸 점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않나. “이 반지 어디서 났냐?”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놈에게 내뱉는다. 좀 전에는 서로 하고 싶은 물음만 던지는 비극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대, 대체 아까부터 자꾸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오!” 놈이 대답을 해주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지만. “묻는 말에만 답해.” “꺼헉……!” “이 반지, 어디서 났냐고.” 그리 물으며 나는 놈의 종잇장 같은 몸을 쓱 훑었다. 이미 팔목은 아작냈지만, 부술 수 있는 부위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것을 알았을까? “치, 칠구역의 케르먼 마법공방!” 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케르먼 마법공방, 거기서 구매했소!”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답변이었다. “……뭐?” 우연히 주운 거라든가, 빼앗긴 했지만 죽이지 않았다든가. 그런 애매한 말을 하는 즉시, 다음 단계의 심문을 이어나갈 예정이었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샀다고……? 레이븐에게 빼앗은 게 아니라?” “레이븐이 누군지도 나는 알지 못하오!”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 일단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 정말 약삭 빠른 놈이라 그 와중에 이런 구라를 생각해 냈을 수도 있잖아? “악, 아악!” 덜렁거리는 놈의 손을 잡은 뒤 반지를 빼냈다. 그다음 아공간을 열어 안을 뒤져보았다. 장비, 소모품, 그리고 개인물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몇 가지를 확인한 나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뭐야, 진짜 레이븐 게 아니네?’ 레이븐의 반지가 아니다. 그 증거로, 응당 있어야 할 마법 시약들이 없다. 얘가 반지를 빼앗은 후 비싼 마법 시약들을 전부 땅바닥에 버렸을 리도 없을 터. ‘아, 그러고 보니 레이븐도 마법공방에서 샀다고 했었지…….’ 그래, 믿고 있었다고. 암, 걔가 어떤 여자인데.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지. “오, 오해는 풀린 것이오?” 아, 어……. “그래, 이건 네가 산 반지가 맞더군.” 진실함이 최대 장점인 바바리안답게 시원하게 내가 오해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팔목이 꺾인 채 꿈틀거리는 녀석에게서 발을 치웠다. “그, 근데 왜 돌려주지 않고 주머니에…….” 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이제 이 반지는 내 거다. 원래 노아르크 출신들은 보물 고블린이잖아? “불만이라도 있나?” “…….” 녀석은 침묵으로 내 행동에 불만이 없음을 표현했다. 쉽게 말해, 양도 과정도 끝난 셈. 허락까지 받은 김에 녀석이 입고 있던 무기와 장비들까지 싹 벗겨 아공간에 집어넣었고, 이로써 비폭력 대화를 위한 준비가 갖춰졌다. “너는 누구지?” 나는 이름부터 시작해 놈의 신상정보, 그리고 이 섬에서 있었던 일들을 캐물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은지 술술 나왔다. 이름은 네바르체 그린홉. “왠지 얼굴이 익숙한데…….” “그럴 것이오. 예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으니까.” “뭐? 너랑 내가? 언제?” “황도 카르논에 화재가 났을 때 말이오.” 그 말을 듣자 나도 기억이 났다. 거기서 파멸학자와 마주쳤을 때, 파멸학자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쫄따구 같은 애가 한 명 있었다. ‘그게 얘였을 줄이야.’ 아무튼, 중요한 건 아니다. 그때 파멸학자랑 이백호가 떠나고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얘도 아는 게 없는 듯했으니. “자, 그럼 말해 봐라.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전부.” 이후 나는 녀석에게 여신관에서는 듣지 못했던 사건의 뒷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이놈들이 노린 건 금발이 맞았다. “그자는 원래 노아르크 출신이었소. 하지만 성주를 배신하고 보물을 훔친 뒤 달아났지.” “자, 잠시만요. 드로우스 님이 노아르크 출신이라고요……?” “애초에 그 이름도 가짜요. 얼굴도 바꾸고 숨어 버린 탓에 찾는 것도 아주 힘들었지.” 믿기 어려운 과거였는지, 완전히 멘탈이 나가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여신관. 하긴 나라도 그럴 거 같다. 갑자기 미샤가 악령이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듣게 된다면. “그래서 그자는 어떻게 됐지?” “죽었소.” “확실한 건가?” “저기 저 자리였소. 레인웨일즈 님께서 시신을 처리한 흔적도 보이는구려.” 실제로 놈이 가리킨 곳에는 무언가 액체가 녹아 있는 흔적이 있었다. 거, 살벌하기는. “그래서 너는 대체 뭘 하고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동료들은 어디 있고?” “나와 한 명은 도망친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무리에서 벗어났었소. 중간에 같이 있던 자와는 그러던 도중에 헤어졌고.” 음, 그래. 추격을 하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 보니 지금이었단 거구나. ‘잠깐만, 그럼 이벤트를 발생시킨 건 대체 누구지?’ 문득 피어난 의문에 나는 섬의 공물을 부순 게 누구인지 돌려서 물어보았으나, 기대하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바다가 이렇게 된 것……? 나도 잘 모르오. 추격을 하던 중에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주변이 어두워지더군.” 허, 얘도 모른다고? 이러면 어딘가 또 찝찝해지는데. 가만히 선 채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놈이 조심스레 내게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레인웨일즈 님은 어떻게 되셨소? 이곳에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오?” 아까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질문. 음, 이게 궁금해서 내가 묻는 말에 전부 성실히 대답해 준 건가? 잘은 알 수 없으나, 막 물음에 답하려던 차. 타닷. 수풀 너머에서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웬! 저기! 비요른이다!!” “아, 아저씨! 계셨군요!” 아이나르와 에르웬이었다. 271화 디펜스 (1) 위닉스 카르밀라. 포션을 통해 부상당한 눈을 치료한 그녀가 짜증기 어린 눈으로 씨 다른 오빠를 쳐다봤다. 그 역시 잘린 팔을 포션으로 복구한 상황. “아, 진짜 아저씨가 제대로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네가 너무 급했다고는 생각 못하나?” “……급하긴? 조금 전처럼 우리 둘이랑 그 여자만 같이 있는 순간이 또 올 거 같아? 나는 잘못 없어! 잘못은 제대로 못 쑤신 아저씨한테 있지!” 카르밀라의 비난에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기서 싸워서 뭘 어쩌겠어. “그것보다 물건은 확실한 거겠지?” “아저씨도 걱정은. 안 느껴져? 이 보석 안에서 이렇게 마력이 넘쳐흐르는데?” “……그 정도 마력 적성도가 있었으면 내가 마법사를 했겠지.” “뭐래, 아저씨는 그래도 멍청해서 마법사 같은 건 못 하거든?” 카르밀라는 평소처럼 씨 다른 오빠에게 툴툴거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팔면 얼마나 하려나?” 조금 전에 눈이 단검에 찔리는 경험을 했음에도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노아르크도 사실상 없어진 상황 아닌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한몫을 거머쥐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자, 가자. 대충 아무 섬에서 멈춰서 쉬다 나가면 이제 끝이야. 남은 평생은 귀족처럼 살 수 있다고.” 카르밀라는 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활공하고 있던 드레이크를 몰았다. 그때였다. “잠깐.” 사내가 그런 카르밀라를 멈춰 세웠다. “갑자기 왜?” “레인웨일즈가 죽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뭐? 이미 물건도 챙겼는데 왜?” 카르밀라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직접 싸워 보니 더 잘 알겠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는 괴물 같다는 말도 모자란 괴물이다. 아마 기습이 성공한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아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없었겠지. “만약 그 여자가 살아남는다면 도시로 돌아가고서도 평생 불안해하며 살아야 할 거다.” “살아남기는?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지? 그 상태로 어떻게 살아? 독까지 묻은 검으로 배를 그렇게 쑤셨는데!” 사내의 말에 카르밀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을까. “……정 불안하면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물론 나는 분명 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급하게 튀느라 그 여자 장비도 못 챙겼으니까…….” 이내 짧은 합의를 끝마친 둘은 드레이크를 타고서 섬으로 다시 내려왔다. 다행히 추격을 나갔던 다른 두 명의 동료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은 상황. “……그 몸으로 잘도 움직였나 보네.” 아멜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멀리 가진 못했을 터. “핏자국이 이어져 있군. 이쪽이다.” 둘은 근처에 남은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다만 흔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으며, 또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끊겼다.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군. 설마 그 상태에서도 그럴 정신이 있었을 줄이야.” “어, 어떻게 해? 그럼?” 그제야 카르밀라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흔적을 지울 정신이 있었다고 하니, 정말로 그 여자가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추격은 여기서 끝이다.” “어, 여기서 끝낸다고?” “그래, 우리 중에 전문 탐색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있어 봤자 시간 낭비다. 돌아가지.” 이후 사내는 카르밀라와 함께 좀 전에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콰직-! 섬 중심부 제단에 놓인 돌멩이를 파괴했다. “가, 갑자기 그건 왜 부숴? 호, 혹시 나한테 화라도 났어……?” “화는 무슨. 그런 게 있다.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 일단은 떠나자.” “아니, 그게 무슨—” 카르밀라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쿠르르릉-! 세찬 천둥 소리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딘가 바람도 거세진 거 같고. 「파루네 섬의 공물이 파괴되었습니다.」 「바다의 분노가 섬을 뒤덮습니다.」 그녀는 오늘따라 사내가 낯설게 보였다. *** 아이나르와 에르웬. 이 둘이 모습을 내비친 순간 당장 달려나가 반기고 싶었으나, 클랜장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참았다. “아, 왔나.” 암, 집단의 수장이면 무게가 있어야지. “늦었군.” “죄송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아직이다.” “네? 아직이라니요? 분명 우리가 제일 늦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다들…….” “그만.” 나는 에르웬의 말을 잘랐다. “다들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조금 일이 생겨 늦을 뿐이겠지.” 실제로 에르웬과 아이나르도 이렇게 늦게 도착했지만, 모두 멀쩡하지 않은가. 아, 그런 의미에서 이것부터 물어보자. “그래서, 너희는 왜 이렇게 늦은 건가?” “그게 실은…….” 아직 합류하지 못한 다른 동료들의 사정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지각 사유를 들었다. 별거 없는 이야기였다. 겨우 수영해서 정신을 잃지 않고 해안가에 도착했지만, 도중에 활을 잃어버렸다던가? “파도에 떠밀려 오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계속 둘러보느라 늦었어요. 아이나르 씨는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났고요.” 음, 어쩐지 어깨에 활이 없더라니. 그래도 덕분에 아이나르를 만나 챙길 수 있었으니 잘 된 건가? “그런 일이 있었군. 잃어버린 활은 너무 걱정 마라. 당분간은 이걸 쓰면 될 테니.” 나는 그리 말하며 아공간에서 장궁 하나를 꺼내 에르웬에게 건넸다. “어? 보르탈 나무로 만든 활이네요? 이 귀한 걸 대체 어디서…….” 와, 이게 4단계 소재인 보르탈 나무였어? 어쩐지 때깔부터 곱더라니. “운 좋게 주웠다.” 내가 짧게 이 물건을 얻은 경위를 설명하자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머지않아 상황이 이해됐을까. “저기, 근데 이분은…….” 내게 장비를 싹 털려 평상복 차림인 사내를 보며 정체를 묻는다. “노아르크 출신인 놈이다.” “와, 그랬군요! 이건 감사히 쓰겠습니다……!” 내 대답에 에르웬은 기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확실히 얘가 착하긴 하단 말이지. “동료분들과 만나서 다행입니다. 믿음이 헛되지 않은 듯해 기쁘군요.” 아무튼, 그렇게 잠시 해후를 나누고 있자니 여신관이 대화에 껴들었다. 내친김에 얘 소개도 해주었다. “파츠란 팀에 속해 있던 신관이다. 이름은 에르시나. 이쪽으로 오다가 우연히 만나서 합류했다.” “라이린 에르시나입니다. “아, 네…….” 여신관의 인사에 어색하게 답한 에르웬은 날 보며 물었다. “아저씨, 별다른 일은 없으셨죠?” “별다른 일이라니?” “……아니에요. 그보다 이분은 왜 손목만 꺾고 안 죽이셨어요?” 이내 에르웬이 고개를 내젓더니, 네바르체를 보며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내가 노아르크 출신인 놈을 살려둔 게 이상했던 모양. “혹시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음, 그런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뭐,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 주제는 여기서 마무리했다. 실은 아직 살려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자칫 이놈을 죽였다가 그 여자랑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리면 골치 아파진다고 판단했다. ‘보아하니 얘네 목표도 드로우스 하나였던 거 같고.’ 심지어 네바르체의 말에 따르면 아멜리아 쪽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 아닌가. 어쩌면 더 나아가 임시 동맹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이제 곧 웨이브도 시작될 테고 말이지. 마지막 웨이브를 고려하면 역시 사람은 많은 편이 좋다. “그럼 이동하지.” 아무튼,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채비를 갖추고 자리를 떴다. 목적지는 1차 보스가 등장할 동쪽의 해안가. 후, 설마 웨이브가 시작될 때까지도 전부 합류하지 못할 줄은 몰랐건만. 대체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걱정되게. “길은 내가 뚫을 테니, 아이나르 너는 이놈이 헛짓거리 못하게 감시해라.” 혹시 모르기에 아이나르는 전투에 불참하며 네바르체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최대한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라네무트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3」 「소라고동뿔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3」 「가르벨을 처치하였…….」 「…….」 바다에서 올라온 몬스터들이 섬 전역을 점거한 탓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뭐, 아직은 7등급 정도 수준의 몹들이라 이렇게 섬을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하지만……. ‘다음 웨이브 전에는 다 만나야 할 텐데.’ 자꾸만 조급함이 치밀어오른다. 다음 웨이브부터는 몬스터들 수준이 확 올라가 버린다. 나조차도 혼자서 버티는 게 어려울 정도로. “……다들 괜찮으시겠죠?” 생각보다 많은 몬스터의 숫자에 에르웬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나는 부정이라도 탈까 싶어 얼른 답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괜찮을 테니.” “하지만 몬스터가 이렇게 많은데…….” 혼자서는 버티기 힘들 거라고? “나만 해도 에르시나를 만나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어쩌면 미샤나 레이븐도 섬 어디선가 그들과 만나 힘을 합치고 있을지 모른다. 뭐, 거기에도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마는. ‘니미럴.’ 나는 아까 네바르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운이 좋게 내 동료들이 파츠란의 팀원과 마주친다 한들, 그게 꼭 긍정적인 상황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들이 이 섬에 올 건 어떻게 알고서 덮칠 수 있던 거냐고?] 내 질문에 네바르체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 중에 탐사 계획을 우리에게 전해준 내통자가 있었소. 그게 누구인지는 레인웨일즈 님께서만 알고 계시지만.] 그들 중에서도 배신자가 있다. *** 수풀 쪽을 확인한 아루아 레이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찾던 쪽은 아니지만······.” “······.” “이쪽도 나쁘진 않겠군.” 다행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븐 양, 또 보게 됐구려.” “파츠란 씨!” 노심초사하던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앞으로 달려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몸은 또 왜 이렇게 다치신 거고요? 등에 업힌 분은요? 혹시 죽은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파츠란은 쓴웃음을 내지으며 업고 있던 마법사를 내려놨다. 그리고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저 기절했을 뿐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다, 다행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요?” “……약탈자들의 습격이 있었소.” 습격이 있었고, 겨우 도망쳤지만 추격자들 때문에 일행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만 것. 그래서 일단 동료를 찾으려 돌아다니고 있었단 것까지. 짧게 사정을 정리한 그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찾던 동료들은 아니지만, 레이븐 양을 만나서 참 다행이오. 혹시 괜찮다면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있겠소?” “도와달라니요?” “동료 중 한 명이 섬 중심부에 있소. 우리가 도망칠 틈을 벌겠다고 혼자 남았지. 어서 구하러 가야……. 어, 근데 그러고 보니 그 바바리안이 보이지 않는구려?” 이내 파츠란이 레이븐 쪽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븐 양 쪽에도 뭔가 일이 있었소? 저기, 물에 빠진 듯한 수인 궁수는 어떻게 된 거고?” “그게, 섬에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모두 흩어졌어요.” 이후 레이븐이 섬 중심부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까지 얘기하자, 파츠란이 눈을 빛냈다. “섬 중심부에서? 그렇다면 잘 됐군. 거기까지 함께 이동하는 게 어떻소? 그 미친놈들이 이 섬을 돌아다니는 중이니, 그쪽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오.” 쉽게 말해, 임시로나마 팀을 맺자는 말. 레이븐은 잠시간 고민한 뒤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72화 디펜스 (2) 여기저기 암초들이 솟아난 동쪽 해안가. 거친 파도에 밀려서 흘러들어가 우리 배를 박살 내기도 했던 그곳. “도착했군.” 이미 절반 정도 물이 차오른 모래사장 위에는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6층의 대표적인 해양 몬스터인 라네무트 전사와 주술사. 원거리에서 독액을 내뿜는 소라고동뿔. 처치 시 세 번까지 증식을 한다는 특이한 특징을 가진 가르벨 등등. “비요른, 나도 돕겠다.” 거진 백에 달하는 규모에 아이나르가 우려를 표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거, 너는 쟤 감시만 하고 있으라니까. “됐다.” “뭐?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이 정수를 먹고 얘 앞에서 이건 보여 준 적 없었구나. “걱정 마라. 이 정도야 혼자서도 충분하니.” 나는 야구 방망이를 든 타자처럼 메이스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에르웬.” “네, 이번엔 뭐로 할까요?” “바람.” 엘리멘탈 바바리안(바람) 모드를 꺼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정령화]를 시전했습니다.」 내 몸을 휘감으며 피부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날카로운 바람의 형상. 「캐릭터의 육신에 바람의 정령이 깃듭니다.」 「모든 피해에 회피 보정이 부여됩니다.」 「받는 마법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관통 및 절삭 행위에 강한 보너스.」 「민첩 수치가 대폭 상승…….」 이 모드의 효과는 간단하다. 움직임이 빨라지며 회피 탱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탱커가 아니라 딜러라면, 그냥 DPS가 확 올라갈 테고. 아, 물론 중요한 건 따로 있지만. 「모든 공격 범위가 세 배 증가합니다.」 엘리바바(바람) 모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모드를 꺼내면 평타가 스플래시 대미지로 바뀐다. 쉽게 말해, 나 같은 둔기 전사도 광역 딜을 넣을 수가 있는 셈. “기에에엑-!”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꼈는지, 주변의 몬스터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나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만 나는 자세를 유지하며 때를 기다렸다. 굳이 두 번 휘두를 필요는 없잖아? 딱 한 번. 제대로 된 한 번이면 충분하다. ‘초월.’ 적당히 모일 만큼 모였다고 판단한 나는 즉시 [초월]을 사용했다. 그리고…….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숙달된 검사가 검을 뽑아 휘두르듯, 절도 있게 메이스를 횡으로 휘둘렀다. 휘이이이이잇-! 바람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 후우우웅-! 쥐고 있던 메이스가 여의봉처럼 길어지며 이와 비례해 크기를 키운다. 초월 휘두르기의 효과. 「타격 범위가 3배 증가합니다.」 던전 앤 스톤에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말도 안 되는 플레이가 가능해지는 이유다. 이런 건 대부분 곱연산이거든. 콰콰콰콰콰아아아아앙-! 후, 소리 한번 시원하네. 이내 [휘두르기]를 끝마친 나는 흡족스럽게 주위를 확인했다. ‘그래, 이거지.’ 살아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 “비요른! 방금 건 어떻게 한 건가! 나도 가르쳐 줘라!!” “너도 나중에 에르웬한테 해달라 해라.” “에르웬만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그래, 비슷하게는.” 내 새로운 연계기에 감명받은 아이나르에겐 대충 대답을 해주고서 바다 쪽을 확인했다. 시원한 한 방으로 해안가의 몹들은 대부분 정리가 된 상황. “아저씨, 파도! 파도가 밀려들고 있어요!” 잠시 텅 빈 해안가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 있자, 쓰나미처럼 파도가 높이 치솟았다. 「첫 번째 바다의 분노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웨이브의 중간보스가 나타날 때 생기던 이펙트. “세이렌! 세이렌 여왕입니다!” 서핑을 하듯 파도를 타고 이동하는 몬스터를 보며 여신관 에르시나가 외쳤다. 6층에서 오랜 시간 활동한 탐험가답게 이 몬스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모양. “4등급이나 되는 몬스터가 이 섬에는 왜…….” 왜긴 왜야. 너희 중에 누군가 이벤트를 켰으니까 나왔지. “다들 내 뒤로 와라. 에르웬, 너는 싸울 준비를 하고.” “네.” “나는? 나는 또 지켜만 보나?” “일단은. 필요하면 부를 테니 기다려라.” “알겠다!” 이후 간단히 진형을 한 번 더 손 보고 있자니, 마침내 세이렌 여왕이 앞에 당도했다. “캬아아아아악-!” 어여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뱉으며 손에 쥔 삼지창을 찔러오는 녀석. 콰앙-! 명색이 4등급 몬스터답게 평타조차 꽤나 묵직했다. 뭐, 얘가 4등급이 된 이유는 따로 있겠지만. 「세이렌 여왕이 [바다의 노래]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노출 시간에 비례해 능력치를 감소시키는 오오라. 「세이렌 여왕이 [소용돌이]를 시전했습니다.」 또한, 얘는 평타를 칠 때마다 적중 시 일정량의 MP를 빼앗는 소용돌이를 사방으로 내뿜는다. 그리고……. 「세이렌 여왕이 [충성의 증거]를 시전했습니다.」 쿨타임이 될 때마다 5등급 몬스터인 세이렌을 주기적으로 소환한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열댓 마리씩. ‘전형적인 디버프 주술사 계열 보스 몬스터지.’ 역시 암만 생각해도 쉬운 몬스터는 아니다. 만난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세이렌 여왕의 까다로움은 물량에 있다. 원래는 수백 마리의 세이렌이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게 보통이니까. 다만, 이 섬에 막 도착했을 때는 녀석은 혼자. 물론 좀만 냅두면 알아서 증식을 한다는 성질이 있지만……. ‘내가 왜 다 제쳐두고 여기로 왔는데.’ 나는 놈이 레이드 보스로 진화하기 전에 해치우려고, 동료를 찾는 것도 포기하고 이곳에 왔다. “나, 나도 도울 테니 무기를 주시오! 4등급 몬스터는 그대들만으로는 무리요!” 우리가 못 미더운지 네바르체가 그런 제안을 해왔지만,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이는 아이나르도 마찬가지. “뭐라는 거냐,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다!” “아니, 위대하고 말고 저건 두세 명이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비요른, 이 녀석 입을 분질러도 되나?” “한 번 더 씨불인다면.” “알겠다!” “…….” 아이나르의 협박이 주요했는지, 이내 입을 꾹 닫은 네바르체. 덕분에 나도 뒤는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만 집중했다. 힐과 축복의 대명사인 신관. 정령 궁수. 탱커 바바리안. 사실상 이 셋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보스전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도 그럴 게, 일단 딜러에 탱커에 힐러까지 다 갖춰진 거긴 하잖아? 「라이린 에르시나가 [태양의 가호]를 시전했습니다.」 「5등급 이하의 디버프가 해제되며, 그만큼의 추가 능력치를 얻습니다.」 능력치 감소는 신관이 일정 주기로 해제. 휘이이이익-! 적중 시 MP를 뺏기는 [소용돌이]야 그냥 컨트롤로 피하면 그만. ‘민첩 수치가 오르니까 진짜 편하긴 하네.’ 소환 패턴도 크게 까다로울 이유는 없다. [정령화] 상태로 내 주위를 맴도는 에르웬이 열 마리 이상 쌓이기도 전에 족족 처리하고 있었으니. “베헬—라아아아아!!” 심지어 내 위협 수치가 워낙 높은 탓에 얘네가 날 무시하고 후방으로 달려든다거나 하는 사고가 벌어지는 일도 없었다. 따라서……. 콰직! 콰직! 콰직! 나는 탱커 겸, 딜러에 빙의해 여왕을 두드려 패기만 하면 끝. “끼에에에에엑-!” 그렇게 20분쯤 전투를 치렀을 때였다. 「세이렌 여왕을 처치했습니다 EXP +6.」 정수리에 [휘두르기]를 서른 방 가까이 얻어맞은 세이렌 여왕이 마침내 빛이 되어 사라졌다. 내심 기대했던 정수는 없었다. ‘소환기가 떴으면 엄청 비싸게 팔 수 있었을 텐데. 아, 어차피 마법사도 없으니 그게 그건가?’ 나는 아쉬움을 지우며 메이스를 내려놨다. 그리고 [정령화]를 해제한 에르웬과 함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4등급 몬스터를 정말 셋이서 잡을 줄이야.” 여신관 에르시나는 아직도 어딘가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네바르체도 매한가지. “분명 5등급 탐험가라고 했을 텐데…….” 말꼬리를 흐리던 네바르체가 나를 보며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실력을 감추고 있던 건가…….” 뭐래, 얘는 또. 듣자마자 실소가 나왔으나, 굳이 해명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웃기네. 그냥 이쪽 등급 기준이 엄청 느슨한 것뿐이구만.’ 게임이 현실이 된 후에 절실히 느낀 점 중 하나다. 이곳에서 탐험가 등급은 정말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하다. 길드에서는 정수의 평균 등급만 보고 등급을 매겨줄 뿐, 그 정수들의 시너지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네바르체 이놈이 바로 그렇다. ‘얘가 4등급이었지.’ 이놈은 4등급 탐험가 패를 갖고 있었다. 노아르크 출신이니 이게 진짜 신분패는 아닐 테지만, 4등급을 딴 건 본인이 직접 한 것일 터. 하지만 그럼에도 나한테 10초 안에 발렸다. 내 육성법이 대인전, 특히 원거리 계열에게 강력하다는 점도 있긴 하지만……. ‘다 제쳐두고서 그냥 약해.’ 사실 이곳 탐험가들 대부분이 그랬다. 등급이 높아도 제 성능을 내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돌이켜 보면 용살자도 이런 느낌이었지.’ 오랜 시간 탐사를 했기에 레벨이 높고, 정수도 많이 먹었지만 그게 전부. 정수 조합에 근본이 없다. 솔직히 말해, 내 기준에서는 망캐라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 ‘며칠 하고 망겜이라면서 욕하고 겜 접는 애들이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상위 등급 스킬을 5개 가진 것보다, 하위 등급 스킬일지라도 시너지를 이룰 수 있게 조합한 쪽이 더 강한 게 바로 이 게임이었다. [거대화] 같은 코어 스킬을 하나 정해 각가지 방식으로 진화시켜 사기를 치는 게 이 게임의 기본이기도 했고. ‘그나마 조합이 가장 탄탄했던 건 시체 수집가 새끼 정도였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야, 얀델 씨!!” 응? ‘아니, 잠깐만 이 목소리는…….’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븐! 아브만!!” “파츠란 님, 무사하셨군요!” 숲속에서 네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 이제 미샤만 남은 건가. *** “얀델, 에르웬, 아이나르.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우락부라크!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반가운 얼굴에 얼른 달려가 재회의 해후를 나누기도 잠시. 우리들은 서로 빠르게 정보를 공유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 그거요?” 레이븐에게 있었던 일은 간단했다. 일단 곰아저씨와 같이 스타트, 그리고 머지않아 파츠란과 그의 동료 마법사와 마주쳐 함께 섬 중심부로 이동했다던가? 도착한 다음에는 내가 중심부에 남겨둔 ‘동쪽으로 간다’는 메모를 보고 이쪽으로 방향을 튼 모양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도착한 건가? 거기서 2시간도 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죄송해요. 거기까지 가는데 너무 많이 헤매서…….” 지각 사유가 참 어이없었다. 설마 네 명이나 모였는데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니. ‘하긴 마법사 둘에, 쟤도 검 쓰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고…….’ 곰아저씨야 말할 것도 없다. 응, 이 멤버면 길을 못 찾는 것도 당연하네. “근데… 미샤 씨는요?” “미샤는 아직이다.” “네? 아직이라니…….” “너무 걱정 마라. 너희도 이제서야 만나지 않았나. 섬 어딘가에 잘 있을 거다.” 나는 애써 걱정을 털어내며 시선을 옮겼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본인 동료인 에르시나와 해후를 마친 파츠란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시나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얘기는 들었다.” “들었다……?” “아, 아니, 들었소……. 내내 지켜줬다지? 고맙소.”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지. 그나저나 금발……. 아니, 그 드로우스라는 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들었나?” “아, 그거라면…… 듣기는 했소. 드로우스가 노아르크 출신이었다니, 영 믿지 못할 얘기더군.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직접 몇 가지 확인을 해봐도 되겠소?” 이내 파츠란은 내가 잡은 네바르체와 대화할 수 있겠느냐고 정중히 물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잘 쓰고 돌려줘라.” “암, 깨끗이 쓰리다.” 오케이, 그럼 이 부분은 됐고. 나는 파츠란과 네바르체의 대화를 엿들으며 레이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여 말했다. “레이븐, 대답은 됐으니 듣기만 해라.” “……?” “이들 중 노아르크 놈들과 내통한 놈이 있다.” 팀을 배신하고 이들이 오늘 이 섬에 오리란 것을 아멜리아에게 알려 준 놈이다. 그놈이 누군진 아멜리아만 안다던가? “이 상황에서도 뒤통수를 치려고 하진 않을 거 같지만, 그래도 알고는 있어라.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한다면 바로 알려주고.” 내 말이 끝나자 레이븐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이제 정보 공유도 끝났고. “거기, 마법사. 너는 이름이 뭐지?”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 쉬고 있는 마법사에게 가서 이름을 물었다. 혹시 대화를 나눠 보면 뭔가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판단. 어, 그래, 분명 그랬을 터였는데……. “아, 반갑소이다. 아울록이라 하오.”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뻗는 마법사를 보며 나는 흠칫 굳었다. 여신관 에르시나, 남검사 파츠란,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여궁수까지. 여러 용의자들 중 누가 배신자일지 제대로 알아낸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모를 확신이 치솟고 있었다. “한스 아울록. 편하게 한스라 불러주시오.” 잡았다, 요놈. 273화 디펜스 (3) 한스 아울록. 앞으로는 내게 한스 J라고 기억될 자. “하, 한스……?!” “한스라고요……?” 녀석이 이름을 밝힌 순간, 옆에 있던 레이븐과 아이나르가 움찔하며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둘 다 아는 것이다. 내게 있어 한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뭐, 뭔가 문제라도 있소?” 갑작스레 시선이 집중되자 당황한 표정을 짓는 한스 J. 나는 힘을 줘 허벅지를 쥐었다. ‘지금은 안 돼. 참자.’ 당장 머리통을 박살 내서 이름 없는 시체로 만들고 싶다. 그런 욕구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꽈아악- 아직 녀석이 배신자라는 증거가 없다. 가진 건 오직 심증뿐. 한스의 이름이 가진 불길함을 토로해 봐야 파츠란이나 에르시나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은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따라서……. “아니, 별문제 없다.” 당장은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얘가 배신자라고 해도 생각이 있으면 그냥 입 꾹 닫고 가만히 있다가 도시로 돌아가려 할 것 아닌가. 지켜보는 게 먼저라는 판단. “응? 그런 게 아닌 듯했소만…….” “문제없다고 하지 않나.” “흐음, 그렇다면야…….” 한스 J가 찝찝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왠지 왕따를 시키는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일기도 하지만……. “그래서 손은 계속 이리 무안하게 둘 것—” 암만 그래도 악수는 선 넘었지. “아, 파츠란! 얘기는 다 했나?” 한스 J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저 둘도 때마침 대화를 끝낸 듯했다. “대충은. 들어 보니 정말 드로우스가 그곳 출신이었던 듯하구려……. 평소에도 조금 별난 구석이 있다 생각은 했건만.” “그렇군.” “그래서 이자는 어떡할 것이오?” “우선은 데리고 다닌다.” “알겠소.” 의외로 파츠란은 네바르체의 처우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다. 본인도 이 녀석들 때문에 죽을 뻔했을 텐데. 내 전리품이라 생각해 선을 넘지 않는 건가? “그나저나 다들 모여보시겠어요?” 아무튼, 대략적인 해후가 끝나자 레이븐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상황을 정리했다. “바닷길은 파도로 막혀서 섬을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어째선지 몬스터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고.” “그 몬스터 말인데, 점점 강해지는 거 같다. 방금 전에는 세이렌 여왕까지 나오기도 했고.” “네. 오늘 이 섬에서 발생한 현상이 뭔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일에 휩싸인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파츠란 씨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요?” 파츠란은 잠시 시간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말하는 듯하니, 내 솔직히 말하리다. 우리가 섬에 방문했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소.” 다른 팀원들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은 리더인 드로우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던가?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틀 뒤에 해가 뜰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들었소.” “다행히 이 상태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진 않는단 거군요.” 이후 레이븐은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놨다. “일단 하나는 수비에 용이한 장소를 찾아서 이틀 뒤까지 버티는 거예요.” “두 번째는?” “섬을 돌아다니며 동료를 찾는 거죠. 우리 팀은 미샤 씨를, 파츠란 씨네 팀은 궁수 분을 아직 찾지 못했잖아요? 만약 두 분 다 혼자서 낙오되어 있는 거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위험해질 거예요.” 레이븐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거면 왜 선택지가 두 개라고 말한 거야 얘는? “자,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당연히 동료를 찾으러 간다.”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고, 이는 파츠란도 다르지 않았다. “나도 무사히 도망을 쳤는데 헬가라면 당연히 잘 도망쳤을 것이오. 구하러 가야 하오.” 우선 섬을 수색하며 동료를 먼저 찾아보자. 그렇게 앞으로의 행동 방향이 거의 결정 났을 때쯤이었다. 한스 J가 눈알을 굴리며 대화에 껴들었다. “투표! 투표로 결정하는 건 어떻소?”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아무리 이름이 한스여도 그렇지. 이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크흠흠, 어쩌면 원치 않는데 말만 하지 못한 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않소이까.” “그렇다면야. 투표를 하지. 동료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손을 들어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투표를 진행했고, 모두가 손을 들자 한스 J도 눈치를 보며 마지막에 손을 들었다. “그럼 됐군.” 바바리안식 민주주의는 무적이다. *** 터벅, 터벅. 조금은 빠른 속도로 걸으며 길을 열고 있다. 뒤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따라오는 중이다. 미샤를 제외한 우리 클랜의 전원. 임시 동맹을 맺은 파츠란, 에르시나, 한스 J. 전략적 포로 네바르체 그린홉까지. ‘일단은 8인까지는 모였네.’ 여기에 미샤나 파츠란 팀의 여궁수까지 합류한다고 가정하면 어찌 클리어는 할 수 있을 듯하다. 신관의 존재가 컸다. 만약 신관도 없었으면 진짜 까마득했을 텐데. “미샤 씨! 들리시면 대답해 주세요! 미샤 씨!” “헤이나!” 해안가를 떠난 후로는 섬 어딘가에 있을 동료를 찾는 데 집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섬 자체는 그렇게까지 넓지 않지만……. 콰직, 콰직-! 콰아아아아아앙-! 이제는 어디를 가나 수십 마리씩 나타나는 몬스터들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금에는 거의 멈춰서 전투만 하는 실정이고. 「씨자이언트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나가 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 +5.」 「팔푸스의 뱀을 처치했…….」 「…….」 30분 전부터 생긴 변화다.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등급이 확 올랐다. 8인이나 되는 규모의 파티로도 쉽사리 앞을 뚫고 나가기 어려울 정도. “…….” “…….” 실제로 분위기도 이전보다 어두워졌다.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이토록 침울해진 이유야 안 들어도 뻔하다. “몬스터가 이렇게 많아서야…….” 무리에서 떨어진 동료가 멀쩡할 리 없다는 거겠지. 설령 미샤와 여궁수가 만나서 힘을 합치는 행운이 있었다고 한들, 둘만으로는 이런 몬스터 웨이브를 버텨낼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 악조건에 개의치 않으며 더욱 힘을 내 길을 뚫어낸다. 고작 몇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서 메이스를 수어 번 휘둘러야 한들. 그게 가만히 멈춰 설 이유는 되지 못하니까. 아직 나는 그 무엇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콰직, 콰직, 콰직-! 계속해서 나아간다. 퍼엉-! 터져나가는 피. “…….” 힘에 겨운 동료들의 거친 숨소리. 서걱-! 푸욱. 괴물의 가죽을 베어내고 내장을 꿰뚫는 섬짓한 피륙음. 그러한 소음 속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않소?” 한스 J의 목소리였다. “왜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것이오? 나, 나쁜 사람 되기 싫다 이거요? 하지만 다, 다들 알고 있지 않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었다. 이 와중에도 앞에서는 몬스터들이 군침을 뚝뚝 흘리며 내게 달려들고 있었으나……. “알고 있냐니?”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놈에게 향했다. “제대로 말해 봐라. 오해하기 전에.”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이미 늦었단 걸 모르겠소?” 그래, 너는 똑똑한 마법사라 이거지? 안 그래도 잘 됐다. 사실 만났을 때부터 모가지를 꺾어 주고 싶었는데. 바바리안 앞에서 이딴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명분은 될 것이다. 따라서……. “컥!” 놈의 모가지를 부여잡았다. “야, 얀델 씨!” 내 행동에 옆에 있던 레이븐이 비명을 질렀다. 또한, 전위에서 나와 함께 싸우던 파츠란도 몬스터를 냅두고 내게 달려왔다. “뭐 하는 짓이냐!” 동료를 건드린 탓인지 더 이상 파츠란은 내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또한 그 모습에. “너, 더 가면 죽인다.” 아이나르도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파츠란을 가로막았다. 에르웬도 비슷했다. 스륵. 어떠한 말도 없었고, 여전히 몬스터를 향해 화살을 쏘아내는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어느새 에르웬은 신관의 뒤에 위치해 있었다. 혹여나 전투가 벌어지면 신관부터 죽이겠다는 거겠지. “다, 다들 그만해요!” 레이븐은 아예 패닉 상태가 되어서 외쳤고. “얀델, 정신 차려라.” 곰아저씨는 대형 석궁으로 몬스터들을 밀쳐내며 나를 말렸다. 내가 마법사의 모가지를 잡은 뒤, 불과 3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니미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건 나답지 않다. 털썩. 모가지를 잡은 손에 힘을 풀며 한스 J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미 내 돌발 행동으로 전선은 무너져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상황. “미안하다. 잠시 흥분했군.”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지.” 내가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자, 파츠란도 별말 않고 옆에 서서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휴우…….” 그렇게 금방이라도 내분이 일어날 듯하던 분위기는 끝. 다만, 이전과는 달랐고 같아질 수도 없었다. “…….” “…….” 힘을 합쳐 싸우되, 서로가 서로를 경계한다. 덕분에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 더뎌졌다. 뭐, 그래도 한스 놈의 주둥이는 조용해졌지만. ‘미샤는…….’ 한시라도 빨리 미샤를 찾아내야 하는 나로서는 좋지 못한 소식. ‘제기랄.’ 그렇게 개미 기어가듯 느린 속도로 섬을 수색하던 때였다. “아, 아저씨! 시체예요!” 우리는 찾던 이의 주검과 마주했다. *** 사체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눈앞이 아득해졌으며, 머릿속은 새카맣게 물들었다. 하나 머지않아 그 감정은 안도감으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게, 미샤가 아니었으니까. “헤이나……!” 파츠란 팀에 속해 있던 궁수 포지션의 여성. 함께 길을 열던 파츠란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그녀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제기랄!” 호흡을 확인한 그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때 진형의 중심부로부터 새하얀 파동이 퍼져나갔다. 「라이린 에르시나가 [멸악선포]를 시전했습니다.」 신관의 핵심 스킬 중 하나인 [멸악선포]. 일종의 결계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막을 수 없지만, 유지되는 동안에는 몬스터들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결계. [키예에에에엑!] 쉽게 말해, 당분간은 안전하다. 따라서 나도 방패를 내리고서 시신으로 다가갔다. 여궁수의 시신은 아니었다. 그야 시체는 한 구가 더 있었거든. “이자는 누구지?” 이후 당황한 네바르체를 잡아끌고 와 묻자, 동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나도 머리가 멍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궁수가 죽은 건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바로 옆에 이놈의 시체가 있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레이븐, 사인은?” “물어 뜯긴 흔적이 너무 많아서 확신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복부에 자리한 자상이 치명적이었을 거로 추정돼요.” 그래, 역시 그렇단 말이지. “검에 찔린 흔적이라…….” 헤이나는 궁수 포지션이다. 그런데 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건 역시 말이 안 된다. “저 여자 쪽은 어떻지? 정확히 뭐에 죽은 건지 알 수 있나?” “모르겠어요. 저쪽은 더 처참해서…….” “그래도 일단 말해 보자면?” “……일단 거대한 발톱에 찢긴 상처가 있어요. 근데 이것도 조금 이상하긴 해요. 지금까지 이런 흔적을 남길 만한 몬스터는 보지 못했는데. 이건 마치 대형 몬스터가 찢어발긴 것처럼…….” “추측되는 몬스터는?” “발톱이 세 개고 끝부분의 상처가 깊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보통 와이번 같은 조류형 몬스터들에게 당했을 때 나오는 패턴이고요.” “그렇군.” 상황이 더욱 골치 아프다. “역시 몬스터 짓일 리는 없단 뜻이군.”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레이븐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시체는 장비가 전부 벗겨진 상황이었으니까. “파츠란, 그 여자는 아공간이 남아 있나?” “아니, 없다. 누군가 가져갔더군.” 이제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이 섬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탐험가가 더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노아르크 쪽에도 내분이 있었거나.’ 짜악-! 나는 멘탈이 나간 듯한 네바르체의 따귀를 후려쳤다. “정신 차려라. 네게 물어볼 게 있으니까.” “…….” “누구 짓인지 짐작 가는 자가 있나?” “카르밀라와 벨버슨. 두 연놈들 짓일 거요.” “좀 더 자세히.” 이후 네바르체는 벨버슨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검을, 카르밀라라는 여자는 드레이크 소환수를 부린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근데 그렇다면 그들이 왜 네 동료까지 해친 거지?” “나, 나도 잘 모르겠소. 보물이 탐이 났던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레인웨일즈 님도 저놈들한테…….” 아니, 네 멘탈 챙겨줄 여유는 없다니까. “보물에 대해서 말해 봐라.” 나는 머리채를 잡아 녀석의 고개를 고정한 뒤, 아까 대충 흘려 넘겼던 부분을 다시 청취했다. 딱히 실속 있지는 않았다. “노아르크의 성주 가문에서 오랜 시간 전해진 물건이라는 것 말고는 모르오. 아, 아! 얻은 자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전설이 퍼져 있기도 하오!” 역사를 바꿔? 그 정도의 힘을 가진 물건이라는 건가? 전설이라고 하니 절반은 걸러 들어야 할 거 같다. ‘아무튼, 아멜리아 같은 여자를 보내서 되찾아야 할 정도의 물건이란 건 확실하겠고.’ 동기는 충분해 보인다. 노아르크도 바깥 세상으로 떠난 와중 아닌가. 크게 한 탕해서 신분 세탁하고 도시에서 사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을 터. “아울록 님, 헤이나 님을 부탁할게요.” “아, 맡겨 주시오…….” 이내 한스 J가 여궁수의 시신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아공간에 집어넣는 것으로 시신 수습은 끝. “……얀델,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지?” 탐험가답게 파츠란은 짧은 시간 내에 감정을 털어내고 내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다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속 동료를 찾으러 다닐 건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도무지 말이 안 나온다고 해야 하나? “아직까지는 여력이 있지만, 점점 더 상황은 악화될 것입니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무리한 이동으로 체력이 소모되고 있다. 그 와중에 카르밀라와 벨버슨이란 연놈들도 경계를 해야 한다. 이쯤에서 디펜스 포인트를 찾아서 체력을 아끼는 쪽이 백번이고 옳다. 하지만……. ‘그럼 미샤는, 걔는 어떡하라고…….’ 자꾸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미샤는 이걸 알아서 그날 나를 밀어낸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날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졌다면. 나는 이미 이런 생각조차 하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분명 지금도 감정에 휩쓸려 미쳐 날뛰고 있었겠지. 아까 급발진을 했을 때처럼. “얀델 씨…….”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레이븐, 에르웬, 아이나르, 곰아저씨. 미샤 말고도 소중한 내 동료들이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리더로서의 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 “다들 무기를 내려놔라.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까지는 쉬겠다.” 위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274화 디펜스 (4) 정신을 차린 후에는 우선 사과부터 박았다. “마법사, 아까는 미안했다.” 전투 중에 그것도 팀원에게 목이 졸려 뒈질 뻔한 경험을 했던 한스 J는 못마땅한 눈빛을 지었지만, 사과 자체는 받아 주었다. 본인도 아는 것이다. 지금 이 무리에 분란이 생기면 본인 목숨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사과를 하니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 더 언급하지는 않으리다.” 마법사가 사과를 받아 주자 파츠란도 나서서 상황 정리를 도왔다. “비요른 얀델, 나는 널 탓하지 않을 거다. 그 심정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 아까는 아울록 경이 말실수를 한 것도 있고.” “파츠란,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다고 그러는 것인가? 난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네.” “……그렇지만, 말하는 방법이 좋지 못했습니다.” 파츠란은 의외로 내 편에서 말을 해주었다. 하긴, 동료를 열심히 찾고 있는 사람한테 어차피 뒈졌을 테니 이제 그만하자니? 그 말을 듣고 안 빡치는 바바리안이 어딨겠어. “크흠,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지.” “예, 그러는 게 나을 듯합니다.” 갑자기 또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이를 한 번 빠드득 갈았더니, 얘기가 마무리 지어졌다. 암만 생각해도 잘 된 일이었다. 더 말을 나눴다간 아까 상황이 반복될지도 몰랐으니까. “그럼 이제 어떡할 텐가?” 언제부턴가 하오체를 쓰던 파츠란의 말투가 다시 이전처럼 돌아왔지만, 아까 내가 잘못한 것도 있기에 트집 잡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 우선은 결계가 끝날 때까지 쉰다.” “그다음에는?”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거기서 버틴다. 레이븐이 했던 말대로.” “그렇군. 알겠다.”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이 정해지자, 다들 노곤한 몸을 바닥에 대고 체력을 보충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흘렀을까. “이제 곧 신의 보살핌이 끝납니다.” “그렇군. 고생했다. 다들 일어나라.” 시간이 흘러 [멸악선포]가 해제된 후로는 예정대로 근처를 뒤져 그나마 수비에 적당한 지점을 찾았다. 뒤편이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남은 세 방면만 막아 내면 되는 구조의 평지. “베헬—라아아아아아!” 우리는 그곳에서 몬스터들을 막아 냈다. 내심 했던 걱정과 달리 크게 위험할 일은 아직 없었다. 최고 난이도로 이벤트가 시작된 탓에 더 어려운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으나……. “베르티아 세브누 헬헤이번스!” 마법사의 활약이 컸다. 음, 정확히는 한스 J의 활약이라 해야 하나? 원래 마법사란 물량전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레이븐도 마법사로서의 1인분은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한스 아울록이 4등급 공격 마법 [연쇄번개]를 시전했습니다.」 한스 J의 활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치치지지직. 퍼펑-! 마법이 한 번 시전 될 때마다 명색이 5등급인 몬스터들이 죽거나 실신 상태로 변한다. 그것도 최소 열댓 마리씩. ‘……연쇄번개 영창을 15초 만에 끝낸다고? 얘는 대체 뭐지?’ 펑펑 터지는 고위 마법에 의구심을 갖기도 잠시, 옆에서 함께 싸우던 파츠란에게 물어보니 놀라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모르고 있었나? 아울록은 베녹턴 학파의 4등급 마법사다.” 원소 마법 연구에 비중을 둔 베녹턴 학파. 그곳에서도 나름 한가락 하는 위치에 있는 4등급 마법사. ‘어쩐지 장비가 비싸 보이더라니.’ 예상했던 것보다 실력 있는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자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지가 빡치면 어쩔 건데. 나도 귀족이다. 어디 가서 신분으로는 안 꿇린다는 뜻. “에르시나, 결계를 쳐라.” “예.” 아무튼, 한스 J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사실 이번 디펜스 이벤트의 1공로자를 뽑는다면 역시 신관이었다. 「라이린 에르시나가 [멸악선포]를 시전했습니다.」 이게 없었다면 쉴 시간도 없었을 터. “후아, 아저씨. 이리로 오세요. 여기 침낭 깔아놨어요.” “고맙다.” 우리는 몬스터를 막다가도 조금 힘에 부치기 시작하면, 즉시 결계를 치고 체력과 소모된 MP를 보충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재정비가 끝나면 결계를 풀고 사냥을 재개. 이 짓을 4시간 정도 더 반복했을 때였다. 「두 번째 바다의 분노가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 *** 투둑,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세찬 물줄기로 변한다. 솨아아아아아아-! 장마철처럼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 “……비?” 도시에서나 겪었지, 미궁에서는 겪을 일 없던 기상 변화에 동료들이 당황했다. 물론 6층에서 오래 활동한 파츠란 팀은 달랐다. “왜 하필 이런 때에 비가…….” 비 자체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들어지겠군.” 혀를 차며 표정을 구긴다. 다들 아는 것이다. 미궁에서 비가 오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를. 비 자체만으로 좁아진 시야. 그 와중에 빗물은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리며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날이 차기에 오랜 시간 비에 노출되면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으며……. 젖은 손으로는 무기를 놓치기도 쉬워진다. 호재라고 볼 만한 사항이 단 하나도 없는 셈. “이거 귀찮게 됐네요…….” 다들 이 기묘한 우연에 운도 참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나는 달랐다. 간단한 이유다. 운과는 별개라는 걸 아니까. ‘30분쯤이면 오겠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는 증거. 곧 중간 보스도 나타날 것이다. 인원수가 가장 많은 쪽부터 노리는 게 그놈의 특징이니까. “다들 너무 나가지 말고 붙어서 싸워라!” 일단 지시를 내린 뒤, 중간 보스가 도착할 때까지 몬스터들과 싸우며 뒤바뀐 환경에 적응했다. 솨아아아아아-! 나도 실제로는 처음 겪어 보는 미궁에서의 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찮네.’ 바닥은 미끄럽고, 어딘가는 진흙이 뭉쳐 땅이 푹푹 꺼진다. 그것만으로도 여러모로 신경이 분산되는 와중에, 비 맞은 수 속성 몬스터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게 발톱을 휘둘러온다. 꽈악-! 혹여나 메이스를 놓칠까 평소보다 힘을 몇 배는 더 불어넣으며 휘둘렀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 이제 좀 빗속에서의 전투도 몸에 익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야, 얀델 씨! 저쪽! 저쪽!” 정면부에서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오오오오오오-!!] 구아노 씨 서펜트. 4족 보행을 하며, 갈색 이끼로 뒤덮인 비늘과 통통한 꼬리를 지닌 4등급 몬스터. 가장 큰 특징으로는 [악취]가 있다. 「캐릭터가 [악취]에 노출되었습니다.」 「모든 지속 피해 효과가 2배 증가하며, [악취]에 노출되는 동안 ‘정화’에 면역 판정을 받습니다.」 저주술사로 키울 때 코어 정수가 되기도 했던 그 패시브 스킬. “욱! 우욱……!” 평소 똥도마뱀이라 부르던 몬스터답게, 놈이 온 순간 모두가 헛구역질을 뱉었다. ‘무슨 냄새가…….’ 비위에 강한 바바리안조차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강한 [악취]. 나는 숨을 참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세이렌 여왕과 같은 4등급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상황이 다르니까. ‘……도중에 실수하지 않게만 조심하자.’ 주변을 가득 메운 몬스터. 거기에 소환몹이 갖춰져야 위력을 발휘하는 여왕과 달리 이놈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하다. 이 와중에 인원도 분배해야 할 테고. 나는 빠르게 무리를 둘로 나누었다. “파츠란, 아이나르 너희는 이쪽 신경 쓰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일단 근딜이자 전위인 둘은 좌측과 우측의 잡몹을 전담 마크. 혹시 몰라 한스 J와 곰아저씨도 보스전보다는 잡몹 처리에 집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내 뒤로 와라!” 일종의 공략조다. 목표는 잡몹조가 버텨 주는 동안에 놈을 처치하는 것. [구오오오오오-!!] 이내 멀리서 간을 보던 놈이 뿔 달린 이마를 앞세우며 달려들었고, 내가 놈의 머리통을 방패로 받아내며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 자체는 무난했다. 「구아노 씨 서펜트가 [바다의 역병]을 시전했습니다.」 소환 패턴인 자폭 정령은 에르웬과 레이븐의 요격으로 컷. 퍼엉-! 뭐, 정령이 터지면서 흩뿌린 피 때문에 상태 이상에 걸리기는 했지만……. 「캐릭터가 [괴혈]에 감염되었습니다.」 「모든 회복 효과가 절반 감소하며 지속적으로 중독 피해를 입습니다.」 이 정도야 그냥 신관의 힐로 버티면 그만. 「구아노 씨 서펜트가 [심해의 기원]을 시전했습니다.」 「구아노 씨 서펜트가 [침몰]을 시전했습니다.」 「구아노 씨 서펜트가 [기우제]를…….」 「…….」 이놈이 가진 나머지 패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건 마법으로, 어떤 건 신성력으로. 또 어떤 건…….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바바리안의 무식한 몸뚱이로. 패턴들을 버텨가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물론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없었을 뿐이지, 그 과정이 쉬웠던 건 아니다. “야, 얀델 씨! 그건 피하셔야 돼요!” 구아노 씨 서펜트는 피통이 크기로 유명한 몬스터. 당연히 전투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아찔한 상황도 몇 번이나 있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허용량을 초과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령화]가 해제됩니다.」 막바지에는 에르웬이 피해를 입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전투 내내 절반짜리 힐을 써야 했던 신관의 신성력은 아예 바닥이 났을 정도. 물론 이제 와서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일단 잡는 것에는 성공했으니까. 「구아노 씨 서펜트를 처치했습니다 EXP +6.」 마지막에 한스 J까지 공략조로 넘어오며 흩뿌린 전격 마법. 그것을 끝으로 놈의 육중한 몸체가 기울며 쓰러지더니, 이내 빛이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해, 해치웠……. 응?”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갸웃했다. “어, 어?! 야, 얀델 씨!” “정수예요!!” 정수가 드랍됐다. *** 4등급 몬스터는 6층에서도 흔치 않다. 일단 배를 타고 저 멀리까지 나가야 등장을 하며, 그마저도 개체가 적어 5등급 몬스터처럼 하루에 수십 마리씩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그만큼 정수 수급이 어렵다는 뜻. “4등급 정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6층에서 구르고 구른 파츠란의 눈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거, 지가 먹을 정수도 아닌데 저러긴. ‘후, 하필 나와도 이게…….’ 나는 짧게 혀를 차며 아쉬움을 지웠다. 우리 팀 중에 이 정수를 먹을 만한 애가 없기는 하지만, 밸류만으로는 나쁜 정수가 아니니까. 나가서 팔면 돈은 꽤 되겠지. “레이븐, 정수는 시험관에 담아라.” “아, 네!” 내 지시에 레이븐이 빠릿하게 움직이며 아공간에서 시험관을 꺼냈다. 그리고 정수를 담기 위해 이동하던 차. “잠깐만, 우선 먹을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일 텐데?” 파츠란이 나서서 레이븐을 제지했다.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저쪽은 신관에 마법사뿐이니까. 입찰을 한다고 해도 파츠란 저놈밖에 없는데……. “혹시나 해서 묻는데, 우리 지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 검사가 이 정수를 먹으려 할 리는 없지. “걱정 마라. 정수는 판매해서 인원수대로 나눌 생각이니까.” “흠, 그렇다면야.” 이내 녀석이 원했을 말을 해주자, 녀석도 별말 않고 물러섰다. 이거로 배분 문제는 끝. “저, 그럼 담을게요?” 레이븐이 시험관을 든 채로 한 번 더 물으며 최종 확인을 거쳤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비가 그쳤군?” “상황이 공교롭구려. 어쩌면 비가 내리던 것도 구아노 씨 서펜트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르오.” 파츠란과 한스 J가 나누는 대화에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나는 그대로 굳었다. 구아노 씨 서펜트가 처치되며 비가 그친 것. 여기까지는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지만……. “잠깐… 저게 뭐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개이기 시작한 먹구름 사이로 검은 비행 물체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드, 드레이크예요!!” 니미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나는 외쳤다. “전투 준비!!” 승냥이가 왔다. 275화 소용돌이 (1) 당황과 놀람. 그러한 감정과는 별개로 머리는 시각을 통해 전달된 정보를 분석했다. ‘드레이크.’ 일단 드레이크는 이 섬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해답은 좀 전에 나눈 대화에 있었다. [카르밀라와 벨버슨. 두 연놈 짓일 거요.] 노아르크 출신이자, 보물이 탐나 아멜리아를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은 두 약탈자. 그중 카르밀라라는 여자가 드레이크를 소환수로 부린다고 했다. 음, 그럼 상대가 누군지는 알았고. 화르륵-! 드레이크가 토해내는 불길을 보면 저들이 우리에게 악의를 가졌단 것도 확실하다. 따라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전투 준비!!”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외친다. 비슷한 상황이 여럿 있었던 덕인지, 이 외침은 이번에도 역시나 트리거가 되어 주었다. “다, 다들 이리 모이세요!” 멍하니 허공을 올려보던 레이븐이 시험관을 아공간에 넣을 새도 없이, 황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아레르베스 위아르!” 7등급 보조 마법 ‘마력 장벽’. 마법사들이 가장 애용한다는 그 무속성의 수비 마법. 한데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장벽엔 푸른 서리가 어려 있다. ‘그 잠깐 동안 냉기 속성 부여까지 한 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탐험가가 되고 나서 영창 하나는 진짜 빨라졌네. 후우우우웅-! 짧게 감탄하는 사이, 드레이크가 뿜어낸 불길이 마력 장벽과 맞닿으며 우산을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넓게 퍼져 나갔다. 어찌 됐든 일단 숨 돌릴 시간은 번 셈. ‘에르웬은 전투 불능. 에르시나는 신성력이 바닥났고, 레이븐도 마력이 얼마 안 남았겠지. 나만 해도 MP가 간당간당하니까.’ 주어진 찰나 동안 아군 정보를 갱신한다.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구아노 씨 서펜트와의 전투로, 대부분이 체력을 포함한 모든 생체 자원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 ‘쉽지 않겠는데.’ 그렇게 속으로 막 생각하던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일순간 불길이 멈추더니 드레이크가 마력 장벽을 들이받았다. 이름하여 몸통 박치기. 테이머의 근본과도 같은 그 스킬. 찌지지직-! 저 커다란 몸뚱이가 낙하하며 얻은 가속도까지 담아서 처박았으니, 7등급 수비 마법이 버텨낼 리는 만무.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물질]을 시전했습니다.」 와장창 깨진 마력 장벽 너머로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곰아저씨가 드레이크의 이마를 향해 폭발 화살을 쏘아냈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드레이크는 커다란 날개로 몸을 감싸며 웅크리는 것으로 큰 피해 없이 이를 막아 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저거 한 방으로 뒈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으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나는 꺼뒀던 [거대화]를 활성화하며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곰아저씨의 화살을 막느라 제자리 체공 상태가 된 드레이크에게 달려들었다. 타닷. 허공에서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카르밀라, 저 바바리안은 내가 맡겠다.” 그때 드레이크의 등에 타 있던 사내가 도약하며 내게 검을 찔러왔다. 검신에는 하얀 기운이 둘러져 있었다. 기사들이 쓰는 오러는 아니지만……. ‘씁, 저건 맞으면 아플 거 같은데.’ 탱커로서의 직감이 말해 주었다. 그냥 무시하고 돌진하기에는 위험할 거 같다고. 따라서 나는 방패를 들어 검을 막아 냈다. 콰아아아앙!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함. ‘역시 막기를 잘했네.’ 대포알처럼 날아가던 바바리안의 몸뚱이가 검 한 자루에 의해 멈춰졌다. 딱 보니 방패에도 기스가 난 거 같고. 만약 몸으로 받아낸다는 선택을 했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5등급, 탐험가라, 들었는데.” 그나저나 뭐래, 이 새끼는.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뒈져.” 문답무용으로 메이스를 휘두르자, 놈이 내 방패를 밟고 뒤로 백덤블링하며 거리를 벌리며 지상에 착지했다. 후, 지가 날다람쥐인 줄 아나? 타닷. 허공에서의 짧은 수 교환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온 나는 그 즉시 대시했다. 그와 동시에 드레이크가 목을 꿀렁이며 한 번 더 불길을 토해냈다.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나도 혼자인 건 아니니까. “저쪽은 우리가 맡을게요!” 다시금 레이븐의 수비 마법이 펼쳐지며 드레이크의 불길을 막아냈고, 곰아저씨도 얼른 화살을 쏘아내며 드레이크 쪽을 견제했다. 따라서……. 타닷. 한 번 더 대시하며. 후우우우웅. [휘두르기]. “……!” 처음에는 피하지 않고 막아서려던 놈이었으나, 뭔가 싸한 감각을 느꼈는지 검을 회수하며 거리를 벌렸다. 거, 감도 좋기는. ‘막았으면 통째로 박살내 버렸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뒤에서 곰아저씨의 외침이 들려왔다. “얀델, 그쪽은 맡기겠다!” “그래, 그쪽은 너희에게 맡기지.” 그렇게 자연스레 전투 구도가 잡혔다. 소환사 카르밀라는 레이븐, 곰아저씨, 파츠란, 한스 J가 힘을 모아 공략. “우오오! 몬스터들은 내게 맡겨라!” 아이나르는 이 와중에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덤벼드는 잡몹 처리. 그리고 나는……. “왜 자꾸 도망가나. 먼저 덤벼놓고.” 벨버슨인가 뭔가 하는 이름을 가진 검사놈을 상대한다. 뭐,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지시할 게 하나 있겠지만. “레이븐, 음성 제어 마법을 켜라!” 검사놈에게 거리를 좁히며 레이븐에게 팀 보이스 마법을 쓸 것을 지시했다. 아, 참고로 한 가지 조건을 더해서. “우리끼리만 하라니요? 갑자기 왜…….” “됐고, 그래서 했나?” “네. 우리 대화는 이제 우리만 들을 수 있어요.” 오케이, 그렇단 말이지. 팀 보이스가 잘 적용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전달 사항만을 신속하게 전했다. 레이븐을 빼면 다들 내 지시에 의문을 느낀 듯했지만…….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 그때가 오면 네가 말한 대로 하지.” 지시를 따르지 않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다. 쉽게 말해, 이젠 각자 할 일만 잘하면 된단 뜻. 타닷.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대시하며 검사놈과 벌어진 거리를 좁힌다. 드레이크의 주인인 여자 동료는 몇 번인가 도우려다 레이븐과 한스 J의 방해를 받고 아예 저쪽과 전투를 시작한 상황. “아이 씨, 짜증 나게. 지면 가만 안 둬!”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일대일 매치업이다. 다만 아까 궁수놈을 조질 때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유는 여럿 있었다. 일단 이놈은 유리몸을 지닌 원거리 계열이 아니며, 궁수놈보다 전체적인 수준도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앞선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MP가 바닥나서 스킬로 찍어누르는 게 불가능하다. 후, 컨디션만 멀쩡했어도 진작 조졌을 텐데. “제법이었지만, 여기까지다!” 이내 [거대화]가 해제되자 검사놈이 거리를 좁히며 내게 검을 휘둘렀다. 노아르크 출신답게 대인전에 조예가 깊은지, 방패로 막기 어려운 타이밍과 경로였다. 하지만……. ‘얘, [무쇠가죽]은 모르는구나.’ 오우거의 패시브 스킬 [무쇠가죽]은 베기 공격에 한하여 물리 내성이 추가로 2배 더 상승하는 효능을 지녔다. 카캉! 검이 팔뚝을 파고들었지만 그게 전부. 이제는 내 턴이다. 후웅! 살갗에서 이물감이 피어난 즉시, 메이스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콰직-! 듣기 좋은 피륙음이 들렸다. 다만……. “크윽.” 메이스에 터져 나간 것은 놈의 머리통이 아니라 제때 들어 올린 왼팔이었다. 하긴, 머리보단 팔이 터지는 게 낫지. 너도 그 정도 판단은 하는 거구나.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개의치 않고 메이스를 휘두르며 잡은 기회를 이어가려던 차였다. [캬아아아아악!] 측면에서 달려드는 몬스터 탓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하,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오우거의 정수였군.” 심지어 이제 놈도 [무쇠가죽]을 인지한 듯했다. 실제로 다음부터는 베기는 페이크로만 쓰며 찌르기 위주의 공격을 해왔고. ‘단기전은 이미 글러 먹은 거 같네.’ 한층 높아진 전투 난이도가 이어지자, 몸에 상처가 생기는 빈도가 늘었다. 한데 검에 독을 발랐는지, 중간에 레이븐이 포션을 던져줘도 상처가 낫지 않았다. 하나 그럴수록 나는 조급함을 버렸다. ‘일단 MP부터 채우자.’ 전략 교체다. 우선은 최대한 수비적으로 움직이며 놈이 가진 정수를 확인. 그다음에 승부를 본다. 그렇게 마음먹고서 버티기 모드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한스 아울록!” 저 멀리에서 여인의 외침이 들렸다. 드레이크에 탄 채로 각종 이능들을 쏘아내던 여자의 음성. “그만 방해하고 우리를 도와!” 기시감이 뇌리에 스쳤다. 공교롭게도 도플갱어 숲에서 있었던 일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무, 무, 무슨 소리요!” “뭐래? 네 뒷조사를 해서 그년한테 전해준 게 나인데 그걸 모를까 봐?” 적이 ‘노아르크’ 출신이라는 점도. “다, 다들 듣지 말게! 저 사악한 악녀가 간악한 이간질을 하려고……!”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다? 전부 들어! 한스 아울록은 12년 전에 몬트라이나 백작가의 영애를 간살하고 은폐한 쓰레기야!” 그 적이 ‘한스’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배신을 종용한다는 점도. “간교한 혀놀림이군요! 과연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습니까?” 암만 동료가 ‘배신’을 부정한다고 한들, 한스에게 선택지가 사라졌다는 점까지도 모두 그때와 일치했다. 하지만……. “이헤르노 카르 베르데이…….” 그 결과는 그날과 전혀 달랐다. 푸욱. 한스 J가 영창을 끝마치기도 전에 단검이 놈의 폐부를 뚫고서 삐져나왔다. “커헉……!” 한참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결코 나올 수 없을 신속한 대응. 털썩. 이내 한스 J가 바닥에 쓰러지자, 회유를 시도했던 여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혹시 이럴까 봐 아까 미리 말해 뒀어. 헛짓거리할 낌새만 보여도 쑤셔 박으라고. *** 한스 J의 등에 단검을 꽂은 건 에르웬이었다. 뭐, 전투엔 참가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법사 하나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다. 미리 대비하고 바로 뒤에 있었다면 더더욱. “다, 당신! 어째서 그분을……!” 반면 이 상황을 조금 전까지 상상도 못 했던 여신관은 입을 쩍 벌렸다. 얘는 아직 한스 J의 배신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인데……. “왜긴요. 배신자라잖아요.” “이간질입니다! 아직 제대로 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갑자기 마법을 영창했잖아요.” 에르웬의 딱딱한 말에 여신관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를 노리고 영창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스 J의 마법이 실제로 우리를 겨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짐승. “뭐야,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한스 J는 이해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이간질이라 여길 수 있으나, 도시로 살아 돌아가면 의문을 가질 것임을. 그리고 어쩌면 뒷조사를 시작할지도 모르기에……. 가장 확실한 것은 모두 죽여서 입막음하는 것임을. ‘아무튼, 진짜 이 새끼가 배신자가 맞았네.’ 이름을 제하면 어떠한 근거도 없었기에 내심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 한스는 과학인 건가? “비요른 얀델! 당신도 뭐라 말을 해보십시오!” 에르웬의 비아냥에 여신관이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내가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잘했다, 에르웬.” “아니에요. 시키신 대로 했을 뿐인걸요?” 그건 그런데, 그걸 제대로 잘했다는 게 중요한 거라니까? 실제로 곰아저씨도, 레이븐도 내게 지시를 받았지만 에르웬처럼 신속하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죽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니까. 아무리 마음 준비를 해도 심리적인 저지선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럴 때 가장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게 얘일지도…….’ 에르웬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올리며, 방패를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그 위에 꽂히는 새하얀 칼날. 콰앙-! 쩝, 생각할 시간도 안 주는구만. 하긴, 비장의 수 중 하나가 불발로 끝났으니 조금은 급해졌겠지. “파츠란 님! 파츠란 님도 뭐라고 말을 해보세요. 저 요정이 아울록 님을 해쳤는데……!” “에르시나,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그가 정말 배신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니.” 다행히 파츠란은 여신관처럼 순진하진 않은지 이 주제를 뒤로 미뤘다. 말투를 보니 처음에는 놀랐지만 내 행동이 옳았다고 여기는 거 같았다. 그래, 이래야지. 아까 그건 누가 봐도 배신하는 분위기였잖아? ‘오케이, 그럼 배신 패턴도 무사히 잘 넘겼고…….’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전투를 이어가던 때였다. “얀델 씨, 우리크프리트 씨가……!” 사고가 터졌다. 276화 소용돌이 (2)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 선은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찰나의 순간에 그어진다. 탐험가 직종에서는 대부분 후자다. 어지간한 부상은 포션이나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까. 즉사에 이르는 부상을 입거나, 팀이 전멸한 게 아니라면 보통은 살아남는 것이다. 뭐, 이런 경우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으아, 제발 좀 일어나랑.” 포션이나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상황. 그런 상황이 가끔 있다. 팀 반푼이의 마법사 리올 워브 드왈키. 그는 확정된 죽음을 향해 다가가며 남은 이들을 위해 유언을 남겼고, 그때 미샤와 동료들은 깊은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응? 이 이름도 모르는 여자양. 제발…….” 소중한 동료가 아닌, 그저 남인 존재. 게다가 드왈키처럼 확정된 죽음조차 아니다. 고비를 이겨내고 살아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나아갈지는 철저하게 이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그리고 미샤에게 달렸다. “아, 좀 일어나라고!!” 미샤는 갑갑함을 표출하듯 소리치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 검 끝에는 바닷가에서 올라온 몬스터들이 있었다. 서걱-! 베고, 찌르고, 또 베어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적. 이제 미샤도 한계였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면, 영영 비요른과 만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다만 저 여자를 업고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에야 부상도 어느 정도 나아서 호흡도 안정됐지만……. 서걱-! 사방이 몬스터인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 여자를 업고서 이동한단 말인가. 적어도 저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느리게라도 따라 걸을 수 있어야 길을 여는 게 가능할 터. “아니, 이제 나도 진짜 한계라니까……!” 미샤는 부디 이 재촉이 저 여자의 무의식에 닿기를 바라며 다시금 소리쳤다. 그때였다. “너는…….” 시체처럼 누워 있던 여자가 눈을 떴다. “이, 일어난 거냥! 몸은 어떻고, 움직일 수 있겠냥?” 미샤가 반색하며 물었으나, 여인은 현 상황을 머릿속에 정리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군, 네가 여태까지 나를 지켜준 건가…….” “그래! 근데 더 이상은 나도 힘들거든? 응?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당. 할 수 있겠냥?” 대답은 아주 잠시간의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 “못 움직인다.” “뭐어?” “하지만 이 몬스터라면 해결할 수 있다. 내 포켓에서 말해준 물건을 꺼내라.”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의 말. 그것에 미샤는 몬스터를 막는 것도 멈추고 얼른 뒤로 물러나, 여자의 허리띠에 찬 확장형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 물건을 꺼냈다. “스크롤? 이게 대체 뭐 하는 스크롤인데?” “멸악선포.” 미샤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냥 마법 스크롤도 아니고, 신성력이 담긴 스크롤이라니? 이제는 제작도 되지 않는 귀한 걸 이 여자는 어떻게 구했을까? 여러 의문이 맴돌지만, 중요치는 않았다. “으아, 이런 게 있었으면 정신을 잃기 전에 먼저 말을 해주라고오……!” 미샤는 서둘러 스크롤을 찢었고, 그 즉시 신의 기운이 어린 반투명한 장벽이 몬스터들을 가로막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의 시간. “에휴, 이제 좀 살겠넹. 야, 그래서 너는 비요른이랑 무슨 사이냥?” 미샤는 얼른 여자에게 다가가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바바리안과…….” “……응, 그래서 바바리안과?” “…….” “……뭐? 아니지? 자는 거 아니잖아. 응? 악! 말은 다 하고 자라고……!!”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어깨를 흔들던 미샤는 부상자라는 걸 도중에 깨닫고 손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살 만해지니 다시 헤어진 동료들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괜찮겠지?” 그때 바닷가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끈끈할 정도로 습하며 바다의 짠내까지 품은 싸늘한 바람. 솨아아아아아-. 왠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맞대는 전투. 그런 전투에서 부상을 입는 일은 흔하다. 누구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닐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탐험가들은 미신에 쉽게 빠져든다. 본인들도 아는 것이다. 전투 중 부상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 부상의 정도가 때로는 ‘운’에 달리기도 한다는 것을. “얀델 씨, 우리크프리트 씨가······!” 오늘 곰아저씨에게 벌어진 일도 비슷했다. 드레이크의 발톱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중인 파츠란의 검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 부러진 칼날이 날아가 몸에 박혔다. 본인의 실수라고는 없었다. 더 민첩했다면 보고 피하는 것도 가능했을 터이나, 보통은 그런 걸 보고 실수라고는 하지 않으니까. 운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피가……! 피가 멈추질 않아요……!” 누군가는 10층에서 떨어져도 우연이 겹쳐 살지만, 누군가는 그저 미끄러진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는다. [던전 앤 스톤]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의 일면을 충실히 따른 게임이었고, 나도 그러한 점에 큰 매력을 느꼈었다. 이 몸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는. “신관님! 어서 치료를……!” 아무튼, 문제는 칼날이 지나간 위치였다. 심장은 비껴갔으나 뾰족한 파편은 폐부를 파고들었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꿰뚫었다. 가장 많은 출혈이 발생하는 관통상. 심지어 내장이 다쳤다. 「라이린 에르시나가 [치유]를 시전했습니다.」 여신관이 쥐꼬리만큼 남은 신성력을 사용해 힐을 쏟아부었지만, 무의미했다. 「현재 대상은 [용의 제물]로 지정된 상태입니다.」 「모든 재생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5등급 몬스터 드레이크의 액티브 스킬. 저 망할 소환사년이 곰아저씨의 부상을 보자마자 걸어버린 것이다. “어딜 보는 거냐, 바바리안?” 제기랄. 콰앙-! 당장 달려가 곰아저씨의 상세를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내게 없다. 그리고 이는 저쪽도 매한가지. “아브만 씨는 제가 보고 있을 테니, 다들 싸우는 데 집중하세요!” 사경을 헤매는 곰아저씨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에르웬에게 그를 맡기고 다시금 전투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 마법사 한스 J의 부재.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공백을 메우려고 무리하던 파츠란은 무기를 잃었다. 한데 그 와중에 불행은 또 겹쳐, 부서진 검의 파편이 곰아저씨를 관통하며 전투 인원이 추가로 감소했다. “네바르체라고 하셨죠?” “그렇소만…….” “여기 이 활 돌려줄게요. 그쪽도 싸워요.” “……괜찮겠소?” “그쪽도 여기서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니에요.” 에르웬이 네바르체에게 무기를 쥐여 준다는 강수를 두었으나, 그럼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가자, 용용아! 조금만 더 힘내!” 5등급 몬스터 드레이크. 게다가 소환수를 강화하거나 원거리에서 지원하는 보조 정수로 떡칠을 한 소환사까지. 암만 봐도 전투 난이도가 아주 높다. 사실 저쯤 되면 4등급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나 진배없는데, 그 와중에 우리 컨디션은 개판이란 말로도 모자랐거든. 에르웬은 MP와 자연력이 바닥났고, 신관의 신성력도 차는 대로 족족 소모되고 있는 상황. 심지어 전위를 맡은 파츠란은 검을 잃었다. 궁수 한 명이 추가된다고 전황이 확 달라지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쪽 도움을 바라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네.’ 씁쓸하지만 이제 인정해야 했다. 상황이 변했다. 그러니 전략도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원래는 최대한 안전하게, 상대의 정수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없어.’ 곰아저씨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서 드레이크의 스킬이 해제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포기할 건 포기해야겠지.’ 약간의 각오가 필요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나는 이미 모든 계산을 끝마쳤다. 하면, 상대는 어떨까. “동료가 당하니 아주 다급해졌군, 바바리안!” 이미 승리를 한 것처럼 오만하게 웃는 저놈은 과연 나를 막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곧 알 수 있겠지.’ 함성을 터뜨리며 지면을 박찬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평소처럼 함성을 내지른 즉시 몸을 휘감는 활력은 없다. [야성분출]을 쓸 MP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조상신의 가호는 함께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신께선 야성을 품고 달려나가는 전사를 아끼시니까. 음, 아니면 말고. 휘익-! 거리가 좁아지기 무섭게, 놈이 검을 내찔렀다. 지금까지 전투 중에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놈이 검을 찌르면, 나는 방패를 들어 막는다. 그것만으로 내 턴은 소모가 되고, 놈은 대충 팔뚝이나 허벅지에 칼을 쑤셔 박고서 거리를 벌린다. 그게 조금 전까지의 패턴이었다. 하지만……. ‘응, 안 막아.’ 찔러져 오는 검을 보며, 방패를 들어 올리지 않고 메이스를 휘두른다. 그러니 이제 놈이 선택할 차례다. 자, 너는 어쩔 거냐? “……!” 느닷없이 달라진 전투 구도에 당황한 놈이 검을 회수하며 황급히 백스텝을 밟았다. 거, 남자답게 한 대씩 주고받자니까. ‘이럴 줄 알았지.’ 내심 예상한 경우였기에, 놈이 거리를 벌린 즉시 바닥을 박차며 방향을 틀었다. 소환사를 태운 드레이크가 있는 그곳을 향해. ‘도약.’ 딱 1회분가량 회복된 MP를 써가며 [도약]했다. 쿠우웅-! 착지 지점을 타고 퍼져나가는 먼지구름. [거대화] 상태가 아니기에 특수 지형 효과 ‘반동’은 없었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륵?] 숲 저편에서 나타난 나를 보며 아가리를 벌려오는 드레이크. 입 냄새나 새끼야. 퍼억-! 눈이 마주친 즉시 메이스로 주둥이를 후려쳤다. [궤엑-!] 고개가 크게 돌아갔으나, 중대형 몬스터로 분류되는 놈에게 유의미한 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애초에 내 목적은 저 위에 탄 채 짜증 난다는 눈빛을 짓고 있는 저 여자였다. “아, 진짜! 얘 하나 못 막고!!” 다시금 지면을 박차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푸욱. 한 자루의 검이 등짝을 파고든다. 보나 마나 아까 그 새끼다. 후, 그 거리를 벌써 좁힌 거야? “왜 이제 와!!” 검이 폐부를 찌르며 굳은 나를 보며 소환사가 징징거리듯 외쳤다. 그 행동에 나는 오직 의문만을 느꼈다. “왜.” 내가 못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목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닐진대. 스륵. 검에 찔린 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우웅-! 쥐고 있던 메이스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다. 목표는 내내 징징거리던 저 소환사의 정수리. 푸욱-! 등짝에 꼽혀 있던 칼이 뽑히며 몸이 움찔했으나 팔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그 찰나. 휘익. 놈이 회수한 검을 다시금 내찔렀다. 푸욱-! 파고든 부위는 메이스를 든 팔꿈치. 살갗뿐만 아니라 관절이 박살 나며 손아귀 힘이 풀렸다. 새끼, 사람이랑 많이 싸워 본 티 내기는. 뭐, 피차일반인가? ‘살점폭발.’ 어차피 못 쓰게 된 팔은 과감히 포기했다. 퍼엉-! [산성체액]은 싸우면서 인지를 했으나, 몸이 터져나갈 줄은 몰랐을까? 치이이이이익-! “아아악!!” 내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놈이 신음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난다. 시체골렘의 정수가 좋은 이유다. 희귀 정수라 아는 애가 거의 없거든. MP가 아니라 생명력을 코스트로 쓴다는 것도 이럴 땐 제법 유용하고. 처커컹. 그때 쥐고 있던 메이스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메이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방패 역시 훌륭한 무기니까. 퍼억-! 이내 방패에 처맞은 소환사가 꺄악 소리를 내며 안장에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한쪽 팔이 기이한 형태로 꺾인 게 보였다. 조금 아쉬웠다. 머리통이었으면 즉사도 가능했을 텐데. 하필 그때 드레이크가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앙증맞은 머리통을 부술 수 없게 되었다. ‘……한 번 더 하면 되겠지.’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웃는 바바리안을 본받으며 드레이크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한데 이건 또 뭘까. 후웅-! 추락하던 몸이 갑자기 위로 치솟는다. 드레이크가 내 뒷덜미를 물어서 던져버린 것. 시야에서 소환사의 몸이 빠르게 멀어졌으나 악재만은 아니었다. 푸욱-! 드레이크가 큰 동작을 취한 틈을 타서 파츠란이 부러진 검을 가슴팍에 박아 버렸으니까. [키예에에에엑!!] 심장 쪽을 건드렸을까? 드레이크가 격하게 몸부림을 치더니 이내 빛이 되어 사라졌다. 마침내 소환 해제 상태가 된 것. 상태 이상도 풀렸을 테니, 이제 곰아저씨도 신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을 터였다. 일단 내가 바라는 것 중 첫 번째는 이룬 셈. 콰앙-!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처박힌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찰나였다. 스릉-! 서슬 퍼런 검이 내 목에 겨눠졌다. “괴물 같은 놈.” 놈이 어떤 극찬을 해오던 그 검을 막거나 피할 기력은 없었다. 다만, 오랜만에 불행 중 다행인 점도 있었다. 지금의 놈은 날 죽일 수 없다. “다들 멈춰라! 이놈이 죽는 걸 보기 싫다면!” 이내 놈이 내 동료들에게 외쳤고, 이에 내 동료들도 기절한 소환사의 목에 무기를 겨눴다. “너야말로 그 검을 떼라, 이 여자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흡사 인질 교환식과도 같은 상황. 그렇게 기묘한 침묵이 감돌던 때였다. 터벅. 숲속에서 두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 비요른……?! 이, 게 무슨 일이냥!!” 한 명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미샤였고. “제법 곤란해 보이는군, 바바리안.” 한 명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였다. 어째서 이 둘이 같이 있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러 의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치솟았으나, 난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이 둘의 등장이 긍정적인 변수인가 아닌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역시 살아 있었구려.” 사내놈이 내 목에 검을 겨눈 채 아멜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차라리 잘됐소, 이제 우리를 도우시오.” “그 짓을 해놓고서 내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그럴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 물건은 이 섬 어딘가에 숨겨뒀소. 이대로 우리가 죽으면 영영 잊힐 터. 당신은 정녕 그리되기를 바라시오?” 그 말에 아멜리아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여자와 벌써 몇 번째 만나 봤던 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니미럴.’ 저건 고민할 때 짓는 표정이다. 아마 저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정해지겠지. 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몸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벨버슨 에르프너. 넌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뭐?”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검사놈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멜리아는 말을 이었다. “일단 그 첫 번째는 중간에 말을 하다 마는 거다. 그런데 아쉽게도 두 번째는 듣지 못했지. 하지만 나 혼자 추측해 보건대…….” “……보건대?” 미끼를 문 검사놈이 참지 못하고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는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이 여자는 그 답을 안단 말인가? “…….” 묘한 정적 속에서 관심이 모였고, 아멜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 “말을 하던 중에 뒤통수를 치는 거다.” 아. 타닷. 아멜리아가 말을 마친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뭔지는 뻔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검사놈이 나를 밀치며 뒤로 돌았다. 하지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수라각]을 시전했습니다.」 이미 늦었다. 콰아앙-!! 뒤에서 나타난 아멜리아의 분신이 검사놈의 관자놀이에 꽂혔다. 털썩.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검사놈이 중얼거렸다. “어, 째서……. 당신, 에게 그 물, 건은…….” “그래, 한평생 바라온 것이지.” “근데 왜…….”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아멜리아가 검사놈의 머리통을 발로 짓누르며 말했다. “정말로 숨겼어도 상관없어. 네 동생년한테 들으면 돼. 그년이 심문을 버틸 리가 없으니까.” 참으로 합리적인 여자였다. 277화 소용돌이 (3) “아, 안 돼……!” 사내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발을 내리찍었고, 사내의 머리는 떨어뜨린 수박처럼 짓이겨졌다. 콰직. 조금은 허무했다. 그렇게 격렬하게 투쟁하였건만, 이런 식의 마무리라니. “바바리안.” 이내 아멜리아의 관심이 내게로 옮겨졌다. “많이 다쳤군.” 뭐래. “그러는, 너야말로 팔, 한 짝이 없어졌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여기서 왜 시간 얘기가 나와? 이게 올바른 대화가 맞나? 문득 그런 의문이 생겼을 때였다. “설마 이것까지 갖고 있었을 줄이야.” 사내의 시체를 뒤지던 아멜리아가 아공간에서 잘린 팔 한 짝을 꺼냈다. 뭐야, 왜 저런 게 들어 있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팔 한 짝을 절단 부위에 가져다 댔다. ‘아니, 그런다고 그게…….’ “신경이 원상태로 돌아오려면 하루는 더 걸리겠군.” ‘…붙네?’ 그저 갖다대고 10초 정도 꾹 눌렀을 뿐인데,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딱 붙은 팔. 비례가 딱 맞는 걸 보니 본인 팔인 거 같긴 하다. ‘그러고 보면 포션을 못 먹는 체질이랬지.’ 나는 이전에 아멜리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넌 포션을 먹지 않은 건가?] [그런 체질이라서.] 지난날, 하수도에서 있었던 짧은 대화. ‘역시 그 정수를 먹었던 거구나.’ [불로의 근원]. 포션을 비롯해 모든 치유 효과를 받을 수 없지만, 자연 재생력이 크게 증가하는 패시브 스킬. 신체 결손급의 부상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이 되는 특성도 지닌지라 제법 가성비가 좋은 스킬—. “비, 비요른! 괜찮냥! 또 왜 이렇게 다친 건뎅……!” 아,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땅을 짚고 일어섰다. 미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미칠 것도 같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다. “괜찮, 다. 부축이나 해 줘라.” “어, 알았당. 이리 와라!” 부축을 받으며 동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미샤 씨…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얀델 씨가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아, 늦어서 미안하당. 일이 있었당. 근데 거기 가운데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 이내 미샤는 쓰러진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아브만?! 설마 주, 죽은 거냥……?” “…….” 레이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눈빛으로 땅을 바라볼 뿐. 내가 어깨에 올린 손을 떼자, 미샤는 얼른 다가가 곰아저씨의 호흡을 확인했다. “숨을… 안 쉰당…….” 미샤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날 응시하더니 얼른 곰아저씨의 심장부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맥박도… 안 느껴진당. 그, 그럼 정말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네.” 레이븐은 금방이라도 울듯한 사람처럼 입술을 짓누르며 짧게 말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네는 무슨 네야.’ 아오,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네. “왜, 잘 살아 있는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그러냐.” 이곳저곳 성한 곳 없는 몸을 이끌고 곰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도톰한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잘 보이도록 돌렸다. No. 7611 ‘시체술사의 기만’. 착용자가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을 때, 가사 상태에 빠지며 일정 시간 피해 면역 효과를 갖게 해 주는 물건. “다행히, 잘 써졌나, 보군.” 팔찌의 보석 중에 빛을 자아내는 것은 이제 하나 뿐이었다. 다만 레이븐은 이 아이템의 존재를 몰랐을까? “네? 그게 무슨 소리…….” 길게 대답할 기력도 없기에 그냥 포션 마개를 따서 곰아저씨의 몸 위에 부었다. 치이이이이익. 살짝 말라붙은 피가 부글부글 끓으며 기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곰아저씨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명이 다한 이에게 포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니. “에르시나, 뭐 하나. 어서, 치료해라.” “아, 아… 예! 그러겠습니다!” 포션에 신관의 힐까지 들어가자 곰아저씨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후, 이 정도면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정말 다행이다. 아이템 효과가 끝나기 전에 올 수 있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거 같은 걸 어떻게든 참고 깨어 있어서.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죽은 줄 알고 옆에서 울고만 있었을 거잖아? “아저씨, 아저씨도 이리 오세요. 얼른 치료를 해야…….” 이내 에르웬이 내게 다가오며 뭐라 말을 걸었다. 한데 곰아저씨의 생존이 확인되며 긴장이 확 풀려서일까? “아.” 그래, 나도 치료해야지. “어?” 몸을 움직이려는 차, 땅이 기울기 시작했다. 털썩-!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웠다. 울창한 나무, 검푸른 이파리들 사이로 드러난 자그마한 밤하늘. 타닷, 타다닷, 틱! 모닥불 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를 포근함에 조금 더 이러고 있고 싶단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일단 상황 파악부터.’ 땅을 짚고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깨부터 허리에 종아리까지,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통 내성 덕에 아픔과는 조금 다른 감각. “후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데 그 작은 소리에 깼을까? 옆에 있던 침낭에서 귀쟁이 한 명이 눈 비비며 얼굴을 쏙 내민다. “…아저씨! 일어나셨군요!” 에르웬이다. “몸은 괜찮으세요?” “…일단은.” 나는 그리 답하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주변에 침낭이 여럿인 걸 보니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인데……. ‘야영 중이었나 보네.’ 주변을 확인해 보니 반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힌 몬스터들이 보인다. [멸악선포]의 효능. 아, 물론 불침번은 있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군.”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악연인지 좋은 인연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몇 번이고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여자.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정신을 잃고 하루 정도 지났다. 그게 전부다.” 음, 내가 얼마나 지났냐고 묻진 않은 거 같은데. “네가 왜 미샤와 함께 있었고, 동료에게는 왜 배신을 당했는지, 그 외에도 내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다면 전부 알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군.” 세 살배기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풀어서 얘기하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네 동료에게 들어라.” 허, 까칠하기는. “에르웬, 말해 봐라.” 이내 나는 사정 청취의 대상을 에르웬에게로 옮겼고,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아저씨가 쓰러진 다음부터 얘기할게요.”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동료들은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야 치료가 되지 않았으니까. 곰아저씨는 드레이크의 스킬 때문에 치유 불가 상태였으나, 나는 그 검사 놈의 칼에 발린 독에 당한지라 쉽게 푸는 게 어려웠다. [이, 이대로면 틀림없이 죽어요.] [뭐? 마법을 쓰면 되지 않냥!] [해독 마법은 범용성이 높을 뿐, 전문성이 높진 않기 때문에 불가능해요.] [그, 그럼 신성력은?] [지금까지 이렇게 움직였다는 게 기적일 정도인 극독입니다. 제 상태로는 이 독을 몰아내기에 신성력이 부족합니다.] [비요른은 이런 곳에서 죽을 전사가 아니다!! 살려 내라!!] 마법을 이용한 해독은 힘든 상황. 심지어 신관은 신성력이 오링 난 상태라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때 나선 것이 아멜리아였다. [이걸 써라. 아마 해독제일 거다.] 아멜리아는 검사 놈의 가방에 있던 물품 중에 해독제를 찾아 우리에게 건넸고, 그것으로 독을 중화시켰다. “다행히 약이 잘 들었는지, 그다음에 포션을 먹이니 상처가 낫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내 건강 문제는 일단 끝. 다만 이다음이라고 혼란스럽지 않던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는 여전히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이었고, 다들 몸 컨디션은 최악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기절한 나와 곰아저씨까지 챙겨야 하니 난이도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그래도 저기 저분… 이 도와주신 덕에 어떻게든 신관 님이 [멸악선포]를 다시 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수는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이라는 거군.” “네? 아니요. 이렇게 쉬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예요.” 에르웬은 처음 결계를 펼쳤을 때는, 몬스터랑 싸울 때만큼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말했다. 다름 아닌 파츠란과 아멜리아 때문이었다. [방금은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치기는 했지만, 저 여자는 노아르크 출신의 약탈자. 믿을 수 없다. 애초에 우리를 공격했던 것도 저 여자고.] [에, 엑?! 노, 노아르크 출신이라공……?!!] [설마 그것도 모르고 함께 다니고 있었던 건가? 여러모로 운이 좋았군.] 파츠란은 아멜리아를 향해 적의를 숨기지 않았고, 이는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적의를 내비친 건 아니나……. [말이 많은 놈이군. 덤비고 싶다면 덤벼라.] 적의를 피하지 않으며 분열의 씨앗에 물을 퍼부었다. 그렇게 결계 내에 살기가 감돌던 때였다. [그, 그만들 해랑! 이 여자가 노아르크 출신인 건 몰랐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당!] 미샤가 아멜리아를 비호했다. [이 사람이 없어지면 다음에는 어쩌려고요? 파츠란 씨,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일단 이분도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했던 거잖아요? 둘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우릴 공격하거나 하진 않을 거에요. 애초에 그러려면 진작 그랬을 테고요.] 레이븐도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싸움을 중재하려 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들어 먹지도 않았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원한은 다 잊으란 거요? 저 여자는 드로우스를 해친 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추격자를 보냈소. 아마 우리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면 그때 죽었겠지.] [그거 참 유감이군. 그때 죽었다면 지금처럼 앵앵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라? 이 약탈자 년이……!] 파츠란은 예비로 들고 다니던 세컨드 검을 뽑았고, 아멜리아도 단검을 빼들며 대치했다. 하지만……. [그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파츠란 님.] 파츠란은 끝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깊이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멍청한 남자는 아니니까. [계속 지켜볼 테니 이상한 짓은 할 생각도 마라.] 이후로는 불편한 휴식이 이어졌다. 결계가 끝난 다음엔 다시금 몬스터와 싸웠고, [멸악선포]의 쿨타임이 돌면 휴식을 취했다. 곰아저씨가 깨어난 건 두 번째 휴식 타이밍 때였다. [하하… 오늘 일은 아내에게 비밀일세. 분명 탐험가 일을 그만두게 할 테니.] 깨어나자마자 뒷일부터 걱정하던 곰아저씨는 금방 기력을 되찾고 전선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나오는 몬스터가 바뀌었어요.”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 중간 보스로 나온 것은 4등급 몬스터였다. 신관이 보스에게 당해 기절하는 등, 아찔한 상황이 여럿 있었으나 아멜리아가 메인 딜러 역할을 잘 수행해 내며 이겨 냈다. “정수는?” “안 나왔어요.” 후, 그럼 그렇지. 이제 마지막 보스만 남은 건가? 걔는 꼭 정수를 떨궈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보다 잡을 수 있을지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건가?’ 돌연 생각이 많아지지만, 일단 다 제쳐 두고서 에르웬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다만 생각보다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싸우고, 휴식하고, 파츠란과 아멜리아가 신경전을 펼친 게 전부. “아무튼,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는 거군.” “네, 궁금한 건 다 풀리셨나요?” 어느 정도는. “고맙다. 피곤할 텐데 너도 어서 쉬어라.” “…아니에요. 옆에 있을게요.” 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지만……. 여기서 내가 뭐라 하는 것도 웃기겠지. “근데 아저씨, 그……. 언니는 깨우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미샤를? 됐다. 잘 살아 있고 몸도 멀쩡한 걸 아는데 뭐 하러 깨우나. 자게 둬라.” 애초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 한 명도 깨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고된 전투로 피로가 한계까지 쌓인 거겠지. 얘기는 나중에 나눠도 상관없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쪽 얘기도 들어 볼 차례. “오랜만이다, 아멜리아.” 나는 침낭에서 완전히 나와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까는……. 아니, 어제는 도와줘서 고마웠다.” “바바리안답지 않게 서두가 길군.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라.” 아니, 바바리안도 이 정도는 하는데……. 뭐, 됐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환영이니. “미샤와는 어떻게 된 거지?” “저 요정에게 듣지 못했나?” “이건 네 입으로 듣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쯧.” 아멜리아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지만, 의외로 별말 않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카르밀라와 벨버슨에게 배신을 당한 것. 그래서 도망치다가 미샤를 만나고, 도움을 받은 것. 참고로 이 부분에서 엄청 놀랐다. “뭐? [멸악선포] 스크롤? 그 귀한 걸 갖고 있었다고?” 신성 스크롤은 아주 오래전에 제작법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당연히 부르는 게 값인 보물. 얘는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 ‘…아, 약탈했겠구나.’ “크흠흠, 말을 끊어서 미안하다. 그럼 계속해 봐라.” “왠지 눈빛이 불쾌한데.” “기분 탓이다, 기분 탓.” 아무튼, [멸악선포] 스크롤을 사용한 덕분에 아멜리아와 미샤는 몬스터 웨이브에서 안전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운신이 가능해졌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둘이서 그 많은 몬스터를 뚫고 여기까지 왔지?” “…그런 정수가 있다. 몬스터에게 선공을 받지 않게 해 주는.” 아, 그 정수를 먹었구나? 근데 그걸 왜 먹지? 아무리 탐색꾼이라 해도, 신관 한 명 데리고 다니면 해결되는 문제일 텐데……. ‘아, 노아르크에는 신관이 없지.’ 게다가 생각해 보니 얘는 약탈자였다. 그 정수는 미궁에서 혼자 돌아다닐 때 엄청 유용했을 터. “그래서 궁금한 건 그게 전부인가?” “아니, 몇 가지 더.” “해 봐라.” “이 섬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원인을 알고 있나?” 이 섬의 이벤트를 활성화한 것은 누구인가. 이를 완곡히 돌려서 묻자, 아멜리아는 그 해답을 말해 주었다. “카르밀라와 벨버슨, 그 둘이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건드렸다. 내가 살아 도망치자, 어떻게든 가둬 놓고 여기서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더군.”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어쩌면 그 두 명 중에도 플레이어가 있었던 걸지 모르겠다.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는 히든 피스를 뜻한다. 근데 이 섬에 히든 피스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 같았더란 말이지. “그 소환사 여자를 심문해서 직접 들은 내용인 건가?” “그래.” “그 여자는 어떻게 했고?”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 주의라.” 죽였다는 뜻이구나. ‘아오, 기껏 생포까지 했으면서 그걸 왜 죽여?’ 나는 참지 못하고 아쉬움의 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여자는 흔치 않은 비행 소환수를 다루던 탐험가 아닌가. 걔를 이용했으면 곧바로 이 섬을 탈출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이미 지나간 걸 어쩌겠어.’ 나는 아멜리아를 탓하며 관계를 악화시키는 대신, 다른 부분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무튼, 그래서 찾던 물건은 찾았나?” “…….” 아멜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이제 와서 우리 사이에 뭘 숨기나?” “흐음, 우리 사이라니?” “이래 봬도 내가 네 생명의 은인 아니냐.”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너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미샤가 널 구해 줬을 거 같나?” “…….” 아멜리아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지 이견을 뱉지 않았다. 그저 혀를 차며 내 질문에 답해 주었을 뿐. “물건은 회수했다. 숨겨 놨다고 말하던 것과 달리 아공간 안에 떡하니 있더군.” “어쩐지, 나도 그럴 거 같았다. 그런 놈들이 보물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고 다닐 리 없으니.” “그럼 이제 질문은 끝이겠지?” 아니, 그럴 리가. “한 가지만 더.”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물건이 대체 뭐지? 대충 들어 보니 역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닌—.” “그만.” 아멜리아가 내 말을 칼같이 잘랐다. 그리고 표정을 구겼다. 쩝, 이건 좀 예민한 사안이었던 건가? “시, 싫으면 대답하지 마라. 나도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거니까!” 살벌하게 굳은 아멜리아의 입가를 보며 나는 황급히 선을 넘을 생각은 아니었다는 의미를 담아 변명했다. 한데 내가 한 가지 오해를 했던 것일까. “몬스터.” 아멜리아가 허공을 바라보며 조금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몬스터라니? 솨아아아아아-! 고개를 갸웃하기 무섭게 세찬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치며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후, 조금만 더 쉬고 싶었건만. “최소 3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이 근처에 있다. 어서 네 동료들을 깨워라.” 그래,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된 거구나. 278화 소용돌이 (4) 파루네섬의 히든 피스 ‘바다의 분노’. 섬 내에 20인 미만인 상태에서 공물 파괴 시 발생하는 이 이벤트의 난이도는 인원에 따라 결정된다. 5~9인은 일반 몬스터의 개체 수 증가. 10~14인 모드에선 네 번째 웨이브가 추가되며 최종 보스가 출현하며, 15~19인일 땐 그 최종 보스가 지니고 있던 몇몇 패널티들이 사라지는 식인데……. ‘이렇게 제대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3등급 레이드를 하게 될 줄이야.’ 생각할수록 자꾸 한숨이 나온다. 내가 노리던 건 세 번째 웨이브의 보스였다. 애초에 6인으로 이벤트를 진행하면 네 번째 웨이브는 시작되지도 않으니까. 잡몹들을 대량으로 잡아 마석 및 판매용 정수를 수급하고, 가능하면 미샤나 에르웬에게 먹일 4등급 정수까지 수급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팔자는 왜 항상 이렇지?’ 이벤트가 최고 난이도로 시작된 것도 모자라, 인원은 줄고 줄어 10인으로 마지막 웨이브를 진행하게 되었다. 심지어 목표였던 엘프로트 정수도 안 나왔다. 물론 최종 보스가 정수를 뱉는다면 그 정도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사소한 얘기지만……. ‘아마 잡기는 힘들겠지.’ 전리품보단 생존을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이 게임에서 3등급 몬스터는 그런 존재니까. 아무리 6층까지 온 탐험가라고 한들, 합도 맞춰본 적 없는 열 명으로 무사히 사냥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괴물. ‘그래도 어쩌겠어, 해봐야지.’ 몸을 일으켜 세운다. “곧 권능이 사라질 거예요.” 여신관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정확히 얼마나 남았지?” “10분이요.” 그래, 10분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주변을 훑었다. 멀리서 파츠란과 아멜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3등급 몬스터라니, 그게 확실한 건가?” “네가 믿지 않는다고 진실이 바뀌진 않는다.” “마치 두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위기감지]가 그렇게까지 정확한 이능은 아닐 텐데? 감각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기에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많다고 들었—” 의미 없는 의심이며 대화였다. 나는 둘의 대화에서 관심을 뗀 채 한 명의 인물에게로 다가갔다. “비요른…….” 미샤 칼스타인. 나와 함께 가장 오랜 시간 미궁에서 함께한 동료이자……. ‘연인이라고는 못하겠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일 거 같은데……?” “나는 괜찮다. 조금 찌뿌듯하긴 하지만, 하도 오래 자서 그런 거겠지.” 이후로 나는 잠시간 미샤와 대화를 나눴다. 남들에게 말 못 한 비밀 계획을 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야 아직 얘랑은 제대로 대화를 못 나눴거든. 재회한 다음에는 기절한 채 하루를 보냈고, 깬 다음에는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된 바람에 그럴 틈이 없었다. “많이 걱정했었다.” “그건… 미안하당. 저 여자가 너랑 아는 사이 같아서 도저히 두고 갈 수가—” “그럴 때는 그냥 다음부턴 걱정시키는 일 없게 하겠다고 말하는 거다.” “응. 안 그럴게.” 그래, 그럼 이 문제는 됐고. 이제 뭔 얘기를 하지? “아무튼, 그래도 다들 멀쩡해서 다행이당. 사실 엄청 걱정했었거든.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한 기분이라니?” “……신경 쓸 건 아니당. 지금 생각하면 그냥 너희랑 떨어져서 혼자 남으니까 괜히 불안했던 거 같당.” 하긴, 원래 사람이 그렇다. 보통은 부정적인 상상을 할 때 더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근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냥?” 안 될 건 뭐야. 저기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는 신관도 있는데. 심지어 곰아저씨는 편지를 쓰는 중이다. 한 번 죽을 뻔하고 살아나서 그런가? 3등급 몬스터가 나타났단 얘기를 듣자마자 아내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오른 모양인데……. “우락부라크! 뭔 쓸데없는 짓을 하냐! 애 이름 같은 건 나가서 직접 말해 주면 되지 않나!” “됐고, 말이나 해봐라. 여자면 어떤 이름이 좋겠는지. 일단 너도…… 크흠, 여자 아니냐.” 뭐야, 지금 설마 애 이름을 짓고 있던 거야? 거, 괜히 나까지 불안해지게. 플래그 같은 건 그만 세워줬으면 하는데……. “……이러니까 왠지 그때 같넹.” “아, 1층에 갇혔을 때 말이냐?” “응. 그때도 딱 이런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는 무슨.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다. 그 레이븐마저도 만약 도시로 못 돌아가게 되면 전해달라며 유언을 남겼을 정도. 아, 참고로 대부분 재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나저나 비요른, 너는 이번에도 똑같구낭.” “유언을 남기지 않는 것 말이냐?” “응.”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애초에 유언을 전할 만한 사람이 미궁 밖에는 있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죽더라도 내 정체 같은 건 밝히고 죽고 싶지 않다. 그게 더 훨씬 더 좋은 기억이 될 테니까. “근데 유언을 남기지 않은 건 미샤, 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이내 미샤가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내게 말을 전하고 싶은 눈치였던지라 나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어두운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애초에 그때도 결국 우리 모두 살아서 돌아왔지 않냐. 이번에도 그럴 거다.” “……응. 네 말이니까 믿는당.” 이후 우리는 현재에 벗어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바바리안.”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시간이 됐다.” 평온한 시간은 늘 금방 지나가는 법. “후후, 3등급 몬스터라니. 흥분되는군!” 아이나르는 짜투리 시간 동안 숫돌로 열심히 비벼댄 대검을 쥐고 있었고. “진짜 아이나르 씨는……. 지금 흥분할 때예요? 전부 죽을지도 모르는데?” 레이븐은 그런 아이나르를 타박했다. “자자, 그만 싸우고. 다들 이걸 받게.” 곰아저씨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뒤덮인 편지를 동료에게 나눠주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광명이 비추기를.” 여신관도 길었던 기도를 끝마치고 일어섰다. “미샤.” “응.” 나는 미샤를 자리로 돌려보낸 뒤, 메이스와 방패를 움켜쥔 채 진형의 맨 앞에 섰다. 머지않아 우리를 감싸던 결계가 바스러졌다. 「[멸악선포]가 해제됩니다.」 주사위를 던질 시간이다. *** [키예에에에엑-!] [멸악선포]가 해제된 즉시, 결계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몬스터 무리가 달려들기 시작했고, 레이븐은 미리 준비해둔 마법진의 시동어를 외웠다. “스아르툼 에베헬!” 등급 대비 살상력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일반 마법사들에게는 배움이 허락되지 않은 군용 마법.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공격 마법 [붕괴]를 시전했습니다.」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냄과 동시,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백여 마리 몬스터의 급소 부위에 붉은 표적이 생겨났다. 그리고 약 2초 뒤. 콰지지직-! 안에서부터 폭발이 일며 수많은 몬스터가 터져 나갔다. 평균 6등급의 몬스터 무리가 마법 한 방에 싹 쓸려나가 버린 셈. 물론 아무 대가 없이 얻은 결과는 아니었다. “……저는 이제 좀 쉴게요.” 이 마법 한 번에 가진 마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레이븐의 지원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얘의 역할은 최종 보스가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마력을 아끼며 MP를 보충하는 것.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고로 남은 적들은 우리의 몫이다. [키예에에에에엑-!] 밀집되어 있던 몬스터 무리가 궤멸했으나, 여전히 몬스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는 상황. 콰직, 콰직, 콰직-! 나는 [거대화] 정도만 활성화한 채, 동료들이 편히 딜을 넣기 위한 ‘장벽’ 정도의 역할에만 집중했다. 잡몹들 상대로는 지금도 충분한 화력이니까. 휘이이이잇! 푸욱-! 콰아아아아앙! 에르웬, 네바르체, 곰아저씨로 이루어진 3원딜 구도. 「아이나르 프넬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포식]이 발동되며 영혼력이 회복됩니다.」 약한 다수의 적과 상대할 때 진가를 드러내는 광전사 트리의 아이나르. 4등급 탐험가인 파츠란도 1인분은 톡톡히 해주었으며, 미샤는 특유의 빠른 운신을 활용해 나를 지나쳐 후방으로 향하는 적들을 처치하는 식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진짜 잘 싸우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아멜리아였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내가 배정해둔 포지션을 거절했는데, 과연 그럴 만한 재주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서걱-! 별동대처럼 몬스터 사이를 누비는 저 여자의 단검질에 빛이 되어 사라진 몬스터가 벌써 열을 넘어간다. [자가복제]로 소환한 분신이 해치운 숫자까지 카운트하면 거기서 1.5배는 더 늘어날 테고. 그 때문에 조금 걱정도 됐다. “조금은 힘을 아껴두는 편이 좋을 텐데?” MP도 MP지만, 제일 우려되는 부분은 마나다. 기사의 상징이기도 한 ‘오러’를 사용할 때 소모되는 또 하나의 자원. 이렇게 양껏 썼다간 나중에 보스를 잡을 때 못 쓰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아니 훈수는 그만둬라.” “……그렇다면야.” 저렇게 말하는데 뭐라 하겠어. 게다가 쟤도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조절하고 있겠지. 실전 경험이야 나보다 훨씬 많을 텐데. ‘나는 내 할 일만 잘하자.’ 방패를 들고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것에만 심혈을 기울인다. 메이스는 가끔 휘두르지만, 적을 밀쳐내는 정도에 그친다. MP는 나중을 위해 아껴둬야 한다는 판단. [휘두르기]를 쓰는 게 아니면 열 번은 더 때려야 몹들이 죽는다. “슬슬 괴물들이 줄어드는군.” 그렇게 몬스터들이 뱉어낸 마석이 주변에 쌓일수록, 몰려드는 몬스터의 숫자는 적어졌다. “이거 어쩌면 신관님 기도가 통한 걸지도!” 이 사실에 곰아저씨를 비롯해 모두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무덤덤했다. 그야 알고 있던 내용이니까. 지금까지 싸우고 있던 몬스터들은 전부 세 번째 웨이브에서 잡지 못하고 섬을 배회하던 놈들일 뿐. 네 번째 웨이브에는 일반 몹이 없다. 하긴, 양심이 있으면 이래야지. 3등급 몬스터가 보스로 나오는데 여기에 잡몹까지 바글바글하면 그걸 어떻게 잡아? “좀 더 힘을 내보죠!” 아무튼, 긍정적인 소식에 무리의 사기가 조금 더 올랐다. 그리고……. “이제 주변에는 더 없는 듯하군.” 시간은 흘러 마침내 잡몹 정리가 끝났다. 우리는 재빠르게 마석만을 줍고서 진형을 재정비했고, 짧은 휴식을 취하며 기다렸다. 그로부터 한 10분쯤 더 지났을까. “왔군.” 어느 방향이냐 묻는 이는 없었다. 아멜리아의 읊조림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한곳을 응시했다. 쿠웅. 육중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수풀 너머. 쿠웅-! 놈이 나무를 부러뜨리며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크오오오오오오—!!] 우리가 처음으로 상대하게 된 3등급 몬스터. 놈을 목도한 즉시 레이븐이 소리치며 알고 있던 정보를 공유했다. “……스, 스톰거쉬예요!” 바다의 오우거라고도 불리는 놈이었다. *** 스톰거쉬. 바다의 오우거라는 별명을 지닌 3등급 해수종 몬스터. 조금 더 상세하게 분류를 하자면, 일단 갑각류에 가깝다. 바닷가재 같은 생김새라는 뜻은 아니다. 5m에 이르는 비대한 몸뚱이가 두껍고 단단한 껍질들로 덮여 있을 뿐, 기본 형태는 리자드맨과 비슷하다. 쿠웅-! 길게 뻗어 균형추 역할을 하는 꼬리. 삐죽 튀어나온 주둥이. 이족 보행인 점이나, 저 미친 피지컬을 지닌 주제에 무기를 쓴다는 점까지. 쿠웅-! 이내 놈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3등급 몬스터…….” 7층에 진입한 클랜들이 수십 명이서 사냥해야 하는 규격 외의 괴물. 이 정도 크기의 대형 몬스터와 싸워본 적은 많지만, 놈이 내뿜는 불길한 존재감은 그런 몬스터들과 궤를 달리했다. 그래 봤자 계층군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서둘러 소리쳤다. “전투 준비!!” 다들 뭘 얼타고 있는 거야? 이미 놈의 사정거리 안이구만. [크오오—!!] 거대한 작살을 손에 든 놈은 육중한 몸집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따라서 바로 거대화(초월) 모드를 켰다. 그래, 일단 저런 놈과 싸우려면 사이즈부터 맞춰야지. 「근력에 비례해 체격이 커집니다.」 순식간에 부풀기 시작한 전사의 육신. 달려들던 놈의 눈빛이 조금 변한다. 단순히 사냥감을 보던 눈에서 적을 대하는 눈빛으로. 하긴, 저번에 이 상태로 키를 재봤을 때 5m가 조금 넘었지 아마? 자기랑 같은 눈높이를 지닌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을 거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이내 [야성분출]로 육체 수치까지 뻥튀기하며 달려나갔다. 첫 번째 수 교환에서 힘으로 밀리면 얕보일 게 분명하다는 판단. 콰아아아아앙-! 몇 발 떼기 무섭게 놈의 삼지창이 내 방패를 강타했다. 묵직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일격. ‘역시 이 상태로도 밀리는구나.’ 받아낸 것이 아니라 부딪친 것임에도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간다. 혼령각인 [합일]을 얻은 후로는 거의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다. 넉백 보정 보너스가 붙은 건 아니지만, 장비에 [거대화]가 적용되고서부터 내 중량을 말할 땐 t 단위를 쓰는 게 훨씬 편해지게 되었으니까. “다들 뭐 하나, 덤비지 않고!” 내가 뒤로 튕겨나기 무섭게 아이나르가 아다만티움 대검을 휘둘렀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야성제어]를 시전했습니다.」 「다음 공격의 조건부 발동 효과가 모두 절삭력으로 변환됩니다.」 타격 시 보너스를 가진 효능이 절삭력으로 전환되는 다양한 ‘변환계’ 스킬 중 하나. 거기에 대검의 무게와 내리찍는 힘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카칵-! 아이나르의 대검은 고작 1cm가량을 파고들며 껍질에 흠집 정도나 낼 뿐이었다. 아이나르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저놈이 무지막지한 괴물이라고 보는 게 옳다. 괜히 바다의 오우거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물리 내성이 미친 수준이다. 뭐, 메인 딜러는 따로 있으니 상관없다마는. “잠깐, 빌리지.” 이내 아멜리아가 내 어깨를 밟고 도약해 놈의 어깨 부위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단검에는 물리 내성 90% 무시의 효과를 지닌 오러가 넘실거리는 상황. 푸욱-! 아멜리아의 단검이 손잡이 부분까지 깊게 박혔다가 빠져나왔다. 피슈우우웃-! 압력 차로 인해 상처 부위에서 치솟는 진녹색 체액. 하나 유의미한 일격은 아니었다. 저 정도 상처로 행동에 지장이 생기거나 아파할 정도로 연약한 몬스터가 아닐뿐더러……. 얘, 재생력도 엄청 높거든. 후우웅-! 이내 놈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아멜리아를 할퀴었다. 내 민첩 수치에 두 배는 될 법한 빠른 움직임. 다만 진짜 민캐를 잡기에는 부족했다. 타닷. 아멜리아가 백스텝을 밟으며 놈의 반격을 회피한 즉시, 나는 더 날뛰지 못하게 다시금 거리를 좁혔다. 힘에서 부족해 일대일 마크가 아직 안 되는 것?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이이이익. 일단 내가 메인 탱커라지만, 나 혼자 놈을 막아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껍질 도마뱀! 비요른한테서 떨어져라!” 아무리 창질 한 방에 뒤로 밀려난다고 한들, 옆에서 놈의 시선을 분산시켜 줄 전사들이 여럿 있다. “미샤, 파츠란! 너희도 얼른 도와라!” 나는 신속하게 오더를 내렸다. “절대 가까이 붙지 말고 나를 공격할 때만 달라붙어라!” 레이드 도중에 근딜이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사항이기도 한 그것. 내 지시에 따라 최전선이 갖춰지자 그래도 전투가 성립했다. [쿠오오오오!!] 큰 평타는 내가 전담해서 탱킹. 내가 뒤로 밀려나면 근딜들이 접근해서 시선 분산. 그 틈에 나는 다시 달라붙어서 어그로를 끌고, 그사이에 아멜리아가 틈틈이 딜을 넣는 과정의 반복. “상처가 벌써 아물고 있다. 레이븐 너는 ‘악화’부터 걸어라! 그리고 놈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전부 말하고!”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도중에 레이븐은 지원 마법을 펼치며, 실시간으로 놈에 관한 정보를 브리핑했다. “바, 바닥! 스톰거쉬가 발로 바닥을 내리찍을 때는 멀리 벗어나야 해요! [폭풍의 눈]이라는 이능을 쓸 때의 동작인데…….” 공략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데이터. 다만 이조차 내가 동료들에게 미리 말해두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야 공략법 같은 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것도 3등급이란 것만 알지, 어떤 몬스터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래도 레이븐이 잘 알고 있으니,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 아마 레이븐이 없었다면 내가 브리핑을 해야만 했을 거다. 다 같이 맞으면서 배우는 척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니까. 이런 괴물과의 싸움에선 한 방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예를 들면……. 「스톰거쉬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그래, 방금 레이븐이 말한 바로 이것처럼. 쿠웅. 놈이 땅을 발로 내리찍은 후, 1초도 되지 않아 반경 5m에 소용돌이가 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휘이이이익! 한 걸음 뒤에서도 몸소 느껴지는 풍압. “물러나라!” 혹여나 휘말릴까 반경에서 벗어난 이들이 한 걸음 더 거리를 벌렸다. 아, 물론 나는 정반대였다. 타닷. 반경에서 물러서기는커녕 회오리 안으로 몸을 들이민다. “비, 비요른? 어딜 가는 거냥!!” [폭풍의 눈]은 오오라 형태 스킬이거든. 저 회오리는 해당 지점이 아니라 놈의 주위에 5초간 지속된다. 쉽게 말해, 놈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면 누군가는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는 뜻. 누군가는 도맡아서 홀딩을 해야 안전하다. 휘이이이이익-! 반경 내에 들어선 순간, 바람이 휘몰아치며 온몸을 감쌌으나 내가 놈에게로 자석처럼 빨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캐릭터의 총중량이 1,000kg 이상입니다.」 「특수 효과 [폭풍의 눈]을 무시합니다.」 암, 이런 몸뚱이가 고작 바람에 날아가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 휘익-! 진짜 문제는 눈 뜨기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찔러진 삼지창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콰앙-! 손이 멋대로 움직여 창을 가로막았다. 그간 몸을 이리저리 막 굴리고 다닌 덕인가? ‘와, 이걸 반응하네.’ 이제 정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구나. 콰앙! 콰앙! 콰앙-! 그렇게 직감에 의지해 세 번 정도 더 창을 막아냈더니 어느새 회오리가 잦아들었다. 오케이, 그럼 이제 거리를 벌려도 되겠고. 타닷. 뒤로 물러서자 바람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레이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얀델 씨, 방금 그게 무슨 짓이에요!! 제가 바로 전에 말했었는데……!!”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일원을 향한 다그침. 그러나 바바리안인 내가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까먹었다는 건 아무리 나라 해도 좀 그러니……. “아, 미안. 왠지 그래야 될 거 같았다.” 애초에 마법사인 네가 먼저 말해줬어야지. 무거운 사람은 저거에 안 빨려갈 수 있으니, 들어가서 붙잡고 있으라고. 쯧, 이래서 현지인 마법사들이란. ‘후, 그런 기본적인 것도 책에 안 쓰여 있나?’ 나로서는 통탄할 노릇이다. 279화 소용돌이 (5) “왠지 그래야 될 거 같았다니, 그게 말—!” 어, 이거 왠지 발작 버튼이었던 거 같은데.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말을 끊고 화제를 돌렸다. 서로를 향한 피드백이야 나중에 해도 되니까. “아, 그래서 다음은 뭐냐? 뭘 조심해야 하지?” 그리 말하며 급히 스톰거쉬에게 붙어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레이븐도 어쩔 수 없이 날 질책하는 걸 멈추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다음은 [용맥]이라는 이능이에요. 사용 시 땅바닥이 빨갛게 변하는데……. 아, 지금! 얀델 씨 피해요!!” 스톰거쉬의 두 번째 액티브 스킬 [용맥]. 쿠우우우웅-! 대상자 아래에 표식이 생기고서 잠시 뒤에 공기 기둥이 터진다. 바로 이렇게. 푸슈우우웃—! 후, 갑자기 써서 맞을 뻔했네. “다들 물러나세요! 곧 구멍에서 [소용돌이]가 발생할 거예요.” 아무튼, [용맥]은 강력한 순간 딜뿐만 아니라 이후 구멍이 난 지점에서 [소용돌이]를 뿜어낸단 특징이 있다. 참고로 중간 보스였던 세이렌 여왕이 쓰던 이름과 효과가 완벽하게 일치하는데……. 후우우우우우웅! 저거에 맞으면 동료들이 구해주기 전까지 공중에 뜬 상태가 되며 그 시간에 비례해 MP를 빼앗긴다. 뭐, 내 중량이면 에어본은 면역이지만……. ‘그래도 MP는 뺏기니까.’ 무조건 피해야 한다. 나처럼 무거운 애가 아니라면 더욱더. “다들 뭉쳐있지 말고 떨어져라!” 첫 번째 용맥이 주변에 생기며 전투 난이도가 확 증가했다. 이 와중에 소용돌이까지 피해야 하는 탓에 행동반경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패턴도 당장은 쉬운 해결법이 있다. “지금부터는 이동하면서 싸우겠다!” 그냥 자리를 옮기면 된다. 어차피 이 섬에는 이제 이 새끼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사실상 섬 전부가 보스방이 되는 셈. 넓게 주어진 필드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이 방법도 얼마 못 쓰긴 하겠지만.’ 딜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놈이 까다로운 점 중 하나다. [용맥]을 계속 쓰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맵이 좁아지게 된다. 한데 그 와중에……. “어? 바닷물이 왜 여기까지…….” 파루네섬 특성상, 네 번째 웨이브가 시작된 후로는 점점 해수면이 상승해서 결국엔 섬 중심부만 남기고 전부 잠겨 버린다. “얀델 씨! 큰일이에요! 점점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어, 어떡하죠?” 뭘 어떡하긴 어떻게 해. 일단 계속 이동하면서 싸워야지. “이대로 진형을 유지한 채 중심부로 향한다!” 다행히 내 지시에 의문을 갖는 이는 없었다. 자기들이라고 해서 딱히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스톰거쉬가 [폭군의 포효]를 시전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투와 이동을 하는 와중에도 스톰거쉬는 새로운 스킬들을 사용했다. “에르시나 님! 아까 말한 그거예요! 어서 정화를!” 항마력이나 정신 수치에 비례해 줄어들긴 하지만, 최대 2초까지 반경 10m에 무려 ‘스턴’을 먹이는 정신 나간 광역기 [폭군의 포효]. 가볍게 신관의 정화로 카운터 쳤다. 「스톰거쉬가 [폭풍의 혈족]을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재생력 및 육체 수치가 급증하는 광폭기? “다들 떨어져 있어라!” 그냥 내가 다 처맞으며 버텼다. 그 대신 방패와 갑옷, 더 나아가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났지만……. 이 정도야 신관의 힐로 버티면 그만. ‘장비는……. 나중에 수리하려면 돈 좀 깨지겠네.’ 속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3등급 몬스터 레이드 중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암, 돈보다는 목숨이 중요하지. “발 구르기다! 다들 떨어져라!” 스톰거쉬는 네 개의 스킬을 번갈아서 반복해 썼고, 그 시간이 이어지며 팀원들은 놈의 패턴에 숙련되어 갔다. 다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얘한테는 아직 쓰지 않은 스킬이 세 개나 더 있거든. ‘빌어먹을 3등급.’ 3등급과 4등급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본 스탯은 물론이고, 갖고 있는 스킬의 개수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이쯤 되는 몬스터들은 정수로 나오는 스킬만이 아니라, 고유 능력들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뱀파이어의 흑마법 같은 그런 거. ‘얘는 그게 무기술이었지.’ 게임 내에서는 크리티컬, 명중률, 회피, 방어 성공률 등등. 많은 전투 항목에서 스탯 보정이 생기던 ‘무기술’. 스톰거쉬는 그 무기술 레벨이 높았다. 그래서일까? ‘창 한번 기깔나게 쓰네.’ 몬스터 주제에 창 찌르기가 아주 매섭다. 단순히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무슨 묘리 같은 게 섞여 있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남은 패턴은 체력이 부족해지면 쓰기 시작할 테고…….’ “얀델 씨, 들었어요? 저놈이 그 능력을 쓰기 시작하면 모두 위험해요. 어떻게든 지금 방법을 생각해둬야……!” 거, 소리 지르기는. 생각은 이미 다 해놨어. 설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책을 내놓으면 수상해 보일 거 같아서 기다렸을 뿐. 플랜 A와 플랜 B. 이번에도 역시나 두 개의 계획이 있다. 최선은 A이며, 차선은 B이다. 유일한 문제는……. ‘변수.’ 이 계획은 날먹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앞으로 저등급 몬스터에게서는 겪을 수 없었던 심화된 전투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운이 없는 누군가는 다치고. 혹은 죽을 수도 있겠지. 그저 바랄 뿐이다. 이타심으로 포장된 이기심이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면. ‘파츠란, 에르시나, 네바르체, 아멜리아.’ 부디 우리가 아니기를. “이, 이제 도망갈 곳이 없소!” 내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아로새긴 때. 파츠란이 소리쳤다. 솨아아아아아-! 이동하던 방향에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배를 타고 탈출한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다. 첫 번째 웨이브가 끝난 때부터 섬 주위에는 수백 개의 토네이도가 용솟음치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절반 이상이 잠겼다고 봐도 되겠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저쪽으로 이동한다!” 나는 최대한 크게 돌아가는 경로로 섬 중심부를 향해 무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놈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 한다.” 힘들겠지만, 좀 더 빡세게 전투를 해나갈 것. “뭔가 계획이 있는 건가?” 아멜리아가 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정리해 둔 계획을 설명했다. “……마법사에게 얘기만 듣고 그런 계획을 떠올렸다고?” 내 설명에 남자 검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하지만 그게 될까요? 제가 듣기로는 너무 허황되고 위험한 계획처럼 보이는군요.” 여신관은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비요른은 위대한 전사다! 그 누구보다 싸우는 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아이나르는 나를 타인에게 자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으며. “또… 너만 그런 역할을 하려는 거냥?” 미샤는 어딘가 슬픈 듯이 읊조리며,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말해왔다.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다. 미샤를 아끼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게 가장 효율적인 인원 배치였으니까. 하면, 효율의 대명사 레이븐의 평가는 어떨까. “나쁘지 않은 계획이에요. 실패했을 때를 대비했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래, 너도 오케이구나. “허튼수작을 부리는 목소리는 아니군. 좋다, 네 말대로 하지.” 이후로는 내심 가장 걱정했던 아멜리아마저 내 계획에 동의를 해오며 짐을 덜어주었다. 조금 놀란 부분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흔쾌히 그 역할을 받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의문을 살짝 내비치자 아멜리아가 예상치 못한 말을 해왔다. “네 말에는 힘이 있다.” 응? “무슨 말인지 알겠군.” 아멜리아와 내내 티격태격하던 파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3등급 몬스터가 나왔다고 했을 때도 전혀 절망하지 않았지.” 그건, 그냥 한참 전부터 알고 있어서인데……. “아마 그날 당신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겠죠.” 여신관도 1층 노아르크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언급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누구보다 앞서서 길을 여는 거인이자, 시대의 사명을 타고난 자.” 그리 말해도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마음이 싱숭생숭할 뿐이다. 얘네 앞에서 뭔가 숭고한 모습을 보여 준 것도 아닌 거 같은……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당신이 동료들과 무사히 재회하는 걸 보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운명이 따르고 있어요.” 하, 이래서 종교쟁이들이란. “……뭐라는 거냐.” 한숨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게, 암만 영웅이니 뭐니 해봤자 난 내 본질을 알고 있다. 방금 전만 해도 얘네가 죽더라도 우리만은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전사의 심장이 무겁게 울린다. 기대를 받으면 부응하고 싶어 하는 바바리안의 본능인가? “베헬—라아아아아아!!” 됐고, 전투나 하자. 이들에게 더 큰 책임감을 느끼기 전에 전투에 몸을 맡기며 머리를 비웠다. 「스톰거쉬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또, 이거네. “다들 물러나라!” 소용돌이가 몰아친 즉시 놈에게 달라붙어 홀딩을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이익-! 한 치 앞도 분간키 어려운 세찬 폭풍.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백날 기도해 봤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는 내가 정할 수 없는 것. 콰아앙-! 마치 이 소용돌이와도 같다. 그 바람이 타고 흘러간 끝에 그 무엇이 있을진, 오직 하늘에 달렸다. “얀델 씨, 이제 물러날 곳이 없어요.” [폭풍의 눈] 패턴을 한 번 더 막아내고 좀 더 이동하자 섬 중심부가 나타났다. 수풀 속에 숨겨진 듯한 공터. 그 가운데 위치한 하얀 돌탑. 지면에 드문드문 자리한 짙은 핏자국까지. 불과 어제만 해도 모두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던 그곳. “사, 사방에서 물이 밀려들고 있다!” 이곳을 제외한 섬 전체가 가라앉으며, 이제는 어디를 가나 바다가 보였다. 「스톰거쉬가 [용맥]을 시전했습니다.」 이곳까지 오며 스톰거쉬가 바닥에 낸 구멍에선 [소용돌이]가 뿜어져 나오며 물과 섞여 우리 주변을 휘몰아쳤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아마 게임이었으면 흡족해했을 것이다. 보스전에 걸맞은 장엄한 분위기라고. 쿠웅-! 이내 우리 앞에 당도한 스톰거쉬가 삼지창의 봉 부분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스톰거쉬가 [기우제]를 시전했습니다.」 HP가 70% 이하로 내려가면 쓰기 시작하는 남은 세 개의 스킬 중 하나. ‘오케이, 피 관리는 잘 된 거 같고.’ 슬슬 승부를 볼 시간이다. *** [기우제]. 스톰거쉬가 지닌 세 개의 코어 스킬 중 하나. 효과는 간단하다. 투둑, 투둑. 비가 내린다. 참고로 그 비를 본인이 맞으면 재생력과 종합 육체 수치가 크게 증가하는 반면, 캐릭터들은 각종 디버프에 걸린다. 물론 여기까지는 사소한 문제다. 진짜는 다음 패턴에 있으니까. “다들 뭐 하나! 계획대로 해라!” 내 외침을 기점으로 후방을 제한 모두가 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 [크오오오오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정말이지 몸을 아끼지 않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야 우리 계획이 이거였거든 이판사판. [기우제]를 쓰는 즉시, 모든 딜을 때려 박아 단숨에 놈을 해치우는 것. 따라서 몸을 사릴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쌓이는 부상이 늘어날수록, 동료들이 딜을 넣기 쉬워진다는 뜻이니. 푸욱-! 이내 곰아저씨의 화살이 놈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 봤자 속살은 그리 안 다쳤겠지만…….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굶주린 발톱]을 시전했습니다.」 저 화살은 지속 딜이 들어가는 화살. 박힌 화살 개수가 늘어날수록 놈의 부담도 커지리라. 그다음은 미샤 차례였다. 「미샤 칼스타인이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냉기응축]을 시전했습니다.」 미샤는 늘 그랬듯 [냉기응축]을 [강화]하며 냉기 피해의 계수인 냉기 감응도 수치를 증가시켰다. 그리고 서리혼령 가락지로 계약한 영혼수, 빙하마수 스카디아의 액티브 권능까지 개방했다 「미샤 칼스타인이 [절대영도]를 시전했습니다.」 [절대영도]. 왕가의 보상을 얻은 뒤 ‘야수의 피’를 수십 병 먹고서 새로이 얻은 두 번째 권능. 「캐릭터의 첫 번째 타격이 무조건적으로 상태 이상 ‘빙결’을 유발합니다.」 이내 검에 하얀 서리가 낀 동시에 미샤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타격 부위는 삼지창을 들고 있던 놈의 오른팔. 지지지직. 놈의 팔뚝이 꽝꽝 얼어붙었다. 물론 항마력이 높고, 몸체가 워낙 큰 터라 ‘빙결’이 된 것은 팔 정도가 전부였으나……. 애초에 이건 전부 다 빌드업이라서 말이지. 「미샤 칼스타인이 [얼음분쇄]를 시전했습니다.」 ‘빙결’ 상태의 적에게 데미지가 증가하는 액티브 스킬. 거기에 왕가 보상으로 얻은 5등급 스킬도 더해졌다. 「미샤 칼스타인이 [돌연변이]를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민첩 수치가 근력 수치로 전환됩니다.」 근력이 부족한 미샤가 후반부까지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그 스킬. 콰앙-! 쌍수 검사인 미샤의 두 번째 칼날이 얼어붙은 놈의 팔을 강타했다. 다만, 얼어붙었던 건 껍질 정도였을까? 지지지직. 얼음이 깨지듯 파편이 튀었으나, 놈의 두터운 팔은 멀쩡했다. 하긴, 다 쏟아부었다고 3등급 몬스터의 팔을 단칼에 베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 “다음은 나다!” 놈이 발광하며 미샤를 노리기 무섭게, 아이나르가 달려들며 껍질이 부서진 팔목에 검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카칵-! [야성제어]로 절삭력이 급증한 상태에서도 부족했다. 속살을 깊이 파고들기는 했으나, 머지않아 단단한 뼈에 걸렸다. [크오오오-!!] “아, 아이나르!!” 놈이 팔을 보호하듯 몸을 회전하며, 꼬리로 아이나르를 쳐냈다. ‘제기랄.’ 저건 아무리 아이나르여도 맞고 일어나기는 어려울 거 같은데……. 3등급 몬스터의 무서운 점이다. 스킬이 아니더라도 평타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으로 작용……. 「스톰거쉬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니미럴, 이걸 지금 또 쓴다고? 타닷. 내가 앞으로 대시함과 동시에 동료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곧 죽어도 홀딩.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5초가 끝나고, 회오리가 걷혔다. “아저씨, 물러나세요!” 아, 이제 너도 준비가 됐구나. 나는 에르웬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얼른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 순간이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왕가의 보상으로 획득한 4등급 정수. 캐스팅 시간에 비례해 MP가 기하급수적으로 소모되며, 그만큼 데미지가 상승하는 그 스킬이 완성됐다. 근데 MP를 다 때려 박은 건가? 화살촉 위에 맺힌 빛무리의 기세가 심상치— 휘잇-! 그때 에르웬이 시위를 놓으며 화살이 섬광처럼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앙-! 타격 지점은 놈의 상복부. 아무래도 심장이 있을 법한 곳을 노린 듯하다. 머리도 급소기는 하지만, 맞히기가 어려우니. [크오오오오오—!!] 스톰거쉬가 괴롭다는 듯 포효를 토해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멀쩡했다. 애석하게도 화살이 심장을 꿰뚫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맞혔어도 그거로 한 방에 죽이긴 어려웠을 테니까. 3등급 몬스터는 심장이 꿰뚫린 정도로는 즉사하지 않는……. “어?” 그때 처음으로 스톰거쉬가 처음 보이는 모션을 취했다. 「스톰거쉬가 [폭풍부름]을 시전했습니다.」 HP가 40%일 때 쓰는 스킬이었다. 280화 소용돌이 (6) 놈이 창을 하늘 높이 들었다. 보자마자 이 생각이 먼저 피어났다. ‘아니, 벌써?’ 아무리 여기까지 오면서 여기저기 구멍을 냈고, 3초도 안 되는 시간에 팔을 반쯤 베어내고 화살로 배때기에 구멍을 냈다고 한들. 벌써 피가 40%라고? ‘아…….’ 이내 고개를 들어 놈을 확인한 나는 납득했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진 모르겠으나, 아멜리아가 놈의 등 뒤에 매달린 채 단검을 목에 쑤셔 박은 상태였다. ‘할 거면 목이 아니라 뒤통수에 때려박지.’ 일순간 그런 아쉬움도 생겼으나, 아멜리아나 되는 여자가 일부러 목을 노렸을 거 같진 않다. 아마 놈이 피하는 탓에 저기에 꽂혔겠지. 나는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처음 보는 스킬이네.’ 목에 난 구멍에는 검은 오러가 삐죽 솟아나 있다. 어, 설마 그거인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심연의 힘]을 시전했습니다.」 도플갱어 정수에 오러도 모자라 저런 거까지 갖고 있다니. 지금까지 쟤한테 깝치다가 안 뒈진 게 기적일 정도. 아무튼,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멈추지 마라!” 나는 지시를 내리며 다시금 놈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을 모르는 동료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요구였을까. 다들 전투에 집중 못하고 몸이 굳었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스톰거쉬가 [폭풍부름]을 시전했습니다.」 [폭풍부름]. 주변의 바람을 빨아들이며 MP를 회복하는 것이 전부지만, [기우제]로 주변에 빗물이 가득한 상황이라면 연계로 HP까지 대량으로 회복시키는 게 가능한 그 스킬. 그래, 원래라면 그게 끝일 터이나……. 이 지랄 맞은 섬에서 레이드를 할 땐 추가 효과가 있다. “무, 물이 벽처럼 커졌다!!” “해일이에요……!!!” 잡아당기는 바람에 이끌려, 차오른 물이 해일처럼 밀려든다는 것. 솨아아아아아아아-!! 굴러가는 눈덩이가 그 크기를 점차 키우듯, 저 멀리서부터 파도가 몰아치며 벽을 이루었다. “아, 안 돼!” 누군가는 저도 몰래 눈을 감았을 정도로 위압적인 자연의 폭력. 후, 저거에 쫄 필요 하나도 없건만. 솨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사방에서 몰아치는 난폭한 물결이 우리 위를 뒤삼켰다. 하지만……. 「섬 어딘가에 성역이 생성되었습니다.」 피해는 전무했다. “어, 어?”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나도 자세한 원리는 모른다. 게임을 할 땐 그냥 연출에 신경을 썼구나 했었던 부분이었거든. “레이븐, 주변을 밝혀라!” 이내 바닷물이 위를 뒤덮으며 어두워졌기에 광원부터 확보했다. 그러자 더욱 우리가 처한 환경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항 속에 갇히기라도 한 듯한 느낌. 다만, 상황이 급하니 구경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들 움직여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다시 오더를 내리자, 얼 타고 있던 동료들도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새로운 국면에 치달은 전투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흘러갔다. 「스톰거쉬가 [용맥]을 시전했습니다.」 일단 곰아저씨가 땅에서 솟아난 공기층을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반응을 하긴 했는지, 다행히 비켜 맞아 성역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는 일은 면했지만……. “우리크프리트 님……!” “시, 신관. 나, 난 버틸 만하니… 얀델이나 계속 도와, 주시오…….” 곰아저씨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굶주린 발톱]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상처야 아물겠으나, 몇 분은 훨씬 더 걸릴 터. [우웅-?!] 곰아저씨가 부상을 입자 재생력을 바탕으로 어찌어찌 최전선에서 버티던 철웅 이라둔도 얼마 못 가 소환해제 됐다. 한데 악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용맥]이 시전된 구멍에서 샘솟은 [소용돌이]가 한정된 공간을 활개치며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 “절대 맞으면 안 된다!!” 지금부턴 [소용돌이]를 즉사기라 보는 게 옳다. 이 상황에서 저거에 휘말린 순간 저기 바다로 던져지게 될 테니까. 서걱-! 이내 아멜리아가 오러를 가득 담은 단검으로 덜렁거리던 놈의 팔을 베어냈다. 쿠웅. 뼈로 만들어진 삼지창을 쥔 채로 바닥에 떨어진 육중한 팔. 하나 무기가 없어도 놈은 위협적이었다. [크오오오오오오!!] 놈이 반격하듯 휘두른 왼팔에 파츠란이 뱃가죽이 헤집어지며 나가떨어졌다. 움직임을 제한하는 [소용돌이] 때문에 평소처럼 기민하게 피해내지 못한 것. ‘죽을 만한 상처는 아니야.’ 전력 하나가 날아갔으나, 나는 냉정하게 한 번 흘깃한 뒤 시선을 옮겼다. 살아만 있다면 힐이나 포션으로 부활이 가능한 게 이 세상의 몇 없는 장점 아니겠는……. 타닷. [소용돌이]가 진형을 가로지르며 내게 날아든 탓에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벌렸다. 그때, 아멜리아 팀의 궁수 네바르체가 당했다. 후방에 날아든 [소용돌이]를 피하려고 스킬을 썼다가 괴물의 아가리 앞에 떨어지고 만 것. ‘아, 저거 랜덤 블링크였지…….’ 결국 네바르체는 단말마조차 뱉지 못하고 놈에게 씹어 먹혔다. 우직, 우지직. 전투 중 발생한 첫 번째 희생. 애도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죄책감은 없었다. 그러게 누가 [비상탈출] 같은 똥스킬을 여기서 쓰래? 아무튼, 우리 쪽만 멀쩡하면 됐— “…윽!” 그때 미샤가 당했다. 서걱-! 내려찍기 공격을 옆으로 피했으나, 그 대가로 팔을 잃었다. “미샤!” “거, 걱정 마라! 한쪽 팔로도 싸울 수 있으니!” 한쪽 팔로도 싸울 수 있다니. 얘도 날 따라다니더니 엄청 터프해졌구나. 뒤로 물러나 있으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으니까. 그저 조금 더 감정을 실어 되갚아 줄 뿐.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아껴두었던 MP를 양껏 쓰며 메이스를 휘두른다. 타격지는 저 삐죽 튀어나온 주둥이. 퍼억-! 놈도 은원에는 확실한지, 허리를 비틀며 내게 꼬리쳤다. 콰앙-! 방패로 막았음에도 충격이 뼈를 관통한다. [기우제]로 육체 수치가 급증해서 그런가? 아까 막았을 때는 그냥 막을 만했는데……. ‘니미럴.’ 탈구를 넘어 방패를 든 채로 팔이 꺾였다. 체중을 싣는다고 팔을 딱 붙였더니, 갈비뼈도 얼얼할 지경. 하나 금방 힐이 들어왔다. 「라이린 에르시나가 [치유]를 시전했습니다.」 끊어진 힘줄을 이어내고, 조각 난 뼈를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포근하면서도 신비한 힘. 이 신비한 힘은 내게 말하는 듯했다. 다 나았으면 쉬지 말고 싸워서 동료를 지켜내라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고된 전투, 그런 짧은 말로는 설명 못 할 싸움이 이어진다. 놈은 3등급 몬스터답게 강했고, 질겼다. 푸욱. 오러에 속살이 난자되고. 껍질에는 수십 발의 화살이 박혀 생명력을 앗아가고. 저주 마법이 수도 없이 중첩되어 재생이 되기는커녕 진녹색 체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눈알에 미샤가 박아넣은 검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 놈은 계속해서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치 우리가 악의 화신이며 자기가 정의라도 되는 양. 지치지도 않고 몸을 움직였고, 놈이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가 다쳤다. 대부분은 나였다. 카카칵. 날카로운 발톱이 방패와 갑옷을 찢어발기며. 푸욱! 때로는 살을 파고든다. 이제는 신성력도 떨어졌는지, 힐도 제때제때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내가 너보다 먼저 쓰러질 줄 알고? 버틴다. 쉬지 않고 메이스를 휘두르고, 때론 동료를 구해내기 위해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버티고 또 버틴다. 그렇게 1분쯤 흘렀을까. [크오오오오오!!] 이내 놈이 괴성을 터트리며 나를 바라본다. 왜 쓰러지지 않냐고 묻는 듯하다. 그래, 너도 나랑 심정인 거였구나. 몬스터 주제에 극찬은. ‘제발 이제 다음 패턴 좀 가자, 새끼야!’ 나는 그러한 심정을 가득 담아 메이스로 놈의 모가지를 후려쳤다. 퍼억! 놈은 잠시 움찔할 뿐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푸욱. 그 틈에 아멜리아가 단검을 놈의 관자놀이에 쑤셔 박았다. [키아아아아아악!!!] 놈이 고통스럽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우우우우우웅……! 두꺼운 바람 장막이 놈의 몸을 보호하듯 뒤덮었다. 「스톰거쉬가 [폭풍의 제사장]을 시전했습니다.」 HP가 10% 남았을 때 사용하는 최후의 생존기. 너무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레이븐!!!” 여태껏 저주 마법 정도만 쓰며 대기 중이던 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다만, 이미 마법은 사용되고 있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빛을 흩뿌리며 지면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선명한 마법진. 타닷. 옆으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 멀리 거리를 벌렸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남아 있던 전위인 미샤와 아멜리아 모두가 그러했다. 그야 이제 뭐가 날아올지를 알고 있으니까. “펠즈 아스카르 비에르.” 레이븐이 열심히 배운 군용 마법 중, 유일하게 다량의 적이 아니라 강대한 개인을 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 ‘……이라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단 말이지 저거.’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공격 마법 [천벌]을 시전했습니다.」 바닷물이 뒤덮인 천장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1초 후. 번뜩-! 온 주변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렇게까지 눈부신 느낌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닿기까지 몇 번이고 굴절이 되었을 새하얀 빛은, 어스름하게 빛나며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콰쾅-! 기다렸던 ‘천벌’이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 높은 물리 내성 및 항마력. 오우거의 필적하는 근력과 민첩한 몸놀림. 그러한 점들 때문에 ‘바다의 오우거’라는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 스톰거쉬의 생명력 자체는 오우거에 비해 굉장히 낮다. 또한, 쓰는 스킬들부터가 단기전을 노리는 게 합리적이다. 스킬 구조상 이놈과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공략하는 쪽이 점점 불리해지게 되니까. 그래서 나도 단기전을 노렸다. HP 70%까지는 자원을 아끼며 평타로만 딜. [기우제]부터는 빠르게 템포를 올려가며 딜을 욱여넣고, [폭풍부름]을 쓰는 40%부터는 극딜. 10%에는 일점사로 페이즈 스킵까지. 나름 정석적인 공략법이었다. 몇 가지 패턴을 무력화시킬 카운터 스킬이 없어서 전투 리스크가 훨씬 커진 점. 그리고 HP 10%까지 가는 데 대부분의 자원을 소모한 탓에 마무리 일격을 마법사 혼자 감당해야 했다는 점만 뺀다면. 그래, 충분히 해볼 만한 계획이었다. 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 콰쾅-! 이내 벼락의 모습을 한 ‘천벌’이 바닷물을 뚫고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히며, 나는 그 결과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실패했네.’ 정신 승리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실패였다. 치이이이익. 놈은 잘 익은 랍스터처럼 김이 피어나는 껍질을 갖게 되었으나, 여전히 살아 움직였다. 놈을 보호하듯 자리한 회오리도 그대로였다. 원인은 명확했다. 타이밍이 늦어 무적 상태에 마법을 꼬라박은 게 아니다. ‘딜이 부족했어.’ 단지 레이븐의 마무리 딜이 부족했다. 그것도 한참이나. ‘저 마법이면 간당간당하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내 잘못일지 몰랐다. 일반적인 환경이었다면 모를까. 저 벼락도 바닷물을 통과하며 그 힘이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되었을 터. “사, 살아 있어요! 어떡하죠?” 뭘 어떡하긴 어떡해. 이제 플랜 B로 가야지. “파츠란! 배 꺼내라!” 내 외침에 파츠란이 뱃가죽이 찢어진 채로 되물었다. “……배라니?” 음, 내가 플랜 B는 안 말해줬었나? 아니, 분명히 말해줬었는데? 설마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 까먹은 건가? 했던 말을 반복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아까 말했던 플랜 B의 핵심을 다시 한번 얘기했다. “튀자!” 여기 남아 있다간 다 죽는다. *** 「스톰거쉬의 육신에 폭풍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스톰거쉬가 일시적으로 모든 피해에 면역 상태가 됩니다.」 「10%.」 「20%.」 「3…….」 「…….」 *** 결국 플랜 B를 꺼내게 됐지만, 긍정적인 부분은 여럿 있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 비록 노아르크 출신의 궁수 한 명이 오늘 명운을 다하기는 했지만. 또 미샤의 팔이 절단되고, 아이나르는 기절, 곰아저씨도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모두 살아남았다. 그래, 이거면 된 거지. “아, 배……!” 이내 파츠란도 플랜 B가 떠올랐는지, 서둘러 선박보관용 아공간 반지를 매만졌다. 한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을까? “하, 하지만 이 상황에 배를 꺼내 봤자… 커헉!” 녀석이 의문을 뱉던 중에 각혈했다. 다만 녀석의 의문은 레이븐의 입을 타고 이어졌다. “파츠란 씨 말이 맞아요. 사방이 물로 뒤덮였는데 대체 배를 어떻게 띄우겠어요?” 어떻게 띄우기는. “기억 안 나나? 저 녀석 배는 ‘아르테네목’으로 제작됐다.” 아르테네목은 최상급 선박 재료다. 단단하기도 더럽게 단단한데, 구명조끼도 울고 갈 정도로 엄청난 부력을 가졌다. 그냥 배째로 물 안에 집어넣어도 알아서 맨 위로 떠오를 터. “뭐 해요, 파츠란 씨! 얼른 배 꺼내지 않고!” 이내 레이븐이 다그치자, 파츠란이 찢어진 뱃가죽을 어루만지며 배를 소환했다. 열 명이 타도 자리가 넉넉히 남을 사이즈의 배. 나는 기절한 아이나르와 부상 입은 곰아저씨를 배 위에 태우고서 밧줄로 기둥에 묶었다. “뭐 하냐, 너희도 어서 묶어라. 그냥 갔다가는 떨어질 수도 있으니.” “아, 네!” 스스로를 챙길 여유가 있는 자들은 직접 자기 몸을 밧줄로 묶어서 고정했다. 그때 미샤가 잘린 팔을 한 손으로 꼬옥 쥔 채 내게 물었다. 음, 그것도 내가 밧줄로 잘 묶어놔서 그렇게 꼬옥 쥐고 있을 필요는 없는데……. “비요른, 너한테 할 말이 있당.” 응? 얘기? “그건 나중에 하자.” “하지만…….” “왜? 나를 못 믿나?” 내 말에 미샤는 멈칫하더니 작게 도리질했다. “믿는당.” 오케이, 그럼 출항 준비는 끝. “……근데 저기까지는 어떻게 가죠?” 탑승 인원이 전부 배에 타자, 레이븐이 크게 당황하며 나를 응시했다. ‘어, 그것도 그러네.’ 땅에 소환된 배가 어떻게 출항을 하는가. 계획을 세울 때 생각하지 못한 난점이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면,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음, 역시 그런 거 같다. 저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설마 이 배를 통째로 들려고……?” 거, 알면 가만히 좀 있지. 사람 힘 빠지게. “으아아아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양팔로 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물가로 향한 뒤. 나라도 오래는 들고 있기 어려울 듯하기에. “다들 숨 참고.” 마지막 조언을 뱉으며 바다 안쪽으로 배를 집어넣었다. “가라.” 강한 부력을 지닌 목재로 제작된 선박답게 물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치솟기 시작한 배. [폭풍의 제사장] 모드를 켰으니 위로 올라간 다음에는 그리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까처럼 소용돌이가 치고 있진 않을 테니까. 실제로 게임에서도 이 단계에서는 배를 이용한 탈출이 막혀 있지 않았다. ‘……갔네.’ 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등을 돌렸다. 그곳엔 오늘 이 자리에 남기로 한 단 한 명의 동료…… 아니, 전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아멜리아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동료 하나는 끔찍이 아끼는군.” “작고 소중한 녀석들이라서 말이지.” “……그렇군.” 그러고 보면 얘는 거의 대부분의 대답을 ‘그렇군’으로 때우는 버릇이 있다. 짜증 나는 건 몇 번을 들어도 어떤 의미의 ‘그렇군’인지는 도무지 분간이 어렵다는 것. 그냥 나도 내 할 말이나 하기로 했다. “너야말로 의외였다. 그렇게 선뜻 이런 역할을 함께해 주겠다고 하다니.” 지금 우리가 할 임무는 미끼다. 이놈이 차징을 끝마치면 무차별 광역기를 쓰기 시작하며, 이는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연약한 마법쟁이나 신관, 그리고 부상당한 전사들은 몇 초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면 플랜 B로 넘어가 후퇴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전부 다 갈 수 없었다. 누군가 시간을 끌지 않으면 이놈도 저 꼬리로 물장구치며 우리를 추격해 올 테니까. 바다에서 배를 탄 채로 이놈은 죽어도 못 이긴다. “이런 역할이라…….”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내가 할 법한 일은 아니긴 하군.” 본인도 본인이 이상해 보인다는 걸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얘는 왜 남으려 한 걸까? “하지만 빚은 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와, 진짜 이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죽을 뻔한 걸 한 번 구해줬다고, 이렇게 의리를 발휘하다니? 딱 이용해 먹기 좋은 성격 아닌가.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마다 빚을 달아둬야지.’ “뭐지? 방금 그 눈빛은?” “아, 들켰나? 약속을 중요시 여긴다는 점에서 너를 높게 평가하는 중이었다.” “……빈말은.” 아멜리아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됐으니까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라. 네가 말한 탈출 방법도 확실해 보였고, 해볼 만하다는 계산이 서지 않았다면 절대 남지 않았을 거다.” “음, 그렇군.” “바바리안, 그건 무슨 의미의 ‘그렇군’이지?” “그건……. 아, 슬슬 끝나가는 거 같다.” 이내 내가 시선을 옮기자, 아멜리아도 잡담을 멈추고 정면부를 응시했다. 「90%.」 놈 주위를 감싼 회오리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제 곧 마지막 페이즈가 시작된다는 뜻. 꽈악. 나는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이에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을까? “잠깐만, 버티기만 하다가 탈출하는 게 원래 계획이었을 텐데?” 아멜리아가 호전적인 내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따라서 나도 고개를 갸웃해 버렸다. “……버티려고 하는 거다마는?” “……그럼 차라리 메이스는 집어넣고 방패만 드는 게 효율적일 텐데?” 응? 얘가 자꾸 뭐라고 하는 거야?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메이스는 훌륭한 방어수단이다!” 늘 말하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법이다. 거의 다 뒈져가는 놈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너도 무기를 들어라! 치사하게 대충 피하면서 시간만 때울 생각 말고!” “…….” “어차피 미샤가 살려준 목숨이지 않냐!” “…………그렇군.” 태업은 용납지 않는다. 281화 표류 (1) [폭풍의 제사장]. 이 스킬의 효능은 크게 셋이라 볼 수 있다. 1. 일시 무적. 스킬의 게이지가 풀차징 될 때까지, 시전자는 피해 면역 상태가 된다. 어떤 면에선 밸류가 높은 스킬이다. 그 상태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고는 해도, 무적기는 무적기니까. 게임에서도 잘만 활용하면 슈퍼 플레이가 가능했다. 2. 방어 수치 증가. 캐스팅이 끝나면 시전자는 막대한 양의 방어 스탯을 골고루 획득한다. 일시 무적에 이 효과까지 합쳐지면 최상급 생존기로 봐도 무리가 없는 셈. 하지만, 그게 끝이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3. 광역기. [폭풍의 제사장] 모드가 끝날 때까지 시전자 주변에 퍼부어지는 광역기다. 단순 생존기라 여기기엔 딜량이 굉장히 높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것처럼. “곧 온다.” 방패를 눈 아래까지 올리며 몸을 웅크린 순간, 놈의 주위에 세워진 폭풍의 장벽이 서서히 그 반경을 넓히며 성역 전체를 휘감았다. 「100%.」 스킬 차징이 전부 끝났음을 의미하는 이펙트 변화. 솨아아아아아아-! 세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폭풍의 눈]에 들어갔을 때처럼 한 치 앞도 분간키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피해를 입고 있습…….」 「…….」 몰아치는 바람 속에 칼날이 숨겨진 듯, 하얗게 빛나는 비수 형태의 무언가가 방어구와 내 몸을 강타한다. 동료들을 먼저 내보낸 이유다. 이런 종류의 광역기는 방패로 대신 맞아주는 게 불가능하니까. 카칵, 카칵, 칵! 콰앙! 팔, 등, 어깨, 허리, 허벅지, 종아리. 딱히 어느 부위라 지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지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마치 사방에서 수십 명이 돌을 담은 눈덩이를 쉬지 않고 던져대는 기분. ‘음, 그래 딱 그 정도네.’ 하긴 내 물리 내성이랑 항마력이 몇인데. 한 방 딜도 아니고, 이런 중첩형 틱딜에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면, 아멜리아 쪽은 어떨까. 얘는 나처럼 물리 내성이 높진 않을 텐……. ‘뭐야, 얘는.’ 놀랍게도 얘는 하나하나 피하고 있었다. 와, 민첩 수치 몇이 되면 저런 동체시력이랑 반사신경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지? ‘할 수 있대서 오라고 하기는 했는데, 저게 진짜 되는 거구나.’ 아, 물론 부럽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왜? “바빠 보이는군.” 내 말에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잡담할 시간에 집중이나 하라는 건가? [크오오오오오오-!!] 이내 팔 잘린 껍질 괴물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으로 포효하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협 수치’의 효능이다. 만약 저 스킬을 쓴 게 사람이었으면, 저기 저 아멜리아부터 해치우려고 했을 텐데. 콰아아아아앙-! 놈의 무지막지한 몸체를 방패로 받아내기 무섭게 몸이 뒤로 밀려난다. 다만 저런 큰 동작에는 틈이 생기기 마련. 푸욱-! 아멜리아가 뒤에서 단검을 쑤셔 박았다. 방어 수치가 급증한 탓에 이전처럼 깊게 박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움찔하지도 않네.’ 놈은 칼빵을 맞고서도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게 앞발을 휘둘렀다. 후웅-! [폭풍의 제사장] 모드의 까다로운 점이다. 최선의 공격은 방어라는 진리를 증명하듯. 방어 수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즉, 공격력이 증가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비에 쓸 시간을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타닷. 얼른 옆으로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좀 전이었다면 [용맥] 혹은 [폭풍의 눈]을 썼을 타이밍. 이번엔 그러한 후속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상은 무언가를 쥐기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비정한 곳이니까. [폭풍의 제사장]에도 페널티는 있다. [크오오-!] 응, 소리 질러. ‘어차피 너 지금 스킬 못 쓰잖아.’ 스킬 사용 불가. 이 페이즈에 온 스톰거쉬는 오직 육탄전과 저 광역기에 의지해서 싸워야만 한다. 게임 내 지속 시간은 약 10분. ‘그 안에 못 잡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자.’ 스킬 사용이 가능해지는 즉시, 레이드는 실패다. 놈이 각종 지랄 맞은 스킬들을 다시 쓰기 시작할뿐더러, 저 모드가 끝나면 부상도 서서히 아물게 되니까. 메인 딜러 아멜리아 한 명으로는 넣는 딜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따라서…….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남은 MP를 신경쓰지 않으며 스킬을 펑펑 사용한다. 그냥 평타로는 시선 분산조차도 안 되리라는 판단. “아멜리아!” 놈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메인 딜러가 얼마나 잘해주느냐에 달렸다. “……쯧.” 내 외침에 아멜리아가 혀를 차며 다시금 단검을 휘둘렀다. 표정에서는 대충 시간 때우고 싶다는 티가 팍팍 났다. ‘쯧, 이래서 있는 놈들이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어차피 좋으나 싫으나 10분 동안 싸워야 하는데, 왜 그냥 버티려고만 한단 말인가? 잡기만 하면 대박인……. ‘아, 얘는 정수가 나와도 얻는 게 없겠구나.’ 아멜리아가 열의 없는 모습을 내비치는 것도 납득은 됐다. 얘는 어차피 모든 자리가 정수로 찼을 테니까. 한데 마법사는 이미 빠져나갔으니 정수가 나와도 시험관에 담을 수 없고, 담을 수 있다 한들 우리가 판매해 정산을 해주는 것도 어렵다. 얘는 노아르크 출신이니까.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랄 터. “이놈을 잡는 데 성공하면 벨버슨의 장비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설마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었나?” 아멜리아가 순진한 말을 내뱉는다. 아니, 그럼 넌 그걸 혼자 먹을 생각이었니? 나중에 등장해서 막타만 친 주제에? “……카르밀라는 너희가, 그놈 것은 내가 갖기로 얘기는 이미 다 됐을 텐데?” 음, 그렇게 합의를 했었다고 듣기는 했지. 근데 나랑 했던 건 아니잖아? “나는 모르는 이야기다!” 스톰거쉬의 발톱을 피하며 외치자, 아멜리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렇군.” 왠지 이번엔 무슨 의미인지 알 거 같았다. 이후에 있을 내 바바리안 식 억지 논리가 눈에 훤했던 거겠지. 덕분에 눈빛에 조금이나마 열의가 생겼다. 고용주로서 더없이 바람직한 상황. 쿠웅-! 그렇게 좀 더 적극적인 교전이 이어졌다. 벌써 전리품 얘기를 하며 김칫국을 잔뜩 마시긴 했으나, 가능성은 엄밀히 말해 반반이었다. 시간 내에 잡든가. 아니면 잡는 데 실패해 그 많은 고생과 손실을 감수하고 달아나야만 하는가. 결과가 어떨지는 아직 재단하기 어렵다. 부디 전자이기를 바라며 열심히 몸을 움직일 뿐.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땀, 그리고 핏방울이 피부를 타고 흐른다. 그렇다고 쉴 시간은 없다. 내가 더 열심히 놈을 귀찮게 할수록, 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딜을 욱여넣는 아멜리아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푸욱-! 놈의 발톱이 어깨를 내리찍는다. 덜컥. 이음새를 잃은 흉갑이 쪼개져 바닥에 떨어졌다. ‘망할 수리비.’ 손이 벌벌 떨렸으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작살날 대로 작살난 갑옷 아니었던가. 방금 걸 피했다고 수리비가 크게 차이 나진 않았을 것……. “아멜리아!” 스톰거쉬가 나가떨어진 나를 무시하고 아멜리아에게 꼬리를 휘둘렀다. 타닷. 다행히 급히 위로 점프하며 피하긴 했으나……. 푸욱-! 폭풍 속에 감춰진 비수 하나가 아멜리아의 몸에 들이박혔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처음엔 하나하나 보고서 피했으나, 전투가 이어지며 크고 작은 부상들이 몸에 누적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큭.” 이번 거는 위치가 좋지 않다. 다른 곳도 아닌 허벅지. 혈관을 건드렸는지, 뚫린 허벅지 부위에서 피가 말도 안 될 정도로 흘러나온다. 한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타닷. 아멜리아의 기동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니미럴.’ 우려한 대로 부상을 입은 뒤부터 아멜리아는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DPS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대로면 못 잡겠는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이라도 전략을 바꿔야 하나? 그냥 존버만 하다가 튀어? 아니, 그러면 내 수리비는? 우리가 한 고생들은 누가 보상해 주는데? ‘……좀 더 해보자.’ 나는 신속하게 고민을 끝마치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 상태가 안 좋아진 것만큼이나, 놈도 코너에 몰린 건 확실하다. 생명력은 놈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을……. [인간.] 그때 놈이 처음으로 말을 했다. 어딘가 울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인가아아아아안—!!!] 그런 대사를 쳤다. 그 묘한 기백에 덜컥 몸이 굳었다. ‘이런 대사가……. 아니, 애초에 얘가 대사를 치는 몬스터였나?’ 암만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다. 그럼 현실 패치가 되며 생긴 변화인가? 아무튼, 이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캐릭터가 [거대화]를 해제했습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잽싸게 거대화(노말)로 모드를 전환했다. 거대화(초월) 중에는 [초월]을 쓸 수 없는 탓이다.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정말이지 한 끗 차이. 이 차이를 메꾸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탱이 아닌 딜이다. 「다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이 강화됩니다.」 물론 내가 가진 스킬은 많지 않다. 하면, 그중에서 무엇을 사용하느냐. ‘도약.’ 일단 이건 아니다. 종이몸이 특징인 원거리 계열을 상대하는 중이면 모를까. 빨리 움직이는 능력으로는 놈의 체력을 1%도 깔 수가 없다. ‘휘두르기.’ 이 또한 마찬가지다. [초월]을 켜도 범위가 늘어날 뿐, 대미지 자체가 증가하는 건 아니니까. 의미가 없다. 내 육성법 안에 존재했던 적도 없던 정수. 그럼에도 우연히 먹게 되며, 우습게도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무수한 도움을 주기도 한 그것. 「캐릭터가 [살점폭발]을 시전했습니다.」 그래, 이거라면 모를까.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미리 스킬을 시전한 뒤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제 이건 즉발 스킬이 아니거든. 「3초 뒤에 폭발하며…….」 3초의 딜레이. 하지만 그 대신. 「폭발 피해가 대폭 증가합니다.」 피해량이 증가한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이. ‘음, 이게 35배 정도였었지 아마?’ [초월]을 연구하며 한두 번 계산해본 게 다지만 아마 내 기억이 맞을 거다. [던전 앤 스톤]에서도 이 정도로 대미지가 증가하는 스킬은 흔치 않았으니까. 아, 물론 그래도 순수 대미지량 자체는 낮다. 애초에 [산성체액]을 뿌리는 용도일 뿐, 폭발력 자체는 낮은 스킬. 35배 정도로는 3등급 몬스터의 체력 3%도 까기 어렵다. 뭐, 지금은 그 정도면 족하겠다마는. 타닷. 한 번 더 앞으로 대시해 놈의 목을 양팔로 잡으며 달라붙었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자폭병 모드. [인가아아아아아안-!!] 놈이 날 떼어내려 발버둥 치며 포효했다. 오, 설마 알아서 입까지 벌려줄 줄이야. 쓰윽. 메이스를 버리고서 냉큼 놈의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콰직-! 이 인간이 미쳤냐는 듯 즉시 두터운 이빨로 깨물며 내 손을 짓이기는 놈. 근데 하나 틀렸다. 나는 바바리안이다. 인간이 아니라. ‘응, 아무튼 시간 다 됐어.’ 제한 시간을 속으로 다 세었을 때, 놈에게 깨물린 손에서 폭발이 일었다. 비록. 폭발이라면 응당 함께하는 불꽃은 없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래, 이게 폭발이 아니면 뭔데. *** 폭발이 피어난 순간, 몸이 허공에 떴다. 그 정도로 강한 폭발이었다. 쿠웅-! 이내 육중한 몸이 바닥에 처박혔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어 놈이 있던 곳을 응시했다. 어느새 바람이 잦아든 것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솨아아아아아. 스톰거쉬의 몸체가 빛무리로 변해 흩날리고 있었다. 「스톰거쉬를 처치했습니다 +EXP 7」 그래, 잡은 거구나. 「업적 달성」 조건: 첫 3등급 몬스터 처치.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바바리안으로 하도 오래 지내서 그런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충족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 그 충족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뒤덮은 탓이다. 원인은 명확했다. 「모든 방어 수치가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살점폭발(초월)의 부작용. 하, 고통 내성이 사라지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런, 씹…….’ 너무도 오랜만에 겪어보는 생생한 고통에 감히 비명조차 뱉지 못하며 입만 끔뻑거리던 때였다. “바바리안, 괜찮나?” 흐릿한 시야로 아멜리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운도 좋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단순히 살아남아서, 저놈을 해치우는 데 성공해서 하는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 설마……. “정, 수…… 가…….” “그래, 나왔다.” 뭐, 진짜로? 나는 좀 더 고개를 들어 위를 확인했다. 그러자 허공에 떠오른 군청색의 정수가 보였다. 아까는 눈에 초점이 안 맞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인데……. ‘……할렐루야.’ 나는 곧바로 포복해서 정수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온몸에서 밀려드는 고통?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인간이란 어느 상황에서도 탐욕에 눈이 멀 수 있는 존재. “……먼저 치료부터 하는 게 낫지 않나?” 치료는 그다음에 해도 된다. 팔 하나 작살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저엉수우우…….” “웃긴 녀석.” 나는 아멜리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며 홀린 듯이 정수를 향해 기어갔다. 「캐릭터의 영혼에 [스톰거쉬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근력이 +90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55 상승합니다.」 「물리 내성이 +75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이 +50 상승합니다.」 「폐활량이 +40 상승합니다.」 「번개 내성이 -30 하락······.」 「…….」 신체 내부에서부터 차오르는 듯한 강력한 힘. 그 기분 좋은 충만함을 만끽하던 때였다. “그럼 이제 포션부터 먹어라.” 아멜리아가 아공간 팔찌를 오픈했다. 그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찬란한 빛이 아공간 입구로부터 새어나왔다. 마법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괴상한 일이었다. 아공간 안에 빛나는 무언가를 집어넣어도 저런 일은 생기지 않으니까. 그럼… 대체 뭐지? “…….” 의문을 느낀 건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서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그리고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이게 대체 왜 지금…….”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돌이었다. *** 「비요른 얀델」 레벨: 6 육체: 939.77(New +332.15) / 정신: 503.49(New +1.3) / 이능: 2,175.55(New -39) 아이템 레벨: 4,627 종합 전투 지수: 4,775.56(New +294.45)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New) 282화 표류 (2)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멜리아가 손에 쥐고 있는 저 돌……. 저 돌이 바로 그 노아르크 성주의 ‘보물’이 아닐까? 물론 아직은 근거 없는 직감에 불과했다. “……그 돌은 뭐지?” 바바리안답게 속 시원하게 물었다. 하나 아멜리아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신경 쓰지 마라.” 거, 신경 안 쓰이게 잘 하든가 그럼. ‘일단 반응만 보면 그 ‘보물’은 맞는 거 같은데…….’ 여기서 더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거 같진 않다. 따라서 나도 저 돌에는 관심을 접고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당장은 호기심보다 먼저인 게 있었다. 피슛-! 수족관의 유리처럼 물을 막고 있던 결계에 틈이 생기더니, 이를 통해 물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곧 성역이 사라집니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 나는 우선 바닥에 떨어진 내 메이스, 그리고 박살난 흉갑의 조각들을 주워서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뭐 하나? 어서 이리 와라. 물에 휩쓸려 가고 싶지 않으면.” 추가로 밧줄을 꺼냈다.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아멜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스크롤은 쓰지 않으려는 건가?” “아, 다중 순간이동 스크롤을 말하는 거냐?” 플랜 B의 핵심이었던 다중 순간이동 스크롤.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전 때의 일이 인상 깊어 나중에 카일에게 비슷한 스크롤을 만들 수 있냐고 물어서 제작한 물품이었다. 다만 최대 인원이 2명에 불과. 좌표 지정도 불가능하며 스크롤을 제작 시 등록한 ‘좌표 전송기’가 있는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게 특징이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성능을 낮춘 게 아니면 이렇게 스크롤로 만들지도 못했겠지.’ 아, 참고로 ‘좌표 전송기’는 레이븐이 갖고 있다. 평소에는 아공간에 넣고 있지만, 이번에는 미리 말해뒀으니 밖에 꺼내둔 상태일 터. 즉, 스크롤만 찢으면 바로 동료에게 갈 수 있다. 하지만……. “놈도 잡았겠다,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뭐 하러 그 비싼 물건을 쓰나?” 이걸 조금 편하자고 쓰는 건 미친 짓이다. 카일 그 양반이야 재료만 구해오면 언제든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 재료들을 언제 다 구해? 비싼 걸 넘어 대부분이 수급 자체가 어려운 희귀 품목들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이리 와서 앉아라. 어차피 물만 다 빠지면 동료들이 와서 구해줄 거다.” “그럼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뭐,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숨 참고 버텨야지. 몇 분 안 걸릴 텐데 그것도 못 참아? “……됐다, 내가 알아서 묶지.” 이내 아멜리아가 아공간에서 대못 하나를 꺼내 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내게서 밧줄을 넘겨받더니 그것과 자신의 몸통을 이었다. “아, 다 했으면 나 좀 도와줘라. 손이 하나밖에 없어서.” “……가지가지 하는군.” 뭐래, 그래 봤자 도와줄 거면서. 내가 만세를 하듯 하나 남은 손을 위로 들자, 아멜리아가 내 몸통을 밧줄로 묶어 고정했다. 그럼 이거로 준비는 끝. 피슛-! 성역 곳곳에 생긴 구멍을 통해 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대화의 시작은 아멜리아였다. “이제 통증은 지나갔나 보군.” 아, 기껏 생각 안 하고 있던 거구만. “……윽.” 고통은 직시할수록 커지는 성질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내 얘기는 됐으니, 슬슬 말해주면 안 되나?” “……?” “그 돌 말이다.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대충 보니까 그 연놈들이 탐내던 ‘보물’은 맞는 거 같은데.” “바바리안, 내가 분명 관심 갖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멜리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건 바바리안의 특징 중 하나. “아니, 그렇게 말해도 자꾸 옆에서 빛이 나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않나! 많이는 안 바라니까 왜 빛이 나는지라도 말해봐라. 아까 너도 당황하는 거 같던데.” “그건…….” 왜 이 돌이 빛을 발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아멜리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손에 얹어진 돌을 꽉 쥐었다. “나도 모른다.” “응? 모른다고?”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응시하자, 아멜리아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당당하게 나를 꼬나봤다. “그래, 모른다. 그게 뭐 잘못됐나? 애초에 내가 이 물건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이 없다. 단지 이게 있으면…….” 응, 그래 있으면? 말을 방해하지 않으며 귀를 쫑긋 세운 때였다. 「성역이 사라집니다.」 바닷물을 막아주던 결계가 깨지며 재난 영화처럼 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쩝, 하필 이 타이밍에. ‘좀만 더하면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아쉽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물어봐야지. “숨 참아라! 밧줄 꽉 잡고!”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크게 외친 순간, 차가운 바닷물이 우리의 몸을 뒤덮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지금부터는 잠시 존버 타임이다. 가만히 숨을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물이 빠질 터. 그럼 배 타고 나간 동료들도 돌아와 우리를 발견할 것이다. 근데 스톰거쉬의 정수에 폐활량이 붙어서인가? ‘십 분은 그냥 버티겠는데?’ 숨을 참았음에도 크게 불편함이 안 느껴진다. 게임에서는 딱히 쓸 일이 없던 스탯이었는데. 그도 그럴 게, 수중전을 할 일이 생기면 미리 세팅을 다 해두기 때문에 잠수 시간 증가 같은 건 필요할 일이 없었다. ‘근데 의외로 좋을지도……?’ 게임과 달리 이곳은 진짜 몸으로 싸워야만 하는 세계. 폐활량이란 스탯은 전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키보드나 만지작거리던 이한수가 아니니까. 실제 전투에서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다. ‘슬슬 몸도 낫는 거 같고.’ 부상이 회복될 때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전신에서 피어난다. 이쪽 바다가 소금물이 아니라 포션의 성질을 지녀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단지, 새로 얻은 스킬의 효능일 뿐. 「캐릭터의 육신에 바다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패시브 스킬 [기원]으로 인해 자연 재생 수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스톰거쉬의 패시브 스킬 [기원]. 효능은 간단하다. 바닷물에 닿았을 때 자연 재생력이 증가하며,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증가폭이 복리 이자처럼 쭉쭉 상승한다. 한 10분쯤 지나면 잘린 팔도 돋아났었지 아마? ‘뭐, 이건 6층 말고는 쓸 일이 없기는 하지만.’ 예전에 바닷물을 빈 병에 담아 포션처럼 쓰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결과는 대실패. 담고서 한 시간만 지나도 스킬이 안 터졌다. 거, 대체 바다의 기운이라는 게 뭐기에. ‘아무튼, 드디어 재생력을 되찾았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뱀파이어 정수가 사라지고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해결됐다. 무려 3등급짜리이며, 단순히 재생력에 몰빵된 정수도 아니다. [기원]만 해도 다른 효과가 더 있으니까. ‘얘는 나중에 2등급 정수 파밍을 시작하면 그때 바꿔 끼면 되겠고…….’ 그렇게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며 실시간으로 회복 중인 몸을 지켜보던 때였다. ‘응?’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물이 밀려들며 스톰거쉬를 잡으며 켜뒀던 횃불도 꺼진 상황. 심지어 물에 들어온 터라 앞도 흐릿하다. 그런데 왜……. ‘왜 앞이 보이지?’ 이번에도 원인은 아멜리아가 가진 그 정체불명의 돌에 있었다. 아공간에 집어넣었음에도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며 광원 역할을 해준 것. 보자마자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공간 단절이 기본인 아공간에서 빛 같은 게 어떻게 새어 나오느냐는 둘째치고. ‘어째 빛이 더 강해진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멜리아의 아공간 팔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의미를 담은 제스처였다. ‘야, 그거 괜찮은 거야?’ 그런 물음에 아멜리아가 내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신경 끄시지.’ 대충 이런 의미인 거 같다. 한데, 점점 더 빛의 세기가 커지는 걸 보며 본인도 심상치 않았을까? “…….” 아멜리아가 팔찌를 열어 돌을 꺼냈다. 돌은 아공간에 들어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 딱 봐도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쿡쿡. 왠지 불안해진 나는 서둘러 아멜리아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아니, 이거 괜찮은 거 맞냐고.’ 내 제스처에 담긴 뜻이야 충분히 잘 전달이 됐을 터인데,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그저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돌을 바라볼 뿐. ‘씁, 이거 더 불안해지는데…….’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번뜩-! 돌이 폭발하듯 새하얀 빛을 뿜어내며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처음 끌려 온 그날처럼. ‘악, 내 눈!’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오류 발생.」 「캐릭터의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캐릭터 로그 전송이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관리자는 조속히 해당 플레이어의…….」 「…….」 *** 눈을 떴을 때, 그 너머엔 빛이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향하며 노을 진 적색 빛. “씹!” 시간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하루가 지났다고?” 스톰거쉬와 전투를 할 때만 해도 밤이었다. 그런데 석양이 지고 있다니? 최소 하루 동안 기절해 있었다는 뜻……. ‘……어, 뭐야 이건 또.’ 이내 나는 흘러간 하루 따위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와 직면했다. ‘내 장비, 씨발 다 어디 갔어.’ 뒤늦게 허전함을 느끼고 확인해 보니 장비가 없다. 아니, 장비는커녕 아무것도 없다. 아공간 반지, 귀걸이는 물론이고 ‘산성 면역’ 인챈트를 한 마법 팬티까지 싹 사라졌다. 완벽한 태초의 알몸 상태. ‘누가 기절한 걸 발견하고 싹 털어간 건가?’ 음, 근데 그럴 거면 보통 죽일 텐데? 아니, 애초에 이 섬에 우리 말고 더 없었잖아. 먼저 배 태워서 내보낸 애들은 이때까지 다들 뭘 하고 있던 거고? 하,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돌겠네.” 머리가 복잡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야.” 옆에 누워 있던 아멜리아를 흔들었다. 아, 물론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얘도 나처럼 장비가 싹 털린 상태였거든. “……아멜리아, 일어나라.” 응? 제발, 일어나 봐. 네가 그 돌 주인이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건데. “하…….” 해답을 바라는 마음을 실어 간절히 아멜리아를 깨워봤으나, 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숨은 쉬는 거로 보아 죽은 건 아닌데. ‘니미럴.’ 일단 깨우는 건 그만두기로 하고 주변을 확인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가득했던 모순이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팔.’ 그래, 일단 잘린 팔이 멀쩡히 있는 건 바닷물 덕에 재생이 됐다고 치고. ‘못이랑 밧줄.’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바닥에 고정한 못과 밧줄이 사라졌다. 다른 섬으로 이동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스톰거쉬와 싸움이 있었던 아까 그 자리다. 한데……. ‘땅은 벌써 다 말랐고.’ 섬이 완전히 바닷물에 잠겼었는데, 밟히는 모래알이 푸석푸석하다. 이게 물리적으로 하루 만에 가능한 건가?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근데 나는 젖어 있단 말이지.’ 햇볕에 자연 건조가 된 거라면 나랑 아멜리아는 왜 젖어 있는 걸……. 위이이이이잉-! 그때 멀리서 벌레 특유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얼씨구.’ 8등급 곤충형 마물 ‘크룽비’. 원래라면 이 파루네 섬에서 서식하는 메인 개체. ‘너는 또 왜 지금 나오고 지랄인 건데.’ 기가 차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벤트가 하루 전에 끝났는데 얘네가 나온다고? 원래라면 다음 미궁 회차에서나 젠이 되어야 할 놈들이? ‘아무튼, 나머지는 차차 고민해 보기로 하고.’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변에 떨어져 있던 적당한 나무를 하나 찾아 쥐었다. 그립감은 메이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일회용으로는 쓸 만하네.’ 8등급 몬스터야 이거로도 충분하리라. 타닷. 바닥을 박차며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곤충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휘두르기.’ 분노의 몽둥이질을 해주었다. 퍼억-! 시스템 메시지는 없지만, 평소처럼 착 감기는 손맛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됐다. 그래, 일단 정수는 멀쩡한 거구나. 283화 표류 (3) 투둑. 곤충형 몬스터 ‘크롱비’가 빛이 되어 사라지며 마석을 떨구었다. 굳이 줍지는 않았다. 그야 저걸 주워서 뭐 하겠는가. 수납할 주머니도 없는 상황에. ‘돌겠네.’ 어찌 보면 처음 미궁에 떨어져 세 발로 기던 시절보다 더 열악하다. 그땐 속옷이라도 있었으니까. ‘……여기가 어딘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가릴 것부터 구하자.’ 낯선 상황에 처한 것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정리하고서 하나씩 해치웠다. 우선은 의식주 중 하나인 의衣. 사방에 나무밖에 없고, 몬스터는 잡는 순간 빛이 되어 사라지는 세계지만, 의를 충족시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바바리안이잖아? ‘……진짜 여기서 별걸 다 해보는구나.’ 일단 허리에 맞는 덩굴줄기 하나를 줍는다. 그리고 호박잎 크기의 이파리들을 덩굴에 끼운 뒤 허리에 감고서 줄기를 묶으면 끝. 이로써 내 존엄성을 지켜 줄 장비, 이름하여 ‘나무 정령의 가호’가 완성됐다. ‘……생각보다 튼튼한데?’ 제작한 아이템을 입고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나는 예상보다 높은 완성도에 놀랐다. 역시 근본은 근본인 건가? 태초의 인간들이 이런 룩을 선호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쟤도 만들어 줘야겠네.’ 내친김에 아멜리아의 것도 제작했다. 하의면 충분하던 나와 달리, 아멜리아의 경우엔 파츠가 두 개나 필요했지만……. 나보다 훨씬 몸집이 작아서 작업 시간 자체는 얼마 차이나지 않았다. ‘그래도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사이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고.’ ‘나무 정령의 가호’가 가진 몇 없는 장점이다. 너무 원시적이라 사이즈가 큰 건 문제가 안 된다. 그냥 줄기를 꽉 조여서 묶으면 그만이거든. ‘얘는 대체 언제까지 자려는 거야.’ 나는 아멜리아에게 다가가 ‘나무 정령의 가호(여)’를 몸 위에 툭 던져두었다. 입혀둘까 하는 생각도 없던 건 아니지만……. ‘괜히 더 어색해질라.’ 아무리 생각해도 입히는 거는 너무 선을 넘는 거 같다. 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당장 배가 고프진 않으니 쉴 곳부터 만들자.’ 의를 충족시킨 후에는 곧장 주住를 완성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또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삽만 한 손으로 구덩이를 판 뒤, ‘나무 정령의 가호’를 만들 때 썼던 큼직한 이파리들을 안에 쑤셔 넣으면 끝. 아, 마른 나무도 주워서 중앙에 모닥불도 피웠다. 의외로 불을 지피는 일은 수월했다. ‘몸에 힘이 넘쳐서 그런가?’ 힘을 꽉 준 채 쉬지 않고 나무를 박박 비비니 금방 연기가 피어올랐다. 의외로 세상엔 힘으로 안 되는 게 없단 말이지. ‘그나저나 얘는 대체 언제 일어날 생각인 거야.’ 이내 아멜리아를 들어 이파리 침대에 눕힌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었다. 다만 불을 피워 둔 덕에 춥다는 느낌은 없었고, 시야 확보도 되었으니 몬스터가 나와도 평소처럼 싸울 수 있을 터. 이쯤 하고 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문제는 식인데…….’ 생활을 위한 세 번째 요소이자 생존만을 따지면 첫손가락에 꼽아도 모자랄 그것. “하, 진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첫 진입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 이런 걱정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꼬르르륵. ……먹을 건 어떻게 구하지? *** 파루네섬에는 산이 없다. 해안가를 제외하면 전부가 평평한 숲지이며, 덕분에 가림막이 많아 모닥불의 빛은 멀리까지 퍼져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부나방 같은 새끼들.’ 모닥불의 빛은 근처의 몬스터들을 불러 모으기엔 충분했고, 덕분에 나는 밤새 쉬지 않고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했다. 뭐, 그렇다고 모닥불을 끄진 않았다. 애초에 빛이 없어도 나타나는 게 몬스터니까. 차라리 시야라도 확보된 상태에서 싸우는 게 합리적이라는 판단. ‘……이 상황에서 내가 잘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굶주림과 싸우며 몇 시간을 더 보냈을 때, 마침내 아멜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일어났군.” “……어떻게 알았지?” “숨소리가 사라졌으니까.” 얘도 보면 참 웃기다. 정신을 차린 게 분명한데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니. 상황 파악이 먼저라는 건가? “……여긴 어디지?” “잠깐, 일어나기 전에 그것부터 입어라.” “……?” 상체를 일으킨 아멜리아가 알몸 위에 놓인 나무 쪼가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바바리안, 네가… 나를 벗긴 건가?” 아멜리아가 눈을 떴을 때 할 예상 질문 리스트 중 하나였던지라, 나는 당황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나도 옷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군.” 이내 등을 돌리자, 뒤에서 부스스 나뭇잎 소리가 났다. 다행히 어떻게 입는 건지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되는 모양. “다 됐으니, 돌아봐도 좋다.” 다시 뒤로 돌아봤을 때 아멜리아는 내가 제작한 ‘나무 정령의 가호(여)’를 모두 착용한 상태였다.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둘 다 이런 걸 걸치고 있으니 무슨 세트 아이템 같다고 해야 하나? 같이 싸우면 세트 효과 버프라도 들어올 거 같다. “그래서 여긴 어디인 거지?” 아멜리아는 입은 옷에 수치심도 없는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내게 다시금 첫 질문을 해왔다. 거, 질문은 내가 할 입장이구만. “여긴 파루네섬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겠고, 눈을 떴을 때 우리 모두 옷을 다 벗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내가 눈을 뜨자마자 느꼈던 여러 의문점들을 간략하게 브리핑하자,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 나는 1분 정도 시간을 준 뒤에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얘기해 봐라. 우리가 왜 이 상태에 놓인 건지.”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어허, 모르는 척하기는. “마지막에 네가 쥐고 있던 그 돌이 빛났지 않냐. 나는 그게 이번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중이다.” “그래, 그것 말인가…….” 아멜리아가 텅 빈 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없었던 그 물건이 갑자기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아, 맞다. 이것도 먼저 말해놔야지. “미리 말하지만, 나도 그 물건에 손 안 댔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걱정 마라. 그런 의심은 하지 않으니까.” 음, 그 정도 신용은 있다는 뜻인가? “그래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짚이는 건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말해달라고 이 여자야. 이런 상황에서조차 정보 통제를 해야겠어?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봐라. 대체 그 돌은 뭐고, 왜 우리가 이런 상태에 놓인 거냐?”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묻자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그건…….” 무언가 결심한듯 표정으로 막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탁. 수풀가에서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 둘은 자세를 낮추며 소리가 난 방향을 응시했다. 그야 이 섬에는 곤충형들뿐이거든. 즉, 저 소리를 낸 게 사람일 가능성이 높단 뜻. “…….” 모닥불 소리를 제외하면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덕분에 더 긴장이 됐다. 인기척이 들렸다면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제까지 훔쳐보고 있을 셈이지? 나와라.” 이내 아멜리아가 어두운 수풀 속을 바라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반응이 나온 것은 약 5초 정도가 지난 후였다. “하하, 그렇게 말하니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거 같구려.” 웅크렸던 몸을 펴고서 수풀을 헤집으며 나오는 다섯 명의 탐험가. 뭐야, 진짜 지켜보고 있던 거야? 대체 언제부터? ‘니미럴.’ 아찔한 기분이 들지만, 우선 상대방 무리부터 쓱 스캔했다. 전원 인간이었고, 남성이었다. 장비로 보아 수준은……. ‘5층 정도.’ 다만 가슴에 클랜 문양이 있다. 처음 보는 클랜의 문양이다. ‘클랜에 속해서 6층에 올라왔고, 이 섬에서는 팀으로 나눠 행동하는 중인 건가?’ 물론 여기에도 위화감은 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번 미궁 회차에는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진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섬에도 20인 이하의 조건이 만족됐던 거고. 근데 이제 와서 이렇게 탐험가들을 만난다? 뭔가 석연치 않다. 막연히 그런 기분을 느끼던 차였다. “왜 우리를 훔쳐보고 있던 거지?” 아멜리아가 경계심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물으며 본격적인 대화가 진행됐다. “오해 마시오. 우연히 멀리서 불빛을 보고 우리 클랜원인가 싶어 인사라도 할까 왔다가 그쪽 행색을 보고 놀라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오. 아, 그리고 애초에 발견한 것도 방금 전이라오.” 어느 정도 납득은 가는 말이었다. 나였어도 섬 중심부에 원시인처럼 나뭇잎을 걸친 남녀가 있으면 이게 대체 뭔가 싶었을 것이다. 사정이 궁금하기도 할 테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너희가 알 필요는 없다.” “허허, 너무 경계하지 마시구려. 딱 봐도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사내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한데 그런 부분도 매력적으로 느껴졌을까? “허허, 앙칼지기는.” 사내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호쾌하게 웃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미친 새끼처럼 보였다. 무슨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아멜리아.” “내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라.” 응, 그래. 상황을 너무 크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이름을 부르자, 아멜리아도 조금은 태도를 너그럽게 했다. “타고 있던 배가 좌초됐다. 동료들과는 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고. 설명이 됐나?” 딱 봐도 내 사연을 각색해 만들어낸 듯한 이야기. “흐음, 그럼 장비는 다 어디 간 것이오?” “장비는 물에 빠지기 전에 배낭에 넣었다가 잃어버렸다. 입고 있던 옷은 젖고 더러워져서 그냥 버렸고.” “그렇구려.” 이후 사내는 호기심을 내비치며 아멜리아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고, 아멜리아는 대충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깊이 파고들면 모순은 많았지만……. “오호,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꽤 난감하셨겠구려.” 그런 모순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지, 남자는 아멜리아의 헐벗은 몸을 훑으며 눈을 빛냈다. 그 순간이었다. “이거야 원, 아주 운이…….” 퍼억-! 아멜리아가 남자의 머리통에 하이킥을 꽂았다. 털썩- 하, 이 여자가 진짜. 바바리안인 나도 가만히 있었는데. ‘선빵부터 치고 보는 건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몸을 움직였다. “무슨 짓이냐!” 물은 이미 엎질러진 상황 아닌가.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당장은 합을 맞춰야지. “베헬—라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을 터트리며 [거대화]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도약]을 통해 놈들의 진형 중심에 안착. 그리고……. ‘휘두르기.’ 몽둥이를 휘둘러 마법사부터 바닥에 눕혔다. ‘오케이, 일단 법사는 조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틀며 원심력을 이용해 옆에 있던 궁수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노오옴!!!” 궁수 옆에 있던 방패수가 적절하게 막아내며 두 번째 기습은 실패. 우직. 덤으로 방패에 가로막힌 몽둥이도 박살이 났다. 쩝, 메이스였으면 방패째로 날려보냈을 텐데. 툭. 나는 부서진 몽둥이를 바닥에 버리고, 양손으로 방패를 쥐었다. 그리고……. “내놔.” 힘을 줘 잡아당겼다. 하나 단번에 빼앗는 건 어려웠다. 힘에서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해도 방패는 대부분 팔목에 띠를 감아서 쥐기 때문. 물론 사소한 문제긴 했다. 팔이 문제라면 팔을 부수면 끝나는 문제니까. 콰직-! “으아아아아악!!” 방패째로 놈을 잡아당긴 후, 팔꿈치를 내리찍어 관절을 박살냈다. 그다음, 놈을 발로 차며 방패를 빼앗은 뒤— 깡-! 즉시 방패를 옆으로 내밀어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전투의 전부였다. 푸욱-! 그 짧은 시간에 아멜리아가 대부분 정리했거든. 이내 궁수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지자, 주변에 서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전부 죽은 건 아니지만……. “오, 오러라니…….” 아멜리아가 빼앗은 칼로 오러를 뿜어내는 걸 보고서 모두 전의를 잃은 상황. “너, 희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 가장 처음에 하이킥을 맞고 쓰러진 남자가 독기 품은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봤다. 하,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조용히 해라.” 얘네가 소리라도 질러대면 귀찮아질 수 있기에 어서 바닥에 널린 나뭇잎을 모아 놈의 입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아멜리아를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이냐?” 일단 어쩔 수 없이 가담은 했지만, 방금 우리가 한 것은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 일이 도시로 퍼져나가면 분명 엄청나게 곤란한 상황에 처할 터. “말해봐라.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했는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이내 해명의 기회를 주겠다는 듯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무기가 없는 상황이기에 불리해지기 전에 선공을 했을 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통은 대화로 풀어갈 생각을 먼저 하지 않나?” “그런 게 통할 놈들이 아니라 판단했다.” 마치 벽을 보고서 말을 하는 듯한 기분. 후, 날 만났던 사람들도 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얘랑 있으면 자꾸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얘는 자기가 무슨 궁예인 줄 아나.’ 이쯤에서 대화를 중단하고 한숨을 푹 내쉬자, 아멜리아가 위로하듯 말을 툭 던졌다. “걱정 마라. 네가 생각하는 상황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무슨 뜻이지?” “배낭을 확인해 봐라.”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놈들의 확장형 배낭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간식용 육포였다. 안 그래도 배고파 죽을 거 같았는데. 그래도 식량 문제는 해결된 셈인가? 우걱, 우걱. 일단 입에 육포를 집어넣은 뒤에 가방을 마저 뒤져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상한 부분을 눈치챘다. ‘뭐야, 이 새끼들……. 클랜 소속 아니었어?’ 배낭에는 이런저런 장비들로 가득했다. 비상용 장비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종류도 다양했을뿐더러, 무기 대부분에 피가 묻어 있었거든. “이놈들…… 약탈자였군.” 그럼 클랜 마크는 위장용인 건가? 그렇다기엔 어딘가 눈에 익은데…….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기억을 되짚고 있자니 곧 떠올랐다. “……클랜 엘비스.” 예전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본 클랜이었다. 수십 명이 모여 잔혹무도한 범죄들을 일삼던 곳으로 결국 그 행각이 발각되어 전원 형장에 올라 처형당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15년 정도 전에. ‘제정신인 새끼면 위장을 해도 그런 클랜 문양을 위조해서 갖고 다니진 않을 텐데…….’ 뭔가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솨아아아아아-! 차디찬 밤바다의 바람이 불어오며 등골을 쓱 훑고 지나갔다. ‘아니, 잠깐만…….’ 다급히 배낭을 열어 아까 본 신분패들을 다시 확인한 나는 그대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이런 미친…….” 이름도 종족도 나이도 각양각색인 신분증. 그것들에는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갱신일이 개벽 134년……?” 어째선지 20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284화 표류 (4) 이거, 실화냐?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고? 얼떨떨하다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감각에 사로잡힌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다만, 그럼에도 납득은 빨랐다. ‘타임 슬립.’ 이거 하나면 내가 이 섬에서 눈을 뜬 후 생긴 모순들이 전부 다 설명이 된다. 따라서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래, 컴퓨터를 하다가 바바리안 몸에서 깨기도 하는 판에 시간 이동이 불가능하겠어?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군.” “어느 정도는.” 아멜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확신하게 된 건 이 녀석들을 만난 후라고 말했다. 나야 책에서 봤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놈들이라던가? ‘……어쩐지 이상하더라. 얘가 그렇게 다짜고짜 선빵을 때릴 애가 아닌데.’ 일종의 시간 여행자 특전이다. 속내를 숨긴 새끼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뭔가 하기도 전에 머리틍올 박살 내는 것. 당한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겠지. “유, 유명하다니, 대, 대체 무슨 소리오, 그게!” 뭐래, 설명할 시간 없어. 설명해 봤자 의미도 없고. “너희 말고 다른 클랜원들도 이 섬에 있나? 맞다면 고개만 살짝 끄덕여라.” 나는 신속하게 심문 시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몇 가지 궁금했던 점들을 해결한 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20년 전이라…….” 일단 시간대는 20년 전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뒤에 범행이 드러나고 처형당할 놈들을 만난 셈. ‘생각보다 골치 아픈 상황이네.’ 심문을 통해 알아내길, 30명도 넘는 인원이 이 섬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경고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클랜 엘비스의 단장은 굉장히 위험한 탐험가라고. “……우선 움직여야겠군.” “그래야겠지.” 나는 아멜리아와 눈짓을 몇 번 주고받는 것으로 빠르게 의사소통을 끝냈다. 의외로 얘랑은 이런 부분에서는 제법 합이 좋았다.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 없었던 덕이다. “일단 장비부터 벗기지.” “아, 여기 이놈들은 내가 하겠다.” 우리는 능숙하게 놈들의 장비를 벗기고, 배낭을 빼앗았다. 그리고……. 푸욱. 전부 죽여버렸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살려서 보내주겠는가. 돌아가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우리를 쫓기 시작할 게 분명한데. ‘애초에 죽어 마땅한 놈들이기도 하고.’ 5년 뒤 범행이 드러나는 클랜의 문양. 배낭에서 명백한 약탈의 증거까지 나온 것은 물론, 심문을 하며 여러 내용을 들은 직후였기에 죄책감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다. “시체는 어떻게 할 거지?” “묻는 게 좋을 거 같군.” “그럼 얼른 땅을 파야겠군.” 묻자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이견 없이 따랐다. 암, 이럴 땐 전문가 말을 따라야지. “그럼 나는 저쪽에서 흔적을 지우고 있겠다.” 내가 시체 묻을 땅을 파는 동안, 아멜리아는 야영지로 돌아가 내가 피워 둔 모닥불과 열심히 땅을 파서 만든 풀잎 침대를 해체했다. 짧았던 내 원시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이제 문명인으로 돌아갈 차례. “단검이군. 쓸 테냐?” 우리는 ‘나무 정령의 가호’를 벗어던지고서, 놈들을 죽이고 획득한 옷, 그리고 장비를 걸쳤다. 내가 쓰던 장비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냥저냥 쓸 만하겠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일 것이다. 이후 시체를 파묻고 흙으로 덮는 과정을 끝마친 나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수통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침반을 통해 방향을 확인했다. ‘후, 이제 좀 사람 사는 거 같네.’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봐둔 동굴이 있다. 그리로 가지.” 서서히 하늘이 퍼런빛을 내며 밝아지는 시각. 아멜리아를 따라 30분가량 이동한 나는 자그마한 동굴 하나와 마주했다. 미샤와 함께 섬 중심부로 향하던 때 발견한 곳이라던가? “생각보다 안이 넓군.” “……들어와 봤던 게 아닌가?” “지나가면서 눈여겨봤을 뿐이다.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을 거 같아서.” 아니, 근데 그걸 위치까지 기억한다고? “대단한 기억력이군.”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하자, 아멜리아는 오랜 습관일 뿐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 다 큰 어른이 칭찬 하나에 부끄러워하기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 그렇군.” “바바리안, 그건 무슨 의미의 그렇군이지?” 그렇군이 그렇군이지 뭐. 아무튼, 잡담 타임은 여기까지다. “그보다 슬슬 그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대체 그 돌은 뭐였지?” 나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금 뱉었고, 마침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기록의 파편석. 대현자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자, 오랜 시간 노아르크의 성주들이 보관해왔던 보물이다.” 그래, 그게 정식 명칭이었구나. 딱 봐도 이번 사태랑 연관이 있어 보이네. “그럼 우리가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 것도 다 그 기록의 파편석 때문이냐?” “아마 그럴 거다.” 아멜리아는 순순히 긍정하며 말을 이었다. ‘기록의 파편석’은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이 있는 물건으로, 그 때문에 한평생 이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고. “근데 그런 걸 왜 나랑 있을 때 쓴 거지?”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뭐?” “애초에 어떻게 쓰는 것인지 방법조차 몰랐다.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면 그때 제대로 연구해 볼 계획이었지.” 아멜리아의 말에 따르면, 노아르크 성주조차도 사용법을 알지 못해 보관만 했다는 듯했다. 아우릴가비스가 ‘기록의 파편석’을 건네주며 했던 말대로, ‘시대의 부름을 받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니미럴.’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지만, 자꾸 한숨이 나온다. “그럼 너도 돌아갈 방법은 모른단 건가?” “……그렇다.” 아멜리아는 면목없다는 듯 말했으나, 눈은 시종일관 반짝거렸다. 하긴,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얘 입장에서는 평생 바라왔던 소망이 이뤄진 것 아닌가. 돌아갈 방법보다는 어떻게 해서 과거를 바꿀지가 주된 관심사일 터. ‘내가 이리로 왔으면 저쪽은 어떻게 된 거지? 그냥 멈춰 있는 상태인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다만 내가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무. 일단은 호기심이나 채우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어떤 의미지?” “그렇게까지 해서 과거로 오려고 했던 사연이 뭔지가 궁금해서.” “…….”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던가. “…….” “…….” 이후로는 어색한 정적이 한참 동안 흘렀다. 뜬금없이 시간 이동을 하게 된 나는 나대로, 얘는 얘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해가 뜨는군.”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날이 밝았고, 우리는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괜히 나가서 움직였다가 놈들과 마주쳐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판단. 후, 아까 죽인 애들이 배라도 갖고 있었으면 그걸 타고 섬을 탈출했을 텐데. ‘설마 섬 자체를 통제 중일 줄이야.’ 심문 과정 중 알아낸 것인데, 파루네섬은 놈들 클랜의 영역이었다. 이곳을 베이스 삼아 근처 섬들을 돌아다니며 클랜이 없는 탐험가들만 골라 약탈한다던가? 애초에 다섯 명이서 섬을 돌아다니던 것도 클랜이 섬을 비운 사이에 들어온 탐험가가 있는지 수색하는 과정이었다고 하던데…….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거겠지.’ 6층은 60일 차에 미궁이 폐쇄된다. 놀랍게도 오늘이 그날이다. 타임슬립까지 한 판에 새삼 놀랄 게 뭐 있는가도 싶긴 하지만. ‘애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거기는 미궁이 닫힐 때까지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텐데. 나 없이 잘 버티다가 나가겠지?’ 문득 그곳에 두고 온 동료들이 걱정됐으나, 너무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걔들보다는 일단 내 걱정부터 해야지.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미궁이 폐쇄됐을 때 다 원래대로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때,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바바리안.”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인간.” “…….” “그래서 하려던 말은?” “배낭에 있는 신분증 중 하나를 미리 골라두라고 말하려 했다.” 응? ‘아…….’ 처음엔 뭔 소린가 싶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지금 이대로 과거의 도시로 돌아가면 검문소도 제대로 넘지 못할 테니까. 이내 나는 배낭을 싹 뒤져 있는 신분증을 전부 한데 모았다. 마흔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근데 이놈들은 왜 신분증을 이렇게 모아둔 거지? 자칫하면 약탈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흔한 일이다. 신분증도 나름 돈이 되는 편이니.” 도시에서 신분이 없는 노아르크 출신들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신분을 원하는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던가? ‘하긴 어차피 배낭을 수색하면 약탈한 게 걸리는 건 매한가지니까. 신분증도 챙겨다가 파는 게 이득이긴 하겠네.’ 이내 우리는 신분증들을 하나씩 살피며 쓸 수 있을 만한 걸 골랐다. 인간인 아멜리아와 달리 난 선택지가 없었다. 그 많은 신분증 중에 바바리안 신분증은 딱 하나였거든. “아멜리아 베리웰즈라니, 좋은 걸 구했군?” 아멜리아는 동명의 신분증을 골랐다. 종족은 인간에 성별은 여성. “나이는 스물하나군. 양심이 있는 건가?” “……나, 나라고 좋아서 고른 게 아니다.” 어? 뭐야, 이 반응은. “잠깐만, 아멜리아. 너는 대체 몇 살인 거냐?” “……나한테 관심 갖지 마라. 비요른 얀델.” 아멜리아는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차갑게 말을 잘랐다. 말 더듬는 모습은 처음이라 좀 놀려볼까 했건만. “단지 이곳 생활이 길어지면 세금도 내야 하니까 최대한 적게 낼 수 있을 만한 걸 골랐을 뿐이다. 이름도 같으니 편할 테고.” 그래, 너는 이미 1년 넘게 이 시간대에 갇혀 있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거구나. ‘쩝.’ 나는 입맛을 다시며 손에 쥔 신분증을 다시금 살펴보며 외워야 할 내용들을 재차 점검했다. ‘이름 니벨즈 엔체, 나이 스물하나. 탐험가 등급은 6.’ 필수 정보는 이 정도였다. 다만 6등급이면 소유 정수도 몇 개 정도 길드에 등록되어 있을 테니, [거대화] 같은 건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는 게 현명할 듯하다. “다 확인했으면 줘봐라.” “응?” “바바리안이라고 부르지 말라면서? 남들 앞에서 얀델이라 부를 순 없지 않나.” 아, 그것도 그렇네. 나는 앞으로 내가 한동안 쓰게 될 신분증을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니벨즈 엔체……?” 아멜리아가 신분증을 쥔 채로 굳어버렸다. 마치 알고 있던 누군가의 이름이라도 되듯이. *** “설마 아는 사람인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냥 우연일 것이라며 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참, 얘도 진짜 복장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럴 거면 아예 내색을 하지 말든가.’ 아무튼, 이후로도 미궁이 폐쇄될 때까지 동굴에서 버티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면서 간간이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돌아가는 방법은 내가 책임지고 찾아볼 테니, 되도록이면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마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니?” “예전에 우연히 한 마법사에게 들은 말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아주 사소한 변화 하나로 나라가 멸망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을 거라더군.” 아무래도 나비 효과를 말하는 거 같았다. 그 있지 않은가.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바다 건너 대륙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그거. ‘……잠깐만, 이 시대의 비요른이 죽으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20년 전이니 지금 이 시간대에도 비요른은 존재할 것이다. 이제 막 젖병을 우물우물거릴 나이겠지. 한데 만약 그 아이가 죽으면 내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걸지도.’ 일단 도시로 돌아가게 되면 당분간은 아멜리아의 조언대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알겠다, 사고 같은 건 안 칠 테니 걱정 마라.” “……믿지.” 전혀 신용하지 않는 눈빛으로 그리 말한 아멜리아는 이내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다. 섬 안에서 동료들이 실종되자 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클랜원들 몇몇이 근처를 지나쳤지만, 아멜리아가 앞에 위장을 잘 해둔 덕분에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00 : 00] 시계의 시침이 딸깍이며 움직였다. 미궁 폐쇄 시간이 되었다는 뜻. 솨아아아아아-! 이내 새하얀 빛이 내 몸을 보듬어 안았다. 즉시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고, 서서히 시간이 흐르며 색채가 돌아왔다. 멍하니 하늘부터 올려다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는 20년 전에도 우중충했구나.’ 평소와 같은 라프도니아의 잿빛 하늘. “이봐, 바로 숙소로 가진 않을 거지?” “그럴 리가. 일단 가서 술부터 마시지.” 바글바글한 탐험가들로 시끌벅적한 차원 광장. 그래, 여기 원래 이런 느낌이었지. 최근에는 하도 일이 많아서 이렇게 평화로운 쪽이 더 어색하네.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20년 전 세상인 거구나.’ 한동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85화 인과 (1) 세찬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 “비요른은! 비요른은 아직이냥?” “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루아 레이븐은 ‘좌표 전송기’를 손에 꼭 쥔 채 한곳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배 위에 탄 모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고 있었다. 비요른 얀델. 그들의 리더이자,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3등급 몬스터 앞에 홀로 남은 바바리안.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당. 구하러 가야 한당!” “안 돼요! 얀델 씨 말 못 들으셨어요? 절대 근처에도 오지 말랬잖아요.” “그놈은 항상 그렇게 말하고 지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단 말이야! 됐당. 나도 이제는 그냥 마음대로 할 거당!” “하지만 어떻게 갈 건데요? 얀델 씨는 저기 저 바다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건…….” 미샤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에 감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레이븐도 입술을 씹으며 조금은 너그럽게 입을 열었다. “지켜봐요. 얀델 씨라면 분명 멀쩡히 돌아올 테니까.” “소리쳐서 미안하당.” “아니에요. 저도 비슷한 심정인걸요.” “비슷한 심정이라니?” 미샤의 물음에 레이븐은 잠시간의 공백을 두고서 답했다. “……동료잖아요.” “아, 응… 그렇지.” 이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에도 배에 탄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들이 지나쳐 온 길 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5분가량이 더 지났을 때였다. 닻을 내리고 바다 위에 정박해 있던 배가 크게 휘청거렸다. “무, 물이 빠지고 있습니다!” 홍수라도 난 것처럼 높아진 해수면이 실시간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뭐, 뭐냥? 비요른은 아직인데? 설마… 실패한 거냥?” “그건 아닌 듯해요! 스톰거쉬가 살아 있었다면 다시 폭풍우가 몰아쳤을 테니까!” “어, 그럼…….” “네! 얀델 씨가 스톰거쉬를 처치한 거예요!” 레이븐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고, 이는 미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 이 미친 바바리안 놈!! 버티기만 한다더니 아래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냥!” 말의 내용과 달리 미샤의 얼굴에는 환한 안도감만이 가득했다. “파츠란 씨, 얼른 배 돌려요!” “그, 그러리다!” 레이븐은 서둘러 배를 돌려 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던 때였다. 번뜩-! 바다 아래에서 천둥이라도 치듯, 수면 위로 하얀 빛이 일렁이고 사라졌다. “바, 방금은 뭐였습니까?” “호,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징……?” 여신관을 포함해 모든 일행의 시선이 레이븐에게 모였다. ……마법사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닌데. “저, 저도 몰라요…….” 어디 미궁이 그런 곳이던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애초에 스톰거쉬를 직접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 이내 시간이 지나자 수위가 내려가며 가장 고지대였던 섬 중심부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찾던 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냥! 여기 이 장비들은 뭐고?” 섬 중심부에 남아 있던 것은 아멜리아라는 그 여자와 비요른의 장비들뿐. “여기 못이 있어요. 밧줄도 엉켜 있는 걸 보니, 방금 전까지 아저씨가 여기 있던 게 분명한데…….” “아무래도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 했던 거 같네요. 근데 대체 어디로…….” “그럼 잠깐만, 장비는……? 장비는 뭐지? 굳이 장비를 벗을 이유가 없을 텐데…….” 온갖 모순만이 가득한 현장. “……일단 주변을 수색해 봐요. 혹시 물에 휩쓸려 간 거라면 멀리 못 갔을 테니.” 머릿속이 복잡한 건 레이븐도 마찬가지였으나, 최대한 냉정히 할 수 있는 지시를 내렸다. 예전에 비요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없을 때는 네가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기! 장비가 더 있다! 비요른이 차고 다니던 목걸이다!” “여, 여기에는 아저씨 속옷이 있어요!” 이후 일행들은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수위는 계속 내려가 섬은 어느덧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왜…… 왜 어디에도 없는 거냥.” 섬 전역을 뒤졌음에도 비요른은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일이 이곳에서 있었던 걸까. 당장은 무엇도 알 수 없으나 레이븐은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얀델은…….” “우리크프리트 씨, 이상한 소리 마세요. 분명 그 사람이라면 살아 있을 테니까.” 근거가 없을지라도 긍정적인 말을 뱉는 것. 그래, 그 바바리안은 그게 리더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정황상 둘이서 스톰거쉬를 처치한 건 분명해요. 물에 안 떠밀려 가려고 못을 박을 정신도 있었고요. 왜 장비를 다 벗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근처 다른 섬으로 떠밀려 내려갔을 수도 있어요. 한 번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죠.” 이후 레이븐은 파츠란의 배를 타고 근처에 있는 모든 섬들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추측이 있었고, 때론 다툼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도시에서 만날 거예요.” 결국 비요른을 찾지 못한 채 미궁 폐쇄일이 되었다. 솨아아아아-! 귀환을 알리는 미궁의 빛. 이내 도시로 돌아온 레이븐은 한적한 차원광장을 보며 한 명의 바바리안을 찾았다. 당장 보이는 이는 없었다. 혹여나 찾기 전에 움직였을까 싶어 검문소도 가 보았지만 이곳도 똑같았다. “비요른은? 광장에는 있었나? 직원이 말하길 먼저 지나간 탐험가 중에는 없었다는데.” “……광장에서는 못 찾았어요.” 레이븐은 먼저 검문소에 와 있던 동료들과 함께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탐험가들이 모두 검문소를 지나쳐 광장이 텅텅 비게 되었을 때에도. “…….” 비요른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궁 그 어디에 있건 살아만 있다면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기… 이제 슬슬 검문 마감 시간입니다마는.” 직원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다만 누구도 쉽사리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 그렇게 무거운 정적이 내리앉던 때였다. 그의 유일한 동족이자 전사인 아이나르가 짧게 읊조렸다. “그래, 비요른은 죽은 거군.”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은 아니었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시간이건만, 이 도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검문소 앞 거리처럼. “아빠! 여기예요! 여기!” “라미리온,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어서 집으로 가요. 당신이 좋아하는 거로 차려 놨어요.” 검문소 앞을 가득 메운 탐험가들의 지인 혹은 가족들. 주변의 건물조차 크게 변한 게 없다. 단지 건물 1층에 걸린 현판들에서 조금 차이가 날 뿐. ‘원래 저기엔 잡화점이 아니라 술집이 있었구나.’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조금 신기해, 다른 것은 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때였다. 한 여자가 옆으로 쓰윽 붙었다. 아멜리아였다. “아, 왔나.” “기다리게 했군. 검문 중에 문제는 없었나?” “네가 말한 대로 신분증을 건네고 마석을 환전한 게 끝이었다.” “그래? 다행이군. 그럼 어서 이동하도록 하지.” “어디부터 갈 거지?” “일단은 옷가게부터.” 아멜리아와 만난 후로는 근처에 있는 옷가게에 들러 옷을 구매했다. 그리고 내 평소 생활권이던 7구역에 숙소를 잡았다. “씻은 다음에 내 방으로 와라. 잠시 얘기 좀 하지.” 우선 욕실에 들어가 몸을 박박 닦은 뒤 새로 산 옷을 입고 아멜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다 씻었는지 금방 문이 열렸다. “할 얘기가 뭐지?” 이내 침대에 앉으며 묻자, 아멜리아가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맞은편 탁상 의자에 앉았다. “일단 네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해 봐라.” “너는… 돌아갈 생각인가?” 과연, 뭘 물으려는가 싶었는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물론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거다.” “흐음, 그렇군?” “설마 내가 남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너도 이제 슬슬 과거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을 테니까.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 “……이곳은 20년 전이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간 차이를 이용하면 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살 수도 있다.” “그렇군.” “……그렇군으로 끝날 게 아니다. 바바리안, 넌 아직 감이 안 오나 본데 지금 네가 가진 기회는—.” 더 길어지기 전에 아멜리아의 말을 잘랐다. “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진 알겠는데, 역시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그래봤자 비트 코인도 없지 않은가. 이곳에 남으면 내 장비와 겨우 얻은 귀족 신분은 물론, 열심히 키운 소중한 동료들까지 전부 무로 돌아간단 페널티뿐이다. 나로서는 남을 이유가 전혀 없는 셈. “돌아갈 방법만 있다면, 나는 바로 돌아갈 거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애초에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일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거, 사과 한번 늦기는. “됐고, 그래서 그걸 물어보려고 부른 거냐?” “아니, 본론은 따로 있다. 만약 네가 여기에 남을 생각이었다면, 말하지 않으려 했지.” 어쩐지 떠보는 느낌이 가득하더라니. “간보는 짓은 그만하고 속 시원하게 말해 봐라.” “과거에 머무는 동안에 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한다.” 허, 섬에서는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는 적이 없더니, 이제는 도와 달라라……. 이건 좀 나를 너무 호구로 보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나도 돕겠다.”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한 가지 해 볼 만한 방법이 있다.” “말해 봐라.” 만약 내가 결정을 해야지만 말해 줄 수 있다든가 그런 대답이 돌아오면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으나……. “한 번 더 기록의 파편석을 사용하는 것.” 아멜리아는 순순히 그 방법이 뭔지 말해 주었다. 다만,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기록의 파편석? 그건 이곳에 오면서 없어졌을 텐…….” 의문을 뱉던 나는 중간에 멈칫했다. “아…….” 아예 없어진 건 아니겠구나. 여기는 20년 전 세상이니까. “그래, 내가 쓴 건 없어졌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다. 지금 시기면 노아르크의 성주가 보관 중이겠지.” 불현듯 창세보구가 떠올랐다. 이 이론대로라면 현 시간대에서는 도둑맞은 마지막 층의 키 아이템 ‘창세보구’도 실존한다는 뜻 아닌가. ‘만약 그걸 내가 갖고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클리어 할 방법이 생기는 건가?’ 그런 호기심이 감돌았으나, 빠르게 접었다. 일단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만 신경 써도 모자란 상황일뿐더러……. ‘애초에 갖고 돌아가는 것 자체가 안 되겠구나.’ 나와 아멜리아가 시간 이동을 거치며 맨몸뚱이로 파루네 섬에 떨궈진 걸 보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템을 갖고 돌아가는 건 불가능. “…….” 아, 갑자기 생각이 딴 곳으로 샜네. 정신을 차려 보니 아멜리아가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쩝, 바바리안이 집중 못 할 수도 있지. “크흠, 듣고 있으니 마저 말해 봐라.” “……나머지는 네 대답을 들은 다음에 하지.” 하,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치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기록의 파편석’을 다시 써서 돌아간다는 계획이 그나마 가장 그럴듯하게 들렸을뿐더러……. ‘얘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나 혼자서는 힘들겠지.’ 그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노아르크 출신인 아멜리아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나야 성주가 그걸 어디 보관 중인지도 모르니까. “좋다, 그러니 말해 봐라. 내가 어떻게 너를 도우면 될지.” 내 승낙이 떨어지자, 아멜리아는 조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언짢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다. 그놈 말이 사실일 리 없으니까.” “그놈이라니?” 그리 되물었으나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간 감정을 추스른 뒤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꽤 긴 이야기였고, 얘기가 끝났을 때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라는 여자가. 그토록 바꾸고 싶어 했던 과거가 무엇인지를. *** 길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그다음 날. “당분간은 바빠서 오지 못할 수도 있다. 뭘 하든 내가 막을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 조용히 지내라.” 아멜리아는 아예 방도 빼 버리고서 떠났다. 범죄자가 되면 은근슬쩍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노아르크로 영입을 시도하는 음지의 스카우터가 있다던가? 그들과 접선을 해 볼 계획이라고 했다. 그야 나든 얘든 목적을 이루려면 노아르크로 들어가는 게 급선무니까. ‘후, 하다 하다 내가 노아르크까지 가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아멜리아가 말한 기간은 3주 정도. 중간중간에 들러 경과를 말해 준다 하니, 뭔가 계획 변경이 생기면 그때 들으면 되겠고. ‘이제는 뭐 하지?’ 혼자 방 안에 남아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어쩌면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무려 20년 전의 세상 아닌가. ‘조금 구경해 볼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섰다. 비록 아멜리아는 사고 치지 말고 숨만 쉬고 있으라 거듭 말했지만……. ‘솔직히 이걸 어떻게 참아.’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286화 인과 (2) 이번 외출에 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이 향하는 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오, 저기 꼬치 집은 20년 전에도 있었네.’ 산책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제법 즐거웠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20년 후에도 영업을 이어가는 가게들을 볼 때면 몇 번 가본 곳도 아닌데 괜히 반갑고 그랬다. 그렇게 마냥 돌아다니던 때였다. “……응?”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대? 정말 버릇이라는 게 무섭구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외관의 건축물을 바라보았다. [라비기온 남부 중앙 기록물 보관소.] 그냥 편하게 다들 ‘도서관’이라 부르는 곳이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이기도 한 장소. ‘여긴 20년 후랑 달라진 게 없네.’ 당장 할 일들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입장하자마자 직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솔직히 아주 당황스러웠다. ‘뭐야, 이거. 여기 원래 이런 곳 아니잖아.’ 라그나가 있을 땐 텅텅 비어 있던 카운터들이 전부 직원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처음 왔을 땐 졸고 있던 사서 한 명뿐이었건만. 많은 사서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첫 방문이십니까?” 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사서. 나이가 되게 어린 거 같은데, 정규직은 아니겠네. 알바 같은 건가? 근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첫 방문이십니까?” “아, 어…… 그렇다.” “그럼 간단하게 열람 수칙 및 방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후 직원의 안내를 들어 보니, 변한 점은 사서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행정 마법사는 이 많은 인원 중에서도 단 한 명. 그조차도 이용자가 키워드를 말해주면 마법을 사용해 보관된 서적들의 기록을 뽑아주고, 다른 일반 사서들이 위치까지 안내를 해주는 식이었다.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 “예……?” “이용자들한테 마법을 걸어주고 알아서 찾는 식으로 하는 게 편하지 않나?” 내 물음에 사서는 ‘이 바바리안 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란 눈빛으로 환히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으시겠네요. 다만, 타인에게 행해지는 마법들은 마력 소모가 몇 배는 더 늘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아, 마법사가 적은 게 문제라는 거군.” “예. 애초에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도 전혀 듣지 못했고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마법이 없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던 차, 사서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상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저희 같은 사서를 위한 마법을 만들어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 그렇군? 미안하다. 이따 다시 오지.” “아닙니다. 그럼 둘러보시다 읽기를 희망하는 서적, 혹은 분야가 있다면 언제든 문의해 주십시오.” 이내 대화가 끝나자 사서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근데 그 덕분인지, 서서 대화를 나눌 때는 각도상 보이지 않았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견습 사서 - 샤빈 에무어] 하, 어쩐지 어딘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얘였구나. 성인이 되어 행정청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근무를 했던 모양인데……. ‘되게 신기하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유년 시절의 미샤가 내는 혀 짧은 소리를 들을 수……. ‘아, 어차피 지금도 혀는 짧구나.’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맘만 먹으면 내 지인들의 파릇파릇한 응애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 흥미롭긴 하겠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드왈키도…… 여기에선 살아 있겠구나.’ 리올 워브 드왈키. 아마도 평생 내 아픈 손가락 중 하나일 마법사. ‘미래를 바꾸는 게 가능하다면…….’ 내가 여기서 하기에 따라 드왈키가 죽는 걸 막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몸에 전류가 통했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지지지직. 뭐야, 이거. 누가 전기를 지진 거야. 발치에서 따가운 감각이 피어나 쓰윽 내려다보니 웬 꼬마 한 명이 불손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성인 바바리안답게 너그럽게 말했다. “뭔 개같은 짓이지?” 내 물음에 꼬마는 대답했다. “나는 마법사야.” 어이가 없었다. 응, 마법사인데 그래서 뭐. 그럼 내가 쫄아서 굽신거릴 줄 알았나? “인간 꼬마, 네가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마법사도 목이 꺾이면 죽는다.” 예닐곱 살 정도의 꼬마 마법사와 진심으로 다투는 것도 우습기에 그냥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다만 그게 마음에 안 들었을까? “됐고, 얼른 비켜. 너 때문에 못 지나가잖아.” 꼬마 마법사가 싹수없는 눈망울로 나를 째려봤다. 덕분에 전기를 지진 이유는 알 수 있었다. ‘허, 길 좀 막았다고 전기로 지진 거야?’ 참으로 되바라진 꼬맹이가 아닐 수 없다마는, 사고 치지 말라는 아멜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겨우 참았다. “그래, 지나가라. 꼬맹이.” “크면 뭐 해, 마법도 못 쓰면서.” “뭐? 목이 꺾이는 마법이 보고 싶다고?” 이내 옆으로 길을 터주자 꼬마는 다 들리도록 콧방귀를 뀌며 사라졌다. “……야만적이긴.” 응, 야만인한텐 타격 없어. ‘쯧쯧, 20년 전 꼬맹이들은 다 저러나? 후, 우리 때는 안 이랬는데……. 세상이 어찌 되려는 건지.’ 이후로는 도서관을 쓱 둘러보며 구경했다. 그리고 책은 꺼내지 않고 빈자리 아무 곳에나 앉았다. 생각 정리를 할 게 하나 있었거든. ‘역시 이 기회를 그냥 버리기는 아깝긴 해.’ 20년의 시간 차. 아멜리아가 ‘기회’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냥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 머무를 시간이 3주밖에 안 되니 많이 투자할 순 없겠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우선 창세보구.’ 창세보구는 20년 뒤에 도둑맞는다. 그걸 내가 막을 수는 없으며, 미리 훔쳐서 땅에 파묻어 둔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성지 내에 어디에 숨겨 뒀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경고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렇게 첫 번째 할 일이 정해졌다. 1. 개벽 153년 3월 1일에 창세보구를 털어가는 놈이 온다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 쓰기. 물론, 이거로 미래가 바뀔지는 미지수다. 다만 큰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해서 손해 볼 건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서 쓰는 김에 성물 전쟁에 대해서도 적어 보내기로 했다. 사실 그게 바바리안족 쇠락의 1차 원인이니까. ‘……딱 이쪽 세상만큼만 세력이 커도 좋을 텐데.’ 20년 전의 도시를 오랫동안 둘러본 건 아니지만, 가장 체감되던 변화는 바바리안족의 비율이었다. 바바리안족은 어디를 가든 제법 많이 보였다. 아마 예전에는 이게 정상이었던 거겠지. 성물 전쟁이 터지며 인구가 감소하고, 마탑에서 우리의 심장이 마법 재료로 가치가 있다는 발표를 하며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마탑은…… 내가 어떻게 못 막으려나?’ 음, 이건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딱히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이쯤에서 다음. 2. 드왈키가 죽지 않을 상황 만들기. 이 항목의 경우, 떠오르는 방법은 총 두 가지다. 아예 과거에 개입해 녀석이 탐험가가 되지 않도록 유도를 하든가……. ‘용살자, 그 씹새끼를 죽여놓든가.’ 전자는 변수가 많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 어떤 수단보다 확실하다. 세상에 좀 더 이로울 행동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장점만이 가득하다. 다만, 문제는……. ‘그 새끼가 노아르크에 있을지도 확실하지가 않단 말이지.’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놈이 용살검을 훔쳐 달아난 이후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후. 성물 전쟁으로 박살난 요정족의 성지에 단신으로 테러를 감행하며 오르큘리스 데뷔를 했었더랬지. 애석하게도 이전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 일단 드왈키를 만나 보는 게 좋겠네.’ 따라서 이 사안은 ‘드왈키가 탐험가가 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변수는 많지만, 나름 해볼 만한 시도였다. 심지어 나는 이 시기에 드왈키가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찾아가서 탐험가가 얼마나 힘들고 더러운 일인지 나쁜 말만 해주면 인식이 안 좋아지겠지.’ 오케이, 그럼 이건 이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차였다. 지지지직-! 어디선가 전기 지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도 이번엔 내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아악!” 이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기 테러를 당해 비명을 지르는 남성이 보였다. “비켜, 길 막지 말고.” 꼬맹이는 그런 남성에게 아까 내게 뱉은 대사를 똑같이 읊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결과는 이전과 달랐다. 그야 나처럼 인자하고 너그러운 어른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짜악-! 사내가 인정사정없이 꼬맹이의 뺨을 후려쳤다. 멸치 특유의 비실비실한 체격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어엿한 성인 남성의 힘을 예닐곱 살 꼬마가 버티기는 어려웠다. “비르헤 테…….” 처맞고 날아간 꼬맹이가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마법을 영창했으나, 테러를 당한 사내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퍼억-! 작은 몸뚱이를 향해 가해지는 무자비한 발길질.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서! 사서를 부릅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으나, 먼저 나서는 자는 없었다. 하, 이래서 공부만 하는 녀석들이란. 집중 안 되게시리.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소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이 가시질 않는지 연신 발을 내리찍는 사내놈에게 다가가……. “도서관에선 조용히 해라.” 발을 걸어 휙 넘어뜨렸다. 쿠웅-! “아씨, 넌 또 뭐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가 씨익씨익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보며 짜증스레 언성을 높이더니. “다치기 싫으면…….”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꼬리를 흐렸다. “다치기 싫으면?” “…….” “왜 말을 하다 마나.” “…….” 사내는 내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마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첫 번째 방법을 쓰려는 건가도 싶었으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냥 갈 길 가쇼.” 슬그머니 눈을 아래로 깔며 센 척을 하는 비실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애 뺨을 가차 없이 후려치기에, 바바리안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평등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약한 놈한테 강할 뿐이었구나.’ 뭐, 그래도 이번 건 얘가 100% 잘못한 게 맞으니까. “이쯤 하고 가지? 사람들 책 읽는 거 안 보이나?” “……쳇.” 대충 명분을 깔아주자 비실이 놈이 혀를 차며 뒤돌아 사라졌다. 분노가 가시고 나니 창피한 건 알았던 모양. “일어날 수 있겠냐?” “……신경 쓰지 마.” 그런 말 할 거면 몇 살 더 먹고 젖살이라도 빠진 다음에 하든가. “에휴.” 나는 한숨을 쉬며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꼬마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엄마가 없나?” “있어.” 엥? 있다고? “없는데?” “……집에 있어.” 아, 그렇구나.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엄마도 없이 혼자 나오고 그러냐. 이런 데 올 거면 같이 다녀라.” “……나 혼자도 할 수 있어.” “그래서 그렇게 처맞은 거냐?”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아픈 곳을 찌르자 꼬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길 수 있었어.” “그렇군.” 이래서 나는 어린애들이 싫다. 합리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주제에 고집은 또 어찌나 센지. “됐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 또 시비 털고 다닐 거면 저쪽에 나 없는 데 가서 하고.” “……시비 건 거 아니야. 애초에 길을 막고 있는 쪽이 잘못한 거잖아.” 얘는 또 뭐래. “길을 막았다고 마법을 쓰는 쪽도 잘못한 거다. 비켜달라고 먼저 말을 해야지.” “했어. 너한테도, 그리고 아까 그 남자한테도. 근데 둘 다 무시했잖아.” 어? 진짜? 나는 진짜 몰랐는데……. “그러니까 안 할 거야.” “무슨 소리냐?” “고맙다고는 안 할 거라고.” “아, 그러냐?” 사실 바라지도 않았다. “알았으니까, 가라.” 내가 손을 훠이훠이 젓자 꼬맹이는 뭐가 그리 분한지 씨익씨익 숨을 들이쉬더니, 뒤돌아 사라졌다. 저 멀리서 직원이 달려온 건 그다음이었다. 다행히 내가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나 대신 주변 이용자들에게 상황을 전해 받은 직원은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서 사라졌다.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잠깐의 해프닝은 끝. 그렇게 다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이어가던 때. 드르륵. 옆에서 소리가 나서 흘깃 바라봤더니, 아까 그 꼬맹이가 내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는 게 보였다. “야, 뭐 하냐?” “책 읽는데?” “왜 여기서 읽는데?” “왜 여기서 읽으면 안 되는데?” 하, 진짜……. ‘참자.’ 어른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나는 자리를 옮겼다. 근데 이게 또 어찌 된 일일까. 드르륵.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의자가 당겨진다. “왜 따라왔냐?” “안 따라왔는데?” “따라왔잖아.” “아닌데.” 내 수많은 봉사 활동 경험에 따르면, 아무래도 난 이 꼬맹이의 관심을 사버린 모양이었다. ‘이럴 땐 무관심이 약이지.’ 대꾸를 안 해주면 알아서 흥미를 잃고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터. 나는 관심을 끊고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망할 꼬맹이는 선을 몰랐다. “왜 책도 안 펴놓고 가만히 있어?” “…….” “혹시 글자를 못 읽는 거야?” “…….” “내가 알려줄까?” 아, 진짜 미치겠네. “야, 꼬맹이.” 참다 참다 한마디 하자 꼬맹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꼬맹이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 “아루아 레이븐.” “……어?” 나는 멍하니 굳었다. 일순간 귀를 의심했으나,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아루아 레이븐이라고, 내 이름.” ……아니, 진짜로? *** 푸른 눈에 찰랑거리는 금발. 작디작은 체형과 종족이 인간이라는 것. 당장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것뿐이었으나, 가만히 뜯어보니 ‘아루아 레이븐’이 보였다. 하지만 샤빈 에무어처럼 확신은 어려웠다. 그야 예닐곱 살과 십대 중후반인 건 너무도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래서 확인 차 다시 물었다. “아루아가 맞나? 아루나, 아루루, 아루베로스 같은 게 아니라?” “뭔데 그 이상한 이름들은? 내 이름은 아루아야. 그러니까 똑바로 불러.” 거, 예민하게 굴기는. 어차피 20년 뒤엔 ‘아루아’라고 똑바로 불러주는 애가 없어지는데. “그래서 넌 몇 살이냐?” “다섯 살.” 와, 나이도 똑같은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 얘는 어렸을 때는 나이에 비해 키가 컸구나.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라기는 했지만, 서서히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책은 뭐냐? 마법에 대한 책 같은데, 혼자 배우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응.” “마탑에는 안 가나?” 아루아가 마탑 소속이라는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는 질문. 그러나 얘는 혀를 찰 뿐이었다. “마탑은 아무나 들어가는 줄 알아?” 어, 그건 맞긴 한데……. “우리 집은 가난해서 안 돼.” “그래서 혼자 공부하는 거냐?” “응, 나중에 행정 마법사가 되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그, 그렇긴 하지?”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다섯 살 때 뭐 했더라? ‘수술실 들락날락하면서 맨날 병실에서 책만 읽었지.’ 나도 나이에 비해 꽤 조숙했던 편이지만, 얘한텐 비교도 안 된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장래’를 고민하진 않았다. 뭐, 죽네 사네 하던 시절이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도 크긴 하지만. “그럼 나는 가볼게.” “어? 갑자기?” “이제 엄마가 퇴근할 시간이야. 도서관에 간 걸 알면 혼나.” “하긴, 이렇게 몰래 외출하면 걱정하긴 하겠군.” “……그거랑은 조금 다를걸.” 이후 레이븐은 읽던 책을 반납대에 올려놓더니, 기약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떠났다. ‘걱정이랑은 조금 다르다니, 무슨 뜻이지?’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말을 하던 레이븐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웠던 게 눈에 밟힌다. ‘가족들이랑 뭔가 문제라도 있나?’ 그러고 보면 얘가 가족 얘기를 우리 앞에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서민 출신인 것도 처음 알았고. “흐음…….” 이거 호기심이 좀 생기는데? 287화 인과 (3) 레이븐이 도서관을 떠난 후, 뒤를 밟아서 집이 어딘지 알아볼까도 싶었지만 그만뒀다. 그건 동료 간의 예의가 아닐 테니까. 지금까지 내게 집안 사정을 언급하지 않은 건 그 얘기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터. 정 궁금하면 차라리 나중에 돌아가서 직접 물어보는 편이 옳다. ‘……그럼 이제 뭐 하지?’ 레이븐이 떠난 후로 하던 계획 정리를 마저 이어갔지만 집중이 안 돼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대충 밥을 챙겨먹고 침대에 뒹굴뒹굴하고 있자니, 일찍 외출했던 아멜리아가 돌아왔다. “……하루 종일 그러고 있던 건가?” “그런데?” 네가 집에만 있으라며? 그런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묵직한 주머니를 툭 던졌다. “자, 받아라.” “……돈?” “약탈자들이 갖고 있던 장비와 물품을 판매한 대금이다. 정확히 반으로 나눴으니, 내일은 도시로 나가 앞으로 쓸 장비들부터 맞춰라.” “오, 꽤 많군?” “노아르크에는 대장간이 얼마 없어서 장비를 새로 맞추기 어려우니, 엄한 데 쓰지 말고 꼭 필요한 곳에만 써라.” 거, 잔소리는. “하던 일은? 잘 되어가나?” “아직 진행 단계다.” 아멜리아는 성과가 생기면 그때 다시 알려준다 하더니, 할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돈을 주려 잠시 들른 거라던가? ‘내일은 고기나 구워먹으러 가야지.’ 날이 밝은 후로는 일찍 외출해서 ‘자유 시장’이라 불리는 상업 구역 컴멜비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도 자주 이용하던 대장간에 몇 가지 장비를 주문 제작 요청했다. 한 3주 정도 소요될 거라고 하는데……. ‘여기는 20년 전에도 장사가 잘됐구나.’ 뭐, 이해는 된다. 여기처럼 가성비가 좋으면서 상위 티어의 장비를 취급하는 곳은 컴멜비에도 얼마 없으니까. ‘온 김에 여기도 구경 좀 하고 가야지.’ 이후로는 딱히 할 것도 없기에 마냥 돌아다니며 관광을 즐겼다. 중앙 거래소에 들러 물가 체크도 해보고, 주변 탐험가들에게 물어 20년 전 맛집도 가보고 하는 등. 막차 시간 직후까지 알뜰하게 놀다가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 술이나 한잔하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3일 차 아침. ‘후, 떨리네.’ 성지에 방문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혹시 누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을까 걱정도 됐지만……. ‘인구가 많아서 그런가? 성지도 20년 뒤랑은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없었다. 동기는 물론이고, 위아래로 1년까지 이름, 얼굴을 몽땅 외우던 우리 세대와는 여러모로 다른 부분이 많던 것. ‘오케이, 얼른 편지만 두고 튀자.’ 이내 부족장 천막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나는 부족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날 적어둔 편지만 집어넣고 성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레아틀라스 교단에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딱 알맞은 의뢰 공고가 있었다. 내용은 교단 산하의 건물 보수. 보상으로는 공적치가 전부인, 사실상 봉사 활동에 가까운 의뢰. “접수되었습니다.” 의뢰 시작일이 3일 뒤였기에, 오늘은 신청서만 제출한 후 거리로 나섰다. 일단 오늘 할 일은 끝난 셈이지만……. 시간이 제법 남기에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맞은편 자리의 의자가 소리내며 당겨졌다. 드르륵. 그래, 또 온 거구나. “반갑다, 아루아.” “…….” 선뜻 이름까지 불러주며 인사를 건넸으나, 레이븐의 표정은 뾰로퉁했다. “어제는 왜 안 왔어?” 아니, 무슨 만나기로 했던 것처럼 그러네. 갈 시간이 됐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건 자기면서. “됐고, 식사는 했냐?” “응.” 내 물음에 레이븐은 집에서 가져온 빵 하나를 먹었다고 대답했다. 거, 그게 무슨 식사야. “나가자, 고기나 구워 먹게.” “……고기?” “싫어하나?” “몰라.” “모른다니?” “먹어 본 적이 없어서.” 후, 얘가 진짜 아저씨 눈물 나게 하네. “그럼 오늘 먹어보면 되겠군. 뭐 하냐? 얼른 일어나라.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냐.” “하지만…….” “어차피 요 앞에 있는 가게로 갈 거니 너무 걱정 말고.” “걱정 같은 거 안 했어.” 어린애 취급이 짜증났는지, 레이븐이 책을 덮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한 칸 옆으로 이동해 내게서 조금 더 떨어졌다. “날 동정하지 마. 고기 같은 거는 나중에 내 돈으로 사 먹으면 그만이니까.” 뭔가를 사주려 했단 행위 자체가 굉장히 자존심 상했던 모양. 쩝, 내 실수였다. 이런 타입에는 이런 타입에 맞는 접근 방법이 있을진대. “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이내 솔직하게 사과의 말을 담자, 레이븐은 또다시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사과하는 어른은 처음이야. 봐줄게.” 다시 처음 앉았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거야 원, 고양이도 아니고. “이제 책 읽을 거니까 방해하지 마.” 이내 레이븐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더니, 진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방해를 언제 했다고……. “…….” “…….” 아무튼, 그런 적당한 거리감을 둔 상태에서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툭. 레이븐이 다시 말을 걸어온 건 읽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였다. “……탐험가야?” 솔직히 언제 나오는가 싶던 질문이었다. 애들은 또 이런 거에 또 환장하는 법이니까. “그래, 탐험가다.” “몇 등급인데?” “5등급…… 아니, 6등급이다.” 나는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혹시 모르니 모든 답변은 ‘니벨즈 엔체’ 기준으로 하는 게 옳다는 판단. “높은 거야?” “그냥 보통이다. 여기서 읽는 책에 나올 탐험가 정도 되면 대부분 4등급은 넘었을 테니.” “음, 그렇구나.” 의외로 레이븐은 등급이 낮다며 시비를 걸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호기심을 내비칠 뿐. “얘기해 줄 수 있어?” “미궁에 관해서 말이냐?” “응.” 이후 나는 어린애 놀아주듯 미궁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탐험가 생활을 하며 들은 재미난 사건, 과장 섞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아, 되도록이면 안 좋은 이야기들은 뺐다. 레이븐의 경우엔 드왈키랑은 다르니까. 암, 애들 동심은 지켜줘야지. “재밌네. 바바리안족은 다 너 같아?” “너가 아니라 니벨즈 엔체다.” “아, 미안. 앞으로는 똑바로 이름으로 부를게.” 뭐 이런 미친 꼬맹이가 다 있냐는 첫인상과 달리, 레이븐은 의외로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 배려심도 있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행동은 남에게도 하지 않으려 했다. 단지, 한 가지 결핍이 있었을 뿐. “근데 어른한테 시비 걸고 다니는 건 왜 그러는 거냐?” “시비 건 거 아니라니까.” “대뜸 전기를 지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단 걸 너처럼 똑똑한 애가 모를 리 없지 않냐.” “……몰라, 그런 거.” 대화를 하며 느낀 것인데, 레이븐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컸다. 뭐,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얘는 그게 또래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심했다. 어쩌면 길 막는 행인들에게 전기를 지진 것도 그러한 심리의 표출이었을지 모른다. 누구든 좋으니 마법사라는 걸 뽐내고 싶었겠지. 뭐, 기대하던 반응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겠지만. 경험에 의하면, 뜬금없이 전기 테러를 받게 되면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이 미친 꼬맹이가 돌았나? “그럼 이제 나는 갈 게. 잘 있어.” 어제보다는 조금 이른 시각이었으나, 레이븐은 껄끄러운 주제를 피해 달아나듯 도서관을 떠났다. 따라서 나도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 20년 전 과거의 시대. 그 사실이 신기해 매일같이 빨빨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때도 있지만, 금방 흥미가 죽었다. 그야 20년 전이라고 해서 대수인가? 결국 사람 사는 곳인 건 똑같다. 그래서 최근 3일은 도서관에서 레이븐과 수다를 떠는 걸 제하면 거의 숙소에만 있었다. ‘아, 그러고 보면 오늘은 못 간다는 걸 말 안 해줬네.’ 며칠 동안 매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눴더니, 레이븐과 꽤나 친해졌다. 미궁 얘기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집안 얘기를 먼저 꺼낼 정도로. ‘……의외였지.’ 레이븐은 편모 가정이었다. 다만 부친이 죽거나 한 건 아니고, 바람이 나서 1년 전에 집을 나갔다던가? 아, 참고로 부친도 마법사였다고 한다. 어쩐지 아무리 애가 똘똘해도 도서관 책만 보고 마법을 익히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었는데, 기초를 전부 부친이 잡아둬서 가능했던 거였다. [아무튼, 그래서 엄마는 내가 마법을 배우는 걸 싫어해. 집에 있던 책도 전부 팔아 버렸어. 그 사람 생각이 나나 봐.] 깜빡이도 없이 들어온 집안사에 얼떨떨해졌지만, 레이븐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것조차 방어 기제의 일부였다. 남들한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내게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것만 같으니까. ‘하, 진짜 억장 무너지게…….’ 그래서 최근에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목표는 다름 아닌, 레이븐을 마탑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 뭐, 내가 아니어도 언젠가 마탑의 일원이 되기는 하지만……. ‘입학이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니까.’ 어쩌면 미래로 복귀했을 때, 레이븐은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음, 근데 그러면 첫 만남도 달라지려나? ‘에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지겠어.’ 그냥 뱀파이어전이 조금 더 수월해지는 게 전부일 것이며,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이미 과거는 비틀렸으니까. 성지에 편지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3주 뒤에는 아멜리아와 노아르크로 내려가 죽어야 할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낼 것이다. ‘어차피 바뀔 거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우리한테 좋은 쪽으로 바뀌도록 유도하는 쪽이 나아.’ 그래, 그런 의미에서……. 툭.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뭔가 긴장되네.’ 레아틀라스 교단 산하의 보육원. 드왈키가 유년 시절을 보낸 장소이기도 한 그곳. “아, 니벨즈 엔체 님 맞으신가요?” “맞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작업반장님께서 오늘 할 일을 안내해드릴 거예요.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이내 보육원에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고 한 뒤 잠시 앉아서 대기했다. 그러고 있자니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 한 명이 와서 나와 봉사자들 몇 명을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 “보다시피 건물이 좀 낡아서, 애들끼리 지내기에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 꽤 있소. 경험자와 처음인 자를 잘 섞어서 조를 나눴으니, 다들 오늘 하루 힘내서 작업합시다.” 오늘부터 약 일주일간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노후된 건물의 보수 작업. 조금 감회가 묘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는 보수가 아니라 철거 직전에 짐을 나르는 역할이었는데. “어이, 바바리안 형씨! 오전 작업은 다 끝났으니 가서 좀 쉬게!” 아무튼, 일단은 열심히 시키는 대로 일을 하다가 남는 시간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공터로 갔다. 드왈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뛰놀고 있는데 혼자 나무 그늘 밑에서 책을 읽는 애가 있었거든. ‘……이때도 친구가 없었구나.’ 수통에 담긴 물을 마시며 자연스레 그늘가로 가서 옆에 앉았다. 다만 자연스레 친해지려 준비한 대사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녀석의 마지막 순간만이 떠올랐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이 있었는데. “비, 비켜 드릴게요. 쉬세요…….”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불편했는지, 드왈키가 주춤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감상에 젖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하자. “앉아라.” “네, 넷!” “……편하게 말해도 된다. 안 잡아 먹으니까.” “…….” 내 말에 드왈키가 다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 불편한 표정으로 내 눈치만 살살 보기 바빴다. 쩝, 이렇게까지 얘가 소극적일 줄은 몰랐건만. “이름이 뭐냐?” “리올이요.” “성은?” “안 말할래요.” “난 니벨즈 엔체다. 6등급 탐험가지.” “네에…….” 후, 이러니까 괴롭히는 거 같네. 보통 탐험가처럼 보이는 사람이 오면 좋아하지 않나? 그래, 이 꼬맹이들처럼. “와, 바바리안이다!” “이거 문신이죠? 할 때 안 아팠어요?” 내가 바닥에 앉자 뛰놀던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탐험가라는 걸 밝히자 미궁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어느새 구석진 자리로 이동한 드왈키의 표정을 살폈다. ‘쓱 빠져도 될 텐데 남아 있는 걸 보니, 얘도 궁금하긴 한가 보네.’ 드왈키도 미궁 얘기가 듣고 싶기는 한지,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아, 물론 레이븐에게 해주었던 꿈과 동심이 넘치는 얘기와는 다른 버전이었다. “고블린! 고블린도 잡아봤어요?” “암, 죽여 봤지. 손으로 이렇게 눈알을 짓뭉갠 뒤, 주먹으로 여기를 이렇게 내리쳤다. 두개골이 제법 단단해 세 번은 쳐야 했지.” “와아……” “갑자기 덫을 밟았던 일도 떠오르는군. 그땐 정말 뒈지는 줄 알았다. 근육은 물론이고 힘줄까지 찢겨서 한쪽 발을 아예 쓰지도 못했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날 구해줄 사람을 찾아 몇 시간 동안 어둠 속을 기었지.” “어어…….” “그래. 다시 생각해도 힘든 경험이었다. 정강이 쪽에 뼈가 튀어나왔는지, 뼈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얼마나 아팠는지. 중간에는 고블린 마비독도 풀려서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금니 하나가 없더군.” “……에?”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얘기가 이어질수록 아이들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하긴, 누가 와서 이런 얘기를 해줬겠어.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통은 몬스터가 죽자마자 마석으로 변하는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다. 코랑 귓구멍으로 뇌수를 줄줄 쏟아내면서도 3초 정도는 나를 빤히 바라보지. 딱 이런 눈빛을 짓고서.” “…….” “몬스터 얘기만 하니까 재미없나? 그럼 이번엔 사람 얘기를 해주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사람 귀를 목걸이처럼 해서 차고 다니던 약탈자를 만난 적 있는데…….” “……으아아아아앙!” 가장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꼬마 여자애 한 명이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얘기를 이어갔다. “이건 별로인가 보군? 그럼 이번에는 내가 처음으로 팔이 뜯겨져 나갔을 때 얘기를 해주마.” “…….” “이것도 별로인가? 그럼……. 음, 길드에서 내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 들었던 얘기를 해줘야겠군.” “저기…….” “응?” “그, 그런 것밖에 없어요?” 막 다시 얘기를 이어가려던 때, 한 아이가 벌벌 떨며 내게 물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뭘 바라나? 너희가 그동안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탐사 중에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이것만은 거짓없는 진실이었다. 비록 너는 그 순간에도 탐험가가 되길 잘했다며 웃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드왈키를 콕 짚어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이런 거 하지 마라. 알겠지?” 288화 인과 (4) 건물 보수를 위한 일주일의 작업 일정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한눈팔지 않고 작업에 열중하다가도, 휴식 시간이 되면 아이들 앞에서 탐험가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얘기하는 게 전부. 그마저도 3일 차부터는 스킵하게 됐다. 이제 내가 쉰다고 그늘 아래에 앉아도 아이들이 오지 않게 됐거든. “…….” “…….” 그래서 휴식 시간에는 이처럼 드왈키와 그늘 아래 앉아 조용히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 아, 물론 간간이 대화는 나눴다. “너는 왜 여기에 들어왔냐?” “……원장님께 말씀하시길, 부모님들한테 절 키울 여유가 없었대요.” “그렇군.” “그, 그래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나아요. 전 좀만 지나면 집에서 데리러 올 거니까…….” “……혹시 그걸 다른 아이들 앞에서도 말했나?” “그, 그런데요?” 에휴, 여기에 친구가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네. 내가 한숨을 내쉬자, 드왈키가 뭐라뭐라 변명의 말을 해왔다. “저,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곳도 아니니까. 부, 부모님이 상인이시거든요. 지금은 좀 힘들다고…….” ‘힘들기는 개뿔.’ 듣자마자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그야 나는 이 녀석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 현 남작은 드왈키가 태어나자마자 방계 가문에 입적시켰고, 그곳에서는 무책임하게 녀석을 이곳에 맡겨 버렸다. ‘나중에 친모가 그걸 알고 남작에게 일러바친 다음에야, 드왈키가의 별채로 들어가 둘이서 살게 됐다고 했었지…….’ 참고로 십 년 넘게 살며 양부와 양모는 거의 본 적도 없다고 그랬다. 다만, 금전적인 지원은 제법 괜찮아서 마법도 배우는 등, 부족함 없는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고생이 많군. 여기 육포나 먹어라. 어렸을 때 잘 먹어야 키가 큰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내 둘이서 앉아 육포를 우물우물거리고 있자니 금방 휴식 시간이 끝났다. “저… 오늘이 마지막이신 거죠?” “그래, 보수 작업도 이제 다 끝났으니까. 이제는 비가 와도 천장이 안 샐 거다.” “……감사합니다.” 거, 그래도 예의는 있구나. 다른 애들은 봉사자들이 와서 집 고쳐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데. “정 고마우면 탐험가는 절대 되지 마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됐고, 대답이나 해라.” “탐험가라니요. 그, 그런 거 저는 못 해요…….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리 답하는 꼬마 드왈키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하긴, 그 얘기를 들었으면 이게 정상이지. 다른 꼬맹이들도 탐험가라면 이제 학을 떼는 와중이니, 괜히 바람을 불어넣을 녀석도 없을 거다. ……솔직히 그래도 안심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으니, 남은 건 그냥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어이, 엔체! 다 쉬었으면 이리 와서 이것 좀 도와주게!” “리올,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네. 안녕히가세요.” 이후 나는 가방에 있던 육포와 간식거리 전부를 드왈키에게 준 뒤에 작업 현장으로 돌아갔다. 꼬맹이 주제에 한사코 사양을 했으나, 바바리안이 꼭 줘야겠다는데 지가 뭐 어쩔 거야. “자네 덕분에 오늘도 일정이 빨리 끝났군. 자, 그럼 다들 고생 많으셨소!” 아무튼, 몇 시간 정도 더 보수 작업을 이어가자 반장이 작업 종료를 입에 담았다. 일주일이나 걸렸던 일정의 끝. “오늘 끝나고 한잔할 건데, 자네도 오겠나?” “하지만 난 탐험가인데?” “하하, 자네가 다른 탐험가들처럼 거들먹거리고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다들 알고 있으니 괜찮네.” 반장이 회식에 참가하겠냐고 물어왔고, 나는 잠시 고민한 뒤 그러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이후로 딱히 할 것도 없거든. 도서관에 가도 레이븐은 없을 시간이고. “교단에서 수고비라고 넉넉하게 챙겨줬으니, 다들 걱정 말고 마시게!” 그렇게 다 같이 근처 주점으로 이동해 술을 마셨다. 근데 탐험가가 아닌 사람들이랑 이런 자리를 가져 본 게 처음이라서 그럴까? ‘좀 어색하네.’ 대화 주제 같은 걸 못 따라가겠다. 우리는 어느 대장간이 품질이 좋고, 어느 클랜의 누가 누구랑 사귄다든가 그런 얘기를 하는데. “저기…….” 홀로 겉돌던 때,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까, 이름이……. “워브 에미른이요.” 아, 그랬지. 작은 체구로도 요령 피우지 않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열심히 작업에 참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그… 애들한테 하는 얘기들을 들었거든요.” 아, 어쩐지 내가 얘기할 때마다 옆에서 묘한 눈길로 이쪽을 보고 있더라니만. “미궁 말이냐?” “네.” 내 되물음에 에미른은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거긴…… 정말로 그렇게 끔찍한 곳인가요?”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 “네? 하지만…….” “애들 앞에서 그리 말한 건 괜히 이상한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해서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버티기 힘든 곳인 건 틀림없으니까.” “아…….” 내친김에 그녀에게 몇 가지 얘기들을 해줬다. 드왈키가 특히 좋아했던 3층의 경치부터 시작해 드넓은 숲, ‘빙하굴’에서 보았던 하얗게 눈이 내린 설원과 여러 신비들 등등. 얘기가 이어질수록, 어느샌가 주변 사람들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긴, 이런 건 어른이고 애고 할 거 없이 좋아한단 말이지. “눈이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리 말해도 상상이 안 가는군.” “차가운 설탕 같은 걸까요?” 한평생 성벽 안에 갇혀 살아왔을 그들에게 미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들의 얘기가 낯설었듯, 이들 역시 탐험가들과 어울릴 일은 드물었겠지. “오래간만에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구려.” “돌아가면 아들한테도 들려줘야겠어요.” 물론 나 혼자 떠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충 할 만큼 이야기를 끝내자, 자연스레 화제는 그들 사는 얘기로 돌아갔고, 나도 적당히 낄 수 있는 얘기만 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두 명씩 가정으로 복귀하며 회식이 마무리됐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온 차였다. “저기요……!” 한 여자가 뒤따라 나오며 나를 붙잡았다. “아, 에미른. 무슨 일이냐?”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서요. 괜찮을까요?” “해라.” 에미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어딘가 버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까 엔체 씨도 두려울 때가 있다고 하셨죠?” “그랬지.” “저, 저도 그래요. 눈앞이 깜깜해지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려울 때가 있어요. 엔체 씨는 그럴 때 어떻게 이겨내시는 건가요?” 조금 어려운 질문이다. 그 대상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면식 하나 없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다만 너무 깊이 고민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미 용기를 바라고 내 앞에 선 사람 아닌가. “아까도 말했듯 바바리안이라고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나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단지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두렵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끝에는 최악의 결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최악의 결과……. 네, 역시 그렇겠죠…….” 이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뒤 그녀에게 물었다. “꼭 해야 하는 일인 건가?” “네.” 목소리는 작지만 망설임은 묻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더 해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해라.” 이 세상에서 오직 바바리안만이 할 수 있을 응원. 대답이 돌아온 건 약간의 텀을 두고서였다. “……용기를 주셔서 감사해요. 한 번 힘내 볼게요.” “그래? 뭔진 몰라도 잘 되길 바라겠다.” “네. 그리고 아까 들려주신 얘기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특히 그 바다라는 곳요. 얘기로 듣기만 했지만 굉장히 멋진 곳일 거 같아요. 아마…… 저 같은 건 평생 가볼 수 없겠지만요.”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야 뭔 말을 하겠는가. 너도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그게 기만의 말이라는 건 나부터가 잘 알고 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 그래. 가 봐라.” 이후 에미른과는 한 번 더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워브 에미른이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돌아가는 길 내내 자꾸 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 회식을 끝내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왔을 때, 내 방에는 아멜리아가 자리해 있었다. “낮부터 없던데, 어디를 다녀왔지?” “아, 잠시 봉사 활동 좀 다녀왔다.” “봉사……?” 거, 표정 구기기는.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나? “사람은 베푸는 법도 알아야 하는 거다.” “……그렇군.” “아무튼, 잘 왔다. 안 그래도 돈이 떨어졌는데, 온 김에 돈 좀 주고 가라.” “그 돈을 설마 다 쓴 건가?” “아, 장비 사고 할 거 했더니 남는 게 없더군.” “……그렇군.” 이내 아멜리아가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주머니 하나를 내게 던졌다. 꽤나 묵직했다. ‘한동안 고깃값 걱정은 없겠네.’ “이건 잘 쓰지.” 감사 인사를 전해준 뒤, 내친김에 내가 방문한 20년 전 맛집들 중 몇 가지를 알려줬다. 표정을 보니 가볼 거 같진 않지만. 후,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화라도 낼 거 같다. “아! 근데 그래서 하던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지난번에 그 중개인인지 뭔지랑은 만났다면서?” “아직은 접촉 단계다. 다행히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다른 사고가 없다면 다음 주에는 출발할 수 있을 거다. 너도 준비해 둬라.” “그러지.” 짧은 본론이 끝나자마자 아멜리아는 할 일이 있다며 떠났다. ‘일주일 뒤 출발이라…….’ 대충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침대에 누워 남은 시일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딱히 정리할 만큼 많지도 않았다. ‘다음 주 출발이라니, 레이븐 쪽도 얼른 마무리 지어야겠네.’ 주문한 장비야 다음 주 중으로 받을 수 있을 테고, 레이븐 정도만 해결하면 될 거 같다. 내일은 도서관으로 바로 가든가 해야지. ‘중요한 건 노아르크로 내려간 다음부터인가.’ 아마 그때부터는 나도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내야 할 것이다. 내려가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야 그동안 아멜리아와 계획을 짜두긴 했지만……. 어디 세상이 계획대로만 되던가? ‘후…… 됐고, 얼른 돌아가고 싶네.’ 이런저런 소망을 머릿속에 품은 채, 서서히 수마가 몰려왔다. *** 장소는 미샤와 함께 구한 2층짜리 월세 집. 그곳에서 나는 동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구나.’ 확신한 계기는 거울이었다. 웃으며 떠들다가 옆을 봤는데, 거울 속에 비요른이 아니라 이한수가 있었거든.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눈치를 챈 순간 배경이 뭉개지며 공간이 변했다. [비요른, 뭐 하냥? 얼른 가자!] 이번에는 미궁 속이었다. 평소처럼 층을 오르며 탐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는 비요른이 아니라 이한수였다. 방패는 무거웠고, 몬스터를 바라보는 눈높이도 달라져 내가 올려다보는 입장이었다. 그래서일까? [왜 그것도 못 막는 거냥!] 내가 계속 실수를 하며 동료가 피해를 봤다. 처음에는 부상 정도였지만, 마지막에는 누군가 한 명이 죽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드왈키였다. 그제야 나는 이것이 꿈임을 다시 한번 인지했고, 재차 배경이 소용돌이쳤다. 이번에도 익숙한 장소였다. 중세 귀족의 집무실을 연상시키는 고즈넉한 방. “뭐야, 이번엔 원탁이야?” 처음에는 피식 웃고 넘어갔지만, 머지않아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다른데……?’ 방의 구조나 분위기는 비슷하다. 한데 의상과 치장용 장신구, 그리고 한쪽 벽면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가면이 없다. 뭐, 꿈이라 디테일이 부족한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현실적이야.” 나는 멍하니 손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히 느껴졌다. 심지어 사고의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똑똑. 벽을 두들겼을 때의 소리도, 질감도. 모든 게 현실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 스륵. 이를 깨달은 즉시 한쪽 면에 놓인 전신 거울도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비요른이 아닌 이한수가 서 있었다. 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일단 꿈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생각을 해보자, 의외로 그럴듯한 추측이 금방 나왔다. ‘아……. 오늘 커뮤니티가 열리는 날이지.’ 자고 있던 사이에 소환이 됐다. 그렇다면 이 모습인 것은 설명이 된다. 컴퓨터를 통해 소통하던 20년 후의 커뮤니티와 방식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초창기란 걸 감안하면 납득이 가능하다. 어쩌면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놀란 표정을 짓는 GM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 불현듯 이백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백 년도 전부터 이 도시엔 악령이 있었어요. 지구로 치면 20년도 더 전인 거죠. 그럼 걔들은 누구일까요?] 그때 나는 모르겠으니 그냥 말해 보라 했고, 이백호는 이렇게 말했다. [정답은 다른 차원에서 온 놈들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악령. 지구 출신들에 비하자면 소수지만, 하나같이 특이한 힘을 갖고 있던 존재들. 그중 한 명이 이러한 공간을 창조했고, 우리가 아는 GM은 그걸 물려받은 거라던가? ‘설마…….’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 그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289화 거물 (1) 두 번째 노크는 없었다. 첫 노크는 그저 알림의 의미였다는 듯, 허락을 구하는 말조차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들어온 것은 한 명의 노인이었다. 백발이 무성했고, 피부에는 주름이 자글했다. 다만 노인 특유의 연약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며, 허리는 굽은 곳 하나 없이 정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흐음.” 분위기. 말하지 않아도 몸의 동작, 눈빛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기질이 말하고 있다. 이 노인은 위험하다고. “복장을 보아하니, 지구 출신이겠군.” 이내 노인이 나를 쓱 훑어보며 짧게 읊조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건가?” 일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저쪽 복장을 보니 이계의 악령들이 확실한 거 같은데. “…….” 일단 침묵을 택했다. 섣불리 입을 열기보다는 저쪽이 먼저 말을 하게끔 유도해, 조금이라도 상황 파악을 해보겠다는 판단. 음, 그랬을 터이나……. “놀랍군. 3등급 정수가 벌써 세 개라니. 자네들이 이곳에 불려온 지 이제 1년이 좀 지났을 터인데.” 이 노인은 내가 한 마디조차 내뱉지 않았음에도 나에 대한 정보를 읽어내고 있었다. 니미럴, 저런 능력은 대체 어디서 얻는 거야? “이거, 오랜만에 호기심이 샘솟는군.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됐으니, 이것부터 말해보게.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 “계속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겐가?” 초대한 적도 없는 낯선 인물의 방문을 경계할 법도 한데, 노인은 오히려 호의적인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후, 뭐라고 하지?’ 그냥 미래에서 왔다고 확 말해버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생각만으로 끝냈다. 당장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내 정보를 털어놓는 건 현명하지 않다. 그래, 그러니까……. “질문은 내가 먼저 하지.” “호오, 그러면 내가 묻는 것에도 답해주는가?” “어느 정도는.” 상대의 호기심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았다. 내가 혼란스러운 것만큼이나, 저자 또한 내가 누군지 궁금할 터. 이걸 이용해 최대한 정보를 얻자. “해보게.” 이내 노인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우선 이 질문부터 던졌다. “이름이 뭐지?” “허허, 이름이라…….” 노인은 김 빠지는 질문이라는 듯 웃었지만, 내게 있어 이름은 아주 중요하다. 내게는 20년 미래에서 왔다는 이점이 있으니까.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라도, 미래에는 어떨지 모른다. 잘하면 이름만으로 이 사람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아내는 것도 가능한 셈. “통성명부터 하려는 걸 보니 예의는 제법 아는 친구였군.” 이내 노인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막 열려던 찰나. “…….”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미안하네. 밖에 일이 있어서 이 대화는 나중에 다시 이어가야 할 거 같군.” 기품이 넘치는 말투로 대화의 중단을 말한 노인은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그렇다고 여기에 내버려 두는 것도 실례겠군. 흐음, 어쩔까……. 아예 함께 가겠나?” 나는 잠시 고민하고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야 이 방에 혼자 남아서 뭘 어쩌겠는가. 노인을 따라서 바깥으로 나가면 뭔가 더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라도 있을 터. “좋아, 마른 친구가 아주 강단이 있군? 아무튼, 그 모습으로 나가면 다른 회원들의 주목을 받게 될 걸세. 여기 이걸 입게나.” 노인이 손을 휙 젓자 이 시대에 어울리는 의상이 허공에 생겨났다. 한데 이거로는 뭔가 모자랐을까? “아, 얼굴도 가리는 편이 좋겠군.” 노인은 즉석에서 새하얀 가면까지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뭐지, 저 편리한 능력은? 여기 이 영적세계에서만 쓸 수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일단 옷을 입고, 가면을 얼굴 위에 얹었다. “불편하진 않나?” “아니, 딱 맞아서 편하군.” “후후, 나중에 가면 같은 거라도 비치해 두는 게 좋겠어. 누군가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할 수도 있지 않나.” “…….” “자, 그럼 가보세.” 이후로 방을 떠나 노인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면서 노인은 내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안에서 누구를 보든 놀라거나 아는 척을 하지 말게. 아니, 가능하면 그냥 아까처럼 입을 꾹 닫고 지켜만 보게.” “누가 먼저 말을 건다면 어떡하지?” “그럴 일도 없을 테니와,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한들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 말게.” 뭐, 그렇다면야. 노인의 뒤에 딱 붙어 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을 계속해서 탐색했다. 그럴수록 묘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아까 내가 있던 방도 그랬지만, ‘원탁’이 있던 그 저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도 똑같고.’ 물론 벽에 걸린 장식, 방의 위치, 복도의 너비 등 디테일한 부분들은 다르다. 하지만……. ‘단지 우연의 일치라 보기에는 어딘가 좀 걸린단 말이지.’ 그저 기분 탓으로 치부하지 않고 눈여겨 주변을 쓱 훑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도착했네.” 복도를 걷던 노인이 걸음을 멈춰 세우고 커다란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뭐야, 여기.’ 놀랍게도 그 너머에는 원탁이 있었다. *** 수사자 가면을 쓰고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던 원탁의 방. 찾아보면 그곳과 다른 점이 꽤 있기는 하다. 일단 원탁에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 주는 보석도 없을뿐더러, 방 크기도 조금 작다. 하지만……. ‘비슷해.’ 그걸 제외하면 거의 판박이다. 원탁 테두리에 띠처럼 새겨진 문양이라든가, 벽에 걸린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 액자라든가. 대부분의 것이 20년 뒤의 원탁과 일치한다. 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이 노인네가 ‘마스터’인 건가?’ 마스터. 지난날 딱 한 번 만나 보았던, ‘원탁의 감시자’를 만든 정체불명의 인물. 어쩌면 지금 내 앞에 선 이 노인이 바로 그자일지 모른다. 뭐, 여기 있는 자들 중에 한 명이 이 장소를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다마는. ‘아무튼, 이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눈에 익은 원탁을 보고서 흠칫 몸이 굳기도 잠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당장 이 원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일 텐데. ‘네 명.’ 방에 자리한 인물은 총 넷이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들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뒤에 그자는 누구요?” 가면까지 쓰고 있는 내게 강한 흥미를 보였다. 어느 면에선 처음 원탁에 참가했던 그때와 조금 비슷했다. ‘거, 눈깔들 하고는.’ 마치 눈에 가시가 달린 것만 같다. 그들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피부가 따끔하며, 쿡쿡 쑤셔지는 듯한 감각이 피어난다. 그런 불편한 시간이 이어지던 때였다. “이자가 누군진 자네들이 관심 가질 것 없네.” 나를 대할 때와 달리 위압적이며 강한 말투로 딱 잘라 선을 그은 노인은, 순식간에 정리된 분위기 속에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없는 동안 분란이 있었다고 들었네.” “…….” “물론 나야 자네들이 이곳의 원칙을 잊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고 있네마는.” “…….” “일단은 얘기를 들어봐야겠지. 어떻게 된 건가?” 노인은 마치 어린애들을 타이르듯 말했고, 그 물음에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게 마치 누가 총대를 멜 건지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나선 건 산만한 덩치를 지닌 중년 사내였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끼리 상잔을 하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하지만 이자가 자꾸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지 않소.” 사내의 힐난에, 과묵하게 앉아 있던 흑의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왕을 죽이자는 게 이상한 바람입니까?” “하, 그대가 왕을 죽이고자 하는 그 이유가 뭔지 내 모를 거 같소? 개인적인 욕심에 우리를 끌어들일 생각일랑 하지도 마시오.” “카구레아스. 당신은 수십 년 동안 방법을 찾지 못했으면서 아직도 돌아갈 희망을 품고 있는 겁니까?” “물론이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듯이. 아, 이제 그대는 모두에서 빼야겠지만 말이오.” “웃기는군요. 돌아가길 바란다면 더더욱 나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거대한 비밀을 품은 왕가야말로 모든 의문의 종착지일 터인데.” “……그를 건드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오. 심지어 귀환의 단서를 왕가가 숨기고 있단 보장도 없지 않소.” 딱 보니 어떤 이유로 대립 중인진 알 거 같았다. 왕을 죽여 단서를 얻자는 강경파와, 그건 너무 위험하니 다른 방법을 찾자는 온건파. 20년 전 이계의 악령들이 나누는 대화가 제법 흥미로워 열심히 귀에 새겨듣던 때였다. 이어진 중년 사내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혼자 뭘 하든 상관없소. 오르큘리스인가 뭔가 하는 집단을 만들든 말든. 나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을 테니까.” 뭐? 오르큘리스를 만들어? ‘……얘가 설마 그 ‘단장’이야?’ 예상치도 못한 거물의 등장. 불현듯 아까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에서 누구를 보게 되든 놀라지 말라던가? 오르큘리스의 단장 정도면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알려진 게 없는 유명 인사가 아닌가. 설마 그런 인물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 “하지만 루인제네스 공은 다르오.” 그때 중년 사내가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인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순간 다시 한번 머리가 멍해졌다. ‘응? 루인제네스라면…….’ 벨베브 루인제네스. 거대 학파의 수장이었으나,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대고 범죄자로 전락한 ‘파멸학자’의 본명. “같잖은 말로 그를 설득하려 든다면 좌시하지 않겠소.” “정말로 그가 차원 마법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믿소. 왕을 죽이겠단 허무맹랑한 계획보다는 훨씬 더.” 본인 얘기가 나오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는 꼬마를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후릅- 정말, 이 꼬맹이가 파멸학자라고……? *** 오르큘리스의 단장. 그리고 파멸학자. ‘후, 라인업이 무슨…….’ 두 거물의 정체를 알게 되니, 남은 두 명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 하지만……. ‘카구레아스란 이름은 난생처음 듣는단 말이지.’ 일단 중년 사내의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 봤다. 저 여자의 경우엔 내내 말이 없어서 정보가 없고. 대체 이 둘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사정은 알겠으니, 그만들 하게.” 그때 노인이 입을 열며 장내를 조용히 시켰다. 딱히 카리스마가 느껴지거나 한 건 아닌데, 이만한 사람들이 그 한마디에 쩔쩔맸다. “다들 나가 있게. 오늘은 보다 중한 일이 있으니, 이 안건은 이따가 다시 얘기하세.” “중한 일이라니요?” 노인의 말에 내내 듣기만 하던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뒤에 있는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인가요?” “그러네.” 노인이 순순히 긍정하자, 다시금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쟤가 우리보다 중요하다고? 딱 그런 시선이었다. 다만, 다들 노인의 눈치만 보며 그런 말을 아끼던 때. “그 사람은 누구죠? 그쪽이 누군가를 데려온 건 처음인 거 같은데. 여기선 의미도 없는 가면은 왜 쓰고 있는 거고요?” 여인이 다시 한번 물었고, 노인은 답했다. 이전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신경 끄게.” “…….” “그럼 이제 자리를 좀 비켜주겠나?” 노인이 재차 축객령을 내리자, 여인을 필두로 장내에 있던 인물이 하나둘 일어나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허허, 드디어 다시 둘만 있게 됐군?” 모두가 떠나자 노인은 가면을 벗듯, 아까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나 이어가보세. 어디까지 했었더라?” “……이름을 말하던 중이었다.” “아, 그랬지.” 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나도 이렇게 될 거라며 옆집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지구에서 왔다니, 어쩌면 자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름일 수도 있겠군.” “……?” “반갑네. 아우릴 가비스라고 하네.” 아우릴 가비스. 균열총해록의 저자이자, [던전 앤 스톤]을 만든 게임 제작자의 이름이었다. 290화 거물 (2) 두근. 낮게 뛰던 심장의 박동 주기가 점차 짧아진다. “……당신이 아우릴 가비스라고?’ 어쩌면 이 몸에서 눈을 뜬 그날 이후로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을 풀어줄 수도 있을지 모르는 존재. “정말로…… 당신이 그 게임을 만든 건가?” “질문은 하나씩이었을 터이네만, 자네 심정은 이해가 가니 여기까진 답해주겠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그 게임을 제작했네.” 후, 그래 정말 본인인 거구나. 물론 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자, 그럼 내 이름을 말했으니 자네 차례겠군. 이름이 뭔가?” 그는 내가 이름을 물었으니, 자기도 이름을 묻겠단 듯 질문했다. 다만……. ‘아마 나랑 똑같은 의도겠지.’ 이름은 중요하다. 외형이 의미 없는 영적세계라면 더더욱. 파멸학자가 꼬맹이 모습을 하고 있던 걸 봐도 알 수 있듯, 이곳에서 우리는 본인이라 여기는 모습을 가진다. 이름을 밝히는 순간 익명성이 사라지는 것. 바깥에서 나를 찾아낼 수단이 생기는 거다. 그러니까……. “이한수.” 이백호를 제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본명을 밝힌다. 물론 노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호, 한국 태생이었나 보군? 한데 내가 물은 건 그런 것 말고 자네가 이곳에서 쓰는 이름이었네.” “이곳에서 쓰는 이름이라…….” 오케이,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니벨즈 엔체.” 이것도 일단 여기서 쓰는 이름은 맞잖아?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 내는 이백호를 본 적 있기에 일부러 트릭을 섞었다. 원탁을 만든 게 이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집회의 핵심 시스템이었던 그 보석을 만든 자라면 그런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판단. ‘애초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실제로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흐음…….”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닐세. 그럼 이제 자네 차례군?” 어딘가 애매하다는 듯 빤히 바라보던 그가 이내 턴의 종료를 알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뭘 먼저 물어봐야 할까. 이자를 만난다면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기에 우선순위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우선 그것부터 묻자.’ 나는 생각해 둔 질문 리스트들 중 하나를 골랐다. “왜 우리를 이 세계로 불러낸 거지?” 모든 사건의 근본이기도 한 그것. 동기動機. 그는 어째서 이러한 일을 벌였는가. “……확실히 자네는 특별하군.” 아우릴 가비스는 대답 대신 묘한 말을 했다. “무슨 의미지?” “지구에서 온 자들을 몇몇 만나봤네마는, 대부분 자기가 그냥 게임 속에 들어온 줄로 알고 있더군.” 아, 그 소리였구나. 하긴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다만 이곳에서 그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많은 단서를 얻었다. 한데 아직도 그런 착각을 할 리가. 이곳은 하나의 독립적인 세상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던전 앤 스톤]은 이 세상을 기반으로 제작된 게임일 테고. “그래서 대답은?” “하긴, 자네들 입장에선 그것만큼 궁금한 게 없겠군.” 이내 아우릴 가비스의 입이 열렸다. 그들이 머나먼 이계의 존재들을 이 세계로 불러와야만 했던 그 이유. “심연의 문을 열 수 있는 게 자네들뿐이기 때문일세.” “뭐? 심연의 문? 그게 대체 뭐기에…….” 아우릴 가비스가 내 말을 끊었다. “질문은 하나씩, 그런 규칙 아니었던가?” “아…….” 그래, 그게 맞긴 하지. “해봐라.” 이내 내가 턴을 넘기자, 그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 “혹시 기록의 파편석을 사용했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눈에는 열띤 기대감이 가득 맺혀 있었다. *** 기록의 파편석. 노아르크의 성주 가문이 수 대에 걸쳐 대물림 해온 가보이자, 시간 역행이라는 터무니없는 능력을 지닌 보물. ‘뭐야, 이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것이 언급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도 그럴 게, 생각도 않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본 바로 그다음 질문이 내 모든 사정을 꿰뚫는 질문일 것이라고는. ‘……아씨, 뭐라고 대답하지?’ ‘기록의 파편석’이 뭐냐며 태연하게 넘기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당황했다는 것은 저쪽도 눈치를 챘을 터. “천천히 대답해도 좋네.” 아우릴 가비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서둘러 판단을 끝마치고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지?” 물론 이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반쯤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서 뭐 어쩌겠는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통할 거 같지도 않은 상대일뿐더러……. ‘내가 모르는 근거가 있을 거야.’ 아우릴 가비스는 거의 확신하는 단계이다. 그게 아니면, ‘기록의 파편석’ 같은 걸 콕 집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유는 셋일세.” 실제로 아우릴 가비스는 손자 대하듯 웃으며 추측의 근거를 내게 설명해주었다. “하나, 이제 1년이 됐다기에 자네는 너무 강하네. 둘, 내가 이곳에 초대한 자들 중에 자네는 없었네. 셋, 자네가 강하긴 해도 내 영역에 허락도 없이 침입할 정도는 아니지.” “겨우 그것 정도로……?” “허허, 겨우 그 정도가 아닐세. 이 수준의 모순이 납득 되려면 ‘그것’ 외에는 없을 정도니.” 아니, 그렇게 말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서 질문의 답은 긍정이라 여겨도 되겠나?”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우습기에, 그냥 쿨하게 인정했다. 두 번째 질문에서 까발려진 건 아쉽지만, 여기서 뭘 어쩌겠는가. 이 다음부터 잘 하는 수밖에. “후후, 지구 출신이니 과거에서 온 건 아닐 테고. 자넨, 몇 년도에서 온 건가?” “질문은 한 번씩이었을 텐데.” “아, 그랬지. 어서 해보게.” 그는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자네는 이제 또 뭐가 궁금한가? 심연의 문이 뭔지? 마녀가 살아 있는지? 음, 아니면 바깥이 왕의 말대로 지옥인지가 궁금할 수도 있겠군.” 원하는 게 뭐든지 묻기만 하면 대답해 줄 것만 같은 목소리. ‘묘하게 껄끄럽단 말이지.’ 아까 다른 회원들을 차갑게 내치던 모습을 봐서 그럴까? 아우릴 가비스의 이유 모를 호의는 내 청개구리 심보를 자극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때려치워?’ 지금이라도 이쯤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끝내고 바깥으로 내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현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합리적인 이유는 없지만, 우습게 여길 일은 결코 아니었다. 경험상 이런 종류의 직감은 무시했을 때 큰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몰라.’ 단순히 찝찝하다는 것 때문에 지나치기엔 너무 귀중한 시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노인은 모든 해답을 갖고 있을 테니까. 이내 나는 고민을 끝마쳤다. ‘자잘한 건 다 쳐내고 중요한 것들만 확인하자.’ 당신은 이곳 출신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차원 이동을 했는가. 뜻을 함께하는 동료는 있으며, 이 영적세계는 어떤 이유로 만든 것인가. 그 외에도 수 많은 의문을 뒤삼키고서, 나는 물었다. “왜 심연의 문을 열려고 하는 거지?” 인간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쉬운 요소 중 하나인 동기. 이 인간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아우릴 가비스는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답했다. “왜 그게 궁금한 것인가?” “질문은 한 번씩 하기로 했을 텐데.” “허허, 정색하지 말게. 나는 그저 자네 입장에서 심연의 문이 뭔지 묻는 게 먼저 아닌가 싶었을 뿐이니.” 그의 의문은 합당했다. 단지 내게 있어선 합리적이지 않았을 뿐. “하하, 자네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는 슬슬 알 것도 같군.” “그래서 질문의 답은?” “자네가 묻는 것엔 어지간하면 전부 대답해 줄 생각이었네마는, 이건 좀 불공평한 거 같군.” “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아직 자네가 누군지 잘 모르지 않나. 모든 건 순서가 있는 법일세.” 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럼 그냥 질의응답은 여기서 끝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 대신 이건 어떤가? 심연의 문을 열면 자네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네. 어때, 자네가 묻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아우릴 가비스가 보상이랍시고 그러한 말을 꺼냈다. 딱 보니까 내가 심연의 문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걸 알려 주려 했던 거 같은데…….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정말 중요한 건 숨겼다는 생각이 든다. 심연의 문이 가진 특징이 ‘귀환’뿐이라면, 그가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낼 이유가 없으니까. 쩝, 이래서 동기를 확인하려 한 건데……. ‘뭐, 이런 식이면 나도 앞으로 얼버무리기 힘든 건 그냥 패스해 버리면 되니까.’ “좋다, 이제 당신 차례다.” 이쯤이면 만족한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턴을 넘겼다. 그리고 빠르게 질문을 주고받았다. “자네는 몇 년도에서 왔는가?” “154년.” “20년 뒤군.” 그는 천천히 내 인적 사항을 캐물었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왕가와 적대 관계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네.” “볼 수 있다라니? 확실하게 말해 줬으면 하는데.” “적대 관계일세.” 음, 그렇단 말이지? 한통속인 건 아니었구나. “자네에게 초대장을 건넨 건 미래의 나……. 아니, 질문을 다시 하겠네. 자네에게 초대장을 준 게 누구였나?” “GM이란 별명을 지닌 지구 출신 악령이다.” “……GM?” “나도 그것 말고는 알지 못한다.” “그렇군. 이제 자네 차례일세.” “왕가에서 바깥세상이 멀쩡한 걸 감추고 있는 이유가 뭐지?” “흐음, 20년 후에는 거기까지 알려졌나 보군?” 아우릴 가비스는 은근슬쩍 나를 떠보더니,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대답을 내놓았다. “왕가에서는 그게 이 세상을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네.” “단순한 권력욕 때문은 아니라는 거군.” “애석하게도.” 이후 턴을 넘겨받은 그는 내게 몇 배 난이도를 깼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15배.” “……거짓말을 하는군.” 거, 정색하기는.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진짜 거짓말 탐지기가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던 거구나. “그나저나 이해가 안 되는군. 왜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데서 거짓말을…….”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원본! 설마 자네는 내가 만든 원본을 클리어 한 건가?” 잔뜩 흥분하며 언성을 높였다. ‘빌어먹을.’ 외통수였다. 그야 여기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대답이 될 테니까. ‘후, 이래놓고 내 질문이 불공평하니 뭐니 하던 거야?’ 어처구니없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힘센 놈이 다 해먹는 세상 아닌가. 나 같은 잔챙이는 그러려니 하고 참아야지. “…….” 그렇게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때였다. “그랬군, 그랬어! 하긴, 기록의 파편석이 그딴 쓰레기 같은 양산품으로 넘어온 자에게 반응할 리가 없거늘……!”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노인네가 감정적인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듣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말해보게, 어떻게 깬 건가? 얼마나 걸렸고? 아니, 원래는 뭘 하던 사람인 건가?” 갑자기 노인네가 간절해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다만 노인들은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기에, 일단 확인을 한 번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뭔가 좀 마시고 싶군.” “응? 여기선 갈증이 느껴질 리가 없는데…….”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내가 가면을 벗고 인상을 찌푸리자, 노인네가 후다닥 컵을 만들어 물을 담아줬다. 흐음, 이거로는 조금 애매한데. “사이다.” “……사이다?” “물이 아니라 사이다였으면 좋겠는데.” “아아! 그거 말인가?” 노인네가 컵에 담긴 액체를 얼른 바꿨다. 투명했지만 아래에서부터 기포가 싹 올라오는 게 틀림없는 사이다였다. 나는 곧장 참지 못하고 컵을 들이켰다. “크으으으.” 내 방에 있던 무미무취의 그것과 다르게 청량한 탄산의 감각이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꺼억.” “허허, 사내답게 아주 시원하게 마시는군 그래. 아무튼, 다 마셨으면 이제 대답해 주게. 20년 뒤엔 자네처럼 원본을 깬 자들이 많이 있나?” 그 물음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도 그럴 게, 서열에 민감한 바바리안의 본능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오리지널’을 클리어한 게 뭐 그리 중요한진 모르겠지만……. “흐음,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지금부터는 내가 갑인 게 아닐까? 291화 거물 (3)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관계라는 게 다 그렇다. 대개는 간절한 쪽이 을이 된다. 지금 이 순간처럼. “한 잔 더.” “아, 여깄네.” “크으으으으으.” 사이다를 한 잔 더 리필해서 마셨다. 노인네는 이쯤 하고 다시 얘기를 마저 하고 싶은 눈치지만……. 어림도 없지. “혹시 콜라도 가능한가?” “허허, 고향이 많이 그리운가 보군.” “크으으으으으!” 그래, 이거거든. 너무도 오랜만에 접하는 탄산의 청량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다만, 음료 갑질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사이다랑 콜라가 뭔지 아는 걸 보니, 정말 우리 세상에 오긴 했던 거 같은데, 그럼 얘네는 대체 어떻게 넘어온 거지? ‘심연의 문’을 연 것도 아닐 텐데…….’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만약 그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으면, 층을 오르지 않아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물론 한 번 해본 생각일 뿐, 그렇게까지 간절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요즘엔 굳이 돌아가야 하냐는 것이 내 최대 고민거리였으니까. 이미 난 이곳에 훌륭히 적응했다. 조금 불편한 세상인 건 틀림없지만, 충분히 지낼 만한 곳이었다. 그래, 탄산 따위 없어도 말이지. “허허, 그리 기뻐하는 걸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군. 어디, 한 잔 더 마시겠나?” “아니, 이제 됐다.” “그래?” 아우릴 가비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내게 아까 전과 똑같은 질문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내 차례였을 텐데?” 내가 면박을 주자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아, 미안하네. 내가 급했군. 자네 말대로 이번엔 자네 차례이니 뭐든 물어보게.” 뭐래, 그래 놓고 다 대충 대답했으면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질문은 여기까지다.” “응?” 응은 무슨 응이야. 뻔뻔하기는. “더 해봤자 의미가 있나?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는 마당에.” 뒤에서 거짓말 탐지기 돌리고 있던 비열함을 지적하자, 노인네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 없네!” 응, 그거야 그랬겠지. 어차피 중요한 건 다 안 말해 줬으니까. 오히려 그런 행동 덕분에 거짓말은 안 했으리란 신뢰가 생긴다. 하지만……. “불공평한 건 사실이지 않나.” 이 노인네는 불편한 주제일 때 그냥 말을 돌리면 그만인데, 나는 침묵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음, 글쎄. 나는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내가 질문 열 개를 하면 당신이 하나를 하는 건 어떤가?” “뭐……?”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를 뱉었다. 쩝, 그래 이거는 역시 너무 심했나? 나는 서둘러 준비해 둔 변명거리를 꺼냈다. “애초에 나는 당신과 대화하는 것부터가 굉장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거다.” “리스크?” “이것 때문에 미래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르지 않나.” 내가 떠안는 위험 요소와, 20년 미래의 정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를 동시에 암시하는 대사. 하지만……. “뭐? 하하하하!” 아우릴 가비스가 진심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단 것처럼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호쾌한지, 내가 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그야 웃긴 얘기를 하던 게 아니었으니까. “아, 갑자기 웃어서 미안하네.” 노인네가 웃든 말든 빤히 꼬라보고 있자, 이내 그가 기침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단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라서 말일세. 물론 자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긴 하겠네마는…….” 아우릴 가비스는 말을 이었다. “기록의 파편석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네.” 그가 내 말을 듣고 웃었던 이유였다. *** 일시적으로 뇌정지가 왔다. 하지만 평정심을 찾고서 다시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툭 까놓고 물었다. “바꿀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아, 혹시 그게 ‘질문’인 건가?” 어……. “…….” 말문을 물론이고 숨까지 턱하고 막히는 기분. 그렇게 사이다가 한 모금이 다시 절실해지던 때였다. “허허, 농담일세.” 아우릴 가비스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시간과 인과의 개념을 지금 자네에게 설명하는 건 어려우니, 이것만 알고 있게.” “…….”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선후 관계는 중요치 않네. 우주의 역사는 오직 한 번뿐일세.” 우주의 역사니 뭐니 해도 잘 모르겠다. 다만, 원리는 몰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지금 이 늙은이가 말하길……. “내가 여기서 뭔 짓을 하든 미래는 바뀌지 않는단 뜻인가?” “그러네. 한 번이라도 관측된 시간대는 변하지 않네.” “쉽게.” “자네가 여기서 무슨 생각을 갖고, 그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그 어떤 대화를 나누든. 이미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라는 뜻이네.” 이해와 납득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무슨 이론을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럼 드왈키는? 성지에 두고 온 편지들은? 결국에는 내가 뭘 하든 달라지는 게 없단 거야? ‘그럴 리가.’ 노인네의 말을 귀담아듣되, 너무 맹신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 노인네라고 해서 만사에 통달한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오리지널 클리어인 것도 몰랐지 않나. “믿는 눈치가 아니군.” “…….” “뭐, 자네도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면 알 수 있을 걸세. 시대의 부름을 받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내 아우릴 가비스는 주제를 돌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래서 형평성 말인데……. 열 개는 너무 비상식적일세. 세 개에 하나는 어떤가?” 거, 사람 정신없을 때를 노리기는. 우주의 역사니 뭐니,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며 나도 협상에 집중했다. “세 개는 너무 적다. 다섯 개에 하나 정도라면 모를까.” “……자네, 너무 양심이 없는 것 아닌가? 20년 뒤의 정보가 중요하기는 해도,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해서 결코 밀리진 않을 걸세.” 아우릴 가비스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 심정은 이해 못할 바 아니었다. 지구인 출신 플레이어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이 다 ‘아우릴 가비스’가 알고 있을 정보에 흥미를 가지며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의 가치는 환경에 따라 다른 법. 목마른 자에게는 한 줌의 물이 백 근의 황금보다 귀하다. “질문 다섯 개에 하나. 싫으면 마라.” 나는 기다렸다는 듯 최종 제시안을 내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 망할 것들이…….” 노인네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그래서 내가 방금 선을 넘었나 싶어서 잔뜩 쫄았지만……. “아, 미안하네. 자네에게 한 말이 아닐세. 단지 아까 봤던 그자들이 또 규칙을 어겨서 말이지.” 다행히 정색의 원인은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노인네는 내가 오해를 했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듯하네. 이 얘기는 다음 달에 또 나누는 게 어떤가? 그 형평성 문제는 내가 그동안 좀 생각해 보겠네.”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나, 나는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기서 그런 티를 내는 순간, 성사되기 직전이었던 협상 조건이 내려갈 테니까. “좋다.” 나는 딱히 급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그가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리고……. “……돌아왔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숙소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 [00 : 00]. 15일 자정, 시간만을 확인한 나는 다시금 누워 잠을 청했다. 물론,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수많은 상념과 걱정, 불안거리들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날은 밝았다. “……변한 건 없어.” 아침이 되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래 봤자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뭔 짓을 하든 과거에 있던 일이니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게 가만히 있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0이다. ‘오늘은 없네.’ 그런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렀지만, 레이븐은 보이지 않았다. 이 꼬맹이는 대체 어디 간 거지? 나 없는 동안 또 아무나 전기로 지지다가 혼쭐이 나기라도 한 건가? ‘……결국 안 왔네.’ 레이븐이 평소에 귀가하던 시간까지 기다렸지만, 레이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씁, 걱정되게.’ 예전에 집이 어딘지 알아둘 걸 후회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도서관에 방문했다. 레이븐이 나타난 것은 그렇게 하루를 더 공친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왜 그동안 안 왔어?” “일이 있었다. 너는?” “그냥.” 레이븐은 딱 봐도 둘러대는 투로 말하며,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왜 자꾸 고개를 돌리나?” “안 돌렸어.” 아니, 지금도 돌리고 있잖아. 머리는 이상하게 산발을 해가지고. “이리 와봐라.” “싫어.” “그럼 내가 가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레이븐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그리고 겨우겨우 참을 인을 머리에 새겼다. ‘그래, 이걸 숨긴다고 그러고 있던 거구나.’ 레이븐의 눈가에는 큼지막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구냐?” “……상관없잖아.” 하, 이걸 어떻게 해서 입을 열게 하지? 그런 고민을 하며 한숨을 쉬고 있자니, 레이븐이 내 눈치를 살살 보며 달래듯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마. 집에 늦게 들어갔다가 엄마한테 도서관에 갔던 걸 들켰을 뿐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입맛이 썼다. 이 어린애가 엄마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집에 늦게 들어갔다라…….’ 귀가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키던 애였다. 한데 어쩌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된 걸까. “혹시 나를 기다리다 늦은 거냐?” “…….” 레이븐은 내 말에 침묵했고, 그 침묵은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 되어 주었다. 뭐, 뒤늦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미 늦었어, 인마. “내 얘기는 됐으니까, 미궁 이야기나 해줘. 그때 하다가 말았잖아.” “……어디 얘기를 하고 있었지?” “도플갱어 숲. 도플갱어는 죽은 척하는 게 특기라는 데까지 했었어. 근데 이건 별로 재미없으니까 다른 거 해줘.” 일단 레이븐이 바라는 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미궁 얘기를 해주었고, 그런 시간이 이어져 어느새 레이븐이 귀가할 시간이 되었다. “그럼 가볼게.” “그래.” “내일도… 올 거야?” “별일 없으면.” 내 대답까지 들은 레이븐은 총총걸음으로 뛰어 도서관을 떠났다. 따라서 나도 이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따라가 볼까.’ 레이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남의 가정사에까지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얘가 맞을 만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암, 이건 좀 선을 넘었지. 292화 거물 (4) 왕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라비기온. 상류층 사람들은 이곳에서 지내는 이들을 몽땅 서민층이라 묶어 부르지만, 라비기온에서도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 탐험가, 번듯한 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이런 이들은 광장이 가까운 중심부, 대로변에 집을 얻어 생활한다. 그런 곳은 치안도 좋고, 주거 환경도 제법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얘는 어렸을 때 이런 데서 살았구나.’ 대로변에서 멀어져, 뒷골목을 타고 거대한 블록 안으로 들어서면 사정은 다르다. 경비의 눈이 닿지 않는 열악한 치안. 건물은 낡고 헤졌으며, 그런 건물을 수십 개의 방으로 나눠 방 한 칸을 얻어 생활을 한다. 욕실도 공용이고, 주방도 공용. 하룻밤에 500스톤 하던 바바리안 숙소도 외곽일 뿐, 이런 곳에 있지는 않았건만. “…….” 레이븐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거주민들의 경계 어린 시선이 쏟아진다. 비프론에서의 경험과 비슷하다. 다들 경계만 할 뿐 먼저 다가와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눈을 깔면 깔았지. ‘거, 바바리안 처음 보나.’ 바바리안의 장점을 새삼 느끼면서도, 레이븐이 얼마나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왜냐면 여기는 사람 많던 대로변이 아니거든. 저 사람들도 내가 레이븐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걸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서는 새끼가 없다라…….’ 그래, 자기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이거지? 뭐, 됐다. 나도 레이븐을 이곳에 오래 둘 생각은 없으니. 끼이이익. 턱. 이내 뒤를 밟던 레이븐이 한 건물로 쏘옥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처음엔 그게 집인 줄도 몰랐다. 그냥 문이 벽에 달려 있는 게 끝이었으니까. ‘그럼 조금 기다려 볼까.’ 집에 도착한 후로는 벽에 기댄 채 시간을 때웠다. 퇴근한 레이븐의 친모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흘렀을 때였다.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윤기 가득한 금발과는 거리가 멀었고, 키도 훨씬 컸지만 얼굴만은 레이븐이랑 판박이였거든. “그쪽이 아루아 레이븐의 엄마인가?” “맞는데… 누, 누구세요……?” 왕년에 미인이었을 것 같단 말을 하자기엔,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다. 많아 봐야 이십 대 후반 정도? 그럼 초반에 애를 낳았던 건가? 뭔가 기분이 묘해서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레이븐의 모친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또 뭔가 사고를…….” “여긴 좀 그러니, 밖에 나가서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지.” “……네.” 일단 친모와 함께 대로변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카페 역할을 하는 다과점에 들어갔다. “걱정 마라.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네에…….”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굉장한 위화감이 들었다. 레이븐이랑 얼굴은 판박이인데, 말투나 그런 게 아예 다르단 말이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시켜라.” “…….” “없으면 내가 알아서 시키겠다.” ‘친구 모임’ 짬밥이 있기에 여자 도움 없이도 메뉴를 주문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다과점답게 금방 주문한 것이 나왔다. 물론 나도, 이 여자도 입에 대지는 않았다. 후,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일단 오해부터 풀지. 나는 레이븐이 뭔가 사고를 쳐서 따지러 온 게 아니다.” “네? 그럼…….” “나는 레이븐과 친구다.” “친구…… 요?” “바바리안은 나이 같은 거 신경 안 쓴다.” “그, 그렇군요…….” 친모는 떨떠름한 얼굴이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떤 성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레이븐이랑 정반대네. “오늘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에 상처가 있더군.” “아…….” 이내 친모는 내가 방문한 이유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만, 다시 생각하니 어딘가 억울했을까? “그건… 그쪽이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내내 쫄아서 말도 못 하더니, 이런 건 또 딱 잘라 선을 긋는다. 확실히 그만큼 원론적인 말이긴 했다. 세금을 못 내면 형장에 오르는 미친 세상. 부모가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매타작 좀 한 것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아니, 그걸로 뭐라 하는 쪽이 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세상이다. 하지만……. “관여? 어려운 말은 하지 마라.” 나는 그딴 건 모르는 바바리안족의 당당한 일원. “친구가 맞았으면, 피의 복수를 할 뿐이다.” 별다른 감정 없이 담담하게 말하자, 친모가 흠칫 굳었다. 하긴, 피의 복수니 그런 말을 들어 볼 일이 있기나 하겠어. 들어 보니까 그냥 주방에서 일하는 것 같던데. “……그래서 저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앞으로 손찌검을 하지 말라고? 그러면 되는 건가요?” “아니, 놓아줘라.” “무슨 뜻이죠?” “너도 알 텐데? 레이븐은 대단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의 핏줄이니까요.” 친모는 그리 말하며 입술을 짓눌렀다. 눈가에는 선명한 증오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바람 나서 가정을 버린 남편이라도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레이븐을 마탑으로 보내라.” “그럴 여유는 없어요.” “필요한 비용은 내가 전부 내겠다.” “……왜 그렇게까지 하죠?”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 대답에 친모는 오랜 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절 버릴 거예요.” 응? “어느샌가 잘난 사람이 되어 나를 깔보겠죠. 그러다 결국엔 자기 세상으로 떠날 거예요. 그날의 그가 그랬듯이, 그 사람 핏줄이니까…….” 아……. “뭔가 잘못됐지 않아요? 왜 그 아이는 인생이 그렇게 편하죠? 분명 내 배로 낳은 자식인데, 나는 평생 살아오며 그런 이유로 도와준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어요. 근데…… 그런데 왜 그 아이는…….” 이후로도 친모의 입에서는 온갖 설움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말의 형태로 쏟아졌다. “그러고 보면 전 재능도 없었죠. 글을 배우는 것도 느렸어요. 근데 그 아이는 그 나이에 마법을 배우고 썼죠.” 남편과 딸. 대상은 그 둘이 대부분이었으나, 결국엔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과 불만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트라우마. 그런 짧은 말로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증오는 복잡했고,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다 끝났나?” 나는 물었고, 그녀는 답했다. “좋아요. 마탑으로 보낼게요. 어차피 나랑은 얼굴 말고는 닮은 것도 없는 아이니까. 눈앞에서 아예 사라지면 저도 좀 마음이 편해지겠죠. 그래요. 저도 이제 좀…… 편해지고 싶어요.” “그럼 됐군.” 이야기가 끝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그리고 가게에서 나와 돈을 쥐어 주려 했지만, 친모가 거절했다.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마탑에서 사람을 보냈었거든요. 전부 지원해 줄 테니 마탑에 보내서 시험이라도 보게 해 보라고. 어린 나이에 마법을 막 쓰고 돌아다니니 눈에 띄었나 봐요.” “……그렇군.”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평생토록 일군 게 이 시궁창에 있는 방 한 칸이 전부인데.” 이후 친모는 기력이 쇠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뒷골목 안에 있을 집을 향해 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정심이 피어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인생은 대체 뭐였던 걸까요?” 저 여자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친모는 약속대로 레이븐을 마탑에 데려갔고, 레이븐은 며칠에 걸쳐 마탑에 자질을 인정받았다. 참고로 그 과정은 이틀에 한 번꼴로 도서관에 오는 레이븐을 통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는데……. “알테미온 학파에 들어가게 됐다고……?” “응, 그쪽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어린애라고 무시하지도 않고.” 결국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 말 대로인 건가? 이렇게 어릴 때부터 마탑에 보내 놓으면 미래가 조금은 바뀔 줄 알았건만. ‘그러고 보면, 나는 얘가 언제 마탑에 들어갔는지 모르는구나…….’ 당연히 열 살은 넘어서 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야 처음 만났을 땐 행정 마법사가 될 거라며 말하던 레이븐 아니었던가. 나중에서야 어떠한 사건이 생기며 심경 변화가 있으리라 여겼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마탑에 들어갔으니 잘됐군.” “……조금 걱정돼.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너는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다. 내가 보장하지.” “히히, 그래?” 아무튼, 레이븐과의 대화는 마탑에만 국한되지 않고 집안 얘기도 나누었다. 갑자기 엄마가 착해졌다던가? 보아 하니 친모는 나와 있었던 일을 레이븐에게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레이븐이 귀가할 시간이 되었다. “그럼 가 볼게. 아, 그리고 앞으로는 여기에 못 와. 내일부터는 마탑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거든.” “어차피 나도 내일부터는 못 왔을 거다.” “왜?” “일정이 생겼거든.” 내일은 아멜리아와 함께 노아르크로 내려가야 한다. 아마 목적을 이룰 때까지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레이븐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마탑에 가면 지금처럼 반말 찍찍 뱉지 말고 조심해라.” “응?” “아니, 다른 사람한테도 마찬가지다. 괜히 적을 만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섭지 않아도 하라면 해라. 적을 만드는 것만 아니라, 네 친구가 되려고 하던 사람도 그런 짓을 하면 도망쳐 버릴 테니까. 그런 태도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혹시… 너도 나 때문에 기분 나빴어?” 레이븐이 조심스레 한 가지를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조금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무언가 느낀 게 있었을까? “알았어. 앞으로는 안 할게.” “안 할게?” “……요.” 그래, 이제야 좀 꼬맹이답네. “근데 슬슬 가 봐야 하지 않나?” “응…….” 이내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끝마치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리고 기약 없는 말을 나누며 헤어졌다. “그럼 나중에 봐!” 장소, 시간 중에 그 무엇도 정해진 게 없는 약속의 말. 거, 존댓말은 또 얻다 팔아먹은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중에 보자.” 그때는 날 기억도 못 하겠지만. *** 레이븐을 떠나보낸 뒤, 나는 고민 없이 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야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 드왈키는… 살릴 수 없는 거구나.’ 레아틀라스 교단 산하의 보육원. 그 앞에 도착한 나는 한참이나 문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드왈키와 대화를 나눠 볼까 하는 마음이 피어났다가도, 이게 뭔 의미가 있겠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엔체 씨……?”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에미른?” 지난날, 봉사할 때 인연이 있었던 여자였다. 마지막에 회식 때는 용기를 바라며 묘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지. “여긴 어쩐 일이냐?” “그게 실은…… 이곳에 제 아들이 있거든요.” ……뭐?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제가 데려올 수 있게 됐어요. 정말 감사해요. 엔체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망설이고만 있었겠죠.” 본능적으로 느껴 버린 진실에 몸이 쭈뼛 굳었다. 그러나 확인은 해 봐야 했다. “혹시…… 아들 이름이 리올인가?” 리올 ‘워브’ 드왈키. 그리고, ‘워브’ 에미른. “어, 맞아요.” 이내 에미른이 놀라며 긍정의 말을 뱉었다. 그래, 드왈키의 미들 네임은 엄마의 이름을 딴 거였구나. “저기,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 아이랑 조금 닮은 것 같아서.” “후후, 그런가요? 하긴, 엔체 씨는 그 아이랑 둘이서 자주 얘기를 나누셨죠.” 에미른은 내 말에 기쁜 듯 웃었다. 그러나, 나와의 대화보다는 어서 드왈키를 데리러 가고 싶었을까?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아, 그래…….” 이내 에미른이 서둘러 내게 인사를 고하고서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나는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 시간이 몇 분 정도 이어졌을 때였다. 타닷. 나는 보육원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앉아서 책을 읽던 그 자리, 드왈키는 오늘도 그곳에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드왈키가 나를 보고는 인사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냥… 와 봤다.” “……?” 드왈키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간 지낸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스윽. 나는 고개를 돌려 건물 창 안을 들여다봤다. 데스크에 앉은 직원에게 서류들을 한 다발 건네는 에미른이 보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드왈키는 이제 친모와 지낼 것이다. 그러면서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고. 행정 마법사가 되었다가도, 그 꿈을 놓지 못해 미궁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모두, 내 동료가 되어 주어서 고맙소.] 죽겠지. ‘그게…… 전부 나 때문인 거야?’ 깊은 책임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우주의 티끌만 한 먼지가 된 기분도 들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무력감. 이에 반발하듯 그런 욕구도 피어났다. 아직 늦지 않은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뭔가 한다면 그 미래를 막을 수 있진 않을까. 그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얘를 납치하면 뭐든 바뀌겠지. ‘제기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장면이 재생됐다. 용기를 달라며 나를 찾아온 에미른의 얼굴이. 팀 반푼이 시절 친모를 떠올리며 추억을 곱씹던 드왈키의 목소리가. 자꾸만 보이고 들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그런다고 미래가 바뀌는 건 맞나? 만약 내 행동이 결과에는 영향이 없고, 단지 어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줄이는 일이 되는 건 아닐까? 꽈악.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고, 꽉 쥐어진 주먹에 작은 손이 포개어졌다. 드왈키의 것이었다. “크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만져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저도 언젠가 그렇게 커질 수 있을까요? 나중에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지킬 수 있을 만큼?” 그 물음에, 나는 참듯이 말을 뱉어 냈다. “너무, 걱정 마라.” 비록 몸은 빼빼 마르고 키는 작을지라도. “너는 큰 사람이 될 거다.” 나 같은 것보다. 아니, 내가 보았던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보다. *** 도망치듯 보육원 담장을 다시 넘었다. 그리고 골목길에 숨어 보육원을 보았다. 끼이이익. 시간이 지나자 보육원 문이 열리며 드왈키와 에미른이 나오는 게 보였다. “아줌마, 아줌마가 왜 제 엄마예요?” “그건……. 많은 사연이 있단다. 일단 가자. 가면 전부 알 수 있을 거란다…….” “…….” 둘은 모자 관계라기에는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는 길을 떠났다. 그리고……. “잘 가라, 드왈키.”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293화 뉴비 (1)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늦게 왔군.” 아우, 깜짝이야. 분명 잠그고 나갔는데, 문은 어떻게 딴 거야? ‘불이라도 켜고 있던가…….’ 이내 램프의 불을 밝히자, 내 방 침대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음,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딘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저기압인 건 나도 매한가지다. 그래서 그냥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눈으로 빤히 꼬나보자, 아멜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정까지 장소로 가야 하니, 준비하고 나와라.” 그래,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인 거구나. 얼른 장비부터 챙겨 입어야겠네. 쾅. 이내 아멜리아가 방을 나선 후, 방 한쪽 구석에 보관해 둔 장비를 하나씩 착용했다. 스윽. 2단계 소재, 와이번 가죽으로 제작한 장화. 철컥. 포션이나 스크롤 등의 수납이 가능한 확장형 포켓이 달린 일체형 벨트. ‘허전하네.’ 각반이나 흉갑은 사지 않았다. 약탈자 다섯 명을 턴 것으로 풀 세트를 맞추는 건 불가능하니까. 차라리 방패와 무기에 몰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제작한 것이 3단계 금속인 아이디움 함량 100%의 메이스. ‘그립감 좋고.’ 5단계 금속인 아다만티움제 대형 전투 방패. ‘그래, 방패면 이 정도 사이즈는 돼야지.’ 둘 다 중량이 너무 높다 보니, 이 두 개를 구매한 것으로 아멜리아가 준 예산은 바닥이 났다. 그래서 투구는 그냥 평범한 강철제다. 뭐, 이쯤 되면 강철로는 방어력 기댓값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어차피 방어구로 쓰려고 산 건 아니니까.’ 3주 전에 이 장비들을 주문 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미래에 관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통짜 철투구를 제작했다. 내가 초창기에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시야 확보 용도로 T자 흠만이 나 있는 투구. 물론 차이는 있다. 대장간이 다르다 보니 디자인에서부터 차이가 있을뿐더러……. ‘그때보다 흠이 좁아서 그런가? 엄청 불편하네.’ 얼굴이 노출되는 부분이 훨씬 줄어들었다. 앞으로 미궁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날 텐데, 내 얼굴을 노출했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 ‘사실 이제 와서 이런 게 의미가 있냐 싶긴 한데…….’ 한숨을 내쉬며 잡념도 함께 털어냈다. 그리고 거울을 한 번 본 뒤 밖으로 나갔다. 아멜리아는 준비를 끝마쳤는지,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나왔군.” 거, 드디어는 무슨. 10분도 안 걸렸구만. “……너.”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아멜리아가 흠칫 굳었다. 그리고 마치 취조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 투구, 어디서 났지?” “주문 제작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주문 제작?” 내 대답을 들은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으며, 눈빛은 매서웠다. 마치 파루네섬에서, ‘니벨즈 엔체’의 신분증을 처음 보았을 그때처럼. 아, 물론 그때와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다. “왜 먼저 말을 걸어 놓고 그러고 있나?” “……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이기적인 여자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일단 이동하지.”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접선 장소인 하수도 앞에는 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중개인이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마치 밀입국자가 된 기분이라 해야 하나? “…….” “…….” 중개인은 인사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이는 아멜리아도 매한가지였다. 중개인이 로브 밖으로 손을 꺼내자, 거기에 돈주머니를 올려둔 게 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지만, 일단 내려가고 나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기가 쉽지 않소.” 이내 계산이 끝나자 중개인이 형식적인 경고의 말을 해왔다.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돈 받기 전에 하든가. 딱 보니까 환불도 안 해 줄 거 같구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다.” “후후, 그렇다면야.” 아멜리아가 차갑게 말하자, 중개인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열쇠를 꺼내 하수도 철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뒤떨어지지 않게 잘 따라오시오.” 노아르크 여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미로처럼 얽히고 얽힌 하수도 속을 몇 시간이고 걸은 다음에서야 입구가 나타났다. “자, 나는 여기까지요. 이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 이 지도대로 가다 보면 문이 보일 텐데, 경비에게 이 패를 보여 주면 들여보내 줄 거요.” 이내 중개인은 앞으로 우리의 신분패가 될 것을 넘겨준 뒤 뭔가 마도구 같은 것을 가져다 대 입구를 열었다. 드르르륵. 평범한 벽으로 위장되어 있던 석문이 옆으로 밀려나며 드러난 것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다만 아래로 내려가려던 찰나. “혹시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소?” 내내 필요한 말을 제하고는 입을 열지 않던 중개인이 물었다. “바바리안이 노아르크로 내려가는 일은 흔치 않은데,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오? 사랑의 도피 같은 건 아닐 테고—” “그만.” 아멜리아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역할이 끝났다면 이제 가 봐라.” 프로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말투. 보아하니 살기까지 자연스레 섞인 거 같은데……. “……이거 나답지 않게 실례했군. 먼저 가시오. 문이 닫히는 것까지는 확인을 해야 하니.” 중개인이 꼬리를 내리자, 아멜리아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나도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드르르륵, 쿵-! 머지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후, 이러니까 무슨 지옥 속으로 가는 거 같네. “잠깐, 기다려라. 지도부터 봐야지.” 계단을 모두 내려온 뒤 지도를 펼치려 했으나, 아멜리아가 이를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성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아, 맞다. 얘 여기 출신이었지. 아무튼, 오랜만에 길잡이 역할을 내려놓고 얘 뒤만 쫄쫄 따라가니 목적지가 나왔다. 지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드넓은 공동. 라프도니아 왕궁의 성문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석문이 저 멀리서부터 보였다. “흐하하핫, 거기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이리들 오시오!” 성문 앞에는 오직 한 명의 남자만이 자리 하고 있었는데, 바바리안만큼이나 다부진 체형을 가진 인간 남성이었다. 아멜리아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책 잡힐 일은 하지 마라, 가벼워 보이는 말투와 달리 이 도시에서 손 꼽히는 강자니까.” “아는 자인가?” “노아르크에서 지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자다.” 흐음, 그런가? 그렇게 세 보이진 않는데……. 아무튼, 이후 성문 앞의 사내에게 아까 받은 패를 건넸다. “오호라아! 그놈들이 웬일로 제대로 된 자들을 데려왔군? 반갑소. 문지기 렉 아우레스라고 하오!” “…….” “아, 본명은 조금 껄끄러운가 보구려? 걱정들 마시오. 어차피 여기 안에서 본명을 쓰는 자들은 없으니까. 새로 쓸 이름은 정해들 오셨는가?” 본인을 문지기라 소개한 렉 아우레스는 이내 우리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미리 정해 둔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아멜리아는 ‘에밀리’. 그리고 나는……. “토르의 아들 비욘.” 그냥 예전에 썼던 가명을 다시 꺼냈다. ‘니벨즈 엔체’도 가명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새로 만드는 게 낫다는 판단. 물론,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긴 했다. 패에 각인할 이름을 적는 것일 뿐, 도시 내에서는 어지간하면 이름을 묻지 않는다고 하니까. “후후, 바바리안식 이름을 패에 새겨 넣는 건 근 5년 만인 거 같구려.” 이내 문지기가 패를 돌려주었을 때는 우리가 말한 가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뭔가 더 할 게 남았나?” “아니, 입성 절차는 끝이오. 저쪽으로 가시오.” “……저 문이 열리는 거 아니었나?” “흐하하핫, 고작 두 명 들어가는 데 저 큰 문을 열고 닫는 건 낭비지 않겠소?” 이내 문지기가 옆에 나 있는 쪽문을 열어 주었다. 드르르르륵. 옆으로 밀려나는 석문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곳에 왔던 첫날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딱 이랬는데. 쿠웅. 이내 문이 완전히 열리며 낯선 도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에밀리, 그리고 토르 비욘.” “토르가 성이고 비욘이 이름이다.” “흐하핫! 아, 그랬지? 아무튼! 노아르크에 온 것을 환영하오!” 결국 내가 여기까지 와보게 되는구나. *** 흔히들 노아르크는 범죄자 소굴이라 생각한다. 그야 당연하다. 지상에서 살지 못할 만큼 죄를 저지른 자들이 흘러들어가는 곳이 여기였으니까. 심지어 이곳은 ‘오르큘리스’의 은신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외로 멀쩡하군.” 성벽에 묻은 핏자국도 없고, 길거리도 깨끗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다.” 거, 뉴비가 신기해할 수도 있지. “따라와라.” 우선 이곳 토박이인 아멜리아를 따라 움직이며 도시를 구경했다. 그리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저기 천장에 박힌 돌은 뭐냐?” “마도구다. 마석을 원료로 빛을 내지.” “저 움직이는 인형 같은 건?” “순찰자란 이름으로 불리는 골렘이다. 전부 성주에게 귀속되어 있지.” “아, 그리고 혹시 여기에도 시장 같은 게 있나?” “있기는 하지만 크지는 않다. 이 도시에는 연금술사가 한 명뿐이니까. 대부분의 식품은 몇 가지 품목으로 통일시켜서 배급을 한다.” 음, 그렇구나. “그럼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연금술 공방에서 마석을 주고 신청을 하면 된다. 다만 이틀 정도 걸리는 데다가 값도 지상에 비하면 훨씬 비싸지. 질문은 다 끝났나?” “……당장은.” “다행이군. 안 그래도 네 덕분에 이목이 끌린 거 같은데.” “응?” “미행이 붙었다. 속도를 올리지.” 이내 아멜리아는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속도를 올렸고, 나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미행이라니?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이 도시에서 바바리안은 특히나 흔치 않지. 분명 보자마자 오늘 지상에서 내려왔단 걸 알아챘을 거다.”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진 알 거 같았다. 지상에선 악마들이 산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는 노아르크 아닌가. 막 지상에서 내려온 신입들의 주머니가 얼마나 탐날지 짐작이 간다. 지상에서 갖고 있던 재산이 싹 다 들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다만……. “분명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 사람 사는 곳이니 이런 놈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 그런가? “그것도 그렇긴 하군.” 도무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쿨하게 납득했다. 애초에 라프도니아라고 크게 다른 건 아니니까. 라프도니아에서도 외곽 지역을 밤에 돌아다니는 부류는 셋 중 하나였다. 범죄자거나.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는 탐험가거나. 그도 아니면, 무소유의 신념을 지닌 자거나. “그럼 이제 어쩔 거지?” “순찰자의 눈이 닿지 않는 뒷골목으로 갈 거다.” “응? 뒷골목?”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멜리아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노아르크에서 태어난 ‘일반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으며 성주가 어떻게든 찾아내 응징을 가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OK라던가? “신입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놈들이니, 이것저것 가진 게 많을 거다.” 후,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역시 토박이들은 마인드 자체가 다르구나. 그래, 어떤 경우에서든 파밍이 먼저긴 하지. 터벅. 이내 골목길로 들어와 한참이나 헤매듯 이동하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막다른 길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등을 돌리자……. “어딜 그렇게 가쇼? 멀리 가지도 못할 거면서.” 기다렸다는 듯 열댓 명의 약탈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길로 들어가면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설마 알아서 여기까지 제발로 들어와 줄 줄이야. 이래서 신입들이란.” “우리도 다 신입 때 겪은 일이니 너무 원망들 마쇼.” 신입을 털어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도시의 고인물들. 마치 섭종 직전의 망겜을 보는 것 같다. 쯧, 뉴비는 보듬어 안아줘야 하는 것을. “응?” 이내 그들 무리를 쓱 둘러보던 나는 한 명의 인간 남성을 발견하고서 흠칫 굳었다. 다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 너.” “나 말인가?” 콕 짚어 묻자 호기심이 동했는지 놈이 앞으로 나왔다.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체형을 가진 녀석은 반짝이는 흉갑을 입고 있었다. 내가 못 알아볼 수 없는 재질의 흉갑이었다. “……라이티늄제군.” “허,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소매넣기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고인물이 뉴비에게 아이템을 양보하는 건 상식이잖아? 안 그래도 상의를 벗고 있으니 창피했는데 잘 됐다. “벗어라.” “……?” “피 묻기 전에.” 문명인으로 진화할 시간이다. 294화 뉴비 (2) 아마 놈들도 어느 정도 경계는 했을 것이다. 신입이 얼마나 강한지 정보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처럼 열 명도 넘는 무리를 지어서 우르르 몰려왔겠지. 참 고맙게도. “벗어라.” “……?” “피 묻기 전에.” 내 말이 골목길에 울려 퍼진 순간, 녀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상황이 납득되었을까. “…….” 놈을 포함해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사냥감이 도망칠 땐 나보다 약하다 싶어 쫓지만, 반대로 강하게 나오면 뭔가 잘못됐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위험하다는걸. 스윽. 천천히 걸음을 좁히던 녀석들이 뒤로 거리를 벌리며 기습에 경계했다. 내게는 크게 의미 없었다. 벽으로 가로막힌 골목길. 옆으로도 비좁아 [거대화]를 쓸 공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좋아.’ 위로는 방해될 게 없거든. ‘도약.’ 단숨에 놈들 머리 위를 가로질러 건너편에 착지했다. 오케이, 이거로 퇴로는 막았고. “……이놈부터 죽여!” 놈들은 당황하며 일단 내게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퇴로가 막히니 이것부터 뚫어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후웅-! 새끼들, 잘 피하네. “막지 말고 피해라!” “이딴 느린 거에 맞는 놈 없지?” 내 앞에 선 세 명은 미꾸라지처럼 내 메이스를 피하며 저마다의 흉기를 휘둘러왔다. 대부분의 공격은 물리 내성으로 버텨졌지만, 스킬이 담긴 몇몇 공격은 두터운 가죽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푸욱. 거, 따갑게시리. [거대화]만 켰어도 피 한 방울 안 났을 텐데. 뭐, 나를 지키는 방법이 ‘방어’만 있는 건 아니겠다마는. ‘초월.’ 메이스를 위로 들어 올리며 머릿속으로 커맨드를 입력한다. [초월]로 지정할 대상은 당연히 정해져 있다. ‘휘두르기.’ ‘타격 범위가 3배 증가’ 특성이 추가되는 덕분에 많은 적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그 콤보. 후우우웅-! 이내 메이스를 바닥에 내려찍음과 동시에, 메이스가 여의봉처럼 길어지며 크기를 키운다. [거대화]와 연계했을 때보다는 한참이나 작은 범위였지만……. “미, 미친……!” “피해!” 어디로 피하게? 이렇게 좁은 골목길에서. 콰콰콰콰아아앙-! 놈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지만, 가장 앞에 있던 셋은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우, 속 시원해. 터벅. 이내 다진 고기로 변한 삼인방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자 놈들이 뒤로 물러섰다. 아주 사지는 귀신처럼 찾아서 들어가는구나. “여자! 여자를 잡아!” 인질극이라도 할 생각인지 놈들이 아멜리아에게 달려들어 손을 뻗고 무기를 휘둘렀다. 물론 닿을 턱이 없었다. 퍽, 퍽, 쿠웅-! 주먹과 발차기로 순식간에 두 명을 제압한 아멜리아가 허벅지에서 단검을 빼내며 다른 한 명의 목주가리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비록 상대도 강철 보호대를 찬 손목을 들어 올려 방어하긴 했지만……. 서걱-! 오러를 쓸 줄 아는 여자한테 그게 통하겠냐고. 툭. 투둑. 깔끔하게 절단된 손목과 모가지가 거의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리고……. “오, 오러라니…….” 여기까지가 전투의 끝이었다. 아멜리아가 오러를 쓰는 순간 전부 무기를 그냥 내려놨거든.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자비에 목숨을 걸기로 한 것이다. 그래 봐야 한참 늦었다마는. “사, 살려 주십시오. 가진 것은 전부 드릴 테니…….” “어떡할 거지?” “당연히 죽인다.”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이에 납작 엎드렸던 놈들도 서둘러 무기를 집어 들고서 항전했으나……. “죽어!” 아니, 그게 되겠냐고. 보니까 다들 평균 6등급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구만. 퍼억, 콰직. 서걱! 나와 아멜리아는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온 2인조 약탈자 파티처럼 신속하게 살아 있는 놈들을 정리했다. 걸린 시간은 총 5분 안팎. ‘딜러가 세니까 믿음직 하긴 하네.’ 여지껏 어느 팀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든든함. 얘는 나중에 어떻게 팀에 못 넣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신속하게 손을 움직여 시체 파밍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이었다. “으윽…….” 처음부터 내가 눈독을 들였던 라이티늄제 흉갑을 벗기고 있자니, 놈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뭐야, 기절해 있던 거였어? 퍼억-! 일단 뒤통수를 후려쳐 눕힌 뒤,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근데 이놈은 왜 기절만 시킨 거지?” “……아까, 피 묻은 건 싫다 하지 않았나.” 아……. “고, 고맙다?” “…….” “크흠흠.” 잠시 어색한 상황도 있었으나, 몇 분 더 지나자 대충 파밍이 끝났다. 어찌된 게 전투보다 파밍이 더 오래 걸리네. 그래도 노동 대비 수익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지상에서 내다 팔면 7천만 스톤은 되겠는데.’ 확장형 배낭에 쑤셔 박기 전, 전리품들을 한 번 쓱 둘러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몇 분 치고받고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설마 지하에 이런 개꿀 사냥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어쩌면 노아르크는 사람 살기 좋은 동네일지도 모르겠다. *** 철컥. 라이티늄제 흉갑을 입은 뒤, 놈이 입고 있던 세트로 각반과 잡다한 장비들까지 착용했다. 흉갑만큼이나 사이즈가 찰떡이었다. 암, 바바리안이고 뭐고 모름지기 전사라면 갑옷은 제대로 맞춰야지. “그럼 슬슬 이동하지.” “아, 그래.” 커튼이 쳐진 창문들 틈으로 느껴지는 인근 거주민들의 시선이 불편했기에,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아멜리아를 뒤따르며 마음 편히 주변을 구경했다. 신입인 티를 팍팍 내면 또 파밍의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판단. 음, 그랬을 터인데……. “미행은 없나?” “없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미끼를 무는 놈이 없다. “지금도 없나?” “……없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조심스레 아쉬움을 내비치자, 아멜리아는 무슨 이런 놈이 있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노아르크는 작은 곳이라 소문이 금방 퍼진다.” 아, 우리를 따라 들어온 놈들이 전부 돌아오지 못했으니, 아까처럼 섣불리 덤벼들 리 없다는 거구나. “……으윽.”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이에 아멜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낮췄다. “다친 건가? 아까 분명 외상은 없었는데, 설마 독?” 아멜리아가 서둘러 해독제를 먹이려 들기에, 나는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라. 다친 척하는 거다.” “………뭐?” “혹시 이러면 또 와줄 수도 있지 않나.” “바바리안, 너는 정말…….” 아멜리아의 눈빛에 혐오가 생기는 듯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쩝, 자기도 파밍할 땐 즐거워 해놓고. 이렇게 사람한테 무안을 주네. “얼른 따라오기나 해라. 더 늦으면 오늘 밖에서 자야 할 수도 있으니.” “알았다.” 아무튼, 이후로 도시 중심부로 이동한 우리는 근처에 숙소 하나를 구했다. 아, 물론 방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잡았다. 소문이 퍼진 와중에도 우리를 노린다면, 그만한 실력을 가진 놈들일 거라던가? “다행히 침대는 여러 개군.” “노아르크의 숙소는 다 이런 형태니, 놀랄 거 없다.” “응?” “이런 곳에 혼자 와서 자는 놈은 이 도시에 없으니까.” 들어 보니 가정을 이뤄 집을 구매한 게 아니라면, 대부분 동료와 생활까지 함께하는 게 일반적이란 모양인데……. 어느 정도 납득은 간다. 이런 곳에서 생활을 하려면 무리 지어 다니는 게 가장 안전하긴 할 테니까. “얀델, 네가 먼저 씻어라. 그동안 나는 전리품을 정리하고 있지.” “아, 금방 나오겠다.” 이후 순서대로 몸을 씻은 다음에는 아멜리아가 욕실에 들어갔고, 그다음에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전리품은 어떻게 할 거지?” “일단은 팔지 않고 보관할 거다. 추후 지상에서 파는 쪽이 세 배는 더 비싸니.”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나는군?” “수요보다 공급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음, 하긴 그렇겠네. 약탈자들은 마석보다 장비를 더 많이 캐오니까. “근데 예전에 들어 보니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상단도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냥 그쪽에 넘기면 안 되나?”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군. 내가 세 배 더 비싸다 말한 건 상단에 넘겼을 때를 말한 가격이었다.” “……그렇군.” “그러니 필요한 게 있으면 팔 생각하지 말고 써라.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니까.” 아무튼 전리품 처분 관련 대화는 이거로 끝. 이후로는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거지?” 일단 예정대로 노아르크 입성은 성공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이뤄야 할 목표는 총 두 가지. 1. 성주가 보관 중인 ‘기록의 파편석’을 탈취해 원래 시대로 돌아가기. 2. 아멜리아의 소망 이루기. 사실 말은 않았지만, 2번의 경우에는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이 여자의 소망이 이뤄지려면 과거가 바뀌어야 하니까. ‘그때 표정이 굳은 걸 보면 얘도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거 같기는 한데…….’ 하면, 과연 아멜리아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었을까 봐.”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아멜리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계획에 변동은 없다.” 그래, 너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구나. *** 지하도시 노아르크에도 낮과 밤은 존재한다. 다만, 새벽과 저녁은 없다. 활동 시간이 되면 천장에 박힌 보석들이 빛을 뿜어내고, 밤 시간이 되면 최소 출력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낮이군.” 하룻밤을 지내고, 창문 너머가 밝아지자마자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낯선 도시라는 게 확 느껴졌다. 그야 낮이 되자마자 모든 건물에서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닐 테니까. “그만 구경하고 이리 와라. 늦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 “아, 알았다.” 이후 아멜리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노아르크 중심부에 위치한 영주성이었다. 어제 멀리서 봤을 때와 달리 커다란 성문은 활짝 열린 채로 수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들 왜 저리로 가는 거지?” “대부분의 일자리가 영주성에 있으니까. 미궁에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거기서 배정받은 일을 하고 삯을 받아 생활한다.” 이건 뭐,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하긴, 이런 데서 살아남았으니까 노아르크 출신들이 다 그렇게 악착같은 거겠지. [미궁 관리처]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탐험가 길드와 비슷했다. 실제로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럼 이따가 보지.” “아, 그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서로 짧은 줄을 찾아 섰다. 노아르크에선 미궁에 들어가려면 생각보다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일단 이제 막 도시에 들어온 신입이라면 따로 등록부터 해야 할뿐더러, 보아하니 매번 미궁에 들어갈 때마다 입장비도 따로 지불을 해야만 하는 모양인데……. ‘어찌된 게 여긴 라프도니아보다 더 악질이냐.’ 노아르크의 시초가 왕가 타도를 외치던 ‘오르미 혁명단’이란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그나저나 줄은 대체 언제 줄어들어? 이럴 거면 라프도니아처럼 번호표라도 만들어 두던가. 사람 다 모아두고 줄 세우는 건 뭐 하는 짓이야.’ 그렇게 느린 일처리와 낙후된 시스템에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으며 30분 넘게 줄을 서던 때였다. “오, 형씨! 등록 서류를 쓴 걸 보니 신입인가 봐?” 다섯 명으로 된 탐험가 무리가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친한 척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근데 우리가 바빠서 그런데 순서 좀 양보해 줄 수 있나? 응? 이제 우린 같은 진영 사람이잖나. 서로 돕고 그래야지.”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뭐지?’ 또 소매넣기인가? 295화 뉴비 (3) 고개를 돌려 어깨 위로 올라간 손을 보았다. 특이한 문양의 반지가 검지에 끼워져 있었다. “아공간 반지군.”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연 저 반지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마치 아직 열지 않은 랜덤 박스를 보는 듯한 기분. 스윽. 나도 모르게 반지로 손이 향했다. 내 보물……. “……뭐야, 이 새끼!” 손이 닿자마자 질색을 하며 어깨에 올린 손을 떼는 사내. “바바리안, 이 새끼! 너 설마……!” 기겁하는 눈깔을 보니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알 거 같았다. 놈의 동료들도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어쩐지 바바리안이 신입인 게 이상하더라니.” “정상적인 놈이라면 이 도시까지 내려올 리 없지.” “과연 이런 성향 때문에 부족에서 내쫓긴…….” 뭐래, 이 미친놈들이. 서둘러 오해를 풀어야 했다. 따라서 신속하게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퍼억-! 첫 타는 감히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친한 척을 했던 뻐드렁니의 면상. “컥!” 크게 벌어진 녀석의 입에서 하얀 무언가가 튀었다. 주먹 한 방으로 뻐드렁니가 완치된 것. “베헬—라아아아아!” 전투 함성을 내뱉기 무섭게 주변에 가득하던 탐험가들이 뒤로 물러나며 공간을 만들었다. “싸움이다!” “와아아아아아!” “신입이랑 렉스 패거리가 붙었다아!!” 여기가 무슨 학교 교실도 아니고.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들도 ‘또야?’ 같은 표정으로 한숨만 쉴 뿐이다. 그래, 말리려는 놈은 하나도 없다 이거지? ‘오히려 좋아.’ 점점 노아르크가 마음에 든다. 어쩌면 나는 아닌 척하면서도 이런 상남자스러운 사회를 바랐을지 모른다. “이 새끼가!!” 전 뻐드렁니의 동료, 수염쟁이가 분개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래, 템전으로 가자 이거지? 혹시 몰라 무기 사용을 자제했던 나는 기다렸단 듯 메이스를 꺼내 휘둘렀다. 하지만……. 후웅-! 수염쟁이가 허리 숙여 메이스를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지지지직. 뒤에 있던 남자의 손에서 전기 구체가 스파크를 튀기며 날아왔다. 마법은 아닌 거 같고. 이능술사인 듯한데……. ‘응, 내 방패 아다만티움.’ 아다만티움은 속성 대미지 50% 감소를 가진 5단계 금속. 파짓-! 방패를 타고 전류가 몸에 흘렀지만, 이 정도는 그냥 항마력으로 버티면 그만이었다. 다만,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을까? ‘탱커를 잡을 거면 저주부터 걸어야지 새끼들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메이스를 휘두르자, 수염쟁이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 이해는 됐다. 놈은 내가 ‘경직’될 걸 예상하고, 더욱더 거리를 좁힌 상황이었으니까. 딱 후려치기 좋은 각도로. 퍼억! 오케이, 이거로 두 마리째. 쿠웅. 수염쟁이의 몸이 천장 위로 날아가 처박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야구였으면 파울이었을 상황. 나는 메이스로 어깨를 두드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뭐 하냐? 안 오고.” 새치기나 좀 하려 했다가 순식간에 동료 두 명이 박살 난 삼인방은 놀랍게도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렉스, 물러나자.” “……?” “어제 온 신입인데, 칼테 패거리가 뒤따라갔다가 전부 사체로 발견됐다는 거 같다.” 아, 너네는 아직 소문을 못 들었던 거구나. 아무래도 구경꾼들이 하는 말들을 통해 만만한 적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모양인데……. “하지만 이대로 물러났다간…….” “웃음거리가 되겠지.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저놈 동료 중에 오러를 쓰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오러……?” 렉스란 이름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윽. 다른 곳에서 줄을 서고 있던 아멜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 왔나.” “너는 사건이란 사건은 다 몰고 다니는 거 같군.” “이번엔 내 잘못이 아니다.” “……안다. 봤으니까.” 그리 말하며 아멜리아가 허벅지에 맨 단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게 결정적이었을까?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소?” 렉스란 이름의 사내가 제안을 해왔다. 거, 협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구만. “사과는?” “하리다. 그쪽을 만만히 보고서 무례한 요구를 해서 미안하오.” 업드리기로 마음먹었다면 바짝 업드리는 게 이쪽 문화일까? 의외로 녀석은 철저하게 저자세로 나왔다. ‘자, 그럼 어떡할까…….’ 고민하며 옆을 쓱 바라보니, 아멜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하고 보내 주라는 뜻. “좋다, 사과를 받아 주지.” “고맙소, 그럼…….” 내가 사과를 받자, 렉스와 동료들이 쓰러진 동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음,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그만.” “……?” “그 둘이 가진 건 전부 두고 가라.” “사과는 받은 게…….”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 사람아. 말뿐인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우린 같은 진영 사람이잖나. 서로 돕고 그래야지.” 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정 아니겠어? *** 한참이나 고민하던 렉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기절한 동료들의 장비를 벗겼다. “자, 됐소?” “반지는?” “……여깄소.” 후, 이게 또 대체 얼마래? 거의 돈이 복사되는 수준이다. 노아르크 애들은 대체 왜 가난하게 살았대? ‘아무튼, 반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가봐라.” “…….” 렉스 놈들을 쫓아낸 뒤에 벗겨낸 장비들을 다 아공간 반지에 집어넣었다. 후, 안 그래도 확장형 배낭은 불편한 점이 많아서 아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외모는 좀 많이 그렇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자들이었군.” “…….” “뭘 가만히 쳐다보냐? 자, 다시 줄이나 서자.” 이후 우리는 다시금 창구 쪽으로 향했다. 줄에서 빠져나온 덕에 서 있던 자리에는 어느덧 다른 탐험가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나는 이미 이 도시에 적응을 끝마쳤으니까. “오, 인간.” “……무, 무슨 용무요?” “아까 봤듯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순서 좀 양보해 줄 수 있나?” “……물론이오.” 이내 우리는 친절한 탐험가의 배려로 맨 앞줄에 설 수 있었다. 싸우기 전에는 중간 줄이었으니, 거의 30분을 아낄 수 있게 된 셈. “이곳 사람들은 정이 넘치는군.”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네가 이곳 출신인 줄 알겠군.” 허허, 부끄럽게 칭찬은. “나는 단지 적응이 빠를 뿐이다. 천재 같은 게 아니라.”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마는.” “후후, 솔직하지 못하기는.” “…….” 아무튼, 맨 앞줄이다 보니 금방 차례가 왔고 우리는 일정보다 일찍 등록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야 등급 조정 신청을 스킵 했거든. “원래 5등급까지는 올려 둘 거라 했지 않나?”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우리 소식도 성주 귀에 들어갔을 테니까.” 내 덕분에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괜히 등급 조정을 하면서 소유 정수를 만천하에 알릴 필요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길 잘했군.”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는 신중히 움직여라. 이 도시에 저런 송사리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알았다. 그럼 이제 오늘 할 일은 끝인가?” “그래, 일단 복귀해서 쉬지.” 이후 어제 잡은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아예 장기 임대로 돌린 뒤 외출을 자제하며 대기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멜리아의 예상과 달리 며칠이 지나도 성주 쪽에서 먼저 관심을 보이며 접근을 해오는 일은 없었다. 쩝, 일단 성주 아래로 들어가는 게 계획이었건만. “아멜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우리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잠시 시간을 두고 성향을 알아보려는 거 같군.” “그래서?” “일단 계속 기다려 보지. 언젠가 연락이 오긴 할 거다. 성주의 성격상 무소속인 상위 탐험가를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미궁 진입 날이 되었다. *** “와아아아아!” “얼마 만이냐!” “자, 돈 벌러 가자아아아아아!” 축제라도 벌어진 듯 많은 인파로 붐비는 광장. 미궁 진입 날이면 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오늘 광장에 모인 자들은 특히나 들떠 보였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저번 달에 미궁에 들어간 소수 인원이 대부분 생환하며, 미궁이 안전해졌다는 여론이 생겼으니까. 쪼들리던 이들로서는 더없이 기쁜 소식일 터. 촤아악- 마차를 타고 광장 옆의 도로를 지나치던 아루아 레이븐은 씁쓸하게 커튼을 쳤다. 새삼 실감이 났다. “그래, 벌써 한 달이나 지난 거구나…….” 비요른 얀델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탐험가들 사이에서 영웅이라 불리던 남자의 죽음이었으나,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단지 그녀의 주변만이 변하였을 뿐. “하아…….” 레이븐은 짧게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그래, 비요른은 죽은 거군.] 의외로 무리 내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움직인 것은 여전사였다. [뭐 하나? 다들 가서 쉬자. 피곤하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내일 얘기하자. 길드에는…… 내가 혼자 들르겠다.]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서, 당장 해야 할 일을 하려 했다. 비요른 얀델이 만든 이 팀을 유지시키는 것. 물론 잘 될 턱이 없었다. [앞으로…… 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비요른이 죽었으니, 앞으로는 우리 다섯이서 미궁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요정이 공격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탐사요? 지금 그게 문제인가요?] [그럼 뭐가 문제지?] [당연히 복수를 해야죠!] [복수라니?] [노아르크요! 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부터가 다 그 사람들 때문이잖아요! 애초에 그 빨간 머리 여자도 수상해요. 만약 그년이 살아 있고, 아저씨 일에도 연관이 있는 거라면…….] 요정의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아니, 연관이 없더라도 상관없어.] […….] [전부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분노에 이성을 잃은 심정은 이해가 됐다. 최근에 언니를 잃었던 것 역시, 노아르크가 원인이었으니까. [에르웬, 기분은 알겠지만 진정해요. 애초에 밖에 나갔다는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복수할 건데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서 쉬고서 내일 다시…….] [그래, 당신들한텐 그냥 그 정도였던 거구나.] [네?] [아저씨가 불쌍해요. 이런 사람들도 동료라고, 지켜 주겠다고 혼자 남아서.] […뭐라구요? 다시 말해 봐요.] [레, 레이븐 그만해라! 너까지 그러면 안 된다!] 여전사가 그녀를 막았다. 평소였으면 수인 전사가 나섰겠지만, 그녀에게도 그럴 정신은 없어 보였다. 근데 그게 눈에 띄었을까? […….] 요정이 수인 전사를 향해 다가갔다. [언니는요? 할 거죠? 복수?] [나, 나는…….] 수인 전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짐승 같은 년.]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던 요정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 떠났다. [에, 에르웬은 내일 내가 만나 보겠다. 그러니 우리도… 이만 가지.] 그렇게 그들은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사는 자기가 길드에 들러 비요른 얀델의 사망 신고를 하겠다고 했지만, 마법사가 이를 막았다. [아이나르 씨는 미샤 씨를 챙겨주세요. 이건…… 제가 할게요.] [하지만…….] [아이나르 씨는 글자도 못 읽으시잖아요.] [알았다. 부탁하지.] 헤어지는 순간까지 가정이 있는 수인 궁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던 것처럼, 팀이 분열되어 가는 과정을 씁쓸한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어디 보자, 사망자가… 비요른 얀델 준남작님?!] 사망 신고서를 길드에 냈을 때, 주변은 난리도 아니었다. 근처 탐험가들은 물론이고 직원까지도 뭔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으나, 레이븐의 표정을 보고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들었나?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 죽었다는군.] [설마 거인이 그렇게 갈 줄이야…….] [아까운 자가 죽었어.] 비요른 얀델의 죽음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명성만큼이나 빠르게 도시에 퍼졌다. 그리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 [아이나르! 미샤! 문 좀 열어보게! 정말로 얀델, 그 친구가 죽은 건가? 대, 대체 왜……. 열어보게!] 전 동료였던 드워프 전사 히쿠로드 무라드. [……무라드, 그만하시오. 내 길드에 들러 사망 신고서까지 확인하고 온 길이니. 우리까지 둘을 힘들게 해서 되겠소. 이만 돌아가고 다시 옵시다.] 브라운 로트밀러. 그리고 그 외에도 비요른 얀델이란 이름의 영웅에게 빚을 진 수많은 탐험가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 [그날, 우리를 살려 줘서 고맙네.] [이젠 도서관에… 오지 않겠군요.] 문 앞에 꽃이 쌓였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차대 족장으로 여기고 있던 바바리안족은 아예 성지 문을 걸어 잠그고서 몇 날 며칠간 장례를 치르며 미궁에 잠든 그의 영혼이 숲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주변만 바뀌었을 뿐. [……다들 당분간 탐사는 생각하지 말고 쉬죠.] 앞으로의 탐사 계획은 모두 정지됐다. 그야 넷이서 뭘 어쩌겠는가. 심지어 다들 제정신도 아닐진대.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아루아 레이븐,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쉰다고 바뀌는 건 없어.’ 그날 요정이 그렇게 떠나 버린 후, 아루아 레이븐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날이 흐를수록 모든 게 고쳐지기는커녕 더욱 엉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찾아야 돼.” 아루아 레이븐은 그날 이후로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매일같이 책에 파묻혀 보냈다. 오늘만 해도 왕궁에 있는 도서관에 들렀다가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죽음엔 의문이 있다. 도시에는 ‘스톰거쉬’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납득이 안 돼.” 정황상 그는 사냥에 성공했다. 바다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바닥에 못도 박아 몸을 고정시킬 기운도 있었다. 한데, 대체 그 짧은 사이에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말로 물에 휩쓸려 간 거라면, 장비는 왜 벗겨져 있던 거고? “뭔가 더 있어……. 뭔가 엄청난 비밀이…….” 레이븐은 숨쉬기 어려운 사람처럼 덜컥 가슴을 부여잡았다. 비록 마법사다운 합리적인 추론은 아닐지라도. “분명 더 있어야 한다고…….” 그녀에겐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296화 뉴비 (4) 정이 넘치는 도시, 노아르크. 하지만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볼 게 ‘정’밖에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너무 뒤죽박죽이라 적응 안 되는 물가. 노후되고 시대에 뒤처진 행정 서비스. 심지어 오늘 아침 결속 마법을 받으러 미궁 관리처에 찾았을 땐, 서 있던 줄의 행정 마법사가 도중에 피곤하다며 1시간 쉬고 오는 일도 있었다. 뭐, 그다음엔 홧김에 맨 앞 줄로 가 순번을 양보받긴 했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아, 잠깐 기분이 묘해서. 이 안은 정말 20년 뒤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군.” “무슨 당연한 말을 새삼스럽게 하는 거지?” 거, 낭만이 없기는. 암만 똑같아도 일단 20년 전 미궁인 거잖아? “잘 따라와라.” 주변을 둘러보며 여러 감상에 빠지기도 잠시, 나는 먼저 뛰기 시작한 아멜리아를 따라 뛰었다. 조금 묘했다. 보아하니 일단 길은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어떻게 나침반도 보지 않고 길을 찾는 거지? ‘아, 설마…….’ “혹시 넌 인도자인 건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말없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이 대답이 되었다. ‘미친…….’ 오러 유저에, 도플갱어 정수에, 인도자 특성까지 갖고 있는 인간 캐릭터라니? 새삼 세상이 불공평하단 생각이 든다. 조금 욕심도 나고. ‘이런 애가 팀에 있으면 진짜 믿음직스러울 거 같긴 한데…….’ 여기서 좀 더 친해진 다음에 돌아가서 영입하면 받아 주려나? 안 그래도 클랜 정원 10인을 채우려면 자리가 꽤 남는데……. 아, 그나저나 우리 클랜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겠지? “…….”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멜리아를 따라 뛰고 있던 때였다. “오, 둘이 다니는 거요?” 도중에 마주친 탐험가 무리가 말을 걸어왔다. 저층 탐험가가 아니라, 이동 시간을 단축하려 우리처럼 2층을 향해 뛰고 있던 무리였다. ‘이거 은근히 긴장되는구나.’ 현재 내 소속은 라프도니아가 아닌 노아르크. 그 탓인지 저쪽에서 우리를 뭔가 수상히 여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든다. 뭐,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걱정이었지만. “관심 갖지 마라.” “허허, 까칠하기는. 고생하시오!” 아멜리아가 차갑게 말하자 그들 무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가던 길을 따라 그대로 사라졌다. “뭘 그렇게 얼어 있는 거냐?” “그냥… 별거 아니다. 난 역시 죄 짓고는 살기 어려울 거 같단 생각이 들었을 뿐.” “………뭐라고?” 아멜리아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묻더니 이내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 “핫, 프하하하핫!”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웃을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애초에 얘가 이렇게까지 크게 웃는 건 처음 봤다. “……후후, 이런 걸 좋아하나 보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묻자, 아멜리아가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오해하지 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을 뿐이니.” 어허, 그럴 거면 입꼬리나 내리고 말하든가. 노아르크 출신이라 그런지 유머 코드도 되게 괴상하네. 내가 불안에 떨고 있는 게 그렇게 재밌었나? 쯧, 소리를 내며 불만스럽게 혀를 차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방금 본 자들은 노아르크 출신들이다.” “뭐?” 그냥 유쾌한 아저씨 같던 그 사람이 노아르크 출신이라고? “그걸 어떻게 알지? 진영 표식을 차고 다닐지 말지는 이쪽 재량이라고 들었는데.”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짧게 설명했다. 팀 내에 마법사와 신관이 없던 것. 누군가에게 빼앗은 장비인 양, 입고 있는 장비들 색이나 디자인이 통일되어 있지 않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이쪽 출신들밖에 없다.” “꼬맹이라니? 아, 뒤에 있던 그 작은 탐험가를 말하는 건가?” “그래.” “흠, 나는 그냥 키 작은 여자거나 드워프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살짝 경직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나는 보면 안다.” “뭐?” “됐고, 어서 움직이지.” 아멜리아는 길게 말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라는 듯 대화를 끊었다. 이 여자의 못된 버릇 중 하나다. 하, 진짜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아멜리아.” “…….” “근데 네 말이 사실이라면, 노아르크 출신들이 꼬맹이들을 데리고 미궁에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얘가 꼬맹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던 방법을 캐묻는 대신, 조금 다른 걸 물었다. 이 정도는 오케이였는지 아멜리아도 답해 줬다. “일단, 아이들은 푼돈으로 부려먹을 수 있지.” “흠, 그래도 그게 미궁에 데려올 이유가 되나 싶은데.” “의외로 유용하다. 요리나 불침번처럼 귀찮은 일들을 시킬 수도 있고, 약탈에도 도움이 되니까.” “약탈에 도움이 된다고……?” “미끼로 쓰는 거다. 어린애가 다가가서 도와달라 말하면 아무리 경계심 많은 탐험가들이라도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려 하니.” 음, 그런가? “이상하군. 나라면 애가 다가오면 더 경계할 거 같은데. 라프도니아에서는 미성년자가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뒀지 않나.” “그건 네가 20년 뒤 사람이라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은 변함없지만, 이 시기엔 공무원들도 암묵적으로 허용을 해주고 있었다.” 와, 얘가 이런 말을 하니 진짜 어르신이 ‘나 때는…….’ 하고 말하는 거 같네. “근데 아멜리아, 너는 몇 살인 거냐?” “……헛소리할 시간에 발이나 움직여라.” 아무튼, 이후로도 우리는 잡담을 하며 2층으로 향했고, 뛰어서 이동한 만큼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시나 포탈은 누군가에 의해 개방된 상태였다. 쩝, 아쉽네. 우리도 나름 일찍 온 거 같은데. “올라가지.” 이내 포탈 안으로 들어서자, 음산하면서도 질척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여기는 언제 와도 기분이 나쁘네.’ 망자의 땅. 구울과 데스핀드 등의 각종 언데드 몬스터가 출현하는 지역이자, 나와 아멜리아가 처음 만나기도 했던 바로 그 장소. ‘후, 그땐 진짜 무서워서 지릴 거 같았는데.’ 이걸 보면 참 사람 일은 모른다 싶다. 설마 이렇게 단둘이서, 이번엔 동료 관계로 이곳을 다시 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아멜리아, 궁금한 게 있다.” “하지 마라.” “그때 비프론에서 말했었지. 여기서 네가 죽였던 자들한텐 죽어 마땅한 죄가 있었다고. 혹시 네가 고치려는 과거와 관계가 있던 건가?” “넌…… 참 내게 궁금한 것도 많군.” “물론이다.” 비꼬는 말에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아가 혀를 차며 답했다. “그래, 관계가 있다.” 음, 역시 그랬구나. 뒤의 이야기도 듣고 싶지만, 표정을 보니 화를 낼 거 같아서 그만뒀다. 이건 나중에 다시 물어보든가 해야지. “질문이 끝났으면 이동하지.” 2층에 진입한 우리는 멈추지 않고 몬스터들을 학살하며 이동했다. 근데 인원이 둘이라서 그럴까? 아이나르와 2인조로 탐험가 생활을 할 때가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전투 한 번 한 번이 고역이었는데. 시간 참 빠르다. 퍼억-! 어느새 데스핀드도 맨주먹으로 때려죽일 수가 있게 됐다니. “베헬—라아아아아아!!!” “…….” “아, 미안하다. 습관이라.” “됐고, 앉아라.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지.” 그렇게 하루 종일 이동만 하다가 밤 시간이 되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세 시간만 자고 움직이기로 합의를 봤다. 참고로 불침번은 없었다. [자가복제]로 분신을 소환해 두면 된다던가? “……그게 된다고?” 게임 내에선 도플갱어 정수에 ‘자동사냥’ 모드가 딸려 있지 않았다. 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걱정 마라. 난 성인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으니까.” 늘 잠을 자면서도 정신이 반쯤 깨어 있기 때문에 분신체의 컨트롤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음, 일단 이 여자 말로는 그렇다.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쯧, 어쩐지 항상 눈이 퀭하더라니.” “싸우자는 건가?” “성격 하고는, 잘 좀 자고 다니라는 말이었다.” “…….” 아무튼, 자동사냥 모드 중엔 평소보다 움직임이 둔해진다곤 하지만, 저층에서는 이거로도 충분할 터. “그럼 쉬어라.” 따라서 그냥 이견 없이 자리에 누웠다. 잠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불침번이 없는 게 불안해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나야 탱커라 자다가 처맞아도 어지간한 거로는 바로 뒈지지 않으니까. ‘애들은 잘 지내려나…….’ 미궁에서 야영을 하고 있자니 특히나 동료들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1일 차 밤이 지나갔다. *** 미궁 진입 2일 차. 우리는 예정된 일정에 딱 3층에 도착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미궁에 들어온 임무를 해야 할 차례. 아, 임무란 딱 하나다. 노아르크 성주의 눈에 들 수 있을 만큼의 성과를 내어 돌아가는 것. [노아르크로 내려온 첫날부터 도시를 들쑤시며 실력은 증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주는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았지.] 아멜리아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분명 조심하고 있는 거다. 왕가에서 지하로 공작원을 보낸 일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 이번에 미궁에서 증명해야 할 것은 실력이 아닌 ‘성향’. 과연 우리가 노아르크에 걸맞은 인물인가. [가장 쉽게 우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약탈이다. 이번 미궁행에서 약탈품들을 보란듯이 모아서 돌아가면 의심이 줄어들겠지.] 아멜리아는 첫 번째 방법으로 약탈을 말했고, 나는 이에 동의했다. 아, 물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약탈은 하되, 일반 탐험가가 아니라 약탈자들을 그 대상으로 하자고. [그게 조건인가?] [그래. 이제 사람 목숨에 너무 큰 가치를 두진 않게 됐지만, 그래도 나는 내 이득을 위해 아무나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약탈자를 어떻게 구분할 거지?] 아멜리아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융통성을 보였고, 나는 말하기 어렵다고 나중에 직접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 “자, 이제 어쩔 거지?” 우리는 목표 층이었던 3층에 도착했다. 그야 4층에는 약탈자가 나올 수 없는 구조이며, 5층은 둘이서 활동하기 어려우니까. 약탈자 파밍을 하기엔 3층이 딱인 셈. “정말 네게 약탈자를 구분해 낼 방법이 있다면, 어서 해봐라.” 거, 급하기는. 이내 나는 아멜리아에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아멜리아, 우선 은신 계통 이능을 써라.” “……은신?” “뭘 모르는 척이냐. 그때 내 앞에 썼던 그거 있지 않나. 갑자기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 아멜리아는 별다른 질문 없이 내가 말한 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 진짜 인기척이 하나도 안 느껴지네. 나중에 돌아가면 탐지 계열 넘버스 아이템도 미리 맞추든가 해야지. “자, 그럼 이 다음은 뭐지?”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니 굉장히 어색했으나, 나는 내색 않고 태연히 답했다. “별거 없다. 이제 그 상태로 나를 따라오면 된다. 약탈자는 내가 찾을 테니까.” “그러지.” 아멜리아가 동료로서 좋은 점 중 하나다. 내가 뭔 짓을 하든지 간에 일단 잡다한 질문을 삼가고 지켜본다는 것. 음, 그랬을 터인데……. “바바리안.” 뜬금없이 아멜리아가 내게 물었다. “왜…… 갑자기 장비를 벗는 거지?” 아, 그래, 그게 궁금해서 참기 힘들었구나. 하긴, 평범한 사람 눈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래도 너라면 알아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설명하기 어려우니 그냥 봐라.” 이후 나는 몇 가지 장비를 뺀 나머지를 모두 아공간 반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미리 눈여겨봤던 초심자 세트를 꺼내 입었다. “…….” 주변이 조용한 걸 보니 이때까지도 아멜리아는 내가 뭘 하려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듯했다. 다만,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듯. 백번을 들어 봤자 한 번 보느니만 못한 법. “그럼 슬슬 시작할 테니, 잘 따라와라.” 나는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기, 길을 잃어 동료와 헤어졌다! 아, 앞이 안 보인다! 누구 없나! 도와달라!!!” 심장을 지키기 위해 진화한 바바리안의 비기. 이름하여, 내자불선來者不善. “도와달란 말이다!!! 난 돈이 많다!!” 오는 자는 선하지 않다. 297화 악령 (1) 거진 30분을 달려 마주한 건 5인 팀이었다. 구성원은 인간 셋에 드워프 하나, 요정 하나. 장비로 추정컨대, 적어도 5층 이상의 탐험가로 추정되었으며……. “길을 잃었다고? 일단 진정하고 이리 와서 좀 쉬게.” 야영 중 다가온 나를 보고 경계는커녕 모닥불에 앉히고 육포도 줬다. 처음엔 독이 든 육포인가도 싶었다. 하지만……. “흐음, 어쩔까. 자네 팀을 찾아준다고 3층을 전부 헤집고 다니기에는 시간이 없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대화 내내 탐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살려 준 대가로 장비를 달라거나 하는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음, 이 정도는 거의 관례일 텐데. “하하, 무기를 주겠다고? 됐네. 자네 장비를 우리에게 주면 자네는 이번 탐사에서 어떡하나?” “됐소.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비슷한 이들을 만났을 때, 그때 인색하게 굴지 말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갚으시오.” 사람 좋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인성을 갖춘 사람들.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서 모닥불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등 빈틈을 보였으나……. “많이 피곤했나 보군.” “제스, 어쩔 거요? 이자를 이대로 두고 가기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사실상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지 않소.” “몇 시간 정도만 주변을 돌며 동료들이 있는지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만약 못 찾는다면?” “음, 그럼 아예 같이 층을 올라가 이번 탐사 동안 데리고 다니죠? 번거롭긴 하겠지만, 이런 데서 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더 이상 이들을 시험하는 건 의미가 없었으며, 민폐만 끼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근처에 있을 아멜리아에게 신호를 줬다. 미리 말을 맞춰둔, 나를 데리러 오라는 신호. “오늘따라 찾는 이가 많구려. 누구시오?” “……방해해서 미안하다. 동료를 찾고 있다.” “동료라니? 아, 설마……!” 이내 아멜리아가 모닥불 근처로 다가서자 나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오! 에밀리!! 보고 싶었다!! 왜 이제 온 거냐!!” “미, 미안하다……. 근데, 이것 좀…….” “에밀리이이이!!” 연기가 들통나지 않도록 격하게 끌어안으면서도 뒤를 경계했다. 좋은 사람들 같긴 하지만, 아멜리아를 보고서 혹여나 변심할 수도 있다는 판단. 어, 그랬을 터인데……. “동료와 만나다니 잘 됐군.” 결과적으로 반전 같은 건 끝까지 없었다. “후후, 다음부터는 동료들을 잘 따라다니게나.” “좋은 동료들을 두었네요. 미궁 속에서 이렇게 흩어져서 찾으러 다니긴 쉽지 않은데. 서로 소중히 여겨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이스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만 불청객은 물러가 줄 차례. “자, 어서 가지. 다들… 널 걱정… 하고 있다…….” 아멜리아는 동료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가 있다며 나를 데려갔고, 그들은 훈훈한 미소로 우리를 배웅해 줬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 ‘나… 진짜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온 거야?’ 얼떨떨함을 느낌과 동시에, 가슴 깊이 감동을 느껴 버렸다. 이게 치유인가……? 나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세상엔 이렇게 멋진 사람들도 많은데. “애석하게도 네 방법은 통하지 않았군.”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 아멜리아가 이제 어쩔 거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쩝, 사람 무안 주기는.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계속할 건가?” 이어진 아멜리아의 물음에 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거기, 동료들과 헤어지기라도 했소? 둘이서 뭐 하시오?” 어둠 속에서 다섯 명의 탐험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그런 거면 이리 와보쇼. 우리가 도와줄 테니.” 그들은 모두 환히 웃고 있었다. 마치 길에서 황금이라도 주운 사람처럼. 따라서 나도 인간찬미는 이쯤에서 끝내고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 정말인가! 도움이 필요한데 잘 됐군!” 원래 이런 놈들은 찾지 않아도 오는 법이다. *** 두 번째로 만난 팀은 생각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놈들이었다. 놈들은 우리가 합류하자마자 포위라도 하듯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오호, 이건 아공간 반지 아닌가? 장비는 구린데 귀한 걸 차고 있군.” 내 손을 잡아당겨 아공간 반지를 만져 보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서 동료는 어딨소?” “모른다.” “흠, 그래?” 몇 가지 정보를 얻고서 위협될 게 크게 없다고 여겨졌을까? 이내 놈들 중 한 명이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살이 드러난 허벅지 쪽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푸욱. 닿기도 전에 단검이 손등을 꿰뚫었다. “아악!! 이 미친년이!” “죽여!” 그렇게 대면한 지 3분도 되기 전에 시작된 전투. 휘익! 칼에 찔리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격하는 걸 보면, 놈들은 대인 전투 경험이 꽤 많아 보였다. 물론 문제는 없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지. “베헬—라아아아아아!” [거대화], [휘두르기] 등. 본격적으로 스킬을 써가며 날뛰기 시작하자 빠르게 승부가 갈렸다.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녀석들이 포위 진형을 한 것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고블린이야 가두고서 패면 유리하지만……. 콰직-! 트롤이나 오우거는 아니잖아? 일단 활과 지팡이를 찬 후열부터 조진 뒤에 시작하자 머지않아 놈들이 전부 바닥에 누웠다. “속, 인 건가……. 씨발.” 콰직-! “…….” 이내 리더로 보이는 놈의 머리통을 짓이긴 순간 기분 좋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럼 이제 주인 잃은 물건들을 주워 볼 차례. 장비를 벗기고 가방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약탈의 증거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3일 차라 그런지 장비는 얼마 없었지만, 수면제, 독, 정신계 스크롤 등등.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에게 쓰일 법한 소모품이 한가득이었다. 빼앗은 듯한 신분증도 여럿이었고. 근데 한 번에 큰 소득을 올려서일까? “한 열 번만 더 하면 되겠군.” 더 이상 아멜리아는 내 방법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긴 자기도 알아 버린 거겠지.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는걸. 약탈을 행한 약탈자를 죽이면 장비도 여럿. 신분증도 여럿이라 시간과 노력 대비 훨씬 더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그럼 피만 닦고 계속 움직이지.” 아무튼, 이후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전략을 펼치며 여러 팀을 만났다. 반응은 전부다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크게 나눠 보자면……. [관심 없으니, 가시오.] 혼자 다가갔을 때, 아예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는 부류가 90%. [사정이 딱하니 잠시 머물게는 해드리리다.] 일단 얘기를 들어 본 뒤, 쉬었다 가게 해주는 대가로 적당한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는 게 5%. [……수상하군. 신분증을 꺼내라.] 약탈자로 오해하고 정의의 철퇴를 꺼내 드는 이들이 3%. [아무리 물건이 귀해도 목숨보단 아니지 않은가.] 내가 몬스터에게 뒈지든 말든 장비를 전부 벗겨가려는 무리와……. [미안하네. 뒤탈 생길 일은 하지 않는 주의라.]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앗아가려는 이들이 약 1%.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타율이 낮네.’ 백 팀을 만나면 그중에 한 팀을 건질까 말까다. 하, 이런 새끼들을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자주 만났던 거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막상 찾을 때가 되니 이러는 건가?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8일 차가 되었을 때. 우리는 처음 보는 타입의 팀을 만났다. “오, 그 유명한 신입들을 여기서 다 보는군?” 노아르크 출신의 약탈자 팀이었다. *** 결과만 말하자면, 전투는 없었다. 우리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기보다는, 애초에 그럴 여지를 상대에서 주지 않았다는 쪽에 가깝다. “하하, 만난 건 반갑지만, 선은 지켜 줬으면 좋겠군.” 놈들은 아예 거리조차 주지 않았고, 아멜리아도 딱히 적대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게 경고했다. “성주 쪽 자들이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거, 할 생각도 없었구만. 일단 같은 편인 척은 해야 하잖아? 혹여나 선공을 가했다가, 저들 중 누가 살아 돌아가 증언이라도 한다면 우리의 계획이 망가진다. “잠깐, 얘기 좀 하겠나?” “좋다.” 노아르크 팀의 제안에 아멜리아는 주저치 않고 승낙을 표했다. 얘가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주 측 세력에 들어가야 하니까. 오히려 지금 상황은 자기 어필 기회라고도 할 수 있을 터. “벡일세.” “우리는…….” “알고 있네. 에밀리, 그리고 그쪽은 철가면이지?” “철가면?” “아, 몰랐나? 자네한테 붙은 별명인데.” 설마 그런 별명이 붙은 줄은 몰랐는데. 뭐, 맨날 두꺼운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니 어울리기야 하겠다마는. “근데 생각보다 얼굴이 훤칠하구만 그래.” 아, 맞다. 지금 한창 낚시 중이라서 투구 안 쓰고 있었지. 낭패감이 느껴졌으나, 굳이 투구를 끼진 않았다. 그래, 어차피 얘네 몇 명한테 얼굴을 보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변하는 것도 없을 텐데. “근데 아까 그게 자네들 수법인가? 굉장히 인상 깊더군. 바바리안족에 관한 선입견을 아주 잘 이용했어.” “……무슨 뜻이지?” “아, 칭찬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으니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게. 잘 하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 말에 아멜리아가 껴들었다. “동료라니?” “아, 그 말을 하지 않았군. 자네들도 이 도시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말하지 않았네마는, 성주께서 자네들을 좋게 보고 계시네.” 해석하자면, 실력은 좋아 보이지만 어떤 놈인지 몰라 지켜보고 있었단 뜻이었다. “성주께서는 과감한 자들을 좋아하지. 특히나 자네들처럼 도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거는 더 이상 테스트를 해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될 테고. “아마 돌아가면 연락이 있을 테니, 그동안 잘 생각해 보게. 낯선 도시 아닌가. 자네들도 둥지가 하나쯤은 있어야지?” “……한번 생각해 보지.” “하하, 그럼 됐네.” 이내 놈이 호쾌하게 웃더니 나를 보았다. “아, 그리고 자네. 인간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아주 인간물이 다 들었구만?” “그러는 너는 세상에 나온 지 너무 오래됐는지 머리가 다 빠졌군?” “……뭐?” 딱 봐도 돌려까는 듯했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한데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던 걸까? “아! 칭찬일세, 칭찬! 오해했다면 미안하네.” 녀석은 불쾌함을 내비치기보다는 사과의 말을 뱉었다. 따라서 나도 사과할 차례. “아, 나도 칭찬이었다. 오해했다면 미안하다.” “……그, 그렇군?” 놈이 어색하게 웃었고, 나도 이를 따라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놈을 바라보았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이름이 분명 ‘벡’이었지?’ 근데 왜 보고 있으면 자꾸만 손이 근질거리는 걸까?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며 시선을 움직일 때. 무리 중 유일하게 로브를 뒤집어쓴 탐험가가 보였다. 체구는 작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 자네들은 아직 모를 수 있겠군?” 빤히 바라보고 있자, 내가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벡이 꼬맹이의 로브를 휙 벗겼다. “어찌 보면 자네가 쓰던 수법이랑 비슷하네. 얘를 미끼로 쓰는 걸세. 그럼 대부분은 경계하지 않지. 안에 들여보내면 미리 상대의 전력도 알아볼 수 있고. 전투에도 의외로 도움이 되네. 대부분은 이런 어린애들을 죽이는 데 심리적인 저항이 있거든.” 벡은 상품을 자랑하듯 아이에 대해 설명했다. 다만 설명은 귓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멜리아에게 한 번 들은 얘기일뿐더러……. ‘뭐지? 얘를 내가 어디서 봤지?’ 로브가 들춰지고서도 무표정하게 서 있는 아이에게서 기시감이 들었다. 한데 빤히 보는 시선을 오해했을까? “흐음, 이제 보니 궁금한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거였나 보군?” 벡이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평소였다면 우선 대가리를 터뜨려 오해부터 풀었겠지만, 나는 부정하지 않고 질문했다. “이름이 뭐지?” “이름?” 벡은 이상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같은 게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다는 표정. 다만 그래도 질문에 대답은 해주었다. “젠시아 네이프린.” 그래, 너였구나. 어쩐지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니. [우, 우린 진짜 사람… 사람이잖아요? 그랬다간 살인이잖아요?] 이 아이는, ‘빙하굴’에서 내가 처음으로 죽였던 악령이었다. 물론 내가 죽인 젠시아는 이 아이와 다를 거다. 악령이 깃드는 건 오로지 성인이 된 현지인이며, 아직 그 외에 케이스는 발견된 게 없으니까.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이를 인지함과 동시에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노아르크 태생의 아이. 이 아이는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이 지하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인즉슨.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이런 데서 죽을 수 없다구요. 이런 좆같은 곳에선···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요. 네? 제발요······.] 그제야 그 여자가 그토록 울분을 터트리던 게 이해됐다. 인간 캐릭터는 생존이 쉬운 편이니까. 이종족에 비해 세금이 훨씬 낮게 책정되기에 탐험가 일을 하지 않아도 몇 년간은 생존에 있어 큰 문제가 없다. 그래서 당시엔 그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냥 약탈자 짓을 하며 쉽게 살려는 여자의 악다구니로만 보였다. 하지만……. [어, 엄마…….] 그래, 얘는 이 지옥에서부터 시작했던 거구나. 그동안 바바리안족이 최악의 스타팅이라고 생각했는데. “…….” 바닥에는 더한 밑바닥이 있었다. 298화 악령 (2) 기분이 이상하다. 이제 와서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메이스를 내리찍은 걸 후회하는 것도 아닐진대. 어딘가 찝찝하면서도 갑갑하다. “표정이 좋지 않군.” “…….” “혹시 아는 아이였나?” 아멜리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하나 물었다. “저런 아이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지?” “탐험가가 된다.” “다른 길은 없는 건가? 영주성에서 일을 하든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불가능하다. 저 아이들은 애초에 그런 약속을 하고서 성주의 아래로 들어온 거니까.” “약속이라니?” “키워 주는 대신,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 어이가 없었다. “잡일을 몽땅 맡기고, 약탈할 땐 미끼 역할로 쓰는 게 키워 주는 거라고?”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강하게 자라지.” 그 말을 듣자마자 불현듯 부족장이 내게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너라면 알지 않나. 살아남은 전사만이 강한 전사가 된다.]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의 환경. 성주는 일부러 아이들을 그런 환경에 넣었다. “그래도 미끼 역할을 주로 하는 어릴 때를 제하면 사망률은 점점 낮아지는 편이다. 배정된 팀에서 아이를 대하는 대접도 마찬가지고.” 아멜리아는 이어서 말했다. 미끼 역할로 3년 정도 살아남으면 자질을 인정받아 무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한다고. 게다가 사냥 중에 주인 없는 정수가 나오면 그 정수를 먹을 수도 있게 된다고 하는데……. “그런 생활을 거친 아이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즉시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 되지.” “만약 성인이 되어서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그럴 일은 없다. 보통 어렸을 때부터 꾸준하게 사상 교육을 하니까. 성인이 되었을 땐 누구보다 성주에게 충성하는 종이 되지.” “하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고 그만둔다고 한다면?” 아멜리아는 끈질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교정 작업을 할 거다. 다시금 충성하도록.” “…….”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런 걸 모르고 성주 아래로 들어간 아이들은 없을 테니까.”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생각했다. 과연 ‘젠시아 네이프린’의 몸에 들어간 플레이어는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글쎄, 어쩌면 그리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아르크는 악령이라고 무작정 죽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자유롭게 풀어 주진 않겠지만.’ 성주 입장에선 몇 년 동안 남는 정수들을 먹이며 키운 인재의 몸에 악령이 깃든 것일 터. 성주는 깃든 악령이 누구든 ‘젠시아’의 삶을 이어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조금 더 강한 ‘교정’을 해서라도. ‘아무튼, 악령인 게 들켰든 잘 숨겼든 시작부터 약탈을 하러 다녀야 했겠네. 그럼 다 NPC 취급하며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것도 사실은 방어기제 같은 거였을 수도 있…….’ 아니, 내가 왜 자꾸 이런 걸 궁금해하고 있지? ‘그만 생각하자.’ 나는 이쯤에서 상념을 끝냈다. 그 플레이어가 어떤 환경에서 생존해야 했는지는 나와 관계 없다. 그 여자는 나를 죽이려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게 사건의 전부이다. 후, 이렇게 정리하니까 좀 갑갑함이 가시네. “뭐 하나, 아멜리아. 어서 가자.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넌…… 감정 기복이 왜 이렇게 심한 거지?” “바바리안이지 않나!” 찝찝한 기분을 모두 털어낸 나는 이후로도 비기 ‘내자불선’의 묘리를 이용해 약탈자 낚시를 이어갔다. 그렇게 또 며칠의 시간이 흘러……. “오, 또 아공간 반지가 나왔군.” 어느 때처럼 평범하게 약탈자 팀의 장비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던 시기. 드듯- “……응?” 고개를 갸웃하기 무섭게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허, 이런 경우는 생각도 안 했건만. 드드드드듯-! 3층에 균열이 생성됐다. *** 입장한 계층에 균열이 열리는 것. 조금 갑작스럽긴 했으나, 딱히 놀라거나 신기해할 일은 아니다. 탐사 중이라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다만, 문제는……. ‘왜 하필 지금.’ 우리는 정상적인 탐사를 위해 미궁에 들어온 게 아니다. 심지어 3층 균열엔 내가 먹을 만한 정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정수 칸이 꽉 차서 시체 골렘의 정수를 지우지 않으면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신 넘버스 아이템과 균열석이 있지 않냐고? 어차피 그것들은 20년 뒤로 가져갈 수 없다. 뭐, 팔면 그 돈으로 여기서 지내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김칫국 그만 마시고 확인부터 하자.’ 나는 신속하게 고민을 끝마쳤다. 균열이 열린 것과 균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아멜리아, 위치는? 인도자의 재능을 가진 이는 균열이 생성됐을 때 그 위치를 알 수가 있다. 하면, 과연 균열은 어디에 생성됐을까. 만약 가장 가까운 게 몇 시간은 달려야 하는 곳이라면 우리로서는 뭔 짓을 해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북쪽으로 5분.” 와씨, 진짜 코앞에 열렸네. 진작에 이렇게 나와주지. 저번에 5층에서는 아예 다른 지역에 균열이 생성되어서 고배를 마셔야 했건만. “뭐 하나! 어서 가자!” 내가 당장 뛰어갈 기세로 외치자, 아멜리아가 짧게 되물었다. “들어가려는 건가?” 뭐래, 그야 당연하지. 균열은 들어갈 수 있으면 무조건 들어가는 게 베스트다. 정수고, 아이템이고 뭐고. 균열에서만 수급 가능한 경험치가 있으니……. ‘아니, 잠깐만.’ “아멜리아, 넌 혹시 3층 균열에 가봤나?” “예전에 한 번.” 그래, 넌 이미 여기 경험치를 다 먹어 둔 거구나. 어쩐지 이번에도 의욕이 없더라니. “나는 아니다! 그러니까 어서 가자!” “…….” “어차피 그 성주 눈에 드는 건 거의 성공했지 않나! 약탈품 몇 개 더 못 챙긴다고 변하는 건 없을 거다!” “하지만 균열에 갔다가 괜한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사고 안 친다! 그리고 우린 동료 아니냐! 한 번 좀 도와줘라! 얌전히 공적치만 얻고 나오겠다!” “……알았으니, 따라와라.” 잠시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한숨을 내쉬더니 신속하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동료’란 워딩에 마음을 바꾼 건 아닐 터였다. 그저 ‘협력자’와 관계가 틀어질 바에는 며칠 정도 귀찮음을 감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지. 여러모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여자니까. ‘의외로 바바리안이랑 궁합이 좋단 말이야.’ 감정적이지 않기에, 아멜리아에겐 바바리안식 무지성 ‘해줘’가 잘 통한다. 내내 귀찮을 바에 해주는 쪽이 이 여자에겐 더 합리적인 것이다. 타닷. 아무튼, 뛰고 있자니 머지않아 가시 범위 내에 포탈의 모습이 보였다. “얀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생각…….” 생각은 무슨 생각. “베헬—라아아아아아!”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번뜩-!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새하얀 신전에 들어와 있었다. *** 마음껏 [도약]을 해도 될 만큼 높은 층고. 새하얀 대리석 기둥. 그리고 벽면의 테두리를 따라 길게 늘어진 백 개의 석상.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왔나 보네.’ 일단 다른 탐험가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그야 3층에는 균열이 하나뿐이니까. 백색신전百色神殿. 흰색이 아니라, 백 가지 색을 지닌 신전. 참고로 플레이 중에 무조건 한 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경험치 수급이 어마어마하거든. “얀델, 이곳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그렇다면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백색신전의 특징은 세 가지다. 1. 시체골렘처럼 일반 필드에서는 출현하지 않는 정예몹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뭘 잡든 초행이라면 최초 처치 경험치를 챙길 수 있으며……. 2. 일반 균열들처럼 협력 레이드가 아니라 입장한 탐험가들끼리 경쟁을 해야 한다. 보스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직 한 팀뿐이다. 만약 먼저 들어간 팀이 공략에 실패하면 그때 다른 팀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식. 아, 그렇다고 나랑 아멜리아 둘이서 다른 팀들과 경쟁해야 한단 뜻이 아니다. 3. 균열이 생성될 시 해당 층에 총 5개의 포탈이 열리며, 동일 포탈로 입장한 자들은 팀이 된다. 게임 내에선 이게 제일 까다로웠다. 그야 당연하다. 5인 팀으로 활동하다가 균열을 발견했는데, 안에 두 명이 먼저 들어가 있었으면 어쩌겠는가. 같이 다니던 동료 캐릭터 두 명이 낙오되게 된다. 방금 들어온 이 탐험가 팀처럼. “……어?” “제기랄, 벌써 선객이 있었을 줄이야.” 허공에 떠 있던 포탈이 세 명의 탐험가를 토해내며 닫혔다. 보아하니 밖에 팀원을 두고 온 듯한데……. “큰일 났다! 레무드와 한스가 못 들어왔다!!” 어, 나이스. “……진정들 하시오! 우리와 떨어지긴 했지만, 레무드와 한스라면 둘이서도 3층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테니!” 이내 검을 착용한 인간 검사가 혼란에 빠진 동료들을 달래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반갑소. 그쪽은 둘이서 온 거요?” “그런데.” 아멜리아의 단절식 화법에도 사내는 사람 좋게 웃었다. “하하, 한동안은 함께 지낼 거 아니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선 통성명부터 합시다. 나는 칼톤 드렉이란 사람이오.” “에밀리.” “비욘이다.” 나와 아멜리아가 가명을 밝히자, 칼톤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비욘, 당신은 혹시 바바리안이시오?” 당연한 의문이었다. 지금 나는 판금 장비를 풀착용한 상태니까. 얼굴부터 발끝까지 전부 철판으로 가려져 있기에 문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게 무슨 상관이지?” 삐딱하게 되묻자, 칼톤이 아차 했다는 듯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미안하오. 단지 호기심이었는데, 그쪽에게는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었겠구려.” 보아하니, 내가 덩치 큰 인간이라 여긴 듯했다. 하긴, 이런 사소한 질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대부분 마음이 좁은 인간들이니까. “칼톤, 이리 와보겠나?” 아무튼, 우리가 이름을 밝히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요정족 사내가 칼톤을 불렀다. 그리고……. ‘안 들리네.’ 귓속말을 하며 뭐라 대화를 나누었다. 일단 뭔가 상의를 하는 거 같긴 한데……. “우리가 수상하다고 하는군.” “응?” “이 정도 거리에서 하는 말 정도야 들린다.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면.” “……그렇군?” 얘는 청각 수치가 높은 편이었구나. 여태껏 몰랐는데. 나중에라도 얘 앞에서는 귓속말 같은 거 몰래 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뭐라고 하는 중이냐? 표정이 심각한데.” 이후로 아멜리아를 이용해 도청한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태연하게 이름만 밝히는 놈들이네. 13일 차에 3층에서 둘이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약탈자일지도 몰라. 심지어 한 명은 얼굴까지 가렸지 않나.’ 요정족 사내는 이상한 점을 토로했고, 이를 들은 칼톤은 말했다. ‘그렇지만 다른 방도가 없지 않소. 수상하다고 대뜸 먼저 뒤를 칠 수도 없고. 일단 티 내지 말고 함께 다니며 어떤 자들인지 알아봅시다.’ 그렇게 상의가 끝났을까? “아! 미안하오! 이 친구가 두고 온 동료들이 걱정된다고 말하는 탓에.” 칼톤이 호탕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른 두 명도 이름을 밝히며 소개할 시간을 주었다. “자, 여기 요정족 출신인 이 친구는…….” “그만, 내가 하겠네. 에임버른 베르타 가르시아. 보다시피 활이 특기지.” 에임버른은 짧게 주무기와 이름만을 밝히며 소개를 끝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더 정보를 주고 싶지 않은 모양. 아무튼, 그다음은 바바리안 전사였다. “흐하하하! 다들 반갑다!” 바바리안답게 두 동료끼리 귓속말 상의에 끼지도 못한 전사는 해맑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쟈르쿠의 세 번째 아들 얀델이다!” “…………뭐?” 듣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아, 인간에겐 조금 어렵나? 그냥 편하게 얀델 쟈르쿠라 불러라!” 생물학적 부친이란 뜻이었다. 299화 악령 (3) 바바리안의 작명 방식은 굉장히 쿨하다. 낳은 자식이 아들이라면 친부의 이름을 성으로 쓰고, 딸이라면 친모의 이름을 성으로 쓴다. 그렇기에 부족 내엔 가문이랄 게 없으며, 모든 바바리안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하겠느냐마는. ‘얀델 쟈르쿠.’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야 ‘쟈르쿠의 세 번째 아들 얀델’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생물학적 친부라 보는 게 옳다. 하지만……. “하하핫! 언제까지 내 손을 무안하게 할 건가!” 그래, 우선 정신부터 차리자. 친부라고? 근데 그게 어떻다고? 놀라고 당황할 순 있지만, 이렇게까지 넋을 놓을 건 아니다. 내가 진짜 비요른 얀델인 것도 아니고. “아, 잠깐 딴생각을 했군.” 일단 악수에 응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거로 자기소개는 끝. 칼톤이 어색하게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로 다른 소속인 탐험가가 균열에서 만났다면 응당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하하, 소개는 이만하면 됐고. 앞으로 계속 같이 다녀야 할 테니, 전리품을 어떻게 처분할지부터 상의해 봅시다.” 전리품 배분이 언급되자마자 아멜리아가 내 손목을 잡고서 뒤로 이끌었다. “잠시 동료와 상의 좀 하지.” 응? 상의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그리고 둘만 있게 되자 조용히 물었다. “상의는 갑자기 왜 하겠다고 한 거냐? 전리품 배분을 어떻게 할진 아까 다 정해 뒀을 텐데?” “전리품 때문에 부른 게 아니다.” “아니라면?” 내 물음에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괜찮은 건가……?” 그제야 얘가 나를 왜 따로 부른 건지 이해됐다. 하긴 얘라고 내가 굳었던 이유를 모르진 않겠지. “괜찮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네가 걱정하는 사고 같은 건 치지 않을 테니.” “나는 사고 같은 걸 걱정해서 묻는 게…….” 응? 그게 아니면 뭔데? 내가 빤히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됐다, 괜찮다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그럼 돌아가지. 배분 문제는 아까 정해둔 대로 하겠다.” 그렇게 상의를 끝마친 척 중심부로 돌아간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리품 배문 문제를 다뤘고, 별다른 분란 없이 신속하게 끝났다. 그야 우리는 정수를 먹으러 온 게 아니거든. “정말 마석만 가져가도 괜찮겠소……?” 나오는 정수를 모두 저쪽에게 주는 대신, 나머진 전부 우리가 갖기로 결정됐다. “마석만이 아니라 넘버스 아이템과 균열석도 포함이다.” “하지만 수호자를 우리가 잡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지 않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니 신경 쓰지 마라.” “음, 그렇다면야.” 칼톤은 자신들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에 얼떨떨한 얼굴이었으나, 가타부타 말을 더 해오진 않았다. 그럼 이거로 전리품 안건도 끝. “……얀델, 이리로 오시오!” 후, 저거 진짜 적응이 안 되네. 이름이 불릴 때마다 괜히 내가 움찔하게 된다. “어? 난 저자들과 좀 더 얘기를…….” “그건 나중에 해도 되지 않소. 아까 보니까 도끼 날이 무뎌졌던데, 숫돌로 갈고 계시오.” “응? 괜찮은 거 같은데…… 알았다!” 아무튼, 전리품 관련 대화가 끝나자마자 얀델 쟈르쿠가 동료에 의해 불려갔고, 우리도 딱히 접근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거리를 둔 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저기선 뭔 얘기를 하고 있나?” “우리가 정수를 먹지 않는 게 어떤 의도일지 추측하는 중이다.” “추측?” 별걸 다 신경 쓴다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저들로서는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정수를 먹지 않는단 말은, 우리에게 3층 균열의 정수가 필요 없을 만큼 강자란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도 하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에 불안하겠……. “비욘, 네 부모는 어떤 사람이지?” 그때 뜬금없이 아멜리아가 내게 물었다. 의도가 너무 뻔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부모는 무슨, “내 친부에 대해서 궁금한가?” “조금은.”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군.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미궁에서 죽었다는 것 말고는.” 대충 지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내가 악령이어서가 아니라, 이 몸의 원주인조차 자기 아버지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바바리안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종족은 99%의 구성원이 미궁 탐사를 통해 먹고살아가니까. 아무래도 사망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멜리아도 더 캐묻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대고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르르르륵. 굳게 닫혀 있던 정면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른 쪽도 포탈이 전부 닫힌 모양이군.” 슬슬 균열 탐사를 시작할 때였다. *** 백색신전은 경쟁형 균열이다. 보스방에 진입 가능한 건 한 팀뿐이며, 이는 선착순으로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타트가 좋았다. 5인 입장 마감이 빨리 끝난 덕분에 미리 전리품 배분 같은 문제를 처리해 둘 수 있었……. “자, 그럼 갑시다. 아, 근데 누가 먼저 가겠소?” 거, 진형 갖고 힘을 뺄 거면 아까 해두던가. “내가 먼저 가지.” “아! 그럼 내가 옆에 서겠—” “얀델!” “……?” “이리 오시오. 뒤에서도 몬스터가 나올 수 있지 않소.” “아, 알았다!” 내가 앞에 서자 자연스럽게 전투 진형이 잡혔다. 맨 뒤에는 쟈르쿠가, 나머지 셋은 중심에 위치한 진형. 물론 진형이야 우리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3층 균열 아닌가. 그것도 5인 기준 난이도의.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클리어하고 나가자.’ 그런 일념으로 문 너머로 들어서자 이전에 있던 신전과 동일한 구조의 석실이 나타났다. 평수는 비슷했지만, 석상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석상의 손에 쥐어진 푸른색 보석에서 흘러나온 빛이 안개처럼 장내에 퍼져 있었다. ‘시작부터 보스 타입이네.’ 색을 통해 이번 방의 특징만을 확인한 나는 목을 풀며 빛의 안개 속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칼톤이 당황하며 경고를 해왔다. “이, 이보시오!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음, 그래. 너희는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구나. 경쟁 구조인 건 알고 있기에 혹시나 했는데. 이제 보니 백색신전이 어떤 곳인지 정도만 어디서 조금 들어 본 게 전부인 모양. 쿵. 그때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족 보행 형태였으며, 신장은 거진 5m에 달했다. 청갑 거신병. 원래라면 3, 4층 탐험가들이 5인 팀으로 뭉쳐 싸워서 잡아야 할 중간 보스 타입의 적. 다만, 그래 봤자 3층 균열의 몬스터다. 경험치상으로도 등급은 6등급에 불과하며……. ‘무력으로 따져도 5등급보다는 낮지.’ 중간 보스라 해봤자 트롤 같은 5등급 몬스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베—” 아, 이건 하면 안 되지. “우가아아아아아!!” 원시적인 외침을 토해내며 앞으로 대시했다. “잠깐! 힘을 합쳐 싸워야…….” 칼톤이 뒤에서 뭐라 말했지만, 굳이 들을 이유는 없었다. 힘을 숨기는 쪽보다, 대놓고 드러내는 편이 피차 편할 테니까. ‘거대화.’ 우선 상대와 체급부터 맞춘 뒤. ‘도약.’ 뛰어올라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휘두르기.’ 있는 힘껏 풀스윙. 콰직-! 그 기본 콤보로 청은색 갑주를 입은 거신병의 목이 기형적인 형태로 꺾였다. “무, 무슨 힘이……!” 뒤에서 뉴비들의 찬사가 이어졌으나, 나로서는 제법 입맛이 썼다. 이게 탱커의 비애인가? 지금 근력으로도 원킬이 안 뜨는구나. 거, 쪽팔리게. 그냥 딜러한테 맡길걸. “에밀리!” 내가 딜러를 호출함과 동시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푸욱. 오러가 넘실거리는 단검이 거신병의 심장부를 꿰뚫었다. 콰직-! 이내 거신병이 빛이 되어 사라지더니, 주변에 가득하던 안개가 사라졌다. 전투 시작 3초 만에 상황이 종료된 셈. “오, 오러라니…….” “이런 자들이 왜 3층에서…….” 20년 전의 뉴비들이 늅늅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 하나? 어서 따라오지 않고?” “아, 가, 가리다……!” 본인들이 고속버스에 승차했다는 것을. *** 3층 균열은 스테이지식 구조다. 방 하나를 클리어하면 다음 방이 열리고, 이를 가장 빨리 끝낸 팀만이 보스방에 들어갈 권한을 얻는 식. 콰직-! 첫 번째 방을 3초 만에 클리어한 후로도, 나와 아멜리아는 본 실력을 발휘하며 초고속으로 방들을 클리어해 나갔다. 다만 첫 스테이지처럼 몇 초 안에 전부 끝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스 타입이 있으면 물량 타입도 있는 법이니. “우가아아아아아아!!” 정해진 시간 동안 몬스터들이 쏟아지거나, 함정 혹은 정신계 이능을 뿌리는 몹들이 출현하는 등. 다양한 콘셉의 방들을 넘어갈수록, 스테이지의 난이도는 점점 상승했다. 백색신전이 가진 특성이었다. 이곳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캐릭터에게 상태 이상을 부여하거나, 다음 스테이지에서 등장할 몬스터들에게 영구적인 버프를 준다. 그래서 보통은 이렇게 무작정 달리지 않는다. “잠깐! 저 문양에 대해선 예전에 들어본 적 있소. 여기에 우리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칼톤의 조언대로, 정석적인 공략법은 각 방마다 숨겨진 요소들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힌트가 대놓고 방마다 있기도 하고. 갈림길에서는 문양을 보고서 저주를 풀 수 있는 방을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됐다,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럴 기분이 아니라니, 대체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 많군. 따라오기나 해라.” “…….” 조금이라도 시간이 걸리는 건 전부 스킵했다. 난이도가 올라봤자 클리어에는 딱히 문제가 없다는 판단. 그렇게 미친 듯이 균열을 돌파하던 때였다. “에밀리, 이 문은 왜 열리지 않지?” “금색 방의 특징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3시간 정도 기다려야 열리더군.” “오, 그렇군?” 균열의 중간 지점에 도착한 우리는 그제야 한자리에 모여 휴식을 가졌다. “여기서 쉴 건가?” 아까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편하지 않냐는 의미를 담아 묻자, 칼톤이 멋쩍게 웃었다. “어차피 의미도 없지 않소.” 음,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피식 웃고 있자니, 칼톤이 사과를 해왔다. “사과하리다. 처음엔 당신들을 수상하게 여겼소. 혹여나 우리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소.” “이유는?” “당신들이 못된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우리는 진작에 죽었을 것 아니오. 우리 셋이 빠진다고 둘이서 균열을 돌파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이유를 댄 칼톤은 이어서 말했다. “무엇보다, 그런 짓을 할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소.” “직감인가?” “그렇소. 내가 아니라 저 친구의.” 칼톤의 시선 끝에는 우걱우걱 육포를 씹어먹는 바바리안 전사가 앉아 있었다. 이제 보니 옆모습이 나랑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쉬어라.” 칼톤과 짧은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쟈르쿠의 옆으로 다가갔다. “오, 여긴 웬일이냐? 아, 너도 좀 줄까?” 자르쿠는 내가 오자마자 순박하게 웃으며 육포를 내밀었다. 일단 받아서 입에 넣었다. 참고로 투구를 벗을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제작할 때 입가만 올렸다 내렸다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뒀거든. “그거, 안 불편한가? 나라면 갑갑해서 하루도 못 버틸 거 같은데.” “적응되면 괜찮다.” “하하! 다들 말하는 그 인간의 적응력 말인가!” 쟈르쿠는 호탕하게 웃더니 배낭을 깔고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비욘, 너는 자식이 있나?” “……없다.” “그런가? 나는 있다.” “이름이 뭔가?” “비요른. 바로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래, 진짜 당신이 이 몸의 친부인 거구나.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눈앞에 놓이자, 새삼 가슴이 옥죄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때 제법 괜찮은 이름 아닌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후 쟈르쿠는 한참 동안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어댔다. 대부분은 자식에 관한 얘기였고, 나는 묵묵히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러던 때였다. 두근- 점점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부터인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피했다. 그랬더니 저 멀리서 아멜리아가 어딘가 짠한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는 게 보였다. 덕분에 나는 가슴에 자리한 감정을 깨달았다. “후후, 분명 대단한 전사가 될 걸세. 나와 그녀의 피가 섞인 아이—” “그만!” “응?” “그만, 나는 이만 가보겠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300화 악령 (4) 불현듯 첫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영혼에 ‘악령’이 깃들었다.] 그날 부족장은 무시무시한 도끼로 내 옆에 있던 이름 모를 플레이어의 목을 베었고, 그때부터 내 생존의 나날은 시작됐다.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세상 전부가 나의 적이었고, 만나는 모든 이를 경계해야만 했으니까. [NPC라고 생각했어요.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을 거예요.] 모두를 NPC라 여기던 젠시아가 그러했듯. 나에게도 그들의 증오를 납득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꽈악-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네놈이었구나······.] ‘카두아의 아들 오름’을 보던 부족장의 눈가에 실려 있던 안타까움은 슬픔이었다. [역겹지 않나? 악령 주제에 사람 흉내를 내고 다닌다는 게]. 악령을 처형할 때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자아낸 분노는 불안이었다. 그야 당연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악령이 깃들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다니. 과연 세상에 그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미움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나만 해도 미샤가, 레이븐이, 곰아저씨, 에르웬, 아이나르의 몸에 악령이 깃든다면 숨이 턱하고 막혀 올 테니까. “비욘, 슬슬 시간이 됐다.” “……벌써 그렇게 됐군. 알았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장 위에 돌이 얹어진 듯한 기분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주책이냐. 이런다고 변하는 것도 없는데.’ 결국 감정은 감정일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까드득. 얼른 해야 할 일이나 끝마치고 나가자. *** 드르르르륵. 시간이 되자 힘을 줘도 꼼짝도 안 하던 석문이 열렸고, 우리는 다시금 균열 탐사를 이어갔다. 백갑 수호병, 녹갑 탐사병, 은실의 예언병 등등. 각 방마다 새로운 타입의 몬스터가 나타나며 경험치가 계속해서 쌓였다. 그리고 간간이 정수들도 드랍이 됐다. 다만 백색신전에서 획득 가능한 백여 개의 정수를 모두 외우진 못했을까? “혹시 이 정수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겠소?” 정수가 나올 때마다 칼톤 삼인방은 우리에게 조언을 구해왔고, 의외로 아멜리아는 친절하게 아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청백궁 심판자의 정수군. 활이나 투사체 관련 정수에서는 드물게 근력이 높게 붙었던 거로 기억한다.” “흐음, 그렇다는군. 에임버른, 자네는 어쩔 텐가?” “근력이라……. 안 그래도 활의 장력을 좀 더 높이고 싶었는데 잘 됐네. 이능도 제법 마음에 들고. 앞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 거 같네. 내가 취하도록 하지.” 에임버른이 이번에 하나. 그리고 칼톤과 쟈르쿠가 아까 하나씩. 우리 뒤를 따르기만 하며 벌써 총 세 개의 6등급 정수를 주워 먹은 그들이었으나, 딱히 배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필요가 없는 물건일뿐더러……. “하하! 고맙다! 너희 덕에 쉽게 쉽게 가는군!” “……고마워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이런 거로는 보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봤자 그가 언젠가 미궁에서 죽는다는 미래도 변함없을 터였고. “그나저나 슬슬 마지막인 거 같구려.” 아무튼, 그렇게 한참 동안 공략을 진행한 끝에 우리는 보스방 앞에 도달했다. 석상의 손에 쥐여진 보석에 빛이 안 들어 온 걸 보니 우리가 가장 빨리 온 모양인데……. “근데 문은 어떻게 여는 것이오?” “나와봐라.” 이내 아멜리아가 석상을 통째로 부쉈다. 돌발행동이라기보다는, 가장 빠른 진행 방식 중 하나였다. 이러면 빡친 목소리랑 같이 문이 열리거든. ‘얘는 누구랑 같이 왔었기에 이런 것까지 다 알지?’ 돌연 아멜리아의 과거가 더더욱 궁금해지던 때, 석문 너머에서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고귀한 희생자의 안식처.] [침입자들은 피로 그 죗값을 치르리라.] 뭐래, 5등급따리 주제에. 게임 중에 몇 번이나 봤던 인트로였던지라 그냥 감흥 없이 육포를 씹으며 듣고 있자니, 머지않아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드, 들어가도 되는 것이오?” “방금 분명 사람 말을 했다! 모, 몬스터가 아닌 건가?” 좀 전에 들린 음성에 잔뜩 위축된 칼톤 삼인방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백색신전의 수호자는 5등급에 랜덤 정수까지 먹은 ‘상위 변이종’이니까. 3층 이하에서는 ‘상위 변이종’이 거의 나오지 않으니, 몬스터가 사람 말을 하는 건 어지간해선 겪을 일이 없었을 터. “비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정확히는 갑자기 ‘핏빛성채’가 떠올랐었다. 그때 만났던 뱀파이어도 5등급에 ‘상위 변이종’인 새끼였는데. 정수 하나 없던 시절에 만났더랬지. 아, 물론 그래도 그 뱀파이어보다 이곳 보스가 훨씬 세기는 하다. 지금 우리는 미궁을 돌파하며 저주도 걸렸고, 반면 저 보스에게는 온갖 버프가 중첩됐을 테니까. ‘그나저나 정수는 뭐가 걸렸으려나?’ 이내 석문 너머로 들어서자, 쿠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숲……?” 대리석 재질의 석실 구조였던 지난 방들과 다르게 바닥에는 수풀이 가득했고, 곳곳에 자라난 나무에는 과실이 맺혀 있었다. 그렇다고 석실 너머가 외부라는 소린 아니었다. 인공 정원이 꾸며진 커다란 돔 형태의 실내. 원형의 외벽에는 우리가 들어온 문까지 총 다섯 개의 문이 자리했다. 아마 우리가 토벌에 실패하면 저 문들 중 하나가 더 열리고, 다른 팀들이 도전을 하게 되겠지. 음,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너희는 물러나 있어라.” “명색이 수호자인데, 둘이서 괜찮겠소……?” “필요하면 부르겠다.” “……그러리다.”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됐고. 버스 승객들을 좌석에 앉힌 나는 아멜리아와 함께 숲 중심부에 자리한 오두막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반경 내 센서가 작동됐을까. 쿠웅-! 하늘 위에서 회색 갑주를 입은 기사가 말을 탄 채 떨여져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개체 명칭은 종말의 기사. 승마 중이긴 하지만, 대형으로 분류될 타입은 아니었다. 신장은 1m 80 정도 될 듯한, 평범한 인간 체형의 비례. 앞서 만난 거신병보다 훨씬 작은 체구다. 하지만 만만히 볼 놈은 아니다. 원래 대부분의 게임은 고렙으로 갈수록, 몸집이 작은 놈들이 더 위협적인 법이니까. 휘익. 이내 말을 탄 기사가 창과 대검 사이 어딘가에 놓인 무기를 허공에 휘두르며 허세를 부렸다. “욕심에 사로잡힌 제국의 들개들이여. 내 오늘 너희를 징벌하리라. ” 거,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기는. “에밀리, 저게 뭔 소린지 알고 있나?” “나도 모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터벅. 우선 [거대화]를 써서 체급부터 맞추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히히힝! 종말의 기사가 타고 있던 7등급 야수형 몬스터, 혼령마가 투레질을 하며 달려들었다. 뭐, 혼령마야 [휘두르기] 한 번이면 잡을 수 있는 잡몹이지만……. ‘여기선 스탯이 뻥튀기 되지.’ 보스방 내에서 혼령마는 종말의 기사의 스탯을 공유 받는다. 쉽게 말해, 한두 방에 죽일 수 있는 몹이 아닌 것. 아, 그리고 애초에 지금은 [휘두르기]도 못 쓴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저주에 걸렸는데, 그때 하필 [휘두르기]가 봉인돼 버린 탓. 물론 사소한 문제였다. 훨씬 효율 좋은 딜러가 있는데 내가 굳이 왜 딜을 해? 쿠웅-! 그런 일념으로 혼령마를 타고 내찌른 기사의 창을 방패로 막았다. 꽤 묵직했다. 왜 중세 시대에 기병들이 최강이라 불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시대엔 [거대화] 할 수 있는 초인은 없었잖아? “버틸 만하군.”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으며 나는 외쳤다. “에밀……!” 아, 이미 날아가고 있었구나. 서걱-!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시퍼렇게 일렁이는 오러가 말의 모가지를 따버렸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역시 오러가 사기긴 해.’ 힘없이 쓰러진 채 빛이 되어 사라지는 혼령마. 털썩-! 2페이즈를 시작할 차례였다. *** 종말의 기사는 3개의 페이즈로 나뉘어 있다. 액티브 스킬 [종복]으로 소환한 혼령마를 타고 날뛰는 1페이즈. 그리고 혼령마가 해제된 다음 펼쳐지는 지상전. 참고로 2페이즈 때부터 종말의 기사는 5등급 이하의 랜덤 정수 스킬도 함께 쓰게 되는데……. ‘……이 새끼 왜 스킬을 안 써?’ 아무리 기다려도 정수 스킬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평범하게 보스전을 이어가다가 아멜리아가 목에 칼을 박아 넣고 3페이즈로 넘어갔다. “불멸은 의지이며, 약속이다.” 허세 가득한 멘트를 치며 부활한 종말의 기사. 패시브 스킬 [기사도]가 지닌 효과였다.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을 시, 입고 있던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장비를 입고 있던 시간과 비례해 생명력을 회복하는 하이 리스크의 스킬. ‘처음엔 무슨 이런 스킬이 다 있나 싶었는데.’ 장비가 없는 만큼 3페이즈부터 종말의 기사는 평소보다 약해진다. 그러나 이는 보통 플레이어 쪽도 마찬가지. 비등한 스펙이라면 2페이즈에서 온갖 부상을 입고 MP도 바닥이 난다. 그래서 나도 첫 트라이 때 서로 평타만 치면서 개싸움을 이어가다가 결국 전멸했었다. 뭐, 지금의 우리에게야 잘 차려진 밥상이겠— “나는 패할 수 없다.” 어, 뭐야. 그때 갑자기 종말의 기사의 몸이 부풀었다. 살짝 어이가 없었다. ‘설마 [거대화]일 줄이야.’ 허, ‘상위 변이종’ 특성으로 걸린 게 오크 히어로 정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어쩐지 다른 스킬을 안 쓰더라니.’ 그제야 놈이 앞선 페이즈에서 스킬을 쓰지 않던 것도 이해가 됐다. 원래 [거대화]는 장비를 입고 쓸 수 없는 스킬이니까. 그 대신 스탯 증가량이 엄청나긴 하지만. “나는 져선 안 된단 말이다……!” 이후 [거대화]를 쓴 놈이 미친놈처럼 지랄 발광을 하며 내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다고 잘 될 턱이 없었다. 아니, 네가 커지면 어쩔 건데. 그래 봐야 스탯도 덩치도 나보다 딸리는데. 꽈악. 달려드는 놈의 주먹을 잡은 뒤, 레슬링을 하듯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푸욱. 아멜리아의 단검으로 마무리 일격. 솨아아아아아아- 이내 놈이 마지막 대사도 남기지 못한 채 빛의 입자로 변하며 흩날렸다. 늘 겪지만 매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앞을 응시했다. ‘제발, 뭐든 떠라.’ 기대와 달리 허공 위로 둥둥 떠오르는 정수는 없었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균열석도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장비 하나가 놓인 게 시야에 들어왔다. “넘버스 아이템이 나왔…….” 이내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니, 뭔데 이거. ‘……미친,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움찔하기도 잠시, 나는 호다닥 달려가 망치를 주웠다. 그립감은 잘 모르겠고. 이 남자다운 때깔이며 투박한 멋을 잘 살린 디자인을 보고 있자니 확실했다.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 황도의 천공 경매장이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싼 더블 넘버스이자……. 오우거 정수를 먹은 이후로, 내 졸업 무기로 쓰면 되겠다고 내정해 둔 바로 그 물건. 근데 이게 3층 균열에서 나온다고? 대박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니미럴.’ 지금이 20년 전만 아니라면 말이다. *** 효율충으로서 못내 아쉬움이 느껴졌으나, 그래도 기쁜 일은 확실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이다. 그래, 그것은 틀림없다. 다만 망치를 쥐자마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 이거 어떻게 가져가지?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곳에 땅을 파고 숨겨두면 20년 뒤에도 멀쩡하려나?’ 아니, 그랬다가 누가 가져가기라도 하면? 그럼 그냥 망하는 건데. 쓰읍, 그냥 팔까? 그래, 그냥 팔고 그 돈으로 떠나기 전에 경매장에서 비싼 정수를 사먹든가 해도 되잖아. 애초에 그러려고 장비들을 모아둔 거였……. “축하하오. 정수가 안 나온 것은 아쉽지만, 이건 우리 욕심이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차, 칼톤 무리가 다가와 축하의 말을 던졌다. “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군! 너희도 뭐라도 하나 가져가서 다행이다!” 어, 그냥 ‘뭐라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치가 큰 물건인데. 이건 그냥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보아하니까 아멜리아도 이게 더블 넘버스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는 거 같고.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막 포탈도 열렸고 말이지. 후우우웅! 이내 숲 중심부 오두막 앞에 생성된 포탈을 보며 칼톤이 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이제 어쩔 것이오?” “우리는 조금 더 있다가 나갈 거다. 남는 시간에 주변을 좀 둘러보려고.” 정확히 말하자면 챙겨 나갈 것이 몇 개 있다. 근데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눈치를 챘을까?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찾으려는가 보구려.” “그래.” “그럼 저기 나무에 난 하얀 열매들은 어떻소? 딱 봐도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아, 그거……. 히든피스가 맞긴 한데, 예능 템에 가까운 거라. 이걸 뭐라 잘 말해야 안 먹으려나? 고민하던 차 아멜리아가 나 대신 설명했다. “백과라는 열매다. 복용 시 갖고 있는 정수 중 하나의 능력치가 무작위로 바뀌지.” 설명이 짧긴 했지만 틀린 건 없었다. ‘백과’는 복용 시 정수의 성질을 바꾼다. 스킬은 그대로지만, 정수에 붙어 있는 기본 능력치가 등급에 맞는 무작위 수치로 바뀌는 것. 제정신으로는 먹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이 게임에는 세부 스탯이 수천 가지나 되니까. 근력, 민첩 같은 좋은 스탯이 탐욕, 집착 등 거의 쓸모가 없거나 밸류가 낮은 스탯으로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너희는 이제 어쩔 거지?” “우리는 곧바로 나가보려 하오. 분명 두고 온 동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렇군.” 칼톤과 인사를 나눈 뒤로는 요정 궁수가 내게 다가왔다. “우선 고맙단 말을 먼저 하겠네. 필시 우리끼린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훨씬 더 고생을 해야 했을 테고.” “너희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운이라……. 하긴, 균열에서 자네들 같은 탐험가를 만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지. 처음에 경계했던 건 이해해 주게. 최근에 안 좋은 일들이 너무 연달아 있던 탓에.” “안 좋은 일이라니?” “뭐라 딱 말하기엔 조금 애매하네. 누가 잘못을 했다거나 한 건 아닌데, 뭘 해도 운이 없어서 일이 자꾸 꼬이게 되더군.” 음, 그래? 한 가지 짚이는 게 있기는 한데. 나는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스란 자가 팀에 있댔지.” “그랬네마는.” “빼라. 그럼 운이 좀 트일 거다.” 내 말에 요정 궁수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은.” 음, 100% 진심이었는데. 301화 악령 (5) “비욘! 뒤에서 구경만 했지만, 그래도 재밌는 탐험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 “……그래.” 짧은 작별 인사를 끝으로, 칼톤 무리가 균열 밖으로 나갔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차례. “자, 가보자. 뭐가 더 있을지 모르지 않나!” “……무작정 돌아다니며 찾을 생각인 건가?” 아니, 무작정 돌아다니는 척 원하는 것만 족족 찾아낼 생각이었는데. “따라와라. 내가 아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오, 그렇다면야. 경험자인 아멜리아를 따라서 보스방을 나와 역순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가지 숨겨진 요소들을 찾아냈다. 대지 저항력 및 물리 내성이 1씩 상승하는 ‘땅의 파편’. 3의 추가 경험치를 주는 ‘영혼의 서’. 참고로 아멜리아는 예전에 와서 전부 먹었다기에 전부 내가 먹었고, 그것으로 백색신전의 히든 피스 탐사는 끝이었다. 그야 영약류는 이게 전부였거든. 나머지는 ‘왜곡’ 마법을 써야지만 갖고 나가서 팔 수가 있다. ‘그럼 챙길 건 다 챙겼으니…….’ “아멜리아, 바로 나가지 말고 좀 더 있다 나가는 게 어떠냐?” “어째서?” “솔직히 매일 3시간씩 자다 보니 피곤하기는 해서 말이다. 그냥 여기서 한숨 푹 자는 게 어떤가?” “…….” 내 제안에 아멜리아는 어딘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했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내일이면 미궁이 닫히는데, 꼭 지금 쉬어야 하냐는 거겠지. ‘쯧, 이미 목표 달성은 진작에 했구만 욕심이 뭐 저리 많은지.’ 다만 징징거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기에, 나는 쉬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댔다. “머리가 복잡해서 좀 시간이 필요하다.” “아…….” 아멜리아는 그제야 뭔가 깨닫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련 없이 내 요구를 받아주었다. “좋다. 그럼 쉬었다가 나갈 테니, 준비가 되면 언제든 말해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쪽으로는 마음씨가 따듯하다니까. “고맙다, 아멜리아.” “……쉬기나 해라.” 이내 아멜리아는 침낭을 꺼내 바닥에 누웠고, 나는 아멜리아와 3m 정도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산을 시작했다. ‘어디 보자…….’ 백색신전에서 최초 처치로 획득한 경험치가 156. 그리고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1에 수호자 처치 보너스 3에 영혼의 서로 3까지 더하면 총 163. 물론 이걸 더해도 7렙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하지만……. ‘잘하면 6층 중후반부에선 7렙까지 찍겠네.’ 점점 캐릭터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에 악마분쇄기도 먹었고 말이지. ‘이걸 어떻게 해야 가져갈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얀델, 묻고 싶은 게 있다.” “아! 그 넘버스 아이템 말이냐? 나, 나도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무게감이 마음에 들어 내가 쓰려고 하는—” “그게 아니라 다른 질문이다.” 어, 그게 아니야? N빵 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걱정 중이었는데. “너는… 바꾸고 싶지 않은 건가?” “무슨 소리지?” “얀델 쟈르쿠, 너의 친부 말이다.” 아, 그거……. 쩝, 일부러 최대한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렸을 때 죽었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이유로, 정확히 어느 시기에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린단 말이냐?”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나도 이쪽에서 일을 모두 끝낸 후에 도시로 올라가서 도와줄 수도 있—” “됐다.” 나는 아멜리아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 “그건 내가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긴, 얘 입장에서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악령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그리고……. “고작 그런 거로 바뀔 거였다면, 우리가 여기서 만난 거로도 바뀌었겠지.”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물론 아멜리아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긴 한 거 같다. 하나 아우릴 가비스에게 확답을 듣고, 레이븐과 드왈키의 인과까지 확인한 나와는 그 무게가 다를 터. “바뀌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아멜리아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말했다. 드왈키와 레이븐의 미래를 바꾸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했던 일에 대해서. “그럴 리가…….” 내 얘기를 들은 아멜리아는 입술을 짓무르며 애써 부정했고, 나는 그냥 속 시원하게 물었다. “아멜리아,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않나?” “알고 있었다니……?” “아니면 뭐였나. 네가 ‘니벨즈 엔체’의 이름을 보고 놀란 거나, 내가 이 투구를 쓰고 왔을 때 그런 눈빛을 하던 건.” “그건…….”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던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는걸.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있었기에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는걸.” “…….”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양 주먹을 꽉 쥐고서 무언가를 참아낼 뿐. 입이 다시 열린 건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후였다. “……그래서 너는 포기하겠다는 거군? 가족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도도 해보지 않고.” 말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목소리에서는 어딘지 모를 공격성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도 조금 삐딱하게 말이 나왔다. “어차피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다.” “즉, 그럴 만큼의 정은 없다는 건가?” “……그래.” “그렇군.” 아멜리아는 납득하는 듯 말하면서도 혀를 찼다. 내게 실망을 한 거 같기도 했다. 하, 그냥 이 주제는 언급하지 말 걸 그랬나? 요즘 좀 친해진 거 같았는데, 전부 말아먹었네. “…….” “…….” 이후로 우리는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서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한 다섯 시간쯤 지났을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나는 그냥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이렇게 가시방석 위에 뒹굴고 있는 것보다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편하리라는 판단. 다만……. “잠깐, 저기 좀 들렀다 가도 되겠나?” “마음대로.” 포탈을 타기 위해 보스방에 돌아온 나는 뒤에 있던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단순 호기심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지형지물이라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오, 문도 열리네.’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내부를 쓱 훑어봤다. 그리고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책장 하나, 식탁, 카페트, 난로. 실내는 크게 특별한 건 없었다. 누구던 떠올릴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오두막. 다만 평수라든가 구조라든가 가구의 배치라든가. ‘거기랑 아예 똑같은데……?’ 세세히 둘러볼 것도 없이, 한 장소가 떠올랐다. 3층 마녀의 숲에 존재하는 유일한 안전지대. 마녀의 오두막. 지난날, 미샤와 함께 쉬며 인간 장작을 바쳤다가 혼돈의 군주가 소환되기도 했던 바로 그곳. “수색은 네 마음이지만, 예전에 우리가 거기를 뒤져 봤을 땐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같은 건 없었다.” 얼른 나오라는 듯한 아멜리아의 말에, 책장에 꽂힌 책들만 살짝 확인하고 나왔다. 아, 책은 모두 다 백지였다. 제목들은 고대어로 쓰여 있어서 읽을 수 없었고. 음, 나중에 레이븐을 데려오면 뭔가 찾아낼 수 있으려나? “준비됐으면 나가지.” “아, 혹시 모르니 내가 먼저 나가겠다.” “…….” 이내 우리 둘은 포탈 앞에 섰다. 이제 이걸 타면 처음 균열에 들어올 때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게 될 터. 터벅. 탱커로서 먼저 포탈을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 솨아아아아아아. 포탈의 빛이 내 몸을 휘감으며, 눈앞이 번뜩였다. 그리고 서서히 시야가 돌아왔다. 한데, 이건 대체 뭘까. “후아! 드디어 나왔냐!” 한 탐험가 무리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듯. “그래, 넘버스 아이템이 나왔—” 나와 탐험가 무리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움찔했다. “어, 뭐야. 철가면?” 성주 세력의 일원이었던 ‘벡’의 탐험가 팀. “하, 이거 참 신기하군? 설마 여기 이 세 놈이 안에서 만났다는 게 자네들일 줄은 몰랐는데.” “세 놈……?” 무의식중에 벡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인 나는 그대로 굳었다. 삐이이이이이. 어째선지 귀에서 자꾸만 이명이 들렸다. *** 이게 뭐지?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으나, 뇌는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인지하고 분석해 나갔다. 칼톤 드렉. 에임버른 베르타 가르시아. 그리고, 쟈르쿠의 세 번째 아들 얀델. 몇 시간 전에 포탈을 타고 나간 그 셋의 사체가 바닥에 늘어져 있다. 아니, 비단 이 셋뿐만이 아니다. 두 구의 시체가 더 있다. 누군지도 짐작이 갔다. [큰일났다! 레무드와 한스가 못 들어왔다!!] 아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던 그 둘일 테지. 하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비욘.” 어느새 뒤따라 밖으로 나온 아멜리아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내 팔목을 손으로 잡았다. 돌발 행동은 참으라는 건가? 음,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삐이이이이이이- 아우, 시끄러워. 어떻게든 이성을 찾으려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앞에 자리한 모든 것들은 그대로였다. “이번 탐사 중에만 두 번째 마주치는 걸 보니 인연이긴 한가 보군!” 벡이 사람 좋게 웃으며 의자처럼 앉아 있던 사체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런 벡에게 아멜리아가 물었다. “……왜 너희가 여기 있던 거지?” “글쎄, 균열이 열리자마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여기 이 두 녀석이 보이지 않나.” 벡이 레무드, 그리고 한스로 추정되는 사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일단 잡아놓고 물어보니 동료들 셋만 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더군? 그래서 쭉 기다리다 보니, 이 셋이 나오더란 말이지.” 벡은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생략했고, 아멜리아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거야 뻔했으니까. 이 셋을 죽이고서, 필요한 정보만 캐냈겠지. 마지막에 수호자가 ‘넘버스 아이템’을 떨궜다든가 하는 그런 거. 삐이이이이이- 아멜리아와 벡이 뭐라고 대화를 나눈다.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생각했다. [아, 인간에겐 조금 어렵나? 그냥 편하게 얀델 쟈르쿠라 불러라!] 죽는 건 알았다. 근데, 그게 나 때문일 줄은 몰랐다. ‘내가 없었다면.’ 얀델 쟈르쿠는 팀원들 모두와 함께 균열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따라서 남겨진 동료가 앞에서 기다리다가 이놈들 눈에 발견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 결과, 그는……. 아니,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여정을 이어갔을 테지. 그리고 잘하면……. [후후, 분명 대단한 전사가 될 걸세. 나와 그녀의 피가 섞인 아이—] 얀델 쟈르쿠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겠지. 아니, 어쩌면 성인이 되어 함께 미궁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을지 모른다. ‘나만 없었다면.’ 비요른 얀델의 몸에 악령이 깃드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삐이이이이이이이. 이명이 심해진다. 일종의 보호 기제였다.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외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겁쟁이를 위한 울림. 꽈악. 분명히 손에 모든 힘을 불어넣고 있는데, 머리에 피가 모인다. 삐이이이이이이- ‘나만 아니었으면.’ 드왈키는 죽지 않았다. 훗날 탐험가가 된다고 한들, 4층에 그 위험한 곳까지 가진 않았겠지. 삐이이이이이이-. ‘내가 오지 않았다면.’ 드왈키의 사랑도 이뤄졌을지 모른다. 어느 날, 우연히 동료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어쩌면. 만약에. 그래, 만약에 없었다면. 삐이이이이이이-. 귀가, 아니, 머릿속이 얼얼하다. “근데, 철가면 저 친구는 왜 이렇게 말이 없나?” “비욘.” 내내 미뤄둔 숙제처럼. 감정은 감정일 뿐이라며. “비욘, 정신 차려라.” 가슴 한구석에 던져 놓고서 외면했던, 수많은 감정이 동시에 나를 덮쳐온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누군가를 위해서라 해봤자 위선인 것을 알기에, 나를 위해서.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 에밀리라는 가명이 아닌, 진짜 이름. 그것만으로도 상황 파악이 됐을까. “성주 측 세력이다. 참아라.” 내 손목을 잡은 아멜리아가 가하는 힘이 보다 강해진다. 물론, 의미는 없었다. 터벅. 너, 민캐잖아. “비욘…….” 아멜리아를 뿌리치며 앞으로 나가자, 벡이 피식 웃었다. “후후, 철가면이 화가 났나 보군. 어디 내가 아예 달라고 했나? 단지, 뭘 얻었는지 구경이나 좀 해보자 이 말이었지. 우리도 오래 기다렸지 않나?” 둘이 나누던 대화는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맥락상 이해는 됐다. 그래, 이게 궁금하다 이거지? 철컥. 아공간에 넣어 뒀던 망치를 꺼냈다.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 “망치? 넘버스 아이템 중에 이런 것도…….” 벡이 뭐라 중얼거리다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표정을 달리했다. “자, 잠깐만. 좀 더 가까이에서 봐도 되겠나? 혹시 내가 아는 그 물건인가 싶어서 말이지.” “그래라.”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이에 벡도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딱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저, 정말 그 물건이군! 정말 그게 안에서 나온 건가?” “그래.” 궁금증이 풀렸다니 다행이네. 퍼억-! 그럼 이제 죽어. 302화 악령 (6) 퍼억-! 악마분쇄기로 벡의 반질반질한 정수리를 있는 힘껏 내리친 즉시. 피슈우우욱-! 두개골과 머리 가죽이 동시에 터지며 피분수가 온갖 구멍에서 뿜어져 나온다. 성공적인 기습. 다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놈들답게 리더의 머리통이 깨졌음에도 대응은 빨랐다. 타닷. 궁수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이 미친 놈이!” 근접류는 빠르게 다가서며 일사불란하게 내 좌측과 우측을 가로막았다.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후우우웅-! [거대화]를 하며 가장 앞에 있던 방패 전사를 향해 망치를 내리찍었다. 놀랍게도 놈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망치의 궤적을 따라 방패를 들며 이렇게 외칠 뿐. “찔러라!” 그래, 막을 테니 내 옆구리를 쑤시라 이거지? 슬쩍 보니 방패의 때깔이 제법 좋았다. ‘아다만티움이네.’ 보아하니 비싼 방패를 믿고 있는 거 같은데……. 세상엔 그보다 더 좋은 템들도 널렸는데 말이지. ‘발악은.’ 방패와 망치가 충돌하며 폭발음이 피어났다. 콰아아아앙-! 녀석의 방패는 살짝 찌그러졌을 뿐 멀쩡했다. 하지만……. 콰직-! 정작 방패를 든 놈은 송곳에 찔린 캔 음료처럼 모든 구멍으로 피를 뿜어냈다. 그야 아까는 [휘두르기]를 쓰지 않았으니까. 더블 넘버스 아이템의 효과도 볼 수 없었다. 둔기류 스킬 사용 시 500% 대미지 증가 및 영혼력 소모 절반 감소. 그리고 내려찍기 시, 방어구 관통 50% 보너스. 툭. 압력에 의해 안구가 과할 정도로 돌출된 모습으로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럼 이제 다음 차례. 스윽. 세 번째 목표물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녀석이 뒤로 물러났다. 슬쩍 보니 뒤에 있던 궁수도 마찬가지다. 도망치려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웃기다. 이쪽은 보내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초월.’ 나는 신속하게 커맨드를 읊었다. ‘폭풍의 눈.’ 스톰거쉬에게서 획득한 액티브 스킬. 쿠웅-! 이내 발로 땅을 내리찍자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스톰거쉬가 쓰던 것과는 달랐다. [초월]의 효과였다. 후우우우우웅-! [폭풍의 눈]은 더 이상 반경 5m 내의 적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 대신. 반경 20m 내의 지정 대상. 오직 단 한 명을 잡아당겨 내 앞으로 데려온다. “악, 아아아아악!” 바로 이렇게. 콰직-! 그럼 이거로 세 마리째. 다만 나는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타깃, 도망치는 궁수 쪽을 확인했다. 너무 멀어졌다면 [도약]을 통해 뒤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푸욱. 이미 궁수 놈은 아멜리아가 접근해 마무리를 해 둔 상황. 참 합리적인 여자였다. 좋든 싫든 일단 사고가 벌어졌으니, 다 죽여서 입막음을 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겠지. “아, 으, 어, 사, 살려…….” 퍼억-! 아멜리아가 궁수 옆에 있던 꼬마, 젠시아까지 뒷목을 쳐 기절시킨 뒤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미련한 짓이었다.” “성주 측 사람이라서?” “아니, 너 때문에 이제 이 꼬맹이도 죽여야 하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근데 얘는 그때 분명 살아 있었는데? “꼭 오늘이 아니어도 죽일 기회는 많았다. 네가 나서지 않았어도, 언젠가 내가 죽였을 생각이었고.” “……네가?” “이 일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책임이라……. 아,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삐이이이이이이. 전부 다 때려죽였지만 이명은 그대로.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더욱더 갑갑하다. “왜 그렇게 성급한 짓을 한 거지? 어차피 얼굴 한번 못 본 아버지라고 했으면서?” 그건 분명 그렇지. 심지어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미친놈처럼 이 새끼들을 전부 때려죽여도, 그에겐 어떠한 보상도 될 수 없다는 걸. 오히려 그보다 더한 위선도 없다는 걸. 하지만……. “그냥.” 뭐라 더 잘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군.” 의외로 아멜리아는 그 말에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볼 뿐. “…….” 아멜리아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얀델 쟈르쿠의 사체가 보였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만이 아니라, 장난감처럼 다뤄진 듯한 정황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사체. 꽈악. 양 주먹을 쥐었다. 균열 안에서 나눴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비욘이라 했나? 가능하면 얼른 애를 낳아라.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런가?] [그래, 나도 애를 낳기 전에는 몰랐다.] 쟈르쿠는 말했다. 피를 이은 아이는 또 하나의 나와도 같다고. 그것은 참 신비한 일이라고. 자식을 낳고서, 나 자신이 뛰어난 전사가 되는 것보다 더욱 바라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고. [후후, 분명 대단한 전사가 될 걸세.]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그만!] [응?] [그만, 나는 이만 가 보겠다······.] 그 한마디에 사무치게 깨달아 버린 것이다. 내가 비요른 얀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며, 많은 이를 구하고, 도시에서 영웅이라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고 한들.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 설령 그게 내가 바란 게 아니었다고 한들. 꽈악. 누가 뭐래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에 나는 악령인 것이다. 이 바바리안 전사의 하나뿐인 소중한 유산마저 빼앗은. *** “이제 좀 진정이 됐나 보군.” 얀델 쟈르쿠의 사체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때,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간이 약이라던가? 어느새 이명도 잦아들고 떨림도 멎었다. 그러니 이제 벌인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할 차례. 나는 기절한 젠시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꼭 죽여야 하나?” “그럼 달리 방법이 있나? 이 꼬맹이가 살아서 돌아가면 성주 쪽에 우리가 한 짓이 들통난다.” 하, 니미럴.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니 아멜리아가 물었다. “죽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아직…… 어리지 않나.” 그런 대답을 하면서도 의문은 들었다. 나는 왜 죽이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는 거지? 그도 그럴 게,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이 아이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악령에게 몸을 빼앗긴다. 그러니까,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니미럴.’ 욕지거리가 나온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어차피 언젠가 죽을 테니까 지금 죽여도 변하는 게 없을 거라고? 오히려 죽이는 행위로, 아우릴 가비스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이는 건 안 된다. 방법을 찾아보자.” “너답지 않군.”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지?” 악령이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도 모르게 까칠한 말이 나갔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인정하고 있기는 했다. 확실히, 평소의 나였다면 다른 선택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유난히 힘든 날이지 않았던가. 설령 이 결정이 운명에 순응하는 일이라 해도,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네 말대로다. 내가 널 잘 몰랐나 보군. 이렇게 유약한 놈인 줄은 몰랐는데. 네가 못 하겠다면 내가 하—.” “그만.” 아멜리아의 팔목을 붙잡았다. “……놓는 게 좋을 거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하지 않았나.” “방법?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 아오, 진짜……. 그러니까 그 방법을 잠깐만 같이 생각해 보자는 거 아니……. ‘아, 맞다, 그거!’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 환단!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든 그 약을 먹이면 기억을 지울 수 있지 않나! 성주 쪽 세력이라며?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레카를 외치는 철학자의 심정으로 말했으나, 아멜리아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지금 이 시기는 그 약이 막 개발된 초창기다. 그 귀한 걸 이놈들이 갖고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일단 찾아볼 필요는 있는 거 아닌가!” “……좋다, 직접 봐야 포기할 거라면.” 그리 말하며 아멜리아가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한 가지 경고하는데, 다시는 내 팔을 멋대로 잡지 마라.” 거, 예민하기는. 이내 아멜리아는 사체들에게 다가가 루팅을 시작했다. 오케이, 이거로 그 환단이 나오든 말든 생각할 시간은 벌었—. ‘아, 잠깐만.’ 뒤늦게 한 가지 실수를 깨달았다. 보니까, 아멜리아 얘는 아직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거 같은데……. ‘돌겠네.’ 하, 좀 전에 멘탈이 너무 나가서 그런가?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 ‘……이건 나중에 얘가 먼저 언급을 하면 그때 잘 수습해 보기로 하고.’ 나도 일단 쪼그려 앉아 사체들의 장비를 벗기고, 배낭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서 기억 제거 알약이 나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러던 때였다. “……운이 좋군. 설마 이 시기에 이걸 갖고 있을 줄이야.” 정말로 가방에서 환약이 나왔다. *** 환약이 나온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서둘러 아멜리아가 젠시아의 입에 환약을 넣었고, 우리는 젠시아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으, 으아아! 뭐, 뭐야……!” 손발이 묶이고 안대까지 채워진 젠시아가 의식을 회복했고,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반응을 관찰했다. 초창기 약이니 불량이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 “벡 아저씨! 벡 아저씨! 도, 도와줘요!” 일단 뒈진 벡을 찾는 걸 보니 기억이 지워진 건 확실했다. 그럼 어디까지 기억이 지워졌을까? 우리는 제대로 멘탈이 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젠시아를 통해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설마 수정동굴에 들어온 순간부터 기억이 없다니. 초창기라 그런지, 양산되던 그것과는 성능이 과한 거 같군.” 이내 아멜리아는 발버둥 치는 젠시아의 가서 다시금 기절을 시킨 뒤, 도중에 일어나지 않도록 수면제까지 먹였다. 그럼 이제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된 셈. “곧 미궁이 닫힐 테니, 몇 시간 정도만 같이 있으면 되겠군.” 이후 우리는 자리를 이동한 뒤, 잠든 젠시아와 함께 시간을 때웠다. 그야 얘를 미궁에 혼자 두고 갈 순 없지 않은가. 이러고 있다가 미궁이 닫히면, 젠시아도 성주 측 세력에 의해 수습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보를 캐려 하겠지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고. “……저, 아멜리아. 아까는 미안했다.” 기다리는 동안 사과를 했으나, 아멜리아는 그냥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얼마나 흘렀을까. 솨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며 미궁이 닫혔다. 다만, 평소처럼 따스한 햇빛이 우릴 반긴다거나, 시원한 공기가 기분 좋게 몸을 휘감는 일은 없었다. 칙칙한 지하 도시만이 우리를 반길 뿐. “나왔군.” 영주성 서부에 위치한 차원 광장. 여기서부터 라프도니아와는 다르다. 지상에서는 탐사 종료 시 반드시 검문소를 지나치며 마석을 환전해야 했으나, 여기서 환전은 개인의 자유. “자, 술이나 마시러 가자!” “뭐야, 저기 쟤 벡 패거리의 꼬맹이 아니야? 왜 혼자 저러고 있는 거지? 설마 다른 놈들은 안에서 뒈진 건가?” “철어금니가 반길 소식이로군. 안 그래도 벡 그놈에게 이를 갈고 있던데.” 광장에 나온 탐험가들은 제각기 목적에 따라 흩어졌고, 주변은 금방 한산해졌다. 저 멀리 쓰러져 있던 젠시아 역시 성주 측 무리에게 발견되어 어디론가 이송됐고. “우리도 이만 이동하지.” “아, 그래…….” 우리도 슬슬 광장을 떠나 한곳으로 향했다. [멜타 상단] 노아르크의 유일한 상단이자, 지하의 약탈자들이 장비를 처리할 때 가장 애용하는 판매처. 제법 줄이 짧은 마석 환전소와 달리, 멜타 상단의 지부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야 여긴 마석 자체가 돈이라 꼭 바꿀 필요가 없거든. 애초에 저기 마석 환전소도 돈으로 바꿔 주는 게 아니라, 식량이나 원하는 물품으로 바꿔 준다고 들었다. “흐음, 철가면과 에밀리. 최근 가장 유명하신 분들이 오셨군요?” 이내 차례가 되자 우리는 보관 중이던 장비들을 전부 꺼냈다. 아, 참고로 벡의 장비들은 뺐다. 이걸 꺼냈다가는 우리가 그놈들을 죽인 게 알려질 게 뻔하니까. “……이걸 전부 이번 탐사에서 획득하셨단 말입니까?” 아무튼, 본격적으로 배낭을 탈탈 털고 있자니 점점 직원의 눈빛이 멍해졌다. 약탈자들이 득실거리는 노아르크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털고 나온 놈은 흔하지 않던 모양. “시간이 조금 걸리겠군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후 직원은 상단 소속 감정사들을 몇 명 더 호출한 뒤 다함께 정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분쯤 흐르자 감정가가 나왔다. 4등급 마석 21개. 5등급 마석이 1개. 7등급 마석이 7개. 후, 이렇게 말하니까 감이 잘 안 오네. “라프도니아 환전소 기준으로 얼마지?” “아, 노아르크에 오신 게 처음이니 잘 모를 수도 있으시겠군요. 저번 달 환율 기준으로 도합 2,157만 스톤입니다.” 아멜리아에게 듣긴 했지만, 이거 정말 도둑놈 새끼들이구나. 아무리 저층 장비들이고 아공간이나 확장형 배낭 같은 건 매대에 안 올렸다 해도 그렇지. “지상에서 팔면 7천만 스톤은 훌쩍 넘을 물건이다.” “예, 지상이라면 그렇겠지요.” 거, 말투 띠꺼운 거 보소? “됐다. 에밀리, 이만 챙겨서 나가지.” “판매하지 않으시겠단 뜻입니까?”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넘길 생각은 없다.” “그러시다면야.” 이내 우리는 다시 장비들을 챙겨서 나왔다. 직원은 아쉬워하며 우리를 붙잡지도 않았다. 어차피 결국엔 자기들한테 팔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일단 숙소로 가지.” 상단 지부에서 나온 우리는 묶고 있던 여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순서대로 몸부터 씻은 뒤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눴다. “일단 상단에 들러 약탈한 장비들을 보여 줬으니, 벡이 아니어도 성주가 관심을 보일 거다.” 우리가 팔 생각도 없는 장비를 갖고 상단에 들른 이유였다. 사실상 상단의 주인은 성주나 다름없으니까. 피 묻은 장비와 신분증 등, 우리가 보여 준 수많은 약탈의 증거가 성주의 귀까지 들어갈 터.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그래, 일단은 그렇지.” 이후 몇 가지를 주제로 더 대화를 나눈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침대에 누웠다. “얘기 다 끝났으면 먼저 자겠다. 피곤해서.” 물론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뒤척이고 있던 때였다. “자나?” 돌연 아멜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안 잔다. 왜?”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궁금한 거라……. 왠지 짚이는 게 있었다. 돌이켜 보니까 아까 그 ‘실수’에 대해 생각이 난 거겠지. “해 봐라.” “아메른의 축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게 된 거지?” 오, 그 약 이름이 이거였구나. 처음 알게 된 정보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답했다. “아, 그거? 지난 번에 네가 여관에서 나보고 먹으라며 주지 않았었나.” “하지만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든 물건이란 말은 하지 않았는데.” “뭔지 궁금해서 다른 노아르크 탐험가를 붙잡고 죽이기 전에 물어봤다!” “흐음, 그렇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니, 뭔데 그 말투는. 괜히 불안해지—. “바바리안, 일단 그 환단의 이름은 레테의 축복이다. 아메른의 축복 같은 게 아니라.” 응?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이내 내가 누운 침대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졌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그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너, 그때 기억을 잃지 않았었어.” 외통수였다. 심지어 보아하니, 실수를 했을 때부터 인지를 했음에도 내가 방심할 때까지 내내 모른 척한 모양인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영악해? 나는 한숨을 쉬며 쿨하게 인정했다. “그래, 어찌 된 영문인지 나만 멀쩡하더군.” 약이 불량이었던 걸 뭐 어떻게 해. 그래서 어쩔 건데? 그때는 내가 기억이 있는 걸 알면 암살하러 올까 봐 숨겼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잖아? 노아르크의 존재도 도시에 다 까발려진 상태고. ‘그래, 이제 와서 내가 숨길 게 뭐 있어?’ 생각을 해 보니 마음 졸일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당당하게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 눈빛이 이상하다. 어딘가 싸늘하게 느껴진다 해야 하나? “……왜 날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차갑게 대답했다. “비요른 얀델, 그 약에 기억을 잃지 않는 건 악령뿐이다.” 아, 어, 음……. ‘니미럴.’ 이건 또 내가 몰랐네. 303화 레인웨일즈 (1) 노아르크는 악령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상과 달리 정체를 밝히고 살아가는 자들도 꽤 된다. 실제로 지난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이곳 태생인 아멜리아도 악령을 그렇게 적대적으로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는 순간 평생 약점이 되겠지.’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다. 그 문장은 내 아킬레스건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내 사회적인 모든 것을 말살하고, 더 나아가 내 목숨마저도 위협할 폭탄. 한데 그 폭탄의 버튼이 아멜리아에게 주어졌다. 물론 지금은 아멜리아와 우호적인 관계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만약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틀어진다면? 그날부터 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딱히 관계에 문제가 없더라도 불안 요소임은 틀림없다. 만약 얘가 작정하고 나를 이용하려 든다면 나는 종처럼 불려나가 개처럼 부려먹히게 되겠지. 그렇기에……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도 그럴 게, 악령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니? 단순히 나를 떠보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설령 진짜 그 약에 그런 특성이 있더라도 불량품이었던 것으로 만들어야— “모욕하는 거라면 어쩔 거지?” “……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타입은 처음인데……. 잠깐 당황한 사이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덤벼들기라도 할 건가? 내 도움 없이는 성주가 보관 중인 물건을 얻기 더 힘들어질 텐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내 말에 아멜리아가 코웃음쳤다. “그런 말을 하는 것부터가 별로 화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니었다면 진작 내게 달려들었을 테니까. 다른 바바리안들이 그러하듯.” “…….” “그러고 보면 첫 만남부터 이상했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목숨 구걸을 하라는데, 너는 잠깐도 고민하지 않았지.” “…….” “근데 모욕?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웃기지 않나?” 하, 이게 업보인가? 저리 말하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다. 따라서 이제 내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바바리안을 비웃다니, 넌 머리에 문제가 있나 보군.” 최후통첩이었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더 불리해질 게 뻔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몸에 힘을 불어넣던 차였다. “왜, 정말로 내게 덤벼들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때 널 찾아간 악령사냥꾼에게 그런 것처럼?” 응? 그 얘기까지 안다고? “……너, 내 뒷조사까지 했던 건가.” “수상한 점이 한둘이어야지. 비단 나만 아니라 어지간한 자들은 모두 해봤을 거다. 뭐, 귀족 작위를 받은 다음에는 나처럼 모두 의심을 접었겠지만.” 아멜리아는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설마 정말로 악령일 줄이야. 재주도 좋군. 귀족 작위는 대체 어떻게 받은 거지? 비밀 치안부가 아무리 무혐의 처분을 했더라도, 작위 수여인 만큼 왕가에서도 따로 검증을 하려 했을 텐데.” 어, 그런 거 없었는데. 모르겠지만, 잘 됐다. 이 부분은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악령이 아니니까 그랬다고는 생각 못 하나?” 당당히 어깨를 펴며 말했지만, 아멜리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즉답했다. “아까도 말했듯, 그 약에 기억을 잃지 않는 건 악령뿐이다.” “불량품—” “그럴 일은 없다.” 단호박인가? 가드가 얼마나 단단한지 뭔가 말하려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가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던 차, 아멜리아가 뭐라 중얼거렸다. “……흐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왕가에서는 알면서도 묵인해 줬을 수도 있겠군. 그때 너는 도시에서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후,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뒷말이 궁금해지지만, 물어봤다간 인정하는 일이 될 거 같아서 겨우 참았다. 한데 표정에서 티가 났을까?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눈치군.” “아니, 전혀. 애초에 내가 왜 그런 걸 궁금해해야 하지?” 내 부정에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끝까지 인정할 생각은 없다 이건가?” “물론이다. 난 악령 같은 게 아니니까.” “뭐, 너답긴 하군. 됐다. 어차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내 아멜리아가 아공간에서 나침반 크기의 원판을 꺼냈다.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미친, 이게 왜 여기서 나와.’ No.7234 어긋난 신뢰. 발동 시 반경 10m 내에서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하는 횟수 소모형 아이템이자, 도플갱어 숲에서 그 지랄을 나게 만들었던 그것. “아까 상단에서 짐을 풀 때는 못 봤는데.” “예전에 도시에서 지낼 때 따로 사둔 것이니까. 이런 도시인 만큼 유용하게 쓸 일이 있겠다 싶었지. 설마 너한테 가장 먼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 그랬구나. 너는 이미 갖고 있는 패들을 조합해 나를 어떻게 요리할지 전부 시뮬레이션을 돌린 상태였던 거구나. “표정을 보니 이게 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 같군. 하긴, 악령이라면 모를 리가 없겠지.” 딸깍. 아멜리아가 ‘어긋난 신뢰’의 상단에 달린 홈을 눌렀다. 그리고 침대 사이 협탁에 올려놨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초침. 그 상태로 아멜리아가 물었다. “비요른 얀델, 넌 악령인가?” 체크 메이트였다. ***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악령임을 밝힐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다. 그건 이미 ‘어긋난 신뢰’가 등장한 순간 물 건너갔으니까. ‘가짜 같은 게 아니야.’ 애석하게도 ‘어긋난 신뢰’는 진품이었다. 작동된 순간에 곧바로 시험해 봤거든. ‘나는 여자다’ 같은 거짓말은 말을 하려 해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이제 5분 남았군.” “…….” “계속 그러고만 있을 건가?” 침묵 자체만으로도 대답이 되어 버리는 아이템. 내가 악령이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이 되었다. 따라서, 내가 고민하는 것은 단 하나. ‘죽여?’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비밀인 만큼, 극단적인 수단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하지 말자.’ 나는 애써 그 생각을 털어냈다. 애초에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솔직히 말해, 1:1로 싸웠을 때 이길 각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아멜리아가 도주를 택하면 추격이 쉽지 않다. 또한, 당장 얘랑 틀어지면 앞으로의 계획들도 다 막막해진다. ‘게다가 딱 봐도 적이 되면 엄청 골치 아플 거 같은 타입이란 말이지.’ 하면, 역시 방법은 하나다. 바바리안스러운 해결책은 아니겠다마는. 흑백논리에 빠진 여자이니, 적이 되기 싫다면 친구가 되는 수밖에. “이대로 낭비되는 건 아까우니 나라도 뭐라 말을 해야겠군. ‘약에 기억을 잃지 않는 건 악령 뿐’이란 말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내 나는 기나긴 고민을 끝마쳤다. “……그래, 나는 악령이다.” 이백호에 이어 두 번째로 하게 된 커밍아웃. 아멜리아는 딱히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내 입으로 인정하기 위해 꺼냈을 뿐, 사실 이미 진작에 확신하고 있었던 거겠지. “묘한 표정이군.” “……넌 모를 거다. 지금 내가 얼마나 속이 시원하면서도 갑갑한지.” “왠지—” 갑자기 아멜리아가 말을 멈췄다.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곧 상황이 이해됐다. ‘어긋난 신뢰’가 거짓으로 인지해 입을 막아 버린 거다. “설마 미안하게 됐다든가 그런 말을 하려 했던 거냐?” “…….”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순간 열불이 치솟았지만 겨우겨우 참아냈다. 그래, 적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 악령인 게 들킨 이상, 이제 나는 얘랑 이 세상에 둘도 없을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 그러니까 우선 이것부터 확인하자. “근데 넌 괜찮은 건가? 내가 악령이어도.” “도시 사람들처럼 악감정이 있냐는 거냐면, 답은 그렇지 않다다. 예전에는 악령과 1년 넘게 팀으로 활동했던 적도 있었지.” “……근데 그럼 왜 그렇게 집요하게 캐낸 거냐?” “궁금했으니까.” 여기가 두 번째 고비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이 어떻게든 감추고 싶어 한 것을 캤다고? 머리에 스팀이 오르던 찰나. “……이상하게도 너와는 자주 얽히니까. 그래서 궁금했다. 네가 숨기고 있는 건 없는지, 믿어도 좋은 건지.”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하며 그리 말했다. ‘어긋난 신뢰’가 작동 중인 걸 보니, 마음에도 없는 빈말이거나 한 건 아닌데……. 하, 이러니까 화내기도 그렇— “아, 물론 약점을 잡으면 네가 함부로 날 배신할 수 없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텐데. 뭐,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먹은 여자인 것을. “궁금한 게 있다.” “……해봐라.” “악령이라면, 얀델 쟈르쿠의 죽음에는 왜 그렇게 분노했던 거지? 죄책감이었던 건가?” “그건…….” 나도 모른다. 그리 대답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 “흐음, 넌 실제로는 굉장히 여린 사람이었군.” 흥미롭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는 아멜리아. “너도 다른 악령들처럼 돌아가는 게 목표인가?” “……모르겠다.” “그 동료들 때문에?” “…….” “정이 많던 건 원래부터 그랬나 보군.” 진짜, 얘는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 슬슬 주제를 바꾸든가 해야……. 딸깍. 그때 딸깍 소리를 내며 ‘어긋난 신뢰’의 침이 움직임을 멈췄다. 효과 유지 시간이 끝났다는 뜻. ‘이제 좀 살겠네.’ 나는 신속하게 대화 화제를 바꾸었다. 좋든 싫든 악령인 걸 밝힌 상황이지 않은가. 평소에는 정체를 감추려 묻지 못했던 것부터 확인을 해야지. “아멜리아, 근데 예전에 아우릴 가비스는 왜 찾던 거냐?” “아, 그러고 보면 네가 악령이라면 그자에 대해서도 알았겠군.” “알기만 할까. 얼마 전엔 직접 만나 보기까지 했다.” “그를 만났다고?” “그 얘기는 일단 나중에 하고, 내가 묻는 것부터 답해 봐라.” “……내 언니가 죽던 날, 그날 그 자리에 그자도 있었으니까.” “뭐?” “분명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만나 진실을 듣고 싶었지. 그게 전부다.” 흐음, 생각보다 별게 없네. 더 대단한 비밀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지, 그날 그 자리에 그 늙은이가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정보야. 어쩌면 이번 여정 중에 그 늙은이 목표가 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자, 그럼 말해 봐라. 어디서 그자를 만났지?” “고스트 버스터즈에 대해서 아나?” “악령들의 집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는.” 오케이, 그럼 설명할 거리가 줄었네. “20년 전이라 당연히 불려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잠에 드니 소환이 되더군. 거기서 아우릴 가비스라 주장하는 자와 만났다.” 이후 대화를 나누다 미래에서 온 사실을 들킨 걸 간단히 설명한 나는 이어서 말했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니 잘 들어라. 그 늙은이는 말하더군. 우리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시험을 해봤지. 그리고 결과는 그때 말했던 그거다.” 드왈키와 레이븐. 둘의 미래를 바꾸려 했으나, 그 행동조차 인과의 한 부분이었다는 듯 상황이 흘러갔다. “그러니 다시 묻겠다, 아멜리아.” “…….” “그래도 해 볼 생각인 거냐?”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을 땐 미동조차 없더라니. 아우릴 가비스의 말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자 그 무게가 남달랐던 모양. “해볼 거다.” 한참 동안 조용히 감정을 추스르던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니까.” 늦었다라……. 무슨 낭떠러지 맨 위에서 주식을 산 사람 같네. “그렇군. 그럼 나도 돕겠다.” 손절을 권유하는 대신, 함께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은근히 인정이 많은 여자 아닌가. 이렇게 호감도를 쌓고 빚을 지우다 보면, 내 약점 갖고 장난칠 생각은 안 하겠— “……피곤하니, 먼저 쉬겠다.” 그때 아멜리아가 대화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응? 잔다고? 지금은 고맙다고 말할 타이밍 아닌가?’ 의지가 된다든가,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든가. 그런 대사는 기대도 안 했지만, 설마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누워 버릴 줄이야. 후, 이러면 계획이 어긋나는데……. 어떻게 해야 점수를 딸 수 있지? “아멜리아, 자나?” “……?” “그, 그냥 피곤하면 아, 안마라도 해줄까 해서.” “…….” “아, 그래……. 역시 좀 그렇지?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나는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며 맞은편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올 리는 만무. 그렇게 정적의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던 때였다. “원래 이름이 뭐지?” 그때 깜빡이도 없이 질문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냥 솔직히 대답했다. 갑자기 본명이 왜 궁금해졌는진 모르겠지만……. “이한수다. 아, 참고로 이가 성이다.” 악령인 걸 들켰으니 본명이야 별반 중요치도 않을뿐더러, 답변 거절은 호감도 하락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음,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한스? 그럼 이름이 한스인 건가? 의외로 흔한 이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뭐, 씨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지. 304화 레인웨일즈 (2) 벌떡 일어나 발작이라도 하듯 욕지거리를 뱉은 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길지는 않았다. “나한테, 방금 씨발이라고 한 건가?” 아멜리아가 확인을 하듯 되물었고, 나는 서둘러 수습을 시작했다. 아, 물론 무지성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건 나한테 중요한 문제니까. “크흠흠, 내 이름은 이한수다. 이한스가 아니라.” “그래서?” “발음에 주의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있지 않냐. 나한테는 굉장히 예민한 사항이라…….” 그리 말하면서도 이것 때문에 더 호감도가 깎이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의외로 아멜리아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알겠다. 앞으로는 유의하지.” 왜 발음 갖고 이런 반응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선을 넘었다는 건 인지한 모양. 그래, 그럼 이 부분은 끝났고. 이왕 저쪽에서 말을 걸어준 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아멜리아.” “말해라.” “아까 했던 말은 무슨 뜻이었나? 왕가에서 내가 악령인 걸 알고 묵인했을 수도 있다는 그거 말이다.” 악령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는 묻고 싶어도 참아야 했던 그 질문. “아직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보험부터 깔아 둔 뒤, 자신의 추측을 입에 올렸다. “일단 왕가에서 ‘검증’을 했다면 너의 정체는 진작에 들통이 났을 거다.” 음, 그건 그렇지. 오늘처럼 넘버스아이템 하나만 써도 나로서는 뭘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알겠는데, 그게 왜 묵인이랑 연결이 되는 건가? 그냥 왕가에서 날 완벽하게 믿었다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 너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이었지 않나. 왕가에서 건드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여겼다.” 어,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암만 이름을 날려 봤자 왕가 입장에선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좀 더 자세히.” “흐음, 너는 정치 쪽으로는 감각이 없군?” 아니, 이한수 탐구는 제발 그만하고. 대꾸도 않고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라. 미궁에서 목숨을 바쳐 동료를 구하고, 악적들과 혈투를 펼쳐 수천 명의 탐험가를 살려서 되돌아온 영웅. 한데 그 영웅의 정체가 악령이었다? 과연 어떤 문제가 생길 거 같나?” “어…… 혼란에 빠진다?” “그래, 혼란에 빠질 거다. 그간 왕가에서는 세 개의 교단과 함께 악령을 사악한 존재라 묘사하고 척살해야 할 대상으로 공표했으니까.” 아……. 그제야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얘가 왜 왕가에서 내 정체를 알고도 묵인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악령은 언제까지나 악한 존재여야만 한다, 이건가…….” “다행히 눈치는 빠르군.” 나는 다른 악령들과 다르다. 세력이 약한 바바리안족을 키우기 위해 동족들을 도왔고, 더 나아가 노아르크전에서 그 누구보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렇기에 왕가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날 악령이란 이유로 처형을 하는 순간, 시민들은 생각하고 말 테니까. 수천 명을 구했는데? 그런데도 악령이란 이유 때문에 죽이는 거야? “물론 널 악령이라 밝히고 처형대에 올려도 폭동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을 거다. 늘 그렇듯이 잠깐 시끄러웠다가 조용해지겠지. 하지만…….” “왕가 입장에선 그런 선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겠군. 어쩌면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악령도 존재할지 모른다는 그런 선례를.” “다시 말하지만, 추론일 뿐이다.” 아멜리아는 추론이란 말을 끝으로 얘기를 마무리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찝찝했다. 그야 무지성 추론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근거가 있다. 한데 그 근거가 내 귀에도 신빙성 있게 들리는 게 문제다. ‘허, 정말로 이게 사실이면 어쩌지? 돌아가자마자 신분 세탁을 하고 숨어 살아야 하나?’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던 때였다. “……아멜리아, 자냐?” “안 잔다. 그리고 앞으로는 둘이서 있을 때도 에밀리라 불러라. 나도 널 가명으로 부를 테니.” “어, 갑자기?” “남들 앞에서 또 실수할 수도 있지 않나.” 또라고 말하는 건, 벡 패거리를 조졌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그러니 평소에도 버릇을 들여놓는 게 좋다. 우리 계획대로라면 이제 곧 성주 쪽 세력과 접촉하게 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잡념을 지웠다. 그래, 왕가에 대해 암만 생각해도 이 시대에서는 제대로 된 해답을 찾을 수 없잖아? 우선 이쪽 일에만 집중하자. *** 다음 날 아침. 똑똑.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릭 오마누스라고 하오. 에밀리, 토르의 아들 비욘 맞소?” 그는, 놀랍게도 기사였다. 그냥 검을 무기로 쓰고 판금 갑옷을 둘둘 두른 탐험가가 아니라 진짜 영주 휘하의 기사. ‘이쪽에도 기사단이 있기는 하구나.’ 하긴, 그러니까 아멜리아 얘가 오러를 쓰겠지. 저 나이에 자연 각성을 할 정도로 검 숙련도를 높이 쌓기는 어려웠을 테니. 분명 누군가에게 배우긴 했을 거다. “무슨 용건이지?” “성주께서 그대들의 능력을 높이 사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소.” 라프도니아의 높은 사람들이 떠오를 만큼 오만한 단어 선택이었다. 아주 그냥 우리가 거절할 거라곤 생각도 안 하지? 뭐, 안 할 거긴 하지만. “지원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아멜리아가 모른 척 묻자, 릭 오마누스는 대답 대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자세한 건 거기에 모두 적혀 있으니, 읽고 나서 대답을 해주시겠소?” 영입 제안에 응할 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원과 반대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적힌 계약서. 조건만 보면 나쁘지 않았다. 팀원도 지원 받고, 공적을 세우면 라프도니아로 올라갔다 올 수 있는 권한도 주는 데다가, 영주의 권력을 등에 업고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대신 긴급 상황 시 영주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지원이 아니라 영입이었군?” “말했지 않소. 성주께서 그대들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앞에서 기다리겠소. 너무 오래 걸리지만 않았으면 하오.”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너무 쉽게 응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기에 우리는 잔뜩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계속 그 자세로 있던 거냐?” “공무 중이니 당연하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두 시간이 넘게 앞에서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 여기 받아라.” 이후 우리는 서명한 계약서를 기사에게 줬고, 기사는 이미 내성에 말을 해뒀다며 언제든 찾아가란 말을 해주었다. 거절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안 했던 모양. “근데 서명 같은 게 의미가 있나?” “형식상이오. 어차피 그분의 뜻을 어기고서는 이 도시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하니.” 뭐래, 신입 앞이라고 허세 부리기는. 아예 동쪽 구역으로 이주해서 오르큘리스랑 짝짜꿍하는 방법도 있구만. “그럼 나중에 또 보리다.” 기사는 용건을 마친 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떠났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하루를 시작할 차례. “에밀리, 이제 어떡할 거냐? 관심은 끌었지만, 영주가 직접 만나보려 할 정도는 아니었나 본데.” “문제는 없다. 앞으로 관심을 끌면 되는 부분이니.” “뭐, 그건 그렇지.” 자랑은 아니지만, 관심을 끄는 일은 자신이 있다. 이 바바리안 몸뚱이로는 가만히만 있어도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더란 말이지. “자, 그럼 나가지.” 이후 우리는 장비를 모두 챙겨입고서 영주성으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외성에서만 간단히 행정 업무를 봤지만, 이번엔 허가가 필요한 내성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에밀리 님과 철가면 님이시군요. 오마누스 경께 얘기는 들었습니다. 멜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두 분께서 내성에 방문 시 업무를 보좌하는 게 저의 임무이지요.”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 행정원 멜은 한식구가 된 것을 환영한다며, 내성의 지리를 알려 주며 이곳의 구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딱히 집중해 들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아멜리아에게 다 들었던 거거든. “일단 첫날이시니, 등록부터 하시는 게 먼저일 듯하군요. 아, 두 분께서는 추후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대부분은 원래 있던 팀에 들어가는—” “정규 팀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렇군요. 그럼 두 분의 이름으로 팀을 창설하는 방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행정원을 따라 성주 측 탐험가들만 이용 가능한 내성 미궁 관리처로 향했다. 그리고 2인조 듀오 팀을 만들어 등록했다. 아, 참고로 팀 이름은 ‘철가면’이다. 에밀리든 비욘이든, 그런 이름보단 이런 닉네임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던가? “세 자리의 동료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시는 역할군을 말씀해 주시면—” “보류.” “예?” “마음에 드는 자를 찾을 때까진 일단 우리 둘이서 움직일 거다. 그러니 입단 신청도 다 막아 뒀으면 좋겠는데.” “예,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현지인답게 파티 설정까지 전부 능숙하게 끝마친 아멜리아는 미궁 관리처 직원에게 한 가지 정보를 확인했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몰이꾼은 몇 명이나 되지?” 몰이꾼은 젠시아처럼 어린 나이에 미궁에 들어가 온갖 위험한 일을 도맡는 그 포지션을 뜻한다. “현재는 13명입니다.” “무소속이 아니라 소속이 있는 몰이꾼까지 합치면?” “173명입니다.” “전부 보고 싶은데.” 아멜리아는 직원이 뽑아 준 내역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그리고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여기 이 두 아이를 데려가고 싶은데.” “레인웨일즈 자매라면, 이미 소속된 팀이 있어서 불가능합니다마는…….” “그래도 소속된 팀에 연락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 아닌가. 넘겨준다면 보상은 넉넉히 해준다고 전해라.” “……예.” 일단은 이걸로 오늘 예정됐던 용무는 끝. 다만, 돌아가기 전에 아멜리아는 내성에 위치한 어느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은 술집이었다. “주점? 성 안에 이런 곳도 있나?” “내성 출입 권한을 얻은 자들을 위한 복지 중 하나다.” “근데 왜 여기에…….” 평소 아멜리아가 술 한 모금 입에 대는 꼴을 본 적이 없기에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주점의 간판을 보기 전까지는. [레인웨일즈] 아멜리아의 성과 이 주점의 이름이 같은 게 단순히 우연일 리는 없겠지. “들어가지 않을 건가?” “아, 아, 어어…….” 실내는 나름 깨끗했고, 낮이라 그런지 사람도 얼마 없었다.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잡고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 “…….”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나를 데려온 거야. 딱 봐도 사연이 가득한 장소 같은— “궁금한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살면서 재미있는 일만 겪을 순 없는 거지.” 그리 말하면서 술잔을 쥐고서 원샷을 때렸다. 크으, 이거 독하네. 더럽게 맛도 없고. 역시 상남자의 도시 노아르크라 이건가? “……이상한 녀석.” “응?”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멜리아는 그리 말하며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오, 얘가 웬일이래? 원샷까지 하고. 맨정신으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라 이건가? 그렇게 아멜리아가 다 마신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콰앙-! 아우, 깜짝이야.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굵직한 남자의 고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년들!!” 남자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머지않아 무언가 집기가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는 여자 특유의 비명도 섞여 있었다. 퍼억-! 퍼억-! 주방에서 폭력이 행사되고 있음은 장님조차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상황. 다만 몇 없는 손님은 이 상황이 익숙하단 얼굴이었다. “주인장이 또 딸을 잡는군.” “크크, 딸년들도 불쌍해. 저딴 것도 애비라고.” 뭐, 주인장? 딸? 그럼 저기서 처맞고 있는 게 설마……. 휙.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아멜리아를 확인했다. 부르르. 술잔을 쥔 아멜리아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케케묵은 분노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가엾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305화 레인웨일즈 (3) 아멜리아는 강한 여자다. 오러를 쓸 줄 알며, 귀한 상위 정수도 몇 개나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여자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 그런 아멜리아의 몸이 떨리고 있다. 저기 저 주방의 부친이 누구든, 이제 그녀에게는 무서울 이유가 없을 터인데도. ‘트라우마인 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옛날에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머리로는 안전하다 생각하면서도 몇 년 동안 차를 타지 못했고, 자다가도 어디선가 탄내가 나면 눈이 번쩍 떠져 건물 전체를 어슬렁거리며 근원지를 찾아야 했다.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에 새겨진 것이다. 퍼억-! 그것은 두려운 것이라고. “……괜찮나?”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떨리는 팔목을 잡았다. “에밀리.”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대답이 돌아왔다. “아, 미안하다. 못 들었군……. 뭐라고 했지?”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 그래, 안 괜찮은 거구나. 아멜리아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주방에서 나던 소리가 잦아든 다음이었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봤어도 그게 못 볼 꼴이라 생각은 안 할 거고. “후, 저년들 때문에 맨날 열불이 나서 원.” 그때 주방 쪽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단련된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으나, 키는 170 정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인상도 굉장히 평범했다. “주인장, 오늘 너무 심하게 한 거 아니오?” “심하긴?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들인데. 갑갑한 이야긴 됐으니, 술이나 마시지.” 사내는 단골로 보이는 손님의 테이블에 앉더니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아멜리아는 그 모습을 구석 자리에서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다가 운을 뗐다. “저 남자는 내 양부였다.” “양부?” “이곳에서는 흔한 이야기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머물 곳이 필요하고, 그런 아이를 거두겠다는 자는 도시에 널렸으니까.” “널렸다라…….” 왠지 그 이유를 벌써 알 것도 같다. 홀로 남겨진 아이들의 둥지가 되어주겠다든가, 그런 숭고한 동기는 결코 아닐 테니까. 아멜리아는 분명 ‘흔한 이야기’라 말했고. 그런 이야기는 대부분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일종의 공생 관계인 거다. 아이들은 노동을 할 수 있을 나이까지 보호를 받고, 양부모들은 그 후로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지.” 이 도시에서 양자에 대한 모든 권리는 양부에게 있으며, 그 권리는 절대적이다. 적어도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양부모를 죽이거나,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선례가 되어 버리니까.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다른 이들에게 보복을 받게 되는 것. “……그렇군.” “그래도 우리 자매 같은 경우에는 조금 나았다. 사지도 멀쩡했고, 워낙 건강해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지. 그래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가 몇 살이었지?” “다섯 살. 언니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지.” 그래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미궁에서 부상을 입고 쇠약해진 친부와 있을 때와 달리 밥도 제대로 나오고, 춥지도 않았다. 뭐, 그 어린 나이에도 부려먹히며 온갖 잡일들을 도맡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크게 힘들진 않았다. 어차피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의지할 언니라도 있는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지.” 그 시절의 아멜리아는 막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라다가 언젠가 성인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았겠군.” “……전부 나 때문이었다.” 때는 아멜리아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주점 일을 돕던 때 한 취객이 아멜리아의 목을 졸라 죽이려 들었다. 음식을 쏟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때 나선 게 언니였다.” 아멜리아의 언니는 서빙 중에 그 모습을 보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식칼을 집은 뒤, 천천히 걸어가 취객의 등 뒤를 덮쳐 정확하게 경동맥을 그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주점에 있던 탐험가들 중 어느 누구도 언니가 칼을 들고 그놈의 뒤에 갈 때까지 인기척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군.” 다만, 그날 취객은 죽지 않았다. 제때 포션으로 치료를 받아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한 소녀의 재능이 세상에 드러났다. “다음 날, 성주 측에서 사람이 왔다. 이번 일을 무마해 줄 테니 언니를 넘기란 거였지.” 놀랍게도 양부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가진 돈을 털어 취객에게 포션값과 사죄금을 전달해 자력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쪽이 합리적이니까. “언니는 그날부로 ‘몰이꾼’이 되었다.” 양부는 판단한 것이다. 재능이 있는 아이이니, 잘 키우면 주점 일을 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 언니는 재능이 있었다. 약탈 팀에 들어간 지 고작 1년 만에 공로를 인정받아 조금이나마 배분을 받게 됐지.” 일이 그렇게 되자 양부는 생각했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아이들이니, 아멜리아에게도 재능이 있지 않을까. “나도 얼마 안 가 ‘몰이꾼’이 되어 약탈자 팀에 팔려가듯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재능을 인정받았지.” 아멜리아는 그다음 이야기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하며 넘어갔고, 나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레인웨일즈 자매가 ‘몰이꾼’이 되어 어떠한 삶을 보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그저 버티고 버텼으리라.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핏줄끼리 서로 의지하며. “아무튼, 그렇게 돼서 지금 우리 자매는 염술사 패거리에 속해 있고, 도시에 있는 동안에도 주점에서 일을 하며 부려먹히는 중이지.” 유년기부터 소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끝으로 아멜리아는 이야기를 마쳤다. “어때, 이제 나에 대한 궁금증은 좀 풀렸나?” “그래, 충분하다.” 이 다음 이야기는 계획을 짤 때 대강 들었으니까. 성인이 되어 자유로워질 날을 꿈꾸던 이 자매의 희망은 짓밟히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뒤에 벌어질. 꽈악- 흔한 비극으로 인해. *** 어느덧 정오가 지나 서서히 주점에 들어오는 이들의 숫자가 늘던 때였다. “……저기.” 한 소녀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다. 적발에 긴 곱슬머리를 지닌 10대 초반의 여아. 얼굴에 살짝 멍이 들었는데, 그걸 가린다고 머리카락을 흩트려놔서 굉장히 부스스했다. “혹시 술 좀 더 가져다드릴까요……?” 보통 한 가게에 너무 오래 있으면 직원이 하는 말이었다. 더 주문을 하든가, 꺼지든가 하라는 뜻. “…….” 아멜리아는 여아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심정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름이 뭐냐?”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래,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는 건 껄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겠지. 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으니, 죄책감도 생길 테고. “이만, 나가지.” 아멜리아가 자리를 뜨려는 시도를 했으나, 나는 이를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봐라.” 마침내 만나게 된 아멜리아 응애 모드 아닌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꼬마야, 나이는?” “열넷… 인데요…….” 오호라, 20년 전에 열넷이라 하면……. “서른넷이었군.” 내가 중얼거리자, 아멜리아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봤다. 아무래도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게 짜증났던 모양. “서른넷이요……?” 아멜리아(응애)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손님 앞이란 생각에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웃을 땐 이런 표정이었고.” “네?” “아, 보기 좋으니 자주 웃으란 말이었다.” “아, 네에…….” 어른 아멜리아는 똥 씹은 표정을 한데 비해, 응애 아멜리아는 당황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따라서 장난은 여기까지. “됐다, 이제 나갈 테니 계산해 줘라.” “아, 네!” 더 했다가는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기에, 얼른 계산을 하고 주점을 나섰다. 그리고 숙소로 막 돌아왔을 때. “……어쩌면 네 말대로일지도 모르겠군.” 내내 썩은 표정으로 걷던 아멜리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냐?” “듣다 보니 기억이 났다. 예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었던 게.” 아, 똥씹은 표정이었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영락없이 나한테 빡친 건 줄 알았는데. “아멜리아.” “에밀리.” “크흠, 그래 에밀리. 술이나 한잔 더 하겠나?” 그리 말하며 아공간에 비축된 술을 꺼냈다. 전부 약탈자 놈들이 갖고 다니던 거였다. “거절하지. 어차피 마셔봐야 내게는 의미도 없으니.” “정수 때문에?” “그래.” 쉽게 말해, 독 내성과 정신 저항 수치가 높아서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다는 뜻. “그럼 아까 주점에서는 왜 마신 거지?” “그건……. 주점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수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도 안 지긴.” “뭐?” “정색하지 마라. 그냥 술 한잔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는 거냐? 나 혼자 마시면 적적하지 않냐.” 술병을 꺼내 잔에 따르자, 아멜리아가 물었다. “……애초에 왜 술을 마시려는 거지?” “아직 나눌 대화가 더 남았지 않나.” 거, 그럼 내가 정말 술이나 마시자고 이러겠어? 아까 주점에서 유소년기 이야기를 한참 듣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듣고 싶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야 이젠 커밍아웃도 끝난 상태 아닌가. “아직 나눌 얘기라니?” “뭘 모른 척하는 거냐? 우린 이제 비밀이랄 것도 없는 사이인데.” “……친한 척하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그래? 그럼 안 할 테니 말해줘라. 예전에 계획을 세울 땐 ‘니벨즈 엔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 않나. 아우릴 가비스가 그 자리에 있었단 것도 어제 처음 들었고.” 당시의 아멜리아는 나와의 소통을 거부했다. 협력을 하되, 모든 걸 털어놓고 서로를 의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과거 얘기까지 해준 걸 보면 어느 정도 신용을 얻었다고 봐도 무방할 터. “그걸 말하면 뭐가 바뀌지? 너는 어차피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 그건 그렇지.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너는 어제 울면서 포기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했지 않나.” “…울지 않았다.” 쯧,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갈 것이지. “그랬나? 아무튼,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 했으니 나도 진지하게 옆에서 도울 생각이다.” “그래야 내가 너를 도울 테니까?” “뭐,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지.” “그건, 다른 이유도 있다는 뜻?”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게 빚을 지우고 싶다.” 아멜리아는 이해가 안 된단 얼굴이었다. “……어째서?” 하나하나 말하자면, 이유는 엄청나게 많다. 일단 아멜리아는 내 약점을 알고 있다. 어떻게든 빚을 지워 입막음을 시켜야 한다. 또한, 아멜리아는 강하다. 겪어 보니 심성도 선한 편인 거 같고, 경험도 많아서 어떤 부분에선 의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짧게 줄여서……. “솔직히 첫 만남은 좀 그랬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든다.” “…뭐?”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라. 이성으로서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니까.”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크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아무튼, 이제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빚을 지우면 반드시 갚으려 하겠지.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네 언니를 살리고 싶다. 그럼 넌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줄 테니까.” “부, 부탁? 아니, 넌 대체 내게 무슨 부탁을 할 생각이기에…….” 아멜리아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쩝,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데? 이러다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사겠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나는 멀어진 만큼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렇게 일찍 내 욕심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뭐, 미리 침 발라두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만약 내가 네 언니를 구하는 데 성공하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서도 이런저런 제약을 내가 다 해결한다면.” “……해결한다면?” “그땐 내 클랜에 들어와라.” 암, 퀘스트에는 보상이 있어야지. 306화 레인웨일즈 (4) 내 영입 제안이 그렇게 뜻밖이었을까? 아멜리아는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하나 끝내 다른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약탈자다.” “노아르크 출신이니 당연한 거지. 하지만 그들과 본질이 다르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아멜리아는 첫 만남 때 나와 아이나르를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다. 하수도에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난쟁이놈과, 로트밀러, 미샤, 그리고 드왈키까지. 비단 ‘바바리안’인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귀한 ‘레테의 축복’을 먹이면서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렇기에. “내 정보는 탐험가 길드에도 등록이 되어 있다. 당연히 왕가에서도 알 테고—” 나는 아멜리아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신분이야 새로 만들면 그만이다.”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귀족인 네 옆에 있으면 분명 내 정체를 캐는 자들이 나올—” 어휴, 오늘따라 말 진짜 많네 “그러니까 말했지 않나. 그런 제약들을 내가 다 해결하면, 그땐 내 클랜에 들어오라고.” “그딴 게…… 될 리가 없으니 지금 말하는 거다. 그때가 되어서 억지를 부리면 서로 곤란해 질—” “거, 보험 깔기는.” “보험……?” “됐다, 그게 될지 안 될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냥 대답만 하면 된다.” ‘예’와 ‘아니오’로 이루어진 양자택일. 내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자, 아멜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는 왜 항상 날 곤란하게 하는 건지…….” “그래서 대답은?” “알겠다. 만약 내가 네 옆에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상황이 된다면…….”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데 그런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스윽. 고개를 든 아멜리아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땐, 네 동료가 되겠다.” 퀘스트가 성립됐다. *** 퀘스트 명: 우리 언니를 구해줘! 목표: 언니의 생존(0/1), 신분 문제 해결(0/1) 보상: 아멜리아 레인웨일즈(SSR) 영입권 음, 대충 이런 느낌이려나. 깔끔하게 이번 퀘스트를 정리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테이블에 있던 술병을 가져가 꿀꺽꿀꺽 마셨다. “안 취해서 안 마신다더니?” “목이 말라서.” 오, 그렇구나. 근데 술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저런 말을 하니 굉장히 마초스럽네. 툭. 아멜리아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를 본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넌 술이 맛없나?” “이딴 게 어떻게 맛있게 느껴지지?” “아니, 그냥 확인해 봤다. 나도 술은 별로 맛이 없다.” 힘든 일을 많이 겪으면 달달한 음료 같아진다는데, 혹시나 해서 물었지. 역경은 나도 겪을 만큼 겪은 거 같은데 아직도 그냥 그래서.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리 말하며 아멜리아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니벨즈 엔체에 대해서 듣고 싶댔지? 말해 주마. 네 의견을 들으면 다른 방법이 생각날지도 모르니.” “좋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네 동료가 되겠단 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앞서 말한 약속을 모두 다 지켰을 때다. 알겠나?” “근데 나는 동료가 아니라 클랜에 들어오라 했던 건데?” “아, 어…….” 내 말에 아멜리아가 움찔했다. “그것도…… 확실히 그렇군. 나는… 그게 정말로 그 뜻인 줄 알았다. 만약 둘이 다른 거라면 말을 정정—” “됐다, 이제 보니 클랜원보단 역시 동료가 어감이 더 좋은 거 같으니.” “……혹시 방금 넌 나를 놀린 건가?” 눈치 빠르긴. “그럴 리가.” 아멜리아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았으나, 확증은 없기에 뭐라 말은 하지 못했다. 따라서 화제를 돌릴 차례. “얼른 말이나 해봐라. 니벨즈 엔체를 포함해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 전부.”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오자, 아멜리아도 장난기를 지우고 기억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벨즈 엔체는 그날 내 목숨을 살렸다는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철가면’은 그가 노아르크에서 쓰는 별명이었고.” ”역시 그랬군.” 일단 긴가민가하던 부분이 명확해졌다. 나는 이 여자의 생명의 은인이다. 후후, 어쩐지 철가면을 쓰고 노아르크로 내려온 날부터 왠지 나한테만 물러지더라니. “그래서 네게 이것을 말해도 될지 계속 고민했다. 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정작 와보니 발버둥 칠수록 모든 게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그렇군.” 이미 나 역시 한 번 겪었던 경험이기에 긴말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않나. 됐고, 말이나 해봐라. 나와……. 아니, 니벨즈 엔체와 이다음으로 다시 만난 게 언제지?”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다만,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으로부터 3주 뒤 정도. 장소는 내성의……….” 이후로 나는 아멜리아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며 내가 알아야 할 정보들을 습득했다. 아멜리아는 내가 무엇을 묻든 이전처럼 경계를 하거나 간 보는 짓을 하지 않고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찌 보면 처음으로 있는 완벽한 소통. 아, 물론 그런다고 곧장 해답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 궁금한 게 있나?” “아니, 들을 내용은 전부 들은 거 같다.” “그렇군, 그럼 혹시…….” “미안하다. 솔직히 말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좀 더 생각을 해보지.” “그런가…….” 나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고 답하자, 아멜리아는 아쉽다는 듯한 눈치였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긴, 너라고 바로 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겠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이상한 녀석. 정말 그랬다면, 이런 얘기를 네게 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흐음, 그럼 날 믿는단 건가?”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라.” 듣자마자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능구렁이 같은 대답이라 여겼을 터이나, 말한 당사자가 아멜리아라서 그런지 어딘가 뿌듯했다. 그 있지 않은가. 부모님의 칭찬은 그냥 대충 걸러듣지만, 평소에 까칠하던 사람이 호평을 해주면 어딘가 인정받은 기분이 드는 그거. “아무튼, 더 궁금한 게 없다면 이제 내 차례다.” “응?” “뭘 놀라는 거지?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 그렇겠군. 해봐라.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아우릴 가비스와 만나서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눴지? 그때는 자세히 묻지 못했지 않나.”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한 질문이나 그런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얘는 진짜 쓸데없는 호기심이 없구나. 뭐, 그게 나로서는 편하긴 하겠다마는. “사실 네가 궁금해할 만한 건 앞서 말했던 그게 전부다. 하지만 궁금하다니 처음부터 말해주지.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던 곳은 굉장히 기시감이 드는 저택이었다. 아, 왜 기시감이 들었는지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괜찮으니 해봐라. 밤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어……. 그렇다면야, 알겠다.” 이후 나는 지난달에 방문한 영적세계에서 있던 일들을 전부 다 말했다. 그러다 보니 거물들의 이름들도 거론됐다. 오르큘리스의 단장. 파멸학자 벨베브 루인제네스. 그리고 ‘카구레아스’라 불린 정체불명의 남자. “카구레아스? 그런 이름은 나도 처음 듣는군.” 애석하게도 그 남자에 대해선 아멜리아도 아는 게 없었다. 뭐, 다른 두 사람이야 조금 경우가 달랐지만.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그곳에 있었다라……. 악령일지 모른단 소문은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그럼 너도 단장과 같은 곳에서 온 건가?” “그건 또 아니다. 악령이라고 모두 같은 차원에서 온 건 아니거든.” “파멸학자도 마찬가지인가?” “아마 그렇겠지. 우리 고향 사람들이 끌려오기 시작한 건 딱 이 시기 때부터이니까.” “그런가……. 덕분에 놀라운 비사를 들었군. 단장은 몰라도 루인제네스, 그 늙은이는 악령이란 소문조차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묻는데, 두 사람에 대해서 좀 들을 수 있겠나?” “아는 건 많지 않지만, 그거라도 원한다면.” 이번에도 정보를 뱉기 전에 보험부터 까는 아멜리아였으나. 생각보다 유용한 얘기들이 많았다. 그야 나는 아는 게 얼마 없었거든. 단장이나 파멸학자나 밖에 퍼진 정보들은 얼마 없으니까. 노아르크 토박이로 오르큘리스와 접점이 많았던 아멜리아와는 상식의 수준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던 것. “그래서, 너는 또 15일이 되면 그곳에 불려가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마지막에 형평성 문제를 해결해 두겠느니 뭐니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됐을지도 좀 궁금하군. 아, 혹시 그자에게 묻고 싶거나 하는 게 있나? 그럼 나중에 불려갔을 때 물어봐 주겠다.” “……한번 생각해 보지.” 이후로는 더 나눌 대화도 없기에 자리를 파하고 침대에 누웠다. 거의 밤을 새워서인지 하루가 유독 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눕고 나니 또 궁금한 게 생겼을까? “비욘, 네가 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나?” 평소답지 않게 아멜리아는 또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고, 나는 하나하나 착실히 답해주었다. 민주주의, 과학, 자동차와 비행기, 미사일. 뭔 얘기를 할 때마다 설명이 필요했던 탓에 말이 길어졌지만, 지루하거나 귀찮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처음이었다. 이런 얘기를 이 몸으로 누군가와 나눴던 것은. 악령임을 감춰야 하기에, 무슨 말을 하든 단어 하나하나조차 한 번 더 생각을 해야 했던 평소와 달리 아멜리아와의 대화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름 흥미로운 얘기였다. 대부분 알고 있던 거긴 하지만.” “뭐? 알고 있었다고? 대체 어떻게?” “노아르크엔 정체를 드러낸 악령들이 많으니까. 지내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를 듣기 마련이지.” “그렇군……. 아니, 잠깐만 그럼 왜 굳이 나한테 그걸 또 물어본 건데?” “그건…….”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설마, 잠든 거냐?” “…….” “자는 척 마라. 너 돌고래처럼 반만 자는 거 내가 다 아는데.” “…….” 이게 청출어람인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나한테 역으로 쓸 줄을 몰랐건만. “……진짜 자냐?” “…….” 얼씨구, 이젠 코까지 고네. 하, 진짜 웃겨 가지고. 연기야 뭐야? 알 수 없지만, 이후로 나는 말을 걸지 않고 눈을 감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만약 얘가 정말로 오래간만에 깊게 잠에 든 거라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 자라.” 나도 등을 돌려 벽을 보며 누웠고, 머지않아 잠에 들었다. *** 그날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니, 빠르다고 하기엔 조금 그런가? 솔직히 말해, 굉장히 지루한 시간이었다.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단 이유로 철저하게 외출을 삼가한 탓에 온종일 숙소 안에서만 시간을 죽였다. 아, 그렇다고 무의미한 시간이었다는 건 아니다. “비욘, 좀 씻어라.” “나가지도 않는데 왜?” “……냄새가 난다.” 우리는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화제는 여러 가지였다. 내 고향일 때도 있었고, 아멜리아와 언니의 추억일 때도 있었으며, 미궁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일 때도 있었다. 아무튼, 다방면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는 아멜리아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됐다. 뭐, 그중 가장 큰 수확은 아멜리아의 소유 정수 내역을 마침내 듣게 된 것일 테지만. ‘제대로 된 팀 활동을 못 해본 건가? 저 스펙으로 왜 8층까지밖에 못 갔는지 이해가 안 되네.’ 아멜리아의 스펙은 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솔직히 말해, 아크제 장검이나 ‘용언’만 없으면 용살자 놈보다 윗줄로 봐도 무방할 정도. ‘근데 전투만이 아니라 인도자의 재능도 있지.’ 이를 바탕으로 탐색꾼 포지션 수행이 가능하며, 오러 유저라 물리 내성인 몬스터도 휙휙 썰어버리는 게 가능한 극딜러. 대신 몸이 약하단 단점이 있지만……. 그거야 내가 앞에서 탱킹만 잘하면 되는 문제. “아, 맞다. 오늘 나갔다 온 건 어떻게 됐나?” “예상대로 거절의 답변이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나온 아멜리아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대답했다. 쩝,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흐음, 너무 적게 부른 게 문제였을지도…….” 다른 팀의 ‘몰이꾼’으로 속해 있는 레인웨일즈 자매를 돈 주고서 데려오는 일은 실패했다. “그놈들은 어땠나? 혹시 돈을 더 준다 하면 마음을 바꿀 거 같던가?” “글쎄. 잘 모르겠지만, 그런 방식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우리가 둘에게 집착하는 걸 알면 경계하는 걸 넘어, 그걸 갖고서 우릴 이용하려 들 테니.” “그것도 그렇겠군. 여기 놈들은 다 영악하니까.” “그래도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행히 놈들 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고.” “관심이라면?” “자기네 팀에 들어올 생각은 없냐더군.” 어찌 보면 우리 계획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는 중이었으나, 우리 둘 다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래 봤자 이 모든 게 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주 그냥 너무 착착 맞아들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군.” 원래 역사에서도 우리는 저 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겪은 후, 약 5개월 뒤에 그 사건을 겪게 된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거지?” “……계획대로 팀에 들어간다. 조금 갑갑하긴 해도,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근처에 있으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지.” 나는 딱히 이견을 내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으로는 과거를 바꾸는 게 불가능할 거 같지만,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 아멜리아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적어도 더 좋은 계획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23 : 55]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 나를 보며 아멜리아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면 오늘이 그날이군.” “그래.” 나는 물 한잔을 마신 뒤, 침대에 누웠다. “잘 다녀와라.” 배웅이라니, 이건 또 굉장히 어색하네. “가려면 아직 5분 남았다. 어차피 여기서는 아주 잠깐이기도 하고.” “아, 그것도 그렇군.” 이후로 나는 아멜리아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상대가 아우릴 가비스라 그런가? 조금은 긴장이 된단 말— 딸깍. 그때 협탁 위에 올려둔 시계의 초침이 딸깍이며, 눈앞이 흐려졌다. ‘그때 사이다가 참 맛있었는데.’ 또 달라고 하면 주려나? 307화 원탁 (1) 차분해지는 나무 향이 그윽한 서재. ‘딱히 변한 곳은 없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내 시야로 한 가지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가면. 내가 지난번 방문에 썼던 바로 그 하얀 가면이 텅 빈 벽에 걸려 있다. ‘쓰고 나오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가면을 썼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복도 저 멀리에서 노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우릴 가비스. 어쩌면 내 모든 의문의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인물이자……. “허허, 자네 왔는가. 기다렸다네.” ‘오리지널 클리어’를 했다는 말에 감정을 감출 생각조차 못하고 기뻐했던 노인. “그동안 별 탈은 없었나? 그날 그렇게 자네를 보낸 다음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내 얼마나 불안하던지.” 저렇게 시작부터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며 정겹게 인사말을 건넨들, 방심할 수 없다. 지난날, 나는 봤으니까. 오르큘리스의 단장, 파멸학자 등. 어딜 가도 꿇리지 않을 강자들이 이 노인네 말에 꼼짝도 못하고 눈치만 살살 보던 것을. “난 잘 지냈다. 근데 그때 그들은 어떻게 됐지?” “응? 그들?” “마지막에 규칙을 또 어겼다며 날 내보내고 갔지 않나.” 그제야 아우릴 가비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실패작들을 말하는 거였군.” 실패작이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그 단어를 통해 나는 본격적인 수 싸움이 시작됐음을 인지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노인네가 내가 경계할 만한, ‘실패작’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쓴 의도야 뻔하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나한테 질질 끌려다니던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일종의 채찍과 당근 변형판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채찍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휘두른다는 것뿐. “실패작들이라면 그 방에 모여 있을 테니 걱정 말게 이번에도 소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날 톡톡히 보여 줬으니.” 다른 자들에겐 가차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며 위엄을 세우는 반면. 대상에겐 한없이 따뜻한 모습만을 보인다. 그래, 이런 식으로. “크흠, 그나저나 내가 배려가 없었군. 자네가 듣기에는 조금 그랬겠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그들과 다르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좀 전의 차가움과 대비되는 호의. 그 호의를 받은 대상은 생각하고 만다. 이 사람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저 호의에 나도 부응해야 한다. 그런 심리가 자연스레 무의식에 생기는 것이다. 뭐, 나야 이런 비열한 화술에는 면역이지만. “자네는 특별하네. 그렇지 않나?” 노인네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모르겠는데.” “응?” “같잖은 수작은 집어치워라.” 나는 당근이 딱 질색이라서 말이지. “……수작이라니, 말을 심하게 하는군?” 내 도발적인 말에 노인네도 표정을 달리하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저릿한 살기는 없었지만, 눈빛과 분위기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야 이런 상대에게는 사전에 알려 줘야 하거든. 난 너랑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게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걸. “당신이랑 이런 얘기나 나누러 온 게 아니다.” “응……?” “됐고, 이런 잡담이나 할 거라면 돌려보내 줘라. 아니, 아예 다음부터는 이곳에 오지 않게 알아서 잘 처리까지 해줬으면 좋겠는데.” 노인네는 짐짓 당황하더니, 억울하단 듯 외쳤다. “자, 잡담이라니!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본 건 자네였지 않은가!”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 조금 상황이 웃기게 됐다. 근데 자기가 뭐 어쩔 거야. “그럼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건가?” 아무 데서나 뿡빵뿡빵 방귀를 뀌는 바바리안을 보며 나는 믿음의 중요성을 배웠다. 자기 자신을 향한 강한 신뢰. 그 굳건한 마음이 자신감을 형성하며 어떤 난관을 마주하고도 주눅 들지 않고 나아가게 해준다. 따라서……. “아니, 자네 탓이라는 게 아니라…….” “사과해라.” 당당히 요구한다. “잠깐만, 진정해 보게.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리 예민하게—” 그것이 설령 억지일지라도. 지금 내가 바바리안의 몸이 아니라 이한수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사과하지 않겠다는 건가?” “……허허, 나도 참 너무 우습게 보였나 보군.” 거듭된 요구에 늙은이가 정색했다. 아까와 달리 주변 공간까지 일렁거리는 것이 매우 심상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존나 무서웠다. 하지만……. “사과해라.” 변하는 건 없다. 자기가 정색하면 뭐 어쩔 건데? ‘오리지널 클리어 유저’를 내쫓을 거야 뭐야. “후우… 자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내 늙은이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느새 주변 공간이 일렁이던 것도 멈춰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딱 봐도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빡친 척을 한 게 훤히 보였거든. 아, 화가 났던 건 진짜이려나? “왜 자꾸 나를 도발하는 건가? 지난번엔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 친구가 아니었을 텐데.”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습게 보냐고? 날 우습게 본 건 당신이 먼저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습게 봤다니—” “실패작이니 뭐니 말하고서 배려가 없었다느니 그러면 내가 굽신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 의외로 늙은이는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실수였다느니, 그럴 의도는 없었다느니. 변명할 말이야 이것저것 많이 있었을 텐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는 확실히 다른 자들과 다르군…….” “……?” “사과하겠네. 실패작이라 여겨졌던 원본을 깬 자네가 평범한 자일 리 없는데도 내가 자네를 너무 쉽게 대했네. 앞으로는 주의하지.” 어, 이렇게까지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빈말로 사과하면 대충 받아주고서 이후 대화에서 조금이나마 더 주도권을 가질 계획이었던 나로서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이것까지 의도한 걸 수도.’ “……그렇게 말하니, 나도 넘어가지.” 원래 말뿐인 사과는 받지 않는 주의지만, 여기서 더 바바리안질을 했다간 정말로 관계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받아주었다. 그렇게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 “자,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저쪽 방에서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나 나누세. 아, 혹시 원하는 차 종류가 있나?” 뭘 당연한 걸 물어. “사이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 크으, 이거지. 원래라면 이런 생각을 해야 했을 타이밍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어야 했다. 한데……. ‘왜 이렇게 밍밍한 거 같지?’ 얼음을 넣어달라 해서 그런가? 덜그럭. 얼음만 남은 잔을 탁상에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량감이 없는 건 아닌데 탄산이 약해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전에 먹었을 때보다 뚜렷하게 맛이 없어졌다. ‘설마 이 늙은이가 앙심을 품고……?’ 그나마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라 흘기듯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아우릴 가비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데 말일세…….” 조금 웃기긴 했다. 사실 어디를 보나 나 같은 조무래기 눈치나 살살 살피고 있을 양반이 아닌데. ‘그만큼 내가 이 늙은이한테는 중요하단 거겠지.’ 내 노력이 어느 정도 들어가기는 했으나, 내 대우가 좋아질수록 경계심은 올라간다. 이 세상에 목적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없으니. 나도 청량감에 대한 고민은 접고,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대체 오리지널 클리어 유저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음, 글쎄.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다른 플레이어보다 게임 지식이 풍부한 것? 그건 맞지만,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여기 내 앞에 있는 늙은이는 아우릴 가비스. 즉, 게임 제작자니까. 내가 아는 지식은 당연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며, 지식을 가진 플레이어가 필요한 거라면 그저 그걸 나눠주면 그만. 그런데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 걸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크흠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하! 이 나를 앞에 두고 말인가!” 아우릴 가비스는 스스로도 이 상황이 어이없는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아, 물론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후, 설마 또 시작인 건가.” “아, 아닐세. 난 단지 이런 상황이 오랜만이라 신선하다는 뜻이었네.” “아, 그렇군. 잘못하면 오해할 뻔했지 않나.” “……자네, 혹시 바바리안인가?” 어? 씁, 너무 티냈나? 내심 찔리긴 했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당황하지 않고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는 듯 흘려넘겼다. “그딴 게 질문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농담이었네.” 표정을 보니 진짜 농담을 했던 거 같은데, 이제 좀 조심해야지. “아무튼 질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괜찮으니, 눈치 보지 말고 해봐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노인네가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형평성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 않나. 내가 그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고심해—” “짧게, 핵심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네.” 그래,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잖아. “흐음, 물건?” “이걸세.” 아우릴 가비스는 길게 말하는 대신 안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보석 하나를 꺼냈다. 내게 있어서 굉장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건…….” 위로 보나, 옆으로 보나 틀림없다. 원탁 중심부에 박혀 있던 그 보석이다. 허, 설마 이런 사연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역시 이 늙은이가 마스터? “……혹시 뭔지는 알고 그런 반응을 하는 겐가?” “아니, 그냥 비싸 보여서.” “비싸다라…… 허허! 이건 그런 현실의 재화 따위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물건……. 크흠, 또 얘기가 딴 길로 샐 뻔했군.” 몇 번의 학습을 통해 자기 스스로 주접을 멈춘 아우릴 가비스는 신속하게 물건에 대해 설명했다. “이 영적 공간에 존재하는 내 권한 중 몇 가지를 오브젝트화 해서 만든 물건일세.” 원리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원래 잘 모르겠을 땐 가만히 있는 게 최고인 법. “작동법은 실로 간단하네. 이 보석 앞에서 진실을 말하면 녹색 빛이 켜지고, 거짓을 말하면 적색 빛이 켜지지. 한번 시험해 보겠나?” 사실 저게 등장한 순간부터 가짜일 거라는 생각은 버렸지만, 굳이 티내진 않았다. 그야 공짜 질문 기회를 준 셈 아닌가. “아우릴 가비스, 당신 나이는 300살이 넘나?” 일부러 기준이 있게 말했다. 몇 살이냐고 물었다가 1살이라고 답하면 보석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끝일 테니까. “……넘지 않네.” 아우릴 가비스는 내 의도를 알면서도 넘어가 주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솨아아아. 보석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거짓이라는 뜻일세.” 와, 그럼 300살이 넘는다고? 균열총해록 제작연도가 150년 전이라, 그냥 대충 던져 본 건데……. 무슨 이런 괴물이 다 있지?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티는 내지 않았다. “어때, 이거면 서로 질문을 하나씩 해도 형평성에 어긋날 일은 없지 않겠나?” “흠, 근데 이거로는 좀 그렇지 않나? 당신이 만든 물건이니 보석에서 어떤 빛이 나오게 할지 당신 맘대로 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너무나도 타당한 의견 제시. 놀랍게도 아우릴 가비스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런 건 불가능하네.” 맹세라……. 내게 있어서는 꽤 그리운 단어였다. 맹세한다 해놓고 뒤통수를 오죽 쳤어야지. “그런 거로는 믿기 어렵다. 부모님이라도 걸고 맹세한다면 모를까.” “부, 부모를……?” “못하겠는 걸 보니 역시 거짓말이었던 거군.” “그럴 리가 있나! 단지… 너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 당황했을 뿐일세. 이미 이 세상에도 없는 분들을 어떻게 걸겠나.” 자기 이름을 건 맹세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줄은 몰랐을까? 아우릴 가비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믿고 말고는 자네 결정이겠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해두겠네. 방금 전 내 맹세는 사실이며, 이제 나는 이 물건이 없으면 자네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네.” “응?” 고개를 갸웃하던 때 초록불이 떴다. “아까 말했지 않은가. 내 권한 중 상당 부분을 이 물건 하나 제작하는 데 썼다고. 나는 이제 자네의 영혼 총량조차 읽지 못하네.” “영혼 총량……?” “자네가 몇 등급 정수를 가졌는지 읽을 수 없단 소리였네.” 또 초록불이 떴다. 근데 이 늙은이는 알까? 그럴수록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이 사라지고 있단걸. ‘자기 입으로 그렇게 약점을 말하니까 더 수상해지는데…….’ 진짜 조작 같은 거 해둔 거 아냐? 그렇게 늙은이를 보는 내 눈빛이 노골적으로 변해갈 때였다. “그날 봤던 그자들은 기억하는가?” “아까 당신이 실패작이라고 불렀던?” “맞네. 사실 아까 말은 그리했지만, 어딜 가든 이름과 능력 하나만으로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자들이지.” “이름과 능력이면 두 개인데.” “……말이 그렇단 거였네.” “아무튼,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대화를 나눠 보는 방법은 어떨까 싶네. 그들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을 때, 이를 눈치채고 이의를 달 능력은 충분하니.” “…뭐?” 듣자마자 진심으로 멍해졌다. 이게 무슨 원탁 데모 버전도 아니고. 308화 원탁 (2) “그 있지 않은가. 일종의 배심원 제도 같은 걸세.” 그렇게 운을 뗀 그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이런 방식은 내키지 않고, 그리 좋은 방법이라 생각도 하지 않네. 자네가 믿지 못하겠다니 한번 말이나 해본 것뿐이니, 싫으면 거절해도 되네.” 말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내가 빤히 바라보던 것을 부정의 뜻으로 이해한 모양인데……. ‘원탁이라…….’ 사실 내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기왕 한다면 배심원 흉내 같은 게 아니라, 그들 모두를 원탁 앞에 끌어 앉히는 등 약간의 수정을 거쳐야겠지만. 오르큘리스의 단장과 파멸학자. 그리고 정체불명의 고인물 두 명까지. 이들과 원탁 놀이를 한다면 유용한 정보가 나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거절하지. 남들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역시 당장은 아우릴 가비스표 한정판 정보가 우선이다. 원탁 룰로 넘어가는 거야 나중에 해도 될 테니까. “거절이라……. 사실 그리 답할 줄 알았네. 자네 입장에서는 그들과 내가 한통속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아우릴 가비스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어쩔 텐가?” 나는 피식 웃었다. 뭘 어쩌긴 어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지. “질문 세 개에 하나.” “흐음, 그래도 다섯에 하나일 때보다는 내 사정이 나아졌군 그래.” “그래도 이런 물건까지 만들어 왔으니까.” 보석을 보며 말하자, 이번엔 아우릴 가비스가 피식 웃었다. “내 노력을 인정해 준 것은 고맙네마는, 그럴 거면 차라리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는 게 합당하지 않겠나?” 하긴, 그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 거짓말 탐지기가 작동하는 이상, 우리 둘의 조건은 동일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의 대가라고 생각해라.” 미래에서 저 보석을 보았던 것과 별개로, 나는 저 늙은이가 보석의 진위 여부 결과를 조작할 수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없다. 그야 보석을 제작한 당사자가 아닌가. 치트키를 숨겨놨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에. “모순적이군.” 아우릴 가비스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만약 내가 자네를 속인 거라면 추가 질문이 몇 개가 있든 의미가 없으리란걸.” 물론 알고 있다.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거절이라는 뜻인가?” “허허, 그럴 리가. 신기하게도 모순적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일리는 있게 여겨진단 말이지. 적어도 자네는 불확실한 상황에 몸을 던지는 거니 말일세.” 예상했던 것보단 시원시원한 승낙이었다. 좀 더 구질구질하게 협상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대신 첫 순서는 내가 해도 되겠나? 자네는 아까 내 나이도 물어봤지 않았나.” “좋다.” 이번만큼은 나도 한발 양보했다. 저 늙은이도 꿍꿍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일단 많은 배려를 받은 건 사실일뿐더러······. 질문을 받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질문을 통해서 역으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묻겠네.” 그렇게 시작된 진실게임의 시간. 이내 아우릴 가비스의 입이 열렸다. “원본을 클리어한 자들이 20년 뒤에는 몇 명이나 있나?” 첫 번째 질문이 고작 그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안심하긴 이르다. 세 번에 한 번이라는 불리한 교환비를 감수하고 물은 질문 아니던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저게 궁금한 이유는…….’ 아마 궁금한 거겠지. 미래에는 나를 대체할 사람이 있는 건지. 따라서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오리지널을 깨고 넘어온 사람은 나뿐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너무 나에게만 집착하지 않도록 여지는 남기되, 내가 이 관계에서 유일하게 점한 우위를 어느 정도 피력하는 답변. “흐음, 그렇군.” 보석에서 초록불이 뜨자 아우릴 가비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제는 내가 질문을 할 차례. 진작에 질문 리스트들을 쫙 뽑아두었던 나였기에 고민의 시간은 필요 없었다. 아, 물론 ‘보석’이 앞에 있는 만큼 변형은 필요하겠지만. “당신도 기록의 파편석을 사용한 적이 있나?” 일부러 ‘예’와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게끔 묻는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는 들을 수 있는 정보량이 적어지지만……. 그래도 팩트 체크는 제대로 할 수가 있으니까. 팩트만 정리가 되면 나머지는 내가 추론하면 그만이다. 남이 해준 얘기보다는 그 편이 내게도 더 믿음직스럽고. “시작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네마는……. 자네도 정말 만만치 않군.” “대답은?” “사용한 적이 있네.”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구나. 약간의 시간 텀을 두고 초록불이 뜨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차분히 다음 질문을 골랐다. 그러던 때였다. 아우릴 가비스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았나?” 답은 간단하다. 지난번에 대화를 나눌 때 그런 티가 조금씩 났으니까. 터놓고 말하자면 그냥 찔러 보기였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 공짜란 없는 법. “궁금하면 나중에 물어봐라.” “크흠…….” “그럼 두 번째 질문을 하지.” “해보게.”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할 두 번째 정보. “이 영적세계는 당신이 만든 건가?” 질문을 받은 아우릴 가비스는 살짝 움찔하더니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자네 의중을 모르겠군.” “무슨 뜻이지?” “그게 궁금한 이유를 알기 어려워서 말일세. 그저 호기심에 물은 거라면 납득할 수 있겠네만. 자네가 그렇게 감정으로 움직일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 거 같다. 이 노인네 눈에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질문처럼 보였던 거겠지. 확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정황은 명백했으니. 그걸 굳이 확인하는 게 낭비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법이지.’ 매달 15일마다 끌려오는 이 공간은 특이하다. 왕가나 마탑에서도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기에 많은 연구가 이뤄졌으나, 어떠한 원리로 이 세계가 구현되었는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마법사들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자신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위대한 마법사가 이 장소를 창조해 냈으리라고. 하면,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정말 이 늙은이일까? “그래서 대답은?” “자네 생각대로일세. 이곳은 내가 만들었네.”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빨간불이 떴군.” 보석은 그 답변을 거짓으로 판단했다. 흠칫한 아우릴 가비스만큼이나 나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거짓말이 뜰 줄은 예상도 못했거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을 좁히며 묻자 아우릴 가비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아무래도 좀 애매했던 모양일세.” 애매하다라……. 저 보석에 대해 지식이 있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대강 납득이 됐다. 저 보석은 말하는 대상자의 ‘심리’를 기반으로 하니까. 스스로가 찜찜함을 느낀다면 초록불은 안 뜬다. 어서 설명을 하라는 눈으로 째려보자, 아우릴 가비스가 선문답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이 공간은 내가 만들되, 내가 만들지 않았네.” 이게 뭔 말장난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래도 초록불은 떴지 않나.” “똑바로 말해라. 그게 무슨 의미로 한 말이지? 협력자가 있었단 뜻인가?” 아우릴 가비스는 잠시 텀을 두고서 대답했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네.” 그런 거면 그런 거지, 볼 수 있네는 또 뭐야? 어처구니가 없지만, 일단 보석에 초록불이 뜨기는 했다. ‘……그럼 협력자가 있었다는 걸 감추고 싶었단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네. 처음에 빨간불이 뜬 건, 설렁설렁 턴을 넘기려다 가책을 느껴서였을 테고.’ 뜻밖에 소득을 건졌다. “……그럼 이제 세 번째로군. 어서 해보게.” 아우릴 가비스는 어딘가 진이 빠진다는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거, 보채기는. “마녀는…….”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고쳤다. 이 경우에는 확실한 게 좋을 테니까. 좀 더 정확하게 지칭하는 편이 옳겠지. “땅의 마녀는 정말로 죽었나?” 당장 급한 질문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 땅의 마녀. 역사에 딱히 관심이 없더라도, 이 세계를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들을 수밖에 없는 그 이름.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나는 항상 궁금했다. ‘마녀’에 관해 세간에 알려진, 내가 아는 그 이야기들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첫 질문부터 시작해서 어디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군 그래.” “대답은?” 내 재촉에 아우릴 가비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을 내놓았다. “그녀는 살아 있네.” 와, 진짜로……?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왕가에서도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단 뜻이 될뿐더러……. ‘게임에서도 그런 내용을 암시하는 이스터에그나 그런 것도 없었지.’ 게임 제작자는 바로 이 늙은이다. 한데 알면서도 그런 내용을 넣지 않았다? 온갖 불필요한 정보와 설정들을 몽땅 때려 박고 마지막에 ‘튜토리얼 완료’니 뭐니 했던 양반이? 역시 이는 자연스럽지 않다. 차라리 이러한 이야기가 플레이어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감췄단 게 신빙성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왜 이걸 비밀로 하고 싶었을까.’ 잠시 추측을 해봤으나, 아직은 모르겠다. 단서가 적다. 다만 이걸 파내려가다 보면 왕가나 이 늙은이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란 직감이 섰다. 쉽게 말해, 이 질문으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얻게 된 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후후, 그럼 드디어 내 차례로군.” 긴 인고의 시간을 거친 늙은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쩝, 대체 뭔 질문을 하려고 저런데? 괜히 불안해지는 가운데, 늙은이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나?” 질문의 의도는 명백하다. 완곡히 돌려서 표현하긴 했지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을 테니까. 나에겐 심연의 문을 열 의지가 있는가. 그래, 정말 묻고 싶은 건 이거였겠지. “모른다.” 참던 숨을 내쉬듯 대답을 내놓았고, 머지않아 보석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모른다라······.” 아우릴 가비스는 어딘가 착잡하다는 듯 웃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조언을 해왔다. “서둘러 선택하기를 바라네.” “어째서?” “그러는 쪽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무슨 의미냐고 되물었으나, 늙은이는 ‘그게 이번 질문인가?’라며 능청을 떨었고, 그거로 이 주제는 끝이었다. 그럼 이제 다시 내 차례.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곧장 물었다. “마녀의 독은 정말 존재했던 건가?” “…원래 그녀에 대해 관심이 많았나?” 글쎄,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녀’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을 뿐. “후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인 아우릴 가비스는 머나먼 옛날이야기를 하듯 답했다. “그것만큼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세. 이 세상은 그녀로 인해 한 번 멸망할 뻔했지. 미궁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분명 종말을 고했을 것이네.” 보석에 밝혀진 빛은 초록색. 흠, 그럼 바깥세상이 멀쩡해진 건 정말로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마녀가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에 있지?” 오늘 행한 질문 중 유일한 주관식이었다. 아는 게 없다 보니 이것만큼은 객관식 질문으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판단. 다만, 아우릴 가비스는 비열했다. “그녀는 모두의 소망이 향하는 곳에 있다네.” 후, 저 빌어먹을 수수께끼식 화법.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보석을 확인했다. 초록불이 떠 있는 걸 보니, 트집을 잡아도 그냥 넘어갈 거 같은데……. “정말 이런 식으로 굴 건가?” 일단 시도라도 해보잔 생각에 눈알을 부라리며 묻자, 아우릴 가비스는 다시금 보석 위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것보다 더 적당한 설명은 찾기가 어려워서 말일세.” 이번에도 초록불이 켜졌다. 저 뺀질거리는 표정을 보니 더 해봐야 태도를 바꿀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나도 그냥 미련을 버렸다. ‘뭐, 그래도 한 가지는 확인했으니까.’ 아우릴 가비스는 마녀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 쉽게 말해……. 내가 마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아우릴 가비스의 목적과 대비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벌써 세 번째로군.” 이번 질문들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는 듯 늙은이가 여유롭게 웃는다. ‘거, 기분 나쁘게.’ 슬슬 그것을 확인할 차례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마녀든 뭐든 앞에 물은 것들보다도 내게는 훨씬 중요할지도 모르는 그것. “자, 해보게.”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게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나?”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 직업이 마법사인 걸 알았다. 마녀를 포함해 이 세계의 비사에 대해서도 빠삭한 거 같고. 게임 제작자이며, 왕가와 적대 관계란 것도 안다. 그러니, 이제는 확인할 차례였다. 과연, 아우릴 가비스는 어떠한 인물인가. “허허, 이번에도 곤란한 질문을 하는군.” 늙은이 특유의 너털웃음소리가 짧은 정적의 끝을 고했다. “자네는 아까 지구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모른다’라고 대답했었지? 그 말인즉, 이곳에서의 삶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뜻도 될 걸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다만 길게 말할 것 없이 대꾸도 않고 바라만 보았다. “그 눈빛은 뭔가? 자네라면 알지 않나. 목표를 위해선 때론 감정을 무시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네.” 공감하는 바이지만, 이번에도 내가 물은 질문의 답변은 아니었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게 그리 어렵다면 질문을 바꾸지.” 한발 양보하는 듯한 내 말에 아우릴 가비스는 옳다구나 동의를 표했다. “아, 그래 주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바꿨다. 방금 질문은 답하기 힘들었던 것 같으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아우릴 가비스, 당신은 당신 욕심 때문에 이곳에 끌려와 죽어 나간 수많은 ‘악령’들에게 조금이라도 가책을 느끼고 있나?”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허…….” 다만 어색하게 흘리는 웃음. 그것이면 대답은 충분했다. 그런 생각을 막 하던 때였다. “하하! 흐하하하하핫!” 아우릴 가비스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참, 귀엽게 봐줄 수가 없는 친구란 말이야.” 장난기 싹 뺀 눈으로 그가 나를 보았다. 그 순간,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툭.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보석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처럼 호의적인 목소리로. “어찌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물론 안쓰럽네. 책임감도 느끼지. 아마 이런 마음을 평생 지닌 채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네.” 그리 말하며 아우릴 가비스는 싱긋 웃었다. “어때, 이러면 대답이 되겠는가?” “……충분히.” 나는 짧게 답하며 보석을 확인했다. 솨아아아아아- 너무도 선명한 적색의 빛이 보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309화 원탁 (3) 대화 중에 몇 번이나 있었던 정적이 다시금 길게 이어진다. “…….” “…….” 아우릴 가비스는 평온한 눈길로 나를 보았고, 나 역시 이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왠지 숨이 막혀 왔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속에서. “자…….” 아우릴 가비스가 입을 열었다.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그럼 이제 내 차례군?”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늙은이는 어느 철학자가 말한 심연과 같았다. 이 대화를 통해 선 너머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 [원본을 클리어한 자들이 20년 뒤에는 몇 명이나 있나?] 그는 첫 질문을 통해 내 ‘대체품’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자네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나?] 두 번째로는 내게 결함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렇다면, 과연 세 번째는 무엇일까. 그 해답이 지금 그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자네가 심연의 문을 넘어 혼이 깃들게 된 그 육신의 이름이 뭐였는가?” 비요른 얀델이라는, 나의 이름. 익명에 가려진 이 영적세계를 벗어나 나를 찾기 위한 수단. “니벨즈 엔체란 말은 말게. 그날 뭔가 애매한 기분이 들어서 확인을 해 보았으니까.” ‘니벨즈 엔체’란 이름을 대었을 때,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잘 넘어간 줄 알았건만. “그날 내가 물었던 건 자네가 ‘이곳에서’ 쓰는 이름이었지?” 내가 섞은 트릭을 눈치챈 아우릴 가비스는 조사를 시작했다. “알고 있나? 라프도니아에 그 이름을 쓰는 자가 총 7명이 있더군. 그중 여섯은 직접 찾아가 평범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네마는…….” “한 명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 “6등급 탐험가, 니벨즈 엔체.” “종족은 놀랍게도 바바리안이었네. 분명 인간식 작명이라 여겼네만.” 말이 이어질 때마다 사방에서 벽이 좁혀져 오는 기분이었고, 덕분에 나는 깨달았다. [……자네, 혹시 바바리안인가?] 아까 농담처럼 했던 그 말조차 내 속내를 떠보기 위한 화술의 일부였단 것을. 만약 내가 위장 신분의 이름을 댔다고 한들, 종족은 그대로 따랐으리라 여겼겠지. “그럼 다시 묻겠네.”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자네가 심연의 문을 넘어 혼이 깃들게 된 그 육신의 이름이 뭐였는가?” 다른 이름으로 둘러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렇게까지 조건을 달아 놓고 물었을 때, 말할 수 있는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니미럴.’ 다른 건 몰라도 이름만큼은 감춰야 한다. 아우릴 가비스가 어떤 ‘인물’인지도 알게 됐지 않은가. 적이라고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를지언정,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찌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물론 안쓰럽네. 책임감도 느끼지. 아마 이런 마음을 평생 지닌 채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네.] 이 늙은이는 결코 아군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대답하지 않겠다.” 당당하게 묵비권을 행사한다. “흐음…….” 아우릴 가비스는 의외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런 내 반응조차도 흥미롭다는 듯 관찰할 뿐. “아무래도 많이 곤란한 질문이었던 모양이군? 하긴, 자네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네. 그럼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그는 내 이름을 듣지 못한 것에 크게 미련 갖지 않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 몸에서 눈을 뜬 지 얼마나 되었나?” 연차를 묻는 질문이다. 20년 뒤에서 온 걸 알았으니, 저 정보를 얻음으로 아우릴 가비스는 내가 ‘바바리안’의 몸에서 눈을 뜨는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답하지 않겠다.” “그래? 그럼 다른 질문을—.” “아니, 이제 질의응답 시간은 끝이다.” 나는 미련 없이 진실게임을 종료했다. 아직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이 늙은이는 고양이 주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판단했다. 여기서 더 대가를 치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잠깐, 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다. 선수는 당신이었으니, 문제는 없을 텐데?” 내 일방적인 말에 아우릴 가비스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응시했다. 하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겠지. 몇 번씩 질문을 하자고 미리 정해 두었던 것도 아니니까. 단지 아쉬움을 내비칠 뿐이었다. “예상외로군. 분명 자네도 내게 궁금한 게 잔뜩 남았으리라 여겼네마는.” “글쎄.” 확실히 질문 리스트는 페이지 단위로 남았다. 실제로 다음에 내가 할 질문은 성주가 갖고 있는 기록의 파편석을 이용해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였다. 그러나……. ‘미리 하지 않기를 잘했네.’ 지금 생각해 보면 뒤로 미룬 게 다행이다. 저 질문을 통해 내가 지금 노아르크에 있다는 정보가 역으로 노출될 수도 있었을 테니.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이내 빤히 나를 바라보던 늙은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돌연 칭찬의 말을 뱉었다. “참 보면 볼수록 영리하단 말이지.” “…….” “그럼 이제는 어쩔 텐가? 돌아갈 텐가?” 예상과 달리 아우릴 가비스는 신사적으로 나오며 내가 원하면 언제든 돌려보내 줄 것처럼 말했다. ‘……어떡하지?’ 이렇게 일찍 진실게임이 마무리될 거라고는 예견치 못했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역시 아쉬운데.’ 잠시 고민한 나는 결국 아까 세워 둔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아까 말했던 그건 어떤가?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자 했던 거.” “응? 그건 이미 끝난 얘기 아닌가?” “아이디어는 좋은 거 같아서 말이다. 몇 가지를 고치긴 해야겠지만.” 암,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들은 보고 가야지. *** 아우릴 가비스와의 진실게임은 러시안룰렛과도 같다. 한 번 한 번 턴을 넘길 때마다 조마조마하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한정판 정보는 이만하면 됐어.’ 어차피 나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리고 아우릴 가비스만 쓸모 있는 정보를 가진 것은 아닐 터였다. 그 대상이 나보다 수십 년 일찍 이 세계로 불려 온 이계의 악령들이라면 더더욱. “흐음, 꽤나 재미있는 생각을 해 냈군.”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정보 공유. 다만 반드시 그것은 진실이어야 하며, 참가자 중 절반이 모르는 정보여야 한다는 것까지. 미래의 원탁을 고스란히 따와 룰을 설명하자, 아우릴 가비스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괜찮을 거 같네. 방금 생각했다기에는 틀도 제대로 잡혀 있고. 자네 원래는 무슨 일을 했나?” 답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물론 솔직히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질의응답 시간은 끝났다고 했을 텐데?” 내가 까칠하게 답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살짝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단지 호기심에 물었을 뿐이네. 그리고 애초에 막 대단한 비밀을 물은 것도 아니지 않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당신이 물어보니까 이 질문에도 뭔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 같단 말이지. “아무튼, 잠시만 기다리게. 자네가 말한 규칙을 추가하려면 아무래도 권한을 더 불어넣어야 하겠군.”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보석에 손을 댄 채로 정신 집중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후우우우웅-. 육안으로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한여름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석 주변의 공기층이 굴절되기 시작했다. “다 끝났네.” “생각보다 쉬워 보이는군?” “허허, 그렇게 말하니 굉장히 억울해지는군. 믿든 말든 자네 선택이네마는, 이거로 나는 이 공간에 대한 대부분의 권한을 잃었네.” 음,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는데……. 그런 눈치로 힐끗하자, 늙은이가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설명해 왔다. “대표적으로 구현력이 있지. 사념을 집중시켜 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아직도 가능하지만, 실제의 것과는 차이가 날 테고.” 대충 흘려듣던 나는 움찔했다. 구현력, 사념 집중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실제의 것과 차이가 나게 된다니……. “잠깐만, 혹시 아까 사이다 맛이 밍밍하던 것도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질문에 아우릴 가비스는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마는. 문제라도 있나?” 당연히 있다. 앞으로는 그 사이다의 청량감을 맛 볼 수 없다는 뜻이니까. “…….” “자네, 그거 심각한 수준의 사이다 중독일세.” “…….” “근데 그 정도로 그리워하는 걸 보니, 이곳에 넘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군?” 뭐래, 이 늙은이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정보를 캐내려는 게 참. 덕분에 정신이 들어서 나도 은근슬쩍 물었다. “……그건 됐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딱 봐도 그 권한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능력 같은데.” “후후.” 아우릴 가비스는 그런 내 속내를 알면서도 귀엽다는 듯 답했다. “그때 자네가 말했지 않나. GM이라는 별명을 지닌 자에게 초대장을 받았다고.” 아, 그런 말도 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 “그 말은 이 공간의 소유권이 그자에게 넘어갔단 뜻이네. 그렇게 된 경위는 모르겠네마는, 어차피 다른 놈 손에 넘어갈 거라면, 구태여 알맹이까지 넘길 이유가 없지.” 대충 무슨 심리인지는 알 거 같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짓거리라 해도, 서비스 종료 일자가 정해진 망섭이라면 얘기가 다르니까. 온갖 개뻘짓을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 다만, 궁금한 것은 하나다. “GM에 대해선 왜 더 묻지 않지?” “허허, 자네도 그 별명 말고는 잘 모른다고 했지 않나.”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 고개를 주억이며 납득하고 있자, 아우릴 가비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설령 아는 게 더 있더라도 굳이 묻고 싶지는 않네.” “……어째서?”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아우릴 가비스는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했지 않나. 관측된 미래는 무슨 일을 해도 바꿀 수 없다고.” 음,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뜻이려나? 그가 남긴 말에 뭔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들던 때였다. “잡담은 이만하면 됐으니, 어서 가 보세. 그치들도 재밌어할 거 같군.” 아우릴 가비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이동했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원탁이 있는 그 방으로. *** 수십 개의 좌석이 자리한 원탁. 끼이이이익. 아우릴 가비스가 연 문 너머로 들어서자, 그 안에 앉아 있던 네 남녀의 시선이 모인다. “……마스터.” 그들의 반응은 동일했다. 지난번에 날 보내 놓고 뭔 짓을 했는진 몰라도, 다들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두려운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뒤에… 그때 그자도 있군요.” 나에게 호기심을 내비친다. 그러나 지난번에 아우릴 가비스가 내 정체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어 놔서일까? 호기롭게 입을 여는 자들은 없다. “…….” “…….” 그렇게 묘한 침묵이 잠시간 원탁의 방에 감돌았다. 정적을 끝낸 것은 아우릴 가비스였다. “허허, 다들 너무 얼어 있군.” 그 한마디는 절대자의 말과도 같았다. 마치 지금부터는 긴장을 놓아도 된다는, 약자들을 위한 배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요. 마지막에 그런 모습을 보이셨으니까요…….” 이름 모를 여인이 참아 왔던 숨을 내뱉듯 입을 열었고, 아우릴 가비스는 미안하게 됐다며 껄껄 웃었다. 이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유해졌다. “아무튼, 다들 모여 있다니 잘됐네. 내가 이번에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재밌는 걸 만들게 돼서 말이지.”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원탁의 중심부에 보석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교류를 목적으로 자네들을 이곳에 불렀으나, 사실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 않던가? 어쩌면 이거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지 모르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르큘리스의 단장으로 추정되는 흑의 사내의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가 회담의 룰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얘기가 끝난 후에 나온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절반 이상이 모르는 정보를 말해야 한다라, 어렵군요.” 여인은 어딘가 염려하는 기색이었고. “하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교류가 될 것이오. 그동안은 다들 속내를 감추기만 바빴으니.” 카구레아스, 그런 이름을 가졌던 중년 사내는 달갑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스터도 참가하는 것이외까?” 어린아이의 외모와 달리 중후한 말투를 쓰는 꼬맹이, 파멸학자는 그저 하나만을 물었다. “물론, 나도 참가할 생각이네. 여기 옆에 있는 이 친구도 마찬가지고.” 아우릴 가비스의 답변에 네 남녀의 시선이 내게 또다시 모였다. 어딘가 껄끄럽다는 눈빛이었다. 하긴, 정체도 모르는 이방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회담에 끼겠다고 하면 정보가 있어도 말하기 싫겠지. ‘내가 일단 편애를 받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정말 자기들이랑 급이 맞는지도 궁금할 테고.’ 음, 어떡하지? 일단 자격을 증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거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아우릴 가비스를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부르려 하던 차였다. “저기…….” “아, 그냥 마스터라 부르게.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자네뿐이니.” 어, 갑자기? 늙은이가 칼같이 내 말을 자른, 그 순간이었다. “……!” “……!” “……!” 네 남녀의 눈빛에 이채가 실렸다. ‘뭐야, 이거…….’ 솔직히 말해, 당혹스럽단 말로도 부족했다. 아니, 이 늙은이는 대체 여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던 거야? “이름을… 안다고……?” 설마 이름도 안 알려 줬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이걸로 넘어갔으니 잘된 건가?’ 얼떨떨한 감정을 추스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자니, 아우릴 가비스가 내게만 보이게끔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거, 속이 빤히 보이게.’ 늙은이가 날 돕는 이유야 명백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우릴 가비스는 이 회담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내 제안에 옳다구나 승낙을 한 것도,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겠지. 아니, 어디 그뿐인가? “자자, 앉아들 있게. 경계하는 건 당연하네만, 정 그러면 저 친구가 첫 번째 차례로 입을 열면 되는 거 아니겠나.” 아우릴 가비스는 자연스레 분위기를 유도했다. 내가 대단한 정보를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를. “……그보다 일단 다들 참가할 건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늙은이의 수작에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건 또 뭘까. “……!” “……!” 또 네 남녀의 동공이 확대된다. 마치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는 듯이. “어찌 마스터에게 저렇게 가벼운 말투를…….” “……한데 마스터도 별말을 안 하시는군요.” 아니,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드륵. 그래서 그냥 아무 곳에나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를 기점으로 한 명씩 입을 열어 참가 의사를 밝혀 왔다. “참가하겠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누가 이런 자리를 마다하겠어요?” 불참을 선언하는 자는 0명. 아우릴 가비스는 흡족한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사회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럼 만장일치로 합의가 끝났군. 소개 같은 건 할 필요 없으니, 이제 시작해 보세. 자네가 먼저 한 다음에, 시계 방향으로 돌지.” 그 말에 또다시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아무리 나라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처음 만들어진 회담의 첫 순번 아닌가. 내가 뱉는 정보의 질에 따라 이들이 꺼낼 정보의 수준도 올라갈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얕보이는 건 좋지 않겠지.’ 20년 후의 원탁에서 배운 게 있다. 일단 있어 보이는 척하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원탁 회의 중에 별거 아닌 정보들로 턴을 넘겨도 뭔가 숨은 속뜻이 있으리라 여기며 대강 넘어가는 일도 여럿 있었고. ‘흐음, 그럼 뭐로 할까.’ 나는 잠시 고민을 이어 가면서도 천천히 원탁에 앉은 일원의 면면을 살폈다. 모두가 나를 향해 강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열의가 넘치는 건 아우릴 가비스였다. ‘그래, 내가 이 분위기에서 뭘 정보로 밝힐지 아주 궁금해서 죽겠다 이거지?’ 덕분에 고민이 끝났다. 이 노인네가 뭘 기대하는진 알겠지만……. ‘어림도 없지.’ 내가 원탁 짬이 얼마인데. 고민을 끝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아우릴 가비스에게 쓸데없는 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회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그것. “땅의 마녀는 살아 있다.” 이름하여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1식第一式, 정보 돌려막기. 310화 원탁 (4) 땅의 마녀는 살아 있다. 이 정보를 재활용한 이유는 여럿 있다. 그리고 그중 첫 번째는 내가 무슨 정보를 꺼낼지 기대하던 아우릴 가비스를 엿 먹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허…….” 말도 잘 나오지 않는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앓는 소리만 내뱉는 늙은이. 그 모습에 절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뭐, 이것만 노리고 이 정보를 꺼낸 건 아니지만. 이쯤에서 두 번째. 이 정보는 꽤 쓸 만하다. 출처는 나이다. 그도 그럴 게, 이걸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간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얘네들이랑 달리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쉽게 말해, 있는 척하기에 딱 좋다는 뜻. 스윽. 나는 천천히 다른 회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응, 뭔 소리야 저게?’ 이런 얼굴이었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닫고는 한곳을 향해 시선을 모은다. 보석이 놓인 원탁의 중심부. 진실이 담겨 있을 그곳을 향하여. “초록색이구려.” 이내 보석에 녹색빛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저 말이 진실이라는 뜻…….”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믿고 있단 말이겠지.” 탄성을 뱉는 회원들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 정도면 자격 증명은 됐을 테고. ‘아무튼, 이런 건 얘네한테 안 말해줬다 이거지?’ 세 번째 효능이다. 이 질문을 하면, 아우릴 가비스가 이 멤버들에게 어디까지 정보 공유를 했는지 파악할 수가 있다. 만약 아우릴 가비스가 이런 고급 정보를 허물 없이 이들에게 공유하는 사이였다면, 이런 식으로 불빛이 들어올 리 없었을 테니까. ‘뭐, 이름도 안 알려 준 걸 보고 대강 예상은 했지만.’ 아, 참고로 네 번째 이유도 있다. 회원들에게 정보 공유가 된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서는 땅의 마녀가 살아 있단 내용 자체가 없었지 않은가. 나는 게임 제작자인 저 늙은이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감추려 했다고 해석했다. 그렇기에……. ‘암, 숨기는 건 까발려 줘야 제맛이지.’ 지금 나는 이 집단에 독을 푼 거나 다름없다. 이 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니면 그냥 살짝 저릿하고 끝날지, 아직 그 효능은 알 수 없지만……. ‘똥 씹은 표정인 걸 보니, 성공인 거 같네.’ 이로써 집회에 참가한 네 명의 고인물들은 아우릴 가비스가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을 알게 됐다. 분명 이후 어떻게든 연쇄 작용이 일어나겠지. 아우릴 가비스가 원하지 않았을 형태로. “설마 땅의 마녀가 살아 있었다니, 앞으로는 그쪽도 연구를 해보아야겠소이다.” “왕가에서도 이를 알고 감췄던 것일 터. 어쩌면 그들의 역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꼬맹이 모습의 파멸학자는 학구열적인 눈으로 내 말을 곱씹었고, 오르큘리스의 단장은 좋은 칼을 얻은 무사처럼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녀가 정말로 살아 있다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여인은 내가 아우릴 가비스에게 했던 그 질문을 똑같이 반복했다. 거, 이 여자도 참 똘똘하게 생겨 가지고. “이름이 뭐지?” 내 물음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그맣게 말했다. “……라비.” 라비. 성인지 이름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명칭. 아니, 애초에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쩝, 나중에 따로 알아보려 했건만.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죠?” 이유야 뻔하지. 여기서 얘만 이름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지만. “미련한 질문을 하기에.” “……?” “내가 네 물음에 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마스터에게도 말을 까는 와중에 이들에게 경어를 하는 것도 웃기기에 그냥 아랫것 대하듯 말했다. 한데 그게 조금 분했을까? “…….” 라비는 입술을 잘게 씹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수사자 경력 1년 차인 내가 보기엔, 당근을 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 “네가 흥미로운 얘기를 한다면 원하는 걸 답해 줄 수도 있겠지.” 내 오만한 말에 라비는 멈칫하더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나를 보았다. “우리도 증명을 하라는 거군요. 좋아요.” 째려보는 듯한 눈빛에는 승부욕이 감돌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하긴, 마스터가 모은 정예들인데 콧대가 오죽 높겠어? 처음 만난 의문의 남자에게 이딴 말을 들으면 열불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 “…….” 더군다나 저 여자 말고 다른 회원들도 내 말을 듣고 살짝 자극을 받은 눈빛이다. 오케이, 그럼 떡밥은 이만하면 된 거 같고……. ‘응?’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아우릴 가비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얘는 대체 뭐 하는 새끼지?’ 딱 이런 눈빛으로. *** 회담의 순서는 나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제 내 차례겠군?” 두 번째 순서는 내 왼쪽에 앉은 저 늙은이다. 따라서 나도 귀를 쫑긋 세웠다. 고인물들이 가득한 이 자리에서 절반이 모르는 정보를 뱉어야 하다니? 분명 쓸 만한 정보가— “그럼 말하지.”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정보를 꺼냈다. “라비 양, 땅의 마녀는 모두의 소망이 향하는 곳에 있다네.” 하, 이 영악한 늙은이. 내가 다음 턴에 쓰려고 했던 정보였건만. ‘뭐, 그걸 예상했으니까 자기 입으로 먼저 말한 거겠지만.’ 필시 내가 정보 돌려막기술을 쓰는 걸 보고서 이것부터 해결해야, 내가 가진 진짜 패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솨아아아아아. 당연히 켜진 불빛은 녹색. 회원들은 관례처럼 제각각 감상을 중얼거렸다. “소망이 향하는 곳이라…….” “역시 미궁을 뜻하는 걸까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는 하나, 어찌 보면 성벽 바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소.” 흠, 얘네들이라고 딱 짚이는 게 있거나 한 건 아니었구나. “자자, 얘기는 나중에 해도 괜찮으니 우선 계속 이어 나가도록 하세.” 아우릴 가비스의 진행에 대화가 정리되며 집회가 다시 진행됐다. 다음 순번은 중년 사내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카구레아스.’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아멜리아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했었지. 어쩌면 가명일지도. “하하, 이런 게 처음이라 뭘 말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구려.” “편하게 하게. 자네쯤 되면 하나씩은 있을 거 아닌가. 남들은 모를 만한 중요한 이야기가.” “그건 그렇소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중년 사내, 카구레아스는 그걸 여기서 말해도 되는가 고민하는 눈치로 우리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가 계시는데 대충 말하고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하겠소.” “해보게.” “왕궁 지하에 포탈이 있소.” 뭐요……? 이내 초록불이 켜지자, 아우릴 가비스를 제외한 모두의 입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포탈이라니? 미궁과 연결된 것인가?” 이미 턴은 넘겼기에 답변을 할 이유는 없으나, 카구레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변까지 해주었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라 잘은 알 수 없으나, 미궁과 이어진 포탈은 아닌 거 같소.” “이건… 굉장히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포탈이 이어졌을꼬…….” 파멸학자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네 남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나와, 아우릴 가비스가 있는 방향으로. “…….” “…….” 모두 입을 꾹 닫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에 섞인 바람은 너무도 명백했다. 당신들이라면 알고 있는 거겠지? 수사자로 살아가며 수없이 겪었던 의문을 품고 해답을 갈구하는 자들의 눈. “……허허.” 아우릴 가비스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나는……. “…….” 늘 그랬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경험을 통해 몇 번이고 학습한 것이다. 이러고 있으면 반 이상은 간다는걸. 이름하여,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2식第二式, 가만히 있기. 아, 물론 제 2식을 펼치면서도 머리는 열심히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왕궁에 관련된 비밀이라……. 어쩌면 왕가 쪽 세력에 속해 있는 자일 수도.’ 카구레아스. 과연 이 남자는 어떤 자일까. 단장이나 파멸학자처럼 아는 게 아예 없다 보니 오히려 더 관심이 생긴다. 한데 침묵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하면 이제 내 차례구려.” 그렇게 운을 뗀 파멸학자는 질질 끌 것 없이 곧장 정보를 꺼냈다. “미궁의 순환 원리는 생명력이올시다.” 듣자마자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한데 그건 나만이 아니었을까? “……루인제네스 공,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소? 우리는 그대와 달리 마법에는 문외한인 자들이라.” “쉽게라, 좋소이다.” 카구레아스의 요구에 파멸학자가 부연 설명을 더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미궁은 마력으로 유지되지 않소. 지금처럼 순환이 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지.” 내 입장에서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하나, 라비라는 여자는 마법 쪽에도 견문이 있었을까? “……그 자원이 바로 생명력이라는 뜻이군요.”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말하자, 파멸학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것이오? 이 자리에서 미궁의 원리 같은 게 궁금한 사람은 없을 터인데.” 카구레아스는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걸 알아서 어디다가 쓴단 말— “쯧, 귀찮게.” 파멸학자가 혀를 차자, 카구레아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근육질 사내가 꼬맹이에게 눈치를 보는 격이나, 직접 보고 있자면 납득 못 할 광경은 아니었다. 저 파멸학자는 꼬맹이 모습임에도 어딘가 건드리기 어려운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으니까. “제가 대신 설명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어딘가 토라진 듯한 파멸학자를 대신해 라비가 입을 열었다. “마석의 원재료가 생명력이란 뜻은 즉, 미궁이 생명력을 통해 유지된단 거예요. 제가 알맞게 이해한 거라면…… 모든 게 뒤바뀌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궁의 발견으로 인해 인류가 재건되고 이 도시가 유지된 게 아니에요.” 라비는 말했다. “이 도시가 있기에 미궁이 유지가 될 수 있던 거지.”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니, 잠깐만……. 진짜야? 분명 저 말대로라면……. “……미궁에서 죽어나간 탐험가들이 연료나 다름없었단 거군요. 왕가에서는 그 사실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고.” 나랑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때마침 단장이 내가 속으로 정리한 결론을 입밖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글쎄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래요.” 라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파멸학자를 힐끗했다. “일단 적어도 미궁의 순환을 유지하는 자원이 생명력이란 건 틀림없소이다. 왕가에 대한 의심이야 이를 통해 도출 가능한 합리적인 의심일 테고.” “그, 그렇구려…….” “자, 그럼 됐소이까? 왕가 지하에 정체불명의 포탈이 있다는 애매한 정보만큼의 가치는 있을 거 같은데.” 파멸학자의 날카로운 말에 카구레아스가 무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화내지 마시오. 나 같은 사람들은 전부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통 알아먹지를 못하니.” ……이 사람, 혹시 바바리안인가? 어딘가 화법에서부터 친근감이 생기지만, 종족을 단정 짓기엔 비약이 심하다. 저런 타입이야 탐험가 중에 새고 샜으니. “이제 라비 양 차례군?” 아우릴 가비스의 말에 여인을 향해 시선이 모였다. 나도 조금 기대가 됐다. 앞서 두 명의 정보가 굉장히 흥미로웠을뿐더러, 이 여자는 아까 내 도발을 정면으로 받았다. 내 콧대를 누르는 건 아니더라도, 비슷한 급은 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을 터. “제 차례네요.”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정보를 꺼냈다. “태고룡은 죽었어요. 여러분은 모르셨겠지만, 10년도 더 전에.” 어이가 없었다. 비장한 얼굴로 말하기에 뭔가 대단한 정보를 뱉는가 싶었더니. ‘고작 이거?’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보석에서는 초록빛이 나왔다. 아우릴 가비스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테니, 다른 세 명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는 뜻. “……그렇군. 어쩐지 용인족이 최근에 잠잠하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었구려.” “불멸자의 시대를 거친 그자가 죽다니, 아쉬운 일이오.” 듣기 힘든 비사를 들었다는 듯 납득하는 삼인방. 처음엔 그 모습이 이질적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가 태고룡을 죽이고 일족의 보검을 탈취한 사실이 알려진 건 새로운 태고룡이 선출된 다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대충 이 시기쯤이지……?’ 역사 공부를 했던 건 아닌지라,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랬던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들도 모를 만큼 철저하게 비밀로 감추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한데 그런 내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어때요, 이 정도면 흥미로운 이야기려나요?” “글쎄.” 애초에 왜 용인족의 부족장이 죽은 사실 갖고 저들이 저런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얘가 이런 거로 뻗대는 것도 납득이 안 되고. 누가 봐도 앞의 정보들이 훨씬 가치가 있지 않나?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딱히 가치는 느끼지 못하겠군.” “……납득할 수 없는 말이군요.” 라비는 자존심이 상한 듯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한 줄기의 의심도 섞여 있었다. 내가 일부러 자기를 무시하려고 연기하는 건 아닐까 싶은 거겠지. ‘아니, 뻗댈 거면 좀 더 재미난 걸 갖고 오든가.’ 양질의 정보를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한 번 기를 죽여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슬슬 제 3식을 꺼낼 차례인가?’ 톡톡, 의자를 무의미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순서는 안 왔지만 미리 한 번 더 해두지.” “그게 무슨 뜻—” 어허, 어디 감히 수사자 님이 말씀하시는데. 잘하면 공짜로 턴을 넘길 수 있을 수도 있을 듯하기에 끼어들 여지 없이 단숨에 말을 이었다. “태고룡을 죽인 자는 리갈 바고스란 이름의 용인이다.” “……어?” 뭐라 따지려던 여자가 말을 멈추고 흠칫했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서. 솨아아아아아. 보석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 “…….”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라비를 보며 말했다. 마치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듯이. “어때, 납득이 되었나?” 이름하여,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3식第三式, 약자멸시弱者蔑視. 311화 원탁 (5) “리갈 바고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소. 굉장히 유용한 용언을 지닌 탐험가였지.” “일족을 배반한 탐험가라…… 이건 좀 흥미가 생기는군요.” 내 말이 끝난 후, 단장과 카구레아스가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듣는 내가 다 의미심장했다. 흥미가 생기다니? 오르큘리스의 단장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까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 다만,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한 곳을 응시했다. “…….”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 라비. 호전적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이 작게 벌어지고 있었다. 눈빛에는 경악의 감정만이 가득했다. “그, 그걸 대체 어떻게…….”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정말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긴 한 모양. 다만 동정의 여지는 없다. 이곳은 냉정한 승부의 세계니까. 기회를 놓치는 자는 맹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마, 말도 안 돼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아직 열 명이 채 안 되는데…….” 혼란에 빠진 라비를 보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 세상의 좋은 면만을 보고 자란 철부지 꼬마애를 대하듯. 나는 말했다. “어리군.” 실제 나이야 저쪽이 훨씬 많겠지만 알게 뭔가. 저쪽에선 나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한데. “…….” 라비의 반응은 실로 즉각적이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 애송이 취급이 분한지 혈색이 오른 낯빛과 내게 고정된 시선. 그리고 그 안에 깊게 배인 하나의 의문. “당신은…….” 이내 라비가 의문을 토해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이름이든, 신분이든 뭐든. 내 정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 너무도 포괄적인 물음을 내게 던졌다. “…….” 다른 회원들도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기야 체면 때문에 먼저 묻지 못했을 뿐. 내가 누군지 궁금한 건 저들도 마찬가지였겠지. 아마 방금 라비가 한 질문은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케이, 분위기 딱 좋고.’ 내가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제 좀 진부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진부하단 말은 지금까지 잘 통해왔단 뜻이기도 하니까. 나는 느긋하게 운을 뗐다. “글쎄, 말해 주지 못할 건 없겠지.” 그 말에 회원들의 집중도가 확 올라가는 게 한눈에 보였다. 정말? 정말 뭐라도 말해 주려는 건가? 그런 기대감이 깃든 표정들. 나는 그런 표정들을 감상하듯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보고서 말을 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자들이라면.” “허…….” 내 말이 원탁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단장은 탄성을 뱉었고. “그쪽 이름을 들으려면 증명하라 이거요? 우리가 그쪽이랑 어울릴 자격이 되는지?” 근육 중년, 카구레아스는 호기롭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 “다행히 제대로 이해했군.” 오히려 그 말에 긍정했다. 그야 요즘은 자기 PR의 시대잖아? 굳이 겸손 떨 거 뭐 있어. 나오는 것도 없는데. “……어디서 이런 자가 나타났을꼬.” 그런 내 오만한 말에 파멸학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면 웃는 건 처음 보는 거 같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무료하다는 듯 차만 홀짝이고 있었는데. ‘확실히 이거로 어그로는 제대로 끌렸—’ 흡족한 결과에 나도 모르게 가면 속에서 웃음 짓고 있자니, 돌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우릴 가비스였다. ‘거, 부담스럽게.’ 그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얘는 진짜 뭐 하는 새끼지?’ 그런 의문을 담은 채. *** 잠깐의 해프닝이 있기는 했으나, 아우릴 가비스의 진행으로 회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3개월 전에 왕의 사신이 노아르크의 성주를 찾았습니다. 아쉽게도, 철저히 함구한 탓에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번 회차의 마지막 차례인 단장은 그런 정보를 뱉고서 초록불을 받았다. “흐음! 신기하군. 왕가에서 직접 교류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소만.”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는 파멸학자와 달리 내게는 그리 유의미한 정보가 아니었다. 20년 전의 정치 얘기 따위를 알아서 뭐 하겠는가. 내가 이 정보로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왕가는 물론이고 알 만한 자들은 전부 지하도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 “그럼 다음 순서는…….” 한 번의 회차가 끝나고서 아우릴 가비스는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저 친구를 제하고 다시 해야겠군. 혹시 먼저 하고 싶은 자가 있나?” 손을 든 것은 카구레아스였다. “내가 먼저 하겠소.” “아, 그러겠나?” “먼저 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할 거 같아서 말이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럼 해보게.” 이내 근육중년 카구레아스가 정보를 뱉음으로써 2회차가 시작됐다. “그……. 창세보구를 하나 더 손에 넣었소.” 볼을 긁적이며 한 말치고는 너무도 충격적인 정보. 나도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야 20년 뒤에는 아예 종적이 사라져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물건 아닌가. 한데 ‘하나를 더 손에 넣었다’라고? ‘그럼 원래도 최소 한 개 이상 갖고 있었다는 거잖아?’ 나도 모르게 기함이 나올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한데 충격을 받은 건 나만이 아니었을까? “뭐? 그게 사실인가!” 파멸학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흥분한 건 라비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느 일족의 창세보구이죠?”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럼 어떻게 입수했는지라도…….” “어떻게 얻었냐고 해봐야…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을 못하겠구려.” “그 물건을 어떻게 운이 좋다는 이유로…….” “아, 너무 그러지들 마시오. 정확히는 나중에 필요할 때 한 번 빌릴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에 가까우니까.” 와, 이 사람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그제야 고인물들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게임에서 창세보구 하나를 얻는 건 그래도 꽤 할 만하다. 그냥 메인 캐릭터의 종족 에피소드를 깨고 부족장이 되면 그만이니까. 정말로 어려운 건 두 번째 창세보구부터다. 타 종족 에피소드를 깨고 ‘사용권’을 얻든가, 동료 캐릭터를 ‘부족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진짜 클리어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그런 생각이 든 즉시, 나는 아우릴 가비스를 힐끗 바라봤다.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쉽게 말해, 이러한 진척도를 미리 알고 있었단 뜻. 한데 이 늙은이는 이런 애들을 두고서 도대체 왜 ‘실패작’이라 불렀던 걸까. “아무튼, 지금 이 사실을 여기서 밝히는 이유는 하나요. 마스터가 말한 대로 우리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단 한 번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없었지. 그러나 이젠 달라질 필요가 있소.” 고민하고 있을 때 카구레아스가 말을 이었다. “자, 내가 두 개를 얻었소. 태고룡이 죽었다니, 라비 양만 열심히 하면 하나를 더 가져올 수도 있을 테고.”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는 거예요.” 라비가 앙칼진 목소리로 카구레아스를 타박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미 들을 정보는 다 들은 상황. ‘그래, 역시 용인족이었던 거구나.’ “아, 미안하오. 내가 생각이 짧았구려.” 카구레아스는 남자답게 사과를 하더니, 계속해서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세 개가 남았소.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힘을 모으면 그 정도는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모두에게 묻는 듯했으나, 카구레아스의 시선은 단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이 둘이서 싸우고 있었지.’ 어찌 보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거라 볼 수 있다. 하면, 단장의 대답은 어떠할까. “…….” 그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이에 카구레아스가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왕을 향한 그대의 원한은 알고 있소.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오. 어차피 이 세계에서 쌓은 인연 아니오? 원래 세상에 두고온 가족을 생각—” “그만.” 단장이 완고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했다는 듯,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에 카구레아스도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웠다. “역시 쓰레기였군. 그래도 목표만은 우리와 같을 거라 생각했거늘.” “…….” “왕가가 의문의 종착지라고? 돌아가길 바란다면 더더욱 자기를 도와야 한다고? 그 말에 혹시나 했던 내가 다 바보 같을 정도야.” “카구레아스, 그만하세요…….” “하지만 라비 양도 방금 들었지 않소. 저놈에게는 돌아가고 싶단 의지 자체가 없소.” “그렇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왜 아직까지 매번 이곳에 얼굴을 내비치겠어요?” “그야 빤하지 않소? 우리를 잘만 이용하면 왕을 죽이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소모품처럼 쓰고 버릴 생각밖에 없었겠지. 아닌가?” 카구레아스가 호전적으로 바라보며 묻자, 단장도 냉소적으로 입을 열었다. “속내를 감춘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루인제네스 공이 차원마법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창세보구를 모으러 다니고 있었지요.” “……그게 뭐가 문제란 거지? 방법은 여럿 있는 편이 좋은 거야 당연할 텐데?” “하지만, 내가 루인제네스 공을 설득할 때 반대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창세보구를 모두 모으는 게 목적이라면 왕가와 대립이 불가피할 것인데도, 그때 당신은 한사코 나를 방해했지요.” “아아, 그거 말인가.” 카구레아스는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서 말이야. 네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쓰레기란 직감이 팍 왔지 뭐냐.” “…….” 단장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카구레아스와 시선을 마주한 채, 더더욱 진득해진 살기를 뿜어낼 뿐. 이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뻔했다. ‘……살기 수준이 다르네.’ 20년 뒤의 원탁 멤버들과는 천지 차이다. 그 살기가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에도, 피부가 저릿하고 호흡이 무겁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던 때였다. “허허, 다들 머리가 많이 뜨거워진 모양이구먼.”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아우릴 가비스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네.”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다들 돌아가서 쉬고 다음에 보세.” ……뭐? 잠깐만, 여기서 끝낸다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끝낼 거면 제대로 한 회차를 돌고 나서 하든가. 기껏 설계를 해놨건만. “아니—” 일단 뭐라고 말이라도 붙여 보려던 찰나. 번뜩-! 불빛이 점멸하듯 눈앞이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설마 벌써 다녀온 건가?” 익숙한 아멜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하, 진짜 쫓겨난 거구나. *** “얼마나 지났지?” “눈을 감고서부터 3초 정도.” 3초라……. 아멜리아가 묘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도 당연하다. 얘 입장에서는 정말 잠깐에 불과했을 테니.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겠지. “자.” 목이 타서 협탁 쪽으로 손을 뻗자, 아멜리아가 물이 담긴 컵을 대신 잡아서 전해주었다. 뭐야, 이거. “아, 어… 고맙다.” 내가 멋쩍음을 감추지 못하며 감사 인사를 뱉자, 아멜리아도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번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거…….” 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간추려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그냥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다 말했다. 혹시 내가 놓친 점을 얘가 발견할 수도 있으리란 판단이었으나……. “잠깐만, 아우릴 가비스가 사과를 했다고? 그딴 억지 같은 요구에?” “그런데?” “……아니다, 계속해라.” 아우릴 가비스와의 기싸움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덧 원탁에 이르렀을 때였다. 점점 의미심장해지던 아멜리아의 눈빛이 너무도 명확한 빛을 띠었다. 원탁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넌… 대체 원래 세상에서 뭘 하던 놈이지?” 312화 유산 (1) 7구역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고급 음식점. 오랜만에 클랜원들끼리 만남을 가지기 위해 아루아 레이븐이 찾은 곳이었다. 물론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자주 가던 곳을 약속 장소로 잡으면 분명 이런저런 생각에 더 우울해지기만 할 테니까. “주문은 안 할 건가?” “아직 다 안 왔잖아요.” 레이븐이 짧게 답하자 아브만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가 감돌던 때. “아니, 다 온 게 맞다.” 아이나르가 입을 열었다. “……미샤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나 나중에 맘이 바뀌어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안 왔으면 오지 않는단 거겠지.” “……그렇군요. 그럼 이 세 명이 전부인 거네요.”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도 비슷한 한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하긴 씁쓸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으리라. “레이븐.” “말씀하세요. 우리크프리트 씨.” “근데… 에르웬은 어떻게 됐나? 연락은 했고?” “일단 우편은 보내놨었어요. 지난 탐사 때의 정산, 그리고 얀델 씨의…… 유산 관련으로 얘기를 나눌 게 있으니 오라고.” 물론 도리를 지키기 위해 연락을 했을 뿐, 그 요정이 이곳에 올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런 모습을 보이고 떠났으니까. “답장은 왔던가?” “아뇨, 안 왔어요. 그래서 정산이 다 끝나면 그것도 그냥 우편으로 보내려고요.” “……그렇군.” “아무튼, 그 요정은 됐고, 설마 미샤 씨도 불참일 줄이야. 이건 몰랐네요. 이 문제에 가장 중요한 분이라 반드시 올 줄 알았는데.” 레이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나르를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미샤 씨는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요?” 레이븐은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됐다. 그야 마지막으로 본 게 왕가에서 진행한 장례 행렬 때였으니까. 심지어 그때는 거리도 멀었고 말을 걸 분위기도 아니어서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었다. 하면, 그녀의 상태는 어떨까. “……잘 지낼 리가 있겠나. 하루 종일 방에만 박혀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한 번은 억지로 먹였더니 토를 하더군.” “그렇군요…….” “그래서 요즘은 집에도 잘 안 간다. 내가 있으면 더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그럼 아이나르 씨는 지금 어디서 지내세요?” “성지에서 지내는 중이다. 그래도 내가 없을 때는 미샤도 최소한의 식사는 하는 거 같더군. 그래서 그냥 집에 먹을 것만 잔뜩 사서 넣어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레이븐, 근데 네가 보기엔 어떻나? 이대로 미샤를 내버려 둬도 괜찮겠나?” “그건…….” 레이븐은 한 달 동안 겪은 스스로의 경험에 빗대어 말했다. “일단 식사를 안 하는 건 죄책감인 거 같아요. 그 있잖아요?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서…… 그 거북함이 느껴지고…….” 그녀답지 않게 횡설수설했으나, 아이나르와 아브만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말이지.”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알 것 같다. 근데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미샤 씨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그게 정답인지는 또 모르겠고.” “하긴, 너라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이나르가 악의를 갖고 한 말은 아닐 터이나, 레이븐은 갑갑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나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있었다면, 분명 옳은 대처를 했을 테니까. “그보다 일단 주문부터 하지. 이대로 더 시간만 죽치고 있으면 내쫓길 테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브만이 화제를 바꾸었고, 레이븐도 무거운 주제에서 넘어가 음식을 함께 골랐다. “오, 이 식당은 처음인데 음식이 아주 맛있군. 다들 뭐 하나? 먹지 않고.” “아, 네…….” 음식이 나온 후로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고,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나누었다. “전리품 정산은 문제 될 게 없어요. 그날 얻은 걸 전부 5등분을 하면 됐거든요. 문제는 유산인데……. 혹시 다들 얀델 씨의 유서는 보셨나요?” “아, 봤다. 유산을 어떻게 할 건지 비율을 써둔 걸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더군. 뭐, 그 녀석답다면 그 녀석답기는 하지만…….” 아브만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요?” “비율 말이야. 터놓고 말해서, 그 녀석이 이런 식으로 비율을 분배한 게 영 이해가 안 돼서.” “아, 그거 말이죠…….” 레이븐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그녀 역시 처음엔 놀랐다. 설마 정확하게 20%씩 다섯 명에게 유산이 돌아가도록 지정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당연히 미샤나 아이나르에게 재산 중 대부분이 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비요른 얀델은 그렇지 않았다. 누구에게 뭘 줄지 딱딱 정해둔 게 아니라 재산의 비율만 적어둔 탓에 누가 뭘 가져갈지는 우리끼리 합의를 봐야 하지만, 비율만은 일치하게 두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말을 하다 마는 걸 보니,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가 보군?” 레이븐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뻔하잖아요. 얀델 씨가 왜 그랬을지는.” 그 영리한 바바리안 전사는 바란 것이다. 자신의 사후에도 우리가 서로에게 서운하지 않기를. 그래서, 변함 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기를. “……역시 아무래도 미샤 씨를 이대로 둘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래, 그라면 분명 그걸 바랐을 것이다. *** 원탁에 다녀오고서 사흘 뒤. 나와 아멜리아는 오래간만에 장비까지 풀로 챙겨 입고서 영주성에 방문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서 한 남자와 마주했다. “반갑네. 이쪽이 철가면이지?” 노아르크에서 사용 중인 닉네임은 ‘펠릭 바커’. 어린 시절의 레인웨일즈 자매가 ‘몰이꾼’으로 소속되어 있는 클랜의 리더인 자였다. 총 인원이 열셋인가 그랬지. “반갑다. 철가면이다.” ‘토르의 아들 비욘’이라는 닉네임도 있지만, 그냥 별명으로 자기소개를 대체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이 도시에서는 별명 자체를 닉네임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들어가지.” 그를 따라 영주성 안에 위치한 클랜 하우스에 들어서자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힙하게 꾸며진 내부에는 험상궂게 생긴 클랜원들이 자유롭게 앉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꾸벅꾸벅 피는 중이었다. 이게 뭔 범죄자 아지트도 아니고. “마시겠나?” 맞은편 소파에 앉자 펠릭 바커가 술을 병째로 권해왔다. “사양하지.” 아멜리아는 칼같이 거절했고, 나는 그냥 술병을 받았다. 그야 둘 다 안 마시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일단 우리는 이 클랜에 들어가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기도 하고. 이 도시에서 술을 거절한다는 것은 너를 믿지 못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철컥. 이음새를 건드려 턱 부분만 투구를 올린 다음에 술을 들이켠다. 그러자 펠릭 바커가 씨익 웃었다. “좋아 좋아, 마음에 드는군. 아, 근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괜찮겠나?” “해봐라.” “왜 우리 클랜을 선택한 건가?” 답은 간단하다. 레인웨일즈 자매가 이 클랜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3개월 뒤에 그 사건이 벌어질 때 가장 자연스럽게 붙어 있으려면 이 방법이 제일이었다. 뭐,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지만. “에밀리는 너희가 먼저 제안을 했다던데?” “하지만 자네들 소문의 반만 사실이어도 다른 좋은 곳도 있었을 텐데.”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답변을 꺼냈다. “클랜이 있으면 편할 거 같긴 한데, 그런 곳에 가면 비율이 적어지기 마련이니까.” “오우거의 발톱을 가질 바엔, 트롤의 머리를 챙기겠단 뜻이군.” “그래, 문제라도 있나?” 펠릭 바커는 내 진의를 살피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될 턱이 만무했다. 아니, 철투구를 얼굴에 뒤집어썼는데 눈이 제대로 보이겠냐고.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던 때였다. “핫! 하하하하하!” 녀석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눈을 빛냈다. 아우릴 가비스와 달리 가소롭기만 할 뿐이었다.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컨셉충 같다고 해야 하나? 목소리도 묘하게 연기톤이라 거슬린다. “좋아, 아주 좋아.” “뭐가 좋다는 거지?” “자네들이 더 마음에 든다는 뜻일세.” “그럼 합격인가?” “아니, 아직은.” 펠릭 바커는 무슨 마피아 보스인 척 여유롭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실력제라서 말이지. 클랜 내에서는 나를 제외하면 3개의 등급이 있고, 그 등급에 따라 원정을 나갔을 때의 몫이 정해지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자네 실력을 모르지.” “……?” “약육강식이라는 말은 들어 봤나?” “들어 봤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트롤의 머리가 갖고 싶으면 빼앗게. 그리고 증명하게. 자네가 서 있는 이곳은 그런 세계—” 아,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좋다.” “응……?”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거 아닌가.” “그건 그런데…….” “그럼 된 거지 왜 이렇게 말이 많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펠릭 바커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뭐, 폼 잡으면서 말하면 내가 쫄 줄 알았나? 원래 이런 잡 이벤트는 빠르게 스킵해야지. “됐고, 얼른 말이나 해라. 너를 처죽이면 되는 건가?” “……쟁탈전은 단원들끼리만 가능하네. 그리고 꼭 죽이라는 말은—” 아, 뭐야 싱겁게. “그럼 누구를 처죽이면 되는 거지?” 그리 말하며 나는 주위에 있는 클랜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덩치 한 명이 움찔했다. “딱 보니까 쟤가 내 상대였나 보군.” “그러네. 하지만 쟁탈전이라고 해서 꼭 죽이라는 건—” 뭐래, 자꾸 시끄럽게. 내가 살의를 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기세에 밀린 덩치가 뒤로 물러나며, 펠릭 바커를 흘깃했다. 구원을 바라는 자 특유의 시선. 이내 펠릭 바커도 정신을 차리고 내게 말했다. “자, 잠깐! 저기 뒤에 공터가 있네.” “아, 그럼 그리로 옮기지.” “그, 그리고 쟁탈전 중에는 이능을 쓰는 게 금지되어 있네.” 허, 설마 스킬 사용 금지 룰이 있을 줄이야. 패시브랑 깡스탯으로만 전투를 치르란 뜻이다. 역시 상남자의 세계인 노아르크인가? “이능을 쓰지 않고 처죽여야한다라……. 뭐, 크게 어렵진 않을 거 같군.” 잠시 고민한 나는 흔쾌히 룰을 받아들였다. 근데 이건 또 뭘까. 펠릭 바커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도록이면 죽는 이가 없게 했으면 하네마는…….”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럼 승급을 못하지 않나!” “……항복만 받아낼 수 있으면 되네.” “뭐? 안 죽여도 승급을 할 수 있다고?” 피의 승급전은 이런 지하 세계의 국룰 아니었어? 게다가 아까 약육강식이라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게 말이나 되나?” 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비슷한 눈빛이었다. “자네…… 노아르크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닐세…….” 먼저 눈을 피한 건 펠릭 바커였다. *** 두터운 천으로 창문이 가려진 어두운 방. 미샤 칼스타인은 퀭한 눈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생각했다. 하루가, 또 시작됐구나. 커튼을 살짝 걷어 낮인지만 확인한 그녀는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잠은 다시 오지 않았고, 씻지 않은 몸에는 지난밤에 악몽으로 흘린 땀이 흥건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팠다. 쓰라릴 정도로. “…….” 미샤는 초췌한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손 한 번 대지 않은 얀델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마치 문고리만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기다리던 사람이 자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다만 그녀는 결국 오늘도 문을 열지 못했다. 터벅. 힘없이 등을 돌린 그녀는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2층과 마찬가지로 1층은 어두웠다. 꽃이라도 두고 가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모든 창문에 커튼을 쳐뒀기 때문이었다. 미샤가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왔다, 갔구나…….” 1층 식탁에는 아이나르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써둔, 식료품함을 채워놨으니 확인하라는 쪽지가 남아 있었다. 덜컥. 미샤는 식료품함을 확인했다. 호밀빵과 요리를 할 때 자주 쓰던 야채. 그리고 고기와 과일들. 대부분 이전의 그녀가 잘 먹었던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읍.”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냄새를 맡는 것조차 할 수 없다. 호밀빵은 비요른이 좋아하던 것이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야채는 비요른이 편식만 하니까 항상 넉넉하게 사둔 것이고, 매일 남아서 자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샤는 도망이라도 치듯 식료품함을 도로 닫았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니까. 얀델이라면 그걸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비요른…….” 불 꺼진 어두운 부엌. 쓰러지듯 의자에 앉은 그녀는 한참을 흐느끼다가 다시 일어나 식료품함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오, 있었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등 뒤에서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도둑?’ 미샤는 도마에 올려져 있던 칼을 쥐며 뒤로 돌았다. 폐인 꼴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워워, 위험하게.” 괴한은 너무나도 손 쉽게 칼을 든 팔목을 잡으며 그녀를 제압했다. 힘을 줬지만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칼부터 휘두르기 있기 없기?” “오랜만……?” 미샤는 무의식중에 시선을 위로 올려 괴한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익숙했다. 종족은 인간.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곱게 자란 듯이 흉터 한 점 보이지 않는다. 고귀함의 상징인 백금발은 잘 정돈되어 뒤로 넘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묘족, 너 플레이어냐?] [으응? 프, 프레이아?] [악령이냐고.] [아, 아, 아닌데요……?] 특유의 가벼우면서도 오싹한 말투. 덕분에 금방 이 사내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너, 는 그때 그……!” “기억이 났나 보네? 이백호라고 해. 이건 놓아 줄 테니까 얌전히 있고.” “…….” 이백호라는 이상한 이름을 말한 사내가 약속대로 팔을 풀어 주었다. 미샤는 쓰라린 손목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백금발의 사내는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 등줄기부터 쫙 소름이 퍼져 나갔다. 길게 휘어진 입꼬리와 달리. “그냥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이니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313화 유산 (2) 천적을 마주한 듯 얼어붙은 몸.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듯 뛴다. 매일같이 죽고 싶다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삶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심리를 읽었는지, 이백호의 미소가 더욱더 진해졌다. “너, 비요른 얀델이 플레이어라는 건 알지?” “모른당.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 미샤는 말을 들은 즉시 부정했으나, 이백호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오, 역시 알고 있었구나?” 단순히 떠보는 거 같지는 않은 목소리. “…….” 미샤는 말의 저의를 읽어 내기라도 하듯, 이백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흠칫.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공허한 눈빛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모든 속내가 간파되고 꿰뚫리는 듯한 감각.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르르 떠는 미샤를 보며 그의 입이 열렸다. “비요른 얀델, 걔는 어쩌다 죽은 거야?” 무덤덤하게 사실 확인만을 원하는 목소리. 다만 미샤는 알 수 없는 분노를 감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설마 둘이 친한 사이였던 걸까?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된다. 그럼 왜 분노를 자신에게 토해낸단 말인—. “도시에는 너희가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다가 죽었다고 알려졌던데…….” 그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혹시 너희가 죽인 건 아니고?”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내리누르는 위압감. 그와 동시에 이백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던 분노의 감정 역시 선명해졌다. “그도 그럴 게, 걔가 악령인 것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냥 뒤통수 치고 재산을 꿀꺽한 거 아니야? 유산도 너희 이름으로 지정해 놨다면서? 죽일 이유는 아주 충분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너희는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데.” 냉소적이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듯한 억양. 그 말에 미샤는 저 남자가 비슷한 경험을 했단 걸 눈치챘다. 그래서일까? 날붙이가 심장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단지 저 사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혹시 비요른도 자신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기 정체가 드러나면 우리에게 혐오의 시선을 받을까 남몰래 가슴 졸이고 아파했을까? 그래서 한구석에선 선을 긋고 있었을까? 그리고……. 홀로 남은 마지막 순간에,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폐가 조여왔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유서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건 그래서겠지. 우리 앞에선 늘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사무친 외로움이 함께했으리라. 하지만……. “대답해. 너희가 그런 거야?”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를 소중히 여겨줬다. 그렇기에, 미샤는 곧은 눈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냥…….” 암만 이 남자에게 말을 한들, 그 목소리가 그에게 전해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답했다.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니……. 비요른을……. 그런 게 어, 떻게 가능하겠어…….” 적어도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후회가 됐다. 이걸 더 빨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럼 비요른도 우리를 보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 미샤는 눈을 감았다. 이 정체 모를 사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대해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견뎌냈다. 그러던 때였다. “……좋은 동료를 뒀네.” 이백호가 말했다. “나랑은 다르게.” 폭군과도 같던 지난 모습과 달리 어딘가 서글픈 목소리였다. 미샤는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샌가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조여오던 압박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미샤 칼스타인이라 그랬지?” “그, 그런데……?” 너무도 간극적인 태도 변화에 미샤가 당황하며 답하자, 이백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요른 얀델을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리 말하는 그의 눈가는 길게 휘어져 있었다. * * * 펠릭 바커의 클랜에 입단한 지 2주가 흘렀다. 그리고……. 화르륵. 지금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장소는 2층의 바위 사막. 뒤로는 네 명의 남녀가 바삐 움직이며 야영을 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아, 참고로 내가 지시한 일이다. 귀찮다고 평소처럼 몰이꾼 한 명한테 모든 업무를 맡기면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아우, 이런 걸 왜 우리가…….” “조용히 해라, 저쪽에 들릴라.” 이미 들렸어 인마. 나는 피식 웃으며 야영 준비를 하는 네 명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물근육 덩치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펠릭 바커의 클랜에 입단하며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피의 승급전……. 아니, 이곳에서는 쟁탈전이라 불리는 승부를 펼쳤던 놈이었다. 지상 기준으로 탐험가 등급은 6. 노스킬전에서 내게 3초 만에 머리가 반쯤 터진 뒤, 포션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건진 전력이 있다. 근데, 그러니까 얘 이름이……. “덤보.” “……덤보가 아니라 더르본이오.” 아, 그랬지. 실수한 건 맞긴 한데 정색까지 하니까 좀 짜증이 난다. 어차피 더르본도 가명일 게 뻔하구만.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아주 정신 못 차리지?” 냅다 자리에서 일어나 덤보에게 향했다. 그러자 이전에 처맞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놈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거, 앞에만 서도 이럴 거면서 왜 패기를 부리지? “덤보.”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읊조렸다. 바커 클랜의 제3 팀장이란 직함의 무게를 담아. “팀장이 우습게 보이나?” 손에 힘을 꽉 주며 말을 이었다. “네 이름은 이제 덤보다. 그쪽이 발음하기 쉬우니까. 알겠나?” “…….” “대답.” “…그러쇼.” 쯧, 진작 그럴 것이지. 개명 신청에 응해 준 덤보의 어깨를 두들겨 격려한 뒤, 야영 준비를 마저 하도록 보냈다. 그리고 모닥불 앞으로 돌아와 육포를 까먹었다. 질겅질겅. 입단 첫날에 쟁탈전만 세 번 치른 나는 클랜장의 인가하에 그날부로 3개뿐인 팀의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노아르크는 상남자 진영답게, 팀장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그곳이 미궁 안에서라면 더더욱. ‘후, 이게 권력의 맛인가?’ 다들 일하는 동안 띵가띵가 놀고 있자니, 비실이 한 명이 와서 야영 준비가 끝났음을 말했다. “주무시지요. 불침번은 저희가 서겠습니다…….” 비실이의 이름은……. ‘뭐였지?’ 아무튼, 우리 팀의 탐색꾼이다. 인도자인 건 아니고 길찾기 실력은 로트밀러보다 살짝 아래. 다만 약탈자 짓을 오래 해서인지 약탈하기 좋은 포인트들을 꿰고 있다. “안 졸려서 좀만 이따가. 초번은 저 꼬맹이였지? 졸리면 얘를 냅두고 잘 테니 너희는 먼저 자라.” “아, 예…….” 내가 취침 허가를 내리자 비실이가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한 뒤 침낭에 들어갔다. 그리고…….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다.” 내 맞은편 의자에 붉은 머리의 여자가 앉았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앳된 외모를 지닌 우리 팀의 몰이꾼. 아멜리아의 언니다. “이름이 뭐였지?” “라우라 레인웨일즈입니다.” 라우라는 새롭게 부임한 팀장인 나를 경계하듯 업무적으로 대답했다. 근데 그게 또 기분이 묘했다. ‘닮긴 했는데 어떻게 분위기가 이렇게 다르지?’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비슷하다. 한데, 언니 쪽이 훨씬 더 순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준다. 열두 살에 동생을 구하려 잘나가던 탐험가의 목을 따버렸다는 과거를 알고 있고, 심지어 이렇게 딱딱한 말투를 쓰고 있을진데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그냥 너도 고생 많았겠다 싶어서.” “아…….” 내 말에 라우라가 입을 살짝 벌렸다. 누구보다 상남자스럽게 부하 팀원들을 갈구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 “동생도 몰이꾼이라지?” “예, 마르티스 팀장님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중입니다.” “걱정되지는 않나?” “…….” 내 물음에 라우라는 입을 꾹 다물고서 나를 힐끗 바라봤다. 이런 질문을 하는 내 저의가 뭔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러나 새 팀장의 질문을 무시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을까?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마르티스 팀장님께서 제 동생을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습니다.” 라우라가 가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후, 이러니까 내가 무슨 쁘락치라도 된 거 같네.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라. 자매라며?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할 텐데?’ 내가 집요하게 묻자 라우라도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걱정은 되지만, 마르티스 팀장님께서 제 동생을 악의적으로 괴롭히거나, 사지로 보내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 정도의 가치가 제게 있으니까요.” “흐음?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명색이 내가 이 팀의 팀장인데 사정은 알아야지.” 라우라는 이걸 말해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몰이꾼이긴 하지만, 이미 다년간의 탐사 끝에 한 사람분은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이건 아는 사실이다. 저등급 정수이긴 하지만 정수도 네 개인가 먹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라우라는 아직도 몰이꾼이다. 몰이꾼치고는 팀 내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1인분을 해도 전리품 정산 때 제 몫을 주장할 수 없는 클랜 내 노예나 다름없는 포지션. “네 몫을 포기하는 대신 동생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군.” “어차피 제가 돈을 번다고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아버지가 동생을 몰이꾼으로 팔아넘기려 할 때, 이곳에 데려온 것도 저였습니다.” “이유는?” “적어도 이 클랜에선… 그 일들을 겪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상냥하군.” 그 말에 라우라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후로는 적막한 시간이 이어졌다. 딱히 어색한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불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고, 적당히 몸이 노곤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자러 가보겠다.” “예.” “이제 한 시간쯤 불침번을 선 거 같은데, 한 시간만 더 있다가 다음으로 교대해라.” “예? 하지만 제 교대 시간은…….” “혼자 두 배씩 더 하면 피곤해서 내일 어떻게 싸우나? 아까 한 사람분은 할 수 있다면서.” “…….” “그러니까 한 시간 있다가 다음 순번한테 넘기고 너도 자라. 만약 따지면 내가 시켰다고 말하고.” 그리 말하며 나는 곧장 침낭에 누웠다. 라우라가 곤란하다는 듯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드르렁거리는 내 코골이 소리에 한숨 소리를 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라우라 레인웨일즈라…….’ 잠에 들기까지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을까. * * * 2층 바위사막에서 1일차 야영을 끝낸 우리는 다음 날 아침부터 서둘러 여정을 재개했다. 2일차에는 3층 순례자의 길에 도착할 수 있었고, 바위 사막 루트인 황혼의 비탈길을 지나 클랜 집합 장소로 계속 이동했다. 가시갈대 밭. 3층의 중심부인 마녀의 숲으로부터 서쪽의 일부 필드를 아울러 말하는 사냥터. 4일차가 되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우리를 제외한 모든 팀이 도착해 있었다. “…….” 아멜리아와 짧게 눈인사만 나눈 뒤 나는 클랜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면서 별일은 없었나?” “없었다. 다들 실력이 좋더군.” “하하, 싸우는 건 자네에 비해 부족할지 몰라도 한 사람분은 톡톡히 하는 친구들이지.” 이 새끼는 빈말을 구분 못하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았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바로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이번이 초행인 친구도 있으니 한 번 더 얘기를 하겠네.” 클랜장 펠릭 바커는 물흐르듯 자연스레 앞으로의 계획을 브리핑했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이 갈대 숲을 베이스로 두고서 팀별로 흩어져 약탈을 벌이잔 거니까. “미리 말하네마는, 조금이라도 힘들 거 같은 상대를 만나면 탐색꾼을 통해 다른 팀에게 연락을 취하게. 만사 제쳐두고 금방 달려가서 도울 테니.” 순식간에 브리핑을 끝마친 클랜장은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는지 물었고, 나는 냅다 손을 들었다. “근데 이건 너무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 아닌가?” “……효율?” 클랜장은 별 신기한 걸 다 본다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바바리안인 내가 효율을 입에 담는 게 이질적이었던 듯한데……. 조금 억울하다. 바바리안만큼 효율을 중시하는 종족이 어디에 있다고?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게.” 클랜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당차게 입을 열었다. “일단 몰이꾼을 쓰는 것부터 문제다. 왜 그런 짓을 하나?” “전에도 말했지만, 내부에 조력자를 심어두는 것만으로도 기습하는 입장에서는 큰 강점일세. 전투 소모품도 줄일 수 있고.” “뭐라는 거냐? 나는 그딴 걸 얘기한 게 아니다.” “으응?” 그럼 뭔 뜻인데? 클랜장이 그런 의미를 담아 나를 꼬나봤다. 따라서 나도 조곤조곤 우매한 인간을 가르치듯 말했다. “그렇게 하면 몰이꾼을 들여보내 주는 ‘선량한’ 탐험가밖에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선량한’ 탐험가들은 대부분 가난하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우리처럼 약탈을 하는 놈들을 사냥하는 거다. 그럼 놈들이 약탈한 장비들까지 전부 차지할 수 있다!” 내가 진지하게 계획을 설명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왜 웃지?” “아,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네. 10년도 넘게 노아르크에서 지냈지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생각이라서 말일세.” “그래서 대답은?” “얼핏 들으면 논리는 있지만, 자네 의견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네. 우리가 신의 집행관도 아니고, 약탈자를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후후,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들어봐라. 내게 방법이 있으니.” 314화 유산 (3) 6등급 탐험가 드로프 아이톰즈.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탐험가였다. 대형 클랜에 소속된 것도 아니며, 현재 몸담은 팀도 탐험가 길드의 중개를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뭐, 얼마 전에 전대 팀장이 죽는 바람에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봤자 평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팀의 활동 구역은 4층. 팀원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하며, 성향이나 사고방식도 남들과 다를 것 없다. 보통은 열심히 사냥을 해 마석을 모으지만, 여느 탐험가들처럼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드로프 아이톰즈와 그의 팀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오우, 너희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군!!” 이 바바리안을 만난 것은 철저하게 우연이었다. 마녀의 숲으로 가기 위해 가시갈대 밭을 지나치고 있던 중에 도와달라 외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휴식 중에 몰래 술을 마시려고 팀에서 떨어졌다가 길을 잃었다던가? ‘뭐, 이런 무식한 새끼가…….’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바바리안 아닌가! 이런 상식 밖의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들 종족은 거짓말은 잘 하지도 않고, 가끔 할 때조차 티가 잔뜩 난다. ‘그렇다면 정말 길을 잃었다는 뜻인데…….’ “드로프, 어떻게 할 거냐?” “그냥 보낼 건 아니지? 저기 저놈이 끼고 있는 반지, 아공간인 거 같은데.” “무기도 두고 왔다고 하더라. 할 거면 얼른 하자. 혹시 동료들이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 모두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그도 그럴 게, 아공간은 살 때나 되팔 때나 가격이 비슷하다. 수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형이 맞아야 낄 수 있는 장비와는 경우가 다르기 때문. 기본으로 수백만 스톤은 호가한다. ‘갑옷도 좋아 보이고 말이지…….’ “다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나! 동료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면서?!” “잭슨, 너는 얼른 가서 저 바바리안 놈이 정신 못 차리게 하고 있어라.” “쉬운 일이지. 어이, 바바리안! 배는 안 고프나? 육포 좀 먹어라!” “오! 육포!! 근데…… 술은 없나?!” “하하, 여기 있네. 심심하면 같이 마시지.” 드로프는 팀원 한 명을 바바리안에게 붙여준 뒤 남은 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해왔다. 순식간에 이뤄진 만장일치. “으, 하루 종일 뛰었더니 졸리다……. 너희끼리 뭐 상의할 게 있다 했지? 그동안 잠시 자도 되냐?” “하하, 마음대로 하게.” 때마침 바바리안이 졸리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웠고, 머지않아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르르렁! 드르렁! 그 모습에 드로프는 한 줄기의 가책마저 버렸다. 이건 저놈이 잘못한 거다. 아주 그냥 전부 털어가달라고 발악을 하는데, 그 누가 이런 상황에서 참아? 드로프는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동료들과 함께 바바리안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 일시에 사방에서 무기를 찔렀다. 한데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카칵-! 검 끝이 가로막혔다. 손잡이에서는 벽을 찌른 듯한 반동이 느껴졌으며, 소리 또한 달랐다. 살과 가죽이 찢길 때와 다르게 돌벽을 긁는 듯한 마찰음이 났다. “…뭐, 뭐야.” 이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하던 때였다. 바바리안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로 몸을 확 일으켜 세우더니, 주먹을 뻗으며 외쳤다. “문제 발새애애애애애앵!!!!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허… 이게 정말 통할 줄이야.” 첫 번째 약탈자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펠릭 바커는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그도 긴가민가하며 뒤따랐지만, 막상 결과를 보니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 “단장님, 가방에서 나온 약탈품은 없지만, 이놈들 장비가 수준에 비해서 상당한데요?” “그렇겠지. 하는 짓을 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닌 거 같던데.” 이 세상의 불합리한 점이다. 백날 몬스터를 사냥하며 성실하게 성장하는 것보다, 같은 탐험가를 뒤통수치는 놈들이 훨씬 더 빠르게 앞서간다. 뭐, 잘못하면 너무 앞서가서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는 일도 있겠지만. “자, 어떠냐? 내가 말한 방법이.” 내가 당당하게 어깨를 피며 말하자, 펠릭 바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거 같네. 아니, 솔직히 말하지. 이건 혁신적이야.” 그리 운을 뗀 펠릭 바커는 정말로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한참 동안 극찬을 해왔다. “일단 자네 같은 전력을 몰이꾼으로 잠입시킬 수 있다는 것부터가 아주 말이 안 되네. 내부에서 기습을 하고 외부에서 덮쳐들면 그 누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나!” 실제로 방금 전투에서도 다들 나를 보며 등을 돌린 상태였던지라, 갈대 숲에 숨은 클랜원들이 기습을 하자마자 픽픽 쓰러졌다. 전투에 걸린 시간이 10초쯤 되려나? “그나저나 바바리안족은 정말 대단하군! 어린애를 몰이꾼으로 보내도 조금은 의심하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지 않았나!” ……근데 이것도 칭찬으로 볼 수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의문도 들었으나, 그냥 집어 던졌다. 내가 진짜 바바리안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그냥 극찬으로 분류해도 될 듯했다. ‘아무튼, 이쯤 됐으면 이 방법이 얼마나 좋은지는 설명이 됐을 테고…….’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그야 이 방법을 얘네한테 공유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으니까. “마음에 든다니 잘 됐군! 그럼 너희도 이제 다 내 방법을 쓰는 건가?” 아무리 이놈들과 한동안 어울려야 한다고 한들, 정말로 무고하고 선량한 탐험가를 약탈하고 싶지는 않다. 마냥 방관만 하는 것도 조금 그렇고. 그래서 이놈들이 약탈자를 사냥하도록 유도했다. “그럴 수 있으면 나도 좋겠네마는…….” 내 질문에 펠릭 바커는 입맛을 다셨다. “애석하게도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네.” “뭐지?” “바바리안이 자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일세. 좋은 방법이긴 하나 이걸 위해 모두 같이 몰려다니는 건 아무래도 효율이—” 아, 그거? “걱정 마라. 그것도 내가 다 생각해뒀으니까. 야, 거기 너랑 너.” 나는 씨익 웃으며 1팀과 2팀에서 눈여겨 본 사내들을 지정해 내 앞으로 불러내서 탈의를 시켰다. “저, 옷은 왜…….” 왜긴 왜야 그냥 근육 상태 좀 보려고 그랬지. ‘오케이, 물살이 좀 많이 끼긴 했지만 덩치는 이만하면 된 거 같고.’ 스윽.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탈의한 두 사내가 상체를 팔로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허, 내가 뭐 나쁜짓 한대? “저기, 뭘 하시려는 건지 말씀을 해주시면…….” “내가 너희를 전사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 말하며 나는 준비해 온 물건을 꺼냈다. 이에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을까? 두 사내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그건……!” “설마!!” 붓과 염료였다. ***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말했다. [나는 이상하지 않다. 나는 단지 평범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인상 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말했다. [내 삶에 확신은 없다. 그러나 별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아, 파블로 피카소가 했던 말도 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느냐이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유명한 말을 남길 수 있는 날이 올까.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나는 말한다. “……가만히 있어라! 뒈지기 싫으면!” 아오, 뭐가 그리 간지럽다고 자꾸 몸을 꿈틀거리는지. 자꾸 선이 휘잖아. 스윽, 스윽. 외부의 방해가 있을수록 나는 더욱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검은색. 너무도 흔해 빠진 네 개의 색을 바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배들의 격언을 가슴속에 새기며 붓질에 매진한다. 범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이란 분야답게. 도화지가 아니라 사람의 피부를 대상으로. 스윽, 스윽. 내 주변을 둘러싼 범인들은 지치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무슨 낙서 같군.” “저렇게 삐뚤삐뚤해서야…….” 쯧, 야만스럽긴. 현대미술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크흠!” 내가 불쾌하다는 듯 기침을 뱉자, 주변인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후, 한결 낫네. 진작 이럴걸. “…….”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마저 작업을 이어 나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하다 보니까 점점 지루해지더란 말이지. “자, 끝났다! 이제 일어나도 좋다!” 대충 작업을 마무리 짓고 두 사내놈의 등을 두들기자, 녀석들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 창작자 의욕이 안 생기게. “왜 팔로 문신을 가리고 있는 거지?” 나는 수치스럽다는 듯 팔로 상체를 감싼 두 사내놈의 팔을 치웠다. 그러나 내 작품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내가 하고 있는 문신에 비해 조악한 퀄리티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티가 안 나는군.” 미친 새끼 바라보듯 하던 클랜장도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두운 미궁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생각보다 티가 안 났던 것. 다만, 창작자 입장인 나로서는 부족한 점이 보이지 않을래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땅을 보는 거지? 설마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가?” 저 숫기 없는 표정과 행동들을 보아라. 저래서야 그 누구도 이들을 바바리안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리 와라, 내가 너희를 진짜 전사로 만들어 주겠다.” 나는 클랜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녀석을 데리고 가 교정을 시작했다.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한 30분 정도 걸렸나? “베, 베헬라아!” “더 크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좋군. 그럼 달릴 땐 뭐라고 했지?” “길을 잃었다아아아아아!! 도와달라!!!” “코골이!” “드르르렁! 드르르컹컹!!” “앉아!” 철푸덕. 그래, 이제 좀 바바리안답네. *** 초승달이 높이 떠오른 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한 자택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이 열린 것은 1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연 요정족 사내는 에르웬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흠칫 굳었다. 비장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이 말해준 것이다. 이 시간에 그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결정을 내린 것이구나.” “네.”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단답에 사내는 씁쓸하다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이 아이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족의 순혈의 힘을 얻는 과정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며, 원한다고 무조건 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알아요.” “부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재고를 해 보는 게 어떠느냐?” 사내는 도무지 지켜볼 수가 없어 말하였다 앞으로 이 아이가 걸어갈 길이 훤히 보인 탓이다. 그러나 에르웬의 결의는 변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이미 결정을 마쳤어요.” “…….” “도와주세요. 제가 순혈자가 될 수 있도록.” 에르웬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늘 밝은 빛을 띠던 그녀의 호박색 눈에는 힘을 향한 갈망만이 가득했다. 사내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이런 눈을 가진 자들의 말로를 너무도 많이 봤던 탓이다. 그러나……. “알겠다. 내가 너를 도우마.” 사내는 에르웬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일족의 영웅이라 불리고, 어떠한 권력을 얻었다 한들, 그는 이들 자매 앞에서는 죄인이었다. “감사해요. 그럼 가볼게요.” 이내 에르웬이 등을 돌렸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만약에 말이다……. 그래, 만약에…….” 그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런 물음을 던지려던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다,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구나. 밤이 늦었으니, 가보거라. 장로회에는 내가 말을 전해두겠다.” “네.” 잠시 멈춰서 고개를 갸웃하던 에르웬은 이내 다시 등을 돌려 떠나갔고, 이번엔 사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생의 돌’에 대해 알고 있는 그가 이번 집회에 불참했을뿐더러……. “…….” 그 돌로 살려야 하는 자는 정해져 있다. 315화 유산 (4) “자자, 다들 한잔 드세! 내가 사는 거니 뺄 생각은 말고! 흐하하핫!” 시간이 흘러 미궁이 폐쇄된 뒤, 나와 아멜리아는 뒤풀이에 참가했다. 장소는 레인웨일즈 자매의 양부가 운영하는 예의 그 주점이었다. “하핫! 철가면! 그때 그놈이 내장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했던 말 기억나쇼? 사, 살려줘어어!! 어… 안 웃기시오……?” “하나도 안 웃긴데.” “그, 그렇구려……?” 신이 나서 친한 척하는 덤보에게 정색을 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펠릭 바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 철가면!” “바커.” “하핫, 편하게 펠이라 부르래도?” “됐다, 이게 편하다.” “한잔하겠나?” “좋지.” 이내 그의 옆에 앉아 술을 마시자 녀석이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부분의 내용은 내 공치사였다. 패션 바바리안 전략은 예상대로 잘 통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고 해야 하나? 얘기를 들어보니 내게 교육을 받고 각 팀으로 분양된 ‘전사’들은 나보다 높은 타율을 보였다고 한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야 철가면이란 별명답게 늘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얼굴까지 깐 쪽이 덜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던 것. “이건 혁신일세! 어찌 된 게 어린애를 몰이꾼으로 썼을 때보다 훨씬 더 쉽게 믿더군!” “그럼 앞으로 몰이꾼은 없어도 되겠군?” “음, 글쎄. 아직 시기상조일 듯하네. 이 방법이 언제까지 통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혹시나 해서 은근슬쩍 던져봤으나, 클랜장은 이들 자매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꼴에 보는 눈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한 놈은 몰라도 레인웨일즈 자매는 재능이 상당하네. 몇 년만 더 굴리면 좋은 전력이 될 테지.” 그래, 곱게 풀어줄 생각은 없다 이거지. ‘에휴, 이걸 이 자리에서 처죽일 수도 없고.’ 나는 조용히 입맛만 다셨다. 사실 펠릭 바커야말로 우리 계획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음, 정확히는 놈이 가진 정수 하나가 문제였다. 4등급 희귀종 씨머챈트. 6층 대해에서 항해 중일 때 극히 낮은 확률로 만나 볼 수 있는 희귀종 ‘중립’ 몬스터다. 어지간하면 선공을 하지 않으며, 만났을 때 놈이 헤엄치는 바다에 마석을 일정량 쏟아부으면 블루스톤이라는 최상급 장비 소재를 대가랍시고 던져준다. 물론 몬스터기에 사냥도 가능하며, 극악의 확률을 뚫고 정수를 드롭 시 [불건전계약]이라는 특이한 액티브 스킬을 얻을 수 있는데……. ‘현재 계약에 묶인 건 언니 쪽만이랬지.’ 바로 이 [불건전계약]이 문제다. 놈이 악랄한 계약을 걸어둔 바람에, 라우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 계약을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 ‘하, 어쩌다 이 귀한 정수가 이런 놈한테 가게 되어가지고…….’ 왠지 짜증이 나서 펠릭 바커에게 물었다. “근데 씨머챈트의 정수는 어떻게 얻은 건가? 굉장히 귀한 정수인 거로 알고 있는데.” “아, 그거?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묻나?” “원래 궁금했었다. 예전에는 친하지 않아서 묻지 못했을 뿐.” “하하핫! 그럼 이제는 좀 친해졌다는 건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회피하자, 알아서 좋을 대로 이해한 녀석이 껄껄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직 지상에서 클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네. 그땐 나도 참 어렸는데…….” 불필요한 정보를 제하고 정리하면 녀석의 사연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클랜 활동 중에 씨머챈트가 정수를 드롭했는데, 놈이 돈에 눈이 멀어 그 정수가 담긴 시험관을 훔쳤다. “시간이 흐르고 잠잠해지면 경매장에 올려 일확천금을 노릴 셈이었네. 잘만 하면 평생 돈 걱정은 없이 살겠다 싶었지!” 다만 희망 회로를 돌리던 펠릭 바커의 범행은 얼마 못 가 들통이 났다. 따라서 녀석은 노아르크로 도주. 그 과정에서 시험관에 담긴 정수도 팔지 못하고 직접 흡수했다고 하는데……. “비욘.”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아멜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 에밀리…….” “슬슬 돌아갈까 하는데.” “그래? 먼저 일어나겠다.”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양해를 구하자, 펠릭 바커가 음흉한 미소를 내지었다. “크크, 좋은 시간 보내게나!” 그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하루 빨리 이놈의 대가리를 부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 툭. 아루아 레이븐은 밤새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연구실 한쪽 구석에 모아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요른 얀델의 소지품들이었다. “이제… 이것도 처리를 해야겠지…….” 레이븐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간이란 참으로 야속했다. 처음에는 뭔가 거대한 비밀이 있을 거라 여기며 이런저런 서적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전무했고, 날이 흐를수록 레이븐은 점점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게 그녀의 본질일지도 몰랐다. 감정은 한때. 아무리 분노하고 슬퍼한들, 결국 시간이 지난 후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비요른 얀델은 죽었다. 그러니 이제 이 물품들도 팔아서 돈으로 바꾼 뒤, 그의 유언장에 적힌 내용에 따라 나머지가 나눠서 가져야 한다. 밤늦게까지 책이나 뒤져보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할수록 레이븐은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책을 읽던 것도 그래서였다. 비요른 얀델의 죽음으로 미샤와 에르웬의 세상은 변하였다. 그 둘은 앞으로도 절대 이전과 같은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하아…….” 얼마 전부터 매 끼니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이러다 몸이 망가질까 걱정돼서. 비밀을 찾기 위해 책을 뒤지는 일도 이전처럼 필사적이지 않다. 그래 봤자 변하는 게 없단 생각이 들어서. 어디 그뿐인가? 홍차도 마시고, 학파의 선배들이 말을 걸 때면 억지로나마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레이븐은 알았다. 이런 시간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결국에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뜨거워질 수는 있지만 오래 타오를 수는 없는 성냥과도 같았다. ‘나라고… 그 사람을 안 좋아했던 건 아닌데…….’ 그녀 역시 비요른을 좋아했다. 이성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호감을 느꼈다. 배우는 것도 많았고, 함께 있으면 즐겁기도 했다. 감정적으로 이렇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여자’ 다음으로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 그녀는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죄책감을 느꼈다. “……일단 정리는 해두자. 파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레이븐은 스스로에게 되뇌듯 혼잣말을 뱉은 뒤, 본격적으로 비요른 얀델의 소지품을 정리했다. 우선 장비들을 감정한 뒤 시세에 맞는 금액을 써서 붙여놨고, 그다음에는 아공간에 들어 있던 물품들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어? 이건 분명…….” 황금 가면. 1층 균열인 ‘핏빛 성채’에서 획득이 가능하지만, 풍화로 인해 그녀가 가진 균열총해록에선 정확한 입수 방법이 지워져 있던 바로 그 아이템. “이걸 어떻게 얀델 씨가……?” 한때 그녀는 얀델이 ‘여신의 눈물’을 사용해 뱀파이어를 처치한 걸 보고서 균열총해록을 갖고 있을 거라 의심했다. 그러나 전사의 맹세를 하며 정말 우연이었다는 말을 듣고 의심을 접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뭘까. “……설마 거짓말이었던 건가?” 어쩌면 그는 균열총해록을 갖고 있거나 읽은 적이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려던 차였다. 한때 스승님이 그를 악령이라고 의심했던 게 떠올랐다. ‘에이, 무슨 또 쓸데없는 생각을…….’ 레이븐은 피식 웃으며 배낭 정리를 이어갔다. 그러던 때였다. “뭐지, 이건?” 레이븐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마도구를 발견했다. 술식을 보아하니 ‘전음’과 ‘녹음’이 함께 되는 마도구인 거 같은데……. 딸깍. 레이븐은 하단부에 자리한 홈을 눌렀다. 그러자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뭘 그리 고민해? 어차피 NPC들이잖아.]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한 동료—] [웃기고 있네. 걔들이 네 정체를 알아도 그런 생각을 할 거 같나?] 비요른 얀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러면 대화를 나누는 이 둘은 누구일까? 그 해답은 금방 나왔다. [네 동료들이 친구라 생각한 건 진짜 한스다. 그리고 알다시피 진짜 한스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 [하지만······. 저는 그들이 진짜 제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도플갱어 숲에서 만났던 한스 크리센과 노아르크 출신 드워프의 대화였다. 그때 약점이니 뭐니 했던 게 이거였구나. 설마 이걸 아직도 갖고 있을 줄이야. 아무튼, 나중에 팔려면 초기화를 해둬야겠지? 솨아아아. 레이븐은 마도구에 마력을 흘려보내, 회로 구조를 파악했다. 마공학을 전문적으로 익힌 그녀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누르고 한 번 길게 누르면 되는 방식이구나.’ 원하던 초기화 방법은 알아냈지만, 그녀는 마력을 회수하지 않고 계속해서 회로 구조를 익혔다. 구조가 특이해서 조금만 더 살펴보려던 것. 그렇게 더 들어가 잔류 마력까지 읽어내던 차였다. ‘녹음 된 걸 재생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네? 코어를 싸구려를 썼나?’ 레이븐의 손이 움찔했다. “어?” 해당 마도구는 한 번 녹음한 것을 최대 100회까지 재생할 수 있었고, 한도가 넘으면 자동으로 초기화가 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이 남았다고?’ 기록된 재생 횟수가 조금 많이 이상했다. 단순 오류라기에는 어딘가 찜찜했던 그녀는 좀 더 마력을 흘려 넣어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재생 기록을 확인했다. “뭐야…….” 재생 기록 중 2회를 제한 나머지는 도플갱어 숲을 나온 다음이었다. 쉽게 말해, 나머지 96회를 재생한 것은 비요른 얀델이었다는 뜻. “얀델 씨는 대체 왜 이런 대화를 그렇게나 많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이븐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레이븐은 일단 하던 걸 중단하고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앞에 서 있었다. “미샤 씨……?” “응… 들어가도 되겠냥……?” “아, 네!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잠깐만, 주변을 좀 치워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당.” “네… 근데 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갑작스러운 방문에 허둥대던 레이븐이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당…….” 어딘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또 술이냐?” “아, 딱히 할 게 없다 보니…….” 숙소로 돌아온 아멜리아가 외투를 옷걸이에 걸며 나를 힐끗했다. 거, 눈치 주기는. 혼자 여기 있으면 얼마나 심심한데. “정산금은 잘 받아왔고?” 내 물음에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런 것도 제대로 계산 못할까 봐?” “그건 아닌데, 혹시 모르지 않나. 놈들이 뒤에서 장난을 쳤을 수도 있고…….” “걱정 마라. 우리 몫은 확실하게 챙겼으니까. 뭐, 이게 의미야 있겠냐마는.” “그건 그렇지…….” 우리의 목적은 돈이 아니다. 아예 무의미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라우라를 구해내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다음에나 돈은 의미가 있어진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냐? 대화를 나눠보니 그 사건이 있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고 빼내는 건 역시 힘들 거 같던데…….” “당장 변하는 건 없다. 계속 시도는 해본다. 적어도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래…….” 노아르크로 복귀한 지 어느덧 2주가량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들은 내내 대화를 나누며 상의를 했다. 어떻게 해야 라우라를 구해낼 수 있는가. 몇 날 며칠간의 대화로도 마땅한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하, 뭔가 잘하면 떠오를 것도 같은데…….’ 갑갑함이 이어질수록 15일 자정이 기다려졌다. 다시 아우릴 가비스를 만나고, 다른 회원들에게 정보를 얻다 보면 뭔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오늘이지?” “정확히는 두 시간 뒤다.” 내 대답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씻으러 들어갔고, 나온 뒤에는 심심해서 수다만 떨었다. 그러다 보니 머지않아 그 시간이 왔다. [23 : 59] 자정이 되기까지 10초가 남은 시각. 나는 눈을 감고 초침 소리에 집중했다. 째깍, 째깍, 째깍……. 머지않아 열 번째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뭐야.” 나는 곧바로 눈을 떴다. 째깍, 째깍, 째깍……. 정적 속에서 초침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벌써 다녀온 건가?”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의문을 내비쳤으나 나는 멍하니 시계만을 응시했다. 째깍, 째깍, 째깍……. 뭐야, 왜 안 가져. 316화 메모리 (1)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이 한 바퀴를 돌며 분침이 끝끝내 다음 칸으로 몸을 옮겼으나, 내가 영적세계로 불려가는 일은 끝끝내 없었다. 날짜와 시간을 다시금 확인하고, 시계가 망가진 건 아닐까 해서 하염없이 아침까지 기다렸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아멜리아와 밤새 의논을 하며 경우의 수를 줄여 나갔고, 총 세 개가 남았다. 하나씩 정리를 하자면……. 1. 이번에만 우연히 일시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이번 사태가 누군가의 수작으로 인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우연이었을 경우. 일단 확률이 0%는 아니다. 전자기기든 마법의 정수가 담긴 마도구든, 결국엔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드물긴 하지만, 아공간 반지만 해도 고장 나서 고치기 전까지 안에 들어 있는 물품을 꺼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뭐, 그래도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차라리 이쪽이 더 합당하다. 2. 아우릴 가비스가 나를 영적세계에서 추방했다. 1번보다는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었다. 늙은이의 태도만 보면 이 타이밍에 나를 추방할 이유가 전무하긴 하지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던 음흉한 늙은이 아닌가. 이것도 모종의 수작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이쯤에서 다음. 3. 아우릴 가비스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 이 또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아니, 나는 그나마 셋 중에 이게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했다. 그 괴물 같은 늙은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려면 어떤 사태가 벌어져야 할 지,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지만…….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세상 아닌가. 그 늙은이라도 위협적인 적수는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왕가라든가. ‘됐고, 잠이나 자자.’ 무엇이 정답인지 알아낼 수 있는 수단이 없기에, 그 이상 고민하는 건 무의미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음 달 15일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그렇게 날이 지나 미궁에도 한 번 더 다녀왔다. [하하핫! 이번에도 잘 됐군! 계속 이렇게만 하면 우리 모두 금방 부자가 될 걸세!] 미궁에서는 딱히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미궁 폐쇄일까지 약탈자를 약탈하며 바쁘게 지낸 것이 전부. 이는 다시 돌아온 15일 자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못 간 건가?] [……그래.] 여전히 시간이 되었음에도 내 정신은 육신에 머물러 있었다. ‘하, 진짜 찝찝하게…….’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갑갑한 마음은 나날이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 다음 달 아침. ‘거, 시간 참 빠르구만.’ 씁쓸한 미소를 애써 지워내며 손에 쥔 달력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과거에 온 지도 어언 네 달이 지났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자 아멜리아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오늘도 갈 건가?” “여기서 할 것도 없으니까. 너는?” “나는 숙소에 있겠다.” 아멜리아와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눈 뒤에 숙소를 나섰다. 요즘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짧고, 얕으며, 항상 보이지 않는 날이 서 있다. ‘하, 진짜 불편해 죽겠네.’ 처음에는 버틸 만했지만, D-Day까지 며칠 남지 않은 최근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그야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방법을 못 찾았거든. 혹시나 했던 커뮤니티는 결국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고. ‘……진짜 나를 추방이라도 한 건가?’ 한번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지하 도시에는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있으니까. 가서 물어보면 나만 강퇴를 당한 건지, 커뮤니티 서버 자체가 다운된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차피 그런다고 변하는 것도 없는데.’ 한숨을 내쉬며 지하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어느새 이곳도 꽤 익숙해졌다. 골목이나 오르큘리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동쪽 구역을 제하면 큰길은 거의 다 외웠고. “아, 대장! 오셨소!” 이내 영주성에 위치한 클랜 하우스에 도착하자 덤보가 나를 반겨주었다. 벌써 세 번이나 함께 미궁에 들어갔더니 이전처럼 날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는 짓만 보면 심복이 따로 없다. “자자, 여기 앉으시오! 술도 좀 드리까?” “가벼운 걸로.” “하핫, 잠시 기다려 보시오! 금방 가져올 테니!” 빈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리고 있자니, 덤보가 금방 술을 가져오더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주크박스처럼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도시에 도는 소문이나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을 혼자 떠드는 식이었는데, 입담이 좋아서 그런지 듣고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았— “맞다, 대장. 바바리안 심장 얘기는 들으셨소?” 갑자기 한 귀로 흘릴 수 없는 얘기가 나왔다. “심장? 뭔 얘기지? 어서 해봐라.” “아, 못 들었나 보구려? 글쎄, 이미 지상에는 소문이 쫙 퍼졌다고 하오. 바바리안의 심장이 마법 재료로 쓰임새가 있어 비싸게 팔린다고.” “……뭐?” 마탑에서 바바리안의 심장이 귀한 마법 재료라고 공표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후. 요정족과 바바리안족이 전쟁을 펼치고서도 훨씬 다음이다. 한데, 그 이야기가 벌써 나돌다니? ‘설마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뀐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덤보에게 세세히 캐물어 봤더니 사정은 이랬다. “아, 마탑에서 공표한 건 아니오. 오히려 그냥 헛소문이지.” “헛소문?” “단장이 몇 달 전에 멜터 상단에 의뢰를 했었다고 하오. 그런 식으로 지상에 소문을 내달라고.” ‘뭐? 이런 씹…….’ 길게 갈 것도 없이 거기서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야 당연하다. 클랜장 펠릭 바커가 노아르크의 유일한 상단이자 지상과의 연결책인 멜터 상단에 그런 의뢰를 할 동기는 단 하나뿐이니까. “아무래도 단장은 그런 소문이 나면 지상의 약탈자들이 우리 수법에 훨씬 더 잘 넘어올 거라 생각한 듯하오. 아, 이렇게까지 크게 소문이 날 줄은 단장도 예상치 못한 거 같지만 말이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여겼는지 덤보는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히 말해주었다. 지상에 소문이 쫙 퍼진 걸 넘어, 그 헛소문이 돌고 돌아 노아르크에까지 역수출 되고 있다던가? 거기까지 듣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니미럴.” “…예?” “조용.” “…….” 한 마디에 덤보가 빠릿하게 내 눈치를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고,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마 얼마 안 가 헛소문이라고 밝혀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시초가 되었을 수도…….’ 자꾸만 이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펠릭 바커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몇몇 마법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이로 인해 10년 뒤에 바바리안의 심장에 가치가 매겨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럼 그 미친 짓의 원인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아직은 그저 생각에 불과하다. 다만 문제는 이게 도통 비약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것. “덤보야, 그럼 난 간다.” “예? 예!” 클랜 하우스에서 친목질이나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산책이라도 하듯 영주성 내부를 돌아다니던 차. “자네가 그 철가면이로군?” 옆으로 지나치던 노인이 돌연 걸음을 멈춰 세우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냥 무시하기엔 좀 그랬다. 이 세상은 노인에게 유난히 불친절하니까. 그 나이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한 재주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 조심스레 되묻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손톱만 한 마석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세.” 입을 엶과 동시에 마석이 빛을 뿜어내며 빵으로 변했다. *** 연금술사. 마석을 빵이나 철 등으로 바꿀 수 있는 선천적 자질을 지닌 변환계 마법사. ‘……설마 복도에서 이런 사람이랑 만날 줄이야.’ 어찌 보면 연금술사는 성주나 오르큘리스의 단장보다 거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노아르크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내가 알기로 여기엔 연금술사가 두 명뿐이니까. 성주야 누가 물려받든 당장 망하진 않지만, 연금술사 자리가 공백이 되면 이 도시는 망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허허, 놀란 걸 보니 연금술은 처음인가 보군?” 연금술이 처음이고 뭐고, 이해가 안 됐다. 이 도시의 근간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는 자를 이렇게 복도에서 마주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잠깐만, 암만 영주성 내여도 그렇지, 연금술사가 미쳤다고 혼자 돌아다닐 리가 없는데…….’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주변을 유심히 살피니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걸 보니 다들 은신 계통 정수를 먹은 듯한데……. “생각보다 예민한 친구로군? 너무 걱정은 말게. 노부의 호위일 뿐이니.” 예민하고 뭐고, 애초에 저쪽에서 숨길 생각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튼 짓일랑 할 생각도 말라는 일종의 경고. “아, 그나저나 내 이름도 아직 말해주지 않았군. 노부는 마르파 이파엘로라고 하네. 편한 쪽으로 불러도 상관없네만, 굳이 따지면 성으로 부르는 쪽이 좋다네.” “…철가면이다.” “알고 있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겠나?” “좋다.” 나는 딱히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성질 더럽다고 유명한 다른 연금술사라면 모를까. 이 노인의 이름은 아멜리아에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레테의 축복을 만든 장본인.’ 그것만으로도 대화를 나눠 볼 가치는 충분하다. “흐음, 듣던 대로 아주 호탕한 친구군? 자, 가세.” ‘듣던 대로라……. 역시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날 찾아온 거였구나.’ 이내 이파엘로가 먼저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출입 제한이 걸려 있던 3층을 넘어가는데도 옆에 그가 있어서 그런지 나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연금술사의 공방. “이제부터는 괜찮으니 다들 나가 있게.” ‘마법사 연구실이랑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좀 다르네.’ 일단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싹 스캔하고 있자니, 그가 숨어 있던 호위들을 싹 내쫓고는 자리를 권했다. “앉게. 혹시 뭔가 마시고 싶으면 말하고.” “괜찮다.” 평소였다면 고기를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을 타이밍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냥 스킵했다. 무례하게 군 걸 들키면 아멜리아에게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으니까. 이 노인은 어린 시절의 아멜리아를 보살펴 준 은인이었다. 따라서 직위와 관계없이 막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뭐, 그래도 바바리안의 체면이 있기에 경칭은 쓸 수 없었지만.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뭐냐?” “그냥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네. 그 아이들이 미궁에서의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한 것은 처음이라.”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 아이들?” “라우라와 아멜리아 말일세. 예쁜 아이들이지. 가끔 적적할 때마다 불러서 간식 좀 챙겨주고 말상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네.” “……그렇군.” “내심 걱정을 했네마는, 자네를 보니 그런 걱정이 싹 가시는구만. 불쌍한 아이들이니 자네가 앞으로 좀 잘 챙겨주게.” “그러겠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그런 부탁을 할 거면 그냥 차라리 당신이 보살펴주면 되는 거 아닌가?” “후후, 당장은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말일세.” 그는 에둘러 말하며 자세한 사정은 생략했지만, 나는 그 사정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간식을 챙겨주는 정도였지만, 연금술사 한 명이 죽고 나서는 아예 팀에서 빼와서 직접 길렀댔지.’ 아마 그 전에는 빼오려는 시도가 무산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연금술사가 도시에 두 명이니까. 대체재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은 누릴 수가 없었던 것. “그 아이들은 요즘 어떤가?” “잘 지내고 있다. 되도록이면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고.” “……그렇군.” 이후 자연스레 이어진 대화의 화제는 주로 레인웨일즈 자매였다. 연금술사 이파엘로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소상히 물었고, 나는 숨김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틈을 보다가 적당한 때 입을 열었다. “근데 혹시 우리 대화가 저쪽에도 들리나?” “호위라면 괘념치 않고 말해도 되네. 들리지 않을 걸세. 궁금한 거라도 있는 겐가?” “혹시 연금술로 정수로 인한 제약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제약? 독이나 그런 걸 말하는 거면 가능…….” 내 물음에 별생각 없이 답하던 그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설마 [불건전계약]을 말하는 겐가?”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것이면 대답이 충분했을까? “……그건 연금술의 영역을 벗어났다네.” “그렇군.” “그렇지, 애석하게도.” 이파엘로가 쓴웃음을 내지었다. 아쉬운 거로 따지면 나도 못지않았으나, 구태여 티는 내지 않았다. 하긴 게임에서도 없던 게 이 시대라고 있지는 않겠지. “말고도 궁금한 건 없나?” 이파엘로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의적인 목소리로 그런 말을 던졌고, 나는 내친김에 레테의 축복이란 환약에 대해서 물었다. 한데 좀 이상한 반응이 나왔다. “레테의 축복? 그게 뭔가?” “그… 기억을 지워주는 약 말이다.” “아, 그거! 근데 그 약에는 아직 이름이 없네마는…….” 어, 이건 예상 못했는데……. “근데 레테라……. 어감이 나쁘지 않군. 망각을 축복이라는 빗댄 점도 굉장히 낭만적이고.” 그 말에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왜 하필 ‘레테’인가 싶었더라니만. “좋아, 안 그래도 이름을 고민 중이었는데, 그걸로 하면 되겠군?” 설마 여기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317화 메모리 (2) 레테의 축복. 솔직히 말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의미심장하기는 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약의 효능이 ‘망각’이란 게 단순히 우연일 리가 없었으니까. 아, 물론 그때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악령이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는 도시 아닌가. 플레이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플레이어가 바로 나였을 줄이야…….’ 좀 전에 펠릭 바커가 낸 ‘헛소문’부터 시작해 이런 일이 연달아 이어지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있던 때였다. “아니, 근데 잠깐만…….” 이파엘로가 수상하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자네는 그 약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던 건가? 여태껏 시험작을 나눠준 건 스무 명도 채 안 되는데.” 아, 그거. “이번에 펠릭 바커가 성주에게서 그 약을 받았단 얘기를 들었다.” “흐음, 그래?” 약간의 의심이 담은 눈길에도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야 딱히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실제로 펠릭 바커는 레테의 축복을 갖고 있다. 뭐, 내게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고, 연금술사가 만든 비약을 성주에게 포상으로 받았다는 정도로만 언질을 줬다마는. “하긴, 성주도 근래에 관심 있게 지켜보는 듯하더니 그럴 수도 있겠군.” 길게 변명할 것도 없이 이파엘로는 머지않아 수긍했다. 다만 이것 하나는 궁금했을까? “근데 레테의 축복이란 이름은 어디서 들은 건가?” “글쎄, 걔네가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다.” “허허,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벌써 은어를 만들었나 보군?” 이내 그의 눈에서 의심이 지워졌다. 따라서 이걸로 이 안건은 끝. 나는 은근슬쩍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그 약은 괜찮은 건가? 만든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다른 문제 같은 건 없고?” “걱정 말게. 기억을 잃은 범위가 들쭉날쭉한 걸 제하면 부작용 같은 건 없으니.” 들쭉날쭉하다라……. 아무래도 아직 동일 성능으로 양산할 정도의 연구는 되지 않은 모양. “근데 자네들이 쓸 용도를 생각하면, 부작용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그건 그런데, 혹시 먹였는데 불량이라 효과가 없거나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걸세. 효과가 너무 과하면 과했지, 첫 시험작에서도 불량이 있던 적은 없었으니.” “효과가 과하다니?” 학자답게 대화 주제가 전공 분야로 넘어가자 신이 났을까? 이파엘로는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공방 한쪽에 보관되어 있던 상자를 꺼내왔다. “자, 이게 처음 제작했던 비약일세.” 그가 연 상자에는 새하얀 단환이 들어 있었다. 보관이 가능한 자리는 열 개가 넘었지만, 그 하나를 제하면 전부 비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본 것보다 두 배는 더 큰 거 같군.” “후후, 큰 거는 크기만이 아닐세. 이거 한 알을 먹으면 거의 평생의 기억이 소거되니.” “……뭐?” 평생 기억이 사라져? 근데 그럼 불량이라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아니, 애초에 왜 더 좋은 성능의 프로토 타입을 두고 양산품을 만들었대? 순수 호기심으로 되묻자, 이파엘로는 대기업 연구원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아, 그게 한 알을 제작하는 데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서 말일세. 성주는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다고 말하더군.” 회사원이었던 나는 충분히 납득되는 이유였다. ‘하긴 애초에 목격자에게 쓰려고 만든 물건이니, 며칠만 기억을 지워도 효과는 충분했겠지.’ 이후로 나는 이파엘로와 5분가량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그걸로 그날의 대화는 끝이었다. *** 시간은 계속 흘러 D-Day 하루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했다. 뭐, 다 해놓고 나니 이걸 계획이라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남지만……. 어쩌겠는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단 해 봐야지. 아무튼, 계획의 큰 갈래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1. 영주성 침투 및 기록의 파편석 탈취. 참고로 이 과정은 내 단독 임무다. 어차피 내일이면 영주성에 병력이 얼마 안 남아 있을 거라던가? 아멜리아가 보기에 내 실력이면 빈집털이는 충분할 거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영주성에 있는 동안 아멜리아는 응애 시절의 언니 옆에 딱 붙어 있기로 했는데……. 계획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긴다. 2. 아멜리아와 합류 후 자매를 데리고 도주. 일단 말은 그렇게 해뒀지만, 이 과정에서 뭐 하나 제대로 정해진 게 없다. 펠릭 바커가 라우라에게 걸어둔 [불건전계약]이야 ‘그놈’이 와서 푼다고 해도, 이후 나머지는 모두 다 임기응변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3. 레인웨일즈 자매는 지상에서 새 신분을 얻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게 우리가 세운 계획의 전부. 터놓고 말해서 잘 될 거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세세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게 문제일 뿐. [한 번이라도 관측된 시간대는 변하지 않네.] 과거에서 무슨 짓을 하든 미래는 동일하며, 그 증거는 지금까지 차고 넘칠 정도로 목격했다. 드왈키와 레이븐. 바바리안의 심장. 거기에 레테의 축복까지. 나만 해도 벌써 이만큼이나 되는데, 아멜리아는 더할 것이다.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 속에서 몇 번이고 기시감을 느끼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겠지. 툭. 그때 무언가가 내 팔뚝에 닿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술병을 내밀고 있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마시라고?” “그렇다만.” “갑자기?”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하자, 아멜리아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결행일은 내일 밤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에게 할 말도 있다.” 아,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나는 술병을 받아 들고서 마개를 깠다. 그러면서도 조금 웃겼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본인이 취하질 못하니, 내게 술을 먹이겠다는 거 아닌가. 하긴, 맨정신이라도 상대가 취해 있으면 말하기 편할 순 있겠네. “크으…….” 병에 담긴 절반을 스트레이트로 꿀꺽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중요한 내용이냐?”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너와 제대로 대화를 못 한 거 같아서.” 아멜리아는 그리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 “어… 그, 그래…….” 괜히 나까지 낯이 뜨거워진다. 아, 이건 술 때문인가? 후아, 이거 술 진짜 독하네. 쓰기도 엄청 쓰고. 이런 술은 대체 어디서 구해온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얀델.” “숙소에서도 가명을 쓰자더니?” “어차피 오늘로 끝이니까. 설령 누가 듣는다고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한 가지, 말해야 할 게 있다.” 그리 말한 아멜리아는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죄다.” “……사죄?” 듣자마자 어딘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러한 예감은 빗겨가는 법이 없었다. 툭, 데구르르. 반병 넘게 비운 술병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하, 어쩐지 술이 엄청 쓰더라니……. “뭘 탄 거냐.” 잘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허벅지로 가져다 대며 묻자, 아멜리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내가 가진 약물 중 목숨에 지장이 없을 만한 것 전부.” 저 표정으로 저리 말하니 진짜 싸이코패스 같네. 등줄기가 오싹한 것과 별개로, 덕분에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죽일 생각은 아니었던 거구나.’ 나는 허벅지에 단검처럼 매고 다니던 비상용 소형 망치를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애석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후웅-! 아멜리아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망치가 허공을 가른다. “손을 내릴 때부터 그럴 줄 알았지.” 싸울 때마다 매번 기습을 했더니, 이제는 내 눈만 봐도 뭘 하려는지 훤히 보이는 모양. “니미럴.” 근육에 힘이 빠지며 벌떡 일으켜 세운 몸이 휘청였고, 바닥에 넘어지려는 걸 아멜리아가 제때 부축해 주었다. 오케이, 그럴 줄 알았지. “읏……!” 부축을 받는 자세에서 냅다 팔을 움직여 아멜리아의 목을 압박했다. 전문 용어로는 트라이앵글 초크. 그러나 역시 이 여자도 만만치가 않았다. 콰앙-! 관자놀이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며 몸이 나가떨어졌다. 빙빙 도는 눈앞으로 두 명의 여인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짧은 순간에 분신체를 소환해 하이킥을 날린 듯한데……. ‘글렀네.’ 약물에 몸이 절여진 것에 이어 머리까지 다치자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정말 한 번도 쉽게 가는 적이 없군.” 아멜리아는 헛웃음을 내뱉더니, 쓰러진 나를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멋대로 자기 할 말만 뱉었다. “미안하다. 아무래도 나는 네 동료가 될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사력을 다해 등을 돌리는 아멜리아의 팔목을 잡으며 물었다. “넌… 대체, 뭘 하려, 는 거냐?”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떼어 내더니, 사지로 들어가는 듯한 비장한 얼굴로 장비를 하나씩 착용했다. 그리고……. “일어나면 서랍을 열어 봐라.” 거기까지가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멜리아 레인웨일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오래전에 잘려 나간 귓등의 흉터가 드러났다. 여인의 삶을 바란다면 분명 결점이 될 상처. 다만 이것은 대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이보다 더한 것들을 희생해야만 했으니까. “…….” 한데 어째선지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아멜리아는 거울 앞에 선 채로 자신의 감정을 관찰했다. 일단,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 삶이란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설령 오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목표만을 갖고 움직여 온 수십 년간의 삶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있어 실패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조차 구원에 가깝다. 쉼 없이 달려나가는 내내 한편으로는 그날을 간절히 바라왔으니까. 적어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방패만을 쥔 채로. 하면,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발길을 잡아채는 것일까. “…….” 아멜리아는 등을 돌렸다. 잠에 든 바바리안이 보였다. 뭔 짓을 하려는 거냐며 악귀 같은 얼굴을 할 때는 언제고, 코까지 골며 세상모른 채 편히 자고 있었다. 터벅, 터벅. 아멜리아는 침대로 다가가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미리 적어 둔 쪽지를 그 안에 집어넣고서 등을 돌렸다. 그때 불현듯 몇 달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내가 네 언니를 구하는 데 성공하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서도 이런저런 제약을 내가 다 해결한다면.] [······해결한다면?] [그땐 내 클랜에 들어와라.] 다시 생각해 봐도 참 가당치도 않았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다만 그럼에도 한번 상상이나 해보자면, 제법 즐겁기는 했을 거 같다. 이 바보 같은 남자와 미궁에 들어가 탐험을 하는 일에는 온갖 사고들이 가득할 테니까. 그래, 분명……. “아…….” 그제야 아멜리아는 발이 떼어지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아쉬움이었다. 결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미련. 터벅. 그러나 감정은 감정일 뿐. 자신의 발이 무겁다면 그보다 더한 힘을 주면 그만이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끼이익. 이내 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손에 힘을 줘 문고리를 돌렸다.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써 혼란이 시작된 게 보였다. “부, 불이야!!” 동쪽 구역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거리에 가득 찬 인파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며 움직였다. 그 남자에게는 내일 밤이라고 속였지만……. 결행일은 오늘이었다. 318화 메모리 (3) “이런 씹!” 눈을 뜸과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앞은 뿌옇고 코로는 매캐한 향이 맡아졌다. 그리고 창밖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거리에 있는 자들은 반역도로 간주하겠다. 다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위압적인 외침. “꺄아아아악!” 이따금씩 비명소리도 났으며, 저 멀리서 ‘콰아아앙!’ 굉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침대를 타고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하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정보가 필요하다. 따라서……. 터벅, 터벅.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창가로 향한다. 창문을 활짝 연 순간 시꺼먼 연기가 훅 들어오며 마른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일단 창밖을 쭉 훑어보았다. 연기가 자욱한 거리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불이 났구나.’ 저 멀리 불에 휩싸인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오르큘리스의 본거지이기도 한 동부 지역이었다. 현 위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 지하도시답게, 큰 화재가 발생하자 온 도시가 연기로 가득 찬 것인데……. 콰앙! 콰아앙-! 간헐적으로 인위적인 굉음이 터져 나오는 걸 보면 암만 봐도 단순한 화재는 아닌 듯하다. “돌겠네… 대체 뭔 상황인 거야.”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평소보다 머리가 몇 배는 더 느리게 돌아가는 듯한 기분. 어쩌면 아멜리아가 내게 먹인 독의 잔재일지도 몰랐다. ‘그래, 독을 먹었지…….’ 확 정신이 들며, 의식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지금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고?’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하나에 집중했다. 처음 이 몸에서 깨어난 날과 똑같았다. 다 제쳐두고,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금방 답이 나왔다. “서랍.” 아멜리아는 내게 서랍을 열어보라 말했다. 어쩌면 거기에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창문을 닫고 침대 옆으로 향했다. 친절하게도 이미 열려 있는 협탁의 서랍에는 몇 줄 안 되는 쪽지 한 장만이 달랑 남겨져 있었다. “하…….” 미안하게 됐다는, 짧은 사죄의 말로 시작된 쪽지. 전부 읽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다 읽은 즉시 쪽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가시질 않았다. ‘설마 디데이가 오늘이었을 줄이야.’ 아멜리아가 나를 속였다. 쪽지엔 적혀 있지 않았으나, 이유야 뻔했다. 내가 더 이상 과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목적이었겠지. 그러면 혹시 미래가 바뀔지도 모른단 판단이었으리라. ‘하, 얘가 이런 식으로 돌발 행동을 하는 캐릭터일 줄은 몰랐는데…….’ 뒤통수가 얼얼했지만, 애써 속을 삭이며 시간부터 확인했다. [04 :31] 오전 네 시 반. 아멜리아랑 술을 마셨던 게 오후 10시가 좀 넘어서였으니 약 6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셈이다. ‘자, 그럼 어떡할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멜리아가 남긴 쪽지엔 나머지는 홀로 해볼 테니, 일어나면 기록의 파편석을 찾아 돌아가라고 적혀 있었다. 확실히 도시 상태를 보니, 영주성에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웃기고 있네. 그럼 뭐, 자기는 여기에 혼자 남겠다 이거야?’ 역시 이런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감정과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든다.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미래가 바뀌게 될까? “……됐고, 일단 나기기나 하자.” 나는 거기서 고민을 끝마쳤다. 그리고 신속하게 장비들을 걸쳐 입었다. 시간이 촉박하니 나머지는 이동하면서 생각해 봐도 충분하다는 판단. 끼이이익. 나는 서둘러 영주성으로 향했다. *** 매캐한 연기. 그리고 거리의 민간인들을 통제하느라 바쁜 병사들 사이를 지나친 나는 이내 영주성에 도착했다. 다만 이미 굳게 닫힌 성문은 성주 측 세력이라는 패로도 열 수 없었다. “성주께서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란 지시를 내리셨소. 그리고 애초에 소집 명령이 떨어진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온 것이오?” “……자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시오. 확인해 보니 당신이 속한 클랜은 이미 한참 전에 출정을 나간 상황이니.” 하, 귀찮게. “알았다. 수고해라.”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성문 앞을 벗어났다. 어차피 문이 닫혔다고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바바리안은 허락 따위 구하지 않는다. ‘연기도 꼈고, 이 정도면 안 보이겠지.’ 성벽을 따라 잠시 이동한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높이 [도약]해 성벽을 뛰어넘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바로 그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누, 누구냐!” 순찰 중에 하늘에서 떨어진 날 보고 기겁을 하는 병사. 퍼억-! 시끄러워지기 전에 서둘러 조용히 시킨 뒤, 내성을 향해 달려갔다. 결행일 날에는 빈집이나 다름없을 거라던 아멜리아의 말대로 성내에는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순찰하는 병사들 정도가 전부. 아마 지금쯤 알맹이들은 오르큘리스가 점거한 동부 지역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적이다!” 퍼억-! “적이 침입했다!” 퍼억-! 덕분에 이 구간은 빠르게 스킵. 그러나 문제는 내성부터였다. 콰아앙-! 내성의 문을 박살 내고 1층에 홀로 진입한 순간, 흉악한 표정의 탐험가들이 나를 포위해 왔다. ‘그래, 아무리 빈집이래도 이 정도는 남겨뒀다 이거지?’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정예 병력. 지난 몇 달 동안 수없이 영주성을 들락날락한 덕분에 그중 몇몇은 안면도 있었다. “……철가면, 네가 왜 여기 있지? 전투가 벌어지는 동부 지역이 아니라?” “아, 잠깐 영주랑 만나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지.” “설마 네가 오르큘리스의 끄나풀이었을 줄이야.”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빡빡이가 믿던 동료에게 배신이라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딱히 가책 같은 건 안 느껴졌다. 나는 오르큘리스의 끄나풀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이놈들을 단 한 번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말이지. “됐고, 덤벼라.” “무슨 만용으로 혼자 이곳까지 기어들어왔는진 모르지만 이곳이 너의—” 뭐래 기껏해야 5등급따리들이. 덤비라니까 자꾸 말만 하네.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콰앙-! 무의미한 대화로 시간 낭비를 할 것 없이, 즉시 [거대화]를 켜고 놈들의 진형 한가운데로 [도약]했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 [거대화] 덕에 안 그래도 괴물 같은 사이즈인 망치를 [초월]과 [휘두르기]의 연계로 약 세 배가량 더 커지게 만든 뒤— 후우우웅-! 팽이처럼 돌며 망치를 휘둘렀다. 이름하여, 훨윈드. [던전앤스톤]에 빠지기 전에 가장 좋아했던 게임에서 따왔으며……. 특징으로는 몸이 회전하는 동안 시원한 타격감과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있다. 바로 이렇게. 콰콰콰콰아아아아앙-! 유리몸들은 망치에 처맞은 순간 풍선처럼 터졌고, 몸이 단단한 몇몇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예견된 결과였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망치는 일반 무기가 아니니까. ‘분명 탱커로 키웠는데, 어찌된 게 지금은 탱보다 딜이 더 잘 나오는 세팅이 됐단 말이지.’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 둔기류 스킬 사용 시 500% 대미지 증가 옵션을 지닌 더블 넘버스 아이템. 쉽게 말해, 이 무기는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3등급 스킬인 [휘두르기]의 위력이 5배나 증가한다. 한데 이걸 맞고 버티는 놈이 있을 리가. 아, 물론 피하면 의미는 없지만. “이, 이, 대체 무슨…….” 망치를 휘두르자마자 바닥에 납작 업드려 화를 면한 이들이 아연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중에는 정신을 차리고 반격해 오는 놈도 있었다. 화살. 불. 번개. 도끼. 나는 그들의 무기를 확인하고서 피식 웃었다. ‘어찌 된 게 검을 쓰는 놈이 하나도 없냐.’ 노아르크의 웃기는 점이다. 기사라고 해서 오러를 쓸 줄 알거나 하는 건 아니다. 충성심을 인정받고 작위만 받았을 뿐, 오러까지 쓸 줄 아는 진짜 기사는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하는 수준. ‘역시 그런 애들은 다 전선으로 끌려갔구나.’ 이후로는 한 명씩 수작업으로 망치를 내리찍는 식으로 전투를 전개했다. 중갑으로 온몸을 도배한 전사들도 ‘내리찍기’로 방어구 관통 50% 옵션을 활성화시켜 주니 금방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에 누웠다. 그렇게 5분 정도 흘렀을까? 남은 몇몇이 도주하는 것을 끝으로 전투가 종료됐다. 굳이 잡으러 따라가진 않았고, 루팅도 생략했다.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몇 달 동안 아공간 반지에 전리품을 차곡차곡 쌓아뒀더니, 이제 빈자리도 없다. ‘……하, 이 망치는 어떻게든 갖고 돌아가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둘러 이동을 재개했다. 목적지는 영주의 서재나 집무실이 있는 위층이 아니라, 아멜리아가 알려준 지하 피난처. 타다다닷.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겨우 찾아 뛰다시피 내려간 나는 걸음을 멈춰세웠다.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고 있던 탓이다. “위쪽에 무슨 소란인가 했더니…….” 공교롭게도 일전에 한 번 만나 본 적 있는 자였다. 영주의 지시로 우리를 영입하러 왔던 기사. 그러니까, 이름이……. “철가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릭 오마누스. 그가 나를 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다든가. 그런 핑계를 댈 틈조차 없었다. 후웅-! 판단이 어찌나 빠른지, 녀석은 나를 본 즉시 검에 오러를 불어넣으며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게 태세를 갖추었다. 대화를 시도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답해라, 철가면. 그대가 이곳에 있는 이유.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장소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까지 전부.” 질문에 답하자면, 아멜리아가 알려줬다. 지금은 지하 피난처에 대해 아는 이가 없을지 몰라도 미래엔 그렇지 않으니까. “대답하지 않겠다 이건가?” 그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기사’는 탱커들의 카운터나 다름없다. 탱커들은 단단한 대신 몸이 느리기 마련인데, 오러는 방어력을 무시하니까. 심지어 탱커는 딜이 낮아서 기사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어렵다. 수정동굴에서 만났던, ‘뱀의 기사’란 이명을 지닌 기사 출신 약탈자와의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다. 팔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내가 한 것은 그 틈을 이용해 달려들어 매미처럼 달라붙은 것뿐. 승리의 주역은 레이븐의 마법이었다. 두근-! 심지어 지금은 그때와 엄연히 상황이 다르다. 서로 동료가 없는 일대일 구도. 오러 대비용 세팅은 아직 손을 대지도 못했다. 하지만……. 두근-! 심장 박동 주기가 짧아지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두려움으로 인한 신체 변화는 아니었다. 전투 전에 이 정도 긴장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그래, 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 “우선 팔을 베지.” 이내 릭 오마누스가 기수식을 취했다. 나는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래, 슬슬 기사도 잡아 볼 때가 됐지. 319화 메모리 (4) 과연 나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최근 몇 개월 동안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이다. 게임에서야 이 수치면 어느 정도가 되겠다 감이 잡히지만, 그것만으로 실감하긴 어려웠다. 이곳은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딱 좋은 상대일지도.’ 오러 발현이 가능한 ‘평기사’만 하더라도 6층 탐험가와 대등하게 여겨지며, 대인전만 놓고 보면 그 윗줄로 쳐준다. 다만 나도 스펙은 딱히 꿀리지 않는다. 물론 혼령각인도 아직 6레벨에 불과하며, 레벨도 낮아 이 시대의 강자들에 비하면 정수 개수가 압도적으로 적지만……. 오우거에 바이욘에 스톰거쉬까지. 3등급이 정수가 무려 셋이나 된다. 정수 조합도 근본이 없는 게 아니라 시너지가 일어나도록 맞췄고. 무엇보다 탱커가 기사에게 맥을 못 추는 가장 큰 이유는 딜 부족 때문인데, 이는 악마분쇄기로 커버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서로 조건은 똑같아.’ 한 방 맞으면 골로 가는 건 서로 마찬가지. “…….” “…….” 어두운 계단 위에서 때아닌 정적이 이어졌다. 내가 강하게 나오자 저쪽도 어딘가 찝찝해진 걸까? ‘괜히 세게 나갔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놈은 신중하게 나와의 거리를 쟀다. 다만 그럴수록 나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저 옛날 검객들의 대결이 한 호흡만에 정해졌다고 하듯. “…….” “…….” 승부는 한순간에 갈렸다. 스윽. 처음 움직임을 보인 건 상대 쪽이었다. 단 한 걸음. 딱 그만큼 부족한 거리를 채우기 위해 녀석이 계단 한 칸을 오른 그 순간. “푸흐으으읍!” 나는 혀를 씹어서 머금고 있던 산성피를 놈의 면상에 뿌렸다. 다만, 녀석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주먹이 날아들어도 눈 하나 꿈쩍 안 한다는 복서처럼, 표리부동한 자세로 검을 뻗었다. 시체 골렘 정수가 사기인 이유였다. 산성피에 대해 아는 새끼가 없거든. 아무래도 피쯤이야 그냥 뒤집어쓰면 그만이라 여긴 거 같은데……. 치이이이이익-! 놈의 검보다 산성피가 먼저 닿았다. 녹는 소리만 날 뿐, 비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암만 단련을 했어도 사람인 이상,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시적으로 놈의 눈이 감기며 검 끝이 흔들렸다. 그 틈을 타 나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날아들었다. 타닷. 체공한 상태에서 검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경 쓸 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한데 검에서 전해진 감촉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을까? 스륵. 놈이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를 들어 올렸다. 첫 수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번 턴은 수비로 버텨 내겠다는 판단. 하얀 빛무리가 방패 표면에 맺힌 걸 보니 방어계 스킬도 하나는 갖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두 번째 패착이었다. 이 망치에는 방어구 관통이 붙어 있거든. 콰아아아앙-! 사정없이 망치를 내리찍은 즉시. “커헉!” 놈이 입을 벌리며 핏물을 뿜어냈다. 눈빛에는 당황스러운 감정만이 가득했다. 하긴, 방패로 잘 막아 냈는데 왜 몸이 아작났는지 이해가 안 됐겠지. 그러나 이해와 납득은 다른 영역의 이야기다. 타닷. 놈은 위험하다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서, 계단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든 정비할 시간을 벌어 보겠다는 것. 이게 놈의 세 번째 패착이었다. 나한테는 그랩 스킬도 있거든. 후우우우우웅-! [초월]과 [폭풍의 눈]을 연계해 멀어지던 놈을 눈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콰직, 콰직, 콰직! 나는 녀석의 머리가 짓뭉개질 때까지 연신 망치를 내리쳤다. *** “아우, 땀 나.” 총 세 번의 확인 사살을 마친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불과 몇 초간의 전투였지만 심력 소모가 상당했던 탓이다. 뭐, 그래도 보상은 확실했지만. ‘캬, 장비가 무슨 최소 4단계에서부터 시작하네.’ 성주가 투자를 많이 했는지 장비가 제법 좋다. 차마 두고 갈 수가 없기에 얼른 장비를 벗겨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조금 자리가 부족해서 가장 가치가 적은 것들을 빼내야 하긴 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문제. 문득 아멜리아가 남긴 쪽지가 떠올랐다. 기록의 파편석을 얻고서 혼자 가라던가? ‘……뭘 가라는 거야. 장비들 묻어둘 곳도 아직 못 찾았구만.’ 암, 이것들을 어떻게 모았는데 그냥 두고 가. 그거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 못 가지. 애초에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 물건인지도 알 수 없고. ‘아무튼, 다시 안 올 기회니 얼른 그것부터 챙기자.’ 루팅을 끝마친 나는 발가벗겨진 사체를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툭. 계단 자체도 굉장히 넓었지만, 전부 내려가니 스무 명은 너끈히 지나갈 법한 넓은 통로가 나왔다. 참고로 그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했는데……. ‘살짝 열려 있네.’ 근처에는 당장 보이는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최대한 기척을 죽여 문 쪽으로 다가갔다. 피난소 용도로 설계된 문 너머 거대한 공동에는 딱 한 사람만이 자리해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맞고 벗겨진 정수리. 뒤룩뒤룩 살찐 뱃살. 딱 봐도 좋은 옷감을 사용한 듯한 화려한 의상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쌍꺼풀. 예전에 한 번 멀리서 본 적이 있는 성주가 틀림없었다. “……오마누스 경인가?” 그때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성주가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흐음,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모습을 비추었다. “자네는… 철가면?” 성주가 날 보며 흠칫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온다던 오마누스 경은 어디 가고 자네가…….” “오마누스라면 죽었다.” “…….”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죽인 건 나다.” “……!” 내가 담담하게 사실을 고하자 성주가 눈을 부릅뜨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거, 쓸데없는 짓 하기는. 그런다고 도망칠 수 있겠냐고. “읏! 놓게! 놓으란 말이야! 무엄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얼른 다가가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리자 성주가 한껏 역정을 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도시의 지배자라기엔 굉장히 추한 몰골이었다. 쩝, 그러게 암만 아무도 모르는 패닉룸이라고 해도 호위 좀 더 데리고 숨지 그랬어. “뭐, 뭘 원하는 겐가……! 그, 그만! 말로 하게!” 한 손으로 성주를 집은 채로 툭툭 몸을 치며 간단하게 소지품을 뒤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찾던 물건을 발견했다. 아멜리아가 말하길 반드시 품에 소지하고 있을 거라던데 정말이었다. 그게 목걸이 형태일 줄은 몰랐지만. 툭. 힘을 줘 목걸이를 끊어낸 다음 성주를 놓아줬다. 두 눈을 뜨고 선대가 남긴 보물을 빼앗긴 성주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지만, 그래도 생각은 있는지 내게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좋아, 일단 이건 챙겼고…….’ 혹여나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작동이 될까 우려한 나는 목걸이 줄만 잡고서 기록의 파편석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놈……!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어서 이리 내놔라! 내놓으란 말이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이라도 좀 뽑아줄까?” “…….” 일단 성주의 입을 다물린 뒤, 차분하게 물었다. “기록의 파편석을 쓰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놈! 정말 이걸 노리고… 으, 읍!!” “묻는 것에 대답만 해라. 여긴 너와 나뿐이니까.” “……너에게 말해줄 게 있을 거 같으냐!” 의외로 성주는 제법 질겼다. 처음에는 성을 냈고, 그다음에는 모른다고 하다가 결국 한 대 처맞은 다음에야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쓰는 방법이 없다고?” “이, 일단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그, 그렇소……. 시대의 부름을 받은 자가 곁에 오면 빛이 뿜어져 나오게 된다고…….” 기대도 않던 정보였다. 아멜리아의 말에 따르면 노아르크 성주조차도 사용법을 알지 못해 보관만 했다는 모양이었으니까. 근데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이거지. ‘액티브가 아니라 조건 충족 시 자연 발동되는 식이었구나.’ 혹시나 해서 물어보길 잘했다. “이제 의문이 풀렸으면—” “됐고, 이거나 말해봐라. 만약 시대의 부름을 받은 자가 다시 되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뭐……? 그걸 대체 왜 궁금—” 지능이 아예 없지는 않은지 성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네, 설마……!” 하긴 대놓고 티를 냈는데 모르면 병신이지.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는 대로다. 그러니까 말해봐라.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 어쩐지… 아무도 모르는 이곳까지 어떻게 찾아왔나 했는데, 그런 배경이…….” “또 묻지도 않은 소리.” 쓰읍하고 소리를 내자 성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와, 왔을 때와 마찬가지라 들었소.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다시 부름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귀찮게 됐군.” “……나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이제 어떡할까 고민하던 차에 성주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미, 미래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소이까?” 그리 묻는 성주의 눈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반짝거렸다. 설마 영웅처럼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겼을 거라 기대한 걸까? “그건 왜 묻는 거냐?” “다, 단지 호기심이오……. 자네가 이곳에 왔으니 이제 그 미래는 없겠지만… 궁금할 수는 있지 않겠소.” 그래, 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보물이라든가 하는 얘기가 나왔겠지. “아, 오늘 일은 어떻게 됐소? 오르큘리스, 그 잡것들을 이 도시에서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소?” “그렇게 미래가 궁금한가?”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을 감아 봐라.” “……감았소.” “뭐가 보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다행이다. 뭔가 보인다고 하면 곤란해질 뻔했는데. “그게 네 미래다.” 나는 힘껏 망치를 내리쳤다. *** 털썩. 성주의 육신이 힘을 잃고 쓰러진 자리에 붉은 피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 몇 달간 지내며 보고 들은 것에 반만 사실이어도 충분히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애초에 원래 이날 죽는 운명이기도 하고.’ 참고로 성주 살해는 세간에 오르큘리스의 짓이라 알려졌고, 아멜리아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밝혀졌듯. 진짜 범인은 나다. ‘뭐, 이젠 새삼 놀랍지도 않지만.’ 사실 죽일지 말지는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럼에도 끝내 망치를 내려친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그냥 떠난다 해도, 성주는 오늘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며 역사가 완성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만에 하나. 사실 내가 죽인 게 대역일 뿐이고. 진짜 성주가 지상으로 도망쳐 신분을 감춘 채 20년간 온세상을 완벽히 속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결과는 변하지 않는 것— “어……?”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유레카를 외친 철학자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온 세상을 속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320화 메모리 (5) 덜컹, 덜컹. 흔들리며 빠르게 나아가는 10인승 운반형 마차 위, 비장한 표정의 성인 남성들 사이에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14세의 소녀. 얼핏 보면 너무도 침착한 그 얼굴 덕에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지금 초조한 상태라는 걸 눈치챈 자는 없었다. 언니, 라우라 레인웨일즈를 제외하면. 스윽. 무릎 위에 손을 올린 경직된 자세를 유지 중이던 아멜리아가 움찔했다. 언니의 손이 위로 포개어진 탓이다. “왜? 많이 걱정되니?” 내성적인 성격의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처럼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언니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의미가 없을뿐더러……. 분명 언니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무리 흔들리는 마차 위라고 해도, 지금 자신의 몸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언니의 체온이 피부로 느껴지자 아멜리아는 조금씩이나마 긴장이 해소되는 걸 느꼈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중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에도. 이내 눈까지 감자 성인 남성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가면과 에밀리는?” “성주 쪽에서 숙소로 사람을 보낸다고는 하던데, 이 와중에 제대로 연락이 전달될지는 모르겠소.” “후, 미치겠군.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밤중에 이게 뭐요?” “그만큼 극비였다는 거 아니겠소. 설마 성주가 왕가와 손을 잡고 오르큘리스를 치다니.” 그들 자매는 여느 날처럼 양부의 주점에서 일하던 중 펠릭 바커에 의해 소집됐다. 다급해 보이던 그는 무엇 하나 설명해 주지 않았고 싸울 준비를 하라더니, 장비를 챙기기 무섭게 도착한 클랜원들과 함께 군용 마차에 태워버렸다. “잠깐만, 오르큘리스를 친다고? 나는 그런 거 못 들었는데? 동부에 폭동이 발생해서 지원을 나가는 거라고만……. 게다가 왕가라니? 그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요? 어떻게 성주가 왕가랑 손을 잡아?” “얘기를 들어 보니 얼마 전에 왕가 쪽에서 성주와 접촉한 일이 있었네. 거기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이쯤 되면 견적은 나오지 않겠나.” “하긴, 왕가 입장에서도 오르큘리스 놈들이 눈엣가시인 건 마찬가지였겠지. 성주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했구려.” “암, 그게 아니면 왕가에서 지원해 준 기사들이 오르큘리스와 싸우고 있을 이유가 뭐겠소?” “……성주가 우리에게 당일까지 말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겠군.” “맞소. 어차피 핵심 전력은 그들일 테니까. 우린 가서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면 그만이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철가면처럼 성 밖에서 자고 있는 건데, 괜히 성내에 있다가 바로 끌려와 버렸군.” “더르본, 말 조심해라.” “아… 실언을.” “그리고 너희들도 너무 불평만 하지 마라. 이 일이 해결되고 나면 성주 성격상 대가는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 테니.” 클랜의 단장 펠릭 바커가 과열된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이내 한참을 내달린 마차가 노아르크 동부 입구에 멈춰 섰다. “여기부터는 걸어서 가야겠군.” 이미 몇 번의 전투가 있었던 듯한 동부에는 그 경계선부터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와 누더기의 사체. 여기저기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시의 것보다도 처절한 사람의 비명이 가득했다. “뭣들 하나! 언제까지 길 막고 있을 거야? 얼른 내려라! 뒤에 마차들 더 오는 거 안 보여?” 아멜리아는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오는 동안 진정됐던 몸은 다시금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언니가 따듯하게 감싸 쥐었다. “너무 걱정 마렴. 언니가 꼭 지켜줄 테니까…….”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는 믿음직한 언니의 말. 그럼에도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꽈악. 감싸 쥔 언니의 손에 힘이 깃들수록, 아멜리아는 진한 불길함을 느꼈다. *** 회상을 마친 아멜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백했다. 오르큘리스가 본거지로 삼은 후부터 서서히 성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띠게 된 노아르크 동부. “부, 불이야!!” 지금에야 사람들은 단순히 그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여기는 정도지만, 실제로는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은……. ‘지금쯤 마차를 타고 동부로 이동하는 중이겠지.’ 20년 전의 기억이며, 당시에는 처음 겪는 대규모 전투인지라 정신도 없었으나 아멜리아는 이 시절의 자신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였는지까지 얼추 기억했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지난 20년간 그녀의 삶은 오늘 하루를 수없이 돌려보고 후회하며 반추하던 나날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닷. 아멜리아는 발길에 박차를 가하며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동부 지역에는 성주에 의해, 아무것도 모른 채 당일 소집된 수백의 탐험가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주변을 쓱 둘러보던 그녀는 머지않아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여기 있었군.” “누구… 어, 에밀리?” 이내 아멜리아가 접근해서 말을 걸자, 전투 대기 중이던 펠릭 바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자네가 여기에?” 자신이 이곳에 나타난 게 반갑기는 하지만 조금은 의문이었던 모양. “소란스러워서 성에 가보니 이곳으로 보내더군. 오면서 다른 자들에게 사정은 대강 들었다.” “아, 그랬군…. 근데 철가면은 어디 있고?” “취해서 자는 중이라 그냥 두고 왔다.” “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처럼 귀중한 전력을 두고 오다니…….” “그럼 어떡하나?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술에 절었는데.” 그녀의 말에 펠릭 바커는 아쉬움을 내비칠 뿐, 내용 자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바바리안이 지각을 할 때면, 전날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단 핑계를 자주 댄 덕분이었다. “하긴, 그 친구라고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겠지. 그럼 그 친구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군.” 이후 아멜리아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언니의 곁에 섰다. 그러자 자매가 어색하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넉살맞은 바바리안과 달리, 아멜리아는 몇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 둘과 필요한 대화 외에는 교류를 하지 않았다. 앞에만 서면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억지로나마 입을 열었다. “붙어 있어라.” “……네?” “그래야 지켜줄 수 있으니까.” “아, 네……!” 친하진 않지만 아멜리아의 뛰어난 실력을 알고 있는 자매들은 그녀의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 갑자기 왜 잘해주는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전투 준비!” 아무튼, 그렇게 진형이 잡히자 머지않아 그녀가 속한 무리도 최전방으로 나갈 차례가 되었다. 수십 개로 나뉜 조가 차례대로 최전방을 맡으며 휴식을 번갈아 취하는 식이었는데……. 당장은 크게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야 소탕을 위한 전투는 왕가에서 보낸 병력과 오늘의 계획을 미리 전해 들은 성주의 정예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놈들이 탈출을 시도한다! 죽여라!” 이곳에 모인 병력의 목표는 소탕이 아니라 포위. 불이 난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잔당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성주께서 완전히 작심을 하신 모양이구려.” “보니까, 보통 시민들이 거의 70%인 거 같은데, 정말 이렇게 다 죽여도 되는 거요?” “에휴, 멍청하긴. 그걸 하나하나 구분할 수가 없잖냐. 오르큘리스 멤버가 시민인 척하면서 빠져나가면 어쩔 건데?” “그건 그렇소만…….” 일방적인 전투에 회의감을 내비치는 이들도 간혹 있었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다들 사람 죽이는 일에는 도가 튼 인물들인 것이다. “아까 지휘관이 했던 말 기억하는 자 있나? 두 당 얼마랬더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지금 추세면 적어도 원정 한 번 다녀오는 것보다 나을 거 같은데?” “야! 들었지? 몰이꾼! 너희는 싸우지 말고 귀만 챙겨! 아, 입은 것 중에 비싸 보이는 거 있으면 전부 벗기고!” 대부분은 쉬운 노동을 하고서 고소득을 얻을 수 있다며 희희낙락했다. 다만 아멜리아는 그럴수록 표정이 굳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 이들과 함께 자라 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런 사고방식들이 그녀에게는 거북했을뿐더러……. 적어도 그녀 한 명만은 알고 있던 것이다. 이 축제 같은 분위기는 찰나에 불과하며, 곧 지옥도가 펼쳐진다는 것을. “뭐야, 저기 누가 혼자 걸어오는데?” 소음이 가득한 와중에도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유독 크게 들렸다. 아멜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나간 놈인가?” 정면부에서 홀로 걸어오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탈출 시도가 최소 수백 명 단위에서 시작됐음을 고려하면 너무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터벅. 사내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지켜보던 이들은 위화감을 감지했다. 터벅. 피를 흠뻑 뒤집어쓴 흑색 무복. 다만, 젖었을 뿐 옷에는 생채기 하나 없다. 시뻘건 피로 물든 걸 보면 이곳까지 오며 운 좋게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건 아닐진대. 터벅. 심상치 않은 건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마찬가지다. 물건의 가치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약탈자들답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그 검이 보통 물건임이 아님을 깨달았다. 검 자체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 평범한 검을 차고 다니는 한 남자의 이름은 이 도시에서 너무도 유명한 것이다. “……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거, 그거 아니지? 제발 잘못 봤다고 말해주라.” “…….” “혹시 얼굴 아는 사람 있냐?” 대기 중이던 탐험가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어떤 자는 본능을 믿고서 뒷걸음질을 쳤고, 어떤 자는 그저 아닐 거라며 부정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터벅-. 이내 사내가 50m까지 거리를 좁혔을 때. 휘이이이이익-! 한 화염계 능력자가 뿜어낸 불길이, 사내에게 닿기도 전에 소멸되며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그야 너무도 유명한 능력이었으니까. “부, 불언령…….” [불언령]. 5층의 지배자, 고요의 군주가 지닌 권능. 탐험가들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이능을 무위로 돌린다는 이 불가해의 힘은 오랜 역사 중에서도 손에 넣은 자가 열 명도 채 안 되며……. 알려진 바로, 현시대에는 오직 한 명뿐이다. “바, 반역자다…….” ‘반역자’란 이명을 가진 유일무이한 범죄자. 오르큘리스라는 집단을 제 손으로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한때 ‘검호’라고도 불렸던 무패의 검사.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그 남자의 등장이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왕가! 왕가에서 보낸 놈들이랑 싸우고 있을 거라면서!” 남자는 그들의 의문 중 그 어떠한 것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 없다는 듯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을 뿐. “도, 도망쳐!” 이를 기점으로 모여 있던 탐험가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사내의 검이 휘둘러진 순간. 번뜩-! 찰나와도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서거거걱-! 20년간 수없이 들여다본 오래된 기억이 다시 한번 재현되기 시작했다. 321화 역할 (1) 제1 왕실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혈기사가 전대 단장을 살해하며 공석이 된 자리에 오른 20대 중반의 젊은 기사. “고대 피난처에 대해 미리 듣지 못했다면 계획에 차질이 있을 뻔했군.” 그가 짧은 은발을 이마 뒤로 넘기며 어두운 계단 아래로 향했다. 터벅, 터벅. 사내가 현재 전장으로 변한 동부가 아닌 영주성의 지하에 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주에게 접근해 그들을 소탕하는 일을 도우면 이 도시를 묵인해 주겠다는 제안은 그저 병력을 이끌고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한 명분일 뿐. 왕가의 목적은 처음부터 따로 있었다. 기록의 파편석. 성주의 측근이 전한 정보에 따르면 목걸이의 형태로 상시 보관 중일 가능성이 농후한 그것. 물론, 제롬은 이 물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명이 떨어진 이상, 어떻게든 이를 갖고서 왕가로 복귀— 툭. 이내 계단을 내려가던 사내의 걸음이 멈추었다. 계단에 엎어진 사체를 발견한 탓이다. 사인은 둔기에 의한 타격으로 추정되는 후두부 손상. 장비까지 벗겨 갔는지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망 시각은……. ‘길어 봤자 30분 전.’ 허리를 굽혀 상처 부위를 만져 본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 이곳에 먼저 침입했다. 아마 목표는 이 아래에 숨어 있을 성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면, 침입자는 아직 저 아래에 있을까? 타닷. 제롬은 빠르게 계단을 내달렸다. 머지않아 넓어진 통로와 함께 활짝 열린 석문이 보였다. 다만 그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이 뒤룩뒤룩 찐 중년 사내의 사체뿐이었다. 이번에도 둔기에 짓이겨진 흔적이 가득했다. ‘누군지 몰라도 한발 늦었군.’ 제롬은 낭패감에 입술을 짓무르면서도 신속하게 사건 현장을 살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기록의 파편석은 없었다. 목에 쓸린 상처가 있는 거로 보아 힘으로 떼어간 듯한데……. ‘설마 경쟁자가 있었을 줄이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제롬은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30분이면 멀리는 못 갔을 터.’ 찾아내야 한다. *** 아우릴 가비스는 말했다. [한 번이라도 관측된 시간대는 변하지 않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미래를 아예 바꾸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관측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면?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아멜리아에게 언니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구해낸 언니를 20년간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게 만든다면? 그럼 구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으나, 머지않아 나는 큰 장애물과 마주했다. [그날 언니는 나를 품에 안고 죽었다.] 아멜리아는 언니의 죽음을 코앞에서 보았다.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드왈키가 그러했듯,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그 광경을 직접 보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속여야 할까? 감도 잡히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수없이 죽여온 아멜리아가 언니의 생사 여부를 착각하게 만드는 게 결코 쉽지는 않을 텐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마치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나, 이전처럼 막막하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게, 성주가 유언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할 일을 모두 마치면 기록의 파편석은 자연스레 작동이 될 것이라고. 달리 말하면, 아직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다. 하면, 내게 남은 ‘역할’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그렇기에……. 콰앙-! 한참을 달려 도착한 연금술사의 방문을 어깨로 밀치며 들어선다. 어쩌면 그냥 문이 열려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확률은 숫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로 결심— “우, 아악!” 응? “뭐야.” 문을 박살 내며 들어서자 공방 한구석에 있던 늙은이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겁하는 게 보였다. 이 공방의 주인인 마르파 이파엘로는 아니다. “누구냐 넌?” “그게…….” 내가 묻자 늙은이가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딱 봐도 뭔가 수상한데……. ‘어?’ 늙은이의 복장을 살피던 중에 로브 앞섶에 달려 있는 특이한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연금술사냐?” 내 물음에 늙은이가 움찔했다. 덕분에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터벅. 혹시 호위가 숨어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주변을 경계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늙은이가 뒷걸음질 치며 변명을 해댔다. “어, 오해! 오해일세! 나는 결코 뭔가 훔치려던 게 아니라…….” “그렇군.” 어쩐지 뭔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놀라더라니. 혼란을 틈타 뭔가 훔치려고 왔던 거구나. “이, 이번 일을 비밀로 해주면 노부가 반드—” 길게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었다. 보니까 도둑질을 한다고 호위들도 떼어두고 온 거 같은데. 퍼억-! 비전투직답게 내가 대시해서 정수리에 망치를 내리꽂을 때까지 연금술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야, 아공간도 있네?” 시간이 없기에 대충 연금술사의 아공간 반지만 루팅한 나는 서둘러 공방을 수색했고, 머지않아 찾던 물건을 발견했다. 레테의 축복 프로토 타입. 복용 시 평생의 기억을 전부 망각하게 만드는 미친 성능의 소모품. ‘오케이, 그럼 첫 번째 준비물은 얻었고…….’ 이제 아멜리아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전화기도 없는 세상.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 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없었다. 내가 잠들고서 6시간이 지났으니 걔가 아마 지금쯤……. ‘한창 쫓기고 있겠네.’ 서두를 필요가 있— “찾았군.” 입구에서 들린 목소리에 황급히 등을 돌리니, 은발의 기사가 보였다. “기록의 파편석을 내놔라.” 뭐야, 이 새끼는 또. ***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한때 검호란 이명으로 불린 적도 있던 검사. 그가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보거나, 직접 상대해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일반적인 기사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고. 후우우웅-! 검끝에 일렁이는 오러. 이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기운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펼쳐진 오러는 예리한 기세를 풍겼으나, 겨우 그뿐이다. ‘빛의 기사’의 오러처럼 태산 같은 기세를 뽐내는 것도, 달의 기사처럼 자유자재로 오러의 형태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걱-! 이 남자의 검은 그들보다 윗줄로 여겨진다. 오러가 아니라, 그 검을 휘두르는 ‘방식’ 그 하나 때문에. “아악! 사, 살려—!” 동부 지역을 봉쇄하던 수백의 탐험가들 중 그의 검격 한 번을 제대로 버텨내는 이가 없었다. “도망쳐야……! 아악!” 막으면 막는 대로 베어 내고. 피하면 예상했다는 듯 어느샌가 그 위치에 먼저 도달해 있는 검. 누가 봐도 투박한 검이었다. 기사들이 추구하는 화려한 기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그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 에밀리 님. 저, 저희도 어서 도망쳐야…….” 보는 것만으로도 벽이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는 것. 그 가치 하나만을 두고서 끊임없이 단련되며 극에 이른 검술. “다들 뭐 해! 얼른 오지 않고!”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자 클랜장 펠릭 바커가 구성원들을 챙겨 달아날 준비를 시작했다. 아멜리아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수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과 어울렸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으니까. “펠릭 바커.” “응?” 펠릭 바커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순간, 아멜리아는 얇은 침을 던져 그의 목에 박아 넣었다. “……어, 어?” 목만 돌린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은 몸. 아멜리아는 펠릭 바커의 몸을 어깨에 들쳐맸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클랜원들이 아멜리아에게 무기를 겨누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배신을 하다니!” 배신이 아니다. 처음부터 동료라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서걱-! 아멜리아는 가장 가까이 다가온 한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 “…….” 격분하던 탐험가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뭔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붙잡힌 클랜장을 두고서 도망쳤다. “아씨, 난 모르겠다!” “……됐고, 얼른 가자!” 예상했던 행동이었다. 저쪽에서는 ‘반역자’가 학살을 펼치며 점점 다가오는 와중 아닌가. 클랜장을 위해 목숨까지 걸 이유가 없었겠지. 여기 이 둘과 달리. “……그 사람을 노, 놓아 주세요.” 어린 시절의 그녀가 자신을 보며 말을 걸어온 순간. 휘익-! 기습적으로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멜리아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이를 피한 뒤, 회전력을 이용해 손목을 걷어찼다. 챙그랑-! 놓친 검이 바닥을 구르며, 얼얼한 손목을 잡은 채 통증을 참아내는 소녀가 보였다. 그녀의 언니, 라우라 레인웨일즈였다. “아멜리아, 도망치자!” 라우라는 상황이 힘들어진다 싶자마자 동생부터 챙겨 들고 도망쳤고, 아멜리아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야 그녀는 클랜원들이 다 도망친 와중에도 이 둘이 펠릭 바커를 구하려던 이유를 아니까. 의리 같은 게 아니다. 단지 펠릭 바커가 라우라에게 건 주박 때문일 뿐. [불건전계약]. 온갖 불평등한 계약이 전부 들어가 있지만, 핵심은 하나다. 펠릭 바커는 자신이 죽음에 달하는 부상을 입은 순간, 라우라의 모든 생명력을 양도받는다. 그래서 그 둘은 남아서 자신을 대적했다. 하나 그럼에도 실패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친 이유는……. ‘나.’ 아멜리아 본인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동생이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까드득.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세 살의 나이 차. 어린 시절엔 언니가 어른보다도 큰 사람처럼 느껴졌으나, 이제 그녀는 안다. 그래 봤자 열일곱 살이었을 뿐이다. 힘듦을 몰랐을 리 없으며, 때로는 전부 포기하고 도망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닷. 아멜리아는 통나무처럼 빳빳하게 굳은 펠릭 바커를 업고서 나아갔다. 서걱-! 초식 동물들 사이에 낀 맹수처럼, 혼비백산 달아나는 수백 명을 쫓아가며 업무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사내가 있는 그곳을 향해. “……?” 무표정하게 검을 휘두르던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하긴, 전부 도망치는 와중에 역으로 달려들고 있으니 신기하게 보였겠지. 그것도 웬 장정까지 어깨에 맨 채로. 후우웅-! 아멜리아의 단검에 깃든 오러가 검게 물들었다. 4등급 몬스터 그래바니치의 정수를 얻고 획득한 변환계 이능 [심연의 힘]이었다. 이 이능을 발동 중일 때는 자연력, 용력을 포함한 모든 자원이 영혼력으로 대체되며, 성능이 두 배가량 커진다. 그것은 마나를 사용하는 ‘오러’도 매한가지. 태생적으로 마나 보유량이 적었던 아멜리아에게 이 이능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하지만……. 사르륵.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간 순간, 검게 물든 오러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가 지닌 계층군주의 이능 [불언령] 때문이었다. 이 이능은 일정 반경 내에 모든 이능을 무위로 돌려 버린다. 그래,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제 됐군.’ 이 안에서는 [불건전계약]도 먹통이 되어 버린다. 툭. 이내 아멜리아가 어깨에 메고 있던 펠릭 바커를 던지자, 뤼엔프라하는 단칼에 그를 베어냈다. 서걱-! 짧은 도륙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육신. 내심 걱정했었지만, [불건전계약]이 발동되며 부상이 치유되는 일은 없었다. ‘일단 한고비는 넘긴 셈인가…….’ 당시 언니와 함께 도망치며 펠릭 바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직접 보지 못했던 아멜리아였기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다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타닷. 목적을 이룬 아멜리아는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수십 명을 학살하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던 그가 즉시 추격해오며 입을 열었다. “잘은 몰라도 날 이용했단 것만큼은 알겠군.” 아무래도 그는 정황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한 듯했고, 이에 분노한 것 같았다. 한데 어째선지 예전에 바바리안이 알려 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딱히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라프도니아에는 그런 식의 압축된 단어가 없었다. ‘참 신기한 어감을 가진 곳이란 말이지.’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개꿀……?” 그 뜻은 아직도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자신을 도와준 적에게 하는 감사의 표시라던가? 322화 역할 (2) “언니, 얼른 돌아가야……!” “못 봤어? 오러를 쓰는 여자야. 뤼헨프라하라는 남자는 그보다 더한 괴물이고.” “하지만……!” “돌아가 봐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야.” 팔을 붙잡고 끌고 가듯 달려나가는 라우라의 말에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합리적인 선택……? 미쳤어? 언니가 죽고 내가 사는 게 어떻게 합리적인 선택이야!!” 아멜리아가 있는 힘껏 팔을 뿌리치자, 앞서 가던 라우라도 뜀박질을 멈추었다. 라우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멜리아, 오늘은 언니 말 들어. 이러고 있을 시간이—” “뭔데 그게!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왜 돌아가서 뭔가 해볼 생각도 안 하고 도망만 치고 있는 건데?!” “이러는 쪽이 살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을 안 듣는 동생에게 화를 내듯 소리친 라우라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에밀리, 그 여자는 펠릭 바커를 죽인 게 아니야. 마비침을 썼어. 용무가 있는 것처럼 들쳐 매기도 했고. 당장 죽일 생각은 아니란 거야. 실제로 나도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고.” “아…….”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냈다. 언니는 그 긴박한 와중에도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생각하고서 결정을 내린 거였구나.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야. 괜히 그 여자한테 덤볐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쪽이 더 가능성 있으니까.” “…….” “자, 그럼 납득이 됐으면 어서 따라오렴.” 라우라는 이럴 시간도 아깝다는 듯 이동을 재개했고, 아멜리아도 서둘러 이를 뒤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레인웨일즈 자매는 익숙한 얼굴들과 조우했다. “어? 라우라, 아멜리아? 너희 살아 있었냐?” “……더르본 님.” 펠릭 바커를 버려 두고서 냅다 달아난 클랜원들. 그사이 뭔가 일이 있거나, 흩어졌는지 인원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야, 잘 왔다. 너희 운 좋은 거야. 지금 우리끼리 막 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했거든.” “예……? 탈출이라니요?” “보면 몰라? 뤼헨프라하, 그 인간이 동부 밖으로 나왔다는 게 뭐겠어. 그쪽은 다 정리가 되고, 성주를 치러 간다는 거잖아? 이미 이 도시는 끝났어.” 더르본의 설명이 끝나자 옆에 있던 사내 둘이 오한이 든다는 듯 사족을 덧붙였다. “반역자, 그자는 사람이 아니오. 수십 명을 도륙하면서 표정 하나 안 바뀌는 거 봤소? 아까 본 걸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소이다.” “반역자가 혀를 낼름거리면 진짜 화난 거라던데.” “이 도시가 그놈 손에 넘어가면 성주 쪽에 붙어 있던 우리 목부터 잘려 나가겠지.”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나 라우라는 침착하게 확인해야 할 정보부터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탈출할 생각입니까? 정문엔—” “그래, 그 문지기가 지키고 있지. 근데 숨겨진 샛길이 있다는 모양이더라고. 멜타 상단이 지상으로 왔다 갔다 할 때 쓰는 곳이라는데, 얘가 거길 안다지 뭐냐?” “……그렇군요.” “너희도 같이 갈래?” 라우라는 더 볼 것도 없이 제안에 응했다. “가겠습니다.” “어, 언니?” 원래는 비교적 안전한 서부로 가서 사태가 마무리 될 때까지 숨어 있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자신이 죽고 나면 동생은 홀로 이 세상에 남겨져야만 하니까. 적어도 동생만은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바랐으니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데려가주는 대신—” “알고 있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크흠, 그래… 역시 말이 잘 통하네.” 사내가 무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무리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 * * 찰랑거리는 은발. 하얀 피부. 왕가의 문양이 그려진 기사 갑주와 일반 규격보다 1.5배가량 큰 사이즈의 장검. 만난 적은 없지만,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제롬 세인트레드.’ 제1 왕실기사단의 수장이자, ‘빛의 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왕가 출신의 최강자. 문제는 이 새끼가 왜 지금 여기 있냐는 것이다. 아멜리아가 들려준 얘기에 얘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기록의 파편석을 내놔라.” 그래도 이 한마디에 덕에 상황이 대강 그려졌다. 지금쯤 동부에서 소탕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할 빛의 기사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 이유의 해답은 참으로 명료했다. 왕가의 목적은 오르큘리스의 소탕이 아니었다. ‘싸워서… 이기긴 힘들겠지.’ 일전에 계단에서 상대한 릭 오마누스와는 격이 다르다. 기사들이 먹는 ‘비약’으로 올릴 수 있는 최대 레벨인 5레벨은 당연히 뚫었을 것이며……. 단장쯤 되면 6레벨 돌파 이벤트는 물론 7레벨 각성까지 끝냈을 터. 심지어 이것도 끝이 아니다. ‘왕가의 재력을 생각하면 7개 정수 전부 다 최소 3등급은 된다고 봐야겠지.’ 정수의 개수와 평균 등급에서 밀린다. 그로 인한 스탯차는 말할 것도 없고, 역할군도 탱커와 기사라는 불리한 상성에 서 있다. 하지만, 그나마 비벼 볼 구석을 찾자면……. 후우우웅! 장비겠지. 더블 넘버스 아이템부터는 기본적으로 하급 파괴불가 옵션이 붙어 있으니까. 콰앙-! 통성명도 없이 휘둘러진 검을 망치로 받아냈다. 후, 이런 식의 싸움은 처음이네. 항상 방패로 먼저 막고 무기로 때리는 게 기본 구도였는데. “……?” 일격을 받아낸 나를 보며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든 베어내는 기사답게, 자신의 검이 도중에 막힐 줄 예상하지 못한 듯한데……. “잠깐.” 일격 후에 잠시간 생겨난 틈을 타서 대화를 시도했다. 통할 거 같진 않지만, 해봐서 손해는 없잖아?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닌가? 기록의 파편석이라니? 나는 그런 거 모른다.” “혀를 놀리는군. 네가 지하에서 올라와서 이곳으로 향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사람 잘못 봤다는 전략은 역시 통하지 않았다. 다만, 기대도 않던 곳에서 쓸 만한 정보가 나왔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고 가져갔을 수도 있겠군. 기록의 파편석… 영주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내놓아라.” 어딘가 파고들 구석이 있게끔 여겨지는 말투. “영주가 차고 있던 거라면, 설마 이 목걸이를 말하는 건가?” 혹시나 해서 내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가리키며 묻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물건만 넘긴다면 불필요한 피는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대어였다. 그야 기록의 파편석은 진작에 아공간에 박아 넣었으니까. ‘얘, 기록의 파편석이 뭔지 모르는구나.’ 지금 내가 차고 있는 건 평범한 목걸이다. 큼지막한 정제석을 박아 넣어서 마법사들이 꼈을 때 캐스팅 시간을 줄여주는 게 효과의 전부. 참고로 예전에 약탈 중에 몰래 횡령해둔 걸 그냥 여태까지 장신구처럼 끼고 다닌 것인데……. ‘이걸 이렇게 쓰게 되네.’ 사람은 대화를 할 줄 아는 동물이라던가? 역시 말을 걸어보기를 잘했다. 뚜둑. 일단 목걸이를 힘으로 잡아당겨 끊었다. “뭐, 원한다면 못 줄 것도 없지. 어차피 기념품처럼 생각하고 갖고 나온 거니까.” “기념품?” “명색이 성주 아니냐? 우리한테는 나가서 싸우라 해놓고 본인은 지하로 숨기에 따라가 봤더니, 이 목걸이 말고는 가져갈 것도 없더군.” “흐음, 단순히 돈이 목적이었나.” 놈은 내 말을 듣더니 납득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성주를 찾으러 갔다가 장비를 싹싹 벗긴 릭 오마누스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 “우리 같은 놈들 목적이야 뻔하지 않나? 물론 너 같은 놈이 원하는 걸 보니, 이 목걸이도 꽤 값어치가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말이 긴 놈들은 대부분 수작이 있다. 그러나 밥만 먹고 검만 휘두른 듯한 이 젊은 기사는 나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설명은 됐으니, 이만 내놔라.” “아, 근데 그 전에 보장이 필요해서 말이지.” “보장?” “이걸 주면 네가 날 보내 줄 거란 보장.” “나는 약속을 어기지—” 뭐래, 지는 명예를 아는 기사라 이건가? 진짜 거짓말을 할 줄 몰랐으면, 애초에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주는 뒈지는 순간까지 왕가에게 속았다는 걸 몰랐으니까. 따라서……. ‘도약.’ 벽면에 자리한 창문을 깨부수며 높이 도약한다. 4층에서 위로 뛰니 몸이 떠오르며 영주성을 중심으로 도시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전투가 발생한 동부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서부는 비교적 평온했다. 하나 이를 여유롭게 바라볼 새도 없이. 팟-! 등 뒤에서 빛이 번뜩이며 놈이 나타났다. 이펙트만 봐도 알 수 있는 스킬이었다. [빛의 관문] 3등급 정수이자, 이동기 중에서는 사실상 최상위 티어에 속하는 그것. 무작위 위치로 발동되는 반쪽짜리 순간이동이 아니라 장소를 지정하는 사기 스킬. 후, 오랜만이네. 바바리안 키우기 전엔 이것도 자주 먹었는데.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여겼나.” 허공에서 허리를 돌리기 무섭게 놈이 검을 휘둘러왔고, 이번에도 망치로 이를 막아냈다. 거, 급하기는. 내가 약속을 안 지킨다고 한 것도 아니구만. ‘아무튼, 공중전은 또 처음이네.’ 검을 막아낸 반동으로 허공에서 몸이 한 번 더 뒤로 밀려난다. 이에 따라 놈과 벌어지는 거리. 팟-! 놈이 다시금 [빛의 관문]으로 그 거리를 좁힌 순간, 나는 있는 힘껏 쥐고 있던 목걸이를 던져 버렸다. “……!” 놈이 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목걸이를 잡기에는 거리가 부족했다. 잠시나마 놈의 시선에 고민이 맺힌 게 보였다. 여기서 나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거였다. 덕분에 한 가지 깨달았다. ‘약속을 어기지 않기는 개뿔.’ 처음부터 놈은 내가 목걸이를 주면, 그 즉시 날 죽일 생각이었다. 목격자를 없애고 싶다든가 그런 이유였겠지. 뭐, 이 상황에서까지 그 고집을 이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퍽-! 목걸이에 한눈 팔린 놈의 복부를 발로 밀어찼다. 놈은 신음 하나 뱉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찬 게 아니니까. 후웅-! 물리 법칙에 의해 다시금 벌어지는 거리. 놈은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를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순수하게 호기심이 이는 상대를 만났다는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걸 내가 왜 말해줘? “병신인가?” 아, 말해 버렸네. “……뭐?” 순간 아차 싶었지만, 놈은 다시금 나를 향해 [빛의 관문]을 타지 않았다. 그야 한 번에 사용 가능한 최대 횟수가 있으니까. 3회부터는 쿨타임을 기다려야 한다. 팟-! 이내 놈의 육신이 빛에 휘감기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리 살필 것도 없이 내가 목걸이를 던진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오케이, 일단 이 새끼는 떨궈냈고…….’ 이어서 ‘초월도약’을 사용하자 발끝에 보이지 않는 발판이라도 생긴 듯한 감각이 일었고, 있는 힘껏 이를 박차자 몸이 화살처럼 직선으로 쏘아져나갔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목적지. ‘이러고 있으니까 슈퍼맨이라도 된 거 같네.’ 나는 피식 웃으며 방금 전에 있었던 짧은 공중전을 복기했다. 하나하나 따져볼수록 기분이 묘했다. ‘무슨 드래곤볼도 아니고.’ 얼른 더 강해지든가 해야지. * * * 노아르크성 외곽에 위치한 공동묘지. 콰앙-! 그 중심부에 떨어진 나는 착지와 동시에 낙법을 펼쳤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와아아악!” 비석들을 다 박살내 가며 한참을 굴렀단 뜻이다. “……아오, 뒈질 뻔했네.” 도시 가운데 위치한 영주성으로부터 단숨에 외곽 지역까지 다이렉트로 왔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높은 곳에서 가속까지 하며 처박아서 그럴까? 다리가 저릿한 걸 넘어 뼈를 타고 전기가 올라오는 감각이 피어난다. 고통내성을 감안하면 사실상 아작이 났다는 것. ‘……그래도 포션은 안 써도 되겠네.’ 오우거의 정수에 붙은 자연 재생 -40의 패널티. 예전엔 이것 때문에 포션을 안 먹으면 상처가 거의 낫지 않는 상태였지만……. 이번에 먹은 스톰거쉬의 정수와 불사자 각인으로 얻은 자연 재생의 총합이 페널티를 훨씬 넘어서며 잔부상 정도는 이제 침만 발라도 금방 낫게 됐다. 스윽. 짧은 휴식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머지않아 찾던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야 예전에 미리 방문을 했었거든. 거대한 비석이 비석 아래에 숨겨진, 마차 하나가 지나갈 높이와 너비의 통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시체였다. ‘묘지 관리인 아저씨네.’ 관리인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상주하며 비밀통로의 경비병 역할을 하던 그는 칼자국이 가득한 몸으로 죽어 있었다. ‘여섯 시간이나 잤으니, 라우라 쪽은 한참 전에 지나갔을 테고……. 아멜리아도 이쯤 됐으면 슬슬 걔네랑 합류했겠네.’ 얼른 따라가야 사건이 모두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하기에, 걸음을 재촉하며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정확히는 들어서려던 차였다. ‘……응?’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터벅, 터벅. 통로 너머에서 멀끔한 복장을 입은 노인 한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두근. 노인과 눈이 마주친 즉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동시에 꿈을 꾸는 듯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노인이 인사했다. “허허, 반갑네.” 아우릴 가비스였다. 323화 역할 (3) 하얗게 세어버린 장발. 자글자글한 주름. 온화해 보이는 호감형 인상. 나이에 맞지 않게 꼿꼿한 허리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벽안까지. “흐음, 여기는 언제 와도 항상 칙칙하단 말이지.”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똑 닯은 노인의 등장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우릴 가비스……?’ 물론 오늘 마주치는 일을 염두에 두기는 했었다. 그야 아멜리아는 말했으니까. 자기 언니가 죽던 날, 그날 그 자리에 이 늙은이도 있었다고. 하지만……. ‘아니, 이 할배가 왜 여기 있어?’ 이 늙은이가 사건의 중심부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하나밖에 없다. ‘나를… 찾으러 왔던 거였구나.’ 심장이 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머릿속이 혼잡해진다. 이 늙은이는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설마 비요른 얀델이란 것도 들켰을까? 커뮤니티가 몇 달 동안 닫혀 있던 이유는 뭐고? 아니, 무엇보다……. 이 늙은이는, 지금부터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지?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뒤늦게 배어 나온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크흠.” 아우릴 가비스가 헛기침을 뱉으며 이목을 끌었다. 가만히 멈춰서 대꾸도 않고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데…….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 하,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일단 자연스럽게 인사부터— “자, 그럼 이제 비켜주겠나?” 어? “자네처럼 큰 덩치로 길을 그렇게 막고 있으면 지나갈 수가 없지 않나.” 뭐라고? ‘……설마 나인 줄 모르는 건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머리가 멍해졌다. 다만 수없이 거짓말을 뱉어온 입은 알아서 눈치껏 제 할 일을 해주었다. “아, 예……. 지나가시지요. 어르신.” 바바리안의 몸에 깃든 후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경어. 이에 아우릴 가비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친구구만? 아니면 눈치가 빠르던가. 오래 살겠어.” 이내 옆으로 바짝 붙어 길을 터주자, 그가 껄껄 웃으며 지나쳤다. 터벅, 터벅. 점점 멀어지는 걸음 소리. 문득 그런 생각도 피어났다. 일단 본능적으로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정체를 감춘 게 잘한 건가? 물론 잠깐 하고 넘어간 생각이었다. 커뮤니티 내에서도 아니고 실제로 만난 것 아닌가. 정체를 숨길 수 있으면 당연히 숨겨야 한다. 만약 비요른 얀델이란 것까지 알아내면, 미래로 돌아가서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지니까. ‘그래, 잘 넘긴 거야…….’ 그리 생각하고 나니 바짝 얼어붙었던 몸이 쫘악 풀리며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였다. “아, 그걸 묻지 않았군.” 잘 걸어나가던 아우릴 가비스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이 이 모양인 겐가?” “성주가 왕가의 세력과 손을 잡고 오르큘리스를 기습했습니다.” “오호라, 그런 일이…….” 흥미롭다는 투의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착각인가도 싶었지만……. 두 번째 질문을 듣고 나니 차이가 명확해졌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묻겠네. 최근에 바바리안 한 명이 이 도시에 들어오지 않았나? 아마 사오 개월 정도 전일 텐데…….” 첫 번째와는 아예 정반대였다. 별거 아닌 듯 툭 뱉는 말투였으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진한 관심이 묻어난다. ‘평정심, 평정심…….’ 콩닥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뒤, 가장 적절한 대답을 찾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예, 있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건 좋지 못했다. 애초에 도시로 가서 몇 명한테만 물어봐도 나올 대답이니 구태여 그럴 이유도 없고. “호오, 그렇단 말이지? 혹시 어디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들을 수 있겠나?” “제 기억에 따르면 그는 성주 세력에 속했습니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동부에서 전투 중이지 않을까 싶군요.” “하하, 예의만 바른 게 아니라 몹시 친절한 젊은이였군? 이름이 뭔가?” “예?” “아, 자네 말고 그 바바리안 말일세.” “비욘. 토르의 아들 비욘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주억이더니, 공치사하듯 내 팔뚝을 툭툭쳤다. “답해줘서 고맙네. 바빠 보이는데 이만 가게나.” “예, 어르신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후, 왜 이렇게 공기가 찬 거 같지? 나는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마자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통로로 들어섰다. 터벅, 터벅. 등 뒤로 늙은이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아휴, 간 떨어질 뻔했네.’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 한편 그 시각. “현재 동부 전선의 상황은?” “명대로 최소한의 병력만을 투자해 시간을 끄는 중이며, 언제든 연락만 하면 철수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부관 마법사의 보고를 들은 은발의 기사, 제롬 세인트레드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단장 자리에 오른 후 받은 첫 ‘특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던 덕이다. 특명의 첫 목표였던 ‘기록의 파편석’을 얻었다. 그리고 내분을 일으켜 노아르크의 세력을 축소화 시킨다는 부가 목표도 달성했다. “즉시 종군 마법사들에게 통신을 보내라. 10분 뒤, 집결 장소에서 모여 복귀한다.” “예.” 동부에 배치된 병력들이 빠지면, 오르큘리스의 세력은 이미 죽은 성주를 향해 분노를 토해낼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되겠— “저…….” 부관의 목소리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의미의 제스처. 허락이 떨어지자 부관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들고 계신 목걸이의 용도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너에게 허락되지 않은 정보다.” 제롬은 완고하게 답하며 목걸이를 함에 넣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부관도 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세인트레드 단장님께서 웬 정제석 목걸이를 갖고 계시기에……. 맹세코 단독 특명에 관한 물품일 줄은 몰랐습니다. ” 정말 호기심에 여쭈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음을 믿어달라는 느낌의 사족. 이에 제롬이 움찔했다. “정제석 목걸이……? 그게 무슨 뜻이지?” “…예?” “자세히 말해봐라. 이게 정제석 목걸이라는 건가?” 제롬은 아예 목걸이를 다시 꺼내서 부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예, 확실합니다. 상급 정제석을 통짜로 박아 넣은 마도구로군요. 아, 정제석은 마법 시전을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게끔 특수 가공된 균열석을 뜻하는데…….” 말하던 도중에 부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직속 상관인 제롬의 턱에서 ‘까드득’ 하고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온 탓이다. “그래, 속았던 건가…….” 부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평소의 제롬은 1만 스톤짜리 물건을 100만 스톤에 사고서도 늘 있는 일이라며 허허 웃던 사내였으니까. “……에이벡스 부관, 그대는 군을 이끌고 도시로 먼저 복귀해라.” “예? 하오면 세인트레드 단장님께선…….” “나는 할 일이 있다.” 제롬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며 떠났고, 부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켜만 보았다. 단장이 저렇게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 라프도니아의 상하수도를 지탱하는 지하 하수도. 이곳에 와 본 자들은 하나같이 생각한다. 일단 그 첫째는 냄새가 지독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란 것이며, 두 번째는 길이 어지간한 미로보다 복잡하단 것이다. 바로 이렇게. ‘참 언제 와도 기분 나쁜 곳이란 말이지.’ 길게 뻗은 일자형 통로를 따라 한참을 내달리다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하수도. 맨홀 뚜껑 비슷한 철구조물을 치우고 올라오니, 시작부터 네 갈래로 나뉜 길목이 나를 반겼다. 물론 방향을 찾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벌써 수십 명은 지나쳐 간 듯한 흔적이 한쪽 길에만 가득 남아 있었으니까. 이정표 삼아 따라만 가면 된다. 뭐, 문제는 따로 있었지만. ‘빌어먹을 하수도.’ 완전히 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구역인지, 내가 경험했던 하수 구역과 달리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이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아예 없는 건 아닐 터이나……. ‘이제 하다하다 하수도 설계까지 바바리안을 차별하는구나.’ 2m가 넘는 장신의 바바리안이 지나가기엔 너무 폭이 좁은 샛길. 철퍽, 철퍽. 결국 정강이까지 오는 구정물을 밟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중간중간 벽에 남은 전투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벽에 새겨진 검흔이었다. 깊이는 모두 달랐지만 검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정밀 기계를 이용한 것처럼 절단면이 아주 깔끔하다는 것. 검흔을 남긴 이의 정체도 대충 유추가 가능했다. 얕은 건 아멜리아겠고, 깊은 건 그놈이겠지. 오르큘리스의 단장.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쯧.” 왠지 입맛이 썼다. 처음 둘이서 실행하기로 했었던 계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놈을 떼어내고 하수도로 들어오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야 원래 역사에선 아멜리아가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하수도에서 재회했을 땐, 이놈에게 쫓기던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떼어내진 못했구나.’ 정황을 보니 역시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후,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미래라는 건 그런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닌데. ‘얘는 이런 데에서만 또 이상하게 우직하단 말이야.’ 어찌 보면 아멜리아는 바바리안과 닮았다. 인간인 주제에,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도통 포기란 걸 모른다.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합리적인 척은 혼자 다하면서 잔정은 또 엄청나게 많— 콰앙-! 그때 저 멀리서 폭음이 일며 하수도가 흔들렸다. 타닷-! 나는 속도를 올렸다. *** 육신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근력을 키워도, 낼 수 있는 힘은 최대치가 정해져 있다. 그렇기에 정수는 탐험가의 근간이다. 이 힘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탐험가들은 한계 이상의 힘을 내며 거대한 괴물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다. “드디어 싸울 생각이 든 건가.” 아멜리아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크게 증가한 육체의 성능 자체는 동일하다. 그러나 모든 이능이 봉인됐다. [불로의 근원]. 포션을 비롯한 모든 치유 효과를 받지 못하는 대신 자연 재생력을 크게 늘려주는 이능도. [자가복제]. 일대일 상황에서 언제나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던 그것도. [심연의 힘]과 [수라각] 등, 전투에 있어서 그녀의 날개가 되어주었던 모든 이능이 먹통이 됐다. 앞에 선 이 한 명의 사내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내게 집착하는 거지?” 아멜리아는 참아왔던 물음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2시간이 넘게 도시를 누비며 이 남자를 떼어내려 노력했으나 그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곳 하수도까지. “예상 밖의 행동이었나?” 사내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나 같은 여자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성주에게 가는 게 너한테는 훨씬 중요할 텐데?” 왕가와 성주가 동맹해 오르큘리스를 쓸어버리려던 상황이다. 한데 지휘관이자 최고의 전력인 이 남자가 대뜸 전선에서 벗어나 연고도 없는 여자를 따라온다? 그 결과를 알고 있던 것과 별개로, 과정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우스운 질문이군.” 그는 너무도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인간 여성. 단검에 특화된 듯한 송곳 형태의 붉은 오러. 모두 장미기사단의 특징이지.” “……장미기사단?” “여기까지 와서 발뺌인가.” 아멜리아는 정말로 당황했다. 장미기사단이 뭔지는 그녀도 알았다. 암살과 잠입, 공작 등의 특수 임무를 도맡는 왕가의 직속 부대. 여성들로만 이뤄졌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는 그곳. “아무래도 신입인가 보군? 하긴 그러니까, 나를 보고도 저딴 질문이나 했겠지.” “아니, 나는 장미기사단 소속이—” “살 생각은 버려라.” 아멜리아는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해 보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궁금한 것 따위 없으니까.” 대화를 차단하며 날아드는 검. 아멜리아는 얼른 오러를 끌어 올려 이를 막아 냈다. 아니,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서걱-! 단검을 쥐고 있던 오른쪽 팔목이 잘려 나가며 하수도 속에 풍덩 빠졌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휘익-! 검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노리는 타격지는 왼쪽 손목. 벨 수 있는 건 전부 베어 버리겠단 잔혹한 의지가 그의 검에서 묻어났다. 콰앙-! 아멜리아는 오러를 담은 단검으로 검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한데 그 움직임까지 예상을 했을까? 왼쪽 팔목을 노리던 검이 반동을 이용하듯 뱀처럼 휘어지며 아멜리아의 목을 향해 궤도를 틀었다. “읏……!” 정신을 차렸을 때, 아멜리아는 어느샌가 벽을 등진 채 몰려 있었다. 목에서는 칼날의 서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꾸욱- 이내 사내가 칼날을 밀어 넣자 따끔한 통증과 함께 핏물이 흘러내렸다. “좋은 얼굴이군.” 기도가 검 끝에 의해 눌린 탓에 아멜리아는 입을 열어 말을 걸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딱 너희한테 어울려.” 산소가 부족해지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말 죽는 건가? 아니, 그럼 언니와 어린 시절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 원래 역사대로라면 나는 부상만 입은 채 그 둘과 만났어야 하는데……. “…….” 아멜리아가 눈을 굴리듯 주변을 확인했다. 마치 이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얀델.’ 찾던 이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이곳에 올 리가 없다. 적어도 여섯 시간은 넘게 뻗을 만한 약을 타서 직접 먹였으니까. 지금쯤 일어나 쪽지를 읽고 영주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음, 조금 일찍 깼다면 벌써 그 물건을 손에 넣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고. 아니, 이미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살길을 찾는 건가?” 암만 둘러보아도 활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 검이 조금만 더 깊게 박히는 즉시, 구차할 정도로 길어진 이 삶도 끝이날 것이다. 그 말인즉슨. “푸흐…….” 역사가 바뀌었다. 오늘 자신은 이곳에서 죽는다. 필시 원인은……. ‘비요른 얀델이 돌아갔기 때문.’ 그녀는 이번 계획에서 얀델을 배제했다. 이유는 여럿 있었다. 우선 바바리안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기록의 파편석을 이용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정해진 인과를 틀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닐 테니까. 분명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능력을 담은 물건인 만큼 거기에 해답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아니, 그저 기대했다. 조각배에 탄 채 표류하던 이가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다름없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왜 웃는 거지?” 그것은 통했다. 꾸욱. 사내가 불쾌하다는 듯 검을 조금 더 밀어넣었다. 늘상 곁에 두고 살았다고 여겼던 죽음이, 조금 더 가까이서 느껴졌다. ‘그래, 정말 돌아가는 데 성공한 거구나.’ 아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더 괴로워해.” 만약 죽고 난 다음에 우리 자매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없으면 분명 누군가 죽을 텐데……. ‘아니, 어쩌면 내가 없기에 무사히 끝날 수도 있겠지.’ 그녀는 결코 알 수 없을 결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기쁘면서도 어딘가 슬플 것 같다. 꾸욱. 검이 조금 더 살을 파고들었다. 숨은 쉬어지지 않았고, 사고는 무뎌졌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 쉬어도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먹은 그 순간이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통로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324화 역할 (4) 하수도 속을 달리고 있다. 철퍽, 철퍽. 정강이까지 차오른 구정물을 온 사방에 튀기며, 시선은 정면만을 응시한다. 두 명의 남녀가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강압적으로 벽에 밀친 채,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 날 두고 갔으면 잘 지내고 있을 것이지.’ 나는 망치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있는 힘껏 통로 전체에 메아리 치도록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어떻게든 이목을 끌어 아멜리아한테서 검을 떼어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푸슉-! 놈의 검이 뽑혀져 나옴과 동시에 아멜리아의 목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하, 그냥 살갗에만 갖다 댄 줄 알았는데. 이미 찔러 넣은 상태였구나. 심지어 그 와중에 검을 뺄 때도 한 번 깊이 넣었다 뺀 거 같은데……. “……바바리안?” 놈이 상체를 내 쪽으로 틀며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철투구를 쓴 상태였으나 앞선 함성의 내용과 커다란 몸집으로 종족을 유추한 모양. 나는 동체시력을 이용해 짧게 아멜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커, 커흐… 으……!” 목에 구멍이 뚫린 아멜리아는 한 손으로는 출혈 부위를 틀어막은 채, 벽에 어깨를 기대 몸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안 죽었으면 됐어.’ 걱정만 해서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과 실행력일 터.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땅을 박차며 대시했다. 철퍽-!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어느덧 서로의 무기가 닿을 반경에 이르자, 놈이 형형한 오러를 뽑아내며 나를 향해 휘둘렀다. 콰앙-! 망치로 오러를 받아냈다. 그 순간 놈의 눈에 의문이 맺혔다. 오러를 썼으니 당연히 무기째로 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 같은데……. “넘버스 아이템이군.” 산전수전 다 겪었을 베테랑답게, 놈은 한순간에 해답을 찾아냈다. ‘눈치 한번 빠르긴.’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하기로 했다. 뭐라 말을 지껄여 준 덕에 잠시나마 틈이 생겼지 않나. 휘익. 무기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는 한편, 한쪽 손을 뻗어 아멜리아를 끌어당겼다. 서 있을 기력도 없어 보인 만큼, 힘없이 끌려와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몸. 그럼 이제 챙길 건 다 챙긴 셈인가? “…그 여자의 동료였군.” “보면 모르냐?” “그렇다면… 너도 나의 적이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 “……!” 그 순간 짧았던 힘겨루기가 끝났다. 뤼헨프라하가 검에 힘을 주어 역으로 나를 밀쳐냈다. 최근에 힘에서 밀리는 일이 없기에 굉장히 낯설었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근력은 나보다 약간 우위.’ 몸이 뒤로 밀려나는 그대로 백스텝을 밟았다. 당연히 놈도 대시하며 따라붙었다. 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랐다. ‘민첩은 나보다 훨씬 우위.’ 일단 근접전의 핵심인 쌍스탯에선 내가 밀린다. 심지어 내가 열심히 시너지가 이뤄지도록 조합한 패시브, 액티브 스킬들은 봉인이 됐으며, 그 와중에 놈은 나와 상극인 오러까지 시원하게 쭉쭉 뽑아내고 있는 상황. ‘진짜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투정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나는 빠르게 판단을 끝마쳤다. 실로 압도적인 스펙 차.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당장 그걸 쓸 필요는 없겠네.’ 큰 문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를 바꿔 말하자면. 콰아아아앙-!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만들면 된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래, 예를 들어. 솨아아아아아아아-! 수중전이라든가. *** 횃불이 일렁거리는 어두운 하수도. 열댓 명의 남녀가 두 무리로 나뉜 채 서로를 원수 대하듯이 노려보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다시 말해 봐라 덤보.” “덤보가 아니라, 더르본이다.”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그 바바리안놈 앞에서 헤실헤실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들던 거 아니었나?” “뭐……? 이 새끼가……!” 선명한 적의를 품고서 오가는 대화. 그 속에 낀 라우라 레인웨일즈는 떨리는 여동생의 손을 꼬옥 마주 잡으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이 상황에서도…….’ 라우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사소한 언쟁에 불과했다. 하수도를 이용핸 비밀 통로를 알고 있던, 전 멜타 상단 출신의 탐험가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걸 갖고 누군가가 비아냥거렸다. 이게 불화의 씨앗이었다. [거, 드럽게도 툴툴거리네. 하는 것도 없이 공짜로 따라오는 주제에.] 은연 중에 무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던 사내, 더르본이 길잡이를 두둔했다. 아니, 두둔하는 걸 넘어 협박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좀 억울한데? 그런 소리를 할 거면 돈이라도 내라. 아, 돈이 없으면 장비를 줘도 괜찮고.] [뭐?] [싫으면 그냥 돌아가든가?] 그 몇 마디 대화로 인해 순식간에 무리가 둘로 나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마지막 제안이다. 장비를 주고 따라오든가, 돌아가라.” “하, 그런 말을 하면 그냥 꼬리를 말 줄 알았나?” “길잡이랑 좀 친하다고 유세 부리긴. 어차피 도시로 나가는 길을 찾는 건 저 길잡이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기어코 피를 보겠다는 뜻이군.” “저기… 다들 좀 진정하시고…….” 어떻게든 말려야 한단 생각에 입을 열었으나, 더르본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라우라, 넌 가만 있어라. 차라리 잘 됐으니까.” “예? 자, 잘 됐다니…….”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많을 것 아니냐? 지상에서 다시 자리를 잡으려면.” 더르본의 말에 그와 대립각에 서 있던 사내도 이것만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딱 절반 정도만 죽으면 나머지는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겠지.” 그 말에 라우라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불화의 씨앗 같은 건 없었다는걸. 말로만 들었던 지상과 달리, 노아르크 출신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은 당연한 것이라는걸. 길을 못 찾는다고 시비를 건 건 계기였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을 노리고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이래서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려고 한 건데…….’ 짐승들이 사는 도시 노아르크. 라우라는 새삼 이 도시에 환멸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검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투라면 그녀가 속한 더르본 세력이 이겨야 했다. 그래야만 여길 나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동생만큼은. “아멜리아, 준비하렴.” “응, 언니.” 라우라의 속삭임에 동생도 무기에 손을 올렸다. 이러나저러나, 그들 자매 역시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훌륭히 살아남은 짐승이었던 것. “자, 그럼 시작해 볼—” 상대 쪽에서 무기를 쥐며 걸음을 내디딘 순간, 더르본 무리에서 화살을 쏘며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솨아아아아아아-!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뿜어져 나온 세찬 물살이 그들을 뒤삼켰다. ***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흉흉한 오러를 뽑아낸 채 달려드는 뤼엔프라하를 피해 달아나며, 일정 간격을 두고 정확히 네 번을 후려쳤을 때였다. 쩌적, 쩌저적, 쩌적, 쿠웅-! 거미줄, 혹은 깨진 거울처럼 크랙이 생겨난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아-! 댐이 무너진 것처럼 급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짜 위에 물이 흐르고 있었구나.’ 사실 망치를 휘두르기 전까지 확신은 없었다. 단지 어린 시절의 아멜리아의 눈으로 ‘관측된 미래’를 통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뿐. [그때 무리에 분열이 생기며 전투가 벌어졌고, 갑자기 통로에서 물살이 쏟아져 나왔다. 휩쓸려서 나와 언니 모두 정신을 잃었지. 그리고 깨어났을 땐—] 나는 잡념을 지우며 아멜리아를 더욱 힘 줘서 안았다.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떠밀려 갔을 급류. 나와 놈 모두 일반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콰앙-! 본능적으로 망치로 몸을 가리자, 봉을 타고 무지막지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수심이 오르는 걸 넘어 이미 물이 머리까지 가득 찬 상황에서도 놈이 검을 휘둘러온 것이다. ‘징한 놈.’ 급류로 중심을 잡기 힘든 상황에서 대여섯 걸음을 뒤로 밀려나게 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시야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광원이 있건 말건 이런 흙탕물 속에서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으니까. ‘오, 그럼 이게 진짜 진흙탕 싸움인가?’ 문득 그런 잡념이 피어났으나 빠르게 흘려넘겼다.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망치를 쥔 팔의 팔꿈치로 벽을 짚으며, 나는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이러면 등 뒤가 무방비해지지만, 너무 걱정되진 않았다. 아마 놈이 방금 검을 휘두른 것도, 그저 마지막에 내가 서 있던 지점을 감각에 의지해 공격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으니— 서걱-! 그때 허벅지에서 따끔한 감각이 일었다. 아무래도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뒤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아유, 미친 새끼 저거.’ 그래도 이제 괜찮다. 목적지에는 도착했으니까. ‘쉰하나, 쉰둘…… 후, 다행히 잘 찾아왔네.’ 눈을 감은 상태로 벽을 짚으며 걸어온 나는 아까 오면서 봐둔 갈림길에 도착하자마자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는 로트밀러에게 배운 재주였다. 지도를 제작하다 보니 정확한 보폭을 잴 수 있게 됐고, 한번 지나간 길을 외우는 능력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이 그놈한테 있을 리 만무. ‘오케이, 딱 보니까 갈림길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간 거 같고.’ 다만 나는 안주하지 않고 계속 길을 따라 이동했다. ‘거대화.’ 이내 놈과 거리가 멀어지며, 스킬이 정상 작동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맥은 뛰고 있어.’ 아멜리아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이제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을 보여주는 패시브 스킬, [불로의 근원]도 작동이 되었을 터. 목의 부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치명적인 곳을 꿰뚫렸을 뿐, 부상의 정도 자체만 보면 그리 심한 건 아니었으니까. 저 정도 면적이 재생되기까지는 1분이면 충분할 터. ‘문제는 산소인가…….’ 내 경우엔 스톰거쉬의 정수로 증가한 폐활량 덕분에 호흡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아멜리아 얘는 좀 사정이 달랐다. 이미 목의 부상 때문에 산소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던 상황. 얘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딱 5분 정도만 더 버텨주면 될 거 같은데. 그때도 그쯤 물이 터져 나오고서 수원이 바닥났는지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아, 몰라.’ 이내 짧은 고민을 마친 나는 아멜리아를 들었다. 그리고 몸을 더듬거리며 겨우 찾아낸 코를 한 손으로 막은 뒤, 입을 맞추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수중 인공호흡. 이게 실제로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다는 판단이었다. 딱히 손해 보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 근데 이 와중에도 정신이 들어 있었을까? 입이 맞닿은 순간, 축 늘어진 아멜리아의 몸이 움찔했다. 힘을 주는 게 날 밀어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따라서……. 꽈악-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를 담아 허리를 더욱 끌어당겼다. 그러자 반항이 옅어졌다. 이건 허락인 건가? 잘 모르겠지만, 붙어 있기만 하던 입술을 잘 움직여 물이 흘러들지 않게 최대한 밀착해서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후욱-! 폐까지 닿도록, 있는 힘껏 숨을 불어넣었다. *** 수중 인공호흡을 반복적으로 하고서 5분쯤 지나자, 수심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쏟지던 물이 바닥나자 넓은 하수도에 물이 골고루 퍼져 나간 것. 놀랍게도 아멜리아는 이때까지도 의식이 있었다. “놔, 놔라…….” 거, 구급 활동이었구만 그렇게 기겁할 것까지야. 내가 허리를 놓자 아멜리아가 물 아래로 풍덩 들어갔다. 아, 얘는 키가 작지. 아직 수심이 내 어깨까지는 와 있으니, 얘한테는 발이 닫지 않았을 터. “푸하앗……!” 다시 손을 뻗어 허리를 잡아 주려던 순간, 아멜리아의 머리가 알아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음, 수영을 할 줄 알았구나. “미, 리… 말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응?”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숨을 참는 게, 특기였단 말이다…….” “뭐라는 거냐?” 숨도 헐떡거리면서 개미 기어가듯 말하니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다시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보다 중요한 본론이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아멜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됐다… 그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전보다 호흡이 안정되었는지, 말투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음, 이 정도면 몸은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고. “왜 여기 있냐니? 무슨 뜻이냐?”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아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설마 쪽지를 못 본 건가?” “아, 그거라면 봤지.” “근데… 왜, 돌아가지 않은 거지……?” 쩝, 되게 뭐라고 그러네. 내가 다 알아보니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구만. 얘의 돌발 행동 때문에 고생한 일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할 일이 남았으니까.” “할 일……?” “그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뭐? 너는 대체 어째서 그렇게까지…….” 뭐래. 그렇게까지가 아니라, 그걸 해야지만 돌아갈 수 있는 건데. 이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하, 새끼.” 돌연 [거대화]가 해제됐다. 쉽게 말해, 반경 30m 내에 놈이 들어왔다는 뜻. 무작정 직진을 하다가 어디선가 날 놓쳤단 생각에 다시 길을 되짚어 온 모양인데……. 아무래도 쉽게 우릴 보내 줄 거 같진 않다. 따라서, 나는 판단했다. “야, 넌 먼저 가라.” “……뭐?” “네 언니 구해주러 가라고. 저놈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아멜리아를 자매에게 보내고서, 내가 놈을 막는다. 그 심플한 계획에 아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살행위다. 저놈은 네가 상대할 만한 적이—” “그럼 어쩌려고? 네 언니는? 포기할 거냐?” “……어차피 뭘 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만.” 나는 아멜리아의 말을 끊었다. 어쩌다가 얘의 의지가 이렇게 박약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믿어라, 아멜리아. 그 문제는 내가 어느 정도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가서 일단 너희 자매부터 구해. 알겠냐?” “하지만—” “쓰읍.”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생전 처음 보는 듯한 반응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걱정 받는 기분이 그리 썩 나쁘진 않지만……. “애초에 너는 왜 내가 진다고 생각하는 거냐?” 5층 계층군주의 정수 [불언령]. 확실히 좋은 정수긴 하다. 희소성은 말도 안 될 정도고. 라프도니아 역사에서도 손에 넣은 자가 열 명도 채 안 되며, 알려진 바로는 현시대에는 이걸 손에 넣은 건 저놈 한 명뿐이라던가? 사람들이 저 힘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보가 없으니, 그냥 날먹 사기 스킬처럼만 보였겠지. 내가 보기엔 참 이상한 일이다. ‘딱히 잡기 어려운 놈도 아닌데 말이지.’ 20대의 남은 여가 시간 전부를 [던전앤스톤]에 바쳤다. 당연히 고요의 군주도 사냥해 보았다. 그러니까 아마 횟수가……. “300번.” 음, 아마 그 정도쯤 될 것이다. 다만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300번……?”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아멜리아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300번은 더 넘게 먹어봤다고, 저 정수.” 약점이 없는 스킬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325화 역할 (5)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이처럼 각 계층군주들은 진명과 이명을 함께 갖고 있으며, 이들의 정수는 대부분 이명을 따서 부른다. 혼돈의 정수라든가, 심연의 정수라든가. 대충 이런 식이다. 그리고 뤼헨프라하가 먹은 고요의 정수에 관한 내 평은 이러했다. ‘빛 좋은 개살구.’ 계층군주의 정수인 만큼, 강한 개성과 능력을 지녔지만 그 컨셉에 문제가 많았다. 일단 액티브 스킬인 [불언령]만 봐도 그렇다. 활성화 시 시전자를 기준으로 반경 30M 내에 모든 스킬을 무효화 시킨다는 광역 침묵기. 참고로 패시브 스킬도 포함이며, 반경 밖에서 스킬을 써도 영역 내에 들어선 순간 소멸하기에 원거리 요격도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결코 무적이란 뜻은 아니다. 먹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마법이나 신성력은 디스펠 불가.’ 심지어 페널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불언령]은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고요의 정수는 오직 대인전만을 위해 존재하는 정수나 다름없으며……. 패시브 스킬은 더욱더 가관이다. (P) 고요한 제어 — 이를 제외한 모든 정수의 스킬이 비활성화되며, 정수로 인해 획득한 능력치가 2배 증가합니다. 2배의 스탯을 얻는 대신 여태까지 먹어둔 모든 정수의 스킬을 포기한다는 극 하이리스크의 스킬. 덕분에 나는 이 정수를 거의 먹지 않았다. 그야 내 목표는 언제나 게임의 클리어였으니까. 애초에 이런 걸 300번이나 먹었던 것도 다른 루트를 한번 깨볼까 해서였다. [탐험가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때, 저희와 함께 세상을 뒤집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게임 내에서 명성을 얻으면 가끔씩 열리던 루트. 오르미 혁명단과 협력해 반역 루트를 깨보려고 했던 시절, 나는 항상 고요의 정수부터 먹었다. 확실히 대인전에는 이만한 정수가 없거든. 뭐, 그래도 결국 한 번도 성공은 못했지만. 수없이 많은 데드 엔딩을 맞이한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게임 구조 자체의 문제인지라 반역 루트를 깨는 건 불가능하다고. 아, 물론 그다음부터는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때마침 고요의 정수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꽈악-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그 물건을 손에 쥐었다. 반역자, 뤼헨프라하의 공략에 핵심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것. 사실 아까 쓸까도 싶었지만……. 그땐 아멜리아를 챙기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기에 아껴두었다. ‘후, 디데이를 다르게 말해줄 줄 알았으면, 미리 걔한테도 말해주고 이걸 주는 건데.’ 굳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건 당연히 같이 움직일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설마 술에 마비약을 타서 기절을 시킬 거라고. 위기 상황에서 꺼내는 게 더 폼 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스으윽. 점점 가속도가 붙어 이제는 초 단위로 내려가기 시작한 수심. ‘이제 허리쯤 오니까 놈도 시야가 돌아왔겠네.’ 나는 아멜리아가 떠난 통로를 응시했다. 떠나기 전에 나눈 대화가 떠올라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믿겠다.] [그래, 믿어라. 네 언니 문제는—] [언니를 말한 게 아니다.] [……어?] [언니가 아니라, 네가 죽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겠단 뜻이었다. 그러니…… 죽지 마라.] [어, 어……. 알았다…….]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들으니 왠지 낯이 간지러워 시선을 피했고, 이는 아멜리아도 비슷했는지 ‘그럼 먼저 가겠다.’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 ‘왔구나.’ 저 멀리서 철렁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서 나도 잡념을 지워내고, 소리에 집중했다. 철퍽, 철퍽.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나는 몸에 긴장을 불어넣으며 상체를 웅크렸다. 그리고……. 지이이익. 한쪽 손으로 꽉 쥐고 있던 그 물건. 스크롤을 찢었다. 솨아아아아- 빛을 자아내며 피부에 깃드는 마력 입자. 마력 입자가 뿜어내는 빛은 미약했으나, 어두운 하수도에서는 그조차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철퍽. 가까워지던 소리가 멈추었다. 두근. 나쁜 일을 꾸미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뛰었다. “…….” 그렇게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제하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딱 3초 정도는. 철퍽-! 뛰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몸을 굽혀 물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 놈이 갈림길 앞에 나타난 순간. “……!” 기습적으로 일어서며 달려들었다. 콰아앙-! 오러와 망치가 맞닿으며 풍압에 의해 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한계까지 끌어 올린 집중력 덕분인지 모든 시각 정보들이 선명하게 뇌리에 전해진다. 수천 개의 알갱이로 쪼개진 물방울. 그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표정. 놈은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아멜리아가 어딨는지 찾는 건가?’ 거, 바바리안 섭섭하게. 타닷.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다시금 뛰어오르며 놈과의 거리를 좁힌다. 놈은 이미 검을 횡으로 휘둘러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할 작정인 듯한데… 덕분에 검의 궤적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부분이었다. 타닷. 나는 멈추지 않고 대시했다. 이대로라면 첫 수교환에서 어깨 뒤까지 밀려난 망치가 놈의 몸에 닿기도 전에 내 몸에 저 검이 먼저 닿을 게 분명했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애초에 망치로 후려치려던 것도 아닌데. 스윽. 앞으로 손을 뻗는다. 오러 유저와의 전투에서는 무용지물인 방패를 진작 아공간에 집어넣은 덕에 남게 된 손이다. 다만 검사라고 검만 쓸 줄 아는 건 아니란 걸까? 녀석은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손으로 내 손을 쳐내기 위해 움직일 뿐. 툭! 이내 녀석의 손이 내 팔목에 부딪쳤다. 근력에서도 밀리지 않는 놈인지라, 팔이 밀려났다. 그 와중에도 검은 내 허리를 가르기 위해 휘둘러지고 있었고, 내 두 발은 허공에 뜬 상태라 뒤로 물러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확실히 이걸 보면 녀석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단지, 조금 안일하였을 뿐. “……!” 살과 살이 닿으며 미리 찢어둔 스크롤의 조건이 만족됐다. 솨아아아아아아-!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깔의 마력 입자. 아마 게임이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캐릭터가 리카르도 뤼헨프라하와 ‘결속’ 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불언령]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나는 즉시 준비해 둔 커맨드를 읊었다. ‘초월.’ 그리고. ‘도약.’ 타닷. 허공을 지르밟은 순간. 파아아아앗-! 물살을 튀기며 몸이 직선으로 가속한다. 검의 궤도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안쪽을 항하여. 이왕이면……. ‘거대화.’ 몸무게까지 뻥튀기를 한 상태로. 마치 엑셀을 풀로 밟은 8톤 트럭처럼. 콰아아아아앙-! 더 볼 것도 없었다. “커헉……!” 몸통박치기의 효과는 굉장했다. *** 반쯤 물에 잠긴 하수도를 빠르게 달려나가던 아멜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물결을 타고 전해진 진동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거리가 한참 떨어진 지점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들렸던 굉음. 아무래도 저쪽도 전투가 시작된 듯한데……. 철퍽, 철퍽- 아멜리아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수도가 붕괴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던데.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소리가 났을까. 혹시, 어딘가 잘못된 거는 아닐까. 여러 의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믿겠다고 말하였으니까. 어찌 보면 그것도 하나의 약속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얀델이 뤼헨프라하를 상대로 승리했다면, 어째서 그가 마지막에 우리 자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그녀는 그러한 모순조차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리고……. 철퍽. 계속해서 걸음을 뻗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하수도였으나, 원하는 지점까지 찾아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러 공적을 인정받고 노아르크 내에서 상당한 위치에 오른 그녀는 이미 몇 번이고 이 길목을 지나쳤다. 당연히 오늘을 대비해 모두 외워두었다. ‘여기서 왼쪽. 그리고 그다음에 세 갈래가 나올 때까지 직진.’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은 성능의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아멜리아는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툭. 아멜리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덕분이다. 다섯 개의 통로가 자리한 갈림길. 물에 젖은 사체가 둥둥 떠올라 있는 것이 곳곳에서 보였다. 모두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멜리아는 기억을 되짚었다. [라우라! 아멜리아! 뭐 하는 거냐! 깨어났으면 어서 너희도 싸워!] 물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에도 전투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아멜리아는 명령대로 무기를 꺼내들고 참전하려 했지만, 언니가 이를 말리며 한 곳을 가리켰다. 유일하게 길을 알고 있던 멜타 상단 출신의 탐험가가 사체들의 장비 몇 개를 챙긴 채 혼자 달아나고 있었다. 따라서 둘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곧장 그 길잡이가 사라진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여기.’ 기억 속의 그 통로를 떠올린 아멜리아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고, 머지않아 찾던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기 나는 그냥 잠시 피하려고…….” 어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변명을 하는 길잡이. “됐어, 너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런 길잡이를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리는 사내, 더르본. “감히 너희가 나를 배신하고 도망을 쳐?” 이내 사내가 언니의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언니는 감히 막을 생각조차 못하며 이를 감내했다. 여기서 더 분노를 사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르본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무기를 겨눈 채 싸우던 이들과 편을 이루고 있었다. ‘숫자가 줄을 만큼 줄었으니, 더 싸워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길잡이가 사라진 것도 한몫 했을 테고.’ 실로 짐승 같다고나 할까. 이러고 나서도 막판에 가서 또 서로를 배신하고 장비를 약탈하려 들지 모른다. 뭐, 정말로 그럴지 확인할 기회는 없겠지만. 꽈악. 이내 아멜리아는 하나 남은 팔로 단검을 쥐었다. “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잘못은 아는군.” “도, 동생은 그냥 따라왔을 뿐이니…… 끄윽!” “그래, 걱정 마라. 이번에도 따라 보내줄 테니까!” 언니의 목을 움켜쥔 사내가 도끼를 내리찍으려던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서걱-! 사내의 팔이 도끼를 쥔 채로 물에 빠졌다. 절단의 고통에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튼 반면, 주변에 있던 자들은 아멜리아를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에, 에밀리?!”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굳이 대화를 할 가치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무감정한 눈으로 한 명씩 순서대로 그들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어, 자, 잠깐! 나, 나는 기, 길을 알고……!” 필요성을 피력하려던 길잡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녀는 도시까지 이어진 길을 알고 있기에 살려줄 이유가 없었다. 서걱-! 깔끔하게 정리된 장내. 레인웨일즈 자매가 벌벌 떨며 이쪽을 경계했다. 그러나 한 가지가 궁금했을까? “저, 저기…….” “아멜리아……!” 어린 시절의 자신은 언니의 다그침에도 아랑곳 않고 물었다. “페, 펠릭 바커는 어떻게 됐나요?” “죽었다.” “저, 정말인가요? 그,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질문은 여기까지.” 아멜리아는 대화를 끊었다. “이럴 시간이 없으니, 어서 따라와라.” 길었던 이야기의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326화 우로보로스 (1) 결속. 사용 시 동료로 인식을 하게 해주어 미궁 포탈을 탈 때 함께 이동이 가능하며, 몬스터 처치 후 경험치를 나눠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보조 마법. 이 마법이 [불언령]의 파훼법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창 반역 루트를 진행하던 때였다. 고요의 정수를 먹고, 300회가량의 트라이 끝에 비로소 도착한 왕가의 심처. 좀만 더 가면 왕의 면상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던 그 시기. [캐릭터가 수호기사단원과 ‘결속’ 되었습니다.] 왕가의 NPC들이 나에게 이 방법을 쓰며 내 오랜 노력 위에 똥을 뿌렸다. 뭐, 머지않아 이 파훼법을 역으로 파훼하는 방법도 찾아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 얼굴 한번 못 봤지.’ 결국 나는 반역 루트를 포기했다. 아마 이게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처음으로 했던 포기가 아닐까 싶은데……. 무의미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때로는 실패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도 있으니까. 바로 이렇게. “커헉……!” 결속에 이은 거대 몸통박치기 콤보. 이에 적중당한 뤼헨프라하의 몸이 허공에 떠올라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만, 이를 지켜보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격투 게임도 그렇지 않은가? 적을 공중에 띄워 반항 불가 상태로 만들었으면 어떻게든 연계기를 꽂아 넣어야지. ‘초월.’ 커맨드를 읊는다. 녀석의 몸이 범위 20m 밖으로 나가기 전에. ‘폭풍의 눈.’ [스톰거쉬]의 정수를 먹으며 얻게 된 그랩기. ‘어쩌다 보니 PVP 최적화 세팅이 됐단 말이지.’ 길게 뻗은 하수도에 강한 돌풍이 일며 날아가던 놈의 육신이 방향을 바꿔 나를 향해 온다. 따라서 스매싱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지금.’ 적당한 타이밍에 있는 힘껏 [휘두르기]. 콰직-! 망치의 추가 날아든 곳으로부터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만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야 내가 노렸던 곳에서 난 소리가 아니거든. ‘쩝.’ 반들반들한 관자놀이가 목표였으나, 애석하게도 놈은 팔을 들어 올렸다. 돌풍에 끌려오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급소를 보호하려 한 것. ‘그래도 팔 한쪽은 가져간 셈인가.’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기형적인 각도로 꺾여서 덜렁거리는 팔. 저것만 봐도 일단 상당한 피해를 입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 타닷. 충격에 의해 측면의 벽을 향해 날아가던 놈이 허공에서 균형을 잡더니, 한쪽 다리로 벽면을 박찼다. 그리고……. ‘얘도 진짜 전투 경험이 많기는 한가 보네.’ 나와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놈은 도리어 나를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이익-! 보는 것만으로도 예리함이 느껴지는 흉흉한 오러. 놈이 나보다 민첩 수치가 월등했기에, 현 자세에서 망치로 막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타닷. 이번엔 그냥 내가 물러났다. 하, 만약 뒤로 튀었던 거면 계속 추격하면서 기세를 이어갔을 텐데. 철퍽. 그렇게 10m 정도 거리가 벌어지며, 잠시간 소강상태가 생겨났다. 놈은 한쪽만 남은 팔로 쥔 검으로 기수식을 취하며 내게 물었다. “어떻, 게 알았지?” 중간에 호흡이 달리는 걸 보면 몸통 박치기와 팔 분쇄로 인한 대미지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음, 그럼 말을 걸은 건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적의 상태를 분석하던 나는 이어진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정수에, 대해서, 아는 자는 없을 텐, 데…….” 자신이 부딪친 모순의 해답을 바라는 목소리. 그래,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구나. 하긴 제 딴엔 이 약점을 감추려 노력했을 것이다. 늘 혼자 다니던 것도 그래서일 테고. 함께 다녀도 그들과 ‘결속’을 맺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다. 그 순간 [불언령]의 약점이 드러나니까. ‘이제 보니 커뮤니티에서 파멸학자한테 질척거리던 것도 [불언령] 때문이었던 거 같네.’ 왕가 타도를 위해서, 그는 ‘결속’을 맺지 않아도 힘을 잃지 않는 동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마법사라든가 신관이라든가. 다만 신관이 왕을 죽이는 데 협력하지는 않을 테니, 파멸학자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높아졌겠지. 최정상급 마법사인 데다가 같은 ‘악령’이니까. “그래, 악령이었군…….” 이내 놈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작 나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결론을 내린 모양. 뭐, 틀린 결론은 아니었지만……. ‘역파훼법은 알지 못하는구나.’ 대화를 통해 놈이 역파훼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혼자이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나는 망치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20년 전이라서 다행이네.’ 물론 미래에서는 어떨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다시 만났을 땐, 이 부분이 보강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정수도 몇 개 갈아 치웠을 수도 있을 테고. 검술도 완성의 단계에 오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20년 뒤 놈의 악명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이기지 못할 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지.’ 나는 커맨드를 읊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그냥 가만히 있던 이유가 뭐겠는가. ‘초월.’ ‘폭풍의 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쿨타임이 다시 돌았다. *** 전투의 국면은 꽤 단순하게 흘러갔다. 콰앙, 콰앙-! 오러와 더블 넘버스인 악마분쇄기가 쉴 새 없이 격돌하며 수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미친, 뭐 이리 잘 싸워?’ 나는 처음으로 벽을 느꼈다. 스펙에서 밀린 적은 여럿 있었지만, 무술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인 탓이다. 서걱-! 아차하는 순간에 베어져 나가는 살가죽. 놈의 검은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였고, 어느 때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놈의 검은 막눈인 내가 보기에도 명확한 형태가 있었고, 식이 있었다. 쉽게 말해, 생전 처음 겪는 타입의 적이었다. 암만 기사라고 해도, 막상 개싸움으로 몰고 가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순간의 판단에 의해 승부가 정해지기 마련이었건만. 서걱-! 점점 몸에 쌓이는 상처가 늘어난다. 자연 재생에 의해 회복이 되는 것보다 상처가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치명적인 부상은 없다. 내가 잘 피해서 그런 건 아니고, 주기적으로 포션을 까고 있는 덕이다. 치이이이이익-! 깊게 베인 상처에서 기포가 끓으며 살이 차오른다. 짧게 상태만 확인한 나는 뒤로 백스텝을 밟았다. 그리고……. ‘초월.’ ‘폭풍의 눈.’ 쿨타임이 다시 막 돌은 그랩기를 이용해 놈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처음엔 단지 몰랐기에 당했다는 걸 증명하듯, 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끌려오는 속도를 이용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후, 이제는 타이밍도 귀신같네. 앞으로는 그냥 그랩기는 봉인하든가 해야지. 타닷. 검을 피해 한 번 더 뒤로 물러난다. 이에 놈은 천장을 밟으며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오며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지?” 콰아아앙-! “그 여자와 동료인 걸 보면.” 콰아아앙-! “역시 왕가에서 보낸 자인가?” 거, 사람 정신 사납게. 말 한번 많기는. 전투 내내 입을 쉬지 않는 놈의 모습에 짜증이 나는 한편 이런 의문도 들었다. ‘왕가에서 보냈냐니? 갑자기 왜 왕가가 나와?’ 물론 짧게 스치고 지나간 의문이었다. 오르큘리스가 점거 중이던 동부 지역을 왕가와 성주의 연합군이 침공한 상황 아니던가. 이런 오해가 생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정말 궁금한 건 단 하나. ‘근데 이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놈을 여기서 죽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원 역사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때에 이놈은 아멜리아의 앞에 나타나게 되니까. 하지만……. ‘이기는 건 힘들어도, 딱히 질 거 같진 않단 말이지.’ 맘만 먹으면 이대로 몇 시간이고 이 자리에 붙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뭐라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예상 못한 변수가 생기는 것만 아니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응?’ 그때였다.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하듯. 철퍽.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나와 녀석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거리를 벌리며 인기척이 난 방향을 빠르게 확인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 있었다. ‘니미럴.’ 그 누군가는 내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니 뤼헨프라하 쪽도 저 남자에 대한 정보가 있는 듯했다. “……제롬 세인트레드.” 뤼헨프라하가 짧게 중얼거린 즉시. 통로 반대편에 있던 은발의 기사도 입을 열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애틋한 통성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소리와 눈빛에서는 서로를 향한 증오와 살의가 넘실거렸다. 하긴, 왕을 죽이겠단 ‘반역자’와 왕가의 수호자가 만났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끝냈다. ‘오케이, 둘이 싸움 붙이고 난 튀어야겠네.’ 빛의 기사가 하수도로 따라들어온 원인은 필시 내게 있을 테지만, 저 둘이 앙숙임을 감안하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튈 각을 재던 차였다. 애석하게도 나보다 판단이 빠른 놈이 있었다. “둘.” 뤼헨프라하가 알 수 없는 한 음절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 옆에 나 있던 갈림길을 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둘’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이게 이렇게 된다고?’ 놈은 내가 저 새끼랑 같은 편이라고 오해한 거다. *** 뤼헨프라하가 나를 나를 왕가 출신으로 오해하던 걸 제대로 풀지 않았기에 생긴 실착이었다. 하기야 내가 쟤였어도 이 상황에서 이 대 일로 싸우는 건 부담스러웠을 터. 그 심리는 납득이 간다. 뭐,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공감 따위가 아니겠지만. ‘아… 일단 나도 튀자.’ 뤼헨프라하의 도주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발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간절히 바랐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나 말고 쟤 따라가. 응? 너네 왕 죽이겠다는 미친놈이잖아. 타닷. 내가 뛰기 시작하자, 약간의 텀을 두고서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를 따라갈지 고민을 끝마친 듯한데……. 촤앗. 하, 그래.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철퍽, 철퍽-! 등 뒤에서 놈이 따라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놈은 ‘반역자’보다 내가 갖고 있을 기록의 파편석을 회수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음, 아니면 아까 거로 뒤끝이 깊게 남았거나. 번뜩-! 뤼헨프라하가 도주하며 [불언령]이 해제됐는지, 놈이 [빛의 관문]을 사용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까는 거리가 멀어서 몰랐는데 인상이 달랐다. ‘뭐야, 얘 왜 눈이 돌아갔어…….’ 전에 만났을 때의 호구 같은 인상은 어디 가고, 용서를 모르는 집행관 같은 눈빛을 내게 쏘아내고 있는 기사가 보인다. “날 우롱하고서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나.”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몰랐다. 그 있지 않은가. 쉽고 빠른 길이래서 그것만 골라서 막 달렸더니 어느샌가 주변에는 적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런 거. 아, 물론 그렇다고 후회가 된단 뜻은 아니다. 애초에 속은 놈이 잘못이지. “네놈을 응징하기 전에 하나만 묻겠다.” 놈이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을 내게 겨누며 말을 이었다. “뤼헨프라하, 그자와는 무슨 관계지? 혹시 기록의 파편석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도 그자인가?” 조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뤼헨프라하는 내가 이놈이랑 한편인 줄 알고, 이놈은 내가 그놈이랑 한편인 줄 알고. 고래 등 사이에 낀 새우 꼴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꿈틀거려 봐야지.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래, 눈치챘나.” 오해를 푸는 대신 그냥 이를 긍정한다. 이러는 쪽이 당장은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 실제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놈의 동공이 떨렸다. “설마, 이미 그자에게 그 물건을 넘긴 건가?” “글쎄.” 수사자 가면을 쓰고서 알게 됐다. 거짓말의 기본은 스스로 납득하게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어떨 거 같나?” 알아서 상상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놈이 열심히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둘로 나뉘어서 도망친 건가.” “빛의 기사란 명성을 허투루 얻은 건 아닌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타이밍에 맞춰 극찬까지 해주자, 놈이 입술을 짓눌렀다.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거의 다 된 밥에 마지막 조미료를 뿌렸다. “단장님께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덤벼라.” 어떻게든 대업을 위해 시간을 끌겠다는 의지의 표출. 다만 제롬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결의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시간을 끌려고 해봤자 [빛의 관문]을 써서 나를 지나쳐 가면 그만인 놈이니까. 사실 내가 바라고 있는 것도 바로 그거였— “크흐흐…….”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웃어. 실성이라도 했나?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놈이 한순간에 웃음기를 싹 털어내며 나를 응시했다. “또 속을 뻔했군.” “……뭐?” “네 말이 진짜건 아니건 상관없다. 우선 네놈을 죽이고 확인해 보면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늦을—” “늦어도 상관없다. 과욕을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정도를 밟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이내 녀석이 나를 보며 멋들어지게 말하였다. “그것이 기사의 길이다.” 아무래도 놈은 사기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신만의 방법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조용히 망치를 들었다. 더 말을 이어가 봤자 놈이 흔들릴 거 같지 않았다. “…….” “…….” 그렇게 정적이 이어졌다. 서로가 무기를 휘두르기 직전, 호흡이 교차하는 승부의 순간. 돌연 뒤에서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정면에 제롬이 있는 탓에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인지 인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네는 사람을 속이는 데 아주 도가 텄구만 그래.” 아우릴 가비스. 다만, 제롬의 경우에는 그와 초면이었을까. “……정체를 밝혀라, 늙은이.” 은발의 기사가 고압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예의가 없는 친구로군.” 아우릴 가비스의 목소리가 하수도에 울려 퍼짐과 동시. “……컥!” 빛의 기사라 불리는 남자가 검을 쥐지 않는 손으로 목을 감쌌다. 표정은 호흡이 곤란한 사람처럼 힘겨워 보였다. 시선은 내 등 뒤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 동공에 실린 것은 경악의 감정이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 “자네에겐 딱히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군.” “커, 컥……!” “이만 사라지게.” 아우릴 가비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순간, 제롬의 몸이 허공에서 길게 늘어졌다.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설마 죽은 건가? 왕가 최강의 기사라는 놈을 저렇게도 쉽게, 마치 파리라도 죽이듯이? 내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는 않았을 걸세. 아마 왕궁에서 깨어나겠지.” 아, 혹시 그 정수를 말하는 건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상념을 애써 털어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제야 나를 봐 주는군.” 인자하게 웃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그야 입꼬리는 분명 휘어졌는데, 눈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기 무섭게 아우릴 가비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했던 바바리안 말일세. 토르의 아들 비욘이라던.” “…….” “도시에 가서 물어보니, 친절한 젊은이가 내게 말해주지 뭔가? 항상 얼굴을 덮는 두터운 투구를 쓰고 다녀서 철가면이라고 불린다고.” “…….” “마치 자네처럼 말이야.” 그래, 다 알고 왔구나. 327화 우로보로스 (2) 그것은 마치 생명을 잃은 몬스터와 같았다. 솨아아아아-! 하수도 수면 위에 축 늘어진 제롬의 몸이 빛 입자로 잘게 쪼개져 휘날린다. 몇 가지 물품들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 남았으나, 대부분은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비싸 보이던 검과 갑옷 등의 장비는 모두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이블루스인가…….’ 짐작 가는 정수는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테지만. “…….” “…….” 하수도의 물 흘러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정적. 안면에 마비라도 온 듯 입만 웃고 있던 아우릴 가비스가 입을 열었다. “묻겠네, 자네는 악령인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최종 확인이었다. 하긴, 여기까지 왔으면 도시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6등급 탐험가, 니벨즈 엔체가 ‘철가면’이란 건 이미 확신했을 터. ‘그럼에도 굳이 묻는 건 철가면이 나인지 내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 이거겠지…….’ 손짓 하나로 왕가 최강의 기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걸 직접 보았던 나는 바바리안 유교 스킨 모드를 활성화하고서 입을 열었다. “악령이요? 어디서 착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 내 정중한 어조에 아우릴 가비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리를 뱉었다. “거짓말이로군.” 후, 역시 여기서도 거짓말 탐지기를 돌릴 수 있던 거구나. 내심 예상하던 거였으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조금은 입맛이 썼다. 다만 좌절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야 여기는 커뮤니티 안이 아니잖아? 자칫했다가 물리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후후, 역시 어르신은 속이질 못하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빠르게 태세를 변환한다. 더 이상 속이는 것은 기만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으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판단. “예, 어르신이 찾던 사람은 제가 맞습니다. 밖에서 만날 줄은 몰라서 당황했던지라 솔직히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요.” “당황해서 그랬다라…….” “예, 당황해서요. 그리고 제가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당찬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래… 생각해 보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 그렇다. 나는 그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도시 상태에 대해서 물은 것? 성주가 왕가 세력과 손을 잡고 기습했다고 답했다. 사오 개월 정도 전에 바바리안 한 명이 들어오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있었다고 답했고, 그 바바리안의 이름을 묻기에 ‘토르의 아들 비욘’이라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예, 어르신 앞이라고 하니 암만 그래도 도무지 거짓말은 나오지 않더—” “그런데 말일세.” “…예?” “거짓말을 한 것보다, 그런 식으로 속는 게 훨씬 더 기분이 나쁜 건 알고 있나?” “아…….” 정론이다. 파훼법이 없는 건 아니겠다마는.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부터 박은 뒤. “제가 정신병이 있어서.” 이유를 첨부한다. “…정신병?” “예. 여기서 살아가려다 보니 자꾸 제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속이게 되지 뭡니까? 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일종의 책임 분산이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환경에 나를 몰아넣은 건 이 늙은이니까. “허허…….” 순식간에 제1 책임자가 되어 버린 아우릴 가비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는 눈도 웃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당돌하게 나가니 본인도 상황이 웃기긴 했던 모양. 오케이, 그럼 이제 분위기는 좀 유해졌겠다……. “그보다, 여긴 저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렇네.” “흐음, 이렇게 사람 뒷조사를 하고 그러시는 건 좀 기분이 그렇습니다마는…….” 내가 말꼬리를 흐리며 부담스럽다는 듯 눈짓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네를 만날 수 없지 않은가.” “예? 아……. 맞다. 거기 커뮤니티는 갑자기 왜 닫힌 겁니까? 혹시 어르신이 저를 추방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그거라면 사정이 있었네.” “사정이라니요?” “왕가의 개입이 있었다고만 해두겠네. 지금은 어느 정도 복구를 한 상황이지.” “오, 그럼 다음 달부터는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그렇지 않네. 얼마 전에 한 친구에게 소유권을 넘겼거든. 자네는 몰라도 이제 나는 보기 어려울 걸세.” “한 친구라면… 혹시 GM을 말하는 겁니까?” “아마 그렇게 되겠지.” 이후 호기심이 확 생긴 나는 GM이 누군지에 대해 물었으나, 아우릴 가비스는 답하지 않았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런 느낌보다는 토라진 것에 가까웠다. “글쎄, 굳이 비밀로 해야 할 이유는 없네마는……. 그래도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 보게.” “예?” “자네가 날 거래 대상으로만 본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 예…….” 거, 나이가 300이 넘는다는 양반이 이런 거로 삐지기는. 거짓말 판독기 같은 걸 달고 다니면서 속은 게 잘못이지. “근데 그래서 그 말투는 언제까지 쓸 건가?” “예?” “그곳에서는 당신이니, 뭐니 하며 그랬지 않나. 왠지 그런 말투를 쓰니 다른 사람 같아서 어색하군.” “하하, 어르신도 참. 거기서는 그냥 컨셉 같은 겁니다.” “컨셉?” “예, 또 하나의 캐릭터 같은 거죠. 얕보이지 않기 위한 약자의 발버둥이라고 할까요? 제가 미쳤다고 어르신께 방자하게 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흐음, 잘은 모르겠지만 뭔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얼추 알 것도 같군.” 아우릴 가비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잠깐의 정적이 생겼다. 그의 입이 열린 건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였다. “아무튼, 자네를 이렇게 찾아온 건 우리의 관계를 다시 시작해 볼까 해서라네.” 마치 헤어진 애인에게 질척거리는 듯한 워딩. “……예?” 당황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니, 노인네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자네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분명한데, 빙빙 돌기만 하는 관계는 피차 답답하지 않겠나.” “아…….” “그래서 선물도 준비해 왔네.” “선물이라면…….” 나도 모르게 그 단어에 몸이 움찔했다. 기대가 되는 한편으로 걱정도 됐다고 해야 하나?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읽을 수가 없다. “긴장하지 말게. 나쁜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알다시피 나는 자네가 심연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있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는 날 위한 것이기도 하지.” 아오, 말이 왜 이렇게 긴 건지. “그렇군요. 그래서요?” “자네가 앞으로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능력일세.” 그리 말한 아우릴 가비스는 ‘선물’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내게 영구적인 버프를 걸어주겠단 거였다. “그러니까, 그걸 받으면 ‘검증’ 마법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어긋난 신뢰’ 같은 심문형 아이템들에도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것, 맞습니까?” “정확하네. 육신에 보호막을 거는 것이라, 정신이 개방된 상태에서는 효과가 없겠지만.” “정신이 개방된 상태라니요?” “예를 들면, 매달 자네가 불려가는 그곳 말일세.” 아, 영적세계에서는 안 통한다는 거구나. 그럼 원탁에서 마냥 거짓말을 씨불이는 건 불가능하겠네. “자, 그래서 어떤가 내 선물이?” 나는 짧게 고민했다. 일단 굉장히 도움이 되는 능력임은 틀림없었다. 자기 입으로 말한 거니, 정말로 저 선물을 받고 나면 ‘어긋난 신뢰’ 같은 거에는 당하지 않게 되겠지.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뭔가 수작질을 몰래 할 것도 같단 말이지.’ 나는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만약 아우릴 가비스가 선물과 함께 위치 추적 바이러스 같은 걸 심어놓으면 이를 찾아내서 제거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제는…….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거고.’ 빛의 기사를 손짓 한 방에 골로 보낸 늙은이다. 쉽게 말해, 내게 해가 될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힘으로 밀어붙여서라도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해주시는 겁니까?” “그게… 실은 이미 해두었네. 하수도에서 자네와 다시 만나자마자.” “예? 하지만 그런 낌새는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내 특기라서 말일세.” 아, 그렇구나. 처음부터 나한테 선택지가 없던 건 알았는데. ‘이건 좀 기분이 더럽네.’ 어쩐지 아까부터 과거형으로 말하더라. *** ‘선물’에 관한 얘기가 일단락된 후. 아우릴 가비스는 딱 잘라 말했다. “미리 말하네만 강압적으로 자네를 통제하거나 할 생각은 없네.” 듣던 중 좋은 소식이었다. 저 말이 언제까지 지켜질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마법으로 목을 조르며 협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역시 어르신입니다. 존경합니다.” “허허, 말은…….” 내가 입 발린 말을 하고, 노인네도 겸허하게 웃었으나 결국 우리 둘 다 이게 헛짓거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사회 생활에서는 가식도 예의인 법. 나는 하하호호 웃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하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강압적으로는 안 하신 댔죠? 그럼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모쪼록 건강하십시오!” 어떻게든 아우릴 가비스를 떨구고, 아멜리아를 구하러 이동하는 것. 그리고……. 2. 노인 착취. 아예 아우릴 가비스의 도움을 받는 것.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피해보려 했으나 결국에는 이렇게 다시 마주했지 않은가. 심지어 몰래 떼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차피 1번을 골라도 이 스토커 같은 늙은이는 뒤에서 따라올 게 분명했으니까. ‘얼굴을 가린 철가면도 저 노인네가 마음만 먹으면 떨어져 나갈 게 분명하고……. 거기까지 가면 내 이름을 알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겠지.’ 어차피 내줄 거라면, 주면서 뭐라도 하나 받아내는 게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쪽쪽 빨아먹자.’ 결정을 끝마친 나는 곧바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어르신.” “아, 말해보게.”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것만 들어주시면 제 얼굴하고 이름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얼굴과 이름……?” “예, 그동안 항상 궁금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러네마는…….” “저랑 일 하나만 합시다.” 내 제안에 아우릴 가비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엔 이 새끼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나, 딱 이런 눈빛으로. *** 그 시각. 자매를 이끌고 하수도를 내달리던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가, 갑자기 왜 멈추세요……?” 주변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던 정수의 이능 중 하나가 먹통이 됐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놈이 왔다.”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가 근처에 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놈을 상대 중이던 얀델은 어떻게 됐을까. 불현듯 그러한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아멜리아는 걱정을 떨쳐냈다. 믿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당장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놈이라면, 설마…….” 아멜리아의 읊조림에 라우라가 몸을 움찔했다. 잘린 팔에 대한 질문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가 자신을 쫓고 있음을 이들 자매에게 말해준 적이 있는 탓이다. “그래, 그자다.” 이내 아멜리아가 수긍하자 두 소녀가 긴장으로 몸을 떨었다. 몇 시간 전에 수백 명의 탐험가들을 베어내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아멜리아, 라우라.” “…네, 네!” “잘 들어라. 이제 거의 다 왔다.” 아멜리아는 최대한 짧게 필요한 정보만을 담아 도시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가라,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 자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에밀리 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어린 시절의 자신은 어쩔 줄 몰라했다. 혼자 남는다는 말에 그녀를 걱정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언니, 라우라는 달랐다. “아멜리아, 어서 이리 와.” “하, 하지만…….” “어서!” 의문과 감사의 감정을 품으면서도, 그녀는 냉철하게 동생을 챙겨 말해준 통로로 뛰어갔다. 라우라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훨씬 중요한 단 한 가지가. “…….” 아멜리아는 자매가 손을 부여잡고서 달려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눈을 감을 것도 없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 어두운 통로의 끝. 그 끝에서 그녀가 겪었던 기억. 내가 과연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중한 아이들인가 보군.”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남자의 중저음. “아주 잘 됐어.” 고개 돌려 바라본 사내, 리카르도 뤼헨프라하는 씨익 미소 짓고 있었다. “잃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아멜리아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328화 우로보로스 (3) 누군가는 미련하다 여길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며, 모두가 한 번씩은 상실의 경험을 하게 되는 세상이니까. 너무나도 흔해 빠진 비극. 몇몇은 놀라기도 할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던 그 여자가 고작 가족의 죽음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파멸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누군가는 나약하다 여길 것이다. 20년이란 세월 동안, 모두가 이겨낼 수 있는 일을 혼자서만 이겨내지 못했다고. 아멜리아 본인이 느끼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푸욱-! 그럼에도 언니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항상 어리고 손이 많이 가던 동생의 머릿결을 쓸며, 많이 힘들었겠구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서. 왜 그런 짓을 했냐는 질책마저 뒤로하고서, 고생 많았다며 꽉 끌어안아 주었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껄끄럽게 여기고, 누군가는 감정을 모르는 냉혹한 여자라며 손가락질한대도. 언니에겐 눈물 많고 어린 동생일 뿐일 테니까. 이 세상에서 자신을 그렇게 여겨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분명 그랬을 테니까……. “미, 안…….” “누구에게 사과하는 거지?” 아멜리아는 복부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뒤로하며 눈을 감았다. “언니…….” 결국 무엇도 이뤄내지 못했다. 20년간 오늘을 대비해 힘을 키워왔으나, 저 남자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신이 장미기사단과 관계가 있다고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고, 언니가 도망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뭐야, 헛것을 보고 있던 건가.” 사내가 조소를 날리며 검을 비틀었다. 부상 부위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달아나게 둘 거 같으냐?” 선명한 통증은 그녀의 정신을 현실로 불러왔다. “너도 봐야지, 내가 겪어야만 했던걸.” 이내 검을 뽑으며 아멜리아의 몸이 쓰러졌고, 사내는 그런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서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후 벌어질 일들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했다. [잃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언니를 해할 것이다. 그때 그날과 같이. 철퍽-! 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가슴이 울렁인다. 의식이 흐려지며, 눈을 뜰 때마다 앞에 보이는 장면이 바뀌었다. “역시 멀리는 못 갔군.” 사내의 읊조림. “어, 언니…….” “먼저 가! 여기는 언니가……!” 그날에도 있었던 대화. “아멜리아……!” 어린 시절의 자신을 향하는 검. 그리고……. 푸욱-! 동생을 끌어안은 언니. “언니……!!” 사내의 검은 그때처럼 언니의 흉부를 꿰뚫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건가…….’ 비로소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이것이 20년에 걸친 소망의 끝이라는걸. 그래서 그 둘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는걸. “좋은 표정이군.” 현실에선 멍청하고 나약한 인간 여자만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푸욱-! 이내 사내가 언니의 몸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아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의식이 흐려지며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피비린내가 풍기는 어두운 하수도. 콰아아앙-! 통로를 가득 메운 굉음과 함께. “어휴, 뭘 울기까지 하냐.” 차갑게 식어가는 피부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끝나지 않았다니? 대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생 많았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좀 쉬고 있어.” 그 한마디에 몸에 깃들어 있던 긴장이 풀리며 눈이 감겼다. “일어났을 땐 전부 끝나 있을 테니까.” 그녀의 의식이 허락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 아멜리아가 의식을 잃음과 동시에, 나는 크게 외쳤다. “뭐 하냐! 언니를 데리고 도망쳐라!” 어린 시절의 아멜리아. 줄여서 응멜리아를 향한 외침이었다. “아, 아……!” 응멜리아는 내 지시에 잠깐 얼 타는 듯하더니, 작은 몸으로 언니를 둘러메고 뛰기 시작했다. 후, 그럼 다음은 늙은이한테 맡기면 되겠고……. 나는 시선을 이동했다. “넌……!” 뤼헨프라하가 당황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주변을 살피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빛의 기사’도 같이 온 건지 확인하는 거 같은데……. ‘이 새끼도 진짜 웃기네.’ “그럴 거면 그냥 튀든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와?” 내 물음에 놈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할 뿐. “너… 설마 나가는 길을 찾다가 헤매서 여기까지 온 거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한 질문. 이에 놈이 짧게 답하였다. “……운명이 날 이끌었을 뿐.” “허, 운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기도 차지 않아 웃음이 나왔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운명’이란 말도 크게 틀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면, 그것이 과연 운명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놈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나저나… 혼자 온 건가?” “그래.” 빛의 기사랑은 애초에 친구도 아니었어서 말이지. 숨길 일도 아니기에 그냥 긍정해준 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야, 근데 하나만 더 묻자. 얘한테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냐?” “…네가 알 필요는 없다.” “거, 까칠하기는.” 그리 말하며 나는 살짝 시선만 움직여 아멜리아를 확인했다. 육안으로도 구별이 가능할 만큼, 부상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난입하기 전에 결속 스크롤을 한 장 더 찢어놨던 덕분이었다. 쉽게 말해, 3인 결속이 되면서 아멜리아도 [불언령]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 ‘아예 깨어 있었으면 좀 더 쉽게 갔을 텐데.’ 약간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동료 영입권(SSR)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생이야 고생도 아니다. 그래, 그러니까……. “비켜라. 그 여자만 내놓는다면 너는—” “뭐래, 침묵 원툴이.” 나는 손을 까딱였다. “잔말 말고 덤벼.” 이번 시간 여행에서 하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었다. *** “허억, 허억…….” 하수도 통로를 내달리던 소녀가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근육은 식혀질 기미가 없었고, 그보다 더한 뜨거움이 흥건하게 젖은 등 뒤에서 전해져왔다. “어, 언니… 괘, 괜찮은, 거지……?” 숨 쉬기도 힘들 만큼 전력을 다해 뛰면서도 아멜리아는 들쳐멘 라우라에게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불길함을 애써 외면하며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몸으로 라우라까지 업은 채 달려서일까? “윽……!” 구보하는 정도의 속도로 달리던 아멜리아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발이 무언가에 걸리거나 한 것은 아니고, 단순히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어, 언니! 괜찮아? 응?” 아멜리아는 넘어지며 비틀린 발목보다도 먼저 라우라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나 상처가 넘어지면서 잘못되진 않았을까 싶었던 것. “아, 멜리아…….” 그때 충격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라우라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언니! 괘, 괜찮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말하지 말고—” “혼, 자…….” 힘없이 흘러나온 음성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으나, 아멜리아는 그 뒤에 이어져야 했을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두고 혼자 가라는 거겠지. 필시 말할 기운만 있었다면, 이미 난 글렀다든가, 그러니 너라도 사는 쪽이 더 합리적이라든가 하는 식의 온갖 이유가 덧붙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아멜리아는 못 들은 척 축 늘어진 라우라의 몸을 조심스레 부축했다. 15cm는 컸던 라우라의 몸이 유독 작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이제 와서 자신의 체력이 회복됐을 리는 없는데. “피…….” 흘린 피 때문이었다. 라우라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명의 무게가 빠져나가며,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 것이다. 아멜리아는 언니의 몸을 벽에 기댄 뒤, 옷을 찢어 상처를 압박했다. 그리고 갖고 있던 포션 전부를 부었다. 저 자리를 벗어나야 한단 생각에 경황이 없었지만, 진즉에 했어야 했던 일이었다. ‘나,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자괴감이 느껴졌다. 항상 침착했던 언니라면, 분명 이런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해나갔을 테니까. “끄으윽……!” 포션에 의해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라우라가 고통스럽다는 듯 꿈틀거렸다. 이마와 목에는 핏줄이 굵게 돋아 있었다. “어, 언니! 좀만 참아 줘…….” 아멜리아는 라우라의 몸을 다시금 업었다. 다만 막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차.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통로가 흔들렸다. 그리고……. 투두두두.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암석이 떨어졌다. 동시에 아멜리아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밀었던 탓이다. 쿠웅-! 앞으로 넘어진 아멜리아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언니가 보였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사랑하는 언니의 하반신이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있는 장면은. “아멜, 리아…….” “어, 언니…….” 아멜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라우라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아멜리아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 힘없이 반쯤 뜨여진 라우라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네가, 원망스럽던, 적도 있었… 어.” “아, 알아. 아, 아무리 언니라도 그랬겠지. 아무튼, 알았으니까 이제 고집 좀 그만 부리고—” “들어……!” 라우라의 외침에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소리는 가래가 끓는 듯했으며, 외침이라고 할 만큼 큰 음성도 아니었으나, 어째선지 거절해선 안 될 것 같은 박력에 몸이 얼어붙었다. 툭. 그런 아멜리아의 뺨에 라우라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아까와 달리 너무도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라, 왔잖니.” “…….” “항상 네가, 바라왔던 거, 잖니…….” 그 말에 아멜리아의 볼을 타고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땀인지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두근-! 아멜리아의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머리로는 애써 부정하려 한들, 결국에는 알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라우라의 말에는 자기 자신이 빠져 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이. “어, 언니… 포기하지 마. 포션도 먹었잖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도, 돌은 걱정 마. 그, 금방 내가 치워줄 거니까. 바, 반드시 그럴 거니까……. 응?” 아멜리아의 애원에 라우라는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물렀다. 물론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괴로운, 기억은 모두 잊어.” “…….” “평범한 삶이… 드디어, 너에게도 시작되는 거야.” 라우라는 경련하는 턱 근육을 억지로 밀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 그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툭.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단검을 뽑아든 라우라가 단검을 꽂아 넣었다. 자기 자신의 목에. 푸욱-! “아, 안 돼……!” 아멜리아는 황급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조금 남아 있던 포션을 상처 부위에 뿌린 뒤, 조금이라도 지혈을 하기 위해 양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 안 돼. 안 돼, 안 돼…….”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울컥울컥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었다. 치이이이익. 끓는 소리를 내며 포션에 반응하던 피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사라져갔다. 피는 끈적거릴 뿐,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아아… 아, 아아…….”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이제 언니는 이곳에 없다. “아아아아아아악!!!” 아멜리아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라우라의 상반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이 한 번 더 붕괴하며 암석을 쏟아냈다. 드드드드-! 아멜리아는 이를 보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함께 마지막까지 있을 셈이었다. 하지만, 잔혹한 세상은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읏!”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쿠웅-! 후두부가 벽에 부딪쳤는지, 시야가 흔들린다.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아멜리아는 잔해에 파묻힌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터벅. 어디선가 들린 인기척. 아멜리아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노인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누, 구…….” 아멜리아의 중얼거림에 노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보았다. 다만 깊게 들여다보면 어딘가 고민하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에휴, 요구하는 게 어찌나 이리 많은지.” 이내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우릴 가비스. 그게 노부의 이름일세.” 329화 우로보로스 (4)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이놈과의 전투는 여러모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귀한 정수의 스킬이나 높은 스탯, 오러 같은 ‘스펙’이 아니라 ‘무기 숙련도’가 전투에서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으니까. 휘익-! 대충 휘두르는 것 같은 검조차 전부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자연스레 다음 수를 위한 안배로 작용한다.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는 영역을 벗어난 레벨. 물론 그렇다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시간만 끌 수 있다면, 나의 승리. 따라서 작정하고 시간을 끌며 놈의 검술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이제 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야 감각과 반사 신경에 의존해서 그때그때 다급하게 놈의 검을 피하고 막았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보인다. 녀석이 이 수를 활용해 다음 수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휘익-! 팔목을 노리는 건 견제가 목적. 뒤로 피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걸 노린 거겠지. 그럼 목이 비어버리니까.’ 어찌 보면 체크메이트라고도 볼 수 있었다. [불언령]이 정상 작동한다는 가정하에는 말이다. 스르륵. [거대화]를 풀자 신체가 줄어들며 녀석의 검이 내 팔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이것까지 예상해서 그은 검이었을까? 휘익-! 놈의 검이 뱀처럼 궤적을 틀며 내 허벅지를 노려온다. 타닷.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다만 녀석은 검을 휘두르며 이 장면까지 보았는지, 잠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검의 궤적을 틀었다. 정신을 잃은 아멜리아를 향해. ‘이런 씹…….’ 신속하게 [초월]과 [폭풍의 눈]을 연계해 놈을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로써 아멜리아는 안전해졌다. 하지만……. 솨아아아아아아-! 이런 경우도 머릿속에 있었다는 듯 놈은 바람을 타고 끌려오며 절묘하게 검을 휘둘렀다. 뭐, 어떻게든 잘 모면하긴 했지만……. ‘이 새끼 대가리는 무슨 슈퍼컴퓨터인가?’ 겪으면 겪을수록 놀아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얼추 다 읽히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문명이기에 농락당했던 현대 바둑 기사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지경. ‘어떻게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배울 수만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말이지.’ 눈요기로 배울 수준의 무술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수준 높은 검사와 생사결을 펼치는 일은 흔치 않기에, 최대한 배우는 마음으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노인네 쪽도 마무리가 됐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차. “으읏…….” 아멜리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의식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부상이 일정 수준 이상 회복됐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오케이, 아멜리아만 깨어나면 2:1로 조질 수 있을 테고…….’ 아마 놈이 나와 전투 중에도 기회만 나면 아멜리아를 노렸던 것도 이게 이유였을 것이다. 빛의 기사 때만 봐도 알 수 있듯, 굉장한 검술과 달리 무인의 자존심 같은 건 없는 놈이었으니까. 불리한 상황이 된다면, 이놈은 튄다. 망설임은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래, 바로 지금처럼.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어차피 튈 거라면 아멜리아가 깨어나기 전인 지금이 적기라 판단했을까? 타닷. 놈이 후일을 도모한다는 전형적인 대사를 치며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고,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티는 안 냈지만, MP가 거의 바닥났거든. 검을 막을 때마다 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휘두르기]를 쓰고, [초월]과 [도약], [폭풍의 눈]을 전투 내내 난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음, 그럼 이쪽은 끝났고…….’ 이내 나는 아멜리아에게로 다가갔다. 호흡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고, 잘려나간 팔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 같— “허허.” 그때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소리가 났다. 이에 황급히 등을 돌리니. “정말 혼자서 그 녀석을 물리쳤군?”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아우릴 가비스가 있었다. *** “어르신께서 도와주셨다면 훨씬 더 편했을 텐데요.” “저 친구와는 아직 만나고 싶지 않아서 말일세.” “그렇습니까…….” 어차피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게 뻔했기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아우릴 가비스의 좌측에는 염력이라도 쓴 것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체가 있었다. 아니,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의식을 잃은 상태의 응멜리아였다. 얘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저쪽도 변수 없이 일이 잘 마무리된 듯싶지만……. ‘확인은 해야겠지.’ 나는 다시금 아우릴 가비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잘 됐네. 자네가 당부한 대로 마지막에 내 이름도 말해줬고.” “라우라는?” “흐음, 갑자기 말이 조금 짧아진 거 같은데…….”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햅니다. 오해.” 내 말에 노인네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더니, 딱히 중요한 건 아니라 여겼는지 피식 웃어넘겼다. “아무튼, 이 여아의 언니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부탁한 대로 약을 먹이고 몸도 모두 치료해서 지상에 올려보냈네.”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 노인네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얘기도 들어보니 지상에 올라가자 가장 먼저 보인 마차에 던져 사고로 위장했다던가? 기억을 몽땅 잃은 것에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갖고 있던 것 중 연고가 없고 나이도 비슷한 신분패까지 품에 넣어놨다고 하는데……. “대충 자네가 뭘 원하는지 알 거 같아서 말일세.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언니 쪽은 문제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나는 이후 다음 안건도 확인했다. “그보다 동생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걱정 말게. 말했지 않은가. 은밀한 마법이 노부의 특기라고. 아마 이 아이는 환각을 보았을 거라고는 평생 깨닫지 못할 걸세. 숨이 멎었다는 것만을 제하면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라우라가 암석에 깔리고, 스스로의 목에 단검을 꽂은 일은 실제 상황이었다. 심장이 멈추며 포션의 효과가 끝난 것만이 환각이었을 뿐. “근데 말일세. 꼭 노부의 이름까지 밝혀야 했나?” “얘 기억에서 그랬다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대본이었다. “흐음, 그것도 그렇군. 그나저나 자네도 참 머리가 좋아.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내다니.” 노인네가 감탄했다는 듯 나를 보았으나, 정작 나는 입맛이 썼다. 사실 생각해 보면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으니까. 대본을 따라가는 연극배우라도 된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너무 비효율적이야.’ 일이 다 끝나고 나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였으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우라가 죽은 것처럼 연기할 필요도 없고, 아멜리아를 굳이 노아르크로 데려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냥 언니랑 같이 지상으로 보내주면 그만인 이야기니까.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비효율적이며 20년간 한 소녀가 비극을 겪어야 하는 방법을 썼다. 과거로 돌아와 아우릴 가비스를 만났기에. 그래서 이미 지나간 일을 돌릴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결과를 정해놓고 나머지를 끼워 맞추었다. 어느 면에선 조삼모사나 다름없는 행위. ‘어쩌면…….’ 어쩌면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이 먼저든, 닭이 낳은 알은 결국에 닭이 되는 과정을 거쳐 닭이 되는 결과로 이어질 터인데. “그리 기뻐 보이지가 않는군?” 아우릴 가비스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털어놨다. 꽤 긴 이야기였으나 그는 귀 기울여 듣더니 내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자네 기분을 이해 못할 건 아니네마는, 너무 깊게 생각지는 말게나. 자네도 이번 일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을 것 아닌가.” 딱히 도움은 안 되는 위로였다. 과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 아우릴 가비스가 걸어준 버프, 더블 넘버스 아이템인 크라울의 악마 분쇄기, 그리고 아멜리아(SSR) 영입권까지. 확실히 많은 것을 얻기는 하였지만……. “세상이 유지되고, 나라가 유지되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지. 이게 자네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하게.” 저리 말하니까 괜히 더 찝찝해진단 말이지. 기록의 파편석이란 대체 뭐 하는 물건인 걸까?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이제 전부 끝났으면 약속한 대가를 받을까 싶은—”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는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직 다 안 끝났습니다.” “응?” “걔, 이리 주십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 아멜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업힌 상태로 하수도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그녀는 의문을 품었다. 대체 누구일까. “정신을 차렸나보군.”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어쩐지 팔이 뻐근할 정도로 등이 넓더라니. “철가면 님…….” 철가면이다. 미궁에서도 바깥에서도 다른 클랜원들과 달리 우리 자매에게 너그럽고 친절했던. 그리고……. ‘에밀리 님의 동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 동안 에밀리는 그들 자매를 보살펴주었다. 그 사실을 모를 만큼 그녀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이분들은 왜 우리를 도와준 걸까…….’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아마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자신과 언니는 진작에……. ‘진작에…?’ 사고가 그곳까지 이르자 기억이 확 몰려왔다. “어, 언니!” “……?” “어, 언니는 어떻게 됐나요? 제 여, 옆에 있었을 텐데……! 못 보셨나요?” “……잔해 속에서 발견한 건 너뿐이다.” “아…….”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 아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현 상황을 설명하는 철가면의 말이 뭉개지듯이 들려왔다. “지금은 노아르크로 돌아가는 중이다. 도시로 나가는 길은 무너졌거……. 뭐야, 잠든 거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지막이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안하다, 제대로 못 구해줘서.” “…….” “나중에 보자.” 거기까지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여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스산함이 감도는 공동묘지에 있었다. 저 멀리로 노아르크의 성채가 보였고, 코로는 매캐한 향이 맡아졌다. 그리고……. “…….”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철가면도, 에밀리도. 하나뿐이던 나의 언니도. 스륵. 아멜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단검을 꺼냈다.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어, 언니…….” 단검에 묻은 피를 보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은 꿈같은 게 아니다. “아, 아아…….”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던 아멜리아의 귀에 번잡한 소란이 들려왔다. “여기! 여기에 누가 있는데?” “뭐야, 얘는?” “펠릭 바커네 몰이꾼 같은데?” “일단 데려가자,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후 아멜리아는 경비들의 손에 이끌려 도시에 들어서고서야 깨달았다. “…….”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나를 지켜주던 언니는 이제 없기에. 앞으로는 이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 경비들에 의해 끌려가는 아멜리아를 보고 있자니,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군그래. 몹쓸 짓이라도 한 것만 같아서.” 뭐래, 인자한 할아비 코스프레라도 할 셈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도 안 하면서. “그나저나 제 동료는 어디에 두고 혼자 왔습니까?” “그 처자라면 아까 그곳에 있네.” “아무리 그래도 의식도 없는 여자를…….” “걱정 말게, 노부가 떠나자마자 깨어났을 테니.” 음, 그렇다면야. 그 말에 나도 걱정을 덜었다. 무슨 일이 있든 스스로는 지킬 수 있는 여자니까. 단지 궁금한 건 하나다. “근데 왜 같이 오지 않고요?” 내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노부와 나눌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아, 그거······. ‘이제 와서 싫다고 배짱부릴 수도 없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람의 태도가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 내줄 건 내주자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막상 이때가 오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인가?” 아우릴 가비스의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묘하게 그 말에서 압박감이 풍겨져왔다. “이름.”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노인네가 눈에 이채를 띠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이름을 말하게. 아니면 그 가면부터 먼저 벗는 것도 좋고. 흐음, 그래…… 일단 얼굴부터 보는 게 낫겠군.” 숨을 쉴 때마다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따라서……. “자, 잠깐만!” 급하게 손을 들며 아우릴 가비스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공간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가 물었다. “…가방은 왜 뒤지는가?” 그야 시도해 볼 게 있거든. “기록의 파편석?” 이내 내가 아공간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어째서?” 어째서긴 어째서야. 이게 마지막 내 노림수였으니까 그러지. 그도 그럴 게, 성주는 말했다. [와, 왔을 때와 마찬가지라 들었소.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다시 부름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할 일’을 모두 마치는 것. 나는 남은 ‘할 일’이 라우라를 구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지금 끝이 났다. 쉽게 말해, 잘만 하면 이를 이용해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래로 튈 수도 있다는 뜻. 음, 그랬을 터였는데……. ‘왜 안 돼.’ 기록의 파편석은 미동도 없었다. 한데 이에 나도 모르게 실망감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허허, 그래 그걸 노리고 있던 것인가.” 노인네도 내 속셈을 눈치챘는지, 눈을 희번덕이며 나를 쏘아봤다.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네. 그래서 이렇게 귀찮은 부탁까지 전부 다 들어준 것이네마는……. 설마 마지막까지 노부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오해… 오해입니다. 차분히 대화를 나누면—” “됐네. 이제 자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확히 알겠으니.” ‘니미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아우릴 가비스가 허공에 대고 손짓을 했다. 후웅-! [폭풍의 눈]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물리력에 의해 끌려가는 몸.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샌가 나는 그의 앞에 다가와 있는 상태였다. “자, 그럼 얼굴부터 볼까.”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내 투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손으로 벗을걸.’ 뒤늦게 후회가 됐으나 이미 돌이키긴 늦은 상황. 툭. 그렇게 아우릴 가비스의 손끝이 내 투구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은 있다던가. 솨아아아아아아아-! 손에 쥐고 있던 기록의 파편석이 돌연 새하얀 광채를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노인 착취지.’ 모든 게 새하얗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약속은 지키려 했는데.” “…놈!!” “소리 지르지 마십쇼. 그럼 뭐 어쩝니까? 여기서 내가 할 역할이 다 끝났다는데.” “이름! 그럼 이름이라도 어서 말해—” 번뜩-! 빛이 섬광처럼 폭발하며 아우릴 가비스의 음성이 짓뭉개졌다. 그리고……. 툭. 빛이 가시며 살짝 떠 있던 발이 땅에 맞닿았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기는 했으나, 무임금 노인 착취 계획이 성공했다는 뜻— “어…….” 근데 이건 또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어……?” 주변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굳었다. 그야 모든 게 그대로였으니까. 부서뜨린 묘지도. 묘지 관리인의 사체도. 그리고 불에 탄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탄내까지도. 원래 시간대로 온 거라면 분명 달라진 점이 있어야 할 터인데, 주변에 자리한 모든 것이 그대로다. 단지……. “뭐야, 이 할배 어디 갔어.” 아우릴 가비스만 없어졌을 뿐. 330화 우로보로스 (5) 후두부에서 피어난 멍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지는 사이.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확인해 보니 기록의 파편석이었다. 분명 빛이 터져 나올 때에도 꽉 쥐고 있었는데, 이게 왜 저기서 떨어져? “…….” 일단 얼른 다가가서 주웠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은 것인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더 있었다. “옷……?” 고급 원단을 사용해 만든 로브였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재질이 아니라 소유자겠지만. 그냥 고급 로브가 아니라, 아우릴 가비스가 입고 있던 로브다. 그게 바닥에 떨어져 있다. 좀 전까지 그 노인네가 서 있었던 자리에. 마치 몸만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이것만 남은 듯이. “설마…….” 나는 손에 쥔 기록의 파편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이 늙은이한테 작동한 거였다고……?” 슬슬 상황이 어느 정도 인지가 되기 시작했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잠시 멍해지긴 했지만……. 기록의 파편석이 반응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우릴 가비스였다. ‘아우, 정리가 안 되네.’ 애써 평정심을 찾으며 처음부터 다시 짚어나갔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일단 하나는 아우릴 가비스가 나처럼 ‘시대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신도 기록의 파편석을 사용한 적이 있나?] [사용한 적이 있네.] 아우릴 가비스가 이미 기록의 파편석을 이용한 상태였다는 것. 이 경우에 그 노인네는 부름을 받고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단 뜻이 된다. 그러다 나를 만나게 되며 할 일… 그러니까 필요했던 ‘역할’을 끝마치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된 것일 테고. ‘전자의 경우에는 과거로 갔다는 뜻이겠고, 후자의 경우엔 그 반대라고 이해하면 되려나?’ 자연스레 그렇게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니, 아직 단정 짓기에는 일러.’ 정보의 부족함을 깨닫고 생각을 바꿨다. 나는 기록의 파편석에 대해 아는 게 부족하다. 그러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현명하다. ‘시대의 부름’이라는 게 과거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미래에서 부름을 받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나중에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기록의 파편석을 아공간에 다시 집어넣은 뒤 바닥에 떨궈진 로브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신나게 뒤적였다. ‘루팅……!’ 무려 아우릴 가비스의 드랍템 아닌가. 분명 뭔가 흥미로운 걸 들고 다닐 가능성이……. ‘장난하나.’ 열심히 뒤적거려 본 결과, 로브 말고는 별게 없었다. 그냥 평범한 양말과 신발, 그리고 새하얀 비단으로 제작된 고급 팬티까지. “아악, 씹!” 뭔가 싶어서 조몰락거리던 천때기의 용도가 속옷임을 깨닫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짜증이 몰려왔다. ‘뭔 놈의 노인네가 가진 게 없어?’ 최종 보스의 아우라를 풀풀 풍기던 노인네여서 잔뜩 기대했건만. 허탕도 이런 허탕이 없……. “아.” 뒤늦게 나는 아우릴 가비스가 아공간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아공간 반지겠거니 싶었는데……. “종속 아공간이었겠구나.” 최상위 마법사들만이 사용 가능한 종속 아공간. 이 경우엔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하는 식으로 영혼과 직접 연결이 되기에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 아니, 잠깐만…….’ 그럼 종속 아공간을 이용하면 여기서 모은 장비를 원래 시간대로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유레카를 외치기에는 부족했다. 그야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종속 아공간은 마도구와 달리 마법사 본인의 마력을 써야지만 열 수 있다. ‘하, 그럼 이것도 허탕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미련을 떨쳐냈다. 암만 짜증을 내고 아쉬움을 토로해 봤자 변하는 것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도 있지 않던가. ‘일단 아멜리아부터 만나자.’ 나는 아우릴 가비스의 소지품들을 다시 주워서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다시금 하수도로 이동했다. 암만 봐도 평범한 옷가지들이지만, 혹시 놓친 게 있을 수 있으니 한 번 더 확인해 보자는 판단. 철퍽, 철퍽- 그렇게 왔던 길을 거슬러가고 있자니, 대여섯 구의 사체가 나타났다. ‘내분이 있던 곳이구나.’ 주인 없는 장비를 두고 갈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기에 전부 루팅했다. 다들 지상으로 이주하려던 놈들이라 그런지, 확장형 가방이나 아공간 반지를 갖고 있었던 덕에 인벤토리 문제는 없었다. ‘와, 이거 다 팔면 대체 얼마냐?’ 어깨, 목, 팔을 전부 사용해 가방을 주렁주렁 맨 뒤에 마저 걸음을 옮겼다. 다만 머지않아 도착한 장소엔 아멜리아가 없었다. 단장 놈이랑 싸운 흔적들을 보면, 기절해 있던 장소는 여기가 틀림없을 텐데. 얘는 그사이에 또 어디로 간 걸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 있겠구나…….’ 나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 천장이 무너지며 절반 이상이 가로막힌 통로. 잔해들을 치우는 중인 아멜리아가 보였다. 어찌나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지 내가 근처에 온 것조차 눈치를 못 챘을 정도. “아아아아악!” 뭐야, 갑자기 소리는 또 왜 질러. 무섭게.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잡는 모습이 살벌했기에 얼른 다가가 아멜리아의 팔목을 잡아챘다. 툭. 살이 닿은 순간 아멜리아가 몸서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얀델?”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눈빛이던 그녀는 이내 내 손을 뿌리치려 했다. “놔라. 나는 찾아야 할 게…….” 뭐래. “찾아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거다.” “뭐?”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지 않냐. 일어났을 땐 전부 끝나 있을 거라고.” 그런 내 말에도 아멜리아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데……. “됐고, 따라오기나 해라.” 뭐,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쪽이 빠를 것이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이 어두운 하수도 속에 그녀는 홀로 있었고, 익숙한 정적은 모든 게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래, 전부 끝난 건가…….’ 아멜리아는 터덜터덜 몸을 일으켜 걸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날, 그녀는 하지 못했으니까. [이곳에서, 있었던 괴로운, 기억은 모두 잊어.] [평범한 삶이··· 드디어, 너에게도 시작되는 거야.] 언니의 사체를 두고서 떠나야만 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찾으러 왔을 때는 이미 언니의 사체가 사라진 이후였다. 통로를 복구하던 인부들의 손에 의해 하수도에 있던 사체들은 전부 치웠다던가? 이는 그녀에게 있어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렇기에……. “찾아야 해.”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미 죽은 육신에 불과할지라도. 반드시 찾아내어 수습을 해야 한다. 언니의 주검을 더러운 하수도에 남겨두지 않는 것. 20년의 세월을 거쳐 과거로 돌아온 그녀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딱 그 정도만이 허락된 전부일지도 모르니까. “읏, 흐읏……!” 얼마 안 가 그날의 참극이 있었던 그 장소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닥치는 대로 돌덩이들을 치워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필사적이라, 어딘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 어째서…….” 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이 근처에 있어야 할 터인데. 설마 이것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걸까? “아아아아악!” 정말이지 오랜만에 그녀는 소리 내어 비명을 내질렀다. 살이 베이고 뼈가 조각나도 짧은 신음 정도로 참아낼 수 있던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심장이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 툭. 그 순간 팔목에서 사람의 온기가 맞닿았다. “…………얀델?” 근 반년 동안 매일같이 보며 지냈던,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놔라. 나는 찾아야 할 게…….” 즉시 뿌리치려 했으나, 바바리안은 늘 그렇듯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반항하는 자신에게 이해 못 할 말을 하며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여긴…….”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지상이었다. 왕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거대한 도시 라프도니아. “아오, 눈뽕…….” 한낮의 도시는 어두운 하수도 속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눈에는 너무도 눈부셨다. 다만 눈이 환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바바리안은 그녀의 손목을 이끌며 어디론가 향했다. “어, 어디를 가는 거냐.” “가보면 안 다니까 그러네.” 아멜리아는 강한 힘에 이끌려가면서도 눈으로는 주변을 훑었다. 길을 지나치는 행인. 웃는 아이와 부모. 호객을 하는 상인과 햇살에 비친 새하얀 대리석. 한때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갈구했던 장소였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하며 노아르크와 달리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물론, 이제는 그녀도 안다. 지상이라고 낙원 같은 장소는 아니란 것을. 노아르크보다 더한 악의를 품은 짐승도 존재하며, 매일같이 흔한 비극이 생겨나는 곳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쯤은…….”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이 도시에서 때론 울고 웃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신과 언니의 풍경을. “응? 지금 뭐라고…….” “얀델, 여기서는 혼자 가라. 나는 아래에서 찾을 게 있—” “아, 그러니까 찾아봤자 안 나올 거라니까?”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춰세우자, 바바리안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살아 있어, 네 언니.” “……뭐?” 살아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따라오지 그래?” 바바리안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이끌고 마저 걸음을 이어갔고, 그녀도 이에 반항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후, 어디 구호소로 이동했는지를 못 들어서 한참 찾았네.” 아멜리아는 지상에 위치한 한 구호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직원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병실을 찾았다. 드르륵. 문을 열자 창가 쪽 침상에 누운 소녀의 모습이 아멜리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창을 타고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어, 언니…….” 평생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비현실적인 풍경. 아멜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침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았다. 맞닿은 살을 타고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멜리아의 물음에 바바리안은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아우릴 가비스와의 거래. 모순을 없애기 위해 레테의 축복 초기형을 써서 기억을 지웠고, 이로 인해 마차 사고로 위장을 했단 것까지. “아마 깨어났을 때 네 언니는 아무것도 기억 못할 거다. 신분패에 있는 이름이 자기 이름인 줄 알고 살아가겠지.” “아, 아…….” 그렇구나. “그래도 너무 슬퍼하진 마라. 20년 뒤로 돌아가면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어지니까. 돌아가서 정체를 밝히고 친하게 지내면 그만 아니겠냐.”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게다가 예전에 용살자, 그 새끼도 잃은 기억을 되돌리려고 뭔가 했었다며? 돌아가면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할 수 있을지.” 정말로 해낸 거구나. 이 남자는. “응? 그러니까 뭐라고 말 좀 해봐라. 괜히 사람 불안해지게…….”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냈으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됐다.” “응? 됐다니?” “더 이상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언니의 기억을 되돌리려 할 일은 없을 테니…….” “엥? 어째서?” 그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에 잘 웃지 않고 살았더니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굉장히 어색했다. 하지만……. “오히려 기억하지 않는 쪽이 좋으니까.” 앞으로 언니는 다를 것이다. 그토록 갈구했던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 있어, 아픈 기억들은 방해만 되겠지. 그래, 그러니까……. “…잘 있어, 언니.” 나는 괜찮다. 언니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내가 바라던 평범한 삶과도 거리가 멀며. 아직은 입꼬리를 올리는 것조차 어색할지라도. 언니가 걱정하던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자, 바바리안.” “바바리안이 아니라, 얀델이다.” “그래, 얀델.”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331화 투 더 퓨처 (1) 창살을 타고 새어들어오는 햇빛과 선선한 바람. 앞 가게에서 포장해 온 고기구이에 럼주로 반주를 하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크, 그래 이거거든.” 이 얼마 만에 만끽하는 일상이란 말인가. 몇 달 동안 칙칙한 노아르크에만 있어서 그런지, 그 갭 차이 덕분에 만족도가 말도 안 될 지경이다. 뭐,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나저나…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 아우릴 가비스, 뤼헨프라하, 빛의 기사 제롬. 온갖 거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 덕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날로부터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에휴.” 나는 아직도 이 시대에 머물러 있다. “요놈은 대체 언제 써지려는 건지.” 습관처럼 기록의 파편석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툴툴대긴 했지만, 시간을 벌게 된 격이라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적어도 장비를 처분할 여유가 생겼지 않은가. ‘요놈이 왜 아직도 묵묵부답인지 짐작 가는 것도 몇 개 있고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당분간 휴식을 갖기로 하며 지상에 숙소를 잡았다. 아, 참고로 방은 한 개다. 나는 두 개로 나누려 했는데, 아멜리아가 이제 와서 굳이 그럴 이유가 있냐며 핀잔을 줬기 때문인데……. 솔직히 납득해 버렸다. 하긴 아래에서 몇 달을 한 몸처럼 붙어 다녔는데? 남녀의 유별함을 논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긴 했지. “또 술인 거냐…….” “오, 왔냐.” “내가 없을 땐 문을 잘 잠가두라 했을 텐데?” 외출했던 아멜리아가 방문에 들어오며 익숙하게 외투걸이에 겉옷을 던졌다. 새벽부터 어디를 갔다 왔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야 뻔하니까. 오늘도 언니가 잘 지내는지 몰래 스토킹을 하다가 왔겠지. “오자마자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라우라는 잘 있냐?” 레테의 축복 프로토 타입의 센 약효 때문인지, 라우라는 사흘 전에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구호소에 봉사를 온 신관에게 기억 상실 판정을 받으며, 품에 있던 신분패의 이름이 본인이라고 믿게 됐는데……. “라우라가 아니라, 셰넌 엘라우라다.” “아, 그랬지.” 참고로 셰넌 엘라우라는 이름은 우리가 새로이 마련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 늙은이가 준 신분패를 이용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더란 말이지. 하루 만에 수급해 온 신분패를 환자 소지품함의 것과 바꿔치기하고, 구호소에 적힌 환자 기록까지 일일이 수정하느라 아멜리아가 고생 좀 했다. “그래서 걔는 어떤데?” “애석하게도 봉사자로 온 신관에게 관심을 끈 거 같다. 오늘은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굉장히 빨랐다. 신관은 그게 기억이 되돌아올 징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걱정 마라. 그렇게는 안 될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교단 측 인물인지라, 관심을 끄는 게 걸릴 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정수 때문에?” “그래. 성인도 안 된 아이가 정수를 갖고 있는 것은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아마 냅두면 평생 자기 몸에 정수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겠지. 스탯이야 그냥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단 것으로 퉁칠 수 있고, 기억이 없으니 이능 발현도 평생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확실히 이건 나도 좀 불안하긴 하네. 하필 봉사를 나온 신관의 눈에 들다니.” 교단과 밀접한 삶을 살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수를 삭제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곳인 만큼 정수의 존재가 탄로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 “……기억을 잃는 게 희귀한 일이다 보니, 예기치 않게 관심을 사버린 거 같다.” “그럼 이제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억지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멜리아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당분간은 계속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거로 이 화제는 여기서 마무리. “그나저나 슬슬 말투 좀 바꾸는 게 어떠냐?” 내가 은근슬쩍 운을 떼자 아멜리아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투라니?” “동료끼리 한다기엔 너무 딱딱한 말투지 않냐.” “동료?” “뭐냐 그 처음 듣는다는 표정은? 설마 나랑 한 약속을 까먹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오려는—” “아니다, 기억하고 있다. 단지… 말투랑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 싶었을 뿐.” “음, 사실 연관은 없다. 그냥 다른 말투를 쓰는 네가 궁금했을 뿐.” “…뭐?” 내 말에 아멜리아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정말…….” “왜 궁금할 수도 있지 않냐? 너 어릴 때 말투를 보니까 그때부터 이랬던 건 아닌 거 같던데.” “그건…….”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여기서 그냥 날 무시하거나, 자기를 놀리는 것이냐며 정색했을 터인데. “말투는 노력해 보겠다.” “어?” “아니, 노력… 하겠어. 이러면 됐나? 아니, 됐… 어?” 되긴 뭐가 돼.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때였다. “흐음… ‘됐어?’보다는 ‘됐니?’가 더 부드러운 어감인 거 같기도 하군. 너는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나?” 아멜리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말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너무 쉽게 말투를 바꾸려는 거 아니냐?” “바꾸라 한 건 얀델, 너지 않냐.” “그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해 마라. 사실 나도 최근 들어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으니.” “생각했던 문제라고?” “…언니라면 분명 그러길 바랐을 테니까. 게다가 너도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내게 문제가 있던 게 맞는 거겠지.” 아……. ‘그냥 너무 분위기가 우울해서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장난 좀 친 건데.’ 더 늦기 전에 나는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억지로 바꿀 문제까진 아닌 거 같다. 말투가 뭐가 중요하겠냐? 암, 중요한 건 사람의 본질이지.” 처음엔 그 말에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아멜리아였으나, 미샤에게 반했던 전적이 있는 내 말이니 신용해도 좋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희 둘은 그런 관계였던 거군.” “아…….” 내가 이걸 왜 말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이야기인데. “흐음, 확실히 그런 말투도 흠잡지 않던 너니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겠군. 일단 알겠다. 말투 문제는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지.” “……그래, 잘 생각했다.” 나로서는 제법 불편한 대화였기에, 서둘러 아까 들어갔어야 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이제 서로 쉴 만큼 쉬었으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좀 나눠 볼까 하는데.” “대화라… 좋다.” 이내 아멜리아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우리는 휴식이란 명목하에 일주일 동안 미뤄 둔 회의를 시작했다. * * * 회의의 첫 번째 안건은 이거였다. “너, 정말 장미기사단이랑은 관계없는 거냐?” “없다. 그리고 그 얘기는 전에 끝났을 텐데?” 나중에 들어보니 뤼헨프라하는 아멜리아가 그 집단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격해 왔던 것이었다. 아마 세간엔 알려지지 않은 원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잃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을 테니까.] 놈이 그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면, 분명 소중한 누군가를 그들 때문에 잃지 않았을까 싶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다마는. “근데 이 이야기는 왜 또 하는 거지?” 그때는 그냥 기묘한 우연이라 하고 넘어갔지만, 차차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 노아르크 성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오러를 배웠다고 했지?” “그래,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몇 가지 알려 줬었다. 물론 기본이 되는 토대를 만들어 줬을 뿐, 오러를 깨우친 것은 훨씬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근데… 이 얘기도 분명 전에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 그때 우리는 그 여자가 장미기사단의 일원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근데 혹시 그 여자가 너일 가능성은 없냐?” “…뭐?”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어서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런 친절을 베풀 리가 없지 않나.” 꼬맹이 시절부터 제법 눈치가 빨랐던 아멜리아는 이번에도 내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설마 우리에게 남은 해야 할 일이 그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혼자 세상에 남은 응멜리아에게 ‘오러’의 뼈대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게 우리에게 남은 숙제일지 모른다. 다만……. “걱정 마라. 그런 건 아닐 테니까.”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가능성을 거부했다. 근거라도 대보라 했지만, 이 부분은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할 뿐 길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내 생각이 틀린 거 같긴 한데…….’ 정말 그렇다면 내게는 기쁜 소식이다. 원래 역사대로 따라가려면 앞으로 2년을 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그럼 이쯤에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두 번째로 꺼낸 화제는 아우릴 가비스였다.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가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우리는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별다른 소득 없이 내가 혼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나저나 너는 왜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거냐? 좋게 헤어졌어도 좋았을 텐데.” “무슨 뜻이지? 그럼 내가 이름이랑 얼굴을 깠어야 했다는 거냐?” “그게 아니더라도, 마지막에 놀리는 식으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다.” “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때는 속이 아주 시원했지만, 나중에 부들거렸을 노인네를 생각하면 조금 오싹해지는 것도 사실이니. “넌 다 좋은데, 평소 언행에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알겠다.” “알겠다니 더 말은 안 하겠는데……. 조심해라. 내가 네 동료가 되겠다 한 것은, 네게 내 목숨을 맡기겠단 뜻이었으니까.” 신뢰를 넘어선 듯한 각오는 굉장히 고마웠다. ‘……근데 분명 더 말은 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크흠.” 나는 기침 소리를 내며 화제를 끝낸 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름 아닌 이번 회의의 핵심. 어떻게 해야 기록의 파편석이 발동할 것인가. “정확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인지를 의논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한 말투군?” 아무렴, 내가 생각 없이 말을 꺼냈을까. 2년 뒤 응멜리아에게 오러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 외에도 몇 가지 후보가 더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이거다. “창세보구……?” 아멜리아는 ‘창세보구’가 언급되자마자 고개를 갸웃했지만, 가능성을 지울 수는 없었다. 뭐, 20년 뒤에 ‘창세보구’를 훔치는 게 나일 리는 없겠지만……. 앞으로 그 일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생기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바바리안의 심장’ 소동처럼. 결과는 훨씬 나중에 이루어지지만, 그 원인을 내가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 “하긴, 창세보구라면 악령에게 특히나 중요한 물건이랬지. 그런 면에선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너도 악령—” “쓰읍.” “아, 실수다. 그 말은 언급하지 말랬는데.” 내게는 예민한 문제였으나 아멜리아가 곧장 미안하다고 사과했기에 옐로카드를 주는 것으로 넘어가줬다. 그럼 이쯤에서 두 번째. “GM이라면… 분명 아우릴 가비스에게 집회를 넘겨받은 그자의 이명이었지.” “그래.” “근데 그자는 왜?” “지금 시기가 딱 그놈한테 커뮤니티가 넘어간 시기라서 말이지.” 좀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과거의 그놈과 만나서 내가 뭔가를 해야지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그럴듯하군. 혹시 세 번째도 있나?” 그러면 없을까봐? 나는 즉시 마지막 가능성을 말하였다. “내가 여기서 모은 것들을 미래로 전달할 수 있게끔 잘 숨겨 놓는 것. 어쩌면 그게 내 마지막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냥 네 희망 사항인 거 아닌가?”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그러는 너는 생각해 본 게 있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그, 글쎄… 생각이 나면 말해주겠다.” 쩝, 뭔가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건만.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동료의 모자람도 포용하는 게 리더의 자질일 터. “됐고, 그래서 장비들은 다 팔렸나?” “절반 이상은. 가격을 낮춘다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처분이 가능한데—” “아니, 시간이 걸리는 건 괜찮으니 제값을 받고 팔아줘라.” “한데 귀한 것들도 꽤나 있던데, 몇 개는 갖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어허, 뭘 모르는 소리. 장비의 경우에는 관리가 필수다. 시간이 흐르면 가치가 저하된다는 뜻. 게다가 20년 전 장비를 팔고 있으면 출처도 의심받을 테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악마분쇄기를 빼면 전부 다 정리하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다. ‘문제는 이걸 대체 어디다가 숨겨놔야 안전하냐는 건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했던 고민을 다시금 이어가던 차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할 게 있다.” “응?” “오늘 나갔다가 들은 건데, 중앙 거래소에 경매로 3등급 정수가 출품될 거라고 하더군.” “어, 3등급 정수가? 웬일로 천공 경매장에 안 가고?” “알미너스 상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거 같더군.” 음, 중앙 거래소의 고급화를 노리는 건가? 암만 그래 봤자 천공 경매장은 못 이길 텐데. “그래서 뭔 정수가 나오는데? 아, 얘네도 천공 경매장처럼 경매일 전날까지 비공개로 하려나?” “그건 그렇지만, 무슨 정수인지 이미 알고 있어서 상관없다. 굉장히 유명한 경매였으니까.” 크, 그래 이게 회귀자 특전이지. 얼른 말해보라는 눈으로 재촉하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볼-헤르찬의 정수다.” 과연 이게 운명이라는 걸까. “……!!!!” 공교롭게도 내 육성법에 꼭 필요한 정수였다. 332화 투 더 퓨처 (2) 볼-헤르찬. 7층에서 출현하는 초대형 몬스터. 정해진 필드에서 군집 생활을 하기에 스펙만 된다면 정수 노가다 난이도 자체는 쉬운 편이기에, 왕가 보상 때는 추후 입수가 좀 더 어려운 바이욘의 정수를 택했다. 하지만……. ‘사실 전투 성능만 보면 이게 더 좋기는 했지.’ 바이욘의 [초월]이 유틸성과 변수 창출, 틀에서 벗어난 스킬 조합을 가능케 한다면 ‘볼-헤르찬’은 딱 한 가지에 치중한다. 물리 내성. 무릇 탱커라면 근력보다도 우선순위로 챙겨가야 한다는 그 스탯. 게다가 볼-헤르찬의 액티브 스킬 중에는 오러를 막아내게 해주는 것이 있기에, 듬직한 방패바바로 성장하기 위해서 이놈의 정수는 필수였다. ‘문제는… 정수 색깔인가.’ 정수의 색에 따라 액티브 스킬이 달라진다. 이는 고층으로 갈수록 성장이 어려워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고위 몬스터들이 사냥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3등급 이상부터는 기본적으로 드랍 가능한 정수 색깔만 대여섯 개씩은 되니까. 아직 김칫국을 마실 때가 아니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아멜리아, 혹시… 무슨 색의 정수인지도 아나?” “음, 아마 녹색이었을 거다.” 뭐? 녹색이라고?! “할렐루야…….”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내자, 아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니 뭔가 싶었겠지. “고향에서 쓰는 말인 건가?” 종교적 의미는 뺀 채 그냥 운이 좋았을 때 쓰는 말이라고만 설명해 주자, 아멜리아가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딘가 서운한 눈빛으로 나를 힐끗했다. “내가 아까 그 단어를 언급했을 땐 그렇게 눈치를 줘놓고서…….” 아… 맞다. 얘가 악령이라 말했을 때 내가 정색했었지. 내로남불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쩝, 평소였으면 할렐루야도 속으로만 외쳤을 텐데.’ 이 세상에서 내가 악령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료(SSR)라서 그런가?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너에게만 엄격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아무래도 네 앞에서는 내가 너무 편해지는 거 같군. 이 부분은 나도 주의하겠다.” “……그러든가.” 아멜리아는 쿨하게 내 사과를 받아주었고, 이 문제는 여기서 끝. 나는 이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근데, 아멜리아…….” “이상한 눈빛 짓지 말고 그냥 말해라.” 뭐, 그렇다면야. “그… 얼마에 낙찰됐는지도 아냐?” 내가 떨리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묻자, 아멜리아가 피식 웃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또각, 또각. 굳이 내 옆으로 와서 허리를 숙이더니,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니, 뭐 그리 비싸? *** 처음엔 가격을 듣고서 까무러칠 뻔했으나, 하나씩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명색이 3등급 정수이지 않은가. 천공 경매장이 아니라 거래소에 풀렸으니, 물건을 노리는 입찰자 수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돈은 많지만 천공 경매장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졸부들은 많이 있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저기… 아멜리아.” “말해라.” “그게…….” 말꼬리를 흐리고 있자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간 아멜리아가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저러고 있으니까 뭔가 말을 더 붙이기 힘든데……. “어… 그게…….” 우물쭈물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멜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다. “모은 장비를 다 팔면 얼마나 나올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넵.” “아마… 70% 정도밖에 나오지 않을 거다. 그것도 천천히 제값을 받고 처분했다는 가정하에.” 후, 역시 그렇구나. “……이건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군.” 고작 30%가 부족하다거나 한 문제가 아니다. 근 반년 동안 약탈한 장비를 모으고, 그런 놈들 열 명의 재산을 모두 모은 게 지금이니까. 단기간에 30%를 채울 만큼의 돈을 조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표정을 보니 아멜리아도 그리 생각하는 듯했고. “……원하는 정수였던 건가?” “응…….” “너무 낙심하지는 마라. 정수야 나중에 직접 우리 손으로 구하면 되는 것이니.” 그건 그렇지만……. “하아…….” 아멜리아의 위로에도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마치 생일 선물을 받았다가 잘못 줬다며 누가 다시 뺏어간 듯한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게, 정수 색깔까지 딱이었잖아?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운명적 이끌림까지 느꼈— “정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그때 들려온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나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방법……?” 아멜리아가 눈을 피했다. 처음에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가도 싶었지만, 자세히 살피니 그냥 허공을 보는 거 같지는 않다.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한 것에 가까운 느낌이라 해야 하나? ‘얘는 대체 뭘 그렇게 뚫어져라…….’ 무심결에 아멜리아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한 나는 기함하듯 몸을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크라울의 악마분쇄기가 우람한 위용을 숨기지 않으며 벽에 기대어진 채 서 있었으니까. “아, 안 된다 이건!” “어째서? 어차피 원래 시간대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물건도 아닐 텐데.” “잘 묻어서 숨겨둘 거다!” “그래도 위험 요소가 있지 않나. 그걸 처분해서 정수로 바꾸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아멜리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잘 숨겨도 20년 뒤에 그 자리에 멀쩡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반면 정수는 무조건 갖고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넌 정말 미친 건가! 전사에게 무기를 팔라니!!” “갑자기 말투가 바바리안스러워졌군.” “아, 습관이라…….” “왠지 그럴 거 같았다.” 근데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됐지? 나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건 절대 안 팔 거니, 다시는 이걸 팔자는 말은 하지 마라! 차라리 그 정수를 포기하면 포기했지!” 단순한 고집 같은 건 아니었다. 그야 3등급 정수라 해도, 희소성은 더블 넘버스 아이템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더블 넘버스는 천공 경매장에서도 잘 올라오지 않을 만큼 귀하다. 뭐, 수요에 따라 값은 차이가 얼마 나지 않거나 정수가 더 비싸게 팔리는 일도 있겠지만……. 입수 난이도만 보면 ‘크라울의 악마분쇄기’가 수십 배는 더 높다. 쉽게 말해, 이걸 지금 팔면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뜻. “흐음, 그렇다면야.” 구구절절하게 이유까지 설명해 주자, 아멜리아도 군말 없이 납득했다. 그리고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아멜리아는 언니를 보고 온다며 또 밖으로 나돌았고, 나는 숙소에서 술을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다. “킥, 술이… 오늘따라 다네…….” 이 정수를 먹으려면 과연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최소 연 단위로 걸릴 것이다. 일단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 클랜을 재정비하고, 차근차근 선박도 업그레이드하며 6층을 뚫고 7층에 가야지만 볼-헤르찬을 만날 수 있으니까.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노가다를 하는 건 그다음의 이야기다. “끄흐으, 볼-헤르차응…….” 그렇게 혼자 술을 마시며 청승을 떨던 때였다. 끼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설마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건가?” 얼마나 정성인지 하루 종일 언니 곁을 지키다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돌아온 아멜리아였다. “후후, 왔냐. 아멜리아…….” “문 좀 잠그고 있으라니까….” “…미안하다.” “……사과를 한다고?” “앞으로는 문단속을 잘하겠다. 그 정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혹시 오러라도 쓸 수 있는 암살자가 오면 꽥하고 죽을 수밖에…….” 오랜만에 취해서 그런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멜리아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술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는군.” 룸메이트로서 잘못한 게 맞기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얀델.” “……?” “그 정수가… 그렇게나 갖고 싶은 거냐?” “응……?”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럴 만했다. 이건 마치 장난감 코너에 드러누운 아들에게 지친 엄마가 보다못해 하는 듯한 말투 아닌가. “설마, 뭔가 방법이 있는 거냐……?” 실낱같은 희망이 담긴 내 물음에 아멜리아가 헛웃음을 흘리듯 숨을 뱉었다. 그리고…….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그, 그말은……!” 나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말랬지 않나. 단지 시도해 볼 방법이 있다는 거니까…….”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연상의 듬직함이었다. *** 그날 후로 아멜리아는 매일 아침에 나가서 지친 얼굴로 새벽에나 숙소로 돌아왔다. 다만 뭘 하는 거냐는 내 물음엔 답하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중에 잘 되면 그때 말해주겠다던가? [잘 풀리기만 하면 금전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너는 경매일까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온종일 집에만 있지 말고.] [아멜리아……!!!] 감히 아멜리아의 지시를 어길 수 없기에 이후로는 열심히 밖을 돌아다녔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숨기고서도 20년간은 안전할 만한 장소. ‘하, 성지에 있는 숲이 딱일 거 같긴 한데, 또 장례를 하다가 건드리는 일이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나만의 마늘밭을 찾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괜찮은 곳 같다가도 하나하나 요목조목 따져보면 결국 100%는 아니게 된다고 해야 하나? ‘하수도는 부랑자들이 모여드니까 또 안심하기 어렵고……. 다른 종족 성지는 내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으니 패스해야 하고…….’ 만약 아멜리아가 돈을 구해오는 데 실패한다면, 거액의 돈까지 숨겨야 하기에 더욱더 철저한 곳으로 골라야만 했다. 뭐, 고민거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근데 정말 돈을 구해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현재 내 레벨은 6. 최대 여섯 개의 정수를 먹을 수 있으며, 현재는 그 여섯 칸이 전부 차 있는 상태다. 볼-헤르찬의 정수를 취하기 위해서는 레벨 업을 하든가, 갖고 있던 정수 중 하나를 지워야 한다는 뜻. 다만 7레벨이 되려면 6층의 절반 이상을 공략해야 했기에 이 부분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뭘 지우는 게 제일 나으려나?’ 오크 히어로, 오우거, 바이욘. 이 세 가지는 코어 정수이기에 뺄 생각이 없고, 스톰거쉬는 3등급 정수라서 지우기에 아깝다. 기본 스탯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따라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만티코어.’ 내 유일한 이동기이자, 처음부터 언젠가는 지우는 것을 염두에 뒀던 5등급 정수. 그리고……. ‘시체골렘.’ 살기 위해 억지로 먹었던 7등급 정수, 시체골렘. 등급은 내가 가진 정수 중 가장 낮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막상 이게 없으면 허전할 거 같단 말이지…….’ 이 정수의 쓸모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고통 내성’ 스탯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가. 심지어 쓰레기 스킬이라고 여겼던 [살점폭발]과 [산성체액]조차 전투 중에 효자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슬슬 졸업할 때긴 해.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쓸 생각도 없었고.’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른다면 역시 만티코어를 갖고 가는 게 옳다. 간단한 이유다. [유전]의 효과로 스탯 중 20%를 페이백 받는다 한들, 당장 200이나 되던 항마력이 40으로 줄어드는 격이니까. 이걸 지금 지우면 ‘벨라리오스’의 정수를 구하기 전까지 항마력을 책임질 중간 정수를 하나 더 먹어서 밸런스를 맞춰야만 한다. ‘뭐, 이것도 아멜리아가 돈을 못 구해오면 의미가 없겠지만.’ 실패 시 물건을 숨길 장소가 더욱 중요해진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도시 곳곳으로 답사를 나갔고,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3일밖에 안 남았네.’ 경매일까지 이제 3일이 남은 시기. 나는 시계를 탁상 위에 올려둔 채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번엔 어떻게 되려나?’ 15일 자정이었다. *** “오, 일단 와지긴 했네.” 평소와 비슷한 방에서 눈을 뜬 나는 일단 벽에 걸린 가면부터 얼굴에 썼다. 그리고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 텅 빈 복도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다만 내 추측이 맞다면, 이곳 어딘가에는 분명 이 공간을 넘겨받은 2대 마스터, GM이 자리해 있을 터. ‘일단 좀 둘러볼까.’ 나는 복도를 배회하며 저택을 꼼꼼히 살폈다. 단장이나 파멸학자 등, 기존에 있던 회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얘네는 어떻게 된 거려나…….’ 그런 의문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하던 때였다. 1층 메인 홀에 한 백인 사내가 멍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척 봐도 이계의 악령은 아니었다. 그야 익숙한 로고의 운동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설마 쟤가 GM?’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다. 한데 그로 인해 이쪽의 인기척을 느꼈을까? “사, 사람……?!”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몸을 움찔했다. “…….” 잠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그를 살폈고,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네.’ 어딘가 어벙해 보이는 이목구비. 혼란으로 가득한 시선. 보니까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저기… 누, 누구세요? 원래 있던 분들은 전부 추방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기존 회원들은 전부 추방되었다라…….’ 경계를 하는 중이면서도 묻지 않은 정보까지 알아서 털어놓는 것을 보며 나는 맡아 버리고 말았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짙은 뉴비의 향기를. ‘그래, GM이라고 해도 여기 온 지 1년도 안 됐을 테니까. 파릇파릇할 만도 하지.’ 이걸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벌써부터 군침이 싹 돌았다. 그래서일까? “호, 혹시… 어르신! 어르신이신 겁니까?” 너무도 순진한 표정으로 하는 그 물음에. 할짝- 나도 모르게 혓바닥을 낼름하고 말았다. 333화 투 더 퓨처 (3)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훌륭한 게이머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목표와 수단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야 이것만 명심해도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되니까. 효율적인 게임 라이프의 시작점인 셈이다. 따라서……. 할짝- 혓바닥을 낼름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정리한다. 이번 커뮤니티 입장에서 내가 이뤄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한 문장으로 끝났다. 목표는 GM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수단은……. ‘음, 역시 이게 가장 좋겠네.’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4식第四式, 빙의憑依. 메소드 연기를 넘어, 해당 인물이 빙의한 듯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끔 해주는 초식이다. 아, 방금 내가 만들었다. “껄껄, 놀랐나?” 내가 노인네처럼 웃자 백인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어르신입니까?” 목소리에서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뒤늦게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을까? 조금 옅어지는가 싶던 경계심이 오히려 더욱 진해진 듯한 눈빛이었다. “아니, 그렇다기에는 키가 다른데……. 피부도 그렇고…….” 허허, 뉴비치고 의심이 많구나. 크게 되겠어. 나는 오히려 그런 의심이 기꺼운 사람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마치 어린 손자에게 친절히 가르침을 내리는 듯한 말투. 이에 사내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벽면에 있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 그럼 그게 어르신의 본모습이신 겁니까?” “그렇네.” “한데, 가면은 어째서…….” “본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일세.” “아…….” 아, 는 무슨 아.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게 제법 웃겼으나, 나는 평정심을 지켰다. 그야 지금의 나는 이한수가 아니니까. “후후, 그래서 이곳은 어떤가?” 우선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정보부터 차근차근 모으기로 했다. “아, 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알려 주신 것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고…….” 알려 준 것? 뭔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던지라, 제 2식 가만히 있기를 꺼냈다. “…….” 언제나 최소 평타를 치게 해주던 비기답게 머지않아 입질이 왔다. “그… 말씀해 주신 구현화? 그것부터가 쉽지가 않아서…….” 아, 그거 말이지. 다행히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였다. 고스트 버스터즈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조작법이었으니까. ‘원래는 채팅방이나 내면 세계에서만 되던 건데. 얘는 마스터 자리를 넘겨받은 덕에 여기서도 되나 보네.’ 눈치껏 상황을 해석한 나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나갔다. “후후, 처음이라면 어려운 게 당연하네. 조금 도움을 주지.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나?” “…예.” “눈을 감고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상상을 해보게. 그리고 그게 자네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게야. 그래, 잘했네. 배우는 게 빠르구먼.” “예……?” “눈을 떠보겠나?” “예… 어, 어?” 이내 눈을 뜬 사내가 손에 쥐어진 햄버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 입 크게 배어물었다. “…맛은 느껴지지가 않는군요.” 아, 그거? 미안, 그 기능은 네가 오기 전에 원탁 만들면서 없어졌거든……. ‘잔혹한 진실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예…….” 녀석은 수긍의 말을 하면서도 속상한 기분은 감출 수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공감하지 못할 감정은 아니었다. 나만 해도 고스트 버스터즈에 처음 들어왔을 때, 냉장고에 가득한 캔콜라를 먹어 보고서 실망을 금치 못했었으니까. “아, 저기.” “말해보게.” “근데,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때는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하시더니…….” 뉘앙스를 보아하니, 날 의심해서 묻는 건 아니고 단지 궁금해서 묻는 듯하다.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어서 쉽게 답했다. “자네가 걱정돼서 말일세. 한 번 정도는 이곳에서 만나 도움을 주고 떠나야겠다 싶었네.” “아, 그렇군요……!” 순진한 뉴비답게 의심 없이 믿어 넘기는 사내. 보자마자 이때다 싶었다. 신뢰는 어느 정도 얻은 거 같으니……. 이제 조금씩 신상도 캐고 그래야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는 사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른 의도는 없다는 투로 툭하고 말을 뱉었다. “마법에 자질이 있는 자네라면 구현화 같은 것도 금방 늘 것이네.” GM은 마법사다. 이건 직접 만나봤기에도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일부러 ‘자질’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뭐든 조심스러운 게 좋으니까. 아직 1년 차라 마법사가 되기 전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 마법… 그래서 어르신께서 저를 고르신 거였군요.” 말투를 보니 이미 마법사 루트를 탄 거 같긴 하네. “그래도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 같은 반쪽짜리 마법사보다는 더 실력 있는 자들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저를…….”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게. 이 세계로 불려온 자들 중 자네처럼 빠르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자네는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걸세.” 무지성 칭찬을 시작하자 사내가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이쯤에서 나는 한 번 더 신상캐기를 시도했다. “근데, 자네 등급이 몇이었지?” “6등급입니다.” 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이제 불려온 지 1년도 안 됐을 거 아니야. 근데 6등급이라고……? 이게 시간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런 의문이 감돌던 차. “운 좋게 등급만 높을 뿐, 아직 마법도 제대로 못 써서 매일 긴장한 채 살아가지만요…….” 사내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덕분에 의문이 풀렸다. 앞서 스스로를 설명하며 ‘반쪽짜리 마법사’라고 말했던 것, 그리고 방금 ‘마법을 못 쓴다’고 한 말을 조합하면……. ‘빙의한 캐릭터가 이미 마법사였다는 거잖아!’ 빙의한 육신은 20살로 고정된다는 통계가 있다. 다만, 성인부터 미궁에 들어갈 수 있는 탐험가와 달리 마법사는 어린 시절부터 전직이 가능하다. ‘하, 나는 맨땅 바바리안에서 시작했구만.’ 오랜만에 타인을 향한 질투가 생겨나는 한편으로, 기억해야 할 정보는 머릿속에 꾹꾹 아로새겼다. 악령 중에는 이런 케이스도 있구나. “저… 왜 그러시는지요?” “후후, 별거 아닐 세. 그저 자네가 대견해서 말이지.”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는? 부족함을 알고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인가?” 입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따뜻한 내 말에 녀석은 감격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르신……!” 오케이, 이 정도면 게임으로 쳤을 때 거의 그로기 상태나 다름없는 거 같고. 나는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자네 이름이 뭔가?” 슬슬 들어볼 때도 된 거 같단 말이지. *** 소문만 무성하던 GM의 정체. 마법사란 것은 알았으나,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기회에 신상을 캐내고 싶었다. 다만……. “예? 이름 말씀이십니까? 그건 왜…….” 내 질문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쓰윽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하는 녀석의 눈에는 신뢰를 쌓으며 겨우 지워냈던 의심이 물꼬를 틀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쩝, 이런 식으로는 안 되려나.’ 빠르게 판단을 끝마친 나는 플랜B를 꺼냈다. 애초에 플랜A는 그냥 떠보기용으로 던진 거였어서 말이지. “껄껄, 내가 물은 건 자네 본명이었네.” “보, 본명 말입니까?”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녀석은 당황하더니 이내 안심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아… 어쩐지, 갑자기 이름을 왜 물어보시는가 했습니다. 굳이 그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는데.” “후후, 단지 궁금해서 한 질문일 뿐이니 말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되네.” “아뇨. 본명을 숨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요. 올리버 와이즈먼이라고 합니다.” “어감이 좋은 이름이구먼, 껄껄…….” 노인네처럼 웃으면서 ‘올리버 와이즈먼’이란 이름은 대충 한 귀로 흘려넘겼다. 녀석이 아까 말한 것처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곳에선 쓸모도 없는 본명 따위가. “그나저나 어르신.” “응?” “조언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해보게.” “어르신께서는 저보고 이곳을 잘 운영하며 악령… 아니, 플레이어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곳으로 꾸며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그랬니? “그랬지?” “말씀하신 알약은 좀 더 공부를 하면 저 혼자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른 부분은 조금 감이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이 장소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런 거라면야. 잠시간의 고민을 끝마친 나는 GM에게 아주 큰 조언이 될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정을 내린 이상 어려울 부분은 없었다. 이 커뮤니티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그냥 미래에서 보고 온 모습을 그대로 설명해 주면 그만이다. “이 세상이 자네들을 악령이라 구분짓는 만큼, 섣불리 이곳에 들어오기가 꺼려질 걸세. 철저하게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할 거 같군.” “아! 그런 부분으로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딱 인터넷 커뮤니티처럼 만들면 될 거 같은데…….” “인터넷 커뮤니티?” “죄송합니다. 어르신에겐 낯선 말이었겠군요.” GM은 노인네에게 현대문물에 대해 알려 주듯 알기 쉽게 커뮤니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한평생 인터넷과 함께 살아온 내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는 더 알게 됐다. ‘그래, 아우릴 가비스가 본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개를 안 해줬구나.’ 말하는 걸 보니 대충 이계 출신의 악령이라고만 소개를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호오, 꽤 괜찮은 생각 같구먼. 근데 이왕이면 그 아까 말한 ‘컴퓨터’라는 사물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네. 커뮤니티라는 형태에 걸맞은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익숙한 것이 적응하는 데 빠르지 않겠나?” “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거래소 같은 것도 만들면 좋겠군. 만약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현실의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들에게 이곳은 아주 매력적인 장소가 될 걸세.” “와아…….” “그리고 알약을 보낼 때는 자네들이 고향에서 쓰는 언어로 편지를 보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네.” “대단하십니다……! 컴퓨터와 커뮤니티의 개념을 바로 이해한 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바로 이런 생각을……!” 나는 GM에게 고스트 버스터즈의 최종 형태에 대해 한참이나 조언을 하듯 설명해 주었고, GM은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탄성을 뱉었다. 근데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말만 들어도 굉장한 곳이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만듭니까?” GM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해줄 말이 없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그건 엔지니어가 알아서 해야지.’ 방법 같은 걸 내가 알 게 뭔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라면 할 수 있네.” “예……?” “구현화도 그렇고 아직은 미숙하지만, 차차 자네도 익숙해지지 않겠나? 나는 자네를 믿네.” “아, 예…….” GM은 자신감이 없는지 성의 없이 답했으나, 내가 신경 쓸 사항은 아니었다. 어차피 미래에는 그렇게 되니까. 나는 실현성 논쟁을 끝내며 다시금 디자인 작업을 이어나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편지를 쓸 때 마지막에 입장 비밀번호 같은 걸 적어 두는 건 어떤가?” “비밀번호 말씀입니까?” “그래, 왕가를 욕하는 말을 비밀번호로 쓴다면 세작들을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지 않겠나.” 실제로 PS는 나중에 패스워드 역할을 했다. 물론 크게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비밀번호를 맞추든 말든 ‘소울퀸즈’가 와서 검증을 한 뒤 회원 가입을 허가해 줘야만 했으니까. 뭐, 눈치가 남다른 나야 편지에 숨겨진 트릭을 간파하고 그 여자가 오기도 전에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패스워드의 약자는 PS가 아니라 PW네?’ 근데 왜 그게 됐지?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었던 건가? 문득 비밀번호를 푸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니었다. “어르신,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크흠, 아닐세.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세작을 구별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아, 그랬지.” 이후 나는 편지에 담길 내용부터 시작해 개별적인 프라이빗 공간, 그리고 세작을 걸러내 추방을 하는 조치 등등의 정보를 전해주었다. ‘가이드라인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말로 전하다 보니 디테일한 부분은 놓칠 수밖에 없었으나,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과거로 돌아와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 얘기를 하든 말든, 이 저택은 점차 내가 아는 커뮤니티의 형태로 변해갈 것이다. ‘음, 어쩌면 이게 이 시대에 남은 내 역할이었던 걸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커뮤니티에서 나가자마자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러겠어?’ 나는 애써 걱정을 덜어냈다. 그러던 때였다. “근데, 어르신…….” GM이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확실한 건 아닌데, 그때 마지막에 말씀하신 자가 누군지 알 것도 같습니다.” “…….” “그… 제가 15배로 클리어했단 말을 듣고서 언젠가 오리지널 난이도를 클리어한 유저가 이곳에 올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든 플레이어의 숙원을 이뤄줄 거라고 하신 그분 말입니다.” 아, 그런 얘기를 했었던 거구나.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동시에 몸이 움찔했다. ‘그냥 미래 얘기를 듣고서 아무한테나 넘긴 게 아니었네.’ 이제 보니 감시역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뭐, GM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근데 숙원은 또 무슨 얘기지? 심연의 문을 말하는 건가?’ 음, 어쩌면 그 늙은이가 GM에게 동기부여를 한답시고 아무 말이나 해둔 걸지도 모른다. 내가 나타나야 너희가 돌아갈 수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아무튼, 이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랬었네마는?” 추임새를 넣어주자 GM이 말을 이어갔다. “그 후로 생각을 좀 해봤는데,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톤 아이벤이란 커뮤니티에서도 굉장히 유명했던 사람인데… 제가 굉장히 존경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15배 모드를 깨면서도 그분이 쓴 글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아우릴 가비스로 위장 중이기에 짐짓 기대된다는 듯 물었다. “그게 누군가?” “엘프누나란 닉네임을 쓰던 분이십니다.” “흐음?”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제가 보기에 오리지널 난이도를 깰 사람은 그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그 유저가 ‘바바리안’일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공교롭게도 그분 역시 ‘방패바바’를 주로 키우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알겠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니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좋을 듯하네. 어쩌면 그자가 ‘바바리안’이 아닐 수도 있거든.” 나는 추적에 혼선이 일어날 수 있게끔 최대한 자연스레 암시를 넣었다. 한데 이게 실수였을까? “예? 아닐 수가 있다니요?” 어, 갑자기 왜 발작해. 나는 당황하면서도 여유롭게 웃었다. “허허,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네.” “그렇습니까…….” GM은 납득했다는 듯 말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어르신.” “말해보게.” “실례를 무릅쓰고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이내 GM은 가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제 이름이 뭡니까?” 에휴, 귀찮게 됐네. *** 생각해 보면 너무 만만히 본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뉴비라고는 한들, 20년이 넘게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자기 정체를 철저하게 감춘 고인물 아닌가. 순간 판단력은 전성기 때보다 떨어질지언정, 지능 자체는 결코 낮지 않을 터. 내 모습이 바깥과 달랐던 것. 그럼에도 쓰고 있는 가면. 그리고 이름을 물었던 것. 전부 타당한 이유를 대며 납득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위화감은 점점 쌓여갔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늙은이 연기를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대화 중에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겠지. 방금 게 결정적인 실수로 작용했을 테고. “…왜 말이 없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씁쓸하게 소리 없이 웃었다. 사태가 이렇게 이르게 된 원인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혹시 제 이름을 모르시는—” 나는 GM의 말을 끊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르키프 엘멘 매킨더.” 급하다고 아무런 이름이나 막 댄 것은 아니었다. [세 명인데 전부 말해드려요?] 옛날에 이백호에게 들었던, GM으로 의심 중이란 세 명의 마법사 중 하나의 이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확률은 33.3%.’ 자포자기하기 전에 시도해 보기엔 충분한 가능성.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당신… 대체 누구야.” GM의 목소리에서 적의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334화 투 더 퓨처 (4) 최고의 상황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때까지 GM이 나에게 어떠한 의심도 갖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까지 숨기는 건 무리였을까. ‘뭐, 이렇게 됐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살짝 남은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차피 지금까지 캐낸 정보만으로도 제 4식을 꺼낸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어느 학파인지 몰라도 20세에 6등급.’ 게다가 세 명의 후보군이 두 명으로 줄었다. 아우릴 가비스가 놈과 만나며 이름을 몰랐을 리는 없으니까. 한데 반응을 보니……. ‘얘가 제르키프 엘멘 매킨더일 리는 없겠고.’ 33.3%의 확률이 50%가 되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정체를 숨기고서 알아낼 수 있는 마지노선은 여기까지였겠지. 뭐, 그렇다고 만족하고 순순히 떠나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후보군 두 명의 뒷조사를 하면 저 조건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편한 길을 두고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캐냈던 것도 이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해. 당신은 누구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고, 왜 그분인 척을 했지?” 내 연기를 간파한 GM이 기세등등하게 나를 압박해 온다.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귀엽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떠나기 전에는 내가 다른 사람인 걸 밝히고 이 말을 해주려 했으니까. “아우릴 가비스.” “……뭐? 그건 게임 제작자 이름—” “그게 네가 만난 늙은이의 이름이다.” 내가 말을 끊자 GM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제대로 들었지만 내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모양. 나는 뉴비를 아끼는 플레이어답게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자가 너희를 이 세계에 소환한 장본인이며, 너희를 이용할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인 것에 죄책감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지. 그자를 경계해라.” “정체를 숨기고서 그런 말을 해봤자—” 뭐래. “믿을지 말지는 네 선택이다. 나는 단지 경고를 해주고자 이곳에 왔을 뿐.” “…그렇다면 왜 그자인 척 연기를 한 거지?” “이 말을 해주기 전에 네가 어떤 자인지 알고 싶었으니까.” 물론 이 말을 GM이 100% 신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100% 진실만을 말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GM도 무슨 의도를 갖고서 이러는지 나를 경계하듯 살피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리냐는 거지.’ 사람이란 것은 참으로 예민해서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믿음과 별개로 조금이나마 꺼림칙함을 느끼게 된다. 아주 작은 크기더라도, 벽에 금이 생기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 혹시, 만약에, 어쩌면. 그런 키워드를 GM의 머릿속에 새겨둔 것만으로도 당장은 충분하다. ‘그럼 이간질은 이 정도면 될 거 같고…….’ 아우릴 가비스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내용은 이쯤에서 끊기로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단, 상상력을 자극하게끔 내버려 두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당신 말에 휘둘릴 것 같나!” 물론 당장은 아우릴 가비스보다 내 정체가 더욱 중요하기에 GM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참 가소로운 짓이었다. ‘질문,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특히 자기보다 강해보이는 사람한테는 더욱더.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되물었다. “밝히지 않으면?” 말이 끊긴 GM이 뭐라 입을 열려 했으나, 음성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입을 연 그대로 헛바람을 집어삼킬 뿐. “……커헙!”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3식第三式, 약자멸시弱者蔑視. 터벅. 내가 한 발짝 더 다가서자, GM이 몸을 떨다 못해 눈의 흰자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흠, 설마 이 정도로 정신력이 낮을 줄은 몰랐는데. “약하군.” 내가 너 시기에는 원탁에서 날아다녔어 인마. 이대로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듯했기에 살기의 강도를 조금 더 낮추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이카 테라티오스.” 이백호가 말해 준 두 번째 후보의 이름. 다만 GM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 남자가 뭔 말을 하는 거지? 마법이나 주술의 캐스팅 같은 건가? 그런 경계심만이 담긴 눈초리가 나를 향한다. ‘쩝.’ 에이, 이것도 아니야? 그럼 이제 남은 후보는 하나인데……. “유르벤 하벨리온.”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설마 이백호가 아예 헛다리 짚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런 불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 반응은 이전까지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일시적으로 확대된 동공. 늘어난 호흡량. 얼굴 근육의 경직도. 내 눈을 피하지 않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하는 점까지. 혹시 얘가 포커페이스의 달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건만. “그래, 그게 네 이름이었군.” 마침내 GM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희열이 끓어오르는 한편으로는 어딘가 씁쓸하기도 했다. ‘세 번째 트라이에서야 성공할 줄이야.’ 33.3%와 50%. 둘 다 해볼 만한 확률인데 연속으로 꽝이 나와서 불안했는데, 그중에 당첨이 있기는 했구나. 하긴 내가 늘 그렇지 뭐. “유르벤 하벨리온.” 곱씹듯이 GM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살기를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선 자세로 경직되어 숨도 못 쉬던 GM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 당신은 대체…….” 적대심보다는 두려움만이 가득한 눈빛. 다만 몸과 정신을 옥죄던 살기가 사라지고 나니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졌을까? 번뜩-! 새하얀 빛이 온 세상을 물들이며 짧게 점멸했다. 수없이 겪어 본 현상이기에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보자고.” 마스터의 권한을 이용해 커뮤니티 서버를 내린 것이다. *** “깨어났나.” 눈을 떴을 땐 침대 옆에 아멜리아가 앉아 있었다. 요즘 매일 밤낮 구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던 얘가 옆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커뮤니티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무력화 상태니까. 혹시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던가?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너무 과보호가 아닌가 싶지만, 그런 생각과 별개로 고마운 감정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깄다.” 목이 타 협탁에 내버려 뒀던 물병으로 손을 뻗자, 아멜리아가 이를 대신 집어서 전해주었다. “아, 고맙다.” “그래서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물을 한 모금 들이켜 목만 축인 뒤, 그곳에서 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아멜리아는 흥미로움을 숨기지 않으며 들었으나,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유르벤 하벨리온, 그 은둔 마법사가 설마 악령이었을 줄이야. 알려지면 도시가 뒤집어지겠군.” “은둔 마법사?” “모르나? 마탑에 틀어박혀 외부 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거로 유명한데. 지금의 명성 중 대부분은 예전에 탐험가 생활을 하던 때에 만들어진 거로 알고 있다.” “그렇군.” 집돌이라는 건 처음 알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조금 조사해 본 덕에 대략적인 정보는 갖고 있다. 어느 사건으로 인해 몸담고 있던 학파가 통째로 터져 나갔고, 그 뒤로 독립해 본인의 학파를 세웠다는 것이나, 탐험가 시절에 풍 속성 마법을 주로 사용한 것. 그리고 주특기인 마도구 제작 분야에서는 어느 누구도 범접 못할 만큼 독보적인 자리에 올랐다는 것까지. ‘그래서 이명도 ‘마공학자’였지.’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기록의 파편석이 작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다행이라니?” “아, 그게 중간부터 이게 내가 이 시대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었구나 싶더란 말이지. 만약 이게 마지막 역할이었다면, 장비도 사지 못하고 눈 뜨자마자 돌아가야 했을 거 아니냐.” “아… 그것도… 그, 그렇군.” “응? 아멜리아, 왜 그러냐?” “아니다. 그래서 장비를 숨길 곳은 찾았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멜리아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지만, 딱히 뭐라 캐물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 화제가 더 중요하기도 하고. “글쎄, 잘 모르겠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안심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것도 너랑 의논을 좀 하고 싶은데.” 나는 지금까지 답사를 다녀온 곳들을 쫘르륵 나열한 뒤 아멜리아의 의견을 물었다. “확실히 모두 불안 요소들이 있기는 하군.” “성지의 숲에 숨겨두는 게 딱이긴 한데, 그 주술사 놈이 맨날 돌아다니는 게 좀 불안해서 말이지.” “그렇다면 은행 금고에 맡기는 건 어떻나?” “은행 금고?”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그야 은행을 이용하려면 ‘니벨즈 엔체’라는 신분을 써야만 하니까. 비요른 얀델로서 되찾을 때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니벨즈 엔체’는 내년에 세금 미납으로 말소가 될 신분이다. 쉽게 말해, 은행에 맡긴 것도 국고에 환수된다. ‘그렇다고 20년 치 세금을 미리 다 내두고 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이지.’ 여러모로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하는 방법이라서 후보에 올려두지도 않았다. ‘근데 얘가 이런 것도 모르고 이런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자세히 말해봐라.” 내가 자세를 고쳐잡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알미너스 은행에는 ‘무기명 기간제 금고’라는 게 있다.” “처음 들어보는데.” 일단 게임 내에서는 없던 시스템이었다. 하면, 150년 사이에 있었던 업데이트라는 뜻.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평소에 은행을 자주 이용하는 탐험가 중에서도 아는 이가 드물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제도니까.” 이후 아멜리아는 무기명 기간제 금고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다. ‘정리하자면,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돈만 내면 정해진 기간까지 물건을 보관해 준다는 거네. 물건을 찾을 땐 비밀번호만 있으면 되고.’ 음, 나쁘지 않은데? *** 다음 날. 오래간만에 아멜리아와 함께 외출해서 은행에 방문한 나는 해당 제도에 독소 조항이 있거나, 내가 인지 못한 불안 요소가 숨겨져 있진 않을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스위스 은행 저리 가라인데?’ 적어도 땅에 묻는 것보다는 안전하리라는 판단이 들어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무기명 개인금고에 넣어 버렸다. 참고로 기간은 넉넉하게 22년으로 잡았다. 뭐, 그 탓에 선금으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만만치 않았으나……. “걱정 마라, 그 정도면 충분히 낼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의 가호가 함께하는 내게 이런 푼돈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야 다행히 일이 잘 풀린 모양이더라고. “어, 진짜 부족한 돈을 다 채웠다고……?” 이 주일이 넘는 시일 동안 밤낮없이 돈을 벌러 돌아다니던, 아멜리아는 정말로 약속했던 자본금을 만들어 왔다. 어떤 마술을 부린 건지 묻자 대답은 이러했다. “별건 아니고 정보를 팔았다.” 회귀자 특전을 이용해 정보를 판매했다. 주요 고객은 이번 경매에 관심이 있던 자들. 이번에 출품될 정수의 이름과 색깔을 팔았다는 모양인데……. “근데 좀 이상하군. 그자들이 뭘 믿고 정보를 사가?” “아, 그거라면 중앙 거래소 지부장의 지위를 이용했다.” “이용했다고? 어떻게?” “매일 밤낮없이 지부장의 뒤를 미행하며 뒷조사를 했더니 책잡힐 만한 게 하나쯤은 나오더군. 그거로 협박했다.” 아, 참고로 거래소에서 보안 유지에 굉장히 공을 들이는 탓인지, 해당 지부장조차 정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물론 우리에겐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고객들이 신용할 만한 내부 정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함께 지부장실에 들러 친분을 입증하니, 아무도 정보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더군. 아마 틀린 정보라면 지부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이 얘기를 모두 듣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사를 해도 성공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수완. 과연 이게 SSR 동료의 위엄인가? “아멜리아……!!” “무, 무슨……! 달라붙지 마라……!” 결과적으로 장비를 숨기는 장소부터 시작해, 장비 판매 및 정수를 살 돈과 잔금을 구하는 것까지 모두 아멜리아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후, 오늘인가…….” 시간이 흘러 경매일이 밝았다. 335화 투 더 퓨처 (5) 알미너스 중앙 거래소 제1경매장. 괜찮은 물품만을 모아다가 개최하는 정기 경매 때도 절반 이상 차는 일이 없던 그곳에 인파가 바글바글 몰렸다. 심지어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다. “저기 넨마 클랜 마스터도 참가를 했군.” “본인이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 ‘철벽’이라 불리는 그 탐험가에게 주려는 게 목적일 거요. 제1팀의 수호자가 얼마 전에 죽지 않았소? 빈자리를 채울 목적이겠지.” 장비에서 광택이 좔좔 흐르는 탐험가부터 시작해. “오호라, 라그만 상회에서도 그 정수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까?” “값만 맞는다면 상인이 사지 못할 물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경매에 나온 물건들은 팔았을 때 그만한 값을 받기 어려울 텐데…….” “물건의 가치는 재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쿠도 공작님의 생일이 머지않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을 빌미로 그 연회에 참가만 할 수 있다면, 많은 귀족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겠군요.” 탐험가는 아니지만 딱 봐도 돈깨나 있는 티를 팍팍 풍기는 자들. 그냥 구경 삼아 참가한 듯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경매가 화제 몰이를 하며 경매장 입장권부터가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하니까. ‘애초에 값이고 뭐고 티켓팅부터가 헬이었지.’ 본격적으로 정보가 풀리기 직전에 먼저 경매 소식을 알린 아멜리아가 아니었다면, 암표로 티켓 한 장 정도나 겨우 구해 혼자 들어와야 했을 것이다. “자꾸 두리번거리지 마라,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 잔소리가 시작될 기미가 보인지라, 나는 익숙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너는 이런 장소에 자주 와 봤나?” “……와 볼 만큼은.” 하긴, 얘 나보다 탐험가 경력이 훨씬 길지? “그럼 궁금한 게 생기면 너한테 물어보면 되겠군.” 이후로는 그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의외로 우리처럼 가면을 쓴 자들이 많군? 경매 낙찰자는 어차피 익명으로 처리된다던데.” “참가 자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오, 저기 정장 입은 놈은 뭐냐? 탐험가도 아니고 상인도 아닌 것 같은데.” “유력가에서 보낸 대리인이다. 깔끔한 차림새긴 하지만 귀족가에서 보낸 건 아니겠군, 귀족가는 저런 부분에서조차 가문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니까.” “오, 그래?” 이건 뭐 백과사전도 아니고. 묻는 질문마다 딜레이 없이 답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성능 확인할 겸 이런저런 질문들을 더 하고 있자니, 경매가 시작이 됐다. “아멜리아… 우리 저거 못 사냐?” “……뒤에 거를 포기한다면.” “못 산다는 거구나…….” 3등급 정수만이 아니라 다른 물품에도 신경을 많이 썼을까? 처음으로 출품된 물건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 나오는 것들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무슨 거래소 경매장에서 트리플 넘버스가 나와?’ 심지어 성능이 구린 트리플 넘버스도 아니었다. 내게는 효용성이 떨어지지만, 날붙이를 쓰는 딜러들이라면 모두가 쓸 수 있을 공용 아이템. ‘후, 돈만 있었으면 저것도 사서 금고에 넣어 두는 건데.’ 나는 새 경매 물품이 올라올 때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서 과열되는 경쟁을 지켜만 보았다. “1억 4천만 스톤! 1억 4천만 스톤 나왔습니다. 입찰자가 더 계십니까?” “…….” “……익명의 입찰자분께 낙찰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경매는 굉장히 시원시원했다. 금액대 별로 진행자가 정해 둔 단위로만 입찰가를 야금야금 올릴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한 번에 높은 입찰가를 적어 넣는 것이 가능한 자유 입찰제. 그런 주제에 입찰 방식은 묘하게 현대적이었다. 띡, 띡, 띠디디딕. 의자마다 오른쪽 팔 받침대에 숫자를 적어 넣을 수 있는 마도구가 있고, 입찰가를 넣고서 엔터를 치면 단상에 있는 전광판에 가격이 나타나는 식. 덕분에 입찰자의 신분은 익명에 가려진다. ‘하긴 이런 방식으로 익명성을 지켜 주는 게 아니면 나중에 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까.’ 참고로 이 방식은 천공 경매장에서 처음 사용됐다. 한창 도서관에서 역사 공부를 할 때 알게 된 건데, 명망 높은 귀족가끼리 실명을 까고 경쟁을 붙다가 일이 커져서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있었다던—. “자, 그럼 열일곱 번째 물품입니다!” 한번의 경매가 끝나고 새로운 물품이 기다렸다는 듯 단상 위에 올랐다. 고급스러운 상자에 보관된 시험관이었다. 지금까지 정수가 등장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이번에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다. “얀델.” “알고 있다.” 앞선 정수들과 다르게 상자 옆에 커다란 그림이 세워져 있다. 온몸이 두꺼운 껍질로 덮인 채 포효하는 거대 괴수의 그림. 볼-헤르찬. ‘이런 것까지 준비해 두다니, 진짜 이번 경매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역동적인 그 모습에 경매에 참가한 이들이 웅성거렸다. “오호라……. 과연…….” “이 정수는 마지막에야 나올 거라 여겼건만.” “예. 조금 이상하군요. 오늘 출품될 물품이 총 35개였으니, 아직 반은 더 남았을 터인데…….” 누군가는 경매의 중반부에 정수가 나온 것에 의문을 품기도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칭찬할 만한 상술이었다. “알미너스 상회가 머리를 썼군.” 정수가 마지막에 나오면 돈을 모아 온 자들이 그때까지 자본금을 쓰지 않고 아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물품들에 입찰할 여지가 적어진다. 하지만 중반부에 등장시켜 일찍이 그 주인을 정해 버리면? 그땐 얘기가 달라진다. 남은 자본금의 용도가 사라졌으니, 필요한 물건이 나온다면 심리적 저항감 없이 입찰을 할 수 있을 터. “이번 물품은 볼-헤르찬의 정수로 마르엘 클랜의 ‘벼락불꽃’이 이번 원정에서 직접 그 흉포한 마수를 처단하고 획득한 것으로…….” 진행자가 본격적으로 이 물건에 얽힌 스토리와 함께 상품 설명을 시작하자 장내의 공기가 달라졌다. “크흐흠…….” 앞선 경매에서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던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탐험가들의 눈에는 욕망이 떠올랐고, 상인의 눈은 기회를 앞둔 승냥이처럼 예리한 빛을 자아냈다. 칼만 안 들었지 전투를 코앞에 둔 자들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쯧, 누구 걸 넘봐.’ 띡, 띡, 띠디디, 띡-. 나는 미리 금액을 적었다. 그리고. “자, 시작가는 5천만 스톤으로—.” 경매가 시작됨과 동시에. 삐빅. 엔터를 눌렀다. 이에 호응하듯 전광판에 숫자가 떠올랐다. [870,000,000] 8억 7천만 스톤. 이번 경매가 나중에 아멜리아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해진 이유였다. “……!” “……!” 입찰이 딱 한 번이었거든. *** 실로 폭력적인 레이즈에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8억 7천만 스톤…! 8억 7천만 스톤이 나왔습니다.” 진행자가 프로 의식을 발휘하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소란이 시작됐다. “8억 7천만 스톤이라고?” “무슨 시작부터 이런 미친놈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자. “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런 금액을 한 번에…….” 내 정체를 궁금해하는 자 등등. 경쟁을 포기한 자들은 그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낸 반면. 진지하게 이 정수를 노리고 있던 자들은 달랐다. “낙찰이 되기 전에 서둘러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안색을 달리하며 황급히 의논을 시작했다. 아, 참고로 여기서도 반응은 제각기 나뉘었다. “8억 7천만 스톤은 무리입니다….” 진작에 예산이 초과한 자. “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수호자들이나 쓰는 저 정수를 저 돈 주고 사는 건 미친 짓이지. 우리는 입찰을 포기한다.” 단순히 가성비를 따져 결정을 내리는 자. 그리고……. “왜 입찰하지 말라는 건가?” “어쩌면 거래소 측에서 수작을 부린 걸 수도 있습니다.” 의심병이 도져서 입찰을 망설이는 자까지. “수작이라면 바람잡이를 말하는 건가?” “그 가능성도 있지만… 거래소에서는 처음부터 미끼로 정수를 내걸었을 뿐, 판매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은 볼-헤르찬의 정수가 호객을 위한 허위 매물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 “…….” 예상을 벗어난 금액에 머리가 멍해지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주변의 말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입찰을 할지 말지 열심히 고민을 해 나가는 그 순간에도. 째깍, 째깍-.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입찰자는… 더 없으십니까…?” 시원시원하게 낙찰봉을 때리던 진행자가 평소보다 3배는 더 시간을 끌다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 “…….” 서로의 눈치만 보기 바쁜 이들을 보며, 입찰의 끝을 알렸다. 땅! 땅! 땅! 낙장불입을 의미하는 청명한 울림이 들리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몇 번이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암, 경매의 꽃은 즉시 구매지. ***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듯한 경매가 끝나고, 우리는 물품 인도실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볼-헤르찬의 정수를 넘겨받았다. “8억 7천만 스톤… 확인되었습니다.” 물품을 인도한 직원은 거래소 내에서 꽤 직위가 있는 듯했는데, 이상한 루머를 만든 우리를 곱지 않게 보는 것과 별개로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프로 의식이라는 걸까? “안녕히 가십시오.” 해당 직원은 가면을 쓴 우리를 가끔씩 살필 뿐, 정체를 묻는 것은 물론이고 쓸데없는 말조차 걸지 않았다. “뭐 하나, 얼른 가지 않고.” 물품 인도실에서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우리가 무엇을 갖고 나왔을지가 궁금해 보였다. 다만 35개의 물품 중 우리가 무엇을 구매했는지는 알 수 없기에 섣불리 말을 걸어오는 자는 없었다. “따라오는 자는?” “이제 없다. 수준을 보니, 그냥 호기심에 한번 뒤를 밟아 보는 정도였던 것 같더군.” “그래?” “어디로 갈 거냐?” 어디로 가기는. 한곳밖에 더 있어? “신전으로 간다.” 이후 마차를 타고 컴멜비를 떠난 우리는 곧바로 레아틀라스 교단에 들어섰다. 슬슬 외부인의 방문을 막는 저녁 시간대였으나,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영혼에 새겨진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오셨군요.” “여기, 기부금이다.” “예. 동료분께서는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신관에게 딱 맞춰서 남겨 둔 돈을 지불하고 정수를 제거했다. 지운 정수는 미리 정해 둔 대로 시체골렘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신전에서 정수는 한 번도 안 지웠었네.’ 평소에 다른 애들한테 말로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처음 해 보는 정수 제거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기묘한 경험이었다. ‘연출 보소, 게임에서는 그냥 키보드만 몇 번 움직이면 됐었는데.’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싸며 도착한 순백의 공간. 알몸의 모습으로 그곳에서 깨어난 내 손에는 방금 신관에게 받은 푸른색 단검이 쥐어져 있었으며……. 주변에는 거대한 괴수들이 득실거렸다. 모두 두꺼운 철창에 갇힌 상태였다. 오우거, 오크 히어로, 스톰거쉬, 만티코어, 바이욘. 그리고 오늘의 내 목표인 시체골렘까지. 잠시 놈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단검을 이용해 시체골렘과 내 육신에 연결된 빛의 실을 끊어 냈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신전이었다. “기분이 아주 이상하군.” “영혼에 새겨져 있던 인연이 떨어져 나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엔 대부분 겪는 일이니 너무 걱정치 마십시오. 며칠이 지나면 빈자리도 익숙해질 것입니다.” “인연이 떨어져 나갔다라…….” 레아틀라스 교단의 신관다운 말이란 생각이 들지만, 어딘가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단순히 스탯이 줄어들며 생긴 공허함이라기엔 탈력감이 상당했던 탓이다. “괜찮나?” “아,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고기 좀 먹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신전에서의 용무를 마친 나는 아멜리아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시험관을 꺼냈다. “아멜리아, 마음 준비는 됐나?” “……?” 내 말에 아멜리아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이걸 먹는 순간 기록의 파편석이 반응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 GM도 만났고, 장비를 금고에다 맡기기도 했다. 심지어 아멜리아는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미래에 세금사하지 않도록 경제적인 조치까지 미리 해 두었다. 그러니 내 예상이 맞다면……. ‘이게 마지막 퍼즐이겠지.’ 나는 아공간에서 기록의 파편석을 꺼낸 뒤, 정수를 흡수했다. ‘크…… 이 맛에 정수 먹지.’ 시체골렘의 빈자리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밀도 있게 차오르는 충만감. 시험관 안에 담겨 있던 빛무리가 체내에 흡수되며 몸에서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오우거 때보다는 훨씬 강도가 약했다. 깡 근력이 그렇게 붙은 정수는 2등급 이상에서도 흔치 않은 탓이다. ‘그래도 뭐, 중요한 건 스킬이니까.’ 나는 여운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여전히 묵묵부답인 기록의 파편석을 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설마 이것도 아니었다는 건가.” 그럼 대체 앞으로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혹시 몇 년은 더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불안감에 새 정수를 얻었다는 기쁨조차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던 때. “그래, 슬슬 돌아갈 때가 되기는 했지…….” 아멜리아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걱정 마라,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어딘가 아쉬운 듯한 눈초리였다. 336화 투 더 퓨처 (6)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물음에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설마 돌아갈 방법을 얘기할 때마다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던 것도 그래서인가?’ 이전 대화에서 느낀 위화감이 착각이 아니었음은 깨달았으나, 이해되지 않는 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짚이는 게 있었다면, 대체 왜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거지?” 내가 빤히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한 번 더 나를 힐끗했다가 시선을 피했다.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넌 돌아가기 싫은 거냐?” “그건…….” 말꼬리를 흐리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다. 단지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을 뿐…….” “뭐? 대체 왜?”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갸웃했지만, 아멜리아의 입장에서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납득이 갔다. “그, 그건—” “아, 그렇군. 알겠다.” “알겠다니……?” “언니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거 아니냐.” 우리가 떠나면 앞으로 20년 동안 라우라는 홀로 살아가야 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게 당연하며, 적어도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확인하고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냥 솔직히 말해줘도 좋았을 텐데.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신뢰도 못 줬을지는 몰랐군.” “아…….” “우리는 동료 아니냐. 그런 건 그냥 말해라.” “…그러지,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겠다.” “그래.” 신속하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오해를 풀은 나는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지금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그것. “그래서 짚이는 게 뭐였기에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갈 수 있다고 자신한 거냐?” “아, 그거 말인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그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중간에 몇 가지 질문까지 해가며 귀 기울여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듣자마자 직감점으로 느낌이 딱 왔다. 그래, 이거였구나.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역할이. ***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온 우리는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아멜리아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거든. 뭐, 나야 얼른 할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20년 뒤에는 없어지는 음식점이라서……. 아, 물론 힘들 거 같다면, 그냥 바로 가도 상관없다.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가? ‘하긴, 돌아가면 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얘는 그동안 일만 하느라 매일 돌아다니기도 했고.’ 심지어 아멜리아는 부탁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이런 평범한 욕구를 내보이는 게 창피했던 모양인데……. 응원할 만한 긍정적 변화였다.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대가 쌓였다는 뜻 아니겠는가. “혹시 하고 싶은 게 더 있으면 말해라.” “그럼… 혹시 9구역의 아랑드제 미술관에 들러도 괜찮겠나?” “…미술관?”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 그…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찾아가도 볼 수가 없더군. 어느 돈 많은 귀족에게 팔렸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멜리아는 보고 싶었다는 그림 앞에서 30분이 넘게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른 것도 좀 봐도 괜찮겠나?” “물론이다.” 이후 미술관을 돌며 다른 그림이나 조각상들을 감상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이런 취미가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눈빛만 봐도 얘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아멜리아, 구경도 좋지만 슬슬 배가 고픈데…….”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덧 한낮이 되었기에,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얀델,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들러도 되겠나?” 아멜리아의 요구로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레아틀라스 교단의 보육원이었다. 어린 시절의 드왈키가 머무르기도 했던 바로 그곳. ‘여긴 묘하게 인연이 깊단 말이지.’ 우리는 건물 안에 들어서지 않고서 그 건너편 벤치에 앉아 창문으로 보이는 라우라를 보았다. 병상에서 회복한 그녀는 데스크에 앉아서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신관의 소개로 보육원에 취직을 하게 됐다던가? “소일거리 정도나 돕는 줄 알았는데, 서류 업무를 하는 걸 보니 벌써 글까지 읽는 거 같군.” 설마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건가도 싶어서 아멜리아에게 말해봤으나, 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건 아닐 거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냐?” “언니는… 글을 읽지 못했으니까.” “…뭐?” 그럼 겨우 몇 주 동안 신관에게 배운 걸로 행정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얼떨떨하지만, 납득 못할 이야기까진 아니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간혹 존재하니까. “…천재였군.”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니의 기억력이 남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신관은? 글을 가르쳐준 신관은 이상하게 보지 않았나?” “그 여자는 단지 기억이 되돌아오는 과정이라고만 여기더군.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고.” 어쩌면 이들 자매의 진짜 재능은 사람을 죽이는 것 따위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단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아멜리아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림을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쪽으로 유명해지거나 했을 수도— “뭐지 그 눈은?” 아, 너무 빤히 바라봤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언제까지 볼 거냐? 이제 네 언니도 퇴근하는 거 같은데.” “이제… 가야겠지.” 라우라가 서류 작업을 끝마치고 외투를 걸쳐 입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끼이이익. 잠긴 하수도의 자물쇠를 따고서 그 아래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야 노아르크로 가는 길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또 거기로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뭔가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아마 괜찮을 거다. 묘지가 아니더라도 몰래 들어가는 길이 하나 더 있으니까.” 예전엔 노아르크의 신분이 필요해서 브로커를 통해서 정식으로 입국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기에 아멜리아가 아는 길을 통해 밀입국을 했다. 영주성과 연결된 길목이라던가? “근데 노아르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가는 동안에는 노아르크를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안 그래도 왕가와 오르큘리스 성주, 그리고 제 4의 세력인 우리까지 합쳐져 그 큰 사건이 있었으니 이후 상황이 궁금했던 것. “노아르크라면 지금쯤 차대 성주가 한창 열심히 수습 중일 거다.” “수습?” 물론 어떻게든 수습이 된다는 결과야 알지만, 그 과정이 궁금했다. “먼저 왕가와 손을 잡고 기습해 놓고서 진 건데 어떻게 해야 수습이 될 수 있지?” “그야 오르큘리스도 이 도시가 필요하니까.” 손에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노아크르에 미궁과 이어지는 포탈이 열리려면 성주 가문의 핏줄이 필요하다.” 그래서 차대 성주는 부친의 죽음을 인지하자마자 본인을 제외한 가문의 핏줄을 전부 죽였다. 그들이 유약한 형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도시를 통치할 것을 우려한 것인데……. ‘난놈이긴 하네. 거기서 바로 그 판단을 하다니.’ 이후 차대 성주는 오르큘리스에게 일정 부분을 양보하는 것으로 휴전을 이끌어냈고, 도시를 차차 안정화 시켜나갔다. 이게 앞으로 20년간 있을 이 도시의 전말이다. “도착했군.” 이내 하수도를 지나 영주성에 도착한 우리는 경비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며 성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탄내가 나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쳐 아담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얀델, 잠시 기다려주겠나? 혼자 다녀오겠다.” “그러지.” 아멜리아의 집이었다. *** 똑똑, 소리를 내며 노크를 할 이유는 없었다. 이 시절의 자신은 문을 잠그고 살지 않았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아멜리아는 쓰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기본적인 초기의 가구들만 들어선 형태였으나 오히려 그게 더 익숙했다. 연금술사 할아범이 마련해 준 이 집은 언제나 이 상태였으니까. 성인이 되어 이 집을 떠날 때까지도. “…….” 인기척을 느꼈는지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았다. “에밀리 님……?” 무채색의 동공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멜리아에게 독심술은 없었지만, 그 상대가 과거의 자신이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호, 혹시…….” 혹시나 하는 기대. 언니가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네 언니는 죽었다.” “아…….” 아멜리아가 딱 잘라 말하자 소녀가 고개를 떨궜다. 소녀의 눈에 떠올랐던 이채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다만 아멜리아는 소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말하였다. “너는 머지않아 다시 미궁에 들어가게 될 거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궁창 같은 삶을 살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또 죽이게 되겠지.” “……그래서요.” 자극적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텅 빈 인형 같던 소녀가 반발하듯 고개를 들었고, 아멜리아는 그녀를 향해 손을 펼쳐서 내밀었다. “나와 약속해라, 바바리안만은 죽이지 않겠다고.”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아멜리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답하였다. “나중에 이 약속을 지킨 게, 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테니까.” 그 말에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겉으로는 표정이랄 것도 없었으나, 아멜리아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이 말을 듣고서 생각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다고. 아니, 오히려 나를 위해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는 거 같다고. 마치 이제는 없는 언니처럼……. 꽈악. 아멜리아는 소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세 번을 손으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들 자매가 무언가 약속을 할 때 쓰던 행위였다. “이걸… 당신이 어떻게…….” 아멜리아는 소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잡았던 손을 풀고서 등을 돌려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 터벅. 이내 아멜리아가 문 앞에 섰을 때 소녀가 입을 열어 지친 음성을 토해냈다. “만약에…….” “…….” “만약에 그 바바리안을 죽이지 않았을 때, 제 신변에 위협이 생기는 경우라면요? 그때도 그 약속을 지켜야 하나요?” 어린 시절의 자신다운 물음이었다. 약속의 중요성을 수없이 가르쳐온 언니를 생각해서라도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도 않겠다는 것. 그러나 아멜리아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땐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이내 아멜리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 “문은 잠그고 다녀라.” 아멜리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서 등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바바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얘기는 다 끝났나?” “그래.”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의도를 알 수 없고, 언니가 죽는 걸 막아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언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땐 반드시 갚으라고 가르쳤으니까. “아멜리아. 근데 아까부터 저기 멀리서 금발 꼬맹이가 나를 보고 있는데……. 해결해야 하지 않냐?” 아멜리아는 바바리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보였다. “아, 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혹시 쟤가 가드위버 드로우스, 걔냐?” “그래, 그 녀석이 맞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지만.” 아멜리아는 그리 말하면서도 생경한 기분이었다. 저 소년은 훗날 그녀에게 기록의 파편석이란 보물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리고 탈취하기 직전에 배신하여 혼자 도망가며 원수로 변한다. 귀에 남은 흉터도 그때 생겼고. 성주와 노아르크 내에서 살인을 할 수 없다는 맹약을 맺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뭐,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정확한 기간이 있었던지라 이 시대에선 작동이 되지 않았다마는.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는군.’ 저 얼굴을 보고서도 분노가 일지 않는다. 마치 가슴속에 분노와 증오라는 케케묵은 감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아멜리아는 평온하기만 한 이 감정의 원인을 깨달았다. “아니, 상관없다. 내버려둬라.” “내버려두라니?” 결국 돌이켜보면 하나의 과정이었다. 저 녀석과 얽히게 되며 겪은 고통들조차도. 훗날 이 남자와 만나기 위한.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안 웃었다.” “웃었는데?” “…….” 아멜리아는 끈질긴 바바리안의 물음을 싹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바바리안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야, 근데 이건 왜 작동을 안 하냐?” “글쎄, 곧 작동되겠지.” “아니, 그래도 작동을 안 하면?” “그럼 그냥 여기서 둘이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 “어… 그건 좀 그런데……. 아니, 네가 싫다는 건 절대 아니고…….” 바바리안이 곤란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거울 앞에서 짓던 어색한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 휙.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리자, 뒤에서 따라오던 바바리안과 몸이 부딪치며 포개졌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 세상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 ‘철가면……?’ 금발 소년이 그들을 발견한 것은 철저하게 우연이었다. 어딘가 길거리에 털어먹을 만한 취객이 있나 돌아다니던 그의 눈에 그들이 들어왔다. 그는 소문처럼 철투구를 쓰지 않은 채였지만……. 저런 무지막지한 체격을 가진 인간은 이 도시에 없었다. 아니, 지상을 통틀어서도 몇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바리안이라면 모를까. ‘무엇보다 옆에 있는 빨간 머리의 여자…….’ 그 유명한 철가면과 에밀리였다. 소년은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부터 몸을 숨기고 그들을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집에서 나와 철가면과 합류했다. 그런데 이쪽의 시선을 느꼈을까? “……!” 소년은 그들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어 목을 움츠렸다. 그 순간이었다.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이 캄캄한 지하 도시를 밝게 물들인 것은. 번뜩-! 찰나와도 같던 섬광. 그 섬광이 잦아들자 인적이 없던 거리에 혼란이 찾아왔다. 취객들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고, 건물 내에 있던 자들은 헐레벌떡 창문을 열었다. “뭐, 뭐야! 방금 그 빛은!” “……마법?”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겠지?” 모두 하나같이 당황한 채 사태의 원인을 찾았다. 다만 골목길에 숨어 있던 한 금발 소년은 달랐다. ‘철가면이 사라졌어…….’ 그들이 사라졌다. 하나 소년은 그 이유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노아르크에서 생존을 해와야 했던 소년은 단지 본능에 몸을 맡긴 채 달려나갔다. 그리고……. ‘……이 돌! 이 돌에서 빛이 나왔어.’ 소년은 옷가지 위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운 뒤 품에 집어넣고서 재빠르게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저기! 저기에서 빛이 터져 나왔소!” “내가 저기 저 창문에서 봤는데, 빛이 터져 나오고 사람이 사라졌다니까?” 야밤에 벌어진 소란에 찾아온 경비병이 상황을 청취하기 시작했고, 빛의 중심지에 있던 남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바리안처럼 보이는 사내와 붉은 머리의 여자?” “철가면! 철가면이다! 성주님께서 찾고 있던 바로 그자! 남은 흔적들을 조사해라!” “신분패! 옷가지 사이에 신분패가 있습니다!” “6등급 탐험가, 니벨즈 엔체……. 이게 철가면의 본명인가? 여자 쪽의 신분패는?” “애석하게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장님, 어떤 꼬맹이가 여기서 뭔가를 집어갔다고 합니다” “뭐? 어디로 갔다고 하더냐!” 이내 경비병들이 다급히 소년이 사라진 골목으로 달려나갔지만, 이미 사라진 소년을 찾아낼 수 없었다. 337화 스노우볼 (1) 등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 이를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주변은 깜깜했다. 그리고……. 삑-! 어디선가 비프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지? 잘못 들은 건 아닌 듯한데……. 스윽. 일단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은 굉장히 어두웠으나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누워 있던 자리에 하얀빛을 내는 보석이 떨어져 있던 덕분이었다. ‘기록의 파편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서둘러 주워 들었다. 하지만……. ‘뭐야, 그냥 라이트 젬이네.’ 잘 살펴보니 애석하게도 평범한 마도구였다. 빛을 내는 게 기능의 전부인, 탐험가라면 한 번쯤 보거나 쓸 일이 있다는 횃불 대용의 마도구. 이건 왜 이 자리에 떨어져 있던 걸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라이트 젬의 빛이 멀리 퍼질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솨아아아아-! 빛이 닿는 반경이 넓어지자 주변의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구분이 됐다. 「캐릭터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개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석조 건물. 라프도니아와 다르게 돌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 내가 조금 전에 있던 장소와 모든 구조와 형태가 일치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간이 많이 흐른 듯하다는 것뿐. 음, 이걸 보면 제대로 돌아오긴 한 거 같은데……. ‘그럼 아멜리아, 얘는 왜 옆에 없는 거야?’ 처음 과거로 이동했을 때와 달리 아멜리아가 없다. 설마 먼저 깨어난 건가? 하긴, 파루네섬에서도 내가 일찍 깨어났었지. 어쩌면 이 마도구도 아멜리아가 어디선가 구해와 켜두고 간 걸지도 모른다. 그럼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을 테고. “크흠.” 마른 기침을 몇 번 내뱉어 목을 풀어준 뒤, 있는 힘껏 외쳤다. “아멜리아—!” 강철 성대를 타고난 바바리안의 외침은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며 메아리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몇 분을 기다려도 답은 없었다. “…….” 왠지 불길하게만 느껴지는 정적. 혹시 기록의 파편석으로 원래 시간대로 돌아온 건 나 혼자일 뿐인 걸까? 불현듯 그런 가능성마저 뇌리에 스쳤다. 하지만……. ‘우선은 기다려보자.’ 당장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깨어난 자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다만 가만히 기다리기는 좀 심심하니……. ‘몸상태나 점검해 보자.’ 자체 점검을 시작했다. 「정보 일치율 83%.」 「캐릭터 정보의 갱신이 필요합니다.」 「갱신 및 동기화 중…….」 예상대로 과거에서 먹은 정수들은 그대로였다. 다만, 나는 차분히 점검을 이어 나갔다. 정수를 먹기는 했지만 여관에만 있다가 도시에서 하루 놀고 바로 노아르크를 내려와야 했으니까.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캐릭터의 영혼에 스며든 [시체골렘의 정수]가 제거되었습니다.」 「고통 내성이 -70 하락합니다.」 「근력이 -15 하락합니다.」 「골강도가…….」 고통내성이 하락하며 무뎌진 감각이 일정 부분 회복됐다. 바이욘의 정수에 붙은 +30 덕분에 아예 내성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70이나 되는 스탯의 공백은 평상시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 물론 큰 문제는 아니다. 고통내성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스탯이 대폭 상승했으니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캐릭터의 영혼에 [볼-헤르찬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물리 내성이 +70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40 상승합니다.」 「독 내성이 +120 상승…….」 물리 내성, 자연 재생력. 탱커의 필수 스탯 두가지와 독 내성. 그리고 근력은 붙지 않았으나,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상위 스탯이 붙어 있다. 「근질량이 +15 상승합니다.」 근질량. 3등급 이상의 몇몇 몬스터들에게서만 획득이 가능한 초희귀 스탯. 효능은 실로 간단하다. 근질량 1당 근력 수치의 총합이 1% 증가한다. ‘지금 내 스탯에 15%면, 근력으로는 60이 조금 넘는 정도겠고…….’ 여기에 지구력 +30, 시각 +20, 골강도 +80이라는 보너스 스탯이 붙어서 정수 하나만으로 스탯 총합이 어마무시하게 올랐다. 반대로 줄어든 스탯도 있기는 하지만. 「민첩성이 -30 하락합니다.」 「유연성이 -50 하락합니다.」 「동기화 완료.」 「캐릭터 로그 전송을 재개합니다.」 의외로 민첩성보다 체감이 잘 되는 게 유연성의 하락이었다. 몸이 이전보다 훨씬 뻣뻣해졌다고 해야 하나? 유연성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원래는 가능했던 몇몇 동작들이 제한되었다. 민첩성의 하락으로 동작의 속도도 느려졌고. ‘뭐, 그래도 얻은 거에 비하면 이 정도 페널티는 없는 수준이지.’ 스탯도 스탯이지만, 볼-헤르찬의 정수가 지닌 가장 큰 이점은 스킬에 있다. (P) 진화형 외피 — 물리 내성 수치에 비례해 상시 보너스 상태를 얻습니다. 우선 패시브인 [진화형 외피] 이 스킬은 물리 내성 수치가 ‘70’, ‘350’, ‘750’, ‘1,500’일 때 추가 효과를 준다. 참고로 1단계 효과는 이렇다. 「캐릭터의 물리 내성 수치가 70 이상입니다.」 「도검류 무기에 한하여 50%의 내성을 갖습니다.」 내가 평소에 ‘도검불침’이라 부르던 그것. 이게 오러 대비용 정수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러는 무조건 도검류로 구분이 되니까. 이 스킬 하나로 90% 물리 관통이라는 미친 성능이 45%로 절감이 되는 것. ‘아무튼, 2단계는 ‘거대화’를 켜야지만 발동이 되겠고…….’ 3단계는 정수 하나 정도만 더 먹으면 풀 도핑 상태에서 개방이 가능할 듯하며, 4단계는 지금 수준에서 꿈도 꾸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배율형 버프들은 대부분 리미트가 걸려 있으니까. 대표적으로 10초간 물리 내성을 3배 증가시키는 오크 주술사의 [열광]도 물리 내성 300 이상으로는 오르지 않는다. ‘근데… 진짜 근처에 없는 건가?’ 캐릭터의 육성 상태를 점검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잠시, 아멜리아를 기다리던 나는 슬슬 초조해졌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체감상 거의 2시간은 지난 듯하다. 그런데 아직까지 주변에선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고 있다. “쓰읍, 이럴 리가 없는데…….” 여러모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이 라이트 젬은 빛을 뿜어내던 중이었으니까. 아멜리아가 아니더라도, 이 마도구를 작동 시켰을 인물이 근처에 있어야 했다. ‘…일단 주변 좀 둘러보자.’ 이쯤 되면 엇갈릴 걸 우려해 계속 가만히 있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기에, 나는 라이트 젬을 이용해 시야를 밝히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면 의문점은 또 있었다. ‘애초에 이 도시가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 것도 좀 이상하단 말이지.’ 지난날, 노아르크는 왕가의 침략을 피해 성벽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왕가군은 이 도시를 점거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없을 만큼 조용하다. “설마…….” 왠지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아직 단정을 내릴 시기는 아니다. 따라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몸을 가릴 것 구하기라든가. 콰앙-! 가장 먼저 보인 숙박업소에 들어선 나는 식탁보의 먼지를 털어낸 뒤 허리에 둘렀다. 어차피 내게 맞는 옷이 있을 거 같진 않다는 판단. ‘그래도 이제 좀 문명인 같네.’ 이로써 조금 더 사람다워졌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먹을 건 없나?’ 의식주 중 ‘의’가 해결되자 허기가 몰려왔고, 나는 각 호실들을 돌며 서랍장이나 찬장을 뒤졌다. 이런 숙박업소는 주로 탐험가들이 이용하기에 머지않아 먹을 만한 보존 식량을 찾아 굶주림을 달랠 수 있었다. ‘이건 뭐 아포칼립스 세계관도 아니고.’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음식을 찾아 먹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그럼… 다시 좀 둘러볼까.” 배도 얼추 채웠겠다, 나는 건물에서 나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적에 휩싸인 도시를 배회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텅 빈 차원광장에 도착한 내 시야에 막사 하나가 들어왔다. ‘왕가……?’ 왕가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달린 군용 막사. 아마 노아르크를 점거했던 군에서 설치해 둔 것인 듯한데……. 스윽. 인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심스레 천을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가 봤다. 한데 회군하며 챙길 건 다 챙겨서 돌아갔을까? 막사 내부는 커다란 책상 하나가 놓인 걸 제하면 먼지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런 씹…….” 그게 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과거로 간 이후에 이곳의 시간이 멈춰져 있었을 가능성은 이 도시가 유령 도시처럼 변한 걸 보자마자 진작에 버렸다. “근데 설마 1:1 비율도 아니었을 줄이야.” 나는 먼지가 쌓인 책상을 검지로 쓸었다. 거의 2cm는 묻어나왔다. 이곳 환경을 감안하면 고작 6개월 만에 쌓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대체 지금이 언제인 거야?” 불길한 예감이 실체화되며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그 순간이었다. “드디어…….” 바로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자,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겨우 영입해 온 SSR급 동료. 그래, 다행히 나 혼자 돌아온 건 아니었구나. 진짜로 먼저 깨어나서 어딘가 갔었던 건가 보네. “넌 대체 어디 갔던 거냐? 나는 네가 사라진 줄로만…….” 반가움에 뭐라 말을 걸던 나는 흠칫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냐……? 그 장비들은?” 아멜리아는 맨몸뚱이로 방금 깨어난 나와 명백히 달랐다. 딱 봐도 맞춤 제작한 듯한 장비를 풀장착한 상태였다. ‘조금 일찍 깨어난 정도로 이런 장비를 파밍하는 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에 이질감을 느끼던 때.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 일단 나를 따라와라!” 아멜리아가 거칠게 내 손목을 부여잡았다. *** 만약에. 갑작스레 드리프트를 하며 나타난 차의 문이 열리며 누가 차에 타라고 소리를 친다면.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내 답은 ‘YES’였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정체불명의 낯선 인물일지라도 고민을 할 텐데, 하물며 그 대상이 동료라면야. 당연히 그 말에 따르는 편이 현명하다. 그렇기에……. “후우, 후우……!” 조금 느닷없지만, 어두운 거리를 내달리고 있다. 그것도 아멜리아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정말이지 온힘을 다해서 전력으로. 궁금한 게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건 일단 뛰면서 물어봐도 늦지 않을 테니까. “아멜리아……! 대체 뭔 상황인 거냐? 짧게라도 좋으니 뭔가 설명이라도 좀 해봐라!”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정말로 짧게 답했다. “추격자가 있다.” “추격자?” “칠강七強의 일원 중 하나, 혈령후다.” “뭐?” “미안하다. 이번 일은 내 실수다. 설마 벌써 내 기감을 속이고 뒤를 밟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해야 하나? 아니, 칠강이 대체 뭔데? 혈령후는 또 누구고? 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으로 확인했다. “우리 둘이서도 못 이길 정도로 강한가?” “강하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내 필패일 만큼.” “뭐?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그러고 보면 너는 모르는 게 당연하겠군. 그 여자가 정령왕과 계약하고 날뛰기 전이었을 테니까.” 이내 아멜리아가 뛰면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어?” “당대 순혈의 주인이자, 아홉 번째 정령왕의 계약자. 그게 그 여자의 이름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순혈? 정령왕? “……에르웬이?” 걔가 그렇게 강해졌다고? 아니, 그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나도 모르게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데 그 작은 중얼거림을 뛰면서도 들었을까. 아멜리아가 씁쓸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개벽 157년 3월 2일.” “······응?” “그게 오늘 날짜다. 얀델.” 이런, 미친······. 진짜로 2년 하고도 6개월이나 지났다고? *** 「비요른 얀델」 레벨: 6 육체: 1,167.34(New +226.66) / 정신: 490.1(New -13.39) / 이능: 2,230.25(New +53.4) 아이템 레벨: 0 종합 전투 지수: 3,987.69(New -2275)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만티코어 - Rank 5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New) 338화 스노우볼 (2) 2년 6개월. 그곳에서 약 반년을 머물렀으니, 대충 5:1로 시간이 흘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이 시간비가 고정이 아닌 거 같단 거지만. “아멜리아, 혹시 너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거냐?” 내심 확신을 짓는 와중이면서도 굳이 물었고, 즉답이 돌아왔다. “그래, 오랜 기다림이었지.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마도구도 내가 두고 간 것이다. 돌아왔을 때 바로 빛을 뿜어내며 내게 신호를 주게끔. 뭐… 신호가 오기까지 2년이 넘게 걸릴 줄은 몰랐지만.” 어쩐지 일어났을 때 ‘삑’ 소리가 나더라니. 그게 마도구가 켜지면서 나는 소리였구나. “아무튼, 궁금한 건 나중에 전부 설명할 테니 지금은 어서 뛰어라.” 아멜리아는 잡담을 끝내고 이 자리를 벗어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싶은 듯했으나, 나는 순순히 그 의견에 따를 수 없었다. 암만 그래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잠깐만, 추격자가 에르웬이라면 왜 도망쳐야 하는 건데?” “너는 몰라도, 그 여자라면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들 테니까. 맹약이 발동되는 이 도시에서 싸우면 내 필패다.” 아니, 지는 건 알겠는데. “걔가 대체 왜 너를 죽이나?” “내가 네 죽음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 그 말에 어느 정도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다만, 그럼에도 아멜리아의 행동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근데 그건 내가 만나서 설득을 하면 되는—” “설득은 쉽지 않을 거다.” “…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문하자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날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얀델, 그 여자는 네가 알던 그때의 그 요정이 아니다.” 마치 어떠한 괴물이라도 떠올리는 듯한 표정. 아멜리아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에르웬을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많은 일이 있었지.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다.” 내 중얼거림을 단호하게 잘라낸 아멜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에게 아직도 그럴 의사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중요한 건 딱 하나다.” “그, 그게 뭔데……?” “그 여자로는 널 보호할 수 없단 것.” 이런 기분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암만 대화를 나눠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해야 하나? “…보호? 나를? 대체 누구한테서?” 나는 멍하게 되물었고, 아멜리아는 이번에도 짧게 답했다. “이 세상 전부에게서.” 뭔 소리야 이건? 그런 의문이 떠올라 새롭게 뭐라 되물으려던 차. “비요른 얀델.” 아멜리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환자에게 시한부 선고를 하는 의사처럼. 단호하면서도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왕가에서 네가 악령이라고 공표했다.” …뭐요? *** 나른한 오후. 따스한 햇살이 창살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집무실. 다만 그 안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입니다.” 제3 마법병단의 부보관 알렉스 헤일로. 그는 정기 보고가 끝났음을 알리며, 바짝 굳은 정자세로 턱을 뻣뻣하게 올린 채 상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흐음…….” 이내 서류를 모두 읽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늘 보아온 피로에 찌든 그 특유의 눈빛. 이를 보며 그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겠다는걸. “잘 썼네요. 보고 내용도 좋고. 특히 노아르크의 동태에 관한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추측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상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가져온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나아.” 이건 비난일까 칭찬일까. 알 수 없으나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감사합—”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이런, 젠장. 꿀꺽. 순식간에 돌변한 목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더 이상 상관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 아니, 피로는 여전하지만… 적어도 졸린 듯한 눈은 아니었다. 잡아먹기 직전의 초식동물을 대하는 포식자의 눈.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진짜 탈탈 털린다. “고칠 부분을 말씀해 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일단 양식부터가 문제예요. 특히 이 부분, 내가 저번에 말해 줬을 텐데 또 실수했네요? 제 승인이 나면 페브로스크 단장님께도 전해지는 거 몰라요?”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애초에 내용부터가 문제예요. 노아르크 놈들이 미궁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차라리 작가를 하는 게 어때요? 뭐, 팔리지는 않을 거 같지만.” “시정하겠습니다.” “뭐, 앵무새예요? 어떻게 시정할 건데? 그거를 말해야죠.” 후, 드디어 끝났구나. “…다시 써오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내 상관의 시선이 다른 서류로 이동했고, 알렉스는 탈탈 털린 영혼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새 업무에 집중한 상관을 방해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끼이익- 점점 줄어드는 문의 틈 사이로 상관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한 얼굴로도 한 가지에 열심히 집중하는 그 모습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병단 내의 군인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되, 어째서 미워하지는 않는지 알 것도 같았다. ‘조금만 친절해도 훨씬 인기가 많으실 텐데…….’ 금의 마도사. 병단의 내부에서는 ‘꼬마귀신’이라는 별명이 더욱 유명한 제3 마법병단의 부단장. ‘확실히 외모가 대단하긴 하단 말—’ “뭐 해요? 안 나가고?” “시, 실례했습니다. 니아 라프도니아!” 이내 당황한 사내가 군례를 올리며 조심스레 당기던 문을 서둘러 쾅 닫았다. 그리고……. “하아, 저건 언제쯤 쓸 만해질런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금의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관심이 옮겨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멈췄던 펜을 움직이며 책상에 쌓인 업무들을 하나씩 해결해 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레이븐은 굳은 몸을 스트레칭하며 창가를 보았다. 어느샌가 창밖 너머 세상은 해가 져 어두컴컴했다. ‘중요한 건 오늘 다 처리를 끝냈으니, 남은 건 내일 아침 일찍 와서 끝마치면 되겠고…….’ 제복 단추를 하나씩 풀던 레이븐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단추를 여몄다. 어차피 내일 또 이 옷을 입고 출근을 할 건데, 굳이 갈아입는 게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든 것. 이내 장교용 외투만 걸쳐 입고서 책상 정리를 끝마친 그녀는 마지막으로 달력을 확인했다. 개벽 156년, 12월 2일 달력을 볼 때면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슬슬 나아질 시기도 된 거 같은데. 아직도 가끔씩 이렇게 몸이 굳고 가슴이 침잠한다. 상실을 알았기에, 더욱 사무치게 깨닫는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과 겪었던 그 짧은 탐험이 너무도 즐겁고 찬란했다는 것을. 다만 그 시절은… 이제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벌써 2년도 넘게 지났구나…….’ 무려 2년 하고도 6개월.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말하려면 며칠로도 모자라다. 그러나 그래도 짧게 표현하자면.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어떻게든 이어붙이고자 했던 인연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고. 알테미온 학파의 6등급 마법사가 왕가군에 합류해 한 병단의 부단장으로 성장할 만큼. 덜컥. 레이븐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조용히 흘러들어왔다. 솨아아아아- 그녀는 기억 속 동료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씩 떠올렸다. 바바리안 여전사 아이나르 프넬린. 평소엔 못 미덥지만 중요할 땐 믿음직하던 아브만. 그리고 미샤까지. ‘다들 못 본 지 반년도 더 지났구나…….’ 가장 최근에 만난 동료는 아브만이었다. 그조차 반년 전 일이었고, 나눈 대화도 이전처럼 정겹지 않았다. 6층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근황이나 얘기하다가 어색하게 헤어졌었지. 뭐, 에르웬이야 2달 전에도 봤지만……. 이제는 전 동료라 하기도 뭐한 사이니까. 잠깐 눈만 마주쳤을 뿐,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브만 씨나 아이나르 씨는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은데…….’ 전 동료를 떠올리던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문득 가장 아픈 손가락이 기억난 탓이었다. “미샤 씨는…….”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레이븐은 열린 창가로 손끝을 내밀었다. 그리고 흩날리기 시작한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미샤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당…….] 그날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 4개월 전. 개벽 154년 10월 28일. 유난히 쓸쓸했던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 직감直感. 탐험가들이 우스갯소리로 제6의 감각이라 부르는 그것. 놀랍게도 이 감각은 삶에 있어 굉장히 유용하다. 명확한 정보나 근거가 없음에도, 단지 느낌이 싸해 허리를 숙였더니 그 위로 발톱이 지나갔다든가 하는 일은 이쪽 업계에서 몹시 흔한 이야기니까. 두근-! 다만 이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다. 경험이 많고, 지능이 높을수록 직감이 들어맞는 일은 많아진다. 직감이란, 무의식에 모래 알갱이처럼 쌓인 정보들이 조합되며 생겨난 결과이니까. 어째서 그 결과에 도달했는지 설명이 힘들 뿐. 무의식엔 그 근거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해야 할 말이라니요……?” 레이븐은 불길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되물었다. 아직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직감이 단순히 판단 오류로 끝나는 일은 흔하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제대로 들어맞는 일이 훨씬 희귀할 정도다. 하지만……. “응… 해야 할 말이 있당… 아니, 있어…….” “저기, 말투가…….” “아, 이거……? 한번 바꿔보려고. 언제까지고 그런 모습일 수는 없으니, 까…….” “아… 그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조, 좋네요? 저도 응원할게요.” 평면적으로 보자면 미샤의 변화는 긍정적이었다. 레이븐도 미샤의 사정은 어느 정도 아니까. 과거에 혀를 다치는 일이 있었다던가? 시간이 흘러 상처가 다 나았음에도 정신적인 문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래, 분명 그럴 터인데……. 두근-! 왜 심장은 더 세차게 뛰는 걸까. 괜히 더 불길해지게.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데요?” “그게 실은…….” 미샤는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결심이 섰는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팀에서 나가려고 한당.” 탈퇴 선언. 다만 레이븐은 그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고.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 결국엔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누구를 데려온들 그 바바리안의 빈자리는 메울 수 없을 테니까. 미궁 탐사는 무기한 중단될 것이고, 끝내 팀이 해체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알겠어요. 그러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면,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문제는 아니겠죠.” 팀이 해체되는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우리들의 인연이다. 같이 미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인연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시려고요?” “우선 가문으로 돌아갈 거야.” “아, 일단 계획 없이 쉬시려는 거라 해도 저는 찬성—” “그리고 미궁에 들어갈 거당. 아니… 들어갈 거야.” “………네?” 레이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팀을 나간다 해놓고, 미궁에 들어간다니? 뒤통수가 얼얼하다. “미궁요? 대체 누구랑요? 설마 벌써 새 팀을 구한 건가요?” 레이븐은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다만, 미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을 뿐. “그보다, 해야 할 말은 이게 끝이 아니당…….” 그 말에 레이븐은 겨우 진정됐던 불길한 기분이 한층 진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일까? 흥분으로 높아졌던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해보세요.” 머릿속이 차가워진 탓인지 목소리도 어딘가 쌀쌀맞게 흘러나왔다. 미샤는 이에 시선을 피하다 못해 바닥에 고정했다. 그리고 정말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곧… 비요른이 악령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건데…….” “…네?” “아! 그, 그냥 소문일 뿐이니까! 누,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믿지 마랑! 나, 난 단지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미샤 씨는. 얀델 씨가 죽은 것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리기라도 한 건가? 지금 나누는 대화가 정상적인 대화인가 싶으면서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이성적인 사고방식보다도 먼저 진실에 도달하는 제6의 감각. “앞으로 미샤 씨가 그런 소문을 퍼트리려고 하는 거군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답을 대신하듯 미샤가 뒷걸음질 쳤다. “그래서 내게 미리 말해 주려 온 거겠죠. 우리가 얀델 씨를 악령으로 기억하길 바라지 않았을 테니.” 레이븐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근데 말이죠.” 이미 그녀는 깨달은 이후였다. “얀델 씨가 악령이란 소문이 날 거라 하셨는데.” 아까부터 몸을 좀먹던 이 불길함의 정체가 뭔지를. “그거… 그냥 소문이 아닌 거죠?” 이내 레이븐은 미샤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그녀답지 않은 오판이었다. 마법사가 육체파 탐험가를 힘으로 제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읏!” 미샤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뒤돌아 도망쳤고, 그다음 날 도시에는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것이 미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339화 스노우볼 (3)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캔이 찌그러지듯 눈앞이 일그러지고, 조금 전에 아멜리아가 남긴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돈다. ‘왕가에서 네가 악령이라고 공표했다.’ ‘왕가에서 네가 악령이라고 공표했다.’ ‘왕가에서 네가 악령이라고 공표했다.’ 마치 장정 수십 명이 나를 둘러싸고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정도의 충격. 만약 얘가 아니었으면 한참 동안 이러고 있었겠지. “얀델.” “아…….” “…괜찮나?” 정신을 차렸을 땐 아멜리아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내가 보기엔 한없이 자그마한 오른손을 내 가슴에 댄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어, 어…….” “심정은 알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 미안…….” 아멜리아가 내 팔목을 휙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아갔고, 나도 이에 멍하니 발을 움직였다. 그야 내가 봐도 얘 판단이 옳았으니까. [그 여자에게 아직도 그럴 의사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에르웬 역시 나를 악령으로 알고 있다. 즉, 아직까지 동료로 여겨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건… 아마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래…….’ 나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간다. ‘결국 이렇게 되는 날이 왔구나.’ 순순히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또 모른다. 나를 죽였다는 오해로 아멜리아를 추격하는 중인 에르웬 아닌가. 혹시 내가 악령이건 말건 이전처럼 대해 줄 수도 있다. 그래, 그런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안 잡아 줘도 괜찮다.” 나는 아멜리아의 손목을 떼어내고서, 내 힘으로 뛰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멜리아의 말대로였다. 에르웬은 지금의 나를 보호할 수 없다. 설령 그럴 의사가 있다고 한들, 에르웬은 요정족의 일원이니까. 날 도우려다간 종족에 해를 끼칠 것이며, 에르웬 역시 개인의 감정보다는 종족을 위해서 결단을 내릴 확률이 높다. ‘……라는 건 그냥 핑계겠지.’ 나는 달리면서도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야 아무리 영악하고 비겁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아직 에르웬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두렵다. 만나서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모르니까. [맞다! 족장도 그랬다! 악령은 발견한 즉시 죽여야만 한다고!] 언젠가 했었던 아이나르의 말이. [응··· 예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일을 겪으니 확실히 알겠당. 왜 사람들이 악령을 믿지 말라고 했는지······.] 미샤의 말이. [기회가 왔을 때 처치하는 게 현명하다. 악령을 믿었던 자가 어떻게 됐는지, 그 결과가 바로 저기 있으니까.] 곰아저씨의 말이. 꽈악.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러온다. 생각만으로도 이런데, 직접 겪었을 땐 어떨까. 그들이 내 진심을 의심하고. 기만당한 것에 분노를 토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 어떻게든 이 자리만 모면한다면 아예 그런 날이 오지 않도록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멜리아를 따라서 뛰었다. “얀델, 이쪽으로!” 텅 빈 광장에서 벗어나, 어두운 지하도시의 거리를 지나쳐 중심부에 자리한 영주성으로 향했다. 묘지 말고도 영주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다. 이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는 게 급선무— 끼이익-! 그렇게 영주성에 도착해 닫힌 문을 힘으로 열어 내던 순간이었다. “얀델, 피해라.” “응?” 아멜리아가 나를 뒤에서 밀며 문틈으로 넘어뜨린 그 찰나. 푸욱. 파공음도 없이 날아든 화살 하나가 아멜리아의 등 깊숙이 파고들었다. “……!” 충격으로 벌어진 입과 기우는 몸. 이내 포개어지듯 내 몸 위로 쓰러진 아멜리아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다행, 이다…….” “…다행이라니, 그게 대체—!” “표, 정을 보니… 널 해칠 거 같, 진 않…….”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되물을 새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아멜리아를 안아 들고서 일어났다. “금, 고를…….” 그 와중에도 아멜리아는 뭐라 내게 말을 해오고 있었지만, 그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콰직-! 아멜리아가 폭발했다. 내 품에 안긴 채.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 투두두두. 수십의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아, 멜… 리아……?” 아멜리아를 들고 있던 팔에서 무게감이 사라졌다. 다만 나는 목적을 잃은 팔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아멜리아가 죽었다고? 이렇게……? 그것도… 에르웬에 의해서……? 몸이 석상처럼 굳기도 잠시, 나는 이질적인 부분을 캐치했다. “피.” 피가 없었다. 이렇게 사람 한 명이 조각날 정도의 폭발이라면, 응당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어야 했을 터인데. 내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솨아아아아아-! 수백의 살점들로 변한 아멜리아가 빛무리로 변해 사라진다. 마치 죽음을 맞이한 몬스터처럼.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의 분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소환이 해제됩니다.」 그래, [자가복제]로 뽑아 둔 분신체였구나. 아후, 놀랬잖아……. 진짜 죽은 줄 알고. ‘처음부터 분신체로 만난 거였으면 미리 말 좀 해주지.’ 너무도 놀랐던 만큼 아멜리아를 향한 투정이 생겼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서둘러 정리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뛰면서 생각하자.’ 나는 땅을 박차며 도주를 이어 나갔다. 아멜리아를 따라서 노아르크로 올 때 길을 모두 외워 두었기에 비밀 통로 위치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까지 무사히 갈 수 있냐는 것인데……. 타닷. 아직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상태일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에르웬이 나를 적대하고, 죽이려 들 가능성. 그 전제를 떠올려보니, 자연스레 아까 아멜리아의 몸이 터져 나가던 장면이 뇌리에 스쳤다. ‘그 이펙트…….’ 일반적인 폭발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발이었다. 불꽃이 함께하지도 않았고. 파편들이 수류탄처럼 튀지도 않았다. 단지 젠가처럼 수백의 조각들로 무너져내렸을 뿐. ‘암만 봐도 [파열]인 거 같은데…….’ 참고로 [파열]의 효과는 간단하다. 화살이든, 검이든, 도끼든 상관없이, 칼날이 살을 파고들어 일정량 이상의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면. 시전자의 주스탯에 비례해 고정 대미지를 준다. 물리 내성, 항마력, 각종 속성을 전부 무시한다는 뜻이다. 마치 인간의 전유물 ‘오러’처럼. ‘거기에 ‘순혈’을 손에 넣고 정령왕이랑 계약도 했다고 했지…….’ 방금 그게 [파열]이 맞든 아니든, 일대일 전투에서 내 승산은 적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게, 저 정도 스펙이면 장비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 뒀을 것 아닌가. ‘이걸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어떻게 이겨?’ 그런 생각을 하며 전력 질주를 이어가던 때였다. 후우웅- 어두운 지하 도시에서 광원 역할을 해주던 라이트 젬이 빛을 잃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라이트 젬이라면 나도 몇 번인가 써봤으니까. 이 마도구는 마력이 다하면 점점 빛이 약해지며 꺼지는 식이다. 이렇게 즉시 빛을 잃는 게 아니라. ‘…어둠의 정령인가.’ 설마 이 속성까지 다루게 됐을 줄은 몰랐는데. 이내 나는 뛰는 걸 멈췄다. 툭. 한 번 지나간 길을 외우는 건 자신 있다. 보폭에 집중하고 걸으면 어둠 속에서 목적지까지 어찌어찌 찾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자만 없다면. ‘도주는 실패.’ 그런 판단이 든 즉시 눈을 감았다. 무용지물이 된 시각을 버리고 다른 감각에 집중을 하는 게 옳다는 판단. 이내 과열된 청각이 발소리를 잡아냈다. 터벅. 조금 의외였다. 당연히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먼저 들릴 줄 알았는데. ‘하긴, 내가 악령이라 생각했어도 대화는 나눠 보고 싶겠지.’ 언제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발끝에 힘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멜리아가 마지막에 남긴 말을 떠올렸다. [표, 정을 보니… 널 해칠 거 같, 진 않…….] 표정을 봤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가시 거리가 나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여자니까. 어둠 너머에서 활을 쏘던 에르웬과 눈이 마주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표정만 보고서 어떻게 확신을 해?’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에르웬이 어떤 생각을 하는 중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에르웬이냐?” 나는 에르웬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발소리도 멈추었다. 두근-! 내 심장 소리만이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정적. “아저씨.”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과 함께 라이트 젬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을 비추는 빛. 덕분에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아멜리아가 어째서 다행이라고 했는지. 왜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는지. “아저씨… 인 거예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 “그래.” 내가 긍정의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에르웬의 호박색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의 편린을 쏟아내며 세차게 떨린다. 기쁨, 반가움, 기대, 불안, 두려움. 그리고……. “어, 어떻게…….” 불신. “부, 분명 죽었다고…….” “아, 그렇게 됐다.” “그, 그렇게 됐다뇨! 그런 말로 끝날 얘기가……!” 일순간 감정이 격양된 듯 목소리를 높이던 에르웬이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그 여자의 수작?”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중얼거림. 동시에 에르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 누구야.” 어,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부터 정말로 얘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건지 불안해졌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답했다. “누구긴? 나다, 비요른 얀델.” “거짓말.” “뭐, [거대화]라도 쓰면 믿겠나?” “어, 해 봐.” 짧은 말투가 묘하게 이질적이었으나, 나는 별다른 말없이 [거대화]를 시전했다. “뭐, 뭐야… 진짜 아저씨인 거예요?!” 에르웬의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그렇다니—” “아니, 이것만으로는 못 믿겠어.” “…응?” “다른 것도 써봐.”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기뻐하던 에르웬은 순식간에 냉기 모드로 돌아갔고, 나는 서둘러 [도약]을 사용했다. 그리고……. “지, 진짜 아저씨……!” “그래, 이제라도 믿어주니 다행—” “…이럴 거 같았어? 이걸로는 부족해.” 똑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내 정수를 전부 다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에르웬은 계속해서 요구를 이어 갔다. [살점폭발]을 쓰라고 했을 때는 아주 아찔했다. “…역시 가짜였네?” 광기와 살기가 휘몰아치는 그 눈빛은 정말이지 오금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수를 삭제했음을 말하고, 이를 대신해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얘기들로 신원을 증명하기로 했다. “첫 만남에서 나한테 준 것.” “리쵸잎.” “우리가 첫날밤을 보낸 여관의 이름.” “…….” “대답을… 못 해……?” “마, 마늘과 소금이란 이름의 여관이었다.” “늦었어.” “아니, 첫날밤이라 하니까 당황한 거 아니냐. 단지 정수를 보러 갔을 뿐인데…….” “흐음.” 그렇게 옛 얘기를 하며 얼마나 떠들었을까. 세상에서 둘밖에 모르던 얘기가 술술 나오자, 얘도 감정 기복이 조금씩 덜해지더니 마침내 지금에 이르러 완전히 의심을 거둬냈다. 비록 언제 또 수틀려서 내 미간에 시위를 겨눌지는 미지수라고는 해도. 일단, 당장은 그랬다. “아, 아저씨……!” “오랜만이다, 벌써 2년 6개월이나 지났다지?” 한참을 걸려 내뱉은 인사. 언제 그랬냐는 듯 활을 거둔 에르웬이 밉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이제 나타난 거예요! 살아 있었으면서……! 왜 저를 찾아오지 않은 거냐고요!” 아, 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나라고 오고 싶지 않아서 안 온 건 아닌데……. “사정이 있었다.” 언제 또 회까닥할지 모른단 생각에 서둘러 답하자, 에르웬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정이라고 하심은… 혹시 악령이라고 공표된 걸 말하는 건가요?” 어찌 보면 이번 대화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질문.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차. “바보.” 에르웬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리 없는데…….” “…넌 왕가의 공표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리 물으면서도 죄책감과 안도감이 공존했다. 분명 에르웬은 ‘믿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을 테니까. 지금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것이 그 증거— “아뇨? 그 공표가 사실이든 말든 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는데요?” “응?” 당연한 얘기를 하듯 되묻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에르웬이 조목조목 가르치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 우린 성인이 되어서 만났잖아요?” “어, 그렇지?” “악령은 성인이 되는 날에만 나타나고요.” “…그런데?” “근데 악령이고 말고가 뭐가 중요해요?” “…그, 그런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되묻자, 에르웬이 어느샌가 다가와 내 손을 꼬옥 마주잡았다. “동굴에서 목숨을 걸고 날 지켜 준 것도, 모르는 걸 알려 준 것도, 언니가 죽고서… 나를 일으켜 준 것도, 전부 아저씨잖아요.”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누가 뭐래도, 나한텐 아저씨가 비요른 얀델이야.” 그래, 이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 고맙다든가, 그런 말들이 여럿 떠올랐으나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에르웬은 모를 것이다. 방금 그 짧은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 “근데…….” 그때 에르웬이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눈빛과 말투로 내게 말했다. “당신, 진짜 아저씨 맞아?” 정신이 나갈 거 같다. 340화 스노우볼 (4) 미궁의 제7계층, 암흑대륙. 그 일부임을 가리키는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깊은 산지에는 현재 다섯 명의 탐험가가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멸 할배, 차단 마법진까지 얼마나 걸려?” “10분쯤 걸릴 것이네.” “아직도? 에휴, 이래서 신관이 있어야 하는 건데.” 금발 남성의 투정에 마법진을 그리던 노인의 얼굴에 미세한 표정 변화가 생겼다. 크게 티는 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불쾌함이었다. “그렇게 불만이면 남은 한 자리에 신관을 넣으면 되는 거 아니겠나.” 노인의 말에 금발 남성이 피식 웃었다. “할배, 신관이 우리 팀에 오겠어?” “카루이의 사제들도 있지 않은가.” “반쪽짜리 힐러는 이쪽에서 사양인지라.” 그리 중얼거린 금발 남성이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안갯속을 응시했다. 새까만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었으나, 사내의 눈에는 그 사이를 지나쳐 이쪽을 향하는 몬스터의 형체가 보였다. 5등급 야수종 다이빌울프. 원래는 무리 생활을 하는 개체지만, 서열 싸움에 밀려 무리에서 낙오됐는지 혼자였다. 이내 금발 사내가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한 여인을 바라봤다. “냐옹아, 저건 네가 처리해라.”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예민하긴, 그래서 대답은?” 사내의 물음에 붉은 머리의 수인 여성, 미샤 칼스타인은 말없이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컹컹……!” 안개 속에서 괴물이 나타난 즉시 검을 움직였다. 단 2격이면 충분했다. 푹! 왼손에 쥐어진 검이 괴물의 가죽을 꿰뚫은 순간, 냉기가 휘몰아치며 관통상을 입은 괴물의 몸이 꽝꽝 얼어붙었고. 콰앙-! 오른손으로 쥔 검이 빙결 상태의 괴물을 산산조각 냈다. “오, 이제 5등급은 원콤이 나오네?” “…….” 미샤는 대꾸도 하지 않으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금발 남성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야, 근데 넌 왜 나한테만 그렇게 쌀쌀맞은 거냐?” “몰라서 물어……?” “그럼 알겠냐? 데리고 다니면서 정수도 먹여줘, 실력도 키워줘, 거기다 낭군님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줘. 너는 대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그만.” “말투만 봐도 그래. 냥냥거릴 때가 귀여웠는—” “그만하라고.” 이내 미샤가 차가운 눈길로 쏘아보자, 금발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아, 낭군님 얘기는 금지였지? 미안.”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사과를 뱉은 금발 남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동료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미샤는 조용히 들끓는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백호.’ 앞에 자리한 금발 남성의 이름이었다. 왕가에서 유일하게 경계를 하는 ‘개인’이자, 노아르크에서도 매번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실력자. 타닥, 타닥. 불규칙적으로 튀기는 불똥을 바라보며 미샤는 그와의 첫만남을 회상했다. *** 그것은 악마가 내민 손길과도 같았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더. “비요른 얀델을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날 이백호는 말했다. 9층에 가면 ‘소생의 돌’이란 게 있다고. 그것만 있으면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물론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선의는 아니었다.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이백호가 제시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증언해.” “…뭐?” “거의 연인 사이였다며? 네가 하는 말이면 그냥 헛소문처럼은 안 들릴걸.” 도무지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첫 번째 조건. “웃기지 마랑! 그랬다간 비요른이 살아 돌아와도 있을 곳이 없어지는데, 내가 그런 짓을—!” “그래서, 안 할 거야?” 이백호는 히죽거리며 말을 끊었다. 미샤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면서도 입술을 짓누르며 참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그가 제안을 물리고 떠날 듯한 직감이 들었다. “옳지.” 그런 미샤의 인내를 흐뭇하게 보던 이백호는 한층 너그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당황스러웠을 건 아는데, 내가 그냥 생각 없이 한 제안은 아니야. 일단 내가 세운 계획이 제대로만 되면 왕가를 아예 조져버릴 수 있거든?” “…왕가를?” “아무래도 심연의 문을 넘으려면 왕가부터 해결을 해야 할 거 같더라고. 비요른 얀델이 악령인 걸 밝히는 게 그 시작이고.” 미친놈. 그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미샤는 참아냈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왕가가 사라지고 나면 걔가 악령이든 말든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거지.” “…그 계획이 실패하면?” “그땐 내가 책임지고 성벽 밖으로 도망치게 해줄게. 얘기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살 만한 곳 같던데? 뭐, 그것도 싫으면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도시 외각에서 몰래 둘이서 살아가도 되고.” “…….” “제법 괜찮은 이야기지 않아?” 괜찮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에게 선택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죽은 것보다는 산 것이 낫다. 그리고 비요른이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있어 죽은 것과 같다. 다만 미샤는 곧장 승낙할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두 번째 조건을 말해.” “아, 그거? 간단해.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 “안 그래도 쌍수 빙결 검사가 하나 필요했거든.” 태연하게 내뱉는 음성의 미샤는 움찔했다. 분명 웃고 있는 표정인데, 그 눈빛은 마치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나였지?” 미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이 남자의 숨겨진 속내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냥 변덕.” 돌아온 대답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변덕?” “어, 사실 꼭 너일 필요는 없거든. 네가 없다고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소문을 못 내는 것도 아닌 데다가, 소생의 돌까지 구해 줘야 하니까 괜히 귀찮은 일만 늘고…….” 마치 귀찮은 짐을 대하는 듯한 목소리. 이에 발끝에서부터 모멸감이 끓어오르던 차였다. “아, 그래도 장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이백호가 씨익 웃으며 미샤를 응시했다. “너한텐 배신 못 할 이유가 있잖아?”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였다. *** 다시 신원 증명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그 물음에 정신이 나갈 듯했지만, 에르웬의 의심병을 해소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대로 말하면 됐으니까. 파루네섬에서 발동된 기록의 파편석. 그렇게 도착한 20년 전 도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오기 위해 그곳에서 하였던 6개월간의 발버둥. 참고로 악령 얘기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누가 뭐래도, 나한텐 아저씨가 비요른 얀델이야.] 처음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서로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니까. [자네가 앞으로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능력일세.] 나에겐 아우릴 가비스가 준 ‘선물’이 있다. 이게 제대로 작동을 한다면, 내가 ‘악령’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만약에 ‘검증’이 에르웬을 향한다면? 그래서 내가 했던 악령 고백이 만천하에 들통나 버린다면?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지겠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서 주의하는 편이 백번이고 옳다. ‘근데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는 설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런 선물을 해준 건가……?’ 미래로 돌아오자마자 들은 소식이 이것이었던 만큼 그런 의혹도 생기지만, 이 역시 현재로서는 그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 “음… 그럼 아저씨는 악령이 아니란 거네요?” 실체가 어느 쪽이든 관심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 에르웬은 악령 문제에 대해 깊게 캐묻지 않았다. 다만, 의외의 부분에서 집요하게 확인을 해올 뿐. “저기, 그럼요…….” “응?” “아저씨는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 여자랑 반년 동안 같이 지낸 거예요……?” “그, 그렇지?” “막 자기를 구해준 아저씨한테 반해서 동료가 되겠다고도 했고요?” “반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은혜를—” “은혜 때문이면 이제 그냥 버려도 되겠네요?” “…어?” 버려? 아멜리아를?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되지? 이전과 달리 에르웬과의 대화는 따라가는 것이 조금 벅찼다. 그래서 조심스레 할 말을 고르던 찰나. 에르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결국 노아르크 출신 약탈자잖아요? 그런 여자를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굉장히 유용한 인재…….”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어째선지 에르웬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웃고 있던 것이다. “후후, 아저씨 귀엽다…….”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오고서 아마 처음으로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칭찬. 빤히 바라보자 그제야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르웬이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을까? “아저씨, 그 여자는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있잖아. 저 엄청 강해졌거든요. 그런 여자 한 명 없어도 아무 상관 없을 정도로. 돈도 잘 벌고, 제 말 한마디로 부릴 수 있는 부하들도 생겼어요.” “어, 그러냐…….” “네. 물론 아저씨 생각은 알아요. 갑자기 그러한 상황에 처했으니 의지할 곳이 필요했겠죠.” 마치 내가 여자 없이는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은 말투. 이게 내가 예민한 건지 아닌지 고민하던 차였다. “어쩌면 그곳에서 그 여자는 꽤 믿음직스러웠을 수도 있어요. 저, 저랑 처음 만난 그때처럼요…….” 에르웬은 기억 왜곡이 있었을 게 분명한 말을 뱉더니, 내 손을 꼭 마주잡았다. “하지만 걱정 마요. 이제 내가 있으니까.” 그리 말해 봤자 솔직히 얼떨떨하기만 했다. 가까운 사이였던 건 맞지만, 나랑 얘가 이 정도 관계였던가? 2년 6개월 만에 만나서도 서슴없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앞으로는 내가 아저씨를 지켜줄게요. 그래, 그러니까아…….” “그러니까……?” 왠지 불길한 기분에 그렇게 되묻자, 에르웬이 싱긋 웃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죽여 버려요.” “누구, 를……?” “레인웨일즈, 그 여자요!” *** 이제 좀 알 거 같다. 어째서 아멜리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얀델, 그 여자는 네가 알던 그때의 그 요정이 아니다.] 20세의 순수한 요정은 더 이상 없었다. 어딘가 머리에 나사가 빠진 듯 극단주의 성향을 갖춘 요정만이 있을 뿐. ‘여기서 끌려다니면 끝장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하하호호 웃으면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일단 소리부터 질렀다. 이러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거든. 다만 에르웬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도, 갑작스런 함성에도 눈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쁜 듯 박수를 쳤다. “와! 아저씨다!” …거, 기운 빠지게. 나는 에르웬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며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에르웬, 아멜리아는 죽이지 않는다.” “네? 왜요?” 역시나 에르웬은 만만치 않았다. “비밀이란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잖아요? 기록의 파편석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렇고. 일단 당장은 아저씨가 살아 있는 걸 숨겨야 할 거 같은데, 그 여자를 살려둘 이유가—” “그만.” 내가 말을 끊자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아멜리아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다시 그런 말 하지 마라. 알겠나?”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한 뒤, 에르웬이 대답할 때까지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르웬은 어딘가 당황한 눈치로 여기저기 쳐다보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후, 이걸 보면 어떻게든 통제가 될 거 같기도 한데. 아멜리아 문제를 일단락시킨 나는 에르웬과 몇 가지를 상의한 뒤, 비밀 통로를 타고 지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걱정 마요. 아무도 아저씨를 못 볼 테니까.” 지상에 나온 후로는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모습을 감춘 채 여관까지 이동했다. 밤중이라 거리엔 사람도 없었고, 은신을 감지할 실력자는 더더욱 없었다. “좁지만, 오늘은 여기서 묵어 주세요. 내일까지는 제가 어떻게든 더 좋은 곳으로 구해 올게요…….” “더 좋은 곳……?” 여기만 해도 방 네 칸이 달린 꼭대기 층인데……? 싸고 맛있단 이유로 천 스톤짜리 식사를 하러 한 시간 거리를 왕복했던 에르웬의 말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이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겠지. 얼른 적응하는 편이 옳— “자, 그럼 얼른 들어가요!” “…너도?” “그럼요? 제 돈으로 잡은 방인데?” 어, 그것도 그러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어버버거리는 사이에 에르웬이 나를 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저씨, 이거 기억해요?” 에르웬이 냅다 아공간에서 술병을 꺼냈다. 마치 새로운 시험에 빠진 기분이었다. ‘기억하냐니…….’ …아, 기억났다. “우리가 처음 마셨던 귀환주군.” 다행히 정답이었는지, 에르웬이 ‘역시 기억하실 줄 알았어요!’라고 기뻐하며 후후 웃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들었다. “굉장히 낭만적이지 않아요?” “낭만적이라니……?” “이 술 말이에요. 나중에 죽여야 할 연놈들을 전부 죽이고 나면 그때 혼자 마시려고 보관하고 있던 거거든요. 헤에, 근데 이걸 아저씨랑 마시게 되는 날이 오다니…….” 얘한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얘가 이 지경이면 다른 동료들도 조금 상태가 걱정되는데……. “좋아, 한 잔 하지.” 술 먹고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것은 주특기였기에, 에르웬의 대작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술은 여전히 잘 못 마시네.’ 에르웬은 얼마 못 가 술에 취해 침대로 향해 몸을 뉘었다. 무방비하게 쓰러진 모습을 보니, 다른 곳에서 이러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아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해.’ 나는 피식 웃으며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왜 남편들이 결혼만 하면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게 되는지 알 거 같은 시간이었다. ‘평화롭네……’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 그 앞에 앉아 정적을 즐기기도 잠시, 나는 본격적으로 사고를 활성화시켰다. 에르웬과의 취중 대화를 통해 들은 정보의 양이 상당했기에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레이븐은 제3 마도병단. 곰아저씨는 생계를 위해서 클랜 입단. 미샤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댔고. 아이나르는……. ‘잘만 풀리면 다시 데려오기 가장 쉬울 거 같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뿔뿔이 흩어진 동료를 다시 모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난관이 있던 탓이다. 퀘스트도 보면 다 순서가 있지 않은가. ‘내가 악령이란 소문이 돌고 몇 달 뒤에 왕가에서 이를 인정했다고 했지…….’ 우선 이것부터 수습해 보자. 341화 스노우볼 (5)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다. 처음은 그런 소문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왕가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증명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아우릴 가비스의 선물을 이용하면 그만. 그럼 나는 얀델 준남작이란 신분과 내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암만 봐도 좀 이상해’ 곱씹을수록 찜찜하다. 그도 그럴 게, 죽은 사람에게는 면책권이 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도의상 그렇다는 거다. 죽은 사람에게 죄를 물어봤자 의미가 없으니 깊게 파고들지 않고, 사람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이미 사망한 사람이 사실 악령이었단 소문이 나고, 그걸 왕가에서 인정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이거, 당분간 몸 좀 사려야겠는데…….’ 역시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신의 뜻처럼도 안 보인다. 소문이 퍼진 건 누군가 바라는 게 있기 때문. 왕가에서 이를 인정한 것도, 거기에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다만, 문제는……. ‘그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보가 부족하다. 따라서 그냥 왕가로 가서 나 ‘살아 돌아왔소’ 하며 검증대에 오르는 것은 위험하다. 모두가 내 생존 소식을 반기진 않을 테니까. 내 생존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질 정도로 이를 유감스럽게 받아들이는 놈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놈이 왕가라면 난 그냥 죽은 목숨일 테고. ‘…검증대에 오르는 건, 적어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아낸 다음.’ 이내 나는 당분간의 스탠스를 정했다. 일단은 생환을 알리지 않은 채 정보 수집. 누명 아닌 누명을 벗고 내 귀족 작위와 명성을 되찾는 것은 그다음에 할 일이 될 것이다. “후…….” 어느 정도 생각 정리를 끝마친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운 에르웬을 확인했다. 한동안은 얘한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을 듯했다. 지금 나에겐 틀어박힐 숙소는커녕, 겉옷을 살 돈조차 없으니까. 애초에 이 티나는 몸뚱이로 신분을 위장하고 정보 수집하는 것도 무리. 솔직히 오늘 모습은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고작 그만큼 마셨다고 뻗은 걸 보면 예전 모습이 아예 없어진 건…….’ 천사처럼 잠에 든 에르웬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언제까지 창밖만 보려고요?” 에르웬의 눈이 떠졌다. “마치 누군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 취해서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 잔잔한 달빛이 유독 평화롭게 느껴졌던 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에르웬은 겉옷을 챙겨 입고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거듭 경고했다. “제가 없는 동안 절대 밖으로 나가시면 안 돼요.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알았죠……?” ‘방법’이 뭔지는 좀 궁금했으나,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행선지를 물었다. “성지로 돌아가는 거냐?” “네. 들르기는 해야죠.” 하긴 요정족의 순혈을 취하고, 정령왕과도 계약을 했다고 들었다. 얘한테도 종족의 의무와 책임이— “앞으로 돈이 필요하니까.” “…응?” “가서 처분할 건 다 처분하고, 오늘 안에 더 좋은 집으로 구해 올게요. 여기는… 좀 그, 그렇잖아요?” “…대체 어디가?” “아니이… 저도 싫은 건 아닌데… 그래도 더 좋은 곳에서 시작하면 더 좋은 거니까요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여관이 은신처로 삼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 잠깐만. 혹시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나?” “네? 부탁? 고기 사다 줄까요?” “그게 아니라……. 아니, 고기를 사오지 말라는 건 아닌데. 아무튼, 부탁은 다른 거다.” 이후 나는 에르웬에게 은행에 들러 금고를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뭔가 들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게 가져다 달라고 당부했다. “알았어요. 이따 봐요, 아저씨!” 에르웬은 내 부탁을 흔쾌히 승낙하고서 떠났다.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뒷모습이었다. ‘제대로 가져다주겠지……?’ 왠지 불안해졌지만,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내가 외출했다가는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분명 나올 테니까. ‘그래도 아멜리아가 먼저 돌아온 거라 다행이네.’ 어젯밤에서야 지금 시간대가 금고의 보관 기간인 22년을 초과했음을 깨닫고 경악했으나, 천만다행히 아멜리아가 적절하게 조치를 취한 거 같았다. 그게 아니면 그런 유언(?)을 남길 리 없지 않은가. [금, 고를…….] 미리 찾아가 보관 기한을 늘리든가 했겠지. 정말 믿음직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어제 보니까 그사이에 더 성장한 거 같고.’ [자가복제]로 뽑아낸 분신체의 소환 반경은 5m. 그리고 소환한 다음에 가동 범위는 100m다. 하지만, 암만 봐도 그때 아멜리아의 본체가 주변에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새로운 능력을 손에 넣었다는 뜻. 참고로 DB에 따르면 위 조건에 해당하는 시너지 스킬은 총 셋이다. 그러나 과거 시간대에서 아멜리아가 내 조언을 귀 기울여 듣던 걸 생각하면, 내가 추천한 것을 먹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중통치]. 트윈 하이드라의 정수를 먹고서 분신체에게 독립성을 부여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다른 시너지 스킬의 단점은 충분히 설명했으니. ‘됐고, 나도 좀 자자…….’ 어젯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기에 피로감이 상당했다. 따라서 침대로 가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저씨, 일어나요.” “아… 왔냐…….” 눈을 떠보니 에르웬이 보였다. 창밖은 서서히 해가 저무는 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약 8시간 정도 흐른 듯한데……. “밖에서 별일은 없었나?” “걱정… 해주신 거예요?” 아니, 자고 있었는데. “물론이다.” “…후후, 이거 뭔가 좋네요.” “크흠흠, 그래서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아, 그거요? 모아둔 돈이 있어서 다행히 적당한 집을 찾을 수 있었어요! 시간이 없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던 건 아닌데, 걱정 마세요! 그 부분은 제가 제대로 보수를 해뒀으니까.” “그래? 잘 됐군.” 집이야 아무래도 좋았기에, 나는 대충 이쯤에서 화제를 끝내고 가장 궁금했던 것을 확인했다. “근데… 은행은? 거기는 어떻게 됐나?” “아… 은행요……?” 어딘가 상당히 미묘한 반응. 이를 보고 있으니 괜히 초조해졌다. 혹시 금고를 못 열었나? 비밀번호는 제대로 알려 줬는데? 아니, 설마… 아멜리아가 기간 연장을 못 한 건가? 온갖 경우의 수가 머리에 맴돌던 때. “자요.” 에르웬이 주머니에서 공처럼 구겨진 종이쪼가리를 내게 내밀었다. “어…….” 엉겁결에 넘겨받기는 했는데, 이해가 안 됐다. “이건… 뭐냐……?” “금고에 있던 물건요. 갖다 달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거기에 망치는 없었나? 딱 이만한 크기—” “그런 건 없었어요. 있던 건 방금 그 편지가 전부예요.” “…편지?” 그제야 종이공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조심스레 이를 펼쳤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누가 쓴 편지인지는 분간이 어렵지 않았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잠깐 읽어 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에르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최대한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렸다. 꼬깃꼬깃한 주름이 가득했으나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랬다.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뒀지만, 혹시 뭔가 일이 잘못되어 만나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해 편지를 남긴다. 금고는 연장해 뒀다. 그러니 여기에 현재 위치를 남기면 내가 그리로 찾아가겠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는…….] 애석하게도 편지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편지를 구기며 찢겨 나갔는지, 마지막 문장은 완성되지 못한 탓이다. ‘제일 중요한 게 빠졌잖아!’ 에르웬에게 빠진 내용을 아냐고 물어도 봤지만,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 부분은 대충 읽어서 기억이 안 난다던가? ‘내 망치……!’ 혹여나 내가 없는 동안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가슴이 미어졌으나, 최대한 나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그건 아직 관측되지 않은 미래 아닌가. 단순히 아멜리아가 갖고 있는 걸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답장만 써서 보내면 금방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을 테고. “저기, 에르웬…….” 보안 유지를 위해 편지를 불태운 뒤 에르웬을 불렀다. 답장을 쓰면 금고에 넣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연애편지를 받은 게 아저씨 잘못인 것도 아니고. 그냥 아저씨가 잘나서 그런 건데 그걸 어쩌겠어요?” “응?” “아, 혹시 몰라서 금고는 폐기해 놨어요.” “어…….” “아쉬운 건 아니죠? 그 여자랑 연락을 못 한다고.” 왜 멋대로 그런 짓을 했냐고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화를 내야 할 상황에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그, 그럴 리가 있나!” 어째선지 부정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뒤늦게 이유를 붙여보자면, 에르웬과 사이가 틀어지는 걸 우려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헤헤, 역시 그렇죠?” 아무튼, 이후로는 에르웬이 포장해온 음식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고, 그러고 있자니 밤이 됐다. 어둠의 정령의 힘을 가장 활성화하기 좋은 시간. 우리는 어제처럼 어둠의 정령으로 모습을 감춘 채 에르웬이 구했다는 집으로 이동했다. “이걸… 하루 만에 구했다고?” 높은 담장이 쳐지고, 그 안에 프라이빗한 마당까지 자리한 단독 주택. “말했잖아요. 저 돈 많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저택을 하루 만에 구하려면 흥정도 안 하고 제값에 샀단 건데……. ‘얘 정도면, 악마분쇄기는 그냥 새로 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르웬을 뒤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쿠웅.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저택의 불이 환하게 켜지며 깨달았다. “…….” 창문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창문이란 창문에는 전부 두꺼운 판자가 덧대어져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어두워서 그냥 커튼이 쳐진 줄 알았는데……. “저기… 에르웬……?” “네?” “창문은 대체 왜…….” “아, 이거요? 그야 밖에서 누가 들여다보면 곤란한 데다가…….” 에르웬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제 밖에 나갈 일은 없잖아요?” 꿀꺽. *** “아무리 그래도… 판자까지 박은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사람들 시선이 문제라면 커튼도 있고, 밖에 담장도 엄청 높은데…….” 어딘가 잘못됐다는 기분에 황급히 합당한 이유를 댔지만, 에르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뇨, 아저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지금이 얼마나 좋은… 아니, 위험한 상황인지요!” “…….” “아저씨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제가 아저씨를 숨겨 주고 있단 게 걸리면 어떻게 될까요?” “…크게 곤란해지겠지.” 너무도 타당한 말인지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곤란한 걸 넘어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올린 모든 기반을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 한데 그런 내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을까? “그렇죠?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조치예요! 아저씨는 사고뭉치니까. 제가 관리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요?” 에르웬의 목소리가 커졌다. 물론 아주 잠시 동안만. “아, 어떡해… 어깨 축 처진 거 봐…….” 힘없이 고개를 떨구자 에르웬은 안타까운 장면을 본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더니, 조심스레 타협안을 제시했다. “힘들겠지만, 기운 내세요… 밤에 가끔 정원에서 산책은 할 수 있게 해줄게요. 네?” “정말이냐……?” “네! 물론 제가 옆에 있다는 가정하에요.” “…….” 그렇게 은거 생활이 시작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15일 자정이 되었다. 342화 컴백 (1)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한수의 방. ‘뭔가… 되게 오랜만이네.’ 어디 변한 곳은 없나 둘러보기도 잠시, 의자에 앉은 채 발가락만 움직여 얼른 컴퓨터 전원부터 켰다. 지이이이잉-! 오늘 커뮤니티에서의 목표는 간단하다. 늘 그랬듯이 정보 수집이 최우선. 다만 차이점은 평소와 달리 2년 6개월이나 되는 분량이 쌓였다는 점이겠지. ‘우선 게시판부터 보자.’ 커뮤니티 활동의 메인 요리라 할 수 있는 원탁은 세 시간 뒤에 입장이 가능하기에 마우스를 조작해 각종 게시판들을 확인했다.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시간순으로 이곳 분위기를 보기 위해선 한참이나 목록을 넘겨야만 했으니까. [와, 비요른 얀델네 집 가본 사람?] -예전에 1층에서 걔한테 도움받았던 사람들이랑 같이 가봤는데, 꽃 쌓인 거 보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더라. -진짜 죽었다는 게 실감도 나고. -그쪽 동료들도 완전 초상집 분위기던데. 음, 내 얘기가 많은 걸 보니 여기서부터 읽으면 되겠고. [tetyys: NPC 하나 죽은 거 가지고 뭔 호들갑?] [└Sogeking33: 하긴, 너 같은 조무래기 새끼 한 명 죽으면 아무도 신경 안 썼을 텐데, 그렇지?] [└SoDamnToxic: 바바리안 부족장 후보, 10년 만에 나온 탐험가 출신 작위 귀족, 왕가에서도 영웅의 죽음을 기린다고 기사단을 보내서 장례 행렬을 할 거라던데……. 열등감 폭발하는 새끼들이 달라붙는 것도 당연하긴 하네.] [Ki11Humans77: 좀 아쉽네. 얘네 클랜 새로 만들었대서,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했었는데.] 처음 클릭한 게시물의 댓글들만 조금 확인하다가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차근차근 페이지를 이동하며 게시글들을 확인했다. 1개월, 2개월, 3개월……. 시간이 흐를 때마다 게시판은 당시에 가장 핫했던 화제를 중심으로 글을 쏟아냈다. 게시판에 가득했던 내 죽음에 관한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언급 빈도는 확 줄다 못해 거의 사라진 수준. 다만, 그다음 달부터는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새로운 장작을 집어넣은 것이다. [비요른 얀델 악령이라는 소문 진짜냐?] -요즘 어디를 가든 그 얘기밖에 없던데. 아예 없는 얘기 때문에 이러지는 않을 거 아니야. [비요른 얀델이 악령인 이유 세 가지] -어, 왔으면 추천 누르고 가~ [상식적으로 걔가 악령이겠냐?] -반박시, 비요른 얀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뉴비. -긍정시, 수인 여자친구 생김. [arolf5205: 얘 말이 맞음.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란 애들은 다 뉴비들일 듯.] [1spring: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수인 여자친구 생기나요?] [Bling0_0: 음, 그래도 나는 왠지 악령이 맞을 거 같은데…….] 비요른 얀델의 사후(?) 2개월 차. 내가 악령인가 아닌가에 대한 얘기로 게시판이 도배됐다. 아직까진 대부분 루머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뭐, 중간에 신경 쓰이는 댓글이 하나 있긴 했지만. [teckmonkey: 어쩌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음. 그 의혹이 처음 나온 곳이 비요른 얀델이 가장 아끼던 동료라는 얘기가 있어서.] 동료라고만 말할 뿐,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는 걸 보고 관심을 지우긴 했다. 화제가 생겼을 때 온갖 어그로꾼들이 달라붙는 거야 익숙하니까. 딸깍, 딸깍. 사후 3개월 차에는 화제성이 줄어들며 내 이름은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후 6개월 차. 서서히 잊혀가던 내 이름이 폭발적으로 게시판에 언급이 되기 시작한다. 왕가에서 정식으로 공표한 것이다.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노라고. [야, 왕가에서 올린 공문 진짜임?]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부족장 후보에 귀족 작위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악령일 수가 있음? 뭔가 잘못된 거 아님?] 처음엔 모두가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서서히 내가 악령이라는 근거들이 쭉 올라오며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내가 악령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면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음.] -일단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성장하는 게 말이 되긴 함? 그냥 난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긴 했어. [└tunaboot: 팩트1, 악령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BrutalizerX: 팩트2, 비요른 얀델은 세 명의 여자들과 동거 중이었다.] [└WingPizza: 팩트 3, 비요른 얀델은 40cm가 훌쩍 넘는 거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내 이름이 화제가 된 기간은 짧았다. 충격적인 이야기인 것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불타기엔 장작이 부족했던 것이다.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놀라운 이야기네. 근데 그래서? 죽은 애 이야기를 언제까지 하려고?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뭐, 몇몇은 돌연 죽은 이에 대해 그런 소문이 퍼진 점이나, 왕가가 이제 와서 그 소문을 사실이라 밝힌 것에 뭔가 거대한 비밀이 있으리라 추측했으나……. 애석하게도 그게 전부였다. 그런 비밀스러운 사정이 커뮤니티 자유 게시판에 돌 리 없으니까. 딸깍, 딸깍. 이후로도 계속 게시글들을 읽어내렸으나, 게시판 전체를 달굴 만한 화제는 몇 달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중구난방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식의 평범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후 1년 차. 커뮤니티에 불을 지필 사건 하나가 터졌다. [얘들아, 나르텔 클랜 얘기 들었냐?] 나르텔 클랜. 일전에 노아르크전에서 나와 인연이 깊었던 탐험가 멜터 펜드가 수장으로 있는 그 클랜. 그 클랜의 90%가 미궁에서 사망했다. 이미 원인까지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godFLEXyou: 어, 노아르크 놈들한테 당해서 몇 명만 겨우 살아돌아왔다며?] 성벽 바깥으로 나갔다고 알려진 노아르크 놈들이 미궁에서 발견됐다. 이에 온갖 추측들이 커뮤니티에 나돌았다. 성벽 바깥에도 포탈이 있다든가. 그게 아니라, 모종의 방법으로 포탈을 새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든가. 어쩌면 도시에 남아서 정체를 숨긴 노아르크 출신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후 1년 1개월 차. 중형 클랜 중 하나가 미궁에서 전멸했다. 나르텔 클랜이 참변을 당했던 그곳, 암흑대륙에서 활동하는 클랜이었다. 생환자는 없었기에 전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1년 3개월 차. 7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클랜들이 급증하고 노아르크 출신을 봤다는 목격담이 여럿 생겼다. 목격 장소의 대부분은 7계층이었다. 1년 4개월 차. 왕가에서 노아르크의 해당 사건의 심각함을 인지하고서 다시금 신분패를 뿌리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미궁에 투입해 저층을 순찰시켰다. 하지만, 나아진 건 없었다. 미궁이 열리자마자 1층에서 입장한 이들을 검문했음에도 노아르크 출신은 없었다. 1년 6개월 차. 노아르크 세력이 7층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을 눈여겨 본 왕가는 대형 클랜 몇몇과 협력하여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무수한 피해를 입은 채 복귀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속보) 노아르크 최신 근황] -원정 중 잡은 포로한테 심문해서 알아낸 확실한 정보임. -노아르크 새끼들이 포탈을 성벽 밖에 열었는데, 그걸 타면 바로 7층이라더라. -아, 물론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포로 새끼도 모르고 왕가에서도 아는 바가 전무함. 새로운 정보가 확인됐다. 그렇게 시간은 더 흘러 1년 8개월 차. 일반 탐험가들의 암흑대륙 진입을 금지한 왕가는 2차 원정대를 꾸렸고, 수많은 전력을 꼬라박은 끝에 한 번의 전투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전쟁이구나.] 7층을 무대로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노아르크 놈들이 7층에 짱박혀 힘을 키우면 추후 큰 문제로 이어질 거라고 판단한 것. 왕가에서 내건 막대한 보상에 수많은 탐험가들이 참전했고,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영웅들이 매일매일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칠강이 있었다. 이전엔 이렇다 할 명성이 없었으나, 이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며 이름을 알린 일곱 명의 젊은 영웅. [근데 지금 보니까 비요른 얀델 파티가 인재풀이 미친 수준이긴 했던 듯. 어떻게 한 파티에서 칠강 중 두 명이 나오냐?] 이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최근 등록 10분 전 게시물까지 확인을 마친 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암만 대충 쓱 보고 넘긴다 해도 2년 6개월 분량을 확인하려니 벌써 2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 있었다. ‘잠깐 쉬면서 정리 좀 할까…….’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에 누웠다. 일단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극히 적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열흘 넘게 집에서만 보내며 에르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타임라인 별로 큰 사건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엔 당연히 노아르크에 관한 것도 존재했고. ‘그래도 쭉 둘러보니까 그때의 분위기 같은 걸 알 수 있어서 좋긴 했지…….’ 게다가 게시물 중에는 에르웬은 말해주지 않았던 사소한 정보들도 꽤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전에 불기둥에 당해 뇌사 상태에 빠졌던 탐험가들이 모두 치료되었다는 것이 있다. ‘아무튼, 이번에는 거래소 쪽이나 좀 확인해 볼까?’ 잠깐의 휴식을 끝낸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게시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03:09] 원탁에 입장 가능한 시간이 되었다. ***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선 고블린 가면이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했다. “오, 여우 씨! 오랜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우리 둘이 가장 먼저 왔나 보군요?” 고블린의 물음에 여우 가면을 쓴 여인, 베르실 고울랜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확인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사적인 대화를 위해 운을 뗀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블린과 딱히 나누고픈 얘기가 없었다. “……하하, 오늘도 저번처럼 생각하실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조용히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내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사슴뿔과 초승달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 확인해 보니 시간은 3시 5분. 입장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아직 그 둘은 오지 않은 모양이군?” “…곧 오겠죠.” 사슴뿔의 물음에 그녀는 그리 답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까지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멤버는 광대와 여왕이다. 아마 그들은 오늘 참가는 할 것이다. 뭐, 멤버를 확인하고서 이번에도 그냥 쓱 등을 돌려 사라지겠지만. 최근 1년 동안 늘 그랬듯이. “그래도 네 명이 모였으니, 오늘은 제대로 집회를 진행할 수 있겠네요.” “……저번에는 사슴뿔이 빠져서 시작도 하지 못했었죠? 그땐 왜 안 오신 겁니까?” “고블린, 네게 그런 이유까지 말해야 하나?” “그건… 아니죠. 네. 그냥 궁금해서 한번 물어나 봤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 의미없는 잡담이나 나누고 있자니 다시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어머, 다들 오랜만이에요?” 여왕. 수사자의 존재감에는 비할 수 없으나, 광대를 정보력으로 압살하며 이 집회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낸 여인. “이번에도 기다렸다가 그냥 나갈 것이오?” 초승달의 정중한 물음에 여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이면 대답은 충분했다. 그녀의 생각이야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 남자가 없는 집회에서 참가해 봤자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거겠지.’ 수사자의 방문이 끊긴 이후에도 그녀는 집회에 참가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 역시 멤버만을 확인한 다음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는 광대도 마찬가지. “피싯, 이번에도 다 같이 모여 있던 겁니까?” “광대…….” 집회가 시작되기까지 2분이 남은 시점. 도착한 광대를 보며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대부분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야 최근 노아르크와 부딪칠 일이 많았으니까. 초승달만큼은 아니더라도, 노아르크 진영의 인물인 그에게 호의적일 수 없던 것. “그렇게 본다고 사람 죽겠습니까?” 광대는 그런 시선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만을 응시하며 한 사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후우… 오늘도 그 사람은 안 오려나 보군요.” “……요즘 노아르크에서 6층으로 기어 나오려는 시도가 목격되고 있다던데, 그 이유가 뭐지?” “예? 집회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걸 말해줍니까?” “그건… 네가 집회에 참가를 안 하니까…….” “사슴뿔 씨도 참… 그럼 진작 재밌을 만한 걸 갖고 오셨어야죠? 하도 재미가 없으니까 제가 매번 왔다가 그냥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다고 네가 수사자처럼 보일 거 같나?” “피싯,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마는.” 이내 광대가 조소하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왕도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오늘도 안 오시는 거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죠” “저도 그럼 이만…….” 여우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부재가 아쉬운 만큼, 한 사람의 필요성이 새삼 와닿은 것이다. ‘후, 대체 수사자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처음에는 광대와 여왕도 입을 모아 그의 실종에 관해 온갖 추측을 쏟아냈다. 흥미를 잃어서 안 오는 거다. GM이 그 사람을 커뮤니티에서 추방했다 등등. 외에도 많은 가설이 있었으나,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블린의 추측이었다. 비요른 얀델과 그가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던가? 만약 사망한 거라면, 그 시기가 아주 공교롭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피싯, 고블린 씨는 성기사 같은 건 때려치우고 작가나 하는 게 어떻습니까?] 고블린은 그 추측을 뱉고서 비웃음을 사야만 했다. 매몰찬 말은 하지 않았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야 수사자가 처음 원탁에 등장했을 때, 비요른 얀델은 1년 차도 안 된 탐험가였으니까. 기껏해야 3, 4층에서 활동하던 이가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 추측이 진짜였을 수도…….’ 여우는 그 가설이 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모순이 자리해 있기는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적어도 수사자가 2년 6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설명이 되니— 끼이이익. 사고가 거기까지 이어진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모두가 몸을 움찔했다. 실로 간단한 이유였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광대가 아직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이었으니까. “……?” 더 이상 올 사람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툭. 이내 열린 문 너머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 “……!” 등장만으로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사내가 말했다. 마치 지나가는 길에 심심해서 들러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오랜만이군.” 수사자가 돌아왔다. 343화 컴백 (2) 원탁에 오기 전에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야 뜬금없이 2년 6개월이라는 공백이 생긴 것 아닌가. 멤버들 역시 내 발길이 끊긴 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실종 시기가 같다는 점을 통해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는 진실에 도달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물론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내가 살아돌아온 걸 아는 사람은 오직 아멜리아와 에르웬뿐이니까. 원탁에 얼굴만 내비쳐 줘도 그러한 의혹은 잠식시킬 수가 있다. 문제는 나중에 내가 생환을 알린 뒤겠지만……. ‘뭐, 그때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당장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다. 내 2년 6개월간의 공백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이 때문에 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해 봤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수사자…….” “…정말 살아 있었군요.” 저들이 암만 경악과 의문을 품은 시선을 던져온다 한들. 딱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비키지 않을 건가?” “아… 예……!” 내가 툭 뱉자, 문 앞에 서 있던 광대가 몸을 움찔 떨며 벽 쪽으로 물러났다. 이는 소울퀸즈도 매한가지. 물론 그녀는 아예 얼이 나가 버린 광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수사자님은 여전하시네요?” 옆으로 길을 터주면서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관찰한다. 그 여유로운 목소리가 불편하였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저 무시한 채 옆을 지나쳐. 툭. 무관심해하며 앉던 자리에 착석할 뿐. “…….” “…….” 이후로 기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회원들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서로를 힐끗하며 눈치를 봤다. 심리야 뻔했다. 누군가 자기를 대신해 총대를 메고 이런저런 질문을 토해내 줬으면 하는 거겠지. ‘크, 이것도 오랜만이네.’ 최근 집에서 기도 못 펴고 숨어만 지내서일까? 중독될 것만 같은 해방감이 밀려든다. 그렇게 말없이 몇 초의 시간이 더 흘렀다. 쿠웅-! 원탁과 이어진 문들 중 열려 있던 문들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3시 10분이 지나 입장 시간이 종료되었다는 뜻. 다시 말하자면, 이제 집회를 시작해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속 서 있을 건가?” 나는 광대와 소울퀸즈를 보며 말했다. “앉지.” 너희들한테 들을 이야기가 많아. 해줄 이야기도 많고. *** “피시싯, 제가 창피한 모습을 보였군요.” 멍하니 벽에 붙어 있던 광대가 정신을 차리고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기쁨을 숨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수사자.” 뭐래, 이 새끼는. 지난번에 친한 척하지 말란 거 다 잊었나? 하긴, 2년 6개월이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 그냥 대꾸도 않고 씹어주자, 광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실 쪼갰다. “이유.” 광대 다음으로 입을 연 건 사슴뿔이었다. “2년이 넘도록 얼굴 한번 비치지 않더니,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지?” 평소에 마초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였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의문을 토해냈다. 물론 내가 답해 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글쎄.”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내 모습에 사슴뿔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왕가 출신들이 누군가를 취조할 때 딱 이런 목소리를 냈던 거 같은데……. 나로서는 참 애석한 일이었다. 2년 6개월 동안 자리 좀 비웠다고 빠져가지고. “불쾌하군.” 나는 최대한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후우우웅-! 천천히 살기를 끌어올렸다. 오랜만에 복귀했으니 한 번쯤은 기강을 다시 잡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 “…큭.” 살기에 노출된 사슴뿔이 고통스럽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정도면 경청할 자세는 된 듯했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기를 퍼부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그 말과 동시에 사슴뿔의 목에 핏대가 섰다. 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렸던 광대보다야 낫지만, 사슴뿔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지 마라.” 이내 있는 힘껏 살기를 방출하자, 사슴뿔의 몸이 서서히 굽혀졌다. 마치 어깨 위로 무언가가 짓누르기라도 하듯. 힘겨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사슴뿔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렇게.” 어느새 사슴뿔은 바닥에 무릎을 댄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지탱하려 테이블에 올린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슬슬 한계인 거 같은데……. 사실 이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아오, 머리야.’ 머리에서 통증을 느낀 순간, 장내를 짓누르던 살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허업!” 사슴뿔이 참아왔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광대가 조소했다. “…피싯, 미련하고 멍청한 인간. 수사자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먹은 겁니까?” “…….” “재미있는 걸 가져오라고요! 재밌는 걸!” 광대는 그리 말하면서도 나를 힐끗 보았다. 마치 ‘그렇죠?’ 하고 물으며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시선. 당연히 이번에도 그냥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수사자.” 한 남성의 목소리가 침묵을 끝냈다. 초승달이었다. 요정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원탁의 그 누구보다 ‘소생의 돌’을 갈망하는 이. “당신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상관없소.” 그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갖고 있었을 불안과 의문을 모조리 속으로 삼키며 내게 말했다. “고맙소, 이제라도 돌아와 주어서.” 딱 내가 바라던 반응의 정석. 다만 막상 그런 말이 나오니 왠지 미안하기도 하다. 이 아저씨도 내가 없는 동안 엄청 애가 탔을 텐데. ‘이번에는 단서 좀 줘 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흐음, 그럼 이제 정리가 다 된 거 같네요?” 소울퀸즈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듯 명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왠지 오늘 집회에서는 서로에게 할 말이 많을 거 같은데.” 그렇게 집회가 시작됐다. *** 순번을 정하는 과정은 짧게 끝났다. “그럼 여우 씨가 먼저군요?” “…그렇게 됐네요.” 순서는 늘 그랬듯이 시계 방향. 다만, 마지막에는 내가 위치하도록. “왜 하필 여기에 앉아 가지고…….” 예로부터 있던 암묵적인 합의였다. 먼저 정보들을 꺼내면, 내가 그것들을 듣고 평가한 뒤 상응하는 정보를 뱉는 것. 그게 평소의 원탁이었으니까. “…오늘은 특별하게 준비해 온 게 없으니, 원래 여기서 얘기하려던 걸 꺼낼게요.” 이내 여우가 첫 순번으로 정보를 뱉었다. 시작부터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약 3년 전에 대신관 납치 사건 이후로 활동을 멈췄던 용살자가 암흑대륙에서 처음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요. 목격 증언에 따르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이었고, ‘용의 저주’도 어느 정도 해결을 한 것처럼 보였다는군요.” 한동안 잊고 살았던 용살자의 근황. ‘용의 저주를 벗어냈다라…….’ 모처럼 불행한 얘기지만, 너무 매몰되지는 않기로 했다. 용언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으니까. 나도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다. 솨아아아-! 원탁의 보석이 초록불을 뿜어내며 첫 순번이 무사히 끝마쳐졌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때. “피싯, 여우 씨도 영리하군요.” 광대가 낄낄거리며 여우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의미죠?” “그거, 원래 여기서 얘기하려던 내용이 아닐 거 아닙니까. 당신 신상을 유추할 수도 있는 얘긴데.” “…….” “사슴뿔 씨 눈치를 보니까 왕가에서도 아직 접하지 못한 소식 같은데. 혹시 여우 씨가 직접 그를 만났던 건 아닙니까?” “사적인 질문에는 무엇도 답하지 않겠어요.” “뭐, 그러십시오. 그 도롱뇽 새끼한테는 나중에 미궁에서 누구를 만났냐고 직접 물어보면 그만이니.” 광대의 비매너 행위에 여우는 불쾌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고, 자연스레 다음으로 순번이 넘어갔다. “그럼 이제 내 차례… 군.” 이번에는 사슴뿔이었다. 그는 정보를 뱉기 전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아무래도 아까 살기의 여운이 진하게 남은 모양. 다만 이를 내색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왕가에서 곧 작위 귀족들을 대상으로 징집령을 내릴 거다.” 그리 말하는 사슴뿔의 시선은 광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적대 진영인 노아르크의 반응을 살필 요량인 듯했다. 하지만……. “피싯, 그런다고 제가 무서워 하기라도 할 거 같습니까? 오히려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광대는 평소처럼 조소를 흘릴 뿐이었고, 사슴뿔도 그 도발에 반응하지 않으며 차례가 끝났다. 초록불이 꺼지자 옆에 있던 초승달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구려.” 소생의 돌이라는 떡밥을 물어 버린 이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정보를 갖다바치던 그였기에 제법 기대가 됐으나……. “애석하게도 특별한 건 준비하지 못했소.” 오늘 내 방문을 예상치 못했던 그는 나를 보며 미리 밑밥을 깔았다. 혹여나 내가 실망해서 다음부터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는데……. “혈령후와 관련된 이야기요.” 의외로 꽤 흥미로운 정보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몇 주 전, 혈령후가 돈이 필요하다며 왕가에서 요정족에 하사한 지원금의 대부분을 가져갔소.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고.” 어찌 보면 부족 내 스캔들에 가까운 사건. 가만히 듣던 소울퀸즈가 의문을 표했다. “저기, 근데 아무리 혈령후라고 해도 이유도 밝히지 않고 그만한 돈을 가져갈 수 있나요? 왕가의 지원금이라면 액수가 결코 적지 않을 텐데?” “당연히 이례적인 일이오. 하나 돈을 주지 않으면 신목궁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린단 말에 장로들도 어쩔 수 없었지.” “…신목궁을 판다고요?” “부끄럽지만 그렇소. 하나 그래도 꼭 써야 하는 일에 필요한 돈이라 했으니 뭔가 밝힐 수 없는 뜻이 있다고 믿어볼 수밖에.” 이어진 초승달의 설명에 다른 회원들도 어딘가 찝찝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피싯, 그 미친 여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죠?” “그 여자에게 그런 거액이 필요한 일이라면 역시 그런 쪽밖에는 연상이 되지 않는군.” “뭔진 몰라도 한바탕 또 피바람이 불겠네요.” 왠지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얘네가 이럴 정도면 에르웬의 대중적 이미지는 대체 어떤 걸까. 아니, 그보다……. ‘나한테는 돈 많으니 걱정 말라더니, 그게 다 부족 삥 뜯어서 나온 돈이었어……?’ 기도 차지 않았다. 하룻밤 만에 저택을 구해 오는 자본력이 어디서 나왔나 싶었는데, 설마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만약 요정족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였으면 억장이 와르륵 무너질 거 같은데……. 그런 고민을 하던 때, 고블린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제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아, 이제 얘 차례구나. ‘얘가 레아틀라스 교단 성기사였지?’ 광대에 이어 내가 확실하게 신분을 알고 있는 놈인 만큼, 무슨 정보를 꺼낼지 조금 궁금해진— “본교에서 제1 성기사단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왕가군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뭐야, 또 전쟁 관련 얘기야? 나는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본교라니,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없나 보네. 아니면 2년 동안 아예 신분이 오픈 됐거나.’ 내가 없는 동안 원탁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고민을 해보면서도 귀는 활짝 열었다. 레아틀라스교의 행보가 앞으로의 전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짧은 대화가 마무리되고 다음 순번이 입을 열려 하는 중이었다. “피싯.” 이번 순서는 다름 아닌 광대. “다들 오랜만에 수사자 씨가 왔는데 재미없는 이야기들만 하면 어떡합니까?” 광대가 과장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단숨에 눈빛을 달리하며 정보를 꺼냈다. “소생의 돌은 이백호가 가지고 있다.” …응? *** 광대가 아무렇지 않게 뱉은 정보의 파문은 컸다. 그리고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초승달이었다. 광대를 볼 때면 항상 증오를 눈에 품던 그는 감정의 동요를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이백호… 왕가에서 비밀리에 척살령을 내렸다는 그자가……? 소생의 돌을……?” 초승달은 소생의 돌의 소재를 듣게 된 것에서 놀란 눈치였으나, 나는 달랐다. ‘이백호가 갑자기 왜 나와……?’ 그만큼 뜬금없는 이름이었을뿐더러, 애초에 얘는 언제 이렇게 유명해진 걸까. 2년 전만 해도 ‘그자’라고 부르며 아는 사람만 아는 이름인 그런 느낌이었는데. 소생의 돌은 대체 어떻게 구한 거고? 이건 입수 조건을 알아도 운이 안 따라주면 절대 못 구하는 건데? “어떻습니까?” 애석하게도 길게 멍 때릴 여유는 없었다. “이백호에 관한 얘기라면 수사자 씨도 조금 흥미로울 거 같아서 꺼내봤는데.” 초록불이 뜸과 동시에 광대가 내게 은근슬쩍 감상을 물어왔고, 나는 잠깐 고민 후 답했다. “확실히.” 앞서 들은 정보들에 비하면 가치가 높았다. 전쟁 관련 얘기들보다 이런 쪽이 궁금했으니까. 그러나 너무 감탄하는 것도 이상할 터. “나쁘지 않았다.” 딱 과하지 않을 정도로만 감상을 내뱉었다. 그야 이런 평이라도 있어야 앞으로도 이런 정보를 물어다 줄 거 아닌가. ‘나중에 돌아가면 에르웬한테 이백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냐고도 물어봐야겠네.’ 이 부분은 짧게 정리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광대, 방금 한 말이 사실이오?” “보면 알지 않습니까?” “조, 조금이라도 좋으니 보다 자세히—” “피싯, 싫습니다만?” “…….” 순식간에 을이 된 초승달이 광대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안쓰럽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백호가 소생의 돌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지금 처음 들었으니까. ‘음, 이러면 소생의 돌을 정보로 써먹기 불편해 지는데……. 이따가 무슨 정보를 꺼내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며 이후 어떤 정보를 꺼낼지 고민하는 동안, 소울퀸즈가 박수를 치며 주목을 모았다. 그리고……. “자, 이제 제 차례네요?” 수많은 회원들 중 정확히 나를 바라보면서. 고혹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사자는 2년 6개월 동안 고스트 버스터즈에 접속한 기록이 없다.” “…….” “당신, 그동안 대체 어디로 사라져 있던 거예요?” 허허……. *** 15일이 되면 커뮤니티의 회원은 강제적으로 이곳 영적세계에 불려온다. 뭐, 들어오자마자 로그아웃해서 나가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접속한 기록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접속한 기록이 아예 없어요.” 로그인 기록이 아예 사라진 점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다. 아마 GM을 통해서 이 부분을 확인했겠지. “그래서 분명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한 사망을 넘어, 이 여자라면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고 확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사망한 유명인은 나뿐이었으니까. 한데 소울퀸즈의 말에서 뭔가 모순을 느꼈을까? 고블린이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주, 죽었다니요? 여왕 씨는 계속 수사자 씨를 기다렸던 거 아닙니까?” “아뇨, 제가 기다렸던 건 마스터였어요. 이 원탁을 만든 장본인. 혹시 또 오지 않을까 해서 주기적으로 방문을 했었죠.” “아…….” 고블린이 납득했고, 이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원하는 바야 명확했다. 솨아아아-! 원탁에서 초록불이 나왔으니, 2년 반 동안 내가 로그인을 하지 않은 것은 진실일 터. 내 입에서 해명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겠지. “아, 역시 대답을 피하시려나요? 하긴, 이런 얘기는 수사자 님한테 재밌는 정보가 아니었을 수—” 나는 그녀의 도발을 끊으며 말했다. “당돌하군.” “그럼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요?” 내 눈을 마주 보는 그녀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사슴뿔이 꼼짝 못했던 살기를 뿜어내더라도, 마치 대응할 방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재밌군.” “오, 그럼 말해주시는 건가요?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어느새 빛이 다한 보석을 한 번 힐끗하고서 대답했다. “이제 내 차례군.” “무시라 이건가요?” “글쎄.” 무시는 아니다. 정확히는 체벌일 뿐. “마공학자, 유르벤 하벨리온.” 앞으로 수사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선 그녀에게 제대로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설령 그게 ‘살기’를 이용한 제압이 아닐지라도. “그게 GM의 이름이다.” 감히 반기를 든 자에게는 벌이 따른다는 것을. 344화 컴백 (3) [수사자는 2년 6개월 동안 고스트 버스터즈에 접속한 기록이 없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꽤 당황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으니까. ‘기껏해야 ‘Elfnunna’라는 닉네임 정도나 들켰겠지.’ 그도 그럴 게, 영적세계에서 현실의 신상을 캐는 것은 그 아우릴 가비스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근데 그걸 반쪽짜리를 넘겨받은 GM이 해낸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대신 문제는 닉네임을 알면 커뮤니티에서 벤을 때려 버릴 수가 있다는 거겠지만……. 이것도 생각을 달리하면 큰 문젯거리는 아니다. ‘커뮤니티 활동을 못 하면 죽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이지.’ 반면 내가 저자세로 나가면 잃는 것은 많다. 그 순간 저 여자는 이게 내 약점이라고 판단할 테니까. [당신, 그동안 대체 어디로 사라져 있던 거예요?] 이후로는 이보다 더 노골적인 질문들이 나를 향할 것이다. 이 질문을 회피만 하다 보면 수사자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고. 그러니, 그럴 바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 그 신념을 믿고서 동전을 던지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이백호를 벤 때렸다가 현피를 당해 골로 갈 뻔한 전적이 있던 GM이 아니던가. 핵무기가 전쟁의 억제 수단이라는 말도 있듯. 오히려 과감하게 몸을 더욱 부풀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일지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뭐, 결과가 어떨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곧 알 수 있겠지.’ 이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 숨소리조차 멈춘 고요한 적막. 그 속에서 각기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원탁에 위치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해 주는 보석이 놓인 그곳. 다만 나는 보석보다는 다른 곳을 살폈다. 소울퀸즈. 여왕 가면을 뒤집어쓴 채 원탁에 참가한 GM의 동료.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녀의 눈이 동요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런 의문을 가득 품고서. 마치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는 것처럼. “…으, 에, 어어.” 그녀의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으나, 하나도 정리되지 못한 채 바람 빠진 소리만을 내뱉었다. 입이 아닌 손 또한 상황은 비슷했다. “어, 어……?” 어서 막아야 한다는 듯 뻗어진 손은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손짓 따위로는 무엇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는 것을. 솨아아아아-! 집중된 이목을 즐기기라도 하듯 보석이 잠깐의 텀을 두고서 초록빛을 자아냈다. 그리고, 짧았던 정적이 끝을 고했다. “GM… 이 마공학자……?” “자, 잠깐만… 머리가 못 따라가겠는데. 어, 어떻게 그 사람이 악령… 아니, 그것도 GM일 수가 있는 거예요?” “…피시싯, 과연 2년 넘게 수사자 씨를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시작부터 이런 비밀이라니.” 회원들이 제각기 음성을 토해내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웅성임 속에는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것도 있었다. “그보다 나는 여왕 쪽도 놀랍군. 그동안 운영진 측일 거란 추측은 있긴 했지만…….” 그래, 어쩐지 접속 기록 얘기를 다 보는 앞에서 한다 싶더라니. 아득바득 숨길 이유가 없었던 거구나. 아무래도 내가 없는 기간 동안 여왕 역시 정체가 어느 정도 드러난 듯했다. 음, 이 여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드러난 게 아니라 일부러 드러낸 거려나?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테지만. 주변에서 뭐라 하건 간에 나는 여전히 한곳만을 응시했다. “감당…….” 테이블에 손을 올린 채 고개 숙이고 서 있던 소울퀸즈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딱히 매섭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주 간단한 이유다. “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말까지 더듬어서야. 누가 그 말을 듣고 겁을 먹겠는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진 모르지만, 이, 이런 짓을 해놓고—”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더니.” “……?” “떨고 있군.” “……!” 소울퀸즈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세차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착. 이내 그녀가 떨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아채며 다시금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을 한 사람처럼 호흡을 한 번 가다듬더니.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죠. 이번엔 저부터 할게요.” 그녀가 자리에 놓인 보석에 손을 올리며 이번 회차에 참가하지 않을 사람은 떠나라고 말했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회원은 없었다. 그리고……. “수사자는 비요른 얀델이다.” 머지않아 보석에 빛이 들어왔다. *** 1. 수자자는 Elfnunna다. 2. Elfnunna는 2년 6개월 동안 커뮤니티에 로그인하지 않았고, 이는 수사자도 마찬가지다. 3. 따라서 수사자는 비요른 얀델이다. 합당한 과정을 통해 도출해 낸 결론인 만큼, 그녀는 이 사실을 100%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이 원탁에서 입장하기 전까지는. 솨아아아아- 긴장감을 넘어 자칫하면 살이 베일 듯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보석이 빛을 자아냈다. “…적색이구려.” 예상대로 초록불이 켜지는 일은 없었다. 이 보석은 ‘사실’을 판별해 주는 물건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소울퀸즈는 내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것 같지만……. 믿음에 빈틈이 생긴 이상 이는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하다. ‘근데 문제는 이 여자가 이 간단한 것도 모를 만큼 멘탈이 나간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럼 대체 무의미한 발악을 한 이유가 뭘까. 그 해답은 고블린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기, 비요른 얀델은 죽었지 않습니까? 수사자 씨는 살아서 여기 앞에 있고……. 근데 왜 그런 질문을…….” “그의 죽음에는 의문이 많아요. 그의 동료들조차 직접 죽는 모습을 본 건 아니죠.”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을 가능성. 이 여자는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꺼냈던 것이다. 뭐, 믿음이 부족해서 빨간불을 받긴 했지만. “피싯, 아무리 그래도 그런 추측으로는 적색불이 켜질 거란 것쯤은 알았을 텐데요?” “…그 부분은 답하지 않겠어요.” 소울퀸즈는 그리 말하며 내게서 시선을 뗐다. 그제야 든 생각인데, 어쩌면 방금 한 말은 단순히 떠보기였을지 몰랐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보석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이 여자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 그 상황에서 역으로 떠보기라니. 진짜 어찌 된 게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냐.’ 과연 내 반응을 보고 이 여자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조용하자 자신감이 붙었을까? “…아무튼, 적색불이 켜졌으니 다시 해야겠네요.” 소울퀸즈는 아무렇지 않게 리트라이를 하겠다고 말하며 나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 수사자가 고스트 버스터즈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운영진 측 인물임을 확정 짓는 정보를 뱉으며 초록불을 받아냈다. 대충 예상 범위 내에 있는 행동이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느니 말은 했지만, 끽해봐야 내게 줄 수 있는 페널티는 그게 전부니까. 나와는 다르게. “피싯, 그런 짓은 안 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 어차피 하지도 못하겠지만.” “…무슨 뜻이죠?” “애초에 추방이 되면 왜 저를 내버려 뒀겠습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노아르크 출신인데. 이쪽 정보가 궁금해서 그냥 놔둔 거 아닙니까?”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죠?” “피시싯, 정답인가 보군요? 아무튼, 그런 이유면 더더욱 수사자 씨를 추방해선 안 된단 뜻입니다. 이후 이분이 무슨 얘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는 데다가…….” 광대가 딱 잘라 말했다. “감당 못 할 짓은 안 하는 게 맞잖아요?” “…감당 못 할 짓?” “예. GM의 정체도 알고 있던 사람인데, 무슨 꼴을 당하려고?” 내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말이었다. 그야 이런 말은 본인이 직접 말하면 어딘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옆에서 이렇게 나서주면 체면도 챙길 수가 있다. 일진들 옆에 항상 이런 앞잡이가 붙어 있기 마련인 것과 비슷한 맥락. “…….”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문 여왕을 피해 시선을 돌리자, 광대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잘했죠?’ 딱 이런 눈빛으로. *** 이 정도면 지난날의 설움은 대충 되갚아 주었다고 여겼을까. “피싯. 뭐, 말이 그렇단 거지 제가 오지랖 부릴 부분은 아니겠죠.” 할 말을 모두 마친 광대가 상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 역순으로 돌아가는 거면 이번에는 제 차례려나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재개된 두 번째 바퀴. 시작부터 대충 흘려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비요른 얀델, 그 씹어 죽일 놈 얘기가 때마침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그놈 사실 악령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응? “피싯, 악령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게 이백호 그 인간이라서요.” …이백호? 걔가 내 정체를 다 까발렸다고?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던 때, 사슴뿔이 더욱 충격적인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토해냈다. “최초의 출처는 미샤 칼스타인, 그 여자였을 텐데?” …응? 미샤?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 여자는 지금 이백호의 동료 중 하나인데.”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미샤가 이백호의 동료인데? “피싯, 다행히 초록불이 떴군요. 하긴 그 적묘족 여자가 이백호의 동료가 됐단 이야기는 다들 모르고 있을 줄 알았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주입되며 머리가 어질어질해졌으나,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겨우겨우 내색하지 않고 버텨냈다. 그런 상태에서 다음 순서가 찾아왔다. “…후, 역시 쉽지 않군요.” 전쟁 관련 정보를 뱉었다가 두 번이나 빨간불을 받았던 고블린은 세 번째 트라이에서 초록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레아틀라스교의 내부 사정에 관한 정보였다. 얘는 항상 궁지에 몰리면 자기가 속한 교단을 팔아먹는 버릇이 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또 나구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초승달의 차례. 앞서 에르웬의 관한 얘기가 나온 만큼 관심이 생겼지만, 애석하게도 나온 정보는 그냥 그랬다. 전쟁에 관련된 정보였던 탓이다. 그다음 차례를 받은 사슴뿔도 매한가지였고. “피싯, 아무래도 이번엔 왕가에서 제대로 칼을 뽑아 들은 거 같기는 하군요.” 매번 사슴뿔을 비웃던 광대가 저럴 정도니 꽤 중요한 정보였던 거 같긴 하지만, 당장 내게 있어서 전쟁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흩어진 동료. 악령 누명(?)을 벗는 일 등등. 먼저 해치울 숙제가 수없이 널려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여우의 정보에는 그나마 흥미가 동했다. 아니, 정확히는 걱정이라고 해야 하나? “몇 개월 전, 알미너스 중앙 거래소에 더블 넘버스가 입수됐어요. 신원 미상의 여자가 이를 담보로 거액의 돈을 빌렸다는데, 상환일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죠. 어쩌면 곧 거래소 경매장에서 그 물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설마… 내 악마분쇄기 이야기는 아니겠지? 응, 아닐 거야. 그 착한 아멜리아가 그럴 리 없지 않나. “…….” 애써 합리화를 하고 있자니, 어느덧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인 것이 느껴졌다. ‘아, 벌써 내 차례구나.’ 무엇을 말할지는 정해 두었기에 이제 와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한 명씩 쓱 훑어보았다. 다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단 한 명만을 빼고. “…….” 앞에서 벌려놓은 일이 있는 탓인지, 소울퀸즈는 기대보다 불안이 더욱 커 보였다. 자존심은 높지만 생각보다 겁은 많은 스타일인가? ‘아무튼, 뜸들이기는 이만하면 된 거 같고.’ 톡톡, 별 의미 없이 의자를 두 번 두드린 다음 나는 소울퀸즈를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 이제 그 물음에 내가 답할 차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되물을 순간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아까 광대가 한 번 말하기도 했듯이. 정말로 감당할 준비가 된 것이느냐고. 꿀꺽. 여왕의 가느다란 목울대가 움찔한 순간, 나는 주저 않고 말을 이었다. “여왕의 닉네임은 소울퀸즈다.”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회원들의 시선이 보석으로 모여졌다. 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 아직 사람 말도 다 안 끝났구만. “그리고 소울퀸즈의 본명은…….” 사실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녀를 보며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 반응이 없으면 ‘나중의 재미로 미루지.’ 같은 말을 하며 자비를 베푸는 척하면 된다는 판단. “호오.” 내가 한 번 더 뜸을 들이자, 회원들의 눈에 배인 흥미가 더욱 짙어졌다. 그중에 제일인 건 광대였다. 하긴, 얘는 예전에 이 여자 때문에 크게 창피를 겪은 일도 있었지. “마공학자처럼 마탑에만 박혀 있는 부류만 아니면 좋겠군요. 그러면 죽이기가 힘드니까. 피시시싯…….” 광대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소울퀸즈의 목울대가 한 번 더 움찔했다. 톡톡. 나는 한 번 더 무의미하게 의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그만!” 원하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그만해 주세요……. 여기서 제 정체를 알리는 것만큼은…….” 쯧, 진작 그럴 것이지. 345화 컴백 (4) 소울퀸즈가 마침내 백기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보겠다는 게 얼마나 허튼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은 듯했는데……. “피싯, 웃긴 여자로군요. GM의 정체를 까발렸을 때는 당돌하게 나오더니, 본인 얘기가 나오자마자 꼬리를 말다니.” 여왕은 광대의 모멸 어린 말에도 대답하지 않으며 이를 감내했다. 원탁에서 짧은 시간 동안 구축한 그녀의 위상을 생각하면 어딘가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아쉽지.’ 여기서 그냥 항복을 받아 주는 건 미련하다. 소울퀸즈는 서열에 민감해 보였으니까. 이 기회에 제대로 각인을 시켜 두는 게 좋겠지. 이 세상에 불려온 날 동굴에서 만난 고블린에게 내가 하였듯이.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내가…….” 나는 한 번 더 의자를 검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왜 그래야 하지?” 짧은 물음에 소울퀸즈가 흠칫하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저희는 수사자 님을 적대하지 않을 거예요.” 커뮤니티에서 벤을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앞서 GM의 정체를 까발린 것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 그녀답지 않은 완곡한 표현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마치 대등한 상대에게 하는 제안 같지 않은가. “아직도 배우지 못했군.” 그리 말하며 툭툭, 한 번 더 의자 받침대를 검지로 두드렸다. 다만 아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 “…바라는 게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소울퀸즈가 내 눈치를 보며 간곡히 말을 올렸다. 따라서……. “나는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녀가 내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기에 나는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또한, 너희가 두렵지도 않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운영진과 척을 지는 게 조금이라도 껄끄러웠다면 이렇게 노빠꾸로 들이받았겠어? 이들 눈에는 내가 통제 불가능한 미친놈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다.” 나는 소울퀸즈에게 다시금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그건…….” 당연히 그녀는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야 이 여자가 거래 대상으로 보았던 이들은 모두 제각기의 바라는 것이 있었을 테니까. 생전 처음 보는 타입에 매끄럽던 혓바닥이 굳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제가…….” 그녀는 여러모로 똑똑한 여자였다. 협박도 통하지 않고, 보상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순간조차 즐거운 유희거리라도 되는 듯 응징을 이어가려 할 뿐인 상대. 그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기나긴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는 해답에 도달했다. 설득할 생각을 버리는 것. 그리고……. “잘못… 했습니다…….” 자비를 바라는 것. 무엇도 제시할 수 없는 약자가, 강자에게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용서해, 주세요…….” “저 멍청한 여자가 드디어 본인 위치를 깨달은 모양이군요. 피싯.” 광대의 조소에도 아랑곳 않고 소울퀸즈는 아까 내가 사슴뿔에게 말했듯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다시는, 수사자 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그러니 부디, 오늘의 제 실수를 용서해 주세요…….” 솔직히 말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자기네들 신상을 다 알고 있다는 게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 “…….” “…….” 주변을 둘러보니 회원들은 입도 열지 않으며 나와 소울퀸즈를 번갈아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과연 그녀의 사죄를 받아 줄지가 궁금한 눈치. ‘서열 정리는 이만하면 됐겠고…….’ 나는 소울퀸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결 낫군.” 그래, 이거거든. *** “여왕의 닉네임은 소울퀸즈다. 그리고 소울퀸즈의 본명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다시금 원탁에 손을 올려 내 차례를 끝냈고, 녹색불을 받아냈다. “후우…….” 이와 동시에 긴장이 풀렸는지 사태를 주시하던 회원들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는 소울퀸즈도 매한가지였다. “감사… 합니다…….” 스스로의 가죽을 제 손으로 벗기는 심정으로 하였을 감사의 인사.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고, 그렇게 약간의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 공기를 조심스레 깬 것은 사슴뿔이었다. “…집회는 어쩔 거지? 계속 이어갈 건가?” 내가 턴을 마치는 것으로 두 번째 바퀴가 끝났다. 많이 돌 때는 네다섯 바퀴를 돌 때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집회를 끝내도 이상하지 않다. 하면, 이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저, 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한 번 호기를 부렸다가 호되게 혼이 난 소울퀸즈가 내 눈치를 보며 그렇게 말하였다. 왠지 가지 마라고 하면 ‘네…….’ 하며 남아 있을 것도 같지만……. 얘 하나 남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그럼, 저도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이번 바퀴에서 두 번이나 적색불을 받고서 겨우 통과했던 고블린이 불참을 선언했고, 자연스레 집회가 마무리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쩝, 벌써 끝이라니…….’ 2년 6개월 만에 컴백한 원탁이 두 바퀴에 종료된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 얼굴을 비췄으니 다음 달에는 좀 더 재미난 걸 들고 오겠지.’ “…피싯, 그럼 다음 달에는 다들 좀 더 열심히 준비해 오는 거로 하지요. 아, 물론 수사자 씨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광대는 다른 회원들에게 하는 말인 척하면서도 나를 틈틈이 흘겨봤다. 조금은 귀엽게 봐줄 만한 행동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도 내가 오느냐는 거였을 텐데. 스윽. 친절히 답해 주는 것도 뭔가 멋이 안 났기에 나는 광대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으며 그대로 원탁을 떠났다. 그리고……. “후아…….” 이한수의 방으로 복귀한 즉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까 쓴 살기의 영향인지 피로가 상당했다. ‘이거 내일 저녁까지는 거의 기절하듯 자겠네.’ 물론 그건 미래의 나였기에, 현재의 나는 내가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다. 우선 그 첫 번째는 정보의 정리. ‘오늘 그렇게 판을 벌였으니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 생각하는 놈은 당장 없을 거 같긴 한데…….’ 나는 원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 나갔다. 컴백 무대는 잘 치른 듯했으나, 완벽하게 해낸 건 아니었다. 그야 언제까지 죽은 척하고 음지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생환이 알려지는 즉시, 바로 똑같은 의심이 생겨나겠지.’ 물론 이를 대처할 수단은 제법 있다. 과거로 여행을 다녀오며 블러핑을 할 수 있을 패가 여럿 생겼으니까. ‘이 부분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고…….’ 정말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원탁 도중에 그것 때문에 멘탈이 나갈 뻔하기도 했다. [최초의 출처는 미샤 칼스타인, 그 여자였을 텐데?] 미샤 칼스타인. 얘는 어째서 그런 소문을 냈으며.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 여자는 지금 이백호의 동료 중 하나인데.] 또 어쩌다가 이백호의 동료가 되었는가. 암만 상상력을 발휘해 봐도, 인과의 연결 고리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래도 추측이나마 해보자면. [소생의 돌은 이백호가 가지고 있다.] 이게 키 포인트가 될 거 같다. 예시로, 미샤가 나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백호와 손을 잡았을 경우도 있는 거니까. ‘…라는 건 너무 내 희망 사항이려나?’ 하, 진짜 1년 만이라도 일찍 돌려보내주지. 2년 6개월의 공백이 새삼 크게 느껴지며 갑갑함이 커진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아무튼, 미샤의 목표가 날 살리는 거면……. 이백호 얘는 뭐가 목표인 거지?’ 글쎄, 모르겠다.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같은 한국인이란 공통점만 있을 뿐, 사실 이백호 얘랑 대화를 나눈 시간도 얼마 되지 않으니까. 심지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이건 이백호에 대해 더 알아본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눈을 감고서 계속해서 정리를 해갔다. GM, 아우릴 가비스, 아멜리아, 그리고 노아르크와 왕가 등등.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생각할 거리들은 넘쳐나는 상태였다. “…….” 그렇게 한참을 브레인스토밍 하듯 흘러가는 대로 상념을 이어간 후에는,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아까 확인하지 못한 게시글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GM이나 소울퀸즈 쪽에서 쪽지를 보내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또 없네.’ 나는 미련 없이 커서를 이동했다. 여기서 더 꼼꼼이 살펴본다고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거 같지도 않은 데다가, 커뮤니티가 닫힐 때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딸깍.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자 눈앞이 번뜩였고 이내 머지않아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방의 모든 창문이 판자로 가로막혀 달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침실. “헤헤, 눈 떴다아…….” 에르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당대 순혈의 주인이자, 정령왕의 계약자. 그 증표로 요정의 보물인 ‘신목궁’을 하사받았으며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며 혈령후란 이명까지 얻어낸 칠강의 일원. 그리고……. [피싯, 그 미친 여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죠?] [뭔진 몰라도 한바탕 또 피바람이 불겠네요.] 동료들 중 유일하게 내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여자. [누가 뭐래도, 나한텐 아저씨가 비요른 얀델이야.] 악령이든 아니든 관계가 없다고 말해준 여자. 다만, 그 헌신에 대해 고맙고 감동적으로 느끼긴 어려웠다. 과해도 너무 과했으니까. 하면, 얘는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하는 걸까. 처음에는 집착 스탯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고블린 궁수, 강철언덕 추격자, 카니바로. 에르웬이 먹은 이 세 가지 정수에 모두 ‘집착’이란 스탯이 붙어 있었으니까. 언니의 사망 이후 머지않아 또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니 이게 기폭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여겼다. 하지만……. “아저씨… 다 주무셨으면… 산책 갈래요? 오, 오늘 달이 예쁘게 떴어요…….” 그건 2년 6개월 전의 에르웬이다. 어지간한 귀족 자제들도 울고 갈 만큼 일족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은 에르웬은 이미 정수의 대부분을 바꾸었다. 문제는 바뀐 것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단 거고. 6층 골렘 섬에서 나오는 순찰병 에르테스. 여기서 방어기제가 +45. 낮에는 비선공이지만, 밤에는 선공으로 변하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 늑대 괴수 칼반. 여기서 충동 +30에 불신이 +30. 4등급 몬스터 멧크로우에겐 소유욕 +24가, 그외의 두 가지 정수에서 통제력이 -30, 결핍 +40이 추가로 붙었다. 하나하나만 보면 정신에 큰 문제가 생기는 스탯은 아니지만, 이만큼 모이면 실생활에도 영향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래서 이를 깨달은 후로는 에르웬을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다. 얘가 회까닥 눈이 돌아 버리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아, 맞다……! 제가 목걸이도 하나 사왔는데……. 이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아저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언제까지 뒤로 미뤄둘 수만은 없겠지. 이런 게 내 취향인 것도 아니고. 툭. 나는 스스럼없이 내 몸을 만져오는 에르웬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어?” 에르웬은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 아저씨… 화, 화났어요? 대체… 왜……?” 혼란스러운 듯 눈을 떨던 에르웬은 내 변화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 판자가 조금 뜯겨져 있었죠.” 갑갑해서 그냥 뜯어 버릴까 하다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얘한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 여자죠……? 그 여자가 왔던 거죠? 그래서, 아저씨가…….” 에르웬은 되도 않는 망상을 펼치더니,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솔직히 말해, 오밤중에 저러고 있으니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두렵고 껄끄럽다고 도망치는 건 내 신념에 어긋난다. 누명을 쓴 채 길드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용살자와 마주쳤을 때도. 거인이란 명성을 얻게 된 노아르크전에서도. 늘 정면으로 부딪쳤기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왜… 대체 왜… 아직까지도 그 여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예요?” 그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내 동료니까.” 에르웬의 반응은 잠깐의 틈을 두고 나왔다. “…그, 그런! 아, 앞으로 제가 있을 테니, 그런 여자는 피, 필요 없다고 제가 누누이 말했는데……!” 그래,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런데. “왜 그걸 네가 정하지?” “그, 그건…….” 에르웬의 말문이 막혔다. 딱히 안쓰럽지는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수사자 가면을 쓰고 있었던 탓인지, 자연스럽게 말이 이어졌다. “버릇없게.” “……!” 에르웬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 순간 나는 잠들어 있던 근육을 일깨웠다. 그야 안 그래도 정신 상태가 불안한 애가 이제 할 행동이 뭐겠는가. “……누구야 너.” “비요른 얀델이다.” “거, 거짓말… 악령이야…….” 이내 에르웬의 몸에서 시꺼먼 오오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에르웬의 주특기가 된 어둠의 정령이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위기를 감지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각오는 했으나 막상 앞에 서니 압박감이 상당했다. 다만, 그럴수록 나는 떠올렸다. ‘내가 누구?’ 온갖 역경을 헤쳐온 바바리안 전사. 거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오리지널 난이도를 유일하게 클리어한 유저. 사자의 심장을 지닌 원탁의 절대자. 꽈악. 잠시 잊었던 내 정체성을 떠올리기 무섭게 가슴이 웅장해지며 용기가 샘솟았다. 따라서 이 마음이 식기 전에.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말해요. 자, 잠깐 잠결에 실수를 한 거라—”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네 머리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 문제가 생겼으면 고치는 수밖에. “잔말 말고, 덤벼라.” 내가 제일 잘하는 방식으로. 346화 은둔 (1) 객관적인 스펙은 나보다 근소하게 우위. 그리고 장비는……. ‘압도적으로 우위.’ 게다가 1년 넘게 전쟁에 참가해 노아르크 놈들 목을 땄다고 하니, 전투 경험도 이제는 나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쫄 필요는 없다. 에르웬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쓰윽. 바로 거리. 정령왕의 계약자고 뭐고, 거리 조절이 생명인 궁수가 직업인 이상, 이 거리에서는 내가 유리하다. 사방이 막힌 밀실이란 점도 긍정적인 점이고. 심지어 상대는 멘탈도 멀쩡하지 못했다. “더, 덤비라니요. 제가 어떻게 아저씨한테 그. 그, 그럴 수가…….” 거, 아까는 나보고 악령이니 뭐니 하더니. 길게 시간을 줄 생각은 없었다. 서로 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조용히 끝내기 어려울 테니까. 꽈악- 수박만 한 손을 웅크려 주먹을 만든 뒤, 단숨에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대시했다. 하지만……. 후웅-! 나름 기습이라고 한 주먹질이 너무도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역시 민캐라 이건가? “…하, 하지 마요.” 뭐, 이 정도야 예상했으니까. 쿠웅. 발로 바닥을 내려찍듯이 몸을 멈춰 세운 순간.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내 몸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치며 주위의 것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초월]과 연계한 것은 아니라 반경은 고작 5m. 다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방 하나를 커버하기엔 충분했다. 휘이이이이이익-! 침대, 이불, 배게, 책장, 탁상, 카펫 등등. 중량이 500kg을 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세찬 바람에 휘말려 나부낀다. 물론 그중에는 에르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파루네섬에서 스톰거쉬와 함께 전투를 치른 바 있는 에르웬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갑자기 이 스킬이 왜 나오나 싶었겠지. 신분 증명을 할 때는 어차피 원래 갖고 있던 정수도 아니란 생각에 일부러 안 보여 줬으니까. 후우웅-! 다만 에르웬도 그동안 이리저리 많이 굴렀는지, 즉시 임기응변에 나섰다.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 “그, 그만해요……!” 그만하긴 뭘 그만해. “말했지 않나. 네 머리엔 문제가 있다고.” 나는 [폭풍의 눈]을 유지한 상태에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후웅-!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이 주먹이 에르웬에게 닿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뒤로 물러나 피할 것이고, 그럼 [거대화]로 팔 길이를 순식간에 늘릴 생각이었다. 음, 분명 그랬을 터인데……. 투두두둑. [폭풍의 눈]의 지속시간이 끝나며 나부끼던 여러 가구와 집기들이 일제히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 에르웬은 서 있었다. 내가 뻗은 주먹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왜…….” 이쯤 되자 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도중에 겨우 멈춰 세운 게 아니었다면 분명 이 주먹은 에르웬에게 적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에르웬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랬다간… 아저씨가 다칠 테니까…….” 응?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머리가 멍해지던 때. “아저씨 말이 맞아요……. 사실 저도알고 있어요…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래도요. 네, 그래도…….” 에르웬이 애처롭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아저씨를 다치게 하겠어요.” 어……. 그, 그렇구나? 뚝. 볼을 타고 흐르다 못해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보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이러면 나만 못된 사람 같잖아. *** 이후로 에르웬과는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때로는 너무 구구절절하고, 도중에 돌연 삼천포로 빠져 한참 동안 주제 외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나, 짧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내가 죽은 다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기나긴 고통을 견뎌내고 일족의 순혈을 취할 수 있었다. 힘을 갖자마자 전쟁이 터졌고, 복수를 할 수 있을 기회라 여겨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한 전장을 찾아다녔다. 정령왕과 계약을 한 것도 그 시기이다. 그리고……. “과한 건 인정하지만, 절대 아저씨를 구속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창문을 판자로 막거나, 밤에만 산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내가 너무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도시에 나는 악령이란 소문이 퍼졌으니까. 일종의 강박증이었다. 또다시 다시 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그럼 아멜리아는?” “…그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믿지 못하겠어요. 난 정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저씨를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 여자는 어떨지 모르니까, 너무 불안해서…….” “…….” “하지만 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동료로 삼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거고요. 솔직히 아직도 여전히 불안하지만…….” “불안하지만……?” “…아저씨가 그러지 말기를 원하니까.” 흠, 진심인가? 거짓말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닌 듯한데……. 나중에 또 갑자기 눈에 회까닥 돌아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으나, 일단 지금만 보면 더없이 진심인 거 같았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은. “정수들요. 아저씨가 지우라고 하면 내일 신전에 가서 전부 지워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되면… 이제 아저씨를 보호해 드릴 수는 없겠지만요…….” 에르웬의 정수 중 대부분은 전공을 세워서 획득한 정수들이었다. 근데 그걸 모두 지워도 상관없다니. “…왜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거냐?”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우리가 그럴 정도로 유대가 깊은 관계였나? 솔직히 이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다만 이 상황에 그런 말을 하는 건 조금 그랬기에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정수는 지우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다.” “…말씀대로 할게요.” “대신,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몇 개쯤은 지우겠다 생각해라.” “네, 아저씨가 바란다면—”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순도 100% 진심이었다. 그야 에르웬은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니까. 매일 달콤한 말을 들려주고, 미움받고 싶지 않단 감정을 교활하게 이용한다면 내 입맛대로 부리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역시 그건 옳지 않다. 동료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니까. 나는 그것을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한 마법사에게 배웠다. 그렇기에……. “저를… 위해서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래, 너를 위해서… 아니, 정확히는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우, 우리의 관계…….” “…알겠나?” 나는 어딘가 멍한 에르웬의 어깨를 잡고서 확인하듯 다시 물었고, 이내 에르웬은 답했다. “네, 네헷…….”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지? *** 그날의 대화 이후 내 생활이 확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은둔 생활을 이어가며 밤에는 마당에서 바람을 쐤고, 창문에 박힌 판자들을 떼지도 않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오직 에르웬의 태도뿐. “아저씨, 여기 아저씨가 쓰시던 장비예요.” 그냥 이 집에서 숨어 살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한 낌새를 풍기던 에르웬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날 돕기 시작했다. 일단 그 시작은 장비였다. “이건…….” No. 2988 수호병단의 징표. 별다른 스탯이나 사용 효과는 없지만, 착용 시 방패에 충격 흡수 옵션을 무려 50%나 붙여주는 방패바바의 코어 아이템 중 하나. “…갖고 있었던 거냐?” “네, 팔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들어 보니 유산 분배는 레이븐이 주도로 맡았다고 하는데, 우편으로 이 귀걸이를 받은 뒤 팔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이걸 이제서야 주는 거지? 장비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물어봤을 텐데.” “죄송해요… 아저씨가 미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해서 숨겼었어요.” 그래,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그랬던 거구나. ‘만약 저번에 제대로 해결을 못 했으면, 정말로 이 집에서 키워졌을지도…….’ 어딘가 오싹해지지만, 설마 정말 그랬으려고. 나는 찝찝함을 내던지고서 다른 부분을 확인했다. 진작 다 팔아치워서 시장에 풀렸겠다 싶었지만, 이제 생각이 좀 달라진 것이다. 다른 애들도 보관을 해뒀을 가능성이 있잖아? “…그건 저도 자세히 알아봐야 할 거 같아요. 하지만 확실한 건, 아브만 우리크프리트는 모두 팔았을 거란 점이에요.” “아브만이?” “네. 그 사람은 아저씨가 입던 장비 말고 비교적 의미가 없는 것들을 받아 갔다고 하더라고요. 아공간 반지나 그런 거요.” 음, 그렇구나. 입고 있던 것들은 현금화하기에 좀 그러니까, 가책 없이 팔 수 있는 걸 가져간 건가?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애초에 이 귀걸이랑 그것만 멀쩡하면 나머지는 다시 구하면 그만이니까.’ 방패와 갑옷이야 다시 제작하면 된다. 다른 넘버스 아이템들도 그렇게 비싼 건 아니고. “혹시 내 목걸이는 누가 가져갔는지 아나?” “아, 그 마석을 넣으면 이상한 물건들로 바꿔주던 그거요?” “그래.” 정식 명칭은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이 목걸이는 마석을 넣으면 랜덤한 물질로 변환을 해주는 기능을 가졌다. 마석을 빵, 물, 금속 등등으로 바꿔주는 연금술의 가챠판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크게 값어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숨겨진 특수 이벤트를 열 만큼의 재력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은… 저도 그게 갖고 싶어서 예전에 그 마법사. 아니, 아루아 레이븐한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누가 가져갔는데?” “미샤 칼스타인이요.” “아…….” 이름을 듣자마자 바람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야 우리 동료들 중에 행적이 묘연해진 유일한 인물이니까. 뭐, 이번에 원탁에서 이백호와 함께 있다는 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 때문에 더 혼란스럽다. 전부 다 수수께끼 같다고 해야 하나? “…….” 그래도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나름 애틋한 사이였던 미샤가 아닌가. 얘라면 팔지 않고 보관 중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음… 딱히 그렇지도 않으려나?’ 2년 6개월이나 지난 탓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갑옷이나 무기 같은 건 왠지 아이나르가 가져갔을 거 같고……. 그럼 나머지는 레이븐한테 갔으려나?’ 뿔뿔이 흩어진 내 구장비들의 행방을 고민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한 아이템이 떠올랐다. ‘아, 불의 보주……. 그건 어떻게 됐으려나?’ 내가 가진 물건들 중 유일한 귀속 아이템. 만약 내가 이 시간대에서 실종된 게 사망으로 인식이 됐다면 판매가 가능했을 테고, 그 반대라면 그냥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후자라면 이것도 아마 레이븐이 갖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테고…….’ “후우…….”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한숨이 나온다. 과거에서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대가로 수습해야 할 숙제들이 너무 많았다. “아저씨, 안 드세요?” “아…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나는 상념을 끝내고 에르웬이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입에 떠 넣었다. 그리고 어서 식사를 마친 뒤에 에르웬과 잠시 상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세요?” “…악령이라는 누명부터 벗어야지.” “제가… 힘을 써서 어떻게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볼까요……?” 에르웬은 왕가 출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증명을 해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이는 거절하기로 했다. 조금 이르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언젠가는 그 방법을 쓰기는 해야겠지만, 왠지 내 사건에 정치적인 무언가가 개입됐다는 예감이 가시질 않아서 말이지.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히 접근해야 할 거 같다. 혹시 잘못됐다간 너를 포함해 요정족 전체에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여, 역시 상냥하세요.” “크흠.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레이븐이나 아브만 얘기는 됐으니 그쪽을 중점으로 정보를 알아와 줄 수 있겠나?” “네! 그럴게요.” 이후 상의가 끝난 뒤에 에르웬은 성지에 들러야 한다며 떠났고, 나는 낮잠이라도 잘 겸 1층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에르웬이라면 노크를 할 이유가 없는데. 347화 은둔 (2) 마공학자, 유르벤 하벨리온. 한 학파의 수장이자 수많은 제작계 마법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마법사.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영적 세계의 법칙에 간섭하는 일은. “제기랄.” 로브를 입은 사내가 작업대에 올려진 보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작업대에 올라간 보석은 사내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난 노인에게 받은 것이었다. 지금은 고스트 버스터즈라는 이름을 붙인 영적 세계의 서버 및 시스템이라고 봐도 무방한 물건.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지?” 이 작은 보석 안에는 무한에 가까운 마법 회로들이 크고 작게 얽히고 얽혀 있다. 사내는 이를 분석하고 연구하며 실력을 키웠고, 파악한 회로를 하나씩 수정해 가며 지금의 고스트 버스터즈를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런 방식은 불가능한 건가.” 이후로도 한참 동안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회로를 수정하던 사내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쉬워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해내지 못한 게 갑자기 며칠 내로 될 리 없지 않은가. 그나마 최근에 있던 가장 큰 성과는 익명 채팅방에 입장한 플레이어들의 닉네임을 관리자 권한으로 몰래 조회할 수 있게 업데이트 한 것이었다. 지이이이잉. 그때 개인용 호출기가 진동했다. 연락을 취한 이가 누구인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예, 소울퀸즈 님. 저에 관한 이슈는 없던가요?” [네… 아직 하벨리온 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고 있어요.] “…그렇군요.” 사내는 짜증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잘 숨겨온 정체가 너무도 뜬금없는 곳에서 드러난 탓이다. “그 부분은 계속 주시해 주십시오. 이런 소문은 커지기 전에 초기 진압을 잘해야 하니까요. 저는 다른 회원들의 정체를 알 수 있도록 계속 수를 찾아보고 있겠습니다.” [네. 그리고… 죄송해요.] “…….” 수정구 속 여성의 사과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빈말로라도 죄송할 거 없다는 식의 말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럼… 추후에 이슈가 생기면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네, 쉬세요.] 이내 연락을 끝마친 사내는 다시금 작업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접속했을 때의 위치 정보가 서버에 저장되는 식으로만 회로를 바꿔도, 역추적이 가능해질 거 같은데…….’ 사내는 보석의 복잡한 내부 회로를 분석해 나갔다. 언제나 그랬듯, 답은 이 보석 안에 있을 것이었다. *** 똑똑. 노크 소리를 들은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누구지?’ 모르겠다. 에르웬이 노크를 할 일은 없으니, 외부인이긴 할 거 같은데……. 외부인이 대문도 아니고 현관문에 노크를 한다고? ‘니미럴.’ 숨소리를 죽이고, 자세를 낮춘 채 최대한 소리 없이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드륵, 드르륵. 문고리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금장치가 풀렸다. 끼이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 상대가 누구건 간에 제압부터 할 생각으로 주먹을 꽉 쥐던 나는 상대를 확인하고서 그대로 굳었다. “…다행히 안에 있었군.” “아멜리아……!” “읏……! 가, 갑자기 달려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니, 반가워서 그렇지. 사람 무안하게시리. “…얼른 들어와라.” “실례하지…….” 아멜리아가 재회의 포옹은 질색하는 듯했기에 이는 생략하고서 서둘러 집 안으로 들였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만, 우선 순차적으로 묻자면…….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냐?”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 요정을 보고서 뒤를 밟았다.” “응? 근데 왜 이제서야…….” “접근할 틈이 없었으니까.” 엥? 그렇다기에 얘는 낮에 항상 성지에 간다고 외출해 있었는데? 이를 말해 주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 여자는 계속 집 근처에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 그럼 그동안 성지에 간 적이 없었다고?” “설마… 몰랐던 건가?” “…….” “그래도 최근에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어디론가 자리를 비우더군. 혹시 함정인가 싶어서 며칠 지켜보느라 늦었다.” 그래도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심경의 변화라면, 역시 얼마 전에 나눈 그 대화를 말하는 걸 테니까. “그래서… 혈령후와는 어떻게 됐지? 네가 살아 돌아온 걸 납득하기 어려웠을 텐데. 악령 문제도 그렇고.” “아, 그거라면 잘 해결 됐다.” 나는 에르웬과 있었던 일을 짧게 요약해 중요한 부분만을 말해 주었다. 아멜리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악령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라……. 지상 출신의 탐험가답지 않은 사고방식이군.” “얘가 조금 이상해졌더라고. 아마 예전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을 텐데.”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응?” “악령이란 게 공표된 다음에도 네 복수를 멈추지 않았던 여자 아니냐. 이미 진작 속으로 정리를 끝마친 상태였겠지. 네 정체가 뭐든지 상관없다고.”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튼, 그래도 악령은 아니라고 못 박아뒀다. 혹시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럼 이 세상에서 네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인 건가?” “아니, 한 명이 더 있다.” “…미샤 칼스타인은 네가 악령이라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사람이다. 애초에 현지인도 아니고. 내 고향 사람이다.” 딱히 숨길 이유가 없고, 추후 변수가 될 여지도 다분했기에 나는 이백호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런데,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이백호……? 그자가 네 고향 사람이라고?” 마치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는 듯한 눈치. 음, 그러고 보면 원탁에서도 이백호에 대해서 아는 애들이 꽤 있었지. 원래 에르웬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려 했지만, 그냥 얘한테서 정보를 얻는 게 나을 듯하다. “아는 이름이냐?” “…알다마다.” “하긴,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이쪽 시간대로 넘어왔으니 들어봤을 수도 있겠네. 아, 근데 너는 돌아온 지 얼마나 된 거냐?” “2년 전이었다.” “오, 그럼 넌 거기서 1:1로 시간이 흐른 셈—” “하지만 내가 돌아온 시기는 상관없다. 내가 그 녀석을 알게 된 건 훨씬 예전의 일이었으니까.” 응? 그 전부터 이백호를 알았다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바란다는 듯 응시하자, 이내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악령과 1년 넘게 팀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단 말을 기억하나?” 어……. “그 악령이 이백호였다.” 뭐야, 이 새끼는. 대체 안 끼는 데가 없어. *** 아멜리아가 이백호와 만난 것은 약 5년 전. 성주의 지령을 받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녀석에게는 악령일지도 모른단 의혹이 붙어 있었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야 악령이라면 회유도 가능할 테니까. “오러를 쓸 수 있는 탐험가는 귀했기에, 녀석의 팀에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녀석의 팀에서 지냈지.” 아멜리아가 말하길, 도플갱어숲에서 [자가복제]를 얻은 거나, 3층의 백색신전을 클리어했던 것도 모두 그 시기라고 하는데……. 와, 어쩐지 히든피스들을 다 알고 있더라니만. 이백호랑 다녔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별거 없다. 1년이 지나도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하자 성주도 관심을 잃었고, 나는 다른 임무를 받아 핑계를 대고 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중에 그 소식을 듣게 됐지.” “그 소식이라니?”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당시 왕가에서 철저하게 사건을 은폐했으니까. 단지 동료의 배신으로 정체가 탄로 났고, 그날 미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그게 뒷조사로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이후 아멜리아는 왕가에서 이백호의 자료들을 폐기했고, 수년간 정보를 통제하며 그의 존재가 도시에서 잊히도록 유도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근데 그러면 이백호란 이름은 어떻게 안 거냐?” “그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왕가와 정말 사이가 틀어진 건지 요즘은 온갖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백호라 소개하고 다닌다더군. 아, 참고로 예전에는 녀석이 쓰던 가명을 쓰던가, 다른 사람처럼 ‘그자’라고만 불렀다.” 그렇구나……. 설마 이백호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바로 내 주변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전에 그놈은 어땠냐?” “글쎄,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그런 가벼운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신,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굉장히 끈끈한 사이였지.” “끈끈한 사이?” “그래, 마치 네가 만든 팀들처럼.” 호기심에 이백호와 관련된 썰을 여럿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묘했다. “뭐? 팀에서 그놈을 빼면 전부 여자? 심지어 걔네 전부랑 전부 사귀어? 와, 이 새끼는 무슨 미궁에서 하렘을 차렸냐…….” “하렘? 그게 뭐진 모르겠지만, 팀원들이 전부 여자인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래, 얘는. 곰아저씨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구만. 게다가 팀 반푼이 시절에는 미샤 빼고 전원이 남자였다. “그렇다면야. 그런 거로 하지.”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다. 능력과 적성만 보고 뽑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 뿐, 절대로 연애 대상으로 보고 그런 건—” “변명할 거 없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 “애초에 살고 있던 나라도 다르지 않나? 한국이란 곳이 어떤진 몰라도, 그런 부분은 이곳의 귀족 문화와 비슷했던 거겠지.” 아니, 한국은 평범하게 일부일처제인데……. 얘는 대체 한국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왠지 이백호와 내가 한국의 이미지를 망쳐도 단단히 망친 거 같지만, 그냥 더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이제 썰도 들을 만큼 들은 거 같으니, 다음 화제로 넘어갈 차례였다. “아멜리아. 그보다 은행에 남긴 쪽지 내용은 대체 뭐였냐?” “…무슨 뜻이지? 적은 대로다만?” “아, 에르웬이 전해준 편지에는 마지막 부분이 찢어져 있어서 말이지. ‘악마분쇄기는…….’ 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못 읽었다.” “…그, 그랬군.” 이내 화제가 내 크고 소중한 망치로 넘어가자 아멜리아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쩐지 그 얘기를 하지 않더라니……. 과연, 읽지 못해서였나…….” “아니, 그러니까 불안해지지 않냐. 말해라. 망치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잘 있는 게—” “망치라면 잘 있다.” 아멜리아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스윽. 내 시선을 피하며 다소곳이 말했다. “알미너스 거래소 담보 대출 부서 금고에…….” 하아……. *** 아멜리아와 나. 우리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리앉았다. 늘 당당한 여성이었던 아멜리아도 자기 잘못은 아는지 내 눈을 피하고 있었고,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그래서 왜 팔아넘긴 거냐?”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멜리아 아닌— “정정할 부분이 있군.” “…응?” “팔아넘긴 게 아니라, 그걸 담보로 돈을 빌린 거다.” 어허, 그걸 말이라고. 내가 째려보자 아멜리아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도 잘못된 부분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추후 문제가 생기지 않는—” “됐고, 묻는 말에나 답해라. 왜 내 망치를 팔아… 아니, 담보로 돈을 빌린 거냐? 대체 무엇 때문에?” “…네가 돌아왔을 때 보호하기 위해서.” 후,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뭔진 몰라도 꼭 그래야만 했던 합당한 이유가— “…경매장에서 정수를 샀다.” “…………뭐?” 긴 정적 끝에 겨우 정신을 되찾고 입을 열자,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말을 이어붙였다. “걱정 마라. 상환일까지 돈만 갚으면 되찾을 수 있으니.” 그 말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하긴, 급전이 필요하면 그럴 수도 있지. 딱 봐도 트윈 하이드라의 [이중통치]를 이 돈을 써서 구한 거 같은데.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당연할 만큼 좋은 정수였다.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하고 지나가야겠지. “…상환일이 언제인데?” “2달 뒤다.” “…갚을 돈은?” “당장은 없다.” “그럼 돈을 마련할 계획은?” “…있었다.” 그래, 과거형인 거구나.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퀘스트가 추가됐다. 348화 은둔 (3) 모두에게 계획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게 잘 될 거란 보장은 없지만. 아멜리아 역시 그랬다. “…평소에 눈여겨보던 조직이 있었다. 구호소로 위장해 아편을 떼 온 뒤 음지에서 비싼 값에 팔아먹던 놈들인데… 원래는 그놈들을 털어서 현금을 충당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놈들의 본거지를 추적하던 중에 치안청에서 들이닥쳤다.”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이거 참, 얘답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뭐 은행을 털겠단 것보단 훨씬 건전해서 다행인가? 피식 웃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슬쩍 사과를 해왔다. “…이번 건은 내 실수이니, 내가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지.” 뭐래, 얘는. 나는 완고하게 말했다. “됐다. 왜 그걸 너 혼자 해결하나?” 애초에 얘가 금고 기간을 연장하지 않았으면 진작 공중분해가 됐을 물건이며, 이 물건엔 아멜리아의 지분도 절반쯤 있다. 그야 드롭됐을 당시에 파티 사냥 중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볼-헤르찬의 정수를 구매할 수 있게끔 돈을 구해줬던 얘한테 이거로 책임을 묻는 것도 조금 웃기고. “돈 문제는 함께 해결하는 거다. 알겠나?” “…동료니까?” 오, 얘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그래, 동료니까. 문제가 생겼으면 누구를 탓할지 따지는 게 아니라, 같이 해결할 방법을 찾는 거다.” “…알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로는 대책을 논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2달 만에 마련하기는 어려운 액수였지만, 아예 답이 없지는 않았다. 2년 6개월 전에 사둔 주식이 떡상을 한 덕이다. “그 요정에게 돈을 빌린다라……. 확실히, 이런 저택을 구매할 정도의 재력이면 가능하긴 하겠군. 근데 괜찮은 건가?” “응? 괜찮냐니?” “그 요정도 네 동료 중 하나일 텐데.” “크흠…….” 얘도 참 아픈 곳을 찌르긴. “아멜리아, 네가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서 뭘 좀 모르나 본데, 동료끼리 서로 힘들 때 돕고 그런 거다. 알겠나?” “과연… 그게 네가 동료를 대하는 방식인가.” 아니, 누가 받기만 한다고 한데? 이자까지 쳐서 갚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이 문제는 이만하면 됐으니 다른 얘기나 하자.” “불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했군.” “…응?” “아닌가? 보통 화제를 돌릴 때면 그랬던 거로 기억하고 있다마는.” 어……. 너무 정론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 근데 얘 성격이 원래 이랬나? 왜 자꾸 나를 놀리는 거 같지? “됐으니 하려던 말이나 해봐라, 얀델.” 뭐라 따질 틈을 주지 않은 걸 보면 의도적으로 놀리는 게 확실한 거 같긴 한데……. 심증만 있었기에 일단은 그냥 넘어갔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아, 별건 아니고 어떻게 너를 에르웬에게 소개를 해줘야 할지를 얘기해보려 했다.” 팀킬을 직관하는 건 사양이다. *** 따닥, 따닥, 따닥. 일정한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혀를 찼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진정하지.” “…….” “그 요정이 그렇게 무섭나?” “누, 누가 무서워한다는 거냐? 에르웬이 내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 그저 조금 긴장이 될 뿐이다. 에르웬에게 아멜리아를 동료로 삼겠노라고 말은 해뒀지만, 사람의 충동이란 게 어디 항상 제어가 되던가? 아멜리아가 터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하물며 그게 분신이 아니라 본체라면 더더욱. 째깍, 째깍.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슬슬 허기가 느껴질 때였다. 철커컥. 마당에 있는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웬이 귀가를 했다는 뜻. 아마 양손에는 오늘 내게 먹일 저녁거리가 가득 쥐어져 있을 것이다. 터벅, 터벅. 마당을 지나치는 요정 특유의 가벼운 걸음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툭.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달그락 소리가 나며 문고리가 돌아갔는데, 왜 문을 열지 않는 거지? 어딘가 신이 난 듯 흥얼거리던 콧소리는 왜 멈춘 거고? 그런 의문을 느낀 순간. “열린 문.” 에르웬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자 냄새.” 그 한마디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준비했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그냥 열었다간 사달이 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탓. “…에, 에르웬! 왔나!” 얼른 현관문으로 마중을 나가자, 에르웬이 내 인사를 무시한 채 집 내부를 쓱 훑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아멜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오랜만이군, 혈령후. 도시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은행에 들렀을 때 미행했다. 암행술은 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모양이더군. 앞으로는 좀 더 경각심을 갖는 게 좋을 거다. 이 집에는 너 혼자만 사는 게 아니니까.” 아멜리아의 답변에 에르웬은 짧게 중얼거렸다. “…죽일까?” “저기 에르웬……?” “아, 죄송해요. 속으로만 생각한다는걸.” “어… 그, 그러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일단… 저기 앉자. 앞으로 함께 지낼 텐데, 그렇게 서먹하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냐.” “알았어요.” 의외로 에르웬은 금방 진정하며 내 부탁대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여자랑 앞으로 잘 지내면 되는 거죠?” “이 여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라.” “그럼 성으로 할게요. 레인웨일즈, 맞죠?” “맞다. 나도 테르시아라고 부르지.” “네.” 에르웬이 단답으로 대꾸하자 대화가 거기에서 끊겼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에르웬, 지난번에 말했던 대로 아멜리아는 이제 우리랑 같이 움직일 거다.” “신분 문제는요?” “그 부분은 신경 쓸 거 없다. 얀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적당한 걸 구해놨으니까.” “…왜 아저씨가 살아 있다고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한심한 질문을 하는군. 널 어떻게 믿고 그걸 말하지?” “뭐? 기껏해야 반년 정도 같이 있었던 주제에.” “흠, 정작 네가 얀델과 미궁에 들어간 기간은 반년보다 짧은 거로 알고 있다마는?” 아니, 왜 또 나만 빼고 대화하는 건데. “자자, 다들 진정 좀 해라.” 나는 서둘러 다시금 대화에 개입했다. “그동안 너희끼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전부 오해로 발생한 일이니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하게 풀고 가는 게 어떠냐?” 그리 말하며 나는 아멜리아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줬다. 까칠하게만 굴지 말고 슬슬 좀 져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글쎄, 난 원한이랄 것도 없다. 덕분에 6층에서 두 다리가 날아가 헤엄도 못 치고 사흘 동안 판자를 잡고 버틴 적도 있지만, 결국엔 살아남았으니까.” 그래, 까칠하게 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그 몸으로 배 위에서 어떻게 도망쳤나 했더니.” “에르웬.” “…걱정 마세요. 저도 크게 원한은 없거든요. 단지 온갖 고생을 해서 잡은 노아르크 출신 탐험가의 시체를 눈앞에서 빼앗긴 정도니까요. 아, 따라갔다가 팔이 베인 것도 포함해야 하려나요?” “하지만 죽이진 않았지.” “마치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 우리 쪽 지원이 오자마자 도망쳤으면서.” “뭐… 목적은 이뤘으니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그때 그놈 장비를 판 덕분에 여기 이 단검도 구할 수 있었지.” 오케이, 친하게 지내는 건 포기하자. 꼭 동료끼리 화목할 이유는 없잖아? 나는 애써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하핫,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군! 자, 얼른 악수하고 화해나 해라.” 어느 때든 웃는 자가 일류다. ***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썩은 표정으로 악수를 한 뒤, 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바바리안 전사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에르웬,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돈은 왜요……?” 나는 숨김없이 악마분쇄기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에르웬은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정수를 산 돈을 제 사비로 메워줬으면 한다는 뜻이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죄송하지만, 그건 좀 힘들 거 같아요.” “…응?” “오해는 마세요. 싫어서가 아니니까.” 아니라면 뭔데? 그런 눈으로 보자 에르웬이 죄지은 사람처럼 작게 읊조렸다. “이제… 돈이 얼마 없어요……. 정말로요.” 아, 하긴……. 그러고 보면 이 집도 부족장을 협박해서 뜯어낸 돈으로 겨우 샀다고 했지. 그래도 일단 혹시나 해서 물어나 봤다. “그럼 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건?” 나 스스로도 쓰레기 같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최악의 경우는 대비를 해야지. “…이, 이 집을요? 추, 추억이 깃든 곳인데…….” “제때 갚으면 되는 거 아니냐.” “얀델, 너는 정말—” “아저씨한테 뭐라 하지 마.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염치도 없지.” “뭐……?” “그러니까 알겠죠? 아저씨는 미안해하지 마요. 집이야… 나중에 새, 새로 구해도 되는 거니까…….” 그렇다기엔 손이 벌벌 떨리고 있는데……. “…미안하게 됐다.” “그런 말 말라니까요, 아저씨를 위한 일인 걸요.” 아무튼, 악마분쇄기는 일단 담보 돌려막기술을 써서 되찾는 것으로 정해졌다. 따라서 다음 계획을 세울 차례. “앞으로 뭘 하든지 간에 우선 자금 확보부터 할 필요가 있겠군.” “네. 아저씨도 다시 미궁에 들어가려면 장비도 새로 맞추고 해야 할 테니까요. 돈이 있으면… 이 집도 지킬 수 있고요…….” “잠깐만, 미궁이라니? 지금은 악령이라는 누명… 부터 벗는 게 급선무일 텐데?” 아, 그거……. “조금 수상한 점이 있어서 잠시 미룰 생각이다.” 내친김에 내가 가진 의문과 불안한 부분들을 말해주자 아멜리아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본인도 미심쩍음을 느끼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아멜리아 네가 적당한 신분 좀 하나 구해줬으면 하는데.” “신분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마는, 결국에는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 될 거다. 아무리 네가 죽고서 2년이 넘게 지났어도 널 기억하는 사람은 꽤 많으니.” 해석하자면, 철투구 같은 거로는 신분이 탄로날 가능성이 높단 뜻이다. 여긴 연고 없던 20년 전 시대가 아니니까. 막말로 [거대화]만 써도 사람들은 비요른 얀델을 먼저 떠올릴 터. “흠, 그래도 미궁에서만 조심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한두 번은 몰라도 기간이 늘면 반드시 알아보는 자가 생길 거—” “잠깐, 정수를 먹는 건 어때요?” 에르웬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정수?” “아이나르 씨가 먹었던 것처럼요. 키가 줄어드는 정수도 있잖아요. 키만 좀 줄이고 인간이라 소개하고 다니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 같은데…….” 그리 말하면서도 에르웬은 아멜리아의 눈치를 봤다. 자기 말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서 경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한두 달이면 모를까. 오랫동안 정체를 감출 계획이라면, 그 편이 훨씬 안전하겠어.” 예상과 달리 아멜리아는 에르웬의 아이디어를 인정하고 칭찬까지 하는 배포를 보여 주었다. 한데 그게 좀 낯설었을까? “제법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냈군.” “…그야 아저씨에 관한 일이니까.” 에르웬이 차갑게 답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딘가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해지는 광경이지만, 나는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저기…….”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한데. “나는 정수를 먹을 자리가 없다.” 7렙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딱히 지울 정수도 없고. 이런 사정을 설명하기 무섭게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만티코어.” “……?” “분명 언젠가 지워야 할 정수라고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내 점프키를 뽑아 가겠다고? 349화 은둔 (4) 만티코어. 분명 언젠가 지울 생각으로 먹은 정수이긴 하다. 이번에 정수를 구매할 때, 시체골렘과 이것 중에 뭘 지울지 고민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하지만……. “저기, 아멜리아… 이걸 빼면 항마력이 떨어져서 마법 같은 것들에 취약해지는데…….” 처음에야 유일한 이동기인 [도약]이 사라지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항마력의 부재. 벨라리오스의 정수를 수급할 때까지 탱킹 능력의 밸런스가 크게 무너진다. ‘그렇다고 스톰거쉬를 지울 수도 없고 말이지.’ 스톰거쉬는 무려 3등급 정수다. 뭐, 그래도 나중엔 지우긴 해야겠지만……. 적어도 지저섬 이벤트는 깨고 없애야지. 이 정수만 있으면 그냥 날먹이 가능한데. 아, 참고로 [거대화]에 이은 두 번째 코어정수가 거기서 나온다. ‘…후, 그럼 어떡하지?’ 고민이 깊어진다. 정수를 포기할 바에는, 그냥 신분 위장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처럼 보인다. 왕가의 행보를 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의외로 내 악령 누명(?)을 푸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설마 살인멸구라도 하겠— “아, 그리고 너도 알 거 같아 말은 안 했는데, 네가 악령이 아니라고 증명되면 왕가에서도 이를 좋게만 여기진 않을 거다.” “…응?” “왜 모른단 표정이지? 이는 소문을 인정한 왕가의 무결함에 흠집이 생기는 것과 같을 텐데.” 아오… 고민되게.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던지라, 에르웬과 아멜리아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았다.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나?” “저는… 감출 수 있다면 최대한 모습을 감추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우선 에르웬은 정수를 먹자는 쪽이었다. “이유는?” “…느낌이요.” 그래, 직감이라는 거구나. 그리고 아멜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니 얘도 생각을 말해 주었다. “나도 테르시아와 같은 의견이다.” “이유는?” “어차피 이름을 되찾는다고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이득이 왜 없어. 정수를 안 지워도 되는데. 그런 말을 하려던 차, 아멜리아가 말을 이었다. “설마 2년도 넘게 지났는데, 네 전 동료들이 바로 돌아와 줄 거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 에르웬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확실히, 아이나르 씨는 몰라도 아루아 레이븐은 아저씨 생환 소식을 들어도 돌아오기 어려울 거예요. 일단 왕가의 군부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예상컨대, 이런 사정은 곰아저씨도 비슷할 거다. 클랜에 입단했으니 몸을 빼기 어렵겠지. 한데 그 와중에 미샤는 이백호가 동료가 됐단 거 빼고는 정보가 없는 상황이고. ‘그런 의미에서 얘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나는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서 두 선택지의 득실을 거듭 계산했다. 생각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원탁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곧 왕가에서 귀족들을 대상으로 징집령을 내린댔지.’ 대부분은 열심히 꿍쳐둔 사병들을 보내겠지만, 탐험가 출신인 나는 얄짤없을 거다. 당장 전쟁에 참가해 상부의 지시를 따라야 할 터.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정수를… 지우겠다.” 내 점프키……. ***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되었으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정수를 먹는다면 무엇을 먹는 게 좋은가. 이 부분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느낀 것인데, 이 둘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임프의 정수가 좋을 거 같은데, 적지만 항마력도 붙어 있고.” “하지만 그건 7등급 정수라 오히려 거래소에서 구하기 어렵죠. 차라리 드워프이터의 정수가 나아요. 아이나르 씨처럼 골밀도가 올라가는 거라 아저씨에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4등급 정수를 구매할 돈은 있고? 차라리 5등급인 알트스모러가 나을 거 같은데.” “아, 알트스모러요? 그건 안 돼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어서…….” “부작용?” 에르웬이 내 눈치를 보더니 아멜리아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이를 들은 아멜리아는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그럴 수도 있겠군’ 하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둘 다 왜 이렇게 내 정수 사정에 관심이 많아?’ 나는 피식 웃으며 둘의 대화를 끊었다. “그만해라. 이미 정해 둔 게 있으니까.” 몸집을 줄일 수 있는 것 중 그나마 스탯과 스킬이 나은 것을 골랐으며, 3순위까지 후보가 있다. “에르웬 너는 내일 은행에 가서 집을 담보로 돈을 얼마나 빌릴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라. 아멜리아, 너는 거래소에서 내가 말한 정수가 있는지 알아봐 주고.” “알았다.” “그럼 식사나 하지. 배고파 죽겠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서 에르웬이 사온 저녁거리를 셋이서 나눠먹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겠다고?” “빈 방도 많은 거 같은데 문제라도?” “공과 사는 구분했으면 하는데.” “후, 그만들 해라. 피곤한데 그냥 자자. 아멜리아, 너는 저기 남는 방 중에 아무거나 쓰고.” 숙소로 돌아간 줄 알았던 아멜리아가 밤중에 짐을 싸들고 찾아오는 바람에 해프닝이 있기는 했으나, 큰 문제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묘하게 힘들었던 하루가 끝났다. “아저씨! 다녀올게요!” 다음 날부터는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각자의 역할을 위해 외출했고, 나는 어두운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보냈다. 쉽게 말해, 계속 잤다는 뜻이다. 다행히 담보 대출은 3일 만에 딱 적당한 수준으로 나왔고, 그 돈을 써서 은행에 담보로 잡힌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헤, 그게 그렇게 좋아요?” 좋다마다. 앞으로 이게 내 보물 1호인데. 「캐릭터가 No. 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800 상승합니다.」 아무튼, 좋은 소식은 그거로 끝이 아니었다. 때마침 찾던 정수도 거래소에 매물로 나왔다. 뭐, 1순위는 아니고, 2순위의 정수긴 했지만……. 순위라 해봤자 유의미한 차이도 아닌 데다가, 오래 쓸 정수도 아니니까. ‘가격이 적당하기도 하고.’ 악마분쇄기를 되찾고 남은 돈을 거의 다 털어 정수를 구매했다. 미궁에서 쓸 방패야 에르웬을 통해 이미 진작 주문 제작을 넣어놨고, 나머지 장비들은 1티어 소재로 싸게 맞출 셈이니 앞으로 크게 돈이 나갈 일이 없다는 판단. …아, 하나 남았나? ‘제발, 알아보는 사람 없어라.’ 정수도 구매했겠다, 그다음 날 신전을 찾았다. 삼신교 중 하나인 토베라 교단이었다. 아무래도 레아틀라스의 신전은 워낙 많이 들러서 불안했거든. “같이 들어갔다간 더 눈에 띄겠지.” “다녀오세요…….” “괜히 실수해서 이목 끌지 말고.” 접근성이 좋은 대신전이 아니라, 도시 외각에 지어져 일반인들의 방문이 90%인 작은 신전. 그럼에도 정수를 지우려면 얼굴을 까야 했기에 제법 걱정이 됐지만……. “허허, 인간이라기엔 기골이 아주 타고난 친구군. 기사가 됐으면 대성했겠어.” 다행히 정수 제거를 맡은 노신관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캐릭터의 영혼에 스며든 [만티코어의 정수]가 제거되었습니다.」 「패시브 스킬 [유전]으로 얻은 능력치 중 일부분을 영구적으로 획득합니다.」 그렇게 걱정했던 정수 제거도 무사히 종료. 이전에 한 번 지웠던 비용에서 정확히 2배를 지불한 나는 서둘러 신전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리 구매해 둔 시험관의 마개를 열었다. 「캐릭터의 영혼에 [가챠본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6등급 언데드 가챠본의 정수. 기본으로 붙은 스탯은 간단하다. 「육감이 +40 상승합니다.」 「물리내성이 +15 상승합니다.」 「어둠 저항력이 +30 상승합니다.」 「명중률이 +45 상승합니다.」 특정 클래스가 쓰기에는 애매한 능력치들. 거기에……. 「골밀도가 +110 상승합니다.」 나를 인간 체형으로 만들어 줄 골밀도 스탯. 마지막으로 여기에 패널티가 붙는다. 「행운이 -50 하락합니다.」 「통제력이 -30 하락합니다.」 행운은 크리티컬 확률 같은 랜덤 요소의 확률을 올려 주는 스탯이고. 통제력은 정신계 마법, ‘공포’ 같은 상태 이상을 막는 데 보정을 주는 스탯이다. 뭐, 하락했으니 이제 반대 효과가 나겠지만. “오.” “우아아…….” 이내 정수 흡수가 끝나자 지켜보던 둘이 묘한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 기분이 묘한 건 내가 제일이었다. 이제 눈높이가 얼마 차이도 안 나네. 아멜리아, 얘 키가 170 초반 정도였었지. 그럼 한 180 중반 정도로 줄어든 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눈을 피했다. “…그렇게 이상하냐?”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아…….” “아니면?” “제, 제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 같아요…….” 에르웬이 검지로 거울을 가리켰고, 나는 헐렁한 바짓춤을 손으로 잡으며 그 앞으로 이동했다. 다만, 그곳에 더 이상 듬직한 바바리안 전사는 없었다. 그저 훤칠한 인상의 인간 사내만 있을 뿐. “…이게 나라고?” 왜 그때 아이나르가 그렇게 우울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너무 약해 보이잖아. 망치로 퍽 내려치면 어디 하나 부러질 것처럼. *** 「비요른 얀델」 레벨: 6 육체: 1,230.39(New +290.62) / 정신: 443.3(New -60.19) / 이능: 1,706.25(New -469.3) 아이템 레벨: 6,285(New +1,658) 종합 전투 지수: 4,951.19(New +175.63)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New) / 가챠본 - Rank 6(New) *** ‘이 정수··· 다시 지울까?’ ‘이 정수… 다시 지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울 너머의 내 모습은 형편없었다. 하긴 이러니까 에르웬이 날 보고 눈을 피하고 말꼬리를 흐렸겠지. “저… 아저씨, 왜 그러세요? 갑자기 어깨를 축 내려서…….” 우울해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이유를 물어왔고, 나는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이 꼴로 어딜 밖에 나가? 저기 에르웬만 봐도 아직까지 나를 제대로 못 보고 있— “네, 네? 오, 오해예요! 제가 눈을 피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응? 상상 이상으로 한심한 몰골에 비웃음을 참느라 그런 게 아니라고?”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왜 그랬던 건데?” 내가 되묻자 에르웬이 어딘가 부끄러운 목소리로 자그맣게 답했다. “자, 잘생겨서요…….” “뭐?” 얘도 취향 참 일반적이네. 바바리안일 때 집착하던 건 정말 이성으로 봐서가 아니라 단순히 보호자로 여겨서 그랬던 건가? 표본을 얻기 위해 아멜리아에게도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글쎄…….” 아멜리아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 올려다볼 때 목은 안 아파서 좋을지도.” 놀랍게도 일행 중 누구도 현재 내 모습을 보고서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바바리안에 너무 물든 걸까? ‘…곰곰이 보니까, 현대 기준으로 미남에 속하는 거 같기도 하고.’ 물론 그런 생각이 든 것과 별개로 지금 이 모습을 유지하고 싶단 마음은 추호도 없다. [거대화]는 기본 체격을 기본으로 하니까. 이런 자그마한 몸뚱이로는 효율이 나오지 않는 것. “됐고, 이능을 확인해 보려는데 좀 도와주겠나?” 작아진 몸뚱이를 갖고 언제까지 낙담하고 있을 수도 없기에 할 일이나 해나가기로 했다. 그중 첫 번째는 스킬을 연습하는 것. ‘대낮에 마당으로 나가기는 좀 그러니까, 그냥 거실에서 해봐야겠네.’ “네, 도와드릴게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 나를 때리면 된다. 정령이나 이능을 써서.” “………네?” 어… 얘는 이 정수의 패시브를 모르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기에 나는 간략하게 패시브 스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P) 확률적 보복 - 자원을 사용하는 피해를 입을 시, 일정 확률로 피해를 무시하며 피해를 반사합니다. 마법이든 신성력이든, 정령를 쓰든 자원을 쓰기만 한다면 적용이 되는 패시브 스킬. 사실 이 정수를 고른 건 이 스킬의 존재가 컸다. 물론 이거로도 줄어든 항마력을 메우긴 어렵겠지만, 이 정도 값에 이런 성능을 내는 건 이 정수뿐이었으니까. 애초에 1순위도 이 정수의 다른 색상이었고. ‘아무튼, 확률이 10% 정도였지…….’ 참고로 이는 줄어든 행운 스탯을 적용한 수치다. 뭐, 기본으로 갖고 있던 행운 스탯에 따라 약간의 오차는 있겠지만 크지는 않을 터. “저… 그러면 할게요?” 설명이 끝나자 에르웬이 정령들을 소환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캐릭터가 냉기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냉기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냉기 피해를…….」 「…….」 응? “에르웬, 속성을 바꿔 봐라.” “네!”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 뭐야. “자, 잠깐! 아멜리아 네가 해봐라.” “원한다면야. 이제 높이도 딱이군.” 「캐릭터가 [수라각]에 적중당했습니다.」 「캐릭터가 [수라각]에 적중당했습니다.」 「캐릭터가 [수라각]에 적중…….」 아니, 뭐야. 진짜 뭐냐고. “아악!! 그, 그만!!” 이거 왜 안 터지는 건데. 350화 암흑대륙 (1) [확률적 보복]이 터질 확률은 10% 안팎. 참고로 이는 [초월]을 갖고 있다고 해서 늘어나지 않는다. 1.5배 성능이 상승하는 건 반사 대미지에 적용이 되기 때문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캐릭터가 [수라각]에 적중당했습니다.」 패시브가 발동된 것은 내가 사기를 당해서 이상한 정수를 먹은 게 아닌가 진심으로 고민이 될 무렵. 그러니까, 거의 100대쯤을 처맞았을 시기였다. 「캐릭터에게 깃든 행운이 피해를 차단합니다.」 [확률적 보복]이 발동되며, 투명한 장막이 나를 보호하듯 타격 부위에 돋아났다. 그리고…….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15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내 바로 옆에 소환된 스켈레톤이 발차기 자세를 고스란히 따라하며 아멜리아에게 [수라각]을 꽂았다. 성대도 없는 게 호쾌한 함성을 내뱉으며. [그아챠앗-!!] 어, 이건 대성공 판정일 때 나던 사운드인데? 잠깐만, 이러면 크게 다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퍼억-! 갑작스레 터진 스킬에 당황했는지, 날아오는 일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로 받아낸 아멜리아. 솨아아아아. 스켈레톤은 정확히 한 방을 때린 즉시 빛무리로 변해 사라졌다. “으읏…….” “괜찮나!” 놀라서 달려가자 아멜리아가 어깨를 부여잡은 손을 떼며 나를 밀어냈다. “…유난 떨지 마라. 조금 놀랐을 뿐이다.” 놀라기는 무슨. 어깨가 아예 아작이 났구만. “에르웬, 부목과 붕대를 가져와라.” “아, 네……!” [불로의 근원] 때문에 아멜리아에겐 포션을 먹여도 소용이 없기에 손으로 뼈를 맞추고 부목을 댄 다음 붕대를 감아 주었다. “이능이 써지면 잘 피하라고 하지 않았나.” “…….” “못 피할 거면 살살 때리기라도 하던가.” “…살살 때린 거였다.” 뭐래, 살살 때리기는. ‘대성공’ 판정이래 봐야 원래 피해의 100%구만. ‘아… 초월 때문에 150%겠네.’ 참고로 원래 기본 반사 피해는 10%밖에 안 된다. [초월]을 넣고 계산해도 15%이고. 스켈레톤이 소환되어 공격하는 식이기에 회피도 가능해서 그렇게까지 스킬 밸류는 높지 않은 편. “아무튼, 아멜리아 너는 이만 쉬고 있어라.” “네! 이제 제가 아저씨를 도와드리면 되니까요! 저는 잘 피할 수 있어요. 막는 것도 되고요!” “…그러지.” 이내 에르웬이 다시 정령을 소환하자, 아멜리아는 어딘가 주눅이 든 사람처럼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캐릭터가 화염 피해를······.」 「······.」 이번엔 10번의 트라이만에 스킬이 발동됐다. 「캐릭터에게 깃든 행운이 피해를 차단합니다.」 「일반적인 행운.」 「입은 피해의 15%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다시금 내 옆에 소환이 되어 불꽃을 쏘아내는 작고 귀여운 스켈레톤. 대성공이 아니기에 특유의 사운드는 없었다. 다만. 퍼엉-! 에르웬이 불꽃을 옆으로 피해내는 바람에 벽에 부딪친 불꽃이 온사방에 튀었다. 그리고……. “오, 불이군.” “에, 에르웬! 물의 정령!!” “아, 네넷!!” 그날 우리는 담보로 잡은 집마저 잃을 뻔했다. *** 화재가 발생할 뻔한 사건을 겪은 우리는 야밤에 마당에 나가서 스킬을 실험했다. 그리고 유의미한 통계를 얻었다. ‘일단 확률엔 크게 오차가 없는 거 같긴 한데…….’ 무려 100번의 트라이로 성공한 최초 사례와 달리, 이후로는 평균 15회 정도에서 스킬이 써졌다. 문제는 통계는 통계일 뿐이란 거겠지만. 그냥 평범하게 작동이 되다가도 갑자기 안 터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는 정말이지 한참을 처맞아야 발동이 됐다. 최고 기록이 198회였지 아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확률이 1%라고 해도 쉽게 납득이 안 가는 수치. 심지어 그렇게 스택을 쌓는다고 대성공 판정이 뜨는 것도 아니었다. ‘뭐, 체감상 조금 더 잘 뜨는 거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패시브에 이어 액티브 스킬까지도 실험을 마친 뒤에는 셋이서 매일 탐사 계획을 세우며 시간을 보냈다. 계획의 제1순위 목표는 돈이었다. 그야 부족한 예산을 맞추기 위해 6개월짜리 단기 대출을 땡겼으니까. 이자도 센 편이고, 시일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집이 은행으로 넘어간다. 한데 그래서일까? “아저씨, 저는 괜찮아요… 무리하지 않아도…….” 에르웬은 집을 담보로 대출받을 때부터 이 집을 되찾을 생각은 버린 듯했다. 6개월 만에 돈을 전부 마련하긴 어렵다 여겼겠지. 하지만……. “말했지 않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다고.”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에르웬이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상, 어떻게든 이를 지킬 수 있는 쪽으로 노력하는 게 옳다. “하지만 단기간에 그 돈을 마련하려면… 역시 전쟁 말고는 선택지가 없겠군.” “레인웨일즈의 말이 맞아요. 우리 중에는 배를 가진 사람도 없으니까. 그럼 6층도 못 가고 결국에는 최대 5층에서만 지내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볼 거 없다. 나도 전쟁에 참가하는 쪽이 나을 거 같으니. 눈에 띄기는 하겠지만, [거대화]만 쓰지 않으면 지금 모습을 보고 날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거다.” 길게 상의할 것도 없이 전쟁에는 참가하기로 됐다. 그야 왕가군에 합류를 하면 대형 범선을 타고 7층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으니까. ‘우리 셋 수준이면 7층 몬스터도 큰 문제는 아니고.’ 심지어 셋 다 대인전에 강한 타입이라,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며 현상금을 획득할 수 있을 거다. 아니, 애초에 현상금이 문제인가? 적들도 최소 중층 이상 탐험가일 테니, 갖고 있던 장비를 싹 벗겨내서 팔면 수익이 어마어마하겠지. 뿐만 아니라……. ‘잘하면 7층 몬스터를 잡아서 7레벨 찍는 것도 가능하겠네.’ 원래 6층을 60% 이상 공략해야 채울 수 있었을 경험치를 좀 더 쉽게 채우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7렙이 되면 지저섬 정수를 먹을 수 있지.’ 그다음에는 상황을 봐서 가챠본의 정수를 지우고 벨라리오스 공략으로 넘어가면 된다. ‘8렙 찍고 정수 하나 더 먹으면, 그땐 스톰거쉬도 지워야겠네. 9렙에 먹을 정수는 계층군주 노가다를 한 다음에 캐는 게 편하니까.’ 그렇게 앞으로의 육성 방향을 정리하고 있자니, 새삼스레 기분이 묘하다. 이 정도면 확실히 중반부는 끝난 거 같은데. 어느새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잠깐 감상에 빠져 있던 때, 아멜리아가 에르웬에게 물었다. “근데 테르시아 너는 괜찮나? 원래 요정족의 집행부와 함께 움직였던 거로 아는데.” “어, 그것도 그러네. 괜찮은 거냐?” “그거라면 괜찮아요. 얼마 전에 휴가를 냈거든요.” “휴가?” “네. 한동안은 미궁에 들어가지 않을 거고, 만약 들어가게 되도 따로 움직일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다면야.” 이후로도 나는 에르웬과 아멜리아에게 지금까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런 얘기들을 경청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캐릭터가 아다만티움제 대형 전투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75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강철제 흉갑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5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강철제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7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워 부츠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어느덧 미궁 진입 날이 밝았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 「비요른 얀델」 레벨: 6 육체: 1,230.39 / 정신: 443.3 / 이능: 1,706.25 아이템 레벨: 8,305(New +2,020) 종합 전투 지수: 5,456.19(New +505)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가챠본 - Rank 6 *** 보랏빛 광채가 은은하게 흐르는 수정 동굴. 일단 눈을 뜨자마자 아멜리아가 선두에 서서 길을 찾았다. “그럼 이쪽으로 와라.” “잠깐만요, 길을 찾는 거라면 제가 더—” “아멜리아는 인도자다.” “…저 여자가요?” 언니에게 전문 길잡이가 받을 정도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던 에르웬이었지만, 인도자라는 말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어딘가 조금 자존심이 상한 거 같긴 하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 못할 감정이었다. 나 역시 내비게이션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만, 이 기능을 못 쓴다고 아쉽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냥 따라가는 편이 훨씬 편한데 굳이?’ 뭐, 그래도 좀 신기하긴 하다. 세 명이 전부인 팀인데, 그 세 명 전부가 길을 찾는 능력을 갖고 있다니. 이게 바로 그 소수 정예라는 그건가? 타다다닷. 아무튼,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됐기에 뛰면서도 계속 주변을 구경했다. 복귀 후 처음으로 진입한 미궁의 분위기는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귀족가의 인장을 가슴에 매단 기사, 클랜 출신의 탐험가들이 여기저기서 보일 건 예상했지만……. “저층 탐험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군.” 뉴비 냄새가 좔좔 흐르는 탐험가들도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대체로 표정도 밝은 편이다. 미궁 안이기에 긴장은 하되, 발발 떨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없다. “그거요? 왕가에서 저층 탐험가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거든요. 아무래도 그날… 상위 탐험가들이 엄청 죽었으니까…….” 좀 더 자세히 들어 보니, 내가 뉴비였던 시절보다 1층에 사람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왕가의 정책도 정책이지만, 대형 클랜들 대부분이 공중분해가 됐던 점이 컸다. 한 번 물갈이가 싹 되고 나니 깃발만 꽂으면 되는 기회의 땅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5층이었다. “5층에서 아무도 통제를 안 한다고……?” “있기는 할 텐데, 예전처럼은 심하지 않아요.” 대마경의 경우, 몬스터가 출현하는 필드를 클랜 단위로 점거하고 독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요즘에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럴 바에 전쟁에 참가하는 게 낫다던가? 아무래도 참전금도 빵빵한 데다가, 전공을 올리면 왕가에서 원하는 정수를 보상으로 내리다 보니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한발 늦었군.” 굉장히 이른 시기에 도착했지만, 애석하게도 1층 포탈은 이미 다른 탐험가에 의해 개방되어 있었다. 그럼 이번에도 정식 타임 어택은 실패인가? 「2층 짐승의 소굴에 입장했습니다.」 1층도 타임 어택에 실패한 와중에 2층이라고 될 리는 만무했기에, 2층에 올라온 후로는 조금 여유를 갖고서 이동했다. 어차피 일정은 여유로우니까. ‘마감이 25일 차까지라고 했지.” 왕가에서 군을 모집하는 방식은 몹시 간단하다. 25일 차까지 시작의 섬 라이미아에 도착하는 것. 이제 막 6층 초입인 팀이라면 좀 빡빡할 정도의 기간이지만, 셋이서도 6층까지는 프리패스인 우리는 얘기가 다르다. ‘마법사가 없으니까 속도가 줄지를 않는구나.’ 이전이었으면 진작 쉬고 갔을 타이밍인데, 그 누구도 멈추자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 ‘벌써 3층이야……?’ 1일 차가 끝날 때쯤 3층에 도착했다. 심지어 2층에선 1층만큼 내달리지 않았건만. “아저씨, 힘드시죠? 이거 마시세요.” 놀랍게도 이 둘은 이렇게 달리고도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맘만 먹으면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하긴, 얘네들은 민캐지? “에르웬, 미궁에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맞다. 조심할게요…….” 내 주의를 들은 에르웬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도 슬슬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불침번은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3층 초입이었던 데다가……. “내 분신을 세워두면 되니 편히 자라.” 아멜리아의 [자가복제] 덕분에 굳이 사람 한 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 “와, 아멜리아. 역시 네가 있으면 편하긴 하네.” “유난 떨지 마라. 별것도 아닌걸.” 허, 까칠하기는. 분신체라도 일단 네가 고생하는 건 맞아서 감사의 의미로 한 말이구만. “네, 맞아요. 별거 아니네요.” “응?” “그, 그야 저도 비슷한 걸 할 수 있는걸요……?” 그리 말한 에르웬은 즉시 정령을 소환했다. 예전과 달리 자는 동안 소환을 해두는 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던가? 자연력의 소모도 부담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어둠의 정령을 이용하면, 몬스터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 어렵게도 할 수 있어요. 어때요? 제가 훨씬 낫지 않아요? 네? 그렇죠?” “그, 그래… 네가 낫다.” 동료끼리 비교하는 일은 삼가고 싶었지만, 묘한 압박감에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게 원하는 대답이었을까? “저 그럼요… 저도 해주세요.” “…응? 뭐를?” “그거요. 아까 저 여자한테 했던 말…….” 이내 에르웬이 몸을 배배 꼬았다. “제, 제가 있어서 편하다고……. 여, 역시… 제가 최고라고……. 나, 나밖에 없다고……” 아니,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는데요. 351화 암흑대륙 (2) 내리쬐는 햇살과 달아오른 모래알.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눅눅한 바람에는 소금의 짠 내가 실려 있는 이곳. 시작의 섬 라이미아. 다만, 수평선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6층 대해大海에 입장했습니다.」 포탈을 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해안선을 따라 늘어진 백 척이 넘는 초대형 범선들이었다. 어찌나 선체가 크고 숫자도 많은지, 넓은 바다가 좁게만 느껴질 정도. “자자, 넘어왔으면 얼른 옆으로 빠지쇼! 다음 사람들도 와야 하니까!” 주변을 구경할 사이도 없이, 탐험가 길드의 문양을 지닌 탐험가의 통제에 따라 포탈 앞을 벗어났다. 말투가 너무 가벼워서 에르웬에게 물어보니 길드 소속 정규 직원은 아니라고 한다. 길드에서 의뢰를 받은 탐험가들이라던가? 탐험가 관리를 위해 왕가에게 협조 요청을 받기는 했는데, 보낼 인력이 없으니 아웃소싱을 맡긴 거다. ‘하긴, 평범한 직원이 6층까지 오긴 어려울 테니.’ 아무튼, 벌써 1년도 넘게 이어진 전쟁인 만큼 딱딱 나뉜 절차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행됐다. “이리로 오십쇼! 우선 참전 등록부터 하고, 부대 지정 과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동부 해안선에 길게 늘어선 대기열을 기다린 끝에 우선 신분증을 내고 참전 등록을 끝마쳤는데, 참고로 여기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에르웬이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던 탓이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어… 어, 혀, 혈령후 님……?”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 없습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혼자 등록을 하러 온 에르웬을 보며 이런저런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등록원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불편해하며 서둘러 등록을 끝마쳤다. “5등급 탐험가 에밀리 레인즈. 이전에도 참전 기록이 있군요. 등록되었습니다.” 에르웬 다음은 아멜리아 차례였는데, 이번에는 정말 1초 만에 등록이 끝났다. 2년 전에 만든 이름으로 나이는 22세. 9등급 탐험가부터 시작해 천천히 등급을 올리며 세금도 내는 등 신분 세탁을 완벽하게 끝냈다던가? 에르웬처럼 아멜리아의 맨얼굴을 아는 사람과 맞부딪치는 것만 아니라면, 신분으로는 프리 패스다. 조금 의미심장한 눈길을 받은 나와 다르게. “5등급 탐험가 리헨 슈이츠. 참전 기록은 없으신 분이군요. 투구 좀 벗어 보시겠습니까?” 아멜리아가 구해다 준 나의 신분, ‘리헨 슈이츠’는 5년 전에 활동했던 탐험가의 것이다. 물론 브로커가 그간 세금까지 착실하게 낸 덕에 서류상 문제될 건 없었지만……. “흠.” 29세라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묘한 반응이다. 왠지 담배를 사러 온 미성년자라도 된 듯한 기분. 그래도 신분증에 적힌 대로 밝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덕인지 무사히 넘어갔다. 눈 색은 애초에 같은 거로 골랐고. “뭐, 문제라도 있소?” “아뇨, 오랜만의 복귀이신 거 같은데 무운을 빕니다.” “고맙수다.” 한차례 투구를 올리긴 했으나, 다행히 별일 없이 등록이 끝났다. 은퇴했다가 전쟁 후에 복귀하는 케이스가 요즘에 워낙 많아 크게 의심하진 않을 거라던 아멜리아의 말대로였다. 애초에 칠강 중 이런 케이스가 두 명이나 있댔고. “그럼 이제 부대 지정만 하면 되겠군.” 등록을 마친 후에는 옆쪽 게시판으로 이동했다. 게시판에는 현재 대기 중인 선박과 배에 승선한 인원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는데, 어느 배에 올라탈 것인지도 전쟁에서는 꽤 중요했다. 7층에 도착하면 같은 배를 탄 탐험가들끼리 하나의 부대를 이루기 때문인데……. “뭘 탈지 고민할 필요 없다. 너는 이번이 초행이다 보니, 3등선 말고는 못 타니까.” “3등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거나, 대형 클랜처럼 큰 세력이 없는 탐험가들이 주로 타는 선박이다. 그러다 보니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기에 주로 후방에 위치해서 지원 역할을 맡지.” 허허, 뉴비는 밑바닥부터 올라오라 이건가? 하긴, 위험한 전장으로 가는데 발목을 잡는 뉴비가 껴 있으면 괜히 곤란하기만 할 테니까. “그럼 저기 타는 거로 하지.” 이후 3등선 중에 가장 인원이 덜 찬 배를 고른 뒤 셋이서 함께 승선했다. 인원이 적은 편이 객실을 고르기 유리하다는 판단. “다행히 3인실을 얻을 수 있었군.” “왜 3인실이 구하기 어려운 편인가?” “그렇게 귀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가장 인기가 많기는 하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되물을 것 없이 알아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내가 없는 동안 결속 마법이 업데이트됐지.’ 지금의 시대에서는 6인 팀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딱 두 그룹으로 나누면 끝인 3인실이 가장 인기일 수밖에. “그럼 출항일은 내일이니 지금부터는 각자 느긋이 쉬는 거로 하지.” “네, 좋아요! 그럼 이제 무슨 얘기를 할까요?” “……쉬자니까?” “네, 그러니까요. 쉬려는 건데요?” “…….”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봤지만, 얘는 어느샌가 주변 짐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누운 뒤였다. 거, 자는 척하기는. “그럼 전쟁 얘기나 할까……?” “좋아요! 혹시 궁금한 게 있으세요?” “보통 3등선에 탄 인원들은 후방에서 지원 임무를 맡는다던데, 정확히 어떤 것들이 있지?” “어… 저는 맨날 앞에만 있어서 잘 모르는데……. 아마 퇴로 확보나 호위 임무 같은 걸 맡는다고 듣긴 한 거 같아요.” 딱히 피곤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후로는 에르웬과 대화를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돌연 방문객이 찾아왔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같은 배에 탔다기에 인사나 하러 왔어요. 오랜만이네요, 테르시아 씨.” 설마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이야. *** “후우…….” 닫힌 선실 앞에 선 금발 머리의 여성이 입고 있던 제복의 옷깃을 정리했다. 그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여자는 왜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한 거야.’ 혈령후,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지금 레이븐이 이 선실 앞에 서 있는 이유였다. 그야 어떤 이유에선지 칠강의 일원인 그 여자가 1등선이 아니라 3등선에 타 버렸으니까. ‘……진짜, 위에서 귀찮은 건 나만 시키고.’ 원래 그녀가 속한 제3 마도병단도 3등선에 오를 예정이기는 했다. 마법사로 이루어진 전력상 호위 병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그 배가 이 배는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윗선의 명령으로 재배치를 받게 되었을 뿐. ‘이제 딱히 친하지도 않구만. 예전에도 그리 친한 건 아니었고.’ 한때 같은 클랜의 일원이었던 것을 이유로 상부는 자신을 이 배에 지정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 미친 여자를 무슨 수로 통제한단 말인가. 앞으로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그래도 시키긴 했으니, 일단 대화라도 나눠 보고 무슨 속셈인지 한번 떠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이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이 열린 것은 노크를 하고서 약 10초 정도 흐른 때였다. 끼이익. 바닷바람에 녹슨 경첩이 소리를 내며 벌어졌고, 닫혀 있던 선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보대로 총 세 명이 있었다. ‘5등급 탐험가 리헨 슈이츠. 그리고 에밀리 레인즈.’ 한 명은 선실 내부에서도 투구를 쓰고 있었고, 한 명은 코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면사로 눈과 귀가 가려진 상태였다. 이에 레이븐은 더 큰 호기심을 느꼈다. 이 둘은 대체 누구기에 갑자기 혈령후 같은 여자와 함께 움직이게 된 걸까. “아저씨는 그만 보고 용건이나 말해요.” 냉기를 넘어 공격성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녀는 선실 관찰을 멈추고 에르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써 사무용 미소를 꺼냈다. “……같은 배에 탔다기에 인사나 하러 왔어요. 오랜만이네요, 테르시아 씨.” “네. 그럼 인사 끝났으면 이만 나가 줄래요?” 쯧, 저 버르장머리는 대체 언제쯤 고쳐질는지. 레이븐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내색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야 이대로 나가기엔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예를 들자면……. “그나저나 아저씨라고 했죠, 방금?” 왜 이 여자는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표현한 걸까. 그 별칭은 그 남자에게만 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 애석하게도 에르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한 눈으로 빤히 노려볼 뿐. 다만 어딘가 초조한 듯한 눈빛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던 걸 보인 느낌이라 해야 하나? “흐음.” 그녀는 에르웬에게서 사내로 시선을 옮겼다. 굉장히 낯설고, 투구에 가려져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뭐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니, 공통점이랄 게 아예 없을진대도. 그럼에도 묘하게 한 사람을 닮았다. “다, 당신 설마! 이 남자는…….” 이내 레이븐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에르웬과 남성을 번갈아서 응시했다. *** “…….”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리고 레이븐의 시선이 내게 오래 고정될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뭐야? 이걸 바로 들킨다고?’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지? 악령이 아니란 걸 납득시킬 수 있으려나? 만약 납득을 못 한다고 하면 분명 왕가에도 소식이 전해질 텐데……. “…….” 눈알만 움직여 에르웬을 보자, 얘도 마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저씨, 이제 어떡해요?’ 같은 눈빛.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말실수는 네가 해 놓고 그걸 왜 나한테—. “설마…….” 그때 레이븐의 입이 열리며 불편한 정적이 끝을 고했다. “이렇게까지 망가졌을 줄이야.”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에르웬과 내가 동시에 당황하는 차, 레이븐이 어딘가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르시아 씨, 아니 에르웬… 대신할 수 있는 걸 찾는 건 옳지 못해요.” “아……?”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저 극복하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힘들겠지만.” “어어……?”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레이븐은 오해한 것이다. 에르웬이 나를 그리워하다 못해 비슷한 남자를 찾아 얼굴을 가리고서 역할 놀이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 아담한 제복 핏의 레이븐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다 알고 있어요.” “……?” “그러니 에르웬 씨를 이용하겠단 생각은 버려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런 꼴은 못 보니까.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건데, 만약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짓을 했다간…….” 이내 레이븐이 말꼬리를 흐리자 나도 모르게 변명의 말을 하고 말았다. “잠깐! 무슨 오해인지 몰라도, 이용할 생각은—.” “목소리…….” “목소리?” 이해 못 할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븐이 흠칫 굳더니 내 눈을 피했다. “목소리가… 닮았… 네.” 마치 에르웬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납득을 한 것만 같은 반응. “그래서였구나…….”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레이븐이 에르웬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안 돼요. 이런 건… 그 사람도 원하지 않을 게 분명하잖아요?”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고, 말투 또한 조언을 넘어 거의 애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에르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얘가 하고 있는 건 다 오해니까. “다, 당신이 뭔데 간섭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내 에르웬도 정신을 차리고 방어에 나섰다. 아, 쉽게 말해 공격했다는 뜻이다. “당장 나가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레이븐을 힘으로 내쫓은 에르웬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 레이븐의 방문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출항일이 되어 해안선에 떠다니던 군함들이 일제히 돛을 펼친 것은 물론이고, 이 배의 정체성도 정해졌다. “마도병단의 호위라…….” 이 배에 탄 탐험가들은 7층에 도착하는 즉시, 제3 마도병단을 호위하며 전투에 참가할 것이다. 아, 참고로 전장에서의 진형이나 전술 등은 항해 도중에 갑판에 모여 교육을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래서 배마다 부대를 묶어 버리는 거구나. 가면서 교육을 할 시간이 있으니까.’ 7층까지 예상 항해 기간은 약 15일. 교육 시간을 빼면 대부분이 자유 시간이었는데, 나는 거의 항상 갑판에서 보냈다. 간단한 이유다. 새삼 느끼는 것인데, 바바리안은 바다에 약했다. “우웨에에에엑-!” 배가 이렇게 큰데도 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선실 내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야 여기선 그냥 아무 데나 토를 해도 되니까. 아무튼, 그렇게 갑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레이븐과도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빈도로. 어째선지 항상 에르웬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만. “…멀미하는 것까지 닮았네. 기분 나빠.” “……웨에엑.” “얼굴은 왜 그렇게 가리고 있어요? 에르웬 씨가 시켜서?” “웩…….” “하긴, 얼굴이 너무 안 닮긴 했네요.” “…….” “왜 멀쩡한 얼굴을 갖고서 그러고 다니는 거예요? 자존심도 없어요?” “…….” “아주 뭐 하나만 저질러 봐요. 제가 가만 안 둘 거니까.” 아오,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꾸 알짱거리는 거야, 얘는. 352화, 암흑대륙 (3) 레이븐의 괴롭힘(?)이 끝난 것은 보름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대륙. 침입자를 불허하듯 지면의 경계를 따라서 펼쳐진 거무튀튀한 보랏빛의 결계. 그리고 그 앞 바다에 자리한 포탈까지. “와아아아아!” “도착했다아!” 수평선 너머로 고대해 온 모습이 펼쳐지기 무섭게 갑판에 모인 탐험가들이 환성을 내질렀다. 하긴, 항해가 지루하기는 했지. 나야 멀쩡할 때는 섬들 구경하고, 대부분은 멀미로 고생하느라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리헨 슈이츠다.” 에르웬이 내 옆에 서자마자 한 번 더 주의를 주자, 에르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자기 잘못을 알기는 하는 모양인데……. 이 정도면 이제 말실수는 안 하겠지? “그래서 왜 왔냐? 포탈에 들어가려면 좀 걸릴 거 같은데.” “그냥요… 같이 있고 싶어서…….” 처음엔 이런 직설적인 말에 엄청난 부담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에는 많이 줄었다. 아니, 익숙해졌다 해야 하나? “…근데 저 배는 뭐지? 출항할 때는 못 봤던 거 같은데.” 나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도착한 포탈에는 이미 도착한 배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범선과 다른 형태의 선박도 꽤 있었다. “아, 저거요? 쾌속정이에요. 보통 6층에 가장 빨리 도착한 사람들만 모아서 미리 보내 두거든요.” “노아르크 놈들이 내려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네, 최근에 그런 경우가 늘었거든요. 배에 전투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이번에는 그런 시도가 없었던 거 같지만……. 얼마 전에는 쾌속정 중 절반이 넘게 완파됐을 정도로 격렬했다더라고요.” 그렇구나. 아무튼, 제일 빨리 도착했다니 수문장이라 불리는 그 몬스터도 얘네가 잡았겠네. 정수는 안 나왔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구경을 하고 있자니 주변 탐험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항해가 길어지며 생긴 변화였다. “저 여자가 혈령후…….” “근데 옆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아나?” “글쎄, 마도병단에 입단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번이 첫 출정인 자라던데, 몇 년 전에 은퇴했다가 복귀했다더군.” “흐음, 그런데 칠강 중 한 명의 동료가 되었다라… 겉보기와 달리 뭔가 한 수가 있나 보구려.” 에르웬의 유명세 덕에 덩달아 나와 아멜리아까지 어딜 가나 시선을 받게 됐다. 일단은 눈빛에 섞인 감정은 호기심이 99%다. 이름 없던 뉴페이스들이 매번 등장한 전쟁이지만, 시작부터 혈령후와 함께 다니고 있으니 그 정체와 실력이 궁금해진 것. 아, 참고로 1%는 적개심이었다. “슈이츠.” “아, 레이븐 말이냐.” “또 멀리서 저러고 있군.” 출정이 코앞이기에 병단 사람들과 모여서 뭐라 뭐라 말을 나누면서도, 레이븐의 시선은 이쪽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저… 이따가 상황이 되면 해치울까요……?” 뭐래, 얘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이마에 딱밤을 놓자, 에르웬이 억울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알아보면 어떡해요. 불안하단 말이에요.” 사실 이 부분은 조금 고민했었다. 물론 해치울지 말지 같은 게 아니라, 내 정체를 밝히고 협력을 요구할지 말지다. 다만……. ‘역시 괜히 번거롭기만 할 거 같단 말이지.’ 일단 악령이 아니라고 납득시키는 일도 일이며, 설령 납득한들 비밀을 지켜 주고서 협력해 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레이븐, 얘가 정이 많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애는 아니니까. ‘비밀로 해 준다 해도 지금 소속이 왕가인 만큼, 나중에 그게 걸리면 피해가 갈 수도 있고.’ 역시 알리는 건 내 손으로 직접 모든 상황을 마무리한 다음이 좋겠다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걸리면 그때는 전부 터놓고 말하는 수밖에.” 내 희망 사항이야 어쨌든 그 전에 들통이 나 버리면 결국 협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 “…씨, 그럼 늘어나는데.” …불안한 게 그거였던 거니? *** 뿌우우우우우우-!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순간, 우리가 타고 있던 배도 분잡해졌다. “각자 제 위치로!” 드디어 짧은 대기 시간을 끝내고 일제히 전쟁터로 들어설 차례. 왕가 측 인물의 지시에 갑판에서 구경 중이던 탐험가들이 배정받았던 자리로 이동했다. 아, 참고로 우리는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배정받은 대기 위치가 갑판 위였던 덕분이다. “아저… 아니, 리헨은 내가 묶어 줄게요!” “어?” “이런 건 제가 잘하거든요!” 이내 우리는 보급받은 밧줄로 배와 몸을 이었다. 혹여나 배에서 떨어질 것을 우려한 조치. 그렇게 얼추 준비가 끝나자, 다시금 선두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조금 긴장되네…….” “걱정 마세요. 리헨… 은 제가 반드시 지킬 테니.” 어, 그건 탱커인 내가 할 대사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잡담을 이어 나가지는 않았다. “대장선 진입 완료!” 선두에 있던 배들이 포탈을 타고 넘어가고, 우리가 탄 배가 포탈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긴, 지금 우리는 전쟁터로 향하고 있는 거니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탐험가들도 아까와는 다르게 경직되고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다. 후, 다들 저러니까 1층에서의 일이 떠올라 PTSD가 올 거 같네. “본대, 진입 완료!” 슬슬 나도 가벼운 마음은 버릴 때였다. 이 몸으로는 난생처음 진입하는 7층 아닌가. 더군다나 저곳에는 몬스터보다 위험한 탐험가가 득실거리고 있다. 비록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저곳을 향한다 해도. 무언가를 잃고만 돌아오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에르웬, 그리고 에밀리.” “네.” “말해라.” 한 손으로는 난간을, 다른 한 손으로는 얼마 전에 새로 산 방패를 꽉 쥐며 말했다.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번뜩-! 이내 우리가 탄 배가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 쿠웅-! 거인이 잡아 던진 듯 잠시 허공에 떠올랐던 커다란 범선이 수면에 부딪치며 물줄기를 쏟아 낸다. 놀라운 경험이지만, 한눈팔고 있을 틈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푸른 하늘 아래의 평온한 바다가 아니니까. 「7층 암흑대륙에 입장했습니다.」 마치 석유가 뒤덮인 듯이 검게 물든 바다. 대륙 초입부에 불과함에도 주변에 낀 안개들은 벌써부터 시야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콰앙! 콰앙! 퍼어엉-!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폭음이 고막을 강타한다. 협곡 위에서 대기 중이던 노아르크의 병력이 쏘아 낸 마력포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환영 인사가 격하네요.” “저놈들, 마력포는 대체 어디서 난 거지?” “예전에 우리 배에서 빼앗은 거겠죠, 뭐.”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마력포와 흑마법, 각종 이능들이 배에 날아들었다. 소리만 들어도 상당한 화력임을 알 수 있었으나, 왕가 측 함대의 타격은 전무했다. 그야 돈지랄로 안 되는 건 없거든. 솨아아아아-! 7층에 진입한 순간부터 발동된 방어 마법진이 날아드는 공격을 모두 사전에 차단한다. 간혹 충격에 배가 크게 흔들리는 일은 있을지언정, 결코 파손까지는 가지 않는다. 초기에 상륙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왕가에서 모든 군함에 취한 조치이자 대규모 투자이다. 저 마법진을 유지하는 데만 분당 천만 스톤 단위의 마석이 소모된다던가? ‘이 상태로 대륙까지 들어가려면 대체 들어가는 돈이 얼마……. 아, 그래도 배에 비하면 헐값이려나.’ 물론 나랏돈이나 걱정할 때가 아니었기에 잡념을 지우고 현재에 집중했다. 세찬 환영 인사를 정면으로 받아 내며 꿋꿋하게 진격한 함대는 어느덧 인접 해안을 돌파하더니 이제 일렬로 대형을 바꿔 좁은 협곡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원귀의 협곡이 부여됩니다.」 「모든 치유 및 재생 효과가 비활성화됩니다.」 「신성력이 봉인됩니다.」 원귀의 협곡. 모든 해안선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암흑대륙에 들어서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필수 코스. 이내 우리가 탄 군함이 앞 배를 따라 협곡 내에 들어서자, 불길하고 음울한 느낌이 가득한 안개가 한층 진해진다. 그리고……. “전투 준비!” 언데드형 몬스터들이 배의 외벽을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수많은 종류만큼이나 등급도 다양했다. 「데드번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레드아이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벤시 퀸을 처치했습니다. EXP +6」 「티쓰 스켈레톤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절벽귀를 처치했…….」 출현 몬스터 중에 절반 이상은 6층에서도 사냥이 가능한 개체였으나, 6층 진행을 건너뛴 만큼 무엇을 잡든 경험치가 빠르게 채워졌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에르웬의 공이 컸다. 배에 올라타기 전에 떨궈져 나가는 몬스터들이 거의 70%는 됐으니까. 해양 몬스터들은 아예 공격할 수단도 없었고. 「카오스씨먼을 처치했습니다. EXP +6」 「말더 엘펀트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스켈레톤 머메이드 퀸을 처치…….」 결속 마법을 맺은 에르웬이 평타 한 대만 묻혀 둬도 들어오는 경험치들. 물론 그렇다고 꿀만 빨며 보낸 것은 아니었다. 퍼억-! 기어오를 필요가 없는 영체류 몬스터들도 갑판에 한가득이었기에 정말이지 쉼 없이 무기를 휘둘러야만 했다. 「고스티즈를 처치했습니다. EXP +4」 「소울드링커를 처치했습니다. EXP +6」 「협곡 망령을 처치했습니다. EXP +3」 후, 배에 탄 인원이 많다 보니 리스폰이 되는 숫자도 장난이 아니구나. 심지어 갑판에서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악랄한 노아르크 새끼들은 협곡 위에서 마력포를 쏴 댔다. 뭐, 이거야 방어 마법진에 의해 무력화가 되기는 했지만……. “아아아아아악!!”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전투 중에 줄이 끊어지며 바다에 빠지는 탐험가들도 간혹 있었다. 게다가……. “뭐야, 왜 배가 앞으로 안 가?” “앞에 배가 침몰했다는군!” “어엉? 잘 가던 배가 왜!” “데드렉트가 출현해 군함의 마법진에 손상이 가해졌다는 거 같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전황을 들어 보니, 몬스터 때문에 방어 마법진이 깨져서 아예 배가 통째로 가라앉는 케이스도 있긴 한 모양. ‘쩝, 위에서 끈질기게 포격을 가할 만하네.’ 운 좋게 한 척만 박살을 내도 손해는 아닐뿐더러, 애초에 얘네가 계속 공격을 하고 있으면 함대 측에선 방어 마법진을 끌 수가 없다. 협곡을 나아가는 내내 마법진을 켜며 군비를 무더기로 소모할 수밖에 없는—. “아멜리아, 뒤!” 내가 다급하게 외치자 아멜리아가 뒤돌려차기로 후방에서 기습을 가하던 스켈레톤을 박살 냈다. 그리고……. “감사 인사는 됐다. 우린 동료—.” “에밀리다.” “응?” “이 와중에 들은 사람은 없겠지만 조심해 줬으면 하는데.” “아, 주의하겠다…….” 과거에서 쓰던 가명이랑 똑같은데도 어째선지 입에 붙지가 않는단 말이지. 후, 이럼 에르웬의 말실수를 탓할 처지가 아닌가? “아저씨……! 저기 봐요!” “리헨이다.” “아… 네… 아무튼, 저기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이내 에르웬이 가리킨 곳을 보았지만, 내 눈에는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필드 효과 - 원귀의 협곡이 해제됩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비좁던 협곡이 펼쳐지며 드넓은 호수가 드러났다. 벽면에서는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물의 색은 피를 연상시키는 적색이었다. 그리고……. “후아, 끝났군!” “이제야 숨 좀 돌리겠어.” 쉴 새 없이 출현하던 몬스터가 사라지며, 노아르크 놈들의 포격도 끝이 났다. 다행히도 첫 관문을 무사히 넘었다는 뜻. ‘그럼 이제부터인가…….’ 안개에 뒤덮여 어렴풋이 보이는 물가를 바라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왠지 벌써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353화 암흑대륙 (4) “리헨! 여기 물이요!” “아, 고맙다.” 나를 포함한 탐험가들이 물 또는 술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왕가 측 인물들이 선체 내부를 돌아다니며 인원 점검을 진행했다. 그리고……. “하선 후 선체는 즉시 소환 해제될 예정이니 두고 가는 물품 없이 잘 챙기십시오!” 점검이 끝난 뒤엔 군의 통제에 따라 차례차례 작은 배로 갈아타 물가로 이동했다. 물가에는 이미 먼저 내린 병력들이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왼발을 맞추며 걷는 현대에 비하면 중구난방이라 할 수 있겠다마는. “다행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나 하진 않았던 모양이군.” “저쪽도 본대와 본대가 붙는 교전은 철저하게 피하는 주의인 거 같더라고요.” “하긴, 꽝하고 붙으면 이 병력으로 지는 게 더 힘들긴 하겠네.” 아무튼, 통제에 따라 대기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선두가 행군을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야 오늘 우리가 타고 온 3등선. 서류상으로는 3-21선이라 불리는 이 배의 임무는 제3 마도병단의 호위니까. 애석하게도 이 마도병단은 3군단 소속으로 퇴로 확보가 주요 임무이다. 쉽게 말해, 본대가 떠나면 이곳에 주둔지를 구축해 이곳을 지키는 게 이번 전쟁에서의 역할이라는 것. “자자! 막사부터 세웁시다!” 이어서 남은 3군단의 배들도 모두 하선하자, 본격적으로 진지 구축 시간이 시작됐다. 탐험가들은 보급 받은 막사를 세웠고, 마법사들도 분주히 움직이며 이런저런 마법진을 그려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솨아아아아아-! 마법 덕분에 귀가 먹먹해지던 폭포 소리가 한결 덜해졌고, 시야를 가리던 안개들도 싹 거둬졌다. “후, 이제 좀 살 거 같네.” “다들 이것 좀 드시면서 쉬고 계십쇼! 곧 막사 배정 및 임무 공지가 있을 예정입니다!” 주둔지 구축이 얼추 마무리되자, 앞으로 우리가 지낼 막사도 배정이 됐다. 호수를 중심으로 동부에 위치한 6인용 막사였다. 군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고 한들, 팀원을 묶어 주는 관례상 우리 셋을 떼어놓지는 않았지만……. “하하, 인사들 나눕시다. 앞으로 같은 조로 활동을 하게 될 터인데.” 생전 처음 보는 인물 셋이 추가됐다. 단순히 막사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추후 보초를 설 때나 순찰을 나갈 때 같은 조로 이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세 명이다 보니 이렇게 됐구나.’ 클랜이든 팀이든 5인을… 아니, 결속 마법이 업데이트 된 후로는 6인을 최소 단위로 친다. 한데 우리는 셋으로 숫자가 맞지 않으니 자동 매칭을 시킨 것이다. ‘보니까 완전히 자동은 아닌 거 같지만.’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연스레 대화를 주도 중인 사내를 보았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허리엔 검까지 찼지만 그는 마법사다. 가슴팍에 달린 마도병단의 앰블럼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 그나저나 제 인사를 아직 안 했군요. 저는 제3 마도병단의 부보관 알렉스 헤일로라고 합니다.” “부보관?”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아멜리아가 귀에 속삭였다. “부단장의 보좌관이라는 뜻이다.” 오, 그럼 얘가 레이븐의 오른팔이라는 거네? 걔가 오른팔을 이리로 보낸 목적이야 뻔할 테고. 우리들… 아니, 정확히는 에르웬의 통제 및 감시. “위 막사에 배정받은 6인은 이후 3-17조에 속해 여러 임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며, 저는 조장으로서 여러분들을 도와—” “조장? 누구 마음대로요?” 에르웬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되묻자, 사내의 미소에 균열이 생겼다. “하하… 그 부분은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상부의 지시이니—” “여유로운 척 웃지만, 상당히 긴장하고 있네요.” “……예?” “왜, 제가 꺼림칙해요?” 그 물음에 사내는 잠시 움찔하더니,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든든하다고 여긴다면 모를까요.” 누가 봐도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빤히 바라보는 에르웬의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자, 그만해라.” 어차피 저 남자도 명령을 받고 왔을 뿐이라는 걸 알기에 얼른 개입했다. “하지만, 우리 셋으로도 충분한데…….” “사람이야 많으면 좋은 거 아니냐.” “그래도 조장이라니…….” “군부 쪽 인물이 조장을 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질색하는 거냐?”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에르웬이 내 눈치를 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데 그 모습이 인상 깊었을까. 그제야 사내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리헨 슈이츠요.”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옆에 분은 에밀리 레인즈 님이시지요?” “그래.”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사내가 멀리서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둘도 소개를 해주었다. “여기 이분들은 오는 중에 침몰한 3등선에 타고 계시던 분들입니다. 다행히 구조에는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동료분들까지는 함께 구해내지 못했지요.” 어쩐지 다른 팀에서 2명을 빼왔을 거 같지는 않더라니. 여기에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우리의 시선이 다른 두 사람에게 옮겨지자, 둘이 약간 긴장한 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혀, 혈령후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무, 물론 옆에 계신 동료분들도 말입니다. 5등급 탐험가 라이키온 엘트라고 합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예의도 바른 거 같고, 소개 시간을 줄 때까지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눈치도 제법 있는 듯하다. 5등급이면 한 사람 몫은 할 테고. 게다가 처한 사정도 제법 딱하니……. “폐, 폐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 한스 카이사르입니다.” “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자, 녀석은 친절하게 한 번 더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한스 카이사르입니다!” 장난치냐? ***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한스를 만났을 때 어떻게 됐더라? 금방 기억이 났다. 파루네섬에서 만난 한스J는 배신자였다. 그리고……. ‘그놈을 만난 다음에 과거로 빨려갔지.’ 그곳에서 무려 반년을 보냈고, 돌아왔을 때는 원래 시간대에서 2년 하고도 6개월이 흐른 때였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모자라, 어째선지 나는 악령 낙인이 찍혀져 있었다. “허허…….”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한스K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친히 말까지 섞으며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봤자 괜히 부정만 탈 테니까. “에르웬.” “네, 말씀하세요.” “아까 우리 셋만으로도 충분하댔지?” “그랬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쓰읍…….” 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여기서 전부 엎으라는 한마디만 해줘도 에르웬은 있는 힘껏 울부짖으며 조를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레이븐한테 이 소식이 전해질 텐데.’ 그 사실이 못내 걸린다. 그도 그럴 게, 레이븐은 내 한스 혐오증을 알고 있는 동료니까. 자세한 내막을 듣고서 나를 향한 의심을 키워올 수도 있다. ‘어, 근데 그럼 이름 때문에 내쫓은 것처럼만 안 보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 좋아, 결정했다. “쓰레기들이군.” “…예?” “너희 같은 놈들이 있어 봐야 괜히 발목만 잡을 뿐이란 소리였다.” 내 입에서 차디찬 경멸의 말이 쏟아지자, 둘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에르웬도 아니고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 “하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슈이츠 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많으면 좋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 말이지. “생각이 바뀌었소.” 한스는 그만큼 중대 사안이다. 이내 저 둘을 빼든가, 우리를 빼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하자, 사내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군. 치마폭에 들어가 있으니 자기가 뭐라도 된 거 같나?” “됐소, 우리가 나가리다. 이런 모멸을 받으며 함께 있을 이유는 없으니. 대신 군부 측에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이쪽에 있다고 확실히 해주시오.” 내 말이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저쪽에서 알아서 탈퇴 선언을 하며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휴, 이거로 한 건 해결— “감히 저런 말을 하다니. 따라갈까요?” “됐다, 말도 섞지 마라.” “알았어요!” 아무튼,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레이븐의 오른팔, 알렉스가 혐오의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하긴 얘는 레이븐의 오해를 그대로 전해 들었을 테니까. 처음엔 좀 멀쩡한가 싶었는데, 이 일로 그냥 남의 힘을 믿고 설치는 한심한 놈처럼 보였겠지. “그래서 이제 그쪽은 어쩔 거요? 여섯 명이어야 하는 조가 네 명이 되었는데.” “……우선 부단장님께 보고를 드린 후에 처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이내 알렉스도 이 사태를 전하기 위해 떠나자, 에르웬이 조심스레 내게 질문을 해왔다. “근데, 아까는 갑자기 왜 그러신 거예요?” “아까 그놈 이름이 한스였지 않냐.” “…한스가 왜요?” 아, 얘는 내 한스 징크스에 대해서 모르나? 음, 생각해 보니 말해 준 기억이 없는 거 같기도 한데……. 뭐라 말을 해주려던 차, 아멜리아가 피식 웃으며 나 대신 입을 열었다. “설마, 이 녀석의 동료라면서 그것도 몰랐던 건가.” “……그래서 당신은 안다는 거야?” “알다마다.” 아멜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갖고 있는 한스 징크스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얘의 경우엔 나를 ‘이한스’로 불렀던 사건 때문에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다만 에르웬은 본인만 몰랐던 사실이 분했을까. “한스…….” 정말이지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읊조리더니, 다짐하듯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 보면 파루네섬에서 배신자였던 한스 아울록도 이름이 한스였죠. 죄송해요. 앞으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어… 그, 그래라.” 이러다 마주치는 한스란 한스는 다 미간에 화살을 꽂아 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너무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어차피 한스인데. 분명 찾아보면 뭔가 죄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한스를 마주쳤다는 건데…….’ 서둘러 조에서 내쫓기는 했으나, 한스K와 너무 오랫동안 한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환기도 잘 안 되는 실내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7층 전쟁터 한복판에 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아저씨, 손이 떨리고 있어요…….” 아오, 진짜 미치겠네. *** 앞으로 대체 뭐가 터지려는 걸까. 그런 불안으로 편히 쉬지도 못하며 손을 떨고 있던 때. “여러분의 처우가 결정되었습니다.” 알렉스가 돌아와 우리의 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알려 주었다. 변한 건 크게 없었다. 조 인원은 그냥 넷으로 가기로 했고, 조장 역할도 그가 맡는 것으로 이전과 동일했다. 다만……. “이후 여러분… 아니, 저희들은 외부 순찰 혹은 보초 임무가 아니라, 요인 경호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제3 마도병단의 부단장 레이븐의 경호 역할로 조 임무가 변경되었다. 물론, 여기까진 문제 될 게 없었다. 단장인 카일 아저씨가 1군단의 특수부대로 지원을 나간 지금, 레이븐이 실질적으로 우리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경호랍시고 부른 것도 그냥 뭔가 사고 치기 전에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한 듯한데……. 그래,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디선가 마력포 소리가 들려오고.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설치되어 있던 알람 마법이 작동되며 주둔지 전체에 울려 퍼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기습, 기습이다!!” “전원 전투 준비!!” 한스K를 만나고서, 불과 2시간도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354화 고립 (1) 주둔지가 자리한 호숫가는 암흑대륙 중 몇 없는 안전지대 중 하나다. 다만 몬스터가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뿐, 절대적인 안전을 뜻하진 않는다. 미궁에서 위험한 건 몬스터만이 아니니까. 바로 이렇게.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적을 감지하고서 비상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는 알람 마법. 그 적의 존재가 누구일지는 명약관화하다. 우연히 몬스터가 흘러들어왔다고 한들, 몬스터가 마력포를 쏴대지는 않으니까. “노아르크다!” “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또 하나가 생긴다. 적이 누구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놈들이 왔는가. 분명 앞서 나간 본대에서 철저하게 수색을 하며 진군을 하였을 텐데. ‘일단 본대가 당했을 리는 없어.’ 우선 그러한 전제부터 깔았다. 그야 본대의 숫자가 얼마인데? 그 많은 병력이 이 짧은 시간 내에 당했을 리 없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라면 연락이라도 왔어야 하며, 연락이 왔다면 우리가 속한 3군단도 즉시 지원을 나갔을 것이다. 따라서……. ‘본대의 눈을 피해서 이곳을 습격했다.’ 위 가능성이 가장 그럴듯하며, 이 전제대로라면 습격자의 병력은 적을 가능성이 높다. 본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니까. 물론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저씨……! 뭐 해요! 얼른 나가지 않고!” 거, 리헨이라니까. 어차피 레이븐도 오해를 한 판에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으려나? “그래, 일단 나가자.” 짧았던 생각 정리를 끝마치고,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어……!”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포탄이 정면에서 보였다. 후, 앞장서서 나오길 잘했네. 콰아앙-! 방패로 막아내자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마력의 잔재. 충격이 제법 상당했지만, 뒤로 밀려날 정도는 아니다. 50%는 수호병단의 징표가 흡수해 주거든. “괘, 괜찮으십니까?” 쫄기는. 항상 후방에만 있던 마법 부대라 그런가? “문제없다.” 코앞에서 터진 마력탄에 놀란 레이븐의 보좌관을 안심시키며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알렉스라고 했지? 내 뒤에 바짝 붙어라.” “예, 예!” “에밀리, 에르웬 너희 둘은 뒤에서 따라오며 이 남자를 지키고.” “네!” 순식간에 진형이 잡혔다. 원래라면 우리 조의 조장인 알렉스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뭐, 보니까 얘는 딱 시킨 일만 잘하는 타입이다. 딱히 내가 오더를 내리는 거에 반발심이 생긴 거 같지도 않고. “알렉스, 부단장의 막사가 어디지?” “저, 저쪽입니다!” “그럼, 우선 그리로 향하지. 잘 따라와라.” “예!” 막사에서 뛰쳐나온 다른 탐험가들이 조끼리 뭉쳐 바깥으로 향하는 사이, 우리는 주둔지 안쪽으로 이동했다. 우리 조의 목표는 요인 경호니까. …라는 건 솔직히 핑계고, 지휘부 쪽으로 가면 현 사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혹시 레이븐이 위험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발길에 박차를 가해 레이븐이 있을 막사에 도착했다. 때마침 레이븐은 막사 앞에 서 있었다. 주변에는 제복을 입은 마도병단 소속의 마법사가 한가득이었다. 마법진을 바닥에 그려 놓고는 뭔가 주술이라도 하는 듯한 형태였는데……. “레이븐 부단장,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 거요?” 내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묻자, 레이븐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들이 왜 여기에…….” “당연히 비상사태이니 배정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온 거 아니겠소.” “아…….” 레이븐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조의 임무를 본인의 호위로 바꾼 것이 떠올랐던 모양. 다만 한 가지는 여전히 거슬렸을까. “알렉스 헤일로 부보관, 왜 당신이 보고해야 할 일은 이 남자가 하고 있는 거죠? 당신이 이 조의 조장 아닌가요?” 레이븐이 째려보자 알렉스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바짝 얼어붙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왠지 얘도 그제서야 내가 자연스레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뭐, 감경 사유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아니, 시… 시정하겠습니다!” “뭐를 어떻게 시정할 건데……. 하아, 됐어요.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부단장님 마력 충전이 완료됐습니다!” 한 마법사의 외침에 레이븐이 대화를 끝내며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루아 레이븐이 2등급 방어 마법 [천금의 벽]을 시전했습니다.」 거대한 철벽이 돔의 형태로 호숫가 전체를 뒤덮었다. *** 솔직히 말해서,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이제 2등급 마법을 쓰는 거야?’ 2등급 방어 마법, 천금의 벽. 수십 명의 마법사가 마력을 퍼부었지만, 결국 그 중심에서 캐스팅을 한 것은 레이븐이다. 쉽게 말해, 마력만 충분하다면 2등급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뜻. ‘기분이 묘하네…….’ 마도병단의 부단장. 거기에 금의 마법사라는 이명까지 붙었기에 꽤나 강해졌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애를 다시 동료로 데려올 수 있기는 할까? 한 병단의 부단장이면 앞으로 탐험가 생활을 할 필요도 없이 탄탄대로일 텐데. “우선 이거로 시간은 벌었네요. 다들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부단장님!” “다들 따라와요.” 이후 레이븐이 두목 포스를 풀풀 풍기며 걸음을 옮기자, 병단의 마법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얼른 속도를 올려 레이븐의 옆에 붙었다. “지금 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물어보면서도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레이븐은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귀찮은 표정으로 답해줬다. “…3군단의 지휘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선 방어 마법을 활성화한 뒤 중앙 본부로 합류하라고. 답변이 됐으면, 앞으로는 더 이상 질문하지 마요.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으니까.” 생각을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기에, 그냥 닥치고서 따라갔다. 머지않아 중앙 본부에 도착하자, 레이븐이 혼자 쏙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나도 어서 뒤따르려 했지만……. “…당신이 여길 왜 따라와요?” “우리 조의 임무는 당신의 경호—” “헛소리하지 말고 밖에 있어요. 명령이에요.” 레이븐의 완고한 선 긋기에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났다. 후, 안에서 수뇌부들이 나눌 대화가 궁금했는데. 어떻게 엿들을 방법이 없으려나? 에르웬과 아멜리아에게도 물어봤지만, 얘네라고 해서 뭔가 방법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부단장님!” 30분 정도가 흐르자 레이븐이 막사에서 나왔다. 이때다 싶어 얼른 옆에 붙으며 어떻게 됐냐고 물었지만, 말해 줄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 받았다. ‘하… 진짜 안 친한 사람한테는 얄짤 없구나.’ 예전의 레이븐이 그립다. 질색팔색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막상 부탁한 것은 다 들어줬었는데……. “에밀리, 네가 좀 알아와 줄 수 있겠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런 때에 정보는 천금보다 귀한 값어치를 갖고 있기에 아멜리아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쪽에 경험이 많은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일단 본대와의 통신은 막혔다고 하더군.” “그럼 본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건가?” “글쎄, 딱히 그렇진 않을 거다. 원래 일정 주기로 연락을 하니까. 그게 끊기면 그쪽에서도 이쪽에 뭔가 사건이 벌어졌음을 인지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군.” 본대가 출발을 한 지 10시간 가까이 흘렀다. 연락 두절로 회군을 한다고 해도,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 “탐험가들 쪽 반응은 어떻지?” “그리 나쁘지 않다. 금의 마법사에 대해서는 다들 신용을 하는 편이니까. 이번에도 저번처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는 분위기더군.” “저번?” “아, 그거라면 저도 알아요!” 에르웬이 이때다 싶어 대화에 껴들었다. 딱 한 번, 주둔지가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던가? 서로에 관해 정보가 없던 초창기였다고 한다. “그때도 그 여자가 미리 설치한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어 이 벽을 소환했었어요. 노아르크에서도 몇 시간 동안 뚫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뚫지 못하고 도망쳤죠.” 참고로 이는 레이븐이 ‘금의 마법사’란 이명을 얻게 된 사건이었으며, 이후로 노아르크는 레이븐이 항상 주둔지를 지킨다는 걸 깨닫고, 다시는 이러한 시도를 해오지 않았다. 그래, 오늘까지는 말이다. “뭔가 이상하군.” “확실히…….” 내 중얼거림에 동의를 해온 아멜리아와 달리, 에르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니요?” “그도 그럴 게, 그때 실패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며?” 한 번 실패했던 전략을 다시 썼다면, 뚫을 방법도 준비가 됐다는 편이 옳다. 노아르크 놈들은 병신이 아니니까. 일전에 차원문을 타고 주요 전력이 도망칠 것까지 예상해서 대규모 폭발 마법을 준비했던 놈들이, 그냥 한 번 더 찔러나 봤다? 이쪽이 더 말이 안 된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뚫을 생각이냐는 건데…….’ 나는 ‘천금의 벽’ 마법에 대해 떠올렸다. 땅과 번개 마법 숙련도가 극에 달해야지만, 사용이 가능한 고위 주문이었다. 참고로 특징은……. ‘일단 채널링 스킬이 아니지.’ 지속적으로 마력을 넣어줘야 실물이 유지되는 타 마법과 달리, 이 마법은 첫 발동 때 사용한 마력량에 비례해 유지 시간이 정해진다. ‘게다가 손상이 가해지면 마력을 더 불어넣어서 고치는 것도 가능하고.’ 왜 탐험가들이 현 상황을 그리 절망적으로 여기지 않는지 알 것도 같다. 일단 병단 단위의 마법사가 모였지 않은가. 망가지면 고치면 그만이고, 고치는 걸 넘어 마법을 다시 발동하는 것도 최소 2번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암만 봐도 이렇게 끝날 거 같진 않단 말이지.’ 바로 얼마 전에 한스까지 만나지 않았던가. 상대측에서 뭔가 비장의 수단이 있다는 가정하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저… 아저씨?” “내버려 둬라.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이 벽을 어떻게 뚫으려는 걸까. 혹시 파멸학자 같은 고위 마법사라도 대동했나? 아니, 애초에……. ‘…굳이 뚫을 필요가 있나?’ 내가 놈들이었다면 멀리서 마력포를 쏘는 게 아니라, 기습적으로 거리를 좁혀 난전을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그러지 않았다. 멀리서 원거리 공격을 가했고, ‘천금의 벽’을 쓸 시간을 주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즉, 놈들은 천금의 벽을 쓰기를 원했다.’ 하면, 그 이유는 뭘까. 이 또한 상대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이미 몰래 안에 들어왔으니까.” 방심한 적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다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게 무슨 뜻이지?” 아멜리아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나는 호수 주변을 뒤덮은 천금의 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예전에 이 벽이 얼마나 유지됐는지도 알고 있나?” “8시간… 정도였을 거다. 본대가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더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8시간이라…….’ 우리가 이 벽 안에 갇혀 있을 시간이었다. *** 머릿속에서 노아르크의 계획이 그려진 순간, 나는 곧장 레이븐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소.” “분명 막사 앞에서 대기하라 했을 텐데요. 무례한 점까지 따라하라고 그 여자가 시키던가요?” 레이븐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디 이런 표정을 보는 게 한두 번이던가? 아랑곳 않고 전할 정보를 모두 전했다. 처음엔 이게 뭔 상황인가 싶던 레이븐도, 얘기가 진행될수록 표정을 달리했다. “노아르크에서 왜 무의미한 시도를 반복했는가. 그건 확실히 우리도 궁금해하던 부분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고요. 이 의견은 제가 잘 정리해서 바로 상부에 전달—” “전달이 아니라, 바로 대책을 마련해야 하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나가봐요.” 말까지 끊고서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건만, 애석하게도 잘 통하지는 않았다. 후, 바바리안의 말투가 아니라서 그런가? “잘 안 된 거 같군.” “레이븐이 제대로 상부에 전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렇게 막사에서 나와 그 앞을 지키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퍼직-! 뜬금없이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앞에 처박혔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어어어어-!] 그것은 질척질척한 피부를 가진 시체였다. 355화 고립 (2) 시체가 몸을 일으킨다. 피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울긋불긋하며 여기저기 꿰매진 자국이 있다. “설마… 시체 수집가……?” 아멜리아의 읊조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 거구나. 노아르크의 네크로맨서라고 한다면 역시 그놈밖에 없기는 하지. ‘정말 소수 정예로 숨어들어온 거면 이 새끼가 빠질 리도 없고.’ 아벳 네크라페토. 시체 수집가라는 이명을 가졌으며, 다대일 전투에 특화된 오르큘리스 소속 범죄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 이놈까지 온 거면 노아르크에서도 아예 작정을 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하, 후방이 습격 당하는 일은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더니, 왜 하필 내가 오자마자…….’ 군소리를 뱉지 않으려도 않을 수가 없지만, 불평을 늘어놓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문제는 없을 터. 타닷. 즉시 앞으로 대시해 시체의 두개골을 망치로 내리쳤다. 굳이 [휘두르기]까지 쓸 것도 없었다. 콰직-! 순식간에 짓이겨지며 핏물을 터트리는 시체. 근접 전사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이를 뒤집어써야 했는데……. 치이이이익-! 후, 독까지 섞인 걸 보니 진짜 그놈이 맞나 보네. “괜찮나?” “신경 쓰지 마라. 괜찮으니.” 굳이 [정령화]로 면역 보너스를 얻을 것도 없다. 볼-헤르찬에 붙은 독 내성 +120만으로도 피부 접촉 정도는 거뜬하니까. 뭐, 조금 가렵기는 하다마는. “그보다 슬슬 시작이 된 모양…….” 내 가설이 맞아들은 것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뭐라 중얼거리던 때, 돌처럼 굳은 에르웬이 보였다. “……에르웬, 괜찮나?” “…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죠?”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아… 아! 네…….” 에르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멍하기 그지없었으며 시선은 짓이겨진 시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시체… 수집가…….” 아, 그래……. 생각해 보면 지금 언니의 원수를 만난 격이겠구나. 다리아를 죽인 것은 파멸학자이지만, 그 과정에는 이놈의 지분도 상당하다. 이내 에르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일 수 있을까요?” 죽일 수 있냐라……. 나는 잠시 고민하고 답했다. “어쩌면.” 그래, 잘 되면 죽이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우리가 살아남는 게 먼저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원수를 갚겠다고 무리를 하다가 무언가를 또 잃어서는 주객전도일 테니까. 납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에르웬은 약 5초 정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았어요. 아저씨 말대로 할게요.” 후, 이러니까 괜히 마음이 불편하네. 나는 에르웬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에르웬, 걱정 마라. 나도 받은 건 꼭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니까.” “……?”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시작은 위로였으나, 모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파멸학자, 벨베브 루인제네스. 나라고 놈들에 대한 원한을 잊은 건 아니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네.” 오케이, 그럼 이 정도면 멘탈 복구는 한 거 같고. “에밀리, 근데 그 녀석은 어디 갔나?” 팔에 묻은 피 정도만 휙 털어내며 부보관 알렉스의 행방을 묻자, 아멜리아가 답했다. “시체가 위에서 떨어지자마자 막사 안으로 들어가더군.” 음, 레이븐한테 보고를 올리러 간 건가? 근데 왜 아직도 안 나와? 이 와중에도 계속 시체들이 떨어지고 있— “정말, 당신 말대로 됐군요.” 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뒤를 돌아보자 부보관 알렉스와 함께 막사에서 나오는 레이븐이 보였다. 잠깐 사이 표정이 많이 안 좋아졌네. “지휘부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 나라도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뭐래, 평소답지 않게 후회는. 과거에 미련을 갖는 것만큼 낭비는 없다. “그보다 이제 어쩔 거요?” “방금 지휘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어요. 각 부대의 병력을 모두 이끌고 호수로 집결하라더군요. 선체의 마법진을 이용해 항전할 계획인 듯해요.” 항전이 아닌 집결이라. 아무래도 적의 전력을 모르니, 최대한 보수적인 전략을 택한 듯한데……. “그럼 지금 당장 이동하는 거요?” “아뇨. 잠시 이곳에서 대기합니다. 마도병단 내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니, 곧 탐험가들과 함께 이리로 모일 거예요.” 그래, 다 모이면 그때 호수로 가는 거구나. 그다음에는 배에 타서 마법진을 발동시켜서 시간을 버는 거고. 좋은 계획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더 있는 건 아니니까. “인원 보고하세요.” “확실하게 확인된 사망자가 셋이며, 행방을 알 수 없는 실종자가 둘입니다!” “실종자가 둘이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두 사람 때문에 여기서 더 지체될 수는 없어요. 우리도 이만 움직이죠.” 이후 시체들을 처리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병단 내 마법사들이 호위 탐험가들과 함께 집결했다. 그럼 이제 호수로 향할 차례. 「아루아 레이븐이 7등급 지원 마법 [중화]를 시전했습니다.」 나를 비롯해 근접 탐험가들이 마법사 및 후방 계열 탐험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길을 뚫었다. 이동하는 과정 자체는 거리낄 게 없었다. 아직까진 기껏해야 시체들이 전부였으니까. 수십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는 백여 명의 육탄계 탐험가들을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그렇게 신속하게 호수로 향하던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앙-!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린다. 그리고……. “마법진에 손상이 가해진 모양이군요.” 마법에 의해 흩어졌던 안개들이 다시금 공기 중에 형성되며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장점이 있기는 했다. 비상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던 알람 마법도 함께 박살이 났는지 한결 조용해졌으니까. “뭣들 합니까? 멈추지 마세요!” 이내 레이븐이 풍 속성 마법을 사용하며 주변의 안개들을 거둬 냈고, 다시금 이동을 재개했다. 머지않아 핏물처럼 씨뻘건 호수가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지며 마법사들이 소형 선박들을 소환해 수면 위에 띄웠다. 그 순간이었다. “차례차례 배에 오르—” “아아아아악-!” 후방에서 한 남성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어느 이름 모를 사내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 이곳까지 오며 시체들과의 전투에서는 부상자가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그 비명 소리는 우리 귀에 유독 크게 들렸다. 그래서일까? 툭. 인원 중에 가장 먼저 배에 오르고 있던 레이븐이 반쯤 걸쳤던 다리를 도로 거두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죠?” “확인 중입니다. 별일 아닐 테니 먼저 가시—” “아뇨. 알아야겠어요. 그러니까 헤일로 부보관, 당신은 이곳에 남아 남은 이들을 통솔해요.” 레이븐은 다른 이를 먼저 배에 오르게끔 지시했다.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혼자서 홀라당 배에 타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와, 이게 군 지휘관의 책임감이라는 건가? 레이븐이 병단 내에서 명망이 높다더니, 왜 그런지 알 것도 같다. 레이븐은 성실한 상관이고 믿음직한 상관이었다. 다만, 문제는……. “뭐 해요? 따라오지 않고.” 우리의 임무가 얘 밀착 호위란 말이지. 얘가 배에 안 타면 우리도 못 탄다. “……어디로 가려는 거요?” 내 물음에 레이븐이 짧게 답했다. “후방이요.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아니, 느낌이 안 좋으면 일단 냅다 도망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속으로 품던 때였다. “아아아악!!” 후방에서 한 번 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부단장님! 적의 정체가 확인되었습니다!” 마침내 후방의 상황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놀랍게도 적은 단 한 명이었다. 하나 그 누구도 현 상황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 한 명의 인상착의는 이 도시에서 굉장히 유명한 것이었으니까. “…검붉은 색의 갑주를 입은 노기사라고요?” “예. 오러도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혈기사. 비프론 태생으로 병사부터 시작해 기사가 되고, 전대 왕실기사단장을 살해하며 악명을 떨치게 된 오르큘리스 소속 범죄자. “에밀리, 아는 게 있나?” 레이븐이 부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나도 몰래 뒤로 빠져나와 아멜리아에게 정보를 얻었지만, 딱히 유의미한 내용은 없었다. 워낙 외부 활동을 안 해서 접점이 없었다던가? 영주성에서 몇 번인가 본 게 전부이며, 그마저도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부단장님……! 뒤에서 막는 동안 얼른 가셔야 합니다!” “아뇨. 정말 혈기사와 조우한 것이라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에요? 누군가 막아야 한다면 제가 맡는 게 합리적일 텐데요. 먼저 배에 타세요.” “…….” “이건 명령입니다.” “…예!” 레이븐의 명을 받은 마법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감동받은 얼굴로 경례를 했다. 굉장히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이 일의 당사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런 의미에서 에르웬 씨, 병단 내 인원이 배에 탈 때까지만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이내 부하들 설득을 끝마친 레이븐이 에르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잠깐 시간을 벌기만 하면 돼요. 그다음에는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빠져나가면 되니까.” “다중 순간이동……?” 얘네 학파는 이 마법을 못 배울 텐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레이븐이 대답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에르웬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운 좋게 기회가 생겨 배웠어요. 이게 있었다면… 그날에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요.” “…….” “부탁드릴게요.” 거듭된 부탁의 말에 에르웬이 나를 힐끗했다. 어떻게 할지 나보고 결정을 하라는 모양인데……. “왜 저 남자를……?” 결정권을 위임하는 듯한 그 모습에 레이븐이 의문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설마 이런 관계까지 흉내를 내고 있을 줄이야…….” 뭐, 그래도 알아서 납득한 듯하며, 시간도 없기에 짧게 하나만 확인했다. “만약 우리가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쩔 거요?” “군법 위반으로 징계를 받겠죠. 앞으로 다시는 왕가의 행사에 끼지 못할 겁니다.” 어, 협박인가? 근데 애초에 내가 물은 건 이게 아닌데……. “당신은 어쩔 건지를 물은 거요. 징계를 받든 말든 우리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혼자라도 갈 생각이오?” “아…….” 레이븐은 잠시 고민하고서 답했다. “혼자서는 무리예요. 아마도 다른 탐험가분들과 함께 가겠죠.” 그래, 안 간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구나. 얘는 어찌된 게 이상한 쪽으로 고집이 세졌네. 하긴, 예전에도 이타적인 성향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 “좋소, 그럼 함께 갑시다.” 결정을 내린 다음부터는 시간 끌 것 없었다. 후방이라고 해봐야 그리 먼 거리도 아니지 않은가. 연신 비명이 울려 퍼지던 후방에 막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흉흉한 오러 앞에 무방비하게 주저앉은 한 마법사였다.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보조 마법 [궤도간섭]을 시전했습니다.」 레이븐은 어중간한 방어 마법으로 오러를 막는 대신, 유틸 마법을 시전해 검의 궤도 자체를 틀어 버렸다. 후우우웅-! 목이 아니라 정수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대검. “읏……!” 이를 본 즉시 앞으로 대시해 패닉 상태에 빠진 마법사를 잡아당겨 위험 상황에서 구출해 냈다. “구, 구해 줘서 고맙… 부, 부단장님?!” “라이몬드, 잘 버텼어요.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탐험가들을 통솔해 본대로 합류하세요. 명령입니다.” “…예!” 이내 마법사가 레이븐의 지시대로 탐험가들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고, 의외로 상대방은 그런 우리를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눈길로. ‘저놈이 혈기사…….’ 일단 방패로 상반신을 가리며 선두에 섰다. 그리고 놈과 마주 보며 쓱 위아래로 탐색했다. 일단, 첫인상은 생각보다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암만 봐도 160 초반대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만만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뭔 놈의 분위기가 저래?’ 골격에서부터 알 수 있는 다부진 체형. 거기에 사람 고유의 기세가 섞이니 작은 몸으로도 뿜어내는 위압감이 상당하다. 그중에 제일인 건 목소리였고. “금의 마도사, 아루아 레이븐.” 쇳소리 같은 걸 넘어, 성대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로 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죽여야 할 표적, 중 하나.” 이내 놈이 그리 말하며 업무적인 태도로 대검을 치켜올렸다. 거, 우리는 아예 신경도 안 쓰지? 혈기사라는 이명처럼 시뻘건 오러를 보며 나는 읊조렸다. “에르웬, [정령화]를.” “어떤 거로 할까요?” 어떤 거긴. 기사 상대로 꺼낼 게 그거 하나밖에 더 있어? “바위.” 대답을 함과 동시에 에르웬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였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은 순간. 「캐릭터의 육신에 대지의 정령이 깃듭니다.」 실시간으로 피부를 타고 대지의 힘이 깃드는 것이 느껴진다. 「화염 속성 받는 피해가 절반 감소합니다.」 「물 속성 받는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중독 면역 보너스.」 「둔기류 무기를 사용 시 파괴 행위에 강한 보정이 추가됩니다.」 「물리 내성 수치가 대폭 상승…….」 「…….」 후, 엘리바바(땅) 모드는 오랜만이네. 「캐릭터의 물리 내성 수치가 350 이상입니다.」 「관통상에 한해서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아무튼, 이쯤이면 [거대화]가 아니어도 2단계 외피는 발동이 됐을 테고……. “무의미한 짓을, 하는군.” 거, 오러 하나 쓸 줄 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어디 탱커 서러워서 살겠나. “죽, 어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늙은 기사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죽기는 누가 죽어. 내가 왜 여기까지 쫄랑 따라왔는데.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한때 내 이명이기도 했던 ‘기사분쇄자’. 드디어 그 진가를 발휘할 날이 왔다. 356화 고립 (3) [진화형 외피]의 1단계 효과는 도검류 내성 50%. 2단계는 관통상 피해를 반이나 줄여준다. 하면, 여기에 효과가 1.5배 증가하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은 실로 간단하다. 도검류 내성 75%. 그리고, 관통상 피해 감소 75%. 참고로 이게 도검류 내성과 합쳐지면, 사실상 기본 상태에서조차 검에 의한 관통상 피해는 면역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른다. 다만, 못내 아쉬운 점은……. ‘리미트만 아니어도 도검 면역 판정을 받는 건데.’ 도검 내성의 한도는 85% 정도다. 따라서 [초월]의 패시브 강화 효과로도 면역 판정까지는 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자면. ‘찌르기에는 면역.’ 그나마 베기 공격은 통하겠지만, 그쪽엔 오우거의 패시브 스킬인 [무쇠가죽]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물리 내성에 [무쇠가죽]이면…….’ 글쎄, 이 정도면 모든 기사들에게 악몽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기에 걱정이 됐을까. 타닷. 혈기사의 발이 지면을 박찬 순간, 누군가 외친다. “피해요……!” 레이븐의 목소리였다. 설득보단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스윽. 그런 생각을 하며 방패로 놈의 찌르기 공격을 막아 낸 찰나. 카칵-! 검끝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 건 오랜만이었을까? “……!” 방패에 가로막힌 오러를 보며 놈이 당황의 감정을 드러냈다. “어, 떻게……?” 어떻게 했기는. 불사자 6단계 각인으로 얻은 [합일]은 무구와 한 몸이 된다는 콘셉트라 [거대화]를 썼을 때 장비에도 적용이 된다. 그리고 이는 [진화형 외피]도 마찬가지……. ‘아, 얘가 궁금한 건 이런 게 아니었으려나?’ 아마 녀석은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부분에 의문을 갖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게 궁금한 정도였겠지. 어떻게 오러를 막아 내었는가. 그것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지만…….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딱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할 터. “내가.” 방패로 놈의 검을 밀어내며 말했다. “너보다 세니까.” 이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후웅-! 그 사실을 놈의 머릿속에 새겨 주기 위해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타닷. 예상대로 녀석은 기민하게 뒤로 물러났다.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도망치는 놈을 잡아오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으니.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초월]과 [폭풍의 눈]의 연계. 휘이이이이익-! 난데없이 불어온 돌풍이 멀어지던 놈의 머리채를 잡고 내가 있는 곳으로. 아니, 정확히는 내 망치가 휘둘러지는 지점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촤아악-! 망치가 닿기 직전에 놈의 몸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변하더니 허공에서 재빠르게 이동해 이를 피해낸다. ‘그래, 너도 오러만 있는 건 아니라 이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망치를 고쳐잡던 때, 레이븐이 옛 버릇을 못 버리고 서둘러 외쳤다. “…혈계진입! 일시적으로 몸이 가속화되며, 공중 이동이 가능하게끔 해주는 4등급 이능이에요!”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보자마자 알았다. 게다가 너무 간략하게 말했잖아. 단순한 가속이 아니라 민첩 수치의 증가다. 그리고……. ‘근력 수치가 감소하는 거랑, 영체화 판정이 돼서 물리 딜이 안 박히는 것도 빼고 말했네.’ 나는 허공에서 날파리처럼 움직이는 핏빛 안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악마분쇄기도 얻었겠다, 이번에는 손맛 좀 느끼지 않을까 싶었건만. ‘저게 있는 이상, 딜은 다른 애들한테 맡기는 게 속 편하겠네.’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다. 탱커의 기본 소양은 팀플레이 아니겠는가.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불, 물, 바람, 땅. 그리고 정령왕과 계약하며 에르웬의 메인 속성이 된 어둠까지. 다섯 가지의 속성이 하나가 된 화살이 날아가 핏빛 안개를 추격한다. 다만……. ‘역시 오러가 사기긴 해.’ 놈이 휘두른 검에 화살들이 일제히 박살 났다. 그러나 놈에게도 방금 전 화살이 위협적이기는 하였을까. 피슈우우웃-! 도망치기 바쁘던 놈이 몸을 돌려 에르웬을 향해 날아든다. 원거리 공격수인 에르웬부터 처리를 해야 한다 여긴 모양인데……. 그게 되겠냐고. 보고 있는 탱커 섭섭하게. “에르웬, 내 뒤로.” 놈이 날아든 순간, 에르웬이 내 뒤로 모습을 숨겼다. 미궁 속에서 탱커가 중요한 이유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딜러들이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벽이 되어 주니까. 후웅-! 에르웬이 내 뒤로 사라졌음에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무의미한 재시도는 아니었다. 아까 오러가 막힌 게 방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놈은 이번엔 방패가 아니라 내가 입은 갑옷의 이음새. 즉, 피부가 드러난 관절부를 노렸다. 아, 물론 그럼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억-! 찌르기가 아닌 베기. 덕분에 완전한 면역은 될 수 없지만, [무쇠가죽]이 발동되며 살갗이 조금 베인 정도로 끝이 났다. 쉽게 말해, 맨몸으로 오러를 버텨 낸 셈. “……!” 그 진귀한 광경에 놈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거, 새삼스럽게 또 놀라기는. 아까 내가 너보다 세다고 한 말을 못 믿었던 건가? “쉐테르 에브온!” 나를 공격하기 위해 잠시간 멈춘 녀석을 향해 레이븐의 저주 마법이 적중했다. 탐사 중 수없이 겪은 마법이라, 무슨 마법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물질화]. 영체류 몬스터에게 적중 시 물리 면역 상태를 강제 해제시키는 8등급 저주 마법. 그래, 이게 팀플레이지. 노아르크에서 지낼 땐 마법사가 없어서 답답한 일이 참 많았는데. 후우우웅! 안개처럼 흐릿하던 놈의 몸이 또렷해지기 무섭게 망치를 내려쳤다. 다만, 민첩 수치가 낮아서인지 이번에도 미스. 후, 한 방만 때리면 다시 못 일어나게 할 자신이 있는데. “돕지.” 이내 아멜리아도 전투에 합류했다. 참고로 이 와중에도 진작에 소환해 둔 분신체로 사방에서 달려드는 시체를 전담해서 처리하는 중이었는데……. “……너희는, 누구지?” 놈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매서운 연격에 쉽사리 반격도 못하는 주제에 이것 하나만큼은 궁금했던 모양. 당연히 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너희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우와아아아아아—!!” 이제 부를 수 없는 조상신의 이름 대신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지르며 연신 망치를 휘둘렀고, 이에 놈도 의문을 삼키고 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 전투가 이어지며 놈은 여러 스킬들을 꺼내며 항전했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수세에 몰렸다. 예정된 결과였다. 그야 [던전앤스톤]은 팀 게임일뿐더러, 개개인으로 봐도 현 멤버에는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일단 에르웬만 봐도 그렇다. “에르웬, 뒤로!” 놈의 표적이 될 때마다 내 뒤에 숨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놈보다 약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타고난 민첩 수치와 정령을 이용한 각종 유틸 능력으로 거리를 벌리면 되니까. 일대일로 붙는다 해도 최소한 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러한 건 아멜리아도 마찬가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심연의 힘]을 시전했습니다.」 혈기사의 오러는 똑같은 오러로 막아 낼 수도 있고, 육체 스펙이 밀리는 것도 아니다. 뭐, 레이븐이야 좀 사정이 다르겠지만……. “아르헨 헤일 툰……. 꺄악!” 얘는 논외다. 마법사인데 기사랑 일대일을 하라는 것부터 사실 말이 안 되는 거니까. “무서워도 내 뒤에 바짝 붙으시오. 놈도 작정하고 당신만 노리는 거 같으니까.” “아, 알겠어요.” 에르웬과 아멜리아야 알아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실력자기에, 레이븐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근데 쟤는 왜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안 튀지?’ 나는 조금씩 위화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필패인 걸 본인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도주하지 않는가. ‘내 MP가 바닥나길 기다리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았다. [철옹성]을 활성화시 초 단위로 MP가 빠져나가긴 하지만, 그래서 일부러 [거대화]도 켜지 않았으니까. MP가 바닥나는 것보다 승부가 나는 게 빠를 터. “다중 순간이동 마법은?” 어딘가 불길했기에, 우리의 마지막 보험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다시하면 5분 정도 더 걸려요.” “다시하면……?” “실은… 아까 영창을 중단해서…….” 압도적으로 흘러가니 필요 없을 줄 알았다는 거구나. “지금부터라도 일단 준비해 놓으시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았어요.” 그렇게 다시금 오더를 넣던 순간이었다. “슈이츠, 마법이다……!” 돌연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리란느 비비앙이 3등급 흑마법 [추락하는 별]을 시전했습니다.」 저 하늘 위에서 떨어진 거대한 흑빛의 구체가 안개를 뚫으며 내리꽂혔다. ‘니미럴.’ 그래, 동료를 기다렸던 거구나. *** 마법이 발동되고, 그 마법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즉시 몸이 바짝 굳었다. 그야 마법 대비 세팅은 아직 못 이뤘으니까. 오러 세팅은 얼추 끝났으나, 반대급부로 항마력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줄어든 상태. 한데 그 와중에. ‘얘도 눈치채는 게 늦었나 보네.’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영창 중이던 레이븐도 이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어떡하겠냐. 몸으로라도 때워 봐야지.’ 찰나와도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판단을 끝냈다. 저 마법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그리고 에르웬과 아멜리아는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는 상황. 다만, 내가 피해 버리면 바로 뒤에 있던 레이븐은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 “…읏!” 레이븐의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은 뒤, 그 위를 덮듯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거대화.’ [초월]까지 사용해가며 육신을 키운 즉시. [아, 아저씨……!] “슈이츠!!” 마법이 내리꽂히며 내 등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시작은 척추가 부서질 듯한 충격이었다. 그다음은 내장이 진탕되는 울림이 뼈와 근육을 타고 전해졌고, 피에는 전류가 흐른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피어났다. 씁, 시체 골렘이 없어져서 그런가? 뭐 이리 아파? “어…….” 참기 힘든 고통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 떻게… [거대화]까지……?” 후, 이제 다 틀렸나? 이럴 줄 알고 [거대화]는 아껴두고 있었는데. 이펙트가 거의 없다시피 한 [휘두르기]와 달리 이건 쓰자마자 딱 티가 나니까. “당신, 설마…….” 거, 지금 그럴 틈이 아니구만.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등을 타고 전해진 충격이 가신 즉시,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커컥. 등 뒤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완전히 개박살난 갑옷의 파편이었다. 또한……. ‘아오, 어지러워.’ 눈앞이 뿌옜다. 안개가 아니라 연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 몸에서 나고 있는. 치이이이이익. 와, 이렇게 온몸이 작살난 게 대체 얼마 만이지? 허리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에도, 관절 마디마디가 안 된다며 비명을 내지른다. 쯧, 엄살만 늘어가지고. ‘겉바속촉 모드는 꽤 오랜만이네.’ 애써 가벼운 생각을 하며 완전히 일어선 뒤, 품에 안은 레이븐을 내려줬다. 그리고 내 뒤로 보냈다. 한데 그제서야 내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을까? “당신… 드, 드, 등이…!” 등이 뭐. 끝까지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아멜리아가 내 옆에 붙더니 대신해서 상태를 살폈다. “상태는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군.” “…그 정도인가?” “그래, 어떻게 멀쩡히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 어, 음……. 그렇다면야. “……됐고, 포션이나 부어 줘라.” “포션이라면… 이미 부었다.” 응? 그런 느낌은 아예 안 들었는데? 아, 뒤쪽에 감각이 완전히 마비가 된 건가? ‘어,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프지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이라 생각하며, 나는 앞을 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저 멀리 우리와 거리를 두고 선 혈기사였다. 4:1로 처맞으며 망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뭐, 들어보면 나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은 거 같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할아버지, 왜 그러니까 혼자 무리하고 그래요! 네크라페토 오빠한테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혈기사 옆에 선, 로브를 입은 여자. 지팡이를 들은 걸 보니 마법사 같은데……. 그럼 방금 마법도 쟤가 쓴 건가? “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그걸 맞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워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나를 보며 해맑게 손을 흔들어 왔다. 이에 에르웬이 부들부들 떨었다. “에르웬, 난 괜찮으니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그리 말하고서도 걱정이 되어 에르웬의 손목을 잡아서 내 옆으로 이끌은 다음에서야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됐고, 에밀리 저 여자는 누구지?” “절규의 마녀, 리란느 비비앙.” 아, 그래 쟤가 걔구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럼 그 옆에 남자는?” 여자 옆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묻자, 아멜리아가 다시금 즉답해 주었다. “등대지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 이 새끼도 유명인이네. 오르큘리스에 몇 없는 지원계 이능술사랬지? “그리고 그 옆에는…….” “됐다, 걔는 누군지 아니까.” 아멜리아의 말을 끊으며 시선을 이동했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 가면 틈새로 놈의 눈이 길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 “자! 이제 좀 숫자가 맞춰졌으려나요? 짝퉁 씨?”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에휴, 이 새끼는 뭔데 안 끼는 데가 없는 거야. 357화 고립 (4) 최악의 범죄 조직 오르큘리스. 그 안에서도 제법 명성이 있는 4인방. 그래서인지 더 기분이 묘하다. 이전과의 변화가 보다 확실하게 체감됐으니까. “슈이츠, 어쩔 거지?” 어쩌긴 뭘 어째. 2층 고블린숲 전투에서는 고작 세 명이었다. 그 세 명을 상대하기 위해 천여 명에 이르는 탐험가들이 목숨을 바치고 싸워야 했다. 하지만……. “싸워 봐야지. 적어도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때처럼 절망적이지는 않다. 아니, 지금 멤버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부터 드는 나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런가? 알겠다.” 아멜리아의 반응을 보니 나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하다. 에르웬은 애초에 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고. “……아벳, 네크라페토.” 시체 수집가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에르웬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의를 줄까도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겁을 집어먹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다. 게다가 당장 달려나가거나 선공을 때리지 않는 걸 보면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당신, 뭐 해요. 마법 영창이 끊겼잖아요.” 멍하니 굳은 레이븐에게 순간이동 마법 영창을 이어가라는 말을 할 정도면, 살아남는 게 먼저라는 내 말도 기억해 주고 있는 듯한데……. 왠지… 대견하네. “아……. 아, 알았어요.” 내 등에 대해 뭐라 말한 것을 끝으로 한참 동안 반응이 없던 레이븐이 정신을 차리고 제 할 일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의혹을 풀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모양. ‘쩝, 역시 눈치를 챈 거겠지?’ 이 일이 추후 어떤 변수로 이어질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저기 시체 수집가 놈도 날 보고 말하지 않았던가. 짝퉁 씨라고. “피시싯, 거기 요정 씨는 너무 뚫어 지레 보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저라도 부담스러운데요.” “…….” “흐음, 그보다 참 놀랐습니다! 이번에 일족에서 돈을 크게 빌렸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런 짝퉁을 만드는 데 썼을 줄이야!” 녀석은 [거대화]를 보고도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는 것까지 연관 짓지 못했다. 하긴, 얘는 내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중일 테니까. 에르웬의 광증이야 워낙 유명하다 보니, 가짜를 만들었다고 하는 쪽이 더 납득이 됐겠지. ‘레이븐, 얘도 그리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몰라. 걸렸으면 걸린 거지. 설마 이번에 몸 바쳐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왕가를 배신할 수 없다며 다 일러바치겠어?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야 상대 쪽에서도 더 시간을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네크라페토 오빠, 저기 저 여자가 영창 중인 거, 다중 순간이동 같은데?” 상대측의 흑마법사가 우리의 보험을 눈치챘다. “피시싯, 그럼 서둘러 시작해야겠군요. 피와 뼈, 그리고 절규의 춤—” “아, 진짜 그 말투 이제 좀 그만하지? 언제부턴가 갑자기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원정을 나갈 때면 항상 가면부터 뒤집어쓰고…….” “저… 비비앙 씨, 다른 사람도 보는데 그러는 건 조금…….” “다른 사람 다 보니까 하지 말라는 거잖아! 어휴, 진짜 안에선 멀쩡한 사람이 왜 밖에만 나오면…….” “……취미 생활입니다. 취미 생활.” 절규의 마녀가 녀석을 타박하며 잠깐 딜레이가 되기는 했으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둘 다 그만하고, 일이나 하지.” 로브를 뒤집어쓴 거구의 사내, 등대지기가 둘의 대화를 끊으며 자연스레 공기가 무거워졌다. 후, 텔레포트 게이지를 꽁으로 채우는 건 이제 끝인가?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남았소?” “…10분은 걸릴 거예요. 아까 술식이 해제되면서 마력이 흩어진 바람에.” “그럼 영창 중에 다른 마법을 쓰는 건?” “가능해요. 고위 마법은 무리겠지만, 필요할 때 돕는 정도라면.” 오케이, 한시름 덜었네. “일단은 마법을 완성하는 데 집중하되, 상황을 봐서 지원해 주시오.” “네, 알겠… 아니, 그보다 왜 당신이 지휘를 하고 있는 거죠?” 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시답지도 않은 의문이군. 지금 그게 중요하오?” 나는 재빠르게 논점을 흐린 뒤, 오더를 마저 이어갔다. “에르웬, 에밀리. 너희 둘도 당장은 지키는 것에 집중해라. 일단 마법이 완성되는 게 먼저니까.” “네.” 의외로 에르웬이 잠깐의 고민도 없이 내 말에 수긍했고, 아멜리아는 한 가지를 되물어왔다. “…차라리 마법을 포기하고 힘을 합쳐 놈들과 싸우는 게 낫지 않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 네 명 말고 다른 놈이 언제 또 올지 모르지 않나.” 지원군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지원군이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는 건 꺼려진다. 승산이야 충분하지만,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 중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도 그렇군.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설명이 됐는지 아멜리아도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음,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이제 없어졌다 해야 하나? [그어어어어어-!] 우리를 포위한 형국의 시체 군단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전투가 시작됐다. *** 우선 기본적인 형국은 간결하다. 사방에서 시체 군단이 달려들고, 우리는 수비 진형으로 이를 막아 낸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그어어어어어-!] 한 방이면 터져 나가던 시체들이 훨씬 위협적으로 변했다는 거겠지. 「리란느 비비앙이 5등급 흑마법 [죽은 자의 분노]를 시전했습니다.」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암흑세례]를 시전했습니다.」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 나도 한때 애용했을 정도로 위력적인 조합이다. 흑마법에는 언데드를 대상으로한 고효율 버프들이 잔뜩 있으니까. 서로 시너지가 잘 난다고 해야 하나?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명계의 등불]을 시전했습니다.」 후, 그래 역시 이것까지 쓰는구나. 하긴 이 조합에 이 마법이 빠질 수 없지. 후우우웅-! 하늘 위에 떠오른 흑빛의 불꽃이 떠오른 순간, 지금까지 열심히 박살 낸 시체들이 재생되며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리란느 비비앙이 [고통의 여왕 에리미안느]를 소환했습니다.」 수천 개의 가시가 박힌 원령이 상공을 날아다니며 비명을 내지른다. 리란느 비비앙이란 흑마법사가 절규의 마녀라는 이명을 얻게 된 시그니처 소환수였다. 그러니까 효과가 분명……. 「캐릭터의 고통 내성 수치가 -200 하락합니다.」 통증 강화. 그리고. 「비명을 들은 대상자가 피해를 입을 시, 소환자의 흑마력이 일정량 회복됩니다.」 마법사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마력 수급. ‘뭐, 그래도 이건 우리가 안 다치고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소수 정예로 싸우는 지금에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소환수는 아니다. 다만……. 「리란느 비비앙이 3등급 흑마법 [부두인형]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를 대상으로한 저주 계열의 마법 명중률이 100%로 상승하며,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시체 군단의 버프에서부터 시그니처 소환수를 뽑는 것까지 기본 준비를 끝마친 절규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써대기 시작했다. 「[상급 부패]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부상이 회복되는 속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무기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근력 수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보이지 않는 위협]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할 확률이 증가…….」 아니, 왜 얘는 나한테만 저주를 거는 건데. 예전에 카루이의 사제였던 엘리사가 떠올라서 PTSD가 올 것만 같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힘내 봐야지. 조상신의 이름 대신 악이라도 써가며. “으아아아아악!” 기합을 내지르며 망치를 휘두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전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니까. 콰직-! 동료를 지키는 것에만 모든 행동을 배분하고, 원거리 공격은 에르웬에게 맡긴다. 다행히 에르웬은 투자한 그 이상의 아웃풋을 보여 주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한 발에 큰 힘을 응축시킨 견제용 저격.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고속연사]를 시전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늘비. 그리고…….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에르웬에게 혈령후라는 이명을 가져다 준 어둠의 정령왕까지. 콰콰콰콰쾅-! 정령왕이 소환된 시간은 5초 안팎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 그 많던 시체 군단 중 반이 소멸됐다. 그래, 말 그대로 소멸이다. 아무리 [명계의 등불]이라고 한들 흔적 없이 사라진 시체들까지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아,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았는데……!” 그 압도적인 폭력에 시체 수집가마저 극찬을 해올 지경. 다만, 정령왕을 소환한 반대급부로 에르웬의 자연력이 바닥났다. 영혼력을 자원으로 쓰는 각종 스킬들은 여전히 쓸 수 있지만, 앞으로 정령은 활용하지는 못한다는 뜻. “…고생했다.” “아니… 에요.” 에르웬이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가 사라진 셈이나, 상황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몰려들던 시체 군단에 큰 공백이 생기며 훨씬 더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뭐, 애석하게도 그 여유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슈이츠, 놈이 온다.”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물러나라.” 전투가 시작되고서도 잠시간 후방에 빠져 있던 혈기사가 등대지기로부터 치유를 받고서 전장에 복귀했다. ‘지원계 이능술사라더니 치유 스킬도 있었구나.’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에르웬에게 [파열]을 맞고 왼팔이 통째로 날아간 게 아까 전인데, 몇 분이나 됐다고 그게 벌써 나아? 그런 부상은 최상급 포션을 써서 붙여도 후유증이 남아서 한참 동안 못 쓰는— 서걱-! 응? “끄윽.” 이번에도 갑옷 이음새를 노려오기에, 대충 몸으로 때우며 역공을 가하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고통 내성이 200이나 하락했으니, 작은 상처에도 커다란 아픔이 느껴지는 건 당연했지만……. “이제, 베이는군.” 아까에 비해 상처가 훨씬 더 깊다. 한데 출혈은 비교적 적으며, 탄 냄새가 난다. 하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오러가 아니구나.’ 놈의 검은 여전히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아까의 오러와는 달랐다. 공기를 타고 전해질 만큼 후끈한 열기. ‘하, 그사이에 불 인챈트를 해왔어?’ 필시 등대지기의 공로일 것이다. 오러에는 멀쩡했지만, 마법에 작살이 난 정보를 통해 혈기사의 평타를 마법 딜로 바꿔 버린 거겠지. ‘거, 똑똑한 새끼.’ 물론 화염 딜로 바뀌었다고 해도 도검류, 그리고 ‘베기’ 공격이라는 고정 값은 변하지 않기에 버티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딱 조금 더 전투 난이도가 오른 정도. ‘이 정도면 버티기는 충분하겠네.’ 예상대로 이후로는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등골이 서늘했던 순간이 없던 건 아니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서로가 이렇다 할 득점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끄, 끝났어요!” 마침내 레이븐이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완성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전투를 끝내고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오케이, 그럼 보험 가입은 끝났고. “쓰지 말고 기다려 보시오.” “네?” ‘네’는 무슨 ‘네’야. 한참 동안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이대로 가면 잠이나 제대로 자겠어? 떠날 땐 떠나도, 적어도 한 명은 데리고 가야지. ‘그럼 누구로 할까.’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첫 타깃이 정해졌다. “오빠들! 쟤네 주문이 완성됐는데요?” 흑마법사는 빗자루를 타고 날고 있으니 패스. “비비앙! 뭔가 좀 해보십쇼! 이대로 보내면 저만 손해가 막심하지 않습니까!!” 시체 수집가 새끼는 민첩 수치도 높은 데다가 무적기까지 있어서 잡기 어려울 테고. 휘이익-! 바로 지근거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중인 혈기사도 마찬가지다. 4:1로 덤빌 때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놈을 무슨 수로 나 혼자 잡아? 밀실에서 일대일로 붙는 게 아닌 이상 어렵다. 그렇기에……. “……언젠가, 또 보겠군.” 이미 우리가 도망치는 게 기정사실인 듯 말하는 혈기사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거, 누가 그냥 간다고 말이라도 했나? ‘그래, 역시 쟤가 좋겠네.’ 등대지기, 이름은 불명. 특징은 노아르크의 몇 없는 지원계 이능술사라는 것. 그리고……. ‘보통 장신구가 비싼데.’ 손가락에 반지 열 개를 꽉 채워서 끼고 있다는 점이 있었다. 358화 고립 (5) 키는 190 초반 정도. 어찌 된 게 혈기사보다 더 전사에 적합한 체격을 지닌 노아르크의 이능술사, 등대지기. 놈을 바라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후… [도약]이 있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놈과 나의 거리는 약 130m. 딱 스킬 두 번만 쓰면 좁힐 수 있는 거리다. 다만……. ‘뭐, 어쩌겠냐, 없어진 걸.’ 애써 아쉬움을 뒤로했다. 그야 이미 사라진 것에 미련을 가져서 어쩌겠는가. 이동기가 없다면, 직접 두 발로 이동하는 수밖에. 그게 바바리안의 정신에도 더욱 걸맞기도 하고. “에르웬, 에밀리 너희 둘은 여기 남아서 자리를 지켜라.” “…아저씨는요?” “잠시 다녀오마.” “다녀오다니, 어디를—.” 어디긴 어디겠어.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오오오오오오!” 역시나 조상신의 이름이 아니라 어딘가 내지르는 맛이 없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레이븐에게 들켰는지 확실하진 않으니까. 시체 수집가 놈이 그랬던 것처럼 예전에 갖고 있던 오해를 더 키웠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타닷. 수비로 일관하며 동료들을 지키는 역할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진형을 이탈하자 곧바로 반응이 나왔다. 그 시작은 혈기사였다. “…….” 혹여나 텔레포트 범위 내에 들어가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던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칵-! 그게 되겠냐고. 오러를 대신하는 불꽃검이야 그냥 방패로 막으면 그만. 타닷. 혈기사를 무시하고서 한 번 더 앞으로 대시한다. 물론 내 민첩 수치로 놈을 떨쳐 내는 것은 어렵기에 등 뒤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으나……. 서걱-! 뭐, 꼭 방패로 막아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몸으로 때워도 조금 깊게 베이는 게 전부고, 사지 절단 같은 중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떨어진 고통 내성 탓에 매우 아프기만 할 뿐. ‘아오, 무슨 칼에 소금이라도 쳐 둔 거 같네.’ 솟구치는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아프다고 할 일을 못 하는 성격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란 말이지. 타닷.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꿋꿋하게 한 번 더 지면을 박찬다. 그리고 그 순간. 혈기사의 입에서 극찬이 터져 나왔다. “이, 무슨……!” 뒤에서 칼침을 놓든 말든 계속해서 앞으로 대시를 해 나가는 내 모습이 인상 깊었던 모양. “멈춰, 라……!” 그간 받았던 찬사들에 비하면 살짝 밋밋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당황의 감정은 나를 제법 흡족하게 해 주었다. 그래, 네가 언제 이런 경우를 겪어 봤겠어. 오러 하나면 탱커고 뭐고 썰려 나갔을 텐데. 서걱-! 놈이 지치지도 않고 또 칼침을 놓았다. 물론 변하는 건 없었다. 살갗이 좀 베이든 말든 계속 앞만 보고 폭주한 기관차처럼 달려 나간다. 그리고……. “……!” 그 과정에서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무. 타닷. 이놈도 슬슬 느껴 볼 차례였다. 오러 덕에 편히 살아가며 여태 깨닫지 못했겠지만. 서걱-! 원래 탱커 앞에서 딜러는 무력한 존재란 것을. 휘이이이이익! 때마침 뒤에서 지원 사격이 가해졌다. 에르웬이 쏜 화살이었다. 그리고……. 푸욱. 그 화살은 녀석의 팔에 적중했다. 우리가 수비만 할 때는 잘만 피하더니, 그렇게까지 나를 어떻게 해 보고 싶었던 걸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 하지만, 놈의 이번 실수는 몹시 결정적이었다. “……!” 벌써 일그러진 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살 한 방 맞은 건 별거 아닐지 몰라도. 뒤에 이어지는 후속타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한때 아멜리아의 분신체를 산산조각 냈던 그 스킬. 콰직-! 그 스킬이 시전되자 혈기사의 팔이 수십 조각으로 나뉘며 투두두둑 떨어졌다. 오케이, 이러면 귀찮은 모기도 사라졌고. 타닷. 팔이 터진 충격으로 나가떨어진 혈기사를 뒤로한 채 뜀박질을 이어 나간다. 물론 머지않아 다음 장애물이 나타났다. “우와, 저 오빠 무슨 오우거 같아!” 수십 미터 상공에서 유유자적하게 나의 돌파를 지켜보던 흑마법사, 리란느 비비앙. 그 여자가 깔깔 웃으며 마법을 쏘아 댄다.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타락하는 불꽃]을 시전했습니다.」 시작은 빗줄기처럼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흑색 불꽃이었다. 하지만 이런 광역 스킬이 대부분 그렇듯 단일 대미지는 떨어지기 마련. 우산처럼 방패로 머리 위를 가리며 지면을 박찬다. 뭐, 덕분에 방패에 손상이야 좀 가해지겠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지금까지 힘든 전투를 겪은 후에 방패가 멀쩡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수리비야 전리품으로 메우면 그만이다. 타닷.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땅을 박차며 튀어 나간다. 그러자 저쪽도 전략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을까.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고통의 비석]을 시전했습니다.」 불꽃 비가 멈추고, 그 대신 새까만 안개가 피어나 사방에서 나를 덮쳐 온다. ‘이펙트를 보니까 그거 같은데…….’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스킬은 항마력으로 버티는 것 외에는 회피 판정이 없다. 그 말인즉슨……. ‘상대도 못 피한다는 거지.’ 안개가 내 몸에 달라붙는 순간, 나는 재빠르게 커맨드를 읊었다. 「캐릭터가 [위험부담]을 시전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얻은 가챠본의 액티브 스킬. 효과는 간단하다. 시전 중인 동안, 받는 피해량이 2배 증가하는 대신 [확률적 보복]으로 반사하는 피해량도 늘어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초월]과 연계하면 재밌는 효과가 추가된다. 「[확률적 보복]으로 인한 피해 면역 효과가 사라지는 대신 발동 확률이 100%로 고정됩니다.」 이름하여 확정 가챠. 후우우웅-! 스킬 발동과 동시에 내 피부 위에 달라붙은 시꺼먼 안개들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고통의 비석]의 효과다. 일시적인 이동 제한. 그리고……. 푸슉-! 회피가 불가능한 공격. “우아아아아아아아!” 진짜 따가워 죽겠네. 콰지직-! 기합을 내지르며 2초 정도 버티자 딱딱하게 굳은 안개들이 도자기처럼 깨져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안쪽 표면에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시들이 가득했다. 하, 이건 뭐, 중세 고문 기구도 아니고. 그래도 나만 당하는 건 아니라 다행인가? 「일반적인 행운.」 피격 판정이 끝나며 [확률적 보복]이 발동됐다. 드르륵, 드륵. 뼈관절 소리를 내며 내 옆에서 몸을 일으키는 스켈레톤. 대성공 판정은 아닌지, 호쾌한 사운드는 없었다. 하지만…….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15%가 아닌 30%. 게다가 내가 받은 피해량도 두 배 늘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통상적 반사 딜의 네 배를 돌려줄 수 있게 된 셈. 뭐, 사실 그것도 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만……. “어, 어……?!” 상대는 종이 몸의 대명사인 마법사잖아? 이 정도 교환비는 감안하는 게 옳겠지. “이, 이게 뭐야……!” 스켈레톤이 하늘 위로 손을 뻗은 즉시, 새까만 안개가 빗자루 탄 마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푸슉-! 섬뜩한 소리가 여기 아래까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거, 목청도 좋아라. 저래서 절규의 마녀였던 건가? 타닷. 온몸에 크고 작은 구멍이 생긴 몸을 이끌고서 다시금 이동을 재개했다. 확정 딜이 들어가는 마법이라 그런지, 2배 증가한 대미지가 들어왔음에도 생각처럼 상처가 깊지는 않다. 아프기는 진짜 더럽게 아팠는데. ‘그 탓인지 저쪽도 죽진 않은 거 같고.’ 마법이 풀리자마자 비명을 내지르면서 추락하던 비비앙은 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부유 마법으로 겨우 추락을 면했다. ‘보니까 상처도 별로 안 깊었지…….’ 쩝, 30%짜리 딜이어도 마법사 정도는 원콤이 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마나 쉴드 같은 거로 어느 정도 대미지를 줄인 건가?’ 못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으나……. “끄으으…….” 그래도 일단 목적은 달성이다. 아직도 엄살을 부리며 몸을 배배 꼬는 걸 보면, 당분간 내게 마법을 쏟아 낼 기력도, 정신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흑마법사까지 해결하고 신속하게 후방과 거리를 좁히던 차였다. [그어어어어-!] 시체 수집가 놈이 추가로 아공간에서 꺼낸 시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숫자는 일곱. 날 저지할 목적으로 탱킹용 언데드를 꺼낸 건지 대형 몬스터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몸집이 크다. [거대화] 중에 이렇게 목을 들어 올려다볼 정도면……. ‘한 7m쯤 되려나?’ [도약]이 있었으면 쉬웠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어디 내가 그냥 탱커이던가. 벽이 앞을 가로막아서 문제라고?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그 벽을 없애면 그만이니까. 「타격 범위가 3배 증가합니다.」 여의봉처럼 길게 늘어난 망치로 무려 7m의 신장을 가진 시체 거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탱커용 언데드인 듯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게, [휘두르기]의 계수는 근력 수치다. 한데 거기에 악마분쇄기 효과로 위력이 500% 증가. 심지어 내려치기인지라 방어구 관통 50%까지 붙었으니……. 콰콰아아아아앙-! 이걸 소환수 따위가 어떻게 버텨? 피슈우우우욱-! 망치질 한 방에 썩은 고깃덩이가 된 시체 거인이 대형 분수처럼 핏물을 쏟아 냈다. 후, 얘는 독이 좀 센데? 「캐릭터가 중독(상)되었습니다.」 「독 내성 수치가 100 이상입니다.」 「중독 등급이 ‘하’ 등급으로 조정됩니다.」 독 기운이 피부를 타고 내부로 스며들며 통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멈출 정도는 아니다. 그것도 목표물이 코앞에 다다른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제야 다 왔네.’ 묵사발 낸 시체 거인의 빈자리를 얼른 지나친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타깃과의 거리는 약 30m. 다만……. ‘뭐야,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앞에 나와 있어.’ 시체 거인을 소환하려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걸까? 약 5m 거리를 두고서 시체 수집가 놈이 보인다. 척 보기에도 아주 당황한 눈치인데……. 이걸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지.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타격 범위가 3배 증가합니다.」 더 볼 것도 없이 놈을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놈은 피하는 대신 방어를 택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 스킬을 사용하며. 「아벳 네크라페토가 [뼈갑옷]을 시전했습니다.」 후, 예전에는 몇 번이나 내려쳐야 깨졌었는데. 이번에는 어떠려나? 그 결과는 곧 알 수 있었다. 콰지직-! 시전자의 몸 위를 둘러싼 껍질은 고작 망치 한 방에 벗겨지며 속살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벳 네크라페토가 [찰나의 불멸]을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놈의 몸이 불길에 휩싸이며 뼈로 변한다. 3등급 정수로, 정신 및 이능 수치가 육체 수치로 전환되며 1분간 피해 면역 상태가 되는 최상급 무적기. ‘이야, 한 방에 무적기까지 뺄 줄은 몰랐는데.’ 저게 터진 이상 헛된 일에 힘을 쓸 이유가 없기에 놈의 한쪽 팔을 잡아 저 멀리 던졌다. 그리고……. 타닷-! [도약]을 하듯 위로 높이 점프했다. 놈이 주변에 박아 놓은 말뚝들이 디펜스 게임의 포탑처럼 각종 이능들을 쏘아 대는 게 보였다. 4등급 변환계 스킬 [숭고한 우상]. 등대지기의 코어 스킬로 효과는 이렇다. 토템을 바닥에 꽂는 것으로 소지한 이능을 변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단일 버프나 저주가 광범위한 오오라의 형태로 바뀌는 식인데……. ‘다급하긴 했나 보네.’ 토템들이 불길을 토해 내고, 마력탄을 쏘아 내는 걸 보니 [가속]이나 [영혼재생] 같은 지원 오오라 모드를 끄고 급히 공격용으로 전환한 듯하다. “…괴물 같은 놈.” 꿋꿋하게 다 처맞아 가면서 여기까지 온 나를 보면서도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하긴, 토템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위험하긴 하겠지. 이내 놈이 결사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와라!” 뭐래, 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구만.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이쯤 되면 사정거리에 들어온 듯했기에, 그랩기를 사용했다. 솨아아아아아아-! 나를 향해 몰아치는 돌풍. 그리고……. “악, 아아아악!” 그 돌풍에 휘말려 날아오는 녀석의 몸뚱이. 평소에 말할 땐 시크하더니, 급하니까 너도 그런 비명을 내지르는구나. 꽈악. 방패를 걸친 손으로 녀석의 모가지를 공중에서 잡아챘다. 녀석이 발버둥 쳤으나 손끝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얌전해졌다. 진작 그럴 것이지. 쿠웅. 이내 바닥에 착지한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반지들.” “……?” “비쌌으면 좋겠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 콰직-! 녀석의 모가지를 잡은 채 이마를 녀석의 얼굴에 들이박았다. 망치로 내려치기에는 각도가 좋지 않았을뿐더러, 가까이서 보니까 목걸이도 차고 있었거든. 망치로 쳤다간 다 짓뭉개진다. “…….” 한 번 더 박치기를 하려는데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죽었나? 아니면 기절? 전자였으면 했기에, 그냥 두 번 정도 더 들이박았다. 콰직, 콰직-! 오우, 징그러워. 사람 눈이 어떻게……. ‘…아무튼, 얘는 이만하면 됐겠고. 자, 그럼 어떡하지?’ 첫 목표는 이뤘으니, 다시금 고민을 해 볼 차례다. ‘등대지기도 잡았겠다, 4:3으로 싸우면 나머지도 다 조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대로 복귀해서 텔레포트를 타느냐. 아니면, 마저 싸워서 놈들을 조지느냐.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쿠웅, 쿠웅-! 이 순간에도 시체 거인들이 나를 향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빠지자.’ 여기까지 오며 수없이 칼침을 맞았으며, 마법에 당하기도 했고, 독에도 중독됐다. 그런 문제는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다. 하지만……. ‘MP가 너무 간당간당해.’ 오러를 상대하느라 [철옹성]을 계속 유지했고, 지금은 [거대화]까지 썼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스킬들을 [초월]까지 연계해 가며 난사해 댔다. MP가 바닥나면 오러도 막기 어려워지고, 그만큼 혈기사에게서 동료를 지키는 일도 힘들어질 터. ‘거기에 또 지원군이라도 오면 큰일이니까.’ 이내 결정을 끝마친 나는 전리품을 한 손에 쥔 채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한데 어찌된 일일까. ‘왜 아무도 안 덤벼?’ 나를 향해 달려드는 듯하던 시체 거인은 한쪽을 방어하듯 벽처럼 늘어섰으며, 마법도 날아오지 않는다. “…네크라페토! 대체 뭐 해요! 막지 않고! 어차피 죽지도 않잖아요!” 소리치는 걸 보니 저쪽도 슬슬 정신을 차린 거 같은데……. 왜지?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뼈다귀 상태인 시체 수집가를 대신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의 언데드 하나가 소리쳤다. [막고 싶으면 비비앙 씨가 하면 되지 않습니까! 보니까 마법은 잘 통하는 거 같던데!] “뭐……? 아니, 아까 못 봤어요? 마법 튕겨 내는 거!” 이제 보니 전부 한 번씩 당한 게 있기에 섣불리 나를 건들지 못하는 거였다. 하긴, 나에 대한 정보가 없을 테니까. 등대지기처럼 내게 붙잡혀 머리가 터지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렇게 허허벌판을 지나치듯 뛰어가던 때였다. “뭐야, 너는. 덤비려고?” 외팔이 모드를 활성화한 혈기사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툭 하고 물어 왔다. “…이름.” 응? “이름이, 뭐지?” 뭘 하려는가 했더니 고작 묻는 게 이름?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덤빌 거면 덤비고, 말거면 꺼져라. 이제 돌아가서 밥 먹어야 되니까.” “…….” “거, 입에 꿀이라도 물었나.” 그리 말하며 앞으로 뛰기 시작하자, 혈기사가 몸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의외로 혈기사는 뒤에서 칼침을 놓거나 하지도 않고 나를 보내 줬다. 아까의 무력함을 통해 학습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칼질을 해 대도 무시하고 뛰는 걸 지가 무슨 수로 막겠어? 타다다닷. 이내 막판 스퍼트를 올리자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금방이라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듯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법사는 멍하니 굳은 상태였다. “뭐 하시오, 어서 출발하지 않고?” 내가 다그치자 레이븐이 고개 들어 나를 보았다. 어째선지 눈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의문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니, 에르웬이나 아멜리아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 “…….” “…….” 거, 전리품도 챙겨서 돌아왔건만. 마치 괴물이라도 바라보듯이. 359화 심문 (1) 절규의 마녀, 리란느 비비앙.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온 그녀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소리쳤다. “네크라페토! 미쳤어요? 왜 그냥 보낸 거예요!” 히스테릭한 음성에 이제 막 뼈에 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내가 연상인데 말이죠…….” “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말이나 해 봐요. 왜 저 연놈들을 그냥 보냈는지! 이걸 단장 오빠가 알면 가만 안 둘 걸요!” 비비앙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검지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빛을 잃고 흐릿해진 마법진만이 남아 있었다. 이에 사내가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 “허, 왜 내가 혼나야 합니까? 네크로맨서한테 근접전을 하라는 것부터가 무리한 요구인 데다가, 지켜본 건 비비앙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예상보다 더 예민한 반응에 쏘아붙이던 여인도 움찔했다. 그러나 꼭 따지고 싶던 부분이 있었을까. “…하지만 명계의 부름도 쓰지 않았잖아요!” 비비앙은 시체 수집가의 핵심 장비인 그것을 붙잡고 늘어졌다. 다만……. “제가 그걸 왜 써야 합니까?” 사내는 기가 찬다는 듯 반응할 뿐이었다. “그야 그걸 썼으면 등대지기가 잡혀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블 넘버스 중에서도 상위 넘버에 속하는 명계의 지팡이를 썼다면, 그 전차처럼 달려오던 남자를 전장에서 이탈 시킬 수 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걸 쓰면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정보도 없는 자에게 쓰라고요? 그냥 내버려 두면 나는 100%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도 있었잖아요.” “그게 밖에 알려지면 왕가 쪽에서 내 공략법을 미리 만들어 둘 텐데, 누구 좋으라고요? 만약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 그 능력에 기대야 했을 때, 이번 일 때문에 발목이 잡히면 그땐 비비앙이 날 구해 줄 겁니까? 예?” “…….” “제발, 선은 지키십시오. 당신이 마법을 쓰지 않은 이유도 나랑 별반 다르지도 않을 텐데.” 사내가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하자, 비비앙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모든 말 하나하나가 정곡이었으니까. 사실 그녀가 아까 그 괴물 같은 놈을 끈질기게 막지 않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마법을 썼다가 그대로 돌려받았기에, 더 큰 마법을 사용하기가 껄끄러웠다. “아, 짜증 나…….” 결국 패배의 책임은 모두에게 있었다. 한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만큼 고상한 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료가 위험한 것보다, 자신의 손익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 “…다들, 괜찮은가.” 비비앙이 입술을 짓무르며 노기를 참아내고 있던 때, 혈기사가 돌아와 무리에 합류했다. 팔 한쪽이 날아간 노구는 그들 셋 중에 가장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잘했으면 괜찮았겠죠.” 비비앙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타깃을 그로 바꾸었다. “……?” “그 괴물 새끼를 막을 게 아니라, 똑같이 후방을 노렸어야죠!” 그냥 트집을 잡으려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막지도 못할 거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그 남자를 막는 시간에 차라리 적을 노렸다면 지금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각종 공격들을 맨몸으로 받아 내며 동료를 지키던 그 괴물놈이 진형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벗어난 상황 아니었던가. “칠강 중 하나인 혈령후를 죽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고, 금의 마법사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이번 기습의 목표 중 하나일뿐더러, 그 여자가 죽으면 순간이동 마법은 무력화됐을 테니까.” 혈기사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그런 직설적인 말을 옆에서 듣던 사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와, 당신… 여기서 할배 탓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쓰레기 같은 여자였군요? 우리를 지켜 주려 했던 분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왜, 혼잣말도 못해요? 틀린 말도 아니고.” “뭐, 그렇긴 하긴 합니다마는. 피시싯.” 이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혈기사를 힐끗했다. 순식간에 승냥이들의 먹잇감이 된 셈이나, 의외로 노구의 기사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 “어서, 단장에게, 연락해라. 금의 마법사를, 놓쳤, 다고.” “…할아버지가 하면 안 돼요?” 비비앙의 물음에 혈기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결국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목표물을 놓쳤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오르큘리스 내에서도 귀한 자원으로 취급받던 등대지기가 당했다. 그럼에도 놈들이 순간이동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그야 나섰다가는 나만 손해를 볼 거 같아서. “…….” 그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망설이고 있던 차에 시체 수집가가 그녀를 보챘다. “마음은 알겠지만, 우선 연락부터 하십시오. 금의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꼭 전해야 할 정보가 있으니까.” “…그 괴물 같은 놈을 말하는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사내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전하기나 하십시오. 어째서 여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 여자를 찾았다고.” ***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공간 마법 [다중 순간이동]을 시전했습니다.」 발동된 마법진이 뿌려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철창이었다. “가만 있어요. 잘못 온 건 아니니까.” “…무슨 소리요?” “각 군함마다 있는 설비예요. 침입자를 대비해 공간 이동 계열 능력이 사용되면 무조건 이쪽으로 유도를 하죠.” 아, 그런 게 설치되어 있었구나. 근데 텔포 유도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효과인 거 같은데……. “제3 마도병단의 부단장, 아루아 레이븐입니다. 여긴 제 신분증이고요. 오르큘리스의 범죄자들과 전투 중에 순간이동 마법을 통해 복귀했습니다.” 이내 레이븐은 철창 밖에 대기 중이던 병사에게 신분을 밝혔고, 머지않아 신분 확인이 끝나자 철창이 열렸다. 하지만……. 처커컹-! 뭐야, 왜 자기 혼자 나가고 닫는 건데. “…무슨 짓이지?” 경어를 쓸 정신머리도 없이 되묻자, 레이븐은 내 눈을 피하며 병사에게 말했다. “이들은 한동안 이곳에 둘 테니, 잘 감시하세요.” “예.” 어……. 이런 전개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던 때, 옆에 있던 에르웬이 철창에 달라붙어 창살을 흔들었다. “…죽여 버리겠어!!” 또 습관성으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고 보기에는 상황이 좀 그랬다. 나도 통제력이 사라질 거 같거든. 왠지 길드 지하실이 떠올라서 당장에 철창을 부숴 버리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심정은 알겠지만, 얌전히 계셔주세요. 어차피 힘으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뭐? “No. 399 침묵의 우리. 그 안에서는 이능이 봉인되는 건 물론, 마법도 신성력도 오러도 쓸 수 없어요.” 하, 어쩐지 등골이 싸하더라니. 커맨드를 읊어도 스킬이 나가지 않는 걸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철창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여기… 이건 포션입니다. 상처는 치료해 두시길.” 이내 레이븐은 철창 사이로 포션 몇 병을 넘겨준 뒤 병사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서 떠났다. 중요한 것만 정리하자면 이랬다. 정중하게 대할 것.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철창을 열지는 말 것. 그리고 적들이 이곳까지 침입한 위급한 상황일 시에는 우리가 대처할 수 있도록 풀어 줄 것. “…당했군. 테르시아, 너도 헛된 힘 빼지 말고 이리 와라.” “뭐? 지금 저 여자가 우리를 여기에 가뒀는데, 대체 어떻게—!” “그럼 달리 어쩔 거지?” “…….” “에르웬, 저 말이 맞다. 일단 침착하고 이리 와라.” “………네.” 나도 서둘러 멘탈을 회복하고 말하자, 에르웬도 고집을 꺾고 내 옆으로 향했다. “우선… 포션부터 쓰는 게 좋겠군.” 자연 재생만으로 나으려면 한참 걸릴 듯했기에 아멜리아와 에르웬의 도움을 받아 온몸에 포션부터 뿌리며 출혈을 막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괜찮나?” “…그래, 이제는 익숙하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뒈질 거 같았다. 이제 내게 남은 고통 내성은 바이욘의 정수에 붙어 있던 ‘30’이 전부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상처는 치료해야지. “저기… 물 좀 주시겠어요?” “아… 아, 알겠소!” 이내 에르웬이 병사에게 부탁하듯 말하자 병사가 헐레벌떡 움직이며 물을 가져왔다. 정중하게 대하라던 레이븐의 당부도 당부지만, 아무래도 에르웬의 신분이 있다 보니 대하기가 어려웠던 모양. “저기… 괜찮소이까?” 아, 그냥 내가 걱정됐던 거구나. “피보다 땀이 더 많이 흐르는 거 같던데…….” “괜찮으니, 걱정 마시오.” 포션을 먹을 때면 늘 이래 왔다. 착한 마음씨의 병사에게 받은 물을 한 번에 쭉 들이켠 뒤, 입구 반대편에 위치한 철창에 바짝 붙었다. 그야 이제 나눌 대화는 비밀적인 것이니까. “아무튼, 치료도 끝났으니 얘기나 하지. 둘 다 이리 와라. 목소리도 낮추고.” “당신, 너무 얼굴이 가까운 거 같은데?” “뭐가 문제지?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다마는.” “…그, 그럼 나도…….” “흐음, 요정족은 청력이 좋을 텐데?” “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그게.”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 어휴, 얘네는 또 왜 이래. “둘 다 그만해라.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까.” “네에…….”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서둘러 정리하고서 대화를 시작했다. 우선 가장 먼저 논의를 해야 할 부분은 이거였다. “너희는 레이븐이 왜 저런 짓을 했을 거라 생각하나?” 어째서 레이븐이 우리를 이곳에 가두었는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쉽게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너의 정체를 깨달은 거겠지.” “네, 역시 그것밖에 없어요. 그 여자는 아저씨를 악령이라고 알고 있을 테니까……. 까드득, 몇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은 주제에, 은혜도 모르고.” 얘는 이제 뭐 피에서 살기가 흐르나? 알 수 없지만 에르웬의 치아 상태가 걱정됐기에 그다음으로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입 밖으로 꺼냈다. “에밀리, 네 정체를 알아서 그랬을 확률은?” “글쎄,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겠군. 그때 그 섬에는 그 여자도 있었으니까.” 레이븐과 아멜리아는 면식이 있다. 파루네섬에서 함께 싸웠고, 아멜리아의 [심연의 힘]이나 [자가복제], [수라각]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근데 거기에 단검을 주무기로 쓴다? 암만 2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얼굴을 가렸어도 레이븐이라면 눈치를 챘을 터. “확실히… 이 여자 때문에 저희가 그쪽의 세작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중일 수도 있겠네요. 하,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잠깐, 뭘 알았다는 거지?” “뭐겠어? 당신이 아저씨 발목만 잡을 거라는 거지.” “풋, 자기 정신머리 하나 못 챙기는 게 말은 잘하는군.” “뭐……?” 아니, 왜 또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건데. 나는 서둘러 대화 화제를 옮겼다. “됐고, 에밀리 너는 괜찮은 거냐? 노아르크 쪽에서도 너를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건……. 아마 알아봤겠지. 혈기사야 워낙 접점이 없었으니 나를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시체 수집가 그놈은 나를 알아봤을 거다.” 쩝, 왠지 미안하게 됐네. 신분 세탁을 한 뒤에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지냈다고 했었는데. 얘는 이제 왕가도 노아르크도 적이 되었구나.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각오한 일이니. 네게 피해를 끼칠 정도가 되면 떠나겠다.”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있나 보네요?” “너와 다르게 이성이 있는 거겠지.” 아오, 또또또. 지금 잘못하면 우리 셋 다 잘못될 수 있구만. 아니, 에르웬 얘는 최악의 경우에도 괜찮으려나? 나는 왕가의 제거 대상으로, 아멜리아는 노아르크 세작으로 몰릴 수 있지만 얘는 아니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요정족에서 비호를 할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떡할 거지?” 아멜리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 답했다. “글쎄, 우선 기다리는 수밖에.” 철창에 갇힌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이후 레이븐이 돌아오면 그때 상황을 봐가며 알맞게 대응해 가는 게 최선이다. 따라서……. “아저씨?” 나는 대화를 마무리 짓고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병사에게 물과 함께 받은 천으로 얼굴을 가려둔 시체로 다가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있는 게 낫겠지. “…뭐 하려는 거냐?” “전리품 확인.” “…뭐? 지금 상황에?” 거, 그럼 달리할 수 있는 거라도 있나?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쪼그려 앉아 본격적으로 시체 루팅을 시작했다. ‘반지 열 개, 목걸이 하나, 지팡이는 아까 그랩 할 때 떨구는 바람에 못 주워 왔고…….’ 아공간은 나중에 철창에서 나가면 그때나 열어 볼 수 있을 듯했다. 이 철창 안에선 마도구가 작동을 안 하니까. ‘이야, 그래도 대체 이게 얼마야?’ 상황이 어려울수록 작은 것에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아야 하는 법. 정확히 얼마만큼의 소득을 올렸는지는 추산할 수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걸 다 팔면 빚은 얼추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문제는 멀쩡히 이걸 갖고 나갈 수 있겠냐는 것이겠지만. 360화 심문 (2) 계단을 타고 갑판으로 올라온 레이븐은 서둘러 함선의 장교실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에는 이미 먼저 보낸 부보관은 물론, 병단 내의 소대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레이븐 부단장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복귀가 늦어져 저희끼리라도 지원대를 꾸리려 하는 중이었는—” “보고를 올려야 하니 모두 자리를 비워 주세요.” “…예? 아아, 예!” 급해 보이는 레이븐의 명령에 모여 있던 간부들도 의문을 버리고서 명령에 따랐다. 불과 몇 초 만에 싹 비워진 장교실. “…….” 레이븐은 복잡한 얼굴로 선실 내에 비치된 군용 메시지 스톤에 손을 올렸다. “니아 라프도니아. 제3 마도병단의 부단장 아루아 레이븐입니다. 부대원들의 퇴로 확보를 위해 이동이 지체되어 이제 복귀했습니다. 현 전황에 대해 공유 부탁드립니다.” [니아 라프도니아. 제3 군단의 참모장 엘토라 테르세리온이오. 혈기사를 막으러 갔다는 얘기는 듣고 걱정했네마는 무사해서 다행이구려.] “…실례지만, 어째서 군단장님이 아니라 참모장님께서 연락을……?” [전시에 최고 명령권자가 부재 시, 그 자리를 이어 받는 제2 명령권자가 나이기 때문이오.] “부재… 말씀이십니까?” [라므레온드 소백작님께서 전사하셨소. 전 부대에 집결 명령을 내리고 이동하는 중에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를 주축으로 범죄자 무리들에게 기습을 당하셨지.] “그럴 수가…….” [전 병력이 호수 위로 퇴각한 뒤로는 습격이 멈추었으나, 추후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 별도의 지시가 하달될 때까지 그대는 부대를 통솔해 주변을 경계하시오.] 이후로는 현재 파악된 피해 규모와 이번 습격을 자행한 적들에 대한 정보들이 짧고 명료하게 공유가 됐다. 그리고……. [이 정도면 알아야 할 것은 다 전달한 듯하군. 이제 그대가 해보시오. 정말로 혈기사였소?] 상관의 물음에 레이븐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군더더기 없이 정리해 보고를 올렸다. 혈기사를 막기 위해 남은 것. 몰아붙이던 중 적들의 지원군이 가세한 것. 그리고 전투 중 ‘등대지기’를 살해하고서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통해 후퇴한 것까지. 과정은 몇 마디로 생략한 채 정말로 간략하게 결과만을 보고했다. 단순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말에 어색하게 입을 다물 일은 없었을 테니까. [등대지기를 처리했다라… 듣던 중에 실로 반가운 소식이군. 잘해주었소. 혈령후에게도 이후 전공에 대한 포상이 있을 거라 전달해 주고.] 상관은 이번 전공이 혈령후의 기여로 이루어졌다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리헨 슈이츠. 악명 높은 혈기사에게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던 것은 그 남자 덕분이었으며, 마지막에 등대지기를 처치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럼 이만 끊으리다.] 레이븐은 마지막까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전투 중에 혈령후만큼이나 활약한 그 여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 파루네섬에서 만났던 노아르크 출신의 그 여자인 게 분명함에도.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췄다.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고는 해도,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 “하아…….” 언제나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나갔던 그녀는 깊은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리헨 슈이츠…….’ 그런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 남자가 에르웬이 그 사람과 닮은 사람을 구해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대화]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닮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에르웬이 ‘아저씨’라 부르던 것도 그게 이유였던 것이라면. 정말로, 사실 그 사람이 살아 있었던 거라면. “……모르겠어.” 혼란스럽다. 그 무엇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정말 그 사람인가 싶다가도, 그저 닮은 점이 많은 사람인가도 싶다. 명백하게 다른 점들도 많았으니까. ‘키와 얼굴.’ 그리고. [당신… 드, 드, 등이……!] 자기도 모르게 상처로 손을 뻗었을 때, 만져진 피는 뜨겁고 끈적했을 뿐이었다. 그 사람 피라면 따가웠어야 했을 터인데. 또한, 차이점은 또 있다. ‘…너무 강해.’ 혈기사의 오러를 막는 몸뚱이. 마법을 튕겨내던 특이한 능력. 거기에 바람을 이용해 적을 끌어당기던 이능까지. 예전의 얀델이었다면 저런 강적들을 상대로 이런 신위를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으니까.’ 새 정수를 먹고 더 강해졌을 가능성도 있겠지. 칠강의 일원인 에르웬이나 본인만 하더라도 2년간 많이 바뀌었으니까. ‘그렇다면…….’ 단기간에 주입된 수많은 정보들을 정리할수록 레이븐은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자신을 발견했다. 결정적인 것은 아멜리아의 존재였다. 결국 무엇도 밝혀내지 못했으나, 그 사람의 죽음에 납득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던 건 사실이니까. 한데, 함께 실종됐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다? 이는 그 사람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다만, 문제는……. ‘정말 얀델 씨인 거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다. 이미 왕가에서 그렇게 정식으로 공표를 하였으며, 공표를 하기 전에도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야 그 표정을 보고 말았으니까. [얀델 씨가 악령이란 소문이 날 거라 하셨는데, 그거… 그냥 소문이 아닌 거죠?] 동료들 중에서 얀델과 가장 오래되고 깊은 관계던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떨리는 그 눈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따각, 따각. 레이븐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심리적으로 몰렸을 때나 나오는 버릇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자기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얀델이길 바라면서도, 아니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확인해 봐야지.” 이내 레이븐은 결심을 끝마쳤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두렵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도망쳐선 안 된다는 것을. *** No. 399 침묵의 우리. 일정 반경 내로 공간 이동 계열 능력이 사용됐을 때 발동되는 트랩형 넘버스 아이템. “그 여자… 영영 안 오는 건 아니겠죠?” “올 거다. 그것도 아마 이제 곧.” “어떻게 확신하세요?” “이 철창이 언제까지고 유지되는 건 아니니까.” 정확히는 한 번 발동되면 2시간 동안 지속이 됐다. 그런 주제에 쿨타임은 엄청나게 길었고. ‘게다가 가둬 둔 상태로 패는 것도 불가능하지.’ 이는 침묵의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오직 ‘구속’만을 위한 아이템이라 해야 하나? 이 아이템이 발동되면 외부에서의 공격도 전부 차단이 된다. 따라서 보통은 이걸 써서 가둔 다음에 포위 진형을 펼치고 해제가 됐을 때 다구리를 놓는 식으로 연계를 하는데……. 툭. 복도 너머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간수 역할을 맡은 병사가 그 방향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 “니아 라프도니아!” 그래, 온 거구나. “잘 감시해 줘서 고마워요. 이들과 나눌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아,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두 비밀로 해주시고요.” “예!” 약 1시간 만에 돌아온 레이븐은 혼자였고, 병사까지 물리며 듣는 귀도 없앴다. 긍정적인 징조이긴 했으나, 안심하긴 일렀다. 철창 앞에 멈춰선 채로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던 레이븐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우릴 어쩔 셈이오?” “아직도 그런 말투를 쓸 생각이에요?” 허, 초장부터 세게 나오는구만? 그냥 이쯤에서 정체를 밝히고 도와달라고 설득을 해보는 게 좋으려나?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레이븐이 말을 이었다. “…투구, 벗어봐요.” 어차피 얼굴이야 한 번 깠었기에, 순순히 등대지기의 핏자국이 묻은 투구를 벗었다. 의외로 레이븐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입고 있는 갑옷도요.” 허허, 나를 뭐로 보고. 남녀칠세부동석이랬거늘. “부당한 성적 요구에는 따를 수 없소. 만약 내가 여자였어도 그러한 요구를—”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논리적으로 갑옷을 벗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으나 레이븐은 정색하며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좀 무서운데……. “아직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보고하지 않았어요. 거기 옆에 레인웨일즈 씨에 대해서도요. 하지만, 제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 “벗지.” “말이… 짧아졌네요?” 뭐래, 어차피 이미 빠져나갈 방법이 없구만. 나는 길게 대꾸하는 대신 등 뒤가 작살 난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 “……!” 그때 처음으로 레이븐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어딘가 동요한 듯한 그 시선은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내 문신 위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후, 차라리 이렇게 되니까 속이 시원하네. “오랜만이다, 레이븐.” “…….” “왜 대충 예상했던 거 아니었나?” 내 물음에 레이븐이 입술을 짓무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아니길 바랐어요.” “내가 악령이라서?” “그래요. 차라리 좋은 추억으로만 남았다면 좋았을 것을…….” 레이븐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이에 나 역시 심장이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너는 내가 악령이라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인 거구나. “잠깐만!” “……?” “레이븐, 내가 악령이라는 건 오해다.” 나는 서둘러 설득 과정으로 들어섰다. “오해?” “그래, 나는 악령이 아니다.” “그럼 그 꼴은 뭔데요?” 나를 보며 레이븐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보아하니, 아이나르 씨가 먹었던 ‘본나이트’ 같은 정수를 먹어서 키를 줄인 거 같은데……. 악령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 그 물음이 올 줄 알았지. “내가 돌아왔을 땐 이미 왕가에서 그런 공표를 한 후였다. 알아보니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더군. 그래서 일단 당분간 정체를 숨기고 있던 거다.” “……그 공표에 수상한 점이 많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당분간? 그리고 돌아왔다니요? 그건 대체 무슨 소리죠?” 오케이, 호기심을 끌어내는 건 성공한 거 같네. “긴 이야기다. 기록의 파편석이라는 게 있는데—” “잠깐!”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려던 차, 레이븐이 끼어들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어요. 이거면 충분하니까.” 그리 말하는 레이븐의 손에는 익숙한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No.7234 어긋난 신뢰. 발동 시 반경 10m 내에서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하는 횟수 소모형 아이템. “얀델 씨라면 이게 뭔지 알겠죠? 예전에 도플갱어 숲에서 파르테이안 씨에게 받았던 물건이에요. 전에 군 예산이 남아서 소모된 횟수를 채워 놨었죠.” 어휴, 준비가 철저하기도 해라. 후우우웅-! 그사이 전원 버튼까지 켰는지, 나침반 크기의 원판에 박힌 시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 그럼 이제 말해 봐요. 그게 정말 오해인가요?” 레이븐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 ‘…잘 되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제법 긴장이 됐다. 아우릴 가비스의 ‘선물’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실제로 확인해 본 건 아니니까. 나중에 ‘어긋난 신뢰’나 그 비슷한 물건을 사서 한 번 확인한 다음에야 검증대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레이븐, 정말로 오해다. 나는 악령이 아니다.” 그래, 이렇게 말이 나오는 걸 보니까 ‘선물’이 제대로 작동하기는 하는— 딸깍. 그때 잘 돌아가던 시침이 멈추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죠?” “어…….”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시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오류가 생긴 건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서둘러 모르쇠로 일관하자, 다시금 째깍 소리를 내며 어긋난 신뢰가 작동을 멈췄다. 그리고……. 째깍, 째깍. 잠시 시간이 흐르며 다시금 움직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왜 얀델 씨가 말할 때면 ‘어긋난 신뢰’가 멈추는 거죠?” 레이븐의 물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앞으로 이런 물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더니…….’ 망할 늙은이. 이런 식으로 되는 거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361화 심문 (3) 어떤 면에선 추리 소설 속 클리셰와 같다. 모든 정황 증거가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물증이 없는 상황. 지금 내 입장이 딱 그랬다. ‘이딴 게 무슨 선물이야!’ 악령이라는 선입견이 갖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내 결백을 증명하려면 그만한 물증이 필요하다. 그야 지금 상태에선 더 수상해 보이기만 할 테니까. 바로 이렇게. “따라해 보세요. 나는 여자다.” 어긋난 신뢰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뒤, 레이븐이 내게 해온 요구다. 목표는 명확하다. 어긋난 신뢰가 왜 멈추는지, 그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조건을 바꿔 가며 실험하여 파악해 보겠다는 거겠지. 따라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단 하나. “나는……! 윽, 목소리가……! 아무래도 거짓말이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거 같—” “장난치지 말고요!!” 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시도해 본 거였는데. 역시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건 어렵나? “됐고, 그럼 아무런 말이나 해봐요.” “…나는 정말로 악령이 아니다. 믿어줘라, 레이븐.” 다시금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이번에도 시침이 멈추었다. 다만 차이점은 레이븐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는 것일까. “나는 남자예요. 뭐야… 진짜 되잖아?” 그래, 먹통이 됐을 때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전부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거구나. 또 하나 알게 됐네. 빌어먹을. 째깍, 째깍. 반면 작동이 멈췄다가도 원판의 침이 움직이면 다시 원래대로 정상 작동을 한다. “나는 남자……. 음, 이제 또 안 되네요?” “…….” “얀델 씨가 뭔가 한 거죠?” 아니, 왜 당연하다는 듯 나를 의심하는 건데. 뭐, 내가 원인인 건 맞지만……. 이것만큼은 철저하게 부정해야 한다. “어, 억울하다! 네가 불량품을 가져와 놓고 그거를 왜 나한테 따지냐!” “불량품이라니요? 얀델 씨가 입을 열 때면 이렇게 변하는 게 정상적인가요?” 그건 확실히 수상한 부분이긴 하다. 내가 레이븐이었어도 저 입장을 고수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잖아?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정말이다! 믿어줘라!!” 어긋난 신뢰를 통해 거짓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목소리 큰 놈이 대화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 “……시끄러우니까, 제발 좀 닥쳐봐요.” 왜 정색을 하고 그래……. 무섭게. “…….” 이내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자, 레이븐도 잠시 말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해봐요.” “응?” “아까 뭐라 하려던 말 있잖아요. 일단 해보라고요.” “아…….” 어찌 보면 마법도 과학도 없는 태초의 시대와 같다. 사람을 믿는 과정에 오직 대화면 족했던 시절. 후, 얼마나 정이 넘치는 세상인가. “돌아왔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럼 그전까지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고요?” “다 말해주마.” 이후 나는 파루네섬에서 둘만 남은 뒤에 벌어진 일들을 시간순으로 설명했다. 결국에 둘이서 ‘스톰거쉬’를 처치한 것. 거기서 정수가 나온 것. “그럼 아까 등대지기를 잡아당긴 것도…….” “그래, 바이욘의 [초월]과 연계해 사용한 거였다.” “일단 여기까진 사실이겠네요. 계속해봐요.” 다음 사건을 얘기하기 전에 노아르크의 성주가 갖고 있던 보물 ‘기록의 파편석’에 대해서도 말했고, 의외로 레이븐은 쉽게 납득했다. “들어본 적 있는 물건이에요. 설마 드로우스, 그 남자가 갖고 달아났다는 보물이 그 물건일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죠?”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뭐, 역사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지만.” “……?” “들어보면 알 거다.” 기록의 파편석이 발동된 것. 그래서 20년 전 과거의 세상에서 깨어난 것.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 설명은 되네요. 어째서 섬에 장비들만 남아 있었는지.” 얘기가 진행될수록 얘도 슬슬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듯했으나, 그래도 일단 진술은 다 듣고서 판단할 셈인지 방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벨즈… 엔체?” 이내 섬에서 만난 약탈자 놈들을 죽이고 획득한 ‘니벨즈 엔체’의 신분을 빌린 것까지 말하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 설마 그때 일까지 다 기억하는 건가?’ 순간 그런 기대도 들었으나, 현실은 현실인 법. “……왠지 낯익은 이름이네요.” 하긴, 그때 얘 나이가 다섯 살인가 그랬으니까.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겠어. ‘오케이, 그럼 이 다음은…….’ 드왈키가 등장할 차례. 이후 나는 녀석의 운명을 바꾸려 했지만, 내가 뭘 하든 역사가 원래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깨달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했던 일들이, 원래 시간대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들이더군.” “시간에 관한 연구는 고대부터 있었죠. 단일 차원 시간선 이론이네요.” “……?” “아뇨,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주세요.” “그러지.” 이후 노아르크로 내려가고, 거기서 6개월의 시간을 보냈으며 아멜리아의 언니를 구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 물론 악령과 연관된 얘기는 모두 뺐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노아르크였다. 시간으로는 한 달 전이었지. 그동안 아멜리아와 에르웬을 만났고, 에르웬은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곧장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건, 왕가에서 행한 공표가 미심쩍었기 때문… 맞죠?” “그래. 네가 이걸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다. 하면, 레이븐은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지켜보자, 레이븐이 딱 잘라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네요.”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마법사 아닌가. 여러 지식들이 많은 만큼 더욱 내 이야기가 말도 안 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놨지. 왜 내가 너랑 만났던 얘기를 아직 안 했는데? 원래 이런 건 좀 더 극적인 상황에서 꺼내는 것이 더 잘 먹히는 법. “증거라면… 물론 있다.” “……?” “니벨즈 엔체라는 이름이 익숙했다고 그랬지?” “그런데요?” “아무렴 익숙할 수밖에. 너와 나는 20년 전에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까.” “……?” 혼란스러워 하는 레이븐을 보며, 나는 그때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첫 만남. 아무에게나 전기를 지져대다가 호되게 당할 뻔한 걸 구해 줬던 일. 그 후로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것까지. “그 사람이… 얀델 씨였다고요……?” 머지않아 레이븐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이제야 니벨즈 엔체가 누구였는지 떠올랐나 보군.” 참 다행인 일이었다. 이름은 까먹었어도 기억 자체를 못 하는 건 아니라서. *** 레이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할 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네 심정은 모를 바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 너도 나와 나눴던 대화들이 기억난 거 아닌가?” “흐릿하게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마탑에 들어간 후로는 정말 바빴거든요. 머지않아 ‘그 일’도 있었고…….” “…그 일이라니?” 내 물음에 레이븐은 멈칫하더니, 쌀쌀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건 얀델 씨가 알 필요 없어요.” 허허, 어린 시절에 그렇게 귀여워해 줬건만. 어쩌다 이렇게 자라가지고. 아, 싸가지 없는 건 그때가 더 했나? 지금은 존댓말이라도 써주고 있으니……. “아무튼, 그래서 이제는 내 말을 믿을 생각이 들었나?” 내 물음에 레이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째깍, 째깍.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며 원반의 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보니까 이제 2분도 안 남았다. 하긴, 내가 말할 때마다 멈추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1초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 건 아니니까. 째깍, 째깍.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흐르던 때였다. “제가 뭐라고 믿고 싶은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당신이 대답을 해봐요. 방금 이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인가요?” 정신없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제야 타인을 통한 검증이 떠올랐는지, 레이븐이 아멜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째깍, 째깍. 어긋난 신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음에도 아멜리아의 답변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얀델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그래, 진실 몇 개를 빼기는 했지만 겪은 경험들 자체는 팩트니까. “나와 얀델이 20년 전 과거에 갔던 것도, 거기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것도 모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었지.” 결정타였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해도 이쯤 되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 ‘오케이, 이 정도면 설득은 다 된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방심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레이븐이 쥐어짜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게… 얀델 씨가 악령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하잖아요…….” “…응?”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지?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어째서 아직도 저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거지? ‘설마… 왕가의 공표 말고, 나를 악령이라 의심하는 이유가 따로 더 있기라도 한 건가……?’ 문득 그런 경우의 수가 떠오르며 입 안이 바짝 마르던 순간이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어요.” “…말해라.” 이내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븐은 약간의 텀을 두고서 말했다. 잠깐 주저하는 듯했으나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조금이라도 석연찮거나,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모른다고 해주세요.” “…….” “비요른 얀델은 악령인가요?” 니미럴. *** 레이븐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다. 그야 어떻게 하겠는가. 저 빌어먹을 넘버스 아이템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조차 없는데. 가능한 건 오직 침묵뿐. “…….”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째깍, 째깍, 째깍. 원반의 침이 움직이며 소리를 자아낸다. 다만, 그 기간 자체는 길지는 않았다. 째깍. 이내 한 바퀴를 다 돌은 침이 움직임을 멈추고, 원판에서 피어나던 빛도 사그라들었다. 어긋난 신뢰의 유지 시간이 끝나 버린 것. 그러나……. “…….” “…….” 여전히 숨 막히는 공기가 이어진다. 그야 가끔은 그럴 때가 있으니까. 만 마디의 목소리보다도, 잠깐의 침묵이 보다 명확한 대답이 되어 주는 경우가. “…이래서야 뭐라 답하든 의미가 없겠군.” 뒤늦게 아멜리아가 그리 중얼거렸으나, 레이븐의 입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또한, 어긋난 신뢰를 다시 작동시켜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굳이 묻진 않았지만, 횟수가 없어서는 아닐 테고. “레이븐…….” “됐으니까, 제발 아무런 말도 하지 마요. 적어도… 지금은…….” “…….” 이내 레이븐은 철창 앞에서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혼자 조용히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리가 잘 안 됐을까? “……저는 제3 마도병단의 부단장이고, 그 역할에 자부심도 책임감도 있어요. 제 위치에 따른 의무를 저버리거나 할 생각도 없고요.” 돌연 레이븐이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는 이 일을 보고해야 해요. 국가에 대한 반역을 넘어, 그건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기만하는 짓이니까…….” 어두운 선내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아멜리아도, 에르웬도 아닌. “저, 저는…….” 자기 자신.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아니, 못 해…….” 마치 꼬일 대로 꼬여 버린 머릿속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중얼거리던 레이븐이 자그마한 양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일견 위태롭기까지 해 보이는 뒷모습. “얀델, 지금 저대로 보내면 큰 문제가 생길 거다.” 아멜리아가 옆에서 뭐라 조언을 해왔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야 알고 있다. 이대로 떠나면 다음에는 병력을 이끌고 오겠지. 하지만……. 까드득. 무슨 말로 잡을 수 있겠는가. 나를 믿고자 했던 동료가, 결국에는 진실을 깨닫고 돌아서 향하는 것을. 두근. 심장이 조여온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악령이 아니었다면, 그냥 비요른 얀델의 몸에서 태어나 이들을 만나고 동료가 되었다면…….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는 지랄. 그랬으면 동료가 되는 일도 없었겠지.’ 나는 애써 무의미한 상상을 떨쳐냈다. 레이븐을 향한 죄책감도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결국 플랜 B로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일단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이상, 내 입지고 뭐고 살아서 나가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달린 건 내 목숨만이 아니니까. 아멜리아와 에르웬도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병력이 도착하고 철창 문이 열리면 [거대화]로 길을 막아서 시간을 끈다. 그리고 갑판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바닥을 박살 내서 호수 아래로 탈출. 이때 호흡은 물의 정령을 이용해서 해결하고……. ‘그다음에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플랜 B를 정리하던 차. 툭. 계단을 향해가던 레이븐의 걸음이 멈추더니, 이내 레이븐이 천천히 등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아까는… 왜 나를 구한 거죠……?” 정확히 나를 보며 물었다. 마치 이것 하나만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거대화]만 쓰지 않았다면, 내게 정체가 들통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그럼에도 나를 구한 거예요. 그런… 상처까지 입어가면서.” ‘그래, 그게 궁금했던 거구나.’ 그리 묻는 심정이야 이해 못할 바 아니나, 내 입장에선 괜히 씁쓸함만 커질 뿐이었다. 예전의 레이븐이라면 굳이 묻지 않았을 질문이니까. 그러나 이를 되묻는 건 역시……. ‘내가 악령이기 때문이겠지.’ 악령이기에. 그동안의 모든 진심을 의심받고, 함께했던 시간을 부정받는다. ‘이백호, 걔도 이런 기분이었겠네.’ 한때 그 녀석이 느꼈을 감정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하게 온몸을 잠식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굳게 닫힌 마음의 벽. 어떠한 말을 하든 무의미할 거라는 의심이 솟는다. 하지만……. “그래, 이유라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그래요. 역시 뭔가 다른 게 있던—” 내가 이들 눈에는 사람 몸을 빼앗는 괴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모든 게 가식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한들. 그런 주제에 할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레이븐, 네가 위험했으니까.” “……?” “그래서 구했다.” 이유가 있다면, 정말로 오직 그뿐이었다. 362화 심문 (4) 아루아 레이븐은 다시 등을 돌렸다. 시선을 떼는 그 순간까지도 그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쓸쓸하면서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 날카로운 물건이 속을 파고드는 듯한 기분. ‘왜 저런 눈빛을 짓는 거야……. 배신당한 건 난데…….’ 악령은 이 세계 전부를 기만하는 존재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고, 커가며 그런 사례들을 수없이 보았다. 내가 위험했으니까, 그래서 구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속 외침을 외면하며, 그게 해답이라고 머리에 새기기라도 하듯. 그 남자는, 그저 자신이 믿고 싶었을 말을 꺼냈을 뿐이라고.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을 거라고.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고. 그리 여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터벅. 걸음을 한 번 옮길 때마다 그와 탐험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시작은 그와 처음 만났던 핏빛 성채. [대체 저놈은 뭐란 말인가! 대체 왜 뱀파이어가 이런 곳에…….] [징징거릴 시간에 뛰어라, 드워프.] 1층 균열에서 수호자로 등장한 뱀파이어.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끌었고, 말 그대로 몸을 내던지며 투쟁한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썼던 그 성수도… 사실은 악령이라서 알고 있던 거겠지.’ 결국 이런 식이다. 하나하나 짚어 보면 소중했던 추억의 이면에는 속고, 기만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리한다. 그 남자에겐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쉬워 보였을까. 터벅. 물론 결과적으로 핏빛 성채에서 그 남자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긴 하다. 그러나 레이븐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렇다고 우리를 구하려 희생했거나 한 건 아니야.’ 그러지 않으면 자기도 죽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터벅. 그다음 떠오른 장면은 1층 수정동굴에 갇혔을 때였다. 기사들과 대형 클랜들이 우리를 버림패로 쓰고서 차원문을 타고 도망친 절망적인 상황. 그 남자가 도시의 영웅이 되기도 한 그날. [그럼 뭘 어쩌라는 건데!] [다시 한번 말한다—! 모두 멈춰라—!!] 그 남자는 우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했고, 이에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탐험가들이 힘을 모았다. 그리고 시작된 돌파. [씨발, 미치겠군.] [나,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소. 미안하오.] 사선을 수도 없이 넘었을 전사들이 무너지고, 나아갈 힘을 잃는 와중에도 그 남자는 나아갔다. [베헬—라아아아아아!!] 그 남자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처했고, 그 누구보다도 더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렇지만, 레이븐은 판단했다. ‘그것도… 그래야 자기도 사니까……. 그래서 그랬을 뿐인 거야…….’ 걸음을 내디딘다. 터벅. 한 걸음씩 철창에서 멀어질 때마다 그 남자와 있었던 일들이. 정확히는 그에게 받았던 크고 작은 도움들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레이븐은 생각했다. ‘이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목숨을 거는 일까지는 아니었지.’ ‘…그 정도 도움이라면 나도 많이 줬어.’ 대부분은 그렇게 되뇌며 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 불길을 뚫고?] [산책 중이었다.] 황도가 불탔던 날에 있었던 일.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설마 이 배를 통째로 들려고……?] [으아아아아아아악!!!] 파루네섬에서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남아 적과 싸웠던 일.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당신… 드, 드, 등이……!] 그녀를 향해 쏘아지던 마법을 온몸으로 막아낸 일까지. ‘근데… 그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레이븐은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애써 부정하려고 한들, 점점 그러기 어려워지는 자기 자신을. ‘그럴 리가… 없잖아…….’ 급박했던 상황임에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그 남자는 목대에 핏줄이 설 만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 아래에 깔린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버텼다.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는 건 의미가 없었다. 몇 번이고 부정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레이븐, 네가 위험했으니까. 그래서 구했다.] 그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었다. *** 끼이이익. 철창 너머, 통로 저편에 자리한 문이 닫힌다. “가버렸군.” “그래…….” 결국 레이븐이 떠났다. 되돌아와 철창 문을 열어 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는 이제 버려야 된다는 뜻— “악령.” 응? 옆을 확인하니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채 시선만은 내게 고정한 에르웬이 보인다. “…악령이었던 거예요?” 그래, 왜 가만히 있나 했더니. 역시 이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랬던 거구나. 하긴 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하네. 내가 자신을 못 믿어서 안 알려 준 것처럼 보일 테니까. “에르웬, 진정해라. 다 설명—” “이 여자는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네요.” “그게, 그러니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왜 저만 속인 거예요! 나를 못 믿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 오우, 이렇게 빡친 건 처음인 거 같은데…….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아멜리아를 곁눈질했지만,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내 업보이니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건가? ‘그래도 다행인 건… 악령인 건 정말로 신경도 안 쓰는 거 같다는 거려나…….’ 악령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난 레이븐을 방금 전에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일까? 살기를 내뿜는 에르웬의 모습에 아찔함을 느끼는 한편으로는 안도감과 고마운 감정도 인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으려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븐, 그 여자는 뭔데요!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처, 철저하게 감췄으면서! 그 여자가 위, 위험하다고! 정체까지 드러내면서 지키는 건—!” 툭. “……?” 에르웬이 더 발작하기 전에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에르웬, 네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야 레이븐이 아니라 에르웬이었어도 나는 분명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하나 쉽게 믿기 어려웠을까. “거, 거짓말……. 나, 나한테는 미리 말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나, 나보다 그 여자가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거잖아요.” “뭐……?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 “그야… 내, 내가 이러니까요……. 그런 정수만 먹어서… 미친년 취급을 받으니까…….” 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보아하니, 에르웬 본인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자괴감을 느낀 듯한데……. “에르웬,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럼… 왜 저한테만 숨기고 있던 건데요…….” 후, 그러니까 설명을 해준다고 했잖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너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어째선지 대답은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왔다. “재활용이라니, 합리적이군.” 뭐래, 얘는. 대충 무시하며 에르웬을 보고 있자, 잠깐의 텀을 두고 반응이 나왔다. “………으, 예?” 시간 차를 두고서 움찔하고 떨리는 어깨. “저, 저, 저를요?” 오케이, 목소리도 이제 좀 진정된 거 같고……. 혹시나 뭔가 또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오해를 할까 싶어 서둘러 설명을 이었다. “너도 봤지 않나. 레이븐이 아멜리아에게 질문을 하는 걸.” 아우릴 가비스의 선물이 있다고 한들, 그런 식으로 응용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아는 이를 줄이고 싶었다. 물론 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나만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악령이란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면, 너만큼은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몰랐다면 피해자지만, 알고서도 도왔다면 공범으로 취급될 테니까.” “…….” “그, 그럼 레인웨일즈, 저 여자보다 저를 더 아껴서 그랬다는 거네요……? 저, 저한테만 일부러 숨긴 거니까. 저를… 지키려고…….” “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겨 아멜리아를 보았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뭘 고민하냐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됐으니, 수습부터 하라는 듯한데……. 후, 어찌나 이렇게 믿음직한 건지. “그래, 그래서 너한테만 숨긴 거다.” “……여, 역시!” 이내 내가 긍정의 말을 해주자 에르웬이 크게 기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어깨를 피며 한 곳을 응시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아멜리아가 있는 자리였다. “…저건 좀 열받는데.” 아멜리아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에르웬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다시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아저씨, 마음은 고맙지만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아저씨를 내버려 두고 저 혼자 빠져나가다니, 그런 걸 제가 원할 리 없잖아요?” 에르웬은 그리 말하며 레이븐이 떠난 철창 너머를 힐끗했다. “몇 번이나 구원을 받은 주제에, 은혜도 모르는 그 여자랑 저는 다르니까요.” 어, 그러니……? “그러니까, 저만 믿으세요! 알았죠?” “그래…….” 그렇게 얼추 정리가 끝나자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대화에 끼어들며 주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이제 어떡할 거지?” 아, 그거……. 슬슬 준비를 해야지. “일단 짐부터 챙기지.” “짐?” “장비를 두고 갈 수는 없지 않냐.” 나는 등대지기에게서 루팅한 아이템을 모아둔 곳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활짝 펼쳐 둔 로브에 장비들을 모은 뒤 보따리처럼 싸서 묶은 다음 목에 돌돌 말아서 잘 여몄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보부상 모드. 혹시 모르니 일단 이렇게라도 지니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아공간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다 챙겼으면 말해 봐라, 이제 어쩔 거지? 너라면 분명 뭔가 계획을 세워 뒀을 텐데.” 이내 아멜리아가 다시 물었고, 나는 속으로만 정리해 둔 플랜 B를 공유했다. 때가 올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으며 대기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컥. 복도 끝에 자리한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이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툭. 떠났던 레이븐이 다시금 모습을 내비쳤다. 그 어느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군.” “무슨 꿍꿍이일까요……. 지금 시간이면 이미 윗선에 보고는 끝냈을 텐데.”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경계하듯 무기를 쥐고서 철창 바깥을 응시했다. 이에 다가오던 레이븐이 흠칫하며 멈췄다. “왜 혼자 왔지?” 내 물음에 레이븐이 작게 답했다. “확인하려고요.” 약 7m 정도 떨어져 나누는 대화. 통로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거리감이 더욱더 여실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을?” 내 물음에 레이븐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뻗으며 거리를 좁혀올 뿐. 터벅, 터벅. 레이븐과 철창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표정도 선명해졌다. 어느 하나의 감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런 복합적인 표정.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설마 보고를 하지 않은 건가?” 나는 확인을 위해 물었고, 레이븐은 이번에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터벅, 터벅.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걸음걸이. 서로 간에 철창 하나만이 놓이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 “…….” 레이븐은 투명하리만치 푸른 눈으로 철창 너머의 나를 들여다보았고, 나 역시 다른 말을 꺼내지 않으며 마주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처커컥. 레이븐이 말없이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의 벽이 굳게 닫혀서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았었는데. ‘설마… 유인책 같은 건가?’ 그럴듯한 추리다. 우리의 전투력도 보고가 되었을 테니까. 배 위에서 우리가 적이 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 당장은 돕는 척 넘어가고 도시에서 체포를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지금 하려는 짓은, 아까 네가 말했듯이 너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신하는 짓일 텐데.” 그리 물으면서도 레이븐의 눈에 집중했다.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연기에 재능이 없는 얘라면 분명 티가 날 거라고 여긴 것이었지만……. 그런 내 행동에 레이븐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왜 웃지……?” 비웃음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씁쓸함이 묻어나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하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아까랑 상황이 비슷하다 싶어서요.” 응? “만약 얀델 씨가 악령인 걸 제가 몰랐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도 않았겠죠.” “아…….”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레이븐은 이미 모든 정리를 끝마치고 되돌아왔던 것인지,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스르륵. 자물쇠에 맞물려 들어가는 열쇠. 나와 레이븐 사이에 자리한 철창이 횃불에 비쳐 반짝이며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담아냈다. 어째선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글렀다고 여기고 플랜 B만 생각했건만. “…제 대답도 같아요.” “여기 있으면 얀델 씨가 위험해질 테니까.” “그래서 일단은 돕기로 했어요. 뒷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그러니까…….” 철컥, 소리를 내며 열쇠가 돌아갔다. 그리고……. “얼른 나와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도 들어 봐야 하니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363화 책임 (1) 마침내 철창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선박 중심부에 위치한 장교실로 이동했다. 그야 앞으로 나눌 이야기들은 보안이 중요하니까. “여기선 편하게 말해도 돼요. 애초에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기 위해 설계된 곳이라서.” 오, 그렇다면야. “일단 전황부터 듣고 싶은데. 기습은 어떻게 됐지?” 철창에 갇혀 있는 동안에 가장 궁금했으며, 철저히 차단되어 있던 정보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오르큘리스의 습격은 어찌되었는가. “라므레온드 소백작님께서 전사하셨어요. 퇴각 중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에게 당하셨죠.” 무려 우리 소속의 군단장이 암살당했다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으나, 자세히 들어보니 전황 자체는 그리 긴박하지 않았다. 호수에 띄워 놓은 수십 척의 배를 요새처럼 활용해 버티기에 들어가자마자 공세가 멈췄다던가? 그 상태가 2시간째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휘부에서는 혼란을 이용한 요인 암살이 이번 기습의 목표였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요인 암살이라…….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하겠군.” 그도 그럴 게, 혈기사 놈도 우리를 보자마자 이런 대사를 중얼거렸었다. [금의 마도사, 아루아 레이븐.] [죽여야 할 표적, 중 하나.] 분명 레이븐도 살생부에 적힌 요인 중 한 명이었겠지. 이번 습격 사태의 전략이 대충 머릿속에 그려진다. ‘시체 수집가가 광범위하게 언데드들을 뿌리고, 그걸 통해 암살 대상들의 위치를 알아내 공유하는 식이었겠네.’ 실제로 혈기사와 전투를 하고서 주변에 언데드가 확 늘어났으며, 머지않아 3인으로 이루어진 지원군도 도착을 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그렇게 급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선 그 얘기부터 해보죠. 얀델 씨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음, 계획이라…….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 늙은이가 준 선물이 이딴 식으로 작동할 줄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 덕분에 나도 머릿속이 복잡해졌— “저기, 그리고…….” 그때 레이븐이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보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저는 이번에 어쩔 수 없이 한 번 도운 거뿐이지, 계속해서 이럴 수는 없어요.” …응? 이제 다시 동료가 된 게 아니었어……? 배신감을 담아 바라보자 레이븐이 눈을 피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요. 이번 일을 보고하지 않고 넘어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 부담을 졌다고 생각해요. 제가 할 도리도 다 마쳤다고 보고요.” 씁쓸하긴 하지만, 이해 못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보고를 올리진 않았지만, 나와 함께 구렁텅이로 떨어질 각오까지 한 건 아니겠지. 이 세계에서 악령을 돕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들키는 순간 파멸이 확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레이븐, 탓할 생각 없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이렇게 한 번이라도 도와준 것이 더 고마우니까. 나중에 뭔가 잘못돼도 네 이름이 나오지 않게 잘 노력해 보마.” 나는 바바리안스럽게 웃으며 레이븐의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퍽! 퍽! 퍽! 평소였다면 아프다고 소리를 빼액 지르며 나를 쏘아 봤어야 할 타이밍인데도 레이븐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짓무르며 시선을 아래로 향할 뿐. “얀델 씨는…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도…….” 에휴, 그게 마음에 또 걸린 거였어? 쓸데없이 감정적이기만 해가지고. 다 이해한다니까 저러네. “모든 걸 알고서도 나를 도우려 했다는 것. 그거면 나는 이미 충분하다.” 오히려 미안함도 느낀다. 멀쩡히 잘 살아가며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던 애가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위기를 무릅써야만 했던 것 아닌가. “…….” “…….” 이후 잠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레이븐도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원래 주제를 꺼냈다. “아무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그건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군.” “……?” “그걸 듣고 여기서 더 나와 엮이면 나중에 빠져나가기 어려울 테니까. 어차피 돕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선을 긋자, 레이븐이 움찔했다. 그러나 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을까. “…얀델 씨는 내 이름이 안 나오게 노력한댔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당장은 들키지 않는 게 최선이에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면…….” “…위해서라면?” “저도 도울 용의가 있어요. 어느 정도는…….” 뭐야, 결국 이럴 거였으면서. 내가 씨익 웃자 레이븐이 어딘가 짜증난다는 듯 나를 힐끗했다. “됐고, 그러니까 말이나 해봐요. 이제 어떡할 생각인지. 얀델 씨도 생각이 있으니까 정체를 감춘 상황에서 전쟁터까지 나왔을 거 아니에요. 눈에 띌 수밖에 없단 걸 알았을 건데.” 이내 레이븐이 물었고, 나는 고민 끝에 답했다. 바바리안답게 허심탄회하게. “없다. 당장은.” “…예?” 그런 눈을 해봤자 없는 건 없는 거다. 아우릴 가비스가 주고 간 선물이 이런 식일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 급전이 필요해서 오긴 했지만, 최대한 눈에 띄는 짓은 안 할 생각이었다. 한데,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을까? “……없다는 건, 그러니까…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뜻인가요?” 레이븐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다시 확인했고, 나는 이번에도 남자답게 수긍했다. “그래.” “…정말로? 얀델 씨를 도왔다는 게 들키면 저는 군부에서 짤리는 건 물론이고 마탑에서 제적당할 수도 있는데?” 와, 마탑에서 제적도 당할 수 있다고? 설마 했는데 그 정도까지 리스크를 졌던 거였어? 레이븐의 각오에 한 번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나는 대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래 갇혀 있었더니 배가 고프군. 혹시 육포 좀 꺼내 먹어도—” “말 돌리지 말고요!” “그,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배고파서—” “뭐라는 거야! 진짜 바바리안도 아니잖아!!” 허, 그러고 보니 이제 얘한텐 이게 안 통하겠구나. “…….” 왠지… 시원섭섭하네. *** “하아…….” 적막한 장교실에 한숨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불편한 공기 속에서 나는 몰래 꺼낸 육포를 조심스레 씹었다. “지금… 뭘 먹는 거예요?” 아니, 배고픈 건 진짜였다니까. 일단 몸은 바바리안이잖아? 시도 때도 없이 영양분을 공급해 줘야 한다. “…너도 먹을 테냐?” “됐어요.” “…….” “하, 매번 이러고 다니는데 어떻게 악령인 줄 아냐고…….” 레이븐이 또다시 한숨을 크게 내쉬었으나, 그만큼 내가 주도면밀했다는 칭찬으로 듣기로 했다. 찌걱, 찌걱. 후, 그래도 뭐 좀 먹으니까 이제 좀 몸에 힘이 나네. “레이븐, 근데 너는 뭔가 알고 있던 거냐?” “…뭐를요?” “왕가에서 한 공표가 아니더라도, 뭔가 나를 의심하던 이유가 있던 거 같은데.” “아, 그거요…….” 레이븐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나 숨길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을까? “한스 크리센과 노아르크 출신의 드워프가 나눴던 대화가 담긴 마도구요.” 아, 그게 얘한테 갔구나. 근데 그 녹음기가 왜? 그런 의문을 담아 눈짓하자 레이븐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싸구려 코어를 써서 그런지, 녹음된 걸 재생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100회까지 가능했는데, 두 번이 남아 있기에 얀델 씨가 왜 그렇게 이걸 반복해서 들었을까 의문을 처음 가졌죠.” “……그랬군.” 설마 이게 힌트가 될 줄이야.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 “사실… 이것보다는 다른 게 훨씬 더 결정적이긴 했지만요…….” 응? “연구실로 미샤 씨가 찾아왔었어요. 얀델 씨가 죽고 50일쯤 지났을 때에.” “…걔가 뭐라고 했는데?” “얀델 씨가 악령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거라고 하더군요.” 미샤가 주제였기 때문일까. 문득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마도구 건도 그렇고, 뭔가 찜찜해서 물어봤어요. 그거 사실 그냥 소문이 아닌 거 아니냐고.” 당시 미샤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위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답이 되어 주었다. “…잠깐만요, 그럼 소문을 퍼뜨린 게 그 짐스… 아니, 그 여자란 뜻이에요?” 잠자코 듣고 있던 에르웬이 껴들자, 레이븐은 살짝 불편한 눈치로 힐끔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미샤 씨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븐의 긍정에 에르웬이 이를 갈았다. “사정은 무슨. 그래, 그 여자…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 “진정해라, 에르웬. 미샤가 어떤 상황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않나.”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라고 한들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걸요! 아저씨는 분하지도 않아요? 배신당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러니까, 그걸 아직 모른다는 거 아니냐.” 솔직히 말해 화가 난다거나 한 것보다는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크다. 원탁에서 들은 정보도 있지 않은가. 미샤는 이백호와 있다. 그리고……. [소생의 돌은 이백호가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 살리기 위해 그 녀석과 어떠한 거래를 했던 것일지 모른다. 뭐, 내 추측일 뿐이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내게 해가 됐다는 것엔 변함이 없겠지만. 후, 얘는 진짜 어디서 뭘 어쩌고 있는 거야. “정말! 아저씨는… 왜 그렇게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거예요!” 뭐래. “됐고, 레이븐… 그럼 왕가가 그 소문을 인정하고 공표한 이유는 너도 모르는 건가?” “네. 하지만… 페브로스크 단장님께 들은 얘기는 있어요.” “들은 얘기라면?” “공표가 되자마자 제게 와서는 이미 죽은 사람 아니냐고, 진실은 이제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그때는 그냥 제가 충격 받았을 거라 생각해 위로차 하시는 말이라 여겼지만…….” “…….” “돌이켜 보면 좀 이상한 뉘앙스이긴 했어요. 마치 단장님은 진실이 뭔지 아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그쪽을 파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도시로 돌아가면 알아봐 줄 수 있겠나?” “네, 그 정도라면야…….”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레이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정도 부탁은 ‘어느 정도’에 포함이 되는 듯했다. *** 이후로는 다 같이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고, 머지않아 결론이 났다. “그럼 당분간은 정체를 감추는 게 좋겠네요.” 어긋난 신뢰를 통해 검증하는 게 이런 식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내 정체를 드러내는 일에 있어 더욱더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근데… 왜 얀델 씨한테만 어긋난 신뢰가 통하지 않았던 걸까요?” 아우릴 가비스의 선물에 대해서는 그냥 둘러댔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기록의 파편석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속이는 행위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어쩔 수 없다. 어긋난 신뢰 같은 물건에 통하지 않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니까. 악령인 것도 공유된 마당에 이게 무슨 소용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일이 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아멜리아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고. ‘애초에 그 얘기까지 하면 아우릴 가비스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아우릴 가비스는 왕가의 적이다. 한데 그놈한테 ‘선물’까지 받은 악령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게 분명하다. 악령으로서 뭔가 협상해 볼 여지도 없어진다는 뜻.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일이에요. 단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통하지 않는 거라면 조금 더 안전해졌다는 뜻이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근데… 아저씨, 꼭 정체를 밝혀야 하나요? 저는 이 모습 그대로도 좋은데…….” 에르웬이 그런 의견을 꺼내기도 했으나, 누명(?)을 벗고 원래 이름을 찾겠다는 최종 목표를 변경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다간 혼령 각인도 영영 못 받지 않나.” 내가 왜 하필 바바리안을 키웠는데? 지금 먹은 정수들과 더 시너지를 내려면 혼령 각인은 필수다. 다만, 에르웬은 내 심정에 공감할 수 없었을까. “그건… 그냥 안 받으면 되잖아요.” 에르웬이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데 목을 매는 거예요……?” 그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그러고 보면, 얀델 씨는 예전부터 그랬죠…. 탑을 올라가는 거에만 관심이 있고…….” 레이븐의 경우에는 어딘가 불안한 눈빛인 반면. “예전에 들은 적 있다. 미궁의 끝에 도달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지?” 아멜리아는 차분하게 내 입장을 이해했다. 하나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거, 그렇게 말하면 오해할 게 분명하건만. “설마, 아저씨도 그래서……?” “…얀델 씨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거군요. 하긴, 고향일 테니까…….” “아저씨…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요……? 제, 제가 더 잘 할 테니까… 사고도 안 치고…….” 아, 진짜 뭐라는 거야. “에르웬, 진정해라.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니까. 귀환? 애초에 귀환은 예전에도 최우선 목표는 아니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내 1순위 목표는 생존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고, 탐험을 하고, 많은 일을 겪은 지금에는 1순위 목표가 조금 바뀌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살아남는 것. 그래,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에 목을 매냐고?”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너희를 지킬 수 있으니까.” 이 방패로 지켜야 할 것은, 이제 이 몸뚱이 하나만이 아니게 되었다. 364화 책임 (2) 리헨 슈이츠. 사실 생각해 보면 아예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지금 스펙이면 힘을 감춘 상태로도 몇 년만 구르면 은퇴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귀환은 포기해야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나는 이미 적응을 끝마쳤다. 이제 이 세상이 이전처럼 끔찍하지만은 않고,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원래의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곳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한수의 삶에서는 없던 인연들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정체를 숨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과연 리헨 슈이츠라는 새 신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 수 있을까. 글쎄, 아무리 조심해도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뿐더러……. ‘이미 목격자가 많아.’ 결국 리헨 슈이츠에 대한 이야기는 퍼져 나갈 거다. 레이븐이 거짓 보고를 올려도, 일단 그 자리에 광대가 있었으니까. 재미난 놈을 만났다며 원탁에서 씨불여대겠지. 원탁에는 사슴뿔도 있으니 왕가로 그 소식이 퍼져 나가는 건 자명한 사실. ‘거기다 가챠본의 정수도 쓰는 걸 보여 줬고.’ 잘 알려지진 않은 정수지만, 결국 연구를 하다 보면 이 정수에 대해서도 알게 될 테고 골밀도에 대해서도 인지를 할 것이다. 그럼 내 원래 키가 훨씬 더 크다는 것까지 알아내겠지. 뭐,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만.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가 알맹이 쏙 빠진 ‘선물’을 전해 주며 내게 뭔 짓을 해뒀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신분을 감추고 음지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 그렇기에 역시나 결론은 같다. 주술사에게 점을 봐준다며 내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러했듯. ‘더 강해져야 돼.’ 그 무엇이 닥쳐오든 버텨 낼 수 있도록. *** 후우우우웅-! 장교실에서 한창 앞날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을 때 탁상 위에 놓인 수정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휘부와 직통으로 연결된 군용 메시지 스톤이에요. 아무래도 하던 얘기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다시 나눠야겠네요.” 하긴, 전시 중에 언제까지고 우리에게만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솔직히 나 스스로도 계속 이래도 되나 싶었다. “우리는 나가 있지.”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명목상 호위이기도 하니까. 연락을 할 때는 조용히만 해주세요.” “그렇다면야.” 이후 지휘부에서 연락을 받은 레이븐은 업무적인 태도로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부대 내 장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부단장님, 근데 저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 호위 역할인 분들이니.” “저, 그래도 회의를 하는데…….” “두 번 말하게 할 건가요?” “…….” 와, 얘는 진짜 딱 지휘관 체질이네. 키도 조그마한 게 목소리에선 어떻게 저리도 냉기가 풀풀 넘치는지. “그럼 회의 시작할게요. 방금 전에 지휘부에서 명령이 하달됐어요. 장벽 내에서 적군의 생체 파장이 감지되지가 않는다더군요.” 아무튼, 우리는 레이븐의 곁을 지키며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호수를 포위 중이던 적 병력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던가? 전군이 군선으로 퇴각하고 2시간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제 발로 배에서 내리게끔 하려는.” “글쎄요. 저는 퇴각을 했다는 의견에 좀 더 무게가 실립니다마는.” “다들 조용하세요. 어차피 추론은 의미가 없으니. 지휘부에서 수색을 위해 각 부대에서 병력을 차출하기로 했어요.” 레이븐은 그새 누굴 보낼지도 생각해뒀는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멤버를 정해 수색 병력으로 편입을 시켰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수색을 나간 병력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들이 갱신됐다. [호수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광대 놈의 언데드들로 가득했던 호숫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또한……. [제2 수색조에서 대규모 마법이 사용된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마법의 흔적이 발견됐다. 확인 결과, 다중 순간이동 마법진이었다. [천금의 벽]이 발동되면, 외부에서는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해 내부로 들어올 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니까. 지휘부에서도 적이 물러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시 대기 명령이 떨어졌어요. 조금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천금의 벽]이 무너지고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배 위에서 대기합니다. 경계 상태도 현단계를 계속 유지하고요.” “예, 탐험가들에게도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지휘부의 판단 아래 전 병력들은 군선 위에서 존버 하며 호숫가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더 흘러……. 솨아아아아아아-! 유지 시간을 다한 [천금의 벽]이 마력 입자들로 변하며 무너져 내리며, 원정을 나가 있던 본대가 다시 합류했다. 그다음에서야 우리도 호수로 나와 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본대는 약 하루간 대기하며 안전하다는 걸 확인 한 후 만일을 대비해 약간의 병력을 추가로 남겨 둔 채 다시 원정을 나갔다. “본대의 목표는 노아르크의 본거지가 어딘지를 찾는 거랬지?” “네. 정확히는 입구를요. 수정 동굴의 중심부처럼 일정 지역과 이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서요. 거길 발견하고 점거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연구도 해볼 수 있겠죠.” 아휴, 본대도 진짜 정신없겠네. 7층에서 대규모 병력으로 수색을 하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이븐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큰일 없이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큰일이 아예 없던 건 아닌데……. 뭐, 그래도 누구 하나 죽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이번 사건의 수습도 다 끝나고 나니까 확실히 이제 마무리가됐다는 감상은 나도 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발, 복귀 때까지 사건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어허,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건만. 레이븐의 넋두리에 괜히 불안한 마음이 피어났으나 설마 또 뭔 일이 생기겠어. 이제는 병력도 제법 많은— “…순찰조?” 그때 탁상에 놓인 서류 중 하나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거요? 아무래도 이번 일이 있다 보니까 위에서도 조금 말이 많았나 봐요. 아무리 소수였다고 해도 잠입을 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순찰 병력을 배치하기로 한 거군?” “네.” 레이븐은 바쁜지 단답으로 답하고서는 다시 서류 업무에 열중했다. 허, 여기 갇혀 있으면 심심하지도 않나? 난 하도 좀이 쑤셔서 입에 단내가 나는 거 같은데. “아저씨, 많이 심심해요?” “조금?” “그럼 같이 산책이나 갈까요?” “그럼 레이븐은 누가 지키고?” “뭐, 문제야 있겠어요? 어차피 저 여자가 남아 있을 거기도 하고.” 에르웬의 말에 아멜리아가 발끈했다. “…누구 맘대로?” “예민하기는. 우리 둘이 갔다 오면 그땐 당신이 쉬러 가면 되잖아요?” 어휴, 이러다 또 싸우겠네. “둘 다 그만해라. 산책 갈 생각은 없으니.” 일단 둘을 중재하고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자니 지루함이 더 크게 몰려왔다. ‘그나저나 순찰조라…….’ 살짝 충동적일 수도 있으나,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순찰조면 밖에 나가서 돌아다닐 거 아닌가. 몬스터도 자주 만날 테니 아직 쌓지 못한 경험치도 자연스레 수급이 될 터. ‘잘하면 이번에 7레벨까지 찍을 수 있을지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븐, 순찰조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못 가요.” “응? 어째서?” “이미 인원을 다 뽑았거든요. 게다가 원칙적으로 한 번 배정받은 임무는 변경을 할 수가 없어요. 안 그러면 다들 쉬운 임무만 받으려고 할 테니까. 공정성 문제도 있고요.” 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소속 부대의 지휘관 재량하에 임무 변경이 가능하기는 해요.” 뭐야, 그냥 날 놀렸을 뿐인 거였구나. 심술궂기도 하지. “그 지휘관이 너 아니냐. 네가 바꿔주면 되는—” “그러니까 못 간다고요. 제가 안 해줄 거니까.” “…응?” “그러니까, 제가 안 해줄 거라고요. 제가 없는 동안 거기서 어떤 사고를 칠 줄 알고?” 레이븐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 물론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니까. “하하! 고작 그게 문제였던 거냐?” 별거 아니란 듯 웃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했다. “……?” 뭔데 그 눈은. 이래서 공부 벌레들이 안 되는 거다. 뇌가 딱딱하게 굳어서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네가 없어서 문제라고?” “……?” “그럼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냐!” 이내 해결책을 제시하자 레이븐이 눈을 좁히며 나를 위아래로 쓱 훑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묻는데, 그쪽 세상에도 바바리안이나 그런 비슷한 종족이 있는 건가요?” 아, 어, 음……. “…….”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듣고 말았다. *** 결과적으로, 나는 순찰조에 들어가게 됐다. 그야 레이븐은 합리주의자거든. “해줘라!” “…….” “해줘라! 사고 안 친다고 약속하지 않냐!” “…….” “해줘라!” 이름하여 바바리안 앵무새 모드. 지난날 수정 동굴에서 톡톡히 덕을 보았던 그 모드를 활성화하자, 처음에는 무시로 일관하던 레이븐도 점점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람이 이상한 데서 끈질기기만 해가지고!” “그러면 해줘라!” “…안 된다고 말했으면! 그리고 네 시간이 넘게 대답도 안 했으면!! 적당히 알아듣고 그만할 줄도 알아야지!!” “모르겠으니까, 해줘라!!” “하아…….” 상대가 분노를 끝내고 한숨을 내쉬었다면 그것은 체념의 징조. 나는 그 틈을 계속해서 파고들었고, 결국에는 레이븐도 허락을 해주었다. 남은 시일 동안 업무 방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차라리 이쪽이 낫다고 판단을 한 것. 아, 그렇다고 내 고집에 져준 것만은 아니었다. “아, 진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그냥 며칠 얌전히 지내면 되는 건데!!” “…밖에는 몬스터들이 있으니까.” “……?” “말했지 않나.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고.” “아, 진짜…….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OK 사인이 떨어졌다. 아, 물론 처음 말했던 것처럼 레이븐이 함께 따라오는 조건은 아니었다. 나야 같이 가는 편이 더 좋다고 말했지만, 그것만큼은 지휘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을 거라던가? “이곳에서 [천금의 벽]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저뿐이니까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남아야 해요.” 그러고 보니, 얘 귀중한 전력이었지. “그럼 에밀리나 에르웬을 두고 가지.” “제 호위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얀델… 아니, 슈이츠 씨가 없을 때도 잘만 지냈는데요 뭘.” 음,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전 진짜 괜찮으니까 가서 사고 치지나 말아요. 특히 [거대화]는 절대 쓰지 말고. 몬스터만 잡는다고 순찰 임무도 소홀히 하지 말고요. 그리고 또…….” 소풍 나가는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한참이나 주의 사항들을 듣고서야 레이븐은 상부에 연락을 취해 내 소속을 변경시켜 주었고, 그제야 나는 막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때마침 지금 막 출발하는 순찰조가 있었거든. “방금 새로 추가된 분들이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르시아 님.”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순잘조의 조장이 안면을 트며 스펙 확인부터 해왔다. “혈령후 님은 활과 정령술이 주특기시니 중심부 진형에 서시면 될 듯하고……. 다른 두 분은 근접 계열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장은 좀 더 세분화해서 포지션을 확인해 왔고, 민첩 위주의 딜러인 아멜리아는 진형의 좌익 부분에 배치됐다. 그리고 나는……. “중무장한 갑옷이나 방패를 보니 역시 전위를 맡으셨을 거 같은—” 어허, 이 조그마한 몸뚱이에 처맞을 곳이 어디 있다고? 탱커로 낙인 찍히기 전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나는 때려 부수는 쪽이요.” “…예? 그럼 그 방패는……?” “폼으로 갖고 다니는 것이오.” 나는 방패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양손으로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쥐었다. “나는 우익에 서리다.” 어차피 [거대화]까지 써가며 날뛰지도 못할 거. 한 번쯤은 편하게 근딜 포지션에 서봐도 되잖아? 365화 책임 (3) 7계층 암흑대륙의 진입 장벽인 ‘원귀의 협곡’. 이곳을 빠져나오면 현재 주둔 중인 호수가 나오며 이후로는 세 가지 필드로 나뉜다. 첫 번째는 아리베오나 강어귀.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호수로 이어진 강물을 따라 나아가는 루트이며, 이 루트를 따라가면 암흑대륙의 중심부인 용의 산맥에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벨라리오스가 나오지.’ 최종 육성에서 항마력을 책임질 정수를 수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용의 산맥이다. 뭐, 순찰조라 이번엔 거기까지 갈 일이 없겠지만. 아무튼. 두 번째 필드는 강어귀의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정글로, 이름은 대수림. 워낙 넓다 보니 그 안에서도 여러 필드로 나뉘어 구분 짓기는 하지만, 일단 정식 명칭은 그렇다. 그리고……. 세 번째, 강어귀 서쪽에 위치한 판텔리온 유적지. 약, 서른 명으로 이뤄졌으며 내가 소속된 제4 순찰대의 목적지이기도 한 그곳. “전군 앞으로!” 폐허나 다름없는 유적지의 초입부에 도착한 순찰대는 진형을 재정비한 뒤, 본격적으로 필드에 진입했다. 물론 순찰대가 창설된 목적은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한 적극적 방어였기에 유적지 깊숙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위 앞으로!” “방패 벽을 세워라!” 애초에 여기는 몬스터가 워낙 많은 곳이라서 말이지. [크르르르……!] 마치 골렘처럼 강철로 된 몸을 가진 개조형 야수들부터 시작해. 쿠웅-! 쿠웅-! 거대한 마공학 골렘. 휘이이이잉-! 드론처럼 날아다니는 기계형 비행 몬스터까지. 유적지 곳곳에 잠들어 있던 몬스터들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뛰쳐나온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방패를 든 전위들을 뚫어내고 우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콰아아아앙-! 사람으로 이뤄진 거대한 벽에 저지된 몬스터들. 왠지 보고 있자니 조금 낯설다. 내가 이 각도에서 누군가의 등을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게 평소 애들이 보던 장면이구나.’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면서도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옆으로 빠져나오는 몬스터들을 망치로 짓이겼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기가울프를 처치했습니다. EXP +4」 7층이라 해도 판텔리온 유적지의 초입부는 평균 등급이 그리 높지 않기에 한 방을 제대로 버텨내는 놈이 없었다. 기계로 개조된 놈들이라 그런지 손맛도 독특했고. 카카각, 콰지짓, 콰직-! 후, 그래도 망치만 휘두르면 되니까 엄청 편하네. “전위 옆으로!” 이내 순찰대의 지휘관이 소리침과 동시에 방패를 든 탱커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중앙의 길을 열었다. 이에 몬스터들이 정면부로 빠져나왔지만……. “리오나 에르 에푸라!” 이미 후방에서는 합동 마법이 완성된 상황. 휘융-! 진형의 중심부에서 광선포 같은 것이 쏘아지며 열댓 마리의 대형 몬스터들을 관통했고, 이로 인해 대치 구도가 무너지며 남은 몬스터들을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공격대 단위로 다니니까 사냥이 쉽긴 하네. 신관이 있어서 전위도 안정적이고.’ 평균 등급은 낮다고 하지만, 거의 백 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달려든 것인데 전부 정리하기까지 10분도 걸리지가 않았다. 뭐, 이쪽도 서른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겠다만. 백 마리를 잡았어도 사람 수대로 나누면 이번 전투의 소득은 그리 크지 않을 터. “정수는 안 나왔으니, 마석만 수집하고서 이동을 재개하겠습니다!” 이내 순찰대는 미리 계획해 둔 루트를 따라 유적지 초입부를 뺑뺑 돌며 계속해서 사냥… 아니, 순찰을 해나갔다. 그리고……. ‘이야, 오늘 캔 경험치만 해도 100은 넘겠는데.’ 이번 순찰 중에 처치한 신규 몬스터만 해도 무려 20마리가 넘었다. 출현 몬스터 등급은 낮지만 이 필드에만 서식하는 고유 개체들이 많았던 덕분. “그럼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약, 10시간가량 순찰을 돌던 우리는 다음 교대조에게 인수인계를 하고서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정병에게서 표를 하나씩 받았다. 오늘 일당에 사냥하면서 나온 전리품에 관한 지분을 증명하는 표라던가?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서 공훈처에 제출하면 정산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데……. “이봐, 친구.” 표를 받고 돌아서자 한 사내가 껄렁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시오?” 이런 친구를 둔 기억은 없을뿐더러, 애당초 이 남자는 초면— “뭐냐, 그 처음 봤다는 듯한 반응은. 싸울 때 계속 옆에 있었지 않나.” 어, 그랬던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경험상 이럴 때는 대충 얼버무리며 주제를 옮기는 게 베스트다. “아, 그래서 무슨 용무시오?” 내가 다가온 이유를 묻자, 이름 모를 사내는 마치 자기가 윗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까 보니 무지하게 잘 싸우더군?” 음, 친목질을 목적으로 온 거였나? 그리 생각하며 일단 겸양의 말을 뱉었다. “그 정도로 잘 싸운다니, 눈이 낮구려.” “뭐?” 어째선지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신경 쓸 사항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단 어깨에 올라간 손부터 휙 떼어냈다. 툭. 아까부터 기분이 나빴거든. 친해지고 싶은 거면 눈깔이라도 제대로 뜨고 오든가. “그래서 용건이 뭐요?” 이내 다시 묻자, 녀석도 가식적인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한 가지 조언이라도 해줄까 해서.” 의외의 말을 꺼냈다. “…조언?” “보아하니, 무식하게 힘만 키운 거 같던데, 그런 식으로만 정수를 먹으면 언젠가 크게 위험에 처할 것이네.” 그리 말한 녀석이 단검을 꺼내서 자기 팔뚝에 상처를 냈다. “보이나? 힘을 꽉 줘도 잘 안 베이는 거. 모름지기 탐험가란 힘만 세기보다는 이렇게 나처럼 균형이 맞게—” “뭐야, 그냥 병신이었네.” “……?” “아, 미안하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걸.” 내가 남자답게 사과했음에도 녀석은 쫌생이처럼 표정을 굳힌 채 나를 꼬나보았다. 거, 툭 치면 뒈질 거같이 생긴 게. 어디 내 앞에서 쥐꼬리만 한 물리 내성 수치를 자랑하고 있어? “그나저나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는 노릇이기에 이름부터 물었다. “멜리버 엘테인.” 뭐야, 한스도 아니었잖아? “그렇구려. 언젠가 또 봅시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해요?” “봤겠지만, 이제 일행이 도착해서.” 방금 들었던 이름은 대충 기억에서 지우며 자리를 떠났다. *** 그러니까, 이름이 멜리버……. ‘뭐였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애석하게도 그놈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이후로도 계속 순찰대 임무를 맡기는 했지만, 매번 다른 순찰대에 들어간 탓인데…….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의 순찰대는 한 필드만 고정적으로 순찰을 돌았으니까. 뭐, 지휘부 입장에서야 합리적인 조치였다. 한 순찰대가 한 지역을 담당하다 보면 지형에도 익숙해질 거고, 자연스레 합도 맞아갈 테니까. 원래라면 이렇게 매번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다. 군부 상층부에 빽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레이븐, 제11 순찰대에서 이번에 깊숙이 순찰을 나갈 거라던데…….] [알았어요. 추천서를 써줄게요.] [고맙다.] 뒤에서 레이븐이 도와준 덕에 첫 순찰지였던 판텔리온 유적지뿐만 아니라 아리베오나 강어귀, 대수림까지도 방문하며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다. 물론 모두 초입부만 돈 것이라 만나보지 못한 몬스터들이 한가득이겠다마는. 그래도 순찰대를 바꿀 때마다 경험치는 계속해서 쌓였다. 그리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어느덧 지금.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3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마침내 염원했던 7레벨에 도달하며 정수 칸이 하나 더 늘어났다. 현재 조합에 새 시너지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단 뜻. ‘돈 문제는 사실상 거의 해결이 됐으니, 다음에 도 굳이 참전할 필요까진 없겠고. 다음 탐사 때는 정수 노가다나 해봐야겠네.’ 아, 그러려면 일단 배부터 구해야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 때리고 있자니, 불현듯 주변이 한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븐.” “왜요.” “에르웬이랑, 에밀리는 어디 갔나?” “그 여자는 아까 막사에서 좀 잔다고 나갔고, 에르웬은… 글쎄요. 그 여자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라나가던데요?” “음, 그렇군?” “그래서 질문은 그게 끝?” 그리 말하는 레이븐은 이미 내게서 시선을 떼고 서류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거, 대답할 시간이라도 주던가. ‘그러고 보면… 얘랑 단둘이 있는 거 같네.’ 업무를 방해하지 않도록 더 말을 걸지 않으며 뒤에 물러나 있자니, 새삼스레 이 시간이 낯설었다. 그야 재회 후로 레이븐과 만날 땐 항상 아멜리아나 에르웬이 곁에 있었으니까. ‘이 기회에 궁금했던 거나 물어봐야겠네.’ “저기 레이븐.” “또 왜요.” “그때 말했던… ‘그 일’이라는 건 뭐였나?” 내가 조심스레 묻자 펜을 움직이던 레이븐의 손이 움찔하며 멈췄다. 또한, 레이븐도 시선을 돌려 나를 힐끗했다. “그 일이라니요?” 거, 못 알아들은 척하기는. “그때 철창 앞에서 말했지 않나. 마탑에 들어간 후로는 머지않아 ‘그 일’도 있었다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냐?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리 평소에 바바리안인 척을 하고 지낸다 한들, 이럴 때까지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호기심을 접었다. 그리고……. “그럼 어머니는? 잘 지내고 있나?” 그냥 수다나 떨기로 했다. 이 역시 조금 민감한 주제일지 몰라도, 지금 나는 아예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거였어요……?” “응?” 어딘가 이상한 반응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븐이 빠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어머니… 는 갑자기 왜요? 암만 봐도 그쪽이 궁금해할 부분이 아닌 거 같은데.” 후후, 그런 식으로 선을 그을 줄 알았지. “왜 궁금해할 부분이 아니냐? 네 엄마한테 너를 마탑에 보내라고 설득한 사람이 나였는데.” 툭 뱉은 말에 레이븐이 흠칫했다. “…………뭐, 뭐라고요?” “기억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네가 엄마한테 처맞고 도서관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애처럼 엉엉 울면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그, 그런 적 없어요!!” “응? 그때 일은 거의 기억 안 난다면서?” “그래도, 제가… 그랬을 리 없다는 믿음은 갖고 있다고요.” “오, 그러냐?” “그럴 기분 아니니까 장난은 됐고, 말이나 해봐요. 아까 한 말이 정말이에요? 당신이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그래.” 나는 내친김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때 철창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생략하고 넘어갔었으니까. 한 번쯤은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정확히는 내 존재가 인과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싶었다 해야 하나? 그야 또 모르지 않나. 언젠가 한 번 더 ‘기록의 파편석’을 쓰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 ‘아, 그래도 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네.’ 다만, 옛이야기를 하면서도 모친과 나눴던 대화의 일부는 생략했다. 이 역시도 몹시나 간단한 이유다. [그 아이는 절 버릴 거예요.] [어느샌가 잘난 사람이 되어 나를 깔보겠죠. 그러다 결국엔 자기 세상으로 떠날 거예요. 그날의 그가 그랬듯이, 그 사람 핏줄이니까······.] [뭔가 잘못됐지 않아요? 왜 그 아이는 인생이 그렇게 편하죠? 분명 내 배로 낳은 자식인데, 나는 평생 살아오며 그런 이유로 도와준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어요. 근데······ 그런데 왜 그 아이는······.] 이런 어두운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도서관에서 저랑 있었던 일들은 이제 됐으니까, 그만하고 어서 말해봐요. 그날 어머니랑… 무슨 대화를 나눴던 거죠?” “별거 없다. 필요한 비용은 내가 전부 낼 테니 널 마탑으로 보내라고 설득했고, 거절당했다.” “거절… 이요?” “아, 정확히는 돈을 거절했다는 거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마탑에서 사람을 보냈다더군. 네가 어린 나이에 아무한테나 마법을 지지고 다니니 눈에 띄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였어…….” “크흠,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내가 네 은인이기도 한 셈이지……?” 그 점을 은연중에 어필했지만, 레이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며 무시할 뿐이었다. “…….” 사람 무안하게시리. “그래서… 어머니는 어떻게 됐나? 이제는 서로 좀 잘 지내냐?” 이내 화제를 다시 돌리자, 레이븐이 차갑게 답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죠.” “…응?” “이미 돌아가셨거든요.”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히며 침묵이 흘렀다. “아, 어… 그, 그러냐? 유감이다. 어디 건강에 문제가 있던 거 같진 아, 않았는데…….” 정말이지 오랜만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상황을 정리하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건강 문제는 아니었어요. 사고도 아니었고요. 수명이 다한 건 더더욱 아니죠.” “……그럼?” “목을 매달았어요. 자기 스스로.” “…….” “마탑에 들어가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요? 스승님이 내준 숙제 때문에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레이븐은 창고 한구석에 숨겨뒀던 오래전 일기장을 읽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침실에서 썩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게 어머니를 본 마지막 기억이었고요.” “…….”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어차피 한참 전에 다 털어낸 일이니까. 사람 죽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얘기도 아니고.” 도리어 레이븐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그런 배려의 말을 해줬지만, 나는 정말이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른 탓이다.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평생토록 일군 게 이 시궁창에 있는 방 한 칸이 전부인데.] 친모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그 대화가.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제 인생은 대체 뭐였던 걸까요?]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뒷골목으로 향하던 그 뒷모습이. *** 「비요른 얀델」 레벨: 7(New +1) 육체: 1,230.39 / 정신: 443.3 / 이능: 1,745.25(New +39) 아이템 레벨: 8,305 종합 전투 지수: 5495.19(New +39)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가챠본 - Rank 6 366화 책임 (4) 어색한 정적을 끝내며 레이븐이 말했다. “자꾸 그런 표정 지을 거예요? 이게 얀델……. 아니, 슈이츠 씨 잘못도 아닌데.” 내 사정을 전부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하지만, 낭떠러지 앞에 선 사람의 등을 마지막으로 떠민 게 나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내가 그 여자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 아니, 오히려……. 드왈키. 비요른의 생물학적 부친이었던 얀델 쟈르쿠. 이 둘의 경우를 떠올리면, 역시나 그 가능성을 더 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진다. 내 존재로 인해 바뀐 미래.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얘기는 끝까지 하지 말 걸 그랬네요.” 레이븐은 또다시 나를 배려하듯 말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또 하나의 기만이 될 것이다. 하지만……. “…….” 반면 이런 생각도 든다. 기껏 아문 상처를 내가 다시 건드려도 되는 걸까? 고작 내가 내 책임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유로? 그런 고민으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던 때였다. “분위기가 묘하군. 설마 우리가 방해한 건가?” “묘하기는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아저씨, 둘이서… 뭐 하고 있었어요……?” 출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막사 천을 걷어내며 들어서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보였다. “…….” 다시 고개를 돌리니 레이븐은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돌린 상황. 하긴, 이런 분위기에서 할 대화는 아니지. “…….” 결국 그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탐사 75일 차. 어느덧 7층의 폐쇄일이 다가오며 우리는 도시로 귀환했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오는 거 같네.’ 무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미궁 속에 있었더니 도시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상층 클랜 중에는 원정 한 번 다녀오면 한두 달씩 쉬는 곳도 있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만도 같은 기분. “바로 집으로 가실 거예요?” “일단은. 좀 쉬자. 그다음에는 맛있는 것도 좀 먹고.” “네!” 환전소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곧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아, 참고로 환전된 마석은 얼마 없었다. 6층에 도착한 후로는 모든 전리품을 왕가의 직인이 찍힌 전표로 받았으니까. 공훈처에 가면 돈으로 바꿔 주는데, 며칠은 사람이 붐빌 테니 좀 시간을 두고 방문하기로 했다. “후, 드디어 집이군.” 작게나마 정원이 있으며, 모든 창문이란 창문은 판자로 막혀 있는 저택. 이 저택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아무튼, 오면서 포장해 온 음식은 씻고 나서 먹는 거로 하고……. “그럼 누가 먼저 씻을 거냐?” 이내 씻는 순서를 정하려는데 아멜리아가 내게 말했다. “슈이츠, 네가 2층 욕실을 써라.” “응? 그럼 고맙긴 한데, 내가 먼저 써도 되나?” “1층 욕실은 2층보다 넓으니까. 우리는 둘이서 같이 쓰면 된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둘이서 쓴다고?” 왠지 그런 모습이 쉽게 상상이 안 가는데 말이지. “너네… 언제 그렇게까지 친해진 거냐?” 놀란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묻자, 에르웬이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치, 친하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씻어?!” “그게 더 효율적이니까. 뭐, 정 싫다면 내가 먼저 씻지.” “뭐요? 그걸 왜 당신 멋대로 결정—” “그럼 먼저 들어가지.” “…잠깐, 멈춰!” 이내 아멜리아가 욕실로 향하자, 에르웬이 뭐라 소리치며 그 뒤를 따랐다. ‘어찌 된 게 얘네는 조용할 날이 없냐.’ 나도 관심을 끄고 2층 욕실로 향했다. 누가 먼저 씻을지, 아니면 같이 씻을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일까. 이쯤 됐으면 서로 무기를 꺼내 들고 싸워 대지는 않겠지. “후아, 살 거 같네.” 이내 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자 착실하게 몸에 쌓인 피로들이 싹 풀리는 듯하다. 동시에 탐사가 끝났다는 실감도 났다. ‘그래도… 일이 많았던 거에 비해 무난하게 끝난 거 같네.’ 첫 습격 이후로 이렇다 할 사건들은 없었다. 7레벨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순찰대에 들어가 경험치를 쌓았고, 그런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다만 본대 쪽은 뭔가 일이 있었는지 중간에 우리 쪽에 지원을 요청해 병력 일부분을 떼어 가는 일이 있었다. 물론 나와는 크게 연관 없는 이야기였다. 레이븐은 전략적 역할 때문에 후방에 남아야만 했고, 그건 레이븐의 부대에 소속된 우리도 마찬가지. ‘이번 정산은 일단 장비부터 팔고, 전표도 돈으로 다 바꾼 다음에나 해야겠고…….’ 그렇게 몸을 씻으며 이번 탐사의 소득을 정리하고 있자니, 굉장히 감회가 새로웠다. “7레벨인가…….” 이제는 중후반부는 왔다고 자랑스레 말해도 좋을 만한 레벨. 심지어 획득한 3등급 정수의 개수를 따지면 사실상 후반부 초입이라 봐도 무방하다. 고블린 덫을 밟고 빌빌 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강해지긴 했구나 내가.’ 새삼 나 자신의 성장이 체감된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번 탐사를 무난하게 끝났다고 평할 수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시체 수집가, 절규의 마녀, 등대지기, 혈기사. 오르큘리스의 멤버 중 무려 넷과 싸워야만 했다. 분명 예전이었다면 누군가 희생을 하고, 나 또한 목숨을 판 위에 내걸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강해져야 해.’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부족함이 더 크게 와닿는다. 그야 아직 멀었으니까. 왕가나 아우릴 가비스, 이백호 같은 괴물을 상대로 나, 그리고 동료들의 안전을 100% 장담하기에는. ‘어떻게든 9레벨까진 찍어야 돼. 혼령각인 문제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때였다. “아저씨, 오래 걸려요? 슬슬 음식들을 다시 데울까 하는데…….” “아, 금방 나가마.”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 욕실에 박혀 있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왔다. 그리고 따듯하게 데워진 음식들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슈이츠, 길드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길드 문제?” “레이븐, 그 여자가 말했지 않나. 왕가의 눈을 피하고 싶다면 길드에 적힌 정보들부터 어떻게든 처리하는 편이 좋다고.” “아…….” 5등급 탐험가 리헨 슈이츠. 가장 마지막으로 미궁에 들어간 것은 약 5년 전. 다만 길드에 보관된 자료를 왕가에서 열람한다면 내 위장 신분은 금방 탄로가 나버린다. 리헨 슈이츠가 활동했던 팀, 먹은 것으로 확인된 정수 등등이 그곳에 적혀 있을 테니까. “옛 동료를 찾아가 몇 가지만 물어도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게 분명하다. 직접 데리고 와 대면을 시켰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리헨 슈이츠의 기록을 불태워 없애거나, 아니면 추적할 수 없게끔 수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길드의 내부자만 할 수 있는 일. “혹시 도와줄 만한 자가 있나?” “글쎄, 예전부터 길드랑은 친하게 지낸 적이 없어서.” 물론 그리 말하면서도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기는 했다. 줄리안 어반스. 예전에 누명을 풀기 위해 인질로 잡기도 했던 지역장의 금지옥엽. ‘음, 금지옥엽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다시 생각해도 제법 특이한 여자였다. 꼭두각시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제 아비의 몰락을 바라다니. 그 여자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만약 그때 도와주고 은혜를 입혔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가능했을까? *** 도시로 돌아온 다음 날. 아멜리아는 등대지기의 장비를 처분하기 위해 외출했고, 에르웬은 성지에 들러야 한다며 떠났다. 그리고……. “그럼 나가볼까.” 나도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야 의논 결과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결론이 났거든. 전 동료이던 레이븐조차 못 알아본 얼굴 아닌가. 애석하게도 이 얼굴을 통해 비요른 얀델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 집에만 콕 처박혀 있는 것도 좀 이상할 테고. ‘이 얼굴로 그 용인족 꼬맹이를 만났어야 하는 건데.’ 초면에 더럽게 못생겼느니 하던 그 용족의 무녀도 이 얼굴을 보고서까지 그런 거짓말은 하지 못할 터. 쯧, 이런 비실이 같은 얼굴이 뭐가 좋다고. ‘아무튼, 그럼 거기부터 가볼까…….’ 현 시간대로 돌아오고서 처음으로 제대로 하는 외출. 과거에 갔을 때처럼 주변 거리들을 구경하며 설렁설렁 걷고 있자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르시아 로므네.] 직종에 맞지 않게 멋들어진 고대어로 된 이름을 한 대장간. 해석하자면 마법의 불꽃이라던가? 난쟁이놈. 그러니까 히쿠로드 무라드가 팀 반푼이에서 탈퇴하고 지은 대장간이었다. ‘……요즘 장사가 잘된다더니, 진짜였네.’ 레이븐에게 어느 정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옆에 건물들까지 합쳐져 증축이 된 것을 보니, 2년 반 사이에 사업이 성공하긴 한 모양. ‘한번 들어가 보기나 할까.’ 왠지 궁금해져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시된 장비들을 천천히 구경하던 때였다. “하하핫! 전시된 물건들은 파는 게 아니라 주문 제작을 위한 표본들이네. 혹시 달리 찾는 물건이 있다면 내게 말해주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등을 돌리니, 정말로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히쿠로드 무라드.” “오, 내 이름도 아는가? 하하핫! 최근 들어 유명해지긴 한 모양…….” 오랜만에 만난 난쟁이놈이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위로 들더니, 이내 날 보고서 흠칫했다. “…응?” “왜 그러시오?” “아, 아닐세. 그냥 좀 묘한 느낌이어서. 거, 키도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이였구만?” 설마 알아본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 오케이, 이 정도면 진짜 얼굴 까고 다녀도 알아볼 사람은 없다고 봐야겠네. ‘근데… 왜 이렇게 서운하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은 한구석에 쓰윽 밀어둔 상태로 난쟁이놈과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이 밖에 나와 있어도 되는 것이오?” “하하, 나는 대장간 일은 잘 안 하네.” “어째서?” “그야 채용한 대장장이들이 대신해 주는데 왜 내가 하는가? 그치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 만들기도 하고.” “…그렇구려.” “오히려 이쪽이 더 내 천직이랄까? 뒤늦게서야 내 적성을 찾은 셈이지. 그러니 말해보게. 원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가격을 맞춰 주겠네.” 이제 보니 난쟁이놈은 대장장이의 꿈을 접고서 영업직으로 직종을 전환한 듯했다. 어쩐지, 장사가 잘되는 거 같더라니. ‘얼씨구, 미스릴제 목걸이도 차고 있네?’ 솔직히 말해 꽤 충격이었다. 꿈을 접은 것이나, 하고 있는 복장이나 모두 내가 알던 그 녀석이 아닌 거 같았다. 뭐, 화룡점정은 마지막에 한 말이었지만. “에잉, 쯧… 돈이 많아 보여 잘 설명해 줬더니만, 재수가 없기로서니.” 살 목적은 없고 구경 차 와봤다고 하자마자 녀석은 웃음기를 싹 지우더니 나를 쫓아냈다. “안 살 거면 얼른 나가게! 자네가 있으니 다른 손님이 못 들어오지 않나!” 등 떠밀려 쫓겨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이렇게 돈독이 오른 거야?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으니 됐나.’ 대장간에서 나온 후로는 미리 위치를 알아둔 교습소로 향했다. 로트밀러 그 아저씨가 탐험가들을 대상으로 탐색꾼 기술을 알려 주며 장사를 하는 곳이었는데……. ‘닫혀 있네. 멀리서라도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어째선지 오늘은 영업 중이 아니었다. ‘그럼 어디로 가지?’ 집에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가봤자 할 것도 없기에 새 목적지를 정해 이동했다. [라비기온 국립도서관] 할 게 없을 때는 여기 만한 곳이 없으니까. 운영 중임을 알리듯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서니 익숙한 형태의 데스크가 보였다. 하지만……. ‘뭐야.’ 데스크에 앉은 사람의 얼굴들이 다르다. 원래라면 저 넓은 데스크에 졸린 눈을 한 사서 한 명만 있어야 했건만.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스무 명도 넘는 직원이 데스크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는 게 보인다. 마치 20년 전 과거의 도서관처럼. “저기… 원래 있던 사서는 어디로 갔소?”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그나 리타니엘 페프로크라고…….” “……?” 내 물음에 사서 한 명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데스크로 가서 다른 사서들에게 묻고서 돌아왔다. “선배님들께 물으니 도서관 개편 전에 퇴직하신 분의 성함이라고 하시네요.” “…언제 퇴직했는지도 알 수 있소?” “개편 직전이라고 했으니, 2년 정도 전이겠네요.” 2년 전이라…. 하긴, 걔가 평생 사서나 할 스펙은 아니긴 했지. 애초에 수십 명이서 할 업무를 방대한 마력량으로 홀로 보고 있었던 거니까. “혹시 달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실까요?” “괜찮소, 탐지 마법만 걸어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리다.” “서적 탐지 마법 수수료는 3천 스톤입니다!” 얼씨구, 이제는 수수료도 받아? 내가 없는 동안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음이 실감났지만, 일단 돈을 지불한 뒤 몇 권의 책을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드르르렁-! 누구야 대체 아까부터. 드르르르렁-! 일정 주기랄 것도 없이 연이어 울려 퍼지는 코골이 소리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 이용자님, 민원이 들어와서 그런데… 제발, 좀 일어나 주시겠어요……?” 안 그래도 사서 한 명이 코까지 골고 있던 거한의 바바리안에게 빌다시피 하며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드르르르렁-! 어휴, 바바리안 망신은 쟤가 다 시키는……. ‘어?’ 이내 깨어난 바바리안이 침을 쓱 닦으며 벌떡 몸을 일으킨 순간,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하다! 잠깐 졸았나 보군!” 대충 땋은 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금발. 고집이 느껴지는 금색 눈. “아, 예에……. 그럼 퇴관을…….” 허, 설마 도서관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골격이 너무 커져서 처음엔 못 알아볼 뻔 했지만, 얼굴을 보니 확실했다. “하하! 내쫓을 것까지야. 이렇게 사과하지 않나! 야박하게 굴지 마라. 아, ‘야박하다’라는 단어는 좀 어려운 말이었으려나?”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였다. 367화 책임 (5) 거의 2m에 다다르는 키. 다만, 비율이 좋고 몸에 붙은 근육이 슬림해서 그런지 비대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네.’ 역시 본나이트 정수를 지운 거려나? 오랜만에 보는 아이나르의 모습은 새삼 낯설었다. 초반부에 체격이 줄어든 뒤로부터 계속 그 모습만 봐 왔으니까. 뭐,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때의 얼굴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때는 완전 앳된 티가 났었는데.’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다. 음, 어쩌면 얼굴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관록의 차이려나? “하하! 사람이 책 좀 보다 잠들 수도 있지. 너는 내가 바바리안이라고 차별하는 건가?” “저…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저, 정말로—.” “농담이다! 농담! 더 폐는 끼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약속할 테니, 한 번만 봐줘라. 응?” 호방한 말투에서는 여유가 느껴지며, 화술도 제법 늘었다. 상대방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자연스레 몰고 가다니. 나도 솔직히 감탄했다. 이제 얘도 바바리안 족의 특성을 이용할 수 있게 됐구나.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하하, 고맙다! 아, 혹시 육포 좀 줄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관내에서 음식물은—.” “안다! 그냥 네가 너무 빼빼 말라서 그랬지. 자, 얼른 가라! 일도 바쁠 텐데!” 이내 사서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돌려보낸 아이나르는 자지 않겠단 약속은 지킬 셈인지 정말로 책을 펼치고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글도 읽는 거야?’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 읽던 책을 보는 척 연신 건너편의 아이나르를 힐끗 관찰하던 때였다. “으음…….” 아이나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책 중에 어딘가 막히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 다만, 여기서도 아이나르의 변화가 체감됐다. “이봐, 친구!” 나를 보며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아이나르. “…나를 부르는 것이오?” “하하, 이상한 친구군! 그럼 말고 또 있나? 여기 와서 이것 좀 읽어 줄 수 있나?” 허, 설마 인간을 친구라고 호칭하는 것도 모자라 도움을 청할 줄이야. 혹시… 얘 눈에는 내가 바바리안처럼 보이나? “겁먹지 마라! 내가 해치는 것도 아닌데!” “…겁먹은 게 아니라 의외여서 그랬소, 바바리안은 인간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그거 다 선입견이다, 선입견! 뭐, 나도 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지만,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걸 점점 알게 됐지.” 음, 일단 바바리안으로 착각한 건 아닌 거 같고. 날 보고 비요른 얀델을 떠올린 것도 아닌 듯했기에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여기를 읽고 있는데 이 단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무슨 뜻인지 좀 알려 주겠나?” “이건… 병참이라 읽는 것이오. 군에서 물자를 관리하거나 보급하는 그런 병과를 뜻하오.” “병과? 그건 뭐지? 맛있어 보이는 이름인데.” 아니, 얘는 무슨 이런 것도 못 읽으면서 군사 서적을 읽고 있어? 어이가 없지만 일단 묻는 것에는 답해 줬다. 그러면서 옆에 쌓인 책을 보니 군사 서적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자리해 있다. 대부분은 역사에 관련된 서적들. ‘…얘가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마저 읽을 수 있겠군!” 이내 단어 설명이 끝나자 아이나르는 다시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나도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그런 책은 왜 읽는 것이오?” “응?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핫!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내가 특이해 보인단 건 나도 잘 아니까!” 뭐야, 얘는 진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호쾌하게 웃는 아이나르를 빤히 보고 있자니, 이내 아이나르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중얼거렸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전사가 책을 자주 읽었다.” “…….” “뭐, 이래 봤자 나는 그 녀석 발끝도 따라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란 게 있는 거다.” 어딘가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목소리. 이에 나는 에르웬이나 레이븐에게 들었던 아아나르의 근황을 떠올렸다. ‘내가 죽은 뒤… 부족장이 되겠다며 선언을 했댔지.’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던 내가 사망한 후, 슬퍼하는 동족들 앞에서 당차게 밝힌 포부였다. 처음엔 동족들도 회의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하나둘 인정하기 시작해 이제는 거의 후계자처럼 여겨지고 있다는데……. “그나저나… 조금 아쉽군?” 돌연 아이나르가 날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뭐가 말이오?” “바바리안으로 태어났으면 꽤 잘생겼을 얼굴일 거 같아서.” “…그렇소?” “아무튼, 여기서 만난 건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떤가?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다. 너는?” “리헨 슈이츠요.” 가명을 밝히자 아이나르는 머리에 새기기라도 하듯 곱씹더니, 이내 쌓여 있던 책들 중 몇 권을 내게 건넸다. “이걸… 갑자기 왜 주는 거요?” “친구가 된 선물이다.” 아니, 도서관 책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어차피 갖고 나가지도 못하는걸. “…고맙소.” 어이가 없었지만 빈말로라도 감사의 말을 뱉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고맙기는. 상위종으로서 당연한 일인데.” “…상위종?” “아, 조금 어려운 단어려나? 사실 인간인 너는 모르겠지만…….” 아이나르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나한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바바리안은 사실 이 세상에서 제일 우월한 종족이다.” …응? “그 책을 읽어 보면 알 거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무심코 건네받은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심장의 비밀, 이기적 우월 인자] [바바리안 III - 마법사들은 어째서 그들의 심장을 탐냈는가.] [성물 전쟁으로부터 배우는 바바리안을 적대하면 안 되는 이유 일곱 가지.] …그런 이름의 책들이었다. *** “안 읽나?” “…읽고 있소.” 자꾸만 앞에서 눈치를 줬기에 하는 수 없이 받은 책들을 읽어 내렸다. 솔직히 호기심도 있었거든. 책 제목만 이럴 뿐, 내용은 의외로 정상적일 수—. ‘…는 개뿔.’ 책의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용들이 전부 하나같이 똑같다. 바바리안이 대단한 종족이라고 치켜세우는 글. 대체 이 책은 무슨 생각으로 쓴 걸까. 책을 쓴 걸 보면 종족이 바바리안은 아니었을 텐데. 제정신이면 바바리안을 수요 대상으로 여기고 출판한 것도 아닐 테고. 툭. 나는 이해를 포기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아이나르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땠나? 좋은 책 아닌가?”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였소.” “후후,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는 마라. 인간이란 종족도 그렇게까지 열등한 종족은 아니니까. 우리가 유독 특별할 뿐.” “…….” “알고 있나? 바바리안의 문맹률이 인간의 99배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수천 년 전의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하고 있지. 그 어느 종족도 하지 못한 일이다.” “…….” “아, 그리고 또, 바바리안이 물에 뜨지 않는 이유를 아나? 그건 사실 우리의 영혼의 밀도가 타 종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저기, 근데 밀도가 뭔지 아시오?” “…크흠, 혼령각인이 바바리안에게만 되는 이유도 있다!” 모르는 거구나. “우리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이 없기 때문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어딜 가나? 이제 시작인데.” “미안하지만, 할 일이 떠올라서.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봅시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잘 가라.” 아이나르와 만난 건 반갑지만, 더 있다가는 이런 얘기를 온종일 들어야만 할 듯했기에 얼른 튀었다. 그리고……. ‘여기 있으면 눈에 안 띄겠지.’ 구석진 자리로 옮겨 새로 꺼낸 책을 읽었다. 대부분 최신 정보에 관한 것들이었다. 한 해 동안 발행된 신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하거나 그런 책들도 꽤 있었으니까. ‘왕가에서 저층 탐험가를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더니, 이런 것들이었구나.’ 그렇게 책을 탐독하며 정보를 얻던 중, 나도 모르게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굳었다. 1년 전 기사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온 탓이다. [탐험가 길드의 제7 지역장 나일 어반스 자진 퇴임 결정, 정치적 다툼 문제 아닌 개인 사정.] 그 아저씨가 은퇴를 했다고? 흥미가 돋아 자세히 내용을 읽어 내리고 있자니 어느덧 기사에 막바지에 이르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길드장에 입후보를 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그가 갑작스레 은퇴를 결정한 것에 대해 그의 지인들은 1년 전 딸의 죽음이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1년 전, 딸의 죽음. “…걔가 외동딸이었나?”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한번 확인은 해 보자.’ 내친김에 1년 전 기사들이 적힌 책을 꺼내 온 뒤 하나씩 확인했고, 머지않아 찾던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반스 가문의 장녀, 줄리안 어반스. 알미너스 상회의 본부장과 결혼 발표.] 일단 시작은 약혼 기사였다. 그리고……. [줄리안 어반스, 결혼식 당일 밤에 사망.] 세 달 뒤에 사망 기사가 올라왔다. 사인은 실족에 의한 추락사. 술에 취해 3층 테라스에서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하는데……. [나일 어반스, 배상 청구받자 결코 자살 아닌 실족사라 다시 한번 완고히 주장.] 왠지 입맛이 쓰다.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 다 아니까, 괜히 내 책임도 있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됐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쩝, 찾아보지 말 걸 그랬나……. ***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늘 그렇듯 도시에서의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흘렀다. 하긴, 월초에는 해야 할 일들이 제법 많으니까. 전표를 돈으로 바꾸고, 장비들도 팔고 하다 보니 정말이지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가온 정산의 시간. “이 정도면 빚은 전부 갚고도 남겠군.” “그, 그럼 집은 안 팔아도 되는 건가요!” “그게 말인데, 빚을 갚는 건 좀 미뤘으면 한다.” “어, 어째서요……?” 그야 아직 납기일까지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당장은 먼저 돈을 투자해야 할 곳도 있고. “아, 아저씨가 그러겠다면… 어, 어쩔 수 없기는 한데……. 근데 대체 어디에 그 큰돈을 쓰시려고…….” “배를 살 거다.” “…배요?” 에르웬은 고개를 갸웃한 반면, 아멜리아는 내 생각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계속 전쟁에 참가할 게 아니라면 배 한 척은 있는 편이 좋겠군.” “그 말대로다. 다음 탐사에 가려는 곳도 6층이고.” 당장은 돈이 없어 용병으로 참전했지만, 고작 한 번의 원정으로 목표 금액을 충당한 상황. 굳이 또다시 참전할 이유는 없다. 이번에 받은 일당을 생각하면 돈은 잘 벌리겠지만, 내게는 그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가려는 곳이라니요……?” “지저섬이다.” “…지저섬? 6층에 그런 이름의 섬도 있었나?” 아멜리아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섬은 아니다. 뭐, 레이븐 정도쯤 되면 당연히 알 거 같지만. 아무튼, 지저섬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자 에르웬과 아멜리아도 들어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다 아래에 숨겨진 섬이라… 이제 보니 거길 말하는 거였군.” “예전에 언니가 알려 줬던 적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우리 셋으로만 갈 수가 있나? 항해사도 없는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구해 봐야지.” “…또 한동안 바빠지겠군.” 다행히 둘 다 별다른 이견 없이 내 탐사 계획을 따라 주기로 했고, 그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선박과 항해사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또 하염없이 흘러……. “에르웬은?” “자고 있다.” “그래? 너도 굳이 올 필요까진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싫다면 다음부터는 오지 않으마.” 어, 싫다고는 안 했는데……. “크흐흠, 고맙다는 뜻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런 뜻이 되지?” 거,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탁상에 올려 둔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럼 다녀오마.” “그래.” 안심하며 눈을 감기 무섭게 온 세상이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자, 그럼 컴퓨터부터 켜 볼까. 368화 블랙 스타 (1) 딸깍, 딸깍.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부터 살폈다. 매번 커뮤니티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이백호와 첫 만남이 있었던 한국인 채팅방. 역시나 이번에도 접속 인원은 없었다. ‘후, 차라리 한번 만나서 속 시원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닌데…….’ 이내 짧게 확인만 하고서 자유 게시판으로 화면을 이동했다. 보통은 커뮤니티가 열리고 나서 폭발적으로 게시글이 리젠되니까. 한 달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을 간략적으로 살피기엔 이보다 좋은 시간이 없다. [속보) 이번 원정에서 라므레온드 소백작 사망.] -오르큘리스 단장이 네 명인가 데리고 가서 조졌다더라. -공석이 된 제3 군단장 자리는 이번 원정 중에 대리로 임무를 수행했던 참모장한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함. [these99: 이번 사태로 [천금의 벽]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더 이상 후방도 꿀빠는 자리는 아니게 되겠네.] [└SecureId7: 꿀빠는 자리가 아니기는. 보니까 얼마 죽지도 않았더만. 기껏해야 앞으로 순찰 병력이 좀 더 늘어나는 정도겠지.] [stevencastle: 근데 거기 참모장이면 엘토라 테르세리온, 그 새끼 아닌가?] [└글쓴이: 맞음. 재상놈 아들내미.] [└stevencastle: 하, 앞으로 3군단은 절대 안 가야겠네. 그 새끼랑은 얽혔다가 좋게 끝난 적이 없어서.] 역시나 게시판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글들은 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혈령후 소식 들은 사람?] -이번에 등대지기인가 뭔가 하는 오르큘리스 멤버 죽였다던데, 확실한 이야기임? 듣자 하니 상대 쪽에 혈기사에 시체 수집가랑 절규의 마녀도 있었다고 하던데. [marcelone: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확실한 정보 맞음. 참고로 혼자 힘으로 죽인 게 아니라 금의 마법사랑 같이 힘을 합쳤었다더라.] [└글쓴이: 와, 진짜? 옛날에 동료였다더니 소문이랑 다르게 사이가 그리 나쁘진 않은가 보네.] [marcelone: 그래도 상대 쪽 전력이 너무 강해서 여러 추측이 나오는 중. 아무리 혈령후라고 해도 그만한 전력을 상대로 서폿 포지션이던 등대지기를 잡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쯧, 이 부분도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구나. 여기서도 의혹이 돌 정도면 다른 곳에서는 정말 조사까지 시작했을 수도 있겠는데. 딸깍, 딸깍.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게시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띠링-! 돌연 쪽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인: Ghost master.] 발신인에는 GM의 닉네임이 적혀 있었으나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커뮤니티 내 시스템 메시지나 공지 사항 같은 것이 이 이름으로 발신되니까. 내 쪽지함의 9할 이상이 GM에게 온 쪽지다. 하지만……. ‘업보가 있다 보니 괜히 긴장되네.’ 나는 올 게 왔다는 기분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지난 회차에서는 경황이 없어 이제야 연락을 드리는군요.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한번 보시죠.] GM에게서 초대장이 왔다. ***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GM의 연락이 있으리라는 것은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제야 온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솔직히 지난 회차에 바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원탁에서 GM의 정체를 오픈했다. 그리고 이는 소울퀸즈의 입을 통해 GM에게도 전해졌을 터. ‘그런데 다음 회차에서야 연락이 온다는 건…….’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신중히 시간을 두고서 만남을 갖고 싶었거나. 그도 아니면,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는 도중에 연락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던가. 뭐,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그럼 어떡할까…….’ 쪽지를 켜 둔 상태로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일단 초대를 거절한다고 해도 GM이 내게 벤을 먹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수사자 가면을 쓰고 열심히 거물인 척을 해댔지 않은가. 생각이 있으면 완전히 척을 지려고는 안 하겠지. 이백호 때 벤을 때렸다가 현실에서 뒈질 뻔한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그래, 한번 만나보기나 하자.’ 결정을 내린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나는 쪽지 창을 닫고서 쪽지에 적혀 있던 비밀 채팅방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비밀 번호가 0720? 뭐 기념일 같은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추측이 사실이라고 한들 깊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닐 터. 솨아아아아-! 이내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번뜩였고, 어느덧 눈을 떳을 때 나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 은은하게 감도는 책 내음.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장소는 내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곳이었다. 그야 한 번 와봤으니까. 차원 붕괴 루머가 돌던 시절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다니던 중에 이곳에서 한 남자에게 정보를 얻었다. [Elfnunalove] 머리 위에 그런 요상한 닉네임을 달고 있던 그 남자. 그땐 얘가 GM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음, 그건 얘도 마찬가지려나? “오랜만에 뵙는군요, 엘프눈나 님. 아니, 수사자 님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려나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간 말투가 많이 변하셨군요. 아니, 사실 이게 본모습이려나요?” 떠보는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기에 대충 무시하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이 가식적인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그나저나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군요. 참 묘하지 않습니까? 사람 인연이라는 게.” 확실히, 묘하긴 하다. 첫 만남은 커뮤니티 내에서 정보를 구하던 뉴비의 입장이었고, 두 번째는 이백호와의 채팅방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앞으로는 이곳에 오셔도 백호 씨는 못 만날 겁니다.] 녀석은 이백호와 동향 사람이던 나에게 도의상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말해주었고, 그게 끝이었다. 녀석에게도 나는 그저 흔치 않은 한국인 플레이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겠지. “못 보던 사이에 많이 과묵해지셨습니다.” “…….” “그럼 직접적으로 묻지요. 사실 저는 인연이라는 걸 쉽게 믿지 않습니다.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이라……. “왜 원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두 번째 만남은 아니더라도, 첫 번째 만남은 분명 의도적이었을 테니까요.” 그래, 그걸 그렇게 해석한 거구나. 진짜 우연이었는데. “그때도 대화방에 초대한 건 너였을 텐데?” “예, 그랬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해서요. 질문 글에 타루테인 학파, 셔널 페르강이란 마법사에 대해서 콕 짚어 올린 것도 그렇고.” “…….”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일부러 제가 흥미를 느낄 만한 걸 올린 거 아닙니까?” 얘도 참 웃기네. 그런다고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참 오싹하더군요. 그만큼 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 터무니없는 비약이지만, 이를 내 입으로 말한다고 득이 될 것도 없기에 대충 이쯤에서 얘기를 끝냈다. “…그런 얘기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답변을 회피하는 것입니까?” 회피는 무슨. 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네 멋대로 생각해라.” “그러지요.”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는?” 내가 딱 잘라 화제를 정하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상한 질문이군요. 부른 건 그쪽 아닙니까.” 응?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 알 수 없는 전개에 가만히 있자 녀석이 알아서 말을 이었다. “대체 제 본명을 어떻게 알아냈는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울퀸즈 님에게 제 본명을 말한 건, 저와 만나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어……. 그렇게 날카롭게 말하면서 헛다리를 짚으면 내가 더 무안해지는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늘 그렇듯 고민의 시간 자체는 길지 않았다. “과연.” 이왕 이렇게 된 거. “머저리는 아니었군.” 노선을 조금 틀어보자. *** “그 말씀은…….” 녀석이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힐끗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어차피 이놈도 나를 떠보는 것일 테니까. 일단 저런 식으로 질문을 하며 정보를 얻으려는 수작일 게 뻔하다. 내가 인정을 하면 팩트 체크가 되고, 반대의 경우라면 경우의 수 하나를 지울 수 있으니. 사실상 저놈 입장에선 헛발질도 손해가 아니겠지. 따라서……. ‘제대로 헛발질하게 둬버리자.’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네게 바라는 것이 있다.” 생각해 보면 나쁜 상황도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들 중 GM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 “그렇다면 조용히 연락을 취하셨어도 됐을 텐데요.” 아, 그거……. “그런 방식은 재미가 없지.” 대충 답하자 역시나 녀석은 알아서 해석해 주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저를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뭐, 그거야 너 알아서 생각하고. 나는 다시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묻지 않을 생각인가?”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 녀석은 가만히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습니다. 한번 말이나 해보시지요. 제게 뭘 원하기에 이런 짓을 한 건지.” 나는 잠깐의 텀을 두고서 답했다. “이백호의 벤을 풀어라.” 굳이 GM의 힘이 필요하다면 이것뿐이다. 이백호가 커뮤니티로 돌아오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얘가 임시 보호 중일 우리 고양이에 대해서도 정보를 캐내야 한다. 다만, 나름 예상하고 있던 요구였을까? “……과연, 이게 목적이었던 거군요.” 의외로 GM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하긴, 국적별로 세력을 이루는 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유난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그럼 제 정체에 대해 말해 준 것도 이백호입니까?” 이미 나와 이백호가 한통속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물음. 굳이 답해 줄 이유는 없었다. “글쎄.” “도대체… 둘은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답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얼빠진 표정을 짓는 녀석. 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건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 가져온다면.” 내가 말을 잇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재미난 정보, 그걸 말씀하는 겁니까?” 그래, 역시 그 얘기가 너한테도 전해졌구나. 내가 부정의 말 없이 침묵을 이어가자 녀석이 무릎을 검지로 두드리더니……. “하하하……….” 느닷없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무섭게. “어지간히도 본인에게 자신이 있나 봅니다?” 친절하고 정중하던 지금까지와는 180도 변해 버린 싸늘한 물음. “없지는 않지.” “그건 저랑 비슷하군요.” “거절하겠다는 뜻인가?” 내 말에 녀석은 조금도 주저 않고 답했다. “예. 멋대로 제 정보를 퍼뜨려 놓고,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요구에 제가 응할 이유가 없지요.” “…….” “이백호 씨의 벤을 풀고 싶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걸 가지고 오십시오.”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녀석은 마지막으로 더 할 말이 있냐는 듯 나를 보았다. 음, 그래도 말할 시간은 줘서 다행이네. “유감이군.”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실어 말했다. “내가 거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니.”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이해 못한 척하고 있어. 첫 만남 때부터 아닌 척해도 날 겁내고 있는 티가 확 났구만. [그간 말투가 많이 변하셨군요.] 놈은 내 무례한 말투에도 정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저를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내 행동을 보고서 큰 위협을 느꼈으며. [그렇다면 조용히 연락을 취하셨어도 됐을 텐데요.] 지난 내 행동에 대해 분노를 토해내기보다는 아쉬움을 먼저 내비쳤다. 그렇기에……. “세 달을 주지.”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해석은 듣는 사람의 몫이니까. 이내 녀석이 말했다. “…이백호조차 저를 어쩌진 못했습니다.” 거, 그런 작은 목소리로 말해 봤자 자기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는 것처럼밖에는 보이지 않구만. 정정할 부분도 있고. “정확히는, 그 녀석에게도 죽을 뻔했지.” “…….” “넌 내가 그 녀석처럼 물러 보이나?” “…….”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억해라. 세 달이라는 것을.” “…….” “그다음엔 직접 찾아가겠다.” 이제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차례였다. *** “후… 돌아오니까 좀 살 거 같네.” 채팅방을 나와 컴퓨터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수사자 가면을 쓴 후로 수도 없이 겪은 경험이지만 여전히 할 때마다 피로감이 상당했다. ‘이게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네.’ 원래는 GM과 만나서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그런 정보나 조금 캐볼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이백호 얘기도 한 번 꺼내보고. 그래, 분명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나를 두려워하고 있을 줄이야.’ 녀석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변했다. 마공학자, 유르벤 하벨리온. 그 신분을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강자. 아무래도 그 포지션이 녀석에게는 상당한 불안감으로 작용한 듯한데, 이를 빨리 캐치할 수 있던 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근데 정체가 까발려졌는데도 왕가는 경계하지를 않는 거 같았지.’ 다만 천천히 대화를 복기해 보니 아까는 생각 못한 의문이 떠오른다. 직접 해코지를 할 것도 없이 악령이라는 정보를 왕가에 흘려주기만 해도 얘 입장에서는 파멸이 확정된 것일 터. 한데, 왜 녀석은 직접적인 위협만을 경계하는 듯했을까. ‘…왕가에 뭐 빽이라도 있는 건가? 악령 문제쯤은 묻어 버릴 수 있을 만한?’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 빽 좀 같이 공유하고 싶은데. …그런 건 안 되겠지? ‘마지막 대화도 조금 걸리네…….’ 이내 나는 채팅방을 떠나기 전에 녀석이 내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비밀번호. 비밀번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으시군요.] 꽤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야 비밀번호가 왜?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의미가 있는 거 같긴 한데. […….]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말을 아꼈고, 이것이 녀석에게는 대답이 되었다. [그럼, 정말로 그자와는 연관이 없는 건가…….] […….]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근시일 내에 또 뵙지요.] 후, 괜히 사람 찝찝해지게. ‘0720이라…….’ GM은 대체 그 숫자를 통해 내게서 뭘 확인하고자 했던 걸까? 369화 블랙 스타 (2) GM에 대한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나올 만한 주제도 아니잖아? 괜한 일에 시간을 쓸 바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보내는 편이 효율적이다. 예를 들면, 웹서핑이라든가. 딸깍, 딸깍. 현대에서와 달리 이곳에서의 웹서핑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용도의 오락거리가 아니다. 다음 달의 생존을 위해 정보를 얻고 정리를 하는 소중한 시간. “…끄흑, 끄흐흐흐.”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웃기지? 자존심 상하게. 딸깍, 딸깍. 이내 마우스를 쉬지 않고 움직이며 게시물들을 확인하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슬슬인가.’ 원탁 입장 가능 시간이 찾아왔다. ***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서재. 그곳에 앉은 백인 남성은 손에 깍지를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자가 이백호와 한편이었을 줄이야.”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코 바라던 상황은 아니다. 통제 불능이라는 말로밖에 설명 못 할 이백호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 와중에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니까. “…대체 어디서 나온 놈이지?” ‘엘프눈나’가 커뮤니티에 가입한 것은 약 3년 전. 원탁에 수사자 가면이 등장한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일부러 뉴비인 척 연기를 하고 들어왔단 거겠지.’ 하면, 그자는 어째서 커뮤니티에 들어왔을까. 추정되는 무력은 이백호에 뒤지지 않으며, 월등한 정보력을 보면 자신만의 세력 또한 구축한 듯한데. ‘…원탁의 감시자.’ 당시 사내는 그의 목표가 그 비밀 채팅방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닉네임 0720. 몰래 커뮤니티에 잠입해 있던 이계의 악령이자, ‘원탁의 감시자’라는 클럽을 만들고 시체 수집가 같은 거물들을 직접 채워 넣은 수완가. 그가 수사자 가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기색이었단 말이지.’ 그 비밀번호를 본다면 어떻게든 반응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어땠는가. 대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지막에 직접 언급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유로 그것을 입에 담은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그것조차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닌 거라면, 그럼 이백호와 편하게 접촉하기 위해서 커뮤니티에 들어온 건가?’ 음, 어쩌면 그럴지도. 사내는 여러 가능성들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그러던 때였다. “죄송해요. 게시판 쪽에 문제가 생겨서, 연락을 받고 바로 오지 못했어요.” 혼자 있던 서재에 백인 여성이 나타났다. 머리 위에 떠 있는 닉네임은 ‘소울퀸즈’. “그래서 어떤 일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이내 그녀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고, 사내는 방금 전까지 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수사자, 그와 만났습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됐죠?” “협박을 하더군요. 이백호의 벤을 풀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행히 세 달의 시간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안에 결정을 내릴 생각입니다.” 사내의 말에 여인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요?” 사내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했던 주제였다. 그야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 한국 출신의 플레이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꽈악.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빌어먹을 한국인들.’ 가만 보면 참 불공평하다. 그도 그럴 게, 이 커뮤니티를 만들고서 그가 만난 한국인은 몇 명 되지도 않는다. 그야 이 게임을 하는 한국인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숫자만 보면 대부분의 서양 국가보다 월등히 적다. 그런데, 아웃풋은 어떠한가? 그보다 훨씬 늦게 진입한 주제에 무력으로는 상대도 불가할 강자로 성장한 이백호. 거기다 이번에 새로이 등장한 ‘엘프눈나’까지. ‘심지어 ‘엘프누나’ 님도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지.’ 이쯤 되면 유전적으로 뭔가 특별한 것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생길 지경. ‘그나저나 엘프누나와 뭔가 관계가 있어서 그런 닉네임을 지은 거냐는 걸 묻지 못했군. 뭐, 어차피 대답은 해주지 않았을 거 같지만.’ 사내는 누군가 원본을 클리어하고 이 세상에 진입을 한다면 ‘엘프누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겼다. 모두가 쉬운 길을 찾아 치트 버전을 즐길 때, 그는 꾸준히 오리지널만을 파고 또 팠으니까. “마스터?” “아, 잠깐 다른 생각을 했군요.” 여인의 부름에 사내는 상념을 끝내고 지시를 내렸다. “소울퀸즈 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는 아직 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지요.” “…….” “그러니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을 만한 선에서.” 사내의 지시에 여인은 잠깐의 텀을 두고 답했다. 다만, 항상 자신감에 찬 태도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노력은 해볼게요.” 하기 싫다는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 익숙하게 가면을 얼굴에 쓰고, 고즈넉한 복도를 지나 원탁의 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두 먼저 입장해 있었다. “…오셨군요! 걱정했습니다, 피싯!” 내가 혹여나 원탁을 스킵할까 초조했는지, 몸까지 일으켜 세우며 환대를 해오는 광대. “…….” 여왕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긴, 지난번 일도 있었을뿐더러……. 아까 GM이랑 만났던 일도 얘 귀까지 들어갔겠지. “…….” 이내 자리에 앉자 정면부에 여우 가면이 보였다. 얘의 경우에는 눈이 마주치자 짧게나마 눈인사를 해왔는데……. “쯧.” 얘는 볼 때마다 아쉽단 말이지. 느닷없이 과거로 이동한 것만 아니었으면, 그때 상황을 이용해 정체를 캐낼 수도 있었을 텐— “저기…….” 그렇게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던 때였다. “혹시 제가 뭔가 실수라도……?” 여우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처음엔 갑자기 그게 뭔 소리인가도 싶었지만, 금방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내가 혀를 찬 것 때문에 이러는 거구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터져 죽는 것과 비슷한 이치. 보아하니 여우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내가 뭐 때문에 그랬는지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데……. 굳이 구구절절하게 오해를 풀 생각은 없었다. “글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 이 대답에 여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한 게 분명하다 여기는 듯했다. 쩝, 이렇게까지 하면 좀 미안한데……. ‘그냥 화제나 돌리자.’ “그럼 슬슬 시작하지.” 때마침 입장 제한 시간이 끝나며 원탁의 문도 닫힌 상황이기에 다른 멤버들도 여우가 저지른 ‘실수’가 뭐였을까 고민하는 것을 관두고 현재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흥미로운 얘기가 나올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피시싯.” “그럼 이번엔 저쪽부터겠구려?” 초승달의 질문에 내 왼쪽 자리에 위치한 사슴뿔 가면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원탁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야 내 왼쪽에서부터 시작해야 마지막 순번에 내가 오니까. 항상 얘들이 먼저 정보를 풀면 나는 그것을 듣고 판단한 뒤 상응하는 정보를 푸는 식이었다. 후, 포지션을 진짜 잘 잡았단 말이지? “……나부터 하지.” 이내 사슴뿔이 담담하게 준비해 왔을 정보를 풀었다. “왕가 회의에서 악령의 민족 편입 안건이 150년 만에 다시 거론됐다. 물론 수많은 반대로 즉각 안건에서 내려가기는 했지만.” 공직에서 실무를 본 게 아니라면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울 짧은 말. 그러니까 쉽게 말해……. ‘뭔 소리야?’ 나도 이해를 못 했다. 물론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원탁에는 지식이 부족할 상황이 오면 항상 먼저 나서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민족 편입 안건이라니요……?” 고블린이 숫기 없는 목소리로 묻자, 소울퀸즈가 대신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악령을 적으로 단정짓는 게 아니라, 포용하고 신민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에요. 150년 전에도 한 번 발안이 됐지만, 여러 이유로 무산됐죠.” “그, 그렇군요……. 근데 왕가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참 신기합니다…….” “피시싯, 저한텐 그만큼 전력이 모자라졌다는 뜻으로 들리는—” “글쎄요. 적어도 당신이 왕가의 전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단 것 정도는 알겠네요.” “……당신은 왜 나한테만 시비입니까?” “어머나, 자의식도 참. 저는 그저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걸요?” 소울퀸즈가 천연덕스럽게 웃자 광대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쟤는 이상하게 얘한테 약하더라. 몇 번인가 말로 두드려 맞아서 그런가? ‘광대 이 새끼도 참 강약약강의 표본 같은 놈이란 말이지…….’ 아무튼, 사슴뿔이 뱉은 정보는 첫 시도에 초록불을 받아내며 산뜻한 시작을 알렸고, 곧장 다음 차례로 이어졌다. 이번엔 고블린의 턴이었다. “흠흠, 며칠 전에 레아틀라스교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죠?” “하하, 그럴 리가요. 아무튼 알아보니 조금 기묘한 내용의 신탁이더군요.” “그만 질질 끌고 내용이나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봤자 추하기만 한데, 피싯.” 광대의 비난에 고블린은 왜 쟤는 또 나한테만 저러냐는 느낌으로 힐끗하더니 이내 내용을 입에 담았다. “왕의 핏줄이 검은 별을 품었으니, 그 주인이 될 자를 도우라.” “……?”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별의 여신 레아틀라스. 영혼의 운명과 앞날을 주관하는 신의 신탁인 만큼 해석의 여지가 다분했다. “검은 별이라……. 반역을 뜻하는 걸까요?” “노아르크와 내통 중이란 해석도 가능하겠구려.” “그런데… 그 주인이 될 자를 도우라니…….” “어쩌면 왕비가 임신을 했다는 말일 수도 있지요. 근데 그 애가 까만색인 거고요, 피시싯!” “……당신, 어떻게 그런 추잡한 이야기를.” “왜요? 까만 게 어때서? 내가 인종 차별이라도 했습니까?” 광대놈은 마치 재미난 농담이라도 한 사람처럼 낄낄거렸으나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이 새끼는 분명 친구가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던전앤스톤]이나 하고 살았겠— ‘니미럴.’ 왠지 자존감이 떨어질 듯했기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안 그래도 때마침 신탁을 화제로 하던 대화도 끝이 나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신탁이 그랬으니까. 어떤 해석을 하며 추측을 해봤자, 결국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야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제 내 차례구려.” 세 번째 순서는 초승달이었다. 예전에 창세보구에 관한 대박 정보를 가져왔던 그였지만, 요즘에는 그런 게 없었다. 애석하게도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휴, 뭐만 하면 전쟁 정보로 넘어가려 하지.’ 뭐, 그래도 일단 알아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만. 내가 세력을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런 정보로 이득을 챙기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왕가가 군선 제작 기술을 민간에 전수하기 시작했어요. 파손된 군선을 단기간에 제작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요. 어쩌면 곧 대형 클랜들이 군선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우의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듯 정보와, 그 정보가 가진 파장을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라 해야 하나? ‘첫 바퀴라 그런지 정보들이 좀 그러네.’ 그나마 흥미가 생겼던 것은 신탁, 그리고 왕가 회의에서 나왔다는 ‘편입’ 안건이었다. ‘악령을 받아들인다라…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 한 번 상상은 해보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슴뿔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 번 언급이 됐을 뿐, 금방 반대로 인해 안건에서 사라졌다고. “피시싯, 그럼 이번에는 제 차례군요?” 그렇게 한 바퀴의 절반을 넘게 돌아 다가온 광대의 차례. 다만 안타깝게도 이놈의 정보 역시 내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피해를 끼쳤다고 하는 게 맞나? “등대지기가 죽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그 말로 운을 뗀 광대놈은 아니나 다를까 내 정보를 원탁에 까발렸다. “세간엔 혈령후의 공이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지요. 혈령후가 아니라, 그 미친 여자가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남자의 공입니다.” “…이상한 남자?” “예, 오크히어로의 [거대화] 정수까지 먹여 둔 걸 보고 처음엔 혈령후가 비요른 얀델 대용으로 데리고 다니는가 싶었는데…….” “리헨 슈이츠. 왕가에서도 주시 중인 놈이지.” “피싯, 그런 이름이었습니까? 아무튼, 다음 원탁 때 이자에 관한 정보가 나왔으면 하니 좀 더 상세히 말해드리지요.” “…….” “어디서 이런 자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넷이 합공을 해도 죽이는 게 불가능할 만큼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습니다. 피싯.” “……그런 자가 있었다고요?” “잠깐, 금의 마법사로부터 그런 내용의 보고는 없었는데? 확실한 건가?” “아니면, 초록불이 켜졌겠습니까?” 광대의 말에 경악을 하며 깊은 관심을 표하는 멤버들. ‘어휴, 이 새끼들이 전부 내 뒷조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면 막막한데…….’ 그렇게 남들 모르게 속으로 한숨만 내쉬던 때였다. ‘뭐야, 이 여자는 왜 또 나만 보고 있어.’ 시선이 느껴져 옆을 힐끗하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소울퀸즈가 보였다. 어째선지 그녀는 뭐라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옆에 있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거대화… 3년 전에 가입… 혈령후…….” 설마 뭔가 눈치챈 건가? 아니, 어쩌면 잡을 듯 말 듯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는 과정에 돌입한 것일지 모른다. 심지어 위화감을 느낀 건 이 여자만이 아니었다. “잠깐만, 대용이 아니라 진짜 그 사람인 거 아닙니까? [거대화]가 흔한 정수도 아니고. 오우거의 정수도 먹은 거 같다면서요……?” 시작은 고블린이었다. “확실히 혈령후, 그 여자가 아무리 미쳤어도 대역을 세우고 애칭을 쓰진 않았을 거 같기는 해요…….”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피싯,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비요른 얀델은 죽었는데.” 광대는 그런 의혹을 비웃었다. 하지만…….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남들 모르게 힘을 키운 거라면? 그렇다면 금의 마법사가 이런 보고를 누락한 것도 말이 되겠군.” 이내 사슴뿔이 읊조렸고. “말이 되는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악령이라는 정체가 까발려졌으니까. 그것 때문에 죽음을 위장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오.” 초승달이 정리하듯 말했다. 그리고……. “비요른 얀델이 정말 살아 있는 거라면…….” 여왕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기간은 수사자 씨가 사라져 있던 기간과 겹쳐요.” 그 순간, 내게 모든 시선이 주목됐다. 너 혹시 비요른 얀델인 거 아니냐. 대놓고 그리 묻고 싶지만, 간을 보다가 호되게 당한 전적들이 많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정말 이렇게 됐네.’ 다만 딱히 코너에 몰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런 건 알리바이 하나면 끝이잖아? “또 그 이야기인가.” 이내 나는 원탁의 보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다들 나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니, 이번에는 먼저 하지.” 나는 말했다. 그들의 눈에 담긴 의혹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가 이 커뮤니티에 들어온 것은.” “…….”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다.” 초록불이 켜졌다. 370화 블랙 스타 (3) 수사자가 비요른 얀델이다. 이러한 주장은 소울퀸즈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이 원탁에서 등장했다. 그 근거는 비요른 얀델이 죽은 직후 수사자가 사라진 것에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알리바이만 해결되면 끝이라는 거지.’ 수사자는 비요른 얀델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절대적인 전제가 되는 순간 저들의 의혹은 많은 힘을 잃는다. [오우거의 정수도 먹은 거 같다면서요?] [대역을 세우고 애칭을 쓰진 않았을 거 같기는 해요.] [그렇다면 금의 마법사가 이런 보고를 누락한 것도 말이 되겠군.] [죽음을 위장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오.] 결국 이러한 의혹은 수사자가 비요른 얀델이란 가능성을 토대로 파생된 것이니까. 광대의 반응이 그 증거다. [피싯,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비요른 얀델은 죽었는데.] 수사자가 비요른 얀델일 리 없다고 굳게 믿었기에, 놈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저 의혹에 반응하지 않았다. ‘허, 얘도 안팎이 참 다르단 말이야.’ 밖에서 만나면 당장 대가리를 터뜨려 죽이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래도 원탁에서 만나면 의외로 귀엽게 봐줄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보아하니 쟤들도 슬슬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고. “…….” “…….”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정적 속에서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여우였다. “……22년 전, 이라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몇 가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 깃들어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저… 이,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 말대로면 수사자 씨는 20년 차가 넘었다는 뜻인데…….” 고블린이 말꼬리를 흐리자, 사슴뿔이 자연스레 끼어들며 말을 받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 GM, 그자가 끌려온 시기도 그때쯤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최장수 플레이어로 알려진 GM과 동기라 봐도 무방할 추정 입장 시기. “피시싯, 저도 10년 더 사람을 죽여대면 수사자 씨처럼 될 수 있으려나요?” 그래, 광대야 너는 이제 10년 차쯤 됐나 보네. 보니까 다른 애들도 대충 그 언저리인 거 같고. “근데 여왕, 당신은 왜 말이 없습니까? 피싯.” 광대가 헛다리를 짚은 소울퀸즈를 비웃듯이 말을 걸었다. “얼른 머리를 박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수사자 씨가 비요른 얀델이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낭설이나 퍼뜨리고 있고.” 그리 말한 광대는 유일한 정답자(?) 포지션을 즐기며 다른 멤버들도 쓱 훑어보았다. “당신들도 똑같습니다! 비요른 얀델? 그놈이 만에 하나 살아 있다고 한들, 그런 조무래기가 수사자 씨에게 비빌 수 있기나 할 거 같습니까? 예?” “하하하… 그냥 생각이나 해본 거지 저희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건…….” 고블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반면 사슴뿔은 책임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의 말을 되돌아보았다. “애초에… 지금 생각해 보면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큰 비약이긴 하군.” “…저는 사실 비요른 얀델, 그 사람이 악령이라는 것도 잘 믿지 못하겠어요. 왕가의 공표도 어딘가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저는 그 사람을 직접 본 적도 있거든요.” 여우가 나랑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얘는 차원문을 타고 도망친 고위층이었을 텐데? 음, 그때가 아니어도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나?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이내 광대가 여우의 말에 동조했다. “피시싯, 그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바바리안이 악령이라니? 어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번엔 광대와 사이가 나쁘던 사슴뿔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말을 내뱉었다. “확실히… 작위 수여식에서 보여 준 그 모습은 연기라 생각하기 어려웠지.” “…재상의 앞, 그것도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쿠도 후작을 밀쳤던 사건 말이오?” “후후, 그 얘기라면 저도 나중에 들었어요. 자기를 이용해 후작이 앞구르기를 한 것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죠?” ……부끄럽게. 이렇게 면전에다 칭찬을 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튼, 이 정도면 의혹은 완전히 벗어낸 거 같고…….’ 쓱 주변을 훑고 있자니, 여전히 대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가만히 있는 소울퀸즈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얘는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는 거지?’ 그 속내가 궁금해 여왕을 지켜보고 있자니, 광대가 화제를 전환했다. “여왕 씨,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이제 당신 차례인데요. 수사자 씨가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아무래도 내가 소울퀸즈를 빤히 보던 것을 이러한 의미로 해석한 모양. 이건 뭐 전문 앞잡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내 입장을 대변하지 못해 안달이야? “아, 아! 네. 그렇죠……. 해야죠…….” 아무튼, 광대의 재촉이 효과가 있었을까? 소울퀸즈도 조금은 정신이 들었는지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가는 GM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 마공학자, 유르벤 하벨리온. 한 학파의 수장이자 수많은 제조계열 마법사들의 우상이기도 한 존재. 하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야기일 뿐. 그의 실체는 다르다. 악령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 그곳의 수장이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전설적 존재로 여겨지는 존재 GM. 그게 바로 그의 정체이다. 그러나……. 솨아아아아-! 원탁에 띄워진 초록불은 소울퀸즈가 뱉은 정보가 사실이며, 과반수가 모르고 있던 정보임을 증명해 주었다. “왕가에서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라…….”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왕가에서는 의도적으로 GM을 풀어 주었다는 것을 넘어서— “그렇다면 협력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겠구려. GM이랑 왕가가.” 그렇게까지 이해할 수 있다. 나와의 대면에서 왕가의 위협 자체는 배제하는 듯하던 그 행동도 설명이 될 테고. 하면, 소울퀸즈는 어째서 이런 정보를 원탁에서 밝혔을까.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피싯, 역시 GM도 똑같은 놈이었군요. 어쩐지 암만 떠들라 시켜도 도시에 소문이 돌지 않는다 하더라니.” 필시 조언이자 경고였을 것이다. 소문을 내려 해봤자 의미가 없으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잠깐만요, 근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GM은 분명 왕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잖아요?” 이내 고블린이 모순을 짚자, 초승달이 쓴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영원을 믿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지. 하물며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욱더.” 초창기의 GM은 몰라도, 지금까지 그 순수성이 지켜졌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의미의 말. “이게 알려지면 이 커뮤니티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겠군.” 사슴뿔이 탄식 어린 어조로 읊조렸다. “네. GM이 왕가에 붙었단 소식이 알려지면 모든 플레이어들이 불안에 떨 테니까요.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내 여우가 소울퀸즈를 응시하자 다른 멤버들도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여왕 씨, 말해주세요. 당신은 운영진 측이잖아요? GM은 무슨 의도로 왕가와 손을 잡은 거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럼 우리가 알아서 해석하라는 뜻—”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내 소울퀸즈가 여우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차례가 끝났으면 이번엔 아예 저부터 시작을 해보죠.” 이내 그녀가 원탁의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GM은 그 누구보다 플레이어를 위해서 행동하고 살아가는 분이에요.” “…….” “왕가에 다른 플레이어를 제물로 바칠 일은 맹세코 없어요. 애초에 이 커뮤니티의 기능으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고요.” 말을 끝마친 그녀가 보석에 올린 손을 뗀 순간, 보석에서 초록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하, 그렇게 말하시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고블린은 어색한 분위기 자체가 껄끄럽다는 듯 웃으며 침묵을 깨트렸고, 이를 기점으로 소울퀸즈를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는 싹 사라졌다. “기능적으로 불가능하다니 참 다행인 일이오.” 사실 이게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GM의 마음은 나중에 변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다니 불안감이 가신 것. “하긴, GM의 권한으로 우리 신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아무래도 왕가 밑에 들어갔다기보다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식의 관계일 가능성이 높겠구려.” “그럼 이제 당신 차례네요.” 소울퀸즈는 이 주제로 길게 얘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지, 서둘러 대화를 정리하며 광대에게 턴을 넘겼다. “피싯, 시작부터 재미난 얘기를 들은지라…….” 광대는 턴을 넘길 정보를 고르듯 말꼬리를 흐렸다. 다만, 금방 적당한 게 떠올랐을까? “아하, 이게 좋겠군요!” 광대가 과장스레 손뼉을 마주치며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된 건데, 꽤 놀라운 얘기라서 말이죠.” “아까는 질질 끌어봤자 추하기만 할 뿐이라더니.” “피싯, 하지만 고블린 씨와 저는 다르지 않습니까?” 광대가 어깨를 으쓱하자 사슴뿔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상처받은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뱉는 고블린. 다만, 고블린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원탁 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야 막 광대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암흑대륙은 실존하는 곳이다.” 잔뜩 고양된 분위기에서 흘러나온 광대의 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일단 초록불이군.” “그보다 대체 무슨 뜻이죠? 의미를 모르겠는데요.” “피싯! 말 그대로입니다! 말 그대로! 도시 바깥으로 나와서 여기저기 가보니 알겠더군요. 지형이나 구조, 거기에 약간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7층 암흑대륙과 쏙 빼닮았다는걸!” 오랜만에 게이머의 호기심이 돋는 정보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구려.” “미궁이 다른 차원과 이어진 통로가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낸 차원이라는 가설 말인가?” “수정동굴도, 바위사막도… 어쩌면 실존했던 공간을 본떠서 만들어진 곳일지 모르오.” 정말 그렇다면 좀 아이러니하다. 누군가 이 세상을 본떠서 미궁을 만들었고, 그 미궁 도시를 또 누군가 본떠서 게임으로 만들었다니. ‘바깥세상도 좀 궁금하네…….’ 언젠가 그쪽도 탐험해 볼 날이 오려나? *** 역순서로 돌기 시작한 두 번째 바퀴는 빨간불이 뜨는 일 없이 술술 진행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그게 전부였다. ‘여왕이랑 광대는 좋았는데, 나머지 정보들이 좀 그렇단 말이지.’ 정보의 객관적 가치와 별개로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들이었다. 그야 여우만 봐도 그렇다. 여우는 혈령후가 거금을 들여 저택을 구매했고, 그 저택을 담보로 또 큰돈을 빌렸다는 것으로 초록불을 받았다. 초승달은? 한숨을 내쉬며 혈령후가 그 돈으로 정수를 구매한 거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신혼집까지 구해다가 정수까지 사 먹인다라……. 피싯, 그 여자도 참 극성이로군요! 그런다고 비요른 얀델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여기서 나온 반응들이 좀 상처였다. “…리헨 슈이츠, 누군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멀쩡한 놈은 아닐 거 같군.” “그, 그래도 엄청 강하다면서요? 정수 몇 개로 그렇게 강해지긴 어려울 거 같은데…….” “원래 있는 놈이 더한 법이지. 여인의 상처를 이용해 자기 잇속이나 챙기다니, 남자의 수치다.” “어머나, 사슴뿔 님은 굉장히 낭만적이신 분이었네요?” “크흠…….” “요정족에서도 종족 차원으로 그에 대해 알아봐야 할 듯하오. 정수를 샀다는 것만 알았지, 그걸 생판 남에게 줬을 줄이야…….” 에휴, 이렇게 되면 원탁이 끝나자마자 온갖 곳에서 나에 대해 조사를 해대겠구나. ‘탐험가 길드의 자료만 손댈 수 있으면 나도 좀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해답을 찾아내야 할 듯싶다. “하하, 벌써 제 차례로군요!” 아무튼, 이후 순번이던 고블린, 사슴뿔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선 두 정보처럼 나와 연관된 것은 아니었으나, 꼭 필요한 정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들뿐. ‘뭐, 항상 필요한 것들만 나올 수는 없는 거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어느덧 내 차례가 이르러서일까? 장내의 분위기가 아까와는 조금 달라졌다. “…….” 이번엔 어떤 정보가 나올까 하는 기대로 모인 시선. 숨소리마저 정돈된 공기는 고요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럼 어쩔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을 거듭했다. 다만, 이미 정해 둔 걸 바꾸는 일은 없었다.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던전앤스톤]의 제작자 아우릴 가비스와 만난 적이 있다.” 암, 이런 건 확실히 못을 박아 둬야지. “……!” “……!” 수사자가 비요른 얀델이라곤 생각도 못 하도록. *** “후, 피곤하네…….” 이한수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진 뒤 눈을 감고 원탁에서 있던 일을 복기했다. ‘세 바퀴까지 간 건 오랜만인 거 같네.’ 두 바퀴를 마친 다음에도 한 바퀴가 더 이어졌다. 유익한 정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고블린 씨 하나 빠진다고 별 차이도 없는데, 다들 계속하시죠?] [그런다고 재밌는 게 나올 거 같지는 않군.] 광대의 아쉬운 눈초리를 차갑게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야 고블린이 빠지면 과반수 비율이 줄어들잖아? 늘 그랬듯 이쯤 되면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아도 한두 명 더 이탈할 터.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고급 정보가 나오지 않을 거 같다는 말도 사실이긴 하고.’ 오케이, 잠시 쉬었더니 좀 머리가 돌아가네. 남은 시간은 웹서핑이나 하면서 때워야지. 딸깍, 딸깍.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게시글들을 읽었다. “끄흐흐, 미친놈들 진짜…….” 그냥 어그로용 뻘소리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웃기지? 다들 뇌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끄끄극…….” 그렇게 한쪽 다리를 탁상 위에 올린 자세로 한참을 낄낄거리며 웹서핑을 하던 때였다. “…응?” 나는 급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도 모니터에 적힌 글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대한독립만세] - 1명이 접속 중입니다. 접속 중이라니? 대체 누구야? 설마 이백호? 아니, GM이 벌써 벤을 풀었을 리 없는데……. ‘애초에 풀렸다고 해도 지금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럼 그냥 심심해서 들어온 부류이려나? 아니면 진짜 한국인? ‘……어쩌면 최근 들어온 신입 중에 한국인이 껴 있었을지도.’ 뭐가 됐건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마우스를 더블클릭했다. 그리고……. 딸깍, 딸깍.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주변 공간이 변했다. 채팅방의 기본 스킨인 공터나, 들판과 달리 화려하게 꾸며진 귀족가 저택. 방장이었던 이백호가 직접 꾸며둔 그곳. ‘뭐야, 여자잖아?’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측후면이 보였다. [HS123] 일단 닉네임으로는 국적 판별이 어려웠지만, 머리색이나 피부를 보면 동양인 것은 확실했다. 음, 그럼 진짜 한국인인가? ‘뭐, 대화를 나눠보면 알겠지.’ 남자가 편하긴 하지만 여자라고 해서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향 사람이라면 이백호가 내게 그랬듯 어느 정도 도움의 손길을 줄 용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인기척을 냈다. “크흠흠.” “꺅!” 이내 앉아 있던 여인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보아하니 내가 채팅방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던 거 같은데……. 연기 따위로는 만들 수 없는 짙은 뉴비의 향기가 흐른— “…어?” 이내 화들짝 놀란 여자가 뒤를 돌았고,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 “어.” 여인의 눈이 커졌다. 아니, 눈이 커진 건 나도 실상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어어?” 뭐야, 이거. 꿈인가?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어…….” 사고가 정지한다. 벌어진 입은 금붕어처럼 꿈뻑거릴 뿐 제대로 된 언어 체계를 갖고서 소리를 뱉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 “어, 어.” “어…….” “으어?” 그래도 상대가 나보다 회복이 빨랐다. “한수… 오빠……?” 반가움보다는 놀람의 감정이 훨씬 더 크게 묻어나는 표정으로 물어오는 여성. “현별이……?” 나는 멍하니 되물으면서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정장 치마에 깔끔한 블라우스. 그리고……. “하… 진짜, 오빠는 여전하네요?”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371화 블랙 스타 (4) 강현별. 나보다 4살 연하였던 전 여자친구. 서로 취업 준비 중에 얘가 먼저 고백을 해서 3년 정도 연애를 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지만. 스윽.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려 현별이를 마주본다. 어째선지 나를 보는 시선이 차갑다. 아마 그 이유는……. “이 상황에서 거기에 눈이 가요?” “크흠…….” 아니, 시선이 가는 걸 어쩌라고.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처에 나섰다. “오해 마라. 확인해 봤을 뿐이니까.” “확인?” “여기서 기본 복장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을 따라가거든.” “그럼… 이게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런 거지.” 다른 의상을 갖고 싶으면 GP로 구매해야 한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운동복에 반팔 티도 그렇게 구한 거였고. “오빠는 기본 복장이 뭐였는데요?” “어…….” 몸에 착 붙는 남색 정장이었다. 취직 기념으로 전 여자친구… 그러니까 얘가 사준 옷이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이거. 이게 기본 복장이었어.” 그렇게 말하기엔 뭔가 창피하단 말이지. 진작에 헤어진 마당에 그걸 입고 있었다고 하면 마음이 남은 것처럼 보이잖아? “…흐음, 오빠답다면 답네요.” 다행히 현별이는 별 의심을 보이지 않으며 쉽게 수긍했다. 다만, 여기서 조금 궁금한 부분이 생겼다. “나답다고? 나다운 게 뭔데?” “뭘 예민하게 되묻고 그래요? 그냥 편해 보인다는 뜻이었어요.” “그, 그래?” 아후, 얘 앞에서는 도무지 기를 펼 수가 없네. 지은 죄가 하도 많아서 그런가? “그나저나…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오랜만이다. 현별아!” “그게 끝?” “어…….”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아, 그걸 안 물어봤구나. “그래서 여기에는 어쩌다가 온 거야?” 내 물음에 현별이는 조용히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가는 그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 그냥 못 들은 척했다. “됐어요.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뭐가 중요한가 싶긴 하니까…….” “그렇지. 과거가 뭐가 중요해? 황금보다 값진 게 바로 지금이라는 말도…….” 어디선가 한기가 느껴졌다. “왜 멈춰요? 계속하지 않고.” “그냥.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인 거 같아서.” “…….” “그때 일은 미안하다. 이건 진심이야.” 목소리에서 장난기를 싹 지우고서 사과하자, 현별이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뭔가… 좀 변했네요. 오빠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근데 그래서 사과는 받아주는 거냐?” “사과라면 됐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게 딱히 누가 사과할 일인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현실 시간으로 1년 전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와 머나먼 이세계에서 재회한 격이니까. “그나저나 정말 놀랐다. 널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래요? 전 언젠가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응?” “여기서 눈을 뜬 후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오빠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겠구나. 좀 안심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안심……?” “실종 얘기요. 듣고서 엄청 놀랐거든요.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고…….” 아, 그렇게도 보일 수 있었겠구나. 그렇게 헤어지고 1년도 넘었는데 걱정을 해줬다니 어딘가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래서… 너는 어쩌다가 여기 온 거냐?” 자꾸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 탓에 벌써 세 번째로 묻는 질문. “암만 봐도 넌 게임이랑 거리가 먼데…….” 다행히 이번에는 현별이도 제대로 답을 해주었다. “그… 오빠랑 헤어지고서 조금 흥미가 생겼거든요. 대체 그게 얼마나 재밌기에 오빠가 그렇게 빠졌는지.” 어딘가 감회가 새롭다. 사귈 때는 그런 게임을 무슨 컴퓨터 세 대까지 돌려가며 하냐고 타박을 했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럼… 너 오리지널을 깬 거야?” “에이, 그걸 어떻게 깨요. 나중에 오빠 실종되고서 우연히 치트 버전이 있는 거 알고서 그걸 했었어요.” “그럼… 몇 배로 깼는데?” “30배요.” “30배……?” 30배면 나름 상위권 배율이다. 그것도 못 깨고 고배율을 플레이하고 넘어온 애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꽤 열심히 했었나 보네…….” “아뇨, 열 판인가 하니까 깨지던데요? 오리지널 판을 하다 와서 그런지 쉽더라고요. 예전에 오빠가 게임하던 걸 지켜보면서 배운 것들도 있고.” “아…….” 그러고 보면 히든피스 같은 걸 발견하면 현별이한테 설명하고 자랑하는 일이 제법 있었지. 워낙 똑똑한 애라 다 기억하고 있었을 거다. “갑자기 왜 표정이 어두워져요?” “…그게 보이냐?” “아무렴요. 같이 있던 시간이 얼마인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별건 아니다. 그저 지금 생각하면 관심 없었을 얘기를 불평도 없이 매번 잘 들어줬다 싶어서…….” 말을 하다가도 뭔가 어색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현별이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건 잠깐의 텀을 두고서였다. “……오빠, 정말 많이 변했네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건… 네, 그렇죠…….” 또다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 뻔하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내가 실종된 다음의 일을 아냐는 질문에 현별이는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줬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 달째에 회사에서 실종 신고를 넣었고, 경찰이 너를 찾아와서 얘도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우리 엄마를 만났다고……?” “네. 경찰서에서요.” “그 여자가 뭐라고 하디……?” “저랑 직접 대화는 나누지 않았어요.” “하지만 뭔가 일이 있기는 했네.” “…….” “괜찮으니까 말해봐.” 내 말에 현별이는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산에 대해서 한참이나 얘기를 하다가… 실종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사망 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경찰에게 묻더라고요.” “하…….” 대충 예상은 했는데 기분 참 더럽네. 내가 모아둔 돈이 얼마나 될 거라고. 혹시나 했던 내가 바보지. 까드득. 나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고 있자니, 현별이가 위로의 말을 해왔다. “그, 그래도 5년은 시간이 있어요.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범죄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특별 실종으로는 처리가 안 되었거든요.” “뭐가 다른 건데?” “특별 실종은 1년만 지나도 상속이 가능해요.” “그렇구나.” 그건 좀 위안이 되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웃겼다. 피식. 현별이다운 위로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말뿐인 공감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서 논리적으로 위로해 줬었지. 현재 내 성격이 형성된 것엔 얘 지분도 제법 크다. “그래서 그다음은?” “저도 몰라요. 오빠가 실종되고서 3개월 뒤에 저도 이곳에 끌려오게 됐거든요.” “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기록의 파편석으로 시간이 꼬이긴 했지만, 단순 시간만 계산하면 내가 비요른 얀델이 된 지도 어느덧 4년 하고도 1달이 더 지났다. 그리고 시간비가 5:1이라고 했으니······. ‘내가 실종되고서 현실에서 열 달 가까이 지났단 거네.’ 바꿔 말하면, 현별이가 이 세상에 소환된 건 개벽 154년 여름쯤일 테고. 여러 의미로 온갖 일이 있던 여름이구나. 차원 광장에 불기둥이 터졌던 때도 딱 그쯤이었으니. 그리 생각하니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근데 왜 이제서야 커뮤니티에 온 거냐? 그때 소환이 됐으면 거의 3년이나 이 도시에서 지냈다는 건데.” “저는 탐험가가 아니라서요. 아무래도 그쪽 눈에 잘 안 띄었나 봐요.” “탐험가가 아니라고……?” “네. 그런 게임 조금 했다고 현실에서 그런 괴물이랑 싸우는 게 말이나 돼요? 그냥 평범하게 괜찮은 곳에 취직해서 돈을 벌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넌 인간인가 보네.” “오빠는 아닌가 보네요?” 현별이의 되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개인 정보를 말해줘도 되냐는 고민에서였다. 한데, 그 잠깐 사이에 그 주저함을 느꼈을까? “그래, 나한텐 말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현별이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 사귀던 사이일 때에 몇 번인가 보았던 눈빛. 그 눈빛에 나는 쩔쩔매며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줘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은 남남이잖아? 늘 이성적이던 현별이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선, 오빠가 먼저 그은 거예요?” “그래.” “…좋아요. 앞으로 그런 건 안 물어볼게요. 됐죠?” 현별이답게 쿨하게 납득을 해줬다. 다만, 그래도 조금은 서운하긴 했을까? “대신 오빠도 제 얘기는 들을 생각하지 마요. 죽어도 안 말해 줄 거니까.” 쩝, 그래, 이게 맞기는 하지. 반박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아쉬운 마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현별이가 입술을 짓물었다. “정말 하나도 안 궁금한가 보네.” “그걸 들으면 나도 말해줘야 하니까.” 대충 얼버무리는 대신 솔직히 답했다. 그야 얘는 내가 입장한 시기를 정확히 알잖아? 종족만 말해 줘도 후보가 확 줄어든다. “…….” “…….”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며 침묵이 이어졌다. “…일단 좀 앉자.” “…네, 그러는 게 낫겠어요.” 계속 서 있는 것도 좀 그랬기에 우선 비치된 소파에 앉았다. 한데 앉고 나니 막상 할 만한 얘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다. “커뮤니티는 이번이 처음인 거 맞지?” “네.”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면 어떻게 초대장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게 문득 궁금해졌지만, 나는 호기심을 삼켰다. “혹시 필요하면 GP 좀 줄까? 이거로 거래소에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데.” “됐어요.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벌 수 있으니까. 게다가 현금화 시엔 반드시 현물이 움직일 텐데 그럼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사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말했을 뿐, GP를 현금화 하려고 한다면 한사코 막을 생각이었다. “오빠는… 역시 탐험가가 됐겠죠?” “그랬지.” 서로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 정도 화제도 거부해서야 대화 자체가 이어질 수 없을 테니까. “근데 왜 웃냐?” “그냥요. 오빠가… 몬스터들이랑 피 튀기며 싸우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돼서.” “하다 보니까 되더라.” “힘들었겠네요.” “너는?” “저는 그냥 그럭저럭요. 오히려 직장 생활은 여기가 더 편하던데요?” 하긴, 얘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애니까. 이쪽 세상에도 금방 적응을 했겠— “정말로요. 전산화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초창기 자본금 만들기도 쉽더라고요.” 자본금이라면, 설마 지금 횡령을 했다는 뜻인가? “형성된 시장 자체가 허술해서인지 본격적으로 돈을 굴리니까 수익률도 꽤 괜찮게 나왔고.” “…….” “오빠.” “…응?” “그런 의미에서 서로 간 보는 건 그만하고 그냥 합치는 건 어때요?” “하하, 합치자니… 우리는 그때 이미—” “아니, 다시 시작하잔 게 아니라 힘을 합치자고요. 제가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줄게요.” “도와준다고?” “금전적으로 자유로워진 다음 목표는 권력을 손에 넣는 거였어요. 그리고 최근에 꽤 높은 사람 줄을 잡았죠. 제가 그 힘을 이용해서 오빠를 밀어줄게요.” “대가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대신 나중에 돌아갈 때 오빠가 저도 껴주는 거죠. 오빠도 돌아가는 게 목표일 거 아니에요.” “귀환이라…….”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현별이는 또 뭔가 기색을 느꼈는지 표정을 달리했다. “오빠… 설마 여기서 계속 살려고요?” 나는 굳이 부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을 고생 다 해서 돌아가 봤자 기다리고 있는 것도 없으니까.” “……어머니는요!” “응? 우리 엄마?” “오빠가 여기 남으면, 전세금이 다 그리로 갈 텐데!” 아, 그 얘기였구나. “오, 확실히 그건 좀 동기부여가 되네.”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현별이가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넘어가려 하지 말고요! 오빠, 진짜 여기서 살 거예요?” “왜 흥분하고 그러냐. 막말로 못 살 것도 없는데. 그거 아냐? 나 이쪽에서 사귄 친구가 더 많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 한 말에 현별이의 입매가 싹 굳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시간 차를 두고서. “…………친구요? 오빠가?” 현별이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 어……. 아무리 나라도 그런 반응은 좀 상처인데. 372화 블랙 스타 (5) 의외로 현별이와의 대화는 편했다. 관계도 그렇고, 서로 감추는 것도 있기에 훨씬 더 어색할 줄 알았건만. ‘선이 한번 그어지면 절대 먼저 넘지를 않으니 참 편하긴 하단 말이지.’ 경제, 문화, 정치, 행정 등등. 굳이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해도 공감할 만한 화제는 여럿 있었고, 우리는 그러한 얘기들을 자유롭게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서관이라… 어쩌면 지나가면서 한두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는데?” “오빠도 자주 가셨어요?” “그냥 시간 남는 대로?” “하긴 정보를 얻는 데 책만큼 좋은 게 없기는 하죠.” 시간을 확인해 보니 현별이를 만난 지도 약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와,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다음에는 뭔 얘기를 하지? 고민하던 때 현별이 쪽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오빠.” “어, 왜?” “친구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갑자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현별이가 별거 아닌 투로 말했다. “그냥 좀 궁금해서요. 사실 오빠한테 친구가 없던 건 전부 오빠 탓이잖아요?” “…어? 여기서 명치를 때린다고?” 내가 멍하니 되묻자 현별이가 얼른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오빠가 상대를 친구라고 생각하느냐 안 하느냐가 기준이었다는 뜻이에요. 사실 오빠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었을걸요? 왜 신년이나 생일마다 연락하는 그런 사람들.” “야, 그게 무슨 친구야? 지인이지.” “그러니까 그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거예요.” 뭐라 할 말은 많았지만, 그래도 얘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전달됐기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제가 놀란 것도 그래서고요. 지금 만난 친구는… 오빠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저는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오빠 같은 사람이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가 잘 안 가거든요? 어떤 사람들이에요?” …얘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이상한 일인가? 나한테 친구가 생긴 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들지만 일단 답은 해 줬다. “그냥 믿을 만해. 등 뒤에서 칼을 들고 있어도 아무런 걱정이 안 될 만큼.” “흐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많다 보니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단 뜻이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그거, 친구가 아니라 그냥 동료 아니에요?” 어……. 그건 그런데……. “여기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동료는 친구 그 이상으로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통용되고 있—” “뭐야, 그냥 동료였던 거네.”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야 친구든 동료든 뭐가 중요한가.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게 핵심인데. “…뭐예요? 그 눈빛은?” “생각해 보니 너도 친구가 없었지?” “절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엄청 많았거든요?” 그거야 알지. 근데 너는 나랑 비슷한 과잖아?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그래서 너는 여기서 친구는 좀 사귀었냐?”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저는 돌아갈 거니까.”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피식 웃으며 말하자 현별이는 어딘가 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다만 그 시간은 짧았다. “어?” 현별이가 돌연 움찔했다. “갑자기 귀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났어요.” “아, 쪽지가 왔나 보네.” “쪽지요……?” “혹시 뭐 거래소에 올려 둔 거 있어?” “올려 둔 건 없고, 제가 정보 구매 글에 제안을 보낸 건 있어요. 일단 GP를 좀 벌어 두면 편할 거 같아서. 오빠, 쪽지는 어떻게 확인해요?” “그건 여기서 못 봐. 나가서 컴퓨터로 직접 봐야 돼.” “…그럼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네요.” “그러지 말고 지금 가서 봐. 이렇게 늦게 답장이 온 걸 보면 다른 판매자한테도 쪽지가 왔던 거 같은데.”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해 주자 현별이도 표정이 확 밝아졌다. 본인도 이쪽이 합리적이라 생각은 했던 모양. “그럼 죄송하지만, 금방 다녀올게요.” “응? 다녀온다고?” “…설마 가려고요?” “기다리고 있으면 괜히 빨리 끝낸다고 다급할 거 아니야. 뭘 그렇게까지 해. 다음에 또 보면 되지.” “…….” “게다가 커뮤니티 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며? 여기서 나랑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다른 기능들도 확인해 보고 그래야지.” “그건… 그렇죠.” 역시나 논리적으로 말하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현별이. “그럼 다음 달에 봐요.” “그래, 그동안 잘 지내고.” 이내 우리는 짧게 작별 인사까지 나누었다. 음, 분명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 “…….” “안 가고 뭐 하냐?” “…….” “아, 나 먼저 가라고? 그럼—” 이내 채팅방에서 나가려고 의식을 집중하려던 차. “잠깐!” 현별이가 다급하게 내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저기, 오빠.” 현별이가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가는 건 어떻게 해요……?” 허, 텅 빈 채팅방에서 혼자 뭐 하고 있는가 싶었건만. 얘도 참 이상한 데서 맹한 구석이 있다니까. “설마 너…….”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라, 나가는 방법을 몰라서 갇혀 있던 거였어? *** 22년 전… 이란 말입니까?” 백인 남자가 입술을 짓누르며 묻자, 여성이 답했다. “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원탁에 있던 보석에선 초록색 불이 켜졌고요.”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때는 커뮤니티가 제대로 만들어지기도 전이었잖아요?” 그 말에 남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에게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우릴 가비스로 추정되는 노인에게 영적 세계의 권한을 넘겨받고서 처음으로 만났던 가면의 남자. [믿을지 말지는 네 선택이다. 나는 단지 경고를 해 주고자 이곳에 왔을 뿐.] 그 남자는 처음에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하더니, 탄로가 나자 경고인지 협박인지 모를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래, 그게 네 이름이었군.] 강제로 자신의 이름을 알아갔다. “…마스터, 손이 떨립니다.”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미세하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건만 아직도. “…….” 물론 그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때 자신의 몸을 옥죄던 기운은 살기란 것이다. 하지만……. 꽈악.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쥐며 억지로 떨림을 멈췄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듯. 때로는 알기에 더욱더 두려워지는 것도 있다. 그런 살기를 내려면 대체 몇 명을 죽여야 할지, 그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수사자 가면이 그였을 줄이야…….’ 워낙 오래전 일이라 곧바로 연결 짓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 설명이 된다. 유르벤 하벨리온이란 본명을 알고 있던 것도. 소울퀸즈가 보고한 그 말도 안 되는 살기도. 3개월이라고 그랬지…….’ 사내는 두려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만약 그 협박에 객기를 부리며 단박에 거절했다면 그 남자가 자신의 적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두려운 만큼 그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22년 전에 한 번 마주쳤던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수사자인 거라면. 대체 그는 무엇이 목적인가. 그게 현 상황의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그가 커뮤니티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3년 전.’ 닉네임은 엘프눈나. 이계의 악령은 아닐 거라 사료되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뭐라 단정 짓기엔 너무도 비밀스러운 자니까. ‘커뮤니티에 들어오자마자 이백호와 접선을 했고, 바로 원탁에 들어갔지.’ 하면, 그 이유가 뭐였을까. 그 단서는 22년 전에 나눈 대화에 있었다. “아우릴 가비스…….” “그건 게임 제작자 이름 아닌가요?” 그는 막 권한을 넘겨받은 자신에게 경고했다. 권한을 넘겨준 노인, 아우릴 가비스를 조심하라고. 그자가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왔으며 이에 죄책감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다고. “…….” “실례했어요. 생각 중이신 거군요.” 서서히 실타래가 풀린다. 수사자는 아우릴 가비스의 적이다. 그런 그가 근 20년 만에 커뮤니티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낸 이유는……. ‘원탁의 마스터가… 아우릴 가비스였기에?’ 닉네임 0720. 원탁의 감시자들을 만든 존재이자, 그가 이계의 악령일 거라 추측했던 자. ‘아니야, 여기에도 모순점이 많아.’ “소울퀸즈 님, 예전에 원탁의 마스터가 원탁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했지요?” “네. 그때 저는 없었지만, 들은 바로는 그래요.” “그때 둘은 친분이 있는 듯 보였고요.” “네. 격의 없는 사이처럼 보여 회원들이 모두가 놀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요…….” 비로소 실타래가 풀리는 듯했으나, 사내는 다시금 벽에 부딪혔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늪에 빠져드는 것 같달까? 아우릴 가비스도, 마스터도, 수사자도, 이백호도.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끼워 맞춰 보려고 해도 단서가 부족하기에 모순에 부딪혔다. 하지만……. 까드득. 그래도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물들이 심계를 펼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무엇을요?”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커뮤니티의 주인? GM? 가장 오래된 플레이어?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며 우러러본다 한들,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 결국 자신 역시 조무래기에 불과했다. “소울퀸즈 님,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중인 거 같습니다.” “예, 저도 최근 들어서 자주 그렇게 느꼈어요.” “앞으로는 더 노력해야겠군요.” 다만 사내는 절망하기보다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아가길 택했다. 그리고 이에 하늘이 화답이라도 하듯. “……마, 마스터! 한국인 채팅방에 수사자가 들어가 있어요! 입장 인원은 두 명—” “한 명은 누구입니까?” “HS123. 아까 제가 입장을 도와드린 사람이에요. 하, 한국인이었고요!” “…이번 기수에 들어온 신입이란 뜻이군요.” 사내는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그쪽에 쪽지를 보내십시오. 만나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다시 없을 기회일지 몰랐다. *** 한쪽에 침대가 자리하고, 한쪽에는 컴퓨터 책상이 놓인 작은 방. 강현별은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 공간은 본인의 상상이 구현화된 거예요.] 처음 커뮤니티에 들어왔을 때 만난 안내역은 그렇게 말했다. 정신 방벽이 너무 두터운 탓에 자신은 볼 수 없지만. 이 공간은 내면의 정신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을 베이스로 한다던가?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 혹은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장소일 거랬다. 그런데……. ‘참 웃겨. 그게 여기라니.’ 강현별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게 이 장소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있어야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할 일이나 하자.” 방을 쓱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쪽지를 확인한 뒤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구매자한테 온 쪽지가 아니었잖아?’ 왠지 모를 짜증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강현별은 쪽지 내용을 세심히 읽어내렸다. 발신인에 적힌 닉네임 때문이었다. ‘소울퀸즈라면… 아까 처음 들어왔을 때 만난 그 안내역 여자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쪽지로 자신과 만남을 청하고 있었다. 딸깍, 딸깍. 강현별은 별다른 고민 없이 쪽지에 적힌 채팅방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갔다. 그곳엔 두 명의 남녀가 자리해 있었다. 여자는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Elfnunalove.] 대체 뭐야 이 닉네임은? 강현별은 시작부터 생리적인 거북함을 느꼈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엘프누나러브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무슨 일이시죠?” “HS123 님에게 드릴 말씀—” “그냥 그쪽이라고 해 주세요. 마주 보고 그런 이름으로 불리려니 조금 그러네요.” “아하하, 이해합니다. 조금 그런 게 있기는 하죠.” 강현별의 요구에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닉네임을 저렇게 지어?’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보면서도 빠르게 판단을 끝냈다. ‘아무튼, 조금 까칠하게 나가봤는데 저렇게 저자세로 나온다는 건……. 그럴 이유가 있단 거겠지.’ 강현별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조금도 우습게 볼 생각이 없었다. 어딘가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미련한 짓이니까. 소울퀸즈란 닉네임의 여자는 운영진이었다. 한데 그런 여자가 보좌하듯이 서 있는 저 남자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있나. ‘어쩌면 GM일 수도 있는 사람이 신입인 나를 개인적으로 불렀다라…….’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쪽지가 도착한 시점, 저 소름 끼치는 닉네임, 묘한 저자세 등등. 종합해서 볼 때 가능성은 하나다. ‘한수 오빠랑 관련이 있나 보네.’ 실제로 그녀의 추측은 옳았다. “그쪽 분은 한국인이시라고 했죠?” “저기 죄송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하하, 첫 방문이시라니 이해합니다.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면 12시간도 부족하죠.” “…….” 강현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무뚝뚝하신 분이셨군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엘프눈나라는 유저와 무슨 관계입니까?”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는요?” “GP를 드리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요. 근데 그게 왜요?” “흐음…….” 엘프누나러브라는 괴상한 닉네임을 가진 사내는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을 이리로 불러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엘프눈나에 관한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저보고 그 남자 뒷조사를 하라는 건가요? 오늘 처음 봤는데?” “사소한 정보들이라도 좋습니다. 한국인들은 서로 끈끈하다면서요? HS123… 아니, 그쪽분이 다가간다면 조금 경계심을 풀 겁니다.” “……보상은요?” 강현별이 조심스레 묻자, 사내가 짧게 답했다. “원하는 그 모든 것.” “…제가 뭘 원하는지 알고요?” “무엇이 됐건 간에, 그걸 이뤄드릴 힘이 저희에겐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이내 강현별은 쌀쌀맞던 태도를 뒤로하고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를 지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런 건 너무 멍청한 짓이지 않은가. ‘오빠도 참 칠칠맞지 못하게…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몰라도 이런 애들이나 뒤에 붙이고 다니고.’ 그녀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373화 트레져 헌터 (1) 커뮤니티가 닫히고서 사흘 뒤. 6층에서 타고 다닐 선박을 알아보고, 그 배를 몰 항해사를 구하는 나날을 보내던 중 아멜리아로부터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슈이츠, 길드 쪽은 이제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지 마라니?” “적당한 녀석을 발견해서 처리했다.” “…뭐?”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니 아멜리아다운 일처리였다. 횡령 및 탈세 등 걸리면 인생이 끝날 만한 죄를 저지른 길드 간부를 발견했다던가? 그 증거로 협박을 해서 ‘리헨 슈이츠’에 관한 길드 정보들을 폐기하는 데 성공했다는 모양이다. “폐기하는 것보단 우리가 원하는 내용으로 수정을 하는 쪽이 훨씬 더 안전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어렵다더군.” “자료가 폐기된 게 문제 될 가능성은?” “일반적으로는 없다. 행정 자료들이 분실되거나 손상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니까.” 음, 그렇단 말이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아멜리아는 모든 자료를 폐기한 것은 아니며 리헨 슈이츠가 5등급 탐험가라는 자료는 남아 있다고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 5등급 신분은 유지가 된다는 뜻.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이군?” “아무리 분실이 흔한 세상이어도 내 자료가 갑자기 사라진 건 좀 수상해 보일 거 같아서.” “그래도 예전 자료를 방치해 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뭐,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해. 심증까지 없애는 건 어려워도 최소한 물증은 나를 쫓는 쪽에게 주지 않을 수 있으니. “잘했다… 아니, 고맙다. 아멜리아.” “…잘하는 쪽이 잘하는 일을 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쪽이 효율적이니까 말이지?” 이내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네가 맡은 일 쪽은 어떻게 됐지? 넘겨준 자료들은 다 읽었나?” 아, 선박 목록 말이지. 시장에 올라온 배들의 스펙과 가격을 깔끔하게 정리한 서류였다. “혹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면 빨리 말해 줬으면 하는데, 다시 찾아봐야 하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서류 내용이랑 실물이 다른 것만 아니면 딱 적당한 게 있었으니까.” 이내 고른 선박이 무엇인지 알려 주자 아멜리아가 이유를 물어왔고, 나는 신이 나서 읊었다. “가격은 후보들 중에 가장 비싸지만 성능과 가격을 보면 오히려 싼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으흠.” “게다가 특수 지역들만 피하면 현재 상태만으로도 7층까지 항해가 가능할 수준이고, 나중에도 옵션만 추가하면 특수 지역들도 항해가 가능해서 새 배를 또 구할 필요가 없지.” “그렇군?” 이내 아멜리아가 영혼 없이 대꾸했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반응할 거면 왜 물어봤나 싶기도 했지만……. “뭐, 네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겠지. 이런 건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이어진 아멜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그, 그런가?”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고, 그 배의 선장은 너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멋쩍음을 느낄 수밖에 없을 말. 다만 이와 별개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얘가 내 기를 세워 주려고 일부러 이런 건가? 하긴, 최근에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서 얘네한테 부탁만 하는 입장이었지. 어쩌면 배려였던 걸 수도— “그럼 배도 결정됐으니 먼저 가보마. 빨리 움직이면 거래소가 닫기 전에 약속을 넣을 수 있을 테니.” 정말 나 때문에 그런 말을 해준 건가 묻고 싶었지만 이내 아멜리아가 외투를 걸쳐 입고 외출하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뭐,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럼 이거로 배는 구했고…….’ 예산이 많았으면 더 좋은 배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딱히 아쉽지는 않다. 이번에 고른 배 정도면 나름 괜찮았기 때문. ‘문제는 항해사인가…….’ 예로부터 문제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 쪽이었다. *** 똑똑. 침대에 누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음, 벌써 밥시간인가? “들어와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역시나 방문객은 에르웬이었다. 아멜리아는 지금 배를 팔기로 한 판매자와 한창 협상 중일 테니까. “무슨 일이냐?” 이내 책을 덮고 용무를 묻자 에르웬이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짧게 읊조렸다. “손님이 찾아와서요.” “손님?”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기 무섭게 문가로 여성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에 푸른 눈. “저예요.” 레이븐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르게 마도병단 제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도 올려 묶지 않고 풀어져 있었다. 후, 갑자기 분위기가 확 달라졌네. “들어갈게요?” “아, 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레이븐은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고, 이에 에르웬도 따라 들어오더니 의자 하나를 집어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너는 왜 들어온 거냐?” “안 돼요?” 아니,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이유를 물은 거였는데……. 뭐, 됐다. 저렇게 떨어져 앉은 걸 보면 방해는 안 하겠지. “오랜만이다, 레이븐.” “네. 잘 지내셨어요?” “아직까지는. 근데 이렇게 찾아와도 괜찮은 거냐?” “사람들 눈 피해서 잘 왔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그래서 머리도 풀고 옷도 그렇게 입은 건가?” “………그럼 달리 이유가 있겠어요?” 아니, 얘는 또 왜 이렇게 까칠하게 대답해? 그냥 물어나 본 건데, 어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오늘은 대화할 때 조심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슬슬 용건을 물으려던 때, 레이븐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책.” “……?” “책을 읽고 계셨나 보네요. 산 거예요?” “아니, 요즘에는 대출도 되는 모양이라서.” “아… 그 얘기라면 저도 예전에 들었어요. 신원이 확실하게 보장된 사람에 한해서 서적의 외부 반출이 가능해졌다죠?” “공식적으로는 그런데 실제로는 귀족들이나 고위 공무원이 아니면 보증금을 맡기는 식이다.” “아저씨는 안 그래도 됐지만요.” 에르웬이 뜬금없이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레이븐은 별 내색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테르시아 씨 신분이면 그럴 수 있겠네요.” “그래서 모습을 감춰가면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냐? 뭔가 일이라도 있었나?” 대화 주제가 이상한 곳으로 빠지기 전에 서둘러 용건을 확인하자, 레이븐도 이쯤에서 서론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얀델 씨… 아니, 죄송해요. 자꾸 조심한다 해도 입에 붙지를 않아서.” “괜찮다.” “아무튼, 슈이츠 씨한테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그래, 역시 그냥 날 보러 온 건 아니었구나. 서론이 길기에 혹시나 했는데. “이야기라니? 말해봐라.” 가벼운 내용은 아닐 듯했기에 나도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서 대화에 집중했다. “왕가에서 슈이츠 씨에 대해서 비공식적인 조사를 시작했어요.” “비공식 조사?”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날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에요. 명분 없이 공식 조사를 하면 탐험가들을 향한 통제와 탄압처럼 보이니까.” 음, 민간인 사찰 같은 느낌인가? 어차피 독재 국가인데 이상한 곳에서 눈치를 보네. “아무튼, 그래서?” “저한테도 조사가 들어와서 말해 둔 대로 어느 정도 정보 공개를 했어요. 얀델 씨가 그때 보여 준 능력처럼 숨길 수 없는 것들만 뽑아서요.” “그럼에도 비공식적인 조사라면, 내 정체 자체에 의심을 갖거나 한 건 아닌가 보군.” “네. 그랬으면 진작에 잡혀갔을걸요? 비공식적이라 해도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가 있으니까요.” 왕가가 음지에서 비밀 특수 부대를 양성하고 있다든가 하는 루머는 사실 루머도 아니다. 장미 기사단인가 뭔가 하는 그 집단이 대표적인 예고. “그래서 너는 어떻게 됐지? 일단 상부 측 입장에선 네가 보고를 누락한 셈일 텐데.” “그거라면 괜찮아요. 당시에 제3 군단장 자리가 공석이던 걸 핑계로 잘 둘러댔거든요. 제 직속 상관인 페브로스크 단장님께는 따로 보고를 올렸다고 말도 해뒀고.” “그럼 거짓말이 걸리지 않나?” “거짓말이 아닌걸요. 정말로 도시로 돌아오자마자 단장님께 보고를 드렸었어요. 물론 어느 정도는 꾸민 이야기로.” “그랬군…….” 똑 부러지는 일처리에 든든함이 이는 한편으로는 죄스러운 감정도 피어난다. “내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레이븐.” “…그 얘기는 끝난 거 아닌가요? 예전에 받은 빚을 갚을 뿐이에요.” “나도 이 빚은 꼭 갚으마.” “네, 꼭 그러셔야 해요. 안 그러면 손해가 날 거 같아서.”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으나, 레이븐이 농담조로 말을 받으며 조금은 편안해졌다. 슬슬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차례. “레이븐, 혹시 민족 편입 안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민족 편입 안건? 그게 뭔데요?” “악령을 적으로 단정 짓는 게 아니라, 포용하자는 주장을 말한다. 150년 전에도 한 번 발안이 됐지만, 여러 이유로 무산됐다던데.” “아,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있어요. 근데 그게 왜요?” “왕가 회의에서 그 안건이 거론됐다더군.” 내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를 설명하자, 레이븐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얘기는 지금 처음 들었어요. 슈이츠 씨는 거의 집에만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아, 얼마 전이 보름이었구나!”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은 레이븐의 장점 중 하나.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한 번 좀 알아봐 줘라. 누가 회의에서 그 주제를 꺼냈는지, 그리고…….” “그리고요……?” “왕가 쪽이 그 안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지.” 어쩌면 이게 키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 *** 레이븐이 다녀간 후로는 꽤 바쁜 나날. 정확히는 집에만 있는 내가 아니라, 아멜리아에게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내정해 둔 선박은 거의 전 재산을 다 꼬라박아 구매를 끝마쳤지만, 정작 그 배를 몰 항해사는 구하지 못했으니까. 아주 그냥 항해사들 씨가 말랐다. 다들 군선을 타고 암흑대륙까지 직행하는 와중이니 시장에 풀린 매물들이 제법 있으리라 여겼건만. “역시 한 달 만에 구하긴 좀 어려웠나…….” “말은 제대로 해라. 네 눈에 차는 자를 찾는 게 어려운 거겠지.” 음, 그건 그렇긴 해. 솔직히 말하면 항해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 어중이떠중이였던 게 문제다. 이번 탐사의 목표지인 지저섬 해역까지 제대로 찾아가려면 무엇보다도 항해 실력이 중요하니까. “눈을 낮추든 포기를 하든 한 가지를 택해라. 그런 실력이 있는 자는 시장에 풀려도 다른 팀에서 빠르게 낚아채가는 데다가, 용병을 부리듯 단기 계약 형태로 채용하려는 우리 팀에는 오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 그럼 포기하지 뭐.” “그렇게 쉽게……?” “뭐, 어쩌겠냐. 이제 이틀 뒤면 미궁이 열리는데. 다음 달에 마저 구해봐야지.” “그럼 이번 탐사 계획에서 지저섬은 빼는 건가?” “아니, 일단 그냥 우리끼리 해보려고.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차피 저층에서는 딱히 할 것도 없잖아?” 애초에 나는 6층 초반부에서도 경험치 수급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지저섬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큰 손해까진 아니다. 다만, 그런 내 말이 좀 짜증 났을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받는군. 미리 말해 줬으면 이렇게 바쁘게 다니진 않았을 텐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멜리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 뒤 에르웬도 방으로 불러 다음 탐사 계획을 의논했다. 하나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항해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플랜 B도 세워뒀거든. “균열에 들어간다고요……?” “길게는 아니고 잠깐만. 어차피 며칠 늦게 6층에 도착한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냐. 이번에 우리가 원정군에 합류하려는 것도 아니고. 들어 보니까 너희 둘은 균열 경험치도 거의 안 먹어둔 거 같던데?” “그야 균열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팀 반푼이 시절에도, 그다음에 직접 만든 팀에서도 내가 균열 여는 방법을 쉽사리 공유하지 못했던 거고. ‘확실히 악령인 걸 그냥 까버리니까 이런 부분에선 엄청 편하네.’ “아무튼, 그럼 탐사 계획은 이만하면 되겠군.” 계획 공유가 끝난 후로는 각자 개인 정비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더 흘러— 「1층 수정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미궁 입장 날이 되었다. “아저씨, 왜 웃으세요?” “그냥 조금 기대돼서. 얼른 2층부터 가자.” 오랜만에 탐험을 하는 느낌이 좀 나겠네. 374화 트레져 헌터 (2) 미궁 진입 13시간 차. 우리는 1층 수정동굴 속에 있었다. 지난번에는 셋이서 몇 시간 안쪽으로 주파했던 1층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 이번 탐사 계획의 시작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흐음, 이런 식으로 균열을 열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군.” “헤헤, 정말 아저씨는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핏빛 성채, 빙하굴 등 네 가지 타입이 존재하는 1층 균열. 이 균열은 플레이어가 의도적으로 여는 게 가능하다. 시간이 이렇게 소요된 것도 이를 위해서 2층까지 올라가 8등급 몬스터를 잡고 되돌아오느라 그런 거고. ‘이 시간쯤이면 올라갈 애들은 다 올라갔겠고…….’ 나는 아공간에 넣어 뒀던 8등급 마석을 꺼내면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여기도 오랜만이네.’ 비석 하나가 놓인 반경 30m 정도의 공동. 군대와 대형 클랜들이 차원문을 열고 도망갔을 때 남은 이들끼리 살길을 궁리하던 것이 바로 여기였다. 뭐, 그때는 마법사들이 이리저리 확장 공사를 해둬서 훨씬 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럼 다들 준비됐나?” 내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신호로 나도 마석을 비석 앞에 공물을 바치듯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드드드드드드! 비석을 중심으로 1층 전역에 진동이 퍼져나간다. 이와 동시에 열린 초록색 빛깔의 포탈. 「캐릭터가 1층 균열에 입장했습니다.」 자, 가보자. *** 솨아아아아-! 허공에 떠오른 포탈의 빛으로 윤곽을 드러낸 동굴. 바닥에는 철로가 깔려 있으며, 주변에는 나무로 된 폐자재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다. 게임보다는 좀 더 음산한 편인가? [녹색 탄광] 1층에 존재하는 네 가지 타입의 균열 중 하나. 진행 방식은 간단하다. 천장이 무너져 가로막힌 지점에서 시작해 철로를 따라 탄광을 헤매고 헤매다 수호자를 잡으면 끝. “다들 뭣들 하나? 얼른 가자.” 낯선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우선 주변 지형부터 확인 중이던 두 사람을 이끌고 서둘러 갱도 안쪽으로 향했다. 그야 곧 추가 인원이 들어올 게 분명하잖아? 마주치지 않는 게 베스트다. 나랑 아멜리아는 몰라도 에르웬은 이 도시에서 아주 유명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저층 탐험가라고 한들, 알아볼 가능성이 있는 것. 타닷. 이내 포탈의 빛이 닿는 곳에서 벗어나, 에르웬이 소환한 어둠의 정령으로 몸까지 가리고 나니, 그제서야 추가 입장 인원이 균열 안에 들어섰다. “우, 우어!” 시작은 딱 저층 수준의 장비를 입은 남자였다. “뭐, 뭐야? 내가 처음인가?” 처음엔 멀뚱멀뚱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자신이 균열에 입장했다는 것이 뒤늦게 실감이 났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그리고 그때. “우아앗!” 두 번째 인원이 포탈에서 튀어나오며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도 남자였다. “후후, 반갑소이다!” 오케이, 둘 다 남자니 뭔가 일은 안 생기겠지. 거들먹거리며 인사를 나누는 둘을 지켜보던 나는 이내 걱정을 접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 소리는 저쪽까지 안 닿겠네. 뛰자.” “네!” 우리는 본격적으로 갱도를 뛰며 균열 공략을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마주친 몬스터는 역시나 고블린이었다. 1, 2층에서 보던 놈들과는 조금 다른 체격을 가진. [그르륵-!] 신장은 일반적인 개체와 비슷하나 몸집이 다르다. 떡하니 벌어진 등과 촘촘하게 붙은 다부진 근육. 머리에 쓴 광부모와 어깨에 걸친 곡괭이까지. “고블린 광부군.” 등급은 8. 1층 균열에서만 경험치 수급이 가능한 놈이다. [캬아아악!] 마초스러운 몸을 가진 녀석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3:1 상황이고 뭐고 곡괭이를 내리찍으며 달려들었다. 확실히 일반 고블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세를 품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기분 나빠…….” 그게 되겠냐고. 우리 중 한 명만 있어도 1층 균열은 쉽게 깰 텐데. 푸욱-! 굳이 화살을 쏠 것도 없이 에르웬이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녀석의 미간을 꿰뚫었다. 「고블린 광부를 처치했습니다. EXP +2」 원샷원킬. 사실 우리 수준이면 이는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을 터이나… 검지로 상대를 가리킨 뒤 압축된 공기를 뿜어내는 과정이 꽤 인상 깊었다. ‘이건, 탄지공……?’ 한때 무협 소설에 빠져 있던 적도 있어서 말이지. 후, 나도 저런 거 하나 못 갖나? “슈이츠, 뭔가 문제라도 있나?” “네, 갑자기 저를 그렇게 빤히…….” “별거 아니다. 어서 가지.” 나는 서둘러 잡념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음, 지금 내 상태를 무협에 빗대면 금강불괴의 경지를 이룬 외공 고수쯤 되려나? 타닷, 타닷. 아무튼, 이후로는 내가 앞장서서 달리며 길을 찾았다. 뭐, 사실 초반부엔 일자로 쭉 뻗은 갱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끝이긴 하지만……. “왜 멈추지?” “철로가 중간에 끊긴 걸 보니 아마 이쯤일 거라서.” 바닥을 관찰하면서 움직이던 나는 레일이 파손된 장소가 나오자마자 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콰아앙-! 망치로 주변 벽들을 박살 냈다. 이에 아멜리아가 우리를 생매장할 셈이냐며 당황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어디 균열 필드가 그렇게 잘 부서지던가? 부서지는 곳은 대체로 숨겨진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렇게. 콰지지직-! 스티로폼 상자로 쌓아올린 것처럼 맥없이 부서지는 벽. 이내 그 너머의 공간이 드러났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비집은 샛길. 후, 체격이 줄어들기 전이면 못 들어갈 뻔했— 툭. 아오, 이래도 어깨가 걸리네. 하는 수없이 몸을 옆으로 세운 뒤 게걸음을 하듯이 샛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단 300만 스톤은 벌었군.” 샛길 안에 자리한 좁은 공간에 숨겨진 상자 속에서 초록색 보석 하나를 집어 들고서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탄광에 이런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군.” “근데 아저씨… 마법사가 없는데 갖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괜찮다. 보통 이런 물건들은 왜곡 마법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1층 핏빛 성채 때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왜곡’ 마법을 요구하는 것은 균열에서 나온 벽돌, 건물 장식 같은 잡동사니들뿐. ‘네크로노미콘’처럼 가치 있는 것은 아이템 판정을 받기에 그냥 들고 포탈 밖으로 나갈 수가 있……. 아, 얘는 그때 거기 없었지. “그럼 얼른 가자. 여기서 챙길 건 다 챙겼으니.” 아무튼, 첫 챕터의 히든피스는 이게 전부였기에 이후로는 바닥을 신경 쓰지 않고 이동에만 집중했고, 머지않아 절벽이 나타났다. 철로와 함께 3분의 2 이상이 무너진 다리. 원래 공략법은 옆에 있는 통로를 타고 우회하는 것인데……. ‘도약이 있었으면 그냥 스킵할 수 있었을 것을.’ 이동기가 사라진 게 아쉽다. 원래 이 구간은 중급 이상의 이동기만 있어도 스킵이 가능한 곳이니까. ‘어차피 저쪽으로 가봐야 고블린 광부들밖에 없는데 시간만 버리겠네.’ 히든 피스가 있는 루트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옆 통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블린 광부들을 보이는 족족 터트려 죽이며 건너편 출구로 빠져나왔다. 여기까지 한 30분 정도 걸렸나? “1층 균열이라 그런지 쉽기는 하군.” “확실히 기대한 것과는 좀 다르네요…….” 에르웬은 균열 탐험이 싱거운 게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7층에서 사냥이 가능한 멤버로 1층 균열에 왔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일반적인 RPG 게임에선 보통 경험치도 안 준다. 아, 근데 경험치를 챙기러 저렙 사냥터까지 찾아오는 게 더 악랄한 시스템인 건가……? “다들 실망하지 마라. 어차피 금방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갈 거니까.” 다들 지루함을 느끼는 듯했기에 균열 공략에 더욱더 속도를 붙였다. 우회해 건너온 다리 너머 통로를 지나쳤고, 두 번째 챕터부터 나오는 몬스터들을 전부 사냥했다. 「홉고블린 광부를 처치했습니다 +EXP 3」 「광물 슬라임을 처치했습니다 +EXP 2」 「코퍼 골렘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두 번째 챕터에서 마주친 새로운 몬스터는 이 정도. 아, 이제 중간보스도 더해야지. 「고블린 폭탄병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역시 정수는 안 나왔네. 뭐, 어차피 담아갈 시험관도 마법사도 없지만. ‘두 번째 챕터는 전투가 메인이라 금방 끝났네.’ 거진 10분 만에 중간 보스를 클리어한 나는 잠시 주변을 수색하며 히든 피스를 찾았다. 중간 보스방 주변 광물을 박살 내다 보면 나오는 그것. [고블 쿼츠] 오, 딱 세 개가 나왔네. “하나씩 나눠 먹으면 되겠군.” 이내 캐낸 고블 쿼츠를 나눠주려는데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먹는다고?” “이상한 냄새가 나네요. 어째선지 촉감도 끈적거리고요…….” “그래도 영약이다. 독 내성 수치를 올려주지.” “그렇다면야.” 노아르크 태생이라 비위가 좋게 자랄 수밖에 없었을 아멜리아가 먼저 고블 쿼츠를 삼켰고, 이에 에르웬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에 넣었다. “맛이 그렇게 별로냐?” “…의외로 아무 맛도 안 나요.” “식감이 굉장히 독특하다.” “오, 그러냐?” 식감 정도야 독특해 봤자지. 딱히 각오하고 먹진 않아도 되겠네. 오도독-! 이내 고블 쿼츠를 어금니로 씹자 정말로 신기한 식감이 느껴졌다. 겉은 말랑한데 안은 돌을 씹는 것만 같달까? 바바리안들은 보통 뼈도 씹어먹기에 유별날 게 없었다. 「캐릭터가 고블 쿼츠를 복용했습니다.」 「독 내성이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해당 효과는 중복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후로도 균열 공략은 대체로 비슷했다. 보이는 몬스터들을 전부 다 때려 부수며 앞으로 전진. 히든피스가 있는 곳에서만 잠시 멈춰서 주변 수색. 그렇게 절벽 가장자리에 설계된 원형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세 번째 챕터가 끝났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군.” 탄광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한 우리는 무언가 봉인이라도 해둔 것처럼 무너진 갱도 앞에 섰다. 원래는 탄광 곳곳에 숨겨진 폭발물을 이용해 길을 열어야 하지만……. 고렙에겐 고렙만의 꼼수가 있는 법. 쾅, 쾅-! 악마분쇄기로 하부 쪽 주춧돌을 박살 내서 쪼개고 있자니 확 무너져 내리며 사람이 지나갈 틈이 생겼고, 이내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잠들어 있던 녹색의 왕이 깨어납니다.」 약 50m 반경의 드넓은 공동. 그 중심부에서 초록색 점액질이 꿈틀거리며 울부짖었다. [뀨이이이잇-!] ‘녹색 탄광’의 수호자, 킹 슬라임이었다. *** 그 시각, 균열의 초입부. 깊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두 사내는 몸을 떨고 있었다. “……저, 정말 우리 둘이서 가야 하는 거요?” “달리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포탈도 닫혔는데.” “균열은 다섯 명이서 탐사를 하는 곳이라고 들었소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도끼 전사의 말에 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그리 말해 봤자, 그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균열에 들어온 게 두 명뿐인데 어째서 포탈이 닫혔는가. 물론 처음엔 일시적인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탈이 닫히고서도 그 주변에서 언제 올지 모를 입장자를 기다리고서도 어언 3시간. 언제까지 현실 부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됐고, 가기나 합시다. 우리 둘이서 균열을 깨려면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나아가야 하니.” “…아, 알겠소.” 덩치와 달리 유약한 성격을 가진 도끼 전사가 앞에 섰고, 궁수는 그 뒤에서 보조를 하며 뒤따랐다. ‘빌어먹을 버그 좆망겜.’ 궁수는 평소에 본인의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뭐, 우연히 그 게임을 발견해 플레이하다가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그의 인생은 쉽게 풀리는 편이었고, 이는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뜬 후로도 변하지 않았다. 첫 탐사만 봐도 그렇다. 그는 시작부터 운 좋게 정수를 먹었고, 두 번째 탐사에선 양패구상한 탐험가와 약탈자의 장비를 벗겨내고 초반 자금을 벌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착실히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탐사에 1층 균열에 와보나 싶더니, 이런 개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이야.’ 사내는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야지만 살아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잠깐, 멈춰 보세요.” “…왜 그러시오?” “뭔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쯤이면 고블린 광부가 나올 때가 됐는데…….” “균열에 대해… 잘 아시는가 보구려?” “그냥 어느 정도 압니다. 평소에 공부를 좋아해서.” 일단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오리지널 버전 유경험자였으니까. 비록 초반부를 넘기지 못하고 접었다가, 나중에 치트 버전이 있음을 알고서 이를 깬 것이긴 하다마는. 그럼에도 오리지널을 해봤기에 초반부는 빠삭했다. 정신 나간 난이도 때문에 제대로 플레이를 하려면 ‘Elfnuna’가 남긴 ‘뉴비 안내서’를 몇 번이고 정독하는 것은 필수였으니. “……일단 가봅시다. 왜 아직까지도 고블린이 나오지 않는진 모르겠지만.” 다만, 기다린다고 변하는 것도 없기에 그는 게임과 현실 사이의 괴리 정도라고만 여기며 조심스레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오, 저기 무너진 곳 사이로 샛길이 있구려!” 철로가 고장 난 지점. 그 지점에 벽이 뚫려 있는 걸 보고서 그는 진실을 깨달았다. “……누가 먼저 들어왔던 거였네.” “…뭐라고 했소?” “혼잣말입니다.” 누군가 먼저 균열에 입장했다. 분명 그 숫자는 셋. ‘그럼… 몬스터들도 그쪽에서 다 잡고 갔겠군.’ 이를 인지한 순간 안도감이 확 밀려들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안도감이 가라앉은 후에는 오히려 기회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에 전투 흔적이 없는 걸 보면, 그냥 전부 다 썰어 버리면서 갈 정도로 강하단 뜻이겠지.’ 그들은 1층 균열의 정수에는 관심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정수의 드랍 유지 시간은 약 30분. 지금이라도 빨리 따라가다 보면 후반부 쪽에서는 버려진 정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두고 간 히든피스를 챙길 수 있을 수도 있고. “얼른 갑시다. 몬스터는 신경 쓰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요?” “아마 앞에 몬스터는 없을 겁니다. 못 믿겠으면 제가 먼저 가도 되고요.” 궁수는 그리 말하며 어두운 갱도를 거침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블 쿼츠는 챙겨갔네.’ 두 번째 챕터에서도, 세 번째 챕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먼저 입장한 놈들이 얼마나 이 균열에 빠삭한지 안 챙겨간 것을 찾을 수가 없을 지경. ‘저건 나도 모르던 건데… 부서져 있는 걸 보니 안에 뭔가 숨겨져 있었나 보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그는 마지막 보스방에 도착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40분. 만약 수호자 정수가 드롭됐고, 그 정수를 그들이 먹고 가지 않았다면…….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이내 그는 도끼 전사와 함께 보스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허공에 떠올라 있는 정수를 발견하며, 두 사내의 눈동자에 짙은 탐욕이 어렸다. 물론 차이점은 있었다. “저, 정수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서, 설마 저게 수호자의 정수인 건—” 앞장선 도끼 전사의 눈빛은 탐욕보다 놀라움의 감정이 더 컸지만, 뒤에 있던 사내는 그 반대였다. 푸슉-! 사내가 화살을 손으로 쥐고서 도끼 전사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아아악!” 갑작스러운 기습에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구른 도끼 전사. 물론 그 역시 정신을 차리며 도끼를 들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잘 되지 않았다. 철크렁. 미끄러지듯이 손에서 떨어져 내린 도끼. “소용없어요. 화살촉에 마비독을 발라 놨으니까.” “…왜, 왜 이러는 거요! 저, 정수라면 주겠소. 그, 그러니 제발!” 패배를 직감한 전사가 애걸복걸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궁수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NPC 주제에 목숨을 뭐 이리 아껴?” “에, 엔피, 씨……? 그게 무슨 말이오? 아니, 그보다 드라군! 부디 한 번만 봐주게. 나는 집에 딸이—” “드라군은 프로토스고.” 사내는 피식 웃으며 박혀 있던 화살촉을 뽑았다. 그리고……. “한스 엘리번.” “……?” “그게 내 이름이야. 아, 생각해 보니 이것도 본명은 아니긴 한데.” “자, 자네 설마……!” “이제 눈치챘나 보네. 미안. 이걸 미리 말해 둬야 나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거 같아서.” “아, 안—!” 전사가 뭐라 외치려 했으나, 그 외침은 끝가지 이어질 수 없었다. 그전에 화살촉이 전사의 목을 꿰뚫은 탓이다. “고블린 잡는 거랑 다를 것도 없네.” 이내 사내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운 뒤, 허공에 떠오른 정수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운이 좋군.”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캐릭터의 영혼에 [슬라임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새롭게 얻은 스킬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375화 트레져 헌터 (3) 녹색 탄광의 수호자, 킹 슬라임. 먹어 두면 중반까지는 괜찮게 쓸 수 있을 정수다. 뭐, 나와도 우리 중에는 이 정수를 먹을 사람이 없을뿐더러……. 애초에 나와주지도 않았다마는. 「킹 슬라임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빛 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킹 슬라임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와, 진짜 아무것도 안 뜬다고?” 정수는 됐으니 넘버스 아이템이라도 떠주기를 바랐건만. 어떻게 균열석도 안 뜨냐? 개별 드랍률이 33.3%일 텐데……. ‘…그러고 보면 여기 오는 도중에도 정수가 하나도 안 나왔지.’ 사실 그래서 조금 기대했었다. 마지막에 수호자가 괜찮은 넘버스 아이템을 뱉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도 정수 하나는 나오지 않았나.” 나를 달래는 듯한 아멜리아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게 무슨 정수야? 그냥 쓰레기지. 9등급 몬스터, 슬라임. 먹으면 골강도, 물리 내성, 근력, 민첩 등의 육체 수치가 떨어지고 독 내성, 직감, 소화력 등 전투 밸류가 낮은 스탯만 무더기로 붙는 정수. 한데 스킬도 그냥 그렇다.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쓸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저 페널티를 감수할 가치는 없기에 9등급 중에서도 밸류가 최악인 정수로 손꼽힌다. 아, 참고로 정수는 킹 슬라임을 사냥 중에 잡몹으로 나온 놈들을 잡았다가 나왔다. ‘쩝, 이딴 게 나올 바에는 아예 나오질 말지.’ 그럼 다음에 잭팟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남아 있을 텐데. “아저씨, 저기에 포탈이 열렸어요! 바로 나가실 건가요?” “물론이다.” 나는 동료들을 이끌고 포탈로 향했다. 걸음에 망설임 따위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명색이 균열인데 나온 게 슬라임 정수 하나라니. 대체 뭐야, 이 거지 방은? 「1층 수정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얼른 나가자. 괜히 더 있다가 재수에 옴 붙을라. *** 균열을 깨고 나온 다음에는 거침없었다. 이제 저층에는 볼일이 없기에 위층으로 향했고, 26일 차에는 목표 층에 도달했다. 「6층 대해大海에 입장했습니다.」 시작의 섬 라이미아. 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탐험가와 군인들로 북적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는 해안선을 꽉 채우고 있던 군함들도 마찬가지. 암흑대륙으로 향하는 원정군은 25일 차에 출발을 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일부러 하루 늦게 도착을 한 것도 그래서고. “자, 그럼 해안가로 가자.” 아무것도 없는 섬에서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기에 해안가로 직행했다. 그리고 아공간에 있던 선박을 꺼냈다. 돛이 없어서 노를 저어야 했던 이전의 배와는 그 외관부터 차이가 났다. ‘크,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배라고 부르지.’ 한국에서 흔히 보던 낚싯배와 비슷한 사이즈와 형태를 갖춘 선박. 배 중심부에는 큼지막한 사각돛이 자리하며, 후면 하단부에는 마력 추진 장치도 달려 있기에, 마석만 집어 넣으면 급할 때 속도를 확 올릴 수 있다. 쉽게 말해, 마석만 넉넉하면 무풍지대도 넘어갈 수 있는 배라는 뜻. ‘사실 항해사도 없는 와중에 무풍 지대까지 나갈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이내 우리 셋 모두 배에 올라탄 뒤, 아멜리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배의 키 앞에 섰다. 한데 그 모습이 좀 못 미더웠을까? 에르웬이 조심스레 불안감을 내비쳤다. “근데, 항해사도 아닌데 저 여자가 이 배를 제대로 몰 수 있을까요……?” “예전에 작은 배를 몰아본 경험도 있다고 하니, 노질 경험만 있는 나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선박을 구매하면서 기본적인 조작법을 배웠다고 하기도 하고.” “흐음…….” “그렇지 아멜리아?” “…말 걸지 마라. 생각하는 중이니까.” “…….” 쓰읍, 이거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배의 키를 잡고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멜리아가 본격적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노를 저어서 섬에서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바람을 탈 수가 있었다.” “있었다……?” “불만이라면 네가 직접—” “아니, 없다. 시키는 대로 하지.” “…….” 초보 티가 팍팍 나는 아멜리아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대신 일단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굳이 힘들게 노를 저을 생각은 없었다. 비싼 돈 주고 이 배를 산 이유가 뭔데? 스르르륵-! 마력 추진 장치와 연결된 관에 마석을 집어넣자 배가 앞으로 쑤욱 나가기 시작했다. “…읏!” 아멜리아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놀란 듯했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키를 돌려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지, 지금이다! 돛! 돛을 펼쳐라!” 돛을 펼치자 본격적으로 배가 바람을 타며 앞으로 나아갔다. 후, 그래 어떻게든 하니까 되긴 하는구나. “방향은?” “동쪽으로 잘 가고 있으니 걱정 마라.” “그런가…….” 내 말에 아멜리아는 안도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양손은 키를 꽉 붙잡고 있었다. 조금 신선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사람 죽일 땐 눈에 미동도 없던 애가 이런 거에는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다니. “슬슬 보이는군.” 한 15분 정도 동쪽으로 항해를 이어가자 수평선 끄트머리로 섬이 보였다. 스톰거쉬와 혈전을 펼쳤던 서쪽의 파루네섬 다음으로 스타트 포인트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섬. 구르카섬. 사실 이 섬에는 딱히 들를 이유가 없기는 했다. 이 섬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등급도 낮은 데다가, 모든 개체가 중층에서도 출몰을 하니까. 경험치 수급은 진작에 전부 끝났다. 하지만……. ‘배에 항해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우리의 항해술로는 원하는 목적지까지 직선거리로 나아가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에 차근차근 섬을 하나씩 찾아가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뭐, 다른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아저씨, 괜찮으세요?” “…….” 후, 이 빌어먹을 뱃멀미. 확실히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거 같기는 한데 그럼에도 속이 울렁거려서 참기가 어렵다. “슈이츠, 힘들면 잠시 쉬었다 출발해도 좋다.” “부탁하지.” 이내 해안가에 배를 정박한 뒤 우리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바바리안의 몸이 좋은 점이 이거였다. 멀미가 심하긴 해도 10분이면 낫거든. “자, 그럼 다시 출항하자.” 컨디션을 회복한 뒤에는 다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항해를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는 동쪽 루트의 두 번째 섬, 아노스. “거기는 배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걸릴 텐데 제대로 갈 수 있어요?” “…걱정 마라. 동동북 방향으로만 계속 나아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누가요?” “…책에서.” 한 번도 이런 주먹구구식 항해에 참가한 적이 없었을 에르웬은 이번에도 못 미더운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항해에 제법 소질이 있었는지, 세 시간쯤 지나자 저 멀리에 섬이 나타났다. 이에 아멜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대로 찾았군.” “근데 왜 섬이 정면이 아니라 동쪽에서 보이는 거죠?” “…그 정도면 오차 범위 내다.” 암, 이 정도면 오차 범위 내지. 이내 아멜리아가 뱃머리를 돌렸고, 머지않아 우리는 아노스섬에 도착했다. 스킵했던 구르카섬과 달리 이 섬엔 용무가 있었다. 히든피스나 숨겨진 보물은 없지만, 아직 수급하지 못한 경험치를 얻어야 한다. 또한, 날도 저물었기에 여기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다. 하지만 그 전에……. “웨에에에엑-!” 일단 속 좀 비우자. *** 「래플 몽키를 처치했습니다. EXP +3」 「워 스네이크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니겔 펜서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벨가로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블랙 트리를 처치했…….」 「…….」 *** 해안가를 제외한 섬의 99%가 밀림 지형을 하고 있는 아노스섬. 일단 해안가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고서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섬 전체를 쭉 돌며 경험치 수급을 모두 끝냈을 땐 또다시 날이 저물고 있어서 하룻밤 더 야영을 해야만 했다. ‘쩝, 한나절이면 다 잡고 다음 섬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스케줄이 꼬인 것에는 마지막에 사냥한 몬서터의 공이 컸다. 섬 전체를 돌았는데도 보이지가 않아서 밤이 될 때까지 찾아다녀야 했으니까. “아저씨, 별이 되게 예쁘지 않—” 드르르르르렁—! “자는구나…….” 그렇게 하룻밤을 더 쉬고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일찍부터 출항해 다음 섬으로 향했고 이번에도 다행히 제대로 다음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계속해서 이어져……. “벌써 일곱 번째 섬이군.” “이름이 피오네섬이었죠?” 우리는 열흘에 걸쳐 동쪽 루트의 일곱 번째 섬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전진, 정지, 주차밖에 할 줄 모르는 항해사를 데리고 여기까지 무탈하게 온 격이니까. ‘한 번쯤은 지나쳐 버리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배를 모는 게 쉬운가? 그런 생각으로 요즘에는 아멜리아가 배를 모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뱃멀미도 이제 슬슬 적응이 되어가거든. “와, 듣던 대로 섬이 참 예쁘네요.” “에르웬, 너도 처음 와보는 거냐?” “네. 보통은 지나쳤거든요.” “하긴, 운이 나쁘면 시간 낭비만 하는 곳이니까.” 동쪽 루트의 일곱 번째 섬, 피오네.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흔히 보물섬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그곳. 중심부에 산이 떡하니 있던 섬들에 비하면 지면은 평평한 편이며, 3시간 정도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면적이 좁은 편에 속한다. 참고로 여기서는 4등급짜리 몬스터 한 종류만이 출현하는데……. “여기도 그냥 지나치실 건가요?” “슬슬 날도 저물어가니 하룻밤만 지내고서.” 내 답변을 들은 에르웬은 어딘가 기쁜 기색이었다. 하긴, 섬 자체에 몬스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만약 몬스터를 만난다면 로또에 당첨된 격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저씨! 밤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 같이 섬 좀 둘러봐요! 네?” “…그 정도라면야.” “위험할 수 있으니, 나도 함께 가지.” 섬에 내린 다음에는 배를 아공간에 집어넣고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익혔다. 솨아아아아. 시원하게 몸을 쓰다듬는 바닷바람.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그곳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꽃밭. “나쁘지 않군.” 나도 모르게 감상을 입 밖으로 내뱉자, 에르웬이 동의한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후훗, 그렇죠?” “그래, 사방이 뻥 뚫려 있으니 자는 중에 약탈자가 접근한다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거다.” “……네?” 순간 이해를 못했다는 듯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 점이었다. 괜히 이 섬이 보물섬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상위 탐험가들 중 대부분이 전쟁에 참가해 7층으로 갔다고 한들, 이 섬에 아무 탐험가도 없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 섬은 균열을 제하고 유일하게 넘버스 아이템 수급할 수 있는 장소이니까. “정찰은 이만하면 됐으니, 저쪽에 야영지를 치자. 아까 봐둔 곳이 있다.” “아, 네에…….” 모두가 일당백의 노련한 탐험가인 만큼 이번에도 야영 준비는 금방 끝났고, 우리는 아멜리아의 분신을 불침번으로 세워둔 뒤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슈이츠, 일어나라.” 아멜리아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주변을 확인하니 어느새 에르웬도 일어나서 활을 꺼내 들고 있는 상황.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 섬에서 몬스터를 마주치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더 말이 될 테니까. “몇 명이지?” 불필요한 대화를 생략한 채 확인해야 할 정보만을 물었고, 아멜리아 역시 짧게 답했다. “열다섯.” “클랜 단위로군.” 야밤에 불청객이 찾아 들었다. 376화 트레져 헌터 (4) 무기는 쥐었지만 겨누지는 않는다. 아직 저들의 목적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니까. 괜히 자극했다가 쉽게 풀릴 수 있을 일이 어렵게 꼬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어쩔 거지?” “일단 대화부터.” “준비는 해 두겠다.” “그래.” “에르웬, 너는 내가 신호를 주기 전까진 절대 먼저 나서지 말고.” 동료들과 짧은 소통을 끝내고서 두 사람을 보호하듯 앞에 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터벅, 터벅. 열다섯으로 이루어진 탐험가 무리가 우리 야영지 밖에 멈춰 서더니, 대표자로 보이는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행히 깨울 필요는 없겠군.” “누군지 소개부터.” “하하, 겁먹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뭐래, 누가 겁을 먹었다고. 대가리를 쳐부숴야 하는 놈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원거리 넷, 마법사 둘, 근접이 아홉, 신관은… 없는 건가.’ 다만, 숫자가 열다섯인 건 좀 의미심장하다. 6인 결속이 생긴 후 기본 단위는 6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남은 세 명이 다른 곳에 숨어 있거나 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 “의심이 많은 친구로군. 진정하고 잠시 대화나 나누세. 못된 마음을 품고 온 것이라면, 이렇게 자네들과 대화를 나눌 일도 없지 않겠나?” 그건 결국 까 봐야 아는 거고. 뒤쪽에서 대기 중인 무리를 쓱 훑어보던 나는 이내 시선을 옮겨 사내를 응시했다. “됐고, 무슨 용무지? 이런 야밤에 남의 야영지 근처를 배회하는 게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텐데?” 내 물음에 사내가 정체를 밝혔다. “우리는 헌츠맨 클랜의 사람들일세.”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그럴 수밖에. 터놓고 말해 그리 유명한 클랜은 아니니까. 최근에는 피오네 섬에서 보물 사냥을 하느라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보물 사냥이라…….” 그제야 나는 이 녀석이 왜 우리를 찾아왔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네마는, 피오네 섬은 여섯 개의 클랜이 각기 나뉘어 고유의 영역에서만 행동을 하고 있네. 무차별적인 분쟁을 막기 위한 조치지.” “그래서?” “자네가 야영 중인 이곳은 우리 헌츠맨 클랜의 영역일세.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나 줬으면 하는군.” 역시 아니나 다를까, 사냥터 통제였다. 탐험가라면 5층부터 지겹게 겪는 일이자, 미궁이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해 주는 바로 그것. 첫인상도 별로였지만, 더욱 좋게 볼 수가 없다. “왕가에서 특정 집단에게 피오네 섬의 권리를 부여했다는 소식은 들은 기억이 없는데.” “하하, 생긴 것과 달리 꽉 막힌 말을 하는군. 어디 탐험가 일이 원칙대로만 되던가?” 녀석은 그리 되묻는 것을 끝으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말없이 선 채로 나를 꼬나보기만 할 뿐. 아마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저 입에서 나올 말도 달라지겠지.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걱정 마라. 날이 밝으면 떠날 예정이었으니.” 정말로 하룻밤 묵기 위해 온 것이니, 구태여 사냥터 권리를 찾기 위해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 하지만 내 대답이 꼬리를 만 것으로 보였을까? “하하, 그랬나? 아무래도 우리가 괜한 걸음을 했나 보군. 이해해 줘서 고맙네.” 조금이나마 우리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보이던 녀석이 한결 편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별놈 아니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냥 꺼지지 않고 이딴 말이나 나불대는 걸 보면. “그나저나 세 명이라니 좀 특이하군. 이곳까지 오며 동료를 잃기라도 한 건가?” “그쪽이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다.” “경계하지 말게. 그저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니까. 갑자기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원한다면 우리 쪽 야영지를 빌려줄 수도 있네마는…….” 말꼬리를 흐리는 녀석이 내 뒤에 있던 에르웬과 아멜리아를 힐끗했다. 하. 이 새끼, 진짜 사람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흐음, 그래? 근데 두 숙녀분 의견은 다를 수 있지 않나?” 좋게 말했음에도 녀석은 끈질기게 제안을 했고, 결국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확실하게 거절의 말을 하고서야 물러났다. “거절이에요.” “우리 일도 알아서 못 할 정도는 아니라서.” “아쉽군. 우리 클랜 지부는 라비기온 8구역에 있소. 만약 팀이 해산돼서 갈 곳이 없게 되면 우리를 찾아오시구려.” 하, 마지막까지 저 지랄이네. “자, 야영지로 돌아간다!”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녀석이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저씨, 왜 참으신 거예요?” “조금 짜증 난다고 다짜고짜 망치부터 휘두를 수는 없지 않냐.” “음, 아니었나?” 나도 에르웬도 아멜리아의 말은 대충 무시했다. “그, 그래도 제가 나섰으면 저런 쓰레기들이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요……!” 에르웬이 분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으나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얘는 어디를 가도 눈에 띄고 소문도 쉽게 도니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나는 우리 정보를 외부에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하책이겠지. “그래도 고맙다, 에르웬.” “…뭐, 뭐가요?” “그렇게 화가 났는데도 참았던 거 아니냐.” “그야… 아저씨가 절대 먼저 나서지 말랬으니까…….” “그게 고맙고 기특하다는 거다.” “그, 그런가요……? 별거 아닌데. 매일 그럴 수도 있는데…….” 합당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논점을 흐렸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의 해소 아니겠는가. “의외로 일찍 끝났군?” “뭘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거냐. 됐고, 이제 다시 잠이나 자자. 내일 또 멀리 나가야 하니까. 알았지, 에르웬?” “네!” 이내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서 우리는 다시 모포에 누워 취침 시간을 이어 갔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슈이츠, 일어나라.”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어깨를 흔들며 나를 깨웠다. 뭐야, 설마 그 새끼들이 또? 휘익.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옆에 모셔 둔 망치로 손을 뻗던 차였다. “진정해라. 이번엔 사람이 아니니까.” “…뭐?”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 대체 무슨……. “설마…….”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주변을 쓱 훑었고, 이내 찾던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기긱, 기긱?] 피오네 섬에서 유일하게 출연하는 몬스터. 4등급 희귀종, 라플레미믹이었다. *** 라플레미믹. 처치 시 넘버스 아이템을 확정 드롭하며, 정수가 나올 시 최대 수십억 스톤을 벌 수 있다고 알려진 바로 그 몬스터. 다른 필드에서도 출현을 하는 몬스터이기는 하나, 피오네 섬만큼 이놈을 만나기 쉬운 곳은 없다. 그래 봤자 한 달에 하나 출현하면 잘 나온 거지만. 물론 그것도 섬 전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잠깐 들른 곳에서 얘를 만날 줄이야.” 그래, 이게 탐험이고 낭만이지. “슈이츠, 어쩔 거냐?” 아멜리아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답했다. “뭘 어쩌긴 어째?” 설마 내가 그놈들 때문에 얘를 포기라도 할까 봐? “당연히 잡아야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럼 나는 에르웬을 깨우고 오지.” 이내 아멜리아가 에르웬도 깨우기 위해 옆쪽 모포로 향했고, 나는 뒤늦게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잠깐만, 에르웬이라니?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 “보다 보니 좀 귀여운 것도 같아서.” 허,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알 수가 없네. 싸우다 정이 든다는 게 바로 이 경우인가? “…귀엽다니요?” “따로 깨울 필요도 없었군.” “깨우다니… 그보다 둘이서 지금 뭐 해요?” “라플레미믹이 나왔다.” “…정말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에르웬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2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태평하게 뒹굴거리는 상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긱! 기기긱?! 기긱!] 비선공 몬스터답게 라플레미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를 보고도 호기심만 내비칠 뿐, 적의는 표출하지 않았다. “에르웬, 여기서 네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팀에는 마법사가 없으니까.” “알아요. 마법사가 없으면 반드시 한 번에 해치워야 한다고 했죠?” “그래, 안 그러면 바로 땅 아래 숨어 버리니까.” 참고로 놈이 땅 아래 숨어 버리면 그냥 놓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원 샷 원 킬이 중요한데……. “에르웬, 있는 힘껏 쏴라. 가능하면 어둠의 정령도 소환하고. 아, 본체는 상자인 건 알지? 몸체처럼 보인다고 줄기를 쏘면 안 된—.” “걱정 마세요. 반드시 제가 잡을 테니까!” “그래, 믿는다.” 애초에 믿지 않고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우리 중에 단일 딜량이 가장 높은 건 명실상부 에르웬이었으니까. “그럼… 할게요.” 이내 에르웬이 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불, 물, 바람, 땅, 그리고 어둠까지. 다섯 개의 속성이 하나로 합성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라플레미믹은 태연했다. [기긱……?] 신기한 현상을 다 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라플레미믹. 그 순수한 모습에 왠지 생물학적인 죄책감이 밀려들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야 우리는 탐험가 아니겠는가. 몬스터와 사람을 때려잡고서 돈을 버는 게 직업인. 툭. 이내 정신 집중을 끝마친 에르웬이 시위를 놓았다. 휘이이이이익-!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화살. [기, 기기긱-!] 그제야 라프레미믹이 화들짝 기겁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앙-! 라프레미믹의 벌어진 입(?) 안으로 쏘옥 들어가더니 굉음을 토해 내며 폭발했다. 다만……. [기, 기기긱……!] 놀랍게도 녀석은 살아 있었다. 상자 껍질이 박살 나고 몸도 걸레짝이 됐건만. [기기기긱-!] 마지막 기력을 짜내 땅속으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내보이는 녀석. 그러나 에르웬이 한발 더 빨랐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후속타가 들어감과 동시에 수백 개의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라플레미믹. 솨아아아아-! 머지않아 나뉜 조각들이 빛무리로 변하며 사라졌다. 「라플레미믹을 처치했습니다. EXP +6」 4등급답게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험치의 증가. 몇 번을 겪어도 참 기분 좋은 감각이었으나, 나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정수는… 역시 안 나왔네.’ 뭐, 기대도 안 했다. 거기까지 바랐으면 완전 도둑놈 심보일 테니. ‘제발, 5천 번대 이상만 나와라.’ 이내 라플레미믹이 서 있던 자리로 두 개의 물체가 떨어졌다. 하나는 마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지네요……?” 가까이서 다가가 전리품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 “슈이츠, 아는 물건인가?” 아무렴 어찌 잊을까. 이것 때문에 예전에 죽을 뻔한 적도 있는데. No.6111 운명 추적자.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만난 용살자 놈이 끼고 있던 그 반지. ‘나쁜 아이템은 아닌데 뭔가 좀 아쉽네…….’ “어떤 반지예요? 호, 혹시 궁수가 쓰기 좋은 거면…….” 에르웬이 탐욕스러운 눈길로 말꼬리를 흐렸다. 평소에 딱히 물욕을 보인 적 없던 애인데, 그래도 넘버스 아이템은 좀 탐나는 건가? “어떤 유형의 탐험가에게 좋다고 말하기 애매한 물건이다.” “애매하다니요?” “굳이 분류하자면 감지 계열의 마도구다. 뭔가 주변에 일이 생겼을 때, 반지가 나타내는 색을 통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점칠 수 있지.” 참고로 색의 종류는 총 세 가지. 녹색, 적색, 황색이다. 그래서 평소에 신호등 반지라고 불렀다. “하나쯤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 이건 팔지 않고 갖고 있는 편이 낫겠군.” “…그러면, 제가 껴도 되나요?” “네가? 근데 너는 어차피 끼고 있는 반지도 많지 않냐. 이건 그냥 내가 끼고 있겠다.” “아, 네. 네! 그, 그게 낫겠죠? 역시?” 에르웬에게도 양해를 구했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반지에 불이 들어왔다. 377화 트레져 헌터 (5) 반지를 끼자마자 번뜩인 빛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색을 확인하고서 입맛을 다셨다. ‘황색 불이라…….’ 이 색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지금 내 주변에 내 앞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에르웬, 주변에 뭐가 있나?” 이내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에르웬은 반문도 하지 않고 청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아까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있어요.” “언제부터 있었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걸 보니 이제 막 도착한 건 아닌 거 같아요. 호흡도 안정적이고…….” 말꼬리를 흐리던 에르웬이 말을 이었다. “아, 지금 대화도 나누네요. 메시지 스톤을 사용 중인 거 같아요. 넘버스 아이템도 나왔다고,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어쩐지 반지에 빛이 들어왔더라니. 아무래도 라플레미믹을 잡는 것까지 모두 목격을 한 듯한데……. “정찰병을 두고 갔던 모양이군. 에르웬, 너는 계속 저쪽에 집중하고 있어라. 우리는 야영지 정리를 할 테니.” “네.” 에르웬에게 경계를 맡긴 후, 신속하게 짐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다만, 저쪽이 우리보다 한발 더 빨랐다. “사람들이 도착했어요.” “숫자는?” “모두 합쳐서 열여덟 명이요. 아, 지금은 우리를 어떻게 할 건지 상의를 하고 있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쩌겠다냐?” “모르겠어요. 마법을 썼는지 중간부터 소리가 막혀서. 죄송해요…….” “미안할 게 뭐 있냐. 어차피 뭐가 됐건 곧 알 수 있을 텐데.” 실제로 그 말을 내뱉기 무섭게 녀석들이 몸을 숨긴 곳에서 인위적인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보게, 친구! 이름이 뭐였지? 아까는 깜빡하고 묻질 않은 거 같은데.” 깜빡하고 묻지 않기는 개뿔. 자기 이름도 말하지 않았던 주제에. “글쎄, 통성명할 정도로 친한 거 같지는 않아서.” “하하, 자네 보기와 달리 수줍음이 많은가 보군?” 녀석은 웃으며 말을 이었지만, 눈가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 또한, 아까부터 삐딱하게 선 자세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지점이 허리에 찬 무기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그래서 용건은?” “우리 소속원 중 하나가 순찰 중 우연히 자네들이 라플레미믹을 잡는 걸 목격했다더군.” “참 공교롭기도 하군.” “세상 일이 그런 것 아니겠나. 아무튼, 그냥 본론만 말하겠네. 이번에 얻은 전리품을 내놓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말했듯이 이 지역은 우리 클랜의 영역이니까. 아까 자네도 합의를 했던 거 같네마는.” “합의?” 듣자마자 코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이놈들 입장도 이해는 됐다. 이 섬을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라플레미믹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그걸 잠깐 들른 탐험가들이 쏙 알맹이만 먹은 것이니까. 하지만, 이걸 어쩌나. “너는 우리가 아침 일찍 떠나 주길 바랐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인 게 합의의 전부였을 텐데?” 실제로 우리는 전리품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궤변이군.” “궤변이 아니라 정론이겠지.” “…….” 이내 녀석이 턱을 세게 조이며 까드득 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의 심정이야 대충 알 거 같기는 했다. 당연히 그러한 합의까지 되었다고 생각을 했겠지. 아니, 애초에 하룻밤 사이에 우리 쪽에서 몬스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미궁에는 미궁에서의 불문율이 있는 법. 자네가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우리가 자네를 해친다 한들 어느 누구도 우릴 탓하지 못할 것일세.” 너무나도 직설적인 협박. 나는 진심이냐는 듯 녀석을 빤히 응시했고, 녀석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 “…….” 언제 어느 쪽에서 무기를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꿀꺽. 침묵이 길어지자 녀석 뒤에 자리한 무리가 각자의 병기를 꽉 쥐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따라 그 즉시 공세를 시작할 것처럼. 물론 그런다고 할 말을 못 할 내가 아니었다. “불문율 같은 건 모르겠고.”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 것을 빼앗으려 하는 놈은 모두 약탈자다.” “…악수를 택하는군.” 주의 깊게 들을 것도 없이 한 귀로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주 들었던 말이지. 다 어디 있을 거 같나?” “…….” “그래도 이제 좀 상황이 명료해졌군.” 이내 나는 최종 통보를 날렸다. “뭐 하냐? 덤빌 거면 덤비고, 말 거면 꺼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첫 만남과는 전혀 다른 구도였다. 아까는 내가 아침 일찍 떠나겠다 말하자마자 우리를 얕잡아 보며 오지랖을 부렸던 놈이었다. 근데 지금은 어떠한가? 극단적으로 보일 만큼 강하게 나가자 도리어 어쩔 줄 모른다. 하긴, 찜찜하기는 했겠지. 숫자가 다섯 배나 적은 상태에서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그중에는 에르웬에 대한 것도 있을 테고.’ 놈들은 아직 에르웬을 알아보지는 못한 거 같다. 하지만, 우리 팀에 있는 요정 궁수가 라플레미믹을 화살 한 방으로 처치한 일은 놈에게도 전해졌을 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란 건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 다만, 그럼에도 녀석은 클랜원들 앞이라 그런지 결정을 내리는 게 어려워 보였다. 따라서……. “선택하기가 힘들다면 내가 도와주지.” “……?” “셋을 센 다음에도 내 앞에 있다면 덤비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뭐?” 놈은 가당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실제로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안색이 바뀌었다. “셋.” “……!” “둘.” 질질 끌 것 없이 오히려 실제 시간보다 빠르게 숫자를 셌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외치려는 순간. “…무의미한 피를 볼 필요는 없겠지.” 녀석이 백기를 들었다. *** “단장! 거기서 왜 물러난 겁니까!” 부하의 외침에 헌츠맨 클랜의 단장, 에크셔 멜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심복 중 한 명이 얼른 나서서 그를 대변했다. “라플레미믹을 마법사 없이 사냥했습니다. 적어도 그 요정 궁수는 3등급 탐험가예요. 같이 다니는 걸 보면 다른 두 사람도 비슷할 테고.” “설령 셋 다 3등급 탐험가라 해도 우리는 숫자가 훨씬 많소!” “레밀턴, 당신은 3등급 탐험가와 싸워 본 적 있어요? 그들은 괴물이에요.” “하지만, 마법사도 없지 않았소! 그래도 우리 숫자면 이길 수 있었을 거요!” “그래도 우리 중 절반은 넘게 죽었겠죠. 그 넘버스 아이템 하나에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보나요?” “그건…….” 심복의 논리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던 남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어딜 가서도 우습게 보일 것이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고, 설령 그렇다 한들 단장님의 결정이 옳았다고 봐요.” “근데 그 요정은 대체 누구요? 라플레미믹을 한 번에 죽이다니…….” “은발 여성이라면… 혹시 혈령후, 그 여자인 거 아닙니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크게 곤란해질 수도 있었던 것이겠구려.” “혈령후라니? 다들 뭐 이상한 거라도 먹었소? 그 미친 여자가 여기에 왜 있겠소. 전쟁에 미쳐 가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을 썰어 대고 있을 텐데.” 서로의 의견을 반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는 점점 그 소리를 키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의견이 일치하는 자들끼리 파벌이 갈린다. 그러던 때였다. “단장! 놈들이 배를 타고 섬에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정찰 중이던 부하가 보고를 해 왔고, 이에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던 단원들이 일제히 한 명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 에크셔 멜릭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클랜을 운영하는 것은 한 척의 배를 모는 것과 같다. 태풍이 불고, 파도가 밀려들며, 번개가 내리치는 등의 시련이 찾아와도, 선장은 이를 이겨 내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한다. 그렇기에……. “다들 그만하고 짐부터 챙기게.” 사내는 결정을 내렸다. “단장, 그 말씀은…….” “놈들을 추격하겠네.” 이에 과격파에 속하던 단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면 온건한 대응을 요구하던 이들은 우려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평균 3등급으로 추정이 되는 탐험가 셋. 그러나 사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네 걱정은 알고 있네. 하나 육지에서면 모를까. 해상 전투에서는 우리가 질 리 없지 않은가.” “과연, 그래서 그렇게 순순히 보내 주신 거였군요!” 과격파에 속한 이들은 사내의 심계에 감탄했고, 그 반대 진영 역시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그들은 해상 전투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래도 이런 의문은 있었을까? “그래도… 넘버스 아이템 하나에 그 정도 가치가 있겠습니까?” 한 단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크셔 멜릭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넘버스 아이템 하나면 수지가 맞지 않지.” “그 말씀은—.”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게 그거 하나가 전부이진 않지 않은가?” 헌츠맨 클랜. 지금에야 이런 섬에 처박혀 보물찾기나 하고 있지만, 한때 그들은 6층 대해를 누비는 해적이었다. 사람을 사냥하고 돈을 버는. *** 서서히 날이 밝아 오는 초새벽. 솨아아아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돛에 부딪치며 배를 앞으로 밀어낸다. 뒤쪽으로는 어스름한 하늘에서 별무리가 빛나며, 뱃머리가 위치한 동쪽으로는 수평선 너머로 가려진 태양의 존재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나름 운치가 있는 광경이었다. 애석하게도, 여유럽게 이를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아저씨, 배가 따라오고 있어요. 총 세 척이고, 문양 같은 건 없어요.” 섬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추격이 붙었다. 누구일지는 빤했다. ‘처음부터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이건가.’ 어쩐지 황색 불이 뜬 것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상황이 종료되더라니. 아마 그냥 보내 준 것도 이걸 노린 것이리라. 배를 세 척이나 갖고 다니는 놈들이면, 해상 전투에도 꽤 조예가 있을 테니까. 바다에서라면 훨씬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물론 의문점이 하나 남아 있기는 했다. ‘근데 왜 적색이 아니라 황색이 뜬 거지?’ 어차피 습격을 받는 거면 그냥 적색이면 됐지 않나?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게 뭐가 있다고? 그러한 고민은 아멜리아가 말을 걸어오며 도중에 끊겼다. “슈이츠, 어쩔 거냐?” “따돌리는 건 힘들겠지?” “아마도.” 기동성에 특히 힘을 준 배들인지, 마력 추진 장치를 활성화했음에도 오히려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선택지는 단 하나. “에밀리, 아까우니까 마석은 이제 그만 넣어라.” “싸울 셈인가?” “달리 방법이 있나?”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키를 놓고서 돛을 접을 뿐. 이내 아멜리아를 도와 돛을 접자 바람을 타고 나아가던 배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그리고……. 촤아아아아-! 물살을 헤치며 빠르게 접근하는 세 척의 배가 내 시야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에 있는 배였다. “…….” 우리 배의 세 배는 될 법한 체급. 측면과 전방에 마력포가 장착됐으며, 돛은 무려 세 개나 된다.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뱃머리에는 쇄빙 장치까지 달려 있다. 이 정도면 왕가의 군함급은 아니어도 2단계 아래 정도는 될 거 같은데……. “슈이츠, 놈들이 포를 쏴 대면 우리 배는 금방 침몰할 거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아멜리아가 우려를 내비쳤다. 이해 못 할 걱정은 아니었다. 확실히 해상전이 시작되면 이런 배야 금방 박살이 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츄릅. 나는 입술을 핥으며 신호등 반지를 확인했다. 아까 떠올랐던 황색의 빛은 진작에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제 좀 알 거 같았다. 왜 적색 불이 아니라 황색 불이 켜졌던 것인지. “배가… 참 크고 튼실해 보이는군.” 미궁에서 보물을 뱉는 건 몬스터만이 아니다. 378화 아틀란테 (1) 세 척의 배는 약 400m 거리를 두고서 멈추었다. 아무래도 에르웬의 화살 공격을 경계하는 거 같은데……. “에르웬, 이 거리에서도 요격이 가능하냐?” “네. 하지만 이 거리면 대부분 반응을 하더라고요.” 하긴, 저쪽에는 마법사도 있었으니까. 화살이 닿기 전에 대처할 시간은 충분할 거— 퍼엉-! 그때 놈들의 대장선의 전면부에 달린 마력포가 굉음을 토해내며 마력구체를 뿜어냈다. 쩝, 시작 전에 항복 권고 정도는 할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는 건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음… 아니면 배째로 가라앉힌 뒤 익사한 시체들만 나중에 건져 올릴 생각이거나. 휘이이이익-! 마력포탄이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슈이츠!”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내 가명을 불렀으나, 대답이 나온 것은 에르웬 쪽이었다. “아저씨, 이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방법을 물을 새도 없이 시위에 건 화살을 쏘아낸 에르웬. 콰아앙-! 이내 바람 정령의 힘이 실린 화살이 바다 위에서 마력포탄과 부딪치며 폭발했다. “에르웬, 몇 개까지나 막을 수 있나?” “한 번에 네다섯 발까지는 충분할 거 같아요.” 와, 진짜?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탄도 마법진은 달 필요도 없겠는데? “장하다, 에르웬. 다음에도 포탄이 날아오면 그렇게 막아라.” “네!” 능력을 인정받은 에르웬이 기쁜 듯 다시 포탄이 날아오길 기다렸지만, 애석하게도 포탄 세례는 첫 발을 끝으로 날아들지 않으며 잠시 소요 상태에 접어들었다. “상대 측에서 제법 당황한 모양이군.” 나도 아멜리아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다만, 곧 상대도 어떻게 할지 결정을 끝냈을까. 퍼엉-! 퍼엉! 퍼펑! 세 척의 배가 일제히 마력포를 연사하며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에 에르웬이 정말이지 숨 쉴 새도 없이 요격을 했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놓치는 것들이 생겼다. 콰앙-! 배 하단부에서 포탄이 터지며 크게 흔들리는 선체. 쩝, 이제 슬슬 시작해 봐야겠네. 이 정도면 거리도 딱 적당한 거 같고. “에르웬, 정령화를.” 오더를 내리자마자 에르웬은 이견을 내지 않고 즉시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겠을까? “어떤 속성으로요?” “물.” 이내 속성까지 말해주자 에르웬이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왔다. 오케이, 그럼 링크도 끝났고. 「캐릭터의 육신에 물의 정령이 깃듭니다.」 「수 속성 받는 피해가 절반 감소합니다.」 「전기 속성 받는 피해가 4배 증가합니다.」 「근접 무기 사용 시 위력이 50% 감소합니다.」 「샘물의 축복 보너스.」 「받는 치유 및 재생 효과가 2배 증가합니다.」 「영혼력 재생 속도가 증가…….」 「…….」 음, 그러고 보니 실전에서 엘리멘탈 바바리안(물)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쓰윽. 나는 고개를 내려 변한 모습을 확인했다. 육안상으로는 딱히 큰 변화가 없었다. 그냥 피부가 촉촉해지며 조금 반들반들해진 정도. “에밀리, 다녀오마.”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최선의 방어는 늘 공격인 법일진대. 음, 그래도 이 말은 해두고 가는 게 나으려나?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배를 지키는 게 어려울 거 같으면 그냥 버리고 아래 뛰어내려라.” “그게 무슨—” 낭비할 시간이 없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그리고……. 타닷. 배의 난간을 밟으며 파도치는 바다 위로 몸을 내던졌다. 다이빙을 하는 자세는 아니었다. 현 상태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거든. 「샘물의 축복 보너스.」 설명 하나 적히지 않은 한 줄짜리 보너스. 이 보너스를 얻은 캐릭터는 수중 호흡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며, 물 위에서 걷는 게 가능해진다. 바로 이렇게. 탓. 중력을 거부하듯 출렁이는 해수면 위에 우뚝 선 신체. 이름하여……. “우오오오오오오!!” 바바리안 제트 스키(뜀) 모드. 타다다닷. 해수면 위에 착지하기 무섭게 나는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퍼엉-! 퍼엉! 퍼펑! 물 위를 내달리는 바바리안을 보며 당황하기도 잠시, 적들은 배를 노리던 마력포를 나에게 겨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쾅-! 콰쾅! 콰콰쾅-! 일단 방패로 급소는 보호했으나 무차별적으로 연사 중인 마력포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 명색이 ‘마력’ 포탄이니까. 물리 내성으로는 대미지 감소가 적용되지 않는 것. 맞을 때 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하지만……. “에르웬, 굳이 포탄을 막을 필요 없다.”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 에르웬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뒤에서 덜그럭, 소리를 내며 일어난 스켈레톤을 본 탓이다. 「캐릭터가 [위험부담]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확률적보복]으로 인한 피해 면역 효과가 사라지는 대신 발동 확률이 100%로 고정됩니다.」 마력 포탄은 마력을 자원으로 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 한 대 처맞았을 때 확실하게 한 대를 되돌려 줄 수가 있다는 뜻. 퍼펑-! 퍼엉! 퍼퍼펑! 마력포에 피격당한 즉시, 스켈레톤들이 잔상처럼 나타나며 역으로 포격을 가했다. 다만, 그 포격이 배에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었다. 솨아아아아아-! 배를 중심으로 펼쳐진 마력의 결계. 그 결계는 30%로 위력이 절감된 마력포를 너끈하게 막아 냈다. 이에 적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포격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30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오, 대성공도 떴네. [그아챠앗-!!] 판정 특유의 호쾌한 사운드가 함께하며 초대형 마력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스켈레톤. 퍼어어엉-!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큰 소리를 뿜어내며 날아간 마력포탄은 선체 주위를 감싸던 결계를 너무나도 쉽게 박살 냈다. 그리고……. “무슨 저런 괴물이……!” “다들 메리나호를 버리고 탈출해라!” “얼른 넘어와!” 배 한 척이 그대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니미럴.’ 설마 그 한 방에 바로 가라앉을 줄이야. 이렇게 되면 손실이 대체 얼마— 번뜩-! 그때 빛이 터져 나오며 인원이 모두 빠져나온 배가 역소환되며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음, 이렇게 되면 나중에 수리만 하면 되겠네. “일단 배부터 가라앉혀!” 이내 놈들은 확실한 것부터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마력포를 돌려 아멜리아만 혼자 남은 배에 포탄을 쏴댔다. ‘쩝, 저럴 거 같기는 했는데.’ 에르웬도 가능한 막기는 했지만, 우리 배가 침몰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얘도 마법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저씨, 마법이에요!] “넌 혹시 모르니 내 뒤에 숨어라!” 나와 링크된 상태로 쫄쫄 따라오던 에르웬을 뒤에 숨겼다. [정령화] 중에는 물리 면역 판정을 받지만, 마법 같은 것에는 훨씬 더 크게 피해를 입으니까. 만약 여기서 [정령화]가 해제되기라도 하면 바다에 가라앉는 미래밖에 없는 것인데…….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 마력포와 함께 쏟아지는 마법, 그리고 각종 원거리 스킬들을 몽땅 다 몸으로 받아내며 달려나갔다. 활성화 중인 [위험부담] 덕에 처맞는 족족 대응 사격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상대측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팔탄이 죽었습니다!” “놈이 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 “더! 더 쏟아부어!” “놈도 죽어가고 있다! 좀만 더 하면 돼!” 서로가 모든 것을 내건 전력투구. 물론 유리한 건 본인들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저 배까지 도착해도 그때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테니까. 숫자로 밀어붙여서 다치고 지친 나를 잡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을 게 분명하다. 참 멍청하게도— 피슉-! 그때 섬광처럼 날아든 빛이 내 몸을 관통했다. 「캐릭터가 ‘뇌창’에 적중당했습니다.」 일순간 정신을 놓을 정도로 강렬한 충격.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겨우 중심을 잡아서 넘어지는 일을 면했다. 그러나 몸 상태는 이미 최악이었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몸에 흐른 전류가 내장을 아예 삶아 버린 거 같은데……. ‘빌어먹을 번개 마법.’ 엘리 바바(물)에 [위험부담]까지 켜둔 탓일까? 무려 8배에 달하는 딜량은 나를 빈사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그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지만. [그아챠앗-!!] 때마침 또 터져 나온 대성공의 판정음.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30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스켈레톤이 신화에서나 나올 거 같은 거대한 뇌창을 던졌다. 그리고……. ————! 단어 그대로 빛의 속도로 날아가 대장선 옆에 있던 두 번째 배를 박살 냈다. ‘저건… 수리도 못 하겠네.’ 참고로 굉음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청각이 마비된 탓이다. 삐이이이이이이이. 뇌를 찌르는 듯한 이명 소리. 이내 나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뭐, 반쯤 의도한 것이긴 하다마는. 「캐릭터의 육신에 바다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패시브 스킬 [기원]으로 인해 자연 재생 수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말했잖아. 바다에서는 절대 질 수가 없다고. *** 스톰거쉬의 패시브 스킬 [기원]. 여기에 [정령화]로 얻은 치유 밎 재생 2배 효과까지 겹쳐지니 포션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신체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 어긋났던 뼈가 다시 제자리로 맞물리고, 타고 찔리고 짓이겨진 살이 새롭게 돋아난다. 포션과 달리 고통은 없었기에 몸이 회복되는 과정을 보다 세밀하게 실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청각도 돌아왔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영체 상태에서는 수중에서도 대화가 가능하구나. 근데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나는 검지로 위를 가리킨 뒤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위에서는 어쩌고 있냐는 말씀인가요?] 옳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에르웬이 빠르게 브리핑을 해주었다. [일단 당장은 공격이 멈췄어요. 아무래도 아저씨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 신나게 플래그를 꽂고 있단 말이지. [아, 대화 나누는 게 희미하게 들리는데… 지금 마법사가 탐지 마법을 쓰려는 거 같아요.] 음, 그러면 곧 살아 있단 것도 들키겠네. 그 전에 서프라이즈를 해줘야지. 내가 위로 올려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에르웬이 물의 정령을 소환해 나를 쑤욱 밀어냈다. 촤아아앗-! 그렇게 다시 돌아오게 된 바다 위. “…노, 놈이다!” 지옥에서 올라온 물귀신처럼 씨익 웃자, 놈들이 기겁하며 극찬을 쏟아냈다. “부상도 다 나았어……!” “무슨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대부분은 당황만 하며 입을 뻐끔거린 데 비해, 우두머리는 달랐다. 리더란 그런 존재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만 하는 자. “단장!” “…뱃머리를 돌려라!” 이내 하나 남은 대장선이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바닷물이 주변에 가득한데도 치유를 하지 않았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좀비처럼 회복하며 달려가면 진작에 손절을 하고서 도주를 시도할 테니까. 아무리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더라도, 저런 배를 두 다리로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닷. 이 정도 거리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 같단 말이지.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자 놈들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놈이 온다!” “빨리! 더 빨리!” 이제는 견제 사격조차 없었다. 어차피 회복되는 게 들킨 마당이니까. 괜히 반사를 당해 뱃머리를 돌리는 데 지장이 생기면 그게 더 큰 문제라 판단한 것. “다 돌았다……!” “마석! 얼른 마석을 부어라!!” 마침내 뱃머리를 완전히 돌린 배가 모터라도 단 듯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와 배의 거리가 약 15m. ‘이런 씹…….’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내서 뛰는 데 집중했다. 그야 이 새끼들이 이대로 돌아가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니까. ‘우리 배는 박살 내 놓고 자기들은 튀겠다고?’ 어림도 없지. 갈 땐 가더라도 배는 주고 가! “으아아아아아악!!” 이내 괴성까지 내지르며 발길에 박차를 가하자 점점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속이 붙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이러다 잡히겠소!” “더! 마석을 더 부어!!” 거리가 점차 좁혀지자 배 후미에 탄 녀석들 표정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흡사 괴물에게 쫓기는 듯한 표정. 피슉-! 그 와중에 에르웬이 화살을 맞혀 난간 앞에 있던 녀석 중 한 명을 바다로 떨어뜨렸다. 급소는 피했기에 즉사는 아니었다. “사, 살려줘……!” 어푸어푸 헤엄치며 비명을 내지르는 녀석. 다만, 녀석들은 떨어진 동료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뛰느라 바빠 신경도 쓰지 않았고. 타닷. 놈을 지나치며 있는 힘껏 발을 내뻗는다. 9m, 8m, 7m, 6m, 5m……. 조금씩이나마 좁혀지는 거리.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서서히 가속이 붙기 시작한 배는 어느덧 내가 뛰는 속도를 넘어서 버렸다. 5m, 6m, 7m, 8m……. 좁혀지던 거리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하자 배 후면에서 날 보던 놈들의 눈에 안도감이 어렸다. ‘니미럴.’ 새삼스럽지만 이동기의 부재가 아쉽다. 원래 방패 바바는 8레벨에나 이동기가 들어가지만, 그 전에 운좋게 만티코어 정수를 먹지 않았던가. [도약]을 안 지웠으면 진작에 배에 올라탔을 텐데! ‘진짜 여기서 이렇게 된다고?’ 내심 체념하는 마음으로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물론 정말 놓쳤다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에르웬, 우리 배를 쏴라. 어느 정도는 부숴버려도 좋으니.” […우리 배요?] “사소한 건 넘어가고, 얼른.” 내가 다시금 말하자, 에르웬이 배의 후미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콰아앙-! 이내 폭발했다. “…수리비 좀 깨지겠군.” 대장선의 마력 추진 장치가 있는 자리였다. *** 마력 추진 장치가 박살 난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벌어지던 거리가 금세 다시 좁혀졌고, 이내 나는 성공적으로 갑판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리고……. “죽여라!!” 물론 놈들이 날 보자마자 투항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6층에서 활동하는 클랜인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 쉬우면 지들이 어쩔 거야.’ 사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에르웬이 [정령화] 상태로 내 주변을 감돌며 한 명씩 처치. 나는 그런 에르웬을 보호. 그러다가 몸에 부상이 심하게 쌓이면……. 풍덩-! 잠수 한 번 하고 다시 올라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이 짓을 세 번인가 반복하니까 놈들도 전의를 잃었는지 무기를 떨구며 투항을 해왔다. 열다섯이던 게 일곱이 됐으니 반 넘게 죽은 건가? “쯧쯧,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아주 그냥 막 쓰고 다니지?”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뭐라는 거야, 이미 넌 죽은 상태인데. 콰직-! 투항과 동시에 단장 놈이 머리를 땅에 박았고, 나는 그 위에 망치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남은 놈들을 전부 묶은 뒤에 배를 장악했다. “항해사는 누구냐?” “저, 저입니다!” 휴, 그래 항해사는 살아 있었구나. “야, 너 마법사 맞지?” “…….” “고개만 끄덕이네? 대답 안 해?” “마, 맞소. 내, 내가 마법사요…….” 전투 중에 한 명 남은 마법사도 따로 분류. “문신이 있는 걸 보니 네가 다른 배를 몰던 새끼지?” “그, 그렇습니다.” 대장선을 제외한 다른 두 척의 배를 소유한 녀석도 따로 분류했다. 그리고……. “남은 너희 둘은…….” “…….” “그냥 가라.” “예? 배, 배 위에서 어디로…….” 어디긴 어디겠어. 콰직, 콰직-! 남은 두 명은 쓸모가 없으니 바로 처리. 그렇게 빠르게 인원 정리를 한 후에는 후미로 가서 배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처참하게 박살 난 마력 추진 장치가 보였다. “제기랄.” 진심으로 분통했다. “너희들, 내 배를 이렇게나 망가뜨리다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로 끝날 문제면 법은 왜 있지?” “…….” 내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묵념했다. 후, 그래 얘네한테 화내서 뭐 하겠— 철벅철벅. 그때 배 아래쪽에서 물장구 소리가 들렸다. ‘응? 뭐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난간에 붙어 아래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 아멜리아가 보였다. 얘 설마 저기서 헤엄쳐서 여기까지 온 거야? “…조난자인가!” 나는 그리 말하며 로프를 던졌고, 아멜리아는 이를 잡자 그대로 끌어당겨 배 위로 올렸다. 그리고……. “슈이츠, 너는 정말…….” “응?” “한 대만 맞아라.” 그대로 명치에 주먹이 박혔다. 379화 아틀란테 (2) 아멜리아가 합류한 후에는 우선 주변을 돌면서 파밍을 끝마쳤다. 그야 아까 바다 아래로 떨어진 애도 있잖아? 돈을 바다에 버리고 다니면 나중에 천벌 받는다. “항해사, 배를 몰아라.” “어디로 갈까요……?” “피오네섬으로.” 해상 전투가 마무리된 후에는 일단 배를 이끌고 보물섬으로 돌아왔다. 지금 상태로 재정비 없이 다음 섬까지 항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꽤 간당간당했고. ‘배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데…….’ 박살난 마력 추진 장치를 대신해 돛을 펼치고 노를 저으며 돌아가고 있던 와중, 바닥에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박살난 게 추진 장치만은 아니었던 모양. 그래서 우리는 보물섬에 도착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물을 퍼내야만 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그래도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던 거 같아요.” 허, 재밌어? 얘도 취향 참 이상하네. 그래도 뭐, 재미와 별개로 한번 해서 나쁠 것 없는 경험이기는 했다. 처음엔 함께 물을 퍼내다가, 중간에는 뭔가 깨닫고 물의 정령을 이용해 물 자체를 밖으로 역류시켜 버리던 에르웬 아니던가. 나중에 또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 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베테랑 탐험가가 되는 거지.’ 아무튼, 다시 섬으로 돌아온 후에는 배를 역소환한 뒤, 내륙으로 가서 박살난 배들을 전부 소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상태를 점검했다. 단 하나도 멀쩡한 배가 없었다. “……에밀리, 수리해서 파는 쪽과 그냥 파는 쪽 중에 뭐가 더 비쌀 거 같나?” “글쎄…….” 물건을 사고파는 데 있어서 일가견이 있던 아멜리아가 감정을 포기했다. 그만큼 시세를 알기 어려운 상태란 거겠지. “그래도 어느 쪽이든 나름 돈은 될 거다. 이런 배는 자재만 떼다 팔아도 굉장히 비싸니까.” “그건 그렇겠지만… 야, 항해사!” “예!” “배를 고쳐라.” 배를 고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고치라는 명령. 이에 항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허허, 아주 정신 못 차리지? “못 하는 건가?” 이내 짧게 되묻자 항해사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소리쳤다. “해보겠…….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악으로 깡으로 해내겠다는 각오가 물씬 풍겨나는 답변. 아무래도 내게 쓸모가 없어지면 앞선 동료들을 따라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좋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이내 항해사는 그리 답하더니 배가 놓인 쪽으로 달려가 여기저기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각을 보는 듯했다. 그럼 일단 배는 얘한테 맡기고……. “마법사.” “…말하시오.” “배의 소유권을 넘겨받고 싶은데, 관련 마법을 쓸 줄 아나?” “쓸 수 있소…….”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이런 해적 같은 새끼들이랑 같이 다니는 걸 보고 내심 기대는 했지만 정말 쓸 수 있을 줄이야. 꽤 희귀한 마법인 거로 알고 있는데. “좋아, 그럼 얼른 쓸 준비를 해라.” “알겠소이다….” “와, 목소리 뭐야… 하기 싫냐?” “아니오! 하고 싶소!” 진작 그럴 것이지. 마법사도 설득을 했겠다, 이후로는 배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선장이 사망하며 주인이 사라진 대장선이었고, 그다음은 한 척씩 배를 소유한 두 남자였다. 다만……. “이 배는 양도가 불가하오.” “뭐? 어째서지?” “보다시피 너무 파손이 심해서…….” 대미지가 8배 증가한 ‘뇌창’을 300% 뻥튀기 시켜서 되돌려 주었던 그 배였다. “무엇보다 핵심 마법진이 망가졌소. 이래서야—” “마법진이 망가져? 하지만 소환과 역소환은 잘 됐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왜 그 기능이 아직도 작동하는지가 의문일 정도요…….” “그럼 이 배는 어쩔 수 없지.” 전문가가 안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배 한 척은 포기했다. 어차피 수리하려면 자재가 필요하기는 했으니까. 후면부가 박살난 대장선을 앞에 두고서 막막한 표정을 짓던 항해사가 우리 대화를 듣더니 냉큼 달려왔다. “저기… 그럼 여기서 판자를 떼가도 됩니까?” “그래라.” “그리고 혹시 인력도…….” “여기 셋 전부를 빌려주지.” “감사합니다……!” 이내 인력 지원까지 빵빵하게 받은 항해사는 마법사에게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더니, 배 수리에 돌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촤아아아아악. 아공간에 대충 쑤셔 박았던 전리품들을 전부 바닥에 떨궈놓고서 정리를 시작했다. “이건… 대박이군.” 정확한 금액은 도시에서 팔아봐야 알겠지만, 척 보기에도 장비들이 전부 상등품이다. 하긴 6층에서 활동하던 놈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아무튼, 이거면 빚을 다 갚고 아예 저택을 하나 더 살 수도 있을 듯한데…….. ‘돈을… 이렇게 쉽게 벌어도 되는 건가?’ 고블린을 잡으며 돌빵 하나의 가치를 가진 마석을 손수 캐던 시절을 떠올리면 현실감이 없을 정도. 뭐라 딱 잘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손끝에 감돈다. “아저씨… 그럼 저희 집 안 팔아도 돼요?” “물론이다! 침대도 좋은 거로 바꾸자.” “치, 침대요?” 침대는 중요하다. 삶의 질이 달라지니까. “그럼 나도 무기를 바꿔도 되나? 안 그래도 갖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아멜리아도 사고 싶던 물건을 말했다. “…물론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군.” “근데… 얼마인데?” 내가 묻자 아멜리아는 에르웬의 눈치를 쓱 보더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스톤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곱절은 더 큰 액수. “……!”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으나, 했던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래, 사라.” 동료에게 투자하는 건 아깝지 않으니까……. “후훗, 그럼 이거로 나를 배에 버려두고 간 것은 잊지.” 게다가 얘한테는 잘못한 것도 많고……. *** 배 수리를 끝마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 정도면 작업 속도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배 자체는 굉장히 완성도 있게 고쳐졌다. 작업에 도움을 줄 마법사가 있는 데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항해사 놈이 조선소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던 것이 컸다. ‘항해사에 정비 기술도 어느 정도 있다라…….’ 꽤 괜찮은 인재처럼 보인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아우옌 록로브라고 합니다마는…….” 오케이, 일단 한스는 아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서류 전형은 통과다. “좋은 이름이군. 수고했다. 응우옌.” “아우옌인데…….” “아, 그랬나?” 성공적으로 배 수리를 마친 항해사의 공을 치하한 뒤 바닷가에 배를 띄웠다. 그리고……. “뭐 하냐? 안 탈 거냐?” “……타야지요.” 항해사가 무슨 지옥으로 향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배에 올라탔다. 다음은 마법사였다. “너도 타라.” “…알겠소.” 이내 마법사까지 승선하자 남은 두 명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배 소환 각인을 갖고 있기에 살려서 섬까지 데려온 녀석들이다. 그야 배 위에서 죽이면 각인 아공간에 있는 배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니까. 다만, 수리 인력이 필요해서 장비들만 빼앗고서 내버려 두었는데……. “타겠습니다…….” “예, 저도…….” 내가 빤히 쳐다보자 녀석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배로 향했다. 하지만……. “동작 그만.” “……?” “너희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 합격 목걸이를 받기에는 가진 재주가 너무 미천하단 말이지. 툭. 내 어깨에 가로막혀 걸음을 멈춘 녀석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럼 저희는 여기 남는 겁니까……?”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얼굴. 그래도 한 놈은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제발, 데려가주십시오.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겁니다.” 음, 이 정도 판단이면 쓸모가 있을지도?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으나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됐고, 너희도 그냥 이쯤에서 쉬어라.” “제기랄……!” 제기랄이라, 흔하네. 아마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지고 가장 많이 들은 유언 1순위가 아닐까. 콰직, 콰직-! 두 녀석의 머리를 공평하게 깨부순 뒤, 사체는 그냥 바닷가에 던졌다. 내버려두면 피 냄새를 맡고 온 바다 몬스터들이 알아서 치워 주겠지. 자, 그럼 가볼까. 철퍽, 철퍽. 어느덧 핏물이 번진 바닷속을 성큼성큼 걸어가 배 외벽에 달린 밧줄 사다리를 타고서 배에 올랐다. 이미 나 빼고는 전원이 승선을 마친 상황. “……힉!” 쓸모가 다한 동료들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을 본 항해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거, 겁은 많아가지고. ‘뭐, 이 정도 긴장감은 있는 게 좋겠지.’ 나는 다가가서 항해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놈들이 갖고 있던 동부 해역 전도를 꺼내 한 곳을 검지로 짚었다. “지금부터 이곳에 가려는—” “물론 가능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즉답. 선장으로서 제법 만족스러운 태도였다. 암, 모름지기 수하라면 이 정도의 긍정적인 면모가 있어야지. 뭐, 말을 끊어먹는 버릇은 교정을 해야겠지만. 터벅, 터벅. 항해사가 키 앞에 선 것을 본 나는 갑판 쪽으로 걸어나가 뱃머리 앞에 섰다. 그리고 우렁차게 외쳤다. “출항이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 항해사는 침대와 같았다. 삶의 질을 바꿔준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중간에 섬을 하나도 안 들러도 된다고?” “예! 섬을 찾아다니며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건 비숙련 항해사들이나 하는 짓이니까요!” 바짝 기합이 들린 답변을 하면서도 자기 PR을 틈틈이 끼워 넣는 항해사. “그래도 여기 이 섬들은 들렀으면 좋겠는데.” “그럼 동선을 새로 짜오겠습니다!” “오, 넌 참 쓸모가 있군.” “칭찬 감사합니다! 뼈에 새기겠습니다! 평생!” 이내 항해사는 선장의 오더에 따라 금방 동선을 짜오더니 배를 루트대로 몰기 시작했다. 근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쯧.” 함께 잡혀온 마법사가 항해사를 보며 혀를 찼다. 뭐, 자기는 쟤랑 다르다 이건가? 마법사의 우월감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솨아아아아아-! 바람을 헤치며 빠르게 망망대해를 나아가는 배. 나와 에르웬은 갑판에 접이식 의자와 파라솔을 설치하고서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그래, 이게 항해지.’ 예전 배는 이런 공간까지는 없던 데다가, 배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아멜리아를 도와줘야만 했는데. 항해사 하나로 이렇게까지 편해지는구나. “에밀리, 너도 와서 쉬지 그러냐?” “…나는 됐다.” “왜?” “……그냥.” 내친김에 아멜리아도 불렀지만, 얘는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참고로 제자리란 항해사의 옆이었다. 왜 저기서 저러는가 싶어서 잠깐 살펴봤더니, 아멜리아는 항해사가 배를 조작하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키는 왜 이렇게 꺾은 거지?” “아, 그게 돛이 저렇게 살짝 꺾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걸 각진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이럴 땐 키를 살짝 틀어주는 편이…….” 관찰만이 아니라 항해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아멜리아. 얘가 저런 눈도 할 때가 있구나.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경청하는 아멜리아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앞으로 항해를 쟤한테 맡긴다고 했을 때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더라니.’ 아무래도 얘는 배를 조종하는 게 재밌었던 거 같다. 뭐, 물어보면 곧 죽어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기술을 익히는 거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몹시도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쭉쭉 순풍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항해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려서 몬스터를 처치. 그리고 다시 다음 섬으로 이동. 아멜리아 같은 경우엔 이동 중에도 열심히 항해술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나와 에르웬은 낚싯대로 물고기나 잡으며 시간을 때웠다. 심심해서 둘러보던 차에 낚싯대가 있더란 말이지. 모든 경험은 해보는 편이 좋다. 혹시 모르지 않나, 배에서 식량이 다 떨어져 이렇게 자급자족을 해야 할 경우가 올지. “오! 오랜만에 월척이군!” 의외로 움직이는 배에서도 낚싯대를 걸어두면 뭔가 걸리긴 하더란 말이지. “와아… 대단하세요, 아저씨.” 낚싯대에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평범한 물고기였다. 음, 정확히는 핏빛 성채에서 사냥한 데드맨처럼 무등급 판정을 받은 몬스터라 해야 하나? 처치했을 때 마석도 정수도 떨어뜨리지 않으며, 시체도 사라지지가 않는다. 다만……. “해각수예요!” 가끔 이렇게 몬스터가 미끼를 물고 나타날 때도 있었다. 내가 낚시를 끊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고. [해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 +4] 이렇게 바다에만 나오는 몬스터들은 사냥보다 조우하는 게 더 어려우니까.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걸 넘어 실익이 존재하는 것. 여하튼 그러한 일상적인 시간이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고, 동쪽으로 향하던 우리는 초반 해역을 벗어났다. 아멜리아와 항해사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왜 여기서부터는 나침반이 먹통이 되는지도 알고 있나?” “글쎄요. 대해에는 해극신이란 게 있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탐험가들을 상대로 심술을 부리는 거란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냥 설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해극신이라면 역시 레비아탄인가? 걔도 언젠가 잡기는 해야 하는데……. “아무튼, 이곳부터는 방향을 쉽게 알 수가 없기에 항해사의 역량이 중요해지지요. 사실 초보 항해사들이 가장 많이 벽을 느끼는 게 이곳이기도 합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항로를 찾지?” “별, 태양, 온도, 날씨, 그 모든 게 정보가 되지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경험이겠지만.” “신기하군.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 있나?” “후훗, 물론입니다요. 아, 이제 바람을 탔군요. 한번 키를 잡아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나?” “암요. 어딘가 틀어질 땐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아멜리아 쟤는 항해사랑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나중에 자기가 밥 주고 다 할 테니 버리지 말고 키우자 하는 거 아니야? ‘…아멜리아가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잠시 눈을 붙였고, 눈을 떴을 땐 어느덧 바람이 멈춰 있었다. 대해의 대표적인 특수 지역 중 하나인 무풍지대. “이곳에서는 마력 추진 장치를 사용하는 게 가장 편하지요.”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 모아둔 마석으로 무풍지대를 돌파했다. 아, 참고로 에르웬이 박살낸 추진 장치는 고친 게 아니라 교체한 것이다. 다른 배 세 척에도 추진기가 달려 있었으니까. 그거 세 개를 전부 뜯어다가 옮겨 달았다. 명색이 중대형 선박이다 보니 기존 출력을 내려면 소형 추진기가 세 개는 필요하다던가? “바람이 부는군요!” 이틀에 걸쳐 무풍지대를 넘은 뒤에는 여기저기 암초가 가득한 해역이 펼쳐졌다. 바위섬과 화산섬이 99%를 차지하는 극동부 해역. 그랜드록. 나름 저만의 특색이 묻어나는 바다를 쓱 훑어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어떻게 중간에 항해사를 구해서 여기까지 왔네.’ 지저섬 아틀란테를 탐사할 시간이다. 380화 아틀란테 (3) 지저섬 아틀란테. 극동부 해역 그랜드록에 위치하며 [거대화]에 이은 두 번째 코어 정수가 나오는 곳. 이곳을 찾아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랜드록까지 항해가 가능한 선박. 마법이든 정령이든 스킬이든 상관없으니, 깊은 바닷속을 자유로이 잠수할 수 있을 능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반복 노동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끈기. 이 세 가지만 갖췄다면 지저섬 아틀란테를 찾아가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이제부터는 노가다구나.’ 그랜드록에 입성한 우리들은 조심스레 배를 이끌며 암초들을 피해 주변 일대를 돌아다녔다. 극동부 해역 아래 숨겨진 지저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인데……. “혹시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는지요……?” 마냥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자니 항해사가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이제 와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판단. “예? 붉은색 바위섬이요……?” 내 대답을 들은 항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일 거다.” 미궁이 열릴 때마다 그랜드록에는 세 개의 붉은 바위 섬이 랜덤으로 생성된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바위섬에서 모두 해금 이벤트를 끝내야 숨겨져 있던 지저섬이 드러나는 식. “…알겠습니다.” 놀랍게도 항해사는 내 지시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곳에 가려는 거였군요.” 이제 보니 지저섬 이벤트에 대해 아는 게 있었던 모양. 의외로 모르는 애들도 많던데 항해사 경력이 꽤 길기는 했나 보네. “그럼 수색에 중점을 두고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선을 짜보겠습니다.” “아, 그 부분은 일임하지.” 내 목표를 알아낸 항해사는 이전보다 더 능동적인 태도로 배를 몰았고, 4일차가 되어서 찾던 바위섬을 발견했다. 철퍽. 발목까지 물에 잠긴 평평한 바위섬. 섬 중심부로 가서 안에 틈을 확인해 보니 타조알 크기의 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알이네요? 이제 이거로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옆에 딱 붙어서 따라온 에르웬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던전앤스톤]의 숨겨진 요소가 다 그렇지 뭐. 콰직-! 수상해 보이는 건 일단 부숴 보면 된다. 그게 탐험이란 거잖아? *** 「캐릭터가 머멀의 둥지를 파괴하였습니다.」 *** 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 내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반응이 오는군.” “네?” “전투 준비!” 내가 소리치기 무섭게 바위섬 아래에서부터 바다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음, 바다 괴수라 하기엔 좀 애매한가? 철퍽. 나는 삼지창을 든 채 우리를 노려보는 몬스터를 위아래로 살폈다. 일단 이족 보행을 하며 비율도 인간에 가깝다. 다만 파란색 피부의 질감은 비늘을 연상케 했으며, 그 반들거리는 피부에는 빛을 내는 문신이 가득했다. 또한, 몸의 중요 부위도 천으로 가렸으며 머리 스타일도 제각각 개성이 있어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생김새의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됐다. 뭐, 그래도 지능은 몬스터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캬아아아아악-!] 언어 체계란 전혀 느낄 수 없는 흉포한 하울링. 이와 함께 사방을 포위한 녀석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리고……. 「머멀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머멀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3」 「머멀 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 +3」 「머멀 주술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3」 「머멀 대전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병과가 다양했던 만큼, 신규 경험치들이 쏙쏙 들어왔다. 전투 난이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덤벼드는 이벤트긴 하지만, 그래 봤자 평균 등급은 6도 안 되니까. 콰직, 콰직, 콰직-! [거대화]로 위협 수치를 높여 대부분의 어그로를 내가 끌고 있자니, 누구 한 명 다치는 일 없이 무난하게 사냥이 종료됐다. 한데, 이 모습이 인상적이었을까?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다니……. 그 꼴이 나는 게 당연했구려.” 마법사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고, 이에 항해사도 극구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인데. “마법사, 놀 시간이 있으면 마석을 수거해라.” “…그러리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마법사를 이용해 사방에 떨어진 마석들을 수거했다. “정수가 나왔는데, 이건 어쩔 것이오?” “내버려 둬라. 팔아봤자 얼마 이득도 못 보는 거.” “…….” 머멀의 정수가 나왔으나 굳이 챙기지는 않았다. 마법사도 있고, 이 마법사가 갖고 다니던 시험관도 있지만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두 개뿐인 시험관을 여기에 낭비할 순 없었— 드드드드드드. 뭐야. 갑자기 땅이 왜 흔들려. “아저씨?” “잠깐만.” 배에 다시 올라타려던 우리는 잠시 대기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해수면을 타고 전해지던 떨림은 약 1분간 이어지더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멈췄다. 하지만,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깊은 바닷속 어딘가에서 해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설마, 다른 바위섬을 누가 깨뒀을 줄이야. 이러면 두 개 더 찾는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겠는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는 뭐라 딱 잘라 현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노가다 시간을 줄인 것은 좋지만, 다른 두 섬의 이벤트가 종료된 상태라는 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이니까. 지저섬을 목표로 하는 경쟁자가 어딘가에 있는 것. 물론 아직 100% 확실한 건 아니다. 단지, 지나가는 길에 이벤트만 깨고 다른 곳에 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가보면 알겠지.’ 이 문제는 추후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경쟁자가 있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자, 그럼 멤버는 어떻게 할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을 해봤지만 역시 모두 다 데리고 가는 게 제일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먹지 못할 정수가 나오면 시험관에 담아야 하니까. 일단 마법사는 무조건 데려가야 한다. 그리고 이는 수중 호흡 문제를 해결해 줄 에르웬이나 지저섬을 찾는 데 필요한 아멜리아도 마찬가지. 뭐, 항해사야 없어도 되긴 하지만……. ‘얘만 내버려 두고 가는 것도 불안해서 말이지.’ “마법사, 잠수 마법은 쓸 수 있댔지?” “그렇소만…….” “얼마나 오래 지속이 가능하지?” “몇 명에게 썼을 때를 가정하고 말하면 되오?” “너까지 포함해서 셋.” 나와 에르웬은 [정령화]로 수압과 호흡 문제가 해결되기에 셋만 마법으로 커버를 해주면 된다. 물의 정령으로도 아멜리아의 호흡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긴 하지만, [정령화]를 계속 유지하려면 자원 소모는 최대한 줄이는 편이 나으니까. “다른 마법을 쓰지 않는다면, 최대 4시간은 가능할 것이오.” “예상보다는 짧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다들 준비해라. 다 같이 내려갈 테니.” “…….” 내 지시가 떨어지자 항해사와 마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쓸데없이 비장하기는. 어차피 너네는 싸울 일도 없을 텐데. 풍덩. 준비를 끝마친 후 내가 먼저 물에 뛰어들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에르웬과는 [정령화] 링크가 끝난 상태였기에, 물 속이라고 갑갑한 느낌은 일절 없었다. 시야 확보도 물안경을 쓴 것처럼 편안하고. 후우우우웅. 딱히 수영을 할 필요도 없이, 물에 가라앉는 성질을 가진 바바리안의 몸은 빠르게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뒤따라 내려오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항해사와 마법사의 허리의 밧줄을 묶고서 이를 마치 고삐처럼 잡고 있는 모양새. 아, 참고로 항해사의 발에는 무거운 강철 족쇄가 묶여 있었다. 쿠웅-! 10분 넘게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자니 묵직한 소음을 내며 발이 땅바닥에 닿았다. 조금 기다리자 머지않아 아멜리아 무리도 도착을 했고. 딸깍. 사실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깜깜했기에 일단 라이트 젬부터 작동시킨 뒤 투구의 홈에 끼웠다. 아, 진작 켜두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불을 켜두고 잠수를 하면 떨어지는 도중에도 몬스터들이 공격을 해오니까. 솨아아아아아아-! 지상에서와 비교하면 너무도 좁은 범위에만 퍼지는 불빛. 휘익, 휘익. 호흡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소리 내어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손을 휘적거려 얼른 출발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침반도 통하지 않는 어두운 심해. 다만, 목적지를 찾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야 우리 팀에는 인도자인 아멜리아가 있으니까. 「딥다이버를 처치했습니다. EXP +4」 「씨웜을 처치했습니다. EXP +3」 「쉘아머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매드클롭터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마리모어를 처치했…….」 빛을 보고 몰려드는 다양한 바다 괴수들을 처치하며 한 2시간가량을 이동하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물에 잠긴 채 부식되고 파괴된 유적지. 그 안에 발을 들이밀자 그나마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 중이던 기둥들이 빛을 뿜어내며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솨아아아아아……. 그렇게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사원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일행 중 유일하게 자유로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에르웬이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 나도 소리만 못 냈지 비슷한 심정이었다. ‘2D가 아니라 실제로 보니까 진짜 웅장하네.’ 정말이지 오랜만에 탐험다운 탐험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게임 정보를 모른 채 우연히 이곳에 도착했다면 훨씬 더 짜릿한 감정이 피어났겠지. 휘익, 휘익. 멈춰선 채 멀리 떨어진 사원의 모습을 감상하기도 잠시, 우리는 텅 빈 유적지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 사원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 피라미드 구조의 사원 꼭대기에 위치한 좁은 방. 에르웬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탈이네요……?] 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인도자인 아멜리아를 앞장 세울 때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어차피 뭐라 대답을 할 수도 없기에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한 뒤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캐릭터가 아틀란테에 입장했습니다.」 제발, 정수가 한 번에 나왔으면 좋겠는데. *** 지저섬 아틀란테. 바위섬의 이벤트를 깨고서 심해로 잠수를 하면 찾아갈 수 있는 숨겨진 섬. 일반적인 섬과 달리 포탈을 지나치지만, 그렇다고 이 섬이 ‘균열’이라는 뜻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수호자가 나오지 않으니까. 드랍률도 바깥과 동일. 수호자가 없기에 균열석도, 넘버스 아이템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보통 이런 곳을 히든 필드라 불렀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용살자 놈과 처음으로 마주친 ‘라르카즈의 미로’라든가, 5층에서 밀라로든을 잡고 얻은 거울로 입장했던 ‘이면세계’가 있을 테고. 「필드 효과 - 아틀란테가 적용됩니다.」 「상태이상 [과호흡]이 부여됩니다.」 「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신, 모든 자원 소모량이 2배 증가합니다.」 「상태이상 [도전자]가 부여됩니다.」 「전투가 벌어질 시, 도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특수 필드가 으레 그렇듯, 입장하자마자 변화가 찾아왔다. 발이 닿은 지면에 일렁거리는 붉은색 오오라. ‘이건 ‘도전자’ 이펙트겠고…….’ ‘과호흡’의 경우에는 이펙트는 없지만 이미 작동은 되고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제 말도 제대로 나오고 있고. “이제 [정령화]는 풀어도 좋다.” 후, 이제 좀 살 거 같네. 의사소통을 전부 손으로 하려니 답답해 죽을 거 같았는데. [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에르웬이 움찔했다. [어? 아저씨, 지금 물속에서 말을?] “그러니까 말했지 않냐. 풀어도 된다고.” [신기한 곳이네요…….] 이내 에르웬이 [정령화]를 풀자, 마법사도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잠수 마법을 해제했다. “굉장히 생소한 기분이군. 분명 물속에 들어온 느낌인데, 불편하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아. 움직이는 것도 밖에서와 다를 게 없고.” 늘 그렇듯 환경이 바뀌자마자 자신의 상태를 점검부터 하기 시작한 아멜리아. “여기가 지저섬 아틀란테…….” “6층에서만 10년을 넘게 있었지만,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군요…….” 마법사와 항해사도 어딘가 고양된 목소리로 감상을 내뱉었다. 다만, 뒤늦게 좀 불안해졌을까? “저…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떡합니까? 전투에 도움이 안 될 텐데…….” 항해사가 조심스레 내 의견을 물어왔고, 나는 피식 웃으며 지시를 내렸다. “너희 넷 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5분 뒤에 천천히 뒤따라와라.” “…예?” 항해사가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마법사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슈이츠, 분명 너는 이곳에서 3등급 몬스터까지 나온다고 했을 텐데?” “네. 맞아요. 아무리 아저씨라도, 혼자서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은 우려를 표했다. 딱히 이상할 건 없는 반응이었다. 지저섬 난이도는 6층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니까. 몬스터의 숫자도 엄청나기에 원정대 단위로 공략을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됐고, 내 말 들어라. 언제 내가 위험한 일에 나서는 거 봤나?” “……네.” “아니었던 적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 같은데.” ……거, 사람 무안해지게.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숨을 멀쩡히 쉬고 말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여기가 바닷속이 아니란 말은 아니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 “혹시라도 위험하시면 바로 절 불러주세요! 알았죠?” 이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자 에르웬과 아멜리아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를 보내주었다. 오케이, 그럼 설득은 끝났고. 터벅, 터벅. 나는 포탈이 자리한 곳에서부터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밟은 그 순간. 솨아아아아아아-! 라이트 젬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아틀란테 초반부에 나오는 몬스터, 해신석이었다. 참고로 등급은 5. 높은 수준의 물리 내성과 느리지만 강력한 원거리 한 방 딜을 가진, 지정 위치에서 이동이 불가한 타워형 몬스터였지만……. 터벅. 나는 그 한복판에 멈춰섰다. 굳이 무기를 꺼내들 필요도 없었다. 직접 때리는 쪽보다 이게 훨씬 더 효율적이니까.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입은 피해의 3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패시브 스킬 [기원]으로 인해 자연 재생 수치가 최대치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15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그아챠앗-!!] 「해신석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5」 자, 어디 그럼 날먹을 해볼까? 381화 아틀란테 (4) 지저섬 아틀란테. 사실 방패바바 육성에 있어서 가장 난관이 되는 구간이 바로 이 구간이었다. 괜히 두 번째 코어 정수라고 말하던 게 아니랄까. 원래라면 이곳에 도착할 시기쯤에는 4등급 이하의 정수들로만 세팅이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스톰거쉬의 [기원], 그리고 바이욘의 [초월]과 가챠본의 [위험부담]. 이 조합을 먼저 맞추고 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 따라서 이렇게 1인 공략을 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고 알맞은 동료들을 구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들어와야만 했다. 이곳 정수를 먹은 다음에야 확 전투력이 급증하며 3등급 정수 루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순서가 역으로 바뀌었네.’ 지금 돌이켜 보자면, 그 시작은 오우거의 정수였던 거 같다. 운 좋게 일찍 고등급의 정수를 얻었고, 거기서부터 눈덩이가 굴러가듯 성장이 가속화됐으니. 바로 이렇게. 「머멀 제사장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6」 「라비토르를 처치하였습니다. EXP +5」 「해저 수호병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4」 「나가쿨로스를 처치하였…….」 「…….」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며 앞으로 달리고만 있을 뿐인데, 경험치가 쭉쭉 오른다. 사실상 이 정도면 거의 스피드런 수준이란 생각이 들 정도. 물론 중간에 쉬는 타이밍을 갖기는 해야 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MP는 무한하지 않으니까. 자원 소모량이 2배 증가하는 상태이상 ‘과호흡’까지 달고 있어야 하는 이곳이라면 더욱더. “아저씨!” 이내 잠시 쉬고 있자 마석들을 수거하며 뒤따르던 동료들이 도착했다. “저기 정수가 나왔던데, 그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정수가 나왔다고? 처맞으면서 달리기만 하느라 보지도 못했네. 나는 살짝 고민한 뒤 답했다. “그냥 버려둬라.” 4등급 몬스터인 머멀 제사장이라면 굉장한 가치가 있겠지만, 걔는 정수를 안 뱉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 정체도 모르는 정수에 두 개뿐인 시험관을 쓸 이유는 없었다. 그 정수가 5등급이면 살짝 이득이고, 6등급이면 대부분 손해니까. “슈이츠, 이제 어느 정도나 온 거지?” “절반쯤 넘게.”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직선으로만 움직이고 있는데 그건 이유가 따로 있나?” “외곽의 몬스터들은 나중에 잡아도 되니까.”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에르웬이 껴들었다. “아, 혹시 아까 말하신 그 경쟁자 때문인가요?” 사실 이건 좀 애매하다. 원래 우선순위대로 중요한 걸 먼저 해결하는 게 내 성격이다. 하지만, 그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래,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아틀란테는 균열이 아니다. 한번 개방된 포탈은 미궁이 폐쇄되는 날까지 열려 있으며 탐험가들은 자유롭게 이곳과 바깥을 오갈 수 있다. “만약 그자들과 마주치면 어쩔 거지?” “글쎄.” 일단 버릇처럼 답한 뒤에 마저 말을 이었다. “덤비면 싸우고, 아니면 그냥 지나치겠지.” “그런가…….” 내 대답에 아멜리아는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냥 넘어갈까도 싶었지만 묻고 말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단지… 네가 어느 쪽을 반길지 생각해 봤을 뿐이다.” “어느 쪽을 반기냐니?” “말 그대로다.” “……?” 더 자세한 대답을 요하는 눈으로 응시하자, 이내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슈이츠, 너는 내심 상대 쪽에서 먼저 덤벼주길 기대하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듣자마자 느끼는 바가 있었고, 나를 방어할 수 있을 수많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일단은 꾹 참고 다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갑자기가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네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을 뿐.” 아멜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항해사와 마법사를 힐끗했다. 이에 나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추친 그 둘은 혹여나 불똥이 떨어질까 싶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못 들은 척했다. 조금 이해가 안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밀리,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럼 날 먼저 공격한 놈들을 살려서 보내주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이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예민한 목소리. 아멜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단지?” “……아니다, 됐다. 내가 실없는 얘기를 꺼냈군.” 그리 중얼거리며 대화를 일축한 아멜리아가 뒤로 물러났고, 나도 더 캐묻지 않았다. 물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과연 흐려진 말꼬리 뒤에 위치했을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되묻지 않았기에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형은 생각 안 해봤어요? 방해가 되면 죽이고, 의심돼도 죽이고, 새로운 누구를 만나면 쟤가 날 해치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고. 사람 목숨이··· 그냥 게임 캐릭터처럼 느껴지고.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요?] 예전의 이백호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 당시에도 제법 공감이 가는 말이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 무게가 달랐다. 특히 사람 목숨이 게임 캐릭터 같다는 부분이. [콰직-!] 망치질 한 방이면 사람이 죽는다. 물론 그 대상은 언제나 내 기준에서 죽을 만한 놈이라고 분류가 된 놈이다. 하지만……. [잘, 잘못했네! 살려주게!] 내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히게 했던 그 아저씨. 한스 A 때에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심적인 저항감이 있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설득하며 무기를 휘둘러야 했다. 그다음에도 한동안은 비슷했었고. 손속의 망설임은 사라졌지만, 한동안은 찝찝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는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에 그들이 짓던, 눈빛과 표정이 떠오른 탓에 찬물로 몸을 식히며 의도적으로 머릿속을 비웠다. 그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그러했다. 하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배에 있던 선장놈…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이제는 얼마 전에 죽인 놈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 선명히 떠오르는 건 놈이 차고 있던 장비와 값비싼 귀중품, 그리고 그것을 손에 얻었을 때에 느꼈던 강한 자극뿐. 이걸 익숙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서히 변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까. “아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별거 아니다. 30분 정도 쉬고서 다시 이동할 거니, 너도 쉬어라.” 나는 질척질척한 맨바닥에 서슴없이 몸을 뉘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를 둘러싼 빛이 끝나는 지점으로부터 끝없이 이어진 미궁의 어둠. 참 이상한 일이었다. 7층, 8층, 9층, 10층. 이제 이 위로는 네 개의 계층만이 남았다. 그 길목만 지나치면 심연의 문을 지나쳐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1층, 2층에서 죽을 고생을 하던 때보다 훨씬 높이 올라왔을진대도. 그곳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 약 30분간 휴식을 가지며 MP를 보충한 뒤, 이전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며 지저섬 공략을 이어나갔다. 쉽게 말해, 내가 먼저 가서 싹 쓸어버리면 뒤에서 따라오며 마석들을 챙겼다는 뜻. ‘이따가 외부 몬스터들까지 다 잡는다 치면, 마석 소득만 해도 상당하겠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웃겼다. 사실 암만 소득이 높아봤자, 얼마 전에 했던 전투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파손이 생기긴 했지만, 배 세 척과 10인분이 넘는 양의 고급 장비들. 몬스터만 잡아서는 절대 올릴 수 없는 탐사 소득이다.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15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대성공 판정이 뜨며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던 마지막 몬스터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벌써 보스방까지 왔네.’ 어느덧 아틀란테의 중심부에 이르렀다. 수십 층 빌딩만 한 크기의 기둥이 원형을 이루며 세워져 있는 광활한 공터. 그 기둥들 가운데에는 거대한 알 하나가 놓여 있다. 내가 [거대화]를 해도 서너 배는 더 클 법한 크기의 푸른색 알. ‘게임에서의 알처럼 생긴 건 똑같네.’ 그런 생각에 피식 웃던 차였다. 「캐릭터가 신화의 일부를 목도하였습니다.」 심장이 크게 박동하며 뭔가 차오르는 듯한 충족감이 피어오른다. 「업적 달성」 조건: 신화적인 발견 (1/5) 보상: 영혼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뭐야, 설마 지금 MP가 오른 거야? 이게 정말이면 ‘업적’ 시스템도 제대로 활성화가 되고 있다는 건데……. ‘그럼 지금까지 정신 관련 업적도 꽤 많이 깨졌겠는데?’ 정신 수치는 확 티가 나지 않았기에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앞으로 업적 사냥도 하고 다녀야 할 거 같다. 7층부터는 꽤 도움 되는 업적들이 있으니까. ‘……잠깐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애들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다음 번에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첫트라이에 정수가 나올 확률은 낮으니까. 다음에 또 왔을 때 해도 늦지 않으리라. 애초에 업적이 현지인들에게 적용이 되는지도 미지수고. 솨아아아아아아-! 이내 기둥 안에 들어서자 거대한 소용돌이가 기둥 너머를 감싸며 돌아갈 길을 막았다. 내가 보기엔 쓸데없는 이펙트였다. 거, 어차피 상태이상 ‘도전자’ 때문에 튈 생각을 하면 발도 안 움직여지는구만. 터벅. 이내 중심부의 알을 향해 걸어가고 있자니, 바다가 분노라도 하듯 기둥 밖에 몰아치는 소용돌이가 더욱 세찬 진동을 뿜어냈다. 그리고……. 쿠웅-! 쿠웅-! 쿠웅-! 일정한 간격으로 굉음이 피어나며 지면이 흔들렸다. 참고로 묵직한 굉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는데……. 쿠웅-! 땅의 흔들림이 멈춘 즉시, 나는 위를 응시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시퍼런 안광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3등급 몬스터 심해 거인. 지저섬 아틀란테를 제하면, 9층에서나 만날 수 있는 몬스터다. 물론 그때가 되면 저 새끼들도 잡몹처럼 군집을 이룬 채 다니고 약점도 지금처럼 드러난 상태가 아니라서 사냥이 몇 배는 더 힘들어지지만. [세르키마 디오 메르더.] 게임에서처럼, 놈이 나를 내리깔아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읊조렸다. 텍스트로만 읽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나를 내리깔아보는 느낌이 가득했다. 따라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거대화]를 켠 뒤, 오랜만에 조상신의 이름을 앞으로 대시했다. 어차피 여기엔 나 말고 아무도 없잖아? 타닷. 아, 물론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곳은 중심부 알이 있는 곳이었다. 이게 이 새끼를 잡는 공략법이거든. 두근-! 살아 있는 것처럼 태동하는 알. 아니, 알처럼 생긴 심장이라고 해야 하나? 콰앙-! 악마분쇄기로 있는 힘껏 심장을 내리침과 동시에 거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손바닥을 내리찍었고,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나 이를 피했다. [위험부담]으로 반사가 가능한 건 자원을 쓰는 스킬이니까. 반사도 안 되는 평타 딜을 맞아줄 이유가 없는 것. 「심해 거인이 [칼날 급류]를 시전했습니다.」 평타가 빗나가기 무섭게 놈이 스킬을 시전했다. 수중 속에서 쏘아낸 탄환처럼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직선으로 날아드는 수백 개의 물길. 이건 그냥 맞아 줘야지……. 「강력한 행운.」 「입은 피해의 150%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어, 뭐야 시작부터 대성공이야? [그아챠아앗-!] 혹시 몰라 급소만을 방어하며 처맞아주기 무섭게 호쾌한 스켈레톤의 외침이 뒤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촤아아아아아아-! 나를 향해 날아들던 것보다 훨씬 두꺼운 궤적을 그리며 바다 거인을 향해 쏘아졌다. [그아아아아아아-!] 대미지가 크게 들어갔는지, 체구에 맞지 않게 맥없이 휘청이는 놈. 놈이 비틀거리며 평타 한 방을 더 내리찍었다. 원래라면 반드시 피하는 게 정석이지만……. 콰아앙-! 3등급 정수들을 떡칠한 뒤 이곳을 찾아서 그럴까? ‘이 정도면 그냥 막을 만하네.’ 방패를 들고서 버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뼈로 전가된 대미지야 [기원] 덕분에 곧바로 회복도 되는 상태고. 「심해 거인이 [생명의 근원]을 시전했습니다.」 본체에 대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놈이 심장에 비축된 생명력을 꺼냈다. 심해 거인의 주력기 중 하나였다. 9층에서 조우한 심해 거인들은 이렇게 심장이 드러나 있지 않으니까. 놈은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재생력을 뽐내며 3등급 몬스터다운 괴력을 자랑했다. 뭐, 이곳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었지만. 괜히 내가 첫 3등급 정수로 늘 이놈을 선택한 게 아니다. 두근. 이전보다 작아진 크기로 좀 더 힘없이 박동하는 심장. 콰앙-! 콰앙-! 콰앙-! 평타도 피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나는 아예 심장에 달라붙어 연신 망치를 휘둘렀다. 이에 놈은 나를 제지하기 위해 각종 스킬을 쓰며 공격을 해왔고, 이는 또다시 반사되며 본체에 대미지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심해 거인이 [생명의 근원]을 시전했습니다.」 또다시 반복되는 악순환. 심장이 본체를 향해 생명력을 전이하고, 전이된 생명력만큼 심장의 방어도가 낮아진다. 이 과정이 몇 번이나 이어졌을까. 두근. 처음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작아진 크기의 심장을 향해 나는 망치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그 직후. 콰직-! 나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한 번에 마주할 수 있었다. 「심해 거인을 처치했습니다. EXP +7」 좋은 소식의 첫 번째는, 그 어느 때보다 손쉽게 3등급 몬스터 사냥을 끝마쳤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솨아아아아아-! 첫트라이부터 정수가 등장했다는 것. 다만 여기부터는 나쁜 소식이다. ‘니미럴.’ 정수는 떴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원하는 색의 정수가 아니었다. 뭐, 지금 상황에서 이게 뭐 중요하겠냐마는. 나는 심해 거인 처치와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용돌이 너머를 응시했다. “…….” 미궁에서의 복장이라고는 믿기 힘든 평상복 차림. 고상한 분위기의 흰 피부와 마른 체구. 거기에 포마드 스타일로 쫙 넘긴 백금발까지. “이야, 너 뭐야, 진짜 혼자 잡은 거야?” 예기치도 못했던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82화 우리 (1) 뭐야, 얘가 왜 여기 있어. 처음에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해 거인과 싸울 때보다도 세차게 심장이 뛰고, 8톤 트럭이 전속력으로 뒤통수에 처박힌 것처럼 그저 머리가 멍했다. 정신이 든 것은 녀석이 먼저 말을 건 다음이었다. “이야, 너 뭐야, 진짜 혼자 잡은 거야?” 저 모습으로 대화를 나눠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와 말투. ‘이백호.’ 이 순간이 현실임을 인지한 순간, 놈의 옆에 자리한 노인네가 시야에 들어왔다. ‘파멸학자.’ 일단 당장 보이는 건 이렇게 두 명이었다. ‘그때 강냉이를 뽑니 뭐니 하며 싸울 땐 언제고, 이 새끼랑 백호랑 동료가 된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동료가 된 건 둘째 치고, 얘네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나를 목적으로? 아니, 그보다 뒤에 있던 에르웬과 아멜리아는 어떻게 된 거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계속 대기하라고만 해뒀는데. “신기하네. 너 같은 애가 있단 건 내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들어 본 적이 없기는. 얼마 전에 화제였던 그자가 있지 않은가.” 파멸학자가 말을 끊자 이백호가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러네. 걔가 있지? 인상착의도 비슷하고.”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만 말일세.” “그거야 이제 알아보면 될 문제고. 야, 네가 슈이츠인가 뭔가 하는 그놈이냐?” 초면의 대화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례했으나,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날 콕 짚어서 찾아온 건 아니구나.’ 이백호의 목표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마……. ‘목표는 이 공간 자체에 있겠지.’ 안 그래도 우리 말고 바위섬 이벤트를 깬 ‘경쟁자’를 경계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들이 바로 얘네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 만남은 철저하게 우연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때였다. “대답 좀 하지?” 하, 새끼 싸가지 하고는. “그쪽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게 어떻소?” 내 질문에 녀석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백호. 너는?” “그쪽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을 거요.” “이야, 진짜 신기하네. 이런 데서 유명인을 다 만나고.” “유명인?” “노아르크 조무래기들이랑 4:1로 싸웠다며? 그런 놈이 하늘 위에서 뚝 떨어졌는데 안 유명하겠냐? 혈령후, 그 요정 아가씨가 애지중지한다는 점도 그렇고.”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미궁의 인구 분포도는 위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니까. 7층만 가도 몇 다리만 건너면 서로가 아는 사이인 와중에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강자의 등장은 이상하게 보였을 터. “잠깐만, 근데 이 말은 그 요정 아가씨도 여기에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러고 보니 마법사도 보이지가 않는군. 아무래도 순간이동으로 넘어오느라 마주치지 못했나 보네.” 둘의 대화에 나는 또다시 안도의 숨을 삼켰다. 저 말대로라면 에르웬과 아멜리아는 무사하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그쪽은 무슨 용무요?” 나는 그리 말하며 정수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곧바로 이 정수를 먹을 계획이었다. 색이 다르긴 해도 당장은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 “동작 그만.” 그때 이백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일단 정수에는 손대지 마.” ‘정수?’ 현 상황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단서였다. 이백호의 목적이 심해 거인의 정수. 평소였다면 여기까지가 추론의 전부였을 터이나, 생존 본능으로 달궈진 뇌는 무심코 넘어갈 수 있었을 부분에도 의문을 던졌다. ‘심해 거인이 열댓 마리씩 나오는 9층이 아니라 굳이 여기까지 와서 구한다고?’ 이것이 의미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형도 10배짜리 깼다면서요? 10년쯤 지나면 저랑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사실상 저는 이제 더 강해질 구석이 거의 없어서······.] 그때 내게 했던 말과 다르게 사실 이백호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거나. 아니면, 9층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 툭. 우선은 정수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괜히 더 다가갔다가 저 미치광이 같은 놈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전리품이다만.” 너무 순순히 지시에 따르는 모습만 보여 주는 것도 좋지는 않겠지. 조금 호전적인 목소리로 묻자, 이백호가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워워,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혹시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멈췄을 뿐인데.” “거래?” “나한테 필요한 게 거기 그 빨간 정수거든. 꼭 그게 필요한 게 아니면 바꾸는 게 어때?” 솔직히 말해 잘 실감 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왜 굳이 거래를 하려는 거지?” 무례한 태도만 봐도 알듯, 이백호는 나를 자기 아래로 여기고 있다. 한데 그럼에도 어째서 ‘거래’를 제안하는 것일까. 더 쉬운 방법을 내버려 두고서. “뭐, 그럼 죽여서 빼앗기라도 할까?” 이백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솔직히 헛걸음한 게 짜증나긴 하는데… 네가 뭐 이상한 수작을 부린 것도 아니고, 나보다 더 빨라서 먼저 잡은 걸로 징징대는 것도 추하잖아?” “…만약 내가 거래를 거절한다면?” “글쎄? 아쉬워하면서 다음에 다시 오겠지?” 너무나도 정상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 이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지만, 돌이켜 보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지구로 귀환하는 게 최종 목표인 녀석이 아니던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선을 세워뒀겠지. 지금까지의 내가 그러했듯이. “좋다.” 예상외로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점잖다. 최악의 경우 문답무용으로 치고받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건만. 이대로면 그런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을 듯하다. 거래 제안 자체도 내게 있어 나쁠 것 없는 제안이고. “정수를 넘긴다면 뭘 줄 거지?” 내 선제시 요구에 놈은 좀 고민하는가 싶더니 거래창에 아이템을 올렸다. “심해 거인의 정수.” “……?” “요즘 계속 주기적으로 잡고 있었거든. 파란색이랑 녹색이 있는데—” 뭐? 나는 즉시 말을 끊고 답했다. “녹색으로 하지.” 좋은 소식이 하나 늘었다. 적어도 당장은. *** “뭐야, 원하는 거였나 봐?” “녹색이 평균 거래가가 더 높으니까. 게다가 시험관 가격도 아낄 수 있고.” 조금의 공백도 없는 즉답에 이백호는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공간에서 시험관 하나를 꺼냈다. “근데 그게 심해 거인의 것이라는 건 어떻게 믿지?” “구질구질하게 사기를 칠 거면, 이렇게 거래 제안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허, 의심 좀 받았다고 노려보기는. “그래서 거래는? 할 거야, 말 거야.” “……한번 믿어보지.” 내가 답하자마자 이백호가 시험관을 툭 던졌다. 시험관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뭐, 그래도 잘 받아냈으니까. “물건 받았으면 비켜 주지? 이 노친네가 무서워서 못 가잖아.” 이내 내가 옆으로 거리를 벌려주자 파멸학자가 다가가 시험관에 정수를 집어넣었다. 이것으로 거래는 끝. ‘이백호가 먹으려고 구한 건 아니었구나. 그럼 동료에게 먹이려는 건가?’ 조용히 관찰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이백호가 말을 걸어왔다. “슈이츠라고 했지?” “그렇소만.” “말이 짧아졌던 게 돌아왔네? 그냥 편한 대로 해.” “이게 편하오.” “그러든가 그럼. 아무튼,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냐?” 일단 들어보겠다는 눈짓을 보내자 녀석이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혹시 비요른 얀델이냐?” 얘는 진짜 후진 기어라는 게 없구나. 두근-! 심장이 철렁였으나,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단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을 뿐.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요?”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놈이 갑자기 튀어나왔잖아? 근데 그런 놈을 그 요정 아가씨가 아저씨라 부르면서 쫄쫄 따라다니고. 그 아가씨도 병신은 아닐 텐데 좀 이상하잖아?” 나름 합당한 이유였다. 실제로 원탁의 멤버들도 이런 이유로 나를 의심했었고. “그래서 대답은?” 이내 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뭘 하고 있는지야 뻔했다. ‘거짓말 탐지기를 쓰고 있구나.’ 이백호가 갖고 있던 거짓말 탐지 스킬. ‘입을 꾹 다물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겠지. 어쩌면 강압적으로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백호가 가진 탐지 스킬로 추정되는 후보는 둘. 하나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능력을 지녔고, 다른 하나는 오직 거짓만을 선별해낸다. 혹자는 그럼 똑같은 거 아니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나한테는 아우릴 가비스가 준 선물이 있으니까. 후자의 경우, 스킬을 켰는데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는다면 내 말은 녀석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질 터. ‘……잘하면 무슨 정수를 먹었는지 알아낼 수도 있겠는데?’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나는 비요른 얀델이 아니오.” 이내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답하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아쉽게 됐네.” 내 답변에 대해서 의심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듯한 말투와 표정. 덕분에 나는 놈이 먹었을 수많은 정수 중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전자였다면, 저리 쉽게 납득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판별이 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터. ‘뭐, 앞에 대화에서 내 말을 하나도 의심하지 않는 걸 보고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이거로 확실해졌네.’ 이로써 이백호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나 다름없는 셈. 다만 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물었다. “나도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소?” “그래 뭐, 기브 앤 테이크니까.” “…….” “해도 좋다는 소리였어.” 자연스럽게 얻어낸 한 장의 질문권. 나는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안 할 거야?” 묻고 싶은 질문은 산더미였다. 갖고 있다는 소생의 돌은 어디에 쓸 것인지. 파멸학자와는 어째서 동료가 된 것인지. 그리고……. [그 여자는 지금 이백호의 동료 중 하나인데.] 어째서 광대의 입에서, 미샤가 너의 동료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미샤는 지금 어디 있는지. 대체 어떤 수작을 걔한테 부렸는지 등등등. “…….”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많은 질문을 삼켰다. 그런 질문을 하는 순간 녀석도 내게 지금보다 큰 관심을 보일 테니까. 아직은 아니다. 내가 이한수라고 밝혔을 때, 이놈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조차 전혀 예상할 수 없지 않은가. 아직 나는 놈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 그러니까……. “이백호.”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현지인치고는 발음이 좋다고 웃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비요른 얀델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겠소.” “뭔데?” “당신은 왜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소문을 낸 것이오?” 이백호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너,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네?” “그럴 수밖에. 유명한 이름이니까.” “그래? 하긴, 요즘 알 만한 애들은 다 알더라고.” 잠깐 흠칫하기는 했지만, 이백호는 내 질문에 큰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혈령후가 거기까지 알아냈나 보네? 소문을 낸 게 나라는 거.” “그래서 대답은?” 내 말에 녀석은 고민하듯 허리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 뭐라 입을 열던 차. “저자의 동료들이 오고 있네.” 시험관에 정수를 담아낸 파멸학자의 조언에 이백호가 표정을 달리했다. “그래? 그럼 얼른 튀어야겠네.”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마주쳤다간 괜히 귀찮아져. 난 몰라도 할배는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들 테니까. 냐옹이가 그랬잖아. 전 동료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녀가 어떻게 알겠나?” 파멸학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망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찰나. “…할배, 선 넘지 마.” 대화 내내 웃는 상으로 유쾌하게 말하던 이백호가 차갑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농담이었네.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쓰지.” 둘의 대화에 안도하면서도 분노가 샘솟았다. 냐옹이라면, 분명 미샤를 말하는 것일 테니까. 미샤가 이백호의 동료가 되었다는, 말만 들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상실감이 뒤늦게 찾아왔다. 하지만……. “잠깐.” 나는 모든 감정을 꾹 참아내며 말했다. “질문에 답은 하고 갔으면 하는데.” “아, 맞다. 내가 그런 소문을 낸 이유를 물었지?” 깜빡 잊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이백호가 파멸학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파멸학자가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혀 차는 소리에서 기시감이 피어났다. 어디서 자주 보던 상황 같다고 해야 하나? 왜지? 왜 익숙한 거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던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 파멸학자를 중심으로 생겨난 마법진이 푸른빛을 내뿜었다. ‘뭐지?’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사태 파악을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설마 기습?’ 혼란스러운 뇌리에 그러한 가능성이 떠오르던 때. “아! 뭐야! 할배!” 이백호의 연기 톤의 대사가 이어졌다. “한창 대화 중인데 순간이동 마법을 켜면 어떻게 해! 이러면 대답을 할 수가 없잖아!” “…….” “슈이츠라 했지? 미안, 나중에 만나면 말해줄게. 진짜 답하기 힘든 질문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정말로. 응? 알았—” 번뜩-! 이백호의 음성은 빛이 환하게 점멸한 순간 흩어져 사라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꽈악. 그래, 얘도 한국인이었지. 농락당하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네. 여기에 온 다음부터는 늘 하는 입장이었는데. ‘아니, 잠깐만…….’ 뒤늦게 아차하는 심정이 된 나는 서둘러 시험관을 깨뜨렸다. 「캐릭터의 영혼에 [심해 거인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다행히 정수는 진짜였다. *** 「비요른 얀델」 레벨: 7 육체: 1,461.40(New +231.01) / 정신: 521.3(New +78) / 이능: 1,807.65(New +62.4) 아이템 레벨: 8,305 종합 전투 지수: 5866.60(New +371.41)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가챠본 - Rank 6 / 심해거인 - Rank 3(New) 383화 우리 (2) “아저씨!!” 막 정수를 확인을 끝낸 차에 에르웬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웬이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서 데리고 오는 구도였다. 아무래도 하도 안 오니까 걱정돼서 온 듯한데……. 그래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 했건만. “다 끝나신 거예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요?” 재빠르게 내 앞에 당도한 에르웬이 걱정이 된다는 듯 내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아멜리아는 눈치껏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마법사와 항해사를 데리고 떨어져 있었다. 다만, 어째서일까. ‘진짜 최대한 살려두고 싶은가 보네.’ 왠지 모르게 아멜리아의 행동에서 그런 심리가 느껴진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 해야 하나?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저 녀석이 살아서 돌아갈 확률은 더 낮아질 테니까. 아예 들을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거다. 아마 내가 멀찍이 뒤에 두고서 따라오게 했던 것도 그런 이유란 걸 얘라면 눈치챘을 테고. ‘아무튼, 얘들 표정을 보니 이백호나 파멸학자가 왔다 간 건 아예 모르는 거 같네.’ 다행히 놈들의 접근을 인지했기에 대기하라는 내 지시를 어긴 것은 아닌 듯했다. 아니, 이럴 땐 어긴 게 다행이라 해야 하나? 만약 싸움이 벌어졌다면 동료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쪽에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필드 효과인 ‘도전자’ 때문에 전투가 벌어져도 도망을 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제 에르웬과 아멜리아는 예전 동료들처럼 무조건 지켜 줘야 할 존재가 아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한 사람 분을 해낼 전력일 뿐. “근데… 오는 길에 여기서 마력이 느껴졌는데, 그건 뭐였어요?” 그래도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인지하긴 했는지, 조심스레 질문을 해오는 에르웬. 나는 잠시 고민하다 둘러댔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런가요? 하긴… 균열이나 그런 곳에서는 특수한 마력 파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말을 듣기는 한 거 같아요.” 예상대로 에르웬은 별 의문을 갖지 않고 납득했다. 알려진 정보가 적은 특수 필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거나. 그 때문인지 조금은 기분이 착잡하다. 하지만……. ‘역시 그래도 이게 나아.’ 파멸학자는 에르웬의 언니인 다리아를 죽인 놈이다. 광대 놈처럼 어시스트를 올린 게 아니라, 정말로 직접적으로 죽음에 관여했다. 한데 이백호 얘기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파멸학자를 만난 것도 말할 수밖에 없는데……. 기껏 정상화되는 중인 멘탈을 흔들 필요는 없을 터. ‘파멸학자만 빼놓고 말할 거면 굳이 이백호에 대해서 말할 이유가 없고 말이지.’ 이후 에르웬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항해사와 마법사를 이끈 채 합류했다. 그리고 주어를 뺀 채 물었다. “슈이츠, 원하는 건 얻었나?” “그래, 운 좋게도.” 일단은 이 정도로 정리를 해두고, 거래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해주자. *** 대화가 일단락된 후로는 다시 탐사를 진행했다. 그야 일직선으로 오느라 다른 곳은 들르지 못했지 않은가. 다른 지역에는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할 거다. 그중에는 아직 처치하지 못한 몬스터도 있고, 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정수를 지닌 녀석도 존재한다. 따라서……. 터벅. 먼저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 먼저 갈 테니, 뒤에서 따라와라.” 참고로 사냥 방식은 이전과 동일했다. 내가 길을 열며 몬스터들을 다 처죽이면, 뒤에서 얘네가 따라오며 마석을 수거하는 것. 다만……. ‘이번엔 실험이나 좀 하면서 가봐야겠네.’ 새로운 정수를 얻었으니, 이번에는 성능 테스트도 같이 하면서 갈 생각이다. 아직 증가한 스탯도 몸에 적응이 안 됐고. ‘확실히 3등급이라 그런지 스탯 증가가 확 느껴지긴 한단 말이지.’ 심해 거인의 정수에는 특이한 스탯도 껴있기에 이질감이 더욱 심했다. [심해 거인] 근력 +55, 물리 내성 +35, 자연 재생력 +35, 항마력 +35, 어둠 내성 +55, 지구력 +40, 적응력 +70 육체 수치들은 딱 3등급 수준으로 고르게 분포해 있으며 대부분 밸류가 높은 것들이다. 다만 희소가치가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 좋은 스탯들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정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스탯들이니까. 스탯 마지막에 붙어 있는 ‘적응력’과는 다르게. ‘게임 내에서는 디버프의 지속 시간에 비례해 점점 효과가 줄어드는 게 끝이었는데.’ 실제로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물론 앞서 말한 내용도 틀림없이 적용이 되고 있을 터이나……. 터벅, 터벅. 적응력 수치가 작동이 되었는지, 조금 더 물속에서 걷는 게 편해졌다. 원래부터 행동에 제약이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집중을 하지 않으면 물속에 들어왔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정도라 해야 하나? 뭐, 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 이곳이 아니라 그냥 바닷속에 잠수한 거였으면 이 정도까진 절대 아니었겠다마는. ‘그럼 이제 패시브도 확인을 해볼까.’ 아까 제대로 실험해 보지 못한 패시브를 활용하기 위해 [거대화]를 사용했다. 심해 거인의 패시브 스킬은 ‘변신계’ 이능에만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수치 및 육체수치가 증가합니다.」 체격이 1.77배가량 커지며 몬스터 어그로를 끄는 데 도움이 되는 ‘위협수치’가 증가하는 [거대화]. 「캐릭터가 변신계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초의 세포] 효과에 의해 해당 스킬의 영혼력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1.5배 상승합니다.」 여기에 [태초의 세포] 효과가 추가된다. 참고로 내 육성법에서 가장 높은 스탯은…….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태초의 세포] 효과가 1.5배 상승합니다.」 「캐릭터의 근력이 2.25배 상승합니다.」 그동안 자주 키웠던 방패 바바와 달라진 점이다. 원래 강철거인(4등급)이 들어갈 자리에 오우거의 정수가 들어갔다 보니, 어찌 된 게 물리 내성보다 근력이 높아졌다. ‘쩝, 이렇게 되면 [적응형 외피] 3단계를 뚫기가 힘들어질 텐데.’ 물론 당장은 그렇다는 것일 뿐, 최종적인 육성 단계에서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벨라리오스 정수를 먹고 나면 물리 내성에 비중을 두고 스탯작을 하면 될 테니까. 「근력에 비례해 체격이 커집니다.」 내친김에 [초월]을 액티브로 전환하고서 [거대화]를 사용해 보았다. 쓰윽. 고개만 내려 아래를 확인해 보니, 아까는 올려다봐야 했던 유적지 건물의 천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 정도면 6m가 넘겠는데.’ 자세한 건 돌아가서 정확히 측정해 봐야겠지만, 일단 눈대중으로는 그렇다. 가챠본 정수 때문에 줄어든 키를 감안해도, 이전보다 훨씬 더 체격이 커진 것. 다만, 체격이 그렇게나 커졌음에도 근력 수치는 [초월]을 쓰기 전과 비슷했다. 근력 2.25배가 1.5배로 줄어든 탓이다. ‘그래도 다른 수치들은 일괄적으로 올라간 거 같으니 손해 볼 건 없을 테고…….’ [초월]을 액티브로 사용했을 때의 단점은 오히려 스탯이 아니라 영혼력 감소 효과에 있다. 75%와 50%는 차이가 많이 나니까. ‘뭐, 그래도 지금 MP 총량이면 [초월]을 비활성화한 상태로는 [거대화] 상태가 무한으로 유지되겠네.’ [던전앤스톤]에서 MP의 재생속도는 MP의 총량을 비례로 한다. 그리고 현재 나는 7레벨에 영혼력 수치도 여기저기서 많이 땡겨왔기에 MP의 총량은 어지간한 이능술사들과 비슷할 정도. ‘이제야 궤도에 오른 셈인가.’ 나는 한층 높아진 눈높이에 적응하기 위해 [초월] 상태를 유지했다. 바닷속이긴 하지만 6m의 공기는 남자의 심장을 울리는 그런 맛이 있었다. ‘…가챠본 정수를 지우면 얼마나 커지려나?’ 아직 이르지만, 한번 상상해 보았다. 기본 신장이 185에서 225로 증가한 상태로 [거대화]를 사용하는 나의 모습을. 모르긴 몰라도, 3층 계층 군주 리아키스와 맨몸으로 레슬링을 벌여도 위화감이 없을 수준이지 않을까? 콰직, 콰직, 콰직-! 그런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며 연신 망치를 휘둘렀다. 그야 [초월]은 한 번에 한 스킬만 적용이 되니까. 애초에 지금 상태에선 [위험부담]의 반사딜로 잡는 거나 직접 잡는 거나 속도는 비슷하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어차피 맞아봤자 곧바로 재생이 되기에 방어를 도외시하며 망치를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한다. 「리우모비딕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6」 늘어난 근력 수치로 휘두르는 초대형 악마 분쇄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빛이 되어 사라지는 몬스터들. 다만 [휘두르기]를 남발했더니 MP가 쭉쭉 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따라서……. 「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나는 액티브 스킬을 사용했다. [칼날급류], [생명의 근원], 그리고 변신기에 속하는 [거인의 피] 등, 심해 거인이 가진 일곱 가지 액티브 스킬 중 녹색 정수에 해당하는 그것. 이 스킬도 좀 특이한 편에 속한다. 액티브인 주제에 MP 소모가 없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스으으으으읍. 깊게 숨을 들이마심과 동시에 비어 있던 감각이 충족되기 시작한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MP 소모가 없는 MP 회복기. 대신 이 스킬에는 쿨타임이 존재한다. 게임에선 30분 정도였지 아마. 별거 아닌 듯 보일지 몰라도 아주 좋은 스킬이었다. 급할 때 땡겨 쓸 수도 있으며, 일단 사냥 중에 MP를 회복하느라 휴식을 갖는 시간이 확 줄어드는 것이니까. ‘무엇보다, 그 새끼 카운터도 되고 말이지…….’ 용살자, 리갈 바고스. 놈이 갖고 있던 용언, 영혼의 침묵. 이 스킬이면 놈의 용언에 대응할 수 있다. 영혼 탈진 상태에서도 스킬 한 방으로 원래 컨디션으로 돌아올 수 있단 뜻이니까. ‘그럼 준비는 차고 넘칠 만큼 끝난 셈인가.’ 나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다 괴수들의 머리통을 처부수며 씨익 웃었다. 언젠가 가슴에 새긴 다짐이 선명하게 떠올라서였다. [이길… 수 있소?] 차가운 심장을 가진 전사의 몸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느꼈던 그날. 그날의 나는 무력함을 삼키며 다짐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그래서 언젠가 요행 따위는 필요 없어질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용인.] 반드시 놈을 찾아가겠노라고. 콰직-! 비로소 그때가 되었다. *** 지저섬 사냥을 이어간 지 5일 차. 나는 이곳에서만 경험치 수급이 가능한 개체의 사냥을 완료했다. 다만, 이후로도 나는 지저섬에서 사냥을 이어나갔다. 바깥에도 공략해야 할 섬들이 널리긴 했지만……. ‘마석 벌이가 상당하단 말이지.’ 이왕 오게 된 특수 필드 아닌가. 특수 필드는 대부분 난이도가 높은 만큼 소득도 짭짤하다. 한데 그 와중에 나 한정으로는 이곳에서의 사냥이 5층보다 쉬웠고. ‘그래도 바위섬 이벤트를 찾아다니며 시간 낭비를 하면서까지 다시 찾아올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초고속 사냥을 이어가고 있자니 정수들도 꽤 볼 수 있었고, 조금 더 욕심을 낸 결과 나는 두 개 있는 시험관 중 하나에 4등급 하나를 담을 수 있었다. ‘심해 거인 게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4등급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지만,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다. 지저섬엔 심해 거인이 딱 한 마리만 나오는 게 아니니까. 마냥 돌아다니다 보면 낮은 확률로 마주칠 수가 있는데, 얘네들은 모두 정수를 뱉지 않았다.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긴 했다. 소용돌이치던 해저 신전에서 만난 그놈과 달리, 일반 필드 몹에는 드랍률 보정이 들어가지 않으니— “슈이츠.” 지난날들을 짧게 복기하고 있던 때, 아멜리아가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딱 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양새. 다만, 얘가 좀 더 쉬자는 말을 하려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내일이면 미궁이 닫힌다.” 아,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거구나. 아멜리아다운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속뜻을 알아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 말하면서 자고 있는 항해사와 마법사를 힐끗하기도 했고. “어떻게 할 거지?”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물음. 아무래도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던 내가 답답했던 모양인데……. “마법사는 죽인다.” 일단 이 결론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애초에 살려 둘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게, 마법사 놈들은 머리가 굵다. 고고하고 오만하며, 원한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탑이란 배경이 있는 이상, 도시로 돌아가서 통제하긴 어려우니까.” “그렇군. 알겠다. 그럼?” 이내 아멜리아가 항해사를 한 번 더 힐끗했고,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웅-! 자고 있던 마법사의 머리맡에 선 채 망치를 높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 겪었던 구도였다. 졸다가 눈을 떴을 때 밤친구 사이였던 한스A 아저씨가 내 위에서 이러고 있었는데. 아, 물론 그 아저씨와 나는 다르다. 실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콰직-! 자던 상태에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고 축 늘어진 마법사의 육신. “흐, 흐익!!” 소리를 듣고 깼는지 항해사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펴, 평생 입 꾹 다물고 살겠습니다! 타, 탐험가 일도 그만둘 거고요!” 항해사가 납작 엎드리며 고개를 낮췄다. 내 손에 피 묻은 망치가 높이 들려 있다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대범하다 볼 수 있을 행위. ‘…확실히 죽이긴 아깝단 말이지.’ 이내 나는 아멜리아를 보았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따르겠다는 듯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눈빛 깊숙한 곳에서 욕심이 보였다. 따라서……. “에밀리.” “말해라.” “도시로 돌아가서도 딴짓 못 하게 잘 감시할 수 있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근거는?” “이미 식사에 독을 섞여 먹인 뒤 딱 하루치만큼만 해독제를 투여하고 있었으니까.” 너무도 덤덤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말. 반면 본인의 목숨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줄도 몰랐던 항해사는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히익……!”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한 번 더 고민을 거듭했고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응우옌 록로브라고 했지?” “…예!” “앞으로 얘 말 잘 들어라. 알겠나?” “예! 물론입니다!” 베테랑 항해사(무임금)가 팀에 추가됐다. 384화 우리 (3)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근 두 달 만에 접하는 도시의 햇빛. 마지막까지 어두운 바닷속 아틀란테에서 시간을 보낸 탓인지 그 빛이 더욱더 크게만 느껴진다. ‘역시 사람이 빛을 쐐야 한단 말이지.’ 여타 탐험가들이 그렇듯 우중충한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잠시, 나는 서둘러 검문소로 이동했다. “여기예요!” 먼저 도착해 있던 에르웬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합류해서 줄을 서고 있자니 머지않아 아멜리아도 도착했다. “늦었군.” “의외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리 답하며 오른편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항해사에게 눈짓하는 아멜리아. “일단 우리와 같은 7구역 광장을 타고 들어왔다는 말은 사실이었군.” “이 녀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을 해? 조금 어이가 없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나?” “전혀.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대기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더군.” 아멜리아의 목소리에선 어딘가 뿌듯함이 가득했다. 말을 잘 들어준 게 그렇게 기쁜 건가? 반면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는 뒤늦게 현타가 온 거 같았지만……. “헤헤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헤실헤실 웃으며 업무용 미소를 짓는다. 음, 이런 걸 보면 좀 짠하기도 하고. 우리를 먼저 노린 놈들 중 하나이니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고 한다. “이제 우리 차례군.” 줄을 서고 있자니 곧 우리 순서가 됐고, 우리는 모아온 마석들을 전부 돈으로 바꾼 뒤 검문소를 지나쳤다. 그리고 나타난 인파가 가득한 거리. 여기서는 진형을 좀 바꿔서 이동했다. 아멜리아가 맨 뒤에 위치하고 그 바로 앞에 항해사가 위치한 구도. “하하……. 아, 안 그러셔도 도망 안 가는데…….” “혹시 따라오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저는 7구역에서만 20년을 살았는데…….” 항해사가 뭐라 작게 중얼거리기는 하였으나, 사람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쳐 자택에 도착할 때까지 진형을 이탈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란 말입니까……?” 이윽고 도착한 3층짜리 단독 주택. 높은 담장을 지나쳐 정원 마당 안으로 들어온 항해사가 입을 벌리며 감탄한다. 하지만 구경 중 뭔가 위화감을 감지했을까. “저기 근데 왜 창문들이 전부…….” 항해사가 말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흐렸다. 시선은 판자로 가로막힌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경 쓰지 마라. 보안을 위한 조치이니까.” “아, 예…….” 별말은 없었지만 항해사의 눈빛과 표정에서는 우리를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놈들이기에 이런 집에서 사느냐 하는 눈치. ‘그러고 보면 에르웬이 누군지는 이미 눈치챈 거 같기는 한데…….’ 이건 이따가 확인해 봐야지. 일단 정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선 후, 약간의 상의 후 남는 방 중 하나를 항해사에게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지하에 자리한 방이었다. “…지하? 우리 집에 지하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보내자, 에르웬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 있는 집을 구했어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음, 그런가……? 하긴 부잣집에는 대피용 패닉룸이 하나씩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끼익, 끼익, 끼익.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에르웬이 카펫을 치우고 장치를 조작해 계단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했다. 아래로 내려가니, 창고로 쓰이도록 설계한 듯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아직 무엇도 채운 적 없기에 텅 비어 있었고, 가장 깊숙한 곳의 벽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두터운 철문 하나가 자리했다. 철컥. 에르웬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 하나가 놓인 방이 나타났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벽에는 구속구도 있었다. “이건… 방이 아니라 감옥이잖아…….” 이내 배정받은 방을 확인한 항해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어째선지 지하 방을 보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거든. 뭐, 이제는 나와 관계가 없는 곳이겠다마는. “……감옥이라니? 평범한 방이구만.” “…….” “저기 봐라, 화장실과 욕실도 있지 않나.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쓰지 않을 테니 좋겠군.” “…….” “크흠흠, 그럼 나는 이만 먼저 올라가 보겠다.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서…….” 어휴,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폐소 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얼른 항해사를 방 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자, 에르웬이 재빨리 자물쇠를 잠갔다. 철컥. “자, 잠시만! 잠시만!” 쾅쾅쾅! 항해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모두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열쇠는 내가 관리해도 되겠나?” “그러세요.” 아멜리아가 열쇠를 양도받는 것으로 항해사의 거처 문제는 끝. 밥 주고 하는 건 이제 얘가 알아서 하겠지. 사실 예전부터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에밀리, 근데 진짜 그런 독이 있나? 매일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죽는다니,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거야 마치 무협지의 고독 같지 않은가. 마교에서 이거로 정파의 인사들을 협박하고 수족으로 부리는 게 전형적인 클리셰였는데. 정말 실존하는 거라면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도 싶었다. 하지만……. “슈이츠, 너도 순진한 구석이 있군.” “…응?” “그런 독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않나. 다행히 저 녀석은 독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아…….” 그럼 역시 블러핑이었던 거구나. 내심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보여서 이제야 확인을 한 거긴 하다마는— “네에?” 그때 돌연 에르웬이 움찔했다. “그 독… 없는 거예요……?”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깊게 묻어나는 목소리. 그냥 넘어가기엔 어딘가 마음에 걸려서 필요한 일이 있기라도 했냐며 돌려서 묻자, 에르웬이 눈을 피했다. “호.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뭐가 혹시 모르는 건데.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거 같지 않아서 그만뒀다. *** 미궁 복귀 후 첫날은 모두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에 얻은 전리품이 한둘이어야지. “에르웬, 너도 함께 가자.” “엑? 제가요? 어차피 당신 혼자서도 충분한—” “슈이츠를 위해서 그런 것도 못 한다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 2일차부터 에르웬과 아멜리아는 전리품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외출했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을 지키며 보냈다. “슈이츠, 식탁에 순서대로 급여할 음식을 준비해 뒀으니 내가 없는 동안 끼니때가 되면 잘 챙겨줘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지하에 들르는 걸 제하면 이렇다 할 게 없는 하루의 일과. 다만, 3일 차에는 손님이 찾아왔다. “레이븐.” “원래 어제 오려고 했는데, 좀 바빴어요. 들어가도 되죠?” “물론이다.” 이내 안으로 들이자 주변을 쓱 둘러보던 레이븐이 내게 물었다. “둘은요?” “전리품 때문에 밖에 나갔다.” “흐음…….” 살짝 묘한 느낌을 풍기는 중얼거림. 뭔가 문제라도 있냐고 물었더니, 레이븐이 별거 아니라며 답했다. “그냥 예전에 제가 도맡던 일을 이젠 그 두 사람이 하는구나 싶어서요.” “그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 부분을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사과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무엇보다… 사과받을 일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군.” 일단 레이븐을 거실로 안내한 뒤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서로의 근황을 얘기했다. “그쪽은 어땠어요?” “그냥 이리저리 잘 풀렸다. 너희는?” “이쪽이야 똑같죠 뭐. 하루 이틀 내에 끝날 전쟁이 아니니까.” “그렇군.” “…….” 예전에 동료로 지낼 때와 다르게 어딘가 느껴지는 거리감. 이건 아마 얘도 마찬가지겠지. 서로 미궁에 들어가 있었으니, 거의 두 달 만에 본 것이나 다름없으니. 쿵쿵쿵! 그때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났구나. “얼마 전에 하수도 공사를 했는데 그거 때문인 거 같다. 신경 쓰지 마라.” 사람을 감금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도 조금 그랬기에 일단은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레이븐도 의심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무튼, 이후로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이번 원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뭐, 중요한 정보는 가장 마지막에 나왔지만. “아, 그리고 얀델… 아니, 슈이츠 씨가 물어보셨던 그거 말인데요.” “그거라니?” “민족 편입 안건요.” “혹시 누가 그 주제를 꺼냈는지 알아낸 거냐?” “네. 페브로크 여백작이었어요.” “페프로크……?” 듣자마자 뭐지 싶었다. 그야 이래 봐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성씨였으니까.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 그냥 성씨가 같은 건가 싶기도 하면서도, 이러한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예전에 확인해 봤을 때 라프도니아 그 어느 곳에도 페프로크란 이름의 귀족가는 없었으니까. “레이븐, 그 여백작의 이름이 뭐지?” “라그나 페프로크,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요.” “……뭐?” 진짜 걔야? 그렇다기엔 미들 네임이 빠지긴 했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어쩌면. 페프로크가 어떤 가문인지 마저 설명 좀 해주겠나?” “흔한 몰락 귀족 가문이에요. 왕가 귀족부에서도 사라졌다가 1년 전에 아무도 모르게 복권했죠.” 뭐야, 그럼 내가 확인할 땐 찾을 수 없던 게 당연하단 뜻이었잖아. 설마 진짜 여백작이 라그나인 건가? 그런 고민을 속으로 거듭하고 있던 때. “그 부분이 너무 납득이 안 돼서 더 조사를 했어요. 몰락 귀족이 복권을 하는 일은 간혹 있지만,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내에 왕가 회의에 참여할 만큼의 위치를 구축했을까.” 레이븐이 목소리를 줄이며 말을 이었다. “답은 간단하더라고요. 뒷배가 있었어요.” “누구였지?” “라프도니아의 재상, 테르세리온 후작.” “…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페프로크 여백작이 라그나와 동일 인물인 거야 둘째 치고, 레이븐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백작은 재상의 파벌에 속한 인물이라는 뜻 아닌가. “그럼… 민족 편입 안건을 주장한 게 재상이라는 뜻이겠군…….” 나도 모르게 생각을 내뱉자, 레이븐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뇨. 그건 좀 애매해요. 정작 재상 본인은 민족 편입 안건이 도마 위에 오르자마자 단칼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며 소리쳤다고 했거든요. 이에 다른 귀족들도 놀라서 바로 흐지부지됐고요.” “어쩌면 단순히 퍼포먼스였을지도 모르겠군.” “퍼포먼스……?” “짜여진 연극이었을지 모른단 소리였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줘서, 다른 귀족들이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미리 못 박아두는 거지.” “아…….” 그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듯 입을 벌리는 레이븐. “정치 쪽에도 조예가 있으셨나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추측일 뿐 실제로는 어떨지 모른다. 아직은 갖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으니까. “레이븐, 페프로크 여백작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주겠나?” “그럴게요. 저도 왠지 석연찮은 점이 많아서.” “항상 고맙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고.” 그날 레이븐과의 만남은 거기서 마무리가 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일주일 뒤. 전리품 판매 대금을 받기 위해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상업 도시로 향한 화창한 어느 오후. 콰아앙-! 왕가의 문양을 가슴에 새긴 기사들이 현관문을 부수며 저택 안으로 침입했다. “리헨 슈이츠, 너를 노아르크와의 내통 혐의로 체포한다.” 후, 그래. 결국, 올 게 왔구나. 385화 우리 (4) 콰아아앙-!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소파에서 낮잠을 자던 중에 문을 박차며 들어온 기사 무리. 자다 깬 와중에도 기사가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리헨 슈이츠, 너를 노아르크와의 내통 혐의로 체포한다.” 내통 혐의라……. 아마 이건 나를 잡아가기 위한 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 아무 혐의로든 잡아간 다음에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할 속셈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점이 많았을 테니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네.’ 사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에르웬과 다니며 관심을 끌었고, 전장에서 레이븐과 얽히며 더 눈에 띄게 된 상황이었으니. 언제 이런 일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커컥-. 순식간에 거실을 점거하고 내 주위를 포위한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겨눈다. 나를 얕보는 기색은 없다. 거리를 두고서 내게 시선을 고정한 기사들. “리헨 슈이츠, 무기를 버려라.” 이내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가 내게 고지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자, 그럼…….’ 나는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일단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날 잡아가기 위해서 온 것은 기사들이 전부라는 뜻. PVP에서 기사들이 가진 위상을 감안하면 이것도 과한 전력일 테지만, 내게는 희소식이다. 여차하면 다 때려 부수고 도망가는 것도 가능하단 소리이니. ‘문제는 그러는 순간 이 도시에서 지낼 수가 없게 된다는 건데…….’ 이는 최악의 상황에서나 고를 수 있는 선택지다. 무엇보다 비요른 얀델이라는 이름을 되찾는다는 내 최종 목표와도 상충될 테고. ‘슬슬 호랑이굴에 들어갈 때가 됐긴 하지.’ 결국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왕가와 접촉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낼 수 있었다면 불안 요소가 훨씬 줄어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알아낸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왕가는 GM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플레이어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GM. 소울퀸즈가 원탁에서 뱉은 정보에 따르면 왕가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니, 어디 알기만 했는가? 오히려 그 정체가 밖에 탄로나지 않게 정보까지 통제해 주었다. 그 말인즉슨, 왕가에서 악령이라고 무차별적으로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뜻. 비요른 얀델이란 게 탄로나고, 악령이란 것까지 들통난 최악의 경우에도 협상의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얘네가 어디까지 알고 온 건지는 한번 떠볼 필요는 있겠지.’ 짧은 고민을 끝마친 즉시, 나는 입을 열었다. “혐의가 있다니 조사는 받겠지만 잠깐 기다렸다가 동료에게 말은 하고 갈 수 있게 해주시오.” 이 요구를 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말하는 동료가 에르웬이라는 건 저쪽에서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 만약 거절한다면 좀 더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는 일부러 에르웬이 외출했을 때를 노렸다는 뜻이 되며, 에르웬의 눈치를 볼 정도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 “혈령후를 말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 함께 가면 만날 수 있을 테니.” 지휘관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 뭐? 에르웬도 잡혀간 거야 설마? 그럼 같이 있었을 아멜리아는? 아니, 일단 이 말이 진짜인지부터 확인해 보자. “에르웬이 그곳에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증거는?” 내 물음에 지휘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라프도니아 왕가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지.” 하, 이러면 거짓말도 아니란 건데……. 상황이 좋지 않다. 요정족에서 애지중지하는 에르웬까지 체포하다니? 왕가에서 나와 에르웬을 체포할 명분과 근거들을 충분히 준비했단 소리가 된다. ‘니미럴…….’ 당장에라도 체포에 불응하고 튀고 싶어지는 기분. 하지만, 에르웬이 잡혀간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리헨 슈이츠, 무기를 내려라. 아니면 왕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지휘관이 최후통첩을 날림과 동시, 마력에 둔한 바바리안의 몸으로도 선명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고밀도의 마력이 저택 밖에서 진동을 했다. 이제 보니 마법사가 없던 것도 아니었구나. 단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 중이었을 뿐. ‘주도면밀한 새끼들.’ 이내 나는 힘없이 쥐고 있던 망치를 내렸다. 스윽. 일단 당장은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앞으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는 수밖에. *** 무기를 내린 이후에는 상황이 신속하게 전개됐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무기를 아공간에 넣었고, 기사들이 다가와 아공간 반지를 수거해 갔다. 그리고……. “위 물품은 혐의가 벗겨지면 모두 온전한 상태로 돌려받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고압적이던 지휘관의 목소리가 정중하게 변했다. 아니, 실제로 목소리만이 아니라 이후에 받는 대접도 범죄자를 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차를 준비해두었소.”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나가자마자 대기 중이던 마차. 죄수를 호송할 때 쓰는 것과는 명백히 판이했다. 철창이 달린 수레 같은 것이 아니라, 대귀족이나 쓸 법한 화려한 마차. “타시오. 황도 카르논으로 갈 것이니.” 심지어 동승인도 지휘관 딱 한 명이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듯 따랐다. 얀델 준남작일 때조차 받아본 적 없는 극진한 대접. 드르륵, 드륵. 이내 마차가 딱딱한 관도를 부드럽게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맞은편에 앉은 지휘관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어딘가 불편한 점이라도?” 아니, 그럼 없겠냐. 참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란 생각이 들지만, 여기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건 옳지 않을 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 내 혐의가 뭐요?” “아까도 말했듯—” “내통 혐의란 말은 하지 마시오. 그런 혐의였다면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거란 건 아니까.” “…….” 지휘관이 입을 다물더니 곤란하단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냥 침묵만 해서는 내가 계속 귀찮게 할 거라 판단했을까. “지금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얼마 없소.” “그래도—” “황도에 도착하면 곧 알게 되실 것이오.” 딱 잘라서 선을 그으며 대화를 끝내는 지휘관. 결국 내가 대화로 알아낸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분께서 결정하실 것이오.” 굉장히 높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에르웬을 데려갈 때 다른 사람도 있었소?” “전해 듣기로는 그녀 혼자였다고 하오.” 아멜리아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이후로는 별다른 대화 없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고, 관도를 내달리던 마차는 1시간쯤 지나 한 곳에서 멈춰 섰다. 7구역의 군용 승강장. 각 구역과 연결된 순간이동 마법진이 자리한 그곳. 원래는 비상시 신속한 병력 이동을 위해 마련된 시설이나, 평소에는 귀족들의 이동 수단으로 애용된다. 아, 참고로 나는 이번에 처음 와봤다. 준남작 작위를 받은 후로 이용 자격은 생겼지만, 그 비용이 어마어마했던 탓. ‘이걸 이렇게 타보게 되네.’ 마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이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곧바로 황도의 군용 승강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왕성이 아니네.’ 나를 태운 마차는 왕성 인근에 위치한 대저택으로 들어섰다. 덕분에 나는 나를 데리고 오게 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떡하니 가문 문양이 있었으니까. 가시나무가 그려진 방패. 이는 테르세리온 후작가의 상징으로, 이 도시에서는 거의 모르는 자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왕이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어언 십수년간, 라프도니아의 재상인 테르세리온 후작이 대부분의 공무를 대리로 수행해왔으니. ‘왕국의 이인자라…….’ 지휘관이 귀족 가문이 아니라 왕가의 문양을 달고 있기에 그 높은 사람이 왕족이진 않을까 했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아. 대화 상대가 왕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에 긴장감이 깃든다. 마치 호랑이굴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한 기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해야 하나? 잘하면 그와의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내가 가진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대라면 그야말로 나락으로 가버릴 수도 있겠지. “내리시오.” 마차에서 내렸을 때 그 앞에는 기사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실내로 들어섰다. 덜컥. 딱 봐도 돈을 많이 쓴 듯한 접객실. “…에르웬은 어디 있지?” 방 내부를 신속하게 체크한 뒤 묻자 지휘관이 어딘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데리고 왔다는 말은 거짓이었소.” “………뭐라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니, 이 새끼 아까 분명 왕가 이름까지 팔았는데? 내가 그런 눈빛을 쏘아내자 녀석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당신을 최대한 조용히 이곳까지 데려와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왕의 이름을 판 게 걸리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걸리지만 않으면 무사하단 뜻 아니겠소.” 허… 이런 융통성 있는 사람을 봤나. 나도 모르게 극찬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기사가 아니라 탐험가를 했으면 잘 어울렸겠군.” “비아냥거려도 좋소. 나는 주군의 명을 위해 실리를 택했을 뿐이니.” 얘도 참 끝까지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구나. ‘니미럴…….’ 어찌 보면 내가 자주 했던 짓이었다. 바바리안의 선입견을 이용해 거짓 맹세를 하고 상대를 속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해야 하나? 잘 통했던 수법인 만큼 효과가 상당했다. 설마 기사가 왕까지 언급하며 구라를 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것도 왕실기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놈이 말이야.’ 다만,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로 했다. 에르웬이 잡혀온 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가. 생각을 달리하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적어도 에르웬의 신변은 무사하단 뜻이니까. ‘게다가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기도 했고.’ 중요한 것은 무엇을 실수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 그럼 이제 나는 뭘 하면 되는 것이오? 또 마냥 기다리면 되나? 아까 말한 ‘그분’이 올 때까지?” “그럴 필요는 없소.” 기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수정구를 탁상에 내려놨다. 이게 뭐냐고 되물을 것도 없이 의미는 명백했다. 그래, 어쩐지 호위 병력들이 없더라니만. 처음부터 이거로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던 거구나. “그럼 이만.” 이내 기사는 자신이 나간 뒤에 수정구를 작동하면 된다고 말한 뒤 방을 나갔다. 그렇게 혼자만 남게 된 실내. “…….” 근처에 숨은 놈이 없나 주위를 재빠르게 살펴보던 나는 이질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카페트를 옆으로 휘익 걷어냈다. ‘옘병.’ 카페트 아래에는 형형색색의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가 도망치려 하거나, 뭔가 수틀리면 통째로 폭발시켜 버리겠단 건가?’ 왕국의 이인자쯤 돼서 그런가? 스케일이 장난 아니다. 현재 자리한 이 저택 자체가 거대한 처형 장치나 다름없단 소리였으니. ‘……일단 수정구부터 켜자.’ 놈들의 철두철미함에 기가 질리기도 잠시, 나는 기사의 지시대로 버튼을 눌러 수정구를 활성화했다. 솨아아아-! 머지않아 수정구가 빛나며 사람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을 한 사내였다. 라프도니아의 재상이자 후작위를 지닌 대귀족. 아게니 로튼 테르세리온. 지난날, 작위 수여식 때 왕을 대리해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던 바로 그자. [오랜만일세.] 이내 그가 중후한 음성으로 짧게 인사말을 건넸고, 나는 뒤늦게 흠칫 굳었다. ‘………오랜만이라니?’ 위화감을 느낀 즉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근-! 그냥 심리전인가? 후작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의문들은 억지로 삼켜냈다.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생각해 내야 하는 게 있었다. 지금 나는.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는 게 최선인가. 고민을 끝내고 액션을 취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시…….” 나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테르세리온 후작님이십니까?” 갑자기 자던 중에 기사들에게 끌려온 탐험가라면 이런 반응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설마 벌써 내 얼굴을 잊었을 리는 없을 테고……. 자네도 참 그들답지 않게 영악하군?] 후작은 그런 내 모습에 껄껄 웃으며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비요른 얀델 준남작.] 몹시 오랜만에 들어보는 풀네임이었다. 386화 우리 (5) 비요른 얀델 준남작. 그 이름을 입에 담은 후작의 눈에는 작은 떨림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마 에르웬이나 아멜리아가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으면 나는 솔직하게 더 혼나기 전에 모든 잘못을 털어놨겠지. 그만큼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후작과 그 둘은 다르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수십 년간 왕국의 이인자 자리를 지켜온 정치인의 눈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순진한 짓은 없을 터. “후작님께선 혹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떠보고 있을 가능성을 절대 배제하지 않으며 모르쇠 자세를 일관했다. 물론 후작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경어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어색하군. 난 아직도 작위 수여 날의 자네 모습이 선명한데 말이야.] “……이 오해의 원인은 역시, 에르웬입니까?” [자네의 입장을 이해하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두고 뭐라 책잡지는 않겠네. 하지만…….] 수정구 너머의 후작이 등을 의자에서 떼며 탁상에 팔꿈치를 붙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자네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부터 만들어야겠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마 검증 마법이나 어긋난 신뢰 같은 넘버스 아이템을 쓰려는 건가? 그도 아니면 고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양한 가능성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예상들은 전부 다 빗나갔다. [일단 이것부터 말하지.] 후작이 선택한 것은 ‘대화’였다. [얀델 준남작, 경계치 말게. 나는 자네가 악령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 그래, 초장부터 세게 나오는구나. *** 내 정체가 들켰을 때, 아멜리아가 가장 놀란 부분은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거였다. 악령인 내가 귀족 작위를 어떻게 받을 수 있었는가. [……흐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왕가에서는 알면서도 묵인해 줬을 수도 있겠군. 그때 너는 도시에서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시 아멜리아는 그런 추측을 하였고, 나도 이를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금 후작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몰랐다는 뜻이 되겠네.’ 물론 후작이 다 알면서 미끼를 던진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나 일단은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듣기로 했다. 때로는 선공보다 후공이 유리할 때도 있는 법이니. 다 듣고 나서 판단하고 행동해도 늦지 않는다. [리헨 슈이츠와 비요른 얀델 준남작. 이 두 탐험가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시간만 아까우니 따로 짚고 넘어가지 않겠네. 괜찮나?] “예, 뭐 실제로 그런 오해를 몇 번인가 받았으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은 나를 준남작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일단 자네가 리헨 슈이츠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건 쉬웠네. 자네의 자료들을 우연히 손상시켜 폐기하게끔 만든 직원에게 전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 웬 여자가 찾아와 협박을 했다던가? 의심이 깊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행정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오직 숫자만을 보는 것일세. 아무리 논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지라도 숫자가 맞지 않으면 그건 틀린 이야기니까.] [바로 자네의 경우가 그러했네.] 비요른 얀델은 죽었다. 그 명제를 부정한 순간, 모든 실마리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고 후작은 말했다. [자네는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라기엔 너무 강했지. 하지만 2년이란 시간과 지원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네.] [하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의 눈을 피해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이 또한 자네가 이 도시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말이 됐네.] 이 도시가 아니라면 어디였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뻔했다. [파루네섬에서 실종이 될 때, 노아르크에서 온 자들과 접촉이 있었다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로운 타이밍. 심지어 조사 결과, 2년 뒤에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지금은 폐쇄가 된 지하 성채에서였다. 성벽 밖과 이어진 길이 있다고 알려진 바로 그 성채. [혈령후가 그곳에 다녀온 뒤, 자네가 나타났지.] 이제 보니, 괜히 기사가 우리 집 문을 박살 내며 내통 혐의를 말한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냥 구실이라고만 생각했건만. [자, 그럼 이제 내 얘기를 들은 감상을 말해주겠나?] 이내 후작이 수정구 너머의 나를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확실히 자신할 만큼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2년간 시간 여행을 하고 왔다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개연성이 맞는다. 하지만……. ‘어………….’ 긴 얘기를 들은 내 감상은 단 하나였다. 암만 봐도 미끼가 아니라 진심으로 저리 믿고서 하는 얘기 같은데. ‘이걸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부족하다고 해야 할지…….’ 이걸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구나. ***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게는 목표를 정할 때 항상 우선순위를 매겨두는 버릇이 있으니까. 1순위는 우리의 생존. 2순위는 비요른 얀델 신분 되찾기. 3순위는 악령 혐의를 벗는 것. 나는 이곳에 향하며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해뒀다. 그렇기에……. “확실히 재상이라 그런지 똑똑하군.” 리헨 슈이츠의 탈을 벗고서 바바리안의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도 간단한 이유다. 앞서 말했듯 악령 혐의를 벗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비요른 얀델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 나를 악령으로 알든, 배신자로 알든 상관없다. 이는 후작과의 협상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한 문제였으니. ‘애초에 배신자라고 죽일 거였으면 여기 부르지도 않았겠지.’ “그래, 내가 비요른 얀델이다. 오랜만이군 후작.” 새삼 느끼지만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 가면을 벗어던진 순간,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렇게 뿜어져 나올 리 없으니. 후, 이제 좀 살 거 같네. [하하, 다행일세. 여기서도 아니라고 부정했으면, 정말 귀찮아질 뻔했으니.] 뼈가 실린 후작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귀찮아질 뻔했다라…….’ 사실 내가 이쯤에서 순순히 정체를 밝힌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 다음에는 ‘대화’가 아니라 ‘물건’이 사용될 테니까. 그 ‘물건’이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훤했다. 에르웬, 아멜리아, 레이븐. 어차피 얘네한테 빡세게 조사가 들어가면 저 가당치 않은 오해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 그럴 바엔 쿨하게 인정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쩌다 보니 남들 속이는 게 내 특기가 됐기도 하고. [자, 그럼 이제부터가 본론이겠군.] 이내 후작이 잡담을 끝내고서 목소리를 깔았다. [얀델 준남작, 노아르크에 붙은 이유가 뭔가?] “글쎄, 그게 중요한가?” [그런 비협조적인 자세는 좋지 않네. 자네는 똑똑한 친구가 아닌가.] “붙었다고 할 것도 없다. 잠깐 내 목적을 위해서 머물렀을 뿐이니.” […….] 내 답변에 후작이 묘한 눈으로 말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뭐, 아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나는 과거에 돌아가서 노아르크에 머물렀다. 그것도 무려 6개월 동안. 심지어 마지막엔 성주놈 대가리도 쳐부쉈더랬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 “꺼억.” [……?] “아, 미안하다. 속에 공기가 차서.” 정말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사실 아까부터 속이 더부룩했었어서 말이지. [자네도 긴장을 했었나 보군.] 한데 갑작스러운 딸꾹질로 분위기가 살짝 전환이 되어서일까? 후작도 더 깊이 캐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그럼 지금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물론이다.” [그리 말해도 좀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일세. 자네가 세작이 아니라면, 정체를 숨기고 활동한 이유가 뭔가?] “왕가에서 먼저 날 악령이라고 공표했지 않나. 내 누명을 벗기 전에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리를 경계했다라…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이내 후작이 고개를 살짝 주억였고, 이제 슬슬 내 차례였다. 원래 질문은 주고받는 게 제맛이잖아?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묻는데, 그런 공표는 왜 한 건가? 후작 당신이라면 분명 그 이유도 알고 있을 거 같은데.” [그건 자세히 말해 줄 수 없네. 단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만 생각해 주게. 게다가 그때 우리는 자네가 살아 있는지도 몰랐지 않은가.] 후,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는데 제일 중요한 걸 못 들었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나는 미련을 갖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거나 슬슬 말해봐라.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정말 배신자라 생각했으면 이렇게 데려올 게 아니라 암살을 하는 게 맞았을 텐데.” [왕가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네.] 지랄,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기는. 왕궁만 갖다 오면 온갖 구린내가 뒤섞여서 몸에 풀풀 배는구만. “그럼 내게 원하는 게 없다는 뜻인가?” [사실 자네가 세작이라고 하면, 자네를 회유해서 전쟁에 활용할 예정이었네.] 이거 봐, 말하자마자 바로 나오잖아. “그렇다면 안타깝게 됐군.” [글쎄, 안타까울 것까지 있겠나. 현 상황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네.] “나쁘진 않다니?” [전쟁에는 늘 영웅이 필요하니까.] 거, 악령으로 공표를 할 때는 언제고? 뻔뻔한 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저런 사람이니까 저 위치까지 올라간 거겠지. [비요른 얀델 준남작, 왕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그래야 하는 이유는?” [자네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한 번 더 튕기자 후작이 본심을 드러냈다. [노아르크와 연을 끊었든 아니든, 자네가 그들과 손을 잡았던 건 사실이지 않은가. 즉결 처형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사안이네.] “쉽게 말해, 손을 잡으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없던 일뿐인가. 자네의 귀족 작위는 물론이고 원래의 이름까지 모두 되찾도록 도와주겠네.] “악령이라는 공표는 어떡하고?” [적당한 이야기가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 걸세.] 보아하니 후작은 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까지 이미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 듯한데……. [노아르크에도 잠시 목적을 위해서 머물렀다고 하지 않았던가? 감정적으로 꺼려지는 것이라면,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게.] 조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정확히는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그도 그럴 게, 최악의 최악까지 상정을 하고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왔건만. ‘이렇게까지 일이 술술 풀릴 수가 있나……?’ 너무도 내게만 유리하게 일이 착착 진행되니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준남작, 결정을 내렸다면 슬슬 답해주겠나?]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적이었다. 후작이나 왕가가 함께 뭔가 음흉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한들, 여기서 달리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는가. 여기선 승낙하고 나중에 자력으로 알아내야지. “좋다. 그러니 자세한 얘기를 해봐라. 내 작위를 어떻게 돌려줄 건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까지.” 이내 승낙 의사를 표하자 후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다만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콰아아앙-! 정원 쪽에서 커다란 진동이 피어났다. 이게 뭔 소란인가 싶었으나, 곧이어 후작의 입을 통해 원인을 들을 수 있었다. [저런, 그녀가 온 모양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행동할 줄은 몰랐네만.] 에르웬인 거구나. [오늘 하려던 얘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고, 자네는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그녀부터 진정을 시키게.] “…그러지.”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387화 야생마 (1) 솨아아아아아-! 온수로 머리를 적시고, 때를 밀듯이 비누로 피부를 박박 긁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에서 나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집에 돌아왔다는 게. 터벅, 터벅.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어내며 1층으로 내려가니 거실에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도 걸렸군.” 열심히 뽀득뽀득 씻고 온 나를 보며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멜리아.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필담으로 하지 않는 걸 보니, 별게 나오지 않았나 보군?” “그래, 네가 우려한 것과 달리 도청 장치 같은 것은 찾아낼 수 없었다.” 다행이다. 놈들이 집에 쳐들어온 김에 뭔가 잔뜩 설치해 두고 가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했는— “원래 있던 것들을 제하고는 말이지.” 응? 원래 있던 것이라니? “표정을 보니 몰랐나 보군? 거실에는 예전부터 기록용 수정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말해도 금시초문이다. 다만, 예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통해 유추라도 해보자면……. “에르웬?” 유력한 용의자를 바라보며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자, 에르웬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오…….” “…….” “시, 실제로 이게 아니었으면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그렇게 빨리 찾아내지 못했을 거기도 하고…….” ……이러면 또 할 말이 없는데. 심지어 물어보니 기록용 수정구가 설치된 것도 현관과 거실뿐이라는데, 집주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보안적 조치로 여겨진다. ‘어쩐지 금방 후작가까지 잘 찾아왔더라니만.’ 나는 후작이 준비한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는 나누지 못했던 의문을 꺼냈다. “근데 에르웬, 너는 내가 후작가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그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그 남자가 직접 여기까지 왔는데!” “그 남자라니……?” “어, 혹시 아저씨는 모르셨던 건가요? 아저씨를 잡아가려 했던 그 지휘관이 바로 엘토라 테르세리온, 재상의 아들이잖아요!” “뭐? 걔가 이번에 3군단장이 된 그놈이라고?” 재상은 미친놈인가? 자기 아들을 이런 위험한 임무에 보내? 만약 내가 거기서 대가리를 부쉈으면 어쩌려고? ‘아니, 애초에 자식을 애지중지했으면 전쟁터에 내보내지도 않았으려나?’ 후작의 자식 농사 기법이 참 스파르타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오지랖을 부릴 영역은 아닐 터. “그보다 슈이츠, 후작가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 얼른 말해주세요. 돌아왔을 때 아저씨는 없고 문은 부숴져있고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이후로는 후작이 한 오해와 내게 제안한 거래를 설명하고서 둘의 의견도 들어봤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어머, 아저씨의 작위를 돌려준다니 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 에르웬은 호재라며 기뻐한 반면. “재상이라면 뒷배로서 최적의 인물이겠다마는, 그래도 어딘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군.” 나랑 비슷한 과인 아멜리아는 일이 너무 술술 풀린 것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어쩌겠냐. 거기서 싫다고 하면 일만 더 꼬였을 텐데.” “…재상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조사를 해보지.” “그래, 너만 믿고 있겠다.” “네? 저는요?” “물론 에르웬 너도.” 정말로, 믿을 건 동료뿐이다. 혼자 살아남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세상이니까. *** 툭툭. 일정 주기로 탁자를 검지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엘토라 테르세리온. 후작가의 독자이자, 언젠가 재상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물려받으리란 평을 받는 자. 다만, 그를 보는 후작의 시선은 싸늘했다. “너도 눈과 귀가 있으면 보고 들은 게 있을 테니,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으마.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솔직히… 굉장히 놀랐습니다. 설마 아버님의 말대로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게 전부더냐?” 후작의 되물음에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합류는 우리 후작가에 긍정적인 소식으로 여겨집니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용하게 활용을—” “그만.” 논리적인 어조로 이어지던 사내의 말은 후작의 제지로 도중에 끊겼다. “고작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한 것이냐?” 실망을 넘어선 혐오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이에 사내는 눈을 내리깔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친네가 최근 들어서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원래부터 친절한 아비는 아니었으나. 절대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2년 전부터 조금 심해지더니 요즘에는 아예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다 해야 하나? ‘그 알 수 없는 여자를 데려온 것도 그렇고……. 설마 나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건가?’ 수상한 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지시를 내릴 일이 없으면 그를 부르지 않았고, 정보 공유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님.” “말해보거라.” “얀델 준남작이 악령이 아니란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왜 저에게까지 숨기신 겁니까?” 사내는 후작을 떠볼 생각으로 조심스레 물었고, 이내 후작은 차갑게 답하였다. “언제까지고 내가 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미리 알았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애초에 얀델 준남작이 악령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글렀다.” “예?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분명…….” “됐다. 네게 말해봤자 입만 아플 테니.” 자식이 대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매정한 말. 이에 사내가 입을 꾹 다물었고, 후작은 이에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이곳에 그를 부른 이유를 꺼냈다. “내일, 네가 직접 찾아가 얀델에게 기일을 알려라. 오늘 못다한 대화를 이어가자고.” “기일은… 언제로 하면 되겠습니까?” “금월 보름.” 시간대는 저녁이었다. *** 15일 오후. “그럼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에르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자, 대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의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이제 경어도 그만두기로 한 것이오?” “후작의 아들이라며? 그럼 어차피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 “그건 그렇소만…….” 그리 답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재상 아들내미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으나,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됐고, 얼른 출발이나 하지.” “그럽시다.” 드넓은 마차용 관도를 내달리는 마차. 머지않아 군용 승강장이 나타났고, 이전에도 그랬듯 이를 타고서 편하게 황도 카르논으로 이동했다. “황도까지 1시간 만에 오다니, 편리하긴 하군. 한 번 탈 때 가격이 얼마지?” “한 사람당 백만 스톤 정도로 계산하면 편할 것이오. 물론 마차가 없다는 가정하에.” “……그 정도면 그냥 마차를 타고 다니는 편이 낫겠군.” “그럴 거요. 실제로 사용인들까지 대동하며 이 설비를 이용하는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으니. 급한 용무가 있을 때나 쓴다고 들었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덧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대저택. 이 비싼 황도 땅에 부지를 이만큼 쓰려면 대체 얼마가 드는 걸까? “어서 갑시다. 아버님께서 기다리시오.” “이번엔 수정구가 아닌 모양이군?” “말했지 않소. 아버님께서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자 한다고.” 그리 말해봤자 뭐……. 비대면 회식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지. 끼이이익- 이윽고 재상 아들내미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은 4층에 위치한 만찬실이었다. 한쪽 외벽은 창이 크게 나 있어서 바깥의 정원과 그 너머 멀리로 왕궁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 뷰를 구경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마는. “왔군.” 상석에 앉은 채로 내게 인사말을 건네는 재상. “오랜만이다, 테르세리온 후작.”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앉게, 얀델 준남작. 아, 엘토라 너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고.” “…좋은 시간 되십시오.” 재상 아들내미까지 떠나자 안 그래도 텅텅 비어 있던 만찬실이 더욱 비어 보인다. 하지만 프라이빗한 대화를 나누기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을 터. 툭. 일단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 도중 사용인의 출입을 막기 위함인지, 이미 상에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참고로 내 앞에는 음식의 양이 후작의 다섯 배는 됐다. 아무래도 내 종족적 특이점을 배려해준 모양. “그럼 편하게 들게나. 갑갑한 예법을 그대에게도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다면야.” 이내 후작이 먼저 칼질을 하며 고기를 썰기 시작했고, 나도 후작의 눈치를 보며 닭다리 하나를 뜯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음식은 어때 입에 맞나?” “훌륭하군.” “그렇다면 다행일세.” 식사를 이어가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라프도니아 예법상 식사 중에 일 얘기는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그런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종족. “후작, 음식도 좋지만 이제 슬슬 그 얘기도 들어보고 싶은데.” “자네의 작위를 어떻게 돌려줄 건지 말인가?” “그래. 내가 갑자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면 납득하지 않을 자들이 많을 텐데.” 후작도 내 무례에도 별말 않고 대화에 응해줬다. “내 말을 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묻겠네. 혹시 자네가 노아르크에 있을 때 자네를 알고 있던 자가 몇이나 되나?” “없다. 거기서도 모습을 감추고 지냈으니까.” “그렇다면 훨씬 더 일이 쉬워지겠군.” 이내 후작은 이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우선 자네가 왕가의 특명을 받고서 노아르크에 잠입했던 것으로 포장할 계획이네. 그리고 2년 반이 지나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를 한 거지. 어떤가?” 고작 몇 문장으로 정리될 정도로 짧은 시나리오. 다만, 이게 통하겠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후작에게는 응당 이 계획을 실현할 능력이 있을 테니까. “나쁘지 않군.” “물론, 조금 시간은 걸릴 걸세. 왕가 내부의 서류를 만들고 해야 하니까.” “나를 악령이라 공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걱정 말게. 잠입 임무 중에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니.” 시나리오 자체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복귀를 하면 다시 예전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럼 그 대가로 내게 바라는 건?” 이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해야하는가. 후작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손을 들었다. “총 두 가지일세.” “말해봐라.” “자네를 주축으로 한 특수 부대를 꾸려줄 테니, 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게.” “기한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예 노예로 부리려고 하는구나. “밑도 끝도 없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니, 이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럼 최대 3년으로 하지. 그전에 전쟁이 끝나면 거래는 끝이고. 물론 그동안 전공을 올린다면 이에 대해서도 차등 없이 포상이 나올 걸세.” 음, 일단 내용만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은 아니다. 어차피 요즘에는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전쟁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추세이기도 하고.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후작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포크를 내려놨다. “두 번째는 내일 아침 다시 말해주겠네. 그러는 쪽이 훨씬 더 얘기가 빠를 테니까. 널리고 널린 게 빈 방이니 오늘은 거기서 묵고 가게나.” 이건 뭐 60초 뒤 공개도 아니고. *** 저녁 만찬이 끝난 후, 나는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이동했다. 이동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심적으로는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의도가 수상하단 말이지.’ 후작이 나를 저택으로 초대한 날짜와 시간대, 그리고 뜬금없이 자고 가라는 요구까지. 딱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그렇기에 집에 있을 에르웬에게 연락만 하게 해달라고 한 뒤, 후작의 요구대로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때로는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에휴…….” 혼자 쓰기에는 너무도 넓고 화려한 방. 딸깍, 딸깍- 협탁의 마력등만을 켜둔 채 침대에 누워 시계를 확인하던 나는, 협탁의 마력등마저 끄고서 시계를 올려두었다. 딸깍, 딸깍, 딸깍. 정적 속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초침. 딸깍, 딸깍. 그러한 소리가 열 번 더 반복됐을 때.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나는 즉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번엔 평소보다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388화 야생마 (2) 매달 15일 자정에 열리는 악령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 내에서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게 흐른다. ‘여기서 1시간이 밖에서 1초.’ 쉽게 말해,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12시간을 전부 다 사용해도 바깥에서는 12초가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려주지는 않겠지.’ 후작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확인되지 않은 의문을 내게 품고 있고, 오늘 밤 내게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 하나. 나에게 얼만큼의 시간이 있는가. 일단 내가 희망하는 여유 시간은 4초였다. 그렇게 되면 3시간 뒤에 열리는 원탁에도 참가하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이니까. 수사자의 불참으로 인한 의혹도 막을 수 있으며, 원탁을 한 회차 쉬며 생기게 될 정보의 손실도 없다. 빌어먹게도. ‘역시 4초는 너무 아슬아슬해.’ 나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욕심을 억눌렀다. 그래, 예정대로 포기할 건 깔끔하게 포기하자. 딸깍, 딸깍.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부팅이 끝난 컴퓨터. 나는 얼른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부터 확인했다. [대한독립만세] - 1명이 접속 중입니다.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즉시 채팅방에 들어갔다. [HS123] 일단 접속 중인 플레이어는 현별이가 맞았다. 혹시 GM이 내 요구대로 이백호의 벤을 풀어서 걔가 오지는 않았을까 싶었는데. 뭐, 이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왔네요?” 소파에 앉아 있던 현별이가 다리를 꼬고 있던 자세로 고개만 들어 나를 응시했다. 흰색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이번에도 복장은 여전하구나. “뭐냐 그 말투는? 마치 내가 안 올 수도 있었을 것처럼.”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받자, 옛날이 떠오르는 티키타카가 이어졌다. “오빠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어요. 평소에도 조금만 불편한 일이 생기면 도망쳤잖아요?” 뭐래, 도망치기는. “꼭 해결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그러는 쪽이 더 에너지 낭비가 없으니까.”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짠 이벤트들은 스킵하는 게 국룰인 법이다. 효율을 추구한다 함은 낭비를 줄인다는 것이니. 바로 지금 그러하듯이. “현별아.” 시답잖은 잡담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기에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저번에 GM 만났냐?” 원탁에 참가할 시간이 되지 않음에도 곧장 나가지 않고 채팅방에 들어온 진짜 이유였다. 그야 이번 입장에서 이걸 확인하려 했으니까. 내 질문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던 현별이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말. 나는 차분하게 의심의 근거를 설명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쪽지가 왔던 게 이상해서 말이지. 조금 알아봤어.” 처음 위화감을 느낀 건 현별이와 헤어진 후였다. 방에 돌아와 마우스를 매만지던 차, 이 채팅방에 관심이 많던 GM이 떠올랐다. GM이라면 채팅방 내용은 엿듣지 못해도 누가 그 채팅방에 들어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으니까. 현별이에게 쪽지를 보낸 게 GM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 나는 한 채팅방을 검색한 뒤 인원수를 주시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GM이 자주 쓰는 비밀 채팅방의 인원수가 얼마 안 돼서 3명으로 늘어나더라고. 타이밍이 공교롭단 생각에 너인가 했지.” “…그러면 왜 그때 저를 다시 부르지 않고 오늘까지 기다린 건데요?” “쪽지는 GM이 염탐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채팅방으로 오라고만 해도 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잖아.” “……짜증나.” 현별이가 나를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할 거 같아서 미리 말해두지만, 오빠를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알아.” “오늘 말해주려 했다고요. 물론 오빠 입장에서는 믿기 어렵겠…….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안다고. 속일 생각 없었다는 거.” 내 말에 현별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렇게 말하니 잘됐긴 한데… 어떤 근거로요?” 근거라면 간단하다. “숨길 생각이 있었다면, 내 물음에 그렇게 쉽게 긍정하지 않았을 테니까.” 얘 성격상 더 철두철미하게 숨겼을 거다. 다 들켰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부정을 했겠지. “하지만, 제가 연기를 했을 수도 있잖아요?” “거기까지 가면 한도 끝도 없잖아. 그래도 납득이 안 되면 그냥 내가 널 믿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 내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자, 현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오빠, 여기서 여자 생겼어요?” 그런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듣자마자 미샤가 떠올랐지만, 일단은 이유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내가 되묻자 현별이가 살짝 묘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냥요. 말솜씨가 늘었단 생각이 들어서…….” 이건 칭찬일까, 아니면 비난일까. 전자로 여기기로 하며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길게 이어가고 싶은 주제도 아닐뿐더러, 그럴 여유 시간도 없었다. “근데 현별아, 내가 시간이 없거든?” “아까 오빠가 말한 효율적인 회피, 그런 거예요?” “그게 아니라 정말로 없어서 그래. 딱 확인할 것만 확인하고 가려는데 그것만 대답해 줘.” “알았어요. 뭔데요?” “GM이 너한테 뭘 제안했어?” “GP든 뭐든 줄 테니 스파이가 되어 달라 하던데요?” “역시 그랬구나.” “오빠는 뭘 하고 다녔길래 그런 사람이 저렇게 집착을 해요? 그 사람 닉네임도 이상하던데…….” “어쩌다 보니. 별거 안 했어.” 내가 대충 얼버무리자, 현별이도 깊게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오빠는 제가 어찌해줬으면 하는데요?” “말하면, 해줄 거야?” “오빠가 말한 거, 제가 안 해준 적 있어요?” 어… 많지? 아니, 그래도 중요한 건 거의 다 툴툴대면서 해줬나? 됐고, 그냥 일단 얘기는 해보자. “그쪽에 내가 흘리고 싶은 정보를 흘려줘.” “좋아요. 그럼 이번에도 뭔가 있어요?” “이따가 채팅방에서 나가면 곧바로 로그아웃을 할 건데, 아마 GM은 그 이유를 궁금해할 거야. 그러면 내가 전투 중이라 길게 대화는 못 한다고, 다음을 기약하며 급하게 떠났다고 말해줘.” “좋아요. 근데 하나만 물을게요.” “뭔데?” “진짜 로그아웃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거? GM에게 말해준 거랑 비슷해.” “그 말은… 진짜 싸우다가 왔다는 거예요? 아직 미궁도 열리지 않았는데?” “말했잖아, 비슷하다고.” 꼭 몸으로 치고받고 하는 것만 싸우는 거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무튼, 답변은 이만하면 됐을 테고. “그럼 나 간다! 다음에 또 보자!” 나는 현별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채팅방을 떠났다. *** 그녀가 디자인하고 채워 넣은 가구들이 놓인 고즈넉한 서재. “다 끝났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 “예, 약속했던 GP는 바로 넣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어딘가 어설프던 동양인 여성이 방을 떠남과 동시에 GM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 남자가 전투 중이라……. 이거 참 기분이 묘하군요. 그 남자가 1초조차 아껴야 할 상대라면, 비슷한 수준의 적이란 뜻이니.” GM의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허탈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다만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해 온 소울퀸즈가 그 감정의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사실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닉네임 HS123. 부르는 게 불편하다면 그냥 ‘블랙스타’라고 불러달라 말을 했던 한국인 여성. 그 여자가 말해주기 전까지 그들은 몰랐다.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평소에 정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그런 거물이 암중에서 충돌을 할 때까지 징조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블랙스타 님을 포섭해 둬서 다행입니다. 그 남자가 고전할 정도의 충돌이 발생했다면, 분명 흔적도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당분간 그 흔적을 찾아내는 데 집중하도록 하죠.” GM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소울퀸즈는 한 가지 의문을 꺼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부분도 있어요. 정말 그렇게 긴박한 상황이라면, 굳이 채팅방에 들어갔을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 남자 아닙니까. 표정도 그렇게 긴박해 보이지 않았다고 하고. 그 정도 자신은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것도… 그러네요.” 참 이상한 일이지만, 소울퀸즈는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겠다고. 아니, 분명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급해하는 수사자의 표정은 상상이 안 됐으니까. 그는 마치 거인과도 같았다. 자신에게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늘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지만 그럼에도 큰 족적을 남긴다. “그보다… 소울퀸즈 님 슬슬 준비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준비라니요?” “곧 원탁에 입장할 시간 아닙니까.” “하지만, 어차피 수사자는 오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꽤 유용한 정보들이 그곳에서 다뤄지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노아르크와의 연결점인 시체 수집가도 있고. 한번 다녀와 보시지요. 어쩌면 지금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충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알았어요.” 소울퀸즈는 GM의 지시에 군말 없이 응하며 채팅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입장 가능 시간이 되자마자 ‘원탁의 감시자’에 들어섰다. “일찍 오셨네요?” “네. 시간이 남아서.” 그녀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여우 가면이었다. 간단하게나마 인사를 나누고 있자 회원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고블린, 초승달. 그리고……. “피시싯, 오늘은 웬일로 사슴뿔 그 인간이 안 보인답니까?” 광대까지. 총 다섯 명의 인물이 원탁에 모였고, 이는 방문이 쾅 닫히며 입장 마감을 알릴 때까지 이어졌다. “사슴뿔 그놈이야 어디선가 객사를 했든 말든 상관없지만, 이건 좀 곤란하군요. 수사자 씨가 오지 않다니.” 아무런 미련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광대. 그러면서도 그는 툴툴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당신들이 매번 같잖은 것만 가지고 오니까 안 오신 거 아닙니까! 어휴, 이런 것들도 밖에서 목에 힘주고 다닐 걸 생각하면…….” 구시렁대며 문가로 향하던 광대가 말꼬리를 흐리며 소울퀸즈를 응시했다. “응? 여왕 씨는 안 갑니까?” “네. 이번에는 그냥 참석하려고요.” “나까지 빠지면 저런 조무래기들만 남을 텐데?” 광대의 오만한 말에 소울퀸즈가 입이 있을 위치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어머나, 재미난 말을. 사실 광대 님이라고 딱히 다를 건 없잖아요?” “제가 저들과 동급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으흠, 수사자 님이 우리 정보에 만족하지 않아서 오지 못했다고 믿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요?” “……마치 수사자 씨가 왜 오지 않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군요.” “글쎄요. 이걸 맨입으로 알려 줄 수도 없고. 아, 그래 정 궁금하면 한 바퀴만 돌아볼까요?” “……피시싯, 허세는. 자칫 속을 뻔했군요. 당신이 수사자 씨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확신해요? 그러면 그냥 나가면 되는데.” 그녀가 조소하며 말했음에도 광대의 멈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수사자를 향한 광대의 맹목적인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툭. 어느덧 문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자리에 착석한 광대가 변명하듯 읊조렸다. “……뭐, 얼마나 가당찮은 말을 할지는 지켜보고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피싯.” 버릇없는 말투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녀의 의도대로였다. 광대가 있어야 수준이 높은 정보가 나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 “…….” 그렇게 광대까지 착석하자 자연스럽게 모이는 시선. 그 기대감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며 그녀는 가면 속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첫 번째 순번을 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딱히 피할 이유는 없을 듯했다. “피싯, 왜 막상 판이 깔리니 가만 있습니까? 하긴, 나도 알아내지 못한 걸 당신이 어떻—” 그녀는 광대의 말을 끊으며 짧게 읊조렸다. “수사자는 지금 누군가와 전투 중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 광대는 말이 끊긴 것에 대해 화내지도 못하며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실을 가려주는 보석이 있는 바로 그곳. 비단 광대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들이 눈을 잔뜩 빛내며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솨아아아아. 이내 보석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초, 초록불이군요.” 고블린이 정적을 끊은 것을 기점으로 소란이 들끓었다. “여왕, 설마 당신은 수사자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오?”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초승달이 테이블을 박차며 몸을 일으켜 세웠고, 여우 가면 역시 작게 읊조렸다. “여왕이 아니에요. GM이 알아낸 거겠죠.” “그, 그보다… 수사자 씨가 싸우느라 집회에도 참가하지 못하다니, 대체 그 상대가 누구기에…….” 이내 고블린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 광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광대 님은 갑자기 조용해지셨—” “어떻게…….” “……?”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겁니까……? 설마 그분이 알려 준 겁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내,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먼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광대의 말에는 흥분기로 가득했으며, 가면 틈새로 드러난 눈동자는 뚫어질듯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열렬한 관심의 눈길. “흐음, 글쎄요. 왜일까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면,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지도?” 중독될 것만 같았다. ***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약 20분. 현실 시간으로 치환하면 약 0.3초. 아무도 없던 방에서 뭔가 해를 입기까지 너무도 짧은 그 시간. 다만, 현별이와 대화를 끝마친 뒤 나는 주저 않고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야 어차피 원탁에는 가지 않기로 했지 않은가. 남아 봤자 게시판을 둘러보며 낄낄거리기나 할 텐데, 그럴 바에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서 상황에 대비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용하네.’ 막상 눈을 뜨니 반긴 건 이전과 변함없는 어둠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창틀 역시 굳게 닫혀 있— 철컥. 그때 잠겨 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윽.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전사의 육신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내 몸에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감지했다. ‘여유 부리고 나왔으면 큰일 났겠네.’ 문이 열리고 이곳에 놈이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초 안팎. 이거야 원 바퀴벌레도 아니고.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콰악- 단숨에 움켜쥐게 된 모가지. “……!” 나는 그 상태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야밤의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내 손에 잡혀 버둥대고 있었다. “엘토라 테르세리온.” 설마 재상의 아들이 직접 왔을 줄이야. 물론,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아들이 아니라 할아비였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함없을 테니까. “……뒈질 각오는 하고 왔길 바라지.” 커뮤니티 활동도 못 하고 불려온 값은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다. 389화 야생마 (3) 모두가 잠든 한밤중. 잠긴 문까지 따고 들어온 불청객. “…….”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왜 몰래 기어들어왔냐고 연유를 물으며 ‘말’로 화를 내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뒈질 각오는 하고 왔길 바라지.” ‘온몸’으로 화를 내는 것. 평범한 바바리안으로서 불청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무엇일지는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꽈악- 불청객의 모가지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 싣는다. 그야 이게 일반적인 반응일 거잖아? ‘암살자’를 대하는 바바리안의. “후작이 나를 죽이라고 시키던가?” “……커, 컥!” 내 물음에 놈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런 게……! 잠깐, 놓고 얘기 좀—” 무슨 말을 하려는지야 뻔하다. 죽일 의도는 없었단 거겠지. 실제로도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무기를 들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정말 날 죽이고 싶었다면 이런 방식보다 괜찮은 패가 후작에게는 많았으니까.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날 죽이려 한 놈과 나눌 대화는 없다.” 근데 그걸 듣고 나면 깽판을 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좀 자고 있어.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네 아비한테 받을 테니까. 꽈악- 손아귀에 힘을 더 불어넣으며, 소리가 새어 나올 약간의 공간마저 원천 차단한 뒤, 이렇다 할 장비 하나 걸치고 오지 않은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는다. 퍼억-! 적당한 타격감과 함께 새우처럼 말려 올라가는 녀석의 등. “커헉—!” 오, 이걸 맞고 기절을 안 해? 그럼 한 대 더. 퍼억-! “커헉-!” 그래도 기사라 그런지 잘 버티네. 역시 턱주가리를 날려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타격 지점을 위로 바꾸려던 때. “끄어억-!” 놈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허리에 있는 칼을 꺼낸다. 평소에 내가 육포를 잘라 먹을 때 쓰던 단검과 비슷한 사이즈의 칼. 그러나 기사의 손에 쥐어진 칼에 크기는 무의미하다. 후우우우웅-! 도검을 매개체로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는 푸른색 오러. 휘익-! 이내 오러를 뿜어낸 단검이 번개처럼 쇄도하며 내 팔목을 노려온다. 목에 잡힌 손을 풀 수 없으니, 통째로 잘라내겠다는 판단인 듯한데……. 이해 못할 건 아니다. 기사란 대부분, 방해되면 베어 버리면 그만이란 마인드를 갖고 사는 족속이었으니.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서둘러 스킬을 발동함과 동시에 놈의 오러가 팔목에 닿았다. 하지만……. 카각- 살가죽을 힘겹게 베어내고서 뼈에 걸리는 오러. “……!” 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지난날, 암흑대륙에서 조우했던 혈기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대체 왜, 베이지 않지? 오러를 쓰며 한평생 날먹을 해왔을 이 새끼들은 이러한 현상을 쉬이 납득하지 못한다. 물론 내가 배려해 줄 사안은 아니겠지만. “무기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벌어진 살갗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팔. 다만 나는 미동도 않고 여전히 놈의 모가지를 잡은 채 말했다. “역시 넌 암살자가 맞군.” 녀석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부정하지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 손에 잡힌 모가지를 옆으로 흔들기에는 놈의 근력 수치가 부족했으니까. 안 그래도 크게 뜨여진 눈을 더 크게 떴을 뿐이다. 후웅-! 커다란 주먹이 얼굴뼈를 뭉개는 그 순간까지. 콰직- 자, 그럼 가볼까. *** 축 늘어진 후작 아들내미의 뒷덜미를 잡아 들고서 방에서 빠져나왔다. 다만, 애석하게도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후작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후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놈을 깨워서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뚝, 뚝. 하, 팔목에 난 상처가 자연 재생되기 전에 후작이랑 만나고 싶은데……. 그래도 다행히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나가보면 알아서 되겠지.’ 현재 내가 묵고 있는 장소는 본관의 동쪽에 위치한 별채. 텅 빈 복도를 걸어 계단 쪽으로 향한다.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어디서나 보였던 사용인들이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내미를 보내기 전에 미리 접근을 차단해 두었다는 뜻. ‘뭐, 그래도 1층은 멀쩡하네.’ 야밤에도 환하게 밝혀진 1층 현관 로비. 아무도 지켜보는 이가 없음에도 성실하게 곧은 자세로 대기 중이던 사용인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뭐, 생체 알람 그런 건가? “무슨 소란인가!” 사용인의 비명 소리에 굳게 닫힌 대문이 활짝 열리며 야간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실내로 들어왔다. 숫자는 총 넷. “리헨 슈이츠……! 이게 무슨 짓이오! 손에 잡힌 그자는 누구고!” 애석하게도 그들은 도련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음, 얼굴은 때리지 말 걸 그랬나? “허리띠의 실을 보니, 우리 후작가의 일원 중 하나인 듯하구려.” “아무리 후작님의 손님이라고 하나, 이러한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어서 그자를 내려두고 투항하시게!” 무려 기사 넷이 검에 오러까지 뿜어대며 나를 포위했다. 일반적인 탐험가라면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손발이 바들바들 떨릴 만한 상황. 그런 상황이란 건 아마 저놈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기세등등한 것일 테고. “마지막으로 말하겠네, 순순히 투항하고 후작님의 처분을 기다리게.” “싫다면?” “…실력 행사를 하는 수밖에.” “그래? 해봐, 그럼.” 최종 통보나 다름없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자, 녀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내가 미련한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툭. 잡고 있던 아들내미를 바닥에 떨구고 아공간에서 꺼낸 악마 분쇄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타닷. 서로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기사 넷이 일제히 사방에서 덮쳐들었다. 참 고맙게도. 쿠웅. 발로 지면을 내리찍음과 동시에 피어난 소용돌이.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과는 일부러 연계하지 않았다. 다수와의 전투에서는 노말 상태가 훨씬 더 효율적이니까. 휘이이이이이이이익-! 반경 5m 내에 진입한 녀석들이 세찬 바람에 휩쓸리며 나를 향해 끌려온다. 물론 그 와중에도 놈들은 검을 휘둘렀다. 언제나처럼 몸에 걸친 중갑을 손쉽게 지나쳐 살과 뼈를 저항 없이 베어냈을 기사의 일격. “우아아아아아아아!!!” 다만 나는 방어를 도외시한 채로 악마분쇄기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딜탱 바바리안으로서의 평범한 딜교 방식이다. 똑같이 서로 한 대씩 주고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이득을 보는 쪽은 나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휘이잇. 정면에서 달려든 녀석이 검을 내리찍는다. 하나 나는 막거나 피하는 것에 내 동작을 배분하지 않았다. 서걱- 어찌나 힘을 빡 줬는지 쇄골 아래까지 틀어박힌 칼날. 콰직-! 관자놀이에 망치를 박아 넣는 것으로 되갚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걱- 좌측면에서 달려든 녀석이 내 발목을 베었다. ‘거, 치사하게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네.’ 잠깐 무게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힘줄이 크게 상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이익. 다른 쪽 발로 얼른 균형을 잡고서 다른 쪽 발로 축구하듯 면상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앙-! 저 멀리까지 날아가 저택 기둥에 틀어박히는 놈. 그때 뒤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일었다. 칵-! 그래, 너는 벤 게 아니라 찌른 거구나. 「관통상 피해 감소율 75%.」 어쩐지 아픈 느낌도 안 들더라니. “대, 대체 당신은…….” 뭐야 얘는 또. 이 상황에 뭐 할 말이 있다고 입을 열고 있어. 콰직-! 뒤로 돌며 팔꿈치로 턱주가리를 날려줬다. 그렇게 남은 녀석은 단 하나. “으아아앗!” 녀석은 당한 동료의 복수라도 할 셈인지, 흉흉한 금색 오러로 내 목을 베어 오고 있었다. ‘목은 예민한데.’ 이번엔 딱히 동작이 크게 소모될 것도 없기에, 왼팔을 들어 올려 방패로 이를 막아냈다. 그리고……. “……커헉!” 발로 배를 힘차게 밀어 찼다. 솨아아아아. 지속 시간이 끝나며 소용돌이가 잦아든 것도 딱 그 시기였다. “…….” 어느덧 조용해진 장내. 공평하게 서로 한 대씩 주고받았지만, 누가 거래의 승자인지는 명확하다. 이쪽은 기스가 좀 생긴 걸 제하면 너무도 멀쩡한 것에 비해, 상대는 벌써 바닥을 기고 있었으니까. “커어억……!” 그래도 의식이 남은 놈이 두 명이나 되네. 마지막에 걷어찬 애는 몰라도, 홧김에 관자놀이를 후려쳤던 놈은 자칫 죽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맞기 전에 방어기라도 쓴 건가?’ 그래도 머리에 대미지가 상당했는지, 열린 대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향하는 기사의 걸음걸이는 처연하게 보이기만 했다. “지, 지원을…….” 와, 기사라 그런지 직업 의식이 있기는 하구나. 그러한 책임감이 제법 인상 깊기는 했지만, 너무 멀어지는 건 원치 않기에 [초월]과 [소용돌이]의 연계로 끌어당긴 뒤 머리에 꿀밤을 놔서 기절시켰다. ‘그럼 후작이 어디 있는지는 얘한테 물어보면 되겠고…….’ 이내 나는 쪼그려 앉아 아까 배가 걷어 차인 기사의 머리를 잡아당겨 나를 보게 했다. “물어볼 게 하나 있는—” “퉤엣! ……이 새끼가 돌았나. 피가 섞인 가래는 항상 뱉는 입장이었기에, 기분이 참 더러웠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후작은 어디 있지? “결국, 너도 날, 따라올, 것이다.” 아니, 누가 죽인대? 어이가 없지만, 벌써 체념한 눈으로 저주의 말을 뱉는 꼴을 보니 묻는다고 답해줄 거 같진 않다. 따라서……. 콰앙-! 정수리에 딱밤을 놔준 뒤, 고민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밖으로 더 나가봐?’ 음, 밖에는 마법사들도 있을 거 같은데. 애초에 여기서 일을 더 키우는 것도 원하진 않고. 그냥 딱 후작이랑만 독대를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거 같긴 한데……. 차라리 그냥 아들내미가 깰 때까지 기다릴까? 스윽. 그렇게 여러 상념들이 뇌리를 스치던 때, 활짝 열려 있던 대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만 들어 해당 지점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찾으러 갈 필요는 없겠군.” 후작이 그곳에 있었다. *** 후작은 낮에 보았을 때와 동일한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지 않았단 뜻이다. 뭐, 업무가 바빠서 깨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글쎄, 과연 진실은 어떨까. 난 암만 봐도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났다고 보는 게 타당한 거 같은데. 옆에 득실득실한 병력들도 그렇고. 스윽. 내가 몸을 일으키자 후작의 옆에 있던 여성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괜찮으니, 자네는 가만 있게.” “…예.” 후작의 지시에 즉시 검에서 손을 떼는 호위. 나는 호위를 유심히 관찰했다. 일단 저 여성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야 오러는 오직 인간의 전유물이니까. ‘용인족이군.’ 이내 그녀의 동공이 용인족의 특징을 띄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장비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니미럴.’ 호위가 허리에 찬 검이 어떤 물건인지 깨달았다. ‘No. 19 이그제니스 마룡검.’ 물리 피해를 크게 증폭시키며, 상황에 따라 물리 피해를 마법 피해로 전환시킬 수 있는 변환계 장검. 항마력 세팅이 덜 끝난 지금, 저 검은 내 카운터 무기라 봐도 무방하다. ‘이런 놈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장비가 실력을 따라간다고 하면, 저놈은 분명 이 도시에서도 손 꼽히는 강자일 것이다. 애초에 용인족 중에 약한 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 상황 파악을 하고 있자니 생겨난 잠시간의 정적. 먼저 입을 연 것은 후작 쪽이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겠나?”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고?” “흐음, 그럼 저들을 치울 수만 있게 해주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후작이 눈짓을 보냈고, 이에 옆에 있던 기사들이 동료들을 수습해서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라비옌 양을 제하고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가 있게.” 후작이 병력들을 모두 저택에서 물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옆에 있던 용인족 여성뿐. 후작은 용인족 호위가 자리에 있음에도 내 본명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얀델 준남작.” “…….” “자네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네. 아마 오해를 했겠지.” 오해라……. 하긴, 후작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악령이 아니어서 도중에 깬다 해도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것도 자신의 저택 한복판에서. 물론 내가 그런 상황을 배려해 줄 이유는 없지만. “야밤에 암살자를 보내놓고 오해라, 낯짝도 두껍군.” “그러니까 그게 오해라는 걸세. 나는 단지 자네가 악령인지 아닌지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니.” “……악령?” 후작의 의도야 한참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나 모른 척 되물었다. 아, 여기서는 짜증도 섞는 게 자연스러우려나? “…지금 나를 악령으로 의심했다는 거냐?”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물음. 이에 후작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나. 자네도 들어는 봤을 테지만, 악령들은 매달 보름마다 집회에 끌려가네. 그리고 그동안은 철저하게 무방비해지지. 맹세코 그동안 자네가 깨는지 아닌지만 확인할 셈이었네.” “…그래서?” “확인은 끝났네. 자네는 악령이 아닐세.” 그 말에 나는 옅게 숨을 내쉬었다. 그야 이번 일을 벌인 이유 중 가장 큰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하필 아들을 보낸 거지?” “그건… 그 녀석이라면 자네가 깬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일세.” “좀 더 자세히.” “일단 첫째로, 자네가 이렇게 소란을 벌일 줄은 몰랐네. 그리고 둘째, 그 녀석이라면 만약의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네.” 쉽게 말해, 아들내미 정도라면 불상사가 벌어져도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는 뜻. “그 자리에서 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하나뿐인 아들일 텐데?” “안으로 싸고돌기만 해서는 나약하게 자랄 뿐이네.” 그래, 그게 당신의 교육 방침이란 말이지. 살짝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좀 어느 정도 납득은 간다. “자, 그럼 오해가 풀렸다면—” “오해가 풀렸다고 앙금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애초에 오해가 전부 풀린 것도 아니고.” “……?” 내가 말을 끊자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거, 그러면 내가 할 말도 못 할까 봐? “이거, 이 상처 보이나?” 나는 벌써 반쯤 아문 손목의 상처가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아까 네 아들내미가 나를 기습해서 생긴 상처다.” “……기습을 했다고?” “대화를 하려는데 대뜸 칼부터 휘두르더군.” “그런 일이 있었다니, 오해를 하는 게 당연했군. 녀석은 내가 단단히 타일러두겠네.” “내 피해는?” 나는 손목에 그치지 않고 아까 기사 넷과 싸우며 생긴 부상들도 잘 보이도록 쓱 내밀었다. 묵사발이 난 기사들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부상. 다만, 후작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 실수로 생긴 일이니 자네가 만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도록 하지.” 오케이, 이거면 적당한 보상은 될 테고. “그럼 이제 슬슬 앙금을 풀고 대화를 나누겠나? 내일 아침 말해주기로 했던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좋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용인족 호위가 자연스레 아공간에서 의자를 꺼냈다. 딱 봐도 값비싸고 그만큼 편해 보이는 의자. 허, 저런 의자를 수하 아공간에 넣고 다니게 한 거야? 귀족들이란……. “나이가 드니 점점 몸이 편치 않아서 말일세. 아, 자네도 앉을 곳이 필요한가?” “필요 없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이 뭐지?” 더 길게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 신분을 되돌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첫 번째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었다면. 과연, 그 두 번째는 뭐였을까. “그 얘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더 확인을 하겠네.” 후작은 능글맞게 대답을 피하며 질문권을 행사했다. 하, 여기서 싫다고 하기도 그렇고. “해봐라.” 허락이 떨어지자 후작이 다소 뜬금없는 서론을 입에 담았다. “내 아들도 아들이지만, 아까 자네가 상대한 기사 넷은 가문 내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축에 속하던 자들일세.” 그랬나? 스킬을 보기도 전에 다 조져서 그리 말해봤자 실감이 안 나는데. “그래서?” “바란다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내 후작이 내게 물었다. “자네는 얼마나 강한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긴 했다. 후작이라고 해서 내 정확한 실력을 알았을 리 없으니. 단지 내 명성을 전쟁에 이용할 생각뿐이었겠지. “흐음, 답이 없는 걸 보니 곤란한 질문이었나 보군?” “딱히.” 곤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란 말이 옳다. 사람의 강함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시간만큼이나 상대적인 것이 바로 사람의 강인함이듯,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저 여자.” 내가 용인족 호위를 응시하자 후작이 조금 놀란 눈빛을 지었다. “라비옌 양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다는 뜻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기는 건 좀 그렇지. 실제로 싸워 본 것도 아니고. 확신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내 전투력을 묻는 후작의 물음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 여자를 뚫고 네 머리통을 부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답변이 됐으려나? 아마 그럴 것이다. “…….” 늘 내 앞에서도 여유롭던 후작의 몸에 미세한 떨림이 발생하고. “……듣던 것 이상으로 미친 자로군요.” 이렇게 호위의 입에서 극찬이 나온 걸 보면. 390화 야생마 (4) 어찌 보면 동물원에 방문한 사람의 심리와 같다. 그들은 철창에 갇힌 맹수를 보며 귀엽다고, 갇혀 있는 게 불쌍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만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직경 3cm가량의 철창. 그 철창만 사라지면 된다. 자신과 맹수 사이의 구분선이 깨지는 그 순간, 인간은 맹수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되니까. 지금 후작이 그러한 것처럼. “…….” 아, 물론 후작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진심을 담은, 내 호전적인 말에도 그는 살짝 움찔하는 모습만을 보여 줬을 뿐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긴, 실제로 철창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나는 후작을 죽일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후작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 그러니까……. “어때, 이 정도면 답변이 됐나?” 순전히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상황을 종료시킨다. 저 잘난 후작의 표정이 썩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장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테니. “걱정 말게.” 후작이 그리 말하며 화답했다. “자네가 전하고자 한 말뜻은 충분히 와닿았으니.” “그렇다면 다행이군.” 사실 이는 경고이기도 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면 응할 생각이 있지만, 만약 선을 넘는다면 언제든 철창을 부수고 달려나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경고. “그럼 궁금증도 풀렸다면, 두 번째 조건을 들어보고 싶은데.” “아, 그것 말이지. 두 번째 조건은 이렇네.” 이내 후작이 옆에 있던 용인족 여인을 힐끗하고는 말을 이었다. “라비옌 양을 도와 용살자, 리갈 바고스를 처치해주게.” “용살자를……?”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로군. 라비옌 양에게 듣기로는 자네도 그자와 악연이 있다던데?” 그건 그런데, 너무도 예상치 못한 요구인지라. ‘…나와 용살자 사이에 있던 일을 아는 건, 역시 저 여자 때문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후작과 이 용인족 여인은 어떤 관계인 걸까. 분명 용살자 처치가 두 번째 조건이 된 것에 저 여자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한데. 거래 관계인 건가? “자, 그럼 이제 대답을 해주겠나?” 못내 호기심이 샘솟지만, 일단은 답변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 이거 하나만 더 물어보고. “근데 고작 이걸 말하려고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한 건가?” “그때는 라비옌 양이 자택에 없었으니까. 그녀가 있는 곳에서 대화를 진행하는 게 옳다 여겼네.” 음, 그렇다면야. “좋다, 어차피 그놈은 언젠가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면 얘기는 끝났군.” “아직 만족할 만한 합의점 얘기를 못 했는데.” 어느덧 전부 아문 팔목을 들이밀며 말하자 후작이 껄껄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아침에나 다시 보세. 요즘엔 좀만 늦게 자도 다음 날이 너무 힘들어서 말이야.” “……그러지.” 이내 대화가 일단락되자 후작이 의자에 일어나 뒤로 돌았고, 용인족 여자는 익숙하게 의자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얀델 준남작, 너무 만용은 부리지 마세요.” 호위가 나를 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뭐, 아까 내가 한 말에 대한 복수인가? 처음엔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그런 게 아님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또 죽으면 내 동생이 슬퍼할 테니까.” “동생? 아, 설마 너는…….” “…….” 용인족 호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휙 등을 돌려 후작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하, 어쩐지 이목구비 같은 게 익숙하다 싶더라니. ‘페니타사우로스.’ 태고룡의 딸이자 용의 무녀, 페니. 줄여서 용꼬맹이. 얘가 걔의 언니였던 거구나. 어쩌면 내 동료가 될지도 몰랐던. *** 후작가의 독자 엘토라 테르세리온.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의 생물학적 부친이었다. “깼느냐.” “……죄송합니다.” 엘토라는 무엇도 묻지 않으며 우선 사과의 말부터 입에 담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할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자 이 밤에 네 앞을 지키고 있던 것 같으냐?” “…….” “말해보아라.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부친의 말에 엘토라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자정에 있었던 일들을 짧게 이야기했다. 그야 길게 말할 것도 없었으니까. 부친의 명령에 따라 야밤에 그의 방에 침입했고, 그 즉시 모가지를 잡혀 뭔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잔뜩 처맞고 기절한 것. 단지 그게 전부인 이야기. “한심한 놈.” 엘토라는 모멸감을 참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이제서야 이런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한데, 어째서 이런 방법을 선택하신 겁니까? 만약 그가 악령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한 거라면, 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처음에는 얀델 준남작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라 여겼다. 부친은 그를 좋은 도구라고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 같달까. “너는 그 정도조차 혼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냐?”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내 엘토라가 저자세를 취하자, 후작도 눈살만 살짝 찌푸릴 뿐 질문의 답은 해주었다. “적의 약점이란, 우리가 쥐고 있음을 몰라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법이다.” “드러나지 않은 약점은 감출 뿐이지만, 드러난 약점은 고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군요.”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듯해 다행이구나.” “…….” “그럼 이제 나가보거라. 생각할 것이 있으니.” “예…….” 아비의 축객령에 힘없이 문가로 향하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였다. “저… 아버님.”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하거라.” “아까 ‘적의 약점’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얀델 준남작을 적으로 규정했다는 뜻일는지요?” 어쩌면 실수로 드러냈을지도 모를 부친의 진심. 다만, 엘토라는 그 해답을 들을 수 없었다. “네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나가 보거라.” “예…….” 이내 엘토라는 부친의 집무실에 나온 뒤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얀델 준남작이 후작의 적이라…….’ 대체 후작은 어떤 암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그의 발이 목적지 앞에 멈춰 섰다. 하지만……. 덜덜덜. 어째선지 열쇠를 쥔 손이 떨려왔다. 이 방은 아까 열었던 그 방이 아니라, 몇 년간 자신이 지내온 방인데도. 이 방을 여는 순간 맹수가 잠들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심지어 귀에서는 환청이 들려왔다. [엘토라 테르세리온.] 듣는 이로 하여금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던 중저음. 내려다 깔아보는 듯하던 그 눈빛. 그리고……. [······뒈질 각오는 하고 왔길 바라지.] 이 남자 앞에서는 그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그 특유의 감각까지. 불쾌한 기시감 속에서 엘토라는 본능적으로 한 남자들 떠올렸다. 뭐,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이 커뮤니티에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다.] 비요른 얀델은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내가 한 망상을 고블린이 알면 비웃겠군.”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열쇠를 집어넣어 잠긴 방문을 열었다. 철컥. 갑주와 장검, 그리고 박제된 사슴의 머리가 장식된 전형적인 귀족 남성의 방. 늘 그랬지만,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 다음 날 아침, 후작의 부름에 조찬에 참가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음식이 차려진 다이닝룸에는 딱 두 사람이 존재했다. 자리에 앉은 후작과, 그 뒤에 기립해 있는 용인족. “아들내미는?” “잘 쉬고 있을 것일세.” 보통 이런 자리에는 아들도 참석을 시키지 않나? 그런 의문도 들기는 했지만, 나야 자리에 사람이 없을수록 편하긴 했다. 음, 그럼 나를 배려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들지.” 일단 식사부터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안 그래도 오늘 끝내야 할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면, 어제 말했던 ‘합의점’이라든가. “우리 실수에 대한 보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게.”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보게.” “내가 내 이름을 되찾을 때까지 기간이 얼마나 걸리지?” “세 달 정도를 생각하고 있네. 이번 일은 완벽하게 되어야만 하니까.” 세 달이라……. 듣자마자 너무 길단 생각이 들었지만, 후작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비요른 얀델이 왕가의 특명을 받고서 노아르크에 잠입했음을 증명하는 2년간의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니. “그전까지진 자네 역할도 중요하네. 만약 준비가 되기 전에 자네 이름이 퍼지면, 여기에 의심을 갖고 뒷조사를 하는 자가 나올 테니까.” “후작, 당신이 막을 수는 없나?” “상황이 그리되면 막기 위해 노력은 할 터이나, 그래도 새어나가지 않으리란 보장은 하기 어렵네. 왕궁은 그런 곳이니까.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좌지우지할 수가 없지.” 쉽게 말해, 이 나라의 지배자인 국왕이 아닌 이상 국가 기관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단 뜻.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악평도 있는 그의 말이라 하기엔 너무도 맥이 빠졌으나, 납득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재상은 명실상부 왕국의 이인자이지만, 그의 호적수라 할 세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 대표적으로 케알루너스 공작가가 있다. 핏줄 중 하나가 마탑주로 있으며, 역사적으로 미궁 관련 사업에 활발히 참가하며 대형 클랜들에 강한 영향력을 갖춘 대귀족 가문. 사실 ‘재상’이라는 직위 원툴인 후작가보다는 공작가 쪽이 훨씬 더 아웃풋이 다양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역도 광범위하다고 들었다. “기간에 대해 납득이 됐다면, 이제 슬슬 자네가 하려던 말도 들어보고 싶네마는.” “부족의 주술사와 만나고 싶다.” “이유는?” 거, 당연한 걸 묻기는. 아, 바바리안이 아니라서 모르는 건가? 전사가 주술사를 만나려 할 때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혼령각인을 받아야 하니까.” 어쩌다 보니 6단계에서 멈춘 혼령각인. 7단계로 가는 재료까지 사뒀는데 뜬금없이 과거로 끌려가는 바람에 각인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재료였던 ‘망자의 영혼’은 레이븐이 내 유산(?)으로 물려받아 보관 중이라고 하니, 신분 문제만 해결되면 각인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아까도 말했지만, 준비가 다 끝나기 전에 이름이 퍼지면 곤란—” 나는 후작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뜻이다.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도록 알아서 잘.” “그게 자네가 바라는 ‘합의점’이라는 거군.” “그래, 당장 다음 미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3개월은 너무 기니까.” 내 요구에 후작은 고민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다만, 나를 전쟁에 참가시키려는 입장에서 내 전투력이 상승한다는 게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을까. “좋네. 이번 달 내에 주술사와 만날 수 있도록 힘을 써보겠네.” “잘 됐군.” 어떻게 주술사를 불러내고, 납득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건 후작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이 사람 일처리 방식을 보면 알아서 깔끔하게 잘 해주겠지. 툭.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식사가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빈접시들을 그대로 방치하고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남은 탓이다. “나를 주축으로 한 부대를 꾸린다고 했었는데, 대충 생각해 둔 건 있나?” “서른 명으로 이뤄진 부대를 꾸릴 걸세.” “총 다섯 팀이 되겠군. 그럼 누구로 채울지도 정해졌나?” “그건 아니지만, 내정해 둔 이들이 있네.” 이후 후작은 눈여겨 본 예비 멤버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렀고, 잠자코 듣던 나는 꽤 놀랐다. 최신 정보에 약한 나조차도 알고 있던 이름이 상당수 섞여 있던 탓이다. 칠강의 일원. 대형 클랜의 에이스. 명성 높은 성기사. 소문이 자자하던 군부의 실력자 등등. 후작은 무슨 드림팀이라도 꾸리려는 건가? “근데 그자들이 부대에 들어오겠나?” “들어올 걸세. 대부분은. 엄청난 보상을 약속할 생각이니까.” “…그렇다면야.”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실현은 가능하단 뜻일 터. 따라서 우리는 그다음 내용을 의논했다. “얀델 준남작, 자네는 세 팀 중 하나를 맡게 될 걸세. 그리고 그중 한 자리엔 라비옌 양이 들어가게 될 거고.” “그럼 나를 제외하고 4명을 더 넣을 수 있다는 뜻이군.” “일단 그 둘은 데려갈 생각이겠지?” 그 둘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뻔했다. 필시 에르웬과 아멜리아를 말하는 것일 터. ‘그나저나 역시 아멜리아에 대해서도 파악은 하고 있었구나. 설마 노아르크 출신인 것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다.” “그럼 남은 자리는 두 개뿐이군. 생각해 둔 자가 없다면, 아까 말한 자들 중 원하는 이름을 말하게. 포섭을 할 때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라도 데려와줄 테니.” 추가 인원이라……. 당장 먼저 떠오른 것은 레이븐이었다. 팀에 마법사가 한 명은 있어야 할 텐데, 얘라면 실력에서도 신뢰성에서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근데 그럼 항해사는 어떡하지? 남은 자리를 얘로 넣을 순 없을 텐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냥 지하실에 넣어놔? ‘이건… 이따가 아멜리아랑 상의를 해봐야겠네. 레이븐도 후작한테 언급하기 전에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 할 테고.’ 나는 짧은 고민을 끝마치고 말했다.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한 뒤에 말하지.” “그러게.” 이거로 오늘 나눌 대화는 끝. 그리 생각하며 슬슬 자리를 끝내려는 차,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아, 한 가지 더 자네에게 말할 사안이 있네.” “……?” “이 부대를 꾸리는 것은 나 혼자 계획한 일이 아닐세.” “뭔 소리지 그건?” “짧게 설명하자면,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단 말일세.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자네가 다섯 팀 중 하나를 지휘할 수 있게 한 것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총지휘관은 정해지지 않았네.” 즉, 원정대장 역할 자리가 공석이라는 뜻. “어째서지?” 내 말에 후작이 나를 정면에서 응시하며 말했다. “위에서 정해준다고 어디 그들이 순순히 납득을 하겠는가? 아니, 설령 그들이 수긍한다 한들, 그들의 후견자들이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래, 정치적인 이유라 이거구나. 후작의 역량으로도 한계가 있었다는 걸 보면 이번 부대 창설에 낀 세력가들이 꽤 많기는 한가 보다. 뭐, 나야 잘된 일이겠지만. 슬슬 후작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도 같다. “아무튼……. 그래서 서른 명이 전부 모이고 팀장이 정해지면, 그때 원하는 이들끼리 경쟁해 적임자를 뽑기로 했네.” “…….” “만약 이번에 창설된 부대가 전쟁에서 큰 전공을 올린다면 총지휘관의 후견자 역시 그 전공의 상당수를 공유하게 될 것일세.” 이내 말을 잠시 멈추며 내 표정을 살핀 후작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때, 가능하겠나?” 원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한 짧은 물음. 이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야 가능 여부를 묻는 것부터가 잘못됐으니까. “못 할 건 없겠지.” 솔직히 말해서. 아까 말한 놈들이 다 하나같이 대단한 놈들이긴 했지만. “보상만 확실하다면.”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은 놈은 없었거든. 391화 캡틴 바바리안 (1) 에르웬표 CCTV가 설치된 저택의 1층 거실. 소파에 세 명의 여인이 쪼르르 앉아서 차를 홀짝이고 있다. “서른 명으로 이루어진 특수 부대라, 저도 처음 들었어요. 그만큼 극비리에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겠죠.” 레이븐의 중얼거림에 아멜리아가 말을 이었다. “전쟁이 길어진 만큼 왕가에서도 뭔가 상황을 반전시킬 한 수를 찾고 있는가 보군.” “네. 후작이 말한 내정자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하나의 팀으로 묶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의문일 정도예요.” “하지만 그 부분은 틀림없겠지. 그 후작이 그렇게 단언을 했다고 하니.” “그럼 그 정도 전력이 필요할 만큼 큰일을 꾸미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어요.” 둘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으며 의논을 한 반면, 에르웬은 딱히 이번 상황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저씨, 너무 단 건 별로랬죠? 이거 드세요. 일부러 담백한 걸 사왔어요.” “아, 고맙다.” 에르웬이 준 땅콩 쿠키를 먹고 있자니, 레이븐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상황만 설명해주고서 가만히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 씹고 있던 것만 대충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레이븐, 그래서 너는 어떡할 거냐?” “…어떻게 하냐니요?” “말했지 않나. 나, 에르웬, 에밀리, 그리고 후작이 붙인 용인족까지 해서 두 자리가 남는다고.” “아…….” “나는 너도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레이븐은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저도 일선에서 돕고 싶지만, 당장은 어려울 거 같아요.”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던 답변. “…그래?”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그러한 내 기색이 느껴졌는지 레이븐이 묻지도 않은 상황을 설명해 왔다. “전장에서도 도시에서도, 최근 들어 페브로스크 단장님이 여기저기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어요. 근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빠지면 마도병단을 관리할 사람이 없고요…….” 하여간, 성실하기는. 뭐, 이런 모습이 동료로서 믿음직했던 거겠지만. 딱히 자기 잘못도 아닌데 저렇게 기 죽은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마무리했다. “뭘 변명하듯 그러냐?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건데.”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이해고 자시고, 네가 변명할 일도 아니다.” “…….” 아무튼, 이걸로 레이븐의 영입은 물 건너 갔고. 남은 두 자리를 어떻게 채우지?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아멜리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슈이츠, 혹시 팀에 항해사도 필요하려나?” “글쎄, 어차피 대형 군함을 타고 이동할 테니 딱히 필요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가.” 아멜리아는 딱히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설마 반지하 항해사 아우옌을 데리고 가고 싶었던 걸까? 거, 아무리 항해가 즐거워도 TPO라는 게 있는 것인데……. “아우옌은 잠시 저대로 두는 게 나을 거 같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필요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 “알겠다. 최근 밥을 잘 먹지 않아 걱정이 됐는데, 평소보다 산책을 늘리면 되겠지.” “……그래, 그러면 될 거다.” 그럼 이거로 항해사 문제도 종결. “근데 레이븐, 혹시 그 용인족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아뇨. 라비옌이라는 이름은 처음이에요. 그래도 한번 돌아가서 알아는 볼게요. 혹시 단장님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 부탁하지.” 이후로는 차를 다 마신 레이븐이 눈치껏 일이 있다며 떠났고, 이후로는 우리 셋이서 후작이 말해준 후보들 중에서 어떤 이를 팀에 넣을까에 대한 상의를 나누었다. 늘 대립 구도를 취하던 둘이었으나, 첫 번째 동료는 쉽게 의견이 일치됐다. “우선 마법사가 한 명 필요하긴 할 거 같네요.” “나도 같은 의견이다. 마법사가 없으면 불편한 일이 너무 많으니까.” 레이븐의 영입 실패로 공석이 된 마법사 자리의 보충. 그리고……. “남은 한 자리는?” “역시 신관이 좋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마지막 자리에는 신관을. 만약 어렵다면 지원계 이능술사를 채워넣는 것이 좋을 거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야 탱커는 나 하나로 충분하고, 근접 딜은 아멜리아가, 원거리엔 에르웬이 있으며 마법사도 들어올 예정이니까. 지원계 이능술사로 변수를 대비하며 근접 라인에 더 힘을 싣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 모두 합리적인 이야기였기에 쉽게 수긍했다. 딱 마지막에 나온 얘기만 뺀다면. “그럼 마법사는 이분이랑 이분, 신관은 이분, 만약에 신관이 못 온다고 했을 때 이능술사는 여기 이분이 좋을 거 같아요!” 대화를 나누면서 정리한 후보 목록지의 이름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에르웬이 해맑게 의견을 내비쳤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는……. “오, 전부 남자군?” 그냥 별생각 없이 뱉은 그 말에 관한 답변이었다. “그야… 아저씨 옆에는 여자가 너무 많잖아요?” “…응?”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유로 남자만 고르는 게 합당한가? 도움을 바라듯 옆을 힐끗했지만, 아멜리아는 내 기대와 달리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극구 공감한다는 듯이. “확실히 남자로 고르는 편이 좋을 거 같군.” “……어째서?” “넌 여자가 얽히면 제대로 판단을 못하니까.” 뭐래, 얘는 또. 내가 얼마나 철혈 같은 남자인데. 여자든 남자든 죽여야 한다면 항상 평등하게 머리통을 아작냈다. 빙하굴에서 처음 죽인 플레이어도 여성이었고. “에밀리,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대체 왜 그렇게 생각을 한 거냐?” 내가 억울하다는 듯 묻자 아멜리아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즉각 답하였다. “나한테도… 그랬으니까.” 대체 얘네한테 내 이미지는 어떻게 된 거지? *** 다음 미궁이 열리기까지 열흘이 남은 시각. 도시로 돌아오고서부터 매일같이 상업 도시에 들르던 아멜리아가 마침내 전리품 처분을 끝마쳤다. 쉽게 말해, 드디어 이번 탐사에서의 최종 소득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잔돈을 떼고 계산해도 3억 5천만 스톤이나 되는군.” 정말이지 억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규모의 금액. 동시에 마석 소득만으로는 몇 층에 올라가더라도 이 인원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소득이었다. ‘하긴, 6층 클랜 하나를 전부 털어먹었으니 당연한 건가?’ 그래도 액수로 들으니 놀랍기는 하다. 심지어 부서진 배들은 제값을 받지 못했고, 가장 큰 배는 나중에 쓰려고 팔지 않고 보관하기로 결정을 하지 않았던가. 이 배만 팔아도 총 소득은 세 배로 뛰었을 거다. “그럼 이 현금은 어쩔 거지?” 누구보다 열심히 물건 처분을 한 아멜리아가 내 의사를 물어왔고,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당연히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그럼 한 사람당 1억 1천만 스톤 조금 더 넘게 가져가겠군.” 이 정도면 예전부터 눈여겨보았던 무기를 살 수 있겠다며 오랜만에 미소를 내보이는 아멜리아. 다만, 그 미소가 꺼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기를 바꿀 생각하는 것보단, 우선 제 돈부터 갚았으면 하는데.” 동료한테 한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쌀쌀맞은 에르웬의 목소리. 물론 요구 자체는 합당했다. 거래 관계가 조금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내 악마 분쇄기를 은행에 담보로 맡긴 건 아멜리아였으니까. 그 돈으로 아멜리아는 정수를 구매했고, 그 돈을 갚을 수 없어서 에르웬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다. “빚 상환까지는 기간이 아직 남았을 텐데……?” “그렇게 펑펑 쓰면 그 기간 안에 절대 못 갚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리고 애초에 빚은 빨리 갚는 쪽이 좋잖아요?” “……얼마면 되지?” “당연히 전부죠. 그거에 제가 이번에 번 돈을 다 털면 얼추 다 갚을 수 있을 거 같네요.” “…….” 에르웬의 말에 아멜리아는 꼬리가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딱 봐도 도움을 바라는 눈빛. 하지만 내가 여기서 뭘 어쩌겠어. “…무기는 다음에 사자.” “지난번에 무기를 바꿔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그때 너는 그래도 좋다고 약속했었다.” “상황이 좀 달라졌지 않나. 가장 큰 배를 팔지 않고 타고 다니기로 하잔 건 너도 동의했을 텐데?” “그건… 6층이 아니어도 배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테니까.” “그래, 그랬지. 몇 달만 더 기다려 봐라. 그때는 나도 돈을 보태줄 테니까.” “…….” 단단히 삐졌는지 아멜리아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창가를 보며 조용히 숨을 내뱉는 걸 보면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은 한 모양. 얘는 이럴 때 뭘 줘야 풀리려나?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는 딱히 별 감흥이 없는 거 같던— “아저씨, 밖에 사람이 왔는데요?” 응? 사람이? 에르웬의 말에 뭔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니, 후작가에서 온 사람이었다. 체격 건장한 남자지만, 일상복을 입고 있어서 기사인지는 분간이 안 됐다. 나눈 대화도 몇 마디 정도로 극히 짧았고. “후작님께서 전하신 편지입니다.” “아, 전해줘서 고맙다.” 얼른 집 안으로 돌아온 뒤에 편지부터 확인을 해봤다. 후작의 성격인지, 아니면 편지를 받는 내가 바바리안이라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편지의 내용은 몹시나 짧고 간결했다. [주술사 문제가 해결이 됐네.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낼 테니 함께 오게.] 그래, 드디어 혼령각인 7단계를 찍는구나.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집에서 나온 나는 후작이 보낸 마차를 타고서 황도로 향했다. 원래였다면 6시간은 족히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을 거리였으나, 이번에도 군용 승강장을 이용하니 오전에 출발해 오전에 도착하는 게 가능했다. ‘진짜 편하긴 하네…….’ 그렇게 낮잠을 잘 새도 없이 도착한 저택. 다만, 이번에는 후작과 만날 수 없었다. 업무가 있어 새벽부터 입궁을 했다던가? 하긴, 후작이 방구석 백수도 아니고 한 나라의 재상이었으니 평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사실 최근에 그만큼이나 자주 독대가 가능했던 것도 후작이 나를 굉장히 많이 신경 써 줬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마저도 저녁이거나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나눈 거긴 하지만. ‘뭐, 나야 안 보는 편이 더 편하긴 하지.’ 아무튼, 후작가의 안내인을 따라서 쭉 따라가 도착한 곳은 본관 3층에 위치한 집무실이었는데……. “…….” 서류 업무를 보고 있던 재상 아들내미가 나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안내인이 떠나고 둘만 남게 되자 일단 인사말을 건네왔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얀델 준남작.” 말투 자체는 점잖고 동등한 대상을 대하는 듯하나, 어딘가 모르게 위축된 분위기가 풍긴다. 아, 말을 할 때 눈을 안 마주쳐서 그런가? “고생이라 할 거까지야. 덕분에 편하게 왔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떤가? 다행히 얼굴뼈는 잘 붙었나 본데…….” “…보다시피 이제는 괜찮소이다.” “그렇다니 잘 됐군.” “아, 그리고 지난번에는 이 말을 하지 못했구려. 일전에 무례는 송구하게 됐소.” 재상집 아들내미, 엘토라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사실 저게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란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밤중에 처맞은 쪽이 무례 어쩌고 하면서 사과를 하는 게 좀 웃기다고 해야 하나? “됐다, 어차피 지난 일 아닌가. 그 얘기는 예전에 후작이랑 다 끝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마라.” “그리 말해주시니 참으로 고맙구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었소.” “그래서 주술사는?” “그는 다른 방에서 대기 중이오. 나가면 레니아… 앞에 있을 하녀가 안내를 해줄 것이오.” 그럼 이따가 이동해서 혼령각인만 받으면 끝이란 거구나. 급하게 이동할 이유는 없을 듯해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확인했다. “근데 주술사는 어떻게 데려온 거지?” “아버님께서 바바리안족 족장에게 직접 부탁을 했다고 하오. 혼령각인을 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주술사를 좀 보내달라고.” “흐음, 그렇게 하면 수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고 들었소. 바바리안이라고 해서 그들 전부가 성지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아, 설마 부족에서 쫓겨난 전사라고 말한 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내 질문에 엘토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도시에서 낳고 길러진 바바리안이라고 했소.” “…그랬군.” 나는 그 말에 군말없이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경우도 있었다. 바바리안이라고 인간과 크게 다른 건 아니니까. 도시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다 보면 도시의 문화에 물들고 전통에 너무 얽매이지 않게 된다. 심하면 낳은 자식을 성지로 보내지 않고 직접 기르는 케이스도 꽤 있다고 들었고. “아무튼, 그러면 별문제는 없겠군. 잘 처리해줘서 고맙다.” “준남작을 돕는 게 우리를 위한 일 아니겠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지.” 의문은 모두 해소했기에 대화를 종료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즉시 주술사가 있는 방 앞까지 나를 안내했다. “여기부터는 제게 안내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안으로는 나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구란 가구는 싹 치워져 휑한 방에 가득 채워진 담배 연기가 나를 반긴다. 방 중심부에는 천으로 가려진 공간이 자리했고, 한 사람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주술사랑 만나는 것도 거의 3년 만인가…….’ 천천히 다가가고 있자니 왠지 긴장이 됐다. 후작이 아무리 양념을 쳐놨어도, 결국 주술사를 만나면 내가 누군지 알아볼 게 분명하니까. 뭐, 그 주술사 성향이면 내 사정을 설명했을 때 족장에게도 비밀을 지켜줄 거 같기는 한데. 확신은 할 수 없— “왔는가.” 그때 천떼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명 속에서 자란 동족이여.” 뭐야, 이 애 같은 목소리는. 휘이익. 이내 천을 옆으로 젖히자, 안대를 쓴 문신쟁이 바바리안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눈이 멀쩡했던 상태지만,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술사를 찾을 때마다 몇 번인가 오고가며 봤던 어린 제자. “크크큭, 고대하던 주술사를 만나고 나니 떨리느냐? 잔뜩 들뜬 심장의 고동이 여기까지 전해지는구나.” 뭐래, 얘는 또. ‘그나저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할배 주술사는 어디가고 얘가 여기 있어? 392화 캡틴 바바리안 (2) 할배 주술사 아래에서 잡일들이나 하던 수습 주술사의 겉모습은 꽤 그럴듯했다. 어딘지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 안대도 그렇고, 몸에 가득한 문신들도 그렇고. 몸이 젊다 뿐이지, 일단 외견만 보면 그럴듯한 주술사처럼 보인다. 다만……. “자, 그만하고 앉아서 상의를 벗거라. 작은 전사여.” 앳된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깔고 연기 톤으로 대사를 치는 걸 보면 확 깬다. 저거, 눈깔도 사실 멀쩡한데 멋으로 안대를 낀 건 아니겠지? 스윽. 못미덥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자리에 앉아 옷을 벗자, 아기 주술사가 대뜸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몸에 불사자의 혼력을 이미 담아냈구나.” 단번에 내가 택한 경로를 알아낸 주술사가 내 가슴팍으로 손을 내리며 변태처럼 더듬는다. “그럼 어디 한번 얼마나 구극에 닿았는지를 볼까.” 해봤자 얼마나 했겠어라는 마인드가 깔려 있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변하는 데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스윽. 어깨에서 시작한 손짓이 가슴으로 내려왔다가, 이내 광배근이 있는 옆구리 쪽으로 향한다. 불사자 각인의 3단계 시술을 받은 곳이자. 처음으로 각인 전문화가 있었던 기점. “크크크, 야성의 혼을 택했구나.” 나는 여기서 [야성분출]을 손에 넣었다. 탱커라면 일단 위협 수치를 올릴 기술이 있어야 하잖아? “젊은 듯한데 벌써 혼백까지 받아들였다니, 꽤 노력을 했—” 기특하다는 듯한 말투로 뭐라 씨불이던 주술사가 흠칫 굳었다. 어느새 손은 광배근 쪽을 넘어 등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 나는 얼굴을 후려칠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다 괜찮은데, 이러면 얼굴이 가까워지잖아. 자세도 나를 앞에서 안고 있는 듯한 구도고. 스윽. 이내 주술사의 손이 등짝을 타고 올라가 목덜미 부분에 다다랐다. “오호라, 영맥까지 이미 뚫려 있다고? 제법—” 정신력 및 영혼력 수치가 증가했던 4단계 각인. 손은 목덜미를 타고 다시 앞판으로 돌아와 내 심장이 있는 부위에 도달했다. “…기, 기맥까지도 열렸다?” 슬슬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후작의 설명을 듣고서 저단계 각인이나 좀 해주고 돌아갈 줄 알았던 모양. 뭔가 갑자기 귀찮아졌기에 주술사의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무, 무슨 짓이냐! 지금 너의 길을 읽는 숭고한 의식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시간이 아깝다니까? “영맥이고 기맥이고 뭐고, 그만 더듬어라. 무구의 혼까지 각인을 끝냈으니.” “무, 무구의 혼이라면… 생맥까지 열었다고……?” 6단계 각인까지 끝냈음을 듣자 주술사가 몸을 크게 한 번 움찔했다. 다만, 너무 위엄이 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을까. “아, 알고 있느냐? 다음 각인을 새기기 위해서는 매우 귀한 제물이 필요—” “아, 망자의 영혼이라면 이미 챙겨 왔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 왜 주술사가 아니라 전사가 각인 의식을 주도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각인을 새기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모두 줬을 터. “대화는 이만하면 됐으니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떤가.” 그리 말하며 날 위해 준비된 듯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술은 시작이 안 됐다. “주술사, 뭐 하는 거냐?” “…잠시 기다리거라.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할 시간이—” 정신 집중은 무슨. 쉽게 말해서 그냥 긴장이 된다는 거잖아. 위화감을 감지한 즉시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갖고 있던 의심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설마, 정말로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주술사, 너 설마…….” “…….” “상위 각인은 한 번도 안 해본 거냐?” “……받고자 하는 전사가 없었을 뿐, 하는 법은 모두 익혔느니라.” 씁, 이러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 어린 주술사의 경험치 습득용 교본이 된 듯한 기분이었으나,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할배 주술사를 불러오라고 하기도 그렇고. 차라리 얘는 나를 못 알아보니 얘한테 받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일단 명색이 정식 주술사 아닌가. 각인은 제대로 잘 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첫 바늘이 내 피부를 쑤시기 전까진. 푹. “아아악!” “……!” 푹. “끄아아아아악!” “……?” 푹. “고개를 갸웃해? 씹, 너 이상한데 찔렀지?” “…그, 그렇지 않다!” “아니긴—” “잘 되고 있으니 가만 있어라!” 푹. “끄아아아아아악!” 원래 혼령 각인이 이렇게까지 아팠나? 예전에 했을 때도 미칠 거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푹. 푹. 푹. 푸욱-!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그만큼 더 선명해진 고통이 뇌를 절여버리는 시간이 이어진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다, 다 끝났느니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주술사가 마침내 간절히 기다려온 그 말을 뱉은 순간. 「불사자 각인 7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한 줌의 기력도 남지 않은 듯하던 몸에 이질적인 기운이 스며든다. 평소에 스탯이 오를 때와는 조금 다른 감각. 이걸 보면 일단 각인 자체는 제대로 끝난 거 같긴 한데……. 「수복력이 상승합니다.」 수복력은 근질량과 비슷한 부류의 스탯이다. 근질량이 1당 총 근력 스탯을 1%씩 늘려줬다면, 수복력은 수치에 비례해 모든 치유 및 재생 효과에 보정을 준다. 뭐, 그래도 근력처럼 확 티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막 체감하기에는 어렵지만……. 「이능 수치가 +300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이든 힐이든 치유 효과가 작용할 때는 확 티가 나겠지. “끄흐흐흐흐흐…….” 고난의 시간을 감수할 가치가 있던 커다란 보상. 이에 고통도 잊은 채 실실 쪼개고 있자니, 옆에 있던 주술사가 묘한 탄성을 내뱉었다. “…새 혼을 몸에 새기고 나서도 웃는 자는 처음이로구나.” “그건 네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전사들은 원래 힘들 때 웃는다.” “그렇지 않다……! 내가 얼마나 많은 전사들을—” 뭐래, 내가 없던 2년 6개월 동안 각인 시술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 거라고. “어, 그래, 수고 많았다.” 슬슬 몸에 기력이 돌아오고 있었기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주변이 촛불로 가득하고 왔을 때도 커튼이 닫혀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새 밤이 되었다. ‘늦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 걱정은 안 하겠지.’ 주술사야 오늘이든 내일 아침이든 알아서 성지로 돌아갈 테니, 그냥 겉옷만 챙겨서 입고 나왔다. 앞에는 아까 나를 안내해 줬던 사용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근데 표정이 왜 저러지? 마치 뭔가 무서워하는 것처럼……. “저… 괜찮으신지요?” 아, 앞에 있었으면 내가 비명 지르는 것도 다 듣고 있었겠구나. 각인 이야기도 모를 테니, 안에서 뭔 짓을 하다 나온 건가도 싶겠지. “됐고, 이제 돌아가려 하는데 그냥 나가면 되나?” 왔을 때처럼 마차를 준비해 줄 수 있냐는 기대가 담긴 물음. 이에 사용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슈이츠 님, 후작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후작이……?” 나도 모르게 존칭을 빼고 되묻자, 사용인은 마치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질렸다. 다만 손님 면전에 대고 지적은 할 수 없었을까? “예, ‘후작님’이 기다리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존칭에 악센트를 주며 앞장서서 나를 어디론가 이끄는 사용인. 쓰읍, 남들 앞에서는 조심 좀 해야겠네. 아직 바바리안인 걸 아웃팅하면 안 되니까. 끼이이이익. 이내 도착한 곳은 후작의 서재였다. 내가 들어서자 후작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힐끗하더니 사용인을 도로 내보냈고, 완전히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내게 인사말을 건넸다. “어때, 각인은 잘 끝났나? 얀델 준남작.” “덕분에. 근데 왜 나를 또 부른 거지?” 피곤했기에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으나 후작은 늘 그랬듯이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바라는 대로 맞춰 줄 뿐. “마침 자네에게 바로 알릴 일이 있어서 말일세.” 불쾌한 티조차 내지 않으며 본론으로 들어가는 후작. 근데 과연 이 아저씨는 알기나 할까? 이렇게 친절한 모습을 보여줄수록 믿음직스럽긴커녕 오히려 경계심만 든다는 것을. “알릴 일이라… 뭐지?” “첫 번째는 자네가 영입을 원했던 자들의 설득이 끝났다는 걸세.” 이어서 후작은 마법사는 내가 지정한 자를 영입할 수 있었고, 신관은 거절을 표하는 바람에 플랜 B로 점찍어둔 이능술사가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쩝, 여신관도 됐으면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아무튼, 첫 번째라 한 걸 보니 두 번째도 있겠군?” “그러네. 사실 앞에 거야 나중에 서면으로 전달을 해도 충분한 내용이니까.” “궁금하니 어서 말해봐라.” “내일, 각 팀의 수장들끼리 모임을 갖기로 했네. 가능하면 그 자리에서 총지휘관 자리를 정하자는 식으로 유도를 할 생각이고.” “……내일이라니, 그렇게 갑자기?” “이제 곧 미궁이 열리지 않은가. 당장 큰 작전에 나갈 수는 없어도 체계 정리는 끝내야 한다는 말이 많았네. 혹시 문제라도 있나?” “아니, 없다. 그쪽 말대로 이런 건 일찍 끝내는 편이 좋으니까. 그래서 지휘관은 어떻게 정하는 거지?” “말했지 않은가. 유도를 할 것이라고. 다섯 팀 모두 뒷배가 있는 만큼 본인이 지휘관 역할을 하고자 할 것이네.” “쉽게 말해, 모아두고서 자기들끼리 정하게 만들 생각이란 거군.” “정리하자면 그렇겠지. 그래서 괜찮겠나?” “걱정 마라. 나도 답답한 놈 아래에서 구르는 일은 사양이니까.” 위험한 임무에 나가는 특수 부대라며? 웬 트롤 새끼가 원정대장 자리에 앉아서 뻘짓을 하는 걸 지켜볼 바에 내가 하는 게 낫다. 뭐, 적임자가 있다면 뒤에서 그냥 편하게 꿀을 빠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겠지만. “그래서 내일 어디서 만나는 거지?” “그들을 본가로 초대했네. 내일 점심 만찬을 함께하게 될 걸세.” 내일 점심이라……. 어차피 장소도 여긴데, 다시 오기는 귀찮은데. “혹시 여기서 자고 가도 되나?” “물론일세. 원한다면 바로 저택에 연락도 할 수 있도록 돕겠네. 그녀가 걱정을 할 테니.” “아, 그 부분은 부탁하겠다.” 이후 약 30분 정도 대화를 더 나눈 뒤, 후작의 도움을 받아 7구역 마탑 지부를 통해 자택에 있을 에르웬과 아멜리아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다음에는 지난번에 하루 묵었던 그 방에 들어가 씻고 잘 준비를 끝마쳤고. 푸욱- 우리 집 침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푹신한 귀족가의 침대. 각인을 끝낸 날이면 항상 그랬듯이 눕자마자 잠이 솔솔 밀려왔다. 드르르르러러렁-!! 설마 또 이상한 놈이 밤중에 찾아오진 않겠지. *** 「비요른 얀델」 레벨: 7 육체: 1,461.40 / 정신: 521.3 / 이능: 2,197.65(New +390) 아이템 레벨: 8,305 종합 전투 지수: 6256.60(New +390)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가챠본 - Rank 6 / 심해거인 - Rank 3 *** 다음 날 아침. 대면 약속은 점심이었으나, 후작의 체면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일어나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몸단장을 시작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착 달라붙는 정장핏의 상하의. 이런 옷을 입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데…… ‘나쁘지 않네.’ 거울을 들여다본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꽤 괜찮았다. 체격이 줄어들어서 그런가? 예전처럼 그렇게 부담스러운 느낌은 없네. “조금만 더 기다리게.” “창밖을 보니까 몇 명은 이미 도착한 거 같은데?” “아직 모두 온 게 아니지 않은가.” 하룻밤 저택에서 묵은 만큼 준비를 일찍 끝낼 수 있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내 방에서 기다렸다. 이럴 거면 그냥 만찬장에서 기다려도 되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귀족가에는 귀족의 체면이 있는 법이라던가? 입장하는 시기에도 기싸움이 존재하는 듯하다. “자, 이제 가세나. 다들 기다리고 있다니.” 뭐, 이런 쪽이야 후작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작과 함께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끼이이이익. 직접 손을 쓸 것도 없이 옆에서 대기했다가 자동문처럼 문을 열어주는 사용인들. “테르세리온 후작님을 뵙습니다.” “설마 재상님께서도 식사 자리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마는.” “이거 오늘 제가 호강을 하는군요. 진심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이내 후작이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네 명의 남녀가 모두 일제히 일어나 예를 취해왔고, 인사를 받은 다음에야 후작도 답사를 전했다. “하하, 다들 만나서 반갑네. 자네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차린 게 부족할 수도 있을 터이나, 부디 편히 즐기다 가주게.” 그리 말하며 테이블의 상석으로 가서 앉는 후작. 나는 미리 들었던 대로 후작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음식을 내오게.” 사용인들이 식탁 위를 채우는 동안 후작이 소개팅 주선자라도 된 것처럼 소개 시간을 유도했다. “초면인 자들도 있을 테니, 서로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을 듯하군. 어떤가?” “예, 그럼 저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내 정면에 앉은 남성이었다. “다들 나보다 어리고, 귀족도 없는 듯하니 조금 편하게 말하겠소.” 잘 차려입은 정복에 가지런히 넘긴 적발. 상의에 박혀 있는 체크 패턴의 자수. 그러니까 얘 이름이……. “멜렌드 카이슬란이라고 하오.” 아, 어제 후작이 말해줬던 게 기억이 났다. 카이슬란 백작가의 막내아들이자, 일찍이 군부에 들어가 많은 전공을 올린 베테랑 기사랬지? 막내아들이라고 말은 했지만, 나이는 마흔이 넘었으며 결혼도 어릴 때 해서 자식도 여럿 있다. “수십 년 동안 군부에서 지냈고, 덕분에 전투에는 이골이 났소. 하지만 지휘는 또 전투와 다른 영역일 터. 그간 무능력한 상관에 의해 무의미하게 덧없이 목숨을 잃는 인재들을 수없이 보아왔소.” 먼저 통성명을 하겠다고 일어나더니 장황한 자기 PR 시간을 시작한 녀석. “내 그대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책임지는 자리에 서야 한다면, 나보다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하오.” 확실히 연륜이 많은 노장이라서 그런가? 군인식 연설을 하는데 벌써부터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어머나, 간단하게 통성명만 하는 자리가 아니었나요? 이거야 원, 다음 사람 부담되게.” 옆에 있던 드워프 아줌마가 사근사근 웃으며 그를 돌려까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다음은 제가 할게요.” 이야, 자연스러운 거 보게? 사실 이 여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누구인지 보자마자 알았다. 저 나이대 드워프 여자 탐험가가 흔치는 않잖아? “티타나 아쿠라바예요.” 티타나 아쿠라바. 나이는 밝힐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그녀의 나이는 61. 물론 일찍 늙고 그게 유지되는 종족 특성상 그 나이대의 인간보다는 훨씬 젊은 몸을 가졌다. 뭐, 저 여자에게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아쿠라바? 당신이 정말 아쿠라바란 말이오?” 이내 그녀가 이름을 밝히자 귀족 기사가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그만큼 유명한 탐험가였다. 아니, 전설적이라 해야 하나? “아무리 저라고 해도 후작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정도로 간담이 크진 않답니다?” “그건… 그렇겠구려. 단지, 그 정도로 놀라웠을 뿐이오. 당신은 10년 전에 은퇴를 했다고 들었으니.” 사실 나는 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후작에게 처음 들었다. 9층을 탐사하던 전설적이던 팀의 멤버였으나, 10년 전 돌연 팀의 해체와 함께 은퇴한 후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나랑은 세대가 완전히 다르단 것. “호호, 어쩌다 보니 다시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네요. 그래서 계속 말해도 될까요? 어린 기사분?” “……물론이오.” 이내 끼어들던 기사의 입을 다물린 그녀는 아까 기사가 그랬듯이 자기 PR 시간을 가졌다. “이 중에 저보다 미궁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 단언해요. 탐험가끼리의 섭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는 짧은 연설. 그러나 그녀가 앉자마자 기죽지도 않고 또 한 명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하하, 존경하던 선배님 중 한 분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이번엔 제가 하겠습니다.” 어딘가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특징은 키가 160대 초반으로 인간 중에서도 살짝 작은 축에 속했다는 것 정도. “톱니이빨 클랜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입니다.” 몇 년간 십대클랜에서 사대클랜으로 줄어든 초대형 클랜 중 하나인 톱니이빨의 부단장. 이 녀석도 앞선 선례를 따라 한참이나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대형 클랜에서 실무를 보고 있는 만큼 최근 정보에 빠르며, 모든 의견을 종합해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자신이 있다던가? 딱 봐도 늙다리 드워프와 고집불통 기사를 겨냥한 어필이었지만, 딱히 감흥은 없었다. 단지 서류로 봤던 정보를 한 번 더 상기했을 뿐. ‘얘가 궁수였었지?’ 기억할 게 있다면 딱 그 정도. 이내 부단장의 소개 시간이 끝나자, 그 옆에 있던 성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헤인델교의 준입니다. 속세에서 쓰던 성은 버렸기에 없습니다.” 앞선 놈들과는 대비가 되는 짧은 소개. “…그게 끝이오?” 기사가 되묻자, 성기사는 살짝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혀를 차더니 말을 더 이었다. “사람의 뜻만큼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은 없지요. 모든 것은 순리대로,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의외로 삼신교 측에서는 이번 임무에 대해서 욕심이 없나 보구려.” “…….” 기사가 뭐라 말을 걸며 삼신교 측의 의사를 떠보려 했으나, 성기사는 그냥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말을 씹었다. 그리고……. “이제… 그쪽만 남았군요.” 어느덧 내 차례에 이르며 관심이 모였다. 다들 아닌 척 했지만 짙은 호기심을 내비치는 중이었다. 하긴, 궁금하긴 하겠지. 일단 명색이 왕국의 이인자인 후작이 대표로 삼은 인물인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을 테니까. 정보가 없는 만큼 조금 경계도 될 테고. 끼이익. 나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고서 짧게 이름만을 밝혔다. “리헨 슈이츠다.” 곳곳에서 인상을 찌푸린 게 보였다. ‘고작 그게 끝?’ 딱 이런 느낌의 눈빛. 심지어 이는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는 다들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PR 했는데 나는 왜 가만 있느냐는 거겠지. ‘거, 재촉하기는. 모양 빠지게.’ 앞선 녀석들처럼 구구절절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다들 한 귀로 듣고 흘릴 게 뻔한데 굳이? 스윽. 이내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기사고 귀족이고.” 시작은 귀족가 출신의 군인. “유명한 탐험가고.” 그다음은 드워프 아줌마. “클랜이고.” 세 번째는 부단장. “신이고 나발이고 뭐고.” 마지막으로 성기사까지 쓰윽 내려다봐준 뒤, 딱 잘라서 말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무릇 자기 PR이란, 짧을수록 강렬한 법이다. 393화 캡틴 바바리안 (3) 툭. 할 말을 끝마치고 자리에 앉자, 잠시간의 정적이 만찬장에 내리 앉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각자가 자신이 대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어필하던 자리 아니던가.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뻔하다. “그 말은, 그대가 우리보다 강하단 뜻인가?” 불편한 심기가 굳은 입매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귀족 기사의 물음.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맞게 이해했군.”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 내 당돌한 답변에도 의외로 주변은 조용했다. 귀족 기사는 내게 뭐라 쏘아붙이고 싶은 듯했으나 옆에 있는 후작의 체면을 생각해 말을 아끼는 것 같았고. 스윽. 그런 의미에서 후작을 한 번 힐끗하자 눈이 마주쳤다. 의외로 후작은 내 행동에 질색을 하기보다는 그저 눈을 빛내며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그러면 다른 애들은 어떠려나? 주변을 한 번 훑어보자 각기 다른 느낌을 담은 눈빛들이 내게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부디 그 오만함의 절반만큼이라도 실력이 있기를 바라지. 실력 있는 수하는 언제든 환영이니.” 불쾌감에서 비롯된 적대감. 귀족 기사의 것이었다. “호호, 저 나이대의 사내들이란 다 그런 법이죠. 왜요 전 남자다워서 좋은데요?” 산뜻한 목소리와 달리 한심하다는 속내가 뻔히 비치는 시선. 드워프 아줌마의 것이었다. “리헨 슈이츠, 들어 본 적 있습니다. 혈령후의 남자라고 불린다지요?” 짙은 호기심을 내비치며 분석하듯 나를 보는 시선은 톱니이빨 클랜 부단장의 것이었고. “…….” 토베라교의 성기사, 준은 놀라울 만큼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 신경 쓸 가치도 없어 보인다 이건가? 알 수 없지만 내게 고정됐던 관심이 흩어지며 서로의 시선이 서로를 탐색하듯 움직인다. 자기소개도 끝났으니 이제 판단을 하는 거겠지. 자신이 대장 자리에 오르는 데 가장 방해가 될 인물이 누군지를. “기쁜 자리인데 분위기가 무거워졌군. 다들 통성명도 했으니 식사나 들지.” 때마침 후작이 나서며 환기시켰고, 이에 다들 식사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우리 중 한 명이 모두를 이끌 자리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다시피 막중한 의무가 따르는 자리요.” 총 서른 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 다만, 그 자리에 앉는 순간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나만 해도 후작이 빵빵한 지원을 약속했었고. “그래서 카이슬란 경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요?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드워프 아줌마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은 그 자리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알렸다. “크흠,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 의미를 그대들이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아줌마를 가장 큰 경쟁자로 여겼는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기사. “하하, 무슨 뜻인지는 알 거 같습니다. 저 역시 부단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책무와 의무에 짓눌려야 했으니까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단장도 은근하게 자신의 경력을 어필했다. 이야, 무슨 신경전이.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만, 준 경도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이오?” “사람의 감정만큼 덧없는 것은 없을 터.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방관자 포지션에 서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 이에 기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딱 성기사가 말을 이어붙이기 전까지만. “다만, 이 중에 신의 뜻에 가장 근접한 이는 저인 듯하군요.” 신이니 뭐니 말은 길었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이 경쟁에 참가하겠다는 뜻. 성기사의 뒷배가 삼신교임을 알기 때문인지, 기사의 표정에 조금 더 깊은 고민이 맺혔다. 이 역시 큰 경쟁자라 판단한 듯한데……. “그렇구려.” 뭐야,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사람 서운하게. *** 서로를 간보는 듯하던 신경전이 끝난 뒤. 기사 놈은 어딘가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이내 대화를 주도했다.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리는 하나뿐. 결국엔 우리 중에 누가 더 적임자인지를 가려야 하겠소.” “어머, 생각해 둔 방식이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일단 각자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휘관이 무엇인지 말해보는 건 어떻소?” 쉽게 말해, 서로의 성향을 좀 더 알아보자는 뜻. “좋네요. 그 정도라면야.” 기사의 제안에 드워프 아줌마와 부단장이 흔쾌히 동의했고, 나와 성기사도 딱히 반대표를 던지지 않으며 일이 진행됐다. “말을 꺼낸 게 나이니 내가 먼저 하겠소이다.” 역시나 첫 순번으로 나선 것은 처음부터 나서기를 좋아하던 기사. 놈은 군인답게 큰 목소리로 대차게 선언했다. “본디 집단이란 한 몸처럼 움직이지 못하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법.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통솔력이라고 생각하오.” “너무 추상적인 말이네요. 통솔력이 정확히 뭘 의미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규율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힘이라오. 통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지. 완벽하게 지배된 병력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군더더기가 없어진다오.” 벌써부터 이놈이 리더가 됐을 때가 연상됐다. 융통성 없이 사사건건 간섭하며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사라진 집단. 이내 녀석은 한참이나 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집단이 무엇인지, 또 장점은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이오.” 기사의 턴이 끝나기 무섭게 드워프 아줌마가 다음 순번을 낚아채갔다. “좋은 얘기 잘 들었어요. 그럼 다음은 제가 할게요.” 너무나도 틀에 박힌 얘기였던 기사의 것과 다르게 이 아줌마의 말에는 제법 흥미가 생겼다. 일단 최상위 탐험가 출신이잖아? 과연 이런 사람은 어떤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둘까. “예로부터 미궁에서의 문제는 탐험가들의 손으로 해결이 되어왔어요.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지금처럼 군이 개입하는 일은 극히 적었지요.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왕가에서 탐험가들의 방식을 존중하기 때문이오.” “그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왕가 입장에서 더욱 효율적인 게 크다고 봐요. 미궁에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모든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고, 그게 탐험가였죠. 애초에 미궁에선 수백수천의 군대를 운용하기에는 단점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아쿠라바, 그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휘관이 탐험가라는 뜻이오?”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단지, 미궁에서 누군가가 지휘를 해야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미궁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죠.” 드워프 아줌마가 요구한 자질은 납득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저 기사 새끼보다야 이 아줌마 아래에 있는 게 훨씬 더 안전할 거 같달까. 뭐, 저 말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례지만, 아쿠라바 선배님께서는 지휘 경험이 없지 않으신지요?” 부단장의 말에 드워프 아줌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존경하는 선배님 뭐니 하던 후배가 이런 식으로 물을 먹일 줄은 몰랐던 모양. 다만, 아줌마가 째려보는 와중에도 부단장은 자기 할 말을 모두 끝마쳤다. “예전에 팀 활동을 할 때에도 지휘는 그분이 모두 하셨던 거로 압니다마는.” “…그전에 팀을 이끌던 경험이 있어요.” “그러시군요. 하지만 하나의 팀을 통솔하는 것과 서른 명이나 되는 대인원을 이끄는 것은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와, 얘도 완전 노빠구네. 하긴 비즈니스 자리에서 선배니 뭐니 도의적인 감정을 따지는 게 웃기긴 하지. “아무튼, 제 얘기는 끝났으니 세 번째 차례는 제임스 칼라, 당신이 하면 되겠네요.” “뺄 이유는 없지요.” 드워프 아줌마를 깎아내리며 턴을 넘겨받은 그가 내민 가치는 바로 이것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력입니다. 아쿠라바 선배님이 말씀하셨지요? 어떤 상황에서든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요?” “미리 정보가 있으면,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설령 어찌 위기에 처한다고 한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늘어나고요.” 부단장은 견제가 목적이었는지, 드워프 아줌마를 콕 짚어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데 이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쪽에게 그 정도의 정보력이 있다면 말이죠.” 드워프 아줌마가 평소보다 좀 더 신경질적으로 답했고, 부단장은 이 반응을 유도했던 것처럼 즉각 입을 열었다. “제 뒤에는 알미너스 상회와 탐험가 길드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벽하게 세상 일을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 “적어도 이 중에서는 제 귀가 가장 밝을 듯하군요.” 그 말에 드워프 아줌마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야 알미너스 상회나 탐험가 길드가 뒷배라면 미궁 한정으로 왕가 이상의 정보 수집이 가능할 테니. 고급 정보 쪽에서는 좀 약세를 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여기까지인데, 그럼 다음은 어느 분이 하시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부단장 다음 차례는 성기사 준이었는데, 그는 미사를 보는 성직자처럼 설교하듯 우리에게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모든 것은 믿음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지휘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강한 믿음과 신뢰는 어떠한 악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만들어내며…….” 와, 이 사람 말이 많은 편이었구나. “세상에는 시련이 가득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이겨내고, 누군가는 좌절하며 믿음을 잃지요. 그런데 아십니까?” 눈빛도 이전과 달리 열정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목석같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나 시련을 이겨낸 자들은 믿음을 간직한 자였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타인과 타인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고, 그렇게 뭉쳐진 믿음만이 우리를 시련 속에서 구원하게끔 해주지요.” 후, 그래도 똑같은 말을 장황하게 반복만 해대면 질리는데. “하암…….”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고 있자니, 성기사가 입을 꾹 다물며 나를 째려봤다. “제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지루해 보이는군요.” 아니, 그럼 안 지루하겠어? 뭘 바랐냐는 듯 꼬나보자 성기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이제 당신이 말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내 성기사가 내게 턴을 넘기려 하자, 옆에 있던 쪽에서 더 좋아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려.” “네. 안 그래도 궁금했거든요.” 믿음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지루했던 건 얘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리헨 슈이츠, 당신은 어쩐 자가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부단장이 내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한 사람의 경쟁자를 보는 게 아니라 한 표를 던져줄 시민을 대하는 듯한 은근한 낌새가 묻어났다. 아니, 그건 얘만이 아닌가? “아까 보인 자네의 성향이라면 강하게 통솔할 수 있는 지배자를 원할 거 같네마는.” 슬쩍 자신을 어필하는 기사. “군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죠. 탐험가라면 제가 말한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진 않을 거예요.” 기사가 나서니 드워프 아줌마도 얼른 껴들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내가 자기들 의견에 동조해주길 기대하는 거야? 분명 아까 내가 분명히 말했건만. “…왜 웃는 거죠?” 그야 당연하지. “누가 적임자니 뭐니 하며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게 웃겨서.” “……?” “애초에 너희는 뭘 나불대며 설득을 하고 있는 거냐?” 지금까지 그들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열심히 고기를 씹어대며 식사를 마친 나는 손을 쪽 빨아 양념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냥 이긴 놈이 가지면 그만인 걸.” 벌컥벌컥 들이켠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쿵. 묵직한 충격음이 만찬장에 감돌았다. 다만, 움찔하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왠지 이럴 거 같았어요.” “그럼 슈이츠 씨가 추구하는 것은 ‘무력’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어딘가 한심하다고 여기는 듯한 시선들. 전부 다 내숭쟁이들이다. 아니면,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이제 보니 알량한 힘을 믿고 까부는 바보였군. 그런 식으로 우리를 납득 시킬 수 있을 거 같나?” “어.” “자고로 우두머리란 힘만으로 되는 게… 뭐?” “납득시키지 못할 이유가 있나?” 이제 배도 부르겠다 딱 운동하기 좋은 컨디션이란 말이지. “혀는 그만 놀리고, 덤벼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내 시선을 받고 있던 기사가 당황했다. 후작도 있는데 이래도 되는가 싶은 눈치. “나는 자네들이 어떤 방식을 택하든 참견할 생각이 없네.” 이번 일은 내게 일임하기로 결심했는지, 완전히 내게 맞춰주는 후작. “그렇다는군.”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드워프 아줌마가 비아냥대듯 말했다. “설령 당신이 그와 싸워 이긴다 한들, 우리가 당신을 인정할 일은 없어요. 힘만 믿고 까부는 자가 그런 위치에 서게 된다면—” 뭐래 이 아줌마는 또. “다른 말이었으면 납득했을 거냐?” 내가 아까 얘네가 하던 짓을 시간 낭비라 말한 근본적인 이유다. 나는 한 명씩 응시하며 말했다. “강한 통제.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 광범위한 정보 수집 능력. 그리고 신뢰.” 앞선 넷이 말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 “그래, 전부 다 나쁘지 않지.” 이것만은 진심이다. 하지만, 여기엔 아주 중대한 문제가 껴 있다. “근데 그걸 백날 떠들어봤자, 저 사람이 대장을 하는 게 좋겠다고 납득할 사람이 있긴 한가?” 모두가 바라는 것은 합의로 얻어낼 수 없다. 가판대에 올린 게 저딴 허상의 가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당신은 다르다는 건가요?” “그래.” 무력은 다르다. “그러니까 덤벼라.” “괜한 짓 마세요. 만에 하나 당신이 정말 그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겠지. 그 정도야 나도 안다. 하지만……. “누가 한 명이랬지?” 바바리안으로서의 삶이 내게 알려주었다. 만약 무력으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전부.” 그 사람의 무력이 부족했을 경우뿐. “……?” 뇌가 따라가지 못한 듯 보이는 네 명의 남녀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전부 다 같이 덤벼라.” 넷 중에 마법사는 없다. 394화 캡틴 바바리안 (4) 굳이 넷과 한 번에 싸우겠다 한 이유는 간단하다. 1:1 토너먼트로 네 명 전부를 쓰러뜨린다 한들, 그들은 납득하지 않을 테니까. 모두를 납득시킬 방법은 이것뿐이라 판단했다. 집어 삼키지 않고서는 못 배길 먹이를 눈앞에 던져주는 것. “아,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진다면 대장 자리는 깔끔하게 포기하지.” 한 명의 경쟁자를 무대 위에서 치워버릴 기회. “근데 왜 아무도 말이 없나? 혹시 넷이서 같이 덤비고서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건가?” 여기에 도발까지 더해지자 슬슬 상대 측에서도 반응이 나왔다. “저는 찬성이에요.”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한 명을 상대로 저렇게 할 것까지야—” “알아서 나가떨어져 주겠다는데 굳이 반대를 할 이유가 있나요?” “아쿠라바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드워프 아줌마의 말에 부단장도 가세하며 만들어진 여론. 이에 기사도 내키지 않는단 표정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고, 성기사도 침묵하며 찬성 의사를 표했다. 본인들도 아는 거겠지. 남들에게 들려주기엔 상황이 조금 우습겠지만, 한 명의 경쟁자를 손쉽게 떨쳐낼 수 있는 기회란 걸. “리헨 슈이츠라고 했죠?” “그런데?” “조금 전에 한 약속은 지켜야 할 거예요.” “물론이다. 만약 내가 진다면 군말없이 너희 중 한 명을 대장으로 모시지.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확답을 듣고 싶은 거겠죠? 좋아요.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우리 모두를 이긴다면 당신은 원하는 자리를 얻을 거예요.” 이후 나는 아쿠라바 말고 다른 셋에게서도 확답을 요구했고, 그렇게 순식간에 구두 계약이 끝났다. 서면으로 남긴 건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 확실한 공증인이 있으니 걱정은 내려둬도 될 터. “그럼 됐군요. 후작님, 적당한 곳이 있을까요?” “물론일세.” 후작은 내가 걱정이 되지도 않는지 흔쾌히 저택의 연병장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아마 나를 100% 신용해서 저런 건 아닐 거다. 단지, 내가 만용을 부려 실패했다고 한들 거기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예를 들면 이번 실패를 이유로 사사건건 간섭을 해온다든가. “자,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이내 연병장에 도착한 후에는 장비를 챙겨입었다. 「캐릭터가 아다만티움제 대형 전투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750 상승합니다.」 과거에서 돌아와 거금을 주고 다시 구매한 방패부터 시작해. 「캐릭터가 강철제 흉갑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50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강철제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75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워 부츠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5 상승합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싸게 맞출 수밖에 없었던 저렴한 장비들. 후, 이제 돈도 생겼으니 싹 다 아다만티움제로 바꾸든가 해야지. 「캐릭터가 No. 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800 상승합니다.」 이내 망치까지 풀장착을 하고서 연병장으로 나오자, 머지않아 준비를 끝마친 네 명의 남녀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참 이상하지 않소? 이제는 천옷보다 이쪽이 더 편하단 말이야.” “몸이 맞춰졌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일상복보다는 이쪽을 입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때깔의 장비들. 다만 아무리 관리를 잘 했어도 마모된 부분이나, 관절부의 헤진 자국들이 눈에 띈다. 나는 그들의 장비를 눈여겨보았다. ‘얼씨구, 다들 못 보던 장신구까지 풀로 끼고 왔네.’ 그래, 다들 정장 차림으로 왔어도 아공간에 장비들을 챙겨왔을 줄 알았지. 안 그러면 탐험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한데, 저쪽은 영…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군요.” “혈령후의 남자라더니, 그녀가 갑옷은 사주지 않던가?” “리헨 슈이츠, 정말 그 장비를 입고 싸울 생각인 건가요?” 내가 입은 평범한 강철제 장비들을 보며 묘한 표정을 내짓는 네 명의 남녀. 눈빛은 멸시보다는 낯설다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하긴, 후작가의 추천으로 이 자리에 선 내가 이렇게 수준 미달일 줄은 예상치 못했겠지. “문제없다.” 강철제 갑옷이 뭐 대수인가? 이번 전투에 있어 그리 유의미한 변수는 아니다. 뭐, 솔직히 저런 시선이 모이니 조금은 창피해서 PTSD가 재발할 것도 같았지만……. 이 또한 생각해 보면 크게 상관은 없는 문제다. “자, 덤벼라.” 상식적으로, 머리통이 박살난 쪽이 더 창피한 모습이잖아? *** 고수의 싸움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극딜 검사들끼리 생사결을 벌이는 와중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진성 탱커이지 않은가. 내 진가는 장기전으로 갔을 때 발휘된다. 하지만……. 일단 시작만큼은 적어도 내가 상상한 고수끼리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어느샌가 사라진 대화. 서로의 간격에서 떨어진 거리. 감기는 주기가 줄어든 눈꺼풀. 시선이 교차하며 무거운 긴장감이 깔린다. 숱한 실전으로 학습된 근육은 어느 순간에라도 최적의 힘을 낼 수 있도록 수축되며, 무기를 쥔 손에 점차 땀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스윽. 작은 움직임에서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 다대일 전투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다. 신경을 써야 할 게 너무나 많거든. 그래, 그러니까 차라리…….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질문을 던지고서, 상대가 답하려는 그 찰나. 그 한 번의 호흡을 빈틈으로 삼아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대시한다. 첫 목표물은 가장 호전적으로 앞에 서 있던 기사. “……!” 호흡을 강제로 삼킨 녀석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자신이 첫 타깃이 되었다는 것에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한데……. 후우우우웅-! 경지에 다다른 숙달된 기사의 오러가 순식간에 칼날을 휘감으며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미궁이든 도시든 수많은 중갑쟁이들을 두부처럼 썰어댔을 그 오러.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방패를 들어서 막아냈다. 카칵! 평소처럼 쓱 베이는 게 아니라 검이 튕겨져 나가자 당황한 눈빛을 띠는 기사. 그러나 실전으로 다져진 군인답게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휘이이익-! 놈이 튕겨진 힘을 이용해 허공에서 회전하며 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이번 타격지는 방패로 막기 힘든 하단부. 정확히는 강철제 각반으로 피부를 감싼 종아리 부분이었다. ‘아다만티움이 문제라 생각한 건가?’ 한 번의 공방을 나눈 순간에 내린 판단이라기에는 굉장히 빨랐다. 문제는, 정답이 아니란 거지만. 카칵! 거, 강철제라고 무시하나. 안 그래도 큰 동작을 소모하며 빈틈을 많이 내보인 상대였기에 발로 놈의 턱주가리를 올려찼다. 콰앙-! 반동으로 인해 허공에 떠오른 육신. 딱 망치로 후려치기 좋은 각도— 「준 아르셴이 [수호의 빛]을 시전했습니다.」 니미럴. 콰아아앙-! 때마침 시전된 신성 주문이 기사의 머리 위에 반투명하게 펼쳐지며 내 망치질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틈에 뒤로 물러나는 기사. “어떻게……?” 녀석은 구사일생을 한 상황에서도 한 가지 의문에 더욱 매몰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간, 기사들은 어찌 다 저리 똑같지? ‘……철제 방어구로 오러를 막아내면 놀랄 만하기는 한가?’ 아무튼, 명품을 입는 것보다 본인이 명품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 있는 이유다. “아무리 봐도 장비 자체는 평범해요.” “그렇다면 저 기현상은 사람에 있겠군요.” 정답이다. [합일]에 의해 물리 내성이 장비에 플러스 알파로 추가되는 것은 물론 [진화형 외피], [무쇠가죽]도 적용이 되거든. 뭐, 아다만티움 방패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반면, 철제 방어구엔 흠집이 깊게 새겨졌지만. “무슨 정수들을 먹은 건지는 몰라도 오러를 막다니, 마냥 오기를 부린 건 아니었던 듯합니다.” 비교적 전장과 거리가 먼 후방에서 나를 보며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는 아쿠라바와 부단장. “몇 가지 짐작가는 게 있어요. 어째서 그게 무구에 적용되는진 모르겠지만. 칼라 군, 한번 화살로 공격해 보겠어요?” 아쿠라바의 지시에 용가죽 갑옷으로 깔맞춤한 부단장이 활의 시위를 당긴다. 설마, 도검 내성을 벌써 파악한 건가? 「제임스 칼라가 [꿰뚫는 빛]을 시전했습니다.」 화살촉에 빛이 뭉쳐지기 무섭게 방패 안에 몸을 집어넣어 방어했다. 그야 눈으로 보고 막으면 이미 늦거든 저건. 휘융-! 짧은 섬광음과 함께 쏘아진 빛 화살. 방패로 제때 잘 막았기에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화살촉이 박혔네요.” 오러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아다만티움 방패에 깊숙히 파고든 화살촉. 이내 아쿠라바가 소리쳐 정보를 공유했다. “저 남자에게 검은 통하지 않아요.” 후, 이러다가 밑천이 다 털리겠— 콰앙-! 아까 기사를 밀쳐낸 이후로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하며 거리를 좁히고 있던 내 앞을 성기사가 가로막았다. 녀석의 주무장은 거대한 방패와 메이스. 그래, 탱커한텐 저 조합이 근본이긴 하지. 콰아아앙-! 무기를 쓰기보다는 방패로 벽을 만들며 나를 저지하고자 한 성기사. 지이이익. 다만 기본 근력이 높은 편은 아닌지 충돌한 즉시 발이 땅을 끌며 뒤로 밀려난다. 뭐, 애석하게도 멀리 가지는 않았지만. 「준 아르셴이 [신성개방]을 시전했습니다.」 「준 아르셴이 [차오르는 힘]을 시전했습니다.」 「준 아르셴이 [태양의 축복]을 시전했습니다.」 버프 및 자힐 탱커의 대명사인 성기사답게 놈이 각종 신성 주문을 연달아 사용하며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굉장한 힘입니다.” 어느덧 멈춰선 채 조금도 밀려나지 않으며 나를 칭찬하는 말을 해왔다. 쓰읍, 자존심 상하게. 그래도 뭐, 원하는 거리까지는 왔으니 됐나?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PVP에서 최대 효율을 발휘하는 나만의 그랩기. 최대 거리는 20m이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한 이유는 간단하다. 거리가 짧으면, 그만큼 더 반응하기 어렵잖아? 휘이이이이익-! 점잖던 공기 중에 세찬 돌풍이 피어난다. “읏……!” 내가 지정한 타깃은 후방부의 부단장이었다. 그야 원래 다대일 전투에서는 후위를 먼저 조지는 게 정석일뿐더러……. ‘저딴 갑옷을 입고 있으면 찢고 싶어지잖아.’ 드레이크 가죽은 항마력 보정이 상당한 대신, 물리력에는 취약한 성질을 지녔다. 쉽게 말해, 한 대만 쳐도 빈사 상태라는 뜻.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지금껏 아껴둔 스킬을 사용하며, 늘어난 근력으로 성기사를 밀쳐냈다. 그리고……. 타닷. 돌풍을 타고 날아드는 궁수를 향해 점프. [거대화]를 하며 한층 더 늘어난 리치로 궁수놈이 뭔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망치를 내려친다. 「준 아르셴이 [수호의 빛]을 시전했습니다.」 뭐, 나를 놓친 성기사놈이 아까 기사를 구원한 신성주문을 다시 사용했지만……. 「캐릭터가 변신계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초의 세포] 효과에 의해 해당 스킬의 영혼력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1.5배 상승합니다.」 아까와는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아까는 그냥 평타였잖아?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내 유일한 공격 스킬 [휘두르기]. 콰지지직-! 이내 망치가 닿은 즉시 결계가 유리창처럼 깨져나갔다. 콰직-! 부단장이 박살난 이마로 피분수를 뿜어내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한 명의 기사, 한 명의 탱커. 그리고 9층 탐험가 아쿠라바가 있음에도 막아내지 못한 불상사. “…….” 불편한 침묵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숫자를 셌다. “일단 하나.” 남은 것은 셋이다. *** 네 명의 고위 탐험가. 음, 그중 한 명은 기사니 빼야 하나? ‘이제부터가 진짜겠네.’ 네 명의 실력자를 상대로 쉽게 한 명을 없앴지만, 나는 방심은커녕 각오를 다잡았다. 이게 순전히 초반 어드밴티지란 걸 아니까. 나는 후작에게서 놈들에 대해 이것저것 들었지만, 놈들은 나에 대해 아는 게 극히 적었다. “…….” 그런 의미에서 조금 상황이 공교롭다. 즉사는 아니지만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부단장. 아까 만찬장에선 ‘정보력’이 가장 중요하다 설파한 놈이 정보의 부재로 가장 먼저 아웃되다니. ‘사실 아예 아웃시켰다 하기엔 좀 그렇지만.’ [던전앤스톤]은 죽지만 않으면 되살려내는 게 가능한 세계관. 「준 아르셴이 [재생의 손길]을 시전했습니다.」 성기사의 몸에서 새어나온 새하얀 광채가 기절한 부단장의 몸으로 흘러들어간다. 방패바바에게 캔슬기가 있을 리도 없으니 결국 언젠가 놈이 회복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하지만……. ‘단기전은 안 돼.’ 나는 급하게 모든 걸 쏟아부으며 회복되기 전까지 이 승부를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애초에 그런 압도적인 승리는 바라지도 않았으니.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조합을 잘 맞췄다고 최상위권 탐험가 넷을 혼자 박살내는 게 말이나 되는가. 모든 것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 냉혹한 세상의 유일한 진리다. 그렇기에……. “우아아아아아아—!!!”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나간다. 콰앙. 성기사가 나를 가로막았다. 후우우우웅-!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날아오르며 무기를 휘둘러온다. 아까 맥없이 떨어져 나간 기사놈이다. 언제 무기를 스왑한 건지 검이 아니라 둔기를 손에 쥐고 있다. 기사가 오러가 아니라 일반 무기를 쓰는 것도 좀 웃기긴 하지만……. 이것도 상위권 실력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에 알맞는 대처를 하는 것. 콰아아아앙-! 내리쳐진 둔기가 내 어깨를 파고든다. 물리적인 충격 자체는 그리 심하지 않다. 그러나, 맞는 순간 뼛속부터 뜨거움이 올라온다. 무엇이 이유인지야 뻔했다. ‘무슨 스왑용 무기로 저런 걸 들고 다녀?’ No. 761 로암의 용광로 망치. 트리플 넘버스 아이템이었다. 효과는 물리력에 비례해 화염 관통 딜을 추가로 넣어주는 것. 그래도 화염 내성 덕에 아직은 버틸 만했다. “우아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야성분출]을 발동. 일시적으로 증가한 육체 수치를 이용해 한 번 더 성기사를 발로 차서 멀리 밀어낸— ‘뭐야, 왜 안 밀려.’ [던전앤스톤]에 20대를 바치며 절여진 나의 뇌는 의문과 동시에 해답을 찾아냈다. 「준 아르셴이 [성체강림]을 시전했습니다.」 그래, 벌써 그것도 발동시킨 거구나. ‘역시 쉽지가 않네.’ 아무래도 한 명이 당하고 나니 이놈들도 방심을 완전히 버린 모양이다. 이제부터 한동안은 성기사 상대로 근력적 우위는 보기 어려울 테고……. 「티타나 아쿠라바가 [No. 1911 파벨러의 고장난 회중시계]를 사용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드워프 아줌마도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참고로 이 아줌마는 공격형 이능술사다. 넘버스 아이템을 필수로 쓰는 드워프족에 있어서 전사만큼이나 효율이 좋은 포지션. 「5분간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사라집니다.」 그 일례로, 저 시계도 원래는 드워프가 아니면 그냥 70% 감소로 끝나는 아이템이다. 9층이라더니, 이거 말고도 코어템은 다 있다고 보면 되겠고. 그러니까, 이 아줌마 주력기가 뭐라고 했더라? 「티타나 아쿠라바가 [흡혈송곳]을 시전했습니다.」 아, 맞다 이거였지. MP 소모도 적고 대미지도 준수하며, MP 흡혈이란 특징도 있는데, 쿨타임이 있어서 평가가 낮은 2등급 스킬. 휘이이이익-! 거대한 송곳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원래라면 피하는 게 베스트지만, 내 양옆을 성기사와 그냥 기사가 가로막은 상황. 콰아앙-! 그래서 그냥 방패로 막아냈다. 이능술사이기는 했지만, 이런 기술은 그냥 물리 딜로 판정이 돼서 말이지. 팔이 좀 뻐근한데, 못 버틸 건 아니다. 문제는, 이걸 막느라 옆이 비었단 거겠지만. 틈이 보이기 무섭게 성기사와 그냥 기사가 둔기로 나를 후려쳤다. 콰아앙-! 하나는 맞자마자 온몸이 불타는 듯했고. 콰아앙—! 하나는 그냥 물리 내성을 뚫고서도 뼈까지 딜이 박혔다. 하긴, [성체강림]이면 지금 근력이 나보다 2배는 높을 테니. ‘그래, 방어는 그냥 포기하자.’ 나는 빠르게 판단을 끝마쳤다. 어차피 한 대를 막아도 두 대를 처맞는 상황이라면. 세 대 맞고 한 대라도 치는 편이 나을 터. 게다가 7단계 각인 덕분에 이제 자연 재생도 꽤 괜찮게 되는 편이고. 콰아아앙-! 방패로는 큰 공격들 정도나 막아내며, 망치를 휘두른다. 이에 남은 셋도 위협적이라 생각했는지, 쓰지 않은 스킬들을 개방하며 나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깨어났으면 얼른 활부터 잡으시오!” 부단장도 힐을 받고 전투에 복귀했다. 콰아아앙-! 방패는 그나마 나았지만, 기본 내구도가 낮은 강철제 갑옷은 곳곳에 손상이 가해졌고. 휘이이익-! 푸욱! 그런 부분에 화살이 파고들며 부상이 점점 늘어난다. 화아악-! 용광로 망치에 하도 맞았더니, 처음에는 버틸 만하던 게 이제는 뜨거워 뒈질 거 같다. 콰아앙-! 성기사놈의 메이스질은 맞을 때마다 뼈가 조각나는 기분이고. 아, 실제로 조각이 났다가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으려나? 음,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웃는다고?” 나는 그럴수록 웃었다. 그야 이 정도 힘들 건 예상했으니까. 푸우우우웃-! 아까 망치에 처맞고 혀를 깨무는 바람에 입에 고인 핏물을 분수처럼 뿜어낸다. 더 이상 산성피가 나오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시야는 가려지잖아? “…괴물놈.” “인정하긴 해야겠구려, 나보다는 그대가 확실히 더 강하오.” 그렇게 한참이나 개싸움을 하고 있자니, 기사가 뭐라 씨불여댔다. “하지만, 아무리 그대라도 넷을 한 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라오. 이만 포기하시오.” 뭐래. 지들도 지쳐서 헥헥대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래도 나는 MP는 꽤 많이 남았거든? 「캐릭터가 [영혼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거의 바닥에 처박혔던 MP가 확 채워진다. 그 상태로 더 전투가 이어졌고, 그로부터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왜… 쓰러지지 않는 거지?” 포기하라고 제안하던 잘난 듯 말했던 기사가 그런 의문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근원의 샘물이라도 마신 것 같군요.” 이에 화답하듯 성기사도 뭐라 중얼거렸고. “이만하세요. 이길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알지 않나요?” 드워프 아줌마는 내 고집에 질린 듯 말했다. “약속은 없던 거로 할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어떻습니까?” 궁수는 이 지긋지긋한 전투가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모두… 갑자기 말이, 길어졌군.” 놈들이 날 설득하려 할수록, 나는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질까봐, 불안해지기라도 했나?”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제발, 쓰러지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가장 잘해왔던 것. 「티타나 아쿠라바가 [흡혈송곳]을 시전했습니다.」 「제임스 칼라가 [꿰뚫는 빛]을 시전했습니다.」 「준 아르셴이 [재생의 손길]을 시전했습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다 보니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사용자의 영혼력이 부족해 스킬이 취소됩니다.」 「사용자의 영혼력이 부족해 스킬이 취소됩니다.」 「사용자의 신성력이 부족해 스킬이 취소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놈이 더 강한 거다. 395화 캡틴 바바리안 (5) 머리가 아프다. 속은 메스껍고 입술은 바짝 말랐으며, 목구멍은 수분을 잃어 텁텁하기만 하다. 하나 그런 불편함보다는 의문이 먼저였다. ‘근데,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톱니이빨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는 호흡 정지가 왔던 사람처럼 마른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허업……!”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고급스러운 원목에 아름다운 패턴이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줄에 매달린 천장. 먹먹한 정신으로 이곳이 어디인가를 유추하고 있던 때, 눈앞으로 한 남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요.” 토베라교의 성기사, 준. 처음 봤을 때, 뭐 이렇게 잘생긴 성기사가 있나 싶었— “아……!”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제임스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행히 제때 피해 얼굴이 부딪치지 않은 성기사에게 황급히 물었다. “승부는… 승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의 물음에 성기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역시…….” “예, 졌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정말로 강하더군요. 그 사람은.” 아쉬움조차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의 성기사와 달리 제임스 칼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라 님은 승복하기 어려우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절 믿고서 지원해 준 알미너스 상회나 탐험가 길드에는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가 막막했을 뿐…….”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명이서 덤볐다가 져서 웬 야만적인 인간에게 대장직을 줘야 할 판에 놓였다고요? 그런 말을 대체 어떻게… 아니, 왜 웃으십니까?” “아, 실례. 야만적이라는 말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 말에 제임스 칼라는 말실수를 인정했다. 패한 입장에서 이런 비방의 말을 하는 게 어떻게 보일지 깨달은 것. 깎아내리려고 험담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가 부단장 자리에 오르면서 수없이 만났던, 혐오스러운 종자들처럼. “칼라 님은 아직도 그를 인정하기 어렵습니까?” “그건…….” 말꼬리를 흐리던 그가 씁쓸한 어조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야만스럽다는 말이 먼저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첫인상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일 뿐이니까. “그 남자는… 똑똑한 사람이더군요.” 칼라의 읊조림에 성기사가 이견 없이 수긍했다. “예, 그렇지요.”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그자의 손에서 놀아났습니다. 우리를 쉽게 본다고 여겼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옳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저희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분명 저도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는 거겠지요.” 제임스 칼라도 극구 동의하는 말이었다. 만약 ‘혈령후의 남자’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웃어넘길 게 아니라 더 자세히 조사를 해봤더라면 이 꼴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다른 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모르겠다는 거군요. 아, 카이슬란 경과 아쿠라바 선배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다른 방에 있습니다. 아까까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칼라 님과 달리 부상이 좀 더 심했던 터라.” “…직접 가보는 편이 좋겠군요.” 이후 둘은 나뉘어서 개인 병실로 향했다. 이미 신관을 통해 몸의 치유는 다 끝난 상태고, 의식만 회복하길 기다리면 된다던가? 옆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머지않아 티타나 아쿠라바가 눈을 떴다. “그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졌나 보네요?” 그녀는 제임스와 달리 긴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착잡한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있더니, 다른 이들은 어딨냐고 물었을 뿐. “아쿠라바 님도 깨어나셨군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예, 다행히요. 근데… 그 남자는 어디 있죠?”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깨서 마음 정리를 할 때까지 시간을 주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설마, 그 남자가 그 정도까지 섬세하려고.” 아쿠라바가 털털하게 말하자, 침잠하던 분위기가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 상태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카이슬란도 정신을 차렸다. “…그자는! 그자는 어떻게 됐소이까!” 본격적으로 의논을 할 차례였다. *** “그렇구려. 우리가 진 것이야…….” 깊은 회한, 그리고 이유 모를 노기가 진득하게 실린 중얼거림. 이내 기사 카이슬란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소이다.” “패했다는 사실을요?” “아니, 그것을 부정할 만큼 미련하진 않소. 다만, 우리가 진 것과 그놈이 감투를 쓰는 것은 별개라오.” “어머나, 후작님 앞에서 공증까지 받은 약속을 어기시기라도 하겠단 건가요?” 후작의 이름이 나오자 카이슬란도 잠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고집을 꺾기에는 부족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순순히 납득할 것이오? 무려 서른 명이오! 그냥 서른 명도 아니고, 이 도시의 미래를 짊어진 최고의 인재들이지! 그런데 그들의 목숨을 가진 게 힘밖에 없는 자에게 일임하겠다고? 대의를 위해서라도 그 꼴을 좌시할 수는 없소!” 날선 외침에 제임스 칼라는 자신도 모르게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답이 없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카이슬란 님은 무력만 뺀다면 다른 분야에서 자신이 그 남자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거요.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놈보다야 우리가 낫지 않겠소?” “그렇군요. 하면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런지 말씀을 해보시겠습니까?” “왜 그런 눈빛인지 나는 이해가 안 되는구려. 다들 아까 이상적인 지휘관이 무엇인지 심도 깊은 대화도 나누지 않았소? 그자를 빼면 단 한 명도 무력을 얘기한 자는 없었소.” “그랬지요.” “다들 알고 있던 것 아니오? 지휘관의 무력이란, 그 어떤 자질보다도 우선순위가 낮다는 걸.” 제임스가 보기에도 기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휘관은 명검을 다루는 자이지, 꼭 본인이 명검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작이 공증까지 한 이상 결과는 뒤바꿀 수 없다. 지금이라도 선을 그어두는 편이 좋겠군.’ 제임스는 정치적 계산을 끝마친 뒤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남자의 자질이 우리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뭣이?” “패한 입장에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는 저희 넷보다 월등하게 강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제임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우리에게 미리 합을 맞춰볼 시간이 있었고, 처음부터 진심으로 상대했다면 승자는 달랐을 거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의미는 없겠지.’ “한 번뿐인 승부에서 우리는 졌고,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 차이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임스도 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싸울 때를 보니 알겠더군요. 그는 이미 우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정수를 가졌는지, 어떠한 장비를 사용하는지까지.” “그래서 그대가 말했던 이상적인 지휘관에 그자가 적합하다 이건가? 정신 차리시오! 그자는 단지 후작에게서 정보를 얻었을 뿐이오!” “그게 가장 무서운 점 아닙니까? 우리는 이곳에 오기까지 누가 이곳에 오는지도 몰랐지만, 후작은 달랐다는 소리이니.” 제임스의 말에 카이슬란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 뜻은 알겠네. 그대는 그 사내가 우리 위에 서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보겠다는 거군. 다들 같은 의견인가?” 이내 카이슬란의 시선이 9층 탐험가, 티타나 아쿠라바에게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셔도, 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네요.” 기대했던 지원 사격은 없었다. “…이유가 뭐요? 후작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오?” “아예 없다고 하진 않겠어요. 다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커요.” “다른 이유?” “네. 그 사람이 딱히 우리보다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가 않아서.” 카이슬란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좁게 뜨자 아쿠라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인상 깊게 본 점은 뒷배 같은 게 아니라 그 사람 본연의 치밀함이에요.” “치밀함……?”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공기를 내뱉는 카이슬란. “네. 치밀함이요. 일례로 만찬장에서 어땠나요?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모른다는 듯 행동했고 오만한 행동을 보이며 우리가 미끼를 물도록 유도했죠.” 어디 그뿐인가? 전투가 벌어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정수의 이능들을 마지막까지 아꼈다가 가장 최적의 효율을 보일 수 있을 때만 꺼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제임스 칼라가 있었다. 그가 맥없이 당하며 초반에 더욱 많은 부담을 남은 셋이서 져야 했으니. “그리고 이건… 판단력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싸울 때의 감각만큼은 경이로울 정도였어요.” “…타고난 자더군요.” 스스로를 불사르는 듯하나, 정작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역시 그 세찬 불길에 휘감겨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자는 만족스레 미소 지었고. “그땐 본능에 맡긴 전투 방식이라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린 거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겠군요. 한쪽 눈을 포기하며 망치로 카이슬란 경을 내리친 게 이성적인 결정이었다니.” “전열이 무너진 게 그때부터였으니, 그 입장에선 이득이 훨씬 더 컸습니다.” 제임스 칼라와 성기사가 서로 주고받으며 찬사의 말을 나누자 카이슬란이 이를 악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뭐지, 이자들은?’ 원정대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알 텐데도 이런 꼴이라니. 혹시 의식이 없던 동안에 후작과 뭔가 밀약을 맺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 다만, 그런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대화는 이어졌다. “사실… 제가 가장 높게 여긴 점은 목표를 이루어 내겠다는 결의입니다.” 하, 이번엔 결의야? 카이슬란은 못내 코웃음쳤지만, 성기사는 아무런 반응도 않고 말을 이었다. “칼라 님이 말했듯, 그는 저희 넷보다 월등하게 강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 그럼에도 오만할 정도로 대범하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뼈가 수없이 박살 났으며, 내장은 익었고, 한쪽 눈에는 화살이 틀어박혀 애꾸가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불로 벽을 세우면 피부를 태우며 넘어갔고, 혀를 씹어 만든 피를 뱉었다. 견갑골이 내려앉아 어깨가 달랑거려도 망치를 휘둘렀다. “과연 이 중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까지 그러한 상태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싸우는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남자라고 그 과정이 즐거웠을 리 없다.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여기서 포기하더라도, 누구나 납득했을 것이다. 그만큼 한계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되면 마음의 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할 만큼 했어. 타협을 하고 스스로를 설득할 핑계를 만들기 시작하죠.”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성기사는 신의 종속된 자답게 그 원인을 믿음에서 찾았다. “믿음입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본인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것이고, 시련을 넘어서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하면, 준 경도 그자가 지휘관이 되는 것에 찬성을 한다는 뜻이구려.” 어딘가 비아냥거리는 듯한 중얼거림. 다만 성기사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하였다. “예. 제가 이 중 누군가의 등을 따라야 한다면, 저는 그자의 등이 가장 믿음직하군요.” “……. “모두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자만큼은 굳건히 서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성기사는 그 남자에게 제대로 꽂힌 거 같았다. 제임스 칼라는 후작을 신경 쓰고, 아쿠라바는 약속을 했으니 이를 어기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고. “이만 인정하세요. 우리가 졌어요. 애초에 기절한 사람이 회복되어 전선에 복귀해도 그는 불만조차 내뱉지 않았잖아요? 그땐 싸우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이는 반칙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침묵한 것은, 그 정도는 돼야 우리가 납득할 거라 생각한 거겠지요.” 세 명의 의견이 일치한 이상, 카이슬란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다행이야. 저자가 승부에 불복하며 후작에게 재대결이라도 요청했다면, 후작의 성격상 가만둘 리가 없었을 테니.’ 괜히 불똥이 튀는 일을 면한 제임스 칼라는 입을 꾹 다문 카이슬란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직 불안 요소는 남아 있기는 했다. “다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진 않겠소. 하나, 이게 실수란 것만 알아두시오. 아까도 말했듯, 강한 규율과 강한 통제만이 강한 집단을 만들어 내는 법. 그에게 그 정도의 통솔력이 있으리라고는 여길 수 없소.” 끝까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태도. 딱 봐도 뭔가 건수만 생기면 언제든 들고 엎으며 일어날 것만 같은데……. 만약 그 장소가 미궁 내에서라면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아, 다들 깨어났나 보군.” 허락을 하기도 전에 벌컥 열린 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 순간. 제임스 칼라는 작은 불안마저도 털어냈다. “이제 내 부하가 됐으니 말은 편하게 하지.” 애초에 경어를 쓴 적도 없으면서도 뻔뻔스럽게 그러한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 그가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기사 넌 눈깔을 왜 그렇게 뜨지? 혹시 아까 맞은 머리에 문제라도 있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에 핏대를 세우며 통솔력의 중요성을 소리치던 기사가. “대답해, 있냐고 묻잖아.” “어, 없소…….” 어느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마치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396화 원정대 (1) 정색한 채 한참이나 기사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다가 표정을 바꾸었다. “내 착각이었나 보군.” 부드러워진 내 표정에 안도를 하면서도 놈은 뭔 소리인가 하는 눈빛을 지었다. “아, 머리에 문제는 없는 듯해 다행이라고.” 이내 기사의 어깨를 두드린 뒤, 다른 세 명에게도 내가 대장이 되는 것에 이견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후작 앞에서 공증까지 받은 약속을 깰 간담은 없을 듯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은가. 후속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없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내기였으니까요.” “그렇게 되었으니 언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불러주시길.” 의외로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아무런 이견도 내지 않았다. 다들 생각보다 쿨한 타입들인가? 본인만이 아니라 뒷배의 정치적 이권이 걸린 만큼 욕심을 부리는 애가 하나는 나올 줄 알았는데. 뭐, 나야 일거리가 줄어서 좋긴 하지만. “아무 불만이 없다니 잘 됐군.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네? 가보겠다니요?” 떠나겠다 말하며 등을 돌리려 하자 네 사람 모두 의문의 눈빛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대장도 정해졌으니, 뭔가 더 대화를 나눌 거라 생각한 듯한데……. “배가 고파서 말이지.” “……?” “그럼 나중에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네 명을 뒤로하고서 방을 벗어났다. 일종의 빌드업이다. 영원히 리헨 슈이츠로 살 것도 아니고, 세 달 뒤엔 밝혀질 거잖아? 미리 이런 모습을 보여 줘야 그때 납득이 빠를 거다. 어쩐지, 하는 짓이 뭔 야만인 같더라니.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하고. “왔나.” 이후 향한 곳은 후작의 집무실이었다. 떠나기 전에 일단 보고는 해주는 게 도리란 판단. “어떻던가?” “어떻고 자시고, 별일 없었다.” “모두 순순히 납득을 했단 뜻인가?” “안 하면 뭐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겠군.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말해주게.” “든든하군.” 그럼 이거로 중간 보고는 끝— “아, 그리고 하나 더.” “……?” “지휘관이 정해졌으니, 곧 창단식이 있을 걸세.” “창단식?” “미궁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 안면을 틀 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번 계획에 참가한 후견인들도 자네들을 한번 보고 싶어 할 테고.” “그럼 그건 언제 하는 거지?” “일정이 나오면 바로 전달하도록 하겠네.” 조금 웃겼다. 미궁 입장까지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이제 창단식을 하고 안면을 튼 뒤에 곧장 미궁에 들어가야 하다니? 이거야 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이유가 뭘까.’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그 답은 너무나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일단 15일은 지난 뒤에 하려 했겠지. 노아르크 측에 정보가 넘어가기 가장 쉬운 시기니까.’ 윗놈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정보 노출을 줄이고 싶었으리라. 실제로 창단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니, 보안 유지 때문에 수백 명을 불러놓고 성대하게 치르는 건 불가능하다는 답이 나왔고. “아무튼, 창단식은 알겠는데 내 팀원이 될 둘은 어떻게 됐나? 걔네도 창단식 때나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자네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게 조치를 취해두겠네.” “그럼 내일 내 집으로 둘을 보내주겠나?” “그렇게 하지.” 내 요구에 후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로 주고받을 대화는 다 나눈 건가?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을 각을 보고 있던 때, 후작이 돌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뭐지?” “만찬장에서 내기를 걸었을 때 말일세…….” 이내 후작이 호흡을 고르고서 내게 물었다. “넷을 상대로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던 건가?” “왜 그게 궁금해진 거지?” “그야 궁금할 수밖에. 자네도 내가 준비한 서류를 봤을 테니,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았을 거 아닌가. 그래서 처음에 내기를 걸 때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네.” “그런데?” “지켜보니 그렇지가 않더란 말이지. 몇 번이나 마음을 졸일 상황이 있었는지 아는가?” 대충 뭘 묻고 싶어 하는지는 알 거 같다. 그렇게 겨우 이길 거면서 무슨 깡으로 그런 내기를 걸었냐는 거겠지.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후작, 당신 말대로다.” 승리의 요인은 불사자 7단계 각인이었다. 재생의 효율을 올려주는 특수 스탯 수복력. 이게 없었다면 내 기본 자연 재생 수치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쪽에서 먼저 MP가 부족해졌을 수도 있고. 수복력은 MP 재생에도 적용이 된다. 즉, [영혼잠수]로 인한 MP 회복량도 늘어나는 것. 이거면 저 네 명과 비벼 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반드시 이길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승리를 100% 자신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싸움이라는 게 그렇잖아? 럭키 펀치를 잘못 맞고 골로 간 사례는 예시를 들 필요도 없이 많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확신도 없는데 어찌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한 건가?” “글쎄, 어째서였을까.” 후작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한 뒤,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야…….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지면 절대 인정 못 한다고 억지를 부리려 했으니까 맘껏 시비를 털었지.’ 플랜 B는 언제나 감춰둬야 하는 법이다. ***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 점심. 후작의 연락을 받은 두 명의 팀원이 우리 집에 방문했다. “그쪽이 리헨 슈이츠 씨겠군요. 반갑습니다. 렝만 학파의 3급 마법사 리어드 애쉬드입니다.” 훈훈한 인상과 마법사치고 훤칠한 키를 소유한 30대 중반의 마법사(남). 그리고……. “젊군. 그올드 알디디라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60대의 이능술사(남) 한 명. “반갑다, 리헨 슈이츠다.” “…자네 혹시 군인 출신인가?” “아닌데, 그건 왜 묻지?” “하대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말일세.” 나이로 대접이라도 받고 싶어서 돌려까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깊게 고민하진 않았다. 정답이 무엇이든 그리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알디디, 만약 일반적인 탐험가 팀을 생각하고 이 자리에 온 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일단 우리는 한동안 군부 소속으로 행동할 것이며, 체계를 위해선 상명하복이 절대적이니까.” 원래 첫 만남은 기선 제압이 중요한 법. 내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그올드 알디디, 줄여서 디디 영감이 유하게 발을 뺐다. “하하, 그럴 리가. 그저 궁금했을 뿐, 자네가 말을 낮추는 것에 불만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닐세. 이 나이까지 탐험가 일을 해왔는데, 어디 나보다 어린 자들의 밑에 있던 적이 없겠는가? 익숙하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마법사…….” “리어드 애쉬드. 성이든 이름이든 편한 쪽으로 호칭하셔도 됩니다.” “그럼 애쉬드로 하지. 애쉬드, 너도 이 영감과 같은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능력에 따라 대접을 받는 것은 우리 마탑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더러……. 이 팀은 제게도 놓치기 싫은 기회니까요.” “기회라…….” “이미 원정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보상이 약속됐습니다. 한데, 어제 후작님께 전해 듣기로… 슈이츠 님께서 원정대장 자리에 올랐다지요?” 아, 후작이 벌써 거기까지 말해준 건가. “아무래도 저희가 좋은 줄을 잡은 모양입니다. 원정대장 직속의 팀이라면 공을 세울 기회도 더욱 많을 테니. 그렇지 않습니까? 알디디 님?” “크흐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마법사 애쉬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묻자 디디 영감도 헛기침을 뱉으며 긍정을 표했다. 나는 그런 그 둘을 쓱 훑어보았다. ‘다들 첫인상은 나쁘지 않네.’ 일단 마법사 애쉬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유능해 보인다. 뭐, 마법사 중에 멍청한 놈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사회성이랑 지능은 다른 거니까. ‘영감도 나이 갖고 고집은 안 부리는 거 같고.’ 물론 여기에는 애쉬드의 공도 있다. 기회니 원정대장이니, 속물적인 면모를 보이며 자신들이 을이란 사실을 영감에게 각인시켜 줬으니. “그럼 슈이츠 씨, 괜찮으면 뒤에 두 분도 소개를 시켜주겠습니까?” 이내 애쉬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고, 내가 눈짓을 하자 에르웬과 아멜리아도 스스로를 간단히 소개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에요.” “에밀리 레인즈다.” 에르웬의 소개 때는 ‘혈령후!’ 하며 놀란 얼굴을 한 반면, 아멜리아 차례에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얘가 누군지 궁금할 텐데도 쓸데없는 소리를 안 한 건 좋네.’ 음, 이 정도면 뽑기 운은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자, 들어와라.” 통성명이 끝난 후에는 우선 둘을 집 안으로 들였다. 얘네가 오면 같이 식사를 하려고 밥도 많이 차려뒀거든. “그나저나 이걸 묻지 않았군. 식사는 했나?” “저택으로 부른 걸 보고 혹시나 해서 먹지 않고 왔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는 공복을 유지하는 편이 좋으니 말일세.” 그래, 둘 다 식전이라는 거구나. “차린 건 없지만, 양껏 먹어라. 할 말이 있으면 먹으면서 하고.” 일단 다들 식탁에 앉힌 뒤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분 솜씨인진 모르겠지만, 음식 맛이 아주 훌륭하군요.” “후후, 제가 차렸어요. 고마워요.” “감사는 이쪽에서 해야 하지요.” “어머나, 별것도 아닌데요. 호호.” 분위기를 한층 더 유하게 만드는 애쉬드와 에르웬의 화담. 나는 그냥 가만히 음식이나 먹었다. 그야 음식들은 모두 식당에서 산 것들이거든. 아침에 나가서 직접 사온 뒤 접시에 담아 상에 올렸으니 차렸다는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미샤였으면 자기가 차린다고 아침부터 난리였을 텐데…….’ 문득 미샤 생각이 났으나, 에르웬의 노고를 깎아내릴 생각은 아니었다. 괜히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나는 항상 나가서 밥을 사오자는 주의였으니까. 항상 미샤가 고집을 부렸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단기적으로 뭉친 것이긴 하나, 새로운 팀원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 “슈이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멜리아가 내 허리를 쿡 찔렀다. “아무것도. 지금 경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지?” 잠깐 생각이 딴 길로 새기도 잠시, 나는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새 동료들의 호구 조사를 시작했다. 후작을 통해 들었던 내용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미궁에 들어간 건 7년 전입니다. 5년 정도 머물렀던 클랜이 깨지고서는 마탑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지요.” “이제 와서 생각을 바꾼 이유는?” “탐험가들이 기를 쓰고 위층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이유지요.” 보다 나은 삶. 보다 많은 기회. 이상한 신념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이쪽이 몇 배는 더 신용이 간다. “미궁에서는 뭘 할 수 있지?” “미궁에서 마법사에게는 뭘 잘하느냐보다는 뭘 못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내 질문에 씨익 웃은 애쉬드가 스스로가 가진 패들을 공유했다. “5급 이상 저주 마법은 극히 일부만 가능합니다. 지원 보조 계통은 4급까지. 그 외에는 타 학파의 고유 마법을 제하고 다 할 줄 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미궁에 관심이 많아서 채집이나 소재 관련으로 지식이 꽤 풍부한 편이란 것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듯하군요.” 애쉬드는 일종의 올라운더였다. 저주랑 지원 계통에서 스탯이 좀 딸리기는 하지만, 크게 흠 잡을 정도는 아니고. “뭐가 자신 있느냐고 굳이 묻는다면, 공격 마법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속성은? “딱히 편차가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이야, 속성까지 광범위해? “렝만 학파가 전투 마법을 연구하는 곳인가?” “아뇨. 저주 계열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뭐? 이거 웃긴 녀석이네. 저주 계통 학파에 갔는데 가장 잘하는 게 공격이라니. 뭔가 사연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럼 제게 더 궁금한 게 없다면, 알디디 님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군요.” 사연을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차, 애쉬드가 자연스레 옆에 있던 디디 영감에게 턴을 넘겼다. ‘…노린 건가?’ 설령 그렇다 한들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다. 애초에 개인사에 가까운 이야기일 거 같아서 나도 묻지 않으려 했으니. “나는 치유사라네.” 치유사는 이능술사의 세부 카테고리다. 신관의 치유력을 흉내 내면 치유사. 마법사의 화력을 대체 가능하면 술법사. 술법사인데 독을 쓰면 독술사고, 불을 쓰면 화염술사. 버프 도핑이 주력이면 지원계 주술사. 그 반대면 저주계 주술사. 대충 이런 식으로 구분이 되며, 상위 탐험가가 될수록 이 분류법은 더 세밀해지고 광범위해진다. 나만 해도 만약 길드에 이력서를 제출하려면 바바리안 전사가 아니라 ‘수호자’라고 적어야 할 테니. “치유사라… 균형이 좋군요.” 디디 영감의 직업군을 들은 애쉬드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하기야 에르웬이 궁수인 거야 유명하고, 아멜리아 얘도 집에서 가죽옷에 단검까지 챙겨들고 다니니 어떤 포지션인지야 뻔했겠지. 나에 대해서는 후작에게 들었을 테고. “대부분은 치유계 이능을 얻었지만, 지원 주술 계열도 두 개를 갖고 있네.” 쉽게 말해, 버프류의 지원 스킬도 있다는 뜻. 이후 디디 영감은 자신이 소유한 정수들 내역과 그 정수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했고, 그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물론 우리는 팀원의 이해가 필수인 이능술사가 아니었기에 정수 내역까지 전부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역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아멜리아의 ‘오러’와 ‘자가복제’, 에르웬의 ‘어둠 정령’ 정도만 특이점으로 말해줘도 충분하다. “그럼 이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대부분 알게 된 거 같습니다마는. 앞으로는 어떡하실 겁니까?” “가능하면 매일 만나서 합을 맞춰봤으면 하는데.” “예, 혹시 항상 가시는 훈련장이 있습니까?” “있긴 한데, 얼마 전에 망해서 사라졌더군.” “그렇다면 제가 아는 곳으로 잡아두겠습니다. 아, 이후 서면으로 연락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다들 주소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네.” 유능한 집사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애쉬드는 팀 활동에 있어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도록 도맡아 주었고, 우리는 다음 날부터 매일 훈련장에 모여 합을 맞춰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슈이츠,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침내 창단식 날이 되었다. ‘이 새끼들은 진짜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미궁 입장까지 사흘이 남은 시기였다. 397화 원정대 (2) 창단식은 황도에 위치한 빈 저택에서 열렸다. 어느 백작이 별장처럼 쓰고 있던 곳인데, 사업 자금이 필요해 급하게 내놓았다던가? 보수가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만찬을 차려놓고, 서른 명의 원정대원과 그들의 후견인들만 초대해 조용한 분위기에서 창단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진짜 빨리 끝났네.’ 후작을 비롯한 후견인들이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 격려 혹은 응원의 연설을 하는 데 약 30분. “나라를 구하느니 영웅이니 하는 말은 앞에서 다 했으니, 짧게 말하겠다.” “많이 죽이고.” “많이 벌어오자.” 마지막에 있었던 원정대장(나)의 연설이 약 10초. 도합 30분 10초 만에 정식 행사 일정이 마무리 되고 연회 파트로 넘어갔다. 재상, 케알루너스 공작, 중소귀족 연합, 삼신교, 알미너스 상회, 탐험가 길드 등. 온갖 세력가들이 후견인으로 참가한 연회였으나, 그 실속은 이름값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음식은 푸짐했으나 미리 준비해둬 식었고. 응당 연회라면 따라오는 악단도 없었으며, 음료를 채워줄 접대인도 수많은 구경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에 불만을 품지 않는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 웃고 떠들며 흥겨운 음악을 듣고, 몸을 흔들거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반갑습니다. 슈이츠 씨.” “저 네 명이랑 싸웠다면서? 어떻게 이긴 거요?” “네 명이랑 싸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 그쪽은 카이슬란 경의 팀원이었지? 카이슬란 경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그때 있었다는 일에 대해?” “오랜만에 뵙는군요. 혈령후 님.”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수많은 원정대원들이 내가 있는 자리로 와서 먼저 인사를 청해온다. 후, 이게 권력자의 삶인가? “반갑다. 원정대장 리헨 슈이츠다. 이름이?” “벤티스 게로드라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나는 찾아오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하나하나 맞이하며 통성명을 하고 안면을 익혔다. 그야 앞으로 내가 목숨을 책임질 사람들이잖아? 얼굴이랑 이름은 알고 있어야지. 그렇게 한참이나 사람과 인사를 하던 때였다. “리헨 슈이츠라는 이름을 창단식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베르실 고울랜드예요.” 이야, 나야말로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리헨 슈이츠다.” “제 소개가 부족했죠? 저는—” “알고 있다. 라레르 클랜의 부단장이었지?’ 이 여자를 처음 만난 건 1층 수정동굴이 쑥대밭이 되었던 그 시절이었다. 모두 텔레포트를 안전지대로 가려면 열다섯 자리가 부족했고, 이 여자는 주사위를 통해 버림패를 골라냈다. 그중엔 우리 팀이 껴 있었고. 후, 그때 15명이서 길을 뚫느라 정말 뒈지는 줄— “알아봐 준 건 감사하지만, 소식이 느리시네요. 이제 부단장은 아니에요.” 부단장이란 단어를 입에 담으며 씁쓸하게 웃던 베르실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래 잤는지, 깨어났을 땐 제 자리가 더 이상 없더라고요.” “아… 그때 폭발에 휘말렸다고 했었지.” “네. 그 후로 거의 1년을 넘게 자고 있었죠.” “그래도 깨어났다니 다행이군.” “네… ‘대리인’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계속 그 상태였을 테니까요…….” ‘대리인’은 토베라교의 대신관이 가진 이명이다. 회복계 신성 주문에 한해서는 그 어느 신관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를 이루었다던가? ‘근데 말투가 좀 미묘하단 말이지.’ 정확히는 안색이나 표정이 좋지 않다. 은혜를 입은 사람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베르실 고울랜드, 현재 소속된 팀이 어디지?” “제 4팀이에요.” “4팀이라…….” 4팀이라면, 성기사 준이 팀장으로 있는 조다. 창단식 전에 후작을 통해 미리 알아낸 구성원은 총 넷으로, 그 모두가 종교 세력 측 인물이었다. 한데 거기에 뜬금없이 마법사가 꼈다라. ‘빚쟁이 신세인가 보네.’ 대충 이 여자의 사정이 짐작된다. 그리고 이 여자도 내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는 걸 눈치챘을까.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보던 것과는 다르시네요.” “어떻게 보였는데?” “불쾌해하지 마세요. 그야 아까 그 연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똑같은 인상을 받았을 테니까.” 허, 연설이란 무릇 짧은 게 최고인 것을. 중학생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깨달은 진리다. “언제까지 그분이랑 얘기하시려고요?” 그때 옆에 있던 에르웬이 껴들었다. “혈령후…….” “오랜만이네요. 그때 우리를 버리고 갔던 게 마지막이었죠?” “……그때 일은 후회하고 있어요. 진심으로요.” “당연히 후회야 하겠죠. 그렇게 다 버리고 도망친 결과가 그거였으니까.” 과거의 악감정이 남은 듯한 날카로운 말. 이에 베르실은 내 눈치를 싹 보더니 짧게 목례를 하고서 떠났다. “잘했죠?” 날 위해 한 행동이었다는 듯 배시시 웃는 에르웬. 뭐라 하기도 좀 그랬기에 그냥 피식 웃어넘겼다. “저… 반갑소이다. 파이크 넬다인이오.”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을 서성이던 대원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나는 그들과 통성명을 하고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너희는 여기서 쉬고 있어라.” “어디 가시는데요?” “아직 인사를 못 한 자들도 있지 않나.” “먼저 오지도 않는데 굳이?” “아까부터 뭐가 그리 화가 난 거냐? 안 오면 내 쪽에서 가면 그만인 것을.” “그냥… 그러면 아저씨가 진 거 같잖아요.” 에르웬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내 결정은 변함없었다. 자존심을 부리면 뭐 빵이라도 나오나? 할 건 하고 넘어가야지. “당신은…….” “반갑다. 리헨 슈이츠다.” “……맥켈리 레이아더스요.” 먼저 오지 않은 자들은 내가 찾아가서 인사하고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그야 후작이 전해준 정보에서는 20명의 명단밖에 없었잖아? 정보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때까지도 인원이 전부 채워지지 않은 팀이 대다수였— ‘뭐야, 얘가 왜 여기 있어.’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아직 안면을 트지 못한 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때, 한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스벤 파라브.” 레아틀라스교 제2 성기사단의 부단장. 어딘가 심란한 표정으로 구석진 자리에서 술을 홀짝이던 놈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눈을 했다.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교에 방문할 때 몇 번인가 보기도 했던 데다가, 모종의 사건이 겹쳐 ‘고블린 가면’이라고 내가 확신하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후작가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라.” “…얕보거나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여기서 쉬실 생각이면 비켜 드리—” “잠깐 얘기나 하지.” “예……?” “싫나?” “그건 아닙니다마는…….” 아니기는. 딱 봐도 싫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음, 정확히는 긴장한 얼굴이라 해야 하나? “준에게 내 이야기는 들었나?” “그 내기라면… 예, 들었습니다.” 어쩐지 긴장을 한 거 같은 표정이더라니. 그 얘기를 들어서였구나. “그런데 여기는 왜…….” “왜는 무슨. 곧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인사도 못 했지 않나. 안에서는 잘 부탁하지.”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벤 파라브와는 짧은 대화만 나누고서 등을 돌렸다. 왠지 기분이 착잡했다. ‘하, 이거 골 때리네…….’ 스벤 파라브는 고블린 가면이다. 쉽게 말해, 커뮤니티가 열릴 때마다 원정대에 관련된 정보를 깨진 독처럼 쏟아낼 가능성이 높다. ‘기도쟁이들은 골라도 하필 이런 애를 골라와서.’ 하, 어떻게 입을 못 열게 할 수 없나? 악령으로 의심하는 척하면서 15일마다 감시를 붙이면 쟤도 곧장 로그아웃하고 그래야 할 거 아냐. ‘…이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이후로도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후작에게 정보를 전해 받지 못한 이를 포함한 모든 대원과 통성명을 끝냈다. 스벤 파라브의 존재는 부정적인 변수였으나,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몇 번이고 강조해도 부족하지만. 노 한스, 노 페인. 한스가 없다는 건 매우 희망찬 징조다. *** 저녁까지 이어진 연회가 끝나고, 창단식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다만, 우리는 그 저택에 남았다. 그야 일단 우리의 존재는 대외비니까. 원정대원들 대부분이 유명인이다 보니 미궁이 열리는 날까지 이곳에서 지내며 합을 맞춰보기로 결정된 것인데……. ‘합은 개뿔.’ 서른 명이 이틀간 합을 맞춘다고 뭐가 변할까. 각 팀이 따로 진입해 6층에서 만나려면 몇 주는 걸릴 터. 그사이에 다 까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전투는 각 팀마다 자율에 맡기고, 유사시에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형태가 최선일 듯해요.” 수뇌부 회의 끝에 이런 결론이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괜히 한 몸처럼 움직이겠다고 서른 명이서 뭉치면 삐걱거리기만 할 것이라는 판단.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형 하나 정도는 짜두는 게 좋지 않을는지요?” 다만 유사시를 대비한 분류는 해두기로 했다. 마법사는 마법사끼리, 치유계는 치유계끼리. 분간할 수 있도록 표식을 가슴에 새긴 뒤, 비상사태에 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교육하면 훨씬 더 안전할 테니까. “방패 표식을 받은 전사들은 외곽에, 검 표식을 받은 전사는 그 바로 뒤에 섭니다.” “치유계는?” “당연히 최중심부입니다. 그들이 살아야,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활 표식을 받은 원거리 지원계열은 치유계와 마법사를 보호하는 진형으로 서야 합니다.” 그래, 이 정도면 이틀 안에 교육이 가능하겠지. 애초에 집단생활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녀석은 이 중에 없을 테니. “슈이츠 경, 듣고 있습니까?” “…물론이다.” 거, 잠깐 턱 좀 괴었다고 뭐라 하기는. 어차피 원정대장 전용 커맨드가 딱 두 개구만. 각 팀별로 흩어져 싸워대는 각개 전투. 그리고 원정대가 크게 한 팀을 이루는 헤쳐 모여. 뭐, 앞으로 시간이 주어지면 ‘돌격!’, ‘집중 포격’, ‘방패 벽’등의 전용 커맨드가 더 늘어날 테지만. 당장은 이게 전부라 외울 것도 없다. “그럼 지금은 이 정도로만 해두고, 나머지 진형은 6층에서 합류 후 남는 시간에 교육을 하는 것으로 하지요. 아니, 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지.” 회의는 지들끼리 의견을 나누다가 내게 허락을 받는 구조로 진행됐고, 회의가 끝난 후에는 클랜 부단장 출신인 제임스 칼라가 열심히 구르며 ‘헤쳐 모여’ 커맨드를 원정대에 습득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이 더 흘러…….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미궁에 입장할 시간이 되었다. *** 영롱한 빛이 감도는 수정동굴. 팀원 모두가 전신을 가린 로브를 입은 채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야 최대한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으니까. 타닷, 타닷. 팀 내에 육체 능력이 낮은 마법사와 이능술사가 껴있지만, 이동속도는 상당히 준수한 편이다. 둘 다 이동 수단이 하나씩 있었거든. 「리어드 애쉬드가 4등급 변이 마법 ‘여우등불’을 시전했습니다.」 빛구체로 변하여 공중에서 따라오는 마법사. 그리고……. 「그올드 알디디가 [룩베르타의 비둘기 장화]를 사용했습니다.」 템빨로 이를 커버하는 이능술사까지. 옆에서 자신의 속도를 따라오는 영감을 보며 아멜리아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넘버스 아이템인가?” “룩베르타의 비둘기 장화라는 3천 번대 넘버스 아이템이라네. 비전투 시에만 쓸 수 있다는 제약이 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미궁에서 아주 유용하지.” “그렇게 속도를 내면 영혼력이 부족하진 않나?” “허허, 자네는 이능술사를 얕보는군.” 이능술사는 육성 시 영혼력을 늘리는 시너지를 필수로 맞추기에, 그 어느 직종보다 MP량이 많은 편이다. “걱정 말게. 이걸 쓰는 건 보통 3층까지니까. 5층은 길이 좁아 쓰기 어렵고, 6층이야… 어차피 배를 타고 다니니 쓸 일이 별로 없지.” 확실히 상위 탐험가를 데려와서 그런가? 모든 부분에서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 ‘이 정도면 스피드런이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에밀리, 속도를 더 높여라.” 이내 나는 새로이 오더를 내렸고, 정말이지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후우우웅-! 유성처럼 날아가는 빛구체. 휘이잇- 지면에서 살짝 떠올라 몸을 기울인 채 앞으로 나아가는 알디디 영감. “……슈이츠, 왜 점점 뒤로 가는 거냐?” “혹시, 뒤에서, 적이, 나타날, 지도, 모르, 니까.” 하아, 진짜 숨 딸려 죽겠네. “…….” 설마 넷 중에 내가 제일 느릴 줄이야. 398화 원정대 (3) 결과만 말하자면, 스피드런은 실패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2층과 이어진 포탈은 열려 있었고, 우리도 최초 개방 공적을 얻을 수 없었다. 쩝, 이번에는 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앞 팀과 얼마나 차이가 난 거지?” “한 10분 정도.” 뭐, 10분이나? 사실 우리가 도착한 시간도 게임에서였다면 스피드런이 충분히 가능했을 시간인데.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가 있는 듯한 느낌. ‘그래도 10분이면… 내 이동속도만 좀 더 올리면 가능하겠는데.’ 스피드런이 안정적으로 가능해지면, 매 탐사마다 공짜 경험치가 누적되기에 그 궤도에 오르는 것은 육성에 매우 중요하다. 그 용인족 여자도 그러니까 개인 활동을 요청한 것일 테고. ‘라비옌, 그 여자는 스피드런에 성공했으려나?’ 우리 팀의 마지막 멤버, 용인족 라비옌. 그 여자는 창단식에 참가만 한 뒤, 연회도 즐기지 않고 자리를 떠났으며, 미궁에도 따로 입장했다. 혼자 움직이는 게 몇 배나 빠르다며, 어차피 6층에서 만나면 되는 게 아니냔 그 여자가 말한 논리였는데……. ‘그때 후작만 아니었어도 진짜…….’ 머리에 문제가 발생한 게 분명한 사고방식. 교정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애석하게도 후작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다른 원정대원과 달리 개인적으로 어떠한 약속을 했으니, 그 정도 자율성을 인정해 주라던가? 그 말을 하며 통제를 시도하는 건 막지 않겠지만, 찍어 누르는 형태는 삼가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다짜고짜 패지 말라는 뜻인데……. ‘무슨 공주님을 팀에 들인 것도 아니고.’ 물론 쉽고 편한 수단이 막혔다고, 고삐를 잡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앞으로가 편할 테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4층 천공의 탑에 입장…….」 아무튼, 그 여자가 있든 말든 탐사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에 문제 될 거 없이 예정대로 일정을 진행했다. 4층까지는 빠르게 직행했고. 전투 회피가 불가능한 4층부터는 실전에서 합을 맞추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도 많이 나누게 됐다. “흐음, 역시 셋이서 같은 집에 살고 있던 게 맞단 말이지…….” 대화 중엔 이러한 개인적인 사담도 많았지만, 그 누구도 선을 넘을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에르웬과 나의 관계가 소문대로냐고 묻는다든가. 후작과의 관계를 궁금해 한다든가. 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수 있던 것인가 등등. 디디 영감은 간혹 그러한 것들에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기 전에 마법사 애쉬드 선에서 다 잘려나갔다. “근데 혹시—” “레인즈 씨,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중에 든 의문인데 분신체도 오러를 쓸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가요? 보니까 다른 이능들은 분신체도 사용이 가능한 거 같던데. 워낙 희귀한 정수이다 보니 오랜만에 학구열이 샘솟는군요.”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이 마법사는 디디 영감이 불편한 얘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나서서 주제를 흐리고 있다. ‘참 똑똑한 사람이란 말이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마법사라서 그런가? 리어드 애쉬드를 보면 자꾸 드왈키가 생각난다. 물론 녀석과 달리 애쉬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 말도 다 하고 사회성도 훨씬 높았다. 사람의 기질부터가 다르다 해야 하나? 눈치도 빠르고 훨씬 어른스럽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왜 그렇게 보십니까 슈이츠 씨?” “안 봤다.” 보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리올 워브 드왈키. 만약 그 녀석도, 시간이 지나 성장했다면 이런 느낌을 내게 됐을까. *** 「6층 대해에 입장했습니다.」 *** 미궁 진입 18일 차. 4층을 제외하면 탐사 기간 내내 뛰듯이 움직여 도착한 시작의 섬 라이미아는 몹시 한적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달린 우리가 이제 도착했는데 이 시기에 여기까지 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발 빠른 이들로 구성된 군부의 정찰조. 후속 인원의 도착을 기다리는 대형 클랜의 정예. 그리고……. “…….”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저 멀리서 눈인사 정도만 해오는 원정대의 다른 팀. 이야, 우리보다 먼저 온 팀이 둘이나 있네. 드워프 아줌마 팀이야 베테랑 탐험가들로 구성된 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성기사 준이 리더로 있는 4팀도 우리보다 빠를 줄은 몰랐다. “…아, 저기 있군.” 아무튼, 한적한 덕분에 사람 하나 찾는 일도 수월했다. 용인족 라비옌. 재상과의 거래로 멤버에 넣게 된 여자이자, 아직 풀네임도 듣지 못한 비즈니스 동료. “너희는 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라.” 일단 팀원들을 대기시킨 뒤,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해변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18일 차라…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내가 다가가자 라비옌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으며 말했다. 뭐야,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원정대의 집합지는 섬 동부라 했을 텐데?” “어차피 출발은 20일 차잖아요. 보니까 먼저 도착한 다른 팀도 그냥 근처에서 쉬는 거 같고.”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사실 이거로 뭐라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언제 도착했지?” “이틀 전에요.” “이틀 전……?” …그럼 16일 차에 도착했단 건데? 거의 보름 만에 1층에서 6층까지 왔다고? 개인주의에 빠진 팀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한 가지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움직이겠다고 말할 만도 하군.” 저 속도면 사실상 1층에서부터 6층까지 전부 다 스피드런에 성공했을 터. 이 여자 입장에서 우리와 같이 입장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우리랑 같이 다녔으면 공짜 경험치를 무려 12나 포기해야 했을 테니. ‘이런 식이면 설득하기가 더 어려울 텐데.’ 고민이 깊어진다. 한 팀이란 이유로, 1층에서부터 같이 움직이자고 강요하는 게 꼰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튼, 일어나라.” “어째서요?” “도시에서는 바쁘다고 얘기도 못 나눠보지 않았나.” “좋아요.” 그냥 집결 일자까지 여기서 쉬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라비옌은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며 함께 집결지가 있는 섬 동부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창단식 때 뵙고 이번이 처음이지요?” “그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일족 내에 사정이 생겨서. 다음부터는 도시 내에서도 최대한 시간을 내볼게요.” “그렇다면 감사하지요. 앞으로 라비옌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애쉬드 씨.” 생각보다 훨씬 더 편하게 이어지는 대화. “라비옌 양이라고 불러도 되겠소이까?” 용인족의 나이가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디디 영감이 조심스레 물었고, 라비옌은 별 고민 없이 그러라고 답했다. 그리고……. “두 분은요? 어떻게 부를까요?” 라비옌이 아멜리아와 에르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든 레인즈든 마음대로.” “레인즈 씨로 하죠.” “저는 테르시아로요.” 에르웬이 까칠한 목소리로 선을 긋자, 라비옌은 묘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싱긋 웃었다. “좋아요, 테르시아 씨.” 오케이, 그럼 이제 호칭 정리는 끝났고……. ‘……근데 호칭 정리를 왜 6층에서 해야 하는 거지?’ 과연 이걸 한 팀이라 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일단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도시에서 합도 맞춰봤고, 여기까지 함께 오며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됐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저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이거죠?” “누구한테 등을 맡기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알겠어요.” 이후 라비옌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더니, 자신이 가진 스킬 몇 가지를 시연하며, 전투 중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뭐, 보니까 몇 가지는 말 안 한 거 같지만……. 사실 마법사나 신관, 이능술사를 제한 직종에선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럼 이동 시에는 어디에 서면 될까요?” “후방.” “전투 시에는요?” “에밀리가 내 좌측 후면을, 네가 우측 후면을 맡을 거다.” “고전적이네요.” “복잡한 걸 하기에는 서로 아는 게 없으니까.” 말에 뼈가 담겨 있다고 여겼는지 라비옌이 피식 웃었다. “계속 그럴 거예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뭐, 기싸움은 대충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고. 이후로는 마법사와 이능술사도 자신의 포지션에 대해 라비옌에게 이해를 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지켜보는 데 짜증이 났다. 도시에서 했으면 한 번 하고 말았을 일을 왜 두 번 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개인주의란 비효율의 동의어일지 모른다. “왔군.” “원정대장도 왔는데 해변가에서 농땡이를 피울 순 없잖아요?” 머지않아 해안가 쪽에서 쉬고 있던 아쿠라바의 팀과 성기사 팀이 집결지로 정해둔 섬 동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3팀도 이제 도착했군.” 조금 더 고지대에 위치한 섬 동부였기에 원정대가 6층에 진입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톱니이빨 클랜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가 팀장으로 있는 팀이었는데……. “저 팀은 꼴이 말이 아니네요.” “무리를 해서라도 속도를 올렸던 모양이군.” 심리는 이해가 된다. 집결 일자는 20일이지만, 팀 중에 가장 늦으면 그게 실력의 척도처럼 보이리라 여겼겠지. 이것도 일종의 기싸움이다. ‘이거야 원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집단 내 경쟁? 이는 좋은 통솔의 수단 중 하나지만, 그것도 일단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생긴 다음에야 긍정적으로 작용을 할 터. 현 상황에서 서로 경쟁을 해봐야 내분만 일어나기 딱 좋다. ‘어떻게 해야 얘네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응당 리더라면 숙명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날이 저물었다. 제5팀… 그러니까 기사 카이슬란이 리더로 있는 팀이 도착한 것도 딱 그 시기였다. “제길……!” 정해진 일자보다 무려 이틀이나 빨리 왔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꼴찌란 사실을 알게 되자 분한듯 주먹을 쥐는 녀석. 허, 얘가 또 조절 장치가 망가졌나. “거기서 뭐 하나? 얼른 이리로 와라.” “…아, 알겠소.” 내가 손짓을 하자 녀석이 움찔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렇게 화 내봤자 주름만 생긴다니까? 툭툭. 나는 녀석을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준 뒤, 이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예정보다 이틀 더 시간이 남았지만, 다 모인 이상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할 이유는 없겠지.” “어머나, 이제 우리가 어떤 임무를 할 건지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런 거라면 다른 대원들을 뒤로 물리는 게 낫지 않을는지요.” “됐다, 어차피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니까. 어차피 들어봤자 이제 와서 다른 곳에 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말에 주변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던 대원들이 중심부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 허락도 있으니 당당히 들어도 되겠다 싶던 것. “자, 말해봐요. 대체 뭘 하려고 그리도 꽁꽁 감추는지, 원정대장인 당신만 이번 임무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요?” 흔들리는 모닥불 사이로 아쿠라바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보인다. 제발, 드워프들은 의자에 앉지 않았으면 좋겠다. 봐봐, 모닥불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잖아. 별로 크게 피운 것도 아닌데.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크흠흠.” 대장의 위엄을 생각해 한 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다들 궁금했을 거다. 노아르크 놈들이 포탈을 타고 암흑대륙으로 오는 것이라면, 그 지역이 어디인지.” “네. 수정동굴처럼 시작 지점이 있는 거라면, 분명 그곳이 본거지처럼 쓰일 테니까요.” “설마, 왕가에서 마침내 어디인지 알아낸 건가?” “그래.” 내가 후작에게 들은 극비 정보를 꺼내자, 일동이 술렁였다. 거, 아직 놀랄 타이밍도 아니구만. “우리의 임무는 놈들의 본거지를 치는 것이다.” 병과로 치자면 기동 타격대다. 전장에서 본대가 시선을 끄는 동안 적군의 핵심 부대, 혹은 시설을 파괴하는 것. “…저,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임무가 그거라면, 굳이 왜 이렇게까지 일정을 촉박하게 잡은 겁니까?” “혹시 우리끼리 원귀의 협곡을 뚫게 하려고?” “…그건 미친 짓이오! 본대에 껴서 함께 진군하는 게 아닌 이상, 그 협곡을 배 한 척으로 넘을 수는 없단 말이오!” 허,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지방방송이 켜지는 것도 당나라 군대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 오해가 커지기 전에 얼른 이것부터 말했다. “우리는 원귀의 협곡을 넘지 않는다.” “뭐? 암흑대륙의 본거지를 친다면서, 그게 대체 무슨…….” “마지막 경고다. 자꾸 말 끊지 마라.” “…….” 후, 이제 좀 조용하니 좋네. 나는 한층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임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암흑대륙으로 향하는 길은 원귀의 협곡만이 아니지.” “아! 설마……!” 그래, 이제 눈치챘나 보네. 애초에 섬 동부에 모이라 한 이유가 뭐겠어. “우리는 동부의 아이스록으로 향한다.” 고블린 숲, 짐승의 소굴, 바위 사막, 망자의 땅. 2층으로 분류된 네 개의 필드가 모두 3층 순례자의 길과 이어지듯이. 7층 역시 암흑대륙 하나만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다음 8층을 경유해 암흑대륙으로 진입, 방심한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꽝꽝 얼은 케이크를 먹는 듯한 임무다. 씹기도 힘들고. 때론 이가 시리기도 하며.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하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겠지만. “이해 못한 놈이 있으면 나와라.” “…….” “겁쟁이는 없는 듯해 다행이군.” 그럼에도 끝맛은 달콤할 것이다. 399화 원정대 (4) 미궁 진입 18일 차. 솨아아아아아아-! 서른 명의 선원을 모두 태운 중대형 군함이 물살을 헤치며 출항했다. 참고로 이는 왕가에서 보급 받은 군함으로, 일단 주인 각인은 원정대장인 내게로 임시 이전된 상태. 각 대원들이 배정된 객실로 가서 짐을 정리하는 동안, 아멜리아가 키를 잡은 항해사에게 다가갔다. “저기.” “그러니까… 에밀리 레인즈 님이시군요. 무슨 용무이십니까?” “아이스록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약 12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이스록이 암흑대륙보다 가까운 건가? 저번에 군함을 탔을 땐 암흑대륙까지 보름이 걸렸는데.” “단순 거리로만 계산하면 비슷하나, 타고 있는 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가 탄 7타입 군함은 중대형에 속하긴 하지만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배입니다.” “고작 사흘 차이로 뛰어난 기동성이니 뭐니 하는 게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극동부 해안은 일반적인 바다와 다르니까요.” “흐음, 그렇군.” 최근 들어 항해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아멜리아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함에 대해서 잘 아는 거 같던데, 맞나?” “하하, 잘 알 수밖에요. 반평생 동안 군함들을 몰아왔는데.” 우리 원정대의 유일한 항해사는 제5팀 소속으로, 원래는 왕가 군부에 속한 인력이었다. 음, 그리 생각하니 카이슬란 네가 꼴찌로 6층에 도착한 것도 납득이 되네. 걔는 항해사를 데리고 스피드런을 한 거 아니야. “혹시 군함에 대해서 좀 알려줄 수 있나?” “죄송하지만, 군함에 대한 정보는 유출이 불가합니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같은 배에 올라탄 이상, 근처에서 곁눈질하는 것까지 제가 막기는 어렵겠죠.” “절대 방해는 하지 않겠다.” 아멜리아가 항해사의 친절에 느낌표를 띄우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이, 나는 배 내부로 들어갔다. 배 가장 중심부 안쪽에 위치한 방. “오, 다 모여 있었군.” “원정대장 명령이니까요. 객실 정리가 끝나면 이리 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뇌부 회의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방에는 각 팀의 팀장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빠르게 한 가지를 물었다. “아이스록에 가본 자가 있나?” 손을 든 것은 아쿠라바와 제임스 칼라뿐이었다. “둘 말고는 없는 건가?” “아무래도 자주 가는 지역은 아닐 테니까요.” “저희도 예전에 클랜 차원에서 공적을 얻기 위해 몇 번 원정을 간 것을 제하면, 아이스록은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하긴, 일반적인 사냥을 할 만한 환경이 아니니까. 모르긴 몰라도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모인 이 배에서도 아이스록을 경험한 자는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지시할 사항들만 짧게 전달했다. “제임스 칼라. 너는 항해하는 동안 대원들 교육에 전념한다.” “교육이라면요?” “진형이라든가 그런 걸 말하는 거다. 도시에서는 며칠 하지도 못했지 않나. 다들 경험 많은 탐험가니 갑판에서 몇 번 연습해봐도 실전에서 곧잘 따라줄 거다.” “알겠습니다.” 우선 원정대장 전용 커맨드를 늘릴 필요가 있다. 안 그러면 돌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피해가 발생하니까. 우리는 아직 도주, 혹은 퇴각 시 진형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목적지가 아이스록이니, 그곳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을 우선하지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돼서 좋군.” 오케이, 온갖 진형들에 빠삭한 대형 클랜 출신인 놈이니 이 부분은 알아서 잘 해줄 테고. “티타나 아쿠라바. 너는 짐 정리가 끝나는 대로 보급품 관리를 맡을 거다.” “권한은요?” “이후로 전부 다 네게 일임하지.” 탐사 관련 소모품 및 장비의 관리는 아쿠라바에게 맡겼다. 종교측 세력인 준이나, 융통성 없는 군인 출신 카이슬란이 저 자리를 가지게 되면 분명 반발이 나올 테니까. 반면 아쿠라바는 나이도 많고 짬도 많이 찬 전설적인 탐험가이니 간혹 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와도 잘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판단. “멜란드 카이슬란.” 다음 차례는 기사였다. 앞서 두 명이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인지, 침을 꿀꺽 삼키며 기대감을 내비치는 녀석. 얘도 가만 보면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너는 원정대 내 치안을 총괄한다. 대원들끼리 분쟁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 중재하고, 만에 하나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도 네가 해결해야 한다.” “나 카이슬란을 오른팔로 쓰겠다는 뜻이구려. 알겠소. 그렇게 하지.” 어, 그게 왜 오른팔이라는 뜻이 돼? 군인놈이라 그런지 사고방식이 다르네. “그럼 마지막은 저겠군요.” 카이슬란까지도 역할이 주어지자, 성기사 준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당신을 도우면 될지요?’ 그날 맞짱 한번 뜨고 난 다음부터 이상할 만큼 호의적으로 변했단 말이지. 가끔가다 ‘설마 이 새끼……?’ 하는 의심은 들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원정을 나갔을 때, 탐험가들이 신관을 자주 찾는다지?” “예, 그렇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미궁은 아무래도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는 곳이니까요.”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최대한 귀를 열어라.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이 생기면 전달하고. 그게 네 목표다.” “이종족들은 저를 찾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삼신교는 인간들의 종교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가는 원정대 아닌가. 그 인간들마저도 각 팀에 퍼져 있고. 그들의 목소리만 잘 살펴도 대략적인 여론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지시 사항은 이게 끝인가요?” 이내 아쿠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니, 그녀가 조심스레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질문? 해봐라.” “왜 우리에게 권한을 넘겨주는 거죠? 우리는 당신의 수족도 아닌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대단한 얘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고민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짧게 답했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다. *** 무풍지대를 지나, 암초 가득한 극동부 그랜드록을 넘은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총 항해 시간은 12일 하고도 7시간. 딱 항해사가 말했던 일정과 오차가 없었으며, 이는 도중에 어떠한 섬에도 들르지 않고 최단 거리를 주파한 덕분이다. ‘확실히 군함이 좋기는 해.’ 무풍지대를 순식간에 지나치는 스펙은 둘째치고, 동부 해안에서 배의 내구성을 믿고 암초에 박아가며 나아가던 모습이 아주 인상 깊었다. 앞에 달린 쇄빙 장치도 아주 튼실해 보이고. 콰카카카칵! 콰카카카가가각! ‘빙해’처럼 특수 지역으로 분류된 곳은 아니지만, 떠다니는 얼음 조각을 박살내며 나아가는 배. “정말로 와버렸군…….” 갑판에 모인 대원들이 점차 가까워지는 대륙을 보며 입김을 내뿜는다. 가죽이든, 판금이든, 천이든 다들 장비 위에 두터운 털옷을 걸쳐 입고 있다. 이 또한 왕가에서 받아낸 보급품들이다. ‘쓰읍, 난 추운 것보다 더운 게 나은 파인데…….’ 나 역시 다른 대원들처럼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꽉 붙잡고들 계십쇼! 이제 배가 포탈 안으로 들어섭니다!” 항해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그 순간. 「7층 아이스록에 입장했습니다.」 푸르른 포탈의 빛이 우리 배를 감싸 안았다. 뭐, 그런 이펙트가 아니었어도 아이스록에 도착했다는 건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겠지만.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아이스록이 부여됩니다.」 「냉기 내성 수치가 -100 하락합니다.」 내성 수치가 대폭 떨어지며 밀려오는 한기. 일단 당장 체감되는 변화는 그것뿐이지만, 그 지랄맞은 효과들도 분명 우리의 몸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모든 탐험가들이 아이스록을 기피하게 만든 그것. 「상태 이상 [얼어붙은 세계]가 부여됩니다.」 「공간 관련 아이템이 비활성화됩니다.」 아공간은 물론이고 확장형 배낭도 먹통으로 만드는 상태 이상. 이 짧은 한 줄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자자! 다들 가만히만 있지 말고 우선 짐부터 내려보죠!” 물자 관리를 맡은 아쿠라바가 대원들을 통솔하며 ‘보존’ 마법으로 인챈트 된 보급 상자들을 육지로 내렸다. 그야 이제부터는 이것들을 끌고 움직여야 하니까. 아니,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여기에 골 때리는 게 추가로 붙는다. 「상태 이상 [기아]가 부여됩니다.」 「섭취를 통해 획득하는 자원이 3배 감소합니다.」 이곳에선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배가 3배 더 빨리 꺼진다. 그래서 보급 상자가 저렇게 많이 필요한 거고.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이곳을 ‘사냥터’로 취급하지 않는 것도 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거다. 추위는 버텨도 배고픔은 그렇지 않으니까. 식량이 한정됐기에, 이곳에서 활동 가능한 시간은 정해져 있다. ‘우리 식량으로는 일단 한 달.’ 물론 사고가 터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렇다. “아저씨!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고 전해달래요.” 아무튼, 대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니 갖고 온 물자를 배에서 모두 내리는 일은 금방 끝났다. 얼어붙은 땅 위에 놓인 다섯 대의 썰매와 그 위에 가득 실린 상자들. “그럼 얼른 돌아갔다 오자.” 물자를 모두 내린 후엔 나랑 항해사만 배를 타고 6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작은 나룻배로 바꿔탄 뒤 군함을 역소환. 「7층 아이스록에 입장했습니다.」 그후로는 나룻배를 타고 아까 장소로 돌아왔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꼭 해야 할 과정이었다. 거기다 군함을 버려두고 갈 순 없지 않은가. “이 배는 어쩌실 겁니까?” 뭘 어쩌긴 어째, 당연히 여기에 두고 가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떠내려가지 않게 구석진 곳에 잘 숨겨두었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모든 원정 준비는 끝. “각 팀은 진형대로!” 그간 잘 교육이 됐는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동할 대형을 갖추는 대원들. “출발!” 이내 내 외침과 동시에 원정대의 첫 행군이 시작됐다. *** 넓은 평지 진형에서 원정대의 구조는 간단하다. 제1팀인 우리가 선두에. 좌측과 우측은 3팀과 5팀이. 후방에는 4팀이 위치하며, 보급 관리를 맡은 2팀은 중심부에서 우리를 따른다. 쿠웅, 쿠웅, 쿠웅-! 이러한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아저씨, 저거 아이스 트롤이죠?” 보급 상자가 가득 실린 다섯 대의 썰매를 끌고서 행군을 따라오는 세 마리의 아이스 트롤. 아쿠라바 팀에 있는 소환사의 공이다. 아마 저게 없었으면 사람이 직접 썰매를 끌어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을 터. “정지!” 동쪽으로 진군하며 아이스록의 초입부를 막 벗어나려던 차, 제1팀이 멈춰 섰다. 이유를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투드드드드드드. 절벽처럼 보이던 얼음이 부서지며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괴생명체. “스톤윈터다!” 3등급 몬스터 스톤윈터. 초대형으로 분류되는 그놈이, 무려 셋. 쿠우우우웅-! 허, 아무리 아이스록이라 해도 그렇지. 무슨 시작부터 3등급이 막 이렇게 기어 나와? “전군 전투 대형으로!” 내 외침에 따라 대원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공포로 몸이 얼어붙거나 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긴, 이 전력이면 3등급 셋 정도는 쉽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전투를 지휘했으나, 그 기대가 박살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톤윈터를 처치했습니다. EXP +7」 첫 전투가 끝나고서도 함성은커녕 장례식장 같은 침묵만이 감도는 원정대. “……피해 보고.” 처참한 심경을 애써 억누르며 각 팀의 팀장들에게 물었고, 팀장들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답했다. “경상자 넷에 중상자 셋. 중상자부터 우선시해서 치료 중이오.” 사람이 다친 건 그나마 나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처음으로 합을 맞춰 본 자리잖아? 3등급이 무려 셋이나 한 번에 나왔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냥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면 끝나는 문제다. 다만……. “그리고?” “…썰매 하나가 반파됐고, 적재되어 있던 보급 물자는 분실됐어요.”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초대형 괴수가 보급 물자가 있는 곳까지 진입에 성공했고, 정말 불행하게도 하중을 버티지 못한 지반이 붕괴하며 물자의 5분의 1이 날아갔다. “썰매에 적재 중이던 식량의 비중은?” “…전부 식량이에요.”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아쿠라바에게서 나오는 순간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빌어먹을.” 아이스록에 진입하고서 고작 1일 차. “지금부터는 속도를 더 올린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400화 아이스록 (1) 8층을 지나쳐 암흑대륙으로 향하는 대원정. 이 원정에서 아이스록을 주파하는 데 잡은 기간은 20일로, 우리는 약 세 달 치의 식량을 챙겨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넉넉히 챙긴 건 아니다. 아이스록은 그렇게 여유를 갖고서 지나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단지, 여유분의 식량이 필수였을 뿐이다. 이곳에선 [기아] 때문에 식량이 인당 3배씩 소모가 될뿐더러, 자칫하면 음식들이 상하기도 하거든. 바로 이 빌어먹을 것 때문에. “얼음 폭풍이다!!” 빠르면 30분, 늦으면 6시간 주기로 불어오는 눈보라. 「필드 효과 - ‘곪아드는 한기’가 적용됩니다.」 「적중한 대상의 부패 속도가 가속됩니다.」 이 지랄맞은 폭풍은 꽝꽝 언 음식들도 상하게끔 만든다. 막아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사람보다 식량을 우선시하며 마법으로 지켜내는 것뿐.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리어드 애쉬드가 4등급 시공 마법 [차단]을 시전했습니다. 」 「맥켈리 레이아더스가 4등급 시공 마법 [차단]을 시전했습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4등급 시공 마법 [차단]을 시전했…….」 4등급으로 분류되는 ‘차단’ 마법의 마력 소모가 상당하며,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준비를 하려면 안 그래도 큰 소모량이 더욱 커진다는 것. 야밤에도 교대를 하는 건 기본이다. “애쉬드, 썰매 쪽으로 가서 쉬고 있어라.” “예? 하지만…….” “걱정 마라. 급할 땐 부르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이미 다른 팀 마법사들은 전부 다 썰매에 앉아서 편히 쉬면서 가고 있구만. 「필드 효과 - ‘곪아드는 한기’가 해제됩니다.」 눈보라가 그친 뒤에는 다시 여정을 재개했다. 서벅, 서벅. 걸을 때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 꼬르르르륵- 배가 고파서 뒈질 거 같지만, 식량은 최대한 아껴서 보급 중이기에 양껏 배를 채울 수 없다. 지금까진 ‘차단’ 마법으로 식량들을 잘 지켜내고 있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전투 중에 눈보라가 불어오고, 마력이 부족해서 상자 하나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때부터는 진짜 상황이 심각해진다. ‘뭐, 지금도 멀쩡한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아이스록 진입 3일 차. 모두가 지쳤기에 대원들 사이에서는 잡담, 혹은 실없는 농담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단지, 묵묵히 체력을 배분하며 걸음을 옮길 뿐. 여유가 사라진 원정대 내에서는 예민하게 날이 선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다. ‘이걸 데리고 나중에 노아르크 놈들이랑 전쟁을 하라고?’ 전쟁에 있어서는 ‘사기’가 가장 중요하단 말이 있던데, 이 상태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경험치가 빠르게 쌓이고 있다는 것 정도. 「얼어붙은 영혼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오염된 눈의 정령을 처치했습니다 EXP +6.」 「프로스트 가디언을 처치했습니다 EXP +7.」 「리치를 처치했습니다 EXP +6.」 「빙하 거인을 처치했습니다 EXP +7.」 「서리불꽃 거북을 처치…….」 「…….」 아이스록의 개체들 대부분이 고위 몬스터다 보니 경험치가 쌓이는 속도 하나는 기가 막히다. 뭐,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아이스록에서 출현하는 개체를 전부 다 처치해도 8레벨이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오기 힘든 곳이니 최대한 많이 사냥을 해둬야지.’ 그렇게 얼마나 더 몬스터와 싸우고, 더 지친 몸을 이끌고 여정을 이어갔을까. 슬슬 날이 저물며 우리는 절벽가에 야영지를 꾸렸다. 썰매에 적재된 상자에서 천막을 꺼내 설치하고, 그 안에 침낭을 넣는다. 그리고……. 「보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활성화시킨 마도구를 천막에 몇 개 넣어주면 아늑한 보금자리가 완성된다. “오늘 우리 팀에는 불침번이 없으니 다들 편하게 자라.” 아, 참고로 원정대를 통틀어 불침번의 숫자는 총 둘이었는데, 내일에서나 우리 차례가 돌아오기에 오늘은 편히 잘 수 있었다. 신관이 무려 넷이나 돼서 가능한 일이었다. 걔네가 돌아가며 [멸악선포]만 해줘도 몬스터는 얼씬도 하지 못하며, 이 척박한 땅에서 활동하는 약탈자 팀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까. 설령 약탈자가 있더라도 이런 대인원을 공격할 마음은 먹지 않을 것이다. 목 위에 대가리가 박혀 있다면. “잘 자고, 내일 봐요. 아저씨.” 천막은 3인용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분류를 해서 사용했다. 암만 격의 없는 탐험가 끼리라도, 남녀가 유별한 건 유별한 거니까. 나도 남자끼리 자는 게 편하다. 뭐, 비실이 영감과 마법사는 좀 비좁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애쉬드, 알디디. 너희는 먼저 자고 있어라.” “순찰이십니까?” “일단 원정대장이지 않나.” 오늘 하루 고생한 디디 영감과 애쉬드를 재운 뒤 야영지를 쓱 둘러보며 문제가 있는지 확인을 했다. 야영지를 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다들 피곤했겠지. ‘다 괜찮은 거 같으니 슬슬 나도 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 팀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서벅. 인기척에 등을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카이슬란, 안 자고 있었나?” “원정대장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오.” “뭐지?” “잠깐, 걸으면서 대화 좀 하겠소.” 이내 우리는 야영지 끄트머리 쪽에서 크게 한 바퀴를 돌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고 있소.” 불만이라……. 어떤 불만일지야 뻔했다. “대부분 내 욕이겠군?” 내 물음에 카이슬란이 씁쓸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사람이란, 즐거울 때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힘이 들 땐 반드시 그 이유를 찾으려 드는 법이니까.” 사람에 대한 고찰이 깊이 묻어나는 중얼거림. “그래서 그게 끝인가?” 내가 묻자 카이슬란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까지였다면 굳이 야밤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거요.” “뭔가 더 있다는 거군.” “……원정대 내에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소이다.” “소문? 어떤 내용이지?” “모두 식량 보급이 줄은 상황에서, 제1팀만은 사리사욕을 챙기고 있다는 내용이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카이슬란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 뭐 애들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딴 게 왕가에서 모으고 모은 최정예라고? “최초 근원지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나?” “파이크 넬다인이오.” “제임스 칼라의 팀원이군.” 참고로 이놈의 포지션은 나와 같은 전사로, 지난 연회에서는 먼저 찾아와 웃으며 통성명을 청했던 놈이었다. 거, 덩치도 큰 놈이 비겁하게. 아, 덩치가 크다 보니 배가 고파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던 건가? “어떻게 할 거요?” “글쎄…….”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카이슬란은 몇 가지 대응법을 추천까지 해주었다. “만약 그자를 징계하겠다면 나를 통해서 하는 것이 옳소.” “원망의 화살을 돌릴 수 있으니까?” “원한다면 전 대원이 보는 앞에서 아주 크게 일을 벌여주리다. 당신에 대한 미움은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허허… 설마 얘가 이런 충신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신기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일단 이어지는 말에 경청했다. “아니면 아쿠라바를 이용해도 좋소. 보급품 관리는 그녀의 임무였고, 이유야 어쨌든 이 사달이 난 것은 그녀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열이 무너졌든 아니든, 아쿠라바는 보급품을 지켜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에야 그녀가 명망 높은 탐험가라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언급만 되면 다들 그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할 것이오.” 역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내 답변을 들려주기 이전에 한 가지만 묻기로 했다. “카이슬란, 화살받이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면서까지 나를 도우려는 이유가 뭐지?” 혹시나 숨은 저의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한 질문. 다만 카이슬란은 올곧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좋으나 싫으나, 지금은 원정대를 이끄는 건 당신이니까.” 의외의 답변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 흔들리면 이 원정이 성공할 수 없소.” 솔직히 말해, 내 입지가 위태로워지면 가장 먼저 나서서 내 자리를 탐낼 줄 알았는데. 일단 군인 출신이라 이건가? 카이슬란은 개인의 욕심보다는 공공의 목표를 우선하는 타입이었다. “자, 그럼 이제 말해주시오. 어떻게 할 것이오?” 녀석이 제시한 선택지는 두 가지였으나,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와도 같았다. 아쿠라바든, 이 녀석이든.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이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란 거니까. 조언은 고맙지만,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짧은 답변에 카이슬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가만히 있는다면, 대원들은 뭔가 일이 잘못될 때마다 당신에게 책임을 묻고자 할 것이오.” 그래, 그렇겠지. 근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놈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 “그래서 걔들이 대원인 거고, 내가 대장인 거니.” 권리만 누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 아이스록 진입 8일 차. 첫날부터 탈 많던 원정은 아득바득 이어져 어느덧 중반부에 이르렀다. 평야지대가 끝나고 마주한 거대한 얼음산. 앞으로 이 산을 우리가 등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방향은 그 산의 아래다.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수색을 맡은 제임스 칼라의 팀이 머지않아 다음 필드로 향하는 길목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 길목을 따라 거대한 얼음 동굴을 타고 지하로 향했다. 터벅, 터벅. 딱딱한 지면에 울려 퍼지는 대원들의 군화 소리. 다만, 이전처럼 칙칙한 분위기만은 아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그렇지 않던가? 힘든 일을 함께 겪다 보면 자연스레 끈끈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온 사방의 얼음이 유리처럼 투명하니 뭔가 환상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거 같구려.” “하하,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소.” 물론 분위기가 변한 건 체력적으로 여유가 생긴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원 중 절반이 초행이라 초반부에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이제는 다들 어느 정도 적응을 끝냈으니까. “으아, 배고파서 죽겠군. 왜 다들 아이스록을 꺼리는지 알겠어.” “힘들 땐 아이 초상화를 보며 버텼는데, 여기서는 그럴 수도 없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배에서 내리기 전에 아공간에서 꺼내둘 걸 그랬어요.” “오, 아이가 있나? 몇 살이지?” 아, 변한 건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삐걱거리기만 하던 원정대가 이제는 곧잘 한 몸처럼 움직여준다. 바로 이렇게. “측면 및 전방에서, 마물 출현!” “선두의 1팀이 막는 동안, 2팀 3팀은 측면의 적부터 처리한다!” 지시가 내려지면,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게 이를 수행하는 대원들. 「프로즌 웹터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녹지 않는 고치를 처치했습니다. EXP+6.」 「서리불꽃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EXP +5」 전투 자체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해졌다. 이제야 좀 정예답다고 해야 하나? 합이 맞춰지기 시작하니 그들도 본연의 전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된 것. 아, 그리고 긍정적인 점은 또 있었다. “슈이츠, 저자… 확실히 싸우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군.” 강자를 존중하는 탐험가 업계답게, 선두에 서서 가장 위험한 일들을 자처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내 평가도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밤중에 식량을 퍼먹는다는 괴소문도 어느새 사라졌고. 역시 사람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하는— 지지지직- 응? 돌연 귓가에 잡힌 소리에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에르웬, 방금 무슨 소리였지?” “모르겠어요. 저기 뒤쪽에서 난 거 같은데…….” 뒤에서 났다고? 나는 서둘러 등을 돌렸고, 이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지지직. 하중을 버티지 못했는지, 거미줄처럼 바닥에 퍼져나가는 실금들. ‘빌어먹을!’ 하필 썰매를 끄는 트롤이 있는 지점이었다. “소환! 소환부터 해제해라!” 내가 있는 힘껏 소리치자 넋이 나가 있던 소환사가 오더를 따라 트롤을 역소환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을까. 콰지지지직. 이전보다 한층 더 커진 들려오는 균열음. “……모두 피해!” 균열지의 중심부에 있던 탐험가들이 다급히 몸을 피했고, 용기 있는 몇몇은 일신의 안전보다는 짐부터 챙기고자 했다. “물자! 물자를 챙겨라!” “저게 없으면 끝이라고!” “옮겨!!” 하중이 더 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있는 힘껏 썰매를 끌어내는 탐험가들. 그러나 바닥이 무너지는 게 더욱 빨랐다. 콰콰콰아앙-! 싱크홀이 발생하듯 푹 꺼지며 무너지는 지면. 미처 이동시키지 못한 한 대의 썰매와 함께 밀고 있던 탐험가 둘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리어드 애쉬드가 5등급 보조 마법 ‘부유’를 시전했습니다.」 기적처럼 위로 떠오르는 두 명의 탐험가. 절망으로 가득 찼던 둘의 표정이 안도로 변함과 동시에 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풍덩-! 하, 이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던 거야? 이러면 다시 꺼낼 수도 없잖아. 처참한 심정과 별개로 나는 신속하게 지시부터 내렸다. “다들 낭떠러지에서 최대한 떨어져라! 혹시 모르니 너무 붙어 있지 말고!” 지시가 떨어지고서야 굳은 몸을 움직이는 대원들. 나는 조심스레 끄트머리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사를 통해 빛으로 비춰보니, 예상한 대로 그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서 썰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쿠라바!!” “네, 네!” “저 썰매에 있던 식량의 비중은?” “저, 절반 정도요!” 그래,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이 또 줄은 거구나. “…….” 내가 이를 악물고 있자 아쿠라바가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저기…….” “조용히 해라. 생각 중이니까.” “…….”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처음에도 지반이 무너지더니, 이번에도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암만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아쿠라바.” “네. 말씀하세요.” “지금 당장 전 대원들에게 물어 확인해라.” 우선 확인할 것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대원 중에 개명을 했던 사람이 있는지, 혹시 그 이름이 한스였던 건 아닌지.” 이걸 확인하고 나면 좀 더 분간이 수월할 것이다. 이게 단지 우연이 겹쳐 발생한 불행의 연속인지. 그도 아니면……. “최대한 빨리 확인해라.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의 악의로 인한 인재人災인지. 401화 아이스록 (2) 조사 결과, 개명을 한 자는 두 명이었다. 다만 그 두 명이 사용하던 이름은 ‘멀저리’와 ‘딕’으로 그 저주받은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 중에 (구)한스는 없었다. 한데, 도대체 이 기분은 뭘까. ‘막상 없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네…….’ (구)한스가 없단 것에 안도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도 어느 정도 공존한다. 만약 놈이 실존한다면,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인한 사태일 수도 있을뿐더러……. 그게 아니라 한들 용의자가 확 좁혀질 테니까. ‘……아니, 잠깐만.’ “트롤.” “네?” “소환수로 쓰고 있는 트롤 세 마리의 이름은 뭐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이 역시 헛발질이었다. 키 큰 놈 순으로 삐삐, 뽀삐, 예삐라던가? 정상인인 나로서는 이해 못 할 작명 센스다. ‘아무튼, 이거로 다른 누가 고의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게 확실해졌네.’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런 우연의 일치를 잘 믿지 않는다. 적어도, 그 과정에 한스가 껴있는 게 아니라면. 심지어 아이스록의 지반 무너짐 현상은 원정 중에 두 번이나 겪을 만큼 흔한 경우도 아니었다. 게다가……. ‘짚이는 것도 있고.’ 나는 잠깐 꼈다가 얼른 다시 뺀 반지를 조심스레 품 속에 집어넣었다. “수습은 얼추 끝난 거 같군.” “네.” “손실은 어떻게 되지?” “다행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단 식량의 비중은 크지 않아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다른 탐사 용품들도 생존에 중요한 것들이지만, 식량보다는 중요도가 낮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어떻게 하기는, 다시 여정을 재개한다.” 피해 규모만을 확인한 뒤, 나는 원정대를 다시 출발시켰다. 그야 안 그래도 시간이 별로 없잖아? 여기서 가만히 시간을 죽인다고 범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면서 계속 생각을 해봐야지. “아이스 트롤은 얼마나 멀리까지 보낼 수 있지?” “……제, 제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해요!”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묻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까. 내 눈치를 보며 즉답하는 소환사. ‘…연기인가?’ 사실 제일 수상한 건 얘인데 말이지.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에 깊이 캐묻진 않았다. “앞으로 남은 세 대의 썰매는 전면, 중앙, 후면으로 나뉘어 움직인다.” 이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썰매를 나누어서 이동하는 진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터벅, 터벅. 투명한 얼음 동굴 안쪽으로 계속해서 행군하며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물자를 파괴한 범인이 이 중에 있다면, 그게 대체 누구일까. 용의자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하지만 우선 배신자일 경우에 가장 타격이 큰 자들부터 하나하나 따져봐야겠지. 예를 들면, 각 팀의 팀장들이라든가. “…슈이츠, 미안해요. 이번 일은 제 책임이에요. 썰매를 나누는 것도, 사실 제가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인데.” 일단 티타나 아쿠라바. 이 여자의 수상함은 말할 것도 없다. 보급품 관리를 맡았으며, 그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가장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자리했으니까. “아쿠라바 경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터이나, 벌써 두 번째요. 좋든 싫든 벌을 주지 않으면 모두가 당신을 우습게 볼 것이오.” 수상한 건 카이슬란도 비슷하다. 친절한 조언이나 희생정신도 다 고맙지만, 그게 더 수상하거든. 대장 자리에 가장 욕심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녀석이었고. “저는 누구의 실수라고 보기 어려운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 같군요.” 제임스 칼라. 그나마 가장 덜 수상하지만, 동기야 찾아보면 없는 건 아니다. 그야 이 중에 개인의 입지가 가장 적은 놈 아닌가. 뒷배 쪽에서 녀석 정도야 충분히 쥐고 흔들 수 있었으리라. “…모두 그대 뜻대로 하시지요. 그게 이끄는 자의 의무이며 권리이니까.” 마지막으로 성기사 준. 얘는 그냥 예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내게 호의적인 것이, 굉장히 껄끄럽게 느껴지는 중이고. “슈이츠 씨, 대원들의 피로가 극심합니다.” 평소의 일정보다 2시간가량 더 이어진 행군. “야영한다!”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하며, 각 팀장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가장 먼저 나온 안건은 이것이었다. “포션, 체온 유지를 위한 소모품 등의 분실도 분실이지만, 천막과 침낭이 줄어든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배도 고픈데,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면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게 분명해요.” “형평성에 문제가 없는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편하게 자고, 누군가는 불편하게 침낭도 없이 잔다면 서로를 원망하게 될 테니.” 서른 명의 인원이 다 사용할 수 없는 천막과 침낭. 내가 선택한 해결 방식은 간단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잠자리가 부족한 만큼 불침번을 늘린다.” “…불침번을요?” 어차피 침낭도 숫자가 안 맞잖아? 밖에서 경계를 서는 인원이 늘면, 실내에서 잘 수 있는 인원도 그만큼 늘어난다. “…너무 극단적인 방식입니다.” “체력 소모가 더 커질 것이오.” “차라리 순서를 둬서 침낭과 천막을 돌아가며 쓰는 건 어떻습니까?” 팀장들은 우려를 내비쳤지만, 원정대장의 권위로 묵살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슈이츠, 그런 방식이라면 그대를 향한 원망이 더욱 커질 게 분명합니다.” 뭐, 이들의 걱정은 이해 못 할 바 아니었다.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없애는 식의 해결법. 아마 내일부터는 전술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저 야만적인 인간이 이상한 짓을 시킨다고 씹어대겠지. 리더의 자질이 없다는 말도 돌 거다. 하지만……. “상관없으니, 그렇게 알리고 각 팀에서 불침번을 뽑고 순서를 정해라.” 불침번을 늘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자고 있지 않은 사람이 늘면 자연스럽게 밤의 치안도 올라가잖아? 지금부터 나는 원정대 내의 배신자도 경계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라비옌.” 피곤하다는 듯 천막으로 들어가려는 용인족 여자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죠?” 이 여자도 조금 의심스럽단 말이지. 후작이랑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도 좀 궁금하고. “잠깐 얘기 좀 나눌까 해서.”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요?”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누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이라도 하나 보네요.” “모든 가능성은 열어둬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한 팀이 되어서 오래 움직였기에 이전보단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지만, 딱히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말해도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 쪽에는 소질이 없어서.” “그런가…….” “이게 끝인가요?” “그래, 피곤할 텐데 어서 자러 가라.” 좀 더 대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나올 게 없을 듯해 라비옌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천막 뒤편으로 향한 뒤 주머니에서 꺼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캐릭터가 No.6111 운명 추적자를 착용했습니다.」 최근 며칠간 늘 그랬듯이, 끼자마자 반지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적색의 빛. 나는 누가 볼까 싶어 얼른 반지를 뺐다. ‘니미럴.’ 7층에 진입한 후로 계속 이 상태였다. *** 넘버스 아이템 중에는 도시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No. 399 침묵의 우리가 그렇고, 바로 운명 추적자가 그렇다. 따라서 미궁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반지부터 꼈다. 그리고……. ‘그땐 적색불이 안 떴지.’ 이는 6층에서 다른 원정대원들과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항해 도중에도 변함없었다. 하나, 아이스록에 도착한 순간. 솨아아아아아-! 반지는 붉은빛을 뿜어냈다. 긍정적인 부분은 단 하나도 섞이지 않은, 부정적 이벤트가 근처에 있다는 뜻.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배신자를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우리를 배신하는 시기가 7층에 도착한 후로 정해져 있던 거라면, 내내 안 뜨다가 이제서야 빨간 불이 뜬 것도 말이 돼.’ 여정 내내 낮은 확률의 불행이 겹쳤고, 그럼에도 반지의 불빛이 여전했다.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니며, 더 부정적인 이벤트가 내 반경에 남아 있다는 뜻인데……. “아저씨, 언제까지 주무시려고요!” 어느샌가 눈을 떠보니 에르웬이 보였다. 보온돌 숫자가 부족해 보급을 줄였더니, 밤새 체온이 내려가 몸이 으슬으슬했다. “영감이랑, 애쉬드는?” “먼저 일어나서 준비 중이에요.” “왜 아까 깨우지 않고?” “아저씨가 피곤해 보였나봐요.” 음… 마음은 고마운데, 마법사랑 이능술사한테 체력 걱정을 받는 건 전사로서 수치다. “제가 면도 해드릴까요?” 이내 몸을 일으켜 세우자, 에르웬이 싱긋 웃으며 그런 말을 해왔다. 무심결에 턱을 매만지니 수북한 수염이 만져졌다. 물론 딱히 문제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됐다. 불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수염은 이런 환경에서 도움이 된다. 일단은 이것도 털이니 조금은 보온이 될 거잖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쉽네요. 아저씨는 수염이 없는 쪽이 훨씬 인물이 사는데…….” 에르웬이 칭얼거리는 것은 대충 무시하며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살갗, 폐부를 휘감는다. 뭐,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일 테지만. 꼬르르르르르륵-! 잠에서 깨기 무섭게 배에서 느껴지는 공복감. “일어났는가.” “서둘러 천막부터 해체를 하지요.” 밖에서 기다리던 디디 영감과 애쉬드와 함께 하룻밤 지냈던 천막부터 해체해 썰매에 실었다. 그리고……. 찌걱, 찌걱. 아침 식사로 보급된 육포 쪼가리를 최대한 아껴 씹은 뒤, 여정을 재개했다. 아이스록 진입 10일 차. 앞으로 우리가 넘어야 할 루트는 간단하다. 대륙 중심부의 거대한 산맥 아래로 이어진 미로 형태의 얼음 동굴을 탐사하다 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거대한 싱크홀, 빙하의 눈이 나올 것이고 그때부터는 후반부라 봐도 좋다. ‘빙하의 눈’의 끝 지점. 쉽게 말해, 지하 바닥에 8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있으니— “정수… 정수다!” 돌연 뒤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메르안, 방금 메르안이 죽고 나온 거 맞소?” “뭐? 잠깐만, 그럼 3등급 정수잖아?” 덧붙이자면 그냥 3등급 정수가 아니다. 여기 아이스록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정수. “다들 비키시오!” 일단 대원들부터 뒤로 물린 뒤, 마법사를 보내 시험관에 정수부터 담았다. 확인 결과, 정말 메르안의 정수가 맞았다. 어제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고 바로 좋은 소식이 찾아오는 건가? 상위 탐험가이지만, 3등급 정수는 탐이 나는지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다들 진정하시오. 이 정수는 추후 구매 희망자가 있다면, 평균가를 기준으로 시험관 값을 제한 뒤에 우선적으로 구매할 권리를 선사할 것이오! 만약 경쟁자가 있다면 경매를 붙일 것이고!” 큰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서둘러 원정대 내의 군기를 잡는 카이슬란. “…….” 몇몇 탐험가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대부분은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원정 동안 정수가 몇 개 나오긴 했지만 전부 다 아래 등급이었으니까. 3등급은 금액대부터가 다르다. 뭐, 그래도 서른 명이서 나누면 개개인에게 떨어지는 금액은 얼마 안 될 테지만. 그래도 소득은 소득인 것. “……노아르크 놈들에게서 나온 전리품도 추후 공평하게 분배한댔지.” “게다가 전공에 따라 왕가에서 보상도 나올 테니, 그것도 무시 못 할 걸세.” “저 정수를 노리는 자는 전공을 많이 쌓아야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돈이 있을 리 없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생한 값은 톡톡히 받을 수 있겠단 거군.” “원정이 성공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일세.” 그래도 오랜만에 긍정적인 소식이 있던 덕인지,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원정대 내의 분위기는 제법 밝았다. 뭐, 뒤에서는 내 욕을 오지게 하겠지만. 그런 거로 멘탈을 챙길 수 있다면야. 원정대장으로서 딱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사람이 모이면 나쁜 놈이 한 명은 있어야 되잖아?’ 그 상태로 사흘이 더 흘렀다. 천만다행이도 그동안 물자를 또 잃어버리거나, 대원이 전투 중 목숨을 잃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반지가 뿜어내는 색은 여전히 적색. 때문에 나는 여정을 이어나가면서도 소환사에게 취조를 하거나, 원정대원들의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을 하는 등, 쫓기듯이 배신자에 대해 조사를 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빙하의 눈이다!” 아이스록 진입 13일 차. 어느덧 7층의 후반부를 목전에 둔 그 시기. “무슨 일이 있소?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야영 준비를 하겠다니…….” 나는 야영지 구축 명령을 내린 뒤, 수뇌부들을 몽땅 불러 모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어떤 놈인지 이제 알 거 같거든. 402화 아이스록 (3) “배신자……?” “그게 무슨 뜻인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뱉은 나의 말에 팀장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앞뒤 잘라먹은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강 이해를 하였을까. 제임스 칼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물자를 잃어버린 그 사건 때문에 그러십니까?” 나는 애간장 태울 것 없이 긍정했다. “그래, 맞다.” “하지만 그 사건은—” “우연의 일치라고? 내가 배신자를 언급하자마자 그 얘기를 한 걸 보면, 너도 뭔가 이상하다 여겼던 거 같은데?” “그건…….”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무는 제임스 칼라. 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아쿠라바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껴들었다. “혼자 생각을 해본 것과 그걸 언급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배신이라니요? 심증 하나만으로 꺼내기에는 지극히 예민하고 위험한 주제예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단지, 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을 뿐. “그래서 말의 요지가 뭐지?” “우리 중 누구를 의심하든지 간에, 반드시 우리 모두가 납득할 만한 물증이 있어야 할 거예요.” 후, 아픈 데를 찌르기는. 설마 자기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하긴, 보급 관리는 이 아줌마 역할이었으니까. 그렇게 여기고 벌써 방어 기제를 발동한 걸 수도 있겠네. 오해를 더 사기 전에 얼른 딱 잘라 말했다. “걱정 마라. 너희를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네? 하지만 아까는 분명…….” “너희를 의심했으면 따로 불러서 이런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지.” 정확히는 모두 다 용의 선상에 놓고서 의심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됐다.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되었으니까. 다행히 우리 소중한 팀장들 중에는 범인이 없었다. “하오면… 누구를 배신자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오?” “파이크 넬다인이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제임스 칼라에게로 보였다. “……제임스 칼라의 팀에 속한 전사였죠?” “틈만 나면 원정대장의 험담을 늘어놓으러 돌아다니던 녀석이기도 하오.” “흐음…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원정대장을 견제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일단 내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듯한 삼인방. 삼인방의 시선에 제임스 칼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뭐, 뭔가 오해가 있던 것 아닙니까? 넬다인, 그 친구가 좀 마음이 좁고 그런 부분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신기하군. 그자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 “이미 놈에 대한 조사는 다 끝마쳤다. 탐험가 길드의 추천으로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 놈이라지? 너도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게 아니라 그때 처음 만났고.” “그건 그렇지만…….” 제임스 칼라가 말꼬리를 흐리자, 아쿠라바가 그를 돕고자 나섰다. “슈이츠. 우선 어떤 이유에서 그자를 배신자라 생각한 건지를 듣는 게 먼저일 거 같은데요? 물증이 있는 거라면 더 좋고요.” 아오, 아까부터 물증 물증 물증. 귀에 딱지가 박힐 것만 같지만, 일단 나는 준비한 대로 파이크 넬다인이 배신자인 근거를 요목조목 설명했다. 그리고 얘기가 끝났을 때. “확실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건 알겠어요.” “아직은 심증뿐이지만, 충분히 의심을 할 만한 정황이긴 하구려.” 모든 팀장이 내 의심을 합당한 의심이라고 받아들였다. 아, 제임스 저놈만 빼고. “한데 가장 중요한 물증이 없지 않습니까? 이런 정황만으로는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혹여 누군가는 보복 행위라 여길 수도 있을 거고요!” 이놈이 목소리를 높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다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팀장이 팀원을 보호하려 드는 건 당연하니까. “진정해라. 나도 그걸 아니까 너희를 불러놓고 이렇게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거 아니겠나.” 나는 제임스 칼라를 보며 물었다. “이것만 답해봐라. 너는 지금도 내가 괜한 의심을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 “좋아, 그렇다면 됐군.” 나는 녀석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박수를 크게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는 너희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도움이라면…….” “설명해주마.”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을 팀장들에게 공유했고, 이내 모두에게서 동의를 얻어냈다. 그리고……. “슬슬 밖은 해가 저물었겠군.” 밤이 되었다. 뭐, 이 동굴 안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똑같이 어두울 뿐이지만. “자,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너희는 가서 파이크 넬다인을 포함해 모두 다 불러와라.” 밤이 되었으니, 슬슬 재판을 열어봐야지. *** 얼어붙은 천장과 외벽. 공동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싱크홀. 그리고 그 옆에 구축된 야영지에 모인 서른 명의 원정대원들. “…피곤해 죽겠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원정대 내에 배신자가 있다더군.” “……배신자?” “그래, 식량을 잃은 것도 모두 그자가 꾸민 일이란 얘기가 있어.” 팀장들이 내 지시대로 정보를 조금 풀기는 했는지, 모인 대원들의 표정에는 당황한 감정이 깊게 배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호기심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배신자가 누군데?” “글쎄, 그건 곧 알 수 있지 않겠나.” “하긴. 잘 시간에 이렇게 모두 불러 모은 걸 보면 누군지 알아냈으니까 그런 거겠지.” 웅성거림이 줄어들고, 점점 더 내게로 주목되는 시선. 그러나 나는 시선 따위는 싹 무시한 채 딱 한 곳만을 집중해서 살폈다. “넬다인, 자네 왜 그러나?” 파이크 넬다인. 원정대 내에서 허구한 날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녔던 제임스 칼라 팀의 전사. ‘새끼 쫄기는.’ 처음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움찔하며 피했던 녀석이 이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마주 본다. 흔한 거짓말쟁이의 습관이다. 걔들은 눈을 피하면 상대가 자신을 보고 뭔가 숨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거든. “자자, 조용들 하시오!” 이내 내가 눈짓하자 카이슬란이 앞에 나서며 대원들을 다잡았고, 이내 머지않아 싸늘한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뭔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기 딱 좋은 분위기. “파이크 넬다인, 나와라.”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대원의 시선이 한곳으로 이동했다. “…뭐? 설마 저놈인 건가?” “놈놈 거리지 말게. 아직 확실한 건 없지 않나.”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림. “나오지 않을 건가?” 내 말이 이어진 순간, 파이크 넬다인 주변에 있던 이들이 거리를 벌리며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터벅, 터벅.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당당하게 내 앞에 서는 녀석. “…나왔소이다마는.” “아주 당당하군.”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소? 됐고, 이제 이유나 들어봅시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요?” 녀석이 호전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대강 예상한 상황이었다. 분위기 좀 조성해두고서 겁을 준다고 울면서 전부 고해바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까. “파이크 넬다인.” “듣고 있으니 말하시오.” “현재 너는 중대한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반역?” “왕의 특명을 받고 세워진 원정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니, 반역 행위라 받아들여도 무방하지 않겠나.” “…나는 도통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소. 대체 내가 어떤 짓을 했다는 것이오? 혹시 내가 당신 욕을 하고 다녔던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파이크 넬다인!” 혓바닥을 길게 놀릴 시간을 줄 생각은 없었기에 볼륨을 높이며 놈의 말을 끊었다. “너는 원정 도중 두 차례, 지반을 무너뜨리며 소중한 보급 물자를 분실토록 유도했다! 인정하나?” “당연히 할 수 없소. 사실이 아니니까.” “마지막까지 부정하겠다 이건가?” “다들 왜 가만히만 보고 있소! 원정대장이라는 작자가 아무 증거도 없이 대원을 이렇게 핍박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녀석은 내가 아니라 타 대원들을 타깃으로 크게 소리쳤고, 이에 여론도 조금씩 움직였다. “조금… 납득이 안 가기는 해.” “무작정 사람을 불러내서 저래봤자…….” “그러고 보면 매번 대장 욕을 하고 다니던 녀석이었지?” “하지만 갑자기 배신자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말이지.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게 아니라면야…….” “애초에 땅이 무너진 건 우연이 아닌가?” 놈이 바라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앙갚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슈이츠,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한 것이오.” 이내 놈이 기세등등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를 모함해 핍박하고 싶은 거라면, 적어도 이곳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대야 하지 않겠소?” “증거라…….” 사실 그동안 이 부분이 제일 눈엣가시였다. 그야 무작정 고문해 자백을 받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 그렇다고 어긋난 신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검증 마법? 5층만 넘어도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검증 마법에 면역을 갖는 와중에, 과연 그 마법이 이 중 몇 명에게나 통할까.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답이 없는데.’ 결론을 내렸다. 유도 신문으로 놈이 자백을 하는 게 아니라면. “보아하니 그런 것도 없—” 방법은 딱 하나뿐이라고.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몸체. 촥. 섬광처럼 뻗은 손으로 놈의 모가지를 움켜쥔다. “……!” 이에 대원들은 놀란 눈빛이었으나, 당장 몸을 움직여 나서는 자는 없었다. 탐험가들의 습성이다. 사태 파악이 덜 끝났다면, 대부분은 잠자코 관망하는 태세를 취한다. “커허, 이게 무슨 짓—!” “친구 사귀는 거 좋아하는 거 같던데. 이럴 때 도와줄 진짜 친구는 없었나보군.” “그, 그만—!” 뭐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구만. 꽈악- 모가지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어 놈의 기도를 막았다. 퍼억! 퍼억!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 팔을 내리치는 놈.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었다. 스윽. 나는 놈이 발버둥을 치든 말든, 팔을 구부려 놈을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넬다인, 알고 있나?” “…으, 읍!” “증거 같은 건 필요 없다. 원정대장에게는 유사시를 대비해 전 대원을 대상으로 한 즉결 처형 권한이 있지.” “크, 커, 커헉!” “나는 지금이 유사시라고 보는데.” 그리 말하며 살짝 손에 힘을 풀자, 놈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 말을, 밖에서 믿을 거, 같—!” “그래, 안 믿겠지.” 귀족들이 바보도 아니고. 거기다 여기 보고 있는 눈들이 몇 개인데? 여기서 이놈을 처형시키는 순간, 후작의 경쟁자들이 내게 책임을 물리고 원정대장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 바냐?” “……?!”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놈의 모가지를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머지않아 놈의 혈관이 빳빳하게 돋았고, 피가 몰린 머리가 새빨갛게 익기 시작했다. “……!!”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녀석은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단지, 구원을 바라듯 주변을 바라보았을 뿐. “저거…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것이오?” “분명 문제가 될 텐데…….” “카이슬란 경!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는 것 아니오까?” 우려를 내비치는 대원들. 다만, 그러한 질문을 받은 팀장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문 채 사태를 관망했다. 그렇게 약속이 다 끝났으니까. “…….” “…….” 팀장들도 묵묵히 지켜보며 내 행동을 지지함을 내비쳤기 때문일까? 어느새 적극적으로 우려를 표하고 말려야 한다 주장하던 이들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아… 돼…….” 그 사실을 가장 깊이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내 앞에 떠 있는 이놈이었다. 거, 안 되긴 뭐가 안 돼. “됐고, 뒈져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살기를 끌어올리며 놈의 모가지를 쥔 손에 모든 힘을 불어넣는다. 꽈지직-! 으스러지는 목뼈.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 흰자위. 기형적으로 빠져나오는 눈알. “젠장!”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욕지거리를 뱉고, 비명을 내지른 그 순간이었다. 「파이크 넬다인이 [과부하]를 시전했습니다.」 폭발적으로 급증한 놈의 체중을 버텨내지 못하고 팔이 기울었다. 그래, 드디어 써준 거구나. 콰아아아앙-! 각도가 내려가며 지면에 발이 닿게 된 놈의 육신. “허어업……!” 이내 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자 놈이 괴롭다는 듯 주저앉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미, 미친놈이야! 다, 다들 뭐 하시오! 이 미치광이를, 막아야, 하오!” 죽다 살아난 놈의 외침에 대원들이 동요했다. 지금이라도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표정. “다들 왜 보고만 있는 것이오!!” 놈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며 팀장들을 보았다. 하나 그를 보는 팀장들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지 않기를 바랐건만.” “정말로 [과부하]군요. 전사라면 절대 소지할 이유가 없는.” “우선 포박부터 하시지요. 혹여나 자결이라도 한다면 뒷얘기를 들을 수 없게 될 터이니.” 오늘의 교훈 하나. 심증이 있다면, 물증은 만들어 낼 수 있다. 403화 아이스록 (4) 배신자의 존재 여부를 확신하게 된 후. 나는 매일같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탐문을 하고 다녔다. 아, 물론 너무 형사처럼 굴진 않고 그냥 휴식 시간이나 야영 때마다 한량처럼 돌아다니며 말을 걸고 다닌 정도였다. 안 그러면 놈이 꼬리를 말고 숨을 수도 있잖— “자, 잠깐! 우리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시오!” 각 팀장들이 달려나가 파이크 넬다인을 포박하자, 지켜보던 대원 중 하나가 껴들었다. “설명이라…….” 못 해줄 건 없겠지. 그러는 편이 상황 정리에도 도움될 테고. “파이크 넬다인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밀번 나리아 덕분이었다.” “나리아라면…….” “아쿠라바 님의 팀에 속한 그 소환사?” 숫기가 많은 편은 아닌지, 소환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크게 움찔하며 당황감을 내비쳤다. “으어, 예? 저, 저 때문에요?” “그래, 몇 가지 물으러 갔을 때 네가 말했지 않나. 왠지 이상할 정도로 트롤들이 빨리 지치는 것 같다고.” “아, 네. 분명 그런 말을 했던 적은 있지만…….” 거, 눈치는 왜 그렇게 봐? 혹시 불똥이라도 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쓸데없는 걱정이다. 이번 추리의 최대 공적자를 내가 해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사고를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고 해야 하나? 이전엔 지반 침하 현상이 땅을 무너뜨리는 마법, 스킬 등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저 증언을 듣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외부가 아닌 ‘트롤’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 것. “트롤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 여긴 나는 사건이 있던 전후로 트롤에 접근한 자가 있는지를 확인했지.” 군중을 앞에 놓고서 추리를 읊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쿠라바의 팀원이나, ‘보존’ 마법을 상시적으로 걸어야 하기에 항상 썰매 근처에 대기하던 마법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탐정 모드.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트롤에 접근한 이가 그 외에도 딱 한 명이 더 있더군.” 나는 포승줄로 꽁꽁 묶인 놈을 가리켰다. “그게 바로 파이크 넬다인이었다.” “……!” “이놈은 온갖 핑계를 대며 찾아와 자연스레 트롤과 접촉했고, 사건이 벌어진 후로는 귀신같이 발길이 끊겼—” “그, 그건 정황일 뿐이잖소!” 그때 포박 당한 파이크 넬다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고작 그런 것 갖고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고?” 허허, 사람 말 아직 안 끝났구만. 성기사 준이 놈에게 재갈을 물리려 했지만, 내가 눈짓으로 이를 막았다.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데 굳이 막을 필요까지야. “증거! 결국 증거는 없다는 말 아니오!” 그래, 증거는 없었지. 그것 때문에 이렇게 귀찮은 방법을 써야 했던 거고. 사람들은 직접 본 것만 믿고 싶어 하니까.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옆에 있던 아쿠라바가 나섰다. “당신이 방금 쓴 이능은 [과부하]였어요.” “그,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요?” “왜 그 이능을 가진 걸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죠?” “비, 비장의 수를 하나씩 갖고 있는 건 다들 마찬가지이지 않소!” “흐음, 그게 ‘전사’인 당신의 비장의 수라고요? 7등급 정수인 [과부하]가?” 비꼼이 가득한 말에 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과부하]는 체중이 일시적으로 크게 늘어나 이동속도가 줄어드는 대신, 원거리 공격 스킬의 대미지가 상승하는 스킬이니까. 전사에게는 알맞지 않은 스킬이다. 그렇기에……. “노,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 애초에 [과부하]는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이 되는 이능이란 말이오!” 놈은 예상대로 이쪽에서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래, [과부하]라면 예전에 쓰는 녀석을 본 적이 있소.” “분명… 타인에게는 쓸 수 없는 이능이었지.” “뭐야, 그러면 엄한 사람을 잡았단 거잖아?” 놈의 논리에 현혹된 듯 웅성이는 대원들. “이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죄 없는 대원을 핍박하고 있소이다! 모두 나를 도와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 차례는 그대들이 될지도 모르오!” 이내 놈이 더더욱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이것 참, 고맙게도 말이지. 씨익. 사실 저 논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선 대화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세워둔 논리가 자기 자신을 옭아맬 테니. 지금부터는 뭔 짓을 해도 벗어나지 못할 터. 슬슬 칼을 뽑아들 차례다. “거기, 칼 좀 빌려주겠나?” 이내 근처에 있던 대원 중 하나에게 칼을 강제로 빼앗듯이 빌린 뒤 놈에게 다가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다, 다들 도와—” “다들 가만 있어라!” “커헉—!” 포박된 놈의 뒷덜미를 잡고서 모두에게 보이도록 높이 들어 올린다. 이에 대원들이 움찔하며 눈치를 보았다. 다 같이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 저들의 의견이 한데 모이기 전에 나는 서둘러 크게 소리쳤다.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이 되는 이능? 분명 [과부하]는 그런 이능이다. 하지만—!” 새끼가, 감히 누구를 속이려고. 내가 [던전앤스톤]만 몇 년을 했는데? “변환계 이능 [부여]를 갖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말을 뱉음과 동시에 놈의 팔뚝. 정확히는 정맥을 노려 칼로 깊이 그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선혈. 정맥을 넓게 그은 덕에 압력 차로 피분수가 솟지는 않았으나, 흘러나오는 혈액의 양은 그보다 더했다. “저 출혈량이면 몇 분도 못 버틸 거요.” “……치, 치료를 해야… 시, 신관!” 갑작스러운 처형 현장에 패닉이 온 대원들. “다들 가만히 있으시오!” “저희를 믿고 기다려주세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상황을 지켜보던 팀장들이 개입하자 그들도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1분, 2분, 3분……. 영원히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던 시간이 흐르고, 눈썰미가 좋은 몇몇이 먼저 이질감을 눈치챘다. “…왜 죽지 않지?” “저 정도 출혈인데, 아직까지 의식이 있다고?” “바닥에 고인 핏물을 봐요. 몸에 있는 피가 다 빠져나와도 저렇게는 안 될 거 같은데…….” 역시 사냥과 살인의 스페셜리스트라 볼 수 있는 탐험가들이라서 그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눈치를 챘네. 아무튼, 이 정도면 상황은 전부 무르익었다 봐도 될 테고……. “크흠흠.” 나는 추위로 잠긴 목을 한 번 풀어준 뒤, 다시 소리쳤다. “지금 너희가 본 이것은 [피의 샘]이라 불리는, 5등급 몬스터 블러드로어의 체화 이능이다!” 체화 이능. 이 세계에서 패시브 스킬을 뜻하는 명칭. “…[피의 샘]?” “그게 뭐지?” “예전에 책에서 본 적 있소. 절대 출혈로는 사망하지 않게 해주는 이능이었지.” “잠깐만, 블러드로어라면… 분명 아까 말했던 [부여]를 가진 몬스터들 중 하나 아닌가?” “맞소. 항상 다른 개체의 마수들과 무리를 짓는 탓에 그 이능이 굉장히 까다롭게 작용했던 기억이 있구려.” “그렇다면……!” 내가 더 설득을 할 것도 없이 납득을 하기 시작한 대원들. 이내 나는 잡고 있던 놈을 바닥에 내던졌다. 쿠웅. 제법 충격이 있었을 텐데도 놈은 신음 한 번 뱉지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없다고 판단한 것일 터였다. “자, 잠깐만! 브, 블러드로어의 정수를 먹은 건 맞지만, [부여]가 있다는 증거는 되지 않잖소?” 거, 이 지경에서도 증거 타령인가? 이번에도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럼 블러드로어의 다른 이능을 써보시게.” “그, 그건…….” “분명 네 개였지. 전부 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쉬운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오.” “이, 인정하리다! 사실 [부여]를 가진 것은 맞소! 하지만 그게 내가 배신했다는 뜻은 아니잖소!” “하오면, 어째서 처음엔 부정한 것이오?” “나, 나는 그저 겁나서……! 배신자로 몰릴까 두려워서 그랬을 뿐이오!” 발발 떠는 몸으로 내뱉는 최후의 변론. 온몸이 피칠갑에 줄로 꽁꽁 묶여 바닥을 구르는 놈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으나,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 다들 왜 그러는 것이오! 내가 그런 짓을 할 능력이 있다고, 내가 범인이란 말은 될 수 없소!” 무죄추정의 원칙. 현대의 재판이었다면. 아니, 조금 야만적일지라도 ‘법’이 존재하기는 하는 도시의 재판이었다면 통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파이크 넬다인, 언제까지 그렇게 순진해 빠진 말을 할 것이오?” 이곳은 미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들 뭘 고민하나? 딱 봐도 거짓말을 하는 표정이며 말투인데.” 탐험가들도 병신이 아니다. “하긴, 두 번이나 땅이 무너지는 것도 이상했지. 예전에 왔을 때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상황이 이쯤 되자 다들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 전부 저 새끼 때문이었다 이거지? 파이크 넬다인은 배신자가 맞으며. 지난 여정 간의 모든 굶주림과 불편함이 바로 이놈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터벅, 터벅. 나를 피해 대원들을 향해 기어가던 녀석이 급히 방향을 돌려 나를 향해왔다. “이, 이보시오! 사, 살려주시오! 묻는 질문에 모두 솔직히 말하겠소!” 좋아, 그럼 이제 심문 시간으로 넘어가 볼까. *** 4등급 탐험가 파이크 넬다인. 소수 정예 팀, 대형 클랜 등 이곳저곳 구르면서 활동을 했던 탐험가. 그럼 이놈은 어째서 원정대를 배신했을까. 아니, 정확히는……. “네 배후가 어디지? 노아르크? 알미너스 상회? 그도 아니면 탐험가 길드인가?” 자자, 어서 좀 말해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망치로 정수리에 있는 네 행복 버튼을 눌러줄게. 응? “……배, 배후 같은 건 없소! 단지 나는 당신이 미워서…….” 허허,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준.” 짧게 호명하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준이 기다란 송곳을 놈의 손톱 아래에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아무리 출혈이 심해도 죽지 않는 몸이라니, 이건 몹시 귀하군요.” “끄윽, 끄으, 윽윽!” “출혈은 버텨도 장기가 상하면 버티지 못할 테니 조심해라.” “걱정 마시지요. 그분께서는 아직 이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실 테니.” 이딴 게 성기사……?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비가 없는 말이었으며, 고문 행위도 이상할 만큼 능숙했다. ‘뭐야, 이 새끼… 옛날에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거나 그랬던 거 아니야?’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사안이다. 성을 버렸다는 점도 그렇고, ‘준’이라는 이름이 도시에 알려져 있지 않던 점도 그렇고……. 좀 수상하긴 하잖아? 뭐, 일단 당장은 저 능력이 크게 도움은 됐지만. “그, 그만……! 모두, 말할 테니……!” 꼴에 전사라고 1시간을 넘게 버티던 놈이 마침내 의지를 꺾고서 자백을 시작했다. “배후는?” “이리야 아드너스…….” “탐험가 길드의 길드장이군요.” 이런 씹……. 갑자기 이런 거물이 거론된다고? “제대로 말해라. 확실한 건가?” “화, 확실하오!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내게 이번 일을 사주한 게 바로 놈의 보좌관이었으니까!” 하,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은데. 길드장 문제는 뒤로하고서 일단 심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너는 어떤 명령을 하달 받았지?” “…….” “준?” “워, 원정대가 실패하도록 하라는 명이었소!” “구체적으로 어떤 명령이었지?” 이내 나는 여러 질문을 던지며 자세하게 사정을 파악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길드장은 우리가 아이스록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식량 및 보급 물자를 건드려 원정이 실패하도록 손을 썼다. “매, 맹세코 누군가를 해칠 의도는 없었소. 그런 일이었으면, 나도 하지 않았을 거고!” “뭐라는 거냐? 대원 중 두 명이 휘말려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우리 팀의 마법사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을 거고.” “그, 그건……! 그자들이 그렇게까지 물자를 지키려 할 줄 몰랐단 말이오!” 녀석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쩝, 이것도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퍼억-! 일단 필요한 걸 전부 들은 후에 턱주가리를 후려쳐 놈을 재웠다. 그리고 나가 있던 팀장들을 불러 모은 뒤 정보를 공유하고 의논의 시간을 가졌다. “정말로 그가 배신자였을 줄이야…….” “그보다 배후가 길드장이라니, 이거 사태가 더 커졌습니다. 돌아가면 일이 어떻게 될는지…….” “차라리 노아르크의 수작이었다면 나았을 것을.” 배신자를 색출해 낼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내 요청에 응하기는 했으나, 내심 내가 틀리기를 바랐을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면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다는 것 정도. “일단 이것부터 상의해보지. 길드장이 원정대의 실패를 바란 이유가 무엇일 거 같나?” “유력한 것은 정치적 견제예요. 원정이 실패하면 그 책임을 후작에게 돌릴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탐험가 길드에서는 이 전쟁의 추가 왕가든 노아르크든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오.” “설마 그랬을까 싶기야 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군요. 이번 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건 탐험가라 볼 수 있으니.” “준, 너는? 의견이 없나?” “…….” 회의 결과는 딱히 소득이 없었다. 여러 추측이 나오긴 했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저기… 파이크 넬다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요?” 이내 제임스 칼라가 조심스레 물었고, 각 팀장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당연히 처형을 해야 하오. 군기를 어지럽힌 이가 살아서 활보한다면 사기가 저하될 게 분명하니.” 멜란드 카이슬란.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살려서 돌아간다면, 도시에서 길드장을 몰아넣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준, 당신은 왜 말이 없어요?” 티타나 아쿠라바. “해당 사안은 오로지 슈이츠 님 혼자서 결정할 일입니다.” 성기사 준. “…….” 이내 그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거, 내가 어떻게 할지는 뻔한 거 아닌가? “처형한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쥐새끼까지 데리고 갈 여력은 없다. *** 처형식은 그날 밤, 모든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형은 전시에 가장 편한 참수형을 택했다. 교수형은 준비할 것이 많아 귀찮은 데다가, 모두가 피를 바라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서걱-! 말 그대로 단칼에 끝나버린 처형. 다만 몇몇은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앞에 고꾸라져 식어가는 사체에 다가가 침까지 뱉었다. 하긴, 약탈자보다 배신자를 더 혐오하는 게 탐험가들이긴 하지. “어디 가십니까……?” “순찰.” 처형이 끝난 뒤에 나는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 외곽으로 향했다. 그리고……. 「캐릭터가 No.6111 운명 추적자를 착용했습니다.」 품에 보관하던 반지를 다시 껴보았다. 한데 이건 또 뭘까.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배신자도 잡았으니 불이 꺼지지 않을까 했는데. 착용과 동시에 은은하게 빛을 자아내는 반지. 솨아아아아아- 색을 확인한 나는 흠칫 굳었다. 뭐야, 왜 아직도 빨간불이 켜져있어. 404화 아이스록 (5) 신호등 반지에서 적색불이 들어왔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나다. 착용자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이벤트가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것. ‘설마… 배신자가 한 명 더 있는 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심문을 할 때는 공범에 대해서 듣지 못했지만, 녀석도 모르는 또 다른 세력의 첩자가 한 명 더 껴있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뭐, 어쩌면 첩자 때문에 불이 들어온 게 아닐 수도 있고.’ 여럿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에 선 만큼,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만 이에 너무 매몰되지는 않기로 했다. 아직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단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계속해서 주위를 더 세심하게 관찰할 뿐.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빙하의 눈이 부여됩니다.」 처형 다음 날, 야영지를 정리한 우리는 내핵까지 이어졌을 것만 같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원기둥 구조의 필드. 외벽에 난 샛길을 나선 계단을 타듯이 빙빙 돌아 내려가는 형태였는데, 8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인 만큼 난이도는 상당한 편이다. 출현 몬스터 자체는 지나쳐 온 길들보다 크게 강하거나 하지 않지만……. 「상태이상 [불멸의 속삭임]이 부여됩니다.」 사망 시 언데드로 부활해 팀킬을 하게 만드는 악독한 저주. 「모든 치유 및 회복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개같은 디버프까지 추가가 된다. ‘……자연 재생도 역으로 작용하면 어쩌란 거야.’ 이곳에선 작은 상처도 절대 낫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끊임없이 곪아들며 악화된다. 그리고 그 속도는 캐릭터의 자연 재생력이 높을수록 빨라진다. 그야말로 탱커의 무덤이라 볼 수도 있는 장소. ‘여기서 잃어버린 방패바바가 몇 개였더라…….’ 글쎄, 생각하기도 싫다. 모르긴 몰라도 수백은 태웠을 것이다. 마침내 공략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긴 더 으스스한 거 같네요.” “에르웬, 잡담은 그만하고 주변을 경계해라. 이제 곧 마수들이 나올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웬만하면 다치지 않게 주의하란 말이죠? 히히, 알았어요.” “…….” 폭이 좁다 보니 원정대 전체가 팀별로 나뉘어 기차처럼 뒤를 따르는 구조. 여기서는 원거리 딜러의 비중이 높아진다. 출현 몬스터 중 거의 90%가 비행 가능한 개체인 탓이다. “가고일이다……!” 핏빛 성채에서 보았던 8등급 몬스터, ‘가고일 석상’이 아닌 진짜 가고일. “데스나이트도 있다!” 가고일을 타고서 창을 휘두르는 데스나이트. [끼히히히히히!] 허공에서 깔짝대며 디버프를 뿌려대는 벤시 여왕과 각종 영체계 언데드 몬스터 등등. 근접 딜러들의 카운터나 다름없는 비행 몬스터가 곳곳에서 속출했지만, 모두 우리 근처에 오기 전에 요격당해 빛무리로 변했다. 「제임스 칼라가 [꿰뚫는 빛]을 시전했습니다.」 「티타나 아쿠라바가 [No. 1911 파벨러의 고장난 회중시계]를 사용했습니다.」 「5분간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사라집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궁수, 이능술사, 마법사 등. 애초에 원정대 구성 자체에 원거리 계열이 많았을뿐더러, 신관도 무려 넷이나 됐기에 화력이 모자랄 일은 없던 것. 「니아로 캠벌이 [치유의 파장]을 시전했습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긴급재생]을 시전…….」 「…….」 언데드에게는 무려 1.5배의 대미지로 적용되는 들어가는 신성 주문. 물론 나타나는 몬스터가 전부 언데드 계열인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그래도 딜은 충분히 박히거든. 「모든 치유 및 회복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어차피 아군한테 힐을 써줄 수도 없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신관 포지션은 그냥 원거리 딜러다. 「가고일을 처치했습니다 +EXP 6」 「유령마를 처치했습니다 +EXP 4」 「화이트 와이번을 처치했습니다 +EXP 6」 「청염조를 처치했습…….」 「…….」 높은 힐 계수, 그리고 광역 신성 주문에 의해 녹아내리는 몬스터들. 근접 딜러들은 수비에 집중하며 절벽을 타고서 기어오르는 각종 마물들을 상대했다. 그리고……. “전투 종료!” “10분간 휴식 후 이동을 재개한다!” 한 번의 웨이브가 끝나면 얼른 재정비를 끝내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몇 번의 웨이브를 이겨낸 우리는 마침내 첫 번째 고지에 도착했다. 어느덧 좁은 비탈길이 끝나고. 절벽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드넓은 바위턱. 그리고……. “미치겠군. 저 숫자랑 싸우면서 다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위를 가득 채운 수백의 몬스터. 저기 절벽에 난 동굴 안이 빙하의 눈 리스폰 지역인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뭘 투덜거리냐? 여태까지 쉬면서 잘 왔으니, 이제 우리가 고생해야지.” 비탈길에서 원거리 계열이 활약했다면, 이제는 근접 딜러들이 몸을 쓸 때였다. “진형대로!” “매 순간 집중해라! 남은 일주일 동안 썩어가는 팔을 보면서 여정을 이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일렬 진형을 끝낸 뒤, 전사들을 선두에 모은 뒤 방패벽을 세운다. 그리고……. “가자아아아아!”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밀어내며 공간을 확보. 그다음부터는 난전이 펼쳐졌다. 앞에서 전사들이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내는 사이, 원거리 계열이 화력을 쏟아낸다. 확실히 전력이 압도적이라 그런지, 전투 난이도 자체는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랄, 팔이……! 아아아아악!!” 부상자가 발생했다. *** 부상자의 숫자는 총 넷. 그중 셋은 경상자로 분류가 가능하며, 생채기가 난 정도인 터라 죽음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일단 예정상 앞으로 6일이면 8층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저기서 다른 부상을 더 입는 게 아니라면, 상처가 썩어서 곪더라도 치료가 가능해질 때까지 버티는 건 가능할 터. 문제는 중상자에 속한 다른 한 명이었다. “나, 나는… 이, 이대로 죽는 거요?” 릭 저거스타. 파이크 넬다인의 부재로 안 그래도 숫자가 하나 적어진 제임스 칼라 팀의 근접 딜러. 뼈가 튀어나온 허벅지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놈의 곁에서 제임스 칼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죽을 리가 있겠나! 절대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말게!” 그래, 저 둘은 오랜 친구 사이랬지. “피오나! 얼른 와서 저주 마법을 써주시오!” 제임스 칼라가 마법사에게 저주를 요청했다. 마법사는 처음에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눈치였으나 설명을 듣고서 무릎을 쳤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대형 클랜의 부단장쯤 되어서 그런가? 예전에 한 번 와 본 적 있다더니 기초 대응법은 알고 있구나. 「피오나 에이머스가 5등급 저주 마법 [재생저지]를 시전했습니다.」 나도 한때 애용했던 방식이다. 저주 마법으로 자연 재생력을 낮춰 버리면 적어도 상처가 악화되지는 않으니까. 그사이에 최대한 부상을 줄여가며 무작정 길을 뚫는 방식으로 매번 아이스록을 주파했었다. 진짜 공략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슈이츠! 당장 원정대를 돌려서 위로 향해야 합니다!” 이내 저주 마법으로 긴급 조치를 끝내자마자 제임스 칼라가 외쳤다. 다급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째서?” “어, 어째서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절대 8층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과연 이 녀석은 다른 이가 다쳤을 때도 이렇게 나왔을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냉정히 판단했을 거 같다. 바로 저기 아쿠라바처럼. “이미 하루의 전부를 내려오는 데 썼어요.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총 이틀을 더 소모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도합 스물여덟 명이 이틀을 낭비한다. 뭐,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하지만……. “칼라 경, 미안하지만 우리의 식량은 앞으로 5일 치뿐이오. 지금 상태로도 마지막에는 온종일 쫄쫄 굶어야 한단 것이지.” 지금 카이슬란이 말했듯, 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것은 고작 시간만이 아니다. 임무의 성공 여부다. 하루야 굶는다 쳐도, 사흘이나 굶으며 여정을 이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아, 누구의 팀에서 배신자가 나온 덕분이지요?” 근데 얘 성기사 맞아? 비꼬는 솜씨가 무슨……. “배신자 얘기는 됐고, 한 가지만 묻겠소. 칼라 경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이 원정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오?” 그 물음에 제임스 칼라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고, 카이슬란은 냉정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게다가 앞으로도 부상자는 나올 것인데, 그럼 그때는 어쩔 것이오? 그때마다 위로 올라가야 하오?” 이번에도 제임스 칼라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까드득. 단지, 분함을 감추지 못하며 이를 악물었을 뿐.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는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다. “차라리 편히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칼라 님이 하기 어렵다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아예 산소 호흡기를 떼어 버리자는 듯한 준의 제안. 이에 애처롭게 몸을 떨던 제임스 칼라가 나를 보며 물었다. “슈이츠. 당신도 같은 생각이신 겁니까……?”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카이슬란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나.” 원래 극한 상황에서는 대개 이런 법이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며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제가 하지요.” 뭐라는 거야. “됐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니.” 소중한 대원 한 명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뭐, 원정 중 사망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곳이 여기는 아니다. “……예?” 얼빠진 얼굴로 올려다보는 제임스 칼라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지도, 그렇다고 동료를 여기서 죽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내 말에 각 팀장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가 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딱 그런 표정. 쯧쯧, 이래서 초심자들이란. “우리는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간다.” 공략법을 쓸 때다. *** ‘빙하의 눈’은 내가 가장 기피하는 필드였다. 아까도 말했듯, 공략법을 발견해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치유 및 회복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단기간도 아니고, 장장 일주일이나 필요한 여정. [던전앤스톤]에서 이런 미친 페널티가 붙었다는 뜻은 단 하나.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분명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라 판단한 나는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하며 마침내 발견해냈다.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었다. “왜곡 마법… 말인가요?” “그래, 앞으로는 모든 전투에서 마수들을 상대로 왜곡 마법을 사용한다.” “안 그래도 ‘보존’ 마법을 사용하느라 마법사의 피로가 상당해요. 한데 여기서 부담을 더 늘리려는 이유가 뭐죠?” 그야 공략법의 핵심은 ‘왜곡’이니까. 왜곡에 걸린 몬스터는 마석과 정수를 뱉지 않지만, 그 대신 일정 확률로 처치 시 시체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 와이번 가죽. 아다만티움. 포션의 원료인 트롤의 피. 상위 혼령각인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들이 바로 ‘왜곡’을 이용해 캐낸 대표적인 부산물이다. 그리고……. ‘빙하의 눈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모두 다 다른 계층에서도 사냥이 가능하지.’ 왜곡이 답이란 걸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다 그 이유였다. ‘아공간’을 못 써서 인벤토리도 부족한 곳에서 ‘왜곡’을 사용해 부산물을 캔다고? 다른 층에서 더 편하게 잡을 수 있는걸? 이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뭐, 늘 그랬듯 이 빌어먹을 게임은 그런 행동에 정답이 숨겨져 있었지만. “……설마 그런 식으로 부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줄이야.” 이내 내가 간단하게 공략법을 설명하자, 다들 탄성을 터트렸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후작의 정보력이 대단하군요. 아니, 왕가의 저력이라 해야 할까요? 이렇게 날고 기는 탐험가도 모르는 ‘안배’를 알고 있었다니.” 내가 탐정 모드를 켜고서 배신자를 잡았을 때, 내 팀에 다른 지략가가 있으리라 여겼던 것처럼. 이들은 이 공략법의 출처가 다른 곳이라 여겼다. ‘……차라리 이렇게 오해하는 게 나으려나?’ 음, 그러는 게 나을 듯하다. 괜히 으스대 봤자 이득 볼 게 없잖아? 우리 유교에서는 겸손이 미덕이기도 하고. “그럼 됐군. 오늘은 모두 지쳤으니 이곳에서 야영을 한 뒤, 내일 다시 출발하지.” 제임스 칼라의 친구도 이틀 정도는 버텨주리라 판단한 우리는 바위턱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여정을 재개했다. 그리고……. 「리어드 애쉬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습니다.」 「맥켈리 레이아더스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습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 일반 ‘왜곡’보다 1.5배 확률이 높은 ‘상위 왜곡’을 수없이 퍼부으며 사냥을 이어간 결과. 오후가 되었을 무렵엔 운 좋게 보존된 사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슈, 슈이츠! 그때 말한 게 혹시 이것입니까?” 이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간 제임스 칼라가 사체를 뒤적여서 구슬 하나를 발견했고, 나는 그 구슬이 녹기 전에 얼른 부상자에게 먹였다. 「릭 저거스타가 ‘얼어붙은 생명의 흔적’을 복용하였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거로 한 명은 회생했고……. “저기… 남은 부산물은 어떻게 할 거죠?” 남은 몬스터 사체는 그냥 버리기로 했다. 도시로 돌아가 팔면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짐을 더 늘리는 게 불가능하니까. 당연히 그냥 버리는 쪽이— 꼬르르르륵. 으음, 근데 왜 발길이 안 떨어지지? 무의식적인 저항감의 원인을 찾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고기지 이거? 조금 썩기는 한 거 같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일단 아멜리아한테 쪼르르 달려가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에밀리! 내가 식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다!” “너,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이번엔 이상한 게 아니라 정말이다!” “하아, 일단은 말해봐라.” “그게…….” 이내 나는 내가 고안해 낸 식량 수급 플랜을 아멜리아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짜악—! 괜히 등짝만 한 대 맞고 말았다. ‘……이게 그럴 정도인 건가?’ 쩝, 아무리 봐도 괜찮은 생각 같았는데. 405화 필연 (1) 어둠 속에 파묻힌 끝없는 절벽. 한기가 휘몰아치는 소리만이 가득 찬 그 아래를 지켜보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식스, 그들이 완전히 빙하의 눈 아래로 들어섰다.” “외부의 개입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원정을 이어나가기로 결정한 모양이군.” “자, 그럼 이제 어쩔 거지?” “경계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며 대기한다.” 식스라 불린 이의 명령에 한 여성이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은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식스.” “말해라.” “과연 저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 식스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만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저들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못하든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솨아아아아아……! 그들은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다. *** 찌걱, 찌걱. 육포를 야금야금 씹으며 나아간다. 오늘 아침에 보급 받은 특수 제작된 탐사용 고열량 육포. 누군가 왜 아침 식사를 이제서야 먹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이게 마지막 보급이었거든. 찌걱, 찌걱. 금일부로 비축돼 있던 식량이 모두 소진됐다. 쉽게 말해, 8층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음식은 없다는 것. 근데 그래서 그런가? 찌걱, 찌걱. 오늘 건 왠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맛있는 거— ‘뭐야, 왜 없어졌어.’ 육포의 맛을 깊게 음미하며 행복감을 느끼기도 잠시, 어느새 손이 텅텅 빈 것을 깨닫자 분노가 밀려왔다. “벌써… 다 먹었다고?” 정말로? 이게 마지막 식사인데? 먹고 나서도 이렇게 배가 고파 뒈질 거 같은데? 아니, 애초에 사람마다 쓰는 열량이 다른데 보급량은 똑같이 하면 어쩌자는 거야. 꼬르르르르륵-! 이거야말로 역차별이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마법사나 신관 같은 비실이들은 기초 대사량도 적을 것이고, 뒤에서 지팡이만 휘적거리면 되니까 체력 소모도 훨씬 덜할 터. 한데, 그럼에도 원피플 원육포 정책을 한다? 이건 최전선에서 피땀 흘리며 싸우는 전사들에 대한 모욕이자 혐오다. 만약 정신이 똑바로 박힌 대장이었다면 이런 정책은 절대— ‘아, 내가 대장이지.’ 그래, 어쩌겠어. 사실 나라고 해서 이러고 싶진 않았다. 근데 내가 전사에게 특혜를 주면 사리사욕을 챙긴다며 반발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먼저 솔선수범해서 이런 정책을 펼쳤다. ‘뭐, 보니까 실패한 정책 같지만.’ 나는 이 정책으로 타 직업군의 ‘고맙지도 밉지도 않은 마음’, 그리고 전사들의 증오심을 얻었다. 아, 전사들이 날 미워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출처는 바로 나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었잖아. “흐흐흐흐흐.” “아저씨, 왜 그래요?” “전사는 원래 힘들 때 웃는다.” “그게… 웃는 거예요?” 대형에서 잠시 벗어나 종종걸음으로 내 옆에 다가온 에르웬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싱긋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육… 포……?” “네!” “이걸, 나한테… 준다고……?” “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지만, 그럼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웬. 나는 멍하니 육포를 건네받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돼, 됐다! 나는 하나도 배 안 고프니 너나 먹어라!” “그런 소리를 할 거면 입꼬리라도 내리고 말하는 게 어떨까요?” 어, 입꼬리? 뭔 소린가 싶던 때, 에르웬이 물의 정령을 소환해 거울처럼 만들었다. 그 너머엔 얼간이처럼 미소 짓는 중인 내가 있었다. “이거 봐요, 그게 진짜 웃는 거죠! 헤헤.” “…….” “그러지 말고 얼른 드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다른 분들도 다 힘든 분께 양보를 하고 있는걸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번엔 뒤따르던 아멜리아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체력에 여유가 있던 후열들은 만일을 대비해 그동안 조금씩 식량을 안 먹고 모아놨다더군.” “모아? 어떻게? 금방 상했을 텐데?” “동굴 안으로 들어온 다음부터 말하는 거다. 그때부터는 얼음 폭풍이 없었으니까.” “아, 맞다 그랬지…….” 하도 허기에 시달려서 그런가? 이 간단한 것도 바로 생각을 해내지 못하다니.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근데 그게 정말이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타인에게 양보한다는 게.” “믿기 어려우면 이따가 보면 되지 않나?” 음, 나는 그걸 지금 봐야겠는데. “정지!” 원정대장의 권한을 이용해 이동을 멈추었다. 어차피 안 그래도 슬슬 한 번 쉴 때가 됐으니까. “오, 휴식인가!” “이제 좀 살겠군!” “흐아아아아! 보급관! 모포! 모포 좀 주시오! 잠깐이라도 눈을 좀 붙여야겠으니!” 이내 신관이 ‘멸악선포’를 활성화하며 주변이 안전지대로 변하자 대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누워 체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터벅, 터벅. 나는 순찰을 하는 척 뒤쪽으로 쭉 이동하며 주변을 관찰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에르웬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기, 이거 드세요.” 전사들에게 식량을 양보하는 신관. 그리고……. “……유, 유, 육포를? 내게?” 짙은 불신의 눈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전사. “네. 지치셨을 거잖아요?” “호, 혹시 나를 연모하고 있던 것이요? 그렇다면 이 육포는 받을 수 없소. 나는 도시에 처자식이—” “그런 뜻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뭐? 사랑하지도 않는데 육포를 준다고……?” 전사들은 경악하면서도 받은 육포를 냉큼 챙겨 우걱우걱 씹었고, 그런 장면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끄흐으으윽, 이… 빚은! 이 빚은 언젠가 반드시 목숨을 걸어서라도 갚겠소이다!” 육포 하나에 눈물까지 보이며 결심을 다잡는 수많은 전사들. 내가 보기에도 몹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내 정책은… 실패가 아니었구나…….” 진실로 하나가 되어 서로를 돕는 원정대의 모습. “슈이츠 님? 방금 제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준……. 아무것도 아니다.” “예. 근데 여기는 어쩐 일로……. 혹시 갑자기 원정대를 멈춰 세운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실제로는 에르웬에게 육포를 낼름 받아먹기에는 양심이 찔려서 한번 확인을 하러 온 거지만,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암, 원정대장 체면이 있지. “오늘 분위기는 어떻지?” “오늘이라면…….” “아침에 식량 보급이 끝났지 않나. 불만을 가진 자는 없던가?” “다들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을 터인데 하루 정도 통째로 굶는 것 정도야. 다들 이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어차피 정말 궁금해서 온 것은 아니었기에, 대강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 *** 준과의 대화를 끝내고 팀이 있는 최전선으로 돌아가는 길. “오, 슈이츠! 저번에는 고마웠수다!” “어째 그대는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거 같구려?” “먹던 거지만 이거라도 좀 드리오까?” 안면이 있는 전사들이 내게 인사말을 던져온다. 어쩌면 파이크 넬다인의 처형 이후에 생긴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소속 팀이 어디든 간에 크게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들은 방패를 꺼내들고 뛰어나가야 했으니, 전우애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렇다고, 전사들과의 관계만 개선된 건 아니다. “…….” “…….” 농담스레 말을 걸어오는 전사들과 달리 아직은 데면데면한 관계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온화해졌다. 예전에는 지나칠 때마다 흘겨보면서 속닥거리기 바빴던 모습을 떠올리면 참 감개무량한 일. ‘아마 이건 넬다인 그놈 덕분이겠지.’ 외부의 적은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법. 놈의 배신이 밝혀지며, 날 향하던 원망의 화살은 모두 놈에게로 돌아갔다. 심지어 그걸 밝혀낸 것도 나였고. 자연스레 내 평가가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 “슈이츠, 저 사람…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 않아요?” “저번에 들어보니까, 막 몬스터 고기를 먹자고 했다가 동료에게 혼이 났다던데…….” “엉뚱하긴 한 거 같지만, 그렇다고 미련한 것 같지는 않소. 그때 그 배신자 놈을 색출해낸 걸 보면 말이오.” “아, 그거요? 하지만 그건… 저쪽 마법사가 다 추리해 놓은 걸 공만 가로챈 거라던데?” 허허, 이런 곳에서 배신자가 더 있었을 줄이야. 당장 제압해야 하나도 싶었지만, 곧장 이어진 대화에 마음을 바꾸었다. “하지만 능력 있는 수하를 두는 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지. 게다가, 사람 하나는 괜찮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죠. 대화는 얼마 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착해 보였어요.” “대장 직함을 꿰찼으면 목대를 세울 법도 한데, 궂은일이란 궂은일은 전부 자기가 먼저 나서고 말일세.” “암, 저런 친구가 곤란한 상황이 왔을 땐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는 법이지.” 뭐야, 평범한 동료들이었나. 터벅, 터벅.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 지나쳐 팀이 있는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불문율로 정해진 20분의 휴식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간 상태였다. “아저씨! 어때요. 제 말이 사실이죠?” “그렇더군.” “자, 그럼 얼른 먹어요. 네? 부담 갖지 말고, 다들 하는 일이라고요?” “아, 그거… 이미 오면서 먹었는데.” “헤헤, 잘 하셨어요! 저밖에 없죠?” “그래, 너밖에 없다.” 그렇게 대충 답해준 이후로는 벽에 기댄 채 남은 휴식 시간 동안 반지나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빛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건가?” “아, 그렇지 뭐…….” No. 6111 운명 추적자. 줄여서 내가 신호등 반지라 부르던 이 반지는 갑작스레 빛을 잃었다. 시기는 오늘로부터 약 4일 전. “확실히 특이하긴 하군. 한번 감지된 운명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진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참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딱히 뭔가 나쁜 일이 있었던 거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 아이스록 진입 20일 차. 우리는 마침내 아이스록의 끝 지점에 도달했다. ‘정말 딱 20일 차에 도착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계획을 세우던 단계에서 아이스록을 주파하는 데 잡은 것이 20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불상사가 겹치며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렸음에도 정확한 일자에 도착을 해버렸다. ‘애초에 계획부터가 너무 촉박했던 걸지도.’ 모르긴 몰라도, 원래 일정대로 이동을 했으면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더 늦게 이 지점에 도착했을 것이다. 왕가에서 계획을 세울 때는 나도 대장 자격으로 참석을 했으니 이에 변명을 해보자면……. ‘예상 못 한 변수가 너무 많았어.’ 대원들 대부분이 초행이라는 점은 당연히 계획 단계에서부터 감안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서류로만 보았을 뿐. 대원들의 능력을 정확히 몰랐다. 사냥 속도는 특출나지만, 기동성 면에서는 조금 부족함이 있는 구성의 원정대. 음, 탐사가 아니라 전쟁을 목표로 만들어진 원정대니 당연한 일인가? “아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이내 나는 상념을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 눈을 연상시키게 하는 문양이 그려진 빙하의 눈 최하단부. “자자, 다들 흥분 가라앉히고 기다리시오! 추첨은 순서대로 할 터이니!” 이제 포탈을 타고 8층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지만, 원정대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간단한 이유다. 여긴 아무도 오지 않는 험지 ‘아이스록’이니까. 당연히 우리가 현 기수에서는 최초로 도착했다. “순서는 어떻게 정하는 거요?” “아니, 누가 하든 상관없으니 그냥 얼른 넘어가면 안 됩니까? 배고파 죽겠는데.” “뭐야? 그럼 너는 빠져!” “뭐? 빠져? 처음부터 낄 생각도 없었어요! 저는 마법사라고요!” 결속 마법의 최대 인원은 총 여섯. 그에 따라 포탈 최초 개방 경험치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여섯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평하게 추첨을 하기로 했다. 팀장, 원정대장 등 직위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정말 운빨만을 걸고서. “으아! 제기랄! 왜 백지인 건데!” “어이! 이능을 써서 상자 안을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내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니!” “우아아아아아! 8층 개방 공적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오는군!” 길게 늘어선 줄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환성과 탄식이 연달아 이어진다. 그 모습을 가장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때. “아쉽지 않아요?” 라비옌이 옆에 와서 그런 말을 던졌다. “무슨 뜻이지?” “당신은 원정대장이잖아요. 권력으로 자리를 꿰찼어도 누구 하나 아무 말 못 했을 텐데.” “아, 그거 말인가.” 실제로 팀장들 사이에서 논의됐던 이야기다. 우리끼리 경험치를 먹고 남은 한 자리를 추첨으로 뽑자는 말이었지. 참고로 카이슬란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남은 자리를 추첨이 아니라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자에게 하사해야 한다고 했다. 원래 부하는 그렇게 부리는 거라던가? “…저기요,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아, 듣고 있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한 거예요?” 이내 라비옌이 물었고,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뭔 대답을 바라고 묻는 거야? 왜 그랬을지는 뻔히 알 거면서. “쯧, 백지군.” 나보다 먼저 제비를 뽑은 아멜리아가 혀를 차며 돌아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슈이츠, 이제 네 차례다.” “몇 장이 남았지?” “한 장.”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최소한으로 돌려서 눈으로 뒤에 남은 인원의 숫자만을 확인했다. ‘남은 사람은 총 넷.’ 쉽게 말해, 확률은 4분의 1. 그리고……. ‘이 중에는 한스도 없어.’ 모든 행운의 징조가 내 등을 떠민다. 솨아아아아—! 위에서부터 하강해 바닥을 쓸고 다시 올라가는 차가운 한풍. 스윽. 나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야 이런 것은 지금 필요가 없으니까. 터벅, 터벅. 본디 운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것. “행운을 빌겠소.” 이내 상자 앞에 서자 카이슬란이 격려의 말을 뱉었다. 이제는 슬슬 승부를 봐야 할 차례.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사내답게 기합을 내지르며 제비를 뽑았다. 그리고……. “아쉽게 됐소. 백지구려.” 역시 안 되는구나. 하, BGM이 없어서 그런가? 원래 이런 거 할 때는 틀어놓는 게 국룰인데. 터벅, 터벅. 힘없이 등 돌려 자리를 비켜주고 있자니, 옆으로 라비옌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내 다음은 얘 차례구나. 설마 진짜 뽑는 건 아니— “동그란 표식이 있는 거, 이거 맞죠?” “맞소이다. 축하하오.” 와, 이걸 뽑는다고? ‘한 턴만 늦게 뽑을걸…….’ 괜스레 배가 아파지던 때였다. “이 표, 타인에게 양도도 가능한가요?” “아까 설명을 할 때 못 들었나 보구려. 한참을 의논하다가 가능하게 하기로 합의가 끝났소.” “그래요?” 카이슬란과 짧게 대화를 마친 라비옌은 미련없이 등을 돌려 내게 다가오더니……. “자, 받아요.” 갑자기 표를 내밀었다. “……?”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얘는 스피드런을 해야 한다며 따로 미궁에 들어와 6층에서야 합류를 했지 않았던가. 분명 경험치가 급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텐데……. “이걸 왜 나한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제 것이 아닌 거 같아서요.” “…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라비옌이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속 옆에 있었으니까 저도 봐서 알아요. 당신이 제일 고생했잖아요.” 뭐야, 이거……. “휘유우우우!” “그래, 그래! 여기까지 우리를 이끌고 온 게 당신인데, 당신이 열어야지!” “아깝군. 아무도 양도를 안 하면 내가 주려 했는데.” “거짓말! 아까 그렇게 기뻐했던 주제에?” “저, 정말이오! 아까 의논을 할 때도 양도가 가능하게 해달라는 쪽에 섰잖소!” “됐고, 얼른 받기나 해라! 무릇 탐험가면 자기 잇속은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지!” 콧김이 얼어붙을 만큼의 한파가 깔고 앉은 지하 깊숙한 곳. ‘따뜻해…….’ 왠지 눈물이 날 거 같았다. 406화 필연 (2) 추첨이 끝난 후, 당첨자들끼리 모여 ‘결속’부터 맺었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 중심부에 우뚝 세워진 비석으로 향했다. 후우우웅-! 손을 위에 올리자 오색 광채와 함께 열리는 포탈. “호오, 신기하군요. 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일반적인 시공 마법의 전개와는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네는 포탈 개방을 보는 게 처음인가?” “예. 마법사는 공적에 목을 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대원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포탈이 열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와중에도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무리는 이내 뚜렷한 형체를 만들었다. 「최초로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2」 후, 항상 생각하는 건데 8층 포탈을 여는 게 1층 포탈을 여는 거랑 똑같은 건 좀 억울하단 말이지. 후우우우우웅-! 구체의 형태로 변해 일렁거리는 오색의 빛무리. 이내 뒤를 돌아보자 다들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보기만 한다. 그래, 여는 것도 내가, 들어가는 것도 내가 먼저 하라 이거지? “진형대로!” 혹시 포탈 너머에 누가 있을지 모르기에 진형을 먼저 갖춘 뒤, 먼저 포탈 너머로 발을 들이밀었다. 번뜩-! 눈앞으로 새하얗게 번지는 빛. 머지않아 조각난 파편들이 맞춰지듯 초점이 잡혔다. 「8층 여명의 땅에 입장했습니다.」 여명의 땅. 게임 내에서는 다운 랜드(dawn land)라고 표기되던 미궁의 심층. 「업적 달성」 조건: 8층 도달. 보상: 영혼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50 상승합니다. 5층 대마경에 처음 진입했을 때처럼 업적이 달성되며 영혼의 그릇이 넓어지는 감각이 피어난다. 그러니까, 얘네는 ‘세례’라고 불렀지 이걸? 과업을 이루었을 때 탑이 탐험가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그런 신비한 현상. 후우우우웅-! 먼저 들어가서 주변을 쓱 살피고 있자, 뒤따라 대원들이 진입했다. “적은… 없구려.” “다행이에요. 전에 들었던 ‘고블린 숲 전투’처럼 적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드디어 내가 8층에도 와보는군.” “이것만으로도 원정에 참가한 가치는 있었다고 봐요.” 대원들 중 세례를 받은 탐험가는 무려 절반쯤 되었다. 아니, 사실상 마법사와 신관 쪽은 빼야 하니 절반이 넘는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하긴, 8층부터는 심층으로 분류가 되니까. “신기한 곳이네요…….” 보아하니 에르웬도 8층은 처음인 거 같았고. 그나마 경험자를 뽑자면 아멜리아나 저기 저 라비옌 정도려나? “적이든 8층이든 뭐든 됐고, 얼른 좀 먹자아아!” “우와아아아아아!!” “나는 상처부터! 제발 이것부터 얼른 치료를 해주쇼! 어제부터 눈에 띄게 곪더니, 이제는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 전투 대기 상태를 더 유지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기에 얼른 휴식 명령을 내렸다. 그야 썰매에 적재 중이던 식량은 바닥났지만, 아공간에 있는 것들은 멀쩡하잖아? 찌걱, 찌걱, 찌걱. 우걱, 우걱, 우걱. 이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각자의 아공간에서 음식을 꺼내 허겁지겁 입에 들이박는 대원들. 경상으로 분류되어 치료를 받지 못했던 이는 육포를 씹어대며 신관부터 찾았다. “아저씨, 우리도 얼른 먹어요.” “그래.” 배가 고파서 뒈질 거 같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나도 얼른 식량을 꺼내 팀원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먹었다. “말로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곳인지 몰랐어요.” “이곳 여명의 땅 말이냐?” “네. 심층이라고 부르기에 훨씬 더 무서운 곳일 줄 알았는데…….” 뭐, 저러한 감상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우뚝 솟아있는 초록색 동산. 주변으로는 드넓은 초원만이 보이며 바람을 타고 따스한 온기가 피부를 스친다. 조금 전까지 두꺼운 털옷을 입고서도 벌벌 떨고 있었으니 그 변화가 더욱더 크게 체감되겠지. “너희는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마.” 어느 정도 배가 찬 뒤에는 일행을 두고서 자리를 떠났다. 대장은 대장으로서 할 일이 있는 거잖아? 육포야 걸어다니면서 먹어도 상관이 없고. 찌걱, 찌걱. 입에 육포 다섯 개를 한 번에 넣고 씹으며 걸음을 옮긴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사치. 다만, 단순히 행복에 젖기에는 마음이 무겁다. 편히 쉬지 못하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게 이유였고. ‘균열이 안 보여…….’ 8층 여명의 땅은 굉장히 좁은 지역이다. 아마 필드의 면적만 본다면 미궁의 전 층을 통틀어 가장 작을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균열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럴 경우엔… 누가 먼저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 8층은 반드시 한 개의 균열이 열려 있다. 어떤 타입이 열릴지는 랜덤이며, 균열을 완전히 클리어할 시 두 개의 포탈이 열리며 선택이 가능해진다. 이대로 9층으로 향할지. 아니면 다시 8층으로 돌아올지. 어느 쪽을 택하든 클리어가 된 순간, 8층에는 다시 균열이 재생성되며 그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는……. ‘지금 균열에 들어간 게 분명 노아르크 놈들일 거란 건데…….’ 과연 놈들은 9층으로 향할까. 아니면 8층으로 복귀를 해 다른 타입의 균열에서 사냥을 이어가길 택할까. 만약 후자라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다. 8층에서 활동할 정도면 원정대 단위일 게 분명하며, 실력도 우리보다 못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튼, 왕가에서 급한 이유를 알겠네…….’ 직접 8층에 와보니 체감이 된다. 2년 전의 전쟁으로 왕가는 많은 상위 탐험가를 잃었다. 물론 이후 무수한 정책 지원과 비축한 정수 공급, 그리고 은퇴했던 탐험가들의 복귀로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전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이대로면 오히려 더욱 벌어지겠지.’ 노아르크는 치트키를 쓰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진입 1일 차부터 7층에서 시작하다니? 곧장 8층으로 올라가 최상위 정수를 캘 수 있단 뜻 아닌가.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최상위 탐험가 간의 간극이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정수는 못 지우니까, 정수 등급은 높아도 조합은 구리려나?’ 음, 대부분은 그럴 거 같다. 애초에 정수 조합을 나처럼 극한까지 효율 높게 짜는 놈은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으니. 90%는 주먹구구식 스펙일 거 같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중에 이레귤러는 있을 터. ‘……어찌 됐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애써 덜어냈다. 일단 왕가 산하의 포지션이긴 하지만, 내가 왕한테 목숨을 바쳐가며 충성할 것도 아니고. 미궁에 들어왔으면, 당장 눈앞의 것만 집중을 해도 모자라다. 그래, 그러니까……. “5분 뒤 출발할 것이니 채비를 갖춰라!” 단비와도 같던 휴식을 끝마쳤다. 이제 곧 적지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늘어지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 “이 지긋지긋한 썰매도 이제 안녕이군!” 썰매, 그리고 보급 상자들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그간 아공간에 봉인되어 있던 포션 및 스크롤 등의 각종 전투 소모품들을 각 팀에 적절히 배분했다. 그럼 이것으로 여정 재개 준비는 끝. 철컥, 철컥. 출발할 시각이 됐을 때는, 다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나라 군대 같더라니. 이제 좀 정예 티가 나기는 하네. “출발한다!” 8층을 경유해 암흑대륙으로 향하는 과정은 별거 없었다. 그야 균열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8층은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는 안전지대일뿐더러, 애초에 포탈도 동산에서 보일 만큼 가까이에 있거든. 터벅, 터벅. 약 3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목적지. “여기만 넘으면 암흑대륙이 나오는 거죠?” 저 멀리서도 육안으로 확인을 했지만, 가까이서 봐도 포탈엔 이상이 없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혹시라도 노아르크 놈들이 8층 포탈을 열지 않고 내버려 뒀다면 우리는 그냥 여기서 손가락만 빨아야 했을 테니까. ‘……뭐, 8층에서 사냥은 안 해도 경험치 때문에 누군가 열기는 했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지만.’ 이내 진형을 유지한 채 내가 먼저 포탈로 향하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앞이 노아르크의 영역인 만큼 슬슬 긴장이 되는 모양인데……. “슈이츠.” 막 들어서려는 차, 카이슬란이 말을 걸었다. “출발 전에 뭐라 한마디 하는 게 어떻소? 그대의 말이면 원정대 사기에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오.” 음, 별로 안 내키는데. 시간만 아깝기도 하고. 그런 무심한 반응을 내비치자 카이슬란이 기겁을 하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자, 잘 생각해 보시오. 역사적인 순간이지 않소? 만약 이번 원정이 성공하고, 승전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대가 어떤 말을 하건 후대에 남겨져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오.” 글쎄, 지금이 역사적인 순간인지는 모르겠고. 활활 타오르는 명예욕을 애써 억누르는 눈빛을 보면, 얘가 나를 부러워하다 못해 미칠 지경인 건 알겠다. ‘안 하고 지나치면 계속 아쉽다고 징징거릴 거 같은데…….’ 쩝, 그냥 대충 하고 지나치는 게 낫겠네. “크흠흠.” 이내 내가 목을 풀자 카이슬란이 근위병처럼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군은 들으시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소. 실패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모두 잃을 것인가, 전부 손에 넣을 것인가! 의심되고 불안한 자는 있을 것이오!” “…….” “하지만!” “…….” “나 멜란드 카이슬란은 우리가 역사에 승자로 기록될 것을 의심치 않소이다!” “오오오오오!!” 카이슬란의 팀원들은 적극적으로 환성을 터트린 반면, 다른 대원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쟤가 뭔데 나서는 거야? 딱 이런 느낌. 한데 그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눈치챘을까? “그런 의미에서!!” “……?” “모두 잘 들으시오! 왕가에서 부여한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전, 슈이츠 공의 말씀이 있을 것이오!” 녀석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내게 차례를 넘겼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나보고 하라더니 제 할 말만 다 해버리고 마이크를 넘겨버리는 건?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기록되고 싶은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심리지만, 뭐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른 거니까. 암흑대륙과 이어진 포탈을 등지고 대원들을 보았다. 카이슬란 때와 달리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한 눈치. 이래서 미국 CEO가 그렇게 SNS에서 어그로를 끄는 건가도 싶다. 어떤 사고를 칠까 걱정이 되어서라도 관심을 가져주잖아.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크흠…….” 목을 한 번 가다듬고서 주변을 쓱 둘러본다. 지난 원정 동안 매일같이 동고동락하며,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대원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때마침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길게 말은 안 하겠다!” 그래. 많이 죽이고, 많이 벌자는 말은 그때 이미 한 번 했으니까. “최대한 많이 살아서 돌아오자!”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지. *** 「7층 암흑대륙에 입장했습니다.」 *** 암흑대륙의 후반부 필드 ‘용의 심처’. 박물관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 거대한 척추뼈들이 유적지처럼 널려있고, 바닥도 두개골과 뼛조각으로 가득 찬 평야. 잘그락, 잘그락. 그곳을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나아간다. “…….” 대원 간의 대화는 없고. 잘그락. 주변을 비추는 빛조차 없다. 물론 그렇다고 시야 확보에는 크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어둠 문제는 마법으로 해결했으니까. 「리어드 애쉬드가 5등급 지원 마법 [통찰]을 시전했습니다.」 무려 5등급에 이르는 지원 마법. 이걸 상시적으로 쓰고 다니면 마력 소모가 막심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적지 한복판에 들어선 것 아닌가.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야— 절그럭. 7층 한정으로 나보다 먼저 선두에서 움직이던 아멜리아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휘익, 휘익. 급하게 손을 움직여 수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적이 있다는 뜻. 이에 뒤따르던 수뇌부들이 선두로 합류했고, 즉시 ‘음성 제어’ 마법. 그러니까 팀 보이스 마법을 활성화시켰다. “적의 규모는?” “15명.” 음, 그럼 딱 소형 클랜 단위네. 하긴 이런 곳을 돌아다니려면 그 정도는 뭉쳐서 다녀야지. “어떻게 할 거죠? 전투인가요?” “그야 당연하지 않소. 저들은 왕국을 위협하는 적이오. 당장 칩시다!” “저도 카이슬란 경 의견에 찬성입니다. 전공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부터 차근차근 숫자를 줄이며 이동하는 편이 안전할 테니까요.” 팀장의 의견이 순식간에 모이며, 발견한 적을 기습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나 역시 대장으로서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자, 그럼 얼른 칩시다.” “잠깐만요. 기습을 할 거라면 조금 더 준비를 해요. 마법사들과 이능술사들이 한 번에 화력을 모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전투할 수 있을 거예요.” “오, 그것도 그렇구려. 첫 전투인 만큼, 선두엔 우리가 서리다.” 얘네는 또 무슨 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해? “너희는 기습이 뭔지 모르나?” “……?” 내가 찬물을 끼얹자 팀장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 다들 사람은 많이 죽여본 거 같던데. 먼저 약탈을 시도한 적은 없었나 봐? “마법사고 뭐고 일단 기다려라.” “기다려서 뭘 어쩌려는 것이오?” 그야 당연하잖아. “놈들이 몬스터와 싸울 때, 우리는 그때 그 뒤를 친다.” 이게 PK의 기본이다. 407화 필연 (3) [던전앤스톤]을 하기 전에 즐겨 했던 온라인 게임은 PVP가 메인 콘텐츠였다. 캐릭터 생성 시 두 진영 중 하나를 골라, 다른 대륙에서 성장을 하며 세력을 다투는 형식의 게임. 적 진영에 원정대를 이끌고 가서 필드 보스를 스틸하는 맛이 일품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PK도 신명나게 하고. 필드 보스도 막타를 쳐서 달달하게 먹고. 거기에 적 진영 유저들에게 온갖 극찬까지 들을 수 있다니? ‘꽤 재밌는 게임이었지.’ [던전앤스톤]을 접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까지 그 게임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했던 것들 중에 그게 가장 나았거든. ‘……근데 그거 계속했으면 여기 끌려올 일도 없었던 거 아닌가?’ 그런 뒤늦은 아쉬움이야 어쨌든. 거의 잊고 살았던 그 게임이 돌연 떠오른 이유는 간단하다. 어찌 보면 현 상황과 공통점이 많으니까. 현재 암흑대륙은 노아르크 세력이 점거한 상태. 우리 원정대는 지금 그곳에 몰래 발을 들이민 격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무엇보다……. ‘거기서 쓰던 방식이 잘 통한다 이거지.’ 그 게임을 하면서 느꼈던 맛이 느껴진다. “……기, 기습이다!” “대체 어떻게 적들이 여기에……!” “앞! 앞에 마수부터 처리해!!” “악, 아아아아악!” 당황한 적들의 어쩔 줄 모르는 무빙. “이익! 비겁한……!” “하필 이때를 노리다니!” “반드시 너희들은 데리고 가주마!” 쏟아지는 극찬. 「본 드래고니안을 처치했습니다. EXP +7」 거기에 케이크처럼 쉽게 떠먹는 3등급 몬스터 처치까지. 물론 화룡점정은 따로 있었다. “저, 정수다!!” 기습에 성공해 부상자 한 명 없이 PK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덤으로 잡은 몬스터에게서 정수까지 드롭됐다. 이번 원정에서 획득하게 된 두 번째 3등급 정수. 솔직히 말해 기쁜 것보다 얼떨떨했다. ‘뭐지……?’ 원래 3등급 정수가 이렇게 쉽게 나오는 물건이 아니다. 그야 애초에 7층에서도 3등급 몬스터의 개체는 극히 적으니까. 아이스록에서부터 여기까지 다 합쳐도 사냥했던 3등급 몬스터가 스무 마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벌써 두 개라……. ‘운이 따라주는 건가?’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애쉬드, 너는 가서 정수부터 담아라.” “예.” 마법사를 보내 시험관에 정수를 담는 동안 신속하게 전장을 정리했다. 그야 전리품은 정수만이 아니잖아? 늘 그렇듯, PK의 메인 디쉬는 따로 있다. “커, 커헉… 사, 살려줘…….” “살려줄 수 없단 건 알고 있지 않소.” 뭔데 얘는 시체랑 대화를 나누고 있어. “쓸데없는 말 말고 비켜봐라.” 망치를 꺼내든 뒤 아직 명줄을 붙들고 있는 녀석들의 행복 버튼을 세게 눌러줬다. 콰직, 콰직, 콰직-! 살이 짓이겨지며 축 늘어지는 몸. 직접 확인 사살을 끝낸 뒤에는 대원들을 시켜서 장비들을 벗겨낸 뒤, 원정대 공용 아공간에 모두 수납했다. “휘유, 저놈들 아공간에 들어 있을 장비들까지 생각하면 장난 아니겠군.” “돌아가면 다들 한몫 단단히 챙기겠어.” 곁눈질해서 살펴본 것만으로도 사이즈가 예상이 됐는지 대원들이 의욕으로 타올랐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3등급 정수도 충분히 귀하긴 하지만, 7층에서 활동하던 15인의 장비에 비할 바는 아니니. 무엇보다, 전투에 들어간 노력이 적기도 했고. “전리품 수거가 끝났어요.” “부상자는?” “0명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5분 안에 깔끔하게 마무리가 된 전투.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전투를 할 계획인가요?” “문제라도 있나?” “아뇨. 그건 아닌데…….” 뭐라 묻던 아쿠라바가 입을 꾹 다문다. 본인도 직접 경험했으니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 진영에서 방심한 채 사냥하는 놈들을 기습하기엔 이게 최고의 방식이라는 것을. 뭐,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30분이라…….’ 전투는 5분 만에 끝났지만, 놈들이 몬스터와 조우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물론 장점에 비하면 신경 쓸 단점까진 아니다. 싸우다가 누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게 더 손실이 크잖아? 다만,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을까. 카이슬란이 조심스레 내게 조언을 올렸다. “슈이츠, 모두 다 죽인 것은 너무 성급했소. 한 명은 붙잡아서 정보를 캐냈어야 하오.” 아, 그것도 그렇긴 하지. “다음 기습부터는 그러겠다.” 자기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여겼는지, 확 밝아진 안색을 보이는 카이슬란. “마법사들은 시체를 태우고, 흔적을 지워라!” 이후 주변 정리까지 끝마친 우리들은 다시금 어둠 속에 몸을 숨겼고,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근데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였을까? 어느 대원끼리의 대화가 귓가에 들려왔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까 봤나? 그 장비들?” “앞으로 이렇게 전투를 열 번만 치르면… 그것만 해도 대체 얼마인 거지?” 글쎄, 그건 머지않아 알 수 있지 않을까. *** 암흑대륙에 도착한 뒤 우리의 루틴은 이러했다. 터벅, 터벅.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동. “적이군.” 적군을 발견 시 몬스터와 싸울 때까지 기회를 엿보며 대기. 그리고……. “지금이다!” 놈들이 몬스터에게 한눈이 팔렸을 때를 틈타 전력으로 기습. 콰콰콰쾅-! 휘이이이이익! 쿠웅-! 모든 원거리 화력을 일제히 쏟아부어 후열을 통째로 날려버린 뒤에는 더더욱 쉽다. “가자아아아아아!” “전부 쓸어버려라!” 근딜들이 난입해 설쳐도 전열은 앞에 있는 몬스터 때문에 쉽사리 지원조차 오지 못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금방 끝난 전투. ‘이걸로 딱 10번째인가.’ 이동하며 계속해서 이 짓을 반복했더니, 용의 심처를 벗어나는 동안에만 어느덧 횟수가 두 자릿수에 달했다. “마법사! 소리가 안 들리게 방음막부터 쳐!” “어이! 살살 벗기라고! 자꾸 살점까지 붙어서 나오잖아!” 전투가 끝나자 익숙하게 전리품 수거 및 흔적 지우기에 돌입한 대원들. 지켜보고 있자니 한 대원이 생존자의 머리채를 잡아끌고서 내 앞에 대령했다. “대장! 여기 말했던 한 명이올시다!” “수고했다.” “별말씀을.” 두 번째 전투에서부터는 항상 한 명은 살려 둔 뒤 정보를 캐내고 있다. 그야 혹시 모르지 않은가. 미궁이란 언제 어떤 변수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 평소에도 정보 수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심문도 내가 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준.” “맡겨 주시지요.” 우리 원정대의 공식 정보 추출기, 준에게 잠시 맡겨두기만 하면 알아서 조금 있다가 정보들이 술술 나와서 정리된다. 예를 들어, 8층에서 사냥 중이던 녀석들이 노아르크의 최정예라든가. 그래서 본거지가 텅텅 비어 있는 것이라든가. 그런 쓸모 있는 정보들이 다 이렇게 나왔다. 다만 문제는 요즘에는 이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놈이 없어서, 새로운 정보 갱신이 없다는 것 정도인데……. “슈이츠, 잠시 이쪽으로 와보시지요. 급한 사안입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준이 심문 도중에 날 불렀다. 뭔가 싶어서 얼른 가보니 꽁꽁 묶인 생존자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유의미한 정보가 이번 심문에서 발생했다는 뜻. “어서 말해봐라. 뭘 알아낸 거지?” “알아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애매하다니……?”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준이 시선을 한 곳으로 옮겼다. 그 시선을 쭉 따라가보니 빛을 내며 옅게 진동하는 돌멩이가 보인다. 탐험가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그 물건. “메시지 스톤……?” “이자가 소지 중이던 물품입니다.” “그 말은…….” “예, 누군가가 이자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지요. 어쩌시겠는지요?” 준의 물음과 동시에 메시지 스톤이 한 번 더 옅게 진동했다. 지이이이이잉- 과연 몇 번 더 이 진동이 울릴까.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거고. 스윽. 살짝 손을 들어 올려 시간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생각을 정리했다. ‘근처일까, 아니면 멀리서 온 연락일까.’ 품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메시지 스톤의 반경은 한정적이다. 그러나 이곳은 노아르크의 영역. 이 연락이 아주 멀리서 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애초에 왕가에서 원정대를 만들어 본거지를 치게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까. 마력 파장 방출기. 현대에 빗대어 말하자면, 송신탑 비슷한 역할을 하는 바로 그 물건. 7층에 다이렉트로 입장한다는 치트키를 쓴 놈들은 원래라면 아공간에 담을 수 없을 크기의 거대한 장치를 갖고 들어오는 초강수를 뒀다. 덕분에 놈들은 대륙 곳곳에 흩어진 병력들과 자유로이 통신을 취하며 능동적으로 왕가군을 괴롭힐 수 있었고. 지이이이이잉- 사람 피 마르게 하는 진동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진다. 나는 고민을 끝내고 몇 가지만 확인했다. “거기 너, 이게 어디에서 온 연락일 거 같지?” “……아, 아마 정기 연락일 겁니다. 각 병력의 상태를 확인하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준, 이놈이 우릴 엿먹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신을 입에 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정도면 몹시 자신이 있다는 뜻. “……하, 할 수 있습니다! 말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 그러니까 제발 주, 죽여줘……!” 삶보다 죽음을 갈구하는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판단을 끝마쳤다. 그래, 이 정도면 믿을 만도 할 거 같으니까. “좋아, 연락을 받아라. 뭔가 이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일도 없다고 답하고.” 나는 그리 말하며 진동하는 메시지 스톤을 쥐고 놈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딸깍. 버튼을 눌러 연락을 받은 그 순간. 빛을 자아내는 돌멩이 너머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 어딘가 귀에 콕콕 박히는 중저음. 이를 들은 즉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리, 리갈 바고스 님… 이십니까?” 용살자, 리갈 바고스. 까드득. 그래, 너도 7층 어딘가에 있는 거구나. *** 이 세상에 들어와 많은 적을 만났다. 대부분은 머리통을 박살 냈지만, 애석하게도 힘이 부족해 그러지 못한 놈들이 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파멸학자, 벨베브 루인제네스 등등등. 당장 떠올려 봐도 생각이 나는 게 이만큼이나 되지만, 그중 가장 원한이 깊은 것은 역시 이놈이 아닐 수 없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성이 마비되며, 피가 들끓는다. 하지만……. 꽈아악.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겠지. 꽉 쥔 주먹에 힘을 더욱 불어넣으며 감정을 식혔다. 그리고……. [메이라스, 지금 너는 어디에 있지?]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요, 용의 심처에서 팀원들과 함께 사냥 중입니다!” […그래? 그럼 혹시 아는 게 있나?] “아는 거라 하심은…….” [용의 심처로 간 놈들이 하나같이 연락이 안 되고 있다.] “그, 그,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군요. 저, 저희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로요!” 마치 의심을 해달라고 비는 것처럼 과한 말투. 말을 더듬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좀 선을 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스으윽- 준이 옆에 놓여 있던 송곳 하나를 조용히 들었고, 이에 즉시 놈의 말투와 자세가 교정됐다. “한데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군요. 다들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혹시 몬스터들에게 당한 건 아닐는지요?” 언제 말을 더듬었냐는 듯 또박또박한 발음. [아무리 한심한 놈들이라도, 전부 다 당했을 리는 없겠지.] “…그렇지요. 한데, 그쪽에는 별일이 없습니까?” 더 나아가 녀석은 역으로 정보까지 캐묻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아직은.] “다행입니다. 이쪽은 제가 한 번 더 돌아보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너 따위가?] “…….” [헛짓거리 하지 말고 기다려라. 안 그래도 그쪽으로 병력을 보냈으니까. 합류해서 그쪽 말을 따라.] “예, 알겠습니다.” [쯧, 쓸모없는 놈들.] 이내 놈이 혀를 차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자, 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쉽군요. 이쪽으로 병력을 얼마나 보냈는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 그렇지…….”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별거 아니니까.” 그저 분노를 참아내느라 조금 힘겨울 뿐이다. 저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그날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버렸으— “아, 안 돼.”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휘익. 고개를 얼른 돌려보니 에르웬이 서 있었다. 툭. 무언가를 양손으로 쥐고 있는 모양새였으나, 손에 쥐고 있었을 그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보통 실수라면 허리를 굽혀 물건을 다시 줍겠지만, 에르웬은 가만히 멈춰선 채 나만을 응시했다. “에르웬? 여기는 무슨 일이냐?” 의문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서기 무섭게 나는 에르웬의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잠깐만, 너 떨고 있는데…….” “그, 그 모, 목소리…….” “진정 좀 해봐라. 괜찮은 거냐?” “방금! 바, 바, 방금 그놈… 그놈 맞죠……?” 어째선지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요, 용살자, 리갈 바고스…….” 에르웬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408화 필연 (4) 용살자 리갈 바고스. 이놈과 내 악연을 알고 있는 자는 소수다. 당시 한 팀이었던 멤버를 제외하면 레아틀라스교의 고위 인사 몇몇과 용인족의 수뇌부들이 전부. 당연히 에르웬은 그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 단지, 아는 것은 드왈키라는 마법사가 미궁에서 변을 당했다는 것 정도. ‘둘이 뭔가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음,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다. 후작에게서 라비옌을 도와 용살자를 처치하라는 히든 미션에 대해서 공유했을 때는 이런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 ‘……음, 그때도 표정이 안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 생각해 보니 실제로 표정이 안 좋았다. 굳은 입매를 보고서 아멜리아가 어디 아프냐고 묻자 아무 일도 아니라며 황급히 자리를 떴었지. 뭐, 그때야 나도 깊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역시 확인해 봐야겠어.’ 동료의 멘탈이 무너지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단 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곧장 자리를 벗어나 에르웬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사정을 청취했다. “죄, 죄송해요. 가, 갑자기 그래서…….” “사과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건지가 걱정되는 거지. 용살자, 그 새끼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게…….” 에르웬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10살 때의 일이에요.” “10살 때라면…….” 지금으로부터 약 13년 전이다. 달리 말하면, 바바리안과 요정 간의 전쟁이 끝나고서 1년쯤 지났을 무렵일 테고. 듣자마자 당장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그때 그… 혈겁과 관계가 있는 거냐?” 요정족 성지에서 벌어진 테러. 범인은 용살자 리갈 바고스였으며, 그때 죽은 요정의 숫자가 천 명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네, 그때 저희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제 앞에서… 언니와 저, 그리고 동생을 지키다가…….” “…그랬군.” 에르웬은 그날 부모를 잃었다. 외삼촌이 그들 세 자매를 모두 양자로 거두고 사랑으로 보듬었지만, 그럼에도 그 빈자리는 채워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에르웬은 버텨냈다. 첫째인 다리아가 어떻게든 그 자리를 채우고자 노력했던 덕분이다. 하지만……. [저 아가씨가 자네 다음으로 많은 운명을 타고났더군.] 잔혹한 현실은 다리아마저 앗아갔다. 비록 용살자는 아니지만, 공교롭게 그 범인은 오르큘리스의 멤버 중 하나였던 파멸학자였다. “빌어먹을.” “죄, 죄송해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겁이 났어요. 분명 그 사람은 적인데… 더, 더 이상 소중한 걸 잃지 않으려면 내가 싸워야 하는데……. 또다시… 또다시 그놈들이 내게서 빼앗아 갈까 봐…….” 에르웬이 패닉 상태에 빠진 것도 이해가 된다. “하, 한심하죠……? 이제 나도 강해졌는데……. 그래서 언젠가 만나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원래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이성보다 감정. 아니, 정확히는 그때의 기억이 앞서며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 “한심하게 보인다니, 그럴 리가 있겠나. 한심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네? 하, 한심하다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저씨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데요!” 어… 글쎄, 사람마다 기준은 다른 법이니까. 실제로 에르웬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과거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저도 알고 있어요···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에르웬의 불안 증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단순히 스탯의 영향이라고만 치부하지 않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괴로우셨죠? 저도 알아요. 무언가를 잃는 기분이 뭔지.] 드왈키를 잃고 도시로 돌아왔을 때. 그 위로의 말이 담은 의미를 더 깊이 생각했다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진작에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 그렇다고 이렇게 풀 죽어 있는 것도 나답지는 않겠지. 문제가 문제인 거라면, 그 문제를 없애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에르웬.” 내가 이름을 부르자, 에르웬이 촉촉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손을 잡았다. 마치 어떠한 말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 그래, 너도 내가 이런 말을 해주길 바랐던 거구나.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 파멸학자든, 시체 수집가든, 그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든.” “………?” 나는 조용히 다짐하듯 읊조렸다. “언젠가 내가 전부 처죽일 거니까.” “………에?” …응? 내가 생각한 반응은 이게 아닌데. “뭐야, 설마 날 못 믿는 건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에르웬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 그럴 리가요? 미, 믿어요!” 어딘가 기운이 빠지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 “…….” 불안으로 가득하던 에르웬의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 진정이 된 에르웬을 팀 위치로 돌려보낸 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신기하단 말이지.’ 용살자, 리갈 바고스. 이 새끼와 악연이 있는 게 우리 팀에서 무려 네 명이나 된다. 용인족 출신인 라비옌이나 나는 두말할 것도 없고, 방금 확인됐듯 에르웬과도 원수지간이다. 그리고……. ‘아멜리아도 비슷한 사정이랬지.’ 물론 아멜리아는 우리 셋과는 좀 다르다. 얘는 일방적으로 용살자에게 원한을 받게 된 것에 가까우니까. 예전에 용살자 새끼가 차원문을 타고 떨어진 걸 발견하고 장비를 털은 뒤에 기억을 잃는 약을 먹였다던가? [만약 기억을 되찾았다면, 지금쯤 나를 죽이지 못해 몸이 한껏 달아올랐을 거다.] 이때 조금 놀랐던 부분이 있다면, 그 시기였다. 첫 번째 덩굴이 끊어진 게 바로 그때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멜리아가 그때부터 나를 도와줬던 셈인가?’ 참으로 기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인연. 나는 피식 웃으며 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으아아아악!” 소음 차단 마법이 적용된 천막을 걷은 즉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주, 죽여 준다고 했, 잖아! 으아아악!” “그때는 당신이 모든 죄를 고백하고, 순수한 마음을 되찾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니, 속았기 때문이지요.” “나, 나는 아무것도 거짓말, 안 했어!” “하면, 어째서 용살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입니까? 보니까 그자도 본거지에서 대기 중인 듯하던데.” “그, 그건……!” “아직도 눈빛에서 악의 기운이 묻어나—” “나, 나는 몰랐어! 몰랐다고! 그런 사람들은 나한테 언제 어디서 뭘 하는지, 말 안 해준다고!! 으아아아아악! 죽여! 나를 죽이라고!!” 사지가 꽁꽁 묶인 채 발작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준이 다가가 우악스럽게 볼을 잡고서 턱을 벌렸다. 그러자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결을 위해 스스로의 혀를 깨문 것. “저런… 아직 광명을 찾기에는 덕이 부족한 것 같군요.” 준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신성력을 일으켜 녀석의 부상을 한순간에 치유했다. “……아, 안 돼애애애애!” “걱정 마십시오. 언젠가 순수한 마음을 되찾고 반드시 광명을 찾을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악마! 이 악마! 악마야!!” “……저런.” 준은 모욕적인 말에도 인자한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조용히 송곳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 오셨는지요.”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놈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읍, 으윽!” “……알아낸 것은 있나?” “애석하게도 아직은 부족합니다. 본거지에 머무르는 중인 대기 병력이 우리 예상보다 더 많다는 것 외에는.” “……병력이 많다고? 얼마나?” “이자의 말대로라면 거의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뭐? 두 배?” 잠깐만, 이건 좀 상황이 심각한데. 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왜 다른 놈들에게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지? 우리를 속인 건가?” “아뇨. 충성심에 목숨까지 바쳐가며 거짓을 고할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자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알고 있던 거겠지요.” 음, 그것도 일리가 있기는 하네. “한데 그 논리대로면 이놈만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예, 그렇지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도 연락을 받고서야 추측한 거라고 하더군요. 보통 정기 연락은 본거지에서 보내는 게 일반적. 용살자가 그곳에 있는 거라면, 그의 부대원들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어쩌시겠습니까? 일단 정보는 계속 캐내겠지만, 적의 병력이 예상보다 2배나 더 많다면 우리 임무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더 많은 피해를 입을 테고 말이지.” “……예, 그렇지요.” 후, 그러면 어떻게 할까. 얼마나 피해가 커지든지 간에 원래 계획을 밀어붙여?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준, 심문은 잠시 멈추고 팀장들을 불러라.” “회의를 여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혹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지 모르니까. *** 원정 중에 수도 없이 있었던 수뇌부 회의. 심문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모두 공유하기 무섭게 여러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력이 두 배라고 하기엔 그렇구려. 용살자의 부대라 해봤자 중소 클랜 규모라고 했지 않소?” “수치만 보면 스무 명 정도의 추가 병력이지만, 얕잡아 볼 수 없어요. 우리 역시 서른 명이 안 되는 인원이잖아요?” “예. 이 근처에서 만난 조무래기들과는 달리, 한 명 한 명이 정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설마 임무를 포기하잔 말이오?” “그런 말은 아무도 안 했어요. 다른 방책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거죠. 슈이츠 씨도 그래서 우리를 전부 부른 걸 테고요.” “…….” 원정대장인 내 이름이 거론되자 카이슬란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무력에서 나온 권위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존중받는 법이니까. “아무튼, 이대로라면 임무에서는 성공하더라도 우리 피해가 커질 텐데, 다들 좋은 수가 없나?”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곧장 여러 의견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서 매복하며 천천히 숫자를 줄이는 건 어떻소이까?” “안 돼요. 그랬다가는 본대와 약속한 시간을 맞추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그쯤되면 놈들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채겠지요. 그때부턴 기습의 이점이 사라져서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놈들도 대비를 시작할 테니까요.” “그럼 칼라, 그대는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잠입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심문 중인 그자를 이용하면 의외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 전원이 당하겠지. 당연히 임무는 실패할 테고. 위험이 너무 크오. 그럴 바에 차라리—” 매복부터 시작해 잠입, 유인, 척살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지만, 모두가 찬성할 만한 그런 좋은 계책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란 집단 지성의 대명사. “역시 적을 유인해 병력을 분산시키는 게 가장 좋겠네요.” “적군의 메시지 스톤을 이용하면 쉬울 겁니다.” 결국 머리를 맞대니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계책이 나왔다. 뭐, 그마저도 금방 두 갈래로 나뉘긴 했지만. “용살자를 불러내서 먼저 그쪽을 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본거지는 그다음에 노려도 되잖아요?” 용살자를 먼저 처리할 것인가. “아니, 병력을 불러낸 뒤 우리는 본거지를 쳐야 하오. 그게 우리의 임무이니까.” 아니면, 임무를 더 우선시할 것인가. 둘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엔 성공만 한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아쿠라바, 전공에 목을 맬 때가 아니오. 그들이 전에 만난 자들처럼 후방에 연락할 새도 없이 당할 것 같소? 분명 죽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알리고 죽을 것이오.” “게다가 기습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요. 만약 그들이 침착하게 대응을 한다면, 우리의 피해도 커질 겁니다.” “그래, 내가 하려던 말도 저거요! 이겨도 다들 지치고 피곤할 텐데, 그 상황에서 본거지를 치는 게 가당키나 하오?” 일이 잘못된다면 임무 자체가 실패한다. 반면 후자는, 적어도 임무 하나만큼은 확실히 성공시킬 수 있다. “자자, 흥분들 가라앉히시지요. 결국 슈이츠가 결정할 일 아니겠습니까?” 이내 언성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준이 중재하자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하, 고민되네.’ 정말이지 오랜만에 선택이 쉽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게 옳다는 걸. 만약 ‘용살자’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분명 아무런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으리라는 걸. 툭툭. 나도 모르게 무릎을 두드리자, 팀장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슈이츠가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요.” “항상 뭔가 생각이 끝나면 저랬죠.” 어… 나한테 그런 버릇이 있었다고? 생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택한 결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리는 임무에 집중한다.” 역시 용살자까지 욕심내는 건 시기상조다. “잘 생각했소! 어차피 임무만 성공한다면, 왕가에서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 아니오!” “보상이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한데 그 웃음 속에서 뭔가 이질감을 느꼈을까? 아쿠라바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슈이츠, 혹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분명 당신이라면 더 욕심을 내리라 여겼는데.”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결정에 너희들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 “한 번이라도 덜 싸우면, 그만큼 살아서 돌아가는 숫자가 늘어날 테니까.” 그래서 욕심을 버렸다. 그게 이번 결정의 전부다. “자, 답변이 됐나?” “……네, 아주 충분히요.” 어딘가 고분고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쿠라바를 보며 나는 마지막 미련마저 덜어냈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용인.] 그날의 다짐은 반드시 이뤄질 테니까. 409화 딜레마 (1) 용살자와 놈의 부하들을 밖으로 유인하는 일은 아주 손쉬웠다. 그야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섭단 말도 있잖아? 준에게 감화되어 어느덧 광명을 찾은 노아르크의 탐험가, 광명이를 시켜 거짓 정보를 줬더니 곧바로 낚였다. […서른 명 정도의 왕가 측 탐험가들이 있다고?] “예! 아무래도 아이스록을 넘어서 온 거 같습니다!” [네놈, 몰래 뒤에서 추격을 하고 있다고 그랬지? 일단 현 상태를 유지해라,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예!” 허허, 또 속냐, 이놈아. 라르카즈의 미로에서도 느꼈지만, 어떤 면에선 참 순진한 놈이다. 그때도 ‘절제된 소망’을 포기하고 내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그 지경에 몰려 갖고 있던 검을 빼앗길 일도 없었을 텐데. “자, 그럼 이동하지.” 용살자 유인해 낸 뒤에는 ‘용의 심처’ 남쪽으로 향했다. 동선이 겹쳐 도중에 놈들과 만날 걱정은 없었다. 우리에겐 광명이가 있으니까. [현재 위치는?] “용의 심처 서부 지역입니다.” [계속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군. ‘아이언폴즈’로 가려는 건가?] “일단 당장 움직임만 보면 그런 거 같습니다!” [알겠다. 우리도 그쪽으로 향할 테니, 혹시 움직임이 바뀌면 즉시 연락해라.] “예!” 이대로면 놈이 서부의 ‘아이언폴즈’에 도착할 때쯤 우리는 놈의 본거지 앞에 도착할 터. 연락을 받고 급히 회군을 한다고 해도 놈이 이곳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일 것이다. “전방에 노아르크 무리입니다.” “정지, 놈들이 지나갈 때까지 이곳에 숨어서 대기한다.” 그렇게 전투를 최소화하며 이틀 동안 강행군을 이어 가자 드넓은 황야 지대가 나왔다. 뭐, 시야 반경이 좁아 볼 수 있는 거리는 제한이 됐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드디어 회색 벌판이군요.” 회색 벌판. 대륙 중심부인 용의 산맥과 최북부 지역인 용의 심처 사이에 자리한 중간 지역이자……. 다이렉트로 7층에 입장이 가능한 노아르크 진영의 스타트 포인트가 있는 바로 그곳. “예상과 달리 한산하군요. 거점으로 쓰이는 곳인 만큼 주변에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본대 쪽에서 시선을 잘 끌고 있다는 거겠지.” 이번 원정 계획은 일종의 양동 작전이다. 정석 루트로 암흑대륙에 진입한 왕가군이 용의 산맥을 경계로 두고 노아르크 본대와 접전을 펼치는 동안에 우리는 뒤에서 타격을 가하는 것. “여기서부터는 속도를 줄여서라도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인다.” “척후와 본대 사이의 거리를 더 넓히라고 지시하겠소. 더 멀리서부터 적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도록.” “그래, 세밀한 병력 운용은 네게 맡기지.” 회색 벌판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 신중을 기하며 이동했지만, 그럼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졌다. 그야 미궁은 원래 몬스터들이 가득한 곳이니까. 어찌어찌 사람은 피해도 몬스터는 피해 갈 수가 없다. 「공허 개미를 처치했습니다 EXP +4.」 「다크 크리스탈을 처치했습니다 EXP +6.」 「마이눔을 처치했습니다 EXP +5.」 「헬구울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잠베트를 처치했…….」 「…….」 가뭄철 논밭처럼 쩍쩍 벌어진 틈새에서 기어오르는 각종 몬스터들. 그중에는 3등급 몬스터도 존재했다. “볼-헤르찬이다!” 내 방패바바의 최종 육성 트리에 속해 있기도 한 바로 그놈. 물론 전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들 뭐 해? 처음 잡아 봐? 간격부터 벌려!” “전사들은 막기만 해! 어차피 결정타는 마법사가 넣을 거니까!” 아이스록에서는 3등급 몬스터를 세 마리씩 한 번에 잡고 그랬는데, 고작 한 마리쯤이야. 심지어 우리는 지금 배도 부르다. 쿠웅-! 최상위 방어력을 지닌 개체답게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바닥에 쓰러져 빛이 되어 사라지는 볼-헤르찬. 「볼-헤르찬을 처치했습니다 EXP +7.」 정수는 뜨지 않았지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놈 정수는 이미 얻었으니까.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네.’ 최초 처치를 하기 전에 이놈 정수를 먼저 수급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착착 진행되던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정수 루팅 순서가 제멋대로다. ‘오우거 정수를 초중반에 먹은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가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이 비정상적인 성장의 시작점은 역시 ‘시체골렘’일 것이다. 만약 그 정수가 나오지 않았다면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도 죽이지 못했을 테니. “슈이츠, 척후조에서 놈들의 본거지를 발견했단 소식이 들어왔소.” 그렇게 회색 벌판에 진입하고서도 하루 정도를 더 이동하자, 마침내 목표지 부근에 도착했다. 탑 형태의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고, 그 주변을 백 명 정도의 탐험가들이 지키고 있다니 확실하게 찾아온 것은 분명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인 것은. “……예상보다 훨씬 숫자가 적군.” “리갈 바고스가 우리를 잡는다고 예상보다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확실한 건 아니니 주변 정보부터 획득하겠다.” “그럼 척후조를 다시 보내겠소이다.” “남은 대원들은 어떻게 할까요?” “곧 전투가 있을 테니 최대한 체력을 회복하라 말해라.” “멸악선포는요?” “쓰지 말라고 해라, 혹시 저쪽에서 우리를 발견할지도 모르니. 작은 것을 탐하다 모든 걸 잃을 수는 없지. 몬스터가 나오면 그냥 최대한 조용히 처치하라고 해라.” “그렇게 전할게요.” 은신류 스킬을 가진 민캐로 이뤄진 척후들에게 주변 탐색을 시킨 뒤, 나머지는 절벽 아래쪽 공간에 몸을 숨긴 채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 “피곤해 보이는군.” 그렇게 등을 기대고 쉬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다가와 육포 하나를 건넸다. 거, 아이스록에서는 육포 하나 안 주더니. 여기서는 남아돈다 이거지? 찌걱, 찌걱. 일단 받아서 씹고 있는데, 아멜리아가 불길한 말을 꺼냈다. “슈이츠, 너무 일이 술술 잘 풀린다.” “니미럴…….” 기어코 그 말을 하고 말았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여태껏 혼자 생각만 하면서 언급은 안 했는데. “……?” “너한테 한 말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냐? 뭔가 수상한 거라도 찾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내 말에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얘도 딱히 근거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닌 모양. “걱정 마라, 일이 술술 풀리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고생을 미리 다 해 둔 거니까.” “미리 다 해 뒀다니?” “아이스록을 넘어오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 않나. 배신자 새끼도 숨어 있었고.” “그건… 그렇지. 미안하다. 내 말은 신경 쓰지 마라.” 그리 말해 봤자 이미 엄청나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생각을 이어 나갈 뿐. ‘백 명이라…….’ 이 정도 병력이면 임무 자체는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을 수준이다. 척후조가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네임드급이라 할 만한 자들은 얼마 없다는 듯하고. ‘이건 뒤에서 적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노아르크의 본대는 왕가군이 산을 넘지 못하도록 넓은 전선을 유지하는 데 모두 쓰이고 있다. 물론 핵심 거점인 만큼 용살자 리갈 바고스를 필두로 병력을 대기시켜 뒀지만……. ‘놈은 지금 병력을 이끌고 외부로 나갔지.’ 지금은 완벽한 빈집 상태. ‘주변에 한스도 없고.’ 이제 문제는 혹여나 척후조가 가져올지 모르는 변수뿐인데……. “슈이츠, 척후조가 도착했소.” “어떻다고 하지?” “반경 5km 내에는 아무도 없다더구려.” 확인 결과 주변에도 이렇다 할 변수는 없었다. 쩝, 너무 일이 잘 풀려서 뭔가 함정이라도 파 둔 건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이내 나는 애써 불길함을 털어 냈다. “밖에 다녀온 이들에게는 수고했다고 말하고, 좀 쉬게 두어라. 뭐, 그래도 오래는 못 쉬겠지만.” “…거사를 치르려는 것이오?” “그래, 슬슬 준비를 시켜라.” 이제 길었던 원정을 끝낼 때가 됐다. *** 캄캄한 황야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비록 미궁의 어둠에 가려져 육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 너머에 있을 노아르크의 본거지를 응시하며. “…….” 정적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준비를 끝마친 원정대원들과 함께.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머지않아 어둠 속에서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탐험가 경력이 좀 있는 자라면, 단박에 대형 몬스터의 걸음 소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소음. “마, 마수들이다!” “다들 나와!” 조용하던 어둠 너머가 시끌벅적하게 변한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표정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씨발, 대체 뭔데, 이 숫자는!” 당황. “에휴, 운도 지지리도 없군. 다들 뭐 해! 얼른 무기부터 꺼내지 않고?” 짜증. “어째서 몬스터들이 이곳에 몰려온 거지?” 그리고 의문. 물론 그중에는 정답을 입에 담는 자도 있었다. “정신 차려! 적이야! 누가 마수들을 이끌고 온 거라고!” 역시 온갖 약탈법을 연구하는 노아르크 출신들이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네. 당연한 말이지만, 사방에서 몬스터 떼가 밀려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경 5km 내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척후조를 시켜 근처의 몬스터란 몬스터는 깡그리 긁어모았거든. 어그로는 넘겼으니 척후조는 지금쯤 은신을 켜고서 이쪽으로 복귀하고 있을 거다. “뭐?” “적이라고……?” “제길, 설마 리갈 바고스 님이 말했던 그들인가?” “지원! 어서 지원부터 요청해!” 어허, 어디 지원을 부르려고? 어차피 와 봤자 다 끝나 있을 텐데. “카이슬란.” 내가 짧게 읊조리자, 옆에 있던 카이슬란이 왕가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며 외쳤다. “쏴라!!” 이와 동시에 이미 캐스팅을 끝마친 마법사, 궁수, 이능술사들이 일제히 필살기를 쏘아 냈다. 콰아아아아아앙-! 몬스터들이 몰려오던 상황에서 가해진 공격. 적의 진형 중 한 곳이 완전히 궤멸되며 구멍이 생겼고, 영악한 몬스터들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기랄, 어디야! 어디냐고!” “아아아악!” 무너진 전열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는 몬스터들. “일단 저곳부터 막아!” 놈들도 서둘러 진형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그걸 우리가 지켜볼 리가 없었다. “카이슬란, 한 번 더.” 이후 우리는 캐스팅이 끝나는 대로 모든 화력을 동원해 원거리 포격을 가했고, 이에 적들도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다. 하지만……. “저쪽이다!” “저기에 놈들이 있어!” 알면 너희들이 어쩔 건데. 몬스터랑 싸우느라 정신도 없어 보이는 와중에. 콰아아앙-! 콰앙! 휘이이이이익! 그렇게 한참 동안 더 원거리 포격을 가하던 때였다. 지이이이이잉-!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메시지 스톤이 진동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야 빤했다. 그야 이곳까지 오며 이 메시지 스톤으로 허구한 날 연락을 한 것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딸깍. 지켜보는 것 외에 할 것도 없기에 별 고민 없이 통신을 연결했다. [네놈! 지금 어디 있는 거냐!] 연결이 되자마자 떨어지는 불호령.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 연락이 대륙 끄트머리에 있으니 거기까지 와야 한다는 보고였었지? [지금 네놈이 말한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지 않나! 천공의 눈 쪽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는 보고도 있고.] 천공의 눈은, 송신탑 역할을 하는 마력 파장 방출기에 붙은 이름이다. ‘쩝, 그새 거기까지 소식이 전해진 건가.’ 왕가가 천공의 눈을 파괴하려고 혈안이 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저 광범위한 연락 통신망을 통해 손해를 본 일이 한둘이 아니었겠지.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대답해! 지금 넌 어디에 있는 거지?] 이제 굳이 속일 필요도 없기에 솔직히 답했다. “나? 느그집 앞마당.” 적당한 인성질은 엄연히 전술 중 하나인 법. 그리 말한 뒤 재미난 반응을 기다렸지만, 의외로 놈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연락이 끊긴 건가 확인하던 차에 들려온 말도 딱히 재미는 없었고. [……누구냐, 넌.] 거, 입에 산낙지라도 물었나. 무게 잡기는. “알면 뭐, 찾아오게?” [……처음부터 네놈의 수작이었군.] “뭐 당연한 걸 씨불이고 있어. 야, 됐고,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이왕 거기까지 간 거 바다나 잘 보고 오고.” [네놈이 누군진 몰라도, 곱게 죽을 생각지 마라. 죽음마저 널 구원할 수 없을 테니까.] 살기가 넘실거리는 목소리였으나, 나는 귓구멍을 쑤시며 대충 한귀로 흘렸다. 죽음마저 구원할 수 없다니. 애초에 이거 예전에 한 번 쳤던 대사잖아? “응, 열심히 해.” [뭐? 농담 같나? 너는 내가 반드—.] 슬슬 다음 챕터로 넘어갈 차례였기에, 나는 연락을 끊었다. 이와 동시에 아쿠라바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슈이츠, 이제 마수들이 거의 다 정리됐어요!” 필사적으로 응전하며 적들이 어느덧 몬스터들을 대부분 처치한 것. 따라서……. “돌격 진형!” “전열 앞으로……!” 놈들이 재정비를 하기 전에 전장으로 난입했다. “돌겨어어어어억!” 베테랑 전사들을 선두에 둔 전투 진형. 노아르크 놈들 역시 이를 막기 위해 전사들로 이뤄진 벽을 만들었다. 다대다의 전투에서 기본이 되는 방패벽이다. “막아라아아아!” “죽여어어어!” 이내 선두에서 전사들끼리 부딪치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아아!” 힘겨루기의 승자는 당연히 우리였다. 그야 전사들의 평균 수준에서 우리가 저쪽보다 월등할뿐더러……. 결정적으로. 「니아로 캠벌이 [치유의 파장]을 시전했습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재생의 달빛]을 시전······.」 「······.」 저쪽은 사제가 없잖아? 부상을 감수하고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전사들을 쟤네가 어떻게 막겠어. “뚫렸다!” 전사들이 일당백의 기세로 전선을 뚫었고, 우리 원정대는 순식간에 그 틈을 파고들었다. 텅텅까지는 아니지만, 중앙은 비어 있는 상태. “방패벽!” 우리는 진형을 바꿔 원형의 수비 진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대로 전선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이제는 형세가 바뀌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군을 상대하며 중심부로 나아갔다. 그야 우리 목표는 섬멸이 아니라, 타격이니까. “노, 놈들이 천공의 눈으로 향한다!” “막아!” 이내 우리의 목표를 깨달은 놈들이 더욱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아이스록을 넘어서며 하나로 똘똘 뭉친 우리를 뚫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우리 쪽에 신관이 많기도 하고. “정지!” 이내 적들을 상대하며 이동하고 있자니 어느덧 ‘천공의 눈’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를 등지고 선 채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걸 파괴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인데……. “슈이츠! 어서 이쪽으로 와 봐요.” 그때 아쿠라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불렀다. “얼른요! 문제가 생겼어요!” 뭐? 문제? “그렉손. 이쪽은 부탁하지.” “암, 맡기고 다녀오쇼!” 서둘러 옆에 있던 전사에게 내 자리를 맡기고 후방으로 향했다. 아쿠라바는 우리가 둘러싼 ‘천공의 눈’ 앞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토, 통신 좌표를 입력하고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해 봤지만 도무지 본대와 연결이 되지가 않아요!” 쓰읍, 이건 좀 큰일인데. 410화 딜레마 (2)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본대와 통신 연결을 시도한 횟수가 쌓일수록 불길함이 온몸을 잠식한다. 하나 달리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 번 더.” “네······.” 그저 계속해서 시도를 해볼 뿐. 다만, 이후로 몇 번 더 연락을 취해도 본대와 연결이 되는 일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우리 원정대의 계획은 이랬다. 1, 본거지 기습 및 침투. 2, 천공의 눈을 이용해 용의 산맥에 있을 본대와 연락. 3, 목표물 파괴 및 도주 후, 마중을 나온 본대에 합류. 본대가 일시적으로 힘을 모아 한쪽 전선을 뚫고 들어오면 그때 접선 지점에서 만나 우리를 데리고 퇴각하는 게, 이번 타격 계획의 핵심이다. 하지만······. “실패에요.” 가장 중요한 본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설마··· 우리를 버린 건가?’ 문득 최악의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나는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이만한 병력을 한 번 쓰고 버리다니? 왕가에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뭔가 본대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아니, 설령 최악의 경우에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이몸에서 눈을 뜬 그 첫날부터 그러했듯. 콰아아아아앙-! 살아남는 것. “대장! 언제까지 버텨야 합니까!”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캠벌 신관님께서 이제 한계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한정적인 자원 내에서 최선의 수를 택해야 한다. 무엇이 가장 생존하는데 보탬이 될 것인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비록 이게 최선의 선택일지는 알 수 없지만. 툭툭. 좋아, 일단 이거로 가자. 달리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아쿠라바.” “말씀하세요.” “통신 좌표 지정을 완전히 해제해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정된 전화번호에 발신을 하는 식으로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 전지역으로 제한 없이 송출이 될 텐데요···?” “그게 내가 바라는 바다.” 받지도 않는 상대에게 부재중 전화를 남겨봤자 의미가 없잖아? “······알겠어요.” 아쿠라바는 내 말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이견없이 승낙했다. 그리고······. “다 됐어요. 대역폭도 최대로 맞췄고요.” 이내 설정이 완료된 메시지 스톤을 내게 건네는 아쿠라바. 딸깍. 나는 조심스레 버튼을 눌렀다. 조금 긴장이 됐다. 현재 설정은 라디오 송출 모드와 비슷하니까.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메시지 스톤만 켜뒀다면 대륙 전역으로 통신이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 들어라.”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모두 들어라.] 메아리가 치듯 주변에 활성화된 메시지 스톤이 일제히 출력하는 송출음. 전부 연락을 안 받은 본대 책임이다. 뭐가 그리 바쁜진 몰라도 본대가 귓구멍을 닫고 있는데 바바리안이 달리 뭘 하겠어? “천공의 눈은 파괴됐다.” [천공의 눈은 파괴됐다.] 귓구멍 안에 목소리를 때려 박을 수밖에. *** 칙칙한 색채의 황량한 벌판. 그리고······. “······.” 처참하게 박살이 난 ‘천공의 눈’. 스윽. 한 사내가 로브를 벗으며, 그 아래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산성 물질을 들이부은 듯한 흉측한 피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끔찍한 몰골을 한 사내가 주변을 쓱 둘러보자, 눈이 마주친 이들이 시선을 내리깔기 바빴다. “너.” 사내가 손을 뻗어 가장 근처에 있던 탐험가의 목을 틀어잡았다. “커허, 컥! 사, 살려주십시오! 리, 리갈 바고스 님!” “살고 싶으면 어서 말해라.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마, 말하겠습니다······! 숨김없이 전부!” 목이 졸린 탐험가가 필사적으로 외치자, 리갈 바고스도 손에 쥔 힘을 풀었다. 벌을 내리더라도 사정은 들어봐야 하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천공의 눈은 파괴됐다.] [우리는 지금부터 접선 지역으로 향하겠다.] 그 통신을 끝으로 메시지 스톤은 먹통이 됐기에, 병력을 이끌고 급히 회군한 그는 이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정리하자면. 놈들이 대놓고 쳐들어와 천공의 눈을 파괴하고, 다중 순간이동 마법으로 도망칠 때까지 너희는 구경만 했다는 거군?” 사정을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 들었다. “그, 그게··· 리갈 바고스 님께서 출정을 나가며 병력이 빈—.” “내 탓이란 말이냐?” “커, 커헉! 아, 아닙니다! 단지 놈들이 비겁하게 몬스터를 끌고 온 탓에······! 저, 저희로는 역부족, 이었단 얘기였, 습니다!” “······쓰레기 같은 것.” 이내 리갈 바고스가 손에 힘을 불어넣자, 공포에 질린 탐험가가 한 사람의 이름을 토해냈다. “티, 티타나 아쿠라바!” “티타나 아쿠라바···?” 사내 역시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가 오르큘리스에 입단했을 무렵, 그 시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탐험가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 할망구가 있었다고···?” “그, 그녀뿐만이 아닙니다! 화, 황금매 제임스 칼라! 백검 카이슬란! 말고도 유명한 탐험가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발 자비를···!” 죽음을 직감한 탐험가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애원을 해왔고, 그때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바고스 님, 그만하시지요. 이들로써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케일 엘바드 제네거. 그가 이끄는 무리의 참모 역할을 하는 자였다. 왕가 측 원정대가 아이스록을 통해 잠입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경거망동하지 말고 이곳을 지키자고 한 것도 그였고. 그래서일까? 이 녀석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이는 한편으로는 반발심도 일었다. “케일, 넌 나서지 마라. 지금 나는 합당하게 벌을 내리려는 거니까.” “하면, 어째서 저 남자입니까? 이곳을 지키지 못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을진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모두에게 벌을 내리면 되겠지.” 그 말에 눈치만 보던 탐험가들이 어깨를 움찔 했고, 충언을 올리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최후의 패를 꺼냈다. “······그랬다간 단장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오르큘리스의 수장.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이 새끼가······!” 그 이름에 리갈 바고스 역시 발끈하며 참모의 멱살을 부여잡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그라도 그 이름을 무시할 수는 없던 것. “이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곧 전선에 나가 있던 단장님께서도 복귀해 사태를 파악하려 할 것입니다. 일단 경거망동치 말고 기다리시지요.” “······쳇.” 결국 리갈 바고스는 노기를 속으로 식혔다. 참모의 말을 무시하고 외부에 나갔던 것만으로도 단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더 책잡힐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혈령후의 남자? 리헨 슈이츠?” “예, 예! 확실합니다. 그놈이 원정대의 수장이었습니다. 슈이츠라고 부르는 것도 확실히 들었고요! 무엇보다 [거대화]도 사용을 했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서 자신을 농락한 ‘그놈’에 대해 조사하던 리갈 바고스의 몸이 움찔했다. [거대화]를 듣자마자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팽배한 탓이다. “케일!” “무슨 일이신지요?” “메시지 스톤을 가져와라.” 참모는 그의 명령에 의문조차 보이지 않으며 메시지 스톤을 꺼냈고, 리갈 바고스는 이를 휙 낚아챘다. 그리고······. 딸깍. 버튼을 조작해 녹음된 음성을 재생했다. [나? 느그집 앞마당.] [알면 뭐, 찾아오게?] [응, 열심히 해.] 듣는 것만으로도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그놈’의 목소리. 동시에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던 그 목소리. 딸깍, 딸깍, 딸깍. 몇 번이고 반복해서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던 리갈 바고스는 이내 손에 힘을 풀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마침내 리갈 바고스는 목소리의 주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다시 한번 말한다. 천공의 눈은 파괴됐다.] [우리는 지금부터 접선 지역으로 향하겠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의 배신으로 인해, 몸을 회복하고 기억을 되찾기까지 무려 3년이 넘도록 기억해 내지 못했던 원수. 수많은 대가를 치르며 얻은 소중한 검을 훔쳐간 도둑놈. 지금까진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살아 있던 건가.” 아마 왕가에서는 놈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죽음으로 위장하게 한 것도 왕가의 짓일지 모르지. 아니면 아쿠라바 같은 거물이 참가한 원정대에 ‘혈령후의 남자’ 같은 평을 듣는 놈을 수장으로 앉혔을 리 없으니까. “비요른 얀델.” 그날의 분노를 떠올리듯, 조용히 이름을 읊조린 리갈 바고스가 몸을 일으켰다. “케일! 병력을 모두 모아라! 지금부터 도망친 놈들을 추적한다!” “하지만 아직 단장님께서 도착하지—.” “됐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다시 만날 시간이다. *** 데드우드. 용의 산맥 서부에 위치한 필드이자, 전쟁 중 단 한 번도 왕가군의 침입을 허가한 적 없는 노아르크의 영역권이자······. 왕가와 미리 약속해둔 접선 지역이기도 한 그곳. “······.” 그곳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보낸 연락을 듣지 못했을 리 없으니, 기다리면 그들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으며. “······.” 생기를 잃은 나무들의 거대한 가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불안한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무려 사흘째. “연락을 받고 즉시 본대를 움직였다면, 어제는 도착을 했을 시간이에요.” “왜··· 오지 않는 것이야!” “카이슬란 경, 목소리를 낮춰요. 음성 제어 마법은 이제 여력이 없어서 못 쓴다고요.” 어제까지는 다들 곧 본대가 도착할 거라며 서로를 격려하던 이들이었지만, 서서히 분위기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오늘 아침 처음으로 사망자가 발생했으니까. ‘필립 아인트로피.” 멜렌드 카이슬란의 팀에 속해 있던 탐험가였다. 클래스는 항해사. [해류조종], [경량화], [과잉공급] 등 항해의 도움이 될 스킬을 주로 익혔던 그는 오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사망했다. 마력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마법사들의 체력이 바닥난 탓에 잠시 은신 마법이 풀렸던 탓이다. 아래를 수색 중이던 노아르크 놈들이 우리를 발견했고, 무리해서 전투를 펼치던 중에 머리가 으깨져 즉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흐른 지금. “슈이츠,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요.” 대원들의 불안감은 극에 치달았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슬슬 아침에 죽은 놈들의 부재를 노아르크 측에서도 인지를 했을 테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의 수색이 강화될 것이다. 안 그래도 노아르크 놈들이 이 아래를 지나가는 횟수도 이전보다 훨씬 늘었고. “결단을 내려야 해요.” “잠깐만, 결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곳을 버리는 게 옳아요.” “······무, 무슨 소리오! 왕가에서 우리를 버렸단 말이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단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만약 그쪽에 사정이 있는 거라면, 우리도 그에 맞춰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옳아요.” “일리는 있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다들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도중에 발각된다면 전멸입니다.” “그래서 기다리자고요? 언제까지? 이제 이틀이면 마법사의 마력도 바닥이 날 텐데? 그때는 전멸이 아닌가요?” 비상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 분분해진 의견들. ‘하아······.’ 나는 속으로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쿠라바의 말이 아니었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미쳐버리겠군.’ 선택지는 총 세 개다. 일단 첫 번째는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는 것.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모두 멀쩡하게 구조될 것이다. 반면 최악의 결과라면······. ‘이곳에서 개죽음을 맞겠지.’ 두 번째는, 기다리지 않고 움직여 직접 왕가의 세력권까지 돌파를 하는 것이다. 데드우드는 용의 산맥보다는 중요도가 훨씬 떨어지기에 전선도 얇으며 병력도 적으니까. 접선 지역으로 고른 것도 그래서였고.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망상은 아니다. 하지만······. ‘서른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역시 힘들어.’ 10%만 살아서 도착해도 기적에 가깝다. 최악의 경우에는 첫 번째와 동일할 테고. ‘그럼 역시 다른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세 번째는 일종의 존버 전략이다. 전선에서 거리가 먼 본거지 쪽이 비어 있었듯, 차라리 그쪽으로 가서 숨는다면 미궁이 닫힐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천공의 눈도 박살을 냈으니, 우리에 관한 정보도 멀리까지 공유되지 않을 테고.’ 다만, 위의 선택지 중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위험에 노출되다 보니 수많은 변수에 노출이 될 것은 불보듯 빤하다. 최선의 수만 착착 두며 나아가더라도, 수많은 희생이 뒤따르겠지. ‘어느 쪽을 고르던 최악의 결과가 나오면 전부 죽는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에 몰살 엔딩이라면. 최상의 결과가 나왔을 때, 모두가 살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나? 왕가가 잘못한 거니 책임도 돌릴 수 있고. “······는 개뿔.” “만약 우리가 떠나고서 본대가 도착한다면! 그땐! 그땐 책임질 수 있……… 으응? 방금 뭐라고 하셨소?” 카이슬란의 의문은 대충 무시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비록 그 선택에 확신이 없을지라도. 툭툭.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들 준비해라, 지금부터 이곳을 벗어난다.” “보, 본대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이오?” “그래, 바람은 이미 맞을 만큼 맞았으니까. 아, 그리고 너무 걱정 마라.” 나는 카이슬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411화 딜레마 (3)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먼저 희망 회로를 돌린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고, 이렇게 되면……. 그럼 다 잘 풀릴 수 있는 거 아닌가? 만약의 경우를 수없이 가정하며 희박한 가능성에 눈이 멀어 골든 타임을 놓쳐 버린다. 수 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 미궁에서 구르고 굴렀다지만, 우리 원정대 역시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이곳을 떠나겠다고요?” 내 결정이 대원들에게 공지되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섣부른 결정이오!” “그, 그래도 여기서 더 기다려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뭔가 저쪽에서 문제가 생겨서 조금 늦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맞습니다! 주변에 노아르크 놈들이 쫙 깔렸는데 우리끼리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습니까!”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반대표.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그게 모든 선택지 중에 가장 희망적이니까. 구조대가 온다면 모두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위기는 이로써 끝이며, 도시로 돌아가 행복해질 일만 남는다. 아마 이번에 겪은 고생도 술자리 안주 정도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해.’ 나는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리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걸. 진짜 절망은 골든 타임이 끝나고 저 한 줄기의 희망마저 짓밟혔을 때 찾아온다는 걸. 그때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하려면 지금뿐. “다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혹시 단체로 머리에 문제라도 생겼나?” 반발을 사는 게 당연할 정도로 강한 워딩을 사용한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아이스록에서는 쥐새끼가 껴 있었다. 천공의 눈에 도착했을 때? 몇 번을 걸어도 연락이 닿지 않았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나?” “…….” “사흘이나 됐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조금 늦는 거라고? 구조대는 오고 있을 거라고? 웃기는 소리. 만약 그랬다면 아직도 이 주변엔 노아르크 놈들이 가득할 리가 없겠지. 진작에 왕가군을 막기 위해 전선으로 불려나갔을 테니까.” 나는 한 번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 “우리는 버려졌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헛된 희망을 부술 수 없다는 판단. “와, 왕가에서 우리를 왜 버린단 말이오!” 글쎄,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걸지도 모르지. 나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여겨진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상대의 사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버려지지 않았다면, 왜 아직도 오지 않지?” “그건…….” 말꼬리를 흐리던 대원이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거요?” “그래.” “다들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그게 될 거 같소? 모두 죽을—!” “여기서 기다리면 뭐가 다른가!” 언성이 높아지자 마법사들이 부족한 마력으로도 ‘음성 제어’를 활성화했기에 나는 마음 놓고 크게 소리쳤다. “다들 눈을 떠라!” “…….”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내 외침에 모든 대원들이 침묵했다. 반박하려면 반박할 거리가 없지는 않겠지만, 본인들도 내심 느끼고 있던 것이다. 내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걸. 애초에 그런 의심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불안해할 일도 없었을 터. “…….” “…….” 잠시 이어진 정적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 없다.” “…….” “너희는 다른가?” 그 물음에 답한 것은 카이슬란 팀의 대원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럼 됐군. 나를 따라와라. 적을 죽이고, 동료를 지켜라. 적어도, 이곳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더 의미 있을 테니까.” 나는 그리 말하고서 두꺼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대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표정을 보면 내 목소리가 그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진 거 같진 않았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헨 슈이츠. 원정대에 속하기 전까지는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의문의 탐험가. 이곳에 오며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줬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믿음직하겠어. 그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팀장들을 보았다. 그리고……. “광명이 이끄는 곳으로 향할지어니.”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준이었다. 그는 날 돕기 위함인지 어딘가 신성하게 보일 정도로 과하게 예를 취하며 나를 보았다. “저희 제4팀은 당신이 택한 고난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그다음은 카이슬란이었다. “라프도니아 왕가는 리헨 슈이츠를 이번 원정의 책임자로 임명했소. 그의 판단을 의심하고,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왕가에 대한 불충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을 터.” 서론은 길었지만, 그의 말은 한 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했다. “우리 제5팀은 그대의 명을 따를 것이오.” 준과 마찬가지로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일까? 불편한 가지 위에서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예식을 취하는 카이슬란. 조금 의외였다. 수뇌부 회의에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더니. “저희 제2팀은 조금 달라요.” 그때 아쿠라바가 입을 열었다. “막연한 믿음을 가진 것도, 왕가의 군법이 무섭기 때문도 아니에요. 전 단지 저 사람의 의견에 찬동했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왕가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기는 어려운 상황인 거 같거든요.” “그래서?” 내 재촉에 이내 아쿠라바가 피식 웃었다. “제2팀도 당신을 따라갈 거라고요.” 오케이, 그럼 이제 마지막 한 팀이 남았다. 톱니이빨 클랜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가 리더로 있는 제3팀. 이내 시선이 모이자 제임스 칼라가 당혹스럽단 표정을 내지었다. “저는…….” 앞선 팀장들의 퍼포먼스가 좀 부담이 된 모양. 다만 그런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을까? “이하동문입니다. 저 하나 반대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언제나 대세를 찾고 따라가야 하지요.” 조금 심심하기는 했지만, 이 녀석다운 말이었다. 농담스러운 말투에 섞인 그의 진솔함도 다른 대원들에게 충분히 잘 전해진 거 같았고. “……이미 글렀군.” “이미 다 정해두고서 저러면 어쩌잔 거야?” “하하핫, 나는 원래 마음에 안 들었소. 왕가에서 일 못하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내 살길은 내가 알아서 찾아야지.” “이번 사태는 제가 왕가에 단단히 따질 겁니다. 그러려면 살아 돌아가는 게 우선이겠지만요.” 중얼거리는 대원들을 쓱 둘러보던 나는 주먹을 쥐었다. 꽈악. 좋아, 한번 해보자. *** “주변을 순찰하는 병력이 늘었어요. 아무래도 그들이 죽은 걸 눈치챈 모양인데……. 어쩌죠?” 뭘 어쩌긴 어째. 앞으로의 계획은 간단하다.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한다.” 우선 메스 텔레포트를 사용해 적지의 한복판에서 벗어난다. 뭐,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큰 마법을 쓰고 나면 당분간 마법사들은 전력 외의 상태가 될 거예요. 우리 위치도 들킬 테고요.” 분명 노아르크 측 탐색꾼은 마력의 잔향을 따라 우리를 추적해 올 것이다. 하나 달리 선택지가 없다. “그래도 감수하는 수밖에. 암만 은밀히 움직인다 한들, 이 인원이 적들에게 걸리지 않을 리 없지 않나.” “그건 그렇겠지만…….” “천공의 눈이 박살난 이상 놈들도 자유롭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다. 차라리 다중 순간이동 마법으로 거리를 벌리는 게 최선이다.” 그런 내 판단에 팀장들은 약간의 우려를 내비쳤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끝났고. “다음은 어쩔 거죠?” 이후 계획도 아주 간결하다. “추격대가 붙든 붙지 않든 북쪽으로 올라간다.” 목적지는 암흑대륙의 북반구. “…아군이 있는 남쪽이 아니고요?” “그래.” 남부가 아니라 북부를 택한 이유는 하나다. 탐색꾼이 추적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어디로 텔포를 탔는지 정도뿐이니까. 그다음에 어디로 향했을지는 놈들도 알 수 없다. 쉽게 말해……. “우리가 남부로 향했을 거라고 적들을 속이려는 거군요. 놈들이 병력을 남부로 보낸다면, 그만큼 북쪽이 텅텅 비게 될 테니까.” “맞다. 우리는 등잔 밑에 숨을 거다. 폐쇄일이 될 때까지.” “이해했어요. 이것도 그쪽 참모가 생각해낸 건가요?” 거, 내가 생각했을 거라고는 믿지를 않네. 됐다 뭐, 중요한 것도 아니니. “다들 준비하라 해라. 마법 영창이 시작되면 개떼처럼 놈들이 모여들 테니까.” “……알겠어요.” 팀장들에게 전략을 공유하고, 각 팀장들이 자신의 팀원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이거로 계획을 시작할 모든 준비는 끝. 타닷. 이내 우리는 숨어 있던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메스 텔레포트 마법을 완성시키는 동안엔 마법으로 몸을 숨길 수가 없을 테니까. “무려 사흘 만에 밟아보는 땅이군.” 지면의 감촉을 낯설게 느끼기도 잠시, 원정대에 속한 다섯 명의 마법사들은 즉시 일사불란하게 나뉘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아-! 28명의 대인원을 옮기기 위해서 필요한 다중 순간이동 마법은 둘. 방대한 마력이 사용되는 만큼, 기감이 좋은 놈은 곧 이변을 눈치챌 것이다. 후, 제발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좋겠는데. “…….” 거대한 나무를 등지고서, 마법사들을 호위하듯 반원형으로 펼쳐진 호위 진형. “아저씨, 누군가 와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내 기감이 유별난 에르웬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를 발견하고는 멈췄어요. 지금은 다시 급하게 돌아가고 있고요.” 그래, 지원을 부르려는 거구나. 휘이이이이익-! 뭐라 지시를 내리려고 하기도 전에 에르웬이 어두운 숲 너머로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죽였나?” “아뇨. 나무에 박혔어요.” “그렇군.” 뭐, 어차피 맞혔어도 시간을 조금 더 버는 거에 불과했을 테니까. 입맛을 한 번 다시고서 크게 소리쳤다. “전원 전투 준비!!” 어차피 다 들킨 와중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곧 노아르크 놈들이 흥분해서 몰려들 거다. 그리고 우리는 메스 텔레포트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낼 테고. 스윽.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지금 마지막으로 뒤쪽을 확인했다. “좌표! 이쪽 좌표 입력이 틀렸소!” “아, 미안하오. 지금 고치리다!” 본인들도 급박한 상황을 아는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하게 마법진을 그리는 마법사들. 노고는 고맙지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저게 차원문 마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란 건 알고 있다. 원래 게임에선 1등급에 도달한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차원문’ 마법을 쓸 수가 없었으며, 사용의 대가는 시전자의 목숨이었으니까. 현재 미궁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차원문은 오리지날 버전의 개량판. 정확히 말하면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 4등급 마법사도 쓸 수 있도록 개량된 차원문. 생에 단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한 마법이긴 했으나, 그 대신 사용 시 목숨을 대가로 내놓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7층 이상에서는 사용 불가.’ 개량판 차원문에는 그런 결정적인 패널티가 붙어 있다. 그렇기에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건 다른 부분이다. ‘어떻게든 1등급 마법사를 넣어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요청은 했지만, 후작 선에서 반려당했다. 1등급 마법사는 마탑에도 극소수이며, 왕가에는 고작 한 명뿐이니까. 천공의 탑을 부수고 원정대 전원이 살아서 돌아와도 1등급 마법사가 죽으면 손해다. 차라리 원정대 전원을 버린다면 모를까. ‘니미럴, 설마 진짜 이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논제 자체가 틀렸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1등급 마법사와 우리의 목숨을 저울에 올리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결국 최종 완성된 계획은 본대를 보내 우리를 구조해내는 것 아니었던가. 물론 그 과정에서 구조대의 피해가 생기기야 하겠지만, 원정대에 속한 개개인의 명성을 생각하면 왕가에서도 그 정도 희생은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러니까, 구조대가 오지 않는 건 다른 이유— ‘……이 생각은 그만하자.’ 어째서 구조대가 오지 않았는가. 수없이 고민하던 문제였으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야 어차피 살아 돌아가면 알게 될 일이며……. “온다……!”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면, 알아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쿠웅-, 쿠웅- 지면을 통해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우와아아아아!” “죽여!” 이내 어둠 속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낸 즉시, 나는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오로지 하나만 생각할 때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변신계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초의 세포] 효과에 의해 해당 스킬의 영혼력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1.5배 상승합니다.」 살아남는 것. 412화 딜레마 (4)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 그리고 이를 수비 진형으로 막아 내는 원정대. “죽여……!!” “막아!!” 마치 디펜스 게임을 하는 거 같다. 뭐, 게임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디펜스 게임에서는 근접 전투 능력밖에 없는 적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휘유우우우욱-! 쏟아지는 화살 비. “리바이블 에센더!” 흑마법.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번개, 냉기, 화염 등으로 이루어진 각종 정수의 스킬들까지. 보통 이런 원거리 요격은 마법사들이 막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 마법사들은 쥐꼬리만큼 남은 마력을 모두 써서 메스 텔레포트 마법을 완성하는 중.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 원거리 요격이 뒤에 있는 유리몸들에게까지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선. 「캐릭터가 [스며드는 오한]에 적중당했습니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에 입는 냉기 피해가 2배 상승하며, 입은 피해량에 따라 냉기 내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항마력 및 번개 내성을 초과하는 전격 피해.」 「캐릭터가 ‘마비(중)’ 상태에 빠집니다.」 「캐릭터가 [관통하는 빛]에 적중…….」 「…….」 몸에 빠르게 쌓이는 부담. 허나 그럼에도 거대해진 몸을 방패 삼아 앞에 벽을 세우고서. 까드득. 혀라도 씹을까 이를 악문 상태로. 콰아아아앙-! 정면에서 쏟아지는 공격들을 몸으로 때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위들이 그러고 있다. 「벤자민 오르먼이 [정화의 달]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니아로 캠벌이 [빛의 축복]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받는 모든 치유 효과가 상승…….」 「…….」 신관의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그들은 믿음을 대가로 신의 힘을 빌려 쓸 자격을 손에 넣었을 뿐.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신의 영역이니까. “……마이트!!” 우리의 죽음에는 비명이 없다. “다, 다들 뒤로 물러나!!” 나를 기준으로 좌측에 위치해 있던 제2팀의 전사 마이트 밀리언. 푸욱-!! 직선을 그리며 날아온 날카로운 흑색의 가시가 그의 방패를 뚫고서 심장… 아니, 상체를 관통한다. “안 돼……!!!” 카운트 다운을 외울 필요조차 없을 완벽한 죽음. 그 죽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몸을 보듬던 신성한 빛들이 빠르게 주변으로 흩어진다. 몹시도 빌어먹을 이유다. 솨아아아아아아- 죽은 자는 스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마, 마이트……!” 죽은 전사와 같은 팀이었던 궁수가 앞으로 달려나와 그의 사체에 꽂힌 흑색의 가시를 뽑아내려 애쓴다. 무모하고도 미련한 짓이다. 그런다고 빠질 리도 없으며, 빠진다고 살아 돌아올 일도 없을 텐테. ‘……친구였을까?’ 글쎄,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에밀리, 잠깐 다녀오마.” “…뭐?” 이내 나는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뒤 옆으로 살짝 이동해 궁수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헛짓 말고 뒤에 가있어라.” 아쿠라바가 있는 후방 쪽으로 궁수를 던졌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성난 외침이 뒤에서 들려왔다. “…무, 무슨 짓! 마, 마이트가……!” “마이트는 죽었다. 너희를 살리기 위해.” “……!!” 마이트 밀리언. 그는 날아오는 흑색의 가시를 분명하게 보았다. 피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의 신체 조건이었으면 반드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막기를 택했다. [다, 다들 뒤로 물러나!!] 동료를 지키는 것. 그게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물론 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한 번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을 수도 있다. 하기야 이리도 혼잡한 전투 상황에서 한 번 본 것만으로는 알아채긴 어려웠겠지. 저 흑색의 가시가 2등급 정수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스킬이란걸. ‘……어쩌면 알고도 막은 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진실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니까 뒤에 있어라. 이제부터 이곳은 내가 맡겠다.” “…….” “에밀리! 제2팀과 합류해라!” 제2팀의 유일한 전사가 죽었기에, 그 빈자리를 내가 메운다. 두 팀이 맡아야 할 공간을 나 혼자 맡게 된 격이지만……. 짜증이 나기보다는 안도감이 인다. ‘몸이 커서 다행이네.’ 내친김에 [초월]까지 사용해 몸의 크기를 더 키울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뒀다. 언제까지 두들겨 맞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캐릭터가 [위험부담]을 시전했습니다.」 「받는 피해량 및 [확률적보복]의 반사 피해량이 2배 증가합니다.」 시험 삼아 맞아보니 딜이 2배 더 들어와도 버틸 수 있을 거 같더란 말이지.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확률적보복]으로 인한 피해 면역 효과가 사라지는 대신 발동 확률이 100%로 고정됩니다.」 [초월]을 활성화하기 무섭게 덜그럭,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뒤에서 스켈레톤들이 일어선다. 그리고……. [그아챠아앗-!] 내가 몸으로 처맞은 각종 스킬들을 역으로 돌려준다. “뭐, 뭐야!” “가챠본! 가챠본의 정수다!” “뭐? 하지만 그 스킬은 이렇게 막 터지는 게 아니었을 텐데……!” 아군이 쏘았던 공세가 역으로 가해지니 피어나는 혼란. ‘진작에 켤 걸 그랬나?’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뿐인 건가? 오히려 더 아프게 맞을 걸 각오하고 [위험부담]을 켰더니 공세가 줄어들었다. 덕분에 빈자리를 혼자 메우는 것도 수월했고. 오케이, 그럼 이제 텔포만 완성되면 되는데……. “……비켜라 쓰레기들!” 그때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던 적군들 사이에서 한 명의 남자가 무리를 이끌고 등장했다. 다시 봐도 토가 쏠리는 역겨운 몰골. “리갈 바고스다!” “용살자……!” 놈이 왔다. *** 콰아아아앙-! 터지는 폭발. 다급한 동료들의 외침. 비명과 흩뿌리는 피. 온갖 소음이 나부끼던 전장에 정적이 감돈다. 주변이 시끄러운 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마 그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 테고. “…….” “…….” 거리를 둔 채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구도. ‘설마 나를 알아본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놈이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말했지.” “…….” “죽음조차 널 구원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 알아본 거구나. 어찌 된 게 무사히 기억을 되찾긴 했나 보네. 가챠본 정수도 들킨 탓인지, 키가 작아진 모습은 그리 개의치 않는 모양. 좋아, 그럼 오랜만에 인사나 해볼까? “비싸 보이는 검이군.” 나는 시선을 내려 놈의 허리춤에 매여진 한 자루의 검을 응시했다. “또 내게 주러 온 건가?” 반응은 즉발적이었다. “이놈……!”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 근데 이걸 어쩌나. 아직 화날 일은 더 남아 있을 텐데. “마법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1분이요!” 음성 제어가 비활성이기에 모두에게 들렸을 그 답변. “그렇다는데, 어쩔—” “1분이면 충분해.” 그 순간, 놈이 자리를 박차며 내게 대시했다. 「리갈 바고스가 [상급 가속]을 시전했습니다.」 「리갈 바고스가 [잔상]을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민첩 수치를 폭증시키던 놈의 스킬 조합. 다만, 이전과는 다르다. 그때는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만났으니까. ‘훨씬 빨라졌어.’ 원래는 이게 본 스탯으로 내는 출력이었을 터.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콰앙-!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라서 말이지. “……!” 검과 방패가 충돌하며 놈의 눈이 좁혀진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야 뻔하다. “왜 그때처럼 구멍이 송송 날 거 같았나? 여긴 그 미로 속이 아니니까?” 놈은 답하지 않으며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리갈 바고스가 [신성한 칼날]을 시전했습니다.」 검면을 타고 일렁이는 백색의 빛. 하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쿠웅-! 이제 오러도 거뜬한데, 그거라고 다르겠어? “어찌 된 게, 너는 그대로군?” 참 다행인 일이다. 만약 2년 사이에 더 강해졌으면 어쩌나 하고 잠시 탐색전이나 해보려 했던 건데. “이놈……!” 이내 놈이 휘두르는 검격을 한참 동안 막아내던 나는 방패를 밀어 파리 쫓듯 놈을 밀쳐냈다. 그야 이제는 근력 수치도 내가 높거든. 그것도 압도적으로. “…읏!” 예상하지 못한 저항력이었는지, 당황하며 뒤로 나가떨어지는 용살자.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제 10초 남았소!” 곧 마법이 완성된다는 뜻. “알아볼 건 다 알아봤으니, 이만 꺼져라.” “…….” “너는 이제 나보다 약해.” 내게 이런 말을 들은 게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이 나간 건가 싶었으나 그건 또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망치를 내리찍었는데, 그건 또 잽싸게 피하더란 말이지. 콰앙-! 나는 지면에 박힌 망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점점 늘어나는 적군의 숫자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악연을 매듭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슈이츠! 어서 이리 와라!” 뒤에서 아멜리아의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바닥에서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순간이동 마법이 완성된 것. 나를 비롯해 최전선에 있던 전사들이 서둘러 중심부로 이동했다. “보내 줄 것 같으냐……!” 뭐래, 네까짓 게 안 보내주면 어쩔 건데? 진짜 아쉬운 건 이쪽이구만. “네이노오오옴!!” “바고스 님! 거기 있으면 다중 순간이동 마법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흥분하며 내게 달려들려던 녀석이 부하의 충언을 듣고서 멈칫했다. 쩝, 좀만 더 와줬으면 얘까지 텔레포트를 태워 데려간 뒤 다구리를 놓았을 텐데. 솨아아아아아-! 내가 도착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욱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 “다음에 또 보자. 그때까지 머리 간수 잘하고.” 이내 오색찬란한 빛이 점멸했다. *** 번뜩-! 눈앞을 가득 채운 빛이 꺼지고, 시야가 돌아온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생기를 잃은 거대한 나무들이었다. 좀 전에 우리가 있었던 곳과 거의 비슷한 환경.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메스 텔레포트 한 방으로 필드를 건너뛰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무도 없군요.” 암흑대륙의 중부 필드 중 하나인 데드우드의 서부. 다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아마 우리를 잡는다고 이 근방에 있던 병력이 전부 몰린 탓이겠지. “신관은 어서 부상자를 치료해라. 치료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테니.” 한 번의 고비를 넘긴 셈이나, 여유로이 쉴 틈은 없기에 잠깐 정비할 시간만을 가진 뒤 즉시 행군을 시작했다. 아군이 자리한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며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확인했다. “……피해는?” “사망자는 총 셋이오.” 그래, 옆에 있던 그놈 말고도 둘이 더 당한 거구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래서 사망자는? 누구지?” 이내 카이슬란은 씁쓸한 목소리로 정확한 피해를 보고했다. “마이트 밀리언, 피오나 에이머스, 니아로 캠벌이오.” 2팀의 전사 한 명. 4팀의 신관 한 명. 그리고 3팀의 마법사까지……. “마법사가 당했다고……?” “마지막에 용살자와 그의 부하들이 합류한 이후 눈 먼 공격에 당했던 모양이오. 마법진은 얼추 다 완성된 상황이라 마법에는 문제가 없었다더구려.” 니미럴, 도움 안 되는 용살자 새끼. 까드득. 여정을 시작할 땐 서른 명이었던 원정대가 어느새 25명으로 줄었다. 그중 가장 피해가 큰 것은 제3팀이었다. 배신자 파이크 넬다인에 이어 마법사까지 이번 전투로 사망하며 인원이 넷으로 줄었으니까. “2팀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오. 밀리언, 그 친구가 팀의 유일한 전사였으니.” 화력에 집중한 아쿠라바의 팀 역시 불안하다. 소환사가 있으니 임시방편으로 트롤 세 마리를 전위로 쓸 수야 있겠지만, 애초에 그 소환사 여자도 극딜러에 가까우니까. “진형에 손을 대야겠군.” “아무래도 그래야겠소.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고집을 부리려는 자들은 없을 테니.” 그동안 이동 시에는 각 팀이 일정 거리 떨어져서 행동했다. 천공의 눈 타격이나, 방금 같은 특수 상황이 아니면 그쪽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기 때문.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개의 팀이 모인 연합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하나의 원정대가 될 필요가 있다. “허락만 해준다면, 우선 역할군별로 나눠서 진형을 새로 짜보도록 하겠소만…….” “나는 괜찮다. 우리 팀원들도 이해해줄 테고. 진형은 맡길 테니 다른 팀장들과 상의해 정해라.” “알겠소. 그럼 해보리다.” 첫 인상은 별로였지만, 카이슬란은 상당히 유용한 인재였다. 내 지시가 떨어지고서 머지않아 그가 각 팀을 하나의 병력으로 편제했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직업군들을 중앙에 모았고, 그 주변에 궁수, 검사, 도적 등의 민캐들을 배치했다. 전투 시 그들의 역할은 호위. 이동 시에는 체력이 부족하거나 걸음이 느린 이들을 업고서 이동한다. “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죄, 죄송해요.” “됐수다.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내가 다치면 치료나 잘해주쇼.” 의외로 탈것 취급을 받게 된 이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본인들도 아는 것이다. 살기 위해선 이 집단을 유지하려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저씨……. 몸조심하세요.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크게 소리치시고요.” “너야말로 조심해라.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아무튼,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우리 팀도 흩어지게 되었다. 그야 나는 수호자 포지션의 전사니까. 당연히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 “서로 아주 끈끈하네요.” 그렇게 진형을 새로 갖추고 여정을 재개했을 때, 내 뒤에 위치한 라비옌이 말을 걸어왔다. 음, 그러고 보니 얘랑도 할 말이 있긴 하지. “고맙다.” “…네?” “용살자가 나타났을 때, 자리를 지켜줘서.” 라비옌은 강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아멜리아나 에르웬보다 한 수 위라 평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 만약 이 여자가 그때 돌발 행동이라도 했다면, 분명 우리 팀에도 부상자, 혹은 사망자까지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얼간이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 이후로는 딱히 나눌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리고 얼마나 더 흘렀을까. “잠시 쉬었다 가겠다!”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 적당한 타이밍에 휴식을 가졌다. “으아! 드디어!” 행군이 멈추자마자 각 대원들은 모두 지친 몸을 그대로 바닥에 붙였지만, 한 남자는 달랐다. “저기…….”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으로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 “스벤 파라브.” 달리 말하자면, 고블린 가면. 얘도 보면 참 신기하다. 싸우는 걸 보면 그렇게 무력이 높은 거 같지는 않은데, 이상할 정도로 다치는 일이 없단 말이지. “여긴 무슨 일이지? 쉬지 않고?” 내 물음에 놈이 어딘가 초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그게 실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라. 나도 쉬어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짜증을 담아 말하자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내게 말했다. “그…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하면 안 됩니까?” “쉬지 말자고……?” 뭔 개소리인가도 싶었지만,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거란 생각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 말하는 이유가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마는…….” “아닌데?” “왜, 왠지 어딘가 불안해서……. 쉬자는 말을 했을 때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집니다. 시, 심장도 누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고요.” ……뭐지, 이 새끼는? 괜히 사람 불길해지게. 413화 딜레마 (5) “그… 제가 사실 어렸을 때부터 감이 좋았던 편이라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고블린은 그런 말을 시작으로 본인이 겪은 여러 경험들을 예시로 말해 주었다. 본인도 뭐라 하는지 알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중구난방인 말이었으나,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불기둥이 솟아오른 그날에도 그랬습니다! 원래 미궁에 들어가야 했는데, 오늘과 똑같은 기분이 들어서…….” 처음에는 정신병자인가도 싶었지만, 지금 한 얘기들이 정말로 경험담인 거라면 한 귀로 흘리기 어렵다. ‘육감’은 [던전앤스톤]에 실재하는 스탯이니까. “알겠으니 자리로 돌아가 봐라.” “추, 출발하시는 겁니까 그럼?” “근거도 없는 불안 때문에 무작정 강행군을 이어갈 수는 없다.” “……여, 역시 그렇겠지요?” “그래. 하지만, 고민은 해보지.” 여지를 남겨 둔 말에 녀석은 ‘그래, 이 정도가 최선이겠지’ 하는 표정으로 떠났고, 그제야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한마디씩 뱉었다. “신기한 친구로군.” 시작은 ‘미친놈인가?’를 순화해서 말한 이능술사 디디 영감. “어쩌면 계시라도 받은 것일지 모르지요. 신을 모시는 성기사이니.” 마법사 애쉬드는 녀석을 두둔하는 듯한 말을 뱉었고, 에르웬의 경우에는 어딘가 기분이 나쁘단 얼굴이었다. “저 사람 뭐예요? 다들 지쳐서 쉬는 중인데 재수없게.” “자자, 진정해라.” 에르웬을 달래고 있자니 아멜리아도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슈이츠, 어쩔 거지?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는 표정은 아니던데.” “탐험가들이 미신을 신봉하는 것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저 말을 따르겠단 건가?” “글쎄…….” 한번 고민은 해봐야겠지. 사실 나도 저 말을 듣자마자 뭔가 안 좋은 직감이 들기 시작했거든. 스윽. 그런 의미에서 끼고 있던 신호등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반지는 어떠한 빛도 내보내지 않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안심하기엔 이르다. ‘이 반지라고 모든 사건을 전부 예지하는 건 아니니까.’ 신호등 반지는 게임에서도 그랬다. 주변에 이벤트가 있어도 무조건 100% 확률로 발동이 되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작동한다. 초록불이 뜨면 반드시 근처에 좋은 일이 있지만. 불이 뜨지 않았다고, 근처에 좋은 일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닌데……. ‘어떡하지?’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때였다.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돌연 반지가 작동하며 빛을 자아냈다. 솨아아아아아. 급히 고개를 내려 확인한 불빛의 색은 너무도 선명한 적색. “아저씨……?” 에르웬의 당황한 음성을 뒤로하고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두 이동할 채비를 갖추어라!” 휴식을 끝내고 서둘러 이동을 재개했다. “……아직 10분도 채 쉬지 못했소만.” “대원들이 많이 힘들어해요.” 팀장들이 우려를 내비쳤으나 어쩔 수 없다. 적색 이벤트를 겪는 것보다는 그냥 조금 힘든 게 낫잖아? “진형대로! 이제 출발하겠다!” 그렇게 다시 행군을 시작하고서 한 30분쯤 더 지났을까. 솨아아아아. 반지의 불이 꺼졌다. 대체 어떤 부정적인 이벤트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떨떨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벤 파라브, 저 새끼는 대체 뭐지?’ 그냥 우연인가? 하긴 사람 육감이 아무리 좋아도 어떻게 신호등 반지보다 반경이 더 넓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는 감이 좋다며 진심으로 날 설득하려던 표정이 걸린다. 따라서, 이동하는 중에 잠시 뒤로 떨어져 고블린 옆에 붙었다. “이제는 어떻지? 괜찮나?” 만약 여전히 불안하다거나 한다면 그냥 우연으로 치부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얘는 신호등 반지에 대해 모르니— “아, 예… 펴, 편안합니다.” 얘는 대체 뭐지……? *** 7층 암흑대륙. 바바리안만큼이나 다부진 체형을 가진 인간 남성이 허리를 굽혀 지면을 매만졌다. “백호, 여기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소만!” “그래? 몇 명이나?” “스무 명이 좀 넘는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소! 하지만 분명한 건 떠난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이오!” 큰 덩치에 걸맞은 커다란 외침. 이에 노인은 귀가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짧게 읊조렸다. “어쩌면 그자들일지도 모르겠네.” “그자들?” “그 있지 않은가. 천공의 눈을 부수고 도주 중이라던 그들 말이야.” “아, 그놈들…….” “따라가 볼 텐가? 만약 정말 그들이라면, 이번에 꽤 많은 것을 노아르크 측에 요구할 수 있을 텐데.” “으음.” 노인의 말에 턱을 짚고서 고민하던 금발 사내가 피식 웃으며 한 곳을 응시했다. “냐옹아, 너는 어떤 게 좋을 거 같아?”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 물음을 받은 수인족 여성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표정만 봐도 알겠네. 싫다는 거지?” “…시간이 아까우니까.” “시간이 아깝기는, 정말 도시 쪽 사람인 거면 그냥 건들기 싫은 거면서.” “…….” “재미없기는.”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처음 흔적을 발견한 전사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쩔 것이오? 따라갈 거요?” “아니. 귀찮게 굳이?” 금발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만약 가봤는데 그냥 주변에서 사냥하던 새끼들이면?” “시간만 날리는 일이 되겠지. 하지만 아깝지 않은가? 지금부터 따라가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 “에이, 됐어. 걔네 잡는다고 뭐 대단한 게 나올 거라고.” 이내 금발 사내가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젓더니 아공간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우연히 여기서 만났다면 모를까, 굳이 따라가 확인까지 해볼 필요야.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자.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들 하겠지.”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군.” “오케이, 그럼 이 얘기는 여기서 끝. 잠시 쉬다가 뭐 좀 먹고 다시 움직이자. 야, 아우레스!” “하하! 조금만 기다려보시오! 내가 금방 맛있게 고기를 구워줄 테니!” 머지않아 그들 주위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져 나오기 시작했다. *** 미궁 진입 60일 차. 바꿔 말하자면 7층이 폐쇄될 때까지 15일이 남은 시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군.” 우리는 포탈이 자리한 ‘용의 심처’의 서쪽 필드 ‘패자의 안식처’에 도착했다. 솨아아아아아아. 세찬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으며 주변을 가득 메운 흑색의 안개. 끝없는 벌판에 박혀 있는 수만 자루의 낡은 검.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를 뽐내는 공간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감상은 내뱉지 않았다. 그야 그런 감상에 빠질 만큼 여유가 있는 자는 없었으니까. “슈이츠, 계속 이동해야 하오. 가만히 있다가 포위라도 된다면—”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라.” “…….” 음, 너무 날카롭게 말했나? 뒤늦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사과를 입에 담진 않았다. 그럴 정도의 여유는 내게 없었— “슈이츠,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오. 지휘관이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 허, 역으로 위안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해하지 말라는 건 너무 무리한 주문 아닌가.’ 이미 내 계획은 어그러졌다. 아군이 있는 남쪽이 아닌, 적의 세력권인 북쪽. 이곳을 택하면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단 원리로 존버가 가능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던가. ‘집요한 새끼들.’ 잠깐 속도를 늦추면 금방 따라붙는 추격대. 우리는 놈들 때문에 휴식은커녕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며칠 동안 강행군을 이어가야만 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소. 어떻게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정확하게 알고 따라오는 것인지…….” 카이슬란은 노아르크의 병력이 우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온 것에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야 예전에 한 번 겪어 본 적 있으니까. [팔 하나 더 바친 게 아니었으면 놓쳤을 수도 있었다니까?]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용살자 놈은 카루이의 사제를 이용해 우리를 추적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겠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제물 같은 건 아무렇게나 바쳐 버리는 놈들이니. “파라브. 현재 기분은 어떻지?” “아, 아직은 괜찮은 거 같습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사망자가 한 명도 더 나오지 않은 것에는 고블린의 공이 컸다. 어찌된 게 쉬고 있다가도 추격대가 근처에 온 거 같으면 귀신처럼 눈치를 챈달까. 잘 가고 있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면 안 되냐고 조심스레 물을 때면 그 앞에 적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후로부터는 이동 시에도 아예 내 옆에서 걷게 하며 끼고 사는 중이고. “그럼 조금 더 쉬어도 되겠군. 뭔가 이상이 생기면 바로 내게 말해라.” “알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바닥에 벌러덩 눕는 녀석. 하, 쟤가 저럴 정도면 정말 주변이 안전하단 건데. 나도 이대로 쓰러져서 잠깐이라도 눈을 좀 붙이고 싶다. 하지만……. ‘나까지는 그럴 수 없겠지.’ 나약한 마음을 이겨내고서 팀장들을 모아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칼라, 카이슬란, 준, 아쿠라바.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겠다.” “……?” “이곳까지 오면 폐쇄일까지 숨어서 지낼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조금 갑작스러운 사과였을까? 팀장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운 얼굴을 짓더니, 한 명씩 위로의 말을 던져왔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 추격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구조대를 더 기다렸다고 한들, 하루도 채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예요.” “부끄럽소만, 나는 이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지휘관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안도했소. 아까도 말했듯, 지휘관은 결코 무너져서 안 되는 존재이니까…….” 오, 그렇다니 좀 마음이 가벼워지네. 사실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 그냥 데드우드에서 구조대를 기다렸어야 하는 건 아닐까.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남쪽으로 향하며 적지에서 빠져나갔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모두가 죽는 건 아닐까. 쿠웅- 마치 가슴속에 산덩이만 한 바위를 얹고서 사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 설령 그로 인해 더 큰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게 될지라도. “크흠.” “멋쩍어 하는구려.” 뭐래. 툭툭. 나는 무릎을 두드리며 팀장들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너희들에게 의견을 묻기 위해 불렀다.” “보아하니 이미 결정을 내리신 듯하군요.” 어, 그건 그렇지. 그래도 생각만 하고 있을 뿐,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아마 이곳에서 숨어 지내도 얼마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밑밥부터 깔았다. “아마 계속 이동하지 않으면 금방 따라잡히고 포위를 당하겠지.” 앞으로 나아가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어와 같다. 안일하게 멈춰 버리면 그 순간 게임 오버. 본격적으로 포위가 형성되면 지칠 대로 지친 우리 전력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다. 따라서……. “하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호기심을 내비치는 팀장들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정해둔 곳이 있는 듯하오만.” 저 말대로다. 정해둔 곳은 있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다음에 떠올린 게 아니라, 계획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었던 곳이다. 그래, 쉽게 말하자면 플랜 B였다. 정말 어지간한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고르고 싶지 않기도 했던 선택지.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지금 상황에서 어디로 이동하려는 건지.” 나는 결국 그 선택지를 입에 담았다. “우리는 다시 아이스록으로 간다.” 우리에게 힘든 길은, 놈들에게도 힘든 길일 테니. 어디 한번 여기까지 따라와 보라지. 414화 오르막길 (1) 미궁 진입 62일 차, 용의 심처. 8층과 이어진 포탈까지 이제 30분 정도만을 앞에 둔 무렵. 「반지가 캐릭터의 운명을 감지하였습니다.」 신호등 반지의 불이 켜졌다. “아저씨, 저, 적색 빛이에요!” 그래, 저 앞에 부정적인 이벤트만 가득하다는 거지? 그래도 녹색이 조금은 섞여 있을 줄 알았건만. 거, 사람 기운 빠지게. “…어쩌죠?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에르웬이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지금까지는 반지에 빨간불이 켜지거나, 스벤 파라브의 육감이 발동하면 그 즉시 방향을 틀어 이벤트를 피해갔다. 하지만……. “에르웬, 이제 와서 목적지를 바꾼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건… 그렇겠지만요…….” 온 사방이 시뻘건 불길로 뒤덮인 상황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쳐봤자, 불길은 점점 영역을 좁히며 우리의 숨통을 틀어막겠지.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 늦기 전에, 모든 걸 걸고서 불길을 넘어서는 것뿐. “파라브, 무슨 일이지?”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고블린이 멋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저… 대장님 옆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끔 느껴져서…….” 그나마라니, 조금 기분이 상하지만 봐준다. 지금까지 많은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떻지?” “숨이 턱턱 막힙니다. 마, 마치 불타는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요.” “그래? 근데 웬일로 별말이 없었군. 그럴 때면 항상 다른 곳으로 도망치자고 하더니.” “그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건 맞는데, 그래도 이 길이 맞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곧 있으면 포탈이다. 모두 속도를 높인다!” 이내 나는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포탈이다!” 저 멀리서 포탈이 일렁거리며 오색의 광채를 흩뿌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적이다!” 포탈의 빛을 광원으로 확보된 시야로 적들이 보인다. 약 40명으로 이루어진 별동대. 그들 역시 포탈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왕가놈들이다!!” “정말 이쪽으로 왔잖아!” 우리가 녀석들을 보았듯, 녀석들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내질렀다. 후,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대?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적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네놈……!!” 용살자, 리갈 바고스. “그래, 네놈이라면 이쪽으로 올 줄 알았지!” 내가 널 아는 만큼, 너도 나에 대해 조금은 아는 거구나. 참으로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다!” 뭐래, 지들도 이제 막 도착한 주제에. 누가 들으면 완전히 길목을 틀어막은 줄 알겠어. ‘속도를 올리길 잘했네.’ 나는 20분 전에 내렸던 내 판단을 자찬했다. 만약 반지가 붉은빛을 뿜어냈을 대,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망설였다면 이미 놈들은 우리를 막아선 상태였을 테니까. 막대한 희생을 치렀어야 했으리라. “뭘 망설이냐! 달려라!” 막판 스퍼트를 넘어서, 전력을 다해서 다리를 움직인다. 현재 구도는 간단하다. 원정대는 포탈을 향해 동쪽으로. 용살자와 친구들… 줄여서 용살단은 포탈을 향해 북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구도. “달려어어어어어!!” 먼저 도착하는 쪽이 막대한 이점을 가져간다. 한데 그건 저쪽도 알기 때문일까. 용살단도 필사적으로 달리며 포탈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하지만……. ‘좋아, 우리가 더 빨라.’ 현재 기준으로 우리가 포탈에 더 가까운 것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사실. “제기랄, 다들 뭐 해! 공격해라!” 어떻게든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용살단 쪽에서 원거리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인원이 많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제자리에서 캐스팅이 필요한 원거리들은 멀리서 견제만 하도록 해두고, 그사이 육탄 전투에 능한 근접 계열이 포탈을 점거하겠다는 판단일 터. 휘유우우우웅- 콰아앙-! 투두두두두두. 후, 이러니까 무슨 진짜 전쟁터에 온 거 같네. 하늘에서 수많은 화살과 이능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뭐 해! 더 빨리 움직이지 않고! 뒤처지면 그대로 끝이야!” “다, 다리에 힘이……!” “에라이, 미치겠군! 제기랄, 업히쇼!” “하지만…….” “어서!” 이런 광역 딜쯤이야 나는 맨몸으로 버티면서 나아가는 게 가능했지만, 대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커헉-!” 눈 먼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대원. 그리고……. “좀만 참아! 곧 치료해 줄 테니까!” 그런 부상자를 업어들고서 나아가는 또 다른 대원. ‘니미럴, 이대로면 또 여기서만 몇 명은 더 죽겠는데…….’ 그런 생각에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가던 때였다. 열심히 내달리는 우리들 위로 여성의 윤곽을 가진 그림자가 떠오른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혈령후라는 이명을 만들어 준 최강의 소환수.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 이내 디클로에가 거대한 어둠 구체를 적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폭딜 타입인 아쿠라바조차도 내지 못할 압도적인 화력. 다만, 그만큼 유지 시간은 짧다. 전력을 쏟아부었을 때의 가용 시간은 약 5초. 그러나 5초면 충분했다. “달려!!” “이쪽은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라!” 용살단이 역공을 막느라 이동이 멈춘 찰나, 선두의 그룹부터 시작해 하나둘 포탈 너머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마지막 어둠 구체를 던진 디클로에가 역소환되며 에르웬이 비틀거렸다. “아저씨, 계셨군요…….” “두고 갈 리가 없지 않나.” “…그렇죠. 아저씨니까.” “수고했다.” 이미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모든 대원들이 8층으로 올라간 상황. 나는 탈진 상태에 빠진 에르웬을 안아들고서 얼른 포탈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보낼 것 같으냐!” 등 뒤, 바로 지척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민캐라 그런지 빠르긴 하네. 언제 여기까지 왔대? 뭐, 그래 봐야 이미 한참 늦었지만. 타닷. 슬라이딩을 하듯 몸을 날린 순간, 포탈의 빛이 몸을 포근하게 감싸안는다. 「8층 여명의 땅에 입장했습니다.」 바닥을 구르며 눈을 떴을 때는 포탈 앞에 대기 중인 대원들이 보였다. “대, 대장이군.”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확 긴장이 풀렸는지 무기를 내리는 대원들. 다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포, 포탈이 빛난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안도하던 대원들이 다시금 무기를 고쳐잡았다. 그야 우리 원정대는 모두 진입을 끝마쳤으니까. 지금 포탈을 탄 자가 누구일지야 뻔하다. ‘허, 여기까지 따라들어올 줄이야.’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그냥 눈이 돌아간 거야? 어느 쪽이든 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뭘 위해 그렇게 죽어라 달렸는데? “전투 준비!” “들어오는 대로 전부 죽여라!” “와, 왔다.” “죽여……!!” 입구 막기는 무적이다. *** 포탈 앞에 서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서. “…….” 언제든 스킬을 시전하고, 무기를 휘두를 준비가 끝난 대원들과 함께. “……너무 잠잠하니, 도리어 불안해지는구려.” 포탈 앞을 틀어막고서 벌써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이 포탈이 적을 뱉어낸 것은 단 한 번. 내가 8층에 진입한 직후, 용살자와 그의 부하들이 동시에 들어왔을 때뿐이었다. ‘그때 어떻게든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부하들 여덟을 죽였지만, 애석하게도 용살자는 놓치고 말았다. 처음 당해본 입구 막기에 신나게 처맞다가 부하고 나발이고 다 버린 채 7층으로 도망을 친 것. 그때부터는 쭉 지금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다. ‘아마 병력이 충분하게 모이면 한 번에 밀고 들어오려 하겠지.’ 아마 그때가 되면 입구 막기고 나발이고, 이곳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뭐, 애초에 평생 입구를 막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내가 원한 것은 단지 재정비를 할 시간이었다. 바로 이렇게. “슈이츠, 부상자들이 모두 회복됐소.” “식량과 물자는?” “갖고 있는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을 모두 모아 썰매에 적재했소.” 쉽게 말해, 지금 당장 마음만 먹으면 아이스록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 그러나 나는 조금만 더 무리를 하기로 했다. “이곳은 우리가 볼 테니, 다들 돌아가면서 조금씩 쉬게 해라.” “……그러리다.” 이내 카이슬란이 상태가 안 좋은 대원들부터 휴식을 취하게 했고, 이를 보던 아쿠라바가 내게 다가왔다. “슬슬 출발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계속 이곳에 있는 건 위험해요.”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아쿠라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을 내비치듯 연신 뒤쪽으로 향하는 시선. 무얼 걱정하는지야 뻔하다. “……슈이츠, 당신도 알겠지만 언제 그들이 돌아올지 몰라요.” 지금은 8층 균열에 들어가 있을 노아르크의 최정예들. 만약 놈들이 균열을 클리어하고 나온다면, 우리는 양쪽으로 포위된 형국으로 변한다. ‘그래도 지금은 운이 따라주고 있어.’ 사실 내가 가장 우려한 것은 8층에 진입했을 때 최정예들이 때마침 대기 중이던 상황이었다.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을 정도의 확률이긴 하지만, 아예 배제할 순 없는 가능성이었으니까. ‘문제는 놈들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는 건데…….’ 마치 확률형 즉사 장판에 누워있는 것과 같다. 운이 나쁘면 지금 당장 놈들이 균열에서 나오며 우리를 데드 엔딩으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몇날며칠 동안 강행군을 이어갔지 않나. 이대로 아이스록에 진입하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전멸할 거다.” 달리 선택지가 없다. 이를 아는지 아쿠라바도 순순히 납득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12시간쯤 흘렀을 때였다. 솨아아아아-! 포탈이 일렁이며 노아르크 측 탐험가 한 명을 뱉어냈고, 장비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있던 그 탐험가는 앞을 지키고 있던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고작 한 명……?” “…정찰인 건가.” 참 노아르크다운 대응이었다. 제물로 보낸 놈이 죽으면 우리가 여전히 입구 막기 중인 거고, 반대면 살아 돌아가 말을 전해주면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아르크여도 무작정 사람을 계속 보내진 않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다음 정찰이 온다면 최소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가 될 터. 게다가 이 정도면 최소한의 휴식은 취했으니. “모두 짐 챙기고 일어나서, 옷을 입어라!” 미궁 폐쇄까지 이제 13일. “아이스록으로 진입한다!” 마지막 챕터로 향할 차례다. *** 8층 여명의 땅. 푸른 초원과 동산이 자리한 평화로운 그곳. 다만 그곳의 분위기는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탐험가들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풍겨져 나온 탓이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케일 엘바드 제네거. 방금 내게 뭐라고 그랬지?” “포기하십시오. 바고스 님, 우리는 이미 그들을 놓쳤습니다.” “뭐!” 이내 용살자가 대뜸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으나, 사내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아무리 그러셔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아이스록에 뒤따라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놈들보다 몇 배는 더 숫자가 많은데, 그놈들이 한 걸 우리가 못한다고?” “아이스록을 모르니까 하시는 말씀이지요. 숫자가 많아봤자, 아이스록에서는 움직이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 “혹시 정예만 추려서 가면 되는 거냐고 물을 거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역시 위험합니다. 그들이 여태까지 도주만 했던 것은 사방에 적군이 가득했기 때문이니까요.” “우리끼리 따라가면… 역으로 당할 거라고,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예. 그들은……. 특히 대장인 그 남자는 엄청난 괴물—” 사내는 용살자의 분노 어린 물음에도 굳건하게 답을 하였고, 그 즉시 목에 압박을 받았다. “커헉……!” “쓰레기 같은 놈.” 그리 말하며 목을 조르는 용살자의 눈에는 오직 살의만이 가득했다. 한데 아무리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해도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까? 목이 졸린 사내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다, 단장이 이 일을 알면—” “단장, 그놈의 단장.” “커헉-!” “그 단장이 너랑 나를 두고 누구를 택할까? 널 죽였다고, 나를 뭐 죽이기라도 할 거 같아?” “아, 안…….” 이내 머리로 향하는 혈류가 막히며 목이 졸리던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마 여기서 몇 초만 더 있으면 틀림없이 숨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퉷.” 용살자는 사내를 아무렇게다 바닥에 집어 던진 뒤 침을 뱉었다. 주제도 모르고 자꾸 기어오르는 게 열받아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말이 많은 걸 빼면 쓸 만한 놈이긴 하니까. 그래서 단장이 유독 저놈을 아끼기도 했고. “빌어먹을.” 화풀이를 잔뜩 하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용살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에 다른 부하들이 모두 눈치를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정작 용살자의 머릿속은 차가웠다. ‘……이놈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병력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면, 이대로 따라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다들 자신과 같은 수준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정예라고 뽑아봤자 다들 쓰레기 수준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 그나마 나은 게 방금 기절한 이놈이었다. 만약 무리를 하다가 용언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겨우 회복된 몸이 망가질 테고, 그럼 몇 달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 ‘단장 그놈도 개지랄을 해댈 테고.’ 여러모로 손해가 확실시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대로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보내줘야 한다고?’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히 마음 문제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난 감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라르카즈의 미로에서도 그랬으니까. [네가 왜 매번 돈을 잃는지 알려줄까? 너는 딱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걸면서 따라가. 승부가 필요한 순간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하나씩 내주다가 결국 그 지경에 이르렀다. 몸이 망가졌고, 기억도 잃은 탓에 반병신으로 1년을 넘게 지내야만 했다. 한데, 그 원흉을 순순히 보내주라고?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할수록 그래서는 안 된단 쪽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었다. 이제는 단순히 복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불과 그 기간 동안 이렇게 강해진 놈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과연 어떨까. 천공의 눈도 파괴를 했으니, 돌아가기만 하면 왕가에서도 큰 보상을 내릴 게 분명한데. 만약 놈이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그때는 과연 내가 그놈을 이길 수 있을까? 이내 리갈 바고스는 결심을 끝마쳤다. ‘……지금 해야 돼.’ 더 이상 시간을 줄 수는 없다. 그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놈과의 악연을 매듭지어야 한다. 그게 현명한 선택이다. 꽈악. 그런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하늘이 그의 결심을 응원하기라도 하듯. 솨아아아아-! 따사로운 바람이 세차게 불며 그들을 보듬었고, 동시에 텅 빈 허공에 빛무리가 흩뿌려졌다.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균열! 균열이 열린다!” 노아르크에서 총력을 기울여 비밀리에 육성 중인 최정예 부대. 4등급 미만 정수는 먹지도 않는다던가? 노아르크 내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오르큘리스 내에서도 세대 교차가 이루어 질 거라는 말마저 돌고 있는데……. ‘시대를 잘 만난 운 좋은 놈들.’ 저들을 향한 용살자의 평은 딱 이랬다. 그야 남들은 차근차근 1층에서부터 올라가며 개고생을 했는데, 얘네는 잠재력이 있고 정수의 빈자리가 많다는 이유로 수많은 지원을 받은 거니까. ‘뭐, 그래도 잘 됐군.’ 배가 아픈 것과 별개로, 용살자는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포탈이 열리고 공략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된 전투를 펼친 듯 닳고 닳은 모습들. “당신은… 리갈 바고스? 여기는 무슨 일이오?” 공략대의 물음에 용살자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천공의 눈이 파괴됐다.” “…뭐? 천공의 눈이?” “그리고 그걸 부순 놈들이 저기 아이스록으로 도주했지.” “그런데 우리는 왜…….” “너희들을 이끌고 추격하라는 게 단장의 지시다.” 415화 오르막길 (2) 다시 돌아온 7층 아이스록. 그곳의 극후반부 필드인 빙하의 눈.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빙하의 눈이 부여됩니다.」 「모든 치유 및 회복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상태이상 [불멸의 속삭임]이 부여됩니다.」 「사망 시 해당 캐릭터는 언데드로 부활합니다.」 얼어붙은 공기가 폐부를 휘감는다. 8층에서의 따사로운 햇살이 거짓말이었던 같다. 다만 우리는 한순간에 변한 환경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나리아, 트롤을 소환하세요!” 세 대의 썰매를 한 대씩 맡아서 끌기 시작하는 아이스 트롤. 썰매에는 딱 13일 치의 식량이 들어 있다. 개인 아공간에 비축하고 있을 식량을 모두 다 징발했다면 수십 일도 가능했겠지만, 일부러 정확히 폐쇄일에 맞춰서 가지고 왔다. 최대한 많은 공간에 전투 및 탐사 용품을 채워 넣어야 했을뿐더러……. “이동 진형으로!” 우리 원정대의 현재 인원은 25명이니까. 냉정한 말이지만, 그에 맞춘 13일 분량의 식량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출발한다!” 진형이 갖춰진 즉시 열흘에 걸쳐 내려온 빙하의 눈을 다시금 거슬러 올라갔다. 절벽 끄트머리에 좁은 나선 형태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격이지만, 오히려 속도는 전보다 빨랐다. 포탈이 개방된 다음부터 이곳에서는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으니까. 길어 봤자 5일이면 필드를 벗어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뒤쫓아 올 추격대겠지만. ‘정상적인 놈들이라면 그냥 우리를 놓아 주겠지.’ 그도 그럴 게, 아이스록에 진입하는 것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추위를 막아 줄 두툼한 털옷, 마도구의 일종인 보온돌, 식량,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아서 옮길 수 있을 썰매까지. 평소 아공간만 달랑 들고 다니는 탐험가라면 이곳에 들어선 즉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놈이라면… 분명 올 거야.’ 안도하기에는 이르다. 내 목숨만이 아니라 동료의 목숨, 그리고 수많은 대원들의 목숨까지 걸렸지 않은가.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에……. 터벅, 터벅. 휴식을 취했음에도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대원들을 이끌고서 속도를 올린다. 그로부터 한 여덟 시간쯤 흘렀을까. “슈이츠 님!!” 카이슬란 팀에 속한 여자 마법사가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며 다가왔다. 얘가 제2 마도병단 출신이랬던가? 몇 번 대화는 나눠 보지 못했지만, 군인답지 않은 목소리와 말투인지라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슈이츠 님! 슈이츠 님! 큰일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큰일!” 키도 레이븐보다 훨씬 크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도무지 왜 이런 말투를 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큰일이라면, 역시 그거냐?” “네! 포탈 앞에 설치해 둔 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결국 놈들이 아이스록까지 따라 들어왔단 뜻이다. 내심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기어코. “숫자는?” “감지 마법이 작동되자마자 정신 동화 상태로 바꿔서 지켜봤는데, 스무 명은 확실히 넘었어요!” “확실히 넘었다는 게 무슨 소리지? “그게… 그쪽에서 생각보다 일찍 눈치를 채 버려서요. 마안이 파괴된 바람에 더 입장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상대의 병력이 얼마인지만 알 수 있다면 앞으로의 판단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행색은, 행색은 어땠지?” “헷, 저희처럼 철저하게 준비했는지가 궁금하신 거죠?”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완전 허술해요! 장비 위에 얇은 망토 정도나 두른 정도? 다들 빵빵한 배낭을 들고 있기는 했는데 아마 거기엔 식량들이 들어 있겠죠. 확장형 배낭일 리도 없으니, 금방 배고파서 돌아가지 않을까요?” 처음엔 울상이더니 지금은 저리 웃는 걸 보면 이건 희소식이라 생각한 듯한데……. 확실히 이건 좋은 소식이었다. ‘망토는 둘째 쳐도 배낭이라……. 하긴, 썰매나 수레 같은 걸 갖고 다니는 탐험가가 어디 있겠어.’ 배낭의 적재 한도는 명확하다. 굶주림이 3배로 적용되는 이곳에서 13일 치의 식량을 배낭에 짊어지고 오는 것은 불가능. 심지어 배낭은 그 자체로 전투 시에 페널티로 작용한다. 무게도 무게지만, 부피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 아공간을 구하기 어려운 초반부에는 짐꾼을 따로 두는 저층 팀도 있을 정도니 그 불편함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알겠다. 아무튼, 추적대가 있는 걸 확인했으니 여기에 하나 더 설치를 하고 이동하지. 좀 더 정확한 규모를 알아낼 필요가 있으니까.” “네!” 이내 우리는 잠시 멈춰서 감지 마법을 한 번 더 설치했고, 작업이 끝나자마자 여정을 재개했다. 쉬었던 만큼 속도를 더욱 올려서. *** “슈이츠 님! 슈이츠 님!” 좀 전의 마법사가 또다시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약 여섯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가, 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저 순진한 마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뱉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좋지 못한 뉴스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 8시간을 이동한 지점에서 설치했던 마법이 불과 여섯 시간 만에 작동이 됐다. 그 말인즉슨, 놈들이 우리보다 속도가 빠르단 뜻. 지금 상태가 유지되면 이틀 뒤에는 놈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아, 아무래도 저쪽은 썰매 같은 걸 끌지 않아도 되니까… 그, 그래서 그런 거 같아요…….” 슬슬 놈들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다. 식량이 부족하니까, 식량이 허락하는 시간 내에 최대한 일찍 따라잡아서 모든 걸 끝내 버리려는 거겠지. “그래서 규모는?” “아! 그건 제대로 확인했어요! 마, 마흔여섯 명이요.” “좋은 소식이군.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여자 마법사가 그리 말하며 장난스레 경례를 취했다. 한데 갑자기 전달할 사항이 생각났을까? “아, 맞다. 저…….” 경례를 마치고 뒤를 돌았던 마법사가 그대로 반 바퀴를 더 돌아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중에 심상치 않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장비만 봐도 딱 다른 사람들이랑은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하나……. 제 감지 마법을 가장 먼저 알아챈 흑마법사도 그중에 한 명이었고요.” “…….” “무, 물론 제 주관적인 판단이니까 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알겠다, 유의하고 있지.” “네……. 아, 그리고 하나 더! 감지 마법은 어떻게 할까요? 또 써요?” “부탁하지. 규모는 얼추 확인이 됐으니 그냥 언제 거기를 지나쳤는지만 알 수 있으면 된다.” “네!” 이내 전달을 끝마친 마법사가 자기 자리로 복귀하자, 옆에 있던 고블린이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마로네 양은 언제 봐도 참 활기차군요.”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나? 헛소리 말고 앞이나 보라고 타박하려 했지만, 이어진 중얼거림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마법사의 등을 보며 읊어지는 쓸쓸한 목소리. 이에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 그렇게 나와 고블린 사이에 자리한 침묵. 이에 옆에서 걸음을 맞춰 걷던 라비옌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파라브 씨, 지금은 기분이 어때요?” 거, 처음엔 나를 병신 취급 하더니. 이제는 먼저 물을 정도가 됐네. 하긴, 내 옆에서 이동하며 파라브의 귀신 같은 직감을 두 눈으로 본 건 이 여자도 마찬가지니까. “그게…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이 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말고는.” “…그런가요.” 순식간에 우울해지는 주변 공기. 나는 목을 가다듬고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파라브, 너는 왜 원정대에 참가했지?” “…예?” “그 좋은 감이면 이런 것도 피해 갈 수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1층 사태 때는 그 직감을 믿고 미궁에 입장하지 않은 덕에 변을 피했다면서, 왜 이번에는 미궁에 들어온 걸까. “그게 실은… 처음부터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뭐?” “괜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죠?” “정말 사실입니다. 대주교님이 참가했을 때에 보상을 막 늘어놓으며 저를 설득하는데, 그래도 내키지가 않더란 말이죠. 그래서 여러 핑계를 대고 빠지려고 했는데…….” “했는데요?” “대주교님이 절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더군요. 그때 어딘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얼른 가겠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 처형대에 오르는 것보단 가시밭길을 걷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네? 처형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거 같은데, 거절했다간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랬습니다. 차라리 미궁에 들어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아…….” “뭐, 지금에 와서는 후회 중입니다. 대주교님이 정말로 저를 죽일 리야 있었겠습니까. 하하하…….” 이내 고블린이 어색하게 웃었고, 녀석의 직감에 대해 긴가민가하던 라비옌은 그러려니 납득했다. 하지만……. ‘좀 이상한데.’ 나는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파라브, 왜 대주교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나?” “흐으음,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 더 위험한 다른 임무를 시킬 계획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마는…….” 이후로도 이동 중에 대화를 나누었지만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 일은 없었고, 체력을 위해 잡담을 멈추고서 여정을 이어 갔다. 안 그래도 생각할 거리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지금 속도로는 이틀 뒤에 놈들에게 따라잡힌다.’ 이는 여기서 속도를 더 올려도 마찬가지다. 그래 봤자 빙하의 눈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잡힐 게 분명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지 내가, 동료가, 다른 대원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지금은 그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 사가각, 사각- 숫돌로 검을 가는 소리. 쩌업, 쩌업. 육포로 배를 채우는 소리. “하하, 그게 정말이오?” “네.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면 같이 가 봐요. 정말로 처음엔 저도 안 믿었다니까요?” 누군가는 친해진 이들끼리 모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는 정좌를 하고 앉은 채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뱉는다. 그야 간단한 이유다. 사람마다 긴장을 푸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니까. “…아저씨도 좀 쉬시는 게 어때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너는 네 자리로 가 있어라.” “하지만…….” “어서.” 내 명령조의 말에 에르웬이 축 늘어진 어깨로 자기 자리를 향해 돌아갔고, 나는 어둠으로 뒤덮인 내리막길 너머를 응시했다. “저쪽도 나름 신경을 써 준 걸 텐데,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요?” “라비옌, 선을 넘지 마라.” “…알았어요.” 뭐라 말이라도 걸어 볼까 했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즉시 입을 꾹 다무는 라비옌. 그러거나 말거나 하염없이 어둠 속을 보았다. “…….” 현재 우리의 위치는 빙하의 눈의 중반부. 이곳에 도착함과 동시에 끝없이 오르막길을 오르던 여정은 중단됐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다. 단순 계산상 이제 1시간 뒤면 추격대가 이곳에 도착하니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세차게 뛴다. 전투를 향한 기대가 아닌 불안으로. “…….” 그도 그럴 게, 지난 시간 동안 전투를 피할 방법을 수없이 강구해 봤지만, 기발한 수단은 떠오르지 않았다. 전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 따라서 그 전에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휴식을 명했다. 한데 그래서일까? “하하!” 사가각, 사각- “…….” 쩌업, 쩌업. 너무나도 평화롭게 들리는 일상적인 저 소음이,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한 바람처럼만 느껴진다. 그리고 아마 그게 이유일 거다. “…….”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하염없이 어둠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적의 숫자는 46명. 우리 원정대보다 거진 2배가 많은 숫자. 게다가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적 중 열 명은 특히 강하다 한다. 장비만 보면 용살자에게 딱히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던가? ‘어쩌면 8층을 공략하던 놈들 중에 몇 명을 이끌고 온 걸지도.’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위험하다. 8층 공략에서 한 사람분을 하려면 적어도 아멜리아급은 되어야 하니. 전면전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 하지만……. “…….” 달리 방법이 없다. 이미 전투는 불가피한 상황 아닌가. 적의 전력이 얼마가 되건 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뭐, 실패하면 전부 죽겠지만.’ 휘익, 휘익. 나는 잡념을 떨쳐 내듯 고개를 털어 냈다. 지금부터는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적들이 우리 예상보다 약했을 때. 그럴 경우에는 오히려 여기서 적들을 물리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그럼에도 희생은 있을 터이나……. 승리한 즉시 이 원정은 끝. 힘들게 더 올라갈 것도 없이 여기서 남은 식량을 까먹으며 버티기만 하면 된다. 꽈악. 그래, 그런 경우의수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니까……. “감지 마법! 감지 마법이 발동됐어요!” 해보자. “모두 진형대로!” 불길하리만치 고요한 저 어둠 너머. 폭풍이 지나친 뒤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놈들이 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전투 준비!!” 싸우는 것. 416화 오르막길 (3) 후우우욱. 숨을 뱉고. 후우우욱. 깊게 숨을 들이쉰다. 그때마다 흡사 담배를 피우듯 가득 새어 나오는 입김. 주르르륵. 흘러내린 땀방울이 얼어붙은 채로 바닥에 떨어진다. 근육은 비명을 내지르고, 눈앞은 흐릿하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터벅, 터벅. 한 걸음, 한 걸음. 그 어느 때보다 호흡에 집중하며 걸음을 뻗는다. 두 대가 연결된 썰매의 가장 앞에서, 놓치지 않게 줄을 꽉 잡은 상태로. 터벅, 터벅. 썰매를 이끌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한 이유다. 썰매를 담당하던 트롤 소환사가 당했거든. “밀번 나리아의 상태는 어떻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런가…….”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를 회상했다. 초반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거대화]를 한 내가 바위처럼 길목을 틀어막았고. “테이룬 쉐아르디엠.” 마법사들은 ‘마나실드’로. 「준 아르셴이 [수호의 빛]을 시전했습니다.」 「페리톤 에리아보티가 [신성한 피부]를 시전했습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피해경감]을 시전했…….」 「…….」 신관들은 각종 보호막 및 버프로 나를 보조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 다른 말로는 올-인이라 할 수 있을 그런 전략. 그 전략은 유효했다. 「모든 치유 및 회복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으로 변하는 환경에서 적들은 적극적으로 나에게 달려들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오르막길의 이점을 통해 적들에게 모든 화력을 쏟아부었다. 스킬만으로도 모자라 치유 포션을 던지고. 치유 장판을 오히려 저쪽에 깔아버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앞에 있는 놈의 모가지를 잡아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상태이상 [불멸의 속삭임]이 부여됩니다.」 「사망 시 해당 캐릭터는 언데드로 부활합니다.」 사망한 적군은 언데드가 되어서 가까이 있던 아군을 공격했고, 우리는 견고하게 진형을 유지한 채 공세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확실히… 리갈 바고스 당신만으로는 힘든 상대였겠구려.] 그놈들이 전투에 참가하면서부터 구도가 달라졌다. 「마누아 레펠레스가 [철권]을 시전했습니다.」 「리키 에이몬드가 [징벌의 걸음]을 시전했습니다.」 「푸르안 컬린이 [강신]을 시전…….」 8층에서부터 수급이 가능한 상위 정수로 무장한 열댓 명의 탐험가. 놈들이 전투에 참가한 순간, 전선이 무너졌다. [슈이츠, 레이아더스의 마력이 바닥났소!] 내게 마나실드를 걸어주고 있던 마법사들이 한 명씩 아웃됐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놈들이 나를 뛰어넘으며 아군의 진형 한복판으로 침투했다. 메인 탱커 라인인 성기사 셋. 보조 탱커 역할인 기사 둘과, 제3 팀의 전사 한 명. 아멜리아나 라비옌과 같은 근접 딜러들이 어떻게든 합심해서 몰아내려 했지만, 그조차 역부족. [퇴, 퇴각해야 하오!] 나를 포함한 모든 대원이 패배를 직감했다. 패배의 원인은 참으로 간결했다. 놈들의 전력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했다. 결사항전을 이어나가면 놈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 결국 그 끝은 전멸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이 새끼들을 전부 족치는 건 깔끔하게 포기.’ 나는 즉시 플랜B를 실행했다. 플랜B의 핵심은 제 2팀 소속의 소환사 밀번 나리아였다. 이 여자는 범위형 극딜 타입의 소환사거든. 세 마리의 아이스 트롤 ‘주술사’를 부리는. 「밀번 나리아가 [가혹한 지휘]를 시전했습니다.」 「밀번 나리아가 [맹수조련]을 시전했습니다.」 「밀번 나리아가 [잠재된 본능]을 시전했습니다.」 「밀번 나리아가 [안정감]을 시전…….」 그녀는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모든 버프를 소환수에게 걸었다. 그리고……. 「소환수 삐삐가 [눈사태]를 시전했습니다.」 「소환수 뽀삐가 [눈사태]를 시전했습니다.」 「소환수 예삐가 [눈사태]를 시전…….」 아이스 트롤들이 수십 배 강화된 위력으 스킬을 일제히 시전하며, 퇴각할 시간을 벌어냈다. 하지만……. “꺄악!” 그 과정에서 나리아가 부상을 입었다. 소환수의 스킬 범위를 3배 증가시켜주는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트롤들과 밀착한 상태로 최전선까지 나왔다가 당하고 만 것. 그래도 다행히 그녀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정신 집중을 유지하며 소환수들을 부렸고, 우리는 성공적으로 퇴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게 지금이었고. “슈이츠, 괜찮소……?” “말 걸지 마라.” “…….” 나리아가 정신을 잃은 뒤, 전 대원이 배낭을 메고 식량을 나눠 담았지만, 그래 봤자 썰매 한 대 분량이 전부. 스으윽, 스으윽. 썰매를 끌어당기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조금 더 힘들어지면 다른 전사들과 교대를 하긴 해야겠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 그런 일념으로 머리를 비우고 몸을 움직이던 차였다. “으윽…….” 썰매에 누운 나리아가 의식을 되찾았다. 두툼한 털옷을 몇 겹이나 덮고서, 보온돌까지 가득 터뜨린 상태의 그녀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추, 추워요…….” “조금만 더 버텨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위로 올라가서 치유를 받고 나면 나아질 거다.” “그, 그럴까요……? 쿠, 쿨럭!” “…그래, 반드시 그럴 거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숨소리는 들리는 걸 보면, 어느샌가 다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쿠웅- 마치 심장에 대포알이 박힌 기분이다. 갑갑하고 갑갑해서 미칠 것만 같은 감각. ‘뭐가 반드시 그럴 거다냐…….’ 이 여자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진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니,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이 여자겠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몸. 점점 다가오는 죽음. “집에…….” 그때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고… 싶어요…….” 나리아의 목소리였다. 힘없는 그 중얼거림에 나는 이를 악물며 거짓을 입에 담았다. “갈 수 있을 거다. 반드시.”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 네가 버텨준다면.” “…….” 이후 나리아는 또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 “슈이츠 씨……. 저는, 이곳에 두고 가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지?” “그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여긴… 그런 곳이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불멸의 속삭임’. 사망 시 몇 배나 더 강해진 채 언데드로 부활하게 만드는 지독한 필드 효과. 그런 식으로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리라. “…….” “…….” 침묵이 흐른다. “대답, 해… 주세요.” 그 목소리에 나는 인정하고 말았다. 더 이상 위선을 떠는 건 이 여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차라리……. 꽈악. 주먹에 힘을 불어넣으며 겨우 입술을 열었다. “알겠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하지.” “…….” “도시에 말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대답은 이번에도 한참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안 돼요. 그래, 서는.” “……안 된다니?” “나, 나한텐, 그럴 자격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두서가 없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자주 보이는 패턴의 변화. “아아… 정말 미안, 해요…….” “속이기, 싫었어. 나도 당신들을…….”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내가……!” “끄흐흐흐흑…….” 뭔가 이 여자에게도 사정이 있겠구나 여길 뿐, 깊게 캐묻지 않았다. 그저 토해내는 한을 잠자코 들으며 나아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내려, 주세요…….” 비교적 정확한 발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이에 옆에 있던 전사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따스한 빛이 그대의 영혼을 보듬어 안기를.” 성기사는 눈을 감고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수많은 죽음을 보아온 자들답게,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나리아 양……. 정말 고생 많았어요.” 그녀가 속한 팀의 팀장인 아쿠라바가 흐트러진 머릿결을 매만져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들어서 내렸다. “고마워요, 아쿠라바 님…….” “고맙다니, 그런…….” 아쿠라바는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바닥에 깔은 털옷 위에 나리아의 몸을 눕혔다. “……가요. 그렇게, 보지 말고.” 나리아의 말에도 우리는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급하잖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 “가세요.” 씨발. 까드득.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는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다. “슈이츠, 그녀의 말이 옳소. 이만 가야 하오.” 나는 억지로 걸음을 떼어 다시 썰매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무섭지 않아요…….” 힘없이 눈을 감은 나리아. “이제야, 집에 가는 거야…….” 걸음을 뻗을수록 그녀의 중얼거림이 점점 멀어져갔다. “아침엔 커피향이 나던, 진짜, 내 집으로…….” 제기랄. [뭐, 지금에 와서는 후회 중입니다. 대주교님이 정말로 저를 죽일리야 있었겠습니까. 하하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 알겠다. *** 생존자 24명. 서른 명에서 시작된 원정대가 나아간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어수선함을 품은 채. “나리아 양이 말한 그거…….” “집이라면… 역시 그것뿐이겠죠?” 수많은 세월을 미궁에서 보내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을 탐험가들. 당연히 그중에는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죽음을 앞둔 악령이 가장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럼 나리아 양이 악령이었다고……?” “쉬잇! 조용히 하게.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원들 사이에서 의문이 퍼져나간다. 또한, 누군가는 그 의문 자체에 분노를 품었다. “다들 제정신이오! 우리를 살리려다 다쳤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도움이 되려 한 사람이오! 우리를 위해 외롭게 죽어가길 택했단 말이오! 한데 악령이라니? 설령 악령이라 한들 그게 무엇이 중하단 말이오!” 좋지 못한 징조였다. “아니, 우리는 단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악령이 대체 왜 우리를 위해…….” “이 빌어먹을 새끼가! 그걸 정말로 모르겠다면 내가 몸소 알려주지!” 아주 개판이구만. “그마아아아아안!!!” 대원들 사이의 균열이 생기기 전에 카이슬란이 소리치며 개입했다. “다들 제정신이오! 모두 하나가 되어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나는 그의 외침을 굳이 막지 않았다. 이번 일로 몸소 깨달은 거다. 집단을 이끌기 위해서는, 때로는 완벽하게 찍어 누를 필요도 있다는 걸.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다면 내가 먼저 지엄한 왕가의 법률하에 즉결 처형을 하리다! 알겠소?” 극약처방에 가까운 강압적인 명령. 이에 대원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뭐, 애석하게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해보든가.” 정적이 끝나갈 때쯤 어디선가 튀어나온 읊조림. 그 목소리의 주인은 푸타 리커번. 2팀의 근딜이자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던 사내였다. “……해보라니?” “어차피 당신들도 다 알고 있을 거 아니요? 이미 우리는 끝났다는 걸!” “이놈……!” “그, 그만두십시오! 카이슬란 경!” 카이슬란이 즉시 검을 치켜들었지만, 주변 기사들의 제지로 무산됐다. 이에 리커번이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그놈들 봤지 않소? 우리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오! 숫자도 더 많고! 이대로 도망을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제 곧 놈들에게 따라잡힐 텐데.” “…놓아라, 명령이다.” 이내 카이슬란의 지시에 그를 제지하던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후, 이대로면 진짜 우리끼리 피를 보겠는데? “카이슬란, 비켜라.”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썰매를 멈추고서, 소란이 벌어지는 중심부로 향했다. 그리고……. 꽈악. 성큼성큼 걸어가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큭!”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답이 없는 상황 같으니 그냥 손 놓고 죽기라도 하겠다고? 정말 그러길 원하나? 그런 거면 내가 네놈을 먼저 죽여줄 수도 있는데.” “커, 허헉-!” 멱살을 잡힌 놈은 헛기침을 토해내면서도 불손한 눈빛을 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해볼 테면, 해봐.” 정말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눈빛에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뭐?” 나도 모르게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내려온 놈. 놈은 절망을 부르짖듯 큰 소리로 외쳤다. “기적처럼 놈들을 따돌린다고 하면 뭐가 바뀌지? 도시로 돌아가 하하호호 웃는 미래? 그런 게 있을 거 같아?” 죽여서라도 이 새끼의 입을 막아야 한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놈은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 않고 전부 토해낸 이후였다. “당신도 알 거 아니야? 본대가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은 이유가 뭔지! 우리는 버려졌어! 뭔가 사정이 생겨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던 거라고!”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거라니?” “허, 허튼소리! 와, 왕가에서 이만한 인물들을 버림패로 쓰며 죽이려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다들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게 함정이었던 거라고!” “……함정?” 이미 내가 수습하기에는 한참이나 늦은 상황.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관망했다. “나 푸타 리커번은 케알루너스 공작가 소속이오! 어렸을 때 공작가에 큰 빚을 진 바람에 이후로는 더러운 뒷일들이나 해결하며 지냈지! 진절머리가 나서 은퇴를 하겠다고 했더니,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이 바로 이 원정이었고!” “…….” “이게 뭔 뜻인지 모르겠소? 나는 버려진 거요! 그냥 죽이기엔 시선이 있으니, 친절하게 감투까지 씌워가며 친히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린 거지!” “…….” “하하핫! 다들 표정을 보니 이런 사정이 있는 건 나만이 아닌 거 같은데? 다들 내심 찔리는 게 있던 거 아닌가?” 이내 녀석의 말이 끝났고, 잠시간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원정대 내에 자리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 “사, 상회에서 나를 버렸다고……? 아, 안 돼. 그럴 리 없어. 이번 일만 성공시키면, 횡령 건은 용서해 준다고 그랬는데…….” 패닉의 빠진 누군가의 중얼거림. 이에 서로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한다. ‘너도 혹시 그런 경우인 거니?’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들. 그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팀장들이었다. 그야 이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자들이니까. 이들이 나서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버려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현실은 잔혹했다. “저 티타나 아쿠라바는 차원붕괴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왕가에게 의문을 토해내고 관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했어요. 어쩌면 그게 거슬렸던 것일지도 모르죠.” 시작은 아쿠라바. “최근 클랜장이 저를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겨우 그것 정도로…….” 두 번째는 톱니이빨 클랜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 “후… 굳이 꼽으라면 나도 칼라와 비슷하오. 나야 가문의 작위엔 관심 없지만, 우리 형님께서는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 이럴까 봐 어릴 때 군에 들어간 것이건만…….” 카이슬란. 그리고……. “저는 토베라교의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알려진 임무는 카루이교에 물든 교인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이었지만……. 카루이교와는 관계없는 정적들을 누명 씌우는 것을 보고서 환멸이 나서 자리를 내려놨지요. 치부를 감추고 싶은 주교들이 꽤 많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준의 고백까지. 팀장 한 명 한 명의 입이 열릴 때마다 원정대 내에는 절망이 새겨졌다. 다만, 아직까지 희망을 놓지 못한 것일까. “슈이츠, 그대는 어떻소?” “후작의 추천을 받은 데다가, 이 원정대의 대장 자리까지 얻어냈잖아요.” “정말 당신도 저희와 비슷한 겁니까!” 대원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이제 와서까지 숨길 이유는 없겠지.’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앞선 사례처럼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비요른 얀델이다.”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417화 오르막길 (4)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뿐인 짧은 읊조림. 다만, 이 울림의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미친……!” 기함하듯 욕지거리를 내뱉는 자. “어쩐지 그래서 그런 짓들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했던 건가.” 납득하는 자. “근데 잠깐만, 이거 큰일 아닌가?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라면 분명…….” 그리고 경계심을 내비치는 자까지. 나는 괜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악령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자세한 사정은 말해줄 수 없지만, 왕가와 합의를 한 뒤 죽음으로 위장하고 그렇게 공표를 했던 거니까.” 물론 이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변명이었는지, 대원들은 생각보다 차분한 반응을 보여줬다.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 원정대장 같은 중요한 자리를 무명 탐험가에게 맡길 리가 없는데…….” “혈령후가 따르던 것도 그래서였나.” “사실 저런 남자가 갑자기 미궁에서 죽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기는 했소.” “하지만 대체 어떤 사정이었기에, 악령이라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던 거지……?” 천성적인 탐험가의 기질인지 이 와중에도 대원들은 나를 향한 호기심을 내비쳤으나, 지금 그러한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줄 때는 아니었다. “설명은 언젠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겠다.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딱 잘라 소란을 정리하자,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임스 칼라가 내게 물었다. “슈이츠. 아니, 비요른 얀델… 아니, 비요른 얀델 준남작!” 거, 어쩔 줄 몰라하는 게 귀엽긴 하네. “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면, 왕가에서 그대를 버림패로 쓸 이유가 무엇입니까?” 녀석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 짐작되는 부분이야 많다. “많은 이들을 살린 대가로 수십 년 만에 귀족 작위를 얻은 탐험가의 영웅.”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일단 이게 바로 나다. “역시 놈들 입장에서는 그냥 조용히 사라져 주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나? 심지어 악령이라 공표했던 걸 번복까지 해야 한다면.” “아…….” 제임스 칼라는 수긍한 표정을 내지었다. 하나 사실 이게 끝은 아니다. 이들에게까지 그 의혹을 말해줄 순 없지만. 어쩌면 후작은 내가 악령이라는 것도 한참 전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야밤에 아들내미를 보내 악령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했던 건……. ‘단지 날 속이기 위해서였겠지.’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가 속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자, 그럼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그리 말하며 나는 대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래서 너희는 어떻냐는 의문을 눈빛에 담은 채. “이번 일의 대가로 후작에게서 한 가지 약속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나 보네요.” 시작은 라비옌. “저는… 혼수상태로 보내다가 토베라교의 ‘대리인’ 덕분에 겨우 의식을 찾았어요. 그 대가로 교단에 묶여 지냈죠. 버림패로 써야 하는 마법사를 찾는다면, 저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었을 거예요.” 베르실 고울랜드. “작년에 내 손녀딸이 죽었네. 증거는 없지만, 후작가에 속한 어느 기사에 의해. 나는 계속해서 그 기사를 찾고 있었네. 어쩌면 그걸 알아서 내게 접근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우리 팀의 이능술사 디디 영감. “저는 마탑주가 왕가와 공모 중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공론화를 하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큰돈이 필요해 원정대에 참가했죠. 한데, 그자는 이미 저에 대해서 알고 있던 모양입니다.” 마탑주가 마스터로 존재하는 렝만 학파의 마법사 리어드 애쉬드 “잠깐만요! 저, 저는 진짜 없는데요? 제 삶의 신념이 가늘고 길게란 말입니다!” 뭐래, 네가 악령인 건 내가 알고 하늘이 아는데. 어쩌다가 비밀이 들통난 거겠지. 고블린 가면, 스벤 파라브의 억울한 외침은 빠르게 스킵했다. 이후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대원들은 흠칫 몸을 떨며 개인적인 사정들을 고백해왔다. “…….” 물론 침묵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치부를 밝히기 싫어서 입을 다무는 것일 뿐, 그들 역시 어딘가 짐작이 가는 게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때아닌 고백 시간이 이어지던 때. 누군가 억울하다는 듯 고성을 내질렀다. “잠깐만요! 저, 저는… 교단에서 버려질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페리톤 에리아보스티라는 이름을 지닌, 카이슬란 팀 소속 신관이었다. “이,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다, 단지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지원자를 받을 때 지원을 했던 것뿐인데…….” 거짓말을 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아니, 실제로도 거짓말이 아닐 테지.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유감을 표하지. 너는 단지 운이 나쁘게 휘말렸을 뿐이니까.” “잠깐! 운이 나빠서 휘말렸다니—” “너와 비슷한 경우가 너 말고도 더 있지 않나.” 예를 들자면,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그렇다. 카이슬란의 수족 생활을 10년 가까이 해온 기사, 파시블 에릭 콜슨이 그렇고. 제임스 칼라의 죽마고우 릭 저거스타도 바로 그런 경우다. 뭐, 얘네는 친구를 잘못 둬서 휘말린 경우니 이 여자보다는 덜 억울할 테지만. “그런……!” 정말 무고한 듯하던 신관이 고개를 숙인다. 아니,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역시나 예상했듯 원정대의 분위기는 초상집에 가까웠다. “정말… 우리는 버려진 건가.” “이렇게 돼버리면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 “그럼… 살아 돌아가도 결국 왕가에서 어떻게든 죽이려 들 거란 거야?” “제기라아알!!”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그들의 눈빛이 초조한 기색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죽는 건가? 정말? 여기서 이렇게……?” 누군가는 절망을. “나는…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군가는 분노를.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파이크 넬다인은 어떻게 된 거죠?” 누군가는 의문을 토해내며 실낱같은 희망을 갈구한다. “우리를 전부 버릴 생각이었다면, 굳이 세작을 넣어 임무를 망칠 이유가 없잖아요!” 아, 그거. 나도 고민을 해봤던 부분이다. 생각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길드장이 후작에게 전공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 내가 원정대장이니까. 천공의 눈을 파괴하고, 우리가 전멸 시에 우리가 올린 전공 중 대부분은 후작에게 향할 텐데 그걸 방해하고 싶던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 아이스록에서 식량 전부를 잃었다면, 이곳조차 넘지 못하고 전부 다 죽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툭툭. 이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최악을 걱정하는 건 나 혼자로도 족하다. 그러니까……. “어째서 누군가가 세작을 보냈는가.” 그 세작의 배후가 길드장이란 건 아직 팀장들만 알고 있는 사실. 지금은 필요한 말을 하자. “그야 간단하지 않나.” 어쩌면 모든 대원들이 듣고 싶어 할 바로 그 말. “저 밖의 도시에는 있는 거다!” 나는 힘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곳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가!” 그게 설령 헛된 희망일지라도. “우리가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도와 왕가와 대적해 줄 자가!”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살아 있으니까. *** 창문이 모두 닫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 그것이 현재 우리 원정대의 상황과 같다. 반쯤은 내가 의도한 것이다. [기적처럼 놈들을 따돌린다고 하면 뭐가 바뀌지? 도시로 돌아가 하하호호 웃는 미래? 그런 게 있을 거 같아?] 녀석이 그 말을 대원들 앞에서 꺼냈을 때, 나는 막지 않았다. [······나는 비요른 얀델이다.] 이들에겐 사망 선고나 다름없을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정말… 우리는 버려진 건가.] [이렇게 돼버리면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 상황을 주도해 모든 대원의 머릿속에서 희망을 지워버렸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방의 창문을 하나하나 직접 닫아버린 것과 같은 행위. 그런 짓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황금빛 미래를 그리는 놈들은 쉽게 무너지니까. 그러니까…….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미세한 빛. 당장은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모두가 한곳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게끔은 할 수 있을 터이니. “돌아가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과연 그 사람에게 그런 힘이 있을지는…….” 그들은 분명하게 빛을 보았다. 헛것을 본 건 아닐지 의심할지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틀림없다. 그렇기에……. “다들 들어라!” 이제 어떻게든 독려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 어둠 속을 기어서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 보자고.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있을지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확인이나 한번 해보자고. “나는 비요른 얀델이다!” 나의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들어본 적 있나?” 대원들은 대답했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르겠소.” “수십 년 만에 귀족이 된 탐험가인데.” “죽었단 소식이 들렸을 때도 이런 난리가 따로 없었지.” 영 매가리가 없는 축 늘어진 목소리. 그럴수록 나는 기운차게 외쳤다. “들어는 봤다니 다행이다! 긴말하지 않겠다! 지금 우리 상황은 최악이다!” “뒤에서는 쓸데없이 강한 개잡놈들이 추격 중이고, 도시에서는 웬 승냥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하지만……!”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포기란 걸 해본 적이 없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들에게 말한다. “나 비요른 얀델이 전사의 심장에 대고서 약속하겠다.” 모두를 살린다는 말은 감히 할 수도 없지만. “가장 힘든 일은 내가 하겠다.” “모두가 원하지 않을 더러운 일도 내가 하겠다.” “피비린내가 나는 곳엔 내가 먼저 걸어들어가고, 누군가 다쳐야 한다면 내가 다치겠다.” “그러니까……!” 나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나를 따라와라.” 소리는 작았지만, 틀림없이 모두의 귓가를 파고 들었을 울림. “…….” “…….” 다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기 바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했는데도 저러네. 하, 진짜 사람 열 뻗치게. “어차피 시궁창에 내다 버릴 목숨이라면 나한테 버리라 이 말이다!!” 결국 소리를 내질러야 듣지? *** “알아들은 놈이 있다면, 채비를 갖춰라. 1분 뒤엔 출발을 할 거니까.” 그리 말한 뒤에 나는 등을 돌렸다. 그 즉시 따라붙는 이가 있었다. “아저씨, 같이 가요!”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다행이군. 출발이 더 늦어지면 나 혼자서라도 출발을 하려 했는데.” 아멜리아. 내가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함께 따라와 줄 소중한 동료들. “준, 결국 그때 당신의 말이 맞았구려.” 그다음은 카이슬란이었다. “모두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저자만큼은 굳건히 서 있을 거라고. 이 끝에 뭐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저 등을 따라가리다.” 이내 카이슬란이 내 뒤에 섰다. 그다음은 아쿠라바였다. “저는 처음부터 여기서 포기할 마음이 없었어요. 이보다 더한 상황도 여럿 있었는걸요? 그때마다 포기를 했다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일도 없었겠죠.” 아쿠라바 다음에는 준이 섰고, 이후 제임스 칼라까지 합류하자 대원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요른 얀델이라… 소문보다 더 무식한 놈이란 말이지.” “크큭, 뭔가 멋진 얘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니.”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다시 가봅시다.” “위험한 일은 그가 다 하겠다고 하지 않소? 이런 말을 듣고도 주저앉으면 그걸 탐험가라고 볼 수 없지.”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잠깐만! 다들 그냥 아무렇게나 막 서지 말고 진형대로 섭시다! 진형대로! 예?” 내가 말한 1분이 되기 전에 모든 대원이 내 뒤에 자리했다. 딱히 감동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죽을 마음으로 난간 앞에 섰어도 마지막까지 번뇌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였으니까. 애초에 그냥 혼자 출발을 했어도 전부 다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얀델! 그래서 언제 출발하나?” “이봐 너… 지휘관에게 무슨 말버릇이…….” “참, 별걸 다 신경 쓰는군. 어차피 잘못되면 전부 죽을 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단 말도 있지 않은가. 오크 하나 제대로 못 썰었을 것 같던 무기력한 눈빛들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혼자 남기에는 두려워서. 이미 한 번 버려진 주제에 또 버려지는 건 싫어서. 그래서 마지못해 따라왔다면 결코 이끌어 낼 수 없었을 변화. “좋아, 그럼 출발하기 전에 하나만 더 처리하면 되겠군.” “처리?” 이내 옆에 있던 스벤 파라브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이를 싹 무시한 채 썰매로 향했다. 이에 어느 전사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잠깐! 지금까지는 당신 혼자 끌지 않았소? 지금부터는 우리들도 같이…….” 뭐래. 누가 언제 끌고 간다고 말이나 했나? “잠깐만… 왜 식량 상자를 썰매에서 내리는 거요?” “이 정도는 배에 채우고 갈 수 있을 거 같아서.” “……응? 배에 채워? 그럼 나머지는……?” 나머지는 뭘 어쩌긴 어째. 버려야지. 후웅-! 나는 겨우겨우 끌고 가던 썰매 두 대를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렸다. 어찌나 절벽이 깊은지 십 초가 넘게 지나서야 쿠웅-!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 미친!”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하기는. 놈들이 우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가 뭔데? “썰매를 끌고 이동하다간 금방 놈들에게 따라잡힐 거다.” “그, 그건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식량을…….” “뭐가 문제냐? 빙하의 눈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배낭에 있는 식량으로도 충분할 텐데.” “하, 하지만! 그다음엔 어쩌려고 그런 거예요!” 합당한 의문이며 걱정이었다. 짐까지 줄었으니 앞으로 이틀이면 빙하의 눈 구간이 끝난다 해도, 이후로도 우리는 미궁이 폐쇄될 때까지 8일을 더 버텨야 한다. 그러나……. ‘거, 신경질 내기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어? 동요가 더욱 커지기 전에 얼른 내가 세운 계획을 공유했다. “빙하의 눈이 끝나면 몬스터가 나오지 않나.” “몬스터……?” “잠깐만, 당신 설마……!” 나는 그들의 의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거기서부터는 왜곡 마법을 사용해 고기를 수급한다.” 어째선지 이 말에 동요가 더 커진 거 같지만.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 같은데…….” “돌아버리겠군.” “저기… 저…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낫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418화 오르막길 (5) 우걱우걱. 육포를 씹으며 나아간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다 함께. “저··· 토, 토가 나올 거 같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 더는······.” 몇몇은 단어 그대로 배부른 불만을 내뱉기도 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 경보에 가까운 속도로 오르막길을 나아가면서도 다들 억지로 육포를 씹어 넘겼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건 앞으로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슈이츠 씨!! 아, 아니지··· 얀델 준남작님!!” 그렇게 나아가고 있을 때, 제5팀의 마법사 마로네가 내게 달려왔다. “10분 전에 설치한 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놈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군.” 전력으로 뛴다면 몇 분 내에도 도착할 거리. “다들 식량 상자를 버려라!” 그리 외치며 나 먼저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육포 상자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그야 속도를 올리려면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하니까. 휘익! 대부분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잘 됐다는 듯 상자를 절벽 아래로 내던졌으나, 몇몇 대원들은 미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손을 떨었다. 성기사, 기사 등의 전사 역할군의 대원들. “제기랄, 나는 아직 더 먹을 수 있는데···!” 주머니란 주머니에 육포를 가득 꽂아 넣은 상태로 저리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왜 벌써 배가 꺼지는 거 같지?’ 이 연비 나쁜 몸뚱이는 먹어도 먹어도 부족함을 외칠 뿐이다. 참 빌어먹게도. ‘그럼 이제 좋은 시간은 다 끝났군.’ “마로네, 감지 마법을 새로 써라. 시간을 통해 놈들의 속도를 유추해낼 수 있도록.” “네!” 이내 마로네가 감지 마법을 새로 설치함과 동시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동 속도를 올렸다. 물론 그렇게 급격하게 늘린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한강 둔치에서 경보로 걷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거의 슬로우 마라톤을 하는 정도의 속도. 그로부터 한 7분쯤 지났을까. “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속도를 올렸음에도 오히려 3분이나 좁혀진 거리. “골치 아프게 됐군.” 이미 신관이나 마법사 같은 비실이들은 업혀서 이동 중인 상황.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생존이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로 정해지니까. “보온돌이 든 배낭도 전부 버리고 간다.” 우리의 체온 유지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보온돌을 포기했다. 썰매를 버릴 때 진작에 버린 천막과 침낭을 제하면 가장 무게가 나가는 것이 이거니까. 식량이야 어차피 먹다보면 자연스레 줄어들 거고. “니미럴, 이제는 추위와도 싸워야겠구만?” “뭣들 하시오! 얼른 버리지 않고!” “어차피 계속 뛰어야 하는데, 너무 아깝게 생각하지 맙시다들!” 예상대로 보온돌을 포기하니, 이동 속도가 조금 더 올랐다. 비육탄계 인원을 업고 뛰어야 하던 대원들의 부담이 한결 덜해진 덕분. 실제로 머지않아 희소식도 전해졌다. “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이번에는 정확히 7분 37초만에!” 좁혀지던 거리가 유지되기 시작했다. 뭐, 우리도 속도를 올린 탓에 죽을 맛이긴 하지만. ‘그건 쟤들이라고 다르지 않겠지.’ 지금부터는 누가 더 끈질긴가의 싸움이다. 척박한 환경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우리가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처럼, 저들도 곧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어, 어떡하죠? 가, 갑자기 빨라졌어요. 이제 6분 밖에 차이가 안 나요!” 육포도 달리면서 씹으며, 잠깐의 휴식조차 없이 뛰기를 다섯 시간. 그동안에 꾸준히 유지됐던 7분의 벽이 깨졌다. 하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녀석들 숫자가 줄었어요! 열두 명 정도로!” 놈들도 포기한 것이다. 우리를 잡기 위해서. 숫자라는 거대한 이점을. ‘식량을 전부 넘겨받고 남은 놈들은 아래로 돌려보낸 건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돌아가는 놈들은 굶기야 하겠지만, 사흘 정도 굶어서 아래까지 도착만 하면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열두 명이라······.’ 어찌 된 게 이제 우리 숫자가 2배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지.’ 물론 언젠가 부딪치기는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아직은 아니다. 따라서. “어, 어떡하죠? 이대로면 금방 따라잡힐 거예요!” 뭘 어쩌긴 어째. 놈들이 하나를 포기했으니, 우리도 하나 더 포기를 해야지. 그게 공평한 거잖아? “무게가 나가는 판금 장비들을 버린다. 물론 싸울 수는 있어야 하니, 방패나 무기는 예외로 하지.” “네에에에?” 길게 말할 것 없이 나부터 몸을 덮고 있던 장비를 벗은 뒤에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지,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요?” “다 죽을 거라고 소리칠 때는 언제고, 아깝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군. 버려라. 어차피 아공간에 보관 중인 전리품을 도시로 돌아가 정리하면 장비값은 나오지 않나.” “후아···. 적에게 쫓기는 중에 장비를 버리라니. 당신은 제대로 미쳤어.” 판금 장비를 목숨처럼 여기는 전위들이 볼멘소리를 뱉었지만, 결국 내 지시에 따라 장비를 모두 벗고 그 위에 두툼한 털옷 만을 걸쳤다. 그 결과. “6분! 이전이랑 똑같아요!” 6분의 거리차가 좁혀지지 않고 유지되기 시작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놈들도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뭐지? 왜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거지? ‘나중에 발가벗은 우리랑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좋아, 그 표정을 떠올리면 좀 더 힘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터벅, 터벅. 그렇게 얼마나 더 오르막길을 달려나갔을까. “······사람이 뛰면서도 잘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소이다.” “1분··· 1분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봤으면······.” 그때 오랜만에 현 상태에 변화가 생겼다. “뭐지? 지금쯤이면 감지 마법이 발동됐어야 하는데······.” 6분을 주기로 발동되던 감지 마법이 20분이 넘어도 작동을 하지 않는다. 왜일까. 설마 감지 마법을 피하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야. 그런 거라면 진작에 그 방법을 썼겠지.’ 그런 고민을 하며 이후로도 10분이 넘게 오르막길을 내달렸으나, 감지 마법은 묵묵부답이었다. 따라서 나도 결론을 내렸다. ‘슬슬 놈들도 한계인가 보군.’ 현재 놈들은 멈춰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정지!” 우리도 이제 쉬면서 한숨 돌릴 수 있다. *** “모두 쉬어라! 자도 좋다! 출발할 때가 되면 깨워줄 테니!”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호조차 뱉지 못하며 그대로 쓰러지는 대원들. 그중 체력 소모가 극심했을 몇몇은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저씨는 안 쉬세요?”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죄송해요. 같이 있어드리고 싶은데, 저는 못 참겠어서······.” “죄송하기는. 얼른 가서 쉬어라.” “네에······.” 이내 지친 낯빛으로 등을 돌린 에르웬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아멜리아의 옆으로 가서 쪼그려 눕더니, 서로 딱 붙어서 잠에 들었다. 그래, 보온돌도 없으니 체온이라도 나눠야지.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식사를 하거나 그대로 뻗어 잠에 든 대원들 속에서 유난히 튀는 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다. “카이슬란, 지금 뭘 적고 있는 거지?” “아! 아까 슈이츠··· 아니, 얀델 그대가 했던 말을 기록하고 있었소.” “내가 했던 말···?” 카이슬란은 대답 대신 조용히 수첩을 내밀었다. [가장 힘든 일은 내가 하겠다. 모두가 원하지 않을 더러운 일도 내가 하겠다. 피비린내가 나는 곳엔 내가 먼저 걸어들어가고, 누군가 다쳐야 한다면 내가 다치겠다.] [그러니까······, 나를 따라와라.] [어차피 시궁창에 내다 버릴 목숨이라면 나한테 버리라 이 말이다!!] 후, 이걸 글로 읽으니까 수치심이 확 올라오는데. 그렇다고 잠도 참아가며 정성스레 적고 있는 애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암기력이 좋군.” “글쎄, 암기력이 무슨 소용일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요.” 얘도 참 취미가 고약하네. 왠지 창피해진 나는 귀중한 휴식 시간을 쪼개가며 이걸 적어서 어디에 쓰려는 거냐며 타박했지만, 카이슬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소.” “응?” “이 기록이 위대한 역사의 한순간이 될지.” 허, 그놈의 역사 타령. 그러고 보면 얘는 예전부터 그런 걸 좋아했지? 나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살아돌아가야겠군. 그 기록이 역사에 남으려면.” “아, 그것도 그렇구려. 그래, 살아돌아가야지······.” “적당히 쓰고 쉬어라. 그런 건 돌아가서 써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리다.” 이후 카이슬란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에르웬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자니, 쪼그려 앉아 배낭에 등을 대고서 비스듬히 누워있던 여자 마법사가 눈을 떴다. “비요른 얀델 준남작.” 베르실 고울랜드였다. “아, 나 때문에 깼나? 그렇다면 미안—.”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저예요.” “······응?” “미안해요. 그때 1층에서 당신들을 버리고 가서.” 뭔 말을 하는가 싶더니, 대체 언제적 일을 꺼내는 건지. “연회장에서 진심으로 후회한다고 했던 거 기억해요? 정말로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에요. 나중에 깨어나 당신이 수정동굴에서 해낸 일을 들었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부끄럽던지.” “부끄러울 게 뭐 있나? 한 무리의 수장이라면 당연히 내려야 했을 결정이었는데. 나라도 그랬을 거다.” 진심으로 한 말에 베르실 고울랜드가 정색했다. “농담 마세요. 당신이 그랬을 리 없잖아요.” 받아들이기 과한 말이다. 만약 수정동굴에서 나에게 인원수만큼 탈출 티켓을 줬다면, 그 즉시 차원문을 탔을 테니까. 하나 버려졌으니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뿐. 영웅적인 사명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니다. 한데,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을까. “당신은 폭풍의 눈 같은 사람이에요. 사방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도, 당신은 절대 휘말리는 법이 없죠.” 거, 바바리안한테 무슨 어려운 말을 해대고 있어. 악령인지 떠보는 건가도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베르실 고울랜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세찬 폭풍 속에서도 당신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단지··· 상황이 그렇게 됐을 뿐이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네요.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닌데. 지금··· 쉬러 가는 중이셨죠?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아니다. 너도 이만 쉬어라.” 그렇게 베르실과의 대화도 끝. 이후로는 쓰러진 대원을 지나쳐 에르웬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감지 마법이 작동이 되면 마법사가 알아서 깨울 테니, 나도 이만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폭풍의 눈이라······.’ 다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칭찬이다. 내 팔자에 악운만이 가득해서 주변인들이 모두 불행에 휩쓸린다는 해석이라면 모를—. “아저씨! 일어나세요!” 뭐? 체감상 눈을 감고 몇 초도 되지 않은 거 같은데? “감지 마법이 작동된 건가?” “네. 얼른 출발해야 돼요.” 니미럴. 피로가 풀리긴 커녕 더 심해진 것만 같구만. “진형대로!” 한숨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서둘러 일어서 출발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얼마나 더 흘렀을까. “마로네, 시간은?” “5분…! 5분이요!” 추격전이 이어지며 점차 놈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놈들의 속도가 딱히 더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그만큼 느려졌을 뿐. “허억, 허억…….” 잠깐의 휴식으로 체력을 온전히 회복하는 건 역시 불가능했을까. 하긴 두 달이 넘도록 고된 여정을 이어가는 중인 우리랑 저쪽이랑은 누적된 피로량부터가 다르겠지. “어, 어떡하죠? 이러다가 따라잡히겠어요!” “지금이라도 싸우는 게 어떻소이까? 여기서 더 지치면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게 분명한데.” 대원들의 불안감이 커진다. 따라서 우선 시계부터 확인했다. [00 : 12] 막 자정이 지나간 시각. 달리 말하자면, 빙하의 눈을 벗어나기까지 딱 하루 거리만을 남겨둔 시기. ‘하루면… 아슬아슬하게 가능은 하겠는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생존이란 선택의 연속인 법. 갈림길에 선 생자는 매순간마다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과연 이번에는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주 심플하다. “맥켈리 레이아더스!” 당장 원정대를 멈춰 세우고서 마법사 한 명을 호출한다. 그야 그 마법을 쓸 줄 아는 건 원정대 내에서도 이 녀석뿐이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소?” 이동까지 멈춰가며 본인을 부르자 어딘가 긴장한 기색으로 되묻는 마법사. “지난 번에 물었을 때, 차원문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었지. 맞나?” “예…. 분명 그랬소이만……, 갑자기 차원문 마법은 왜?” 아, 그거. 사실 별 건 아니고. “사용해라. 지금 당장.” 거두절미한 채 명령조로 말하자 마법사의 표정에 당혹감이 맺혔다. “차원문을… 말이오? 지금 이곳에서…?” 이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궁에서 사용되는 차원문 마법은 모두 개량판이이니까. 사용 횟수는 생에 단 한 번 뿐.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도 횟수를 소모하는 것 자체엔 불만이 없을 터이나……. “갑자기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려. 7층에서부터는 차원문 마법이 작동하지 않소.” 개량판 차원문 마법이 통하는 건 딱 6층까지. 7층에서 차원문 마법을 써봤자 귀중한 횟수만이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끝이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친절히 말해주기는.’ 거, 나라고 그걸 모를까봐? “맥켈리 레이아더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 지금은 내 말을 따라라. 지금 당장 그 마법이 필요하다.” “……알겠소. 바로 준비하지.” “얼마나 걸리겠나?” “주변의 마력 밀도로 보아 1분 정도면 충분할 듯하오.” “그럼 지금 당장 부탁하지.” 대화가 끝난 즉시 마법사는 영창을 시작했고, 나도 멍하니 이쪽을 살피고 있던 대원들에게 얼른 새로운 지시를 하달했다. “차원문 마법이 끝나는 순간 다시 이동을 재개할 테니 채비를 갖춰라! 지금부터는 전투 돌파 진형으로 움직인다!” “…돌파 진형?” “혹시 여기서 놈들과 싸우려는 생각인 건가…?” 내 지시에 대원들 사이에서도 의문이 피어났다. 다만 각 팀의 팀장들은 일단 내 지시에 따라 진형 구축부터 끝낸 뒤에 내게 다가왔다. “느닷없이 차원문 마법이라니, 무슨 생각이오?” “그것도 도망칠 시간도 부족한 와중에요.” “저는 돌파 진형이 가장 궁금합니다. 혹시 반대로 방향을 틀 생각입니까?” 일단 나를 믿고 지시를 이행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던 모양. 나는 짧게 답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더욱 힘든 길을 간다.” “…힘든 길?” “우리에게 힘든 길은 놈들에게도 힘든 길이 될 테니까.” “…잠깐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카이슬란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이었다. 「맥켈리 레이아더스가 1등급 시공마법 [차원문]을 시전했습니다.」 마법이 완성되며 세찬 빛무리가 형성됐다. 음, 딱 한 1초 정도만. 「미궁의 어둠이 시공의 간섭을 차단합니다.」 제대로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파공음을 퍼뜨리며 사라진 차원문. 이로써 맥켈리는 평생 차원문 마법을 못 쓴다. 분명 허탈한 눈으로 나를 책망하듯 보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하지만……. 「미궁의 어둠이 시공의 간섭을 차단합니다.」 드드드드드드.! 애초에 내가 바란 건 차원문을 타고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었어서 말이지. “…뭐, 뭐야?” 협곡 전역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진동하자 대원들의 낯빛에 경계심이 새겨졌다. 「특수 조건 - 찰나의 자극이 충족됩니다.」 그래, 개량판 차원문도 될 줄 알았지. 패널티가 이것저것 붙기는 했어도 일단 1등급 시공 마법으로 분류가 되기는 하던 모양이니까. ‘후… 일단 되기는 했는데…….’ 기대했던 대로 일이 진행된 격이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벌써부터 전사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해당 지역에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출현하였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힘든 하루가 될 것이라고. 419화 폭풍의 눈 (1)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 개체명은 엘더 리치로 3등급에 속하며, 네임드라 불리는 상위변이종. 이놈의 소환 조건은 매우 간단하다. 「특수 조건 - 찰나의 자극이 충족됩니다.」 7층 폐쇄일로부터 10일에서 5일 전 사이. 그 기간 내에 ‘빙하의 눈’ 지역에서 1등급 시공 마법이 사용되는 것. 드드드드드드. 세차게 흔들리던 협곡이 멈춤과 동시에 절벽 아래서부터 마물들이 기어오르며 손을 내뻗는다. “뭐야! 마물이 왜 나와!” “잠깐만 보던 예전에 보던 놈들이 아닌데?” “스켈레톤···? 스켈레톤이 여기서도 나왔나?” 갑작스레 나타난 마물을 보며 당황하기도 잠시. 이미 전투 진형을 이루고 있던 대원들은 서둘러 무기를 휘두르며 마물들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얀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내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팀장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시공 마법을 사용해서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중 하나를 활성화했다.” “…어째서입니까?” “마물이 상대라면 노아르크 놈들보다 우리 쪽이 더 유리하니까.” 대답은 제임스가 아닌 준에게서 나왔다. “똑같이 마물을 상대한다면 비교적 우리 쪽이 더 사정이 좋다는 뜻이군요.” “그래, 놈들은 신관도 마법사도 없으니. 빙하의 눈을 나갈 때까지 지금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다.” 아니, 어디 유지만인가? 어쩌면 거리를 더 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켈레톤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구조니까. 우리보다 아래에서 따라오는 중인 노아르크 놈들은 우리가 남기고 간 스켈레톤까지도 상대를 해야만 한다. 그나마 변수는 보스 격인 카리아데아인데……. ‘저 아래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하루는 걸리니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자, 그럼 이해가 됐나?” “예.” 내 답변에 준은 그럴 듯한 계획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반면, 제임스는 여전히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힘든 길을 가겠다는 게 이런 뜻이었습니까? 전위들이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지금이라면 큰 피해가 생길 겁니다!” 확실히 틀린 의견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장비마저 벗은 상태니까. 필시 버티지 못한 몇몇이 희생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상태로 놈들과 직접 맞붙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라.” 나는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이내 제임스 칼라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그렇게까지해서… 빙하의 눈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는 뭐가 달라집니까?” 거참, 그걸 말이라고. “달라진다.” “……?” “많은 부분이.” 묻기는 했으나 이렇게 확신에 찬 답변이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내짓는 녀석. 음, 얘는 강하게 말하는 쪽에 약한가? 알 수 없지만, 상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조금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녀석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너희는 뭘 보고만 있는 거냐? 얼른 가서 너희 팀원들을 챙겨라.” 내 주변에 모여 있던 팀장들을 제 위치로 보낸 뒤, 나는 진형의 최선두로 향했다. 그야 여기가 내 자리니까. “아저씨,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뭐야? 이번에는 안 말리는 거냐?” “하지만··· 그때 수정동굴에서랑 똑같은 눈을 하고 계신 걸요···.” 음, 그때 거울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결과도 그때랑 비슷했으면 좋겠건만.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이제는 기본형이 된 전투 모드부터 켠 다음에 방패와 망치를 들어 올린다. 근데 갑옷은 버리고 맨몸에 털옷을 걸쳐서 그런가? ‘이야, 진짜 야만인이 따로 없네.’ 이름하여 (진)바바리안 모드. “얀델, 이제 바로 출발해도 좋소!” 때마침 제자리로 돌아간 카이슬란에게서 보고가 들어온 즉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아.” 앞을 가로막은 스켈레톤을 보며 잠시 흠칫했다. ‘맞다, 이제는 딱히 참을 필요가 없지?’ 좋아, 그래도 이거 하나는 긍정적이네. 그럼 가보자.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가호가 나와 함께하리라 믿으며. *** 쿠웅-! 쿠웅-!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실드차지를 하듯 방패로 상체 전부를 가린 채. 콰아아앙-! 어깨로 방패에 체중을 실으며 뼈다귀 새끼들을 밀어낸다. 아, 참고로 최전선에 있는 것은 나 혼자다. 근딜을 포함한 나머지 전위들은 측면과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뒤로 보낸 탓이다. “밀어내!” 뒤쪽에서 따라붙고, 옆의 절벽에서 기어오르는 스켈레톤을 처리하며 뒤따르는 대원들. “아악!” “꺼져, 새끼야!” “읏, 으윽···!” 처절한 전투의 소음 속에서 기합이 아닌 신음도 간간이 들려온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위들은 전부 방어구를 버린 상태였으니까. 스윽-! 스켈레톤이 내찌른 갈비뼈가 누군가의 피부를 베고서 스쳐 지나간다. 「리어드 애쉬드가 5등급 저주 마법 [재생저지]를 시전했습니다.」 자연 재생력이 역으로 작용하는 일을 우려해 마법사들은 저주 마법을 연신 아군에게 걸어대고 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잠시 막았을 뿐. 부상 자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니까. 서걱-! 찢어진 상처는 격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더 크게 벌어지고, 아물지 않는 상처는 끝없는 출혈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상처는 곪아들고 썩어간다. 아무리 저주 마법을 써대도 자연 재생력을 0으로 만들 수는 없는 탓이다. “으아아아아아!”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몬스터들을 뚫고 이동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원정대 내의 부상자가 속출한다. 아주 작은 상처가 발목을 붙잡고, 더 많은 부상을 입게 만드는 악순환. 물론 마나실드를 걸었다면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건 아예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격이지.’ 그도 그럴 게, 이만한 인원들에게 어떻게 마나실드를 다 걸어? 3시간이면 마력이 오링날 게 분명—. 콰아아앙-! 니미럴, 진짜 한눈을 팔 수가 없네. 뒤쪽도 상황이 심각하긴 했지만, 나라고 딱히 상황이 나은 건 아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전력을 다해 몬스터들을 밀어내며 길을 뚫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오는 기력 소모가 극심했다. 아니, 애초에 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태초의 세포]와 [영혼 잠수]가 아니었으면 진작 MP가 바닥나 [거대화]가 해제됐을 터. ‘아오, 삐가리.’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부상이 몸에 쌓이고 있다. 이런 잡몹들에게야 사실상 내 물리 내성이면 피해 면역이나 다름없지만······. 스켈레톤이라고 물리 공격만 하는 건 아니니까. 냉기 피해로 적용되는 뼈폭발을 코앞에서 맞으면 아무리 나라도 피 한 방울은 흘릴 수밖에 없다. “얀델! 앞에 또 그놈이요!” 한 놈 해치운지 얼마나 됐다고, 나타난 거대한 스켈레톤. [거대화] 상태인 나보다 머리 네 개는 더 크니 대형으로 분류를 해도 무리가 없을 터이나, 이놈은 중형에 속한다. 대형 스켈레톤은 따로 있거든. 쿠웅-! 쿠웅-!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절벽을 기어 오르는 초대형 스켈레톤. “미, 밑에! 그놈이 또 올라온다!” “신과아안!!” 이번에도 놈이 끝까지 올라오기 전에 신관들이 신성 주문을 연달아 펼치며 놈을 떨어뜨려냈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 온 사방에 메아리치는 흉포한 울음소리를 뱉으며 도망친 초대형 스켈레톤. 딱히 속이 시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래놓고 몇 분 뒤엔 또 뭐 주워 먹을 게 있나 기어 올라올 게 빤하니까. 콰직-! 일단 [휘두르기]까지 써서 내 앞을 막았던 중형 스켈레톤의 두개골부터 박살 냈다. 그리고 다시 방패로 뼈다귀 새끼들을 밀어내며 길을 개척. “크흐흐흐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길을 뚫고 있자니, 왠지 자꾸 웃음이 나온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웃지라도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거 같아서. 꽈악-!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콰직-! 머리는 멍하고. “으아아아아아!” 그런 상태에서 몸은 우직하게 해왔던 일을 반복한다.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그래도 다행인 건 놈들이 아직까진 우리를 따라잡을 기미기 없다는 건가.’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지도 거진 4시간. 감지 마법을 통해 거리를 유추하는 건 몬스터들 때문에 물 건너 갔지만, 지금까지 추격대가 우리의 뒤를 따라잡는 일은 없었다. 하긴, 그 새끼들도 다치는 건 싫을 거 아니야? ‘아마 최대한 수비적으로 이동하고 있겠지.’ 반면 우리는 재가 되기 직전의 연탄처럼 온몸을 불태우며 나아가고 있다. 내가 좀 더 다쳐도, 원정대가 나아가는 게 먼저. 그런 마인드로 길을 뚫고 있는데 붙잡히면 억울하지. 비틀-! 그때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졌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피를 너무 흘렸나?’ 음, 그런 거 같다. 지금 내 몸은 난도질당한 물주머니와도 같으니. 평소였다면 몇 초 안에 딱지가 굳었을 상처들이 온몸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는 피를 쏟아낸다. 따라서······. ‘이대로면 위험할 거 같은데······.’ 나는 판단을 내렸다. 원래 생존이란 그런 것이니까. 최악을 대신해 차악을 택하는 것. “마로네, 불로 내 상처를 지져라.” “······뭐, 뭐라고요?” “아무래도 이제는 출혈을 막아야겠다.” “추, 출혈을 막겠다니 그게 무슨 해괴한······. 아니, 애초에 어떻게 그런 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내 요구를 들은 마법사는 기겁을 했다. 고통은 둘째 치고, 화상을 입은 곳이 썩어가며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던가? 색다를 것도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상처는 이미 썩어가고 있을 뿐더러······. “어차피 위에만 도착하면 싹 나을 거 아니냐.”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자칫하면, 신성력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신체에 영구적인 결손이 생길 수도 있다고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면책성 대사를 치는 마로네. 거, 사흘 동안 술 담배 말라는 의사 말 같네. 바바리안답게 한 귀로 흘려 넘겼다. “그래도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할게요. 한다고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거, 얘는 마법사인데도 기억력이 안 좋은가? 왜 이해를 못 하지? “출발하기 전에 약속했지 않나.” “······.” “가장 힘든 일은 내가 할 테니, 따라만 오라고.” “아······.” 마로네는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화염 마법을 손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끄흐흐흐흐흐······.” 나는 흐느끼듯 웃으며 되도록 긍정적인 점을 떠올렸다. 그래, 적어도 이제 춥지는 않네. ***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처절한 여정이 이어지며 나는 대원들의 또 다른 면모를 두눈으로 볼 수 있었다. 허, 그냥 개복치들인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아기 새들이었다. 조금은 터프한. “나도 불로 상처 좀 지져주겠나?” “저는 얼음 마법으로 부탁합니다. 그게 그나마 덜 아플 거 같아서.” 포션 없이 출혈을 막아낸 내 행동을 보며 미친 새끼라느니 뭐니 할 때는 언제고, 머지않아 내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한 전위들. 그중엔 나보다 더한 새끼도 있었다. “이쪽 팔은 그냥 떼어내주쇼.” 푸타 리커번의 말에 신관이 잠깐의 텀을 두고서 되물었다. “······네?” “나도 바보는 아니오. 어차피 이 정도로 썩었으면 신성력으로도 못 고칠 거 아니요? 아까부터 감각도 없고.” “저기··· 아,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시 생각해 보시는게······.” “거,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외팔이가 어디 있을까. 팔 한 짝 없는 작자들 많이 보았는데, 이 정도 사연으로 팔 하나면 남는 장사올시다.” 옆에서 듣던 바바리안조차 기가 막힐 지경인 손익 계산법. 하나 분명 그런 계산법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빙하의 눈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필드 효과 - 빙하의 눈이 해제됩니다.」 그동안 간절히 바라고 바라왔던 그 순간. 털썩-!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로 마지막 언덕을 넘은 전사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끔찍하다는 말로도 설명 못할 몰골들이었으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한 미소를 입가에 품어져 있었다. “왔다아아아······.” “씨발, 씨발, 씨발······. 진짜 왔어, 왔다고······.” “뭣들 하세요! 마법사 분들! 얼른 저주 마법을 풀어요! 당장 치료부터 해야 하니까!” 이곳까지 오며 그들의 처절한 투쟁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했던 신관들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있는 힘껏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고생했습니다. 정말로요.” “팔은··· 힘들 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신관은 전위들을 향해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쓰읍, 역시 그렇소? 됐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런 시선을 받던 전위 중 하나. 카이슬란은 그저 조심스레 신관에게 한 가지를 청했다. “이보게, 힘든 건 알지만 한 가지 부탁 좀 하고 싶은데…….” “말하시지요.” “딱 한 번 만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기도를 해주겠소?” “기도··· 말입니까?” “그래, 이곳까지 오지 못하고 죽은 그들을 위해.” “······물론입니다.” 무릎을 꿇은 채 경건하게 양손을 모은 신관들. 이에 널브러져 쉬기 바쁘던 다른 대원들도 잠시 일어나 성호를 그었다. 인간의 신을 믿지 않는 드워프도, 수인도, 요정도, 그리고 나도 동일했다. 그들처럼 성호는 가슴 위로 긋지 않을지라도. “······.” “······.” 눈을 감고 묵념하며 진심으로 기도를 올린다. 조상신이든, 수호신이든, 세계수든. 목소리를 듣는 게 그 누구든 좋으니까······. “······부디 편히 쉬소서.” 각자가 바라는 안식처로 그들을 이끌어 달라고. *** 원정대의 현 생존 인원은 스물둘. 빙하의 눈을 뚫으면서 소환사 밀번 나리아를 제하고도 두 명이 더 죽었다. 그야 살을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각오 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으니까. ‘맷 하이브리함.’ 한 명은 제4팀 소속이던 성기사였고. ‘파시블 에릭 콜슨.’ 다른 한 명은 제5팀 소속인 기사였다. 카이슬란과 10년 넘게 한 부대에서 지냈던 친구이자 수하랬던가? “카이슬란······.” “하하, 그런 표정 하지 마시오.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이니. 녀석도 너무 억울하지 만은 않을 것이오.” “···억울하지 않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적어도 당신이 있었지 않소.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걸음을 내딛지 않았소? 그건··· 결코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오.” “······.” “그는 우리를 버린 왕가가 아니라 나를···, 그리고 그대의 뒤를 따르다 죽은 것이니까.” “그런가······.” “나는 괜찮으니 그대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시오.” 짧았던 기도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해야 할 일로 돌아왔다. 신관들은 전사들의 치료를 이어가고.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바닥에 그린다. 그리고 나는······. “잠깐만요!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이 정도면 괜찮으니, 우선 다른 놈들부터 치료를 해줘라.” “뭐라는 거예요! 지금 당신이 가장 심각한데!” 뭐래, 정말 심각했으면 움직이지도 못했겠지. 신관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린 채, 원정대의 상태부터 점검했다. 지금까진 정신없이 길을 뚫느라 뒤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아쿠라바.”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내가 향한 곳은 아쿠라바가 있는 장소였다.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이제 없어요.” “싸우는 와중에도 육포는 잘 챙겨 먹었나 보군.” “······그래야 한다고 억지로 먹게끔 했던 건 바로 당신인데요?” 거, 면박을 주기는. “다들 잘 해줬다는 뜻이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지금 놈들이 어디쯤 왔을 거 같나?”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악착같이 따라오던 걸 보면 순순히 포기할 거 같진 않던데.” “그런가······.” “빙하의 눈은 제가 주시하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쉬세요. 당신이 쓰러지면 이 원정대도 끝이니까···.” “그래······.” 아쿠라바와 대화를 나눈 후로는 신관에게 마저 치료를 받은 뒤, 빙하의 눈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고생 많았어요··· 아저씨.” 조금 전까지의 지옥 같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평화. 등이 닿은 차가운 눈밭조차 포근하게 느껴진다. 다만 늘 그렇듯 달콤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얀델! 놈들이에요!” 아쿠라바의 외침과 동시에 휴식 중이던 대원들이 모두 일어나 진형대로 섰다. 피유우우우웅! 퍼어엉! 빙하의 눈 아래쪽으로 쏘아지는 조명탄. 어두운 절벽 아래 공간이 확 밝아지며 언덕길을 오르는 열두 명의 추적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놈들은 내 생각과 달리 멀쩡한 모습이었다. 스켈레톤들과 싸우면서도 조급하지 않게 대형을 유지하며 이동 중이었고. 딱히 눈에 띄는 부상도 존재치 않는다. 나름 식사도 잘 했는지 야윈 기색도 없다. 썩어문드러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가며 이곳에 도착했던 우리와 다르게.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래, 그렇게 편하게 왔으니까 이제서야 여기에 도착한 거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저쪽에서도 우리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한 가지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 뭔 생각을 하는지는 빤했다. 전위랍시고 앞에서 길을 막기는 했는데 갑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이상하게 보였겠지. 피식. 추격대의 일원으로 껴 있던 용살자놈이 동료들과 뭐라 뭐라 쑥덕이는 듯하더니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나를 보았다. 뭐, 비웃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웃긴데. ‘아직도 자기들 처지를 모르는 건가?’ 애초에 내가 왜 장비까지 버려가며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철저하게 미래를 보고서 내린 판단이었다. 여기선 장비빨보다 필드빨이 더 크니까.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빙하의 눈이 부여됩니다.」 오케이, 딱 여기서부터 필드 효과가 생기는구나. 터벅. 딱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경계선에서 멈춰 선 나는 씨익 웃으며 외쳤다. “전투 준비!!” 자, 이제 너희도 고생 좀 해봐야지. 420화 폭풍의 눈 (2) 용의 산맥. 노아르크의 병력과 왕가의 군이 길게 전선을 이루고서 힘겨루기가 한창인 그곳. “반역자! 잠시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던 반역자가 서부 전선에서 나타났다는 보고입니다!” 제3 군단장, 엘토라 테르세리온은 수하의 보고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역자라··· 알겠네, 이만 나가보게.” “예!” 수하는 반역자의 존재가 상관의 심기를 거슬렀다 여겼지만, 엘토라가 표정을 구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반역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라······.’ 엘토라는 바보가 아니다. 며칠 전, 노아르크 측의 서부 전선 병력이 북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발견됐다. 그들이 병력을 움직인 이유는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원정대를 쫓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추격을 끝마쳤다는 뜻인가?’ 엘토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 아니, 후작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군을 이끌고 미궁에 진입하기 직전, 엘토라는 부친으로부터 두 가지 밀명을 받았다. 하나는 원정대의 구조 요청을 묵살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약 자력으로 살아 돌아올 경우, 아무도 모르게 해치울 것.’ 다행이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엘토라가 두 번째 밀명을 수행할 일은 없었다. 원정대가 택한 길은 이곳과 반대였으니까. ‘정말 그들은 다 죽은 건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그들을 버리는데 일조한 것은 그 역시 동일했다. 원정대가 혹시나 살아돌아온다면 곤란해질 것 또한 그였고. 하지만······. 두근-! 어딘가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들이 죽었을까? 그 수정동굴에서도 살아 돌아온 비요른 얀델이 이렇게? “······.” 엘토라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가 원정대의 지휘관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가정했다. ‘아군이 있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도주를 한 건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겠지.’ 나쁘지 않은 수였다. 두 마리의 사자를 피했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그는 알고 피한 걸까···?’ 글쎄, 이것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알았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북쪽으로 향했다고 해서 딱히 활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원군을 기대할 수도 없는 적의 세력권. 점점 조여오는 포위망. 지쳐가는 대원. 과연 나라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아니, 내가 아니라 비요른 얀델··· 그 무식할 정도로 결단력 있는 그 사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이스록.’ 불현듯 사고가 거기까지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망을 친다면 남은 선택지는 그곳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곳으로 향했다고 해도 살아돌아오진 못하겠지.’ 그 어떤 가정을 한들, 희망적인 미래로 이어지는 선택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결코 비요른 얀델의 능력을 무시해서는 아니다. 아이스록? 빙하의 눈? 그라면 틀림없이 역경을 이겨낼 것이다. 수정동굴에서 보여준 역량을 생각하면, 고작 그런 위기에 무너지는 족이 말이 안 된다. 하나,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후작이 이걸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아이스록으로 향하는 것. 누가 봐도 파격적인 행보.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 역시 생각할 수 있는 수였다. 한데 그의 부친은 아무것도 해두지 않았을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사태를 대비하고 싶어 하는 그 인간이? ‘비요른 얀델이 살아서 돌아오는 일은······ 없다.’ 엘토라 테르세리온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두근-!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 현재 우리 대형은 간단하다. 네 명 정도가 서면 꽉 찰 너비의 좁은 샛길. “슈이츠, 정말 괜찮겠소?” “말했지 않나. 너희가 있으면 좁아서 움직일 수도 없을 거라고.” 최전선에서 적을 막아야 하는 1열은 나 혼자다. 그야 이게 내가 내린 해답이니까. 어떻게 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오.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그래, 든든하군. 믿고 있겠—.” “비요른 얀델···!!” 그때 살의가 담긴 용살자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친다. “기껏 도망친 게 여기냐!!” 기세등등한 목소리를 보니 정말 아직까지도 본인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모양. 다만 애석하게도 모두가 저놈처럼 머리가 꽃밭인 건 아니었다. “리갈 바고스, 진정하시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던 용살자의 앞으로 손을 뻗어 돌발 행동을 제지하는 한 탐험가. 까드득. 놈의 얼굴을 본 누군가가 이를 악문다. 사실 나라고 심정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저놈이 나리아 양을······.” 트롤 소환사 밀번 나리아. 그 본질이 악령이었던 아니던,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돌아가기만을 바랐던 그 여자. 그 여자를 죽인 게 바로 저놈이었다. “비요른 얀델, 맞소?” 이내 용살자를 제지한 녀석이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새끼가 실질적인 리더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 보통 권한이 없다면 저런 짓을 할 때에는 다른 이의 눈치를 볼 법도 할 텐데. 보니까 용살자 새끼도 그냥 가만히 있는 중이고. “그래, 내가 비요른 얀델이다.” 고민 끝에 대화를 받아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궁금했으니까. “그러는 너는 누구지?” 내 물음에 놈은 별 고민없이 답했다. “마누아 레펠레스.” 내 살생부에 적혀질 그 이름. “저놈은 내가 죽이겠소···.” 아니, 우리 모두의 살생부에 적힐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놈이 대화를 걸어온 순간부터, 뒤쪽에 서 있는 대원들의 눈빛에 살기가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만 경거망동하는 자는 없었다. “마누아 레펠레스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뭐, 그럴 것이오. 일단은 명색이 비밀 병기 같은 위치인지라.” 이로써 내 추측에 더욱 신빙성이 생긴다. 8층에서부터 수급이 되는 상위 정수들로 무장한 걸보고 혹시나 하긴 했는데. 진짜 이놈들은 8층 공략대 중 하나인 거 같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일단 살생부에 적을 이름도 들었겠다, 용건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놈도 서론을 길게 즐기는 타입은 아닌지 즉시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제안할 것이 있소.” “제안···?”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비밀 병기 같은 입장이라 말이오. 그대들을 모두 처단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 중 한두 명이 죽는다면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소.” “됐고, 본론만.” 내 말에 놈이 손바닥을 펼쳤다. “다섯.” “······?” “우리 체면도 있으니 딱 다섯 명만 넘겨주시오. 그럼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쯤에서 돌아가리다. 아, 물론 비요른 얀델, 당신이 아니어도 좋소.” 허허,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싶었더니······. 간혹 너무 어이가 없는 소리를 들으면 화도 나질 않는다더니, 지금 딱 내 상태가 그랬다.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오? 딱 다섯 명만 주면 당신들 모두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데.” “글쎄,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제안 같군. 너희 중 다섯 명만 모가지를 내밀면 살려서 돌려보내주마. 아, 물론 너랑 리갈 바고스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벌주를 택하는구려.” 뭐래, 병신 새끼가. 술은 아무리 써도 술이고, 독은 아무리 달아도 독인 것을.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 없소.” “후회는 너희 엄마가 하는 게 후회고.” “······뭐?” 입이 거친 노아르크에서도 이런 말은 별로 듣지 못해봤는지 흠칫하는 녀석. 하하호호 웃을 관계는 아니기에 그냥 노빠구로 말을 이었다. 조명탄 빛으로 붉게 그을린 놈의 민머리를 보며. “아마 너희 엄마도 몰랐을 거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적을 앞에 두고 혓바닥만 놀리는 겁쟁이일 거라고는.” “······.” “혹시 우리가 무서워서 지린 건 아니겠지? 지금 너희한테 썩은 내가 너무 많이 나서 분간이 잘 안되는데.” “······.” “왜 말이 없지? 아, 혹시 엄마가 없어서—.” “이놈이······!” “저런, 정말 없었나 보군. 그렇게 흥분한 걸 보니. 너무 열 내지마라. 나는 이해한다. 네가 겁쟁이로 자란 건 분명 어렸을 때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런 거겠지.” “······.” “머리 털이 다 빠진 것도 전부 그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 “······죽여버리겠다!!” 아우, 왜 자꾸 말을 끊는 거야? 이제 보니 무모한 것만 아니라 무례하기까지 하네. 왠지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그도 그럴 게, 세상은 늘 그래왔다. “응, 안 죽어.” “······이익!”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거다. ***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뱉은 도발성 멘트에 낚여 자리를 박차는 빡빡이 레펠레스. “레펠레스! 원래 저런 놈이니까 흥분하지 마라! 간교에 넘어가 봤자 저놈만 좋은 일을 할 뿐······.” 놀랍게도 그런 놈을 향해 용살자가 제지의 말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피식. 그게 통하겠냐고. 피가 쏠린 민머리가 벌써 빨갛게 달아올랐을 정도인데. 타닷. 이내 놈이 주먹을 쥔 채 네게 달려온다. 놈의 클래스는 권투사. 미궁에서는 흔치 않은 직업군이다. 저층에서야 나름 쓸만하지만, 중반부에서 쓸만한 코어 정수가 없는 클래스거든. 뭐, 후반부에는 좋은 스킬들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지금 쓴 이거라든가. 「마누아 레펠레스가 [철권]를 시전했습니다.」 8층 균열에서 획득이 가능한 [철권]. 효과는 간단하다. 번뜩-! 순간이동에 가까운 약 4m 정도의 대시. 그리고······. 콰아아아앙-! 물리법칙을 무시한 무조건적인 넉백. 그리고······. 「시전자의 근력 수치 및 대상의 물리 내성 수치에 비례해 고정 대미지를 입습니다.」 단단할 수록 더 아프게 들어오는 트루 대미지. 지난 번 전투에서는 이 스킬 때문에 모든 게 망했다. 몇 방 처맞기 무섭게 마나실드가 깨져나갔고, 뒤로 밀려나며 전열이 무너졌다. 그런 와중에 방어보다 회피를 택하다보니 탱커의 주목표 중 하나인 적의 홀딩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하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큭.”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 마나실드가 없기에 그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로이타 매맨더가 [긴급 재생]을 시전했습니다.」 처 맞은 즉시 들어오는 힐. 「벤자민 오르먼이 [월광성지]를 시전했습니다.」 자연 재생력을 증가시켜주는 장판도 놈들과 우리 사이에 깔린다. 스윽. 나는 내 복부에 꽂힌 놈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고성에 귀가 아픈지 움찔하는 놈. 이어서 망치를 내리치자 놈이 뒤로 물러선다. 다시 거리를 벌린 뒤에 [철권]을 쓰려는 거다. 저 스킬은 다 좋고, 재사용 대기 시간도 없지만 반드시 일정 거리를 돌진해야만 사용을 할 수 있으니까. ‘거, 누가 그냥 둘 줄 알고?’ 나는 즉시 [초월]과 [폭풍의 눈]을 연계했다. 그때는 전열이 무너지며 수많은 적이 나를 넘어 지나쳐가는 와중이었기에 할 수 없었던 대응법. 솨아아아아아아아-! “······!” 당황한 표정으로 빨려드는 놈을 향해, 타이밍에 맞춰 망치를 휘둘렀다. 다만 아쉽게도 큰 재미는 못 봤다. 그야 이놈도 일단 탱커 포지션이니까. 「마누아 레펠레스가 [불괴]를 시전했습니다.」 머리 위로 교차한 손으로 망치를 방어하는 놈. 그 짧은 수교환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 있던 놈들도 합세해서 달려들기 시작한다. 「리키 에이몬드가 [천둥의 표적]을 시전했습니다.」 「케일 엘바드 제네거가 [땅끝가시]를 시전했습니다.」 나를 향해 쏘아지는 이능. 몇몇 스킬들이 물리 내성을 무시하고 내 몸에 파고들었지만, 집중된 신관들의 치유로 인해 금방 회복이 됐다. 「앤 파르벨라가 [번개질주]를 시전했습니다.」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가는 근접 탐험가. 그리고······. 「앤 파르벨라가 [집결]을 시전했습니다.」 일정 거리 내의 동료 두 명을 순간이동 시키는 스킬의 연계. 「푸르안 컬린이 [강신]을 시전했습니다.」 「마리오네 트리더가 [격변의 춤]을 시전했습니다.」 저러니까 무슨 강습 부대라도 된 거 같네. 하긴, 이쪽으로 넘어오면 최소한 필드 효과는 해제가 되니까. 적군의 한복판이어도 이쪽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지. ‘어지간히 우리를 얕보고 있었나 보네.’ 아무리 개인 기량이 좀 더 낫다고 해도 그렇지, 셋 만으로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건가? “이쪽은 걱정 마시오! 절대 여기서 더 보내지는 않겠소!” 강습 부대는 동료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설령 뒤에서 칼을 쑤셔박는다 해도 치유 장판 위에서는 절대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나를 노릴 틈을 줄 거 같지도 않지만. “죽여라! 복수의 칼을 뽑아들 때다!” “지난번처럼 무력하게 당할 것 같냐!” “와아아아아아!!” 그렇게 시작된 난전. 빡빡이를 비롯해 경계선 너머의 적들은 나를 뚫기 위해 달려들었고, 경계선을 넘어온 세 명의 서로가 등을 맡기며 어떻게든 전선을 무너뜨리려 무기를 휘둘렀다. 솨아아아아-! 안전한 언덕 위에 위치한 신관들은 무차별적으로 신성 주문을 뿌리며 딜과 힐을 동시에 했다. “신관! 신관부터 처리해라!” 이에 어떻게든 놈들도 신관을 먼저 노리려고 각종 스킬들을 쏟아부었으나······. 솨아아아아-! 신관과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언덕 위까진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소멸했다. 그야 올라오자마자 열심히 그렸던 마법진이 바로 이거거든. 신관만 지키면 이 싸움은 질 수가 없으니까. “결계 마법···!” 투사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놈들도 다른 방법을 짜내기 시작했다. 「마이크 로이머스가 [점액걸음]을 시전했습니다.」 「리아 앤데스가 [화염유영]을 시전했습니다.」 이능을 사용해 직접 절벽 위로 오르려 하는 놈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고속연사]를 시전했습니다.」 당연히 우리 팀 원거리 부대에 의해 저지 당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전투는 내 예상대로 우리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흘러갔다. 기세 좋게 넘어온 세 명은 수적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었고, 나는 철벽처럼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채 남은 놈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견제를 이어갔다. “제기랄···!” “저 괴물 같은 놈은 왜 지치질 않는 거야!” “죽여! 어떻게든 죽이라고오오!!” 상황이 불리해질수록 놈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매우 간단한 이유다. 다들 부상을 입었으니까. 여기서 물러나면 다음 기회는 없다고 판단을 한 거다. “다들 몸 사리지 마!” “얼마나 다치든 이번 전투만 이기면 끝이다!” 부상이 쌓일수록 더욱 더 거세지는 공격. 이는 내 앞에서 빡빡이와 합을 맞추며 내게 검을 휘두르는 용살자놈도 마찬가지였다. “야, 하나만 묻자.” “······?”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대체 언제 오는 거냐? 죽음조차 날 구원할 수 없는 순간은?” “······까드득.” 한참이나 내게 칼을 쑤셔 박다가 현자 타임이 찾아왔는지, 뒤로 물러나 나를 째려보는 녀석. “그래, 네놈은 언제나 내게 희생을 강요했지.” 그리 읊조린 놈이 놈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필살기를 꺼냈다. 「리갈 바고스가 [용언: 영혼의 침묵]을 시전했습니다.」 오, 그래 드디어 쓰는구나 이거.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순식간에 작아지는 몸.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망치와 방패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캐릭터가 영혼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70% 감소합니다.」 라르카즈의 미로에서도 겪었던 그 상태. 이야, 그립네. 그때는 진짜 이거 한 방에 다 끝났구나 싶었—. “커허헉! 케허헉! 크어어어억···!” 뭐야, 이 새끼. 갑자기 피는 왜 토해. 아, 방금 용언을 쓴 게 몸에 부담이 된 건가? 이거야 원, 무슨 독침 한 번 쏘면 죽는 꿀벌도 아니고. “리갈 바고스! 괜찮소?” “난 괜찮으니··· 놈을 죽여라···. 크흐흐흐흐···.” 잘은 알 수 없지만, 비틀거리면서도 나를 향해 증오의 시선을 쏘아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왠지 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영혼탈진 상태가 해제됩니다.」 그래봤자, 스킬 한 번이면 풀리는데······. 421화 폭풍의 눈 (3) 용언: 영혼의 침묵. 범위 내 모든 캐릭터의 MP를 태워 ‘영혼탈진’에 이르게 만드는 씹사기 스킬. 그러나 이것에도 약점은 있다. 예전에 용인족 할배에게 들은 약점으로, 우선 최대 MP의 50%까지 밖에 태우지 못한다던가? 쉽게 말해, 그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면 MP가 0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영혼 탈진’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지금까지 아끼고 있던 거겠지.’ 빙하의 눈을 벗어나고서 신관에게 치유를 받아 몸은 회복이 되었으나, MP는 다른 이야기. 이미 MP는 절반을 웃돌고 있었고, 그 와중에 이놈들과 싸우며 [거대화]를 쓰고, [휘두르기]를 남발하는 등 상당량의 MP를 소모했다. 그래서였다. 일부러 이놈을 도발했던 것도.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대체 언제 오는 거냐? 죽음조차 날 구원할 수 없는 순간은?] [······까드득.] 이대로면 MP가 바닥난다. 물론 [영혼잠수]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쿨타임이 존재하는 스킬. 한 번 써버리면 이후 용언을 카운터 칠 방법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용언을 빨리 쓰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커허헉! 케허헉! 크어어어억···!” 용살자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음, 라르카즈의 미로에서도 용언을 쓸 때마다 힘들어하긴 했던 거 같기는 한데. 설마 이렇게까지 꿀벌화가 됐을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소득. 「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반면 적의 필살기도 빼고 부족해지던 MP도 회복한 내게 거릴 것은 없었다. “어, 어떻게···?” 사진으로 찍어 영구 소장하고 싶은 저 표정은 덤이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기운이 온몸에서 솟구치는 듯한 기분. 「마누아 레펠레스가 [철권]을 시전했습니다.」 이어진 빡빡이의 정권 찌르기는 웃으면서 받아냈다. 음, 역시 얘네는 용언에 적용이 안 됐구나. ‘하긴, 용언을 쓸 생각을 했으면 주변에 있을 애들이랑은 미리 결속을 맺어뒀겠지.’ 빡빡이를 비롯해 노아르크 측 전위들은 영혼의 침묵에 노출되지 않았다. 후위 라인은 용언의 범위 바깥에 있는 듯했고. ‘다행히 우리 팀도 반경에선 빗겨갔나 보네.’ 내가 원정대의 전열을 뒤로 보내둔 이유도 사실 이거였다. 강습 부대를 막는 2차 저지선 역할도 역할이지만, 어떻게든 용언에 당하는 것 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무리하게 안에 들어가서 용언을 쓰지 않은 건, 나만 처리하면 모두 끝이라 판단한 거겠지. 아마 우리 진영에서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목숨이 위험하단 계산도 있었을 테고.’ 그리 생각하니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네놈은 언제나 내게 희생을 강요했지.] 이딴 게 희생? 팔을 자르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어깨뼈까지 전부 도려낼 각오를 했어야 하는 게 옳다. 한데 그럼에도 이렇게 안일하게 패를 던지다니. 정말로 희생하길 마음먹었더라면, 우리에게도 몹시 위협적인 변수가 되었을 텐데. ‘잘 된 일이야. 하지만······.” 안도의 감정이 이는 한편으로 억울하다. 아니, 정확히는 허무하다. ‘고작···. 고작 이딴 놈에게 드왈키가······.’ 오르큘리스의 간부? 태고룡을 죽인 거물이자, 악명 높은 범죄자? 그래봤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까짓 놈보다는 그 녀석 쪽이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그랩기를 이용해 용살자 놈을 잡아당긴다. 세차게 불어오는 돌풍에 피를 토하며 힘없이 끌어당겨지는 놈. 콰직-! 망치를 내려친 즉시, 놈의 왼쪽 어깨가 박살난다. “아아악···!” ‘쩝, 머리를 노린 거 였는데. 거기서 몸을 비트네.’ 뭐,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용살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든 빡빡이를 막아낸다. 아니, 놈 뿐만이 아니다. 「마이크 로이머스가 [땅고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일정 반경 내에서 입는 아군의 피해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남은 절반을 대신 입습니다.」 탱커에 가까운 둔기 전사. 「리아 앤데스가 [불의 파동]을 시전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화염 피해가 크게 증가하며, 피해 대상과 근접할수록 추가 효과를 획득합니다.」 흔치 않은 근접계 이능술사. 이 셋은 평소에 합을 많이 맞춰봤는지, 오히려 용살자 놈이 빠지자 더욱더 긴밀하게 움직이며 나를 귀찮게 해왔다. 「케일 엘바드 제네거가 [땅끝가시]를 시전했습니다.」 중간중간에 후위에서 날아온 원거리 공격은 덤. 방어구도 없는지라 놈들의 공격은 내 몸을 꿰뚫고 베어냈다. 하지만······. 「로이타 매맨더가 [상급 치유]를 시전했습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상급 치유]를 시전했습니다.」 신관들의 버프를 덕지덕지 처바른 것도 모자라, 집중 케어까지 받고 있는 나를 밀어내기엔 역부족. 「켈버스 아이른이 4등급 흑마법 [악의 표식]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모든 재생 효과가 감소합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정화의 달빛]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에게 가해진 모든 부정적인 효과가 제거됩니다.」 흑마법사도 집요하게 저주 마법을 뿌려댔지만, 원래 이런 건 거는 쪽보다 푸는 쪽이 쉬워서 말이지. “무리하지 말고 막기만 해라!” 더 적극적으로 나가면 하나둘은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수성 태세를 유지했다. 본래 디펜스 게임이란 그런 거잖아? 뚫리지만 않으면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형식의 게임.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이놈들은 못 도망쳐.’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쳐도 상관없다. 놈들의 퇴로는 막혔으니까. 뒤에는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보스 몬스터까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올라오는 상황.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내 뒤로 넘어갔다가 실컷 두들겨 맞은 세 명은 빙하의 눈으로 돌아가는 순간 며칠도 못 가서 온몸이 썩어문드러질 게 분명하다. 그런 와중에 8층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보니까 식량도 이제 없어 보이는 와중에? “제기랄, 어디서 이런 놈이···!” 겁도 없이 나에게 힘겨루기를 시작했다가, 발길질 한 방에 나가떨어진 둔기 전사가 허망한 표정을 내짓는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우리를 막을 놈은 없는 것 아니었냐고!” 아, 8층에서 왕가 몰래 성장하며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뭐, 완전히 그릇된 희망은 아니라고 본다. 8층에는 하나하나가 코어 정수가 될만큼 가치 있는 정수들이 널리고 깔렸으니까. 근데······. ‘그럴 거면 조합이라도 제대로 맞춰오든가.’ 방패 바바만 해도 핵심은 [거대화]다. 오크 히어로를 사냥시 얻을 수 있는 5등급 정수이며, [합일]과 연계가 되는 순간부터 말도 안 되는 효율을 낸다. 무작정 상위 정수로 떡칠한다고 능사가 아닌 것. “레펠레스! 이, 일단 물러납시다!” 암만 덤벼들어도 끄떡없는 내 모습에 전의를 상실했을까. 둔기 전사 놈이 퇴각 요청을 해왔지만, 빡빡이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오!” “그래도 우선은 잠시 정비를 해야···!” “허튼소리 말고 어서 싸우시오!” 놈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잠시 재정비를 하려 물러나면, 그다음에는 더 힘든 전투를 겪어야 한다는 걸. 결국 놈들의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다. “이놈만, 이놈만 죽이면 된다!” “나머지는 별거 아니야!” 우리를 뚫고 위로 나아가는 것.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물론 보내줄 생각은 없다. *** 전투가 이어진다. 그리고 한 번 기울어진 추가 반대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더 이상은 무리에요!” 일종의 강습 부대. 나를 지나쳐 본대를 노리던 두 명의 탐험가가 다시금 나를 지나쳐 아군에게 합류했다. “컬린은···?” “보면 몰라요? 죽었다고요!” 셋이서 등을 맡대고 결사 항전을 해나갔지만, 한 명이 사망하자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친 것. ‘좋아, 그럼 이제 11명인가.’ 적의 숫자가 줄었다. 반면 우리 쪽에는 사망자가 없다. 내게 힐이 집중되며 부상을 입은 대원은 있어도, 그조차 거의 다 경상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관건이겠군.’ 방심하기는커녕 더욱더 경계심을 끌어올린다. 그야 이것으로 놈들도 확실히 깨달았을 테니까. 이대로 간다면 정말 모두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줄이야.” 사람이란, 계산적인 동물이다. 그렇기에 생존의 갈림길에 섰을 때, 그들은 결국 포기하는 것을 택한다. 생존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을. ‘적으로 만났을 때 가장 무서운 상태지.’ 보스 몬스터로 치자면 ‘광폭화’ 패턴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태. 「캐릭터의 영혼력이 부족합니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때마침 MP가 바닥나며 몸이 줄어든다. “얀델, 너는 잠시 뒤로 가서 쉬고 있어라.” 그 즉시 아멜리아가 내 오른편으로 붙었다. “맞아요. 이곳은 우리가 맡고 있을 테니까.” 왼편으로는 라비옌이. “그대 자리는 우리가 맡으리라.” 이내 뒤에서 준과 카이슬란도 걸어 나왔다. 그래, 카이슬란은 몰라도 준 정도면 메인 탱커 자리를 맡아줄 수 있겠지. MP가 바닥난 상태로 오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동료를 믿는 쪽이 효율적이라 판단한 나는 신속히 1열에서 물러나 2열로 이동했다. 혹시 뭔가 변수가 생기면 즉시 달려나갈 생각이었다. “저 괴물놈이 물러났다!” “지금, 지금이 기회야!” 눈엣가시 같았을 내가 빠지자마자 전의를 회복하며 달려드는 노아르크 놈들. 다만, 그 전의가 꺾이는 것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준 아르셴이 [신성개방]을 시전했습니다.」 준 얘도 스킬을 다 쓰면 나 못지않은 괴물 탱커로 변하는데다가······. 카이슬란, 라비옌, 아멜리아. 후우우우웅-! 얘네들한테는 잘못 베이면 진짜 죽거든. “······읏!” “조심해라!”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 그냥 처맞는 게 아니라 날카로운 반격이 빈틈을 노리고서 날아들자, 저쪽도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레펠레스, 리키 에이몬드가 당했다!” 머지않아 추가 득점이 이어졌다. 에르웬, 아쿠라바 등으로 형성된 포격 라인이 마침내 힘겨루기에서 승리하며 적들의 원거리 딜러 중 한 명을 처치한 것. 이는 몹시나 고무적이었다. 「상태이상 [불멸의 속삭임]이 발동됩니다.」 앞서 우리 쪽에서 사망한 녀석과 달리, 빙하의 눈 필드 효과가 발동하며 언데드로 몸을 일으킨 것인데……. “어, 얼른 밀어내! 아래로 떨어뜨리라—.” “으아아아악!” 리치로 변한 적의 이능술사는 무차별적으로 아군들에게 스킬을 난사하다가 제압된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대응을 잘한 덕에 아쉽게도 추가 득점은 얻어낼 수 없었지만······. ‘남은 원거리는 흑마법사 둘, 이능술사 하나, 카루이 사제 하나······.’ 이후로도 격렬한 전투가 펼쳐진다. 카이슬란이 크게 다치며 뒤로 물러났지만, 즉시 2열에서 대기 중이던 탱커 한 명이 투입되어 길을 막았다. “후우, 후우, 후우······.” 스벤 파라브. 긴장한 듯 숨을 내뱉는 모습이 어딘가 못 미덥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성기사이니까. 나와 준을 제외하면 유일한 메인 탱커 라인이다. 아, 참고로 근접 딜러의 교체도 한 번 있었다. “에밀리, 돌아와라!” “······.” MP가 바닥난 아멜리아가 2열로 물러나고, 제3 팀의 전사인 릭 저거스타가 투입. 우리는 좁은 길목에서 수적 우세를 통해 점할 수 있는 모든 이점을 활용해 적을 상대했다. 그러나······. 푸우우우욱-! 그럼에도 희생은 나왔다. 상체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흑색의 가시. 데드우드에서의 전투를 하던 때, 탱커 포지션인 마이트 밀리언을 즉사시켰던 바로 그것. 까드득···. 그것에 교체된지 얼마 안 된 릭 저거스타가 사망했다. 필드 경계선 바깥에 있던 상태가 아니었기에 [불멸의 속삭임]이 발동하지는 않았지만······. “아, 안 돼! 릭···!” 그래, 얘가··· 제임스 칼라의 친구였었지. “푸타 리커번! 뭐하는 거냐! 얼른 막아라!” 서둘러 2팀의 길잡이이자 근딜인 대원을 빈 자리로 보냈다. 팔 한 짝이 없다고 뒤에서 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본인도 싸울 수 있다고 했었고. “릭…!!” 여하튼, 푸타 리커번이 빈 전선을 채움과 동시에 후열에 있던 제임스 칼라가 뛰쳐나와 주검이 된 친우의 몸을 끌어안았다. 다만, 나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칼라, 네 위치로 돌아가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위로의 말일지 모르지만, 필요한 것과 해야 하는 건 다른 법. 다행히 제임스 칼라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예······.”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서 친우의 사체를 업어들고서 후열로 이동하는 제임스 칼라.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발을 뻗는 그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돌려 전장을 보았다. 서걱-! 희생은 있었으나, 때마침 또 한 번의 추가 득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펠레스! 마, 마이크가 당했소!” 탱커 포지션이던 둔기 전사를 해치웠다. 잡아낸 것은 라비옌. 다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신관의 힐이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회복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터. 「상태이상 [불멸의 속삭임]이 발동됩니다.」 이번에도 필드 효과가 작동하며 언데드로 변한 적군. 다만, 이번엔 별로 재미를 못 봤다. “뭐해, 다들 물러나시오!” 우리에게 어그로를 넘기고서 전선을 뒤로 물리는 놈. 그 탓에 우리는 잡은 놈을 한 번 더 고생해서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10명···. 아니, 용살자 놈은 전투 불능 상태이니 9명인가······.’ 착실하게 줄어드는 적의 숫자. 점점 더 승리가 가까워진다. 우리 쪽 원거리 딜러 라인에서 MP가 바닥난 대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처럼, 저쪽도 온갖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저, 저주 마법! 얼른 저주 마법을 걸어!” 재생력을 줄이던 흑마법사의 저주 마법이 해제되며 놈들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신관을 견제하던 흑마법사의 마력량이 기어코 바닥이 난 것인데······. ‘좋아, 이대로만 가면 돼.’ 성기사 준의 도핑이 끝나며 탱킹력이 떨어짐을 확인한 즉시, 나는 전선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갔다. “······제기랄, 벌써 회복이 된 건가!” 아직 MP가 충분히 채워지려면 멀었지만, [거대화]만 유지하는 건 충분하니까. 곧 [영혼 잠수]도 쿨타임이 돌 테고. ‘무엇보다 저주 마법이 끝난 이상, 이제 더 이상 딜을 넣을 필요도 없지.’ 겨우겨우 막고 있던 둑이 터진 것과 비슷하다. 앞으로는 그냥 앞을 꾹 막고서 빙하의 눈 필드 효과만 놈들에게 적용시켜도 알아서 무너질 터. “밀어내! 밀어내라고!” 이를 아는 놈들도 전선을 필드 바깥으로 이동시키려 온갖 애를 써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신관들의 신성력이 바닥난 듯하오!”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주던 힐이 끝난 것도 이젠 크게 상관없었다. 이 새끼들도 힘이 다 빠졌거든. 빠르게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한 팔과 다리로 어떻게든 무기를 휘둘러대지만 그게 전부. 그런 일념으로 방패를 쥐고 버티던 때였다. 두근-! 절망이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던가. “아아아아악!” 돌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들려선 안 될, 우리들의 뒤편에서. “야, 얀델!!” 적을 막느라 뒤를 돌아볼 수 없는 나를 대신해서 카이슬란이 다급하게 외쳤다. “···적이오! 새로운 적이 나타났소!” 변수가 발생했다. 422화 폭풍의 눈 (4) 뒤에서 동료의 외침이 들려온 순간. “···적이오! 새로운 적이 나타났소!” 픽하고 전구가 나가듯 머리가 멍해진다. ‘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려온 외침이었으나, 납득 자체는 생각보다 빨랐다. ‘새로운… 적이라고……?’ 필시 농담으로 꺼낸 외침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잘못 알고서 생겨난 보고도 아닐 테고. 그러니까… 저 보고는 어떠한 착오도 없는 진실. 꽈아악.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또한 동시에 나도 모르게 사태의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런 개같은 일이 벌어진 거지? 우리 중에는 한스도 없는데? 설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한스가 있나? 우리가 아니라 저기 추격대 쪽에? 사고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짜악-! 나는 양손으로 뺨을 후려쳤다. 너무 세게 치면 위험하니, 딱 정신이 들 정도의 강도로. ‘이한수, 지랄 말자.’ 일종의 회피 심리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한스를 찾는 것은. ‘그냥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야.’ 실제로 라르카즈 미로에서는 어땠던가. 우연히 용살자와 조우해 그 개고생을 하고서, 소중한 동료까지 잃어야 했을 때. 그때는 한스가 있었던가? 심연의 군주가 출현한 1층 수정동굴에서는? 천 명에 가까운 인원 중에 한스가 한 명도 없는 기적이 있었지만, 어디 일이 술술 풀리던가? 돌이켜 보면 그랬다. 정말 좆 같은 일을 겪을 때는 한스가 없었다. 마치 하늘이 내게 책임을 돌릴 구멍을 결코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럼 한스는 사실 행운의 존재였던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글쎄. 그건 또 아니긴 한 거 같단 말이지. 그래도 실없는 생각을 한 덕분에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피식. 한스든 뭐든 어쩌란 말인가. 나는 단지 내 할 일만을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 구조될 거란 희망을 버렸다. 식량을 버렸고, 장비도 버렸다. 그렇게 도망쳤음에도 따라잡혀 죽어가는 동료를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생존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포기하고, 또 포기하는 것.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 “얀델! 얼른 뭔가 지시라도 내려주시오!” 자, 그럼 이제는 또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빌어먹게도, 그 해답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준, 이곳은 잠시 맡기겠다.” 서둘러 바톤 터치를 하고서 후방으로 향했다. 등을 돌리기 무섭게 뒤편에서 원거리 부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뒤에서는 적들이 따라붙는 중이었고. “아저씨···!” “에르웬!” “열댓 명쯤이에요! 기사 같진 않은데 오러를 써요! 지금 게로드 씨가 혼자 막고 있는 중이고요!” 벤티스 게로드. 제3팀에 속한 이능술사. 웃는 인상에 쓸데없이 긍정적이라 다들 핀잔을 주면서도 좋아했던 사내. “알려줘서 고맙다. 어서 아쿠라바를 따라 본대에 합류해 있어라.” “···조심하세요!” 이후 에르웬과 스치듯 지나쳐 후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뜨거운 피를 흩뿌리고 있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며 김을 뿌려대는 혈액. ‘그래··· 또 한 명이 더 죽은 거구나.’ 아마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야 했겠지. 두근-. 순간 심장이 꽉 조여오지만, 이 냉혹한 현실은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스윽. 고개를 들어 정면부를 응시한다. 게로드의 사체 위로 열댓 명의 적이 보인다. 보자마자 예전에 노아르크에서 오르큘리스의 단장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인간 여성.] [단검에 특화된 듯한 송곳 형태의 붉은 오러.] [모두 장미기사단의 특징이지.] 장미기사단. 암살, 잠입, 공작 등 특수 임무를 도맡는 왕가 직속 특수부대. 그래, 얘네도 결국 만나는 날이 오는구나. 뚝, 뚝, 뚝, 뚝—. 핏방울이 떨어지는 단검을 쥔 여자가 가만히 멈춰선 채로 나를 응시한다. 첫 만남 때의 아멜리아와 비슷했다.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눈빛. 그리고······.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군.” 삭막하단 표현도 부족할 무미건조한 목소리. “정보에 따르면 최소 2급 이상의 도검 방어 능력을 지닌 자다. 평가 무력은 우리 개개인보다 두 단계 더 높으니 신중하게 상대하도록.” 여자의 사무적인 브리핑이 끝난 즉시, 그들은 언제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적을 보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지만, 진심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놈이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건 두렵지 않지만, 이쪽은 그런 게 아니잖아? 오직 살인을 목적으로 훈련된 전문가. 두근-! 아직 무기 한 번 맞대지 않았음에도, 전사의 심장이 힘든 전투를 직감하며 고동한다. 하지만······. 꽈악-. 그래서 어쩌라고? “후작이 보냈나?” 언제든 즉각적으로 대응할 태세를 유지한 채 물었으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 거, 눈깔 한 번 살벌하기는. 죽일 놈이랑 대화는 안 한다 그런 건가? 철저하게 프로 같은 모습에 옅은 기대마저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거 하나만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서 기다리던 거지?” “······.” “응? 말해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하나는 도저히 설명이 안 돼서 말이지.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나?” 농담스러운 어조의 말에도 여자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의 집요한 요청으로 만일을 대비해 대기를 했을 뿐, 정보부도 너희가 정말 여기까지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했었다.” “희박하다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그 힘든 여정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적의 세력권 한복판에서 아군에게 버림받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력으로 활로를 찾아 이곳까지 도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며칠 전에 처음 만나 급조된 원정대가. 희박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것이다. “······왜 웃지?” “그냥 너희들은 못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도 그럴 게, 그 희박한 가능성조차 차단하기 위해 이런 전력을 대기시켜두는 게 말이나 되나? 거대한 벽이 사방에서 조여오는 듯하다. 어디를 향하든 출구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 “그렇다면 대화는 실패군.” 그때 여자가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실패?” “마음이 꺾인 자는 그런 눈빛을 짓지 않으니까.” 뭐야, 그럼 답변에 응해줬던 것도 사실은 내가 좌절했으면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거 참 이상하군. 나는 지금 충분히 절망하고 있었는데.” “그럼 이대로 죽을 생각인가?” “아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그래, 간혹 당신 같은 자들이 있지. 결코 죽음을 도피처로 삼지 않는······.” 내 대답에 여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아주 미미하지만, 어딘가 조금 안타까워 하는 것 같다 해야 하나? 물론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옳게 봤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대화 시간은 이제 끝인 거 같군.” 나는 말했고. “······.”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이다. “베헬—라아아아아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 오러 대비용 정수, 볼-헤르찬. 이것 덕분에 나는 기사들의 악몽 같은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적이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던전앤스톤]에 그딴 건 없으니까. 서걱, 서걱, 푸욱-! 두부처럼 썰리지만 않을 뿐이지, 단검이 몸에 맞닿을 때마다 작은 부상이 겹겹이 쌓여간다. 신관의 신성력은 진작에 바닥났기에 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캐릭터가 왕실 혼합독에 중독 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육체 수치가 700 이상입니다.」 「독 내성 수치가 100 이상입니다.」 「중독 효과가 70% 감소합니다.」 칼에 뭘 잔뜩 묻혀놨는지, 상처 부위가 저릿하며 저릿한 감각이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심지어 상처 악화 계열도 있는지 자연 재생조차 막혔다. 그렇게 꾸준하게 늘어가는 부상. 후우우우우웅-! 날파리를 내쫓듯 망치를 휘두르지만, 이번에도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다. 벽을 타고,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물리 법칙을 무시한 제동 능력으로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는 등. 내 공격은 전부 다 피해대면서도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단검으로 몸을 썰어댄다. 물론 부상들 하나하나는 크지 않지만······. 서걱, 서걱-.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느릿하던 몸이 더욱더 둔화되며 상처를 입는 횟수가 늘어난다. 아마 지형이 좀 더 넓어 열댓 명이 사방에서 덤벼든 거였다면 진작에 넝마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겠지. “···윽!” 비틀거리며 앞으로 기우는 몸. 그 즉시 목을 향해 단검이 휘둘러진다. ‘그래, 지금!’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발에 힘을 불어넣으며 망치를 올려쳤다. 하지만······. ‘아오, 이제 좀 맞아라!’ 이런 씹, 이것도 안 통해? 무슨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상대하는 거 같다. 게임 뭐 같이 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일단 쿨타임이 돈 [영혼 잠수]부터 바로 사용해 바닥을 향해 달려가던 MP부터 회복했다. 그리고 딱 그 시점에. “저희도 도울게요!” 원군이 도착했다. 노아르크 놈들과의 전선을 지키고 있어야 했을 라비옌과 아멜리아였다. “앞은? 앞은 어떻게 됐지?” 내 질문에 아멜리아가 답했다. “놈들은 빙하의 눈 경계선 바깥으로 나오고서 지금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 회복 중이라는 거구나. 우리가 얘네랑 싸우면서 전력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하긴, 뭔 상황인지 몰라도 장미기사단이 본인들 아군이란 확신이 없으니 현명한 판단이다. ‘니미럴, 왜 하필 가운데 껴가지고.’ 나는 방패를 들어 상체를 보호했다. 쿵-! 철벽에 가로막힌 듯 튕겨져 나가는 단검. 다만 시간이 지나도 평소처럼 하체에서 통증이 일지 않는다. 원래라면 기다렸다는 듯 아래를 쑤셔댔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애매하게 거리를 벌린 장미기사단을 보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얘들 덕분이구나.’ 양 옆에 선 아멜리아와 라비옌을 경계하느라 이전처럼 마음 놓고 쑤셔댈 수가 없던 것. 그래, 민캐는 민캐가 상대하는 게 국룰이지. ‘후, 그래도 이제 좀 여유가 생기네.’ 나는 후방의 아쿠라바에게도 들리도록 소리쳤다. 그야 나는 탱커이자 원정대의 지휘관이잖아? 두 가지 역할을 한 번에 해내야 한다. “아쿠라바, 할 수 있으면 노아르크 놈들과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라고 해라!” 이제 막타 치는 것만 남았던 노아르크 놈들에게 시간을 주는 건 가슴 아프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 ‘응?’ 근데 이건 뭐지? 쩌렁쩌렁 소리를 쳤는데도 장미기사단 측에서 별 반응이 없다. 그냥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한 표정. “에밀리, 지금 음성 제어 마법이 작동 중인 거냐?” “아, 내려온 마법사들이 써주었나 보군.” “······내려와?”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라비옌이 내 어깨를 노리던 단검을 대신 쳐내며 답했다. “뒤쪽에서 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부유 마법을 써서 다같이 이쪽으로 도망쳤어요.” “도망? 설마··· 위에도 적이 있던 건가?” “네. 기습으로 로이타 매맨더 신관이 죽었어요.” “그렇군······.” 어찌 된 게 안 좋은 뉴스 밖에 나오지가 않네. 저기 열댓 명이 적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도 모자라, 신관까지 한 명이 죽다니······. ‘이제 19명인가······.’ 30명에서 시작된 원정대가 벌써 이만큼 줄었다. 설령 살아서 돌아가는데 성공한다 쳐도, 그 인원은 절반도 채 안 되겠지. 꽈악-. 참아왔던 울분이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계속해서 포기하고 또 포기하였다. 황금빛 미래를 그리고 내려놓은 것도 아니다. 개똥밭을 구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미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다. 한데, 왜 불합리한 상황은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 당장에라도 신을 욕하고 탓하며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으아아아아아아아!!!” 달아오른 숨결을 한바탕 털어내며. 머릿속을 덮히는 열기마저 억지로 덜어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분노가 아닐 테니까. 적어도 이 순간, 나만큼은 그래선 안 될 테니까. “······아쿠라바!” “네, 말씀하세요!” “이쪽은 돕지 않아도 좋으니, 다 같이 최대한 몸을 회복해라. 곧 크게 힘을 쓸 일이 있을 테니까.” 기회는 오직 단 한 번뿐이다. ***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거나. 내 말을 따랐다간 전부 죽을 거라거나.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알겠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아쿠라바는 곧장 내 지시를 수행했으며, 이는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 지난 원정 동안에 리더로 나름 인정을 받은 건가? 그렇다면 어딘가 좀 뿌듯하긴 하네. 내 고생이 아예 보답 받지 못한 건 아닌 듯해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후열의 지원이 끊기며 장미기사단의 공세가 더욱 거세진다. “얀델은 혼자 열 명도 넘는 적을 상대 중이다! 어떻게든 막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비를 끝낸 노아르크 놈들도 대치 구도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가 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버텨라!!” 어떻게든 버티는 것. 신관은 신성력이 바닥났고, 원딜의 지원도 멈춘 상황에서. 앞뒤로 전선을 유지한 채 시간을 버는 것. “으아아아아아악!” 양쪽에서 포위된 채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었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할만했다. ‘아주 그냥 우리는 이미 시체 취급이구만.’ 우리의 전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노아르크와 장미기사단이 무언의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것. ‘우리가 다 죽으면 지들끼리 한 번 더 싸워야 한다 이거지?’ 뭐,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야 어쨌든. 적의 방심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신호였다. 덕분에 결국 그 시간이 찾아왔으니까. 드드드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듯 흔들리는 협곡. 솨아아아아아-! 심연과도 같은 어둠뿐이던 절벽 아래에서 새하얀 한기가 안개의 형태로 올라온다. 「캐릭터가 [증오의 한기]에 노출되었습니다.」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시전한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 놈이 아득바득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끝에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얘를 이렇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이래서 계획은 세워도 세워도 끝이 없다는 건가? “제기랄! 뚫어라!” 이를 기점으로 노아르크 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최대한 신속히 정리한다.” 훨씬 더 점잖기는 했지만, 당황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장미기사단 측도 마찬가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보스가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본 게 여기서 나뿐이었을 줄이야.’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여유로웠겠지. [그어어어어어] 몰려오는 안개의 위로 팔을 허우적거리는 수천의 스켈레톤. 그리고 안개의 중심부에서 시뻘건 안광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엘더 리치, 카리아데아. “얀델, 전부 준비가 끝났어요!” 내가 원거리 딜러 라인에 요구했던 ‘큰 것’도 때마침 준비가 됐다. 그러니까······. “쏴라.” 이제 해보는 수밖에. 「제임스 칼라가 [꿰뚫는 빛]을 시전했습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티타나 아쿠라바가 [No. 1911 파벨러의 고장난 회중시계]를 사용했습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3등급 공격 마법 ‘멸악의 불꽃’을 시전했습니다. 」 「맥켈리 레이아더스가 3등급 공격 마법 ‘단죄’를 시전했습니다. 」 「리어드 애쉬드가 3등급 공격 마법 ‘마광선’을 시전했······.」 원거리 딜러 만이 아니라, 원거리 스킬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전력을 다해, 쿨타임과 MP가 허락하는 대로 스킬을 쏟아붇는다. 노아르크 측도. 장미기사단 측도 아닌. 콰콰콰콰쾅-! 방금 모습을 드러낸 엘더 리치를 향해.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의 첫 번째 영혼의 함이 파괴되었습니다.」 후, 그래 화력은 충분했나 보네. [끼예에에에에엑!] 안갯속에서 뽑혀져 나온 벤시들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며 발광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드드그륵, 드르르극, 득드드, 끄극. 박살 났던 뼈를 순식간에 복원한 엘더 리치가 우리를 보며 손을 뻗는다.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영혼추출]을 시전합니다.」 [영혼추출]. 2페이즈에서 쓰는 바로 그 패턴.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후우······.”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방금 세찬 폭풍 속에 주사위가 던져졌지 않나. 「범위 내의 모든 캐릭터가 기절합니다.」 부디 좋은 눈금이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423화 티밍 (1) 엘더 리치의 액티브 스킬 [영혼추출]. 이 스킬의 효과는 간단하다. 정수로 획득한 스킬이거나, 일반적인 필드에서 만난 엘더 리치가 시전한 스킬이라면. 「캐릭터가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기절이 끝이다. 참고로 이는 광역기가 아니라 지정 대상에게만 적용이 되는데, 정신력이나 항마력, 그 외에 여러 스킬을 통해 카운터 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캐릭터가 [증오의 한기]에 노출되었습니다.」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시전한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이 지랄 맞은 안개 덕분에 단순 기절에 그치지 않고 특이한 상황이 연출된다. 바로 이렇게.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추출된 영혼을 징벌의 함으로 인도합니다.」 번뜩-! 눈을 다시 떴을 때 보인 것은 수정동굴. 그리고 은은한 보랏빛 조명을 받은 한 명의 남성이었다. “이보게.” 그가 고블린 피로 떡칠된 망치를 쥐고서 묻는다. “혹시 밤친구를 구하고 있는 건가?” 종족은 인간. 나이는 삼십대 초반으로 추정. 키는 180이 조금 넘으며, 선하고 푸근한 인상을 가진 사내. ‘···키에 비해서 발이 큰 편이었지.’ 그나저나 이런 얼굴이었구나.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졌다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확 떠오르네. 이내 아저씨가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아, 소개를 안 했군. 내 이름은 한스일세.” 통칭 한스 A. 모든 한스의 시발점이자,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마음가짐을 알려준 고마운 존재. 망치, 나침반, 수통, 신발 등을 처음 본 나에게 선물하며 야만인이었던 나를 문명인으로 진화시켜 주기도 했었다. “근데 왜 나를 죽였나?” 그런 그가 순식간에 악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붉게 충혈된 눈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글쎄, 죽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뒈졌겠지?” “자네는 나를 용서할 수도 있었잖나.” “용서라······.” “내게는 딸과 아내가 있었네.” 그래, 그거···. “알아.” 어디, 모를 수가 있나. 그때 빼앗은 네 가방에서 가족 초상화를 봤는데. 세 살배기쯤 된 어린 여아와 아저씨보다는 몇 살 더 어리게 생긴 아내였다. 하지만······. “그걸 봤을 때, 나를 죽인 걸··· 후회했나?”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아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그야 후회를 왜 해? “만약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너를 죽일 건데.” “······.” “어차피 아저씨도 내가 첫 약탈 대상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그 사람들은 가족이 없었겠어?” 애초에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고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걱정 마. 엄마 아빠 없어도 사는데는 문제가 없더라고. 네 아내랑 네 딸도 그럴 거야.” 출처는 바로 나. 그러니까 믿어도 좋아. 콰직-! 더 대화를 나눠봤자 의미도 없기에 즉시 달려들어 악마분쇄기로 가볍게 톡 쳐서 대가리를 박살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변했군. 그때의 자네는 그렇지 않았는데.” 턱만 남은 한스A가 꾸역꾸역 입을 열어서 평온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간다. “···응?” 뭐야, 이거 무섭잖아. [영혼추출] 패턴에 이런 게 있었나? 그냥 지금까지 죽인 캐릭터들이 나와서 나한테 덤벼드는 구간 아니었어? 게임에선 보지 못한 연출. “근데 변했다니, 그건 또 뭔 소리냐?” 뭔 말인지가 궁금해져서 되묻자 놈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때 나를 죽일 땐 그렇게 떨었는데.” “응, 그래서?” “이젠 아무런 감흥도 없지 않나.” “아하!” “분명 자네는 앞으로도 그렇겠지. 누군가에게는 소중했을 부모를 죽이고, 딸과 아들을 죽이고, 한 가정이 파탄이 나더라도. 모두 용납을 할 거야. 그 대상이 자네의 적이었단 이유 하나로.” 아주 악담을 해라 해. 괜히 대화를 받아줬나 싶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게 됐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이놈은 내 심리를 읽는다. “자네는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네.” 그래서 가장 깊숙한 곳을 정확하게 찌른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 대상이 적이었기에 자신을 속일 수 있었겠지. 나는 아직 괴물이 아니라고.” 콰직-! 망치로 턱주가리를 내리쳤으나,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 질긴 거 보소?” [적이 아니라면.]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면.] [아니, 누구보다 자네가 지키고 싶어 했던 동료라면.] [그렇다면 어떨 거 같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야 이 목소리의 근원은 나의 내면이었으니까. [자네는 이미 괴물이 되었네.] 살아남기 위해서. 가슴 한구석에 숨겨놓고서 철저하게 외면해온 의심과 불안. [자네가 죽여온 괴물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 [자네는 이미 이곳 사람일세.] 그 말을 끝으로 한스 A는 빛이 되어 사라졌다. *** 내 삼촌은 명백한 폐급 인간이었다. 변변한 직업이 있을 리 없는 도박 중독자. 돈을 땄을 땐 적잖은 용돈을 쥐여주기도 했으나, 반대로 돈을 잃었을 땐 폭력을 행하며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옆산 돌멩이에서도 찾아보면 하나쯤은 배울 점이 있다는 말도 있듯. 삼촌도 그랬다. 암만 생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도 채 안 된 8살 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면. 남이 만든 판에서 놀아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든 판 위에서 주사위를 던지라던가? 머릿속 깊숙이 새겨진 그 조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 그렇기에······. 터벅, 터벅. 수정 동굴 속을 걷고 있다. 실재하는 공간은 아니다. [영혼추출]으로 인해 기절하며 끌려오게 된 가상의 공간. ‘수정 동굴이 배경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참고로 게임 내에선 항상 배경이 달랐다. 2층의 바위 사막, 4층 천공의 탑, 6층 대해 등, 미궁이 아니라 왕궁이나 그런 곳에서 깨어나는 일도 있었다. 하면, 과연 배경 선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가장 인상 깊은 공간일지도.’ 나름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덫을 밟고 죽을 뻔한 것도, 에르웬을 만난 것도, 사람을 처음으로 죽인 것도 이곳이니까.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가 소환 됐을 때 했던 고생은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테고. ‘그래도 징벌의 함에 들어오면서 체력이랑 MP는 전부 회복돼서 살만하네. 뭐, 이건 그 씹새끼들 쪽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게 현재 몸상태를 점검하던 차였다. 툭.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서둘러 몸을 트니 익숙한 얼굴의 삼인방이 보인다. 방패를 든 콧수염 아저씨. 훤칠한 체격의 금발 창술사. 그리고······. “끼, 히, 히, 히, 히, 히, 히!!!” 반쯤 머리가 짓이겨진 상태로 웃어젖히는 신관복을 입은 여자. 이름하여, (구)엘리사 하프 헤드 모드. “이야, 너희도 오랜만이네.” 한스 A와 달리 놈들은 대화를 시도하는 일도 없이 즉시 내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콰직, 콰직, 콰직-! 10초 안에 전부 빛무리로 바꿔버렸다. 그야 지금 내 레벨이 몇이고 먹은 정수가 몇 개인데? 심지어 이곳에서 만나는 적들은 생전 무력의 절반 정도라는 패널티까지 붙어 있기에, 사실상 지금에서는 고블린과 별 차이점이 없다. 한 방 툭 치면 뒈진다는 점에서 특히나. “후··· 그럼 이제 몇 명 남은 거지?” 수정 동굴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죽인 적들의 숫자를 세봤지만, 어찌된 게 잘 모르겠다. 그야 먹은 빵의 개수를 기억할 순 없잖아? 탐험가 짓을 하며 살인을 밥 먹듯이 한 탓에 내가 지금까지 정확히 몇 명을 죽였는지도 셀 수가 없다. ‘······예전에는 기억했던 거 같은데.’ 한스 A가 했던 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실제로 나는 놈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엘리사. 얘는 워낙 인상 깊어서 확실히 기억이 나고······.” 창술사 얘는 이름이 뭐였더라? 테이저건? 다이슨?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방금 해치운 삼인방의 이름을 떠올리던 나는 이내 움찔하고 말았다. 콧수염 아저씨의 이름이 떠오른 탓이다. “한스 아르고.” 참고로 내가 부여했던 한스 코드는 C. “니미럴.” 이제야 든 생각인데, 그럼 지금부터 나는 내가 죽인 한스들을 전부 다 만나봐야 하는 건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거야 원, 한스 지옥도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한스를 몇 명이나 죽였더라?’ 다행히 하나씩 돌이켜 보니, 실제로 죽인 건 얼마 안 됐다. 내가 막타를 친 건 얼마 안 된다 해야 하나? 엘리사를 추적하던 중 하수도에서 만났던 한스E는 함정이 발동됐을 때 고기방패로 썼고. 파루네 섬에서 우리를 배신한 마법사 한스J를 죽인 건 에르웬이었으며, 그 외에 나머지는 전부 한 번 스치듯이 만나서 헤어졌다. 딱 한 명만을 제외하면. “내, 이, 이름은, 하, 한스, 크리센··· 입, 니다.” 도플갱어 숲에서 처단한 악령 소환술사 한스G. 와, 이게 바로 나와주네. 매도 먼저 맞아라 이건가? “왜, 나, 나를··· 죽, 였습, 니까? 우, 리는 가, 가, 같은 프, 플레이어, 인데···.” 영혼의 단짝 요정 궁수와 함께 샛길에서 나타난 한스G는 어째선지 이상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 그거라, 여기서도 말을 더듬어대는 건가? 하긴, 그때의 충격이 크기는 했지. “저는 배신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악령이라는 걸 저놈이 까발린 바람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콰직, 콰직-!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대시해서 머리통을 부순다. 세상을 훨씬 더 편하게 살아가는 야만인의 방식. 이후로도 동굴을 배회하고 있자니 내가 살아가며 죽였던 인물들이 기억을 재구성해 재현된 모습으로 나에게 덤벼들었다. “이제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약탈자가 되어야 했을지! 그 빌어먹을 곳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빙하굴에서 죽였던 플레이어 젠시아 네이프린. 그때의 나는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설마 노아르크에서 시작하는 플레이어도 있을 거라고는. “시, 실수였다고 했는데 고작 그것 때문에! 죽어! 죽으라고오오오!!” 카루이의 사제였던 엘리사의 혓바닥에 농락당해 팀 반푼이를 공격했다가, 오두막에서 재회해 내게 죽었던 종교쟁이 삼인방. 이놈들을 죽이며 나는 진실로 깨달았다. 현대인의 때를 벗으면 벗을 수록, 이곳에선 좀 더 사람처럼 살 수가 있게 된다는 걸. 콰직, 콰직, 콰직-! 그 외에도 미궁에서 만난 수 많은 약탈자들이 원한을 흩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초반부에 만난 녀석들은 대부분 한 방에 머리가 터져나갔지만, 후반부의 녀석들은 달랐다. 퍼어어엉-! 오르큘리스의 등대지기. 후우웅-! 과거 시대의 노아르크에서 만난 기사. “결과적으로 나는 너희를 도우려고 했던 거라고!” 원정 중에 반역 혐의로 처형 당한 파이크 넬다인. 한 명 한 명은 무섭지 않았지만, 그런 놈들이 자꾸만 여럿이서 한꺼번에 덤벼들다보니 부담이 커진다. 마치 죄의 무게와도 같다. “내가··· 이렇게 많이 죽였다고······?” 적어도 수백 명. 그것도 내가 직접적으로 죽인 목숨의 숫자. 하지만······. “그래, 차라리 잘 됐어.” 건실하게 살아온 내가 이 정도면 장미기사단 새끼들이나 노아르크 놈들은 얼마나 심하겠어? 타인의 불행을 동력 삼아 계속해서 나아간다. 터벅, 터벅. 목적지란 존재치 않는 어두운 동굴 속을. 하염없이. *** 「마지막 적 처치.」 「캐릭터의 [기절] 상태가 해제됩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원혼을 대신해 빙하의 마법사가 대신해서 징벌을 내립니다.」 「미궁 폐쇄까지 무작위 패널티가 부여됩니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양쪽 다리를 누군가에게 붙잡힌 채, 차갑고 뾰족한 지면과 등을 마찰하며. “으으읏···! 이 사람은 장비도 안 걸쳤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스벤 파라브의 목소리. 그래, 네가 날 끌고 가고 있던 거구나. ‘빙하의 눈이 아닌 걸보면, 일단 절반쯤은 성공한 건가······.’ 나는 끌려가는 상태에서 주변을 보았다.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기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으으으으···!!” “하아···, 하아···, 하아···.” 기절한 육체 계열 탐험가들을 역으로 업어들고서 힘겹게 이동 중인 신관과 마법사들. 나는 허리춤에 달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15분 정도인가······.’ 2페이즈가 시작되고 내가 기절해 있던 시간이었다. “파라브, 이제 놔라” “어? 깨어났습니까?” “그래.” 여기서 더 짐덩이가 될 수는 없기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스벤 파라브에겐 다른 이를 업도록 지시했다. “오르먼 신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 뒤의 그분은 제가 업지요. 저기에 있는 다른 분을 도와주십시오. 둘이서 들면 좀 나을 겁니다.” “후우··· 죄송해요. 파라브 성기사님도 힘드실 텐데.” “하핫,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야가 확보된 나는 얼른 주변을 쓱 훑어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신관 둘에 마법사 셋, 이능술사 둘, 근딜 하나, 성기사 둘, 궁수 하나.’ 기절 상태에서 깨어난 건 나까지 해서 총 열둘. 한 사람당 한 명씩만 맡아도 오히려 숫자가 남지만, 전사 한 명이 두세 명을 업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상태가 열악하다. 몹시 간단한 이유다. 괜히 내가 [영혼추출] 패턴을 도박이라 여긴 게 아니니까. ‘에르웬이랑 아멜리아는 아직인가······.’ 우선 축 늘어진 두 명을 넘겨받아 어깨에 하나씩 걸쳤다. 그리고 푸타 리커번에게 업힌 상태로 이동 중인 준에게로 다가갔다. “준.” “···아, 깨어나셨습니까.” 내가 다가가자 푸타 리커번에게 업힌 상태로 고개를 드는 준. 그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애석하게도,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됐습니다.” 기절 상태에서 풀려났을 때 입게 되는 무작위 패널티. 이 패널티는 철저하게 랜덤이며, 운이 좋으면 맛을 못 느끼는 정도에 그치지만, 심할 경우에는 지금처럼 캐릭터 하나가 병신이 된다. 아마 의식이 있으면서도 업혀 있는 사람은 다 이런 경우겠지. “얀델, 당신은 괜찮습니까?” “일단은··· 당장 달라진 건 없어 보이는군.” “무사해서 다행이군요. 정말로.” “너는 언제 깨어났나? 상황 보고를 받고 싶은데.” “다섯 번째입니다.” “예상보다 빠르군?”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단 심문관 일을 하면서 직접 죽인 카루이의 사제는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대부분은 힘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덕분에 그곳에서 상대하기 편했지요.” “그런가······.” 딱히 위로의 말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갔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있던 일을 듣고 싶은데.” “가장 먼저 깨어난 건 오르먼 신관님과 페리톤 에리아보스티 신관님입니다. 정말··· 손에 더러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분들이시더군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신관 자체가 직업 특성상 막타를 칠 일이 얼마나 있겠어. ‘빙하의 눈에서 싸웠을 때도, 막타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쳤고.’ “다만 두 분이서 우리 모두를 옮길 수는 없기에 기다리다가, 어찌 이동이 가능해질 만큼 인원이 깨어났을 때부터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지났을 때였지?” “11분입니다.” “그때 깨어 있는 다른 자들이 있던가?” “떠나기 전까지 노아르크나 장미기사단 측에서는 깨어난 사람이 없었으나, 지금은 어떨지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얀델, 그대의 말대로더군요. 혹시나 해서 공격을 해보기도 했으나, 둘러싼 얼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꿈쩍도 않았습니다.” 이어진 보고에도 딱히 아쉽진 않았다. 그야 [영혼추출]에 당한 즉시 캐릭터는 얼음에 갇히게 되며 2페이즈 내내 무적 판정을 받게 되니까. 그때는 카리아데아도 공격하지 않는다. 보스전이 재개되는 것은 [영혼추출]이 시전된 시점으로부터 30분이 지났을 때. 그때가 넘도록 돌아오지 못한 자는 죽는다. 그 안에서 죽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에르웬은 그렇다 쳐도, 아멜리아는······ 괜찮으려나?’ 심히 걱정이 되지만, 그저 믿는 수밖에. 당장 어쩔 방법이 없는 문제는 제쳐두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시던 겁니까?” 그제야 성기사 준이 조심스레 의문을 내비쳤다. 주어는 빠졌으나, 무엇을 묻는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걸 묻는 거겠지.’ [영혼추출]로 인해 얼음 기둥에 갇히며 무적 판정을 가진 것은 오직 적들뿐. 우리 원정대는 어느 누구도 얼어붙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처럼 먼저 깨어난 이들이 기절한 이들을 업고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었던 거고. “생명의 불꽃으로 저런 현상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토베라교도였던 저조차도 알지 못했던 정보입니다.” “그런가?”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시던 겁니까? 저 사악한 리치를 소환했던 그 방법도 그렇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참 쉽다. 저 리치놈을 한 백 번쯤 잡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처음에는 버그인가도 싶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던전앤스톤]에 그런 건 없더란 말이지. 이번에도 그럴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매번 이런 부분이 걸리적거린단 말이야.’ 그러한 사실을 말할 순 없기에 대충 둘러댔다. 버려진 게 확실한 와중에 후작에게 들었다고 하는 것도 좀 웃기니. “부족장에게 들었다.” 암, 이렇게 말하면 얘가 뭐 어쩌겠어. “바바리안의 부족장… 말입니까?” “그래,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일을 겪었다 하더군.” 핑계를 들은 준은 애매한 반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됐고, 다른 이들은 어떻지?” “아… 지금 말해드리겠습니다.” 다급한 상황이기 때문인지 준도 그쯤에서 의문을 접고 보고를 시작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큰 패널티를 입은 인원은 총 셋이었다. 절름 발이 신세가 된 준. 장님이 된 궁수 제임스 칼라. 오른손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디디 영감. 기절한 대원들이 어떤 패널티를 안고 깨어날진 모르지만, 일단 당장은 그렇다. 하면······. ‘나는 뭐지?’ 나에게는 어떤 패널티가 적용이 되었을까. 걸어가며 이것저것 확인을 해본 나는 머지않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까드득···. 그 많은 패널티 중에 하필 이게 걸리다니. 「캐릭터의 액티브 스킬이 사용 제한됩니다.」 동굴에서 만난 한스들의 저주인가? 424화 티밍 (2) 액티브 스킬의 봉인.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패널티 중 하나다. 뭐, 아무리 그래도 제임스 칼라처럼 장님이 된 것보단 나은 듯하지만. ‘차라리 디디 영감처럼 팔 한 짝 못 쓰게 되는 정도였으면 더 나았을 텐데.’ 팔 한 짝 없는 쪽이 유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투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패널티.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던진 주사위의 눈금이 이렇게 나온 걸 뭐 어떻게 하겠어. 저쪽도 주사위 결과가 지랄났길 바라는 수밖에. ‘게다가··· 내 패널티만 빼면 나쁘지 않아.’ 사실 [영혼추출] 패턴은 꽤나 까다로운 패턴이다. 이능술사나 마법사 같은 포지션에게는 특히나 더 그렇다. 딜러 포지션이기에 막타도 많이 쳤을 텐데, 늘 함께하던 전위들 없이 혼자서 싸워 이겨야만 한다. 하지만······. ‘다행히 다들 착하게 살아왔다 이건가.’ 신관은 둘 다 무탈하게 생존. 마법사는 넷 중 한 명을 제하면 모두 깨어났고, 이능술사도 기절 중인 건 아쿠라바 뿐. ‘아마 마탑에서 오래 지냈던 마법사들이었던 게 유효하게 작용했겠지.’ 이 정도만 되어도 도박은 성공했다 볼 수 있다. 같은 원정대에 속해 동고동락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이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 터벅, 터벅. 딱딱한 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얼음 동굴. 최대한 빙하의 눈 입구와 멀어지도록 이동하고 있자니 한 쪽 어깨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저씨······.” “일어났군···.” 깊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우선 조심스레 에르웬을 내려줬다.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멀쩡히 중심을 잡은 걸 봐서 두 다리가 패널티로 날아간 건 아닌 모양. “몸은 어떻지? 안 좋은 곳은 없나?” “잘 모르겠어요···.” 어딘가 멍해 보이는 에르웬. 안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당장은 패널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일 테니까. ‘니미럴.’ 무작위 패널티 중 안 좋은 것들 순으로 실험을 해보던 나는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여덟 번째라···.’ 애석하게도, 에르웬 역시 운이 나쁜 편이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모든 자원 회복이 제한됩니다.」 모든 자원 회복 불가. 쉽게 말해, 이제 MP든 자연력이든 소모만 가능하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뜻. “······네 몸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아니면, 최대한 힘을 아껴라.” “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나. 일이 그렇게 된 건데. 깨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무튼, 이후로도 시간이 흐르며 기절했던 이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폐를 끼쳤소이다. 지금부터는 스스로 걷겠소.” 다행히 약한 패널티를 받은 멜란드 카이슬란. “읏···! 이게 왜······.” 무기 사용 제한이 걸려, 검에 손을 올렸다가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떠는 라비옌. “저기··· 다들 왜 말을 안 하십니까?” 청각을 잃은 2팀의 궁수 츠온 이리번. 그리고······. “정말··· 끔찍한 곳이었어요.”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아쿠라바. ‘이제 두 명인가······.’ [영혼추출] 패턴이 시작되고서 25분이 경과한 무렵에 남은 인원은 둘이었다. 아멜리아와 2팀의 마법사 맥켈리 레이아더스. “제발, 부디 힘을 내십시오···.” 시간이 촉박해지자, 아직 잠들어 있는 둘을 향해 대원들이 불안한 시선을 보내온다. 나도 미칠 거 같았다. ‘얘는 대체 왜 일어나질 않는 거야······.’ 그 안에서 죽은 건 분명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심장이 멈췄을 테니까. 두근, 두근.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시간이 이어진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흘렀을까. “맥켈리 씨, 이제 1분 밖에 남지 않았어요. 제발, 힘내주세요···.” [영혼추출] 패턴 종료까지 1분이 남은 시기. “으음······.” “···에밀리! ” 아멜리아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 “······제기랄.” 다른 한 명은 눈을 뜨지 못했다. *** 생존자 18명. 다만, 전투 가능 인원은 훨씬 더 적다. 나를 포함해 많은 대원들이 상당한 패널티를 받게 되었으니까. 사실상 전력이 반 이상 줄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그럼 저쪽은 어떠려나.’ 행복은 상대적인 가치란 말도 있듯. 불행 역시 마찬가지다.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흡수한 영혼의 총량에 비례해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이제 30분도 지나서 2페이즈가 끝난 시기. 과연 저쪽은 몇 명이나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놈들은 어떤 패널티를 갖게 되었을까. ‘됐고, 그냥 살아남은 새끼들도 다 보스랑 싸우다 뒈졌으면 좋겠는데······.’ 쯧, 현실적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 카리아데아는 빙하의 눈 바깥까지 추격을 하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우리가 전투 중이던 곳은 빙하의 눈의 정상부. 몇 명이 깨어났는지는 몰라도, 지금쯤 다들 빙하의 눈을 벗어났겠지. ‘용살자··· 그놈은 어떻게 됐으려나.’ 글쎄, 잘 모르겠다. 용인족 장로 역할을 하는 태고룡을 죽인 게 바로 그놈이니까. 그때도 기습을 해서 겨우 죽였다고 했으니, 절반쯤 약해진 상태라 해도 이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애초에 그놈이 태고룡이랑만 싸울 게 아니잖아? 모르긴 몰라도, 죽인 놈이 천 단위는 될 거—. ‘아니, 잠깐만.’ 그렇게 잠시 용살자에 대해 생각을 하던 중에 문득 몸이 굳었다. ‘씨발, 그럼 그 새끼 필드에는 드왈키도 나왔던 거 아니야?’ 갑자기 기분이 확 더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 환상에 나온 사람들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영혼추출] 때문인가? 생각이 많아졌어.’ 이쯤에서 상념을 끝내고 눈을 뜬다. 화르륵-! 따뜻한 열기를 뿜어내는 불길. 그 불길 앞에 무릎을 꿇은 신관은 연신 기도를 읊었고, 대원들은 이를 들으며 각자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나마 현 상황에서 긍정적인 부분이다. 죽은 동료의 장례를 치뤄줄 만큼의 여유가 우리에게 생겼다는 거니까. 콰직, 콰직, 콰직-! 마법사들의 화력을 쏟아부은 불길이 순식간에 살점과 피부를 녹여내고, 남은 뼈들은 왜곡 마법을 걸은 뒤 전사들이 잘게 부숴 주머니에 보관했다. 이후 남겨질 그의 유가족들에게 이것이 작은 위안이라도 되기를 바라며. “······.” 그것으로 짧았던 장례는 끝. 뜨거운 불길이 꺼지며 잠시나마 따스했던 몸이 차가운 바람에 식어간다. 그러니,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얀델, 이제 어쩔 것이오?” 카이슬란이 내게 말을 걸음과 동시에 대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된다. 그야 내가 말해준 계획은 여기까지였으니까. [영혼추출]이 시작되면 먼저 깨어난 사람들이 나머지를 데리고 튀는 것. 그 다음에 대한 지시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거리를 벌리면 폐쇄일까지 버티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오.” 저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보면, 카이슬란은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마 그래서 눈치껏 먼저 언급을 한 거겠지.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나 얀델,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요. 그렇게 도망쳐봤자 결국 끝은 낭떠러지일 거라는 사실을.” “나, 낭떠러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모두 산 거 아니었어요?” 카이슬란의 말에 움찔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한 대원. “폐쇄일까지 버틸 수 있다면서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 대체 뭘 고민하는 겁니까?” 정말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고비는 넘기지 못했다. 그랬다면 내가 ‘도박’이라고 말했을 이유도 없으니까. “······.” 카이슬란이 나를 보며 무언의 눈짓을 보냈고, 이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아무리 카이슬란이 유능하다고 한들 이런 것까지 맡길 수는 없겠지. “우리는 이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 말이 끝나자마자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악, 그리고 의문이 담긴 시선들. “···이유가 뭐지요?” 그야 간단하다. “아까 뒤에서 나타난 적들은 장미기사단이니까.” “추격을 떨쳐내지 못할 거란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하면 대체 무슨 뜻으로······.” 다들 내 얘기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기에 마저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왕가 쪽에서는 준비해둔 변명을 꺼냈을 거라고. 본대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구하러 갈 수가 없었다던가. 그럼에도 자력으로 살아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던가. 눈 가리고 아웅하듯,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었을 거라고.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활로였다고. “외면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요?” “우리가 버림패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를 한다면, 왕가에서도 극단적인 수를 쓰지 않을 테니까.” 비겁할지 몰라도, 이게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이제 쓸 수 없다.” “······.” “장미기사단이 이곳에서 있던 일을 왕가에 전한 순간, 왕가에서는 필시 우환을 제거하려 들 터.” “······우리 입을 막기 위해 협상을 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래 그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 그런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옆에서 누군가 새로운 질문을 꺼냈을 뿐. “그래서 어쩌잔 거요? 여기서 죽을 게 아니라면, 일단 어떻게든 도시까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케알루너스 공작가 출신, 푸타 리커번이었다. 뭔가 좀 기특하면서도 웃겼다. “다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던 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 이곳까지 멱살을 잡고서 우리를 데리고 왔으니까. 그 개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포기할 거 같소?” 하긴, 빙하의 눈을 뚫을 때 자기 의지로 팔까지 잘라내는 각오를 보여줬던 놈이니까. 이대로 죽는 건 억울하긴 하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칭찬이었으니, 예민하게 받지 마라. 그리고 애초에 포기한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고.” “아······.” 내 말에 녀석이 아차하며 입을 벌렸고,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 “그래.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누가 알겠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물론 의심이야 받겠지만, 심증이 있는 것과 물증이 실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 노아르크 놈들과 장미기사단 모두를 죽인다.” 지금부터는, 우리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야만 한다. *** 이대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맞서 싸울 것인가. 그것에 대한 의견 일치는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다. “전···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핫, 유별날 것도 없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대부분의 상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그는 결정을 내렸죠.” “비요른 얀델, 그대의 선택을 믿는 것. 그게 제 선택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당신 눈엔 조금 옹졸해 보일지 몰라도, 나 같은 사람한텐 그러는 쪽이 더 편하거든.” 원정대의 의사 결정이 끝난 후로는 모든 게 명료해졌다. 우리는 동굴 속을 배회하며 다양한 곳에 탐지 마법을 펼쳤고, 왜곡 마법을 걸어 몬스터들을 사냥해 식량을 수급했다. “이거······ 생각보다 먹을만한데요?” 몬스터 고기는 의외로 먹을만 했다. 뭐, 그중에는 식용이 불가능하다 판단이 될 만큼 최악인 것도 몇몇 있었지만. “맛은 둘째치고 아까워 죽겠군. 저 부산물들을 챙겨가면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지금은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하니까······.” 왜곡 마법을 통해 획득한 고가의 부산물들은 눈물을 머금고 전부 버렸다. 이동이 어려운 동료를 업기까지 해야 하는 와중에 그런 걸 챙길 여유는 없던 것.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을 때였다. “얀델 님! 얀델 님!” 5팀의 마법사 마로네가 황급히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다. 얘가 이럴 때는 딱 하나뿐이었다. “탐지 마법이 작동한 건가?” “네, 네···! 작동했어요!” 마로네가 가져온 소식은 크게 세 가지 타입으로 분류를 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좋은 소식 하나. “장미기사단이었어요. 숫자는 열 명 밖에 안 됐고요!” 장미기사단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아무래도 살인을 밥 먹듯이 한 놈들이라, 피해가 컸던 모양인데······. “남은 놈들의 상태가 어땠지?” “저, 그게······.” 두 번째는 애매한 소식이었다. “네 명은 상태가 안 좋은지 동료들에게 업힌 상태에요. 한 명은 한 쪽 발을 절고 있는 정도고요.” 우리 원정대 중 3분의 1이 꽤 강한 패널티에 당한 것처럼, 놈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이러면 패널티 눈금은 동점인 셈인가? 뭐,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니 뭐라 확정을 짓기엔 이르겠지만. “그··· 아,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에요!!” 대망의 세 번째는 나쁜 소식이었다. 그것도 보통 나쁜 소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최악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소식. “어, 어째선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랑 노아르크 사람들이랑 함께 움직이고 있어요···!” 물과 기름이 섞였다. 425화 티밍 (3) 티밍 Teaming. 온라인 경쟁 게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게임 내에서 서로가 적으로 분류된 플레이어가 임시로 연합을 하는 행위를 뜻한다. ‘하, 여기서 티밍을 한다고?’ 티밍에 대한 관점은 게임사마다 다르다. 티밍을 게임의 일부로 보는 쪽이 있는가 하면, 부정행위로 보며 적극적으로 제재하는 쪽도 있다. 물론 고의적인 티밍일 경우에는 어느 쪽이든 핵, 혹은 버그 사용 급의 부정 행위로 여긴다. 그 자체로 게임의 밸런스를 크게 망가뜨리고 일반 유저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인데······. ‘니미럴, 운영진들은 뭐하냐. 이 새끼들 안 잡아가고.’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든 삼파전 구도를 만들어냈는데 여기서 티밍을 할 줄이야. 노아르크랑 왕가는 철천지원수 사이 아니었어? 일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되면 각개격파는 무리인가······.’ 시작부터 플랜 A가 어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이 그랬다. 최초의 계획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내가 항상 희망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편인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늘 그렇게 상황이 흐른다. “저기······.” 조심스러운 마로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 딴 생각을 했군.” “아니에요.” “그래서 노아르크 측은 몇 명이나 됐지?” “여섯 명이요.” “구성원은?” 적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전투를 했기 때문일까? 마로네는 간략하게나마 적의 능력을 위주로 구성원을 설명했다. “그··· 시꺼먼 창을 날리던 이능술사랑, 번개처럼 변해서 달리던 여자. 아! 그 대머리 권투사도 있었고요······.” 여기에 카루이의 사제가 하나. 흑마법사가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갈 바고스, 그놈도 있었다고?” “네, 네···!” 용살자, 리갈 바고스. 조금 허무할지 몰라도 [영혼추출]로 사망하진 않았을까 싶었는데, 무슨 재주를 썼는지 용케도 거기서 살아나왔던 모양. ‘······정신 세계니 몸은 다 회복이 된다고 해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태고룡이 약한가?’ “다행이네요. 놈이 살아 있어서···.” 마로네의 보고가 끝나자 옆에 있던 라비옌이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펜을 구하려면 놈의 심장이 필요하니까요.” “아······.” 완전히 잊고 있었네. 리갈 바고스에게 저주를 걸어 꿀벌처럼 만든 게 바로 용꼬맹이 펜이었다. 무리한 저주를 건 대가로 몸의 시간이 멈추며, 평생 용의 신전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몸이 됐더랬지. “······이제 떠올린 표정이군요.” “미안하다.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래도 신경을 써야 할 거예요. 만약 당신이 펜을 구해낸다면, 아버지의 비호를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네 비호로는 안 되는 건가?” “저는 일족 내에 어떠한 권한도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죠.” 쉽게 말해, 이 퀘스트를 깨면 용인족 전부를 아군으로 얻을 수 있다는 뜻. 실제로는 일이 어찌 흐를지는 알 수 없지만, 왕가와 대적해야 하는 내 상황에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퀘스트다. “명심하고 있지.” “그거면 됐어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 기회는 언제든 또 있을 테니까. 살아만 있다면······.” 뭐래, 살아남기 위해서 놈을 죽여야 하는 건데. 그래도 전하려던 말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앞으로 뭘 하든 최우선 순위 만큼은 잊지 말라는 거겠지. “자, 그럼 다시 이동한다!” 이후 우리는 통로 곳곳에 탐지 마법을 설치하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놈들은 우리가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싸우기 위해선 내가 선택한 전장으로 놈들을 불러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70일차. 미궁 폐쇄까지 5일이 남은 시기. 동굴 속을 배회하던 우리는 한 지점에 정착했다. “다들 최대한 쉬어라.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 될 테니.” 슬슬 전투를 준비할 때였다. 그야 지난 번 탐지 마법에서 놈들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으니까. ‘아마 장미기사단이 갖고 있던 식량이겠지.’ 참 부러우면서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쪽은 몬스터 고기나 씹어대고 있는데, 저쪽은 멀쩡한 식사를 하고 있다니. 뭐, 그 덕분에 추격에 속도가 안 붙는 거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시간을 끌었을 때 우리야말로 불리해지는 셈인가.’ 몬스터 고기 덕분에 생존에는 지장이 없다. 다만, 왜곡 마법이 성공을 해야 고기 수급이 가능했기에 모두가 배부르게 먹는 것은 불가능. 아사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 순간에도 굶주림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러니 결착을 낸다면 더 지치기 전인 지금. “얀델 님, 추운데 거기 있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이내 마로네의 부름을 받은 나는 순순히 불가로 향했다. 더 이상 팀은 의미가 없었다. 캠프파이어라도 하듯 모두가 한곳에 모여서 불길을 쐐는 대원들. “크으··· 역시 고기는 구워야지! 얀델! 하나 먹을 테요?” 고기를 사양해선 바바리안이라 할 수 없기에 얼른 받아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걱우걱 씹으며 대원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되겠지요?” 불안한 듯 양팔로 무릎을 감싸는 여자. 페리톤 에리아보스티, 5팀의 신관이었다. 헤인델교 소속으로 고아원에서 자라 신관이 되었다던가? 도시에 남편도 있다고 했다. 탐험가는 아니고, 행정청에서 사무관 일을 하는 평범한 남성. 교단에 봉사를 왔던 걸 인연으로 사이가 깊어졌다고 한다. ‘아이도··· 있댔지······.’ 기나긴 원정이 끝에 다다르며 생긴 변화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헤쳐나가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보니, 너무나도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저는··· 살아 돌아갈 거예요. 내 아이도 나처럼 자라게 할 수는 없으니까.” 위태로우면서도 단단한 결의. 이에 침묵이 흐른다. 타닥, 타닥, 타다닥-. 불똥 튀기는 소리만 가득하던 중에 입을 연 것은 우리 팀의 마법사 애쉬드였다. “내 아내라면 내가 없이도 잘 이겨낼 겁니다. 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분명 울겠죠.” “자네··· 결혼을 했었나? 그런 말은 없었지 않나?” “그야 물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알디디 님.” “허······!” 디디 영감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입을 벌렸고, 그 다음 입을 연 것은 푸타 리커번이었다. 케알루너스 공작가의 해결사 일을 하다가 은퇴를 미끼로 이곳에 내던져진 불쌍한 녀석. “들으면 들을 수록 비참해지는군.” “······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고르자면 나일 거요.” “······갑자기요?” “그도 그럴 게,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도시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지. 그런 인생에 신물이 나 은퇴를 바랐지만 결국 이 지경에 와버렸고. 만약 신께서 누군가 죽을 사람을 고른다면 나를 고를 게 분명하오.” “······.”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을 거요. 이런 비루한 삶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건 끔찍하지 않소?” 그것은 마치 무너진 강둑 같았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단 불안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며 깊은 곳에 숨겨두었을 응어리를 토해낸다. “다 끝났다면서 악을 쓰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건··· 이만 잊어주면 안 되나?” “하하하! 글쎄, 맨입으로?” 다만, 그럼에도 분위기는 밝았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이들 중 분명 몇몇은 내일을 같이 맞이할 수 없으리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미래를 이야기했다. “얀델, 그보다 나간 다음에는 어쩔 거요? 당연히 복수를 하겠지?” 누군가는 복수를. “아아, 그런 건 됐고 케이크가 먹고 싶네요······.” 누군가는 사소한 바람을. “전 집에 계실 할머니가 걱정되는군요······.” 누군가는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의지를 다잡는다. “다 제쳐두고 술이라도 한 잔 있었으면 좋겠군.” “그러게요. 정말로.” 딱 술 한 잔이 절실한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기··· 도시로 나가면 클랜이라도 만드는 건 어떤가요?” “클랜?”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그리고··· 다들 원래 있던 곳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을 테고······. 그··· 모두 다 힘을 합치면 도시에서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 하나만이 아닌 우리의 미래. “칼라, 네 친구는 어떤 사람이었나?” “릭 말입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놈이랑은 얘기를 얼마 나눠보지 못한 거 같아서.” 비단 우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죽어서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까지도. 두서 없이 말하며 기억하고자 했고, 추모하며 아쉬워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얀델 님······.” 마로네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부른다. “탐지 마법이 작동됐어요.” 그 한 마디에 우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 중심부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을 꺼트렸다. “······.” 차디찬 현실로 돌아올 때였다. *** 계획은 간단하다. 아니, 정확히는 계획이랄 게 없다. 우리는 싸울 장소를 정했고, 이곳에서 배수의 각오로 처절하게 적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쪽은 승자가 되겠지. “···진입했어요.” “숫자는?” “일치해요.” 땅에 귀를 대고 있던 에르웬을 통해 원하던 정보를 들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로부터 한 1분쯤 지났을까. 터벅, 터벅. 내 귀로도 인기척이 들릴 만큼 가까워졌고, 머지않아 모퉁이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데 숫자가 좀 이상하다. 장미기사단 일곱에 노아르크 여섯. 도합 열셋의 적. ‘패널티 때문에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놈들은 두고 온 건가?’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추위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곳곳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미궁 속. ‘두고 온 게 아니라, 버리고 온 건가…….’ 놈들답다면 놈들 다운 대응이었다. “······막다른 길?” 이내 수비 진형을 구축한 우리를 보며 맨 앞에 선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내 우리를 따라잡은 건 기쁘지만,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던 모양인데······. “설마 우리를 기다렸던 건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듯한 여자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뭐,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겠지만. “칼라!” 내 외침과 동시에 제임스 칼라가 스킬을 시전했다. 「제임스 칼라가 [기민한 손놀림]을 시전했습니다.」 패널티 때문에 장님 신세가 된지라 공격 스킬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범위 내에서 스킬이 사용되었습니다.」 스킬이 시전됨과 동시에 부르르 떨리는 지면. 「함정이 작동합니다.」 콰콰쾅-! 머지않아 놈들이 나타난 뒤쪽에서 무언가가 붕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 여기는 함정 방이거든. 얼음 동굴 구간을 넘다보면 가끔 만날 수 있는. “···길이 막혔소!” 작동 조건은 스킬의 시전 여부. 그리고 한 번 함정이 작동하면 유일한 입구는 얼음으로 뒤덮이며, 하루가 지나서 녹을 때까지 이곳은 밀실이 된다. 다만, 노아르크 놈들이 당황한 것에 비해 장미기사단은 평온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인 건 수장격인 저 여자였고. “왜 이런 선택을 내렸지?” 그저 호기심만이 담긴 듯한 질문. 답해주자면 실로 간단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으니까.” “인상 깊은 말이군.” 그럴 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했던 말이거든.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이름은 식스다.” “···응?”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식스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지?” 어딘가 무안해 하는 거 같긴 한데, 굳이 여기서 그걸 트집 잡을 이유는 없을 터. 나는 그냥 묻고자 했던 것을 물었다. “대체 어떻게 너희들이 협력할 수 있었지?”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아, 그거 말이냐?” 그새 몸을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거들먹거리며 나서는 용살자 리갈 바고스. “이 여자들도 알았던 거 아니겠냐? 너희를 잡아 죽이려면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음, 확실히 장미기사단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이 여자들한테는 임무가 최선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너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을 텐데?” 용살자가 아니라 빡빡이 권투사를 보며 말했다. 리갈 바고스야 나에 대한 원한으로 병신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리더는 쟤인 거 같았으니까. “정말 모르는 거냐? 우리가 당하고 나면 다음은 너희 차례라는 걸?” 이간질할 의도가 담긴 물음. 이에 빡빡이 권투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미기사단이 왕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결코 어길 수 없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 아, 그랬구나. 맹세는 우리 바바리안족 치트키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유명하다는 것도 웃기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봤는데. “게다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네놈들을 따라가다가 식량이 바닥났으니까. 힘을 합쳐 너희도 잡고, 식량도 얻는 수밖에.” 이제 좀 상황이 그려진다. 이 두 집단이 어떤 식으로 협력 관계가 되었는지. “자, 그러면 의문은 모두 풀렸나?” 이내 수장으로 보이는 여자, 식스가 슬슬 대화를 끝내자는 듯 입을 열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 “레펠레스라고 했나?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에 빡빡이가 피식 웃었다. “설마 회유라도 해볼 셈이냐?” 어, 어떻게 알았대?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그래. 우리 쪽에 붙어라. 식량이라면 우리가 제공해주겠다.” 몬스터 고기지만 말이지. “···뭐라고?” 정말 이런 제안을 받을지는 몰랐는지 놀라는 놈.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게, 어차피 왕가도 우리를 버렸단 말이지?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아예 소속을 바꿔버릴까 싶기도 한데, 어떠냐?” “···적을 신용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지.” “맹세가 필요하다면 맹세하겠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장미기사단이 치트키를 쓴 것처럼, 나도 우리 부족만의 치트키를 사용했다. “너······ 진심인 건가?” 그러자 빡빡이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간은 짧았다. 생각해 보니 훼방꾼이 있었거든. “레펠레스, 적의 간계에 넘어가지 마라. 저놈은 예전에도 한 번 맹세를 어긴 적 있으니까. 전사의 명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별종이다.”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뒤통수를 얻어 맞은 전적이 있는 용살자가 본인의 사연을 밝혔고, 이에 빡빡이도 심지를 굳혔다. “아쉽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지. 애초에 도시에 있는 너희를 제어할 방법도 없고.” 음, 역시 안 되는 건가? “아쉽게 됐군.” “······.” “전부 쳐 죽이는 수밖에.” 나는 방패로 상체를 가린 채 놈들을 보았다. [거대화]를 쓸 수 없는 상태라 어딘가 눈높이가 낮았지만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게 바바리안의 정신. “에르웬!” 내 호출이 떨어진 순간, 에르웬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정령화]를 시전했습니다.」 오러 유저가 득실거리는 만큼, 당연히 속성은 땅. 「화염 속성 받는 피해가 절반 감소합니다.」 「물 속성 받는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중독 면역 보너스.」 「둔기류 무기를 사용 시 파괴 행위에 강한 보정이 추가됩니다.」 「물리 내성 수치가 대폭 상승······.」 「······.」 물리 내성 수치가 급등하며 [거대화] 없이도 진화형 외피 2단계가 작동됐다. 「캐릭터의 물리 내성 수치가 350 이상입니다.」 「관통상에 한해서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개싸움은 제법 자신 있는 편이니까. 426화 얼음처럼 (1) 네 명이 서면 길 하나가 꽉 찼던 빙하의 눈과는 엄연히 다르다. 사방이 뻥 뚫린 공터에 가까운 구조. 전위들이 막아내야 할 범위는 크게 늘었지만, 원정대의 전위들은 숫자가 오히려 줄었다. ‘나, 준, 고블린.’ 퓨어 탱커 라인은 이제 우리 셋 뿐. 한데 그 와중에 준은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되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푸타 리커번, 카이슬란, 라비옌, 아멜리아.’ 근딜에 속하는 전위들 역시 띄엄띄엄 떨어져 장벽을 이룬다. 물론 장벽이라 하기엔 빈 공간들이 너무 많지만······. 이는 불평을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문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했다. 이제 남은 건 그 결과를 꺼내보는 것뿐. 솨아아아아아-!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며 공터를 뒤덮는다. 흑마법사의 짓이다. 디버프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아마 진짜 목적은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일 터. ‘가시 범위는 약 1m.’ 시야가 좁혀진 전사의 몸이 예민하게 달궈진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어어어어] 어둠 속에서 나타난 각종 언데드 마물들이 이빨을 들이밀고 발톱을 휘둘러온다. 모두 카루이의 사제가 소환한 것들이다. 빙하의 눈에서야 길목이 좁은 탓에 물량전이 소용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니까. 콰직-! 이리저리 망치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마물들을 밀어낸다. 그러던 때였다. [아저씨···!] 영체화 상태인 에르웬의 경고가 귓가를 파고든 즉시. 휙-! 짧은 파공음과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어둠 속에서 내 목을 노려온다. 카칵-! 시야가 좁아진 탓에 평소보다 반응은 늦었지만, 어찌저찌 방패로 막아냈다. 한데 그 순간. 후우우우웅-! 심장이 있어야 할 부위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처음엔 뭔가 싶어 당황했지만, 어떠한 현상인지 파악은 금방 끝났다. 「페리톤 에리아보스티가 [꺼지지 않는 등불]을 시전했습니다.」 신관의 버프 중 하나인 그것. 게임 내에선 정신 수치를 올려주고 끝날 뿐이라 크게 쓸 일이 없던 그 스킬. 다만······. ‘시야 확보용으로 쓴 건가? 똑똑했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솨아아아아아-! 심장에서 피어난 하얀 광채가 어둠을 밀어낸다. 이제 가시반경은 약 3m. 물론 빈 공간에 찬 어둠은 여전하다. 좌우에 위치한 스벤 파라브와 아멜리아 정도가 겨우 보이는 정도. 하지만······. 카칵-! 비록 어둠에 가로막혀 얼굴은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심장부에서 타오르는 빛은 뚜렷하게 일렁거린다. 마치 어둠 속을 유영하는 반딧불처럼. “으아아아아아아!!” 방패로 날아드는 칼날을 쳐내고,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한편, 실시간으로 주변에 떠오른 빛들을 확인한다. 솨아아아아아아-!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을 알려주듯 흔들리고 격동하는 빛. 어둠 속에 숨은 적들에겐 잘 보이는 표적이 될지 몰라도, 우리에겐 표식이 된다. 내 옆에,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동료들이 아직 살아서 싸우고 있다는. 그러한 믿음의 증거.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화살이 쏘아지며 어둠을 밀어내고. 「벤자민 오르먼이 [정화의 달]을 시전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알갱이들이 몸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이어질수록. 푸욱-! 몸에는 상처가 쌓인다. 날보며 식스인가 뭔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여자가 말한다. “···이전보다 훨씬 약해졌군.” 그야 지금은 [철옹성]을 못 쓰니까. 엘리바바(땅) 모드를 활성화 했다고 해도 오러를 막아내는 능력이 크게 줄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거대화]에서 오는 근력 보너스도 없다. 유일한 타격 스킬이던 [휘두르기]도, 가끔씩 허를 찌르며 적을 견제하던 [폭풍의 눈]도 쓰지 못한다. 하지만. 늘 거듭 말하는 부분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약해졌다고 생각하면 죽여 봐.” “······.” “나는 절대 안 쓰러지니까.” 정확히는, 반드시 그러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싸움은 원래 마지막까지 서 있는 놈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니까. “···신관을 믿는 건가?”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들어오고 있는 힐이 아니었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뭘 쪼개고 있어.’ 참 웃기는 여자란 말이지. “동료를 믿는 게 잘못됐나?” 원래 [던전앤스톤]은 팀 게임인데 말이지. 콰앙-!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망치를 내려찍는다. 망치 자루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머리통 특유의 타격감은 당연히 없었다. “동료를 믿는 것 치고는 조급해 보이는데.” 아, 진짜 더럽게 말 많네. “불안한가? 여기서 너를 상대하는 게 나뿐이라는 것이?” 이 여자의 의도야 빤하다. 나를 흥분시켜 조금이라도 빈틈을 드러내게 하는 것. 애초에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이 얼음 같은 여자가 이처럼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조금은 통했다는 것일 테고. 후우웅-! 한 번 더 망치를 휘두른다. 그럼에도 의문과 불안을 덜어지지 않는다. 다른 놈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분명 나한테 여러 명이 몰릴 거라 예상했는데. 그래서 내가 버티면 동료들이 훨씬 더 편해지리라 봤는데. “아아아악!!”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들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귓가에 잡힌다. “비요른 얀델, 너는 마지막이다.” 저 비명 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네가 쉽게 쓰러지지 쓰러지지 않는다는 건 그때 이미 충분히 깨달았으니까.” 적? 그도 아니면 아군?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러니까, 그때까진 절대 쓰러지지 않았으면 좋겠—.” 뜨겁게 달아오르는 머리를 억지로 식힌다. 당장 내가 달려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저 믿고 내 할 일을 하는 수밖에. *** 어릴 적, 그를 거둬준 대주교는 말했다. [네게 이제 부모는 없다. 네 부모는 오직 찬란한 태양이신 토베라 님뿐.] [신의 대리인에게 속세의 정은 의미가 없으니, 사람의 마음을 버려라.] [자, 오늘로부터 너는 이제 준이다. ] 토베라교의 전 이단심문관, 준. 그가 아르셴이란 성을 버렸던 날. 그날 후로 그는 사람이 아닌, 신의 대리인이란 이름의 짐승 같은 삶을 살았다.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너도 사내지 않느냐.] 기도문을 외우며 욕망을 거세했고, [아, 아파요···!]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구나.]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매일 같이 받아냈다. [너는 일어설 수 있다. 태양의 빛이 함께하는 한.] 이대로 망가지길 바란 적도 있으나, 이 따스한 태양의 빛은 그를 억지로 고쳐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의심은 없었다. 그저 교단이 시키는 대로, 신의 이름 하에 세상을 위한 일을 해나갔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특별한 계기 따위는 없었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하늘은 흐렸고, 그럼에도 피부에 와닿는 햇빛은 포근했다. 하지만 그날, 준 아르셴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나는 올바른가.’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질문. 다시 생각해도, 왜 그런 의문이 갑자기 생겼는진 알 수 없다. 글쎄, 어쩌면 그날 길을 가다 본 세 명의 가족이 너무 찬란하게 보였던 걸지도 모르지. 하나, 분명한 건 그날부로 짐승의 삶은 끝을 고했다는 것이다. [···뭐, 뭣이!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이단심문관 자리를 내려놨고, 보통의 교인으로 돌아왔다. 선후 과정이 바뀌었지만, 그러고 나서야 교단에 환멸이 났다. 신을 향한 증오는 아니었다. 계시처럼 다가온 그 질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꼈으니까. 오히려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나는··· 올바르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좌절이 앞섰다. 신의 이름을 면죄부 삼아 저지른 죄의 무게가 비로소 온몸을 옥죄어왔다.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간절하게 그 삶을 바라였다. 그래,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마지막으로 네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느니라.] 준 아르셴은 대주교··· 아니, 이제 추기경이 된 노인과의 연을 끊기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락했다. 평소처럼 없는 죄인을 만들어내는 임무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임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이나마 속죄가 될 수 있겠다 여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지금에 이르렀다. “징벌.” 어쩌면 이건 벌일지 모른다. 신의 뜻을 곡해하고, 삿된 인간의 마음에 휘둘린 자들에게 조종당한 멍청한 자식을 벌하는. 그래, 분명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나 그는 이제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게 정말로 그의 징벌인 거라면. “당신은··· 틀렸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됐다. 설령 짐승 같은 삶에서 꺼내준 것이 그일지라도. 이건···, 올바르지 않다. “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저들이 여기까지···!” 가슴속 등불이 꺼진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던 이들의 것. 스윽. 나아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다리. 스윽. 다리를 질질끌며 비틀거리듯 앞으로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아슬한 움직임일지라도, 조금씩. 스윽. 나아가고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말장난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스윽.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나아갈 수 있다. 그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아마,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겠지.’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준 님! 무, 무슨 짓이세요!” 페리톤 에리아보스티.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밝은 삶을 살아가며 순백의 정의를 관철해왔을 여자.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 반드시 살아나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여자. 비단 그녀만이 아니다. “바르하툰 위아르!” 수염난 마법사에겐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그올드 알디디가 [무효화]를 사용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노인에게는 풀어야 할 숙원이 있었으며. 「티타나 아쿠라바가 [흡혈송곳]을 시전했습니다.」 드워프에겐 굳건한 대의가 자리한다. 불현듯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푸타 리커번이 했던 말이 뇌릿속에 스쳤다. [들으면 들을수록 비참해지는군. 모르긴 몰라도, 우리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고르자면 나일 거요.] 그의 말은 틀렸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열여덟 명 중에서. 아니, 처음 시작했던 서른 명을 전부 다 합쳐도. 그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건 아마도. 아니, 분명······. ‘바로 나······.’ 이내 준은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부모의 이름만을 갖고 태어나. 이단 심문관이 되어. 방황한 끝에 차디찬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이 여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순간들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구나. 그것은 계시와도 같았다.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었다. 이 순간이 시련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 쪽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조차, 이 자리에 서 있기 위한 필연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도 전위가 있을 줄이야.” “다리를 못 쓰는군.” “그래서 여기 있던 건가?” “서둘러 배제한다.” 시뻘건 오라를 내뿜는 적들이 그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달려든다. 준은 방패를 들었다. 카카카칵-! 두 개의 단검이 방패를 관통했다. 그리고······. 푸욱-! 두 개의 단검이 그의 폐부를 찔렀다. 아픔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감사하다고 여겼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그 혹독한 훈련들이. 「준 아르셴이 [성체강림]을 시전했습니다.」 신의 힘이 몸에 깃든다. 진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한 기분. 이내 그가 함성을 내질렀다. 성기사로서 어울리는 외침은 아닐지 모르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어차피 저지른 죄도 다 갚을 수 없을 마당에, 한 번쯤은 괜찮을 것이다. 그래, 한 번쯤은. 단지 뱉고 싶을 뿐인 외침을 토해내는 것도. “준 님을 도와야 해요!” 신관, 마법사, 궁수. 그의 뒤로 물러난 후열들이 각자의 재주를 발휘하며 최대한 그를 돕기 시작했다. 하나 그럼에도 준 아르셴의 생명의 불꽃은 빠르게 꺼져갔다. 덜그럭. 힘줄이 끊긴 팔에서 방패가 떨어지고. 푸욱, 푸욱, 푸욱-! 단검이 상체를 난자한다. 준 아르셴은 더 이상 막거나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쓰러지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며 서 있을뿐. 그런 그를 보며 장미기사단원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의견을 주고 받았다. “죽어도 진작에 죽었어야 할 부상.” “···근데 왜 쓰러지지 않는 거지?” “벌써 3분이 넘게 시간을 뺐겻다. 어서 해치워라.” 더욱 거세진 공세. 푸욱! 바닥에 흘린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머릿속이 흐릿해진다. 몇 분이나 서 있었을까. 시간 감각도 뒤틀리고, 적들의 얼굴조차 뿌옇게 변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 그럼에도 선명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솨아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제각기 흔들리는 등불. 저 중에는 분명 그도 있을 것이다. 비요른 얀델. 아마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할 일을 해내며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겠지. “클랜······.” 도시로 나가면 만든다고 했었던가.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문득 아쉬움이 일었다. 그 말이 나왔을 때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란 생각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즐거울 거 같았는데······.” 분명 그랬을 것이다. 왕가와 노아르크, 그 외에도 우리를 버린 수많은 단체들. 설령 그들 모두가 우리를 적대한다 해도. 푸욱-! 날카로운 칼날이 폐부를 휘적인다. 준 아르셴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불꽃이 모두 타버렸다는 것을. “······.” “······.” 시끄럽던 주변이 고요해지며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저 멀리 흔들리는 불빛이 멀어지고 얼룩처럼 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어둠이 물러나고 온 사방이 빛으로 물든다. 마치···, 임무를 마친 자식을 데리러 마중이라도 나온 듯. 온몸을 따스하게 보듬어 안는 빛. “푸, 푸흐흐흐······.” 준 아르셴은 미소 지었다. 설령 이것이 죽기 전에 보는 환각에 불과할지 모르더라도. 그게 헛된 믿음과 기대에 불과할지라도. “방황하던, 나를 구원하소서······.” 어리석은 죄인을 채찍으로 벌하지 않고서. 부디, 지치고 지친 영혼을. “부디, 보듬어 안아주소서······.” 바라고 바라온 순간이었다. *** 전략도, 전술도 없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투쟁의 연속. 콰아아앙-! 서걱, 푸욱-! 폭발음과 병장기의 마찰음, 그리고 기합과 비명 소리가 아우러지는 난전. 전투가 끝난 뒤에 누가 살고 누가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황이 몇 분이나 이어졌을까. 솨아아아아아아아-! 우리 주변을 감싸던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흑마법사의 마력이 벌써 바닥이 났을 리는 없을 테니······. ‘누가 흑마법사를 죽인 건가?’ 글쎄, 그거야 곧 알 수 있겠지. 이내 안개가 싹 거둬지며 좁혀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인상을 찌푸린 여자. 그리고······. ‘쟤는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정면부의 저 멀리, 적의 후열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검을 휘둘러대고 있는 기사. 멜란드 카이슬란. 그의 주변으로 로브를 입은 비실이 하나가 목이 베어진 채 쓰러져 있다. ‘돌발 행동이긴 하지만, 나이스.’ 이후 나는 좌우를 살폈다. 일단 전위들 중에 사망자는 없었다. 다만 다들 꼴이 말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건 역시 라비옌일 테고. 아깐 주먹질도 자신이 있다더니, 검이 없으니 아주 작살이 났구나. ‘좋아, 아직 아무도 안 죽었어.’ 그럼 후방은 어떨까. 아까 비명 소리가 들린 곳도 거기였는데. ‘누가 우리 조상신 이름을 외친 거 같기도 하고.’ 확실하진 않다. 주변에 폭음이 오죽 심했어야지. 타닷. 여자가 내게서 살짝 거리를 벌린 틈을 타서 얼른 뒤를 확인했다. 예상과 달리 그곳이 가장 처참했다. 후열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장미기사단원. “······.”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체.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했으나, 자세히 보니 장미기사단원이었다. 그리고······. ‘준이 막아낸 거구나.’ 후열을 보호하듯 그 앞에 서 있는 준이 보인다. 녀석을 발견한 즉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나눈 대화가 불현듯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후열에… 숨어 있으란 말입니까?] 녀석은 내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다만 진짜 싸움은 도시로 돌아간 이후가 될 거라고, 나중에 밖에 나가서 너의 힘이 필요하다는 나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놈이 저런 꼴이 될 때까지…….’ 준의 몰골을 확인한 나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피칠갑을 한 녀석의 몸은 멀쩡한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마 이 녀석도 판단을 한 거겠지. 미래를 위해 몸이나 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뒤쪽은 완전히 작살이 났었겠네.’ 그 사실이 아찔한 한편 안도감도 피어난다. 그래도 준이 투혼을 발휘해 나서준 덕에 후열이 장미기사단원 한 명을 역으로 죽인다는 성과를 낼 수 있었—. 두근-! 위화감은 뒤늦게 찾아왔다. “왜······.” 준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손에 방패는 쥐고 있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그랬다. 하지만······. “불이 꺼져 있지?” 다른 대원과 달리 등불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두근거릴 뿐인 가슴과 달리, 머리는 그 해답을 곧장 도출해냈다. 그래, 죽은 거구나. “······!” 그의 사망을 눈치채는 게 늦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코앞에서 전투를 치르던 장미기사단원도 뒤늦게 준의 사망을 깨닫고서 앞으로 대시하며 우리 후열 라인을 기습했다. 다만, 그들의 단검은 원하는 곳에 닿지 못했다. 캉-! 뒤를 확인하자마자 몸부터 움직인 아멜리아가 분신과 함께 두 명의 단검을 쳐낸 것인데······. “생각보다 피해가 크군.” 감흥없는 눈으로 사망한 단원을 힐끗한 식스가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타닷. 즉시 지면을 박차며 튕겨져나갔다. 전담 마크 중이던 내가 아니라. ‘이런 씹…!’ 다른 곳을 향해. 정확히는, 아멜리아가 겨우 방어에 성공한 후방을 향해. [아저씨…!] 에르웬의 외침을 신호 삼아 식스의 뒤를 쫓았다. 그야 이 여자의 머릿속을 알 것도 같았다. ‘저년도 이젠 내가 액티브 스킬을 못 쓴다는 걸 알아챘을 테니까.’ 액티브 스킬이 봉인된 바바리안 탱커. 물론 그래도 [정령화] 덕에 몸은 단단해 잡기는 어렵지만, 다대다 구도로 갔을 때는 이전처럼 위협적이진 않은 적. 그런 와중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단원들까지. 이를 토대로 식스는 최종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지금 나를 홀딩하는 것보다 내버려두고서 다른 쪽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에르웬…!” 큰 소리로 도움을 외친 즉시 정령의 기운이 깃든 화살이 쏘아졌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화살의 목표는 식스의 돌진을 저지하는 것. 휘익! 식스가 기민하게 점프해서 공중제비를 도는 것으로 화살의 목표는 달성이 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서둘러 거리를 좁혔다. 그러면서도 얼른 오더를 내렸다. “에르웬, 속성을 바꿔라.” [뭐로요?] 즉답에 가깝게 원하는 속성을 읊자, 그 즉시 몸에서 변화가 찾아왔다. 솨아아아아아-! 속성은 물도, 불도, 땅도, 바람도 아닌. 혈령후라 불리는 에르웬의 주속성. 「캐릭터의 육신에 어둠의 정령이 깃듭니다.」 피부 위로 피어나는 불길할 정도로 짙은 어둠. 이름하여······. 「모든 내성 수치가 0으로 고정됩니다.」 「신성 내성이 -200으로 고정됩니다.」 「어둠 내성이 +800으로 고정됩니다.」 「심연의 축복 보너스.」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면역 보정을 받습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이 피할 수 없는 일격 보정을 받습…….」 「…….」 엘리멘탈 바바리안(흑) 극딜 모드. 427화 얼음처럼 (2) 엘리바바(흑) 극딜 모드. 줄여서 흑화 모드는 [정령화]로 활성화 가능한 여러 모드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다. 모든 내성 수치 0. 더군다나 신성력에 피해를 입게 되기에 힐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 대신. 출혈, 중독, 기절, 마비, 속박 등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면역. 이런 말도 안 되는 효과가 붙어 있다. 그래도 무작위 패널티는 상태 이상이 아닌 시스템 효과로 판정되기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작금에는 그리 중요치 않은 부분이다. 당장 이 흑화 모드의 핵심은 따로 있으니까. 「모든 종류의 공격이 피할 수 없는 일격 보정을 받습니다.」 무려 회피 불가의 타격. [던전앤스톤]을 통틀어 흑화 모드에 밖에 붙지 않은 유니크 옵션. 물론 등가교환을 사랑하는 이 게임의 모토답게 그 대가는 유리몸을 제하고도 더 있다. 「모든 자원 소모량이 20배 증가합니다.」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5배 증가합니다.」 멀쩡한 탐험가 한 명을 순식간에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두 줄의 문구. 하나 현재의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어차피 무작위 패널티 때문에 이미 반쯤 병신이 된 상태 아닌가. 신경을 써야 한다면 역시 이쪽 부분이겠지. 「유지 시간에 비례해 캐릭터에게 반동이 찾아옵니다.」 최대한 반동을 줄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 순간 만큼은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 ‘자, 그럼 얼른 해보자.’ 한 번 더 앞으로 걸음을 내뻗자, 식스가 잽싸게 간격을 벌린다. 타닷. 아무래도 뒤바뀐 내 모습을 경계하는 듯하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하려던 걸 멈추고 다시 탐색전부터 시작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만. ‘오케이, 그럼 어그로는 다시 확실하게 끈 거 같으니…….’ 늘어난 거리를 좁히며 망치를 휘두른다. 그야 허공에 휘두르면 공격 판정이 안 되거든. 설령 무의미하게 공기를 가른다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명확한 목표가 존재해야지만 회피 불가 보정이 붙는다는 걸 예전에 실험으로 확인했다. 탓. 이번 전투 내내 그러했듯, 최소한의 몸놀림으로 망치를 피해내는 여자. 「피할 수 없는 일격 보정을 받습니다.」 그와 동시에 보정 효과가 발동했다. 찌이이익-! 망치의 궤적을 따라 사선으로 찢겨져나가는 공간. “······!” 이를 본 여자의 눈에 이채가 맺힌다. 이게 무슨 현상인진 알지 못해도,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것인데……. ———! 휘둘러지던 망치가 벌어진 틈의 어둠 속으로 쏙 들어가며 무기의 파공음도 멎는다. 데구르르. 사라진 무기의 흔적을 찾듯 시야각을 넓히며 굴러가는 동공. 거, 그래봤자 소용없구만. “…!!” 그야말로 찰나의 가까운 시간 차를 두고서 나타난 망치가 공간을 초월해 식스의 몸을 강타한다. 처음 휘둘러지던 물리력은 고스란히 보존한 채. 퍼억—! 머지않아 이어진 둔탁한 소음. 애석하게도 손맛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야 꽂힌 게 복부였던 데다가……. ‘이 여자는 또 왜 이렇게 단단해?’ 처음엔 단지 민첩 계열인 줄로만 알았는데, 방어 쪽에도 상당한 스탯이 투자된 듯하다. 뭐, 그래도 처맞을 때 표정을 보면 타격이 없진 않은 듯한데……. ‘쩝. [휘두르기]만 쓸 수 있었어도 어디 하나는 제대로 작살낼 수 있었을 텐데…….’ 악마분쇄기의 대미지 증가 효과는 둔기류 스킬을 썼을 때만 발동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한 번으로 안 되면 한 번 더.’ 아쉬워 하는 건 모든 게 실패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터. 후웅-! 미련을 버리고 재차 망치를 휘두른다. 타닷. 식스는 이전보다도 더 멀리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아까 맞은 일격이 경계가 되기는 했던 듯한데……. 이게 그런 식으로 파훼되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퍼억-! 어김없이 거리를 초월해 적중한 일격. ‘드디어 머리빡에 꽂혔네.’ 이번엔 적지않은 손맛이 전해졌으나, 놀랍게도 식스는 작은 신음성조차 내뱉지 않았다. 몸도 한 번 살짝 휘청거린 게 전부. 스윽. 이내 식스가 숙여졌던 목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퉷.” 기계적으로 입에 머금고 있던 핏물을 뱉어내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응? “5등급 마물, 플로라의 이능 [정령화]. 거기에 어둠 정령이 더해졌을 때의 효과였지.” 어……. ‘얘도 설마 정수들 효과를 달달 외우고 다니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요원들이잖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파악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나는 즉시 지면을 박차며 앞으로 대시했다.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이전과 달리 식스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타닷-! 나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행동을 통해 직감적으로 할 수 있었다. 방금 한 말들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하, 아직 두 대 밖에 못 때렸는데.’ 이제부터 지옥길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 후웅-! 달려드는 식스의 동선에 따라 망치를 내리친다. 식스는 피하지도 않았다. 갖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냉정하게 판단을 내린 거다. ‘피하지 않으면 타격 부위를 자기가 정할 수 있으니까.’ 먼저 닿은 것은 망치였다. 퍼억-! 다만 망치가 식스의 어깨를 강타한 그 즉시. 푸욱-! 오러가 코팅된 단검이 내 팔뚝을 두부처럼 헤집고 틀어박힌다. ‘씁, 이래서 암흑바바 모드는 아껴만 두고 있던 거였는데…….’ 똑같이 한 방을 주고 받은 격이나,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는 명백하다. 저 기고만장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생각보다 기민하군. 목을 노린 거였는데.” 빌어먹을. 차라리 저주를 퍼부었다면 극찬으로 여기며 입꼬리가 올라갔을 텐데. 생각보다 기민해? 이거야말로 최고의 모욕이나 다름없다. 욱씬. 고통 내성도 0으로 변한 덕에 찔리 팔뚝에서도 아린 통증이 선명하게 올라온다.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암, 내성 0으로 오러에 당했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관통 부위가 팔뚝, 그것도 살갗 쪽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부상이 심각했을 거다. 그래, 그러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저릿한 고통조차도 연료 삼아 기합을 내뱉는다. “질긴 녀석.” 이 승부는 생각보다 일찍 끝날 테니까. ‘한 번 더.’ 다시금 망치를 내리친다. 방금 전과 똑같은 구도였다. 식스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으며 단검을 뻗었다. 그리고……. 퍼억-! 서걱. 서로가 한 방씩 주고 받는 일격. “…….” 식스는 아까도 처맞았던 어깨였고. ‘니미럴.’ 내 경우에는 방패를 들고 있던 손이었다. 방패를 이용해 한 번이라도 턴을 넘겨볼까 했지만, 오러를 머금은 단검은 방패를 꿰뚫은 것도 모자라 손바닥을 관통했다. 철커덩. 손목에 방패를 고정하던 끈까지 잘라냈는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방패. 아, 방패 말고 새끼와 약지손가락도 껴있다. 하지만……. ‘한 번 더.’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망치를 휘두른다. 다만, 이번에는 구도가 조금 바뀌었다. 피하지 않고 덤벼들던 식스가 양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단검을 나란히 모으며 망치의 궤적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찌이이이익-! 망치는 단검과 부딪히기 직전에 보정을 받으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퍼억-! 공간을 무시하며 식스의 발목을 강타했다. 지방층이 적은 만큼 뼈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졌을 게 분명함에도 식스는 아무렇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거군?” 하, 이러니까 뭐 공략 당하는 몬스터가 된 거 같네. ‘한 번 더.’ 망치를 휘두른다. 퍼억-! 한 대를 후려치고. 푸욱. 몸에는 칼자국이 하나 더 늘어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몇 번의 공격을 더 주고받았을까. 비로소 나는 식스를 인정했다. ‘이 여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 본연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오러를 쓸 수 있으며, 칼질 또한 오르큘리스의 단장 만큼이나 매섭다. 퍼억-. 심지어 이 여자는 무지한 타입도 아니었다. 고작 몇 번의 수교환 끝에 흑화 모드에 대한 지식이 활용되기 시작했고. 푸욱-. 판단력도 매한가지다. “이쪽 어깨는 이제 못 쓰겠군.” 이를 증명하듯 식스가 미련없이 왼손으로 쥐고 있던 단검을 땅에 버린다. 어차피 이제 더는 쓸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엘리전이 시작된 후, 이 여자는 내 공격의 대부분을 왼쪽 팔뚝, 어깨로 받아냈으니까. 피해를 한 곳으로 몰겠다는 냉철한 마인드. ‘열 방을 넘게 때려서 팔 하나라…….’ 물론 몸 여기저기가 베이고 구멍이 송송난 내 꼴에 비하면 양반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나는 욕심을 버렸다. ‘적어도… 얘 만큼은 내가 여기서 어떻게든 처리해야해.’ 목표가 간소화되니 한결 머리가 개운해졌다. 그래,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바바리안 전사답게. 퍼억-! 매 순간순간에 모든 게 걸린 듯 집중한다. 언젠가 저 여자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드러냈을 때. 들개처럼 달려나가 물어뜯을 수 있도록. 푸욱. 팔뚝, 살갗, 손목, 허벅지 등. 급소 만큼은 피해가며 처맞던 칼침이 하복부 깊숙이 파고든다. “……!” 씁, 이건 위험한 거 같은데. 지이익. 휘청이는 몸을 하체 힘으로 억지로 잡아내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아니, 정확히는 몇 초가 남았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아직이야.’ 최대한 조급함을 덜어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테니까. 기다려왔던 승부수를 띄울 순간이. 퍼억-! 푸욱-. 그렇게 쉴 새 없이 공방이 이어진다. 아니, 사실 공방이라고 하기에도 웃겼다. 서로가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서로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고 또 공격할 뿐인 순간의 연속. “아까 죽은 성기사.” 말 한 마디 없이 내 몸을 난도질하기 바쁘던 여자가 돌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뭔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많이 친한 자였나?” 왜 그게 궁금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후우우웅-! 일단 한 번 더 무기를 휘두르며 나는 답했다. “아니.” 친하다기에는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렇다면 이해가 안 되는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런 곳에서 죽을 놈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보아온 것은 미궁에서 내비치던 그의 많은 면모 중 일면 뿐. 그렇기에 더욱더 아쉽다. 준과 함께하는 탐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쁘지 않았을 거 같다. 평소엔 죽이 잘 맞다가도, 이단심문관 시절 버릇이 나오면 어딘가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겠지. 무조건적인 지지가 부담스럽긴 해도, 때론 그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었을 테고. 후우웅-! 술자리에서는? 술은 잘 마시는 편일까? 꼭 저런 애들 중에 술만 마시면 성격이 바뀌는 애들이 있던데. 과연 녀석은 어떤 타입이었을까. 후웅-! 모른다. 그 기회를 이놈들이 앗아갔다. 아니, 비단 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푸욱-! 이렇게 허무히 아스라질 삶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인다. 이놈들이 내게서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도록 두지 않기 위해서. 꽈악-! 잘려나간 허벅지 근육에 강제로 힘을 불어넣으며 균형을 잡는다. 휘이익. 그런 나를 반드시 꺾고야 말겠다는 듯, 서슬퍼런 오러가 공기 저항을 무시하며 내 배때기를 향해 날아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캐릭터에게 깃든 행운이 피해를 차단합니다.」 마침내 기다려왔던 순간이 찾아왔다. 툭. 투명한 장막에 부딪치기라도 하듯 허공에 멈춰서는 단검. ‘그래, 드디어 터진 거구나.’ 가챠본의 이능 [확률적 보복]이다. 패시브는 액티브 스킬이 봉인됐든 말든 작동을 하니까. 「입은 피해의 15%를 적에게 반사합니다.」 좌측면에 생성된 스켈레톤이 식스를 향해 단검을 휘두른다. 그것도 평범한 단검이 아니라. 식스의 오러와 똑같은 색상의 오러가 이글거리는 단검을. 타닷. 이에 공격일변도로 덤벼들던 식스가 얼른 자세를 갈무리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이전에도 몇 번은 봤던 장면이었다. 흑화 모드를 켜기 전에도 [확률적 보복]은 꾸준히 터졌고, 식스 저 여자는 재수없을 정도로 날렵하게 반격을 회피했다. 하지만……. 씨익. 오랜만에 긍정적인 징조다. ‘흑화 모드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네?’ 그랬다면 저런 순간적 판단을 내렸을 리 없다. 흑화 모드의 회피 불가 보너스는 패시브에도 확실하게 적용이 되니까. 바로 이렇게. 찌이이익. 소환된 스켈레톤의 단검이 허공을 가른 즉시. 허공에 생겨난 균열이 단검을 뒤삼킨다. 그리고 머지않아. 푸욱-! 공간을 초월하며 식스의 몸을 꿰뚫는다. “크윽.” 정말이지 오랜만에 저 강철 같은 여자에게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니미럴.’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그게 허벅지에 꽂히냐.’ 만약 목이나 심장, 미간 같은 곳에 꽂혔다면 그 즉시 게임 끝이었을 텐데.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나, 나는 미련을 버렸다. ‘애초에 이럴 거라고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수정 동굴에서 만났던 한스 A부터 시작해 수 많은 적들과 맞부딪쳐왔다. 그리고……. ‘그래, 오히려 이게 내 마지막답지.’ 그때마다 날 승리로 이끈 것은 플랜 B였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준비했던 대로. 타닷. 승부수를 던질 시간이다. 푸우우우웃-! 앞으로 대시하며 입에 차있던 핏물을 식스의 면상에 토해낸다. 시체골렘의 [산성체액]은 더 이상 없지만. 그래도 시야는 가릴 수 있을 테니까. 후우웅-! 핏물을 뿌리는 것과 망치를 휘두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이뤄진 일이었다. 시야각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일격. 그러나 식스는 궤적이 보이기라도 하듯이 어깨를 내밀었다. 이미 작살이 나서 덜렁거리는 예의 그 어깨였다. 아주 그냥 팔 한 쪽으로 뽕을 뽑는구나. 퍼억-! 망치가 어깨를 내려친다. 휘익-! 그 와중에도 여자는 단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푸욱-! 하복부를 깊숙히 파고드는 단검. 스윽. 통증을 무시한 채 기다렸다는 듯 팔을 앞으로 뻗는다. 평소에는 방패를 차고 있던 팔이자, 아까 손을 당한 뒤 축 늘어진 채로 쓰지 않고 있던 그 팔. 식스의 눈매가 굳었다. “……!” 오, 그래 너도 이건 예상 못했던 거구나. 지금까지 안 쓰고 참은 보람이 있네. 툭. 이내 손끝이 식스의 목에 닿은 즉시. 꽈악-. 나는 검지와 엄지, 그리고 중지를 사용해서 목을 세게 움켜 쥔 뒤. 콰직-! 이 상황에도 크게 동요가 없는 상판데기에 이마를 냉큼 박았다. 그리고……. 콰앙-! 관성에 의해 쓰러지는 식스의 몸을 붙잡는 대신 짓누르듯 그 위에 포개어졌다. 푸욱-! 옆구리가 불타는 거 같았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칼빵을 꽂은 거야? 후웅-! 마운트 자세에서 짧게 고쳐 잡은 망치를 내리친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허… 미쳤네 진짜.’ 상체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반사신경으로 목만 움직여서 망치를 피한 것인데……. 놀랍긴 하지만,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근거리라고 해서 회피 불가 보정이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니니까. 콰직-! 머리를 향해 내리친 망치가 허공을 관통하며 식스의 발을 짓이긴다. 푸욱-! 그 대가로 옆구리에 칼침이 하나 더 늘었다. 일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 힘을 내서 한 방 내리쳤다. 콰직-! 이번엔 타격지가 제법 좋았다. 망치가 손목을 제대로 내리꽂았는지, 저 여자가 어느 순간에도 꽉 쥐고 있던 단검이 튕겨져 하늘을 날았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좋아, 그럼 이제 무기는 없고.’ 반격 걱정을 버리고서 재차 망치를 내리친다. 콰직-! 콰직-! 콰직-! 신묘한 움직임으로 세 번이나 목을 틀어 머리를 보호한 식스였지만, 네 번째부터는 달랐다. 그야 이번엔 정수리에 제대로 들어갔거든. 콰직-! 뇌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며 발작을 하듯 굳는 몸. 다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망치를 내리쳤다. 더 이상 회피 불가 보정은 터지지 않았다. 이 괴물 같던 여자도 뇌진탕이 제대로 온 상태에서 목만 움직여 피한다는 묘기를 보여줄 수는 없었던 모양. 콰직, 콰직, 콰직-! 그렇게 세 번을 더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고. ‘한 번 더.’ 네 번 째 일격을 준비하며 망치를 들었을 때. 살과 뼈가 짓뭉개지고 피범벅이 된 얼굴 사이로 식스의 눈이 보였다.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다. 수 많은 적들의 머리통을 쪼개봤지만, 그 중에서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 곤경에 처한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 평온한 눈. 그러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졌다.” 허, 쿨한 거 보소? 목숨 구걸을 할 여자처럼 보이진 않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니, 아… 라프. 도니아······.” 나는 있는 힘껏 망치를 내리쳤고. 콰직-! 섬찟한 타격음과 함께 아래 깔린 식스의 몸이 정지했다. “허억, 허억, 허억….” 가파르다 못해 턱끝까지 차오른 호흡. ‘정말… 죽은 건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만큼 강적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쉴 수는 없겠지. 스윽. 멍하니 호흡을 고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에르… 웬, 이제 됐으니 [정령화]를—.” 어서 해제하라고. 그렇게 말을 하려던 순간. [아저씨—!!!!]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라도 온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번지며 몸이 휘청인다. ‘이런 씹….’ 당장 일어나야 하는데. 아직 해치워야 할 놈들이 많은데. 이대로 잠들면 또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는데. 스르륵. 눈이 감긴다. *** 「캐릭터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령화]가 해제됩니다.」 「심연의 잔재.」 「유지 시간에 비례해 캐릭터에게 반동이 찾아옵니다.」 「유지 시간 318초.」 「3,180초 동안 캐릭터의 모든 내성 수치가 50% 감소합니다.」 「3,180초 동안 캐릭터를 대상으로 한 모든 치유 및 재생 효과가 90% 감소합니다.」 「3,180초 동안 캐릭터······.」 428화 얼음처럼 (3) 장미기사단의 식스 로즈. 그녀가 전투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멀리서 포착한 사내, 리갈 바고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병신 같은 년. 자신 있다고 혼자 맡을 수 있다 나댈 때는 언제고.’ 그는 전투가 시작된 후로부터 내내 둘의 전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야 식스가 승리한다면, 그 여자가 저 바바리안 놈을 죽이기 전에 막아야 했으니까. 저놈에게 평온한 죽음은 사치다. 따라서 [권속화]를 통해 노예로 만들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만약 운이 없어 그 전에 죽는다면 영혼이라도 흡수해서 능력치를 올릴 생각이었고. ‘뭐, 차라리 잘 됐나? 놈도 마침 쓰러졌으니.’ 전선을 유지하며 대강 싸우는 척만 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가 슬그머니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주시하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빠르게 줄어드는 거리. ‘권속으로 만들어서 역으로 저놈들과 싸우게 만드는 것도 재밌겠군.’ 그런 기대를 하며 나아가던 때였다. “리갈, 바고스…….” 떨림이 묻어나는 작디 작은 음성. 그리고……. 휘이이이이익-! 머지않아 이어진 위협적인 파공음. 캉! 그는 서둘러 등을 돌려 칼로 화살을 쳐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한 명의 요정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네년이 있었지.” 칠강의 일원 중 하나. 혈령후,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스릅. 리갈 바고스는 습관처럼 입술을 핥으면서도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어째선지 볼 때마다 오래전에 어디선가 봤던 얼굴 같단 말이지.’ 물론 그에게 중요한 의문은 아니었다. *** 현실은 이야기 속 비극과는 다르다. 그 증거로, 그날은 비가 오지도 천둥이 치지도 않았다. 혁명이 시작됐던 날도 아니었고, 별도 뜨지 않을 만큼 캄캄한 밤조차도 아니었다. 그날은, 어느 날과도 같던 평범한 오후였다. [에르웬, 자꾸 그렇게 사고치면 무서운 바바리안 아저씨가 와서 이놈 할 거야?] 어머니는 평소처럼 그녀를 혼냈고. [허허, 그만 하시게. 이쯤하면 알아들었을 테니.] 아버지는 자상했다. [으아아아아아!] 어린 동생은 시도 때도 없이 울었고. [다리아, 얘는 또 어디를 간 건지…….] 장난꾸러기인 언니는 어제 새벽에서야 들어와 아직까지도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모든 게 평범했던 하루였다. 똑똑.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누구시오?] 집안일을 하던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현관으로 나갔고, 그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요, 용인……? 대체 왜 용인이 이곳에… 커헉-!] [명성이 필요한데, 요정족이 제일 죽이기 쉬울 거 같더라고.] [꺄아아아아아악!] [미, 미리아네! 애들을 데리고 도망쳐!] 아버지가 그자를 막는 사이, 어머니는 우리 세 자매를 챙겨 도망쳤다. 그러나 멀리 가기도 전에 그자에게 따라잡혔다. 그리고……. [부탁할게……. 내 아이들만이라도 데리고 도망쳐 줘.] [……알겠습니다, 누님.] [고마워… 착한 내 동생.] 세 자매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치던 외삼촌에 의해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 아버지에 이은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자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날 그렇게 죽은 사람의 숫자가 천 명이 넘었으니까. 언니가 있었고.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아가씨가 자네 다음으로 많은 운명을 타고났더군.] 언니가 죽었다. [큰 언니는… 이제 없는 거야?] 자신 때문이었다. 동생과의 관계가 그렇게 멀어졌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내 말 들어라. 이제 내가 네 보호자니까.] 위험할 때마다 모든 걸 다 바쳐서 지켜준 사람. 무너질 것 같을 땐 손을 뻗어 일으켜주었던 사람.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래, 비요른은 죽은 거군.] 언니에 이어 그마저 자신을 떠나갔음을 깨달은 그 순간. 에르웬은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나는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가. 내가 겨우 손에 넣은 작은 행복은, 왜 이리도 쉽게만 부서져 가는가.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약하니까. 지켜져야 할 존재니까. 그들은 나를 지켰는데, 나는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으니까. [일족의 순혈의 힘을 얻는 과정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며, 원한다고 무조건 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강해지고자 했다. 이제 지킬 것이 없으니. 앗아간 자들에게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빼앗기는 고통을.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 그런 어두운 감정은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그 힘으로 복수를 행했다. 피에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덜덜덜덜……. 손끝이 떨린다. “리갈, 바고스…….” 이대로 있으면 또 빼앗기고 만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온몸이 덜컥 굳는다. 그 시절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건만, 무력하게 빼앗기기만 했던 그 나약한 본질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털썩- 그래선 안 되겠지. 또 그렇게 후회를 할 바에는……. [아저씨—!!!!] 죽는 게 나으니까. 지이익, 시위를 당기고. 퉁. 시위를 놓는다. 휘이이이이이익-! 어떠한 이능도 담기지 않았음에도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화살. 캉! 찔러 넣은 검을 회수한 놈이 화살을 쳐낸다. 그리고 그 즉시. “…그래, 네년이 있었지.” 두려움이 각인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타닷. 그간의 성장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휘익-! 활이 아닌 단검을 휘두른다. “궁수가 칼로 덤빈다고?” 그야 정령의 힘은 이제 쓸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이곳에 비요른 얀델이 있으니까. 거리를 벌리면서 싸우는 궁수의 싸움법은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캉-! 단검이 놈의 검과 맞부딪치기 무섭게, 몸을 회전하며 연격을 꽂아넣는다. 탓! 생각보다 매서운 일격이었던 듯 급하게 지면을 박차며 물러나는 놈. 좋아, 일단 놈을 밀어내고 아저씨 옆자리는 확보했다. “뭐야, 너…….” 에르웬은 상체를 낮추며 짧은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이전에 언니에게 배운 기본 자세였다. 그때는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냐고 징징거렸는데. [말했잖니. 활이 없어도, 정령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너는 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해.] 새삼 느껴진다. 나는 정말 지켜지기만 할 뿐이었구나.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빌어먹을 연놈들.” 놈이 짧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달려들었다. 에르웬은 다가오는 그를 보며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마지막까지 움직임을 관찰했다.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후우…….” 정수의 이능은 쓸 수도 없다. 아저씨의 싸움을 돕기 위해 순찰병 에르테스의 체화 이능 [조화]를 사용해 영혼력을 자연력으로 치환시켜버렸으니까. 덕분에 자연력이 살짝 남기는 했지만, 이는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한 양뿐. 남은 것은 이제 정말로 이것밖에 없다. ‘단검 하나.’ 언니에게 배운 단검술. 그마저도 아멜리아 같은 근접 계열의 탐험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겠지. 평생 검을 휘둘러온 탐험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단검에 힘을 불어넣는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아저씨는…….” 아니, 사실 아저씨도 아니지. 나이도 동갑인 데다가, 이제 험상궃은 얼굴도 아니니까.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비요른 얀델은 내가 지켜.”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 포기하면 편해. 특히 인터넷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던 유행어. 자학적인 뉘앙스가 좀 불편하긴 해도 말의 내용 자체에는 오류가 없다. 「리갈 바고스가 [공포각인]을 시전했습니다.」 포기를 하면 편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 받는 일도 없듯이. 내가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빠르게 선을 긋고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래, 마치 바로 지금처럼. 「강인한 정신력.」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공포각인]에 저항합니다.」 짐을 내려놓는 순간, 더 없는 편안함이 찾아온다. 귀찮게 하던 잡음이 멀어지고, 괴롭히던 통증을 대신해 따스한 어둠이 내 몸을 감싸안는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편안함. 때로는 찬란한 빛 속보다 이곳이 편한 사람도 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나도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영웅을 동경하던 평범하디 평범했던 꼬맹이. 「리갈 바고스가 크게 포효합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지지않고 더욱더 크게 포효합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히어로물이 싫어졌다. 그야 멍청하지 않은가? 어째서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되는데? 그 의문과 함께 내 삶의 방식은 바뀌었다. 좀 더 편해졌고, 강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수라각]을 시전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 「에이트 로즈를 처치하였습니다.」 대체 그건 또 언제부터였을까.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5% 미만입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캐릭터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의문이 시작됐다. 「티타나 아쿠라바가 동료를 구해야 한다며 소리칩니다.」 「페리톤 에리아보스티가 [구원]을 시전했습니다.」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대적하는 어둠]을 시전합니다.」 「악신의 개입으로 신성 주문이 효력을 잃습니다.」 어쩌면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오며 생긴 정신적 결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멜란드 카이슬란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이동합니다.」 「앤 파르벨라가 전선을 이탈해 기사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강력한 행운의 일격.」 「앤 파르벨라를 처치했습니다.」 「연인을 잃은 악신의 사제가 크게 분노합니다.」 더 이상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 목숨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까지도.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살점공물]을 시전합니다.」 「오른팔을 대가로 다음 주문의 위력이 5배 증가합니다.」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시체꽃]을 시전합니다.」 욕심이 생긴다. 「멜란드 카이슬란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그 욕심이 나를 상처입힐지라도. 더 이상 겁먹고 외면할 수 없을 짙은 욕망. 「강력한 불행.」 「징벌 - 등가교환 발동.」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입힌 피해의 50%를 돌려받습니다.」 근데……. 「죽음을 직감한 악신의 사제가 절규하며 증오의 말을 토해냅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었더라?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살점공물]을 시전합니다.」 「왼팔을 대가로 다음 주문의 위력이 5배 증가합니다.」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살점공물]을 시전합니다.」 「양쪽 눈을 대가로 다음 주문의 위력이 5배 증가합니다.」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살점공물]을 시전…….」 「…….」 소리가 멀고, 통증은 무디다. 주변은 어둡고, 쓸쓸하다. 「보거스 라이치몬트가 [처단자]를 소환합니다.」 「라비예니아스토로우스가 큰 피해를 입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스벤 파라브가 상태 이상 [공포]에 빠집니다.」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 「강인한 정신력.」 「스벤 파라브가 [공포]에 저항합니다.」 「스벤 파라브가 전선을 이탈해 처단자의 공격을 방어했습니다.」 「스벤 파라브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서 도와달라 소리칩니다.」 기억을 돌이킨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깊은 고민을 끝마치고 선택합니다.」 「처단자가 아닌 리갈 바고스를 공격합니다.」 「스벤 파라브가 경악합니다.」 내가 잊은 것이 무엇인가. 「처단자가 날뛰기 시작합니다.」 「스벤 파라브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츠온 이리번이 사망했습니다.」 「리리스 마로네가 주먹을 꽉 쥐며 결심합니다.」 「리어드 애쉬드가 리리스 마로네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내젓습니다.」 분명 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리어드 애쉬드가 7등급 정신 마법 ‘사고가속’을 시전합니다.」 「리어드 애쉬드가 6등급 촉진 마법 ‘마력증폭’을 시전합니다.」 「리어드 애쉬드가 8등급 마법 ‘심장촉진’을 시전합…….」 「…….」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리어드 애쉬드가 마법을 난사합니다.」 「큰 피해를 입은 처단자가 비명을 내지릅니다.」 아오, 머리 아파. 「일레븐 로즈가 [절대적 절단]을 시전했습니다.」 「푸타 리커번이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믿기지 않는 반격.」 「일레븐 로즈를 처치하였습니다.」 이대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떻게든 생각을 이어나간다. 「나인 로즈가 [절대적 절단]을 시전했습니다.」 「푸타 리커번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믿기지 않는 반격.」 「나인 로즈를 처치하였습니다.」 「푸타 리커번이 사망했습니다.」 그렇게 잊은 것에 대해 한참이나 떠올리던 때였다. 「티타나 아쿠라바의 영혼력이 영혼력이 부족해 스킬이 취소됩니다.」 「마누아 레벨레스가 [철권]을 시전했습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뒤로 크게 밀려납니다.」 「처단자가 [대지진]을 시전합니다.」 쿠우우웅-! 「캐릭터가 낙석 피해를 입었습니다.」 주변이 크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0%에 도달했습니다.」 「카운트 다운을 시작합니다.」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93/49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90/49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87/496)」 뭘까 이건. 「페리톤 에리아보스가 희생을 결심합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희생을 결심합니다.」 「위대한 관조자가 그들의 숭고한 의지에 미소 짓습니다.」 모르겠다. 「멸악.」 이제는 어찌 되든 좋을 것만 같은 기분. 「반경 내의 모든 악 속성 캐릭터 및 몬스터가 큰 피해를 입습니다.」 「처단자가 소환 해제됩니다.」 「페리톤 에리아보스가 사망했습니다.」 「벤자민 오르먼이 사망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리어드 애쉬드가 마법을 난사합니다.」 「써틴 로즈를 처치하였…….」 정신이 무뎌지고. 「리어드 애쉬드의 마력이 소진되었습니다.」 「뒷일은 부탁한다며, 리어드 애쉬드가 미소 짓습니다.」 찾아온 정적 속에서. 「리어드 애쉬드가 사망했습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잔상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그올드 알디디가 스벤 파라브를 향해 이동합니다.」 「스벤 파라브가 고개를 저으며 치료를 거절합니다.」 눈을 질끈 감는다. 「그올드 알디디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마누아 레펠레스가 [풍압]을 시전했습니다.」 「그올드 알디디가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마누아 레펠레스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눈을 떠야 하는 것을 알지만.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볼멘 소리가 튀나온다. 「그올드 알디디가 이동합니다.」 할 만큼 했잖아. 「그올드 알디디가 이동합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거잖아. 「그올드 알디디가 이동합니다.」 그런데……. 「그올드 알디디가 멈춰섭니다.」 대체 왜. 「그올드 알디디가 [수혈]을 시전했습니다.」 두근-! 「캐릭터가 회복됩니다.」 「캐릭터가 회복됩니다.」 「캐릭터가 회복…….」 어딘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식어가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1% 이상 회복됐습니다.」 「카운트 다운을 종료합니다.」 그 따스함에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두근-! 그래, 늦어도 이미 한참 늦은 거구나. 「캐릭터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중간에 그만두기에는. *** 눈이 뜨여진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디디 영감이었다. “깨, 깨어났는가……. 다행… 다행이야…….” 영감은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긴 채. 스으윽. 시선이 내려간다. “영감…….” “아, 이거… 말인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조금 다쳤네.” 디디 영감이 감추듯 손바닥으로 복부를 덮는다. 무의미한 행위였다. 그런다고 감춰질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어서 치료를 해야—” 멍하니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디디 영감이 말을 끊었다. “불가능하네.” “……?” “바위에 파묻힌 자네를 구하는 게 마지막이었어. 이제 포션도 없지 않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왜 나를…….” “파라브 경이… 말하더군. 자기는 버틸 수 있으니, 자네부터 살리라고.” 디디 영감이 웃었다. “다들 아는 게지. 자네가, 죽으면 끝이란 걸.” “…….” “이보게, 얀델…….” 이내 디디 영감이 피를 토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하나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 “우리의 죽음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자네뿐이네. 자네뿐이야. 나는 할 수 없을 걸세. 그러니까…….” 납득은 할 수 없었다. 무의미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개똥 밭에 굴러도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네는, 살아남아야 하네.” 디디 영감은 말한다. “자네는… 거인이지 않은가.” 거인. 수정동굴에서 혈전을 벌이고서 얻은 내 이명. “자네밖에 없는 거야.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이들의 짐까지 들고서도, 나아갈 수 있는 건…….” “영감, 나는 거인 같은 게….” “약한 소리 말게. 자네는 할 수 있을 테니까.” “…….” “내가… 손녀딸의 복수를 하고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살던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지 않은가. 자네를 살리기 위해….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온다. “그러니까…….” 마치 믿음이 만근의 바위가 되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 “누가 뭐래도… 자네는 거인이야.” 디디 영감의 생명이 아스라진다. 꽈악. 주먹에 힘을 불어넣으며 금방이라도 토해낼 거 같은 약한 소리를 참아낸다. 나는 거인 같은 게 아니라든가. 그저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든가. 왜 나한테 그런 걸 시키려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까지 일지만. 꾸욱 참아낸다. “……걱정 마라.”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은 그런 게 아닐 테니까. 그 어디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말한다. “네가… 아니, 너희가 바랐던 모든 것을 전부 내가 대신해서 이루어 내겠다. 믿어도 좋다. 내가… 이 전사의 심장에 대고 맹세하겠다.” 굳건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내가 과연 저 맹세를 지킬 수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사실 속으로는 의심이 가득했다. 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그것참… 마음이… 놓여……….” 그것이면 족하다는 듯 웃으며 눈을 감는다. “역시… 자네는… 거인이… 될 거야…….” “뭐라는 거냐. 아까는 이미 거인이라 하더니…….”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였다. 그렇기에……. 스윽. 몸을 일으킨다. 내가 기절한 동안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쓰러져 있다. 얼음 파편과 바위에 짓눌린 시신도 있으며, 공터 한 구석엔 거대한 괴물이 쓰러져 있다. 그 주변으로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다. 정상적으로 서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해 오직 여섯 명뿐. 카칵-! 레펠레스라는 이름의 빡빡이 권투사와 놈과 대적 중인 아멜리아. “바고스 님! 바바리안이 깨어났습니다!” 노아르크 측 후열 라인 중 하나던 이능술사. 그리고……. “보지 말고 이년부터 죽여……!” 검을 휘두르는 용살자. 성치 않은 몸으로 단검 하나만을 든 채 놈을 상대 중인 에르웬. “아, 아저씨……!” 이능술사의 외침을 듣고서야 내가 깨어난 것을 인지했는지, 에르웬의 고개가 움직인다. 결코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전투 중 한눈을 파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까. 「케일 엘바드 제네거가 [땅끝가시]를 시전했습니다.」 이능술사의 손에서 흑색의 창이 쏘아진다. 데드우드에서 메스 텔레포트를 시전하던 중에 마이트 밀리언을 즉사 시켰던 예의 그 2등급 스킬. “……!” 뒤늦게 기습을 감지한 에르웬의 동공이 커진다. 또한 이와 동시에 숱한 전투를 겪은 전사의 머리는 또렷하게 인지했다. 에르웬은 저것을 피하지 못한다. 미래 예지와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트럭에 치이면 사람의 몸이 날아가는 것처럼 당연하게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우우우우웅-!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스윽. 발목이 굽혀지며 대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 몸이 덜컥 굳는다. 어째서일까.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준비는 모두 끝났는데. 두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것만 같다.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로는 생각한다. ‘저걸 막으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분명 반동도 왔을 텐데. 지금 몸 상태로는 한 방도 못 버티고 즉사하는 건 아닐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돌연 머릿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재생됐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 전에 재회했던 한스 A의 목소리였다. [아니, 누구보다 자네가 지키고 싶어 했던 동료라면.] 어쩌면 한스 A의 말은 옳았을지 모른다. 벌써부터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떨 거 같나?] 그도 그럴 게, 내가 죽으면 디디 영감은 뭐가 돼? 준은? 그 외에도 다른 대원들은? 모두가 희생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해서 달라선 안 된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모두를 위한 길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지이익. 그래서 에르웬이 죽는 걸 그냥 보라고? 그럼 다리아는 어떻게 되는데? 나한테 보호자가 되어달라면서 죽었던 그 여자는……? 까드득. 머리가 복잡하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기에, 더욱더 선택이 어렵다. 아무렇게나 만지작거리다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꽈악. 목을 조여온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이제 나도 몰라.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다. 그러니까……. [역시… 자네는… 거인이… 될 거야…….] 마지막까지 날 믿어준 디디 영감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게다가 영감이 말했던 거인이라면. ‘나 하나 안전하자고 몸을 사리지 않을 테니까.’ 멈칫했던 발에 힘을 불어넣는다. 잠깐의 주저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육신. 솨아아아아아. 돌풍이 불어오고. “……!” “……!” 에르웬과 나의 시선이 교차한다. 왼쪽으로는 놀란 표정의 용살자가 보이고. 카칵-! 아멜리아는 싸우느라 바쁘다. 그러한 찰나 속에서. 후우우우우웅-! 나를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흑색의 창. 다만 이를 지켜보는 내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포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정신만 바짝 차리고 급소만 피하면, 이 몸으로도 한 방을 버텨낼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정령화]를 시전했습니다.」 ……어?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캐릭터에게 ‘계약’을 제의합니다.」 에르웬과 맞닿은 살결을 통해 익숙한 감각이 전이되기 시작했다. 429화 얼음처럼 (4) [정령화]가 사용된 즉시. 「캐릭터의 육신에 바람의 정령이 깃듭니다.」 내 피부 위로 반투명한 바람이 감돌기 시작한다. 대화는 커녕, 눈짓도 주고 받을 수 없었으나 에르웬이 뭘 노리는 건지가 전해졌다. 「모든 피해에 회피 보정이 부여됩니다.」 확률으로 발동하는 회피 보정. 참고로 이 회피 보정은 마법 피해로 분류되는 공격에 한해 회피 확률이 최고치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모드 자체에 이런 조건이 붙었지만. 「받는 마법 피해가 2배 증가합니다.」 이것 때문에 마법사나 이능술사를 상대할 때 바람 모드를 켜지 않았다. 그야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했으니까. 50%의 확률로 작동하는 회피 능력? 말은 좋지만, 맞았을 때 두 배의 딜이 들어오게 되면 게임 특성상 더 큰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휘이이익-! 이미 동전은 던져졌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두근-.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 휘이이이익-! 어쩌면 모두의 명운이 걸렸을지 모르는 찰나 속. 질질 끌 것도 없이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캐릭터가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내 몸을 관통할 기세로 날아들던 [땅끝가시]가 돌풍에 밀려나듯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궤적을 비튼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을 터트리며 천장에 박힌 흑색의 가시. “……!” 심장이 크게 내려앉는 듯한 탈력감과 함께 온몸을 휘감던 바람이 사그라든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자연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정령화]가 해제됩니다.」 그래, 딱 이것 정도만 남아있던 거였구나. ‘…생각은 나중에.’ 에르웬의 몸을 안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한 바퀴 굴러 일어난다. “비요른···.” 응? 웬일로 아저씨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가 낯설지만, 깊이 의문을 이어나가진 않는다.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니까. “힘들겠지만, 저쪽에 이능술사를 상대할 수 있나? 맡고만 있어도 된다.” “…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바통터치는 끝났고. “네놈······!” 자세를 잡고 몸을 돌리기 무섭게 방패 너머로 충격이 전해진다. 카칵-! 용살자, 리갈 바고스. 내게 처음으로 동료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준 존재. 카칵-!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기세를 담고서 휘둘러지는 칼을 받아내며 생각한다. ‘눈물이 날 만큼 기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간절히 기다려온 순간이긴 했지만,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걸 잃어야 했으니까. “네놈은, 네놈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질긴 거지?” “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네 새끼가 할 말은 아닐 거 같은데.” “매듭을 지어주마!” 놈의 칼에 힘이 실린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스스로를 태우며 휘둘러지는 칼. 그 원동력이야 빤하다. 나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지만, 본인부터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려면 나를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카칵-! 현재 구도는 간단하다. 죽다 살아난 에르웬이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저 멀리 있는 이능술사를 마크. “에밀리! 그놈은 신경 안 써도 되겠지?” “……당연한 소리를.” 아멜리아는 빡빡이 레펠레스와 접전을 벌이는 중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쓰러졌다. 물론 그중엔 아직 숨이 붙은 자들이 있겠지만, 이들도 그저 끈을 잡고서 버텨내고 있을 뿐. 당장 싸울 기력은 없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카칵-! 이 싸움에 길었던 승부의 승자가 정해질 터. 카칵-! 방패에 힘을 주며 칼을 밀어낸다. 반동으로 내성 수치가 작살이 났어도, 근력이 줄어든 건 아니니까. “······!” 가뿐한 손짓에 세 걸음을 물러나는 놈. 몇 번이나 칼을 받으며 놈의 몸 상태는 대충 확인했으니, 이제 내 차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시한다. 암만 소리를 질러봤자 액티브로 분류되는 [야성분출]은 활성화가 되지 않지만……. ‘이제는 이게 없으면 영 힘이 안 난단 말이지.’ 후우우우웅-! 조상신의 힘을 담아 망치를 내려친다. 타닷. 놈이 두 걸음 더 물러나며 피하더니, 망치를 휘두르며 살짝 보인 빈틈을 향해 검을 뻗어온다. 확실히 실전을 많이 겪은 놈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판단이 빤하단 말이지.’ 이내 놈의 칼이 내 옆구리에 깊이 박힌다. 반동으로 하락된 내성 수치가 여실하게 느껴지는 부상. 푸욱-! 사실 정 피하거나 막지 못할 일격은 아니었다. 다만, 그랬다간 승부가 더 길어졌겠지. 휘익. 검이 옆구리에 박힌 즉시, 기다렸다는 듯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목표지는 놈의 모가지. 근력 차가 명확한 만큼, 한 번 잡기만 하면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한데 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타닷. 놈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어찌나 급했는지 챙길 것도 챙겨가지 못한 채. “이건 두고 가는 거냐?” 나는 이를 악 문채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굳어 있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검 선물은 됐는데.” “······.” “거, 검사라는 놈이 왜 자꾸만 검을 잃어버리는 건지.”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차주자 놈의 얼굴이 굳었다.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해 레이저라도 나올 거 같다. 하지만, 행동은 눈빛과 다르다. 검을 잃었단 사실 때문인지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는 놈. 탓. 이내 놈이 대시했다. 내가 아니라 옆쪽으로. 이번에도 심리가 훤히 읽혔다. ‘바닥에 있는 검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그때 미로에서도 이랬다. 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미샤한테 달려들어 검을 뺏어갔었지. 이건 우리 물건이라며, 로트밀러가 직접 몸으로 검을 받아내고 [보물창고] 안에 검을 집어넣기 전까지 나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최악과 차악. 그때는 놈이 선택지를 제시하면, 우리가 그것들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었다. 고르는 건 내가 아닌, 바로 이놈. 타닷. 놈이 발을 뗀 즉시, 나 역시 앞으로 대시한다. “······!” 초 단위로 좁혀지는 거리에 흔들리는 놈의 동공. 이대로 검을 챙기는 게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인데……. 후우우웅-! 머리 위에서 휘둘러지는 망치를 보며 놈이 내린 선택은 너무도 한심했다. 타닷. 녀석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포기하고 땅 위를 구른다. ‘페이크 걱정은 괜히 했나?’ 나였으면 검을 줍는 척하다가 몸을 틀어서 허를 찔러왔을 텐데. 뭐, 쟤는 검사니까 어쩔 수 없나? 음, 그래도 그렇게 검이 중요하면 어깨 하나 정도는 포기하고 검을 챙긴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뭔가 따로 노리는 게 있는 걸지도.’ 놈의 판단이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따면 거짓말일 터이나, 방심보다는 경계심으로 마음을 무장한다. 그야 이러는 쪽이 훨씬 나을 테니까. 적을 업신 여기다 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후우우우웅-! 너무 가까이 붙지 않도록 신중하게 망치를 휘두른다. 타닷-! 놈이 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과정이 수어번 반복됐을 때. 툭. 마침내 놈의 등이 벽에 닿았다. 이와 동시에 놈의 용눈깔이 길게 확장됐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 벽은 생각도 안 했던 건가?’ 이 새끼가 노리고 있던 비장의 수? 그 따위 것은 없다. 단지 순간순간 급하게 망치를 피하다가 이곳까지 내몰린 것. 그게 이번 일의 전부다. 콰직-! 이를 증명하듯 위에서 내려친 망치가 놈의 왼쪽 어깨에 명중한다. “으윽···!!” 핏발 선 눈으로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도망치는 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정확히는 허탈하다고 해야 하나? “어깨를 줬으면, 뭐라도 챙겨가야지.” 아니, 이딴 식으로 어깨를 줄 거면 아까 무기라도 챙겼으면 됐잖아? 적의 오판에 기쁘긴커녕 분노가 치민다. 그렇기에······. 꽈악.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벽으로 내던진다. 콰앙! 놈이 입을 크게 벌리며 피를 토했다. “커헉···!” 나는 망치를 한 번 더 휘둘렀다. 타격지는 정수리였으나, 놈은 그 와중에 몸을 옆으로 내던져 피했다. 콰직-! 그 덕분에 완전히 짓이겨진 왼쪽 다리. “아아아아악···!” 놈이 비명을 내지른다.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아까 죽인 식스 그 여자는 머리가 아작나는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지키고 있었건만. 이거야 원, 애새끼도 아니고. “고작··· 너 같은 놈 때문에.” 그래도 놈의 생존 욕구 하나는 대단했다. 질질. 아작난 다리를 끌고 바닥을 기며 내게서 멀어지려는 놈. 방향이 어디인가 하니, 아멜리아와 열심히 격전을 벌이고 있는 빡빡이가 있는 곳이다. 저놈한테라도 의지할 생각인가? 꾸욱. 등을 짓밟아 놈을 멈춰세운다. 그러자 놈도 슬슬 현실을 깨달았을까? “······주, 죽여라.” 이내 놈이 이를 악물며 부르짖듯 말했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구차하게 목숨 구걸은 하지 않는구나. 그랬다면 정말 기분이 나빠졌을 텐데. 콰아앙-! 이 순간에도 열심히 전투 중인 아멜리아 쪽을 한 번 확인한 나는 빠르게 고민을 끝마쳤다. 길게 끌 것 없이 그 말만 해주고 슬슬 끝내자. “리올 워브 드왈키를 기억하나?” “크큭, 크흐흐흐흐······.” 죽음을 각오한 놈은 내 아킬레스건을 찾은 듯 조소를 흘렸다.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설마 그때 그 반쪽짜리 마법사놈을 말하는 거냐?” 미궁에서 시체도 챙겨서 나오지 못하고. 유품 만을 몇 개 두고서 장례를 치렀던 그날. 그날 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이 순간이 오면, 반드시 놈의 면전에 대고 말해주겠다고. 그러니까······. “너는 듣기만 해.” 망치로 놈의 남은 어깨를 박살낸 뒤 말한다. “리올 워브 드왈키는.” 거진 3년에 가까운 시간. “그날 미로에서 우리 모두를 구해냈던 그 반쪽짜리 마법사는.” 오래 걸리기도 참 오래 걸렸지만. “지지 않았어.” 놈에게 지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널 죽이게 됐으니까.” “······.” “녀석이 이긴 거라고, 알겠어?” 놈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 그런 건가? 나는 놈을 뒤집은 뒤 발끝으로 턱을 잡고는 강제로 고개를 끄덕이게끔 만들었다. ‘후,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실감은 잘 나지 않지만, 그런 듯하다. 아무튼, 그럼 됐으니까······. 콰직-! 이제 죽어, 새끼야. *** 콰직-! 용살자에 이어, 아멜리아와 힘을 합쳐 빡빡이 권투사의 머리통을 망치로 짓이겼다. 「마누아 레펠레스를 처치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에르웬을 피하느라 온갖 난리를 치고 있던 이능술사 차례였고. 「케일 엘바드 제네거를 처치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적의 대가리가 부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머리가 인지한 즉시. 고된 전투의 열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며,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솨아아아아아아-. 적이 사라진 주변은 폭풍이 그친 듯한 고요했다. 그래서일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끝났구나······.” 마침내 전투가 종료됐다. 그러나 쉴 시간은 없었다. “아멜리아, 너는 혹시 살아 있는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라.” “저, 저도 도울게요…!” “돕기는. 너는 쉬는 게 돕는 거다.” 확인사살은 아멜리아에게 맡기고, 한계까지 기력을 소모한 에르웬은 강제로 휴식을 시켰다. 그리고 나는……. 까드득. 차디 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원들을 수습했다. 숨이 붙어 있는 대원은 부상의 정도를 확인했고, 온기를 잃은 대원들은 감지 못한 눈을 직접 감겨주었다. 참담하단 단어로도 부족했다. ‘스벤 파라브, 멜란드 카이슬란, 리리스 마로네, 티타나 아쿠라바, 라비옌, 제임스 칼라, 베르실 고울랜드, 에르웬, 아멜리아.’ 그리고 나까지. “열 명······.” 이번 원정에서 생존한 대원의 숫자. 그 외에는 모두 죽었다. “얀델··· 네 병의 포션을 찾았다.” 장미기사단과 노아르크 놈들의 시체를 뒤진 끝에 아멜리아가 포션을 찾아왔고, 포션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서 배분했다. “포션이 더 있는지 찾아보겠다.” “고맙다, 에밀리···.” 부상자 모두가 완치에 이르기까지엔 너무나도 부족한 양의 포션. 다만 급한 순서대로 포션을 나눠 복용시킨 덕에 생사를 넘나들던 대원들은 조금씩 회복되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리만··· 정말 우리만 살아남은 거군요.” 정확한 원정대의 피해를 전해 받은 대원들의 눈 아래에 짙은 어둠이 깔린다. 간단한 이유다.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먼저 느끼기에는, 너무 서로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으니까. 안도보다는 울분이 먼저 치솟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앙!!” 마법사 마로네처럼 펑펑 울어재끼지는 않더라도, 양주먹을 꽉 쥐며 슬픔을 버텨낸다. “애쉬드 님은··· 아내분이 기다리신댔어요. 에리아보스티 신관님은··· 자식이 있었고요.” “벤티스 게로드는 언젠가 반드시 심연까지 가보겠다는 꿈이 있었지.” “이리번 씨는 이번 원정이 끝나면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모두···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왜······!” 슬픔이 분노로 변하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얀델 님···, 말해주세요. 우리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왜 여기서 이렇게 다 죽어야 했던 거죠?” 길게 돌아와, 마침내 갖게 된 근본적인 의문. “우리가··· 그 정도로 잘못을 했었던 건가요?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밖으로 나가면 클랜장놈부터 죽여버릴 겁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방법으로는 안 돼요. 이번 일은 제대로 공론화를 해서 항의를 해야 해요. 우리가 이곳에서 어떤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왕가가 껴 있는 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가능하긴 하겠구려. 라비옌은 용인이고, 아쿠라바 당신도 드워프족 내에서 발언권이 제법 있을 터.” “얀델 님도 부족장 후보였다면서요? 에르웬 님도 요정족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고······.” “그래, 분명 네 종족이 전부 모여 힘을 합치면······!” 그들이 감정을 토해낼수록 머리도, 심장도 차갑게 식는다. 나 역시 저들처럼 마냥 분노를 토해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될 테니까. [역시··· 자네는··· 거인이··· 될 거야······.] 디디 영감이 내게 바라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선······. 꽈아악-. 적어도 나만큼은 그래선 안 될 테니까. “얀델 님! 얀델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가만있지 않으실 거죠?” 뜨거운 감정에 몸을 떨어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가만히 있을 거다.” “···네?” “우리가 살 방법은 그것 뿐이니까.” “······!” “카이슬란, 기사인 너라면 알고 있을 테지? 네 종족이 모여서 왕궁에 처들어가봤자 전부 죽을 뿐이라는 걸.” 지금까지 늘 내 편에서 여론을 조성해왔던 카이슬란도 이번 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대답하기 싫다 이거구나. 나는 그냥 마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네 종족이 힘을 합치는 것부터가 무리다. 정말로 우리가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들 전부가 목숨 걸고 함께 싸워줄 거 같나? 종족의 명운을 걸고?”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르니까.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은 꽃밭이 아니라, 차가운 땅 위에서 무엇이든 계산을 하고서 결정을 내린다. “그래도···! 그래도 뭔가 해야죠!” “설령 그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마로네,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기껏 살아남은 목숨을 그딴 식으로 써버리면, 이미 죽은 녀석들이 기뻐해줄 거라고?”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이 마법사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낯설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 가만히 있어야 한다.” “······.” “항의는커녕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 “······.” “본대가 오지 않은 것은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야 하고.” “······.” “비밀병기처럼 8층에서 키우고 있던 노아르크의 병력을 죽인 것도 우리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들을 잡아 죽인 사실을 밝히면 굉장히 큰 전공으로 여겨질 테지만,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도시전설처럼 여겨지는 장미기사단?” 이또한 마찬가지다. 그들과 대적한 것은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만한 업적이 될 테지만. “우리는 그들과 만나지도 못한 게 될 거다.” 그래야만 한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만 알고 있으니까. 변명을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한다면, 우리를 이곳에 보낸 사람들은 알아서 어긋난 조각을 맞출 것이다. 본인들에게 납득이 되는 방향으로. 뭔가 상황이 엇갈려 우리를 뒤쫓던 놈들과 장미 기사단이 맞부딪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저놈들이 운 좋게 살아나온 게 아닐까 하고. “그러면···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요······.” 이내 마로네가 울먹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녀석들은······.” 나는 입술을 씹으며 토해냈다. “그 녀석들은······. 빙하의 눈에서 빠져나온 뒤, 마물들에게 죽은 게 될 거다.” “마물······ 들이요?” “그래, 빙하의 눈을 빠져나오느라 무척 지쳤고, 장비도 버린 와중에 식량도 바닥이 났으니까. 그러니까······. 결코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닐—.” “거짓말이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죽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강했던 사람들이랑 싸웠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이나 생각할 상황이었는데······.” “······.” “그런데도 싸웠다고요··· 우리들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 어느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서. 싸워서 이겼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마물? 마물한테 죽었다고···?” “그만하시오··· 마로네 양···.” “아아아아아악!!” 카이슬란이 마로네를 안아들며 진정을 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스벤 파라브가 나섰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폐쇄까지 겁쟁이처럼 숨어서 버티고 버틴 끝에 우리끼리만 살아나왔다. 그게 세상에 전해지게 될 우리 원정의 결말이 되겠지.” “그렇군요. 확실히 그 방법이 살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단 한 번도 녀석에게서 들어볼 수 없었던, 굳건한 목소리. 그러나 눈빛에 적대감은 존재치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지만,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 눈만 봐도 알겠으니까. 그 짓거리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게 당신이란 것쯤은. ”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자, 이번엔 아쿠라바가 나섰다. “당신,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닌 거죠?” “···물론이다.” “그렇다면, 저는 기다릴게요.” 이내 아쿠라바가 물러섰고, 그다음은 제임스 칼라였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클랜장 그놈과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을 마주 봐야겠지만···.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던, 오늘보다는 나을 테니까······.” 감긴 두 눈으로도 느껴지는 뜨거운 열의. 나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다가가 한 명씩 의사를 묻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모두 끝났을 때. “리리스 마로네.”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제까지······.” “······.”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건데요?” 글쎄, 모르겠다. 다만 그래도 솔직하게 답해보자면. “아주 오랜 시간.” 우리가 칼을 뽑아들 수 있게 되려면 몇 년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렇군요.” 원정 71일 차. 7층 아이스록의 얼음 동굴. 차가운 한기가 지면을 타고 올라오는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기다리면···.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스스로를 불사르는 뜨거운 분노는 아닐지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을 차가운 분노를. “저도… 기다릴래요.” 우리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새겼다. 430화 사자귀환 (1)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후. 아멜리아에게 단검을 빌려 용살자 놈의 배부터 갈랐다. 스으윽-. 수술용 메스로 그은 듯 벌어지는 배. 개복 작업을 끝마친 뒤에는 무덤덤하게 심장을 꺼냈다. 워낙 추운 곳이라 그런지 아직도 싱싱했다. ‘용인 심장은 보통 사람이랑 다르게 생겼네.’ 마치 겉면이 오돌토돌한 열대 과일 같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를 쇠사슬 자국 같은 것도 나있고.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나를 지켜보고 있던 라비옌이 툭 하고 말했다. “사슬 자국은 펜이 건 저주의 흔적일 거예요.” 음, 그래? 아무튼, 그럼 오돌토돌한 건 원래부터 그렇다는 거네? “고울랜드, 보존 마법과 왜곡 마법을 부탁하지.” 이후 꺼낸 심장에 왜곡 마법을 걸은 뒤, 적당한 상자 하나에 넣어서 보관했다. 라비옌은 자신이 관리하고 싶은 듯했지만……. “이건 한동안 내가 갖고 있겠다.” “…왜죠?” “협상의 수단이니까.” “설마… 바로 가져다 줄 게 아닌 건가요?” “그래, 조금 사태가 진정된 후, 당대 태고룡과는 직접 만나서 비밀을 약속 받고 건네 줄 거다. 이놈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가면 곤란하니까.” 조금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라비옌은 순순히 납득했다. “……알겠어요. 제가 가지고 돌아가는 것보단 당신이 돌려주는 쪽이 훨씬 더 많은 걸 받아낼 수 있겠죠. 물론 펜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일은 아닐 테니까…….” “이해해주니 고맙군.”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여기까지. 심장 루팅이 끝난 후에는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주관할 신관은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았지만, 그때 보았던 것처럼 묵념하며 죽은 대원들을 화장했다. 그리고……. 덜컥. 뼛조각을 상자에 담는 것으로 끝. 이후로는 전반적인 루팅을 시작했다. 장미기사단과 노아르크의 정예. 그리고 죽은 아군의 장비……. “대원들의 장비는 모두 챙긴다. 아공간은 쓸 수 없으니 최대한 가방에 쑤셔 넣어라.” 아무튼, 유품이 될 아군의 장비는 모두 수거. “자리가 부족하니 노아르크 쪽 장비들 중에서는 값어치가 있는 것들만 고르고.” 노아르크 장비는 적당히 챙기기로 했다. 그야 빙하의 눈에 오기 전까지 노아르크 놈들을 엄청 죽였잖아? 그 전리품은 우리의 아공간 속에 잠들어 있다. 출처를 물어도 그때 얻은 건지 아닌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장미기사단의 것과 달리. “장미기사단 물건은 따로 모아놔라. 그것들은 엄중히 관리해야만 하니까.” 얘네가 가진 장비나 소모품은 거진 군용 물자다. 따라서 파는 것도 실착용 하는 것도 제한적이다. 그야 이 물건들이 시장에 풀리는 순간, 왕가에도 소식이 전해질 것 아닌가. ‘아니, 돌아가자마자 전리품 정산을 해준다며 주머니를 뒤지기만 해도 계획이 어그러지겠지.’ 100%는 아니지만, 리스크가 존재한다. “일단 군자금은 확실하게 벌었구려….” 군인 출신인 카이슬란은 집단을 위한 예산이 두둑해진 것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뭐, 그러다가도 죽은 전우들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무슨 조울증도 아니고. “얀델,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마시오.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면 되는 것이니.” “뭐라는 거냐. 나는 추워서 콧물이 났을 뿐이다.” 후,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돌연 멈춰 선 걸음을 옮겨, 장미기사단의 사체와 장비가 모인 곳으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단 하나도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지만……. ‘뭘 갖고 있는지 보는 것 정도는 되잖아?’ 혹시 왕가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이나, 중요한 정보 같은 게 얘네 몸에서 나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철저하게 소지품들을 뒤졌다. 보면 볼수록 배가 아파왔다. ‘와, 단검들이 다 미스티움이네. 가죽제는 전부 오우거 가죽이고…….’ 이거를 그냥 두고 가야만 한다고? 어떻게든 잘 숨겨서 가져간 다음에 녹이거나 잘라내서 새장비로 바꾸면 안 되나? 그런 욕심이 절로 기어오른다. 하지만……. “포기하자. 이건.” 1%의 리스크조차 용납할 수 없다. 용살자 놈의 심장이야 빙하의 눈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중 얻었다는 변명을 할 수 있지만, 이 물건은 아니니—. “……응?” 장미기사단의 시체를 뒤적거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반지들은 뭐지?’ 기사단원들의 중지에 끼어진 똑같은 형태의 반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얘네가… 반지를 끼고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역시 아닌 거 같다. 이 식스라는 여자랑 싸울 때, 이 여자는 이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한데……. ‘뭐지?’ 의문을 느낀 즉시 시체들에게서 반지들을 전부 뺐다. 일단 넘버스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럼 마도구인가? “마로네, 고울랜드.”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낀 나는 마법사들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결과값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종속형 마도구에요. 반지를 장착한 순간 실물이 사라지고 영혼에 귀속되죠.” “종속형 마도구?” “그 있잖아요. 6층 대해에서 선박을 소환할 때 쓰는 그 소환 각인. 그게 대표적인 종속형 마도구 중 하나에요.” “그럼… 이 반지는…….” “네. 아공간 반지에요. 그것도 일반 마도학의 수준을 몇 배나 뛰어넘은.” 어쩐지 시체 중에 아공간 반지나 팔찌를 낀 애가 한 명도 없더라니. “보통 이런 종속형 마도구에는 문신 같은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이건 그런 것도 없네요. 보니까 감지 무효화 회로도 새겨진 거 같고.” “그 말은, 왕가에서도 이 아공간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뜻인가?” “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잭팟이 터졌다. *** 이 종속 아공간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들은 게 하나도 없더라도 대박이다. 그야 이 반지가 있으면 장미기사단의 장비를 모두 버리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니까. “전부 챙겨라!” 장미 기사단의 장비를 모두 모아 배낭에 담았다. 그야 이렇게 정리해뒀다가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아공간에 집어넣으면 그 새끼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문제는 아공간이 일곱 개 뿐이라는 건데…….’ 현재 우리의 인원은 총 10명. 3명은 이 반지를 가질 수 없다. 다만, 의외로 아공간 분배는 분쟁이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이번 전투에서 아무것도 못한 제가 받기에는 너무 큰 물건입니다.” 장님 신세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던 제임스 칼라가 기권. “저 역시 양보할게요. 저는 이미 종속형 아공간을 하나 갖고 있어서.” “저도요.” 이미 비슷한 물건을 하나 갖고 있는 아쿠라바와 라비옌은 양보. 그렇게 주인이 정해졌다. 「캐릭터가 거짓말쟁이의 장미 반지를 착용하였습니다.」 「거짓말쟁이의 장미 반지가 캐릭터에게 귀속됩니다.」 착용하기 무섭게 빛을 흩뿌리며 사라지는 반지. “아공간은 어떻게 여는 거지?” “뇌파 인식이요. 아공간을 열겠다고 생각하면 열릴 거예요.” 이야, 왕가의 최신 기술 같은 건가? 앞으로 엄청 유용하겠는데. “자, 그럼 얼추 수습은 끝났군.” 이내 유품 수습 및 전리품 수거가 마무리되고. 「얼어붙은 벽이 녹아내립니다.」 하루가 지나며 밀실 상태가 끝난 즉시, 우리들은 다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장미기사단 놈들의 배낭에서 식량이 나오긴 했지만, 열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탓.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습니다.」 「리리스 마로네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습니다.」 그렇게 몬스터 고기를 최대한 수급하며 내가 향한 곳은 빙하의 눈이었다. 하지만……. “아쉽군요. 이 아래에 있는 물건들까지 다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면, 황도의 저택을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텐데.”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거기 아래에 파묻힌 장비가 대체 몇 개야? 알 수 없지만, 미궁이 폐쇄된 순간 전부 공중 분해 될 것이다. “자, 오늘은 이만하고 여기서 쉬지.” 고기를 수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휴식을 자주 가졌다. 어차피 남은 일자를 전부 굶는다고 죽기까지는 하지 않을 것인 데다가……. 대원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거든. “카이슬란, 괜찮나?”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시오. 나갈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신관도 없고 포션은 네 병 밖에 없던 상황. 모두 목숨은 건졌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몇몇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여실히 남아있다. 에르웬은 MP도 자연력도 다 소진되어, 스킬 한 방 쓸 수 없는 상태고. 멀쩡히 전투 가능한 인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일들을 겪어서일까요? 힘들다는 느낌이 전혀 없네요…….” “아아, 동감입니다.” “평생 어지간한 일들은 다 겪어봤다고 생각을 했는데, 돌이켜 보면 다 분에 겨운 생각이었던 것만 같지요.” 휴식 도중에는 이러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으나, 대체로 미래에 대해서 의논을 나누었다. “클랜은… 바로 만드실 건가요?” “아마도. 하지만 모두 들어오는 건 좀 더 나중이 될 거다.” “하긴… 카이슬란 경은 군부 출신이니까. 쉽게 나올 수 없겠죠.” “카이슬란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우리가 똘똘 뭉치는 것도 이상하니까. 어느 정도 시간을 둬야겠지. 어차피 기다리고 있으면 그쪽에서 먼저 우리를 내칠 테고, 뭉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저기 제가 클랜 문양을 생각해봤는데요.” “우와, 마로네 양은 손재주가 좋으셨군요?” 앞으로 만들 클랜은 물론. 원정 시작부터 지금까지. 타임라인에 따라 시나리오를 쓰며 말을 맞췄고, 어딘가 모순이 생기거나 걱정이 되면 다 함께 의논을 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얀델, 한 가지 걱정 거리가 있어요.” “말해봐라.” “아무리 말을 맞추고 그래도 과연 왕가에서 저희 말을 다 믿어줄까요?” “…….” “우리 모두가 검증 마법에 저항성을 가진 것은 확인이 됐지만, 진실을 가려내는 방법은 그것 하나가 아니잖아요.” 이 부분은 나 역시 충분히 고민했던 것이다. 이들이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을 때. 적어도 조금은 의심이 되어 팩트를 확인하고 넘어가자가 마음을 먹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전에도 말했듯, 왕가 쪽에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그쪽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까.” “네… 보통은 그렇겠죠.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의심할 건덕지를 주는 거니까…. 하지만 그걸 감수한다면요?” “그래도… 상관 없다. 애초에 이번 계획의 핵심은 왕가를 속이는 것에 있지 않으니.” 플랜 A가 가장 베스트이긴 하지만, 플랜 B라고 전부 망한 정도까지는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가 말까지 맞추며 침묵했다는 것 자체가 놈들에게는 하나의 신호다. 그냥 넘어갈 테니, 앞으로 우리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약자의 부탁 같은 거지.” 공작과 후작, 소귀족 연합, 알미너스 상회에 탐험가 길드까지 얽힌 사건이다.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의심해도 확인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확인을 한들 또 무리수를 던져오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 전에 내가 최대한 일을 키울 거니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면 그쪽도 조금 조심을 하겠지. 검증도 않고 내게 귀족 작위를 줬던 그때처럼. 그게 왕가의 일처리 방식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시간 안에 더욱 몸을 키워야 한다. 우리를 건드리는 것보다 눈 감아 주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처럼 보이도록.” “하지만 그러면 더 위험한 거 아닌가요? 우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저쪽도 우리를 경계할 텐데.” “글쎄,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어째서죠?” “우리가 아무리 커져봤자, 왕가 앞에서는 작은 촛불에 불과하니까.” 왕가의 세력은 거대하다. 정상적인 놈들은, 왕가에게 칼을 빼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우리가 놈의 목에 칼을 박을 준비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단 한 번의 미궁행. 그 전까지만 해도 서로 본 적도 없던 초면의 대원들이다. 과연 누가 그들의 복수를 위해 왕가에 대항할 거라고 여길까. 슬픔과 분노는 그저 한순간의 감정일 뿐. 보통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현실적은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에요.” 아쿠라바는 내 말들에 어느정도 납득을 하면서도 최악의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그래도 만약에… 그들이 우리를 화근이라 생각하고 제거하려고 든다면요?” 그 대답은 간단하다. 뭐, 어떡하겠어. 그때는 플랜 C로 가야지. *** 미궁 진입 75일 차.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22 : 10] 그토록 고대해왔던, 미궁이 폐쇄되기까지 고작 4시간도 안 되게 남은 시기. “뭐지?” 베르실 고울랜드가 휴식 중이던 내 옆에 앉더니 툭 뱉듯이 물었다. “저기 얀델 씨, 나리아 양은 악령이었겠죠?”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역시… 그렇겠죠……?” 베르실은 그리 중얼거렸고,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조용히 있었다. 베르실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잠깐의 정적이 있은 후였다. “저… 그럼 얀델 씨는 나리아 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딘가 조심성이 가득 묻어나는 물음. “안타깝게 죽은 동료라 생각한다. 근데… 대체 뭘 묻고 싶은 거지?” “질문을 바꿀게요. 만약 나리아 양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래도 동료로 여길 건가요?” 질문의 의도가 어렴풋이 보이긴 했으나, 일단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이다.” “…악령이라고 해도요?” “어차피 왕가와 적대하기로 한 와중에 그런 걸 신경 쓰는 거냐? 악령이고 뭐고, 나는 상관 없다. 믿을 수 있는 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그렇군요.” 베르실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마디 더 잡담을 나누다가 떠났다. 음, 얘는 대체 뭐가 목적이었던 걸까.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나? ‘쓰읍, 설마 고블린 이 새끼 악령인 게 들킨 거 아니야? 그래서 얘는 내가 걔를 어떻게 할 건지 떠본 거고?’ 꽤 그럴 듯한 가설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약 2시간 뒤, 아멜리아가 나를 따로 불러내기 전까지는. “얀델, 잠깐 얘기 좀 할까 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예전에 네가 맡긴 일 때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맡긴 일이라니?” “스벤 파라브의 뒷조사를 해보라 하지 않았나.” 아, 그거? 확실히 그런 부탁을 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원탁에서 보여준 경솔한 행동들을 보면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으니까. 잘 지켜보며 엄중히 관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밖에 나가서를 말한 거였는데…?” 심지어 뒷조사라는 워딩도 아니었고, 유심히 지켜봐줄 수 있겠냐는 부드러운 요청이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그렇다면 내가 오해한 걸 감사해야겠군.” 아멜리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좋은 패를 지녔음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찾아냈나 보군?” “…궁금하면 직접 두눈으로 확인해라.” 그리 말하며 아멜리아가 허리띠를 풀었다. 갑작스런 돌발 행동이 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아멜리아가 허리띠를 만지작하더니 그 안에서 자그마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이건…….” “기록용 수정구다.” 아니, 그걸 내가 모르겠냐고. 단지 항상 차고 다니던 벨트에 이런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 ‘……관음증이냐고 놀리면 처맞겠지?’ 나는 그런 욕구를 애써 참아내며 아멜리아가 건넨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일단은 이걸 먼저 보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 [……쩌업, 찌걱, 쩌업.] 영상의 시작은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상의에 꽁쳐둔 육포를 몰래 씹어 먹는 스벤 파라브였다. 배신감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이 새끼, 분명 나한텐 꽁쳐둔 육포 같은 건 없다고 했는—.” “조용히 하고 보기나 해라. 곧 나오니까.” “…….” 아멜리아의 훈계 말투에 입을 다물기 무섭게, 영상에 변화가 생겼다. [스벤 파라브 씨.] 등 돌린 놈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한 명의 여성. [히익!] 육포를 먹다 들킨 것에 놀라는 놈.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말을 건 여성은 놀랍게도 베르실이었는데, 스벤 파라브는 어딘가 불편한 눈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 미리 말하는데 육포에 관해선 다른 분들에게 말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시고요. 그냥 잠시 얘기 좀 하자는 것뿐이에요.] [……다음에 하면 안 됩니까?] [저랑 얘기하기 싫단 뜻인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괴, 굉장히 느낌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영문 모를 말을 하시네요.] 베르실은 놈의 표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설마 아멜리아가 지켜보고 있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건가?’ 알 수 없으나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됐다. [아무튼, 그럼 본론만 말하고 짧게 끝낼 게요.] [예? 아, 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저는 그쪽이 악령인 걸 알아요.] 단 한 줄짜리의 문장. “……어.” [……어?] 그 한 마디에 나와 영상 속 스벤 파라브가 동시에 멍한 표정을 내지었다. 그리고……. [……컥! 커허, 컥컥!] [조용히 해요. 저쪽에서 관심을 갖겠어요.] [그, 그래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제가 아, 아, 아, 악령이라니…!] 폭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요. 저도 악령이니까.] 미친, 여기서 커밍아웃을 한다고? [……예? 어, 어… 고울랜드 씨가… 악령…?] 아예 넋이 나가버린 스벤 파라브. 녀석을 보며 고울랜드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말을 한 이유는 간단해요. 당신 성격이라면, 커뮤니티에서 뭔가 말실수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어, 어…….] [이번 원정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할 생각도 하지 말아요.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커뮤니티 게시판이든, 원탁에서든 간에.] 두둥-! 그런 효과음은 없었지만, 나와 스벤 파라브의 귀에는 그런 효과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워, 원탁? 그곳을 당신이 어떻게…….] [그야 저도 그곳 멤버니까 알겠죠? 애초에 당신이 악령인 걸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자, 잠깐만… 거기에 여자가… 여, 여왕?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닌데…….] 횡설수설하며 머릿속을 진정시키던 스벤 파라브가 이내 손가락을 높이 들었다. [서, 설마… 당신이… 여우……?]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영상을 정지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여우였다라…….’ 이번 원정에서의 또다른 수확이었다. ***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따스한 햇살. 탁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후작은 펜을 내려놓고 뜨겁게 우러난 찻잔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포탈이 열릴 때가 됐군.’ 오후 12시까지 5분이 남은 시각. 곧 미궁이 닫히며 텅 비어 있던 차원광장에는 고된 여정을 마친 탐험가들이 가득차게 되리라. 매 달 보는 풍경일 터이나, 오늘 만큼은 그에게도 각별했다. “부디 임무는 성공했으면 좋을 텐데.” 노아르크 측의 핵심 전략 병기이던 천공의 눈.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급조된 서른 명의 원정대. “뭐, 실패 했어도 상관은 없나.” 후작은 이미 두 가지 경우를 대비한 서류를 작성해두었다. 하나는 임무는 성공했지만, 원정대는 생환하지 못했을 때, 다른 하나는 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생황도 하지 못했을 때를 위해 만들어둔 서류였다. 참고로 생환을 염두에 둔 서류는 없었다. 성격이 신중하다 뿐이지,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취미는 그에게 없었으니까. “이제야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란 말이지.” 후작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금 펜을 쥐고서 밀린 업무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이 좀 더 넘게 흘렀을 때였다. 우우우우웅-! 집무실에 비치된 메시지 스톤이 진동했다. 발신 위치는 후작가와 연이 닿아 있는 검문소. “무슨 일인가?” 이내 연락을 받은 후작의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왕가의 특수 부대라 주장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특수 부대?” [아, 예… 모르시는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그냥 헛소리를 한다기엔 이들의 신분들이 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군…….” [예. 그 중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후작 님께 어서 연락을 넣어달라고 소리를 박박지르는 중인데……. 어떻게 할까요?] “그런가? 알겠네. 곧 사람을 보낼 테니, 그곳에 잡아두고 있게나. 아, 참… 몇 명이던가?” [열 명…, 정확히 열 명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이내 후작은 사람 좋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지이이이이익. 탁상에 있던 두 가지의 서류를 모두 찢어서 불태웠다. “열 명이라…….”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것인진 알 수 없지만.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죽어야 했던 자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431화 사자귀환 (2) 조금은 울적한 하늘. 그럼에도 새어 나오는 햇살. 뼈까지 스며든 한기를 밀어내는 따스한 온기. 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도, 배고픔도 없는 이곳. “이제… 조금 실감이 나네요. 정말… 살아서 돌아온 거군요…….” 늘 그렇듯, 힘든 일을 겪고 돌아온 도시는 유독 묘한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살아남은 것은 분명 기쁜데, 마음이 무겁다. 함께 오지 못한 이들이 있기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텼다면은…….” 그랬다면은. 몇 사람 더 함께 왔을지도 모르는데. “마로네 양.” 옆에 있던 스벤 파라브가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주자 마로네가 혼잣말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그야 도시로 돌아왔다고 끝난 것은 아니니까. 아직 안도하기엔 이르다. 어쩌면 미궁에서보다 힘든 일이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꽈악-. 속에서 피어나는 불평불만조차 억지로 삼켜 낸다. 지금 있는 이곳이 미궁 진입 전에 며칠간 합숙을 했던 그 저택이라서, 그래서 말조심을 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래선 안 될 테니까.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높고 험하다 한들. 고작 이곳에 서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그들을 미궁에 두고 와야만 했으니까. “카이슬란, 몸은 괜찮나?” “아, 이보다 더 좋지 않을 수 없을 정도요. 근데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이구려?” 이내 빈 저택으로 출장 온 신관에게 불려 갔던 카이슬란이 돌아오는 것으로 모든 대원들이 접객실에 모였다. “여기만 있지 말고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떻소? 보니까 오늘 날이 참 좋던데.”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다니?” “오면서 접객실 앞에 있는 기사들 보셨죠? 밖에 잠깐 나가려고만 해도 막아 대고 있어요.” 아쿠라바의 설명에 마법사 마로네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토해 냈다. “하! 마치 우리가 뭐,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요! 기껏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영웅 대접이라면 모를까!” “저기, 마로네 양…….” “뭐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스벤 파라브가 내 눈치를 보았지만, 딱히 내가 나서서 말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정도 불평불만이야 안 하는 쪽이 이상할 테니까. 애초에 그 정도는 내가 하라고 말했기도 하고.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다. “하하, 일단은 우리 원정대는 군부에 속했지 않소. 상부에 공식적으로 보고를 올리기 전까진 여정이 끝났다고 볼 수 없소.” “그래도요. 저도 군부 출신이지만, 이건 너무 빡빡한 거 아니에요?” “자자, 진정들 하시오. 전세 역전을 위해 천공의 눈을 부순다는 과업을 달성한 우리 아니오? 보고가 전부 끝나면 그다음은 그토록 기다렸던 포상의 시간이 될 것이오.” “휘유, 드디어입니까.” 카이슬란의 말에 휘파람까지 불며 호응하는 제임스 칼라. 그다음은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보상이 기대된다든가, 나는 뭘 달라고 말할 것이라든가 하는 그런 속물적인 이야기들. 당연히 밖의 놈들 들으라고 하는 말들이다. 지금 나누는 대화는 고스란히 고위 관계자의 귀로 흘러 들어갈 테니까. “아저씨, 그래도 먹을 것 하나는 어디서 금방 잘 구해다 줬네요.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아, 고맙다.” 에르웬이 담아 온 접시의 고기를 뜯으며, 나는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한 번 더 돌이켜 보았다. 혹시 실수가 있었다면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까. ‘…검문소 놈들은 모르는 눈치였지.’ 차원광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종속형 아공간에 배낭들을 집어넣었다. 그야 왕가 놈들에게 보여 줄 장비와, 보여 줘선 안 될 물건들을 잘 정리해 따로 보관했으니까. 그리고 도착한 검문소. 그곳에서 나는 우리가 왕가의 특수 부대임을 큰 목소리로 말하며 후작을 불러 달라 청했다.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검문소에 탐험가들이 수두룩했으니, 특수 부대에 관한 얘기들은 지금쯤 도시에 퍼졌을 테고.’ 후작과 연락을 취한 검문소 공무원은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이곳에 ‘모셔 두라’ 했다는 후작의 말만 반복하며 우리를 붙잡아 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불과 30분도 채 되기 전에 도착한 후작가의 기사. 그들에 의해 우리는 창단식이 있었던 황도의 빈 저택으로 호송됐다. [짐은 저희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짐을……?] [후작님의 지시입니다. 결코 누락되는 물품은 없으리라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보여 줘도 괜찮은 전리품을 담은 배낭도 그 과정에서 빼앗겼고, 저택에 도착한 다음엔 기사들이 불러 준 신관들에게 한 명씩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게 바로 지금. 똑똑.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열렸다. 그래, 늦기도 했네.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이 끝났다 이거지? “후작님께서 여러분을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자. *** 기사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우리가 있던 곳과 비슷한 형태의 접객실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상석이 비어 있으며……. 그 자리에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다는 점 정도. ‘메시지 스톤이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여기서 후작가까지 얼마 멀지도 않을 텐데 원거리 통신이라니. 뭐, 그래도 알고 있기는 한 거 같네. 눈이 마주친 순간 당장 대가리가 쳐부숴 져도 할 말이 없는 몹쓸 짓을 우리에게 저질렀단 걸.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이런 식으로 자네들을 맞이하는 걸 용서하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흐음, 경어를 쓰지 않는 걸 보면……. 대원들은 이미 알고 있나 보군?] 소파에 앉기 무섭게 들려오는 은근한 목소리. 숨길 부분은 아니었기에 나는 쿨하게 인정했다. “어쩌다 보니 들통이 나서. 내가 비요른 얀델인 건 이미 말했다. 아, 물론 왕가와 함께 일을 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정도로만.”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그보다 먼저 할 말이 있지 않나?” 이쯤에서 서론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자, 말해 봐라. 왜 구조대가 오지 않았던 거지?” 그야 어떤 게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우리는 남아도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의논을 나눴으니까. “설마 전 지역으로 보낸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확한 사정은 파악 중이네.] “이렇게 늦게, 그것도 수정구로 연락을 하면서 아직도 파악 중이라고?” [일단 전해 듣기로는 데드우드에 적의 병력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는 듯하네. 그래서 구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는군.] 대충 이런 식이지 않을까 했던 답변. 다만, 나도 이것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아마 자네가 광역으로 통신을 보내며, 노아르크 측에서도 구조대의 존재를 눈치챈 듯하네.] 이야, 여기서 내 책임도 있다고 말한다라……. 이 후작 새끼의 낯짝은 얼마나 두꺼운 거지? “그럼 처음에 연락이 가지 않았던 건? 애초에 처음부터 제대로 연락이 됐으면 그럴 일도 없었지 않나!” [그건… 아무래도 아들놈 쪽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다는 모양일세.] “…실수?” 못 들을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되묻는다. 그리고……. [이건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지. 미안—.] 분노를 터트린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후작과 왕가가 아닌. 장기말이었을 뿐일 당사자를 향해서. “엘토라 테르세리온!” [잠깐, 자네 진정—.] “그래, 전부 그놈 때문이었던 건가! 그놈이 무능력해서! 실수로 우리 연락을 제때 못 받아서!” [그러니까, 그건—.] “후작! 그 새끼는 어디 있나? 아, 말하지 마라. 찾아낸 순간 그놈 머리통을 실수로 부숴 버릴 것 같으니까.” […….] 나는 분에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앞에 있던 탁상을 주먹으로 박살 냈다. 그리고 씨익씨익 숨을 들이쉬었다. […진정이 좀 됐는가.] 그리 말하는 수정구 너머 후작의 눈빛엔 의문이 자리했다. 하긴,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건 나답지 않겠지. 조금 일반인에 비해 과격할지언정, 항상 현실적으로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였던 나니까. 그러니까……. “보상.” 이쯤에서 분노를 삭히며 말한다. 화가 아예 가시지 않은 건 아니지만. 대놓고 화를 냈던 건 모두 이것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상은 제대로 준비해 둬야 할 거다. 당신이 바란 대로 원정대의 지휘관 역할도 꿰찼고, 임무도 성공시켰으니까.” [아… 물론일세. 보상… 그래, 당연히 해야지.] 이내 후작의 약속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고개를 움직여 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자 몇몇 대원들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건 디테일이 중요한 법이거든. [자, 그럼 실수에 대한 보상을 얘기하는 건 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 [어디 들어 볼 수 있겠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 이제 이 부분이구나. 나는 한 번 호흡을 고른 뒤에 준비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후작이 끼어들며 질문을 던져 온 탓에 좀 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야기가 모두 끝나기까지에는 1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내 못난 아들놈 때문에 힘든 일을 겪었군.]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에 후작이 뱉은 짧은 감상. 힘든 일이라……. 그 한 문장으로 끝난다는 부분에서 왠지 머리에 피가 쏠려 왔지만, 어떻게 잘 참아 냈다. [아들 놈의 실수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받을 수 있도록 내가 크게 힘을 쓰겠네.] 이내 후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하네, 자네들의 생환을.] 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는. [그럼 또 연락하지.] 아무튼, 그것으로 후작과의 연락은 끝.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통했을까, 아닐까. 글쎄,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지. *** 이후 우리는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침대에 뽀송뽀송한 이불.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빙판 위에서 맨몸으로 자던 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과분한 방이었으나, 75일간의 피로가 쌓이고 쌓인 몸은 쉽게 잠에 들 기미가 없었다. 아마 그건 다른 방의 동료들도 마찬가지겠지. 혹시 잠에 든 순간 기사들이 덮쳐 오진 않을까 불안도 있을 테고. “…….” 그럼에도 누운 순간부터 점점 노곤해지기 시작한 몸은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목은 멀쩡히 붙어 있군.’ 다음 날 아침, 멀쩡히 깨어났다. 후, 앞으로는 도시에서조차 매일같이 이런 불안감을 안고서 잠들어야 하는 건가? 갈 길이 멀구나. ‘뭐, 어떡하겠어. 그래도 해야지.’ 아무튼, 그렇게 맞이한 생환 이틀 차. 우리는 전날 빼앗긴 배낭을 돌려받았다. 그때 이럴 거면 왜 빼앗아 간 거냐는 내 물음에 대한 후작의 대답이 참 압권이었다. [저런… 그게 그런 식으로 전달이 됐나 보군. 난 단지 지쳤을 자네들을 대신해 전리품을 대신 감정하고, 시중가보다 높게 매입 의사를 전하라 했을 뿐인데. 앞으로는 내 말을 곡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겠네.] 어이가 없지만, 실제로 후작은 그 말을 지켰다. 판매 의사가 있는 물품에 한하여 시중가보다 훨씬 비싸게 사 주었고,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처분했다. 이야, 이거 앞으로 군자금은 넉넉하겠는데. [아, 그리고 하나 더. 자네가 검문소에서 나타난 것 때문에, 원정대에 관한 대중들의 관심이 크네.] 듣던 중 좋은 소식도 있었다. 전쟁 도중 암흑 대륙 전지역에 퍼져 나간 ‘천공의 눈은 파괴됐다’라는 무전. 그리고 도시에서 나타난 왕가의 특수 부대.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며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 덕일까. [이틀 뒤에 개선식이 있을 걸세.] “개선식?” [왕궁에서 열릴 예정이며, 왕국의 귀족들과 신민들 앞에서 그간 비밀에 부쳤던 자네들의 존재를 그날 공표하며 전공을 치하할 걸세.] 음, 예상은 했지만 이틀 뒤는 너무 빠른데. 이렇게까지 빠르게 일 처리가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지만, 머지않아 납득이 됐다. ‘아,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던 거구나.’ 개선식은 진작에 준비되고 있었을 거다. 생환자가 없다고 해서 축제를 열지 못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천공의 눈을 파괴했다는 공적을 갖고서, 전멸한 원정대를 애도하며 그 공적을 저들끼리 나눠 먹을 셈이었겠지. [그러니 준비해 두게. 행사의 내용이나 예식 같은 것은 보내 둘 터이니 읽어 보고. 아, 물론 의상도 전부 우리 쪽에서 준비할 걸세.] “알겠다. 대원들에게도 그렇게 전달하지.” [아까 말했듯 대중들의 관심이 크네. 불편해도 성공적인 개선식을 위해서라도 그때까지만 이곳에 묵으며 숨어 지내 주게. 지내는 데 필요한 거나 따로 요구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아, 그렇다면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나는 후작에게 한 가지를 청했고, 이후로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그렇게. “와아아아아아아아-!” “영웅들의 행차다!” 개선식의 날이 밝았다. 432화 사자귀환 (3) 후작이 계획한 개선식의 절차는 간단했다. 우선 우리가 복귀했던 라비기온의 차원광장에서 시작해 상업 도시 컴멜비를 지나 황도 카르논으로 향하는 행렬. 빠밤, 빠밤, 빠바바밤-! 제복을 입은 군악대가 경쾌한 연주를 뽑아내고. 쿠웅-! 쿠웅-! 쿠웅-! 북이 달린 마차에서는 시종일관 웅장한 소리를 터트리며 천천히 달려 나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민중의 축복과 함성. 그리고 그들이 뿌려 낸 꽃가루가 가득한 대로의 한복판을. “영웅들의 행차다……!” 실전에서는 쓰지 못할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장비를 걸친 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들은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우리를 보는 민중들의 표정은 모두 하나같이 밝았다. “천공의 눈을 부쉈다지? 아주 큰 공들을 세웠어.” “앞으로는 왕가 측에 훨씬 유리해지겠네요.” “아무래도 가장 까다롭던 물건이었으니까.” 손뼉을 치는 탐험가도 있었고. “아빠, 천공의 눈이 뭐예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물건이던 것 같구나.” “저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요!” “그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무엇이든.” 단순히 축제가 있다기에 어린 아들을 목에 얹고서 나온 가족도 있었으며. “아쿠라바! 저기 그 아쿠라바가 있다!” “은퇴한 줄 알았더니, 이런 곳에서 다시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멜란드 카이슬란이다!” “오오! 저기는 혈령후야!” 단지 유명인의 얼굴이나 한 번 보겠다고 인파 속에 낀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당신들 덕분에… 우리 아들도 이제 잠들 수 있을 거예요!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노아르크에게 가족을 잃었을까. 마차 앞까지 달려들어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붙잡는 여자도 있었다. 한데 과연 이들은 알기나 할까? 후작이 계획했을 원래의 개선식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적힌 텅 빈 관짝만 마차에 실려 있었으리란 걸. 삐이이이이이이이- 너무 사람이 많아서 공황 장애라도 왔을까. 이명이 들려오고,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는 것이 점점 버거워진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던 어느 때였다. “아저씨…….” 옆에 있던 에르웬이 내 손을 포개어 왔다. 앞 수레에 타고서 가고 있던 카이슬란도 뒤돌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거, 누가 사고라도 칠까 봐?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한참이나 대로변을 달리던 개선 행렬이 라비기온을 지나쳐 컴멜비에 도착했다. 라비기온과는 조금 달랐다. 탐험가들의 숫자도 훨씬 늘어났고,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옷차림은 라비기온의 평균보다 훨씬 더 격식 있었다. 뭐, 그래 봐야 황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드르륵, 드르륵.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의 바퀴가 굴러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인파, 함성, 뻗어지는 양팔.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도 갑갑하다. 만약 이번 원정에 뒷수작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모든 대원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그 녀석들도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소리를 내지를 수 있었을 텐데. 쿠웅-! 무겁고, 쿠웅-! 또 무겁다. 드르륵, 드르륵. 멈추지 않고 바퀴를 굴리던 마차는 이윽고 컴멜비를 지나 황도에 들어섰고, 쭉 뻗은 대로를 타고서 왕궁으로 직행했다. 평소 지엄하게 닫혀 있던 왕궁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영웅들의 도착이다!” 활짝 열린 성문에 자리한 기사들의 대열. 성벽 위에도 군악대가 자리한 채 클라이맥스에 접어든 연주를 격동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여기에 또 오게 됐네요.” 끝없이 굴러갈 것만 같던 마차가 멈춰 섰다. 내 작위 수여가 있었던 ‘영광의 궁’ 앞에서였다. “영웅들을 맞이하라!” 이내 궁전의 대문이 옆으로 벌어지며 열리고,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궁 안으로 들어섰다. 대열은 퍼레이드를 할 때와 조금 달랐다. 아까는 내가 중심부 마차에 타 있는 구도였지만, 이번에는 내가 맨 앞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궁에 들어서며 터져 나온 함성은 길거리에서 듣던 것보다는 조금 더 작았다. 하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이거나, 상회 혹은 길드의 고위 간부들이니까. “뭐 하시오? 얼른 가지 않고.” 입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내 등을 카이슬란이 쿡쿡 찔렀다. 쯧, 보채기는. 터벅, 터벅. 나는 텅 빈 왕좌가 있는 곳까지 쭉 뻗은 붉은 양탄자 위를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쌍안경까지 꺼내 드는 군중들. 그렇기에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도 찾아내는 게 쉬웠다. 툭. 모두가 축복하는 이 자리에서. 오직 그들만이 웃는 이들 사이에 불청객처럼 낀 채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 저기였구나.’ “자, 잠깐… 어딜 가는 거요!” 카이슬란의 제지는 가뿐히 무시한 채, 걸음을 돌려 그 관중석 쪽으로 향했다. 한데 이제 내가 어디를 향하는지 눈치챘을까. “…제길, 나도 이제 모르오.” 카이슬란도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았다. 터벅, 터벅. 그렇게 방향이 꺾인 우리의 행렬.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며 따라오던 군악대는 당황하면서도, 프로답게 티 내지 않으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툭. 마침내 앞에 서게 된 우리. “…….”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그들도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후작에게 말해 영광의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부탁한 대원들의 유가족들. 빠밤, 빠밤, 빠바바밤-! 아니, 아까부터 거슬리게. 이제 소리 좀 꺼 주면 안 되나? 불만이 나오지만, 그럴 눈치도 권한도 군악대엔 없는 듯했기에 내가 직접 가서 악기들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까강-! 이에 일제히 연주가 끊기며 찾아온 정적. 그제야 군중들도 함성을 멈추었고, 내 앞에 선 유가족들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툭. 그런 그들 앞에서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당신들에게 소중했을 사람을, 살려서 데려오지 못해서.” 이내 그 상태로 머리까지 숙이자, 내 뒤를 따르던 대원들도 똑같이 동작을 따라 했다. 이따 텅 빈 왕좌 앞에서 했어야 할 예식이었지만, 그따위 건 알 게 뭔가. 어차피 이번에도 왕은 코빼기도 안 내비칠 텐데. “고마워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와중에, 머리 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이는… 애쉬드는 어떤 끝을 맞이했나요?” 그래, 애쉬드의 아내였던 거구나. “그 녀석은… 마치 동화 속의 위대한 마법사 같았다. 죽음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우리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흐느낄 뿐. “그런… 그런가요…….” 이제보니 그 녀석도 거짓말쟁이였다. 자기 아내는 강한 사람이라고 했었으면서……. “나는 이제… 나는 이제 어떻게… 어떻게 해……. 우리 그이가… 불쌍해서……. 어떻게…….” “…….” “흐아아아아아악!”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던 여자가 슬픔을 토해 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둑이 터진 듯. “매, 맥켈리 레이아더스요. 그 사람은 어떻게, 어떻게 됐죠? 저, 전혀 듣지 못했다고요. 그냥 죽었으니 여기 참가하라는 말밖에…….” “…벤티스 게로드! 제 아버지예요! 근데 저는 이런 위험한 임무를 하러 가는 줄도 몰랐다고요!” “칼라 씨! 말해 주십시오! 릭은… 릭은 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던 겁니까! 왜 당신만 살아서 돌아온 거냐고!” 자리에 앉아 있던 그들이 우리에게 달려들며 의문을 토해 냈고, 우리는 지어낸 그들의 결말을 죄인처럼 답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을 보며. “뭐야? 이것도 행사의 일부인가?” “이야, 왕가 측에서 준비를 제대로 했군.” “이렇게까지 인상적인 개선식은 난생처음일세!” “아니, 아무리 봐도 그냥 난장판인 거 같은데… 뭐, 재밌으니 됐나?” 군중들은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본다. 그런 개판 오 분 전의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내 후작의 지시를 받은 기사들이 다가와 상황을 정리했고, 다시금 개선식이 재개됐다. 잠시 경로에서 이탈했던 우리들은 다시금 붉은 양탄자 위를 밟으며 텅 빈 왕좌로 향했다. 그 앞에는 후작이 서 있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그동안에는 수정구 안에만 숨어 있더니.’ 나는 그를 한번 바라본 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앞의 예식과 달리 존중의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감정을 참아 내는 게 쉽지 않으리라 여겼을 뿐. “험한 길을 걸어서 왔다, 영웅들이여!” 내가 돌발 행동을 했든 안 했든 아랑곳 않고 정해진 대사를 치는 후작. 이내 후작의 입에서 우리의 여정이 정리됐다. 숭고한 사명을 부여받은 서른 명의 영웅들이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서, 숱한 시련을 넘어 살아 돌아왔도다. 수많은 찬사가 붙은 탓에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요약하자면 그뿐인 이야기였다.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 진실도 아니었다. 심지어 구조대가 오지 못한 이야기는 후작과의 협상으로 아예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극지의 추위조차 그대들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지하의 역적들도 그대들의 명을 앗아 가지 못했다.” 후작이 우리의 공적을 이야기하고 찬사를 해 나갈수록 군중들은 박수를 쳐 댔다. “크흠, 크흠… 우선 저는 이 자리에서 희생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고자 합니다.” 후작이 물러난 다음에 나타난 것은 토베라교의 대주교였다. 탈모가 의심되는 고위 사제는 우리를 보며 위로의 말을 전하고, 특히나 희생이 컸던 신관, 성기사들을 과하게 언급하며 묵념의 말을 꺼냈다. 삐이이이이이-. 그다음은 공작가였다. 삐이이이이이이- 그다음은 탐험가 길드. 그다음도, 그다음도……. 삐이이이이이이-. 이번 원정의 결과를 나눠 먹을 예정이었던 그들이 한 명 한 명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숟가락을 끼워 넣는다. 꽈악- 이야, 생각은 했는데 이거 정말 쉽지 않구나. 다만 다행히 앞에 있었던 내 돌발 행동 덕분에 행사 시간이 줄었는지, 인내의 시간은 짧았다. 마침내 개선식이 클라이맥스에 들어섰다. “그대들에게 왕가의 빛이 있으라.” 후작의 말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연주. 학교 행사로 치면 국기를 향해 경례와도 같은 시간. ‘이게 3분이었지, 아마.’ 나는 정확히 2분을 센 뒤에 입을 열었다. 한 3m쯤 떨어진 후작에게만 들릴 정도로. “저기, 후작.” 내가 말을 걸자 후작은 미친놈 보듯이 바라봤다. 하긴 행사의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딴짓을 하는 게 제정신인가 싶었겠지. 그것도 어지간한 귀족들이 전부 모인 곳에서. “생각해 봤는데, 내가 이름을 되찾는 건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내가 행사를 망칠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까? 후작이 텅 빈 왕좌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급히 답했다. “그때도 말했듯 두 달은 더 걸릴 걸세.” “두 달이라…….” “그런 약속이었지 않나.” “그랬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긴 거 같다. 좀 더 앞당겼으면 하는데.” 내 물음에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연주가 끝나고 다시 행사를 재개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 나를 다그치듯 한번 눈짓을 보내고서는 다시금 왕가를 향한 찬사의 말을 이어 가는 후작. 거, 아무리 급해도 대답은 해 줬어야지. 이러면 어쩔 수 없잖아. 바바리안들은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알아먹지 못한다고? “왕가의 빛이 그대에게 있으라!” 한참이나 왕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비로운지 일장연설을 하던 후작이 우리를 보며 소리쳤다. 후작이 알려 준 이번 개선식의 마지막 행사였다. “자, 이제 원정대장 리헨 슈이츠는 고하라!” 일종의 인원 보고. 이제 정식으로 이 보고를 하는 순간 길었던 우리의 원정은 공식적으로 끝이 난다. 그렇기에…….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근력에 비례해 체격이 커집니다.」 [초월]까지 써 가며 한계까지 몸을 키운다. 그야, 이 정도는 되어야 알아볼 거 아니야. 순식간에 커진 몸을 보며 수천의 시선이 내게로 모인다. “왕궁 내에서 이능을 쓰다니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왕가에 대한 모욕이오!” 내가 스킬을 쓴 것에 화내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반면. “…거, 거대화?” 비요른 얀델의 시그니처 스킬인 그것. “우, 우연인가?” “아니, 잠깐만 닮은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자는 죽었지 않소.” “무엇보다 악령이라고…….” 이를 알아본 군중들이 의문을 토해 낸다. 그리고 후작은? “……!” 내가 거대화를 하자마자 뒤로 나자빠졌다. 뭐, 내가 여기서 암살이라도 할 줄 알았나? 스윽. 후작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텅 빈 왕좌를 응시한다. 그리고……. “유일한 군주를 앞에 두고서 진실을 고한다.” 담담하게 말했다. 시선은 앞을 봤지만, 장내의 그 어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또박또박 한 사람씩. 유가족에게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그 순간들을 가슴속에 홀로 새기며. “파이크 넬다인.” 아이스록에서 배신자로 몰려 처형됐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여겼지만, 지금에서는 조금 후회된다. 원정의 실패를 바랐다면, 그건 어쩌면 우리의 아군이었을지 모르니까. “필립 아인트로피.” 카이슬란 팀 소속의 항해사였다. 데드우드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던 중, 기습적으로 벌어진 전투에 목숨을 잃었다. 머리가 으깨졌었지. 몇 마디 대화는 나눠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카이슬란에게 들었다. 결혼도 않고 노부모를 모시던 효자라던가? “마이트 밀리언.” 데드우드를 탈출하던 때, [땅끝가시]를 맞고 즉사했다. 단말마조차 존재치 않던 죽음. 아마 나는 평생 궁금해야만 하겠지. 피할 수 없던 걸까. 아니면 피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맞았던 걸까. “피오나 에이머스.”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메스 텔레포트를 영창하던 중에 눈먼 공격에 당했다. “니아로 캠벌.” 신관인 주제에 다친 전사를 돕겠다고 앞으로 나갔다가 죽었고. “밀번 나리아.” 언제나 예의 바르던 우리의 트롤 소환사. 모두를 지켜 냈지만, 쓸쓸하게 홀로 맞이하는 죽음을 택하였다. 부디, 커피향이 가득한 집에서 깨어났기를. “맷 하이브리함.” 탱커 포지션인 성기사였다. 그런데 내가 장비를 다 벗겨 버렸다. 그 상태로 무리하게 길을 뚫다가 빙하의 눈 최정상을 앞에 두고서 목숨을 잃었고. “파시블 에릭 콜슨.” 카이슬란과 같은 부대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자 수하. 그의 죽음에 눈물 흘리면서도 카이슬란은 나를 위로했다. 내가 있었기에. 그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의 죽음은 유의미해졌다고. ‘그게…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겠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릭 저거스타.” 재정비를 마친 후, 노아르크 놈들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사인은 마이트 밀리언을 죽였던 [땅끝가시]였다. “벤티스 게로드.” 뒤쪽에서 장미기사단이 덤벼들었을 때, 홀로 퇴각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평소에 낭만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양반이었는데. 이능술사가 전사들이나 할 짓을 했으니, 낭만은 확실하려나? “로이타 매맨더.” 절벽 위에서 돕다가 장미기사단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말투가 굉장히 엄한 신관님이었지. “맥켈리 레이아더스.” 아쿠라바 팀 소속의 마법사였다. [영혼추출]에 당한 이후 깨어나지 못했다. “로안 벨리아로.” 어딜 가든 중간만,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모토라던 유쾌한 아저씨. 어둠을 틈탄 장미기사단의 기습에 사망했다. “준.” 선 채로 죽었던 고결한 성기사. 적들조차 그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을 정도로 그는 마지막까지 커다란 사람이었다. “츠온 이리번.” 제5팀 소속의 궁수였다. 스벤 파라브의 저지선이 뚫리고, 카루이의 사제가 소환한 괴물에게 상체와 하체가 찢어졌다. 그런 상태로 죽기 전 신관에게 부탁했다고 했다. 희망의 찬가를 불러 달라던가? 페널티 때문에 귀도 들리지 않았으면서, “푸타 리커번.” 케알루너스 공작가의 해결사 짓을 하며 살아갔던 녀석이다. 길잡이에 근딜 역할도 하는 다재다능한 잡캐. 전투 실력은 그냥 그랬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장미기사단 두 명을 연달아 죽였다는데…….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면 장례식에서 틀어 줘도 부족함 없었을 텐데. 공작, 네가 버린 해결사가 이렇게 대단한 새끼였다고. “…무슨 힘이!” 어느덧 다가온 기사들이 내 팔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꼴이 영 이상했을까? “그만.” 후작이 기사들을 물렸다. 웬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네. “페리톤 에리아보스, 벤자민 오르먼.” 이 둘은 신관들의 필살기, 희생 주문을 사용해 날뛰던 악신의 소환물을 처치했다. 아마 이 둘이 아니었으면 전부 죽었겠지. “리어드 애쉬드.” 드왈키처럼 각성 마법을 썼다고 한다. 악신의 소환물에 큰 피해를 준 것도 모자라, 장미기사단원 셋을 죽였다던가? 폐쇄 하루 전 마로네가 울고 불며 나에게 말했다. 원래 자기가 하려고 했는데, 애쉬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렸었다고. “그올드 알디디.” 나라면 뒷일을 맡길 수 있다며, 목숨 바쳐 전선을 뚫고 달려왔다. 그 영감이라고 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 텐데. ‘그래, 정말 많이도 죽었구나.’ 새삼 그들 이름 하나하나를 읊조리고 있자니, 그 무게가 여실하게 느껴진다. 이내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지금 최종 보고를 하고 있는 순간이니까. “이하 사망자 20인.” 무려 스무 명. 각자의 꿈, 혹은 목표를 갖고서 이 위험한 임무에 자처했던 그들. 그들은 죽었다. 차디찬 눈밭 속에서. 너무도 처참하고도 쓸쓸하게.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며. 물론 전부 착한 놈들은 아니었다. 소속된 상회의 공금을 횡령한 놈도 있었고, 준만 해도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을 했었다 한다. 푸타 리커번, 얘도 공작가 해결사를 하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녔었겠지. 잘 죽었다고 말할 사람도 분명 어딘가 있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런 식으로 죽어도 될 놈은 한 명도 없었어.’ 우리는 그런 그들 덕분에 살아 나왔다. 그렇기에……. “리리스 마로네, 베르실 고울랜드, 제임스 칼라, 멜란드 카이슬란…….” 분명하게 말해야겠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스벤 파라브, 라비예니아스토로우스, 에밀리 레인즈, 티타나 아쿠라바,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나는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말하기 전에 잠깐 고개를 들어 후작을 보았다. 녀석은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거대화]까지 쓴 마당에 나를 말려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내 후작이 나를 보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쯧, 조금만 더 참았으면 서로가 좋았을 것을.” 그래, 너한테는 그랬겠지. 근데 얼른 이름을 되찾지 않으면 너무 무력할 거 같아서 말이야. 좀 더 판을 키워 보자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랑스러운 왕가의 준남작.” 수천 명의 귀족들 앞에서 나는 당당히 외쳤다.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원정대를 대표해 모든 임무를 끝마치고서 생환했음을 고한다!” 내가 돌아왔음을. 433화 사자귀환 (4) 항상 탐험가들로 붐비는 7구역의 어느 주점. 싸구려 술을 싸게 팔아 늘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틈만 나면 취객끼리 싸움이 붙는 바로 그곳. 콰앙-! 그곳의 문이 벌컥 열린다. 그야 어느 세상이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게 돈이 된다면 더욱더. “호외요! 호외!” “뭐야, 신문팔이?” 소년의 등장에 험상궃은 외모의 주인장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이보쇼, 우리 주점엔 잡상인 출입 금지외다.” “아니, 호외라니까요!” “호외는 무슨, 보나 마나 개선식 소식이겠지.” “껄껄, 야! 대낮부터 여기서 술 퍼먹던 우리가 그런 얘기에 관심 있을 거 같아?” “그런 것치고는 너 아까부터 짜증 엄청 내지 않았냐? 별 대단한 것도 아닌 일로 온 도시가 시끌벅적하다고.” “자자, 꼬마는 더 커서 와라.” 이내 주인장이 소년을 어깨에 들고 출입문을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바보 멍청이들!” “하하하!” “비요른 얀델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하, 하……?” 일순간 주점에 감도는 정적. 물론 그 시간은 짧았다. “꼬맹이가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난리를 치는구만.” “2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돌아와?” “게다가 그놈 악령이잖아? “그러니까 살아서 돌아왔고, 악령도 아니라고! 너희가 여기서 술만 죽어라 마시는 동안에! 바깥에서는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오!”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지고 진솔하게 들리는 소년의 외침에 주인장이 가장 먼저 멈칫했다. 그리고……. “잠깐만, 그 얘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싶은데.” 한 탐험가가 관심을 드러냈고, 이에 주인장도 소년을 내려 주었다. “아유, 술 냄새 진짜…….” 이내 구겨진 옷깃을 손바닥으로 털어 내던 소년이 탐험가가 있던 테이블로 향했고, 탐험가가 값부터 치르듯 동전을 던졌다. “일단 그것부터 말해 봐라. 비요른 얀델이 살아서 왔다니, 확실한 정보냐?” “그럼 확실하죠. 무려 철의 재상이 수천 명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정한 내용인데!” “…철의 재상이?”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이내 소년이 말꼬리를 흐리며 주변에서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운 탐험가들을 힐끗했고, 이에 근처 탐험가들도 한숨을 내쉬며 동전을 던졌다. 그리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입담 좋은 소년의 양념을 제하면 생각보다 짧게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비요른 얀델이 죽었다고 알려진 건 왕가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위장을 하기 위해서였고, 악령이라 공표했던 것도 임무 중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거지?” “그보다 리헨 슈이츠라면… 혈령후의 남자라 불리던 남자 아니오? 이번 원정대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던!” “어쩐지, 제대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가 그 쟁쟁한 사람들을 이끌었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시간이 지났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던 영웅의 귀환. 흥미가 돋았는지 주점의 탐험가들은 내친김에 개선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돈을 주고서 경청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콰아앙-!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던 테이블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탐험가들이 눈치를 보며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터벅, 터벅.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도 눈빛 하나만큼은 또렷한 거구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가,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거구의 여인이 뿜어내는 기백에 주변 탐험가들은 말을 아꼈고, 소년만이 눈치를 보면서도 용건을 물었다. 이내 여인의 입술이 열렸다. “소년, 네 얘기는 저곳에서 듣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인가?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었다는 게. 그게 리헨 슈이츠였다는 게.” 어딘가 절실해 보이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 소년은 이에 의문을 품으면서 착실히 답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가……. 그랬던 건가…….” 이후 여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돈을 꺼내 소년에게 쥐여 주고는 주점을 벗어났다. 쥐여 준 금액을 확인한 소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1만 스톤……?” 술집을 돌아다니는 이야기꾼으로선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거금. 이에 주변인들도 술렁였다. “이런 거금을 이야기값으로 준다고?” “…이런 싸구려 술집에 저런 부자가 있었을 줄이야.” “누구지……?” “어이, 너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어?” 모두가 스쳐 지나간 여인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끌어 올리던 때, 한 사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미친…….” “너 설마 누군지 아는 거냐?’ “금발의 여자 바바리안이 몇 명이나 되겠소. 저토록 거대한 대검을 등에 차고 다니는 이는 그중에 또 얼마나 될 거고.” “아니,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군데?” “폭검, 아이나르 프넬린.” 사내가 정체를 입에 담자, 주변인들의 눈이 또 한 번 크게 떠졌다. “뭐, 방금 저 여자가 칠강七強중 하나라고?” “아니, 그보다… 폭검이라면, 비요른 얀델의 전 동료였잖아!” “설마… 그래서 그렇게 관심을 보였던 건가……?” “이제야 말이 되는군!” “뭐야, 그러면 전 동료들조차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거네?” 또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주점. 손님들은 새로운 화제에 열심히 자기 생각을 밖으로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단지 가게 주인만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저 여자… 자연스럽게 술값을 안 내고 갔어…….” *** 폭풍과도 같던 개선식이 끝나고, 우리들은 제각기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더 잡아 두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생각은 후작에게 없었던 모양. ‘여기까지는 잘 풀린 셈인가…….’ 오랜만에 돌아온 우리들의 저택. 일단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면서 어제 있었던 개선식을 떠올렸다. ‘일단 생각보다 쿨하게 인정해 줬지.’ 수천 명의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가 합의 안 된 커밍아웃을 한 직후. 후작은 자연스럽게 행사를 이어 가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 죽음이 사실 위장되었으며, 그것이 모두 왕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악령 공표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까지. 원래 두 달 뒤에 증빙용 서류가 준비되면 공표할 내용을 앞당겨서 만인 앞에서 말하였다. 그야 후작에겐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내 말을 부정하면 왕가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됐겠지.’ 내가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그야 거하게 개선식을 열어 주면 뭐 하는가. 한 달 정도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잊혀 갈 터. 좀 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관심을 받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왕가는 여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니까. ‘좋아, 그럼 최소한 몇 달 동안은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다거나 하는 수는 그쪽에서도 쓰지 못할 거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첫 단추는 잘 꿰어졌다. 이제 다음 단계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몸집을 부풀리는 것이다. 혹여나 미궁에서의 일이 들통나더라도, 우리를 제거하는 것은 악수라는 생각이 먼저 들도록. ‘앞으로 할 일이 많겠어…….’ 딱 거기까지 생각을 하며 환복을 끝마치고서 1층으로 내려오자, 거실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에밀리, 이게 무슨 상황인 거냐?” “우리가 없는 동안에 침입자가 있었다.” “…응?” “외출할 때마다 문고리에 걸어 둔 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더군. 혹시 몰라 네 방을 빼고 전부 수색을 했지만 다행히 도청 장치는 찾아내지 못했다.” “잠깐만, 침입자가 있었다면 기록용 수정구부터 확인을 해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 집에는 거실과 현관 쪽에 에르웬이 사다 놓은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아, 그거라면 이미 부쉈다. 어차피 기록이라고 해야 하루밖에 저장이 안 되는 데다가, 조작하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어쩌면 이미 마력 회로에 간섭을 해 뒀을지 모르는데 방치를 해 둘 수 없지.” “…그렇군.” “근데 누군진 몰라도 어설픈 자들이더군. 기껏 빈집에 들어와 놓고 지하는 건드리지도 않더니.” “지하……? 아, 항해사!” 그제야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난 미궁 탐사에서 획득한 약탈자 출신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 ‘합숙할 때는 아멜리아가 밥을 넉넉히 챙겨 주고 왔다고 듣기는 했는데…….’ 미궁이 폐쇄되고서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럼 설마 그동안 굶고 있었던 건가? “걔는 괜찮나?” “확인해 보니 멀쩡하다, 조금 마르기는 했지만. 나는 마른 쪽이 더 좋아서.” 아니, 그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게다가 의도치 않게 복종도도 올라갔다. 이번 일로 매일 먹어야 하는 해독제에 대해서는 거짓말인 게 들통났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를 의존하게 됐지.” “어…….” “가서 한번 볼 테냐? 위에서 인기척이 났을 때도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며 칭찬해 달라고 하던데.” “아, 아니… 나는 됐다…….” “음, 너무 내게만 맡기지 말고 너도 관심을 좀 갖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나중에.” 아무튼, 멀쩡하다고 하니 아우옌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아멜리아가 내 방으로 가서 수색 작업을 하였고, 작업이 끝난 다음엔 세 사람이 모두 거실에 모였다. “저기, 그럼 이제 집은 안전한 거예요?” “일단 오늘 당장은.” “하아… 뭔가 집에 오니까 전부 꿈이었던 거 같네요.” 긴장이 풀린 듯 소파에 늘어지는 에르웬. “얀델, 안전하다니 이제 슬슬 열어 봐도 괜찮지 않나?” “아, 아공간 말이지.” “그래…….” 그리 말하는 아멜리아의 눈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앞에 둔 어린애 같았다. 뭐, 그건 나도 다르지 않으려나? 장미기사단원이 갖고 있던 아공간에는 과연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까. “자, 그럼 하나 둘 셋 하고 다 같이 열어 보는 거로 하지.” 이내 나는 조용히 숫자를 셌다. 그리고 둘까지 세었을 때였다. 똑똑. 방문객이 찾아왔다. 일단 아공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누군지를 확인했다.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경계를 했는데 다행히 반가운 얼굴이었다. “레이븐.”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얘기를 듣고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일단 들어와라.” 이후 레이븐은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 냈다. 신분을 되찾는 게 예정에 있는 일이었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해 둔 것은 있나. 그리고…….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이윽고 원정에 관한 화제도 도마에 올랐다. “얀델 씨는… 괜찮나요?” “괜찮냐니?” “많이 죽었잖아요……. 저도 개선식 날 영광의 궁에 있었어요……. 유가족들 앞에서 사죄를 하는 모습도, 그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던 것도 전부 봤다고요…….” “…그러냐.” “걱정이 돼서요. 얀델 씨… 괜찮은 거 맞죠?” 괜찮냐니, 이걸 뭐라 말해야 할까.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과하게 웃으며 레이븐의 여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안 괜찮을 이유가 뭐냐? 이렇게 살아서 돌아오게 됐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고작 열 명이 살아 돌아온 원정. 짧은 몇 마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후작이 말했던 대로다.” 레이븐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군부에 속한 몸으로 나를 돕는 것만으로도 큰 죄책감을 품어야 했던 여자니까. 심지어 이번엔 당사자도 아니지 않은가. 왕가와 싸우자는 짐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만 남은 짐이다. “왠지 오늘따라 얀델 씨가 멀어진 기분이네요. 아니, 사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기분 탓일 거다.” “네. 그렇겠죠?” 그렇게 조금 어색해진 공기. 그런 상황에서 레이븐은 별다른 말없이 차를 홀짝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서려 하던 때였다. 쾅쾅쾅! 노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과한 충격음이 현관 쪽에서 피어났다. 뭐지? 도적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킨 순간. “비요르으으으으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요른! 당장 나와라! 진짜 살아 있는 거냐!” 기다리고 있던 동료의 방문이었다. 그것은 참 마법과도 같았다. “비요르으으은!” 그토록 우울했는데, 저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가네. 피식. 그래, 이제 나도 이름을 되찾았잖아? 헤어짐의 시간은 이미 충분히 길었다. 그러니까……. ‘이제 미샤랑, 곰아저씨만 남은 건가.’ 슬슬 우리도 다시 모두가 모일 때가 됐지. *** 덜그럭, 덜그럭. 식기의 소리만이 무미건조하게 울려 퍼지는 식탁. 숟가락의 끝을 질끈 씹던 이백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냐옹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성으로 부르는 것도 싫고, 이름으로 부르진 말라며?” “이해가 안 돼? 그냥 나를 부르지 마.” “이야, 매정하기는…….” 이백호는 그리 중얼거리며 쓰윽 옆을 살폈다.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식사 자리였으나, 모두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수저를 뜨고 있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면. “냐옹아.” “…….” “근데 너는 밖에 안 나가니?” “…….” “진짜 고양이도 아니고, 어찌 된 게 미궁을 갈 때 빼면 나가는 법이 없냐. 봐 봐, 피부 하얘진 거—.” 탁-! 이내 적묘족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수저를 식탁에 내리쳤다. 그리고……. “다 먹었어.” 자신의 그릇만을 치운 뒤에 계단을 타고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덜컥. 이내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자 이백호가 한숨을 길게 늘어 쉬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을 보며 의견을 구했다. “쟤… 역시 아직 모르는 거 같지?” 가장 먼저 대답을 한 것은 파멸학자였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을 걸세.” “그래, 그건 나도 아는데… 그때까지는 다들 말조심 좀 해 줘. 오케이?” 그 말에 길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리다.” “그래, 그럼 오늘은 식사 끝. 다들 할 거 해.” 이백호는 씨익 웃으며 자기 그릇을 식탁에 둔 채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덜컥.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순간. “…….” 동료들 앞에서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다라…….” 사실 비요른 얀델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야 일단 같은 악령 아닌가. 싹수 있는 후배를 보는 기분이었다. 왠지 걔를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도 났고. 비에 젖은 고양이 꼴이던 미샤를 거둔 것도 그래서였다. 악령인 걸 알고서도 순정을 다하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찢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마음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재밌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제는 그의 생환을 순수하게 반길 수만은 없다. 그야 자칫하면 2년 동안 열심히 대리로 키운 빙결 검사가 엄한 놈에게 돌아갈 처지였으니까. 아, 물론 엄밀히 말하면 원래 주인한테 돌아가는 것에 가까울 터이나……. “그럴 거면 진작 돌아오든가. 이제 와서 이러면 민폐란 말이지.” 이백호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역시… 그냥 죽일까?”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배제하는 것. 이백호의 오랜 철칙이었다. 434화 사자귀환 (5) 아이나르와의 재회는 생각했던 대로였다. 바바리안들에게 눈물 어린 재회 같은 건 썩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 차라리 이런 식이라면 모를까. “비요르으으으으은!” “그래, 아이나르. 오랜만—”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마당을 지나쳐 대문을 열기 무섭게 아이나르가 나를 마당 쪽으로 밀친다. 그리고……. “나를 속였겠다아아아아아!!” 곧바로 주먹다짐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2년 넘게 죽음을 위장했던 것과 이후 도서관에서 만나고서도 리헨 슈이츠인 척 연기를 했던 것에 뿔이 잔뜩 났던 모양.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맞아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아이나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닐 터.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맞서싸운다. 퍼억-!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치고. “아아아아악!!” 레슬링을 하듯 잔디밭을 구르는 개싸움. 그런 개싸움이 얼마 정도 이어졌을까. 감정이 격해졌는지 아이나르가 바닥에 집어 던진 대검을 집어 들고, 나도 에르웬에게 망치를 가져오라 소리친 그때. “둘 다… 그만하세요!!” 에르웬의 개입으로 재회의 격투가 끝이 났다. 잘 가꾸던 정원이 난장판이 된 탓인지 에르웬은 울상이었지만, 애써 모른 체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이나르가 먼저니까. “퉷!” 이내 아이나르가 입에 고인 핏물을 잔디 위에 뱉어내더니 씨익 웃었다. “뭐야, 정말 비요른이 맞지 않냐…….” 이게 내추럴 바바리안인가? 정말로 고작 이런 거에 바로 풀어버리다니. 미샤였으면 한참이나 나를 욕하며 복부에 냉기 딜을 욱여넣었을 텐데. “아이나르, 너는 변한 게 없군.” “그래? 많이 변한 거 같은데.” 아이나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다가오더니 주먹으로 가슴팍을 툭툭 쳤다. “너한테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 아마 설명해 줘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비요른.” “아…….” 나도 모르게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담담한 목소리 속에서 진심이 묻어나서였다. 한데 저쪽도 이런 분위기는 어색했을까. “근데… 그 비실해진 몸은 대체 뭐냐?” 아이나르가 나를 내리깔아보며 말했고, 나는 이유 모를 수치심을 느꼈다. 바바리안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할까. 어째선지 이미 내 입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하게 열리고 있었다. “저, 정수 때문이다! 네가 먹었던 본나이트의 정수 같은 건데, 걱정 마라! 이제 이름도 되찾았으니 금방 지울 거다!” “흐음, 그런가? 되도록 빨리해라. 나보다 키가 작은 비요른이라니, 왠지 보기 힘들군.”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듯한 감각. “그리고… 너를 성지로 데려가는 것도 오늘은 참아야겠군. 동족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분명 실망할 테니까.” …심장이 저리다. 차라리 나한테 게임을 못한다고 했으면 그나마 버틸 만했을 텐데. ‘후, 가챠본 정수도 빨리 지우든가 해야지.’ “그래서… 재회는 다 끝난 거죠?” 이후 지켜보던 레이븐이 대화에 개입했고, 이에 아이나르도 레이븐의 존재를 확인했다. “오! 아루루! 너도 오랜만이다!” “반년 만에 보는 건데 그게 전부예요?” “하하핫! 너도 참 별걸 다 신경 쓰는군! 자꾸 그러면 키 안 큰다.” “신경 안 써도 어차피 키는 안 클 거거든요!” “희망을 잃지 마라. 봐라, 나도 있지 않나!” “그거야 당신은 정수 때문에 그랬던 거고!” 레이븐이 발끈하며 소리치자 아이나르가 껄껄 웃으며 귀를 후볐다. 이에 레이븐이 한 번 더 뒷목을 잡았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었다. ‘오랜만이네…….’ 어딘가 그리운 이 감각. 이 감각을 공유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아이나르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는 레이븐도 입은 웃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응?” “아저씨가 다시 밝아져서요.” “……뭐라는 거냐, 얼른 우리도 들어가자.” “네.” 정원에서의 재회를 끝마친 우리들은 이후 집 안으로 장소를 바꿔서 대화를 이어갔다. 레이븐에 이어 아이나르도 에르웬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고, 그다음 차례는 아멜리아였다. “바바리안, 오랜만—” 넌 뭘 태연하게 아는 척하려고 그래. 얼른 아멜리아의 입을 막으며 껴들었다. “이쪽은 구면이지?” “구면……?”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때 얘 때문에 전사의 명예가 짓밟혔니 뭐니 하면서 엄청 우울해 해놓고서. 뭐, 그런 주제에 파루네섬에서 만났을 때도 바로 못 알아봤지만. “아, 아아……! 기억 났다! 그때 마지막에 비요른이랑 함께 남았던 그 노아르크 출신 여자!” 다만 파루네섬에서의 기억은 갖고 있는지 아이나르가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에밀리 레인즈다.” “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이기는 무슨. 그때 서로 통성명도 한 적이 없구만. 당시에는 다들 약탈자니, 저년이니 라고만 불렀지 본명에는 관심도 없었다. ‘예전에 2층에서 명예를 짓밟혔던 건… 역시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낫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에밀리 레인즈라고 했나?” “그런데?” 의외로 호의적인 목소리로 아멜리아에게 말을 건 아이나르는 정말로 의외의 말을 꺼냈다. “우선 네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겠다.” “…응?” “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의지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요른이 너를 옆에 두었을 테지.” 아이나르는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아멜리아를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비요른의 옆에 있어 줘서.” “……딱히 감사 받을 일은 아닌데.” “하핫! 나한테는 할 일이다! 의지할 대상이 내가 아니었던 게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이 모양이니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 “나는 아루루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저 요정처럼 아무렇지 않게 부족을 등질 수 있을 만큼 맹목적인 것도 아니니까.” “…………저기, 지금 제 욕한 거 맞죠?”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에르웬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고, 아이나르는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하핫, 그렇게 들렸나?” 와, 저러면서도 부정은 안 하는 거 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아이나르의 화술이 많이 늘었다. “아무튼, 이건 됐으니 얘기나 해봐라. 주점에서 네 얘기를 듣고 당장 찾아오기는 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후로는 한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순도 100%의 진실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 정도 필터를 거쳐 만들어진 이야기였는데……. “오!” “아!” “어!” “그렇군.” 아이나르는 오직 이 네 가지의 추임새만을 반복하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에르웬이나 레이븐과 달리 시작된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됐다. 어떤 대화든 길어지지 않는단 건 바바리안족만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이다.” “오!” 동시에 이는 바바리안과 대화할 때의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당췌 잘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이렇게 직접 묻는 게 아니라면. “이해했나?” “어느 정도는!” “……그러면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근데, 아이나르 너도 많이 놀랐겠군.” “응?” “왕가에서 내가 악령이라고 공표를 하지 않았나. 분명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텐데. 비단 너뿐만 아니라 동족들도.” “아, 그거 말이냐? 그거라면 생각보다 별일 없었다.” “…별일 없었다고?” “멍청한 인간들이라면 모를까. 네가 악령이는 말이 가당키나 하나? 우리 부족 중 어느 누구도 안 믿었다. 그냥 왕가 쪽에서 뭔가 또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 어, 그렇구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으나, 일단 할 거는 마저 해야겠지. “근데 말이다. 다른 의도 없이, 그냥 궁금해져서 하는 말인데, 정말로 만약에…….” 나는 조심스레 아이나르를 떠보았다. “내가 악령이라면 어쩔 거냐?” 이는 앞으로 아이나르를 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대답 여부에 따라 아까 들려준 이야기들을 전부 철회하고 진실을 들려줄 수도 있으니까. 하면, 아이나르의 대답은 어떨까. 나 하나만이 아니라 에르웬과 아멜리아, 레이븐 모두가 태연한 척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하하핫! 비요른, 네가 악령? 재미난 소리를 하는군!” “우스갯소리로 넘기지 말고 한번 생각은 해봐라. 네 대답이 궁금하니까.” 그런 기묘한 공기 속에서 내 재촉을 이기지 못한 아이나르가 입을 열었다. “흐음, 비요른 네가 악령이라……. 뭐, 그럼 결국 답은 하나뿐이지 않나.” “하나뿐이라면……?” “악령인 것까지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요? 시간과 정을 함께 나눈 동료니까?” 에르웬과 레이븐이 추임새를 넣듯 되묻자,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무슨 소리냐? 당연히 쳐죽여야지!” “쳐… 죽여……?” “그야 부족장이 말했다!! 악령은 쳐죽여야 하는 존재라고!!” 후, 그래……. 얘는 쉽지 않겠구나……. *** 레이븐과 아이나르의 방문은 그날 밤까지 이어졌다. 차를 마시며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고, 저녁을 먹으며 간단하게 반주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이후에는 자연스레 술판이 벌어졌고. “벌써 시간이…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레이븐은 외투를 챙겨서 일어났고, 시작부터 부어라 마셔라 하던 아이나르는 진작에 뻗어 다음 날 아침에 해장까지 하고 떠났다. “오늘부터는 할 일이 있댔지? 전부 정리가 되면 말해줘라. 성지에도 한 번 들르고. 어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가 온다면 다들 기뻐할 거다.” “그래…….” 아이나르를 보낸 후에는 에르웬도 외출을 준비했다. 미궁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만큼, 오늘은 성지에 얼굴을 내비쳐야 할 거라던가? “그럼 집은 부탁하지.” 에르웬이 외출한 뒤에는 나도 아멜리아에게 집을 맡기고서 홀로 밖으로 나왔다. 어제 아이나르에게도 말했듯, 오늘부터는 할 일이 많거든. “얀델 준남작이다……!” 담장을 넘어서 외출했던 에르웬의 경고대로 집 앞에는 꽤 많은 인파가 진을 이루고 있었다. 하긴 이제 온 도시에 내 이야기가 퍼져 나갔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기자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단순히 내 얼굴이나 구경할 목적으로 찾아온 자들도 있었다. “저기… 준남작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와아아아아!” “여기 손 한 번만 잡아 주세요!” 와, 그럼 아이나르는 여기를 혼자 빠져나간 건가? 뭐, 그리 어렵진 않았겠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군중의 벽을 뚫고서 앞으로 나아간다. “아악! 도, 도망친다!” “따라가!!” 거, 도망친다니. 앞으로 돌진하는 것뿐이구만. 타다다닷- 압도적인 근력으로 순식간에 인파를 뚫어낸 후엔 텅 빈 아침의 거리를 달려 나갔다. 끈질기게 내 뒤를 따라붙는 몇몇도 있었지만, 머지않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럼, 가볼까…….’ 빛이 가려진 골목길에서 커다란 로브까지 몸에 걸친 나는 지도를 보며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곳이……. ‘여기구나.’ 빨간 대문이 인상적인 아담한 소형 주택. 이윽고 문패에 적힌 이름까지 확인한 나는 한 번 심호흡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노크했다. 똑똑. 잠시 기다리자 초췌한 얼굴의 여인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들어가도 되겠나, 애쉬드 부인?” 내 물음에 그녀는 입술을 질끈 씹더니, 이내 몸을 틀어 길을 터주었다. “저… 준비한 게 없는데 차라도…….” “괜찮다. 대접받고자 온 게 아니니까. 돌려줄 것이 있어서 왔다.” “전해줄 것이라니…….” 나는 대답 대신 아공간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여자는 조심스레 보자기를 풀었고, 상자에 담긴 잿빛의 유골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아, 아아, 아…….” “미안하다. 그때 상황이 그래서. 온전한 상태로 가져다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 아아…….” “여기 이건 애쉬드가 갖고 있던 물품들이다. 아공간에 잘 정리를 해뒀으니, 나중에 한번 잘 살펴봐라. 뭔가 빠진 게 있는 거 같다면 언제든 내게 말하고.” “…….” “아니, 그런 게 아니어도 좋으니 부탁할 일이나 내가 필요한 상황이 생긴다면, 여기 내 주소를 적어 뒀으니 언제든 찾아와라.” “아흑…….” “내가 있는 게 불편하다면, 이만 일어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때였다. “잠깐만…….” “……?” “잠깐만요… 기다려주세요…….” 그리 말한 그녀는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더니, 기어코 깊은 향이 우러난 찻잔을 갖고 돌아왔다. “그이가… 손님이 올 때면 항상 내오던 차예요.” “그런가……. 차에 조예는 없지만, 향이 좋군. 잔잔한 게 그 녀석이랑 잘 어울린다.” “얘기해 주세요. 그이가… 어땠는지…….” “아무래도 차가 더 필요하겠군.” 이후 나는 차로 목을 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부분이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어차피 진실을 밝힐 수 없으니까. 원정 중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 그 녀석과 스쳐 지나가듯 나눴던 대화. 둔한 자는 눈치채기도 어려울 만큼 세세한 배려와 행동 등. “그래서 대원들 모두가 녀석을 좋아했다. 너는 알 거 아닌가. 확 튀지는 않지만, 녀석이 옆에 있으면 어딘가 편안하고 든든해지는…….” “네……. 정말로요.” “다른 사람의 말은 항상 잘 들어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래서 처음 아내 이야기를 했을 때, 다들 얼마나 놀라던지…….” “그이가… 제 얘기를 했나요……?” “그래.” “뭐라고… 뭐라고 했던가요?” “강한 여자라고 했다.” “…….” “하지만 자신이 없어지면 분명 울 거라고도 했지.” “끄, 끄흑…….” 유골을 넘겨받은 이후로 악착같이 눈물을 참아내며 이야기를 듣던 여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고마워요…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기는. 덕분에 좋은 차를 알아간다.” “…다른 분들에게 가는 건가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니까.” 애쉬드의 집을 나선 이후로도 나는 대원들의 집을 하나씩 방문했다. 유골을 챙겨 돌아올 수 있던 대원은 유골을 전해 주었고. 그게 없으면 그의 소지품 몇 개라도, 그것조차 없다면 고개 숙여 사죄를 하였다.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달랐다. “허, 이거 위대한 영웅인 준남작님 아니오? 한데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일이외까?” 비아냥거리는 자도 있었고. 그저 무덤덤하게 물건만을 받고 내쫓는 자도. 후작이 말한 원정 내용이 사실인지 의심을 품는 자도, 유명한 영웅이 잊지 않고 찾아준 것에 감격해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자, 메이린…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이게… 우리 엄마예요? 왜?” 어떤 반응을 하건 그들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다. 아마 언젠가 당당히 그날 있었던 진실들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 전까진 계속 이 짐을 가슴에 얹은 채 나아가야 하겠지.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흐른다. 죽은 대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며칠로도 모자랐다. 나흘, 닷새, 엿새…….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리고…….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그날이 찾아왔다. 435화 맞수 (1)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한수의 방. ‘뭔가… 좁네.’ 언제나 포근함만이 가득했던 이 방에서 나는 이유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지금 나는 커다란 바바리안의 몸뚱이도 아닐진대. ‘됐고, 일단 컴퓨터부터 켜자.’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잠시, 얼른 본체의 전원을 키고서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한국인 채팅방부터 확인했으나, 일단 당장은 텅 비어있는 것만 볼 수 있었다. ‘현별이는 아직인 건가?’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갈 이유가 없기에 우선 마우스를 조작해 게시판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선 벌써부터 게시물들이 빠르게 리젠되고 있었다. 뻘글부터 고민 상담 등. 다양한 주제들 속에서 나는 가장 눈에 띄는 글을 클릭했다. [속보)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비요른 얀델, 생환.] 내용. 작성자의 의지가 한눈에 묻어나는 글이었다. 대체 얼마나 1등으로 글을 남기고 싶었던 건지, 내용이 어떻게 ‘내용’ 두 글자로 채워져 있다. 다만, 첫 번째로 적힌 글인 만큼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댓글은 실시간으로 달렸다. [Harbinn: 와! 후작이 놀라고, 왕가가 경악했을 소식이네!] [└Sogeking33: 확실히, 이제 거의 보름이나 된 소식을 속보라고 말하는 글쓴이의 뻔뻔함이면 놀라긴 할듯.] [└these99: 심지어 내용도 ‘내용’이 끝임. [└글쓴이: 하지만 빨랐죠.] 댓글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하기야 내 생환 소식을 이미 들은 상황이었으니 호들갑을 떨어대진 않겠지. 뭐,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인 애들도 있긴 했지만. [showmustgone: 엥? 이 얘기 진짜임? 비요른 얀델이 어떻게 살아 있어? 걔 죽었잖아?] [└Sogeking33: 저기 뭐 지하실에 감금이라도 됐어요? 얀델이 영광의 궁에서 귀환 선언한 게 언제적 일인데.] [└IsABot: 귀환 선언할 때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솔직히 소름이 쫙 돋더라.] [└arolf5205. 텅 빈 왕좌 앞에 인사하기도 전에 유가족한테 먼저 가서 사죄하는 것도 솔직히 장난 아니었음. 난 지금까지 내가 상남자인 줄 알았는데, 진짜는 저런 사람을 뜻하는구나 싶었달까?] [└WingPizza: 그때 귀족들 벙쪄서 표정 진짜 웃겼는데.] [└showmustgone: 원주인 영광의 궁에서 귀환 선언? 대체 무슨 소리임? 살아있던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비요른 얀델은 악령인데?] [└ReDCod: 그게 사실 악령 아니었다고 함. 죽은 척하고서 왕가 밑에서 비밀 임무 수행 중이었다나 뭐라나.] 반응이 재밌어서 쭉 읽다가 마지막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vaman: 근데 여기서 나만 댓글 작성자가 수상함? 도시 전체에 쫙 퍼진 소문도 모르고.] [└vaman: 이 새끼 혹시 노아르크 출신 아님?] 오, 그러고 보니까 진짜 수상한데? 노아르크 상층부에서도 내 존재를 인지하긴 했을 테지만, 정보를 통제했으면 모르는 애들이 있는 것도 납득 못 할 얘기는 아니었으니. [└WingPizza: 일단 수상해서 운영진에 문의는 넣어둠.] 신고도 다른 애들이 잘 하고 있는 듯했기에, 여기까지만 읽고 채팅방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근- 마우스를 쥔 채 잠시 굳었다. 당황했다기보다는 정말 올 게 왔구나 하는 감각에 가까웠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내가 외부에 있음에도 두 명이 들어가 있는 채팅방. 경우의 수는 셋이다. 아예 엉뚱한 사람이 흘러 들어왔거나. 현별이에게 GM이 접근을 했거나. 그도 아니라면……. 두근-! 이백호가 돌아왔거나. “후우…….” 세 달 안에 이백호의 벤을 풀라던 내 요구를 GM이 들어준 거라면, 저 안에 있는 건 이백호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자, 들어가 보자.” 들어가 보면 알겠지. 저 안에 있는 게 호랑이인지 뭔지. 딸깍딸깍. 마우스를 더블 클릭하기 무섭게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주변 공간이 변화한다. 원래 방장이었던 이백호의 취향이 한껏 들어간 화려한 대저택. 타닥, 타닥, 타닥- 백색 소음을 터뜨리는 벽난로 앞 소파에는 두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어, 오빠!” 한 명은 예상대로 현별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난번에 후작과 신경전을 하느라 급히 할 말만 하고 나가서인지, 현별이의 목소리에서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함께했다. 다만, 인사를 받아주기 전에. 스윽. 잠시간 현별이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마침 그쪽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맞다. 둘도 인사해요. 여기는 우리랑 같은 한국인인데—” 우리 눈치를 보던 현별이가 자연스레 대화를 주도하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배려는 필요 없었다. “소개는 됐어.” “소개는 됐어요. 누나. 저희는 아는 사이거든요.” 이내 씨익 웃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녀석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형. 보고 싶었어요.” 밖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대접. 그 태도 변화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지만, 나는 자연스레 인사를 받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백호야.” 보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물어봐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 타닥, 타닥, 타닥- 평화롭게 불똥을 튀기는 벽난로. 그 앞 소파에 앉은 우리 셋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겉모습만큼은 꽤나 즐겁게. “뭐야, 그럼 형이랑 누나는 실제로도 아는 사이였다가 여기서 다시 만났다는 거예요?” “그랬지.” “와, 진짜 대박이네. 나도 내가 아는 사람이 오면 진짜 잘해줄 자신 있는데.” 대체 왜 안 오는 거지? 하며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는 이백호. 이내 녀석이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을 음흉하게 떴다. “근데 그래서… 둘은 어떤 사이였던 거예요?” 그 질문에 현별이가 나를 한 번 힐끗하고는 먼저 답했다. “아무 사이 아니었어요.” 하긴, 얘는 개인사를 남한테 떠드는 걸 안 좋아했지. 그런 게 나랑 참 잘 맞았었다. “에이… 아무 사이가 아닌 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능글맞은 목소리로 집요하게 재시도를 하는 녀석. 이에 현별이의 얼굴에서 영업용 미소가 사라졌다. “저기요, 이백호 씨.” “어… 네?” “갑자기 왜 반말해요?” “어… 이건 반말이 아니라… 그건데… 그 있잖아요. 그 반존대……. 친할 때 쓰는…….” “아, 그랬구나… 근데 우리가 친해요?” 이야, 오랜만에 보네. 저렇게 정색하는 거. “…….” 이백호는 그 모습이 꽤 당황스러운 듯했으나, 병신처럼 어버버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사소한 거 갖고 되게 예민하시네요?” 슬슬 바깥 버릇이 나오는지 조금 더 공격적인 톤으로 변한 목소리. 물론 현별이는 신경도 안 썼다. “사소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제가 아닐까요?” “뭐, 그렇긴 하죠. 근데, 근데 엄밀히 따지면 제가 그쪽보다 실제 나이는 더 많잖아요?” 유교 국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대사였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갔던 이백호만이 할 수 있는 하극상. “하아…….” 짜증을 잔뜩 담아 한숨을 내쉰 현별이가 말했다. “일단 첫째로, 현실 나이가 더 중요하다면서 누나라고 한 사람은 이백호 씨예요.” “그런데—” “둘째로, 나는 그런 대접을 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셋째, 난 이백호 씨를 동생이라 생각 안 해요. 단지 오늘 처음 본 남이라고 생각하지.” “어…….” “그래서 저는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존댓말.” 거기까지 말을 이은 현별이가 정색하고 있던 표정을 풀고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이에 싸늘하게 식어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선은 지켜 줬으면 해요.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요?” 결국 기세에서 밀린 쪽은 이백호였다. “어… 어어…….” “그래줄 수 있죠?” “네…….” 반격할 타이밍조차 잃어버린 이백호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입에는 헛웃음이 가득했다. 왠지 자기 스스로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얘도 현별이한텐 안 되는구나.’ 꽤 도움이 되는 정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여겨지는 작금에도 현별이에게 깝치면 안 된다는 걸 미리 알아낼 수 있었으니. “아하하… 근데 현별… 씨랑 한수 형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예요?” “응? 무슨 소리냐? 알고 있는 사이?” 이백호가 대화 주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얼른 답하며 호응했다. “아, 그게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서……. 아 씨, 이걸 뭐라고 하지?” “도시 내에서 만나 본 적 있는지가 묻고 싶은 거냐?” “네! 맞아요. 그거요 그거.” 그거라면 아직이다. 이 정도는 딱히 감출 이유도 없었기에 솔직히 답하려던 찰나. “그건 왜 궁금한 건데요?” 현별이가 껴들었고,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는 이백호도 마찬가지였다. “이백호 씨는 참 궁금한 게 많네요. 아까부터 계속 일방적으로 질문만 하고.” “……아하하하. 그랬던가요? 제가?” “네.” “…….” 어휴, 진짜 불편해서 죽겠네. “현별아, 그만 괴롭혀라.” “하지만 개인 정보를 자꾸 물어보는데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오늘 처음 본 남인데.” “나, 남이라니… 그래도 같은 한국 사람인데요! 누나!” 이백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으나, 이번에도 현별이의 마음에까지 닿지는 못했다. “한국에는 범죄자가 없던가요? 내가 살던 한국은 그렇지 않았는데요?” “…….” “정 그러면 이백호 씨가 먼저 말해볼래도 자기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고,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네에? 제가요? 왜요?” “그걸 알면 저도 조금은 안심하지 않겠어요?” “어… 하지만 암만 그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요? 남자는 좀 신비로운 면이 있어야 한달까……. 아하하하……….” “이백호 씨는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리 말하는 현별이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후, 이러다 얘 도망가겠네.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현별아.” “왜요?” “미안한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을까? 내가 백호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내 부탁에 이백호가 움찔했다. 그리고 ‘형 미쳤어요?’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야 얘는 현별이를 잘 모르니까. “…알았어요. 이따가 오면 되죠?” 현별이는 허락 없이 선을 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상대가 그어 둔 선을 절대 먼저 넘는 법이 없다. 뭐, 그때 그날을 생각하면 예외가 아예 없진 않은 듯하지만.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사라지지 마요. 밖에서 기다리다가 한 명으로 바뀌면 바로 들어올 거니까.” “그래. 그리고 고맙다.” “…….” 내 입에서 고맙단 말이 나온 게 그리 어색했을까. 현별이는 묘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채팅방을 떠났다. 그렇게 이제야 둘만 남게 된 저택. “형……!! 아니, 형님!” 이백호가 감탄했다는 듯 일어선다. “형님은 휘어잡는 쪽이었군요! 그래! 내가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휘어잡기는 무슨…….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허허 웃고 있자니, 녀석이 먼저 화제를 바꿨다. “아! 근데 그건 뭐예요? 저랑 할 말이 있다니?” “아, 별건 아니고 그냥 묻고 싶은 게 몇 개 있어서. 오랜만에 보기도 했잖아.” “그래요? 그럼 하나씩 묻는 게 어떨까요? 저도 형한테 궁금한 게 조금 있어서.” 한 턴씩 돌아가는 진실 게임이라……. 왜 나는 항상 이런 구도가 되는 거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제안에는 승낙했다. “그럼 나부터 해도 될까?” “네. 그러세요.” 오케이, 이거로 선수는 얻었고……. 나는 일단 가벼운 질문들부터 던졌다. 아니, 엄밀히는 가벼운 게 아니라 내 본목적을 숨기려는 위장용 질문이었다. “우선 이것부터 묻겠는데, 도시에서 유명한 그 이백호가… 너 맞아?” “아… 역시 이제 아시는구나.” 이백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자기 이름을 대놓고 밝히면서 싸돌아다녔는데 당연한가? “그래도 형도 꽤 하네요? 사실 그렇게까지 유명한 건 아닌데.” “됐고, 이번엔 네 차례야.” 이후 턴을 넘기자 이백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현별 누나랑은 진짜로 무슨 사이였어요?” 순간 맥이 쫙 빠지는 물음이었다. “그건 왜 그렇게 궁금한 건데?” “아니, 그럼 안 궁금해요? 달리 뭘 궁금해해야 하는데?” 이백호가 경박하게 목소리 톤을 올렸다. 하나 그 모습을 보고 방심하기에는 내가 이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아서 말이지. “예전 여자친구였어.” 일단 솔직히 답하자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가 않았다니까요?” 이후로도 그런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노아르크 애들이 성벽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있느냐. 아우릴 가비스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지 알고 있느냐 등등등. 나는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졌으나, 이백호는 자기 차례가 오면 시답잖은 질문만 해왔다. 바로 이렇게. “현별 누나 같은 사람이랑은 어떻게 사귀게 됐어요? 형이 먼저 대시를 한 거예요?” 이 새끼는 이런 게 궁금해서 일부러 하나씩 묻자고 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으나, 나는 티내지 않으며 차근차근 질문의 수위를 올려갔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뭐 이리 많아? 그러는 너는 어떤대?” “어, 갑자기 저요?” “그래. 애인은 없어? 너는 여기서 십 년 넘게 살았잖아. 생각해 보니 연애가 뭐야. 결혼도 하려면 할 수 있었겠는데?” “어허허, 형님 그거 선 넘는 발언입니다?” “어… 그렇다면 미안한데… 근데 궁금해서. 진짜 없는 거야?”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 NPC라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야, 갑자기 진지한 표정 지으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 “쯧, 너도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단 말이지. 잘 생각해 봐. 결혼은 농담이었지만, 연애 정도는 할 수도 있잖아?” “음…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래, 되도록이면 주변에서 찾아봐. 너 동료들 중에 여자도 있다며.” “아, 미샤 칼스타인이요?” “어,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네.” “흐으음…….” 이백호가 잠시 나를 응시하고는 물었다. “근데 형이 걔는 어떻게 알아요?” 예측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이었다. “그거? 네가 소개해 준 원탁의 감시자에서 들었어. 걔네 말로는 네가 걔를 이용해서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소문을 냈다던데…….” “그런데요?” “갑자기 조금 궁금해지네.” 나는 어느 정도 조심스러운 티를 내며 물었다. “그게 사실인 거면… 왜 그랬던 거냐?” 돌고 돌아 끝내 내가 녀석에게 묻고 싶었던 여러 질문 중 하나. 어째서 이백호는 그런 짓을 하였는가. “네가 같은 플레이어한테 해가 될 짓을 할 거 같진 않았거든.”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까지도 자연스레 덧붙여 준 뒤 나는 차분히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형.” 머지않아 이백호의 입이 열렸다. “지금 제 차례예요.” “…응?” “애인이 없냐는 게 형 질문이었잖아요.”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제 차례.” “……알았으니까 해봐 그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백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갑갑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상대가 형이라 그런가? 진짜 뭔가 마음에 안 드네. 이런 건 적들이랑만 해야 하는 건데.” 너무나도 느닷없게 느껴지는 분위기 변화. 그 변화를 뭐라 짚을 새도 없이 이백호가 말을 이었다. “형, 서로 떠보는 건 이제 그만해요.” “…떠보다니?” 말에 어폐가 있다. 내가 떠보고 있다고 말한 거라면 또 모르겠는데. ‘서로……?’ 그럼 너도 날 떠보고 있었단 뜻인데? 두근, 심장이 불온하게 떨린다. 머리에 혈류가 과하게 모인 탓인지, 시간이 느려졌단 착각이 들 정도로 사고가 가속한다. 이백호가 나를 떠보았다. 무엇을? 뻔하다. 대체 어디서부터였지? 짚이는 게 있다. 내가 뭘 놓친 거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선택. 이제부터는 어쩔 것인가. ‘됐어, 어차피 순서가 달라졌을 뿐이야.’ 뇌의 모든 신경을 집중해 상황 정리를 끝낸 즉시. “아오, 저저 머리 굴러가는 소리.” 나는 강제로 현실로 돌아왔다. “형.” 이백호의 입이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역린을 찌르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로. “정말 형이 비요른 얀델이에요?” 이내 녀석이 물었고.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나는 대답했다. “어.” 436화 맞수 (2) 이백호. 나이 스물셋. 풋내 나는 까까머리에 앳된 시골 청년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갓 전역한 군인. 그런 녀석은 나를 형이라 불렀다. [저요? 그냥… 십 년은 지났어요.] 최소 10년. 아니, 이제 그 말을 한 지도 4년은 지났으니 최소 14년 이상을 이 도시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일진대도. 처음엔 별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네는 이미 이곳 사람일세.] 징벌의 함에서 만난 한스 A의 말을 통해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전에 녀석이 했던 그 말에 담긴 독기와 집념을. [형님! 그런 잣 같은 소리 마십쇼! 전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현실 나이로 쳐야죠!] 이백호는 별난 녀석이 아니다. 그저 어느 누구보다도 필사적일 뿐. 그렇기에 오히려 속내를 읽기 편하다. [빨리 벤 풀어. 안 그러면 진짜 여기서 넌 뒈지니까.] 말투는 경박하고. [야, 틀. 누가 맘대로 불 지르래, 내 허락도 없이.] 무소불위의 무력을 믿고 망나니처럼 행동하며. [이야, 진짜 플레이어였네?] 오로지 본인의 욕구대로만 움직이는 듯 보일지 몰라도. 결국 놈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난 이쪽 세상에서 정 같은 거 안 쌓으니까.]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탈출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목표가 명확한 사람만큼이나 대하기 쉬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의 나는 이백호에게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을 경계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 어차피 이놈도 비요른 얀델이 이한수라는 걸 알지 못할 뿐, 악령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와, 대박…….”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느 정도 생겼으니까. 이 괴물 같은 놈이 상대라 해도, 최악의 상황에서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자신이. “그래… 형이 진짜 비요른 얀델이었던 거구나. 리헨 슈이츠가 비요른 얀델이니, 그러면 저번에 아틀란테에서 만난 것도 형이었네요?” 내 정체를 밝힌 후, 묘한 탄성을 몇 번이나 터트리던 이백호가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진짜 다행이네. 지금에라도 알아서.”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다행이라니……?” “아… 그건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그건 내가 들어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 같은데.” 내가 딱 잘라서 말하자 이백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근데, 형.” “…….” “저한테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목소리. 다만 내가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녀석은 혼자서 납득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좀 그랬지…….” 아무래도 비요른 얀델과 있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미안해요, 형. 형인 줄 몰랐던 때 일이니까 이해해 줄 거죠?” 사과를 받을지 말지 결정도 하기 전에 이백호가 다시금 한숨을 뱉었다. “형도 참… 그때 그냥 말해 주지. 그랬으면 이렇게 일이 꼬일 일도 없었을 텐데.” 허허허……. 사람 빡돌게 하네, 이거. “그래서 그게 내 책임이라는 거냐?” “아뇨.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제 잘못이기는 하죠. 형 말대로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 알려지게 된 건 저 때문이니까.” 덤덤한 목소리에서 순간 다시 열이 뻗쳤지만, 일단 감정을 죽이고서 대화에 집중했다. “이제 서로 이름도 깠으니까 다시 묻는데, 그건 대체 왜 그런 거냐?” “제 계획을 위해서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해서요. 다시 말하지만, 형인 줄 알았으면 그런 방법은 절대 안 썼을 거예요.” 글쎄, 말은 그리하지만 신뢰가 가진 않는다. 나도 이제 이 녀석에 대해 조금은 아니까. “정말로 내가 죽었던 거여도?” 과연 그래도 이 녀석은 나를 이용하지 않는단 선택을 내렸을까? *** “…….”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침묵이었다. 거짓말하는 걸 싫어하는 타입인가? 그런 생각도 들지만 확신하기엔 이르다. 어쩌면 단지 들킬 게 빤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니. 이백호가 자연스레 화제를 바꿨다. “근데 제가 어떻게 형이 비요른 얀델인지 알아낸 건지는 안 궁금하세요? 난 솔직히 그것부터 바로 물어볼 줄 알았는데.” 답은 간단하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유를 찾아봐야 한번 지나간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까. 그게 설령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될지라도— “아, 물론 물어봤어도 대답 안 해 줬을 거지만.” 뭐 하자는 거야, 이 새끼는? “그래도 한 가지만 말하자면, 그렇게 확실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조금 떠보기로 했죠.” 떠본 방식은 굳이 들을 것도 없었다. 날 비요른 얀델이라 의심하면서도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내가 먼저 ‘미샤’ 혹은 ‘비요른 얀델’을 먼저 언급할 때까지. ‘아마 현별이한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인 것도 그래서겠지. 그래야 내가 좀 더 경계심을 풀—’ “아, 근데 현별 누나는 진짜 무섭더라고요.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연애를 했어요? 와, 기 싸움에서 진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막 헛웃음이 나던데요? 어이가 없어서.” 음, 그건 진짜였던 건가? 알 수 없지만, 지금 깊이 생각할 주제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건 됐고.” 해당 주제를 이쯤에서 끝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샤는 왜 데려간 거냐?” “당연히 미궁 공략 때문이죠.” 그래,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내심 짐작은 했으나, 직접 말로 들으니 어딘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형도 그래서 걔를 키우고 있던 거 아니에요? 9층 후반부에는 빙결 쌍수 검사가 있으면 편하니까.” 물론 그 답변에도 의문점은 있었다. “너 정도 되면 다른 후보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미샤였지?” “순애보가 마음에 들어서요. 소생의 돌로 형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면 절대 배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게 전부야?” “뭐, 다른 것도 있긴 하지만… 전부 사소해요. 솔직히 말해 그 결정에 제 변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요. 조금 신기했거든요. 악령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실제로 얘는 미샤에 대해서는 정말 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물건처럼 생각하고 있달까? “아, 맞다! 돌려받길 원하시면 드릴게요. 몇 년 동안 꽤 열심히 키웠고, 현별이 누나한테도 왠지 죄짓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지금 이 녀석이 흥미를 보이는 건 오직 나뿐. “형이랑 저 사이잖아요?” 이내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죠. 암요?” 부담스러울 정도의 호의. 이를 통해 나는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나를 잘 대해 주는 것은, 단순히 내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다. 뭔가 더 이유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귀환’이 목표인 이놈이 미샤를 이리 쉽게 양보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낫겠지.’ 나는 떠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선은 미샤를 안전하게 돌려받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한 것인데……. “그럼 냐옹이 문제는 해결이 됐으니, 말고 다른 얘기나 하죠!” “다른 얘기?” “그냥 형 얘기가 좀 궁금해서요. 저도 형 연차일 때 형만큼 강하진 않았거든요. 심지어 얼마 전에는 심해거인 정수도 먹었고. 대충 확인된 팩트들로만 견적을 내 보니 3등급 정수가 최소 4개는 될 거 같던데…….” 이백호는 나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토해 내기 시작했고, 나는 거를 것은 거르며 답해 줄 부분은 착실히 답해 주었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이니까. 쿨하게 미샤를 보내 준다고 한 이상, 나도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래서 실제로는 어때요? 2년 반 동안에 어디 가 있었던 거예요?” 이 질문에서는 고민을 많이 했다. 20년 전 과거에 갔던 일을 얘한테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닐까. 결정을 내리는 데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어차피 내가 비요른 얀델인 것도 아는 애인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어쩌면 얘한테도 뭔가 도움이 될 정보를 듣게 될지도 모르고.’ 아우릴 가비스는 플레이어들의 공공의 적이다. 그러니 정보를 공유하고 대적할 방법을 의논하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기록의 파편석……? 들어는 봤는데, 그게 진짜 있었구나.” 파루네 섬에서 과거로 빨려가게 된 일. 그리고……. “…아우릴 가비스를 만났다고요?” 20년 전의 커뮤니티에 입장을 했던 것을 위주로 썰을 풀었다. 어차피 얘는 아멜리아 언니를 구한 얘기는 궁금하지도 않을 테니까. “어, 이제 보니까 이 커뮤니티 자체를 그놈이 만든 거였더라고.” “아, 그건 알아요. 루인제네스 그 늙은이한테도 들었던 거라… 어? 잠깐만… 그때 그 늙은이가 말하길, 커뮤니티가 터지기 전에 아우릴 가비스가 이상한 놈을 데려왔었다고 했는데……. 설마 그게 형이었던 건가?” “아마 그럴걸.” “와… 이러니까 형이 무슨 주인공 같네. 더 해 봐요.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아우릴 가비스는 내가 미래에서 온 플레이어란 거에 엄청 관심을 보이더라고.” 나는 내가 오리지널 모드를 깼다는 것을 제하고 아우릴 가비스와 나눴던 대화를 설명했다. 놀랍게도 이백호는 대부분의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얘의 현 동료 중의 한 명이 파멸학자니까. 애초에 과거 이야기를 한 것도 이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고. “땅의 마녀가 살아 있는 건 저도 알아요. 뭐,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요.” “그 늙은이는 모두의 소망이 향하는 곳에 있다고 하던데. 혹시 짚이는 게 있어?” “엥? 정말 그렇게 답했어요? 쉬운데요? 미궁의 끝 말고 더 있어요?” “하지만 게임에선 최종 보스 같은 게 없었잖아.” “그거야 튜토리얼이었으니까요. 형도 이만큼 지내 봤으면 알 거 아니에요? 이곳은 엄연히 게임과 다르다는 걸. 어쩌면 땅의 마녀가 최종 보스로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흐음, 그러면 대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지?” 비단 땅의 마녀만이 아니더라도 이백호와의 대화는 나름 유익했다. 오히려 정보를 푼 건 나인데, 내 쪽에서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해야 할까? “카구레아스라면 창세보구 세 개를 모았던 그 바바리안을 말하는 거죠?” 어, 내가 갔던 시기엔 두 개였는데……. 아니, 애초에 그보다. “그 사람이 바바리안이었어……?” “몰랐어요? 형이랑 나름 인연도 깊은데. 작은 발칸이라고… 형이 그런 이명으로 불렸잖아요?” …뭐? “설마…….” “네. 카구레아스가 발칸이에요. 정확히는 정황상 그렇게 추정돼요. 개벽 136년 4월 2일. 발칸이 55세의 나이로 사망한 직후 사라졌던 창세보구가 모두 잃어버렸던 종족들 품으로 돌아갔거든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내 이명의 원주인이었던 전설적인 선배가 설마 악령이었을 줄이야. “왕궁 지하에 있다는 포탈에 대해서도 알아?” “예전부터 조사 중이긴 한데 알아낸 건 별로 없어요. 거기 있는 포탈이 입구가 아니라 출구라는 것 정도?” “출구라니?” “포탈을 통해 어디론가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거죠. 어딘가에 있는 포탈을 타면 왕가 지하의 포탈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음, 그렇구나……. 뭔가 딱 보기에도 굉장히 수상한 이야기네. 아무튼, 이후로는 정말 오래간만에 같은 편에 선 입장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얘기도 하게 되었다. [아우릴 가비스, 당신은 당신 욕심 때문에 이곳에 끌려와 죽어 나간 수많은 ‘악령’들에게 조금이라도 가책을 느끼고 있나?] 어쩌다 보니 진실 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던 바로 그 질문. 이를 듣자마자 이백호가 박장대소했다. “푸핫! 풋, 아하하하하! 정말요? 그 늙은이한테 그런 질문을 했다고요?” “왜 웃는데?” “그냥요. 형답다면 형다운 질문이었다 할까요……. 그래도 형은 아직 순진한 편이니까…….” 뭐? 내가 순진해? 들으면서도 기가 찼으나, 이백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요? 그 늙은이는 뭐라고 대답했어요? 나는 그때 들었던 답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어찌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물론 안쓰럽네. 책임감도 느끼지. 아마 이런 마음을 평생 지닌 채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그렇게 말하고. [어때, 이러면 대답이 되겠는가?] 보석에 빨간불이 들어왔던 것까지. “흐음…….” 사이코패스 같은 늙은이라며 함께 욕을 해 줄 줄 알았던 이백호는 묘한 표정이었다. “이건 좀 애매하네요.” “애매하다니?” “말을 길게 했잖아요, 그것도 일부러 엄청 과장해서.” “응?” “진실 속에 거짓을 숨길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패턴이에요. 심지어 예, 아니요로밖에 답을 못 하던 상황이었잖아요?” 이백호는 아우릴 가비스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생각해 보니, 저게 또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 “음, 근데 왜 그 늙은이가 그렇게 했지? 그냥 우연인가?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그 늙은이 속을 어떻게 알겠냐, 우리가.” “그건… 그렇죠.” 아우릴 가비스의 답변에 대한 의논은 거기서 깔끔하게 끝이 났다. 이백호는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는 듯했다. “저기, 형…….” “말해. 갑자기 그러면 괜히 더 불안해지니까.” “아, 근데 좀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됐고, 하라니까.” “그럼 할게요?” “어.” 한 번 더 허락이 떨어지자 이백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은 목표가 뭐예요?”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나는 되물었다. “목표라니?”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요.” 그래, 역시 그게 궁금했구나. “그때 노움트리에서 만났을 때는 분명 잘 모르겠다고 하셨죠.” 응, 그랬지. 참고로 그 대답을 했을 때 이놈은 너는 그 적묘족 때문이냐고 물었고. 내가 침묵으로 답하자, 예전의 자기를 보는 거 같다며 NPC한테 많은 걸 바라지 말라는 조언 아닌 조언까지 해 줬다. ‘…그때 그렇게 쿨하게 넘어간 건 ‘비요른 얀델’한테 그리 큰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글쎄…….” “그럼 지금이라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마냥 살아남겠다는 게 목표일 시기는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이백호의 의도야 빤했지만, 일단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한데 나도 최근 들어서 자주 하고 있던 고민이라 그럴까? “목표라…….” 시늉만 내려고 했는데, 정말로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에 휘몰아친다. 내 목표는 무엇인가.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을 해 봐요. 여기 버튼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형은 곧바로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고요.” 이백호의 조언은 생각보다 도움이 됐다. 실제로 미래의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까지는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자,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적어도 당장의 상태는 알 수 있었으니까. “…….” 정말 그런 버튼이 있다면, 나는 한참 동안 버튼 앞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다. 또한, 머리로는 쉴 새 없이 생각했겠지. 집으로 돌아가면, 그 집에는 무엇이 있는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가득이었다. “…….” 햄버거, 콜라, 게임. 재밌는 미디어와 수많은 현대 기기의 편의. 무엇을 죽이지 않아도 되며, 매일같이 피를 흘릴 일도, 아프고 힘들 일도 없다. 생활을 걱정할지언정, 생존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 내가 바라는 그런 평탄한 삶이 그 너머에 있다. 하지만. “…….” 분명 이 게임 속 세상은 빌어먹을 곳이고,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 없지만. ‘아마…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 끝내 나는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누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바라는 건 그러한 삶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 고민이 끝난 거 같네요?” “그래.” 결론은 나왔다. 내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살얼음 위를 걷듯 온갖 위협이 가득한 이곳에서. 나,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과 함께. 그게 내 솔직한 욕망이다. 그렇기에……. “말해 줄 수 있어요? 어떻게 할 건지.” 나는 녀석의 눈을 마주하며 답했다. “누를 거야, 그 버튼.” 진실된 속내를 밝히지 않고, 당장은 녀석에게 맞춰 주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빤했으니까. 이 녀석이 무슨 답을 기다렸는지 정도는. “…….” 내 대답을 들은 이백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딘가 무겁게만 느껴지는 침묵. “쯧.” 그 짧은 시간에 끝을 고한 것은 이백호의 혀 차는 소리였다. “거, 사람 기분 나쁘게. 여기선 스킬 못 쓴다고 병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늘상 경박하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던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보면서 거짓말을 하시네.”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437화 맞수 (3) 커뮤니티 내에서는 이능이 봉인된다. 그렇기에 외부에서는 그토록 나를 곤란하게 했던 거짓말 탐지 또한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쓸 수 있다고 해도 내겐 아우릴 가비스의 선물이 있으니 카운터를 칠 수 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떠보는 건가?’ 경우의 수는 두 가지. 하나는, 이백호가 내 말의 진위를 알 수 없기에 일부러 정색하고서 한 번 더 검증을 해봤을 경우. 그리고 그 두 번째는……. 두근-! 정말로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확신했을 경우. ‘니미럴.’ 심장이 진동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얕봤던 것일지 모른다. 명색이 십수 년 동안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왔을 녀석 아닌가. 거짓말 탐지 스킬이 없다고 해서 병신일 리는 없다. 아니, 오히려 없을 때가 더 예민할 것이다. 그 스킬 덕에 거짓말쟁이의 패턴을 수없이 마주하며 방대한 정보를 쌓았을 테니. ‘단순히 떠보는 것일 가능성은 극히 낮다.’ 찰나의 순간, 나는 판단을 끝냈다. ‘변명이 통할 거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쪽이 나아.’ 다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백호 쪽이었다. “형.” “…어?” “미안한데, 역시 냐옹이는 못 돌려주겠어요.” “뭐라고……?” 내 되물음에 이백호가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바바리안으로 살더니 귀까지 먹었어요?” 이한수의 모습일 때는 단 한 번도 이백호에게서 들은 적 없던 비아냥 가득한 말. 이내 이백호가 나를 보며 똑똑히 말했다. “못 돌려주겠다고요.” “…….” “형이 그토록 아끼던 냐옹이.”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봐도 형보다는 걔가 내 목표에 도움이 될 거 같거든요. 형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거잖아요?” “…….” “아, 물론 걱정 말아요.” 딱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 잘 쓰고 나면 확실히 돌려드릴 테니까.” 그저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백호야, 너…….” 머리로는 저게 뻔한 도발이란 것도. 여기서 관계가 더 악화되는 걸 막는 게 옳단 것도 알고 있음에도. “진짜 망가진 새끼구나.”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필터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오는 일조차 없었다. “이야, 이제 본색이 나오네? 내 앞에서는 맨날 머리만 살살 굴리더니.” 다만, 그런 말에도 이백호는 피식 웃었고. “네가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냐?” 나도 조금 더 입꼬리를 올렸다. 결과적으로, 이 자리에서 웃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타닥, 타닥, 타닥- 벽난로의 온기와 별개로 싸늘한 공기가 나와 놈 사이에 가라앉는다. “재밌네.” “어, 그러게.” 한 마디씩 중얼거린 후,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왜 망가진 새끼야?” 놈은 더 이상 내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암만 봐도 망가진 건 형 쪽 아닌가?” 기도 차지 않아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한데, 놈도 할 말이 있었을까. “그렇잖아? 원래의 인생은 저 너머에 있는데, 그냥 헤벌레 NPC들한테 푹 빠져서 여기 남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이나 하고.” 답할 가치는 느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얘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 또 좆밥 새끼들이면 몰라. 형은 돌아가는 게 꿈만 같은 상황도 아니잖아? 능력도 있어. 동료 캐릭터도 나름 괜찮아. 명성작도 잘해뒀고, 근데 얼씨구? 거기에 귀족 작위까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중간에 말을 끊자, 이백호가 본론만을 툭하고 던졌다. “혼자 정상인인 척하지 말라고. 역겨우니까.” “…….” “아무리 봐도 망가진 건 그쪽이잖아.” “…….” “즐거웠어? 사람들 만나니까 결핍이 채워져서? 게임 정보 덕에 휙휙휙 강해지니 뭐라도 된 인간 같아서? 다들 영웅 취급을 해주니 더더 몸바쳐서 노력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3자의 시선으로 그간 내 변화를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저런 말을 뱉어댈 것이다. 그러나 팩트인지 아닌진 중요하지 않다. “어휴, 아주 시간이 지나면 아우릴 가비스 걔한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겠—” 어휴, 말이 뭐 이리 긴 건지.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그래. 백호가 화 많이 났나 보네.” 최대한 평정심을 지키며 이백호를 응시한다. 턴제 형식의 게임이라면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해해, 너는 차인 쪽이었잖아?” “……차여?”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 나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왜 모르는 척해? 네가 좋아했던 여자들이 네가 악령인 걸 알고 곧바로 튀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유명한데.” “………허.” “너… 사실은 그래서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도.” 이거야 원 애새끼도 아니고, 쯧. 이백호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을 이었지만, 그걸 또 변태처럼 엿들었을까. “…….” 이백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구겨진다. 다만, 그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하핫, 하하하하핫! 크흑, 푸하하하하!” 이백호가 진심으로 유쾌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대소한다. 흔한 정신승리 패턴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내가 이렇게 웃는 것도 그래서고. 딱 이런 느낌. 그냥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백호도 슬슬 웃음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걸었다. “형.” “왜.” “그 냐옹이가 그렇게 좋아요? 나한테 이렇게 급발진 박아 버릴 만큼? “그건 상관없어.” “상관없기는. 돌아가지 않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부분일 거 같은데.” 나는 침묵했다. “캬, 이 상황에서도 인정을 못 하는 걸 보니까 우리 한수 형은 의외로 수줍음이 많구나?” 여기서 그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 잠깐!” 그때 이백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듣는 나로서는 괜히 불길해질 수밖에 없는 말. “냐옹이 말이예요…….”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냥 제가 죽여 버리는 건 어때요?” 씨발. “사실 형이 이 세상에 남으려는 건 현재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인 거잖아요?”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수록 심장이 조여온다. “그러니까, 그냥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이곳이 괴로워지면, 자연스레 돌아가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겨울이 오면 도피처를 찾는 토끼 새끼처럼?” 이백호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다. “음, 다시 생각해도 꽤 괜찮은 거 같아요.” 이백호, 이놈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놈이니까. “망가진 건, 때론 고쳐쓰기도 하는 거잖아?” 이내 놈이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환한 미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 나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하지만……. “백호야.” 두려움보다 더 크게 피어나는 감정이 있다. “왜요.” 살의殺意. 간절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의념. “자꾸 그러면…….” 원탁에서처럼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더 이상 참지 않으면 되었을 뿐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끌어오르고 있었던. “내가 널 죽여야 되잖아.”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살의를. “……!” 정제되지 않은 의념이 퍼져 나간 즉시 이백호가 몸을 움찔한다.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머지않아 이백호의 입이 다시 열렸고, 내뱉은 말은 이전에 보아온 사람들과 명백히 차이가 났다. 사과의 말도. 원망의 말도. 그만둬 달라는 애원의 말도 아니다. 시체 수집가였다면 진작에 벌레처럼 바닥 위를 꿈틀거리며 켁켁거렸을 살기 속에서 녀석이 뱉어낸 것은. “와…….” 그저 진심 어린 탄성이었다. “이 형 진짜 미쳤네……. 이 정도면 다른 애들은 거의 지리겠는데?” 극찬 아닌 극찬을 토해낸 녀석이 뻐근한 어깨를 풀듯이 좌우로 꺾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형.” 한 걸음. “근데 기억 안 나요?” 두 걸음. “제가 가르쳐준 거잖아요.” 세 걸음. “살기.” 그렇게 녀석과의 거리가 팔 뻗으면 닿을 만큼 좁혀졌을 때였다.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녀석이 내게 품은 살의를. *** 살기. 뉴비들 겁주기로 제격인 고인물들의 잡기술. 원탁에서 주야장천 남발하며 살기 덕을 봤던 나였지만, 막상 내가 살기를 뒤집어쓴 적은 거의 없다. 정확히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은 딱 한 번. 원탁의 회원이 됐던 날, 여우에게 당했던 것이 마지막. 신기한 기분. 처음 살기에 당했을 때 느꼈던 감상이었다. 선명한 살의에 피부가 저릿했고, 자꾸만 심장이 쿵쿵대며 울렸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자, 그럼…….” 반면 이백호의 살기는 달랐다. 살기의 밀도에서부터 그 흉포한 기세까지. “다시 말해봐요.” 시체 수집가 놈이 왜 그렇게 벌벌 떨었던 건지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이대로라면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격동하는 심장. 식은 땀은 고이다 못해 흘러내리고. 이론상 호흡이 필요한 곳도 아닌데, 누군가 목을 강하게 옥죈 것처럼 호흡이 강제로 끊어진다. 또한, 뇌세포가 불타는 것처럼 아리다. 하지만……. “뭐? 내가 널 죽여야 되잖아?” 시체 수집가나 여우처럼 완전히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물론 힘들기는 하지만.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그저 채팅방에서 나가기만 해도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지만……. “형, 진심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버틴다. 그야 알고 있으니까. 비요른 얀델로 살아가며 배웠지 않은가. 두렵다고 도망친 이후에는 더욱 두려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에?” 살기에 잠식되어 멍한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그리고……. 터벅. 좀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딱히.” 놈을 내려다보며 귓가에 속삭인다. “못 할 거 같진 않은데.” 기싸움에서 이기겠다고 부린 허세가 아니다. [형도 10배짜리 깼다면서요?] 정말로, 나는 자신이 있다. [10년쯤 지나면 저랑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은 녀석에 비해 무력이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저는 이제 더 강해질 구석이 거의 없어서…….]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디 열 배 따리가.’ 나는 이백호를 이길 수 있다. 한데 그러한 확신이 놈에게도 전해졌을까. 내가 말하는 동안 굳어 있던 이백호가 애써 여유를 되찾고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네요.” 지랄, 재미있기는. “거, 사람 기분 나쁘게.” 나는 혀를 차며 전에 녀석이 내게 했던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왜 갑자기 거짓말해?” 이백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너 지금.” “…….” “하나도 재미없잖아.” 그게 아니면, 왜 자꾸 뒤로 가는— “……워워! 그만 그만!” 그때 이백호가 과장스런 손짓으로 앞을 막으며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아! 진짜 이 형도 참! 장난도 못 치겠다니까?” 어느샌가 180도 바뀐 표정과 분위기. 이에 적응할 새도 없이 이백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냐옹이를 죽일 리가 없잖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해본 말! 아니, 제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잘해줬었잖아요!” 좋아하기는 개뿔. 아니, 좋아하기야 하겠지. 제 딴에는 내게서 뭔가 쓸 곳을 발견했을 테니까. “미샤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도 그래서였냐?” “릴렉스, 릴렉스! 협박이라니요! 말했잖아요? 장난이었다고!” 어느새 경박한 말투로 이백호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협박… 그래, 그건 협박이었다. “제가 냐옹이를 왜 죽여요? 얻는 것도 없는데?” 그래,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빙결 쌍수 검사를 잃는 것도 모자라, 추가로 나랑도 원수지간이 되는 거니까. 어느 면을 봐도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협박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나를 쥐고 흔들 수 있게 됐겠지.” 조금 전에 있었던 기싸움에서 밀렸을 경우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아찔하다. 그땐 지금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전혀 달랐을 테니까. “아이, 차암! 무슨 그런 생각을 다 하셨대. 형! 저 그렇게 속이 새까만 놈 아니에요!” 그때의 녀석은 지금처럼 웃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형, 형’ 거리며 저자세로 나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새까만 놈 아니면 잘 됐네. 그럼 내놔, 미샤.” “드릴게요. 제 부탁을 들어주면.” 이렇게 ‘거래’를 제안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그럼 지금 상황이 이 새끼의 플랜 B라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보고 있자니, 이백호가 멋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랑 같이 돌아가자고는 안 할게요. 이제 저도 형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았으니까.” “본론만.” “그래도 우리 둘이 협력할 수는 있잖아요?” 이백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은근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물론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 계속.” “지금 형 상황이 어떤지는 형이 더 잘 알죠?” 그래, 일단 너보다는 잘 알겠지. 좋지 않다, 골치 아픈 것들이 산재한다. 그런 걸 넘어서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하다. “그래서?” “제가 도와줄게요. 형이 힘든 시기를 이겨 낼 수 있게끔. 음지에서 양지에서 물심양면. 대신 나중에 제가 10층을 뚫을 때 도와줘요.” 이백호의 제안은 꽤 그럴듯했다. 나와 달리 행동에 거릴 게 없는 놈 아닌가. 막말로 이 새끼가 후작을 암살만 해줘도 나한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백호야.” “…네?” “형한테 부탁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게 있지 않냐?” “…….” 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나를 원하는지는 100% 이해할 수 없지만. “미샤부터 데려와. 이 얘기는 그다음에 하고.” “…….” “대답은?” 재차 묻는 말에도 이백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하긴, 미샤를 보내는 순간 이놈이 갖고 있는 패가 하나 더 줄어드는— “형.” 그때 녀석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로 흥분했으니까. 이만하죠.” 녀석이 내린 대답은 보류였다. “뭐……?” “그렇잖아요? 저도 지금 머리가 잘 안 굴러가서.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얘기 나눠요. 냐옹이 얘기는 한번 잘 생각해 볼게요.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는 무슨.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형, 오케이라 했죠?” “…뭐?”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야, 잠깐! 기다—” 다급히 팔을 앞으로 뻗었으나, 이 영적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툭. 손끝이 닿기 녀석의 몸에 닿기 무섭게. “뿅!” 녀석의 몸이 빛무리로 변하며 사라졌다. 438화 맞수 (4) 처음엔 얼떨떨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하나, 이백호가 떠난 후 멍하니 서 있자니 서서히 실감이 났다. “후…….” 진짜 간 거구나. 마지막까지 지 같은 새끼. ‘거기서 뿅이 뭐야, 뿅이…….’ 그래도 이제는 좀 살 것만 같다. 아까는 흥분해서 피로감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 정말이지 단어 그대로 진이 빠져나가는 기분. 3일 넘게 커피를 마시며 밤을 지새웠던 대학생 때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머리가 뻐근하다. ‘잠깐만, 그 새끼도 그래서 머리가 안 굴러가니 뭐니 한 건가?’ 아, 몰라. 그게 뭐가 중요한데. 털썩. 나는 쓰러지듯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 정신적인 휴식이 간절했다. 하지만……. ‘쉬는 건 나중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대신해 해야 할 일을 입 밖으로 읊는다. “……일단 더 늦기 전에 복기부터.” 첫 재회 때부터 마지막에 도망가듯 떠난 때까지. 녀석과의 대화를 세세하게 돌이켜 본다. 뭔가 일이 발생했을 때의 평소 루틴이다. 한데 머리가 뻐근하다 못해 타버릴 듯해서일까? 대화를 하며 보여 준 눈빛, 표정의 변화까지는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오, 머리 아파…….” 복기 과정은 기름이 바닥난 차의 엑셀을 밟는 것과 비슷했다. 나아갈 의지는 충만한데, 머리는 점점 둔해진다. 그래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만을 중점으로 점검했다. [정말 형이 비요른 얀델이에요?] 녀석이 던진 미끼. [형이랑 저 사이잖아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죠. 암요?] 비요른 얀델인 걸 알자마자 흔쾌히 미샤를 포기하겠다고 했던 것. [여기 버튼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형은 곧바로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고요.] 녀석이 대놓고 보여 준 나를 향한 기대감. 그리고……. [눈을 보면서 거짓말을 하시네.] 그 기대만큼이나 컸던 실망감. ‘뭔가 많았네…….’ 천천히 복기하던 사고가 흐릿해진다. 어쩌면 조금은 만족한 걸지도 모른다. 이득은 보지 못했지만. 손해도 보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어차피 비요른 얀델인 걸 밝히는 것도 계획 중에 있었으니까.’ 원래는 의중을 슬쩍 떠본 뒤, 정체를 밝힌 다음 친분을 토대로 미샤를 반환 요구할 생각이었다. 만약 그걸로도 안 되면 협박할 계획이었고. 벤을 푼 게 나라는 걸 말하면, 다시 벤을 걸 수 있다는 것도 암시할 수 있을 테니까. 뭐, 어쩌다 보니 그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빨리 벤 풀어. 안 그러면 진짜 여기서 넌 뒈지니까.] 도시에서 난장판을 벌이면서까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길 희망하던 이백호라면 어느 정도 유효할 협박이라 여겼다. ‘……근데 이백호는 왜 그렇게까지 해서 벤을 풀려고 한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뭐, 그놈 속을 어떻게 알겠어. 한국인이랑 노닥거리는 게 그리워서든가 하겠지. “…….” 그렇게 눈을 감고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고를 내버려 두었다. ‘애초에 걔는 내게 뭔 기대를 하고 있는 거지?’ 조금 이해가 안 됐다. 그도 그럴 게. [대신 나중에 제가 10층을 뚫을 때 도와줘요.] 10층에서 도와달라니? 고평가 받는 건 좋지만, 솔직히 비요른 얀델이 그 정도인가? ‘음, 확실히 성장세만 보면 그런 기대가 생기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닌데…….’ 그렇다기엔 걸리는 부분이 있다.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는 걸 놈이 알아챈 것은 노움트리에서였지 않은가. [참고로 다음에 만났을 땐 남이다 우리?] 당시에 녀석은 쿨하게 넘어갔다. 친분을 쌓으려는 시도조차 없이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해…….’ 단순히 그땐 ‘비요른 얀델’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고 판단을 한 거라면. 지금은 뭐가 달라졌지? 성장세로만 따지면 그때가 더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막 명성을 얻으며 영웅이라 불리고 귀족 작위까지 얻은 시기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잘해줬었잖아요!] 일순간 이백호가 뱉었던 말 중 하나가 뇌리를 스친다. ‘처음부터……?’ 그래, 녀석은 처음부터 내게 잘해줬다. 하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비요른 얀델이 아니라 이한수여서.” 아니, 이건 틀렸다. [믿겠다, 너는 한국인이 맞군.] 그럼 한국인이어서? 음, 이건 애매하다. 어쩌면 단지 하나의 조건이었을 지도 모르지. 놈은 아무도 없는 한국인 채널에서 3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혹시 오지 않을 한국인을 기다리며. ‘……그렇게까지 목표에 진심인 놈이 고작 외롭단 이유로 그런 시간 낭비를 했을까?’ 글쎄, 역시 그건 아닐 거 같다. 애초에 현별이도 같은 한국인인데, 나를 대할 때와 다르게 까칠했었고. 그렇다면 무엇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백호는 처음부터 내게 잘해줄 수밖에 없던 것일까. “이런 미친.”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심코 벽면의 거울을 바라본 후에 깨달았다. “닉네임.” 그래, 닉네임이다. 커뮤니티에서 유명해진 줄도 모르고, 원래 쓰던 거에 그냥 대충 철자 하나를 더 붙여 지은 닉네임. [Elfnunna] 역시 그 닉네임 말고는 없다. 지금까지는 이백호가 이 닉네임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어서 떠올리는 게 늦었지만. ‘아니, 여태 한 마디도 안 꺼냈던 것부터가 이미 이상하잖아…….’ 이 닉네임을 달고 처음으로 들어간 ‘새내기방’만 봐도 그렇다. [엘프누나?!] [미친, 스탯 정리본을 쓴 그 사람?] [어… 그 사람 게임사 측 사람 아니었어요?] [역시 그분은 한국인이었군!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나를 본 모두가 격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분 팬이신 거 같기도 하고.] GM의 경우엔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그 이름을 언급하며 반가워했고. [그나저나 닉네임 짓는 센스하고는…….] ‘엘프누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현별이조차 내 특이한 닉네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데, 이백호에겐 그 당연한 게 빠져 있었다. 그 장난기 많고 방귀랑 공룡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거 같은 녀석이. ‘이 닉네임을 보고 아무 말 안 했다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어쩌면, 녀석은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웃는 얼굴로 속내를 감춘 채— “저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순간, 측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오빠, 거울 보면서 뭐 해요……?” 현별이였다. *** ‘백호 문제는… 머리가 멀쩡할 때 마저 생각해 보자…….’ 결국 얼마 쉬지도 못했네. 그냥 나도 이대로 튀어버려? “…지금 못된 생각했죠.” “…안 했어.” 그래, 나 조금 힘들다고 민폐 끼치는 것도 조금 웃기지. “흐음, 딱 표정이 그랬는데…….” “아니라니까. 그보다 너는 백호한테는 그렇게 구박을 하더니, 왜 나한테는 반존대 쓰냐?” “뭐라는 거야. 새삼스럽게.” 이내 현별이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총 3칸짜리 소파에서 한 칸이 떨어진 자리. “자리도 많은데, 왜 애매하게 거기 앉냐?” “아, 오빠랑 저 사이에는 선이 있어서요. 여기서 더 넘어가면 안 돼요.” …아무래도 자리를 비켜달라던 내 부탁 때문에 잔뜩 심기가 상한 모양이다. 거, 그럴 거면 싫다고 하든가. “…….” “…….” 그렇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정적이 이어진다. 사실 현별이와의 연애는 거의 이런 느낌이었다. 함께 있지만 시끌벅적하지는 않고, 그런 조용한 정적이 혼자 있을 때보다도 편하게 느껴졌다. 아, 물론 연애를 했을 때에는 그랬다는 뜻이다. ‘……더럽게 불편하네.’ 결국 참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별아.” “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그리 말하며 슬쩍 옆을 보자, 내가 아니라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 중인 옆모습이 보인다. 현별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답했다. “피곤해 보여서요.” “…응?” “딱 표정이 그래요. 오빠가 회사에서 잔뜩 깨지고 돌아왔을 때 같다고 해야 하나?” 뭐, 보니까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더 힘들어하는 거 같지만요. 그런 사족을 붙인 현별이가 나를 힐끗 보았다. “……왜요? 재잘재잘 옆에서 귀찮게 해줘요?” “아니.” “그래요? 그럼 참을게요.” “참다니?” “사실 묻고 싶은 게 엄청 많은데, 겨우겨우 참는 중이에요. 오빠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어……. 그러니? 그것 참……. “고맙다……?” “……뭐래.” 기껏 감사의 인사를 했으나 현별이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구나. 씨,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괜히 나까지 창피해지게. “……그럼 좀 쉴게.” “네.” 솔직히 힘들어 죽을 거 같았기에 현별이의 배려를 받기로 했다. 솔직히 힘들어 죽을 거 같았다. 살기를 남발한 것도 남발한 것이지만, 이렇게 지독한 살기에 노출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 “…….” 그렇게 평화로운 정적이 이어진다. 일순간 지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현별이가 책장 넘기는 소리 대신 벽난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뿐. 그런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타닥, 타닥, 타다닥- 불똥 튀기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깼어요?” “아, 어…….” 조금 놀랐다. 영적 세계에서도 잠에 들 수가 있구나. 왠지 조금은 피로가 풀린 거 같기도 하고……. “얼마나 지났어?” “1시간 30분 정도요.” 휴, 그럼 원탁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겠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요?” “덕분에.” “그러면 시작할게요.” “응?” 시작하다니? 뭘? 그 의문은 구태여 되물을 것도 없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오빠, 아까 걔 대체 뭐예요?” 기다렸다는 듯 토해지는 질문. “걔?” “이백호 걔 말이에요. 걔가 걔 맞죠?” 좀 문맥이 이상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조금 놀랐을 뿐. “맞아.” 현별이도 이백호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긍정의 답변을 받은 현별이는 역시 그랬구나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에서 똘기가 보이더라니.” “잠깐만, 근데 현별아. 너는 걔가 누군지 알고도 그랬던 거야?” “그런데요? 문제 있어요? 어차피 상대가 밖에서 얼마나 강하든, 여기서는 의미 없잖아요?” “어, 그것도 이론상 그렇긴 한데…….” 확실히 이걸 보니 뉴비 티가 나기는 하네. 어디 가서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교육을 시켜둬야 할 거 같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여기서만 쓸 수 있는 기술이 있거든.” 이후 나는 ‘살기’에 대해서 현별이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영혼과 영혼이 링크됐다는 거. 그래서 무형의 기운이 증폭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된다는 거. 그거는 이해가 되는데…….” 언제나 학습이 빨랐던 현별이답게 이론은 얼추 이해한 듯했으나, 막상 실체가 잡히진 않는 듯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죽을 거 같다는 공포? 그거 때문에 현실에서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니?” 사실 현별이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원탁의 멤버였던 여우의 살기도 단지 상대방을 조금 압박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 어떤 느낌인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냥 오빠의 표현력이 부족해서 아니에요?” 뭐래, 내가 읽은 소설이 몇 권인데. 그래도 얘만큼은 안 되겠지만. “아, 차라리 직접 겪어보는 게 빠르겠다.” 현별이가 아니면 결코 하지 않았을 제안이다. 안 그래도 심력이 바닥난 게 쥐꼬리만큼 회복된 상태 아니던가. 맘 같아서는 다음으로 미루고서 쉬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현별이니까.’ 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그럼 한다?” “자, 잠깐! 고민을 좀—” 고민은 뭣하러 해? 이쪽이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할 텐데. 나는 현별이가 밖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곧장 살기를 피워냈다. “……읏!” 변화는 즉발적이었다. “그, 그… 만…….” 이백호를 제외한 모두가 그러했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현별이. ‘백호 그놈은 멀쩡하더라니.’ 그래, 다행히 살기가 고장이 난 건— “그만… 하라… 고……!” 아……. 살짝 맛만 보여 주려고 했는데. “…….” 망했네. *** 생전 처음 경험한 살기가 그리 충격적이었을까? ‘얼마 한 것도 아닌데…….’ 진짜 살짝 맛만 본 정도임에도 현별이는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왜 현실로 돌아가서도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는 건지도 이해를 했고.” “오, 그렇다니 다행—” “하지만 다음부터는 화낼 거예요. 이렇게 제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면.” “이해 완료.” “……오빠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어요?” “아니? 없는데? 왜?” “하아…….” 뭐 이리 사람이 이상해졌어? 그리 중얼거리던 현별이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가 쉬어야겠다며 몇 가지만 빠르게 질문했다. 첫 번째는 이거였다. “오빠, 비요른 얀델에 대해 알죠?” 듣자마자 뒷골이 싸했다. 뭐지? 설마 얘도 내 정체를 눈치채고 이백호처럼 떠보고 있는 건가? 결과만 말하자면, 다행히 아니었다. “…알긴 알지?” “그래요? 그럼 혹시 그것도 알아요? 비요른 얀델이 정말 악령인지 아닌지?” “어, 글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흐음, 그래요?” 현별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고, 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근데… 비요른 얀델은 왜?” “아, 일 때문에요. 악령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이후 계획을 짤 수가 있거든요.” 이후 계획이라니……. 어딘가 불안해진다. 현별이 얘는 탐험가가 아니라 사무직으로 지내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 [금전적으로 자유로워진 다음 목표는 권력을 손에 넣는 거였어요.] 권력을 통해 귀환할 방도를 찾아내는 것. 그땐 그냥 현별이다운 수단이다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꽤 높은 사람 줄을 잡았죠.] 과연 그때 말한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만약, 그 높은 사람이 후작이라면……. “현별아.” “…네?” “너 지금 누구 아래에서 일하는 거냐?” 장난기가 싹 빠진 내 질문에 현별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 그 문제는 제대로 선 긋기로 한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랑은 상황이 달라졌어.” “……네?” “어쩌면 내가 실수로 널 죽일지도 모르니까.” “…….” “그러니까, 말해. 누구야?” 다시 한번 목소리를 깔고서 묻자, 현별이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페프로크 여백작이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테르세리온 후작이나, 공작가 같은 이름이 나오지 않은 건 반길 일이지만……. “…페프로크 여백작?” 설마 이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네. 우연히 인연이 생겨서 그분 아래에서 일하고 있어요.” 풀 네임,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 매일같이 방문했던 도서관 사서이자 마법사. 7급 행정관 샤빈 에무어의 정보가 귀중했을 뉴비 시절에 주기적으로 참가했던 ‘친구 모임’의 일원 중 한 명. “자, 이제 됐어요?” “어.”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여기서 더 캐묻는 것도 좀 그랬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작가 소속이 아닌 건 확인했지 않나. 당장은 현별이와 내가 적대할 일은 없다. 지금은 그거로 만족— “그나저나 오빠.” 그때 현별이가 소파 가운데 칸에 손을 한짝 얹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어?” “결국 선은 오빠가 먼저 넘은 거예요?” 뭐라 답할 새도 없이 현별이가 소파에 얹고 있던 손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럼 다음 달에 봐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이후 현별이는 그 말을 끝으로 채팅방을 떠났고, 나도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에 밖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03: 07]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서 잠시 쉬고 있자니 머지않아 그 시간이 왔다. “후우…….” 마음 같아선 그냥 이쯤에서 로그아웃하고 잠이나 자러 가고 싶다. 하지만……. 번뜩-! 그래, 아무리 피곤해도 이걸 빠질 수는 없지. 439화 자이언트 스텝 (1) 집회가 열리자마자 입장한 사내는 사슴뿔 가면을 얼른 쓰고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겨 원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원탁은 텅 비어 있었다. “다행히 첫 번째인가 보군.” 쓱 둘러보던 사내가 이내 한 자리로 향했다. 수사자가 매번 앉는 자리에서 왼쪽으로 네 칸 떨어진 자리였다. 초창기 원탁과 달리 빈자리가 남는 지금은 다들 무조건 한 칸씩 여유를 두고 앉았으니까. 일곱 명이 모두 참석한다는 가정하에, 무조건 두 번째 순번을 챙길 수가 있는 것. ‘아무래도 첫 번째 순서는 귀찮지…….’ 첫 순번이 뱉은 정보에 따라 그 한 바퀴의 정보 퀄리티가 정해진다. ‘무엇보다 그자의 바로 옆이기도 하고…….’ 음, 역시 두 번째가 가장 무난하다. 세 번째나 네 번째 자리도 나쁘진 않지만, 위치상 그자랑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니까. 뒷순번은 어딘가 부담이 심하고. 뭐, 광대 그놈이야 관심이 좋아서 매번 뒷자리에 앉는 거 같긴 하지만. ‘그놈이야 태생이 그런 놈이니.’ 아무튼,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앉은 자리는 알게 모르게 회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였다. 그래서일까? “오! 사슴뿔 씨? 이번에는 오셨네요?” 고블린 가면이 원탁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건네며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그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을게요?” 집회가 시작되면 세 번째 순번이 될 자리였다. “그나저나 저번엔 급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이내 착석한 고블린이 질문을 던지자 사슴뿔은 대충 둘러댔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래요?” 애초에 스몰 토크를 위한 인삿말이었는지, 그의 짧은 답변에도 고블린은 별 신경도 안 썼다. 사슴뿔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보다 뭣 좀 있었나?” “…네?” “지난 회차 말이다. 혹시 내가 없는 동안에 뭔가 큰 사건이 있진 않았을까 싶어서…….” 그리 묻는 사슴뿔의 목소리는 고블린을 대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저자세였다. 그야 이런 행위는 비매너에 가까웠으니까. 이전 집회에서 있었던 일은 비참석자에게 말하지 않는 게 원탁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고블린이라면 말해 줄지도.’ 애초에 이렇게 급히 입장한 이유가 뭐겠는가. 다른 회원이 도착하기 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슬쩍 운을 떼보기 위함이었다. 한데 바로 도착한 게 고블린이라니? 운이 따른— 터벅.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블린에 이어 또 한 명의 회원이 도착한 것. ‘하필이면 여우군.’ 오지랖이 심한 그녀라면 고블린이 내 질문에 답하지 못하도록 도와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던 때. “의도치 않게 들었어요.” “…….” “걱정 마요. 별일 없었으니까요. 아니, 애초에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리지?” “저번 집회에선 수사자가 불참했거든요” “수사자가 불참했다고……?” “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광대랑 여왕도 왔다가 그냥 떠났고. 그쪽까지 없으니 자연스레 자리가 끝났죠.” “아…….” “궁금한 게 풀렸으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누군가 한 명이 어기는 순간, 그건 규칙이 아니게 되니까요.” 어딘가 조금은 불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조심하지.” 사슴뿔이 순순히 수긍하자 여우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고블린 씨도요.” “에? 예? 저는 왜 그럽니까?” “누가 묻는다고 막 대답해주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 정확히는 ‘입조심’을 하라는 거죠.” “……하핫! 여우 씨도 참… 입조심… 예, 입조심 그렇지요… 하하핫!” 고블린이 어색하게 웃는 사이, 여우는 빈자리를 쓱 확인하고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았다. “여, 여우 씨, 이렇게 되면 첫 순번은 초승달 씨가 되겠군요?” “그분도 참석을 한다면 말이죠. 뒷자리는 별로 선호하지 않으시는 거 같았으니.” “……흐음, 근데 수사자 씨는 또 불참하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기다리다 보면 알겠죠.” “하, 하핫. 그렇죠…….” 자연스레 앉자마자 대화를 나누는 고블린과 여우를 보며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좀 이질적이라 해야 하나? 왠지 여우는 고블린을 편하게 대하는 거 같고, 반대로 고블린은 여우를 불편히 여기는 거 같다. 다만, 사슴뿔은 그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사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자의 불참이라…….’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집회에 빠지느라 아쉬웠는데, 왔어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단 뜻 아닌가.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만, 못내 한 가지가 걸린다. [수사자는 비요른 얀델이다.] 지난날, 여왕이 보석 앞에서 하였던 말. 물론 적색불이 떠오르며 다 식기는 했지만, 한때 원탁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화제였다. 정황상 알게 모르게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수사자와 비요른 얀델 사이에는. ‘……뭐, 그냥 우연이겠지. 동일인이라고 하기엔 그만큼 둘 사이의 차이점도 크니까.’ 우선 비요른 얀델은 이제 4년 차 탐험가다. 그리고 수사자가 처음 이 커뮤니티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역시 동일인일 수가 없다. 하지만……. ‘대체 뭐지? 뭔가 놓치고 있는 이 기분은…….’ 사슴뿔은 한창 여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블린을 힐끗했다. “초승달 씨는 언제 오시려나요? 광대 씨나 여왕님은 오늘도 마지막쯤에 오실 거 같은데.” “때가 되면 오겠죠. 근데… 고블린 씨, 왜 여왕만 님이라고 불러요?” “하핫… 제가 그랬나요?”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원탁에서 처음으로 그 의심을 꺼냈다. 비요른 얀델과 그가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던가? 만약 사망한 거라면, 그 시기가 아주 공교롭다는 점이 그 근거였는데, 그땐 비웃음만 샀었다. “왠지 존대가 절로 나온달까… 그… 별칭도 일단 여왕이기도 하고…….” 그는 둘이서 나누고 있던 대화에 껴들었다. “이봐, 고블린.” “……예?” “비요른 얀델이 수사자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어… 갑자기요?” “그래, 갑자기 궁금해져서 말이지.” “흐음…….”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던 고블린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답은 해주었다. “아뇨.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너무나도 명확한 목소리의 답변. 이에 사슴뿔도 곧장 납득했다. “그런가…. 하긴, 22년 전에 소환된 사람이 그와 동일인일 리는 없겠지.” “예? 아아… 확실히 그것도 그렇긴 하죠…….” 애매한 반응에 사슴뿔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설마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그게… 애초에 저는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생각을 안 하거든요.” “아, 그것 때문이었나.”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는 것은 왕가의 전략적인 발표였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는 새로운 뉴스가 전역에 퍼진 상황. 그럼 이 반응도 이해가— “아뇨. 그것도 좀 이유가 다른데…….” 뭐? 이것도 아니라고? 사슴뿔이 대답을 바라는 눈짓을 보내자, 이내 고블린이 여우의 눈치를 살살 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뭐라 길게 말은 못하겠고……. 비요른 얀델은 악령이 아닙니다. 악령일 수가 없어요. 예, 그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이후 고블린은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사슴뿔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스벤 파라브도 원정대에 껴 있었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뭔가 느꼈을지 모른다. 악령들은 악령을 비교적 능숙하게 알아보니까. 직접 미궁에서 동고동락한 입장에서 내린 판단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 비요른 얀델은 정말 악령이 아닌가 보군.’ 사슴뿔은 이 문제를 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야 이미 알 듯 말 듯 하던 감각도 어느새 사라진 이후였던 데다가……. “다들 먼저 와있었구려.” 네 번째로 도착해 첫 순번 자리에 앉은 초승달을 필두로 남은 멤버들도 도착하고 있었다. “모두 오늘도 반가워요.” 다섯 번째로 도착해 다섯 번째 순번 자리에 앉은 여왕. 그리고……. “피싯.” 광대까지.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자, 자연스레 남은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하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상황이었다. 이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다는 게, 상석처럼 자리까지 비워 두고 한 사람이 도착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이라니? “아아, 오늘은 꼭 와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광대의 염원이 화답이라도 받듯, 복도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터벅.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 그 소리가 들려온 즉시 사슴뿔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터벅. 그저 평범하게 걷는 소리일 뿐인데. 심지어 아직 그의 모습은 복도 너머에서 보이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살기 같은 잡기술을 쓴 게 아닐까도 싶지만, 그런 게 아니란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다. 터벅. 그렇다. 저 발걸음 소리는 특별하지 않다. 이 중 누가 걸어도 저런 소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리가 들려온 즉시 모두 입을 다문 건……. 터벅. 단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소리는 평범할지라도. 터벅. 그 소리의 주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터벅. 이내 걸음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고, 마침내 그자가 당도했다. “피시싯, 오셨습—” 광대가 심복이라도 된 듯 일어나 그를 반겼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빈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 자리에 앉아 아무런 말 없이 턱을 괴었다. ‘……오늘은 최대한 조심해야겠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딱히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우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 자신만이 아닐 테니까. “…….” “…….” 이 분위기를 느낀 건. *** 얼른 등을 까뒤집고 낮잠을 자고 싶어지는 정적. ‘아오, 졸려 죽겠네…….’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으며 자꾸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아냈다. 후, 그냥 오늘은 스킵할 걸 그랬나? 피곤한 걸 넘어서, 진짜 눈만 감으면 잠에 들 거 같다. ‘오늘따라 여기는 또 왜 이렇게 조용한 거고.’ 뭔가 말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알아서 진행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는데, 어째선지 정적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 “…….” 얘네들은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원래라면 오자마자 저번에는 왜 안 왔냐는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 “이러고 있을 거지?” “……!!” 빨리 시작해 졸려 죽을 거 같으니까. 그런 의미를 돌려서 한 말에 고블린이 빠릿하게 대답했다. “예, 예! 시, 시작해야지요! 그, 그, 그럼 오늘은 초, 초승달 씨부터……. 하시면……. 될 거 같은데…….” 음, 여우가 진행할 줄 알았는데 얘가 하네? 긴장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모습이 못미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시선이 첫 순번인 초승달로 옮겨갔다. “……다른 자리에 앉았어야 했거늘.” 초승달은 첫 순번이 부담스러운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집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나부터 하겠소.” 그가 꺼낸 정보는 요정족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에르웬에 대해서라고 해야 하나? 혈령후가 순혈단 탈퇴 의사를 내비쳤단 정보로 그는 초록불을 받아냈다. 참고로 순혈단은 요정족의 특수부대 같은 거로 에르웬은 휴가를 낸 채 잠시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탈퇴 신청을 한다고 했었고. 툭툭. 그럼 일단 첫 번째는 알고 있던 내용이고. “……비요른 얀델이 이끌었던 원정대는 전멸할 것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 두 번째 순번이던 사슴뿔은 원정대가 버림패였단 얘기를 꺼내고서 적색불을 받았다. 그야 여우에 고블린, 그리고 나까지. 이미 셋이나 알고 있던 얘기였으니까. 결국 사슴뿔은 당황하며 재시도를 했는데……. “……왕가에서는 비요른 얀델에게 이번 원정의 공으로 승작을 제시했다.” 초록불은 나왔지만, 이에 대한 피드백은 없었다. 평소라면 ‘그럼 준남작이 아니라, 남작이 되는 건가? 자식에게 계승도 할 수 있고!’ 하면서 한두 마디가 붙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초승달 때도 그랬지. ‘오늘따라 애들이 유난히 조용하네.’ 사실 원정대 얘기도 우리나 아는 거지, 다른 애들은 경악했을 얘기였을 텐데. 반응이 좀 이상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피곤해서 딱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툭툭. 아무튼, 그럼 두 번째 정보도 꽝인가? ‘여우랑 고블린한테는 미리 말해둘 걸 그랬나. 그랬으면 이번에도 빨간불이 떴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자, 세 번째 순서가 됐다. 자기 차례인 고블린은 벌벌 떨며 본론만 얘기했다. 원정대 관련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우가 당부한 ‘입조심’ 때문인가? 음, 그래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정보 정도는 공개해도 될 거 같은데……. ‘딱히 관심도 안 가는 교단 내부 사정이라…….’ 이는 고블린의 특징이기도 했다. 가끔 중대한 정보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뱉는 정보들의 질은 낮은 편. 다만, 초록불이 뜨기는 했기에 순번은 넘어갔다. ‘그럼 세 번째도 꽝인가…….’ 오늘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면 초록불이 떴어도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걸 꺼내게 했을 정보인데 왜 다들 그냥 가만히만 있지? 툭툭. 나서긴 싫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일단 이제 고블린은 아군이라 할 수도 있고. ‘그럼 이제 여우 차례인가.’ 사실 이번에도 딱히 기대는 안 됐다. 그야 얘도 고블린이랑 마찬가지로 미궁에서 내내 나랑 같이 있었던 데다가……. “………대형 클랜들이 집단 보이콧을 계획하고 있어요. 자신들에겐 말도 하지 않고 특수 임무를 맡은 원정대를 조직한 게 불만이었나 봐요.” 이건 도시에 있던 동안에 나한테 보고가 됐던 내용이니까. 식물인간 시절 이후 클랜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부단장 생활을 오래 했던 여우는 넓은 인맥으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는 그 정보망이 내게도 공유되고 있었고. ‘결국 네 번째 정보도 쓸모가 없었네.’ 제발 이 다음은 달랐으면 좋겠는데. 툭툭. 이내 다음 차례인 여왕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잠시간 시선이 마주쳤다. 한데,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스윽. 여왕이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시선을 피하더니, 평소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GM께서 그자… 이백호의 커뮤니티 벤을 풀었어요.” 딱 봐도 GM이 시킨 짓이었다. 예전에 내가 요구한 부탁을 들어줬다는 걸 어필하는 것. 거, 쓸데없는 짓 말고 정보나 뱉을 것이지. 툭툭. 아무튼, 나를 제외하고서는 초록불을 받을 내용이었기에 차례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벌써 저군요. 피시싯.” 이번에는 다들 잡담이나 그런 것 없이 정보만을 뱉어서일까? 평소의 템포보다 몇 배는 빠르게 여섯 번째 차례까지 왔다. 후, 그래, 항상 이놈이 조커였지 않은가. 졸려 죽을 거 같은 상황에서도 기대감을 놓지 않고 귀만은 활짝 열어서 경청했다. 하지만……. “용살자 리갈 바고스가 죽은 건 다들 아실 테고…….” 간을 보듯 그렇게 운을 뗀 녀석이 끝내 뱉어낸 정보마저도 영 실망스러웠다. “비요른 얀델, 그놈이 왕가에서는 특수 임무를 받고 우리 쪽에 숨어 들었다고 했던 거. 그거 전부 거짓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정보인 걸 넘어 괜히 귀찮게만 됐다고 해야 하나? ‘쯧, 이렇게 되면 나중에 여우랑 고블린한테도 해명을 해야겠네. 얘네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내 기분이야 어쨌든 광대의 정보는 거뜬하게 초록불을 받아냈다. 그렇게 다가온 나의 차례. “…….” “…….” 시선이 하나둘 내게로 모인다. 내 차례가 되면 항상 나오는 패턴이었다. 내가 온 이후로 이 원탁에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으니까. 재밌는 이야기를 갖고 오면, 나는 그걸 평가하고 놈들에게 보상으로 정보를 준다. 하면, 과연 이번에는 어땠을까? 정말 내가 듣기에 흥미가 있는 이야기였을까? 툭. 이에 대한 내 답변은 간단하다. 나는 보석에 손을 올린 채 입을 열었다. 평소였다면 필터를 거쳐서 훨씬 더 순화되어서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방금 한 모든 얘기들은.” 솔직히 짜증이 난단 말이지. “전부 쓰레기 같았다.” 컨셉질이 아니라 100% 진심이다. 암, 내가 하품을 몇 번이나 참으면서 꾸역꾸역 얘기를 들었는데?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더 유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을 보석에서 손을 뗀 즉시 불이 들어왔다. 솨아아아아아-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근데 정말 너희들은 몰랐나 보군?” “…….” “이렇게 초록빛이 밝혀진 걸 보니.” 시시해서 자고 싶어졌다. 440화 자이언트 스텝 (2) 잠시간 점멸했던 녹색의 불빛은 이미 진작에 사그라들었지만, 이후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 “…….” 마치 무서운 선생님에게 혼난 학생 같은 반응. 다 큰 어른들이 저러는 걸 보면 뭔가 짠한 마음이 피어날 법도 했으나, 어째선지 그 모습에 짜증만 더 커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잘걸.’ 다들 아주 빠져가지고. 그간 정보 수급을 얼마나 게을리한 거야? 이딴 얘기나 들으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아후, 그보다 졸려 죽겠네 진짜…….’ 어쩌면 피로 때문에 예민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렇게 짜증이 나는 일도, 짜증이 난다고 해서 이렇게 감정적이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툭툭. 조금 고민이 커진다. 더 시간 낭비를 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끝낼까? 음, 그러기엔 조금 아쉬운데……. 툭. 이내 고민을 끝마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그래,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혹시 뭐가 나올지 모르잖아? “기회를 주지.” 그리 말하며 주변을 쓱 둘러보자, 눈이 마주친 회원들이 움찔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흡족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야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회원들도 아끼고 있던 정보를 꺼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데다가……. ‘다행히 지적하는 사람은 없군.’ 아주 자연스럽게 내 차례가 스킵 됐다. ‘전부 쓰레기 같았다.’라는 감상 한마디로 한 바퀴를 날로 먹을 수 있던 것. ‘확실히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가시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던 차. 시선을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던 회원들 중 한 명이 먼저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럼 이번 바퀴는 역순으로 가지요. 피싯.” 이 상황에서조차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는 광대. 그래도 제법 기대가 됐다. 목소리에서 어딘가 결의가 느껴졌거든. 첫 순번을 자처한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 때문일 테고. “다만, 시작하기 전에…….” 이내 광대가 회원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부디 이번에는 날로 먹을 생각을 하려는 분은 없었으면 하는군요.” 처음에는 나를 저격하는 말인가도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란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 광대는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나도 아끼고 있는 걸 꺼낼 테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 애석하게도 그 경고에 답한 회원은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을까? 이내 광대가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노아르크에서는 도시 침공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초록불이 밝혀진 즉시. “……!” 가면 속에 감춰져 있던 회원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하도 피곤해서 반응은 못 했지만, 놀란 것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도, 도시 침공이라고요?” 미궁 내의 전쟁을 말하는 게 아닌, 도시 침공. 이건 바깥으로 나갔던 놈들이 라프도니아로 쳐들어올 계획을 세우고 있단 뜻 아닌가. “……어째서죠?” 여우가 당황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으며 광대에게 물었다. “바깥은 멀쩡하다면서요? 노아르크 세력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합당한 의문이며, 나도 내심 생각하던 바였다. 멀쩡한 바깥으로 나가 놓고서도 꾸역꾸역 미궁에 들어와 힘을 키우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는 도시 침공이라니? ‘…바깥이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닌가? 아니면 왕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이유가 있어서?’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광대는 이에 대한 대답을 아꼈다. “글쎄요…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만? 피싯.” 그래, 이 정도면 턴 한 번 넘길 양은 충분하니까. 이후 광대는 내 눈치를 한 번 쓱 보더니, 자기 차례를 끝냈다는 듯 등을 의자에 붙였다. 그렇게 돌아온 여왕의 차례. “…….” 여왕은 자기 차례가 되었음에도 잠시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있었다. 어딘가 고민하는 듯한 분위기. 이를 감지한 광대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깐족거렸다. “당신, 뭘 고민하는 겁니까? 설마 이번에도 대충 넘길 생각인 건 아니겠죠?” “……잠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여왕이 퉁명스레 답하며 곧바로 보석에 손을 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광대의 발언이 그녀의 등을 떠민 것. ‘나이스, 어시스트.’ 마음속으로 광대에게 칭찬 스티커 하나를 적립해 주며 기다리자, 이내 여왕의 입이 열렸다. “최근에서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정보 중 하나예요.” 근데 대체 뭘 말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길— “원탁의 마스터는 아우릴 가비스다.” …뭐? *** 원탁의 마스터. 장래가 유망한 플레이어들을 섭외해 비밀 집회를 만든 장본인. 사실 내심 생각은 했었다. 그때 한 번 보았던 그 늙은이가 아우릴 가비스는 아닐까 하고. 의심의 시작은 과거 시대에서였다. [자네가 말한 규칙을 추가하려면 아무래도 권한을 더 불어넣어야 하겠군.] 나는 약 22년 시대에서 그 늙은이와 함께 원탁과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물론 여기까진 수상할 뿐이지, 단순한 우연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는 한다. 특별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정말로 공교로운 건 다른 부분이었다. ‘서로 하고 다니는 짓이 똑같아.’ 아우릴 가비스는 이 영적 세계를 만들어 내고, 유망주들을 모아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은연중에 도왔다. 마치 이 원탁에서 마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무, 무슨 말이에요? 그, 그분이… 아우릴 가비스라니?” 초창기부터 유난히 마스터를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여우가 멘탈이 나가 중얼거렸으나, 여왕의 답변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말 그대로예요.” “그, 그럼 그분이 저희를 이 세상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라고요……?” “저희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래요.” 여왕의 뒤에 GM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부정의 말조차 더 던지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여우. 솨아아아아아. 초록불이 꺼지자마자 여왕이 보석에서 손을 떼며 광대를 힐끗했다. 그리고 마치 어떠냐는 듯한 눈빛을 쏘아냈다. 좀 웃겼다. 나보다 광대를 먼저 살피는 걸 보니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거 같은데……. ‘이 둘, 왠지 시너지가 좋네.’ 오케이, 앞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싸움을 붙이든가 해야지. ‘원탁의 마스터가 아우릴 가비스라…….’ 내심 예상은 했지만, 조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늙은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대로 각을 잡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은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니까. ‘일단 오늘은 까먹지 않게 인풋만 제대로 해두자…….’ 그렇게 목표 설정을 새로이 하는 동안에 상황은 정리되어 다음 순번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여우, 이제 당신 차례에요.” 어느덧 도달한 세 번째 차례. 워낙 앞선 두 정보가 충격적이어서 그럴까? 머리는 멍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집중력이 올라갔다. ‘그래, 이게 원탁이지.’ 역시 사람이 해이해지면 자극을 줘야 하는 건가? 좀만 건드렸더니 좋은 정보가 술술 나오네. 아, 그렇다고 여우가 원정대 정보를 술술 불거나 하면 안 되는데……. ‘……말고 다른 게 있겠지.’ 걱정 반 기대 반의 눈초리로 여우를 지켜보고 있자, 이내 여우가 정보를 꺼냈다. 이전에도 뱉었던 대형 클랜 보이콧에 관련된 정보였고, 아는 이가 없었던 것인지 보석도 초록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여우 씨, 장난합니까?” “…이런 식이면 앞으로는 이 집회에 계속 참가할 수 없을 거 같네요.” 치고받고 싸우던 광대와 여왕이 이번엔 합심해서 이의 제기를 했고, 결국 여우는 한 번 더 트라이를 해야만 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탐험가 길드의 길드장, 이리야 아드너스는 이번 왕가의 원정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세작을 보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조금이라도 원정대와 관련된 정보가 밖으로 거론될 일도 없었을 텐데. 쩝… 이게 자업자득이라는 건가? ‘뭐, 이 정도는 크게 영향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길드장이 우리 아군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렇게 정보를 오픈하면 다른 회원들이 조사를 하다가 새로운 정보를 얻어올 수도 있고. ‘음… 어쩌면 그것까지 생각해서 언급한 걸 수도 있겠네.’ 나는 미련을 버리고 회원들의 눈빛을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 광대는 ‘길드장?’ 하는 느낌이었고, 여왕은 잘 알 수 없었다. 고블린은 여우를 우려하듯 힐끗했으며……. “아드너스 경이… 세작을……?” 왕가 소속으로 추정되는 사슴뿔이 그나마 조금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너희는 아예 모르고 있던 얘기인가 보네. “자, 일단 초록불이 뜨기는 했는데…….” 두 번째 바퀴 내내 조용히 있던 초승달이 눈치를 보며 운을 뗐다. 혹시 이의 제기를 할 사람이 있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피싯, 글쎄요. 아직 한참 부족하긴 합니다마는…….” “앞에 정보도 사실 남들이 모르는 정보이기는 했으니까요.” 정보 2개를 써서 겨우 최소 컷을 넘긴 느낌으로 여우의 차례가 끝났다. 그럼 이제 문제는 고블린인가? “……이, 이제 제 차례군요.” 제발, 이상한 소리만 꺼내지 않았으면 하는데. “뭘 그리 긴장합니까? 피싯. 여기서 아무도 당신한테 기대하지 않는데.” “글쎄요. 그건 광대 당신만의 생각 아닌가요?” “피싯, 여왕 당신은 다른가 보군요?” “……겨울철 다람쥐도 잘 뒤져보면 볼에 숨겨둔 도토리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요.”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을 중얼거림. 이에 긴가민가하던 고블린이 묘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감사합니다……?” 일단 칭찬이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피싯, 이 사람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배알이 없는 건지. 됐고, 얼른 하기나 하죠?” “아, 예……. 신탁… 신탁이 내려왔는데—” “……또 신탁입니까? 레아틀라스교 여신은 뭐 그리 할 말이 많은 건지.” “이, 이건 저희 교단이 아니라 토베라교에서 내려온 신탁입니다!” “흐음? 토베라교?” “예! 토베라교 말입니다. 아실지는 모르겠는데 거기는 신탁을 잘 안 하는 곳으로 유명—” “잡설은 필요 없으니 신탁 내용이나 얼른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광대의 재촉에 고블린이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영생의 현자가 돌아왔다.” 너무나도 짧은 한 줄짜리의 정보. 초록불은 떴으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게 끝입니까?” “예…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광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여왕은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추기경이나 고위 사제들이 해석한 주석은 없었나요? 그게 있으면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없었습니다. 애, 애초에… 저도 신탁 내용만 어찌어찌 전해들을 수 있었던 거라…….” 고블린의 목소리에서는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왠지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번 바퀴가 좀 유별난 거지. 평소에는 신탁이라면 무슨 내용이든지 간에 무조건 프리패스였으니. ‘……한 번 도와줘 볼까.’ 그냥 내버려 두면 뭔 정보를 꺼낼지 알 수 없다. 그런 판단이 든 즉시 광대의 말을 끊으며 대화에 껴들었다. “피싯. 아무래도 다들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다른 걸로 다시 해보는 게 어떻—” “영생의 현자라…….” “…………예?” 이 집회에서 오직 나만이 가능한 개수작. 이름하여……. “그래, 그가 돌아온 건가…….” 수사자류雄獅子流. 제 5식, 유잼판정. “재미있군.” 내가 그렇다는데 너희가 뭐 어쩔 거야? “……!!” [던전앤스톤]은 엄연히 팀 게임이다. 441화 자이언트 스텝 (3) 잠시간 원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 “…….” 고블린이 뱉은 정보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이미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은 다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바빴다. 유잼판정의 부가적인 효능이었다. “영생의 현자가… 대체 누구기에…….” 그야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딱 듣자마자 아우릴 가비스가 떠오르긴 했는데 확실한 건 아니다. 근데 이렇게 해두면, 얘네가 열심히 조사해올 거 아니야. “…피시싯, 나가자마자 알아봐야겠군요.” “만약 단서를 찾으면 알려 줘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테니까.” “못 할 건 없죠. 단, 그쪽도 그러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말입니다.” “약속할게요.” 그래, 잘들 해보고. 안 그래도 너희 둘에게는 기대하는 게 많으니까. ‘그럼 고블린 문제는 해결이 된 건가?’ 음, 그런 듯하다. 광대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걸 보니. “피시싯, 그나저나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군요. 설마 고블린 씨가 잭팟을 터트릴 줄이야!” 고블린은 광대의 칭찬이 낯선지 어색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 그렇습니다. 참……. 하하핫….” 보아하니, 본인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같다. “……그럼 이제 나군.” 차차 소란이 잦아들자 다음 순번인 사슴뿔의 차례가 시작됐다. 어떤 얘기를 듣던 포커페이스를 지킬 예정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힘겨웠다. “라그나 페프로크 여백작은 테르세리온 후작의 사생아다.” 아까 현별이에게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공교롭게도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고 있는 그 이름. 솨아아아아아- 머지않아 보석에는 초록불이 떠올랐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없었다. “…어쩐지 후작이 정계에서 계속 밀어주는 거 같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려.” 초승달이 한마디 덧붙였고, 여왕도 저만의 반응을 보였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저기 사생아인 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고블린이 조심스레 껴들자 여왕이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뭐, 일단은 정치적으로 쓸 수 있는 무기니까요. 한 국가의 이인자나 다름없는 재상을 상대로.” “아, 예… 그렇군요…….” 아무리 봐도 여왕이 재밌다고 한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직접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라그나가 후작의 딸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항상 부티가 나더라니.’ 사실 감정적으로 보면 앞에 광대나 여왕이 뱉은 정보들보다도 충격적이다. 라그나도 라그나지만, 이번 일에는 현별이도 껴 있으니까. ‘하……. 일이 더 골치 아파지는데.’ 나중에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간절히 바랄 뿐이다. 라그나가 후작과 견고한 아군 관계가 아니기를. ‘최악의 경우에는 현별이만이라도 어떻게든 빠져나오게 해야지.’ 아무튼, 사슴뿔의 턴이 끝나자 자연스레 시선이 초승달에게로 모였다. 흐음, 얘는 뭘 얘기해주려나. 역시 이번에도 요정족— “창세보구.” ……응? “드워프들이 새로운 창세보구를 제작할 방법을 찾고 있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뤄냈소.” ……진짜로? “네? 그게 사실인가요? 제작이라니?”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행동에서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얘랑 GM 쪽은 돌아갈 생각이 가득한가 보네.’ 반면 광대 쪽은 심드렁하다. 좀 놀라기는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치라 해야 하나? 음, 이 새끼는 돌아갈 생각이 별로 없는 건가? 어쩌면 장난감 수집가 생활이 나름 마음에 드는 걸지도. “그래서 방법이 뭐죠?” “단서는 줬으니, 남은 건 그대들 하기 나름이오.” “잠깐만요. 그런 식으로 넘어가기엔 너무 애매한 정보지 않아요? 확실하게 알아낸 것도 아니고, 아직 성과가 있는 정도라면서요?” 여왕의 강력한 주장에 초승달도 못 이긴 척 추가 정보를 풀었다. “수많은 균열석.” “……?”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피.” “…….” “드워프들은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창세보구를 새로이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보고 있소.” 허, 이건 뭐 미치광이 과학자도 아니고. 저 방법이 제대로 될지는 둘째 치고, 발상 자체는 꽤 인상 깊다. ‘제작이라…….’ 진짜 그게 가능한 건가? 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존재했다는 설정이 붙은 장비들인데? ‘……생각은 나중에 한 번에 하자.’ 이내 나는 잡념을 떨쳐냈다. 그야 아직은 초승달이 뱉은 정보가 준 여운에 잠겨 있는 회원들이었지만, 언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실제로 머지않아 곧 하나둘 시선이 모였다. “…….” “…….” 이전과 달리 불안한 눈빛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고블린 때 유잼 판정을 내린 일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자, 그럼 뭐로 할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가로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스톤 아이벤에서 ‘Elfnuna’란 닉네임을 썼던 자.” 미끼를 던져보자. “그자는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이제는 나도 슬슬 궁금해졌거든. 별생각 없이 지었던 이 닉네임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이백호와 GM이 그 난리인 것인지. *** 솨아아아. 보석에서 초록불이 밝혀짐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회원들의 입이 열렸다. “엘프누나라면… 그 사람이죠? 오리지널 버전을 클리어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졌던 사람.” “피싯, 소환이 됐다니 적어도 커뮤니티에서 돌고 있던 괴담의 절반은 사실이었군요.” 광대가 말한 괴담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았다. 엘프누나가 원본을 깨고서 진작 이 세상에 소환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원본을 깬 대가로 엄청난 특전을 받았다는 것. 장본인인 내가 들으면 웃음만 나오는 괴담이다. ‘특전이라니…….’ 장난하나. 특전은커녕 오자마자 고블린 동굴에서 덫 밟고 뒈질 뻔했구만. “…절반이라니요?” “그야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그자가 정말 오리지널 난이도를 깼을지는.” 혹시 모르죠. 나중에서야 불가능하단 걸 깨닫고 배율을 조정했을지. 그런 말을 덧붙인 광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얘는 엘프누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왕, 소울퀸즈와는 다르게. “…….” 그녀는 단 한 마디의 감상도 뱉지 않았다. 단지 돌처럼 굳어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오히려 그 모습에서 그녀에게 이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느껴졌다. ‘오케이, 그럼 이 소식은 GM한테도 잘 전해질 테고…….’ 기다리면 GM이 먼저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1:1 대화를 걸어온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 엘프누나에 대해 캐보려 하겠지. 그때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다. 갑의 위치에 서서 역으로 살살 정보를 캐내는 것. “아무튼, 오늘도 덕분에 신비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군요. 피싯.” “수사자… 혹시 당신은 그자와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슴뿔 씨! 그런 질문은 실례인 거 모릅니까?” “…….” 내가 질문을 컷할 것도 없이 전문 대변인 광대가 나서서 여러 의문들을 차단했다. 그리고……. “피싯, 그나저나 다음 바퀴는 역시 무리인 거 같네요?” 다른 회원들을 비웃듯 실소했다. 다만, 기분 탓일까? 자기도 던질 정보가 없으니까 이쯤에서 끝내자는 것처럼 보이는 건. “예, 저는 여,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저도요.” “나도 마찬가지오.” 고블린을 필두로 여우, 초승달이 불참을 선언했고 자연스레 집회는 이번 바퀴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따라서,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그렇게 돌아온 이한수의 방. 원탁까지 끝나서인지 피로가 크게 몰려온다. 이번 커뮤니티에서는 유독 일이 많았던 것만 같은 기분. ‘체감상 거의 일주일은 여기 있었던 거 같네.’ 이내 나는 컴퓨터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마우스를 조작해 로그아웃 버튼으로 커서를 옮겼다. 뭐, 평소였다면 게시판을 돌면서 봤을 테지만……. ‘얼른 돌아가자.’ 오늘은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 딸깍딸깍.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자마자 눈앞이 번뜩이며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에르웬의 저택 2층에 위치한 나의 방이었다. 이번에도 옆에는 아멜리아가 있었다. “오늘은 일찍 돌아왔군?” “아, 어쩌다보니.” 거, 몇 초나 다녀온다고 매번 갈 때마다 옆에서 호위를 서주는 건지. 어딘가 든든하고 고마우면서도 민망해진다. “왔으면 됐다. 그럼 쉬어라. 피곤해 보이는군. 내일은 되도록이면 먼저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요정에게도 말해두겠다.” “아, 고맙다.” “…….” 이내 아멜리아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쿨하게 일어나더니 방을 나가기 전에 불까지 꺼주었다. 딱 잠에 들기 좋은 정적과 조명. ‘……원래는 대충 정리라도 하고 잘랬는데.’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자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피로가 몰려온다. 살기를 쓰고 원탁까지 했더니 진짜 뒈질 거 같네. 이백호 걔는 괜찮으려나? “…….” 그렇게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 두꺼운 커튼으로 달빛조차 차단된 어두운 방. “후아, 살 거 같네.” 눈을 뜬 금발 사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몸을 일으켜 방문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케이, 가 있는 동안에 침입한 흔적은 없고.’ 후, 설마 이번에 벤이 풀렸을 줄이야. 갑자기 끌려간 탓에 꽤나 당황스러웠다. 보통은 가기 전에 준비를 다 해두고 가니까. “아오, 머리야…….” 현관문을 확인한 사내는 그제야 피로를 느끼고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누워서 그냥 잠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진짜 잠들면 누가 들어와서 업어가도 모를 거 같은데…….” 사내는 애써 피로를 참아내며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관짝 형태의 금속 상자를 꺼냈다. ‘이걸 도시에서 쓰는 건 또 오랜만이네.’ No.1,577 영면의 관. 체력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것 말고도 엄청난 내구도를 지닌 덕에 미궁에서 침낭 대신 애용하던 물건. ‘그래, 오늘은 아예 여기서 자자. 사내가 관 안으로 몸을 욱여넣고는 안에서 관을 닫았다. 편안한 침대를 옆에 두고서 이러고 있는 게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에 하나까지 경계하고 대비하는 것. 그것이 사내의 오랜 철칙이었으니까. ‘…….’ 자리는 불편했으나, 안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마음은 편해졌다. 사내는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안 그래도 연신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딱히.] 자신을 죽이는 게 가능할 거 같냐는 질문에 그가 했던 답변. [못 할 거 같진 않은데.] 그 음성을 듣자마자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버튼을 누르겠다고 했을 때 거짓말을 간파했던 것처럼. 저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참 쉽지 않은 형이란 말이지.’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다만, 한편으로는 그가 살기를 뿜어내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웃게 된다. “아, 자야 하는데 돌겠네 진짜…….” 사실 이 정도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이러면 더 갖고 싶어지잖아. 엘프눈나. ‘얼른 다음 달이 됐으면 좋겠다.’ 이백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442화 자이언트 스텝 (4)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고, 지금 일어나 봤자 할 것도 없다는 판단에 다시 잠을 잤다. 그래서 총 이틀을 잔 줄 알았는데……. “……사흘이나 잤다고?” 처음에는 아멜리아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사흘을 내리 잤는데도 아직 몸에 피로가 남아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더 자려면 더 잘 수 있는 걸 억지로 일어난 거였는데……. ‘그런데 진짜 사흘이 지났다니.’ “그래도 이제라도 일어나서 다행이군. 만약 오늘도 일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깨울 셈이었다. 요정이 호들갑 떠는 걸 말리는 것도 이젠 넌더리가 나니까.” “……그래서 에르웬은 어디 있지?” “잠깐 외출.” “외출?” “성지에 다녀온다고 하더군. 그쪽도 생각처럼 쉽게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주어는 빠졌으나 무엇을 말하는지는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분명 순혈단 탈퇴 이야기겠지. 내가 없는 동안 요정족에서 받은 지원이 많은 만큼, 다시 이전처럼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신목궁’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신목궁을 인질로 잡고서 강제로 뜯어낸 이 저택의 구입 자금이라든가. ‘……뭐, 진짜 문제는 ‘순혈’ 그 자체겠지만.’ 요정의 ‘순혈’이란 일종의 종족 비기다. 당대에 오직 한 명만이 계승을 받을 수 있으며, 계승자는 ‘자연 친화력’ 스탯이 미친듯이 뻥튀기 된다. 에르웬이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이었고. ‘이 문제도 얼른 해결해야겠네. 에르웬 혼자 감당하라고 두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새삼스레 자고 있던 시간들이 아까워진다. 아이스록에서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 지 아직 한 달조차 되지 않았지만, 쉬며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꼬르르륵-! “…부엌에 사다 둔 게 있으니 가봐라.”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 사흘 동안 굶주렸던 배를 채운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정리였다. 이백호, GM, 현별이, 라그나 아우릴 가비스, 그 외에도 원탁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들까지……. 아멜리아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에 틀어박혀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하… 진짜 머리가 터지겠네.’ 개학식을 앞둔 학생 때로 돌아간 거 같다. 숙제는 밀리고 밀렸는데, 도대체 무엇부터 처리를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 그래서 그냥 게임을 할 때처럼 우선순위를 정해서 정리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퀘스트처럼 정리하니까 좀 낫네.’ 이상형 월드컵을 하듯이 강제로 순위를 부여하고 나니 머리가 좀 개운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오늘 당장 해야 할 퀘스트는……. “아멜리아, 클랜 창설은 어떻게 됐지?” 클랜 창설 마무리하기. “서류 심사는 어제 끝났으니, 직접 방문해서 최종적으로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 하면 될 거다.” 사실 예전 클랜을 부활시켜 볼까도 했지만,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에 아예 해체가 된 상황이었기에 행정 절차가 복잡해서 새로 만들기로 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클랜의 경우 창설 일자가 조금이라도 오래된 쪽이 유리한 게 있으니까. ‘뭐, 이 부분은 나중에 귀족 작위로 찍어누르면 되려나?’ 길드와의 ‘협상’은 내가 자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이내 옷을 갈아입고 오늘 스케줄을 처리하려고 나가려는데 아멜리아가 외투를 챙겨 입고 따라붙었다. “같이 가려고?” “그게 나을 거다. 행정 절차는 대부분 내가 처리를 했으니까.” 하긴, 둘이 가면 놓치는 부분이 아무래도 덜할 테니까. 쩝, 원래 이런 부분들은 레이븐이 해줬었는데. ‘군부에 있는 애를 데려오려면 한참은 더 걸리겠지.’ 물론 그게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레이븐의 의사겠다마는. “잠깐.” “응?” “이걸 써라. 그냥 나갔다가는 소란이 날 거다.” “아…….” 이후 나는 아멜리아가 가져다준 철투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둘이 낮에 외출하는 건 ” 음, 그런가? 하긴, 생각해 보면 경매장에서 ‘볼-헤르찬’ 정수를 구매하고 미술관에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거 같기는 하네. 현 시대로 돌아오고서는 마음 놓고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아, 저깄군.” 주택 자체가 도심지에 위치한 입지였던 터라, 길드 지부까지는 걸어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우리는 다른 탐험가들처럼 번호표를 뽑고서 대기했고, 차례가 오자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리고……. “비, 비, 비, 비……. 흐읍!” 내 신분증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던 직원에 의해 2층에 있는 프라이빗 접객실로 자리를 옮긴 뒤, 헐레벌떡 튀어나온 지부장이 직접 남은 행정 절차를 마무리해 주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단장, 비요른 얀델. 부단장, 공석. 단원, 공석 단원, 에밀리 레인즈. 단원, 아이나르 프넬린. 단원, 아우옌 록로브. 창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충족된 명부. 참고로 에르웬의 경우에는 아직 ‘순혈단’ 탈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클랜에는 입단할 수 없었다. “다, 다음에도 또 방문해 주십시오!” 지부장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길드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사흘을 굶었더니 벌써 배가 고프더란 말이지. “아멜리아.” “밖에서는 에밀리라 했을 텐데.” 아, 그랬지. 배가 고파서 그런지 정신이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였지?” “아, 별건 아니고 궁금해서. 1번 단원 자리는 왜 비워 두라고 한 거냐?” 일단 비워 두래서 비워 두기는 했는데, 아직 설명은 듣지 못했다. 대체 어째서였을까? “때로는 조급함 때문에 모든 일이 망가지기도 하니까.” “…응?” “나중에 탈퇴를 하고 나면, 일부러 자리를 비워 뒀다고 말해라. 그럼 그 요정도 조금은 차분해질 거다.” “어…….”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에르웬을 위해서 남겨 둔 거라고?” 내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묻자, 아멜리아는 어딘가 수치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속상해하는 거 같았으니까.” 자그맣게 중얼거리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클랜 이름.” “응?” “그렇게 지은 이유가 따로 있나? 알아보니까 유명한 고대어던데, 맹수 무리라는 뜻의.” 역시 너도 듣자마자 고대어를 먼저 떠올렸구나. 일단 이렇게 되면 성공인가? 잠시간의 고민을 마친 나는 아멜리아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누가 들으면 안 되니까 가까이 불러들여서. “사실 고대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귓가에 속삭이자 소스라치듯 어깨를 떨던 아멜리아가 조용히 되물었다. “한국어……? 설마 네 본국의 말이란 건가?” “그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친김에 뜻도 알려 주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고생하자는 정신.” “……호오?” “그게 ‘아나바다’의 뜻이다.” 참고로 당분간은 우리 클랜의 신조가 되기도 할 예정이었다. 진짜 여유가 없거든. *** 식사를 마친 후, 아멜리아는 볼일이 있다며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야 뻔했다. 오늘도 언니가 일하는 곳에 가서 옆모습이나 훔쳐보다 올 생각이겠지. 감히 말을 걸어 볼 시도조차 못 한 채. ‘……뭐, 본인이 그걸로 만족한다니 내가 할 말은 없겠지만.’ 아무튼, 오늘의 퀘스트는 끝이 났지만 나는 집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 아니, 하고 싶은 게 있었던 탓이다. 딸랑!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적당하게 반쯤 찬 식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2층은 여관을 겸하고, 낮에는 음식을 밤에는 술을 팔며 주점을 겸하는 가게.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싱그러운 인상의 20대 초반 여종업원이 활짝 웃으며 나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식사는 어떤 거로 준비해 드릴까요?” “고기가 많이 들은 거로 부탁하지. 좀 걸었더니 벌써 배가 꺼져서.” “예, 잠시만 기다—” “잠깐만, 여기 주인장은 오늘 안 나오나?” “아, 사모님은 신관님이 슬슬 조심하라고 말씀하셔서요. 요즘은 출근을 안 하세요.” ……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조금 걱정이 됐지만, 일단 오해부터 고치기로 했다. “내가 물은 건 여주인장 쪽이 아니라, 남자 쪽이었다.” “아! 우리크프리트 씨라면 곧 출근하실 거예요. 한 30분 정도 뒤에? 매번 들쭉날쭉해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오케이, 그럼 기다리면 볼 수 있다는 거네. “대답해 줘서 고맙다.” 시간을 뺏은 답례로 팁까지 쥐여주고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주문한 요리를 다 먹고 새 요리를 추가로 주문했을 무렵. 딸랑! 문이 열리며 기다렸던 이가 도착했다. “오셨어요? 우리크프리트 씨!” “그래, 일은 없었고?” “지인분이 오셨어요.” “…지인?”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던 곰아저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가게 내부를 쓱 훑어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 즉시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다만, 곧 상황 파악을 하였을까? “마일라, 지금부터는 손님 받지 마. 있던 손님은 식사가 끝나는 대로 보내고.” “…네?” “아, 그리고 너도 손님들 다 내보내고 나면 주방장이랑 같이 퇴근해라.” “으에?” “되도록이면 내가 있는 테이블로는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하고.” 종업원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린 곰아저씨가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너군. 비요른 얀델.” “오랜만이다. 아브만.”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 곰아저씨는 서슴없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 “…….”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곰아저씨 쪽이었다. “소식은… 들었다.” 후, 뭔데 이 어색한 거.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네게 어딘가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더군.” “아, 그래…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만났나?” “미샤만 빼고.” “그래… 그런가…….” 이후 곰아저씨는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몇 번인가 집까지 찾아갔었다. 하도 사람이 많고 네가 나올 기미가 없기에 그냥 되돌아왔지만.” “노크라도 하지 그랬냐. 너였다면 언제든 들여보냈을 텐데.” “글쎄, 역시 생각이 바뀌어서 말이지.” “……?” 말에서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아브만, 나는 너희를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이것부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내가 2년 6개월 동안 너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건 전부—” “그만.” “……?” “비요른,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그런 거로 네게 화가 나거나 한 게 아니다. 물론 조금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건 이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 딱 잘라 선을 그은 곰아저씨가 내 술잔을 빼앗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단지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 “네가 모습을 감춘 이유가 뭐든. 어쩌면 위험한 일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어차피 이제 나랑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꽈악, 무언가가 가슴을 조이는 듯한 기분. “관계가 없다라…….” “미안하지만, 이 부분은 확실하게 못 박고 넘어가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만약 나를 다시 팀에 넣고 싶어서 찾아온 거라면, 그건 불가능해.” 이게 고백도 안 했는데 차였다는 그건가? 섭섭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다.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지금 소속되어 있다는 그 클랜 때문은 아니겠군.” “그래, 아니지.” “괜찮다면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내 요청에 곰아저씨는 한숨을 참아내듯 코로 숨을 크게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네 생환 소식이 들려온 날… 아내가 묻더군. 무척이나 걱정스럽다는 듯이, 너를 만나러 갈 거냐고.” “그랬군…….” “있지, 알고 있나 비요른? 2년 6개월은 정말이지 긴 시간이었다. 미궁의 끝을 보는 게 꿈이었던 한 탐험가의 정신머리를 고쳐 버릴 정도로.” 그리 말한 곰아저씨는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역시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함께 다니면 자식 결혼식도 보지 못할 거 같아서 말이지.” “그래… 그렇군…….” 이를 끝으로 한 줌 남은 미련조차 싹 덜어냈다. 아니, 애초에 미련이랄 것도 없었다. 오늘의 방문을 퀘스트로 분류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겠는가. 영입 시도는 할 생각도 없었다. 아니, 반드시 참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도 그렇잖아? 언젠가 왕가와 싸울지 모르는 클랜에 어떻게 들어오라고 해? 자식도 있는 유부남한테? “……미안하다.” “미안하긴, 술이나 하지.” 그러니까 이게 내가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 “왜? 같이 미궁에 안 들어가면 술도 함께 못 하나?” “…그건 아니지.” 이내 곰아저씨도 순순히 술잔을 들었고,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차차 손님들이 떠나고, 직원들까지 전부 퇴근한 가게에서.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때로는 진지하게 언쟁까지 벌여가며. “……시간이 늦었군.” “이제 밤이 되었을 뿐인데?”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미안하다. 아내가 만삭만 아니었다면, 나도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었을 것을…….” ……만삭?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대충 상황은 이해가 됐다. ‘둘째도 생긴 거구나.’ 새삼스럽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첫째를 낳을 때도 옆에 있어 주지 못했구나. 술을 마실 땐 내가 대부가 되느니 마느니 했었는데……. “비가 오는군. 이거라도 입고 가라. 나는 대충 정리라도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아, 고맙다.” 이후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곰아저씨에게 받은 우비를 뒤집어쓰고서 거리로 나섰다. 투두두두두- 쏟아지는 장대비. ‘딱히 슬픈 건 아닌데.’ 오랜만에 과음을 해서 그런가? 괜스레 나만이 없이 흘러간 2년 6개월의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이제와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철퍽, 철퍽. 비 내리는 거리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간다. 철퍽, 철퍽. 걸음걸이에 한껏 집중한 상태임에도 술에 취한 몸은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한데, 그렇게 흔들리고 있어서 그럴까? [비요른 얀델.] 자꾸만 마지막에 나눴던 몇 마디의 대화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성큼 성큼 나아가라. 나 같은 낙오자는 미련도 갖지 말고.] 거참, 이 세상에 낙오자 같은 게 어디 있다고. [너라면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 테니까.] 왜 다들 나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 취급하지 못해 안달인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걸어 나갔다. 철퍽, 철퍽— 내일 해야 할 일을 수없이 되뇌이며. 443화 자이언트 스텝 (5) 술에 취해 잠에 든 다음 날 아침. 이불 속에서 협탁으로 손만 뻗어 수통을 쥐었다. 그리고 벌컥벌컥 마시는데 이상하게 단맛이 났다. 마치 누가 꿀이라도 타 둔 것처럼. ‘……으어, 그래도 마시니까 살겠네.’ 이불을 끌어안고 뒹굴거리기도 잠시, 나는 슬슬 침대에서 나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협탁에 고이 접힌 한 장의 편지였다. [성지에 다녀와야 해서 먼저 나가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세요. 탈퇴 문제는 의외로 잘 해결될 거 같아요. 아, 그리고… 만약 힘든 일이 있으면 저한테 꼭 말하시고요! 알겠죠?] [PS. …일부러 첫 번째 단원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뒀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고마워요, 정말로.] [PS2. 아, 그리고 그게 오늘이었죠? 몸조심해서 다녀오시고요!] [당신의 첫 번째 동료, 에르웬이.] 그래, 에르웬은 또 성지로 간 거구나. 어제 일찍 돌아왔으면 얘기를 나눌 시간은 있었을 텐데. 하, 어쩌자고 술을 그렇게 퍼마신 건지. “…….” 가만히 앉아 술냄새를 빼며 곰아저씨와 헤어진 이후의 기억을 더듬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반겨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2층까지 올라갔던 거 같긴 한데…….’ 피로가 덜 풀린 와중에 술까지 마셔서 그런가? 분명 올라가면서 뭐라 대화를 나눴는데, 그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음, 그래도 실수는 안 했겠지. 그랬으면 분명 기억을 했을 테니. “깼나 보군.” “아, 방금.” “얼른 일어나서 씻어라. 오늘은 황도에 가는 날이니.” “……알았다.” “아, 나는 이제 나가볼 생각이니 오늘 일은 알아서 잘 하고.” “그래.” 이후 아멜리아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슬슬 화장실로 가 몸을 씻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의 퀘스트는 복장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쯧, 그러고 있을 줄 알았다.” 이내 씻고 나와서 정장을 입고 있자니, 인기척도 없이 쓱 다가온 아멜리아가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조금 신기했다.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능숙한 거냐?” “…네가 입은 옷을 누가 구해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 네가 사왔던 거지 이거.” 아무래도 옷을 구해오며 입는 방식까지도 전부 학습을 해온 듯하다. 의외로 아멜리아는 섬세한 일처리가 특징이니까. “다 끝났으니, 이제 얼른 나가봐라. 좀 전에 마차가 도착한 모양이니.” “얼른 가야겠군. 이따 저녁에 보자.” “…다녀와라.” 아멜리아의 배웅을 받아 집을 나선 나는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를 타고 군용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곧바로 황도에 도착했다. ‘매번 느끼지만 엄청 편하단 말이지. 조금 멀미가 나는 것만 빼면.’ 아무튼, 승강장 앞에도 마차가 대기 중이었고 이에 올라타자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젠 딱히 신기하지도 않네.’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방문했던 영광의 궁. 오늘 이곳에서는 작게 행사가 열리며, 내 오늘의 퀘스트도 바로 그 행사와 연관이 있다. “1급 집사장 미아 아르벨토입니다. 얀델 준남작님의 입궁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안내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원정대의 생환 신고를 하였던 그곳. “텅 비어 있는 건 또 처음이군.” “아직 예식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곧 가주들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그래 봐야 그게 얼마나 된다고. 다 모여도 앞자리가 전부 차는 정도겠지.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후 영광의 궁을 지나쳐 방으로 이동한 나는 집사장에게 오늘 진행될 예식의 절차 같은 것들을 숙지 받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면의 노인이었다. 초면의 노인이었으나 날 교육하던 안내인은 구면인지 놀란 눈으로 하던 일을 멈추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한데 여기는 어쩌한 일로…….” “오늘의 주인공과 잠시 이야기나 나눠볼까 해서. 바쁜 게 아니라면,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내인은 손윗사람을 대하듯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방을 나섰고, 그다음에서야 나와 노인과의 공식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반갑네. 케알루너스 공작일세.” 그래, 어느 공작인가 했더니. 그쪽이었구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나도 형식적으로 이름을 밝혔다. 한데 이건 또 뭘까. “틀렸네.” 뭐야, 이 할배는? “……?” 눈살을 찌푸리자 할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비요른 얀델일세. 얀델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자네도 엄연히 내성의 일원이 되는 것 아닌가.” 시비를 걸러 온 건가도 싶었으나, 목소리에서 딱히 큰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따라서 들이받는 건 일단 보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이어지는 말을 경청해서 들었다. “경박한 말투야 선왕께서도 공식적으로 용인한 것이니 내 뭐라 할 수 없겠네마는, 그래도 정체성은 이제 바로 해야지.” “…….” “명심하게 자네는 누군가의 아들인 비요른이 아닐세. 그저 어디에나 있는 바바리안도 아니지. 자네는 라프도니아의 비요른 얀델 준남작일세.” “…….” “아, 이제는 남작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여기가 흐트러졌군.” 공작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조금 서러웠다. 하, 키가 작아지니까 이런 할배도 내 어깨를 건드는구나. “조언은 고맙다. 근데 아무리 봐도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닌 듯한데…….” 기분이 나쁘다고 왕국의 공작을 박살낼 수는 없기에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런 상황이 너무 낯설었을까? “………뭐? 하핫, 흐하하하하핫!” “…….” “크흐흠… 오해 말게. 자네를 무시하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이 상황이 신기해서 그랬을 뿐이니.” 이해는 한다. 귀족들은 원래 서론을 좋아하잖아?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자네 질문에 답을 하자면, 자네 말이 맞네. 단순히 인사를 하려면 지금이 아니어도 됐을 테니까. 내가 자네를 찾은 건, 자네에게 물을 것이 몇 개 있기 때문일세.” 어휴, 또또 저러네. 그냥 ‘질문이 있다’ 한마디면 끝날 것을. 이렇게 나처럼. “질문이 뭐지?” “…….” “………혹시 귀가 잘 안 들리나?” 조심스레 되묻자 잠시 얼이 나가 있는 듯하던 공작이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네.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군. 아니, 사실 다른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자네 말이 다 끝난 줄 몰랐네.” “아, 그랬군. 그래서 질문이 뭐지?” 재차 되묻자 공작도 슬슬 날 찾아온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벌써 나와의 대화법을 터득한 모양. “짧게 말하겠네. 자네는 귀족의 삶을 동경하는 부류도 아니지 않은가. 한데 이번 원정의 공로로 ‘승작’을 택한 이유가 뭔가?” 전혀 짧지는 않지만, 그래도 본론이기는 한 질문. [······왕가에서는 비요른 얀델에게 이번 원정의 공으로 승작을 제시했다.] 사슴뿔은 원탁에서 그런 정보를 뱉었지만, 사실 왕가에게 제시한 보상은 ‘승작’만이 아니다. 맨땅에 대저택을 쌓을 만한 거액의 돈. 3등급의 정수 두 개. 그리고 더블넘버스까지. 보훈처에서 내민 선택지는 총 네 개였고, 나는 고민 끝에 ‘승작’을 택했다. 간단한 이유다. 그야 앞선 세 가지는 내 힘으로도 얻을 수 있는 데다가……. 그게 아니어도 이쪽이 훨씬 더 도움이 되니까. 당장 살아남는 데 있어서. “자네의 진심이 듣고 싶네. 승작을 바란 이유가 뭔가?” 웃긴 노인네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진심? 재촉하듯 묻는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그야 부인은 많으면 좋지 않나!” 일부러 활기차게 외쳤건만, 공작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부인… 이라고?” 거, 진짜 귀가 안 좋나? “그래, 부인. 남작부터는 정실만 셋씩 들일 수 있지 않나!” 천연덕스럽게 다시 한번 말해주자, 공작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이 새끼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딱 그런 눈빛. 다만, 그럼에도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건 쉽게 확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꺼어억- 상대가 나지 않은가. *** “아, 미안하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곱게 컸을 게 분명한 양반인지라 얼굴에 대고 트림한 것을 얼른 사과했건만, 정작 공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납득하듯 중얼거릴 뿐. “확실히… 자네에게는 여자가 많다고 했지.” 정확히는 여자인 동료다. 숙소를 같이 쓴 탓인지, 이상할 정도로 많은 염문과 루머가 도시에 퍼져 있었지만. 아무튼. “그래서 궁금한 건 풀렸나?” “적어도 절반은.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네.” “해봐라.” 막상 해보니 바바리안의 화법이 제법 마음에 들었을까? 공작이 노빠구로 내게 물었다. “자네는 후작의 사람인가?’ 짧아도 지나치게 짧은 말. 그런 호쾌함은 나쁘지 않지만, 중요한 질문으로 보였기에 확인 작업부터 거쳤다. “후작이라면, 역시 재상을 말하는 건가?” “그러네. 자네가 실종되어 있던 기간도 그렇고, 후작과 함께 일을 한 시간이 길지 않은가.” “…그렇지?” 조금 의미 심장한 물음이었다. 죽었다고 알려진 비요른 얀델은 사실 2년 6개월 동안 후작의 지휘 아래 이런저런 특수 임무를 도맡아 해결하고 있었다. 악령 공표도 그 임무 때문에 진행했던 것이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공작까지도 진상을 모를 줄은 몰랐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몸을 덮친다. “임무에 관한 서류는 모두 읽어 봤네. 꽤 많은 일을 했더군. 자료도 정확하고. 처음에는 모종의 거래가 있는가 싶었는데, 임무 자체는 진짜였던 것 같단 말이지…….” 심지어 서류도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공작도 깜짝 속아 넘어갈 완성도로? ‘개선식날에는 두 달 더 걸린다고 기다리라고만 하더라니…….’ 한 나라의 재상쯤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그런 의문이 새로이 생겨났지만, 일단 공작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대답할 필요가 있었다. “난 후작의 아랫사람 같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들을 수 있겠는가?” “일종의 친구 사이다. 가끔 곤란할 때 서로가 서로를 돕는.” 내심 바라고 있던 대답이었는지, 공작의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친구라……. 재밌는 단어를 쓰는군. 생각보다 영리해. 꽤 감각도 있고.” 그리 중얼거린 공작이 다시금 내게 물었다. “아무튼, 자네의 대답은… 나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거절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듯 이미 뻗어져오는 손. 나는 허벅지에 손을 박박 문댄 뒤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이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뭐, 진짜 친구끼리는 악수 같은 거 안 하지만. *** 케알루너스 공작. 사실 왕궁 권력도에서는 재상에 이은 3인자쯤 되는 사람이다. 재상처럼 실권이 막강한 자리를 꿰찬 건 아니지만, 가문의 힘이 워낙 비대하니까. 후원하는 클랜만 해도 수십 개는 되고, 그중에는 중대형 클랜도 심상치 않게 껴 있다. 자식놈 중 한 명은 무려 마탑주고. ‘그런 공작이랑 친구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나쁠 건 없었다. 애초에 진짜 친구가 된 것도 아니고. 공작은 내가 후작의 사람이 되는 것을 견제하려 친구 사이를 제안했을 뿐 아닌가. 이쪽에서도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관계로 지내면 된다. 적어도 그런 관계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슬슬 갈 시간이군. 그러면 가보겠네. 이따 보지.” “그래.” 이후 공작은 예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나와 잡담을 나누다가 떠났다. 대부분은 그저 친분 쌓기용 스몰 토크였지만, 그중에 의미심장한 주제가 껴있기도 했다. 이번에 원정대가 생환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임무로’ 대기 중이던 장미기사단과 노아르크의 세력이 충돌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던가? ‘이건 떠본 건지 아닌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공작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왕가의 정보부에서는 내가 바랐던 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 ‘후작, 그 새끼는 어떠려나…….’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하다. 개선식 이후로는 후작과 마주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마 오늘이 그날 이후 첫 재회가 되겠지. “얀델 준남작님.” 그래, 이제 시작인 거구나. 나는 안내인에게 숙지를 받은 대로 문 앞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터벅, 터벅. 두 시간 전만 해도 텅 비어있던 영광의 궁 내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음, 앞에 두 줄 정도는. 터벅, 터벅. 지난번 개선식과는 다르다. 궁 내의 모든 좌석이 채워지지도 않았고, 웅장한 음악 소리도, 뒤따르는 병사들도 없다. 규모로 따지면 이전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다. 하지만……. 터벅, 터벅. 이 행사를 ‘작다’고 표현하기엔 역시 어폐가 있겠지. 자리를 채운 사람들 전부가 작위 귀족이니까. “이렇게 모두가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군요.” “참석 명령이 떨어진 걸 보고서 정말 놀랐소이다. 설마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 승작이라니…….” “하하, 사실 저는 참석 명령 통지서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긴 자네는 작위를 승계한 지 얼마 안 됐지?” “얼마 안 됐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예, 승작식 자체가 흔치 않으니 말입니다.” 카펫을 걸어가는 날 두고서 수군거리는 귀족들. ‘승작식’이라는 흔치 않은 이벤트에 나름 즐거워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 반대도 있었다. “…바바리안 따위가.” 나를 경멸하는 자. “그저 시대를 잘 탄 자이지요.” 시기하는 자. 그리고……. “어서 끝났으면 하는군요.” 라프도니아 전통에 의해 의무적으로 참석은 했지만, 내게 별 관심은 없고 얼른 돌아가 쉬고 싶어 하는 자까지. 터벅, 터벅. 그들 사이를 지나친 나는 이내 텅 빈 왕좌 앞에 이르렀다. 그 앞에는 이번에도 후작이 서 있었다. 쩝, 이번에는 왕의 상판대기도 한 번 봐보는가 싶었건만. “오랜만일세.” 내게만 들릴 만큼 작게 인사말을 건넨 후작은 답할 새도 없이 목소리를 높여 한참 동안 뭐라 뭐라 연설을 이어가더니, 내게 빈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가문의 상징을 함에 봉하라.” 이는 준남작이 남작으로 승작을 할 때에만 있는 의식이었다. 그야 준남작과 남작은 천지차이니까. 왕가를 지탱해 온 천여 개의 귀족 가문에 하나가 더 늘어나는 역사적인 순간. 스윽. 준비해 온 천을 고이 접어 상자 안에 넣은 즉시 장엄한 목소리가 홀에 울러 펴졌다. “이로써 영원의 맹약은 맺어졌다.” 직접 상자를 봉인한 후작은 옆에서 대기 중이던 왕실친위대에게 상자를 넘겼고, 이를 받아든 친위대는 엄중하게 영광의 궁을 빠져나갔다. 아마 이제 저 상자는 불멸의 궁에 들어가 삼엄한 관리하에 보관이 될 것이다. 이 왕국이 불에 타 멸망하거나. 내가 반역의 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비요른 얀델 남작은 일어나시오.” 일어섰다. “귀공들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왕가를 떠받칠 새로운 기둥의 등장을 축하해 주길 바라겠소!” 환호 소리도 휘파람도 섞이지 않은 조용한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자, 그럼 이것으로 승작식을 마치겠소!” 연회가 시작됐다. ‘오케이, 그럼 일단 크게 한 발 내디딘 셈인가.’ 다음 차례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444화 파티 (1) 영광의 궁 내에서 치러진 연회는 무척이나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참석자들 전원이 한 가문의 수장인 자들이니까. 좀 더 체면도 신경을 써야 하며, 애초에 다들 나이대도 높은 편이다. ‘제일 많은 연령대는 50대 정도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웃음이 나왔다. 명색이 내가 이 연회의 주인공인데, 여기서 혼자 궁상이나 떨고 있어야 하다니. 우걱우걱. 조금은 짜증을 담아 고기를 씹어 넘긴다. 학창 시절 전학을 자주 다녔던 내게는 PTSD가 올 것만 같은 특유의 분위기. 새삼 실감이 난다. 내가 완전히 맨몸으로 새 집단에 들어왔다는 게. “…….”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 ‘페르데힐트 백작, 세르피아 남작, 뮐바르크 자작, 얼씨구 저긴 마르토앙 남작도 있네…….’ 멀리서 나를 힐끗하는 이들 중에는 안면 있는 가주도 있었으나, 내게 먼저 다가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거, 다른 연회에서는 먼저 와서 친해지자고 그러더라니. 심지어 페르데힐트 백작은 나한테 자기 딸이랑 결혼을 하라니 뭐니 하기까지 했던 양반이었다. ‘뭐, 쟤들 입장도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곳은 동물의 왕국이다. 단, 본능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우걱우걱.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기를 뜯고 있지만, 나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은 일종의 길들이기다. 왕국의 귀족가 중 하나가 됐다고 해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들과 같은 선상에 설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무언의 표시. 다만, 해결법은 간단하다. 아까 만난 공작이 조언했던 대로 그냥 내가 먼저 가서 말을 걸면 된다. 그럼 그들은 친절하게 웃으며 대해 줄 것이다. 마치 나를 아랫사람 대하듯이. ‘아휴, 피곤하게 사는 새끼들.’ 참고로 여기서는 누구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 것인가도 중요하다. 내가 아까 만난 공작에게 간다면, 공작과 경쟁 구도인 후작 산하의 귀족들은 나를 투명 바바리안 취급을 시작할 테니까. 이곳에서 하는 내 모든 행동과 말이 정치적인 선택으로 작용을 하는 것. 우걱우걱. 다만, 나는 그냥 계속해서 고기를 뜯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정말로 배가 고팠다. 둘째, 고기가 진짜진짜 맛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드디어 왔네.’ 나는 처음부터 메인 스트림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없어요.” 나는 다가온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며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하얀 머리카락에 하얀 눈. 거기에 하얀 피부. 한복이 연상되는 특이한 형형색색의 의상을 제하면 모든 게 하얀 여자였다. 아, 물론 머리 위에 돋아난 토끼 귀까지도. “반가워요, 얀델 남작. 어때 식사는 입에 좀 맞나요?” “글쎄, 너도 하나 먹을 테냐?” 이후 새 고기를 집어 쓱 내밀자 여자가 잠시 멍한 눈빛을 하더니, 겨우 정신을 되찾고 미소 지었다. “아뇨, 저는 됐어요. 입맛이 없어서.” 거, 까탈스럽게 굴기는. 같은 이종족끼리. 툭. 나에 대한 설명은 이만하면 된 듯했기에, 일단 대화를 위해 먹던 고기를 그릇에 내려뒀다. 그리고 손을 쪽쪽 빨아 닦아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수하자고 하면… 받아주려나?’ 알 수 없지만, 진짜로 시도할 생각은 없다. 나도 그 정도 교양은 있는 바바리안이니까. 적어도 그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라면. “아무튼, 반갑다. 얀델 남작이다.” 먼저 이름을 밝히자, 저쪽에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리리비아 남작이에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야 백토족 출신의 귀족 가문은 단 하나이니까. ‘나이는 마흔셋. 슬하에 애도 셋이나 있댔지.’ “잠시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다. 안 그래도 심심했었는데.” 허락이 떨어지자 리리비아 남작……. 줄여서 토끼 남작이 내 정면에 위치한 좌석에 앉았다. 혼자였던 8인석 테이블 자리가 처음으로 채워진 것. 다만, 그 기념비적인 순간을 축하하는 박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날선 조롱만이 있었을 뿐. “쯧, 결국 저렇게 되는군.” “알아서 천한 것들끼리 지내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요.” 바바리안인 내 귀에도 들릴 크기였으니, 토끼 수인인 이 여자한테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하나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단지 익숙한 듯 웃으며 조용히 나에게 말할 뿐. “본가의 초대 당주님께서도 얀델 남작과 같은 영웅이었어요. 철벽의 난 때 역천의 공작을 막아내는 위업을 이뤄냈지요.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니, 미안하지만 오늘 처음 들어본다.” “후훗, 미안하기는요. 그게 당연하지요. 이제는 역사를 따로 배운 자들이나 아는, 이제는 그런 옛 이야기니까…….” 남작은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2천 년.” “…….” “무려 2천 년 전이에요. 리리비아 가문의 문장이 맹약의 함에 담기고 나서 흐른 세월이. 참으로 긴 세월이었죠. 불멸로 여겨졌던 왕의 시대가 끝을 고하고, 새로운 새벽이 찾아올 만큼.” 슬슬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 같았다. “그러니까 얀델 남작도 어서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시간이 지난다고 저들의 시선이 달라질 일은 없으니까.” “오, 그런가? 참 이상한 일이군. 내 눈엔 너희나 저쪽이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특히 말이 번지르르하다는 점에서 특히나. “……소문처럼 재밌는 분이시네요.” 재밌기는.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조언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닌 듯한데, 내 말이 맞나?” “역시 비범한 분이시네요. 맞아요.” “그럼 말해봐라.” 직설적으로 되묻자 여자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아까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했던 이유다. 머리에 귀가 달렸을 뿐, 가문을 대표해 이 자리에 참석한 이 여자도 결국 어엿한 귀족이었다. 격식에 벗어난 상황을 저급하게 여기는. “……돕기 위해서 왔다고 하진 않을게요. 저희는 얀델 남작가가 다른 세력 아래로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아요.” “무려 600년 만에 새로이 탄생한 이종 출신의 귀족가이니까?” 내 물음에 여자가 다시금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는가 싶더니 목소리를 바꾸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엇보다 바바리안 출신이죠. 그것도 라프도니아 역사상 최초의.” 그 말을 통해서, 어쩌면 저 인간 귀족들보다도 더 나를 단순한 바바리안 취급했던 여자의 인식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리리비아 남작가가 수인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처럼, 얀델 남작가는 바바리안족을 정계로 이끌어낼 수 있어요.” “그게 끝인가?” “물론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귀한 상황이니까.” “흐음, 그랬군…….” “리리비아 가문을 포함해 총 31개의 가문이 뜻을 모으고 있어요. 물론 그럼에도 정계에서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최소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는 되죠.” 이어지는 설명에도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자, 토끼 남작이 먼저 협상을 시작했다. “대의를 위해 함께하란 제안은 하지 않겠어요.” 그래, 조급한 쪽이 먼저 나서야지. “저희와 뜻을 함께한다면 얀델 남작가가 토대를 잡는 과정에서 막대한 지원이 들어갈 거예요.” “자세하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예를 들면, 당장 땅을 구입하고, 저택을 짓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인력을 갖추는 등, 제대로 된 가문을 세우기까지 걸릴 수십 년의 세월이 최소 몇 년으로 단축이 되겠죠.” 귀족 사회라 그런가? 정말로 시작부터 억 소리가 나는구나. 이것만 받아도 보상에서 ‘승작식’을 택한 것에 대한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우리의 시작은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내 그녀가 말했다. “얀델 남작이 저희와 뜻을 함께한다면, 우리의 적은 당신의 적이 될 것이고.” “…….” “당신의 적은 우리의 적이 될 거예요.” 내가 다른 귀족들에게 말을 걸러 가지 않고 이들을 기다렸던 이유였다. 한 명 한 명이 귀한 만큼, 정말로 그들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여기니까. “자, 어떤가요?” 이내 그녀가 내 답변을 요구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군.” “그 말씀은—” “하지만 부족해.” “……?” 그런 표정을 지어도 어쩔 수 없다. 딱 봐도 더 받아낼 수 있는 게 남았는데, 여기서 만족하기엔 아쉽잖아? *** 내 답을 들은 토끼 남작의 눈이 굳었다. 그러나 금방 원상태로 돌아온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정중하게 물었다. “제가 직접 만나 보고 느낀 얀델 남작은 영리한 분이셨습니다. 혹시 바라는 게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여자가… 정확히는 이종 출신 귀족가 연합인 ‘멜베스’에서 나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물론 나도 그만큼 이 집단이 간절하지만……. ‘그걸 저쪽은 모르지.’ 이왕 팔거면 가장 비싼 값을 받아내는 것. 그게 K-바바리안의 정신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미궁에 들어갈 거다. 거기에 대한 지원도 있었으면 하는데.” “…예시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내가 만들 클랜을 후원해 줬으면 한다. 상위 정수라든가, 귀한 넘버스 아이템이라든가 그런 것들로.” “……쉽지 않군요. 그것에 저희는 어떤 이득도 없다는 점이.” “이득이 왜 없나? 너희도 알 텐데? 이 나라는 미궁에서 시작해 미궁에서 끝난다는 걸.” “미궁에서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미 저희는 다른 대체재를 충분히 갖고 있어요.” 쩝, 역시 쉽게 가지는 않는구나. 다시 바바리안을 꺼낼 때가 된 듯하다. “아니, 왜 안 된다는 거냐?!” “…예?” “땅도 사주고 집도 지어준다고 했으면서. 이건 그것보다 싸지 않나!” “저기… 얀델 남작? 목소리를 좀…….” “이유를 말해라!!” 그 말을 하며 벌떡 일어나자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에 압박감을 느꼈을까? “가문에 대한 지원과 이것은 다릅니다. 얀델 남작가가 자립하는 일은 추후 당신이 정계에서 활동할 때 도움이 되는 일이고, 이건 그렇지 않으니까요.” 토끼 남작이 속사포로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뱉고 나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을까? “하지만 혹시 또 모르죠……. 만약 얀델 남작이 저희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저희 역시 그 무엇을 내어주든 아깝다 여기지 않을 것이니.” “뭣! 지금은 필요 없는 존재라 이거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하! 농담이었다. 리리비아 남작.” “……에?” 이내 웃으며 도로 자리에 앉자, 남작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거, 장난도 못 치겠구만. “쉽게 말하자면,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 아니냐. ‘최초의 바바리안 출신 남작’이라는 명패 말고 다른 부분에서도, 내가 쓸모가 있다는 걸.” “예… 아, 예. 그렇지요……?” “그럼 문제 없다. 내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니.” “……?” 내 자신 있는 답변에 그녀가 또 한 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때 주변에서 귀족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게 다투는가 싶더니 이제는 또 낄낄거리고 있구려?” “이래서 잡종들이란……. 정말 짐승 같소이다.” “그나저나 리리비아 남작이 뭐라 말했기에 저 바바리안의 화가 풀렸을까요?” “음, 혹시 또 모르지요. 듣자하니, 저 바바리안은 수인족 취향인 듯하던데.” “예? 그 말씀은 설마…….” “엣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바리안이 듣기에도 너무나 천박한 수군거림. 수많은 조롱을 들었어도 이런 종류를 대놓고 들은 것은 처음인지 남작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조금 인상 깊었다. “……얀델 남작.” 이 와중에도 내가 사고치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부분이. “한 귀로 흘려넘기세요. 이후 정계에서 활동을 하려면 수없이 들어야 할 말입니다.” “어째서?”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약자의 울분이 묻어나는 솔직한 답변. 근데 저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까 진짜 초식 동물 같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깐 익숙하다더니, 화가 안 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어찌 아무렇지 않겠어요. 그저 염원하며 참아낼 뿐이죠. 이런 설움을 느낄 일이 없는 그날을.” “염원이라…….” 간직만 한다고 이뤄지는 게 염원이라면, 이 세상 어디에도 불행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얼마짜리일 거 같나?”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너희의 염원을 이루지는 못해도, 최소한 저렇게 뒤에서 나불대는 놈들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말했다.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을 거 같냔 말이었다.” 다행히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토끼 남작은 순순히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천금을 주어도 아쉽지 않겠지요.”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대답.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좋아, 그럼 거래는 끝났군.” “……에?” “내가 사실 너희에 대해 분석을 좀 해봤는데. 너희가 그동안 처맞기만 했던 건, 매번 처맞기만 해서다.” “그, 그게 무슨 뜻—” 무슨 뜻이긴. 너희에게 필요한 건 돌격대장이란 뜻이지. 스윽. 반문을 불허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전투함성으로 어그로부터 확실하게 끌어준 뒤. 터벅, 터벅.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야, 얀델 남작!” 토끼 남작의 당황한 외침이야말로 한 귀로 흘려주며. 터벅, 터벅. 걷고 있자 몇 초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내 취향이 수인족이니 뭐니 하며 씨부렸던 귀족놈 앞에. “……무슨 일이신가? 소란스럽게.” 애석하게도 놈은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한 거 같았다. 겁도 없이 눈깔을 올려뜨는 것을 보면. “키프리오트 남작.” 통성명은 없었으나, 놈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귀족 루트를 타기로 마음 먹고 나서 모든 귀족가의 문양을 외워뒀거든. ‘남작에, 뒷배도 그닥이고, 본보기로는 딱 제격인 놈.’ 나는 그런 놈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모욕했다.” “모욕? 설마 아까 한 말 때문에……? 하! 웃기지도 않는군. 자네에게 모욕당할 명예가 있는지도 의문이 들뿐더러, 있다고 한들 어쩔 것인가?” 거, 안 쫄은 척하고 있기는. 딱 봐도 당황해서 말이 길어지고 있는데. “정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면, 위원회에 자네 의견을 써서 제출하게나. 아, 글은 쓸 수 있는지 모르겠네만 말일세!” 이내 놈이 대사를 끝내자, 옆에 친구로 보이는 놈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건 뭐 삼류 양아치도 아니고. 진짜 천한 게 어느 쪽인지. “자,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자리를 비켜주겠—” 할 말이 없기는 왜 없어. 나는 녀석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라프도니아의 고대 귀족 사회 때부터 존재해 온 유일한 분쟁 수단. 물론, 작위 귀족이 직접 결투를 한 횟수는 그 긴 역사를 통틀어 10번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서운가? 그러면 대리 결투도 상관없다. 아, 물론 나는 내가 싸울 거다.” “…진심인가 자네?” “왜, 농담이었으면 좋겠나?” “…….” 내 물음에 놈은 어떠한 답도 하지 않았다. 심리야 뻔했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고 두렵게 느껴지겠지. 평소처럼 했고, 다른 애들도 있었는데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싶기도 할 거다. 하지만. ‘이제 알 때도 됐지.’ 하필이면 바바리안 귀족이 탄생했지 않은가. 느슨해진 귀족계에도 긴장감을 불어넣을 때도 됐다. 그래, 그러니까……. 터벅.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놈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기사든 탐험가든, 마법사든 상관없다.” 결투 대리인은 용병을 허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딱히 네 가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 “아무나 데려와라.” “…….” “네가 부를 수 있는 놈 중 가장 센 놈으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자신 없나?” 나는 있는데. 네가 누구를 데려오든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자신이. 445화 파티 (2) 원탁에서 살기를 내뿜듯. 당장이라도 목을 쥐어뜯어 버릴 기세로 녀석을 내려다본다. 정신과 정신이 연결되는 커뮤니티가 아닌 외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겁없이 올려다보던 녀석의 눈을 깔게 하는 것은. “…….” 그래, 그래야지. 귀족가의 직계로 태어나 오냐오냐 자랐을 네가 언제 이런 상황을 겪어봤겠어. “…….” 답변이 돌아오지 않은 채 침묵이 흐른다. 스캔들에 환장하는 귀족들은 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만 보는 중이다. 천한 것이라 여기던 내가 날뛰고 있으면 옆에서 도와줄 법도 한데. ‘바바리안이 역시 사기캐가 맞다니까.’ 만약 내가 요정, 드워프, 수인이었다면 분명 내 무례함을 비난하며 나선 이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말은 통한다 생각할 테니까. 하면, 표본이 없는 바바리안은 어떨까. 그 대답이 바로 이 정적에 있었다. “…….” 아무 통계도 없기에 쉽게 액션을 취하지 못한다. 혹여나 나섰다가 불똥이 튈 일을 경계하는 것. “……저렇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이오?” 실제로 누군가는 그런 우려를 표하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딴청을 피웠다. 상식적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수많은 귀족들이 있는 이 자리에서 무력을 동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확신은 없는 것이다. 조금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결투를 신청하는 바바리안에게 과연 상식이 통할 것인지가. “슬슬 답해줬으면 하는데.” 그리 말하며 놈이 물러난 만큼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결투, 하기 싫은 건가?” 이에 조금 전까지 녀석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귀족들이 슬그머니 뒤로 발을 뺐다. 그러자 결국 자력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했을까. 이내 녀석이 결단을 내렸다. “…기일을 잡으시오.” 결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서 내린 결정은 아닐 터였다. 단지 선택지가 없었겠지. 그야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하다며 비웃던 이종족의 결투 신청을 거절하다니? 체면으로 먹고 사는 이쪽 업계에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기일을 잡으라는 걸 보니 직접 싸울 배짱은 없나 보군?” “…짐승을 잡는 칼은 따로 있는 법.” 멋들어지게 말은 했지만, 직접 싸우긴 무서우니 결투 대리인을 지정하겠단 뜻이다. “뭐, 상관은 없지만 되도록이면 여러 명 준비해놔라.” “……여러 명?” 뭘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야? 한 번 하고 끝날 줄 알았어? “아, 몰랐나? 난 오늘부터 네게 계속해서 결투를 신청할 거다. 네가 더럽힌 나의 명예가 회복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미친개는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아야 미친개인 법. “……뭣?” 그러게 입조심 좀 하지 그랬어. 아니면 뒷배가 빵빵하든가. 그럼 다른 애를 물었을 텐데. “당신… 정말 감당할 수 있겠소……?” 해석하자면,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는 간절한 물음이었다. 하기야 이놈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겠지.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감당할 수 있냐고?”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똑똑히 말했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 같나?” 너희도 물리기 싫으면 앞으로 조심하라고. *** 그렇게 결투는 성립됐다. 이제 남은 건 기일을 정하는 것뿐. “기일은 이번 주 내가 좋을 거 같은데.” “…….” “왜 사람을 부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하오.” 슬슬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도 적응이 됐을까. 남작은 더 이상 병신처럼 대답을 끌지 않았다. 아마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난 것일 터였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고 여기려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천박하게 날뛰는 야만인. 그리고 그런 야만인의 결투를 받아들이고 멋지게 승리하며 귀족의 품위를 지켜내는 자신. 꽤 그럴듯한 미래가 아닌가. 물론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기껏 해봤자 인맥을 이용해 이름 좀 날리는 기사 정도나 겨우 섭외하겠지.’ 대리 결투인의 급이 어느 정도일지 정확하게는 나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있다. 고작 남작의 결투 대리인으로 나설 왕실기사단 단장은 없을 테니까. 그 급이 아니면 전부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쯤 하는 게 어떤가?” 애석하게도 그때 끼어든 자가 있었다. ‘케알루너스 공작.’ 그가 홍해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를 지나쳐 내게 다가오더니 이내 내 어깨를 툭툭쳤다. 마치 토라진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자, 좋은 날이지 않은가?” “…….” “이쯤에서 자네가 너그러이 넘어가게. 우리는 모두 이 왕국을 떠받치는 기둥들 아닌가?” 공작이 정확히 이 타이밍에 나선 정치적 의도는 명확했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상황. 한데 거기서 그가 나서자마자 날뛰던 야만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뜻을 꺾는다? 그만큼 이후 귀족계에서 케알루너스 공작의 입지가 올라가는 격이다. 하지만……. ‘친구 사이가 되자며?’ 모름지기 주는 거 하나 없이 받기만 하면 금방 손절을 당하는 것이 친구라는 관계. 내게 뭔가 요구하려면 너도 뭔가 내어줘야지. “키프리오트 남작은 나를 모욕했다.” 정면으로 반기를 들자 공작의 입가가 싹 굳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녀석은 나를 잡종이라고, 짐승 같다고 말했다.” 사실 이건 옆에 있던 놈이 한 말이지만 아무튼.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리리비아 남작을 이종족이란 이유로 창부 취급했고, 이에 항의하자 내게 모욕당할 명예가 있느냐고 코웃음쳤지.” 글은 쓸 수 있냐고 조롱하기까지 했지만,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없어보이니까 패스. “자, 이게 키프리오트 남작이 한 일이다. 공작, 당신이 말한 그 좋은 날에.” 내가 결투를 신청한 이유를 만인 앞에 공표한 뒤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내가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 그 물음에 공작의 시선이 남작을 향했다. 상황을 보고 나서긴 했지만, 자세한 원인까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듯한데……. “쯧.” 남작을 보며 짧게 혀를 찬 공작이 이내 다시금 나를 보았다. 괜히 나섰나 후회하는 것 같았지만, 사건에 개입한 이상 공작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멋지게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고 맥없이 돌아가거나. 그도 아니면……. “키프리오트 남작이 실수를 한 모양이군.” 내게도 무언가 하나를 양보하든가. 공작의 판단은 신속했고 과감했다. “본 공작이 대신 약속하겠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실수가 없을 것이라고. 오늘만이 아니라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무려 케알루너스 공작의 이름을 걸린 하는 약속. “그렇지 않나? 키프리오트 남작?” 이내 말을 받은 남작놈이 발발 떨며 즉답했다. “예, 예… 물론입니다 공작님.” 내가 보기에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빈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작은 이후 오늘 같은 일은 벌이지 못하겠지. 아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작의 약속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으니까. 만약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공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과 동일한 짓. ‘결투까지 못 간 건 조금 아쉽지만……. 이건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공작도 한발 물러서 준 상황 아닌가. “자, 그럼 이쯤에서 화를 풀어주겠나?” 이 제안마저 거절한다면 그냥 척을 지자는 뜻과 다름없을 터. “나는 아직 키프리오트 남작에게 사과조차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사과를 받는다 해도 오늘 모욕 받은 명예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나는 말을 이었다. “이쯤에서 끝내겠다.” “호오…….” 그 말에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누구도 아닌, 친구의 부탁이니까.” “……!” 이어진 말에 그들의 눈이 커졌다. *** 친구. 우호적이며 대등한 관계를 뜻하는 낱말. “…….” 그 낱말이 내 입을 통해 뱉어진 순간, 영광의 궁 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야만인과 공작이 친구라고?’ 마치 해명을 기다리는 듯한 조용한 공기. 그 침묵 속에서 미간을 살짝 좁혔던 공작이 이내 푸근한 미소를 되찾고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일세.” ‘친구’란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짧은 말.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막 승작해서 로얄 클럽에 진입한 얀델 남작가의 격이 팍팍 올라가는 것에는. ‘의도치 않게 개이득을 봤네.’ 물론 공작도 정치적인 계산을 충분히 한 다음에 뱉은 말일 것이다. 한 귀족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차라리 나의 격을 올리는 것이 공작가의 위엄에 흠집을 덜 내는 일이라 여겼겠지. “그럼 슬슬 본 공작은 공무가 있어 이만 물러가 보겠네. 추후 일자를 잡아 따로 부르지. 아, 그리고 승작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이후 공작은 이후의 만남까지 기약하는 말을 모두 보는 앞에서 한 채 떠났다. ‘이렇게까지 해주면 부담스러워지는데…….’ 그래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를 훑는 시선 자체가 확 달라진 게 느껴졌으니. “……단순히 운이 좋아 귀족이 된 자는 아니었나 보구려.” “설마… 이번 승작에 인가가 난 것도 공작이 힘을 썼기 때문에……?” 아랫것을 보는 듯한 눈에 깃들기 시작한 호기심. 좋은 징조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아내야, 후작도 경거망동 못할 거 아니야? 따라서 키프리오트 남작놈에게 다음은 없다는 경고만을 해준 뒤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토끼 남작은 테이블에 앉지도 않은 채 멍하니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 반겨줄 필요까지는 없는데.” “…….” “……리리비아 남작?” 내가 그리 말하며 눈앞에 손을 휘젓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토끼 남작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예요……!” “…….” “공, 공작이 나서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크게 낭패를 봤을 거예요.” 거, 이 집은 탱커 대우가 별로구만. 고생했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그래도 잘 끝났지 않나.” “……?” “공작의 약속 하나로 차별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앞으로 뒤에서 수군거리는 일은 없을 거다.” 너희가 바라던 대로. 그렇게 딱 잘라 말을 덧붙이자 토끼 남작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당신… 정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럼 달리 이유가 필요한가?” “너무 무모했어요. 공작이 나선 게 아니라면 멜베스에서도 남작님을 구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수 있다고요……!” 조금 섭섭해지는 말이었다. 저러면 내 공로가 모두 운빨인 거 같지 않나. “글쎄,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물론 적어도 저는 얀델 남작님의 가치를 높게 치고 있어요. 하지만, 멜베스의 가문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이제 겨우 입지를 다져가는 와중에 귀족들의 반감을 크게 사면서까지 영입할 가치는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 “그만.” 동문서답이었다. 내 말뜻은 그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멜베스는 관계 없다.” “……예?” “공작도 마찬가지고. 애초에 공작이 나서지 않았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토끼 남작에게 나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네가 말했지 않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 “결투를 신청한 것도 그래서였다. 나 같은 놈이 한 명쯤은 있어야 다른 놈들이 못 까불 테니까. 아, 본보기로는 키프리오트 남작이 딱 제격이었지. 가문 자체도 별거 없고, 뒷배가 센 것도 아니니까.” “잠깐만! 남작은… 방금 그걸 전부 계산하고 움직였다는 뜻인가요?” “어느 정도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끼 남작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 가지가 의문인지 이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아, 그거? “아까 나한테 한 귀로 흘려넘기라 했을 때, 내가 이유를 묻자 방법이 없다고 했었지 않나.” 그때 한눈에 보였다. 이종족 귀족 당에 결핍된 게 무엇인지. 산전수전 다 겪은 메인 탱커만이 알아볼 수 있던 바로 그것. “사실 너희에겐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다. 어느 상황에도 길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적이 가득한 상황에서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단지 너희에게는 없었을 뿐이다.” “…….” “맨 앞에서 화살을 맞으며 길을 뚫어낼 자가.” 내 말이 끝난 후 토끼 남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케이, 이 정도면 자기 PR은 확실하게 먹힌 거 같고.’ 암, 내 가치는 내가 정하는 법이지. *** 이후로도 토끼 남작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큰 감명을 받은 사람처럼 이것저것 내게 물었고, 나는 방문판매원에 빙의해 약을 팔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이어질수록. “남작의 말이 옳아요…….” 토끼 남작의 얼굴 또한 조금씩 변해갔다. “버티고 버텨서 지금까지 바뀐 게 뭐죠?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적어도… 한 걸음씩이라도 착실히 나아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순진무구한 초식 동물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결의에 찬 하나의 맹수만이 있었을 뿐. “우리 멜베스도 이제는 바뀔 때가 됐죠. 얀델 남작은 걱정 마세요. 길드의 후원 건은 책임지고 인가를 받아내겠어요. 우리 멜베스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토끼 남작은 테이블을 떠났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이빨을 감출 것인가, 아니면 드러낼 것인가. 어쩌면 초식과 육식이 처음 분류된 그 시작점은 그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참 이래서 환경이 중요하다니까.’ 토끼라서 그런가? 유난히 귀가 얇단 말이지. 아무튼, 그녀가 떠난 후 빈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중단됐던 식사를 이어가고 있자니, 귀족들이 하나둘 말을 걸어왔다. “얀델 남작, 아까는 욕봤소이다. 내 듣자 하니 결투를 걸 만한 일이더군?” “예, 사정을 들어보니 정말 기가 차더군요.” “쯧, 이종 멸시라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투명 바바리안 취급할 때는 언제고, 태세 전환한 그들의 모습이 웃기긴 했지만, 나는 모른 척 그들과 사교를 나누었다. 이제부터는 인맥도 자산이니까. “하하, 다들 고맙다. 언제 한번 초대해 준다면 놀러 가지.” “오, 그렇소이까? 페르데힐트 백작가에서 열린 연회 이후로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들었소이만.” “그때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친구이지 않나?” “……친구? 하하핫! 확실히 탐험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화끈하시구려? 그래요, 합시다. 친구!” 아무튼, 이런 느낌으로 찾아온 자들 중에는 그 페르데힐트 백작도 껴 있었는데, 그는 이전에 나와 딸을 결혼시키지 못한 것에 미련을 내비쳤다. “자네가 이렇게 대성한 걸 보니 참으로 기쁘기는 한데, 조금 아쉽군. 딸이 참 좋아했을 텐데…….” 딸이 좋아하기는 무슨. 그때도 억지로 끌려 나와서 날 보고 벌벌 떨던데. “하하, 그럼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초대를 할 테니 모른 척하지 말고!” 그렇게 페르데힐트 백작을 보낸 이후로도 나는 여러 귀족들과 통성명을 하고 안면을 텄다. 그러던 때였다. ‘……응?’ 한 중년의 남작이 나와 악수를 하며 손에 쪽지를 쓱 쥐여주더니 은근한 눈빛을 던지고 사라졌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새끼 설마…….’ 당장 쪽지를 갈기갈기 찢을까도 싶었지만, 혹시 모르기에 얼른 화장실로 가서 혼자 읽어보았다. 내용을 읽어보니 찢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사흘 뒤,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의 진짜 친구가.] 후, 이렇게 비밀스럽게 연락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럼 일단 승작식의 보조 퀘스트 하나는 달성이 된 셈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후작만 만나보면 되겠군.’ 나는 쪽지를 갈가리 찢어 수돗물과 함께 삼킨 뒤 화장실을 나섰다. 446화 파티 (3) 정오가 조금 지나 시작된 연회는 해가 지기도 전에 끝이 났다. 오늘 연회는 참석자 전원이 각 가문을 대표하는 수장들이었으니까. 흥청망청 놀기 바쁜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정말로 일이 쌓여 있다. ‘실제로 한 2시간쯤 지나니까 사람이 확 빠지기 시작했지.’ 전통에 의해 강제로 참석한 그들 중 대부분은 책잡히지 않을 만큼만 연회에 머물러 있다가 미련 없이 궁을 떠났다. 물론 얼굴 보기 힘든 가주들이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이 연회를 기회 삼아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는 가주들도 많았다. 뭐, 그조차도 해 질 무렵엔 다들 피곤하다며 떠나갔지만. ‘이래서 늙으면 아이처럼 변한다는 건가?’ 무슨 통금이 있는 새 나라의 어린이들도 아니고. 덜그럭, 덜그럭. 마차를 타고서 멀어지는 왕궁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황도에도 집이 하나 있으면 편할 거 같다는 그런 잡생각부터 시작해 앞으로의 내 미래까지. ‘결국 후작과는 대화를 제대로 못 나눠봤네.’ 애석하게도 이번 연회의 퀘스트 중 하나였던 ‘후작 떠보기’는 실패했다. 먼저 인사하며 찾아가 테이블에 앉기는 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더란 말이지. 저쪽도 딱히 사람을 물리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고. 결국 인사치레만 하고서 돌아와야 했다.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 이제 와서는 후작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앞으로 중요한 건 균형이다. 나를 향한 후작의 의중이야 어떻든, 내 몸집이 커지면 후작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따라서 최대한 선을 잘 타야 한다. 쉽게 건들 수 없을 만큼 커지긴 했어도, 작정하고 칼을 빼들 만큼 위협적으로는 느껴지지 않게끔. ‘아무튼, 멜베스에 들어가는 건 잘 됐고…….’ 정식 가입은 이후 날을 잡아 따로 다 같이 모이는 날 하기로 했지만, 일단은 별문제가 없다. 다만 쪽지를 통해 나와 연락을 취한 라그나는 어떻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사실 이야기가 잘만 풀리면 얘가 이후 후작과의 대립 구도에서 조커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한데……. “하아…….” 이런 생각부터 해야 하는 나 자신이 조금 서럽다. 차라리 계속 그대로 도서관 사서였다면, 그냥 마음 편히 반갑게 재회를 하면 그만이었을 것을. ‘왜 하필 후작의 딸이어가지고…….’ 심지어 이 관계에는 현별이도 껴 있기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터질 거 같다. ‘……그래, 만나보면 알겠지.’ 이후 한숨 자고 있자니 머지않아 군용 승강장에 도착했고, 텔레포트를 타고 순식간에 라비기온으로 넘어온 다음에는 마차를 갈아타 집으로 향했다. “일찍 왔군?”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에르웬은?” “조금 전에 들어와서 지금은 씻는 중이다.” 오,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볼 수 있겠구나. 2층으로 올라가서 몸을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오니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소파에 도란도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근데 어찌 된 게 생각보다 둘이 친해 보인다. 음, 아이스록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덕분인— “아저씨!!” 이내 나를 발견한 에르웬이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었고, 나는 손을 뻗어 이를 제지했다. “에르웬, 나는 아저씨가 아니다.” “……에?” 내 말에 바람 빠진 인형 같은 표정을 짓는 에르웬. “나는 비요른 얀델 ‘남작’이다!” 이내 말이 이어지자 에르웬이 어색한 탄성을 터트렸다. “아…….” 쩝, 바바리안 무안하게. 이걸 안 받아주네. 아이나르였으면 함성을 내지르며 함께 기뻐했을 텐데. “비요른, 헛소리하지 말고 앉아라.” “…알았다.” 이후 시무룩하게 소파에 앉자 곧바로 집안 회의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열린 만큼 안건은 여럿 있었으나, 그중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역시나 에르웬이었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어요. 일단 신목궁은 다시 반납을 했고, 이 집을 살 때 빌려온 돈은……. 한 달 안에 되돌려주기로 했어요.” 그리 말하는 에르웬은 어딘가 죄를 저지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왜 그런 목소리냐 물으니 소중한 추억이 담긴 집을 지키지 못한 게 미안해서라고 하는데……. “됐다, 그걸 왜 네가 미안해하나?” 애초에 나는 요정족에서 겨우 이걸로 에르웬을 놓아줬다는 쪽이 더 납득이 안 된다. 순혈은 한 시대에 오직 하나뿐이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요구하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사실상 이 정도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이 이렇게 잘 풀리는 게 수상해 이것저것 캐묻자 에르웬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한창 원로들이랑 싸우고 있을 때, 저희 삼촌이 도와주셨어요. 아무래도 그게 크게 작용한 거 같아요.” 삼촌이라……. 그러고 보면 삼촌이 요정족의 영웅 같은 위상을 지닌 사람이랬지. 이 사람도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기는 한데. “그나저나 한 달이면 기간이 꽤 빠듯하군.” 에르웬의 근황 보고가 끝나자 아멜리아가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돈은 이 집을 팔아서 마련한다 치고, 앞으로 살 집은 새로 구해야 할 테니.” “…우리가 다시 구매하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 얻은 전리품을 팔면 가능은 할 거 같은데…….” “글쎄. 비요른, 네 생각은 어떻지?” “음…….”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의견을 내놓았다. “당분간은 여관에서 생활하는 게 나을 거 같다. 아니면 월세로 들어가든가. 물론 그래도 지금 살던 저택보단 훨씬 작겠지만.” “……그, 그런가요. 역시…….” 에르웬은 이 집을 판매한다는 게 내키지 않은 듯하면서도 내 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거, 이런 곳에선 솔직해도 될 텐데. “너무 걱정 마라.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렇고, 이후 살 집도 그렇고 결국 다 잠시 머무를 곳일 뿐이니.” 이후 멜베스에서 토지 구입과 저택 건설 비용을 지원해주기로 한 얘기를 꺼내자 에르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그러면 정말로 얀델 남작가가 생기는 거네요……!” “그래, 그러니 나중에 설계할 때 너도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다 말해라.” “……?” “앞으로 네가 살 집이기도 하니까.” “……!!!!” 에르웬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지금 사는 집을 매각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일절 사라진 듯했다. “물론 아멜리아 너도.” 혹시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 아멜리아도 언급을 해주자, 아멜리아는 어째선지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참고로 그러면서도 원하는 걸 말하기는 했다. “……우리 항해사가 있을 방은 지금보다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다. 볕이 드는 창문도 있고.” 최근 항해사가 많이 우울해하는 모양이었다. 바닷바람이라도 좀 쐬면 나아지려나? *** “거주 문제는 이만하면 됐고… 미궁 탐사는 어떻게 할 거지?” 집 문제가 일단락되자마자 아멜리아가 꺼낸 안건이었다. 그야 우리 파티는 현재 미완성 상태니까. 아이나르, 에르웬, 아멜리아, 나, 그리고 우리 항해사까지. 풀파티 6인을 채우기까지 한 자리가 남는다. 문제는 당장 넣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고. 언젠가는 원정대 동료들을 전부 다 내 클랜에 들어오게 할 계획이지만, 너무 조급하게 움직이면 탈이 난다는 생각에 조심하는 중이다. 그나마 당장 영입한다면 라비옌이나 마법사인 베르실 고울랜드가 탈이 없을 거 같지만……. ‘베르실은 교단과의 은원을 확실히 매듭짓는 데 한 달은 걸릴 거 같다고 했고, 라비옌 그 여자는 당분간 탐사는 쉴 거랬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자리가 빈다. 그냥 쉬기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운 상황이고.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그냥 우리끼리 들어가는 게 나을 거 같다.” “다섯이서?”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섯 명이 보통이었는데.” “그건… 그렇지.” “7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6층에서만 활동을 할 생각이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6층이라… 알겠다. 록로브에게도 그렇게 전달을 해두지.” 그럼 이렇게 미궁 탐사 건도 마무리. 이후로는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며 잡담을 나누다가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 함께 길드 지부로 가서 클랜원 등록을 끝마쳤다. “헤… 고마워요. 아저씨.” 감사 인사는 옆에 있는 아멜리아한테 해줬으면 하는데……. 똑같은 서류를 한 장 더 발급까지 받아서 소중히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양심이 쑤셔온다. ‘후, 그나저나 부단장 자리도 채워야 하는데.’ 클랜을 만들 당시 아멜리아가 제격일 거 같아서 슬쩍 운을 떼보기도 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괜히 사람들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던가? 하긴, 일단 걔는 쓰고 있는 ‘에밀리 레인즈’라는 이름부터가 가명이니까. ‘그럼 부단장은 누구로 한다…….’ 고민이 깊어진다. 그만큼 부단장 자리는 꼭 채워져야 하는 자리다. 위임장만 미리 등록해 두면 단장의 권한이 필요한 행정 절차를 대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레이븐이 부단장으로는 딱이었는데. 귀찮은 일들도 꼼꼼하게 잘 처리해주고.’ 클랜원 등록을 끝낸 뒤에는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비요른, 그럼 이제 컴멜비로 갈 건가?” “아니, 먼저 신전에 들르고.” “…신전?”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아멜리아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가챠본의 정수를 지우려는 거군.” “이제는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오늘까지도 이 문제를 고민했다. 가챠본의 정수도 꽤 괜찮은 정수였던 탓이다. 본격적으로 다음 정수를 파밍하기 전까지는 그냥 갖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도 싶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군.” “그야 이번에 아이나르랑 아브만에게 이전에 쓰던 장비들을 돌려받지 않았나. 원래 체형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쓸 수 있는데 안 쓰는 건 낭비다. 게다가 6층 탐사 중에 더 좋은 정수가 나올 수도 있고. 언젠가는 부족에도 한 번 들러야 하는데 역시 이 몸으로 가면 좀 그렇단 말이지?” “흐음……?” 내 답변을 들은 아멜리아는 묘한 콧소리를 냈고, 반면 에르웬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어… 그럼 다시 예전처럼 커지는 거예요……?” “그래.” “저는 지금도 좋은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적 감각이다. 대체 이런 홀쭉이 같은 몸 어디가 좋다는 건지. “그럼 다녀오마.” 이후 신전에 도착한 후에는 나 혼자 들어가 정수 제거 과정을 거쳤다. 「캐릭터의 영혼에 스며든 [가챠본의 정수]가 제거되었습니다.」 「육감이 -40 하락합니다.」 「물리내성이 -15 하락합니다.」 「어둠 저항력이 -30 하락합니다.」 「명중률이 -45 하락…….」 떨어지는 스탯. 「골밀도가 -110 하락니다.」 그만큼 늘어나는 신장. 「통제력이 +30 상승합니다.」 아무튼, 뭔가 정신도 더 또렷해진 거 같고. 「행운이 +50 상승합니다.」 가장 중요한 행운도 조금은 나아졌을 테지. 스윽. 뒤바뀐 눈높이에 적응하기도 잠시, 따로 챙겨온 옷을 꺼내 입은 나는 거울에 비친 몸을 확인했다. ‘후, 드디어 원래 몸으로 돌아왔네.’ 새삼스럽지만, 나 정말 크구나. 왠지 조상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초인적인 통제력으로 참아냈다. 일단 여긴 신전이니까. *** 「비요른 얀델」 레벨: 7 육체: 1,390.55(New -54.5)/ 정신: 521.3/ 이능: 2,197.65 아이템 레벨: 6,285(New -2,020) 종합 전투 지수: 5,680.75(New -575.58)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심해거인 - Rank 3 *** 신전에서 나온 나를 본 둘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헤, 아저씨! 이쪽도 멋있으세요!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요!” 아쉬움을 내비치던 에르웬은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찬사를 보냈고. “…확실히 예전이 낫기는 하군.” 반면 별말 없던 아멜리아는 전사의 심장에 못을 박았다. 묘한 중얼거림과 함께.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쪽이 한결 나을지도.”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넌 차라리 못생긴 게 낫다는 뜻이다.” “난 못생긴 게 아니라, 남자답게 생긴 건데?” “풋….” “……지금 비웃은 건가?” ‘가정 교육’. 그 단어가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참아냈다. 일단 소중한 동료 아닌가. 게다가 얘는 정말 가정 교육을 못 받았기도 하고. 암, 이런 부분은 클랜장으로서 참고 넘어가야지. ‘……통제력이 돌아온 게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아무튼, 원래 일정대로 컴멜비로 향했다. 그야 우리 원정대 멤버들 모두가 7구역에 사는 건 아니니까. 도시의 중심부인 컴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기군.” 이내 베르실이 하루 대관했다는 건물로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후후, 드디어 왔구려. 얀델 준남작……. 아니, 이제 남작이라 해야 하나?” 멜란드 카이슬란. “……어머, 모습이 바뀌셨네요?” 리리스 마로네, 제임스 칼라, 스벤 파라브 등등 춥고 배고팠던 아이스록에서 함께 살아돌아온 대원들이 내 바뀐 모습을 신기해하며 옹기종기 모인다. “베르실. 아쿠라바와 라비옌은?” “두 분은 사정이 있어 못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나머지는 전원 참석을 했군.” “아무래도 다들 궁금했을 테니까요.” 하긴, 나부터가 그랬는데 얘들은 오죽했겠어. “주변은 어떻지?” “감시는 걱정 마세요. 일부러 창문도 없는 곳을 골랐고, 음성 제어 마법도 작동 중이니까요. 혹시 몰라서 마력 감지까지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확실히 마법사라 그런지 일을 잘하네. 나중에 클랜에 들어올 때 부단장 생각은 없냐고 넌지시 물어봐야지. “얀델 남작!” “남작은 무슨, 그냥 대장이라고 불러라.” 오랜만에 재회한 우리들은 자유로이 근황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시간이 찾아 왔다. “저기… 근데 그건 언제 하는 겁니까?” 장미기사단원들에게서 루팅한 아공간의 오픈식. “열어 봤을 때 우리가 집어넣은 배낭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그런 줄 알았지 뭡니까.” 사실 나도 그랬다. 근데 얼마 전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숨겨진 물건이 존재하며, 그걸 꺼내려면 종속 아공간의 술식을 조정해야 한다던가? 참고로 이는 마법사 베르실의 발견이었는데……. “자자, 한 분씩 오세요. 시약은 넉넉하게 만들어 왔으니까요.” 술식 조정은 나도 아직이기에 살짝 긴장이 됐다. “과연… 뭐가 들어 있을까요?”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는데, 이러니까 오히려 더 기대가 되는군요.” “후… 다들 진작에 열어봤나 보군? 난 근처에 감시가 붙어 있을까 봐 열어볼 생각도 못했소.” 이중으로 보안을 해두면서까지 숨기려 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좀 더 뒤에 지워도 될 가챠본 정수를 오늘 미리 지웠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 “자, 한번 열어봅시다!” 오늘만큼은 운이 좀 따라줬으면 해서. 447화 파티 (4) 장미기사단의 비밀 아공간에서 어떤 게 나올지 모르니 한 명씩 순서대로 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군부 마법사 리리스 마로네. “상자네요……?” 그녀의 아공간에서 나온 것은 목각함이었다. 책 한두 권 정도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사이즈. “별다른 마법적 조치는 없어요. 그냥 열면 돼요.” 베르실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어…….” “이건…….” 목각함 내부의 물건을 확인한 대원들의 입에서 어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용물이 기대한 것과 너무 달랐던 탓이다. “현금이랑 위조 신분증 몇 개, 초상화 한 장이 전부네요…….” “…초상화는 대체 누구지? 가족인가?” “그런 거 같아요.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 있는 걸 보면.” 뭐야 이게……. “다, 다음! 다음 것을 열어보죠!” 김이 빠진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나를 비롯한 대원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아공간 오픈식을 재개했다. “마찬가지로 현금이랑 신분증… 그리고 여기엔 이상한 알약이 있네요?” 두 번째 상자에서 나온 알약은 아멜리아, 그리고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레테의 축복이라는 비약이다.” “……레인즈 씨는 아시는 물건인가요?” “그래, 복용 시 대상자의 기억을 지우는 효과를 지녔지.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들어 낸 비약인데 왕가에서도 어떻게 제조법을 알아냈나 보군.” “이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을 얼마나 지울 수 있죠?” “글쎄, 개량이 됐는지 내가 알던 것과는 형태가 조금씩 달라서.” “그런가요……. 보니까 크기가 전부 다르기도 하네요. 왠지 클수록 많은 기억을 지울 거 같기는 한데… 이건 제가 한번 연구실에서 확인을 해볼게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어진 아공간 오픈식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또 레테의 축복인가 뭔가 하는 그 알약이군.” “여기 무슨 독극물 같은 것도 있소이만.” “…강산성 용액이네요. 무언가를 인멸할 때 썼을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시체라든가…….” 보물상자인 줄 알았던 아공간은 애석하게도 속 빈 강정이었다. 뭐, 레테의 축복 말고 쓸 만한 것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카이슬란 경, 이 수첩을 좀 봐주시겠어요?” 여섯 번째 아공간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이건… 왕가에서 풀어둔 세작들의 이름인 듯하오.” 다양한 기관에서 위장 신분으로 잠입 활동 중인 왕가의 정보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 새삼스레 왕가의 저력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이건 수많은 정보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인 듯하구려.” “이렇게 많은데… 그게 일부라고요?” “보시오. 정보원들 중 대부분이 특정 귀족가의 세력에 집중돼 있지 않소? 어쩌면 이 아공간의 주인은 그 귀족가와 관련된 개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오.” “이 명부는… 그 개인 임무 하나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원일 뿐이고요?” “물론 나의 추측이오.” 카이슬란은 그렇게 말을 끝마쳤지만, 내가 봐도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왕가의 눈과 귀는 어디에도 있다더니,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대원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왕가의 진짜 힘을. “아무튼, 잘 됐군.” 나는 침묵 속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베르실, 이 명부는 내가 갖고 있겠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내 명부를 따로 챙겨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사안은 마무리.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이군.” 내 말에 대원들이 눈을 빛냈다. 아공간 오픈식이 진행되며 잔뜩 부풀었던 기대는 사그라들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게 그 여자의 아공간이었지요?” 장미기사단의 식스. 단장인지 부단장인지, 그도 아니면 평단원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여자는 그날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각함이군.” 마지막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으며 오픈한 상자의 내용물은 간소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현금. 신분증. 레테의 축복. 그리고……. 봉인이 뜯긴 편지지에 담겨 있던 한 장의 서류. “이건…….” 왕가에서 하달된 명령서였다. 만약 원정대가 살아 돌아온다면 아이스록에서 멸하라는 지시가 담긴. “쓸 수 있겠군.”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 아공간 오픈식이 끝난 후. 미궁에서 싸들고 온 장비들을 전부 양도 받았다. “이 장비들은 앞으로 어쩔 것이오?” “우선 노아르크 놈들에게 얻은 장비들은 최대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처분할 거다. 그리고 그 돈은 앞으로 우리의 군자금이 될 테고.” “그렇구려…….” 사실상 원정에서 획득한 대부분의 전리품을 내게 넘기고 사용 권한도 맡긴 거나 다름없으나, 의외로 불만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신뢰가 기쁘긴 한데, 조금은 걱정되는 태도였다. ‘거참, 사기당하기 딱 좋겠네.’ 만약 대장 자리에 앉았던 게, 나처럼 선량하고 책임감 넘치는 바바리안이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얀델, 그나저나 장미기사단의 장비들은 어찌할 생각이오? 그 상태로 처분한다면 반드시 왕가의 눈에 띌 텐데.” “아, 그거라면 적당한 대장간을 수배해 하나씩 재가공을 할 생각이다. 파는 게 위험한 것도 맞지만, 파는 게 아까울 만큼 상위 소재이기도 하니까.” 아크와 동급의 금속인 미스티움은 녹이고, 5등급 소재인 오우거 가죽은 재봉선 그대로 잘라내 다른 장비로 제작할 계획이다. 물론 다 해봤자 양은 얼마 안 될 것이다. 단검을 다 녹여봤자 미스티움은 갑옷 하나를 만들기에도 애매할 것이며, 가죽의 경우에는 재가공 과정에서 손실률이 상당할 테지. “모인 소재로 뭘 제작할지는 나중에 함께 정할 생각이니, 만약 소재가 탐나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갖고 와라.” 미스티움 방패를 하나 만들면 딱일 거 같지만, 리더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법. 공금은 공정하게 집단을 위해서만 쓸 예정이다. 뭐, 얘네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저는 그보다 슬슬 그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며칠 전에 클랜은 창설했다던데……. 우리는 언제 합류할 수 있는 걸까요?” “아, 그거라면 베르실이 간략하게나마 차례대로 시기를 정해놨다.” “어머, 그래요? 저는 언젠데요?” “마로네 양은 약 3개월 뒤요. 상관과의 마찰을 이유로 퇴역하는 게 가장 깔끔할 거 같지만. 더 좋은 사유가 생각난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고요.” “오호라, 그러면 나는 언제쯤이오?” “카이슬란 경은……. 저희 중에 가장 늦어요. 아무래도 직위가 있으시니까. 우리에게 관심이 조금 덜해질 무렵… 최소 1년은 있다가 합류하는 쪽이 자연스러울 듯해요.” “그렇구려…….” “칼라 님은 얼마 전에 클랜에서 방출을 당했다고 하셨죠? 두 달 정도 쉬며 다른 클랜에 입단 의사를 표해 보세요. 어차피 받아 줄 클랜은 없을 테니까.” “…….” “새 둥지를 찾아봤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어서 전 원정대 인맥이었던 얀델의 클랜에 합류했다. 역시 이쪽이 훨씬 더 위화감이 없잖아요?” “만약 받아 준다고 하면… 그땐 어떡합니까?” “그러면 이전 부단장 경력을 인정해 달라고 하며 높은 지위를 요구하세요. 분명 그 즉시 꺼지라 할 테니. 인사 담당 업무도 해봤던 제 말이니 믿어도 좋아요.” 그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제임스 칼라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아, 파라브 경은…….” 그렇게 베르실의 논리정연한 브리핑이 한동안 이어졌다. 꽤 인상적이었다. 마법사 속성에 전직 클랜 부단장 속성에 현대인 속성까지 합쳐져서 그런가? 일 처리가 아주 칼 같구나 정말. ‘지구에서는 무슨 일을 했으려나?’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지나 브리핑이 끝나자 그다음은 내게 질문이 모였다. “폭검 아이나르 프넬린, 그녀는 우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소?”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중에 만났을 땐 다들 입조심해라.” “그렇구려…….” “그나저나 벌써 칠강의 일원이 둘이나 있는데, 여기에 우리까지 들어가면…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도 상당히 끌게 되겠군요? 후후후.” “흐음, 파라브 너는 네가 그 정도 급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어, 아닙니까? 아니, 대외적인 명성에선 조금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서도……. 어…….” “저는 아우옌 록로브라는 단원이 궁금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던데. 믿을 만한 자인지요?” 우리 항해사의 경우에는 내가 아니라 아멜리아가 대신 답했다. “믿을 만하다. 내가 보증하지.” 이와 비슷한 질문이 쏟아진 후에는 화제가 또 바뀌었다. 이번엔 승작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였고, 멜베스에 들어가기로 한 얘기를 해주자 자연스레 우리의 다음 계획이 도마에 올랐다. 다만 이 자리에서 전부 설명할 수는 없기에 나는 간추려서 비전만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적이 많은 만큼, 적들도 적이 많다.” “…….” “그리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클랜을 만들고, 가문을 세우며 착실하게 우리를 지킬 성벽을 쌓아올리는 한편, 동료들을 최대한 늘리는 것. 그게 내 계획의 핵심이다. 우리를 그 지옥 속에다 내다버렸던 놈들에게 엿을 먹여주기 위한. *** 진지한 이야기가 끝난 후엔 한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카이슬란 경은 어때요? 원정대에서 돌아온 후, 취조 같은 건 없었나요?” “있기는 했지만, 취조라기보다는 청취였소. 검증 마법 같은 것도 따로 쓰지 않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고울랜드 씨, 혹시 잠이 좀 잘 오는 약 같은 것도 갖고 있습니까?” “네. 필요하다면 드릴게요.”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사실 저도 잠이 잘 안 오거든요. 그날 이후로.” 누군가는 도움을 받기도 하며. “마로네 씨라고 하셨죠……. 그 손톱에 칠한 거는 뭐예요?” “아, 이거요? 예쁘죠?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예요. 테르시아 씨도 해볼래요?” 몇몇은 그저 취미를 화제로 한참 떠들기도 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한 달 전 미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남이었는데. “…….” 나는 모퉁이 쪽 소파에 혼자 앉은 채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승작식 연회와 달리, 화려한 궁중요리도 값비싼 와인도 없었다. 단지 임차인이 나가서 텅 빈 건물을 빌려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눌 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생각했다. 역시 내게는 이런 쪽의 연회가 훨씬 더 즐겁다고.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려.” 늘 그렇듯 즐거운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저녁이 되자 하나둘 자리를 뜨며 사실상 우리 원정대의 뒤풀이는 끝이 났고, 나와 에르웬, 아멜리아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뒤. “도서관에 간다고? 이 아침에?” 나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그야 나도 나중에 깨달은 것인데. [사흘 뒤,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쪽지에는 시간이 안 적혀 있었다. 라그나, 얘도 안 그럴 거같이 생겨서 가만 보면 진짜 칠칠맞다니까. “후우…….” 눈에 익은 7구역의 거리를 걷고 있자니 머지않아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라비기온 국립도서관] 이 야만인의 몸에서 막 깨어난 초창기에는 정말 집처럼 틀어박혀 살기도 했던 바로 그 장소. 다만 도착하자마자 나는 흠칫 굳었다. 도서관 앞에 오늘은 폐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던 탓이다. ‘……이런 경우는 생각 못 했는데.’ 어떡하지? 이대로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응, 그래 그러면 적어도 엇갈리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또각, 또각. 문 앞을 서성이던 내 곁으로 한 여자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눈을 마주친 즉시 몸이 움찔했다.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검은색 치마까지. 하얀 셔츠를 제하면 모든 게 검은색인 여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틀렸다.” “……예?”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초면의 여자를 보며 딱 잘라 말했다. “오늘은 남작이 아니라 단장이다.” “…….” “며칠 전에 창설된 ‘아나바다’ 클랜의.” 조금 느닷없었을 나의 말에도 여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비즈니스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답할 뿐. “그러시군요. 앞으로는 호칭에 주의하겠습니다. 얀델 단장님.” “고맙다. 오늘은 왠지 그런 기분이라서.” “그런 기분… 말씀입니까?” “아, 남작보단 단장이 더 강해 보이지 않나.” “……그렇군요.” 뭔 차이인지 이해도 못 했을 거면서도 무작정 긍정의 뜻을 밝히는 여자. 나는 그 여자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아나바다가 무슨 뜻인지도 아나?”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고대어로 맹수 무리라는 뜻을 지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어, 어… 그래, 그렇지……. 역시 아는군?” 나는 지식을 뽐낼 기회를 잃은 바바리안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자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잠겨 있던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내 여자는 내 앞에서 먼저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입맛을 다셨다. 또각, 또각. 씁, 이거 암만 봐도 현별이 같은데 말이지. 448화 확장 (1) 또각, 또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 텅 빈 도서관. “여자, 넌 이름이 뭐지?” “…하린 스에뷔입니다.” “생긴 것만큼이나 이름도 특이하군?” 사실 방금 내가 한 말은 뜯어보면 인종차별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같은 인간이 했다면 말이다. ‘역시 바바리안이 좋기는 해.’ 나는 차별 업계에서 면책권을 가진 바바리안의 일원. 그래서인지 하린도 별 불쾌함 없이 답했다. “낯설게 느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희처럼 동대륙의 피가 아직까지 이렇게 진하게 남아 있는 가문은 이제 이 도시에 얼마 없으니까요.” “선조가 동대륙 사람이었나?” “예. 상인이셨던 선조께서는 멸망 당시 운 좋게 이 도시에 들어와 있었고, 덕분에 살아남아 참변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뭐라 더 물을 것도 없는 간결한 설명. 오히려 얼떨떨해진 건 내 쪽이었다. 보통의 악령들이라면 가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잘 알고 있지 않을 거 같은데……. ‘현별이라면 다를 수도 있지.’ 나는 의심을 지우지 않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페프로크 여백작과는 어떤 관계지?” “운이 좋아 얼마 전부터 곁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단 거구나. 심증이 더욱 커진다. 하지만……. 또각. 애석하게도 더 취조를 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저는 이만 물러나 있겠습니다.” “네, 하린. 매번 고마워요.” 안내를 끝마친 그녀는 정중하게 자리를 비켰고, 나도 의심은 이쯤에서 끝내고 현재에 집중했다. “…….” 푸른색 눈에 푸른색 머리. 목선이 드러나게 머리를 틀어올려서인지, 이전과 달리 귀족 특유의 분위기가 겉모습에서부터 풍겨져 나온다. 하지만……. “오랜만입니다. 비요른 얀델.” 말투는 그대로구나. 낯선 겉모습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잠시, 나는 곧 반가움을 느꼈다. “그래, 오랜만이다. 라그나. 아니, 이제 페프로크 여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장난기는 여전하시군요.” 장난기라기보다는 그냥 확인해 봤을 뿐이다. 뭐, 남작이라 호칭하지 않은 부분에서 얘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는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지만. “그러는 너는 좀 변한 거 같군.” “그렇습니까……?” 머리 때문인가? 중얼거리며 머리를 살짝 만지는 라그나였지만, 사실 바뀐 헤어스타일이나 복장과 무관하게 좀 더 성숙해진 분위기가 딱 티가 난다. 예전에는 겉은 까칠해도 속은 유약한 게 훤히 보여서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사람이 무겁고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정말로 꿈에도 몰랐습니다. 얀델, 당신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나도 몰랐다. 사연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네가 재상의 딸이었을 줄이야.” “………예?” “………응?” 티키타카를 하듯 툭 던진 말에 라그나가 잠시 굳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후작 각하의 딸이라니?” “…아니었나?” “아닙니다! 아니? 아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의문이던 부분이 얼추 설명이 되긴 합니다마는…….” 대체 뭐야, 이 상황은? ***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얀델, 제가 후작 각하의 딸이란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어…….” “밝히기 곤란하다면 얼마나 확실한 건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부탁하겠습니다.” “확실한 정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널 만나기 전까지는.” “신용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는 뜻이군요…….” 음, 그게 그렇게 되나? 난 사슴뿔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머리가 멍해졌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네 사연을 들려줄 수 있겠나? 그걸 듣고 나면 이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라그나는 내 요구에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갖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감출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 “무엇보다, 감춰야만 하는 이야기도 아닐 테고.” 그 말에서 라그나의 변화가 확 체감됐다. 예전엔 몇 번을 떠봐도 단지 슬픈 눈빛을 지으며 대답을 거절했을 뿐이었는데. 성숙한 분위기의 원천은 내면에 있었구나. 내심 감탄하는 사이 라그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어린 시절, 홀로 절 키운 보모가 늘 하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라그나, 당신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야 해요. 그게 그분을 위해 보답할 유일한 길이에요.” “…….” “알다시피 전 페프로크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제 부친께서 저 홀로 살아갈 환경을 만들기 위해 몰락한 가문의 이름을 빌렸을 뿐.” “그랬군…….” “아버지가 누군진 모릅니다만, 보모가 말하기론 굉장한 위치에 있는 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존재가 드러나면 굉장히 곤란해질 거라 했지요. 아, 사정이 있어서 직접 만날 수 없을 뿐, 부친께선 저를 사랑하고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 “전 보모를 사랑했지만,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단 그녀의 말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죠. 조용히 숨죽이며 살았고, 유일한 취미였던 마법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그저 마법을 배우는 게 즐거웠을 뿐인데, 어째선지 사람들의 이목을 자꾸만 끌게 되더군요.” 젊은 나이에 최소 5등급 이상으로 추정됐던 마법사가 도서관에서 사서나 하고 있던 이유였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녀를 사랑했으니까요. 작은 욕심 정도는 포기해도 좋을 만큼.” “혹시… 그 보모의 이름이 리타니옐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쩐지 명부에는 라그나 페프로크 백작으로만 나와 있더라니. 그 풀네임이 본명인 건 아니었던 거구나.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됐는지도 아나?” “저를 낳은 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군…….” 담담하게 뱉어내는 라그나의 사연을 듣고 나니 그동안 갖고 있던 의문들 대부분이 풀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그래서 이후로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과거로 떠나 있던 동안 라그나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용히 살고자 했던 사람이 갑자기 백작이 되었는가. “얀델, 당신이 악령이라고 왕가에서 공표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테르세리온 후작 각하께서 저를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후작이?” “예. 몰락한 페프로크 가문을 부활시켜 줄 테니, 자신의 아래에서 일을 해달라는 제안이었지요. 전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라그나가 밝힌 사연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그때는 후작이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했을 때였을 텐데?” “물론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보모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평생을 숨듯이 지낸 탓에 어딘가 나서는 일은 어색했으니까요. 하지만… 후작 각하가 제게 원하는 걸 듣고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말해주겠나?” “후작 각하께선 제가 악령들을 도시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앞에서 나서주길 바랐습니다.” “…….” 라그나가 민족 편입 안건을 왕가 회의에서 꺼낸 이유였다. 그러나 역시나 이해되지 않는 점은 있다. 이 사연을 관통하는 아주 근본적인 의문. 후작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둘째치고. “넌 어째서 그 제안을 듣고 생각을 바꾼 거지?” 라그나는 대체 무슨 이유로 악령의 민족 편입을 바랐는가.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는 알고 있으니까요.” 해답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악령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 “그러니까… 친구가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건 싫었습니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라그나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이상합니까? 이런 이유인 건?” 나는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래, 이상하다.” 까놓고 말해서, 라그나와 나는 그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렇게 이 관계를 보았다. 친구와 지인 사이의 어딘가. 만나면 반갑지만 연락이 끊기면 끊기는 대로 자연스레 멀어질 그런 사이. 그래, 그랬을 터인데……. “으아, 어… 역시 그, 그런 겁—” 뭔가 더 오해하기 전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하지만.” “……?” “고맙다, 라그나. 진심으로.” 이것 말고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었다. *** “…….” “…….” 어색한 침묵이 이 넓은 도서실에 내리 깔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줬던 편지, 시간이 안 적혀 있던데.” “아… 그건… 급히 적다 보니까 깜빡했습니다.” 어쩐지 그랬을 거 같더라니. 나는 피식 웃으며 재차 물었다. “보니까 한참 먼저 와 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거냐?”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다면야 뭐. 아무튼, 이후 주제는 자연스레 도서관 폐관으로 이어졌다. 그야 나도 좀 놀랐거든. 명색이 백작이니 도서관 하루를 통째로 빌리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서도……. “설마 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남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흐음, 그럼 아예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했어도 됐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만난다면 역시 이곳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건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래서 권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일부러 놀리듯이 짓궂게 말했다. 그러자 처음엔 당황하는가 싶던 라그나는 의외로 뻔뻔하게 역으로 물어왔다. “예. 문제 있습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한 번쯤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아, 어, 음…….” 그러면 할 말이 없기는 하지. 이후 나는 좀 더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풀었다. 친구 모임의 일원이었던 샤빈 에무어의 근황이나 그런 것들.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웃을 일이 몇 번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그나, 할 말이 있다.” 물론 오늘 만나서 하려던 말과는 다른 말이었다. 은근슬쩍 후작가의 정보를 캐내고, 만약 각이 나온다면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 그래, 원래는 그게 계획이었다. 하지만……. “백작 자리, 내려놓을 생각은 없나?” 얘기를 듣고 나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어졌단 말이지. 도움은 됐으니, 이제 그냥 라그나가 이 세력 구도에서 빠지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물론 그런 내 기대는 곧바로 뭉개졌지만. “왜 그런 걸 묻는진 모르겠지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이유가 뭐지? 후작이 아버지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관합니다. 진실이야 어쨌든 저는 그 사람과 평생 남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계속 백작 자리에 있겠단 거지? 내가 돌아왔고, 오해도 다 벗었으니 네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그야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이해가 안 되는데.” “그동안 이 의제를 통과시키기 위해 정말 다양한 사례를 접하고 분석했습니다. 악령이라고 모두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나와 무관하게 그 문제에 대해 너도 진심이 되었단 거냐?” “예. 축약하면 그렇습니다.” 딱 봐도 허투루 하는 말로 보이진 않았다. 지금 라그나는 진심이다. “후우…….” 따라서 설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럼 후작 아래에서라도 벗어나는 게 어떠냐? 어차피 후작은 그 의제를 통과시킬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들었다. 저번에 왕가 회의에서 그 안건을 처음 언급했을 때, 가장 극심하게 반대한 게 바로 그 후작이었다고 하던데?” “그건… 저도 이상하게 여긴 부분이긴 합니다. 다만, 후작 각하께서는 제가 가져온 정책의 근거가 빈약하다 보니 다른 귀족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선 것이라 해명하셨습니다.” “…뭐?” “추후에 제가 다른 귀족들까지도 설득시킬 수 있을 보완된 정책을 갖고 오면, 그때는 전력으로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걸 믿는 거냐?” “그럼 믿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애초에 후작 각하께서 저를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는데.” “그건…….” 그래, 표면적으로 그렇긴 하지. 사실 이간질을 시도하긴 했지만, 후작의 속내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잘 살고 있던 라그나는 왜 데려온 거고, 그런 애한테 민족 편입 안건은 왜 먼저 제안을 했— “얀델, 당신은 후작 각하를 싫어하시는 것 같군요?” 그때 라그나가 내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영영 남일 거라더니. 그래도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이건가?’ 하긴 혈연이란 게 끊고 싶다고 쉽게 끊어지는 건 또 아니니까. 쯧, 일이 좀 복잡하게 됐네. “딱히 후작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네게 접근한 의도가 조금 수상하다고 여길 뿐.” 라그나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에 서둘러 해명 아닌 해명을 뱉었다. 다행히 라그나는 믿는 눈치였다. “그렇군요. 얀델,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도 이제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으니까요.” 참 부러운 말이었다. ‘앞가림이라…….’ 그거, 나는 아직도 잘 못하겠던데. *** 라그나와 헤어져 도서관을 나온 것은 막 정오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와중에 라그나에게 호출이 들어온 것이다. “하린, 후작 각하께서 절 부르신다고요……?” “예.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말씀하신답니다.” “……날 왜 보나? 미안해할 거 없다. 어차피 나도 배가 고파서 슬슬 일어나려 했으니까.” “추후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아까 당부했듯 나랑 만났단 얘기는 후작에게 하지 말고.” “물론입니다. 저도 후작 각하께서 저와 당신의 친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아, 하린도 입이 무거우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라그나는 동대륙 가문 출신의 비서, 하린을 따라 떠났고, 나는 떠나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하린이라…….’ 라그나와 수다를 떨면서 ‘하린’에 대한 정보도 꽤나 획득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약 1년 전. 장소는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도서관이었다. 사서직을 그만둔 후에도 자주 들러 민족 편입 정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했던 라그나는 이곳에서 하린과 만나 친해졌다. 그리고……. ‘하린이란 여자가 마음에 들고, 생각보다 능력이 좋았기에 얼마 전에 정체를 밝히고 비서 겸 책사 같은 포지션으로 영입했다.’ 이것이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 ‘하린은… 역시 현별이겠지.’ 일단 하린이 현별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정황상 다른 후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라그나에게 가신이라고 할 사람은 하린 말고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일단 현별이라면 틀림없이 알았을 거야. 옷만 봐도 귀족인 티가 나니까. 분명 의도적으로 접근해 호감을 쌓고 친해졌겠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한 가지가 걱정된다. [최근에 꽤 높은 사람 줄을 잡았죠.] 그때 현별이가 말했던 ‘높은 사람’이. [제가 그 힘을 이용해서 오빠를 밀어줄게요.] 과연 정말로 라그나를 뜻하는 거였을까? 툭, 툭. 만약 그렇지 않은 거라면……. ‘……아니야. 누구 밑에서 일하냐고 물었을 때, 속이는 눈치는 아니었어.’ 이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름 현별이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니까. 현별이가 날 속였다기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역시 더 타당하다.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에겐 비밀이 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449화 확장 (2) 라그나와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방문객이 와 있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어! 아저씨, 잘 오셨어요! 친구분들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친구……?” 고개를 갸웃하며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다과를 즐기던 두 명의 사내가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겨 주었다. “이거이거이거, 진짜 비요른 얀델 아닌가!!! 정말로 비요른 얀델이야……!!” 히쿠로드 무라드. 줄여서 난쟁이놈. 그리고……. “…오랜만일세. 살아 있단 소식은 한참 전에 들었네만,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군.” 브라운 로트밀러까지.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뭐, 난쟁이놈이야 예전에 대장간에 몰래 들러서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충격적인 기억이었다. [에잉, 쯧… 돈이 많아 보여 잘 설명해 줬더니만, 재수가 없기로서니.] 설마 구경만 하다가 나갔다고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건만. “반갑다. 안 그래도 먼저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미안하다.” “하하! 이 친구도 참, 미안하기는? 자네 소식을 들어 보니 최근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던데?” “그걸 어떻게 알지?” “그야 자네 같은 유명인은 뭘 하고 다니든 말이 나오니까 그렇지! 대장간에서 일만 하고 있어도 자연스레 들려온단 말일세.” “…그, 그렇군?”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난쟁이놈은 내가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다녔던 것부터 승작식, 심지어 가장 최근에 컴멜비에서 원정대원들과 만났던 것조차도 알고 있었다. 영웅들의 뒤풀이라고 신문에 나왔다던가? “우리가 이제야 찾아온 것도 그래서일세. 나야 진작에 오고 싶었지만, 로트밀러 이 친구가 말렸거든. 차차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보자고.” “그랬군…….” 나는 로트밀러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눈짓한 뒤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해후를 지켜보고 있던 에르웬이 쪼르르 옆에 다가왔다. “아저씨는 뭐로 가져다드릴까요?” “물로 부탁하지. 아, 차갑게.” “네!” 이후 에르웬이 주방으로 향하자 난쟁이놈이 슬쩍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아, 맞다! 아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집에 왔는데 그 혈령후가 반겨 준 것도 모자라, 웃으며 이렇게 차까지 타 주다니!” “…아, 너희 둘은 에르웬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인가?” 내 물음에 로트밀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쟁이놈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와는 한 번 본 적 있네. 예전에 팀이 해체됐을 무렵에 나를 찾아와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스레 물었지.” 아, 그랬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후, 그때는 설마 그 어린 요정이 이렇게 유명한 탐험가가 될 줄은 몰랐네만……. 참 사람 앞날이란 건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 않나?” “그렇지…….” 에르웬을 될성부른 떡잎으로 여기긴 했지만, 나조차도 얘가 이렇게까지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혈령후’ 같은 이명을 갖게 될 거라고는 더욱더 예상 못 했고. “그나저나, 얀델.” 그때 로트밀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칼스타인 양은… 만났나?” 그래, 이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지. “아직 못 만났다.” “그런가…….” “그러는 넌 미샤랑 만난 적 있나?” “자네가 죽었다고 알려진 후 딱 한 번. 걱정이 돼서 찾아갔지만, 한 번을 제하고는 만나주지도 않았네. 그다음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히쿠로드, 너는?” “나도 로트밀러 저 친구와 비슷하네. 쯧, 자네 소식이 도시에 이만큼 퍼졌으니,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었네마는……. 설마 안 좋은 일이 있던 건 아니겠지……?” 최대한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난쟁이놈이 우려하는 게 뭔지는 빤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미샤는 잘 있다. 아니, 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는 멀쩡히 살아 있다. “미샤는 나도 알아보는 중이다. 내가 반드시 찾아서 데려올 거니 너희는 너무 걱정 마라.” “뭐, 자네가 그리 말하면 그러겠지만……. 근데 말일세… 혹시 혈령후 때문인 것은 아닌가?” “…에르웬이 갑자기 왜 나오지?” “그야 그런 소문도 있지 않은가, 자네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어때 사실인가?” 허, 가십거리에 빠져 사는 건 아직 여전하구나. “사실무근이다.” 딱 잘라 말하자 난쟁이놈이 안도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다면 참 다행일세…….” 듣는 입장에서 굉장히 미묘한 말이었다. “…다행이라니?” “결국 자네 마음에 따라 달린 일이겠네만. 역시 아무래도 칼스타인 양 쪽이 자네와 함께한 시간도 길지 않은가? 드왈키, 그 친구가 마지막에 바라던 것이기도 하고……. 사실 나도 지켜보면서 내심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 난쟁이놈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쨍그랑-!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난쟁이놈의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그리고……. 툭. 주방 쪽에서 에르웬이 걸어 나왔다. “어머, 찻잔이 깨졌네요.” 내가 부탁한 찬물과 함께, 웃는 얼굴로. *** “아저씨, 여기 물이요.” 에르웬이 컵을 내 앞에 내려놓은 즉시. 후우우우웅-! 깨진 파편이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오른다. 그리고 이는 카펫을 적신 찻물도 마찬가지. “자, 이제 깨끗해졌네요.” 정령의 힘을 사용해 순식간에 정리를 해 버린 에르웬은 방에 들어가 있겠다며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났다. “…….” 테이블에 자기 찻잔만 사라진 꼴이지만, 난쟁이놈은 떠나는 에르웬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은 좀 가벼워도, 눈치가 없진 않은 것이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소. 우리는 단지 객일 뿐인데.” “…하하하, 그러게 말일세. 내, 내가 큰 실수를 했어…….” 난쟁이놈은 다시 생각해도 섬찟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쯧, 그러게 얘도 참 오지랖만 넓어 가지고. 꽤 분위기가 이상해졌기에 집주인으로서 먼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보다 둘은 어떻게 지내는 중이냐? 히쿠로드, 너는 요즘 대장장이 일은 안 하는 거 같던데.” “어? 그걸 어떻게 아는가?” “사실 예전에 네 대장간에 찾아갔었다. 그때는 작은 모습이라 너는 날 못 알아봤지만.” “허! 그런 일이……. 내가 자네를 못 알아봤다고? 고작 키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난쟁이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그런다고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말했다. “좀 놀랐다.” “아, 하긴 요즘 장사가 좀 잘되긴—.” “그게 아니라, 내가 있어서 다른 손님이 못 온다고, 안 살 거면 얼른 나가라고 내쫓을 줄은 몰랐거든.” “…….” “뭐, 그래도 장사가 잘된다니 다행이지만.” 그 말에 난쟁이놈은 흑역사를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그 모습을 자네가 봤다니, 참으로 낯이 뜨거워지는군…….” “탓하려던 건 아니다.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단지 좀 사람이 달라졌다 싶었을 뿐.” “그럴 걸세. 포기했던 꿈을 다시 이루겠다고 팀을 나갔던 내가 장사꾼이 되었으니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어, 그렇게까지 까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했던 부분이라서 그냥 가만히 듣기로 했다. “하지만 있지 않은가, 비요른. 내게는 다른 꿈이 생겼을 뿐이네. 망치를 쥐고 철을 두들기는 것 말고도 더 큰 꿈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인가?” 내 말에 난쟁이놈은 피식 웃었다. “비슷하네. 보육원 하나를 후원하는 것에도 제법 큰 돈이 들어가니까.” “뭐?” 아니, 잠깐만. “…너 설마?” “아직은 여력이 부족해 많이는 하지 못하지만, 얼마 전 후원하는 보육원을 늘려 두 개가 되었네.” 후, 이러면 내가 졸렬한 사람이 되잖아.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왠지 모르게 생각했다. “비요른, 나는 돈을 많이 벌 걸세. 아무리 추한 모습이라도. 내게 남은 가능성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 “내가 못 이룬 꿈을 그 아이들이 이루는 것.” “…….” “그게 내 새로운 꿈일세.” 오늘따라 난쟁이놈이 커 보인다고. “…….” “…….” 자신의 새로운 꿈을 밝힌 난쟁이놈은 막상 말하고 나니 쑥스러운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나도 뭐라 할 말을 잃어 어색하게 물을 들이켰다. 그때 입을 연 것이 로트밀러였다. “나는 그냥 일없이 지내고 있네.” 어찌 보면 난쟁이놈보다도 의외인 근황이었다. 이 성실한 아저씨가 백수로 지내고 있다니? “교습소는 어떻게 되고? 탐험가들을 상대로 탐색 기술을 전수해 주며 지내던 것 아니었나?” “애석하게도, 내게는 장사꾼 기질이 없더군.” 그래, 망했다는 거구나……. 위로의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었던 찰나, 난쟁이놈이 벌떡 일어섰다. “이보게, 로트밀러! 교습소가 그렇게 된 건 자네 탓이—.” “그만.” “……?” “그만하시오, 무라드. 그 얘기를 하려고 온 자리가 아니지 않소.” “하, 하지만……! 얀델은 남작일세! 말하기만 하면—!” “내 그만두라 하지 않았소.” 로트밀러의 낮은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어찌나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인지 난쟁이놈도 침을 꿀꺽 삼킬 정도. 사실 나도 속으로는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목소리 뭐야.’ 지금까지 로트밀러가 화난 모습은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팀 반푼이의 마지막 탐사였다. 탐험가로서의 한계를 느낀 로트밀러는 무척이나 화를 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그런 사람이 남한테 저러니 뭐라 말을 못 하겠다. 이래서 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는 건가? ‘난쟁이놈이 저러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 후, 이건 나중에 난쟁이놈이랑 둘이 있을 때 슬쩍 물어보든가 해야지. “…….” “…….”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찾아온 어색한 공기. 이런 시간은 낭비나 다름없기에 나는 차라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히쿠로드.” “응? 아, 어… 말하게! 뭔가?” “네게 사업적으로 제안할 게 하나 있다.” “사업적인 제안… 말인가?” “그래.” 오늘 찾아온 게 아니었다면, 이것 때문에라도 내가 먼저 찾아갔을 정도로 중요한 안건이었다. “자네가 그러니 괜히 긴장되는군……. 일단은 말해 보게.” “나는 앞으로 클랜을 더 크게 키울 거다.” “그래서?” “너희 대장간에서 우리 클랜을 전담해 줬으면 한다.” “오! 대형 공방들이나 받는다는 그 제안이군!” 예상대로 난쟁이놈은 제안을 받자마자 눈에 띄게 기뻐했다. 오케이, 그럼 이제 다음 단계인가? “됐군, 어서 계약서부터 쓰지.” “응? 계약서? 아니 우리 사이에 그런 걸 굳이…….” “공적인 일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네만……. 근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 계약서까지 쓴다면 나도 좀 검토를 해 봐야…….” “섭섭하게 그럴 건가? 우리 사이에 깊이 고민할 게 뭐 있나? 자자, 그냥 손바닥만 찍으면 된다. 형식적인 것일 뿐이니까.” “으음……. 그러세…….” 동의를 받아 낸 나는 서둘러 계약서를 작성했고, 확실하게 마력 인주까지 손바닥에 묻혀 난쟁이놈의 수인을 받아 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끝났군.” 단골 장물아비를 확보했다. 다음에 장미기사단의 장비를 들고 가면 얘는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 난쟁이놈과 로트밀러가 다녀간 다음 날. 나는 얼마 전 곰아저씨와 아이나르에게 되돌려 받은 유품—. ‘아니, 유품이라 하니까 뭔가 이상한데…….’ 아무튼, 예전에 입고 있던 장비들을 오랜만에 풀장착했다. 「캐릭터가 아다만티움제 대형 전투 방패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750 상승합니다.」 5단계 금속 소재의 방패. 그리고……. 「캐릭터가 라이티늄제 흉갑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270 상승합니다.」 처음 구매한 이후로 박살 나면 수리하고, 수리가 안 되면 동일 규격으로 재구입했던 국밥 갑옷. 「캐릭터가 아이디움제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00 상승합니다.」 도플갱어 숲에서 얻은 뒤 유용히 썼던 각반. 「캐릭터가 No. 8,667 황야의 무법자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15 상승합니다.」 벨트. 「캐릭터가 No. 8,820 철벽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10 상승합니다.」 사용 시 3초간 물리 내성 및 항마력이 2배 상승하는 장화. 그리고……. ‘이걸 왜 하필 곰아저씨가 가져간 거야? 괜히 기분 이상하게.’ ‘자동 수복’과 ‘형상 변환’, ‘산성 면역’ 그리고 나중에 ‘청결 유지’ 마법까지 추가로 인챈트를 했던 특제 마법 팬티. 전문 용어로 ‘에그 가드’라 불리는 그 파츠까지. ‘사실 이건 [합일]이 있어서 이제 딱히 필요는 없지만…….’ 물품의 특성상 판매가 좀 그러했기에,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항상 애용했던 물건이다. ‘레이븐한테는 저번에 ‘망자의 영혼’이랑 ‘불의 보주’를 돌려받았으니, 이제 미샤한테 목걸이만 받으면 끝인가…….’ 그리 생각하니 좀 웃겼다. 무슨 드래곤볼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스윽. 이내 장비를 입고 거울을 보고 있자니 돈까지 돌려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야 장비가 정말 깨끗하게 관리된 상태였거든. 애초에 팔지 않고 보관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뿐인데, 스톰거쉬와 싸웠을 당시에 파손됐던 부분들도 싹 고쳐져 깔끔하다. 장비 같은 경우엔 수리비도 꽤 나왔을 텐데. ‘미샤는 그냥 목걸이 하나만 갖고 갔댔지…….’ 후, 사실 그게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한 건데. ‘좋아, 그럼 어디 문제 있는 곳은 없고…….” 장비의 상태를 점검한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투구를 빼긴 했지만, 이렇게 풀장착 모드로 도시 거리에 나온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야 도시에서는 싸울 일이 별로 없으니까. 평소에는 흉갑 정도만 걸치고 다녔다. 반대로 말하면 오늘은 싸울 일이 있다는 뜻이 되겠지만. 터벅, 터벅. 아침부터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7구역의 외곽부였다. 다른 지역과 맞닿은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벽 위에 서 있던 보초는 마치 암구호를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후, 쟤는 딱 보면 모르나?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바바리안스럽게 시원하게 외치자 다행히 별다른 신원 확인은 없이 성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터벅, 터벅. 성인식을 끝마치고서 동기 바바리안들과 걸었던 그 숲길을 지나쳤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거인의 이름을 물려받은 최강의 전사!”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바바리안들은 날 보더니, 하던 일을 멈추고서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직감이 발달한 바바리안답게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앞으로 꽤 재미난 이벤트가 있으리라는 걸. “와아아아아아아!!”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돌아왔다!!” 이내 숲길이 끝나고 바바리안의 주거 구역…….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지어진 움막들이 가득한 그곳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내 뒤에는 수백이 넘는 전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또한. “…소식이 정말이었군.” 주거 구역에 머무르고 있던 바바리안들도 모두 내 소식을 듣고선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터벅, 터벅. 이렇다 할 말 없이 걸음을 내딛자, 바바리안들이 길을 터 주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내리쳤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거, 인간들이 보면 무슨 축제 날인 줄 알겠네. 쿠웅-! 쿠웅-! 비켜진 길을 따라 나아가니 부족장의 움막이 나타났다. 참고로 앞에는 아이나르가 서 있었다. 부족장 교육을 받고 있었다더니, 정말로 요즘엔 여기서만 지내는 모양이구나. “…부족장은 안에 있나?” 아이나르와 눈인사를 끝내고 묻자, 아이나르가 옆으로 비키며 움막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직접 들어가라는 건가? 그렇다면야, 뭐. 터벅, 터벅. 그렇게 움막의 앞에 도착했을 때, 이내 천막이 거두어지며 안에서 거대한 바바리안이 나타났다. 부족장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뜬 날, 악령이란 게 들통난 ‘키두아의 아들 오름’의 목을 도끼로 무참히 썰어 냈던. “늦었군, 얀델의 아들 비요른.” 바로 그 부족장. 부족장은 큼지막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로 날 내려다보았다. “귀족물을 하도 먹어서 이쪽은 아예 잊기로 한 줄 알았는데.” 진짜 이 아저씨도 엄청 크다니까. 원래 몸으로 돌아왔는데도 살짝 올려다봐야 하는 걸 보면. “잊다니, 그럴 리가.” 그리 답하자 부족장은 조금 있던 서운함마저 싹 지워 냈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잘 돌아왔다, 부족의 전사여!” 두 팔을 벌리며 나를 반겨 준 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반가움의 표시가 끝난 즉시 내게 물었다. 다만, 그 물음은 오랜만에 만난 사이끼리 으레 하는 그것과는 명백히 차이가 있었다. 2년 6개월 동안 어디 가 있었냐고. 왕가에서 한 발표가 정말 사실인 거냐고. 혹시 정치적으로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냐고 묻는 등. 그런 인간적인 물음이 아닌—. “그래서—.” 원초적인 본론.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그 질문에 나는 답했다. 물론 이것 역시 오랜만에 본 사이에 바로 할 말은 아니겠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나도 어엿한 바바리안이니까. “뭐냐?” 되묻는 부족장을 향해 바바리안답게 노빠꾸로 말했다. “시원하게 한판 붙자.” “…….” “부족장 자리를 걸고.” 부족장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이번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좋다.” 이내 부족장이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 베헬—라다아아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앍!!!!” 모든 바바리안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 「비요른 얀델」 레벨: 7 육체: 1,390.55 / 정신: 521.3/ 이능: 2,197.65 아이템 레벨: 7980(New +1,695) 종합 전투 지수: 6,104.5(New +423.75) 획득 정수: 오크 히어로 - Rank 5 / 오우거 - Rank 3 / 바이욘 - Rank 3 / 스톰거쉬 - Rank 3 / 볼-헤르찬 - Rank 3 / 심해거인 - Rank 3 450화 확장 (3) 귀족은 왕의 신하이다. 하면, 그런 귀족이 한 종족의 수장 역할을 동시에 겸하는 것이 가능한가? 누군가 그리 묻는다면,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야 전례가 없으니까.’ 물론 첫 사례가 생긴다면 귀족계에서는 한차례 크게 난리가 나리란 사실은 자명했다. 다시 말하지만, 귀족은 왕의 신하이니까. 귀족은 왕과 왕국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한다. 특정한 하나의 종족이 아니라. 법규나 제도적으로 금지를 해두지 않았다고는 해도, 엄연히 불문율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지.” 부족장은 그러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불문율을 모르기 때문인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이에 대한 호기심을 버렸다. 부족장이 알든 모르든 뭔 상관인가? 설령 안다고 해도 결과는 뒤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부족장 역시 한 사람의 바바리안이니까. 뒷일 같은 건, 역시 아무래도 좋다. 지금 곁에서 함성을 내지르는 수천의 전사들이 그러하듯이.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성지 내에 있던 전사들은 전부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인파를 이끌고 이동한 곳은 ‘증명의 땅’이란 이름이 붙은 장소였다. 작은 시비가 붙거나, 훈련을 할 땐 아무 곳에서나 뒹굴며 치고받고 싸우는 전사들이 숭고한 ‘결투’를 치를 때 찾는 바로 그 장소. ‘뭐, 그래 봤자 숲 한복판에 크게 구덩이를 파둔 게 전부지만.’ 실제로 ‘증명의 땅’은 정말 대충 만들어졌다. 땅은 평평하지도 않고 자갈들도 가득하며, 때론 빗물이 고여 그 상태로 결투가 치러지는 일도 많다. 하지만……. 두근-! 도착하자마자 전사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래, 웅장한 대리석 바닥이든, 높은 동상이 서 있는 곳이든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부족장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예전에 한판 붙었을 때와 달리, 그냥 대뜸 도끼를 휘두른 게 아니라. ‘뭔가… 인정받은 느낌이네.’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진짜 바바리안 전사도 아닐진대. 두근-! 왜 이렇게 흥분이 되지? 쿠웅-! 반대편에 서 있던 부족장이 7m가 넘는 깊이의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웅! 소리와 함께 피어나는 흙먼지. 뒤따라 내려가기 전에 눈이 마주친 아이나르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뭐지?’ 일단 시선이 맞닿자 응원하듯 고개를 끄덕여주긴 했는데, 평소처럼 호쾌하게 웃는 모습은 아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그도 그럴 게, 내가 없는 동안에 부족장이 되려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이런저런 노력을 했던 게 바로 아이나르 아니던가. 오늘 내 도전이 달갑지 않게 느껴진 걸 수도— “비요른…….” 그때 아이나르가 내게 다가오더니, 웃음기를 싹 뺀 채 경직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기고 돌아와라! 알겠나! 나는 너만 믿고 있겠다!!” 왠지 허무해졌다. 뭐야, 그냥 자기가 더 긴장한 것뿐이었어? ‘덕분에 긴장이 확 풀리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나르가 내뻗은 주먹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알겠다. 나만 믿고 있어라.” 그 말을 끝으로 나도 구덩이 아래… 아니, 증명의 땅으로 뛰어내렸다. 쿠웅-!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올라오고, 주변에는 꿉꿉한 흙 먼지가 피어난다. 위에서는 군중의 함성 소리를 뚫고 아이나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위, 위대한 전사가 승리를 약속했다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거참, 이러면 창피해서 지지도 못하겠네. ‘질 생각도 없었지만.’ 이내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흩날리는 흙 먼지 너머로 부족장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터벅, 터벅. 어째선지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서도 귀에 딱딱 내리 꽂히는 발소리. 터벅. 부족장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추고서 등에 매고 있던 대형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에 나도 얼른 망치와 방패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스윽— 귀족들의 결투처럼 스스로를 소개한다든가. 공증 중인 신관이 멋들어진 말로 참가자들의 맹세를 받는다든가. 하다못해 탐험가들의 개싸움처럼 시시비비하며 죽여 버리겠네 뭐네 고래고래 떠드는 일도 없었다. 단지. “…….” 한 번 눈짓을 주고받으며 서로 준비가 끝났음을 알린 순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도끼와 방패가 부딪친다. 콰아아아앙-! 몇 센티 정도 더 큰 부족장이 거대한 도끼를 내리친 구도. 그 상태로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그때는 [거대화]를 쓴 상태로도 도끼를 잡은 채 들어 올려졌었지.’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으나, 결과는 이전과 명백히 달랐다. 그야 그때는 용꼬맹이에게 ‘대지룡의 축복’을 받기도 전이었고, 바이욘의 정수도, 스톰거쉬의 정수도, 볼-헤르찬의 정수도, 심해거인의 정수도 없었으니까. 지금에선 힘으로 밀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일단 몸집부터 키워 내며 도끼째로 부족장을 밀어낸다. 사실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든 지이이익- 자꾸 내려다보는 거. 「캐릭터가 [야성분출]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위협 수치가 3배 상승하며, 그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뒤로 밀려난 부족장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망치를 휘두른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부족장은 회피 대신 도끼로 이를 막아냈다. 콰아아앙-! 무기가 맞닿으며 터져 나온 굉음. 「구드눌프 올가가 [마찰열]을 시전했습니다.」 눈앞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뜨거운 열기가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대상의 무기가 충격을 일정량 흡수합니다.」 「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그거, 스택형 스킬이잖아. “……!” 열기 중첩이 될수록 성능이 점점 좋아지지만, 전투 초반에는 충격을 조금 줄여주는 것 말고는 별거 없는 스킬. 큼지막한 전사의 몸이 찌부러지듯 굽혀진다. ‘오케이, 각도는 나쁘지 않고.’ 있는 힘껏 배를 거대한 발로 후려차자, 부족장의 몸체가 축구공처럼 떠올랐다. 전문 용어로는 에어본. 후우우웅-! 적이 공중에 떴다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기에 야구 빠따를 휘두르듯 망치를 움직였다. 다만, 그 순간. 파아앗-! 부족장이 허공을 지르밟으며 높이 떠오른다. 「구드눌프 올가가 [화염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도약]의 상위 호환인 이동기들 중 하나. 만티코어의 그것과 달리 공중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나, 이동 거리 자체는 좀 더 짧은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가 효과도 다르다.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화염 피해가 200% 증가합니다.」 이동기에 붙기 어려운 대미지 2배 옵션. 이것 때문에 화염계열 루트에선 사실상 졸업 이동기로 쓰였는데……. 「구드눌프 올가가 [천둥불꽃]을 시전했습니다.」 내 뒤편에 착지한 부족장이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앙-! 방패 위로 폭발이 피어나며 정말이지 오랜만에 뼈까지 충격이 울렸다. 「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마치 대형 몬스터와 전투를 하는 듯한 기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전사의 도리란 마음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퍼억-! 뭐야, 이게 왜 맞아. 망치가 턱에 꽂히며 부족장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아… 이 아저씨도 힘캐지…….’ 최근에 싸운 게 거의 민캐들이어서 그런가? 견제처럼 휘두른 일격이 맞아 버리니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뭐, 힘캐인 만큼 맷집은 민캐와 차원을 달리했지만. 콰앙-! 회복하기 전에 재차 망치를 휘둘렀으나, 그새 정신을 차렸는지 부족장이 도끼로 이를 막아냈다. 「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이제 3스택인가? 대충 그럴 거 같지만, 정확히 카운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10스택이 되면 알아서 티를 내줄 테니. 「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열기가 생성되었…….」 「…….」 실제로 일격을 주고받으며 스택이 어느 정도 쌓였을 무렵. 「충전된 열기에 의해 다음 일격이 강화됩니다.」 「구드눌프 올가가 [화염 도약]을 시전했습니다.」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화염 피해가 200% 증가합니다.」 부족장이 높이 도약하며 도끼를 내리 찍었다. 그래, 이 기본 콤보를 어떻게 참아? 타닷. 막으라면 못 막을 건 없지만, 방패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그냥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도끼가 맨바닥에 내리꽂히며 사람 셋 정도 묻어도 될 만한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겼다. ‘오케이, 그럼 이제 10스택인가?’ 참고로 이와 같은 평타 강화는 10의 배수로 스택이 쌓일 때마다 터지기에 계속 주의해야 했다. 혹시라도 머리에 맞으면 나라도 위험하니— ‘응?’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부족장이 쿵 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3등급 몬스터 헬스미스의 스킬이었다. 「구드눌프 올가가 [두드리기]를 시전했습니다.」 「대지에 깃든 불꽃이 깨어납니다.」 솔직히 좀 신기했다. 아직 스택도 제대로 못 쌓은 와중에 필살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땅이 갈라지며 치솟은 불길이 부족장의 몸을 집어삼켰다. 아니, 집어 삼켰다보다는 뒤덮었다란 표현이 옳으려나? [두드리기]는 일종의 버프 스킬이니까. 「모든 화염 스킬의 피해량이 대폭 증가합니다.」 「화염 감응도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지속적으로 주변을 불태웁니다.」 불길에 뒤덮인 부족장은 즉시 땅을 박차며 내게 대시했다. 화르륵-! 휘두른 도끼는 방패로 막았으나 불길에 그을린 피부에서 따끔한 감각이 피어난다. 뭐, 불의 보주를 키니 좀 덜해졌지만. 「불의 보주를 활성화했습니다.」 「반경 15m 내에서 파생된 모든 화염 계열 지속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역시 챙겨오길 잘했네. “베헬—라아아아아아!!”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불꽃의 전사를 몰아붙이고 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이후로도 몇 번의 수교환이 이어졌고, 구경 중인 바바리안들이 내지른 함성처럼 당장 우세를 점한 것은 내 쪽이었다. 그야 상성에서부터 내가 유리하니까. 콰아아앙-! 도끼는 족족 망치로 막아내는데, 근력에서조차 밀리지 않기에 자세를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 화르르륵-! 절감되어 들어오는 화염 피해는 그냥 자연 재생력으로도 커버가 되는 수준이며…… 「충전된 열기에 의해 다음 일격이 강화됩니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공격은 절대 오기 부리지 않고 회피한다. 부족장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냥 퓨어 탱커라 딜이 안 박히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퍼억-! 방어에 올인한 전사라기엔, 툭툭 휘두른 망치에 실린 무게가 매서웠을 테니까. 아, 물론 그렇다고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단 뜻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역시나 부족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충전된 열기에 의해 다음 일격이 강화됩니다.」 페이크를 넣기 위해 [화염 도약] 콤보 없이 도끼를 휘둘러 아다만티움 방패를 찌그러뜨렸고. 「구드눌프 올가가 [대자연의 공명]을 시전했습니다.」 「구드눌프 올가가 [도화선]을 시전했습니다.」 화염 전사라는 컨셉에 맞는 위협적인 여러 스킬을 난사해댔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충전된 열기에 의해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50스택이 쌓이자 더욱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구드눌프 올가가 고유 효과 [잿불]에 의해 입힌 화염 피해에 비례해 재생력을 획득합니다.」 「구드눌프 올가가 고유 효과 [작열]에 의해 소모된 자원에 비례해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황금태양 각인 루트의 다양한 효과들도 생각 이상으로 거슬렸다. [작열]이 발동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각인도 최소 9단계까지 찍은 듯한데……. ‘하, 이러니까 탱커도 아니면서 이렇게 질기지.’ 속으로 극찬을 몇 번이나 곱씹을 만큼, 부족장은 고레벨 바바리안 전사의 표본과도 같았다. 강력한 딜, 단단한 육체, 다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재생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궁지에 몰릴수록 더 난폭해진다는 점까지. ‘이명이… 불꽃의 전사랬지…….’ 이제야 부족장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납득됐다. 당시 최대 규모의 클랜에서 팀장 대우를 해주며 스카우트를 했다던가? 8층의 균열인 서리군주의 궁전 공략 때문이었다. 그때는 부족장이 그 정도인가 싶었는데. ‘확실히… 이 정도면 모셔 갈 만하지.’ 역대 부족장 중에서는 약한 편에 속한다는 평이 있는 부족장이었으나, 그럼에도 부족장은 충분히 강했다. 하지만 명백한 체급 차이를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슬슬.’ 승부를 끝낼 시간. ‘하나, 둘, 셋…….’ 속으로 셋을 외우기 무섭게 부족장의 몸을 휘감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두드리기]가 해제됩니다.」 필살기나 다름없던 그 버프가 마침내 끝난 것. 이를 기점으로 나는 훨씬 더 세차게 공세를 이어나갔다. 콰아아앙-! 모든 공격에 [휘두르기]를 시전했고, [초월]과 [폭풍의 눈]도 계속해서 연계하며 숨을 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이러면 MP가 금방 떨어지겠지만……. ‘아직 [영혼잠수]도 안 썼으니까.’ 승부를 끝내고자 하는 내 의지를 느꼈는지, 부족장의 저항도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콰지직-! 몇 번이나 도끼를 받아내며 찌그러졌던 방패가 끝내 박살 났다. 수리를 하려면 얼마나 들까. 긴박한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며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결국 남는 장사였다. 방패가 아니었으면 박살난 건 내 팔이었을 테니. 퍼억-! 방패가 사라진 손을 이용해 주먹으로 부족장의 턱주가리를 후려친다. 부족장은 턱이 돌아가는 순간에도 나를 노려보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앙-! 망치로 도끼를 막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열기가 충전되었습니다.」 부족장의 도끼가 대장간에서 막 나온 것처럼 시뻘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후, 그래 기어코 풀스택을 쌓은 거구나. 어떻게든 그전에 끝내려고 했는데. 「열기로 인한 모든 능력치의 상승분이 대폭 증가합니다.」 물론 풀스택을 쌓았을 뿐이지, 부족장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팔이든 다리든 복부든 어디든, 온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땡땡 부운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저 지경으로 어떻게 서 있는지가 의문일 정도인데…….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날 보던 다른 애들이 이런 느낌이었겠—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때 부족장이 내게 물었다. 거, 말을 걸 거면 저 시뻘건 도끼라도 좀 멈추고 하든가. 그래도 전투 중에 처음으로 말을 건 것이나 다름없기에 도끼를 피하는데 집중하면서도 경청했다. “강해졌군.” 뭔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이거였나? “너라면 믿고 부족을 맡길 수 있을 거 같다.” 그리 말하는 부족장의 눈빛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이어서 한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하지만…….” 이내 부족장이 포효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역시 지는 건 분하단 말이지!!” “…….” “그러니까! 이기는 건 나다……!!!” 그리 외친 부족장은 호된 망치질에도 아랑곳 않고 호전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를 대하는 내 대응은 이전과 같았다. 피할 건 피하고, 막을 건 막고, 맞을 건 맞으면서, 적이 쓰러질 때까지 망치를 휘두르는 것.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 ——— ——!” 귀마개를 낀 것처럼 주변의 소음이 묻힌다. 절벽 위의 전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 힘껏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을 게 틀림없을진대. 귀에 들려오는 건, 오직 전투에 필요한 소음뿐.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 —————!!!”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바바리안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지금은 그게 적의 호흡이었고, 발이 땅과 맞닿는 마찰음이었으며……. 후우우우우웅-! 바람 소리였을 뿐이다. 타닷. 눈으로 보고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면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고, 그 순간 시뻘건 도끼가 내 상체를 스치며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다. “……!” 뭐야, 방금 그거. 내가 어떻게 피했지? 만약 그대로 맞았으면 진짜 혹시 몰랐을 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뭔 짓을 했기에 그 각도에서 도끼가 올라와?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한편. 여러 의문들이 뇌리에 스친다. 반면, 몸은 이미 판단을 끝마치고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콰직-! 망치를 휘둘러 도끼를 쥔 손을 후려친다. 손목이 기형적으로 꺾인 와중에도 부족장은 도끼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망치를 후려쳤다. 콰직-! 그제야 손목이 완전히 작살나며 바닥에 떨어지는 도끼. 다만, 거기서 승부가 끝났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 부족장은 하나 남은 손으로 주먹을 쥐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무언의 표시. ‘하… 진짜 바바리안들이란…….’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긋지긋하단 감정이 피어나는 동시에, 이래야 우리 바바리안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후, 다들 보는 자리인 만큼 좀 더 화끈한 KO 승부로 가고 싶었는데. ‘뭐, 됐나…….’ 우리 바바리안들이라면 이런 것도 좋아할 게 분명하다. 쿠웅-! 따라서 나는 망치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활성화 중이던 [거대화]도 종료했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부족장이 만족할 때까지 어울려 주었다. 퍼억-! 퍼억-! 퍼어억-! 아무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듯했으니. “스, 승자가 정해졌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새로운 부족장이다……!!” 결국 부족의 계승이 끝난 건 점심시간에서도 한참이나 더 지난 때였다. 451화 확장 (4) 부족장과의 결투를 끝내고 구덩이 위로 올라온 순간, 잔뜩 흥분해 소리를 내지르던 전사들이 돌연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본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듯한 눈치.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충 전투 함성이라도 내질러주자, 전사들은 흡족한 듯 함께 소리를 내질렀다. 어우, 귀 아파. 스윽. 그렇게 수많은 전사에게 환호를 받으며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로들이 쓰러진 부족장을 이끌고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쓸쓸하게 보이는 패자의 말로. 사라지는 패자의 뒷모습에 관심을 갖는 전사는 없었다. 얼핏 비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이쪽 문화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나뉜 건 그저 자연의 섭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 상태로 곧장 축제가 시작되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전사는 북을 쳐댔으며, 재주가 없는 전사는 그냥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쳐댔다. 모두가 아무렇게나 춤추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즉석에서 나무를 베어 크게 불을 피웠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고기들을 불에 구워 전사들과 나눠먹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이어져 해가 저물 무렵. “위대한 전사!! 어딜 가는 건가!!” “쉬.” 나는 소란스러운 축제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와 주거지 쪽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마주친 전사들이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다들 나를 축하하는 것보단 자기들 노는 게 더 즐거운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터벅, 터벅. 축제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주변은 점점 어둡고 조용해졌다. 쿠웅-! 쿠웅-! 북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숲길. 축제 중반부터 보이지 않던 아이나르가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비요른? 여긴 무슨 일이냐?” 아이나르는 축제의 주인공인 내가 더 놀지 않고 외진 곳으로 온 것이 의문인 듯했다. “잠깐, 부족장을 볼까 해서. 어디 있지?” “쓰고 있던 천막에.” “깼던가?” “글쎄, 조금 전까지는 자고 있었다.” “그쪽에서 오는 길이었나 보군?” “아무래도… 조금 신경이 쓰여서.” “그래?” 무엇이 그리도 신경 쓰인 거냐고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로 부족장과 딱 붙어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던 게 바로 아이나르 아니었던가. 뭔가 기분이 묘했겠지. 하고 싶은 말도 여럿 있었을 테고. “그보다 축하한다, 비요른! 나중에 알아보니 네가 최초다! 너처럼 젊은 나이에 부족장이 된 전사는 없었다!” “쉽게 말해, 내가 최연소라는 거군?” “그, 그래! 그거다! 최연소! 대단하지 않나?” 음, 일단 모르고 있던 정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실감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부족장에게 가는 거라면 같이 가는 게 어떠냐?” “근데 너는 거기서 오는 길 아니었나?” “하하! 그게 뭔 상관이냐? 어차피 너한테 가고 있는 길이었는데!” “그렇다면야.” 아이나르와 함께 부족장의 천막으로 향하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이번 결투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다음은 부족장의 현 상태였다. 이제 부상은 거의 다 치유가 되었다던가? “장로들은 전부 쫌생이들이다! 포션 없이도 다 나을 상처라며 가만히 있어서 결국 내가 포션을 퍼부어야 했다! 이게 말이나 되나?!” “…….” “성인식 때도 그렇다! 나는 최소한 신발이라도 제대로 신겨서 보내야 한다고 했는데! 고집불통 장로들은 자꾸만 전통만 얘기한다. 내가 그렇게 합리적이라고 했는데도!” “아이나르.” “응?” “그럴 땐 비합리적이다라고 하는 거다.” “아… 그러냐?” 내가 단어를 정정해주자 아이나르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터벅, 터벅. 잠시간 대화가 끊긴 채 조용히 숲길을 걸었다. 아이나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서서히 부족장의 천막이 보일 무렵이었다. “비요른.” 아이나르가 걷는 속도를 낮춰 내 뒤에 서더니 밀어내듯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네가 더 나은 거 같다. 똑똑하고, 강하고,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전사들이 따르고.” 그래, 너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구나. “아이나—” 뒤돌며 뭐라 말하려 했으나, 아이나르가 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잘 부탁한다.” “……?” “너라면 나보다 백오십 배는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전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다!” 150배라는 계산이 어디서 튀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래? 그럼 됐다. 가라.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지 않나. 나도 이제 전사들 사이에 껴서 좀 놀고 쉬고 해야겠다.” “그래. 이따가 보자.” 그렇게 아이나르는 등을 돌려 숲길을 다시 되돌아갔고, 나도 부족장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왔나.” 의외로 부족장은 깨어 있었다. 그것도 꽤나 멀쩡한 모습으로. 아이나르가 포션을 쓴 덕일까? 온몸에 붓기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겨우 그뿐. 끼익. 집주인의 허락은 없었지만, 바바리안답게 보이는 의자 하나를 꺼내와 그 자리에 앉았다. “몸은 괜찮나?”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 뭐, 나도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였으니까. 서론은 이만하면 충분했기에 나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족장 자리는 언제 줄 거냐?” “내일, 아침이 밝는 즉시.” 이것만큼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다른 전사들에게도 연락을 해야 하니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어차피 지금쯤 온 도시에 네 얘기가 퍼졌을 거 아니냐. 올 놈은 전부 알아서 오겠지.” 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축제가 이어질수록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전사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으니까. “근데… 그렇게 열심히 싸운 것치고는 굉장히 후련해 보이는군?” 두 번째 질문은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늘 내게 맞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물론 진 건 분하지만.” “그랬군.” “그래서 왜 날 찾아왔나?” 부족장은 내게 다른 용건이 더 있음을 확신하듯 그리 물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진짜 용건을 꺼냈다. “왕에 대해 듣고 싶다.” “…왕?” “그래, 왕은 어떤 자이지?” 이제 내일이면 부족장이 되지 않던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국의 어두운 비밀도 알아볼 때가 됐다. *** “왕이라…….” 부족장이 벽에 등을 기대며 씁쓸하게 웃었다. “딱 한 번.” “응?” “딱 한 번이었다. 내가 그를 만났던 것은.” 좀 의외인 부분이었다. 지난번에 엄청나게 두려워하듯 말해서 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성물전쟁이 끝나가던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13년도 더 전이겠군. 내가 막 부족장이 되었던 때였다. 쇠락한 우리 부족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야망으로 참가한 종족 회담에서 그를 처음 보았지.” 텅 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부족장의 호흡은 거칠었다. 마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처음엔 평소의 회담과 다를 바 없었다. 난쟁이놈과 수인놈은 뭔지 모를 얘기만 나눴고, 난 귀쟁이놈, 그리고 인간 대표로 회담에 참가한 마탑 늙은이와 투닥거리느라 바빴지.” “마탑? 인간 대표는 왕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할 거 같기는 한데, 내가 부족장이 된 후엔 항상 그랬다. 항상 왕 대신 다른 인간이 대표로 회담에 참가했지.” “그렇군…….” 나도 처음 듣는 정보였다. 각 종족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종족 회담의 정보는 일개 전사로서 접하기 어려웠으니. “아무튼, 그래서 그날이 특별했던 거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왕의 행차. 다만, 부족장은 왕이 왜 회담 도중에 나타난 건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탑의 늙은이와 한창 싸우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자리에 와있었다. 나를 비롯해 모두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우리 중 한 명은 웬 놈이냐 물으며 내쫓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딱 한마디였다.” 꿇어라, 나의 종들아. 그 한마디가 왕의 입에서 나온 순간, 부족장들은 뱉으려던 말도, 의문도 잊은 채 멍하니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직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우리의 입에서는 멋대로 말이 나왔다.” “무슨 말이었지?” “국왕 폐하를 뵙나이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섬뜩한 경험이었노라고, 부족장은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 짧은 순간에 저항할 의지조차 없애버리는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꼈다던가? 물론 내가 관심을 보인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조종 능력이라… 설마 마법사인 건가?’ 과연, 왕이 지닌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 일단 어떠한 터치도 없이 대상을 조종하는 식의 정수는 미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능성이 있다면 마법 정도. 다만, 그런 추측을 꺼내자 부족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이나 정수와는 달랐다. 마치 목소리에 힘이 있는 듯했지. 태어날 때부터 내 피와 혼에 각인이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자가 나의 왕이며, 나의 주인이라고.” 경험담을 들을수록 더 혼란스러워지는 듯했지만, 일단 남은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나?” “별거 없었다. 단지 그는 누군가를 찾듯 우리를 쓱 둘러보더니 ‘이곳엔 없군’이라 말하며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참아왔던 숨을 들이쉴 수 있었지.” 여기까지가 우리 부족장이 왕과 만났던 썰의 전부. 나는 본격적으로 추리를 하기 전에 몇 가지를 체크했다. “당시 부족장들이 얼마나 강했냐고? 글쎄… 대부분 나랑 비슷했을 거다.” 왕의 ‘조종 능력’은 절대적이란 말로도 모자랐다. 8층 이상의 상위 탐험가 다섯을 말 한마디로 조종해버린 것이니까. 게다가 조종 가능한 범위도 제한이 없는 듯했다. “쉬운 명령이라 저항하지 못한 거 아니냐고? 웃기는 소리. 처음 보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을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거다.” 부족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왕이 죽으라고 명했다면, 그 자리에서 이 목숨은 끊어졌을 것이라고. ‘정수도, 마법도 아니라면… 왕은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희망 회로를 굴릴 구석은 남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마탑의 늙은이는 우리가 무릎을 꿇은 다음에야 그의 정체를 깨닫고서 뒤따라 무릎을 꿇는 일도 있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안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추측은 가능하나 확실한 건 아니다. 단지 왕이 부족장들에게만 힘을 썼을 가능성도 존재하니. ‘……아무튼, 왕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한 거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소득이라 여기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왕의 생김새는 어땠지? 아파 보이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나이대였는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내 귀에 파고들었던 그 목소리조차도…….” 흐음… 설마 왕은 기억 조작도 가능한 건가? 아니, 어쩌면 그런 마법이나 아이템을 썼을지도 모르지. 조종 능력과 달리 이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게 여럿 있으니. “자, 이제 왕에 대해 궁금한 건 풀렸나?” “어느 정도는.”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군.” 부족장은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나가보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리고……. ‘좀 이상하단 말이지.’ 그 태도가 내 발을 붙잡았다. “부족장,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얼른 해라.”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거냐? 내가 부족장이 돼서 뭘 할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지난날, 부족장은 내게 말했다. 인간을 증오하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그러니까 불합리하더라도 참아야만 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부족장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왜 신경 쓰나? 이제 나는 부족장도 뭣도 아닌데.” 부족장은 별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듯 피식 웃었다. “내일부터 나는 한 명의 바바리안이다.” 부족장이 아닌, 한 명의 전사. “그리고…….” 부족장은 전사로서 내게 말했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우리들은 항상 부딪치는 쪽의 편이었지. 어때, 대답이 됐나?” “……충분히.” “잘 됐군. 그럼 배가 고프니 이만 나가라.” 부족장의 축객령에 나도 이만 천막에서 나왔고, 대충 아무 천막이나 열고 들어가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만 명이 훌쩍 넘는 전사들이 보는 앞에서. “전사들이여,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전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어려운 말을 해봤자 이해하는 놈도 없을 테니까. 짧고 간결하게. “우리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잃은 모든 것을 다시 쟁취해낼 것이며, 보다 멀리 나아갈 것이다!” 나는 숲 너머의 성벽을 보며 선언했다. 그리고……. 「캐릭터의 부족 내 직위가 ‘일반 전사’에서 ‘부족장’으로 변경됩니다.」 「특수 스탯 ‘지지도’가 생성됩니다.」 그렇게 나는 바바리안 로드가 되었다. ***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 「…….」 「…….」 452화 바바리안 레볼루션 (1) [던전앤스톤]에는 여러 특수 능력치가 존재하며, 그중에는 종합 전투 지수에 영향을 주지 않는 투명 능력치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명성 수치다. ‘사실 이걸 스탯이라 말하는 것도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명성이 높으면 주변에서 알아보는 이가 생기고, 그로 인해 돌발 퀘스트 같은 특수 이벤트가 발생할 확률이 증가한다. 초면의 NPC와 대화를 나눌 때 기본 호감도가 상승하는 건 덤. 이것만 보면 꽤 쓸모 있는 능력치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수치화를 해뒀다고 보는 편에 가깝지.’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명성이 높아서 그런 효과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런 효과가 나타날 만큼의 명성을 가진 자이기에 높은 명성 수치를 갖게 된 것일 뿐. 실제로 유명 연예인을 데려다가 상태창을 만들면 명성 수치가 아주 높게 나올 것이며, 그로 인해 얻는 효과도 비슷할 것이다. 아무튼, ‘지지도’ 역시 그런 종류의 능력치였다. 수치에 따라 부족 내 통솔력 증가. 반동분자 세력의 감소. 정책 성공률과 지시 수행률 상승 등등. 평범한 탐험가 루트에서는 쓸모가 없지만, 내정 콘텐츠에 돌입하고서부터는 이 스탯을 굉장히 신경 써야만 했다. 뭐, 바바리안은 예외지만.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 「…….」 「…….」 바바리안은 특성상 정식적인 루트로 부족장이 되기만 한다면, 시작부터 지지도가 미친 듯이 찍힌다. 그야 정당하게 얻어낸 권리이니까. 전사들은 부족장의 권리를 존중하며 지시를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문제는 다른 종족처럼 지지도만 높다고 권력이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란 거겠지만.’ 부족장은 언제든 ‘도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길 만한 사안이다. 그도 그럴 게, 암만 깽판을 쳐도 부족장 자리에서 내려갈 일이 없단 거잖아? 아무한테도 지지만 않으면. ‘…그래도 지지도는 계속 신경 써서 올려두자. 너무 낮아지면 애들 우울증에 걸리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때, 내가 입주할 예정인 부족장 전용 천막(큼)을 청소하던 아이나르가 내게 말했다. “비요른……! 왜 너는 가만 있는 거냐!” 아이나르답지 않은 미련한 질문이었다. “나는 부족장이니까.” “……그, 그래도 나 혼자만 하는 건 부당—!” “그리고 아이나르, 너는 장로지.” “…………장로? 내가……?” 파격적인 승진 소식을 예고 없이 전해들은 아이나르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졌다. 흠, 진짜 예상 못한 건가? “당연하지 않나! 아이나르, 너보다 믿을 만한 전사가 과연 어디에 있다고?” “크, 크흠흠……!” “무려 칠강의 일원인 폭검,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가 바로 너 아닌가! 오히려 그런 너를 지금까지 평범한 전사 취급했던 이전 장로들과 부족장을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다!!” “어…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어허, 자신감 없는 소리 하기는? “라프도니아 왕국의 얀델 남작이자, 바바리안의 족장인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하는 말이다! 그러니 믿어라!” 원래 이런 부류는 높은 지위로 찍어누르면, 높은 사람 말이니 옳겠거니 하는 법. 「캐릭터의 지지도가 +1 상승했습니다.」 실제로 아이나르가 납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그, 그런가?” “그렇다.” “그, 그렇군! 나는 이제 장로인 거다!!” “그럼 마저 부탁해도 되겠나? 나는 따로 해야 할 부족장으로서의 일이 있고, 그런 나를 보좌하는 게 장로의 역할이니까.” “물론이다! 나도 보좌가 좋다!” 아이나르는 언제 불만을 보였냐는 듯 다시 청소 업무로 복귀했고, 나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로 졸려서가 아니라, 생각할 게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판이란 말이지…….’ 전 부족장에게 대충 인수인계를 받으며 부족의 실황을 들었는데, 예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재정부터 시작해 인구, 복지 및 기반 시설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문제라고 해야 하나? 이런 부족이 아직까지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었단 게 놀라울 따름이며,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도 막막하다. 하지만……. ‘복잡한 상황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나는 해야 할 숙제들을 ‘종족 전용 퀘스트’로 분류하고서 우선 순위, 난이도에 따라 공략 순서를 정했다. 덕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1. 내각 재구성. 부족장으로서 가장 먼저 깨야 할 퀘스트다. 다만, 이걸 재구성이라고 해도 될지는 조금 의문이 들지만. “저기… 비요른?”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때, 아이나르가 내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성지 내에서는 부족장이라 불러라.” “어, 그… 부족장……?” “좋아, 말해봐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장로인 내가 이런 잡일을 하는 건 부당한 거 같다!” 쯧, 이래서 배운 애들이란……. 괜히 책 같은 걸 읽으니까 부당한 게 뭔지 알지. “다른 전사를 뽑던가 직접 해라! 아니면… 다른 장로를 시키던가! 여, 역시 나는 청소가 싫다!”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당돌한 선언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 그럼 청소는 그만해라.” “…다른 장로를 시키려는 거냐?” “아니. 그리고 애초에 장로도 너 말고는 없다.” “…엥?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얘는 모르는구나. 나는 1장로에게 부족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원래 있던 장로들은 다 부족장이랑 함께 은퇴했다.” “뭐?! 설마 그 늙은이들이?! 설마 너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제 발로 나간 거냐?” “진정해라. 그런 건 아니니까.” 나도 처음엔 귀족물을 먹은 내가 못 미더워서 집단 보이콧을 한 건가도 싶었지만, 진실은 달랐다. [부족장이 되었으면서도 미궁에 들어간다고? 하하! 잘해봐라! 되도록이면 저번처럼 죽지 말고!] 장로들은 탐험가를 관두지 않겠다는 내 선언에도 심드렁했다. 또한, 귀족 작위로 정통성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단지 은퇴가 가능하단 것에 진심으로 기뻐할 뿐. [클클클, 너도 이제 고생길이 열렸군. 요즘 젊은 전사들은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단 말이야.] [잘해봐라! 모르는 게 있어도 찾아오지 말고! 난 이제 계산 같은 거 안 할 거니까!] 나중에 알아보니, 이전 장로들은 전 부족장의 동기 전사들로 전 부족장이 하도 애원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의무뿐인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일 관둔다고 말씨름을 하다가, 전 부족장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펜을 들어야 했다던가? “그러니까 포션을 아끼려 한 것도 너무 싫어하지 마라.” “……응?” “확인해 보니 정말로 공금이 텅텅 빈 상태더군.” 그런 비용조차 아껴야 성인식 때 무기라도 하나 제대로 쥐여줄 수 있다며 씁쓸해하던 장로의 모습에 대해 들려주니 아이나르가 울먹거렸다. “……그, 그런!” 마치 자식을 위해 밤에도 알바를 뛰러 나가는 부모님의 비밀을 알아버린 소녀 같은 표정. “아무튼, 장로직에 앉을 만한 전사가 있으면 네가 좀 추천해 줘라. 아무래도 이런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건… 분명 그럴 거다! 너는—” “부족장.” “…부족장은 항상 팀을 돌보느라 바빴으니까!” 후, 이건 알아주니 고맙네.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아이나르가 몇몇 전사들을 추천해줬다. 다만……. “아이나르, 표정이 왜 그러냐? 마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것처럼.” 내가 캐묻자 아이나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답했다. “친한 놈들 중에 제일 잘 싸우는 자들을 고른 거긴 한데……. 얘네가 네 기대를 채워줄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일단… 전부 글도 못 읽는다.” “아, 그거라면 상관없다.” “어? 정말인가?” “물론이다.” 애초에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전 장로들도 장로가 되고 나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들었을뿐더러……. “나는 이전처럼 장로들에게 행정 업무를 맡길 생각이 없으니까.” 그야 바바리안이 왜 이 꼴이 됐는데? 글도 잘 못 읽고 숫자도 잘 못 세는 애들이 행정 일을 하니까 이렇게 된 거다. 그러니까……. “장로들은 그냥 싸우는 법이나, 동족을 위하는 사상만 어린 전사들에게 제대로 교육해줄 수 있으면 된다.” “응? 그럼 다른 건 누가 돌보나? 아무리 너라도 혼자서는 버거울 텐데.”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성벽 안쪽.” “……?” “거기서 인간들을 고용해 올 거다.” 전문 용어로는 아웃소싱. 쉽게 말하자면, 그냥 외주를 맡기겠다는 뜻이다. *** 행정 업무에 능숙한 사무직 인간. 마침 적당한 인재가 있었다. 바로 친구 모임의 일원 중 하나였던 행정청 7급 사무관 샤빈 에무어다. ‘라그나에게 듣기로 6급까지 올라갔다가, 최근에 잘렸댔지?’ 물론 영입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우정을 위해서인지 자기 밑에서 일하라는 라그나의 제안도 단박에 뿌리쳤다고 하지 않던가. 비슷한 일환으로 내 제안도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은 애들 몇 명 추천받는 건 가능하겠지.’ 그래, 지금은 그거로 충분하다. 인력도 인력이지만, 그전에 외부 인력을 고용할 ‘자금’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자금이라…….’ 이 역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부족 내의 공금은 매달 열리는 성인식 때 지급할 무기 값과 미성년 전사들의 밥값만으로도 빠듯한 실정. ‘……우선 자금줄부터 새로 만들어야 해.’ 배고픈 자에겐 생선을 주지 말고 낚시를 하는 방법을 알려주라던가? 현재의 바바리안족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수입원부터 뜯어 고칠 필요가 있다. 그야 명색이 하나의 종족인데 전사들의 기부금, 유산만으로 굴러간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돈이라…….’ 곧바로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다. 터를 잡은 지 수천 년이 넘은 이 좁은 땅에 철광 같은 자원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사실 야금술도 별로지.’ 강철을 아낌없이 때려 박다보니 품질이 좋게 나오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도시의 대장장이는 더 좋은 질의 무구를 만든다. 그런 와중에 종족 단위로 대장장이 설비에 투자한다?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며, 투자를 해봐야 드워프족을 이길 리는 없다. ‘……미궁에서 싸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씹, 무슨 이런 종족이 다 있지?’ 욕이 나오는 한편, 이런 의문도 든다. 한 종족 내에 싸우는 게 가능한 모든 인원이 고소득군에 속하는 ‘탐험가’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왜 자금이 부족해야 하는 걸까? 어렸을 때 사상 교육을 제대로 해둬서 연차가 쌓인 후에는 매달 십일조를 내듯이 기부를 하는데? “아이나르.”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트루 바바리안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신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가난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아니, 그러니까 왜 가난한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다들 제법 돈을 벌고 있지 않나?” “에이, 그건 너니까 하는 소리다! 다들 새 장비를 사고, 술도 마시고 하다 보면 남는 것도 없다!” 얼핏 들으면 그런가 싶기도 하지, 바바리안 전문가인 내게는 다르게 해석됐다. 문제는 소득이 아니라 소비에 있었다. 쓸 거 다 쓰고 남는 잔돈을 저금통 넣듯이 부족에 보내니까 항상 돈이 부족하지. “아… 그리고… 내가 흠잡으려 하는 말은 아닌데…….”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봐라.” “…다른 전사들한텐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된다?” “알았으니까 얼른.” “사실 너 말고 다른 전사들은 새 장비를 사도 예전에 쓰던 것들을 팔지 않고 보관하고 싶어한다.” “…뭐?” “그 있지 않냐… 오래 쓴 장비는 애착이 가고 막 그런 거……. 나중에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하는 전사들도 있다……!” 순간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 ……그랬구나. 그래서 돈이 더 없던 거구나.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부분은 내가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문제였다. 장비를 모으는 건 바바리안의 습성이었으니까. 까마귀가 빛나는 물건을 수집하는 것처럼. DNA에 박힌 성질 자체를 바꾸는 건 부족장의 권위로도 힘들다. 하지만……. “그, 그래도 너무 뭐라 할 건 아니다! 자, 장비를 모으는 것도 일종의 저축 아니냐!” 변명하듯 내뱉은 아이나르의 말에 머리에 번개가 쳤다. “…저축?” “그, 그래! 우리가 나중에 유명해지면 그게 더 비싸게 팔릴 수도 있는 거고! 전문 용어로는 투자다 투자!” “…투자?” “아, 무, 물론 나는 안 그런다! 정말이다. 며, 몇 개는 갖고 있기는 한데… 중복되는 건 없단 말이다! 전부 용도가 달라서 언제 필요하게 될지—” “아이나르, 너는 천재냐?” 덕분에 좋은 묘수가 떠올랐다. “……?” 아직 아이나르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래, 이거야말로 혁명이지.’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 축제로 인해 성지에 방문한 동족들이 더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방문한 모든 바바리안을 소집했다. 날씨가 화창하니 뭐니 하는 서론은 필요 없었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인원이 모인 즉시 나는 연설을 시작했다. 사실 연설이라기보다는 부족장으로서의 내 첫 정책을 발표한다는 게 옳았다. “깨어 있는 전사들아! 나는 부족장과 다르다! 그래서 너희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귀를 박박 긁다가도 무언가를 ‘준다’는 워딩을 쓰기 무섭게 눈을 빛내는 전사들. “기회……?” “뭔진 몰라도 좋은 거 같은데……?” 오케이, 일단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건 성공했고. 나는 바바리안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이나르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던. 바바리안들에게 경제 교육을 해주면서도 텅 빈 공금을 훌륭하게 채울 수 있을 바로 그 방법. “너희들에게 성지의 땅을 살 기회를 주겠다!” “…땅?” “준다면서? 사라니? 돈을 내라는 건가?” 바바리안들은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눈치였다. 그래, 바로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 나는 눈높이에 맞춰 짧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너희들은 도시에 집이 있나? 없을 것이다. 아니, 있더라도 그 집의 땅은 너의 것이 아닐 거다! 이 왕국에서 평민은 땅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귀족들만의 특권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지만 성지의 땅은 다르다! 내가 허락한다면 너희도 살 수 있고, 그렇게 한 번 구입한 땅은 너의 소유가 된다, 영원히!!” 물론 보유세는 조금 붙겠지만. “땅에 이름을 새기든, 비석과 동상을 세우든 너의 자유란 뜻이다!” “……자유?” “그래 자유! 집을 짓고 싶나? 지어라! 비가 오면 무너지는 천막이 아니라, 도시에 있는 그런 집을! 네 자식의 자식들이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그런 집을!” 마음껏 지어라. 창문에는 세금을 안 매길 테니. “조, 좋아 보이는데?” 동족에 한하여 귀가 얇은 바바리안들이 서서히 솔깃해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물론 고개를 갸웃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도 땅을 사라니…….” “얼만지 몰라도 분명 비쌀 거다!” “땅에 그 정도 가치는 없지 않나……? 차라리 쓸 수 있는 무기를 사는 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전사들. 슬슬 승부수를 던질 때였다. “생각해 봐라, 전사들아! ” “……?” “무기는 언젠가 녹이 슬지만, 땅은 다르다. 영원히 너의 것이며, 너의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게 모토인 바바리안들에게는 와닿지 않을 한마디. 하지만……. “게다가 땅을 사면 앞으로는 숙박비를 안 내도 된다! 너는 물론이고, 네 자식들까지! 영원히!” 매달 숙박비에 상당한 돈을 쓰던 바바리안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렇군!” “진짜다……! 땅이 있으면 그냥 성지에서 자도 되는 거잖아!” 드디어 땅의 가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시 쪽이 훨씬 편할 텐데… 미궁이랑도 가깝고…….” 그런 합당한 의문을 표하는 전사도 있었으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냥 얼굴만 기억해 놨다. 싸움도 잘하는 거 같으면 장로로 뽑아야지. 아무튼, 이쯤에서 각설하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질 차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바바리안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침묵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덕분에 이번에는 크게 외칠 필요가 없었다. “성지의 땅은 비싸질 것이다!” 돈. 종족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가장 명확한 동기가 되는 바로 그것.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나중에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을 만큼!” “……?” “그야 당연하지 않나! 한 번 산 땅은 영원히 그 사람의 소유인데! 모든 땅이 팔린 다음에는 살 수 있는 땅 자체가 없다!” “……!” “뭐! 그래도 땅이 갖고 싶다면, 애원을 해야겠지! 땅을 가진 다른 전사에게, 비싼 값을 치를 테니 제발 팔아만 달라고!” 너무나도 간단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 “뭐, 그래도 사긴 어려울 거다. 그야 누가 팔겠나? 내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 영원히 도시에서 숙박비로 돈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귀한 땅을?” “……!!” “아, 물론 그렇게 되면 네 자식의 자식의 자식은 천막에서 자며 분통해할 거다!” “……?” “우리 조상님은 대체 왜 그때 땅을 안 산 거냐고 말이지!” “!!!!!!!!!!!” 먼 미래의 자식들이 인질로 잡힌 전사들의 눈에 경악이 맺혔다.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을 듯했다. “전사들아!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고로, 나는 힘차게 외쳤다. 오늘부로 정치인이 된 자답게. “전사는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답은 부동산이라고. 453화 바바리안 레볼루션 (2) 이름하여, 성지 재개발 계획. 아직 첫 번째 땅을 팔기도 전이었지만, 이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벌써 생겼다. 그야 벌써 구매 문의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홍보는 딱히 할 필요도 없이 금방 부족 전체에 소문이 날 테고…….’ 오케이, 그럼 이제 파는 것만 남은 건가? “저… 비요른?” “부족장이다.” “아무튼, 부족장! 왜 바로 땅을 팔지 않는 거냐? 사겠다는 전사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유는 간단하다. “많다고 해봤자, 공급 가능한 땅 면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얼른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나르가 장사꾼의 마음을 얻은 것은 기쁘나, 애석하게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애초에 지금 팔면 몇이나 사겠어? 모은 돈도 없을 테니, 실제 판매로 이어질 양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러니까……. “땅을 사겠다는 전사가 있으면 다음 달 5일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해라. 그때부터 팔 거라고.” 판매 개시일은 다음 달 5일. 바바리안들이 가장 돈을 많이 들고 있을 시기인, 미궁에서 막 나왔을 때. 땅을 얼마나 팔지는 몇 명이 몰렸는지를 보고서 정할 생각이다. 100명이 오면 30명 정도가 적당하려나? 다만, 그 말을 들은 아이나르는 고개를 연신 갸웃할 뿐이었다. “응? 전부한테 팔지 않는다고? 어째서냐?” 나는 1장로를 육성하는 느낌으로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첫째, 행정 업무가 가능한 인력이 없어서 그렇게 많이는 못 판다.” “오……?” “둘째, 그런 식으로 팔면 절대 안 비싸진다.” 아직은 부동산의 개념이 전사들의 머릿속에 제대로 확립이 되지 않은 시기다. 따라서……. “…안 비싸지다니? 그게 뭔 말이냐?” “생각해봐라. 100명이 원하는 땅을 30명이 샀다. 그럼 사지 못한 나머지는 어쩔 거 같나?” “…다음을 기다리겠지?” “물론 그런 전사도 있겠지만, 구매자의 땅을 웃돈 주고 사겠다는 자도 분명 나올 거다.” “음! 확실히 그럴 거 같다! 지금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는 돈이 생긴 전사도 있을 테니…….” 이야, 확실히 일머리가 생기긴 했네. 나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제부터가 재개발 계획의 핵심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판매된 땅은 우리가 판 값보다 더 비쌀 거다. 무기들도 인기가 많은 건 주문도 오래 걸리고 비싸지 않나?” “오! 그러면 처음 땅을 판 전사는 앉아서 돈을 번 격이군?” 마침내 아이나르가 진리에 도달했다. “그렇지, 바로 그게 중요하다. 앉은 자리에서 큰돈을 벌었단 소식은 바로 다른 전사들에게 전해질 테니까.” 땅을 물려줄 후손? 땅의 가치? 월세를 아낄 수 있다는 것? 결국 그런 건 구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땅을 사면 이득을 본다는 굳건한 믿음. 이내 아이나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겠군. 굳이 땅을 살 이유가 있냐며 한 귀로 흘렸던 전사들까지…….” “그래, 열심히 모은 돈을 싸들고 말이지. 사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일종의 돈 복사 버그다. 카론에게서 시작된 배낭 혁명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전사의 명예니 뭐니 해도 바바리안들 역시 돈을 좋아한다. 그리고……. ‘역시 초반에는 경매보단 추첨으로 몇 명만 골라서 파는 게 좋겠네.’ 나는 이 돈 복사 버그를 막을 생각이 없다. 훗날 거품이 꺼지며 본래 가치가 드러난다 해도, 단기간에 부족을 성장시키려면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담보 대출 같은 거만 하지 못하게 막으면 괜찮겠지. 그때는 이것 말고도 다른 수입원이 있을 테니.’ 사실 먼 미래보다 근 미래가 더 걱정이었다. 그야 부동산이란 개념을 만든 ‘바바리안’은 역시 이질적이지 않겠는가. 분명 눈에 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판단을 내렸다. ‘이제 와서 조금 더 눈에 띈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우선 부족부터 키우는 게 맞아.’ 심지어 부동산은 우리가 최초도 아니다. 드워프나, 수인족들은 이미 성지의 땅을 대부분 팔아대며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보통은 내가 다른 이종족을 따라했다고 생각할 터. ‘후… 그럼 바로 사무직원부터 알아봐야겠네.’ 어린 전사들에게 신발까지 신겨보내려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 전사들에게 부동산을 처음으로 전파한 그날. 점심쯤에 대충 업무를 마무리 짓고서 도시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미팅을 가졌다. “오랜만이다. 샤빈 에무어.” 백수라더니 역시 집에 있었구나. “…어? 비, 비요른 님……?” 약속도 잡지 않고 대뜸 집으로 찾아온 날 보며 놀라긴 했지만, 샤빈 에무어는 반가워하며 나를 집 안으로 들여줬다. “미안하다. 사실 진작에 찾아오려 했는데. 하도 바쁜 일들이 많아서.” “아뇨! 미안하기는요. 사실… 저는 이렇게 저를 찾아오실 줄 몰랐어요…….” “찾아와야지. 명색이 친구인데.” “아…….” “게다가 한 가지 제안할 것도 있고.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 하나?” 친구란 말에 감동받은 눈빛을 하다가도, 말이 이어지자 긴장한 표정을 내짓는 샤빈. “부탁이라고 하심은……?” “일자리를 잃었다던데, 혹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나?” “……?” “아니면 아는 사람들을 추천해 줘도 된다. 행정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지. 되도록 믿을 만한 자들로.” “……정말 그런 직종의 사람이 필요해서 오신 모양이네요.” “가장 먼저 생각난 적임자가 너였으니까. 그야 나는 이쪽으로는 아는 사람이 없지 않나? 이럴 때 친구 덕을 봐야지.” 천연덕스러운 내 말에 샤빈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전 직장에서 받던 만큼만 주신다면. 저는 물론이고 적당한 사람들도 몇 명 데리고 갈 게요.” “행정청에서는 얼마 정도 받았지?” 내 물음에 샤빈은 조심스레 전 월급을 말해줬고,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기에 오히려 조금 더 인상을 해서 연봉 협상을 끝마쳤다. “근데 의외군? 이렇게 승낙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안 그래도 슬슬 일자리를 찾아보는 중이었거든요.” “그래? 다행이다. 라그나가 제안을 했을 때는 딱 잘라 거절을 했다고 해서 걱정을 했거든.” “비요른 님은 정말 제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절 도울 생각뿐이던 그 아이와는 다르게.” “친구 사이에 빚은 지고 싶지 않았단 거군.” “……후훗,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근데 그 아이도 벌써 만나보신 건가요?” “그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냐? 아, 물론 내가 라그나랑 만난 건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다.” “비밀이라… 그러니까 뭔가 귀족들 세계라는 게 확 와닿네요…….” 샤빈은 정말 순수한 눈으로 감탄사를 뱉더니 마실 것을 내올까 물었고, 이후로는 차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슬슬 가보지. 탐사 전에 할 일이 여럿 있어서.” “네! 그러면 모레까지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제안을 해보고, 그다음에는 저 혼자라도 일단 출근을 할게요. 아, 어디로 가면 될까요?” “사흘 뒤, 아침에 내가 이리로 오마.” “어? 마중이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신데요…….” 그럴 필요가 없기는. 인간은 허가가 없으면 우리 성지에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그날 데리고 가서 출입증 같은 것까지 다 만들어줄 생각이다. “아무튼, 그럼 그때 보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후 샤빈 에무어의 집에서 나온 뒤에는 곧장 난쟁이놈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약속 따위는 미리 잡지 않았지만, 다행히 난쟁이놈과 만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비요른! 여긴 어쩐 일인가?” 역시 오늘도 일하고 있을 줄 알았지. “장비 수리를 해야 할 일도 생겼고, 며칠 전에 얘기했던 그것도 보여줄까 해서.” “그렇군. 우선 장비부터 주게. 탐사 전까지는 전부 수리를 끝내야 할 거 아닌가.” “그렇지.” 부족장과 싸우느라 파손된 장비들을 맡긴 후 잠시 홀에서 기다리고 있자, 난쟁이놈이 2층에 있는 다락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평소에 주문서를 넣거나 행정일을 할 때 쓰는 곳이네마는……. 자네에겐 좀 불편하겠군.” “괜찮다. 기어서 다니면 되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네만…….” “그러니 누워서 말하는 건 이해 좀 해라.” 층고가 제일 높은 중심부도 1.5m가 넘지 않았기에 그냥 바닥에 냅다 누웠고, 난쟁이놈은 한숨을 내쉬더니 드워프 전용 소파에 냅다 앉아버렸다. “그래서 물건은?” “아, 여기 있다.” 아공간에서 궤짝 하나를 꺼내주자, 난쟁이놈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감정을 시작했다. “이런 물건을 대체 어디서 구했나?” “모르는 게 좋을 텐데.” “……그, 그렇지? 내가 주책을 부렸구만.” 노아르크 탐험가의 장비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난쟁이놈은 떨리는 눈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불안과 긴장보다는 기대감이 더욱 커보였다. 하긴 다른 직업도 아니고 대장장이 출신 아닌가. 넘버스 아이템은 물론이고 최소 3단계 소재의 장비들이 다락방을 가득 채우니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심지어 며칠 전에 작성한 대로라면 무려 5%가 자기 몫으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최대한 조용히 처분을 해줬으면 한다.” “아, 어… 그러겠네. 그래야지…….” 아주 눈이 돌아가서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적당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남은 궤짝도 마저 꺼냈다. “오, 이것 말고도 더 있던 건가?!” “이건 팔지 않고 새 장비로 바꿀 생각이다. 일단 단검은 금괴로 만들고, 가죽은 잘라서 원단으로 바꿔뒀으면 하는데.” “어렵지 않지. 근데 대체 뭐기에?” 난쟁이놈이 호기심을 보이며 새 궤짝을 열었다. 그리고……. “…오우거 가죽은 그렇다 쳐도 이건… 미스티움? 시중에 나오는 것 중 90%가 왕가에 납품된다고 하던데, 이 귀한 걸 대체 어디서 구했나?” 아, 그거. “잘 살펴봐라.” “…응?” 내가 누워서 손가락을 깔짝거리자, 난쟁이놈이 다시금 미스티움제 단검을 요목조목 살펴보더니, 출처를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 이, 이, 이, 이건……!!!” “조용히 말해라. 누가 들을라.” “…………장미기사단의 장비잖은가!!” 최대한 볼륨을 낮춰서 소리를 내지른 녀석이 누가 볼까 싶어 얼른 단검과 갑옷을 궤짝 안에 도로 집어 넣었다. “비, 비요른! 이, 이건 미친 짓일세. 어디서 손에 넣었는진 몰라도… 저, 정말 위험하단 말일세……!” 떨림이 묻어나는 진심 어린 충고. 다만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장물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던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왕가와 얽힌 물건이 있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안 할 거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 어……” 그저 말꼬리를 흐리며 장비들을 쓱 둘러볼 뿐. 눈에서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만약에 거절하겠다면 오늘 본 건 전부 잊어라. 며칠 전에 쓴 계약서도 그냥 불태워 버리고.” 그리 말하며 궤짝으로 손을 뻗자, 난쟁이놈이 툭하고 내 팔을 쳤다. “……안 한다고는 안 했네.” “흐음? 아깐 미친 짓이라더니?”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안 들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난쟁이놈은 역시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 개벽 157년 7월 28일. 바꿔 말하면, 다음 미궁이 열리기까지 고작 이틀을 남겨둔 그 시기. 정말이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한 달이 끝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오셨어요!” 아침이 되자마자 샤빈 에무어의 집으로 마중을 갔다. 그야 오늘이 얘의 첫 출근날이니까. 내심 혼자일 줄 알았는데, 샤빈의 집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세 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이들은?” “행정청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예요. 사람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어, 그건 그런데……. 이렇게 빨리?” “우리 사무장님이 청장 선거에서 지면서 우리 쪽 파벌은 전부 옷을 벗어야 했거든요.” 음,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용케 그 시간에 셋이나 구했군.” “그리 어렵진 않았아요. 미궁의 거인, 얀델 남작의 클랜이잖아요? 다들 기회다 싶어하던데요?” “…클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으나 샤빈이 데려온 이들이 인사를 해온 탓에 깊게 캐물을 수 없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얀델 남작님! 저는 행정청 토목과에서 일했던 릭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메리 제이나입니다……. 에무어 씨와 같은 민간지원과에서 일했습니다.” “셰퍼드 램든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일단, 다행히 셋 중 한스는 없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도 짧게 소개를 한 뒤, 나머지는 승강장의 마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와아… 귀족칸에는 처음 타보네요.” “저는… 승강장에 귀족칸이라는 게 따로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긴 그럴 거예요. 평민들은 아예 이용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으니까.”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곧장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준다니, 너무 편리하네요.” “후후, 너희도 나처럼 귀족이 되면 누릴 수 있다.” “에이, 농담은요… 저희가 어떻게…….” 꽤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앤더슨. 너는 토목과에서 일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남작님!” “정확히 어떤 일을 하던 곳이었나?” 나는 처음 만난 행정원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묻고, 때로는 그들의 의문에 답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그런데……. 마차가 외곽으로 가네요?” 샤빈 에무어가 창밖을 보며 의문을 꺼냈다. “클랜 하우스가 성벽 쪽에 있나 봐요?” “클랜 하우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네? 이번에 새로 클랜을 만드셨다면서요? 거기 사무직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그제야 나는 우리의 대화가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어쩐지 업무 내용을 안 물어보더라니.’ 나는 얼른 오해부터 정정했다. “샤빈 에무어, 네가 일할 곳은 클랜이 아니다.” “네? 그럼 어딘데요……?” “바바리안의 성지.” “……………네?” 잘못 들었다는 듯 샤빈 에무어가 고개를 갸웃했고,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췄다. “일단 내리지.” 먼저 문을 열고 나가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따르는 행정원들. “…….” 그들은 코앞에 있는 성벽을 올려다보며 말을 잃었다. 하긴, 얘네는 여기까지 와볼 일이 거의 없겠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전투 함성을 크게 내지르며 인증하자 문이 열렸고,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이들을 이끌고 성지 안으로 들어섰다. 곳곳에서 나를 발견한 전사들이 인사를 해왔다. “인간! 인간이다! 부족장이 인간을 데리고 왔다!” “오오오오오오오!!” “남자가 둘에 여자가 둘이다!!” 마치 식인종 소굴에라도 들어온 듯 벌벌 떨며 내 뒤에 딱 붙는 행정원들. “…….” “…….” 그들이 정신을 찾은 것은 긴 숲길을 지나 부족장 전용 천막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샤빈이 데려온 행정원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내게 물었다. “그, 그래서… 저희는 이제 뭘 하는 겁니까?” 이름은 릭 앤더슨. 행정청 토목과에서 일하던 6급 사무관. 어쩌면 이번 재개발 계획에서 에이스로 활약하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 나는 그를 보며 짧게 답했다. “숫자가 쓰이는 모든 업무.” 물론 땅을 파는 일도 포함이다. 454화 바바리안 레볼루션 (3) 사람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조직이 된다. 그것이 고작 네 명일 뿐이더라도. 행정원 넷을 모아놓고 밀린 일거리들을 투하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알아서 특기 분야별로 역할을 분담했다. 아, 물론 샤빈 에무어의 공이 컸다. “메리, 당신은 앞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계산하는 일을 도맡아주세요. 당장은 전 장로들이 남기고 간 과거의 자료부터 먼저 처리하면 될 거예요.”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남아 있는 자료를 보니까 양식도 없는 주먹구구식에 글자도 읽기가 어렵던데…….” “할 수 있어요.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네…….” 통계 및 정보 자료의 메리 제이나. “램든 씨는 이틀 뒤에 열리는 성인식 준비를 해주세요.” “서, 성인식 말이오……?” “낯선 업무이긴 했지만, 작은 규모의 행사이니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모르는 거나 궁금한 점은 프넬린 님한테 여쭤보시고요. 프넬린 님, 도와주실 수 있죠?” “아, 아! 물론이다! 나만 믿어라!” “……성인식 준비가 끝나면 무엇을 하게 되오?” “통계 자료가 준비되면 예산을 짜주세요. 1년 단위가 아니라 한 달 단위로.” “…알겠소.” 재정 기획 및 관리의 셰퍼드 램든. “앤더슨 씨는… 말 안 해도 알죠?” “예……. 땅 말이지요…….” “보니까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우선 숲으로 가서 측량부터 해주세요. 나중에 도로도 새로 까신다고 하니, 도로로 쓰일 땅은 비워두게끔 해주고요. 아! 추후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땅도 남겨둬야 해요. 보육 시설을 새로 지어야 해서.” “…사실상 도시 계획이지 않습니까! 그, 그런 중요한 걸 제가 해도 되는 겁니까?” “권한을 줬는데 못 할 건 뭐예요? 게다가 당장 성지 전체를 관리하란 게 아니에요. 외곽부터 토지 판매를 하신다니 당장은 거기만 맡아주면 돼요.” “……해보겠습니다.” 도로 교통 및 도시 개발의 릭 앤더슨. “지금은 단순히 업무가 나뉘었을 뿐이지만, 추후 신규 인력이 들어오면 하나의 부서로서 기능하게 될 거예요. 그럼 여러분은 한 부서의 장이 되겠죠.” 물론 샤빈 에무어는 청장이 될 것이다. 아, 이게 저 신기한 의욕의 원천이었나? 알 수 없지만, 샤빈 에무어의 용병술은 내게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맨땅에서 시작된 조직 개편을 순식간에 끝낸 것도 모자라 동기 부여까지 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하네…….’ 예전에는 틈만 나면 디저트 가게나 찾아다니는 아가씨였는데. 설마 이런 면모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바바리안족 행정기관이 탄생되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직관하고 있던 때였다. “저기…….” 통계의 메리 제이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퇴, 퇴근은 언제인가요……?” 샤빈은 대답 대신 나를 슬쩍 보았다. 이것만큼은 본인의 재량이 아니란 거겠지. 오늘부터는 노동의 시간이 금이나 다름없는 만큼, 나는 얼른 질문에 답을 내주었다. “퇴근을 왜 하나?” “…예?” “너희들은 바보냐? 밤에도 일을 하면 급여가 두 배다!” “……?” 내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한 행정원들이 돌처럼 굳자, 샤빈 에무어가 내 말을 길게 풀어서 해석해 주었다. “한창 바쁜 시기잖아요. 야근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다행히 급여는 일한 만큼 더 주신다고 하니까, 당분간은 다 같이 고생하도록 하죠. 우리 모두 쉴 만큼 쉬었으니까, 이렇게 바쁜 것도 제법 나쁘지 않잖아요?” “……예.” 이렇게 오늘도 바바리안족은 굴러간다. *** 행정원들의 업무가 개시된 후, 나는 전 부족장의 천막으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미처 묻지 못한 게 있었거든. “얀델의 아들 비요—” “부족장이다. “………그래, 부족장. 무슨 일이냐?”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발칸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아, 네 첫 이명의 주인 말이군.” 발칸, 샬릭의 아들 카구레아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55세의 나이로 사망한 부족의 영웅. 사실 본명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전까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해 딱히 조사를 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뭐가 궁금한 거냐?” “발칸에 대한 모든 것.” “또 얘기가 길어지겠군. 앉든가 눕든가 알아서 해라.” 부족장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가 물은 질문에는 착실히 답해줬다. “내가 성인식을 막 치렀을 때부터 발칸은 부족 내에서 유명한 전사였다. 사실 부족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일단 부족 내에서 가장 강했으니까.” “얼마나 강했지?” “지금의 나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음, 저런 워딩이면 현재의 나보다도 강했다 보는 게 옳을 거 같고. “다른 전사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은 탓에, 그를 ‘인간화’ 됐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으나, 내가 봤던 발칸은 그 누구보다 전사다운 전사였다. 그는 오직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시절엔 다들 그렇지 않았나?” “하하핫! 그건 그렇지. 그 시절은 정말 굉장했다! 지금과 달리, 8층을 넘어 9층을 탐사하던 탐험가가 수백 명은 됐으니까. 여섯 종족 모두가 경쟁하듯 심연을 향해 나아갔으며, 최전선에 다가간 전사에게 창세보구를 물려주는 일도 흔했다. 발칸도 그런 전사 중 한 명이었고.” 지금도 나이든 탐험가들이 가끔 말하는 바로 그 황금 세대. “하지만 결국 차원 붕괴로 상위 탐험가 대부분이 전멸하면서 끝났다지?” 티타나 아쿠라바가 그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그 참상을 직접 겪고서 살아남았다. 아마 시간이 흐른 아직까지도 왕가를 향해 차원 붕괴에 대한 진실을 캐묻고 관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한 것도 그래서일 테고. “끔찍한 참사였다. 뭐, 발칸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발칸은 왜 죽었지?” “아무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와 동료들 모두가 미궁에서 들어가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그랬군. 창세보구까지 성지에서 새로이 탄생을 했으니 의심을 갖는 자가 없었겠어.” “너는 그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혹시 나랑 비슷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푸하하하! 전사에게 의심은 재주인 법이지.” 전 부족장은 내 의견이 허무맹랑하다고 느끼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비난하거나 생각을 바꾸려 들진 않았다. “아무튼, 그때 되돌아온 창세보구가 우리 부족만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허… 설마 그것도 알고 있을 줄이야. 귀족 감투가 참 대단하긴 하군.” 출처는 이백호였지만, 해명할 이유는 없기에 그냥 재차 물었다. “어느 부족이었나?” “요정족과 드워프였다.” “그랬군…….” 이후 나는 내 성인식 날, 여섯 종족이 동시에 도둑맞은 창세보구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는지 물었으나, 애석하게도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글쎄, 창세보구의 행방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쩝, 혹시 따로 더 아는 게 있는가 싶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네게도 말해줘야겠군. 창세보구와 관련해서 신기한 일이 있었다.” “신기한 일?” “예전 부족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편지를 두고 갔었다. 미래에 성물전쟁이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153년 3월 1일에 누군가 창세보구를 훔칠 거라는 예언이 적힌 편지였다.” 아… 그거………. 나도 모르게 뜨끔하는 사이, 전 부족장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기하지 않나? 분명 조상신께서 우리를 도운 거다! 주술사도 그렇게 말했다!” 주술사는 모르겠고, 화제가 나온 김에 나 역시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근데 그런 편지를 받았다면서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처음엔 그 편지를 무시해서 일이 그렇게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바바리안들도 그 편지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면, 대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전 부족장의 입을 통해 들은 진실은 이랬다. “처음에는 그 편지가 장난인 줄 알았던 거 같다. 어린 전사들이 장난을 쳤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중에 성물전쟁이 실제로 일어나자 예전 부족장도 뭔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다.” 오케이, 성물전쟁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럼 창세보구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털린 거냐?” “모르겠다. 분명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너희를 도시에 들여보내고 가보니 전사들이 전부 쓰러져 있더군.” “혹시 그 편지에 대해서 다른 종족에게 공유하진 않았나?” “그런 건 안 했다.” “어째서?” “조상신이 계시를 줬다고 하면 걔네들이 믿긴 하겠나?” 어, 그건 그렇지. 이후 나는 부족장이 창세보구 도난을 막기 위해 무슨 준비를 했는지를 물었고, 부족장은 꽤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구나. 성인식 날엔 정말 아무것도 눈치 못 챘는데.’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제 부족장이 됐으니 한번 제대로 파보기는 해야지. 창세보구가 있으면 이백호와의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데다가……. 사실상 졸업 장비니까. “그나저나 편지는? 혹시 아직 남아 있나? 한번 직접 보고 싶기도 한데.” “글쎄? 예전 부족장이 갖고 있었다 듣긴 했는데 그게 나한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잃어버리든가 했겠지.” “그렇군…….” 내가 과거에 남긴 편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근데 주술사는 어떻게 된 거냐? 제자 녀석한테 물어보니 은퇴했다는 거 같던데.” “아, 예전 주술사라면 혼받이를 받다 문제가 생겼는지 그대로 앓아누웠다.” “앓아누웠다고……?” “정확히는 의식도 없이 살아만 있는 상태다. 난 가망이 없어 보여 죽이라고 했는데, 제자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질색하면서 극진히 보살피더군. 그래서 그냥 그러라 했다.” 흐음, 그렇구나. “궁금한 게 다 풀렸으면 이만 나가라. 오랫동안 말을 했더니 배가 고프다.” “알았다.” 전 부족장이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어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기에 더 귀찮게 굴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위치를 물어본 할배 주술사의 천막으로 향했다. 스윽. 어두운 천막 안은 향초의 연기로 자욱했다. 비리면서도 역한 느낌을 주는 향. 이내 나는 할배 주술사가 시체처럼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부, 부족장?!” 전에 한 번 보았던 제자 주술사가 천막을 젖히며 들어오더니, 나를 보며 기겁했다. “아, 안 되느니라! 아직 배울 게 한참 남았는데, 음식만 축낸다고 죽이지 마라!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어……. 나는 그냥 가는 길이기에 안부차 와봤을 뿐인데. “부탁한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도, 내게는 소중한 스승이란 말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쫓겨나듯 천막에서 나와야 했다. *** 샤빈의 행정군단의 등장으로 숨 돌릴 시간은 벌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날까지 쉴 시간도 없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얀델 남작가의 주인이며, 아나바다 클랜의 수장이기도 하며, 바바리안족의 부족장이었으니까. 탐사 준비를 하랴, 부족 퀘스트를 깨랴, 마지막엔 집에 좀 들어오라며 아멜리아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바빴다. ‘다음 달은 이번보다 더 바쁘겠지……?’ 음, 아마 그럴 거 같다. 다음 달에는 이종족 귀족 연합인 멜베스의 집회에 참가해야 하고, 성지의 땅도 본격적으로 판매를 해야 하니까. ‘그나마 멜베스에서 탐사 다음 날로 집회를 열어준 게 다행인가…….’ 만약 집회가 이번 달이었다면, 이 와중에서도 하루를 빼 참가를 해야만 했을 터. “후우…….” 매일 쌓이는 숙제를 생각하면 좀 우울해지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나. 일일 퀘스트가 남았는데 이를 외면하는 건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이제 와서는 도중에 그만둘 수도 없고. “부족장, 다 준비가 끝났다.” 천막 안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때, 1장로 아이나르가 들어와 나를 불렀다. [20 : 58] 벌써 시간이 됐구나. 이내 아이나르를 따라 천막을 나와 걷고 있자니 금방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르르륵-! 수풀이 무성한 숲 한복판의 공터. 어두운 밤을 비추는 것은 LED 가로등이 아닌 일렁이는 횃불이며, 동서남북 어딜 보나 근육질 야만인이 득실거리는 그곳이자……. 터벅. 내가 처음 이 세상에서 눈을 떴던 바로 그 장소. 터벅. 이내 다양한 무기들이 가득한 공터로 들어서자 어린 전사들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 흥분과 긴장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눈빛.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나는 어린 전사들을 한 번 쭉 둘러봐준 뒤, 있는 힘껏 외쳤다. “축하한다! 어린 전사들이여!” 내가 그날 이 숲에서 들었던 그대로. “오늘부로 너희들은 성지를 떠나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자,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 스스로에게 맞는 무기를 골라 보아라!” 아, 물론 그때와 다르게 대사 하나는 추가됐다. “가죽 장화와 포션 두 병은 기본 지급이다!” 이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때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이번 기수에서부터 시작된 복지 시스템이 마음에 드는지 함성을 내지르는 어린 전사들. 노린 건 아니지만,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고함을 치는 이 와중에. “…….” 경직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려대는 전사를. 츄릅. 발견한 즉시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고 말았다. ‘이건 백 퍼센트.’ 뉴비다. 455화 바바리안 레볼루션 (4) 이 세상에서 눈을 떴던 그 첫날은 다른 기억들과 비교해서도 가장 선명하다. 이해되는 낯선 언어에 머리가 멍해졌고, 반면 그 상태에서도 최대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선지, [던전앤스톤]의 도입부 같다고. ‘거기서… 한 명이 죽었지.’ 그 이름조차도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카두아의 아들 오름. 몇 배를 깨고 이 세상에 진입했을지도 알 수 없는 그는 눈을 뜬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목이 댕겅 잘려나갔다. 그리고……. ‘꽤 많았지. 그런 놈들.’ 부족장이 되어서 과거 기록을 살펴보니, 10년간 평균 1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성인식에서 처형됐다. 뭐, 요즘엔 치트판 버전도 인기가 시들해졌는지, 그 평균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하는 애들이 있기는 한가보네.’ 참 안쓰러운 일이다. ‘쯧, 어쩌다 그런 게임에 손을 대서.’ 물론, 잘못이 그들에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책임의 소재를 묻는다면 역시 하나뿐이니까. ‘망할 늙은이 새끼.’ 아우릴 가비스. [던전앤스톤]의 제작자이자……. 「당신은 심연에 도달했습니다.」 「튜토리얼 완료.」 이딴 문구 하나만 보여 주고서 수많은 플레이어를 납치해온 장본인. ‘튜토리얼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뉴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물론 회상에 잠긴 시간은 극히 짧았다. 계속 저러고 있으면 다른 전사들 눈에 띌 게 분명하니까. “다들 조용!” 짧게 외치자 아기 바바리안들은 일제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대로 성인식을 속행했다. 물론 예전의 방식대로는 아니었다. 그야 이러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혹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뉴비가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푸틸의 두 번째 아들 마칼!” 나는 직접 어린 전사의 앞에 가서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두드렸다. “나와서 무기를 골라라!” “알겠다!!!!!” 부족장의 따듯한 응원과 격려에 감동을 했는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달려나가는 어린 전사. “양손도끼라! 훌륭하다!” 이후로도 나는 순서대로 전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격려했고, 틈틈이 뉴비가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한 힌트를 줬다. “오늘부로 넌 한 사람의 전사다.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마!”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내가 눈여겨보았던 뉴비의 차례가 되었다. “킬타우의 세 번째 아들 벡타!” 툭, 소리를 내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난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체 입을 열었다. “나와서 네 여정을 시작할 무기를 택해라!” “…알겠다!!” 다른 전사와 비교하면 타이밍도 늦고,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네.’ 일단 다른 전사들을 흉내내는 걸 보니, 경험이 쌓이면 나름 잘 살아남을 거 같—. ‘응?’ 이내 녀석이 고른 무기를 확인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방패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하는 녀석. ‘설마 방패바바 뉴비였을 줄이야.’ 나는 빳빳하게 굳은 녀석을 지나쳐 방패가 걸려 있던 진열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이 두고 간 물건을 직접 건네주었다. “받아라.” 방패를 골랐을 때 작은 한 손 망치를 같이 주도록 부족장 권한으로 패치했거든. “킬타우의 세 번째 아들 벡타!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게임과 다른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녀석은 내게 망치를 받은 뒤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표정에선 심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긴,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도 이쯤에서 뉴비에겐 신경을 끄고 성인식을 이어나갔고, 어느덧 마지막 전사까지 자신의 무기를 선택했다. “전사들아!” 다만, 도시로 향하기 전에 잠시 연설 시간을 가졌다. 음, 정확히는 복습이라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다 함께 복창한다. 착한 약탈자는?” “죽은 약탈자뿐이다!!!” “탐험가 길드는?” “믿지 않는다!!” “미궁에서 한스를 만났을 땐?” “안 된다! 저리 가라! 뒈지기 싫으면!” 이렇게 어린 전사들에게 복습을 시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고로 복습이란, 해도 해도 모자란 것일뿐더러. 이 중에는 갓 들어온 뉴비도 있지 않은가. “자, 그럼…….” 마지막으로 꼭 알려줘야 할 정보가 있었다. “잘 살아가고 있던 우리의 몸을 빼앗은 ‘악령’을 만났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플레이어의 생존에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바로 그것. “죽인다!!” 플레이어란 게 들키면 죽는다. *** “개문하라!” 내 외침이 울려 퍼진 즉시, 성지와 도시 사이를 구분짓고 있던 성벽의 문이 열린다. 성지에서 자라며 수도 없이 오늘을 꿈꿨을 어린 전사들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라프도니아……!” 원래라면 긴 말 없이 너희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라 외쳐줬을 타이밍. 다만, 나는 어린 전사들을 이끌고 직접 도시로 들어섰다. “……뭐? 부족장이 직접 이끄는 자 역할을 해준다고?” 어차피 가는 길이거든. 나도 미궁에 들어가긴 해야 할 거 아니야.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우리도 위대한 전사가 될 게 분명하다!!” 부족장이 직접 안내인 역할을 해준 것에 또 한 번 감격하는 전사들. 그 순박함에 감탄을 하면서도 나는 얼른 전사들을 이끌고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리고…….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미리 약속해 뒀던 장소에서 길드 마법사와 만나 ‘결속’ 마법을 받았다. 물론 내가 아니라 어린 전사들을 대상으로. 셋, 혹은 넷으로 짝을 만들어 주고 있자, 몇몇 전사들이 내게 의문을 토해냈다. “…부족장! 원래 첫 탐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맞다! 나도 어렸을 때 그게 전통이라고 들었다!” 전통은 지랄. 그 빌어먹을 전통 때문에 첫 탐사에 밤친구를 구하다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뒈졌는데. 순간 꾸짖을 갈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멍청한 놈들!!!” 그런 나보다 먼저 나서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우리 바바리안의 1장로 아이나르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부족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족장이라도 전통은—.” “오늘부터는 부족장이 하는 모든 말이 전통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든 잘 따라야 한다!” 조금은 독재적일지 몰라도, 나름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 종족엔 합당한 이의 제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만약 새로운 전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먼 훗날 네가 부족장이 돼서 바꿔라! 알겠나?” 해석하자면, 꼬우면 덤비라는 말. 다행히 자연의 이치 속에서 자란 전사들은 그 논리에 너무나도 쉽게 수긍했다. “…그렇군. 이해했다!” 오케이, 그럼 이거로 이 문제도 끝. “저기… 대금은…….” “여기 있다.” 결속이 마무리된 후엔 길드 마법사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오늘은 수고했다. 그럼 다음 달도 잘 부탁하지.” “아… 예, 남작님…….” 이례적으로 야근에 출장까지 하게 된 마법사는 다음을 기약하는 나의 말에 똥 씹은 표정으로 떠났다. 하나 결국 다음 달에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이번처럼 길드 지부장에게 가서 ‘부탁’을 하면, 일개 마법사가 뭐 어쩌겠어. “미궁이다!!” “오오오오! 저게 바로 그……!!!” “마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몸을 잡아끄는 것만 같다!!” 아무튼, 대금 지불이 끝난 후에는 다시 전사들을 인솔해 차원광장에 데려다주었다. 따라서 부족장의 의무도 여기서 끝.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가라, 전사들아!”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인파를 헤치고 포탈을 향해 나아가는 어린 전사들. “우오오오오오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를 보며 아이나르가 피식 웃었다. “비요른, 뭘 그렇게 걱정하는 얼굴이냐?” 그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으니까 그렇지. 최대한 많이 살아 돌아와야 우리 부족도 점점 더 부강해질 텐데……. “걱정 마라. 우리 때는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 돌아올 놈들은 다 살아 돌아왔지 않나!” 왕년에 레퍼토리까지 섞인 바바리안식 위로. 다만 우습게도 제법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이제까지의 바바리안족의 훈육 방식이 너무 하드코어 했을 뿐, 나 역시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는 건 원치 않으니까. 결국 사람을 가장 성장시키는 것은 위기다. 위기에서 배운 것은 뼈에 새겨져 쉽게 잊지를 못하니. 설령 잊고 싶다 하여도. “아저씨!!” 전사들을 미궁에 집어넣은 뒤에는 차원광장을 돌아다니며 팀원들과 합류했다. “늦었군.” 아멜리아가 시계를 보며 핀잔을 줬고, 그 옆에 있는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는 긴장한 모습으로 내게 인사를 박았다. “오셨습니까! 클랜장님!” 오랜만에 장비까지 쫙 걸친 모습. “따라갈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녀석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가득 묻어났다. 하긴, 어쩌다 보니 며칠이 넘게 지하실에 갇혀 있었지. 근데 나를 약탈하려던 놈이라서 그런가? 일말의 동정심조차 생겨나지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착한 약탈자는 죽은 약탈자뿐이니까. 애초에 이 정도로 강하게 다루지 않는 이상, 믿고 데리고 다니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에밀리.” “걱정 마라. 미궁 내에서는 내가 잘 감시할 테니.” 아우옌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나눈 대화였으나, 장본인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믿어달라거나, 잘하겠다거나 하는 말도 없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근데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 해야 할지……. “저… 비요른? 이제 가봐야 하지 않나?” “아… 그래.” 휘황찬란하던 포탈도 서서히 크기를 줄여가는 중이었기에, 슬슬 포탈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그렇게 클랜 아나바다의 첫 탐사가 시작되었다. *** 보랏빛 광채가 은은하게 피어나는 수정동굴. “북쪽.” “북쪽이군. “고블린 숲쪽이네요.” 입장과 동시에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로트밀러의 수제자인 나, 인도자인 아멜리아, 그리고 언니에게 탐색꾼 교육을 받은 에르웬이었다. “…….” “…….” 다섯 명밖에 안 되는 팀에 길잡이만 셋이나 되는 바람에 생긴 멋쩍은 해프닝. “크흠.” “제가 좀 더 빨랐어요. 저 여자보다.” “…….” “하하핫! 너희는 애냐? 그런 거 가지고 경쟁이나 하고!” 아이나르가 크게 웃어젖히자, 에르웬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노려봤다. 물론 그런 눈짓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좋은 눈빛이지 않냐, 에르웬!”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나르. “……?” 에르웬이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만난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나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즐거워 보인다는 뜻이다! 그때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달리!” 그 말에 내가 다 움찔했다. 그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라면… 레이븐에게 들었던 그날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아이나르가 기어코 지뢰를 밟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뭐라는 거야.” 의외로 에르웬은 크게 화내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어딘가 창피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할 뿐. ‘그래, 얘는 오히려 이런 쪽에 약했지…….’ 아이나르가 들어온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멜리아 혼자서 에르웬을 케어하는 데 조금 벅찬 느낌이 없잖아 있었는데. ‘얘도 요즘에는 좀 유해진 거 같고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자, 그럼 가보자! 비요른과 다시 함께 탐사를 할 수 있다니, 아까부터 도무지 진정이 안 된단 말이다!!” 아이나르가 먼저 앞장 서 나갔고, 나는 피식 웃으며 이를 제지했다. “아이나르, 혼자 어디 가는 거냐?” “응? 북쪽에서 시작했으니 북쪽으로 가는 거 아닌가! 나도 이제 그런 기본적인 동선은 안다! 나침반도 볼 줄 알고!” 지난 몇 년간의 성장이 기특하긴 하지만……. “오늘 우리가 갈 곳은 고블린 숲이 아니다.” 아멜리아가 딱 잘라 답하자,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 그런가? 그럼 어디지? 망자의 땅인가?” “바위사막이다. 흐음, 이상하군. 탐사 계획은 전에 분명 공유를 했을 텐데……” “아, 미안! 까먹었다!” “……그랬군.” 트루 바바리안은 처음 상대해 봤을 아멜리아가 말문을 잃은 사이, 나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 “음, 그럼…….” 누구한테 길잡이 역할을 시킬까. 지난번처럼 인도자인 아멜리아? 아니면, 이번엔 에르웬? 살짝 고민이 됐으나 판단은 빨랐다. “…길잡이는 내가 하지!” 오늘 탐사의 메인은 손발을 맞추는 것이니까. 둘 중 어느 쪽이든 감정 상할 일은 최소화하는 게 옳다는 판단. “네? 굳이 아저씨가 할 필요는—.” “뭐라는 거냐! 이런 귀찮은 건 모두 나눠서 하는 거다. 자, 다들 얼른 따라와라!” 에르웬의 말을 끊고서 얼른 앞장서 나아갔다. 안 그래도 이번 탐사는 할 일이 제법 많았다. 비록 아이나르는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덕분에 뭘 하든 의심을 안 하지.’ 이건 오히려 장점이다. 옛날 팀에선 레이븐 눈치를 본다고 게임 지식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니까. 「2층 바위사막에 입장했습니다.」 자, 그럼 손발도 맞춰볼 겸. 천천히 하위 레이드들부터 쫙 돌아보자. 456화 레이드 (1) [던전앤스톤]은 파밍 게임이다. 경험치를 모으고, 정수를 먹고, 장비를 획득하는 등의 형태로 캐릭터를 강화시키는 것이 주된 재미의 요인. 보통은 정수를 먹고, 다음 레벨로 가기 위한 경험치를 수급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키운다. 그야 경험치는 첫 사냥 시에만 부여가 되니까. 정수로 캐릭터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다음 경험치 수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데……. ‘어찌 된 게 7레벨까지 오는데 막히는 구간이 한 번도 없었지.’ 물론 이는 초반에 7등급의 시체골렘, 5등급의 뱀파이어, 오크 히어로 정수를 먹은 영향이 크다. 그것만으로도 저층에서는 경험치만 수급하고 넘어가도 될 스펙이 되었으니까. 중반부엔 ‘절제된 소망’으로 오우거 정수를 먹은 것도 컸고. 아, 왕가가 전쟁 중인 것도 도움이 됐다. 전공으로 얻은 ‘바이욘’의 [초월]도 원래대로면 이 시기에나 파밍을 시작할 정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번이 처음으로 성장이 막힌 구간이려나…….’ 아, 물론 성장이 막힌 것은 내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단지, 더 강해지려면 7층 위로 가는 수밖에 없는데 거기가 전쟁터로 변한 바람에 가지 못할 뿐. 사실상 클랜만 더 보강하면 당장 벨라리오스 노가다를 시작해도 무리가 없을 스펙이다. 따라서……. “비요른,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냐? 여긴 나오는 마물들도 너무 약하고, 재미가 없다!” 이번 탐사의 메인은 하위 레이드로 잡았다. 다시 생각해도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언젠가 시간을 들여 사냥해야 할 몬스터들의 경험치도 캐면서, 팀원 간의 손발도 맞추고, 심지어 레이드 중에 정수가 나오면 먹어도 되니까. 현재 우리 넷 전부 다 정수 칸이 하나씩 남아 있다. “얌전히 기다려라.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서 나오는 정수는 네게 필요한 거니까.” 지금 사냥하려는 몬스터는 아이나르가 먹었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정수다. 졸업 정수로는 손색이 있지만, 당장 먹으면 30%는 더 강해질 정수. “뭐, 그렇다고는 해도…….” 다만, 아이나르는 확 와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이제 와서 2층에서 나온 정수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니 믿기 어렵긴 하겠—. “그래 봐야 5등급이지 않나! 그냥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 안 되나? 더 강한 적이 나와야 네게도 보여줄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아… 그냥 그게 문제였던 거구나. 대충 한 귀로 흘린 채 육포를 씹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소환한 분신체로 잡몹 자동 사냥을 돌려둔 채 쉬고 있던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또한, 그와 동시에 에르웬이 말했다. “또 접근 중인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 저 말대로 누군가 이리로 오는 중이다. 숫자는—.” “열두 명이요.” “…….” 허, 듣는 사람 불편하게……. 제발 이런 거로 경쟁 같은 건 안 해줬으면 하는데. “한 2분 뒤엔 도착할 거예요.”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잠시 기다리자 총 열두 명으로 이뤄진 탐험가 팀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음, 팀이 아니라 클랜이라고 해야 하나? 2층에서 마주친 탐험가라기에는 장비가 제법 좋았다. “…….” “…….”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짧은 마주침. 이내 팀장으로 추측되는 사내가 우리 쪽을 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선객이 있었구려.” 이들의 목표가 우리와 같음을 알게끔 해주는 한마디였다. 하긴, 우리가 잡으려는 녀석은 나름 알려졌으니까. 목표가 같은 이상, 해결법도 심플하다. “그래, 선객이 있으니 너희는 이만 가라.” 전문 용어로는 ‘자리요’. “…….” 선점한 사냥터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상대 쪽 리더는 입맛을 다시며 우리를 쓱 둘러보았다. 예전이었으면 보자마자 경계심이 피어났을 시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쉽게 됐구려.” 뭐, 아쉬우면 자기가 어쩌겠어? “이렇게 유명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여겨야겠지.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겠소. 얀델 남작.” 그들은 앞서 마주쳤던 세 개의 팀이 그러했듯 군말 없이 등을 돌려 떠났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캐릭터가 샌드웜을 처치하였습니다.」 「캐릭터가 샌드웜을 처치하였습니다.」 「캐릭터가 샌드웜을 처치하였…….」 「…….」 바위사막 내 특정 지역에서만 출현하는 샌드웜을 죽치며 잡고 있자니, 마침내 조건이 만족됐다. “오, 땅이 흔들린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사막. 솨아아아아아아-! 퇴로를 차단하듯 불어오는 모래 폭풍. 이내 거대한 지렁이가 땅속에서 아가리를 벌리며 솟구쳐 오른다. 「데쓰웜이 출현합니다.」 5등급 몬스터 데쓰웜. 출몰지가 저층인 데다가 항상 상위 변이종으로 출현한단 특징이 있어서 ‘경험치런’ 동선을 짤 때 앞순번에 자주 두던 그놈. [끼예에에에에에엑-!] 상반신(?)만 땅 위로 올라온 녀석이 소름 끼치는 포효를 내지르며 우리를 내리깔아보았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이에 지지 않고 함성을 내지르며 하늘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아이나르. 다만, 애석하게도 한 발 늦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심연의 힘]을 시전했습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아이나르가 대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화살과 검에 꿰뚫린 데쓰웜이 모래알 위로 쓰러졌다. 「데쓰웜을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설마 했는데 1초컷일 줄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하군?” “아저씨! 제가 해치웠어요!” “무슨 소리지? 내 검이 화살보다 먼저 놈의 몸을 반으로 베어 버리는 걸 못 본 건가?” “하지만 머리를 통째로 날린 건 제 화살이었죠.”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대체 이게 뭐냐!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아,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 데쓰웜을 처치한 후, 우리는 바위사막을 벗어나 다시 1층 수정동굴로 내려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녹색 탄광’에 다녀온 지도 어언 세 달째이니까. 이제 다시 1층 균열에 확정 입장이 가능한 것. ‘그러고 보니 여기는 아직도 안 돌았었구나.’ 사실 생각해 보면 다른 층이라고 전부 돈 것은 아니다. 저층을 거의 스킵하다 보니, 여태껏 가본 곳은 3층의 백색신전과 4층의 도플갱어 숲이 전부. 2층은 머문 시간부터가 극히 짧다 보니 균열이 열리는 이펙트조차 아직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가볼 수 있으려나…….’ 글쎄, 잘 모르겠다. 이번 탐사 계획에는 2층 균열 입장도 껴있긴 하지만, 균열이란 게 어디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던가. “하하핫! 이곳도 오랜만이군!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나, 비요른?” 수정동굴 중심부에 위치한 대현자 기념비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나르가 한 말이었다. 하긴, 얘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겠네. 나도 세 달 전에 왔을 때 비슷한 감정이었으니까. 아이나르와 처음 이곳에서 균열을 열었고, 우린 거기서 처음으로 레이븐과 난쟁이놈을 만났다. 별개로 노아르크 놈들에게 포위를 당해 며칠간 고생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고. ‘그것도 별써 3년도 더 전이구나…….’ 과거에 다녀오며 잃어버린 시간이 상당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체감상 진짜 얼마 전에 있던 일 같은데. 툭. 이내 바위사막에서 캐온 8등급 마석을 제단 위에 올려놓자 포탈이 열렸고, 우리는 서둘러 그 안으로 들어섰다. 「캐릭터가 1층 균열에 입장했습니다.」 내가 아직 클리어하지 못한 1층의 마지막 균열. “여기가 바로 ‘강철의 묘’…….” 에르웬이 정령으로 불을 밝히자, 폐소 공포증이 올 것만 같은 복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 물론 피라미드와는 차이점이 명백히 존재했다. 벽화 같은 문양이 새겨진 복도의 벽은 전부 다 금속 재질이었으니까. “아저씨, 무슨 언어일까요? 이건.” “글쎄. 나도 모르겠다.” “하하핫, 그보다 아루루가 봤으면 좋아했을 거 같지 않나?” “잡담은 그만하고 이동하지.”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기에 슬슬 균열 탐사를 시작했다. 아, 선봉은 아이나르가 섰다.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탓인데……. 아멜리아나 에르웬도 내심 아이나르의 실력이 궁금한 눈치였기에 그냥 그러라고 해두었다. 사실 나도 좀 보고 싶기는 했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선봉을 맡은 아이나르는 순식간에 균열을 클리어 해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강철의 묘’는 함정을 해체하며, 착실하게 길을 찾아 마지막 챕터인 묘실까지 향하는 게 정석이지만, 아이나르에겐 의미가 없었다. 자고로 함정이란, 해체하는 것보다 밟아 없애는 쪽이 효율적이니까. 몸만 튼튼하다면. “아이나르, 거기서 왼쪽이다!” “우오오오오오!!” 내가 뒤에서 길만 알려주면 아이나르가 달려가 함정을 밟고, 몬스터를 대검으로 박살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앙! 양학 특화 대검 전사답게 상당한 퍼포먼스였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거듭베기]를 시전했습니다.」 「동일 부위 타격.」 「[폭발의 상흔]이 발동됩니다.」 [거듭베기]와 시너지를 이루는 기본 콤보. 다만, 그 와중에도 지난 몇 년 동안의 성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맨들기름]에 의해 [폭발의 상흔]의 위력이 2배 상승합니다.」 화염계 ‘패시브 스킬’이 사용될 때 발동되는, 5등급 몬스터 스머그의 정수. 그리고……. 「[잔열]이 발동됩니다.」 「입힌 피해에 비례해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단시간에 여러 대상에게 화염 피해를 입힐 시 50% 경감된 피해를 한 번 더 입히는, 무려 4등급 정수까지. 콰쾅! 콰아앙! 콰아앙! 아이나르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많게는 수십 회까지 폭발이 이어졌고, 뒤따르던 나는 그 모습을 대견하게 지켜보았다. ‘설마 내가 말해준 정수들을 알아서 다 챙겨 먹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마치 방학 숙제를 훌륭하게 수행해온 제자를 보는 듯한 느낌. 전부 내성 수치들도 나름 잘 붙은 정수들로 추천을 해준 것이기에 함정을 밟거나 몬스터의 이능에 직격당하는 걸로는 끄떡없었다. 뭐, 어차피 다쳐도 금방 낫지만. 「아이나르 프넬린이 [탐욕의 날개]를 시전했습니다.」 「자연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이나르의 세팅은 패시브에서 딜이 나오기에 영혼력 소모가 적은 편이다. 평타인 [거듭베기]를 제하면 필살기 하나가 전부. 따라서 치유기를 켜두고 다녀도 크게 부담되지 않을뿐더러……. 「8등급 몬스터를 처치했습니다.」 「등급에 비례해 영혼력을 회복합니다.」 학살자 각인의 3단계 효과 [포식] 덕분에 싸우기만 하면 MP와 HP가 둘 다 찬다. 심지어 보니까 6단계 각인도 찍은 모양이었고. 「8등급 몬스터와 전투 중입니다.」 「등급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합니다.」 후, 설마 [전투학습]까지 찍었을 줄이야. 싸우면 싸울수록 힘이 샘솟고, 강해지는 것이 딱 내가 바라던 바바리안 전사의 형태. ‘……저렇게 싸우면 재미있긴 할 텐데.’ 호쾌한 전투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박탈감이 피어올랐지만, 나는 금방 미련을 버렸다. 방패바바는 방패바바의 맛이 있는 법이니까. 애초에 [던전앤스톤]은 메인 탱커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임이기도 하고. 신관이나 마법사, 궁수 없이도 레이드가 가능은 하지만, 메인 탱커는 대체가 불가하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아무튼, 우리는 뭔가 더 할 것도 없이 아이나르의 뒤만 따라갔고, 시간이 흐르며 첫 사냥 경험치도 착실하게 쌓여갔다. 「머미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철기병을 처치했습니다 EXP +3」 「배리드언을 처치했습니다 EXP +2」 「수호자의 눈을 처치했습니다. EXP +2」 「아이언 리자드맨을 처치했습니다. EXP +3」 「수수께끼 문지기를 처치했…….」 「…….」 또한, 중간에 숨겨진 두 가지 히든피스도 모두 찾아내서 다 함께 나눠먹었다. 「캐릭터가 머큐리얼 리퀴드를 복용했습니다.」 「항마력이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해당 효과는 중복되지 않습니다.」 「캐릭터가 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리 내성이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해당 효과는 중복되지 않습니다.」 1층 균열이라 스탯 증가치는 적은 편이지만, 이것도 쌓이다 보면 상당히 커진단 말이지. 「캐릭터가 강철의 분묘에 진입했습니다.」 그렇게 할 거 다 하며 탐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방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음, 한 3시간쯤 걸렸으려나. ‘솔로로 3시간이면 확실히 사냥 속도가 빠르긴 하네.’ 이 정도면 능력은 충분히 증명한 듯하지만, 영 만족스럽지 않은지 아이나르는 기어코 보스전까지 혼자 치렀다. 그리고……. 「철인 일디움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짧았던 보스전이 종료된 순간. 탐욕의 대명사인 탐험가답게, 모두의 시선이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한 시신으로 모였다. 솨아아아아아아- 일단 정수는 없었다. 제법 짭짤하게 팔리는 균열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꽃?” “어? 넘버스 아이템 중에 꽃도 있었던가요?” 넘버스 아이템이 드롭됐다. No.9999 초심자의 행운. 그것도 엄청나게 희귀한. 457화 레이드 (2) “오! 제법 신기한—.” 아이나르가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뻗던 찰나. “멈춰라!!!” 나는 사자후를 터뜨리며 아이나르를 제지했다. 그리고 당황한 아이나르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뒤에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 뭐냐!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다!!” 뭔 상황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자기변론부터 행하는 아이나르. 물론, 나도 딱히 혼을 낼 생각은 없었다. “이, 이 꽃이 대체 뭔데 그러는 거냐!” 무지는 죄가 아니니까. 음… 적어도 바바리안에게는.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다.” 내가 물건의 이름을 밝혔을 때 반응을 한 것은 딱 한 명, 아멜리아뿐이었다. “…시작부터 귀한 물건을 얻었군.” 암, 귀하다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바로 이건데. “그래서 뭔데요, 이게?” “흐음… 미궁의 109가지 보물 중에 하나인데, 어렸을 때 책은 잘 안 읽었나 보군?” “……그쪽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요.” 아멜리아가 말한 109가지 보물이 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내버려 두면 싸울 거 같았기에 일단 내가 껴들어 답했다. “초심자의 행운은 부적 아이템이다.” 참고로 게임에서는 ‘Charm’이라는 영문명으로 표기가 되던 파츠. “부적요……?” 생소한 단어인 듯했기에 우선 부적의 개념부터 설명했고, 에르웬도 탐험가 짬밥이 나름 있었기에 금방 개념을 이해했다. “아, 쉽게 말해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발동되는 류의 장비인 거네요?” “그렇지.” 참고로 부적 계통의 넘버스 아이템은 총 열두 개가 있는데 다른 종류의 것을 여러 개 소지한다고 해도 중첩은 되지 않는다. 효과가 발동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그리고 초심자의 행운은 첫 소유주에게 귀속이 된다는 특징도 있지.” “…예전에 말씀하신 그 ‘불의 보주’처럼요?” “그래.” “…그런! 나, 나는 진짜 몰랐다!! 정말이다! 믿어줘라!!” 귀속 아이템이란 말을 듣자마자 아이나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다. 물론 딱히 반응할 이유가 없었기에 다들 그냥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이 꽃은 어떤 효과가 있는 거예요?” 아, 그거. 간단하다. 이 넘버스 아이템은 전투에 있어서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장착 시 아이템 레벨 증가 효과도 없고, 능력치 상승 또한 당연히 없다. 하지만……. “처음 사냥한 마물에 한해서 정수가 나올 확률을 늘려준다.” “아, 그랬구나……. 신기한 물건이네요!” 의외로 에르웬은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아이나르도 뭔가 맥 빠진다는 느낌이었고. “뭐냐 그 애매한 효과는? 무조건 정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처음 잡은 몬스터만 된다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얘네는 자세한 확률을 모를 테니까. 통계(직접 만든)에 따르면, 초심자의 행운으로 인한 드롭률 증가율은 약 5%. 참고로 이 증가율은 곱연산이 아니다. 그냥 증가치가 고정으로 더해진다. 예를 들어, 수호자의 정수라면 33%인 드롭률에 5%가 더해져 38%가 되는 식. 물론 이것만 보면 효과는 미미해보이지만……. “그래서 얼마나 잘 나오게 되는 거냐?” 대상을 일반적인 마물 기준으로 둔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야 아무래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33%가 38%가 되는 것과, 0.01%가 5.01%가 되는 것은. “대충 스무 마리 중 하나 정도 될 거다.” 이내 대략적인 확률이 내 입 밖으로 흘러나오자 시큰둥하던 아이나르는 물론이고 에르웬, 그리고 아멜리아까지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스무 마리 중 하나라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정확한 드롭률은 모를지라도, 탐험가라면 모두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된다. 극악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정수의 드롭률을.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 물론 스무 마리도 9등급 몬스터 기준이고, 등급이 높으면 이보다 좀 더 잘 나온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몬스터 등급이 올라가면 기본 드롭률도 소폭 상승하기 마련. 3등급 중에는 드롭률이 5%에 달하는 놈도 있다. 뭐, 대신 만나는 게 엄청 까다롭지만. “과연… 109가지 보물에 포함될 만하군.” “확실히 그러네요. 처음 잡는 몬스터라고 해도, 이 정도 확률이면 마법사만 데리고 다녀도 엄청나게 벌 수 있을 테니까.” “비요른… 미안하다. 그런 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만지려 해서…….” 그때 돌연 아이나르가 사과를 해왔다. 아니, 변명하는 거에 반응을 안 해줬다고 그새 의기소침한 건가?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그냥 무시하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게, 전리품 감정도 끝났지 않은가. “저… 그러면 이건 누가 가져가죠?” 이제 물건의 주인을 정할 차례다. 귀속 아이템이라는 특성상 내다 파는 것도 불가능하니. “결속 마법만 맺은 상태면 직접 사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죠……?” “지금까지 처치한 마물이 가장 적은 자가 먹는 게 가장 효율적이긴 하겠군.” 아멜리아의 말대로 효율을 생각하면 가장 레벨이 낮은 자가 먹는 게 좋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레벨은 아멜리아가 8, 나와 에르웬, 아이나르가 7인 상황. “아우옌, 지금 네 영격이 몇이지?” “…예? 아, 예! 6입니다……!” 따라서 6레벨인 아우옌에게 먹이고서 토템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진짜 레이드를 할 때는 데리고 다니지도 못할 비전투직에 이 귀한 걸 박을 수는 없지.’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나르, 이건 네가 가져라.” 에르웬은 벨라리오스를 처치한 경험이 있지만, 아이나르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 이걸 나, 나한테? 조, 좋기는 한데! 그래도 비요른 네가 갖는 편이…….” 말했지 않은가, 부적은 한 종류밖에 끼지 못한다고. 암, 장비 칸을 낭비할 수는 없지. 귀속이라 마음대로 빼지도 못하는 건데. “역시 나보다는 네가 갖는 게 맞다. 그러니까 이건 네가 가져라. 아이나르.” “비요르으으으은!!!!” 다행히 아이나르도 기뻐했다. *** 「꽃에 깃든 행운이 아이나르 프넬린에게 스며듭니다.」 *** 강철의 묘를 클리어한 후, 우리는 곧장 짐승의 소굴로 향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곳에 있어야 하는 거냐! 내가 생각한 탐험은 이런 게 아니었다!!” 8일 차까지 죽치며 균열이 열리길 기다렸다. 물론 ‘초심자의 행운’도 있겠다, 나중에 마법사를 데려와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험관 값을 생각하면 가져다 팔아봤자 차익도 얼마 안 되니까.’ 결국 한 탕 할 수 있는 건 수호자의 정수뿐인데, 그건 나오면 에르웬에게 먹일 계획이었기에 굳이 뒤로 미룰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뭐, 결국에는 김칫국 마시는 짓이었지만. “……정말로? 정말 이렇게 시간만 버리고 위로 올라가는 거냐?!!” “원래 다 그런 거니, 그만 투정 부려라.” 실제로 8일 차가 되어 포탈로 향하자, 곳곳에서 중상층 수준의 탐험가 팀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우리처럼 ‘균열런’을 도는 탐험가들이었다. 2층은 7일 차가 지나면 균열이 열리지 않으니, 망설임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3층에 도착한 후에는 강철바위언덕을 지나쳐 오크 군락지로 직행한 뒤 노가다에 치중했다. 이번에 잡을 몬스터는 나와도 인연이 깊었다. 예전에 혼돈의 군주가 소환됐을 당시 드자르위 클랜이 레이드를 하기도 했던 바로 그 몬스터. 바로 오크 히어로였으니까. “오오오! 그럼 [거대화]! 나도 이제 [거대화]를 할 수 있는 건가!!” 이번 동선의 세 번째 타겟을 들은 아이나르는 크게 기뻐했지만, 사실 이번 타겟의 정수는 우리 중 아무도 먹을 사람이 없다. [거대화]는 불사자 각인의 [합일]이 없으면 패널티가 너무 큰 정수로 전락하니까. 그래서 원래 경험치만 챙기거나, 넘버스 아이템 드롭만 노려보고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초심자의 행운까지 있으니 하나쯤은 나올 법도 하단 말이지. 눈뜨고 정수를 버리는 꼴을 볼 수는 없었기에 제단에 바칠 오크 대전사의 마석을 캐면서 만난 마법사들에게 전부 다 말을 걸었다. 덕분에 한 명은 찾을 수 있었다. “시험관……? 물론 하나는 있소이만…….” “잘 됐군. 이따가 정수가 나오면 거기에 하나만 담아줘라. 시험관 값은 바로 그 자리에서 치르지.” “…무슨 소리요? 당신이 누군지 알고서—.” “루이스! 미, 미쳤소? 야, 얀델 남작님이시잖소!” “……!!!” 명성 수치 덕분인지 섭외는 예상보다 수월했다. 또한 도움이 될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3층에서도 균열이 안 열렸다던가? ‘오케이, 이러면 13일 차까지는 3층에서 있다가 출발하면 될 거 같고…….’ 이후로는 다시 마석 캐기 노가다를 시작. 다 같이 흩어져서 사냥을 하니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777개의 마석을 전부 다 모을 수 있었고, 전부 모은 후엔 근처에 있던 마법사를 찾아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혹시나 말하지만, 내가 오기 전까지 절대로 근처에 오지 마라. 정말 만약에라도 오크 로드가 튀어나오면 너희까지 챙길 여력이 없으니까.” “오크 로드라면…….” “2등급 몬스터다.” “2… 2등급!” “그래도 근처에만 안 오면 안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거로 준비는 끝. 마지막으로 오크 로드가 나왔을 때의 대처법만 설명해준 뒤에 마석을 제단에 바쳤다. 「전사의 그릇에 대전사의 혼이 바쳐졌습니다.」 「전사의 그릇에 대전사의 혼이 바쳐졌습니다.」 「전사의 그릇에 대전사의 혼이 바쳐졌…….」 제단 위에 놓는 족족 빛이 되어 사라지는 마석. 「특수 조건 - 차오르는 그릇이 충족됩니다.」 보스전의 시작을 알리듯, 제단 뒤에 서 있던 석상의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부스스스스스스. 다행히 오크 로드의 석상은 그대로였다. 뭐, 오크 로드의 소환 확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확률 싸움만 되면 괜히 긴장이 된단 말이지.’ 마치 한 번의 고비를 넘긴 것만 같은 느낌. “다들 준비해라!” 제단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던 동료들을 향해 외친 즉시. 「고대의 영웅 데니쉬가 깨어납니다.」 「고대의 영웅 벨타가 깨어납니다.」 「고대의 영웅 타루가스가 깨어납니다.」 오크 히어로 삼인방. 통칭, 영웅 삼돌이가 석상을 깨부수고 튀어나오며 곧바로 전투가 시작됐다. [굴-카아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도끼, 망치, 검. 각기 다른 무기를 쥐고서 내게 달려드는 영웅 삼돌이. [초월]에 [거대화]를 연계한 덕에 체급에서 밀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쿠우웅-! 또한, 막지 못해 무기로 처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그냥 뼈가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 솔직히 그냥 처맞기만 하래도 하루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합을 맞춰보기엔 딱이겠네.’ 내가 처맞는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자, 전투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몹시도 당연한 이유였다. 고작 5등급 몬스터 셋.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이놈들의 공략 난이도는 제법 높은 편이니까. [취이이이이익-!!!] 레이드가 시작되자마자 숲에서 쉴 새 없이 몰아닥치기 시작한 7등급 이하의 오크 떼. 콰아앙! 콰앙! 퍼엉-! 브리핑을 했던 대로 아이나르가 열심히 상대하고 있지만, 그 탓에 보스전을 치를 딜러가 한 명 더 빠지고 말았다. 쉽게 말해, 에르웬과 아멜리아 둘이서 세 마리를 다 잡아야 한다는 뜻. 물론 바위사막에서 데쓰웜을 한 방에 터뜨린 전적이 있는 둘이지만……. 「고대의 영웅 데니쉬가 [고뇌]를 시전했습니다.」 얘네는 5등급 몬스터인 주제에 무려 4등급 정수를 가진 상위 변이종이라 말이지. 심지어 셋이 갖고 있는 정수도 전부 다르다. 「고대의 영웅 벨타가 [신성한 전장]을 시전했습니다.」 「고대의 영웅 타루가스가 [수호방패]를 시전했습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하는 형태의 정수 조합.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골때리는 게 하나 더 남아 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데니쉬가 [제어의 대검]을 사용했습니다.」 「원거리 공격의 궤도가 수정됩니다.」 이놈들은 넘버스 아이템을 사용한다. 「오크 주술사가 [열광]을 시전했습니다.」 「데니쉬의 물리내성이 10초간 3배 상승합니다.」 또한, 그 와중에 설령 처맞는다 해도 엄청 감소한 딜로 맞으며……. 「오크 대주술사가 [재생의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타루가스의 자연재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실시간으로 힐까지 받는 등, 일반 필드에서 만난 오크 히어로라면 흉내조차 못 낼 위용을 뽐낸다. 사실상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넘버스 아이템 드롭 가능’ 특성이 없었다면 절대 할 이유가 없는 레이드. “너희 뭣들 하냐! 얼른 안 죽이고!! 아까 그 지렁이는 잘만 죽이지 않았나!” “아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니까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라. 바바리안.” 조금 어려운 상황에 빠지자, 아니나 다를까 불화가 시작됐으나……. 그래도 다들 프로였다. “아이나르 씨! 주술사를 우선적으로 처치해 주실 수 있을까요?” “테르시아. 우선 망치를 든 녀석부터 노려라. 검을 든 놈은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서서히 시간이 지나자 이대로는 답이 없음을 느꼈는지, 서로가 피드백을 해주고 협력하며 기회를 만들어 냈다. “으아아아아아!” 명색이 6레벨인 아우옌도 에르웬의 근처에서 열심히 무기를 휘두르며 잡몹 처리를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의 영웅 벨타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삼돌이 중 하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고, 이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우세로 접어들며 전투가 끝났다. 「고대의 영웅 데니쉬를 처치했습니다.」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고대의 영웅 타루가스를 처치했습니다.」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시간을 확인해 보니 총 소요된 전투 시간은 약 35분. 4인으로 레이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편이었으며……. “아무것도 안 나왔네요. 그 고생을 했는데…….” 전리품은 0개였다. 정수도, 넘버스 아이템도 나오지 않았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이러한 종류의 허탈감은 [던전앤스톤]을 하다 보면 늘상 겪는 일. “좋아, 그럼 마석만 얼른 수거하고 이동하자. 아, 에밀리. 너는 저쪽에 있을 마법사한테도 이만 가봐도 좋다고 말해주고.” 이내 우리는 손수 마석들을 파밍한 후, 그대로 오크 군락지를 벗어났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만……. “아저씨……?” 마녀의 숲 근처에서 머무르며 13일 차까지 균열 생성을 노려보던 때. 이상 전조가 시작됐다. 「오두막에 다섯 번째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오두막에 여섯 번째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오두막에 일곱 번째 제물이 바쳐졌…….」 횃불이 필요 없을 만큼 밝아진 주변. 올려다본 천장에서는 새빨간 광채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특수 조건 - 일곱 명의 제물이 충족됩니다.」 허,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나자빠져도 이빨이 나간다더니. 대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층을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이거 골치 아파졌네. 458화 레이드 (3) [던전앤스톤]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대체로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 능동적인 정수 세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본적인 플레이 방식에서 그렇다.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균열이 열리고, 약탈자를 만나거나 함께하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하는 등. 모든 판에서 그러한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처럼. “아저씨, 이거…….” “그래, 맞다.” 계층군주가 소환됐다. 바꿔 말하면, 3층에 있는 탐험가 중 누군가가 오두막에 사람 시체 일곱을 집어넣었다는 뜻.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분명 의도적으로 소환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진짜 우연인 경우도 있으니까.” 근거는 바로 다름 아닌 나. 옛날의 미샤와 내가 바로 그 케이스였다. 오두막에서의 휴식이 간절해서 시체를 태웠는데, 공교롭게도 먼저 시체를 태운 놈들이 있던 바람에 계층군주가 소환되는 ‘사고’가 발생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얀델, 어쩔 거지?” “우선 숲에서 벗어난다. 어차피 4층으로는 갈 수도 없으니까.”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소환되면 3층의 모든 포탈은 비활성화 상태로 변한다. 쉽게 말해, 3층 전체가 보스방이 되는 셈. “제가 처리할게요.” 화살을 쏠 것도 없이 에르웬이 불의 정령을 이용해 혼돈의 정령 세 마리를 동시에 처치했다. 「혼돈의 정령이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위치가 침식됩니다.」 보스전을 할 때야 타일 관리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리아키스를 사냥할 것도 아니—. [그오오오오오오오오—!!!!] 그때 마녀의 숲쪽에서부터 귀에 익은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좀 아쉬웠다. 이 소리를 다시 들을 땐 이놈과 끝장을 볼 때일 줄 알았건만. “비요른! 이렇게 도망칠 것만 아니라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나?” “그럼 뭐 우리 넷이서 계층군주를 사냥하잔 거냐?” 엄밀히 따지면 아우옌까지 합치면 다섯이지만, 이에 대해선 아무도 사족을 달진 않았다. 그렇다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 숲 경계선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있자니, 낯이 익은 그놈들도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비요른! 저기서 뭔가 기분 나쁘게 생긴 게 기어오는데? 저건 뭐냐?” “혼돈의 정령이다.” 리아키스가 소환되면 3층 전체에 들끓기 시작하는 토큰형 몬스터로 한번 어그로가 끌린 대상을 죽을 때까지 추격한다는 특징이 있다. ‘후, 이 새끼들도 진짜 오랜만이네.’ “비요른,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냐는 뜻이었다. 저번에도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면서?” 확실히… 그랬다고 듣기는 했지. 사고의 책임이 내게도 있었기에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기분이 엿같았었다. “아, 그리고 또! 원래 재난 상황이 벌어지면 상층 탐험가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도 들었다!” 그래, 그 탐험가 서약 말이지. 실제로 당시 3층에 체류 중이던 드자르위 클랜이 저층 탐험가들도 지키려 한 것도 그게 이유였다. 덩치가 큰 클랜들은 아무래도 길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뭐, 그러면서도 손해는 보기 싫은지 코묻은 돈을 뺏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드자르위 클랜이 없었다면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저층 탐험가를 모아 하루 종일 지켜준 것도 모자라, 계층군주가 당도한 후엔 거의 네 시간 동안 홀딩을 했지 않은가. “무, 물론 나는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요른 너라면—.” “아이나르, 진정해라.”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자 아이나르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딘가 잘못한 사람처럼 불안해하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빛에서 새삼 느껴졌다. “…….” 아이나르는 정의롭다. 아이나르가 가차 없는 것은 몬스터와 약탈자뿐.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갖고 대하며, 할 수 있다면 돕고 싶어 한다. 그리고……. “걱정 마라. 나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아니니.” 나는 그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으니까. 베푸는 것이 항상 손해 보는 장사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오! 역시 그랬던 건가!” “그럼 내가 그냥 둘 줄 알았나? 3층에는 우리 동족들도 꽤 있을 텐데?”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초에 동족 문제가 아니라도 사태를 방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성 수치가 얼마인데? 재난 사태에서 혼자 몸을 사렸다는 게 알려지면 여론이 내게서 돌아설 게 분명하다. 따라서……. “오오오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불에 뛰어 들라고 해도 따르겠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켜본다.” “………어?” 우리는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숲을 주시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몹시 간단한 이유였다.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고?” “3층 계층군주는 탐험가 길드에 토벌 허가가 잘 나오지 않으니까. 어쩌면 무허가로 토벌하려는 클랜이 소환한 걸 수도 있다.” “아! 그럼 그놈들이 잡으면 별문제는 없다는 뜻이군!” “그렇지.” 물론 이는 추측일 뿐, 확인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그오오오오오오오-!!] 흉포한 괴성이 울려 퍼지는 숲을 지켜보며 에르웬을 통해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았다. “리아키스가 마녀의 숲 서부로 이동 중이에요. 너무 멀어서 잘 분간되진 않지만, 주변에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모르겠어요. 너무 거리가 멀어서…….” “그럼 좀 더 가까이 가면 되겠군.” 이후 우리는 숲 외곽을 빙 둘러 서부로 이동했고, 에르웬의 경이로운 탐지 능력으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5명 정도예요. 지금은 리아키스에게 쫓기는 듯한 형국이고요.” 글쎄, 쫓기는 게 아니라 사냥할 장소를 고르는 거 같은데. 시야를 가리는 지형지물이 많은 마녀의 숲은 레이드를 뛰기 좋은 환경이 아니니. 나는 그보다 다른 부분에 관심이 쏠렸다. “15명이라…….” 암만 봐도 레이드를 뛸 인원수는 아니다. 뭐, 제대로 각 잡고 공격대를 짜면 못 잡을 건 없겠지만……. “열다섯은 유인조고, 본대는 다른 곳에서 따로 대기 중이라고 보는 게 옳겠군.” “그, 그렇겠죠?” “혹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도 알 수 있나?’ “아뇨. ‘음성제어’ 마법이라도 썼는지,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가 않아요.” “흐음, 그렇군?” 참 아쉬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한시름 덜었다. 만약에 정말로 우연에 겹쳐 재난 상황이 발생한 거라면, 얄짤없이 내가 달려나가 몸으로 때워야 했을 텐—. 투둑, 투둑, 투두둑- 그때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산성이라도 담긴 듯 닿은 것만으로도 피부가 아려오는 흑색의 비. 리아키스의 패시브 오오라 스킬이었다. 「캐릭터가 혼돈 속성의 지속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경고: 혼돈 속성 피해에 지속적으로 노출 시,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혼란]이 부여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놈의 근처까지 도달했다는 뜻. “좀 더 뒤로 가야겠군.” 신관이 없는 우리로서는 이 패시브 스킬에 저항할 방법이 없기에 비가 내리는 경계선을 따라 거리를 조절했다. 그로부터 또 얼마나 흘렀을까. “곧 숲 밖으로 나올 거예요!” 빛을 빨아들이는 미궁의 어둠이 사라진 3층. 에르웬이나 아멜리아처럼 탁월한 시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저 멀리서 열댓 명의 탐험가가 무리를 지어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쿠웅-! 쿠웅-! 쿠웅-! 아, 물론 뒤로는 거대한 괴수가 추격하고 있었다. “에르웬, 얼른 확인해 봐라. 어디 클랜이지?” “…문양이 없어요.” 허, 앰블럼을 다 떼고 온 거야? 하긴 무허가 토벌을 하는 놈들이니. 전력으로 내달리던 그들은 리아키스를 데리고서 빠르게 멀어졌고, 이에 아멜리아가 내게 물었다. “얀델, 이제 어쩔 거지?” “따라간다.” “이유는?” “놈들이 실패하면 진짜 재난이니까.” 게다가 또 모르잖아? 우리가 숟가락을 올릴 상황이 생길지. *** 유인조로 추정되는 그룹을 뒤따라 도착한 곳은 ‘가시갈대 밭’이었다. ‘하긴 여기가 정석이긴 하지.’ 지형지물도 없고, 땅도 평평하며 지형도 넓어서 타일 관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필드. 준비 작업까지 다 해뒀는지 어깨까지 올라오는 가시갈대들은 전부 불에 타 제거된 상태였는데……. “아저씨, 저기 본대가 있—.” 갑자기 잘 듣고 있던 라디오가 끊겼다. “무슨 일이지?” “저쪽에서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어요. 지금은 한 명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고요.” “거리를 벌리면, 벌릴 수 있나?” “…모두 다 같이는 힘들 거 같아요. 아무래도 저쪽은 한 명인 터라.” 흠, 그렇단 말이지. 덕분에 고민할 이유조차 사라졌기에 나는 얼른 결정을 내렸다.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하러 도망가? 애초에 나도 궁금했다. 구조상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무허가 토벌을 벌인 게 대체 어떤 놈들인지. “왔군.” 머지않아 다 타버린 갈대밭 너머로 이쪽을 향해 쏜살처럼 달려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점처럼 보였다. 점이 커져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툭. 약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멈춰 선 사내. 허리띠에 달린 단검만 무려 일곱 개인 것이 딱 봐도 매우 민첩하게 생겼다. “…….” “…….”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싹 굳어지더니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입을 먼저 연 것은 내쪽이었다. “왜 말이 없나? 방금까진 부리나케 뛰어오더니.” “……이런 곳에서 유명인사를 만나는구려.” 아, 그래서였구나.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이유가. “만나서 영광이외다. 얀델 남작. 설마 남작 각하 같은 거물이 3층에 있을 줄은 몰랐—.” “됐고, 그래서 너는 누구지?” 말을 끊으며 되묻자,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말리드 케브론이라 하외다.” 본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사내. 줄여서 단검잽이에게 나는 추가 질문을 던졌다. “소속 클랜은?” “…저희는 톱니이빨 클랜이옵니다.” “톱니이빨이라…….” 전쟁통에 열 개에서 네 개로 줄어든 초대형 클랜 중 하나이자, 제임스 칼라가 부단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던 바로 그 클랜. “재밌군.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너희가 3층에 있던 게 더 신기한 일 같지 않나?” 피식 웃으며 그리 묻자, 단검잽이가 당돌하게 되물었다. “저희야 사정이 있던지라. 한데 혹시 계층군주를 소환한 게 남작이시옵니까?” 정말이지 판단력이 남다른 놈이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겁도 없이 선수를 칠 줄이야. “나는 아니다.” “그렇습니까.” “근데 반대로 너희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저희는 정말로 아니옵니다.” “리아키스를 데리고 이동하던 자들은 너희와 관계가 없다는 뜻인가?” “그들은 저희의 일원이 맞습니다. 하오나 저희는 단지 근처에 있었기에 서약에 따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어이구, 말은 잘해. “그럼 잘됐군. 지금부터는 우리도 돕겠다.” 이내 내가 슬쩍 숟가락을 내밀자, 단검잽이의 입가가 차갑게 굳었다. “…손길을 먼저 내미신 것은 참으로 감사하나, 남작 각하의 귀한 손을 쓰실 필요는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흐음, 어째서?” “이런 위험한 일은 탐험가들이 하는 게 알맞지 않겠습니까.” 허, 귀족이 됐다고 같은 직종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건가? 순간 망치로 정수리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겨우 겨우 참아냈—. “다른 각하들께서도 남작 각하의 행동으로 인해 귀족가의 위신이 깎이는 일은 원치 않으실 겁니다.” “…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다른 각하라면… 혹시 알미너스 백작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 톱니이빨 클랜의 후원자들 중 하나인?” 나는 확인차 다시 물었고, 녀석은 뻔뻔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그래, 내가 제대로 이해했던 거구나. 더 이상 점잖은 대화를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뭐?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다면 욕심을 부리지 마?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예? 잘못 들었습니다?” 뭘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한 신병처럼 얼어버린 단검잽이를 보며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야, 단검.” “…예?” “혹시 네 머리 안에는 고블린 똥이 들어 있나?” “예? 그, 그게 무슨 마, 말씀이시온지……?” 아니, 그렇잖아. 아까부터 꼴값 떠는 그 말투도 그렇고. 지금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자꾸 뒤로 멀어지는 것도 그렇고. “뭐, 열어보면 알겠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슬그머니, 나는 망치를 들어 올렸다. 459화 레이드 (4) 망치를 들어 올린 즉시, [초월]과 [폭풍의 눈]을 연계해 단검잽이를 끌어당겼다. 솨아아아아아-! 기습이 유효했는지, 맥없이 끌려오는 멸치 같은 몸뚱이. “……!” 앞으로 뻗은 손에 여리한 목이 촥하고 감긴다. 그 순간,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얀델.”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설마 내가 진짜 죽여 버릴 거라 생각한 거라면, 살짝 서운하다. 고작 이런 거로 머리통을 부술 리가 없지 않나. 내가 진짜 야만인도 아니고. 꽈악. 이건 단지 퍼포먼스일 뿐이다. 조금은, 감정이 담긴. “아저씨, 거의 다 왔어요.” 예상대로 이놈의 모가지를 움켜쥐기 무섭게 저 멀리서 탐험가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이 내 앞에 당도하기까지는 정말 잠깐이면 충분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얀델 남작!” 그들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딱히 놀랍진 않았다. 뭐, 메시지 스톤 같은 거로 이쪽 대화를 전해 듣고 있던가 했던 거겠지. “커헉……!” 손아귀에 힘을 더 불어넣자 단검의 몸부림이 보다 심해졌다. “당장 그 손을 놓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무리 당신이 귀족이라도 선은 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죄 없는 탐험가를 해치려 하다니, 이런 짓이 용납될 것 같으십니까?” 녀석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첫째로, 허가도 없이 계층군주를 소환한 놈들이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둘째. “왜 이놈이 죄가 없지?’ 나는 똑똑히 들리도록 말했다. “이 녀석은 반역자다. 감히 라프도니아의 작위 귀족을 협박하고 능멸했다는, 아주 무엄한 짓을 겁도 없이 저지른!” “그,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이 친구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뭐? 지금, 너도 날 능멸하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단검잽이의 몸부림은 계속해서 심해졌다. “커흡, 으읍, 윽……!” 제법 인내심이 강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팔을 쑤실 법도 한데. ‘그랬다간 일이 더 커진다는 걸 아는 거겠지.’ “이, 일단 그 손부터 놓고 얘기합시다.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니, 대화를 하다 보면—.” 더 몰아붙여봤자 이놈이 날 공격할 거 같지는 않기에, 휙하고 던져서 동료들에게로 보내줬다. “부, 부단장! 괜찮습니까?” 허… 얘가 부단장이었구나. 제임스 칼라가 해임된 다음에 올라갔다던. ‘…어쩐지 끝까지 버티더니만.’ 클랜을 위한 책임감은 인상 깊지만, 그렇다고 이놈을 비롯해 톱니이빨이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 그럼 말해봐라. 대체 어느 부분이 오해였던 건지.” 손을 놓으라고 소리치던 사내가 뭐라 답하려 했으나, 단검잽이가 그의 입을 막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얀델 남작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일체의 변명도 없이 사죄를 구했다. “알미너스 백작 각하를 언급한 것은 명백히 저의 실수입니다.” 정말로 눈치가 비상한 놈이었다. 어찌 된 게 깔아둔 지뢰를 전부 최적의 방법으로 피하고 있다 해야 하나? “만약 징벌을 원하신다면, 추후 도시로 돌아가 달게 받겠나이다.” 이렇게 되면, 더 뭐라 하는 것도 이상해진다. 내 면전에 대고 욕을 박은 것도 아니고, 애초에 협박이라는 것도 사실 돌려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 명분으로는 ‘모즐란’에 집행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도시로 가면 알미너스 백작의 입김도 닿을 테고 말이지.’ 그때가 되면 오히려 내가 별것도 아닌 일로 목을 조르며 겁박한 것이 공격받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그럼 아직도 같은 생각인가?” 사과를 받는 걸 보류한 채 다시금 묻는다. 그야 내가 바랐던 건 ‘사과’나 ‘징벌’이 아니니까. “나 역시 한 사람의 탐험가로서 이러한 사고가 최대한 빨리 해결되도록 ‘기여’하려는데.” “…그렇군요.” “아직도 그걸 막을 생각인가?’ 단검잽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추후 사고의 해결이 끝났을 때는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쉽게 말해, 전리품 분배는 어쩔 거냐는 뜻. “피차 탐험가들 아니냐? 공평하게 주사위를 굴려야지.” “…역시 그렇습니까.” 한숨을 내쉬듯 호흡을 가다듬던 단검잽이가 이내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저희는 빠지겠나이다.” “…뭐?” “합이 맞지 않는 동료는 적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지요. 한데, 얀델 남작님의 개입을 막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분명 함께 저 사악한 마물과 싸우다간 손발이 꼬여 큰 손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발을 빼겠다?” “예. 영웅이라 불리우는 얀델 남작 각하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요.” 허, 이 새끼 보소. “저희는 앞으로 3층에 잔류 중인 다른 저층 탐험가들을 돕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하겠나이다.” 해석하자면, 남이 숟가락을 올릴 바에 밥상을 뒤집어 엎어 버리겠다는 뜻인데……. ‘밥상 한번 철석같이 지키는 거 보소.’ 문제는 내가 그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다. 오늘날의 일이 밖에 알려지면 내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이들이 발을 뺐고, 그로 인해 피해의 규모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니, 반드시 그리 되도록 여론전을 펼치겠지.’ “어쩌시겠나이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리아키스는 너희에게 맡기겠다.” 숟가락을 못 걸친 건 아쉽지만 뭐 어쩌겠어. 일단 보스는 최대한 빨리 잡고 봐야지. 내버려 두면 얼마나 죽을지 모르는데.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이군요.” 어서 본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단검잽이를 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라.” “……?” “만약 실패한다면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내가 돕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한 건 너희였으니까.” 대답은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돌아왔다. “……명심하지요.” 거, 딱 봐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 계층군주 건이 마무리 된 후, 나는 미련 없이 갈대밭을 떠났다. 그야 지켜봐서 뭐 하겠는가.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근원의 힘을 끌어당깁니다.」 리아키스가 구슬을 다 처먹고 즉사기라도 쓰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한다. 즉사기 장판에서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혹여나 우리 중 한 명이 ‘먹잇감’으로 지정될 수도 있으니까. ‘또 그렇게 되면 실패했을 때도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고.’ 암, 이왕 이렇게 된 거 깔끔하게 발을 빼는 게 몇 번이고 옳다. “비요른!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냐?” “어디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응?” “딱 보니까 공략이 더 길어질 거 같아서 말이지.” 내가 그리 말하자, 아멜리아가 관심을 보이며 대화에 껴들었다. “흐음, 그리 추정할 근거가 있었나?” “첫 번째는 날짜다.” “날짜?” “그래, 금방 잡을 수 있는 전력이면 13일차도 되기 전에 소환을 했을 리 없으니까.” 명색이 무허가 토벌 아닌가. 미궁이 폐쇄되기 전에 소환하고 재빨리 잡고 튀는 게 가장 베스트다. 한데 그럼에도 넉넉히 시간을 뒀다? 장기전을 염두에 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 두 번째는?” “허리띠에 정화의 횃불이 달려 있더군.” “정화의 횃불이라면… 그걸 말하는 거군. 8천번 대의 넘버스 아이템.” 정확히는 No.8645지만 아무튼. 공략대원 모두가 지니고 있다면, 리아키스의 2페이즈를 공짜로 넘길 수 있게 된다. “근데, 그게 왜 문제지?” “그 물건을 쓰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난이도 자체는 전반적으로 낮아지지만, 최대한 빨리 처치하고자 한다면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아이템 중 하나…….” 너무 떠들었나 싶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라고 책에서 읽었다.” “오오오! 대단하다!” 다행히 아이나르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항상 이런 느낌이다보니 오히려 경계하지 않게 된단 말이지. “크흠흠… 아무튼! 어쩌면 폐쇄일 직전까지 이 상태가 유지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사람들을 구해보잔 말이었는데, 다들 괜찮나?” “물론이다!” “확실히… 가장 위험한 계층군주는 저 사람들이 붙잡아두고 있다 해도, 이 상태가 길어지면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도 나올 테니까요. 저는 좋아요.” “어차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나도 상관없다만……. 이미 정했으면서 우리 의사를 굳이 묻는 건 어째서지?” “절차다, 절차!” 오케이, 그럼 의견은 일치했고. “…저, 저도 찬성입니다!” 이내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만나는 족족 탐험가들이 날 알아보고 도움을 청해왔다. 그중엔 혼돈의 정령쯤은 남은 시일 동안 문제없이 해결할 능력자들도 상당했으나……. 예외는 없었다. “야, 얀델 남작이다!” “거인 비요른 얀델……!” “사, 살았어!” 하긴 얘네들은 리아키스가 3층을 배회 중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공포심이 상당했겠지. “바,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오오! 부족장이다!!! 부족장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 그렇게 약 8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녔더니 어느덧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따라서 나는 적당한 곳에 주둔지를 만들었다. 이만한 인원을 데리고 계속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데……. “전사들아, 나를 좀 도울 수 있겠나?” “물론이다!!! 시켜만 줘라!!” 다만 주둔지 전체를 커버하기엔 인원이 부족해서 바바리안 전사들에게 외곽 경비 임무를 맡겼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남작님! 저희도 뭔가 돕고 싶습니다! 할 일이 없겠습니까?” “저도요! 돕고 싶습니다!” 다른 탐험가들도 지원을 해오며 순식간에 교대 근무식 자동 방어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러면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없겠는데?’ 리아키스가 우리 앞에 당도하지 않는 이상, 현재 인원만으로도 디펜스는 충분하다 판단한 나는 에르웬과 아멜리아를 밖으로 출장을 보냈다. “에르웬, 에밀리. 부탁해도 되겠나?” “네! 저만 믿으세요!” “……너와 있으면 항상 귀찮은 일을 하게 되는 거 같단 말이지.” 이 둘의 임무는 단 하나. 주둔지 바깥을 돌아다니며 낙오되거나, 고립된 탐험가들을 안전한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 “비요른! 나는? 나는 뭘 하면 되나!” 안타깝지만, 혼자 길을 찾아 돌아올 능력이 없는 아이나르에겐 쉘터의 경비대장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13일차, 14일차…….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폐쇄일이 되었다. *** “아저씨, 저 왔어요!” 잠깐 눈을 붙였다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에르웬의 호박색 눈이었다. “고생 많았다. 이번엔 몇 명이나 데려왔지?” “서른한 명이요. 제법 멀리까지 수색했는데, 이제 근방에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렇군. 쉬고 있어라.” “네.” “……쉰다면서?” “옆에 있는 게 쉬는 건데요?” “…….” 뭐라 할 말이 없기에 우선 시간을 확인했다. [04 : 01] 미궁 폐쇄까지 약 18시간이 남은 시각. 불안에 떨던 저층 탐험가들도 서서히 여유를 되찾은 것이 보인다. 하긴, 천 명에 달하는 탐험가들이 모여 쉘터를 만들고 서로 의지하고 있으니 안심이 되겠지. 정작 나는 점점 초조해지고 있건만. ‘아직도 레이드 중이라…….’ 불안의 원인은 역시나 계층군주다. 장기전을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아직까지도 해결을 못할 줄은 몰랐으니까. ‘몇 시간 전에 혼돈의 정령이 사라진 걸 보면 제일 오래 걸리는 2페이즈도 끝난 건 확실한데…….’ 하면 레이드는 어떻게 됐을까? 놈들이 짜증나는 것과 별개로 순탄하게 진행됐길 바란다. 만약 놈들이 실패했고, 리아키스가 3페이즈에 돌입한 상태로 배회하고 있다면 끔찍한 일이 될 테니. “후우…….” 정말로 어떻게 됐으려나. 답답한 마음에 바람을 쐬듯 쉘터를 한 바퀴 쭉 돌며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딱히 문제랄 것은 없었다. 뭐, 혼돈의 정령도 더 이상 출현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 순찰을 끝낸 뒤에는 오랜만에 팀 전원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때의 시간이 오전 6시 30분. 쿠웅-! 땅에서 느껴진 진동에 우리는 식사를 하던 채로 돌처럼 굳었다. “비요른, 방금 그거…….” [그오오오오오오오-!] 니미럴. “계, 계층군주다…….” “놈이 왔어…….” “저, 저번엔 고작 하루 만에 수백 명이 넘게 죽었다던데…….” 순식간에 군중을 타고 전염되는 공포와 혼란. 벌떡 일어나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해라!!” “…….” 후, 이제 좀 낫네. 이내 [거대화]까지 사용해 멀리서도 쉽게 볼 수 있게 해주자,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수백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서둘러 정보를 확인했다. “에르웬, 놈이 이리로 향하고 있나?” “…아니요.” 그래? 그건 그나마 좀 다행이네. “…….”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나는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사내의 이름을 호명했다. “루이스 시유르!” 오크 군락지에서 만났던 마법사였다. “…예? 저, 저는 왜…….” “지금부터는 네가 이곳의 책임자다.” “…예, 예에에에??” 나중에 계층군주가 소환되고서 우연히 만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는데, 제법 똘똘하더란 말이지. “그러니까 네가 이곳 사람들을 인솔해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라.” “그, 그럼 남작님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놈을 막아야지.” “예, 예에? 하, 하지만 테르시아 님께선 놈이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그냥 두라는 거냐?” 3층에 있는 저층 탐험가는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몇 배는 될 숫자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최소 2페이즈가 끝난 게 확실한 놈이 본격적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 “남작님께서는…….”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해라.” “정말로… 들었던 그대로의 사람이군요…….” 뭐래. “잘 하겠단 뜻으로 듣지.” 망치를 챙겨 에르웬이 말한 방향으로 향하자 동료들이 얼른 뒤로 따라붙었다. 터벅, 터벅.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조금은 다급한 걸음. 그것이 이어질수록, 내가 걸어가는 경로에 있던 저층 탐험가들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넓게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길…….” 우리를 향해 조용히 목례했다. 거, 누가 죽으러 가기라도 하나? “루이스! 뭐 하냐! 어서 데리고 가지 않고!” 책임자 자리를 물려준 마법사에게 말했으나, 녀석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목례를 올릴 뿐. “…….” 왠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속도를 좀 더 올렸다. 아멜리아가 창피해하는 거냐며 나를 비웃었다.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내가 왜 저걸 부담스럽게 여겨야 하지? 그래, 저층 탐험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상층 탐험가가 어디 있어? 그것도 심지어 작위 귀족이. ‘암, 이 정도면 존경의 의미를 담아 목례쯤은 해줄 수도 있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터벅, 터벅. 이내 쉘터 밖으로 나온 우리는 속도를 올려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조금 후회가 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억지를 부려서라도 개입을 했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게, 1페이즈의 계층군주라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홀딩하는 게 가능하다. 막말로 ‘먹잇감’ 지정을 당한 뒤에 폐쇄일까지 마라톤만 해도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3페이즈부터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이번 탐사는 좀 널널하게 하는가 싶었더니만.’ 물론, 아이스록에서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요소가 없는 건 아니니까. ‘3페이즈일까, 4페이즈일까.’ 3페이즈라면 손쓸 도리도 없이, 그저 움직이는 고기방패가 되어 부리나케 뛰어다녀야 하겠지만. ‘4페이즈였으면 좋겠는데.’ 만약 놈들이 마지막 페이즈까지 간 상태에서 공략에 실패한 것이라면—. [그오오오오오오오오-!!!] 이내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리아키스를 보며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씨익 미소 지었다. ‘배가 아주 홀쭉해져 있네.’ 그래, 이러면 해볼 만하지. “다들 준비해라.” “…막기만 하겠다더니, 싸울 생각인가?” 그치만, 막타를 어떻게 참아? 460화 레이드 (5) 계층군주. 미궁의 각 계층마다 특정 소환 조건이 충족됐을 때 등장하는 일종의 필드 보스. 보통 7층 균열을 안정적으로 돌 수 있는 스펙이 갖춰졌을 때나 시도해 볼 수 있기에 균열 윗단계의 상위 레이드로 분류된다. 적어도 일단 5층 군주까지는 그렇다. 공략 난이도가 확 뛰기 시작하는 6층 이상의 계층군주부턴 ‘최상위 레이드’에 속하며, 여기부턴 그냥 엔드콘텐츠라 봐도 무방하니까. ‘그런데 사실상 첫 레이드가 계층군주라니.’ 클리어 기준, 4층의 ‘도플갱어 숲’이 가장 윗급의 레이드였단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현재 전투 가능 인원은 네 명이지 않나. 공격대 단위는커녕 풀파티도 못 되는 숫자. 하지만……. ‘3등급 정수가 몇 개인데, 막타를 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멀리서 리아키스를 확인한 즉시 판단이 끝났다. 이건 욕심을 부려봐도 될 정도가 아니라,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멍청한 정도인 데다가……. ‘그때 했던 약속도 있고.’ 중2병 같지만, 나 스스로와 한 약속이었다. 만약 다음에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오오오오오오—!!!!!] 그땐 다를 것이라고. “얀델,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지?” “아,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열심히 때려라.” “그게… 전부인가?” 간단명료한 오더를 들은 아멜리아는 미친놈을 보듯이 날 쳐다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리아키스의 4페이즈는 원래 그런 식이니까. 딱히 공략에 있어 묘수랄 게 없다. 단지, 정공법으로 찍어눌러야 할 뿐.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생명의 근원을 감지합니다.」 이내 놈의 반경 안에 들어서자, 놈이 저 네 발로 열심히 뛰는 걸 멈추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오오오오오오오-!] 흉포한 하울링을 내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든다. 1페이즈 때와는 발소리부터가 달랐다. 타닷, 타닷, 타닷-! 여전히 묵직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훨씬 가볍고 빠른 걸음. 당연히 그만큼 뛰는 속도도 비교가 불가하다. 그야 4페이즈의 컨셉은 ‘민첩’이니까. “다들 뒤로 물러나라.” 동료들을 뒤로 보내고 [초월]과 [거대화]를 연계했다. 「근력에 비례해 체격이 커집니다.」 비대한 몸집을 뽐내던 1페이즈 때였다면 턱도 없었겠으나,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지금에는 대충 사이즈가 맞았다. [거대화]의 여러 장점 중 하나였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캐릭터에게 큰 위협을 느낍니다.」 ‘위협’ 수치가 크게 증가하며 레이드를 할 때 어그로가 확실하게 끌리거든. 그야 이놈이 언제 만나봤겠어. 자기랑 눈높이가 비슷한 사냥감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을 시전해 안 그래도 높은 위협 수치를 한 번 더 뻥튀기시키며 달려들었다. 이름하여 자이언트 실드 차지. 콰아앙-! 방패를 든 거대 바바리안과 거대 괴수가 중간 지점에서 격돌하며 굉음이 피어난다. 지이익. 애석하게도 근력에서 밀리는 건 나였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군주 새끼들 기본 스탯에 양심이 없던 게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퍼억-! [휘두르기]까지 시전해 망치로 후려쳤으나, 놈은 정말 말 그대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턱주가리를 맞았으니 경직 증세가 올 법도 한데. 즉시 앞발을 휘둘러 응징해 오는 녀석. [키야아아악!] 4페이즈라 공속이 무시무시했기에 나로서는 미처 피할 도리가 없었다. 뭐, 피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퍼억-! 몸이 튼튼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지. 내 망치질이 너한테 타격이 없듯이, 나도 너한테 맞아도 딱히 아프지 않—. ‘……근데 왜 자꾸 눈앞이 빙빙 돌지?’ 딜량 확인을 끝낸 즉시 나는 판단을 재고했다. 내성 수치가 부족해 머리가 그대로 뜯겨져 나가거나, 발톱에 넝마가 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나…… ‘……머리는 안 되겠네.’ 충격이 뇌로 전해지니 몸이 휘청거린다. 중학생 때 체육 선생님한테 전력으로 싸대기를 맞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비요른!!” 주마등처럼 떠오른 어린시절의 기억은 서둘러 던져버리고서 현재에 집중했다. 후웅-! 안 그래도 놈이 다시 한번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앙-! 이번엔 다행히 제때 방패로 막아냈다. 또한 때마침 딜러들도 진형 구축을 끝마쳤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분신체와 함께 좌우에서 달려드는 아멜리아. 서걱- 자원을 아낄 생각은 없는지 시작부터 [심연의 힘]을 활성화한 채 리아키스의 발목, 허벅지 등 하체 위주로 공략을 시작해 나갔다. 또한, 그와 동시에. 「아이나르 프넬린이 [거듭베기]를 시전했습니다.」 높이 점프한 아이나르가 놈의 어깨에 대검을 내리쳤다. 다만 평소처럼의 폭발음은 없었다. 그야 지금은 잡몹들을 양학하는 게 아니니까. 「아이나르 프넬린이 [야성제어]를 시전했습니다.」 [야성제어]. 왕가 보상을 뭘 받을지 고민하던 아이나르에게 내가 예전에 추천해 줬던 바로 그 정수. 이 스킬의 효과는 매우 간단하다. 「다음 공격의 조건부 발동 효과가 모두 절삭력으로 변환됩니다.」 [폭발의 상흔], [맨들기름], [잔열]. 총 세 개의 조건부 스킬의 피해량이 절삭력으로 변환된다. 쉽게 말해……. 서걱-! 레이드 모드와 사냥 모드가 자유롭게 스왑이 된다는 뜻. 물론 그렇다고 치명타까지 이어졌단 건 아니다. 두꺼운 가죽을 베어내고 석유처럼 새까만 피가 몇 방울 흐른 정도. [그오오오오오오-!] 오러 유저인 아멜리아야 예상했지만, 아이나르의 딜도 생각보다 잘 박히고 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에르웬뿐인데…….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얘야 말할 것도 없겠지. “아저씨, 피하세요!” 에르웬과 한두 번 합을 맞춰본 게 아니기에, 그 말이 들린 즉시 옆으로 물러나며 각도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 줄기의 형태를 한 섬광이 쏘아진다. 즈웅-! 압축된 듯한 파공음이 들려온 건 그다음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흩날리는 빛무리 너머. [끄오오오오오오오-!!!] 괴로운 듯 울부짖는 놈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에르웬의 공격 역시 치명타로 여기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랐지만. ‘이야, 한 방에 이마 껍질이 깨지네.’ 딜은 충분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오염된 뿔]을 시전했습니다.」 레이드는 지금부터다. ***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이놈의 1페이즈는 간단하다. 패시브 오오라인 [절망의 비]와 혼돈의 정령으로 인한 필드 침식으로 지속 피해를 입히며, 침식된 땅에서는 주기적으로 구슬이 나오며 리아키스의 체력을 회복시킨다. 이때 조심할 건 단 하나다. [악의 틈새] 구슬을 일정량 이상 처먹으면 쓰는 즉사기. 파해법은 쉬운 편이다. 그냥 장판 밖으로 도망치면 된다. 문제는 장판을 벗어나면 지정된 ‘먹잇감’이 행동불가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지만. 이때 리아키스는 ‘먹잇감’에게 어그로가 끌리게 되는데, 만약 ‘먹잇감’을 처치하는 데 성공할 시 기본 스탯이 상승하며 다음 페이즈의 난이도가 상승한다. ‘뭐, 그래도 이것만 빼면 육탄 전투가 끝이라서 쉬운 편이긴 하지만.’ 본격전인 레이드는 2페이즈부터다. 일정 체력 이하로 내려가면 리아키스는 위협을 느끼고서 [혼돈의 문]을 열어서 그 안으로 모두를 빨아들인다. 모든 타일의 영구적인 침식. 높은 레벨의 정신 오염. 플레이어는 그런 최악의 필드에서 리아키스를 추적해 찾아내고서, 수많은 전투 보정으로 떡칠한 놈을 상대해야 한다. 사실상 페이즈만 놓고 보면 가장 어려운 지점. 다만, ‘정화의 횃불’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횃불을 켜두고서 버티면 되니까. 게임 시간으로 이틀이 지나면, [혼돈의 문]이 다시 열리며 원래 필드로 돌아온다. ‘정화의 횃불을 사람 숫자만큼 구하는 게 좀 까다롭긴 해도, 그게 더 쉬운 길이니까.’ 물론 이 공략법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날먹으로 3페이즈로 갈 시, 리아키스는 피를 모두 채운 것도 모자라 훨씬 더 강해져 있다. 뭐, 그래도 횃불을 쓰는 게 훨씬 이득이라서 나도 거의 대부분 횃불을 썼지만. 아무튼. 3페이즈가 되면, 3층에는 혼돈의 정령이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절망의 비]가 강화된다. 비에 노출된 지역은 금방 침식 지대로 변하며, 모든 장비를 먹통으로 만든다. 미궁이 닫힐 때까지 넘버스 아이템은 완전히 그 효과를 잃고, 아다만티움 갑옷은 평범한 철제 장비 수준으로 방어력이 급감한다. ‘아마… 톱니이빨 걔네들도 여기서부터 망하기 시작했겠지.’ 더 이상 횃불을 이용한 정신 면역은 쓸 수 없다. 그 상황에서 더 강해진 리아키스와 싸워야 한다. 내 예상에 따르면, 여기서 톱니이빨 클랜이 택한 공략법은 차륜전이었다. 어그로 관리를 하며 착실히 피를 깎아나갔겠지. ‘그게 아니면 3페이즈가 시작된 지 6시간이나 지나서 얘가 싸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리 없으니까.’ 다만, 정확히 어떻게 레이드가 실패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다. 분명 어디선가 사고가 발생했겠지. [던전 앤 스톤]은 그런 게임이니까. 단 한 번의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아 버리는 그런 게임. ‘그래도 결국 4페이즈까지 끌고 온 걸 보면 나름 열심히 준비는 해왔던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내게만 좋은 일이 됐다. 4페이즈에서 가장 까다로운 점이 장비빨을 못 받는다는 것데, 우리는 그런 패널티도 없지 않은가? ‘이걸 보고서 어떻게 그냥 지나가.’ 이건 거의 먹으라고 떠넘겨준 수준 아닌가. 후에 배탈이 나더라도 일단 먹고 봐야 한다. 정수가 뜰지 안 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나온다면 앞으로 미친 듯이 편해질 테니까. 콰아아앙-! 어느덧 30분이 넘게 이어진 혈전. 에르웬의 화살이 리아키스의 왼쪽 눈알에 깊이 파고들었다.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오염된 왼쪽 눈알]을 시전했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제 눈알 두 짝 다 깐 건가? 후우우웅-! 눈두덩이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검은 연기. 그리고 그 너머에서 빛나는 섬뜩한 안광. […….] 놈은 더 이상 살이 꿰뚫리고, 눈알이 터져나가도 신음성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마치 점점 더 생명체가 아니게 되듯이. ‘발톱이 다시 자라났을 때니까… 오염된 신체가 한 일곱 개쯤 됐을 때였지?’ 4페이즈의 컨셉은 간단하다. 계속 때리다 보면 리아키스는 오염된 신체를 꺼내며 회복하며 이전보다 조금씩 더 강해진다. 그리고……. ‘이제 열하나.’ 앞으로 한 방만 더 먹이면 된다. 오염 가능한 36개의 신체 중 12개가 오염되면 레이드는 종료니까. “다들 뒤로 물러나라!” 서둘러 팀원들을 뒤로 보내기 무섭게, 녀석이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오염된 힘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명색이 보스라면 응당 하나씩은 갖고 있다는 광폭 패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순례자를 위한 가호.」 「혼돈 속에 감춰진 미지의 기운이 오염된 힘을 정화하기 시작합니다.」 리아키스가 오염된 신체를 정화하고 원상태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5분. 그 안에 반드시 한 파츠를 더 오염시켜야 한—. “아, 아저씨!” 그때 에르웬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뭐지? 이 시점에 뒤에서 위급할 일은 달리 없을 텐데……. “수,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빠르게!” “뭐?” 수십 명이라니, 대체 누구지? 설마 쉘터에 있던 우리 바바리안들이 내가 걱정이 된다고 멋대로 찾아온 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톱니이빨 클랜인 거 같아요!” 암, 세상이 그렇게 따뜻하게 돌아갈 리가 없지. “뭐?! 그놈들은 실패한 거 아니었나?” 아이나르가 당황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도 그럴 게, 수십 명이라니? 그만큼이나 인원이 있으면 리아키스는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던 건데? 설마 레이드가 실패했던 게 아니었던 건가? 온갖 의문이 정리되지 못한 채 아른거린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놈들이 여기로 오고 있다라…….’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부정적인 변수다. 그야 입장을 바꿔보면 쉽지 않은가. ‘하필 막타만 남은 때에…….’ 놈들은 우리가 막타 치는 걸 절대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변하는 건 없어.’ 「정화율 1%.」 리아키스의 완전 회복까지 남은 약 10분. 그게 더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자. 단순하고도 용맹한 바바리안답게.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아, 아저씨?” “뭣들 하냐! 얼른 해치워라!!”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니까. 461화 증명 (1) 광폭 패턴의 시간제한은 약 10분. 그 시간이 지나면 리아키스는 순식간에 몸을 회복시키며 플레어이가 한 모든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다만, 10분은 꽤 합리적인 시간이었다. 적어도 이보다 더한 불합리한 상황이 가득한 [던전 앤 스톤] 기준으로는. 「정화율 3%.」 10분 안에 딱 한 방만 더 제대로 먹이면 된다. 그러면 추가 패턴이나 페이즈 없이 보스전이 아예 끝난다. 그래서 나도 조급해하지 않고 최대한 안전에 신경을 쓰며 막바지 작업을 해나가려 했다. 하지만……. 즈웅-! 풀차징을 해서 쏘아낸 에르웬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양쪽 눈알이 전부 업그레이드돼서 그런가? 방금 뭔가 보고서 피했다는 느낌이었는데……. […….] 아오, 제발 그냥 좀 죽어줬으면 좋겠다. 이제 정말 시간도 없는데. 「정화율 7%.」 공방이 이어질수록 조급함이 커진다. 한데, 그런 기분인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까? “에르웬! 거따 화살을 쏘면 어떡하냐!!” “불만이면 직접 어떻게든 해 보든가요!”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습관적으로 원딜을 탓하던 아이나르가 함성을 내지르며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어깨에 올라타 뒷덜미 부분에 대검을 내리쳤다. 서걱-! 여전히 깊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나르는 평소와 다르게 욕심을 냈다. 후웅-! 어깨 위에서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뽑아낸 대검을 한 번 더 내리치는 아이나르. 다만, 공격은 유효타로 이어지지 못했다. “…우억!!” 촉수처럼 아이나르의 허리를 감싸며 가볍게 위로 들어올리는 꼬리. 그래도 다행히 근처에 있던 아멜리아가 서둘러 단검을 휘둘러 아이나르를 구출해냈다. “으, 으억! …고, 고맙—.” “차분해져라, 바바리안. 적어도 전투 중에는.” “으으… 미안하다!” “나중에 저 아이에게도 제대로 사과하고. 얀델 다음으로 많이 기여를 한 아이니까.” “……에르웬! 미안하다! 못 맞혔다고 구박해서!” “…어차피 신경도 안 썼어요.” 아멜리아가 아이나르를 꾸짖고, 그런 아이나르의 사과를 에르웬이 멋쩍어하며 받아주는 훈훈한 광경. 팀장 입장에서도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었다. 다만, 왜 전투 중에 저러고 있는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시간이 빡빡한 와중이건만. “그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때려라!” 약간의 짜증을 담아 소리치자, 얘네도 조금은 정신을 차렸는지 대화를 끝내고 전투에 집중했다. 쿠웅-! 때마침 한 번 더 휘둘러지는 앞발. 방패로 전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기보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충격을 흘려낸다. ‘아직까지는 해볼 만해.’ 나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정화율 9%.」 일단 현재 우리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30분이 넘게 로테이션도 없이 딜을 퍼부은 만큼, 딜러들의 MP가 바닥을 치고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야 이런 종류의 보스몹은 홀딩이 가능해지는 순간부터 레이드의 난이도가 확 줄어드니까. [그오오오오오오-!!] 아무튼,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걸 보니 이제 정화율이 10%는 된 모양인데…….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톱니이빨 클랜이 접근 중인 와중에 정화율이 뭔 상관이겠는가. “에르웬, 다음 일격까지 얼마나 남았지?” “75초 정도요!” 후, 그럼 사실상 이게 마지막 기회라 봐야겠네. “으아아아아아!!” 아무렇게나 함성을 내지르며 리아키스에게 더욱 달라붙는다. 원래 이런 보스전에선 주기적으로 [야성분출]로 위협 수치를 올려주며 어그로가 풀리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지이익-! 나야 방패로 막고 한 걸음 물러나면 끝이지만. 딜러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정화율 15%] 툭 하고 휘두른 저 앞발에 제대로 맞으면 비교적 단단한 아이나르조차 몇 방 못 버티고 박살날 게 분명하다. 계층군주의 평타는 대부분 그런 느낌이니까. 애초에 내가 왜 3페이즈면 어그로만 끌고 도망만 다니려 했겠는가? 4페이즈처럼 물리 딜 100%인 상황이 아니라면, 나도 신관과 마법사 없이 단독으로 탱킹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 “아저씨!” 응? 벌써 차징이 끝난 건가? 아직 62초밖에 안 지났는데? “왔어요!” 주어가 빠진 짧은 외침이었으나, 뭘 말하는지는 단박에 이해가 됐다. ‘니미럴.’ 처음 기척을 느끼고서 아직 3분도 안 지났구만. 대체 얼마나 열심히 뛰어온 거야? 리아키스의 공격을 막아내며 주변을 훑고 있자 에르웬이 필요한 정보를 전해줬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하자 실시간으로 크기를 키워가는 수십 명의 무리가 멀리서 보였다. 따라서……. 쿠웅-! 방패와 망치를 바닥에 내던진다. “……?” 눈이 마주친 아멜리아가 흠칫하더니, 이내 손을 펼치며 달려드는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뜬다. 그래, 이런 진풍경을 어디서 보겠어. 타닷. 지면을 박차며 도약해 덮쳐들듯 거대 괴수의 목을 팔로 휘감는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달려가던 관성을 이용해 회전하듯 놈의 등에 올라탄 뒤. 꽈악. 있는 힘껏 양팔로 놈의 목을 조였다. 이름하여…….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자이언트 바바리안 초크. 어찌 보면 예전에 4층에서 트롤이랑 레슬링을 하던 때와도 비슷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몸집이 몇 배는 더 커졌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무슨 힘이…….’ 그때처럼 완벽하게는 홀딩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오오오오——!!] 힘을 꽉 준 채 두 앞발을 묶고 있던 다리가 너무나도 쉽게 풀린다. 하긴, 체급이 비슷해졌다고 힘도 비슷해진 건 아니니까. “비, 비요른!!” 이내 놈이 이족보행을 하듯 뒷다리로 일어서더니 거대한 앞발로 목을 조이고 있는 내 양팔을 잡았다. ‘72초.’ 버티려는 자와 떼어내려는 괴물의 힘겨루기. ‘73초.’ 사력을 다해 버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까가각. 이미 반쯤 흉물이 되어 있던 라이티늄제 갑옷의 팔목 부분이 깡통처럼 찌그러짐과 동시에 놈의 목을 옥죄고 있던 팔이 힘 없이 풀렸다. ‘74초.’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늦었어 새끼야.” 75초. 마침내 에르웬의 차징이 끝났다. 그리고 이놈은 날 떼어내려고 보기 좋게 가드가 풀린 상태이니—. ‘76초…….’ 뭐야, 왜 안 쏴? 의문을 느끼며 정면을 응시하자 에르웬이 시위를 당긴 채 굳어 있는 게 보인다. 후, 다행히 시간 계산을 잘못한 건 아니었구나. “쏴라—!!!” 다그치듯 고함을 내지른 즉시, 섬광이 일었다. 즈웅-! 이 각도에서 봤을 땐 이런 느낌이었구나. 진짜 천둥이 치는 거 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내 의식을 잠시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한 폭발이 일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맨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이이-!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뭐, 어차피 중요한 건 귀가 아니니까.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가 [오염된 심장]을 시전했습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며 놈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 ———————!!!] 온몸이 새까맣게 물든 놈이 고통스럽다는 듯 뭐라 울부짖고 있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염된 힘이 다시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주먹으로 누른 물풍선처럼 온몸이 울긋불긋하게 커졌다 작았다를 반복하는 신체. 아이나르와 아멜리아는 그런 리아키스와 거리를 둔 채 경계를 하듯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거, 다 끝났으니 안 그래도 되는데. 「고대의 순례자가 오염된 힘을 거부합니다.」 이내 불안정한 물질처럼 변이를 일으키던 괴수의 몸뚱이가 폭발하듯 부풀었다. 그리고……. 번뜩-! 마치 코앞에서 핵이라도 터진 듯이 세찬 섬광이 터져 나온다. 비록 색은 검붉었으나, 그럼에도 너무나 눈부신 빛의 광채. 「고대의 순례자가 소멸합니다.」 이내 빛이 잦아들며 서서히 시야가 돌아왔다. 변화는 동시다발적이었다. “———, ———!!” 더 이상 미궁은 붉게 빛나지 않았다. 또한.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100」 「계층군주 처치 보너스. EXP +15」 놈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수천 수만 개로 쪼개진 빛의 입자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업적 달성」 조건: 첫 계층군주 처치. 보상: 영혼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50 상승합니다. 정말로 사냥이 끝났다는 뜻. 「업적 달성」 조건: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처치. 보상: ??? 묘한 감회가 감돈다. 비록 막타를 친 것이긴 하지만, 수년 전 감히 대항하지도 못하고 도망쳐야만 했던 그 괴물 놈을 내 손으로 직접 잡아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레이드가 끝났단 말은 즉, 보상을 챙길 시간이란 말과 동일하니까. 솨아아아아아아. 아직까지도 봄철의 벚꽃러머 흩날리는 빛무리 사이를 확인한다. 대체 뭐가 나왔을까?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일단 계층군주가 주는 보상은 셋이다. 넘버스 아이템의 상위격인 계층보구. 해당 계층의 균열을 1회 열 수 있게 해주는 계층석. 그리고……. ‘제발 정수, 정수, 정수, 정수……!!’ 어느 면에선 1등급 정수보다도 중요한 계층정수. ‘계층보구도 좋긴 한데, 그래도 정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기다리자 머지않아 빛무리의 광채가 연해지며 기다리던 그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정수였다. 계층보구도, 계층석도 드롭되지 않았지만. “비요—, —수가 ——!!!!” “——!” 정수가 드롭됐다. 다만, 문제는……. ‘…표정들 보소.’ 이제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온 톱니이빨 클랜원들의 얼굴이 절박해졌다는 것. “———!! ———!!!” 심지어 뭔가 다급하게 나한테 소리치고 있는 것도 같은데. 애석하게도, 정말로 들리지가 않아서 말이지.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정수를 확인한 즉시 나는 다리를 움직였다. “에르웬!” “—, —” 에르웬이 뭐라 답했지만, 청각 회복이 덜 끝나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서, —, 저한— ————? —보단, 아——, —!!” 에르웬의 여린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들어 올린 뒤. “설명은 나중에.” 그대로 에르웬을 집어 던졌다. “…껚!” 서서히 회복된 청각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으나, 너무 개의치는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경험자 아닌가. ‘뭔가 그립네.’ 그때 고블린 정수도 이렇게 먹였었는데.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영혼에 [혼돈의 정수]가 진하게 스며듭니다.」 *** “어, 어, 어…….” 혼돈의 정수를 흡수한 에르웬이 정신을 차리고서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왜, 왜 저한테 이걸……. 여, 역시 아저씨가 드시는 게—.” 진짜 아까 하려던 말이 이거였구나. 마음씨는 고맙지만, 저렇게까지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언젠가 네게 줄 정수였다.” 정확히는 사대정령과 전부 계약한 걸 알게 됐을 때부터였다. 이 정수의 진가는 그때부터 드러나니까. 뭐, 이렇게 빨리 먹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그래도 계, 계층군주의 정수인데…….” “왜, 고블린 정수 때처럼 정수만 먹고 날 떠날 생각이냐?” “아뇨! 절대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케이, 그럼 됐네. 어차피 혼돈의 정수는 바바리안과 어울리지 않는다. 뭐, 밸류가 워낙 높다보니 어지간한 3등급 코어 정수를 먹는 것보다는 훨씬 강해지긴 할 테지만……. 계층군주는 캐릭터당 하나로 제한된다. ‘이건 나중에 신전에서 지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이지.’ 내가 먹을 계층군주는 더 위층에 있다. 그래, 그러니까……. “얀델.” 당장은 현재에 집중할 때다. 때마침 놈들도 이곳에 도착을 했으니까. “얀델 남작,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까!”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단검잽이가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내질렀다. “분명 일단 멈추라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 거, 이제는 존대도 제대로 안 하는구만? “아, 그거. 못 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설령 들었어도 멈추지 않았을 거고.” 내가 딱 잘라 선을 긋자 단검잽이가 말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멜리아가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얀델.” “알고 있다.” 어느새 톱니이빨 클랜의 단원들이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한 솜씨였다. 딱히 단검잽이가 뭔가 지시한 것도 아니었지 않은가. 아마 이런 일이 익숙할 만큼 여러 번 있었단 거겠지. 다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말했다. “톱니이빨 클랜의 부단장, 말리드 케브론.” “…말씀하시지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기나 한 건가?” 내 물음에 녀석은 당돌하게 눈을 마주보며 답했다. “무슨 짓이라니요. 저희는 단지 남작님께 묻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가 공략 중이던 리아키스를 어째서 ‘약탈’해 간 것인지를.” “…….” “탐험가 출신인 얀델 남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미궁에서는 약탈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법이지요.” 후, 일단 정수를 먹기만 하면 얘네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건만. “설령 그게 별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더라도.” 진짜 제대로 빡쳤구나 너희. 462화 증명 (2) 아직 남은 전투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진 살갗. 그 위를 뒤덮는 싸늘한 공기와 적대적인 시선.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였으나,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도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위협을 하는 것은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니까. ‘진짜 끝장을 볼 생각이었으면, 웃으며 떠나는 척하다가 기습을 했겠지.’ 하면, 이놈들이 블러핑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그것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심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약탈이라…….” 생각 정리가 끝난 즉시, 대놓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묻지. 무슨 근거로 내가 약탈을 했다고 판단한 거냐? 내가 만났을 때, 리아키스는 분명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나? 에르웬?” “네? 아, 네! 맞아요. 최소 반경 1km 내에는 그 어떤 탐험가의 존재도 감지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판례가 훨씬 많고요.” 이내 에르웬이 친절히 당시 정황을 증언하며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하나 이것으로 물러날 단검잽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물에 대한 판례이지요. 계층군주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본 클랜이 리아키스와 떨어진 것은 공략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과정일 뿐, 결코 점유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불가피한 과정은 무슨. 입고 있는 장비만 봐도 상황이 그려지는구만. 그도 그럴 게, 3페이즈를 끝냈는데 장비가 멀쩡하다니? ‘아공간에서 새 장비를 꺼내 입을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거겠지.’ 필시 시간을 번 것은 전에 봤던 그 유인조였을 것이다. 본대에서 이탈해 재정비를 할 시간을 벌고,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게 원래 녀석들의 목표였겠지. 하지만 녀석들은 실패했을 거다. 그 증거로, 우리를 둘러싼 수십 명의 클랜원들 중에 유인조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뒤늦게서야 유인조가 뒈진 걸 알고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발견해서 호다닥 달려온 게 바로 지금.’ 슬슬 대략적인 전말이 나온다. 뭐,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크게 다른 부분이 있을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얀델 남작님께서는 본 클랜에서 공략 중이던 계층군주를 도중에 가로챘습니다. 그것도 저희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공략 중이던 것을요.” “우리는 너희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하지만 끝내 저희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정수를 취하셨지요.” “그게 왜 문제지? 내가 잡은 마물의 전리품을 내가 취하겠다는데.” “하지만 저희가 공략을 거의 끝내둔 상태가 아니었다면 결코 잡지 못했을 마물이지요.” 뭐,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긴 한데. 정황상 너희가 허가 없이 소환한 게 분명하지 않느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희는 홀딩에 실패했고, 나는 저층 탐험가들에게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나섰을 뿐이다. 그런 말들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나는 그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로가 아무리 논리를 제시해도 누군가가 이를 인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결국 중요한 건 논리 따위가 아니다. “이 자리에서 자랑스러운 라프도니아 왕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궁에서도, 도시에서도. 아니, 어느 세상에서든 시대를 불문하고—. “오늘의 실수를 인정하며, 추후 도시로 돌아가면 반드시 계층정수에 준하는 값을 치르겠노라고.” 논리를 증명하는 건 언제나 힘이었다. “예. 그렇게 약속만 해주시면 오늘 일은 ‘약탈’ 같은 게 아니게 되겠지요.” 쉽게 말해,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약탈자’로 규정하고서 PK를 시작하겠다는 뜻. 역시 본론에 들어서니 상황이 간결해졌다. 이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셋이다. 1. 순순히 약속하고 배상하기. 전재산이 털리는 것도 모자라 최소 몇 년은 빚을 갚느라 허덕이게 될 테지만, 정수를 먹었으니 크게 손해는 아닐 것이다. 2. 순순히 약속하고, 나중에 약속 어기기. 지금 이 순간에도 기록용 수정구가 돌아가고 있으니, 이 경우에는 왕가의 이름을 모욕한 죄로 내 귀족 작위가 날아갈 테고. 음, 그럼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던 건가? 3. 내 논리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결정을 끝마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자, 어떡하시겠나이까?” 어떡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리고 있던 망치를 어깨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실수 같은 걸 한 기억이 없어서 말이지.” “……기어코 독이 든 술을 택하시는군요.” “뭐든 술이면 됐지 않나. 어차피 술이 달진 않을 건데.” “남작님께서는… 우리가 정말로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글쎄, 딱히 그렇게 생각은 안 한다. 클랜전도 결국 이 게임의 콘텐츠 중에 하나잖아? “아이나르, 에밀리, 에르웬!” 나는 재빠르게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다. 뒤늦게 항해사 아우옌의 이름이 빠진 걸 깨닫긴 했지만, 수정하진 않았다. 뭐, 쟤야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이런 상황에선 도움도 안 되고. “모두 전투 준비!!!” 오더를 내린 즉시, 팀원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꺼내들며 자리를 잡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맞대는 식의 진형. 아멜리아의 눈짓을 받은 아우옌까지 눈치껏 내 뒤에 바짝 붙는 것으로 순식간에 준비가 끝났다. 따라서……. “다가오는 놈들은 즉시 쳐 죽여라.” 나는 단검잽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자, 이제 모든 건 놈의 선택에 달렸다. ***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상태로, 살 떨리는 정적이 이어진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 “…….” 후, 슬슬 결정을 내려줬으면 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는 거야? 답답한 마음도 피어나지만, 경거망동하며 놈들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그야 나도 안 싸우는 쪽이 베스트니까. 개인 기량은 이쪽이 우세일지라도, 쪽수 차이가 압도적인지라 우리 쪽에도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리스크가 큰 건 저놈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만약 계층보구가 드롭된 것이라면 보상이라도 확실할 터이나, 지금은 어떤가? 싸워서 놈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배를 짼다고 정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우리가 착용한 장비가 전부. 심지어 그 와중에 우릴 놓치기라도 하면, 도시로 돌아가 귀족을 죽이려한 죄를 받아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냥 놓아주는 건 짜증이 나겠지.’ 지금 이렇게 겁쟁이처럼 서로 간만 보는 구도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일종의 치킨 게임이라고 해야 하나?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먼저 멈추는 쪽이 패배하지만, 모두 멈추지 않으면 모두 파국을 맞이하는 그런—. “절반…….” 그때 단검잽이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정수가 지닌 가치의 절반만을 요구하겠습니다.” 서로가 절벽을 향해가던 도중에 극적으로 건네진 타협안. “흐음, 절반이라…….” “사실 계층군주를 그 지경까지 몰아붙이느라 손해를 가장 많이 본 건 저희가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이쪽은 사망자만 열넷이었다든가. 그들 하나하나가 최정예인 단원들로 빈자리를 채우는 데만 몇 년의 시간, 천문학적인 돈과 노력이 들어갈 거라든가. 심지어 절반을 받아도 파손된 장비와 소모품들 값 정도나 겨우 될 것이라든가. 말문이 트인 단검잽이는 쉬지 않고 뭐라 뭐라 설득의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정수의 값은 공정하게 길드의 위원회가 정해준 감정가를 기준으로 할 생각입—.”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지.” 딱 잘라 말을 끊자 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절… 말입니까……?” 뭘 놀란 표정이야? 꼬리를 내린 놈은 원래 아무것도 못 챙겨가는 게 이쪽 업계의 룰이구만. 탐험가들이 괜히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니다.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증명이 된 것이니까. 어차피 이 새끼는 끝까지 갈 배짱이 없다는 게. ‘그런데 내가 굳이 왜 양보를 해야 해?’ 전부 블러핑인 게 확인됐는데도 배팅을 안 하면 그건 그냥 병신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거기서 절반을 더 줄여준다고 해도 내 대답이 바뀌는 일은 없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강하게 나갔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덤벼라.” 지금까지는 섣불리 하지 않았던 강한 도발. 다만, 놈은 이번에도 무기를 꺼내들고 덤비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입만 열심히 나불거릴 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시지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다.” “…실로 무모한 분이시군요. 얀델 남작께서는.” “글쎄, 감히 왕가의 남작을 ‘약탈자’로 모는 놈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진정으로 감당…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내가 그런 걸 겁냈으면 이 자리에 서 있을 것 같나?” 나는 너처럼 어설프게 블러핑은 안 해. “셋을 주지.” “……?” “그 안에 내 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라 생각하고 행동하겠다.” “그,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하나.” 이내 내 입에서 숫자가 나오자, 단검잽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에서는 놈의 번뇌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그냥 물러나? 아니야. 설마 정말로 덤벼들겠어? 이쪽은 이렇게 숫자가 많은데? ……어쩌면 저 야만인이라면 정말 그럴지 몰라.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둘.” 짧은 찰나에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을 녀석은 아직까지도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하긴,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얼마 전에 부단장이 됐다고 했으니까.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따라서……. “셋이 지났군.” 등을 떠밀어주기로 했다. 진짜 망치라도 휘두르면 좀 더 판단이 수월해질 테니—. “…부단장님!” 그때 단검잽이의 오른편에 있던 궁수가 느닷없이 앞으로 나서더니 단검잽이의 귀에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새 ‘음성제어’까지 켰는지 엿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게 뭔 개수작인가 싶어 서둘러 개입을 하려던 차. “아저씨, 탐험가들이 접근 중이에요.” “…뭐?” “숫자는 약 수백 명 정도…….” 수백 명……? 대체 그만한 숫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아무래도 아까 우리랑 같이 있던 그 사람들 같아요.” 아… 걔네가 있었지 참. 혹시 쟤네들 친구인가 하고 깜짝 놀랐잖아. ‘일단은… 호재인가?’ 재차 고개를 돌려 확인한 단검잽이는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에게도 비슷한 보고가 들어온 모양인데……. 조용히 처리할 방법조차 막힌 이상, 놈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다. “……전원 무기를 내려라.” 그래, 옳지. “서둘러 이곳에서 벗어난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포위 진형을 풀고서 떠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 단원들. 한데 이대로 떠나는 건 좀 아쉬웠을까? 단검잽이가 떠나기 전에 뒤를 돌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그럼 도시에서 뵙겠습니다. 얀델 남작.” 후… 어찌된 게 돌아가서 할 일이 또 늘어났네. *** 톱니이빨 클랜이 자리를 떠난 후, 잠시 기다리자 수백 명의 저층 탐험가들이 도착했다. “오오, 부족장! 위대한 위업을 이룬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흐하하핫! 나는 알고 있었다! 부족장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멀리서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함성을 내지르는 전사들. 이대로면 깔릴 수도 있기에 [거대화]를 쓰며 밀어낸 뒤, 인파에 섞인 한 명을 찾아 사건의 전말을 청취했다. “루이스 시유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게… 계층군주가 처치된 걸 알자마자 다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지 뭡니까…….” 그래서 아까 우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무작정 뛰어왔다던가? 마음은 고맙긴 한데……. ‘음, 그게 아니어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결과적으로 피 보는 일 없이 사건이 마무리된 것에는 이 녀석들 지분도 조금은 있을 터. ‘도시로 돌아가서 얘네 증언이 필요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계산을 마친 나는 루이스 시유르 외에 다른 탐험가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대화를 나누며 이름을 물었다. 근데 어째서일까. “벤트 마헤일로랬지? 기억했다.” “……여, 영광입니다!” 통성명 시간이 이어질수록 나를 보는 저층 탐험가들의 시선이 묘해진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저런 태도라니…….” “종족은 다르지만,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인 건 틀림없습니다.” “예, 분명 저런 사람을 영웅이라 하는 거겠지요.” 어… 난 그저 신상을 캔 거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사기친 기분이었지만, 딱히 정정은 하지 않았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암, 명성작은 할 수 있을 때마다 해둬야지. “자, 그럼 이만 우리는 가보겠다!” 이후 모든 이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알아낸 나는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떠나시다니요……? 아, 위층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따로 할 게 있어서.” 애초에 4층에 올라가도 의미가 없다. 15일차에 진입해 봤자, 5층에 도착하기 전에 미궁이 닫힐 테니까. 솔직히 큰일을 치렀더니 좀 쉬고 싶기도 하고. “아저씨,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무리에서 벗어나 우리끼리만 남게 되자 에르웬이 내 목적지를 물어왔고, 나는 순순히 답해줬다. “마녀의 오두막으로 간다.” “네? 오두막이라면…….” “숲에 있는 그 쉼터를 말하는 거군. 근데 거기는 왜?” 왜 가기는. 쯧, 이래서 던알못들이란. 기껏 혼돈의 군주까지 잡아냈건만. 「업적 달성」 조건: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처치. 보상: ??? 물음표 업적 보상은 챙겨서 나가야지. 463화 증명 (3) 「캐릭터가 마녀의 오두막에 입장합니다.」 미샤와 함께 조난당한 후에 처음 와보는 마녀의 오두막. 그곳은 이전에 왔을 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솨아아아아- 들꽃이 만개한 잔디밭도, 풍성한 이파리를 가진 녹색의 나무들도 없다. “……눈?”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 눈이 쌓인 나무는 빼빼 말라 있었으며, 그 사이로 멀리 한 채의 오두막이 보인다. “오! 이게 눈인가! 우왓, 진짜로 차갑다!” 지면에 쌓인 눈을 본 아이나르는 정말 아이처럼 신나했다. 하긴, 라프도니아에는 눈이 안 오니까. 아이스록과 6층의 몇몇 섬, 그리고 몇 개의 균열을 빼면 눈을 보기 어렵다. 5층에 있는 서리 협곡도 그냥 얼음으로 된 필드에 가깝고. “록록아, 이리 와봐라!” “……록록이가 아니라 아우옌 록로브다만.” “에이, 깐깐하게 뭘 그러냐!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아무튼, 와 봐라!” “…으, 읏?” 아멜리아가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으나, 기어코 아이나르는 아우옌을 데리고 가더니 눈싸움을 하며 놀기 시작했다. “악! 아, 아픕니다! 레인즈 님……!” “…얀델, 보기만 할 건가?” 얼른 제지하지 않고 뭐 햐나는 듯한 목소리로 따지는 아멜리아. 거, 바바리안이 눈싸움 좀 하고 놀 수도 있지. “그냥 내버려 둬라. 어차피 한동안은 에르웬의 정수를 확인하고 있을 거니까.” “그래, 넌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거군.” “아니, 이건 그런 말이 아니라…….” “됐고, 너는 가서 정수나 확인해라. 나는 여기에 남아 있을 테니.” “…같이 안 가고?” “안 그래도 언젠가 한 번 기강을 잡아줘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해 못 할 소리를 끝으로 아멜리아는 아우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오! 너도 같이 하려는 건가!” “그래.” [자가복제]까지 활성화한 뒤, 아이나르에게 연신 눈덩이를 던져대기 시작했다. “흐하하핫! 하핫! 받아라!!” 처음에는 놀 친구가 늘어난 것에 즐거워하던 아이나르였으나, 그 표정이 사라지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으, 으악! 뭐, 뭐 하는 짓—!” 팔을 잡고 눈밭 위로 엎어치기를 한 것도 모자라, 엎어진 아이나르의 얼굴을 눈 위에 비비는 아멜리아. “읍읍……!” “자, 네가 좋아하는 눈이다.” “내, 내가 들은 눈싸움은 이런 게 아니—!” “싸움의 규칙 같은 게 왜 필요하지?” “으, 으아아아앗! 내가 가만히 당할 줄만 아냐!!” 이내 아이나르가 괴력을 발휘해 일어났으나, 아멜리아는 등 뒤에 매달려 다리로 팔을 봉인했다. 그리고……. “안 당하면 어쩔 거지?” 분신체를 이용해 가드가 풀린 얼굴에 일방적으로 눈덩이를 꽂아 넣었다. 퍽! 퍽! 퍽! 퍼억-! 숙달된 투수의 과녁이라도 된 듯한 구도. “…아저씨?” “……그냥 가자.” “네.” 잠시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셋을 내버려 두고서 오두막 뒤쪽으로 향했다. 그야 마녀의 오두막만큼 좋은 훈련장은 없으니까. 프라이빗한 환경인 건 물론, 도시의 훈련장처럼 뭘 부숴버렸다가 배상할 일도 없다. “에르웬, 적응은 끝났나?” “네.” “느껴지는 변화는?” “잘 모르겠어요. 전반적으로 여러 능력이 상승한 거 같은데, 콕 짚어서 하나가 확 증가했다는 느낌은 아니라서…….” “말고도 있을 텐데?” “……아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파요.” 아픈 게 아니라, 참기 힘든 거겠지. 뭐, 그래도 예전 상태를 생각하면 이렇게 티를 안 낸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좋아진 거지만. “정수 때문에 그런 거니 너무 걱정 마라.” “네……? 정수 때문에요?” 이내 에르웬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고, 나는 천천히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말해야 하는 건 능력치였다. [혼돈] 보유한 부정 수치가 2배 증가하며, 증가한 부정 수치에 비례해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단 게임에서는 기본 능력치 항목에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연산식을 알아내는 건 늘 그랬듯이 플레이어인 나의 몫이었고. “부정 수치라면… 약화 수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그거부터 말해줘야겠구나. “그것도 포함이긴 한데, 꼭 그것들만 말하는 건 아니다.” [던전 앤 스톤]에는 각 스탯마다 계수가 정해져 있고, 그 계수에 따라 육체, 정신, 이능으로 나뉘어진 항목의 수치가 올라간다. 예를 들면, 계수가 0.5인 손재주의 경우 스탯이 +1 증가했을 시 이능 수치가 0.5 증가하는 식. ‘고밸류 스탯인 항마력의 경우엔 계수가 3이나 되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대부분의 스탯은 계수가 0 이상이지만, 가끔은 계수가 마이너스인 것들도 볼 수 있다. 그것을 나는 마이너스 스탯이라 불렀다. “대표적으로, 네가 가진 능력치 중에는 충동, 불신이 있지.” 이 스탯은 +가 붙어서 나올 시, 능력치가 깎인다. 반대로 계수가 0 이상인 스탯에 -가 붙었을 때는 에르웬이 말한 ‘약화 수치’라 부르는 거고. [파열]에 붙은 통제력 -30처럼 말이다. “아…….” 기본 개념은 설명이 된 듯했기에, 나는 서둘러 계산에 들어갔다. 현재 에르웬의 부정 수치는 과연 몇인가. 일단 ‘에반’의 정수에서 물리 내성이 -80. 내가 추천해서 받았던 왕가의 보상, ‘리트캐논’의 정수에서 영혼재생력이 -40. [파열]에 붙은 통제력이 -30. ‘칼반’에서 충동이 +30에 불신이 +30이었다. ‘멧크로우 정수에 붙은 소유욕은 계수가 0이니까 포함할 필요가 없고. 결핍 +40도 이번에 미궁에 들어오기 전에 한 칸 비운다고 지웠으니…….’ 능력치를 개별 계수에 따라 곱해서 더해준 뒤, 여기에 혼돈 정수의 계수인 0.2를 곱하면 계산은 끝이다. 숫자가 나왔다. ‘53.8.’ 현재 에르웬이 혼돈 정수로 인해 획득했을 모든 능력치의 상승량. 아, 모든 능력치라고 하기엔 그런가? 행운이나 골밀도처럼 보유 중이지 않은 능력치는 증가하는 게 아니니. ‘……어찌 된 게 벌써부터 효율이 장난 아니네.’ 조금 얼떨떨하다. ‘리트캐논’의 정수야 내가 추천해서 먹인 거지만, 나머지는 에르웬이 알아서 먹은 것들이었지 않나. ‘정신계 능력치로 이만큼 깎이는 거면 좀 위험한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일단 멘탈은 많이 단단해졌으니까. 그 증거로 재회 했을 때보다 스탯의 영향이 더 커졌을 텐데도 얌전하게 있다. ‘그래도 걱정되니 얼른 다른 정수로 바꿔주든가 해야지.’ 애초에 정신계 능력치들은 계수가 낮아 혼돈 정수를 제대로 활용하기에 어렵다. 통제력은 그나마 낫지만, ‘불신’의 경우엔 계수가 0.6밖에 안 되니. 계수가 높은 고밸류 스탯을 깎아내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항마력만 해도 50을 깎아내면, 모든 능력치를 30 상승시킬 수 있지 않나. ‘…뭐, 부정 수치 2배 증가까지 계산하면 100이 떨어지는 거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특징 덕에 딜러들에게 좋은 정수다. 탱커 정수들은 딜을 깎고 탱이 증가하는 정수가 얼마 안 되거든.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예전에 저한테 가장 잘하는 걸 특화시키는 게 좋다고 하셨죠…….” 음,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슬슬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비록 평소에 이능을 보여주던 여관 방은 아니지만……. “자, 그럼 어서 이능을 써봐라!” 그래도 할 건 해야지. *** 혼돈의 정수는 두 가지 스킬로 구성되어 있다. 패시브 하나와 액티브 하나. 그게 전부다. 수호자 정수에서 많게는 다섯 개가 넘는 액티브 스킬을 얻을 수 있단 걸 고려하면,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구성이 아닐 수 없지만……. 때론 백 개보다 나은 하나가 있기도 한 법. (P) 혼돈회로 — 캐릭터가 보유한 모든 자원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모든 자원을 소모 시, 혼돈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선 패시브부터 상당히 특이하다. 쉽게 말해, 마나, 자연력, 영혼력, 신성력 등의 자원이 하나의 게이지로 통합되는 스킬인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정령술을 쓰는 데 필요한 자연력은 수치를 늘리는 게 엄청나게 어려우니까. ‘아마 에르웬이 에르테스의 정수를 먹은 것도 그래서겠지. 패시브를 이용해 영혼력을 자연력으로 치환시킬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돌아가면 쓸모 없어진 그 정수부터 지워야지. 액티브인 [원소합성]이야 나쁘진 않지만, 그래 봤자 끝까지 갖고 갈 정수는 아니기도 하고. “저… 이능이라면…….” “[집중사격]을 써라. 어차피 자원을 다 쓰는 게 목적이니까. 아, 정령도 소환해 두고.” “…그런 목적이라면, 디클로에를 불러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훨씬 빠를 텐데.” 오, 그것도 그러네. 얼른 소환하라고 등을 떠밀자 에르웬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필살기를 꺼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공간을 찢으며 등장한 사람 형체의 흑색 덩어리. 디클로에는 에르웬의 요구에 따라 오두막의 반대 방향으로 어둠 구체를 쏟아냈다. 콰쾅, 쾅! 콰아아앙-! 저 멀리 결계에 닿자마자 터져 나가기 시작한 결계. 예상대로 결계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축적된 기운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에르웬의 자원이 모두 소모된 것은 힘을 막 쏟아부은 지 30초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전에는 전력으로 썼을 때 5초가 한계였는데. ‘마나통이 커져서 그런지 유지 시간이 많이 늘어났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빈 그릇에 미지의 기운이 깃듭니다.」 모든 자원을 소모 시에 발동되는 [혼돈회로]의 효과. 「1분간 모든 자원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이름하여 무한동력 모드. “……정말 소환 해제가 되지 않네요?” 에르웬은 여전히 폭발적인 화력을 뿜어내고 있는 디클로에를 보며 감탄했다. 감탄이 나온 건 사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 화력을 1분 30초 동안 쓸 수 있다라…….’ 심지어 낼 수 있는 화력이 이게 전부인 것도 아니다. MP가 무한이지 않은가. 정령왕은 정령왕대로 싸우게 두고, 이쪽도 스킬을 써야지. “에르웬, 그럼 이제 [집중사격]을 써라.” 추가로 오더를 내리자 에르웬이 군말없이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후우우웅-! 화살 끝에 맺히는 새하얀 빛. 리아키스전에서도 크게 기여를 했던 이 스킬은 내가 왕가 보상으로 획득하는 걸 추천한 것으로 효과는 간단하다. 캐스팅 시간에 비례해 MP가 기하급수적으로 소모되지만……. 후우우우우웅-!! 그만큼 대미지가 상승한다. 다만, 나는 평소에 차징을 15초 이상 못하도록 했다. 그때부터는 MP 소모만 엄청나게 커지고 대미지 상승량은 줄어드니까. 쿨타임도 60초 정도면 돌아오기에 기다렸다가 한 발 더 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하지만……. ‘MP가 무한이면 얘기가 다르지.’ 1초, 2초, 3초, 4초…….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화살촉에 모이는 기운의 밀집도가 높아진다. 그로부터 또 얼마나 흘렀을까. “지금.” 에르웬이 시위를 잡은 손을 놓았고. ————! 빛이 쏘아지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결계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크, 그래 이거지.’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간 화력은 디클로에 이상이라고. *** 「그릇에 담긴 미지의 기운이 빠져나갑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70% 감소합니다.」 *** 에르웬이 지친 듯 내 품으로 쓰러져 쉬기도 잠시, 저 멀리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비, 비요른—!! 어디 있나! 비요른!!” 아멜리아와 놀고 있던 아이나르였다. “바, 방금은 뭐냐! 차, 차원붕괴인 거 아니냐? 도,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재난을 마주한 야생동물도 아니고. 어찌 보면 너무도 순수한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차원붕괴 같은 건 아니니까.” “저, 정말인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세상이 번뜩이더니 막 땅 전체가 흔들리지 않냐!!” “그래, 그래. 진정해라. 이제 괜찮으니까.” 그렇게 아이나르를 달래주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쓰윽 옆으로 와서 물었다. “방금 건… 테르시아가 한 일인가?” “그래.” “……굉장하군. 계층정수란 것은.” “걱정 마라. 나중에 너도 하나 챙겨줄 테니까.” 이내 달래주듯 말하자 자신을 바바리안 취급하지 말라며 고개를 휙 돌린 아멜리아였으나, 딱 보니까 내심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제는 다 끝난 건가?” “어, 다 끝났다.” 액티브는 써보지 못했지만, 그건 어차피 여기서 쓴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도시로 가서 실험을 해봐야 한다. 워낙 특이한 스킬이라서 말이지. “에르웬, 걸을 수 있겠나?” “아뇨……. 못 걷겠어요.” 탈진 상태에 빠진 에르웬을 업으려 했으나, 나보다 빠르게 나서는 이가 있었다. “오! 그럼 내가 업겠다!” 예전부터 탈것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아이나르였다. “자, 업혀라!” “…….” “얼른?” “……네, 부탁… 할게요…….” 아이나르가 에르웬을 업어 든 상태로 우리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겨울로 변한 외부와 다르게 오두막 내부는 이전과 똑같았다. 책장, 식탁, 카펫. 내가 누웠을 때 발이 빠져나왔던 작은 침대. 그리고. 화르르르륵.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얀델, 이제는 뭘 하면 되지?” “불길 속으로 들어가면 끝이다.” 그럼 보상이 들어오고, 마녀의 오두막은 폐쇄가 되며 캐릭터는 숲으로 추방된다. “……비요른.” 돌연 아이나르가 나를 보더니 정색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뭐지, 이 배신감은? 대꾸할 가치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먼저 간다고 말한 뒤 쪼그려 앉아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르르륵-! 결코 뜨겁다고는 할 수 없을 따스한 감촉. 「영구적으로 정신 저항 수치가 +50 상승합니다.」 오케이, 그럼 능력치는 잘 올랐을 테고……. 왠지 모를 포근함에 눈을 감았다 뜬 순간이었다. “어……?” 다시 눈을 뜬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녀의 숲이 아니라 처음 와보는 공간. “너는 또 뭐냐?” 유령처럼 희멀건 안색의 여자애가 나를 꼬나보고 있었다. 464화 증명 (4) 리아키스 처치 업적 보상은 간단하다. 레이드 후 오두막으로 가서 불길 안에 들어가면 정신 저항 수치가 크게 오르고, 캐릭터는 마녀의 숲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업적 달성」 조건: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 처치. 보상: 정신 저항 수치가 영구적으로 +50 상승합니다. 업적 창을 다시 열어보면 ‘???’가 바뀌어 있다. [던전앤스톤]에서도 무척 특이한 히든피스였다. 업적 보상이면서 지정된 장소로 가야 한단 점도 그렇고, 나중에 찾아오면 받을 수 없는 기간제 보상이란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영구적으로 정신 저항 수치가 +50 상승합니다.」 성의 없이 한 줄로 끝나는 문구도 그렇고.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깃든다든가. 숨겨진 존재가 축복을 내린다든가. 히든피스를 발견할 때면 으레 뜨는 문구들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혹시 빠뜨린 게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여러 실험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그래서 그냥 숨겨진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오류 발생.」 대체 어디일까 여긴. 딱 봐도 마녀의 숲은 아닌데. 「캐릭터의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캐릭터 로그 전송이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저 여자애는 또 누구고. 타닷, 타닷, 타닷. 모닥불이 타오르며 어스름하게 빛나는 벌판. 주변을 쓱 둘러보면서도 누구냐는 내 첫 물음에 답하지 않는 여자애를 주시했다. 때마침 여자애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고 있었다. […엘리스 그라운디아.]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음성. 목소리 자체는 의외로 평범했다. 하지만……. “……지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었다. “아, 욕한 건 미안하다. 내가 바바리안이라. 너무 놀라면 가끔 이런다.”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여자애를 탐색했다. 일단 장난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냐는 건 다른 얘기였다. ‘얘가 정말 땅의 마녀라고?’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냥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달리 생각해 보니, 믿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다. 마녀가 살아 있단 건 이미 알고 있었지 않은가. 애초에 이런 장소에서 만난 여자애가 평범한 여자애일 리도 없다. 그래, 그러니까……. ‘오히려 좋아.’ 정말 얘가 마녀인 거라면, 최대한 길게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캘 기회—. [심연의 문을 열어선 안 돼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의문을 느끼며 뭐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아-! 묘하게 섬뜩한 바람이 불어오며 안개가 개이듯 공간이 뒤섞인다. 흐릿해지는 마녀를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나 끝내 그 손끝에 닿은 건—. “…얀델, 지금 뭐 하는 거지?” 화가 난 아멜리아의 얼굴이었다. *** 「캐릭터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캐릭터 로그 전송을 재개합니다.」 *** 어느새 돌아온 마녀의 숲.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잠시, 나는 뒤따라 나온 동료들에게 비슷한 현상을 겪었는지를 확인했다. “…안개가 뒤덮인 벌판? 무슨 소리지?” “우리는 그냥 나오니까 여기였다!” 그래, 너희는 그런 게 없었다 이거지……. “아무래도 내가 뭔가 헛것을 본 모양이다.” 나도 뭔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았기에 일단 대충 둘러댔다. 아멜리아가 수상한 듯 나를 힐끗했지만, 이 자리에서 뭐라 캐묻는 일은 없었다. [23 : 50] 이후 시간을 확인한 우리는 그냥 이 자리에서 탐사를 끝내기로 결정했고, 자유롭게 쉬며 시간을 보냈다. “저기, 비요—!” “프넬린, 귀찮게 굴지 말고 내버려둬라. 생각할 게 있는 모양이니까.” “아. 알았다…….” 비록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아멜리아 덕분에 편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 방금 내가 겪은 일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만났던 그 여자애도 땅의 마녀가 맞을 테고. 여기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심연의 문을 열지 말라니.’ 이건 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왜 나만 그런 현상을 겪은 거고? 아우릴 가비스도 그렇고, 왠지 다들 나한테 뭔가 이상한 기대를 하는 거 같단 말이지. ‘……단지 내가 오리지널 클리어 유저라서?’ 후, 매일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 그래도 왜 자꾸 생각할 거리가 점점 느는 거 같지?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결국 미궁이 닫힐 때까지 고민의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어느 때처럼 흐릿한 도시의 하늘. “잠깐만, 저 사람 혹시…….” “얀델 남작이다…….” 차원광장으로 돌아오자 날 알아본 탐험가들이 쑥덕거린다. 이제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별 신경 쓰지 않으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군.” “우리 중 누구도 죽지 않고 돌아와 다행이다. 어서 돌아가 쉬자.” 이번에도 7층에서 전쟁을 했을 탐험가들은 유독 지쳐 보였다. 장비들의 상태도 처참했고. ‘뭔가 사건이 있었던 건가?’ 이건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이런 정보는 원탁에 갈 것도 없이 이제는 베르실한테 오프라인에서 전해들을 수 있으니까. 점점 세력이 커질수록 원탁의 필요성도 차차 줄어드는 중이다. ‘그래도 광대 새끼랑 GM의 참모가 있으니 계속 참가는 해야겠지만.’ 슬슬 걸음을 옮겨 검문소로 향했다. 예전이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줄을 서려고 얼른 움직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으니까. “비요른! 여기다! 여기!” 4등급 이상의 팀만이 이용 가능한 통합 검문소. 다만, 이 등급쯤 되면 거의 다 클랜 단위이기에 이 검문소엔 줄이 없다시피했다. 10인 이상부터는 무조건 다른 검문소를 이용해야 하니까. ‘클랜 등급도 슬슬 올려놔야겠네. 나중에 검문소에서 시간 낭비를 안 하려면.’ 줄도 짧았고 마석 소득은 거의 없었던 만큼 검문소를 나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따라서……. “아이나르, 너는 바로 여관으로 가냐?” “그래야지, 나중에 보자!” 아이나르와 헤어진 뒤 그대로 집으로 직행. ‘그나저나 이 집도 이번 달 내에 처리를 해야 하는구나…….’ 휴식의 공간인 집에 왔음에도 해야 할 숙제들이 먼저 떠오른다. 리아키스까지 잡고 이제 막 돌아왔건만. “나는 먼저 씻으러 가겠다. 다들 알아서 하고 쉬어라.” “고생 많으셨어요.” “쉬어라, 얀델.” 이내 욕실로 가서 탐험하느라 쌓인 때를 밀었고, 깨끗하게 씻은 뒤에는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후우…….” 얼른 자자.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 다음 날 오전 6시. 잠든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씻고 거리로 나왔다. “하암.” 졸려 죽겠네. ‘오후 2시쯤에 침대에 누웠으니 15시간 정도 잔 셈인가…….’ 3층에서 끝난 15일짜리 탐사였던 덕분에 그나마 좀 버틸 만하지만, 그래도 몸이 피곤한 건 변하지 않는다. 후, 원래 탐사가 끝난 다음 날은 그냥 집에서 팔자 좋게 쉬는 게 국룰인데…….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얀델 남작 각하.” 이내 공용 승강장에 도착한 나는 귀족칸 마차를 타고 황도 카르논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황도로 가는 건 좀 오랜만이었다. 후작을 만날 땐 후작이, 승작식에 참가할 땐 왕가에서 비용을 부담해 줬었으니까. ‘가는 동안 잠이나 자야지.’ 조금의 불편함으로 70만 스톤을 아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 잠이 솔솔 왔다. [13 : 10]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질겅, 질겅. 허기진 배를 육포로 달래며 저택의 대문으로 향하니 토끼 귀를 한 경비병이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못 알아봐서 문제가 생기는 전개는 일절 없었다. “얀델 남작 각하님을 뵙습니다.” 리리비아 남작가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인사를 하고서 나를 저택 안으로 들이는 경비병. 너무도 극진한 대접에 새삼 느끼고 말았다. ‘…이게 귀족가의 위엄이구나.’ 정말 작은 부분까지 전부 보이지 않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고 해야 하나? 훗날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얀델 남작가라 칭한다 해도, 이런 부분까지 따라가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얀델 남작, 오랜만이에요.” 이내 경비병을 따라 도착한 방에서 대기하고 있자 승작식 때 연을 맺은 토끼 남작이 들어섰다. “오랜만이다. 리리비아 남작. 집이 참 좋더군? 사람들도 친절하고.” “후훗,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긴장은 안 되시나 보네요?” “해야 하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요. 좋다는 뜻이었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얀델 남작이 긴장하는 모습은 상상도 안 되는걸요.” “나도 긴장 정도는 한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는.”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탐험가시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사교계에서 오래 굴러먹은 토끼 남작은 굉장히 화술이 좋았다. 그냥 대답만 하고 있을 뿐인데 알아서 편안하게 대화가 이어진다 해야 하나? “어머, 시간이 벌써. 저는 이번 회담의 주최 가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만 가볼게요. 다른 가문에서 오신 분들도 인사를 드려야 하거든요.” “그럼 이따가 어디로 가면 되지?” 내가 장소를 묻자 토끼 남작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깔깔 웃었다. “그건 얀델 남작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때가 되면 알아서 사람이 와서 안내를 해줄 테니. 그때까지 편히 쉬고 계세요.” “…그렇군. 알았다. 이따가 보지.” 토끼 남작이 말해준 안내인이 찾아온 것은 약 30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가주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서재 같은 공간이었는데, 보자마자 원탁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에도 커다란 원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쪽 세상은 원탁 없이는 회의를 못 하나?’ 돌연 그런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참았다. 나사 빠진 놈이란 첫인상을 남길 순 없으니까. “…….” 주변을 쓱 둘러볼 것도 없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모인 것이 보인다. 다들 새로온 신입이 궁금한 눈치인데……. ‘이럴 거면 승작식 때 잠깐이라도 들러 인사라도 하던가.’ 아, 그때는 이목을 끌 거 같아서 오지 못했댔지. 전에 토끼 남작이 해준 말을 듣고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정말 초식동물들의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죄송하지만, 얀델 남작께서는 잠시 그곳에 서 계실 수 있을까요?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지.” “자, 그러면 이로써 모두 모였으니 바로 첫 번째 의제부터 시작하겠어요.” 상석 자리에 앉은 토끼 남작이 사회자 역할을 하며 회담을 진행했다. “오늘 회담의 첫 번째 의제는 얀델 남작의 입당 건입니다. 평등을 추구하는 본회의 이념에 따라 투표 이전까지는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과반수가 넘어 해당 의제가 가결이 된 후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 대충 이런 분위기구나. 어쩐지 서로 마주보는 원탁을 쓰더라니. “우선 얀델 남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이내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콧수염을 기른 요정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 머리카락이 파란색인 걸 보니 어느 가문인지는 뻔했다. “하시지요.” “우선은 소개부터 하리다. 헤스카이라 남작이라 하오. 유명한 영웅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반갑다. 얀델 남작이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지?” “얼마 전에 바바리안의 부족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기에 그냥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는 얘기인지 가주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피차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이 다음 이야기라는 걸. “얀델 남작에 대해선 들은 게 있으니,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리다. 왜 그러셨소? 혹시 이쪽의 불문율을 몰랐던 것이오?” “그럴 리가. 알고 있었다.” “호오…….” 여기서도 쿨하게 인정하자, 지켜보던 가주들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알고 있었다니, 한데 왜 그런 짓을…….” “그야 내게 도움이 안 되는 불문율이었으니까.” “……그 말은 허투루 들을 수 없겠구려.” “이유는?” “우리는 최대한 기존 명가들로부터 적대감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왔소. 한데 얀델 남작이 그 오랜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소.” “알고 있다.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성지와 최대한 선을 긋고 왕가에 충성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줬다지?” “얀델 남작, 그대는 그걸 알면서도—.” 슬슬 이들에게 첫인상을 새겨줄 타이밍이었다. “근데 그래서.” 나는 콧수염 남작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이런 내 행동이 귀족가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여태까지 뭐가 바뀌었지?” 어차피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 뭐가 바뀌었냐는 한마디에 말문이 막힌 요정 아저씨를 뒤로하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내 캐릭터를 각인시키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실은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암만 성지와 선을 그어봤자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일 일은 없다는 걸.” 심지어 선을 제대로 그은 것도 아니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기라 해야 하나? 부족의 수장 자리에만 직접 앉지 않을 뿐이지, 여기 있는 모든 가문들은 뒤에서 성지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 중이다. ‘나한테 목을 맨 것도 내가 있으면 바바리안족의 지원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 거였고.’ 거, 엎드릴 거면 바짝 엎드리고, 일어설 거면 기습적으로 확 일어나야 하는 게 이 바닥이거늘. 어째 정치인이란 것들이 나보다 그걸 몰라? “자, 그럼 궁금한 건 끝났나?” “그렇소. 적어도… 얀델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으니.” 잘 됐네. 딱 내가 바라는 게 그거였는데. 이내 콧수염 남작이 턴을 끝내자, 지켜보던 토끼 남작이 진행을 이어갔다. “얀델 남작에게 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의견을 낼 분이 있으십니까?” “…….” “없다면, 지금부터 의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얀델 남작의 입당에 찬성하는 분께서는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해주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투표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비밀 투표도 아닌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설마 그냥 손을 드는 형태일 줄이야. “…….” 너무도 구시대적인 방식에 경악하거나 말거나, 침묵 속에서 가주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서른하나의 가문이 찬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얀델 남작의 입당이 가결되었습니다.” 만장일치. “오늘부로 얀델 남작가의 적은 우리의 적이며,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얀델 남작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토끼 남작의 말을 끝으로 가주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손뼉을 쳐댔지만, 딱히 기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무려 600년 만에 나타난 이종 출신 귀족 가문. 한데 심지어 최초의 바바리안 가문이라니? 설령 이 자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똥을 쌌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얘네들은 기다리는 게 익숙하니까. 내 아들은 정신적 결함이 없기를 바라며 결국은 입당을 허락했겠지. “얀델 남작, 이제 착석하셔도 좋아요.” 비어있는 유일한 한 자리로 가서 앉자 박수가 멈췄고, 토끼 남작이 내게 몇 마디의 훈화를 보낸 뒤 다시 집회가 이어졌다. “두 번째 의제는 얀델 남작가의 지원에 대한 건입니다.” 사실상 이번 것도 결과는 정해진 안건이었다. 멜베스에서 얀델 남작가를 세우는 데 지원을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 다만, 이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를 들여 어느 땅을 사고 이후에는 어떻게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정도면 최대치로 받아낸 건 확실하고…….’ 토끼 남작이 열심히 나를 대변한 덕에 지원금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빵빵하게 정해졌다. 따라서 이제 다음 안건. “세 번째 의제는…….” 토끼 남작은 긴장되는지 나를 한 번 힐끗하고는 말을 이었다. “얀델 남작 및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정식 지원 건입니다.” “…클랜 아나바다라면, 얀델 남작의 휘하에 있는 그 클랜을 말하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역시나 말이 끝나기 가주들이 술렁였다. “얀델 남작가가 터를 잡는 것이야 우리를 위한 일이니 받아들였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올시다.” “가문이 아니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이라! 유례가 없는 일이오!” 곳곳에서 의문이 빗발쳤고, 그 의문은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되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가 그래야 하오?” 그 행위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 “그건—.” 뭐라 답하려는 토끼 남작의 말을 끊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암, 이런 걸 남한테 맡길 수는 없지.’ 자고로 본인의 가치는 본인이 증명하는 것이다. 465화 증명 (5)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웅성대던 가주들이 입을 닫고서 내게로 시선을 모은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왠지 벽이 느껴지는 눈빛. 나와 눈이 마주친 턱수염 남작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얀델 남작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보구려.”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생각이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말라는 거겠지. 이는 다른 가주라고 딱히 달라 보이진 않는다. ‘거,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구만.’ 서른한 개의 가문에서 온 서른한 명의 가주. 그중 나의 아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저기 주최자 자리에서 노심초사 중인 토끼 남작뿐. 그러니까 다시 말해. ‘열다섯 명을 설득하면 된다는 거지.’ 멜베스는 이제 나까지 해서 총 서른두 개의 가문이 소속된 집단이 되었다. 과반수까지 17개의 찬성표가 필요하며 이미 나와 토끼 남작의 찬성표가 확보된 상황. “저… 얀델 남작?” 어딘가 불안한 기색인 토끼 남작의 목소리를 끝으로 생각 정리를 마쳤다. “일단 이것부터 먼저 말하겠다. 나 한 명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열다섯이나 되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었다. “리리비아 남작이 꺼낸 이 안건은 우리 멜베스 전체를 위한 일이다.”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 반박이 들어왔다. “얀델 남작과 남작 휘하의 클랜을 지원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멜베스를 위한 일이란 것이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니까.” “……?” 고개를 갸웃하는 콧수염 남작. “귀족의 힘은 가문에서 나온다. 한데 내 가문은 이제 막 터를 잡을 땅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잠시 자세를 낮추자 눈에 맺힌 의아함은 더욱 커진다. 후, 그럼 이 정도면 추진력은 충분한 거 같으니. “하지만 그런 나를 진심으로 우습게 보는 귀족은 없다.” 나는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백작 아래로는 만나 주지도 않는단 테르세리온 후작도, 케알루너스 공작도 이런 나를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 “그 이유가 뭐일 거 같나?” “그야… 명성 아니겠소?” “틀렸다.” 뭐, 엄밀히 말하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름값이 어디서 나왔는데? “바로 힘이다.” 거인, 비요른 얀델. 단신의 무력으로 전공을 쌓아 남작이 된 자. “내 명성과 지위는 오직 내가 강했기에 얻을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게 바로 너희가 나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논리가 완성된다. “내가 강해지면 내 지위 역시 올라갈 테니까.” “……?” “나는 남작 작위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 나를 돕는 것은 멜베스를 위한 일이다. *** 총 서른하나. 아니, 이제는 내가 껴서 총 서른두 개의 이종족 가문이 연합해 만들어진 집단 멜베스. 이 집단의 가장 큰 약점은 두 개다. 하나는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기존 귀족 사회의 배척과 견제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가장 높은 애가 백작이지.’ 백작가 하나가 최대 아웃풋이라는 거다. “나를 도와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소망을 모두 이뤄주겠다.” 다만, 내 논리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던 건지 돌아오는 반응은 무덤덤했다. “얀델 남작의 포부는 알겠으나, 이 역시 결국엔 특정 가문만을 위한 특혜 아니겠소?” 거, 이럴 때는 남이지. 원래 사회라는 게 뒤에서 밀어주면 위에서 당겨주고 하는 건데. ‘그래도 몇 명은 내 얘기에 관심이 있던 거 같으니 됐나?’ 낭만은 충분히 보여 줬으니, 이번에는 다른 쪽을 공략해 볼 차례. “물론 나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멜베스는 아직까지도 미궁과 관련된 사업에 손을 대지 않고 있지 않나. 멜베스 차원에서 클랜을 후원한다고 생각하면 딱히 손해도 아닐 거다.” 수많은 귀족가들이 탐험가 클랜을 후원하는 건 단순히 과시 수단만은 아니다. 휘하의 클랜이 있다는 것은, 언제든 미궁 내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의미하니까. 이 왕국 전체가 미궁 하나에 의지해서 돌아가는 나라인 만큼, 그 영향력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멜베스에는 아직 그런 클랜이 없었다. “얀델 남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진 알겠소. 다만, 우리가 미궁 사업에 손대지 않은 건 하지 못해서가 아니오.” “그럼 어째서지?” 짐짓 그 이유를 모르는 척 묻자, 이번에도 콧수염 남작이 친절히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미궁에 손을 대면 기존 세력의 견제가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성지와 선을 그었던 것과 비슷한 일환이었다. 세력이 작은 만큼 적을 늘리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멜베스의 모토였다. 하지만……. “근데 그건 내가 들어온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 멜베스에서 귀족이 되기 전부터 유명 탐험가였던 나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 전략은 쓸 수 없게 된 것이나 매한가지다. 다만, 콧수염 남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제가 더더욱 위험한 거요. 공식적인 지원이 이어지게 된다면 정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외부에서는 우리가 미궁에 손을 대기 위해 얀델 남작을 이용한다 생각할 테고, 이는 얀델 남작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소.” 개인적인 지원금은 1스톤도 줄 수 없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답변. 근데 이거로 물러날 거면 시작도 안 했지. “그들이 그렇게 무섭나?” 나는 도발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면 적당한 자극이 필요한 법이니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의미가 없는 질문이구려.” “왜 의미가 없다는 거냐?” “우리는 단지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릴 뿐이오. 한 가문을 이끈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나를 넘어 내 자식을. 내 자식을 넘어 내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요.” 조금은 감정적인 목소리였으나, 의외로 그다지 적대적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 따라서 더 흔들 필요가 있었다. “내 귀에는 단지 책임을 후대에게로 미루겠단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내 판단에 대해 그대에게 비방을 들을 이유는 없소.” 결국 콧수염 남작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 쩝, 사사건건 껴들긴 해도 나름 젠틀한 아저씨긴 했는데. 왠지 미안한 감정도 일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넘어서 내 팀, 그리고 내 클랜을 위해 행동해서 말이지. “오해가 있군.” 아무튼, 이 정도면 밀 만큼 밀었으니 당기기도 해줄 차례. “헤스카이라 남작, 나는 비방하고자 한 말이 아니다. 단지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을 뿐.” “…….” “나를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 아니었나?” 살살 달래듯 말했으나 콧수염 남작은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대신 다른 곳에서 발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저는 얀델 남작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백랑족의 브웰린 남작. 나이는 30대로 가주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하는 사내. “우리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단 건 모두가 동의를 했던 내용이지 않습니까.” 예전에 토끼 남작이 들었던 대로, 멜베스 내에도 현재 상황에 불만이 있는 자는 많았다. 그러니까 각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나온 걸 테고. “아, 그렇다고 이번 논제를 찬성한다는 뜻은 아닙니다마는. 아직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했던 옛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미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 정도는 해볼 만한 시도라 봅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다들 공을 세우는 와중에 우리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브웰린 남작의 말을 필두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저 역시 이 부분은 동의해요. 탐험가가 필요할 때마다 매번 성지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좀 번거로웠으니까요.” “하지만 굳이 얀델 남작을 통해서 할 필요가 있소? 우리 부족의 탐험가만 모아도 클랜은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을 터인데.” “확실히… 얀델 남작의 클랜은 아직 열 명도 안 되는 규모라고 들었소.” “예. 차라리 각 가문에서 인재들을 모아 새로이 만든 뒤 다 함께 지원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만.” 흐음, 이건 좋지 않은데. 대화의 중심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개입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군!” “…예?” “그때쯤이면 전쟁은 진작에 끝나 있을 거다!” 안전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이 미궁 사업에 욕심을 내게 된 원인이 뭐겠는가. 다 전쟁 때문이다. 수많은 가문들이 자신이 후원하는 클랜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니까. 한데 그걸 지켜만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배가 아파왔을—. ‘어…….’ 분명 그랬을 터인데……. “글쎄요. 이번 전쟁에서부터 이득을 보겠다는 건 너무 조급한 생각이 아닐지.” “나도 같은 의견이오. 훗날 이런 사태가 재발할 때를 대비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하자는 말인 것은 아니었소. 급한 걸음은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니.” 이래서 귀족놈들이란. 미래를 지향하는 저 특유의 마음가짐이 문제다. 저런 느긋하고도 안일한 생각으로 뭔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수천 년 동안 이러니까 지금까지 변한 게 없겠지. ‘빨리빨리’를 최우선시 하는 K-바바리안으로서 실로 속이 터지는 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략을 바꿔야겠는데.’ 미래를 보는 정치인에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니즈에 맞춰 내 미래 가치를 어필하든가. 아니면, 그냥 쟤들이 그리는 미래를 시궁창처럼 보이게 만들든가. 당연히 내가 고른 것은 후자였다. “멍청한 소리! 너희가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너희를 무시하던 가문들은 더 강해질 거다!” 정치는 네거티브가 기본이라고 보고 듣고 자라서 말이지. “재상만 봐도 모르나? 전쟁 중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가문을 키우고 있다! 자기 사람들에게만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를 퍼주고 있지 않나!” “하지만 이번에 공을 세운 얀델 남작은 후작의 사람이 아니지 않소?” “나, 나는 예외다!” 과격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주제를 꺼내고. “재상의 아들만 봐도 그렇다! 이름도 실력도 없는데 전쟁통에 군단장이 되고, 전쟁터에서도 한 일도 없이 공을 인정받고 있다!” “테르세리온 소가주가 실력이 없다고 하기에는 좀…….” “아무튼, 이번엔 남작이 된 게 다행히 나였지만, 전쟁이 더 길어지면 어떨 거 같나? 분명 몇 명쯤 새 귀족가문이 더 탄생할 테고, 그 가문은 고스란히 후원하던 가문의 휘하로 들어가겠지!” “…….” “두고만 볼 건가? 우리가 개입하면 이종족 출신 가문이 하나 더 생길 수도 있는 기회인데?”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소. 때를 준비하지 못한 우리 잘못이니.” “전쟁은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었지.” “솔직히 말해, 이런 사태가 과연 또 벌어질지도 모르겠소이다.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게 최선인 건 아닐지…….” 얘네들은 뭐지 진짜? 내 분전을 보다 못한 토끼 남작도 중간에 껴들어 지원을 했지만, 결국 여론을 확실하게 뒤집지는 못한 채 투표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의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얀델 남작 및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정식 지원을 찬성하는 분께선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해 주십시오.” 보나 마나 결과는 뻔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보수적일지는 몰랐는데.’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는—. “저는 찬성입니다.” 토끼 남작과 내가 쓸쓸하게 손을 들고 있던 와중에 들려온 말. 백랑족의 브웰린 남작이었다. 그나마 가주들 중에 ‘변화’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했던 자인데……. ‘……어?’ 놀랍게도 그를 시작으로 손을 들기 시작한 가주가 점차 늘어났다. 하나, 둘, 셋, 넷……. 이내 집계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찬성표를 던진 숫자는 과반수를 턱걸이로 넘었다. “……여, 열일곱의 가문이 찬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얀델 남작 및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정식 지원 건이 가결되었습니다.” 멜베스 토박이인 토끼 남작도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결과. 다만, 투표가 끝나고 추가 논의가 시작되며 내 벅찬 감정은 사르륵 녹아내리고 말았다. “지원은 동의했으나, 멜베스의 공금을 사용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찬성표, 반대표 중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를 향한 지원에 제약을 걸어댔고, 끝내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너무도 조촐했다. 1. 공금을 이용한 대출 가능(이자 및 한도 있음). 2. 멜베스 상회의 건물 중 하나를 클랜 하우스로 제공(저렴하게). 3. 멜베스 전용 퀘스트 수락 가능. 결국 핵심은 3번이었다. 만약 나와 클랜의 힘이 필요하면 멜베스에서 정식으로 요청을 하고, 그에 따라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식인데……. ‘……시작이 반이랬으니까.’ 그래, 오늘은 이거로 만족하자. *** 토끼 남작의 집에서 열렸던 집회가 끝난 뒤, 나는 다시 마차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 제대로 못잔 숙면을 취하고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또 나섰다. 이번 달은 내내 스케줄이 빡빡하거든. “아, 비요른 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이다. 샤빈 에무어.” “…벌써 아침인가요?” “…….” 곧바로 성지로 가서 부족장 업무를 시작했다. 시일이 다가오며 밤낮없이 근로 중인 행정군단의 부동산 판매 계획이 얼마나 진행됐는지를 체크했고, 내 인가가 필요한 일들을 듣고 허가해 주었다. 참고로 부족장 업무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 비요른! 왔나!” “비요른이 아니라 부족장.” “……그래, 부족장!” 아이나르에게 이번에 성인식을 끝낸 전사들이 몇이나 살아서 귀환했는지, 부족 내에 다른 일은 없는지 여론은 어떤지를 체크. 그리고……. “내, 내가 2장로……?” “싫나?” “그럴 리가 있나! 하겠다! 무조건 내가 하겠다! 시켜만 줘라!!” 동료에게 배신을 당했다가 내게 구원받고서 각성하여 배낭혁명을 불러일으킨 전사, 타르손의 아들 카론을 2장로로 임명했다. 아이나르만으로는 역시 손이 부족했거든.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됐으니, 다음 달 성인식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하나하나 신경 쓰기엔 시간이 없다. 안 그래도 바쁜 행정군단에 부담을 더 지우는 것도 못할 짓이고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하루, 이틀. 바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개벽 157년 7월 5일. 땅을 파는 날이었다. 466화 땅의 주인 (1) 바바리안 역사상 최초의 부동산 판매가 시작되기까지 약 30분 전. 아이나르가 갖고 온 희소식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130명이나 모였다고?” “그래! 다들 언제 파냐고 아우성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기인수. 나는 얼른 바바리안족의 도시개발부 장관에게 물었다. “릭, 팔 수 있는 땅의 최대 개수가 몇이었지?” “73개입니다.” 땅 한 개의 단위는 400제곱미터. 즉, 121평이니……. ‘오늘 판매 가능한 총 면적은 8,833평.’ 혼자서 측량하러 다녔을 릭을 생각하면 그간의 고생이 보이는 듯하다. “한데… 정말 이런 식으로 셈을 해도 괜찮은 겁니까? 땅 한 개라니…….” “걱정 마라. 다들 이쪽이 훨씬 더 편할 테니까.” 괜히 숫자가 커지면 바바리안들은 혼란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암, 역시 가로 세로 20m의 정사각형 형태가 땅 1개인 개념으로 만드는 게 편하지. 물론 소비자의 자유도를 위해 이후 소형 평수와 대형 평수도 만들어 팔 계획이지만……. 200제곱미터는 땅 반 개. 600제곱미터는 땅 하나 반 개. 역시 이쪽이 훨씬 심플하잖아? “아무튼, 그럼 이번엔 40개 정도만 파는 거로 하겠다.” “……예? 전부 팔지 않으시고요?”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혹시 몰라 최대한 많이 땅을 준비하긴 했지만, 지금 이걸 다 팔면 이후 계획이 흐트러진다. “……알겠습니다.” 오늘을 위해 한시바삐 일했던 릭은 조금 허탈한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 부동산의 핵심은 미래가치인 법. “자, 그럼 슬슬 가야겠군.” 이후 추첨용 제비뽑기 상자를 숫자에 맞춰 재조정한 뒤 장소로 향했다. 도시와의 이동이 편리한 외곽 성문 쪽의 숲. “오오, 부족장이다!” “얼른 팔아라! 돈이라면 충분히 갖고 왔다!” 날 발견한 전사들이 하나둘 말을 걸어온다. 대충 인사를 받아주며 전사들의 장비 수준을 싹 스캔했다. ‘평균 5층 정도.’ 이 정도면 사실상 부족 내에서도 중상위권에 속하는 전사라 봐도 무방하다. 하긴, 얘네 정도는 되어아 200만 스톤이라 측정한 땅을 무리없이 구매할 수 있겠지. 바바리안들은 저축 습관이 없으니까. 아이나르의 말에 따르면 오늘 땅을 사려고 소중히 간직하던 무기를 판 전사들도 있다던가? “반갑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전사들아!” 이내 아이나르가 마련해 둔 단상에 오른 나는 우선 서론을 꺼냈다. “저기 노란 깃발 네 개가 보이나?” “보인다!” “깃발 네 개를 기준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땅이 오늘 팔 땅이다.” 우선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 온 녀석들 중에는 그냥 구경하려고 온 녀석도 있을 테니까. 조금 자극을 줘야지. “어때, 나름 넓지 않나? 백 명이 넘게 들어와 있는데도 자리가 남다니!” “어… 그런가? ” “너희가 지내는 여관방을 생각해 봐라! 거기는 침대 하나만 놔도 꽉 차는데, 여기엔 침대 100개는 거뜬하게 들어갈 거다!” 물론 여관방은 맨바닥도 아니고, 벽과 지붕이 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닐 터. “그, 그렇군? 그리 생각하니 넓은 거 같다!” 옳지. “그래, 넓은 땅이다! 여기에 집을 짓고, 마당은 훈련장처럼 꾸며도 좋지. 아! 여기는 사유지라서 도시에서 못 쓰는 이능도 마음대로 써도 된다!” “…사유지?” “완벽하게 너 개인의 땅이란 뜻이다!” “…오오!”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라 생각했는지, 탄성을 내뱉는 전사들. “아, 참고로 도시에선 이 정도 크기의 땅을 사려면 몇 억 스톤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귀족이 아니면 살 수도 없고!” 황도 카르논의 경우에만 억소리가 난다는 얘기 역시 과감하게 스킵하며, 이후로도 한참이나 비슷한 이야기로 전사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그리고 슬슬 때가 무르익었단 판단이 들었을 때. “크흠!” 나는 목을 풀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오늘 팔 땅은 마흔 개다. 전부 다 여기 이곳과 같은 크기로!” “…마흔 개? 우리는 백 명도 넘는데?” 아침부터 불려나온 것도 모자라, 내 연설로 인해 구매 욕구가 한껏 자극된 바바리안들은 턱없이 부족한 공급량에 불만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뻔뻔하게 나갔다. “투덜거리지 마라! 땅이 워낙 귀하다보니 마흔 개도 겨우 준비한 것이니까! 싫으면 사지 마라!” 공급이 적다는 것은, 공급하는 쪽이 갑이 된다는 의미. 이내 전사들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고, 나는 예정대로 진행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각자 순서대로 나와 제비를 뽑겠다! 검은색을 뽑은 사람은 땅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거다!” 130명에 달하는 전사들을 여섯 조로 나눈 뒤, 차례대로 제비를 뽑기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들의 희비가 갈리기 시작했다. “거, 검은색! 검은색이다!!” “희, 흰색이라니! 이건 불공평하다! 나중에 뽑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다! 다시 뽑게 해줘라!!” 떼를 써봤자 결과를 바꿔주는 일은 없었다. 추첨이 끝난 직후 당첨된 바바리안들은 행정군단의 일원인 릭 앤더슨에게 인계되어 현금을 내고 땅을 구매했다. “저기 인간……? 나는 글을 못 읽는다!” “괜찮습니다. 부족장님이 파신 땅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땅 문서에는 오직 바바리안을 대상으로만 상속이 가능하며, 상속인이 지정되지 않았을 시엔 부족으로 소유권이 이전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 역시 사소한 이야기였다. “자, 찍겠습니다?” 바바리안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손에 인주를 묻혀 종이 위에 묻혔다. 그리고……. ‘오지의 맨땅을 팔아서 8천만 스톤이라…….’ 지금까지 성인식 한 번에 평균적으로 천만 스톤 정도가 나간다 했으니, 아홉 번은 거뜬히 더 치를 수 있을 거액. “이봐! 뭐 하는 거냐! 얼른 네가 서 있는 거기는 내 사유지다! 얼른 나가라!” “미, 미안하다! 잠시 구경 좀 하고 싶어서…….” “쯧, 잠깐만이다. 알겠나? 가급적이면 숨도 쉬지 말고.” “알겠다!!” 이내 땅을 구매한 전사들이 희희낙락하며 본인 땅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고, 땅을 사지 못한 전사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쉬리브의 아들 뷔크안! 혹시 10만 스톤을 더 줄 테니 나한테 땅을 팔지 않겠나?” “흐음, 10만 스톤……?” 벌써부터 내가 기대했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뭐, 결국 거래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미안하지만, 그 가격에는 어려울 거 같다.” “그런가……. 알겠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나를 찾아와라.” 프리미엄으로 10만 스톤 이상을 주는 건 조금 그랬는지 쉽게 물러나는 전사. 이 역시 문제는 없었다. “아이나르.” 조용히 읊조리자 아이나르가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없이 뒤로 빠져 사라졌다.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는 멈출 수 없다. *** 마흔 개의 토지가 완판된 다음 날. 한 가지 소문이 성지를 휩쓸었다. “그거 아나? 쉬리브의 아들 뷔크안이 어제 산 땅을 300만 스톤에 팔았다더군!”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100만 스톤을 공짜로 번 거다!” “뭐?! 그게 정말인가! 100만 스톤이면 돈을 좀만 보태서 라이티늄 갑옷을 살 수도 있을 돈이다! 부족장이 즐겨입었다는!” 200만 스톤에 팔린 땅이 고작 하루 만에 절반의 차익을 거두었다. 당연히 정상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어디 머리에 문제가 있는 놈 아닌가? 부족장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다니……?” “그래서 누구냐? 그 땅을 사갔다는 녀석은?” 매수인의 이름은 뷔톨의 두 번째 아들 세이릭. 배낭혁명을 일으킨 2장로가 만든 부족 내 사조직 ‘동지회’의 일원. “…예전에 배낭을 털어서 큰돈을 벌었다던데, 설마 그 정도로 돈이 많을 줄이야!” 카론에게 입이 특히나 무거운 녀석이란 말을 듣고서 내가 뒤에서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그리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근데… 어쩌면 부족장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백날천날 떠들어봤자 모든 동족들이 땅에 높은 가치를 매기진 않을 터. “아아, 나중에는 비싸서 못 살 거라던 그 말 말인가!” “그래! 이번 달 내에 또 땅을 팔 거라던데, 이번엔 나도 참가해볼까 싶기도 하다.” “흐음, 너는 땅 같은 게 필요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여전히 땅은 필요 없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그냥 사뒀다가 나중에 팔면 공짜로 좋은 무기를 하나 얻는 거 아닌가! 너도 사둬라!” “글쎄… 나는 그냥 그 돈을 모아서 무기를 사는 게 나을 거 같다! 무기는 적과 싸울 때 쓸 수라도 있지, 땅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뭐,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은 전사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200만이 하루 만에 350만에 팔렸고. 350만이 다음 날엔 370만에, 370만이 그다음 날엔 400만에 매각되었으니까. 우리 ‘동지’의 손에 의해서. “……무, 무슨 그런 돈을 주고 땅을 산단 말이냐! 다, 다들 미친 거 아닌가!!” 고작 사흘 만에 성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 안 판다는 거냐! 내가 400만 스톤을 준다고 하지 않나!” 몇몇 바바리안은 발빠르게 땅을 사고자 나섰지만 땅을 팔려는 땅주인은 없었다. 그야 땅주인들도 바보가 아니다. “내일이면 더 비싸게 팔 수 있는데 내가 왜 파나?” “그, 그런……!!” 실제로 다음 날에 그 땅은 400만 스톤에 매각됐고, 이를 본 전사들은 눈에 불이 켜졌다. 딱히 그들이 미련해서는 아니었다. 나름 경제에 대해 배운 현대인들조차 그 광기에 휩쓸려 이성이 마비됐지 않은가. “430만! 430만에 사겠다!!” 고작 나흘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젠 ‘동지’가 나설 필요도 없을 만큼 활성하과 된 시장. 다만 나는 카론에게 동지회에 지원한 5천만 스톤을 전부 쓸 때까지 매수를 이어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순익의 3분의 2에 달하는 금액이었으나, 아까운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음에 팔 땅은 600만에 팔아도 다 팔릴 테니까.’ 가격이 오른 이유? 대충 붙이면 된다. 전에 팔았던 것보다 안쪽 땅인 만큼 비싼 건 당연하지 않나. 어차피 얼마가 되건 사려 할 것이다. 일단 사기만 하면 돈이 복사가 된다고? ‘오케이, 그럼 여기는 딱히 내가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될 듯하고…….’ 슬슬 정리하고서 부족장 천막을 떠나려던 차, 부동산 업무를 보고 있던 릭 앤더슨이 말을 걸어왔다.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뭐가 말이냐?” “그 땅값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땅값이 오를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요. 어차피 성지 땅은 넓지 않습니까? 수학적으로 봤을 때, 구성원 모두가 땅 한 개씩을 가져도 땅이 남는단 말입니다.” “흐음, 그런가?” “예. 지금 땅을 산 전사들은 결국 다 후회할 겁니다. 남작님께서 말리시는 게 어떤지요?” “글쎄, 사겠다는데 무슨 이유로 막나?” “그건… 그렇지요.” “아무튼, 난 이만 가보겠다!” 후, 대체 얼마 만에 퇴근인 거지? 또 아멜리아랑 에르웬한테 한소리 듣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단걸음에 집으로 달려왔으나, 의외로 잔소리는 없었다. “에밀리, 에르웬! 내가 왔—.” “읽어봐라.” 아멜리아가 뜯겨진 편지 봉투를 내게 툭 던졌다. “모즐란에서 온 서신이다.” “……응?”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일단 편지를 읽어내렸다. 귀족들의 경찰 같은 역할을 하는 모즐란인 만큼, 격식에 맞춰 쓰여진 내용은 쓸데없이 길었지만 결국 세 줄만 읽어도 충분했다. […이는 톱니이빨 클랜의 후원 가문인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대리인 자격으로 모즐란 분쟁위원회에 정식 요청한 안건으로…….] 신고한 놈이 누군지. [……이에 따라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의 정수 값의 절반인 21억 3천 500만 스톤을 요구하고 있사오니…….] 내게 바라는 게 뭔지. 그리고……. [……비요른 얀델 남작 각하께서는 서한을 수신한 날짜로부터 15일 이내에 모즐란 본청에 방문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찌이익, 찌이익. 내용을 다 읽은 후 전부 찢어서 삼켜버렸다. ‘원래 세상에서도 못 받아본 고소장을 여기서 받을 줄이야.’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딱히 무섭진 않았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어언 4년. ‘알미너스 백작이라…….’ 아직까지 나는 패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잃을 게 많은 놈한테는. 467화 땅의 주인 (2) 알미너스 백작가. 라프도니아 왕가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존재했던 위대한 가문 중 하나는 아니다. 하지만. [알미너스 중앙 거래소] [알미너스 은행] 이 기관을 소유한 ‘알미너스 상회’가 백작가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영향력만큼은 그들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 초대형 클랜 중 하나인 톱니이빨의 후원자로 그 영향력이 미궁에까지 닿아 있기도 했고. “잠자코 있진 않을 거 같았지만, 설마 모즐란에 공론화를 시킬 줄이야.”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말에 아멜리아도 공감을 하는 기색으로 피식 웃었다. “생각 이상으로 백작가의 배짱이 두둑하더군. 무허가 토벌을 시도한 정황이 뻔한 와중에 이런 수를 쓸 거라곤 나도 예상치 못했다.” “에밀리, 네 잘못이 아니니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책임감? 내가 왜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어…….” 그냥 그런 말을 할 타이밍 같아서 한 건데……. 아니었으면 말고. 왠지 멋쩍었기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발신일이 이틀 전인데, 왜 알려주러 오지 않은 거냐?” “바쁠 걸 알기도 하고, 그전에 확인할 것도 몇 가지 있었으니까. 만약에 오늘도 네가 집에 안 오면 내가 찾아가려고 했다.” “확인할 것?” 아멜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지난 이틀 동안 확인한 몇 가지를 내게 말해주었다. 꽤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우선 벌써 사람을 풀었는지 주점에서 말이 나오고 있더군.”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여론전을 시작했다. “대충 예상은 가지만, 뭐라고 그러던가?” “전부 다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엔 우리가 수를 써서 다 잡은 계층군주를 도중에 훔쳐 갔단 얘기다. 아, 참고로 아예 녀석을 소환한 게 우리일지 모른단 추론도 있었다.” “역시 그런가…….” “그래도 그게 헛소문이라고 반박하는 자들도 상당하다. 다행히 네가 그동안 밟아온 길들이 그리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더군?” 그래, 틈틈이 올려둔 명성 수치의 효과 덕분이란 말이지. 이거 좀 뿌듯할 지도—. “하지만 서둘러야 할 거다.” “응?” “그때 너에게 도움을 받은 탐험가들에게 접근을 하는 걸 봤다. 회유해서 본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도록 만들 생각인 거 같더군.” “…회유? 검증 마법이 있어서 거짓 증언은 못 할 텐데?” “혹시 모르고 있는 건가? 모즐란의 재판에서는 묵비권 행사가 가능하다. 아마 불리한 질문은 전부 답하지 않고 넘긴 뒤, 진실의 일부만 말하며 유리한 증언을 하도록 만들겠지.” “……음, 그래도 우리 쪽이 훨씬 더 신빙성 있지 않나?” “아니, 판례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보통 증언이 엇갈려 분별하기가 어려울 땐, 재판에서 증언 비중 자체를 낮추는 식으로 진행되니까. 흔한 전략이지.” 어… 그렇구나……. “근데… 넌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냐?” “지난 이틀 동안 자료를 보며 숙지했다.” “…….” 어쩌면 진짜 천재인 건, 얘 언니가 아니라 얘가 아니었을까. 내심 감탄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아멜리아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 넌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냐?” “재판이 열리는 건 기정사실이니, 우선 그때 네 도움을 받았던 이들 중에 증언을 해줄 자를 구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멜베스에 도움을 요청해라. 역사가 깊은 만큼 이런 분쟁도 여러 번 있었겠지. 실력 좋은 법관이 한 명쯤은 있을 거다.” “오, 그다음엔?” 기대하는 눈으로 응시하자,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잘하는 건 조사지, 해결책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래, 딱히 더 생각나는 게 없다는 거구나. “아저씨,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그때 열심히 듣고는 있지만 대화에 참가는 하지 못했던 에르웬이 그리 말했다.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먼저 말할 테니, 그때까지 너희는 신경 쓰지 마라.” 부족장으로서의 업무는 충분히 보고 왔으니, 이제 클랜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다. *** 무려 나흘 만의 퇴근.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곧장 집을 나서 모즐란 본청으로 향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도 있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전략을 세우기 전에 정보를 먼저 수집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하나. ‘……왜 하필 본청으로 불러가지고.’ 지난날, 드왈키가 체포됐던 모즐란 지부야 해당 관할 구역인지라 7구역 안에 있었으나, 본사라 할 수 있는 본청은 황도 카르논에 자리해 있다. ‘……돈 좀 쓰더라도 군용 승강장을 이용할까?’ 문득 그런 유혹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나, 클랜 아다바다의 클랜장으로서 끝내 유혹을 떨쳐냈다. 암, 한 번 탈 때 그게 얼마인데? 가는 동안에 자면 시간 낭비도 최소로 줄일 수 있다. “본청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얀델 남작님 이리로 오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이내 모즐란 본청에 도착하자 신분을 말할 것도 없이 소속 기사들이 예의바르게 나를 맞이했다. 격세지감이란 게 이런 걸까. 물론 이번에도 좋은 일로 온 건 아니지만, 예전엔 드왈키 건으로 찾아갔을 때 건물에 발도 제대로 못 붙이게 했었는데. 심지어 본청도 아니고 지부였음에도 그러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모즐란의 의장 크리스티나 베알론입니다.” 날 맞이한 모즐란의 수장은 단아한 외모의 중년 여성이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모즐란 소속이니 이 아줌마 역시 기사일 터. “베알론? 베알론 백작가를 말하는 건가?” “예. 베알론 백작님께서 저의 오라버님이 되시지요.” “그렇군. 근데 원래 의장이 이런 일까지도 하는 건가?” “사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오나 작위 귀족분 간의 분쟁은 극히 예민한 사항이기에. 혹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 제가 직접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얼른 해봐라. 편지에는 방문하면 자세한 얘기를 해주겠다던데.” “예, 아무래도 서한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는지라. 크흠,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아줌마가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만 귀족 출신답게 서론은 길었고, 본론으로 들어간 건 편지에 담긴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풀어 말하는 과정을 거친 후였다. “……보통 이런 경우엔 합의를 권하는 바입니다. 알미너스 백작님께서도 얀델 남작님만 응한다면, 요구한 액수를 낮춰주겠다고 확실하게 약속을 하셨고요. 하지만…….” 이내 아줌마가 쓰윽 날 올려다봤다. “남작님께서는 그걸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거, 그걸 말이라고. “물론이다.” “그럼 결국 왕립 판결소로 사건을 넘기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후 의장은 판결소로 넘어갔을 때의 절차와 내가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그중엔 진술서를 쓰는 것도 있었는데…….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기록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진술서 작성은 다음으로 미뤘다. 그야 재판에서 쓰일 진술서가 아닌가. 변호사를 대동한 뒤 전략적으로 쓰는 게 옳다. 따라서 건물을 나선 뒤에는 곧장 토끼 남작가로 직행. “얀델 남작님……? 어머님에게는 방문에 대해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마는.” 날 맞아준 것은 남작의 딸이었다. 애석하게도 토끼 남작은 현재 업무가 있어서 왕궁에 가 있다는 모양. 오늘 내에는 돌아온다기에 그냥 기다기로 했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남작, 이곳엔 어쩐 일입니까? 미니아에게 들어보니 한나절은 기다리셨다는데…….” “리리비아 남작, 네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 말입니까? 일단 자세히 말해보시지요.” 날이 저물 즈음에 돌아온 토끼 남작은 내 이야기를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얀델 남작님은 정말 폭풍 속에서 태어난 사람 같군요.” “…….” “일단 법관이라면 솜씨 좋은 인물을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무리겠고, 내일까진 직접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신경써줘서 고맙다. 근데 혹시 빈방이 있나?” “빈방이라 하심은……?” “집에 가서 잤다가 내일 다시 오는 건 번거롭지 않나.” “……얀델 남작님께서는 라비기온에서 지내는 중이었지요. 알겠습니다. 이따 사람에게 말해 방을 하나 비워놓으라 하지요.” “고맙다.” 오케이, 그럼 숙박도 해결. 이후로는 토끼 남작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했고, 그다음에는 수정구를 빌려 에르웬과 아멜리아에게 외박을 하게 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처음 뵙겠습니다. 얀델 남작님. 제임스 엘크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리리비아가 소개해준 법관을 만나 상담을 받았다. 내 얘기를 모두 들은 법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군요. 일단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모즐란에 공식적으로 기소된 내용은 ‘공헌도에 따른 전리품 분배 요구’가 맞습니까?” “맞다.” 뒤에서는 내가 쓰레기짓을 한 것처럼 소문을 내는 중이지만, 일단 소송의 내용은 그렇다. “어찌됐든 톱니이빨이 이번 사냥에 있어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니 그만큼의 지분을 내놓으라더군.” 소송의 근거는 미궁재난법에 있었다. 재난 시 각 탐험가들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로 인한 전리품 분쟁도 매번 반복됐다. 덕분에 관련 법률도 마련이 되어 있는 상태고. “어렵군요…….” “…그 정도인가?” “예. 공헌도에 따른 분배 요구는 미궁법에 따른 적법한 요구입니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당당하게 한 걸 보면, 본인들의 공헌도를 증명할 수단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요.” 그리 말한 법관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결국 판결소로 가도 최대한 분배금을 줄이는 식으로 흐르게 될 텐데, 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놈들이 계층군주를 무허가로 소환했다고 의심되는 정황이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진 목소리. 다만 법관은 여전히 업무적인 말투로 답했다. “그건 이 사건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정황뿐이지 않습니까? 증명도 어려울 테고, 증명을 한다 해도 분배와는 별개의 사건이 될 겁니다.” 쉽게 말해, 추후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벌금을 내든 징역을 살든 분배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 “얀델 남작님께서 원하는 선택을 하실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너무 노엽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후, 그래, 여기서 얘를 탓할 건 아니겠지. “제임스,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협의하는 쪽을 추천드립니다. 얀델 남작님께서 말씀하신 ‘정황’을 무기로 쓴다면, 분배금을 훨씬 더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짊어질 위험 부담이 훨씬 더 적지요.” “위험 부담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래도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막무가내인 내 물음에도 제임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예. 이게 최선입니다. 분배금 지급은 결국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모즐란에 제기한 중재 신청을 취하하는 게 아닌 이상은 말입니다.” 그래, 그런 거구나. 나는 이쯤에서 법률 상담을 끝마쳤다. 딱히 얻은 게 없는 듯했으나, 그래도 제임스 덕에 앞으로의 방향성은 잡혔다. ‘취하를 시켜야 한다 이거지.’ 요지는 알미너스 백작이 알아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 쉽게 말해, 위협할 총알이 필요하다. *** 법률 상담이 끝난 후. 곧장 모즐란에 방문해 법관의 도움을 받으며 내게 가장 유리하도록 진술서 작성을 끝마쳤다. 일단 재판까지는 가지 않는 게 베스트인 거 같긴 하지만, 사람 일은 혹시 모르니까. 만일을 위해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 한다. ‘재판이 열리려면 두세 달은 걸릴 거랬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기에 알미너스 백작과 직접 만나보는 일은 뒤로 미뤘다. 그야 지금 가서 뭐가 변하겠는가? 따라서……. 딸랑-! 돌아오는 길에 탐험가 길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일반 안내원이 아닌 지부장의 접대를 받으며 토벌 신청서를 작성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 토벌 대상은 1층의 계층군주인 바로 그 녀석. “…이 토벌 신청서는 오랜만이로군요.” 그야 그렇겠지. 5등급 클랜이 4등급 클랜으로 승급을 원할 때는 다른 방법도 많으니까. 보통 창설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실력은 충분해서 빠르게 승급을 하고 싶은 자들만이 이놈을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토벌 일자는 바로 이 다음 미궁이 열린 때……. 이거 서둘러 각 지부에 공문을 올려야 하겠군요.” 다행히 허가는 문제없이 나왔다. “아십니까? 공문이 걸리자마자 한바탕 난리가 날 겁니다.” 모를 리가. 내가 바라는 바가 그건데. “토벌 참가 인원이 다섯 명이라니…….” “…….” “만약 성공한다면 최후의 대현자 이후 열 번째로 있는 위업이 되겠군요.” 알미너스 백작을 상대하기 위한 첫 번째 총알이었다. 468화 땅의 주인 (3) 알미너스 백작가에서 소송을 거는 것보다 먼저 한 것은 여론전이었다. 하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소송만 걸어도 판결을 통해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건 확실할 텐데. 내가 도출해낸 답은 이거였다. ‘알미너스 백작도 판결소까지 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 추측이 맞다면, 이번 소송 건은 단지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협박과 압박 사이의 어딘가라 해야 하나? 아무튼, 너와 나는 체급부터가 다르니, 더 많은 걸 잃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협의하고 뱉을 건 뱉어내라는 말뜻이었다. ‘알미너스 백작쯤 되는 인물이 돈이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분명 체면 때문일 것이다. 경력은 짧지만, 내가 본 귀족 사회란 그랬으니까. 이곳은 오직 승자와 패자로만 구분된다. 그리고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뚜렷한 패배의 증거가 될 테고. 따라서, 나는 여론부터 뒤집기로 했다. 그야 지금 얘네가 가장 공들이고 있는 부분이 뭔데? ‘원래의 얀델 남작에겐 계층군주를 처치할 능력이 없다.’ ‘톱니이빨 클랜이 아니었다면, 그들 클랜은 결코 계층군주를 처치하지 못했을 것. 엄밀히 따져보면 전부 다 옳은 얘기지만, 백작은 이런 논리를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키고 있다. 일종의 밑작업이었다. 처음엔 능력의 유무로 시작해 점점 더 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겠지. ‘비요른 얀델은 피땀 흘려가며 재난을 수습하던 톱니이빨 클랜의 공을 마지막에 가로챘다.’ ‘이게 영웅이라는 사람이 할 행동인가?’ 백작은 한눈에 파악한 것이다. 얀델 남작가가 가진 힘의 근원이 바로 이 명성에 있다는 걸. “흐음, 그래서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토벌 신청서를 냈다는 거군?” “……그렇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레이드 계획을 밝히자마자 아멜리아의 차가운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뭐, 평소처럼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아…….” 사고 친 자식을 바라보듯 한숨을 내쉬며 해결할 방법부터 확인했다. “알고 있긴 한 건가? 다섯 명이서 계층군주를 잡으려고 하다가 사라진 클랜이 몇 개인지.” “저도 들었어요. 다섯 명이서 상대할 때는 특히 더 위험하다고. 그래서 보통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로 인원을 맞춘다고….” 참고로 저 인원수는 6층에서 7층 정도 수준의 탐험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 원래 공포의 군주는 5인 클리어가 국룰이다. 그래야만 보상이 제대로 뜨니까. 그 보상에 대해선 좀 알려진 편이라, 주기적으로 위업을 노리는 클랜들도 꽤 있었다. 많이는 아니고 백 년에 둘셋 정도? ‘사실 공략법만 알면 30인보다 5인 클리어가 훨씬 쉬운 편인데 말이지.’ 다음 탐사 목표를 공포의 군주 레이드로 잡은 것도 그래서였다. 이곳 사람들은 리아키스보다 공포의 군주 5인 클리어를 더 어렵게 보고 있으니까. 성공하는 순간 내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은 싹 사라지겠지. “…….” 그때 우리 얀델 가문의 회담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우옌이 꼼지락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얘가 왜 여기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딱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이번에 같이 고생하기는 했으니까. “록록아.” “예, 남작님. 하문하시지요.” 나는 녀석이 내심 바라고 있을 말을 해주었다. “너는 이번에 불참해도 되니 걱정 마라.” “아… 역시 그, 그렇습니까….” 대놓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숨을 내쉬는 녀석. “그럼 남은 한 자리는 누구로 채울 거지?” 이후로는 아우옌을 방으로 돌려보낸 뒤 남은 멤버를 누구로 할 것인지부터 시작해 공략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얘기가 대충 다 끝났을 때. “얀델.” 방에 들어가 쉬려는 나를 아멜리아가 붙잡았다. “최근 들어서 자꾸 적을 만드는 거 같은데…. 무리하는 거 아닌가?” 쉽게 말해, 너무 설치고 다니는 거 아니냐는 뜻. “이번 백작가의 일만 봐도 그렇다. 그런 자와 적이 될 바에는 순순히 돈을 지불하는 게 우리 상황에선 훨씬 나은 상황일 수도 있는데.” 아멜리아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땅의 오래된 주인들 중 하나다. 귀족 신분으로 부족장이 된 것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자꾸 그들과 마찰이 생기는 것이 영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멜리아.” 나는 굽히지 않고 말했다. “견제가 무섭다고 앞마당 멀티를 안 깔면 결국 게임은 질 수밖에 없다.” 내 오랜 신념이었다. “……?” 아멜리아는 얘가 또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 다음날, 오랜만에 에르웬과 단둘이서 외출했다. 목적지는 마탑에 있는 레이븐의 연구실. “아, 왔어요?” “오랜만이다. 레이븐.” “승작하신 거, 얘기는 들었어요. 축하해요. 몇 번 찾아가보기도 했는데 항상 안 계시더라고요.”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말이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와보는 연구실은 어질러진 채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연구실이 좀 너저분하죠? 최근에는 거의 황도에 있는 부대에서만 지내서. 연구실에 온 것도 엄청 오랜만이에요.” “고맙다. 설마 휴가까지 써가며 시간을 내줄 줄은 몰랐는데.” “에이, 당연히 그래야죠. 계층정수를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말만 했으면 마법사들이 줄을 섰을 걸요?” 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가? 그래도 얘 만큼 믿을 만한 마법사도 없으니까. 베르실 고울랜드도 특기는 마도구 쪽이라 정수는 자신이 없다고 했고. “연락을 받고 리아키스의 정수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공부를 해봤어요. 굉장히 특이한 정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자, 그럼 볼까요…?” 이내 레이븐이 씨익 웃으며 다가오자, 내내 조용히 있던 에르웬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저씨, 그냥 둘이서만 하면 안 돼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에르웬은 실험체 취급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암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말했듯이 네가 얻은 힘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마법사의 도움은 필수다.” “…….” “할 수 있지?” “네….” 내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웬. 이를 보며 레이븐이 실소를 터트렸다. “…에르웬 씨는 여전하시네요.” “그쪽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닌데요.” “뭐, 그렇긴 하죠. 이리로 와요.” 아후, 숨 막혀 죽겠네. 예전엔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나름 살갑게 지냈던 거 같은데. 단지 내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예전처럼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에르웬을 이용하려는 줄 알고 떼어내려고 한 걸 보면 레이븐은 나름 옛정을 갖고 있기는 한 거 같은데…….’ 아, 몰라 알아서들 하겠지. 본인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신경을 쓰는 것도 우습기에, 나는 그냥 실험 과정에 집중했다. “자, 이 팔찌를 차세요.” 예전에 시체골렘 정수를 실험할 때도 줄기차게 채웠던 바로 그 팔찌. 아니 근데 저걸 팔찌라고 할 수가 있나? “…읏.” 에르웬이 흉악한 의자에 앉기 무섭게 의자에 붙은 팔찌(?)가 철컥 소리를 내며 잠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단지 이 상태에서 혈관에 마력전도체를 꽂아넣어 에르웬 씨의 생체신호를 확인할 뿐이니까요.” “…….” “그럼 나머지도 시작할게요?” 이후 레이븐은 본격적인 실험을 위한 여러 준비를 이어나갔고, 준비가 끝난 후에는 에르웬에게 스킬을 쓸 것을 부탁했다. “처음 쓰는 이능이라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잘 상상을 해보세요. 대현자가 붙인 이능의 이름을 떠올려보시면 쉬울—.”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해줘요. 집중 좀 하게.” “좋아요. 뭐, 이런 건 마법사인 저보다 에르웬 씨가 더 전문가일 테니.” 에르웬이 눈을 감고서 몇 초 지나지 않아 변화가 찾아왔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삐빅, 삑, 삐비비빅, 삐익—. 에르웬과 연결된 마도구의 생체신호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정수의 스킬이 발동된 것인데……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융합]을 시전했습니다.」 일단 [융합]은 변환계 이능으로, 내 보유 스킬 중 하나인 [초월]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초월]이 다른 액티브 스킬에 영향을 준다면—, 「모든 패시브 스킬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융합]은 오직 패시브만을 대상으로 한다. ‘과연 어떻게 나왔으려나.’ 나는 현재 에르웬이 가진 패시브 스킬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혼돈의 기운이 [속성강화]를 집어삼킵니다.」 5등급 에반의 정수. 흔히 물, 불, 바람, 땅으로 불리는 사대속성의 딜을 전부 올려준다. 「혼돈의 기운이 [절대집중]을 집어삼킵니다.」 왕가 보상으로 얻은 4등급 리트캐논의 정수. 캐스팅 스킬의 대미지가 2배 상승한다. 「혼돈의 기운이 [조화]를 집어삼킵니다.」 5등급 순찰병 에르테스의 정수. 영혼력을 자연력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 「혼돈의 기운이 [절반의 축복]을 집어삼킵니다.」 5등급 늑대괴수 칼반의 정수. 일정 시간을 간격으로 도핑형 버프가 생겼다 사라졌다 반복한다. 「혼돈의 기운이 [추격자의 눈]을 집어삼킵니다.」 4등급 멧크로우의 정수. 시각에 관련된 모든 스탯이 3배 증가하며, 모든 원거리 공격 행위에 보정이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돈의 기운이 [먹이사슬]을 집어삼킵니다.」 팀이 해체된 뒤 요정족의 지원으로 획득한 3등급 몬스터 천계심판관의 정수. 레벨에 비례해 몬스터에게 주는 모든 대미지가 상승한다. 해당 정수의 액티브인 [파열] 만큼은 아니지만, 패시브 또한 굉장히 밸류가 높은 편. ‘계층군주 정수는 [융합]에 포함되지 않으니, 이렇게가 전부겠네.’ 참고로 이 스킬들이 합쳐져 정확히 뭐가 나올진 나도 알 수 없었다. [던전 앤 스톤]에 정수가 몇 개인데? 아무리 나라도 그런 천문학적인 개수의 조합법을 일일이 다 실험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치트 버전을 했던 것도 아니고. ‘……뭐, 상위 정수 베이스의 조합은 거의 다 해본 거 같지만.’ 그렇게 찾아낸 꿀조합이 꽤 있다. 하지만 이 조합법을 완성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먼 훗날이 될 터. 하면, 지금은 어떤 옵션들이 붙었을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육신에 혼돈의 기운이 깃듭니다.」 이 옵션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내가 시스템 로그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때요? 뭐가 바뀐 느낌이에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그럼 하나씩 조건을 맞춰가며 확인을 해볼게요.” 이후 레이븐은 예전에 내게 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실험을 이어나갔고, 당연하게도 이 실험이 하루 만에 끝날 리 없었다. “이번 달 전부는 휴가를 냈으니 앞으로는 매일 이곳으로 오세요.” 이번 달 에르웬의 스케줄이 정해졌다.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육신에 혼돈의 기운이 깃듭니다.」 「캐릭터의 레벨에 비례해 영혼력 및 자연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4등급 이하의 몬스터에게 속성 피해를 입힐 시, 혼돈 속성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집중하는 동안 받는 모든 피해를 영혼력을 사용해 흡수합니다.」 *** 마탑에 다녀온 후로도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최근 남작님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하는 자들이 많더군요. 당연히 돕겠습니다. 그러면 그 헛소문도 잦아들겠지요.] 이번 미궁에서 만났던 저층 탐험가들에게 추후 증언이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냈고. [용이 산맥 정상부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듯해요. 그 전투에서 칠강 중 한 명이 사망했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게—.] 베르실 고울랜드에게서는 이번 회차에 있었던 전쟁 관련 정보와 전반적인 뉴스를 체크했으며. [비요른!! 얼른 성지로 가자! 네가 필요하다!] 중간에는 부족 내에 일이 생겨 성지에 방문하고. […아직 한 달도 안 됐지 않은가! 자네가 대장간 일에 대해 뭘 안다고? 원래 미스티움이란 게 제대로 녹이려면 설비부터 만들어야……. 응? 재촉한 게 아니라고? 거짓말 말게!] 난쟁이놈 대장간에도 들러 전리품 처분 및 금속 녹이기 진행률을 확인했다. 원래 방치형 게임에서도 이런 게이지들은 자주 클릭해줘야 빨리 완료가 되는 법이니까. ‘……이제야 한 달 중에 반이 지나간 건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지쳐가는 육신. 오늘도 밤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쉬기 위함은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해야 할 한 가지 숙제가 더 남아 있었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가보자. 469화 피아 (1) 띠링-! 컴퓨터 전원을 켜자마자 경쾌한 알림음이 나를 반긴다. “쪽지……?” 서둘러 쪽지함을 확인하자 최상단에 미확인 표시가 떠 있는 쪽지가 나타났다. 발신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초 전. 커뮤니티가 열리자마자 나한테 쪽지를 보냈다는 뜻인데……. 딸깍, 딸깍. 일단 쪽지를 열어서 확인했다. [발신인: Ghost master.]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짧은 한 줄의 용건. 그 아래에는 비밀채팅방의 이름과 패스워드만이 적혀 있었다. “흐음…….” 어떡하지? 지금 저 초대에 응하면 이백호가 기다릴 텐데. 조금 고민이 됐지만,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얼른 끝내면 되겠지. 얘가 무슨 용건으로 날 호출했는지도 궁금하고.’ 어쩌면 GM과의 대화에서 이백호를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단서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조금 늦는 게 뭐 어때서? 그런다고 이백호 걔가 그냥 가버리겠어? “오랜만입니다. 수사자 님.” 이내 채팅방에 들어서자 ‘Elfnunalove’라는 닉네임이 뜬 백인 남자가 일어서서 나를 반긴다. 나는 인사에 답하지 않은 채 곧장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이지?” “수사자 님이 부탁하신 대로 벤은 풀어드렸는데, 어디 백호 씨와는 잘 만나셨습니까?” 거, 생색 내기는. “고작 그 얘기나 하려고 부른 건가?” “아뇨, 그럴 리가요.” 이내 GM도 뒤따라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원탁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Elfnuna’ 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진입한 상태라고 하셨지요?” 역시 이거 때문이었구나. 뿌려둔 미끼가 잘 먹혔다는 생각에 뿌듯했지만, 애써 정색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Elfnuna’가 혹시 당신입니까?” 본론을 좋아하는 바바리안으로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설마 이렇게 노빠꾸로 물을 줄은 몰랐는데. “글쎄, 내가 왜 답해줘야 하지?” 능글맞게 말하자 GM이 즉답했다. “백호 씨의 벤을 푼 게 저니까요. 제가 정말로 저 하나의 안위를 위해 그런 요구를 들어줬을 거 같습니까?” 내가 무섭지 않았다고 하기엔 그때 식은땀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만, 아예 지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수사자 님은 저에게 필요한 게 있고, 저 역시 수사자 님에게 필요한 게 있지요.” 기브 앤 테이크. GM 역시 내게 바라는 것이 있기에, 이백호의 벤이라는 카드를 내주었다. 적은 아군보다 가까이 두란 말도 있듯이. GM 또한 원탁에서 내가 제공하는 정보들을 포기하는 건 아쉬웠을 터. 일단 요구를 들어주고서 지켜보고자 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와중에 ‘Elfnuna’가 언급되자마자 나를 바로 불렀다라…….’ 이쯤 되니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답해주십시오. ‘Elfnuna’가 당신입니까?” 어째서 GM은 ‘Elfnuna’에게 그토록 집착을 하는 걸까? 내가 원탁에서 그 닉네임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기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묻지.” 나는 되물었다. 물론 대놓고 물어보면 너무 아는 게 없어 보이니, 수사자답게 최대한 돌려서. “너는 그 늙은이가 한 말을 믿는 건가?” 일종의 떠보기였다. 나는 과거 시대에서 뉴비 시절의 GM과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으니까. [확실한 건 아닌데, 그때 마지막에 말씀하신 자가 누군지 알 것도 같습니다.] [스톤 아이벤이란 커뮤니티에서도 굉장히 유명했던 사람인데… 제가 굉장히 존경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당시 GM은 나를 아우릴 가비스로 착각하고서 그런 말을 했었다. 따라서 나는 GM이 엘프누나에게 집착하는 것이 다 아우릴 가비스의 말을 믿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세웠다. 하지만…….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적어도 기록석의 이야기는 사실이었으니까요.” 굉장히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록석……?’ 처음 듣는 단어였다. *** 기록석이 무엇인가. ‘과거로 날려보냈던 기록의 파편석처럼 대현자의 유산 같은 건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정보라는 느낌이 빡 왔다. 어쩌면 내가 가진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열쇠. 다만, 나는 티내지 않고 잠자코 얘기를 경청했다. “역시 그분 말고는 없습니다. 그분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오리지널 난이도를 클리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기록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탓인지, GM의 이야기는 어딘가 중간이 빠진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GM의 믿음은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하다. 사이비에 빠졌던 숙모의 눈빛이 딱 저랬거든. “…….” 저 믿음이 향하는 장본인으로서 왠지 생리적인 껄끄러움이 먼저 찾아온다. 하나 슬슬 결정을 내릴 때였다. “자, 그럼 말해주시지요. 수사자 님, 당신이 정말 ‘Elfnuna’인 겁니까?” 벌써 몇 번째나 반복이 된 질문. 제법 고민이 됐다. 저 맹목적인 믿음과 호감이 연기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용은 할 수 있을 터. 어쩌면 GM을 내 동료로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자가 아니다.” 다만, 끝내 내가 내린 결정은 이거였다. 기록석에 대한 정보도, GM이 오랜 시일 동안 쌓아올린 여러 기반들도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그래, 이게 맞아.’ 적어도 ‘기록석’이 뭔지는 조사를 한 다음에 저 물음에 답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의 대부분은 무지가 원인이니까. [심연의 문을 열어선 안 돼요.] ……그때 마녀가 했던 그 말도 뭔가 자꾸 마음에 걸리고. “…그렇습니까.” 다행히 GM은 쉽게 수긍하고 넘어갔다. 콕 짚어서 나냐고 묻기에 뭔가 근거가 있나도 싶었건만. 단지 혹시나 해서 떠본 거였던 모양. “그럼 말해주십시오. ‘Elfnuna’에 대해서.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종족은 무엇—.” 이어서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무례하군.” “……예?” “첫 질문에 솔직히 답해준 것은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호의였다.” 쉽게 말해, 이백호의 벤을 푼 것에 대한 보상은 여기까지라는 뜻. “…….” 넋이 나간 표정의 GM을 보고 있으면 양심이 제법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모른다고 둘러대는 것도 이상하잖아? 암, 이럴 땐 그냥 컨셉을 이용해 넘어가는 게 최고지. “내 호의를 바란다면 너 역시 호의를 보여라.” “……대가를 내놓으란 말씀이시군요.” 원탁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사자만의 룰. “하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역시나 GM의 입에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근데 그래서 어쩔 건데? “저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백호의 벤을 풀었습니다. 한데 질문 하나로 끝—.”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 “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고작 몇 초 들여 이백호의 벤을 푼 것과 ‘그자’에 대한 정보가 대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그건…….” GM은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이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알아들었다면, 이만 가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호다닥 채팅방을 떠났다. *** 그렇게 먹튀를 끝내고 돌아온 이한수의 방. “후우…….” 한숨을 돌린 뒤에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을 확인했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2명이라……. 한 명은 이백호, 한 명은 현별이겠지. 다행히 내가 바로 오지 않았다고 떠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들어가자.’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방금 있었던 GM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적어도 기록석의 이야기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아직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지만, 이백호가 엘프누나를 신경 쓰는 이유도 바로 그 기록석과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이번에 이백호한테도 떠봐야지.’ 좋아, 역시 GM한테 먼저 가보기를 잘했네. 이내 생각 정리를 끝마친 나는 마우스를 클릭해 채팅방 안으로 들어섰다. “……래도 안 된다니까요! 한수 형이 알면 저 죽어요 진짜!” “우리 둘만 알면 한수 오빠가 어떻게 아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어딘가 수상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뭔가 싶어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저쪽에서 눈치를 챘다. “히익!”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는 이백호. “…….” 옆에 있던 현별이도 움찔하더니 잘못했을 때 나오던 그 특유의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살 봤다. “뭐 하냐 너희?” 내 물음에 이백호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오더니 황급히 변명의 말을 해왔다. “형! 저는 잘못 없어요! 현별 누님이 형 정체에 대해 알려달라기에 안 된다고 했을 뿐이에요!” 어쩐지 그런 거 같더라니. 사실이냐는 의미를 담아 현별이를 보자 현별이가 내 눈을 피하며 이백호를 노려봤다. “…역시 이백호 씨는 상종 못할 인간이었네요?” 감정 없이 사실만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 “하하, 누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백호 씨의 누나예요?” “예? 아까는 그냥 그렇게 부르라고—.” “이백호 씨는 지금이 아까랑 같아 보여요?” “…….” 뭔 말을 할 때마다 현별이가 칼같이 끊으며 날 선 음성을 쏘아내자 이백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도와달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뭐, 그래도 현별이한테 비밀을 지켜주긴 했으니까.” 슬슬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볼까 하던 찰나. ‘아니, 잠깐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얘를 변호해 줘야 하지? 서로 죽이니 살리니 하다가 곤란해지니까 진짜 말 그대로 ‘뿅’ 소리를 내고 튄 새끼를? ‘후, 나도 모르게 그냥 넘어갈 뻔했네.’ 그날에 내가 느꼈던 허망함과 분노, 치욕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현별아.” 차갑게 가라앉는 감정만큼이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 현별이가 움찔하며 답했다. “………왜요?” “잠시만 나가 있어. 얘랑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일은 나중에 다시 하는 거로 하고.” “알았어요…….”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현별이도 군말 없이 채팅방을 떠났다. 그리고……. “…….” “…….” 둘만 남게 된 채팅방에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상태에서 가만히 꼬나보고 있자 이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핫… 형… 아직 많이 삐졌어요?” 기도 차지 않았다. 삐졌냐니, 이게 여기서 할 소리인가? “됐고, 결론이나 말해.” “……?” “그때는 머리가 잘 안 굴러가서 다음에 대답해 준다며?” “아하하… 냐옹이… 아니, 미샤 말이죠…….” 이백호가 멋쩍다는 얼굴로 목을 긁었다. 다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우습게 보이거나 하기는커녕 오히려 경계심만 더 커진다. 그야 나는 아니까. 변덕스럽고 경박해 보이는 이 녀석이 실은 얼마나 계산적으로 판단하는지. 지금 보이는 이 모습도 모두 의도된 행동이다. “그게, 제가 고민을 해봤는데 말이죠…….” “…….” “서프라이즈! 결국 저 이백호가 돌려드리기로 결정을 내렸다지 뭡니까! 와아! 짝짝짝! 경사로세, 경사야!” 얘는 진짜 미친놈인가? “…….” 받아주는 순간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판단에 그냥 정색하고 있었지만, 이백호는 아랑곳않고 특유의 텐션을 이어갔다. “어때요, 형? 이제 제 진심을 좀 알겠어요? 진짜 그때는 장난이었다니까요? 조크, 조크! 저스트 키딩!” “…….” “아이 차암! 아직도 화났어요? 이제 그만 좀 풀어요. 네? 대국적으로 보셔야죠! 대국적으로!” “하아…….” 결국 참다못한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 한숨 쉬었다! 된 거죠? 이제 화 풀린 거죠? 네? 그렇죠?” “한숨을 쉰 게 왜 그 뜻이 되냐?” “에이, 괜히 또 그러신다.” “…….”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이런 타입에게 약했다. 입에 주먹이라도 꽂을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여기선 그런 방법도 쓸 수 없지 않은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래서 언제 돌려줄 거야?” “언제든지요. 내일 바로 보낼까요?” “어. 바로 보내. 너랑 나랑 있었던 일은 말하지 말고. 할 수 있지?” “넵. 애초에 형 소식 들으면 곧장 찾아간다고 할걸요?” “너… 그 말투 좀 어떻게 못 하냐?” “넵? 왜욥?” “…….” “헤헷, 알았어요. 안 할게요. 화내지 마요. 형.” “하아…….” 최대한 이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렀다면 또 모르겠는데, 일단 이백호가 한 발 물러나며 양보를 해준 건 사실이지 않은가. ‘못 돌려주겠다고 꼴통을 깠으면 곤란했을 텐데 말이지.’ “그럼 미샤 얘기는 다 된 거죠? 이제 다음 얘기 해도 되죠?” “다음 얘기?” “네! 저번에 미샤를 보내주면, 제가 부탁하는 거 들어준다면서요?” “들어는 본다는 얘기였지.” “그게 그거죠. 형이 손해 볼 게 뭐 있다고?” “그거는 내가 판단할 몫이고. 그러니까 말해봐. 10층 뚫는 걸 도와주면 네가 나한테 정확히 뭘 해줄 수 있는데?” “많죠. 이미 해드린 것도 있고요.” “……?”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말하란 눈짓을 보내자 이백호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테르세리온 후작요.” “재상?” “네. 그 새끼, 이제 형 못 건드려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래? 470화 피아 (2) 라프도니아의 재상이자 2인자. 테르세리온 후작은 내 오랜 걱정거리였다. 그야 웃는 얼굴로 날 속여 자살원정대에 보낸 게 바로 그 아저씨였으니까. 나를 눈엣가시처럼 볼 게 뻔했다. ‘그런 와중에 이해가 안 되는 행동들도 많았고 말이지.’ 대표적으로는 내 ‘승작’이 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후작인 만큼, 막고자 했다면 분명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 승작은 너무도 쉽게 허가되고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딸인 라그나에게 ‘악령편입정책’을 진행하게 만든 점도 수상하고. 후작은 의문투성이인 적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짧게 간추려볼게요.” 이어진 이백호의 말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됐다. “일단 후작이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 공표하고, 악령편입정책을 실행한 거. 실은 저 때문이에요.” 이백호는 내 명성을 이용해 악령들을 양지로 올려보낼 계획을 세웠다. 터무니없으면서도 나름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라그나만 해도 나로 인해 인식이 개선되며 그 정책에 진심이 되었지 않은가. 착한 악령도 존재한다란 논리를 펼치기에 나만한 적임자가 또 없는 것. “너는 왜 악령을 양지로 올라오게 하려는 건데?” “플레이어들의 힘이 커져야 다 같이 왕가를 조질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이백호의 목표는 왕가의 전복. 10층을 뚫으려면 왕가부터 조져야 한다는 게 오랜 생각이라던가? “그럼 후작은? 후작이 그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잖아.” “아, 그거요? 협박했죠.” “…협박?” “네. 재상 아들내미도 플레이어거든요.” 여기서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어쩐지 왕가의 이름을 너무 쉽게 팔아먹더라니. 그런 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시작부터 명문가 직계혈족 스타트? 밸런스 실화냐…….’ 노아르크에서 스타트한 플레이어들이 들으면 배가 아프다 못해 실신할 이야기다. 지금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겠다만. “후작도 아들이 악령인 게 밝혀지면 곤란하다 판단했는지 협박이 통했어요.” 이백호의 협박에 후작은 아들내미를 보호하고자 했다. “시간이 필요했겠죠. 다른 자식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후계자가 사라지면 후작만 남잖아요? 과연 친척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자기 계승 대기 순번이 몇인지 한 번쯤 계산은 해보겠지.” “맞아요. 그렇다고 후작을 암살 시도하거나 하는 놈은 없겠지만, 파벌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악령한테 넘길 바엔 그냥 다른 친척한테 주는 게 낫지 않나?” “말했잖아요. 후작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안 그래도 들어보니 매일 밤마다 열심히 쥐어짜내고 있는 거 같던데요?” 이건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였다. 거참, 그 양반 나이가 몇인데. 막판 스퍼트라 이건가? ‘어쩌면 라그나를 데려온 것도 일종의 플랜B였던 걸 수도…….’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이백호가 느닷없이 사과를 해왔다. “그나저나 미안해요 형. 후작이 형을 원정대에 들여보낸 거,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무슨 소리냐 그건?” “형이 살아 돌아와서 악령이 아니라고 알려지면 제가 요구한 악령편입정책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형을 없애려 했을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고, 비요른 얀델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살아 돌아왔음을 공표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자기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후작의 잘못이라 하기엔 애매했기에 이백호도 그러려니 하며 비요른 얀델을 이후 계획에서 빼자고 했다. 어차피 악령이 아니라고 공표된 상태 아닌가. 더 이상 카드로 쓸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때 제게 묻더라고요. 형을 죽여줄 수 있냐고.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형이 훗날 큰 문제거리로 변할 거 같다고.”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돌아오자마자 그런 음흉한 짓을 꾸미고 있었단 건 둘째치고. “그때는 생각만 해본다고 했죠. 후작이 제시한 조건이 꽤 나쁘지 않아서.” “저번에 지금에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한 게 그것 때문이었냐……?” “아하핫… 눈치 한번 정말 빠르시네.” ……나는 죽을 뻔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근데 결과적으로 형인 걸 알게 됐잖아요? 이미 후작한테 제대로 말해뒀어요. 부탁은 거절이라고. 그리고 비요른 얀델은 앞으로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라고.” “…….” “어때요? 이 정도면 선입금은 제대로 한 거 같은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최소한 아들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후작이 날 직접적으로 해치지는 못한다는 뜻 아닌가. ‘일단 한시름 덜은 셈인가…….’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으나, 나는 최대한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거 말고는 뭐가 더 있는데?” 만족하는 순간, 몫은 줄어든다. *** 이후 이백호는 선입금한 계약금 외에도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옵션들을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하나 예상외로 실속은 없었다. “죽이고 싶은 놈 있으면 말만 하세요. 제가 아주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그래? 그럼 후작 좀 죽여줘라.” “어, 그건 좀……. 그 새끼는 죽여도 왕궁에서 부활해요.” “…부활? 그건 뭔 소리냐?” “아, 그건 모르시는구나. 게임엔 없던 물건이라 그런가? 아무튼, 그런 왕가의 보물이 있는데 그게 지금 후작 손에 있어요.” “그럼 알미너스 백작은?” “걔는 옆에 항상 그 용인이 있어서 힘들어요. 방어에 특화된 새끼라서요……. 시간만 충분하면 뚫는 게 가능하긴 할 거 같은데, 아무래도 도시 내에서는 좀…….” 뭐야 얘는? 자신 있게 말하더니. “그럼 너는 누구를 죽일 수 있니?” 차라리 이걸 묻는 쪽이 빠를 거 같아서 최대한 자상하게 물었는데, 어째선지 이백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옹알거렸다. “아니, 진짜… 형이 말한 애들이 이상한 건데……. 왜 하필 그런 애들만 골라서…….” 물론 이백호가 주눅 든 시간은 극히 짧았다. 금방 회복한 녀석이 다시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이건 어때요? 드레드피어 레이드 뛰신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는—.” “필요없어.” “네?” “분명 이목이 집중될 텐데, 너랑 나랑 친분이 있다고 알릴 일 있냐?” “어… 신분을 위장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됐어. 어차피 너 없이도 잡을 수 있으니까.” “…….” 말문을 잃은 이백호. 이럴 바엔 그냥 내가 받고 싶은 지원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돈은?”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한 10억 스톤?” “그, 그만한 돈은 저라도 좀…….” “그럼 5억 스톤은?” “저도 당장은 수중에 얼마 없어서…….” “……1억 스톤.” “……요즘 돈 들어갈 일이 많았거든요.” 뭐야 얘는, 어찌된 게 나보다 돈이 없어? “그럼 장비라도 주든가. 너 지금 넘버스 아이템 뭐 있냐?” “어… 다 코어템이라 그건 못 드려요.” 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돈도 안 되고 장비도 안 돼. “백호야, 너 혹시 물로켓이 뭔지 아니?” “…….” 이백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수는? 네가 대신 좀 캐다가 주면 좋을 거 같은데. 예를 들면 벨라리오스라든가.” “형… 지금 거기는 전쟁터인데요……?” “백호, 너는 항상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 타입이구나?” “…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다음 입장 때부터 캐볼 테니까!” 그래, 할 수 있으면서 왜 약한 척이야. ‘벨라리오스 노가다를 이렇게 스킵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하면, 이제 다음 옵션으로 넘어갈 차례. “백호야, 내가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답해줄 거냐?” “네! 뭐든지요!” “내가 비요른 얀델인 건 어떻게 알아낸 거였냐?” “그거요? GM 덕분에요. 그날 벤이 풀리자마자 GM이 절 불렀거든요. 형이 내 벤을 풀라고 협박을 했다면서요?” 이런 씹… 그런 일이 있었어? “그 얘기를 듣는데 진짜 놀랐어요. 한수 형이 그 정도였나? 이해가 안 돼서 형이랑 한 패인 척하며 떠봤더니, GM놈이 조금씩 정보를 흘리더라고요?” GM은 이백호 앞에서도 역시나 특유의 호구기를 아낌없이 발휘하며 정보를 흘렸다. “형, 원탁에서 수사자 가면인가 뭔가 쓰고 다닌다면서요?” 내가 원탁에서 수사자로 활동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거기까지는 괜찮았어요. 근데 갑자기 저한테 묻더라고요?” 기어코 가장 중요한 그것까지 불어버렸다. “형이 2년이 넘게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우리 둘이서 뭘 꾸미고 있는 거냐고. 그렇게 돌려서 나한테 묻는데…….” 이백호가 씨익 웃었다. “거기서 감이 딱 왔죠.” 얘가 내 정체를 눈치챈 것도 당연했다. 수사자에게 있었던 기나긴 공백기와 정확하게 맞물리는 비요른 얀델의 복귀. 실제로 원탁에서도 그것 때문에 나를 의심하는 애들이 있었으니까. “그랬구나.” GM 얘기를 더 들으면 속이 터질 거 같았기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그때 황도에 불이 났을 때, 파멸학자랑은 뭐였냐? 둘이 같이 사라졌잖아.” 그동안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때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은 동료 사이가 되었을까. “아, 그거요?” 이백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별거 없어요. 자기가 이계 출신 악령이라고, 자기도 심연의 문을 여는 게 목표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던데요? 안 그래도 마법사 한 명이 필요해서 냅다 승낙했죠.” “오, 진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지난날 이백호가 내가 거짓말을 했을 때 단박에 눈치챘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 늙고 이도 몇 개 나가서 걱정했는데, 나름 실력은 있더라고요?” 이백호. 이 녀석은 도대체 왜. “흐음, 그래?”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걸까. ***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진실 속에 거짓을 숨긴다. 그 논리대로라면 지금 이백호가 한 말은 대부분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계획이요? 간단하죠! 형이랑 저랑 힘을 합쳐서 왕가든 미궁이든 파파팍! 아, 이건 농담이고. 일단 어떻게 할 거냐면—.” 나는 아무 질문이나 던져준 뒤, 이백호가 답하는 동안 조금 전에 한 말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세밀히 분석했다. [자기가 이계 출신 악령이라고.] 일단 이것은 나도 알고 있는 팩트다. [자기도 심연의 문을 여는 게 목표니.] 이것도 마찬가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던데요?] 협력을 구한 것도 필시 사실이겠지. 그게 아니면 둘이 함께 움직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안 그래도 마법사 한 명이 필요해서 냅다 승낙했죠.] 남은 후보는 이것뿐. 이를 토대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결론이 난다. ‘이백호가 파멸학자와 손을 잡은 건 ‘마법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즉,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중요한 건 이백호가 그걸 내게 숨겼단 거고. 어째서? ‘나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정보였으니까.’ 이백호의 서투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의 빗장을 풀기도 잠시, 경각심이 바짝 일어났다. 이백호, 얘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새끼구나. ‘뭐를 더 숨기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면 이백호가 내게 내어준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겨우 구박해서 ‘정수를 캐겠다’는 약속 정도나 받아냈을 뿐. 아, 미샤를 돌려주겠단 것도 추가해야 하나? ‘……여러모로 꿍꿍이가 많은 놈이란 말이지. 애초에 진짜 날 돕고 싶기는 한 건가?’ 정말로 모르겠다. “이 계획에서 왕가가 제일 문제이기는 해요. 아직은 플레이어들은 다 숨어있잖아요? 그래서 외부에서는 결집도 안 되는 편이고, 아무래도 일단 전부 양지 위로 올라오게 해야 하긴 하는데—.” 이백호 이놈은 내 적일까, 아군일까? *** 그로부터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이백호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로그아웃 1시간 제한이 걸려 있던 것. “형, 나중에 GM 만나면 그것 좀 물어봐주세요. 걔도 처음엔 초기형 알약을 먹었을 거 아니에요? 체류 시간을 늘릴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알았어.” “네. 그럼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 결국 이백호가 떠날 때까지 ‘기록석’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당장은 잘 풀려가고 있는 와중 아닌가. 본격적으로 이백호의 비밀을 캐는 것은 미샤를 돌려받은 다음에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오빠, 얘기는 잘 했어요?” 그렇게 이백호가 떠난 후에는 밖에서 기다리던 현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 덕분에.” “걔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요. 믿을 만한 애가 아니에요.” “알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사실 제가 오빠에 대해 물어본 것도 테스트였거든요.” “…테스트?” “네. 얘가 막 오빠 정체에 대해 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잖아요?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한번 시험해봤죠. 뭐, 눈치를 챘는지 결국 아무것도 안 말했지만.” “……그러냐.” 테스트가 목적이란 건 믿기 어렵지만,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이후로 또 얼마나 흘렀을까. “현별아, 나는 이만 가볼게.” 나는 슬슬 얘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번 이 시간에 가시는 거 같네요?” 그야 원탁이 항상 이 시간에 열리니까.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네.” 채팅방을 나선 뒤에는 곧장 원탁에 입장했다. 늘 입던 남색 정장을 걸치고, 수자자 가면을 얼굴 위에 뒤집어쓴다. 그럼 이거로 모든 준비는 끝. 터벅, 터벅. 텅 빈 복도를 지나쳐 집회가 열리는 메인룸으로 향한다. 한데 이건 또 뭘까? “하하핫! 여우 공, 오랜만이올시다!” 이윽고 도착한 원탁의 방에는 기존 회원들 말고도 처음 보는 가면이 존재했다. 그것도 무려—. “오, 그쪽이 수사자 공이오? 반갑소!” “…….” “안녕하세요오…….” 세 명이나. 471화 피아 (3) 여우, 고블린, 광대, 여왕, 사슴뿔, 초승달. 그리고 나까지 총 일곱 명의 인원으로 오랜 시간 유지됐던 집회에 새로운 가면들이 추가됐다. “오, 그쪽이 수사자 공이오? 반갑소!” 능글맞은 목소리의 늑대 가면. “…….” 어떠한 특징도 없는 흑색 가면. “안녕하세요오…….” 마지막으로 앳된 음성의 나비 가면까지. 쓱 둘러보고 있자니 여우가 눈치껏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 늑대 씨는 수사자 씨가 오시기 전에 활동했던 분이세요.” “하핫! 마스터가 사라진 후 바빠서 잊고 살다가 생각나 들어와봤소이다.” “피싯, 진작에 죽은 줄 알았습니다마는? 용케 살아남긴 했나 봅니다?” “으핫! 광대 공의 독설은 여전하시구려!” 오케이, 그럼 일단 늑대는 복귀 회원인 게 확인됐고. 눈짓을 주자 여우가 다른 둘에 대해서도 말했다. “여기 두 분은… 저도 오늘 처음 뵀어요.” 그래, 흑가면이랑 나비는 뉴비라 이거지. 원탁 경력이 가장 긴 여우가 한 말이니 틀림없다 여겨도 될 것이다. 문제는 다른 부분이겠지만. ‘이 시기에 뉴비라…….’ 역시 좀 수상하다. 그야 마지막 뉴비는 GM의 도움을 받아 초대장 없이 회원이 된 여왕이었으니까. 사실상 ‘마스터’의 초대를 받고 원탁에 들어온 신입은 몇 년 동안 존재하지 않던 셈.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합시다! 저기 저 여왕님과는 진작에 했……. 응?” 악수를 청하듯 뻗은 늑대의 손은 쓱 보고 무시한 채 자리로 가서 앉았다. “하핫… 그래! 인사가 뭐 중요하겠소이까!” 멋쩍은 기색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는 늑대. “…….” 흑가면은 여전히 제자리에 앉은 채 이쪽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중이고……. “……에, 엣흠…….” 나비 가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쿠웅-! 입장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듯 원탁의 문이 닫히며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하기야 갑작스러운 신규 회원들의 출현에 당황스러운 것은 기존 회원도 마찬가지였겠지. 꿀꺽. 고블린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장내. “자… 그러면 수사자 님도 오셨겠다, 아까 끊긴 대화나 마저 이어서 하는 건 어떨까요?” 결국 상황을 지켜보던 여왕이 먼저 나섰다. “일단 늑대 님은 알겠는데, 다른 두 분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가 궁금해서 말이죠. 나비 님, 그리고 음… 그쪽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호칭 정리부터 하려는 여왕의 말에 흑색 가면이 작게 답했다. “……블랙.” 낮은 톤이라 조금 헷갈리기는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였다. “블랙이라… 좋아요. 그래서 블랙 님과 나비 님은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죠? 혹시 ‘마스터’란 사람과 만난 건가요?” “에헷…….” 여왕의 질문에 나비 가면은 어색하게 웃었고, 반면 흑가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이유는?” 흑가면이 총대를 메자 옆에 있던 나비 가면도 한마디 거들었다. “네에, 블랙 님 말이 맞아요. 서로의 정체에 대해 묻는 건 이곳 규칙에 어긋나는 거… 아닐까요? 힛.” 헤실헤실 웃으며 할 말은 대놓고 하는 나비. 심지어 할 말은 그것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여왕 가면을 쓴다고 진짜 여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헤헷.” “………뭐라고요?” “에? 아무 말도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여왕이 말문을 잃은 채 부르르 떨었다.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이야……. 얘도 첫인상이랑 다르게 만만치가 않네.’ 한데 그런 첫인상을 받은 건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을까. 느닷없이 광대가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하핫! 푸하하하핫! 아, 이런 실례… 이거 재미난 분이 새로 들어왔군요!” “감사해요오…….” “피시싯.” “헤헷…….” 아무래도 이 둘은 제법 파장이 맞는 듯했다. 뭐, 헤실헤실 웃는 사람끼리 통하는 게 있다 이건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여기서는 저기 저 수사자 씨에게만 말을 조심하시면 됩니다.” “헤에… 그런가요?”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그야… 딱 봐도 건드리면 안 될 거 같잖아요……?” 나비 가면은 그리 말하며 여왕을 힐끗했다. 어째선지 하지 않은 뒷말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이랑 다르게요’라든가. “……하!” 나와 비슷하게 해석을 했는지 여왕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물론 나비 가면은 신경도 안 썼다. “그래서 언제 시작하는 걸까요오……? 저 오늘을 되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집회의 시작을 재촉하는 듯한 그 말에 기존 회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일단은 내 의사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신입들이 집회에 참가했는데 당신은 괜찮은 거냐고. 당연히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나한테 얘네를 내쫓을 권한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재밌기는 하겠군.” 나도 사실 궁금하거든. “하하핫, 오랜만이라 그런지 뭔가 들뜨는구려.” “…….” “헷… 그럼 누구부터 하면 되는 걸까요? 처음은 좀 부담스러운데요오…….” 얘네가 대체 누군지. *** 복귀 유저 출신의 늑대. 비밀이 많아 보이는 흑가면. 소리장도의 나비. 오늘 처음 본 이 세 명의 회원 모두 수상한 점이 여럿이다. 물론 정체불명인 흑가면과 나비에 비하면 기존 회원 출신인 늑대는 그나마 낫지만……. ‘몇 년 만에 복귀라는 게 걸린단 말이지.’ 오늘의 복귀가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몇 년 만에 복귀이면서도 마스터의 행방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이렇게. “그나저나 늑대 님은 오랜만에 오셨다면서, 마스터에 대해서는 하나도 묻지를 않으시네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지, 나를 대신해 늑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여왕. “하핫, 그분이야 어디서든 잘 지내고 계시지 않겠소이까?” “흐음, 그런가요?” “…그보다 순서부터 정하는 게 어떻소이까? 아, 참고로 난 첫 번째만 아니면 상관없소이다.” 하, 진짜 왜 이렇게 수상하지? 암만 봐도 원탁의 마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던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사람을 보낸 거 같은데. 셋 전부 다는 아니어도 최소 한 명은. ‘제일 유력한 건 흑가면이랑 나비겠지.’ 일단 신규 회원 루트 자체가 이제는 몇 없다. 여왕처럼 GM의 권한으로 입장하든가. 아니면 나처럼 옛날에 뿌린 초대 코드로 들어오든가. 사실상 이 둘뿐인데, 원탁의 마스터였던 아우릴 가비스라면 아직 코드를 여럿 갖고 있을 터. ‘여왕이 자기 사람을 몰래 들여보내 놓고 모른 척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아직은 모두 가능성뿐이다. 그렇기에……. “그냥 전통대로 수사자 씨 옆에 있는 늑대부터 하죠? 피싯.” 우선은 지켜봐야지. 뭔가 실수를 하며 단서를 흘릴 때까지. “전통? 그게 무슨 말이오까? 예전엔 그런 건 없었—.” “늑대, 당신이 없는 동안 많이 바뀌었습니다. 뭐, 싫으면 그냥 나가든가?” 광대의 강한 워딩에 늑대가 난색을 표했다. “크흐음…….” “피싯, 못 나가는 걸 보니 역시 그냥 우연히 한번 들어와 본 건 아닌 거 같습니다? 혹시 어디서 여기 이야기라도 들었나?” 딱 보니까 광대도 슬쩍슬쩍 긁어주면서 단서를 캐내려는 듯한데……. “하핫,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인데 벌써 떠나면 쓰나. 첫 순서라고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암, 떠난 동안 규칙이 바뀌었으면 응당 따라야지.” 늑대는 호쾌하게 웃으며 턴을 시작했다. “자, 그럼 나부터 하리다.” 그럼 뭘 할까……. 그리 운을 떼며 고민하는 듯하던 늑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을 다시 찾게 된 것도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올시다. 근데 마땅히 이 얘기를 들려줄 사람들이 없더란—.” “늑대 씨는 여전히 말이 많군요?” 광대가 말을 끊으며 본론만 얘기하라는 눈초리를 쏘아내자, 늑대가 멋쩍게 웃으며 목을 가다듬더니 목소리를 내리깔고서 짧게 말했다. “원탁의 마스터가 아우릴 가비스다.” 즉시 원탁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간단한 이유였다. “놀랍지 않소? 우리를 이곳에 모으고 이런저런 지식을 알려줬던 그분이 바로 [던전 앤 스톤]을 제작한 사람이란 얘기—.” 저번 달에 여왕이 말했던 정보거든 그거. “…어?” 보석에 적색의 빛이 들어오자마자 당황하며 몸을 움찔하는 늑대. “이게 대체 왜…….” “왜긴 왜입니까? 과반수가 알고 있는 정보란 뜻이지. 아, 오랜만에 와서 그것도 까먹었나?” “…….” “그런 시답잖은 정보 말고 좀 재미난 거로 하나 꺼내보시지요?” 저번 달에 저 정보를 듣고 크게 놀랐던 광대가 저러고 있으니 좀 웃기긴 했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확인됐다. 늑대는 원탁 내부에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저번 달에 나온 정보를 꺼냈을 리가 없으니까. 이는 기존 회원들이랑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니란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뭐, 의도된 행동일 가능성도 존재는 할 테지만. “후… 그럼 다시 해보겠소이다.” 늑대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다시금 정보를 뱉었다. “플레이어를 이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왕가이며, 아우릴 가비스의 목표는 플레이어를 도와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잠시 텀을 두던 늑대는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 이건 어떻소이까?” 곧장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놈이 대놓고 아우릴 가비스와 연관이 있다는 티를 내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왕가가 배후라니, 확실한 정보인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수많은 루머가 있었지만, 우리를 불러낸 존재가 왕가라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왕가에서는 그럴 ‘동기’가 없다. 하지만……. “왕가에서 대체 왜 우리를 불러내고 악령으로 몰아 처단한단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사슴뿔의 질문에 늑대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믿어도 좋소이다.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정보이니까.” “피싯, 마치 왕에게 직접 얘기라도 들어본 듯한 말이로군요?” 광대가 툭 하고 떠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아, 그게 궁금하다면 다음 바퀴에 꺼내도록 하리다.” “…….” “후후, 이제 그럼 다음 순번이구려?” 다음 차례는 여우였고, 전쟁에 관련된 정보를 꺼냈다.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을뿐더러……. ‘우리를 불러낸 배후가 왕가라고……?’ 나는 아직도 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말의 진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이 새끼가 한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지?’ 물론 보석은 초록빛을 뿜어냈다. 하나 그것만으로 저 말을 진실이라 받아들이기엔 걸리는 점이 있다. 원탁 시스템엔 구멍이 있으니까. 말을 뱉은 당사자가 ‘진실’이라 믿는다면, 저 보석은 초록빛을 자아낸다. 그 말인즉슨.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도 존재해.’ 하면, 이제 의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늑대는 어쩌다 잘못된 정보를 진실이라 믿게 되었는가. 사실 이건 그리 중요치 않다. ‘늑대는 대체 무슨 의도로 원탁에서 그 정보를 꺼냈는가.’ 답은 정보 속에 있었다. ‘플레이어의 증오가 왕가에게 향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 정보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한 명. ‘아우릴 가비스는 늑대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고 이곳으로 늑대를 보냈다.’ ……라고 한다면 터무니없는 비약일까?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만 머릿속을 정리하고 대화에 집중했다. “…이제 그쪽 차례예요.” 어느덧 여우, 고블린, 초승달, 사슴뿔의 순번이 끝나고 신입의 차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블랙 씨.” 얘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란 말이지. *** “심연의 문을 여는 것 외에도,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은 존재한다.” 흑가면은 짧게 한마디를 뱉고서 초록불을 받아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많은 회원들이 난리가 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지만, 흑가면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이라.’ 딱 하나 예상되는 방법이 있었다. ‘아무래도 차원마법을 말하는 거 같은데……?’ 차원마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년 전에 방문한 원탁에서였다. 파멸학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마법을 연구하는 중이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는 듯했다. 어쩌면 이백호가 파멸학자랑 친구가 된 것도 그 마법이 이유였던 걸지도 모르고. 아무튼,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다. ‘흑가면… 얘는 어쩌면 이백호가 보낸 스파이일 수도 있겠는데?’ 의심의 근거는 여럿 존재한다. 일단 이백호라면 ‘차원마법’도 알고 있을 것이며, 얘라면 나한테 준 초대 코드 말고 하나가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무엇보다 동기도 제법 확실하지. 얘는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니까.’ “…그럼 이번엔 여왕, 당신 차례이군요? 피싯.” 광대와 경쟁을 하듯 고급 정보를 꺼내던 여왕은 낯선 회원들을 경계하는지 정치계에 관련된 일반 정보를 꺼냈다. 나름 흥미로운 정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대충 턴을 넘기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헷, 이제 저네요?” 그렇게 다가온 나비 가면의 순서. 미리 생각해 둔 게 있는지, 나비는 뜸 들이는 시간 없이 쿨하게 정보를 얘기했다. “왕가에서는요. 차원붕괴를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 있어요.” 하, 어찌 된 게 신입들이 기존 회원들보다도 더 임팩트 있는 정보를 뱉는 거 같네. “……소문이 사실이었단 뜻이구려.” 다들 놀란 기색이긴 했으나, 이전처럼 진위나 출처에 대해 캐묻는 회원은 없었다. 다들 내심 저 말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을 하는 데다가, 앞선 사례가 둘이나 있지 않은가. 묻는다고 대답이나 해주겠어? “피싯, 그럼 이제 저군요.” 이내 마지막 순번인 광대가 차례를 시작했다. “피싯, 얼마 전 노아르크 쪽에서 본격적으로 9층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기존 회원들의 면을 세워주는 희귀 정보. 당연히 이의 제기 없이 통과 판정을 받아냈고, 자연스레 나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저 그럼…….” 이제 내 차례라 이 말이지? 사실 순서가 돌아가는 동안에 뭘 말할지는 이미 정해 두었다. 그렇기에……. [어찌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물론 안쓰럽네. 책임감도 느끼지. 아마 이런 마음을 평생 지닌 채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네.] 그날 아우릴 가비스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감정을 끌어 올린 뒤. 툭툭. 늑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를 불러낸 진짜 배후가 왕가든 아니든. 내가 믿는 바에 따라 진심을 다해. “아우릴 가비스는 플레이어들의 적이다.” 나는 말했고. 솨아아아아아- 내 믿음을 증명하듯 보석은 초록빛을 자아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수사자 공, 방금 한 말에 제대로 된 근거가 있소이까?” 늑대가 조심스레 태클을 걸어왔다. 물론,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네가 없는 사이에 내가 여기서 어떤 입지를 다졌는데? “…피싯, 수사자 씨의 말이니 틀림없겠군요.” 약속의 초록불까지 켜진 이상. 내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할 것이다. 472화 피아 (4) 내 말에 납득한 것은 광대만이 아니었다. “아우릴 가비스는 우리들의 적…….” 한때 마스터를 잘 따랐던 여우는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사슴뿔도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왕가만큼이나 비밀이 많은 자이긴 했지. 비밀이 많은 자는 대부분 속이 까맣기 마련이고.” 기존 멤버들 중 아우릴 가비스에 대해 가장 많이 조사했을 여왕도 딱히 반문은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적이란 말씀… 참고하겠어요.” 참고라 말은 했지만, 집회가 끝나면 GM에게 쪼르르 달려가 정보를 공유하고 아우릴 가비스란 가정하에 머리를 굴려댈 게 뻔했다. 그야 그동안 내가 보여 준 것들이 있으니까. “…….” 처음엔 근거가 있느니 뭐니 묻던 늑대는 회원들 반응을 보고서는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하나 그래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됐을까? “……내가 이상한 것이외까? 다들 왜 그렇게 저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소이다. 그분이 뭔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라든가 하는 말이면 모르겠는데, 방금 저 말은 너무 주관적이지 않소?” 복귀한 올드 유저답게 원탁 시스템의 맹점을 에둘러 찔러오는 늑대. 다만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흐음, 근데 그건 늑대 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동일한 논리의 반박은 늑대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다들 내게 확실한 정보냐며 재차 확인을 하지 않았소? 한데 수사자 공에게는 그런 것도 없기에…….” 어딘가 억울함이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 “막말로 내가 지금 그분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말한다 해도 초록불이 켜질 터인데, 그럼 그대들은 누구 말을 믿을 것이오까?” 예리하게 모순을 짚는 항변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즉답이 나왔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피싯.” “……? “수사자 씨의 말을 믿을 겁니다. 몇 년 만에 돌연 나타난, 사실 이제까지 기억도 잘 안 났던 잔챙이를 믿을 바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직구에 늑대는 넋이 나간 눈빛으로 허공만 바라봤다. 그런 늑대에게 여왕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죠. 늑대 님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며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면요.” 여왕의 말에는 늑대의 밑천을 털어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대놓고 드러났다. 하긴, 좀 더 깊게 캐보고 싶겠지. 늑대가 아우릴 가비스 추종자인 건 확실시됐지만 아직은 그게 전부이니까. “근거라……. 알겠소.” 그래도 믿는 바가 있는지 늑대는 더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고, 그렇게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됐다. “아까는 이쪽부터 했으니, 이번엔 역순으로 가는 게 어떻소이까?” “피싯, 제법 자신이 있나 봅니다?” “단지 그게 더 공평하지 않을까 했을 뿐이외다.”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 수사자 씨도 그쪽이 더 재밌어하실 거 같기도 하고…….”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쓱 보는 광대. 얘는 진짜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지? 사실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뭔가 딱히 친절하게 대해주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럼 저부터 하지요. 사실 이건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서 그동안 꺼내지 않은 것입니다마는……. 왠지 이번 집회에서는 이게 주된 화제가 될 거 같아서 말이지요. 피싯.” 평소답지 않게 운을 길게 뗀 광대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서 입을 열었다. “한때 다들 궁금해했지 않습니까? 만 명도 넘는 인원을 데리고 메스 텔레포트를 쓰며 노아르크를 바깥세상으로 인도했던 그 노인네.” “…….” “그 노인네, 아무래도 아우릴 가비스 같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꽤 예전 일이긴 했지만, 관심이 있던 부분이기에 흥미롭게 들린다. 물론 단지 광대의 심증이 있을 뿐이지만. 솨아아아아. 보석의 초록빛이 꺼지고 나서도 기존 회원들은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 여왕이 한마디 툭 뱉었을 뿐. “추측을 하게 된 경위라도 말하는 건 어때요?” “피싯, 굳이 그게 필요합니까? 어차피 내가 누군진 다들 아실 텐데. 제 의견 정도라고만 해도 충분히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만?” “뭐…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 신입 회원들이란 외부 세력이 등장해서일까? 평소였다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을 여왕도 별말 않고 넘어갔다. “헤에… 광대 님 되게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요?” “수사자 씨에 비하면 멀었지요. 피시싯…….” 말은 그리했지만 어딘가 기뻐 보이는 듯한 웃음소리. ‘얘, 그냥 자기도 입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애매한 정보를 꺼낸 거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금방 털어냈다. 글쎄, 그건 아니겠지. 설마 그 정도로 관심이 고픈 애려고? “자, 그럼 이제 나비, 당신 차례입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피싯.” “으… 제 차례가 너무 일찍 온 거 같아요.” 뭘 해야 하지? 고민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나비가 이내 입을 열었다. “왕궁 지하에는 포탈이 존재한다.” 씁, 이거 내가 나중에 쓰려고 아껴뒀던 정보인데 설마 선점을 당할 줄—. “그것도 두 개나.” 응? 두 개? 솨아아아아아- 이내 보석은 녹색불을 자아냈고, 이에 회원들이 질문을 던졌다. “포탈이라니, 그게 뭐죠? 왕가에서는 언제든지 미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인가요?” “헤헤, 글쎄요? 무슨 뜻이려나아?” “…….” “그럼 제 차례는 끝이죠?” 나비는 질문들은 그냥 싹 무시한 채 턴을 끝냈다. 그렇게 다가온 여왕의 순번. “최근—.” “혹시 이번에도 정치 이야기인가요? 정치 쪽은 영 재미가 없는데에…….” “…….” 뭐라 말하려던 여왕이 나비의 깐족거림에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이은 게 아니라 다시 말했다고 해야 하나? “아까 얘기가 나왔던 차원붕괴, 왕가에서 고의로 발생시킬 수 있단 그거 말이에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차원붕괴가 바로 그 케이스이고요.” “…헷, 그런가요?” 녹색불이 떴지만, 나비는 이미 아는 얘기였는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음, 정확히는 ‘요놈 봐라?’ 하는 눈치에 가까웠다. ‘그냥 견제구를 던져버리기로 했구나.’ 어차피 나중에 나비가 이 정보를 써서 턴을 넘길 거 같으니 먼저 선점해버리겠다는 거겠지. “심연의 문을 여는 것 외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차원 마법이다.” 이전 바퀴에서 뱉은 정보의 연장선이기도 한 정보. 다만 얌체 같은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회원은 없었다. 이어진 말이 한 줄 더 있었거든. “아우릴 가비스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 “블랙 님도 정체가 궁금해지네요.” 흑가면에 대한 회원들의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집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슴뿔, 초승달, 고블린, 여우. 이들은 세계의 비밀보다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최신 정보들을 말하며 턴을 넘겼다. 그리고……. “……피싯, 드디어군요.” 마침내 늑대의 차례가 되자 회원들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시선을 모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할지야 뻔했으니까. 지금부터 늑대는 아우릴 가비스가 플레어어들의 적이 아니라는 근거를 댈 것이다. 그다음 초록불이 뜨면 내 턴이 되어서 나는 그 논리를 반박하게 되겠지. 어찌 보면 1:1 구도라 볼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개벽왕과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지.” 허,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설마 작위 귀족이 되고서도 만나보지 못한 왕을 직접 봤을 줄이야. “……언제였죠?” “1년 이내라고만 말해두겠소.” 설득이 목적이기 때문인지 늑대는 추가 질문에도 너그러이 답해줬다. 하지만……. “놀라운 이야기이긴 한데, 근거라고 하기에는 좀 빈약하지 않나요? 세상의 비밀이라고만 해봤자 딱히 감이 안 오는데.” 여왕이 날카롭게 빈틈을 짚었다. 다만, 그동안 여왕과 여러 번 집회를 이어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여왕이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일부러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상태라는 걸. “…….” 보아하니 다른 회원들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으나, 이 상황에서 끼어들지는 않았다. 다들 똑같은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 “그대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와중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힘들 것 같소. 하나 이것 하나만큼은 내 분명히 말하리다.” 늑대는 그런 요구에 딱 잘라 선을 긋고서 말했다. “아우릴 가비스는 결코 플레이어들의 적 같은 게 아니올시다. 오히려 더없는 조력자라면 모를까.” 그 말을 하는 내내 원탁의 보석은 초록빛을 뿜어냈고, 그것으로 늑대의 턴은 끝났다. “…….” 이윽고 내 차례가 되며 모이는 이목. ‘왕을 직접 만났다라… 확실히 자신 있어 할 만하네.’ 엄청난 거물이 거론됐기 때문인지, 내 말을 굳게 믿는 듯하던 회원들도 약간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늑대 또한 왕의 이름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날 바라보는 중이었고. 이쯤에서 기강을 한 번 잡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툭툭.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설령 상대가 왕이라 하여도 전혀 이름값으로 밀리지 않을 존재. “땅의 마녀, 엘리스 그라운디아.” 물론 심연의 문을 열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을 뿐. 아우릴 가비스가 플레이어의 적이니 뭐니 하는 말은 아예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만난 적이 있다.” 해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니까. “……!!” 나는 거짓말 안 했어. *** 땅의 마녀, 엘리스 그라운디아.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신화적인 존재. “……!!” 그 이름이 언급된 순간 늑대를 포함해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하긴, 예전에 땅의 마녀가 살아 있다는 정보를 꺼낸 적 있기는 하지만 그거랑 직접 만나봤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얘기일 터. “땅의 마녀라니…….” “피시싯… 이거야 원, 수사자 씨는 정말 매번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으시는군요. 반성했습니다. 수사자 씨의 말이 결코 틀릴 리 없는데.” 회개자의 마음가짐으로 말하는 광대 정도는 아니었으나, 장내의 분위기가 역전되었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상대가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궁을 통치한 불멸왕이라면 모를까. 임기가 아직 200년도 안 됐으며, 최근에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공석에 나타나지도 않는 개벽왕이 마녀의 이름과 같은 무게를 지닐 리 없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이름값도 있고 말이지.’ 원탁에서 신비로운 절대자 이미지를 구축한 나와 몇 년 전까지 잔챙이 취급을 받았던 올드 유저. “…헤헷,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는 정해진 거 같네요오.” “수사자 공이 땅의 마녀에게 속고 있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 “네? 근데 그건 늑대 님도 똑같잖아요?” “…….” “게다가 둘 중 한 명이 속았다고 한다면, 전 역시 늑대 님 쪽일 거 같은 걸요?” “…그게 무슨 소리외까?” “헤헷, 물론 두 분 다 잘 모르지만, 늑대 님이 좀 더 잘 속고 다닐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오……?” 헤실헤실거리며 늑대의 뼈를 사정없이 때리는 나비. 이에 늑대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 어렵다 판단했는지 말을 아꼈다. 그리고……. “하핫, 오늘은 이만 물러가봐야겠소이다. 다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고, 수사자 공, 나비 공, 블랙 공도 다음에 또 뵙시다.” 늑대가 세 번째 바퀴에 불참을 선언하며 원탁을 이탈했다. ‘이야, 튀는 솜씨 보소.’ 그래도 다음에 또 보자는 걸 보니, 오늘만 오고 말 것은 아닌 듯한데……. “…….” “…….” 한 명이 이탈하자 여지없이 그 분위기가 원탁 내에 찾아왔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쁜 특유의 정적. 이대로 파투나는 모습이 눈에 훤했기에, 오늘은 그냥 내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아……! 가시는 겁니까?” 거, 딱 보면 모르나. “다음에 보지.” 나는 그대로 원탁을 떠났다. *** 커다란 통창을 타고 달빛이 가득 내려앉은 침실. 한 여인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한밤에 찾아온 불청객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전한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이었다. “뭐? 살아… 있어……? 비요른이……?” 머리가 멍해지기도 잠시, 분노가 일었다. “너는… 정말 상종 못 할 인간이었구나.”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른 감정이 고스란히 응축된 음성. 하나 이백호는 난감한 기색으로 웃을 뿐이었다. “어찌 된 게 오늘 그 말만 두 번째 듣네.” “…꺼져. 다시 한번 이딴 장난을 치면 그때는 정말—.” “미샤 칼스타인.” 평소에는 절대 부르지 않던 풀네임. 이에 미샤가 멈칫하자, 이백호도 장난기를 쏙 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비요른 얀델은 살아 있어.” “……증거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인데 증거를 댈 거까지야. 내일 낮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봐도 금방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걸?” 이후 이백호는 비요른 얀델의 최근 행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고, 이를 듣던 미샤도 점차 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직감했다. “비요른이… 살아 있다고……?” 온갖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사무쳤다. 기뻤고, 슬펐으며, 혼란스러웠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 나쁜 새끼.” “그래, 진짜 나쁘지 않냐? 어떻게 팀원들도 다 속이고 죽은 척하고 왕가에 붙—.” “말고 너 말이다. 너. 이미 한참 전에 알았으면서 그걸 나한테 숨겨……?” “아… 미안. 나도 생각 정리 좀 하느라. 그러게 좀 집에만 박혀있지 말고 밖에도 나가고 그러지 그랬냐.” “…….” “오우, 눈빛 한번 표독스러운 거 보소.” 이백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미샤는 대응하지 않았다. “…….” 그 상태로 이어진 야밤의 정적.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내였다. “그래서 이제 걔한테 갈 거냐?” “당연하지. 내가 너랑 같이 있던 게 전부 뭐 때문인데?” “비요른 얀델을 살리기 위해서였지. 소생의 돌을 사용해서.” “알았으면 이제 나가. 짐을 챙겨야 하니까. 날이 밝으면 바로 나갈 거야.” “흐음, 그래 그렇구나…….” 사내가 묘한 말투로 말꼬리를 흐리자, 미샤가 흠칫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해.”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불길한 예감. 그 예감은 늘 그렇듯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냥 별건 아니고.” 이백호는 웃고 있었다. “한 가지 부탁 좀 할까 해서 말이지.” 그날 자신을 찾아왔을 그때처럼. 473화 피아 (5) 대답은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나왔다. “부탁… 이라니……?” 당차게 꺼지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숨긴다고 숨겼으나 떨리는 음성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여실히 묻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차고 넘치게 보았으니까. 이백호 이 인간이 얼마나 미친놈이며, 또 얼마나 무지막지한 힘을 소유했는지를. “그래, 부탁.” 그러니까 이것은 부탁이 될 수 없다. “그동안의 정이 있는데 괜찮지?” 이것은 협박이다. 분명 거절하면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개념이 무의식중에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싫어.” 미샤는 딱 잘라 말했다. “들어보지도 않고?”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난 안 할 거야.”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은 떨리면서도 힘있게 이백호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이백호는 감탄사를 숨기지 않았다. “이야…….” 그로서는 굉장히 신기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는 많지만, 이겨내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바뀌지?” 하면, 이번에 꺾이지 않고 이겨낼 수 있던 마음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한수 형도 진짜 대단하다니까? 그동안 호감작을 얼마나 열심히 해뒀으면 얘가 이래?” 이내 이백호가 피식 웃었다. 정확히 무슨 차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샤는 왠지 한결 숨쉬기가 편해진 기분이었다. “그래, 이해해. 사랑 앞에서는 다 눈 먼 장님이고 그런 거지. 진짜 한수 형은 이런 걸 알까나 몰… 응? 뭐야,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한스가, 누구야…?” “뭐라고……?” 미샤의 질문에 이백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못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풋, 푸핫! 푸하핫! 크흐흐흐……. 아, 맞다. 그랬지. 이게 당연한 거지. 아이 나도 차암!” 웃음 소리가 거슬렸는지 미샤가 인상을 찌푸렸고 이에 이백호도 진정하고 질문의 답을 해줬다. “이한수는 네 낭군님의 본명. 오케이?” 놀리는 듯한 이백호의 말에도 미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에 새겨 넣듯 되뇔 뿐. “……이한스.” “한스가 아니라 한수.” 예전보다는 발음이 많이 교정이 됐음에도 쉽지 않은 발음이었는지 미샤는 한참이나 되뇐 끝에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 있었다. “이한수.” “오, 이제 좀 괜찮네.” “이한수. 그래, 그게 바로 비요른의…….” 미샤는 소중한 것을 갈무리하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고, 이백호는 조금은 묘한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딴짓을 하며 노는 건 해야 할 일을 전부 한 다음. 이백호의 오랜 철칙이었다. “그래서 진짜 부탁 안 들어줄 거야?” “…내가 왜 들어줘야 하는데?” “음, 글쎄?” 이백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평소에 장난도 많고,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가책 없이 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러지 않으면 비요른 얀델이 죽을 테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 원탁이 끝난 후. 나는 즉시 로그아웃한 뒤 잠을 청했다. 거기서 12시간을 풀로 채우고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기 때문인데……. “아저씨! 일어나세요!” “…5분만.” “헛소리하지 말고 일어나라. 이제 이곳만 짐을 빼면 끝이니까.” “……벌써?”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였다. 후, 오늘은 진짜 더 일찍 일어나려 했는데……. “잠깐 기다려라. 내 방 짐은 내가 치울 테니.” “굳이 새삼스럽게 뭘. 가서 세수나 해라.” “네. 아저씨, 별로 무거운 것도 없는데 저희가 할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얼른 가서 세수만 하고 돌아와 내 방에 있던 짐들을 정리했다. 이미 정원에 주차된 네 개의 대형 수레에는 이사 갈 준비가 끝난 짐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쿠웅-! 이내 바바리안용 철제 침대를 꺼내 마차에 싣는 것으로 모든 짐정리는 끝.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남작 각하.” “그래, 잘 부탁하겠다.” 고용된 마부들이 마차를 끌고서 떠났고, 그렇게 텅 빈 저택에는 우리만 남게 되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짐이 싹 빠진 거실을 보며 어딘가 아련한 눈빛을 짓는 에르웬.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확실히… 그사이에 여기서 추억이 좀 생기긴 했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어차피 이제 밖에 나갈 일은 없잖아요?] 그때 얘는 진짜 어떡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어찌 된 게 이제는 많이 안정됐다. 사실 그때보다 스탯의 악영향은 훨씬 더 많이 받을진데도. ‘스탯보다 정신적인 영향이 더 컸다는 거겠지.’ 내게 있어서도 에르웬은 아픈 손가락이다. 뭐, 그중 제일 아픈 손가락을 꼽자면 역시 따로 있겠지만. ‘……이백호, 그놈이 언제 돌려 보내주려나. 이사 갔다고 바로 못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음, 그러면 안 되는데…….’ “뭐 하나? 우리도 얼른 가지. 도착해서 오늘 안에 짐을 풀려면 시간이 없다.” 흘리고 가는 물건이라도 있을까 싶어 떠나기 전에 주택을 한 번 싹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기도 잠시. 우리들도 서둘러 목적지로 이동했다. 하루 대여한 마차를 탔는데, 마부는 우리 클랜의 유일한 항해사 아우옌이었다. 보니까 얘가 배만 잘 모는 게 아니더란 말이지? “…정말로 말을 다루는 게 익숙하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마부 일을 했습니다. 덕분에 도시의 길도 잘 알고 있지요. 물론 단장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재주이지만요.” “아부는.” 아무튼,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이 정도면 아예 마차 한 대를 구매해서 아우옌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마침 새로운 집에는 작게나마 마구간도 있고. 마부 일을 했다니 얘도 말을 돌볼 줄 알겠지. ‘음, 나쁘지 않은데?’ 꽤 좋은 생각 같아서 아멜리아에게도 말해봤더니 꽤나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어느 집단에서든 본인만의 역할이 필요한 법. 아우옌만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다.” “록록아, 그럼 너는 어떻나? 지금 하는 말은 다 들렸을 텐데.” “저, 저야 영광입지요! 맡겨만 주신다면 온힘을 다해 단장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아우옌도 빈말이 아니라 정말 달가운 눈치였다. 하긴, 얘 입장에서도 매일 방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더 낫겠지. 그럼 이건 나중에 따로 추진하는 거로 하고……. “도착했습니다. 단장님.” 아우옌의 부드러운 운전 솜씨에 감탄하며 졸고 있자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업 도시 컴멜비 대로변. 알미너스 중앙 거래소에서 고작 10분 거리인 번화가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 “…예상보다 훨씬 더 건물 상태가 좋군.” “그러게요. 임대료만 들었을 때는 엄청 노후한 건물일 줄 알았는데.” 이 건물은 멜베스 상회 소유로 이전에 했던 합의에 따라 저렴하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용도는 아나바다 클랜의 클랜 하우스. 다만, 아직 사무직들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얀델 남작가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곳에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자자, 그러면 일단 짐부터 옮기자. 안 그래도 다들 여기만 쳐다보고 있는데.” 벌써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게 소문이 났는지 지나가던 시민, 탐험가들이 근처에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거, 이삿짐 나르는 귀족 처음 보나? “후…….” 아무튼, 탐험가가 넷인 만큼 짐 정리는 오늘 하루가 가기 전에 끝났다. 1층은 주거용으로 쓰기 어려운 구조라 그냥 거실처럼 놓고 쓰기로 했고, 2층에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3층에는 나와 아우옌의 방이 들어섰다. 아, 참고로 아멜리아의 요청으로 아우옌에게는 창가의 방이 배정됐는데……. “컴멜비의 도로변이 보이는 방이라니……. 제가 이런 곳에 살아보는 날이 올 줄이야…….” 조금 의외의 반응이었다. 반지하에서 살다 볕드는 곳에 왔으니 기뻐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울먹거릴 줄은 몰랐는데. “원래는 어디서 살았나?” “라비기온에서도 외곽부였습니다.” “성벽 근처의 빈민가 말인가?” “예…….” 항해사. 그것도 약탈을 자주하는 클랜 출신이면 꽤 돈을 벌었을 텐데? 호기심에 묻자, 아우옌은 해당 클랜에서도 거의 노예 취급을 받으며 보수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근데도 왜 거기 붙어 있던 거지?” “단장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클랜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고 발을 들이밀었다가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는…….” 클랜 내부의 규정, 계약서. 그리고 미궁 안에서 같이 저지른 범죄들이 족쇄가 되어 벗어날 수 없었음을 고하는 아우옌. 근데 참 이상하게도, 딱히 불쌍하진 않았다. 암, 진짜 불쌍한 건 얘네한테 약탈당하고 죽었을 무고한 탐험가들이지. “앞으로도 잘해라. 내가 지켜볼 테니.” “무, 물론입니다, 단장님! 믿어주십시오!” 암만 그리 말해도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아서 내친김에 1시간 정도 인생에 대해 설교를 해줬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흘려듣지 말고. 남자는 나처럼 우직한 게 최고다. 알겠나?” “……예.” “목소리.” “예! 단장님!” 그래, 그러니까 좀 낫네. *** 이사가 끝난 다음 날부터도 할 일이 많았다. “아뇨. 뒤쪽 공터는 정원으로 쓸 거예요.” “정원? 누가 봐도 훈련장으로 쓰는 게 훨씬 유용할 거 같지 않나?”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집 꾸미기를 두고서 논쟁을 벌이는 사이, 나는 또 아침부터 외출해서 업무를 봤다. 안 그래도 토끼 남작한테 연락이 왔거든. 내가 말한 조건의 매입 가능한 토지가 몇 개 있다던가? 직접 방문해서 입지를 확인해 보라는 연락이었다. 아, 한 가지 불만도 섞여 있었다. [……황도가 아닌 7구역의 부지에 가문의 토대를 쌓겠다는 건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한 번 더 재고하는 건 어떨련지요?] 나는 정든 7구역에 남작가를 세우기로 정했다. 암, 귀족가라 해도 가주가 탐험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차원광장이랑 가까운 편이 좋지. ‘황도에서는 집을 지어봤자 코딱지만 하게 나올 게 분명하고.’ 7구역이라면 같은 비용으로도 훨씬 더 그럴듯한 대저택을 만들 수 있으니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 판단했다. ‘…오케이, 그럼 땅은 구했으니 이제 건물만 올리면 되나?’ 다행히 매입 가능한 토지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서 바로 결정을 했다. 따라서 남은 것은 멜베스 상회 소속 건축가에게 상담해서 설계도를 짜고, 건설에 들어가는 것뿐. 다만, 완공되기까지는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그럼 오늘 하루는 끝.’ 집에 가서 쓰러지듯 잠에든 다음 날은 난쟁이놈의 대장간에 들러 작업 능률을 올렸고. 로트밀러를 찾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진심인가? 바바리안들에게 탐색 기술을 교육해달라니?” “돈이라면 충분하게 주겠다. 어차피 하고 있는 일도 없다면서?” “그건 그러네만……. 만약 나를 생각해서 하는 제안인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내 분명히 말하—.” “뭔 소리냐?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 말고는 적임자가 없는 거다. 신세 좀 지자.” 내 덕을 본다 생각했는지 로트밀러는 처음엔 거절하려 했으나, 진짜 필요해서 하는 요청임을 알고서 제안을 승낙했다. “그럼 내친김에 바로 성지로 가자. 어떤 식으로 일하면 될지는 2장로가 말해줄 거다. 만약 2장로랑 대화가 안 통한다면 행정 사무실을 찾아가고.” “……행정 사무실?” 로트밀러는 바바리안족에 그런 것도 있냐는 듯한 눈이었는데, 뭔가 서운했다. 거,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무튼, 이후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신세를 졌던 교단과 모든 관계를 정리한 베르실 고울랜드가 마침내 원정대원들 중 첫 번째로 클랜 아나바다에 합류했다. “……부단장 말씀이신가요?” “그래,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건 그렇겠지만… 부단장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분명 제가 바로 그 자리에 올라가면 말이 나올 테니까요.” “…….” “걱정 마세요. 직위가 평단원일 뿐, 부단장이 해야 할 일들은 제가 할 테니. 물론 직위가 없다 보니 단장님이 필요할 때가 꽤 있을 테지만요.” “그러냐.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고맙다.” “근데… 그래서 진짜 하려는 거예요? 계층군주.” “해야지. 물론 너도 참가다.” “……입단 첫 원정부터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뭐 어디 왕가에 진정서라도 넣을 거냐?” “참, 농담도요.” 베르실이 공식적으로 클랜에 합류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5인 레이드를 준비했다. 솔직히 머릿속이 복잡해 집중은 잘 안 됐다. ‘왜 안 오지……?’ 아직까지도 미샤는 오지 않았다. 설마 이백호 이 새끼가 약속을 어기려는 건가? 그런 불안감도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 “또 아침부터 나가는 건가?”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만 지나면 미궁이 열릴 때까진 일정이 없을 테니.” “그런가… 고생하는군.” “늦을 수도 있으니 저녁은 차려두지 마라. 또 저번처럼 다 식은 채로 먹을라.”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공터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몰래 찾아와 라비옌이 주고 간 종이를 찢었다. 솨아아아아아- 머지않아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고, 거기서 퍼져 나온 빛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오랜만일세.” “그래, 오랜만이다.” 몇 년 만에 와보는 용의 신전. 옥좌에 앉은 아저씨를 보며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속으로 되뇌었다. ‘용살자의 심장을 전해주고 보상받기.’ 이번 달의 마지막 퀘스트였다. 474화 남과 여 (1) 텅 빈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기도 잠시. 용아저씨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핫! 언제 오나 했더니, 결국 오늘에서야 보게 되는군! 자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사실상 돌아온 뒤에 만나는 사람마다 하느라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 인사말. 물론 내가 화답하는 말도 평소와 같았다. “아, 미안하다. 좀 더 일찍 찾아오려 했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여러 골치 아픈 일들에 휘말린 모양이더군. 어느 정도 사정은 알고 있으니 너무 개의치 말게.” 오, 그렇다면야. 근데 ‘어느 정도’가 대체 어느 정도이려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자니, 용아저씨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다행일세. 자네가 죽었다고 알려진 후로 우리 딸내미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아, 지금 불러와도 괜찮나? 분명 보고 싶어 할 텐데.” “이따가 얘기가 다 끝나면 그다음에.” “할 얘기라……. 역시 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건 아닌 듯하군?” “라비옌에게 듣지 못했나?” “첫째 딸은 단지 자네가 날 만나 보고 싶어 한다며 추후 종이가 찢어지면 불러내라 했을 뿐이네마는.” 그 말과 함께 용아저씨의 눈에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한 걸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 아무것도 안 말해 준 건가? 갑자기 라비옌을 향한 신뢰도가 확 올라가는데. “단순히 얼굴이나 보러 온 게 아니라면… 그럼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겐가?”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이 필요하다.” “약속?” “그 누구에게도 오늘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단 약속.” 설령 그 대상이 이 나라의 왕일지라도. 그런 뒷말을 덧붙이자 용아저씨도 사안의 중함을 인지했는지 조금 표정이 굳었지만, 그래도 쿨하게 내 요구에 응해 주었다. “나의 이름 ‘피르세아라이도르무스’의 깃든 영혼에 대고 맹세하겠네.”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길면서 발음도 어려운 저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진 이해가 안 되지만, 적어도 용인족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중요시 여기니까. “자, 됐으면 그럼 이제 말해 보겠나?”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편이 훨씬 더 빠를 터. 나는 아공간에 넣어 둔 상자를 꺼내 그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그건…….” 열대 과일처럼 오돌토돌한 겉면을 가진 심장을 보자마자 용아저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긴, 자기도 용인족이니 바로 알아봤겠지. “용인족의 심장이군. 설마 그 심장의 주인이 내가 아는 바로 그자인가?” “그래. 용살자 리갈 바고스의 것이다.” “…그래, 정말로 그것이…….” 용아저씨는 형언키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눈가 근육을 바르르 떨었다. 내심 직감하긴 했을 테지만 제대로 확답을 받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던 모양. 하나 한 종족의 책임자답게 회복은 빨랐다. “…솔직히 말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네만. 우선 이것부터 말하겠네.” 한 종족의 수장인 용아저씨가 날 보며 목례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일족을 대표해, 그리고 딸을 둔 한 명의 아버지로서 진심을 다해, 그대에게 감사함을 표하네.” 그 태도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게 남작이란 작위와 바바리안의 부족장이란 지위가 없었더라도 이 아저씨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따가 내 요구를 들어줄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늘었다는 뜻이니.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 용살자가 죽었단 얘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듣지 못하였네마는. 혹시 이번에 그자를 만났던 겐가?” “아니, 용살자를 죽인 것은 아이스록에서다.” “그때 그 원정에서… 말인가?” “그 원정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딱 바깥에 알려진 만큼만일세. 라비옌, 그 아이 역시 그렇다고 내게 말했고.” “그럼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군.” 나는 우선 원정 중에 있었던 일들부터 모두 설명했고, 경청해서 듣던 용아저씨도 마침내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날 원정의 핵심은 단 한 가지였다. 노아르크의 추격대도, 왕가에서 우리를 버렸다는 것도, 용살자의 사망도 아닌—. “장미기사단을… 죽였다라…….” 장미기사단을 죽인 것. 다시 말하자면, 정면으로 왕가에 반기를 든 것.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왜 시작도 전에 그토록 비밀을 강조했는지. 그 아이가 왜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는지.”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마라. 심장을 얻고서도 이제서야 내가 널 찾아온 것도 다 그것 때문이니.” “…충분히 이해하네. 그럼에도 찾아와 준 것에 고맙기도 하고…….” 말꼬리를 흐리던 용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이는군.” 역시 한 종족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답게 용아저씨는 말이 잘 통했다. “내게 바라는 게 뭔가?”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 용인족의 최고 권력자에게 한 가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을 받을 것인가.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것이다. 그야 생각나는 것들이 한가득일 테니까. 개체 수는 적지만 말도 안 되는 수명을 바탕으로 인간 다음으로 번영한 용인족은 무엇을 바라든 충분히 내어줄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를 향한 용인족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협력.” 내가 원하는 바를 밝힌 즉시 용아저씨는 몸을 움찔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일세.” “뭐, 돈이나 보물을 바란 것도 아니지 않나.” “차라리 그런 걸 바랐다면 더 나았을 걸세. 하나 지금 자네가 말한 것은… 자칫 우리 일족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건이란 말일세.” 용아저씨는 감사하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며, 다른 요구를 한다면 무엇이든 따라 주겠다며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따라서 바바리안 협상 모드를 활성화했다. “그래도 해 줘라! 치사하게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해 놓고 왜 안 해 주는 거냐!” “…자네는, 남작이 되어서도 변한 게 없군.” “해 줘라! 아니면 심장은 안 줄 거다!” 본격적으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자, 처음엔 난감해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용아저씨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슬슬 적응하고서 방식을 달리했다. “약속했지 않은가! 뭐든 들어준다고!” “약속? 엄밀히 말하자면, 보상에 대한 약속 같은 건 없었네! 아니, 이 경우에는 자네를 믿고 먼저 보상을 줬다고 해야 옳겠지! 그렇지 않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용살검을 가져다준 대가로 나는 보상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용살자 처치 시 심장을 가져온다는 걸 조건으로 ‘용의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그거로 그냥 넘어가겠단 거냐! 네 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러니까 계속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감사하는 마음은 정말이라고……. 하나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으니 부디 다른 걸 청해 달라고.” 결국 나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바바리안 협상 모드를 지속해 봤자, 여기 이 용아저씨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 이 정도로 중요한 안건을 두고서 고집에 못 이겨 넘어갈 리는 없겠지.’ 장난은 이만하고 슬슬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볼 차례였다. “라피르.” “……?” “네가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역시 왕가 때문이겠지?” “…부정하진 않겠네. 자네는 아직 잘 모를 수 있지만, 왕은 정말로 무서운 자일세.” 어찌된 게 다 똑같은 말만 하네. 이거 참 서러워서, 나도 얼른 한번 왕의 면상을 봐 보든가 해야지. 그래야 저 말에 반박을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냐. 피식 웃고 있자니, 용아저씨가 은근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만약 자네가 말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왕이 개입하지 않은 상황으로 한정한다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네. 어떤가?” 한 걸음 물러나도 크게 물러나 준 타협안이었다. 딱 듣자마자 용아저씨가 정말로 나한테 엄청나게 고마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 해야 하나? 그도 그럴 게, 왕을 제외한 경우 지지라니? 후작이나 공작, 그 외에 다른 종족들과의 갈등이 있을 시에는 온 힘을 다해 나를 지지해 준다는 것이 아닌가. 뭐, 무력 충돌에 대해선 옵션이 있긴 했지만. “명분이 자네에게 있다면, 자네를 향한 부당한 공격은 나를 향한 공격과 같을 것일세.” 고민이 깊어진다. 본래 협상이란, 서로 조금만 내어 주기 위해 외줄 타듯 조금씩 한계를 찾는 과정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게 최대한도의 제안이겠지.’ 이번 협상은 조금 달랐다. 용아저씨는 그 과정 전체를 스킵하고서 맥시멈의 조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협상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단지 내게 보이는 감사의 표시며 호의일 뿐. ‘이쯤에서 스탑하자.’ 애초에 다른 종족들과 대립이 있을 때의 지지 정도만 얻어 내도 충분한 수확이라 여겼다. 아까 용아저씨가 말한 대로 원래 퀘스트의 보상은 ‘용의 축복’이 끝이었으니까. “…정말 이 이상은 안 된—.”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나를 설득하려는 용아저씨의 말을 끊고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약속이면 충분하다. 가져가라.” 감사의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어울려 줘서.” “…허,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네마는.” “나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기에 필사적이었을 뿐, 최대한 네가 곤란할 일은 없도록 하겠다.” “그만하게. 내 딸도 얽혀 있는 문제 아닌가.” 아, 라비옌도 얘 딸이지? 그래서였구나. 어쩐지 조건이 너무 좋더라니. “아무튼, 다 끝났으면 좀 더 얘기나 나누세. 사라진 기간 동안에는 뭘 했던 건가? 정말 후작의 발표대로 비밀 임무를 했었나?” 이후로는 한결 편해진 분위기에서 용아저씨와 이런저런 근황 토크를 이어 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 그리고 앞으로 날 지지하기로 한 김에 하는 말인데. 혹시 알미너스 백작과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가해 줄 순 없나?” “그 재판에… 내가 증인으로 말인가……?” “왜, 일단 용인족의 대장 아니냐? 네가 나와서 내 편을 들어주면 나도 좀 체면이 설 거 같은데.” “…체면?” “하하! 농담이다, 농담!” 이 아저씨도 뭔가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지. “아차, 오랜만에 즐거이 대화를 나눴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곧 장로 회의가 있어서 슬슬 자리를 비켜 줘야겠네.” “흐음, 그래?” “지금 바로 돌아갈 거라면 말해 주게. 지금 당장 용언을 써 줄 터이니.” “아니다. 온 김에 펜이랑 라비옌도 잠깐 만나고 가지.” “후후, 다행일세. 그 아이가 좋아하겠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딸들과 차라도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오겠네.” 그 말을 끝으로 용아저씨는 펜과 라비옌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고, 나도 그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걸을 때마다 소리가 울리는 대리석 바닥. 나는 복도로 꺾기 전에 등을 돌렸다. “왜 할 말이라도 남았나?” “아무래도 역시 이것 만큼은 물어보고 가야 할 거 같아서 말이지.” 어서 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용아저씨.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다.” 용아저씨와 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더 강해지고, 나를 지지하는 세력도 더욱 늘어나게 된다면.” “…….” “그래서 너도 나름 해볼 만하다고.” “…….” “자살 행위까지는 아니라고,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면—.” 용아저씨의 입장을 고려해 주어는 생략한 채로 나는 물었다. “그때는 날 도와줄 수 있나?” 답변은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돌아왔다. “…그때가 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그래, 그런가.” 나는 등을 돌려 끊긴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터벅, 터벅.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475화 남과 여 (2) 신전의 홀을 떠나 도착한 방에는 두 자매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내게 용의 축복을 새겨준 용인족의 무녀 펜. 그리고 전 원정대 동료 라비옌. “…왔네?” 용꼬맹이 펜은 노크를 하고 들어선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새침하게 시선을 거뒀다. ‘이건 뭐 사춘기 꼬마애도 아니고.’ 그래도 귀엽게 봐주려면 못 봐줄 건 아니다. 용아저씨나 라비옌에게 듣기로는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에 굉장히 침울해했다고 하지 않던가. ‘다음에 또 새로운 얘기를 해주러 온댔으면서…’ 라고 하면서 말이—. “…응? 방금 뭐라고 했냐?” “그걸… 또 들었어……?” “아니, 방금 뭐라고 했냐고.” 내가 목소리를 깔고 다시 말하자, 펜이 살짝 쫄은 눈빛을 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난 그냥 얼굴을 보니 사람 잘못 봤을 리는 없다고 했을 뿐인데!”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냥 얼굴이 아니라 ‘저 못생긴 얼굴’이라는 말을 내가 분명 똑똑히 들었건만. “페니타사우로스.” “…페니타스에아우로스거든?” “몇 년 사이에 까먹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해주지만, 나는 못생긴 게 아니라 남자답게 생긴 거다. 알겠냐?” 그 말을 끝으로 무작정 노려보고 있자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어.” 그래, 결국 인정할 거면서 까불고 있어. 서열 정리도 끝났겠다, 옆에 있던 라비옌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너도 오랜만이다. 라비옌.” “두 사람… 생각보다 더 친해보이네요?” “친하기는. 예전에 축복을 받을 때 한 번 봤던 게 전부인데.” “그래도 아마 펜에게는 당신이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일족 내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을 만난 건.” 뭐, 그렇겠지. 이 용의 신전에 외부인이 얼마나 찾아오겠어. 일단 두 자매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빈 자리에 착석한 뒤 내심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근데 아까 반응을 보니 내가 오는 걸 알고 있는 거 같던데, 맞나?” “…응. 아버지한테 들었어.” “대체 언제?” “얀델 너랑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에.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거든.” 공간 이동 계통의 용언 말고도 음성 메시지 기능 능력도 있다 이건가? 생각보다 용아저씨의 재주가 다방면인 듯한데……. “그래서 어디까지 들었냐?” “어디까지 듣다니? 그냥 네가 왔다고 곧 갈 거니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 끝이었는데? 아! 좋은 소식이 있다고, 네게 들으라고도 그랬다.” 허허, 이 아저씨가. “그래서 뭐야? 좋은 소식이?” 이내 펜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쓰윽 시선을 피하자 눈이 마주친 라비옌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인족의 감성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이런 중요한 이벤트를 외부인인 나에게 맡기는 거지? ‘그래,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여기서 미루는 것도 우습기에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용살자를 처단하고 심장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으나, 결국 정리하자면 이 한 문장으로 끝날 이야기. “…뭐라고?” 다만, 용꼬맹이는 이 한 문장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기에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해줬다. “말 그대로다. 심장은 네 아빠에게 줬으니, 곧 너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어, 언니?” “사실이니 믿어도 된단다, 펜.” “…….” 이내 언니의 검증까지 더해졌으나 펜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순수하게 기뻐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 선물이었다 이건가? “…….” 결국 펜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무래도 예전에 가정 교육을 못 받았다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 할 듯했다. 용아저씨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감사 인사는 진짜 착실하게 하네. 사람 무안하게시리. “물론 회복된다 해도 당장 크게 바뀌는 건 많이 없을 거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 보니.” “…사정이라니? 무슨 뜻이야?” 나는 내친김에 용아저씨와 당부했던 것들을 직접 얘기했다. 내가 용살자를 죽인 것은 당분간 비밀인 것. 그래서 네가 회복이 되어도 그때까지는 이 신전 안에서 숨어지내야 하며……. 태고룡도 그것에 동의했다는 것까지. “미안하다. 너만큼 이곳이 지긋지긋한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런 부탁을—.” “괜찮아.” 펜이 사과하는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난 여기에 계속 있어도 딱히 상관없다고.”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담긴 목소리. 물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긴? 식사도 제때 나오고 매일 걱정 없이 놀기만 하면 되니 이곳 생활도 그리 나쁘진 않—.”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어, 그 이유가 아니었나?” 펜이 날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나도 여기가 지긋지긋해. 들꽃 냄새도 맡고 싶고, 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달리고도 싶어. 하지만…….” 이내 말꼬리를 흐리던 펜이 작은 양 주먹을 꼬옥 쥐며 말했다. “이제는 나 때문에 아버지가 항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자유로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을 테니까.”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그거면 충분해.” 가족이라……. 왠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얀델, 아버지를 구해줘서 고마워.” 이런 가족이 있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 이후 펜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먼저 쉬러 간다며 방을 나섰고, 그렇게 라비옌과 둘만 남는 자리가 마련됐다.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얘랑도 할 말이 있었거든. “라비옌.” “듣고 있으니, 말하세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렵나?” “그게… 무슨 뜻이죠?” 음, 내가 너무 돌려서 말했나? 예민한 주제란 생각은 들었지만, 바바리안답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뒤풀이에 왜 참석하지 않았냐는 뜻이다. 직접 와서 보니까 그렇게 바쁜 거 같지는 않던데.” “듣기로는 티타나 아쿠라바 씨도 불참했다는 거 같던데요.” “뭐,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아줌마는 진짜로 바빠.” 대답은 약간의 어색한 텀을 두고서 돌아왔다. “……저도 바빴어요.” “그래, 그러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궁금한 건 이거로 끝?”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이자 한결 편한 목소리로 돌아온 라비옌. 거, 진짜 그런 말로 내가 넘어갈 줄 알았나? “라비옌, 난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라. 혹시 생각이 바뀐 거냐?” 주어는 빠졌으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이곳 어디에도 없었다. “아뇨.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그래? 나는 도시로 돌아오자마자 네가 우리랑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 “그야 처음부터 같은 생각이 아니었으니까요.” 허허, 얘 좀 보소? “처음부터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라…….”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쏘아내자, 라비옌도 결국 마지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추운 곳에서 죽어간 대원들을 생각하면 저도 당연히 슬퍼요. 그런 일을 겪게 만든 후작, 그리고 더 나아가 왕가에게도 분노를 느끼고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세상 모든 사람이 얀델 당신 같은 건 아니니까요.” 애석하게도 라비옌이 도시로 돌아온 후로부터 우리와 거리를 두는 듯하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유 또한 내심 예상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이 붙었든, 툭 까놓고 보면 딱 한 번 원정을 함께한 사람들일 뿐이잖아요.” 차라리 가족이었다면 모를까.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사건에 제 모든 걸 걸고서 복수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아니, 그렇지 않다’예요.” 라비옌은 감정을 미뤄두고서 현실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설령 가족이 죽었다고 해도 그 상대가 왕이라면 대부분 복수 같은 건 꿈에도 꾸지 않을 테니까. “그런가… 고맙다. 껄끄러웠을 텐데 네 생각을 솔직히 말해줘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남은 생환자들 중에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한 명쯤은 더 있을 거예요. 단지 다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할 뿐.” 뭐, 그것도 그렇겠지. 뜨거웠다가도 차가워지고, 차갑다가도 한순간에 뜨거워지는 게 바로 사람이니까. “충고는 새겨듣지.” “……의외네요. 배신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줄 알았는데.” “그런다고 마음을 바꾸진 않을 거 아니냐? 만약 바뀔 수 있는 거라면 백 번도 질렀을 거다.” “그런… 가요…….” 라비옌은 답답한 사람처럼 바닥만 바라봤다. 본인은 속 시원하게 할 말을 모두 끝내고, 딱히 실랑이도 없이 대화가 마무리되었건만. “…….” 당장이라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대충 어떤 기분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나도 한때는 얘랑 비슷했으니까. “라비옌, 충고를 받은 김에 나도 충고 하나를 해주마.” “말하세요.” “그날 모두가 너처럼 이성적이었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었을 거다.” 이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단지 선택만이 있을 뿐. ***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와라. 너라면 언제든 환영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서려던 차, 라비옌이 한마디를 읊조렸다. “…아직 아버지께서 회의 중이실 텐데요.” “아, 그렇지.” 결국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차만 홀짝거리며 시간을 때우다가 돌아온 용아저씨의 용언을 이용해 집으로 순간이동했다. 이른 아침에 나갔던 만큼, 돌아왔을 때는 이제 막 정오가 지난 무렵이었는데……. “아저씨! 오셨어요!” “…일찍 왔군. 늦을 수도 있다더니.” 마침 집에 있었는지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금방 마중을 나왔다. “아,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근데 여기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나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물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잡초만 무성하던 공터는 어느샌가 리모델링이 끝나 있었다. 딱 선을 그어둔 것처럼 절반은 수풀이 가득한 정원의 모습이었고, 남은 절반은 훈련장처럼 꾸며진 형태. “이거요……? 그렇게 됐어요. 보기엔 좀 흉하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한 명이 독차지할 수는 없으니, 둘이 나눠 갖는 수밖에.” 정원으로 하니, 훈련장으로 쓸 거니 뭐니 며칠 동안 싸우더니 결국에는 이런 식의 타협을 보게 된 모양. “얀델, 식사는 어떻게 했지?” “과자 몇 개 주워 먹은 게 전부다. 너희는?” “아직요!” “그럼 같이 먹으면 되겠군.” 오랜만에 같이 외식이나 할까도 싶었지만, 이미 아우옌이 식사를 준비 중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 녀석이 요리를 한다고……?” “몰랐나? 네가 어제 먹은 저녁도 그 녀석이 차린 것이었다만.” “……밖에서 사온 건 줄 알… 아니, 근데 여기엔 부엌도 없지 않나?” 내 예리한 질문에 아멜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1층의 방 하나를 부엌으로 바꾼 지가 언젠데. 그걸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던 거냐?” “…….” “얀델, 바쁜 건 알겠지만 너는 집에도 관심을 좀 가질 필요가 있다.” 할 말이 없었다. 어디 최근에 집에서 제대로 쉰 적이 있어야지. 아무튼, 아멜리아를 따라 이동하니 텅 비어 있던 1층의 사무실 하나가 부엌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단장님!” 하얀 조리복을 입은 채 내게 인사를 건네는 아우옌. 슬쩍 옆을 보니 완성된 요리가 하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아저씨, 이리로 오세요. 앉아 있으면 이 사람이 알아서 다 해줘요.” “어… 그러냐?” 아우옌, 얘는 대체 직업이 뭐야? 항해사에 마부에 요리사까지. ‘…싸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네?’ 다시금 힘이 최고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내게 힘이 없었다면 이 녀석이 여기서 웃으며 요리를 할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어때, 입맛에는 맞으신지요?” “딱 좋다. 간이 아주 잘 맞는군. 고기 반찬도 많고.” “언제 단장님이 오실지 모르니, 항상 넉넉하게 준비하라는 마님들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마님?” “아…….” 내 물음에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하는 아우옌. 다만 실수인 건 본인도 아는 듯하기에 지적은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내버려 두시지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아우옌이 그릇들을 수거해 갔다.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내 집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자니, 정말 귀족이 된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저씨, 오늘은 다음 일정이 없죠?” “그렇지? 혹시 몰라서 하루 전부를 비워놓은 상태였으니까.” “그럼… 제 정원에서 차 한잔 마실래요?” “오, 좋지.” “테르시아, 나는 흑룡차로.” “하… 진짜 염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에르웬은 까칠하게 말하면서도 찻잎을 우려줬고, 이후 우리 셋은 함께 차와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외부와의 시선을 차단하는 담장은 아늑하게 느껴졌고, 나른한 오후의 햇살은 따스로웠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끽하는 휴식의 시간. ‘좋네…….’ 에르웬은 옆에서 재잘재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고, 중간중간 아멜리아가 껴들며 옥신각신 언쟁을 벌였지만, 그것도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한데 너무도 노곤해진 탓일까? “가족이라…….”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 “……?” 한참 실랑이 중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며 정적이 찾아왔다. “……얀델, 지금 뭐라고 했지?” “네. 아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싸우던 것도 잊고서 한마음 한뜻으로 내게 묻는 두 사람. “…아무 말도.” 왠지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대충 둘러댔으나, 두 사람은 집요했다. “아무 말도 아니긴요. 분명 ‘가족이라…….’ 라고 중얼거리셨잖아요.” “나도 그렇게 들었다.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하, 진짜 어쩌다 그런 말을 해버려 가지고.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용꼬맹이를 생각하던 중에 말이 튀어나온 거 같은데……. “그냥.”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대답. 집요하게 이유를 캐묻던 두 사람은 막상 내 대답을 듣더니 말이 없어졌다. “…….” “…….” 거, 이러면 진짜 분위기 이상해지는데……. 뭐라 주제를 돌리려 입을 열려던 차, 에르웬이 돌연 눈빛을 바꾸더니 정적을 깨고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좌측 담장이요.” 좌측 담장? 갑자기 얘는 또 뭔 소리야? 의문을 가진 찰나, 아멜리아의 입에서 설명이 더해졌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뭐? “테르시아, 셋을 세고서 함께 나가지.” “알았어요.” 내가 뭘 할 것도 없이 속으로 셋을 센 두 여자가 쏜살같이 튕겨져 나가 담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에, 엑?!!” 순식간에 협동 사냥을 끝마치고서 담장 쪽에 숨어 있던 누군가를 전리품처럼 잡아왔다. “이걸… 반가운 얼굴… 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군.” 아멜리아의 반응은 조금 묘했으며. “…….” 에르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아하, 아하하하…….” 제압을 당해 바닥에 엎어진 사냥감이 나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랜만이… 다. 비요르… 읏!” 또박또박 발음을 하다가 혀를 씹었는지 아픈 표정을 짓는 사냥감. “…….” “…….” “…….” 미샤였다. 476화 남과 여 (3) 라프도니아의 남작. 탐험가들의 영웅. 바바리안의 신임 부족장. 클랜 아나바다의 단장.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거인, 비요른 얀델. “정말로… 살아 있었어…….” 미샤 칼스타인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날이 밝자마자 도시로 나가서 직접 몇 번이고 수소문을 해본 결과, 이백호가 한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럼 그동안 대체 뭐를 위해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기쁘면서도 슬펐고, 허탈하면서도 벅찬 감정이 일어났다. 아, 물론 화도 났다. 비요른 얀델은 대체 어째서. 나를 속이면서까지 죽은 척을 했을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몇 년간 그런 범죄자들과 함께 지낼 일도 없었을 텐—.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냈다. 분명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비요른 얀델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 사정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 어떠한 의심도 하지 말고 믿자. “응,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다짐하듯 중얼거린 그녀는 낮에 조사하며 알아낸 비요른의 거주지로 향했다. 그러나 집은 텅 빈 상태였다. “이사를… 갔다는 말씀인가요?” 하필 왜 이런 때에……. 그녀는 일단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금 수소문한 끝에 이사간 비요른의 집으로 향했다. “컴멜비…….” 기분이 참 이상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런 도심지로 이사 오자고 그랬었는데……. ‘여기가 비요른의 집…….’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나 그녀는 쉽사리 현관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막상 찾아오니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비요른은… 나를 보면 무슨 반응일까? 별로 반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들어 보니까, 지금은 그 요정 그리고 에밀리 레인즈란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던데……. ‘에밀리 레인즈는… 아마 파루네섬에서 만났던 그 여자겠지.’ 대체 둘은 어떤 관계일까? 어쩌다 그 둘이 동료가 되었을까.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은… 역시 헛소문이겠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한도 끝도 없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일까? “…….” 미샤 칼스타인은 그날 온종일 집 근처를 배회하고, 때로는 집 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그래도 마지막에 잠깐 보기는 했으니까…….’ 아, 물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온 비요른에게는 말도 걸지 못했다. 피곤해 보이는 표정 때문이었다. ‘응, 그것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내일 다시 와서 만나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 그녀였으나, 결국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비요른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밤 늦게 돌아왔다. 물론 그 어느 때든 말을 걸 수는 있었지만,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헤. 다녀오세요, 아저씨!” “…오늘 저녁은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문 앞까지 배웅을 나오는 두 여자. 그리고 그런 둘에게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오냐며 타박을 하는 비요른. 이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비요른은… 괜찮은 거구나.’ 내가 없어도. 비요른의 생활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집 주변을 맴돌고 때로는 이능까지 써가며 모습을 숨긴 채 그들의 생활을 몰래 엿보았다. 두 여자 모두 기척에 예민해 몇 번인가 걸릴 뻔했던 적도 있지만, 집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덕에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조금씩 과감해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것에 그치지 않고 창문 아래로. 창문 아래에서 엿듣는 것으로 모자라 뒤쪽 공터의 담장으로. 그렇게 은밀하게 숨어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던 어느 날. 솨아아아아-! 마법진이 피어나며 비요른이 돌아왔다. 비요른이 없는 동안에 바뀐 공터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두 여자는 답했다. “이거요……? 그렇게 됐어요. 보기엔 좀 흉하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한 명이 독차지할 수는 없으니, 둘이 나눠 갖는 수밖에.” 정말 공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미샤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부엌으로 이동해 식사를 했고, 요리를 해온 것은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사내였다. “어때, 입맛에는 맞으신지요?” “딱 좋다. 간이 아주 잘 맞는군. 고기 반찬도 많고.” 나한테는… 항상 싱겁다고 해놓고—. “언제 단장님이 오실지 모르니, 항상 넉넉하게 준비하라는 마님들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숨어 있던 미샤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마님들?’ 정말로,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비요른은 그 단어를 지적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두근-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도 비요른 옆에서 지내며 가끔 저런 오해를 받은 적 있지만, 비요른은 그때마다 항상 부정을 했었는데. “아저씨, 오늘은 다음 일정이 없죠?” 식사를 마친 그들은 정원으로 가서 다과를 즐기며 떠들었다. 둘의 취향에 따라 훈련장과 정원으로 나뉜 공터. 그 한편에 위치한 동그란 형태의 테이블과 세 개의 의자. ‘……너무 가까워.’ 계속 이곳에 있으면 들킬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녀는 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담장으로 이동했다. 소리 없이 한 걸음. 두 걸음. 웃으며 떠드는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자니,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만약에. 그날 이백호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나도 저 옆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을까?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냥…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서.” 이 집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다. 그래, 그러니까……. 바스락.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결정을 내린 때였다. 타닷.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여자가 양쪽 측면을 모두 점하며 달려들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대처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 “…에, 엑?!!”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양쪽 팔이 포박된 채 정원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상황은 너무도 간결했다. 예전 동료… 아니, 전 연인이 갑자기 나타나 몰래 집 안을 들여다보다 들킨 상황. “…….” 이럴 땐 대체 뭐라 변명을 해야 하는 걸까? “아하, 아하하하…….” 일단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해보기로 했다. “오, 오랜만이… 다. 비요르… 읏!” 정말이지, 끔찍한 재회였다. *** 공터 쪽으로 창문이 난 2층의 방. 창가 앞에 선 여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저 여자가 왜 이제서야 다시……. 그때 아저씨를 버리고 사라질 때는 언제고……. 또… 또 나한테서, 빼앗아 가려고…….” 웅얼거리는 혼잣말은 그녀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 주었고, 무슨 사고라도 칠까 뒤에서 지켜보던 아멜리아에게까지 말을 걸었다. “…마도구를 썼는지, 대화가 들리지 않아. 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없는 건 아닌데.” “그, 그러면 지금 당장……!” “비요른이 알면 싫어할 텐데?” 그 짧은 되물음에 에르웬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손톱을 씹으며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다 못한 아멜리아가 툭하고 물었다. “그럴 거면 평소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그랬나?” 에르웬이 고개를 돌려 아멜리아를 보았다. 차갑게 굳은 채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으나,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뻔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성을 잃은 듯 보여도 이 상황에서 그의 미움을 살 만한 행동은 결코 하지 못하리라는 걸. 가시로 뒤덮인 듯 보이는 이 요정의 속에는 항상 상처받고 눈물짓는 겁쟁이가 숨겨져 있을 뿐이다. “…….” 이번에도 에르웬은 마찬가지였다. 본질에 다가서는 질문에는 답을 피한 채, 침묵을 고수했다. ‘오지랖 부리는 취미는 없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못할 짓이겠지. 에르웬이 있는 창가 쪽으로 다가간 아멜리아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툭 던지듯이 물었다. “테르시아, 너는 얀델과 정확히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 거냐?” “…….”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말하기 싫은가 보다 하며 여기서 그녀도 대화를 끝냈을 테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지금과 같은 관계라면, 미샤 칼스타인이 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 “너는 얀델과 남녀 관계가 되고 싶은 건가?”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너무나도 전형적인 겁쟁이들의 대답. “잘못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궁지에 몰린 겁쟁이는 공격적으로 나왔고, 이에 아멜리아도 사냥을 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냥 궁금할 뿐이다. 그런 욕심이 있으면서도 왜 그동안 제대로 표현을 안 했는지.” “…….” “너도 알고 있지 않냐? 얀델 저 녀석은 눈치가 빠르면서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을 거란 걸.” “…….” “그러니까 말해봐라. 혹시 내가 도울 수도 있지 않나?” “…하! 당신이 날 돕는다고?” 에르웬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치더니 역으로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아저씨랑… 무슨 관계가 되고 싶은 건데……?” 낯부끄러운 주제였지만, 아멜리아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글쎄, 나는 지금이면 족한데. 이미 충분히 즐거워서.” 사실 그녀는 에르웬이 매일 애처럼 투정부리는 것도, 얀델이 이상한 일을 벌여서 함께 수습해야 하는 것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몹시도 간단한 이유였다. “얀델이 말했듯,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테니까.” 그 말에 에르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어려있던 살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그 빈자리에는 당황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 “…….” 그렇게 이어진 잠시간의 적막. 한참이나 망설이던 에르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해줘.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마침내 가시 돋친 껍질이 벌어진 듯한 기분. 아멜리아는 어린 여동생을 보듯 부드럽게 웃으며 조언했다. “때를 기다려라.” “…기다리라고?” “그야 지금은 비요른도 도망만 갈 테니까.” 무릇 사냥꾼이라면 사냥감이 도망칠 수 없는 환경을 먼저 구축해야 하는 법. 아멜리아는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분명 비요른 얀델은 생각했을 거다. 현재 너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네 감정은 결핍된 부분을 자신에게서 채우려는 것일 뿐이라고. 그래서 일시적인 감정이라 판단하고 저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예상하자면……. “지금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 이 요정과 바바리안은 비슷하다. 겉은 단단해 보여도, 그 속에는 온갖 불안과 걱정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가 봤자 혼자 생각하고 납득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며 도망만 칠 테니까.” “언제까지……?” “나중에 네가 정수들을 지우고, 완전히 멀쩡해졌다고 그 녀석이 생각할 때까지.” 그때가 되어 마음을 밝힌다면 이제 얀델도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마주해 줄 것이다. “물론 기다리기만 하라는 건 아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감정 교류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존댓말.” “…예를 들면요?” 이후 아멜리아는 남녀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기술들을 알려 주었고, 에르웬은 뾰족한 귀를 쫑긋하며 경청했다. 그만큼 아멜리아가 전수해 준 기술들은 굉장했다. 하나하나가 수긍이 된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옷을 차려입어야 할 때 다가가서 넥타이를 대신 매준다니…….” 기술 전수가 끝나자 에르웬은 놀라운 감정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혹시 다, 당신은… 남자를 사귀어 본 적 있는 거예요?” “…………아니.” 그 대답에 신뢰도가 떨어졌는지, 에르웬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그럼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아멜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그 녀석이 핑계를 댈 때 자주 하던 말이긴 하지만. “…책에서 읽었다.” 뭐, 사실이긴 하니까. *** 이백호와의 만남으로부터 열흘이 조금 넘게 흐른 시기. 기다리고 기다리던 재회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설마 이런 형태의 재회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지만 말이지.’ 잠시 머리가 멍해졌지만, 우선 아멜리아와 에르웬부터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휴대용 음성 제어 마도구를 써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 만남이 에르웬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판단. “…….” “…….” 그 상태로 둘만 남은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만 바라보는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물론 애틋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투 중인 것도 아닌데 긴장한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목이 뻣뻣해진다. ‘……아니, 왜 이렇게 어색해 죽을 거 같지?’ 일단 말을 던져봤다. “머리가… 길었군?” “아… 이거……. 응…….” 뭐라 대화를 이어갈 건덕지가 없는 답변. 하나 나는 어색해지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뒤로 묶은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아닌데? 요리할 때 자주 그랬는뎅… 아, 아니… 그랬는… 데?” 이제야 보이는 예전의 그 모습. 왠지 그제야 웃음이 나며 한결 긴장이 풀렸다. “편하게 말해라. 새삼스럽게. 우리 사이에 누가 그걸 가지고 흉본다고.” “하지만… 정말로 다 고쳤단 말이… 다. 네가 없는 동안에…….” “…고쳤다고?” “응……. 가끔… 긴장하면 돌아갈 때도 있지만. 지금은 다 고쳤단 말이당. 아니, 말이다….” 음, 그 말은 얘도 긴장하고 있었단 거구나.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 “아, 아무튼 그럼 인사도 했겠다, 나,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얘는 또 뭐라는 거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어딜 가려고?” 나는 즉시 한 걸음 나아가 미샤의 팔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왜 이렇게 말랐어?’ 아무튼, 이러면 블링크 계열이 아니면 도망은 못 갈 테고……. 아, 설마 그런 스킬도 배운 건 아니겠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미샤 칼스타인.” 나는 미샤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너는 이제 아무 데도 못 간다.” 477화 남과 여 (4) 일단 1층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던 아우옌은 이미 할 일을 끝내고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음, 어쩌면 아멜리아가 지시한 걸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 “…….” 후, 분위기가 또 이상해졌네. 양주먹을 무릎에 댄 채 시선 처리를 못하고 있는 미샤를 보고 있자니, 괜히 나까지 어색해지는 기분. 이제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이…….” 돌연 미샤가 입을 열었다. “한수…….” 이 세상에서는 아는 이가 몇 명 없는 나의 본명. 미리 음성 제어 마도구까지 켜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그리고 이에 실수를 깨달았을까. “아… 미, 미안하당! 너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절대—.” “괜찮다. 반경 2m 내로는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으니까.” “…그, 그러니?” 그러니는 또 뭐야. 발음을 교정했다더니 왠지 말투만 이상해졌네. “그 이름은 이백호에게 들었나?” 우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확인할 것부터 얼른 확인하기로 했다. “응…….” “그럼 이제 내가 악령이란 것도 알겠군.” “……응.” “그런데도 내가 꺼림찍하거나 무섭거나 하진 않은 거냐?” “응.” “어째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쯤은…….” 뭐? 알고 있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그, 그건…….” 미샤는 내 질문에 역으로 당황하는가 싶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개벽 154년 8월 16일. 으응. 확신하게 된 건 그날이었는데…….” 아니, 이걸 날짜로 말해주면 어떡하라고? 어이가 없었지만 천천히 시기를 가늠해 보니 기억이 났다. 얘가 왜 이런 식으로 답했는지도 알 거 같았고. “…….” 개벽 154년 8월 16일. 그날 나는 얘한테 동료로만 여겨지지 않는다고 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 이 잠시 있었다가……. ‘차였지.’ 후, 설마 이게 이유였던 건가? 그동안 차인 이유가 뭘까 수없이 고민했는데.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왠지 대놓고 묻지를 못하겠다. 따라서 나는 조금 돌려서 말했다.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에, 이백호 걔는 왜 따라간 거냐?” “……자기를 도와주면 소생의 돌을 이용해 너를 살려준다 했으니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굳이 아는 질문을 꺼낸 이유는 단 하나. 이 질문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네 말대로라면 그때 너는 내가 악령인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소, 소중한… 동료이니까…….” 소중한 동료라……. 기쁜 이야기이긴 했지만, 조금 애매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악령 혐오가 아니면 나는 왜 차인 건데? 뭐, 악령과 동료는 될 수 있지만, 남녀 사이는 어렵다는 뜻인가? 더 깊이 캐볼까도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미샤 쪽에서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그래, 이 부분은 말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나도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말해라.” “이백호… 걔는 너를 형이라 부르던데. 둘이… 혹시 친한 사이인 거… 야?” “친하다고 하기엔 애매하다. 그쪽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보여서 말이지.” 내 대답에서 한 단어가 인상 깊었는지 미샤가 작게 되뇌었다. “수작…….” “그래서 궁금한 건 그게 끝이냐?” “아, 아니! 하나 더 있다! 그때… 파루네섬에선 왜 그렇게 사라졌던… 거야?” 아, 그거는 이백호가 말 안 해줬구나. 왜지? 나랑 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아니, 어쩌면 단지 실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 말할지 말지는 내가 직접 선택하라는 거겠지.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았던 것—.” 물론 내가 할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잠깐.” “……?” “우선 오해부터 풀자. 밖에 알려진 이야기와 진실은 다르다.” 나는 파루네섬에서 시작된 과거 여행의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딱히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최측근들은 아이나르 빼고 다 알고 있는 와중에, 내 본명까지 알고 있는 미샤에게까지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이백호도 알고 있는 얘기고 말이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미샤는 어딘가 살짝 안심한 얼굴이었다. “역시… 사고였던 거구나……. 갑자기 사라졌던 건…….” 이후 미샤는 돌아온 다음의 내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했고, 나도 전부 사실대로 말해줬다. 에르웬을 만난 것. 아멜리아를 만난 것. 레이븐과 만나고, 아이나르와 만나고, 곰아저씨, 그리고 난쟁이놈, 로트밀러까지 다시 만나 재회를 한 것. “내가… 마지막이었구나…….” 어딘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미샤가 조심스레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다들 네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어……?” “에르웬과 아멜리아, 레이븐 그리고 이백호가 전부다. 내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그렇구나.” “아무튼, 처음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나중에 알아보니 이상한 놈이랑 동료가 됐다고 하고.” 거기다 나를 악령이라고 증언했던 것까지. 나도 모르게 말을 잇자, 미샤의 얼굴이 굳었다. “미, 미안하당. 나, 나는 네가 죽은 줄 알고—.”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날 살리려 했던 일이라는 건 믿으니까.” 뭐, 그래도 내가 돌아온 다음엔 어쩔 작정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가 싶긴 하지만……. 그러한 노력 자체는 고마웠다. 일단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않겠는가. “그럼 이만하면 내 얘기는 충분히 한 거 같고, 이제 네 얘기를 해봐라.” “내, 내 얘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거냐? 몸은 왜 그렇게 마른 거고?” “안 말랐는데…….” 안 마르기는 아까 보니 뼈밖에 없더만. “됐으니 말이나 해봐라. 너한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하던 미샤가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거대한 왕국의 절대자였던 불멸왕도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듯. 그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 비요른은 죽은 거군.] 그 이별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몇 번을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깨도 꿈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비요른 얀델을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소생의 돌로는 두 명까지 살릴 수 있는데, 네가 날 도와주면 그중 하나를 네 낭군님으로 남겨줄게.] 결국 그 제안에 응했다. 이백호가 시키는 대로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고 소문을 냈고, 함께 미궁에 들락날락하며 그가 하는 여러 일들을 도왔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나날이었다. 힘들고 때로는 서러워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으니까. [오, 이제 냥냥체는 버리려고?] 반푼이 같다며 놀림 받던 말투를 고쳤다. 나중에 만났을 때, 놀라는 비요른이 보고 싶었다. ……사실 이유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냐옹아, 또 혼자 뭘 읽고 있는 거냐?]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으면 비요른이 옆에 있는 거 같았다. [그만 읽고 나와라. 훈련장이나 가게. 내가 뉴비 여럿 키워봤는데, 실력 늘리는 건 대련이 짱이야.] 거의 구타와도 다름없는 대련을 매일같이 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그녀 또한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많은 부분이 변하였다. 아직도 가끔은 흥분하면 예전 말투가 나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신경을 쓰면 평범하게 말할 수 있게 됐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 […대체 소생의 돌은 언제 쓸 건데?] 점점 인내심도 부족해졌다. [아, 때가 되면 쓴다니까? 요즘 들어서 자꾸 왜 이렇게 보채?] 언제나처럼 기약이 없는 대답. 결국 묻고 말았다. [……쓸 생각이 있기는 한 거고?] 이백호가 갖고 있는 소생의 돌은 진짜다. 하지만, 이백호는 과연 약속을 지킬 생각일까? 그동안엔 그 의문을 애써 외면하며 꾹 참아왔다. 만약 상자 속 진실이 내 기대와 다르다면, 그땐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백호, 똑바로 말해. 소생의 돌을 언제 쓸 건지. 지금 여기서 딱 말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끝내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에 손을 뻗었다. 하나 돌아온 답변은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뭐 어쩔 건데?] […….] [진짜 짜증나게 하네. 왜 사람을 못 믿어? 애초에 네가 지금까지 날 제대로 도운 게 뭐가 있는데?] […….] [영 쓸데가 없어서 열심히 렙업부터 시켰구만. 이제 좀 쓸 만해지려나 하니까 머리만 굵어져서는. 야, 내게 뭔가 주장하고 싶으면, 실적을 내. 그러면 나도 대답을 해줄 테니까.] 그날부로 이백호와의 관계는 최악에 이르렀다. 물론 그럼에도 이백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적어도 소생의 돌은 진짜니까. [하하! 들었던 것과 달리 까칠한 처자로구만!] 이백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 모두에게 선을 그으며 업무적으로 행동했고, 위험한 일도 서슴치 않고 나서며 공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그 두 가지가 한 번에 찾아왔다. [살아… 있어…? 비요른이…?] 비요른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비요른 얀델이 죽을 테니까?] 새로운 족쇄가 채워졌다. 물론 이걸 전부 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핫… 내 얘기는 여기까지인데… 생각보다 별거 없지……?” 참는 건 익숙하니까. *** 미샤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그야 지난 몇 년간 이백호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 ‘진짜 레벨링 한번 야무지게 하고 다녔네.’ 덕분에 이백호의 스킬들도 대충 알게 됐다. 조합 전부를 본 건 아니지만 캐릭터 컨셉 정도는 확실해졌다고 해야 하나? 직업군을 분류하자면 ‘육탄계 이능술사’가 될 터. ‘상황에 따라서 무기도 전부 다 쓸 줄 안댔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다. 뭐, 그래 봤자 정수 조합의 완성도 자체는 점수를 높게 주기 어려웠지만. ‘근데 더 강해질 구석이 없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뭐지……? 그냥 허세였나?’ 몇 가지 의문점이 들기는 했으나, 이는 결국 당장 해결될 수 없는 종류의 것. 새롭게 얻은 정보들을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만 하고 있자니, 미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뜻이었어?” “응? 뭐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샤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나한테 그랬잖아……. 아, 아무 데도… 못 간다고.” 아, 그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나는 당황한 티가 나지 않도록 곧장 답했다. 미샤가 아까 내게 말했듯이. “……우린 소중한 동료 아니냐. 동료끼리는 함께 있어야지.”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먼저 튀어나온 말. 미샤 역시 긍정하는 기색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 그렇구나?” “어, 그런 거다.” “…….” 나는 얼른 주제를 바꾸었다. “근데 그때는 뭐였나? 파루네섬에서 말이다. 내게 할 말이 있었다고 했지 않나.” “아… 그거… 내가 그, 그랬었낭? 기, 기억이 안 나는데…….” 발음이 뭉개지는 걸 보니 딱 봐도 거짓말인 거 같은데……. 왠지 더 캐묻다가는 다시 어색해질 거 같아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다음 질문. “아! 목걸이도 가지고 있나? 레이븐이 말하기로 네가 가져갔다고 하던데…….”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내가 이에 대해 언급하자 미샤가 목 아래의 단추를 풀었고, 옷 속에 감춰져 있던 목걸이가 드러났다. 그래도 다행히 안 팔고 잘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 근데… 꼭 돌려줘야 하는 거냥?” 뭐래, 얘는. “줘라.” “……으응.” 그래, 이것도 드디어 돌려받았구나. *** 한낮에 시작된 미샤와의 대화는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을 때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대화 주제는 한가득이었고, 그 시간이 이어질수록 재회의 어색함도 차츰 사라져갔다. 하지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배는 안 고프나? 다 같이 식사나—.” 내 제안에 미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식사는 자기 숙소로 돌아가서 하겠다던가? “숙소는 뭐 하러? 빈 방도 많은데 그냥 여기에서 살면 되지 않나.” “비요른. 마음은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돼.” 뭐라 설득하기도 그런 완고한 거절. 나랑은 선을 긋겠다 이건가? “그, 그러냐? 알았다. 편한 대로 해라.” “응.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클랜에 다시 들어오라는 그 얘기는… 좀 더 생각해 봐도 될까?” “……생각? 아아! 물론이다. 생각? 다, 당연히 해봐야지. 그런데… 그게… 얼마나 걸릴 거 같나?” “일주일… 그 정도면 될 거 같은데, 끝나면 내가 다시 올 테니, 너무 기다리고 있지 마. 알았지?” 그렇게 우리의 재회는 마무리되었고, 나도 슬슬 위층으로 올라갔다. 자리도 비켜줬으니 어느 정도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 의외로 두 사람은 한 방에 있었다. 무언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툭. 노크를 할 필요도 없이, 문가에 다가가자마자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거, 이래서 민캐들이란. 평소에 둘이서 뭔 대화를 하는지 조금은 궁금했는데. “들어가도 되나?” “드, 들어오세요!” 어딘가 살짝 놀란 느낌의 음성. 이 부분도 예상외였다. “제, 제 방에는 무, 무슨 일이세요?” 우울해한다거나 공격성을 보일 줄 알았는데, 상태가 아주 괜찮다고 해야 하나? 쓰윽 시선을 돌려 아멜리아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에르웬이 멀쩡한 건, 전부 얘가 초기에 잘 진정을 시킨 덕분인 듯한데……. ‘진짜 믿음직하긴 하단 말이지.’ 감사의 의미를 담아 눈짓을 보낸 뒤 다시 에르웬을 보았다. “무, 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그제야 어딘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감추고 있는 거 같다 해야 하나? ‘오자마자 미샤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물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조금 더 집중해서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니 왠지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잇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한 권의 두꺼운 책. ‘저 책… 원래 아멜리아 방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남과 여’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로맨스 소설 같은 건가? 나중에 찾아서 읽어봐야지. “그래서 칼스타인과는 어떻게 됐지? 떠난 건가?” “아, 그거…….” 나는 간략한 설명과 미샤가 클랜에 합류할지 말지 고민을 해보기로 한 사실을 전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끝. “하아…….”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미샤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 애초에 나는 왜 이백호만 설득하면 미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걔는… 진짜 동료로만 생각하나? 근데 동료로만 생각했으면 그렇게까지 살리려 할 이유가 없잖아. 대체 미샤의 본심은 무엇일까. “…잠이나 자자.” 암만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기에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축하한다! 어린 전사들이여! 오늘부로 너희들은 성지를 떠나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바바리안의 성인식 날. 다시 말하자면, 미궁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478화 대어 (1) 부족장이 되고서 두 번째 진행하는 성인식.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 내에 성인식 과정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음, 이번에는 뉴비는 아예 안 들어온 건가?’ 이번 기수의 어린 전사들 중에서는 플레이어로 의심될 행동을 하는 녀석은 없었다. 참 다행인 일이다. 전사들은 몸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고, 유저 쪽도 괜히 악령 취급 받으며 생존의 나날을 이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 빌어먹을 게임은 사라져야 한다. “카론.” “말해라, 부족장.” 생각이 난 김에, 옆에 있던 2장로에게 뉴비 근황을 확인했다. “킬타우의 세 번째 아들 벡타? 아, 저번 성인식 때 방패를 고른 그 녀석 말이군!” “그래.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나?” “후훗, 방패를 골랐다고 신경이 쓰이는가 보군?” “묻는 말에나 답해라.” “잘 지내고 있다. 듣기로는 미궁에서도 꽤 굉장했다고 하던데…….” 자세한 얘기를 묻자, 바바리안족의 마당발답게 최신 정보가 술술 나왔다. “나름 너를 닮은 녀석이더군. 첫 탐사 때 2층에 갔던 너처럼, 그 녀석도 같은 팀이 된 전사들과 함께 2층까지 올라갔다는 모양이다.” “2층에……?” 뉴비는 내가 도입한 팀 제도와 시작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른 탐험가에게 포션 한 병을 주고서 횃불을 구매했고, 그걸 바탕으로 암흑지대를 클리어. 2층에서는 본인이 방패로 탱을 하면서 다른 전사들을 도왔다고 하는데……. “부족장, 너만큼은 아니지만 첫 탐사에서 적잖은 돈을 벌어 검문소를 나왔다는 것 같다.” 그래,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거 같더라니 벌써 잘 적응하고 있구나. 암만 게임 지식이 있어도 쉽지 않았을 텐데. 물론 한 가지는 걱정이 됐다. ‘그렇게 까불고 다니면 비밀치안청의 악령사냥꾼 놈들의 눈에 띌 텐데…….’ 뭐, 이건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지. 갑자기 옆에 와서 ‘전 미국 출신인데 그쪽은 어디 출신?’ 이렇게 묻는다고 술술 불 녀석이면 애초에 오래 살아남기는 글렀다. “다음 기수부터는 횃불도 하나 넣어줘야겠군.” “오,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한 차례의 대화가 끝났고, 이후로는 나도 수다를 떨지 않으며 어린 전사들을 인솔해 도시를 향했다. 그러던 때였다. “부족장.” 내 옆에서 따라오던 카론이 경직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사실… 얼마 전에 알아냈다.” “……?” “이번에 죽은 전사들의 사인을 알아냈다. 네가 알아보라 하지 않았나.” 아, 그거. 성지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번 기수의 사망자를 확인하는 거였다. 사망한 전사들의 수는 일곱이었다. 첫 탐사 생환율이 거의 90%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수치. 다만, 나는 그 수치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포션에 신발. 그리고 결속 마법까지 써서 서넛씩 팀을 만들어 줬는데 세 명이나 죽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사인이 뭐였지?” 내 질문에 카론은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탈자인 거 같다. 내가 알아보니 수정동굴에서 동족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길드에 몇 개 들어와 있더군.” “…….” “신고 기록에 따르면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에게 당한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는 모양이다.” “역시… 그랬군.” 내심 예상했던 원인인지라 납득은 빨랐다. 물론 한 가지 의문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군. 네 명씩 팀을 이뤘는데도 약탈자에게 당하다니. 그것도 1층에서.” “사실… 나도 그게 이상해서 좀 더 알아봤다. 그런데…….” 이내 카론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뒤따르는 어린 전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최근 우리의 심장 값이 크게 올랐다.” 바바리안족의 미래를 책임지는 부족장으로서 심장이 철렁하는 말이었다. “값이 오르다니……?” “말 그대로다. 마탑에서 공시한 표준가가 몇 배나 올랐다.” “니미럴.”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는 존재가 되자 당연히 공급량은 감소하며 희소가치는 상승. 심장 가격도 날이 갈수록 폭등을 거듭했을 터. ‘심장 하나에 수백만 스톤이면… 눈이 돌아가는 새끼도 생기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야 어지간한 4, 5층 탐사보다 돈이 될 테니까. 암만 포션을 주고, 서너 명씩 팀을 이룬다 한들. 스펙에서 차이가 나는 전문 약탈자들이 1층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어린 전사들은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시신을 목격한 탐험가들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시신들 대부분은 거의 일방적으로 당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까드득…….” 강경한 대응이 필요할 듯하다. *** 어린 전사들을 직접 차원 광장까지 인솔한 후, 대기 중인 마법사의 도움으로 서너 명씩 묶어서 결속 마법까지 걸어주었다. 아, 참고로 이번엔 길드 출신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 팀에도 마법사가 들어왔으니까. “하위 마법이긴 하지만… 숫자가 이만큼이나 되니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고맙다. 베르실 고울랜드.” “아… 생색내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고마울 때는 고맙다고 제대로 표시를 해야 하는 거니까.” 씨익 웃으며 베르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왠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군, 저 녀석.” 대체 내가 뭘 시작했다고 저러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얀델, 그쯤하고 슬슬 우리도 들어가지.” 아무튼, 전사들 인솔도 끝났겠다 우리도 얼른 미궁에 입장했다. 「1층 수정동굴에 입장했습니다.」 언제 들어와도 옛 생각이 나게 만드는 1층의 수정동굴. 우리는 곧장 중심부의 암흑지대로 향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여기에 다시 오게 되다니.” 기념비를 보자마자 베르실이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데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이상할 게 뭐 있어요? 그쪽은 그때 그냥 차원문 열고 편하게 도망쳤던 거로 기억하는데.” 에르웬이 살살 긁듯 쏘아붙였고, 이에 베르실도 움찔했다. 다만, 다행히 베르실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도리어 사죄의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거, 분위기 이상해지게. 나는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껴들었다. “미안할 게 뭐 있나? 네 잘못도 아닌데.” 한데 그 말이 또 불편하게 들렸을까. 정말이지 오랜만에 에르웬이 내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잘못 맞아요. 그때 아무도 도망치지 않고 함께 맞서 싸웠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테니까.” 하긴, 그때 얘는 친언니를 잃었지. “항상 잘못된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대가를 치러야 했고요.” 진심으로 그 일을 후회하는지, 베르실은 에르웬의 과한 언사에도 부드럽게 대응했다. 이에 에르웬도 더 비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게 사과까지 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졌네요.” “어……? 아니다. 괜찮다. 하나도 안 이상한데?” “그러면… 다행이고요.” 뭐야? 얘가 언제 이렇게 멀쩡해졌어? 살짝 발끈하긴 했지만, 언니까지 껴 있는 주제에 이렇게 쉽게 평정심을 되찾다니……. “비요른! 그래서 그놈은 언제 나오는 거냐? 내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는데!” 그때 아이나르가 들뜬 기색으로 외쳤다. 이에 아멜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바리안, 너는 지난번에 회의에서 몇 번이나 말해줬던 걸 기어코 다시 묻는군?” “…까먹었다!” “그리고?” “미, 미안하다……?” “한결 낫군.” 지난번에 서열 정리를 확실하게 끝냈는지, 아멜리아의 말에 어깨를 움츠리는 아이나르. 그래도 궁금하긴 한지 또 똑같은 걸 물었다. “그래서… 언제 싸울 수 있는 거냐? 어떻게 싸울 건지는 대충 다 기억하고 있는데!” 결국 아멜리아도 마지못해 대답을 해줬다. “…7일 차다.” “그, 그렇게나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놈을 소환할 수 있는 건 3일 차부터 아니냐!” “신기하게도 회의 때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1층의 계층군주는 3일 차부터, 5명 이상 한곳에 모여 있을 시 확률적으로 등장한다. 하나 말이 확률이지, 그 확률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사실상 하루가 지나기 전에 100% 소환이 된다. 따라서……. ‘소환 준비는 6일 차 저녁부터.’ 미궁이 닫히는 7일 차에는 확정적으로 소환이 가능하도록 일정을 짰다. 그게 5인 공략 방법이기도 하니까. “그럼… 그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건가?” 아이나르는 벌써 지루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매일같이 심심하다고 난리를 칠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아이나르, 걱정하지 마라. 기다리는 동안 너는 나랑 같이 할 게 있으니까.” “오! 정말인가!” 내 말에 아이나르는 크게 반색했고, 반면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얀델, 할 것이라니? 나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야, 그렇겠지. 이건 오늘 오는 길에 생긴 계획이니까. “어차피 6일 차까지는 다섯 명이서 뭉쳐 있으면 안 되지 않나. 너희 셋은 여기서 쉬고 있어라. 절대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 “……뭘 하려는 거냐?” 아멜리아는 내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칠까 싶은 표정이었다. 거, 사람 섭섭하게. “걱정 마라. 둘이서 오붓하게 산책이나 하려는 것뿐이니까.” 아, 물론 비싼 장비는 전부 벗을 예정이다. 마치 갓 미궁에 들어온 초심자처럼. *** 아이나르와 함께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다. 에르웬이 뭔진 몰라도 자신 또한 돕겠다며 나섰지만 이건 부드럽게 거절했다. 간단한 이유다. 지금부터 할 일들은 오직 바바리안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터벅, 터벅. 아이나르와 단둘이서 동굴 속을 걷고 있다. 목적지 따위는 없이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 “…….” 참고로 기존의 장비는 진작에 벗어서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바바리안 초심자 세트를 걸친 상태다. 장화 한 켤레. 천 배낭. 허리에 거는 주머니. 그리고 성인식 때 아무도 고르지 않아 남은 철제 무기 한 자루까지. “…비요른, 이런다고 과연 그들이 속을까?” 내 계획을 듣고 따라주기는 했으나, 아이나르는 약간 긴가민가한 듯했다. “너나 나나 제법 이름이 알려진 편인데…….” “알려진 건 이름이지, 얼굴이 아니지 않나.”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몰라도 너는 분명 사람들이 다 알아볼 게 분명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람의 첫 인상은 마주친 상황과 겉모습, 그리고 사람이 내뿜는 기질에 따라 결정이 되는 법. “아무리 그래도, 우리 나이가 몇인데…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얘도 참 괜한 걱정이 많다니까? 바바리안들은 다들 노안이라 몇 살 차이는 다른 종족 출신들이 구분하지도 못하는구만. 아, 근거는 내 경험이다. 다들 내가 먹음직스럽게 다가가면 눈을 빛내더란 말—. “그륵, 그륵.” 그때 고블린이 수정바위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서걱- 즉시 아이나르의 철제 장검에 의해 도륙이 났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함할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이나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왜, 왜 그러냐! 나, 난 단지 고블린이 나와서 베었을 뿐인데…….” 움찔하더니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을 하는 아이나르. “그게 문제다! 너무 쉽게 죽이지 않았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보여주마.” 이후 나는 9등급 몬스터를 찾아서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 그륵……!” 상대는 고블린 한 마리. “…….” 살기가 가득한 마물의 눈빛을 보며 무기를 쥔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는다. 꽈악. 오히려 힘이 과하게 들어가 흔들리는 검의 끝. “베, 베헬—라아아아!” 조상신의 가호를 바라며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둘렀고, 당연히 고블린이 이를 피해낸다. 그리고……. 콰직-! 서너 번을 더 휘둘러 겨우 타격에 성공하며, 기본 스펙을 이용해 한 번에 처치. 솨아아아-! 떨어진 마석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달려가 줍는 것이 포인트다. “어때, 할 수 있겠나?” “비요른… 아무리 첫 탐사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난 전투를 하는 전사들은 없다……. 나만 해도—.” 후, 얘가 자꾸 말대꾸를 하네? “그래서, 할 수 있나 없나. 그것만 말해라.” “해보겠다…….” “아, 그리고 전투 함성은 항상 꼭 외쳐라. 그래야 보는 입장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싸운다고 생각을 할 테니.” 고작 9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외치는 조상신의 이름. 그러나 아이나르는 수치심을 참고서 내 말에 따라주었다. “베, 베헬—라아…….” 의욕이 꺾인 느낌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고로 이쯤에서 기초 교육은 끝. 남은 것은 실전뿐이다. “자, 그럼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움직이는 거다. 알겠나?” “알겠다…….” 이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정동굴을 돌아다니며 9등급 마물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해나갔다. 인간 탐험가를 만나면 경계하듯 거리를 벌렸고, 배가 고프면 옛날에나 먹던 돌빵을 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강태공 모드. 의외로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는 꽤 많은 심력이 필요했다. 힘 조절을 아무리 해도 한 대 스친 것만으로도 고블린이 죽는 탓인데……. 그것도 경험이 쌓이며 익숙해졌다. 1일 차, 2일 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애석하게도 아직 입질이 오는 일은 없었다. 하나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실망할 이유는 없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1, 2일 차에는 약탈자들도 시선을 생각해 조심하겠지.’ 어느덧 3일 차가 시작되며 1층을 떠날 탐험가는 모두 위층으로 올라갔을 시기. 드르르르렁! 드르르르르르……. 아이나르를 재워두고 불침번을 서며 졸고 있자니 처음으로 입질이 왔다. 터벅, 터벅. 인기척을 감출 생각도 없이 다가오는 네 명의 탐험가. 장비도 나름 구색을 갖춘 상태였다. ‘최소 4층은 될 거 같은데…….’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터벅. 이내 포위하듯 넓게 펼쳐져 접근하던 녀석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하여간, 안 그래도 몇 명 안 되는 주제에 얼마나 싸돌아다는지. 뭐 이렇게 찾기가 어려워?” 놈들 중 하나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놀랍게도 내가 하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드디어 찾았네.” 그러게. 씨익. 드디어 찾았네. 479화 대어 (2) 전사 둘에 궁수 하나. 그리고……. ‘맨몸인 애는 이능술사인가?’ 음, 그럴 것이다. 잃을 게 많은 마법사들은 어지간하면 이런 일엔 가담을 하지 않으니까. 신관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이 조합에 이 수준으로 1층에서 약탈이라…….’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 아기 바바리안들은 과연 얼마나 무력한 기분이었을까. 나로서는 그 심정을 감히 재단할 수조차 없지만. “…….” 적어도 그 심정을 저놈들에게 전해줄 순 있겠지. “웃어?” 놈들 중 한 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뉘앙스로 보건대, 내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순진한 바바리안을 비웃는 거 같다 해야 하나? “이야! 확실히 심장이 특별할 법도 하다니까? 이놈들은 아주 겁대가리가 없어요. 겁대가리가.” 일단은 맞춰주기로 했다. 따라서……. 스윽.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느낀 사람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맨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나르를 힐끗했다. 드르르르르렁-! 드르르르르……. 얘는 언제까지 자는 척을 하려는 걸까. 툭툭. 일어나도 좋다는 의미를 담아 아이나르의 등짝을 발끝으로 치자, 그 즉시 아이나르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우웍! 뭐, 뭐냐!”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실감나는 반응. ‘…진짜 잠든 거였구나.’ 인기척을 못 느낀 건 그러려니 해도 지척에서 대화까지 나눴는데 어떻게 계속 잘 수가 있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도 그럴 게. “어? 뭐, 뭐냐! 너희들은!” 이걸 보고 어떻게 안 속아? “아아! 너, 너희들 설마……!” 물론 아아나르도 슬슬 불청객들의 정체를 깨달은 듯했기에 나는 얼른 말을 끊었다. “조심해라.” 정확히는 몸이 아니라 입조심을 하라는 뜻. “아, 알았다…….” 아이나르가 무기를 쥔 채 내 뒤로 붙었고, 나도 철제 대검을 들어 올리며 경계하듯 놈들을 쓱 훑었다. 놈들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묻지. 너희는 약탈자인가?” 내 질문에 놈들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형님,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끝내죠? 슬슬 길드도 냄새를 맡은 거 같던데.” 거, 무슨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 같네. 그래, 선빵만 쳐봐. 그때부터는 전부 내 마음대로니—. “잠깐만! 저 바바리안…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어디지? 어디서 봤지……?” 돌연 꼽추 석궁잽이 아저씨가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설마 나를 알아본 건가? 이러면 플랜 B로 가는 수밖에 없는—. “뭘 어디서 봐? 얘네들 다 비슷하게 생겼구만. 그래서 낯이 익은 거겠지.” 때마침 적절한 지원 사격이 이어졌다. “흐음, 그런 느낌이 아닌데 말이지…….” 활잽이 특유의 생존 본능은 감탄스러웠으나, 애석하게도 팀 내에서는 근접 계열들의 발언권이 더 큰 듯했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여기부터 정리하고 뜹시다.” 그렇게 정해진 방침. “크흐흐흐.” 놈들이 씨익 웃으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리고……. 툭. 뒷걸음질 치던 내 등이 벽에 닿은 순간. 좌측에 있던 놈이 재빠르게 장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적당한 기세를 담은 파공음. 다만 나는 내 목을 노려오는 장검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한데, 그게 내가 기습에 반응도 못 하는 것처럼 보여졌을까. “…….” 검사놈의 눈꼬리가 휘어진다. 뭐, 그 얼굴에 당혹감이 맺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지만. 카칵- 생채기도 내지 못한 채 피부에 가로막힌 장검. “…어어?” 그래, 저 표정을 보니 지금까지 기다린 인내의 시간들이 다 보상받는 거 같네. 스윽. 나는 몸에 달라붙은 벌레를 다루듯 검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어!” 손목 스냅을 이용해 잡아당겼다. 무기를 놓지 않는다는 기본은 되어 있는지 그대로 맥없이 딸려오는 검사놈. 꽈악- 잽싸게 다른 손을 뻗어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한 놈이 내 손을 노리고 양날 도끼를 내리쳤다. 뭔 상황인진 몰라도, 동료를 구해내야 한다는 판단을 한 모양인데……. 카칵- 그래, 짧은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게 쉽지는 않지. “아이나르.”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이나르가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도끼로 내 팔을 내리찍었던 전사놈. 콰아아아앙-! 검이 충돌하기 무섭게 폭발이 피어나며 도끼를 쥐고 있던 전사놈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수십 조각의 파편으로 비산한다. “……포, 폭검!” 이능술사가 경기를 일으키듯 외쳤다. 그게 이능술사의 유언이었다. 콰아아앙-! 아무런 반항조차 못한 채 조각이 난 이능술사. 반면 나름 올바른 판단을 내린 놈도 있었다. 타닷. 포지션 때문인지, 아니면 직감적으로 뭔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비교적 우리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석궁아재였다. “……비, 비요른 얀델!” 석궁아재는 이미 내가 누군지까지도 눈치를 챘는지, 동료 하나가 터진 즉시 등을 돌려 도망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달려서 도망가겠다니.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되겠냐고 그게. *** 두두둑. 쥐고 있던 모가지를 비틀자마자 축 늘어지는 몸. 손에 힘을 풀자 목이 꺾인 검사놈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나는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놈들과 다릅니다. 어, 어쩌다 이놈들 꼬임에 넘어갔을 뿐. 저, 저는 이런 짓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석궁아재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서 내게 삶을 구걸하고 있었다. 스윽. 아이나르는 뭘 망설이냔 듯 검을 들어 올렸고, 이에 석궁아재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저, 정보가 있습니다!” 흐음? “정보?” 나는 손을 살짝 들어 아이나르를 제지했다. 그러자 희망이 엿보였을까. 놈이 조건을 내걸었다. “……대신 말하면 살려주신다고 매, 맹세를… 해주십시오.” “맹세라…….” 웃긴 놈일세. 내가 가만히 웃고 있자, 아이나르가 분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요른! 이런 놈은 그냥 죽여버리는 게 좋다!” “그만. 진정해라.” “…….” “좋아. 맹세하지. 네가 준 정보에 값어치가 있단 생각이 든다면, 살려보내 주겠다.” 나는 쿨하게 맹세를 해주었다. 하나 막상 원하는 답변을 들은 석궁아재의 표정은 굉장히 묘했다. 이걸 믿어도 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랄까? 그래도 석궁아재의 결심은 금방 끝났다. “부, 분명 남작님께는 가치가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이 맹세를 어길 일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됐으니, 말이나 해봐라.” 이내 재촉하자 석궁아재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 마법사들입니다…….” 마법사? 마법사는 갑자기 또 왜. 얼른 핵심을 말하라는 눈으로 쏘아보자 녀석이 마저 말을 이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암시장에 의뢰를 넣고 있습니다. 값을 더 쳐줄 테니 바바리안의 심장을 가져와 달라고…….” “흐음…….” 뭐야, 그게. “그게 전부냐?” “……예?” 내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석궁쟁이의 얼굴이 굳었다.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딱히 가치가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의뢰를 넣은 마법사가 누군지에 대한 설명도 없을뿐더러, 누군지 안다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밖에서 처벌할 방도가 없으니까. “이게 전부라면—.” 그냥 이제 슬슬 뒈져라. 그 말을 하려던 차, 놈이 내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더! 더 있습니다 남작님!” “……?” “아, 암시장에… 남작님의 심장에 대한 의뢰도 걸려있습니다…….” “……뭐?” 깜짝 놀란 나는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해당 의뢰의 보수는 무려 20억 스톤. 의뢰인은 불명이라던가? “암시장이라…….” 내가 고민에 잠기자 녀석이 눈치를 보며 어필하기 시작했다. “……저… 어떠십니까? 이, 이 정도면 남작님께 도움이 됐을는지요……?” 아, 그거? 확실히 쓸모가 있는 얘기였다. 그쪽에는 커넥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정보였으니까.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면 조사를 해볼 계획이다. 하지만……. “아니, 전혀. 그럼 이제 슬슬 뒈져라.” 내가 아니라는데 네가 어쩔 건데? “이, 이건 약속이랑 다르지—.” 뭐래 이 새끼가. 꾸욱. 놈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 짓누르자 석궁아재가 괴롭다는 듯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딱히 동정심은 피어나지 않았다. 맹세를 어겼다는 죄책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속은 사람이랑 하는 거고.” 그 말을 끝으로 발에 힘을 주었다. 콰직- 이내 마지막 한 놈까지 정리를 끝낸 후엔 놈들의 장비와 배낭을 챙겨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바바리안 공금에 넣어 바바리안 새싹들을 위해 사용하면 딱일 듯했—. 푸욱. ……응? 옆에서 섬찟한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니 대검을 역수로 쥐고서 시체를 내리찍는 아이나르가 보였다. “뭐 하나, 아이나르……?” “보면 모르나? 이놈들 심장을 뜯어내고 있다.” “……?”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우리 심장을 원하면 자기들도 심장을 걸어야 한다는 걸.” 음……. 일벌백계를 말하고 싶은 건가? “금방 끝낼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리 말한 아이나르는 비교적 멀쩡한 두 구의 시체에서 심장을 전부 다 도려내더니, 마치 예술품을 전시하듯 바위 위에 시신들을 펼쳐놨다. “자, 끝났군. 어서 가자. 비요른. 다른 놈들도 더 죽여아 할 거 아니냐! 이제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만 보면 얘도 참 무섭다니까. *** 4일 차, 5일 차, 6일 차……. 첫 낚시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잠들 시간조차 아껴가며 수정동굴을 하염없이 배회하던 나날들.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낚시는 더욱 정교해졌다. 고블린 피를 몸 위에 덕지덕지 바르며 디테일을 추가했고, 그동안 모은 9등급 마석도 주머니에 담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여기에 상처도 가득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정도 상처는 1분도 되지 않아 재생되니까. 아무튼, 그래도 다른 노력이 유효했는지 5일 차가 끝나기 전에 비슷한 느낌의 약탈자 무리 하나를 더 찾아 죽일 수 있었다. 참고로 이놈들은 이전 놈들보다 신중해서 우리를 몰래 따라다니며 관찰을 해댔는데……. “제기랄.” 좋은 소식이라 하기에는 뭐했다. 이놈들 배낭에서 싱싱한 심장 네 개가 발견이 됐거든. 이미 만나기 전에 한 탕을 끝낸 거다. “……아이나르, 진정해라. 돌아가는 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손을 써볼 참이니.” “…….” “그러니까 이만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알겠다…….” 이후 아이나르를 진정시킨 뒤, 우리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중심부로 향했다. “아저씨!” 저 멀리서부터 내 기척을 느꼈는지, 마중을 나온 에르웬. 일단 에르웬을 따라 기념비가 있는 공동으로 이동한 뒤, 음성 제어 마법부터 켜고서 대화를 나누었다. “에밀리, 별다른 일은 없었나?” “없었을 리가. 네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우려했던 일이라면…….” “근처에 우리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떡하죠? 만약 알미너스 백작이 보낸 자들이면 이대로 계층군주를 소환하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조언의 말을 해오는 베르실. 다만, 나는 씨익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예상 범주 내의 일이니까.” “……예상하셨다고요?” 암, 대놓고 어디서 사냥하겠다고 길드에 토벌 신청까지 했었잖아? 이 정도의 견제는 예측 못 하는 게 이상하다. ‘게다가 ‘우려하던 일’도 아니고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기대하던 일’에 가깝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베르실을 보며 나는 딱 잘라 답했다. “계층군주는 예정대로 소환한다.”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480화 대어 (3)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결과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과정을 중시하느냐. 굳이 따지자면 나는 전자에 속한다. 과정이 어떻더라도 결과만 좋다면 오케이. 그런 의미에서 현재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결국 백작이 고소만 취하하면 되는 거니까.’ 쉽게 말해, 저놈들이 우리 레이드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알미너스 백작가의 사람이라는 증거까지 얻어낼 수 있다면 목표는 달성된다. 그도 그럴 게, 길드에서 정식으로 승인한 토벌을 고의적으로 방해했다? 이거면 백작에게 고소 취하를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돈을 뜯어내는 것도 가능할 터. ‘레이드 성공 확률도 낮은 편이었는데 잘 됐어.’ 내가 정상적인 레이드보다 대어가 미끼를 무는 경우를 내심 더 기대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내 공략법이면 거의 생존은 보장이 되지만, 그 대신 마지막에 화력이 부족해서 놓치는 경우가 꽤 되니까. ‘사실 에르웬이 이번에 리아키스의 정수를 먹은 게 아니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겠지.’ 아무튼, 이러한 것들을 모두 고려해서 내가 점친 레이드의 성공 확률은 약 2할. 실패 가능성이 현저히 높은 만큼, 더 높은 확률의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은 반길 일이다. 계층군주야 언제든 사냥할 수 있지만, 알미너스 백작의 소송 건은 근시일 내에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퀘스트니까. 「어둠 속 무언가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오케이, 슬슬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한 걸 보니 소환 조건은 충족된 거 같고. “다들 너무 긴장을 풀고 있지 마라. 지금부터는 언제든 놈이 소환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당장에라도 싸울 수 있도록 진형을 유지한 채 시간을 보냈다. 간단한 이유다. 일단 소환도 하고, 정말 토벌에 성공할 것처럼 보여줘야 저쪽에서도 후다닥 뛰쳐나올 거 아니야. ‘우리가 바디캠을 달고 있는 건 저쪽도 알고 있을 테니, 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려 하겠지.’ “베르실, 기록용 수정구는?” “걱정 마세요. 잘 작동되고 있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그렇다면 믿고 있지.” 이후 있을 상황들에 대해서 한 번 더 브리핑을 하고 있자니, 주변에 변화가 찾아왔다. 「어둠 속 무언가가 당신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품습니다.」 그래, 이제 확률이 또 늘어났구나. “비요른… 뭔가 더 추워진 거 같지 않나?”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그 변화를 눈치챈 것은 놀랍게도 아이나르였다. 하긴 지진도 동물들이 가장 먼저 알아챈다고 하니까. “슬슬 준비해라. 이제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 내 경고가 떨어지자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드드. 동굴 외벽이 크게 흔들리며 빛을 잃은 수정들이 강렬한 적색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특수 조건 - 다섯 명의 믿음이 충족됩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순례자들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놈이 나타난 것이다. ***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 3일 차 이후부터 5인 이상이 한곳에 모여있을 시 확률적으로 소환되는 1층의 계층군주. 이 녀석의 등장 이펙트는 간단하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리고. 솨아아아아아-! 어둡던 필드는 붉게 물들며. 「기어오르는 공포.」 「캐릭터의 결속 마법이 해제됩니다.」 소환 조건을 충족한 자의 결속 마법이 해제된다. 그리고……. 「캐릭터의 시야가 반경 2m로 제한됩니다.」 시야 범위가 좁혀진 상태에서 놈은 천천히 다가온다. “…저쪽이군.” 어두운 적색 조명의 통로. 츠억- 우리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얼른 진형을 틀었다. 츠억. 평평한 단면에 무언가가 붙었다가 떨어지는 듯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츠억- 고작 2m로 제한된 시야. 이내 끄트머리에서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욱.” 베르실이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마법사답게 비위가 좋지 않던 모양. “듣기는 했지만… 정말 끔찍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시체골렘 때도 느꼈지만, 아무리 잘 그려낸 일러스트라도 실제에는 못 미칠 때가 많다. 지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저놈처럼. 츠억- 신장은 약 1m 60.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에 비하면 아주 왜소한 체격을 지닌 드레드피어는 인간형 몬스터에 속한다. 츠억- 팔 두짝에 다리도 두짝. 이족 보행을 하며 뼈로 만들어진 대검을 쓴다. 그러나 인간형이라고 해서, 멀쩡한 몰골이라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좀비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인간형 몬스터인 거니까.’ 드레드피어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기본적인 사람의 구조를 했다는 것만 알아볼 수 있을 뿐, 정확한 형체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엄지손가락만 한 구더기들에 뒤덮여 있는 탓이다. 츠억- 그로 인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어나는 역겨운 발소리. 툭. 밟고 지나온 발의 모양을 따라 바닥에 떨어진 구더기들이 꿈틀거린다. “……탐험가들이 기피하는 이유를 알겠군.” “후우…….” 베르실처럼 헛구역질을 하진 않았지만, 에르웬과 아멜리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이라 해야 하나? 결국 이 자리에서 유쾌한 것은 오직 아이나르뿐. “오오! 저놈이냐? 생각보다 약해 보이는데?” 그래, 이런 캐릭터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 “하하핫! 다들 왜 그러고 있나! 인상 펴라! 모습은 저래도 냄새는 안 나지 않나!” 드레드피어의 몰골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시체골렘 때의 역한 냄새를 떠올리니 조금 기분이 괜찮아졌다. 역시 사람의 원동력은 더 큰 불행인가? 알 수 없지만. “잡담은 그만.” 이제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츠억- 이내 드레드피어가 시야 반경의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덩치는 내가 내려봐야 할 정도로 작지만,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따라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그냥 먼저 달려들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직접 부딪치는 것뿐. 막상 해보면 벌거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여럿 존재한다. [키야아아아아악-!] 선 대시를 박기 무섭게 놈이 구더기가 들끓는 입을 벌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아니, 구더기 검이라고 해야 하나? 콰앙-! 저 작은 몸뚱이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믿기 어려운 충격. 물리 피해량만 보면 리아키스에 버금갔다. 하나 당장 신경 쓸 부분은 따로 있다. 투두둑, 투둑- 빗자루를 털듯 우수수 떨어져 내 몸에 달라붙는 구더기들. ‘니미럴, 게임에서는 그냥 오오라 스킬이었는데.’ 이딴 게 무슨 오오라야? 「캐릭터가 [갉아먹는 공포]에 감염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정신수치가 감소합니다.」 「캐릭터가 입은 피해에 비례해 드레드피어의 분노 수치가 상승합니다.」 구더기가 맨살 위에서 기어오르고. 피부는 가렵다 못해 따끔하다. 하긴, 이건 물리 내성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베르실 고울랜드가 5등급 태양 마법 [신성 불꽃]을 시전했습니다.」 미리 오더를 했던 대로 베르실이 얼른 내게 버프를 걸어줬다. 1페이즈의 핵심 마법이었다. 예전에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1층 계층군주 공략법을 팔았을 때도 이걸 쓰라고 추천했었다. 뭐, 아예 대체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화르륵-! 이게 제일 구하기도 쉽고 효과도 좋거든. 원래 기생충이 걱정될 땐 잘 익혀먹는 거잖아? 「[갉아먹는 공포]가 해제됩니다.」 오케이, 그럼 오오라 문제는 끝났고. 콰앙-! 드레드피어의 평타들을 받아내며 패턴에 익숙해지고 있자니, 동굴 외벽을 타고서 사람 머리통만 한 구더기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1페이즈의 대표적인 토큰형 몬스터. 물론 내가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콰아아앙-! 잡몹들은 광역 전투에 특화된 아이나르와 베르실이 전담해서 처치하기로 했으니까.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인력은 두 명. 다만 나는 두 사람에게 대기 명령을 내려놨다. “에밀리, 놈들은?”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계층군주만이 아니니까. 일단은 계속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멀찍이 거리를 두고서 상황을 살피는 듯하다.” 후, 1페이즈는 지켜보겠다 이거구나. 하긴, 걔네 입장에서 당연하긴 하네. 아직 공략이 성공할지 못할지도 확실치 않은 데다가……. 방해를 하려면 최적기는 따로 있을 테니.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르웬, 시간은?” 우선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19시 57분이요.” 1층이 폐쇄되기까지 약 4시간이 남은 시기. ‘거, 좀만 더 늦게 나왔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슬슬 2페이즈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보아하니 저놈들이 1페이즈에 재를 뿌리러 올 거 같지 않을뿐더러…… 드레드피어 공략은 시간 배분이 생명이다. 이 새끼는 각 페이즈마다 버프를 받거든. ‘1, 2페이즈는 소환되고서 5분마다.’ 할 수만 있다면, 첫 버프를 보지 않고 넘어가는 게 베스트다. 각 페이즈의 버프들은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중첩이 되니까. “에밀리, 너는 계속 놈들을 주시해라. 에르웬, 너는 지금부터 시작하고.” 따라서 본격적으로 공략을 시작했다. 비록 딜러는 에르웬 하나지만, 공대장으로서 부족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번에 계층정수까지 손에 넣은 에르웬은 이제 어나더 레벨이 되었으니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내 허락이 떨어진 즉시, 공략 계획대로 에르웬이 필살기를 꺼냈다. 그리고……. 콰앙, 콰콰쾅, 콰아아아아앙-! 정확히 15초가 걸렸다. 드레드피어의 첫 번째 페이즈가 끝나고 다음 패턴이 시작되기까지.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원망의 감정이 깨어납니다.」 에르웬이 쏟아낸 화력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공동. 투두둑, 툭- 마치 껍질을 벗듯, 몸 위에 가득하던 구더기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바닥에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놈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들끓던 구더기로 감춰져 있던 그 속에는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며 놈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자, 그럼 일단 첫 페이즈는 끝났고…….’ 나는 빠르게 중간 점검을 끝냈다. 저번에 풀 마나에서 30초를 소환할 수 있었으니, 지금 MP 중 절반 정도를 쓴 건가? “에르웬, 너는 이제 쉬고 있어라. 가능하면 바깥 놈들을 감시해주고.” MP 회복을 위해 에르웬을 전투에서 뺐다. 그리고……. “에밀리.” 아멜리아와 역할을 교대시킨 즉시. 뚜두둑, 뚜둑. 바닥에 널려 있던 구더기들의 사체가 알처럼 깨졌다. 또한, 그와 동시에. [끼야아아아아악-!!] [끼히히히, 끼히히히히히!!] 구더기에서 튀어나온 검은 안개들이 기괴한 비명 소리와 웃음 소리를 뿜어내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나르가 당황해 소리쳤다. “으, 으억! 비요른! 이, 이게 뭐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얘 벌레는 안 무서워해도 귀신은 무서워했지. 후우우웅-! 후우웅-! 패닉 상태에 빠진 아이나르가 허공에 연신 대검을 휘두른다. 하나 대검은 안개를 통과해 지나칠 뿐, 대상에겐 어떠한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그야 저 안개는 몬스터 판정이 아니니까. 「캐릭터가 [스며드는 공포]에 노출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정신수치가 감소합니다.」 「명중률이 대폭 하락하며, 일정 확률로 근처의 아군을 공격합니다.」 두 번째 페이즈의 오오라 효과. “에르웬, 놈들은?” “……아직요. 계속 그 자리에 있어요.” 흐음, 1페이즈가 끝난 건 저쪽에서도 알아챘을 텐데 아직도라……. 역시 2페이즈도 그냥 넘길 생각—. [키야아아아아악-!] 새끼가, 생각하고 있는데.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1페이즈 때와 다르게 물리 내성을 뻥튀기 시키며 검을 받아냈다. 콰앙-! 간단한 이유다. 이놈의 물리 피해량은 1페이즈에 비해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맞아야 할 건 이제 이것만이 아니거든. 바로 이렇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심연의 힘]을 시전했습니다.」 「[스며드는 공포]에 의해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의 공격이 빗나갑니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듯 궤도가 틀어지며 나에게 날아드는 아멜리아의 단검. 서걱-! 아오, 진짜. 저 빌어먹을 오오라. “……괜찮나?” “괜찮으니 난 신경 쓰지 마라.” 2페이즈의 경우에는 탱커의 역할이 중요하다. 원거리든 근거리 공격이든, 오오라가 터지면 보스몹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타깃이니까. 때문에 원래는 탱커 여럿을 두고서, 신관으로 치유를 하며 빠르게 피를 깎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베헬—라아아아아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도 씹어야 하는 법. “얀델, 이럴 바엔 오러를 쓰지 않는 편이—.” 뭐래 얘는. “괜찮으니까 계속해라.” 아멜리아의 우려는 일축하며 드레드피어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미스가 뜰 때마다 동료의 무기에 처맞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언제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내가 아픈 만큼 저놈도 아프다 생각하면 이 세상 천지에 버티지 못할 게 없다. 「[스며드는 공포]에 의해 아이나르 프넬린의 공격이 빗나갑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역병 확산]을 시전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달라붙어 싸우다가도 스킬을 쓸 때가 되면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차분하게 공략을 진행해 가던 때였다. 「원망의 감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두 번째 페이즈의 버프가 들어갔다. 「모든 오오라 효과가 영구적으로 강화됩니다.」 후, 벌써 5분이 또 지난 건가? 2페이즈의 오오라 강화 버프는 최대한 덜 받는 편이 좋은데.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이능수치가 감소합니다.」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진다. 드레드피어의 까다로운 점이다. 이놈은 장기전으로 가면 답이 없는 괴물이 된다. 하지만……. ‘그 대신 유리몸이지.’ 아멜리아와 아이나르가 탱커를 신경 쓰지 않고 전투 내내 칼을 휘둘러댄 결과. 「원망의 감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육체수치가 감소합니다.」 「원망의 감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감소된 수치가 50% 증가합니다. 」 「원망의 감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감소된 수치에 비례해 드레드피어의 분노 수치가 상승합니다.」 네 번째 버프가 터졌을 때에는 다음 페이즈로 넘어갈 수 있었다.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후, 어떻게든 세 번째 버프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이로써 공략 성공 가능성은 좀 더 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서둘러 미련의 감정을 털어냈다. 뭐, 어차피 메인은 레이드가 아니니까. [키야아아아아악-!!!] 드레드피어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 순간. 솨아아아아아-! 정신 사납게 주변을 날아다니며 꺅꺅거리던 검은 안개들이 놈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증오의 감정이 깨어납니다.」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됨과 동시에. “아저씨! 놈들이 움직였어요!” 마침내 미끼를 문 물고기가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481화 대어 (4) 멀리서 레이드 과정을 변태처럼 관음하고 있는 놈들의 숫자는 여섯. 이놈들은 한 명씩 나뉘어 기념비로 이어지는 통로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래, 이제 시작이구나.’ 지금부터 목표는 단 하나다. 놈들이 훼방을 놓으려 한 증거를 찾고. 더 나아가 놈들의 배후가 알미너스 백작이라는 증거까지 얻어내는 것. 솨아아아아아.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에르웬의 목소리를 끝으로 새하얀 연기가 동굴을 가득 메운다. 「캐릭터가 [배신의 장막]의 범위 내에 있습니다.」 세 번째 페이즈의 오오라. 효과는 간단하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정신수치가 감소합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이능수치가 감소합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육체수치가 감소합니다.」 「감소된 수치가 50% 증가합니다. 」 「감소된 수치에 비례해 드레드피어의 분노 수치가 상승합니다.」 이전 페이즈에서 강화된 보너스들을 기본으로 둔 채, 새로운 문구 몇 개가 더 붙는다. 「캐릭터가 은신 상태에 돌입합니다.」 오오라 내에 있는 모든 캐릭터들은 은신 상태가 되며 서로를 볼 수 없으며. 「모든 소통이 단절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차단. 그리고……. 「몬스터가 아닌 대상을 공격 시 피해량이 5배 증가하며, 모든 내성 수치를 무시합니다.」 오인 공격 시의 리스크까지. [키야아아아악-!] 이 오오라 하나 때문에 3페이즈에서는 정상적인 팀 플레이가 불가능해진다. 그야 서로 안 보이는 상태에서 레이드를 어떻게 하겠는가? 공격 스킬을 날렸다가 팀원을 맞히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따라서……. 타닷. 3페이즈의 공략법은 몹시 심플해진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어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함성을 내지르며 드레드피어를 향해 달려든다. 우리만 서로 보이지 않을 뿐, 이놈까지 은신 상태에 접어든 건 아니니까. 콰아아앙-! 탱커들이 미리 정해둔 위치에서 홀딩을 한 다음, 신관들이 무작정 광역 힐을 쏟아부으며 이 오오라 효과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것. 원래는 이게 정석적인 공략법이다. 뭐, 우리 팀엔 신관도 없고 탱커도 나 하나지만. ‘신관이 없이도 한 사람분을 할 수 있다는 게 방패바바의 최대 장점이니까.’ 독박탱이 가능하다면 혼자서도 넘길 수 있는 패턴인 셈. 게다가 의외로 독박탱에는 장점도 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면죄부]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무작위 위치로 이동합니다.」 얘가 야바위를 돌려도 혼선 없이 얼른 달려가서 다시 홀딩을 하면 되거든. 아무래도 탱커들 사이에서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인데……. ‘나머지 애들은 잘 해주고 있겠지……?’ 동료들이 잘 해줬을 거라 믿는 한편으로도, 훼방꾼들의 개입을 경계하며 드레드피어를 전담 마크했다. 그도 그럴 게, 3페이즈의 훼방꾼이 뭘 하겠는가? 안 보이는 틈을 타서 트롤짓을 할 게 분명하며, 그 타깃은 가장 위치가 명확한 내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나름 잘 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지만 방심하는 건 옳지 않다. 어차피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터. 고로 드레드피어를 상대하는 일에 집중했다. 콰아아앙-! 이론상 독박탱이 가능하다는 거지, 그 과정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최약체 취급이긴 해도 명색이 계층군주 아닌가. 그것도 흔치 않은 성장형 타입의. 「캐릭터의 정신수치 감소량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상태 이상 ‘공포’가 부여됩니다.」 오오라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지며 첫 번째 디버프가 들어왔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천적을 만난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며 극도의 스트레스가 뇌를 잠식한다. 그래도 에르웬을 빼면 정신 수치가 나름 높은 편이라, 이성을 잃고 도망치거나 하는 일까지는 안 생기겠지만. ‘에르웬은… 괜찮으려나?’ 조금 우려가 됐지만, 당장은 내 걱정부터 하는 게 옳을 터. 내게 있어서 문제는 두 번째 디버프였다. 「캐릭터의 이능수치 감소량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상태 이상 ‘무기력증’이 부여됩니다.」 수천 개에 달하는 상태 이상 중 하나인 무기력증. 이 디버프에 걸리면 MP 재생이 불가능해지며, 시전한 스킬이 도중에 끊기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는 지속 중인 스킬에도 적용된다. 「[거대화]가 종료됩니다.」 「[철옹성]이 종료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끊긴 스킬들은 다시 사용하기까지 쿨타임도 생겨나기에, 몹시 까다로운 상태 이상 중 하나였다. 까다롭긴 세 번째도 마찬가지겠지만. 「캐릭터의 육체수치 감소량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상태 이상 ‘탈진’이 부여됩니다.」 육체 카테고리에 속하는 모든 스탯의 30% 감소. 스테미나가 최소치로 고정되며, 모든 동작을 수행할 때 기력 대신 MP를 소모하게 된다. 콰아아아앙-! 디버프가 중첩될수록 올라가는 전투 난이도. 지이이익. 후, 이제는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네. 심지어 화룡점정은 아직 남아 있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분노 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드레드피어가 첫 페이즈부터 착실히 쌓고 있던 분노 게이지.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모든 피해량이 2배 증가합니다.」 안 그래도 점점 버거워지던 놈의 공격이 이제는 살이 떨릴 정도로 위협적으로 변했다. 물론 그래도 어찌어찌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공포야 정신 수치 덕에 행동 제약까지는 가지 않았고, 스킬이야 쿨타임을 좀 돌리고서 다시 쓰면 그만. 게다가 내 경우엔 막힌 MP의 수급도 가능했다. 「캐릭터가 [영혼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그래, 이 스펙이면 독박탱이 가능할 줄 알았지. [키야아아아아악-!] 끈질기게 달라붙는 내가 짜증이 나는지 소리를 빽빽 내지르는 드레드피어. 그렇게 열심히 놈을 홀딩하고 있던 때였다. 탓.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놈을 상대하면서도 주변을 경계하지 않았다면 결코 잡아내지 못했을 작은 인기척. 늘 그랬듯, 머리보다 몸의 판단이 빨랐다. 타닷. 드레드피어고 뭐고 일단 옆으로 몸을 틀은 순간. 푸욱-! 후끈한 감각이 등을 타고서 전해진다. 고작 그것뿐이었지만, 탱커로 구르며 수도 없이 쌓인 경험이 말해주었다. ‘다행히 장기는 안 다쳤네.’ 사실상 다쳤다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경상. 「캐릭터가 ‘고블린 마비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육체 수치가 1,000 이상입니다.」 「독 내성 수치가 100 이상입니다.」 「중독 효과가 99% 감소합니다.」 다만, 피해가 적다고 응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후우웅-! 고로, 즉시 허공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물론 오오라 효과 때문에 신음 소리 같은 건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퍼억-! 나름 만족할 만한 손맛이 봉을 타고 전해진 그 순간. 「신뢰의 빛이 내면에 깃든 공포를 몰아냅니다.」 「일시적으로 [배신의 장막]이 해제됩니다.」 세찬 빛이 번뜩이며 어두운 동굴을 밝게 비추었다. “……으윽.”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 3페이즈 공략의 핵심은 탱커와 신관에 있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배신의 장막]이 풀리며 딜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이 오니까. 바로 이렇게.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보호기제]를 시전했습니다.」 [배신의 장막]이 해제됨과 동시에 두꺼운 껍질을 돋아내며 그 안에 숨어든 드레드피어. 일종의 그로기 상태로, 원래는 이때 모든 딜을 퍼붓는 것이 정석적인 공략법이다. 하지만……. “…….” [보호기제]가 터진 즉시 나는 뒤돌아 장내의 상황을 살폈다. 에르웬, 아멜리아, 베르실, 아이나르. 우선 동료들은 모두 멀쩡한 상태였다. 그리고……. ‘셋, 둘씩인가…….’ 에르웬이 맡은 세 개의 통로에 끔찍한 몰골의 시체가 셋. 아멜리아가 맡은 두 개의 통로엔 생포된 훼방꾼 하나와 시체가 하나 자리했다. 쩝, 되도록 생포하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건만. ‘……에르웬은 전부 죽여 버렸네.’ 시체를 보아하니 생포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걸 지금 당장 문책하진 않기로 했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는 데다가……. “…….” 딱 봐도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 않았거든. 이성이 사라진 듯 허공을 응시하는 초점. ‘……아마 ‘공포’ 때문이겠지.’ 그래도 남은 동료들은 비교적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한 명을 놓친 건 너겠군. 바바리안.” 나처럼 사태 파악을 순식간에 끝내고 아이나르를 쏘아보는 아멜리아. “…미, 미안하다! 최대한 살려서 잡으려다 보니 놓치고 말았다…….” 기념비와 이어진 세 개의 통로 중 하나를 담당한 아이나르가 솔직하게 반성의 말을 해왔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참 편한 종족이군. 미안하다고 말하면 전부 끝인가?”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책. “……어?” 모든 잘못을 사과 한마디로 끝내는 바바리안의 삶을 살던 아이나르가 당황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얘가 이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는데……. “바바리안, 네 실수 때문에 얀델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걸 알고나 있—.” “그만!” 나는 얼른 개입하며 아멜리아를 진정시켰다. “얘도 알아 들었을 거다. 그러니 그만해라.” “…이 얘기는 이후에 다시 하도록 하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멜리아도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잡은 물고기를 확인할 차례. “베르실. 너는 에르웬을 좀 봐줘라.” “아, 네……!” 우선 베르실에게 에르웬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한 뒤에 나는 마지막으로 상황을 최종 점검했다. 생포한 훼방꾼의 숫자는 총 두 명이었다. “…….” 우선 아멜리아가 포획한 녀석 하나.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 안대에 재갈까지 물린 걸 보면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일처리가 완벽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으윽.” 아이나르가 놓쳤다가 나를 기습했던 바로 그놈. 망치에 턱주가리를 맞았는지,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의 하관이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있다. 어쩐지 손맛이 좋더라니, “…으, 어, 어…….”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섰다. 거, 어디로 도망가려고? 터벅, 터벅, 터벅. 단 세 걸음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공포에 질린 놈에게 정확히 네 번 망치를 내리쳤다. 그야 입을 여는 데 팔다리는 필요가 없잖아?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오케이, 그러면 심문은 아멜리아가 하기로 했으니 믿고 맡기면 될 테고……. 저기 하나는 제압이 다 됐으니 굳이 팔다리를 짓뭉갤 필요는 없겠지? 일단 필요한 조치는 모두 끝났다. “에밀리, 그럼 어서 두 놈 다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라.” “……정말 이대로 공략을 진행하려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않나?” 공포의 군주에게서는 도주가 불가능하다. 한데 생포한 놈들이 반경 내에 있으면 특수 조건이 발동하지 않기에 더욱 힘들어질 테고. 결국 이게 최선이다. ‘뭐… 레이드가 성공할 확률은 낮겠지만.’ 확률은 한 5%쯤 되려나? 음, 대충 그쯤 될 것이다. 2페이즈의 네 번째 버프도 받은 데다가, 이번 페이즈에서는 첫 그로기 상태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스킵했으니. ‘사실상 실패한 레이드라고 봐야겠지.’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확보가 된 상황이기에 큰 걱정은 없다. 이래 놓고도 잡으면 대박이고, 설령 못 잡아도 아멜리아가 심문에 성공하면 목표는 달성된다. 따라서……. “얀델, 조심해라.” “그래, 나가서 보자.” [배신의 장막]이 다시 켜지기 전에 아멜리아를 전장에서 이탈시켰고, 머지않아 동굴을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내면에 깃든 공포가 빛을 몰아냅니다.」 「[배신의 장막]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레이드를 이어갈 시간이었다. *** 다시 공략이 시작된 기념비 공동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느 통로. 화르륵. 횃불을 지지대에 세워 고정한 아멜리아는 본격적으로 심문 작업에 들어갔다. 천천히 하얀 장갑을 끼고. 미리 챙겨온 도구들을 사용하기 쉽게 정리한다. 그리고 심문 대상이 갖고 있던 소지품들을 전부 확인하며 심문에 도움이 될 게 있을지 점검. “…….” “…….” 한때 이러한 일들이 지긋지긋했으나, 어째선지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인 일이지.’ 그 녀석은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할 테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오.” 팔다리가 짓뭉개진 사내가 결의의 찬 눈으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대화가 통한다는 걸 심문 대상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을뿐더러……. ‘…겁을 잔뜩 집어먹었군.’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보통 저런 놈이 제일 먼저 입을 연다는 것을. “…….” 실제로 다른 한 명은 심문이 시작되고서도 한참 동안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반면, 다른 한 명은 눈알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다만 그녀는 그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심문’만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주, 겨라.” 마침내 사내가 그러한 말을 내뱉었다. 한계점에 임박해 해방되고 싶다는 신호. 아멜리아는 그때부터 입을 열어 하나씩 질문을 해갔다. 결혼은 했는지. 자식은 있는지. 미궁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본인의 정체와 연관되지 않을 사소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사내도 하나둘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답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대답을 할 땐, 고통이 없으니까. 아멜리아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질문의 수위를 올려갔고, 그렇게 어느덧 ‘이름’을 물을 차례가 됐을 때였다. “그럼 이름은… 이름은 뭐지?” “델베인…….” 답변을 들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한스, 델베인…….” 한스? ‘잠깐만, 한스라면 분명…….’ 그 녀석이 경기를 일으키던 그 이름이다. 이 이름을 가진 놈들은 역병이나 다름없으니 마주친 그 자리에서 죽여 없애야 한다던가? 징크스나 미신은 신뢰하지 않는 그녀의 눈에는 그 모습도 나름 귀엽게 비쳤다. 하지만……. ‘…………괜찮겠지?’ 한편으로는 왠지 불길한 마음이 피어났다. 482화 대어 (5) [배신의 장막]이 재활성화되며 동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지지직- 드레드피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며, 놈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밀랍 같은 것에 뒤덮인 듯한 피부. 이목구비랄 게 없는 얼굴에 비례를 무시한 채 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는 커다란 눈 하나. 그리고 양손으로 쥐고 있는 뼈 대검. 겉모습은 [보호기제]를 사용하기 전과 같았으나, 그것은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다. 「증오의 감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로기 상태가 끝남과 동시에 추가된 버프. 참고로 여기부터는 운빨이 중요한데……. 「뼈에 새겨진 기억이 진해집니다.」 후, 이 정도면 평타인가? 스르르르륵. 드레드피어가 쥐고 있던 대검에 날카로운 돌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3페이즈에 존재하는 다섯 종류 버프 중 무기가 걸린 것인데……. ‘앞으로는 진짜 조심해야겠네.’ 대미지 강화 버프인 만큼, 나도 앞으로의 전투 전략을 조금 손봤다. 콰아아앙-! 방패를 이용해 방어에 집중하는 것은 동일하나, 미처 받아내지 못한 일격을 몸으로 때우는 일은 철저하게 삼간다. 무기 버프는 나라도 좀 까다로우니까. 바로 이렇게. 「날카로운 가시가 캐릭터의 몸에 파고듭니다.」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영혼력을 강탈합니다.」 버프를 받은 검에는 MP 흡수 옵션이 붙으며, 이 옵션은 피해를 받은 횟수에 비례해 중첩된다. 다만 여기서 주의 할 점은 하나. 「강탈한 MP에 비례해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증오 수치가 상승합니다.」 무기든, 갑옷이든, 눈깔이든. 3페이즈의 버프들은 모두 ‘증오’ 수치 증가에 영향을 주며, 이 수치가 맥시멈에 달할 시 아주 골치 아픈 추가 버프가 들어간다. ‘증오가 터지면 레이드는 그냥 실패했다고 봐야겠지.’ 사실상 그 수준으로 가면 레이드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 따라서……. 후우웅-! 막기 어려울 때는 뒤로 물러나서 회피. 타닷. 다만 마냥 뒤로 물러나기보다는 지형을 넓게 쓴다는 느낌으로 놈 주위를 뺑뺑 돌며 중심부에 홀딩한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내면의 거울]을 시전했습니다.」 「하락한 정신 수치에 비례해 고정 피해를 입습니다.」 회피 불가 즉발형 스킬은 피를 토하면서 그냥 참아내고.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죽은 자의 기억]을 시전했습니다.」 비눗방울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폭탄들은 마법사 베르실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소환 마법 [생명의 인형]을 시전했습니다.」 곳곳에 더미를 깔아두면 일점사되는 건 막을 수 있거든. [키야아아아아악-!] 그렇게 열심히 공략법을 지켜가며 싸워가기를 얼마나 이어갔을까. ‘…슬슬 된 거 같은데.’ 이제 시간이 됐지 않나? 그런 생각이 막 머릿속에 피어난 찰나였다. 「신뢰의 빛이 내면에 깃든 공포를 몰아냅니다.」 「일시적으로 [배신의 장막]이 해제됩니다.」 새하얀 빛이 어두운 동굴 내부를 환하게 비추자, 드레드피어가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내지르며 아까처럼 껍질을 뒤집어썼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보호기제]를 시전했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저 껍질을 벗겨내지 못하면, 놈은 새로운 버프를 또 받을 테고 이후 전투는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다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에르웬.” 사실상 지금 얘 수준이면 거의 졸업 예비반쯤 됐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마지막 페이즈로 넘어갈 시간이다. ***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 서른 명이서 열심히 공략을 해도 별다른 보상을 주지 않는지라, 보통 클랜의 등급 심사를 위해서나 토벌을 하러가는 비운의 계층군주. 그러나 이놈에게는 한 가지 히든피스가 있다. 뭐, 사실 히든피스라고 하기에는 오래된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에서도 굉장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다섯 명이서 토벌에 성공할 시 엄청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물론 해당 정보엔 두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우선 인원을 다섯 명으로 딱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다섯 명 이하기만 하면 된다. ‘보상도 사실 그렇게 엄청난 편은 아니고.’ 그냥 정상적인 보상을 받는 것에 가깝다. 하나 소문이 그렇게 부풀려진 것은 역시 이게 가장 큰 이유겠지. [만약 성공한다면 최후의 대현자 이후 열 번째로 있는 위업이 되겠군요.] 5인 클리어에 성공한 팀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성공한 이들은 모두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심연 수색자 리메닌. 요정왕 아르멜라. 해룡 살해자 뮬마린. 위대한 탐험가로 불리는 선대 탐험가들이 가진 단 하나의 공통점. 이는 후대 탐험가들의 도전 욕구를 크게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수많은 이들이 그들 뒤를 따라 공포의 군주를 소환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실 그게 당연하지. 첫 트라이에 깰 수 있는 보스가 몇 개나 된다고.’ 나 역시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몇 번이고 도전을 했기에 공략법을 알아낼 수 있었을 뿐. 만약 맨땅에 부딪쳤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실과 게임은 다르니까. 시도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단 한 번. 실패하면 그대로 게임 오버이며, 실패한 기억을 통해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오히려 앞에 사람들이 어떻게 깼는지가 궁금할 정도인데.’ 그들은 과연 어떤 공략법을 썼을까. 나와 똑같은 방식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압도적인 스펙으로 찍어눌렀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토벌에 성공한 열 팀 모두 공략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으니까. ‘이것도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긴 한데…….’ 고위 정보를 외부의 공개하지 않고 독점하는 건 탐험가들의 습성이다. 하나 6층 지도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고, 미지 그 자체던 10층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정보를 풀며 위인 취급 받은 양반들이 왜 이건 비밀로 했는지를 모르겠다. ‘……뭐, 지금 신경 쓸 건 아니겠지.’ 음……. 아닌가? 갑자기 뭔가 기분이 이상한-. 콰콰콰콰쾅-! 뭐라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던 때.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보호기제]가 해제되었습니다.」 두꺼운 껍질이 산산조각 나며 흑색의 안개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단 오더부터 내렸다. “그만.” 여기서 더 때려봤자 MP 낭비니까. MP는 최대한 아껴야지. “잘했다. 힘들었을 텐데.” “네…….” “다들 모여라!” 이내 나는 동료들을 내 뒤로 불러모으고서 이후 충격에 대비했다. [끼야아아아아악-!!] 칠판을 긁는 듯한 소음을 내며 흘러나오던 검은 안개. 머지않아 안개가 새어나오는 양이 줄더니, 벌어진 껍질 사이로 새빨간 안광이 드러났다. ‘거, 눈빛 한 번 표독스러운 거 보소.’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놈을 마주보았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당신들을 상대로 크나큰 위협을 느낍니다.」 어느덧 도달한 4페이즈의 도입부. 사실상 레이드의 가장 큰 분기점이기도 한 지점. 터벅, 터벅. 이내 벌어진 껍질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놈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처음에는 구더기. 그다음에는 검은 안개. 세 번째에는 밀랍 같은 껍질에 뒤덮여 있던 녀석의 모습은 이제 어엿한 사람의 형체였다. 터벅. 파랗게 핏줄이 선 새하얀 피부. 훤히 드러난 늑골과 뼈가 앙상한 팔과 다리. 잿빛의 머리카락도 길게 내려와 있으며 이제는 눈코입도 달려 있다. 애석하게도 무작위로 위치를 정한 것처럼 제자리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 이 정도면 인간형 몬스터지, 안 그래? 데구르르. 턱 아래에 달린 한짝의 눈알이 굴러간다. 까드드득.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한 코에서는 피가 흘러 내리고 있으며. 드르르륵. 그 와중에 손과 이어진 뼈 대검은 바닥에 질질 끌리며 거슬리는 소음을 자아낸다. 터벅, 터벅. 마치 양수에서 갓 꺼내진 것처럼 끈적한 액체를 뒤집어쓴 놈. 툭. 이내 놈이 멈추며 우리를 쓰윽 둘러보더니. [끼예에에에엑!]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달린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한다. 「반경 내의 캐릭터가 5명 이하입니다.」 「특수 조건 - 오래된 기억이 충족됩니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공포의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이미 5인 클리어 전제 조건은 충족됐을 터. 「흘러나온 기억의 파편이 주변 공간을 뒤틀기 시작합니다.」 자, 그럼 이제 5인 클리어 전용 맵으로 가서 레이드만 마저 이어가면 끝—. 번뜩-! 한 차례 세찬 섬광이 피어나며 눈앞이 명멸한 순간. “…….”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야 어디야 여긴.” 난생처음 보는 필드가 펼쳐져 있었다. *** 「캐릭터가 ‘고블린 마비독’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특수 조건 - 일그러진 기억이 충족됩니다.」 「캐릭터가 순례자의 동굴로 이동합니다.」 *** 한스… 한스 델베인……. 곱씹을수록 불길해지는 그 이름에 아멜리아는 잠시 심문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러한 시간은 극히 짧았다. ‘……별일 없겠지.’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지닌 고요의 정수를 무려 300번도 넘게 먹어봤다던 녀석 아닌가. 그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했으니, 별다른 사고는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내 할 일에 집중하자.’ 그녀는 걱정을 접고서 심문 작업에 복귀했다. 겨우 대화의 물꼬를 텄는데, 이러다가 다시 입이 다물어지면 낭패니까. “사는 곳은?” “……9구역.” “알미너스 백작을 만나본 적 있나?” “……없소.” 그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거짓말이라는 게 느껴지면 그저 말없이 징벌을 가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저, 정말이오……. 나는 그저 암시장에서 의뢰를 받은 게 전부란, 말이오……. 의뢰주가 누구인지는 나도 알지 못, 하오…….” 이내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말이 사실이며, 필시 이 이상의 정보는 심문을 통해서도 얻어내지 못하리라는 걸. ‘……결국 알미너스 백작과의 연관성은 찾아내지 못했군.’ 그 녀석…….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텐데. 왠지 침울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녀는 본인의 감정을 제어하는 것에 전문가였다. 아쉽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하겠는가? 미련을 가질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는 편이 옳다. “…….” 이후 아멜리아는 혹시 아까 놓친 게 있을까 싶어 소지품을 한 번 더 면밀히 확인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을 감지했다. ‘……마비독?’ 그 녀석을 찔렀던 무기에 독이 발라져 있다. 맛을 보니 고블린 독을 기반으로 한 하급 독인 것 같은데……. ‘이런 걸 대체 왜……?’ 생각을 곱씹을수록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우선 그 녀석처럼 수준이 높은 수호자에게는 이런 저급한 독은 유의미하게 통하지 않는다. 근데… 이런 걸 쓴다고? 다른 좋은 맹독들도 훨씬 많은 와중에? “고블린 마비독을 쓴 이유가 뭐지?” “마비독……?”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사내의 답변에 위화감은 더욱 커졌다. “나는… 마비독 같은 걸 바른 적 없소……. 그런 걸… 왜 쓴단 말이오.” 이내 아멜리아는 옆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부터 과묵하던 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체념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아멜리아는 얼른 그 사내의 무기도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 무기에도 마비독이 발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번뜩-! 한창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 중심부에서 빛이 퍼져 나오더니 정적이 찾아왔다. 이미 동료들이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갔다는 뜻. 아멜리아는 분신을 소환해 텅 빈 공동으로 보냈다. 공동에 쓰러져 있는 시체는 넷. 무기를 확인해 보니 이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고블린 독이 발라져 있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뭔가…….’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본능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감지한 아멜리아가 다른 사내의 멱살을 쥐었다. “…말해라. 왜 무기에 고블린 독을 발랐지?” “…….” 모진 고문에도 신음 하나 뱉지 않던 사내답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릉-! 아멜리아가 단검을 뽑아 사내의 목에 들이댔다. 꾸욱. 힘을 줘 누르자마자 새어나오는 핏물. 다만 사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동안에는 그저 체념한 얼굴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그 표정이 다르게 보였다. “너는… 누구지?” 그 질문에 처음으로 사내의 입이 열렸다. “글쎄.”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대답. 아멜리아가 조금 더 힘을 줘 단검을 밀어넣는 그 순간. 카칵-!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단검이 튕겨져 나갔다. 툭툭.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그 녀석이 좋은 처자를 동료로 두었구만. 직접 나설 일도 없었는데도 여기까지 의심이 도달하다니. 이런 눈치라면 남은 여정에도 큰 도움이 되겠어.” 도무지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 아멜리아는 살기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넌, 누구지? 목적이 뭐고?” “이 상황에서도 그 녀석을 걱정하는 걸 보니 쉬이 배신할 거 같지도 않고…….” 사람을 품평하듯 내려다보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지 말게. 나는 단지 녀석의 운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뿐이니.” “…….” “아는가? 비요른 얀델은 참으로 신기한 운명을 지녔네. 그는 시련을 통해 더욱더 단단해지지.” 사내가 아멜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례로, 그날 미로에서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겠나? 녀석이 이렇게 위대한 영웅이라 불리게 되는 날이 왔을 거 같나? 혼자서라도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던 놈에게?” 아니, 그럴 리가. 사내는 그리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게. 이번에도 그 녀석만큼은 멀쩡히 돌아올 걸세.” 아멜리아는 언제라도 기습을 할 수 있도록 하나 남은 단검을 꽉 쥐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저의가 뭐지?” 질문을 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저 사내의 빈틈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친절히 말해준 이유는 간단하네.” 그녀는 끝내 틈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또렷한 음성이 귓가를 울리고. “자네는 예전에도 환상 마법에 잘 속아 넘어가지 않았나.” “……!” “이만 쉬게.” 사내의 손끝이 이마에 닿는 그 순간까지도. 483화 순례자 (1)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우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다림’이다. 당황해 몸을 먼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부터 파악하는 것. 이 선택은 최악만은 면하게 해준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보면 상황에 따라 좀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하지 않도록 해주니까. 그래, 그러니까……. “후우…….”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쉰다. 그리고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스르륵. 다시금 눈을 떠 시각 정보를 수집한다. “…….” 장소는 동굴의 초입부.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 입구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혀 뭐라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 ——, ————!!” 음소거된 TV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표정을 보니 굉장히 다급해 보이며… 화가 난 얼굴들이다. 하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니미럴.’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디 동료들만인가? ‘진짜 뭐지?’ 장비도 보이지 않는다. 악마분쇄자, 고가를 주고 구입한 방패, 수호병단 징표를 포함한 여러 넘버스 아이템 등등. 내가 끼고 있던 모든 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헤지고 낡은 천옷. 그리고 손에는 마물 뼈로 만들어진 송곳 형태의 무기 하나를 꼬옥 쥐고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 진짜 문제는 정말 따로 있었구나. ‘……돌았나, 진짜.’ 몸이 무겁다. “——, — ———— —!” 착용 중이던 고중량의 장비들이 싹 사라졌건만. 그럼에도 가볍기는커녕, 너무나도 무겁게만 느껴진다. 다만, 나는 그 사실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우선 하나의 정보로써 정리만을 해나갔다. 「캐릭터의 모든 수치가 15로 고정됩니다.」 정보 1, 스탯이 떨어졌다. 그것도 탐험가가 아닌 일반인 정도의 수준으로. 마차도 들어 올릴 수 있을 듯 활력이 가득하던 육신은 사라졌고, 걷는 것도 버거울 만큼 지치고 지친 몸뚱이 만이 남았다. 또한……. 「캐릭터의 모든 정수가 봉인됩니다.」 정보 2, 스킬이 봉인됐다. 오우거, 볼-헤르찬, 바이욘 등등. 방패바바 무쌍을 찍게 해주던 핵심 상위 정수를 포함해 모든 스킬들이 발동되지 않는다. ‘……아공간도 안 열리고.’ 장미기사단을 잡고 획득한 아공간도 마찬가지. “후우…….” 눈앞이 핑 도는 듯했으나, 나는 최대한 흥분하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았다. 안 그래도 새로운 정보가 갱신되고 있었다. “어… 밖으로 나… 제국의 엄법에 …판을 받……!”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던 반투명한 막이 점점 옅어지며 병사들이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국……?’ 면밀히 살펴보니, 병사들의 복장이 익숙했다. 예전에 도플갱어 숲에서 봤던 제국 병사들이랑 비슷하다 해야 하나? 아무튼, 이걸 정리하자면…… “제국을 위하여……!” 정보 3, 저놈들은 제국 병사들이다. “대장님, 결계의 힘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정보 4, 입구에 쳐진 결계가 약해지고 있다. “준비하라! 사악한 순례자를 심판할 시간이다!” 정보 5, 나는 순례자다. 마녀와의 전쟁 때, 마녀의 편에서 싸운 인류의 배신자들을 뜻하는 바로 그 순례자. “…….” 이러한 정보들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여 정리가 되고 나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즉, 당장 튀어야 한다. *** 5인 이하 공략 시. 4페이즈에 도달한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는 새로운 필드로 캐릭터들을 끌고간다. 고독의 무저갱.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인 밀실형 필드. 플레이어는 그곳에서 새로운 패턴들을 쏟아내는 녀석과 전투를 펼쳐야 하며, 이때 드레드피어는 수십 명이서 트라이할 때보다 강력한 스킬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한다. 동굴이란 장소의 제약이 사라지며 거대해진 몸. 사방에서 몰려오는 토큰형 몬스터. 고위험도의 장판과 광역, 그리고 회피 불가의 여러 스킬들까지. 다만, 나는 레이드 자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야 각 스킬들은 공략법이 명확할뿐더러……. 미궁이 폐쇄되기 직전에만 사용이 가능한 탈출 방법도 있으니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발 상황… 인가.’ 사실 [던전앤스톤]을 하다보면 수없이 겪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이 게임엔 수많은 히든피스가 숨겨져 있으니까. ‘히든피스.’ 그래, 아마 지금 상황도 그래서 벌어진 거겠지. 정보 6, 내가 알지 못하던 히든피스가 발동됐다. 따라서 조금은 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터벅, 터벅. 발걸음 수가 늘어날수록 땀방울이 맺히다 못해 구슬의 형태로 데구르르 굴러 바닥을 적신다. 똑- 병원에서 살았던 이한수보다 살짝 더 나은 듯한 연약한 몸뚱이. “놈은! 놈은 어디로 갔나!” 그런 나를 제국 병사들이 뒤쫓고 있다. 하나 절망스럽단 생각은 품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해 보여도 공략이 불가능한 히든피스는 [던전앤스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두운 동굴 속을 훤히 보이듯이 움직이다니.” “사악한 마녀에게 영혼을 바치고 얻은 힘들 중 하나겠지요.” 병사들에겐 이 동굴이 어두운 듯하다. 수정이 밝게 빛나서 횃불도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정보 7, 순례자에겐 몇 가지 이점이 존재한다. 시야 반경도 반경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혜택은 바로 이것이다. “그륵, 그륵!” 바로 동굴 내부에 존재하는 마물들. 이 마물들은 나를 선공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나를 병사들에게서 지켜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걱-! 뭐, 말 그대로 시간 벌이에 끝나긴 했지만. 이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모가지가 뎅겅 썰려나갔겠지. “그르윽—!” …굉장히 기분이 이상하다. 설마 내가 고블린들한테 목숨을 구원받는 상황을 겪는 날이 올 줄이야. 터벅, 터벅. 물론 길잡이 기술이 있다는 것도 내가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머지는 어떻게 됐을까…….’ 도주를 이어가며 이런저런 추론을 정리한다.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다른 동료들도 나처럼 홀로 떨어져 스타트를 했다는 가설이었다. 일단 여긴 수정동굴과 비슷하니까. 물론 수정동굴엔 입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형식을 따라간다면, 동서남북으로 동굴 입구가 있겠지.’ 이 가설의 근거는 내가 시작한 위치에 있었다. 병사들이 득실거리던 반투명한 장막 너머에는 수풀이 우거졌거든. 마치 고블린 숲처럼. “이쪽이다!” 하, 잠깐 쉴 수 있나 싶었더니. 터벅, 터벅. 몸을 웅크리고 호흡을 가다듬기도 잠시. 서둘러 일어나 통로를 나아가며,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그야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생존은 판단의 연속이다. 일단 성공적으로 도망은 치고 있으니, 서둘러서 다음 판단을 끝마쳐야 한다. 자, 이제 나는 뭐를 해야 하지? ‘합류.’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 선택지였다. 파티를 뿔뿔이 흩어놓는 이벤트들은 제법 있으니까. 그런 이벤트들은 대부분 합류를 하고 난 다음에서야 정상적인 공략이 진행됐다. 따로 시작하는 걸 보면 내가 처한 이 상황도 그 큰 줄기는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합류하기도 전에 전멸할 수도 있다는 건데…….’ 일단 에르웬은 괜찮을 거 같다. 걔는 기본적으로 길잡이 능력이 깔려 있으니까. 문제는 길치인 아이나르랑 마법 원툴인 베르실 고울랜드. ‘……이 부분은 나중에.’ 다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지금 당장 할 생각이 아니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야 이 넓은 동굴에서 어떻게 해야 합류를 할 수 있을지도 막막한 상황 아닌가. 보다 중요한 의문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다. ‘클리어 조건이 대체 뭐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드레드피어의 4페이즈 패턴 중 하나인 거라면, 공략 완료 조건은 무엇인가. 제국 병사들의 몰살? 중심부에 있는 기념비로 가면 뭔가 나오나? 음, 어쩌면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게 다음으로 가는 올바른 방향일지도. 백 개가 넘는 균열. 그 몇 배는 되는 기상천외한 히든피스들을 공략해 낸 경험을 토대로 고민을 거듭했으나, 딱 이거다 싶은 것은 없었다. 아직은 정보가 부족했다. ‘단서… 분명 단서가 더 있을 텐데.’ 이내 나는 판단을 끝마쳤다. 지금부터는 좀 더 능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툭. 걸음을 멈추고, 세차게 빛을 자아내는 수정 뒤에 몸을 숨긴다. 너무 밝아서 몸을 숨기기에는 좋아 보이지 않은 지형이었으나, 나는 애써 불안을 덜어냈다. 추격 중인 병사들은 수정이 밝게 빛날수록 어둡게 여기는 듯했으니까. 기습을 하고자 한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 그런 판단을 내리고 몸을 숨기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터벅, 터벅. 횃불을 들고서 내가 숨은 통로로 진입하는 병사가 나타났다. 숫자는 셋. ‘셋이라…….’ 몸이 멀쩡할 때면 몰라도, 지금의 몸뚱이로는 충분히 부담이 되는 숫자.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해야 하나? 아니면 더 때를 기다려? 찰나의 순간에 수없이 많은 고민이 피어난다. 하나 결정의 시간은 그 순간에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 명이면 해볼 만해.’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보다 적은 병사가 본대에서 떨어져 수색을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판단. 게다가 제국 병사들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고블린을 잡던 모습을 보면 한 2층 탐험가 정도 되려나? 결국 칼로 찌르면 죽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 꽈악. 수정이 뿜어내는 광채에 모습을 숨긴 채, 뼈 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터벅. 병사 셋이 내가 숨은 위치를 막 지나가던 순간.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다가가 후열에 있던 병사의 목에 칼끝을 박아 넣는다. 푸욱-! “……컥!” 선명하게 피어나는 소음. 모가지에 박힌 칼을 뽑아내기도 전에 앞에서 걷고 있던 병사들이 몸을 틀어 뒤를 확인한다. “……넌!” 당황으로 물든 눈빛. 칼이 박힌 병사의 몸을 놈들에게 던지듯 밀며 칼을 뽑는다. 그리고 기습의 이점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푸욱-! 재차 검을 앞으로 뻗는다. “…윽!” 목을 노렸으나 검이 꽂힌 곳은 쇄골 부근. 가죽 갑옷도 입고 있었기에 깊이 찌르지도 못했을뿐더러, 칼도 꽉 껴서 뽑히지가 않는다. 따라서……. ‘칼은 포기.’ 손잡이에서 손을 뗀 다음, 오히려 대시를 하며 거리를 좁힌다. 사람을 죽이는 것엔 꼭 무기가 필요한 건 아니니. 스윽. 칼에 찔려 당황한 병사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뒤에서 끌어안듯이 사지를 포박한다. 그리고 목을 옆으로 꺾어 맨살이 훤히 드러나게 한 뒤. 뜨드득. 있는 힘을 다해 물어뜯었다. 보통 여기가 혈관째로 뜯겨져 나가면 픽하고 죽더란 말이지. “트, 트로안!” 오케이, 이거로 두 명째. 일대일 구도가 되니 확 부담이 덜해졌다. 뭐, 스펙은 물론이고 장비 수준도 저쪽이 훨씬 더 유리할 테지만. 어디 전투가 스펙으로만 하던가? “드루와, 좆밥 새끼야.” 어두운 동굴에서 기습 한번 당했다고 넋이 나간 병사랑은 실전의 경험치가 다르다. “…이, 이놈!” 마지막 남은 병사가 잔뜩 긴장한 동작으로 창을 찌른 즉시 옆으로 몸을 틀어 회피. 그다음엔 창대를 잡아당겨 균형을 무너뜨렸다. 거기까지가 이번 전투의 끝이었다. 콰직, 콰직, 콰직-! 바닥에 자빠진 녀석의 뒤에 올라타 머리를 잡고 바닥에 내리찍길 여러 번. 이내 병사의 몸에서 움직임이 멎었다. “……퉷.” 입에 가득 찬 살점과 피를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의 개싸움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럴까. 어찌 된 게 3등급 몬스터와 싸울 때보다도 정신적 피로가 더 심한 거 같다. “후우… 후우…….”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됐는지, 딱히 다친 곳도 없는데 핑도는 눈앞. 그러나 팔자 좋게 쉴 시간은 없었다. ‘얼른 파밍부터 끝내자.’ 고된 싸움 끝엔 언제나 전리품이 있는 법이다. *** 제국 병사의 방어구 세트는 고정이다. 조끼 형태의 가죽 갑옷을 걸치고, 그 위에 제국의 문양이 그려진 천 쪼가리 하나를 덮으면 끝. ‘제일 덩치가 큰 애 거를 입었는데도 좀 끼네.’ 그래도 무기는 나았다. 사이즈가 안 맞아도 쓸 수 있는 데다가 본인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지 무기는 셋 다 종류가 달라서 선택지도 여럿. 메이스랑 방패. 창. 양손 망치. 당연히 내가 고를 무기는 정해져 있었다. ‘암, 시작 무기는 메이스랑 방패지.’ 양손망치도 제법 탐이 났지만 과감히 포기했다. 지금의 근력으로 저 망치를 한 손으로 다루는 건 불가능하니까. ‘뼈 칼도 혹시 모르니 갖고 가는 거로 하고…….’ 무기 선택이 끝낸 후엔 병사들의 남은 소지품도 뒤져 빵과 식수 등 필요한 물건들을 배낭에 담아 챙겼다. 후, 그럼 이 정도면 루팅은 다 한 거 같고. 병사들의 시체를 수정 뒤쪽에 잘 숨겨둔 뒤 서둘러 장소를 벗어났다. 터벅, 터벅. 조금 작긴 해도 신발이 있으니 훨씬 걷기 편했다. 후, 그래 이게 문명의 힘이지. 뼈 칼을 쓰다가 어엿한 제국 병사로 전직을 하고 나니 절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젠 장비도 있으니, 이 다음에는 한 명 정도는 생포해서 정보를 캐보자.’ 그러한 일념으로 다음 타깃을 물색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찾을 수 있었다. ‘넷이라…….’ 이전보다 한 명 더 많은 숫자. 하나 큰 문제는 없었다. 화르륵. 나는 굳이 필요도 없는 횃불로 시야를 밝히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야 제국 병사 세트에는 숨겨진 효과가 있거든. “이봐! 길을 잃어 일행과 떨어졌는데, 좀 도와줄 수 있나?” 제국 병사 세트는 전부 착용 시, 제국 병사에게 선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 ‘……어?’ 어… 분명 그래야 했을 터인데……. “겨, 경계 태세!” 예상과 달리 병사들은 멀리서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기를 겨누었다. 대체 어떻게 보자마자 안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머릿속에 기록했다. “순례자! 순례자다……!” 정보 8, 제국 병사는 순례자를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콰직-! 콰직, 콰직! 「캐릭터가 제국 병사 다섯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정보 9, 제국 병사를 잡으면 강해진다. ‘오케이, 대충 어떤 느낌인진 알겠네.’ 이제 감을 잡았다. 484화 순례자 (2) 나보다 좀 더 나은 스탯을 지닌 성인 남성 넷. 사실 항상 스탯과 스킬빨로 몬스터와 약탈자를 때려잡던 나로서는 조금 걱정이 됐지만, 결과적으로 괜한 걱정이었다. ‘……생각보다 더 쉬운데?’ 맨주먹으로 네 명과 정면 승부를 하는 거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무기와 방패까지 있으니, 수적 열세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다 보였거든. 하긴, 쪼렙 시절부터 아멜리아 같은 괴물들이랑 싸워대며 컸으니 당연한가? 카칵! 적이 공격하면 방패를 이용해 흘려내고. 공격하느라 훤히 드러난 빈틈을 향해 메이스를 내리찍는 것의 반복. 콰직-! 그렇게 병사 하나의 정수리에 메이스를 내리꽂고 나니 어느새 남은 병사는 한 명이었다. “……주, 죽기 싫어.”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가장 안전한 후방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던 앳된 얼굴의 병사가 패배를 직감하고서 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 먼저 죽은 친구들 섭섭하게. 나는 방패를 부메랑처럼 잡고서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휘익-! 스킬명은 실드 애로우. 쪼렙 시절에 원거리 공격이 갖고 싶어서 열심히 연습했지만 결국 얼마 쓸 일이 없었던 비운의 스킬. 퍽-! 이내 방패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병사가 앞으로 고꾸라졌고, 나는 얼른 다가가 병사를 포획했다. “놔, 놔! 놓으라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병사.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놈에게 답할 게 있을 것 같… 커헉!” 명치에 주먹을 꽂으니 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했다. “켁, 케허헉, 큭……!”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해진 환경. 나는 본격적으로 병사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우선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이곳은 어디지?” “무슨… 의미냐…….” 의미는 무슨.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너는 대답만 해라. 이곳이 어디지?” “……순례자의 동굴.” 음, 암만 봐도 수정동굴인데 말이지. “그럼 너희의 목적은?” “도망친 순례자들을 모두 잡아 심판대 위에 세우는—.” “소리 지르지 마. 울리니까.” 나는 이후로도 빠르게 질문을 쏟아내며 의문점을 해소하고, 불확실하던 정보의 진위를 확실한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이어갔다. 정리할 만한 정보가 꽤 여럿 있었다. 정보 10, 나 말고도 순례자가 더 존재한다. 숫자는 나까지 합쳐서 총 네 명. 아무래도 에르웬, 베르실, 아이나르까지 전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듯한데……. 정보 11, 순례자들의 목표는 동굴에 숨겨진 마녀 제단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딱 봐도 이게 클리어 조건 같다. 혹여 클리어 조건이 아니더라도 이곳으로 가면 최소한 동료들과 합류는 할 수 있을 테고. ‘병사 하나만 조져도 술술 나오는 정보이니, 다들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아, 물론 마녀 제단이 어딨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하나 나는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다. 우리가 레이드를 하던 장소이기도 한 바로 그곳. 중심부의 암흑지대. 최초로 미궁에 발을 디딘 가브릴리우스 기념비가 있는 그 공동. 이 동굴에 뭔가 숨겨져 있다면 역시 그곳이겠지. ‘……그게 아니면 외곽부에서 시작하게 만들 리가 없으니까.’ 대충 이번 이벤트의 컨셉이 머리에 그려진다. 바위사막, 고블린숲, 짐승의 소굴, 망자의 땅. 원래 2층 필드와 이어진 입구에서 시작된 네 명의 캐릭터들이 제각기 시련을 뚫고서 중심부에서 합류하는 것. ‘분명 거기서 보스전을 하든가, 다음 페이즈가 나오는 식일 거 같은데…….’ 그나저나 이 이벤트는 대체 어쩌다 발동한 걸까. 단지 레이드 인원이 네 명이라서?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중간에 캐릭 하나가 죽어서 네 명이서 공포의 군주를 사냥한 적도 꽤 있으니까. ‘……조건은 나중에 생각하고, 당장은 공략하는 거만 집중하자.’ 나는 심문을 끝내고 자리를 벗어났다. *** 첫 트라이. 진성 게이머라면 무릇 그 순간만큼 흥분되고 짜릿한 시간이 없을 것이며, 나 역시 늘 그래왔다. 하지만……. 터벅. 그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을 할 때의 이야기. 현실이 될 경우에는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두근, 두근, 두근. 모든 순간이 두렵고, 경계된다. 짜릿한 흥분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등골이 서늘한 긴장감, 그리고 뇌리에 콕 박혀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생각뿐.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첫 시도에서 완벽하게 성공해야만 한다. 죽으면서 숙련되는 로그라이크 게임이 아니니까. 이곳에 두 번째 트라이 따위는 없으니까. 「캐릭터가 제국 병사 열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제국 병사 열다섯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제국 병사 스물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 적의 숫자를 줄인다는 생각으로 5인 이하로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사냥하며 움직였더니, 서서히 능력치가 오르는 게 체감됐다. ‘다섯 명을 잡을 때마다인가…….’ 스탯이 정확히 몇이나 증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보스몹이 어떻게 나올진 몰라도 최대한 성장을 하면서 가야겠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사냥에 집중해 스탯을 올리고 싶으나, 최우선 목표는 사냥보다 중심부로 이동하는 것으로 잡았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이런 형식일 때는 시간 비례 페널티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강해질 수 있는 방법과 넉넉한 시간. 이 두 개를 동시에 줄 만큼 친절한 게임이 아니다. 내가 즐겨온 [던전앤스톤]이란 게임은. ‘…시간이 남으면 거기서 사냥을 해도 되는 거니까. 일단 움직이자.’ 그렇게 사냥보다는 이동에 치중하며 중심부로 향하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적어도 일곱 시간은 된 거 같은데.’ 이쯤에서 정보가 갱신된다. 정보 12, 미궁이 폐쇄된다고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미궁이 폐쇄됐어도 진작에 폐쇄됐어야 할 시간. 나는 아직도 이곳에 서 있다. 물론 그로 인한 불안도 있었다. ‘……균열처럼 시간 내에 탈출하지 못하면 아예 안에 갇히는 케이스는 아니겠지?’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다만 이걸 벌써 고민해봤자 변하는 건 없을—. “순례자다!” 그때 샛길 너머 통로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아직 서로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서둘러 전투 준비를 했지만, 샛길에서 병사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병사들의 걸음 소리는 멀어졌다. “잡아라!” “더러운 마녀의 종!”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는 것. 타닷. 더 볼 것도 없이 병사들이 뛰어간 방향을 따라 뛰었다. ‘아이나르? 베르실? 에르웬? 누구지?’ 지금 병사들에게 쫓기는 중인 대상이 누구일지 고민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병사들이 멈춰서 모여 있는 것이 저 멀리서 보였다. ‘……아주 근처 병사는 싹싹 모아왔네.’ 세 개의 통로를 모두 가로막은 아홉 명의 병사. 그리고 그런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베르실 고울랜드. “오, 오지 마! 오지 마라고!” 베르실이 발발 떨며 뼈로 된 완드를 휘둘렀다. 전사 포지션인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맞힐 생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움직임. 당연히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뭣들 하나! 어서 잡아라!” “꺄, 꺄악!” 결국 베르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병사들에 의해 제압됐다. ‘얘는… 어떻게 여기까지 멀쩡히 온 거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즉결 처형이 원칙인지, 곧장 무릎을 꿇리고 목을 자를 준비를 취하는 병사들. ‘니미럴, 아홉 명은 좀 빡센데…….’ 애석하게도 선택지는 없었다. 베르실이 죽는 걸 지켜볼 수는 없지 않은가. 콰직-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뒤에 있던 병사 놈의 뒤통수를 메이스로 힘껏 내리쳤다. “…기습이다!” 한 놈을 조지자마자 쏠리는 시선. 음, 그럼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겠고. “베헬—라아아아아아.” 방패에 체중을 실으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하나! 어서 저년부터—!” 차근차근 잡아가며 다가가서 어떻게 인질을 구해? “으, 윽!” 이곳까지 오며 강화된 수치를 토대로 두 명의 병사를 밀어내며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무릎 꿇은 베르실을 안아든 순간. 푸욱-! 옆구리 깊숙이 장검이 파고든다. “야, 얀델 씨?” “…인사는 나중에.” 내가 걸어온 경로는 돌진에 밀려나 넘어졌던 병사들이 어느새 일어나 다시 틀어막은 상황. 우선 포지셔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물리 내성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앞뒤 양옆으로 포위된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으니까. “알아서 꽉 잡아라.” “네? 아, 아악!” 베르실이 알아서 목을 잡고 매달리게 한 뒤, 돌아왔던 길로 돌아간다. 방패로 후려치듯 한 놈을 밀어내고. 타닷. 뛰쳐나가려는 순간, 허벅지에서 따끔한 감각이 피어오른다. 푸욱-! 빌어먹을 창잽이 새끼. 허벅지에 박힌 창대를 메이스로 내리쳐 부수며 대시를 마저 이어간다. 덕분에 순식간에 베르실을 구해내고 포위를 뚫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이 다리로는 못 튀겠네.’ 뭐, 그래도 등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서둘러 베르실을 내려두고서 뒤로 보냈다. 일자형 통로 너머로 병사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중이었다. ‘통로 특성상 한 번에 덤빌 수 있는 숫자는 많아 봐야 셋.’ 그리고 남은 병사의 숫자는 여덟. ‘…안 좋은데.’ 무리를 하느라 옆구리에 한 방, 허벅지에 한 방 부상을 입은 상황. 심지어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면 다른 병사들이 소리를 듣고 모여들 가능성도 있다. 꽈악. 그렇게 힘든 전투를 예상하며 상체를 낮게 숙여 무게 중심을 낮추던 그때. 「베르실 고울랜드가 [차오르는 살점]을 시전했습니다.」 ……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차오르는 살점]. 7등급 몬스터 어둠숭배자의 액티브 스킬. 그것이 베르실 고울랜드의 손에 의해 발동됐다. ‘…뭐야 이거?’ 마법사가 정수 스킬을 쓴다고? [던전앤스톤]을 하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현상. 그러나 호기심을 푸는 것보다는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다르지.’ 내가 당장 베르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단 하나. 그 스킬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느냐가 아니라. “베르실, 이능은 얼마나 더 쓸 수 있지?” “3분 뒤에 한 번 더요.” “잘됐군.” 이미 부상은 깔끔하게 회복이 된 상태. 심지어 더 다쳐도 3분 뒤에 회복할 방법이 있다. 즉, 훨씬 과격한 전투를 펼쳐도 된다는 뜻. 타닷. 수비 태세를 풀고 앞으로 달려나가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리고……. 콰직, 콰직-! 공격의 비중을 올린 만큼 잔부상을 여럿 입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캐릭터가 제국 병사 일흔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7명을 잡고 남은 2명은 도주. 도망친 놈들은 굳이 추적하지 않았다. “야, 얀델 씨…….” “……일단 장소부터 바꾸지. 도망친 놈들이 지원을 부르기 전에.” “아, 네!” 베르실에게 입힐 적당한 사이즈의 갑옷 하나와 방패 하나만 루팅한 채 얼른 장소를 벗어났다. 그리고……. 「베르실 고울랜드가 [차오르는 살점]을 시전했습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힐부터 받고 대화를 시작했다. “이건 뭐지? 어떻게 네가 이능을 쓰는 거냐?”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눈을 뜬 다음부터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는데… 신기하더라고요. 마치 몸에 새로운 기관 하나가 늘어난 기분이라 해야 하나? 아마 마법사 중에 이걸 경험해 본 건 제가 최초일걸요?” 음, 그런 긴 설명은 필요 없는데. 뭐라 말하려 하던 차, 베르실이 헛기침을 하며 알아서 자중했다. “아,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이것 말고도 쓸 수 있는 이능이 하나 더 있어요.” “뭐지?” “제가 판단하기엔 [동화] 같아요.” [동화]라면 노움의 스킬이다. 효과는 반경 3m의 은신 결계를 치는 것. 들어보니 그동안 베르실은 은신 스킬을 열심히 써가며 이곳까지 왔다는 모양인데……. ‘마법사한테는 스킬을 넣어주는 식으로 보정을 해주는 건가?’ 음, 왠지 그럴 거 같다. 전투 경험도 없는 마법사가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밸런스 패치는 있어야지. “정말 큰일이었어요. 영혼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쉬고 있는 차에 병사들이랑 딱 마주쳐서……. 이미 들킨 다음엔 은신도 할 수가 없었고요.” “시작 위치는 어디었나?” “…네?” “결계가 꺼지기 전에 밖을 봤으면 알 거 아니냐.” “어… 죄송해요. 당황해서 바로 도망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어요.” “아… 그러냐? 뭐… 그럴 수 있지.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중심부로 와야 한다는 건 용케 알아챘군?” “네?” “…응?” 나와 베르실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러… 중심부로 온 게 아닌가?” “여기가… 중심부인가요……?” “…….” 그래, 그냥 무작정 그냥 도망치다 온 거였구나. 다행이다. 그러다 만난 게 나였어서. “……그래서 얀델 씨는 어떻게 된 건가요? 병사 열 명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다니. 장비는 뭐고요? 처음엔 얀델 씨인 줄도 몰랐잖아요!” 본인 얘기가 끝나자 베르실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고,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썰을 풀며 정보를 공유했다. 시작은 눈을 뜨고 0분 차. 스킬 봉인, 능력치 봉인, 장비 실종을 확인. 결계가 깨지기 직전에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순례자’임을 알아냈다. 또한, 결계 바깥이 고블린 숲과 유사한 것을 통해 동료들이 정반대 위치에서 시작했을 가능성을 떠올렸으며……. 병사들이 ‘언어’를 쓰는 걸 보고서 심문을 통해 정보를 캐낼 수 있겠다 판단했다. 그리고 도주. 20분 차. 마물이 우리를 돕는 것을 인지. 날 추격하던 병사들과 마물이 싸우는 걸 관찰 후 병사의 수준을 파악했고, 놈들에게는 이 동굴이 어둡게 보인다는 것도 알아냈다. 30분 차.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가장 빛나는 수정 뒤에 몸을 숨긴 뒤에 기습. 삼 대 일 전투에서 겨우 승리한 뒤 장비를 루팅해 전투력을 증강했다. 45분 차. 제국 세트를 입고 병사들을 기습. 전투 승리 후 심문 시작. 이때 수많은 정보들을 얻었고, ‘순례자의 목표가 동굴에 숨겨진 마녀 제단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란 정보를 통해 앞으로 해야 할 목표를 설정했다. 2시간 차.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마주치는 족족 병사를 잡으며 이동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체됐을 때 생길 변수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 7시간 차. “이게 바로 지금이다. 됐나?” 후, 그러면 이 정도면 정보 공유는 끝난 거 같고. “자, 얼른 움직이자. 서둘러 중심부로 가야 한다. 거기에 마녀 제단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내 말에도 베르실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멈춰서 멍하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혹시 얀델 씨는 이 상황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던 건가요?” “응?” 뭐래. 그랬으면 이 난리는 안 치지. “당연히 몰랐다.” “근데,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신 거죠……?” 참으로 어이가 없는 질문이었다. ‘……얘도 플레이어 출신 아닌가?’ 왜 이런 당연한 판단을 신기해하지? 485화 순례자 (3) 콰직, 콰직, 콰직-! 제국 병사들을 무찌르며 통로를 나아간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병사 무리가 늘어났지만 전투는 오히려 더 쉬워졌다. 힐러 역할 수행이 가능한 베르실이 있을뿐더러, 스탯도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으니까. 콰직-! 음, 이제 이쯤 되면 능력치만큼은 3층에서 돌아다니던 시절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캐릭터가 순례자의 제단에 진입했습니다.」 이내 베르실과 함께 도착한 중심부에는 보랏빛 안개가 감돌았다. “조심해라. 지금부터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네.” 제국 병사들을 잡으며 느슨해진 긴장감을 다시금 끌어올리며 안개 속으로 들어섰다. 터벅, 터벅. 방패로 상체를 가리며 나아가길 몇 걸음. 우리가 아까까지 레이드를 뛰고 있던 그 공동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지형부터 확인했다. “…….” 텅 빈 상태의 공동. 기념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4m가 넘는 크기의 석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얀델 씨, 저건…….” “아마 저게 마녀 제단이겠지.” 일단 알맞게 찾아온 건 맞는 듯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석상 앞으로 다가가 제단을 세세히 살폈다. “베르실, 뭔가 알겠나?” “모르겠어요. 동상도 마찬가지고요. 책에서 봤던 마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책에서야 사악한 존재로 묘사를 해야 했을 테니까.”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이게 정말 그 마녀의 실제 모습인 걸까요?” 글쎄, 잘은 몰라도 아마 그럴 거 같다. 리아키스를 처치하고 스쳐 지나가듯이 잠깐 만난 그 여자애랑 똑같이 생겼거든. “이렇게…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니…….” 베르실 고울랜드는 그리 말하며 홀린 사람처럼 석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멈춰라. 만졌다가 뭔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아, 네!” 베르실이 흠칫하며 뻗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거죠?” “일단 좀 더 확인해봐야지.”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선에서 석상을 조사했다. 받침대 부분에 세 줄짜리 글이 적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해석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대어는 제 전공이 아니라서요…….” 쩝, 레이븐은 고대어도 잘만 읽던데. 역시 플레이어 출신은 순혈 마법사의 지식량을 따라갈 수 없는 건가? “아쉽군. 뭐라 쓰여 있는지만 알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하나의 별,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리보는 이 땅 위에선 모두가 같은 존재리라.” 뒤돌아 본 곳에는 기사 갑주를 입은 중년 사내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올려다볼 터이니.” 씨바, 딱 봐도 세보이는데. 얘가 보스인가? 설마 오러를 쓰진 않겠지? “참으로 역겹지 않나? 더러운 마물들 따위가 우리와 동등한 존재라니.” 베르실을 내 등 뒤로 감추며 방패를 들어 올리자 기사놈이 피식 웃었다. “아, 너희에겐 딱히 그렇지 않겠군. 똑바로 된 신념을 가슴에 새겼다면, 인류를 배신하는 짓은 벌이지 않았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놈이 처음 보는 형식의 성호를 그었다. “나 아르가르실 드레드피어가 맹세한다. 세계를 수호하는 제국의 검으로, 더러운 순례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단할 것을.” 이내 성호를 모두 그은 기사놈이 번개처럼 검을 뽑으며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후우우우우웅-! 새하얀 칼날 위에는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미친.’ 밸런스 실화냐? *** 세찬 빛을 흩뿌리는 오러를 목도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목뒤가 빳빳하게 굳는다. ‘정상적인 전투로 이기는 건 불가능.’ 일단 이 대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암만 열심히 스탯을 키웠어도 오러까지 쓸 줄 아는 기사에게는 승산이 전무하니까. 근처로 다가가기도 전에 내 몸은 방패 째로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흩뿌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찾아야 돼.’ 마주한 상황에 절망할 시간에 차라리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저 새끼를 이길 수 있을까.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던전 앤 스톤]은 불친절한 게임이기는 해도 불합리한 게임은 아니다. 스탯에 스킬까지 봉인해두고서 저런 놈을 툭하고 던져준 거라면, 상대할 방법이 분명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 그러니까……. ‘생각해.’ 믿음을 잃지 않고서 하나하나 따져본다. 아르가르실 드레드피어. 일단 이놈이 보스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면, 어떻게 해야 공략할 수 있을까? ‘레벨 업은 아니야.’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제국 병사들을 잡고 강해진 상태에서 보스방에 들어오는 것일 리는 없다. 그야 100명이 넘은 직후부터는 다섯이 아니라 열 명을 잡아야 스탯이 올랐으니까. 이후로도 그런 식이면 몇날 며칠 동안 사냥만 해도 이 새끼를 잡을 스탯은 되지 못한다. ‘그럼… 제단인가?’ 나는 눈만 움직여 마녀 석상을 힐끗했다. 어쩌면 병사들이 말했듯, 제단을 활성화하면 뭔가 공략에 도움이 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식일지 모른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활성화할 수 있냐는 건데.’ 스르륵.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나 석상에 가까이 붙는다. 그리고……. 툭. 한 손을 뻗어 석상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애석하게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뭔가 조건이 필요한 거 같다. ‘제단이라고 했으니, 뭔가 바쳐야 하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붙잡은 순례자들을 데려와라.” 우리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놀랍게도 안개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예, 백인대장님.” 절도있는 말투의 답변. 머지않아 안갯속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승줄로 꽁꽁 묶어둔 두 명의 여자를 포위한 채로. “……아, 아저씨!” “비, 비요른……! 우, 우릴 구하러 온 거냐……!” 그래, 이 둘은 자력으로 도착하기 전에 붙잡힌 거구나. 아이나르는 몰라도 에르웬은 잘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병사들이 이 둘을 곧장 처형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는 한편, 최대한 이성적으로 현재 상황을 해석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정해진 진행 같네.’ 에르웬과 아이나르는 도중에 붙잡혔지만, 결국 포로의 형태로 살아서 이곳에 도달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일단 모두가 생존한 채로 마녀 제단 앞에서 합류하는 것은 정해진 시나리오인 거 같은데……. “…읏!” “으억!!” 이내 기사놈이 포박된 아이나르와 에르웬을 발로 차서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동댕이쳤고, 이에 베르실이 얼른 다가가 둘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죄송해요…….” “구, 구해줘서 고맙다!” 사과하는 에르웬과 감사해하는 아이나르. 둘은 베르실과 다르게 병사에게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와 방어구를 지니고 있었다. 에르웬은 단검, 아이나르는 대검이었다. ‘무기도 뺏지 않고 풀어준다라…….’ “무슨 뜻이지?” 내 물음에 놈이 씨익 웃었다. “단지, 확인해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무엇을?” “제국을 넘어 세계를 배신한 너희들의 신념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이내 놈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죽여라. 너희가 따르는 마녀 앞에서. 지금부터 서로를.”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새끼는 지가 무슨 천마라도 되는 줄 아나. “나 드레드피어가 약속하겠다. 더러운 순례자를 죽여 순수를 증명한 자는 모든 죄를 사하겠노라고.” 보스전 컨셉 한번 지독하네. *** 주변을 포위한 수십 명의 병사. 그리고 그런 병사들 앞에서 검을 꺼내든 채 오만한 눈빛을 흩뿌리는 드레드피어. “…….” “…….”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다. 당연히 저 제안에 혹하는 동료는 없었다. 아, 물론 나를 빼고는 말이다. “그 제안을 어떻게 믿지?” “비… 비요른?” 내 질문에 아이나르가 까무러칠 듯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됐단 말이야. 일단 대화라도 이어가면서 시간을 벌어야지. “어떻게 믿느냐라…….” 내 질문을 받은 드레드피어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믿어라.” 사탕발림의 말도 아니며,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 것도 아닌, 단 한 마디의 말.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가 [설득]을 시전했습니다.」 「대상을 향한 신뢰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그래, 저 제안 자체가 거짓말인 건 아니구나. “사악한 마녀의 품에서 벗어난 자는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생환하는 방법이 있을 줄이야. 굉장히 골치가 아팠다. 물론 배신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암만 저 제안이 사실이도 우리 멤버들이 배신의 칼을 꺼내들 리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줬다는 건, 공략이 그만큼 어렵다는 건데…….’ 대체 무엇일까. 동료를 제물로 바치지 않고 전원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결정이 어렵다면 좀 더 쉽게 해주지.” 그때 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백인대장 드레드피어가 [소유권 박탈]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행동불가 상태에 빠집니다.」 눈이 마주친 즉시 돌처럼 굳은 몸. 암만 힘을 줘도 움직일 기미가 없는 몸에 한 가지를 새삼 깨닫는다. ‘…전투를 하라고 만들어 놓은 새끼가 아니야.’ 오러를 쓰는 것부터 알아봤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 터벅, 터벅. 얼어붙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 녀석이 이내 검으로 내 배를 쑤셨다. 푸욱-! 상처는 깊지는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포션만 부어줘도 싹 낫지만, 계속 내버려 둔다면 출혈이 문제가 될 정도. “끄윽!” 녀석은 나를 시작으로 우리 네 명 전부에게 칼침을 놓았다. 쉽게 해주겠다더니, 이런 뜻이었나. “지금부터는 너희의 선택이다.” “…….” “고통스러운 죽음이냐, 삶이냐. 과연 너희의 신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궁금하군.” 놈은 우리 중 누군가가 배신할 것이 분명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죽음을 목전에 둔 이는 언제나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런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아이나르와 에르웬은 그렇다쳐도…….’ 가장 최근에 합류한 베르실은 어떨까. 아이스록 원정대에서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이긴 하지만, 플레이어 출신인 여자한테 그 정도 의리를 기대해도 좋은 걸까? ‘……는 지랄.’ 이를 악 물며 의심을 억지로 지워낸다. 이럴수록 놈의 의도에 놀아나는 거였다. 애초에 멀쩡한 상황이었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의심할 시간에 생각해.’ 어차피 몸도 움직이지 않는 거, 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던전 앤 스톤]을 공략하기 위해선 항상 제작자의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네 명이 합류한 상태에서 배신을 종용하는 것.’ 우선 여기까지는 고정된 시나리오인 거 같다. 사실상 대적이 불가능한 무력의 보스가 튀어나온 걸 보아 공략법은 무력과 상관없을 테고. 이런 미션들은 대부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뒤바뀐다. ‘아무도 배신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이 자리에서 다 죽고 게임 오버인가? 아니면, 때가 될 때까지 버티면 마녀가 감격하고 제단이 활성화되며 길이 열리는 형식? “…….” 글쎄, 모르겠다. 무엇이 정답인지, 도무지 확신을 할 수 없다. 뭐, 이러니까 첫 트라이의 99%가 실패로 끝나는 거겠지만. “5분이 지났군.” “…….” “생각은 충분히 했을 테니, 한 명씩 기회를 주지.” 그 말과 동시에 육체의 통제권이 돌아왔다. 시작은 나부터였다. 채챙. 놈이 내 앞으로 단검 하나를 던졌다. “쥐어라.” “…….” “너희들의 친구인 고블린 독까지 묻혀뒀으니, 고통없이 보낼 수 있을 거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 무릎 꿇고 앉은 채로 가만히 놈을 노려보자, 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너 같다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터벅, 터벅. 놈이 걸음을 옮겨 에르웬의 앞에 섰다. 그리고……. “쥐어라.” 똑같은 대사를 쳤고, 에르웬은 침묵했다. “…….” 잠시간 이어진 정적의 시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란 참 이상했다. 에르웬을 100% 신뢰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가슴 깊은 곳에선 혹시나 하는 생각이 피어난다는 게. “단 한 명. 단 한 명만 찌르더라도 너는 살아남아 죄를 씻어낼 것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쩌면 베르실을 찌른다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불현듯 피어난 것인데……. “……꺼져.” “입이 거친 여인이로군.” 다행이도 에르웬의 턴 역시 무사히 지나갔다. “쥐어라.” 그리고 시작된 아이나르의 차례. “베헬…… 컥!” 몸의 구속이 풀리자마자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한 아이나르는 발에 채여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다가온 베르실의 순번. “네 차례다.”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즉시, 베르실이 바닥을 기어 떨어진 단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바들바들 떨며 놈에게 물었다. “한 명…….” “…….” “딱… 한 명만 찌르면 되는 건가요……?” 제기랄. 486화 순례자 (4) 몇 구의 시체가 놓인 공동. 한 노인이 천천히 그 중심부로 다가가더니, 손으로 쓸어내리듯 기념비를 매만진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 그 위대한 첫걸음을 기리며] 아주 오래전, 위대한 영웅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비석.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아주 작게 읊조리듯 중얼거리던 노인이 이내 기념비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품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후우웅-! 받침대도 필요없이 중력을 거스르며 허공에 떠올라 펼쳐지는 책. [군주총해록 I] 그런 제목이 적혀 있던 책은 스르륵 페이지를 넘겨갔고, 어느덧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심장을 옥죈 두려움에 신념을 꺾고, 삶을 위해 달아나고 달아나던 순례자는 끝내 마주했다. 두려움을 피해 달아난 곳에는 더 큰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곁에 없다는 공포.] [불식간에 고독의 공포가 순례자를 뒤덮었다. 그것은 달아날 수도 없는 공포였다. 스스로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순례자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렸다. 대지모의 보살핌도 순례자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순례자의 영혼이 소멸함과 동시에 새로운 힘과 권능이 ———에게 깃들었다. 그렇게 한낱 인간에 불과하던 미물은 저주받은 힘을 손에 넣었다.] [공포를 흩뿌리며 믿음을 증오하는 자.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의 탄생이었다.] 툭. 이내 펼쳐진 책이 닫혔다. 세월에 파묻혀 이제 기억하는 이가 없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 “딱… 한 명만 찌르면 되는 건가요……?” 베르실의 질문에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크게 쏘아붙이고도 싶었지만, 온몸이 굳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물론이다. 한 명. 단 한 명만 죽인다면 우리 제국은 다시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어딘가 기뻐 보이는 녀석의 화답. 이내 베르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며 죄책감을 줄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이제… 확실하게 알 거 같네요. 얀델 씨……. 아까 저를 의심하셨죠……?” 의심? 아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 “저한테 생긴 능력이 더 있어요. 몸을 숨기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 말고도…….” “…….” “정확히 어느 마물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절 향한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느껴져요.” 니미럴. 이런 장치까지 있었을 줄이야. “테르시아 씨도… 마찬가지였죠. 저를 의심하며 먼저 죽일까 말까 고민을 하셨어요. 끝내 그러지는 않으셨지만, 절 믿기 때문은 아닐 거예요.” “…….” “물론 유일하게 프넬린 씨는 그 어떠한 의심도 제게 보내지 않으셨지만요.” 베르실의 음성이 이어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망했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무슨 말을 해야 생각을 고쳐먹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심지어 입도 막혀서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다. 두근-! 드레드피어가 오러를 쓰고, 광역 스턴을 걸 때까지도 품지 않았던 절망이 차오른다. “물론 이해해요. 저를 믿기 어렵겠죠. 저는 여러분처럼 오래된 끈끈한 사이가 아니니까.” 이내 단검을 쥔 베르실의 손이 떨림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기로 했어요.” “…….” “제가 안 하면 결국 누군가 먼저 할 테니까.” 니미럴. “…….”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반복했다.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참사를 막을 수 있을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열심히 모은 장비와 정수를 싹 봉인시켜두고서 이딴 걸 보스몹이라고 내던졌을 때도, 애써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며 인정하지 않았지만. ‘씨발.’ 불합리하다. 이런 건, 너무 불합리하다. 힘이 부족해 몬스터에게 죽는 것도 아니고, 뭔가 크게 실수를 한 것도, 정해진 시간 내에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것도 아닐진대. “찔러라, 순례자여. 더러운 피로 단검을 씻어내 너의 순수를 증명하라.” 이렇게 누군가 한 명이 죽어야 한다고? 말로 설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스윽. 이내 베르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얘가 하고 있는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얀델 씨…….”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 “이대로면, 공략은 실패하는 거죠?” 그래, 나로 결정한 거구나. 도무지 깰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혼자서라도 살아서 나가려 마음먹은 거구나. 스르륵.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그러니까 모두 넘어가지 말아요.” 부드러운 손길이 뺨을 어루만졌다. ‘…응?’ 다시금 눈을 뜨자, 본인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댄 베르실이 보였다. 등을 지고 있는 드레드피어에게는 보이지 않을 각도. “저는 여러 번 잘못된 선택을 해왔어요.” 아니, 잠깐만. “이게 당연한 거라고, 다른 누구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이런 내가 똑똑한 거라고.” 뭐라 입을 열려 했으나, 입이 열릴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항상 그 결과는 좋지 못했죠.” 베르실이 내 뺨을 만지던 손을 뗐다. “이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요.” 아니, 그러면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됐잖아. 어쩌면 그게 이 상황의 공략법일지도 모르는데.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말했잖아요. 제가 안 하면 결국 누군가 먼저 할 거라고.” 그 한마디에 납득을 해버렸다. “근데 이거, 아무도 배신하면 안 되는 컨셉 같아서요.” 푸욱-! 그녀의 등을 떠민 것은 우리였다. *** 「첫 번째 순례자가 사망하였습니다.」 「생존한 순례자들의 모든 수치가 +400 상승합니다.」 *** 툭. 힘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육신. 이를 보며 놈이 짧게 감상을 읊조렸다. “……병신 같은 년이었군.” 그 한마디에 머리로 피가 몰렸다. 머리가 멍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머릿속의 무언가가 픽하고 소리를 내며 꺼질 것만 같은 감각. ‘정말로…….’ 죽었다고……? 한계까지 술을 마신 것처럼 속에서 무언가가 훅 올라온다. 삐이이이이이이- 이명 소리 사이로 놈의 음성이 들렸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이내 놈의 몸에서 새까만 아지랑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가 [처형의 시간]을 시전했습니다.」 「대상을 향한 공포 수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살기와 비슷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 “…….” 위기를 직감한 육체의 생체신호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머릿속에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사로잡힌다. [도망쳐.] 귓속에서는 누군가가 계속 그렇게 속삭였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쥐어라.” 만약, 베르실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믿으며 끝까지 저 단검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런 상황을 우려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지 모른다. 항상 제작자의 의도를 먼저 살피는. [던전앤스톤]의 플레이어답게. 스르륵. 바닥을 물들인 핏물이 웅덩이를 만들며 흐른다. 그리고…… 지이이잉-! 흐르던 핏물이 동상에 맞닿은 순간. 「미지의 존재가 고귀한 순례자의 영혼을 보듬어 안습니다.」 「제단이 활성화됩니다.」 균열이라도 열리듯 동굴 전체가 진동했다. 드드드드드! 석상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빛무리. 「신뢰의 빛이 내면에 깃든 공포를 몰아냅니다.」 그와 동시에, 몸을 구속하고 있던 기운이 제거됐다. 타닷. 즉시 떨어진 무기를 쥐며 일어섰다. 놈은 그런 우리를 보며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을 뿐, 경계하는 눈빛은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거 같으냐?” 글쎄, 그건 아직 모르지. 일단 패턴 하나를 넘긴 건 확실하니까. ‘무슨 그딴 스킬이 다 있어?’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역겨운 스킬이었다. ‘믿어라’ 한마디로 동료를 배신하면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믿게 만들다니? 사람 농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가 이 동굴을 살아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너의 순수를 증명하는 것뿐.” 뭐래, 이제 와서 그걸 누가 믿는다고. “아저씨,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왔어요.” 그래? 다행히 나 한 명만 버프를 받은 게 아닌가 보네. “아이나르, 베르실을 챙겨라.” “……알겠다.” 아이나르가 군말없이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 그때.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휘이익. 이곳까지 오며 상대한 제국 병사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신속한 일격. 다만, 제단이 활성화되며 신체 능력이 확연히 상승한 덕일까? 눈으로 궤도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리라…….’ 목이나 심장을 노리지 않는 걸 보아, 놈은 아직도 배신 놀이를 이어갈 생각을 접지 못한 듯한데……. 타닷! 오러를 방패로 막는 대신, 위로 높이 점프해 검을 피한다. 그리고 메이스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친다. 이런 기민한 움직임은 예상치 못했는지, 놈은 피하지 못했다. 퍼억-! 근데, 이 새끼 단단하기까지 하네. 역시 이 상태로도 이기는 건 힘들 거 같다. 사실 이번에 때린 것도 방심한 틈을 노린 게 컸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 활화산처럼 솟아나는 욕구를 참아내며 외친다. “뭣들 하나, 튀어라!” 아직은 정면에서 맞붙을 때가 아니라는 판단. 스탯이 크게 증가한 덕에 공동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제국 병사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으, 으아아아악!” 코뿔소처럼 돌진하는 아이나르의 돌진을 막아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병사들. 서둘러 그 뒤를 따라 공동을 빠져나갔다. “비켜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놈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동속도는……. ‘우리보다 조금 더 빠른 정도.’ 즉, 이 상태가 유지되면 100% 붙잡힌다는 뜻. 뭔가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놈이 바로 뒤에 따라붙기 전까지 온힘을 다해 뛰며 생각하고 생각했다. 스탯이 갑자기 왜 올랐지? 그냥 제단이 활성화된 덕분에 주어진 버프인가? 아니, 어쩌면 다른 조건이 있을 수도. ‘애초에, 클리어 조건이 뭐지?’ 술래잡기인가? 음, 어쩌면 놈을 피해 달아나다 보면 스탯이 오르고, 결국 저 새끼를 잡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일 수도. 무엇 하나 확실치 않지만, 일단 목표를 설정했다. “…어, 어디로 가야 하죠?” “동굴 밖으로 나간다.” 이 동굴을 떠나는 것. 어쩌면 제단을 활성화하고 탈출하는 것이 클리어의 조건일지도 모른단 판단이었는데……. 이 역시 쉽지는 않다. “…아저씨, 이대로 계속 도망칠 수 없어요.” 지금 상태가 유지되면 이제 곧 따라잡힐 터. 아이나르와 에르웬이 하나씩 의견을 냈다. “비요른, 싸우자. 마법사의 복수를 해야 한다!” “아뇨. 셋이서도 못 이겨요. 제가 한번 유인을 해볼게요.” 싸우자는 것과 미끼를 쓰자는 것. 확실히, 나쁘진 않긴 한데……. “…좋다. 대신 내가 남아서 유인하겠다.” “아뇨. 제가 해야 돼요. 혼자서 움직이면 가능할 것도 같은 데다가……. 사실 저도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능력이 있거든요.” “능력?” “저는 다들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어요. 저기서 재회하기 전까지는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포탈을 감지하는 인도자의 권능 같은 건가? 일단 저 능력이면 유인을 하고 나서도 합류하는 게 수월할 거 같은데……. “믿어주세요. 제가 적임자예요.” 어떻게 해야 할까. 뭐가 가장 나은 선택일까. 늘 그렇듯 주어진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치지 마라.” 내 대답을 들은 에르웬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 마라는 듯 웃으며 천천히 속도를 늦출 뿐. *** “허억, 허억…….” 최대한 규칙적으로 호흡을 이어가며 걸음을 내뻗는다. 에르웬과 헤어지고서 어느덧 두 시간쯤 흐른 시각. ‘슬슬 중반부인데…….’ 동굴 입구에서 중심부까지, 거진 8시간에 걸렸던 거리를 두 시간 만에 절반 이상 주파했다. ‘이 정도 육체 수치면, 평상시의 3분의 1은 되는 거 같은데…….’ 물론 스탯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고, 스킬 자체가 없기에 아직 놈을 상대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문제는… 스탯이 더 오를 기미가 없단 건데.’ 스탯이 오르는 건 그냥 한 번뿐인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이나르와 함께 계속해서 동굴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에르웬, 얘는 대체 언제 오려는 거야? 뭔가 잘못되진 않았겠지?’ 슬며시 그러한 불안이 피어오르던 때였다. 「두번째 순례자가 사망하였습니다.」 「생존한 순례자들의 모든 수치가 +400 상승합니다.」 한 번 더 스탯이 증가했다. 487화 순례자 (5) “순례자다, 어서 막—!” 콰직-! 나타나는 족족 제국 병사들의 머리를 깨부수며 통로를 내달린다. 다섯 명을 잡을 때마다 스탯이 조금씩 오르는 건 여전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 속도면 이제 1시간 안에 도착할 거 같은데…….’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어지러운 마음은 쉬이 정리될 기미가 없다. “비요른… 에르웬은 대체 언제 오는 거냐?” 아이나르조차 이렇게 걱정을 할 정도인데, 과연 나는 어떻겠는가. “…….”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혹시 다치거나, 죽은 건… 아니겠지? 초조하다 못해 마음이 타들어간다. 그러나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달리 없었다. 그저 여태까지 그러했듯, 에르웬이 올 것이라 믿고 달려 나가는 것 외에는. 「캐릭터가 제국 병사 사백오를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제국 병사 사백십을 처치했습니다.」 「모든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캐릭터가 제국 병사 사백십오를 처치했…….」 「…….」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30분.’ 예상 도착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며, 에르웬을 향한 걱정은 더욱 크기를 키워가던 그때. 툭.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덜리던 나는 발을 멈췄다. “말했지 않나, 순례자여.” “…….” “너희가 살아서 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놈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뒤에서 쫓아온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놈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우리는 스탯도 올라서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는데. ‘그걸… 따라잡았다고?’ 위화감이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이나르, 싸울 준비를 해라.” 이내 내 명령이 떨어지자, 아이나르도 지금까지 고이 잘 업고 있던 동료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놨다. “…잠시 쉬고 있어라, 마법사.” 그런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드피어가 차갑게 조소를 날렸다. “어리석은 것들.” 뭐래. 보자마자 안 튄 건 그냥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뿐인데. ‘지금 스탯이면 충분히 가능해.’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몸을 낮춘다. 뭐, 습관일 뿐 유의미한 태세는 아니다. 오러를 쓰는 기사 앞에서 싸구려 철제 방패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렇게 잠시 정적 속에서 대치 구도가 이어지던 때. 놈이 툭 뱉듯이 중얼거렸다. “내 제안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새끼는 진짜 미친놈인가? 설마 아직도 그거에 미련을 못 버렸을 줄이야. 다만, 놈이 대화를 원하는 듯했기에 나도 일단 그 기회를 틈 타 입을 열었다. “……에르웬은 어떻게 됐지?” 뜀박질을 이어가던 몇 시간 동안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의문과 불안. 놈은 짧게 답했다. “그 여자 순례자라면, 죽었다.” “지랄.” “내면의 외침을 외면하는군.” 거, 괜히 물어봤네. 배신성애자 컨셉인 보스몹인 만큼, 저 말을 순진하게 믿는 것은 미련할 터. “믿음은 결코 진실을 바꾸지 못한다. 너희가 아무리 정의라 믿어도, 더러운 배신자에 불과하—.”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아이나르!” 신호를 외침과 동시에 앞으로 대시. 거리가 좁혀지기 무섭게 놈이 오러를 뽑아내며 반격했다. 따라서……. 타닷. 반경 내에 들어서기 전에 백스텝. 내게 검을 휘두른 틈을 타 아이나르가 놈과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태산의 기세로 검을 내리친 즉시, 놈이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콰앙-! 놈이 있던 자리를 지나쳐 바닥에 처박히는 검. 다만 실패한 공격이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치고 빠지고를 번갈아 하며 자세를 무너뜨리고, 더 커진 빈틈에 무기를 찔러 넣는 것. 그게 바로 합격술의 기본이니까. 타닷. 아이나르의 검을 피하는 순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방패를 놈의 상판대기에 던졌다. 그리고 시야가 가려진 즉시. 타닷. 재빨리 대시해 메이스를 휘두른다. 물론 놈은 이번에도 반응을 했다. “……!” 메이스의 경로에 끼어드는 검. 이대로 부딪치면 철제 메이스가 두동강 날 게 분명했기에. 스으윽. 억지로 힘을 줘 궤도를 비튼다. 후웅-! 이내 메이스가 검과 맞닿지 않은 채 허공을 가른 즉시. 푸욱-! 아이나르가 내찌른 검이 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오케이, 그럼 선취점은 따낸 셈인가.’ 물론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여기서 물러나며 시간을 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전투란, 기본적으로 수 싸움이다. 공격한다. 막는다. 피한다. 찰나의 순간,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며 이것에 따라 다음 선택이 바뀐다. 그렇기에 우리는 착실하게 놈의 선택지를 제한해나갔다. 타닷. 수세에 몰린 놈은 막고, 피하는 것에 치중했다. 리스크가 커지며 공격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다만 막거나, 피한단 선택마저 자유롭진 못했다. ‘왼쪽.’ 그래, 그 자세면 왼쪽으로 피할 줄 알았지. 퍼억-!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연격에 자세가 틀어지고, 더 큰 손해를 줄이기 위해 강제로 차선책을 고른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다음 수를 읽기가 쉬워지고, 상대는 그만큼 더 선택지를 잃어간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하지만……. “…….” 아무리 몰아붙여도 방심할 수는 없다. 그야 오러라는 한 방까지 갖고 있는 놈인 데다가. 결국 전투란 반드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바로 이렇게. 휘익-! 이번에도 치는 척만 하고 검에 닿기 전에 메이스의 궤도를 틀었지만, 나온 결과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 내가 할 행동을 예상한 것처럼 메이스를 따라 움직이는 검. 무기를 잃을 수 없다는 판단에 나는 허리 힘까지 써가며 억지로 한 번 더 궤도를 비틀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퍼억- 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복부에 발길질을 욱여넣었다. 여기까진 큰 피해가 없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반격을 하느라 놈도 크게 턴을 소모한 상황. 푸욱-! 아이나르의 검이 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푸욱-! 내 배에도 칼침이 박혔다. ‘아오, 따가워.’ 설마 거기서 그렇게 과감하게 나올 줄 몰랐는데. 내가 칼에 찔린 모습을 보았음에도 아이나르는 괜찮냐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베테랑답게 그저 한 번 더 공격을 이어갈 뿐. “흐아앗!” 나도 얼른 몸을 추스르고 전투에 복귀했다. 어차피 뒤에 물러나 있는다고 피가 멈추는 것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다치는가가 아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놈을 죽일 수 있는가이지. 만약, 이놈을 잡는 것으로 레이드가 끝나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부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살 떨리는 전투가 이어진다. 스탯이 이만큼이나 늘어나고, 둘이서 한 명을 상대하는 중이었으나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숫적 우세도 머지않아 사라졌고. “제국을 위하여……!” 꾸준하게 계속 어디선가 나타나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제국 병사들. 이놈들 때문에 전투 난이도가 확 올라갔지만, 그래도 장점은 있었다. 서걱-! 무기 리필이 됐거든. 스윽. 메이스가 잘려나간 즉시 주변에 쓰러진 병사 시체에서 무기 하나를 쥐어 다시금 달려든다. 검이든, 망치든, 메이스든. 형태는 가리지 않았다. 힘을 실어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길기만 하면 됐으니까. 콰앙-! 팔, 다리, 몸통, 어깨, 눈, 귀. 부위를 가리지 않고 내 몸이 망가질수록, 놈의 상태 역시 눈에 띄게 악화된다. 휘이익-! 기사의 기상이 묻어나던 검은 점차 기세를 잃고, 움직임 역시 둔화된다. 오러 역시 이전보다는 크기가 작아졌다. 팔 한쪽은 덜렁거렸고, 아이나르에게 두 방이나 찔린 왼쪽 다리는 제대로 쓰지 못해 절뚝거렸다. ‘이제 곧.’ 이긴다. 이 상태라면 우리보다 놈이 먼저 쓰러진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놈의 관자놀이를 망치로 후려쳤을 때였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의 생명력이 15% 미만입니다.」 폭탄이 터지듯 놈의 몸에서 피어난 충격에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뒤통수를 타고 전해진 충격에 눈앞이 흔들렸으나 얼른 몸을 일으켜 앞을 확인했다. “씨발.”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가 [영원한 악몽]을 시전했습니다.」 「모든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순식간에 부상을 치유한 놈이 멀쩡히 걸어나오며 내게 말했다. “제안은…….” “…….” “유효하다.” 유효하기는 지랄. 나는 역으로 되물었다. “혹시 넌…….” “…….” “부모가 앵무새인가?” 놈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칼로 내 배때기를 쑤실 뿐. “……니, 미럴, 게임…….” 그것을 끝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 「캐릭터의 생명력이 5% 미만입니다.」 「[기면증] 이 발동됩니다.」 「일시적으로 자연 재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캐릭터가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 캄캄한 어둠 속. 흐르는 강물 위에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생각한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 이 새끼는 대체 어떻게 잡으라고 만든 걸까? 답은 간단하다. 불가능하다. 스탯이 확 오른 덕에 잡을 수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함정일 뿐. 애초에 잡으라고 만들어 둔 놈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틀렸어.’ 내 판단이 틀렸다. 전투를 할 게 아니라, 그냥 보자마자 도망쳐서 동굴 밖으로 향했어야 한다. ‘처음부터 술래잡기였던 거지.’ 스탯을 올려준 건 이놈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정을 넣어준 것일 뿐. 정면 승부는 처음부터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허억, 허억…….” 지금 오답을 고른 대가를 치르는 거겠지. 「캐릭터의 생명력이 15% 이상입니다.」 「[기절] 상태가 [마비]로 조정됩니다.」 「자연 재생력의 상승량이 소폭 감소합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아이나르에게 업혀 있었다. “잡아라……!” 뒤에서 들려오는 병사의 외침과 이를 피해 열심히 뜀박질을 이어가는 아이나르. “어? 비, 비요른……? 깬 거냐?” “…….” “괜찮은… 거냐! 내 말이 들리나?”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나는… 괜찮으니… 상황 설명, 부터…….” “아, 아! 그, 그렇지…….” 이내 아이나르는 달리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네가… 쓰러지고, 나서 갑자기… 동굴 전체가 번뜩하더니, 놈이 움직임… 을 멈췄다. 그 틈을 타서 나, 는 얼른 너… 를 업고 뛰기 시작… 했고…….” 놈이 멈췄다고? …제단의 효과인가? 모르겠다. 처음 겪는 히든피스기인데 시스템 로그도 없으니 뭐가 뭐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다. “시간… 은?” “모, 모르겠다. 5분? 그 정도 된 거 같은데…….” 내가 기절해 있던 시간은 약 5분. “그, 근데 몸은 괜찮은 거냐?” “괜찮… 다. 움직이지만, 않을 뿐…….” 지금 나는 어떤 상황인 걸까. 잠시 고민을 해보니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기면증].’ 생명력이 5% 이하로 떨어질 시 발동이 되는 패시브 스킬. 15%에서 [마비]로 바뀌고, 천천히 피가 차다가 30%에서 상태 이상이 해제되는 그것. ‘나한테도… 스킬이 있었구나.’ 베르실과 에르웬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시작 스킬이 하나 있었다. 패시브 스킬이라 인지하는 게 늦었지만. ‘그럼… 아이나르도 뭔가 하나가 있을 거 같은데…….’ 과연 얘 스킬은 무엇일까. 알 수 없지만 차분히 실험하며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왼, 쪽…….” “응?” “왼쪽이, 길이다…….” “아…….” 아이나르를 탄 채 방향을 지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있자니,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허억, 허억…….” 단순히 힘들어서 토해내는 것과는 다른 숨소리. “아이나르… 괜찮나?” “…괜, 찮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단지, 손을 못 쓰다 보, 니… 좀 다쳤을… 뿐. 신경 쓰지, 마라…….” 그 말에 뒤늦게 나는 의문을 가졌다. 아이나르는 나를 업고 있느라 양손을 쓰지 못한다. 하면, 제국 병사들은 어떻게 상대를 했을까? 운 좋게 정면에서 나타나는 놈들은 없던 건가? 그 해답을, 나는 머지않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더러운 순례자들아!” 우리가 향해가는 통로 정면에서 나타난 병사 무리. 이에 대한 아이나르의 선택은 간단했다. 멈추지 않는 것. 아니, 오히려 속도를 올리며 병사들에게 달려드는 것. 푸욱-! 양팔을 뒤로하며 훤히 드러난 몸에 예리한 병기들이 휘둘러졌지만, 급소만을 조심하며 그저 감내한다. 그리고 그 결과. 어깨. 팔. 다리. 세 곳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아이나르는 순식간에 병사들을 지나쳤다. 돌파당한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과 합류해 우리를 추격했고, 아이나르의 숨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거칠어졌다. “허억… 허억…….” 그 모습을 업힌 채로 지켜본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데 그런 내가 걱정이 됐을까. 아이나르가 내게 물었다. “비요른…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멈춰라.” 이건 너무 무모하다. 이 상태면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게 분명할뿐더러, 설령 도착을 하더라도 저 부상을 어떻게 치료할 건가? 포션도 없는 와중에? 차라리 나를 내려놓고 [기면증]이 풀릴 때까지 버텼다가 함께 움직이는 편이 현명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떠한 근거를 들던 아이나르는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어째… 서?” “네가 쓰러진, 순간에… 미래를… 봤으니까.” “……미래?” “마법사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그땐 그냥 헛것, 을 본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이게 내, 능력인… 것 같다.” 대체 뭘 봤기에 얘가 이러는 걸까. 몇 번을 물어봐도 아이나르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멈추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날, 믿어라.” “…….” “난…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다짐하듯 마지막 말을 읊조린 아이나르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앞에서 제국 병사가 나타나건 말건.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488화 순례자 (6) 각양각색의 특징을 지닌 탐지 능력들 중에는 예지 컨셉을 지닌 능력도 당연히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후회의 시곗바늘]이 있다. 9층 이상에서 루팅이 가능한 1등급 정수의 스킬. 효과는 간단하다. 게임 내에서는 이 스킬을 획득 시 동료가 죽었을 때 ‘후회의 기억이 시간을 역행합니다.’라는 문구가 뜨며 분기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음, 이렇게 보면 예지라 하긴 좀 그런가? 아무튼, 이 스킬은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만큼 단점도 뚜렷했다. ‘결속’ 상태의 동료여야만 한다는 발동 조건. 도시 기준으로 몇 달이 넘는 재사용 대기 시간. 그럼에도 주어진 3회라는 최대 사용 가능 횟수. 심지어 본인이 사망할 시에는 발동도 안 된다. 따라서……. ‘일단 이 스킬은 아니겠고.’ 현재 우리는 결속 상태도 아닌 데다가, 나눴던 대화를 보면 이미 최소 2번은 쓴 듯했으니 이 스킬일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제일 그럴듯한 건… 역시 그거려나.’ 이내 나는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를 추렸다. [불행의 선지자] 높은 입수 난이도를 지닌 6등급 패시브 스킬. 갖고 있으면 무작위 확률로 발동이 되며 시스템 로그를 통해 조언 비슷한 미래 정보를 받을 수 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불길한 환영이 선지자의 눈에 깃듭니다.」 「멀지 않은 미래, 비요른 얀델이 뒤따라 온 백인대장 드레드피어의 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그는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난 이 스킬을 정보 탐지 스킬로 분류했고, 실제로도 중반부에 그런 용도로 자주 사용했다. 함정의 유무, 몬스터의 종류와 특징 등을 먼저 알아낼 수 있단 것은 미개척 지역에서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느낌이겠지.’ 일단 스킬이 발동되면 정말 ‘환영’을 볼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선 몇 줄로 끝났던 정보를 직접 자기 눈으로 체험할 터. “허억… 허억…….” “…아이나르, 너는 혹시 내가 죽는 걸 본 거냐?” “…….”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다. 하지만 잠시간 움찔한 몸의 반응이, 내 질문의 대답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무리를…….’ 이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암만 설득을 해도 들어먹지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왼쪽.”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지시하는 것. 그리고……. 까드득. 이를 악무는 것.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맨몸으로 병사들을 뚫는 아이나르의 등에 업힌 채로 무력하게. 푸욱-! 다리에 화살이 박히고. “죽어라!” 날카로운 창끝에 살갗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 잡았다! 지금이다, 어서……!”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무슨 힘이!” 아이나르가 마침내 걸음을 멈춰세운 것은 그렇게 한참이나 더 처절한 돌진을 이어간 이후였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아니었다. 동굴 입구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았지만, 이제는 무리였거든. 나를 지키면서까지 나아가기엔. 툭. 부상이 쌓이며 속도가 늦춰지고, 이에 추격하던 병사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아이나르도 결국 무모한 돌진을 끝마쳤다. 그리고……. “걱정… 하나도,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나는 그런 뒷모습을 벽가에 앉은 채로 그저 하염없이 지켜만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을 베었을 때, 아이나르의 팔뚝에 도끼가 박혔다. 열셋, 열넷, 열다섯, 열일곱……. 열여덟 번째 병사를 해치웠을 때에는 창에 쇄골 부위가 찔렸고. 마흔셋, 마흔넷, 마흔다섯……. 마흔여섯 번째에서는 날아든 화살이 왼쪽 눈을 파고들었다. 일흔하나, 일흔둘, 일흔셋.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시체가 쌓인다. 백.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온몸에 화살이 박히고, 꿰뚫린 상처로 피를 쏟아내면서도 멀쩡히 서 있는 모습에 병사들은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 “…….”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저년도 지쳤다……! 물러서지 마라!” 병사들이 쌓인 시체를 밟아 넘으며 재차 무기를 휘둘러왔다. 백삼십. 아이나르가 나에게 사과의 말을 해왔다. “미안…….” “…….” “몸에, 힘이…….” 이내 아이나르가 쓰러지듯 내 위로 몸을 포갰다. 푸욱, 푸욱, 푸욱-! 내 동료의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이이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했고, 어지러워서 토가 나올 거 같았다. 푸욱, 푸욱, 푸욱— 삐이이이이이이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리고 그 영겁 같은 찰나가 얼마나 반복됐을까.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게 했던 몸이—.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캐릭터의 생명력이 30%에 도달했습니다.」 「상태 이상 [마비]가 해제됩니다.」 *** 손을 옆으로 뻗어 떨어진 무기 중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쥐었다. 그리고 아이나르의 몸을 밀치며 일어선 뒤. 후웅-! 무기를 크게 휘두른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며 약간의 공백이 생겼다. 그 틈에 얼른 아이나르를 업어들고서 뛰기 시작했다. 아까 날 업어든 아이나르가 그러했듯.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로 가득찬 통로를 내달린다. “마, 막아라!” 나를 저지하기 위해 휘둘러지는 무기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크고 작은 부상들이 몸에 쌓인다. 다만, 나는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저 무기가 아이나르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식한 탱커답게 몸으로 때우며 달려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캐릭터의 생명력이 15% 미만입니다.」 기껏 회복된 몸뚱이가 다시금 너덜너덜해졌지만, 포위는 뚫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그렇게 조금은 가질 수 있게 된 여유. 나는 내달리며 아이나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나르! 괜찮냐? 정신 차려라! 자면 안 된다! 어서 일어나—.”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잡혔다. “……비, 요른.” “……!” ……그래, 살아 있었구나. “다, 다행이다. 히, 힘들지? 그래도 좀만 버텨라! 10분! 아니 8분이면 된다!” 그러면 이 동굴을 나갈 수 있다. 물론 그게 클리어 조건일지는 모르지만, 탈출 난이도 자체가 말도 안 됐던 만큼 적어도 다음 챕터에는 회복 가능한 수단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좀만 더 버텨라. 그리 말을 이으려던 차, 아이나르가 말했다. “……놔, 라.”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발음이 뭉개지고 소리가 작아서 내가 잘못 들은 건가도 싶었다. 하지만……. “날, 두고… 가…….” …제대로 들은 게 맞구나. 왠지 화가 났지만, 환자에게까지 모진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보군.” “…….” “그러니까 그냥 가만 있어라.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내 말을 따르기로 했는지, 아니면 단지 그럴 힘도 남지 않았던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이나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불안은 마른 침과 함께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심장이 터지도록 앞으로 내달렸다. 입구가 다가오자 수풀의 냄새가 느껴지고, 새어들어온 광원에 의해 서서히 주변이 밝아졌다. 저 멀리서 눈부신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나르! 아이나르! 정신 차려라. 이제 곧 밖이다!” “…….” “대답 좀 하란 말이다!” “……조, 심.” 뭐라는 거야. 아무튼, 살아 있는 건 확인했으니 됐다. 그러니까 얼른 밖으로—. “……?” 이내 동굴 입구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구로 다가가 반투명한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툭. 동굴 입구가 막혀 있었다. “…………지랄하지 마.” 밖으로 탈출 하는 게 아니면 뭔데? 응? 잡는 게 불가능한 보스몹을 만들어둬놓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다니? “그럼 대체… 공략법이 뭐인 건데…….” 속으로 열심히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륵 무너지는 듯한 감각. “비, 요른…….” 다만, 나는 웃었다. “아… 아이나르? 걱정 마라! 이까짓 결계는 내가 금방 부숴 없앨 테니까!”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부수고 나아가는 것이 바바리안의 정신. 콰앙! 콰앙! 콰앙! 결계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른다. “비요, 른…….” 애석하게도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것도 바바리안으로서 갖춰야 할 미덕 중 하나라서 말이지. “그, 만…….” 주먹, 발, 이마. 체중을 실어 어깨로 들이받는 등,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결계를 향해 달려든다. 콰아아앙-! 거, 파괴 불괴 옵션이라도 걸어놨나. ‘오케이, 그럼 이쯤에서 플랜 B.’ 전략을 바꿔 결계 옆의 벽면을 공략했다. 아무리 견고한 철문이라도 문이 달린 돌벽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거기에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만, 하고…….” 콰앙-! “이제, 가라…….” “…….” “놈이, 오기 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콰아앙-! 화풀이 하듯 꿈쩍도 않는 벽에 이마를 내리쳤다. 조금이라도 개운해지긴커녕 여전히 속이 갑갑했다. “여기다……!” 그때 뒤편에서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거리를 벌려뒀는데 벌써?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는 심정으로 즉시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가장 앞에 있던 놈을 벽에 처박아 짓이겼고, 들고 있던 무기를 빼앗은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학살을 시작했다. “…아, 악마다!” “물러서지 마라!” “제국을 위하여……!”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 ‘다섯 놈.’ 여섯 놈, 일곱 놈, 여덟 놈……. ‘…몇 명째였더라?’ 모르겠으니, 다시 처음부터 한 놈, 두 놈, 세 놈……. 콰직, 콰직, 콰직-!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이 조용했다. 시체만이 가득했고,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나는 등을 돌렸다. “……아이나르.” 헐레벌떡 다가가 확인해보니 다행히 아이나르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길 듯 희미하고 거칠게. “비요, 른…….” 내가 온 것을 느꼈는지 아이나르가 파들파들 떨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다든가, 걱정 말라든가,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든가. 그런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얀델의, 아들… 비요른.”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이나르가 힘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 소중, 한… 친구…….” 심장에 두꺼운 말뚝이 박히는 듯했다. 소중한 친구라니……. “넌, 위대한… 전사가… 될 거다…….” 겨우겨우 참아왔던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 *** 아픈 진실과 달콤한 거짓. 죽음을 앞둔 이에게 둘 중 무엇이 옳은지는 명백하다 하지만. ‘소중한 친구라니…….’ 그 쉬운 사리분별을 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열린다. 그것은 고백이자 사죄였다. “나는…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진짜 비요른 얀델은 따로 있다고. 나는 녀석의 몸을 빼앗은 악령일 뿐이라고. 그래, 네가 말했던 마주친 즉시 머리를 처부셔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악령. 그게… 바로 나라고. 초점 없이 나를 바라보는 아이나르를 보며 그러한 말들을 한참이나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 더 이상 아이나르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뜨여진 눈은 여전히 나를 향했으나,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세번째 순례자가 사망하였습니다.」 아이나르가 죽었다. 또한, 이와 함께. 「생존한 순례자들의 모든 수치가 +400 상승합니다.」 한 번 더 능력치가 증가했다. 이를 통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당신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어떨 때 스탯이 오르는 것인지. 그리고……. 「특수 조건 - 완벽한 결속이 충족되었습니다.」 「모든 수치가 3배 상승합니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를 처치하십시오.」 이 숨겨진 페이즈의 공략법이 무엇이었는지. 489화 순례자 (7) 후회가 밀려든다. ‘계층군주 레이드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도 그냥 기여도에 따라 보상을 나눠 가졌으면. 아예 혼돈의 군주를 손도 대지 않았으면. 아니, 애초에……. ‘그 게임을 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꽈아악,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회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후회할 때도 아니고 말이지.’ 스탯이 상승하는 방식을 깨닫고 난 후에 한 가지 떠오른 가능성이 존재했다. 따라서. 스윽. 나는 시체로 가득찬 통로 너머를 응시했다. 터벅, 터벅. 놈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됐네. 이제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놈이 모습을 드러낸 즉시.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대시 했다. 타닷-! 근력과 내성 위주의 캐릭터였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 지면을 박찬 것과 놈의 앞에 도달한 것은 거의 동시라 봐도 무방했다. 또한. 퍼억-! 더 이상 무기는 필요 없었다. 이미 이 몸뚱이 자체가 하나의 무기였으니까. 그깟 철제 무기로는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한. 퍼억-! 주먹을 휘둘러 놈의 면상에 꽂아 넣는다. 후웅-! 놈이 오러를 휘감은 칼을 휘두르며 응전했으나 내 눈에는 굼벵이를 삶아 먹은 듯 느리게 보였다. 스윽. 피해 준 뒤 다시 거리를 좁혀 펀치 원투쓰리. 마치 치트 키를 쓴 기분이다. 스킬은 존재치 않지만, 기본 스탯만 놓고 보면 풀 컨디션에서 [거대화]를 쓴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느낌. ‘지금 상태면 오러에 맞아도 별로 안 다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훤히 보이는 검에 맞아 줄 이유는 없기에 거리를 조절하며 일방적으로 놈을 구타했다. 퍼억, 퍼억, 퍼억, 퍼억-! 그렇게 많이 때릴 필요도 없었다. 다 합쳐서 한 열 방쯤 때렸을까? 놈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퍼억, 퍼억-! 딱 봐도 아까 궁지에 몰았을 때보다 훨씬 더 처참한 상태. 그러나 놈은 아까처럼 회복하지 않았다. 이에 내 가설이 들어맞았을 확률이 더욱 높아졌다. ‘그 회복기가 한 번만 쓸 수 있는 스킬이라거나 하는 경우의 수도 있기는 하지만…….’ 내 예상대로, 만약 이놈이 혼자 남았을 때만 죽일 수 있는 보스 몬스터인 것이라면. ‘어쩌면.’ 전부 늦어 버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일념을 담아 한 번 더 주먹을 내리친 순간. 콰직-! 놈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으스러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100」 「계층군주 처치 보너스. EXP +15」 경험치가 들어오는 감각과 함께 짓이겨진 놈의 몸이 빛무리로 변해 흩어진다. ‘…끝, 이라고?’ 설마 전부 헛된 기대였던 건가? 그런 생각에 몸이 굳던 때. 「당신은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순례자가 패배를 인정합니다.」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기억의 파편이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너지는 동굴을 피해 달아나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드드드드드드드-! 동굴 내부는 물론이고, 동굴 바깥에서 눈부신 빛을 쏘아 내는 하늘부터 시작해 녹색의 수풀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마치 마물이 죽었을 때처럼. 솨아아아아아-. 형형색색의 빛깔로 잘게 부서져 흩어지는 세계. 이윽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뒤에 나를 반긴 것은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의 공간. 화르륵-! 불이 붙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밝아졌다. “…….” 장소는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벽에 매달린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거렸고, 그 가운데로 돌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이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다가가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쓰여 있는 것은 고대어였으나 어째선지 문제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공포라는 감정을 그려 내야 한다면, 난 주저 않고 그의 얼굴을 백지 위에 담아낼 것이다. 백인대장 드레드피어. 나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준 존재…….] 집중해서 글을 읽고 있자니, 눈앞이 번뜩이며 글자가 흐려졌다.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경험이었다. [내가 그와 만난 것은 위대한 대업의 완수를 목전에 둔 순간이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최후의 순간에 나는 누구보다 위대하게 죽겠다. 늘 그런 다짐을 했지만, 망상과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 “나 드레드피어가 약속하겠다. 더러운 순례자를 죽여 순수를 증명한 자는 모든 죄를 사하겠노라고.” 과업을 목전에 두고서 실패한 우리에게 그는 간교한 제안을 꺼냈다. 물론 누구도 그 제안을 믿지 않았다. 다섯 명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눈을 감고 위대한 최후를 기다렸고, 그렇게 고귀한 정적이 동굴 속을 가득 채웠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정적 속에서 심장은 삶을 갈망하듯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이렇게 죽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죽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동료들을 배신하는 건……. “믿어라.” 참 이상한 일이다. 저 짧은 한 마디가 왜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지? “…….”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떠 보았다. 임무를 부여받고 함께 긴 여정을 함께해 온 여인도 나처럼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두근-! 저 여자는 유혹에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제대로 된 근거는 없지만 틀림없다.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두근두근두근두근. 머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눈앞은 흐릿했다. 씨익. 그때 여자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히 불길했다. 한번 싹튼 의심은 두려움을 갉아먹으며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가고만 있었다. [역시… 죽인다면 저 녀석이 좋겠지…….] 그러던 때, 불현듯 여자의 속마음이 들렸다. 단순히 환청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저 여자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지막 술자리에서는 살짝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인가? 무려 대지모의 영령이 깃든 공간. 계시… 이건 대지모의 계시가 분명하다. 어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저 여자의 사악한 속마음을 내게 들려준 것이다. 어느새 나는 저 여자가 배신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제물로 나를 바치려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후우, 후우, 후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단검을 집어 든 상태였다. 눈이 마주친 여자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방금 고, 고민했지……? 나, 나를 죽일지 말지…….”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거, 거짓말 마! 나, 나는 다 알 수 있어……! 확실하게 들었다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단검을 찔러 넣었다. 동료들이 증오의 말을 흩뿌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이 여자가 먼저 했을 테니까. “푸하하, 푸하하하하핫!” 백인대장 드레드피어. 그는 그런 날 보며 진심으로 기쁜 듯 폭소했다. 그리고 장난스레 말하였다. “잘했다. 그럼 이 다음엔 누구를 찌를 거지?” 나는 잔뜩 흥분한 몸을 벌벌 떨며 되물었다. “하, 한 명만… 찌, 찌르면… 살려 준다고…….” “물론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괜찮겠나? 네가 단검을 내려놓으면, 나는 이들 역시 그냥 보내 줄 생각인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속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심장이 뛰었다. 동료들은 그런 날 보며 외쳤다. 놈의 수작에 넘어가지 말라고.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서 명예롭게 그분의 품에 안기자고. 당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설득에도 자꾸 불길한 미래가 그려졌다. 시작은 망상이었으나, 그 망상을 진실로 믿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꽈악. 끝내 나는 단검을 내려놓지 못했다. 푸욱-! 정신을 차렸을 땐, 나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이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나는 그에게 이제 살려 주는 거냐고 물었고, 그는 답했다. 가라고. 살려 주겠노라고.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동굴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아, 아니야……. 나, 나는… 아니야…….” 새로운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푸욱-! 동료들을 해친 그 단검으로 나 자신을 찔렀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멀리서 백인대장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 좋은 재료가 될 거라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더니 마법사를 불렀다. 마법사가 죽어 가는 내 몸에 알 수 없는 약물을 흩뿌렸다. 치이이이이익-! 타락한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 그 영겁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내 영혼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 기운은 그저 위로할 뿐, 산산조각 난 내 영혼을 이어 붙일 수 없었다. “후우… 다 끝났습니다.” 그렇게 나는 비루한 인간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됐다. 인간을 초월한 무한한 힘과 권능을 지녔으나, 욕망과 감정만이 남은 빈 껍데기와도 같은 존재. “…특이한 경우군요.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듯한데.” “그럴 리가.” 마법사의 말에 그는 애써 두려움을 감추며 내게 다가와 물었다. “자, 말해라. 네 이름이 무엇이지?” 나는 대답했다. “드레드피어.” “…뭐? 그건 내 이름—.” 와그작-.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 「캐릭터가 이름 모를 순례자의 기억 파편을 넘겨받았습니다.」 「고대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습니다.」 *** 잠시간 꿈을 꾼 듯한 단편적인 기억. 하나 그럼에도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순간의 감정과 감각. 화르륵-!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책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이윽고 재가 되어 흩날렸다. 스으윽. 불현듯 느껴진 인기척에 등을 돌리자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를 노려보는 녀석이 보였다. “드레드피어.” 아니, 이제 이름 모를 순례자라고 해야 하나? 마지막에 힘을 얻자마자 그놈을 씹어 삼키고, 그놈의 이름을 빼앗았으니. ‘…뭐가 대체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혼란스러웠다. 이미 레이드가 끝났다. 분명 아까 경험치가 들어오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하면, 내 앞에 있는 이놈은 대체 뭘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경계하며 살피던 사이 놈의 입이 열렸다. “너희는…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던 것이냐?” 일단 뭘 묻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나도 저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니까. 이놈 입장에서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겠지. 우리는 이놈처럼 단순히 공포로 인한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본 것도 아니었지 않은가. 불길한 미래를 볼 수 있는 [불행의 선지자]. 거기에 남의 감정을 읽는 스킬까지 줘서 배신을 부추기는 환경을 구축했다. 한데 이게 끝이 아니다. 백인대장은 본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게 만드는 스킬을 썼으며, 싸워서 겨우 이기는가 싶던 순간에는 말도 안 되는 능력으로 풀 피가 됐다. 하지만……. “우리 중엔 너처럼 나약한 새끼는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내 거침없는 답변에 녀석은 조용히 끄덕였다. “그런가…….”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보스 몬스터와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기에 굉장히 낯설었다. 그러나 다 제쳐 두고서 확인할 사안이 있었다. “됐고, 이제 말해.” 모두가 죽고 나서 떠올린 하나의 가능성. “사실은 전부 살아 있는 거지?” “답하기 전에, 먼저 묻겠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였지?” “설계 자체가 혼자 남아야지만 깰 수 있도록 돼 있었으니까.” 이건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던전 앤 스톤]을 10년 가까이 해 왔지만, 전원 생존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보스는 단 하나도 존재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놈의 컨셉도 단서 중 하나였다. 공포이니 증오니 뭐니 하지만, 결국 등장할 때 나오는 문구는 ‘믿음을 시험한다’였지 않은가. “…실로 놀랍구나.” 내 설명을 들은 녀석이 묘한 탄성을 흘렸다. “어렴풋이나마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다니.” 법칙은 무슨. 그냥 경험에 의존한 빅데이터인데. “아무튼, 그래서 대답은?” 다시금 묻자, 마침내 놈도 대답을 해 주었다. “그것은 너의 선택에 달렸다.” 예상한 답변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래, 정말 다들 그대로 죽어 버린 건 아니었구나. “…말해라. 선택이라니,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놈이 앙상한 손을 내밀어 펼쳤다. 그 즉시 주변이 밝혀지며 두 개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없는 순례자가 당신에게 제안합니다.」 놈이 제시한 선택지는 두 개였다. “저 문을 통해 나가면 너는 이곳에서 잃은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랜 악몽에서 깨어나듯.” “반대로 저 문으로 나가면?” “모든 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다만, 잃은 것 이상의 무언가를 새로이 얻게 되겠지.” 후, 얘는 지치지도 않나? 컨셉은 알겠는데, 마지막까지 이 지랄을 하네. 나는 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여기서 네 대가리를 깨부수면?” 온갖 히든피스로 가득하던 게임의 플레이어라면 응당 궁금해할 수밖에 없을 부분. 놈은 나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다가 답했다. “더욱더 많은 것을 얻겠지.” “…….” “그 또한 이 세계의 규칙이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490화 선전포고 (1) 플레이어로서의 호기심과 놈을 향한 악감정으로 세 번째 선택지를 물었을 뿐, 사실 이미 내가 내릴 결정은 정해져 있다. 다른 문을 골랐을 때 뭘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무엇을 준다 한들, 믿을 수 있는 세 명의 동료의 값어치보다 클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저걸 나 혼자서 잡는 건 불가능할 거 같고 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놈을 쓰윽 살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나와는 전혀 다른 생물을 보는 듯하달까.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그래, 나는 저 문으로 나갈 거다.” 그리 말하며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자, 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았다. 내 선택을 존중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터벅. 이내 문 앞에 멈춰 선 나는 고개 돌려 놈에게 물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그냥 이대로 가버리면 계속 신경 쓰일 거 같단 말이지.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네 수작에 넘어가 배신했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였지?” 나조차도 처음 겪어 보는 히든 피스. 일단 어찌어찌 잘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내심 계속 그 부분이 궁금했다. 다행히 놈은 흔쾌히 답해주었다. “정해진 섭리에 따라, 나의 분신이 힘을 얻었을 것이다.” “…역시 그런 식이었군.” 어쩐지 최대한 살려놓고 배신을 종용하더라니. 슬슬 이 공간의 설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결국 최후에는 혼자서 보스전을 펼쳐야 하는데, 배신이 발생했을 시엔 그 보스전 난이도가 상승하는 것. ‘그리고 보스전에서 지면 석문이고 뭐고 그냥 그대로 게임 오버였겠지.’ 게임이었으면 호감도와 신뢰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었어야지만 이런 방식으로 클리어를 할 수 있었으려나? 아무튼, 덕분에 많은 의문이 풀렸다. 다만,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묻기로 했다. “너는… 대체 뭐지?” “무슨 의미인가?” “무슨 뜻인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미궁 내에서 몬스터와 대화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랜만에 보는 생명체로군. 자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나?] 핏빛성채의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 [욕심에 사로잡힌 제국의 들개들이여. 내 오늘 너희를 징벌하리라.] 백색신전에서 만난 종말의 기사. [어느 누구도 모르는 거짓이라면……. 그게, 진실과 다를 게 뭐지?] 도플갱어 등등. 비슷한 경우가 여럿 있었으나, 그것은 결국 정해진 대사를 치는 느낌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머지않아 이성을 잃고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놈은 다르다. 명확한 주체가 있는 듯한 느낌. ‘게다가 아까 의미심장한 말도 했고 말이지…….’ 놈은 배신자가 나왔을 경우를 설명하며 분명 이렇게 말했다. 정해진 섭리에 따라, 나의 ‘분신’이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뭐라 딱 잘라 말은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게 된 이런저런 정보를 조합해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던전 앤 스톤]이 이 세계관을 토대로 제작된 게임인 것처럼. 미궁 역시 분명하게 무언가를 본 따 만들어졌다. 나는 조심스레 추측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혹시… 이 미궁에서 만난 마물들은 전부 원본이 따로 있는 거냐? 너도 원본인 거고?” 녀석은 침묵을 지키며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고민을 하는 듯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놈의 답변을 듣는 순간, 이 미궁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글쎄.” 놈이 오랜 침묵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너라면 언젠가 알아낼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놈과 나의 대화의 끝이었다. 쿵-!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무언가 툭 하고 내 등을 밀었다. *** 「당신은 미궁에 깃든 거대한 공포를 완벽하게 이겨냈습니다.」 「No.12 ‘신뢰’가 영구적으로 귀속됩니다.」 「이름 없는 순례자가 영원히 미궁에서 모습을 감춥니다.」 「특수 조건 - 일그러진 기억이 영구적으로 삭제됩니다.」 「감춰져 있던 지역이 개방됩니다.」 「최초로 달성된 업적입니다.」 「당신이 남긴 위대한 족적은 명예의 돌에 새겨져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 . .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꾹 닫힌 눈꺼풀 위로 얹어지는 따스한 빛. 멍하니 고개를 들어 눈을 뜨자 우중충한 하늘이 나를 반긴다.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이를 올려다보았다. “…….” 살아 돌아왔구나. 매번 느끼지만, 저 하늘을 볼 때면 어찌나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비요른 얀델이다.” “계층군주를 잡겠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됐으려나……?” “정말로 다섯 명이서 성공한 건 아니겠지……?” 나를 알아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한 탐험가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검문소로 향했다. 검문소에는 딱 한 명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훼방꾼들을 심문하기 위해 레이드 장소에서 빠져나가 있던 아멜리아였다. “……다행이다. 멀쩡히 돌아와서. 미궁이 닫힐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검문소 앞에서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날 발견하자마자 긴장이 탁 풀린 듯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뒤늦게 또 다른 걱정이 피어났을까. “사상자는?” 우리 쪽 상황을 전혀 모르던 아멜리아는 일의 성패보다는 피해를 먼저 확인하고자 했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없다. 아니… 없을 거다.” “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설명하기 복잡하다.” 일단 전부 살아 있을 거라고 듣기는 했는데,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아서 말이지. “잠시 기다리지.” 아멜리아는 본인도 궁금한 게 많을 터인데도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문소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나둘 동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은 에르웬이었다. “아, 아저씨…….” 검문소를 향해 뛰어오던 에르웬은 나를 발견하고 진이 다 빠졌는지, 맨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거… 꿈 아니죠……?” “걱정 마라. 틀림없는 현실이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하긴 얘 입장에서는 어그로를 끌다가 죽었는데 눈을 떠보니 깨어난 느낌이겠지. “전부 도착하면, 그때 설명해주마.” 그 말을 끝으로 머지않아 베르실 고울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걱정했지 않나.” “미, 미안해요. 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그, 근데 이거… 꿈 아닌 거죠……? 저, 저는 분명히 죽었는데…….” 마찬가지로 에르웬과 비슷한 반응을 내보이는 베르실. 이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죽었다니……?” “아까도 말했듯 설명하기 복잡하다. 이따가 다 모이면 한번에 얘기해주마.” “……알겠다.” 이후 발발 떠는 베르실을 진정시키며 한참을 더 검문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아이나르도 모습을 드러냈다. “비, 비요른……!!!!” 저 멀리서부터 소리를 내지르며 존재감을 내비치는 아이나르. 그제서야 나는 참아왔던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후우…….”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는 게. “……뭐, 뭐냐! 이게! 호, 혹시 전부 꿈이었던 거-냐?! 나는 분명 죽—!” 묘한 여운에 잠기기도 잠시, 나는 서둘러 아이나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읍! 으으읍! 윽윽!” “조용히 해라. 안 그래도 너 때문에 다들 여기만 보고 있으니까.” “…….” “우선 자리부터 옮기자. 그다음에 다 설명을 해줄 테니까.” 전부 모인 후에는 신속하게 검문소를 지나서 거리로 나왔다. 늘 그렇듯 검문소 앞은 탐험가들의 지인,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베르실, 컴멜비에 있는 자택으로 가려는데 괜찮나?” “저는 상관없어요.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기엔 그쪽이 더 안심이 될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럼 됐군.” 이후 우리는 공용 승강장으로 가서 귀족칸 마차를 타고 컴멜비로 향했다. 번화가에 살 때의 단점이었다. 7구역에 살 때는 그냥 걸어서 집까지 가면 됐는데. “단장님! 오셨습니까!” 이내 집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아우옌이 나와 우리를 반겨줬다. 집 안에서는 식욕을 돋게 하는 음식들 냄새로 가득했다. 우리가 올 시간에 맞춰 요리까지 해둔 거야? “고맙다. 근데 나눌 얘기가 있으니 잠깐 올라가 있겠나?” “…물론입니다. 편히 쉬시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아우옌이 방으로 올라간 다음에는 베르실에게 부탁해 음성 제어 마법을 활성화시켰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 물론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이나르와 나뿐이었다. “얀델 씨… 먹지만 말고 말해보세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아, 그렇지. 그 얘기부터 해야지. 나는 입에 넣은 것들만 마지막으로 꼭꼭 씹어 삼킨 뒤에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국 핵심은 이거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머지 동료들이 전부 죽어야지만 깰 수 있는 형식이었다는 거네요. 한 명만 살아남아 적을 무찔러도 모두 살아서 깨어날 수 있고.” “그래, 그렇지.” 마지막에 놈과 나눴던 대화를 제하고서 내가 겪은 일과 알아낸 것을 전부 설명해주자, 아멜리아가 묘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 괜찮은 거냐?” “응? 뭐가?” “네 성격상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텐데.” 아, 그거…….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괜찮다.” 중간에 멘탈이 나가는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굉장히 많았지만. 그래도 결과만 좋으면 됐지? 아무튼, 내 이야기는 이만하면 된 듯했기에 슬슬 나도 질문을 시작했다. “아멜리아, 너는 어떻게 됐나?” 심문 결과를 묻자 아멜리아의 안색이 크게 어두워졌다. “증거는 얻지 못했다. 그저 암시장에서 의뢰를 받았을 뿐, 의뢰주가 누구인지는 자기들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런가…….” 아쉽긴 해도 아멜리아를 탓할 부분은 아니었다. 뭐, 알미너스 백작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런지 그렇게 중요한 문제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 그리고 또…….” “…그리고?” “아니다. 이건 나중에 말해주겠다.” 얘가 이러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일단 나중에 말해준다니, 당장은 묻지 않고서 그냥 넘어갔다. “그나저나 에르웬, 너는 어떻게 됐던 거냐?” “……아, 저요? 죄송해요. 믿고 맡겨주셨는데, 도무지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떨쳐내도 정신을 차리면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더라고요. 마치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순간이동이라…….” 어쩌면 정말 그런 능력도 있었을지 모른다.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발동되는 식으로. “근데 그때는 이상했던 게, 죽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설득을 하더라고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서.” 에르웬이 말해준 이야기는 몇 문장으로 끝날 만큼 짧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담긴 고뇌와 마음고생을 나는 그 누구보다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에르웬, 고생했다.” “…아니에요.” 자, 그럼 이 다음은 베르실의 차례. “베르실 고울랜드.” “…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알겠지만, 다시는… 그러지 마라.” “네…….” 얘는 잠깐 혼내고만 넘어갔다. 진짜 중요한 건 이 다음이었으니까. “근데 아이나르…….” “……응?” 조심스레 말을 걸자, 우직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아이나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확인을 해야 했다. “그 있지 않냐… 마지막에…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있냐?” “어디까지 기억을 하냐니? 뭔 소리냐?” “내가 너한테 했던 말을 기억하냐는 뜻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했던 악령 고백을 제대로 들었냐는 뜻. 아이나르가 천연덕스럽게 포크로 고기를 집으며 답했다. “아, 그거……? 뭐라고 말을 하는 거 같기는 했는데… 모르겠다. 기억 안 난다. 그때는 기절하기 직전이라 잘 들리지도 않았고.” 흐음, 진짜인가?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봤으나 이상한 부분은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진짜 못 들은 모양이다. 하긴, 들었으면 진작에 노발대발 난리를 쳤겠지. “왜, 뭐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별말 아니었다.” “그래?” 얼른 화제를 마무리하자 아이나르는 그러려니 하며 넘어간 반면, 옆에 있던 여자들이 난리였다. “왜요, 저는 어떤 말이었을지 알 거 같은데.” “얀델, 이 녀석은 의외로 감성적이니까.” “………다들 왜 그러세요. 무안하시겠어요.” 뭐래……. 나는 대꾸하기보다는 그냥 밥이나 먹는 걸 택했고, 얘네들도 이제 좀 궁금증이 풀렸는지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며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때였다. “그나저나… 얀델 씨. 그 팔찌는 뭐예요? 원래도 끼고 계셨나요?” 베르실의 조심스러운 질문을 듣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뭐야, 이거…….” 낯선 팔찌가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 처음 보는 장비에 당황하기도 잠시. 에르웬과 아멜리아도 식사를 멈추고 중얼거렸다. “어… 전 먼저 말을 안 하시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설마 본인도 모르고 있던 걸 줄이야.” 이걸 왜 이제야 눈치챘지? “혹시 그게 보상인 거 아닌가요……? 다섯 명이서 토벌에 성공할 시 얻을 수 있다는… 그 보상요.” 베르실은 그런 추측을 내비쳤으나, 결과만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다. 정석적인 방법의 5인 클리어에서의 보상은 팔찌 같은 게 아니니까. 심지어 나는 보상 선택 때 동료를 살리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설마 전부 살려서 돌아오는 거 말고도 보상이 더 있던 건가?’ 어… 하긴, 생각해보면 그렇지? 10년 가까이 플레이를 하면서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꽁꽁 숨겨져 있던 히든피스다. 한데 고작 생환이 보상의 전부라니? 오히려 그쪽이 말이 안 되는 셈. 딸깍. 이후 팔찌를 벗어서 요목조목 살펴보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딱 보자마자 떠오르는 물건이 있었다. 하나 확실하지는 않았기에 베르실에게 건네 감정을 받아보았다. 레이븐도 못 딴 ‘특수 감정사’ 자격증을 가진 베르실은 몇 번 살펴보지도 않고서 이 팔찌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 이거……. 더블 넘버스예요…….” 그래, 진짜 그거인 거구나. 이런 보물들에 관심이 많던 아멜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잠깐, 더블 넘버스인 팔찌라면…….” 딱 하나뿐이다. No.12 신뢰. 설마 고정 보상인 건가? 히든피스 컨셉을 생각하면 이것보다 더 알맞은 아이템이 없을 거 같기는 한데. ‘……더블 넘버스가 고정 보상인 이벤트라니.’ 대체 발동 조건이 뭐지? 그것만 알면 템복사도 가능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딸랑, 딸랑. 현관문에 설치해 둔 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방문객이……?’ 일단 식사를 멈추고 문을 열자 모즐란 출신으로 추정되는 기사 무리가 보였다.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나쁜 일로 온 것은 아닌지, 눈을 마주치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 기사들. 얼른 인사를 받아주고서 용건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2시간 전, 명예의 돌에 새로운 위업이 적혀졌습니다.” 새로운 위업?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기사가 말했다. “얀델 남작님의 위업입니다.” 이제 보니, 보상이 팔찌 하나로 끝이 아니었던 모양. 서둘러 돌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개벽 157년, 바바리안족의 위대한 전사 비요른 얀델과 그의 동료들이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를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설마 해금 가능한 지역이 더 남아 있을 줄이야. 491화 선전포고 (2) 명예의 돌. 황도 카르논 영웅 광장 중심부에 자리한 초대형 사이즈의 비석. 최초의 차원 광장이 만들어졌을 때 함께 제작이 되었다고 알려진 이 비석에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나타나고 사라져 간 영웅들의 위업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이 600년 전이랬나……?’ 참고로 이 위업들은 사람이 적어 놓은 게 아니다. 잊혀진 고대 마법으로 제작된 기념비는 미궁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며 미궁 내에서 기록할 만한 위업이 달성되었을 때 스스로 빈자리에 기록을 새긴다. ‘……라는 게 설정이었지.’ 조금 얼떨떨하다. 사실 명예의 돌은 게임 속에선 그냥 흔하디흔한 장식물이었다. 그야 10년간 플레이하면서 작동이 된 적 없으니까.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이게 진짜 작동하는 장치였을 줄이야.’ 기사들의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광장에 도착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에 의해 통제가 된 광장 외곽엔 구경하러 온 인파로 가득했다. 황도 카르논의 시민들답게 귀족도 많았고, 대부분 멀끔한 차림이었다. “비요른 얀델! 비요른 얀델 남작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철창 속 원숭이라도 된 듯한 기분. 다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맨 위에 적혀 있는 기록은 이것이었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이 수정동굴의 모든 마물을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역사책에 의하면, 저 순간을 기점으로 2층으로 향하는 네 개의 포탈이 미궁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다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고. [수인족의 용맹한 전사 에몬 뮬마린과 그의 동료들이 해룡을 처치하고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 한 탐험가가 최초로 보스 몹을 잡았을 때,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섬이 새로이 나타났다. [위대한 항해사 오르델 피크마와 그의 동료들이 대해의 모든 마물을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누군가 6층을 완벽하게 공략했을 때, 7층으로 가는 두 개의 길목이 나타났으며. [인간 탐험가 루드엘 리메닌과 그의 동료들이 심연에 도달하며 모든 군주의 영혼이 깨어났다.] 계층군주가 소환되기 시작한 것도 10층에 처음 도달한 자가 나온 다음부터였고, 계층군주를 처치한 이후에는 해당 층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의 영웅 저거너트. 이 사람이 최초로 계층군주를 잡은 사람이랬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다. 게이머인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명예의 돌은 일종의 패치 노트 같은 것이다. 무언가 미궁에서 변화가 생길 때, 그때마다 이 돌은 위업이라 칭송하며 기록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바바리안족의 위대한 전사 비요른 얀델과 그의 동료들이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를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이건 정말로 새로운 지역이 열렸단 뜻이겠지. 이게 잘 된 일일까, 아닐까.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멍하니 비석을 살펴보던 때였다. “얀델 남작님! 이쪽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공무원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내게 그런 요청을 했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순간. 찰칵-! 사내가 쥐고 있던 영상 기록구에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좀 웃어주십시오! 역사 책에 담겨 영원히 기록될 모습 아닙니까!” 역사 책이라……. ‘그래, 이런 것도 뭐 나쁘진 않으려나?’ 지지 기반을 최대한 많이 쌓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이벤트는 긍정적이다. 그런 이해득실 계산을 끝마친 나는 [거대화]를 쓴 뒤 양팔을 뻗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한 번 더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찰칵-! 이 정도면 A컷이겠지?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 *** 명예의 돌에 이름을 올리는 것.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이슈였다. 나중에서야 신분을 알게 된 왕가 직속 사진사가 A컷을 뽑을 때까지 수없이 비석 앞에서 자세를 취해야 했고. [역시 낮에 찍은 그 사진이 최고인 거 같군요!] 사진을 다 찍은 다음에는 왕실 서기에게 불려가 심문 아닌 심문을 받아야 했다. 아니, 내가 귀족 신분만 아니었으면 분명 그건 심문이라 불러도 무방했을 것이다. [아, 예에… 말씀하실 수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탐험가에게 경험과 지식은 재산이다. 근데 내가 왜 그걸 공짜로 말해줘야 하지?] [……화, 확실히 미궁 법령에 의하면 남작님께 강요는 할 수 없습니다마는. 왕국, 더 나아가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재고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글쎄, 보니까 나 말고 다른 선배들도 전부 다 속속들이 답해주진 않은 거 같던데?] [그, 그건…….] [배가 고프군.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저녁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유명세를 얻어 ‘작은 발칸’이란 이명이 내게 주어졌을 때. 노아르크전에서 큰 공훈을 세웠을 때. 준남작이 되고, 남작이 되었을 때. 그때도 정말 하루아침에 주변 세상이 바뀐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비, 비요른 얀델이다……!” 그저 대로변을 걷고 있을 뿐인데 온갖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저 멀리서 목말 태운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한 번이라도 불러주길 청하고, 악수를 넘어 냅다 달려들어 안기는 사람도 있었다. ‘뭐야…….’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이곳은 황도 카르논이었으니까. 황도의 시민권을 얻은 상류층은 나를 흥미롭게 구경하되 우러러보지는 않았고, 귀족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거인! 거인이다!”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위대한 거인……!” “라프도니아에 무궁한 빛이 있으리!” 고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마치 극성팬처럼 흥분하며 소리를 내지른다. 생각을 해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영웅의 자질을 가진 자와, 영웅은 다르니까. “내가… 사는 시대에 이런 영웅이 탄생하다니.” 대현자 가브릴리우스. 심연 수색자 리메닌. 위대한 항해사 피크마. 철의 영웅 저거너트 등등. 명예의 돌에 기록된 선배들의 이름 값이라 봐도 좋았다. 역사에 남아 아직까지 회자되는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오른 동일 시대의 인물이라니?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는 기분이 들리라. 그래서 어지간하면 팬서비스를 해줬다. “여보! 나, 남작님께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불러줬어요……!” “이 아이는 크게 자랄 거야! 분명!” 이름 하여 바바리안 교황 모드. 결국 이 상태는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고, 마차를 탄 다음에도 따라오며 소리를 질러대는 탓에 눈을 붙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저택. “와아아아아아아아!!” 언제 소식이 여기까지 퍼졌는지. 집 앞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축제날처럼 소리를 질러댔는데, 이는 밤이 되고 모즐란 출신의 기사들이 방문해 사람들을 통제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후우…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눌어붙자, 커튼만 살짝 들어서 창밖을 보던 에르웬이 다가왔다. “이제 다 자러갔나 봐요.” “미치겠군. 오늘이 이 정도면 내일은 얼마나 심할지.” “그래도 생각보단 금방 진정될 거예요. 사람들은 의외로… 빨리 잊거든요.” “내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처럼?” “……네.” 이내 에르웬이 내 맞은편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아우옌이 차를 내왔다. “아, 고맙다.” “아닙니다. 단장님.” 아우옌의 목소리와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원래도 정중했으나, 오늘은 알 수 없는 존경심이 팍팍 뿜어져 나온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단장님을 만나 죄를 뉘우치고 따르게 된 것도 운명이겠지요. 가장 낮은 곳에서 단장님이 가시는 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이 새끼는 자기가 무슨 용사 파티의 짐꾼이라도 된 줄 아는 건가? 조금 웃겼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이후 아우옌이 떠나자 베르실과 아멜리아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아뇨.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길 잘했어요. 이 상황이면 내일 다시 오기도 힘들었을걸요? 애초에 피곤하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겠지.”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들 업적이니 영웅이니 하는데, 이게 명예의 돌에 적힐 정도의 일인가? 애당초 어쩌다보니 히든피스가 발동되며 첫 트라이를 하게 됐고, 그게 운 좋게 성공했을 뿐. 사실 힘든 거로 따지면 아이스록 원정 쪽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실제로도 그땐 수없이 사람이 죽어나갔고. ‘어려운 거로 따지면 그쪽이 훨씬 어려웠는데 말이지…….’ “아무튼, 그래서 좀 잤나?” “아뇨… 잠이 안 오더라고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이번 일정은 7일밖에 안 됐잖아요? 사실 마지막 날을 제하면 쉬는 일정이었고.” 음, 그건 그렇긴 하지. 원래 미궁에서 돌아오면 피곤해서 기절하는 게 보통인데, 나도 아직까지 비교적 멀쩡한 상태니. 우리 중 유일하게 아이나르만 곤히 자고 있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열심히 살펴봤는데요…….” 베르실이 운을 떼며 ‘No.12 신뢰’를 테이블에 올렸다. 기사들을 따라 카르논으로 가기 전에 내가 넘겨준 물건이었다. “일단 영혼에 귀속이 된 상태예요.” “귀속?” “네. 근데 좀 특이하게도 다중 귀속이에요. 이걸 쓸 수 있는 건, 저랑 프넬린 씨, 테르시아 씨, 그리고 얀델 씨인 거 같아요.” 베르실은 예시를 보여주듯 아멜리아의 팔목에 팔찌를 채웠고, 팔찌는 이음새가 맞물리지 않으며 그대로 떨어졌다. “시련을 받은 사람들만 쓸 수 있다는 거군.” “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죠.” “흐음…….” 고민에 잠긴 나를 보며 베르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저희 넷 중 한 명이 사용해야 할 거 같은데, 어쩌실 거죠?” 일단 ‘신뢰’는 범용성이 높은 아이템이다. 직업군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탱커, 딜러, 마법사, 신관 상관없이 효율이 좋다. 사용법이 세 가지나 되거든. 1. 결속 상태의 아군이 입힌 피해에 면역. 탱커가 쓸 경우에는 아군이 광역 딜을 퍼부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된다. 탱커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며 보다 다양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셈. 2. 결속 상태의 아군 수에 따라 대미지 증가. 딜러가 이 장비를 차면 딜이 뻥튀기 되며. 3. 결속 상태의 아군에게 부여한 모든 이로운 효과가 2배 증가. 신관이나 지원계 탐험가가 착용 시에는 그 능력이 2배 증가한다. ‘일단 우리의 경우엔 3번은 제외해야 할 테고…….’ 결국 남은 사용법은 두 개뿐이다. 어나더 클래스가 된 에르웬에게 줘서 딜량을 더 올리든가. 아니면, 내가 장착해서 파티 안정성을 올리든가. ‘생각해 보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네.’ 식탁에 두 종류의 음식이 있으면 둘 다 양손에 쥐고 먹는 것이 바로 바바리안의 정신. 이윽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평소에는 내가 착용하다가, 딜이 필요할 땐 에르웬에게 넘겨줘서 쓰기로. “상황에 따라 베르실 너나, 아이나르에게도 넘길 생각이다.” 그런 내 결정에 팀원 모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아멜리아의 표정이 조금 좋지 않았다. 당최 표정 변화가 없기에 더욱더 눈치채기가 쉬운 작은 변화. “자, 그럼 얘기도 끝났겠다. 다들 가서 쉬어라. 나머지는 내일 더 얘기하지. 아, 그리고 에밀리 너는 잠시 남고.” 베르실과 에르웬도 아멜리아의 표정을 읽고서는 별다른 말없이 방을 나섰다. 그렇게 둘 만이 남게 된 공간. 내내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심문 따위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긴, 얘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울 것이다. 기껏 얻은 전리품은 같이 쓰지도 못하고, 명예의 돌에 적힌 ‘그의 동료들’에도 속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같잖은 위로보단 현실적인 말을 꺼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네 이름이 거기 적혔으면 곤란해졌을 테니.” 오늘 가서 보니까 ‘동료’란 단어로 생략되어 있던 팀원들의 이름이 기록 끄트머리에 부록처럼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쉽게 말해, 도중에 빠지지 않았으면 ‘아멜리아 레인웨일즈’라는 본명도 노출이 됐을 터.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냐?” “단지… 조금 씁쓸해졌을 뿐이다.” “…응?” 고개를 갸웃한 순간, 아멜리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내 이름을 갖고서는 네 옆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아…….” 어, 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거리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니, 아멜리아는 잠깐 투정을 부렸을 뿐이라는 듯 태연히 화제를 바꾸었다. “얀델, 네가 알아야 할 정보가 있다.”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했던 그거냐?” “그래.” 사실 이걸 들으려고 남으라 한 거지만, 심각한 표정을 보니 괜히 또 불안해진다. “뭐지? 해봐라.” “내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 “……응?” 처음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도 싶었지만, 나머지 얘기를 들어보니 제법 심각한 사태였다. “심문이 끝나고 잠시 멍해지는 상황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영상기록구가 파괴되어 있었다. 분명 나는 정신을 잃은 적이 없는데.”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시간의 흐름과 실제 시간을 비교했다. 약간의 오차가 존재하더군.” 약 10분 정도의 오차였다. 예를 들자면, 기억 내에선 35분 동안 심문을 했는데 실제로는 45분이 흘러 있던 거지. “착각일 가능성은?” “없다.” 후, 이렇게 확신해서 말할 정도면 정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 “게다가 돌이켜보니, 기억 속의 내 모습에서도 몇몇 이질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원래의 나였으면 더 꼼꼼히 확인했을 부분을, 기억 속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있더군.” “…….” “그래서 환각 마법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누군가 내 기억을 조작해서 채워놨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지.” “그래서?” “이 부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고울랜드에게 검사를 받았지만, 그 여자는 그런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더군.” 기억 조작이라…….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 알미너스 백작 아래에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나? 아니면 아예 제3의 인물? 열심히 고민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한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자니 무기가 전부 깨끗했다.” “…무기가?” “그래, 너를 찔렀던 그 검까지도. 마치 뭔가로 닦아낸 것처럼 깨끗하더군.” 이거 진짜 수상하기는 하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멜리아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추가했다. “그놈들… 암시장에서 의뢰를 받았다고 했지. 의뢰주는 알 수 없다고 했고.”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보자. 철통같은 보안과 척을 졌다가 살아나온 이가 없다는 살벌한 소문들로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뭐, 그래 봤자 사람 사는 곳 아니겠는가. “한번 가봐야겠군.” 다 때려 부수다 보면 누군가 한 명은 말해 주겠지. 492화 선전포고 (3) 미궁이 닫히고서 이틀 뒤. ‘30시간 좀 넘게 잔 건가…….’ 마지막이 힘들긴 했지만, 미궁 내에서 그렇게 큰 체력을 소모한 것은 아니기에 이 정도만 자도 제법 개운했다. 드르르르르렁-! 비몽사몽하며 1층으로 내려가자 잠들기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있는 아이나르가 보인다. ‘얘도 진짜 잘 잔단 말이지…….’ 일단 뭐라도 먹을까 해서 부엌으로 가 보니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설마 언제 누가 깨서 내려오든 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준비를 해 둔 거야? ‘……얘는 탐험가가 아니라 집사가 적성일지도.’ 아우옌의 센스에 감탄하기도 잠시, 양껏 준비된 음식들을 입에 욱여넣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현관으로 나가 우편함을 확인해 보니, 자고 있던 사이에 수많은 우편들이 도착해 있었다. “뭐야, 이거…….” 하나하나 살펴보니 대부분이 초대장이었다. 여러 미사여구와 칭송의 말들로 시작해 끝에는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말이 적힌 우편.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처음 명성을 얻었을 때도 이런 이벤트가 있었는데. ‘…입단 신청서도 꽤 많네.’ 왠지 호기심이 동해 이력서 위주로 살펴보니 생각보다 다들 수준이 높았는데,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성기 시절에 9층까지 가 본 적 있는 아저씨였다. 당연히 상위 탐험가답게 이명도 갖고 있었고. ‘아쉽네. 탱커만 아니었으면 고민 좀 해 봤을 텐데…….’ 이후 클랜 역시 본격적으로 키울 생각이지만 아직은 팀 하나가 전부이며, 우리 팀에는 다른 탱커가 더 필요 없다. 2팀에는 성기사 스벤 파라브와 카이슬란이 탱커 라인을 채울 예정이고. ‘3팀을 만들 때가 되면 한번 연락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 아무튼, 먼저 스카웃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상위 탐험가가 입단 의사를 내비쳤다는 점에서 굉장히 뿌듯했다. 내가 난쟁이 놈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처음으로 만들었던 팀이 바로 팀 반푼이 아니었던가. ‘……가진 게 없긴 해도, 그때가 진짜 재미있긴 했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우편들을 마저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이 많은 입단 신청서 중에는 신관이 한 명도 없었다. ‘명성 수치를 이만큼 쌓아도 신관은 공적치를 채워서 데리고 와야 한다 이거지?’ 뭔가 좀 아이러니하다. 그토록 많은 시간이 지나고, 숱한 역경을 헤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중에 신관이 정식으로 팀에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쩝, 슬슬 포션도 잘 안 통해서 힐러가 필요하긴 한데— “……응?” 그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한참이나 편지를 읽던 중 나를 멈칫하게 만드는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알미너스 백작가……?’ 익숙한 문양의 황금색 밀랍 씰을 보자마자 얼른 봉인을 찢고 내용을 확인했다. 귀족가에서 온 편지 아니랄까 봐 역시나 긴 서론. 핵심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 사이에 생긴 오해를 풀고 싶으니, 시간이 될 때 언제든 찾아오시게.] 백작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 “오해라…….” 갑자기 백작이 왜 이렇게 태세 전환을 했을까. 짐작 가는 게 있다면, 역시 명예의 돌밖에 없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내 덩치가 커지자, 적이 되는 것에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겠지. 처음부터 자존심 문제였을 뿐, 백작한테 그깟 돈은 딱히 아쉽지 않았을 테니까. 뭐, 전혀 다른 속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백작은 다음에 약속을 잡고서 만나 보는 거로 하고…….’ 밤까지 할 것도 없기에 다시 방에 올라가서 마저 잠을 잤다. 그리고 날이 저문 이후에는 아멜리아의 배웅을 배웅을 받으며 담을 넘었다. “정말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나?” “괜찮다. 혼자 가는 편이 편하다.” “흐음, 그렇다면야.” 야밤에 철 투구까지 쓴 나는 최대한 사람들 눈을 피해 움직였고, 컴멜비 변두리 골목에 위치한 주점에 도착하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이건 뭐 공사장도 아니고.” 낡은 걸 넘어 무너지기 직전인 상태의 건물. 당연히 주점 역시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고, 간판은 녹슬다 못해 덜렁거렸다. 끼이이익- 주점 내부는 외관보다 더한 상태였다. 공사장처럼 폐자재들이 널려 있었으며, 먼지가 가득했다. 안쪽으로 향하는 길목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발자국 많은 거 보소.’ 주변을 둘러볼 것도 없이 발자국을 따라 걷자니 머지않아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나왔다. 계단 아래에는 철문 하나만 떡하니 놓여 있을 뿐, 그 앞을 지키는 덩치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필요한 시스템이 아니니까. ‘근데 이 문 뒤에는 뭐가 있으려나?’ 게임을 할 때 내심 궁금했던 요소 중 하나였기에 힘을 줘서 문짝을 뜯어 봤다. 끼끽, 끽, 쿠우웅-! 벽에 박힌 경첩 통째로 떨어져 나온 문. 다만 기대와 달리 문 너머는 그냥 벽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었다. ‘거, 싱겁게.’ 문에 히든피스가 없었다는 사실에 김이 빠지기도 잠시. 문짝이 있던 위치 옆에 놓인 홈에 미리 구해 둔 마석을 박아 넣고 출입증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즉시. 번뜩-! 내가 서 있던 위치가 달라졌다. 암시장은 텔레포트를 통해서만 갈 수 있거든. 이 드넓은 도시에 암시장 입구가 수백 개 이상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찌 된 게 여기도 이제서야 와 보네.’ 한 평 규모의 작은 석실. 방에는 복도와 이어진 문 하나가 자리했는데, 그 위에는 21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쩝, 217번이면 메인 스트리트까지 한참은 더 가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슬렁슬렁 걸어가 문을 열려던 찰나. 벌컥. 반대편에서 먼저 문이 열리며 가면을 쓴 덩치 세 명이 들어섰다. 음, 게임에선 마중 나오는 서비스는 없었는데. “무슨 용건이라도?” “…혹시 이곳에 오기 전에 문을 훼손했소?” “아, 그거?” 설마 그걸 벌써 알아채고 왔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가 궁금해서 말이지.” “…함께 가 주셔야겠소.” “싫다면?” “방금 나는 당신의 의사를 확인한 것이 아니오. 뭣들 하나!” 덩치1의 외침과 동시에 덩치 둘이 다가온다. 뒤늦게 조금 후회가 됐다. …문은 괜히 부쉈나? ‘이왕 온 김에 구경 좀 하고 싶었는데.’ 뭐, 어쩌겠어. 이렇게 된 거 일이나 하다 가야지. 툭. 팔을 휘둘러 옆에 달라붙은 덩치 둘을 밀어냈다. 마치 모기를 떼어 내는 듯한 가벼운 동작. 다만 벽까지 밀려난 덩치 둘은 흥분해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래, 역시나 탐험가셨군?” “말이 짧아졌네?” “당신은 문젯거리일 뿐이니까. 맞춰서 대접을 해야지.” “오, 그러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박박 긁자, 덩치1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체격을 보아하니, 바바리안이거나 수인족일 테고. 아마 이곳은 처음이겠지?” “어떻게 알았지?” “이곳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런 정신 나간 짓은 하지 못할 테니까. 애송이.” 조금 서운한 말이었다. 거, 나보다 암시장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툭.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 갑갑한 투구부터 벗어 던졌다. 여기부턴 굳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바바리안이었나.” 기대와 달리 놈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후우우우웅-! 덩치1의 검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얼마 전에 있던 그 동굴 속도 아니고. 스킬만 정상적으로 써지면 오러는 내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한다. 바로 이렇게. 휘이익-! 좁은 공간 때문인지 베기보다는 찌르기를 택한 놈. 피할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칼날을 잡아챘다. “……!” 하여간, 오러잽이 새끼들 어찌나 이리도 반응이 한결같은지. 떨리는 칼날을 타고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당혹의 감정. 나는 씨익 웃으며 역으로 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콰직-! 얼굴 정중앙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오케이, 그럼 이거로 하나. “……지, 지원을!” 녀석이 쓰러지자마자 지원을 핑계로 도망치려던 덩치 둘은 한 번에 뒷덜미를 잡아 벽에 문지르는 것으로 깔끔하게 처리했다. ‘얘네 둘은 의외로 별거 없었네.’ 나는 손을 펄럭이며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여기 이 세 놈의 피도 피지만, 이 중에는 내 몸에서 나온 피도 섞여 있었다. [거대화]도 안 쓴 상태라 그런지 맨손으로 칼을 막았을 때 제법 깊이 상처가 남은 것인데……. 딱히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내 자연 재생력 수치면 이 정도 부상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자, 그럼 어디 한번 봐 볼까.” 복도로 나가기 전에 허리를 굽혀 덩치1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겼다. 아니, 정확히는 반쯤 박살 난 가면의 조각을 털어 냈다. 다만, 코뼈가 내려앉고 피로 범벅된 녀석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연 마굴이라 불리는 곳답군. 설마 이렇게까지 보안이 철저할 줄이야.” 조롱의 의미를 담아 중얼거리자, 놈이 갈라진 목소리로 반응했다. “비, 요른… 얀델……?” 아무래도 한 대 맞더니 정신이 번뜩 들며 내가 누군지 떠오른 모양인데……. “다, 당신 같은… 자가, 이곳, 에는 어떻, 게…….” “어떻게기는.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그보다 깨 있는 김에 몇 가지 좀 묻자.” “…….” “여기 대가리는 어디에 있…….” 뭐야, 기절했네. 미련 없이 바닥에 내려놓고 복도로 나가자 석실 앞에 모여 있던 몇몇 구경꾼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복장을 보니 스태프가 아니라 이용객이었다. ‘얘네들은 어차피 물어봐도 모를 테고…….’ “거기! 무슨 일이오?” 그때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 덩치 하나가 사람들이 모인 걸 보고는 이리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 이 무슨…….” 이내 다가온 녀석이 열린 문 너머를 확인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보니 왠지 내가 스릴러 영화의 범인이라도 된 거 같다. “……아악!”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에 얼른 뒷덜미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암시장 대가리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지?” “……말할 수, 없소…….”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는데?” 위협도 해 보았으나 녀석은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죽, 이시오……. 그게 배, 신자의 말로보단 몇, 배 더 나을 테니까…….” “아, 그러냐?” 콰직-! 나는 대충 꿀밤을 놔 준 뒤, 축 늘어진 덩치를 복도 바닥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이놈들을 협박해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려울 듯했다. 물론 이 또한 사소한 문젯거리였다. 댕-! 댕-! 댕-! 댕-!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긴박하게 울리는 종소리. “침입자! 침입자다!” 버닝 이벤트라도 시작된 듯 빠르게 리젠되는 덩치들을 보며 나는 외쳤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뭐, 다 때려 부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변신계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초의 세포] 효과에 의해 해당 스킬의 영혼력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1.5배 상승합니다.」 *** 암시장은 지하 어딘가에 존재한다. 누구도 암시장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있다. 몹시도 합리적인 이유다. 축구 경기장 세 개는 합친 듯한 크기의 건물이 지상에 있었다면 진작에 발견됐을 테니— 댕-! 댕-! 댕-! 댕-! 아오, 시끄러워. 대체 저건 언제쯤 끄려는 거야? 메인 스트리트는 또 언제 나오는 거고? ‘진짜 더럽게 넓네.’ 아, 그래도 건물이 넓다는 것에도 장점이 있었다. 비좁던 석실과 달리 복도부터는 층고도 높고, 폭이 넓은 덕에 [거대화]를 써도 불편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쿠웅-! 쿠웅-! 쿠웅-! 쿠웅-! [거대화]를 켠 상태에서 넓은 복도를 전부 차지하며 달려 나가고 있자니, 사람이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도, 도망쳐……!” 물건이나 몇 개 사러 왔다가 나를 보고는 혼비백산 달아나는 이용객들. “막아라……!” 그리고 이용객들을 거슬러 오르며 내게 덤벼드는 덩치 무리. 아까 오러를 쓰는 놈을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덩치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평균 4층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물론 평균치가 그렇다는 거지, 6층에서도 잘 지낼 거 같은 놈들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무한하게 리젠되는 걸 감안하면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위험한 규모. 그러나 정작 나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 평온했다. 얘네는 뭔 짓을 해도 나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무력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주, 중지! 지, 지시가 내려왔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생포하라는 지시다!” “예? 새, 생포 말입니까?” 그래, 윗선에도 내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구나. 쿠웅-! 쿠웅-! 쿠웅-! 발길에 박차를 가하자 가장 앞에 있던 덩치가 새하얗게 질린 목소리로 소리를 내지른다. “저… 괴물을 어떻게 생포하라고……!” 상부에서 내려온 부당한 지시에 덩치는 몸을 바르르 떨며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내가 아랑곳 않고 달려들자 덩치는 필사적으로 궤도를 틀어 무기를 벽에 박아 넣었다. 콰앙-!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지키려는 마음은 기특했지만, 동시에 미련한 짓이기도 했다. 저 정도면 어차피 진심을 다해 때려 봤자 기스 하나 안 날 거 같구만. “야, 얀델 남작! 머, 멈추시오! 위에서 당신과 대화를 원하고—” 뭐래,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이제 무적의 회피기까지 생겼겠다, 나는 더욱더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콰앙! 툭! 카캉!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덩치들의 무기는 결코 몸에 닿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냥 달리고만 있는데 알아서 공격이 다 비껴 가다니? 유의 묘리에 통달한 무림 고수가 보는 세상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흐하하하하하!!” 나는 더욱더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방패 벽!!” 어느 순간부터 덩치들은 방패를 들고서 벽을 만들어 나를 제지하려 들었다. 상부의 다급한 조치였다.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하면 암시장은 끝이니까. 귀족들도 우습게 본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지만, 어디 정말로 일개 사조직이 귀족보다 위에 있으려고? “반복해서 말한다. 절대 공격하지 마라!” 적어도 이곳의 윗대가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작위 남작을 해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이후엔 파멸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이놈들 입장에선 날 상대하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방법뿐인데, 이미 이곳까지 오며 나는 수많은 이용객들을 만났다. 쉽게 말해, 증인까지 한가득인 상황. “방패 뒤에 숨다니, 이 비겁한 놈들!” “……?!” “이 악의 소굴을 이끄는 두목은 나와라! 나 비요른 얀델이 왕가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그, 그러니까 말했지 않소! 의장님께서도 대, 대화를 바라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더 덩치들을 뚫고 나아갔을까. 덩치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방패 벽이 견고해지고, 마법사나 이능술사들도 지원을 나와 저주 마법을 흩뿌리기 시작하자 나도 슬슬 버거워졌다. 툭.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뒤쪽도 덩치들이 쫙 깔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흐음, 이렇게 싱겁게 잡혀가듯이 만나면 얕잡아 볼 게 분명한데…….’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직위가 있어 보이는 놈이 방패 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작 각하! 잠시 진정하고, 차분히 대화를—” “악에 물든 네놈들과 나눌 대화는 없다!” “…하지만 이제 가실 곳도 없지 않습니까!” 없기는 무슨. 이놈들은 바바리안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구나. ‘오케이, 그럼 고민 끝.’ 이내 나는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방패로 몸을 가린 덩치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좌측의 벽면을 향해서. 콰아아아아앙-! 길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493화 선전포고 (4) 콰아아아아앙! 부서져내린 벽을 넘어 텅 빈 통로를 따라 다시 뜀박질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앞이 막히면 다시 한번 망치를 휘두른다. 콰아아아앙-! 간혹 이렇게 벽 너머가 아예 막혀 있어 길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큰 애로사항은 아니다. 건물 구조상, 위나 아래는 분명 어디론가 이어지기 마련이거든. 바로 이렇게. 콰앙-! 천장을 박살내고 위층으로 올라서자 조금 특이한 장소가 나를 반긴다. 확연히 차이가 나는 어두운 조명. 좁고 긴 복도를 따라서 양옆으로 펼쳐진 수십 개의 철창.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종족들. 바바리안도 아닐진대, 각양각색의 종족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 똑같은 문신을 하고 있다. ‘노예구나…….’ 대뜸 바닥을 깨부수고 초대형 바바리안이 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눈빛으로 허공만 응시할 뿐인 자들. 21세기 바바리안으로서 기분이 묘했다. ‘그래, 여기에는 아직도 노예가 있는 거구나.’ 사실 라프도니아에서도 노예는 불법이다. 한때는 죄를 지은 자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노예로 전락했지만, 약 100년 전 법률 개정 이후 이 세상에서 노예는 모두 사라졌다.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던 노예는 즉시 처형됐고, 신분이 대물림되거나 경범죄의 벌금을 내지 못해 노예화 됐던 이들은 일반 시민의 직위를 되찾았다. 결국 노예 출신이 세금을 제대로 낼 수 있을 리가 없어 대부분이 얼마 못 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이봐.” 그나마 눈빛이 살아있던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 꼬마는 내가 말을 걸자 겁을 먹고 벽에 등을 딱 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물었다. “너는 어쩌다 여기에 잡혀왔나?” 애석하게도 답변은 뒤따라 올라온 덩치에게서 돌아왔다. “……그, 그만두시오! 얀델 남작!” 뭐래. 안 그만두면 어쩔 건데? 그냥 거기에 서서 나를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들이. 대충 무시하며 꼬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의외로 덩치의 외침이 조금 도움이 된 거 같았다. “거인……?” 조용히 내 이명을 중얼거리더니, 눈을 크게 뜨며 철창 앞으로 다가오는 꼬마. “거인은… 영웅이랬어요. 사람을 구하고, 악당을 벌한다고……. 사실인가요?” “글쎄, 어느 정도는.” “……저희도 구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냥 우연히 너희를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봐라. 너는 어쩌다 여기에 잡혀오게 된 거지?” 이 와중에도 옆에서 그만두라고 애원하는 덩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꼬마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엄마가… 빚을 못 갚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 돈을 갚아야 한대요.” “엄마는? 어떻게 됐지?” “세금을 못 내서… 죽었대요.” “옆에 있는 저 요정 여자는?” 같은 철창을 쓰고 있던 여자를 힐끗하며 묻자 꼬마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라일리 누나도 빚을 못 갚았대요. 돈을 갚을 수 있는데도, 나쁜 사람들이 못 갚게 했대요. 그래서 여기에 끌려왔대요.” “…….” “…나중에, 여기서 탈출해 절 구하러 온댔는데, 나쁜 사람들한테 몇 번 끌려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아무런 말도 안 해요.” “그래, 그러냐?” 왜 이 꼬마만이 가장 살아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다. 반항의 의지가 있는 자들은 더욱더 모진 세뇌 작업을 거쳤을 테니까. 사람의 의지는 생각보다 더 쉽게 망가진다. ‘그럼 확인할 건 다 했고…….’ 그렇게 꼬마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서 덩치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가장 앞에 있던 놈이 움찔했다. 마치 약한 친구를 괴롭히다가 들킨 양아치처럼. 터벅. 한 걸음 다가가며 놈들에게 물었다. “알고 있나?” 맨 앞의 덩치가 방패를 더 들어 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나쁜 놈들이란 건 알았기에 인정사정 없이 패긴 했지만, 죽지는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했다. “이유가 뭐일 거 같나?” “……당신도 우리와 완전히 척을 지는 건 원하지 않아서라고, 윗선에서는 그렇게 판단했소.” “그래?” 나는 쿨하게 인정했다. “정답이다.” 애초에 이놈들이 침입자인 나를 상대로 수비적인 태세로 일관한 것도 그런 내 의도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전부 때려죽이면서 돌아다녔으면, 이놈들도 방패만 들고 버틸 리 없었겠지. 목숨만 붙여놔라 정도의 오더가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나도 기강이 잡히고나면 여기 두목과 대화를 나누어 원하는 걸 얻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이제 말해주시오.” 플랜 B가 왜 플랜 B겠어. 온갖 변수가 가득한 이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남작과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 덩치가 말을 전부 완성하기 전에 턱주가리를 날렸다. 콰직-! 야구공처럼 날아가 측면의 벽에 부딪친 덩치가 그대로 쓰러지며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튼튼하네.” 놈을 보며 나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엔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는데.” 이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덩치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인데……. “이게… 무슨 뜻이오?” 아, 그거? “남작, 당신도 아까 말했지 않소. 우리와 척을 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그래, 아까는 그랬지.” 나는 고통스럽다는 듯 꿈틀거리는 덩치를 보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놈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만두시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참 이상한 말이었다. “후회를 내가 왜 하나?” 그 말을 끝으로 있는 힘껏 망치를 내려쳤다. 콰직-! 꿈틀거리던 덩치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회는 너희들이 해야지.” 그게 맞는 거잖아? *** “…….” “…….”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망치를 내리친 이후, 덩치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내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스윽. 걸음을 뻗으면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덩치 무리. 그런 대치 속에서 달려나갈 타이밍을 속으로 재던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철창 사이로 뻗은 복도 저 멀리 자리한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여러 덩치들의 극진한 호위를 받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그쯤하시지요. 얀델 남작.” “누구냐 넌?” “당대 그림자 상회의 회주, 멜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이놈이 바로 암시장의 주인이라는 뜻. 멜이라고 이름을 밝힌 녀석은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저 친구는 어떤가. 살아 있나?” “……아직 숨은 붙어있습니다 회주님.” “다행이군.” 이내 멜이 내게 물었다. “얀델 남작.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우선 저 친구부터 치료를 해도 되겠습니까?” “라프도니아의 남작인 내가 반역도 무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거 같은가?” “하하, 반역도라니… 얀델 남작님께서는 저희를 너무 안 좋게 보시는 거 같군요.” “하면, 지엄한 법을 우습게 아는 너희를 좋게 볼 이유가 있나?” “흐음, 그렇습니까.” 내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놈이 차갑게 읊조렸다. “모두 자리를 비키게.”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주님!” “너무 위험합니다!” 부하들이 단체로 경기를 일으켰지만, 회주 멜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두 번은 말하지 않겠네.” 평소에 어찌나 쥐 잡듯이 잡았는진 몰라도 그 한마디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비키기 시작한 덩치들. 터벅, 터벅. 이내 회주 멜은 단둘만이 남은 복도를 걸어 내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뭐지? 이 새끼 사실은 엄청 강한가? 아니면, 뭐 분신체 같은 거라 뒈져도 상관없는 그런 건가? 그런 온갖 가능성이 맴돌던 차. 스윽. 내 앞에 도달한 녀석이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꺼낸 포션을 쓰러진 덩치에게 뿌렸다. 치이이이이익-! 반쯤 짓뭉개진 덩치의 얼굴에서 들끓는 기포. 의식을 잃은 채 죽는 순간만을 기다리던 덩치의 몸이 미약하게나마 떨기 시작했다. “최상급 포션이군.” “예, 그렇지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암만 혼자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 하자는 짓이지?” “죽어가던 제 부하를 살렸습니다.” “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예. 이자는 제 사람이니까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태껏 수많은 리더들을 보았지만,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가치는 주관적인 법이지요. 여기 이 노예들을 보고서 남작님께서 생각을 바꾸신 것처럼.” “……웃긴 놈이군.” “자, 그러면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엔 좋지 못해 보이는군요.” 놈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 등을 보이며 먼저 걸어나갔고, 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놈을 따라서 이동했다. 문을 여러 번 넘어 도착한 곳은 작은방이었다. “이용객들을 위해 마련한 개인실들 중 하나지요. 이용객분들은 모두 도시로 돌려보냈으니, 방해할 사람은 오지 않을 겁니다.” 이내 놈이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앉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이쯤 되니 묻고 싶지 않아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두렵지도 않나?” “두렵습니다.”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얀델 남작님을 해친다면, 그날부로 이 장소를 비롯해 저희 가문 역시 명을 다할 것인데. 저는 그 정도로 무모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건 무모한 게 아니고?” “제가 죽는다면, 그거로 끝일 테니까요.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제 자리를 넘겨받고 끝나겠죠.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가장 낮은 곳엔 항상 더러운 물이 고이는 법이니.” “…….” “아, 물론 남작님께서는 화풀이만 하고서 원하는 건 얻지 못한 채 되돌아가게 되시겠지요.” 얘는 대체 간땡이가 어떻게 된 건지. 길게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놈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걸. 다만, 더 이상 질질 끌려가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말은 제가 아니라 남작께서 하셔야겠지요.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닙니까?” 어, 그건 그렇지. 아씨, 이러면 또 할 말이 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도권이니 뭐니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것이나 말하기로 했다. “의뢰인들의 신상을 내놔라.” 사실 이게 암시장에 방문한 가장 큰 목적이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암시장에 의뢰를 넣고 있습니다.] 공급이 줄어들자, 암시장까지 방문해 바바리안의 심장을 구하려 든 자. [아, 암시장에··· 남작님의 심장에 대한 의뢰도 걸려있습니다···….] 더 나아가 내 심장을 요구한 자. 그리고……. [저, 정말이오···…. 나는 그저 암시장에서 의뢰를 받은 게 전부란, 말이오···…. 의뢰주가 누구인지는 나도 알지 못, 하오…···.] 겁도 없이 계층군주 레이드를 훼방놓으란 의뢰를 넣은 자까지. “과연… 그것 때문이었군요. 얀델 남작님께서 이곳을 찾은 건.” “사족은 필요 없으니 대답만.” “의뢰인들의 신상을 묻는 것은 저희 입장에서 매우 난감한 요구입니다.”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냐?” “아뇨. 저는 상인입니다. 이 일로 의뢰의 수가 줄기는 하겠지만, 남작님과 척을 지는 것보다는 수지가 맞겠지요.” “그 말은?” “오늘 내로 의뢰인들의 정보를 받으실 수 있도록 정리하겠습니다.” 멜은 쿨하게 내 요구를 승낙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암만 이 난리를 피웠어도 이 요구를 들어주려면 한참 더 실랑이를 해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이제 용무는 끝이십니까?” “아니, 하나 더 있다.” “하문하시지요.” 이후 나는 멜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갇혀 있던 노예들을 풀어줘라.” 도무지 그걸 보고서도 그냥 갈 수는 없어서 말이지. “흐음, 얀델 남작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믿으시는 듯하군요?” “궁금한 것도 많군.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던 거 같은데.” “…잠시 계산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멜은 겁도 없이 눈까지 꾹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눈을 뜬 것은 약 3분 정도가 지난 때였다. “좋습니다. 노예들 전원을 해방하고, 이후로는 노예 산업에도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결정이 빠르군?” 은근슬쩍 떠보자, 놈은 숨길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이번에도 쿨하게 답해주었다. “사실 저 또한 진작에 접고 싶었던 사업입니다.” “접고 싶었다니?” “구매자 측에서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요. 이로 인해 크게 문제가 생길 뻔한 일도 여럿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때문에 몇 번인가 사업을 접으려 했지만, 선대부터 이어져 큰 수익을 내고 있는 사업을 접을 명분이 없었다던가? “얀델 남작님께서 있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겠지요.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 “그럼 이제 용무는 정말로 끝이십니까?” “그래. 의뢰인의 정보와 노예들의 신병을 넘겨받는 대로 눈앞에서 사라져주지.” “하면 최대한 빨리 처리를 해야겠군요.” 그 대화를 끝으로 놈은 부하들을 다시 불러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고, 동이 틀 무렵쯤에는 의뢰인의 정보를 비롯해 수백 명의 노예를 모두 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멜 아스몬드.” 나는 헤어지기 전에 놈에게 물었다. “어째서 전부 다 쉽게 양보하는 거지?” 놈은 대답하기보다는 그저 묘한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얀델 남작께서는 저희 가문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군요.” 그야 게임에서도 암시장 에피소드를 깨봤으니까.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의 왕으로 군림한 가문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닐 텐데?” 다시금 집요하게 묻자, 녀석도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영웅은 늘 단명하는 법이니까요. 떨어지는 칼날을 굳이 우리가 받을 이유가 없지요.” 해석하자면, 나처럼 행동하면 얼마 못 살고 뒈질 게 분명하다는 뜻. ‘재밌는 놈이네.’ 암시장의 주인 멜 아스몬드. 왠지 이놈과는 또 볼 일이 있을 거 같았다. 494화 선전포고 (5) 결혼을 하기 전, 상대방의 방을 먼저 확인해 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방에는 소유주의 흔적이 잘 묻어난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지 검소한지는 물론, 대상이 게으른지 부지런한지, 어떤 색을 좋아하고 또 어떤 취미가 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등등. 소유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방만 보더라도 대충 그 사람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접객실처럼. “…….”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내부. 대놓고 사치스러운 인테리어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돈을 어지간히 처발랐다는 것은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가구와 장식품. 바사삭. 한 사람을 위해 준비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종류의 과자들이 테이블엔 가득 차려져 있으며. 쪼르르르- 전담 사용인 한 명이 출입문 쪽에서 상시 대기를 하며 잔이 반 이상 비워질 때마다 다가와 적당한 높이로 잔을 채워준다. 아, 물론 화룡점정은 따로 있었다. ‘전용 악사가 있는 접객실은 처음인 거 같은데.’ 접객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현악기로 편안한 음색의 곡을 시종일관 연주하는 대머리 악사. ‘연주하는 거 보니까 딱히 오늘만 특별하게 불러온 것도 아닌 거 같고 말이지.’ 새삼 이 접객실의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가 확 와닿는다. ‘본질은 상인이라 이거지.’ 이 접객실에선 과시 목적보다는 접객 목적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 그래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알게 된다. 이 집주인이 얼마나 부자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나를 열심히 대접해주고 있는지를. ‘약속 시간은 5분 뒤. 아무래도 딱 맞춰서 오려는 모양이네.’ 그런 의미에서 다리를 꼬고 신문을 촤악 펼쳤다. 아무렇게나 집히는 대로 펼친 신문이었지만, 첫 장부터 내 얘기가 기사에 실려 있었다. 사실 어느 신문을 고르던 비슷했을 거 같지만. [명예의 돌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 거인 얀델 남작이 암흑가의 반역도들을 향해 칼을 빼들다……!] 사흘 전, 암시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마침내 공론화되어 기사에 실렸다. 하긴 모즐란 쪽에서 쉬쉬하긴 했어도 397명이나 되는 노예를 아무도 모르게 감출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구매자들 대부분이 귀족이었다는 점은 기사에 안 실렸네.’ 여기저기 구멍이 송송 뚫린 기사였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사망 처리가 되었던 노예들이 모두 신분을 되찾았다든가. 모즐란 측에서 마련한 임시 보호소에서 머무르고 있으며, 피해 구제의 일환으로 5년간 세금을 받지 않는 정책을 준비 중이라든가. 아, 인터뷰도 있었다. [……후회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익명이긴 했지만 내용을 보니 아무래도 그 철창 속 꼬마인 듯한데……. ‘오, 암시장은 아예 문을 닫았나 보네? 하긴 이런 때에는 납작 엎드리는 게 상책이긴 하지.’ 그렇게 열심히 신문을 읽어내리고 있던 때, 입구 쪽에서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내게 다가왔다. “알미너스 백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보던 신문을 덮어 테이블에 내려놨다. “들어오라 해라.” 슬슬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였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 *** “크하하하하하!” “허허……!” 천박한 웃음소리와 중후한 노인의 웃음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장내. 그리고 테이블 옆에 위치한 사진사 한 명이 그런 우리를 열심히 찍고 있다. 무척이나 비즈니스적인 이유다. 저 사진사가 찍을 A컷의 가격이 21억 3천 500만 스톤이거든. “얀델 남작님, 조금만… 조금만 더 야만스럽… 아니, 사내답게 웃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핫!! “백작님께서는 저곳. 저곳을 응시하면서 웃고 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일세. 허허! 허허허허……!” 알미너스 백작은 나를 21억이란 배상금이 걸린 고소를 취하하는 대신 자신과 화기애애한 사진을 찍어줄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내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모두 다 역사에 남아 보관될 것이라던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인 만큼 사후에 어떻게 기억될지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듯했다. 물론 처음엔 이게 뭔 개수작인가 싶었지만……. 생각을 해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그 있지 않은가. 나라도 우리 할아버지가 아인슈타인이랑 찍은 개인 사진이 있다고 하면 엄청 멋있게 보일 거 같거든. “크하하하하하하핫!!” “허허허! 허허허허……!”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한참이나 웃고 있자니 사진사는 이런저런 요구를 해왔다. 이 정도로는 나이와 종족을 초월한 우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나 뭐라나. 이후 사진사는 내게는 싸구려 병맥주를, 그리고 백작에게는 와인잔을 준 뒤 건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게 오늘의 A컷이었다. 백작은 직접 사진을 확인하고서 무척이나 흡족한 듯 보너스를 두둑이 쥐여줬고, 그것으로 오늘의 비즈니스는 모두 끝. “허허, 고생 많았네 남작. 피곤할 텐데 식사도 하고 가게나.” “괜찮다. 배가 고파서.” “……?” 아, 실수 실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아쉽게도 식사는 다음에 해야 할 거 같다.” “허허, 그래… 식사는 되도록 가족들과 함께하는 편이 좋지.” 사업적인 감각이 남다른 할배답게, 백작은 이런 내 실수를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대단한 일을 했다지? 그 있지 않은가. 암시장을 들쑤시고 노예 397명을 구해 돌아온 것 말일세.” “아…….” “자네의 젊은 혈기를 지켜보니 나도 오랜만에 피가 들끓지 뭔가? 해서 나도 자네의 선행에 한 손을 보탤까 하네마는…….” 허허,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만. 수저를 올려도 되겠냐는 걸 이렇게 정중하게 물어보네. 단박에 거절하려 했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 친구들 말일세. 거진 400명이나 되는데 아직 거처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지?” “…그런데?” “자네만 허락해준다면 내가 힘을 좀 써볼 수 있을 거 같네. 세금은 면제를 받는다 해도, 그들이 새로 출발하려면 집 한 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상당히 놀라운 제안이었다. 4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집 한 채씩 해주겠다니. 괜히 알미너스 가문이 왕국 최고 부자로 꼽히는 게 아니구나. “영웅이 늘어나는 건 세상에도 좋은 일이지. 마음대로 해라. 내가 왜 거절하겠나?” 나는 백작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순수한 선의는 아닐지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아주 큰 지원이 될 테니까. “걱정 말게. 결국 주인공은 자네가 될 테니.” 이후 그러한 말을 끝으로 나는 백작가를 떠났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렸다. [알미너스 백작, 20억 스톤 상당의 개인적 기부를 약속. 이유 묻자, 그저 오랜 벗을 도울 뿐 별거 아냐—.] 그날 찍은 사진과 함께였다. *** “어휴, 아주 그냥 박제가 됐구만?” 왠지 모를 자괴감을 느끼며 신문을 내려놓기 무섭게 행정군단의 단장 샤빈이 헐레벌떡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미궁이 닫힌 지가 언젠데 이제 온 거예요!!”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내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 어……?” “일단 이 서류부터 받으세요. 지금부터 이것들 전부 확인하고 결재하기 전까지는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시고요!” 안 본 사이에 많이 거칠어진 듯 보이는 샤빈. 다만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며 나는 웃어넘겼다. “아아, 볼 테니까 화내지 마라. 응?” “…….” “근데 서류는 왜 이렇게 많은 거냐? 대부분의 권한은 너한테 위임했을 텐데?” “……위임하지 않은 남은 부분들만 추린 게 그거예요. 부족 예산이 휙휙 늘어나는 만큼, 달마다 총 예산을 책정해야 하는데, 이걸 제가 할 수는 없잖아요. 얀델 씨가 오지 않아서 임시 결재 서류를 매번 작성하고, 장부에 임시 기록하느라 한 번이면 끝날 일을 두세 번씩 나눠서 해야 했다고요!” “오, 그렇군……?”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으려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샤빈의 눈이 번뜩였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냥 이것들도 네가 하면 안 되나?” “하! 뭐 안 될 건 없죠! 제가 부족 예산을 정하고, 그냥 다음 땅을 얼마에 팔지도 쓱쓱 적고, 아주 그냥 내 월급도 내가 정하고 말이죠!” 샤빈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됐다. 일단 반어법을 쓰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왜 안 된다는 거냐?” “…………네?” “샤빈, 나는 너를 믿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 “혹여 실수가 생긴다고 해도 너를 탓하지 않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거다. 널 믿고 그 자리에 앉힌 건 나니까. 그래서 내가 부족장인 거니까.” “…….” “그러니까 너를 믿고 해봐라. 누가 뭐래도 너는 이 분야에서 최고 아니냐. 내가 미궁에서 전문가인 것처럼. 누구보다 성실한 네가 깊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은 나보다 나을 거다.” 오케이, 얼굴을 보니 설득은 거의 다 된 거 같고. 이제 결정타를 먹일 차례. “네 월급도 마찬가지다. 받고 싶은 만큼 받아라.”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나실 텐데요?” “글쎄. 네가 너 스스로에게 매긴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결코 부정하지 않을 거다.” 내 말이 끝나자 샤빈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항상 생각했어요.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막상 그런 자리에 서라니 두려웠나 봐요.” “누구든 처음은 두려운 법이지.” 내 따듯한 격려에 샤빈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었다. “…해볼게요. 그런 말을 듣고서도 하지 않는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제가 그런 인간에 불과한 것일 테니까.” “그래, 잘 해봐라.” 그렇게 긴급 탈출에 성공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막을 벗어났다. 그리고 성지 근처에서 배회 중이던 아이나르를 찾아 임무를 내렸다. “성지 내에 있는 전사들을 전부 모으라고?” “그래, 할 말이 있다.” 밤낮없이 고생 중인 행정군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오늘 내가 성지에 온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약간의 퍼포먼스가 필요하거든. “일단 다 불러보기는 하겠다. 근데 아마 꽤 숫자가 많을 거다.” “많다니?” “몰랐나? 요즘엔 다들 집을 짓느라 성지에서 먹고 자는 전사들이 넘쳐난다.” “이번에 3차 판매까지 끝났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수가 얼마 안 될 텐데?” “집을 혼자 지을 수는 없지 않나. 다들 친구의 친구까지 불러서 매일같이 집만 짓고 있다.” 오, 그렇구나. “아무튼, 전부 불러라! 재밌는 일이 있을 거라고 꼭 말해주고!” “재밌는 일……?” “이따가 보면 알 거다.” “후후후! 뭔가 꾸미고 있군! 뭔진 몰라도 당장 하자! 나도 끼겠다!” 그렇게 아이나르는 잔뜩 신이 난 채로 전사들을 모으러 떠났고, 나는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소식을 들은 전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조금 낯선 모습들이었다. 정말 방금 전까지 집을 짓다가 왔는지 전사들은 손에 망치를 쥐고 있었다. 못을 박을 때 쓰는 그 가짜 망치가 말이다. “부족장이다!!” “오오!! 세 번째로 명예의 돌에 기록된 위대한 전사!!!” 먼저 도착한 전사들은 나를 보며 극도의 흥분 상태에 접어들었다. 혹시 바쁜데 불렀다고 화라도 내면 어떡하지 싶었건만. “재밌는 일이 있다면서!” “대체 뭔데 우리를 이렇게 다 부른 거냐!” “당장 하자!!” 아무래도 얘네들 역시 집을 짓느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모양. “기다려라! 모두 모이면 알려주겠다!” 이후 1시간 정도 흐르자, 어느새 숲 전체가 바바리안들로 가득한 상태가 되었다. 동족이 이만큼 모이면 축제인 줄 아는 전사들의 특성답게 온갖 소음이 가득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언제부터인가 자기 가슴을 북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들기며 즐기기 시작한 전사들. “비요른.” “성지에선 부족장이다.” “…부족장, 전부 모인 거 같다.” “그래?”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네. 잔뜩 흥분한 전사들에게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모두! 나를! 따르라아아아아!!” 목적지도, 목표도 없는 외침. 다만 그 외침을 끝으로 걷기 시작하자 전사들이 알아서 길을 내주었고, 트인 길을 벗어난 이후에는 다들 나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얀델의 아들 비요른!!” “가자아아아아아아아아!” 순도 100% 바바리안들로만 이뤄진 기다란 행렬. 이내 도시와 연결된 성문에 도착하자 보초를 서고 있던 전사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드르륵, 드르륵. 투박한 기계장치 소리를 내며 성문이 열린다. 그리고 이 몸에서 깨어난 첫날처럼, 성문 너머로 익숙한 회색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비된 도로와 석재 건축물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탑. “가자아아아아아아아!!” 이를 이정표 삼아 나아가기 시작하자, 길거리를 활보하던 행인들이 마차를 피하듯 끄트머리로 물러난다. 민폐를 끼친단 생각은 들었지만……. “와! 얀델 남작! 얀델 남작 맞죠 엄마?” “그, 그렇구나……!”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의외로 행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구경거리가 나타났다는 듯 동네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았다. 덜컥-!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수많은 시민의 얼굴이 우리의 행렬을 지켜본다. 단 한 가지 의문을 지닌 채. “근데… 대체 저들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게요…….” “경비를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저만한 인원이 뭉쳐 있는데…….” 실제로 머지않아 치안청에 소속된 경비병들이 긴급 출동하여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야,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무슨 용무로 나를 막아선 거지?” “그, 그게… 신고를 받아서…….” “체포라도 할 생각인가? 우리는 단지 길을 걷고 있을 뿐인데?”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됐군. 비켜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자, 경비대의 대장은 넋이 나간 얼굴로 길을 비켜줬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요란스러운 행진이 더 이어져 어느덧 도심지까지 이어졌을 때, 기사들이 나타났다.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권위적인 것으로 악명 높은 모즐란 출신의 기사 무리. 그러나 내게는 적용될 리 없었다. “실례지만, 지금 얀델 남작님께서 어디로 향하시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왜 내가 답을 해야 하지?” “이러한 행사에 대해서 그 어느 기관에도 전달된 적이 없다고 들어서… 확인차 묻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솔직히 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산책을 하고 있을 뿐이니, 너희는 신경 꺼라.” “……산책 말입니까.” 모즐란 소속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가 일반인이었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해산을 시키고, 더 나아가 주동자 몇을 본보기로 체포했을 테지만……. “내가 산책이라는데, 날 의심하는 거냐?” 나는 이 왕국의 남작이라서 말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염려할 뿐입니다. 천 명이 넘는 무력 집단이 모인 이상, 저희 역시 사태 파악은 해야 하니까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라비기온을 벗어날 일은 없다. 어디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 상업지구인 컴멜비. 더 나아가 황도까지 갈 생각은 없다는 것을 밝히자 기사 무리도 살짝 안도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희가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너희가 길을 걷는 걸 내가 방해할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끝내 모즐란에서 출동한 기사들도 나를 막지 못하고 곁에서 따라오는 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바바리안들이다!” “바바리안들이 왔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 이 소식은 어느새 도시 안쪽까지 전해지며 소란으로 번졌다. 시민들은 흔치 않은 광경에 퍼레이드를 보듯 우리가 가능 경로를 따라 기다렸다. “마탑……! 바바리안들이 마탑으로 가고 있다!!” 우직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슬슬 시민들도 이 행렬의 끝을 눈치챘다. 그리고 이는 바바리안의 흥분도를 더욱더 끌어올렸다. “마탑? 우리가 마탑으로 가고 있는 거였나!” “위대한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부족장이 우리를 신성한 싸움으로 이끈다!” “마법사들의 뼈다귀의 살점을 바를 시간이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이러한 전사들의 외침은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이, 이 미친놈들……!” “정말 마탑이랑 한판 붙으려는 건가?” “뭐어? 하지만 대체 왜?” “심장! 바바리안의 심장 때문이야! 마법사들이 저들의 심장을 마법재료로 쓰고 있으니까!” “…어떻게 될진 몰라도 오늘은 정말 진귀한 구경을 하겠군.” 주변에서 뭐라 떠들건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툭. 이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 높이 솟은 흑색의 첨탑과 그 앞 광장에 모인 수많은 구경꾼들. 그리고……. “…….” 우리가 이곳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나온 수백 명의 마법사들까지. “…….” “…….” 대치가 시작되자 수천 명이 모인 광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과장을 좀 더 보태면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광장. 늙은 마법사 한 명이 대표로 나왔다. “렝만 학파의 수석 마법사 위벨스 귈른이오.” 수석 마법사는 무협지로 치자면 장문 제자와도 같은 서열이다. 그리고 렝만 학파의 마스터가 바로 마탑주이니, 이 늙은이가 바로 마탑의 이인자라 볼 수 있는 셈인데……. “이제 그쪽도 소개를 해주겠소?” 거, 다 알면서 묻기는. 마법사라 그런지 참 형식을 좋아한단 말이지. “소개라…….”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인. 클랜 아나바다의 단장. 바바리안의 부족장. 라프도니아의 남작. 이제는 굳이 먼저 말할 필요도 없는 수식어들은 전부 뺀 채.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짧게 소개를 하자 노마법사가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소문으로만 듣던 영웅을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한데 얀델 남작께서 마탑에는 무슨 일이시오까?” “오래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하러 왔다.” “오래전에 했어야 하는 일이라……. 나이가 들어서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려.” “그러냐? 그럼 직접 말해주지.” 나는 반쯤 귀가 먹었을 노인네는 물론, 이 광장에 모인 모든 시민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말한다! 마탑은 우리들의 심장을 마법의 재료로 쓰는 것을 멈춰라!” “정말… 그것 때문이었나…….” 노인네는 이마를 짚으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이는 적법한 연구요. 아무리 왕국의 남작이자 바바리안의 부족장인 당신이라도 인류를 위한 지적 연구를 멋대로 중단시킬 수는 없단 말이오. 만약 이를 납득할 수 없다면, 정식으로 왕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짧게.” “…………응?” “짧게 말해라 늙은이.” 한데 늙은이라는 단어가 못내 거슬렸을까? “아무래도 남작께선 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내 원하는 대로 짧게 말하리다.” 놈이 안 그래도 주름진 얼굴에 주름을 더 크게 만들며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인자함과는 거리가 먼 굳은 목소리로.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이답지 않게 호전적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당돌하게. “그럼 어쩔 게요?” 노마법사는 물었고. “……!” “……!” 잠깐의 텀을 두고서 나는 답했다. “전쟁이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게. “……저, 전쟁!” “전쟁이다아아아아아아!!” “모두 무기를 들어라아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잖아? *** 「캐릭터의 지지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지지도가 +10 상승…….」 「…….」 「…….」 495화 선전포고 (6) 무려 10년을 넘게 참아왔던 선전포고. “……!!!” “……!!!” 마법사들이고,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이고, 모즐란의 기사들이고 모두가 입을 떡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는 딱 그런 얼굴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마법사가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농담으로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오.” 농담이라……. 하긴, 원래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부정부터 하는 게 국룰이긴 하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바바리안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한 3초 정도는. “······저, 전쟁!!” 한 전사가 소리 내어 외친 순간. 이를 기점으로 거센 함성이 이어진다. “저, 전쟁이다아아아아아아!!” “모두 무기를 들어라아아아아아!!” “베헬—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 명이 넘어가는 전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지르자, 마탑 앞을 지키던 마법사 무리들이 눈에 띄게 주춤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마법사와 전사의 전투력을 체구를 놓고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시각 효과가 없는 건 아니거든. “우아아아아아아아!” “우! 우! 우! 우! 우! 우! 우!” 평균 신장이 2m 10에 달하는 근육질 바바리안이 거대한 병력을 이룬 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하고 있으니 움츠러들지 않는 편이 이상할 정도. “늙은이.” 나는 백 명이 넘는 마법사가 모인 무리를 향해 크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아직도 농담처럼 들리나?” “…….” 노마법사는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 사람이 말하는데. 터벅. 그렇게 한 걸음을 더 내디디려는 찰나. “야, 얀델 남작님!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모즐란의 기사가 경기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전사들이 내뿜는 광기 어린 열기에 넋을 놓고 있기도 잠시, 뒤늦게나마 본인의 역할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저, 전쟁이라니요! 일단 지, 진정하고 얘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습니까? 와, 왕가를 생각해서라도 말입니다……!” 흥분한 거치고는 워딩이 나쁘지 않았다. 만약 왕가가 가만히 있을 거 같냐는 식으로 협박하듯 말했으면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을 텐데. “대화라…….” “예, 예! 분명 대화를 통해 서로의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탑과 바바리안 모두 이 도시를 유지하는 기둥들 중 하나 아닙니까? 이 도시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보자는 기사의 애원에 나는 짐짓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무력시위는 이쯤 하면 된 거 같으니까. 나도 정말 이대로 마탑에 쳐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이미 온 도시의 이목은 끌 만큼 끈 상황. 여기서 무작정 쳐들어가면 바바리안족만 악당이 될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에가틸 학파의 르윈 패스톨름!” 나는 한 사람씩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훌번트 학파의 루렌델 룽고네르드! 얼터스 학파의 오드윅 베르테프! 갈라티르 학파의 엘레넬 드와이나인!” 대화를 해보겠다던 내가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이름을 부르자 시민들은 이게 뭔 상황인가 하면서도 귀 기울여 내 말을 경청했다. “에바운드 학파의 톨스 엘린! 오른슈탈트 학파의 우클라 트라지그! 윌톰 학파의…….” 그렇게 나는 총 21명의 마법사들의 이름을 한 명씩 또박또박 거론한 뒤 노마법사에게 물었다. “늙은이, 너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나?” “물론이오. 대부분이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젊고 훌륭한 마법사들이지.” “아니, 틀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이들은! 암시장의 반역도들에게 바바리안의 심장을 원한다는 의뢰를 넣은 마법사들이다!” 어느 전쟁이든 명분이 중요한 법. “아! 그래서 바바리안들이 마탑에……!” “암시장에서 노예들을 구출했다더니, 그때 그런 정보를 얻은 모양이군!” 구경하던 시민들은 이제야 내가 마탑에 온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었어도 항의를 했을 거라며 납득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거로 끝낼 거면 오지도 않았지.’ 애피타이저는 애피타이저일 뿐, 결코 메인 요리가 될 수 없다. “트리텐 학파의 마스터 루렌델 갈린배럿.”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더 거론하며 물었다. “이자는 누구인지 아나?” “…….” 노마법사는 변호사에게 조언을 받은 사람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 그런다고 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닐진대. “암시장의 반역도들에게 의뢰를 넣은 자다. 내 심장을 원한다고.” 나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 “……!!” 단순히 바바리안의 심장을 구한다는 의뢰를 건 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살아 있는 특정인의 심장. 이 의뢰는 사실상 암살 의뢰나 다름없었으니까. “……귈른 경,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의 목은 물론, 마탑 역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요.” 내내 나를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모즐란의 기사도 표정을 바꾸고 늙은이를 겁박했다. 그야 모즐란은 마법사들의 기사가 아니니까. 모즐란이라는 집단 자체가 ‘귀족’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아직 무엇도 확인되지 않은 점이오. 하지만 내 약속하리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마탑의 원칙 아래에서 엄격하게 조사할 것을.” 노마법사는 능구렁이처럼 애매모호한 약속의 말을 꺼냈고, 이에 모즐란도 별말을 하지 못했다. 사안의 심각성은 인정하지만, 현장에서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는 만큼 한 걸음 물러선 것. 물론 내 경우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탑은 암시장의 반역도들과의 내통 혐의가 있다. 따라서 너희의 조사는 믿을 수 없다.” “……남작의 신뢰와 별개로 이는 우리들의 권한이오. 게다가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소?” “증거라…….”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올 건 예상했지. 나는 유서 깊은 바바리안의 비기를 꺼냈다. “맹세하겠다.” “……?” “바바리안족의 부족장이자, 라프도니아 왕국의 남작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왕가, 그리고 더 나아가 부족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모든 말들이 사실이다!” 그저 허울뿐인 맹세. 하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군중을 설득하는 것에는. “만인이 보는 자리에서 선언을 하다니,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가 보군.” “그럼 남작님께서 거짓말을 하셨겠어요?” “더러운 마법사들아! 감히 얀델 남작님을 해하려 들다니!” “어서 죄인을 데려와 처벌하라!” 내가 지금까지 남긴 영웅의 업적. 이름값. 더 나아가 도시에 남긴 우직한 인상과 호감도. 그리고 앞서 말한 명분들이 합쳐져 여론이 움직인다. “귈른 경, 남작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이상 당신도 해명을 해야 할 것이오.” “말했지 않소이까. 우리가 알아서 조사를 할 것임을.” “그것은 자유이지만, 꼭 그렇게 해야겠소? 당장 그들을 불러 물어보면 끝날 일인데.” “…….” “내 장담하건대, 오늘 저녁이면 모즐란에도 마탑의 마법사들을 조사할 권한이 내려올 것이오. 귀족 암살 모의는 그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니까. 그대는 정말 그것을 바라시오?” 모즐란에게 조사 권한이 내려가는 순간, 마탑은 공권력에 의해 속속들이 조사될 것이다. 그중에는 구린 구석들이 꽤 많이 있을 것이고. 그러나 노마법사가 내린 결단은 거절이었다. “배려는 고맙지만, 그 부분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시는구려. 그냥 그들을 불러다가 묻기만 하면 끝인데, 그 쉬운 걸 하지 못하겠다니.” “…….” 기사의 말에 노마법사는 묵비권을 행사했고, 이로써 모든 여론이 완성됐다. 침묵은 때론 무엇보다 명확한 답이 되어주니까. “더러운 마탑 놈들! 내 그럴 줄 알았지!” “감히 남작님을 해하려 든 자를 감쌀 생각인가!” 마탑이 악의 세력이 분명하며, 바바리안들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구도. 만약 저 늙은이가 여기서 내가 말한 마법사들을 불러다가 죄를 묻고 처벌을 하겠다 약속했다면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겠지만……. ‘일단 오늘만 넘기면 로비를 하든 뭘하든 해서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단 판단이겠지.’ 그런 대응 덕분에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공정한 기회를 믿고, 정의를 좇는 이 도시의 자랑스러운 신민들은 들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마탑을 향해 비난의 말을 던져대던 군중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선동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딱 좋은 정적. “타락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본인들의 죄를 인정할 마음이 없다! 아직도 자기 식구들을 감싸기 급급할 뿐이지! 연구실에서 쉬고 있을 그들을 불러내 검증만 하면 되는데, 그 쉬운 일을 거절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렇지 않은가?” “옳소!” 다시 한번 이쪽이 정의라는 걸 각인시키고. “아마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증거를 인멸하고, 뻔뻔하게 조작된 결과를 갖고 돌아오겠지. 안 봐도 훤하다. 우리들은 그러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지켜봐왔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옳소—!!” 서민들이라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분노를 일깨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러한 죄악을 무력하게 방관할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말한다. 바로 내가 케케묵은 그 분노를 짊어지고서 대신 나아가겠노라고.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이름을 걸고서. “그대들에게 약속한다! 지고한 라프도니아의 왕법 아래 세워진 이 도시의 정의는, 오늘 다시 한번 올바르게 세워질 것이라고!” 맹세한 즉시, 잔뜩 고양된 시민들이 열렬한 함성을 터트린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케이, 이쯤 되면 분위기는 무르익은 거 같고. 민간인들도 섞여 있으면 마법사 새끼들도 제대로 대응 못하겠지. 그래, 판은 이제 다 만들어졌다. 따라서…….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른 뒤, 전력을 다해 소리를 내지른다. “돌겨어어어어어어억!!” 요정족과의 전쟁 이후, 참고 또 참아왔지 않은가. 바바리안이 어떤 종족인지, 그만 잊어버린 이 도시에 다시금 일깨워줄 차례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말로 안 해. *** 제3 마도병단의 부보관 알렉스 헤일로. 오늘 하루도 정기 보고를 끝마친 그는 집무실을 떠나기 전에 상관을 몰래 곁눈질했다. 과도한 업무에도 깔끔하게 다려진 제복. 피로가 가득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총기가 가득한 푸른 눈동자. 펜을 쥔 자그마한 손……. “뭐 해요? 안 나가고?” 상관의 말에 움찔하기도 잠시, 그는 변명하듯 얼른 입을 열었다. “최, 최근에 신문을 자주 읽는 듯해서 말입니다.” “아… 이거요?” 실제로 상관의 책상에는 여러 회사들의 신문이 몇 부씩이나 뭉텅이로 쌓여 있었다. 다만, 이를 짚자 언제나 당당하던 상관이 눈을 피했다. 마치 부끄러워하듯이. “그냥… 취미예요. 매일 이곳에 박혀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알아아죠.” “…그렇군요.” 그렇다고 하기엔 상관의 책상에 놓인 신문들은 매번 내용이 똑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용이 아니라 기사의 주인공이 동일했다고 해야겠지. “요즘 시끌시끌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얀델 남작님께서 명예의 돌에 이름을 올렸다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처음 만났을 땐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정말 ‘위대한 전사’가 되어버렸어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듯한 음성. 이에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얀델 남작님께서는 부단장님의 전 동료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전 동료… 말이죠…….” “아…….”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알렉스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신문을 내려다보는 상관을 보며 알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부하1. 그것에 불과한 자신은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 “…….” 지난 추억을 회상하듯 상관은 말없이 턱을 괸 채 창밖을 보았고, 알렉스는 그런 상관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부, 부단장님! 긴급 출동 명령입니다……!” 집무실 문이 박차고 열리며 단원이 들어섰다. 상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을 차리고서 벌떡 일어나며 겉옷을 챙겼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3 마도병단은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청이나 모즐란이 아니니까. 왕가 직속의 군부에 긴급 출동 명령이라니? 단순한 폭동 이상의 사태가 도시에 벌어졌음을 뜻한다. “자세히 말해봐요.” 그녀는 집합 명령이 떨어진 연병장으로 나가며 부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이내 상황 파악을 끝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사태는 명확했다. 얀델 남작이 부족원들을 이끌고 마탑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경로상 마탑으로 가는 것은 확실하다는 보고입니다.” “어째서죠? 그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확인 중입니다. 다만, 천 명이 넘는 무력 집단이 이동하는 만큼, 치안청에서도 군부에 지원을 요청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군부의 집단답게 비상 소집령이 떨어지고서 몇 분도 채 되기 전에 병단의 모든 병력이 연병장에 집합했고, 그들은 모인 즉시 마차를 타고 군용 승강장으로 향했다. “부단장님, 이거 정말 큰일난 거 같은데요?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게 저희 병단만이 아닌 듯합니다.” 그들 병단을 제외하고서도 수많은 군용 마차가 승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이어져 있는 상황. 다만 알렉스의 말에도 상관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눈으로 평소 뜯지도 않던 손톱을 물어뜯을 뿐. “그 사람… 이번엔 대체 뭔 사고를 치려고…….” 알렉스는 상관의 불안 증세를 보며 최대한 긍정적인 말을 해주었다. 얀델 남작은 똑똑한 사람이다. 또한, 책임질 것도 많은 만큼 마탑에는 그냥 무력시위를 하러 간 게 틀림없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단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생각하는 바를 말했지만, 상관의 초조한 표정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알렉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 제가 걱정하는 건 얀델 남작이 아니에요.” “예……?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탑이지 않습니까.” 알렉스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 또한 마탑 출신이었기에 마탑이 지닌 힘과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녀는 뭘 그렇게 우려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속으로 품고 있던 때, 그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예전에 그 사람 때문에 탐험가 길드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세요?” “아, 그 누명 사건 말입니까…….” “네. 그때 대규모 탈출극이 벌어지며 길드 지부 전체가 박살났죠. 지역장은 그 일 때문에 발목 잡혀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어요.” “그래도… 길드와 마탑은 다릅니다.” 탐험가 길드 전체를 두고 본다면 모를까. 마탑 전체와 비교를 하면 길드는 구멍가게나 다름없다. 하지만…….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죠……. 길드와 마탑은 엄연히 다르다고. 바바리안 한 명한테 휘둘릴 만한 그런 집단이 아니라고…….”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레이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그 사람도 단순히 한 명의 바바리안이 아니니까. 그가 단신으로 뒤집어엎었을 때, 그는 고작 성인이 되고서 2달이 지난 바바리안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알렉스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 종족의 지도자이자 한 왕국의 남작이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요.” “……?” “알렉스, 절 믿어요. 일단 그 사람이 저질렀다면, 그게 아무리 무모해 보여도, 무모한 짓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물론 그런 말에도 알렉스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상관의 말에 계속 반박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에 말을 아꼈다. 드르륵, 드르륵. 그렇게 마차가 빠르게 도로를 내달리며, 이윽고 군용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지직, 지직-! 메시지 스톤을 통해 새로운 정보가 도착했다. [충돌, 충돌 상황입니다. 얀델 남작과 바바리안족 전사들이 마탑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서둘러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그 충격적인 보고에도 상관은 그저 길게 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마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496화 퀘스트 (1) 마르코 토웨어. 나이 서른둘. 십대 때 주방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요리와 장사에 흥미를 붙이고 재능을 갈고닦아 2년 전 라비기온 대로변에 작게나마 본인 이름을 걸고 가게를 열었다. 그는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였다. 치기 어린 시절도 있었으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문제가 생길 일은 하지 않았다. 불의를 보아도 참았고, 불똥이 튈 것 같다면 멀찍이 물러나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소리를 내지르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전사들과 함께. “오늘! 우리는! 마탑을 정복한다……!!” 그 말에 마르코 토웨어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평생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바바리안족의 전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제지하려 마법을 쉬지 않고 써대는 마법사. 그제야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달았다. ‘마탑…….’ 평생 저 멀리서 보았을 뿐, 안까지는 들어가본 적도 없는 바로 그 장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뒤에서 올라오는 이들에 의해 떠밀리듯 계단을 올라가며 그는 생각해 보았다. [얀델! 비요른 얀델이 수천의 바바리안 전사를 이끌고 마탑으로 향하고 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때마침 근처에 있었고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구경을 하러 갔다. [전쟁이다.] 거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영웅은 실제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쾌했고 거침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그가 하려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힘이 그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들은! 암시장의 반역도들에게 바바리안의 심장을 원한다는 의뢰를 넣은 마법사들이다!] 그의 힘찬 말이 이어지며, 정말이지 오랜만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느새 그는 다른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높여 마탑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그때는 그 정도였는데……. “겨, 결계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걸까. 내가 여기 있다고 뭔 도움이 된다고. “부순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이것 때문에 가족들한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왜 계속 이들을 따라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 걸까. 쿠웅-! 쿠웅-! 쿠웅-! 결계 마법으로 가로막힌 벽. “얀델 남작, 그만두시오! 여기까지요!” 그 반투명한 장막 너머에서 오만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 그리고……. 쿠웅-! 그러건 말건 우직하게 망치를 휘두르는 사내. 그 사내의 모습을 어느 때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던 그는 깨달았다. “부족장! 마법은 그런 식으로 파훼하는 게—.” “내가 예전에 말했을 텐데?” “……응?” “만약 부수지 못한다면, 그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강하다……!!” 저 사람은 강하다. 콰직-! 그 어떤 벽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만큼. “겨, 결계가 부서지고 있다!!” 그래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가 밟아나갈 수많은 여정 중에 단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걷는 길에 큰 보탬은 되지 못할지라도. 두근-! 한 번쯤은 지켜보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그런 사람이었다. *** 마탑. 왕국의 최중요 인력인 마법사들의 본거지이자, 긴 역사 동안 단 한 차례도 침입자들에 의해 정복된 적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라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난공불락은 무슨. 그냥 싸울 일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구성원 전체가 100% 마법사로 이뤄진, 딜탱 밸런스가 완벽하게 무너진 집단. 뭐, 설치된 각종 마법진들이 꽤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난공불락의 칭호를 쓸 정도는 맹세코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처럼 단결도 안 되는 느낌이고 말이지.’ 명분과 대중의 여론이 내 등 뒤에 있는 상황. 수백 개의 학파가 모인 이해집단인 만큼, 마탑이 침입된 상황에서도 모든 학파가 발 벗고 나서는 일은 역시나 없었다. “우리를 막지 마라! 우리는 원하는 죄인들만을 잡아 돌아갈 것이다!” 관련이 없는 학파들 중에는 아예 연구실 문을 닫고서 폭풍이 가시길 기다리는 곳도 많았다. 물론 바바리안들 따위에게 유린당할 수는 없다는 사상을 갖고서 열심히 힘을 보태는 마법사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얼씨구, 캐스팅하다 날 새겠네.’ 이 시기에 마탑에서 머무르던 자들은 보통 연구 마법사들이었다. 매일 실험실에 처박혀 새로운 술식을 짜고, 마도학을 공부하는 자들. 당연히 전투 마법사들과 같은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심각한 패널티도 존재했고. “……마스터! 그, 그냥 전부 불태워 버립시다! 노, 놈이 결계 마법을 깨부수기 전에!” “그럴 수 없다……. 네 눈에는 저들이 보이지 않느냐?” 바바리안과 마탑의 전쟁 구도에 엮여든 민간인 무리. “마스터! 저들은 시민이 아니라 그저 폭도일 뿐입니다!” “군부에서 정식으로 공문이 내려왔다. 결단코 시민의 피해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벌써 여기까지 뚫리지 않았습니까!” “…버텨라. 군부에서 보낸 병력이 올 때까지, 버티고 버텨야 하느니라. 그러면 우리의 승리다.” 섞인 민간인들 덕분에 마법사들은 수비 마법만 열심히 펼칠 뿐, 마법사의 최대 장점인 광범위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둔기류의 파괴력이 근력에 비례해 대폭 상승합니다.」 점점 굳건해지는 결계들을 박살내며 한 층 한 층 계단을 올라간다. “……더러운 야만인들! 너희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도중에 생포한 마법사들은 포승줄로 꽁꽁 묶어 포로로 만들고. “비요른! 너는 올라가라! 여기는 우리가 철저히 뒤져보겠다!” 공략이 끝난 층엔 전사들을 주둔시키며 수색을 시작했다. “아이나르, 말했듯이 목록에 없는 학파는 가장 나중에 수색해라.” “응? 하지만 놈들이 그쪽에 몸을 숨겼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래도 가장 나중에 해라.” 마탑 전체를 수색해서 리스트에 있는 죄인을 한 명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구태여 적을 더 만들 필요가 없단 판단이었다. 뭐, 사실 오늘 일로만 해도 이곳 마법사들은 평생 바바리안만 봐도 치를 떨 것 같긴 하지만……. 철천지원수와 그냥 원수는 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여기서 더 선을 넘어버리면 마탑의 모든 학파가 단결할 테고, 이는 이후 계획에 큰 문제로 격상될 것이다. “말했듯 절대 아무도 죽이지 마라. 무조건 생포를 하는 거다! 알겠나!” 몇 번으로 그치지 않고 틈이 날 때마다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내키는 대로 다 때려부수며 층을 올라가면 명분을 잃은 침략자로 전락할 뿐이니까. ‘그나저나 이제 30층인가…….’ 그렇게 힙겹게 또 한 층을 오르자 새로운 결계가 나를 맞이했다. “남작! 남작이 왔습니다……!” 반투명한 결계 너머로 모인 마법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시오, 남작!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리시오. 지금 당신이 얼마나 많은 법을 어겼는지 알고나 계시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법사들은 나를 욕하고, 또 설득하려 들었지만 내가 할 일은 변함없었다. 콰직-! 우직하게 망치를 내리치는 것. [휘두르기]를 열 번쯤 쓰니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만 층이 올라갈수록 결계가 견고해지는 것이 점점 체감됐다. 또한, 안 좋은 소식은 더 있었다. “부족자아아앙! 왕가군! 왕가군이 도착했다!!” 군부의 병력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시기였다. ‘이 정도면 거의 도시에 진입하자마자 출동 명령이 떨어진 거 같은데…….’ 쩝, 이 도시는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만 빠르단 말이지. “이제 다 끝났소! 그만 무기를 내려놓고 전사들을 진정시키시오!” 마찬가지로 소식이 전해졌는지 결계 너머에 있는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기세등등해졌다. 확실히 그럴 만했다. 우리 전사들도 최대한 막기는 할 테지만, 결국 왕가군이 먼저 도착하는 게 빠를 테니까. ‘오케이, 그럼 여기까지.’ 때마침 층과 계단을 구분 짓던 결계가 부서졌다.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던 마법사들은 혼비백산하며 위층으로 달아났고, 그중 몇몇은 전사들에 의해 포박됐다. “부족장! 뭐 하나!” “어서 위층으로 가야 한다!” 군의 개입에 다급해진 전사들. 다만, 나는 새로운 층을 뚫는 걸 멈추고 해당 층에서 대기하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발견한 죄인들을 전부 이리로 데려오라고?” “아, 알았다! 그렇게 전달하겠다!” 여기까지 할 수 있던 최선. 이제부터는 운의 영역이다. 오늘 우리가 점거한 31층 아래에 찾던 놈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이 수월해질 것이고, 그 반대라면 조금 골치 아파지겠지. “후…….” 그럼 결과가 어떨까. “비요르으으으으으은!!” 머지않아 아이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감을 자랑하듯 한 손으로 세 명의 마법사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 마일런 학파의 엑스텔린 플라코. 베벡탈트 학파의 모힐로 오스트퀸. 얼터스 학파의 쿠올 매맨돌리크. 아이나르가 잡아온 마법사는 이렇게 총 셋으로, 마탑 앞에서 거론한 22명의 마법사 중에 한 명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애초에 그때 말한 놈이 전부가 아니었거든. 그야 미리 말해주면 그놈들을 우선으로 안전한 곳에 빼돌릴 것 아닌가. “수고했다, 카론. 아이나르.” 공치사를 하며 도중에 어려운 일은 없었냐고 물었지만 딱히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 놈 전부 다른 곳으로 안 가고 그냥 자기들 학파 안에 숨어 있었다던가? ‘내 심장을 구해오란 놈을 못 찾은 건 조금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거로 만족해야겠지.’ 어차피 결국 그놈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이 이를 위한 발판이니까. “오, 오해! 뭔가 오해가 있소이다, 남작!” “오해인지 아닌지는 곧 알 수 있겠지. 아이나르, 아래층 상황은 어떻나?” “전사들이 막는 중이긴 하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 같다. 내가 아래 있을 때까지만 해도 벌써 4층까지 뚫린 상황이었다.” “어서 시작해야겠군.” 나는 일단 준비해온 기록용 수정구부터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눈이 마주친 이에게 이를 건넸다. 31층까지 따라온 유일한 일반인이었다. “이름이 뭐지?” “마, 마르코 토웨어라고 합니다. 남작님!” “마르코 토웨어. 기억했다. 자, 부탁이 있는데 저쪽에서 이걸 들고 서 있어주겠나? 나와 이들의 얼굴이 보이도록.” “여, 영광입니다! 하, 하지만… 이, 이런 중한 일을 어찌 저 같은 범부에게…….” 그는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봐 벌벌 떨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암, 저 바바리안들한테 예민한 장치를 쥐여주는 것보단 초면의 사람이 덜 불안하지. “마르코 토웨어.” 얼굴이랑 이름도 확실하게 기억해뒀고. “……마, 맡겨주십시오!” 촬영 감독도 섭외가 끝났겠다, 서둘러 심문에 들어갔다. 주변에 마법사가 한 트럭이었지만, 굳이 검증 마법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이미 하나 구해뒀거든. 「캐릭터가 [어긋난 신뢰]를 사용하였습니다.」 최근 많이 나아진 주머니 사정에도 제법 부담이 되는 바로 그 물건. “엑스텔린 플라코, 모힐로 오스트퀸, 쿠올 매맨돌리크.” 나는 포박된 세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 다시 한번 말해봐라. 아직도 내가 너희를 오해하고 있나?” 잡혀온 다음부터 내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누명이라고 하던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야 이 아이템 앞에선 거짓말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 진실을 증명하는 침묵. 그러나 이걸 증거로 쓰기 위해서는 침묵이 아니라 명확한 답변이 필요하다. 따라서……. “너희들은 지금 역모 혐의를 받고 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목줄을 조인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여, 역모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가족이 전부 처형될 수도 있는 민감한 안건인 만큼 여기서도 침묵하기엔 어려웠던 것. “나, 나는 역모를 꾸민 적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소. 지, 지금 이렇게 말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소? 이건 사실이오!” 도리어 촬영 중인 쪽을 바라보면서까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마법사들. 그래, 역모 죄는 무섭다 이거지? “너희의 의도야 어쨌든, 결국 반역도들과 손을 잡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손을 잡다니……! 나, 나는 단지 의, 의뢰를—.” 넣었을 뿐이다. 분명 그렇게 말하려 했던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 말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도중에 끼어든 이가 있던 탓이다. “그만하시구려, 얀델 남작.” 층 전체를 울리는 중후한 음성. 그와 동시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한 노인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초면이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렝만 학파의 마스터이자, 케알루너스 공작의 셋째 동생. “테슐런 렝만 케알루너스.” 마탑주였다. 497화 퀘스트 (2) 때론 눈빛과 존재감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다. 마탑주 테술런 렝만 케알루너스가 바로 그랬다. “타, 탑주님……!” 키는 170 초반 정도. 체구는 전형적인 비실이 마법사이고, 늙어서 피부에 주름도 가득하다. 솔직히 말해, 어깨까지 올라오는 저 지팡이만 아니면 그냥 길을 걷는 평범한 노인네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터벅. 하지만 그가 계단을 전부 내려와 층 로비에 설 때까지 전사들을 포함해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눈빛 하나만큼은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고, 눈매 또한 날카로웠으나 그것이 이유는 아니었다. 전사들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마법사와 전사. 서로의 영역은 다를지라도, 강자의 입장에 선 것은 바로 저쪽이라는 걸. “비요른 얀델 남작.” 이내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온 마탑주가 나를 잠시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정말로 형님이 말한 그대로의 인물이구려. 반갑소이다.” 조금 의외인 첫인사였다. 마탑의 주인 되는 자가 마탑을 침략한 야만인을 보며 저런 반응이라니. 미친놈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건만. 터벅. 크게 걸음을 뻗어 거리를 좁히자, 마탑주가 그만큼 뒤로 물러선다. 덕분에 긴가민가하던 게 확실해졌다. ‘일부러 범위 안에 안 들어오고 있네.’ 지금 마탑주는 ‘어긋난 신뢰’를 의식하고 반경 내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다만,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반갑다고는 못하겠군. 반역도들을 심문하는 중이라서.”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말하자, 마탑주가 피식 웃었다. “감정은 잠시 내려두고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봅시다. 어떻소?” 마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목소리. ‘허심탄회는 개뿔.’ 이 할배는 알려나? 괜히 저러면 바바리안으로서는 청개구리 심보만 커진다는 걸. “거절이다! 아까 말했듯이 반역도를 심문하느라 바빠서 말이지!” “하지만, 내가 당도한 이상 저들이 무엇도 말하지 않을 거란 걸 남작도 알고 계시지 않소.” 확실히 그건 그렇지. 이 노인네가 도착한 순간부터 잡혀온 마법사 셋의 눈에 희망찬 결의가 가득 새겨졌다. ‘정 안 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협박하려 했는데, 저 늙은이가 온 이상 그것도 안 될 거 같고…….’ “천천히 생각해도 좋소만, 이대로면 왕가군이 곧 도착할 거요.”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라.” “우선 사람들부터 물려주시겠소?” “전사들만이라면. 하지만 마르코는 안 된다.” “마르코라면 저 친구를 말하는 것이오?” 마탑주가 힐끗하자 열심히 촬영 중이던 마르코가 움찔했다. 하긴 저런 권력자가 노려보면 무서울 만하지. “왕가에선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흐음, 그렇소이까?” “혹시 이를 부정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소.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로서 왕가의 일을 방해할 마음은 추호도 없소. 하지만…….” 마탑주가 말꼬리를 흐리며 한 번 더 마르코를 힐끗했다. 그리고 그 순간. 펑-! “우, 우아악!” 수정구가 깨져나가며 마르코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런, 고장이 났나 보구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마탑에서 산 건데, 하필 불량이었나보군.” “마력 장치란 것이 아무리 공을 들여도 불안정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 말이오. 다만, 마탑을 대표해 사과하리다. 나중에 구매처에 내 이름을 대시면 새것으로 몇 개 줄 것이오.” 이야, 재밌네. 이 할배. “아이나르, 마르코를 포함해 전부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 있어라.” “괜찮겠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보내자 아이나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네들은 잠시 자고 있게나.”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세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아주 기초적인 수면 마법이었다. 그렇게 장내에 둘만이 남은 상황. “자, 그럼 해봐라. 사람들까지 다 내보내고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였지?” “시간이 없으니 내 짧게 말하리다.” 마탑주는 그리 말하며 세 걸음을 내디뎌 ‘어긋난 신뢰’의 반경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마탑은 오늘 이후로 ‘바바리안 심장’을 이용한 모든 연구를 금지할 것이오. 이를 어기고 연구하다 적발될 시, 금지된 마법을 다룬 것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는 뜻이오.” “그리고?” “암시장에서 심장을 구하려 한 이들 역시 징계를 내리겠소.” “어떤 징계지?” “더 이상 그들은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고 말하고 다니지 못할 것이오.” 쉽게 말해, 해고 조치를 하겠다는 뜻. “남작께서는 미약한 처벌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이 정도 죄몫으로는 그게 한계라는 걸 알아주시오.” 마탑주는 설득하듯 말했지만, 사실 나는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만족이었다. 죄를 부풀리기 위해 반역도니 뭐니 했지만, 그게 인정될 리는 없으니까. “물론 이 다음에 암시장을 통해 바바리안 심장을 구하려 한다면 죄의 무게 자체가 달라질 것이오. 엄연히 금지된 물품을 구하려 한 것이니.” 오케이, 사후 조치도 확실하고. “그리고?” “오늘 마탑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무단 점거한 사건도 문제 삼지도 않겠소. 남작께선 단지 호되게 꾸짖기 위해 방문했을 뿐이고, 이에 마탑도 잘못을 인정하고서 일을 바로잡음으로 용서를 받았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질 것이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긋난 신뢰’ 때문에 거짓말은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물음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진심인가?” 방금 이 노인네가 말한 건 마탑이 바바리안에게 패배했단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진심이오.” 기쁜 감정보다는 껄끄러운 마음이 더 강했다. 그야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대가로 내게 뭘 바라지?”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마탑주가 한 사람의 이름을 댔다. “트리텐 학파의 마스터 루렌델 갈린배럿.” 암시장에 무려 내 심장을 원한단 의뢰를 넣었던 바로 그 마법사. “그녀의 혐의를 지워주시오.” 후, 어쩐지 이 여자에 대한 얘기가 빠져 있더라니.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물었다. “그 여자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그녀는 몹시 훌륭한 마법사요. 잠깐 욕심에 눈이 멀어 무모한 생각을 벌이긴 했지만, 그녀의 연구가 언젠가 이 세상에 큰 변혁을 불러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믿어 의심치 않기는. 딱 봐도 뭔가 더 이유가 있구만. ‘루렌델 갈린배럿이라……. 생각보다 대어를 낚은 거였을지도…….’ 아무튼, 이 여자는 나중에 아멜리아한테 조사를 해달라고 하면 될 거 같고. “어떻소. 내 제안이? 이제 대답을 듣고 싶소만.” “좋다. 네 제안을 따르지.” 나는 이쯤에서 협상을 끝냈다. 내 심장을 노린 여자를 놔주는 것은 아쉽지만, 그걸 감안해도 내가 바라던 것 이상을 얻어냈으니 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저쪽은 못내 불안했을까? “자,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는 악감정이 없는 것이오?” 마탑주가 나를 살살 떠보기 시작했다. 어긋난 신뢰가 발동 중인 상황을 이용해 내 속내를 한 번 엿보겠다는 거겠지. “그러는 너는? 내게 악감정이 없나?” 대답을 피하고 역으로 묻자, 마탑주는 의외로 흔쾌히 입을 열어 답했다. “남작에게 악감정은 없소. 처음부터 그랬소. 남작은 한 종족의 수장으로서 남작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 않소?” 비즈니스 마인드라 이거구나. 아무튼,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대답을 거부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 내게 있어서도 좋을 게 없을 테고. “그럼 이제 남작의 솔직한 마음을 들어볼 수 있겠소?” 솔직한 마음이라……. “악감정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심장 때문에 미궁에서 죽어갔으니까. 당연히 너희가 밉다. 하지만……!”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어긋난 신뢰’의 나침반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손목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마탑을 공격할 일은 없을 거다!” ‘어긋난 신뢰’를 사용하는 주체가 나일 때만 사용 가능한 꼼수였다. “무엇보다, 너도 생각보다 좋은 놈 같고 말이다!” 내가 거짓말을 할 땐, 이거 작동을 안 하거든. *** 이후로 벌어진 일은 별거 없었다. 머지않아 왕가군이 우리가 있던 층에 도착했고, 한 나라의 남작과 마탑의 주인이 대치 상태인 것을 보며 크게 기겁. 다만, 마탑주가 먼저 나서서 책임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식으로 나를 변호하고 나서며 상황이 정리됐다. “그러니까… 케알루너스 경께서 용서를 구했고, 얀델 남작님께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 말씀이시오?” “그렇소만.” 군부 출신의 지휘관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으나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든 무슨 상관인가. 왕가 입장에서는 더 큰 분쟁으로 번지지 않고 좋게 끝난 것만으로도 십년감수할 일이었다. “뭣들 하나! 어서 정리하지 않고!” 군부에서는 바바리안을 포함해 모든 이들을 해산시켰고, 마탑주는 암시장과 접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마법사 36인을 순순히 모즐란에 내주었다. “그런데 이중에 남작님의 심장을 원했다는 그 마법사는 없는 듯하군요?” 암시장과 접촉한 것이 경범죄라면, 귀족 암살 혐의는 교수형부터 시작하는 중범죄였다. 다만, 혐의를 벗기는 것은 아주 쉬웠다. “아, 그거? 잘 생각해보니 이름이 맞는지 기억이 안 나서 말이다. 헷갈린 걸 수도 있는데 엄한 사람을 잡아갈 수는 없지. 나중에 기억이 나면 제대로 말해주겠다.” “…알겠습니다.” 트리텐 학파의 마스터 루렌델 갈린배럿. 왕실 조사관은 그녀가 이번 거래의 핵심이었음을 눈치챈 듯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괜한 말은 하지 않고 넘어갔다. 다시 말했듯, 이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정말로… 잘 마무리 되어서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얀델 남작께서는 왕가의 윤허 없이 도시 내에서 천 명 이상 규모의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약식으로나마 벌금을 내셔야 할 텐데. 그것만 꼭 좀… 꼭 좀 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이후 군부에서는 거의 애원하듯 그리 말하며 마법사들을 이끌고 마탑을 떠났다. 따라서 나도 이제 이곳을 떠날 차례. “저들의 죄가 확정되면, 말했던 대로 확실하게 처벌을 할 터이니 남작께서는 염려 마시오.” “그래, 그럼 가보겠다. 배가 고파서.”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나르에게 붙잡혀 성지로 끌려갔다. 쿠웅-! 쿠웅-! 쿠웅-! 성지는 이미 승전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딱히 부족 내에서 뭔가 준비를 한 것도 아닌데, 전사들은 각자 갖고 온 술을 물처럼 들이켜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규모만 보면 내가 본 어느 축제보다 큰 규모.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던 바바리안들 모두가 성지에 온 거 같았다. “비요른!” “부족장이다.” “부족장! 뭔가 말이라도 해봐라! 다들 기다리고 있지 않나!” 때가 무르익었을 때 아이나르에게 등을 떠밀려 축사도 읊어야 했다. 아, 물론 바바리안 스타일이라 길지는 않았다. “우리는—!!” “우오오!” “승리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짧은 한 마디의 선언으로도 광기 어린 분위기는 더 크게 불타올랐다. ‘이런 홍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카론에게 ‘동지회’를 시켜 부족원들에게 부동산 얘기를 퍼뜨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축제 내내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다들 알고 있나? 승리는 이번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 부족은 더 크게 번영할 테고, 그만큼 집값도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겠지!” “지금 사지 않는 건 미련한 전사뿐이다!” “뭐? 마석을 모아서 무기를 바꾸겠다고?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래서 언제 새 무기를 사겠나?” 이 정도면 부동산 정책에도 큰 힘이 될 터. 어느 정도 축제를 즐긴 뒤에는 몰래 성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거실 소파에는 아멜리아가 앉아 있었다. “얀델.” “……응?” “너는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지 못하는 병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어째선지 아멜리아는 짜증이 난 상태였다. 암시장을 박살낸단 계획에도 별말하지 않았던 게 바로 얘인데. 왜지? 고민을 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미안하다. 너한테 상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벌여서.” 정답인지 아멜리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알고는 있군.” “어? 방금 웃었지?” “무슨 소리지?” “웃었지 않나! 방금 내가 봤는데?” “…모함하지 마라.” 모함은 무슨.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자 아멜리아가 툭하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속은 시원해졌나?” 아오, 얘도 진짜 훅 들어오네. 왠지 기분이 묘했지만, 일단 솔직히 답했다. “어. 아주 많이.”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잘됐군.” “…….” 잠깐의 정적이 있은 후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고, 소리를 듣고 깼는지 에르웬도 눈을 비비며 내려와 함께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 나다… 비요른…….”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다. 498화 퀘스트 (3) 적당하게 우려진 차와 형식적인 다과. 아우옌이 준비해 준 접객용 상차림을 사이에 두고서 어색한 침묵이 잠시간 이어진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샤 쪽이었다. “이거…….” “응?” “루바트 제과점의 과자들이네……. 여기도 나쁘진 않지만, 니엘론 제과점 쪽이 더 싸고 네 입맛에도 더 잘 맞을 텐데…….” 갑자기 왜 과자 얘기?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스몰 토크라 생각하고 대충 답했다. “그러냐? 이런 건 아우옌이 알아서 사오는 거라 난 잘 모른다. 맞다. 아우옌이 누구냐면—.” “알고 있어. 아우옌 록로브… 항해사라고.” “…그러냐?” “…….” 어째선지 시작된 대화가 얼마 못 가서 끊겼다. ‘후, 괜히 사람 긴장되게.’ 회초리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그냥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샤, 오늘 왔다는 건 생각이 다 끝났단 뜻으로 봐도 되겠지?” “…응.” “그래서 결정은 어떻게 했나?”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미샤가 한참이나 망설이다 답했다. “네가 새로 만든 클랜… 들어갈게.” “정말이냐?” “으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긴장이 풀렸다. 자꾸 꼬물딱거리기에 거절하는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너랑… 네 동료들만 괜찮다면…….” 이어진 뒷말에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안 괜찮을 이유가 뭐냐? 아, 에르웬이랑 사이가 안 좋다고 했지? 걱정 마라.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다. 이제 걔도 상태가 많이 나아졌으니까.” “아…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부르는 건 어떠냐?” “어, 어……?” “저번엔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 않나. 이제 같이 미궁에 들어갈 사이이니, 그런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거 같은데…….” 미샤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따라서 그대로 미샤를 두고서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 아멜리아와 에르웬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리고……. “…….” “…….” 아니나 다를까, 불편하다 못해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정적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멜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 좀 어떻게 해보라는 내 눈짓에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인데……. “얀델. 너는 위에 올라가 있어라.” …응? “해결을 바라는 거라면 잔말 말고 내 말에 따라라. 네가 여기 있으면 방해만 될 뿐이니까.” 어째선지 시작부터 쫓겨나버렸다. *** 아멜리아와 에르웬, 그리고 미샤. 셋의 대화가 끝난 것은 약 1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아멜리아가 닫아둔 문에 노크하며 이제 내려와도 좋다고 허락했고, 나는 호다닥 뛰어서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거실의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꼴이었다. “…….” “…….” 화목한 분위기도, 그렇다고 험악한 분위기인 것도 아니다. 단지, 한 차례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난장판이 되어 있을 뿐. “저기… 에밀리?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멍하니 묻자 아멜리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오랜 대화 끝에 셋이 잘 지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 그건 잘 됐는데……. 지금은 그걸 물어본 게 아니다. 뭔가… 이것저것 부서져 있는 거 같은데?” “아, 그거? 신경 쓰지 마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손이 미끄러졌을 뿐이니.” 어떻게 손이 미끄러져야 1층 거실이 이렇게 난장판으로 변할 수 있는 걸까. 주변을 쓱 둘러보고 있자니 도중에 눈이 마주친 에르웬이 시선을 피했다. “……맞아요. 손이 미끄러져서.”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마지막으로 미샤를 응시하며 추궁의 눈초리를 쏘아보냈지만, 미샤 역시 입을 꾹 다물 뿐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진 않은 거 같으니 됐나…….’ 나는 현재 거실 상태에 대해 깊이 추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조금 트러블이 있기는 했지만, 얘기는 잘 끝난 거 같네.’ 좀 더 자세히 예상을 해보자면, 미샤와 에르웬이 대립했고 아멜리아가 중간에서 잘 중재했으리라. “저는… 먼저 올라가볼게요.” 이내 에르웬이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향했고, 이에 미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나도… 이만…….” “응? 어디를 가냐? 그냥 여기서 지내지? 빈방도 많은데.” “그게… 생각해 봤는데, 나는 역시 따로 지내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 서로 불편하기만 할 테고……. 들어보니 아이나르도 그렇게 지낸다면서……?” 어, 그건 그렇지. 아이나르는 요즘 성지가 아주 재밌다면서 매일 거기에 박혀서 1장로로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까… 놔 줄래?” 일단 잡고봤던 팔목을 놓았다. 조금 아팠는지 잡혔던 부위를 손으로 살살 매만지는 미샤. “그, 그럼…….” 이내 미샤가 호다닥 현관문을 열고 떠났고, 결국 나는 선을 긋는 듯한 그 모습에 더 붙잡지 못했다. “…셋이서,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거냐?” 답답한 마음에 아멜리아에게 물었으나,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여자들만의 비밀이니, 너는 몰라도 된다.” 아니, 이러니까 더 감이 안 오는데. 진짜 셋이서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 미샤가 다녀간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레이븐?” “들어가도 되죠?” “아, 물론이다.” 에르웬의 정수 실험 후, 밀린 나랏일을 하느라 바쁘던 레이븐이 오랜만에 방문했다. “예전보다는 집이 작아졌네요?” “아, 여긴 처음이지?” 간단하게 집 구경을 시켜준 뒤, 아우옌이 내온 다과를 즐기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냥 심심해서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 때문에 왔나?” “무슨 일 때문?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역시 마탑 때문이었군.” “하아…….” 한숨을 깊이 내쉴 뿐, 예상외로 레이븐도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얘도 사정을 들어서 아는 것이다. 조금 과정이 과격하기는 했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걸. 무엇보다 사건 자체도 원만하게 마무리됐고.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진짜 방문 목적은 역시 이쪽이겠지. “마탑주께서 그 정도로 양보를 하다니, 이해가 안 돼요. 솔직히 말해서, 이제 전쟁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었는데…….” “그게 궁금해서 찾아온 거였군?” “………겸사겸사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탑주와 했던 거래를 전부 실토했다. 이 부분에선 얘 조언도 들어보고 싶었거든. “루렌델 갈린배럿……. 그분을 지키려고 마탑주가 그 많은 걸 양보했다고요?”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잘은 몰라요. 예전에는 급이 달라서 얘기를 나눠볼 일이 없었거든요. 군부에 들어간 후엔 마탑 활동을 거의 안 했고.” “그래도 같은 마법사인데, 나보다는 아는 게 많을 거 아니냐. 뭐든 좋으니 해봐라.” “그…….” 레이븐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루렌델 갈린배럿은 바바리안의 심장에 대한 논문을 가장 많이 낸 마법사예요. 트리텐 학파 자체도 그쪽 연구에 관심이 많고요.” “흐음, 그래서 내 심장을 원했던 건가.” “어쩌면요. 그 여자라면 정말 순수하게 얀델 씨의 심장을 연구해보고 싶어서 그런 의뢰를 넣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리고, 그 연구는 마탑주도 흥미를 보일 만큼 중요한 연구일 가능성이 높고 말이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니라면 그 마탑주가 그렇게까지 양보하며 싸고 돌 이유가 없으니까요.” “……레이븐, 혹시 네가 한번 좀 알아봐줄 수 있겠나?” “음… 좋아요. 저도 이 부분은 조금 궁금하니까. 혼자 조사해보다가 뭔가 나오면 얀델 씨한테도 공유해드릴게요.” “고맙다.” 그렇게 이번 주제에 대한 대화는 끝. 나는 이왕 레이븐이 온 김에 이것도 물어봤다. “레이븐, 혹시 말이다. 혹시… 미궁에서 ‘지식’ 같은 걸 얻는 경우도 있나?” “지식… 이요?” “그래, 지식. 예를 들면 원래는 읽지도 못했던 고대어를 갑자기 쓰고 읽을 수 있게 된다든가 하는 그런—.” 내 예시에 레이븐이 테이블을 박차며 일어섰다. “고대어! 고대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아, 아니… 고대어는 그냥 하나의 예시일—.” “예시는 무슨! 그게 그 소리잖아요!”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들이란. 둘러대봤자 믿을 거 같지 않아서 그냥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래, 고대어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어느 정도로요……?” “글쎄? 아직 확인을 해본 건 아니라서…….”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레이븐이 아공간에서 고대어로 적힌 책을 꺼내서 내게 읽게 시켰다. 하지만……. “마흐니아르수스가 아내를 돌려달라고 간절히 청했으나 카프라카다흐는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이 그녀보다 더 사랑해줄 수 있다는 게 이유… 아니, 이게 대체 뭔 책이야?” “됐으니까, 계속해봐요.” “…이유였다. 이에 마흐니아르수스는 칼을 뽑아 그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카프라카다흐는 피를 흘리면서도 손을 뻗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뿐…….” 열심히 소리까지 내어가며 책을 읽어 내릴수록 레이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이건 나도 사전 없이는 제대로 못 읽는 책인데…….” 흐음, 그렇단 말이지……. 얘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고대어를 열심히 배운 축에 속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무텐 아비유르 부크라트흐.” “…방금 뭐라 한 거예요?” “난 고대어로 말할 수도 있는데, 라는 뜻이었다.”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한참이나 지나서 반응이 돌아왔다. “…………얀델 씨, 맞을래요?” 단순 위협이 아니라는 듯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올리는 레이븐. “끼앗호 끼끼흐 꾸에엑흐.” “……?” “아, 요번 건 맞기 싫다는 뜻—.”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결국 한 대 맞았다. 뭐, 살이 퉁퉁 부어오른 건 때린 쪽이었지만. “아, 진짜……. 얀델 씨는 사람이 왜 그래요?” “미안하다. 아무튼,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이런 경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근데… 얀델 씨는 어떻게 된 거예요? 역시… 그 보상인가요? 이번에 명예의 돌에 기록된 그 업적과 관련된…….” “뭐, 비슷한 거다.” “………들려줄 수 있을까요?” 레이븐이 조심스럽게 요구했고, 나는 흔쾌히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줬다. 지금은 예전처럼 동료 사이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악령이란 걸 알고도 도와준 여자 아닌가. 마법사의 식견이 필요하기도 했고. “거기서 겪은 일들은 단순히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 거예요. 아니, 분명 과거에 있었던 일이겠죠! 계층군주와 마녀 사이의 명확한 인과 관계라니!” 내 얘기를 들은 레이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에요! 이로써 미궁이 다른 차원이 아니라는 가설이 증명된 거니까요! 어쩌면 미궁의 차원 좌표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축을 사용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요!” 물론 나는 심드렁한 입장이었다. 공간이니 시간이니 해도 잘 와닿지 않는달까. “그러냐?” “베르실 고울랜드! 그 여자는 뭐래요? 그 여자도 마법사잖아요! 분명 이런 대단한 발견을 했으니,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겠죠?” “아니, 걔도 별로 관심 없던데?” “네에에에?!” 베르실은 플레이어 출신이라서 말이지. 이런 역사 쪽에는 큰 흥미가 없는 거 같다. 다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됐을까? “그, 그럴 수가……. 어떻게 마법사가 그럴 수 있죠?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던 레이븐이 돌연 말을 멈췄다. “있었다면?” “…아니에요. 어차피 의미가 없는 이야기니까.” 갑자기 확 가라앉은 분위기. 왠지 대화 화제를 바꿔야 할 것만 같아서 레이븐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꺼냈다. “아, 맞다! 그리고 또 하나 네게 들려줄 소식이 있다.” “…소식요?” “미샤가 돌아왔다.” 이후 미샤와 재회를 한 것, 그리고 다시 클랜에 들어오기로 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그래요? 잘된 일이네요.” “주소를 말해줄 테니 한번 들러봐라. 미샤도 네가 오면 반가워할 것—.” “나중에요.” “…응?”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부대에서 할 일이 있어서.” 레이븐은 더 어두워진 낯빛으로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 레이븐이 다녀간 후로도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성지에 들러 로트밀러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난쟁이놈의 대장간에도 가서 진척도를 살피고, 클랜원 모두가 모여서 다음 탐사 계획에 대해서도 여러 번 의논하는 등. 일상적인 업무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항상 그런 일일 퀘스트로만 하루가 채워진 건 아니었다. 바로 오늘처럼. “구드릭스 자작가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총 31개. 아니, 이제는 32개의 가문으로 이뤄진 이종족 귀족 연합 ‘멜베스’의 일원 중 하나인 구드릭스 자작가의 초대를 받고 저택에 방문했다. “흐하핫! 반갑소이다, 남작. 구드릭스 자작이오. 한창 바쁠 터인데 초대에 응해줘서 참으로 고맙소!” 드워프의 핏줄답게 다른 귀족들보다는 호쾌한 말투를 사용하던 구드릭스 자작. 다만, 그래도 귀족인지라 서론이 길었고, 결국 내가 먼저 눈치를 주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 그래서 왜 나를 부른 거냐?” “멜베스를 대표해 얀델 남작에게 맡길 의뢰가 있소이다.” 첫 멜베스 전용 퀘스트였다. 499화 퀘스트 (4) 이종족 귀족가 연합 멜베스. 나는 이곳에 몸을 담으며 얀델 남작가의 지원을 비롯해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지원을 받아냈다. 사실상 클랜의 경우엔 거의 떼를 써서 받아낸 것인데, 지원 항목 자체도 그리 크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저택으로 사용 중인 클랜 하우스를 저렴하게 제공받은 것이나, 앞으로 공금을 이용한 대출이 가능해진 것이 일방적인 혜택의 전부. ‘의뢰라…….’ 그렇기에 ‘의뢰’의 중요성이 커진다. ‘의뢰’는 혜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조건부 계약에 가까웠으니까. ‘이 의뢰를 얼마나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지겠지. 내 입지도 훨씬 올라갈 테고.’ 게임으로 치면, 공적치 시스템과 비슷하다. 퀘스트를 깨면 랭크가 오르고, 그에 따라 혜택이 늘어나는 거지. 뭐, 그래도 누울 자리인지는 제대로 확인하고 발을 뻗어야 하겠지만. “뭘 의뢰하려는 거지?” 보수가 얼마인지 묻기보다는 의뢰 내용을 먼저 확인했다. “정보요.” “……정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의뢰라는 것은 십중팔구 사냥, 채집, 전투 이렇게 세 항목 중 하나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정보라니? 자세한 설명을 하라는 눈짓을 보내자 구드릭스 자작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 이번에 아주 큰일이 있지 않았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정확히 말해라.” 귀족스럽게 빙빙 돌려 말하려던 자작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딱 잘라 명확하게 말했다. 음, 명확하게까지는 아닌가? “명예의 돌에 새겨진 글귀 말이오. 알아봤더니 숨겨진 지역이라는 것이, 새로운 계층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구려.” 그래도 뭘 말하는지는 알 거 같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내게 바라는 정보가 무엇인지는 확실하니까. “얀델 남작은 분명 다음 탐사에서부터 미탐사 지역을 수색할 것 아니오? 탐사 성과를 우리에게도 공유를 해줬으면 하오. 정말 숨겨진 지역이 새로운 계층이 맞는지, 입구가 어디이며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흐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자작이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 이 의뢰는 멜베스의 의회에 정식으로 공인된 안건이며, 의뢰 완수 시 그에 상응하는 보수가 즉시 지급될 것이오.” “보수라면 얼마나?” “탐사 성과의 가치, 그리고 희소성에 따라 다를 것이오. 아직 확인된 게 무엇도 없지 않소? 막말로 다음 탐사에서 입구가 발견되어 모든 탐험가가 그 방법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나 그래도 제대로 된 성과만 낸다면 결코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오. 이미 열세 개의 가문이 동참하기로 하였으니.” “열세 개?” “기회에 대한 주관적인 의견은 누구나 다를 수 있지 않소? 이번 의뢰의 보수는 동참하기로 한 열세 개의 가문이 모은 공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오.” 해석하자면, 다른 가문들은 이번 의뢰를 ‘낭비’로 판단했다는 뜻. “그래서 정식으로 회담이 열린 게 아니라, 네가 대표로 나를 만난 거군.” “그렇소이다. 애석하게도 임시 표결 과정에서 과반수를 넘지 못했으니 말이오. 아, 물론 걱정은 하지 마시오. 우리가 따로 공금을 모아 의뢰를 넣는 것은 정식으로 허가가 났으니 말이오.” 번거롭기 그지없는 과정을 듣고 있자니, 의회란 집단의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뭐, 그만큼 장점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오?” “시간보다는 몇 가지 묻고 싶은데.” “무엇이든지.” “탐사 정보를 얻어 뭘 하려는 거지?” 내 물음에 구드릭스 자작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남작은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9등급 정수가 무엇인지 아시오? 바로 심연어라오. 다른 9등급 정수들에 비해 크게 좋을 것도 없는 그 정수가, 32억스톤이라는 거액에 판매됐지. 왜 그런지 아시오?”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나,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짐작이 갔다. “…최초였으니까.” “그렇소. 9층 균열에서 발견됐다는 이유 하나로 마탑은 그 큰돈을 주고 정수를 구매해갔소. 최초엔 그만큼 큰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다만 돈이 목적인 거냐고 되묻자, 자작은 그건 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예로부터 새롭게 등장한 지역에서는 수많은 보물과 기회가 있어왔소. 해룡 살해자 뮬마린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영웅이오. 그가 최초로 해룡을 처치하고서 얻은 힘과 권능은, 이후 미궁의 그 어떤 누구도 다시 얻을 수 없었지.” “그래서?” “남작에게 얻은 정보는 믿을 수 있는 각 부족의 탐험가들에게 전달될 것이오.” “정보를 이용해 그들을 성장시키겠다는 거군.” “그렇소. 이종족 출신 탐험가들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의 힘 역시 커질 테니까.”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긴 했으나, 자작의 얘기를 들어보니 멜베스가 이런 의뢰를 건 동기에 대해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납득도 됐고. “물론 남작도 귀중한 탐사 성과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 있소. 하지만 약속을 하리다. 전해 받은 정보는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전해져 비밀을 지킬 것임을.” 그 말을 끝으로 자작은 의뢰를 받을 것인지를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좋다. 의뢰를 받아들이겠다.” 실패 시 위약금이 있는 퀘스트도 아니고. 일단 받아서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럼 다음에 보지.” 이후 자작가를 떠나 집에 들어온 뒤엔 팀원들을 모아 새 퀘스트에 대한 내용을 공유했다. 몇몇 우려는 있었지만 반대는 없었다. 숨겨진 지역을 발견하고, 그다음 그곳의 가치를 확인한 다음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니까. 째깍, 째깍. 조금 늦은 시간까지 앞으로의 탐사 계획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침대에 누웠다. 침대 앞에 놓인 의자 두 개에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테르시아, 너까지 있을 필요는 없다만.” “싫은데요? 저도 여기서 아저씨 지킬 건데요?” ……사이좋게는 아닌가? 거, 얼마나 다녀온다고 다들 이러는 건지. 째깍, 째각. 침대 협탁에 올려진 시계의 초침 소리를 속으로 세며 눈을 감았다.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벌써 한 달의 반이 지나갔다. *** 이한수의 방에서 깨어난 즉시, 컴퓨터 본체에 전원을 넣고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그래, 아직 얘네들은 안 들어왔고……. 이따가 2명이 들어온 다음에 입장해도 늦지 않기에 일단은 자유 게시판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벌써부터 게시물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들 이번 패치노트 봄?] 진짜 뒤통수가 아프단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더라. 아직도 숨겨진 지역이 있던 거 실화냐? [BurtusMaximus: ‘던전앤스톤’이 갓겜인 이유 = 10년도 넘은 무료 겜인데 아직도 패치가 됨.] [ㄴthese99: 대신 집에 안 보내줌.] [ㄴBurtusMaximus: 그러게. 진짜 갓겜이네. 이제 집에 좀 보내줘 신 새끼야.] 이번 패치 내용은 원주민들보다 유저들에게 있어 더 충격적이었던 듯했다. 최근에 암시장, 마탑에 깽판을 치거나 하는 등, 다른 사고도 많이 쳤는데 이 얘기가 가장 먼저 도배 되는 걸 보면. [근데 비요른 걔는 공포의 군주를 대체 어떻게 잡았기에 패치가 되냐?] 다 잡은 다음에 프라이팬으로 튀겨 먹기라도 했나? 갑자기 그거 잡았다고 패치되는 게 이상한데. [Futuralis: 5인클 했다잖아.] [ㄴAI_DIDIGO: 정보1, 5인클이 아니라 4인클이었다.] [ㄴFuturalis: 그럼 4인클이 조건인가 보지.] [ㄴAI_DIDIGO: 정보2, 4인클도 비요른 얀델이 최초는 아니었다.] [ㄴFuturalis: 그래서 결론이 뭔데?] [ㄴAI_ DIDIGO: 결론, 비요른 얀델이 특수한 조건을 충족시킨 뒤 공포의 군주를 처치했을 가능성이 92.24571%에 수렴한다.] [ㄴ글쓴이: 이 새끼 컨셉 웃기네.] [ㄴNyacreeps: 근데 이 말이 맞는 게, 왕실 연구원에서도 특정 조건하에 가브릴리우스의 안배가 발동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음.] 느닷없는 패치에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는 플레이어들. 집단 지성을 활용하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살펴봤지만, 그 ‘특수한 조건’이 무엇일지는 아직도 감이 안 잡혔다. ‘뭐… 이제 와서는 상관없나.’ 게시판을 싹 훑어본 뒤에는 다시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을 확인했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오케이, 그럼 두 사람 다 제때 왔고. 서둘러 방에 입장하자,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먼저 인사해왔다. “형니이임! 오셨슴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허리를 꾸벅 숙이는 이백호. “아, 왔어요?” 그리고 새침하게 힐끗하고 끝내는 현별이. 둘을 지나쳐 소파에 앉자 이백호가 금방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형! 그거 알아요? 형 오기 전에 잠깐 얘기를 했는데, 현별 누나는 아직도 형한테 감정이 남아 있대요!” “………응?” 시작부터 굉장히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주제. 이에 침을 꿀꺽 삼키며 옆을 확인하니, 현별이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오빠, 저는 저런 말 한 적 없어요. 쟤 말 믿는 거 아니죠?” “아, 알아. 당연히 안 믿지.” “형님! 섭섭하게 그러실 겁니까! 누님도요! 그런 적 없기는요? 아까 분명 형님이 다시 사귀자고 하면 어쩔 거냐는 말에 얼굴 붉히셨잖아요!” 아… 역시 그랬던 거구나. …다행이네. 앞으로 현별이 얼굴 어떻게 봐야 할지 싶었는데. “…안 붉혔어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어떻게 그 얘기가 돼요?” “훗, 침묵은 때론 강한 긍정이 되는 법이죠.” “이백호 씨는… 정말 쓰레기네요?” 현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이백호의 장난질에 넘어가지 않았다. 단지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보기만 할 뿐. “현별아 그만해. 어차피 나는 안 믿으니까. 백호, 너도 그만 장난치고.” “넵!” “진짜 열받아…….” 내가 상황을 중재하자 이백호가 얄미운 목소리로 차렷 자세를 취했고, 이에 현별이가 양주먹을 꽉 쥐었다. ‘얘네 둘은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랬다간 현별이가 또 발작할 게 분명하니까. 이백호 이놈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커뮤니티, 거기서도 한 시간만 만날 수 있기에 시간은 되도록 아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별아.” 대화를 위해 현별이부터 내보내기로 했다. 이름만 불렀는데도 표정이 구겨지는 걸 보니 현별이도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거 같았다. 덕분에 나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백호랑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알지?” “…1시간 뒤에 올게요.” 그 말을 끝으로 현별이는 이백호를 한차례 째려본 뒤 채팅방을 떠났다. “휘유! 저 누나 진짜 재밌지 않아요? 기는 엄청 센데, 또 형한테는 쩔쩔 매는 게 참…….” “백호야.” “네?” “너무 예의 없게 굴지 마.” “…알았어요. 앞으로 장난은 안 칠게요. 됐죠?” 하… 얘는 진짜 어떻게 해야 컨트롤할 수 있지? 고민하고 있자니, 이백호가 내 눈치를 보며 새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형.” “어.” “그래서 냐옹이… 아니, 미샤 칼스타인은 잘 만났어요?” “어. 덕분에.” 흘러간 세월 탓인지 아직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나저나 백호야.” 마침내 미샤도 안전하게 돌아왔겠다. 나는 지난 번 만남에서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기록석이 뭐냐?” 나만 모르는 이야기에 휘둘리는 건 이제 그만둘 때였다. 500화 탐험의 시대 (1) 기록석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것은 GM과의 대화에서였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적어도 기록석의 이야기는 사실이었으니까요.] 훗날 어떤 플레이어가 심연의 문을 열 것이란, 예언에 가까운 아우릴 가비스의 말을 어째서 믿냐는 물음에 GM이 내게 들려준 답변. 이를 들은 나는 판단을 내렸다. 이백호 역시 기록석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근거는 이백호 역시 GM처럼 ‘Elfnuna’라는 닉네임에 집착한다는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흐음, 그래?] 그날은 이백호를 자극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본격적으로 그 의문을 수면 위로 꺼내기 전에 혼자 조사를 해보고 싶단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에는 그런 기록이 아예 없었지. 베르실도 처음 듣는다는 눈치였고.’ 짜투리 시간을 써서 나름 알아봤지만, 기록석에 관한 이야기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 만한 이에게 직접 묻는 것. “…….” 기록석이 뭐냐는 질문에 이백호는 침묵했다. 하나 이놈이 아까 현별이에게도 말했듯, 침묵은 때론 강한 긍정이 되는 법. ‘그래, 기록석이 뭔지 알고는 있구나.’ 일부러 앞뒤 다 잘라놓고 툭 지나가듯 물은 보람이 있다. 한데 녀석도 이미 천연덕스럽게 넘길 수 있는 골든 타임은 지나갔다고 판단했을까? 이백호는 여전히 침묵을 이어가며 내 속내를 살피듯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형.” 침묵을 깨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지워졌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서.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는 이백호.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야 사람의 말에는 의도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이놈이 가장 먼저 ‘출처’를 확인려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한 거겠지.’ 상대의 의도를 알았으니, 내가 할 대응은 하나다. “글쎄.”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가진 채 애매모호하게 답하는 것. 그로 인해 대화의 주도권을 꽉 잡아채는 것.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가 중요해?”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자 나를 보는 이백호의 눈이 한층 의미심장하게 변한다. 녀석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기록석이 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단지 나를 통해 대조해 볼 생각? 그렇다면 어떻게 답하는 게 낫지? 그냥 답해줄 수 없다고 둘러대? 흘러가는 찰나 속에서, 놈이 신중히 이후 답변을 고르는 것이 느껴진다. 더 시간을 주는 건 좋지 않단 판단에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뜬금없는 타이밍이란 자각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엘프누나.” 놈이 가장 흔들릴 만한 주제를 꺼낸다. 암만 태산 같은 거목이라도. 크게 흔들면 부스러기 하나 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 단 한 번도 우리 사이에서 언급된 적 없던 그 닉네임이 거론되자, 이백호의 눈빛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린다. 아직은 부족했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그 사람인 거.” 갖고 있던 패 하나를 더 오픈한다. 이백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되물음.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자주 보이는 패턴이었다. 그저 되물었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들거든.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백호야.” “……?” “그거 알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엘프누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거.” 그리 말하며 나는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Elfnunna’라고 적힌 닉네임 창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네가 봐도 이상하지 않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 타닷, 타다닷. 무거운 정적 속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하염없이 이어진다. 나는 더 몰아붙이지 않고 이백호에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보통 이 상황까지 오면, 침묵이 불편해지는 건 거짓말을 하던 쪽이거든. “형은…….” 길었던 정적을 끝내고 이백호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뭘 묻고 싶은 거예요?” 이 녀석은 아직도 줄타기를 이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최대한 간을 보다가 내어줄 것만 내주겠다는 얌생이 같은 마인드. 해결법은 간단하다. “묻고 싶은 게 아니야.” 정보를 철저하게 제한한 채,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이 과정에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그리고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냥 듣고 싶은 거야.” 툭툭. “네가 뭐라고 대답할지가.” 선택은 이백호의 몫이다. *** 이백호는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으아아, 형도 차암! 진짜 못 당하겠다니까요!” 어느샌가 다시 이전처럼 돌아온 활발한 말투. 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이중인격자가 앞에 있는 듯한 섬뜩함이 밀려오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큰 상관은 없었다. “다 말해드릴게요. 그래서 뭐가 제일 궁금해요?” 허, 이 새끼 아직도 이러네. 잘못하면 넘어갈 뻔했다. “…….” 답하지 않고 그냥 빤히 꼬나보고 있자 이백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진짜 회사원이었어요?” “…….”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대체 무슨 삶을 살았어야 사람이 이렇게 되지?” 뭐래, 자기는 갓 전역한 까까머리였으면서. 이번에도 답하지 않자 이백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 알았어요. 말할게요. 솔직히 형이 그냥 날 떠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거 살 떨려서 원. 그냥 자수하고 광명 찾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해 봐.” “형은 운명에 대해 믿으세요?” “…….” “아, 진짜 뭐 말을 못하겠네. 그럼 그냥 이해하든 말든 설명만 합니다?” “말했잖아. 네가 뭐라고 하는지가 궁금하다고.” “그래요. 그럼 그런 거로 해요.” 이백호는 이런 내 태도가 갑갑한 듯했으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혹시라도 실수가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철저하게 침묵하는 편이 옳다. “형도 알죠? 이 도시가 세워지며 고대의 유물, 신화들 대부분이 말소됐다는 거.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진 신화 속 물건 중 하나가 바로 기록석이죠.” “기록석에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적혀있대요.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도 말이죠.” 딱 신화에 나올 법한 얘기죠? 사실 제가 지금 할 얘기도 그런 느낌이에요. 그리 중얼거리며 이백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기록석에도 끝이 있어요. 당연히 그 끝은 이 세계의 종말을 뜻하고요. 그 종말의 시작은 마녀에게 있었다는데……. 저도 이부분에 대해선 잘 몰라요. 아는 건 이거 딱 하나죠.” “종말을 막기 위해 누군가 기록석을 파괴했고, 이로써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예요. 미처 파괴되지 않은 기록석의 파편들이 세상 곳곳에 흩어졌대요.” 딱 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기록의 파편석.’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으로 알려졌으며, 나와 아멜리아를 과거 시대로 보내버렸던 그 기물. “그 파편들 중 몇 개는 실제로 발견이 됐어요. 그중 세 개는 제가 직접 보기도 했고요.” 그 말에 살짝 열이 받았다. 그도 그럴 게, 직접 봤다니? [기록의 파편석··…·? 들어는 봤는데, 그게 진짜 있었구나.] 이 새끼는 그때부터 거짓말이 습관이었구나.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괜히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까 싶어 말을 아낀 채 대화에 집중했다. 안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파편 중 하나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백호가 잠시 텀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심연의 문을 열고서 끝내 소망을 이루어냈다.” 마치 엔딩 장면에나 나올 법한 내용의 글귀. “땡땡땡땡이라 말한 건 뭐라 말할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기록석에선 사람 이름을 글자가 아니라 고유한 무늬로 지칭하거든요. 영혼에 붙은 이름이라나 뭐라나.” “…….”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전 그 무늬를 다른 파편에서도 봤어요.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죠.” 두근-! “…원형의 시험을 최초로 통과한 ‘————’이 비로소 이 세계에서 눈을 떴다.” 그제야 오랜 의문이 풀렸다. 아우릴 가비스가 왜 오리지날 난이도를 클리어한 사람에게 그리 쩔쩔 맸는지. GM이 왜 ‘Elfnuna’의 광신도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백호가 왜 그렇게 나와 적대하는 걸 두려워하는지까지. “형… 아까부터 입꾹닫 하고 계시는데, 만약 형이 기록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게 가장 궁금하실 거예요.”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백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까짓 기록이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부서진 마당에 전부 의미 없는 거 아닌가.” “…….”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봤다는 마지막 하나가 실제로 이뤄졌거든요.” “……그게 뭐였는데?” 꾹 닫고 입던 입을 열어 묻자, 이백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비밀이요.” “……뭐라고?” 즉시 이게 뭔 수작질이냔 눈빛을 쏘아붙였지만, 그럼에도 이백호는 거리끼지 않았다. “이건 비밀로 할래요. 믿으시든 말든 이건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 형이랑은 전혀 관계없기도 하고요.”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왠지 직감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라는 게 거짓말이 아닐 것 같기도 했고. “아… 그럼 이제 기록석에 대한 얘기는 다 끝난 거 같으니……. 이 다음은 ‘Elfnuna’겠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백호가 다시금 멈췄던 이야기를 재개했다. “제가 이 채팅방을 만든 건 기록석에 대해서 알게 된 직후였어요. 계속해서 기다렸죠. 원본을 클리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Elfnuna’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한국인일 테니까.” “…….” “그다음부터도 형 짐작대로예요. 형이 왔을 때부터 형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기대하고 있었죠. 그 기대는 틀리지 않았고요.” 이백호가 또렷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죠?” 긴긴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감춰왔던 진솔한 대화. 여기서까지 둘러댈 생각은 없기에 쿨하게 인정했다. “맞아.” 내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들은 격이지만, 이백호도 확신하고 있던 부분이라 그런지 그리 격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속 시원한 목소리로 끄덕일 뿐. “제가 할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어때요. 형, 궁금한 건 다 풀렸어요?” 다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직.” 대부분의 의문은 해소가 됐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한 명의 사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그것.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나한테 숨긴 이유가 뭐야?” 동기가 빠졌다. “들어 보니 숨길 이유가 전혀 없어보이는데?” 이를 직접적으로 짚고 넘어가자, 이백호가 쓴웃음을 내지으며 답했다. “운명이란 건, 마치 원숭이손 같거든요.” 너무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원숭이손?” 자세한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흘기자 이백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활발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에엑? 형은 몰라요? 원숭이손이 뭔지?” “그건 아는데,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왔나 싶어서.” “말 그대로예요. 기록석에 적힌 이야기들은 반드시 이뤄져요. 하지만, 그게 우리가 바라던 것일진 알 수가 없죠.” “…계속.” “형은 분명 언젠가 심연의 문을 열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게 해피 엔딩이란 뜻일까요? 끝내 형의 소망이 이뤄진다는데, 그게 제 소망까지 포함된 걸까요?” “…….” “형한테 말 안 한 것도 그래서예요. 어떻게든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서 제가 컨트롤 하려 했죠. 형의 소망이 제 소망이 되도록.” 무슨 말인지는 알 거 같았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으니까. [아멜리아의 언니, 라우라는 사망한다.] 그런 확정된 미래를 뒤틀기 위해 온갖 꼼수를 썼고 끝내 성공했다. 아마 이백호도 비슷한 짓을 꾸밀 속셈이었겠지.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것도 그래서였을 테고. “그럼 파멸학자랑 팀을 먹은 건 어째서냐?” 나는 마지막으로 내심 석연찮게 여기고 있던 것을 질문했다. “너 그냥 마법사가 필요해서 걔랑 친구 먹은 거 아니잖아.” 그 말에 이백호는 잠시 굳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형은 머리 안에는 뭐 거짓말 탐지기라도 들었어요?” 탐지기는 무슨. 그 비슷한 건 자기가 들고 다니면서. “됐고, 대답이나 해. 이게 마지막 질문이니까.” 다시 한번 재촉이 이어지자 이백호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요. 형한테는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진 잘 모르겠는데요…….” “괜찮으니까. 그냥 얼른 말해.” “파멸할배는요…….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플랜 B니까.” “플랜 B……?” “네. 세상이 항상 내 마음대로 풀리지만은 않잖아요?” 그리 말하며 이백호는 환하게 웃었다. 뒤틀릴 대로 뒤틀린 속내의 광기를 감추지 않은 채. “플랜 A를 폐기해야 할 때를 대비해야죠.” “…….” “나는 이 좆같은 곳에서 반드시 나갈 거니까.” 501화 탐험의 시대 (2) 플랜 B.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때요? 이제 진짜 궁금한 건 다 풀렸어요?” “어, 대충은.” 이백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낮아졌다. 미소 속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놈보단, 차라리 솔직하게 바라는 것을 말하는 쪽이 나으니까. “플랜 B에 대해선 물어봐도 대답 안 할 거지?” “이건 진짜 안 돼요. 저도 비장의 패는 하나 갖고 있어야죠?” 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이 정도의 비밀은 나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나라고 얘한테 모든 걸 오픈한 것도 아니고. 서로 필요한 만큼은 솔직하게 패를 보여 줬지 않은가.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이제 저는 형의 적이에요, 아군이에요?” 나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글쎄, 협력자 정도가 적당할 거 같은데.” “…협력자요?” “그래, 협력자.” 이백호는 정확히 무슨 의미로 이런 단어를 썼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하긴, 이런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긴 하니까. “네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할게.” “대신 저는 형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도와주고요?” “대충 그런 느낌이지.” “나쁘지 않네요. 근데 그러다 의견이 충돌해서 틀어지면요……?” 이백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말투에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 순간 갈라지는 거지 뭐. 별거 있냐? 나도 되도록이면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데, 네가 말했듯이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굉장히 쿨하시네요.” “어. 그러니까 플랜 B든 뭐든 그때를 대비해 뭘 하든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도 그럴 테니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당연한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협력 상대로서는 더욱 최악일 것이라고. “협력자라… 좋네요. 그렇게 하죠.” 이내 이백호는 마음에 든다는 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거, 낯간지럽게 뭐 하자는 건지. 속으로 질색을 하면서도 일단 악수는 받아줬다. “……형, 나 방금 소름 돋았어요.” “말하지 마. 나도 똑같으니까.” 짧은 악수를 끝낸 우리는 각자 소파에 앉아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나봐요.” “그러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이후로도 이백호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에 가장 메인이 된 주제는 역시나 ‘숨겨진 지역’이었다. “형, 저한테는 말해줘요. 진짜 뭘 어떻게 했던 거예요?” “몰라. 특수 조건이 성립된 거 같기는 한데, 왜 그런 상황이 됐는진 모르겠어.” “그래요? 아쉽긴 한데, 뭐… 알아도 크게 의미는 없긴 할 거예요. 명예의 돌에 기록되는 위업은 딱 한 번만 되거든요.” “어, 그래?” “아, 몰랐어요? 이 형 진짜 게임에서 알 수 있는 거 빼고는 모르는 게 많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지. 한때 도서관에서 살기는 했지만, 따져보면 그건 결국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개방된 지식들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형, 저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한참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곧 이백호가 로그아웃할 시간이 됐다. “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도시에서도 가끔 얼굴도 보고 하는 게 어떠냐?” “저야 좋죠. 근데 당분간은 안 될 거 같아요. 잠시 밖에 좀 나가보려고 해서.” “…밖이라면, 성벽 바깥을 말하는 거냐?” “네. 드디어 바깥으로 가는 길을 알아냈거든요. 이거 때문에 도시 지하를 얼마나 뒤지고 다녔는지.” 잠깐만, 이거 꿀 정보인 거 같은데. 나도 알려달라고 하자 이백호는 뭔가 아까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말로 설명하기는 그렇고, 떠나기 전에 형네 집에 편지 하나 보내둘게요. 가는 방법이 적힌.” “땡큐.” 이래서 주변에 고인물 하나가 있어야 하는 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왕국 탈출 루트를 예상외의 방법으로 손에 넣었다. 따라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근데 넌 왜 나가려는 건데?”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가 왠지 거기 있는 거 같아서요.” “……?” “그래서 한번 찾아보려고요. 그 늙은이라면 제가 가진 의문들 대부분의 답을 갖고 있을 테고.” 그러고 보니, 백호한테 이 할배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라면 더 많은 얘기를 솔직히 답해줄 테니까. ‘뭐… 그건 다음에 만나서 물어보면 되려나?’ “그럼 가볼게요 형. 다음 달에 봬요!” “그래, 찾으면 나한테도 소식 들려주고.” “예압.” 그렇게 이백호가 떠났고, 잠시 소파에 앉아서 벽난로를 보며 불멍을 때리고 있자니 현별이가 돌아왔다. “오늘은 생각보다 늦었네?” “그럼 제가 나가서 인원수만 보고 있을 거 같아요?” 어… 아니었어? 지금까지 거의 나가자마자 들어오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표정이 좋네요?” “응?” “뭔가 고민 하나가 해결된 표정이에요. 지금 오빠 표정.” “아… 그러냐?” 얘도 참 가만 보면 신기라도 있는 거 같다니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자니, 현별이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누웠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현별아……? 너 지금 치마 입었는데…….” “근데요? 스타킹 있잖아요.” “어…….” 그, 그런가? 그러면 괜찮은 건가? 왠지 모르게 납득할 것만 같은 기분에 가만히 얼어있자니 현별이가 피식 웃었다. “참, 별걸 다 신경 써. 이제 와서.” 이내 현별이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뭐야? 어디서 났어?” “오빠는 몰라요? 요즘 이거 때문에 난리인데.” “……?” “진짜 모르시나 보네. GP로 커뮤니티 내에서 쓸 수 있는 옷이나 그런 거 파는 건 알죠?” “어, 그건 알지.” 고스트 버스터즈는 의외로 현질 요소가 있는 커뮤니티였다. 채팅방 꾸미기, 치장용 아이템 등등 과금 요소가 여럿 있었고, 당연히 나는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도 그런 거예요.” “그럼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는 거야?” “아뇨. 적혀 있어요. 원래 자유 게시판에서 글 쓰던 사람 글인데, 하도 인기가 많다 보니까 아예 운영자랑 협의해서 책으로 만들어 판매를 하기 시작했어요 최근에.” “와… 신기하네. 그래서 그거 재밌어?” “오빠도 볼래요? 앞의 권 남은 거 있는데.” “어, 줘봐.” 이내 나는 현별이에게 책 한 권을 넘겨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현대 배경의 판타지 소설이었는데, 나름 초반부터 흡입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미치겠네.’ 현별이 얘는 가만히 책이나 보지, 왜 자꾸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거야? “스트레칭요. 다리가 저려서.” “……내가 말했어?” “아뇨. 표정이 그렇던데요.” ……얘 앞에서는 무슨 생각을 못하겠네. 이후 나는 아예 현별이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책을 읽어나갔고, 그렇게 책 넘기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오빠.” “…응?” “곧 그 시간인데 안 나가봐도 돼요?” “아…….” 뭐야, 이 소설 왜 이렇게 재밌어?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원탁이 열릴 시간이었다. 따라서 얼른 현별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서둘러 원탁에 입장했다. 늘 입던 남색 정장. 그리고 그 위에 뒤집어쓴 수사자 가면. 시간이 아슬아슬했던 만큼, 서둘러 착장을 갖추고 복도를 지났다. 도착한 원탁에는 여덟 명의 회원이 먼저 입장해 있는 상태였다. “오셨군요, 수사자 씨. 피싯.”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광대부터 시작해서 여우, 초승달, 사슴뿔, 광대, 여왕, 나비, 늑대……. ‘여덟 명이네?’ 지난번 집회에서 나타난 뉴비 삼인방 중 하나, 흑가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찰나. 스윽. 원탁과 이어진 반대편 문을 통해 흑가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흑가면은 장내를 쓱 둘러보다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반갑습니다. 블랙 씨…….” 옆자리가 된 고블린이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런 대꾸도 않고서 팔짱을 끼는 흑가면. 뭔가 쟤도 기가 참 세보인단 말이지. 스윽. 아무튼, 나도 슬슬 비워져 있던 내 자리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고, 때마침 시간이 되었는지 원탁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 합쳐서 열 명이라……. 뭔가 사람이 많으니까 낯선 기분이네요.” 여왕이 물꼬를 트듯 중얼거리자 초승달이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왕, 그대는 그럴 수도 있겠구려.” “초승달 님은 아니란 말씀인가요?” 여왕의 반문에 답한 것은 뉴비 삼인방 중 ‘복귀 유저’ 타이틀을 갖고 있던 늑대 가면이었다. “하핫! 마스터가 있을 때는 스무 명이 넘었던 적도 있었지요! 아아, 그때는 정말이지—.” “그때 당신은 마스터한테 알랑방귀만 뀌느라 바빴죠. 피싯.” “…….” “광대, 지금 당신처럼 말이오?” “피시싯, 요정이 매력적이긴 한가 봅니다. 저리 NPC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면. 그래서 저한텐 언제 찾아올 겁니까? 복수, 안 할 겁니까?” “와! 두 분 원수 사이예요? 재밌겠다. 싸울 때는 저도 꼭 좀 불러주세요!” “피시싯! 물론입니다. 나비 양.” 아오, 사람이 많으니까 진짜 난장판이 따로 없네. 스윽. 여우에게 시선을 보내자 여우가 내 눈치를 보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모인 거 같으니, 슬슬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하하, 그럽시다. 잡담이나 하려 모인 건 아니지 않소?” 그렇게 상황이 진정되자 원탁의 불문율에 따라 자연스레 내 옆에 앉은 이에게 시선이 모였다. 그야 이 자리가 항상 첫 순서거든. “여왕 씨가 첫 번째인 건 처음인 거 같군요?” “그러게요. 다들 저렇게 뒤에 따닥따닥 붙어 앉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나와 무려 세 칸이나 떨어져 앉아 있던 여왕이 한숨을 내쉬며 첫 턴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요즘 가장 관심 많은 주제죠? 그거랑 관련된 얘기를 할게요. 명예의 돌을 만든 것은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이다.” 정보가 진실이고, 아는 이가 과반수는 넘지 않았기에 녹색불은 떴지만 곧바로 이의제기가 빗발쳤다.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합니까? 피싯.” “헤헷, 그러게요. 마법사도 아니고.” “애당초 좀 신기하거나 미스터리한 것들은 다 그 인간이랑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오.” 여왕도 이의제기가 들어올 걸 예상했는지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순순히 정보를 덧붙였다. “그럼 이건 어때요. 명예의 돌 그 자체에도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즉 히든피스가 숨겨져 있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 히든피스라……. “이건 뭐 나쁘지 않군요.” 회원들은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하단 눈치였고, 그렇게 순번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달에 종족 회담이 열릴 것이오. 그리고 인간 대표로는 마탑주가 나오는 것으로 확정됐소.” 단순히 종족 회담이 열리는 시기였다면 부족했을 터이나, 인간 대표를 정확히 집는 것으로 초승달도 탈 없이 턴을 끝냈다. ‘마탑주가 인간 대표라…….’ 그나저나 종족 회담이 열린단 건 부족장인 나도 몰랐던 얘기인데, 얘는 이걸 어떻게 벌써 알고 있는 걸까. ‘부족 자체의 영향력 차이겠지.’ 사실 바바리안을 제하면 다른 종족들은 전부 다 왕가에 연줄이 있으니까. 멜베스의 다른 가문들이 괜히 고향의 비호를 받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 밀어주면 위에서 끌어주는 식으로 그들은 공존한다. “미샤 칼스타인이 클랜 아나바다에 합류했다.” 세 번째 순번인 여우가 꺼낸 정보였다. 느닷없는 이름이 언급되어 살짝 흠칫하기는 했지만, 불쾌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온 사방에 알려질 정보니까. 이런 식으로 써도 문제없다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정보의 가치는 낮았지만, 회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비요른 얀델은 그 정도로 핫한 이름이었다. “과연, 그 여자가…….” “그녀는… 그 남자의 동료로 활동 중이라 하지 않았소? 뭔가 사건이 있었나 보군.” “피싯… 여우 씨도 만만치 않군요. 저도 몰랐던 정보인데.” 여우의 차례가 끝난 후에는 고블린의 순서였고, 그다음은 흑가면, 사슴뿔 순으로 이어졌다. 다만, 충격적인 정보랄 것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뉴스를 보는 느낌으로 회담을 듣고 있던 때였다. “헤헷, 제가 말할 건 아까 여우 씨가 말한 거랑 비슷한 주제인데요오…….” 나비가 슬쩍 운을 뗌과 동시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미샤 칼스타인, 그 여자 말이에요.” 뭐지? 뭔 얘기지?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한 순간, 나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 배신자예요.” 귀로는 들었으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신자라니? 혹시 이백호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뜻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나비 가면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물론 비요른 얀델, 그 사람 입장에서요.”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은 원탁의 보석으로 향했다. 솨아아아아아. 보석은 조용히 녹색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502화 탐험의 시대 (3) 나비의 차례가 끝난 후, 원탁의 회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던전앤스톤]의 치트 버전을 만든 것은 아우릴 가비스가 아닌 다른 존재다.” 늑대는 이번에도 그를 향한 플레이어들의 적대감이 떨어질 만한 정보를 뱉었고. “이건 어떠려나요? 피싯. 이번 탐사에서, 노아르크는 8층 계층 군주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광대 역시 노아르크가 무럭무럭 크는 중이라는 정보로 턴을 무사히 넘겼다. 그렇게 다가온 나의 순번. “해골섬의 보스를 잡고 10층에 도달 시, 특수한 이벤트를 경험할 수 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갖고 있던 정보 중 하나를 영혼없이 뱉으며 한 바퀴를 끝냈다. “…특수한 이벤트라 굉장히 기대가 되는군요. 아, 물론 그 이벤트를 하려면 전쟁부터 끝나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피싯.” 오랜만에 나온 게임 정보였으나, 회원들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당초 게임 정보로 초록불을 받아냈다는 건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귀한 정보란 얘기일뿐더러……. “자자, 이번에는 다들 좀 더 힘내보죠!” 나름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겪은 회원들은 단지 이번 바퀴의 정보가 노잼이라 내가 이렇게 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다시 제 차례네요?” 그렇게 다시 여왕의 차례로 시작하며 새로운 바퀴가 시작됐고, 나 역시 차례대로 나오는 정보를 새겨듣고 머리에 확실히 각인했다. 그중에는 꽤 충격적인 정보도, 앞으로 도움이 될 이야기도 여럿 있었다. 하나, 집중은 전혀 되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미샤 칼스타인이 배신자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내 입장에서. 그 말이 내 머릿속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느덧 두 바퀴가 끝나고. 세 번째 바퀴도 서서히 끝을 향해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체 무슨 뜻이지?’ 미샤가 배신자라고? 이제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손을 잡는가 싶더니. 이백호, 그 새끼가 또 뭔 수작을 부려둔 건가? 설마 이게 바로 그 플랜 B? 온갖 가능성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휘몰아친다.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이번 정보를 언급한 것은 나비 가면이었다. 다만 내 기대와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바퀴에선 미샤에 대한 얘기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즉, 추가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내가 먼저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뜻인데……. “피시싯, 다들 뭐 그리 놀라는 눈치입니까? 설마 라프도니아는 노아르크의 발전이 두렵습니까?” 하면,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떠볼 수 있을까. 갑자기 여기서 미샤가 왜 배신자냐고 대놓고 물으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할 텐데. 한때 ‘수사자 = 비요른 얀델’이란 루머가 돌았던 원탁인 만큼 언행 하나하나에 신중을 가해야 한—. “…….” “…….” 아, 벌써 내 차례구나. 정신을 차렸을 땐 묘한 정적 속에서 내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지켜보자.’ 다음 바퀴에서도 미샤에 대한 언급이 없을 시엔 먼저 액션을 취해보기로 결정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1인으로 천공의 군주를 처치 시, 액티브 효과를 선택할 수 있다.” 알아내긴 어렵지만, 알고 있어도 크게 쓸 일이 없는 그런 정보들 중 하나. 솨아아아아아- 초록불이 흘러나오자 원탁 내에는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저… 혼자서 계층군주를 잡는 게 가능한 거였어요……?” “글쎄, 100배 모드라면… 어찌어찌 가능은 할 것도 같소만…….” “피싯, 수사자 씨께서 그런 모드로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 같습니까?” 계층군주와 관련된 정보인 만큼, 이의제기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된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초록불만 뜨면 다들 뭔가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겠지 하며 납득할 거 같지만. ‘그럼 이제 다시 여왕 차례인가?’ 그리 생각하며 옆을 힐끗하던 차. “이 정도면 이번 달에 들을 얘기는 다 들은 것 같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볼게요.” 여왕이 불참 선언을 해왔다. 이에 다른 회원들도 눈치를 보며 동참하기 시작했고. 애석하게도 가장 큰 원인은 내게 있었다. “…하긴, 수사자 씨도 지루해 보이시고 말이죠.” 딴생각을 하느라 회담 내내 가만히만 있고, 순번도 그냥 게임 정보로 때웠더니 그런 오해를 산 듯했다. “아쉽습니다……. 희망의 군주를 잡았다는 얘기를 하면 좀 즐거워하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피싯…….” 이번에 잔뜩 힘을 줘서 준비해 왔음에도 내 관심을 끌지 못한 것에 실망한 듯한 광대. “뭐… 수사자 씨에게는 이런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이후 광대는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다음엔 꼭 재밌는 얘기를 갖고 오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후, 이런 분위기에서 다음 바퀴로 가자고 선동할 수도 없고. “…….” 결국 그렇게 이번 집회가 마무리되었다. ***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 날. 숙면을 취하고 오후가 되어서 일어났을 때, 베르실 고울랜드가 방문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냐?” 방문 이유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모른 척 되물었고, 베르실은 할 말이 있다며 독대를 청했다. “저…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실진 모르겠는데……. 미샤 칼스타인 씨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서요.” 그래, 역시 이것 때문에 깨자마자 나한테 바로 달려왔구나. “배신자?” “…확실한 건 아니에요. 아니, 확실한 건 맞는데…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베르실은 그리 말하며 미샤의 합류를 재고하는 건 어떻냐는 식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확실한 내용도 알지 못하는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네 불안을 모른 척할 생각은 없다. 나도 한번 알아보겠다. 그러니 너도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줄 수 있겠나?” “……알겠어요. 제가 더 알아볼게요.” “부탁한다.” 오케이, 이러면 다음 원탁에서부터는 얘가 여우 가면을 쓰고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캐줄 테고……. 내가 먼저 떠보면서 신상을 노출할 위험이 한층 줄어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주시고요.” “그래.” 이후 베르실이 떠나고, 저녁이 되었을 무렵에는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아저씨! 조금 이상한 편지가 왔는데, 확인을 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에르웬이 우체통 속에서 꺼내온 한 통의 편지. 겉면에는 하얀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고, 이미 뜯겨진 내용물을 보니,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형이 부탁한 거요.] 이 새끼는 한글로 적어서 보내면 어쩌란 거야? 혹시 다른 애들이 보면 어쩌려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일단 도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열심히 읽어내렸다. ‘…생각보다 복잡하네.’ 아무래도 단기간에 암기하고 불태워버리는 건 불가능할 듯했기에, 고이 접어서 아공간에 넣었다. 옵션이 생기는 건 언제나 반길 일이었다. 변수가 늘어나는 건 그 반대일 테고. 믿고 싶지 않은 것과 별개로 대비는 하는 편이 옳다. 따라서……. “에밀리, 혹시 미샤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나?” “어떤 의미지?” 이후 아멜리아에게 원탁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한 뒤 조사를 지시했다. “해보긴 하겠지만, 하루 종일 감시하는 건 들킬 가능성이 높다. 그때 보니 만만치가 않더군.” “그 정도였나? 먹은 정수들만 보면 그런 쪽은 네가 훨씬 더 나을 텐데?” “정말 모종의 목적을 갖고서 우리에게 접근한 것이라면, 다른 정수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일단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마라. 아직은 유심히 지켜보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니.” “그러지.” 후, 그럼 미샤에 대해서는 아멜리아가 최대한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조사를 해줄 테고……. 그날 하루는 그냥 쉬면서 보냈고, 다음 날부터는 다시금 바쁜 나날을 이어갔다. 성지에 들러 땅을 한 번 더 판매하고, 조언이라도 들을 겸 전 부족장을 찾아가 이전에 있었던 종족 회담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었다. 또한, 레이븐과도 한 번 더 만났다. “기록석이요……? 혹시 기록의 파편석을 말하는 건가요?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라는.” “기록석이든 기록의 파편석이든 아무래도 좋다. 어느 쪽이든 관련된 책이 있거나 정보가 있으면 내게 줘라. 이상한 관심을 살 수도 있으니 너무 티내면서 알아보진 말고.” “네. 그럴게요. 그, 근데 얀델 씨, 탐사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 뭐, 확실한 건 이번에 미궁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그렇겠죠……? 아직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 상태니까. 진짜 탐험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베르실 고울랜드… 그 여자는 어때요?”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긴요! 원래 이런 탐험에는 무엇보다 마법사가 중요한 거라고요! 저번에 보니까 그 여자는 역사도 잘 모르는 거 같던데…….” “뭐, 그래도 괜찮다. 싸우는 것 하나는 잘하기도 하고, 신용할 수도 있으니까. 부족한 쪽은 내가 채우면 된다.” “그, 그런가요…….” 레이븐과 만남을 가진 다음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모든 클랜원을 소집해 시간을 가졌다. 표면상 목적은 탐사 전에 새롭게 합류한 미샤와 기존 멤버들 간에 합을 맞춰보는 것. “……아직까지 별다른 점은 찾아내지 못했다.” 소집이 있은 후엔 항상 아멜리아에게 보고를 들었지만, 아직까진 미샤에게서 이상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탐사가 되겠군.” 멜베스에서 지원 물자를 보내왔다. 전투 및 지원 스크롤, 다양한 종류의 포션, 탐색 전용 넘버스 아이템 등등. 산이든 물이든 불이든,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탐사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물품이 다양했고, 품질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이것만 해도 돈 엄청 들었겠는데…….’ 멜베스에서 ‘숨겨진 지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성과를 내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더욱더 탐사 준비애 매진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계속 이어진 지금. “비요른…….” “비요른이 아니라 부족장이다. 1장로.” “아참, 성지였지? 주의하겠다.” 날이 저물어 어두운 성지의 숲길을 걸어나가자 환히 밝혀진 공터와 함께 수십 명의 어린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외쳤다. “축하한다! 어린 전사들이여! 오늘부로 너희들은 성지를 떠나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보아하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엔 뉴비가 없는 모양이다. *** 하루하루가 다르게 시대가 진화한다. 지구 인류의 역사를 따져보면, 그 시대는 역시 근현대일 것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서부터의 200년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하면, 바바리안은 어떨까. 이 부족은 과연 어느 시기에 가장 폭발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지금.’ 참고로 그 증거는, 바로 이 공터다. 그야 튜토리얼의 대사부터가 달라졌거든. “자,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 스스로에게 맞는 무기, 방어구를 골라보아라!” 무구 진열대에 올려진 수많은 무기와 갑옷. 참고로 이것은 선택 가능한 메인 요리일 뿐이고,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구성도 훨씬 개선됐다. “이리 와봐라. 각반은 그렇게 차는 게 아니라, 이렇게 차는 거다.” “아, 고맙다……. 처음 입어봐서.” 흉갑 하나만 딱 입혀서 미궁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부속 방어구들도 전부 지원한다. 또한, 가방에는 나침반과 수통, 그리고 포션을 비록해 각종 탐사 용품들이 가득 차 있다. ‘인당 100만 스톤.’ 사실상 전사 한 명당 들어가는 금액이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격이지만, 문제는 없었다. 우리 성지는, 땅을 파면 돈이 나오거든. ‘이 정도 지원이면 얘들도 금방 성장해서 돈을 모아 땅을 사겠지.’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이대로만 가면 금방 내가 바라던 선순환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으… 갑갑하다……!” 어린 전사들은 온몸에 착용한 방어구가 불편한 듯했나, 자신은 이런 게 없어도 괜찮다며 오기를 부리진 않았다. 사춘기 애들에겐 늘 우상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갑갑해도 참아라. 금방 익숙해질 거다.” “아니, 그렇지만—.” “선택이 아니다! 전사라면 갑옷은 당연히 입어야 하는 거다! 부족장만 봐도 그렇지 않나!” “…….” “위대한 전사가 되고 싶으면 갑옷을 입어라!” 더 이상 우리 부족 내에 갑옷을 업신 여기는 전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얼른 돈을 모아서 라이티늄제 갑옷을 사고야 말겠다!” 특히 내가 즐겨 찾던 라이티늄은 거의 숙달된 전사의 상징처럼 변해 있는 상황. “자, 가라! 너희들의 운명이 기다리는 곳으로!” 기본 장비 지급이 끝난 후에는 성지 밖에서 기다리던 베르실의 도움을 받아 세 명씩 묶어서 결속 마법을 걸은 뒤 전부 미궁에 때려 박았다. “…모두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군.” “걱정 마라. 아이나르. 마탑에서 심장을 금지된 마법 재료로 지정한 만큼 심장을 노리는 약탈자는 줄어들었을 테니까.” “그렇겠지……?” 아무렴, 신발도 제대로 안 신겨 보냈을 때도 살아 돌아오던 게 바로 바바리안인데. 이 정도 했으면 전원 생존도 노려볼 만하지. ‘얼른 무럭무럭 컸으면 좋겠네. 그럼 땅값도 더 팍팍 올릴 수 있을 텐데.’ 어린 전사들이 모두 포탈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이내 잡념을 털어냈다. 이로써 부족장으로서의 역할은 끝.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다.” “……네?” “지금부터는 단장님이라고 불러라.” 이제 탐험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503화 탐험의 시대 (4) 영롱한 빛이 은은하게 깔린 수정동굴. 다만, 마지막에 이 공간에서 드레드피어와 죽을 힘을 다해 싸웠기 때문일까? 눈을 뜬 순간 나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딱… 한 명만 찌르면 되는 건가요……?] [넌, 위대한… 전사가… 될 거다…….] 아오, 진짜 이런 기억은 왜 잊었다고 생각해도 잘 잊히지가 않는 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탐사를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다시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에르웬의 걱정스런 물음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팀원들을 확인했다. 뭐, 사실 주변의 팀원이라고 해봐야 에르웬이랑 미샤밖에 없었지만. “…….” 미샤, 얘는 아까부터 말이 없네. 아직도 많이 불편한가? “미샤.” “……아, 으응?” “이제 출발하려는데 괜찮나?” “으응…….” 왠지 모르게 쭈그러든 목소리로 답하는 미샤까지 챙겨서 얼른 이동하기 시작했다. 1차 목적지는 수정동굴 중심부에 자리한 기념비 공동으로, 우선 그곳으로 가서 다른 동료들과 합류를 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팀을 두 개로 나눠서 들어왔거든. ‘……클랜원도 얼른 늘리든가 해야지.’ 팀이 두 개로 나뉜 이유는 오롯이 인원 문제였다. 현재 클랜의 총 인원이 딱 일곱 명이니까. 셋, 넷으로 나누는 과정이 불가피했던 것. 물론 아우옌을 뺀다면 여섯 명으로 정확하게 숫자가 떨어질 터이나……. ‘혹시 항해사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고민 끝에 아우옌도 탐사 멤버에 넣었다. 6층 대해를 비롯해 선박과 항해사를 요구하는 지역이 여럿 존재했기에 모든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게다가 이번에 찾지 못하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가야 하니까 말이지.’ 도시에서 머무른 기간 동안 열심히 관련 서적을 뒤져본 결과, ‘숨겨진 지역’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반드시 위업이 달성된 층에 나타난다는 것. 대표적인 게 바로 요정왕의 업적이다. [요정 궁수 아르멜라 포웰 메르헤니아와 그녀의 동료들이 조율자 그레고리를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5층으로 올라가지 않고서 계속 천공의 탑을 올라가다 보면 낮은 확률로 만날 수 있는 히든 보스 조율자 그레고리. 이놈이 최초로 토벌되며 추가된 지역이 바로 ‘라르카즈의 미로’다. 음, 정확히는 그곳을 포함한 총 세 가지 타입의 히든필드라 해야 하나?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7일 차엔 1층이 폐쇄되니, 그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 “…그나저나 사람이 되게 많네요.” 이내 도착한 중심부 암흑지대에는 탐험가들이 바글거렸다. 늘 한산하던 평소와는 다른 명백히 이질적인 현상. 다만, 이를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숨겨진 지역’을 찾아나선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이곳을 찾으리라는 건 예상했으니까. 실제로 탐험가들 대부분이 좋은 장비를 입고서 자랑스러운 클랜 마크를 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네…….’ 그런 생각을 하며 암흑지대로 들어서니, 나를 발견한 탐험가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길을 비켜줬다. “이봐, 저 사람…….” “비요른 얀델이다…….” “역시 저자도 그곳을 찾는 건가…….” 단순히 유명인을 본 것을 넘어 호기심을 비추거나, 때론 경쟁자를 대하듯 나를 바라보는 탐험가들. “…저자라면 뭔가 단서가 있는 걸 수도.” “가장 먼저 이곳에 왔다는 건, 역시 여기에 뭔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는 유명하다는 게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는구나. “미샤, 어물쩍 따라오지 말고 딱 붙어라.” “아… 으응…….” 이후 어둠을 밝히며 통로를 나아가자, 머지않아 기념비가 세워진 공동이 나타났다. 역시나 기념비를 중심으로 수많은 탐험가들이 모여 있었다. “오오! 비요르으은! 여기다, 여기!!” “드디어 왔군.” “오셨습니까, 단장님.” 먼저 도착을 했는지 우리가 오자마자 알아보고 다가오는 2팀. 일단 아멜리아에게 보고부터 들었다. “뭔가 알아낸 건 있나?” “아직. 여러 클랜에서 마법사들이 뭔가 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별 소득은 없는 모양이더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 대화를 끝으로 기념비에 다가가자, 앞에서 뭔가 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꿀꺽-! 뭔가 단서라도 나올까 눈을 부릅뜬 채 내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한다. 뭔가 상황이 굉장히 웃겼다. ‘나라고 딱히 다른 단서가 더 있는 건 아닌데 말이지.’ 이내 기념비 앞에 서자 왠지 기분이 묘했다. 저번 탐사에서 내가 이곳에 왔을 땐, 이 비석 대신에 마녀 제단이 세워져 있었는데. 과연 미궁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한번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를 읽었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 그 위대한 첫걸음을 기리며.」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던 그대로의 글귀. ‘글귀는 변한 게 없고…….’ 이후 제단을 쓱 둘러보며 자세히 확인했지만, 바뀐 점이나 수상쩍은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직접 손을 대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쯤하고 돌아와 팀원과 대화를 나눴다. “베르실, 음성제어는?” “이미 켜뒀어요.” “그렇군.” “얀델, 뭔가 알아낸 게 있나?” “아직.” 실험해보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는 역시 무리다. 암만 사람들이 영웅이라 칭송해도, 나는 그런 대단한 위인이 아니니까. 난 언제나 혼자 먹는 떡이 제일 맛있었다. “이만하고 가지.”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나중에 사람이 없을 때 다시 와보기로 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얀델 남작님.” 무기는 검. 머리색은 갈색. 그리고 인간인 것치고는 제법 다부진 체격을 지닌 사내. ‘넌 뭐냐?’ 라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사내가 귀족 예법대로 인사를 해왔다. “백상아 클랜 9팀의 팀장 마누스 스틸리코라고 합니다. 얀델 남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저 마크가 백상아 클랜이었지. 이제 네 개뿐인 사대클랜 중 하나인. “베르실, 잠시 음성제어 좀 꺼봐라.” “네.” “그래서 용건이 뭐지?” 친절히 음성 제어까지 끄고서 묻자, 녀석이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숨겨진 지역에 관한 정보가 있으신 거라면,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고서 구매하고 싶습니다.” 쩝, 뭔 말을 하려나 했더니 이거였어? 사실 최근에 수없이 받은 제안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에 따르면 무시한 편지들 중에 백상아 클랜에서 보낸 것도 존재했다. “구매라…….” 설령 정보가 있더라도 돈을 받고 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일단 생각해보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야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 “백상아 클랜의 단장도 1층에 있나?” “…아직 계시긴 하겠지만, 근처는 아닐 겁니다.” “외곽을 수색하고 있는 건가?” “아뇨. 이번 탐사에서 숨겨진 지역을 탐색하는 임무는 저희 9팀이 전부입니다.” 쉽게 말해, 이놈들을 제한 나머지 클랜원들은 이전에 그랬듯이 상층으로 바로 올라간다는 뜻. “의외로 지원이 부족하군?” 그런 상황이면 정보 값도 얼마 못 받는 거 아니냔 느낌으로 돌려서 말하자, 놈이 얼른 즉답했다. “클랜 내부에서 이번 사안을 가벼이 여기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군부와 전시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당장은 위 사안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일단 전쟁이 먼저라는 거군?” “예. 게다가 단기간에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저희 팀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고, 그 반대라면 시작부터 총력을 기울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비단 저희만이 아니라, 여타 클랜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군.” “저 그럼… 저희 제안은 어떻게…….” 나는 이쯤에서 대화를 끝냈다. “미안하지만, 거절이다.” 이미 궁금한 건 다 들었거든.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기념비 공동을 등지고 밖으로 나왔다. ‘전쟁이 의외로 도움되는 일도 있네.’ 기념비 공동 근처에 탐험가들이 바글바글하기에 걱정했건만, 그래도 아직은 빈집이라 할 수 있었다. 진짜 경쟁자들은 전쟁 때문에 발이 묶인 상황. 막상 입구가 쉽게 발견되더라도 이런 상황이면 우리 몫이 줄어들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될 터. “비요른! 이제 어디로 가는 거냐?!” “외곽으로.”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할 차례였다. 일찍 발견할수록 먹을 수 있는 양이 늘어날 테니까. *** 단언컨대, [던전 앤 스톤]은 내가 해본 게임 중에 가장 불친절한 게임이다. 대가리를 박아가며 공략해야 하는 보스몹. 온갖 기괴한 매커니즘으로 무장된 필드와 균열. 이걸 찾아내라고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꽁꽁 숨겨둔 각종 숨은 요소 등. 이 게임이 얼마나 불친절한지를 말하라면 사흘 밤낮 동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이 게임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 ‘불친절함’이었다. 지긋지긋한 무료함과 매일 싸우고 있던 당시의 나는 어려울수록 불타오르는 타입이었으니까. ‘히든피스 수색은 오랜만이네.’ [던전 앤 스톤]의 난이도는 숨겨진 요소. 즉, 히든피스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로 정해진다. 이 요소를 아무것도 모르면 사실상 정상적으로 계층을 올라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 그래서 난 게임을 할 때, 뭘 하든 숨을 쉬는 것처럼 히든피스를 수색하는 버릇이 있었다. 조각상이 보이면 부술 방법부터 찾아보고. 이동을 할 때도 항상 벽에 붙어 평타 버튼을 연타한다. 조금 수상하면 온갖 마법들을 걸었으며. 때론 불태우고, 얼리고, 오면서 모은 약탈자의 시체를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짓을 10년 가까이 해온 결과. 나는 숨겨진 요소들을 수없이 많이 발견해냈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노하우도 생겼다. ‘문제는 지금 내가 그쪽으로는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단 거겠지.’ 극단적으로 행운에 몰빵한 캐릭터도. 탐색 전용 정수로 세팅한 캐릭터도 없다. 나와 내 동료들은 모두 전투 위주 세팅으로 육성 가이드가 잡힌 상태다. 그야 찾아낼 수 있는 히든피스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내심 자부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고대어를 읽을 수 있다는 건데…….’ 뭐, 이것도 고대어가 필요없는 히든피스라면 딱히 큰 도움은 되지 않을 재주다. 하지만……. 쿠웅-! 어떡하겠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바로 이렇게. 쿠웅-! 게임을 하던 시절처럼, 벽을 망치로 두드리며 이동한다.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라 팀원 전부가 함께. 쿠웅-! 기덕! 쿵! 드르르르. 망치, 단검, 정령들이 동굴의 벽면, 수정들에 부딪치며 피어나는 소음에 가까운 하모니. “오오! 축제 같아서 재밌다!!” 아이나르를 제외한 모두가 이 짓을 꼭 해야 하는가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단호하게 지시를 이어갔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찾는 기초적인 방법이니까.” “……기초적인 방법요?” “예전에 읽은 책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악령임을 알지 못하는 베르실에게는 그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이동했다. 그리고 특정 구간에 들어설 때마다 샅샅이 주변을 수색했다. 네모 수정 삼거리. 큰바위 옆 연못. 이끼 물웅덩이 등. 진입할 때마다 지형지물이 바뀌는 수정동굴엔 이처럼 고정된 위치에 나타나는 장소가 존재했다. 그리고……. ‘보통 히든피스는 특정 가능한 자리에 숨어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열심히 지나치는 모든 것을 박살내며 이동하고 있자니 어느덧 외곽의 암흑지대에 들어섰다. 후우우우우웅-! 고블린 숲과 이어진 포탈은 당연히 선객에 의해 개방된 상태였고, 근처에도 수상한 공간은 없었다. 쩝, 포탈 옆도 아니라 이거지? 이후 우리는 장소 하나를 정한 뒤 이를 중심으로 흩어져 외곽부의 암흑지대를 수색했다. 그리고 수색이 끝나면 멀리 이동해서 이 작업을 다시금 반복. 1일차, 2일차……. 그렇게 시간이 흘러 3일차가 시작되기까지 약 2시간을 남겨둔 시기에 처음으로 수확이 있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중소 클랜이 한곳에 모여서 통행을 막고 있다던가? 마치 발견한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일단 아저씨한테 전하는 게 먼저일 거 같아서 무리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어요. 멀리서 본 거라 그쪽한테 들키지도 않았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잘했다, 에르웬.” 이내 팀원을 이끌고 에르웬이 말해준 곳에 가니 마치 보초를 서듯 통로를 막은 탐험가들이 보였다. 터벅, 터벅. 인기척을 숨기지 않은 채 다가가자 건너편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가 나를 알아보고 흠칫했다. “그만! 멈… 야, 얀델 남작……?” 하긴, 날 알아보고서도 강압적으로 나오기는 어렵겠지. “지나가려는데, 문제 있나?” 더욱 가까이 다가가 묻자, 보초를 서고 있던 탐험가들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말했다. “이곳은 현재 우리가 야영 중인 곳입니다……. 탐험가들의 불문율에 따라… 비, 비켜가주시기를 처, 청합니다…….” 이야, 이러니까 진짜 제대로 수상한데? “불문율이라니… 그게 뭐냐?” “……?!” “내게 어려운 소리 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그냥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서 길을 뚫었다. “어, 어……!” “안 되는데…….” 보초를 서던 탐험가들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런 말을 하며 쳐다보는 것뿐. 이내 통로 안쪽으로 들어서자, 벽 앞에 모여 있던 열댓 명의 탐험가들이 마치 못된 일이라도 하다가 걸린 듯이 움찔했다. “……!” “……!” 그렇게 잠시간 무거운 정적이 내리앉은 때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 응?” 벽에 아주 작게 나 있던 틈새 속에서 한 사내가 빼꼼 얼굴을 드러낸다. “오, 거기에 그런 샛길이 있었군?” “어, 어……. 당신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네가 대장이냐?” “그, 그렇습니다만…….” “여기 안에 뭐가 있는 거지?” “아무… 것도 어, 없습니다…….” “에이,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씨익 웃자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크게 외쳤다. “…이, 이곳은 우리가 먼저 발견한 곳입니다!” 아이 참, 이러면 우리가 나쁜 사람 같잖아. “먼저 발견한 곳이라…….” “예, 우리 같은 탐험가의 성과를 가로챈다면, 얀델 남작님의 명망에도 도움이—.” “너희가 만난 탐험가도 그렇게 말했나?” “…예?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기는. “악! 아아악!” 머리채를 쥐고서 무 뽑듯 놈을 끌어당겼다. “소매.” “……?” “소매에 사람 피가 묻어 있는데.” “……!” “그건 누구 피냐?” 아직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504화 탐험의 시대 (5) 거짓말을 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가? 그것은 누구라도 납득할 만큼 논리정연한 말도, 긴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린 신망도 아니다. 바로 표정이다. “이, 이건… 뭔가, 오, 오해가……!” 저런 표정을 짓고서 말해 봤자 설득력이 없거든. “한번 떠본 건데 진짜 사람 피였나 보군.” 간혹 순간적인 얼굴 근육의 움직임까지 제어하는 전문 거짓말쟁이들이 있지만, 다행히 이번 상대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오해가—!” “한번 말해 봐라. 들어 줄 테니까.”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름을 부르자, 베르실이 알아서 척 하고 검증 마법을 활성화했다. 하지만……. “…이 남자, 보기보다 강한가 보네요.” 애석하게도 마법은 실패했다. 항마력과 정신 수치가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하면 이 마법은 잘 안 통하거든. 하긴,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20명 규모에 이름도 못 들어 본 중소 클랜이지만, 명색이 단장인데 어느 정도 수준은 되겠지. “어떡할까요?” 어떡하기는. 어차피 증인이야 널리고 깔린 마당에 한 명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저놈한테 해 봐라.” 이내 심약한 인상을 지닌 활잡이를 가리키자, 베르실이 다시금 마법을 시전했다. “성공했어요.” 그래, 딱 보니까 얘한테는 될 줄 알았지. “거기 너.” “…예, 남작님…….” “네가 말해 봐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질문을 받은 활잡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나와 단장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살 봤다. “어… 저, 그게…….” 채찍을 들어 올릴 차례였다.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오해가 있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던 모양이군?” 목소리를 차갑게 내리깔며 말하자, 단장이 입술을 짓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 괜찮으니 말씀드려라.” “예… 알겠습니다.” 눈치 보느라 바쁘던 활잡이도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사정을 들어 보니 오해가 있다던 말도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여길 발견한 것은 이놈들이 맞았다. 다만 머지않아 6인조로 된 탐험가 팀이 나타났고, 거기서 사건이 시작됐다. “그들이 너희의 성과를 탐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마는…….” “어물쩍거리지 말고 어서 그냥 말해라.” “그게…….”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 나았을 테지만, 그들 탐험가 무리는 이들 클랜이 무언가 발견했단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적어도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보가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탐험가 무리들을 붙잡았다. “그, 그때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면?” “그쪽에서 격렬히 반항하며 먼저 우리 쪽 한 명을 죽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끝내 탐험가 무리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체는?” “……장비를 벗긴 뒤 용해액을 사용해 모두 없앴습니다.” 그랬구나. 어쩐지 특유의 그 냄새가 나는 것도 같더라니. “지금까지 한 말은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먼저 우리를 해친 건 그들—.” 뭐라는 거야, 얘는. “걔네가 순순히 붙잡혔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 줄 생각이었냐?” “그, 그건…….” 활잡이 스스로도 거짓이라는 걸 아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리더가 나섰다. “그래서,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응?” “그 여섯 놈이라고 다를 거 같습니까? 만약에 수가 부족한 게 우리였다면, 성과를 빼앗기고 죽은 건 우리 쪽이었겠지요.” 뭔 말을 하는가 싶더라니. 하긴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그 차이일 뿐. 그 누구도 우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게 얀델 남작, 당신이라 하여도!” 얘는 겁도 없이 그런 논리를 내 앞에서 펼치네. “그럼 여기서 내가 너희를 전부 죽여 버려도 문제는 없겠군? 우리를 탓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똑같은 논리로 받아 주자, 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짓을 했다간 당신의 명성에—!” “뭐, 유령이 되어서 소문이라도 낼 건가?” “……!” 슬슬 놈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거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소문처럼 고결한 인물이 아니라는걸. “아무튼, 얘기는 여기까지.”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고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 안건은 단 하나였다. “이놈들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지? 다들 눈치 보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말해 봐라.” “전 죽이는 쪽이요.” 고민 없이 의견을 낸 에르웬을 시작으로 한 명씩 의견을 냈다. “미샤, 너는?” “그, 글쎄… 죽이는 편이……. 좋지 않으려나……? 싶은데…….” “저도 칼스타인 씨랑 같은 의견이에요.” 미샤와 베르실은 죽이자는 쪽이었고, 아우옌과 아이나르는 살리자는 의견을 냈다. 그리고……. “나도 살려 두자는 쪽이다.” 의외로 아멜리아가 살리는 쪽에 투표했다. 따라서 이번엔 나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뭐지?” “만약 이들에게 죄를 묻고 싶은 거라면, 길드에 맡기는 편이 합당한 절차니까.” 뭐야, 이건……? 이런 모범생 같은 말이 얘 입에서 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했는데. 멍하니 바라보자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 “그게 너한테 좋을 거 같아서.” “……뭐?” “단지 내 의견일 뿐이니, 너무 귀담아듣지는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나한테 좋을 거 같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진지하게 되묻자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답을 내놓았다. “얀델, 불쾌해하지 말고 들어라. 너는 지금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다.” “……불안정한 상태?” “지금까지 이들이 너에게 피해를 줬나? 아니면 너를 죽이려 들었나? 아니다. 실제로 이놈들을 살려 돌려보내 줘도 너에게는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겠지. 그런데 너는 지금 죽일 이유부터 찾고 있다.” 이유를 찾다니. 나를 무슨 사이코 바바리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에밀리,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아니었나?” 정말로 아니었다. 그리 답해야 하는데, 어째선지 아멜리아의 눈을 본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눈빛은 나를 탓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단지, 깊이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공교롭게도 죽이자는 쪽이 셋, 살리자는 쪽이 셋이군.” 이내 아멜리아가 말했다. “얀델, 남은 건 네 선택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이들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설마 이 문제를 갖고서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아멜리아가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온 건. 정말로 순전히 전사의 몸에 깃들어 몇 년간 싸워 온 ‘이한수’를 걱정했기 때문에. “활잡이.” “…예?” 나는 마지막으로 놈에게 한 가지만을 물었다. “너를 비롯해 네 동료 중 단 한 명이라도, 약탈 경험이 있는 자가 있나?” “…없습니다. 저희는… 그런 클랜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단지… 모두가 욕심에 눈이 멀어 잠깐 사리 분별을 못 했을 뿐입니다.” “사실이에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베르실, 너는 이놈들의 증언을 다시 정확하게 받아서 기록용 수정구에 담아라. 에밀리, 너는 소지품을 뒤져서 피해자 신분증을 찾아내고. 아, 그것 말고도 길드에 증거로 제출할 만한 것들을 모두 빠짐없이 챙겨 둬라.” “그 말은…….” “이놈들을 약탈자로 여길지 말지는 이후 길드의 판단에 맡기겠다.” 괜히 귀찮고 번거롭기만 한 짓. 그런 생각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나,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미궁이 닫힐 때까지 다른 사고는 치지 마라. 길드에서도 이번 탐사에 한하여 샅샅이 조사를 할 테니까.” “…무, 물론이지요!” 오케이, 그럼 이거로 이 문제는 끝. “근데 그래서 이 안에 뭐가 있었던 거지?” “비,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 아무래도 직접 보는 편이 빠를 거 같은데. 아멜리아와 베르실이 증언과 증거를 캐고 있는 동안, 나는 벽으로 다가가 틈새를 살폈다. 암만 봐도 내가 들어갈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거, 바바리안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간의 고민을 끝낸 뒤, 나는 벽을 망치로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후드드드드-! 시원하게 박살 나 떨어지는 파편들. 테두리 부분을 몇 번 더 망치로 후려치고 나니 벽이 완전히 무너지며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오! 포탈 비석과 똑같이 생겼다!” “신기하네요.” “만지면 포탈이 열리는 식이려나?” 약 10m 정도의 통로 너머에 세워진 하나의 비석. 당장 다가가서 손을 가져다 댔지만, 포탈이 열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발견했다 싶더라니. 뭔가 특수 조건이 더 있다 이거지?’ 그래도 일단 알맞게 찾아오긴 한 거 같았다. 원래 1층 수정 동굴에는 이런 비밀 공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부서진 벽도 복원되지 않고 있고 말이지.’ 히든 피스 수색의 기본이 파괴인 이유다. 딴건 재생이 되는데 한 곳만 재생되지 않으면 거기가 정답일 확률이 높거든. “너, 알아낸 게 있나?” “아직… 없습니다.” “그렇군.” 이후 팀원들과 함께 비석 주변을 살피고 있자니 아멜리아와 베르실도 합류했다. 슬슬 증언 및 증거 수집이 끝난 모양. 따라서 나는 놈들을 풀어 줬다. “이, 이대로 가란 말씀입니까?” “그래. 아까 말했던 대로 사고 치지 말고.” 녀석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기 클랜원들을 챙겨서 떠났고, 그다음에서야 베르실이 조심스레 말했다. “정말 저렇게 보내셔도 괜찮겠어요? 정보가 퍼져 나갈지도 모르는데.” 그건 그렇지. 사실 그래서 겸사겸사 얘네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상관없다.” “상관없다니요?” “고작 저런 놈들이 3일 차가 되기도 전에 발견할 수 있던 곳이지 않나. 자기들은 뭐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착각한 모양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알아낼 이들은 금방 알아낼 거다.” “그것도… 그렇기는 하네요.” “그러니 그 문제는 그만 생각하고, 와서 한번 보겠나? 마력 감지를 사용해서, 뭔가 숨겨진 게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데.” “네.” 이후 마법을 비롯해 여러 방법으로 기본적인 탐색을 싹 끝냈지만, 애석하게도 나온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얀델 씨, 이쯤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곳엔 찾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비요른! 여기 뭐라 적혀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단서가 발견됐다. 아이나르가 비석 주변의 땅을 파내면서 비석 아래에 감춰져 있던 글귀가 나타난 것인데……. “잘 찾아냈다.” “후후, 고도로 단련된 전사의 직감은 마법과 다를 바가 없지. 바바리안이 월등한 종족인 이유 중 하나다.” “…….” 아이나르의 헛소리는 대충 무시한 채 쪼그려 앉아 글귀를 읽어 보았다. “고대어네요…….” “괜찮다. 내가 읽을 수 있으니까.” “고, 고대어를요……?” 아, 얘네한테는 말 안 해 줬었나? 세상은 언제나 쇼 앤 프루브. 복잡한 설명 대신 비석 아래에 적힌 고대어를 소리 내어 읽었다. “하나의 별,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 “내려다보는 이 땅 위에선 모두가 같은 존재리라.” “내가 너를 올려다볼 터이니.” 해석이 끝나자마자 베르실과 에르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얀델 씨, 이거…….” “거기서 들었던 거, 그거 맞죠!” “그래.” 그때 마녀 석상에 적혀 있던 글귀다. 애석하게도 아이나르는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응? 그때 들었다니? 무슨 소리냐?” “그런 게 있다.” 이후 비석 아래를 더 깊이 파 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고, 이쯤에서 우리는 팠던 자리를 원상 복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곤란하군. 결국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다니.” 아멜리아는 골치 아프게 됐다는 눈치였으나, 나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단서가 없기는 왜 없어? ‘하나의 별,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 이 정도면 거의 떠먹여 주는 거나 다름없구만. “지금부터 우리는 2층으로 간다.” 서두르면 이번 회차에도 입장이 가능할 거 같다. 505화 지하 1층 (1) 타다다닷—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동굴 속을 뛰고 있다. 후열을 맡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저들의 등 뒤를 쫓는 중이다. “아저씨, 설명 좀 해줘요. 2층에는 왜 가는 건데요?” 동료라기엔 유난스러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 물론 전력을 발휘하면 이젠 1초 안에 좁힐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래, 분명 그럴 터인데……. “정확히는 2층이 아니라 고블린 숲이다.” 어째서일까. 평생 좁힐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전에 그 모습을 봐버렸으니까. [그게 너한테 좋을 거 같아서.] [얀델, 불쾌해하지 말고 들어라. 너는 지금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다.] 그 말을 듣고 납득하는 비요른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했어야 했는데’가 아니었다. 졌다. 그야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니까. 단지 비요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려 했을까 정도나 생각하며 그가 원했을 대답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흘러간 세월 탓에 확신하지 못하며. [그, 글쎄…… 죽이는 편이…… 좋지 않으려나…? 싶은데…….] 나 자신의 생각이 어떤진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눈치를 보며 무조건적인 ‘동의’를 했을 뿐. 그를 위해선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고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그러했다. 비요른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 할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도, 조언을 한 적도 없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길을 택하든 묵묵히 따라가리란 각오는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사람으로서 격의 차이를 느꼈다. 동반자라는 것은 이런 사람을 뜻하겠구나 하며 그만 인정하고 말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내 자리가 없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는, 창고에 있던 어느 짐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괜찮나?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데.” 일부러 후열까지 찾아와 묻는 아멜리아를 보며 그녀는 이를 악물며 답했다. “신경 쓰지 마라. 괜찮으니까.” 내 자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그 사람이 알아주든 않든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으면 비요른 얀델이 죽을 테니까.] 이곳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 3일 차가 시작되고 약 1시간이 지난 시기. 드드드드!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수정이 붉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가 수정동굴 내 어디선가 소환이 됐다는 뜻. 물론 그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이미 탐험가 길드에 여덟 건의 토벌 신청이 꽉 차있었으니까. 문제는 소환 시기였다. ‘1시간 만에 소환이라니. 대체 몇 명이 소환 대기 중인 거야?’ 여전히 7명이서 이동 중인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역시 토벌 허가를 받은 여덟 팀만 소환 대기 중인 게 아닌 듯하다. 하긴, 사람 생각은 대부분 비슷하니까. 공포의 군주 드레드피어 처치. 나만 해도 이번 탐사 계획을 세울 때, 숨겨진 지역으로 향하는 열쇠가 그곳에 있을 가능성도 고려를 했다. 애석하게도 그땐 이미 토벌 신청이 꽉 차있어서 신청을 못했지만.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처치. 만약 이게 열쇠라면 당장으로서는 어림도 없고. ‘……다들 생각이 있으면 베르자크까지는 소환을 안 하겠지?’ 일단은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안심은 안 된다. 상황을 보니 신청을 한 여덟 팀이 아니라 수십 팀이 동굴 전역에서 대기 중인 듯하지 않은가. 그중 한두 팀만 이상한 욕심을 내도 대참사가 벌어지고 만다. ‘됐고, 나는 내 일이나 하자.’ 다만, 그렇다고 동굴 전체를 돌며 탐험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캐릭터가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2층으로 올라섰고, 그다음에도 속도를 최대치로 맞춘 채 이동하여 3일 차가 끝나기 전에 3층까지 올라왔다. 「캐릭터가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열 개가 넘는 다양한 필드로 이루어진 넓은 계층. 고블린 숲을 타고 올라온 우리는 리자드맨들이 출현하는 녹빛꼬리 습지를 지나쳐 인접 필드 중 하나인 조각 사원으로 이동했다. 무너진 석조 건물들의 잔해가 가득한 필드. 7층 암흑대륙의 판텔리온 유적지와 비슷한 외형이나, 그곳과 이곳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여기엔 조각상이 많거든. 전부 목이 부러져 있기는 하지만. “언제와도 기분이 나쁜 곳이군.” “그래도 인적은 드물지 않나.” 조각 사원은 3층의 필드 중에서 압도적으로 인기가 없는 지역이다. 일단 출현하는 몬스터가 딱 하나거든.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니다.」 무명 조각상. 스톤골렘과 비슷한 외형의 7등급 몬스터인데, 체구가 훨씬 작아 사람과 비슷하고 나름 민첩하다. 그리고……. 「무명 조각상이 [응답없는 기도]를 시전했습니다.」 이놈이 쓰는 스킬은 쓰레기로 정평이 나 있다. 플레이어가 사용 시 MP는 엄청 잡아먹는데, 거의 대부분 실패 판정이 뜨는 탓이다. 뭐, 얘네는 성공 확률이 훨씬 높은 거 같지만. 「무명 조각상에 거대한 힘이 깃듭니다.」 기도가 성공 시 5등급 이하의 무작위 정수가 일시적으로 부여된다. 그 탓에 7등급 몬스터치고 사냥 난이도가 높다. 아니, 정확히는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매 전투마다 예상치 못한 스킬을 상대해야 하기에 피로도는 물론이고 변수도 많은 것인데……. 그런 이유로 여기서 자리 잡고 사냥하는 탐험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도 그럴 게, 정수는 쓰레기. 경험치가 목적이면 외곽에서 한 마리 정도만 잡고 지나가도 된다. ‘무엇보다 입지도 구리지.’ 4층으로 가고자 한다면, 옆 필드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기에 지나치는 탐험가들도 보기 어려운 필드가 바로 이 조각 사원이었다. ‘뭐, 소재 드랍은 나름 준수한 편이지만.’ 그나마 조각 사원의 장점은 ‘소재’에 있다. 왜곡 마법을 걸고 잡다보면 가끔 ‘마력결정체’가 드롭되는데, 이게 나름 비싸게 팔린다. 물론 그마저도 5층에서 캐는 게 훨씬 효율이 좋아 이곳은 잘 오지 않지만. 아무튼, 우리가 온 것도 ‘소재’의 수급을 위해서였다. 사실 ‘마력결정체’ 말고도 나오는 게 있거든. “자자, 다들 움직여라!”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못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만큼 서둘러서 사냥을 시작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 왜곡]을 시전했습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 왜곡]을 시전했습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 왜곡]을 시전했습니다.」 전투력은 충분하니 마법사는 그냥 왜곡 마법만 쓰게 둔 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 「…….」 나오는 족족 조각상을 깨부순다. 다만, 그럼에도 노는 시간이 많았기에 인원을 나누어 몹몰이를 시작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사람과 달리, 위협 수치를 올리면 몬스터들은 눈이 뒤집혀 달려드니까. 이를 이용해 주변을 싹 돌며 조각상을 중심부로 몰아오고, 그다음에 베르실이 왜곡 마법을 거는 대로 처치를 해나갔다. 그리고 리스폰이 되는 기간 동안에는 멀찍이 이동해서 한 번 더 몹몰이 사냥. 중심부를 기준으로 12시, 4시, 8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로테이션을 돌리고 있자니 쉬는 시간 하나 없이 딱 맞물려 떨어졌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상을 처치했습…….」 「…….」 그렇게 얼마나 미친듯이 사냥을 해나갔을까. ‘마력결정체’를 6개 먹었을 때쯤에 첫 번째로 원하는 물건이 드랍됐다. “비요르으은! 이거! 이게 네가 찾던 그거 아니냐!” 인위적인 문양이 그려진 자그마한 돌부스러기. 「캐릭터가 ‘무명 조각’을 습득했습니다.」 태양 문양이었다. *** 무명 조각. 무명 조각상에 왜곡 마법을 걸고 처치 시에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특징은 인벤토리에 중첩이 되지 않으며, 세 개의 문양을 랜덤으로 갖고 드롭된다는 것. 그리고 도시로 갖고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태양은 먹었으니, 남은 건 달이랑 별인가.’ 이 조각에도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 여기고 한참 동안 별짓을 다했었는데. 드디어 쓸 길이 나오는구나. “얀델 씨가 노린 게 이 조각이었군요……?” “그럴듯하지 않나? 별, 태양, 달이라니.” “……잘 모르겠지만, 꽤 그럴듯한 시도인 거 같기는 하네요. 시간이 문제이긴한데, 아예 불가능한 정도는 아닌 거 같고요.” 3층까지 올라와서 아이템을 캐고 1층이 닫히기 전에 다시 내려가는 것. 그 자체로도 난이도가 높지만 못할 정돈 아니다. 지금에야 1층에서 이틀이 넘게 시간을 버려서 아슬아슬하지만, 처음부터 3층으로 달렸으면 훨씬 사정이 나았을 테니까. “다음 번에는 될 것 같기도 하네요.” 베르실의 말처럼, 애석하게도 이번에 바로 숨겨진 지역에 입장하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그도 그럴 게, ‘왜곡’이 성공한 시체들에서 ‘무명 조각’이 드랍되기까지 8시간이 걸렸다. ‘2개를 더 먹으려면 앞으로 16시간.’ 단순 계산을 할 시, 남은 문양들이 모두 겹치지 않고 드랍된다는 가정하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한데, 이 이상 사냥 속도를 올리는 것도 어렵다. 애초에 8시간 만에 하나를 먹은 것도 필드 전체를 돌아다니며 몰이 사냥을 할 수 있던 덕분이니까. ‘무엇보다 베르실의 MP가 바닥나면 ‘왜곡’도 쓸 수가 없게 되고 말이지.’ 쩝, 역시 이번 회차에는 무리였나? 서두르면 이번에도 어찌저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희망적으로만 생각했던——. “어! 비요른!! 또 나왔다!!” 응? 나는 멍하니 아이나르가 건넨 돌멩이를 받았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을 습득했습니다.」 별 문양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8시간 안에 달의 조각 하나만 더 먹으면 된다는 뜻. ‘뭐지? 아까도 아이나르가 캐왔던 거 같은데.’ 저번에 먹은 ‘초심자의 행운’에 아이템 드롭 확률 보정은 없을 텐데. 본래 운이란 기세를 타는 법. “계획을 바꾸겠다.” “……?” “지금부터 마물 처치는 아이나르가 도맡아서 한다. 나머지는 다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마물들을 유인해 와라.” 이후로는 조금 시간 낭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투는 모두 아이나르에게 맡기며 몰이 사냥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5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캐릭터가 ‘무명 조각’을 습득했습니다.」 한 번 더 조각이 드랍됐다. “달 문양이군…….” 이제 나도 인정할 때였다. “아이나르.” “맘껏 칭찬해도 좋다!” “바바리안은 월등한 종족이 맞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나르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거대화]까지 사용한 뒤 위로 높이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으꺄하하핫! 흐핫, 흐하하하핫!” 예상대로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며 그 시간을 만끽하는 아이나르. 콰앙-! 오케이, 이럼 논공행상은 끝났고. 나는 얼른 팀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5일 차, 6일 차, 7일 차……. 아래 층으로 역주행을 한다는, 흔히 겪기 어려운 시간. 다만 아이나르 덕분에 남는 시간에 적당히 야영을 하고 휴식도 취하며 체력을 신경 쓰며 이동할 수 있었고, 이윽고 7일 차 오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2층 고블린 숲 중앙. 1층 수정동굴과 이어진 포탈 근처 공터. 한때 입구막기를 하던 노아르크 삼인방과 격렬한 전투를 펼치기도 했던 바로 그 장소. “……뭔데 이건 또.” 그곳은 때 아닌 탐험가들로 가득했다. 눈대중으로도 백 명은 훌쩍 넘어보이는데……. 암만 봐도 1층이 닫히기 전에 수색을 포기하고 올라온 탐험가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경우였다면, 포탈 앞에 모여 있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번뜩-! 실시간으로 포탈을 타고 나오는 탐험가들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신관! 신관 없소이까! 도와주시오!” “일단 이것부터 마시게!” 대체 이게 뭔 상황인 걸까. 이내 포탈로 다가서자 탐험가들이 나를 알아보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거인……?” “1층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었나?” 내가 포탈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나온 것에 의문을 갖는 듯한 탐험가들. 후, 이렇게 눈에 띌 거 같아서 몰래 1층으로 내려가고 싶었건만. 어차피 비밀스럽게 이동하기도 글렀기에 가장 말이 많을 거 같은 탐험가 아저씨를 골라서 물었다. “이봐, 무슨 일이지?”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베르자크! 그 악마 같은 놈이 출현했소!” 후, 대충 그런 거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506화 지하 1층 (2) 심연의 군주 베르자크. 아홉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될 시 등장하는 히든 필드 보스. ‘결국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진짜 소환될 줄이야.’ 포탈 앞에 모인 탐험가들을 통해 중요한 것들만 빠르게 체크했다. 일단 베르자크가 소환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시간 전. 내심 우려했던 1층 탐험가들의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라 한다. 1층 탐험가들 중 상당수가 4일 차쯤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인지하고 2층으로 향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올라가지 않고 버티거나, 올라갈 능력이 없는 자들도 많았을 텐데?” “예. 그렇지요. 그래서 저희를 비롯한 10개의 클랜이 협력하여 층 전역에 흩어진 1층 탐험가들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남들이 죽든 말든 계층군주를 소환하는 놈이 있다면, 얻을 것 하나 없어도 사람을 살리는 자들도 있는 법. 이 앞에 모인 탐험가들 중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포탈 근처에서 탐험가들을 구조하다가 베르자크가 소환되자 2층에 올라온 자들이었다. “그러니 남작님께서는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6일 차에는 1층을 온종일 돌아다녀서 한 명을 겨우 발견할 정도였으니.” 그래, 그렇단 말이지……. “대단한 일을 했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쉽든 어렵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하셨던 일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존경심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탐험가를 보고 있자니 양심통이 찾아온다. 그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베르자크가 소환될 가능성을 인지했으면서도, 난 내 할 일을 하기 위해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된 걸까. “근데 저쪽에서 나왔다는 건, 남작님께서도 다른 탐험가들을 구조했던 것 아니신지요?” 돌연 한 사내가 내게 질문을 던졌고. 이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탐험가들이 탄성을 터뜨리며 혼자서 납득을 하기 시작했다. “아, 왜인가 했더니 그래서였군!.” “과연… 2층에 데려다준 것만이 아니라,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도해줬던 건가!” “얀델 남작님께선 우리와 달리 길드 공적치가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까지 하시다니.” “부끄럽구려. 나도 사실 베르자크가 소환되면 이 구조 행위를 길드에서 공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소이다…….” 어……. “…….” 나는 그냥 어떠한 답도 하지 않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 「…….」 명성을 올리는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오해가 퍼지면 알리바이는 증명이 될 테니까. ‘만약 이 방법으로 숨겨진 지역에 갈 수 있으면 내 행적을 조사하는 애들이 늘 테고 말이지.’ 물론 이것으로 양심통이 조금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암, 찢어진 살에 포션을 붓는 것도 참는데? “그럼 잠시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아, 예……! 혹시 물을 게 생기면 언제든지 제게 물어봐주십시오!” 궁금증을 해소한 뒤엔 탐험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팀원들과 의논 시간을 가졌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단원들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는 우리 클랜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아멜리아였고. “에밀리, 넌 앞으로 우리가 어쨌으면 좋겠나?” “……위험하긴 해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조금 아쉽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 이대로 뚫고 거기까지 가는 게 옳다고 보나?” 고블린숲 포탈에서부터 비석을 발견한 곳까지는 전력 질주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베르자크가 소환됐어도 못 갈 거리는 아닌 것. 다만, 아멜리아는 딱 잘라 말했다. “그건 네가 하려는 방법이 얼마나 확실한지에 달렸다. 만약 그 방법이 제대로 통하기만 한다면 뚫고가는 것도 해볼 만하겠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걱정이었다. 열심히 뚫어서 갔는데 포탈이 열리지 않으면 다시 왕복해서 돌아와야만 하니까. 늘어난 거리, 시간에 비례해 베르자크와 조우할 확률도 그만큼 커진다. “확실하다면, 내려가는 쪽에 찬성한다고 보면 되나?” “그래, 그렇게 봐도 된다.” 오케이, 그럼 아멜리아는 조건부 찬성이고……. 이어서 다른 동료들의 의견도 들었다. “저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려가 볼 만하다고 봐요. 이제 우리도 그때의 우리가 아니니까.” “나도 요정이랑 같다! 열심히 3층까지 올라가서 구했는데 이대로 포기하긴 아깝지 않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되든 안 되든, 이 기회에 확실하게 시험을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만약 통하지 않는다 해도, 다음번에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에르웬과 아이나르, 베르실은 무조건적인 찬성. “저는… 단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알겠으니, 네 생각이나 한번 말해봐라.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너도 우리 클랜의 일원이지 않나.” 클랜의 일원이라는 말이 유효했을까. 머뭇거리던 아우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베르자크라면… 그때에도 수천 명을 죽인 괴물 아닙니까……. 만약 단장님과 사모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인류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아니, 얘는 또 뭐라는 거야. “아무튼, 반대라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저, 저 혼자만의 생각이니 한 귀로 흘려주십시오 부디.” 찬성 3에 반대 1, 그리고 조건부 찬성이 1인가. 과반수를 따른다면 나머지는 들을 필요도 없지만, 일단 마지막 한 명도 의견을 물었다. “나? 아… 나, 나는… 그, 그게…….” 이번 탐사 내내 겉도는 모습을 보이던 미샤는 한참이나 말을 더듬다가 마침내 의견을 말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예전 그 말투로. “어, 어느 쪽이든 좋을 거 같당……. 그, 그때를 생각하면 위험할 거 같기는 한데… 마, 만약 포탈이 열리면 너한테도… 좋은 일일 테고……. 열리지 않아도, 시험해 본 것에 의미가 있달까아……. 어, 어느 쪽이든 너한테 도,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으응… 그, 그런 느낌인 건뎅…….” 얘는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난 그냥 의견을 말하라고 했을 뿐인데. “그럼 기권이라는 거냐?” “…그, 그건 아니고…….” “아니면? 똑바로 말해라. 그냥 네 생각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담아 강하게 말하자 미샤가 내 눈을 피하며 마침내 의견을 내놓았다. “내려가는 쪽이 좋을 거 가, 같아……. 마, 만약 그 방법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쉽게 말해, 미샤도 조건부 찬성에 투표하겠다는 뜻. 근데 왜 아멜리아를 힐끗하면서 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기 의견을 말한 게 맞기는 한 건가?’ 왠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얘도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좋아, 그럼 찬성이 세 표이니 결정이 됐군.” “어라? 얀델 씨 의견은요?” “클랜의 뜻이 나의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뜻이 클랜의 뜻이 되기도 할 테고. 클랜장은 투표 시 일곱 표로 집계가 되거든. 아, 참고로 총원이 여섯 명일 땐 여섯 표였는데, 이번에 일곱 표로 늘었다. 아무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 “자, 그럼 어서 가보자.” 저 너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미지의 필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 「1층 수정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 포탈을 역으로 타고 내려온 수정동굴. 원래 이쪽은 수정이 빛을 내지 않는 암흑지대인 만큼, 딱 내려오자마자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투구에 낀 횃불을 킨 순간. 화르륵-! 주위에 우중충하게 깔린 검은 안개들이 보이며 1층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필드 효과 - 심연의 안개가 적용됩니다.」 「모든 사용 효과가 비활성화 됩니다.」 「마력 효율이 4분의 1로 감소합니다.」 「심연의 안개에 노출된 마물이 보다 월등한 존재로 진화합니다.」 후, 이 안개도 오랜만이네. 그때는 정말 이 안갯속이 내 무덤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설마 내 발로 직접 다시 찾아오게 될 줄이야. “뭣들 하나? 잘 따라와라. 덫을 밟을지도 모르니 내가 지나온 길로만.” 주위의 어둠에 적응하기도 잠시, 나는 앞장선 채로 뛰기 시작했다. 길잡이와 탱커 역할을 동시에 수행이 가능한 나만이 가능한 전술이었다. 그때 그날에도 그러했듯. 여기는 앞장서는 쪽이 죽어나가는 곳이니까. 심연 고블린의 덫은 육안이나 마법으로 미리 탐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바로 이렇게. 덜컥.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무언가 밟는 소리가 들린 순간. 「캐릭터가 [무작위 덫]을 밟았습니다.」 덫이 발동되며 5등급 이하의 무작위 스킬이 시전된다. 그리고 이건……. 화르르르륵-! 음, 몸에 박히는 대미지나 형태를 보니 6등급 스킬인 [꼬리불꽃]이 틀림없다. “얀델, 괜찮나?” 솔직히 말하면 꽤 따갑다. 당시에 비하면 전반적인 스펙이 훨씬 더 높아진 상태지만, 역으로 줄어든 스탯이 딱 하나 있으니까. ‘후, 항마력 세팅을 얼른 해야 하는데.’ 만티코어의 정수를 지우며 ‘항마력’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그나마 [거대화]를 쓰면 상당 부분을 메우는 게 가능했지만, 여기서는 액티브 스킬이 봉인되는지라 그것도 안 되고. “신경 쓰지 마라. 겨우 1시간 거리 아니냐.” 그냥 버티는 수밖에.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조상신의 가호를 받으며 투명 덫이 가득한 통로를 내달린다. 그래도 그때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었다. 카칵-! 물리 딜로 들어오는 스킬은 진짜 간지러운 수준이라는 것. 마법류 스킬들은 그때보다 더 아프게 들어오는 탓에 결국 조삼모사이긴 했지만. 타다다닷-! 덫을 밟으며 달리고, 또 달린다. 목이 마르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포션 한 병을 입 안에 털어넣는다. 다만, 예전처럼 확 몸이 낫는 현상은 없다. 스탯이 높을수록 포션 한 병으로 회복 가능한 총량은 줄어드는 탓인데……. 「캐릭터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한 40분쯤 달려나가니 패시브가 발동됐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그래도 이거라도 켜지니 좀 버틸 만해졌다. 속도를 좀 더 올려도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길에 박차를 가하던 차, 뒤에서 동료들이 중얼거리는 게 들려온다. “그날… 저 녀석이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알 것도 같군.” “그러게요. 저도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그날의 일을 말로만 전해들었던 아멜리아와 베르실은 나를 보며 학을 떼고 있었다. ‘뭐, 그래도 칭찬을 하는 거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나로선 좀 민망했다. 그때는 살기 위해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또한, 무엇보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다, 다들 미쳤어! 그런다고 누가 인정이라도 해줄 거 같아!! 어? 영웅이라고?] [니미럴······. 그래도 나는 가련다. 결국 누구는 해야 할 일이니까.] 가장 앞에서 덫을 밟으며 나아가다 죽어 나간 그 녀석들과 달리. 나는 덫을 밟고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그렇게 누구보다 용감하게 덫을 밟고 나아갈 수 있었을 뿐이다. 바로 지금처럼. 「캐릭터의 생명력이 40% 이하입니다.」 슬슬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눈을 부릅 떴다. 그야 지금 걱정할 상대는 심연 고블린만이 아니니까. ‘베르자크는…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나 보군.’ 아직까진 베르자크의 눈 역할을 하는 ‘심연의 감시자’를 만나지 못했다. 즉, 당장은 놈이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단 뜻. “저기… 폐쇄 1시간 전에 내려와서 시험을 해보고, 안 되면 폐쇄 방출 현상을 이용해서 도시로 돌아가는 건 어땠을까요?” 문득 그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뒤늦게 의견을 내는 베르실이었으나, 사실 그것도 전부 진작 생각해 봤던 것이다. 딱 시간을 맞추면 왕복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랬으면 더 힘들었을 거다. 그때쯤 되면 1층에 남아 있는 놈이 얼마 없을 테니까. 필연적으로 놈과 만나야 했겠지. 얀델도 분명 그것까지 생각하고 내린 결정일 거다.” 그래, 아멜리아 너는 알아주는구나. 내가 그 정도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내려온 게 아니라는 걸. 「캐릭터의 생명력이 30% 이하입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의 상승량이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이내 패시브가 최대 효율을 내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는 1시간이 좀 넘게 걸린 질주를 끝마치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체력이 많이 깎이긴 했지만, 그 외엔 큰 문제가 없었다. 베르자크도 만나지 않았고. 날 제외한 동료들은 모두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니미럴.’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고, 결과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는 법. 문제는 도착한 그곳에 있었다. “…야, 얀델 남작?” “……거인이다! 거인이 단원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 “설마 문을 열 방법을 찾아낸 건가?”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얼핏 봐도 수십 명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달려온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잔챙이들조차 3일 차가 되기 전에 찾아낸 장소. 심지어 떠나기 전에 벽도 박살을 내놨으니 비밀 유지가 될 거라고는 당연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베르자크까지 소환된 마당에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황망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내에게 물었다. “거기, 너 대머리.” “나, 나 말이오?” “다들 여기 모여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내는 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포탈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소이만? 혹시 누가 심연의 군주를 잡을지 모르지 않소. 그도 아니면, 폐쇄 직전에 열리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오!” “……만약 베르자크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그 정도 위험 부담은 해야 하지 않겠소! 무려 숨겨진 지역을 찾는 일인데!”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들리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얀델 남작께서도 아시겠다시피…….” “…….” “그게 탐험이지 않소이까!” 난생처음으로 탐험가란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사 빠진 놈들이 많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외람된 말이오만……. 혹시 남작께선 포탈을 열 방법을 알고 계시오?” 설마 미친놈들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이야. 507화 지하 1층 (3) 팩트를 하나 체크하고 넘어가자면, 죽는다. 베르자크가 이곳에 나타나는 순간. 이곳에 있는 탐험가들 중 70%는 오늘이 마지막 탐험이 될 거다. 물론 베르자크를 보자마자 도망쳤단 가정하에. 만약 맞서 싸운다고 한다면, 전원이 마지막 탐험을 함께하게 될 테고. ‘이 새끼들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르자크가 소환된 채로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사람이 더 도착한다는 게. “……역시 사람들이 더 있었구려.” 사이좋게 덫을 밟으며 길을 뚫었는지 팀 전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도착한 열댓 명의 탐험가 무리. 그들이 탐험가들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포탈은! 혹시 포탈은 열렸소이까?” “아홉 번째 공포의 군주가 처치되고 베르자크가 소환됐지 않소!” 진짜 미친놈들인가? 그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2층이 아니라 이곳에 오다니. 원래 있던 놈들이야 베르자크가 소환됐을 때부터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쳐도, 얘네들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옆으로 쓱 다가왔다. “……얀델, 어떡할 거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탐험가들의 욕망을 너무 얕본 거 같은데.” “탐험가가 아니라 인간을 얕본 거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이런 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었으니.” 요즘따라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면 뭔가 현자랑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다. 다만, 이번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예상을 했으면 미리 조언을 해주든가. “후우…….” 진정하자. 골치 아픈 상황이긴 하지만, 동료들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는 건 옳지 않으니까. 그 시간에 해결책을 마련하는 게 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포탈을 열기 곤란하다는 건데…….’ 포탈이 열리면 이놈들도 얼씨구나 무임승차를 해서 꿀을 쪽쪽 빨아댈 게 분명하다. 그만큼 내가 먹을 수 있는 단물도 줄어들 테고. ‘무엇보다 소문이 나겠지.’ 만약 포탈에 입장 가능한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우리만 입장할 수 있더라도, 우리가 숨겨진 지역을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온 도시에 퍼질 것이다. 다음 탐사부터는 미행이 붙고 견제가 들어오는 등, 귀찮은 일이 한가득 생기고 말겠지. 최대한 조용히 단물만 빨아먹고 싶던 나로서는 반길 수 없는 전개다. 하지만……. “시, 심연의 감시자다……! 베르자크! 그 괴물놈이 왔다……!” 이로써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며 해결책을 만든단 방법도 쓸 수 없게 됐다. 그야 저게 보인 순간, 베르자크가 나타나는 건 확정이거든. “으, 으아! 저, 저리 가!” “밀지 마라!” “으아아아아!” 심연의 감시자가 탐험가 무리 사이에서 생성이 된 즉시 혼돈의 도가니가 펼쳐졌다. 처치하는 놈에게 어그로가 끌린다는 걸 아는지. 탐험가들은 고작 9등급에 불과한 몬스터를 상대로 도망치기 바빴고, 심연의 감시자는 그런 상위 탐험가들에게 겁도 없이 툭툭 평타를 쳐댔다. 찍-! 아, 참고로 평타는 침 뱉기였다. 물총을 쏘듯 눈알에서 쏘아지는 독액. “으아아! 비켜! 비키라고!” 보면서도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소 6층 이상인 탐험가들이 9등급 몬스터 하나에 쩔쩔매며 패닉 상태에 빠지다니, 이건 또 무슨 코미디인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때였다. 퍼억-! 한 탐험가가 눈에 평타를 맞고 당황해서 휘두른 손짓에 심연의 감시자가 맞았다. 그리고 그 즉시. 솨아아아아아아-! 심연의 감시자가 빛무리로 변해 사라졌다. “…….” “…….” 혼란이 끝나며 시작된 무거운 정적. “아, 아아……. 안 돼…….” 심연의 감시자를 처치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탐험가가 벌벌 떨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 얼른 다른 곳으로 가시오!” 누가 했는지도 모를 어느 탐험가의 외침. 이를 기점으로 탐험가들이 황급히 해당 탐험가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베르자크, 그놈이 온단 말이오! 얼른 2층으로 도망치시오!” “하, 하지만… 나, 나 혼자서 2층까지 갈 수 있을 리가…….” “그러게 왜 죽였소 그걸!” 아휴, 진짜 탐험가 새끼들은 진짜 전부 다 사이코패스밖에 없나? “그만들 해라.” 보다 못한 내가 상황에 개입했다. “얀델 남작……?” “…남작님! 저자가 있으면 우리 모두 죽을 게 분명합니다! 어서 쫓아내야 합니다!” 웃기지도 않은 논리였다. 뭐, 얘가 없으면 안 죽을 상황이었나? 심연의 감시자가 보인 이상 결국 이곳에 베르자크가 오리란 건 기정사실이었구만. 아무튼, 저 꼴을 보니 새삼 확신이 든다.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얘들이 순순히 2층으로 갈 거 같진 않다. 그래, 그러니까……. “그만들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포탈을 열겠다.” 이번에도 역시나 플랜 B. “……!” 이내 그리 말하며 걸음을 옮기자 탐험가들이 벽에 딱 달라붙어서 길을 내주었다. 이는 비석 옆에 있던 탐험가들도 매한가지. “전부 나가 있어라.” “…예? 아, 예! 뭣들 하나! 방해하지 말고 어서 다들 나와라!” 포탈을 열겠단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짧게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비석이 있던 방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베르실, 이쪽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나? 아,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이내 베르실이 마법을 이용해 저쪽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결계를 쳤다. 오케이, 그럼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졌고. 슬슬 해볼까 하려는 차, 아멜리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얀델, 괜찮겠나?”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다 뒈지라고 내벼러 둘 수도 없고.” “더 기다리면 2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을 텐데? 아무리 무모한 자라고 해도 자기 목숨이 귀한 줄은 알 테니까.” 음,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런다고 얘네들이 여길 포기할 거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의외로 차분하군.” 글쎄… 사실 체념에 가깝다. 만약 이 방법이 통해서 정말로 포탈이 열리고, 우리를 따라서 수많은 무임승차자들이 들어오는 상상을 하면 배가 아프다 못해 두통이 일 정도다. 하지만……. “만약 이 방법이 틀렸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도 베르자크를 피해 2층으로 도망쳐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는 건 위험하니까.” 이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진짜 이유를 말하자 아멜리아도 납득을 하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3층에서 수급해온 조각들을 손에 쥔 채로 비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앞에 멈춰서 새 오더를 내렸다. “베르실, 너를 제외하고 남은 여섯 명에게 결속 마법을 걸어라.” “네?” “정말 포탈이 개방되는 거면 공적치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 납득이 됐는지 베르실은 군말 없이 결속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어차피 마법사들에겐 경험치가 필요 없으니까. “됐어요.” 후… 그렇단 말이지. ‘제발, 통해라.’ 이내 꿀꺽 침을 삼키며 비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순간. 후우우우우우웅-! 비석을 중심으로 공기가 휘몰아치며 찬란한 오색 광채가 터져 나왔다. 「최초로 숨겨진 지역의 포탈을 개방했습니다. EXP +99」 그래, 이거지. *** 포탈이 열렸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발을 들이밀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으로 이어진 포탈. 그 때문인지, 막상 열리니 생각이 많아진다. 다만, 일단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베르실, 결속 마법을 다시 사용해라.” “어떻게요?” “나, 에르웬, 베르실 너까지가 1팀이고, 나머진 2팀이다. 만약 우리가 들어간 다음 포탈이 닫히면, 2팀은 그 즉시 2층으로 올라가라. 아, 이때 에밀리, 네 역할이 중요한데… 할 수 있겠지?” “걱정 마라. 포탈이 닫히는 걸 보면 저놈들도 정신을 차릴 테니까. 저놈들을 설득해서 다 같이 2층으로 가면 안전할 거다.” “그래……. 혹시 뒤따라 들어왔는데 다른 곳에서 시작을 할 경우에도 네가 잘 해줘야 한다. 알겠지?” “최선을 다해보겠다.” 그래, 그러면 만약을 대비한 계획도 이만하면 됐고…….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지.” 이내 조심스레 포탈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번뜩-! 세찬 빛이 눈꺼풀 위로 번지며 일순간 시야를 잃었고, 머지않아 몸이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회복됐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로 달성된 업적입니다.」 「당신이 남긴 위대한 족적은 명예의 돌에 새겨져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포탈을 타는 것이야 익숙했기에,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아 바닥에 착지. 쿠웅-! 방패를 들어 올려 상체를 보호하며 신속하게 주변을 살폈다. 바닥 타일의 타입은 암석. 가시거리는 약 100m쯤 되는 거 같지만, 그 너머로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 울퉁불퉁한 암석지대만이 펼쳐져 있을 뿐.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이건 파도 소리인가……? ‘일단 몬스터는 없는 거 같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머리 위쪽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동료들이 뒤따라 입장했다. “……!” “우, 우왓……!” 우선 1팀의 구성원인 에르웬과 베르실. 그리고……. “우오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르는 아이나르를 시작으로, 아우옌, 미샤, 아멜리아까지. ‘…다행히 포탈이 닫히진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하던 그 순간. 나는 뒤늦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출구가 없군.” 마치 균열에 입장했을 때처럼, 잠시간 열린 포탈은 사람만을 뱉고서 도로 닫히고 있었다. *** 일방통행일 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다는 것. 이에 왠지 불길해지기는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딱히 변한 건 없어.’ 어차피 1층이야 7일 차가 되면 닫힌다. 당연히 그 시간이 지나면 위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거고. ‘문제는 여기가 언제 닫히냐는 건데…….’ 이는 앞으로 탐사를 통해 알아내야 하는 종류의 정보. 상념은 이만하고서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에밀리, 마지막으로 들어올 때 상황이 어땠지?” “똑같았다. 포탈의 색에서만 좀 차이가 있을 뿐. 여느 포탈들과 다를 게 없더군. 고울랜드가 친 결계가 곧 사라지면, 다른 탐험가들도 내려오기 시작하겠지.” 흠, 그렇단 말이지……. “다들 주위를 경계하면서 현 상태를 점검해라. 혹시 뭔가 변한 게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내게 말하고!” “비요른! 나, 나 몸이 좀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어디가?” “어, 얼굴이 뜨겁고, 심장이 격하게 뛴다!” ……그건 네가 흥분해서 그런 거고. 아무튼, 그렇게 멤버들의 상태를 점검하며 이 필드의 특징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위에서 탐험가들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오오! 새로운 계층! 새로운 계층이다……!” “크하하하하! 내 이름이 역사 속에 기록되겠군!” 나사가 여럿 빠진 듯한 놈들도 있었지만, 나름 정상적인 놈들도 많았다. “전원 경계 태세……!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절대 방심하지 마라!” 입장하자마자 자신의 동료들과 뭉쳐 대비를 하는 자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다들 우리 주변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집결해 있다. 우리 옆에 있는 게 안전하다 생각한 건가? 알 수 없지만, 의외로 비처럼 쏟아지던 탐험가의 입장은 금방 끝났다. 그리고……. “뭐, 뭐야!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아, 아직 젤튼 씨가 안 오셨는데…….” “쿠르도! 쿠르도 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정보가 추가됐다. 다른 계층과 이어진 포탈과 다르게, 이번에 연 포탈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닫힌다. 하면, 그 조건이 무엇일까. ‘일단 제한 시간이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나는 서둘러 사람들의 숫자를 셌다. 어디 보자, 지금까지 들어온 인원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오십팔, 오십구, 육십…….’ 그래, 60명이 되면 포탈이 닫히는 거구나. 508화 지하 1층 (4) 입장 정원 60인. 또한 입장할 때만 포탈이 잠시 열리며 되돌아 갈 포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는 ‘균열’의 특징에 해당한다. 다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균열로 분류를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일단 비석이 있었으니까.’ 계층과 계층이 이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포탈 비석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비석을 활성화하고서 우리는 포탈을 열었다. 또한……. ‘숨겨진 지역이 균열인 케이스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지.’ 명예의 돌에 적힌 ‘숨겨진 지역’은 대부분 새로운 계층을 뜻했고, 그게 아니라면 ‘라르카즈의 미로’ 같은 히든 필드에 해당했다. ‘하지만 여기가 1층의 히든 필드일 가능성은 낮겠지.’ 나는 일단 이곳을 하나의 계층이라 보기로 했다. 히든 필드는 해당 층과 폐쇄일을 공유하니까. 한데 이 포탈을 열기 위해선 3층에서 열심히 조각을 파밍해와야 한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더하면, 암만 빨라도 6일 차쯤.’ 히든필드라면 설계 구조상 최대 2일 정도밖에 탐사를 할 수 없는 구조라 해야 하나? 이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럼 중요한 건 여기가 몇 일차에 폐쇄가 되냐는 건데…….’ 이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 수가 있게 되겠지. “베르실, 인원 파악은 끝났나?” “네.”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세력 파악을 위해 사전 조사를 끝마쳤다. “일단 큰 세력은 둘이에요. 은사자 클랜이 스무 명, 헥츠 클랜이 열아홉 명이고요. “둘 다 수가 딱 맞지 않는군.” 클랜들은 대부분 수를 맞춰서 움직인다. 결속이 5인일 때는 5의 배수로 맞췄고, 여섯으로 늘어난 다음에는 6의 배수로 팀을 나눴다. “네. 두 클랜 다 낙오자가 꽤 되는 모양이에요. 쳐둔 결계가 사라지고 포탈이 열린 걸 보자마자 다들 마구잡이로 달려나가서 정신이 없었다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군. 그럼 나머지는?” “5인 팀이 둘, 4인 팀이 하나예요.” 이어서 더 얘기를 들어보니 4인 팀은 아예 리더인 사람이 들어오지 못했고, 5인팀 중 하나는 전사가 빠져서 전투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모양. “더 알아볼까요? 다들 기댈 곳이 필요한지 제게 호의적이던데.”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고맙다.” “그리고…….” “응?” 이내 고개를 갸웃하자 베르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소 팀 셋 모두 우리에게 의탁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어요. 다른 두 클랜 역시 협력을 바라는 눈치였고요.” ”협력은 알겠는데, 의탁이라니?” “별거 있나요? 시키는 거 다 하고, 대가는 주는 대로 받을 테니 데려가만 달라는 거죠.” 하긴, 욕심에 눈이 돌아가 어찌저찌 입장은 했지만 막상 미지의 땅에 들어오니 정신이 확 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낙오자가 생기며 팀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고. “어쩌실 건가요?” “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지?” “평균적으로는 5층 정도요.” “그렇다면 더 볼 것도 없군. 전부 알아서 쳐내라.” 소수 정예의 전투를 펼치는 우리의 구조상 방해만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우리가 안 받아주면 자기들끼리 뭉치든, 두 클랜에 기생을 하든 알아서 하겠지.’ 내가 억지로 이놈들을 끌고 내려온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포탈은 열어줬으니, 우리의 인연은 그거로 끝이다. 따라서……. “베르실, 결속 마법을 다시 써라.” “인원은 어떻게요?” “에밀리와 아우옌이 한 팀. 나머지가 한 팀이다.” 우선 우리도 팀을 둘로 나누었다. 사실 아우옌을 빼고서 6인 결속 체재로 갈까도 싶었지만, 아우옌도 경험치를 먹으면 좋긴 하니까. 그야 새로운 계층이면 새로운 타입의 몬스터도 나올 거 아니야? 이 구조면 아멜리아가 평타 한 대씩만 쳐도 아우옌에게까지 경험치가 들어갈 것이다. “에밀리, 괜찮겠나?” “상관없다. 광역기가 많은 마법사가 너와 한 팀이 되어야 한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러면 이 문제도 끝났고. “비요른! 언제까지 여기에만 있어야 하나!” 아이나르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 듯하니. “모두 이동 진형으로 서라.” 탐사를 시작해 볼 시간이다. *** 이내 우리가 이동하려 들자, 시작 지점에서 정비하던 탐험가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용기내어 내게 물었다. “혹시… 폐가 안 된다면 멀리서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미지의 계층에서 앞장 서기는 무서우니 우리가 하는 걸 보고서 배우겠다는 뜻. 거, 이 새끼들은 양심도 없나? 내가 연 포탈에 무임승차를 한 것도 모자라 버스 운행까지 바라다니. “폐가 돼서 안 된다.” 나는 여지를 주지 않게 단호히 잘라 냈다. 물론 저쪽도 버스에 타고 싶은 의지가 강한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하, 하지만……. 남작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헛되이 죽는 이들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한 놈이 먼저 총대를 매자 다른 놈들도 용기가 났는지 지원 사격을 가했다. “저 말이 맞습니다……!” “비상사태에는 같은 탐험가들끼리 힘을 합칠 의무가…….” “저희를 돕는다면 분명 남작님의 명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 뭐라는 거야 이 새끼들은. 포탈 한 번 열어줬다고 나를 호구로 보나. “언제 내가 너희보고 들어오라고 했나?” “…….” “너희도 탐험가면, 너희 탐사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그렇지만, 분명 많은 이가 죽을 것—.” “그 정도 위험 부담은 해야 하지 않나? 너희도 알다시피 그게 탐험이란 건데.” 그 말을 끝으로 팀원을 이끌고 시작 지점에서 벗어났다. 강하게 말한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감히 우리를 따라오는 녀석들은 없었다. “후, 이제 좀 속이 시원하군. 다들 뭐 저리 쫑알쫑알 말이 많은 건지.” “단장님, 근데 괜찮겠습니까……? 저들이 살아서 돌아가면 단장님에 대한 어떤 이상한 헛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르는데…….” 아우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으나,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별걱정을 다하는군. 그딴 걸 신경 쓰면 머리만 아프다.” “하하… 역시 대범하십니다.” “됐고, 이제 잡담은 그만두고 탐사에 집중해라. 앞에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이후 나는 이동 진형을 갖춘 채 천천히 스타트 포인트 주위를 싹 돌며 지형을 파악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형 자체가 넓지 않은 덕분이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싶기는 했는데…….” “정말 섬이었군요.”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면 충분한 사이즈의 바위섬. 6층으로 치면 시작의 섬 라이미아 같은 느낌인가? 일단 쫙 돌아보니 섬 내에는 몬스터가 없었다. 아니,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미아 섬엔 캘 만한 나무라도 있었지. 여긴 그런 것도 없네.’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여기서만 나오는 특수 소재라도 있는 거면 밖에 나가서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물론 아직 기대를 접기엔 이르긴 하다. 진짜 탐사는 저 바다 너머에 있을 테니까. “록로브, 어때 가능하겠나?” 일단 배를 띄우기 전에 우선 항해사의 의견부터 들었다. 그야 딱 봐도 보통의 바다랑은 달랐거든. “예. 일반해적인 바닷물과는 다르지만, 나무가 뜨는군요. 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 부력이면 저희 배도 충분히 뜰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행이군.” 바위에 부딪쳐 거칠게 흩뿌려지는 은색의 파도. 마치 수은으로 이뤄진 바다를 보는 듯하다. 그 와중에 이상한 부유물들도 떠다니고. 솨아아아아아아아-! 은색 물결 위에 떠다니는 장롱, 벽난로, 두꺼운 책, 낡은 검, 기사의 투구 등등……. 뭐야, 저건 양말인가? 알 수 없지만, 일단 아우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서 가장 알맞은 곳에서 배를 소환했다. “오오! 배가 떴다!” 다행히 배는 별문제 없이 바다 위에 떴지만, 혹시 모르기에 10분가량 지켜보며 배에 가해지는 손상 등등을 확인했고, 그다음에는 모두 탑승하여 출항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이번 항해의 모든 판단을 아우옌에게 일임했다. “예? 저, 저한테 말입니까?” “그래.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6층에 처음 왔다는 생각으로 한 번 배를 몰아봐라.” 아우옌은 그런 위치가 부담스러운 듯했으나, 내가 강하게 말하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럼 일단 주변 해역을 조사부터 하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나한테 구구절절 보고할 필요도 없다. 항해에 한해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더 나으니까.” 그렇게 출항에 시작한 배는 항해사인 아우옌의 성격을 보여주듯 신중하게 나아갔다. 수심이 깊은지, 또 수면 아래 숨겨진 장애물은 없는지, 아우옌은 그러한 것들을 시도 때도 없이 확인하며 실시간으로 항해도를 제작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옆에서 흥미로운 눈으로 그걸 지켜보고 도왔다. “부럽군.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게.” “…예?” “잘해보란 뜻이었다. 네 지도와 네 이름은 분명 역사에 남게 될 테니까. 피크마의 항해도처럼.” 가만 보면 아멜리아 얘도 이상하게 이런 데에 집착하는 면모가 있었다. 평생 자기 이름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살아서 그런가? ‘……도시로 돌아가면 본명을 되찾게 할 방법도 생각을 해봐야겠네.’ 항해 쪽은 나 없이도 잘 되어가고 있었기에, 슬슬 자리를 옮겨 갑판으로 향했다. 아우옌이 항해의 전문가라면, 나는 미궁 그 자체의 전문가라 할 수 있으니까. ‘시야 범위가 늘어났어.’ 바위섬에서는 가시거리가 약 100M 정도였지만,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나오니 서서히 가시거리가 늘어났다. 하늘이 어두컴컴한 탓에 멀리까지 보이지 않을 뿐, 사실상 가시거리 제한은 사라진 느낌. “베르실, 뭔가 알아낸 건 있나?” “아뇨. 아무래도 관련 설비가 없다보니……. 일단 연구보단 표본 채취만 한다는 느낌으로 가려고요.” “그런가…….” 마법사인 베르실은 바위섬을 시작으로 항해를 하면서도 떠다니는 부유물들을 건져올렸지만,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레이븐이었으면 다르려나?’ 그런 생각도 들지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 연구해서 뭐가 나오겠어? 우린 탐험가이니, 그냥 표본을 채취해 비싸게 팔 수만 있으면 장땡이다. ‘그럼 베르실도 그냥 내버려두면 될 거 같고…….’ 나머지 멤버들을 확인했다. 눈이 좋은 에르웬은 돛대 위에 마련된 전망대에 자리를 잡고 항해 파트와 소통을 하고 있었고, 아이나르는 갑판 끄트머리에서 선장 기분을 만끽. 미샤는 정말 어정쩡한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혼자 서 있었다. 다만, 가까이 가서 말이라도 걸어보려는 찰나. “섬! 섬이에요!” 새 필드가 발견됐다. *** 숨겨진 지역에 들어오고서의 첫 발견. 잔뜩 흥분한 우리는 얼른 뱃머리를 돌려 에르웬이 말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 “…….” 저 멀리서부터 얼어붙었다. 간단한 이유다. “마, 마물…….” 섬이 아니었거든. “……어떡하죠?” “오! 싸워 보는 건가? 아무래도 우리가 처음 발견한 마물 같은데. 생각보다 약할지도 모른다!” “미, 미쳤어요? 저만한 크기의 마물과 싸우다니 너무 무모해요!” 섬과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 이를 앞에 두고 그 위험성을 진정으로 알아챈 것은 나와 아멜리아뿐이었다. “……얀델.” 아멜리아는 [위기감지] 덕분에 몬스터의 등급을 대충 알 수 있거든. 뭐, 보아하니 등급 말고는 얘도 아는 게 없는 듯했지만. “아니, 아우옌 록로브. 당장 뱃머리를 돌려라. 최대한 ‘저것’과 멀어져야 한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아멜리아의 지시에 아우옌은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고 지시를 따랐다. 그러고 나서야 내게 다가왔다. “저것의 정체를 알고 있나?” 암, 알다마다. 거대한 흑색 등딱지. 길쭉한 목과 용을 닮은 머리통. 그리고 주둥이에 나 있는 기다란 수염까지. “톨-라푸파. 1등급 마물이다.” “정말로… 1등급 마물이었군.” 얘네들 전부 다 처음 발견한 몬스터니 뭐니 하는 것도 당연하다. 톨-라푸파를 포함해 1등급 몬스터의 80%가 10층에서만 출현하니까. 아무래도 정보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 ‘심지어 얘는 히든 필드에서만 나오기도 했고.’ 마지막 층에서도 무려 히든필드에 들어가야 볼 수 있던 초대형 마물. ‘니미럴…….’ 이내 톨-라푸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골이 오싹했다. ‘1등급 몬스터가 나오다니…….’ 놈이 비선공 몬스터였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다른 놈들이었다면? 분명 그 즉시 전멸이었다. 1등급 마물은 어지간한 상층 계층군주보다도 레이드 난이도가 높으니까. ‘지금이라도 바위섬으로 돌아가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쉽기에 항해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00 : 01] 7일 차가 끝났다. 이미 1층은 폐쇄가 되었다는 뜻. ‘오케이, 그럼 여기가 히든필드도 아니라는 건 사실상 확정이 됐고…….’ 내 예상대로 이곳은 새로운 계층이 맞았다. 그리고 아마 층수는……. ‘지하 1층.’ 그래, 2층은 이미 있으니까 왠지 지하 1층으로 표기가 될 듯하다. 음, 근데 그럼 이름은 어떻게 되려나? 보통 새 계층이 열리면 명예의 돌에 정식 명칭이 나오는 식이던데. ‘그건 나가서 보면 알겠지.’ 그렇게 1등급 몬스터를 보고서 놀란 가슴을 달래며 다시금 항해를 이어나가던 때. “꺄아아아앗!” 항해 내내 낚시를 하듯 부유물을 건져내던 베르실의 비명을 내질렀다. “마물! 마물이에요!” 얼른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체의 벽면을 타고 기어오르는 몬스터가 보였다. “어? 이놈은 뭐냐? 멀록도, 프로그맨도 아닌 거 같은데.” 몬스터란 소리에 후다닥 달려온 아이나르가 내게 물었고, 나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계층이래서 정말 있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낄, 끼륵, 끼륵!] 신종 몬스터였다. 등급도, 분류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509화 무덤 (1) 기본적인 형태는 프로그맨을 닮았다. 배 부분이 공기가 가득 찬 것처럼 둥근 것이나, 손가락 마디에 빨판 비슷한 게 달려 있단 점. 심지어 얼굴의 형태도 비슷하다. 다만 피부가 녹색이 아닌 회색이고, 트레이드 마크인 작살도 들고 있지 않다. 또한, 결정적으로. ‘날개……?’ 가위로 오려서 붙인 듯 이질적인 분위기의 날개가 등 뒤에 달려 있—. [끼르륵!!] 이내 벽면에 달라붙은 놈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그 힘을 이용해 단숨에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래, 장식용 날개는 아니란 거지? “에밀리. 등급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서 아멜리아에게 등급을 확인했다. 물론 [위기감지]로 정확한 등급 측정은 불가능하지만……. “7등급 아래일 거다. 아무런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빅데이터를 통해 간략히는 파악이 되거든. “7등급 아래라…….” 나는 갑판 위에 올라와 우리를 노려보는 열댓 마리의 마물들을 보며 서둘러 오더를 내렸다. “섣불리 나서지 마라! 우선 놈들에 대해 정보를 얻는 게 먼저다!” “윽!” 당장 달려 나가려다가 내 지시를 듣고 움찔하는 아이나르. 옳지, 그래도 말은 잘 듣는구나.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이내 [야성분출]로 위협 수치를 확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정체불명의 마물들이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놈들의 평타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이빨도, 발톱도 없다. 손에 작살 같은 무기를 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공격을 하는가 싶었더니만. 스윽. 놈들이 고양이자세를 취하며 엉덩이를 들어 올린 즉시. 찌지지직-! 번개 속성으로 추정되는 가시 형태의 투사체가 허공에서 생성되며 쏘아진다. 7등급 이하 마물인 만큼, 당연히 피해는 없었다. 일단 방패로 대부분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미처 막지 못한 쪽도 내 피부를 뚫진 못했다. 하지만……. ‘뭐야, 이 새끼…….’ 몸이 굳는다. 알 수 없는 효과로 ‘마비’나 ‘감전’ 같은 상태 이상을 받은 탓은 아니다. 단지, 그냥 너무 놀라서였을 뿐. “야, 얀델 씨… 마물들이 방금 쓴 저거…….” 그래, 이러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말꼬리를 흐리는 베르실을 대신해 에르웬이 말을 완성했다. “아무래도 플미나스의 [천둥가시] 같은데요……?” 7등급 몬스터 플미나스. 3층 지역 일부와 4층에서 출현하는 번개 속성의 몬스터. 한데 다른 종의 고유 스킬을 이놈이 쓴다고? ‘설마 상위 변이종인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야 갑판을 타고 올라온 열댓 마리가 모두 동일한 스킬을 사용했으니까. ‘똑같은 스킬을 쓰는 다른 몬스터라니…….’ 하면, 다른 스킬은 어떨까. 공격은 일절 하지 않으며 이것저것 확인을 해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건… 아이언팔콘의 [철갑깃털]이군.” “오! 저건 나도 아는 이능이다! 6등급 마물인 씨웜의 [거품방울] 아니냐!” “그… 6등급이 아니라 7등급인데…….” 이놈이 가진 액티브 스킬 세 개가 모두 다 각기 다른 몬스터의 것이다. 패시브는 어떨지 궁금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한 마리를 잡아보잔 생각으로 망치를 휘두른 찰나. 「[썩은점액]에 의해 공격이 빗나갔습니다.」 얼씨구, 패시브는 프로그맨이야? 어째 생긴 게 비슷하긴 하더라니. 뭐, 됐다. 이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 “조사는 끝이다. 이제 모두 죽여도 된다!” “정말이냐!”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나르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 최초로 발견된 마물을 최초로 처치하는 업적을 차지했다. 다만, 문제는……. 「맥구리를 처치했습니다.」 뭐지, 경험치가 안 들어온 거 같은데? 아무리 7등급 이하래도 이제는 그 감각에 익숙해져서 살짝은 느껴지기 마련인—.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앞을 확인했다. “…정수다!” 이야, 진짜 정수도 나오는 거구나. “……베르실! 얼른 시험관에 담아라!” 서둘러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으로는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프로그맨의 [썩은점액]에 씨웜, 아이언팔콘, 플미나스의 액티브 중 하나가 붙는 건가?’ ……어쩌면 육성 조합 세팅 전체가 바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 한 번의 전투가 끝났다. 전리품은 녹색의 정수 하나. 자세한 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왠지 아이언팔콘의 [철갑깃털]일 거 같다. [철갑깃털]이 녹색 정수였거든. “베르실, 시험관은 몇 개가 남았지?” “스물일곱 개요.” “멜베스에서 지원해 준 건 스무 개 아니었나?” “혹시 몰라서 제가 갖고 있던 것도 전부 다 가져왔거든요.” “그렇군…….” “채취가 끝난 시험관은 어떻게 할까요?” “네가 보관하고 있어라. 한곳에 모아두는 게 정리하기 편할 테니까.” 일단 시험관의 보관 문제부터 해결한 뒤에 나는 서둘러 동료들에게 물었다. “그보다, 다들 느꼈나? 아까 저놈을 처음 잡았을 때…….” “아아, 공적치가 들어오지 않은 것 말인가?” “어? 다들 그랬어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전원이 경험치가 들어오는 걸 느끼지 못한 걸 보니, 일단 경험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건 확실해졌다. ‘여기 층은 컨셉이 특이하네…….’ 키메라처럼 이놈저놈 섞어둔 것 같은 몬스터. 그리고 경험치는 주지 않는다. 그 탓에 왠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만약 이 계층에서 출현하는 몬스터가 전부 다 이런 식이라면 크게 기대했던 신규 스킬은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든다. “……다른 종들의 스킬을 가진 몬스터들이 나오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군.” 어쩌면 정말로 큰 게 올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어쭙잖은 신규 스킬보다 이쪽이 훨씬 더 사기 조합을 만들기에 도움이 되니까.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열렸다 해야 하나? ‘강철거인만 해도… 패시브 없이 액티브만 먹을 수 있으면 무기 제약이 사라질 테고.’ 비슷한 맥락으로 액티브나 패시브, 둘 중 하나는 마음에 들지만 스탯이나 다른 부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최종 트리에 들지 못한 정수들도 많다. ‘근데 그런 패시브 스킬에 [거대화]를 추가할 수 있다면?’ 캐릭터의 고점이 훨씬 더 올라갈 거다. 오크히어로만 봐도 패시브는 그냥 덤이니까. 체력이 떨어질수록 육체 수치가 증가하는 [영웅의 길]은 나쁘지 않은 스킬이지만, 기본적으로 5등급 정수라 성능이 떨어진다. 정수의 기본 스탯도 낮은 편에 속하고. [거대화]와 [합일]의 연계가 아니라면, 더 좋은 스펙의 정수가 널리고 널린 셈인데……. ‘……그런 몬스터가 있으려나?’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번에 만난 놈들만 특별한 것일 뿐. 다른 놈들은 새로운 정수로 무장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아예 새로운 개체를 만나는 것이 이번이 끝일 경우도 가능하다. 하지만……. ‘재밌네.’ [던전앤스톤]을 사랑했던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과연 이 앞에 뭐가 있을까.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풀어지면 안 되겠지. 미지란 기회인 동시에 위기이기도 하니까. “돛을 펼쳐라!” 갑판 위가 정리된 후, 다시 항해를 이어갔다. 이 근방은 아까 보았던 그 전기 개구리들의 서식지인지 계속해서 바닷속에서 놈들이 튀어나와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번엔 ‘왜곡’을 걸고 사냥했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6등급 시공마법 [상위왜곡]을 시전했습니다.」 그야 새로운 몬스터잖아? 부산물 역시 마탑에 비싸게 팔릴 게 분명하다. “저기 비요른!” “심심하면 갑판 청소라도 하고 있어라.” “그게 아니라 할 말이 있다!” “…해봐라.” 그렇게 무탈하게 탐사를 이어가고 있던 때, 아이나르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이놈들 이름은 뭐라 지을 거냐?” “이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몬스터들의 이름은 어떻게 작명된 걸까? “에르웬, 알고 있나?” “어… 글쎄요……?” 의외로 아는 게 없는 에르웬은 역시나 몬스터의 작명 유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마법사이긴 하지만 플레이어 출신인 베르실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라서…….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짓지 않았을까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베르실의 말에 아우옌 옆에서 항해를 보조하던 아멜리아가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나나리.” “……응?” “나나리는 어떻지? 어감도 좋고, 그… 나름… 귀여운 느낌도 나는 거 같은데.” 얘, 진짜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몬스터의 이름을 짓는 거지, 귀여운 이름을 짓는 게 아니다. 에밀리.” “……하지만 발견한 사람의 마음 아니냐.” “그건 그렇지.” 이내 쓱 둘러보니 다들 새로 발견한 몬스터의 이름을 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하긴, 다들 탐험가니까. 앞으로의 탐사에 있어 동기 부여가 될 수도 있겠단 판단이 들어 아예 판을 깔아줬다. “다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라. 후보를 하나씩 한 뒤에 투표로 정하겠다.” “투표라… 공평하군. 나는 나나리로 하겠다. 그리고 나나리에 투표하는 자에겐 1만 스톤을 주지.” “투표를 하랬지, 표를 사라 한 건 아닌데…….” “사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지 않나.” “……마음대로 해라.” 잠시 공정성 이슈가 있기도 했지만, 아멜리아를 시작으로 멤버들도 각자 생각한 이름을 꺼냈다. “울티메썬드라! 어떠냐! 강해보이는 이름이지 않나?” “하지만 7등급도 안 되는 마물인 걸요. 차라리 특징을 따는 건 어떨까요? 씨웜, 아이언팔콘, 플미나스, 프로그맨의 이능을 가진 개체니…….” “개체니……?” “씨팔콘 플로그맨!” “……응?” “씨팔콘 플로그맨이요! 제법 괜찮지 않아요?”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졌지만 의외로 멤버들 사이에서는 호평이었다. “오! 그것도 좋군! 굉장히 강해보이는 이름이다!” “…확실히, 귀에 딱 꽂히기는 하네요. 딱 마물의 모습도 연상이 되고.” “나나리가 더 좋지 않나? 2만 스톤을 주겠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름이 후보로 오르내렸고, 마침내 투표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맥구리가 일곱 표. 씨… 팔콘 플로그맨이 세 표. 나나리가 두 표, 끼루루가 한 표군.” “네? 이상한데요? 어떻게 일곱 명인데 열세 표가 나와요?” “아, 베르실 너는 몰랐나? 우리 클랜 내규에도 적혀 있는데. 클랜 단장의 표는 클랜의 인원 수와 동일하다.” “……민주적인 거랑은 거리가 멀잖아요!” 나는 차갑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민주적? 그게 뭐지?” “아, 그게…….” 그제야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주춤하는 베르실. 그래, 플레이어면 그런 것들도 잘 숨겨야지. 여긴 민주주의 같은 사상이 없는 세상이니까. “자, 그러면 끝났군. 이제부터 저놈들 이름은 맥구리다.” 그렇게 첫 발견된 마물의 이름이 정해졌다. 맥구리. 갈매기 같은 날개에 개구리를 닮은 걸 보고 대충 지은 이름이었지만,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맥구리도 씨팔콘 뭐시기보단 이걸 좋아할 테니. *** “그럼 다들 각자 위치로 가서 일해라!” 이내 해산 명령을 내리자 에르웬은 다시 전망대 위로, 아우옌과 아멜리아는 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베르실은 다시 낚시를 하며 표본 채취. “아이나르, 너는 놀지 말고 갑판 청소나 해라.” “……여기 미샤, 얘도 놀고 있지 않냐!” “미샤는… 다른 할 일이 있다…….” “…으응?” “미샤… 넌 여기 갑판에 서서 마물이 나타나면 상대하는 역할이다.” “우우! 그런 건 나도 할 수 있다. 날 시켜라!!” “쓰읍!” 아무튼, 그렇게 다시금 모두가 제자리에서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한량처럼 돌아다니며 배에 문제는 없는지 관리했다. 그러고 있자니, 베르실에게서 호출이 왔다. “얀델 씨, 잠시 와보실래요?” “뭔가 발견이라도 한 건가?” 얼른 가보니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부유물들에 둘러싸인 베르실이 물건 하나를 건넸다. “방금 건져 올린 그림인데, 어때요? 도시로 돌아가면 제법 비싸게 팔릴 거 같지 않아요?” “…그림?” “네. 바다처럼 보이기는 해도, 종이는 멀쩡해요. 전혀 젖지가 않더라고요.” 확실히… 미궁에서 건져낸 예술품이라면 높은 가치가 붙을 거 같긴 한데……. “한번 봐보지.” 일단 베르실에게 그림을 건네받아서 확인했다. 그리고 돌처럼 굳고 말았다. “…….” 사내와, 아내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는 투박한 스케치의 초상화. “저… 왜 그러세요?” “…….”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고. 이게 왜 여기서 발견되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때는 지금으로부터 수 년도 전. 첫 탐사에서 내가 미궁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렸던, 한스A의 가족 초상화였다. 510화 무덤 (2) 한스 A. 나의 첫 밤친구이자, 이 세계에 눈을 떠 내가 처음으로 죽인 존재. 그 덕분에 나는 미궁 속에서 문명인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에르웬을 만나며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한스라 그런가? 죽어서도 끈질기네.’ 놈의 초상화라니. 루팅 후에 가방 정리를 할 때 가장 먼저 버린 게 바로 이거였는데. 몇 번을 버리고 버려도 돌아오는 저주 받은 인형 같은 건가? “흐음, 미궁에서 버린 물건이라고……?” 뭐야, 아멜리아 얘는 또 언제 왔어.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동료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하면서도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보인다. 탐험가라 다들 귀만 밝아가지고. “…어쩌면 이곳은 미궁에서 사라진 모든 것이 모이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내 베르실이 마법사스럽게 가설을 세웠으나, 사실 내 사연을 들었다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이었다. “오! 신기하군! 그럼 이제 예전에 잃어버렸던 내 신발도 찾을 수 있는 건가? 아끼던 신발이었는데!” “운이 좋다면요.” “잠깐만, 고울랜드. 네 가설대로라면, 저것들은 뭐지? 미궁에서 사라진 옷장이나 탁자 같은 게 저리 많지는 않을 거 같은데.” 아멜리아가 의문점을 제시하자 베르실은 쉬이 답하지 못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게요……? 어째서이려나……?” 미궁의 쓰레기장 역할을 한다는 가설의 모순점. 놀랍게도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내놓은 것은 항해사 아우옌이었다. “저… 대형 선박들에서 나온 가구들일지도 모릅니다.” “대형 선박?” “6층이 처음 개척된 그 시기에는 아공간 마법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탐험가들은 지금 우리들처럼 배를 소환하는 방식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오, 그래서?” “그들은 시작의 섬에서 나무를 캐 6층에서 직접 배를 제작했고, 그 배를 6층에 두고서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항해사가 가장 먼저 배우는 역사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근처 섬들만 다니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쓰고 배를 버리나?” “아뇨. 그 부분은 마법을 사용해 해결했습니다. 아공간 마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예 마법이 없던 것은 아니니까요.” 아우옌도 원리는 자세히 모르지만, 배를 어디에 두든 배가 자동으로 조류를 타고 라이미네 섬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이었다고 한다. “미궁이 폐쇄가 되어도 6층의 시간이 흐른다는 점을 이용한 거군요.” “예. 다만, 그로 인해 도난 사건도 많고, 분쟁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 물론 시작의 섬으로 돌아오는 중에 선박이 난파당하는 일도 잦았다고 하는데—.” “그렇군. 좋은 정보 고맙다.” 신이 나서 떠드는 아우옌에겐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말을 끊었다. 설명이 길어지는 건 괜찮지만, 얘는 항해에 집중해야지. “근데 지금은 키나 잘 잡고 있어라.” “아… 예!” “에르웬, 너도 여기 그만 보고.” “……!” “아이나르, 걸레질이 멈췄군?” 나는 서둘러 주의력이 분산된 인원을 본래 임무로 복귀시켰다. 그도 그럴 게, 바다 위에 장롱이 떠다니든 의자가 떠다니든 알 게 뭔가? 중요한 건 단 하나다. 미궁이 폐쇄되며 사라진 물건들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베르실, 너는 뭔가 떠다니는 게 보이면 계속해서 건져올려라. 보물이 섞여 있을 수 있으니.” “네. 알았어요.” 지금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스 A의 가족 초상화였지만, 앞으로는 또 모른다. 넘버스 아이템이라든지, 상위 소재 장비라든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주인 잃은 보물들은 수없이 많을 테니까. 우리가 아이스록에서 그 많은 장비들을 협곡 아래에 버리고 돌아와야 했던 것처럼. ‘음, 그렇게 생각하면 쓰레기장이 아니라 무덤인가? 온갖 값비싼 부장품들이 가득한.’ 이제 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베르자크가 소환된 상황에서도 비석 앞에서 대기 중인 놈들이 뭐 이리 많나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 만한 일이었구나. ‘신규 몬스터 정수에, 부산물에, 그냥 바다에 떠다니는 보물들까지…….’ 이번에 도시로 돌아가 정산을 끝내면 대체 얼마가 손에 쥐어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전망대 위에 있던 에르웬이 목청껏 외쳤다. “아저씨! 섬이에요! 섬이 나타났어요!” …또 1등급 몬스터인 건 아니겠지? *** 결과만 말하자면, 에르웬이 발견한 것은 정말로 섬이었다. 음, 섬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가? 아무튼, 확실한 건 몬스터는 아니다. “…마치 신전처럼 생겼네요.” 두 개의 원기둥으로 세워진 건축물 하나가 떡하니 물 위에 떠 있다. 일단 배를 타고 섬 주변을 한 번 쫙 돌아봤지만 입구는 정면에 있던 하나뿐. 아쉽게도 내부는 미궁의 그림자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직접 들어가 봐야 한단 건데……. “어떡할 거지?” “어떡하기는. 탐사를 하러 왔으니, 탐사를 해야지.” 이후 주변 수심이 낮았기에 다 함께 보조용 소형 선박으로 옮겨 탄 뒤, 본선을 소환 해제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를 저어 섬으로 직진. “…기묘한 공간이군.” 소형 선박에서 내려 입구에 다가가자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시거리는 약 5m.’ 일단 당장 보이는 것은 아래로 이어진 드넓은 계단이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거대한 무언가가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축된 듯한 높이와 폭. 물론 덕분에 나야 편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거대화] 상태에서도 평범하게 걸을 수 있는 계단이라니? 이건 진짜 귀한데. 쿠웅, 쿠웅, 쿠웅- 혹시 뭔 일이 생겨도 내가 먼저 다 처맞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선두에 서서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엄청나게 깊군.” 적어도 계단 200개는 내려온 거 같은데. 대체 뭐야 여긴? 공간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도 싶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세상에서 현실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할 테니. 쿠웅-! 그래도 계속 내려가다보니 결국 끝이 나오기는 했다. “윽… 먼지 냄새.” 퀘퀘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공간. 가시거리가 짧은 탓에 자세한 지형지물은 확인이 어려웠지만, 머지않아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 누가 스위치를 켠 것처럼 환해지는 장내. 그 변화에 팀 전체가 움찔하며 적을 찾기도 잠시, 곧 모두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지금까지 내려온 깊이만큼이나 높은 위치에 자리한 천장. 그리고 그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거대한 책장들. “뭐죠……? 도서관 같은데…….” 먼저 연상된 것은 도서관이었으나, 일반적인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크기. 책 한 권, 한 권이 양팔을 넓게 벌려야 할 정도로 크다. 그 책들이 수천 권 올려진 책장은 말할 것도 없고. “오! 생각보다 크게 무겁진 않군?” 그래도 책의 무게는 탐험가의 근력이면 문제 없이 들 수 있을 정도였다. “프넬린 씨, 책 좀 펼쳐줄래요?” “아, 물론이다!” 이내 아이나르가 책장에서 꺼낸 책 한 권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펼쳤다. 하지만……. “텅 비어 있네요…….” 뭐야, 이 책들은 그럼 그냥 소품일 뿐인 건가? “베르실, 너는 여기서 책들을 조사하고 있어라. 아이나르 너는 옆에서 베르실을 돕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반드시 지켜내라.” 일단 책장에는 아이나르와 베르실을 남겨두고서 근처를 좀 더 조사해 보았다. 원기둥 형태의 공간. 테두리에는 맞춤 제작된 듯한 곡선의 책장이 빙 둘러져 천장까지 이어져 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군.” 중심부에는 테이블 같은 형태의 석판이 하나. 그리고 우리가 내려온 계단 맞은편 끄트머리엔 책장 사이로 커다란 석문 하나가 자리해 있다. 일단 세세히 조사를 해봤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무. ‘일단 이걸 이용해서 뭔가 하는 곳 같은데…….’ 몬스터나 함정이 있는 거 같지는 않아서 나뉘어 각자 조사를 시켜뒀더니 머지않아 소식이 있었다. “얀델 씨, 뭔가 적혀 있는 책을 찾았어요! 근데 고대어라 와보셔야 할 거 같아요.” 후, 고대어 익힌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네. 서둘러 베르실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책 한 권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한쪽엔 그림이, 한쪽엔 글이 적힌 책. “우선 그림은 9등급 마물인 벽두더지 같은데……. 글은 전혀 읽을 수가 없어서요.” 베르실의 추측대로 그림의 주인은 벽두더지가 맞았다. 그야 옆에 글로 그렇게 쓰여 있었거든. 이름. 서식지. 이능. 그리고 이름의 유래나 이능의 특징, 그리고 개체 고유의 습성 등등. “…마치 도감 같군. 발견한 건 이것뿐인가?” “네. 아무리 넘겨봐도 다른 장은 전부 다 백지예요.” “그렇단 말이지…….” “조금 말투가 미묘하시네요?”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우선 이 책만으로도 대단한 가치가 있다. 아마 역사 덕후인 레이븐이라면 방방 뛰면서 위대한 발견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쪽엔 영 관심이 없어서. 마법사가 아닌 탐험가는 지식보다는 다른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이걸 어떻게 쓴담.’ 이 발견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이런 물건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구를 하기보단 닥치는 대로 시도를 해보고 결과를 찾아내는 게 바로 탐험가 방식의 탐사일 터. “다들 모여봐라.” 그런 이유로 즉시 동료들을 소집했다. “뭔가 알아낸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해볼 만한 게 있는 거 같아서.” “해볼 만한 것?”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런 건 말로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빠를 거다. 애초에 될지 안 될지도 확실하지 않고. 툭. 따라서 베르실이 찾아낸 책을 중심부 석판 위에 올렸다. 그리고 한 3초쯤 흘렀을까? “…네가 틀릴 때도 있군.” 정적 속에서 아멜리아가 입을 연 찰나. 솨아아아아-! 석판이 푸른빛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 그리고 이는 [던전앤스톤]에서 위험한 상황임을 뜻한다. 따라서……. “비요른! 저, 저기! 석문이 열리고 있어……!” 미샤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나가 맨앞에 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전투 준비!” 불호령 같은 외침에 잔뜩 기합이 들어간 태세로 몸을 숙이는 동료들. 그렇게 무거운 긴장감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1초, 2초, 3초……. 이내 4초가 흘렀을 때,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몬스터가 다소곳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찍—] ……벽두더지였다. [찍찍!] 그것도 딱 한 마리. *** 탐사 후 처음 만난 몬스터가 무려 1등급이었던 계층. 그래서 나를 비롯해 모두가 저 석문에서 나올 존재를 경계했다. 하지만……. “벽두더지……?” 9등급 몬스터 한 마리라니. “긴장을 놓지 마라. 뭔가 더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 리더로서 그리 말하면서도 나부터가 맥이 빠지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그 감정이 납득으로 바뀌는 것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식인지 알겠네.’ 책에 적혀 있던 ‘벽두더지’를 석판 위에 올리자 석문에서 ‘벽두더지’가 나타났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에르웬.” 이름을 부른 즉시 에르웬의 화살이 쏘아졌다. 이심전심이라고, 이제 이름만 불러도 내가 뭐라 하려는 건지 이해하는 건가?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 총총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벽두더지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솨아아아아아-! 흩날리는 빛무리와 떨어진 9등급 마석 하나. 초심자의 행운 버프도 터지지 않는 만큼 정수는 나오지 않았다. 나와도 버릴 거지만 아무튼. 드드드드드드드! 마물 처치가 끝난 즉시 석문이 도로 닫혔다. 그리고……. “어! 얀델 씨! 저기요!” 거대한 책장의 두 번째 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생겼다. [던전앤스톤]치고는 직관적인 진행이었다. ‘소환을 계속 해나가면서 위로 올라가라 이거지.’ 다만 계단을 올라가보기 전에 우선 석판 위에 올렸던 책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림이랑 글자가 모두 사라졌네요…….” 한 번 쓴 책은 재활용이 안 된다는 뜻. 고로, 백지가 된 책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린 뒤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계단 없이 위로 올라가서 책을 꺼내면 안 되나?’ 생각이 들었으면 실행하는 게 바바리안의 정신. 이내 큰 키를 이용해 아직 이어지지 않은 3층 책장 난간에 매달린 뒤, 그 위에도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책장에 꽂힌 책은 암만 힘을 줘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올라갈 수는 있어도 책을 꺼낼 순 없다는 거구나.’ 그래도 그냥 끝까지 올라가면 뭐가 나오려나? 문득 궁금해졌지만, 이는 나중에 진행이 막히거나 시간이 남을 때 확인해보기로 했다. 아직은 여기서도 할 게 많으니까. “다들 책을 꺼내서 그림이 그려진 걸 찾아라.” 본격적인 지시가 떨어지자 팀원 전체가 매달려 책장을 뒤지며 책을 펼쳤고, 다 같이 매달리니 몇 분도 지나기 전에 수확이 나왔다. 이번에는 두 개의 몬스터가 그려진 책이었다. 하나는 8등급의 나이트플라. “오! 이 녀석은 나도 알고 있다! 핏빛성채에서 만난 뱀파이어가 쓰던 이능을 갖고 있는 개체 아니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곳에 오며 수없이 만났던 맥구리였다. “…어때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이미 정식 명칭이 있었다니, 괜한 수고를 했군.” 최초로 발견된 몬스터였던 만큼 모두 다 맥구리에 대해 뭐라 적혀 있을지에 대해 궁금한 눈치였는데……. ‘어디 보자, 이름이…….’ 이내 상단에 있는 글자를 읽음과 동시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응? 비요른, 갑자기 왜 그러냐?” 아이나르가 걱정스레 내게 다가왔다. 근처에 있던 베르실도 마찬가지로 물었다. “……얀델 씨? 문제라도 있어요?” 나는 답하지 않으며 “맥구리.” “네?” “이 책에도 이름이 맥구리라고 적혀 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분명 그 이름은 단장님께서 지으신 이름일 텐데…….”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차,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로군요……? 이름이 같다니…….” 내가 가만히 책만 보자 아우옌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이해 못할 관점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납득이 잘 됐다. 하지만……. 이름. 서식지. 이능. 그런 설명을 쭉 지나쳐 이름의 유래 부분에 도착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에 최초로 진입한 탐험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최초로 발견 후 그런 이름을 붙였다.] 아니, 대체 뭔데 이건 또. 511화 무덤 (3)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고작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지은 이름에 대한 정보가 이 책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우리는 이제 막 여기에 도착했는데.” “적힌 내용도 정확하군. 얀델, 혹시 이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글쎄…….” 다만, 애매하게 말하면서도 내심 그러려니 하는 나 자신이 있었다. 은연중에 느낀 것이다.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이 현상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인지했다고 해야 하나? ‘기록석…….’ 태초부터 종말의 역사가 모두 적혔다는 그것. 이 현상은 분명 그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심지어 책에서 볼 수 있었듯, 이 계층의 명칭 또한 ‘기록 보관소’이지 않은가. ‘탐사를 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네…….’ 잠시 넋이 나갔기는 했지만,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이 문제는 차후에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터. “이것도 미궁의 신비 중 하나겠지. 다들 이건 그만 신경 써라. 우리 할 일을 마저 이어가는 게 먼저다.” “그래! 연구하고 조사하는 건 마법사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탐사만 하면 된다!”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하는 아이나르. 나는 피식 웃으며 아까 대충 읽고 지나간 부분을 유심히 읽어내렸다. 이름의 유래 부분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 책 자체는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이 책은 도시와 달리 정확한 수치가 표기됐거든. [민첩성 +8, 번개 내성 +15, 도약력 +30, 영혼력 +20] 상, 중, 하가 아니라 숫자로 적힌 기본 스탯. 또한, 내심 궁금했던 각 정수의 색깔 및 효과도 알 수 있었다. 녹색 정수는 [철갑깃털]. 노랑 정수는 [천둥가시]. 파랑 정수는 [거품방울]. 사실 이 정도면 마탑에서 연구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도 싶지만, 어차피 걔들이야 논문을 써서 이름을 높이려고 돈지랄을 하는 거니까. 이게 알려져도 분명 비싸게 팔리겠지. “자자! 그럼 얼른 다시 해보자!” 알아낼 걸 다 알아낸 후에는 책을 이용해 몬스터 소환을 했다. 「나이트플라를 처치했습니다.」 「맥구리를 처치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걸렸다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끝난 전투. 이전과 마찬가지로 석문이 닫히며 책장의 세 번째 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따라서 다시 책장의 책들을 뽑아내며 내용을 확인했고, 소환용 책이 발견되면 아예 1층 전투 대기조에 던져줘서 얼른 후딱 해치우는 식으로 빠르게 진행을 해나갔다. 「서리늑대를 처치했습니다.」 「아이스 골렘을 처치했습니다.」 「데스나이트를 처치했습니다.」 「바이쿤두스를 처치했습니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했…….」 「…….」 예상대로 윗책장으로 갈수록 책에 적힌 몬스터의 숫자도, 등급도 올라가며 점점 난이도가 상승했다. 사실상 이 정도면 일반 사냥터로도 나쁘지 않은 수준. ‘신종 몬스터는 안 나오네…….’ 애석하게도 크게 기대 중이던 신종 몬스터가 그려진 책은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잡아야 나오는 건가?’ 그런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확증을 내리기엔 표본의 수가 부족하다. 올라가야 할 층계도 한참은 더 남았고.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단순 노동 작업을 반복하며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정말 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사냥만을 했기에 단기간에 층수를 많이 올릴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해 충분한 숫자의 표본이 쌓였다. 그리고 그 통계를 통해 알아낸 걸 정리하자면. 1. 책에서 신종 몬스터는 나오지 않는다. 신종 몬스터 자체가 더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발견’된 개체만 책에 등장하는 것인지는 미지수. 다른 곳을 탐사하며 알아내야 할 문제다. 2. 이곳 도서관은 좋은 사냥터가 아니다. 매우매우매우 좋은 사냥터다. 마석과 정수가 목적이라면 그 어떤 필드보다도 효율이 좋다고 해야 하나? 몬스터가 반드시 석문을 통해 나온다는 것. 대형을 짜고 팀 전투를 펼치기 용이하다. 소환 전에 준비 시간이 가능한 것. 마법을 비롯해 스킬을 미리 시전해 둘 수가 있다. 중반부 이상부턴 한 책에 100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들어가 있었단 것. 이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 안 그래도 대량 사냥에 특화된 필드인데, 한 번 사냥을 마치고서 리젠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사냥을 끝내면 그냥 다시 소환을 하면 그만. 실제로 사흘 동안 마석만으로도 거진 천만 스톤 이상을 벌었으며, 드롭된 정수만 일곱 개였다. 뭐, 여섯 개가 6등급 이하라 그냥 버리고 5등급 하나만 시험관에 담아뒀지만. ‘확실히 사냥만 한다 치면 나쁘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사냥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야 우리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니까. 무려 처음으로 사람의 발이 닿은 지역 아닌가.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사냥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가 있다. ‘대신 문제는……. 우리 수준으로 이걸 끝까지 깨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공략의 진척도로 보면 중반은 확실히 넘었고, 후반부의 초입 정도로 볼 수 있다. 하나 마지막 단계를 클리어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여기서 3등급 몬스터가 나온다는 건, 이 위에는 1등급 몬스터도 있을 거란 소리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쯤에서 도서관 공략은 마무리각을 보는 게 좋을 듯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비요르으으은!!” 멀리 떨어진 책장에 올라가 있던 아이나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새로운 마물이 적힌 책을 발견했다!!” 어, 진짜? *** 아이나르의 외침과 동시에 흩어져서 책을 수집하던 단원들 모두가 한군데로 모였다. 대상이 아이나르였던 만큼 다들 의심 반 기대 반의 눈빛이었으나, 아이나르는 득의양양한 태도로 책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촉수 같은 덩굴로 뒤덮인 전신. 사족보행을 하며 등에는 뼈로 된 날개 비슷한 무언가가 달려 있다. “어때? 너희는 이런 마물을 본 적 있나?” “확실히… 저는 처음 봐요.” “얀델, 너는?” “나도 처음이다.” 일단 신종 몬스터가 맞기는 한 거 같다. 근데 갑자기 이 시기에? “얼른 읽어봐라! 얘는 몇 등급이냐! 딱 봐도 엄청 세 보이는데!” 왠지 모를 얼떨떨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일단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대어를 읽었다. “이름은 텐타쿨란. 서식지는 기록의 바다.” “기록의 강이면, 맥구리가 나오는 그 바다를 말하는 거 아닌가?” “맞는데, 말 끊지 마라.” “아! 미안하다.” “4등급 몬스터고, 분류는 마수형.” “오! 4등급이라니! 이능은? 이능은 뭐냐?” 아니, 자꾸 말 끊지 말라니까……. 후…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닌가? “체화 이능은 같은 4등급 몬스터인 씨머챈트의 [평화주의자], 이능은 가고일의 [악의 소리], 메두사의 [돌의 저주], 리우모비딕의 [수중포효]가 있다고 한다.” “……정말 다른 종류의 이능들이 섞인 마물이 더 있는 거네요. 이 계층에는.” 그래, 이쯤 되면 기정사실이라고 봐야지. 이곳엔 새로운 정수 조합을 가진 신종 몬스터가 출현한다. 그리고……. “도서관에 나오는 마물들은 한 번이라도 발견이 되어야 하는 모양이군.”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정보였다. “엥? 우리가 처음 발견한 게 아닌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의 유래 부분을 적힌 그대로 읽어내렸다. “········탐험가 매더킨 릴그리암스가 지하 1층, 기록 보관소를 탐험하던 중 최초로 발견 후 이름을 붙였다.” “매더킨 릴그리암스라면……. 이곳에 같이 들어온 은사자 클랜의 단장이네요……?” “우리가 없으면 죽니 뭐니 했지만, 알아서 잘 탐험을 하고 있나보군.” 그리 말하는 아멜리아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우리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여기 이름이 적힌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아, 그냥 아직 자기 이름도 안 올라갔는데, 무임승차자 이름이 적힌 게 열받는 건가? ‘……나중에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하면 얘가 이름을 짓게 해줘야지.’ 마물에 대한 정보는 이만하면 됐으니 얼른 다 같이 아래로 내려가 소환부터 했다. [그르르르르르…….] 그림으로 봤던 것보단 훨씬 더 큰 사이즈. 근데 한 가지 의문점은 있다. 촉수만 빼고 보면 늑대처럼 생겼는데, 이런 애가 왜 바다에서 서식하는 거야? 「텐타쿨란을 처치했습니다.」 알 수 없지만 사냥 자체는 무난하게 끝났다. 처음 사냥하는 개체인 만큼 딜로 찍어누르는 식이 아니라 정석적으로 천천히 싸웠지만, 그래도 4등급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쉽네.” 그러고 보면 미샤 얘도 엄청 세졌단 말이지……. 4등급 몬스터를 단칼에 썰어버리고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자, 그럼 잠깐 다들 모여봐라.” 사냥을 마친 후에는 단원을 모두 다 소집해서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의 안건은 단 하나. “계속 이곳에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역을 더 개척해 보는 게 나을지, 각자 의견을 말해줘라.” 다만, 팀원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의미가 있나? 어차피 네가 투표한 쪽으로 결정이 될 텐데.” “그러니까요.” 후… 비기를 너무 일찍 꺼냈나? 다중투표술은 나중에 더 중요한 일에 썼어야 했는데. “걱정 마라. 이번 투표에서 난 기권할 거다.” 이내 딱 잘라 말하자, 투표란 말에 불신 어린 눈빛을 보내던 팀원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흐음, 그렇다면야.” “해볼 만도 하겠네요.” 그제야 정상적으로 투표가 시작됐고, 놀랍게도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도서관 탐사를 끝내고 다른 지역을 탐사하는 것. 사실 내심 예상한 결과이기는 했다. 안 그래도 단순 노가다식 사냥에 불만족스러운 분위기였는데, 이번에 텐타쿨란 사건으로 기름이 뿌려졌으니까. “이곳도 나쁘진 않지만, 경쟁자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은 새로운 마물들을 찾아 이름을 붙여대고 있겠지.” “정수가 나온다면, 마탑에 비싸게 팔 거고요.” 그래, 이래야 탐험가답지. 다만 투표 결과가 나왔음에도 나는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더 이곳에 머물기로 정했다. “…당장 떠나지 않고요?” “어째서지? 괜히 시간을 지체하는 건 너답지 않은데.” 이번에도 독재를 하려는 거냐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는 단원들. 왠지 서운하다. 난 단지 리더로서 효율적으로 행동할 뿐인데. “이제 책에서 3등급 몬스터들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 아니냐. 기왕이면 잡을 수 있는 건 전부 잡고 떠나야지.” 2등급은 조금 무리여도, 3등급 몬스터들은 우리 전력으로 충분히 안정적으로 사냥이 가능하다. “게다가 에밀리, 너만 해도 아직 처치하지 못한 3등급 마물이 꽤 될 텐데?” “그건… 그렇지.” “아이나르, 너도 내가 예전에 말해준 그 정수는 아직 못 구했고.” “……윽!” 아이나르만이 아니다. 에르웬도, 미샤도 3등급 정수 중에는 먹어야 할 정수가 존재한다. 나만 해도 ‘벨라리오스’ 정수를 먹어야 하고. “다들 그럼 동의하는 건가?” “…….”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동의어. 앞으로의 계획이 정해진 만큼,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사냥에 매진했다. 「기계 거인을 처치했습니다 +EXP 7」 「불사조를 처치했습니다 +EXP 7」 「어스빈을 처치했습니다 +EXP 6」 「가르시안을 처치했습니다 +EXP 7」 「어비스 스켈레톤을 처치했…….」 「…….」 중반부에 비하면 전투 난이도가 몇 배는 더 상승하긴 했으나 과실은 달콤했다. 7층 암흑대륙이 전쟁 통인 탓에 아직 잡지 못한 4등급, 3등급 몬스터들을 이번 기회에 거의 절반 이상은 잡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초심자의 행운’이 한 번밖에 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그래도 먹은 게, 어비스 스켈레톤의 정수였다. 잡몹 취급이긴 하지만, 일단은 10층에서나 출현을 하는 바로 그놈. 우리 멤버 중에서는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10층 정수는 값어치가 높은 편이라 괜찮은 수확이었다. ‘그나저나 미궁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놈들은 책에서도 별로 안 나오는 거 같네.’ 대표적으로 벨라리오스가 있다. 얘가 좀 나와줬으면 하는데. 어찌된 게 마지막까지 나오지가 않네. “그만.” 아쉽지만, 이쯤에서 3등급 사냥은 끝마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는 난이도가 더 올라서 3등급 몬스터가 두 마리씩 나오는 상황이니까. 어찌어찌 조합이 괜찮은 건 두 마리가 나와도 사냥이 가능했지만, 전투 피로도가 높아서 휴식 시간이 길어지는 등 효율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다들 책이나 챙겨라. 이제 나갈 거니까.” 하산할 준비를 시작했다. “책을 챙기라니?” “다른 놈들이 이곳에 올 수도 있지 않나. 꼭대기 책장의 책들만 빼가면 우리가 공략한 곳보다 더 위로 가는 건 불가능할 거다. 아래의 소환 책들로 백날 소환해 봤자 계단은 나타나지 않을 테니.” “이 책들 부피에 무게면 탐사 중에 아공간 자리가 부족할 수도 있을 텐데요?” “부족해지면 그때 바다에 그냥 내다 버리면 그만이다.” “뭐? 얀델, 너는 정말…….” “정말?” “똑똑하군. 이런 곳에서는 특히나 더.” 아멜리아를 비롯해 모두 다 내 오더를 듣고는 좋은 생각이라며 반겼다. 단 한 명도 비겁한 짓이라며 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 여기 있는 전부가 탐험가들이었으니까. ‘암, 이 정도면 이 업계에선 정정당당한 경쟁이지.’ 그렇게 일사천리로 필드 자체를 공략 불가 상태로 만든 뒤에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갔다. 쿠웅- 쿠웅- 손쉽게 한 계단씩 오르는 나와 다르게, 점프를 해가며 뒤따르는 동료들. 이내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올라섰을 때였다. “…야, 얀델 남작?” 어째선지 입구에 탐험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것도 무기를 꺼내 든 전투 대형으로. 512화 무덤 (4)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단 습관적으로 숫자부터 세보았다. ‘스물넷.’ 입구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탐험가들의 숫자. 그러니까 얘네가 헥츠 클랜이었지? “미르타네 팀이 저 클랜에 의탁한 거 같네요.” “미르타네?” “전사가 들어오지 못한 5인 팀이요. 거기 팀장 이름이 미르타네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나머지 4인 팀 하나랑 5인 팀 하나는 은사자 클랜에 붙은 건가? 알 수 없지만, 일단 상대 쪽에 말부터 걸었다. 사실 아까부터 기분이 나빴거든. “싸울 건가?” “…예?” 내가 묻자 선두에 서 있던 검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지시를 내렸다. “아… 소리를 듣고 마물인 줄 알아서……. 다들 뭐 하나! 무기를 내려라!” 혹시 PK라도 하려 대기를 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 이내 모두 다 무기를 내리자, 녀석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저… 아래 탐사는 끝나신 겁니까?” “그냥 어느 정도만. 근데 너희는 이제 막 도착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마는…….”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이름이 뭐냐?” “와이트. 와이트 헥츠입니다. 헥츠 클랜의 2대 단장을 역임 중입니다.” “2대 단장?” “1대는 제 부친이셨습니다.” 클랜을 물려받다니, 나름 은수저였구나. 그냥 이쯤에서 서로 갈 길이나 갈까도 싶었지만,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대화를 좀 더 이어갔다. “와이트, 우리가 떠난 뒤로 어떻게 됐나?” “아, 그것 말입니까…….” 보통 이런 질문을 다른 탐험가에게 하면 직접 알아보라든가 그런 대답이 돌아오겠으나, 나에게는 달랐다. 명성도 명성이지만, 일단 이쪽으로 가는 포탈을 연 게 나니까. 암만 너희 알아서 하라며 바위섬에 버려두고 왔어도 호의적인 대응이 이어지는 것. “남작님이시라면 예상하셨겠지만, 자연스럽게 둘로 나뉘었습니다.” 아무튼, 와이트를 통해 들은 이후 이야기는 아주 간단했다. 은사자 클랜과 헥츠 클랜. 이 두 집단은 내가 떠난 뒤에 임시적 협력 관계를 취했다. 지휘부를 통합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니 함께 이동하며 위험할 땐 서로를 돕자는 것. “그럼 중소 팀들은 어떻게 됐지?” “클랜 사이에 낀 것이 불안하게 여겨졌는지, 세 팀이 연합을 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세 집단 간의 협력 관계. 그들은 각자의 배를 타고 바위섬을 떠나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섬을 발견한 후에 생겼습니다.” “그 섬?” 내가 흥미를 보이자, 와이트도 완전 호구는 아닌지 거래를 제안해왔다. “남작님께서 이 아래의 정보를 들려주신다면, 저희 또한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할 테니, 계속 말해봐라.” 딱히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지만, 와이트는 내 구두 약속 하나로 충분하다는 듯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큰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발견 개체가 나왔습니다.” “혹시 텐타쿨란을 말하는 거냐?” “얀델 남작님께서 그 이름을 어떻게……?” “나중에 말해줄 테니, 일단 계속 해봐라.” “……일단 텐타쿨란은 아닙니다. 섬으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그 녀석들과 달리 훨씬 강한 마물이었습니다.” 훨씬 강한 마물이라……. 텐타쿨란이 4등급이었으니, 최소 3등급 이상이란 거네. “좀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하는데.” “어찌어찌 처치하긴 했지만, 놈의 체화 이능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데스로드의 [구원의 안개], 렉타스의 [시체독], 헬스미스의 [지옥불]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놈을 ‘디아몬트’라고 불렀지요.” 디아몬트. 등급은 미상에 첫 발견 당시에는 홀로 다니고 있던 걸 보면 단독형 개체로 보인다. “그래서 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됐지?” “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해 해안가에서 주둔하며 ‘디아몬트’를 계속해서 사냥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의견이 갈렸지요.” “어떤 식으로?” “은사자 클랜에서는 섬 내부로 들어가자는 입장이었고, 저희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해안가에서 한 마리 씩 잡는 것도 제게는 충분히 위험하게 여겨졌으니까요.” 하지만 은사자 클랜은 강경했다. 설득을 통해 의견을 일치시키려 노력하기보다는 각자 갈 길을 가자는 식으로 나왔고, 이에 헥츠 클랜도 두 손을 들었다. “중소 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두 팀은 은사자 클랜에. 여기 미르타네 님의 팀은 저희와 함께하기로 하셨죠.” “섬은 왜 떠났지?” “분명 다른 섬도 있을 거란 판단이었습니다. 우리 수준으로도 안정적인 탐사가 가능한.” 하긴, 초입부터 3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니 차라리 다른 곳을 찾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겠지. 1층에서 봤을 땐 자살 희망자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나름 현실을 아는 친구였다. “그럼 남작님의 얘기도 들을 수 있으련지요?” 이후 정보의 대가로 나 역시 도서관에서 알아낸 정보들을 여럿 말해줬다. 처음엔 기대감에 부풀어 얘기를 듣던 녀석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표정이 미묘해졌다. “말씀대로라면, 저희가 아래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겠군요.” “사냥이 목적이라면 나름 괜찮을 거다. 우리가 쓰지 않은 소환용 책만 해도 한가득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걸 너희가 알아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건… 그렇겠지요.” 이후 와이트는 자기들 항해사를 불러다가 우리 항해사인 아우옌에게 섬의 위치를 공유해주는 것으로 비즈니스는 끝이 났다. 따라서 이제 갈 길을 가려는 찰나. “역시… 남작님께서도 나갈 방법을 찾지는 않으시군요.” 와이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해왔다. “무슨 뜻이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쓸데없는 우려라 생각해주십시오.” “쓸데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말해봐라.” 내가 강경하게 말하자 녀석이 살짝 부끄러운 눈치로 입을 열었다. “단지 이곳의 폐쇄일이 언제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괜한 걱정이 들었을 뿐입니다. 정말 폐쇄일이 되면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 “어쩌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 말입니다.” 후, 뭔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괜히 들었네.’ 거, 듣는 사람 찝찝해지게. *** 솨아아아아아아. 은색의 물살을 가로지르며 배가 나아간다. 목적지는 헥츠 클랜에게서 좌표를 들은 바로 그 섬. “저희 배의 성능이면 약 5시간 뒤에는 도착할 듯싶습니다.” 아우옌은 항해사 전용 스킬들까지 써가며 이동 시간 단축에 나섰고, 단원들 역시 익숙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때의 시각이 오전 2시. ‘이제 11일 차인가…….’ 어느덧 미궁이 열린지도 11일 차가 되었다. 하나 여전히 미궁은 닫히지 않았다. 7일 차부터는 매일매일 신경을 쓰고 있던 부분이지만……. 아까 그 말을 들어서인가? 이번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지금까지는 아직 폐쇄일이 아니란 것에 안도를 했다면, 이제는 어딘가 작은 불안감이 피어난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게,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구나.’ 여기도 미궁인데 때가 되면 폐쇄는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이 생겨난다. 1층부터 10층까지 모든 계층이 가진 공통점이란 통계를 갖고 있음에도, 지하 1층의 유니크한 특징 때문인지 도무지 안심이 안 되는 것인데……. ‘30일 차가 되어서도 폐쇄가 안 되면, 이 문제는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 정리하고 나니 조금은 머리가 가벼워졌다.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그것에 매몰되어 할 일을 못하는 건 주객전도니까. “비요르으은! 그 텐타몬드! 그놈이 나타났다!” “텐타쿨란이겠지.” 이후 시간이 지나자 놈들의 영역에 들어섰는지 맥구리가 아니라 텐타쿨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체 바다 아래에서 뭘 하며 먹고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날치처럼 날아올라 갑판 위에 떨어지는 녀석들. 「텐타쿨란을 처치했습니다.」 「텐타쿨란을 처치했습니다.」 「텐타쿨란을 처치했습니다.」 「텐타쿨란을 처치했…….」 항해를 이어나가는 내내 사냥을 했지만, 정수는 드롭이 되지 않았다.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무려 4등급의 신종 마물인 만큼 분명 정수도 비싸게 팔릴 텐데.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이쪽을 돌아다니면서 정수 파밍을 해보는 거로 하고…….’ 나는 애써 미련을 접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오! 새로운 섬이다!” 육안으로 목적지가 보이게 된 즉시, 우리는 배에서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정박 위치는 절벽 아래에 나 있는 작은 해안가. 여기 말고는 전부 다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배를 댈 수가 없댔지. ‘절벽 옆에 배를 대고서 올라가는 것도 안 될 건 없긴 한데…….’ 뭐, 그럴 바에는 그냥 해안가에 내려서 직접 걸어가는 게 나을 거 같다. 원래 그런 짓은 고인물이 되고 난 다음에나 하는 거니까. 저 해안가는 누가봐도 스타트 위치라고 정해둔 거 같지 않은가. “일단 지형 조사부터 할 테니, 다들 따라오다가 뭔가 발견하면 바로 내게 말해라.” 해안가에 도착한 후에는 주변 지형부터 탐색했다. 당장 근처에 보이는 몬스터는 없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가시거리는 10m 정도.’ 지하 1층의 특징 중 하나였다. 각 필드마다 가시거리가 달라진다. 멀리서는 섬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있었지만, 직접 안으로 들어오니 시야가 턱 막혀 갑갑했다. “아우옌, 너는 따라다니며 지도를 만들어라. 할 수 있겠지?” “예. 맡겨주십시오.” 내가 직접 지도를 만들 수도 있지만, 이 역할은 아우옌에게 일임했다. 직업군상 가장 선두에 서야 하는데, 수첩이랑 펜을 들고 다닐 수는 없잖아? “단장님, 이제 더 탐색할 곳은 없는 듯합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군.” 약 20분에 걸친 해안가 탐색 결과, 해안가를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수십 미터는 되는 절벽을 등반할 게 아니라면, 절벽 사이의 비좁은 틈새를 타고 내륙으로 향하는 게 정석적인 루트로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길이 세 개나 된다는 거겠지. 해안가를 기준으로 정면, 그리고 좌우에 위치한 틈새들. 어딜 택하든 같은 곳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하나를 골라서 가야 한다. “아이나르, 어디로 가는 게 좋을 거 같나?” “당연히 전사라면 직진이다!” 어차피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기에 그냥 아이나르의 의견대로 정면을 택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네.’ [거대화]를 비활성화 했음에도 자꾸만 머리가 부딪치고 어깨가 걸리는 비좁은 틈새. 불편을 감수하고 한 20분쯤 나아가니 출구가 나왔다. ‘후, 이제 좀 살겠네.’ 폐소공포증이 올 지경이었던 나는 최대한 빨리 출구를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빠르게 주변 지형을 확인했다. “…….” 아마존 정글을 연상시키는 열대우림. 무릎까지 오는 수풀들이 지면에는 무성했고, 괴이하게 생긴 나무들은 한국에서 본 그 어떤 나무들보다도 거대했다. 또한……. 뚝. 위에서 뭔가 액체가 떨어졌다. ‘비?’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뺨에 닿아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감각은 내게 있어서 착각할 리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피.’ 이내 고개를 들어 위를 확인했다. “……니미럴.” 처참한 몰골을 한 세 구의 시체가 나무 덩굴에 목이 매달린 채로 늘어져 있었다. “…은사자 클랜의 단원들이에요.” 뒤따라 나온 베르실의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아주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 “…….” 몬스터는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 513화 원주민 (1) 나무에 매달린 시체는 셋. “에르웬, 줄 좀 끊어봐라.” 일단 시체를 바닥에 내려 검시를 해보았다. “상처의 단면이 깔끔하네요.” “자상을 보니 무기는 검. 길이는 한 이 정도 되겠군.” “…그럼, 역시 사람 짓일 가능성이 높네요.” 전문직인 마법사와 암살자는 상처가 병기에 의한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저… 그런데 무기를 쓰는 마물들도 꽤 있지 않습니까?” 비전투직인 항해사가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지만, 이 셋을 죽인 게 몬스터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야 시체는 나무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마물들의 공격성이 이런 식으로 드러난 일은 이제껏 단 한차례도 없었어요. 록로브 씨도 한 번쯤은 보셨을 거 아니에요? 탐험가만 보면 미친 듯이 살의를 보이며 날뛰는 마물들이, 막상 사망한 탐험가에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는걸요.” “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거 같습니다.” 아우옌이 곧바로 납득할 만큼, 베르실의 설명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글쎄요. 은사자 클랜 사이에서 내분이라도 있던 게 아닐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이 배신이라도 저질렀다든가. 일단 마물의 소행은 확실하게 아니니까요.” 베르실의 추론을 100% 정답이라 여길 수만은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습성을 지닌 신종 몬스터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정신 오염.” “…네?” “어쩌면 정신 오염에 당한 걸지도 모르지. 마물은 저런 짓을 하지 않지만, 광기에 빠진 인간은 뭔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이 가능성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리더로서 그 가능성을 무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베르실, ‘평온’ 마법을 걸어라.” “아… 네!” 따라서 일단 기본적인 대비부터 해두었다. 정신 오염 계통에 가장 효과적인 ‘영혼방벽’ 마법만큼은 아니지만, ‘영혼방벽’은 마력 소모가 상당하니까. “평온 마법 정도는 상시 유지가 가능하겠지?” “네. 걱정 마세요.” 오케이, 그럼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추가로 오더를 내리는 거로 하고. 스윽. 나는 고개를 들어 시체들이 매달려 있던 곳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미샤에게 물었다. “미샤.” “으, 응?!” “나무에 걸린 시체들을 처음 봤을 때 무슨 인상을 받았지?” “아, 아… 글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마치 사냥감을 전시해둔 것처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밀리, 너는?” “과시보다는 위협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출구 바로 앞에 보란 듯이 있던 것도 그렇고…….” “여기서 더 들어오지 말라는 식으로 말이지?” “그래.”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그러는 너는 어떤 느낌이었지?” “너랑 같다. 내게도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리 중얼거린 순간,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윽.” “왜 그러냐 미샤?” “아무것도…….” 아무튼, 대화는 이쯤에서 끝. 나는 세 구의 시체에게서 관심을 접었다. 이들을 이런 식으로 해친 것이 누구인가. 몬스터라 하기엔 크나큰 모순이 있고, 사람이라 가정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더 들어가보면 알겠지.’ 어둠 속이 궁금하다면, 들어가라. 미궁에 그런 오랜 격언이 있듯이, 가만히 지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따라서……. “출발한다.” 맵부터 밝힌다는 느낌으로 아우옌에게 지도를 그리도록 하며 정글 속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으억! 나, 나무가 움직인다!!” 마침내 첫 몬스터와 마주했다. 이 섬에 대해 알려준 녀석들이 해안가에서 사냥을 했다는 ‘디아몬트’는 아니었다. “신종 마물이군.” 이름과 등급은 미상. 분류는 필시 식물종일 것이다. 움직이는 나무에 야수종이나 자연종이 붙은 경우는 없으니. 휘이이익-!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넝쿨. 음, 이게 이놈의 평타인가? 쿠웅-! 방패 너머로 전해지는 무게감을 보니, 일단 위력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평타란 걸 감안하면 한 5등급 정도 되려나? 물론 그 정보만으로 안심하기엔 일렀다. 메이지 클래스는 평타가 약한 게 상식이니까. 트드드드드드-! 가을바람에 휘날리듯 가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나뭇잎과 함께 빛 구체들이 떨어져내렸다. 처음엔 아주 작은 크기였던 빛 구체는 빠르게 크기를 키웠고, 바닥에 닿을 쯤에는 처음보다 몇 배는 더 커졌다. 또한, 명확한 형체의 윤곽을 하고 있었다. “씨드리아예요!” 5등급 식물종 몬스터 씨드리아. 크기도 작고 귀여운 소리를 내지만, 명색이 트롤과 동일 등급을 받은 그 마물. [삐익, 삐익, 삐……!] 씨드리아가 소환된 걸 보니 소환계 이능 중 하나인 [성장하는 씨앗]이겠고. 남은 스킬은 뭐려나? 고민하며 소환된 일곱 마리의 씨드리아를 잡고 있자니, 머지않아 다음 스킬도 확인할 수 있었다. 투둑, 투두두두! 투두두두두! 기관총처럼 쏘아지는 마력 구체. 4등급 해양 몬스터 팔푸푸라의 [마력연사]다. 치이이이잇-! 먼지가루 날리듯 뿜어지는 저건 [매혹가루]인 거 같고. ‘전반적인 난이도는 4등급을 턱걸이 하는 정도.’ 더 숨긴 능력이 없나 확인을 해봤지만, 추가 액티브 스킬은 꺼내지 않았다. 솔직히 패시브는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더 질질 끈다고 알 것 같진 않았기에, 그냥 이쯤에서 전투를 끝냈다. 콰앙-! 전력을 다해 망치로 옆구리 부분을 후려친 즉시, 반으로 쪼개지는 거목. “오! 해치웠나?” 한데, 이상하게도 시신이 빛이 되어 사라지지가 않는다. 뭐지? 패시브가 부활 계통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다가가던 때였다. [뀨?] 반으로 쪼개진 나무의 옹이구멍에서 작디 작은 생명체가 쪼르르 나오더니, 우리를 보고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던전 앤 스톤]의 유저로서 감이 빡 왔다. “저게 본체였군. 에르웬, 놓치지 마라!” 서둘러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에르웬이 도망치는 적을 향해 응징을 가했다. 퍼어어엉-! 단어 그대로 쏜살처럼 날아가 폭발하는 불꽃. 「굴다람쥐를 처치했습니다.」 이내 먼지가 가신 자리에 남은 것은 두 개였다. 4등급 언저리로 추정되는 마석. 그리고…….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정수였다. ***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신종 마물 아니냐. 당연히 시험관에 담아간다.” 허락이 떨어지자 베르실은 곧장 시험관을 들고 정수로 향했고,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 녀석의 정수는 생각보다 쓸 일이 없겠군.” “확실히… 체화 이능이 뭔지는 몰라도, 이능 자체는 별로 위력적이지 않았지…….” 아멜리아의 중얼거림에 추가 설명을 덧붙이는 미샤.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탐사 내내 다른 팀원들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던 미샤였으니까. ‘슬슬 적응한 건가?’ 제대로 된 대화는 아니지만, 이전처럼 입을 꾹 닫고만 있지 않단 건 긍정적인 변화였다. 뭐, 괜히 그 말을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 같지만.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뜻이지?” “이런 부류는 자기 이능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기생 개체들은 숙주에 따라 쓸 수 있는 스킬이 달라지는 경우도 꽤 있다. 숙주의 스킬 자체를 강화하든가, 그도 아니면 아예 새로운 스킬이 추가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 녀석은 나중에 도서관에 가서 이능을 한번 확인해봐야겠군.” “이름은 어떡할 거지?” “글쎄, 의미가 있나? 어차피 이미 온 놈들이 이름을 붙였을 거 같은데.” “……그건 혹시 또 모르지. 나나리라고 하겠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가만 지켜보니 이번이 아니어도 결국 언젠가 ‘나나리’라는 이름을 가진 마물이 하나쯤은 탄생할 거 같다. “음… 나나리도 좋기는 한데요. 씨드리아를 소환하는 데다가, 팔푸푸라의 이능을 쓰니. 차라리 씨팔푸라라고 하는 건—.” “그만.” 베르실,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녀석은 나나리다. 정식 명칭이 확인될 때까지 그렇게 부르겠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크흠!” 다행히 아멜리아는 크게 기뻐하는 거 같았다. ‘그럼 이름 문제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나나리(임시)의 정수 채취를 끝낸 후에는 다시 천천히 탐사 대형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참으로 기괴한 섬이군요.” 아우옌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납득할 만큼, 이 섬은 으스스했다. 밀림 지형 자체야 평범했고, 빛이 없어 어두운 거야 탐험가라면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해야 하나? “으… 또 모르고 밟았어요…….” 수풀을 걷다 보면 가끔 가다 밟히는 것이 있다. 마치 진흙을 밟은 듯 물컹거리는 무언가. 수풀을 들춰 아래를 확인해보면 아니나 다를까 어느 몬스터의 어떤 부위인지 알 수 없는 고깃덩이 같은 무언가가 떨어져 있다. “정말 비위가 상해 죽겠어요. 대체 왜 바닥에 이딴 게 있는 건지…….” “그래도 다행이지 않나. 적어도 썩은내는 나지 않으니.” 물론 이는 후각의 얘기일 뿐. 시각적으만 보자면 나조차 조금 괴로울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마물을 한 번에 올려두고 유압 프레스로 짓눌러 버린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왜 저딴 곳에 눈깔이 달려서 튀어나와 있는 건데…….’ 아무튼, 그런 것들이 바닥에, 때로는 나무에 아무렇게나 걸린 채로 우리에게 발견되고 있다. 마치 미친 연금술사가 최종보스로 있는 섬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지도를 만들며 천천히 수색을 해나가던 때였다. “전투 준비!” 어둠 속에서 몬스터가 기습을 해왔다. 미리 들어 정보를 알고 있던 몬스터 ‘디아몬트.’ 「디아몬트를 처치했습니다.」 전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조사를 위해 약 40분 간 전투를 빙자한 실험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디아몬트의 체화 이능. 패시브 스킬을 알아낼 수 있었다. [부정한 자]. 정수 최대치가 1개 줄어드는 대신, 모든 액티브 스킬의 성능이 1.5배 상승하는 바로 그 스킬. ‘액티브가 전부 3등급이라서 기대했는데.’ 설마 패시브는 5등급일 줄이야. 조금 김이 빠진다. ‘좋은 패시브가 붙었으면 졸업 정수로 쓰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도 그럴 게, 딴 스킬은 몰라도 [지옥불]은 졸업 정수 성능을 내는 스킬이다. 원주인의 패시브랑 스탯이 구려서 그렇지. ‘새 조합이 나오는 건 좋은데, 맞는 조합을 찾는 게 진짜 어렵긴 하겠—.’ “아저씨!” 그때 에르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투가 끝나고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벌써 또 몬스터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킨 찰나.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중요한 추가 정보가 이어진다. “사람?” “숫자는 넷.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빠르게 내달리는 중인데…….” “이쪽으로 오지는 않고 있다. 어쩔 거지?” 어쩌기는. “가보자. 안 그래도 뭔 일이 있었나 궁금했는데. 우리보다 먼저 이 섬에 온 놈들이니 아는 것도 많겠지.” 모두 노련한 탐험가들인 만큼, 우리는 순식간에 자리를 정리하고서 주파 대형을 갖추었다. 그리고 에르웬을 앞장 세운 채 신속하게 이동. “곧 마주칠 거예요!” 이내 에르웬이 정지하고서 머지않아 수풀 너머로 탐험가들이 모습을 보였다. “어……!”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채 달리던 그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얀델… 남작……?” 당황, 경계, 놀람, 반가움, 희망……. 찰나 동안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감정의 편린. 다만, 슬슬 정신이 들었을까? “사, 살았다!” “…구해주십시오!”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기를 내던지며 달려드는 탐험가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아니, 기쁜 건 알겠는데 할 건 해야지. “무엇에 쫓기고 있었지?” “아… 아아……. 괴, 괴물입니다! 이 섬에 사는……!” “쫓아오고 있는 중인가? 달리 기척이 느껴지진 않는데.” “아, 아뇨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뛴 거지?” “…노, 놈들의 마을에 붙잡혀 있다가 겨우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추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렇군.” 일단 당장 확인해야 할 정보는 끝났기에, 강하게 잡았던 어깨를 놓아줬다. “마물은 없는 듯하지만, 경계는 늦추지 마라.”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기에 전투태세에서 경계태세로 상황을 격하. 그다음엔 마주한 탐험가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고 다 마시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사실 아까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거든. “진정됐으면, 이제 말해봐라. 마을이라니?” “마, 말 그대로입니다. 이 섬에서 사는 괴물들의 마을인데…….” “군락지가 있다는 뜻인가?” “그, 그것과는 다릅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얼을 타는 탐험가. 그를 대신해 옆에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남작님, 그 괴물들은 일반적인 마물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무엇이?” “우선 그놈들은 확실한 언어 체계를 갖고서 소통을 했습니다. 마법사가 말하길, 고대어를 쓰는 거 같다고 했습니다만……. 아,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닙니다.” 이내 여자가 고개를 도리질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가 붙잡혀 간 마을은 정말로 거대했습니다. 수많은 괴물이 살아가는 집이 있었고……. 거리엔 아이,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 “마치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원주민처럼 말입니다.” 원주민이라…….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514화 원주민 (2) 어느 세상이든 전설 같은 이야기는 있다. 라프도니아 또한 마찬가지다. 미궁을 탐험하던 어느 누군가가 미궁 속에서 대화가 통하는 미지의 존재에게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잡아먹히기 전에 도망친다든가. 그런 형태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탐험가들 사이에서 설화처럼 존재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사실로 판명난 적은 없지만. “탐험가면 언젠가 한 번은 해봤을 상상이네요.” 에르웬의 냉소적인 말처럼, 탐험가들은 대부분 한 번은 생각해본다. 이 온갖 비밀로 가득찬 미궁 속에 대화가 통하는 이성적인 존재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재미있군… 아주 흥미로워…….” 에르웬과 달리 아멜리아는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빛냈다. “입구에 있던 시체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것도 그 ‘괴물’들이 한 짓인가?” 아멜리아의 질문을 받은 여자 탐험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입구에 있던 시체… 라니요?” “모르는 건가? 세 명이었는데.” 이내 아멜리아가 생김새를 말해주자, 여자 탐험가가 몸을 움찔했다. “맥홀딘, 프린턴, 릭……. 첫 습격에서 납치됐던 세 명이에요……. 붙잡혀간 마을에서 보이지 않던데, 설마 그리 되었을 줄이야…….” “첫 습격이라……. 처음부터 말해봐라. 세세하게 말해도 좋으니 단 하나도 빠짐없이. 헥츠 클랜과 나누어진 그다음부터.” “예……? 여러분이 그 일은 어떻게…….” “이 섬에 대해 알려준 게 그들이었다.” “…그렇군요.” 그때 그들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여자 탐험가는 작은 목소리로 그리 읊조리고서 말을 이었다. “헥츠 클랜과 나뉜 이후로 저희들은 섬 안쪽을 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발견된 지역. 그리고 그 지역에서 출현하는 신종 마물. 정보가 없던 만큼 전투는 까다롭고, 위험한 상황도 여럿 있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의욕이 가득한 상태였다. “텐타쿨란, 디아몬트, 굴다람쥐, 파파고나스. 바일론타… 마주친 신종 마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있자면 마치 역사 속에서나 나오는 대모험을 하는 것만 같았죠.” 파파고나스, 바일론타. 아직 우리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마물이다. 다만, 이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이따가 묻는 거로 하고……. “섬의 중앙을 목표로 나아가던 때,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했어요.” 중심부 쪽으로 이어진 발자국이었다. 족적은 사람의 것보다 두 배는 컸으며 여럿이 움직인 듯 숫자도 많았다. 하지만……. “형태는 제각각 달랐죠. 그리고 평평했어요. 마치 신발이라도 신은 것처럼…….” 흔적을 발견한 그들은 신종 마물이 분명하다며 신이 나서 흔적을 따라갔다. 안 그래도 무성하던 숲은 울창해졌다. 그리고 가끔씩 보이던 마물이 아예 싹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그때 첫 습격이 있었어요.” 매복해 있던 괴물들이 사방에서 덮쳐왔고,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셋이 납치당했다. 그중에는 클랜장의 연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은사자 클랜은 눈이 돌아가서 놈들을 추격했고, 그렇게 더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어요. 두 번째, 세 번째 전투가 이어지며 많은 이가 죽었죠.” 가장 큰 문제는 그런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괴물을 단 한 마리도 잡아내지 못했단 것이다. “왜 그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똑똑했어요.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을 했고, 전략적으로 움직였죠.” 이를 깨달은 은사자 클랜은 뒤돌아 도망쳤다. 연인이 납치당한 단장이야 노발대발 난리를 쳤으나, 돌아가 얀델 남작을 찾아 도움을 구하자는 설득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돌아가는 길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더라고요. 분명 우리는 왔던 길로 되돌아 간 건데. 올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 함정에 빠진 그들은 전원이 사로잡혔고, 눈이 가려진 채로 그들의 마을로 붙잡혀갔다. “근데 너희는 어떻게 빠져나왔지?” “그게… 괴물 중 하나가 몰래 찾아와 저희를 풀어줬습니다…….” “풀어줬다고……?”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 다른 괴물에 비하면 굉장히 작은 녀석이었다고 한다. 이들 말로는 아이인 거 같다고 하는데……. “친했나?” “아뇨. 말도 안 통하는데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풀어줬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괴물이 저희가 갇힌 감옥에 와서 하루 종일 쳐다보고 뭐라 말도 걸고 하긴 했는데, 그게 전부예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주억이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동정심인가 보군.” 그 말에 에르웬도 옳다구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제 동생도 그랬죠. 한창 축제 준비 중이던 시기였는데, 신기하다며 매일 축사에 들르더니 전날에 모두 풀어줘버렸어요.” 두 사람의 말에 탐험가들의 표정이 굳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본인들도 내심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들이 철창 속 동물 취급을 받았기에, 어린아이의 동정심으로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단 걸. “하하…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그들의 이야기. 그다음에는 그 ‘괴물’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생김새는 어떤지, 어느 정도나 강한지. 마을에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등등. 사전에 알아낼 수 있을 정보를 최대한 얻어냈고, 어느 정도 판단을 끝마쳤다. “이 정도면 탐사를 더 이어나가도 되겠군.” 마을의 규모를 생각하면 일곱으로 턱도 없지만, 이들이 말한 괴물은 개체별로 편차가 컸다. 마치 사람으로 이뤄진 사회처럼. 구성원 전원이 전사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놈들이 이곳 지리에 익숙한 만큼 지리적 이점이 놈들에게 있다는 건데……. 뭐, 불리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면 그만이지. “자, 안내해라. 마을이 있는 곳으로.” “……저, 정말 가시려는 겁니까?” “탐험을 하러 왔으니, 탐험을 해야지.” “…….” 그리 말하며 어깨를 툭툭 치자 탐험가들이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남작님께서 직접 가시는 건…….” “예! 저희들이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겁니다!” 그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하지만……. “배는 있나?” “예! 여기 뮤르톤이 배의 소환 각인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알았다. 이제 가라.” “……예?” “뭐가 문제냐? 해안가까지 살아서 도착하고, 배를 타고 그 바위섬까지 돌아갈 자신이 있다면, 가는 게 옳지.” 참고로 여기까지 오며 만난 몬스터들의 평균 등급은 3에서 4. 다행히 서로 탐험가인 만큼 말이 잘 통했다. “……마을이 있던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잘 됐군.” 왠지 인연이 길어질 듯했기에 통성명도 했다. 마리나, 첸, 크리안, 데니스. 창잡이 데니스는 중소 팀의 일원이었고, 나머지 셋은 은사자 클랜의 멤버였다. 뭐, 사실상 클랜은 이미 해체된 듯하지만. “얀델, 지금부터는 내가 앞장을 서겠다.” 어쩌다 보니 이동 진형도 조금 손을 대게 됐다. “에밀리, 네가?” “숲에 함정이 있다고 했지 않나.”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내가 앞장을 서야—.” “얀델, 너는 우리들의 리더다. 만약 네가 다치거나 잡혀가면 누가 우리를 이끌 수 있지?” 아멜리아는 그런 논리를 대며 선두에 나섰다. 자신이라면 함정을 더 잘 발견할 테니 너무 걱정말라던가? 실제로 아멜리아는 선두에서 함정을 미리미리 발견하며 팀을 이끌었다. 탱커로서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보호받는 기분도…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튼, 그렇게 약 2시간쯤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 여기입니다. 분명 여기 나무 아래에… 응?” 그들이 기어서 올라 나왔다는 나무뿌리 아래엔 지하로 이어진 길목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모, 모르겠습니다.” “잘못 찾아온 건가?” “아뇨! 그럴 리 없습니다. 아까 남작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근처에서 제가 흘린 신발을 찾았던 것!”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한데……. 혹여 다른 나무를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전부 다 확인했지만, 입구는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입구가 열렸다 닫혔다 하는 식인가?’ 자세한 원리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아래에 마을이 숨겨져 있다는 건 분명했다. 스으윽. 이렇게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제가 왼쪽을 맡을게요.” “그럼 내가 오른쪽을 맡지.” 발견 즉시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도주로를 차단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목표물을 제압했다. 파란 피부와 커다란 눈깔. 높이 솟은 송곳니와 외계인처럼 삐죽하게 뒤로 튀어나온 정수리. [키야아아아악-!] 제압당한 괴물은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며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조용히.” 소란을 우려한 아멜리아가 목에 단검을 들이민 순간. 괴물이 반항을 끝내고 천천히 나를 올려다봤다. [사, 살려주세요…….] 고대어였다. *** 고대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조금은 어눌한 느낌이긴 하지만. [너인가? 여기 네 명을 풀어줬다는 꼬마가.] 고대어로 말을 걸자, 제압당한 괴물이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거, 살려달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대답, 하지 않을 건가?] [마, 맞아요… 내가 풀어줬어요. 저들 네 명.] [이유는?] [불쌍… 하니까…….] 그 말을 듣자 뭔가 흔한 클리셰가 떠올랐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마음씨 착한 아이가 실수로 호의를 베풀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거. “얀델, 이놈이 뭐라고 하는 거지?” “저들 네 명을 풀어준 게 자기고, 이유는 불쌍해서였다고 하는군.” 아멜리아에게 한 말이었으나, 옆에서 내 말을 들은 사인방은 이번에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저주받은 마물 따위가 감히…….” “남작님… 전해주시겠어요? 그래봐야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우리 동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놓고 고마워할 줄 알았냐고.” 물론 통역은 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미궁에서 최초로 발견된, 대화가 통하는 개체 아닌가. 최대한 부드럽게 대해서 정보를 빨아내야지. [저들이… 뭐라고 하는 거죠?]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는군.] [그런… 가요…….] 의외로 괴물 꼬마는 내 말에 쉽게 수긍했다. 아무래도 생김새와 언어가 다르다 보니,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감정을 읽어내는 건 어려운 모양. 한데 어딜 가도 애들은 다 똑같은 건지, 꼬마 괴물은 이 상황에서도 호기심을 내비쳤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의 말을 할 수 있죠? 마물인 주제에?] [마물……?] 당돌한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인류로서 가만히 듣고 넘어가기 어려운 말이었다. [왜 우리가 마물이지?] [그야… 우리와 생김새가 다르니까요. 무, 물론 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이게 그건가? 소인국의 나라에 가면 평범한 사람도 거인이 된다는. [좋아, 그럼 우리가 마물이라고 치면 너희는 뭐지?] 내가 피식 웃으며 묻자, 꼬마 괴물은 당연한 상식을 말하는 것처럼 고민없이 답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철학적인 대화가 돼버렸다. 515화 원주민 (3) 괴물이 본인이 인간이라 주장하고, 역으로 우리를 마물이라 칭하는 골 때리는 상황. “재밌네.” “재밌다니? 얘가 뭐라고 했기에 그러는 거냐?” “우리가 마물이고, 본인이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 아주 멍청한 괴물이로군?” 명쾌하게 웃으며 넘어간 아이나르와 달리 함께 얘기를 들은 이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뉘었다. 나처럼 재미있다는 반응. 호기심. 그도 아니면 약간의 짜증. 의외로 마법사인 베르실은 별 반응이 없었다. 플레이어 출신이라 그런가? 레이븐이 있었으면 눈이 돌아갔을 거 같은데. 당장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물어보라고 하면서. [다들…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꼬마 괴물이 내게 물었다. 이제 보니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 [네가 인간이라 한 것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의견을 나눌 게 있나요?] [그건 그렇지.] [당신들은 누구죠?] 본질을 묻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인간도, 바바리안도, 요정도, 수인도 모두 통틀어 일컫는 게 가능한 단어가 있었다. [우리는 탐험가다.] [탐험, 가……?] [왜? 처음 듣는 단어인가?] 꼬마 괴물이 오른손을 들어 검지만 아래로 내렸다. 이쪽 문화에서는 저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같은 제스처인 듯하다. [탐험가… 탐험이 뭐죠?] [미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마물을 잡아 죽이는 사람을 뜻한다.] [……역시 당신들은 섬 밖에서 온 거군요.] [그래.] 그리 말하며 검지를 아래로 내리자, 꼬마 괴물도 두 번 검지를 까딱였다. 뭐야, 이거 왠지 재밌네. “아무래도 좀 더 길게 대화를 할 거 같은데, 다들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라.” “알겠다.” 일단 진형을 경계태세로 바꾼 뒤 원만한 대화를 위해 호감도 작업부터 시작했다. [먹을 테냐?] [그게 뭐죠?] [육포라고, 고기를 말려둔 거다.] [그걸 물은 게 아니었어요.] [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놈이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먹는다는 게… 뭐죠?]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장난을 칠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일단 설명을 해줬다. [먹는다는 건, 음식을 이로 씹어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는 걸 뜻한다.] 바로 이렇게.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서 삼키자 꼬마 괴물이 질색했다. […윽. 이상해요. 이빨은 적을 죽이기 위한 기관일 뿐인데…….] [그럼 너희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단 뜻이냐?] [당연하죠! 어떻게 그런 걸… 모, 몸 안에 집어넣어요?!] 아니, 그런 생김새로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가, 가끔 싸우다보면 모르고 삼키는 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좀 신기하네. 아니, 이 부분은 몬스터랑 똑같다고 해야 하나? [그럼 너희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살 수 있다는 거군?] [물론이죠. 생명수만 충분히 마실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은 죽지 않아요.] [생명수……?] 내가 의문을 내비치자 녀석이 매고 있던 가방에서 도자기로 된 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꿀꺽꿀꺽 삼켰다. [이게 생명수예요.] [혹시 조금 줄 수 있나?] […………네.] 절대 주기 싫은 눈치였으나, 본인이 붙잡힌 상황이란 자각은 있었는지 녀석이 병을 내밀었다. 오케이, 그럼 표본은 확보했고. “베르실, 이게 뭔지 알겠나?” “잠시만요……. 마력 밀도가 굉장히 높은데…….” 혹시나 하고 건넨 것이지만, 의외로 베르실은 단숨에 정체를 알아냈다. “이거… 아무래도 마석을 갈아서 물에 탄 거 같은데요?” “…마석을?” “네. 일반적으로 도시에서 쓰이는 마력수도 그렇게 만드는데, 그거랑 완전히 똑같아요.” 마력수는 이것저것 마도구를 제작할 때 거의 필수로 들어가는 소재였다. 근데 이걸 주식으로 삼는다라……. [이봐, 혹시 생명수라는 게 마물을 잡고 얻은 마석… 아니, 돌로 만드는 거냐?] [네… 그런데요? 그리고 전 ‘이봐’가 아니에요. 제 이름은 마루피치치라고요.] [알았다. 마루피치치.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이상한 이름.] 마루피치치……. 그러니까 줄여서 마루는 그리 말하면서도 수줍게(?) 검지를 앞으로 내밀었고, 나도 눈치껏 검지를 내밀어 부딪쳤다. “지금… 저 괴물이랑 뭘 하고 있는 거지?” “모른다. 악수인 거 같기는 한데.” “정보는 어디까지 알아냈지? 마을의 위치에 대해서는 캐냈나?” 아, 그거……. 진작했어야 하는데 뭔가 재밌어서 쓸데없는 얘기만 한참 했네. “안 그래도 계속 캐묻는 중이다.” “그런가……. 하긴, 암만 어린애라도 그런 기밀 정보를 적에게 쉽게 노출하진 않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알았다.” 이쯤에서 나도 개인적인 호기심을 접고서, 중요한 정보부터 확인해 나갔다. [마루피치치, 너희 마을로 가는 입구는 어디에 있나?] 아멜리아의 우려와 달리, 붙잡힌 포로를 제 손으로 탈출시켜 줄 만큼 착해빠진 마루는 묵비권 행사 같은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원하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없어요. 지금은…….] [응?] [어른들이 열어줄 때까지, 아무도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요……. 저, 저도 포함해서…….] 하, 어쩐지 혼자 수풀에 숨어 있더라니. [마을 입구를 닫는 게 일반적인 경우냐?] [아뇨……. 우기 때를 제하면 거의 닫지 않아요.] 우기라면… 여긴 비도 내리는 건가? 하긴… 지하에 있는 마을이면 비가 많이 내렸을 때 문제가 생기겠네. [근데 왜 지금은 입구가 닫혔지?] [그건…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너 때문에?] [네. 어른들은 붙잡아온 마물들이 도망친 줄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그러면 추격조를 짜야지 왜 마을 입구를 닫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탐험가들이 마을 밖으로 탈출한 줄 모를 테니까. 마을 내에 숨어 있다고 판단하고서, 일단 봉쇄를 해두고서 수색을 시작했겠지. ‘얘네가 탈출하고 이제 네 시간쯤 됐으니, 이제 슬슬 놈들도 사건의 전말을 깨닫고 나올 거 같기는 한데…….’ 일단 알아낸 사실들을 동료들에게 공유했다. 그리고 투표를 시작했다. “주제는 ‘대화가 통하며,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마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이고,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다.” “두 개?” 아멜리아의 질문에 나는 검지를 위아래로 까딱이며 답했다. “친구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전부 죽여버리거나.” 어느 쪽이든 탐험가스러운 선택이 되리라. *** “친구… 라고요? 마물이랑?” 몇몇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머지는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의문을 갖는 모습이었고. “그보다 왜 친구가 되려고 하는 거지?” “이곳에서 살던 놈들인 만큼 아는 것도 많을 테니까.” “그건 그냥 저 괴물에게 물어보면 안 되나?” 글쎄, 이 꼬맹이가 알면 얼마나 많이 알겠어? 결국 수준 높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른 괴물들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다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어른 괴물을 붙잡아서 심문을 하면 그만이다.” “그건 그런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놈이야 어려서 술술 불었지만, 놈들은 아닐 수도 있으니.” “날… 못 믿는 거냐?” “그럴 리가. 단지, 꼭 극단적인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아직 놈들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니까. 근데… 얼마 전에는 함부로 죽이지 말자니 뭐니 하지 않았었나?” “그건 사람일 때의 이야기고.” “아.” “……됐고, 친구가 되는 게 실패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지?” 아멜리아가 거두절미하고 물었고, 나 역시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애초에 선택지가 두 개였지 않은가. A가 안 되면 당연히 B로 가야지. “전부 죽인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친구가 되자는 쪽이다.” “의외군?” “나도 이들에 대해선 조금 흥미가 있으니까.” 아무튼, 아멜리아를 시작으로 투표가 이어졌다. 그리고……. “친구가 되자가 셋. 그냥 죽이자가 셋이군.” 어째선지 이번에도 내 선택에 따라서 결과가 정해지게 되었다. 스윽. 나는 고개를 돌려 마루피치치를 보았다. 그리고 막 결정을 내리려는 차. 휘이이이이익-! 언제 어디서든 싸울 준비가 끝나있는 전사의 육신이 위협적인 소음을 캐치했다. 누가, 어디서, 왜. 그런 것을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푸욱-! 상체를 가린 방패 위로 틀어박힌 의문의 화살.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랐다. ‘…이게 박히네.’ 깊게 관통한 것은 아니지만, 방패의 합판을 뚫고 틀어박힌 한 발의 화살. 심지어 보아하니 물리 딜 100%였던 거 같은데. “전투 준비!” 습관처럼 그 단어부터 외치며 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확인했다. 안 그래도 수풀에서 각종 병기로 무장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표는… 이 꼬맹이를 구출하는 건가.’ 아마 활을 쏜 건 빈틈을 벌기 위해서였겠지. 놈들의 의도를 눈치챈 즉시, 방패를 버렸다. 그리고 팔을 뻗어 마루피치치의 뒷덜미를 잡았다. [으악!] 내 새로운 방패였다. [놔, 놔, 놓으라고……!] 방패 주제에 발버둥치며 소리를 꽥꽥 지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능 하나는 확실했다. 타닷. 특수 부대 요원처럼 일제히 등장한 괴물놈들이 내 새 방패를 보고서 주춤했다. [비겁한 놈…….]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가까이 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쏟아내는 극찬. […마, 마우라티티 아저씨!]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구해드리겠습니다.] 이제 보니 다들 이 꼬맹이랑 아는 사이인 거 같다. ‘근데 왜 존칭을 쓰지? 신분이 높나?’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됐다. 나는 새로 획득한 몬스터 실드를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전부 무기를 버려라! 아니면 이 꼬마의 목숨은 없다!] 그런 내 행동을 보며 옆에 있던 아멜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의외군. 넌 친구가 되자는 쪽일 줄 알았는데.” “응? 친구가 되려는 거다만?” 내가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아멜리아가 짧게 반문했다. “…이딴 게?”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이딴 게’라니. “……원래 다들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다.” 우리도 그랬잖아? *** 침묵이 감돈다. [인간말을 했다.] [마물이… 어떻게 우리 말을?] [설마 촌장이 말했던…….] 수십 마리의 괴물들은 쉽사리 무기를 내리지도, 덤벼들지도 못한 채 나를 보았고. 나 역시 전투태세를 유지한 채 기다렸다. 그리고 한 1분쯤 흘렀을까? 터벅, 터벅. 머지않아 수풀 속에서 키가 3.5m는 됨직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커다란 몸만큼이나 큰 활을 어깨에 매고 있었다. 그래, 얘가 그 궁수구나. [네가 우두머리냐?] 먼저 말을 걸자, 활괴물이 역으로 물었다. [마물, 우리 말을 어떻게 쓰는 것이지?] [무기를 버려라. 그럼 말해주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놀랍게도 내 방패였다. [……아, 아버지! 안 돼요! 저는 괜찮으니까……!] 이야… 아빠였어? “봤나? 비요른이 흉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저 마물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다! 하하핫!” …내가 웃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표정 관리를 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나서지 마라. 치치.] [하지만…….] [조용히 하래도!] […….] 아빠의 호통 한 번에 방패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어른들 얘기하는데 애들이 낄 필요는 없지. [마지막으로 말한다. 네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당장 무기를 버리고—.] [마물, 너를 마을에 초대하고 싶다.] [………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너를 마을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혹시 이해가 안 되나? 어려운 어휘는 아니었을 텐데.] 어… 이건 어휘가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이 상황에서 갑자기 초대를 하면 내가 응할 거 같나?] 저 활괴물의 수준을 보니, 이 종족도 방심할 게 못 된다. 숫자는 우리가 명백히 열세고. 고립된 장소에서 뒤통수라도 맞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할 터. 확실하게 안전이 확보되거나 신뢰가 쌓이기 전까지는 턱도 없는 제안이다. [초대를 거절하다니… 야만적이군.] [나무에 시체를 걸어둔 건 인도적이고?] [……마을로 데려간 네 동족들은 모두 무사하다.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 경계심을 버려라.] 그걸 어떻게 믿어? [원한다면 내 아들을 계속 데리고 있어도 좋—.] [거절이다.]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하자 저쪽도 더 떼를 쓰지 않았다. 단지 특이한 요구를 해왔을 뿐. [그럼 잠깐 기다려줄 수는 있겠나? 정말로 아주 잠깐이면 된다.] 이래놓고 지원군을 불러오는 거 아냐? 좀 불안하긴 했지만, 이 제안은 응하기로 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뭔가 저쪽의 적대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말을 할 줄 아는 걸 알고서 왠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단 말이지.’ 그렇게 묘한 대치를 이룬 채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촌장이다…….] [모두 길을 터라.]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사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턱 아래로 하얗게 수염이 난 괴물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왔다. [반갑네. 이름이 뭔가?] 어딘가 굉장히 부드럽게 들리는 말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좋은 이름이군. 뉘아치치! 전사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나라! 이들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스스로를 인간으로 칭하는 이 괴물들의 문화가 어떤진 모르겠지만, 촌장의 명령에 괴물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아, 미안하네. 저들이 알면 좋을 얘기는 아니라 말이지.] [저들……?] 묘하게 들리는 그 단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지만, 촌장은 송곳니가 과하게 튀어나온 주둥이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브륀그리드일세.] [브륀그리드?]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에밀리, 브륀그리드란 이름을 아나?” “대현자의 동료 중 한 명이 그런 이름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아, 그래서 들어봤던 거 같구나. 이내 다시 본래 대화로 돌아와 촌장을 보았다. 촌장이 손을 뻗고 있었다. “경계치 말게. 악수를 하잔 것뿐이니.” “아…….” 나는 멋쩍은 미소를 내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라고 했나?” 지금 촌장은 말하고 있었다. 고대어가 아닌 라프도니아어로. “반갑네 정말로. 필시 자네는 라프도니아에서 온 탐험가겠지?” 뭐야, 이거. “그래, 밖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얘 대체 정체가 뭐야? 516화 원주민 (4)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 마녀의 저주로부터 도시를 수호하는 결계를 치고, 부족한 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궁과 이어진 차원문을 열고서 최초로 미궁에 들어온 위대한 탐험가이자 구원자. 명예의 돌 맨 위에 기록된 위업은 사실상 거의 다 이 아저씨의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는 원시 상태의 미궁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겼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미궁에 숨겨진 무언가… 즉, 히든피스를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라 불렀다.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이 수정동굴의 모든 마물을 무찌르고 숨겨진 지역을 개방했다.] 처음 역사를 배우는 아이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유명인인 만큼, 그의 동료들 역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람 지금 우리 말을 했죠?” “예? 예… 그, 그랬습니다…….” “아니, 그보다… 라프도니아를… 안다고?” 촌장 브륀그리드와의 대화를 엿듣던 동료들이 혼란에 빠졌다. 내가 고대어를 하는 걸 봤던 괴물들처럼. 마물이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 거야? 딱 그런 표정들이며, 사실 거울을 보면 나 역시 크게 다른 얼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브륀그리드일세.] [필시 자네는 라프도니아에서 온 탐험가겠지?] [밖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하나의 무리를 책임져야 하는 자로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이 괴물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실 정리할 것도 없이 딱 떠오른 게 있었다.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내가 그 이름을 내뱉자,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일세.” 니미럴, 진짜라고? 이딴 괴물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요, 용기사 브륀그리드라니……!” “…믿기지가 않는군.” “거짓말 아닐까요? 수천 년 전 사람인데……. 생긴 모습도 그렇고, 아직 살아 있단 것도 그렇고…….” 동료들이 술렁거렸지만, 촌장은 이들의 반응엔 일일이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을 뿐. “그럼 말해주겠나? 밖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촌장 브륀그리드의 나긋나긋한 음성에는 왠지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부터 짚고 넘어갔다. “답하기 전에 먼저 묻지. 이걸 써도 되나?” 초면인 상황에서 서로 뭘 믿고 얘기하겠는가.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어긋난 신뢰’를 꺼냈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로군…….” “그래서 대답은?” “써도 좋네. 오히려 나도 바라는 일이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흔쾌히 승낙하는 모습에 신뢰도가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안 쓰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딸깍. 허락도 받았겠다 즉시 아이템을 발동시켰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우선 잘 되는지 확인부터 하지. 이름을 말해보겠나?”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일세.” “…….” 아이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진실을 얘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저쪽이 말을 할 때마다 아이템이 정지한다. 마치 내가 말을 할 때처럼. “…이게 무슨 일이지?” “잘 모르겠네.”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때, 베르실이 옆으로 다가와 내게 작게 속삭였다. “혹시… 상대가 마물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제법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나조차도 몬스터에게 이 아이템을 써 본 적은 없으니까. 만약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판정이라면, 이런 경우도 가능하다. ‘아니면 나와 비슷한 케이스일 수도 있고 말이지.’ 혹시나 해서 베르실의 도움을 받아 검증 마법도 걸어봤지만,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이건 없이 대화를 나눠야겠군.” 하… 아까운 내 횟수……. “그럼 이제 내 질문에 답해주겠나?” “그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고.” “해보게.” “당신이 정말 대현자의 동료 중 한 명인 거라면,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 이런 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거지?” “그건…….” 이내 촌장이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네.” “…응?” “보통의 어느 날과 다를 게 없는 날이었네. 나는 미궁에 있었고, 때가 되자 미궁이 닫혔지.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긴 것은 요새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네. 이 끔찍한 몰골은 덤이었지.” “……뭐?” “내가 왜 이곳에서 눈을 떴는지. 왜 이런 몸뚱이가 되었는지. 이곳은 어디며 나는 왜 죽지도 않는지.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생각을 해봤지만, 결국 나오는 답은 하나더군.” “…….” “나는 모르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촌장 브륀그리드의 목소리에서는 서운함도, 울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감정이 마모된 거 같달까? “자네 입장에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네마는, 그래도 답변이 되었나?” “일단은.” 답변을 들었으니, 나도 물었던 것에 답변해주는 게 인지상정일 터. “…지금 왕국은 개벽 157년이다.” “개벽……?” “불멸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한지 157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마녀의 저주가 세상을 뒤덮은 뒤로는 수천 년이 넘게 흘렀고.” “수천 년이라… 그렇군.” 의외로 촌장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바람이 전부 빠져나간 풍선과도 같았다. 터질 거 같은 불안도, 바람이 새어나가며 엄한 곳에 튈 거 같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무튼, 그럼 이제 다시 내 차례인가?’ 그런 합의를 본 것은 아니지만, 뭐 이 방식에 대해 불평한 사람은 못 봤으니까. ‘이번엔 이거로 하자.’ 질문 회수가 한정되어 있지 않단 보장이 없기에 신중하게 질문을 골랐다. “너와 모습이 같은 저 괴물들은 정체가 뭐지?” 촌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곳에서 저런 모습으로 눈을 뜬 거라면, 똑같이 생긴 괴물들은 무엇인가. “저들은 나보다 먼저 이 섬에 살아가고 있던 이들일세.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겠군.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저들의 일원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네.” 그의 말이 끝나자 베르실이 움찔하며 뭐라 중얼거리려 했지만, 나는 황급히 막았다. “얀델 씨… 이거 혹시 악—.” “베르실.” “아…….” 그래, 쓸데없이 정보를 줄 필요는 없잖아. 아직 믿을 수 있는 놈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실수를 깨달은 듯 입을 꾹 다문 베르실에게 시선을 한 번 준 뒤 다시 촌장을 보았다. ‘악령.’ 분명 베르실이 방금 내뱉으려던 단어였으리라. 어쩌면 촌장 브륀그리드는 단순히 모습이 바뀐 게 아니라, 이 괴물의 몸뚱이에 빙의한 걸지도 모른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이 세상에 비밀이 오죽 많아야지. “그래서?” “추측하기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네. 다만, 이들은 나와 달리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지. 지능은 높았지만 배움이 없었네. 초기의 그 모습은 야만적인 짐승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지.” “지금은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하던데.” “나는 이들과 달리 더 늙지도, 죽지도 않았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들 사이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지. 나는 그렇게 촌장이 되었고, 이들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고 가르쳤네. 이 섬은 혼자서 살아남기에 가혹한 환경이기 때문일세. 곧 자네도 알게 되겠지만.” “근데 왜 하필 고대어를 가르친 거지?” “이 모습에서는 고대어가 훨씬 더 익히기도 쉽고, 구강 구조에도 알맞기 때문일세.” 뭐,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이들의 종족명을 ‘인간’으로 한 것은 상당한 악취미로 보이지만.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겠나?” “그래.” 나는 순순히 촌장에게 순서를 넘기면서도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간단한 이유였다. ‘거, 바바리안이라고 우습게 보나.’ 거짓말을 할 거면 들키지나 말든가. ***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진짜 그 고대의 영웅 중 한 명이 이 녀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모르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모른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당장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수천 년이라… 그렇군.] 바깥 시간을 몰랐다는 건 개소리다. 그야 이미 탐험가들을 잡아다 마을로 데려갔지 않은가. 그들에게 물어봤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던 이야기다. ‘라프도니아 말을 하는 걸 보면, 대화가 안 통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한데 녀석은 마을을 나서면서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왜 그랬을까. 그 정도 정보야 우리 도움 없이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 전사들이 보인 반응도 이상했다. [마물, 우리 말을 어떻게 쓰는 것이지?] 마을의 아이를 구하려 했던 괴물들이 나를 마을로 초대한 것은, 내가 고대어를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 ‘고대어에… 뭔가 힌트가 있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촌장의 입이 열렸다. “자네는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모른다.” “그럼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왔나?” “명예의 돌에 숨겨진 지역이 개방됐다는 글귀가 적혔고, 탐사 중에 입구를 발견해 1층에서 내려왔다.” 서로 궁금한 게 한가득인 만큼, 나도 촌장도 서로 신속하게 질문을 주고받았다. “이곳을 찾은 탐험가는 왜 죽였지?” “내 의지와는 무관하네. 그들을 발견한 건 마을의 전사들이었으니까. 처음 보는 침입자인 만큼 두렵고 경황이 없었던 것 같더군.” “그렇군. 네 차례다.” “이 섬 밖에는 뭐가 있는가?” “…모르나?” “이곳의 나무들은 물 위에 뜨지 않네.” 그래? 몰랐던 정보다. “궁금증이 풀렸으면 답해주겠나? 저 바다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모른다. 시작했던 바위섬, 그리고 이 섬에서 5시간 정도 거리의 섬 하나가 전부다.”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네.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순식간에 돌아온 순번. 괜히 풀만 건드리는 게 아닐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떠보기로 했다. “왜 마을에 잡아간 탐험가들에게 묻지 않고, 나를 찾아 이곳까지 온 거지?” “사흘 뒤면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일세.” “……우기?” 그러고 보면 꼬마 괴물도 우기니 뭐니 했는데. “그게 뭔 상관이지?” “우기 준비를 하느라 다른 곳에 힘을 쓸 여력이 없었네. 그 일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천천히 잡아온 이들과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었지.” 쉽게 말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뜻. 솔직히 말해 핑계로만 들린다. 더욱 수상해 보이기만 하고. “그 없는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나러 왔다는 뜻이군. 기껏 잡아둔 여러 탐험가들을 제쳐두고.” 의심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묻자, 촌장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는… 상당히 공격적이군?” “탐험가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생명의 은인에게는 좀 더 예의를 차리는 게 좋을 걸세. 내가 우기 준비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온 것은 전부 자네들이 헛되이 죽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니까.” “뭐? 생명의 은인?” 두 귀를 의심하며 말하자, 촌장은 어떠한 감정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 사흘 뒤 다시 이곳에서 만나 얘기하세.” “사흘 뒤……?” 내가 반문했으나 촌장은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마을로 오라고 해도 믿기 어려울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근데 사흘 뒤에 다시 만난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 싶지만……. “되도록 이 섬을 떠나지 말게. 아니, 가급적이면 이곳 근처에 머무는 걸 권장하겠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어쩔 수 없이 마을 입구를 닫아야 하니까. 아, 입구는 열어둘 테니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도록 하고.” “……?” “그때까지 마루피치치는 데리고 있어도 좋네.” 이후 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사들을 이끌고 나무 뿌리 아래에 자리한 샛길을 타고 사라졌고, 의도를 알 수 없던 나는 섣불리 붙잡지도 못하고 지켜만 보았다. “갔네요…….” “얀델, 이제는 어떡할 거지?” 몰라 나도.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는 아주 잠시일 뿐.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아, 해야 할 일은 아주 명백했다. [마루피치치, 우기가 정확히 뭐지?] 우선 꼬마 괴물에게 우기를 포함해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들었고, 그다음에는 섬 중심부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하루, 이틀……. 딸깍. 초침이 넘어가며 약속한 사흘이 된 날. [00 : 00] 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살면서 단 한 번도 목도한 적 없는. [끼륵, 끼륵, 끼르륵!] [그르르르……!] [크와아아아아!!] 몬스터로 이뤄진 비가. 517화 원주민 (5) 미궁의 어둠에 가려졌기에, 얼마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9등급, 8등급, 7등급…….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하위 몬스터들은 바닥에 부딪친 순간 즉사하며 빛이 되어 사라진다. 너무도 기괴한 장면이었다. 콰직- 콰직. 쿠웅-! 분명 피가 튀고, 살점이 튀며 사방에선 짐승들의 고통 어린 비명이 가득할진대. 솨아아아아아-! 이렇게까지 환한 빛을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얀델! 정신 차려라!” 일순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잠시, 나는 신속하게 주변을 살폈다. 쿠웅-! 현재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베르실이 몇 시간에 걸쳐 준비한 결계 너머에 들어와 있었다. 다만, 안전하단 느낌은 전혀 없었다. 콰직-! 마물이 결계 위로 대가리를 처박을 때마다 크게 흔들리며 반투명한 장막 위로 핏물이 흘러내린다. 또한……. 6등급, 5등급……. 저등급 몬스터와 다르게, 슬슬 괴물이라 불러도 무방한 그것들은 몸이 반쯤 작살난 상태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움직인다. 물론 이 경우에는 개체마다 크게 차이가 났다. 등급이 같아도 몸집이 가볍거나, 튼튼하거나, 재생력이 좋거나 하는 등의 특성에 따라 어떤 놈은 반송장이 되었고, 어떤 놈은 멀쩡히 움직였다. 바로 이렇게. [크와아아아아아아아-!!] 누가 몬스터 아니랄까봐, 이 상황에서도 결계 너머의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드는 마물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어… 비요른? 신종 마물인가? 저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섞여 있다. 하나 신종 마물… 이라고 확신하긴 어렵다. 그야 하나의 개체라고 하기엔 하나하나의 개성이 너무 특출났으니까. “섬에 가득하던 그 이상한 시체들의 정체가… 아무래도 저것들이었던 거 같네요.” 베르실의 추측은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도 그럴 게, 과할 정도로 자신의 개성을 가진 개체들은 전부 죽은 다음에도 시체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거든. 문제는 살아남은 놈이 있다는 건데……. “어… 다, 다가온다……!” 몸집이 무려 10m가 넘어서 어깨 위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끔찍한 형체의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몸을 튼다. “저게…….” “뭐죠……?” 긴 대화는 없었으나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다. 쿠웅— 쿠웅— 쿠웅— 종말의 시대에서나 등장할 것만 같은 무언가. 꼬마 괴물 마루피치치도 내 팔에 매달려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이제 그만 보고 마을로 내려가요! 더 있으면 더 강한 마물들이 나타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사실 내 눈치를 보느라 말만 안 했지, 다른 동료들도 이 녀석과 비슷한 심정인 거 같았다. 그야 얼마 전부터 4등급 몬스터도 간간히 보이기 시작한 데다가……. 쿠웅-! 저 멀리서 꼬라만 보던 거인 새끼가 움직이기 시작했거든. 싸워보진 않았지만,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게 오면 베르실의 결계로는 버티지 못하리란걸. “…이만 마을로 내려간다.” 쏟아지는 비 구경은 이쯤 하면 됐다. *** 나무 아래에 있던 커다란 틈새로 들어가자 주변이 확 넓어지며 마침내 마을의 모습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나를 포함해 뒤따라 들어온 모두가 말을 잃었다. “오아아…….” 푹신할 정도로 수분을 머금은 잔디. 태양빛처럼 자연스레 내리쬐는 새하얀 조명. 문명의 존재가 여실히 느껴지는 석조 건물……. “이게… 마물들의 마을……?” “우, 우리 성지도 이 정도는 된다!” 아이나르가 돌연 그런 말을 꺼냈지만, 글쎄… 이 정도면 우리 성지보다 나은 거 같다. 한창 개발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99%가 움막 생활 중이니.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마루피치치에게 들어서 일반적인 지하 도시와는 다르단 걸 알았지만. 이런 광경을 예상하지는 못했기에 충격이 꽤 컸다. 이상한 나라에 간 엘리스라도 된 거 같달까? “왔군.” 우리가 올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입구 앞에 친절히 마중을 나와있는 촌장. “이제 좀 믿겠나?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여전히 남일처럼 말하는 저 말투는 좀 열받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이 녀석이 우리를 구했다. 물론 마루피치치를 통해서 ‘우기’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애초에 ‘우기’가 계층 전체에 발생하는지, 그냥 이 섬에서만 생기는 이벤트인지도 모르고 말이지.’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정말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다.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우린 지금쯤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었을 테니. “그럼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나누지. 우리 마을도 소개를 해주겠네.” 이후 촌장이 먼저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고, 우리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애초에 여기까지 와서 빼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설마… 마물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걱정 마라! 뭔 일이 생기면 내가 다 지켜줄 테니! 그때 보니 그렇게 강한 것 같지도 않더군!” “프넬린 씨! 목소리 좀 낮춰요! 다 들리잖아요. 다른 마물들은 몰라도, 저 사람은 우리 말을 다 이해한다고요……!” “하핫! 촌장은 고대의 영웅 중 하나 아니냐! 상관없을 거다!” “하, 하지만 그래도…….” 베르실이 말꼬리를 흐리며 눈치를 봤지만, 촌장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마을로 향했다. 이 거리에서 못 들은 건 아닐 테고. 그냥 이런 건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에르웬, 그렇게 딱 붙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걸요. 그땐 제가 지켜야죠.” “……마음대로 해라.” 에르웬은 여전히 경계태세를 취한 채 내 옆에 붙었고, 아멜리아는 우리보다 마을 자체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잔 마인드인가도 싶었지만, 내 착각이었다. “확실히 인간들의 도시와는 다른 점이 많군.” “어떤 부분이?” “말 걸지 마라. 길을 외우느라 집중 중이니.” “…길을 외운다고?” “도주를 해야 할 때 지리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와라.” 어……. 즐기는 게 아니었구나. 동료들의 반응을 살피는 건 이만하고서, 나도 내 할 일에 집중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 아저씨는 나하고만 얘기를 하거든. “저곳은 대장간이네. 내가 잘 모르던 분야라 야금술을 지금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까지 꽤 많은 고생을 했지.” “대단하군. 근데 광물은 어디서 얻나?” “바다에서 흘러들어온 것들을 녹이거나, 우기가 끝나면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자원을 수급하네. 우기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건 마물만이 아니니까.” 그래?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아마 아까는 못 봤을 걸세. 사흘은 되어야 그런 것들이 쏟아지니까.” “그렇군.” 나는 이후로도 촌장의 마을 설명을 듣고, 때론 질문을 하면서 정보를 획득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목적지였다. “내 집일세.” “넓긴 하지만… 생각보다 소박하군?” “이곳에서 부와 영광을 쌓아서 어디에 쓰겠나.” 툭툭 던지는 말에서 촌장이 어떤 캐릭터인지가 점점 잡힌다. 어느 면에서는 이백호와 비슷했다. 모든 감정이 마모된 듯 나긋한 말투를 쓰고는 있지만,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독기가 이면에서 느껴진달까. “…붙잡혀 온 탐험가들은 어디 있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나?” “그럴 리가. 들어오게. 모두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실제로 촌장의 집 안에 들어서자 마을로 납치된 은사자 클랜의 탐험가들 일곱 명과 재회할 수 있었다. 많이 죽었다더니, 정말 많이 죽었구나. “…야, 얀델 남작님!”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야윈 은사자 클랜의 단장. 단장은 애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도, 옆에 있던 단원들을 보자 얼른 달려가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마리나……! 감히 우리를 두고 도망치다니!” “아니,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첸! 너도 마찬가지다! 설마 여기에 있는 네 형도 버릴 줄이야! 네가 사람 새끼냐?” “저, 저는 도망친 게 아니라, 구조를 청하러 간 겁니다!” “크리안! 배은망덩한 놈!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오……!” “…….” 단장 녀석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보고 있으면 제법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잡아먹으려는 거야?’ 내가 나서서 정리를 하려는 차, 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하지.” “아, 예… 이런, 실례했습니다. 브륀그리드 님.” 촌장의 한 마디에 신입사원처럼 몸에 각을 세우는 단장. 한데 귀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님이라니?” “어… 남작님께서는 듣지 못했습니까? 여기 계신 이분은 대현자의 동료 중 하나인 용기사—.” “그만. 설명 안 해도 된다. 나도 알고 있으니.” “그, 그렇습니까?” “내가 궁금한 건 다른 부분이다. 네… 부하들이 죽었는데도 꽤나 쾌활해 보여서.” 나답지 않게 돌려 말했지만, 해석하자면 네 부하들을 다 죽인 괴물들의 수장인데 왜 그런 태도냐는 뜻. 다행히 단장놈도 인간이라 잘 알아들었다. “브륀그리드 님의 사정을 이미 전해 들은 데다가. 그건… 사고였으니까요. 오히려 브륀그리드 님께서 저희를 구해줬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심지어 브륀그리드 님께선 제 부하들을 죽인 괴물들에게 징계까지 내렸습니다.” 징계라……. 웃기지도 않네. 동료가 죽었는데 그런 거로 헤실헤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는 부분이 특히나 더.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지.’ 웃음 뒤에 칼을 품었든, 진짜 모자란 놈이든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사람들만 챙기면 되니까. “해후가 끝났으면, 이제 얘기해도 되겠나?” 그런 의미에서 단장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촌장을 응시했다. 이렇게 전부 다 불러 모은 걸 보면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 텐데…….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모두가 침묵한 채 지켜보고 있자 촌장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부탁?” “미리 말하지만 강압적인 부탁은 결코 아니네. 아니,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아주 합리적인 부탁일 거라 자신하네.” 그거야 들어봐야 하는 거고. “말해라.” “자네들이 이곳을 탐험하는 것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자네들 역시 탐험하며 알아낸 것을 모두 내게 말해줬으면 하네.” 촌장 이름을 달고 저리 말하니, 진짜 퀘스트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 탐사 성과의 공유. 촌장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이면 납득할 만한 요구다.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왜 직접 탐험하지 않고 우리에게 부탁을 하는 거지?” “그건—.” “아, 이 섬의 나무가 물 위에 뜨지 않아서라는 말은 하지 마라. 아까 네가 네 입으로 말했지 않나? 하늘이든 바다에서든 자원이 막 흘러 들어온다고.” 실제로 나는 이곳에서 항해하며 옷장, 책상 같은 나무 부유물들을 수없이 보았다. 하면, 이에 대한 촌장의 답변은 어떨까. “말하는 것보단 보는 게 빠르겠군. 혹시 오면서 습득한 나무가 있다면 줘보게. 무엇이든 좋으니.” 촌장은 평소처럼 나긋하게 말했고, 이에 나도 얼른 베르실에게 말해 부유물들을 꺼내게 했다. 그리고……. 스윽. 촌장이 나무로 된 옷장에 손을 댄 순간. 부스스스- 옷장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더니 가루로 화해 흩날렸다. “지금, 뭘 한 거지?” “아무것도. 그저 손을 댔을 뿐이네.” “그런데 왜 옷장이…….” “이 몸뚱이의 체화 이능일세. 나무로 된 모든 것이 손에 닿으면 이렇게 변하지. 두꺼운 장갑을 껴도 결국엔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지고 마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오는데 나무로 된 게 있었던가?’ ……없었다. 건물도 전부 돌이었다. 활잡이들도 모두 뿔과 힘줄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음식을 먹지 않으니 불도 필요가 없을 테고. 바닥에 깔린 잔디는 나무 판정이 아닌 건가? ‘대장간에서도 전부 다 스킬 같은 걸 써서 불을 쏘아대고 있었지……. 장작을 쓰는 게 아니라.’ 그나마 마을과 이어진 입구가 나무 뿌리 사이에 자리했단 것 정도가 유일한 연관점인데……. “혹시나 해서 말하네만. 땅에 뿌리를 내린, 살아있는 나무는 제외라네.” 아, 진짜 구라를 치는지 분간이 안 되네. 그래서 그냥 일단 이것부터 물었다. “그럼 그때는 왜 그걸 말하지 않았지?” “낯선 이에게 혹여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정보를 말해주는 건 미련한 짓이지. 심지어 자네가 우리의 적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나.” “어…….” 음, 그건 확실히 그렇지. “납득했다.” “의외로 이런 쪽에선 납득이 빠르군?” “탐험가니까.” 그 말에 촌장도 납득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도 탐험가였지.” 탐험가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지 않는다. ***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촌장이 준 퀘스트는 전원이 승낙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도 그럴 게,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지원을 해준다는데 무조건 받고 봐야지.’ 상황이 수틀리면 그냥 퀘스트 포기 버튼을 누르고 튀면 그만이다. 튈 수 없는 상황이면 그냥 약속을 지키면 되고. ‘어차피 일주일 뒤까지는 좋든 싫든 이 마을에 있어야 하기도 하고 말이지.’ 촌장의 말에 따르면 ‘우기’는 정확히 7일 동안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촌장은 아예 그 기간 동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비어있는 집들을 내주고, 자유롭게 마을을 돌아다닐 권한도 줬는데……. “후우…….” 지금 내가 혼자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아멜리아와 베르실. 이렇게 둘을 주축으로 해서 전반적인 마을 조사를 시작했거든. 아, 참고로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고대어, 라프도니아어, 한국어, 영어. 무려 네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고급 인력에게는 그에 맞는 임무가 있으니까. 스륵. 바로 책을 읽는 것이다. ‘오랜만에 읽으려니까 빡세네…….’ 촌장 녀석은 내가 시시콜콜 묻는 게 귀찮았는지 아예 자기 서재를 내줬다. 아, 물론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의 저자는 모두 촌장이었다. 책을 집필하는 게 유일한 취미라던가? 나무를 못 쓴단 말이 사실인지, 책도 전부 다 몬스터 가죽을 엮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퍼억— 집중하자, 집중. 조금 강하게 뺨을 치며 정신을 일깨운 나는, 돌로 된 책상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읽고 있던 가죽 책을 다시금 읽어내렸다. [마물 총해록]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와도 인연이 깊은 시리즈와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 촌장이 극히 조심해서 다룰 것을 당부한 책인 만큼 내용이 아주 알찼다. 이 정도면 공략집이 따로 없달까? 촌장은 이 섬에서 깨어난 후로 마주한 마물들과 직접 싸우고 관찰하며 알아낸 모든 것을 이 책에 적어 넣었다. 뭐, 얼마 전에 방문한 도서관의 책들만큼의 퀄리티와 정확도는 아닐 테지만. ‘여기엔 거기서 못 본 몬스터들도 있으니까.’ 지금 하품으로 흘리는 눈물이 미래의 피라고 생각하며 암기를 반복한다. 몸이 피곤해서 잠이 찾아올 뿐. 내용이 워낙 흥미로웠기에 책을 읽는 것 자체는 재미가 있었—. “어?” 얘는 걔인데? 우기가 시작됐을 때 만났던, 바로 그 10m가 넘던 거인. “이름이… 히프라마전트?” 쯧쯧, 네이밍 센스도 참. 고대어로 들으면 그럴듯한데, 해석을 하면 그냥 거대 거인이란 뜻인데……. [우기가 끝난 뒤, 마석을 수거하던 순찰조가 해안가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순찰조에 속해있던 정예 전사 서른 명 중 절반이 사망. 추정 등급은 2.] 2등급이라……. 떡대를 보고 대충 느끼긴 했는데, 보통 놈이 아니었구나. ‘부딪치기 전에 마을로 내려오길 잘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글들을 마저 읽던 때였다. “……어어?” 나는 책을 쥔 그대로 굳었다. [생환한 정예 전사의 증언에 따르면, 전투가 시작된 즉시 한 번 더 몸집이 커졌다고 한다. 기본 체격과 커진 체격의 격차로 보아…….] [히프라마전트가 지닌 이능은 오크히어로의 [거대화]로 추정된다.] ……새 목표가 생겼다. 518화 일대일 (1) 히프라마전트. 촌장이 매긴 추정 등급은 2. 확인된 이능은 셋. 다만 두 개의 이능은 아무래도 좋다. ‘2등급 스탯을 가진 몬스터의 [거대화]……?’ 이걸 어떻게 참아? 지금 중요한 것은 그냥 이능이 아니라 놈이 갖고 있을 체화 이능. 즉, 패시브 스킬이 무엇인가다. 만약 패시브 스킬까지도 내가 쓸만한 것이라면……. ‘오크 히어로 정수를 빼고 먹어도 되겠지.’ 애석하게도 패시브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잡지도 못하고 도망쳤다고 하니까. 패시브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웠겠지. ‘잠이 확 깨네.’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자니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근데… 똑같은 스킬 정수를 두 개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나만 써지나? 아니면 아예 안 먹어져?’ 음, 글쎄… 왠지 전자일 거 같다. 그래도 만약 두 개가 같이 써지면 그것도 엄청 재밌을 거 같기는 한데.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에 부정적인 경우의 수도 정리를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2등급으로 추정되는 놈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정수를 뱉는 놈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이 계층의 특이한 점이었다. 이곳의 마물은 총 두 종류가 있다. 마석과 정수를 뱉는 일반 몬스터와 처치를 해도 시체가 사라지지 않던 몬스터. 그 둘은 서로 마주치면 죽자고 싸운다. 그러한 특징 덕분에 우기가 끝나고 사흘 정도 지나면 개체 수가 확 줄어드는 것이고. ‘온 사방이 마석밭으로 바뀐댔지.’ 그 마석을 주워다가 생명수로 만들어 마시는 게 이 종족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아, 딴생각을 너무 오래 했네.’ 히프라마전트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다시 생각해보는 거로 하고, 당장은 책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설마 신종 몬스터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이제껏 내가 만난 몬스터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우기’ 때 나타난 개체부터 시작해, 파도를 타고 섬까지 흘러들어오는 여러 개체들까지.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다 읽고 나면 전부 다 따로 옮겨 적든가 해야지.’ 그렇게 책상에 앉아 책만 읽어내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요른…….” “미샤? 에밀리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나?” “다 끝나고 돌아온 참이야…….” 그 말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래? 근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너희가 돌아온 줄 알았으면 바로 책 덮고 나갔을 텐데.” “그 여자가… 내버려두라고 했다. 한창 바쁠 테니 방해하지 마라고…….” “에밀리가?” “…응.” 미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혹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읽던 책을 펼친 채로 두고서 즉시 몸을 돌려 대화할 자세를 취했다. 할 말이 있다며 팀원이 혼자 찾아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단 것이니까.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응? 그럼 왜?” “그냥…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눠봤단 생각이 들어서…….” “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 미샤가 씁쓸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유를 묻는구나. 내가 오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쿡 찔리는 느낌이 드는 한편,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날, 동료로 지내자고 한 건 너였지 않나.” 심지어 재회한 후에도 선을 그은 건 미샤였다. 그래서 나도 굳이 선을 넘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기나긴 공백이 생긴 관계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그랬지…….” 툭하고 던진 말에 미샤는 그 말을 끝으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숨이 막혀오는 정적이 잠시간 이어졌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불편한 점은 없나?” 이러한 주제는 여기서 끝내자는 신호. 이에 미샤도 연기톤의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 응……. 조금 신기할 뿐이야…….” 하긴 이해는 된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 스스로를 인간이라 주장하는 마물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마물. 게다가 미궁에 갇힌 대현자의 동료까지. 처음으로 발견된 계층에서 온갖 신비한 일들을 겪고 있으니 신기할 만도—. “다시 이렇게… 너랑 미궁에 들어와 있다는 게.” 아… 그 주제는 끝난 거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단지 너무 신기하고 그래서… 그래서 아직 적응이 잘 안 될 뿐이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으니까…….”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보듯 힐끗하는 미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걱정 안 하니까 걱정 마라.” 미샤가 풋 하고 웃었다. “뭐냐 그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에르웬 때에 비하면 너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암, 그때는 얼마나 섬짓했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멜리아랑도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우면서 티격태격했고. “그러니까 너도 눈치 그만 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원래 다들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니까.” 내친김에 에르웬과 아멜리아와 관련된 썰을 풀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중간에 끊겼다. “실제로 에밀리랑 에르웬도 엄청 싸우다가—.” “근데 저 책은 뭐야?” “어? 아, 이거… 촌장이 적은 책인데, 촌장이 이 섬에서 살아가며 만난 마물들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아, 그래? 다행이네. 앞으로 탐사에 있어 엄청 도움이 될 테니.” 중간에 주제가 바뀌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이 섬에 대해서, 촌장 브륀그리드가 진짜 고대의 영웅일지, 그런 것들에 대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하는 듯한 편한 대화. 이러고 있으니 마치 옛날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얀델, 아직 바쁜가? 슬슬 다 같이 모여서 오늘 조사한 정보들을 공유하고 싶은데.” 아멜리아가 방문을 노크하고 미샤가 가보겠다며 떠날 때까지. ‘어떤 사람한테 네가 배신자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건 뭔 소리야?’ 결국 그 질문은 오늘도 하지 못했다. *** 하루, 이틀, 사흘……. 이 마을에 오고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우리의 일과는 간단했다. 나는 촌장과 대화를 하거나, 촌장이 쓴 책을 읽으며 정보 수집. 아멜리아는 에르웬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설비나 장소가 있는지를 수색. 베르실은 아우옌과 미샤를 데리고 다니며 이들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 조직 관계도, 병력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아이나르는……. “그럼 다녀오겠다!” 이제 막 하교한 초등학생처럼 놀러 다니고 있다. “오늘은 어딜 가나?” “아침엔 이타피아랑 모의 전투. 그다음에는 대장간에 들러서 무기 만드는 걸 보여 주기로 했고. 그다음엔 카구디디와 만나서 지하 창고에 놀러 가기로 했다. 뭐가 있는지 내가 보면 놀랄 거라는데, 기대된다!” 얘는 진짜 그사이에 어떻게 이리도 친구를 많이 사귄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프넬린 씨는… 대단하네요. 생긴 것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데, 그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다니.” “에이, 과찬이다 과찬! 그리고 말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우리 같은 전사들은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그, 그런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세세한 약속을 잡을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건 다 네 진심이 부족해서다! 마법사, 너도 매일 책만 읽지 말고! 한 번은 상대방의 눈을 보며 말에 집중해봐라! 그럼 상대의 진심이 들릴 거다!” “아, 네에…….” 바바리안이 마법사를 훈계하는 기이한 장면. 다만 말도 안 통하는 상태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아이나르만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도 그냥 다른 일을 시키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앗! 늦었군! 그럼 다녀오겠다!” “그래, 사고 치지 말고. 다녀오고 나서는 지하 창고에 뭐가 있었는지 잘 봐뒀다가 꼭 말하고!” “알았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아이나르가 집을 나서고 나면 다른 동료들도 슬슬 밖으로 나가서 자기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면 다 같이 촌장이 제공한 집에서 모여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유한다. “오늘 특이한 장소를 발견했다. 촌장의 집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인데,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근데 곳곳에 경비가 있더군. 들키지 않고 침입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일단은 얀델 네 생각부터 듣고 싶어서.” “무리하지 마라. 적어도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하니까.” “저는 은사자 클랜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안정한 상태예요. 도망친 쪽이랑 버려진 쪽이랑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요.” “우기가 끝난다고 해도 제대로 탐험은 이어가기 어렵겠군. 아우옌, 너는 할 말 없나?” “저, 그게… 예전부터 느꼈습니다마는. 그… 브륀그리드… 말입니다. 말만 촌장이지, 사실 그냥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인 거 같습니다. 이 마을에서.” “왕보다는 거의 신처럼 여겨지던데요. 촌장이 지시를 내리면,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따라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렇게 회의 시간이 끝나면 각자 방으로 돌아가서 취침. 이게 요즘 우리의 루틴이었다. 물론 한 번 정해진 루틴에도 조금씩 변화는 있었다. 우기 4일 차. 촌장이 그간 취미로 썼던 모든 책을 다 읽었고, 슬슬 나도 방에서 나와 마을을 돌아다녔다. 고대어로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적 자원을 놀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혼자 산책을 하듯 돌아다니던 중에 꼬마 괴물 마루피치치와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주민들 대부분은 나와의 대화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이 녀석은 날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같았다. 수다를 떨다가 마을에 도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아세요? 아주 옛날에 이 섬에는 커다란 용이 살았대요!] 커다란 용이라……. 5일 차. 아이나르를 따라서 친구들을 소개받았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나르처럼 친근한 사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나를 어려워했다. 아이나르와는 주먹으로 농담을 할 정도로 격의가 없으면서. 촌장이 뭐라 지시를 내리기라도 했나? 집요하게 몇 번이나 캐물었지만 끝내 그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6일 차. 아침에 은사자 클랜의 단장이 찾아와 탐사에 낄 수 있겠냐 물었고,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후에는 반으로 나뉜 클랜의 다른 쪽 무리가 와서 같은 제안을 했다.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7일 차. 마을 조사를 끝마치고서 집에 틀어박혀 탐사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이 지나면 ‘우기’는 끝. 내일을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자니, 촌장이 우리를 불렀다. 별 얘기는 없었고, 응원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다. 8일 차. 아니, 우기가 아니라 탐사 일자를 기준으로 하면 21일 차. 이제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마을을 벗어나 다시 섬 위로 나왔다. 흉물스러운 시체가 가득한 섬은 아름다웠다. 어디를 보든 마석이 가득하단 점에서 특히나. 만약 30분이 지나 사라진다는 성질이 없었다면, 여기에 정수들도 널리고 깔려 있었겠지. 촌장은 바닥에 떨어진 마석들은 순찰조가 나와 챙길 것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지만, 어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랴. 티가 나지 않을 선에서 최대한 챙겼다. 22일 차. 여전히 섬 전체에 몬스터가 가득했기에 마을을 베이스로 두고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정수 하나를 주웠다.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 정말로 주운 것이었다. 몬스터끼리 싸우다가 나온 것인 듯한데……. 어떤 놈한테 나온 건진 몰라도, 우기가 끝나고도 살아 있는 놈이니 제법 등급이 될 터. 당장 시험관에 챙겨두었다. 중간에 처음으로 마을을 벗어난 은사자 클랜과 만나기도 했다. 표정을 보니 아주 좋지 않았다. 23일 차. 마을에 들러 하루 묵었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섬으로 올라왔다. 참고로 이번에도 은사자 클랜은 마을에 잔류했다. 어제 누구 한 명이 죽었다던가? 섬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는 마을에 있겠다는 모양. 반면 우리는 점점 활동 반경을 늘려갔다. 24일 차. 마을에서도 순찰대를 밖으로 보내서 널리고 깔린 마석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배가 아팠다. 저게 다 얼마야? 25일 차. 섬은 우기 이전,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이 섬에 왔을 때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왔다. 우기가 끝난 날부터 열심히 섬을 수색했지만, 애석하게도 히프라마전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다른 몬스터들이랑 싸우다 죽었나? 촌장에게 물었지만, 의외로 바다를 타고 섬을 떠나는 몬스터들도 꽤 많다는 모양이다. 26일 차. 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기에, 섬을 떠나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27일 차. 날이 저물기 전에 섬을 하나 더 발견했다. 아니, 이걸 섬이라고 해도 되나? 쫙 넓게 펼쳐진 은빛 물결의 바다. 그 위에 떡하니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 넓이만 봐도 괴물 섬보다도 훨씬 더 컸다. 높이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있는 섬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모습인지 모르겠다. 28일 차. 하룻밤을 배 위에서 보내고 나무 섬에 들어섰다. 나무 뿌리 부분에 배를 대고 내리자마자 나무껍질 부분에서 줄기들이 자라나며 몬스터가 나왔다. 촌장의 책에서도 보지 못한 신종 몬스터. 작명 투표 결과, 이름은 나나리로 낙점됐다. 29일 차. 하루 종일 뿌리를 돌아다니던 중 어지간한 동굴보다 큰 옹이구멍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구멍은 아주 깊게 이어져 어디론가 이어져 있는 모양새였다. 설마 이게 길인 건가? 알 수 없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탐사하고 있자니 새로운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 난이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포션을 써서 금방 낫기는 했지만, 아이나르가 한 번 크게 다쳤다. 30일 차. 신중히 탐사를 이어가는 것과 별개로, 미궁이 언제 폐쇄될지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을 해보기 시작했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 이곳의 폐쇄일은 대체 언제일까? 설마 나도 촌장처럼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정말 그렇다면 큰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놈들처럼 마력수를 먹고서 살 수는 없으니까. 이로 씹어 삼킬 수 있는 고기가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식량을 아껴야 하나? 35일 차. 구불구불한 동굴을 타고 오른지 장장 6일 만에 밖과 이어진 출구를 발견했다. 출구를 통해 나온 곳은 뿌리 부분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면 한 종아리쯤 되려나? 정상까지 가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아무튼, 출구라 했지만 사실상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에 가까웠기에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와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날 다른 출구는 찾을 수 없었다. 다들 지쳐 보였기에 이쯤에서 야영지를 꾸리고 나서 먼저 일찍 잠에 들었다. 그리고……. “…….” 깊은 꿈에서 깨어나듯 번쩍 눈을 떴을 때.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어째선지, 나는 내 방에 와 있었다. “아니, 갑자기 여기에 왜 와지는 건데.”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519화 일대일 (2)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힘든 일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 둘, 셋……. 속으로 셋을 센 뒤에 다시 눈을 뜬다. 잠시 시간을 가진 덕분에 정신은 돌아왔지만, 애석하게도 보이는 광경은 여전히 똑같았다. 싱글 사이즈의 침대. 책상에 올려진 컴퓨터. 활짝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거실과 부엌의 공간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한수의 방이다. 그날 알약을 먹은 순간부터 매달 15일 자정마다 커뮤니티가 열리면 오게 됐던 바로 그곳. ‘꿈을 꾸는 중인 건… 아니겠지.’ 불현듯 그런 추측도 들었으나,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안을 모색하는 것일 터. “왜 여기에 와졌을까.” 종이에 메모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듯, 소리내 중얼거리며 고민을 이어간다. 일단 미궁과 도시의 시간은 달랐다. 미궁에서 며칠을 보내든 도시에서 흐르는 시간은 36시간뿐. 그래서 두 달이 넘게 미궁에서 탐사를 하더라도 지금까지는 커뮤니티에 불려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와졌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내려두고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자니, 금방 답이 나왔다.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더라도. 미궁 탐사 중에 커뮤니티가 열린 건 어디 말이 되던가? 말이 안 되는 결과엔 말이 안 되는 원인이 껴 있기 마련. “밖에선…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랬다면, 미궁에서 이 커뮤니티에 입장을 하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니미럴.” 머릿속이 나름 정리되고 나니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대신해 아주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럼 영영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나? 정말 밖에서는 미궁이 정상적으로 닫힌 거라면, 또 내가 죽었다는 식으로 알려졌을 텐데. 이거 뒷수습은 어떻게 해야 하지? “후우…….” 돌겠네 진짜. 가만히 생각만 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기에 우선 컴퓨터 앞으로 가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일단 백호랑 현별이는 들어와 있는 상태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유 게시판을 확인했다. 검색해서 찾을 것도 없이 날 주제로 한 게시물이 한가득이었다. 딸깍.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을 클릭하자 원문이 펼쳐지며 그 아래에 달린 수 많은 댓글이 나타난다. [거인 친구 진짜 죽은 거냐?] 이번에도 왕가랑 뭐 짜고서 죽은 척하고 있는 거 아니지? [BurtusMaximus: 이번에는 진짜인 듯. 1층에 있던 포탈을 열고 숨겨진 지역으로 들어간 걸 본 목격자가 있음.] [└글쓴이: 진짜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BurtusMaximus: 얀델이 포탈을 열었을 때 옆에 있던 애들도 다 같이 뒤따라 들어갔는데, 중간에 포탈이 닫혀서 낙오됐다고 하네.] [└글쓴이: 정보 고마워. 근데 그런 걸 여기서 말해줘도 돼?] [BurtusMaximus: 어차피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정보인데 뭐.] [└Nyacreeps: 낙오자 중 딱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는데, 진짜 얘가 행운의 최고봉인 듯. 안 따라 들어간 것도 그렇고, 베르자크가 있는 1층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그렇고.] 그래…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렇게 된 거구나. 커뮤니티만이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에 계속해서 게시물들을 읽어내렸다.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정말이지 다양했다. [필독 요망) 비요른 얀델이 살아 있다는 증거 세 가지.] [Futuralis: 없는데 내용이?] [└NExtlevEL: 좀 모자라냐? 없다는 거잖아.] [└Futuralis: 없다니 뭐가?] [└NExtlevEL: 네 뇌가.] 단순히 드립을 치거나 농담을 하며 이 상황을 소모하는 자가 있었고, 구체적인 증거를 대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었다. 또한……. [친구들, 내가 포탈 여는 법 공유한다.] 수정동굴 암흑지대에 비석 하나가 새롭게 생긴 건 다들 알지? 이번에 비요른 얀델이 그거 열고 안에 들어갔다가 참변을 겪은 거고. 자, 그럼 여기서 문제는 포탈이 열리는 조건이 뭐냔 건데……. 결론만 말하자면, 그 조건은 3층에 있을 확률이 높아. 이번 회차 중 비요른 얀델을 3층에서 목격한 탐험가들이 꽤 되거든. 그래, 벌써 그것도 다 까발려진 거구나. [these99: 이 말이 진짜면 그럴 듯하긴 하네. 3층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포탈을 연 거니까.] [ionboii: 쯧쯧, 어그로 수준 봐라. 공유한다면서 이상한 가설만 늘어놓고 있네.] [└EdwardBless77: 루머로 들을 수준의 정보는 아닌 듯해. 2층에서도 그를 목격한 사람이 꽤 많이 있거든.] [└AI_DIDIGO: 정보1, 실제로 비요른 얀델은 7일 차에 1층으로 내려간 뒤, 곧바로 수정동굴의 포탈을 열었다.] 3층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우리가 이번 탐사에서 이동한 루트는 그대로 퍼졌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은데……. [└EdwardBless77: DIDIGO님 오늘은 정보2 없나요?] [└AI_DIDIGO: 정보2, 총 60명이 열린 포탈 안으로 들어선 순간 포탈이 닫혔다. 숨겨진 지역의 입장 인원은 최대 60명으로 추정된다.] 아주 그냥 옆에 있지도 않았던 놈들이 우리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럼 알아볼 만큼은 알아본 거 같고…….’ 이쯤에서 눈팅을 끝내고 백호와 현별이가 있는 채팅방에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습관처럼 한 페이지만 더 넘기던 내 눈에 딱 꽂히는 게시글이 하나 있었다. [비요른 얀델을 따라 숨겨진 지역에 진입한 탐험가입니다.] ……누구지? *** [여러분들이 얘기 중인 60명 중에 한 명입니다.] [제 본명은 밝힐 수 없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모두 사실이니 장난이라 생각하지 말고 들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현재 우리는 지하 1층, 기록 보관소라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 계층은 굉장히 특이한 계층으로…….] 이 글을 작성한 자가 누구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후보는 베르실이다. 하지만, 좀만 생각해 보면 걔가 이 글을 남겼을 리 없다. 단지 내가 확실하게 아는 플레이어가 베르실 하나였을 뿐. ‘60명 중에 한 명 더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게다가 글을 계속 읽어내릴수록 용의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신뢰를 얻기 위해 작성자가 끼워 넣은 디테일에는 어느 정도 신상이 묻어났으니까. [저희는 비요른 얀델과 떨어진 이후 자력으로 탐사를 하였으며…….] 일단 은사자 클랜이나, 그들과 함께 행동 중인 중소 팀원들은 아니다. 따라서 남은 용의자는 도서관 섬에서 지나가며 만났던 바로 그들뿐. [물론 지금 비요른 얀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느닷없이 마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진 탓에 탐사가 중단된 채 고립됐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새로운 정보 하나를 알게 됐다. ‘우기’는 그 섬 하나만이 아니라 계층 전지역에 공통으로 벌어지는 이벤트다. 뭐, 얘네가 그 이벤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진 모르겠지만. 도서관에는 몬스터들이 안 들어가나? [현재 저희는 한 섬에 갇혀 있습니다. 섬을 가득 채운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배까지 파손이 된지라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믿을 건 오직 미궁이 폐쇄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지만…….] [오늘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것 또한 힘들 거 같더군요. 지금 소중한 탐사 성과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글을 남기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곳에 진입하고자 하는 분이나, 혹여 이후에 탐사 계획이 있는 모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만약 이곳에 오신다면, 저희가 있는 섬으로 와 구조를 해주십시오. 저희가 알아낸 정보는 물론, 다른 것으로라도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현재 저희가 있는 섬은 시작 지점인 바위섬에서 19도 방향으로 항해시…….] 이내 작성자는 바위섬에서 본인들이 있는 섬에 오는 항해로를 밝혔다. 항해에는 식견이 없지만, 가는 길목이 복잡하고 시간도 매우 오래 걸리는 것으로 보아 도서관 섬은 아닌 듯했다. [또한, 그분이 먼저 탈출하여 도시에서 만나든, 아직 이곳에 갇혀 있든, 얀델 남작님을 마주친다면 꼭 대신 말을 전해주십시오.] [저희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문의 게시글은 끝. 작성자가 정확히 누구일까 생각하고 있자니, 헥츠 클랜의 단장이 내게 묘한 불안감을 내비쳤던 일이 떠올랐다. [역시… 남작님께서도 나갈 방법을 찾지는 않으시군요.] 이래서 사람 직감이란 게 참 무섭다. 설마 진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왠지 기분이 묘했지만, 우선 게시글에 달린 댓글을 하나씩 읽어내렸다. [Darulus: 뭐야, 이거 진짜야?] [rafał: 60명에서 스크롤 쭉 내렸습니다. 다시 준비해오세요.] [MarkG: 이거 믿는 머저리들은 없지?] [Paweł: 이 정성으로 다른 걸 했으면…….] 대체로 단순 어그로 취급을 하는 분위기였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TheRobson75: 근데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뭔가 디테일이 남다른데……. 설마 진짜 거기에서는 미궁이 닫혀도 시간이 흐르는 건가?] 긴가민가 하는 자도 많았으며, 아예 이 글을 믿기로 하는 자도 꽤 됐다. [Bling0_0: 난 왠지 이 글 내용이 사실일 거 같음. 애초에 그 사람이 죽는 모습은 상상이 안 돼서. 차라리 이쪽이 훨씬 더 말이 된다고 할까…….] [└AI_DIDIGO: 정보1, 이 글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자가 보이는 패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EdwardBless77: 그래서 결론은요?] [└AI_DIDIGO: 결론, 이 글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72.8811%이다.] [└Pnec: 지랄 노. 잘 뒤졌다. 바바리안 새끼.] [└Bling0_0: 하, 이 새끼는 또 기어 나왔네.] [└Pnec: 넌 또 누군데? 나 아냐?] [└Bling0_0: 아냐고? 이제 보니 아래는 3cm인 것도 모자라 뇌 메모리는 3kb였네.] [└Pnec: 아, 생각났다. 그 버러지 새끼 ㅋㅋㅋ.] [└Bling0_0: 어차피 3초 뒤에 잊을 건데, 생각나면 뭐함?] 얘네들은 뭔데 여기서 싸워대냐. ‘할 짓 없는 애들도 진짜 많다니까.’ 이후 적힌 댓글들까지 쭉 확인했지만, 어째선지 글 작성자는 댓글로 소통을 하지 않았다. 나서봤자 괜히 거짓말처럼 보일 거라 생각했나? 알 수 없지만, 벌써 커뮤니티가 열린지도 30분 가까이 흘렀기에 게시판을 끄고 채팅방으로 향했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다행히 두 명 다 아직까지 채팅방 안에 남아있던 상태. 딸깍, 딸깍.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단 생각에 얼른 채팅방에 들어가보니, 서로 몇 걸음 떨어진 채 마주보고 있는 현별이와 이백호가 보인다. 둘은 뭐라 심각한 표정으로 싸우듯이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오, 형! 오셨네요!” “……어?” 인기척을 느낀 둘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오, 오빠?” “늦어서 미안. 근데 둘이 뭔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나누고 있었냐?” “그, 그게…….” 내 질문에 현별이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백호가 얍삽한 목소리로 껴들었다. “그 자꾸 형이 비요른 얀델인 거 맞냐고 묻지 뭐예요?” “뭐?” “모른다고 잡아 떼다가 하도 떼를 쓰길래 그냥 아니라고 말해줬는데, 그래도 자꾸 저러잖아요. 믿지도 않을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대체?” “현별아, 사실이야?” “……오빠는 쟤 말을 믿어요?” 그래, 사실이구나. 아니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걸 저리 말하는 걸 보면.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얘가 저렇게까지 나온 건 이미 내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건데…….’ 조금 갑작스럽지만, 위기란 잘만 이용하면 기회가 되는 법. “그나저나 넌 왜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고 생각한 거야?” 지금 밖에는 비요른 얀델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니, 현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헛다리를 짚었다 생각하며 솔직히 답할 확률이 높다는 판단. “……진짜 쟤 말을 믿는 거예요?” “화 안 낼 테니까. 그냥 말이나 해봐.” 암만 논제를 흐려봤자 의미가 없다는 투로 말하자, 결국 현별이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확신… 한 건 아니었어요.” “근데?” “…오빠가 여기에 온 시기를 저는 정확히 알고 있잖아요.” “계속.” “그 시기에 온 탐험가들 중에 두각을 보인 사람 중에 비요른 얀델만큼 크게 된 사람이 없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혈령후 정도인데……. 그 사람은 여자고요.” 아, 그래서 내심 내가 비요른 얀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거구나. “……오빠가 평소에 저한테 게임 얘기도 많이 했잖아요. 방패바바가 최고니 뭐니 하면서.” “그걸 기억해……?” “당연하죠. 오빠가 했던 말인데.” 뭐가 이상하냐는 듯 당당한 현별이의 답변. 이에 내가 뭐라 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이백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현별 누나 대단하네요. 형, 다시 생각해 봐요. 나라면 이런 누나 절대 안 놓친—.” “닥쳐. 부탁이니까 제발.” 동감하는 부분이다. 이백호 이 새끼는 가만히 있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쓰윽 째려보자 이백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닫았다. “…….” “…….” 이백호가 나대며 어색해진 분위기. 현별이가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말문을 뗐다. “아무튼 그래서였어요……. 오빠가 비요른 얀델이라고 생각했는데…. 주, 죽었다고 하니까…….” “…….”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타나잖아요 여기에……. 그래서 저도 조금 흥분해서 캐물었어요. 얘는 오빠 정체에 대해 아니까…….” 아……. “그래서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진짜 걱정했잖아요!” 이내 현별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다그치듯 목소리를 높였고, 나도 모르게 사과의 말이 나왔다. “미안.” “사과 받으려는 게 아니라, 이유를 물었잖아요.” “나도 바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게시판에 신기한 글들이 올라와서. 그거 보느라고 그랬어.” “엥? 신기한 글요? 형, 뭔데요 그게?” 이백호도 내 말에 관심을 보였고, 나도 그냥 전부 솔직히 말해줬다. 어차피 나가서 게시판 글을 좀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니까. “미궁이랑 도시랑 시간이 동시에 흐른다고요?” “어, 그렇다네?” “잠깐만! 그럼 비요른 얀델도 살아 있을 수 있단 거잖아요?” “응, 그렇겠지?” 내가 태연히 답하자, 현별이가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뭘 남일처럼 말하고 있어! 그럼 네가 비요른 얀델일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하는 거잖아!’ 대충 이런 느낌이라 해야 하나? 현별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뻔뻔하게 웃고 있자니, 이백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아, 이 정도는 비밀스러운 남자가 되어야 형처럼 여자친구를 꽉 잡을 수 있는 거군요? 참 존경스럽습니다, 형님!” 뭐래, 나보다 더 비밀이 많은 놈이. 좀 어이가 없었지만, 천연덕스럽게 이어진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좀 아쉽네요.” “…….” “나도, 형처럼 똑똑했으면 좋았을 텐데.” 거… 분위기 무거워지게. 520화 일대일 (3) 뜬금없는 이백호의 중얼거림에 잠시 공기가 무거워지긴 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백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되찾았고, 나도 그에 맞춰 더 이상 그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내심 속으로는 생각했다. ‘……어땠으려나.’ 나도 이제 이백호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뜨기 몇 년 전, 녀석은 동료의 배신으로 정체가 탄로가 났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나처럼 정석적으로 미궁 공략을 해나가다가 팀이 해체되고 혼자서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 온 것. 지독한 수준의 인간불신은 덤이었다. ‘뭐, 사실 현지인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때 배신을 안 당했다면. 지금의 이백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응? 형 자꾸 왜 그렇게 노려봐요? 제가 뭐 또 잘못했어요?” “그냥 봤어. 근데 너 잘못한 거 있냐? 왜 찔려 해?” “……형도 차암!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하하.” “…….” “그나저나 형 잠깐 둘이서 얘기할 수 있어요?” 이백호가 그리 말하며 현별이를 힐끗하자, 그 시선을 받은 현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뭐 사귀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하하,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누님?” “……이따가 다시 올게요.” 지금까지 그러했듯 크게 툴툴거리지 않고 방을 나서는 현별이. 그나저나 조금 놀랐다. 그러고 보면 이제 누님이니, 누나니 말해도 크게 별말 하지를 않네. 암만 말해봤자 변하는 게 없단 걸 깨달은 건가? “헤헤, 형 이제 저희 둘만 남았네요? 자, 그럼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오붓하게—.” “뒤진다. 그딴 장난치지 마라.” “넵.” “그래서 뭐가 그리 급했냐? 네가 먼저 현별이를 내보내고.” “아, 그거요? 사실 급한 거나 한 건 아닌데…….” “그럼 뭔데?” 계속 서 있기도 뭐해 소파에 앉아 턱을 괴자, 이백호도 맞은편에 따라 앉으며 물었다. “형, 진짜 미궁에 갇혀 있는 거예요?” “어.” “미궁이 닫혀도 유지가 되다니, 진짜 신기한 곳이네요. 나오는 법은 찾았어요?” “아직.” “흐음, 이거 다시 생각하면 좀 큰일 아닌가? 어때요, 제가 구하러 가요?” “뭘 구하러 와. 네 할 일이나 해.” “헤헤, 형이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사실 못 가기도 하고요.” “지금 밖인 거냐?” “네. 밖에 오면 뭔가 더 대단한 발견이 도처에 깔려 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가 않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그냥 숨겨진 지역이나 찾아볼 걸.” “궁금했던 건데, 너는 왜 밖에 나간 거냐?” “숨겨진 지역을 그렇게 빨리 찾아낼 줄 예상을 못했거든요.” 그런 이유였구나. 미궁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녀석이 이 시기에 왕국을 떠난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형, 거긴 어때요? 정보 좀 주세요.” “맨입으로?” “에이… 형도 성벽 바깥 얘기는 궁금할 거 아니에요. 같이 공유하자 이거죠.” “바깥엔 쥐 새끼 한 마리도 없다며?” “언제까지 그러겠어요? 제 직감이 말하고 있다고요? 이 밖에는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이백호의 말은 어딘가 약을 파는 거 같았지만, 그래도 내심 나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성벽 밖에는 무언가 감춰져 있다. 아직은 그게 뭔지 감도 제대로 오지 않지만. “좋아, 딜.” “역시 호탕하십니다 형님!” 이후 나는 지하 1층에 관련된 정보들을 여럿 알려주었다. 변종 몬스터와 신종 몬스터. 백과사전처럼 정보가 담긴 도서관의 소환 책. 바다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 등등. 다만, 촌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거래라고 해도 아직 내가 받은 건 없는 데다가, 어차피 얘도 성벽 밖에서 알아낸 사실들을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해주진 않을 테니까. ‘뭐, 촌장에 대해서도 얘랑 의논을 하면 뭔가 새롭게 아는 게 생길지도 모르지만…….’ 하, 이백호 이 새끼는 왜 이리 믿음이 안 가지? 모든 걸 밝히고 협력하면 언젠가 뒤통수를 맞을 것만 같다.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패고. “자, 그럼 끝이다.” “에? 그 나무섬은요? 한창 흥미롭게 듣고 있던 와중인데.” “거긴 지금 탐사 중이야. 잠시 쉬고 있다가 여기 끌려와서 얼마나 놀란 줄 아냐?” “그래도 다행이네요. 사실 아까 현별 누나가 막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형 진짜 죽은 거냐고 물었을 때 엄청 당황했는데.” 하긴, 얘는 성벽 밖이니 내 소식을 현별이에게 처음 들었을 것이다. 얘는 게시판도 잘 안 읽는 거 같으니까. “형,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응?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그건 그런데, 오늘은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무슨 뜻이냐?”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묻자, 이백호가 씨익 웃으며 나를 보았다. “오늘은 현별 누나랑 있어요. 아닌 척해도… 아, 아닌 척한 게 아니라 대놓고였나? 아무튼, 많이 놀란 거 같더라고요.” “아…….” “그럼 아우는 이만 물러갑니다요.” “백호야, 잠깐만.” 떠나려는 걸 불러세우자 이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괜한 오지랖일지 모르지만. “똑똑한 게 아니야.” “…예? 잘못 들었습니다?” 얼빠진 소리를 내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비밀이 많은 건 똑똑하고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러면요?” “그냥 겁이 많을 뿐인 거지.” 너도. 그리고 나도.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하니까. *** 이백호가 조금 이른 시기에 떠나고서 머지않아 현별이가 재입장했다. “얘기는 잘 했어요?” “응.” “근데 오늘은 일찍 헤어졌네요?” 툭 하고 묻는 질문에 나도 툭 하고 답했다. “너랑 같이 있으라던데?” “…믓? 무슨! 소리를 걔는!” “뭘 그렇게 당황해? 걔가 헛소리 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렇죠……. 하루이틀도 아니고… 네…….” 그리 말하면서도 현별이는 어딘가 더운지 연신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이런 반응은 또 오랜만이네. 왠지 장난기가 도진다. “그렇게 걱정이 많이 됐어?” 씨익 웃으며 놀리는 목소리로 묻자, 현별이가 눈살을 좁히며 째려봤다. “…싸우잔 거예요?” “어… 아니? 그보다 그게 왜 싸우잔 얘기가 돼?” “진짜… 이백호 걔처럼 이상한 애랑 어울리니까 사람이 이렇게 되지.” “…….” 잠깐 장난을 쳤을 뿐인데, 왜 이렇게 혼나는 상황이 된 걸까. 알 수 없지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너는 어때? 하던 일들에는 문제 없고?” “네. 저야 비슷하죠 뭐. 페프로크 여백작 아래서 차근차근 신임을 얻어가며 일하고 있어요.” “여백작은 어떤데?” “…착한 사람이에요. 순수하기도 하고요. 최근엔 조금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귀찮게 굴다니?” “몰라서 물어요? 비요른 얀델요.” “아…….” 단 한 번도 내 의도였던 적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비슷한 짓을 두 번이나 저지르게 됐다. “뭐, 그래도 다행이네요. 저도 게시판 글을 보고 왔는데, 나름 믿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조회수도 엄청 높았고. 이 정도면 며칠 내로 도시 내에 전부 소식이 전해질 거예요.” “다행이군.” “네. 다행이죠. 생존 가능성이 제시된 게 조금만 더 늦었어도, 재산이 몰수되고 얀델 가문을 세우는 일도 전부 올스탑 됐을 걸요?”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정말 천만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 “……난 네 상관이 이제 귀찮게 안 굴 테니 다행이라 한 말이었는데?” “으흠, 그래요?” 후… 이제는 아주 대놓고 의심을 하고 미끼를 던져대는구나. 나중에 밖에서 만나면 트루 바바리안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든가 해야지. 다시는 날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오빠, 지금 무슨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굉장히 불길한 눈빛이었는데.” “이제 눈빛 가지고도 뭐라 하는 거냐?” 현별이가 눈치채기 전에 강경하게 대응하며 말을 끊었고, 이후로는 책을 읽기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오빠, 이제 갈 시간이에요.” “아, 어. 벌써 그렇게 됐네.” 슬슬 원탁이 열릴 시간이 되며 자연스레 자리가 마무리됐다. 채팅방을 떠나 이한수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 번 더 게시판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고, 원탁의 입장 시간이 끝나갈 때쯤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남색 정장에 수사자 가면. 처음엔 인형탈이라도 쓴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이제 적응해서인지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좋아, 그럼 옷은 다 입었고……. 터벅, 터벅. 복도를 걸어 도착한 원탁에는 이미 나를 제외한 모든 회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에이, 그게 말이나 되오? 당연히 거짓말일 게 분명하오.” “글쎄. 난 잘 모르겠소. 그 글에 남긴 댓글을 보면 디디고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하지 않소?” “헤헤, 저 알아요! 디디고라면 그 이상한 컨셉을 가진 플레이어 맞죠? “그렇소이만, 괴짜긴 해도 무시할 사람은 아니라 보오.” “하긴, 수상할 정도로 아는 게 많은 자였……. 아!” 내가 도착하자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던 이들이 대화를 멈추고 내게 눈으로 인사를 해왔다. 아, 물론 광대만 빼고. “피싯, 오늘도 환영합니다. 수사자 씨.”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중세 귀족처럼 허리를 숙이는 광대. 대충 한 번 보고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았다. ‘오늘 첫 순번 자리는 파라브네.’ 자리에 앉으며 넌지시 확인한 옆자리엔 웬일로 고블린이 있었다. 오늘 첫 순번이 하고 싶었던 건가? 내심 이유가 궁금했지만 뭐, 그건 차례가 되면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시작하지.” 길게 말할 것 없이 한마디를 하자, 곧바로 비는 시간 없이 집회가 시작됐다. “오늘 게시판에 올라온 그 글은 모두 읽었을 거라 믿고 말하겠습니다. 그 게시글에 적힌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요?” “…이게 제 순서의 정보인데요?” 고블린의 말에 회원들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높다니 그게 뭐예요?” “피싯, 그럼 다음 순서는 제가 하겠습니다. 고블린의 뇌 용량은 3kb일 가능성이 높다!” “헤헤, 광대님 그거 그 게시글에서 본 거 맞죠? 진짜 웃겼는데. 그 사람 진짜 추하지 않았어요?” “피, 피시싯…….” 나비의 호응에 어색하게 웃는 광대. 다만, 이의제기가 빗발치고 조롱이 이어질 거란 건 내심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럼 지금부터는 그 게시글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근거를 대겠습니다.” 고블린이 개의치 않으며 말을 잇자, 회원들도 고개를 갸웃하며 집중했다. “…근거?” “오, 역시 뭔가 더 있었나 보구려?” “하긴…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냥 저런 걸 정보랍시고 꺼냈을 리는 없겠지.” 이내 관심이 쏠리자 고블린도 옳다구니 자신이 정리한 근거를 설명했다. “저는 예전부터 인터넷을 잘했습니다. 좋아하는 건 논쟁, 주특기는 신상털기였지요.” “…근데 그게 근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전 오늘 집회가 열리기 전까지, 게시자가 남긴 모든 게시글과 댓글을 확인하고 분석했습니다. 익명성을 믿고 툭툭 흘린 단서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제 방식대로 조합했지요.” “……그래서요?” “정확히 누군지까진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 글 게시자는 헥츠 클랜의 일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엄청 놀랐다. 회원들은 ‘이 새끼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이런 반응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저 말이 정답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저게 된다고?’ 미처 알지 못했던 고블린의 재능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헥츠 클랜이라면, 이번에 비요른 얀델을 따라서 숨겨진 지역에 내려간 60명의 탐험가 세력 중 하나이긴 한데…….” “여왕, 당신 생각은 어떻지? GM과 깊은 관계인 만큼 아는 게 있었을 텐데?” 이내 사슴뿔이 묻자 여왕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진 않지만, 고블린 님의 추측은 저희와 일치해요.” “그게 정말인가?” “네. 근데… 이해는 안 되네요. 저희는 삭제된 글들을 복구해서 읽었기에 할 수 있던 추측인데…….” “신상에 대해 적힌 글이었소? 그 삭제된 글이란 게?” “숫자가 꽤 되는데, 전부 헥츠 클랜에 관련된 것들이에요. 주기적으로 여기 클랜이 되게 복지가 좋다는 등 칭찬을 하다가 커뮤니티가 닫히기 전에 삭제를 하더라고요.” 허… 무슨 클랜 뒷광고를 여기서 해? 어처구니가 없지만, 여왕의 증언이 이어지자 고블린을 보는 회원들의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후후후… 다행이군요. 제 조사 결과가 사실이란 게 증명돼서.” ……고블린, 얘는 대체 뭐 하는 놈이지? 521화 일대일 (4) 고블린 차례가 끝난 후 빠르게 순서가 돌았다. “왕실 군전략부에선 이번에 크게 승리하고 용의 산맥 너머까지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노아르크가 이를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노아르크의 핵심 인력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두 번째 순서였던 사슴뿔은 속사정을 말해보란 듯 오르큘리스 멤버인 광대를 콕 짚어 바라보며 말했고. “비요른 얀델을 따라 숨겨진 지역에 들어간 혈령후는 아직 살아 있소.” 세 번째 순번인 초승달은 모두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앞에 얘기가 있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큰 건 맞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혈령후의 몸에 깃든 순혈이 아직까지도 일족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구나. 생존을 확인하는 것에. “그래서 요정족에서는 이미 그녀의 생존을 확신하고서 최정예로 구성된 구조대를 꾸리고 있는 중이오.” “피싯, 근데 이상하군요. 혈령후라면 일족의 배신자 아닙니까? 순혈까지 줘가며 잘 키워줬는데, 홀라당 남자 하나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바친.” “……당신에게 답할 이유가 없소.” “피시싯. 까칠하기는.” “다시 말하지만, 내가 언젠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니 그 전까지 죽지 마시오. 내가 항상 이곳에 오는 건 당신이 살아 있단 걸 알기 위함도 있으니.” 광대와 초승달이 오랜만에 으르렁거렸지만, 이것도 집회 중에 있던 잠깐의 해프닝일 뿐. 다시 차례가 이어지자 둘은 서로 소가 닭 보듯 하며 관심을 껐다. “여우, 이제 당신 차례구려.” 어느덧 순서는 벌써 네 번째.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우 가면을 뒤집어 쓴 베르실이 이번엔 어떤 말을 할지가 궁금했다. 그야 지난번에 퀘스트를 하나 내줬으니까. [나도 한번 알아보겠다. 그러니 너도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줄 수 있겠나?] 미샤가 배신자라는 정보를 듣고서, 원탁에서 더 적극적으로 떠보라는 의미로 내줬던 퀘스트. 하면, 베르실은 어떤 식으로 떠보려 할까? “미샤 칼스타인은 배신자가 아니다. 비요른 얀델의 입장에서.” 지난번에 나비 가면이 했던 말을 딱 정면에서 부정하는 형식의 정보. 듣자마자 ‘이건 또 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야 이런 말을 해봤자 붉은색이 뜰 게 분명—. ‘아, 그걸 노린 거구나.’ 이내 원탁의 보석이 빛을 자아냈다. 솨아아아아아. 뜬 빛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선명한 적색. “헤… 재밌게 됐네요.” 나비 가면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여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케이, 이 정도면 어그로는 확실하게 끈 거 같고. ‘아마 나비 가면의 바로 앞 자리에 앉은 것도 이것 때문이겠지.’ 물론 이 미끼가 통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시도 자체는 매우 좋았다. “피싯,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각 회원들이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쏘아내자, 베르실은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 확신이 좀 부족했나보네요. 나름 증거는 많이 모았는데…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 그럼 다른 거로 할게요.” 이후 베르실은 다른 정보를 대고서 초록불을 받아냈고, 그렇게 차례는 다음 순번으로 넘어갔다. 갑작스레 원탁에 등장한 뉴비 삼인방 중 하나인 나비 가면. 자, 그럼 얘는 과연 미끼를 물까 아닐까. 그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여우 씨는 제가 했던 말을 믿지 않나 보네요.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믿고 싶지 않은 건가? 웃겨 정말.” 그래, 물었구나. “미샤 칼스타인이 비요른 얀델의 팀에 다시 들어간 건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미샤가 지시를 받아서 돌아온 거라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우선 원탁의 보석을 확인했다. 솨아아아아아- 저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듯 새어나오는 녹색빛. 이를 본 광대가 신난 목소리로 읊조렸다. “피싯, 그 멍청한 바바리안놈도 불쌍하군요. 그토록 동료, 동료 외치더니 정작 그 동료에게 배신을 당할 처지라니.” 당장에라도 면상을 바닥에 내리꽂고 싶지만, 테이블 아래로 양주먹을 꽉 쥐며 참아냈다. 감정보다는 이성에 집중할 때였다. ‘……누군가의 지시.’ 나비 가면이 말한 누군가가 누구일까. 더 볼 것도 없이 한 명이 딱 나온다. ‘이백호.’ 암만 생각해도 얘가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새끼가 없단 말이지. 다음 달이 되면 만나자마자—. ‘아니, 잠깐만…….’ 이백호에 대한 분노로 시야가 좁혀지던 때, 불현듯 나비 가면과 눈이 마주쳤다. 물론 마주치자마자 저쪽에서 시선을 바로 피하기는 했지만……. ‘뭐지 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얘가 미샤 칼스타인의 이야기를 꺼낸 게 우연일까? 정말 거기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나? ‘다시 생각해 보면…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단 말이지.’ 한창 달아오르던 머리가 위화감을 감지하고서 차갑게 식는다. 나비 가면이 이 정보를 원탁에서 말했다는 건, 널리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아니면, 알려지기를 바랐던가. ‘후자라면.’ 분명 비요른 얀델의 귀에 들어갈 것도 예상했을 터. 최대한 진정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비요른 얀델이 미샤 칼스타인이 배신자란 걸 알았을 때.’ 나비 가면은, 비요른 얀델이 어떻게 행동하리라 생각했을까. 더 볼 것도 없이 답은 나왔다. ‘미샤를 내치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백호와 틀어졌겠지.’ 그럼 이게 나비가 바란 결과일까? 이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뭐, 이 추측들은 그냥 다 내 망상이고, 정말 얘는 순서를 넘기려고 생각난 걸 아무거나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이 좀 돌아오네.’ 이러한 경우의 수를 인지하고 나니, 훨씬 더 조심스러워진다. ‘정말 누군가 나를 이간질하려는 거라면.’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럼 조급해지는 건 저쪽일 테니까. 툭. 총을 쏘기 전엔, 조준을 제대로 해야 하는 법이다. *** 「캐릭터가 기록 보관소로 이동합니다.」 *** 나비의 순서가 끝난 뒤. [1층에서 발견된 비석 아래에는 고대어로 된 문구가 적혀져 있어요. 그 내용은…….] 지하 1층으로 내려오는 핵심 단서를 꺼낸 여왕을 시작으로 블랙, 광대, 늑대 순으로 차례를 돌았고, 어느덧 내 차례가 찾아왔다. 이번 달에 큰 이벤트가 있었던 탓일까? 멤버들 모두 내가 뱉을 정보에 평소보다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다만 나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게임 정보를 말하며 턴을 넘겼고, 그렇게 첫 바퀴가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바퀴도 딱히 볼 건 없었지.’ 미궁에 갇혀 단절된 외부의 정보를 들을 수 있었을 뿐, 내게 도움이 되거나 관련이 될 만한 이야기는 크게 없었다. ‘나비 가면도 두 번째 바퀴에선 미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렇게 이번 집회는 거기서 마무리. 이후 이한수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게시판이나 좀 둘러보다가 일찍 로그아웃을 했다. 그야 도시에서 접속한 게 아니니까.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탐사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만 하는 것인데……. [00 : 00] 미궁 진입 36일 차가 막 시작된 시기. 모포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 나는 누운 채로 눈만 움직여 주변을 확인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모닥불의 빛이 일렁거리는 동굴 속. 아니, 나무 속이라고 해야 하나? 주변은 커뮤니티에 입장하기 전에 꾸린 야영지 그대로였다. ‘…4시간 정도 있다가 나왔는데도, 엄청 피곤하네.’ 잠시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머지않아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에 불침번으로 세워둔 아멜리아의 분신이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다. “물이라도?” “…아, 네. 고마워요.” 그래, 역시 베르실 너였구나. 깨어난 시기에 몇 초 오차가 있는 걸 보니, 얘는 커뮤니티가 닫힐 때까지 머물렀던 듯한데……. “얀델 씨는… 주무시나요?” “그래.” 여기서 깨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좀 이상했기에 그냥 그대로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 함께 기상해 탐사 준비를 하고 있자니, 베르실이 피곤한 얼굴로 좀비처럼 걸어왔다. “얀델 씨, 출발 전에 잠깐 일대일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얘기? 좋다.” 짚이는 게 없는 척 답했으나 베르실이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고, 실제로도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샤 칼스타인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서 우리 팀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의혹이 있어요.” 물론 이거 하나는 궁금했다.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 “…민감한 얘기다 보니, 좀 더 확인을 한 뒤에 말씀드리려 했어요.” 그래, 그런 식으로 둘러댈 생각이었구나. 내가 만약 아무것도 몰랐다면 굉장히 수상하게 봤겠지만, 속사정을 알기에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흠흠!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요……. 말씀 드릴 게 하나 더 있는데…….” “뭐지?” “어쩌면 지금 바깥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허, 설마 이것까지 바로 보고를 할 줄 몰랐는데. 내게 의심을 조금 사게 되더라도 바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고 하면 좀 기특하다. “근거는?” “…촌장이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아요. 그 사람은 수천 년도 더 전의 사람인데. 들어보니 여기서도 아주 오랜 시간을 지냈단 모양이잖아요? 양쪽 모두 시간이 흐른다고 가정해야지만 얘기의 앞뒤가 맞아요.” 베르실이 댄 근거는 솔직히 좀 놀라웠다. ‘……와, 모르고 들었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거 같은데?’ 어젯밤에 한참 더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런 변명들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뭐, 나도 생각하느라 좀 늦게 자기는 했지만. “그럼 바깥에서는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난 건가?”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베르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니, 아닐 거 같은데……. 제 생각에는 ‘우기’가 기점일 거 같아요.” “근거는?” “…없어요.” 없기는. 바깥에서 15일이 지난 게 가장 큰 근거일 거면서. 그래, 여기까지는 변명을 준비하지 못했다 이거지? 아무튼, 베르실이 얘기한 도시와 이곳의 시간 비율에 대한 의견은 나와 일치했다. 21일 차에 우기가 끝나고. 보름 뒤인 35일 차 자정에 원탁이 열린다. 즉, 우기가 지나간 다음부터 일대일 비율로 시간이 흐른다고 하면 딱 계산이 맞는 것인데……. “제 추측대로라면, 50일 차에 다시 미궁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요.” “그리고?” “57일 차에는 다시 한번 1층이 폐쇄되며 아무도 못 들어오는 상태가 될 테고. 64일 차에는 또 우기가 시작되겠죠.” 이러면 촌장에게 들은 우기의 주기와도 딱 맞는다. *** 베르실이 충격적인(?) 정보를 내게 전한 후, 오랜만에 클랜 회의가 열렸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모두 그 가설에 깜짝 놀랐으나, 대부분은 정보의 진위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야 커뮤니티가 열린 걸 내가 말해줬거든. 내가 악령이란 걸 모르는 아이나르랑 아우옌만 빼고. “오! 그것 참 신기한 일이군!” “그… 크, 큰일 난 거 아닙니까? 그러면? 만약 우리도 촌장처럼 영원히 이곳에 갇히는 거라면…….”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이야 어쨌든. 정보 공유는 시작일 뿐, 회의 주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부터 정할 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다.” “단장님,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쉽게 말해, 결정해야 한다. 다른 탐험가들이 더 이곳에 내려오든 말든, 우린 우리 탐사에만 집중을 하든가. 그도 아니면…….” “아니면?” “그들을 도와 세력을 키우고,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든가.” 전원이 이해득실 계산이 빠른 탐험가들인 만큼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곧바로 투표를 시작하자 빠르게 찬반이 갈렸다. “나는 찬성이다. 단기간의 이득이야 어쨌든, 우선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는 게 먼저니까.” “저, 저도 찬성입니다. 탈출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대부분이 죽을 테니까요…….” 찬성의 아멜리아와 아우옌. 그리고……. “전 반대예요. 그 사람들이 과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나도 반대다! 여기까지 온 탐험가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무엇보다 귀찮을 거 같다!” 반대표의 에르웬과 아이나르. “전… 그래도 탐사를 중단하고서라도 만나보는 게 낫다고 봐요. 일단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수도 있고, 바깥 소식도 들을 수가 있으니까요. 도울지 말지는 건 그 나중 일이고요.” “난… 굳이 찾을 필요는 없고 나중에 만나면, 그때 사람을 보고서 생각을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기타표의 베르실과 미샤. 어찌 된 게 매번 내가 마지막 표지? 알 수 없지만, 나도 그냥 내가 정답이라 생각한 곳에 투표했다. “우선 바위섬에는 돌아가보는 게 좋을 거 같다.” 도서관도 그렇고, 우기도 그렇고, 여기 거대한 나무섬도 그렇고. 엔드 콘텐츠의 난이도가 높은 계층인 만큼, 사람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선택지도 늘어나리라는 판단. ‘무엇보다, 사람이 늘면 그 거인 새끼도 잡을 수 있을 테고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열흘 정도 탐사를 더 이어나간 뒤, 때에 맞춰 바위섬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의 날짜는 53일 차. 시작했던 위치에서 야영지를 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54일 차, 55일 차, 56일 차……. 그렇게 57일 차가 되며, 정말 누군가 오기는 하는 건가 의심을 갖던 차였다. 후우우웅-! “비, 비요른!! 포탈! 포탈이다!!” 허공에서 수십 개의 포탈이 열리며 뉴비들이 유입됐다. 522화 거인섬 (1) 새롭게 지하 1층으로 내려온 뉴비 탐험가 60인. 그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우리를 보고 잠시 크게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먼저 다가와 소개를 해왔다. “얀델 남작, 정말로 살아계셨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르민 탐사단의 단장, 뮐 아르민이라 합니다.” 사대클랜에 속하진 않지만, 나름 유명세도 있고 평가도 좋은 편에 속하는 아르민 탐사단. 전쟁 통에도 탐사만을 해나갔단 것으로 유명하다. “매그논 니아스. 아인페리얼 클랜을 이끌고 있소이다.” 아인페리얼, 얘네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고.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중구난방으로 들어왔던 우리와 다르게, 이번 회차의 인원은 정확히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 뮐 아르민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한데… 남작님께서는 저희를 보고서도 크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바깥에서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을 해서 말이지.” “…예?” 뮐 아르민이 움찔하며 내 뒤에 있는 동료들을 쓱 훑어보았다. 내 동료 중에 플레이어가 있다고 보는 건가? 의심이 커지기 전에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탐사 중에 그런 단서를 얻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촌장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던 부분이니까. “아…….” “근데 우리가 살아 있단 건 어떻게 알았지?” 내 질문에 답한 것은 30대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탐험가 매그논 니아스였다. “남작께서도 악령들의 집회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것이오. 그곳을 통해 이곳의 정보가 도시까지 전해졌소이다.” 근데 이 새끼는 말하는 뉘앙스가 왜 이러지? 마치 나랑 동급인 것처럼 대하네. 귀족이 우습게 보이나? 쓱 보고 있자니, 뮐 아르민이 눈치를 보며 얼른 입을 열었다. “예. 다만 출처가 출처다 보니 아직까지는 다들 긴가민가 하는 눈치지요. 하나 다들 그 가능성 자체는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남작님.” “그렇군.” 오케이, 이러면 악령 의심을 피하기 위한 밑밥은 다 깐 거 같고. 이쯤에서 호구조사를 들어갔다. “한데 너희도 꽤 하는군? 벌써 포탈 여는 법을 찾아내다니.” “얀델 남작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악령들을 통해 나온 단서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비석에서 발견된 고대어와 조각 사원을 연관지어 생각하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너희 두 클랜은 협력 관계인 건가?” “일시적이지만, 일단은 그렇소.” 아니, 얘는 말이 진짜 엄청 짧네. 이걸 어떻게 요리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도 뮐 아르민이 눈치껏 껴들었다. “저희는 조각 사원에서 만난 관계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서로가 모은 조각을 합쳐서 포탈을 열기로 했습니다.” “아, 참고로 우리가 2개. 이자가 1개였소.” “……예. 맞습니다. 그래서 그에 맞춰서 서로 인원도 조율을 했지요.” 어쩐지 40명 20명으로 인원수가 딱 맞아 떨어지더라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구나. “자, 그럼 우리 얘기는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이곳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겠소이까? 새로운 계층인 만큼, 본격적으로 탐사를 하러 가기 전에 얘기를 들어둘까 해서 말이오.” 하, 진짜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웃으며 대하니까 귀족이 귀족처럼 안 보이나? “마치 빌려준 걸 받는 듯한 말투로군.” 목소리를 내리깔자 그제야 녀석이 내 눈치를 쓱 보며 말투를 바꿨다. “그런 건 아니오……. 단지… 탈출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좋든 싫든 자주 마주치게 될 테니, 교류를 하자는 뜻이었소이다.” “그래?” “암, 얀델 남작에게도 우리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아나바다 클랜은 인원이 적지 않소?” 길게 대화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이놈에 대해 판단을 끝마쳤다. “반면 우리 아인페리얼 클랜은 사대 클랜에 비해 규모가 작을 뿐, 그 내실만큼은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오. 다음 달이면 이번에 들어오지 못한 단원들도 뒤따라 들어올 테고 말—.” 이 새끼는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된다. 그런 생각이 든 즉시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필요 없다.” “……?” “너희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 알아서 해봐라.” 딱 잘라 말하자 녀석은 움찔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을까. “…미련한 선택을 하시는구려. 우리가 먼저 탈출법을 찾으면 어쩌려고?” “하는 꼴을 보니 딱히 그럴 거 같진 않은데.” “…후회하게 될 것이오.” “오, 그렇게 말한 놈들은 대부분 뒤졌는데.” “허!”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뀐 녀석은 이내 단원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출발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정말… 저대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서 염려를 표하는 뮐 아르민. “아, 확실히 이대로 보내기엔 좀 그렇군.”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녀석을 불러세웠다. “잠깐만.” “…허! 이제 생각이 바뀐 것이오?” “됐고, 이리 와봐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부르자, 녀석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 쳐다보는데……. 퍼억-! 피차 시간이 없기에 얼른 뒤통수를 후려쳤다. “악!!” 머리가 반들반들한 걸 보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손맛이 나쁘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아,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어서 때렸다.” “………뭐요?” 내 답변을 들은 녀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콧김을 내뿜으면서 노려보는 것 말고는 없잖아? “용건은 이게 다다. 그럼 갈 길 가봐라.” “…….” “문제라도 있나?”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이후 녀석은 나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듯 얼른 단원들을 챙겨 도망치듯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고 있자니, 뮐 아르민이 내게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아, 그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기회가 없다니요?”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뒤진 놈을 다시 만날 순 없잖아? *** 떠난 놈은 떠난 놈이니 미련을 가질 것 없다. 고로, 나는 남은 이에게 집중했다. “뮐 아르민이라고 했나?” “예, 남작님.” “뮐이라고 부르지.” “저야 영광입니다. 남작님.”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나?” “아…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남작님께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게?” 뭔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들어보니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그 게시글의 얘기였다. 섬에 갇혀 있으며 누군가 구조하러 오기를 기다린다던 그 내용. “이렇게 남작님을 뵙게 된 걸 보니, 섬에 갇혔단 얘기도 사실이겠지요. 해서 우선 그곳으로 가보려 합니다.” “이유는?” “살릴 사람은 살려야 하니까요. 게다가 어차피 아무런 정보도 없는 곳이니, 무작정 헤매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뭐, 그것도 그렇군.” 뮐은 아까 그놈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길게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음에도 알겠다. 이 녀석은 꽤 믿을 만하다는 걸. “혹시… 이곳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절 믿고 따라온 단원들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물론 사례도 하겠습니다.” “사례는 무슨.” 나는 피식 웃으며 딱 두 가지의 정보만을 미리 말해주었다. “만약 섬을 본다면 일단 잘 살펴봐라. 지난번에 가까이 갔더니 톨-라푸파가 떠다니고 있더군.” “톨-라푸파라면… 1등급 마물 아닙니까?” “그래. 일단 확인된 건 그놈뿐이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1등급 마물이 더 있을 수 있다니, 진정으로 위험한 지역이었군요.” 1등급 마물의 존재를 듣고서 표정이 어두워진 뮐. “다만, 1등급 마물보다 위험한 건 ‘우기’다.” “우기라니요……?” “14일 차가 되면 하늘에서 마물로 된 비가 내리고, 21일 차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동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내친김에 우기에 출현하는 몬스터들 수준을 말해주니 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게… 바로 이것을 뜻하는 거였군요.” “그래.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 테니, 알아서 잘 살아봐라.” “예?” 갑작스러운 작별 선언에 뮐이 당황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원래 이런 건 정신을 쏙 빼놔야 하거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음, 이쯤이면 붙잡을 때가 됐는데.’ 왜 안 붙잡지? 설마 1등급 마물이랑 우기만으로는 부족했나? ‘쓰읍, 이렇게 되면 내가 먼저 제안을 하는 식으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막 피어나던 찰나. “저 남작님……!” 뮐이 뒤에서 나를 붙잡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천천히 뒤로 돌았다. “무슨 일이냐?’ “그게…….” “빨리 말해라. 시간이 없으니까.” “…혹시 남작님과 저희가 힘을 합치는 건 어떨는지요?” 내가 원하고 있던 바로 그 말. 하나 나는 심드렁하게 뮐의 위아래를 훑었다. “흐음……. 너희와?” “예. 절대 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휘권 역시 남작님께 넘길 것이고요.” 그리 말한 뮐은 ‘아르민 탐사단’이 소수 정예를 지항하며,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전문적으로 찾고 다녔던 만큼 이러한 탐사 경험이 많다는 걸 피력했다. 다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야 아까 말했듯, 얘네는 나름 유명하니까. 그것도 아주 좋은 의미로. “제안은 나쁘진 않은데, 분배는 어떻게 하고?” 이내 내가 현실적인 부분을 딱 잘라 언급하자, 뮐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답했다. “남작님께서 먼저 이곳에 오신 데다가, 아는 것도 더 많을 테니 욕심을 부리진 않겠습니다.” “정확히 숫자로.” “마석은 아예 소유권 주장을 않겠습니다. 대신 정수를 포함한 여러 탐사 소득에 대해서는 절반을 인정해 주십시오.” 허허, 요놈 보게. 아무리 사람이 좋아보여도 탐험가는 탐험가라 이거지? “마석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대신 정수를 포함한 탐사 소득에 대한 지분은 3할로 하지. 물론 우선권은 우리에게 있다.” “지분을 2할로 낮추는 대신, 우선권은 없앨 수 있을는지요?” “그건 안 된다.” 내가 딱 잘라 거절하자, 뮐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실상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조건에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인데……. 이쯤에서 마지막 기름을 칠할 때였다. “뮐 아르민, 남은 건 네 선택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라.”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 하나는 정말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한데 그 진심이 녀석에게도 전해졌을까.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20명의 고급 노예가 생겼다. *** 바위섬에서 날린 며칠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르민 탐사단의 합류는 내게 있어서 아주 큰 수확이었다. 알면 알수록 진국이었다고 해야 하나? 3등급 탐험가가 넷. 4등급이 열둘. 신관 하나에 마법사가 셋.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조건을 승낙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만큼 호화스러운 구성의 인력. ‘손발만 맞추고 나면 2등급도 어찌어찌 잡아볼 만할 거 같은데?’ 전력 점검이 끝난 후에는 아르민 탐사단의 멤버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잘 부탁한다.” “타, 탐사단의 마법사 샬롯 앰블럿입니다……!” “그런가? 식사 좀 잘 해야겠군. 여기 육포나 좀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그래, 너는 이름이 뭐냐?” “브, 브라이언 앰블럿입니다…….” “앰블럿?” “아……! 샬롯은 제 여동생입니다.” “오, 둘 다 탐험가가 되다니, 대단하군! 그럼 거기 너는 이름이 뭐냐?” “아, 저는…….” 통성명을 하느라 시간이 제법 지체됐지만, 그래도 그럴 가치는 있었다. ‘징조가 좋군.’ 다행히도 숨은 한스는 없었다. 523화 거인섬 (2) 은빛 물결을 헤치며 두 척의 배가 나아간다. 솨아아아아아. 선두에 서서 길을 여는 우리의 배와, 뒤따르는 아르민 탐사단의 배. 목적지는 고심 끝에 그곳으로 정했다. 헥츠 클랜의 누군가가 커뮤니티를 통해 구조 요청을 한 바로 그 섬. 이 섬을 첫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무급 노예를 얻을 수 있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아르민 탐사단과는 아예 케이스가 다르다. 그 섬에 갇혀 있을 탐험가들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다. 지금쯤 도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각오까지 서 있을 터. ‘게다가 그 섬도 결국 언젠가 탐사를 해야 할 곳이기도 하고 말이지.’ 이곳 지하 1층은 굉장히 특이한 계층이다. 도서관도 그렇고, 얼마 전까지 있었던 나무섬도 그렇고. 난이도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나무섬만 해도 슬슬 4등급 몬스터들이 나오기 시작했지.’ 참고로 그때 우리는 나무섬의 절반도 채 오르기 전이었으니, 어쩌면 나중에는 1등급 몬스터도 나올지 모른다. 따라서, 인원을 더욱 늘려야 한다. 어느 섬이든 엔드컨텐츠를 다 깨야 탈출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우옌,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지?” “저쪽 항해사에게 들은 항로가 정확하다면, 앞으로 9시간 정도입니다. 단장님.” “그렇군.”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 동안에는 인원이 늘었을 때 어떤 식으로 인원을 분배하고 진형을 짜야 할지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그로부터 세 시간 정도가 더 흘렀을 때였다. “아저씨! 탐사단의 배가! 가, 가라앉고 있어요!” 문제가 발생했다. *** 상황은 충분히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탐험가들에게 돌발 상황이란 일상이나 다름없는 것. “에르웬! 저쪽 상황을 말해라!” “바다 아래서 무언가가 배를 잡아당기는 중이에요!” “마물인가?” “모르겠어요! 밖으로 나온 건 사람 손처럼 생겼는데…….” 에르웬이 전망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엄청 커요!” “그 섬에서 본 그 거인처럼?” “네!” 뭐야, 설마 진짜 그놈인가?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좀 아이러니하다. 우기가 끝나고 찾을 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더니 생뚱 맞게 바다 한복판에서 나타날 줄이야. “단장님! 뱃머리를 돌리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알겠으니, 최대한 서둘러라. 그리고 에르웬! 지원이 가능하겠나?” “해볼게요!” 내 지시를 받은 에르웬이 전망대 위에서 화살의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기운. 다만, 애석하게도 풀차징은 불가능했다. “어, 어어……?” “배, 배가 날아오른다……!!” 무언가가 잡아당기듯 반쯤 바닷속에 잠겨있던 탐사단의 배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물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손이 배의 양옆을 붙잡고 떠받치고 있는 형태.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으나, 어째선지 내 머릿속에선 저 다음 장면이 예상됐다. ‘설마… 저 상태로 집어 던지려는 건가?’ 알 수 없었다. 하나 나와 똑같은 장면을 본 것인지, 에르웬이 차징을 끝내고 활 시위를 놓았다. 피슈우우우욱-! 제트기가 날아가는 듯한 파공음을 자아내며 쏘아지는 정령시. 콰아아아아앙-! 이내 화살이 배를 붙잡고 있던 한쪽 손목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우으으으으으으으!!] 바다 아래 몸을 감춘 녀석의 울음소리가 수면 아래에서 물을 타고 진동한다. 바다와 맞닿은 선박의 밑면을 통해서 전달이 될 만큼 강한 울림. 쿠우우웅—! 이내 녀석이 화들짝 놀라 손을 놓자, 받침대를 잃은 배가 기울어지며 수면 위로 떨어진다. 다만, 평소에 배에 투자를 많이 했던 걸까? 일반적인 배라면 그대로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탐사단의 배는 오뚜기처럼 다시 균형을 잡고 섰다. ‘급한 불은 끈 셈인가…….’ 물론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일렀다. 따끔하게 화살 한 방 맞고 도망갈 놈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분명 머지않아 두 번째 습격이 올 터. “에밀리! 저번에 말한 잠수 상황이다!” “알겠다, 준비해 둘 테니 어서 가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미리 모의를 해두고 연습도 하였기에 길게 소통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즉시 갑판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바다에 떨어지기 직전에 초월 거대화를 발동. 콰아아아앙! 몸이 수면에 닿은 즉시 대포알이 떨어진 듯한 굉음이 피어나며 물살이 사방으로 솟구친다. 암, 다이빙은 이렇게 해야지. “…….” 물 속에 들어간 즉시. 온몸에 철갑을 두른 바바리안의 몸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또한, 심해에 온 듯한 어둠이 주변에 드리운다. 물론 그 시간은 잠시간에 불과했다. 솨아아아아아아-! 베르실이 소환한 수십 개의 빛구체가 바다 아래로 내려오며 사방을 비춘다. 뭐,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편에 속하긴 했지만. ‘보이는 게 어디야.’ 기록 보관소의 바다는 일반적인 바다와 달랐다. 푸른색과는 딱 봐도 큰 차이가 있는 은빛의 물. 아니, 사실 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실험한 결과, 엘리멘탈 바바리안(물) 모드가 이곳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물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무언가라 봐야겠지. 「베르실 고울랜드가 7등급 마법 [산소통]을 시전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던전앤스톤]의 대표적인 잠수 마법이 이곳 바다에서도 통했다는 것이다. 하긴, 안 통하는 게 이상한가? 에르웬의 ‘수중호흡’ 판정과 달리 이 마법은 ‘산소공급’이 핵심인 종류이니. 실제로 게임 내에서도 호흡계 독 같은 걸 이 마법으로 카운터 치는 것도 가능했—. 쿠웅-! 그때 발이 땅에 닿았다. 거인놈이 손을 뻗는 걸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리 수심이 깊진 않았구나. 타닷. 이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윤곽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자니, 서서히 형태가 뚜렷해진다. 히프라마전트. 녀석은 이전에 섬에서 잠깐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 기다란 목과 그 위에 달린 머리통. 전체적인 비율은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구더기가 들끓는 듯한 썩은 피부. 사마귀처럼 이상한 두드러기도 돋아나 있다. 또한 눈, 코, 귀 등. 사람이라면 응당 갖고 있어야 할 이목구비가 없으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흉측한 이빨이 돋아난 거대한 아가리만이 자리할 뿐이다. ‘대가리가 저렇게 생겼었구나.’ 그때는 어둠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는데. ‘초월 거대화까지 켰는데도 허벅지 정도까지밖에 안 될 줄이야.’ 아, 얘도 [거대화]를 켠 상태인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돈의 군주 리아키스의 경우에는 사족 보행을 했기에 실감이 안 났지만, 저 크기로 이족 보행을 하는 놈을 보니 새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거, 바바리안 처음 보나.’ 신기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멍하니 선 채로 저렇게 빤히 꼬나보는 걸 보면. 타닷. 진흙처럼 뭉개지는 지반을 세차게 밟으며 앞으로 대시. 그리고 놈의 아킬레스 부분에 망치를 휘두른다. 퍼억-! 쩝, [휘두르기]까지 썼는데 움찔도 안 하네. 상상 이상으로 맷집이 좋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바라던 대로 어그로는 제대로 끌렸거든. [우어어어어어-!!] 놈은 더 이상 수면 위에 떠 있는 배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위협’이 되는 적에게 온 신경을 쏟을 뿐. 녀석이 좀비 같은 울음소리를 뱉으며 손바닥을 내리찍는다. ‘공속이 뭐 이리 빨라?’ 바깥이라면 모를까. 수중이라 동작이 굼떠진 상태에서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리며 가드. 콰아아아앙-! 서 있던 땅이 음푹 꺼지며 허리까지 처박혔지만 그래도 대미지는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몇 대 더 맞으면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겠다 싶을 정도. ‘몸집에 비해 힘은 평균인가.’ 물론 이는 2등급 몬스터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 이 정도면 3등급 중에서도 물리 평타 딜 하나는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오우거와 견줄 만하다. ‘문제는 스킬인데…….’ 촌장의 책에 기록된 이놈의 스킬은 [거대화]를 포함해 세 개였다. 하지만……. ‘분명 더 있겠지.’ 3등급 몬스터부터는 액티브 스킬만 대여섯 개씩 지닌 놈들이 수두룩하니까. 애초에 얘의 경우엔 패시브도 밝혀지지 않았고. ‘과연 패시브 스킬이 뭐려나.’ 제발 방패바바가 쓸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이라면 좋겠—. 「3등급 시공 마법 [목표물 지정]을 시전했습니다.」 콰아아아앙-! 그때 놈이 축구공을 차듯 나를 발로 차는 탓에 몸이 위로 떠올랐다. 물론 그렇게 높이는 아니었다. 공에 비유하자면, 나는 모래가 가득 들어간 공이거든. 쿠웅.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착지하는 몸. 그때 물 위에서도 지원이 이어졌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4등급 탐지마법 [영혼의 윤곽선]을 시전했습니다.」 일단 시작은 [영혼의 윤곽선]. 바다가 배경인 6층에서 특히 유용하게 쓰이는 그 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걸고 나면, 바다 아래 숨어도 물 위에서 형체를 훤히 볼 수 있다. 지금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듯. [우어어어어어어어-!] 마치 열화상 카메라 너머로 보듯, 형형색색의 빛깔로 빛나는 거인. 표적이 확인된 즉시, 물 위에서 다양한 원거리 공격들이 쏟아져내렸다. 「샬롯 앰블럿이 4등급 공격 마법 [나선송곳]을 시전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영원의 쇠약]을 시전했습니다.」 「가르톤 컬트너가 [투석포]를 시전했…….」 「…….」 못 본 스킬들이 많은 걸 보니, 대부분 아르민 탐사단의 스킬인 거 같은데……. ‘하긴, 우린 원거리가 부족하니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건 에르웬과 베르실뿐. 어찌 된 게 나머지는 전부 다 근접 계열이다. 이것도 차차 개선을 해나가야 하는 부분이겠지. [우어어어어어어어—!!!] 물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놈이 흉포한 포효를 내지른다. 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탐사단 측 인원과 합도 제대로 맞춰보기 전. 심지어 이렇게 수중 전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보는 수밖에.’ 그렇게 각오를 다 잡으며 본격적으로 레이드를 시작해보려는 차였다. [우어어어어어어어—!!] 내가 한참 위로 올려다봐야 할 거인이. 저 체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 나는 허망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쿠웅, 쿠웅, 쿠웅-!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놈은 뛰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의 정반대편으로. *** ‘도망… 쳤다고……?’ 처음엔 뭔가 스킬의 준비 동작인가도 싶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뛰어서 사라진 녀석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뭐지 이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야 지금 내 위협 수치면 2등급 몬스터라도 어그로가 풀릴 수준이 아니니까. 물론 고블린처럼, 몬스터들도 생명력이 바닥을 치거나 죽을 위기를 느끼면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를 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딜을 넣기도 전이었는데…….’ 진짜 뭐지, 저 새끼는? 덩치는 산만한데, 쫄보 특성을 갖고 있나? 지하 1층에 내려온 뒤로, 내 미궁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거의 매일같이 발견되고 있었다. ‘…일단 올라가자.’ 배에서 내려준 특수 제작 탐사 로프로 몸을 돌돌 감고 아래로 세 번 잡아당기자 위에서 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올라온 바깥. “아저씨! 괜찮으세요?” 갑판에 올라 아멜리아가 준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고 있자니, 에르웬이 달려왔다. “걱정 마라. 딱히 다친 곳은 없으니까.” “특이한 개체네요…….” “도망친 놈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저쪽 상황은? 얼마나 다쳤지?” “아, 그게……! 그런 얘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어서…….” 두 척의 배 간에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냥 [거대화]를 풀고서 점프를 뛰어 넘어갔다. “나,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다. 너희는?” “저희도 모두 무사합니다. 다만… 배가 이렇게 돼서 정박해서 제대로 수리를 하기 전까지는 운항이 어려울 듯합니다.” “그거야 우리 배로 넘어오면 되니 걱정 마라.” “아……. 감사합니다.” 이후 배를 잃은 탐사단의 멤버들을 우리 배에 태운 채로 항해를 이어나갔다. 우리 배가 나름 중형선으로 분류되는 선박이긴 해도, 27명이나 타고 있자니 비좁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인원이 더 늘면 어떡하지?’ 그때는 분명 배가 더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뮐 아르민이 내게 다가와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남작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만약 저희끼리 이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이번 해프닝이 뮐의 심경 변화에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하하, 동료끼리 뭔 감사 인사냐.”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건을 더 낮춰도 따라올 거 같은데?’ 음, 그래도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말을 꺼내보—. “아저씨!! 거, 거인들이에요! 거인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들고 있어요!!” “…응?” 전망대에서 전해진 소식에 나는 서둘러 갑판으로 향했다. [거대화]를 켤 것도 없이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거인들이 보였다. 수심이 옅어서인지, 생선아가리 같은 얼굴만이 물 위로 떠 있는 상태였는데……. ‘이건 뭐 갸라도스도 아니고.’ 일단 둥둥 떠 있는 대가리들의 숫자를 세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이라……. 참고로 그중에는 아까 우리와 싸우다 도망친 녀석도 있었다. 걔 혼자만 [영혼의 윤곽선]으로 아래까지 표시가 되고 있었거든. ‘친구를 부르려 도망친 거였나?’ 설마, 집단 생활을 하는 개체였을 줄이야.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은 것과 별개로,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 “아우옌! 추진기에 마석을 전부 때려박아라!” 당장 튀어야 한다. 524화 거인섬 (3) 6층에는 무풍지대라는 곳이 존재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며 해류가 없다시피해 그곳을 지나기 위해선 마공학 추진 장치가 필수인데……. 이 추진 장치는 무풍지대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원활히 사용된다. 그야 항해를 하다보면 가속도가 필요한 상황이 제법 있으니까. 바로 이렇게. 위이이이이잉-!! 모아둔 마석을 추진 장치에 쏟아부은 즉시. 배 하단부에 달려 있는 모터가 작동하며 굉음이 터져나온다. 또한 그와 동시에. 솨아아아아아아아-! 일반적인 항해로는 만들어낼 수 없을 만큼 세찬 물살을 뿌려대며 뱃머리가 앞으로 나아간다. “돛을 접어라!” 활짝 펼쳐져 있던 돛까지 접자 속도는 더욱 올라갔다. 추진 장치를 켠 상태에선 돛이 방해가 될 때가 많은 탓이다. “우, 우어어억!!” “다들 뭐든 잡아라!” 속력에 비례해 크게 흔들리는 갑판 위. 다들 돛이나 난간을 꽉 쥐며 튕겨나가지 않도록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저씨, 이제 녀석들이 보이지 않아요!” 점점 멀어지던 거인놈들의 대가리가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엔 열심히 뒤따라오는가 싶더니, 따라잡을 속도가 아니란 판단이 들자 포기를 한 모양. ‘따돌린 건가…….’ 물론 한시름 놓았을 뿐이지,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단장님, 추진 장치는 어떻게 합니까?” “계속 켜둬라. 아직 놈들의 영역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난다.” “예.” 이 은빛 바다는 각 해역별로 나타나는 마물이 다르다. 바위섬에서 도서관섬으로 가는 항로에는 맥구리들이 서식했고, 인간섬으로 가는 길엔 텐타쿨란이 있었다. 그런 패턴으로 보건대,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해역은 히프라마전트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는 계층이란 말이지.’ 어디선 7등급 수준이 나오고, 어디선 4등급이 나온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한데, 2등급으로 추정되는 마물이 일곱 마리? 사실상 이쯤 되면 그냥 죽음의 바다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다. ‘생각해 보면 1등급 몬스터도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고…….’ 너무 성급하게 지하 1층에 내려왔나 싶지만, 그런 후회는 서둘러 지워냈다. 애초에 내 탐사는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온갖 미지와 위험이 가득한 장소인 만큼, 살아서 되돌아가기만 한다면 큰 보상이 있을 거다. 암, 지금까지 얻은 정수들만 팔아도 얼마인데? ‘…돌아갈 방법을 최우선시 하자. 돌아가서 장비를 싹 업그레이드하고서 다시 내려와도 되는 거니까.’ “아우옌, 지금 위치가 어디쯤이지?” “갑자기 속도를 올린 바람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 계산대로라면… 목적지 부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적지 부근이라니. 그럼 6시간 거리를 2시간 만에 주파한 셈인가? 추진 장치의 성능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내심 걱정도 됐다. 이 장치의 가성비가 구린 건 워낙 유명하니까. “마석은 얼마나 썼지?” “제게 넘겨주신 것들 중에서 9할이 넘게 소모됐습니다.” 쉽게 말해, 이번 탐사 중에 획득한 마석 중 4분의 1을 고작 2시간 동안 태웠다는 뜻. ‘돈으로 환산하면 2천만 스톤 정도 되겠네…….’ 구체적인 숫자를 떠올리자 배가 아프다 못해 쓰라렸지만, 그래도 2천만 스톤으로 목숨을 샀다고 생각하니 조금 나았다. 마석이야 앞으로 더 캐면 되는 거고. “그럼 항로를 다시 재계산해야 하니… 집중을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방해해서 미안하다.” 이후 아우옌은 지나가며 몇 번 본 항해 도구를 꺼내 조물거리며 배를 몰았고, 실제로 머지않아 섬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뮐 아르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분… 아우옌 록로브 씨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굉장한 실력자로군요. 왜 저런 사람의 이름이 도시에 알려지지 않았는지가 의문일 정도로.” 뮐은 그리 말하며 내게 좋은 항해사를 동료로 두었다며 칭찬을 거듭했는데, 딱 봐도 그냥 하는 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저희 탐사단 내에는 항해사가 따로 없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겸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만. 태양도, 별도 없는 이곳에서 그렇게 속도를 올리고도 제대로 길을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 그러냐……?” “예. 지금까지 그리신 항해도 역시 엄청나게 정교하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밑에서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진심이 묻어나는 극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달까? “영웅 주위로는 사람이 모인다더니, 역시 옛말이 틀린 게 없군요.” “크흠…….” 나는 그냥 약탈자를 때려잡다가 죽이기 아까워 데려왔을 뿐인데……. ***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다만 곧장 배를 대는 대신, 섬 주위를 한 바퀴 크게 돌며 섬을 관찰했다. 그리고 절벽으로 이뤄진 북쪽이 아닌 남쪽 해안가에 배를 댔다. “어떤가 뮐. 우리가 잘 찾아온 거 같나?” “예. 일단은 그들이 말한 특징들과 전부 일치합니다.” 인간섬의 열 배 정도는 되어보이는 듯한 섬. 가장 큰 특징은 해안가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었다. “배를 탄 채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엄청나게 크네요.” “우오… 목이 아플 정도다!” 아무렇지 않게 자라 있는 나무들 하나하나가 미궁에서 본 그 어떤 나무보다 거대했다. 아파트로 치면 거의 10층 높이는 될 거 같은데……. “저…….” 주변 지형 조사를 하며 슬슬 이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던 때, 누군가 내게로 다가왔다. 아르민 탐사단 소속의 마법사였다. “저… 그게…….”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라.” “혹시 나무를 조금 캐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나무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어딘가 나를 어려워하는 눈치면서도 눈을 잔뜩 빛내며 그리 묻는 마법사.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최근에 플레이어 출신인 베르실이랑만 다녀서 그런지 꽤 낯설었다. “어쩌면 굉장히 값어치가 있는 소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남작님께도 큰 이득이 될 것이고요…….” “저런 크기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아주 조금만 떼어내면 됩니다.” “뭐, 그렇다면야.” 내친김에 아이나르를 시켜 나무의 표본을 채취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베르실과 다르게 얘네는 진퉁 마법사이니, 탐사 도중에도 뭔가 발견해낼 수도 있다는 판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내 나무 껍질을 포함해 일반적인 통나무 하나 정도의 양을 채취한 마법사는 금쪽이라도 받은 듯 기뻐하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돌아가 다른 동료 마법사들에게 가서 환하게 웃으며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구해왔군!” “어서 밤이 됐으면 좋겠어요. 연구해보게.” “후후후……. 다들 잊지 마시오. 이곳에서 행한 모든 연구는 공동 저자로 남기기로 한 것을.” 쟤네는 저게 그렇게 좋은가? 아무튼, 마법사들의 복지도 어느 정도 챙겨준 뒤에는 진형을 정비하고 섬 내륙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뭐가 나올지 모른단 생각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탐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무언가 우리를 향해 달려 오고 있다.” 섬에 들어온 지 장장 30분 만에 처음으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졌고, 이에 모두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전투 대기 태세로 전환했다. 하지만……. “……?”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우리는 모두 다 멍해졌다. [거대화] 상태에서는 종아리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체격. 녹색 피부와 벌어진 주둥이.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꽉 쥔 조각칼까지. [그륵?!] “……고블린?” 설마 여기서 고블린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살짝 긴장했던 몸에서 공기가 빠져가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고서 모두에게 외쳤다. “방심하지 마라! 혹시 외형을 바꾸는 종류의 이능을 가진 개체일 수도—.” 「고블린이 [덫 생성]을 시전했습니다.」 “…응?” 이내 나타난 고블린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덫을 만들어 앞에 툭 하고 던진다. 그리고……. “…….” […….] 묘한 정적 속에서 대치 상황이 이어진다. “저놈…….” “설마 우리가 밟기를 기다리는 건가?” 나는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다. “다들 방심은 금물이다… 고블린은 이렇게까지 지능이 낮지 않으니까. 분명 우리가 알던 고블린과 다를 가능성이 분명하게 존재—.” 그때 누군가가 쏜 화살이 날아가 고블린의 머리에 박혔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즉사 판정이 뜨며 고블린의 육신이 빛이 되어 흩날린다. “…….” “……?” ……뭐야, 진짜 평범한 고블린인 거야? 난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지? 그렇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괴감이 차오르던 차였다. [끄륵!!] [그르륵!! 끄륵! 끼르윽!!] 동료의 죽음을 직관한 고블린들이 극도로 흥분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우우웅-! 자그맣던 고블린의 몸집이 부풀었다. “…어?” 이제는 내 종아리까지는 충분히 오는 크기. 거기에 근육도 좀 더 붙은 거 같은데……. 「고블린이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뭐야 이거. *** 고블린들을 전부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얘네가 1.5배 커진다고 해서 고블린이란 종족 값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전투 자체는 손쉬웠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전투가 남긴 충격은 상당히 컸다. “방금 본 그거…….” “혹시…….” 고블린이 남긴 마석을 수거할 정신도 없이 모두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거대화]를 가진 나인 만큼, 내 눈이 가장 정확할 거라 본 거겠지.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 그런가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다들 어색하게 말을 아꼈다. 딱 한 명, 아멜리아만 빼고. “확신하는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다들 네 생각이 궁금할 뿐. 네가 보기엔, 그게 [거대화] 같았나?” “……그래.” “신기한 일이군. 저렇게 여러 마리가 다 상위 변이종이진 않을 텐데.” 확실히 이번에 만난 고블린은 굉장히 상식에서 벗어난 녀석들이었다. 그야 이놈들은 신종 몬스터도 아니니까. ‘그런데 다른 개체의 스킬을 쓴다라…….’ 이게 방금 본 고블린만의 특징인 걸까. 아니면, 다른 놈들도 그런 걸까. 그러한 의문은 이어진 탐사를 통해 머지않아 해소할 수 있었다. 「트롤이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웨어울프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아이언골렘이 [거대화]를 시전했…….」 「…….」 도중에 만난 몬스터들 모두가 기본 능력에 플러스 알파로 [거대화]를 사용하는 특징을 보여줬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섬.’ 분명 이 섬에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거겠지. 다른 섬에서 만난 몬스터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이 섬만의 필드 효과 같은 건가?’ 일단 그 추측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확신할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이번엔 마법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정수는 어떻지?” “모든 파장 수치와 패턴이 기존의 정수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1층에서 만난 고블린의 정수랑 다를 게 없단 건가?” “예… 일단 수치만 보면 그렇습니다. 이 정수를 먹는다고 [거대화]는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하신다면… 지원자를 뽑아 시험해보는 것도 가능하긴 합니다마는…….” “됐다. 그렇게까지 할 만큼 중한 건 아니니.” 이후 우리는 다시금 탐사를 이어나갔다. 탐사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새로운 섬의 정보를 얻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섬에 갇힌 탐험가들을 찾아내 구조하는 것. 전자의 경우에는 아직 막연하긴 하였으나, 다행히 후자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일찍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족적이군요. 마물이 아닌 사람의.” 탐사 중에 발견한 어느 누군가의 신발 자국. 아르민 탐사단의 멤버 중 하나의 조사에 따르면 라프도니아의 한 양품 가게에서 제작된 신발이라 하는데……. “그는 한때 왕실 조사부에 몸을 담은 적이 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전적이 화려한 친구였군. 그래서 이 흔적이 언제 생긴 건지도 알 수 있나?” “한… 다섯 시간 정도 지난 듯합니다.” 그래, 내심 그동안 다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생존자가 있기는 했구나. 525화 거인섬 (4) 약 다섯 시간 정도 전에 생긴 사람의 흔적. 이 흔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이 섬에 다른 탐험가가 더 들어와 있을 리도 없으니까. 분명 조난자들 중 일부이겠지. “총 인원은 두 명. 족적이 큰 것으로 봐서 둘 다 남자인 듯합니다. 또한, 굉장히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는 중인 듯하군요.” “은밀하게? 추적이 어렵단 뜻인가?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족적 자체는 지우려는 시도가 없으니까요. 단지, 자세를 낮추고 사방을 주시하며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나아간 흔적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마 그들이 경계한 건 마물들이었겠지요.” 미하일 렉터스. 전 왕실 조사부 요원 출신이라는 중년 탐험가. 아무래도 아르민 탐사단 내에서는 이 아저씨가 아멜리아랑 비슷한 포지션인 듯한데……. “추적은 저자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거다. 왕실 조사부 출신이라면, 추적 만큼은 나보다 한 수 위일 테니.” 아멜리아가 약한 소리를 뱉는 걸 보니, 조사부 요원이라는 전적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긴 한 모양. “렉터스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남작님.” “추적은 네게 맡기겠다.” “예. 실수 없이 완수하겠습니다.” 이후로는 내가 선두에 서고, 이 아저씨가 내게 방향을 알려주는 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흔적을 따라가던 우리는 잠시 추적을 멈추고서 정지했다. 예상치 못한 것과 조우한 탓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발견이라 해야 하나? “저건…….” 숲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체. 참고로 사람이 아닌 거인의 시체였다. “바다에서 보았던 그 거인이로군요…….” 한참 전에 죽었는지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고 썩은내가 풀풀 풍긴다. 거인은 대체 무엇에 죽은 걸까. “상흔을 보니……. 사람이 아니라 같은 마물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역시 우기 때 쏟아져 내린 다른 몬스터가 범인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얀델, 표정이 안 좋은데. 문제라도 있나?” “그야… 시체가 남아 있지 않나.”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이놈한테서는 정수를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아…….” 패시브는 뭘지, 스탯은 어떨지. 혼자 엄청 기대하고 설레발 쳤는데, 결국 전부 다 김칫국 마시는 일이 됐구나. 시체를 보자마자 온몸에 기운이 쫙 빠졌지만, 나와 다르게 환호를 터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거인! 거인의 시체다!” “그냥 거인이 아니오! 남작님께서도 말하지 않았소? 이 거인의 이름은 히프라마전트요.” “다들 뭐 해요? 더 부패하기 전에 어서 뗄 것부터 떼야죠!” 탐사단 소속의 마법사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손에 넣은 것처럼 헤벌레하며 거인의 시체를 해부했다. “잠깐! 조심스럽게! 뗄 건 떼더라도 원래의 신체 구조가 어떤 모습인지는 제대로 기록하시오!” “위장! 위장에는 뭐가 들어있죠? 아니, 애초에 위장이 있기는 한가요?” 아주 그냥 얘들은 지옥 속에서도 처음 보는 책 한 권이면 행복해할 거 같다. “참 열정 있는 마법사를 동료로 뒀군?”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탐사단의 단장인 뮐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돈도 안 되면서 위험한 일만 찾아다니는 저희 탐사단에 들어온 마법사들 아닙니까. 하하…….”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 마법사들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이러한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마법사들이 거인 시체를 뜯고 맛보며 즐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가죽은 어떻지?” “…굉장히 무릅니다. 기초 반응을 실험했을 때, 항마의 성질 또한 보이지 않았고요.” “장비로 만들기엔 무리가 있다는 건가?” “예…. 소재로 쓰기에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해석하자면, 가죽은 딱히 소재의 가치가 없다는 뜻. “그럼 뼈는?” 내 다음 물음에 마법사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답했다. “아! 뼈는 아주 단단하면서도 가볍습니다. 또한 뼈 자체도 엄청나게 커서 실력 좋은 대장장이라면 잘 엮어서 방어구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마는…….” “오, 정말인가? 소재로 치면 몇 단계 정도 될 거 같나?” “어… 그게… 가볍기는 하니, 평범한 강철보단 소재로서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뭐야 그게. 내심 기대했던 뼈 쪽도 별거 없었다. 강철보다 조금 나은 정도면 당연히 값도 싸고 제작도 편한 강철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 그래도 뼈로 장비를 만들 시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녹도 슬지 않는 데다가…….” 마법사는 시간과 예산을 더 원하는 연구원처럼 내게 뭐라뭐라 어필을 했지만, 딱히 귀 기울여 들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알겠다. 특이 사항이 발견되면 알려줘라.” “예……!” 이후로는 시체엔 관심을 접고 주변 경계나 하며 시간을 보냈고, [거대화]를 쓰며 달려드는 마물을 한 열 마리 정도 잡았을 때쯤이었다. 타닷. 수풀 너머에서 들린 기척에 습관처럼 망치를 휘두른 순간. “으, 으악!” 들려온 비명에 서둘러 망치를 멈춰세웠다. “…끄흑, 끄허어… 허억, 허억…….” 사람이었다. 그것도 익숙한 얼굴의. *** 정확히 정수리 위에서 멈춘 망치. 그리고 이에 힘이 풀린 듯 뒤로 발라당 넘어져 사레가 걸린 듯한 소리를 뱉어내는 사내. 그 사내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베르실이었다. “미르타네 씨?”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지하 1층에 내려올 때 전사가 함께 들어오지 못했다는 5인 팀. 나중에 인간섬에 갔다가 분란이 생기고 헥츠 클랜에 의탁을 했었다고 그랬다. “…끄허, 허어…….” “진정하세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해요.” “고, 울랜, 드님……!” 이내 베르실이 등을 두드리자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는 납짝 엎드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도, 도와주십시오. 베리온이 마물들과 싸우다 크, 크게 다쳐서…….” 이제 보니 그의 등 뒤에 작은 체구의 사내가 포대에 묶인 채로 업혀져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포대를 풀고 사내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막 신관을 데려오려던 찰나. “…이미 늦었군.” 귀를 대고 호흡을 확인한 아멜리아의 말에 사내가 무너졌다. “그, 그럴 리가……! 부, 분명 방금까지… 얘기를 했는데……!” 이내 사내는 아멜리아를 밀치며 동료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애써 사실을 부정하며 다시금 자기 손으로 직접 호흡을 확인했다. “…….” 무례한 태도였으나 아멜리아는 그런 사내에게 별말하지 않았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탐험가들이라면 다들 한 번씩은 있는 법이니까. 미궁에서 동료를 잃는 경험이. 빠르든 늦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진정이 좀 됐나?” “예… 우선 이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동료의 일은 유감이다. 수습은 할 수 있겠나?” “예.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왜곡 마법만 좀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물론이다.” 이후 사내는 동료의 시체에서 장비를 비롯해 모든 유품을 수거했고, 그 다음에는 시체에 왜곡 마법을 걸고서 아공간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에는 좀 그랬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조금 사정이 좋았다. 그때의 우리는 마법사가 죽은 상황이었으니까. 시체를 미궁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그럼 이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수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도리는 다 했다고 봐도 좋을 터. “다른 이들은 살아 있나?” “…살아남은 이들끼리 은신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중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은신처의 위치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았다. “은신처는 어떻지? 안전한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래? 근데 너희 둘은 왜 밖에 나와 있었나?” “이 섬에서 탈출하려면 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단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발이 빠른 저와 베리온이 차출됐지요.” 그래, 일종의 정찰단이었던 거구나. 쩝, 그냥 그 안에 숨어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냥 남은 이야기도 은신처에 가서 듣기로 하며 말을 아꼈다. 은신처가 가까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안내를 받고 이동한 뒤 머지않아 수풀 속에 가려진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마법을 써서 벽으로 위장을 해둔 상태네요.” “지금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사내가 바위를 두드리며 안쪽에 신호를 보냈고, 잠시 기다리자 벽이 사라지며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미르타네! 왜 이렇게 늦은 것……. 야, 얀델 남작님?” 걱정 시킨 동료를 질책하다가도 날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헥츠 클랜의 단장. “오랜만이군. 와이트 헥츠.” “신이시여……!” “들어가도 되겠나?” “무,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일행을 모두 이끌고 들어간 동굴 은 밖에서 봤던 것보다 내부가 훨씬 넓었다. “저… 정말로 놀랐습니다. 설마 얀델 남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그러냐? 의외군?” “의외… 라니요?” “나랑 같이 온 탐험가들에 대해서 가장 먼저 물을 줄 알았는데.” “아……! 그, 그것도 그렇군요!  분명 그때 내려온 건 저희 60명이 전부였는데…….”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그리 말했지만, 왠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다. 그럼 얘가 구조 요청을 한 악령인 건가? 뭐, 굳이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니기에 말꼬리를 잡고 캐묻진 않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와이트의 질문에 나는 대강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와중에도 도시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얼마 전에 한 번 더 미궁이 열린 것. 그리고 지하 1층에 탐험가들이 추가로 유입된 것까지. “너희 중 한 명이 악령들의 집회에서 구조 요청을 했고, 그게 도시에서도 퍼졌단 모양이더군. 덕분에 이 섬의 위치를 알게 되어 찾아올 수 있었다.” “그, 그런…….” “악령이 누군지 짚이는 자가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하, 하지만… 어쩌면 이미 죽은 자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군요.” “오늘 죽은 자처럼 말이지?” “…….” 와이트 헥츠는 동료들을 지키기 위함인지 입을 꾹 다물었고, 이에 나도 떠보는 걸 그만뒀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나쁜 버릇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 나도 모르게 떠보는 말을 하게 된다. “됐고, 그 얘기나 해봐라. 우리와 헤어진 뒤에 어떻게 된 거지?” 악령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다른 주제를 꺼냈다. 다만, 이들의 탐사기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우리가 떠난 도서관을 탐사했지만 발견이랄 게 없자 계획을 바꿔 다시 바다로 나왔다던가? “그렇게 새로운 지역을 찾아서 무작정 항해를 이어가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마물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더군요.” 안전한 마을에서 우기를 보냈던 우리와 다르게, 이들은 바다 위에서 우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배가 부서지기 직전에 이 섬에 도착. 그다음에는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이 동굴을 발견하고서 숨었다고 한다. ‘어쩐지 숫자가 절반도 안 되더라니, 우기 때 다 죽었나 보군.’ 그나마도 몇 시간 만에 숨을 곳을 찾았기에 망정이지,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큰일을 치렀군. 고생 많았다.” “저… 남작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밖에서도 시간이 흐르는 거라면,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 터인데……. 혹 찾으셨는지요?”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다.” 내 솔직한 답변에 와이트는 입술을 짓누르더니,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없지는 않겠지요?” “그래. 분명 있을 거다. 나는 반드시 찾아낼 거고.” 기댈 곳을 찾던 이에겐 그 무엇보다도 위로가 되어줄 그 말. “……저희 역시 남작님을 돕겠습니다. 비록 큰 힘은 아닐지라도.” 이에 와이트는 믿을 건 나뿐이라는 듯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그가 이끌고 있던 탐험가들의 숫자를 세며 답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함께 힘내보자.” 무급 노예 12명이 생겼다. *** 평소에 야영을 하던 시간까지는 아직 남았지만, 오늘 탐사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다들 알아서 쉬고 있어라. 내일은 어찌 될지 몰라도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머무를 테니.” 인원이 추가된 만큼, 정비를 한 번 하고 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사전 조사를 할 것도 있고. “와이트. 이 섬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좀 있나?” 거의 동굴에 숨어지내긴 했지만, 일단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이 섬에 방문한 탐험가인 만큼 와이트의 이야기는 도움이 됐다. 현재 우리는 마물들이 [거대화]를 쓴다는 것 외에는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남작님께서 말하신 우기… 가 끝났을 때, 밖에 조사를 나갔던 베리온이 거인 괴물을 멀리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인 괴물. 다만 특징을 들어보니 히프라마전트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처음 목격하였을 때 신장이 40m는 족히 됐으며…….” 히프라마전트는 저것에 반도 안 되는 크기일뿐더러. “발크수스를 양손으로 찢어발기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2등급 몬스터를 그렇게 찢어 죽일 무력은 절대 안 된다. “솔직히 말해, 저희는 환상 계통의 이능을 쓰는 마물을 만났던 건 아닐까도 싶습니다마는……. 일단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할 듯싶어서 말씀드립니다.” “그렇군. 잘했다. 일단 알고는 있지.” 이미 죽은 사람이 목격한 거라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기에 일단 이 문제는 킵해두고서 나머지 얘기를 들었다. 정찰단을 통해서 그린 주변 지도라든가. 아직 우리도 만나보지 못한 신종 몬스터라든가. 내일부터 다시 재개될 탐사에서 꽤 도움이 될 정보가 여럿 있었다. 뭐, 화룡점정은 따로 있었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작님께 하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여줄 것?”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이후 와이트를 따라 들어간 동굴 안쪽의 작은 공동에는 인위적인 조형물이 하나 존재했다. 나는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이건…….” 포탈 비석이었다. 526화 거인섬 (5) 동굴의 내부 공간에서 마주한 포탈 비석. 발견한 즉시 홀린 듯이 다가가 손을 올려봤지만 비석은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남작님의 손으로도 안 되는군요.” 뭐, 내심 예상하던 일이다. 포탈 개방에 특별한 조건을 요구하는 건 이곳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뭔가 준비물이 필요한 거겠지. 스윽. 비석과 땅의 접합부도 확인을 해보니, 이미 주변에 땅이 파여진 흔적이 여실했다. ‘이번에는 아래에 글귀 같은 것도 없네…….’ 쩝, 그럼 그냥 맨땅에서 헤딩을 계속해야 한단 건가? 일단 최초 발견자인 와이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비석은 매일 확인했나?” “예. 발견한 이후로 매일 이곳으로 와서 손을 가져다댔지만 반응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특정 날짜에만 비석이 반응하는 건 아니라는 뜻. “내게 말해야 할 만한 특별한 현상이나 그런 건 없었고?” “예.” “포탈 비석을 찾아냈으면서, 아까는 왜 그렇게 회의적인 반응이었던 거냐?” 조금 전에 생긴 의문이었다. 좀 전에 나를 처음 봤을 때, 이 녀석은 마음속 불안을 표출했다. 탈출할 방법이 정말로 있기는 한 건지, 그 존재 여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면, 그것은 어째서였을까.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녀석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 비석 너머에 있는 곳이 바깥일지 아닐지.” “아…….” 확실히 나도 비석을 보자마자 했던 생각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발이 닿은 미지의 계층인 만큼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저 포탈 비석을 작동시켰을 때. 우리가 기대한 대로, 1층이나 도시로 돌아가게 해주는 포탈이 열릴 수도 있을 테지만……. 전혀 다른 공간과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하 2층이라든가 말이지.’ 물론 그럼에도 이 비석을 작동시킬 방법을 찾는 게 최우선이다. 탐험가가 정답을 알아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닥치는 대로 상호 작용을 다 해보는 것뿐이니까. “이 비석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되지?” “함께 지내던 자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럼 굳이 보안을 유지할 필요는 없겠네. “일단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나는 이쯤에서 비석 조사를 끝내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르민 탐사단을 포함해 모두에게 비석에 관한 얘기를 공유했다. 원래 이런 데는 집단 지성이 필요하거든.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비석이라…. 그래도 드디어 단서는 찾아냈군?” “그러니까 다들 자유롭게 말해봐라. 이 비석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 40m가 넘는다는 거인을 잡으면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 도서관의 책장 끝에 뭔가 있을지도…….” 딱 잘라 주제를 정해주자 베르실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머리에 새겼다. “저… 촌장이라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지요?” 그래, 이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함께 대화를 듣고 있던 뮐 아르민이 조심스런 말투로 내게 물었다. “촌장이… 누굽니까?” “어차피 언젠가 그 섬에도 들를 테니 그때 설명해주마.” “예…….” 그렇게 브레인 스토밍 시간이 끝난 후. 아르민 탐사단의 마법사들과 몇몇은 비석을 조사하고 싶다며 떠났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동굴 내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음 날. 새롭게 충원된 12명의 무급 노예들의 인력 배치를 끝내고 다시금 탐사를 재개했다. 이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벌써 9일 차인가…….’ 내가 탐사를 시작한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59일 차겠지만, 새로이 열린 미궁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아무튼, 14일 차가 끝나면 우기가 시작되니 그 전에 최대한 섬 탐사를 해둬야 하는 것. ‘우기가 까다롭긴 하단 말이지…….’ 또 일주일 씩이나 발이 묶여 있을 걸 생각하면 벌써 시간이 아깝다. 아니, 심지어 일주일도 아니다. 우기 직후엔 몬스터들이 가득해서 정상적인 탐사가 어렵고, 우기 직전은 우기를 피할 장소로 이동해야 하기에 탐사가 스톱된다. “얀델, 다음 우기에는 어쩔 거지? 이들이 찾은 아까 그 동굴에서 보낼 건가? 아니면, 그 마을로 돌아가나?” “마을로 돌아가는 쪽으로 생각 중이다. 어차피 촌장에게 물어볼 것도 있으니까. 은사자 클랜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다면 인력도 더 보충할 수 있을 테고.” “그럼 사흘 뒤에는 섬을 떠나야겠군.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있으니.” 이 섬을 탐사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사흘. 빠듯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사람 숫자가 늘어서 탐사 자체는 훨씬 더 빨라졌다. 자동 사냥 모드를 켜두고 이동하며 맵을 밝히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우측에 트롤 무리입니다……!” “테이룬 에르뷔아스!” 퍼엉-! 5등급 이하의 잡몹들은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원거리 딜러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접근도 제대로 하기 전에 빛이 되어 사라진다. 탐험가들이 상층부터는 거의 반드시 클랜 단위로 움직이는 이유다. 인원이 늘면 늘수록 탐험이 쉬워지니까. 뭐, 그만큼 수익도 배분을 많이 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셰뤼튼. 지도 제작은 잘 되어가나?” “예. 한번 보시겠습니까?” 참고로 지도 제작은 이젠 내가 하지 않는다. 헥츠 클랜의 궁수가 나보다 몇 배는 더 잘하는 거 같아서 아예 일임해버렸다. 또한, 정찰조도 운용하고 있다. 왕실 조사부 요원 출신인 미하일 렉터스에게 사람 몇 명을 붙여줬더니, 이제는 탐사 내내 본대 주위를 수색하며 모든 정보를 사전에 내게 가져다 준다. 바로 이렇게. “남작님, 전방 3분 거리에 넬파르돈 셋이 매복 중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기는. [거대화]를 하는 넬파르돈이 그것도 셋이라니? “피해간다면 많이 돌아가야 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회하도록 하지.” 넬파르돈 같은 경우엔 딱히 정수가 필요 없고, 이미 도서관에서 경험치 수급을 마친 개체이기에 과감하게 스킵. 그런 식으로 잡을 건 잡고, 피할 건 피하면서 이동을 하니 훨씬 더 효율적으로 더 넓은 지역을 탐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남부는 이 정도면 끝났다고 봐도 되겠네.’ 90% 이상 맵을 밝힌 남부를 떠나 동부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은신처로 돌아가거나, 이곳에 야영지를 꾸려 휴식을 취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을 무렵. “남작님.” 정찰을 나가 있던 미하일 렉터스가 다급하게 본대로 복귀했다. “전방 4분 거리에 히프라마전트. 그 거인이 혼자 잠에 들어 있습니다.” 흐음……. 이걸 어떻게 한담. *** 히프라마전트. 배를 타고 이 섬에 오는 중에 만났다가 놈이 친구들을 불러오는 바람에 부리나케 달아나야만 했던 바로 그 녀석. 촌장의 책에서는 놈이 처음 발견했을 때 바다에 반쯤 몸이 잠긴 상태였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아예 그냥 해양 몬스터인가도 싶었는데. ‘바다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닌가보네.’ 이렇게 육지에서 발견이 된 걸 보니 그냥 수륙 양용이 자유로운 개체인 듯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혼자라고?”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놈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그 주변을 수색해봐라. 혹시 그때처럼 동족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정하지.” “예.” 우선 미하일 렉터스에게는 정밀 수색 명령을 내린 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생각을 정리했다. 이놈이 시체를 남기는 종류의 개체인 걸 알게 된 후 열정이 확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한 번쯤 잡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야 이 계층에 머무르는 동안 언젠가는 또 마주치게 될 테니까. ‘혼자 있을 때 잡아보면서 경험을 익혀두는 편이 좋겠지.’ 패시브는 뭔지, 확인되지 않은 액티브 스킬이 더 있는지. 그러한 것들을 미리 알아둬야 상대법을 고안하든 말든 할 수가 있다는 판단. “반경 2km 내에는 아무런 마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돌아온 정찰조에게서 소식을 들은 즉시 레이드 준비에 나섰다. 진형을 새로 짰고, 이전처럼 놈이 싸우다 말고 도망치는 상황도 대비를 했다. 그리고……. “자, 그럼 가보지.”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버, 벌써 말입니까?” “놈이 잠에서 깰 수도 있지 않나. 혹시 동족이 돌아올 수도 있고.” 2등급으로 추정되는 마물이어서 그럴까? 몇몇 이들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듯 했으나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건 낭비일 터. 스윽. 이후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놈이 자고 있는 곳까지 이동한 뒤 넓게 산개해 사방을 포위했다. 다만, 마법사를 주축으로 원거리 딜러진들이 ‘아주 강한 선빵’을 준비하던 찰나. [우으……?] 새우잠을 자듯 웅크리고 있던 거인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본다. 소리는 마법으로 차단했으니 그걸 듣고 깬 건 아닐 테고……. ‘…마력을 느낀 건가?’ 뭐가 됐든, 이미 깼으니 더 이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즉시 [초월]까지 연계해서 체급부터 키운 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놈이 제대로 일어서기 전에 정강이 부분에 망치를 냅다 내려찍는다. 콰앙-! 뼈를 부러뜨리거나 하기엔 부족했으나, 몸을 일으키던 찰나의 균형을 흩트려놓기에는 충분한 일격. 쿠우우웅-! 육중한 거인이 바닥에 쓰러지며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깔리며 시야를 방해한다. 전투 중에 흔히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였다. 솨아아아아아-!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은 재빠르게 바람 마법을 써서 먼지를 거둬냈고, 다시금 시야가 확보된 나는 놈에게 달려들어 턱주가리를 망치로 후려쳤다. 그리고 그 순간. [우어어어어어어어어—!] 놈이 정면에서 나를 보며 포효를 내지른다. 어찌나 우렁찼는지 공기가 진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 ‘아오, 깜짝아.’ 일시적으로 온몸에 털이 삐쭉 서며 소름이 돋았단 게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따라서…….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도 놈을 꼬나보며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니었으나, 의외로 사기 진작에는 도움이 됐다. “뭐, 뭣들 하나! 얼른 공격하지 않고!” “다들 침착하고 계획대로만 하면 됩니다!” 와이트 헥츠와 뮐 아르민이 정신을 차리고서 단원들을 지휘했고, 머지않아 원거리 공격이 날아들었다. 화살과 공격계 이능 등등. 대부분은 내가 휘두른 망치처럼 큰 대미지를 입힐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 벌이는 되었다. 「샬롯 앰블럿이 2등급 공격 마법 [섬멸의 창]을 시전했습니다.」 미궁에서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아르민 탐사단 소속 마법사 삼인방의 합동 마법. 푸욱-! 거대한 백색의 창이 거인의 하복부 깊숙이 틀어박힌다. 조금 놀라웠다. ‘저게 관통까지 안 간다고?’ 항마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기본 능력치가 못내 궁금해지지만, 당장 신경 쓸 건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바바리안, 이번엔 너무 날뛰지 말고 천천히—.”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아이나르와 아멜리아를 시작으로 근딜 라인들도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서 놈을 공격했다. 주된 타깃은 놈의 발목 부분. 참고로 이는 내가 미리 내려둔 오더였다. 그도 그럴 게, 뭐 하기도 전에 도망치는 습성이 있는 놈이지 않은가. 미리 기동력을 깎아둘 필요가 있—. “놈이 일어난다!” “무, 물러나라!” 열심히 방해한다고 했지만, 결국 녀석이 완전히 몸을 일으켜고서 두 발로 땅을 짚고 섰다. 그리고……. [우어어어어어어어—!] 내 반대편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한다. ‘뭐 이딴 쫄보 몬스터가 다 있어?’ 어처구니가 없지만, 한 번 겪은 일을 또 당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여기는 그때 그 바다가 아니잖아?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미사일 폭격처럼 쏟아지는 흑빛의 구체. 놀랍게도 놈은 그걸 맨몸으로 처맞으면서도 열심히 내달렸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쿠웅, 쿠웅-! 나는 단숨에 달려나가 비틀거리느라 느려진 놈의 등에 매달렸다. 콰콰쾅-! 콰아앙-! 콰앙-! 정령왕의 폭격이 이어지는 중이었으나, 지금의 내게는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정수빨 다음은 템빨이란 말도 있잖아? No.12 신뢰. 더블 넘버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그 물건. 「결속 상태의 아군이 입힌 피해입니다.」 「신뢰의 빛이 해당 피해로부터 캐릭터를 보호합니다.」 이게 있으면 이런 식의 전략도 가능해진다. 527화 거인섬 (6) 콰아아앙-! 콰앙-! 콰앙-! 흑색 구체가 쏟아지는 것도 모자라, 나까지 몸에 착 달라붙자 녀석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진다. 쿠우웅-! 이번에도 역시나 피어나는 먼지 구름. [우어어어어어어어-!]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망치로 뒤통수를 후리고, 발목을 잡고 들어 올려 다시 바닥에 처박는 등. 놈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최대한 견제했다. “무, 무슨 이런 싸움이…….” “아르민, 우리가 도움이 되겠나?” “우선 지켜봅시다…….”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에르웬의 화살에 세찬 빛이 뿌려진다. 어느새 정령왕을 소환해 MP가 바닥나고, [혼돈회로]가 발동되어 [집중사격] 풀 차징을 하고 나서도 1분이 지났다는 뜻. —————! 화살이 쏘아지며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다. 그리고……. [………!!] 거인의 대가리 정중앙. 사람이었다면 미간에 해당할 그곳을 빛이 관통하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해치웠나?” 다만, 멀리서 지켜보던 탐험가들처럼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 패시브도 모르는 놈이지 않은가. 몬스터 중엔 머리가 댕겅 잘려 나가도 살아남는 질긴 녀석들이 존재한—. “우, 움직인다……!” 후, 그래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우어어어어어어어—!!] 이내 대가리에 구멍이 뚫린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 포효를 내지르며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아까 처음 봤을 때 자고 있던 바로 그 자세. 덕분에 새로운 스킬을 알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패시브에 대한 정보는 아니지만…… 「히프라마전트가 [웅크리기]를 시전했습니다.」 설마 이 스킬을 갖고 있을 줄이야. 일단 서둘러 지시부터 내렸다. “공격 중지!” 간단한 이유다. 이 상태에서는 패봤자 우리 손해거든. 「3분간 모든 내성 수치가 20배 증가합니다.」 「3분간 자연 재생력이 20배 증가합니다.」 「웅크린 동안 흡수한 피해량에 비례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모든 능력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사실상 무적기나 다름없는 바로 그 스킬. 오우거가 가진 액티브 스킬 중 하나로 오우거 레이드를 뛸 때 가장 까다롭게 만드는 바로 그것. 다만 탱커가 쓰기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웅크리기]가 S급 생존기인 건 틀림없지만……. 탱커가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동료가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물론 몬스터에게는 예외인 부분이었다. 1분, 2분……. 시간이 흐르며 머리에 뚫렸던 구멍에 새살이 차오른다. 그리고 정확히 3분이 된 순간. 놈이 웅크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미 보이는 외상은 전부 다 재생이 된 상태의 놈. [우어어……!!] 이내 잠에서 깨어난 녀석은 재차 도망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웅크린 동안 발목에 채워둔 족쇄. 이능술사와 마법사의 구속기. 그리고 내 적극적인 방해에 번번이 가로막히자 놈도 각오를 고쳤다. 콰아아아앙-! 도주는 포기하고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히프라마전트. 그제서야 정상적인 레이드와 비슷해졌다. 전투를 할 때엔 ‘위협’ 수치가 잘 적용되는지 어그로도 제대로 내게 고정된 상황. “공격해라!” 수십 명의 탐험가가 각 진형에서 열심히 딜을 넣기 시작했고, 놈도 각종 액티브 스킬들을 써가며 반격해왔다. 「히프라마전트가 [종말의 포효]를 시전했습니다.」 「히프라마전트가 [중력장]을 시전했습니다.」 촌장의 책에 적혀 있던 광범위 딜링과 CC기. 미리 대비책을 준비해둔 만큼 이 스킬로 인한 피해는 전무했다. 휘유우우웅-!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은 마법사들이 결계를 쳐서 가드. 일정 확률로 범위 내의 적을 끌어당기는 오오라 [중력장]은 끌려갈 때마다 모든 탐험가들이 최우선시 해서 구해내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뮐 아르민이 [과민성 피부]를 시전했습니다.」 「대상이 받는 피해량이 30% 증가합니다.」 「잭슨 잔빌이 [움직이는 표적]을 시전했습니다.」 「이동 중인 대상을 공격 시, 다음 공격이 3배의 피해를 입힙니다.」 「누아 메르보치가 [정밀사격]을 시전…….」 「…….」 그렇게 10분이 넘게 수십 명이서 패고 있자니, 거인놈이 새로운 스킬을 꺼냈다. 다만, 이번에도 패시브는 아니고……. 「히프라마전트가 [신체압축]을 시전했습니다.」 변신기였다. [거대화]와 다르게 몸집이 반으로 작아지면서, 그 크기에 비례해 추가 보정이 들어가는 3등급 스킬. ‘저걸 쓰고서도 나보다 크네.’ [거대화]와 연계해서 사용하며 여러가지 실험을 해본 스킬이기에 대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공격 중지!” 그냥 상대를 안 해주면 된다. [거대화]와 다르게 저 스킬은 지속 시간이 딱 정해져 있거든. 콰아아아앙-! 이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지고 빨라진 거인놈의 주먹. 다만, 나는 옆에서 부담을 덜어주던 근접 계열을 모두 뒤로 물리고서 혼자 놈을 상대했다. 콰직-! 한 방씩 처맞을 때마다 뼈가 아작났지만……. 솨아아아아아—! 지금 우리 원정대에는 힐러가 있으니까. 신관 하나와 치유술사 하나. 둘의 집중 케어가 들어오며, 특수 능력치 ‘수복력’의 영향으로 힐 뻥튀기 효과까지 연계되니 실시간으로 몸이 박살나도 금방 회복된다. 뭐, 선명한 고통은 또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으아아아아아아아!!” 이건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그만. 「[신체압축]이 해제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종의 광폭 패턴이라 볼 수 있을 [신체압축]이 끝나고, 놈의 몸뚱이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따라서 다시금 근접 딜러들도 앞으로 나와서 열심히 딜을 넣었다. 쿠웅-! 이내 발목 하나가 완전히 작살나며 거인놈이 무릎을 꿇었고, 그다음부터는 근접 딜러들도 놈의 급소를 노렸다. 어느덧 만신창이가 된 거인. “거의 다 됐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라!” 명확하게 승기가 기울자 탐사대원들도 슬슬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으나, 나는 초조했다. 그야 벌써 25분이나 지났거든. ‘[웅크리기]의 쿨타임이 30분이었지.’ 고작 5분 뒤면 놈이 또 [웅크리기]를 쓸 터. 그럼 이 짓을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하는데……. 사실 그쯤 되면 레이드는 실패라 봐야 한다. 이번에 MP도 아끼지 않고 쓴 만큼, 다시 HP를 다 깎을 때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딜이 부족하면 못 잡는 걸 알았으니, 다음번에 시도하면 그땐 무조건 잡긴 하겠지만…….’ 암만 그래도 이렇게 실패하는 건 아쉽단 말이지. 역시 그걸 꺼낼 때인가?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그보다 신속했다. “미샤! 에밀리! 합체다!” 애석하게도 현재 우리 팀에서 근접 DPS 1, 2위를 다투는 두 명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으응? 하, 합체?” 미샤는 양손에 장검을 든 채 당황했고, 아멜리아는 저 멀리서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쳐다봤다. 거,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됐으니까 이리 와라!” 그래도 일단 부르니까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달려오기는 했다. 따라서 설명보다는 행동으로 옮겼다. 무언가를 손에 쥔 채로는 그 무엇도 새로이 쥘 수 없기에. 우선 들고 있던 망치와 방패를 버리고서. “으응?” “무슨 짓이냐……!” 남은 손으로 미샤와 아멜리아의 허리를 움켜 쥔다. 그리고……. 스윽. 양손에 검을 쥔 것처럼 미샤와 아멜리아를 잡고 자세를 취한다. 이름하여 바바리안 사무라이 모드. “얀델… 너 설마……!” 아멜리아는 슬슬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오러만 켜놔라.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만둬라!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샤 너도, 칼 잘 쥐고 있고.” “응? 아, 알았당!” 오케이,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본격적으로 미샤 소드와 아멜리아 소드를 휘둘렀다. 그야 얘네들이 치명타를 못 넣던 이유가 뭔데? 거인놈이 워낙 커서 아래나 쑤시느라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푸욱-! 오른손에 쥔 아멜리아 소드가 거인의 살갗에 깊숙히 파고든다. 단검 자체는 짧지만, 오러가 길쭉이 솟아났기에 상관없었다. 애초에 검도 하나가 아니고. 서걱-! 왼손에 쥔 미샤 소드가 거인의 목을 할퀴고 지나간다. 아멜리아 소드보다 절삭력은 떨어졌으나, 미샤 소드에는 다른 장점이 있었다. 미샤는 빙결 속성이거든. 찌지직— 상처 부위를 따라서 돋아나는 차가운 얼음막. 한 번 더 같은 부위를 때리자 얼음막이 부서지며 상처가 크게 벌어진다. 아까 내가 망치로 때릴 땐 끄떡도 없던 놈인데. ‘이게… 딜러의 감각……?’ 단전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 차오른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참지 않고 소리치며 양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미샤가 쌍검이고, 아멜리아가 쌍단검이니……. “사도류……?” 그리 중얼거리고 있자니, 어째선지 아멜리아 소드가 내게 살의를 내비쳤다. “……죽여버리겠다.” 칫, 저주받은 검이었나. 뒷일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아멜리아는 착실하게 내가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춰 오러를 켰고, 가까이만 대줘도 스스로 왼팔과 오른팔을 움직이며 열심히 단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1분, 2분, 3분……. [우어어어…….] 시간이 흐르며 목과 심장 위주로 난도질을 당한 거인이 마침내. 쿠우우우웅-! 굉음을 자아내며 지면에 쓰러졌다. [웅크리기]의 쿨타임이 돌 때까지 약 40초가 남은 타이밍. 스윽. 서둘러 마무리를 하기 위해 아멜리아 소드를 휘두르려던 차. “……왜 멈춘 거지?” 내가 뻗던 손을 멈추자 아멜리아가 의문을 토해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 이제 잡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 1층에는 두 종류의 몬스터가 있다. 마석과 정수를 주는 일반 몬스터. 그리고 처치 시 시체를 남기는 특수 몬스터. 히프라마전트는 후자에 속하는 몬스터다. 하지만……. ‘마석과 정수를 주는 몬스터는 왜곡 마법을 걸면 일정 확률로 시체를 남기지.’ 참고로 마법사들도 ‘왜곡’ 마법의 원리는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고대 시절에도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이 붙었듯. 단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현상만을 이용할 뿐이다. 그렇기에 돌연 궁금해졌다. ‘시체가 남는 놈한테 왜곡 마법을 걸면 어떻게 될까.’ 한번 실험해 볼 가치는 충분하게 여겨졌다. 어차피 이미 시체는 표본을 잔뜩 얻은 상황 아닌가. “베르실, 왜곡 마법을 써라!” 이내 다급하게 오더를 내리고서 머지않아 투명한 막이 거인의 몸을 뒤덮는다. 이를 확인한 즉시 나는 아멜리아 소드와 미샤 소드를 동시에 휘둘렀다. 푸욱-! 네 개의 검이 동시에 파고든 순간, 격하게 숨을 들이쉬던 거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솨아아- 거인의 몸이 빛무리로 변해 휘날렸다. *** 「히프라마전트를 처치했습니다.」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 히프라마전트의 거대한 육신이 빛이 되어 사라진 직후. 경험치가 들어오는 감각은 피어나지 않았다. 하나 텅 빈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툭. 주먹만 한 크기의 거대한 마석. 그러나 그것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 그깟 마석이 뭐가 중요한데? “…정수군.” “정수다……!” 정수가 드롭됐다. 설마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된 건가? 시체가 사라지는지 아닌지만 확인을 해보려던 건데 설마 정수까지 나올 줄이야. “다들 물러나라!!!!!” 내가 예민하게 소리치자, 정수를 발견하고서 홀린 듯 다가가던 근접 전사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저는 단지 구경을 하려고…….” “됐으니까 물러나라!” 강하게 소리친 덕분에 순식간에 정수 주변이 싹 비워졌다. 따라서 나도 조금은 진정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정수가 뜬 건 반길 일이나,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녹색이… 아니네…….’ 오크히어로의 [거대화] 정수는 녹색이었기에, [거대화] 정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군청색이면… [웅크리기]인가 본데.’ 이걸 어떡할까. 일단 시험관에 담고 생각해? ‘쩝, 아이나르한테 먹이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 패시브가 뭔지 모르니까 먹이기 그렇네.’ 조금 고민이 된다. [웅크리기] 자체는 아이나르에게 매우 적합하다. 바바리안 전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생존력을 이 스킬 하나로 채워 버릴 수 있는 데다가……. ‘아이나르에게 먹이면 패시브가 뭔지, 정수에 붙은 기본 스탯이 몇인지도 어느 정도 실험을 할 수 있을 테고…….’ 불사자 각인 9단계를 찍으면 연계도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나르에게 먹일 거라면 지금 먹이는 편이 시험관 값도 아낄 수 있어 좋은데……. 후, 진짜 어떻게 하지? “아이나르!” “응?” “이 정수가 갖고 싶나?” 일단 의사부터 확인했지만, 예상한 대로 즉답이 돌아왔다. “…가, 갖고 싶다!!!” “체화 이능이 뭔지, 기본 능력치가 몇인지도 아직 모르는데?” “그, 그래도 괜찮다!!” 하긴……. 패시브랑 스탯이 구리면 나중에 신전에서 지우면 되는 거니까. 애초에 패시브도 대충 예상 가는 게 있고. “좋아, 이건 네가 가져라.” “저, 정말인가!!” “다들 불만은 없겠지?” 전리품에 3할 지분을 가진 아르민 탐사단을 보며 물었지만, 뮐 아르민은 어떠한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우선권은 남작님께 있으니까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설령 그게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응?” “…저희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으니까요.” 얘는 왜 갑자기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졌어? 알 수 없지만, 정수의 주인이 결정됐으니 더 질질 끌 이유가 없다. “비요른……. 이, 이제 먹어도 되나……?” “그래, 먹어라.”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나르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달려가 정수를 흡수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영혼에 [히프라마전트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그렇게 아이나르 프넬린은 [웅크리기]를 배웠다. 528화 이스케이프 플랜 (1) 아주 오랜만에 발생한 동료의 스펙업. 에르웬이 혼돈의 정수를 먹고서 미친 듯이 독주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기에 이 이벤트는 내게 몹시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뭐, 정확한 건 정수의 스펙 조사가 제대로 끝난 다음에야 알겠지만. 어서 아이나르에게 다가가 바뀐 점에 대해서 소상히 캐물으려던 차였다. “얀델.” “…응?”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뒤를 돌아보니, 차가운 눈빛을 뿌려대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조금 전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 올 게 왔구나. 지금까지 말이 없기에 그냥 넘어간 줄 알았는데. 정수가 나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건가? “아! 아까 일 말이냐!”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멜리아에게 다가가 전투의 공로를 치하했다. “이 거인을 잡은 건 모두 너랑 미샤 덕분이다. 아마 너희 둘이 아니었으면 놈은 또 몸을 회복할 테고, 그랬으면 사냥은 실패했겠지! 고생 많았다! 아이나르! 너도 얼른 고맙다 해야지?” “고, 고맙다!” 나와 아이나르가 진심 어린 감사를 뱉었음에도 아멜리아의 표정엔 동요가 미미했다. “과연…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가.” 그래, 내 수를 전부 읽었단 말이지. 이건 조금 곤란한데. 변화가 없는 듯하면서도 조금은 더 차가워진 듯한 눈빛에 어떻게 할까 돌파구를 궁리하던 때였다. “칼스타인, 너는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나를 더 궁지에 몰려는 것인지 지원군까지 불러오려고 시도를 하는 아멜리아. 다만, 결과적으로 이는 악수였다. “…으응?” “너도 제대로 의견을 말해라. 싫은 건 싫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결국 너만 끙끙 앓을 뿐—.” “어? 나는 딱히 아무렇지 않은데……?” “……뭐?” 너무나도 태연한 답변에 아멜리아가 역으로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의 물음. 이를 느꼈는지 미샤가 아멜리아를 보더니 나를 힐끗하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 내가… 이제야 도움이 된 거 같아서……. 그래서 별로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는데…….” 누가 봐도 핑계를 대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라는 듯한 모습. “칼스타인, 너는…….” “…응?” “…아니, 됐다.” 아멜리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은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며 이렇게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지켜보겠다, 얀델.” 아무래도 미샤의 대답을 듣고 나니 맥이 빠진 모양인데…….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이쯤에서 끝. “아이나르, 바뀐 점이 느껴지나?” “어… 아직은 잘 모르겠다! 힘이 세진 거 같기는 한데.” 남은 인력들은 경계 대기 상태로 돌려두고서 새롭게 얻은 정수에 대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액티브 스킬부터. “그럼 엎드려봐라.” 내 지시가 떨어지자 아이나르는 군말없이 몸을 웅크렸다. 앞서 히프라마전트가 보인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자세. “자, 그럼 이능을 써봐라.”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웅크리기]를 시전했습니다.」 첫 정수라면 모를까. 이미 여러 정수들을 먹고 사용해온 아이나르는 능숙하게 새로 얻은 스킬을 발동했다. 후우우웅-! 웅크린 자세 그대로, 사용자를 보호하듯 위로 돋아나는 노란빛의 반투명한 막. 「3분간 모든 내성 수치가 20배 증가합니다.」 「3분간 자연 재생력이 20배 증가합니다.」 「웅크린 동안 흡수한 피해량에 비례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모든 능력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웅크리기]가 활성화된 동안에 여러 실험을 한 결과, 일단 스킬 자체는 오우거의 것과 동일했다. 혹시 스킬에서부터 뭔가 차이가 있진 않을까 싶었는데. ‘내성이랑 재생력 증가치도 비슷한 거 같고.’ [웅크리기]를 시전한 동안 받은 피해에 비례해 능력치가 증가하는 게 사람을 대상으로는 발동하지 않는 점도 일치한다. 아마 게임에서처럼 몬스터에게만 적용이 되는 거겠지. “저… 혹시 저희가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후 능력치 부분을 확인하려던 차, 탐사단 소속 마법사 삼인방이 다가왔다. “그… 이번에 미궁에 들어올 때 정수 실험 키트도 갖고 와서……. 실험실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오, 그렇다면야. 도움을 좀 받지.” 주먹구구식으로 힘이 더 세졌니 뭐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기에, 순순히 삼인방에게 아이나르를 맡겼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자세한 수치는 알 수 없으며, 키트로 잡아내지 못하는 특수 스탯도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기본 스탯 정보가 도출됐다. 근력(상), 자연 재생(상), 물리 내성(상). 항마력(중), 골강도(중), 폐활량(중). 시야(하), 인내심(하), 마나감응도(하). 그리고……. “약화 능력치가 하나 있군요.” 마이너스 스탯이 딱 하나. “약화 능력치가? 뭐지? 어서 말해봐라.” 내 재촉에 마법사 한 명이 아이나르의 눈치를 쓱 보며 말했다. “투쟁심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스탯이었다. 하지만……. “투쟁심이라…….” 그러고 보면 아이나르 얘도 지금 이상할 만큼 얌전하게 있단 말이지.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지루한 실험은 그만하고 마물들이나 잡으며 확인하자고 했을 텐데. “대체… 얼마나 약화가 된 거지?” 자세한 수치를 물었으나, 마법사는 현재 장비론 거기까지 알아내기 힘들단 답변만 돌려줬다. 따라서 원시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아이나르! 심심한데 대련이나 한번 할 테냐?” 바바리안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련을 거부하지 않는다. 애초에 대련은 놀이나 다름없으니까. 바바리안 전용 숙소에 가면 공터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치고받고 싸우는 전사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뭘까. “대련……? 으음…….” 바바리안 중에서도 상바바리안인 아이나르가 내키지 않는 듯 말꼬리를 흐린 것도 모자라. “…나중에 하자! 나중에! 지금은 연구를 먼저 할 때가 아니냐!” 거절을 한다고? ‘어쩐지 그 거인놈도 자꾸 도망가더라니…….’ 대체 투쟁심이 얼마나 깎인 거야? *** 어제 본 탐험가와 오늘 본 탐험가는 다른 사람이다. 이는 보통 탐험가들의 칼 같은 면모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사실 그 자체로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몬스터로 가득한 미궁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정수를 먹어야 하고, 그 정수가 탐험가의 성격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너무나도 흔했다. 지금의 아이나르처럼. “싸움? 뭐, 하면 하는 거지만……. 굳이 찾아서 할 필요까지 있나? 지금 평화롭고 좋은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를 무찌르고 용맹을 증명하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던 바바리안 여전사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전투 함성.” “…응?” “전투 함성을 내지른다. 실시.” “베헬… 라아……?” “이런 제기랄.” 웃으며 넘어갈 게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다. 탈이 생기는 일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국 아이나르의 최대 장점은 저돌성이었으니까. “얀델… 저래도 괜찮은 건가?” “…프넬린 씨가 저러니까 무서울 정도인데요.” 매가리가 없는 전투 함성을 들은 다른 동료들도 심각성을 깨닫고서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가장 앞에서 싸워야 할 근딜이 저러고 있으니 걱정이 된 것이리라. 하지만, 당장은 달리 방도가 없다. 이 다음에 먹일 정수에 투쟁심이 꽤 많이 붙어 있으니 그걸 먹으면 좀 괜찮아지긴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이 상태가 지속되는 건가.’ 진짜 다시금 궁금해진다. 투쟁심이 몇이나 깎인 거야? 얘 기본 성향 자체가 호전적이라서, 몇십 깎인 거로는 이렇게까지 안 될 텐데……. ‘최소 -100은 넘는다고 봐야겠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좀 걱정이 됐다. 근력이 내성 수치가 아니라 투쟁심 같은 비전투 스탯이 마이너스인 건 긍정적이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내가 먹어도 저렇게 된다는 거 아니야.’ 심지어 내가 이 정수를 먹을 때는 오크 히어로에 붙은 투쟁심 40도 사라진 이후일 테니, 그 변화는 더욱 크게 드러날 터. “체화 이능은? 알아낼 방법이 없나?” 일단 패시브부터 뭔지 알아보기로 했다. “체화 이능의 경우에는 저희가 가진 실험 도구론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다만, 어떤 종류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해봐라.” 허락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각종 실험 도구를 들고 아이나르에게 다가갔고, 30분 정도 지나서 결과를 갖고 돌아왔다. “체화 이능은 지원 보조 계열인 듯합니다. 그쪽으로 가장 수치 변화가 큽니다.” “생존이나 방어 계열이 아니고?” “그쪽도 신호가 잡히긴 하지만, 미미합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머리가 관통되고서도 즉사를 하지 않았던 걸 보고 내심 그쪽이겠거니 싶었으니까. [최후의 저항], [불사조심장], [구사일생]……. 대충 그런 후보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아니었을 줄이야. ‘그럼 뭐지?’ 알 수 없기에,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테스트를 진행했다. “아이나르, 조금 따끔할 거다.” “아픈 건 싫은데…….” “그건 지금 네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다.” “오, 그런가?” 결국 손가락을 한 마디 정도 잘라보는 선에서 테스트를 해봤고 유의미한 데이터는 찾아내지 못했다. 이는 내키지 않아 하는 걸 설득해서 행한 대련에서도 매한가지. “…대련은 여기까지다.” “오? 정말이냐?” 결국 패시브는 추후 시간이 남을 때 알아보기로 했다. 이미 여기까지 알아보는 데만 시간이 상당히 지체가 됐으니까. “자, 가자.” 그렇게 다시 탐사가 재개됐다. *** 이 섬에서 머무를 수 있는 약 사흘간, 우리는 최대한 시간 낭비 없이 이 섬을 샅샅이 탐색했다. 일단 최우선 목표는 섬의 지도를 완성하는 것.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수많은 몬스터들과 마주쳐야 했고, 그중에는 히프라마전트도 있었다. 얘의 경우에는 한 여덟 번 만났나? 세 번은 두 마리가 같이 있어서 스킵했고, 두 번은 놈이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바람에 실패. 결과적으로 세 번 더 레이드에 성공했다. 다만, 이번엔 세 번 다 마석조차도 얻지 못했다. 그야 전부 다 왜곡 마법이 실패했거든. ‘왜곡 마법이 성공을 하고, 거기서 또 정수가 나올 확률까지 거쳐야 한다라…….’ 처음엔 생각지도 못했지만, 새삼 깨닫게 됐다. 첫 시도에 정수를 먹은 게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이었는지를. 시체가 사라지는 개체들은 정수 입수 난이도가 미친 수준이었다. ‘정수야 ‘초심자의 행운’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왜곡 마법이 성공하지 못했으면……. 애초에 그것도 작동을 안 했겠지.’ 아무튼, 그것과 별개로 히프라마전트와 거듭 전투를 펼치다 보니 이놈에 대해서도 좀 자세히 알게 됐다. ‘촌장의 책에는 2등급 추정이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2등급까진 아니었다. 애초에 마석 크기도 3등급 최상위권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이고. 뭐, [웅크리기] 때문에 공략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 딜량이 높은 편이긴 한데……. 생존력이 높은 만큼, 공격력은 낮은 편이니까. 등급 측정에 앞서 그것도 감안해야만 한다. ‘그럼… 무리 생활을 한다는 것까지 종합해서 한 2.7등급 정도 되려나.’ 음, 대충 그럴 거 같다. 애초에 2등급 스킬이 하나도 없는데 2등급으로 분류되는 것도 이상하고. 불현듯 촌장의 책에 적힌 정보들의 진위가 조금 의심되기도 했지만, 이번은 특이 케이스로 보기로 했다. 책에서도 자기가 직접 목도한 게 아니라 보고 들은 걸 적어놨다고 미리 말해뒀지 않은—. “드디어… 이 섬에서 벗어나는군요.” 점점 멀어지는 섬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때, 와이트 헥츠가 옆으로 다가왔다.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군? 아직 도시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닐진대.” “그래도……. 저 섬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도 싶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밑바닥에도 위아래는 있는 법이니까. 믿을 건더기라도 있는 지금이 훨씬 낫겠—. ——————————! 그 순간, 섬 쪽에서 돌풍이 불어오며 배가 크게 흔들렸다. ‘뭐지?’ 서둘러 전망대에 있는 에르웬을 부르려던 차. 옆에 있던 와이트 헥츠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저기 뭐? 쓱 보며 뭐가 문젠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아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갑판에 서 있는 모든 탐험가들이 똑같았다. “…….” “…….” 저 멀리 점점 작아지는 섬의 중심부에서, 무언가 몸을 일으켜 세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흉포한 괴성까지 내지르면서.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래도 다행인 건 멀리서 소리만 내지를 뿐, 당장 뛰어서 따라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것 정도. “저, 저게 무슨…….” 완전히 넋이 나간 와이트 헥츠를 보며 나는 작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그때 죽은 그 친구가 헛것을 본 건 아니었나 보군.” 신장 40m가 훌쩍 넘는 초거대 거인. 계층 군주 중에서도 이 정도 사이즈는 없었건만. 저 사이즈면 어떻게 레이드를 뛰어야 할지 감도 안 올 지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솨아아아아아아-! 놈을 피해 달아나듯 속도를 높이는 배를 타고 섬과 멀어지며 나는 생각했다. ‘이 섬에서 탈출하려면, 왠지 저놈도 잡아야 할 거 같은데…….’ 쟤는 어떻게 잡아야 하려나? 529화 이스케이프 플랜 (2) 탐사 63일 차, 오후 3시. 넉넉히 일정을 짜서 우기가 시작되기까지 하루 전에 인간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원래는 남는 시간 동안에 섬을 돌아다니며 사냥이나 하려 했지만, 일정을 바꿔 곧바로 마을에 입장. “……들었던 대로 정말 괴물들의 마을이군요.” “와이트 씨…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남작님께서 말하지 않았나. 다들 자중해라.” 사전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탐험가들은 마을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보이는 괴물들 모습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헥츠 클랜에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본인을 인간이라 주장하는 마물이라니…….” “이건… 아주 귀하군요.” “들어보니 고대어를 쓰면 대화도 통한다죠?” “하핫!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소? 이 드넓은 미궁에 말이 통하는 지적 존재가 한 명도 존재치 않는다는 건 거대한 공간 낭비라고!” 뼛속까지 탐험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아르민 탐사단의 일원들은 괴물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내비쳤다. 당연히 그중 제일 심한 건 법사 삼인방이었고. “우기라는 게 지나갈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른다 하셨지요? 기회가 된다면, 저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요.” “……제기랄, 평소에 고대어도 좀 더 열심히 공부해둘 걸.” “걱정 마세요. 제가 나눈 대화는 모두 기록을 한 뒤 번역본으로 만들 예정이니. 이건 기나긴 미궁의 역사상 유례없는 대발견이니까요!” 하긴, 얘들 입장에서 인간섬(?)의 괴물들은 외계인처럼 느껴지리라. 누군가는 두려움을 느낄 테고, 누군가는 알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하겠지. “여기부터는 혼자 가지. 너희는 집에 가 있어라. 에밀리, 네가 이끌 수 있겠지?” “문제없다.” 일단 함께 온 일행은 모두 촌장에게 받은 집에서 대기를 시킨 뒤, 혼자서 촌장의 집에 들어섰다. “다행일세. 늦지 않게 돌아와서.” “걱정이라도 했나?” “아무렴. 그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나타난 이들인데.” 그런 거치고 다시 만난 촌장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기계랑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은 기분. 아이나르랑 친구가 된 괴물을 보면 괴물이라고 해서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는 건 아닌 거 같던데. “그나저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촌장이 운을 뗐다. “못 본 사이 동료들이 늘었더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무래도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마을에서 만난 괴물들에게 우리 숫자가 늘어났단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데……. “그게 우리가 이곳에 있어도 바깥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거 같더군.” “그래서 시간이 흘러 새로운 탐험가들이 이곳에 들어왔다 이건가?”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문을 내뱉었다. “근데 크게 놀라지 않는군?” “바깥에서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이미 자네들을 통해 증명됐지 않은가.” 뭐, 그건 그렇긴 하지.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반갑네 정말로. 필시 자네는 라프도니아에서 온 탐험가겠지?] 촌장과 내가 이 섬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그래, 밖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가장 먼저 했던 이 질문은, 시간이 흐르는 걸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던 질문 아닌가? ‘곱씹을수록 이 아저씨도 엄청 수상하단 말이지…….’ 하나 이러한 의심은 속으로 간직할 뿐, 결코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촌장의 힘과 지식이 필요할뿐더러. 정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라면, 이렇게 묻는다고 솔직히 대답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섬 밖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이내 촌장이 물었고, 나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축약해 들려주었다. 나무섬을 탐험한 얘기부터 시작해, 바위섬에서 만난 탐험가들. 그리고 거인섬에서 탐험가들을 구조한 것과 동굴에 존재하던 포탈 비석. 마지막에 그 섬을 떠나며 본 초거대 거인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찾아냈군.” 촌장은 전혀 감탄사 같지 않은 감탄의 말을 하며 내게 물었다. “한데, 갑자기 바위섬으로 돌아간 이유가 뭔가?” 내심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야 앞에 얘기를 하면서 악령에 대한 이야기는 싹 빼버렸거든. 그래서 이야기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던 것. “촌장, 네 얘기를 곰곰이 곱씹어보니 바깥에서도 시간이 흐른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갔다. 마침 나무섬을 탐험하다가 막다른 길에 부딪친 상황이기도 했고.” “흐음… 그랬군.” 미리 준비해 온 내 변명에 촌장은 별 의심의 말없이 납득했고, 이거로 정보 공유는 끝. 이내 촌장이 먼저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작동하지 않는 비석이라… 어쩌면 그게 이곳을 탈출할 열쇠일지도 모르겠군. 자네의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나?” “아, 그거 말이지.” 나는 답하기 전에 이것부터 언급했다. “촌장, 너와 나는 거래가 있었다. 너는 우리의 탐사를 돕고, 우리는 그 대신 탐사를 하며 알아낸 정보를 준다는 거래였지.” “그랬네만?” 촌장은 내가 갑자기 왜 이 말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뉘앙스였다. 거,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 도움이 필요하다.” 탈출 계획의 첫 번째. “내 도움이……?”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 스펙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은 거인섬을 떠난 직후다. 그도 그럴 게, 마지막에 그 초거대 거인을 봤으니까.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던 걸 보면… 도서관섬도, 나무섬도 마지막에 그런 무지막지한 괴물이 등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지.’ 뭐, 이건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거인은 섬의 보스 역할을 맡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포탈 비석이 발견된 것도 바로 그 섬이었고. [던전앤스톤]을 오랜 시간 플레이하며 쌓은 빅데이터에 의하면, 그 거인이 탈출의 열쇠일 확률이 아주 높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촌장은 미적지근한 답변을 내놓았다. 억겁의 세월 동안 이곳에 갇혀 지내며 우리들 이상으로 밖에 나가고 싶을 게 틀림없을진대도. “내일이면 우기가 시작될 테니, 그전에는 대답을 해줘라.” “알겠네.” 그럼 이번 안건은 일단 여기서 보류. 이후로는 중요도 낮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 늘었으니 그 집 하나만으로는 불편할 수 있겠군. 내일까지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줄 테니 불편해도 좀 참게.” “하루 정도야. 맨바닥에서 자던 사람들이니 불편하다고 생각도 안 할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근데 그놈들은 어디 갔나?” “은사자 클랜을 말하는 거라면, 자네들이 떠난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나섰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흐음… 그래? 이제 곧 우기가 시작될 텐데. ‘설마 이상한 섬에 갔다가 다 당했나?’ 걔들 수준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얘기였다. 우리조차도 엔드 컨텐츠까지 가기에 인원이 부족해서 적극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차니까. “일단 최대한 기다려볼 생각이네만. 우기가 시작되면 곧바로 마을 문을 걸어 잠글 걸세.” “그거야 당연한 거고.” 어쩌면 지금 열심히 섬으로 돌아오는 중일 수도 있기에 은사자 클랜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있나?” “없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나중에 결정이 되면 바로 답해줘라.” “그러겠네.” 나눌 만한 대화는 다 나눴기에 일단은 동료들이 있는 거처로 돌아왔다. 저번 우기에 지낼 때는 넉넉했던 거처가 지금은 거의 난민 소굴처럼 변해 있었다. 하긴, 일곱 명이 39명이 됐으니 당연한가? “헥츠, 뮐. 좀만 참아라. 촌장이 내일까지는 머물 거처를 마련해준다고 하니.”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생존이 최우선인 와이트 헥츠는 내 말에 그저 안도의 감정을 내비친 반면, 아르민은 달랐다. “거처는 어찌 되든 좋습니다. 한데… 촌장이라는 자에 대해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근데?” “그 촌장이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라는 게 사실입니까?” “…그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지?” 내 질문에 뮐이 움찔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앉아 있던 아이나르가 내 눈을 피했다. “하아…….” 그래, 내 잘못이지. 이번엔 딱 잘라서 비밀이라고 말해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만 했으면 얘도 절대 말하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 한숨을 내쉬고 있자 분위기를 눈치챈 뮐이 서둘러 아이나르를 비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질문을 해서…….” “아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니까. 아무튼, 답변을 하자면……. 방금 얘기는 절반 정도만 맞다.” “절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단 본인은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확인된 건 없는 상태다.” “그렇군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뮐의 의견도 들어보기로 했다. 이 아저씨도 거의 평생 동안 미궁의 비밀을 찾아 돌아다닌 사람이니까. 어쩌면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뮐, 네 생각은 어떠냐? 그 주장이 사실일 거 같나?” “글쎄요… 직접 만나본 것도 아니고, 얘기만 들어서는 모르겠습니다. 하나, 그게 사실이라고 하면 한 가지가 걸리는군요.” “어떤 부분이지?” “현재 그가 괴물의 몸에 깃들어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그게 어째서?” “대현자의 일대기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동료에 관한 이야기는 수상할 정도로 기록이 적게 남아 있지요. 한때 그들의 비사가 궁금해 그들의 기록을 열심히 수집하기도 했습—.” “됐으니까, 핵심만 간단히.” “예전에 골동품 시장에서 브륀그리드에 관한 기록물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뭐였지?” “일단 말씀드리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기록물을 분석한 결과 그 시대에 적힌 기록이란 건 확인을 했지만, 그 기록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결론을 짓지 못했습니다.” 거, 핵심만 간단히 말하라니까. “그거야 그렇겠지. 근데 그래서 내용이 뭐였지?” 재차 묻자 뮐 아르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란 영웅이 그 누구보다 영생에 집착했고, 이 때문에 대현자와 거듭 갈등을 빚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뮐에게 처음으로 전해듣는, 진위가 확실하지도 않은 고대의 비사. 그런데 어째서일까. “영생이라…….” 갑자기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 64일 차, 오후 9시. 촌장이 우리 거처에 방문했다. 방문 용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안 그래도 비좁던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새 거처를 준비했다는 것이고……. “자네의 제안을 승낙하기로 했네.” 두 번째는, 마침내 촌장이 결단을 내려줬단 것. 영생 이야기를 듣고서 왠지 모르게 촌장이 조금 더 껄끄럽게 느껴지긴 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현시점에 촌장과 대립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일단 받을 것부터 받고, 그다음에 차근차근 조사하는 게 효율적이다. 따라서……. “마을의 전사들은 모두 준비된 상태네.” 촌장이 총동원한 마을의 전사들과 함께 밖으로 올라갔다. 몹시 간단한 이유였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수준으로는 어려움이 많다. 즉,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선 고난이 필요한 법. “이제 두 시간 정도 남았군. 혹시라도 중간에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게. 재앙을 맨몸으로 맞서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으니.” “암만 그래도 내 생각이 바뀔 일은 없다.” 촌장이 설득하듯 말했으나, 나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 마을의 전사들까지 합쳐 거진 300에 달하는 병력이 비장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때. 마침내 그 시간이 찾아왔다. [우으음!] [게로, 게로, 게록……!!] [컹! 컹! 크흐어허헝!] 하모니를 이루듯 수많은 몬스터의 하울링이 하늘 위에서 크게 들려오고. 콰직-! 딱딱한 지면에 머리부터 내리꽂힌 몬스터들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솨아아아아아아-! 그 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우리를 향해 덤벼들었고, 대기 중이던 탐험가, 괴물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어 맞서 싸웠다. 그리고……. ‘재앙은 무슨 재앙.’ 나는 방패를 높이 쳐들며 소리를 내질렀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우기. 몬스터들이 하늘에서 쏟아진다는 재앙과도 같은 이벤트. 그러나 역시 이 이벤트는 내 생각대로였다. 「뤼투레 부적술사를 처치했습니다. EXP+4」 「웨어울프를 처치했습니다.」 「벽두더지를 처치했습니다.」 「아켈타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지하토룡을 처치했습니다. EXP +4」 「아이안트로를 처치했습니다.」 「오크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군도수호병을 처치했…….」 「…….」 「…….」 균열, 히든 필드, 그도 아니면 일반 필드에서 극히 낮은 확률로 조우가 가능한 몬스터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다니.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3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이게 버닝 이벤트가 아니면 뭔데? 530화 이스케이프 플랜 (3) 영혼의 격. 레벨이 올랐을 때 전해지는 특유의 감각에 대한 탐험가들의 표현은 제각기 다르다.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라는 자도. 사랑하는 연인과 이어진 충만감을 느꼈다는 자도. 술에 취했다가 확 깨어난 거 같다는 자도 있다. 하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들은 결국 한 가지 표현에 극구 동의한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솨아아아아아. 외부의 무언가가 내 안에 스며들어, 마치 내 존재가 더 짙어지는 듯한 감각. 그 감각은 전투 중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8레벨이 되었다. 내심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시기였다. 솔직히 말해, 지하 1층에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1년은 걸리겠다 싶었건만. ‘이러면 정수 두 개를 더 먹을 수 있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다. 길드에서 정리한 통계에 따르면, 7레벨에서 8레벨로 가는 데 걸리는 평균 기간은 약 6년. 이마저도 막힌 벽을 뚫고 8레벨에 도달한 자들만 대상으로 해서 얻은 통계고, 7레벨에서 탐험가 생활을 은퇴한 이들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 콰직-! 하던 상념을 멈추고 망치를 휘두른다. ‘일단 생각은 나중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오크 전사를 뒤로 한 채,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전황을 체크했다. “허억… 허억…….” 우기가 시작된 지 고작 30분. 우산처럼 위에 펼쳐진 결계 아래서 열심히 무기를 휘두르는 탐험가들과 괴물 전사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정수……! 정수가 나왔어요!” “읏……! 누구의 것이었지? 혹시 본 자는! 혹시 본 자는 없소?” “…제, 제가 봤습니다! 본 드레이크의 것입니다!” “4등급이구려! 뭣들 하시오! 얼른 챙기지 않고!” 정수가 떨어지면 마법사가 달려가 시험관을 들이밀고, 정수를 담는 동안 탐험가들과 전사들이 필사적으로 마법사를 호위한다. “어이! 지금 뭐 하쇼! 마석이나 챙길 때가 아니라니까!” “아… 아! 난 단지 발에 걸릴까 봐… 알았소!” 탐험가가 마석을 돌 보듯 하는 기괴한 광경. 뭐, 근데 어쩌겠나. 여기서 마석까지 줍고 다니면 할 일이 몇 배는 늘어나는데. 애초에 마석은 정수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우기가 끝나고 수거하면 그만—. 콰아아아아아앙-! 그때 결계 위에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허공에서 받아냈음에도 충격만으로 땅이 흔들릴 정도. [우어어어어어어어어—!] 대체 뭔가 하고 위를 봤더니, 금이 간 결계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거인과 눈이 마주쳤다. “히프라마전트다……!” 그래, 이번에도 하늘에서 떨어져 준 거구나. 오늘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더라니. 찌지직- “남작님! 결계의 손상도가 7할 이상이에요!” 놈이 딱 바로 위에서 떨어진 덕분에 우기 동안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간당간당해졌다. 하늘에서 몬스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전투가 가능한 건 바로 이 거대한 우산 덕분이었으니까. “저… 나, 남작님! 이쯤에서 만족하고 우선은 마을로 내려가 정비를 하는 게—.” “다들 자리를 지켜라!” “남작님은 어디 가시고요!” “우선 저놈부터 결계에서 떼어낸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우산 밖으로 나갔다. 쿠웅! 콰앙! 퍼억-! 머리, 등, 어깨, 허리……. 바깥으로 나가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몬스터가 [거대화] 상태인 내 몸에 부딪치며 낙하의 충격을 전달한다.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그냥 내 몸에 부딪혔을 뿐인데 몬스터들이 즉사해서 사라지다니. 극반사 세팅을 했으면 매 전투가 이랬으려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것과 별개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혹시 이러다가 정수라도 밟으면 큰일이었다. 성자, 성녀가 아닌 이상 정수 제거는 신전에서만 가능하니까. ‘영차.’ 이내 가뿐히 뛰어올라 반투명한 결계 위에 서자, 탐험가들이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작님이 결계 위로 올라가셨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이 상태로는 우리가 돕지도 못하는데…….” 거, 보고 있으면 알 것을. [우어……?] 이내 나는 결계에 대자로 뻗은 히프라마전트의 머리채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남작님께서 거인을 끌어내린다!!” “저게… 말이 되는 것이오?” “새삼 느끼지만……. 사람이 아니구려.” 결계가 지붕처럼 경사를 지닌 점을 이용해 온 힘을 다해 놈을 끌어내린다. [우, 우어어어어어어!!] 처음 겪어 본 상황에 당황한 녀석이 발버둥치기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내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콰앙-! 결계 위에서 저 큰 몸뚱이를 일으켜세우려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놈. 찌지직-! 그 과정에서 결계의 손상이 더욱 가해졌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우, 우어어어어어어……!!] 이내 결계 위에서 지면 위로 나동그라진 놈이 억울하다는 듯한 느낌으로 울부짖는다. 참,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영업 방해야?’ 나는 놈의 포효를 정면으로 받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찬 함성으로 대응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데 이 행동이 놈에게 내가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인지시키는 계기가 되었을까? “……거, 거인이 뒤로 물러선다!” “거인이 남작님의 기세에 밀렸다!” 나를 보며 엎드린 자세에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거인놈. 내심 간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기에 얼른 망치를 들어 콧등 부분을 망치로 후려쳤다. 퍼억-! 딱히 크게 대미지가 들어간 거 같진 않았다. 그러나 히프라마전트라는 개체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우… 우어어어어어어!!] 즉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하는 거인. “거, 거인이 도망친다!” 그래, 얼른 가. 이 겁쟁이 놈—. 번뜩-! 어? 갑작스러운 섬광에 뒤를 돌아본 순간. 휘유우우우우우우웅-! 하얗게 빛나는 한 자루의 검이 창을 던진 것처럼 직선으로 쏘아져나간다. 그리고……. 푹. 이윽고 검이 거인의 목덜미에 틀어박히며. 콰콰콰콰콰아아앙-! 그대로 폭발했다. 「히프라마전트를 처치했습니다.」 왜곡 마법을 걸 새도 없이 머리통을 잃고서 쓰러지는 거인의 몸뚱이. “죽었… 다고?” 저놈이 한 방에……? “…….” “…….” 나를 포함해 모든 탐험가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한곳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저 검이 처음 던져진 시작점.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잡으려던 게 아니었나?” 그곳엔 촌장이 있었다. 어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괴물들의 마을. 그리고 그곳의 촌장,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사실 이번 버닝 이벤트에 그까지 데리고 온 것은 그의 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뭔데 이 아저씨는…….’ 그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서 내비친 실력은 충격적이란 말로도 모자랐다. 에르웬도 한 방에 못 잡은 걸 한 방에 잡다니? ‘분명 뭔가 비장의 수가 숨겨져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의 괴물이었을 줄이야.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하다. “뭣하나? 탈출하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돌아갈 텐가?” “…그럴 리가.” 하나 촌장의 무력에 대해 생각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기에, 당장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남작님! 더 이상은 못 버팁니다!” “…이만 마을로 내려간다.” 슬슬 결계가 소멸하기 직전에 다다를 때까지 위에서 버티던 우리는 다시금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들 쉬어라!” 일단 입구에서 휴식 시간을 가지며 정비부터 했다. 마법사는 널브러진 채 명상을 하며 MP 회복. 신관과 치유술사는 돌아다니며 부상자에게 힐을 넣었고, 베르실은 인원 파악에 나섰다. “사상자는?” “부상자는 총 열둘이고. 경상자가 셋, 중상자가 아홉이에요.” “사망자는 없는 건가?” “마을 측 전사들 중에 몇몇이 죽은 듯하지만……. 저희 중에는 없어요.” “다행이군.”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촌장이 인기척도 없이 내 뒤에서 나타났다. “다 끝났네.” 와씨, 깜짝아. “다… 끝났다니?” “마을과 이어진 입구를 닫았단 뜻일세. 이제는 우기가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게지.” 아, 그 말이었구나.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건 불가능한가?” “불가능하네.” 여러모로 아쉬웠다. 만약 그게 됐으면 지금부터 소수 정예로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주인 없는 정수들을 주워올 수도 있었을 텐데. ‘입구를 열어두고 마을 아래에서 몬스터들을 잡는 것도 안 된다고 했지. ‘문’이 영구적으로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렇게 버닝 이벤트가 끝난 것은 아쉽지만, 나는 서둘러 미련을 버렸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궁금증이 있었다. “촌장, 아까 그건 뭐였지?” “그것?” “빛나던 검 말이다.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그랬군.” “그랬군이 아니라—.” 뭐라 말하려는 차, 촌장이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한데 내가 먼저 말해줘야 할 이유라도 있나?” “어…….” 확실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하지. 당황해서 잠깐 어버버하고 있자니 촌장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말했듯, 자네와 나 사이에는 거래가 있었네. 우리는 자네를 돕고, 자네는 이곳을 나갈 방법을 찾는 거였지.” “……그런데?” “자네는 자네가 할 일에 집중하게. 엄한 곳에 호기심을 품지 말고.” 각자 할 일이나 하자라…….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싸가지 없게 들리지? “이번 일로 전사들이 많이 죽고 다쳤더군. 나는 이만 그들을 돌보러 가보겠네.” “어, 그래라.” “나중에 시간이 될 때 한번 찾아오게. 그때 좀 더 얘기를 나누지.” 이후 촌장이 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마을로 들어갔고, 우리도 머지않아 마을 내에 마련된 거처로 향했다. 그리고 즉시 전리품 정산을 시작했다. “이번에 획득한 정수들의 목록이에요.” 어디 보자……. “3등급 둘에 4등급 일곱, 5등급이 하나라…….” 미쳤다는 말로도 모자란 소득이다. 우기가 시작되고서 밖에 있던 시간이 2시간도 채 안 됐으니까. 심지어 이번 전투로 얻은 게 이것뿐인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테르시아 씨와 록로브 씨가 이번 전투에서 영혼의 격이 높아졌어요.” 이제 7렙이 된 아우옌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의 레벨이 하나 더 올라 8이 된 건 아주 유의미했다. 혼돈의 정수를 먹으며 꽉 찬 정수 자리에 빈자리가 한 칸 생겼다는 뜻이니까. “영혼의 격이 높아진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내 나도 레벨이 오른 걸 밝히자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뭐? 비요른! 그게 정말이냐!” “한 번에 경사가 세 번이나 생겼네요. 뭐, 오늘 밤에 연회라도 열까요?” “연회는 무슨…….” 원래 동료가 렙업을 했을 땐 ‘ㅊㅊ’ 하나로 끝내는 게 국룰인 법. “으으… 겨우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또 뒤처지는 거냐!” 아이나르가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야 얘는 아직도 7레벨이거든. 아, 물론 레벨 업까지 남은 경험치는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아마 다음 레벨 업은 얘가 하게 되겠지. “축하해… 비요른.” 그때 미샤가 다가와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이나르와 달리 조급함 따위는 없었다. 하긴, 얘는 이미 8레벨이니까. 2년이 넘게 이백호한테 쩔을 받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아, 참고로 아멜리아의 레벨은 꽉 찬 8이다. 2층에서 나랑 처음 만났을 때가 8레벨이 된 직후였다고 하니, 얘도 여기서 나갈 때쯤에는 9레벨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래서 다들 그렇게 새로운 지역에 목을 맸던 건가? 클랜의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될 정도네요…….” 아이나르가 8렙을 찍으면 7인 클랜에 8렙만 다섯 명이 되는 상황. 빈자리에 정수만 모두 채워넣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그럼 슬슬 분배를 하려 하는데…….” 수확 집계가 끝난 뒤에는 베르실의 주도로 정산을 시작했다. 우선권으로 집어갈 물건은 없기에 일단 탐사 소득의 3할 지분을 가진 아르민 탐사단부터. “저희는 라크렐의 정수와 말라카, 그리고 마계 추적자의 정수를 받아가고 싶습니다.” 정당한 방식으로 3등급 정수 하나와 4등급 정수 둘을 지급했고, 그다음은 헥츠 클랜이었다. 뭐, 사실 얘네는 무급 노예 위치지만……. “너희도 골라봐라. 원하는 게 있나?” “예? 저희가 그래도 될지….” “함께 싸운 전우 아니냐. 그리고 너희가 여기서 더 강해져야 우리도 편해진다. 그러니까 돈이라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정수를 골라라.” 이 정도 복지는 챙겨줘야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 “그럼… 저희는 이 정수 세 개로 하겠습니다.” 이내 헥츠 클랜은 단원들과 상의를 하더니 4등급 두 개, 5등급 한 개를 골랐다. 3등급을 안 고른 건 마지막 양심인가? ‘일단 이건 킵해둬야겠네.’ 정산이 끝난 후에는 자유 시간을 줬다. 앞선 전투로 지친 탐험가들은 제각기 흩어져 휴식했고, 새 정수를 얻은 이들은 지친 와중에도 빛나는 눈으로 새 정수를 시험하러 떠났다. “우리끼리만 남은 건 오랜만인 거 같군.” “그러게요.” “얀델, 촌장은 언제 찾아갈 건가?”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쯤.” “그런가…….” “그나저나 은사자 클랜은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았네요.” “죽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실력에 비해 욕심이 큰 자들이었으니.” 이후로는 다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유롭게 행동했다. “잠깐 둘러보고 오지.” “도와줄까요?” “그럼 좋지.” 아멜리아는 에르웬과 함께 정찰. “저… 나도 나갔다 와도 되나?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아이나르는 대장간에서 일하는 괴물 친구를 만나고 온다며 외출. “비요른… 나는 좀 쉴게. 이따 보자…….” “저도… 그 일을 겪었더니 피곤하군요.” 미샤와 아우옌은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거실에는 나와 베르실만 남게 된 상황. “너는 어쩔 거냐?” “명상이나 좀 더 하려고요. 이번에 마력을 과하게 썼더니 좀 머리가 아파서.” “그렇군.” “얀델 씨는요?” “책이나 좀 읽다 잘 생각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방으로 들어가 마력등을 켠 채 책을 펼쳤다. 어째선지 책 내용엔 하나도 집중이 안 됐다.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과연 이놈은 얼마나 강한 걸까. 보니까 인간 시절에 갖고 있던 정수들을 전부 다 고스란히 소유 중일 가능성도 있는 듯한데. 다 같이 다구리를 놓으면 이길 수는 있을까? 아니, 애초에. ‘만약 그놈이 우리를 죽이려 든다면…….’ 그때 나는 동료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에 들었다. “얀델, 일어나라.” “…으응?” 깨어났을 때는 어느새 돌아온 아멜리아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침대에서 자라며 평소처럼 잔소리를 하려는가도 싶었지만……. ‘저 눈빛은 뭔가 일이 터졌을 때 짓는 표정인데.’ “…무슨 일이냐?”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묻자 아멜리아가 철제 단검 하나를 책상에 올려놨다. “이게 뭐지?” “이 마을의 대장간에서 발견한 무기다.” “어… 그런데?” 고개를 갸웃하자 아멜리아가 잘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래서 유심히 단검을 관찰하던 차. “…….”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걸… 대장간에서 발견했다고?” 단검에는 은사자 클랜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531화 이스케이프 플랜 (4) 은사자 클랜의 문양이 박힌 단검. 이게 왜 이곳에 있던 걸까. 그 의문을 갖는 순간,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은사자 클랜을 말하는 거라면, 자네들이 떠난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나섰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지난번에 촌장이 한 이 말이 거짓일 가능성. 어쩌면… 은사자 클랜은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일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서. “…….” “…….” 표정을 보아하니 아멜리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데……. “혹시 단검 말고 다른 건 없었나?” “그게 전부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그렇단 말이지…….” 당장은 뭐라 결론을 내리기 애매하다. 단검 하나야 실수로 두고 간 것을 괴물들이 몰래 슬쩍한 걸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이들이 괴물들에게 단검을 팔았을 수도 있다. 쉽게 말해, 희망 회로를 굴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굴릴 수 있다. 하지만……. “골치 아파졌군.” 변수가 발생했을 땐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하는 법.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그자는 위험하다.” 촌장의 무력은 괴물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휙 하고 검 한 번 던진 것으로 히프라마전트 한 마리를 즉사시켰다. 한데 그 검이 내게 날아오면, 나는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알 수 없기에 우선 이것부터 확인했다. “……이 단검을 갖고 나온 걸 누가 알고 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다. 프넬린이 사고를 치진 않았을까 가봤다가 발견한 것이니.” “들키지 않고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것도 가능하겠나?” 서로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이라면.” “부탁하지.” “알겠다.” 내 부탁을 받은 아멜리아가 단검을 품속에 다시 잘 갈무리했다. 얘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촌장과 대립하는 건 너무나 리스크가 크단 걸.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이 마을에 갇혀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촌장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하나 우리는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아멜리아가 무사히 대장간에 단검을 돌려놓고 온 다음 날. “오늘부터는 은사자 클랜의 행적을 조사를 해봐라. 최대한 은밀하게. 아이나르는 물론이고, 베르실이나 에르웬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얀델, 너는?” “한번 촌장을 만나보겠다.” 아멜리아에게 새 퀘스트를 내려준 뒤, 촌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말이지.” “차라도 내주고 싶지만, 이 마을에 그런 건 없어서. 앉게.” 은사자 클랜의 단검을 보고 와서 그런가? 이전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두근-! 마치 싸이코 패스 살인마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 다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사실 이런 연기야 내 전문 분야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할 얘기가 뭐냐? 이렇게 따로 부른 걸 보면 그냥 수다나 떨자고 부른 건 아닌 거 같은데.” “흐음, 애매하네마는. 이것도 용건이라 한다면 용건이겠지.” 이내 촌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특유의 그 무덤덤한 목소리로. “비요른 얀델. 자네에 대해 궁금하네.” “……뭐?” “이상한가? 어쩌면 날 이곳에서 내보내줄 수도 있을 탐험가에게 관심을 갖는 게?” “그건 아닌데…….” 조금 당황스러운 주제였으나, 나는 서둘러 상황 판단을 끝냈다. 은사자는 은사자고, 이건 또 이거니까. “네가 궁금해한다고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어제 들었던 답변을 조금 각색해서 내 식대로 돌려준다. “전에는 엄한 곳에 호기심 품지 말고 할 일에만 집중하자더니?” 일부러 싸가지 없게 말했으나, 촌장은 의외로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군.” 아니, 오히려 너무 쉽게 납득한 탓에 이쪽이 더 무안해질 정도. “그럼 서로 궁금한 걸 답해주는 건 어떻나? 자네 역시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듯한데.” 흐음……. 일대일 진실게임이라……. “좋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세상은 리스크 없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하게 설계되지 않았으니까. ‘이런 상황은 이제 익숙하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빠르게 선수를 잡았다. “그럼 질문은 나부터 해도 되나?” “하게.” “너는 혹시 인간 시절에 갖고 있던 정수들을 지금도 갖고 있는 거냐?” 현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브륀그리드가 생전에 소유했던 정수는 제법 유명하니까. 다른 유명한 영웅들이 그렇듯, 그의 정수 조합은 비전이라는 이름하에 후대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뭐, 갖고 있는 정수 전부가 알려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만 알면 얼마나 강한 건지 대충은 알 수 있을 터. “그렇지는 않네.” 흐음, 아니라고? “그러면 어제 그 빛나는 검은 뭐였지?” “이제 내 차례일세.” “……해봐라.” 상대의 질문을 통해서도 얻는 것이 있기에 나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턴을 넘겼다. 과연 촌장은 무엇을 첫 질문으로 던질까? 궁금증이 더해지는 가운데 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이가 몇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였다. “나이……?” “혹시 어려운 질문이었나?” “……스물넷이다.”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솔직히 답해줬다. ‘나이는 왜 물어본 거지? 나중에 중요한 질문을 하기 전에 방심시킬 생각인가?’ 왠지 찝찝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 같은 정보로 턴을 넘긴 건 나쁘지 않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군. 한데 그 나이에 그 실력, 그리고 귀족 가문까지 세우다니. 참으로 대단해.” 귀를 간지럽히는 칭찬은 그냥 싹 무시하고서 내 차례를 시작했다. “인간 시절의 정수가 아니라면, 그 능력도 이 섬에서 얻었다는 건가?”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이들은 굉장히 특이한 개체다. 선천적으로 패시브와 액티브를 갖고 있다는 것. 이는 여타 몬스터들과 똑같은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그렇네. 내게 주어진 건 시간뿐이었고, 자네도 봤다시피 이 섬에는 마물들이 가득하지.” 이들은 그런 주제에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 다만, 레벨 업은 불가능하며 정수 슬롯은 각 개체마다 최소 3개에서 최대 7개까지 선천적으로 차이가 난다던가? ‘……얘네를 몬스터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가 참 애매하단 말이지.’ 솔직히 요정, 드워프, 바바리안, 수인처럼 그냥 하나의 종족이라 봐도 무리는 없다. 라프도니아의 종족들도 각자 특징이 있으니까. 요정은 정령을 부리고, 바바리안은 혼령각인을 통해 강해진다. 드워프는 장비에 보정을 받고, 수인은 영혼수를 사용해 스스로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태어날 때부터 레벨이 정해져 있고, 선천적으로 종족 전용 정수 하나를 갖고 시작한다.’ 관점에 따라 이 정도는 ‘종족 고유의 특성’으로 구분짓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석이 나왔단 말이야.’ 이번 전투에서 죽은 괴물 전사들의 몸이 빛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걸 보면 몬스터가 맞기는 한데……. ‘뭐가 중요하겠어. 이게.’ 이내 나는 얘네를 몬스터로 정의해도 되는가에 대한 생물학적인 고찰을 끝냈다. 슬슬 촌장의 차례였거든. “처음 미궁에 들어갔을 때의 얘기를 해주겠나?”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자네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네.” “하나하나 말하기엔 길 텐데?”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많은 것이 바로 시간일세. 하나, 자네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간추려서 해줘도 좋네.” “……그렇다면야.” 이후 나는 첫 탐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려줬고, 다시 내 차례를 얻었다. ‘자, 그럼 이번엔 뭘 물어보지?’ 상당히 고민이 됐다. 마음 같아선 은사자 클랜의 단검이 대장간에서 나왔는데 어찌된 거냐고 묻고 싶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어긋난 신뢰 같은 게 작동 중인 상황도 아니고, 괜히 경계심만 키워서 진실을 알아내는 게 더 어려워지겠지. 따라서 다음 질문은 이것으로 하기로 했다. “불멸왕에 대해서 알려줘라.” “불멸왕……?” 명색이 고대의 영웅이라 주장하는 자 아닌가. 사실이라면 그를 통해 고대에 있었던 비밀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거짓이라도 이를 통해 촌장의 정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리란 판단. “라프도니아의 초대왕 말이다.” “아, 성주를 말하는 모양이로군? 한데, 하나하나 말하기엔 꽤 긴 얘기가 될 텐데, 괜찮겠나?” “나도 당장은 남는 게 시간이라서.” “흐음… 너무 광범위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성주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네.” “…운?” “그렇네. 성주는 평범한 사람이었네. 하지만… 이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마법사를 친구로 두고 있었지.” “대현자를 말하는 거군.” 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현자는 오래전부터 멸망을 예견하고 대비를 하고 있었네. 성주였던 친구를 설득했고, 가문의 전재산을 퍼부어가며 그날을 대비했지. 멍청이 성주가 멍청한 짓을 한다고. 온 대륙의 호사가들이 낄낄대며 비웃었다고 하네.” 하지만 종말이 실현된 후에는 얘기가 180도 달라졌다. “이웃나라의 왕, 대륙 최고의 검사, 잉카룬의 마법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챙길 수 있는 걸 모두 챙겨 그곳으로 향했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었지.” 성주와 대현자는 그런 피난민들을 아주 엄격한 기준으로 가려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라프도니아는 탄생했네.” “잠깐만, 그럼 노아르크는 뭐지?” “……?” “땅 아래에 있는 도시 말이다. 거기도 미궁으로 가는 포탈이 있던데.” “아, 지하 피난처를 말하는가보군.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의 존재는 들어본 적 있네.” 흐음… 피난처라……. “말을 끊어서 미안하다. 계속해봐라.” “…아무튼, 수많은 이들이 도시에 갇힌 만큼 물자는 빠르게 소비됐네. 그리고 그러던 때, 마침내 대현자가 다른 차원과 이어진 포탈을 만들어냈지.” 그곳이 바로 미궁이었다. 몬스터들로 가득한 미지의 땅. 처음에는 도시 전체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주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대현자는 탐사단을 꾸렸고, 나는 운 좋게 그 탐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네.” 탐사단은 본격적으로 미궁을 탐험했다. 그리고 마법사들의 연구로 마석의 가치를 깨달으며 이주 계획은 백지로 돌아갔다. 마석. 밥이 되고, 물이 되고, 때로는 철이 될 수도 있는 만능 물질. “그렇게 이 도시는 안정화됐고,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이 잡혔네. 도시는 점점 커졌고, 하나뿐이던 포탈도 숫자가 늘었지.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성주가 어떤 일을 했느냐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네.” 모든 업적은 대현자의 것이고, 성주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내였을 뿐이라는 것. 그게 촌장의 평가였다. ‘그런 거 치고는 수상한 게 많은데…….’ 새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차례는 저쪽에게 넘어간 상황. “두 번째 탐사는 어땠나?” 촌장은 이번에도 내 탐사 에피소드를 물었고, 그 의도가 무엇일지 경계를 하면서도 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핏빛 성채라… 그리운 이름이군. 흥미로운 이야기, 잘 들었네.” “그럼 이제 내 차례군.” 후, 그러면 이번엔 뭘 물어보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불멸왕은 어떻게 영생을 얻은 거지?” 왕가의 힘과 관련된 정보이면서도,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란 사람을 떠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면 촌장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기대하며 귀를 쫑긋하던 차였다. 똑똑. 현관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고대어가 들려왔다. [촌장, 급히 얘기드릴 게 있습니다.] “미안하네. 오늘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이어서 하도록 하세.” 이내 촌장이 축객령을 내렸고, 나도 어쩔 수 없이 촌장의 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며 보인 것은 안면이 있는 괴물이었다. ‘마루피치치의 아빠네.’ 마을에서 인정받는 전사로 촌장의 오른팔 비슷한 역할을 하던 녀석. “…….” […….] 어색하게 눈인사만 나눈 뒤 녀석을 지나쳐 거처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걷는 내내 생각했다. ‘급한 얘기라…….’ 이렇게 찾아올 정도면 진짜 중요한 일인 거 같은데……. 대체 뭐였으려나? *** 촌장과의 대화는 여러모로 수상했다. ‘…나이를 물어보다니.’ 도무지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다 해야 하나? 애초에 내게 그 정도로 관심이 있었으면, 은사자 클랜을 심문해서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설마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건가?’ 불현듯 대장간에서 발견한 단검은 별거 아니고, 정말 그들이 마을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정말로 위험한 때다. 따라서 사고의 방향을 바꿔서 다시금 오늘 있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촌장이 내 나이를 물었다.’ 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정말로 내 나이가 궁금해서? ‘그럴 리가.’ 은사자 클랜을 붙잡아 심문한 게 아니더라도, 촌장은 언제든지 그 정도 얘기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나에 대해 궁금하단 건 전부 거짓말.’ 한데 촌장은 왜 그런 진실게임을 신청했을까. 이건 금덩이로 빵 한 조각을 사는 짓이나 다름없을진대……. ‘잠깐만.’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순간,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던 걸지도.’ 내게 ‘금덩이’를 건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진실게임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정보’를 주는 것. 그게 목적이라면 여러 가지 납득이 된다. ‘그 빛나는 검도… 지금 생각해 보면 보여줄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촌장의 무력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했다. 쉽게 말해, 촌장이 실력을 숨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촌장은 내가 보는 앞에서 일격에 그 거인을 처치했다. ‘즉, 전부 의도된 행동이라는 건데…….’ 아직은 무엇이 목적인지는 모르겠다. 정보가 부족해서 촌장과 더 대화를 나눠보지 않으면 진실을 향해 더 나아가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단서를 위해 매일매일 촌장의 집에 찾아갔지만, 촌장의 집은 내내 비워져 있었다. 마을 괴물들에게 촌장에 대해 물으면 바쁘단 말만 돌아왔다. ‘날 피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급한 일 때문에?’ 그렇게 날이 갈수록 의문만 커지던 때였다. “얀델 씨…….” “무슨 일이냐?” “레인즈 씨가 보이지 않아서요. 보통 늦어도 이 시간에는 돌아오시는데, 혹시 여기에 있나 싶어서.” 아멜리아의 귀가가 늦는다는 베르실의 보고가 있었고, 애써 불안을 지우며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오지 않는군.” 희망 회로를 돌리며 골든 타임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들 연장 챙겨라.” 매일같이 마을을 샅샅이 뒤지던 아멜리아가 실종됐다. 532화 이스케이프 플랜 (5) 우리 탐사대 전원이 집결하는 것에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진작에 모두 불러 모아 둔 덕분이었다. 뭐, 그렇다고 마음의 준비가 된 건 아니겠지만. “연장이라면… 무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설마… 그들과 싸우려는 것…….” “왜 탐험가가 마물을 때려잡겠다는데, 문제라도 있나?” 나는 준비가 덜 된 이들에게 되물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닙니다.” “뭣들 하시오? 남작님의 명을 따르지 않고!” 무모하다. 아직 제대로 확인된 것도 없으며, 더 기다리면 무사히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나. 그러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 다들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단지, 자기들끼리 뭐라 속삭이며 무기를 챙길 뿐.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아니면 어쩔 건가. 자네가 싫다고 말해 보든가.” “……그럴 일 없네.”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암, 차라리 괴물 놈들이랑 싸우는 게 낫지.”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말대꾸하는 놈들이 없더라니. “비요른… 흥분을 가라앉혀라. 다들 무서워하지 않냐….” 어느새 옆에 다가온 미샤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달았다. “……!” 주변을 쓱 둘러보던 중 아우옌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나르도 비슷했다. “뭔가 잘못 안 거 아니냐…? 그 녀석들… 말은 안 통해도 차, 착한 녀석들인…… 아,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걸고 맹세한다!” 뭐라 중얼거리다가도 내가 쳐다보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변명을 해 댄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앞에 섰다. “아이나르.” “어! 마, 말해라!” “괴물 놈들이랑 친구로 지내더니 그새 정이라도 쌓인 건가?” “그, 그렇지 않다! 이건 머리에 생긴 문제다! 그, 그 정수! 그 정수 때문—!”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끝까지 들어 줄 수 없었다. 아이나르의 말을 끊으며 딱 잘라 말했다. 사실 투쟁심 때문이란 게 아예 납득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동료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정신 차려라. 너한테 실망하기 전에.” “……알았다.” 오케이, 그럼 얘도 정신 개조는 끝났고. 다른 탐험가들도 준비가 다 마무리된 듯 보인다. 따라서 긴말은 필요 없었다. “가자.” 먼저 거리로 나가자 수십 명의 탐험가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른다. 나는 거의 뛰듯이 걸어 나갔다. 그때 내 둔한 감각으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저씨.” “그놈이냐? 매일 멀리서 우리 집을 관찰하던.” “네. 잡아 올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아니, 내버려 둬라. 알아서 안내를 해 줄 테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 “속도를 올린다!” 이후 에르웬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는 감시역을 추격했다. [탐험가… 탐험가들이다!] [아퀴티티…! 드, 들어가렴! 집으로 어서!] 마을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던 괴물들은 무장한 채 집단으로 이동 중인 우리를 발견하고서 화들짝 놀라며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일단 촌장의 집이 있는 방향은 아닌데….’ 과연 이놈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 의문은 곧 해소될 수 있었다. [오늘 특이한 장소를 발견했다. 촌장의 집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인데,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근데 곳곳에 경비가 있더군.] 일전에 아멜리아가 말했던 바로 그 수상한 가정집. “정지.”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탐험가! 무기를 내려라!] 거,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모인 건지.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하게 모인 괴물들을 보며 나는 짧게 읊조렸다. [싫은데.] 지금 나는 대화를 하러 온 게 아니다. *** 사람을 찾고 있다. 감추는 게 없다면 비켜라. 그러한 말은 필요 없었다. 괜히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아멜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비켜라. 막는다면 죽이겠다.] 이 말이 현재 내가 던질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다만 마루피치치의 부친이자 촌장의 오른팔인 마을 전사 뉘아치치는 내 최종 권고를 무시했다.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촌장의 명이 있었다. 물러나라.] 딱히 애석하지는 않았다. 또한,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며 설득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경고를 했고, 저놈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오, 그러냐?] [그렇다. 그러니 일단 진정하고—.] [그럼 죽어라.] 앞서 경고한 대로, 살의를 담아 망치를 휘두르는 것뿐.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몸이 부풀어오르며 샘솟는 활력. 이를 모두 담아 전력으로 망치를 내려찍는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궁수 클래스인 뉘아치치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활시위를 당겼다. 누가 활잽이 아니랄까 봐. 발만 빨라 가지고.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이내 망치를 휘두름과 동시에 그랩기를 시전하자 돌풍이 불어오며 멀어지던 뉘아치치의 몸이 잡아당겨졌다. 그리고……. 콰직-! 정확한 타이밍에 망치가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우연이거나, 운이 좋아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싸워 대면 이 정도 타이밍을 맞추는 건 딱히 어렵지도 않거든. 전투 센스가 탁월한 전사의 육신이라면 더욱더. [……?] 순식간에 찌그러진 깡통처럼 변한 윗머리통. 뉘아치치가 꿈을 꾸는 듯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와 흘러내렸다. 하지만 촌장의 신임을 받는 오른팔답게 한 방에 즉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 번 더.’ 망치를 회수해서 높이 들어 올린 다음. 후우우우웅-! 다시금 있는 힘껏 망치를 내리친다. 뭐, 이 일격으로 마루피치치는 고아로 자라게 되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다. 자식이라면 한스 A도 갖고 있었을뿐더러……. ‘그 해맑은 녀석이라면 잘 살아가겠지.’ 아니면, 곧 아빠랑 같은 곳에 가게 되거나—. ‘…응?’ 마루피치치의 편모 가정까지, 정말 몇 센티만을 남겨 두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망치의 궤적에 무언가 방해물이 껴들었다. ‘검.’ 내 민첩 수치로 볼 수 있던 것은 무기의 종류. 그리고 그 무기가 새하얗게 빛났다는 것 정도. 콰아아아앙-! 이내 새하얀 검과 맞닿은 찰나에 세찬 반동이 망치의 끝을 타고 손까지 전해진다. 번뜩. 터져 나온 섬광에 눈이 부셨지만 억지로 눈을 떠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바빠서 못 만난다고 할 땐 언제고.’ 부하가 뒈질 거 같으니 바로 튀어나오는구나. *** “…….” “…….” 잠시간 이어진 대치 상황. […….] 얼마 전까지 우기를 함께 넘었던 괴물 전사들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서 우리를 바라본다. 사실 우리라고해서 다른 건 아니었다. “…….” 마법, 신성 주문, 이능 등. 나를 따라온 탐험가들 역시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 준비를 해 둔 채 상황을 주시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촌장.”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인내심이 바닥날 거 같았거든. “내 동료를 내놔라.” 앞뒤를 다 잘라 놓고서 뱉은 요구. 하나 촌장은 이 요구를 받고 무슨 소리냐며 되묻지 않았다. 오해가 있는 거 같다며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다. 정말 의외이긴 했지만. “역시 그녀 때문에 온 것이었군.” 촌장은 너무나도 순순히 인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에. 꽈악. 뜨겁게 달아오르던 머리가 식으며 안 그래도 긴장한 근육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야 저 반응엔 해석의 여지가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무력행사를 해도 가뿐하게 막아 낼 준비가 끝났다는. 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죽었나?” 잠시간 눈싸움을 하듯 노려보다가 겨우 내뱉은 질문. 촌장이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두 번 까딱였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이 괴물 부족에서만 통하는 제스처. 그리고 분명 저 제스처의 뜻이……. “걱정 말게. 그녀는 살아 있으니.” 그래, 부정의 의미였지. 숨 막힐 것 같던 긴장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안도감이 피어났다. 물론 촌장이 나를 농락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내놔라.” 이내 나는 한 번 더 강한 어조로 말했고, 촌장은 나를 쓱 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때는 어떡할 건가?” “내가 직접 찾으러 가겠지. 막는 것들을 전부 때려 부수며.” “놀랍게도… 진심인 거 같군.” 그야 동료의 목숨을 걸고서 블러핑을 하는 건 내 신조에 어긋나니까. “나는 자네보다 강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두렵지 않나?” 글쎄. “두렵다고 해야 할 일을 안 해 본 적은 없어서.” “흐음, 그렇군. 실로 호전적이야. 연인인가?” “…….” 괜한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동료를 무척이나 아끼는가 보군.” 촌장은 알기 어려운 뉘앙스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부하들에게 말했다. [뉘아치치…. 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겠군. 누구든 좋으니 안에 있는 탐험가 여성을 데려와라.] 진짜… 살아 있는 건가? “잠시 기다리게. 이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도록 하지.” 이후 불안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괴물 전사들이 아멜리아를 데리고 나타났다. 아멜리아는 의식을 잃은 상태로 들것에 눕혀진 상태였는데……. “어떻게 된 거지?” “잠시 기절을 시켰을 뿐, 해가 될 다른 짓은 무엇도 하지 않았네.” 일단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법. “우선 데려가게나. 지금 자네 상태를 보건대, 이대로는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을 듯하니.” 아멜리아를 인도받은 뒤, 신관과 마법사들에게 상세를 확인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촌장의 말대로… 정말 기절만 한 거 같아요.” 적이 아닌 아군의 확답에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냈다. “후…….” 아멜리아가 무사하다. 그것만으로도 큰 고비를 넘은 듯했으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남아 있었다.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자, 그럼 이제 얘기를 할 준비는 됐나?” “왜 에밀리를 납치한 거지?” “납치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일세. 아니, 오히려 따지려면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이네. 이곳에 몰래 침입한 것은 바로 그 여자였으니까.” 그래, 역시 일이 그런 식으로 흘렀던 거구나.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바로 나를 부르는 게 정상적인 대처일 테지.” “옳은 말이네. 하나 그 전에 미리 확인해 보고 싶었네. 이 여자가 이곳에 침입한 게 개인적인 호기심인지…….” 이내 촌장이 나를 보았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생선 눈깔로. “아니면 자네의 지시였는지 말이야.” 뭐라 답하기도 전에 촌장은 말을 이었다. “아, 이 여자는 자기 혼자 저지른 일이라더군. 그 외에는 아무리 물어도 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게. 조금 겁을 줬을 뿐, 실제로 고통을 가하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그 부분은 감사하게 생각—.” “다만 자네는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네.” “……?” “리더란 그런 자리이니까. 자네의 지시든 아니든 관계없네. 자네의 동료는 우리의 배려를 무시하고 마을의 규칙을 어겼지. 또한, 그것도 모자라 일의 경황도 확인하려 들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와 마을의 전사를 죽이려 들었네.” 이 부분은 할 말이 없었다. 아멜리아의 생존. 그리고 너무나도 온전한 방식으로 신병을 인도해 준 것까지. 이로써 내 행동이 과했음은 증명됐다. “자,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건가?” 이내 촌장이 최후 통첩을 날리듯 물었다. 평소처럼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말투였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압박감이 굉장했다. 그도 그럴 게,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거든. ‘지금 필요한 건… 사과가 아니겠지.’ 최대한 신속하게 판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일단 리더로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니 이것부터. “에밀리 레인즈가 그곳에 들어간 건 내 지시가 맞다.” “호오, 그랬나?” “하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다.” “궁금하군.”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오픈할 생각이 없던 패지만, 때로는 정면 돌파가 답인 경우도 있으니까. “얼마 전에 ‘우연히’ 은사자 클랜의 문양이 박힌 단검을 발견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들더군. 마을을 떠났다는 그들의 무기가 왜 이 마을 안에 있는 건지. 그래서 뒤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과연,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말해 줘라. 그 단검은 어떻게 된 거고, 너희가 감추던 저 집 안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내 질문에 촌장은 잠시 생각하듯 말을 아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우선 그 단검에 대해서부터 말해 주겠네. 직접 본 게 아니라 뭐라 확신할 순 없네만… 전에 그들이 떠나기 전에 주민들과 물물교환을 한 적이 있네. 아마 그때 섞여 들어간 것일 가능성이 높네.” 그래, 그런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지. 어차피 나로서는 진위를 구분할 수 없으니.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빤히 바라보고 있자 촌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금 자네가 말한 이 집은……. 고민이 좀 되네마는… 직접 보는 편이 좋겠군.” “좋다. 보여 줘라.” 이내 촌장이 뭐라 손짓하자 담장 주변을 막고 있던 전사들이 싹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고, 나는 촌장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아래일세.” 평범한 가정집으로 위장된 건물 안에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존재했고, 그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 나는 비로소 이 괴물 놈들이 숨기고 있던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니미럴.” 계단 위에서부터 썩은 내가 풀풀 풍기기에 혹시나 싶었건만. “자, 이게 바로 자네가 궁금해했던—.” 지하에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마을의 비밀이라네.” 시체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상태였지만, 원형을 알아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자네도 알아 버렸군?” …인간의 시체다. 533화 이스케이프 플랜 (6) 두근-! 심장이 세차게 뛰는 반면, 머리는 차갑게 가라앉는다. ‘시체.’ 인간의 시체다. 그리고 이 시체들을 보여주며 내 뒤에 바짝 붙은 채 서 있는 촌장은 말한다. 이 시체들이 우리 마을의 비밀이라고. 두근-!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과 별개로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냥 보여 주기 싫다고 하면 되는 걸 자기가 먼저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비밀을 알았으니 사라져줘야 한다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을 터. “이 시체들은 뭐지?” “예상보다 훨씬 더 침착하군.” “내게 보여 준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물론 나를 제거할 마음을 갖고서 일부러 지하로 유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느낌상 그런 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영민하군. 자네의 추측대로네. 이 장소라도 보여 주면 자네의 오해가 좀 덜해질까 싶어서 말이지.” “오해라…….” 이내 나는 지하실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단어 그대로 산처럼 쌓인 시체. 확실히 뭔가 수상하기는 하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은사자 클랜의 탐험가들을 전부 죽였대도 절대 이 숫자는 안 된다. “그래서 이들은 누구지?” “모르네.” “…뭐?”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섬에 탐험가들이 온 것은 자네들이 처음이 아닐세. 그 전에도 나타난 이들이 있었지.” “한데 우리를 보고 처음인 척 했던 이유는?” “아, 그것부터 얘기해야겠군. 처음인 척 했던 게 아닐세.” 무슨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뭐라 반박을 하려던 찰나. 촌장이 말을 이었다. “살아 있는 탐험가는 자네들이 처음이었으니 말일세.”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일세. 여기 있는 시체들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상태였네. 온몸이 뒤틀리고, 팔과 다리가 이어진 채로 죽어 있는 상태였지.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전혀 부패하지 않았네. 마치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즉, 이 시체들 전부 우기 때 떨어진 걸 주웠단 뜻인가?” “아니, 그렇지 않네. ‘주웠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지만… 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건 우기와는 무관했네. 다만, 그 주기가 매우 길기는 했지.” 촌장이 허리를 숙이며 바닥에 깔린 시체들 중 하나를 머리째 잡아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쯤 썩은 머리통을 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짧게는 십 년에서 십오 년. 길게는 삼십 년에서 사십 년마다 이러한 시체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네. 그리고 나는 그게 차원붕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정 중이네.” “차원붕괴?” “그렇네. 주기도 어느 정도 비슷한 데다가, 이들 시체에서 습득한 일지 하나에도 차원붕괴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말이지.” 그리 말하며 촌장은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장만 읽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어차피 훼손이 심해서 다른 장은 읽기도 어려운 상태라던가? 일단 수첩을 열어 맨 뒷장을 읽어보았다. […………온 세상이 무너지고 뒤틀린다. 수많은 선배들이 그것을 재앙이라 표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것은 결코 재난 같은 것이 아니다.] [……멀크가 죽었다. 일리야가 죽었다. 스왈키 경도 죽었고, 퀴리아네 씨도 죽었다. 그리고 아마… 나도 오래는 버티지 못하겠지.] [……아니,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 내겐 그들이 남긴 말들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각오를 결심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 어느 누군가의 탐험 일지. 촌장이 왜 차원붕괴를 원인으로 꼽은 건지 알 것도 같다. 수첩에 적힌 마지막 기록이 차원붕괴란 점은 충분히 수상했으니까.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그래서 이 시체들을 왜 지하실에 모아둔 거지? 우리에게는 비밀로 한 이유는 뭐고?”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군.” 촌장이 손을 휘젓자, 주변에 있던 괴물 전사들이 빠르게 물러났다. 거, 어차피 사람 말도 못 하는데 왜 보내지? 의문은 가졌으나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이 시체들은 내게 의미가 컸네. 이들의 존재를 통해 바깥에서도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가끔씩 나타나는 기록물을 통해서 밖의 일을 들을 수 있었지.” “그런데?” “연구를 시작했네. 혹시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수 있는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내 기대는 어김없이 빗나갔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봤지만, 이 시체들은 그저 평범한 시체였네. 단지 시간이 흐르지 않을 뿐.” 그렇게 이 시체들을 미궁으로 올려보내 이곳의 존재라도 밖에 알려보자는 마지막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후, 촌장은 연구를 그만뒀다. 그리고 시체들을 모아 지하에 보관했다. 당장은 마음이 꺾여 포기를 했지만, 언젠가 다시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자네들이 왔지. 내심 모든 걸 포기하고 있던 내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네.” “그래서 이 시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기로 했다는 건가?” “안 그래도 괴물 같은 외모 때문에 경계를 하는 중인데, 이것까지 보여주면 오해를 사리라 여겼네. 언젠가 말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조심스레 꺼낼 셈이었네.” 하지만 결국 아멜리아가 이곳에 몰래 침입해 실상을 보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솔직히 고하기로 결심했다. 축약하자면 이런 스토리인데……. “답변이 되었나?” “글쎄.” 아예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찮은 점이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바깥 얘기를 했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알고 있던 것 등등.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내가 갖고 있던 의문점 중 상당 부분이 설명되지만……. ‘대충 끼워맞춘 느낌이 든단 말이지.’ 생각해 보면 어느 세상이든 그랬다. 진실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 중 몇 개만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애초에 가장 큰 의문점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럼 은사자 클랜이 사라진 일에 너희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이거냐?” “그렇네. 애초에 내게 그들을 해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쓰읍… 이제 어떡하지? 차라리 그냥 내 뒤통수를 쳤으면 나도 옳다구니 후려치고 끝이었을 텐데.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다. ‘이걸 그냥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잠깐 고민이 됐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믿어도 될 리가.’ 이 세상에 동료 빼고 믿어도 되는 존재는 없다. 그래, 그러니까……. ‘오케이, 결론 끝.’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도 명확해진다. “우리가 감춘 일도 있고 하니, 자네 동료가 우리 마을의 법을 어긴 점이나, 그로 인해 발생한 자네의 ‘실수’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네. 어떤가?”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촌장의 말에 나는 호탕한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행이군.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다.” “그래, 자네도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 어?” 웃음을 머금으며 망치를 내리쳤다. 퍼억-! 미간에 꽂힌 망치로부터 전해지는 강한 손맛. 이내 벌어진 상처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린다. 그 상태에서 촌장은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왜?” 분노라기에는 너무도 잔잔했고, 슬픔이라기엔 너무나 생동적인 감정. 의문이 가득한 생선 눈깔을 보며 나는 답했다. 이야기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이 존재했다든가. 왠지 시간을 끄는 거 같단 느낌이 들었다든가. 시간을 줬다가 결국 나중에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릴 거 같다는 직감이 빡하고 왔다든가. 그런 비논리적인 근거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눈깔이 기분 나빠서.” “…………?” “그래서 때렸는데 문제라도 있나?” 바바리안에게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 촌장이 적인가 아군인가. 만약 적이라면 어떠한 꿍꿍이를 감추고 있나.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 그러한 고민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망치질 한 방으로 복잡하던 이야기가 한결 명료해졌으니까. 촌장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죽인다. 만약 죽이는 데 실패하면……. ‘동료들과 함께 이 마을을 탈출한다.’ 너무나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상황. 다만, 촌장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내게 물었다. “자네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쓸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네.” “오! 그랬냐?” “자네는 동료들을 끔찍하게 아끼지. 한데 이렇게 동료들을 위기로 빠뜨리다니, 이건 자네답지가 않네.” 나를 얼마나 봤다고 저런 말을 지껄이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주의 깊게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기습적으로 망치를 한 번 더 내려친다. 콰앙-! 애석하게도 촌장은 당황하지 않고 칼을 뽑아서 망치를 막아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대화는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는 확실히 전해졌을까. 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틀린 선택엔 책임이 따르지.” 거, 생선 대가리로 그런 말을 해봤자 하나도 안 멋있는데 말이지. 이번엔 거울 치료가 필요한 환자인가? 알 수 없지만, 나는 생선처럼 주둥이를 내민 뒤 따라 말했다. “뚤린 썬땍엔 쵁임이 똬르쥐.” 어째선지 반응은 약간의 텀을 두고서 나왔다. “……미친놈이었군.” 음, 여기서 극찬을 해봤자 봐줄 생각은 없는데. 꽈악- 망치를 양손으로 잡은 채 힘을 더 불어넣자, 촌장의 검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서로 양손인 상황에서 밀리는 걸 보니 근력은 나보다 낮고.’ 한데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까? 촌장도 힘겨루기를 끝내며 검을 비스듬하게 세우며 부드럽게 망치를 옆으로 흘려냈다. 콰앙-! 그대로 질량을 보존한 채 바닥에 내리꽂힌 망치. 동시에 촌장의 검이 세찬 빛을 뿜어냈다. 후웅-! 이전에 히프라마전트를 일격에 보냈던 바로 그것. 보기에는 오러랑 비슷하긴 한데……. ‘미궁 내에 이런 스킬이 오죽 많아야지.’ 그런 탓에 아직 저 스킬이 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당장 큰 문제는 아니었다.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그도 그럴 게. 「도검류 무기에 한하여 75%의 내성을 갖습니다.」 어차피 그래 봐야 도검류잖아? 콰아아앙-! 히프라마전트의 머리통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간 검이 방패에 막혀 튕겨져 나간다. 방패의 컨디션은……. ‘이 정도면 흠집이 조금 생겼으려나?’ 그래, 역시 상상력만큼 무서운 적은 없다더니.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 해볼 만한 수준이다. 뭐, 문제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후웅-! 민첩 수치만큼은 나보다 훨씬 높은지, 첫 일격을 제외하면 전부 다 빗나가고 있다.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좁은 지역에서 특히 효과적인 [폭풍의 눈]을 쓴 상황에서도 타할은 30%에 머무르는 와중이고. 퍼억-! 심지어 맞혀봤자 큰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내성은 낮은 거 같은데… 재생력이 꽤 되네.’ 가장 크게 들어간 첫 일격으로 인한 상처도 벌써 전부 아물어버린 상황. 이내 나는 빠르게 판단을 재고했다. ‘여기서 1:1로 죽이는 건 무리.’ 혼자서 촌장을 죽이는 건 포기한다. 따라서, 내가 다음으로 해야 할 행동은 이것. “촌장, 혹시 너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우선 생뚱맞은 질문으로 신경을 분산시킨 뒤. “……?” 내가 한 말에 의문을 가질 때쯤. 쩅그랑-! 아공간 가방에서 꺼낸 화염병을 시체더미 위에 던져 깨뜨린다. 그리고…….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한 채. 타닷. 전력을 다해 계단 위로 돌진한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방음이 제법 잘 되는 편인지 계단에는 괴물 전사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촌장이 쉽게 뒤따를 수 없도록 천장을 박살내며 계단을 올랐다. 투두두, 투두두두-! 건축학에는 크게 소질이 없었는지 조금 박살을 내자 도미노처럼 알아서 붕괴하며 내려앉기 시작한 지하. 쿠웅-!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돌무더기는 그냥 머리와 어깨로 처맞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한 30초쯤 흘렀을까. 콰앙-! 마침내 나는 바닥문을 부수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1층 거실에는 동료들과 괴물 전사들이 대치하며 나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어서 우리도 내려가봐야—.” [촌장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두 무리가 나를 발견하고서 멍하니 입을 벌린다. 유일하게 이성을 챙기고 열린 입으로 말을 뱉은 건 베르실 한 명뿐이었다. “어… 얀델 씨? 지금 이게 무슨 상황—.” 거, 딱 보면 모르나? 다 때려부수긴 했지만, 촌장 새끼도 금방 올라올 게 분명했기에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세 살배기든 그 누구든 곧바로 상황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콰직-! 가장 근처에 있던 괴물 전사의 앞통수를 망치로 깨며 나는 소리쳤다. “지금부터 이 마을을 탈출한다!” 534화 레인보우 (1) 촌장의 집에서 입구까지 이어진 메인 거리. 그 위를 전력으로 내달리고 있다. 쿠웅-! 쿠웅-! 쿠웅-! [거대화]를 켜놨더니 뛸 때마다 공사 현장에 버금가는 소음이 울려 퍼지지만, 딱히 민폐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이 잘 시간도 아닐뿐더러……. [부, 불이야……!] [물을 가져와라!] 안 그래도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와중 아닌가. 바바리안 걷는 소리로 예민하게 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사람이 아닌가? 그동안 몇 번이나 했던 똑같은 고민을 다시 한번 해보던 차. “……이래도 괜찮을까요?” 나름 전통을 지닌 마법사 전용 탈것. 아이나르의 어깨에 탄 베르실이 내게 우려의 말을 전해온다. “뭐가 괜찮냐는 거냐?”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되묻자, 베르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마을 중심부에서 피어난 불길, 그리고 연기가 마을 전체를 뒤삼키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 중에는 전사가 아닌 사람들도 꽤 많았어요…….” 얘,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구나. 저 생선 대가리를 보고서도 같은 사람 취급을 해주다니. “그래서?” 바쁜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대꾸하자 베르실이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저…….” 어째선지 미샤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이건 비요른… 너답지 않은데…….” 나답지 않다니. 벌써 오늘만 두 번째로 듣는 말이다. “그래! 나도 궁금하다! 아래에서 뭘 봤는데, 이런 거냐?” 미샤의 말에 아이나르도 호기심을 키우며 내게 물었다. 투쟁심은 줄었어도, 바바리안 특유의 호기심은 여전한 건가? ‘인간의 시체.’ 일단 답하자면 아래에서 본 것은 그게 전부다. 촌장은 시체를 보여 주며 이 시체를 얻게 된 경위를 말했고, 이로써 내가 오해를 풀길 바랐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감춘 일도 있고 하니, 자네 동료가 우리 마을의 법을 어긴 점이나, 그로 인해 발생한 자네의 ‘실수’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네. 어떤가?] 아멜리아가 침입한 일이나, 내가 뉘아치치의 머리통을 쪼갠 것도 없던 일로 해주겠다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내 첫 밤친구였던 한스A가 딱 이랬었는데. [······다행히 자는 동안 문제가 없었으니 별말은 않겠네.] 아무튼, 나는 그때 얻은 교훈을 뼈에 새겼다. 생판 남이 내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그만큼 내게 뽑아 먹을 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이거 말고도 더 있다. [어째서! 어째서 엘리사 님을 해친 거지! 우리가 뭘 했다고······!] 미궁에서 만난 카루이의 사제 엘리사. 평범한 신관을 연기하던 그 여자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나는 깨달았다. 수상한 놈은 일단 머리부터 쪼개는 게 답이라고. 다만, 이런 구구절절한 얘기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설득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만. “말해주세요. 아래에서 뭘 보셨기에 그런 거예요?” 나는 말했다. “별거 아니다.” 아까 촌장에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단지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땅한 근거 따위 없는 그 말. 이를 들은 미샤가 조용히 읊조렸다. “감… 이라는 말이구나?” 직감. 경험을 통해 무의식에 쌓인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도출된 계산 값. “감이라!” 아이나르는 그것으로 납득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저씨의 감은 잘 맞으니까요.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도 한두 번이 아니고.” 에르웬도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고, 지켜보던 베르실도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히… 그런 기분이 든 것엔 다 이유가 있겠죠. 사실, 저도 그 촌장이 불안했거든요.” 아닌 척 옆에서 달리며 우리 대화를 엿듣던 와이트 헥츠와 뮐 아르민도 입을 열었다. 뭐, 얘들이야 나를 오래 겪진 못했지만……. “차라리 그리 말씀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얀델 남작의 야수 같은 본능은 유명하니까 말이오.” 이들은 내 명성을 믿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게, 결과만 좋으면 OK라는 게 탐험가 대부분의 생각일뿐더러……. 탐험가들은 미신에 약하거든. “이놈들 전부 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 “오히려 속이 시원하군. 솔직히 그동안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잤는데.” “게다가 그런 기분이 들었다며? 계시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무시하는 쪽이 훨씬 더 찝찝하오!” “아아… 알지. 항상 이럴 때 감을 무시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아무래도 다들 싸한 건 느꼈던 모양. 이걸 예상하고 그런 대답을 한 건 아니었는데. “갑시다!” “빌어먹을 괴물놈들! 더 불태워라!” 어째선지 동기부여가 되며 사기가 올라버렸다. 내 말 한마디만으로 모든 의심이 지워져야 했다고 하나? 이들은 이게 옳은 선택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거, 나도 확신까지 하는 건 아니었건만. “……웃긴 놈들이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한데 그걸 또 옆에서 들었을까? “웃긴 건 얀델 너다. 웃기지도 않은 말로 전부를 설득했으니까.” 어, 뭐야. 이 목소리는……. “그러고 보면 너는 늘 그랬지. 언제나 그런 재주가 있었다. 네가 가는 곳이 정답이라고 믿게 하는…….” “에밀리?” 고개를 휙 돌려보니 아우옌에게 업힌 상태의 아멜리아가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깼으면 깼다고 말을 하지. 언제 깬 거냐?” “조금 전에.” ”몸은? 괜찮나?” “이상없다.” 그리 말한 아멜리아는 즉시 아우옌의 등에서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상황은 대충 알겠다. 이 마을을 탈출하려는 거지?” “그래.” “하아… 내가 자는 동안에 이런 사고를 치다니. 자세히 말해봐라. 무슨 일이 있었지?” 다과상을 차려놓고 차를 홀짝이며 나누는 대화가 아니기에 얼른 중요한 부분만 브리핑했다. “촌장이 지하를 보여 줬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서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리고 도망치면서 마을에 불을 냈다. 아마 촌장은 지금 불길 사이를 뚫고 우리를 추적하고 있을 거다.” 전달해야 할 정보는 모두 담은 상황 설명. 이에 아멜리아는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답군.” 그 말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오늘 처음으로 나답다는 말을 들은 거 같네. “아무튼,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너는 어떻게 된 거지?” “지하에 내려갔다가 발각이 되고 붙잡혔다. 심문을 당했고 그게 끝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혹시나 했는데 별다른 추가 정보는 없었다. 뭐, 정보가 더 생긴다고 현 상황에서 크게 달라질 게 있을 거 같지는 않다마는. “아저씨, 다 도착했어요!”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 마을은 노아르크처럼 땅 아래에 만들어졌다. 섬으로 나가는 방법은 출구를 통해 나가는 방법뿐인데……. “이제 어떡하죠?” 문이 닫힌 상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떡하니 막힌 바위벽뿐. 출입구를 열고 닫는 건 촌장만 가능하다. 그래,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비켜봐라.” 망치를 쥔 채 벽으로 다가가자 마법사 출신인 베르실이 의문을 표했다. “이게… 그런 식으로 될까요?” 거, 이래서 먹물이 찬 애들은 안 된다. “보면 알겠지.” 그리 말하며 있는 힘껏 망치로 벽을 내려친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주변에 자욱하게 깔린 연기가 일시적으로 퍼져 나갈 정도의 충격. 다만, 벽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 “……안 되는데요?” 음, 그러게 안 되네. 바바리안 무안하게. “걱정 마라.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요?” “그래.” 마법이든 스킬이든 뭐가 가미가 됐든. 물리적으로 부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럼에도 부숴지지 않는다면, 그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로, 이쯤에서 플랜 B. “에르웬!” 더 강하게 때린다.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 콰콰콰쾅-! 수백 개의 어둠 구체가 벽에 부딪치며 굉음을 자아낸다. 하나 그럼에도 벽은 버텨냈다. 그래, 이거로도 안 된단 말이지? ‘[휘두르기]로는 어림도 없었겠네.’ 구체가 닿을 때마다 조금씩 부서지고 파였지만, 수복력이 상당한 듯 금방 복원이 되는 바위 벽. 아무래도 지속 딜이 아니라 단일 딜로 조져야 할 거 같은데……. “에르웬.” 길게 말하며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에르웬의 화살에 세찬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암, 단일 딜은 [집중사격]만한 게 없지.’ 단점은 시전이 끝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 딱 하나뿐.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화살에 담긴 색채가 더 진하게, 더 강렬하게 번진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말 안 해도 된다. 내 눈에도 보이니까.” 불길과 연기가 가득한 마을 방향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점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커다란 점이 되고 완연한 형체를 갖추기까지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쉽게는 안 보내준다 이거지?’ 뭐, 그래도 내 예상보다는 늦게 오긴 했으니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만. “전투 준비!!”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며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상체를 가린 방패에 체중을 실은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릴 향해 돌진하던 ‘그것’이 방패에 충돌했다. 후우우우우우웅-!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흩어지는 연기. 그 즉시 우리 원거리 딜러들의 일점사가 시작됐다. 저주, 바람창, 화염구, 화살, 에너지파 등등. 숙련된 탐험가들이 시전한 만큼, 직선으로 빠르게 쏘아지는 투사체. 하나 애석하게도 목표물에 명중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솨아아아아- 놈에게 닿기도 전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마법과 이능들. 어찌 보면 오르큘리스의 단장이 사용하던 [불언령]과도 비슷했지만, 그것과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까 저놈과 싸울 땐 스킬을 쓸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게 고요의 정수가 아니라면…….’ 비슷한 성능을 내는 스킬은 단 하나뿐이다. ‘톨-라푸파.’ 1등급 몬스터 톨-라푸파가 가진 1등급 스킬. [우주적 비호] 원거리 투사체 계열을 모두 사전에 차단해낸단 특징을 가진 사기 스킬 중 하나. 참고로 [우주적 비호]는 패시브 스킬이기에, 촌장이 톨-라푸파의 액티브 스킬 중 무엇을 가졌는진 알 수 없다. ‘설마 1등급 정수도 갖고 있을 줄이야.’ 어깨가 무거워진 것과 별개로 일단 원거리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서 쏴봐야 MP 낭비니까. ‘……무효화 된 만큼 저쪽도 MP가 닳기는 할 테지만.’ 장기전으로 갈 만한 상황이 아니기에 굳이 엄한 데 MP를 뺄 이유가 전혀 없다. 이따가 몬스터가 가득한 뭍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 그러니까……. “생각보다 늦었군, 촌장.” 대화를 시도한다. 1초라도 공짜로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이득이라는 판단. “자네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할 사람이 있어야 하니 말일세.” 오, 설마 받아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촌장 역시 내게 시간을 길게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밖에 비도 내리는데 어딜 그리 급히 가려고 하나?” “아, 마을에만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서 말이지.” “그만두게.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일세.” “나를 위해서?” 피식 웃으며 말하자 촌장이 최종 통보를 날리듯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네. 지금이라도 그만둔다면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을 없던 일로 해주겠네.” 내가 궁지에 몰린 쥐새끼였다면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렸을 제안. 하나 내게는 그저 확신이 되어줄 뿐이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거면 어쩌나 계속 걱정이 됐는데.’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대뜸 면상에 망치를 내리꽂고 마을에 불을 내지른 놈을 용서해주겠다니? 그런 놈이 정상일 리 없지 않은가. 오늘 당장 튀겠다고 결정한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단 생각이 들 정도. 따라서……. “잠깐 생각해봐도 되겠나?” 고민하는 척 한 번 더 시간을 끌어본다. 그러나 촌장도 어느새 나란 바바리안에 대해서 학습을 한 듯했다. 곧바로 이런 말이 돌아오는 걸 보면. “자네는…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어……. “…조금?” “……셋을 셀 테니, 그 안에 결정하게.” “셋은 너무 적다. 넷으로 하지.” 촌장은 대꾸도 하지 않으며 숫자를 세나갔다. “……셋.”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몇 초는 벌었나? 전부 셀 때까지 내버려 둘 건 아니라 큰 의미는 없겠지만. “둘.” 촌장이 이어서 하나를 외칠 때쯤. 타닷. 나는 앞으로 대시했다. 그야 에르웬이 스킬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아직 꽤 남았으니까. 어차피 피하지 못할 싸움이라면……. “……!” 어디 한번 보자고. 9년 동안 한 게임을 파며 온갖 조합을 맞춰본 고인물 유저의 시선으로.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약점은 무엇인지. 535화 레인보우 (2) 1등급에서 9등급까지. ‘우기’라는 특징 덕분에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섬. 촌장은 이 섬에서 말 그대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쉽게 말해, 무한한 파밍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부 고등급 정수는 아닐 거야.’ [던전 앤 스톤]이 어떤 게임인가. 하위 정수부터 차근차근 챙겨가면서 성장을 해야지만 고위 정수를 파밍하는 게 가능한 게임. 분명 구간별로 등급이 낮은 정수가 껴 있을 거다. 이 섬에 정수를 지워줄 신관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문제는……. ‘고점이 1등급이라 너무 높다는 건데.’ 여기서부터는 이제 촌장의 역량에 달렸다. 초반 정수를 생각없이 집어먹고서 후반에 고위 정수로 떡칠을 한 거라면, 그래 봤자 한계가 명확한 똥캐가 될 것이고……. ‘약점도 뚜렷하겠지.’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만약 내가 보유한 [거대화]처럼, 비록 등급은 낮지만 후반에도 쓸 수 있는 정수로 하위 정수를 채운 것이라면. ‘음, 그래도 크게 다를 건 없나?’ 약점을 찾는 게 조금 번거로워지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전부다. [던전 앤 스톤]에 무적의 캐릭터 따위는 없으니. ‘암, 내 방패바바가 예외인 거니까.’ 아무튼, 그럼 촌장은 어느 쪽일까. 철저하게 탐색을 목적으로 모든 행동과 이펙트를 관찰한다. 현재까지 확인 된 건 ‘톨-라푸파’의 [우주적 비호]. 그리고……. ‘일단 이동기 하나인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 대치하던 순간. 촌장의 몸이 둘로 쪼개져 나뉘듯이 움직인다. 마치 게임을 하다 렉이 걸려서, 화면의 프레임이 겹쳐지듯. 타닷-! 다만 작정하고 관찰하고 있던 만큼, 육안으로 확인된 정보를 신속하게 종합할 수 있었다. 발자국에서 피어나는 증기. 전류로 휘감긴 몸체. 그리고……. 퍼엉— 도착 지점에서 피어나는 노란빛 파장까지. ‘[뇌신걸음]이네.’ 스킬의 등급은 2. 다만, 순혈 이동기라고 분류하기엔 애매한 스킬이기도 하다. 블링크를 하듯 빠르게 대시하는 게 특징이기는 하지만……. 지지지짓-! 도착한 지점을 기준으로 ‘마비’ 판정까지 가능한 광역 딜을 퍼뜨리고. 후우우우우웅-! 이동 속도 대폭 증가. 그리고……. “으읏…!” “마, 막아… 응?” 일시적으로 피해 면역 보너스까지 얻을 수 있거든. 바로 이렇게. 후웅-! 근처에 있던 근접 딜러 한 명이 당황하며 무기를 휘둘렀지만, 무기는 촌장의 몸을 통과하며 지나친다. ‘에르웬한테 가는 건가?’ 하, 징그러운 촌장 새끼. 진짜 어떻게든 우리를 이 마을에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밖에 없구나. 물론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뇌신걸음]의 무적 해제 조건은 두 개.’ 첫 번째는 첫 타를 치는 것이다. 아마 이 조건 때문에 촌장도 다른 탐험가들을 싹 무시하고 에르웬을 향해 돌진하는 것일 테고. 두 번째는……. ‘3초.’ 지속 시간인 3초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 물론 3초면 에르웬의 목에 칼을 들이박기까지 충분한 시간으로 보인다. ‘뭐, 어차피 그래 봐야 소용도 없겠지만.’ 촌장이 눈에 불을 켜고 에르웬을 향해 달려드는 와중에도 마음은 평온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쟤는 ‘집중’ 상태이니까. 「집중하는 동안 받는 모든 피해를 영혼력을 사용해 흡수합니다.」 저 상태의 에르웬은 무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네 호구조사를 하는 중이라서 말이지.’ 언젠가 비장의 카드로 쓰일 가능성이 충분한 핵심 능력인 만큼, 벌써 이 패를 보여 줄 이유는 없을 터. 따라서…….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초월]을 연계해 [폭풍의 눈]을 시전한다. 공교롭게도 이거면 저 스킬을 카운터 칠 수가 있거든. 그도 그럴 게. ‘피해 면역이지 CC기 면역인 게 아니니까.’ 참고로 [폭풍의 눈]에는 대미지가 없다. 투사체 판정도 아니고 말이지. 솨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나를 향해 돌풍이 불며 에르웬을 향해가던 촌장이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내게 날아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지직-! 3초가 다 됐는지, 촌장의 주변으로 전류를 담은 파장이 퍼져 나온다. 어느덧 피해 면역 상태도 끝이 났다는 뜻. 이왕 [초월]을 쓴 김에 한 번 더 사용해서 [휘두르기]를 시전했다. 「타격 범위가 3배 증가합니다.」 여의봉처럼 늘어나며 촌장의 몸에 틀어박히는 망치. 다만, 촌장의 몸은 물리 법칙을 무시했다. 날아가기는커녕, 내 쪽으로 불어오는 돌풍에 의해 망치에 달라붙은 촌장의 몸. ‘이 콤보는 오랜만이네.’ 나는 부드럽게 망치의 궤적을 틀었다. 그리고 놀이기구를 태우듯 촌장을 망치에 태운 채 한 바퀴 크게 돌은 뒤. 콰아아앙-! 반대쪽 땅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단순히 그랩을 당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더욱더 멀리 떨어지게 된 셈인데……. “……!” 바닥에 처박힌 촌장이 각혈하듯 피를 토해낸다. 그래 봐야 재생력이 높아서 금방 회복하기는 하겠지만. 당장은 꽤 충격이 큰지, 일어나는 동작이 조금 굼뜨다. “그래, 그게 있었지.” “오, 누구에게 듣기라도 했나 보지? 나는 말해준 기억이 없는데.” “…….” 촌장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나쳐 저 멀리에 있는 에르웬을 한 번 응시할 뿐. 쯧,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네. “꿈 깨라.” “…….” “너는 절대 저기까지 못 가니까.” “자네를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말인가?” “그—!” ‘그래’ 라고 대답하려던 차. 촌장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모자란 민첩 수치로 다시 촌장의 몸을 찾았을 때, 촌장은 어느새 지근거리에서 칼을 휘두를 자세를 취한 뒤였다. 콰아앙-! 겨우 제때 들어 올린 방패에 꽂히는 검격. 매일같이 방패를 들고 싸운 감각을 통해서 곧장 알 수 있었다. 방패에 가해진 대미지가 훨씬 커졌다. 전에는 흠집이 조금 생긴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거의 파인 느낌인데.’ 물론 이 현상에 의문을 갖진 않았다. 촌장이 다른 스킬을 꺼냈다기보다는, 이번엔 그저 내가 약해졌을 뿐이니까. 「[초월]이 비활성화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1분의 대기 시간을 갖습니다.」 패시브인 [진화형 외피]의 도검류 내성은 50%. [철옹성]을 써야지만 75%가 된다. 여기에 [초월]의 효과로 패시브 효과가 1.5배 증가하면 사실상 면역이나 다름없어지지만……. 아주 안타깝게도 도검 내성엔 리미트가 있다. 모든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도검 내성은 85%. 쉽게 말해, 앞으로 1분간 85%가 75%로 줄었다. ‘바꿔 말하면 15%로 들어오던 게 25%로 들어온단 뜻일 테고.’ 단순 계산으로는 10% 차이일지 몰라도 실제로 체감되는 대미지 증가는 거의 2배 가까이 되는 것. 콰아아앙-! 이내 촌장이 매섭게 휘두르는 검을 막고 있자니, 뒤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금부터는 나도 돕겠다.” “아! 아! 나도……!” “……나도다! 나도!” 아멜리아, 미샤, 그리고 아이나르로 구성된 우리 클랜의 근딜 군단. “조심해라. 만만한 놈이 아니니까.” 조금 걱정이 됐지만, 일단 뒤로 물리지 않고 함께 전투를 이어갔다. 처맞기만 해서는 알아낼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심연의 힘]을 시전했습니다.」 「미샤 칼스타인이 [빙하의 혼]을 시전했습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야성제어]를 시전했습니다.」 내가 메인 탱커를 맡고, 근딜 삼자매가 나를 벽 삼아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듯 무기를 휘두른다. 그 과정에서 촌장의 새로운 정수가 발견됐다. 쿠르르르릉-! 촌장의 주변으로 거무튀튀한 안개가 퍼져 나오며 전류를 방출한다. [천둥구름] 시전자 주변에 광범위한 번개 피해를 주며, 입힌 타수에 비례해 스킬의 쿨타임이 줄어드는 2등급 스킬. “…으, 읏!” 그래도 번개에 맞은 게 날 포함해 네 명뿐이라, 쿨타임이 확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뇌신걸음] 쿨타임은 다 돌았겠네.’ “모두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판단이 끝난 즉시, 서둘러 근딜 삼자매를 뒤로 물렸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타닷-! 한 번 앞으로 대시한 촌장의 몸에 전류가 휘감기며 피해 면역 상태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번 촌장 새끼의 목표는……. “아이나르!!” 거리가 가까웠던 만큼 그랩기를 이용해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이나르 프넬린이 [웅크리기]를 시전했습니다.」 「3분간 모든 내성 수치가 20배 증가합니다.」 「3분간 자연 재생력이 20배 증가합니다.」 그래, 이게 있었지. 「3분간 모든 내성 수치가 20배 증가합니다.」 빛나는 칼이 아이나르의 몸통을 내리찍으며 뼈가 드러날 만큼 파였다. 하나, 즉사까지는 가지 않은 이상 문제없다. 「3분간 자연 재생력이 20배 증가합니다.」 [웅크리기]의 진가는 재생력에 있으니까. ‘그래도 일단 한 명이 아웃된 건가…….’ 몇 초 싸우지도 않았는데 아이나르가 전투 이탈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이제 대충 컨셉이 잡히네.’ 촌장은 번개 검사다. [뇌신걸음]은 그렇다쳐도, 방금 쓴 [천둥구름] 덕분에 확실해졌다. [천둥구름]이야 공용으로 써도 문제 없지만, 거기 딸린 패시브는 아니니까. [전도체]. 전격 계열의 스킬을 사용 시 스택이 쌓이며 모든 전격 계열 스킬에 추가 보정을 주는 패시브 스킬. 아무튼, 이걸 알아낸 건 꽤 중요했다. 촌장이 번개 검사라고 한다면, 저 빛나는 칼에 대해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으니까. ‘분명 [극전하]겠지.’ [심연의 힘]처럼 무기 인챈 계열 스킬로 분류가 되는 변환계 이능. 특이점으로는 번개 관련 시너지를 받으면서도 피해량 자체는 물리 피해로 입힌다는 점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듯. 또다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다. ‘[극전하]를 먹은 거면 그 패시브도 갖고 있을 테고…….’ 벌써 네 개의 정수를 알아낸 거나 다름없는 셈. ‘어찌된 게 벌써 2등급 이상만 네 개네.’ 정수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었나? 예상했던 것보다 평균 등급 수준이 훨씬 더 높다. 하지만, 일단 종합해서 중간 점수를 내자면. “5점.” 아, 물론 10점 만점 기준이다. 번개 계열로 나름 컨셉을 맞추긴 했어도, 시너지가 딱히 좋아 보이진 않거든. ‘암, [천둥구름]만 해도 연계해서 사기칠 수 있는 스킬이 얼마나 많은데?’ 뭐, 그래도 고등급 정수 덕분에 밸류 자체는 엄청나게 높은 편이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남은 정수들도 고등급 정수이길 바랐다. 밸런스가 무너진 캐릭터는 그만큼 약점도 많으니까. ‘오케이, 그럼 오늘은 이만하는 거로 하고…….’ 하나. 혼자 세고 있던 마지막 초를 속으로 읊은 순간. 후우우우우우우웅-! 온 세상이 빛으로 물들며 굉음이 피어났다. 동시에 후방에 있던 베르실이 모두를 대상으로 희소식을 알렸다. “……돼, 됐어요! 정말로 입구가 열렸어요!” 이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날 시간이었다. *** 불타는 마을과 산산조각난 마을 입구. 그리고 탐험가들이 우르르 떠나며 텅 비게 된 그 앞의 공터. 그곳을 지켜보던 촌장의 등 뒤로 마을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촌장, 마을에 붙은 불은 모두 진화했습니다.] 전사들은 마을에 입은 피해의 규모, 사상자의 숫자 등을 보고했지만 이를 듣는 촌장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깟 괴물놈들이 몇 죽는다고 딱히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현재 촌장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비요른 얀델. 현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이자, 육대종족 중 하나인 바바리안족의 족장. 그리고 왕국의 남작.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됐건만.” 태산 같던 바위가 바람에 조금씩 깎여 나가듯, 세월에 부딪쳐 무뎌진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아쉬움이었다. 하나 그는 오랜만에 맛보는 인간적인 감정을 훌훌 털어냈다. [촌장, 추격대를 구성하겠습니다.] [됐다.] [……예? 하지만…….] [당장은 마을을 수습하는 게 먼저다. 그것은… 무사하겠지?] [예. 아까도 확인하신 대로 무사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아직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일이 조금 골치아파졌지만, 아직은 겨우 그뿐. 촌장은 눈을 감고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바바리안을 떠올렸다. “비요른 얀델이라…….” 여러모로 짐승 같은 사내였다. 어느 면에서는 이 마을의 괴물들보다도 더욱더. “다시 만났을 땐 더 강해져 있겠군.” 다만, 그리 중얼거리는 촌장의 눈빛에는 한 가지 감정이 옅게 떠올라 있었다. 기쁨의 감정이었다. 536화 레인보우 (3) 우기가 시작된 지 5일 차. 우리는 자력으로 마을을 탈출해 뭍으로 올라왔다. [그오오오오오-!] [끼예에에에엑!] [……커헝! 컹! 커컹!] 예상대로 위는 난장판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주변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렸고, 몬스터들끼리 싸워대며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하지만 우기가 시작되던 첫날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 있었다. 콰직-! 여전히 하늘에서 몬스터들이 떨어지는 건 변함없지만. “……엄청나게 줄었군.” 사실 줄었단 말로도 부족하다. 첫날에 비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니까. 100mm 정도 되던 강수량이 1mm까지 내려간 정도의 차이. “빌어먹을 촌장 새끼.” 그놈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내게는 말하지 않았던 거겠지. ‘우기가 위험해야, 계속 마을에 의지하게 될 테고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을 테니까.’ 새삼 찝찝한 놈이라 생각하고, 제때 마을에서 잘 나왔다고 여기면서도 당장은 머리를 비웠다. 수십 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에 선 자로서.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따로 있을 테니까. ‘다행히… 촌장은 안 따라왔고.’ 무슨 꿍꿍이를 더 숨긴 건진 몰라도 당장은 신경 쓸 게 크게 줄었다. 따라서……. “이동 대형으로!” 신속하게 지시를 내린 뒤. “지금부터 이 섬을 벗어난다!” 명확한 목표를 구성원들에게 제시하며 선두로 향한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방패로 몬스터의 이빨을 막아내고, 망치로 턱주가리를 후려치며 길을 뚫는다. 또한 그와 동시에. “마법사들은 여유가 되는 만큼 마석을 챙겨라!” 새로운 지시를 하달한다. 그야 아깝잖아? 지천에 마석이 널렸는데, 그냥 두고 지나친다면 탐험가라 볼 수 없다. 뭐, 예전에야 촌장놈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고 말이지.’ 새삼 느끼는 것인데, 역시 망치질은 사회 생활에 도움이 된다. 어느 관계든 명확하게 바꿔준단 점에서 특히나. 솨아아아아아아-! 마법사들이 연신 루팅 마법을 쓰며 산처럼 쌓인 마석들을 수거한다. 그만큼 몬스터와의 전투에선 기여도가 줄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몬스터가 크게 줄어들었단 변수 덕분에 한결 여유가 있었으니까. ‘이대로면… 아무도 안 죽는 것도 가능할지도.’ 최악을 염두에 뒀던 나로서는 몹시도 기쁜 상황. 이후로도 가장 위험한 선두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와 레슬링을 하며 길을 뚫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흘렀을까. 「강철의 정령을 처치했습니다. EXP+6」 「바포메트를 처치했습니다.」 「아이니콘을 처치했습니다. EXP+6」 「머드골렘을 처치했습니다.」 「천계나무를 처치했습니다. EXP+5」 「다키온을 처치했……」 「…….」 무분별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종의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있자니 아이나르에게서 희소식이 전해졌다. “오오오!! 영혼이! 영혼이! 충만해진다!!” 슬슬 그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던 아이나르가 마침내 레벨업을 한 것. “이로써 나는 한 번 더 강해진 것이다!!” 강해졌다고 하기엔, 당장 영혼력이 상승한 게 끝일 테지만……. 그래도 꽤 유의미한 소식이었다. 히프라마전트의 정수를 먹으며 꽉 찬 정수 자리에 한 칸이 더 생긴 거니까. ‘헥츠 클랜이나 아르민 탐사단 쪽도 실시간으로 레벨업을 하는 거 같고 말이지.’ 전체적으로 정수 칸이 +1에서 +2까지 상승한 상황.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저… 남작님! 4등급 정수가 나왔는데…….” “지금부터 나오는 정수는 아무나 먹어라! 3등급 이하까지는 신경 쓰지 않겠다!” 기껏 정해둔 배분비는 아깝지만, 사실 생각하면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시험관에 담을 시간도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전력이 강해지는 건 환영해야 할 일인 것. “와아아아아아!!” 이 조치는 탐험가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반쯤 남은 물 한 잔을 보고서도 관점이 나뉘듯.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뚫고 나아가는 이 상황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여기기 시작한 건데……. ‘나쁘지 않아.’ 분위기 자체는 긍정적으로 봐도 좋았다. 하지만, 분위기 하나만으로 모든 역경을 넘어설 수만은 없는 법. [끼요오오오오오-!] 저 멀리서 포효를 내지르며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음, 새라고 하기엔 그런가? 쿠웅-! 하, 어쩐지 뭔가 술술 풀리더라니. ‘……호락호락하게 보내주진 않겠다 이거지.’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안타깝게도 이전과 변한 건 없었다. 혹시나 내가 잘못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건만. 새하얀 깃털과 활짝 펴진 날개. 드레이크를 연상시키는 몸체에 기린처럼 삐죽 솟아나온 기다란 목. 그리고 그 모가지 끝에 매달린. 사람과 비슷한 이목구비를 지닌 얼굴까지. 워낙 유명한 몬스터다 보니 그 기괴한 모양새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보다 공포가 먼저 앞섰다. “이, 인면조다……!” 2등급 비행종, 인면조. 섬을 탈출하는 과정에 나타난 첫 번째 고비였다. *** 하늘에서 날아와 지면에 착지한 후. 무표정한 표정으로 우리를 쓱 둘러보던 녀석의 눈꼬리가 기이할 정도로 길게 휘어진다. [끼히히히히히히.] 하, 진짜 [던전 앤 스톤]엔 왜 이렇게 끔찍한 몰골의 몬스터가 많은 건지. 시체골렘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역겨움이다. 온갖 몬스터들과 실제로 만나고 피 튀기게 싸우며 내성을 쌓은 게 아니라면 저 면상데기를 본 순간 소름이 돋았겠지. 이렇게 곧장 지시도 내리지 못한 채. “마법사! 보호 결계를 쳐라!” 2등급 이상의 몬스터와 전투 경험이 있는 탐험가는 이 도시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나 나는 저런 놈들을 수없이 잡아왔다. 비록 그게 게임 내의 이야기일지라도. 마주한 순간 곧장 판단을 내릴 경험은 되어주는 셈. 후우우웅-! 이내 마법사들이 반투명한 보호막을 우산처럼 머리 위에 편 순간. 인면조의 눈 흰자위 부분이 검게 물든다. 그리고……. 「인면조가 [종말의 노래]를 시전했습니다.」 하늘에서 샛노란 빛기둥이 떨어진다. 그것도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콰쾅! 콰콰콰아앙! 콰아아아앙-! 마치 하늘이 노해서 심판을 하듯, 10초가량 떨어져 내리며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빛기둥. 이펙트에 비해 대미지 자체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서 결계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끼히히히히히-!] 빛기둥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끼 인면조들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일종의 토큰형 소환 몬스터인데……. “뭣들 하나! 저것들 먼저 해치워라!”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저 새끼 인면조들은 1분이 지나면 완전히 성장해 스킬을 써대거든. 이론상 무한 증식이 가능하다고 해야 하나? 저 새끼들이 [종말의 노래]를 써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답이 없어진—. “얀델, 지시를 내려라!” 아, 그래 혼자 생각할 때가 아니지. “에르웬…….” 습관처럼 에르웬부터 호출하려 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지금 얘는 리타이어 상태거든. 마을을 벗어나느라 MP를 전부 썼기에 지금 당장 전투에는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 에르웬한테만 의지했다고.’ 잇몸이 없으면 턱뼈로라도 씹는 게 바바리안의 정신. “에밀리, 미샤! 너희 둘은 나를 따라와라! 아이나르, 너는 본대를 지키고… 베르실! 후방 지원은 네가 전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해라!” 그리 말하며 앞으로 대시하자 아멜리아와 미샤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아멜리아는 오른쪽, 미샤는 왼쪽이었다. ‘어, 잠깐만.’ 이 위치는……? “얀델, 미리 말해두마.” “…응?” “또 그짓을 하려 든다면… 기필코 죽이겠다.” 쩝,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럴 일 없다.” “나는… 괜찮은데…….” 미샤의 허락이야 어쨌든, 한쪽이 저리 몸서리를 치며 거절하는 이상 강제로 합체를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얘는 히프라마전트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사이즈도 아닌 터라 명분도 부족하고. 쿠웅-! [초월]과 연계해 [거대화]를 한 상태를 기준으로, 딱 눈높이가 비슷하게 오는 사이즈. 첫눈에 반한 것처럼 나만 빤히 보는 걸 보면 일단 어그로는 잘 잡힌 거 같으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대로 달려가 실드 차지를 꽂아넣는다. [키야아아아악-!] 체중을 실은 몸통박치기에 휘청이는 인면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샤와 아멜리아가 양옆으로 흩어져 산개하며 하체 위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번뜩-! 검게 물든 인면조의 눈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인면조가 [파멸의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그래, 역시 나한테 박을 줄 알았지. 화르륵-! 이내 심장부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든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초당 1%씩 감소합니다.」 자, 그럼 이론상 100초가 지나면 죽는 건가? ‘다시 생각해도 골때리는 스킬이란 말이지.’ [파멸의 각인]. 단일 타겟형 ‘저주’에 속하는 이 스킬은 회피와 방어가 불가능하다. 한데 지속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한번 맞으면 저놈이 뒈지거나 내가 뒈지거나 할 때까지 저주가 지속된다는 뜻인데……. 공략 방법은 몹시 간단하다. “으아아아아아아!!” 자연 재생력과 신관의 케어를 받으며 그저 버텨내는 것. “얀델! 괜찮나?” “난 신경 쓰지 말고 칼이나 휘둘러라!” 애당초 인면조 자체가 장기전으로 가서는 이길 수가 없도록 설계가 된 몬스터. 따라서 어그로만 받아주며 딜러들이 공격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애썼고, 머지않아 근딜 라인만이 아니라 원거리 딜러들도 참전하며 집중 포격을 가했다. [끼히히히히……!] 이내 공방이 길어지자 인면조도 다른 스킬들을 연달아 사용했다. 「인면조가 [의태]를 시전했습니다.」 거대한 몸뚱이에 달린 거대한 사람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한다. 원래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컸지만 그 얼굴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오! 에밀리다! 괴물이 에밀리가 됐다!” [의태]. 반경 내에 위치한 캐릭터 중 한 명의 스킬을 무작위로 시전하는 그 스킬. 「인면조가 [자가복제]를 시전했습니다.」 이런 씹……. ‘하필 가져가도 저 스킬을 가져가냐.’ “오! 에밀리가 둘… 아니, 셋인가!!!” 어쩌다보니 보스몹이 둘로 늘어난 상황. 그 와중에 분신체가 새롭게 스킬을 시전했다. 「인면조가 [종말의 노래]를 시전했습니다.」 빛기둥이 한 번 더 떨어지고. 「인면조가 [파멸의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초당 2%씩 감소합니다.」 후, 벌써 이것도 2중첩이네. 신관이 버텨주려나?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안 좋은 소식은 왜 항상 연달아 찾아오는 건지.’ 「인면조가 [종말의 노래]를 시전했습니다.」 이내 기어코 성장한 새끼 인면조 하나가 스킬을 시전했다. 그리고 이로써. 「인면조가 [파멸의 각인]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초당 3%씩 감소합니다.」 3중첩이 되었다. 하… 이 상태면 신관으로는 100% 커버가 안 될 텐데.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싶지만, [파멸의 각인]에 걸린 이상 도주는 불가능하다. 결국 답은 하나뿐. “뒈져라, 이제 좀!!” 자랑스러운 K-바바리안으로서 이순신 장군님의 신념을 본받으며 죽기 살기로 놈에게 달려든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더욱더 격렬하게. 「인면조가 [길라잡이]를 시전했습니다.」 「인면조가 [수호령]을 시전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인면조 역시 미친듯이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캐릭터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의 상승량이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이제 어느 쪽이 이기든 승부가 나겠구나 직감한 그때. 쿠웅-! 네 가지 소식이 추가됐다. 결론만 말하자면 좋은 소식 두 가지와 나쁜 소식 두 가지였는데……. 일단 좋은 소식부터 정리하자면 아주 간결하다. 「인면조를 처치했습니다 +EXP 8」 하나, 마침내 인면조가 죽었다. 그리고…….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둘, 정수까지도 드롭이 됐다. 참고로 정수의 색은 하얀색. ‘[의태]네.’ [종말의 노래]처럼 코어 정수 삼아서 강화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범용성이 크다보니 나름 괜찮은 정수였다. 다만 여기서 나쁜 소식은……. “뭐, 뭐야!” “창……? 갑자기 창이 왜…….” 인면조 막타를 친 게 우리가 아니라는 점일까. 쿠웅-! 이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인면조의 머리통을 꿰뚫고 바닥에 꽂힌 거대한 창을 쥐었다. 정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약 3m 가량 되는 작은(?) 체구. 조각상처럼 매끈한 바위색의 피부를 가진 인간 모습의 외형. “타이타누스……! 타이타누스다!” 이번에도 2등급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것. 그게 첫 번째 나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니미럴.’ 타이타누스가 쥐고 있는 붉은색의 창이었다. No.7 밀라옐의 신록거창. ‘저걸… 저 새끼가 들고 있다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머리는 차분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였다. 「필멸자를 발견한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크게 분노합니다.」 균열 수호자다. 537화 레인보우 (4) 8층 균열 중 하나인 빛의 도시 칼헤움.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 보스방에서 출현하는 균열 수호자.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 이놈이 왜 일반 필드에서 나타났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이놈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자면. 몬스터인 주제에 넘버스 아이템을 사용하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신록거창의 드랍률이 3%나 되지.’ 다른 넘버스 아이템도 드롭을 하지만, 싱글 넘버스에 속하는 ‘신록거창’을 가장 높은 확률로 드롭한다. 그래서 창바바를 키울 때 엄청 잡았던 기억이 있다. 어지간하면 신록거창이 창 계열에서는 졸업 무기로 쓰이니까. 별개로 정수 자체도 굉장히 좋았다. ‘아무튼, 이놈이 왜 여기서 나왔느냐는 제쳐두고.’ 앞서 말했듯, 이놈을 잡을 수 있다면 보상 하나는 확실하다. 정수가 나오면 대박이고, 무기가 떨어져도 대박. 하지만, 문제는 현재 우리의 컨디션이다. ‘못 잡아.’ 나는 빠르게 판단을 끝냈다. 저놈 자체는 우리의 전력으로 공략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일단 신관은 이제 제구실을 못한다고 봐야 할 테고……..’ 메인 딜러 에르웬도 골골대는 중이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정말 운 좋게 아직까지 사망자는 없지만, 다들 벌써 상당히 지쳐 있으며……. [컹! 커헝! 컹컹!] [그오오오오오오—!] 주변에는 여전히 몬스터가 득실거린다. 사실상 보상보다는 생존을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 “얀델, 어쩔 거지?” 아멜리아가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결단을 내릴 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해안가를 향해 돌진한다.” “해안가……? 아, 도망치겠다는 뜻—.” “해안가를 향해 돌진한다는 뜻이다.” “…….” 그것 말고는 우리에게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할 건 하고 가야겠지.’ 튈 땐 튀더라도 그 전에 얼른 정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게, 2등급 정수를 바닥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시험관에 담는 건 무리.’ 욕심은 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도가 크다. 정수를 시험관에 담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니까. 그사이에 사고가 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즉, 결국엔 누군가의 몸 속에 집어넣은 다음에 튀어야 한다는 뜻인데……. ‘누구에게 먹여야 하지?’ 고민이 됐지만, 나는 서둘러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콰아아앙-! 밀라옐이 대시하며 뻗은 창을 방패로 막아냄과 동시에 소리를 내질렀다. “뮐 아르민!” 아르민 탐사단의 단장, 뮐 아르민. 클랜의 단장이면서 저주 특화 네크로맨서 클래스를 갖고 있는 특이한 탐험가. 사실 냉정히 말해 생판 남인 이 녀석한테 이 귀한 걸 넘겨준다는 게 조금 배가 아프지만……. “인면조의 정수를 취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얘가 제격이긴 하단 말이지. 보니까 얘도 최근에 레벨업을 해서 정수 자리가 생긴 거 같고. “……예? “못 들었나? 어서! 시간이 없다!” “아, 알겠습니다!” 잘못 들었다는 듯 얼이 나가 있던 녀석이 그제야 움찔하며 앞으로 달려 나왔고, 아멜리아는 그런 녀석이 정수 앞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보호했다.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저는 남작님의 동료도 아닌데…….” 아, 진짜 뭐라는 거야. 안 그래도 이 새끼 창질 때문에 정신없구만. “상관없으니까 어서!” “예, 옛!” 이내 다그치듯 외치자 뮐 아르민이 손을 뻗어 정수를 흡수했다. 오케이, 그럼 여기서 챙길 건 다 챙겼고……. 곁눈질로 정수 흡수가 끝났음을 확인한 나는 있는 힘껏 밀라옐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얼른 대원들에게 새 지시를 내렸다. “뭣들 하나! 이동 대형을 갖춰라!” “…….” “지금부터 해안가를 향해 전력으로 돌진한다!” “예……?” 아, 진짜 다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튀자고!” “아, 예……! 모두 이동 진형으로 서라! 지금부터 전력으로 도망친다!” 쯧, 바바리안 남작 체면 다 깎아먹게. *** “후우, 후우…….”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달려나간다. 아, 물론 이번엔 최선두가 아니라 본대의 가장 뒤편에 위치했다. 그야 무언가에 쫓길 땐 뒤가 가장 위험하니까. [놓치지 않는다, 필멸자여.] 인게임에서 전투 전에 항상 대사를 치던 녀석은 실제로도 멀쩡하게 사람 말을 했다. 문제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는 거지만. ‘어휴, 저 대사만 벌써 몇 번째야?’ 몇 번인가 시험 삼아 도망치며 말을 걸어봤는데, 결국 대답 같은 대답은 듣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저게 지성을 가진 존재인지도 잘 모르겠을 정도. ‘촌장 마을의 괴물들은 확실히 지성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지.’ 새삼 느끼지만, 촌장네 마을이 특이하긴 했다. 사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이런 느낌이었으니까. 핏빛성채의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도. 백색신전에서 만난 종말의 기사도 모두 사람 말을 했지만, 대화는 통하지 않았—.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거, 사람 생각하고 있는데. 휘이이이이익-! 위협적인 파공음이 등 뒤에서 들려온 즉시, 몸을 돌려 방패로 상체를 가린다. 콰아아아아아앙-! 아휴, 저 빌어먹을 창. 아주 그냥 한 번 막을 때마다 방패가 작살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싱글 넘버스 무기에 스킬까지 적용이 되니 아주 죽을 맛이라 해야 하나? ‘뭐, 그래도 스킬은 하나만 쓰니 나쁠 건 없지만.’ 참고로 이는 밀라옐이 ‘수호자’의 특성을 갖고 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균열 수호자는 패턴이 딱 정해져 있거든. HP가 깎이거나, 주변의 장치를 작동시키는 등. 그런 특정 구간을 넘기지 않으면 정해진 틀 안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아마 일반 ‘타이타누스’였으면 이렇게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없었겠지.’ 물론 그렇다고 만만한 상대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첫 페이즈에서 사용하는 저 스킬도 절대 무시할 만한 게 못 되니까.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재귀]. 회피 불가 판정에 대미지 증가가 붙은 아주 심플한 투척 전용 스킬. 다만 여기에 아주 골치 아픈 특성 하나가 붙었다.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신록거창을 회수했습니다.」 일단 던지고 나면 얼마나 거리가 멀든 간에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시전자의 손으로 투척 무기가 돌아간다. 그리고…….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재귀]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일종의 스택형 스킬이라 해야 하나? 이 패턴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위력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촌장의 칼도 막아냈던 방패에 구멍이 송송 뚫리는 중이다. 하, 여기서는 수리하는 것도 어려운데. 만신창이가 된 방패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우선 전방의 상황부터 확인했다. 맨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지만, [거대화]를 통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인지라 맨앞을 살피는 것은 크게 어렵진 않았다. ‘의외로 잘 돼가고 있네.’ 내가 선두에서 빠졌다고 전열이 무너지거나, 길을 뚫는 것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것을 바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모습을 기대했다. 하나 그럼에도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됐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자.’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 전사의 도리. 그렇게 본대와 뒤떨어진 채 밀라옐의 창질을 도맡아 마크하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바다다!” 무성한 거목들 사이로 절벽이 나타났고, 이내 그 아래로 뛰어내리자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보았던 해안가가 모습을 드러냈—.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아, 진짜 얘는 지치지도 않나. 방패를 뚫은 창이 스르륵 빛이 되어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금 날아드는 창. 푸욱-! 근데 어째선지 이번엔 어깨에서 통증이 피어난다. 방패는 제때 들어서 막은 거 같은데……. “아.” 방패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그냥 통과가 된 거구나. “비, 비요른!” “얀델! 괜찮나!” 선두에 있던 미샤와 아멜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다가왔다. 또한 베르실은 신성력이 바닥난 신관을 대신해 서둘러 포션을 꺼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걱정들을 모두 거부했다. “나중에. 일단 배를 띄우는 게 먼저다.” “아…….” 창이 회수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기에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해안가로 달려나갔다. “어…….” “어어…….” “저거… 괜찮은 겁니까?” 길을 뚫느라 바쁘던 탐험가들이 내 몰골을 보고선 화들짝 놀라며 길을 터주었다. 하긴, 이따만 한 크기의 창을 어깨에 꽂은 거대 바바리안이 달리고 있는데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촤아아아아앗-! 서둘러 배를 소환하고서, [거대화] 상태로 직접 탐험가들을 손으로 잡아다가 갑판에 올렸다. 전부 탑승한 뒤에는 나도 원래 크기로 돌아가 배에 탔고, 그대로 마공학 추진 장치에 마석을 퍼부으며 출발. 그렇게 빠르게 섬에서 배가 멀어지며 한숨을 돌리는가 싶던 차.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한 번 더 창이 날아오며 내 복부에 꽂혔다. “야, 얀델 씨……!” “남작님!!” 아오, 씨바……. 아픈 배를 쥐고 허리를 구부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해안가에 서 있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래, 얼굴은 제대로 기억했으니까……. “다음에 보자.” 바바리안은 원수를 결코 잊지 않는다. *** 솨아아아아아-! 은빛 물결을 헤치며 배가 나아간다. 이만한 인원이 타니 갑판이 비좁을 지경이지만,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없다. 그야 앉아서 쉴 수 있는 게 어딘가. 모두가 현 상황에 만족하며 늘어져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아, 물론 그중에 몇몇 탐험가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껴있었다. “사망자 한 명이라…….” 섬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헥츠 클랜 소속의 전사 한 명이 사망했다. 후… 꼭 이럴 때 죽는 건 항상 전사지. 같은 전사로서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항상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렇지만… 기적이에요. 한 명밖에 안 죽었다는 것도.” “그래, 그건 그렇겠지. 죽은 녀석의 이름이 뭐였나?” “셸리안느 에머타운이요.”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떠올랐다. 사석에서 대화는 얼마 나눠보지 못했지만, 이쪽 업계에는 흔치 않은 여전사라 눈에 띄었거든. 항상 호탕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시체는?” “수습해서 챙겨 올 수 있었어요.” “다행이군…….”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탐험가들을 불러모은 뒤, 죽은 탐험가의 장례를 치러주자 말했다. 다들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으나, 그 말에 반대를 하는 자는 없었다. 화르륵-! 물론 미궁 내, 그것도 선상에서 하는 장례는 간소했다. 불에 타지 않는 천을 깔아놓고서 시체를 태운 뒤 유골함에 넣은 것이 전부. 쿠우웅-! 콰직-! 콰직-!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하늘에서는 주기적으로 몬스터가 떨어졌다. 뭐, 그래도 배 위에 쳐둔 결계에 막혀 바다로 떨어졌지만. 주르륵. 마치 비오는 날의 창문처럼, 결계에 묻은 피가 방울의 형태로 뭉쳐지며 흘러내린다. “편히 쉬시오.” “하하, 너무 억울해하진 마시구려. 우리도 언제 뒤를 따라갈지 모르는 신세이니.” “씁, 말이 씨가 되는 거 몰라요?” 죽음이 가까운 탐험가들답게 엄숙한 분위기에서도 가벼운 농담이 튀어나왔다. 하나 어느 누구도 그런 농담을 책잡지 않았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견뎌내는 방법은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라는 걸. “끝이다. 쉬어라. 그리고 모두 고생 많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다시금 자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마법사들이야 결계를 유지한다고 완전히 편하게 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섬에서 결계를 펼칠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배가 바다에 나오자마자 마공학 추진기를 뜯어서 개조해 마력 회로를 연결한 덕이다. ‘마석도 충분하고, 예상보다 몬스터들도 많이 떨어지지 않으니, 큰 문제만 없으면 우기가 끝날 때까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고…….’ 이제 진짜 한숨 돌릴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벽에 등을 기대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래서 그냥 아공간을 뒤져서 임시용 방패나 꺼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에 쓰던 것보단 훨씬 뒤떨어진 성능의 3등급 방패였다. 당시엔 여유 자금도 적었고, 애초에 이걸 준비해 두면서도 정말 쓸 날이 올까 싶었거든. ‘그런데 진짜 그날이 왔네.’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고 있자니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남작님.” 아르민 탐사단의 단장, 뮐이었다. “무슨 일이냐? 쉬지 않고.”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해봐라.” 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뮐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였습니까?” “무슨 뜻이지?” “그… 인면조의 정수 말입니다. 어째서 그걸 제게 주신 겁니까?” 아, 그게 궁금해서 온 거구나. 일단 답하자면 그 답은 몹시 간단하다. 우선 아이나르, 아멜리아, 에르웬, 미샤는 후보에 오르지도 못했다. 얘네들은 먹을 정수들이 정해져 있다. 베르실은 마법사라 정수를 못 먹고. ‘그나마 후보를 꼽자면 아우옌인데…….’ 사실 아우옌에게도 어울리는 정수는 아니다. [의태]를 사용해 몬스터의 스킬을 흉내내는 식으로 상황에 따라 전투에 기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라고 해야 하나? 인면조 정수의 핵심인 패시브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나는 뮐을 선택했다. “그 정수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게 너였다.” “그게… 전부란 말씀이십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아르민 탐사단은 탐사 지분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 미리 2등급 정수를 선입금을 했으니 나중에 우리가 챙겨갈 때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리란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모양 빠지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게 전부다.” “하지만! 저희는 결국 남—.” “어떻게 남이냐? 이미 동료가 되었는데.” “동… 료……?” “그래, 그런데 문제라도 있나?” 내 태연한 답변에 뮐 아르민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남작님은…….” 어딘가 잠긴 목소리로 뭐라 말하려던 뮐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잘은 알 수 없지만, 왠지 무언가 크게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 우기가 시작된 지 6일 차. 섬을 탈출한 이후의 항해는 평온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배 위로 기어오르는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그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하늘에서 몬스터가 떨어져내렸지만. 그래도 그 섬을 탈출하며 겪은 난장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평온한 시간이 이어진 만큼 생각을 정리하며 계획을 점검할 여유가 있었는데……. ‘좋아, 결정했다.’ 이내 아공간에 고이 잘 모셔두고 있던 팬던트 하나를 꺼내자, 옆에 있던 미샤가 눈을 빛냈다. “어, 비요른? 그거…….” “…….” “혹시… 나, 나를 주려고……?” 뭐래, 얘는. 탐낼 걸 탐내야지. 눈빛에서 탐욕을 읽은 나는 서둘러 다시 팬던트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이제 이걸 써볼 때도 됐다. 538화 레인보우 (5) 가르파스의 목걸이. 처음 참석한 귀족가의 연회에서 ‘기사분쇄자’란 이명과 함께 상품으로 얻어낸 넘버스 아이템. 다만 너무 초반부에 습득한 탓에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바로 그것. 이 목걸이를 쓰려면 탄탄한 재력이 받쳐줘야 한다. ‘한데 지금 마석이 벌리는 걸 보면…….’ 한두 달 안에 목표로 한 양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단 판단이 선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당장 지하 1층에서 이것보다 확실하게 스펙업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없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정수보다 격한 성장이 가능할 터. ‘그럼 앞으로 한동안 중요한 건 마석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촌장섬 전역에 쌓이고 있을 마석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우기가 끝난 다음에 그걸 전부 다 주워오면 기간을 확 단축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너무 위험하겠지? ‘……잠깐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이트 헥츠, 이리 좀 와봐라.” “…부르셨습니까?” “별건 아니고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너는 예전에 우기 때 거인섬에 도착했다고 했지?” “예, 우기가 시작된 첫날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그때 거기 거인섬에서도 마물이 가득했고?” “…그렇습니다만?” 헥츠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지으면서도 ‘시체가 남는 마물’과 그렇지 않은 ‘일반 마물’들이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던 장면의 목격담을 말해주었다. 나는 이를 곰곰이 듣다가 말했다. “이상하지 않나?” “예……?” “그렇게 마물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면 섬 안에 마석이 가득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거인섬에 도착했을 때, 몬스터의 시체들만 보일 뿐 마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짚고 넘어가자 헥츠도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그 말씀대로군요. 당시엔 생각도 못 했지만……. 마을이 있던 섬처럼 그 섬에도 마석이 남았어야 할 텐데.” “네가 그 동굴 안에 들어간 다음 처음 밖으로 나온 게 언제지?” “우기가 끝나고 열흘쯤 지난 시기입니다. 그땐 우기가 언제 끝나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군.” 의문이 더 커진다. 대체 그 많은 마석이 다 어디로 갔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시스템이라면 바다 아래에도 마석이 가득해야 한다. 콰직-!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들이 바다에 떨어지며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으니까.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 마석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뤘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그때 바다 아래에는 딱히 별게 없었지.’ 음, 그냥 지금 한 번 바다에 들어가 확인해볼까?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마법사들의 조언을 구했다. “확실히… 저 역시 굉장히 의문을 갖고 있던 부분입니다.” “당장 바다 아래로 내려가서 확인해보죠!” “하지만, 저 아래에는 온갖 마물들이 가득한데…….” “지금 그게 중요하오? 숨겨져 있던 이 세계의 법칙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잠깐만요! 꼭 입수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요!” “……응?” 흥분해서 당장에라도 바다로 뛰어들 거 같던 마법사들이 베르실의 말에 일제히 멈췄다. “우리가 가진 마석으로 확인해봐요.” 그리 말한 베르실은 갖고 있는 마석 하나를 꺼내 실로 묶은 뒤 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온갖 마법을 사용해서 그 마석의 변화를 관찰했다. 덕분에 한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걸, 왜 이제서야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없어졌네요?” “줄 뿐이군.” 바다에 들어간 마석은 사라진다. *** 실험 이후엔 수많은 가설, 그리고 의문점들이 제시됐다. “바다의 색이 은빛인 것도 마석이 흡수된 영향인 걸까요?” “글쎄, 아직 둘의 연관 관계를 확정짓기에는 근거가 부족하오.” “예. 마석을 흡수한 거라면 바닷물에서도 마력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이 바닷물은 그렇지 않지요.” “흐음……. 그런데 마석이 바닷물에만 녹는 거라면 지상의 것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원래의 나는 이런 지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데, 바바리안으로 살면서 면역이 떨어진 걸까? “저… 남작님께서는 방금 한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윽… 머리가…….” 어째선지 대화를 들을수록 두통이 밀려들었기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뭐, 연구야 마법사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이후로는 마법사들을 피해 달아나 동료들과 수다나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콰직-! 우기 7일 차에 접어들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물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23 : 59] 23시 50분을 넘은 때부터는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음… 10분 정도 시계에 오차가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결계를 해제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혹시 몬스터가 갑판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배가 망가지니까.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 째깍, 째깍. 초침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초침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자니, 어딘가 주변이 조용해진 것이 느껴진다. 쓱 둘러보니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시계를 꺼내놓고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마치 새해가 밝기 직전처럼. 째깍, 째깍.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듯, 어느덧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던 그 시간이 찾아왔다. [00 : 00] 지긋지긋하던 우기의 끝. “12시다!” “그럼 진짜 끝난 건가?” 갑판에 옹기종기 모인 탐험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새 지시를 내렸다. “결계를 거둬라!” 이내 마법사들이 배 위에 우산처럼 펼친 결계마저 해제하자, 개방감이 확 느껴졌다. 그제야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항해 내내 몬스터들이 머리를 처박고 죽은 덕에 결계에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탓인데……. “아, 아저씨!” 바람이나 즐겨볼까 하고 뱃머리를 향해가던 차, 전망대에 오른 에르웬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 저기 좀 보세요!” 뭐지? 고개를 들어 전망대를 응시하니 한 곳을 가리키는 에르웬이 보였다. 스으윽. 자연스레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인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니,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얘기를 듣고 그곳을 확인한 모든 탐험가들이 매한가지였다. 드넓게 펼쳐진 은빛의 수평선 너머. “……무지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치 우기가 끝난 하루를 축복하듯. *** 빨주노초파남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형형색색의 빛무리. 몬스터들의 피가 덕지덕지 붙은 배 위에서 보는 것이라 그런지 더욱더 그 알록달록한 색채가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하나 이대로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탐험가니까. 무지개든, 현세에 없을 지옥의 경관이든 뭐든. 수상한 게 보이면 일단 달려가서 돈이 될 게 있나 찾아보는. “아우옌! 무지개가 있는 방향을 제대로 기록해라!” “예? 아… 예!” 우선 무지개가 발생한 지점부터 체크했다. 그도 그럴 게, 타이밍부터가 수상했으니까. ‘우기가 끝났을 때, 바다에 나와 있어야지만 발견이 가능한 이상 현상.’ 과연 이게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일까? 심지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무지개는 보통의 것과 형태부터 달랐다. 일반적인 무지개가 포물선, 혹은 곡선을 그린다면……. 솨아아아아아-! 저것은 원기둥처럼 쭉 위로 솟아나 있는 형태다. 마치 게임에서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이펙트처럼. “현 위치에서는 21도. 바위섬을 기준으로는 34도 방향입니다! 거리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아우옌이 전문 용어로 뭐라뭐라 말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일단 방향을 확인하는 건 제대로 해냈다는 것. ‘근데 거리는 알 수 없다라…….’ 조금 고민이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뱃머리를 돌려서 무지개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가느냐. 그런 고민을 속으로 이어가던 때였다. “어? 무지개가 사라진다!” 저 멀리 떠 있던 무지개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5분. ‘우기가 끝나고서 5분 동안만 관측이 가능하다라…….’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끝내 뱃머리를 틀지 않았다. “어? 비요른? 무지개를 찾으러 떠나지 않는 거냐?” 아이나르는 그런 내 판단에 의문을 품은 듯했지만, 사실 리더로서 당연한 결정이었다. 거인섬도, 나무섬도, 도서관도 아직 제대로 공략을 하지 못한 상황 아닌가. 당장은 스펙업이 먼저다. 방향을 봐뒀으니 언제든 항해를 시작할 수 있기도 하고. “아우옌, 거인섬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세 시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 항로를 유지하길 약 세 시간. 마침내 거인섬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멍하니 입을 떡 벌리는 것이었다. 후, 어쩐지 그냥 여기로 바로 오고 싶더라니. “……마석이군.” 해안가 전역에 수천 개의 마석이 깔려 있었다. *** 거인섬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여타 섬들 중에 유일하게 포탈 비석이 발견된 곳이니까. 마지막에 본 그 초거대 거인은 마음에 걸리지만, 이곳을 탐사하며 밝혀낼 비밀들이 더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두근-! 섬에 숨겨진 비밀이고 뭐고, 해안가에 펼쳐진 마석을 본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물론 촌장섬에 비하면 마석이 떨어져 있는 밀도는 낮았다. 그러나 거인섬은 촌장섬에 비해 몇 배는 더 크다. 한데 이 섬 전체에 떨어진 마석을 전부 다 수거할 수 있다면? “미쳤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목표량을 다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서둘러 배에서 내린 뒤 주인 없는 마석들을 말 그대로 주워서 퍼담았다. 물론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막 우기가 끝난 직후라 여기저기 몬스터들이 가득했던 탓인데……. ‘우기를 버틴 놈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다 까다로운 놈들뿐이네.’ 최소 4등급. 거기에 괴상한 정수 조합으로 무장한 신종 개체도 나타나는 바람에 전투 난이도가 몹시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도 점점 성장하는 중이란 말이지. 대표적으로는 뮐 아르민이 있다. 「뮐 아르민이 [과민성 피부]를 시전했습니다.」 「대상이 받는 피해량이 30% 증가합니다.」 「뮐 아르민이 [영원의 쇠약]을 시전했습니다.」 「대상의 육체 수치가 30% 감소하며, 모든 저주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이 녀석의 클래스는 저주 특화 네크로맨서. 액티브 스킬도 저주 계통이며, 소환수도 그쪽 방면으로 특화되어 있다. 「뮐 아르민이 [혼령충]을 소환했습니다.」 대미지는 없다시피 하지만 타격할 때마다 일정 확률로 MP를 쪽쪽 빨아먹는 소환수. 「뮐 아르민이 [부식성 맹견]을 소환했습니다.」 적을 물 때마다 일정량의 내성을 깎는 소환수.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날아가 자폭하며 온갖 저주를 묻히는 소환수 등등. 인면조의 정수를 먹인 것도 그래서였다. 패시브 스킬인 [어미새]가 네크 전용이거든. 「반경 내의 소환수가 소환 해제 되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의 80%를 돌려받습니다.」 「해당 소환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80% 감소합니다.」 네크로맨서 트리를 탈 때 필수로 가져가야 하는 정수. 이 정수 하나로로 인해 뮐 아르민은 이전보다 최소 다섯 배 이상은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2등급 코어 정수는 그 정도 성능을 갖고 있으니까.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 돌려받은 MP와 줄어든 쿨타임을 이용해 미친듯이 소환하는 자폭병. 퍼엉-! 대미지 세팅이 없던 만큼 피해 자체는 미미했지만, 폭발이 거듭될수록 저주가 쉴 새 없이 중첩된다. ‘잘 큰 디버퍼 하나가 있으니까 사냥이 확 쉬워지네.’ 심지어 뮐 아르민은 현 상황에서도 찰떡이었다. 약한 적 여러 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강한 적 하나와 싸울 때 더 빛을 발하는 클래스였으니까. “수고했다. 뮐.” “수고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음, 얘는 요즘따라 더 나를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꼬박꼬박 ‘남작님’이라며 극존칭을 쓰고. ‘챙길 거 다 챙겼다고 미리 선을 긋는 건가? 내가 갚으라고 할까 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서운할 거 같지만, 내 기분탓일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시간이 더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섬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석을 수거하랴, 몬스터들과 싸우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나날들. [00 : 00] 어느덧 우기가 끝나고 3일 차가 되던 날. 신이 나서 마석을 줍고 있던 우리에게 안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마석이… 사라지고 있네요.” 섬 전역에 떨어진 주인 없는 마석들이 하나둘 분해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땅에 묻힌 음식이 썩어 가기라도 하듯이. “신기하네요… 마력이 분해된 건 확실한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이유가 어찌됐던 우리로서는 실로 애석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좋은 소식도 있었다. “베르실, 지금까지 모은 마석이 얼마나 되나?” “글쎄요? 검문소에서 환전하는 걸 기준으로 한다면……. 10억 스톤은 될 거 같은데요?” 목걸이 가챠를 하기엔 충분한 총알이었다. 539화 신록거창 (1) 두 번째 우기가 끝나고서 3일 차. 미궁 진입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무려 74일 차가 되는 시기. ‘섬에서 쓸어담은 마석이 약 10억 스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게 약 6억 스톤…….’ 도합 16억 스톤. 물론 이 돈은 수십 명이서 함께 모은 것이며 여기서 분배가 들어가면 내게 떨어지는 몫은 훨씬 더 줄어들 테지만……. 다행히 이 문제는 모든 단원들과 합의가 끝났다. 고로, 남은 건 이제 단 하나. “다들 마음 놓고 쉬어라!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거인섬 전역을 돌며 마석을 캐던 나는 대원들을 이끌고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이란 당연히, 조난당했던 헥츠 클랜이 발견한 포탈 비석이 위치한 동굴을 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구나 싶단 말이지.’ 현재 거인섬의 맵핑 작업은 거의 다 끝났다. 동굴이라 할 만한 것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이렇게 깊숙이 자리한 동굴은 이 섬에 이 동굴이 유일했으며, 심지어 이 동굴은 어째선지 몬스터가 접근하지 않는단 특징마저 지녔다. 사실상 최상의 안전지대인 셈인데……. 그 급박한 상황에 이곳을 바로 찾다니. ‘제발 그 운이 나한테도 조금 들어왔으면 좋겠네.’ 지금부터 내가 할 행위가 ‘운’에 큰 영향을 받는 만큼, 심리적인 압박감이 상당하다. 암만 봐도 내 운은 좋은 편이 아니니까. 아니, 굳이 따지자면. ‘내 운은 보통이니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최근이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불행한 일들을 겪으며 나는 태생부터 글러먹은 팔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딱히 운이 나쁘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일들을 전부 겪고도 살아남을뿐더러. 무엇보다……. “슬슬 시작하려는가 보군.” “비요른! 잘은 모르겠지만 힘내라!” 이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던 것부터 믿기 어려운 행운이다. 첫 탐사에 밤친구로 인연을 맺은 에르웬. 믿을 수 있던 동족 전사 아이나르. 변종이 튀어나온 핏빛 성채에서 동료가 됐던 레이븐과 히쿠로드. 팀 반푼이의 미샤, 로트밀러, 그리고 드왈키까지. 정말이지 내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말 그대로 마법 같은 행운이라 봐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대지 말자.’ 아이나르, 미샤 등. 운이 좋은 동료에게 책임을 미루고자 하는 나약한 의지를 버린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오직 굳건한 확신뿐.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한 번 더 되뇌인 순간이었다. “나는…….” 무언가 머릿속을 번뜩인다. 살짝 긴장한 듯 빳빳해지던 턱 근육에도 힘이 빠지고, 손에 남아 있던 미세한 떨림도 지워진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반이 남은 물컵. 그 물컵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보는 이들의 역할이 아니다. 이를 정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뿐. “운이 좋군.” “…응?” “저게 무슨 소리래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긴. 세상 천지의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 기록석에 적힌 미래가 반드시 실현되는 것과 같은 이치. 즉, 내가 마음을 먹은 즉시 이미 미래는 정해졌다. 그것은 세계의 진리이며, 바뀔 수 없는 법칙이다. “후후…….” 다만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말해봐야 이해할 리가 없기에 그저 웃으며 말을 아꼈다.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군.” 자연을 넘어 우주의 힘이 나를 따스하게 감싸는 듯한 감각. “햇살은 포근하고.” 내 가슴속에 깃든 것은 확신, 그리고 확신뿐. “동굴 안인데 무슨 바람 얘기를 하시는 건지…….” “그냥 시원하단 말이 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그렇다기엔 햇살이 포근하다는 건 좀…….”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필멸자들의 몽매한 의문을 뒤로하고서 바닥에 뿌려둔 마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목걸이에 가져다댔다. 급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물은 물이요, 바람은 바람이니.’ 내게 있어서는 그만큼 당연한 것이다. 솨아아아아아-! 이미 미래는 정해졌다. 「위대한 연금술사 가르파스의 권능이 창조의 힘을 감지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자, 가보자. ***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이 목걸이의 효능은 간단하다. 목걸이에 마석을 가져다대면 마석이 녹아서 사라지며 랜덤으로 빵, 물, 금속 등등을 뱉어낸다. 바로 이렇게. 「돌빵을 생성합니다.」 마석을 집어넣을 때마다 목걸이 보석 안에 표시되는 품목이 변경되는데, 그때 원하는 게 있다면 꺼낼 수 있다. 당연히 돌빵을 꺼낼 이유가 없기에 계속 돌렸다. 그런데……. ‘왜 자꾸 품목이 안 바뀌지?’ 이건 또 뭘까.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 시작부터 6연속 돌빵이라고? 9등급 마석도 아니고 5등급 이상만 박았는데? ‘5등급 이상 마석일 때 돌빵이 나올 확률은 약 4퍼센트.’ 그리고 그게 6연속일 확률은……. “…커헉!” 확률을 계산한 순간 바바리안 명경지수 모드가 깨질 뻔도 했지만, 숙달된 마인드 컨트롤로 이겨냈다. 어차피 초반부 가챠는 스택용이니까. “비요른! 괜찮은 거냐! 가래를 토하는데!” “…비켜라. 나는 괜찮으니까.” …의심은 독이다. 마음을 좀먹고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아주 질이 나쁜 맹독. 그러니까…….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버린 채, 기계적으로 마석을 목걸이에 꼬라박는 것을 반복했다. 6연속을 넘어선 9연속 돌빵?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강철 주괴를 생성합니다.」 그래, 확률은 확률일 뿐. 나올 놈은 언젠가 나온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 믿음뿐. “오! 비요른의 표정이 변했다……!”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남작님이 저런 표정을 지으시면 진심으로 할 생각이 든 거라고!” 그 무엇이 나오든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석을 계속 박아넣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슬슬 된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 「철제 장검을 생성합니다.」 빵, 금속, 벽돌 같은 잡동사니를 뱉던 목걸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장비가 나타났다. 딱히 놀랍진 않았다. 가르파스의 목걸이에는 숨겨진 법칙이 있으니까. ‘9등급 마석 기준으로 7,777개.’ 현금으로 환산하자면, 약 155만 스톤어치. 그 정도의 마석을 박을 시, 확정적으로 ‘쓸 만한 물건’을 무작위로 뱉는다. 그리고……. 「라이티늄제 흉갑을 생성합니다.」 이는 약 155만 스톤을 박을 때마다 반복된다. 이야, 그럼 310만을 박아서 라이티늄 흉갑을 얻은 건가? ‘이 정도면 시작 부분은 나쁘진 않네.’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것뿐.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결과치였다. 여기서 스톱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어? 비요른! 왜 그냥 넘어가냐! 돌빵도 아니고, 아깝게!” 그야 스톱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스택을 쌓아야 하거든. 왠지 계속 귀찮게 굴 거 같아서 얼른 답해줄까도 싶었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아멜리아가 알아서 제때 처리해줬다. “프넬린, 가만 있어라. 방해하지 말고.” “아, 아니… 나는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 “쓰읍.” “아, 알았다……. 방해하지 않겠다…….” 이래서 서열 정리가 중요한 건가? 그때 오두막에서 호되게 처맞은 이후로 유독 아멜리아에게 힘을 못 쓰는 아이나르였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레드우드 장궁을 생성합니다.」 2단계 소재의 목재를 쓴 장궁. 「철제 방패를 생성합니다.」 그보다 한참 더 밸류가 떨어지는 일반 방패 등등. 이내 그런 쓸만한 장비들을 아홉 번 뽑고 나서, 딱 열 번째 차례를 앞에 뒀을 시기. 아니, 정확히는……. 현금으로는 약 1,555만 스톤. 9등급 마석 기준으로 777,777개를 목걸이에 고스란히 꼬라박은 그 순간. 「No.9981 조난자의 기력 반지를 생성합니다.」 처음으로 넘버스 아이템이 떴다. 물론 금전적으로는 이전보다 이득은 아니었다. 넘버스 아이템이라고 전부 비싼 건 아니거든. ‘얘가 한 200만 스톤 정도 했지?’ 어찌 보면 아까 나온 라이티늄제 흉갑보다도 가치가 떨어지는 아이템. 그러나 이 또한 크게 의미는 없다. 「구름 사탕을 생성합니다.」 「수련용 마력 지팡이를 생성합니다.」 「고밀도 마력초를 생성합니다.」 「와이번 가죽 갑옷을 생성합니다.」 「영구 마법 부여(빛구체) 스크롤을 생성합…….」 영약과 장비, 강화형 재료 등등. 대충 눈으로만 보고서 스킵하며 밑 빠진 독에 마석을 집어넣고 있던 때였다. “…응?” 몸이 움찔 굳었다. 몹시 간단한 이유였다. 「미스티움 주괴를 생성합니다.」 미친, 여기서 6단계 금속이 뜬다고? 방금 전에 스크롤이 뜬 걸 보면… 암만 봐도 그냥 일반 가챠 확률이었을 텐데? “미, 미스티움이다!” “저, 저거 주괴 하나만 해도 억 단위 아닙니까?” 여기서 도중에 그만두기만 해도 수천만 스톤의 이득을 보는 셈이다. 하지만……. ‘니미럴.’ 불행 스택을 쌓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초반부에 잘 뜨는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의심을 지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석을 넣었다. “…아!” “……허!” 어째선지 주변에서 통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가챠 돌리는 사람 부정타게. ‘어찌 소인이 거인의 마음을 헤아리랴.’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나아가기를 얼마나 오랜 시간 반복했을까. 솨아아아아아아-! 현금으로는 약 1억 5천 5백만 스톤. 9등급 마석 기준으로 7,777,777개를 목걸이에 집어넣은 그때. 처음으로 목걸이에서 붉은색빛이 터져 나왔다. 「과도한 마력의 응축으로 가르파스의 권능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번 가챠가 끝나면 다시는 가챠를 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 “비요른… 괜찮은 거냐? 목걸이에 실금도 생긴 거 같은데…….” 괜찮지 않을 리가. 애초에 퇴로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한번 볼까.’ 붉은색빛이 가신 보석 안을 확인했다. 확률상 여기부터는 싱글 넘버스 아이템도 뽑기가 가능하다. 만약 좋은 게 나왔다면 이쯤에서 익절을 하고 그만둘 용의도 있었—. 「No.535 극지 방패를 생성합니다.」 Polar regions shield. 게임 내에는 그런 이름이 붙었으며, 방패 바바를 키울 때 먹으면 졸업 방패를 구하기 전까지 요긴하게 썼던 바로 그 물건. ‘에라이.’ 방패가 뜬 건 나쁘지 않은데, 트리플 넘버스라니?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빠르게 패스하고 넘겼다.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물건이나 의외로 주변에서는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다. 분명 알아보지 못한 거겠지. 넘버스 아이템을 전부 외우고 다니는 변태들은 얼마 안 되니까. ‘다음.’ 마석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물건을 대충 쓱 보고 확인한 뒤. ‘다음.’ 계속해서 품목을 새로고침한다. 횟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날수록 고가치의 품목도 거듭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중에 인상적인 몇 개만 꼽아보자면. 「No. 2998 수호병단의 징표를 생성합니다.」 내가 끼고 있는 귀걸이. 「세계수의 힘이 깃든 지팡이를 생성합니다.」 베르실이 눈을 빛내며 탐냈던, 6단계 소재인 세계수로 제작된 스태프. 「아크 주괴 5개를 생성합니다.」 무려 최대 갯수로 나온 6단계 주괴 아크. 「신단을 생성합니다.」 9층 균열에서 일정 확률로 습득이 가능한 영약.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를 생성합니다.」 나보고 어쩌란 건지 모르겠는 목걸이. 뭐, 마트료시카 같은 건가? 아무튼, 이것만이 아니라도 수많은 물건들이 등장했고 나는 전부 다 넘겼다. 그리고 그 결과. 「돌빵을 생성합니다.」 마침내 목적지를 앞에 두게 되었다. 워낙 많은 양의 마석을 박아넣다보니 자세하게 수치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딱 왔다. ‘한 10번 정도.’ 앞으로 마석을 10번 정도만 집어넣으면 목표치에 도달한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현금으로 약 15억 5천만 스톤. 「돌빵을 생성합니다.」 9등급 마석 기준으로는 무려 77,777,777개. 「돌빵을 생성합니다.」 으음……. 「돌빵을 생성합니다.」 어? 「돌빵을 생성합니다.」 잠깐만…….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니다.」 「돌빵을 생성합…….」 마지막에 9연속 돌빵이 뜬다고? 물론 돌빵이 뜨든 강철 주괴가 뜨든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꿀꺽. 나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어째선지 손아귀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계시. 지금 겪고 있는 이 현상이 마치 계시 같았다. 앞으로 내가 겪을 미래에 대한, 그런 우주적인 계시. ‘…는 무슨.’ 다만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멘탈을 지켰다.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또한, 뿐만 아니라. ‘차라리 잘 됐어.’ 어떤 면에선 긍정적인 사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신은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 게임을 할 때 필요없는 장비를 강화하다가 터뜨리고 진짜 장비를 강화했던 적도 많으니까. 그래, 그러니……. 스윽. 믿음을 갖고서 마석을 집어넣는다. 솨아아아아아아-! 마석이 잘게 부서지며 목걸이가 빛을 토해냈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빛. 「흡수한 마석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언제든 목걸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운빨 싸움이다. *** 77,777,777개의 마석. 이를 흡수한 가르파스의 목걸이는 확정형 가챠로 변한다. 나름 천장이 있다고 해야 하나? No.1부터 No.35까지. 지금부터 이 목걸이는 그 번호 사이에 존재하는 최상위 넘버스 아이템을 확정으로 만들어준다. 그럼, 대망의 첫 시도는 어떨까. ‘쓰읍.’ 그래, 쉽게 가지 않는다 이거지.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물론 나락갈퀴도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다. 클로 형태의 무기로 무려 한 짝을 세트로 주며, 효과도 다양하다. 아마 아멜리아에게 주면 굉장히 유용하게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15억을 꼴았는데 35번따리?’ 암만 생각해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한 번 더.’ 이미 최대치에 도달한 목걸이에 마석을 재차 집어넣는—.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어? 왜 안 바뀌어. 마석은 분명 들어갔는데……. ‘……실화냐.’ 마음은 의문을 느낀 반면, 머리는 침착하게 상황을 인정했다. 나락갈퀴가 한 번 더 뜬 거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갑자기 머리에 피가 몰리며 시야가 좁아진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하고 입술이 메마르는 느낌. 스윽. 나는 천천히 마석을 하나 더 집었다. 「주의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언제든 목걸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의 문구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딱히 무섭진 않았다. 세 번까지는 절대 터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자. 이게 다 스택인 거라니까? 어차피 내 미래는 환한 무지개빛—.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한 번 더.”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씨발, 장난하나.” 결국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잡념이 휘몰아쳤다. 오늘 겪은 모든 일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 연속 돌빵도 그렇고. ‘가르파스의 목걸이.’ 아까 리롤을 칠 때 나온 그 물건도 그렇다. 어쩌면 그게 계시가 아니었을까? 오늘은 조졌으니 그걸 받고 돌아가서 다음을 기약해보라는. “……얀델, 괜찮나?” “아아……. 어, 괜찮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데…….” “……그럴 리가. 나는 운이 좋다.” 좌절하려는 마음을 다시금 일으켜세운다. ‘4연속 나락갈퀴?’ 그래 봤자, 이 또한 한 번의 고비일 뿐이다. 달콤한 과실은 언제나 시련 너머에 숨겨져 있는 법. ‘나를 믿자.’ 이전에 얻은 깨달음을 복기하며 확신에 찬 손짓으로 마석을 한 번 더 집어넣는다.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아직 괜찮다. 안 터졌잖아?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암, 터지지 않는 걸 보면 그저 나를 시험하기 위한 우주의 장난일 가능성이—.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설마 고장났나?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이제 위험한 거 같은데. 두근두근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No.35 나락갈퀴를 생성합니다.」 결국 나는 백기를 꺼내 들었다. “……아, 아이나르?” 아이나르 프넬린. 가만히 보면 별생각 없이 살면서도 항상 운이 좋아서 일이 잘풀리는 여전사. “응? 무슨 일이냐?” 어느새 이쪽에는 관심을 잃고 멀리 떨어져서 육포를 집어 먹고 있던 아이나르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런 아이나르를 공손히 불러냈다. “저기…….” “응?” “이, 이리 와서…. 마석 한 번 넣어보지 않겠나?” “오! 정말이냐! 사실 해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아이나르는 흔쾌히 내 부름을 받고서 냉큼 달려왔다. 그리고……. 「No.3 아이기스의 장벽을 생성합니다.」 그날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오? 방패인데, 괜찮은 거냐?” “…….” 이런 건 앞으로 무조건 얘한테 시키자. 540화 신록거창 (2) No.7777 가르파스의 목걸이. 사실 효율이 좋은 아이템은 아니다. 35번 이상의 넘버스를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일단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15억 스톤을 꼬라박아야만 하니까. ‘싱글 넘버스가 드랍될 경우에만 이득.’ 10번부터 19번까지, ‘텐 넘버’가 나올 경우에는 거진 본전. 20번 이상일 땐 대체로 손해이다. 한데 리롤 중에 목걸이가 터져 버릴 가능성도 있고, 그때는 단어 그대로 파멸적인 손해를 보게 된다. 즉, 리스크가 큰 도박형 아이템인 셈인데……. “비요른……? 왜 말이 없나?” 어딘가 걱정스레 묻는 아이나르를 보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혹시… 안 좋은 거냐?” 그럴 리가. 그 반대다. “잘했다. 아이나르. 역시 너밖에 없다.” 진심을 담아 사랑을 표현했지만, 아이나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좋은 물건인가 보군! 그래서 이 방패가 뭐냐?” 아, 그거. 아이나르의 반응이 좀 서운하긴 했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암, 얄짤없이 나락갈퀴로 끝날 뻔했는데. 솔직히 이유 없이 주먹으로 면상을 휘갈겨도 세 번까지는 웃으면서 넘어갈 용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얼른 뽑자.’ 혹여나 다른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얼른 목걸이에 담긴 아이템을 꺼냈다. 솨아아아아아-! 확정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빛무리. 이내 허공에 떠오른 빛무리는 찰흙처럼 오밀조밀 뭉쳐지며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춘다. 「지정된 아이템이 생성되었습니다.」 No.3 아이기스의 장벽. 게임내 표기로는 The wall of Aegis. 두말할 필요도 없는 방패 바바의 졸업 방패. ‘이제 방패는 하나만 쓰면 되니, 이거로 방패는 졸업인가…….’ 사실 내가 기대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그게 나오면 멈춰야지 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입을 십 번대의 졸업 갑옷이라든가. 두 번째 졸업 방패인 21번 방패라든가. 빙결 쌍수검사의 핵심인 싱글 넘버스라든가. 파밍에 도움이 되는 ‘균열 생성기’가 나온다면 미래를 내다보며 고를 만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에르웬, 아멜리아가 쓸 만한 졸업 무기가 나온다면 거기서 멈출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걸 진짜 먹게 될 줄이야.’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된다. 「과도한 마력의 응축으로 인해 목걸이에 깃든 가르파스의 권능이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넘버스 아이템 하나가 이제 평범한 목걸이로 변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회색의 방패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캐릭터가 No.3 아이기스의 장벽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8,600 상승합니다.」 이로써 나는 강해졌다. 그것도 매우 많이. *** 방패 자체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일단 색부터가 회색인 데다가, 보석 같은 장식도 달려있지 않은 외형. 근데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인가? 방패란 자고로 튼실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이 방패가… 싱글 넘버스라고?” “잠깐만요… 3번이면 이 위로는 두 개밖에 없단 건데……. 이거 엄청난 보물이잖아요!” “아이기스의 장벽! 오래전 얘기로 듣기만 해본 그 물건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방패의 정체를 알게 된 동료들이 웅성거린다. 의외로 그중에서도 가장 신이 난 건 아멜리아였다. “오! 다들 저러는 걸 보니 아주 대단한 보물인가 보군?” “쯧, 그 정도가 아니다. 아이기스의 장벽은 120년 전에 한 탐험가가 미궁에서 죽은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아니, 사실 이제는 의외도 아니지. 얘, 이런 거 엄청 좋아하거든. 완전 미궁 덕후라고 해야 하나? “현 시점에서는 왕실이 지닌 한 점을 제하면 얀델, 저 녀석이 끝이다. 참고로 기록에 따르면 저 방패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지식을 뽐내고 싶은 것인지 아멜리아가 나를 대신해 모두에게 장비의 옵션을 설명했다. 뭐, 설명 자체는 나름 전문적이었지만……. ‘이 세상의 정보는 항상 정확한 수치가 빠져 있단 말이야.’ 골수 게이머였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제대로 정리를 해보자면. ‘최상급 파괴불가.’ ‘방패로 ‘가드’ 시 모든 피해에 면역.’ ‘본인을 비롯해 반경 10m 내 결속 중인 아군이 받는 모든 마법 피해가 30% 감소하며, 5등급 이하 마법에 면역 판정.’ ‘착용자의 모든 방어 계열 스탯의 20% 증가.’ ‘오오라 스킬을 사용 시, 반경 및 효과가 2배 증가.’ ‘위협 수치가 500 이상일 시 모든 몬스터가 착용자를 우선적으로 공격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액티브 사용 효과가 하나.’ 크,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졸업 장비지. 아주 그냥 심장이 벌렁거려서 죽겠다. 당장에라도 이걸 갖고 나가서 싸우고 싶다고 해야 하나? 벌써 몸이 근질거리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하루는 휴일이라고 딱 잘라 말해뒀기에 겨우 참았다. 그래, 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되게 가볍네.’ 전에 쓰던 게 무식하게 무거워서 그런가? 평범한 강철제 방패보다는 훨씬 무겁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진다. ‘그럼 망치도 들어볼까.’ 남은 손에는 악마분쇄기를 들고 무게 밸런스를 점검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단순한 게임 속이 아니니까. 감각과 무게가 어긋나는 그런 사소한 변화로도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후웅! 후웅-! 그렇게 동굴 속에서 혼자 허공에 무기를 휘두르며 바뀐 무게에 적응하고 있던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된 게 무기 쪽부터 졸업을 끝냈네.’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와 No.3 아이기스의 장벽. 사실 이 두 개면 이제 무기 쪽은 볼 것도 없다. 악마분쇄기야 업그레이드의 여지가 남아 있긴 하지만, 입수 난이도에 비해 리턴이 적기 때문에 사실상 악마분쇄기로 졸업한다고 여겨도 될 터. ‘남은 건 갑옷이랑 신발, 그리고 벨트 정도인가.’ 일단 육성에 핵심이 되는 코어 아이템만을 두고 본다면 그렇다. 바바리안족의 창세보구 역시 코어 템이긴 하지만, 그건 이제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방패 바바가 사기인 이유엔 창세보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거늘. ‘아무튼, 이 정도면 몸에 익은 거 같고…….’ 새로운 장비에 익숙해진 후에는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 액티브 효과도 사용해보았고, 방패에 달린 마법 면역 오오라도 성능을 점검했다. 그리고……. ‘반경 10m라…….’ 그 10m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체득했다. 이게 중요하게 작용할 일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판단. 대충 그런 과정이 이어진 후에는 남는 시간 동안 나도 휴식을 취하고, 수뇌부끼리 모여 이후 탐사 계획을 논의했다. 뭐, 사실 논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지만. “남작님, 그럼 내일부터는 다시 거인섬 탐사를 재개하는 겁니까?” “아니, 이 섬은 당분간 보류다.” “예?” “그렇게 뒤지고 다녔는데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않나.” 거인섬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결국 그 비밀은 그때 본 초거대 거인을 잡아야지만 알아낼 수 있을 거 같다. 문제는……. ‘그때 본 이후로 보이지도 않고, 막상 찾아낸다고 해서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단 말이지.’ “하면… 어디로 가실 예정이신지요?”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도서관섬이다.” “예? 아아… 그때 얘기해주신 그 섬을 말하시는 거군요.” “그래.” 우선 그 섬에 가서 스펙업을 할 생각이다. 그때야 일곱 명이라는 숫자적 한계로 3등급까지만 사냥을 하고 나왔지만, 이제는 또 얘기가 다르니까.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살짝 궁금하다. ‘그때 아래쪽 책들은 거의 전부 다 공략을 했는데, 다시 리젠이 됐으려나?’ 음, 그건 직접 가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회의가 끝나가려던 차 아멜리아가 내게 의문을 표했다. “얀델. 그럼 히프라마전트는 포기하는 건가?” “포기는 아니고, 당분간 보류하는 거다.” “어째서? 그 녀석의 정수를 탐내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그렇지. 근데 왜곡 마법이 성공하고 정수가 드랍되고, 그 정수가 [거대화]라는 삼 중 확률을 뚫을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그 확률을 뚫어도 당장은 리턴이 적고. ‘암만 생각해도 스킬이 두 번 중첩돼서 써질 거 같지가 않단 말이지.’ 히프라마전트는 오크 히어로 정수의 상위호환인 대체 정수다. 그리고 현재 내게 남은 정수 자리는 두 칸. 이 두 자리는 다른 정수로 채워넣는 편이 전력 증강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히프라마전트의 정수가 나온다고 오크 히어로 정수를 바로 지우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흐음, 그렇군. 이해했다.” 사실 이것도 부가적인 이유일 뿐, 메인은 아니다. ‘에르웬이랑 아이나르는 어느 정도 챙겼으니…….’ 남은 동료들의 스펙업도 필요하다. 정수 자리야 다들 하나씩은 남아 있지 않은가. 도서관에서 파밍을 하다보면 알뜰살뜰하게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아멜리아도 포함이다. ‘얘도 정체된 지 너무 오래됐단 말이지.’ “……무슨 눈빛이냐 그건?” “아무것도.” 그냥 생각 중이었다. 언제 여길 탈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온다면. ‘재밌겠네.’ 우리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까? *** 탐사 계획을 공유한 뒤에는 남은 시간 동안 혼자 앞으로의 육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좀 더 크고 강한 방패 바바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 뭘 해야 하는가. 이를 중점으로 우선 순위를 정하고 단계별로 정리를 했다. 당장 지하 1층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도서관에서 정수 먹기. 참고로 목표 정수는 딱 하나다. 3등급 몬스터인 벨라리오스. 그것만 먹고 다면 다음 성장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 후에나 가능하다. 오크 히어로 정수를 히프라마전트 정수로 교체. 혼령각인 9단계 찍기. 8층 균열을 돌며 2등급 수호자 정수 및 넘버스 아이템 파밍. 그다음엔 스톰거쉬 정수를 지우고 계층 정수를 파밍하는 것까지. 8레벨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서나 트라이가 가능하다. 따라서, 휴일로 지정됐던 하루가 끝나고. 75일 차. 하루가 시작되자마자 동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도서관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해안가로 향한 뒤. 적당한 곳에 막 배를 소환해 띄우려던 찰나. 휘이이익-! 뜬금없이 바닷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다행히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서 막기는 했는데. 이건 또 뭘까. “기습이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까무러친 대원들을 뒤로하고서 아래를 확인했다. 은빛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가는 모래사장 위로 맥없이 떨어진 붉은색의 창이 보였다. ‘신록거창……?’ 뭐야, 이거. 이게 왜 있어. 일순 피어난 그런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저 멀리, 점차 멀어지는 은빛 파도 사이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올라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신록거창을 회수했습니다.」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재귀]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들며 놈이 내게 말했다. [놓치지 않는다, 필멸자여.] 저번에 도망칠 때 수없이 반복해서 들은 대사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남달랐다. ‘…미친놈인가?’ 얘 설마 바다를 건너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 빛의 도시 칼헤움에서 등장하는 균열 수호자. 놈을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난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황이었다. 하나 조금 진정을 하고나니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반가움. 그리고……. “잘 됐네.” 기쁨. “그대로 다시 못 만나는 줄 알았는데.” [놓치지 않는다, 필멸자여.]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대사로 답하는 밀라옐을 보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뭐래, 이제는 도망칠 생각이 하나도 없구만.’ 그땐 에르웬이 전투 불가 상태였다. 또한, 동시에 주변엔 몬스터가 가득했다. 언제 어디서 2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 그래서 전력으로 해안가를 향해 돌격해야 했다. 하나 이제는 다르다. 이 멍청한 녀석이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기는, 진작에 끝났다. 그리고 때마침 내게 새로운 방패까지도 생겼다. 그래, 그러니까……. ‘전투력 측정기로 나쁘지 않겠네.’ 지시를 기다리는 듯한 대원들을 향해 나는 있는 힘껏 외쳤다. “전투 준비! 이곳에서 놈을 처치한다!” 암, 굴러 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는 건 예의가 아니지. 541화 신록거창 (3) 균열 수호자는 수호자 정수를 뱉는다. 또한, 균열석과 넘버스 아이템도 드롭한다. 게다가 수호자 처치 보너스로 경험치도 챙길 수 있기에 어떤 몬스터보다도 영양가가 높다. 문제는 공략 난이도가 높다는 거지만……. ‘보통 균열 수호자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에는 ‘필드’의 영향이 크지.’ 1층 균열인 빙하굴만 봐도 그렇다. 필드 효과인 [저체온증]을 달고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이는 3층 균열인 백색신전도 마찬가지다. 공략 과정에서 디버프를 받거나 하는 등의 효과 때문에 전투 난이도가 훨씬 올라갔다. 하지만, 여기는 빛의 도시 칼헤움이 아니다. ‘천공 마법진도, 수호천사도 곁에 없는 밀라옐?’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조건인지라, 당시에도 도망치면서 못내 아쉬웠는데. 여기까지 따라와 주다니.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환영의 의미를 담아 방패를 밀듯이 내달린다. 콰앙-! 놈이 창을 찌르며 나를 견제하려 했으나, 그딴 시도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 튕겨져 나간 녀석이 공중제비를 돌며 물가에 착지한다. 오케이, 이 정도면 전투 진형은 잡힌 거 같고. 스윽. 굳이 더 따라가 망치를 휘두르진 않은 채 방패를 내린다. 악마분쇄기에 [휘두르기]까지 합쳐지면 딜이 꽤 박히긴 할 테지만……. 딜러가 괜히 딜러 포지션인 게 아니니까. 「뮐 아르민이 [과민성 피부]를 시전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영원의 쇠약]을 시전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시전했…….」 뮐 아르민의 저주 스킬을 시작으로 원거리 딜러들의 포격이 가해진다. 「잭슨 잔빌이 [움직이는 표적]을 시전했습니다.」 「샬롯 앰블럿이 4등급 공격 마법 [나선송곳]을 시전했습니다.」 「누아 메르보치가 [정밀사격]을 시전했습니다.」 「가르톤 컬트너가 [투석포]를 시전했…….」 마법사, 신관, 이능술사, 궁수 등등. 다양한 클래스가 쏟아 내는 각양각색의 투사체. 맷집 하나는 타고난 개체답게 처맞는 도중에도 녀석은 끈질기게 창을 휘두르고 찔러 왔고, 나는 원거리 딜러들이 편하게 때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놈을 밀어냈다. 그렇게 한 1분쯤 지났을까?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빛의 가호]를 시전했습니다.」 신명 나게 처맞던 녀석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재귀] 하나만 써 대는 1페이즈가 끝났다는 뜻. ‘수호천사가 없으니까 엄청 쉽네.’ 물론 2페이즈부터는 신경 쓸 게 좀 늘어나기는 했다. 생명력을 대폭 회복하고 쿨타임이 돌아오기까지 내구성 및 육체 수치를 크게 늘려 주는 [빛의 가호]는 차치하고서라도. 2페이즈부터는 이 콤보를 사용해 대니까.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재귀]를 시전했습니다.」 드디어 나왔네 이 사기 스킬.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혜성분열]을 시전했습니다.」 「모든 투사체가 복제됩니다.」 하늘 위로 쏘아진 하나의 창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회피 불가 판정에 대미지 증가가 붙은 아주 좋은 투척 스킬이 순식간에 광역기로 변한 셈인데……. 어그로가 잘 끌린 상태라면 조금 특이하게 스킬이 전개된다. 바로 이렇게. 휘유우우우웅-! 마치 유도탄이라도 되는 듯 내게로 집중되는 수십 개의 창. 하나 긴장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채챙, 챙, 챙, 채앵-! 방패로 머리 위를 가린 것만으로도 총알처럼 튕겨 나가는 창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합일’과 [거대화]가 중요한 이유다. 일단 방패가 커지면 ‘가드’ 범위도 늘어날뿐더러. 이 방패의 유일한 약점이 방패보다 큰 투사체나 광역 피해는 못 막는단 거거든. ‘아무튼, 그럼 첫 기술은 잘 막아 냈고…….’ 이후로는 다시금 첫 페이즈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됐다. 놈이 바닥에 꽂힌 창 하나를 집어 들고 내게 달려들면, 나는 놈을 밀쳐 낸다. 그리고 놈이 멀어지면……. 콰콰콰쾅-! 정확한 타이밍에 원딜들의 집중 포격이 가해진다. 원래라면 이때 각종 몬스터들과 수호천사들 때문에 이런 식의 일점사는 불가능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여기는 일반 필드니까. 솨아아아-! 그렇게 합심해서 녀석을 공략하던 차, 해안가 바닥에 흩뿌려진 수십 개의 창들이 사라진다. 저 [혜성분열]이 까다로운 스킬인 이유다. ‘복제’ 판정이라 사기 칠 방법이 무궁무진하거든. 대충 이런 식으로.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신록거창을 회수했습니다.」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재귀]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신록거창을 회수했습니다.」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재귀]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 「…….」 「…….」 스킬 한 방으로 순식간에 쌓아 올린 수십 개의 중첩. 이내 녀석이 다시금 하늘 위로 창을 투척했다. 이전보다 2배는 족히 강해졌을 스킬 연계. 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세졌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최고존엄방패 앞에서는 저딴 형식의 스킬은 얼마나 강해지든 의미가 없다. ‘확실히… 템빨이 좋기는 해.’ 위협 수치를 낮춘 다음에 나눠 맞아야 하는 패턴을 혼자서 버텨 낸다. 사실상 2페이즈에서 메인인 스킬 연계를 봉인한 거나 다름없는 셈인데…….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혜성분열]을 시전했습니다.」 「모든 투사체가 복제됩니다.」 그렇게 녀석이 정확히 세 번 더 콤보를 시전할 무렵, 우리는 3페이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4분이라…….’ 이거, 잘하면 6분 컷도 낼 수 있겠는데? *** 3페이즈에서의 밀라옐의 패턴은 간단하다.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강림]을 시전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광폭화’ 패턴. 솨아아아아아아-! 웅크린 자세로 빛을 터뜨리던 녀석의 등 뒤로 빛의 날개가 돋아난다. 아이나르가 지닌 [탐욕의 날개]와 비슷한 형태지만 그것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날개가 훨씬 더 화려하단 사소한 차이는 둘째 치고. 후웅-! 저건 진짜 비행이 가능해지거든. “우오오오! 날개다!” 아이나르가 동경의 대상을 바라보듯 고개를 올려다보는 사이, 녀석이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그런데 필드가 섬이라서 그런가? ‘영 포스가 없네.’ 원래는 여기서 외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빛의 정령 군단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연출이 일품— 「신성한 기운을 감지한 빛의 정령이 모여듭니다.」 어, 뭐야. 필드가 바뀌어도 이건 그대로야? 일반 타이타누스가 [강림]을 쓸 땐 이런 효과가 없어서 그냥 필드 보정인 줄 알았는데……. ‘균열 수호자한테는 뭔가 특별한 게 더 있는 건가?’ 알 수 없지만, 근딜러들을 뒷배치해 두길 잘했다. 사실 이것까지 예상했다기보다는 화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어서 빼 둔 것이긴 하다만. “모두 진형대로 서세요!”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 무리하지 마라!” 아무튼, 후방은 베르실이 알아서 잘 진두지휘하고 있는 거 같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고. 나는 고개를 들어 높이 솟아오른 놈을 보았다. […심판의 때가 다가왔다.] 4분 만에 저 꼴이 난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뭐 쟤가 어떡하겠어. 보니까 주어진 대사만 치는 거 같은데. ‘진짜 얘네들은 뭐지?’ 새삼 근본적인 의문이 샘솟는다. 이 세계는 대체 뭘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삶을 갖고서 살아가는데, 어째서 미궁 안에 있는 몬스터는 전부 다 게임 속 인공지능처럼 행동하는 걸— ‘아오, 귀찮게.’ 잠시 생각하는 사이 하늘로 치솟은 밀라옐이 창을 아래로 던져 댔다. 따라서 한눈파는 건 이쯤에서 그만. “에르웬, 얼마나 남았지?” 슬슬 끝낼 때가 됐다는 판단이 섰기에 에르웬을 호출했다. 얘를 마지막까지 아껴 둔 건 전부 이유가 있는 법. “에르웬, 준비해라!” “네!” 3페이즈에 들어선 즉시, 에르웬의 필살 콤보를 꺼냈다. 공중에 날아오른 다음부터는 이놈의 회피율이 엄청나게 올라가거든. 그러니까…….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피할 공간이 없게 후두려 패는 게 제일이다. 콰콰콰콰쾅-! 하늘 위로 쏘아진 어둠 구체가 하늘 위에서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진다. 파멸적이면서도 어딘가 아름답게 보이는 광경. 에르웬은 그런 광경을 연출하는 와중에도 활시위를 당긴 채 [집중사격]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축적된 기운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빈 그릇에 미지의 기운이 깃듭니다.」 슬슬 [혼돈회로]가 발동되지 않았을까 싶을 차.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이 [껍질깨기]를 시전했습니다.」 이곳저곳 금이 가고 부서진 녀석의 피부가 부서지며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음, 속살이라고 하기엔 그런가? 형광등을 올려다보듯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육신. 솨아아아아. 휘황찬란한 빛을 몸에 휘감고, 한 손으로는 커다란 창을 쥔 녀석이 천천히 날갯짓하며 하강한다. 저런 상태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절대적인 무언가를 앞에 둔 것만 같다. 뭐, 그래 봐야 이제 곧 뒈질 처지이긴 하지만. [필멸자들이여.]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나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욕심이 파멸의 씨앗을 심었으며.] 근데 이런 대사가 있었던가? [너희들의 오만이 끝내 이 세계에 종말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내가 너희를 심판하리— [내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그래, 이 대사 하나만 치고 끝이었는데. ‘…뭐, 게임이랑 다른 게 어디 한두 개여야지.’ 굳이 밀라옐이 친 대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녀석의 변화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놈이 쥐고 있는 붉은색의 거창. 「최후의 창지기, 밀라옐의 부름을 받아 신록거창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녀석이 마지막 페이즈에 돌입하며 껍질을 벗었듯, 창 역시 껍질이 벗겨지듯 떨어지며 숨겨져 있던 모습을 드러낸다. 강렬한 청록색의 빛으로 이뤄진 거창. 치지짓, 치지짓- 스파크가 튀듯 일렁이는 창의 모습은 그 어떤 무기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도 틀린 감상은 아니었다. 창을 이용한 관통 피해량 1,200% 증가. 전투 지속 시간 비례해 자연 재생력 상승. 신성 피해 면역 및 최상급 파괴 불가. 스킬 사용 시엔 소모한 자원의 50%를 1분 동안 나눠서 돌려받으며, 정신 계열 스킬 피격 시 면역을 넘어 아예 반사를 시켜 버리는데……. 액티브 사용 효과를 켜면 여기에 세 줄의 옵션이 추가된다. 창을 이용한 모든 피해량 3배 상승. 모든 회복 계열 효과가 3배 상승.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상급 관통 보정.’ 모든 것을 꿰뚫는 창. 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한다면 역시 가장 먼저 꼽힐 무기가 바로 신록거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츠츠즛-! 지직-!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 내는 방패. 이 두 개가 서로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사라져라!] 사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방패가 이긴다. 그런 의미에서, 회심의 일격이 무로 돌아간 밀라옐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무기가 뭔지 아나?” 예상대로 녀석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그냥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답은…….” […….] “방패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 이유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아, 이런.” 마침 캐스팅이 끝났거든. —————————! 소리라고 부르기 힘든, 무언가 지나갔다는 감각이 귓가에 전해진 순간. 번뜩-! 순백의 섬광이 눈앞을 물들였다. ‘어디 보자, 시간이…….’ 6분 17초. 에이, 6분 컷은 실패했네. ***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을 처치했습니다. EXP +8」 「상위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5」 *** 솨아아아아아아-! 몬스터가 처치되었음을 알리는 빛무리. 그 빛무리가 흩어지는 장면을 수십 명의 탐험가가 침을 꿀꺽 삼킨 채 지켜본다. 미리 말해 둬서 다들 아는 덕분이다. 쟤가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 원래는 8층 균열에서 등장하는 수호자 몬스터라는 걸. ‘과연.’ 무엇이 나올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시야가 확보됐다. 툭. 일단 수호자의 전리품 중 하나인 균열석은 뜨지 않았다. 그리고……. “쩝…….” 무지개 정수도 마찬가지다. 딴 건 몰라도 [혜성분열]은 에르웬한테도 아주 좋은 정수라 나왔으면 했는데. 초심자의 행운도 있는데 이게 안 뜨네. 못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래도 아예 전리품이 뜨지 않은 건 아니다. 솔직히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지만, “…어, 저건!” 천계의 창지기 밀라옐은 빛이 되어 사라지며 넘버스 아이템을 남겼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수호자가 넘버스 아이템을 뱉을 확률은 33%.’ 거기에 넘버스 아이템이 나왔단 전제로 약 3%의 확률로 드롭되는 아이템이 나왔다. “아까 그놈이 들고 있던 창이다……!” No.7 말리옐의 신록거창. 다만 이를 보자마자 기쁨보다는 떨떠름한 감정이 먼저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불안감이었다. 그도 그렇잖아? 아이기스의 장벽을 먹은 게 바로 전인데. 여기서 싱글 넘버스를 또 구하다니? ‘……운이 이렇게까지 따라 준다고?’ 내심 기대는 했지만 정말로 그 일이 실현되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잘 훈련된 불행아의 직감이라 봐도 좋았다. 그러나 사람은 좌뇌와 우뇌로 이뤄진 생물. 불길함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한편으로, 머리는 즉시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신록거창이라…….’ 당장 우리 파티에는 창을 쓰는 클래스가 없다. 하나, 자고로 템이란 나오는 대로 최적의 세팅을 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던전 앤 스톤]의 묘미. “흐음…….” 이걸 누구한테 줘야 잘 줬다고 소문이 날까? 542화 신록거창 (4) No.7 밀라옐의 신록거창. 창 계열의 졸업 무기이기도 한 이 넘버스 아이템은 딜과 탱 밸런스가 적절하게 섞인 무기다. 애초에 창바바를 연구 시작한 것도 이 무기가 가진 높은 생존력 때문이었고. ‘근데 그래 봤자 결국 광전사 비슷한 무언가가 될 뿐이었지.’ 물론 광전사 클래스가 나쁘단 것은 아니다. 팀 내에 동일 수준의 메인 탱커가 있다고 한다면 꽤 괜찮은 성능을 뽑아내며, 위기 상황에는 보조 탱커 역할의 수행도 가능하다. 하지만……. “흐음…….” 암만 생각해도 애매하단 말이지. “다들 주변을 정리해라.” “예?” “곧 출발할 테니!” “아, 아아… 옛!” 다들 저 무기의 주인이 누가 될까 궁금한 듯했지만, 일단 배부터 띄우고 섬을 떠나며 고민을 이어 가기로 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출항이다!” 이내 모두를 태운 배가 은빛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저씨! 저기 보세요!” 점점 작아지는 섬 중심부에서 거대한 거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우리를 보며 흉포한 괴성을 내지른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쟤는 왜 자꾸 나갈 때만 저러는 거야? *** 목적지인 도서관섬에 도착할 때까지, 심도 깊은 고민을 이어 나갔다. 이 무기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 ‘아, 또 눈 마주쳤네.’ 뭔가 답이라도 나올까 주변을 쓱 둘러보던 중 한 남자와 시선이 교차했다. 헥츠 클랜의 창술사였다. 이 많은 인원 중 유일하게 창을 쓰는 직업군인 만큼, 감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내심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게 보였다. 따라서……. 휙.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 탐낼 걸 탐내야지. 이 무기는 클랜 아나바다의 소유다. 이미 그렇게 정해졌다. 따라서 내 고민은 우리 클랜 내 인원 중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정하는 것뿐. ‘일단 에르웬이나 베르실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아멜리아와 미샤도 마찬가지다. 미샤는 이미 빙결 쌍수 트리를 탔고, 아멜리아의 경우에는 오러를 쓰기에 창에 적합하지 않다. 아우옌은 애초에 전투 클래스가 아니고. 소거법에 의하면 남은 건 아이나르 하나인데……. “응? 너도 먹을 테냐?” 눈이 마주치자 아이나르가 싱긋 웃으며 소중하게 쥐고 있던 육포를 내게 건넨다. 일단 잘 받아서 씹어 삼키며 상념을 이어 갔다. ‘……그나마 가장 창의 성능을 뽑아낼 수 있는 게 얘기는 하지?’ [전투 지속 시간 비례해 자연 재생력 상승.] [모든 회복 계열 효과가 3배 상승.] 이 두 줄의 옵션은 ‘학살자’ 각인의 ‘전투학습’, ‘포식’과 궁합이 좋다. [탐욕의 날개], [웅크리기] 같은 자연 재생력 뻥튀기 스킬도 갖고 있어서 이게 합쳐지면 정말 괴물 같은 회복 속도를 갖게 될 테고. 애초에 내가 키웠던 창바바도 ‘학살자’ 각인을 받고서 저런 느낌의 스킬을 가득 채웠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창을 쥐는 순간 스킬 몇 개를 버려야 한다는 것.’ 일단 4등급 스킬인 [거듭베기]. 창으로도 시전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관통 피해량 증가 효과는 볼 수 없다. 조건부 발동 효과를 ‘절삭력’으로 변환시켜 주는 [야성제어]도 비슷한 맥락으로 쓸모가 없어지고. ‘[거듭베기]를 안 쓰면 [폭발의 상흔]이 의미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맨들기름]도 [잔열]도 없는 스킬이 된단 말이지.’ 사실상 창을 쥐는 순간, 스킬 전체를 다 갈아엎어야 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그러나……. ‘얘, 히프라마전트 말고는 전부 4등급 이하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바꾸면 안 되나?’ [던전 앤 스톤]은 육성이 메인인 게임이다. 완벽한 최종 조합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최종 조합까지 캐릭터를 키울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중요하다. 구간별로 필요한 아이템과 대체 가능한 정수를 여러 개 준비해 두지 않으면, 최종 조합까지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게 불가능하니까. 차근차근 스킬의 밸류를 올려 가면서도, 캐릭터의 컨셉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찌걱, 찌걱, 찌걱. [거듭베기]를 아이나르의 코어 스킬로 뒀던 것도 그게 이유였다. 모처럼 초반부에 얻은 4등급 스킬이지 않은가. 이를 활용하는 정수 세팅을 한 뒤, 나중에 상위 호환인 스킬로 바꿔 주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긴 해.’ 이미 나는 성장할 대로 성장했다. 에르웬은 계층 정수까지 먹으며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고, 미샤 역시 이백호와 다니며 엄청나게 성장해서 돌아왔다. 아멜리아는 그냥 예전부터 엄청 강했고. 냉정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 아이나르가 없다고 사냥에 지장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 쩔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사실 말이 쩔이지, 창을 낀다고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싱글 넘버스. 그것도 대체재가 없는 졸업 무기. 거기에 붙은 효과들은 스킬 몇 개를 버리더라도 충분히 메워 줄 만큼의 위력을 지녔다. 하물며 그게 4등급 이하 정수라면 더욱더 그렇고. 관통 피해 1,200%. 창을 이용한 모든 피해량 3배 상승. 최상급 관통 보정. 이거 세 옵션만으로도 단일 대미지는 오히려 검을 쓸 때보다 늘어난다 봐도 무방하며, 각종 재생력 증가 효과 덕에 훨씬 더 안정성이 올라간다. 고로, 지금부터 문제는. ‘얘가 이걸 받아들이냐는 건데…….’ 어디 한번 말이나 꺼내 보자. 그런다고 손해 보는 것도 없으니까. 이번에도 바바리안답게. “아이나르.” 옆으로 다가가 별거 아니라는 듯 툭 하고 말한다. “혹시 검 말고 창을 쓸 생각 있나?” “……창?” 육포를 씹던 것도 멈추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아이나르. 후, 역시 안 되는 건가? 선호하느냐 아니느냐를 떠나 바바리안들은 이런 무기를 겁쟁이 같다고 싫어하니— “오! 그 창을 말하는 거면 좋다! 나 줘라!” ……응? 뭐야, 이 반응은? “혹시 오해했을까 싶어 말하는 건데, 앞으로 평생 창을 쓰라는 얘기다. 정수도 모두 바꾸고.” “바꿔야 한다면… 세무라의 정수도 포함인 거냐?” 세무라의 정수는 [거듭베기]를 뜻한다. 스승처럼 따르던 장로가 죽기 전에 ‘영혼계승’을 통해 아이나르에게 전해 준 바로 그것. “그래, 그 정수도 포함이다.” “그런가…….” 아이나르의 눈빛이 어딘가 아련하게 변했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원한다면 충분히 고민하고 대답—” “좋다. 창으로 바꾸겠다.” “…응?” 육성 전체를 갈아엎는단 건데, 그걸 1분도 고민하지 않고 정한다고? ‘이게 트루 바바리안……?’ 나로서는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경지였다. 하나, 아이나르라고 아예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린 결정은 아닌 듯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애초에 지금 내가 가진 정수들 전부 다 네가 추천해 줬던 것 아니냐?” “어… 그건 그렇지?” “덕분에 나는 분에 넘치는 명성을 얻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의 강적과 싸울 힘을 갖게 됐고, 그 힘으로 동료를 지킬 수 있었다.” 이내 아이나르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믿는다.” “…….” “네가 나한테 해가 될 일을 할 리 없지 않나?” 그렇구나. 그냥 막 내키는 대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 단지 날 믿었기에 어떠한 의심도 없이 나아가려 할 수 있던 거구나.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감당하기 어려운 신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던 찰나.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나르가 내 눈을 피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것도 아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 그 창이라면 괜찮다! 엄청 크지 않나!” “아…….” “내 대검보다 1.5배는 더 큰 거 같다!” 나는 말을 잃었다. 까마귀가 본능적으로 빛나는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처럼. 바바리안들은 큰 걸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도 멋있었고!” 빛까지 나면 금상첨화고. “게다가 날개를 가진 애들은 다 창을 쓰는 거 같다!” 그래… 너한테도 여러 이유가 있었구나. *** 창술사로 클래스를 변경한 아이나르는 그 즉시 창이란 무기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허공에 휘두르고, 앞으로 뻗으며 거리를 재는 등. 처음에는 분명 어떻게 쥐어야 할지도 모르는 듯 어설펐지만,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자세가 안정되어 갔다. “후후, 이제 좀 예전 자세가 나오는군!” “예전 자세?” “기억 안 나나? 우리가 어렸을 때 모든 무기들을 배웠던 거!” “아, 그거… 그랬지…….” 아오, 갑자기 왜 옛날 이야기래. 늘 그랬듯 과거에 대한 화제는 단답으로 말을 끊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나르는 이미 추억에 잠긴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내 어머니도, 그리고 우리 언니도 창을 썼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자연스레 답할 수 있는 얘기였다. 창에 대해서는 처음 듣지만, 아이나르의 언니에 대해서는 전에도 얘기를 나눴으니까.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아이나르에게는 언니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다. “어? 자매가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언니가 있었던 에르웬이 관심을 보이며 묻자 아이나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너한텐 말한 적이 없나? 네 살 차이가 났다. 먼저 탐험가가 돼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고 기술을 연마한다며 날 괴롭혔었지, 후후후…….” “……예?”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아이나르의 말에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종족적 문화 차이에서 온 해프닝이었다. “그래서 언니분은 어때요? 유명하신가요?” “죽었다. 내가 성인식을 치르기 2년 전에.” “아……. 죄, 죄송해요…….” 역린을 건드리기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되어 사과를 하는 에르웬. 그러나 정작 아이나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응? 왜 네가 사과를 하나? 언니가 죽은 게 네 잘못도 아닌데.” “그렇지만… 슬픈 기억이실 거잖아요.” “슬픈 기억? 그게 무슨 뜻이냐? 내게는 좋은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이제 볼 수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언니와의 기억을 떠올릴 땐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말에 에르웬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저는 아직도… 언니 생각을 하면 심장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드는데.” 목소리가 격앙돼서 그런지 살짝 따지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이나르는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할 뿐. “어째서냐고 해도… 딱히 해 줄 말이 없는데?” “…….” “그야 울적해하는 것보단 웃는 게 더 기분 좋지 않나! 분명 우리 언니도 그럴 테고 말이다!” 너무나도 바바리안스러운 답변. 하나 이를 들은 에르웬은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단지 한참이나 아이나르를 응시하다가, 말없이 등을 돌려 전망대로 올라갔다. ‘후… 이제 숨 좀 쉴 수 있겠네.’ 참아 왔던 숨을 길게 토해 내자 아이나르가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냐?” “아무것도. 하던 거나 해라. 섬에 도착하면 곧장 실전에 들어가야 하니까.” “오! 알았다!” 잠시 작동을 멈춘 아이나르를 다시 자동 수련 모드로 돌려 두고서 배의 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우옌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한 뒤,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눈을 붙였다. ‘잡몹들 정도는 알아서 잡을 테고, 좀 쎈 애들이 나오면 어련히 깨우겠지.’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잠에서 깬 나는 수통을 꺼내들며 아이나르를 찾았다. 그동안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가 궁금했던 것인데……. ‘응?’ 어째선지 아이나르는 수련을 멈추고 갑판에서 쉬고 있었다. 그것도 에르웬과 함께. ‘뭐지?’ 의문을 가진 찰나, 아멜리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괜히 끼지 말고 내버려 둬라.”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대화가 궁금할 뿐이지. 이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니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둘이 붙어 있기에 내심 걱정했건만. 너무도 평범한 대화가 둘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고 있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너도 동생이 있다고 했지? 걔는 어떠냐? 탐험가냐?” “아뇨. 아직요. 내후년엔 성인식을 치를 텐데, 좀 걱정이에요.” “걱정이면 네가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 주면 되지 않나.” “그게… 쉽지가 않아요.” “응? 아, 여기에 갇혀 있어서 말이냐?”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 언니가 죽고…… 아저씨도 갑자기 사라진 이후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요.” “아, 하긴 복수를 한다고 매일같이 전쟁터에 나갔을 테니. 그럼 전부 네 잘못이군!” 노 빠구로 잘잘못을 따지는 아이나르의 대사에 식겁했지만, 의외로 에르웬은 얌전하게 수긍했다. “제 잘못… 네. 맞아요. 제 잘못이에요.” “하하, 알면 됐다. 그럼 돌아가서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하지만, 이미 늦은 거 같아요. 동생은 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걸요.” “걔가 자기 입으로 그랬냐?”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면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미워한다니? 가족인데 그럴 리가 있나. 분명 걔도 너와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을 거다.” “그럴… 까요……?” 다른 종족도 아니고 요정이, 앙숙이나 다름없는 바바리안에게 진지하게 인생 조언을 받고 있는 기이한 장면. 그러나 동시에 그 장면은 어딘가 납득이 됐다. “암, 분명 그럴 거다! 나를 믿어도 좋다!” 아이나르가 어떻게 항상 모두와 그렇게 쉽게 친해지는지 알 것도 같았다. *** 미궁 진입 76일 차. 거인섬을 떠난 우리들은 마침내 도서관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한 파밍. ‘벨라리오스도 벨라리오스지만, 아이나르가 먹을 정수가 좀 나와 주면 좋겠네.’ 그런 기대와 함께 우리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얀델, 아래 누군가 있다.” “숫자는 한 명. 그 외에는 없어요.” “웅크리고 있는 게 자고 있는 듯한데…….” “어쩌실 거예요?” 아멜리아와 에르웬을 통해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선객이라니. ‘대체 누구지?’ 가장 먼저 떠오른 후보가 있기는 했다. 저번 회차 때 아르민 탐사단과 함께 지하 1층에 내려왔던 바로 그 클랜. 분명 걔네 이름이……. “……혹시 아인페리얼 클랜의 사람들은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 맞다 그랬지. “근데 숫자가 이상하군요. 한 명이라니. 대체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디에 가고…….” 뮐이 인상을 찌푸리며 상념에 잠겼지만, 나로서는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겠지.” 암만 추측을 해 봤자 제 입으로 진상을 듣는 것보다 정확할 수는 없을 터. 이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쿠웅-! 쿠웅-! 쿠웅-! 워낙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인지, 아래에 도착했을 때 자고 있다던 정체불명의 선객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있는 상태였는데……. “어……! 나, 남작님?!” 상대 쪽에서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게……. “……매더킨 릴그리암스.” 촌장섬에서 마지막으로 보고서 실종됐던, 은사자 클랜의 단장이었다. 543화 고스트 (1) 매더킨 릴그리암스. ‘설마 이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얼굴을 마주한 순간 든 감정은 반가움도, 의문도 아니었다. 그저 당황스러웠다. “넌… 촌장에게 죽었을 텐데?” “예……?” 내 중얼거림을 들은 녀석이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말을 이었다. “촌장에게 죽다니… 그게 무슨 말씀—.” “너희 클랜의 문양이 각인된 단검을 그놈들의 대장간에서 봤다.” “아…….” “그 단검이 왜 거기에 있던 거지?” “그…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섬을 떠나기 전에 단원들이 주민들과 거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크게 쓸모없는 물건을 넘기고, 과할 정도로 많은 마석을 받았지요.” 이 의혹에 대해 촌장이 말했던 답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증언. 덕분에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촌장이 무죄였다고?’ 그럼 내가 마을을 탈출하며 한 짓은 뭐지? 단순히 쌩쇼를 했을 뿐인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판단은 모든 얘기를 듣고 내려도 늦지 않았다. “말해봐라. 우리가 그 섬을 떠나고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우리를 보자마자 ‘구하러 오셨군요!’ 하는 얼굴로 달려오기도 잠시, 내가 차갑게 반응하며 이것저것 취조하듯 캐묻자 녀석도 바짝 얼어붙은 채 묻는 말에 답했다. “우선 저희가 그 섬을 떠난 건 남작님께서 떠나고 이틀 뒤였습니다.” 사실 이 녀석의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뭔가 해봐야겠다 싶어서 섬을 나가긴 했는데, 한 번 그 일을 겪고 나니 무서워져서 그나마 만만한 도서관섬으로 향했다던가? 파밍을 위해 다시 이곳을 찾은 우리처럼, 녀석도 우선 단원들을 성장시킬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개체였습니다. 흉측하게 생긴 날개가 달렸고, 몸체는 슬라임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몸에는 온갖 기괴한 팔다리가 돋아나 있었지요.” 내 데이터 베이스에도 없는 신종 몬스터. 그것에 의해 은사자 클랜은 전멸했고, 타고 있던 배마저 박살이 났다. 그러나 물에 빠진 채 정신을 잃으며 죽었다고 생각한 찰나. 매더킨은 도서관섬에서 눈을 떴다. 바위에 배낭이 걸려 겨우 숨을 쉬는 상태였다. “그 후로는… 밖은 너무 위험하다 생각해 일단 이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홀로 기다렸지요. 누군가 이곳을 다시 찾을 때까지…….” 혹시 모른단 생각으로 갖고 있던 식량을 최대한 아끼면서, 몬스터가 아닌 외로움과 싸우며 홀로 버티고 버텼다. 정리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는데……. “그렇군.” 딱히 슬픈 이야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들어보니까 전멸 판단이 서자마자 단원들을 다 버리고 바다로 뛰어든 거 같은데. ‘그럴듯한 이야기란 말이지.’ 매더킨 릴그리암스. 내가 지켜본 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내릴 만했다. 하지만……. ‘정보 수집은 여기까지.’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러니 이제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해 볼 시간이다. 따라서……. “베르실.”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려 검증 마법을 사용했다. 애석하게도 항마력이 꽤 되는지 검증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나는 미련을 갖지 않고 아공간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이제 한 번 남은 걸 여기서 쓰는 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단 말이지. “매더킨 릴그리암스.” “예?” “지금부터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생각이다.” 괜찮겠느냐는 식의 양해는 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놈한테 선택권은 없으니까. 딸깍- 즉시 ‘어긋난 신뢰’를 작동시켰다. 이거면 뭔가 숨기고 있었더라도 전부 알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자, 그럼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해보지.”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말해봐라. 네 이름이 뭐지?” 도플갱어 숲에서도 그러했듯,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형 질문. “…….” “…….” 근데 이 새끼는 왜 대답을 못 하는 거야? *** 째깍, 째깍. 나침반 형태의 원판. 그 가운데 달린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천천히, 일정하게 반복되는 정적. 고요한 시간이 이어질수록 공기의 밀도가 올라가는 듯한 감각이 등줄기에 내려앉는다. 하지만……. 스으윽. 내가 가진 전사의 육신은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행동을 침착하게 수행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내 손은 자연스럽게 등에 맨 망치 자루에 향해 있었다. 철저하게 본능에 의거한 무의식적인 행동. 후……. 그래도 무기를 만지니 좀 차분해지네. “말해라, 릴그리암스.” 나는 다시금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그 질문에 녀석은 시선을 피했다. 과할 정도로 오른쪽으로 쏠린 눈동자는 수상한 걸 넘어 기이하고 기괴한 이질감마저 풍겼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묻겠다.” 무기에 손을 올려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아예 대놓고 무기를 꺼내 들며 다시금 묻는다. “네 이름이 뭐지?” “…….” 그래, 묵비권 행사를 하겠다 이거지? ‘혹시 모르니까 일단 팔다리부터 다 부러뜨리고 시작하자.’ 머릿속으로 정리가 끝난 즉시, 망치를 쥔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막 휘두르려던 찰나. “……아.” 녀석이 오랜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들, 켰, 다…….” 짧은 한 마디였으나, 어째선지 말투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실제로도 틀리지 않았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렉 걸린 오디오 기기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놈의 눈은 시도 때도 없이 흔들렸으며, 목소리에서는 초조와 불안이 여실하게 묻어났다. 마치 패닉 상태에 빠진듯. 놈은 명백하게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 “……너 뭐야?” 이내 한쪽 손을 뻗어 녀석의 모가지를 틀어잡은 뒤 들어 올리자, 놈이 내뱉는 말이 달라졌다. “어떡하지?” “……?”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분명 모가지를 잡고 들어 올린 건 나인데, 왜 내가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 걸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 그때 녀석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 조용히 턱을 들어 올리며 나를 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오른쪽으로 향해 있던 동공은 어느샌가 정면에서 나를 응시하는 상태였다. 이내 그 상태로 녀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겠다.” 마치 이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목소리. 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망치를 위로 쳐든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말을 끝으로. 퍼어어어엉-! 손에 잡혀 있던 놈의 몸이 폭발했다. *** 폭발력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모가지를 틀어잡느라 밀착해 있던 손아귀가 살짝 따끔했던 정도? 그마저도 생채기가 났다기보다는 알러지 반응처럼 조금 가려운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폭발은 누군가의 살점을 수천 조각으로 찢어발기고, 뼛조각을 비산시키기에 충분했다. “신관… 은 의미가 없겠군.” 핏물과 살점을 뒤집어쓴 채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잠시. 사태 파악을 끝난 나는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에헤이, 조졌네 이거.’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의 요인은 내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두고자 했으면서. 고작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걸 어떻게 알아.’ 물론 자책하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알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안다고 해서 저지하는 게 가능하기는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비상 탈출을 어떻게 막아? 비상 탈출은 대응법이 없는 스킬이다. 신이 아닌 이상에서야 죽은 놈을 붙잡아올 수는 없으니까. 이론상으로는 최고의 도주기인 셈인데……. 그 사기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만큼, 시전 대가는 자기 자신의 목숨—. ‘쓸데없는 생각은 됐고, 정리부터 하자.’ “얀델……!” “괜찮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으니 내버려 두고.” 걱정하며 달려오는 동료들을 안심시킨 뒤, 우선 상황을 다시 한번 복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결과만 말하자면, 짧게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것도 가능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매더킨 릴그라임스인 척 연기를 했다.’ 하면, 범인은 누구일까. 짚이는 용의자는 하나였다. ‘촌장.’ 아니, 정확히는 촌장이 보낸 놈이라고 해야 하나? 촌장이 저렇게 허술하게 들키자마자 패닉에 빠졌을 거 같진 않거든. 아무튼, 용의자가 나왔으니 다음 단계는 간단하다. 추리의 기본 요소 중 하나.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무슨 이유, 그리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이런 짓을 하였는가. 수많은 가정을 하고서 고민해 봤지만, 이것만큼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결백하다고 나를 속이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단지 옆에서 나를 감시하고 싶었던 걸 수도…….’ 뭐가 목적이었는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대체 뭘 해야 이런 게 가능하지?’ 추측이 되는 정수도 없다. 타인의 몸을 빼앗는 스킬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이런 느낌과 전혀 다르니까. 대부분 시전자가 근처에만 있어야 하며, 몸을 빼앗은 후에도 실 같은 게 연결되며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래, 그러니까……. ‘정수가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악령.’ 오히려 ‘악령’과 더욱 형태가 비슷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손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다만 이후로도 한참 동안 시간을 갖고, 때로는 동료들과 상의를 하며 추측을 이어나갔지만, 결국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직 근거가 부실한 가설일 뿐이지만. ‘촌장은 악령처럼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단이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 릴그리암스의 비상 탈출 소동이 있은 후. 찝찝하게나마 어느 정도 사건이 마무리된 즉시, 무리를 이끌고 도서관의 조사를 나섰다. 일단 우리가 떠난 사이 동안의 변화는 두 가지였다. ‘책이… 다시 생겼네.’ 이미 사용된 소환책들이 충전됐다. 떠날 때를 기준으로 책장들 아래쪽은 거의 비어 있는 수준이었건만. 대충 난잡하게 흩뿌려 던져 둔 책들도 전부 정리가 되어 바닥도 깔끔했다. 그리고……. ‘계단도 초기화가 됐구나.’ 열심히 소환책을 소모하며 3등급 몬스터가 나오는 상층 책장까지 계단을 이었지만, 다시 돌아온 도서관은 처음 왔을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흐음, 그럼 초기화 기준이 뭐지? 시간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왠지 우기가 그 기준점이지 않을까도 싶지만, 아직 확실하게 확인된 부분은 아니다. “얀델, 그래도 잘 됐군. 이렇게 되면 훨씬 더 여유롭게 정수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아……. 그건 그렇지.” 일단 아멜리아의 말대로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계단이 리셋된 건 마음이 아프지만, 파밍 자체는 이론상 무한대로 가능해졌단 뜻이니까. 뭐, 그렇다고 부정적인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도중에 초기화가 되면 단순 노가다로 책장 꼭대기까지 가는 건 어렵겠네.’ 안 그래도 난이도가 높은 도서관섬 클리어에 시간제한 조건까지 붙어 버렸다. 하나 이에 대한 불평은 나중에 클리어를 목표로 할 때 해도 늦지 않을 터. ‘리셋되는 것도 알았는데,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모든 고민과 번뇌를 집어 던지고 이곳에 온 이유에만 집중했다. 사실 나는 노가다형 게임과 잘 맞는 편이었다. 그냥 멍하니 하고 있으면 온갖 잡념들이 사라지거든. 「서리늑대를 처치했습니다.」 「스톤골렘을 처치했습니다.」 「홉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아이스 오크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예티를 처치했습니다.」 「뤼투레 부적술사를 처치했습니다.」 「…….」 이후로는 좋은 사냥감이 담긴 책을 찾는 조와 전투조로 인원을 분배해 미친 듯이 노가다를 이어나갔다. 9등급, 8등급, 7등급……. 올라갈 수 있는 책장 높이가 높아질수록 난이도는 점점 올랐고, 4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출현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특정 몬스터’를 찾아서 소환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석이 나왔고. 경험치가 쌓인다. 그리고……. “정수다!” 아직 아나바다 멤버에게 먹일 정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정수도 하루에 몇 개씩이나 나오며 내가 이끄는 집단이 전체적으로 조금씩 성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만하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테니 다들 쉬어라!” 미궁 진입 85일 차.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그날이 찾아왔다. 544화 고스트 (2) 도시 기준으로 매월 15일마다 열리는 악령들의 집회 고스트 버스터즈. 이곳에서의 내 루틴은 거의 항상 비슷했다. 위이이이잉-! 일단 컴퓨터부터 켜서 커뮤니티에 접속한 뒤, 채팅방 ‘대한독립만세’에 몇 명이 접속했는지를 확인. ‘아직 아무도 안 왔네.’ 그다음에는 자유 게시판으로 가서 눈팅이나 하며 최신 정보를 빠르게 살피다 채팅방에 들어가 1시간이 지날 때까지 백호와 노가리. 백호가 떠나면 남은 시간 동안 현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원탁이 열릴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헤어져 채팅방을 나선다. 딸깍, 딸깍. 오늘이라고 평소의 루틴과 다를 것은 없었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유 게시판을 모니터에 띄웠다. 그리고 벌써 올라오기 시작한 게시물들의 제목을 쓱 훑었다. 아침에 모닝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듯이. 급할 것 없이 여유롭게—. “…응?” 벌써 밀려난 페이지를 넘겨 오늘 올라온 첫 게시글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얼빠진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프도니아 왕가 지하 1층 폐쇄 결정.] 뭔데 이게. 딸깍, 딸깍. 단순 어그로성 글인가 싶으면서도 마우스 클릭 버튼을 연타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누르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ㅇㅇㅇㅇ. 물론 예상대로 본문 내용은 없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은 1등을 먼저 먹고, 그다음에 수정 기능으로 내용을 채우니까. 중요한 건 댓글이다. 그것만 봐도 최소한의 팩트 체크가 되거든. 바로 이렇게. [arolf5205: 아, 이거 내가 먼저 쓰려 했는데.] [NIKAMOTO: 이거 또 화제글 올라가겠네.] [AI_DIDIGO: 정보1, 커뮤니티가 열린 날의 첫 게시글 중 56%는 1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며 화제글에 올라갔다.] [└Ki11Humans77: 와, 디디고다. 다음 탐사에서 3등급 정수 먹게 해주세요.] [└MarkG: 근데 화제글 올라가면 뭐가 좋음?] [└Paweł: 운영진 쪽에서 GP를 좀 주기는 함. 근데 그것 때문에 매번 이러는 건 아닐 듯.] 낚시글이니 어그로니 뭐니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유저들. 이 반응을 통해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미친, 진짜였네.’ 라프도니아 왕가 지하 1층 폐쇄 결정. 이 정보는 사실이며, 이미 수많은 이들이 알고있는 ‘상식’ 축에 속하는 정보이다. 나는 얼른 게시글을 새로고침한 뒤 스크롤을 휙휙 내렸다. 그야 생산성 있는 이야기는 항상 나중에 나오거든. 아무래도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다 보니까. [Darkrealm93: 그런데 왕가도 좀 이해가 안 되긴 함. 왜 다음 탐사부터는 못 가게 막는다는 거야?] [└Akaistos: 못 들었음? 너무 위험하다잖아.] [└Darkrealm93: 내가 그 얘기를 몰라서 그러는 거겠냐?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이거지.] [└WhyDoYouSniffShit: 뻔하잖아. 한창 전쟁 중인데 자꾸 지하 1층에 간다고 이탈하려는 놈들이 나오니까 열받겠지.] [└funkinthetrunk: 근데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아직 모르는데 진입 금지가 의미 있나?] [└WhyDoYouSniffShit: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던대로 화살받이나 하란 거겠지.] 대충 상황이 이해된다. 지하 1층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진 지도 이제 한 달. 실제로 저번 회차에서는 두 개의 클랜이 추가로 입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때 두 클랜 모두 입장하지 못한 애들이 꽤 된다고 그랬지.’ 지하 1층으로 향하는 동료들의 뒤를 바라보면서 도시로 돌아간 탐험가가 한무더기다. 분명 그들에 의해서도 지하 1층의 존재가 더욱더 세간에 퍼져나갔을 터. 수완이 좋은 놈들은 입장 방법에 대해서도 벌써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내려갈 준비를 했겠고. 그것 때문에 왕가도 막으려 든 거겠지.’ 또한, 대형 클랜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면, 왕가에서도 분명 입장법을 인지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단 뜻인데……. “흐음…….” 이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이후로도 한동안 댓글, 그리고 우후죽순 올라오는 게시글들을 훑어보던 나는 이내 마우스를 놓았다. 툭툭.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왕가에서 금지를 때렸으면, 어지간하면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려 할 텐데. 쩝, 이러면 그냥 계획을 수정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아, 기다리고 있겠네.” 상념에 빠진 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인지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채팅방에 들어섰다. “오빠, 오셨어요?’ “오, 형! 또 늦으셨네요?” 들어서자마자 먼저 와 있던 현별이와 백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미안. 오늘은 조금 많이 늦었네.” “괜찮아요. 어차피 걱정은 안 했어요.” “……뭐?”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이백호가 씨익 웃었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느낌? 뭐, 저는 나쁘게 보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멋있달까…….” 뭐래 얘는 또. 괜히 집중해서 들었네. 나는 피식 웃으며 비어 있는 소파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둘은 별일 없었고?” “네. 저는 괜찮아요. 오빠.” “백호 너는? 괜찮아?” 디테일한 내용은 생략한 채 좋은지 나쁜지만을 우회해 묻는 질문. 다만 그러면서도 나도 모르게 현별이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이 녀석은 그걸 또 봤을까. “괜찮아요. 어차피 현별 누님도 제가 누군지 알잖아요?” “……어?” “에이 형님! 저도 눈치가 있는 놈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누님 앞에서 말해도 괜찮아요. 제가 지금 성 밖에 있는 거.” “……헤에.” 이백호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자 현별이가 잠자코 들으며 흥미로운 눈빛을 지었다. “…백호야,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안 괜찮을 게 뭐예요? 어차피 우리 셋 다 동향 사람들인데. 전 상관없어요. 솔직히 매번 누님만 빼놓고 둘이서 대화하는 것도 좀 그랬거든요. 셋인 게 노가리 깔 때 더 재밌기도 하고.” 정말 그래도 되냐는 의문점은 남지만.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내심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확실히… 셋이서 얘기하고 있으면 뭔가 돌아간 기분이긴 하지…….’ 정확히는 한국에 와 있는 느낌에 가깝다. 군대 얘기를 한다든가, 정치 얘기를 한다든가, 김치가 먹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이 장소뿐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의 생활은 충분히 만족 중이지만. 가끔 그런 대화가 그리워지는 순간은 분명하게 존재했다. “아무튼, 그래서 거기는 어때? 노아르크 사람들은 만났어?” “네. 이제 한 일주일쯤 됐는데, 지금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알아보는 단계예요. 아우릴 가비스, 그 양반은 아직 못 찾았고요.” “아우릴 가비스……?” “아, 현별 누님은 모르시는구나. 제가 성 밖에 나간 게 그 새끼 찾으려고 간 거거든요.” “아… 그, 그래요?” 평소에는 자기가 최고라는 듯한 느낌으로 기죽지 않던 현별이었으나, 너무도 가볍게 스케일이 큰 얘기가 나오자 당황한 듯했다. ‘이런 모습은 되게 오랜만에 보네.’ 그 모습도 어딘가 그리워서 보고 있자니 현별이가 찌릿하고 째려봤다. “나 방금 안 웃었어.” “저도 아무 말 안 했는데요.” “…….” 아무튼, 이후로는 이백호에게 성벽 바깥에 대해서 궁금했던 점들을 물었고, 이백호는 자기가 알아낸 것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게임 내에서도 철저하게 미지의 지역이었던 만큼, 사소한 얘기들 하나하나가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뽑으라면 역시 이거였다. “농사 짓는 게 가능해요.” 라프도니아와 달리, 성벽 밖에서는 ‘마석’ 없이도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은 더욱더 커진다. “근데 걔네는 왜 자꾸 미궁에 기어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노아르크는 왜 아직도 전쟁을 이어나가는 걸까. 어째서 외부에 포탈을 만들어내면서까지, 미궁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이백호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그 이유엔 ‘아우릴 가비스’ 그놈이 깊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요.” “역시 그렇겠지? 아무튼 오케이, 나중에 뭔가 더 알아내면 꼭 좀 들려줘.” “네, 형.” 그렇게 주제 하나가 일단락됐을 때는 이백호의 로그아웃까지 10분 정도 남은 시기였고, 따라서 남은 시간 동안은 실없는 얘기들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 어쩌다 보니 오늘은 제 얘기만 엄청 한 거 같네요. 다음엔 형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저도 되게 궁금했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알지. 그때 들려줄게.” “그럼 다음에 봬요!” 그렇게 이백호는 시간이 되어서 떠났고, 현별이와 둘이서 보낸 시간 중에도 별일은 없었다. “쟤가 저렇게 궁금해하는 거 보니, 뭔가 재미난 일을 하고 있나봐요?” “아하하…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말 돌리기는. 지금부터 책 읽을 건데, 오빠도 줘요?” “아, 그럼 땡큐지.” 익숙하게 현별이에게서 책을 넘겨받아 읽었다. 안 그래도 저번에 재밌는 부분에서 끊겨서 살짝 궁금했었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밌지?’ 읽으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중간에 감동적인 부분이 나올 때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는 등. 한껏 몰입해서 읽고 있자니 소파에 누워있던 현별이가 발끝으로 내 무릎을 툭툭 쳤다. “어, 왜?” “이제 갈 시간 아니에요?” “아, 그러네.”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덮으며 일어서자 현별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게 재밌으면 이따가 또 오든가요. 그때 책 또 빌려줄 테니까…….” “아냐.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GP도 많은데 그냥 내가 사서 읽지 뭐.” “…….”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채팅방에서 나온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풀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스트레칭 같은 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공간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 뭔가 습관적으로 하게 된단 말이지. 게다가 이러고 있으면 뭔가 정신도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고. “자, 그럼 가볼까.” 오늘은 원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다. *** 얼굴 전체를 가리는 수사자 가면. 그리고 그 밑에 입은 단정한 남색 정장. 매번 입던 그 세트를 걸치고서 거울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마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 다만, 그런 기분과 별개로 나는 냉정하게 현재 내 상태에 대해서 자가진단을 내렸다. ‘중증이네.’ 후, 컨셉질도 연 단위로 하려니 힘들다. 내가 만든 컨셉에 내가 잡아먹힐 것만 같달까? 아, 물론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터벅, 터벅. 거울을 보며 옷차림새를 확인한 뒤, 복도를 걸어 원탁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모두 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피시싯, 오셨습니까.” “헤에… 반가워요, 수사자 님!” “오늘도 마지막에 왔구려.” 그들의 인사를 싹 무시하며 내 지정석으로 향하고 있자니, 불현듯 아까 백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느낌?] 사실 원탁 한정으로는 백호 말이 맞았다. 일부러 원탁에 올 때면 최대한 늦게 도착했으니까.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마지막에 모이는 시선을 즐기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찍 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보통 일찍 도착한 사람들끼리는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거기에 껴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하하호호 웃으며 스몰토크를 나눌 것도 아니고, 괜히 옆에 앉아 있으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터였다. 바로 지금 그러하듯이. “그럼… 다 모였으니… 시작해보려 하는데…….” “…….” “혹시… 뭔가 문제라도… 있소?” 인사를 싹 무시하고 앉아서 가만히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늑대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온다. “딱히.” “그럼… 시작해봅시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 어째선지 오늘은 늑대가 대화를 주도하며 집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뭐, 나야 누가 하든 관심없지만—. ‘아오, 왜 이 가면만 쓰면 뼛속까지 이런 마인드로 변하지?’ 슬슬 경계를 하고 주의해야 하는 단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일단 이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서 귀를 열었다. 일단 첫 순번은 사슴뿔이었다. “지하 1층 폐쇄에 관한 왕가의 지침이 확정됐소. 만약 지시를 무시하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면, 지위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오.” “이례적일 정도로 엄한 처벌이군요.” “아, 물론 일정 규모 이상 클랜에 한해서 엄벌하는 것일 뿐, 일반 탐험가들까지 그런 엄벌을 내리지는 않으리라고 우리들은 보고 있소.” 하긴, 이해가 되는 조치다. 클랜의 이탈만 막아도 전장이 무너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어휴, 빌어먹을 왕가 놈들. 아주 그냥 도움되는 일을 하는 적이 없어.’ 여하튼, 사슴뿔을 시작으로 회원들이 빠르게 순서를 이어나갔는데, 그중에 기억할 만한 것은 총 둘이었다. “3층에서 출현하는 무명 조각상에 ‘왜곡’ 마법을 걸고서 처치 시, 세 종류 문양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게 지하 1층으로 가는 열쇠예요.”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의 입장법을 공유한 여왕. 그리고……. “피싯, 어쩌면 여러분들에게는 희소식일지도 모르겠군요. 안타깝게도 8층을 공략 중이던 저희 진영의 정예들이 공략에 실패하고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답니다.” 광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듣자마자 뭔가 머리에 번개가 치는 기분이 들었다. ‘8층 공략에 실패했다고……?’ 근거는 없지만,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칼헤움.” 8층 균열 중 하나인 빛의 도시 칼헤움. 신록거창을 드롭한 밀라옐이 균열 수호자로 등장하는 바로 그 필드. 이를 언급한 순간이었다. “……피… 싯?”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던 광대가 웃음을 멈췄다. “수사자 씨가 그걸… 어떻게……?” 뭐야, 진짜 거기였어? 그럼 균열 공략이 실패한 거랑, 여기 아래에서 놈이 출현한 거랑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추리를 하고 있자니, 광대가 어느새 마음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었다. “크흠, 흠! 제, 제가 허튼 질문을 했군요. 수사자 씨라면 분명 노아르크에도 숨은 귀가 있을 터인데.” 그냥 내버려뒀을 뿐인데, 알아서 근거를 붙이고 납득을 한 듯했다. 이래서 일단 유명해지라는 건가? 알 수 없지만, 광대가 호들갑을 떨든 말든 회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벌써 내 차례네.’ 그럼 어떤 정보를 꺼내볼까. 오늘은 그러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재밌는 정보가 나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뱉는 식으로 컨셉을 지켜나갔지만……. ‘오늘은 정보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니까.’ 정확히는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지만, 변경점이 생겼다는 쪽에 가깝다. 이번에 왕가에서 똥을 잔뜩 끼얹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면 추가 유입이 끊길 판이다. 그러니 나도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입장법은 여왕이 말해줬으니 그건 그냥 패스해도 될 테고…….’ 왕가에서 사형이라는 강수를 두기는 했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야 탐험가란 족속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지하 1층 기록보관소.” 탐험가들은,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이곳에서 비요른 얀델은 두 달간 싱글 넘버스 아이템 두 개를 획득했다.” 그 너머에 황금만 충분하다면. 545화 고스트 (3) 정보를 말한 동시에 주변을 쓱 둘러본다. “……!” “……!” 오케이, 일단 얘들 반응을 보니 일반 탐험가들이 눈 돌아가는 건 확정인 거 같고. “고작 두 달 만에…….” “싱글 넘버스가…….” “……두 개?” 뭐, 하나는 가르파스의 목걸이로 뽑았고, 다른 하나는 운 좋게 수호자를 잡고 먹은 거긴 하지만……. 거짓말은 안 했다. 애초에 지하 1층에서 나온 마석이나, ‘수호자’ 몬스터가 아니면 먹지 못했을 물건들이기도 하고. 솨아아아아아-! 이윽고 녹색의 빛이 너무도 선명하게 밝혀지자, 잠시간 정적이 원탁 내에 내리앉았다. 여기부터는 다들 반응이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모두가 그 내용 자체에서 경악을 느낀 것이었다면. “대체 어떻게 그곳의 일까지…….” “지금까지 아래로 내려간 이들이 12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소이만…….” “헤에… 설마… 그 안에?” 어떤 부류는 내 정체에 호기심을 표했고. “피시싯, 멍청하기는. 이 세상 천지에 수사자 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 있다고. 아까 보지 못했습니까? 8층 균열에서의 일도 속속들이 알고 있던 거. 그거… 애초에 아는 사람이 50명도 안 되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고요?” “하긴… 애초에 그곳의 정보가 처음 나온 게 헥츠 클랜의 단원 중 한 명이었죠. 그들 중에 정보원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어요.” 어떤 부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납득했다. 또한……. “그렇다면, 그 정보원이란 자는 비요른 얀델의 근처에 있겠군.” 왕가 세력 출신인 사슴뿔은 드디어 단서를 얻었다는 것처럼 호전적인 눈빛을 뿜어냈다. 거, 지가 알면 뭘 어쩌려고. 스윽. 나는 시선을 옮겨 여우 가면, 베르실의 반응도 살폈다. 가면을 쓴 탓에 표정을 제대로 읽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날 보는 눈빛에서 의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황과 불안.’ 그러한 감정의 편린이 느껴졌다. ‘자기네 클랜원 중에 내 끄나풀이 있다고 생각 중인 건가.’ 뭐, 이건 오늘 커뮤니티가 닫히고나서 베르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면 알 수 있겠지. 미샤 사건 때도 곧장 나한테 달려와 배신자 얘기를 꺼냈던 전적이 있으니까. 아무튼, 베르실은 이만하면 됐다. 스윽. 나는 한 번 더 시선을 옆으로 이동해 고블린을 확인했다. ‘쓰읍, 사실 얘가 제일 걱정인데.’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서 뭔가 곰곰이 생각할 것이라도 있는 듯 침묵 중인 고블린. 그래, 그냥 그러고 있을 뿐인데……. ‘괜히 불안하단 말이지.’ 수사자가 비요른 얀델일 수 없는 수많은 이유를 원탁에서 드러냈지만, 세상엔 간혹 터무니없는 직감을 가진 놈들이 있다. 왠지 내가 보기엔 고블린이 그런 유형 같았다. 따라서……. “사슴뿔.” 나는 첫 순번이었던 사슴뿔에게 말을 걸며 대화 화제를 돌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 “이제 다시 네 차례다.” 자, 얼른 돌아보자고. 안 그래도 들려줄 얘기가 많으니까. *** 한 바퀴.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에는 모든 종류의 몬스터, 그리고 균열 수호자가 등장한다.” 두 바퀴.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에는 수많은 신종 개체가 출현하며, 그중에는 변종 개체도 존재한다.” “저… 변종 개체라 하심은……?” 원래라면 어림도 없었을 질문에도 나는 친절히 답해 줬다. “여러 종류 몬스터의 스킬을 가진 개체다. 정수도 드롭을 하지. 예를 들면, 오우거의 패시브에 트롤의 액티브를 가진 식으로.” “……!!”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그건! 새로운 정수 조합을 맞출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몇몇 회원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으나, 근거를 대며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진위 여부는 저 보석이 알아서 해 주니까. 솨아아아아아아-. 보석이 녹색 빛을 자아낼 때마다 회원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졌다. 또한……. 번뜩-! 어느 면에서는 보석의 빛보다 강렬한 탐욕의 빛을 눈가에 품는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그 어떤 플레이어가 이런 꿀 사냥터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어? “피시싯… 이거 이야기가 재밌어지는군요.” “글쎄, 노아르크 쪽에서는 그리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 거 같은데? 어차피 노아르크는 무슨 이야기를 듣든 손가락이나 빨아야 할 테니.” 노아르크 출신인 광대와 왕가 소속인 사슴뿔의 기 싸움. 물론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 따윈 전무했다. ‘뭐, 그래도 애들 싸움이 제일 재밌긴 하지.’ 그리고 그런 감상은 다들 비슷한지, 시비가 붙은 상황임에도 어느 누구 하나 둘을 말리지 않았다. 단지 흥미롭다는 듯 지켜볼 뿐. “아아! 1년이 넘게 8층, 9층에 못 가서 뒤처지던 라프도니아 탐험가들처럼 말입니까? 피싯.” “수사자가 한 말을 못 들었나? 저 말대로라면 이제 8층, 9층으로는 갈 이유조차 없어지는데.” “아아,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그게 어쨌다고 말입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이 소식이 밖에 전해지면 왕가도 진입 금지 처분을 재고할 테고, 아예 본격적으로 탐험가들의 성장을 지원할 테지. 그렇게 되면 노아르크가 망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호오, 그렇습니까? 예. 정말로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군요.” 광대의 심드렁한 답변에 사슴뿔이 조소를 뱉었다. “하긴, 광대 너라면 별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군. 자기네 진영에서 공략에 실패한 일을 자랑스럽다는 듯 적에게 떠벌리는 성격이니. 네게는 그냥 이런 일도 재밌는 일에 불과하겠—.” “글쎄요? 제가 재밌다고 말했던 건 전혀 다른 이유였습니다만?” 이내 사슴뿔의 말을 끊고 나선 광대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게, 사슴뿔 씨는 왜 이번 사태가 왕가에 호재일 거라고만 생각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진짜 몰라서 묻는 겁니까?” 광대가 과장스러울 정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광대는 친애의 의미를 담아 눈인사를 한 뒤 다시금 사슴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사자 씨가 왜 원탁에서 지하 1층에 관한 정보를 말해 줬겠습니까? 사슴뿔 씨도 머리가 있을 테니 오늘은 한번 생각 좀 해 보시죠.” “…….” 사슴뿔은 그 말에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회원 중 한 명이 답을 내놓았다. “왕가를 방해하기 위해서.”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여왕이었다. “아무래도 그것밖에 생각나는 이유가 없기는 하죠.” 그녀의 말에 다른 회원들도 제각기 납득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심 느낀 게 나만이 아니었나 보구려.” “……이 얘기가 퍼지면 어떻게 될지, 수사자 씨가 모를 리 없는데 말이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온 적이 없기도 하고.” 왕가의 진입 금지 명령이 떨어진 후에 풀린 정보. 그리고 그것도 그 명령에 반하는 사태를 야기할 만큼 매력적인 정보. 이 정황을 통해 회원들은 각자 나의 의도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뭐, 눈치채 봐야 큰 상관은 없지만. “피싯, 근데 그것도 모르고 기세등등한 꼴이라니, 본인이 생각해도 참 웃기지 않습니까?” “……너무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군. 왕가를 돕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왕가에서는 지하 1층이 그렇게 귀중한 장소인지 몰랐으니까.” “흐음… 글쎄요? 과연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한 게 어느 쪽이었을는지.” 광대의 말을 끝으로 회원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눈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저 둘의 말 중 무엇이 사실인가. 그것을 내가 명확하게 말해 줬으면 하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갑갑했을까. “그래서…….” 결국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다름 아닌 블랙이었다. “진실이 뭐지?” 조금 의외였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설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지만, 그게 얘일 줄은 전혀 몰랐거든. 맨날 자기 차례 말고는 가만히만 있더니. “수사자, 너는 왕가의 편인가. 아니면 노아르크의 편인 건가?” 장식이나 문양 따위는 전무한 새까만 가면을 뒤집어쓴 블랙의 당돌한 질문. 이에 나는 짧게 읊조렸다. “버릇이 없군.” 살기를 담은 건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블랙이 눈을 피하듯 아래로 내리깐다. 뭐, 뒤늦게 본인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억지로 눈을 맞추긴 했지만. ‘은근히 성질이 있나 보네.’ 아직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 한편에 기록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마치 근성 하나는 마음에 든다는 듯. “하지만, 대답은 들려주지.” 나는 블랙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대는 내가 부디 노아르크의 편이기를 바라는 듯했고, 사슴뿔은 그 반대였다. 나머지는 어느 쪽이든 진실이 궁금해 보였다. 하지만……. “왕가와 노아르크.”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분명하게 선언했다.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실제로도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다. 노아르크는 나의 적이다. 내 동료를 처음으로 앗아 간 것은 오르큘리스 소속의 용살자였고, 놈들 때문에 1층에서 그 지랄을 떨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에르웬의 언니인 다리아가 죽었다. 또한……. ‘왕가는 말할 것도 없지.’ 그날에 품었던 차가운 분노는 아직도 녹아내리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솨아아아아아아-! 원탁의 보석이 진실의 빛을 자아낸다. 왠지 어딘가 평소보다 더 강렬해 보이는 광채. 이를 보며 누군가가 홀린 사람처럼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소리 난 곳을 확인하니, 그곳에는 사슴뿔이 앉아 있었다. “수사자 당신은, 대체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얘기를 한 거지?” 왕가 출신으로서 수많은 정적들과 머리 싸움을 했을 녀석에겐 당연한 의문이었을 것이다. 수사자 가면을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강자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데. 왜 왕가의 일을 방해하는 듯한 짓을 하였는가. 그 질문에 대한, 수사자의 답변은 간단하다. 늘 그랬듯이. 툭툭. 나는 팔받침대를 두 번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그러는 쪽이…….” 역시 아무래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그래,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 이후 원탁은 맥없이 끝났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지하 1층이 얼마나 개꿀 사냥터인지는 충분히 전달을 할 수 있던 데다가, 다른 애들도 이제 오늘 풀 정보가 바닥난 듯하더란 말이지. 게다가 마지막에 끝내는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쿨하게 쫑을 내고 떠나 버렸다. ‘암, 거기서 한 바퀴 더 돌자고 보채면 괜히 모양만 빠지지.’ 그렇게 다시 돌아온 이한수의 방.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쉬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켜뮤질을 이어 나갔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이 커뮤질이 내게 있어서는 유일한 바깥 세상과의 창구였다. “푸흐흐흐흐… 푸흐흐, 이 미친놈 진짜…….” 아오, 자존심 상해. 이게 뭐라고 이렇게 웃기지? 그렇게 낄낄거리며 게시판을 둘러보고 있자니, 자유 게시판 상단에 고정된 칸에 새로운 화제글이 순위를 갱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에 대해 알려진 점 총정리.] 곧바로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내용이 아주 알찼다. 기록 보관소에 입장하는 방법부터 시작해, 그곳에 모든 종류의 몬스터, 균열 수호자가 등장하며, ‘변종 개체’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비요른 얀델이 이곳에서 싱글 넘버스 아이템 두 개를 먹었다는 점까지. 게시글에는 내가 원탁에서 말했던 모든 정보가 짧고 간략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참고로 작성자는……. [BFKILLER] 처음 보는 닉네임이다. ‘일단 확실한 건 원탁 멤버 중 하나인데…….’ 누구려나? 이제 나까지 포함해서 멤버가 10명이나 되다 보니 정확하게 가려 내는 게 불가능했다. ‘애초에 소문이 나길 바라고 풀었던 정보라 오히려 잘된 일이긴 한데…….’ 설마 이렇게까지 공개할 줄이야. 이번 달에 정보가 빠른 이들의 귀에 먼저 닿고, 다음 달쯤 본격적으로 정보가 퍼지지 않을까 싶었던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 ‘하긴, 한곳에 모이긴 했어도 다들 소속된 집단도 개인이 바라는 목표도 다르니까.’ 10명 중 누군가는 이 정보가 밖에 퍼지길 바랐다 하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드르륵, 드륵.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댓글들 반응을 살폈다. 화제글에 오르기 전이라 그런지, 초기의 댓글들은 팩트 체크 관련이 많았다. [YPPL: 이야, 이 정도면 네가 작가 해라.] [gooooooodd2: 화제글 가려고 발악을 하네.] [q1q2q3: 그래서 근거는 어디 있죠? 없으면 누가 믿을까요. 이런 허무맹랑한 정보를.] 단순 어그로라고 판단하고서 날 선 비아냥을 쏟아붓는 유저들. 다만, 그런 반응은 차차 줄어들었다. [Amer91: 다음 탐사 때 조각 사원을 경유하는 경로로 가 봐야겠다. 속은 새끼들 거기서 정모하고 있을 듯.] [└AI_DIDIGO: 정보1, 무명 조각이 지하 1층의 열쇠라는 건 이미 왕가 및 대형 세력들에서도 알고 있는 팩트다.] [└ScottBANE: 와, 디디고 님 그게 정말인가요?] [└Adi: 잠깐만, 입장법이 사실이면 뒤의 얘기들도 전부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닌가?] [└Amer91: 아니, 그래도 그건 좀……. 그냥 그 정보 하나 갖고 화제글 받고 싶어서 어그로 끄는 거 아님?] [└Adi: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아직 공개도 안 된 정보를 누가 화제글 하나 먹겠다고 날림? 애초에 입장법 하나만 공개해도 화제글은 먹었을 텐데?] [└ScottBANE: 게다가 곱씹어 볼수록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닌 듯. 지금 지하 1층에도 플레이어는 있을 테고, 커뮤니티 통해서 정보 전달이 가능하잖아.] 이미 입장법에 대해서 알고 있던 유저들이 나타나며, 상황은 서서히 반전되어 갔다. 단순 어그로 취급에서,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오케이, 이 정도면 일단 도시에는 저 내용들이 확실하게 전해지겠고…….’ 그렇게 내심 흡족해하며 스크롤을 내리던 때. ‘응?’ 나는 한 지점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Pnec: 머저리 새끼들. 누가 아예 입에 떠먹여다 주는데도 받아먹지를 못하네.] [└bigD: 받아먹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Bling0_0: 항상 어그로 끄는 새끼임. 신경 쓰지 마셈.] [└Pnec: 그래, 네 새끼가 언제 나오나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뭐야, 얘네는 여기서 또 싸워 대고 있네. 몇 번인가 봐서 이제 기억날 정도인 닉네임의 출현에 나는 얼른 스크롤을 더 내렸다. [└Bling0_0: 아니죠? 사실 엄청나게 알죠? 네가 3cm에 3kb인 것도 알고 있죠?] [└Pnec: 그래, 너 같은 애송이가 뭘 알겠냐. 쯧쯧, 네가 믿든 말든 이 게시글 내용은 전부 사실이다.] [└Bling0_0: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데?] [└Pnec: 그만큼 출처가 확실한 분 입에서 얼마 전에 들은 정보니까. 참고로 그분까지 모욕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여 버린다.] 뭐야, 이건. 얼마 전에 들어? ‘혹시 이 새끼도 원탁 멤버인가?’ 그런 추측이 머릿속을 스쳐 가던 차. [└bigD: 받아먹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삭제된 댓글입니다.)] [└Pnec: 그래, 네 새끼가 언제 나오나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삭제된 댓글입니다.)] [└Pnec: 그래, 너 같은 애송이가 뭘 알겠냐. 쯧쯧, 네가 믿든 말든 이 게시글 내용은 전부 사실이다.] [└(삭제된 댓글입니다.)] [└Pnec: 그만큼 출처가 확실한 분 입에서 얼마 전에 들은 정보니까. 참고로 그분까지 모욕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여 버린다.] 어째선지 ‘Bling0_0’이란 닉네임을 쓰던 유저가 빛의 속도로 튀어 버렸다. 546화 고스트 (4)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 날.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눈을 뜬 나는 그대로 오늘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쉽게 말해, 아침밥부터 먹었다는 뜻이다. “자자, 식사 나왔습니다!” 세 개의 집단이 얽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그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전투 외 일상에서도 포지션이 나뉘었달까? 지금은 총 네 명의 식사 당번이 매일 우리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있다. 아, 참고로 식사 당번의 지휘자는 미샤다. “어때, 입에는 좀 맞아? 아침이라 평소보다 간을 조금 더 싱겁게 했는데.” “고기가 적은 거 빼고는 괜찮다.” “아… 고기…….” “장난이었다. 고기는 아껴 먹어야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그런 의미에서 식사가 끝난 후에는 물자 관리 담당인 베르실에게로 가서 남은 식량을 확인했다. “총원 38인 기준으로 61일 치가 남았네요. 지금부터 배급량을 줄이면 나흘 정도는 더 늘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됐다. 여기서 더 줄이면 무슨 힘으로 싸우라고?” 현재 우리에게 남은 식량은 약 두 달분. 사실 이것도 전부 아르민 탐사단에서 식량을 넉넉히 챙겨온 덕분이었다. 배를 잃고 조난당했던 헥츠 클랜은 진작에 식량을 전부 소모했고, 우리는 7인 기준으로 네 달 치 식량을 준비해 왔었으니까. ‘86일차라…….’ 일반적인 미궁이었다면, 진작에 7층이 닫히고도 10일이 더 지났을 시간. 하나 우리는 아직도 미궁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 추세로 보면 200일 차가 돼도 탈출할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하겠단 거겠지.’ 물론 그렇다고 식량에 대한 걱정이 큰 건 아니다. 애초에 곧 있으면 추가 뉴비들도 들어올 것이며, 정 안 되면 몬스터에 ‘왜곡’ 마법을 걸고 사냥을 해도 되니까. 식량이 부족했던 아이스록에서처럼. “아무튼, 알았다. 누군가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식량 외에는 아낌없이 내줘라.”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아, 저기 그리고…….” “그리고?” “………아니에요. 나중에 좀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왠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원정대 안에 악령 출신 스파이가 숨어 있단 거겠지. 근데 그 얘기를 하려면 자기도 악령이란 걸 밝혀야 하니 망설이는 걸 테고. “그래? 그럼 가보겠다.” “네.” 물자 현황 체크가 끝난 뒤에는 아멜리아를 찾아가 지난 밤 동안 별일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야 얘가 경비조의 리더거든. “딱히 없었다.” 늘상 그런 말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 미궁 내에선 언제 외부의 적이 나타나도 놀랍지 않을뿐더러……. 내부라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떤 변수가 터져 나올지 미지수기에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다만, 헥츠 클랜의 전사 빌커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거 같더군. 요즘 들어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은 듯했다.” 원정대의 경비조는 사실상 지금까지는 감시자 느낌이 더욱 강한 역할로, 매일 불침번을 서며 밤중에 있었던 일들을 내게 전했다. 참고로 경비조는 총 6명으로 전 왕실 조사부 출신 아저씨가 아멜리아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 “알겠다. 그 녀석은 나중에 내가 가서 한번 대화를 나눠보지.” “그렇다면,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겠다.” “응?” “넌 전사들의 우상 같은 존재이지 않냐. 게다가 그자는 널 특히나 존경하는 듯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좀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아멜리아와 오전 대화를 나눈 후에는 아르민 탐사단 소속의 마법사 삼인방을 찾아갔다. “에밀리에게 듣기로 어젯밤도 밤새도록 연구를 했다던데, 뭔가 성과가 있었나?” 이 셋은 우리 원정대에서 조사단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 정수, 그게 아니더라도 도서관의 소환책, 소환용 제단,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석문 등. 이 미궁에서 보고 발견한 모든 것들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는데……. “어… 성과라고 하기까지는…….” “히프라마전트의 혈액 샘플에서 특이한 수치를 발견하기는 했는데…….”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어째선지 이들은 내가 성과를 물을 때면 벌벌 떨며 내 눈치를 봐댔다. 재촉하는 게 아니라고 마음 편히 먹어도 된다고 거듭 말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마탑 연구원 출신의 버릇이라던가? “헤헤, 남작님께서는 총책임자 아니십니까.” “아무리 그러셔도……. 저희로서는 마음 편히 먹기가 어렵지요.” “암, 너무 안일해선 성과도 제때 나오지 않는 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뭐, 그렇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다. 여하튼 그렇게 조사단의 보고까지 들은 것으로 오늘의 아침 일과는 끝. “자, 다들 소화가 됐으면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 이제 출근해서 일할 시간이다. 밥도 든든히 먹고 소화까지 잘 시켰잖아? “지금부터 마물들을 소환한다!” 슬슬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 아침 일과가 끝난 후의 루틴은 간단하다. 어제 저녁에 미리 한가득 모아뒀던 책들을 한곳에 쌓아두고서 무한 사냥. 솨아아아아아아-! 마석이 쏟아져 나오고, 정수가 나오면 잠시 소환을 멈춘 뒤에 어떤 정수인지를 확인한다. 아, 이제는 목격자 증언에 의지한다는 원시적인 방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기록용 수정구를 위에다 설치해서 사냥터 전부가 보이도록 전부 녹화 중이거든. “카탄다의 정수네요.” “카탄다의 녹색 정수라면, [흉의 예언]이겠군요. 남작님?” “우린 됐다.” “그렇군요. 혹시 다른 분들 중에 필요하신 분이 있습니까?” 정수 확인이 끝나면 내게 먼저 선택권을 준 뒤, 거절을 당하면 후순위 대기자를 찾는다. 그리고 후순위 대기자도 없다면, 그대로 폐기한다.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4등급 정수인데, 아무도 먹지 않는다니.” “3등급 정수들도 가끔씩 폐기가 되는 마당이니 놀라울 것도 없지.” “좀 더 기다리면 더 알맞은 정수를 구할 수도 있는데 급할 이유가 없죠.” “후후, 눈앞에 정수를 보고 미래를 먼저 생각하다니. 밖에 나가서 이곳에서 있던 일을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시험관에 담지도 않는다니, 아까워 죽겠소. 저게 다 얼마인데…….” “남작님께서 시험관을 아껴 쓰겠다 하지 않았소. 나는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 보오.” 의외로 폐기되는 정수가 나오면 탐험가들은 좋아라 했다. 정수가 자연 소멸할 때까지 사냥이 중단되거든. 뭐, 그렇다고 해서 아예 쉬는 건 아니긴 하지만. “뭣들 하나? 정수가 사라질 때까지 소모한 책들을 보충한다!” 나는 그런 짜투리 시간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대원들을 전부 책장으로 보내 소환책들을 꺼내게 했고, 책이 넉넉할 땐 후딱 밥을 차려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노가다를 이어간 결과. ‘장장 10일 만인가.’ 도서관에 도착해 사냥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처음으로 성과다운 성과를 얻어냈다. “…남작님?” “이건 우리가 가져가겠다.” 수십 개의 정수를 패스하고 나서야 겨우 얻어낸 정수. ‘스피어디퍼.’ 6층 대해의 특정 구역에서 깊이 잠수 시, 아주 극악의 확률로 만날 수 있는 3등급 몬스터. 당연히 주인은 정해져 있다. “아이나르.” “오! 역시!!” 짧게 호명한 즉시 근처에서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아이나르가 후다닥 달려왔다. 창을 쓰는 놈이라 그런지, 우리가 가져간단 말을 하자마자 내심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냥 주는 건 뭔가 재미없으니. “기다려라.” “읏……! 아니, 왜 기다리라는 거냐! 어차피 나를 줄 생각—.” “쓰읍.” “…….” 그래, 진작 그럴 것이지. “먹어라.” “우오오오오!!”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나르가 정수에 달려들었다. 거, 투쟁심도 바닥 났으면서 욕심은 남은 건가? 「아이나르 프넬린의 영혼에 [스피어디퍼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정수의 빛이 아이나르의 육신에 스며들고, 이내 그 여운을 즐기는 듯하던 아이나르가 눈을 뜨더니 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소리쳤다. “이거 뭐냐! 장난 아니지 않냐! 이렇게 강해진 기분이 확실하게 드는 건 오랜만이다……!!” 뭐, 그거야 그럴 것이다. 얘는 기본 스탯이 전부 다 육체 수치에 몰빵이 되어 있으니까. 물론 중요한 건 스탯이 아니라 스킬이지만. (P) 차별주의자 — 동족이 아닌 대상을 공격 시, 전투 시간에 비례해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동족을 대상으로 할 시, 반대의 효과를 받습니다. 아이나르의 ‘학살자’ 각인과 찰떡인 패시브. 그리고……. (A) 삼지창 — 창을 이용해 공격 시, 주변의 적 두 명에게 동일한 피해를 입힙니다. 쿨타임도 없고, MP 소모도 적은 편인 액티브. 물론 그만큼 스킬 자체의 성능이 미쳐날뛰지는 않지만……. 원래 전부 그런 스킬들만 채워넣으면 망캐가 된다. [삼지창]은 [거듭베기]를 대신해 아이나르의 평타가 되어 줄 스킬이었다. ‘오케이, 그럼 이제 아이나르는 끝났고…….’ 물론 바꿔야 할 정수는 한가득이지만, 당장은 정수 칸이 없기에 도시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남은 건……. ‘나 하나, 에르웬 하나, 그리고 아멜리아가 둘…….’ 일단 지금 구하자마자 먹을 수 있는 건 이 정도고, 미리 시험관에 챙겨둔다고 하면 훨씬 더 늘어난다. 그야 나가자마자 정수를 지우고 바로 세팅을 바꿀 수 있게 준비해 두면 훨씬 좋잖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가능하면 각인용 재료도 구해봐야겠네.’ 불사자 각인의 8단계 재료는 세 종류의 3등급 몬스터가 드롭한다. 물론 그 외에도 재료가 더 있긴 하지만……. ‘걔네는 어차피 도시에서 돈을 주고 사면 되는 부분이니까.’ 저등급 소재와 달리, 3등급 소재부터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7단계 재료였던 망자의 영혼만 해도 그렇다. 드롭 자체는 4등급 몬스터인 리치가 했지만, 중앙 거래소에 올라와 있던 물품은 단 하나뿐. 그래서 언제 또 구할 수 있을지 몰라서 있는 돈을 다 털어서 구매했었—. 「아이나르 프넬린이 [삼지창]을 시전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나르가 새 정수의 성능을 실험하며 보다 강해진 육신에 적응하고 있던 때였다. “단장님!!” 38인 중 유일한 비전투인력.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가 커다란 소환책 한 권을 끌어안고서 다급하게 내게 달려왔다. “차, 찾았습니다……! 드, 드디어!” “찾았다니, 뭘? 진정하고 말해—.” “벨라리오스가 나오는 책입니다!!” 소식을 들은 즉시,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길게 토해냈다. “후우…….” 그래, 드디어 떴구나. *** 벨라리오스. 동양풍의 용을 꼭 빼다 닮은 형태의 3등급 몬스터. 출현지는 암흑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용의 산맥. 다만, 그곳이 전쟁터로 바뀐 바람에 수급 가능한 스펙이 됐음에도 아직까지 첫 처치도 못 했던 바로 그놈. “베르실, 책장에 있는 녀석들까지 전부 다 소집해라.” 이 도서관에 온 때부터 놈과의 만남을 고대해 왔던 나는 서둘러 전원을 집합시키고, 벨라리오스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근데, 그것에 조금 불만이 있었을까? “저기…….” 집중해서 수업을 듣던 탐험가들 사이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린다. “뭐지, 아이나르? 배가 고픈가?” “그게 아니라… 나는 아직 새로운 정수에 적응도 다 못했는데…….” “그래서?” 진심으로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실전보다 좋은 연습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이는 바바리안 전사라면 모두가 다 공감을 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나는… 싸우는 것보다 그냥 연습하는 쪽이 더 좋은데……. 그 효율? 효율도 좋은 거 같고 말이다.” 아, 맞다. 그 빌어먹을 투쟁심. “그냥 너희가 싸우는 동안 여기서 연습이나 하면 안 되나?” 아주 그냥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건더기가 있으면 무조건 피하려고 하는구나. 당연히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된다. 너도 이번 전투에 참가할 거다.” “……알겠다.” 저렇게 풀 죽는 모습을 보면 내가 못된 사람이 된 거 같고, 마음이 절로 약해지지만 나는 최대한 냉정히 감정을 잘라냈다. 그런 나에게 에르웬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3등급이긴 하지만, 셋도 아니고 둘인데 저희끼리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언제 이렇게 뒤에서 지원을 해줄 정도로 친해진 건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나르가 전투에 불참하는 것? 이번 전투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다른 사람들이 본다는 거겠지.’ 같은 클랜 사람이라고, 이런 부분에서 관용을 베풀고 사정을 봐주면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게 바깥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래, 그러니까……. “이미 내린 결정이니, 왈가왈부하지 마라.” “……네에. 죄송해요.” 에르웬의 설득도 단호하게 쳐낸 뒤 브리핑을 마저 이어갔고, 내 브리핑을 들은 대원들이 완벽하게 적의 정보를 파악했단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소환책을 제단 위에 올렸다. 그리고……. 드르르르르르륵. 오늘만 백 번은 넘게 열리고 닫힌 석문이 열리며 두 마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화르르르륵-! 용암처럼 시뻘건 액체가 담긴 주머니를 등에 맨 채 망치를 들고 걸어오는 염소대가리. ‘헬스미스.’ 불꽃의 전사란 이명을 지닌 부족장이 갖고 있던 정수의 원 소유주이기도 한 바로 그놈. 그리고……. ‘벨라리오스.’ 나는 놈의 매끈한 비늘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낼름 핥았다. 「벨라리오스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벨라리오스가 모든 마법 피해에 면역 보정을 갖습니다.」 내놔, 그거. 547화 고스트 (5) [탐욕의 비늘] 항마력만 충분하다면, 무려 ‘마법 면역’ 판정까지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고점이 높은 액티브 스킬. 심지어 여기에는 효과가 더 있다. 「벨라리오스가 감소시킨 마법 피해량에 비례해 물리 내성 수치가 증가합니다.」 저 스킬은 마법을 막아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물리 내성 수치까지 올려준다. 쉽게 말해, 마법으로 처맞으면 점점 더 단단해지는 만능 비늘을 갖고 있는 셈인데……. 말 그대로 참 탐욕스로운 비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탐욕으로는 탐험가도 밀리지 않거든.’ 오죽하면 탐험가의 탐이 탐욕의 탐이라는 말도 있겠는가. 아, 참고로 방금 내가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내면에 깃든 탐욕을 고스란히 표출하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정수, 정수, 정수, 정수. 기필코 정수! 거울을 보면 맑은 눈의 광인이 들어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몬스터를 앞에 두고서 이렇게까지 몸이 달아오른 건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참아? 내 유일한 약점이었던 마법 피해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낭패를 겪었는데. 저거 하나면 그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은 이놈부터.’ 내 앞을 가로막은 염소대가리의 대장장이. 헬스미스의 머리통을 향해 망치를 내려친다. 콰아앙-! 망치에 맞아 턱이 조금 돌아가긴 했지만, 맷집이 좋은 3등급 몬스터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즉시 반격을 해왔다. 「헬스미스가 [두드리기]를 시전했습니다.」 「대지에 깃든 불꽃이 깨어납니다.」 지면이 갈라지며 치솟는 불길. 우리 부족장이 쓸 때는 지속 시간이 존재하는, 필살기에 가까운 버프 스킬이었으나 이놈에게는 그저 상시 지속되는 스킬이라고 봐도 좋았다. 애초에 정수로 얻은 스킬들은 대부분 성능이 떨어지기 마련이거든. 「모든 화염 스킬의 피해량이 대폭 증가합니다.」 「화염 감응도 수치에 비례해 육체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지속적으로 주변을 불태웁니다.」 놈의 몸뚬이 위로 빨갛다 못해 시퍼런 불길이 일렁거렸으나, 그래도 지속 피해는 버틸 만했다. 원래 탐험가는 장비빨이란 말도 있잖아? 아, 이건 진짜 있는 말이다. 「불의 보주를 활성화했습니다.」 「반경 15m 내에서 파생된 모든 화염 계열 지속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불의 보주’가 발동됨으로 훨씬 더 피해가 줄었다. 그리고 이는 내 주변에 있는 근딜들도 매한가지. 「베르실 고울랜드가 8등급 부여 마법 [냉혈]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화염 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여기에 ‘냉혈’ 마법까지 추가되자 지속 피해는 거의 무시를 해도 될 정도의 수준까지 내려왔다. 따라서……. “공격해라!” 아멜리아가 오러를 뽑아내고, 미샤가 냉기가 풀풀 풍기는 장검을 휘두른다. 또한. 「아이나르 프넬린이 [삼지창]을 시전했습니다.」 아이나르가 새로 얻은 스킬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휘이익-! 화살이 날아드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앞으로 뻗어가는 창. 창의 양옆으로 반투명한 두 개의 창이 추가된다. [삼지창]의 효과로, 원래 이 창들은 대상의 근처에 자리한 두 명의 적에게 꽂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3등급 정수인데, 그거면 서운하지.’ [삼지창]은 광역 스킬이지만, 사실 단일 공격을 할 때 더 빛을 발하는 스킬이다. 바로 이렇게. 「공격 대상 주변에 적이 없습니다.」 「모든 공격이 대상에게 명중합니다.」 염소대가리를 향해 꽂히는 세 개의 창. 물론 [거듭베기]처럼 같은 지점에 꽂히는 판정은 아니라, 갖고 있던 스킬들이 발동되는 일은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약했다는 뜻은 아니다. 창을 이용한 관통 피해량 1,200% 증가. 이 한 줄의 옵션만으로도 4등급 이하 정수 조합의 대미지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으니까. 푸욱-! 깊게 박힌 세 개의 창이 뽑혀져 나오는 순간. 창의 크기만큼 벌어진 구멍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온다. 다만,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헬스미스가 [땜질]을 시전했습니다.」 상처 부위가 용암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충치 치료를 한 것처럼 그 위에 덮여진 은색의 막. 순식간에 부상을 치유한 헬스미스가 포효하며 메인 스킬 중 하나를 더 시전했다. 「헬스미스가 [지옥불]을 시전했습니다.」 [지옥불]. 이 스킬을 메인으로 한 육성법도 과거에 하나 있었을 정도로 나름 성능이 좋은 공격기. 퍼엉-! 펑! 콰아아앙-! 콰아앙-! 이내 화산이 분출하듯. 녀석이 등에 메고 있던 용암 주머니에서 시뻘건 액체가 온 사방에 튀며 폭발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벨라리오스가 [재해]를 시전했습니다.」 벨라리오스도 전장에 난입하며 본격적인 레이드가 시작됐다. *** [재해]는 굉장히 유니크한 스킬이다. 필드 자체에 효과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필드 효과 - 태풍이 적용됩니다.」 사용 시 반경 내에 무작위로 적용되는 필드 효과. 솨아아아아아-! 강풍이 불어오고, 회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덕분에 시야가 많이 좁아졌지만, 이는 단지 이펙트로 인한 부가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모든 스킬의 발동률이 50%로 감소합니다.」 태풍 안에서 스킬을 쓰면 두 번 중 한 번은 중간에 캔슬이 된다. ‘귀찮게 됐네. 시작부터 태풍이라니.’ 그래도 이곳이 용의 산맥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거기에는 자체적인 필드 효과가 있어서 훨씬 더 부담이 심하거든. “헬스미스부터 처리해라!” 이내 지시가 떨어지자 원거리 딜러들도 준비해 둔 스킬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캐스팅해 둔 합동 마법이 펼쳐지고, 각종 이능이 근접한 딜러들을 피해 절묘한 각도로 쏘아진다. 그리고 그 순간. 「벨라리오스가 [용의 보주]를 시전했습니다.」 「반경 내 모든 캐릭터의 자원 소모량이 12배 증가합니다.」 눈 뜨기도 힘든 태풍 속에서 신성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노란빛이 터져 나온다. 그래, 언제 쓰나 했는데. ‘스킬 발동 매커니즘이 일정량 이상의 자원이 소모될 시였지?’ [용의 보주]도 [재해]만큼 특이한 스킬이었다. 자원 소모량을 12배 증가시키며, 소모된 수치만큼 MP로 돌려받는 개사기 스킬. 물론 표면상으로만 그럴 뿐, 이 스킬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헬스미스가 [땜질]을 시전했습니다.」 「[용의 보주]에 의해 자원 소모량이 12배 증가합니다.」 「필드 효과 - 태풍에 의해 스킬이 실패했습니다.」 「[용의 보주]가 소모된 자원을 강탈합니다.」 [용의 보주]는 [재해]와 마찬가지로 적과 아군 모두에게 적용이 된다. 특이한 매커니즘인지라, 이 스킬을 메인으로 한 육성법을 만든 적도 있었다. 극딜 세팅을 해두고서 [용의 보주]로 동료들의 자원을 빨아먹으며 미친 수준의 딜을 뽑아내는 1인 몰빵 캐리형 캐릭터였다. 뭐, 그래 봐야 현재 에르웬의 하위호환 느낌이라 재미로만 몇 번 하고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멈추지 마라!” 태풍이고, 자원 소모량 증가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든 딜을 헬스미스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필드 효과 - 지진이 적용됩니다.」 「이동에 관련된 모든 효과가 봉인됩니다.」 벨라리오스가 회복한 MP로 [재해]를 한 번 더 쓰긴 했지만, 그래도 목표는 이룰 수 있었다. 「헬스미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7」 같이 싸워야 할 동료에게 MP도 뺏기고, 스킬 시전도 막혀 버린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녀석. 솨아아아아아-! 이내 놈의 몸체가 빛무리로 변해 휘날렸으나, 보상은 딱 하나였다. 툭. 3등급 마석. ‘첫 처치라 좀 기대했는데…….’ 혹시나 했던 정수는 드롭되지 않았다. 살짝 아쉽긴 했지만, 크게 집착하진 않았다. 어차피 메인 요리는 따로 있을뿐더러……. ‘오히려 잘 됐어.’ 만약 여기서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으면 괜히 더 불안하기만 했을 것이다. 원래 가챠에는 제물이 필요한 법이니. “이제 남은 건 저놈뿐이구려!” “알고 계시죠? 마법사분들은 지원 마법만 쓰며 도와주세요! 공격 마법은 절대 쓰지 말고요!” 헬스미스를 처치한 후에는 모든 역량을 벨라리오스에게 집중했다. 마법사는 딜러에서 서포터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원거리 딜러들이 허공에 떠다니며 스킬들을 뿌려대는 놈을 요격했다. 그리고……. “온다!” 비행을 하던 놈이 유일하게 아래로 내려오는 타이밍에 맞춰 근딜들도 무기를 휘둘렀다. 「벨라리오스가 [물결유영]을 시전했습니다.」 「벨라리오스가 [죽음의 숨결]을 시전했습니다.」 「벨라리오스가 [파쇄]를 시전했…….」 전투가 길어질수록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녀석의 비늘. 「벨라리오스가 [재해]를 시전했습니다.」 「필드 효과 - 가뭄이 적용됩니다.」 「모든 이로운 효과가 제거되며, 모든 부정적인 효과가 강화됩니다.」 그렇게 녀석이 세 번째 [재해]를 사용을 했을 무렵이었다. 휘이이이이익-! 저 멀리서 쏘아진 에르웬의 화살이 놈의 미간에 꽂히며, 전투가 마무리 지어졌다. 총 10분 정도 걸렸나? 머릿속으로 전투 시간을 계산하는 한편으로, 눈은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는 벨라리오스에게 고정했다. 「벨라리오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7」 이내 놈의 시체가 사라지며 허공에 맺힌 빛무리가 마석으로 변하며 바닥에 떨어진다. 툭. 하나 떨어진 마석에 관심을 갖는 탐험가는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No.9999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습니다.」 정수가 떴다. 대신 문제는……. ‘……노랑색이네.’ [탐욕의 비늘]이 아니었다. *** 노란색 정수의 액티브 스킬은 [파쇄]. 기본적으로 원거리 공격이지만, 근접해서 사용할 경우에 위력이 크게 증가하는 회피불가 즉발형 스킬. “으아… 아쉽네요. 노란색이라니, 아저씨가 바라던 건 아닌 거죠?” “후… 그럼 저 정수는 어떻게 되는 거려나. 갖고 싶어하는 자는 여럿일 거 같소만…….” 다들 정수에 대해 집중하는 사이, 아멜리아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얀델, 몸은 괜찮나? 꽤 다친 거 같던데.” “아, 괜찮다. 장비는 별로 안 다쳤다.” “…….” 2등급, 그것도 균열 수호자인 밀라옐과 싸울 때도 거의 다치지 않았던 나지만, 벨라리오스와의 전투에선 나름 부상을 입었다. [파쇄]는 공격의 형태상 가드가 불가능하거든. 지정된 대상 주변의 공간이 우그러들면서 피해를 입히는 탓인데……. 솨아아아아아- 그래도 잔부상 정도라 힐이 조금 들어가자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그래서 정수는 어떻게 할 거지?” “아, 그거…….” 이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왜 하필 [파쇄]가 떠가지고.’ 일단 스킬 하나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다. 회피 불가에 즉발, 거기에 가드 불가 판정까지. 심지어 대미지도 준수한 편이며 MP 소모량도 적고 쿨타임도 짧은 편이다. 하지만……. ‘성장시키는 게 어렵지.’ 그런 장점들이 있는 만큼, 다른 스킬들로 시너지를 내기가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어떻게 스킬 세팅을 하든 성장 가능성이 적다는 뜻인데……. “결정했다.” 정수의 주인을 정하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없었다. “아우옌 록로브.” 우리 클랜의 유일한 비전투 인력인 항해사. “……예?” “이건 네가 갖는다.” “………………예에?” “뭘 놀라고 있는 거냐?” “하, 하지만… 이건 항해에 관련된 정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래서 3등급 정수가 버려질 때도 별다른 말을 안 했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항해사라고 해도, 너도 우리 클랜의 일원 아니냐. 네 몸을 지킬 정수가 하나쯤은 있어야지.” 안 그래도 적당한 게 있으면 하나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누가 껴도 비슷한 성능을 내는 정수라면, 비전투 인력인 아우옌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패시브 스킬인 [순환의 고리]로 기본 스탯도 땡겨올 수 있고 말이지.’ 그러나 그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았을까? “어, 어어…….” 아우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만 꿈뻑거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째선지 항해사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 「아우옌 록로브의 영혼에 [벨라리오스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 뭐야, 얘는 갑자기 왜 울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간의 설움이 밀려온 모양이다. 옛이야기를 들어보니 항해사 일을 하며 여간 무시를 당한 게 아니더군.” …그래? 그건 몰랐는데. “그런 네가 몸을 지키라며 정수를 줬으니, 만감이 교차했겠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을 테고.” 음, 그렇게 말해도 확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얘도 힘든 일이 많았구나 하는 정도? 이쯤에서 나는 관심을 껐다. “크흠흠…….” “오오! 비요른이 멋쩍어 하고 있다!” 거,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멜리아 쟤는 뭐 또 저렇게 흐뭇하게 웃는 거고.’ 괜히 오해받는 게 싫어서 얼른 소리를 쳐 화제를 돌렸다. “다들 알아서 쉬어라!” 그렇게 모두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 나도 근처에 널브러져 쉬고 있자니, 이번엔 에르웬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쉬세요?” “어. 근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서요.” 궁금한 점? “말해봐라.” “왜 이번 전투에서 제가 나서지 못하게 한 거예요? 제가 한 마리를 잡고 시작했으면 훨씬 더 쉬웠을 텐데.” “아, 그거?” 확실히 옳은 이야기이기는 했다. 에르웬이 필살기를 꺼냈으면, 3등급 몬스터가 둘이라도 금방 끝났을 테니까. 어둠 구체로 헬스미스를 순삭하고, [집중사격]으로 벨라리오스를 한 방에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한참 남지 않았냐.” “네?” 필살기를 한 번 쓰고 나면 에르웬은 한동안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재 시각은 17시. 쉽게 말해, 여기서 벌써 고급 인력인 에르웬이 빠지면 잡을 수 있는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오케이, 그럼 다들 대충 쉴 만큼 쉰 거 같으니…….’ 이내 나는 일어나서 집합 명령을 내렸고, 모두 다 모인 후에는 진형을 잡고서 몬스터를 소환했다. 그렇게 23시까지 노가다를 반복한 다음에서야 하루 일과를 끝내고 야영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꼭꼭 씹어먹어라! 야채도 얼마 안 넣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아침밥부터 먹으며 새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오케이, 밥도 오늘은 맛있고. “총원 38인 기준으로 60일 치가 남았어요.” 물자 관리에도 이상 없음. “프넬린 님의 신체에서 조금 이상한 수치를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히프라마전트의 체화이능에 대한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조사단도 평소처럼 성과가 없고. 모든 게 문제 없는 아침이었다. 딱 하나만 빼고. “얀델, 잠깐 얘기 좀 하지.” 소화나 시킬 겸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경비조의 지휘를 맡고 있는 아멜리아가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헛것을 봤다고 넘어가기에는 같은 것을 목격했다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서 말이지.” “뭘 봤다는 거냐?” “일단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확인해 봤을 때, 이 도서관 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뭘 봤냐니까?” 내 질문에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밤중에… 유령을 봤다는 얘기가 있다.” ……유령? 548화 비밀의 방 (1) 미궁 진입 87일 차. 오전 일과를 보던 중 아멜리아에게서 특이한 소식이 전해졌다. ‘유령이라…….’ 아멜리아가 확인을 했을 땐 그 무엇도 찾아내지 못했다지만, 목격자가 이미 한둘이 아니라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아멜리아를 제하고 경비조의 모두가 한 번씩은 불침번 중에 봤다던가? 따라서 전부 불러 짧게나마 면담을 해봤다.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저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서 하얀 머리를 가진 무언가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왕실 조사부 출신의 미하일 렉터스부터 시작해서 유령을 목격한 모두의 증언을 들었지만, 놀랍게도 본 형태가 모두 달랐다. “내가 본 것은 송곳니가 이만큼 튀어나온 짐승 괴물이었소이다…….” “저는 조금 달라요……. 누더기 같은 옷를 걸친 남자였어요. 눈 전체가 까맣게 물들었고,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제가 본 것은 마치 슬라임 같았습니다. 바닥에 녹아든 것처럼 딱 달라붙은 채, 어둠 속에서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지요. 한데 잠깐 눈을 비빈 사이에 어느새 사라져 있더군요. 그래서 피곤해서 헛것을 봤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너무나도 다른 제각각의 목격담. 하나 그 목격담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잠시 눈을 뗐을 때, 어느샌가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것인데……. “전부 어제 본 거냐?” “아니, 모두 시기가 다르다. 어제 렉터스가 불침번 중에 언급한 것을 계기로 모두에게 물어보니, 날 제외하고는 다들 한 번씩은 봤다는 듯하더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이어가고 있자니, 옆에서 무언가 갈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까드득, 까득, 까드드드득-! 소리의 발원지는 아이나르의 턱이었다. 그야 바바리안들은 무서울 때 턱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거든. “유, 유령이라니……. 위, 위험한 거 아니냐……!!” 그러고 보면 아이나르는 예전부터 이런 거를 엄청 무서워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바바리안들이 그랬다. 영체류 몬스터들에 대해 생리적인 껄끄러움을 느끼고, 더 나아가 이렇게 공포심까지 갖는 녀석들이 꽤 된다. 나중에 신기해서 이러한 특징에 대해 레이븐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땐 이러한 대답을 들었다. 바바리안족의 피. 다시 말하자면, 유전자 자체에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천적에 대한 정보가 새겨진 것일 가능성이 존재한다던가? 본능에 의존하는 바바리안의 성향 때문에 그런 특징이 수많은 개체에서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겠지만. “냄새가 난단 말이지.” “응? 냄새? 혹시 고기 냄새냐……!” 내 혼잣말에 아이나르가 두리번거리며 킁킁대기 시작했다. 유령에 대한 공포보다 고기에 대한 갈망이 더 큰 건가? 어이가 없지만, 나는 관심을 껐다. 그야 지금 내가 맡은 냄새는 그런 게 아니니까. ‘고기도 좋지만…….’ 세상에는 고기보다 더 맛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법. 내가 맡은 냄새도 바로 그런 종류의 것 중 하나다. ‘히든 피스.’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한 유저라면 발견 즉시 눈이 돌아갈 만큼 매혹적인 바로 그것. 한데 유령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그 냄새가 났다. 츄릅. 젖과 꿀이 가득한 히든 피스의 냄새가. 그것도 아주 짙게. *** 히든 피스. 이 세계에서는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라 불리는 그것.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며 수많은 히든피스를 찾아냈던 나는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가장 필요한 건 정보였다. 그것도 통계로 낼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정보가. “시간… 말입니까.” “1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첫 불침번이었으니… 23시쯤이었겠군요.” 유령을 목격했다는 모든 대원들에게 물은 결과, 유령은 오후11시부터 오전 3시 사이에서만 출현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도서관의 유령이 등장하는 시기는 23시부터 03시 사이. “저기! 저기입니다. 저기에서 절 보고 있었어요.” “저는 저기 책장 위였는데…….” “제 경우에는 바깥으로 이어진 계단가였습니다.” 위치는 랜덤인 듯하다. 음, 이때는 랜덤이 아니라 도서관 전체라고 해야 하는 게 옳나? “아저씨, 혹시 그 유령이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게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내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아니, 비단 얘만이 아니었다. “그래, 일단은.” 내가 긍정의 답을 하자 엿듣고 있던 탐험가들 모두가 눈을 빛냈다.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정말이었다니!” 히든피스를 전문적으로 찾아내던 아르민 탐사단은 두말할 것도 없고, 헥츠 클랜의 단원들의 눈빛에도 강한 욕망이 어렸다. 하긴, 탐험가가 그걸 어떻게 참아? “그… 유령을 찾아내면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거냐? 안배를 찾아낸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다던데.” 심지어 유령을 무서워하던 아이나르조차 본심을 쓰윽 내비친다. 아, 그렇다고 모두가 눈이 돌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명. 딱 한 명만이 내게 다가와 우려를 표했다. “얀델, 너무 좋게만 생각하는 건 위험한데.”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시간을 초월한 인연으로 이어진 나의 동료. “위험하다니?” “말 그대로다. 너답지 않게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아, 대충 뭔 말인지 알 것 같다. 사실 나도 유령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은 했거든. 혹시 저 유령이 누군가가 보낸 감시 역할이고, 우리가 우연히 그걸 발견한 건 아닐까. ‘예를 들자면 촌장이라든가 말이지.’ 도서관에 재방문했던 날, 긴급 탈출을 했던 은사자 클랜 단장 사건도 있었듯. 유령의 존재를 호재로만 여기는 건 좋지 않다. 애초에 촌장이 아니더라도 ‘호재’가 아닐 수도 있고. “에밀리,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겠다. 나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면야. 알겠다.” “그래, 말해줘서 고맙다.” 내 직감은 여전히 저 유령이 히든피스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일단은 아멜리아에게 들은 조언대로 조금 더 주의를 하기로 했다. 어느 상황이든 최악을 가정하는 건 도움이 되니까. ‘어느 쪽인지는… 밤이 되면 알겠지.’ 그렇게 결론이 난 뒤에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몬스터들을 소환하며 하루 일과를 보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쉬며 하루 전체를 몬스터들과 싸우며 시간을 보냈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수확이 별로 없었다. ‘먹지도 못하는 4등급 정수 하나라…….’ 원래라면 이것만으로도 대박이라며 시험관에 담았겠지만, 이제는 이런 거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서 말이지. ‘쩝.’ 가장 아쉬운 점은 운 좋게 벨라리오스도 또 발견을 해서 두 마리나 더 잡았는데 정수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추세로 가면 지하 1층을 떠나기 전에는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확실히 책장이 높아지니까 책에 나오는 빈도가 늘었거든. ‘아무튼, 정수 남은 한 칸은 어쩌는 게 나으려나.’ 현재 내게 남아 있는 정수 칸은 두 개. 그중 하나는 벨라리오스 정수로 고정이고, 히프라마전트의 정수는 나중에 오크 히어로 자리에 들어갈 예정이니 노카운트. 남은 한 자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그야 이 자리는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거든. 촌장과의 무력 충돌을 대비해서 채워놓는 편이 좋겠다 싶었던 것일 뿐, 졸업 정수들은 지금 상태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 밀라옐처럼 8층의 균열 수호자가 또 나와주는 게 아닌 이상, 뭘 먹든 몇 달 뒤에는 지워야 하는 것. ‘……이건 나오는 걸 보면서 차차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은 크게 급할 이유가 없으니.’ 아이기스의 장벽을 얻지 못했다면 모를까. 졸업 방패까지 얻은 지금에서는 암만 촌장이라고 해도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상념을 끝냈다. 째깍, 째깍- 오늘 하루를 끝내고 야영할 준비가 끝난 도서관. [23 : 00] 어느덧 밤이 되었다. *** 오후 11시. 우리 탐사대의 일정상 불침번을 제외한 모두가 곤히 잠에 들어 내일 일과를 위해 피로를 풀 시간대. 그러나 의외로 깨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현자의 안배라…….” “그 말이 사실일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궁금하기는 하구려. 혹시 이곳을 탈출하는 데 단서가 되어줄지도 모르니.” 마치 소풍 전날에 잠들지 못하는 아이처럼 누워 동료들과 떠드는 탐험가들. 거, 얼른 잠이나 자라니까. “다들 수다는 그만 떨고 눈 감아라! 많이 깨있으면 안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이내 순찰을 돌며 안 자고 버티는 애들을 잡아내자 금방 도서관은 조용해졌다. 아, 물론 대화가 사라졌을 뿐이지 적막과는 거리가 멀기는 했다. 드르르르르르르르렁-! 도로롱-. 도롱, 도로로롱- 수십 명의 탐험가들이 크고 작게 뱉어내는 코골이 소리. “다들 자는 듯하군.” “그래서, 지금부터는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돌아다니면서 찾아봐야지.” 모두 잠에 든 걸 확인한 후에는 아멜리아와 베르실을 이끌고서 주변을 순찰했다. 그리고……. “그러니까… 3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한 시간쯤 순찰을 해나가며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자 베르실이 입을 열었다. 딱히 순찰에 불만이 있는 거 같지는 않지만……. “얀델 씨는 요즘 어때요?” 조용히 이러고 있는 게 지루했던 모양. 뭐,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스몰 토크를 하자는 신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요즘 어떠냐니, 무슨 뜻이냐?” “그냥 전반적으로요. 다들 궁금해하기도 하고요.” “그니까 뭐를?” 내가 재차 되묻자 베르실이 저 멀리 떨어져 홀로 순찰 중인 아멜리아를 힐끗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누구예요?” “아니, 제발 부탁이니 주어를 좀 써주면 안 되나?” “아이 참… 무슨 뜻인지 아시면서.” 뭐, 그건 그렇긴 하지. 내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무도 아니다.” “네? 정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인즈 씨랑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우리는 그냥 동료다.” “헤에……. 그렇군요?” 베르실은 전혀 믿기지 않는 듯한 투로 말하더니, 이내 다른 이름을 화제에 올렸다. “그럼 칼스타인 씨는요? 최근에는 같이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던데.” “늘기는.” 그냥 조금은 어색한 게 덜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부분 밥이 맛있느니 없느니, 야채 좀 먹으라니 하는 그런 시답잖은 얘기였지만. “아무래도 다들 신경을 쓰고 있단 말이죠. 명색이 남작님의 유일한 전 연인이니까.” 아휴, 미궁에 오래 있으니까 아주 다들 이런 거에만 관심이 늘었구나. 순찰 중 스몰 토크는 환영이지만, 이런 주제는 스트레스가 따라왔기에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이만하고 조용히 해라. 다들 자고 있지 않나.” 내일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귀중한 인력들인데 잠이라도 편하게 자야지. “…….” 뭐야, 얘는 왜 대답을 안 해. 삐진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뒤를 막 돌아본 찰나. “……얀델 씨.” 내 뒤를 따라오던 베르실이 걸음을 멈춘 채 복화술을 하듯 조용히 읊조린다. “저쪽이요, 저쪽.” 고개는 나를 향한 채, 눈만 옆으로 움직여 방향을 알려주는 베르실. 일단 나도 똑같이 눈만 움직여 해당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맞죠? 저거, 사람들이 말했던 그 유령.”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확인할 가치는 있겠군.” “……뭔가 무섭네요. 저렇게 끔찍한 몰골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끔찍한 몰골……?’ 아무래도 베르실과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있는 거 같았다. ‘신기하네.’ 내 눈엔 웬 쥐새끼 한 마리가 보일 뿐인데. *** 도서관에 살고 있는 정체불명의 생물. 특징은 오후 11시부터 오전 3시 사이에 출현하며, 보는 이마다 다른 모습을 본다는 것 정도. 여러모로 신비한 녀석이었으나, 의외로 포획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캐릭터가 [폭풍의 눈]을 시전했습니다.」 「초월체의 권능에 의해 해당 스킬에 내재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그랩기 한 방에 날아왔거든. [삐? 삐, 삐잇—!!!] 워낙 작은 크기라 [거대화]를 쓸 것도 없이 한 손에 촥하고 감겼다. 다만, 그 순간. [삐, 삐이! 삐이이잇!!]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던 쥐새끼의 몸이 반투명하게 흐려진다. 하나 이에 당황해 손으로 터뜨릴 뻔한 찰나. 「베르실 고울랜드가 8등급 저주 마법 [물질화]를 시전했습니다.」 베르실이 제때 대응을 하고 나서며 쥐새끼의 몸뚱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소리는 대체 뭐…….” 소란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얀델, 손에 쥔 그건 뭐지?” “글쎄, 너한텐 뭐로 보이나?” “……굉장히 말캉하고 역겨운 무언가로.” “그래? 베르실 너는?” “오물로 뒤덮인 남자요……. 수상할 정도로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어요.” “아는 사람……?” “얀델 씨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삐, 삐이! 삐이이—! 삐이이!!!] 나는 입맛을 다시며 손에 잡힌 그것을 내려다봤다. 암만 봐도 평범한 쥐새끼였다. 두 발로 일어선 햄스터처럼 생겼다고 해야 하나? 유일한 차이점은 지구의 햄스터와 달리 덩치가 몹시 크다는 것으로, 사실 이 정도면 드워프와 도토리로 키를 재면서 놀아도 문제가 없을 수준인데……. [삐이! 삐이—! 삐이이익!!!] 최선을 다해 몸부림을 치는 걸 보니 나름 귀엽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 “일단 대원들부터 전부 깨… 우지는 않아도 되겠군.” 이미 소란을 들은 대원들 모두가 전부 깨어나 이쪽을 바라보는 상황. “……저게 그 유령인 건가?” “실로 끔찍한 형체로군.” “밤중에 홀로 봤다면, 정말 기겁을 했을지도…….”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나는 쥐새끼를 잡은 채 도서관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리고……. 툭. 소환책을 올리던 제단 위에 쥐새끼를 올려봤다. “……이건 안 되네?” 애석하게도 제단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삐, 삐이! 삐이이—! 삐이이!!!] 앞으로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일단 그냥 죽여본다. 2. 왜곡 마법을 건 채 죽여본다. 과연 어느 쪽으로 테스트를 해봐야 하는 것일까. 표본이 하나뿐인 만큼 신중히 결정해야 할 텐데. [삐이! 삐이! 삐이이!!!] 녀석을 실험용 쥐처럼 제단 위에 결박한 채 고민을 이어나가던 차였다. [이, 이 무도한 것!! 어서 나를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갑자기 쥐새끼가 사람 말을 하기 시작했다. 549화 비밀의 방 (2) 사람 말을 하는 대형 햄스터. 이는 마법과 이종족이 실존하는 이 판타지한 세상에서도 신기한 존재다. 그야 몬스터는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간혹 말을 하는 녀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정해진 대사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놓으라고! 놓으란 말이다! 이 미친 반역도들아!] ……뭐지, 이놈은?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진다. 그도 그럴 게, 이놈이 뱉는 언어는 ‘고대어’. 애석하게도 나는 ‘고대어’를 쓰는 ‘몬스터’를 얼마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근데 그게 과연 우연일까? 그런 의심이 점점 더 깊어지던 때. “얀델 씨, 왜 그러세요?” “혹시 뭔가 문제라도 있나?” 뭐지? 얘들 반응은? 위화감을 느낀 즉시, 의문을 토해냈다. “설마 너희는 이놈이 하는 말을 아예 못 들은 거냐?” “……네? 말이요?” “그런 건 못 들었는데. 단지 불쾌한 괴성만 피어났을 뿐.” “아! 저도요!” 쓰읍, 이건 또 무슨 현상이래? 한층 더 수상해진 햄스터를 내려보고 있자니, 햄스터가 어느새 몸부림도 멈춘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설마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거냐!] 뭐,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그런 건가? 딱히 대답해 줄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햄스터가 몸부림을 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게 압박하며 고대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너.” [윽……! 놓아라……!  이 야만적인 놈아…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기세등등하게 말해봤자 누구인지 아는 게 없다. 그래, 그러니까……. “촌장과는 무슨 관계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이놈이 촌장이 보낸 쁘락치인지 아닌지, 그걸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판단. [……?] 다만, 녀석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기에 나는 촌장의 또 다른 이름을 댔다.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이 이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단 거냐? 너처럼 똑같이 고대어를 쓰는 마물인데?” 만약 여기서도 모른단 답변이 돌아오면 그대로 전문가를 불러 심문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무도한 녀석! 이 몸은 마물이 아니다……!] “됐고, 묻는 말에만 답해라.” 이내 붙잡은 손에 한 번 힘을 줬다가 빼자, 녀석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모, 모른다! 모른다고! 그러니까 누르지마! 토! 토할 거 같단 말이다……!] “모른다니, 애석하게 됐군. 그럼 이제부터는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직접… 알아보다니……?] 그건 너도 직접 겪어보면 알 테고. 이내 옆에 있던 아멜리아를 부르자, 아멜리아가 단검을 꺼내 날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데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을까. [자, 잠깐만!] “벌써 기억이라도 난 거냐?” [고, 고대어……! 고대어를 쓰는 ‘마물’이라면 한 명 짚이는 녀석이 있다! 그… 용을 타고 다니는 그놈을 말하는 거 아니냐!] ……용을 타고 다녀? 일단 촌장의 인간 시절 이명이 ‘용기사’이기는 한데. “에밀리, 잠시 기다려 봐라.” 우선 아멜리아를 다시 뒤로 물린 채 물꼬가 트인 대화를 이어갔다. “너, 자세히 말해봐라. 용을 타고 다닌다는 그놈에 대해서.” [나, 나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푸른색 피부에 큼지막한 눈이 달린 그 괴물놈! 부하들도 엄청 많았고, 고대어! 고대어도 썼다!] 일단 촌장을 말하는 건 맞는 거 같다. 푸른색 피부에 큼지막한 왕눈. 그런 특징을 갖고 고대어까지 쓰는 종족이 다른 곳에 더 있지는 않을 테니까. ‘촌장 새끼 결국 또 거짓말을 했었네.’ 나한테는 자기들은 바깥에 나갈 수 없다고, 그래서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더니. 이제 보니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들이 온 게 언제였지?” [세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의미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숫자로 말해라.” [그, 그렇게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 괴물놈들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다음에도 하늘이 수만 번은 더 열렸으니까……!] 하늘이 열렸다. 이 표현은 아무래도 ‘우기’를 말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세는 게 의미없었단 말도 납득할 수 있다. ‘우기가 1만 번이면… 바깥 시간 기준으로 약 833년.’ 그런데 수만 번은 더 열렸다? 촌장이 이곳에 다녀간 게 수천 년 전의 일이란 뜻이다. 그러니 계산은 이쯤에서 끝내고. “용을 타고 다닌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항상 이곳에 올 때면 그 커다란 용에 부하들을 잔뜩 태워서 왔었다!] “항상이라면, 여러 번 이곳에 왔다는 거냐?” [당시에는 자주 왔었다. 언제부턴가 발길이 끊겼지만…….] “당시에 촌장이 이곳에서 뭘 했지?” [너희랑 똑같았다! 내가 열심히 정리해둔 책들을 아무렇게나 뽑아서 잔뜩 어질러 버리고! 정말—!] “잠깐만, 책을 네가 정리했다고?” [……그랬는데?] 얘는 대체 뭘까. 일단 지금까지 한 말이 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솔직히 말해 이제는 촌장의 쁘락치라는 의심보단 순수하게 이놈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왜 책들을 정리한 거지?”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동기’.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참으로 애매했다. [그, 그건……! 해야 하는 일이니까……!] “뭐……?” [책을 정리하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러니까… 책을 정리하는 게 네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그, 그렇게까지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일단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건 맞다.] 무언가를 숨기려고 둘러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더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결국 돌아오는 대답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이익! 멍청아! 꼭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줄 아냐! 그냥 그런 거다! 그냥 그런 거라고! 나는 책을 정리해야만 한다고!] 그러니까 왜 정리를 해야 하는 거냐고. 재차 묻자 이 햄스터놈은 자기도 처음 생각해 본 논제인 듯 혼란스러운 말투를 하더니, 결국에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암만 봐도 자기 스스로도 자기 행동을 납득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이런 상태인 놈에게 더 캐물어봤자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이쯤에서 다음 단계. “그래서 여기엔 뭔가 더 없나?” [……?] “그 있지 않냐. 특이한 책이라든가. 보물이라든가. 신기한 마물이라든가. 숨겨진 공간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네가 외부인에게 숨기고 싶은 그런 거.” […….] “없나?” 내 은근한 물음에 햄스터놈이 질색하며 크게 외쳤다. [……어, 어, 어, 없다!!!] 강한 부정은 때론 강한 긍정이 되기도 하는 법. “역시…….” [……!!!] “있구나?”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 비슷한 형식의 대화가 반복된다. [어, 없다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앵무새처럼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햄스터. 그리고……. “아, 그러니까 본다고만 하지 않냐.” 바바리안처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나. [대,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을 거냐! 여기에 그, 그런 건 없다고!] “거, 누가 뺏어간댔냐? 진짜 보기만 한다니까. 짜증나게 자꾸 그러네.” […….] 아오, 진짜 사람 말을 뭐 이리 못 믿는 건지. 좋게 말해서는 들을 녀석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따라서……. “야.”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걸자, 햄스터가 움찔하며 경계하듯 나를 올려다본다. [……?] “내가 네 친구냐? 상황 파악 못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 없다니까……. 저, 정말로오…….] “아, 그러면 다른 거라도 말해보든가.” [다른… 거……?] “어, 예를 들면 여기서 나가는 방법, 알아?” [………모르는데.] “촌장의 약점이나, 비밀 같은 건?” […….]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거냐? 나도 일단은 명분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명분……?] “그래,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널 풀어주든 뭘하든 할 거 아니냐. 아니면 뭐, 너한테 정수가 나오는지 아닌지 확인해 줘?” […….] 허, 얘 할 말 없으니까 입 꾹 닫는 거 봐. 그렇게까지 소중한 건가? 윽박지르는 것도 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전략을 수정했다. “야, 그럼 너에 대해서라도 말해봐라.” [……?] “너는 뭐냐? 왜 여기에 있는 거고, 사람 말은 어디서 배웠냐?” [아, 그거…….] 차라리 이런 화제가 낫다 싶었을까. 녀석은 내 질문에 굉장히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다. 뭐, 그래 봐야 알맹이는 없었지만. “정리하면, 태어날 때부터 여기에 있었고 사람 말도 할 줄 알았단 거네?” [그, 그래……. 그 촌장! 그 촌장이라는 놈이 처음으로 본 낯선 생명체였다.] “촌장은 너에 대해서 아냐?” [아마 모를 거다. 말이 통하는 걸 보고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그 멍청한 놈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말고 다른 애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지?” [그나저나 너는 대체 뭐냐! 어떻게 나랑 대화를 할 수 있는 거고, 무서워 하지도 않는 거냐!] 뭐야, 얘는 왜 갑자기 또 건방져졌어? “네가 설명해줘야 하는 걸, 왜 나한테 따지지?” […….] “됐고, 그거나 말해봐라. 사람들이 무서워하다니?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거냐?” [……몰라. 그냥 다들 그랬어. 그 촌장이라는 놈도 날 보자마자 무기를 꺼내들고 휘둘러댔고. 너희들도 딱히 다르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겁을 줘서 내쫓아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붙잡혔지.” […….] “근데 나는 왜 멀쩡한 거냐?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한 쥐새끼로 보이는데.” [쥐, 쥐새끼라니!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아니면 뭔데? 종족명이 따로 있나?”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이름은? 이름은 있냐?” [……나는 이름 같은 거 필요 없어.] “거, 이래서 사회에 안 나간 놈들이란……. 이름은 모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참에 하나 만들어 주지.” [……만들어 준다고?] “그래.” 수천 년을 넘게 도서관에서 외로이 살아오며, 이름조차 없었던 녀석이 조금은 불쌍했기에, 열심히 고민해서 이름을 지어줬다. “햄식이.” [……?] “햄식이, 이제부터 그게 네 이름이다.” […….] “왜? 이름에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 없는데…….]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얀델이 성, 비요른이 이름이지. 그냥 편하게 비요른이라 불러라.” [비, 요, 른……. 알았다.] 오케이, 그럼 통성명도 끝났겠다. 슬슬 끊겼던 대화를 마저 이어가 볼까 하던 차. [그럼… 우리는 이제 친구인 건가……?] 햄식이가 뜬금없이 그런 물음을 던져왔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 이에 고개를 갸웃하자 햄식이가 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관계를 친구라고 한다고,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어디서 얻은 지식이냐?” [몰라.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언어 체계가 그러했듯이.] “그래?”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은 놈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러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겠네.’ 나는 녀석을 풀어 준 뒤에 직접 일으켜 세워줬다. 그리고 마주 본 채 앞으로 팔을 뻗었다. “햄식, 앞으로 잘 부탁한다.” [……?] “왜, 통성명을 하면 친구라면서? 원래 친구가 되면 악수를 하는 거다. 아, 설마 악수를 모르는 거냐?” [아, 아니! 그럴 리가!] 이내 햄식이가 복슬복슬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수줍게 말했다. [나, 나도… 자, 잘 부탁한다……?] 대체 얼마나 친구가 갖고 싶었던 거야?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로써 친구 계약은 성립이 됐다. 그래, 그러니까……. “자, 그럼 말해봐라. 어디 있는 거냐? 네가 숨기고 있던 그 보물은?” [……!] 슬슬 친구비를 받을 차례였다. *** 햄식이가 배신감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뒷걸음질친다. 거, 친구 사이에 섭섭하게. “햄식아, 미리 말해두는데 친구끼리 비밀 같은 건 없는 거다.” [하, 하지만…….] “너는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삐이이…….] 내 질문에 곤란하다는 듯 삑삑 소리를 내는 햄식이. 나는 여기서 더 보채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 알았다……. 보여줄 테니까… 대, 대신 안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알겠냐?] “아아, 물론이다.”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을까. 이내 햄식이는 새로 사귄 친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듯 댄스 가수처럼 검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으으윽. 책장에 꽂힌 책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반쯤 책장에 걸쳐진다. ‘정해진 책들만 골라서 꺼내면 비밀 공간이 나오는 형식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니, 어느새 책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드드드드드드드-! 닫혀 있던 석문이 열리며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550화 비밀의 방 (3) 석문이 활짝 개방된다. 다만, 평소에 몬스터를 소환하며 열렸을 때와는 엄연히 달랐다. 그때는 석문 너머가 암흑으로 뒤덮여 있고, 다가갔을 때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 가로막힌 듯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솨아아아아아아-! 열린 문틈으로 눈이 부실 만큼 세찬 백색의 빛이 퍼져 나온다. 그 탓에 내부를 볼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자, 날 따라와라!] 하나 햄식이가 앞장 서는 걸 보니 안에 들어가는 건 가능한 모양. “왠지… 긴장이 되는구려.” “저 끔찍한 마물을 믿어도 되는 건지…….” “다들 괜한 걱정을 하는구려. 우리에겐 남작님이 있지 않소?” 대원들은 어딘가 불안해하면서도 기대하는 눈으로 햄식이의 뒤를 따르는 내 등을 쫓아왔다. 그리고……. [그럼 먼저 들어갈 테니, 안에서 보자!] 이내 햄식이가 먼저 빛 속으로 들어섰고, 나도 잠깐 마음을 가다듬고서 재빨리 뒤따라 들어갔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마치 포탈 안에 들어선 것처럼 온몸을 보듬어 안는 빛. 「캐릭터가 제1 기록보관소에 진입했습니다.」 눈을 떴을 땐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 원형의 공간. 테두리의 벽면에 위치한 책장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그리고……. [조, 조심해라! 천장이 망가지지 않냐!] 일단 공간은 매우 좁았다. [거대화] 상태가 아님에도 허리를 숙이고 목을 불편하게 꺾어야만 할 정도로. 마치 미니 도서관에 들어온 듯한 기분. 음, 분명 그랬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불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으아! 여긴 뭐냐! 갑갑해서 죽을 거 같지 않냐! 책도 가득하고오!” 나와 동일한 불편을 호소하는 아이나르. 새삼 느끼지만, 이 사회는 왜 이렇게 바바리안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걸까. 평균 층고를 30cm만 높여도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 될 텐데. 그런 불만을 속으로 늘어놓으면서도 눈으로는 열심히 주변을 수색했다. [내가 평소에 지내는 곳이다……. 네가 첫 손님인데 어떠냐?] “멋진 곳이군.” [저, 정말이냐……?] “아마도.” 대충 대답하며 쓱 둘러봤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건 딱 하나였다. ‘책밖에 없네.’ 책장에 꽂힌 책. 바닥에 탑처럼 쌓인 책. 그런 차이만 있을 뿐, 어디를 보든 책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기엔 일렀다. “햄식아.” […으, 응?] 내 부름에 불안한 기색을 표출하는 햄식이를 뒤로하고 나는 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 더미에 숨겨져 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여기 이 책은 뭐냐? 왠지 내가 들어오기 전에 급하게 숨겨놓은 거 같은데.” [……보, 보면 모르냐? 그냥 평범한 책이다……!] 에이, 친구끼리 자꾸 이러네. 겉에 금박지를 두른 게 딱 봐도 평범한 책과는 거리가 멀구만. “오, 평범한 책이라니 다행이군. 이건 집들이 선물로 받아가겠다.” [지, 집들이 선물?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집들이 선물은 손님 쪽에서 주는 거잖아!] 쳇, 이걸 알아? 조금 귀찮아졌다 싶었지만, 큰 문제까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햄식아, 그건 옛날 문화다.” 내가 아니라는데 얘가 어쩔 거야? [……응?] “요즘에는 손님이 선물을 받는 게 상식인데… 혹시 여기에 오래 있다 보니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게 된 거냐?” [………아아! 그랬지! 참! 내가 잠깐 착각했다!] “어…….” [진짜다! 오해하지 마라! 잠깐 착각했을 뿐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진짜 이렇게까지 잘 통할 줄은 몰라서 역으로 당황한 건데……. [크흠! 지, 진짜라니까!] 뻔히 보이는 햄식이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알겠다. 나는 널 믿는다. 친구니까.” [그래! 친구니까! 친구는 원래 믿음이 가장 중요한 관계랬다!] ……얘가 왜 갑자기 귀엽게 보이지? 그냥 털어먹어야 하는 마물일 뿐이건만. 나는 애써 정을 떼어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주는 거냐? 이 책?” [그, 그건 안 된다! 차, 차라리 다른 걸 주겠다!] “왜? 평범한 책이라면서?” […….] 아까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발목을 붙잡자 햄식이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회피형인가? 자꾸 곤란해지면 말이 없어지네. 어떻게 해야 합법적으로 이 황금책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남작님! 여기 고대어가 적혀 있는데, 와서 한번 해석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르민 탐사단의 마법사 삼인방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책장에 꽂힌 책 중 하나인 듯한데……. [이 버릇없는 놈들!!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서 남의 물건을 만지다니!] 그제야 햄식이가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서 분노를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 화날 만한 상황인 건 맞았다.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거든. “다들 빠짐없이 확인하시오!” “어! 죄송합니다! 꺼내다가 책이 찢어졌어요.” “그런 사소한 건 됐으니, 우선 책장부터 밀어봅시다! 저 뒤에 뭔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오!” 들어서자마자 눈이 돌아간 채 공간 전체를 헤집고 다니는 대원들. 새삼 느끼지만, 탐험가란 가히 파괴와 탐욕의 화신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직종이었다. [이놈들……!!!] 햄식이가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렸지만, 애석하게도 이를 신경 쓰는 대원들은 없었다. “저기… 저 괴물이 화난 거 같은데요?” “실로 끔찍한 괴성이로구려…….” “괜찮은 건가?” “에이, 괜찮겠지! 뭘 그리 걱정하쇼? 아까 보지 못했소? 남작님이 눕혀놓고 겁박하니 그 위엄에 못 이겨 바로 문을 열던 거?” “하하! 나중에 밖에 나가서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거요. 저러한 마물조차 순종하게 만드는 위엄이라니? 이런 건 옛이야기에서 나와도 욕을 먹는단 말이오!” “확실히 남작님께선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아, 얘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기도 했겠구나. 실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햄스터 하나를 등쳐먹었을 뿐인데. ‘이건… 모르는 편이 낫겠네.’ 주몽과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그와 비슷한 신화들이 세계 각지의 고대 군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통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햄식, 진정해라.” [뭐? 저 꼴을 나보고 두고보란 말—!] “어차피 정리하는 게 네가 할 일 아니냐. 아니면 정리하는 일이 싫은 거냐?” [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군.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다들 열심히 도와주는 건데, 화를 왜 내나?”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오케이, 그럼 설득은 이만하면 됐고. “한번 열어봐도 되나?” [응? 아아… 그래… 여는 것만이라면…….] 어느 정도 체념한 듯한 햄식이의 허락도 받았겠다, 얼른 황금책을 활짝 열어보았다. 솔직히 아주 기대가 됐다. 이 황금책도 소환책의 일부인 거 같던데. ‘여긴 어떤 몬스터가 있으려나?’ 미믹처럼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희소종? 아니면, 밀라옐 같은 균열 수호자? 음, 어쩌면 몬스터를 잡고 나면 특이한 보상을 주는 식일 수도 있—. ‘응?’ 그런 기대와 함께 첫 장을 읽어내리던 나는 흠칫 굳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한 시골 마을에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가던 남매가 있었습니다.] ……뭔데 이건? *** 어린아이가 쓴 일기처럼, 삐뚤삐뚤한 고대어로 적힌 이야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으나, 일단 나는 천천히 읽어내렸다. 다 읽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책은 두꺼웠지만, 이야기가 적힌 건 첫 장이 끝이었거든. “남작님, 혹시 무슨 내용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총대를 멘 마법사 삼인방이 아니더라도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기에, 나는 짧게 간추려서 내용을 들려줬다. “옛날에 시골 마을에 한 남매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 쪽이 마법사가 된다며 마을을 떠나자 동생이 크게 슬퍼했지.” “그리고요?” “끝이다.” “……예?” 아니, 그렇게 봐도 진짜 거기까지만 적혀 있어서 뭐라 해줄 말이 없다. 애초에 그러니까 내가 고민도 안 하고 말해줬지. 숨길 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걸 넘어서 판단할 거리조차 없는 짧은 이야기. 뒷장을 다 넘겨봤지만, 더 적혀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는 아니겠지.’ 더욱더 이 이야기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온갖 신비와 미지가 가득한 지하 1층. 그리고 거기서 만난 정체불명의 마물, 햄식이가 자기만의 은신처에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책. 이 책에 적힌 이야기가 별거 아닐 리 없으니까. 따라서……. “이 얘기에 나온 남매가 누구인지 알겠나?” 집단 지성을 활용해볼 차례. “흐음… 남매라고 하면… 우선 저는 카일라제 남매가 떠오르는군요.” 카일라제 남매는 불과 수백 년 전에 활동했던 유명 탐험가 남매이니 패스. “혹시 신화가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신학 공부를 할 때 레아틀레스 님과 헤인델 님이 한 부모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을 하는 신학자를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의 이야기도 아닌 거 같고. “글쎄요. 저는 불멸왕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군요. 왕위에 오르기 전, 그에게는 여러 동생들이 있었으니까요.” 뭐, 큰 가문이었으니 여동생도 있었겠지만……. 시골 마을이라는 말엔 어폐가 있을 거다. 라프도니아가 대륙 끄트머리에 위치했긴 했지만, 무역으로 돈을 쓸어담았다고 하니까. “에밀리, 너는? 뭐 생각나는 게 없나?” “…나는 남매라는 것보다 마법을 배우러 떠났단 부분이 더 신경 쓰이더군.” “아, 그거.” “혹시 최후의 대현자, 가브릴리우스의 이야기일 가능성은 없나?” 음, 이것도 그럴듯하긴 하다. 문제는 실제로 그 추측이 맞다고 한들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겠지만. 음… 아예 없는 건 아닌가? “햄식아, 넌 이게 누구 얘기인 줄 아냐?” […모르는데?]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햄식이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그럼 누구 얘기인지도 모르는데 이걸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할 거면 각오하라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햄식이가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저었다. [정말이다! 난 단지… 그냥 그래야 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잘 보관해뒀을 뿐이다.] “흐음, 그래? 그럼 일단 내가 챙겨가도 되겠지?” [그건……! 안 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줘야 하는 책이란 말이다!] “전해준다고……? 누구한테?”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그럼 그 자격이 뭔데?” [그건… 모른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알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든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햄식이에 대한 호기심도 커진다. 얘는 누굴까? 누가 만든 거고, 왜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곳에서 그 오랜 시간을 혼자 있어야 했던 걸까. [아, 아무튼! 너한테는 자격이 없으니 꿈도 꾸지 마라! 그 전까지는 내가 갖고 있어야만 하니까……!] “햄식, 친구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삐이이-! 그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쓰읍, 이것도 안 통한다고? 나는 일단 황금책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이야기 한 줄이 적혀 있던 걸 보고 나니 우선순위가 떨어졌달까? “베르실! 뭔가 나온 건 없나?” “없기는요! 이리 와보세요! 보여드릴 게 엄청 많아요!” 이 비밀의 방에는 황금책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 이 비밀 공간의 조사 과정은 참으로 간단했다. 가득 꽂힌 책을 뽑아내고. 텅 빈 책장을 옆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나타난 벽면을 향해 도끼질을 하거나 마법을 이용해 파괴한다. 조금 야만적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게 미지를 대하는 탐험가들의 정석적인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뭐라도 나오기 마련이거든. 실제로 나만 해도 게임을 할 때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은 수많은 히든피스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야만적인 족속들……!!] 뭐, 집주인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겠지만. 아무튼, 그런 탐험가식 조사 덕에 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숨겨진 무언가는 없는 듯합니다.” 벽이나 바닥, 천장 위에 숨겨진 물건은 없다. [그러니까! 없다고 했지 않냐!] 아, 그때는 몰랐지. “평소에 거짓말을 안 했으면 믿었을 거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단 거냐!] “이 방도 처음에는 없다고 했지 않나.” […….] 어쨌든 간에, 숨겨진 게 없다고 해서 수확이 없던 건 아니었다. “남작님! 여기 이 책 좀 봐보세요! 아무리 봐도 지하 1층의 지도인 거 같아요!” “이건 소환책인 거 같은데, 책 안에 미믹들만 열 마리도 넘게 그려져 있습니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만년필인데, 여기서 해석이 불가능한 마력의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이 액자는 평범한 액자입니다. 뭔가 특이해 보여서 물리적인 손상을 입혔는데, 그 뒤로 전혀 복원이 되지 않고 있—.” 속속들이 밀려드는 조사 결과를 들으며 나는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이게 탐험이지. 551화 비밀의 방 (4) 이 비밀의 방에서 얻은 걸 정리하자면 이렇다. ‘남매의 이야기가 적힌 정체불명의 황금책.’ 뭐, 이건 당장 용도를 알 수 없긴 하지만. 이걸 뺀 나머지 전리품(?)들은 얘기가 달랐다. ‘소환용 책 일곱 권.’ 그냥 소환용 책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밖에 책장에서는 볼 수 없던 책이다. 희귀종 미믹만 열 마리가 넘게 들어있다거나. 이상하게도 몬스터의 그림이 흑백인 게 아니라 파랑, 빨강 등의 물감이 덧칠되었다거나. 몬스터 그림 부분이 ‘???’로 표시된다든가. 그런 특이점이 있는 일곱 권의 책. ‘수상한 만년필.’ 게다가 햄식이 책상에 있던 만년필도 추가된다. “햄식아, 이 만년필은 어떻게 쓰는 거냐?” [그, 그건…….] 한참이나 망설이는 과정을 갖던 햄식이는 ‘그래, 친구니까…’라고 운을 떼며 솔직하게 고했다. [책에 이 펜을 이용해서 그림에 덧칠을 하면……. 그 색의 정수를 얻을 수 있다.] “뭐?!” [소, 소리 지르지 마라! 놀랐지 않냐!] 아니, 그럼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말하든가. 원하는 색의 정수를 확정으로 얻을 수 있는 만년필이라니……? 이런 물건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히 사기적인 물건이지만, 애석하게도 만년필에도 한계는 있었다. 3등급 이하. 그리고 사용 가능한 횟수는 단 두 번. ‘그래, 무제한 사용 가능한 템일 리가 없지.’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상대가 [던전 앤 스톤]이라 생각하니 좀 덜해졌다. 기대한 놈이 바보일뿐더러……. 이 게임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미친 아이템이니까. ‘이게 미개척 지역……?’ 탐험가들이 다들 새롭게 개방된 지하 1층에 눈이 돌아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5층도, 6층도, 7층도. 전부 처음 개방됐을 땐 이런 사기적인 히든피스가 있었겠지. “그보다 햄식아, 너는 만년필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 혹시 내가 오기 전에 몇 번 써봤냐?” [그럴 리가!] “흐음, 그런 거치고 되게 설명이 구체적이던데.” [그냥 알고 있었을 뿐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번도 써본 적 없지만, 이 만년필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햄식이. [그걸 왜 집어넣는 거냐!] 자연스레 만년필을 품에 넣고 있자니 햄식이가 또 한 번 발작을 일으켰다. [그, 그 만년필도 자격을 갖춘 자에게 전해줘야 하는 물건이란 말이다……!] 오, 그래? “근데 두 번 쓸 수 있댔지 않나?” [그런데……?] “일단 한 번 쓰고 나서, 그다음에 주면 되지 않나. 그 자격을 갖춘 사람한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면, 멀쩡한 상태로 줘야 한다는 그런 규칙이 있나?” [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아무 문제 없겠군!” 오케이, 이러면 만년필 문제는 여기서 끝. 일단 나가서 한 번 쓰고, 남은 횟수는 좀 더 고민을 하다가 어디에 쓸지 정하고 난 다음에 설득을 하면 될 듯하다.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슬슬 마지막 전리품을 향해 관심을 돌렸다. “지도라…….” 지하 1층 전체를 축약해서 그려둔 듯한 지도. 스타트 포인트였던 바위섬을 중심으로 여러 섬들이 그려져 있는데……. 만년필도 만년필이지만, 이 지도 역시 굉장히 큰 수확이었다. 그야 맵을 밝히러 돌아다닐 시간이 줄었으니까. “아직 가보지 못한 섬이 두 개군.” 항해사인 아우옌의 자문을 받은 결과, 하나는 도서관 기준으로 일주일 거리. 다른 하나는 한 달쯤 가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한 달이라… 예상보다 훨씬 더 넓은 계층이었군.” “예….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 섬의 위치가 그때 그 무지개가 보였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무지개 너머에 있던 게 이 섬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인가?” “글쎄요… 아직은 뭐라 확답을 드릴 수 없지만, 단순히 공교로운 우연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섬은 앞으로 무지개섬이라고 부르는 거로 하고……. “햄식, 이 지도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도 아나?” [모른다……!] 난장판이 된 방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햄식이가 뾰로퉁하게 답했다. 조금 삐지긴 한 거 같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다. ‘그럼 진짜 모른다는 건데…….’ 일단 이 지도에 나온 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괜히 궁금증만 커졌다. 이 지도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나가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세상의 끝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는지 알 것도 같다. ‘아무튼, 이건 나중에 직접 가보면 알 테고…….’ “얀델 씨, 여기 이 부분 좀 보세요.” 이내 베르실이 펼쳐진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거인섬이 있는 부분이었는데, 정확히는 섬 내에서 우리가 머물렀던 그 동굴이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표시된 그림 보이세요?” “이건… 포탈 비석을 뜻하는 거 같군.” “역시 그렇게 보이죠?” 동굴 부분에 그려진 비석의 문양. 다만, 그 문양 아래에는 너무나도 직관적인 표시가 되어 있다. “아래를 향하는 화살표라…….” 이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하 2층.’ 지도를 보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듯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생각을 입에 내뱉지 않았다. 하나 그렇게 정적이 이어지던 때. “……그럼 여기도 한번 봐보실래요?” 베르실이 지도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여 새로운 곳을 가리켰다. 가장 먼저 위치를 알아본 것은 아우옌이었다. “여긴… 촌장의 섬이로군요…….” “그렇죠. 이 지도 전체에 비석 표식은 단 두 개만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기예요.” 이내 베르실이 가리킨 지점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쁜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출구는 찾았군.” 비석 문양 아래 그려진 화살표는 너무도 분명하게 위를 향하고 있었다. *** 출구를 찾아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출구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이것만으로도 아무 단서 없이 망망대해를 헤매는 듯하던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하필 촌장섬이라니…….’ 못내 이 사실이 내 숨을 턱 막히게 만든다. 결국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언젠가 촌장과 마주쳐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 그럼 이제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됐다아아아! 와아아아아아!!” 몇몇 대원은 출구를 찾아낸 것만으로 감격하며 환호성을 터뜨렸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을 탈출하려면 남은 문제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정말 탈출하는 게 가능한 건가? 그때 그 거인섬에서도 비석은 작동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그렇구려. 우리가 내려왔을 때처럼, 뭔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게 틀림없소.” 몇몇 지성인들의 말대로, 출구를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그 전에 포탈 비석을 작동시킬 방법을 먼저 알아내야만 한다. 촌장을 뚫고 나가는 건 그다음 문제가 될 테고. 하지만……. “무지개! 그 무지개가 있는 방향에 있다는 섬! 그 섬에 뭔가 열쇠가 있지 않겠소?” 시도해 볼 만한 게 몇 개 있다. 그야 우리가 여기에 내려와서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게 아니니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무지개섬이겠지만, 거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섬들을 전부 공략하다면 자연스레 알아낼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햄식이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햄식아, 제일 위에 있는 책장에는 무슨 마물이 나오냐?” 이 도서관섬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어디까지 스펙업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관한 햄식이의 답변은 간단했다. 탐험가들의 기준을 예시로 들며 몇 등급인지, 딱 잘라 말한 건 아니었지만……. [톨-라푸파, 카샨, 레비아탄, 프라헬, 리드거…….] 후, 역시 마지막엔 1등급도 잡아야 하는 거구나. 그래도 여러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만 나오는 거라 다행인가? “걔네들을 잡으면 어떻게 되지?” 내 물음에 햄식이가 새삼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모른다.] “네가 말한 ‘자격’이 생기는지 아닌지도?” [다시 말하지만, 모른다. 그것에 대한 기억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날먹은 여기까지니 남은 건 직접 알아보라 이거구나. “햄식아,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저기 저 포탈 같은 곳으로 나가면 되는 거냐?” 조사도 할 만한 건 다 끝냈겠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판단. 하나, 내 말을 들은 햄식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한 번 들어오면 못 나가는데?] “………뭐?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 [삐이! 장난이다! 저기로 나가면 된다!] 아오, 진짜 놀랐잖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고 있자, 햄식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나를 보았다. [삐이삣……! 친구끼리 장난을 치는 건 상식 아니냐!] 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화도 못 내겠네. 피식 웃으며 대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석문은 여전히 활짝 열린 채로 빛을 자아내는 중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햄식이까지 나오자 빛이 사라지며 문이 닫혔다. “근데 햄식아, 들어갈 때마다 저렇게 문을 열어야 하는 거냐?” [그런데?] “네가 생활하는 곳이라고 들었던 거 같아서. 들어갈 때마다 저러면 불편하지 않나?” [글쎄? 평소에는 하나도 안 불편했다! 책 정리를 하다가 너희가 오는 바람에 계속 못 들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우리한테 잡힌 거구나. 밤 시간대에만 돌아다니던 건 우리가 그때 잠에 드니까 그런 걸 테고. “한숨 자고 나서 다시 사냥을 할 건데, 그동안 너는 뭘 할 거냐?” [구경!] “책 정리는?” [아무도 없을 때… 너희가 떠나고 아무도 없을 때 할 거다.] “왜? 아, 지금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어차피 우리한테 모습도 드러났는데, 그냥 할 수도 있지 않나?” [……없을 때 할 거다. 그러니까 강요 마라.] 뭐, 그렇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지. 그렇게 비밀의 방 탐사를 끝마친 후, 도서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잠시 중단된 야영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사냥을 시작했다. 「미믹을 처치했습니다.」 「미믹을 처치했습니다.」 「미믹을 처치했습니다.」 「미믹을 처치했습니다.」 「미믹을 처치했…….」 우선 처음 소환한 것은 비밀의 방에서 얻은 미믹 소환책. 다만, 애석하게도 열 마리를 넘게 잡았음에도 정수는 드롭되지 않았다. 정수가 나와야 [보물창고]에서 템을 루팅하는데. ‘의외로 무덤덤하네.’ 어차피 미믹에서 가장 잘 나와봤자 3천만 스톤 정도란 걸 알기 때문일까? 별로 크게 아쉽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번에 얻은 소환책이 이거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머지 소환책들도 전부 까봤다. “……드레이크?” ‘???’로 표시되어 있던 책에서는 4등급 비행종 몬스터인 드레이크가 소환됐다. 뭐야, 어떤 게 나오나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냥 진짜 100% 랜덤으로 나오는 건가? 알 수 없지만, 녀석이 드롭한 건 마석 하나가 끝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색칠된 책이네요.” 색칠된 몬스터가 들어 있는 다섯 권의 소환책. 전부 까본 결과 이 책들엔 공통점이 있었다. 몬스터 그림이 빨갛게 칠해져 있던 책에서는 해당 몬스터의 적색 정수가, 파랗게 칠해진 놈에게선 청색 정수가 드롭됐다. ‘문제는 3등급짜리 하나를 빼면 전부 5등급 이하였단 거겠지만.’ 5등급 이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폐기했고, 3등급 정수는 아르민 탐사단 쪽에서 희망자가 있어서 그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벌써 다 깠네.’ 이로써 비밀의 방에서 가져온 소환책은 별 소득 없이 전부 소모됐다. 뭐, 메인 디쉬인 ‘만년필’이 남기는 했지만……. ‘이건 마지막까지 각을 보고 쓰는 게 옳겠지.’ 당장에라도 이걸 사용해 벨라리오스의 정수를 뽑고 싶지만,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오늘 하루만 사냥을 하고 말 것이 아니니까. 자연빵으로 정수를 먹을 가능성도 있는데, 벌써 쓰는 것은 매우 조급한 낭비처럼 느껴졌다. 따라서……. 「스톤윈터를 처치했습니다.」 「메카로테를 처치했습니다. EXP +7」 「프로스트 가디언을 처치했습니다.」 「볼-헤르찬을 처치했습니다.」 「기계거인을 처치했…….」 「…….」 아침 먹고 사냥. 점심 먹고 사냥. 저녁 먹고 자기 전까지 또 사냥을 하는 나날들을 그렇게 얼마나 더 이어갔을까. 미궁 진입 99일 차. ‘내일이면 도시에서도 다시 미궁이 열리겠구나.’ 어느덧 뉴비들이 유입될 시기가 다가왔다. *** “부단장님, 들으셨습니까? 그 소식!” “아아, 그거 말이죠…….” 왕실 제3 마도병단의 부단장, 아루아 레이븐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하 1층, 기록 보관소. 도시 어디를 가든 요즘에는 그 이야기뿐이다. 그야 최근에 충격적인 소문이 도시 내에서 돌기 시작했으니까. 비요른 얀델이 아직 그곳에서 멀쩡히 살아 있다. 그리고, 싱글 넘버스를 두 점이나 손에 넣었다.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악령들에게서 처음 흘러나온 그 소문. “부단장님… 정말로 그 소문이 사실일까요?”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의 일만 잘하면 될 뿐. 먼저 일어날게요.” 레이븐은 부하의 의문을 일축한 채 먼저 식사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소문이 진짜인가 아닌가.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건 의미없다. 어느 쪽이든 그녀가 바라는 건 같을 테니까. 소문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매일 시름시름 앓듯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아… 진짜면 진짜인 대로 짜증나는데 말이죠.” 지하 1층. 그 무엇 하나도 밝혀지지 않은 미개척 지역. 그곳에는 과연 그 어떤 신비와 미지가 존재할 것이며, 비요른 얀델은 그의 동료들과 어떤 위대한 탐험을 하고 있을까? “후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너무나도 익숙해진 제복. 그리고 가슴 상단에 달린 마도병단의 뱃지. 오늘따라 이 복장이 괜스레 갑갑하고 거슬리게 느껴졌다. “됐으니까, 내 할 일이나 하자…….” 좀 전에 부하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그녀는 다시금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부단장님! 왕실에서 내려온 직통 공문입니다!” 그녀에게 왕실 공문이 하달됐다. 온갖 미사여구와 어려운 말로 가득했지만, 공무에 익숙해진 그녀로서는 세 줄 요약이 가능했다. 1. 왕실에서 지하 1층을 탐사하려고 한다. 2. 그래서 탐사 경험이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3. 네가 딱이더라. 공문을 전부 읽은 레이븐은 활어처럼 튕겨지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552화 데자뷰 (1) 미궁 진입 103일 차. 어느덧 진입 일수가 세 자리를 넘어간 시기. 슬슬 도서관 노가다를 잠시 멈출 때였다. 지금부터는 바위섬으로 가서 뉴비들을 맞이해야 하니까. ‘좀 괜찮은 애들이 들어와야 더 위에 있는 책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지금만 해도 소환책을 까면 3등급이 네다섯 마리씩 등장하며, 간혹 2등급이 껴있는 경우도 있다. 뭐, 조합이 괜찮으면 한두 번은 어떻게 잡을 수 있겠지만……. 공장 돌아가듯 술술 잡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내가 탱커 역할을 수행하며 장기간 전투를 펼쳤고, 한 번 전투가 끝나면 휴식 시간을 길게 가져가며 소모된 자원을 회복해야 했다. ‘저번에는 사망자도 나올 뻔했고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인원 확충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셈인데……. 야영지를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자니 멀리서 시선이 느껴진다. 해당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햄식이가 보였다. [가는 거냐……?] 가까이 다가가자 엄한 발끝을 보며 말하는 햄식이. 첫 만남은 좀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친구가 되고 도서관에서 사냥하는 내내 말동무를 해주었더니 정이 쌓인 모양. “아, 걱정 마라. 금방 다시 올 거니까. 황금책도 두고 가지 않냐?” [하지만, 내 만년필을 갖고 가면서……!] “어허, 친구끼리는 사소한 건 묻고 넘어가는 거다. 알겠냐?” […….] “아니, 정말 금방 올 거라니까 그러네.” [누, 누가 기다리고 있겠다 했냐? 평생 오지 마라! 너희 같은 건 없는 게 훨씬 편하다! 조용하고!] 허허, 얘 또 이러네. 햄식이가 뱉는 마음에도 없는 말은 바바리안답게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려 넘겼다. “남작님, 전원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알겠다.” 이내 도서관을 떠날 채비가 끝났지만, 어째선지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 “야, 햄식아.” [……왜?] “없는 동안에 책 정리 잘 하고 있고. 배 안 고파도 시간이 되면 내가 준 육포도 먹고, 만약 이상한 애들이 나타나면 절대 얼굴 보여 주지 말고, 책장 뒤에 꼭 숨어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 [내가 애냐! 그런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갈 거면 떠나라!]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후… 진짜 왜 이렇게 걱정이 되지? 그사이에 정이 쌓인 건 사실 내 쪽이었나? “그럼… 간다, 햄식아…….” [응…….] “빨리 올게.” […응.] 이내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 사이를 지나쳤다. 스윽. 내가 선두에 설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대원들. 먼저 앞에서 계단을 오르자, 대원들이 내 뒤를 따라 진형을 갖춘 채 이동이 시작됐다. 섬 밖으로 나온 뒤엔 소환한 배에 몸을 실었고, 그대로 몇 시간 뒤에는 바위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군가 온 흔적은 없는 듯하네요.” 혹시 몰라서 일찍 오기는 했지만, 역시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지하 1층에 내려온 탐험가는 없었다. 하긴, 이제 미궁이 열린지 3일 차니까. 그 시간에 3층에서 파밍을 끝내고 1층까지 다시 내려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할 터. “무슨 생각하세요?” “그냥, 햄식이가 잘 있을까 걱정돼서.” “아저씨 눈에는 정확히 어떻게 보이는지가 조금 궁금하네요……. 저는 아무래도 모습이 그렇다 보니 영 다가가지를 못하겠던데…….’ “너는 어떻게 보인댔지?” “……마법사요. 해골로 된 지팡이를 들고 있고, 리치보다도 사악한 몰골을 한 채 끔찍한 소리를 내요.” 아, 그랬댔지. 그때는 그냥 듣고 넘어갔지만, 여러 표본들이 쌓인 지금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해골 지팡이를 든 사악한 마법사라…….’ 이거 시체 수집가랑 파멸학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그런 상상 속의 모습인 거 아닌가?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저… 남작님, 단원들을 데리고 해변가에 가도 괜찮겠습니까?” “해변가?” “그… 바다에는 이것저것 떠다니지 않습니까? 남는 시간 동안에 그거라도 좀 주워볼까 해서…….”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한동안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 대기 시간이 지루했던 몇몇 탐험가가 총대를 메자, 눈치를 보던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 합류해 폐지를 주우러 해변가로 떠났다. 예전에 항해 중에 3등급 소재의 장비를 주웠던 게 크게 작용한 거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돌기 시작했거든. 잘하면 잭팟이 터질 수도 있다고. 운만 따라준다면 고대 영웅들이 쓰던 장비를 줍는 것도 가능한 게 아니냐고. ‘뭐, 진짜 운이 좋으면 그런 대박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그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제일 값비쌌던 게 얼마 전에 주운 3등급 갑옷이었으니까. ‘나중에 지하 1층이 제대로 개방되면 전문적으로 폐지만 줍는 놈들도 나오는 거 아냐?’ 음, 내가 보기엔 비효율적인 짓이지만 그런 부류가 나타날 거 같기는 했다. 바위섬 자체는 몬스터가 없기도 하고. 우기만 제때 피할 수 있다면, 여기서 노가다를 하는 것도 하나의 수익원이 될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시간 진짜 안 가네…….’ 하루 종일 스타트 포인트에 앉아 노가리를 떨기도 잠시,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해변가로 떠나 대원들과 함께 폐지를 주웠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하루, 이틀, 사흘……. 어느덧 107일 차가 끝나갈 무렵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1층이 폐쇄될 때까지 불과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뜻. ‘……이렇게까지 안 올 리가 없는데. 왕가 새끼들이 뭔가 수를 썼나? 못 내려가게?’ 슬슬 그런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토록 떡밥을 뿌렸으니, 이번에는 실력 있는 뉴비들이 유입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건만. ‘지금까지 안 온다는 건… 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단 거겠지.’ 쩝, 그러면 이번에는 뉴비들 없이 우리만으로 공략을 이어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던 때였다. 후우우우웅-! “포탈! 포탈이 열렸습니다!” 수십 개의 포탈이 열리며 뉴비가 들어섰다. *** 새로 들어온 뉴비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일단 지하 1층에 대해 알려 주겠다며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지하 1층이 녹록지 않은 곳이란 걸 인지시킨 뒤, 그대로 노예 계약을 맺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후, 어쩐지 마지막 날까지 아무도 안 내려오더라니.’ 이번 회차에 유입된 뉴비들을 본 순간 나는 곧장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방식이 결코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걸. “진형 재구축!” “재구축!” 이내 지하 1층에 내려와 착지하자마자 엄숙하고 절도 있게 진형을 잡기 시작한 무리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경우네.’ 일반적인 클랜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신관. 복장을 단일화한 마도 병단. 그리고 매끈한 판금 장비를 걸친 기사 무리까지. 직업군은 크게 셋으로 분류됐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니아 라프도니아……!” 왕가의 문양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것. 이내 진형 구축이 끝나자,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를 보며 단걸음에 다가와 경례를 취했다.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얀델 남작님! 설마 이렇게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건만. 생존해계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너는… 누구지?”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제1 왕실기사단 소속 질런 에보스트입니다.” “에보스트 남작과의 관계는?” “제 형님이십니다.” 후,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지휘관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었다. 남작 본인인 것도 아니고 동생이라니. 어떻게 잘만 하면 내 남작의 직위로 찍어 누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아, 그리고 현재는 이번 탐사군의 부사령관직을 임시로 수행 중입니다.” 그런 희망은 그 한마디에 산산조각 났다. “부사령관……?” “예. 잠시 물러서주시겠습니까? 곧 2차 탐사군이 진입할 예정이라서.” 그 말에 멍하니 뒤로 물러서기도 잠시. 후우우우웅-! 다시 한번 상공에 수십 개의 포탈이 열리며 수십 명의 탐사군이 지하 1층에 진입했다. 그것도 시간 차를 두고서 두 번이나. ‘60명이 세 번 들어왔으니…….’ 180명. 탐사대가 아니라 ‘탐사군’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규모의 병력. 다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니아 라프도니아! 왕실의 명을 받은 탐사군 180인 전원이 무사히 목적지에 진입했음을 보고드립니다, 사령관님!” 진입하자마자 보고부터 듣는 사령관. “현재 주변에 위협적인 존재는 감지되지 않으며, 현 임무의 제 1급 목표물인 비요른 얀델 남작을 발견했습니다. 총원 38인으로 클랜 아나바다의 일곱 명을 제한 나머지는 1차, 2차에 진입한 헥츠 클랜, 아르민 탐사단의 일원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군.” 귀신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령관이 은발을 찰랑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너무도 익숙한 얼굴의 남자였다. 물론 젊음이 가득하던 그때보다는 20년 정도 늙기는 했지만. “승작식 때 멀리서 보기만 하고 인사는 나누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오.” 제1 왕실기사단의 단장. 빛의 기사란 이명을 지닌 왕가의 집행자이자……. “처음 뵙겠소이다, 얀델 남작. 제롬 세인트레드라 하오.” 20년 전에 철가면으로 노아르크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만나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놈. “그, 그래… 처음 뵙겠다! 반갑다! 야, 얀델 남작의 아들 비요른이다!” ……못 알아봤겠지? *** 세간에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있듯. 두근두근두근-! 절대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다. “……얀델 남작의 아들? 소개가 특이하시구려.” 오케이, 일단 아직까지 뭔가 낌새를 느낀 거 같진 않고……. 하, 아까는 당황해가지고 말이 아무렇게나 나왔네. “특이하단 말은 자주 듣는 편이다.” 일단 차분하게 바바리안스러운 대답을 해준 뒤, 열심히 상황을 정리했다. 제롬 세인트레드.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에 기록의 파편석을 노리고 노아르크에 내려왔다가, 나랑 한바탕 싸웠던 그놈. 이놈이 나를 알아보는가 아닌가에 대한 불안과는 별개로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그야 이놈은 백작 작위를 갖고 있으니까. 쉽게 말해, 작위로 찍어누르는 게 원천 봉쇄됐다는 뜻인데……. ‘설마 탈출법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에 이런 거물을 보냈을 줄이야.’ 암만 봐도 왕가답지 않은 행보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뒷짐을 진 채 사태를 더 주시하리라 여겼건만. “하하, 아무튼 이런 데서 고향 사람을 만나니 너무 반갑군! 도시에는 별일 없나?” “도시? 도시는 당연히 왕가의 비호 아래 무탈하게 잘 보호받고 있소만…….” “그렇다니 참으로 잘 됐군!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너희도 탐사 잘 하고! 잘 지내라! 다들 뭐 하냐? 얼른 떠날 준비하지 않고?” 이내 자연스레 작별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자, 녀석이 순간이동을 한 듯 내 앞에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그때도 봤던, 3등급 이동기 [빛의 관문]이었다. “남작, 지금 어디를 가시려는 것이오?” “아… 배가 고파서…….” “본인의 배려가 없었구려. 식량이 떨어졌을 수도 있을 터인데, 하나 이제는 걱정 마시오. 지원 물자는 충분하니.” 그래, 이렇게 달아나게 둘 생각은 없다 이거지? 나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접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세인트레드 백작, 내 앞에서 비켜라.” 공과 사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차가운 태도. 다만, 놈은 그런 내 기세에도 아무렇지 않게 할 말을 다 이어갔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남작께서는 미지의 계층에 가장 먼저 진입한 탐험가인 데다가, 우리 탐사군의 목표 중 하나는 남작의 구출도 있단 말이오.” “거, 누가 구조해달라고 요청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남작께서는 우리 왕국의 귀중한 보물이오. 그런 남작을 잃는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를 알아주시오.” “그래서? 앞으로 어쩌겠다는 거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한 클랜의 수장이기도 한 나를 사적으로 징집해서 탐사군에 강제로 편입시키기라도 하겠단 거냐? 무슨 권리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녀석은 전혀 기분 상한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미소 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는 남작을 강제로 군에 편입시킬 권리가 없소. 재난 상황 시 탐험가에 대한 강제성을 얻는단 법률이 있기는 하나, 이를 왕국의 작위 귀족인 남작에게는 적용할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녀석은 내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뭐하는 물건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는 왕명이오.” 쉽게 말해, 저 종이에 뭐가 적혀 있든 따르지 않으면 반역도 무리로 낙인찍힌다는 것인데…… “라프도니아의 남작, 비요른 얀델은 들어라.” 이내 녀석이 두루마리를 펼치며 근엄한 목소리로 내용을 읽어내렸다. “사악한 반역도들이 활개를 치는 혼란스러운 날이다. 왕가의 빛이 언제까지고 이 아름다운 도시와 신민들을 보호할 것은 믿어 의심치 않으나, 헛된 소문을 믿은 인재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은 이 도시에도 크나큰 손해일 것이다.” 예법의 최고봉인 왕실 문서인 만큼 서두가 길기는 했지만. “하여, 군주로서 이대로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이렇게 탐사군을 꾸려 출정을 보내니…….” 결국 핵심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비요른 얀델 남작은 제 1차 탐사군에 합류하여, 사령관 제롬 세인트레드의 ‘지휘 아래’ 미개척 지역을 샅샅이 탐사하고, 도시로 돌아갈 수단을 찾아내라.” 에헤이, 제대로 조졌네 이거. 553화 데자뷰 (2) 왕명이 떨어졌다. 공식적으로는 병상에 누워 있다는 왕의 명령일 리는 없고, 분명 재상의 인가를 받고 작성된 왕명일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왕명을 받들겠다.” 목격자를 전부 죽이고, 나가서 왕명 같은 건 받지 못했다며 거짓말을 할 게 아닌 이상에는 거부할 방법이 없다는 판단. “얀델 남작의 충정을 왕가는 기억할 것이오.” 부드럽게 웃는 제롬의 모습이 얄밉기는 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을 생각하기로 했다. 탐사군에 합류해 저놈의 지휘를 받는다? 지하 1층 내에서의 내 자유도는 떨어지고, 저놈이 트롤짓을 해도 제재할 수단이 없음을 뜻한다. 독점 중인 지금과 달리 전리품 또한 정해진 비율을 받는 식으로 콩고물이나 주워 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병력이면 뭐든 할 수 있겠지.’ 사실상 치트키를 손에 넣은 거나 다름없다. 적어도 앞으로 지하 1층을 탐사하며 ‘무력’이 부족해서 난처해지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 아직도 끝을 못 본 도서관섬이든, 여전히 절반 이상이 미지로 감춰진 나무섬이든, 초거대 거인이 있는 거인섬이든. 이 병력이 있으면 뭐든 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계층을 탈출해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뜻인데……. “자, 그럼 정보부터 정리를 할까 하는데, 혹시 일지가 있소? 탐험가들은 일지 같은 걸 써서 그간의 일들을 기록하기도 한다던데 말이오.” 어휴, 진짜 아예 날로 먹으려 하는구나. 지식이 재산인 시대인 만큼 왕가군이 아니라 도적떼를 만난 듯한 기분이다. 따라서……. “정보를 제공하기 전에 전리품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 문제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흐음, 전리품 말이오?” “그래, 왕명에는 네 지휘를 따라 탐험을 하랬지. 어떤 대우를 받으라 했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확실히 그건 그렇구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시오. 우리 탐사군의 목적은 그까짓 푼돈 또한 아닐뿐더러, 왕실에선 이미 남작님의 편의를 잘 봐주라는 말이 있었소.” “그래도 딱 잘라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남작의 휘하에 있는 탐험가들에 대한 지휘권은 남작에게 그대로 두겠소. 또한, 남작이 얻은 탐사 소득은 한 가지 경우를 빼고 온전히 보장하리다.” 지휘권 보전에 탐사 소득 노터치.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지만, 애석하게도 불길한 단어가 붙었다. “한 가지 경우를 빼고……?” “이번 탐사는 왕가,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의 밝은 내일을 위한 것. 정수, 소재, 장비, 특수한 마법 물품 등 종류는 무관하오. 단 한 번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것은 공익을 위한 연구 표본으로 우리 탐사군에서 가져가겠소.” 즉, 첫 발견인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솔직히 듣자마자 진짜 이런 양아치들이 어디 있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제롬은 능숙하게 채찍과 당근 전략을 사용했다. “단, 지금까지 남작께서 얻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려 하는데… 어떻소?” 거, 당연한 이야기를 뭐 대단한 거라도 내어주듯 저러네. 지휘관 경력이 길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저 말을 듣고 위로를 받을 뻔했다. “약속은 좋다.” “그렇다면 다 됐구—.” “하지만, 한 가지 더.” 녀석이 자연스레 합의를 끝내려는 거 같아서 급히 말을 이어갔다. “경청하리다. 말씀해보시오.” “첫 발견에 대해서도 지분을 갖고 싶다.” “그것은 불가하오.” “설령 그 과정에서 내 공이 압도적이라 해도?” “그렇소.” 쩝, 그래, 이건 안 되는 거구나. 상상 이상으로 완고한 태도를 보니 이건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소귀에 경읽기가 될 거 같다. 뭐, 그렇다고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면 두 번째 발견일 시, 내게 우선권을 줘라.” “우선권이라…….” “그래. 연구 목적이라면 하나면 충분한 거 아니냐? 아까 내게 푼돈은 아무래도 좋단 식으로도 말했고.” “흐음… 잠시 부사령관과 상의를 해도 괜찮겠소?” 이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이 부하에게 다가가 상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제롬의 손짓을 받은 마법사가 음성제어 마법을 푸는 것으로 다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얀델 남작께서 큰 공을 세웠거나, 자력으로 얻은 것에 한하여 우선권을 드리고자 하는데, 이건 어떻소?” “그렇다면 큰 공의 기준은 누가 정하지?” “그건…….” “그런 애매모호한 기준 말고 확실하게 정하지. 내가 자력으로 얻은 것을 제외하고 세 개. 딱 세 개에 대해서 우선권을 줘라.” 내 말에 제롬은 다시금 부사령관을 힐끗했다. 쟤가 전용 참모 비슷한 느낌인 건가? 알 수 없지만, 녀석은 이 정도로 상의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 판단한 거 같았다. “좋소. 두 번째로 획득한 성과에 한해, 세 개까지 얀델 남작에게 우선권을 드리리다.” 이내 녀석이 그리 말하며 악수를 청해왔고, 나도 이를 마주잡았다. “도시로 돌아갈 때까지 잘 부탁드리리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 전리품 합의가 끝난 후. 우리 클랜 아나바다를 주축으로 한 38인의 탐사대는 왕가의 군대에 임시 편입됐다. 정식 소속은, 제 1차 탐사군의 임시 4조. 60명으로 구성된 나머지 세 개의 조에 비하면 숫자가 적었지만, 이는 내 지휘권을 보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제롬도 인원을 재분배하는 과정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굳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조직 개편이 끝난 다음에는 곧장 정보 공유 시간을 가졌다. “베실러스 경은 가서 연구 자료를 확인하게.” “예……. 오랜만일세, 앰블럿 양.” “아, 네에… 안녕하세요…….” “마스터께서는 잘 지내시나?” “그러시지… 않을까요……?” “하하, 생각해보니 오히려 내가 소식을 전해줘야 하는 쪽이겠군. 인사는 이만하면 됐으니, 그럼 연구 기록을 주겠나? 우선 그걸 읽은 뒤에 질문을 할 테니, 자네는 질문에만 답하게.” “……여기… 있습니다…….” 탐사군 내의 서열 1위 마법사는 우리 탐사대의 마법사 삼인방에게 가서 그동안 열심히 연구했던 자료를 약탈했다. 그리고……. “자, 그럼 남작도 말해보시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는 제롬에게 이 계층의 특징부터 시작해 그간 방문했던 섬들에 대해서 설명해야만 했다. 제롬이 가장 흥미를 가진 건 ‘우기’였다. “신기한 현상이로군. 마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다니.” “그래도 너무 걱정 마라. 계층 내에 피할 수 있는 곳이 몇 곳 존재하니까.” 지금까지 확인된 안전지대는 세 곳이었다. 햄식이를 통해 안전하단 게 확인된 도서관 섬. 헥츠 클랜이 은신처로 삼았던 거인섬의 동굴. 마지막으로, 촌장이 통치중인 그 마을. “사령관.” “하하, 그런 호칭은 말고, 그냥 성으로 부르시오.” “세인트레드……. 네가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게 있다.” 조금 고민이 됐지만, 나는 ‘촌장’에 대해서도 제롬에게 정보를 공유했다.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말이오?” “일단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생물체다.” 그의 존재가 왕가 출신 군대에 어떤 작용을 할지 미지수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얘네들도 언젠가 알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출구가 거기 있는 이상 지나쳐야 하니까. “혹시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지내다 보니 영 수상한 점이 많아서.”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단 판단에 촌장과 있었던 일들까지 상세히 말해봤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은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가브릴리우스의 동료를 사칭하는 마물이라… 수상한 자로구려.” 지식과 별개로 행동력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역시 첫 탐사는 그 섬으로 하는 게 좋겠소.” “……바로 가겠다고?” “그야 수상하지 않소. 게다가 말도 통한다고 했으니 잡아다가 심문을 해서 정보를 캐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오.” 어……. 그건 그런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니 도리어 내가 다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이 병력이면 바로 잡으러 가도 될 거 같기는 한데.’ 무식해 보이는 방법도 힘이 있는 녀석이 하면 합리적인 방법이 되는 법.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나는 일단 녀석을 말리기로 했다. “급하게 움직일 거 없이 우선 다른 섬들부터 조사를 해보는 게 어떻냐?” “흐음?” “출구가 그 섬에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출구를 열려면 무언가 조건이 필요한 거 같은데. 그걸 찾은 다음에 가도 늦지 않지 않나.” 천천히 쉬운 곳부터 탐사를 해가며 이 탐사군이 얼마나 제대로 된 집단인지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촌장섬으로 향하는 편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지금도 병력은 충분한 거 같지만. 병력이 전부가 아니란 건 지난 역사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굳이 그렇게 돌아갈 이유가 있는가 싶지만, 먼저 이곳에 온 남작의 말이니 흘려 들어선 안 되겠지. 알겠소. 남작의 말대로 하리다.” 오케이, 의외로 설득은 쉽게 끝났고……. “그럼 남작은 어디를 가장 먼저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오?” 녀석의 물음에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도서관. 도서관섬이 제일 좋을 거 같다.” 아직 최상위 몬스터들 경험치는 수급을 못 했거든. *** 목적지가 정해진 후. 우리는 바위섬의 해안가로 나가서 배를 소환했다. 소환된 선박은 총 네 척으로, 나뉘어진 조끼리 무리를 이뤄 올랐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는 약간의 인원 교체가 있었다. “베실러스 경이 말하길, 연구 성과를 모두 전달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구려. 해서 말인데, 저 마법사 셋을 우리 배에 태워도 되겠소? 아, 물론 빈자리만큼의 다른 마법사들을 보내 채워드리리다.” “……좋다.” 임시로 마법사 삼인방이 탐사군의 배에 올라탔고, 대체 인력으로 다른 마법사 셋이 우리 배에 출장을 나왔다. 그리고……. “오랜… 만이네요?”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레이븐……? 네가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이긴요.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어요. 탐사군에 합류하라고.” “아… 너는 군인이었지.” “근데 진짜 이제야 봤어요? 아까 대화하는 내내 몇 번이나 제 쪽을 보기에 아는 줄 알았는데.” “그냥 전체적으로 쓱 둘러보던 거라서.” “아… 그랬구나.” 레이븐이 머쓱한 눈치로 머리카락을 검지로 꼰다. 참 이해 못할 행동이었다. 사람이 180명이나 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볼 거라 생각한 거지? 심지어 키까지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아무튼, 만나서 반가운데 어서 배에 타라. 얘기는 가면서 하지.” 이후 레이븐과 함께 초면인 마법사 둘까지 배에 태우자, 먼저 타 있던 아이나르가 달려들었다. “아루루!! 아루루다!! 아루루다!!” “악! 놔, 놔요! 아프다고요!!” “아, 미안!” 정신을 차린 아이나르가 끌어안았던 몸을 놓자 레이븐이 구겨진 제복을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프넬린 씨는… 여전하네요.” “일단 겉보기로는 그렇지.” “겉보기로요……?” “정수 하나를 먹었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어서… 이건 너도 나중에 보면 바로 알 거다.” “그런가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대장선에서 출발하란 신호를 받았단 아우옌의 보고가 있었고, 이에 서둘러 배를 출발시켰다. 솨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선두에 선 아나바다호와 이를 뒤따르는 세 척의 군함. 지금 우리 배도 나쁜 스펙은 아닌데, 저것들을 보면 괜히 기가 죽는다. 딴 건 몰라도 큰 게 좋아보이긴 한달까? 저쪽은 60명이 타도 갑판 위가 널널해보였다. 다들 공용 선실도 충분한 거 같고. “또 보는군.” “네. 안녕하세요. 레인즈 씨.” 레이븐의 등장에 안면이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 다가와 인사를 시작했다. 아멜리아의 경우엔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강했고. “오랜만이에요…….” “아… 네. 그러게요.” “…….” “…….” 에르웬과는 어색함이 풀풀 풍겼다. 뭐, 그래봤자 미샤만큼은 아닐 테지만. “안녕…….” “아, 네… 안녕하세요. 미샤 씨…….” 후, 얘네는 무슨 보는 내가 다 숨 막힐 정도네.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던 거 같은데. “얀델 씨한테 듣기는 했는데… 뵙는 건 지금이 처음이죠?” “으응……. 그땐 미안…….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 “아, 아니에요……! 미샤 씨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죠.” 팀이 해체되면서 에르웬처럼 싸웠던 것도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데면데면하게 구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어색한 건가?’ 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레이븐은 미샤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그걸 캐묻기 어려운 분위기이기도 하고. “아무튼, 다들 무사한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여기 지하 1층에 내려간 걸 끝으로 소식이 끊겨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조금이라니, 그건 조금 섭섭하군.” “…뭐라는 거야 진짜.” 조금 농 섞인 말을 했더니 레이븐이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정색했다. 원래는 그냥 싹 무시하고 끝내는데. 목소리를 보나 말투를 보나 왠지 오늘 텐션이 꽤 높아 보인다. “됐고, 그나저나 그건 아세요?” “그게 뭔지 말해야 알지.” “카이슬란 경이요. 예전에 얀델 씨랑 같이 원정에 다녀왔던 그분.” “카이슬란? 그놈이 왜? 밖에서 사고라도 쳤나?” “아뇨. 그분도 이번 탐사군에 들어와 있어요. 근데 역시 못 봤구나.” 오… 이것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설마 반가운 얼굴이 하나 더 섞여 있을 줄은 몰랐는데. ‘카이슬란이면 믿을 만하지.’ 심지어 그 녀석의 위치면 나름 수뇌부에 속할 게 분명하니, 저쪽에서 뭘 꾸며도 내가 알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리리스 마로네는? 걔도 군부 마법사 출신일 텐데 함께 오지 않았나?” “그분은 없는 거로 기억해요. 아, 대신 그분은 있어요!” “그분이라면?” 이내 호기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묻자, 태생부터 설명하길 좋아하는 레이븐이 옳다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스벤 파라브 경이요. 레아틀라스교의 성기사.” 허, 설마 얘까지 왔을 줄이야. “왜 그러세요?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예요? 같이 원정까지 다녀온 사이면서?” “아니… 그럴 리가. 기억하고 있다.” 성기사 스벤 파라브. 다른 이름으로는 고블린 가면. 인물의 특징으로는 말도 안 되는 ‘육감’이 있다. 녀석이 아이스록 원정 당시 말도 안 되는 육감을 선보이며 몇 번이나 원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베르자크 사건 때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핑계를 대고 미궁 진입도 하지 않았댔지. “레이븐, 혹시 그 녀석이랑 관련된 이야기는 없나? 소집을 거부했다든가, 출정 당일 날 배탈이 났다든가 하는 그런 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뱉은 질문. 한데 이 말에 레이븐은 역으로 화들짝 놀랐다. “어? 그날 그분이 배탈 났던 일을 얀델 씨가 어떻게 알아요?” ‘……실화냐.’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554화 데자뷰 (3) “……자세히 말해봐라. 무슨 일이 있었지?” 최종 판단을 내리기 전에 디테일한 내용들을 확인했다. “아, 그거요? 출정 당일에 없어져서 사령관이 직접 찾으러 갔거든요. 그런데 막상 찾았더니 배탈이 났니 뭐니 하는 핑계를 대며 못 간다고 그랬다는 거 있죠?” “…….” “막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서 결국 마법사를 불러 확인까지 했다나봐요.” “확인……?” “마법을 써서 장에 들은 걸 확인해봤다는데요? 아무 문제 없었대요. 그리고 이를 근거로 탈영 시도로 몰아세우자 어쩔 수 없다는 눈치로 태도를 바꾸고 합류했는데…….” “…했는데?” “그 소문이 돌아서인지, 탐사군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인상이 좋지 않게 박혔어요. 보니까 같은 교단에서 온 신관들도 사람 취급을 안 하던데요?” “그렇군…….” 하, 괜히 들었네. 저렇게까지 탐사군에 합류하지 않으려 했던 걸 보면 분명 그 ‘육감’이 발동했기 때문일 텐데. 두근-! 설마 이번에도 아이스록에서처럼 그런 개고생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 바위섬에서 출항한 네 척의 배가 도서관섬에 정박했고, 간단히 진형만 가다듬은 뒤 그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참고로 진형이란, 선두에 4조… 그러니까 우리 38명이 맨 앞에 선 진형이었다. 그 탓인지 왠지 안 좋은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우리를 맨 앞에 세운 건 우리가 선발대였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응응, 버림패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지휘관이라도 그랬을 거다. 아오, 근데 왜 이렇게 등 뒤가 못미덥지? ‘……빌어먹을 왕가놈들.’ 베르자크 전, 그리고 아이스록. 벌써 두 번이나 왕가 세력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더니 도무지 이 새끼들을 믿을 수가 없—. “도착했군.” 정면보다는 뒤를 더 경계하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어느덧 드넓은 지하 도서관이 나타났다. 책들은 어느새 싹 정리된 상태였다. 그리고……. [……왔냐? 생각보다 일찍… 어……?] 도착하자마자 마중을 나온 햄식이가 우리를 뒤따르던 탐사군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하, 얘는 왜 또 이러고 있어. 얼른 돌아가 몸을 숨기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훠이훠이 저었지만, 햄식이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눈빛이었다. 따라서……. 스으윽, 스윽. 엄지로 뒤에 탐사군을 한 번 가리키고, 검지로 햄식이를 가리킨 뒤. 슥. 손으로 목을 베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야 얘네는 나처럼 착한 녀석들이 아니니까. 진짜 농담 안 하고, 보자마자 왜곡 마법을 걸고 죽인 다음에 해부부터 시작할 녀석들이다. 한데 그런 내 다급함이 전해졌을까. [삐이—!!!] 제스처를 알아들은 햄식이가 기겁하며 도망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들려온 거 같은데.” 선두에 선 우리 4조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뒤따르던 본대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오케이, 보아하니 햄식이를 본 거 같지는 않고. “별거 아니다.” “예?” “원인은 모르겠는데, 여기 있으면 그런 소리가 가끔 난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로써 가끔 햄식이와 몰래 만나서 대화를 나눠도 탐사군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뭐, 소리에 대해 조사해보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기에 조심은 해야겠지만. “이곳이 바로 얀델 남작이 말한 그곳이구려.” “어떤 거 같나?” “어떠냐니? 나 개인의 감상은 의미가 없소이다. 자,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어서 시작합시다. 현재 우리는 단순히 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내린 신성한 임무를 수행 중인 것이니.” 어휴, 누가 왕가바라기 아니랄까봐. 이내 제롬이 부사령관에게 뭐라뭐라 지시를 내리자 부사령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들어라! 일단 지형 조사부터 시작하겠다. 각 조사대는 주변을 샅샅이 수색해라!” 그렇게 시작된 지형 조사. 나는 제롬에게 다가가 물었다. “시간도 없다면서 굳이 조사를 다시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이미 여기는 우리가 다 끝냈는데.” 어쩌면 내가 왕가를 신뢰하지 않듯이, 제롬 이 녀석도 나를 불신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후후, 우리 탐사군은 왕실에서 고르고 고른 탐사의 전문가들만을 모아 만들어졌소. 얀델 남작의 탐험가로서의 소양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켜보시오. 혹여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낼지 모르니.”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진짜 그냥 우리를 개무시하고 있을 뿐이란 게 느껴졌다. ‘탐사 전문가들은 개뿔.’ 마법사들도 대부분 군부 출신에, 기사랑 신관들만 바글바글한 전투 몰빵 집단이구만. “알아서 해라. 대신 우리는 여기에 있지.” “그러시오. 어차피 전에도 발견 못 한 걸, 지금이라고 발견해낼 수 있을 리 없으니.” ……진짜 한 대 때릴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뇌리에 스쳤으나,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새로이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탐사군의 조사대원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고, 그다음에서야 도서관 공략이 시작됐다. “우선 남작이 말한 대로 진행하는 편이 좋겠소. 남작과 달리 우리들은 마지막 책장까지 충분히 공략할 능력이 되니 말이오.” 끝까지 못 미더운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공략이 진행되자 나름 전문가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 “이런 형식이로군.” 몇 번인가 소환책을 사용한 녀석은 대충 알겠다는 듯 빠르게 진형을 재구축하고, 200명에 달하는 인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했다. 수십 명의 인원이 책장에 달라붙어 책을 찾아 왔고, 그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 석문 앞에 대기하며 석문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족족 사냥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한참 걸리겠군.” 제롬은 이것도 느리다 생각했는지, 궁극의 비기를 꺼냈다. “에보스트, 속도를 올려라.” 이 세상의 모든 발견은 필요에 의해 나타나는 법. “예? 하오나 한 번에 한 권만 소환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리는 것은…….” “그러니까 방법을 찾으라고 하지 않나.” “…….” 직속 상관의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허망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부사령관은 나조차 생각해내지 못한 창의적인 방법을 강구해냈다. “문이 한 번 열렸다 닫히는 시간만 줄일 수 있어도 한층 더 속도를 낼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래서 결론은?” “문을 부숴 버리는 건 어떨는지요?” “……!!!” 옆에서 듣고 있던 바바리안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인 대응책. 하나 계획을 들은 제롬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군. 당장 실행해라.” 이내 허가가 떨어지자 탐사군 내의 마도 병단이 한곳에 집결했다. 그리고 수십 명이서 합동 마법을 펼쳤다. “마이르티 에스타 피오뤼에브 드 테일라!” 그렇게 완성된 마법은 아직까지도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 주문이었다. 그야 1등급 공격 마법을 어디서 보겠어. 「가휜 베실러스가 1등급 공격 마법 [개벽의 구]를 시전했습니다.」 마법이 완성됨과 동시에 마법진이 빛나며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마력에 둔감한 바바리안 전사조차 진하게 느껴질 정도의 밀도.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 찰나와도 같은 섬광. 무언가 쏘아졌고, 무언가에 부딪쳤다는 인과만을 어렴풋이 느끼며 다시 눈을 떴을 때. 화아아아아아아앗-!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겁게 달궈진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며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다만, 그 감각에 집중할 여력은 없었다. “……다행히 성공했군.” 높이가 20m는 되었을 거대한 석문은 파편조차 남기지 않고 박살이 난 채로 끝없는 어둠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게… 되네……?’ 새로운 경지를 본 기분이었다. *** 석문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소환을 빠르게 이어간다는 계획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이 없어지니 잡는 족족 소환이 되는군. 잘 했다. 에보스트.” “단지 왕가의 명을 따랐을 뿐, 치하받을 일은 아닙니다. 사령관님.”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몬스터를 소환하며 생기는 지연 시간을 없애 버린 둘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저기를 봐라! 벌써 끄트머리에서부터 복원이 되고 있다.” 이는 미궁의 성질이었다. 1층의 수정동굴을 포함해 미궁은 특수한 지점을 제외한 모든 곳은 자연 수복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탐사군의 마법사들은 지금 1등급의 헛수고를 하게 된 셈인데……. “그런데 문제라도 있소?” 제롬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내지었고, 이에 나는 바바리안답지 않게 친절히 풀어서 잘 설명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헛수고였다. “그렇게 말해도 뭐가 문젠지 모르겠구려. 복원이 된 만큼, 계속 부수면 되는 문제 아니오?” “어……?” “복원되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번처럼 1등급 공격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을 듯하구려. 마법사들은 많으니 돌아가며 계속 부수면 될 것 같소.” “……어.” “어차피 아직까진 마법사들이 필요할 만큼 강한 마물은 나오지도 않는 중이지 않소?” 어… 그건 그렇지. “그럼 궁금증은 다 풀리셨소?” “그래. 다 풀렸다.” 결국 나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건… 나였다……!’ 힘을 지닌 자는 더 많은 것을 실현해낼 수 있기에, 더 높은 영역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로, 내가 이런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말도 안 된다 재단한 것도 전부 힘이 부족했기 때문. 상상력이란, 힘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상상력에 힘 력자가 붙은 것도 그래서겠지.’ 과연, 고대인의 지혜라 이건가. 그들은 수천 년 전에 이미 그 이치를 통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임무를 재개하겠다!” 아무튼, 내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건 말건 제롬은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처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왕가의 임무를 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태도라던가? 그런 진심 덕분인지, 실제로도 공략 속도는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그동안 우리도 공장식 사냥을 해나갔다고 했지만, 비교조차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마석은 내버려 둬라! 나중에 수거하겠다.” 탐사군은 마석조차 줍지 않았고, 정수가 나와도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원거리 포격으로 사냥했기에 원치 않은 정수 획득을 하는 불상사는 없었고, 근딜이 필요한 경우엔 정수를 꽉 채운 기사들이 필드를 채웠다. 그리고 그 결과. ‘하루 만에 4등급까지 왔네…….’ 엄밀히 말하자면, 16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4등급 몬스터들이 하나둘 나타나는 구간에 돌입했다. 우리 38명이서 진행했을 때보다 거의 5배는 더 빠른 속도.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진행하면 되겠군. 마도 병단에게도 그리 전해라. 더 이상은 복원되는 걸 막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겠다, 야영을 준비하라.” 그렇게 식사조차 교대로 해가며 공백없이 진행된 공략이 중단되며 고대해왔던 휴식 시간이 되었다. 고된 하루를 보낸 탐사군 병사들은 능숙한 솜씨로 야영지를 꾸렸고, 그러는 동안에 잠시나마 시간이 비자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찾아왔다. “하하, 많이 바쁘시오?” 멜란드 카이슬란. 아이스록 원정대에서 동고동락했던 군부 출신의 기사. “아무리 바빠도 네가 왔는데 시간은 내야지.” “그거 참 영광이로구려.” 카이슬란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고, 나도 툭 치며 인사를 받았다. 지나가면서 서로 눈인사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거든. “그나저나 이제야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인트레드 백작의 휘하에 들어가면 지옥을 맛본단 말은 들었소만, 설마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이제 보니 군부 출신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악명 아닌 악명이 퍼져 나가고 있던 모양. “그래서 너는 어떻게 된 거냐? 왕가에서 합류하라 명령이 떨어진 건가?” “그렇소. 후후, 전역하기 전에 최대한 부려먹을 생각인 듯하더구려. 뭐, 그래도 남작을 구하는 목적도 있다니 큰 불만은 없었소이만.” “전역? 신청을 낸 건가?” “신청서야 한 달 전에 냈소. 처리가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아마 이번 원정이 끝날 쯤엔 되지 않을까 기대 중이오.” “그렇군…….” “근데 표정이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야식으로 뭘 먹을지 생각 중이었다.” 대충 둘러대기는 했지만 본심은 아니었다. 단지, 전역 직전인 카이슬란이 이곳에 ‘강제로’ 끌려오게 됐다는 점에서 불현듯 아이스록 원정대가 떠올랐을 뿐. ‘뭔가 딴생각을 품은 거면 마로네도 탐사군에 합류를 시켰겠지만… 그래도 일단 염두에 두고는 있자.’ 에이, 아니겠지. 그런 식으로 넘기기보다는 우선 최악의 경우는 항상 머릿속에 품고 있기로 했다. “카이슬란 경! 드디어 인사를 나누네요!” 이후 원정대 멤버였던 베르실, 에르웬, 아멜리아도 와서 카이슬란과 해후를 나누고 있자니, 새로운 얼굴이 하나 더 등장했다. “죄송합니다. 대주교님께서 야영이 처음이라 하는 탓에 돕느라……. 바로 오려 했는데 늦었군요.” 고블린 가면, 스벤 파라브. 녀석이 등장하자마자 베르실이 다가와 눈총을 쏘아댔다. “오셨네요.” “오, 오랜만입니다……? 고울랜드 양…….”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파라브 경.” 거, 얼마 전에 원탁에서 만났으면서 저러긴. 얘네들 정체를 다 아는 내 입장에서는 귀엽게만 보일 뿐이다. “잠깐, 다들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나?” “예, 물론입니다. 저도 오래 있기에는 교단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파라브, 너만 빼고.” “……예?” 인사 및 근황 대화가 끝난 뒤에는 주위에 사람들을 물리고서 파라브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 무슨 일이신지……?” “이번 탐사군에 불참하려고 배탈이 난 척을 했다지?” “카이슬란 경이 그것까지 말했습니까?” “아니, 다른 쪽에서 들었다.” “……그, 금의 마법사에게 들으셨군요.” 내 전 동료였던 레이븐이 우리 배에 탄 것을 통해 정답을 유추해낸 모양. 다만, 그 부분은 아무래도 좋았다. “왜 그랬냐? 또 그 ‘이상한 기분’이라도 든 거냐?” “저…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다르다고? 자세히 말해봐라. 나는 네 육감을 신용하는 쪽이니.” “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계속된 요구에 고민하는가 싶던 파라브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신탁을 받은 거 같습니다…….” 뭐……? *** 신이 실존하는 세계. 이곳 사람들은 때때로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계시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계시’를 돕기 위해 성물을 내리는 일도 있고. 여하튼, 핵심은 그게 아니다. “신탁을 받았다고……?” “조, 조용히 말해주십시오! 다 듣겠습니다!” 신탁은 모두 다 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서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축복받은 이들을 ‘성자’, ‘성녀’라고 부른다. 한데……. ‘이 새끼는 플레이어잖아.’ 스벤 파라브는, 지구 출신의 악령이다. 그리고 삼신교는 악령 사냥에 왕가만큼이나 진심인 존재. 한데, 거기 가장 웃대가리인 신이 악령에게 신탁을 내린다? “……확실한 거냐? 그걸… 받았다는 게.” “이, 일단은 그, 그런 거 같습니다.” 고민이 깊어진다. 대체 신이라는 작자들은 뭔 생각인 걸까? 그러고 보면 예전에 용살자한테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을 때도 성물을 내려서 나를 도와준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내용이 뭐냐? 어떤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런 짓까지 했던 거지?” “저… 그게…….” 이후 신탁 내용까지 서둘러 확인을 하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도중에 훼방꾼이 나타났다. “파라브 경! 대주교께서 찾으시는 중이네! 어서 와보게!” “아,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내 눈치를 쓱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녀석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답하며 교단 세력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자세한 건 내일 들으면 되겠지.’ 당장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나도 육포로 대강 허기만 채운 뒤 모포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잠이 안 오네.’ 물이나 마실까 해서 잠깐 몸을 일으켜세우자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니 순찰 중인 불침번들 말고도 저 멀리 책장 뒤에 숨은 햄식이가 보였다. “크흠…….” “남작님, 어디 가십니까?” “잠이 안 와서. 잠깐 몸이라도 풀려는데 여기서 하면 시끄러울 거 아니냐.” “아, 예…….”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에게는 그럴듯한 변명을 해둔 뒤 책장 앞에 다가서자, 숨어 있던 햄식이가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저 미친 인간들은 뭐냐!!] “어… 왕국에서 온 사람들인데……. 너한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피해를 끼치지 않기는……!!] 이내 아직도 복원이 끝나지 않은 석문을 보며 햄식이가 복슬복슬한 양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왜… 내가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하는 거냐……!!] “…….” [어째서 인간들은 전부 이런 거냔 말이다……!!]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바바리안인데……?” 이 말 말고는. 555화 데자뷰 (4) 미궁 진입 109일 차. 다르게 말하자면, 왕가에서 보낸 탐사군에 합류해 도서관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이른 아침. 빠바바빠밤! 빠바바빠밤! 빠라라라빠라라라밤-! 군악수가 연주하는 기상 나팔 소리가 도서관 전역에 울려 퍼지며, 아침이 왔음을 알린다. 하, 군대는 왜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거 같지? ‘……라고 말하면 백호가 화내려나.’ 공익이라고 훈련소를 안 가는 건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밍기적거리느라 낭비되는 시간 없이 순식간에 모두를 깨운 나팔 소리. 이 나팔 소리가 끊기자마자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배급입니다!” 야영지를 정리하자마자,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 취사병들 앞에 줄을 서서 식사를 받고 30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흡입. 그리고……. “아침 회의가 있으니 각 지휘관들은 참가하시오.” 수뇌부끼리 모여서 오늘 하루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고, 정해진 계획을 브리핑하는 시간이 있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딱히 중요한 건 없었다. ‘그냥 오늘도 어제처럼 사냥만 한다는 얘기네.’ 물론, 디테일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어제는 문을 박살 내고서 복원을 막으며 미친 속도로 소환을 했지만, 몬스터 등급이 높아진 만큼 이번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략을 진행한다. 당연히 마법사들도 전투에 참가를 할 예정이고. “자, 그럼 오늘도 활기차게 임무를 시작해봅시다!” 굳이 다 불러 모아 회의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 생각은 들었지만, 사실 이게 군대의 특징이겠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때론 비효율적으로 작용할지 몰라도, 때로는 그 과정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막을 수도 있으니. “각자 위치로!” 이후 각 조들이 전달받은 대로 위치에 섰고, 그렇게 다시금 도서관 공략이 재개됐다. “오늘도 전투조는 각각의 조가 번갈아가면서 하나 보네요.” “그게 효율적이니까.” 200명이 넘는 인원. 당연히 이 모두가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제롬이 채택한 것은 교대 근무 체재였다. “일시 중지! 1조, 2조는 3조, 그리고 임시 4조와 임무를 교대한다!” 시간이 되자 석문 앞을 지키던 1조와 2조가 자리를 비켜주고, 책장에서 책을 골라오던 3조와 4조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그리고 1조, 2조는 우리를 대신해 책을 나르며 소모된 체력과 자원을 회복한다. ‘오늘도 카이슬란이랑 파라브는 계속 엇갈리겠네.’ 참고로 이 둘의 소속은 1조다. 그래서 이후로는 식사도 따로 한다. 뭐, 레이븐은 3조라 그나마 좀 낫기는 하지만……. 얘는 마법사라 멀찍이 뒤에 물러나 있어서 임무 중에 마주칠 일이 없는 건 매한가지. ‘…결국 신탁 얘기는 밤이 되어서나 할 수 있겠구만.’ 그렇게 집단을 움직이는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자니, 탐사군 출신의 기사들과 어느새 친해져 수다를 떠는 동료가 보였다. “하하핫! 거짓말하지 마라! 마법사 따위가 어떻게 우리 같은 전사를 이긴단 말이냐!”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치욕스러운 거요! 설마 마법사한테 일대일 결투에서 지는 놈이 나올 줄 그 누가 알았겠소?” “그래서 그게 언제 있던 일이라고?” “한 달 전! 다만, 폭검께선 이곳에 있었을 테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구려. 나름 사교계에서는 유명했던 이야기인데.” 아니, 얘는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보면 볼수록 놀라운 친화력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나?” “아… 나, 남작님! 죄송합니다. 임무에 집중—.” “사과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예……?” “우리는 다 같은 전사 아니냐. 나도 좀 궁금해서. 마법사한테 진 기사라니, 그 머저리가 대체 누구냐?” 슬쩍 다가가 노가리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잠시 눈치를 보던 기사가 씨익 웃으며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이 눈에 띄었을까? 3조에 속한 다른 기사들도 우리 주변으로 다가와 얘기를 엿듣기 시작하더니, 간혹 추임새를 넣거나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는 등 노가리에 참가했다. ‘하긴, 얘네들이라고 이렇게 공장 돌리는 게 재밌을 리 없지.’ 남작이란 작위 때문인지 날 어려워하던 기사들도 내가 털털한 모습을 보이자, 조금은 친밀감을 느꼈는지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 그런데 남작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괜찮으니 해봐라.” “남작님께서 승작식 당시, 키프리오트 남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요?” “아, 그거? 별거 없다. 웬 고블린 같은 놈이 뒤에서 나를 씹어대는 거 아니냐?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니 결투를 신청했다.” “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키프리오트 남작이 엄청 당황했겠군요.” “자업자득이지. 귀족가엔 잘 모르는 놈들이 너무 많다. 뭣도 없는 놈이 까불면 처맞는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들과 동일한 위치인 작위 귀족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시원한 농담. 그게 못내 마음에 드는지 기사들은 옳다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분들이 험한 일을 언제 해봤겠습니까.” “우리 같은 이들이 지켜 주기에 그들이 안전한 것이란, 당연한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이 꽤 많기는 하지요…….” 그래도 선을 지키려는지 소극적으로 뒷담화에 동참하는 기사들. 다만, 내가 썰을 풀고 시원시원한 발언을 이어갈수록 알게 모르게 대리만족을 하며 입꼬리를 올리는 게 훤히 보였다. ‘오케이, 호감작은 이 정도면 충분하게 된 거 같고.’ 이후로도 나는 근무 내내 열심히 썰을 풀었고, 그렇게 탐사군 소속의 기사들과 친분을 다졌다. “남작님께서는… 소문 이상이신 분이시군요. 아! 절대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소탈하고 재밌는 분인지를 몰라서…….” “하하! 뭘 변명하고 그러냐? 우리는 이미 친구 사이 아니냐!” “치, 친구 말입니까! 어휴, 그러지 마십시오! 사령관님이 들으시면 크게 노하실 겁니다!” “그럼 전우로 하면 되겠군.” “전우… 예, 전우라면야…….” “그럼 위험할 때는 등 뒤를 부탁하겠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남작님!” 사람과 친해지는 건 언제든 도움이 된다. *** 기사들과 노가리를 까며 하루를 보낸 그날 밤. 야영 준비는 동료들에게 부탁을 한 뒤, 스벤 파라브가 소속되어 있는 1조의 야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교단 소속의 인물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녀석을 불러냈다.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아… 아, 그것 말이지요…….” “네가 받았다는 신탁. 그 신탁의 내용이 뭐였지?” ‘신탁’이라는 단어에 녀석은 움찔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이곳의 대화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단 걸 확인하고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확 낮추며 보험을 깔았다. “그… 이게 다 제 착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는 확실하다면서?” “예, 아니오로 답하면 그런 쪽에 속하기는 하는데 말입니다……. 이게 또 저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 것과, 남이 보는 건 또 다를 수도 있달까……. 대충 그런 느낌인데…….” 아오, 속 터져. “알았다. 판단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내용이나 말해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내 마음을 다잡듯 눈을 길게 감던 녀석이 다시 눈을 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시에 있을 때, 꿈을 꿨습니다.” “꿈?”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굉장히 신성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지요. 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그녀라는 걸.” “그녀라면, 레아틀라스를 말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꿈에서 여신이 나왔다. 어째서 이 녀석이 그것만으로 ‘신탁’이라 굳게 믿은 건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잠자코 남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가 뭐라 했지?”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며, 미래의 한 장면을 보여 줬습니다.” 예지몽. 신에게 계시를 받은 성자, 성녀가 가장 흔하게 받는다는 형태의 신탁. 그날 파라브는 하나의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대주교가 제게 탐사군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예지몽은 바로 다음 날에 실현됐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꿈이 단순히 개꿈이 아니라 정말로 신탁을 받은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게… 끝입니다.” “뭐?” “그분께서는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날 것이라며,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메인 퀘스트는 탐사군과 함께 미궁에 들어온 다음에 던져주겠다는 뜻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안 됐다. “……근데 왜 배탈이 난 척하며 도망치려고 한 거냐? 신탁까지 받았다면서?” “어, 그게…….” 한참이나 말꼬리를 흐리며 망설이던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신탁이라니……! 뭔가 위험한 일일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뭐?” 잠시 머리가 멍해졌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본인의 속내를 터놓았다. “위험하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인 건 분명합니다. 그, 그런 직감도 들었고요.” 허, 무슨 이런 놈이 있지? 이러니까 신탁을 받은 걸 꽁꽁 숨겼을 거다. 그게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교단의 모두가 그 신탁을 지키기 위해 이놈을 여기저기 굴려댔을 테니. ‘성기사라는 놈이 그런 이유로 그 짓을 했다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나, 달리 생각해 보면 고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한텐 그렇게 숨기는 걸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준 거 아니야. ‘의리는… 합격.’ “저… 그럼 이제 그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저쪽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내 녀석이 교단 측 무리를 보며 말했다. 실제로 저쪽에서는 이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는데, 따가운 눈초리보다는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는 것 같달까? ‘교단에서도 그런 취급이구나…….’ “알겠다. 나중에 또 꿈을 꾸게 되면 내게 바로 말하고.” “그러겠습니다.” “좋은 밤 돼라.” “예. 남작님도요.” 파라브와 대화를 끝낸 후에는 나도 야영지로 돌아와 눈을 붙였다. 다만, 오늘도 어째선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신탁이라…….’ 오늘 녀석에게 들은 내용은 딱히 별게 없었다. 하나 어떻게든 미궁에 들어오지 않으려 발버둥친 녀석이 그러했듯. 무언가 큰 게 온다. 그런 직감이 강하게 꽂혔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해일이 몰려오든, 태풍이 불어오든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 ‘되도록 아껴뒀다가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이윽고 나는 야밤의 모포 속에서 결단을 내렸다. ‘벨라리오스의 정수.’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먹어야겠다. *** 미궁진입 111일 차. 도서관 공략은 어느덧 벌써 이만큼이나 진행돼 3등급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구간에 들어섰다. ‘여기까지 오는 데 고작 5일밖에 안 걸리다니.’ 새삼스럽지만, 왕가의 저력이 느껴진다. 기사, 마법사, 신관. 그 귀하디 귀한 직군들 중에서 인재를 고르고 골라 군대를 만들어 버리니, 밸류 자체가 말이 안 될 지경이라 해야 하나? ‘이 정도면 바로 촌장섬으로 달렸어도 됐겠는데.’ 처음에야 이들이 얼마나 제대로 된 집단인지 알 수 없어 반대를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곧바로 촌장섬에 가서 촌장부터 잡을 걸 그랬다. 촌장이 인간 시절의 정수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 무력 집단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할 테니까. “남작님! 벨라리오스가 그려진 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희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을 전해다준 이는 3조의 기사였다. 내가 벨라리오스를 발견하면 꼭 좀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었거든. “품에 안고 있는 그 책인가?” “예! 찾아내자마자 따로 빼서 가져왔지요!” “고맙다.” “고맙기는요. 우리는 전우 아닙니까!” 호감작을 열심히 해둔 덕분에 얻어낼 수 있던 결과물. 책을 빼서 갖다 준 기사에게는 바바리안족이 보일 수 있는 최대 성의로 육포를 잔뜩 쥐여줘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스윽. 분 단위로 색이 변하는 만년필 끝에 묻은 잉크가 녹색으로 변했을 때. 나는 얼른 책 안에 그려진 벨라리오스의 그림 위를 덧칠한 뒤, 사령관 제롬 세인트레드를 찾았다. “흐음, 4조끼리만 잡고 싶다 이 말이오?” “우리에게 필요한 정수라서 말이지. 자력으로 획득한 것에 대해서는 소유를 인정하기로 했을 텐데?” “그건 확실히 그렇소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시간이 아까우니 잡는 건 다른 조들과 함께하시오. 아, 물론 정수는 드리겠소. 나온다면 말이오.” 정수가 드롭될 가능성이 낮다고 여겼는지, 제롬은 흔쾌히 승낙하는 걸 넘어 사냥까지 도와주기로 했다. 따라서……. “소환하겠습니다!” 그대로 꼽사리를 껴서 벨라리오스를 소환. “처치하라!” 석문 사이로 등장한 벨라리오스의 매끈한 비늘은 기사, 궁수들에 의해 순식간에 걸레짝이 됐고, 전투 시작 후 1분도 채 되기 전에 녀석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솨아아아아아아아-! 큼지막한 마석. 그리고 정수만을 남긴 채. “정수가… 정말로 나올 줄이야. 응? 남작 어디 가시오? 아, 설마… 정수가 필요하다는 게……!” “그래, 나였다.” 어딘가 당황한 듯 보이는 제롬을 내버려두고서 나는 얼른 달려가 정수를 흡수했다. 「캐릭터의 영혼에 [벨라리오스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그래, 이것도 드디어 먹는구나.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방패바바가 완성될 날이 머지않았다. 556화 퍼스트 클리어 (1) 벨라리오스. 내 유일한 약점이었던 마법 피해 방어에 특화된 스킬을 갖고 있는 3등급 몬스터. 이 정수가 가진 기본 스탯은 이렇다. 항마력 +200. 그 어느 몬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높은 항마력. 그리고……. 모든 속성 감응도 +30. 물, 불, 바람, 땅 등등. 그 어떤 속성의 스킬을 쓰던 그 효율을 증폭시켜 주는 감응도. ‘이게 전부지.’ 벨라리오스에게 붙은 스탯인 이 두 개가 전부다. 애초에 여기에 뭔가 더 붙으면 밸런스가 이상해질 정도겠지만. ‘쩝.’ 항상 느끼는 건데, 감응도 대신 내성이 붙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감응도 자체는 엄청나게 가치가 높고 이 게임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스탯이지만……. 불꽃바바, 대지바바를 키웠다면 모를까. 애석하게도 방패바바가 쓸 일은 거의 없다. ‘지금 적용되는 건 스톰거쉬 하나겠네.’ 바람 속성으로 분류되던 [폭풍의 눈], 물 속성인 [기원]. 이 두 스킬은 감응도의 영향을 받아 성능이 좀 더 증가했을 것이다. 언젠가 지울 스킬이라 큰 의미는 없겠다마는. ‘…중요한 건 스킬이지.’ 스탯에 쌍스탯이나 내성 수치가 붙지 않은 건 아쉬우나, 스킬을 생각하면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스탯은 채우면 되니까. (P) 순환의 고리 — 반경 내에서 3등급 이상 마물이 사망 시 일정 확률로 스탯이 증가합니다. 무려 스탯을 늘려주는 패시브. 어느 면에서는 마석을 섭취 시 스탯이 늘어나던 만티코어의 [유전]과도 비슷하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순환의 고리]에는 한계점이 없다. 뭐, 스탯이 늘수록 발동 확률이 감소해서 총합이 400을 넘은 뒤에는 거의 올라가지 않지만. 아무튼. (A) 탐욕의 비늘 — 항마력에 비례해 추가 보정이 추가됩니다. 결국, 이 정수의 핵심은 액티브다. ‘심해거인에서 35. 바이욘에서 20, 오우거가 80, 벨라리오스가 200.’ 여기에 [유전]을 지우며 얻은 게 40. 그리고 균열을 돌며 영약으로 챙긴 게 8이니……. ‘총 383.’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383에 대지룡 축복으로 30%를 추가하면……. ‘497.9.’ 아쉽게도 500에는 조금 못 미치는 수치. 하나 여기서 [거대화]가 코어 스킬인 이유가 한 번 더 등장한다. 그야 애초에 대지룡 축복은 방패바바 육성법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 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굳이 [초월] 거대화까지는 하지 않고, [야성분출]로 한 번 더 스탯을 뻥튀기 시키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이미 500은 충분히 넘었을 터.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이내 스킬을 사용하자, 바바리안 특유의 두꺼운 피부 위로 푸른색의 비늘이 돋아난다. “오오! 비요른이 리자드맨으로 진화한다!” 거, 리자드맨이라니 섭섭하게. 나는 순식간에 변한 몸뚱이를 쓱 내려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500 이상입니다.」 「받는 모든 마법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흡수한 마법 피해에 비례해 물리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마침내 바바리안 드래곤 모드를 손에 넣었다. *** 정수를 먹고 스킬을 직접 써보며 감격하기도 잠시. “남작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하오. 그러나 일단 당장은 임무를 재개했으면 하오만.” 분위기를 초 치는 제롬의 말과 함께 나는 다시금 사냥터로 끌려나가야 했다. 어휴, 누가 임무밖에 모르는 바보 아니랄까 봐. 조금 얄밉기는 했으나, 효율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반타오를 처치했습니다.」 「엘더 와이번을 처치했습니다.」 「플릿윈더를 처치했…….」 이제 3등급 몬스터는 잡을수록 이득이거든. 솨아아아아아아-! 한 일곱 마리쯤 잡았을 때, 내 머리 위로 천사링 같은 것이 형성되며 처치되어 사라지던 빛무리를 끌어당긴다. [순환의 고리]가 발동될 때의 이펙트였다. 아우옌에게 작용되는 걸 몇 번 봐서인지 크게 신기할 건 없었지만. 「항마력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근데 시스템 메시지가 없으니 뭐가 올랐는지를 모르겠다.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마탑에 가서 스탯 확인을 하든가 해야지. 높은 확률로 육체 스탯이 오르긴 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아슬아슬했을지도, 지금부터는 더 달라붙자.’ [순환의 고리]에는 발동 매커니즘이 존재한다. 처치된 몬스터가 반경 1m 내에 있을 경우 육체 스탯이 증가할 확률이 대폭 증가하고, 반경 5m 내일 경우에는 완전히 랜덤. 반경 10m 이상 떨어졌다면 이능과 관련된 스탯의 확률 보정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 당연히 연구는 내가 했다. “일시 중지! 3조와 임시 4조는 1조, 2조와 임무를 교대한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머지않아 사령부에서 교대를 명했다. 그 명령에 노가리를 까던 기사들은 전부 표정이 밝아졌지만, 나는 예외였다. ‘아… 그냥 계속 여기서 스탯이나 쌓고 싶은데.’ 3등급 이상 몬스터를 이렇게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언제 또 오겠는가? 탐사군과 함께일 때 되도록 꿀을 빨고 싶다. 하지만……. “남작께서는 군을 이끈 경험이 없으니 잘 모를 수도 있겠소만, 규율은 규율이오. 반드시 지켜져야 하오.” 사령관 제롬은 그런 내 요구를 단칼에 쳐냈다. 한 번 선례가 남으면 이를 이용하는 자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라던가? 더 따져봐야 없던 융통성이 생길 거 같지는 않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퍼엉! 콰아아앙-! 파즈즈즛-! 그렇게 석문 앞을 떠나 높디높은 책장을 오가며 책을 퍼나르고 있자니, 아래에서 펼쳐지는 전투가 새삼 잘 보였다. 후우우웅-! 기사들이 뽑아내는 형형색색의 오러. 솨아아아아아! 전투 내내 신관의 힐이 광역으로 쏟아지는 만큼, 기사들은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힐리아트 벤다이 티울론!” 수십 명의 마법사가 합동 마법을 펼치며 막강한 화력을 쏟아낸다. 만년필을 끝까지 아끼겠단 계획을 틀어가면서까지 이 정수를 일찍 획득한 이유이기도 했다. 최악을 대비해야 하니까. ‘마법사들이 많아도 너무 많단 말이지.’ 만약 저들이 내 적으로 돌변한다면,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금이라면… 최소한의 반격은 할 수 있겠지.’ 후, 그런 의미에서 아멜리아한테도 정수를 먹여야 하는데. 한 번 남은 만년필을 또 쓰기는 좀 그렇고. 기다리면 운 좋게 나와주려나? “아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넌 왜 그렇게 항상 내 생각이 궁금한 거냐?” “아하하… 그러게요? 왜일까요……?” “실없기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책을 뽑아 나르고 있자니 어느덧 다시 교대 시간이 왔고, 다시 한번 더 교대를 할 때쯤에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그런 하루가 몇 번이나 더 반복됐을까. 미궁 진입 114일 차. 오후 4시. 우기까지 8시간만을 남겨둔 그 시기. “…사령관님, 이제 마지막 책장에 도달했습니다.” 도서관 공략의 끝이 다가왔다. *** 솔직히 조금 놀랍다. 고작 일주일 만에 도서관의 엔드 컨텐츠까지 오는 게 가능할 줄이야. 한 달 넘게 사냥을 하고서도 3등급과 2등급 선에서 끝났던 우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 다만, 그래도 변명 거리는 있다. 얘네는 사냥이 아니라 공략이 목적이었으니까. 최대한 많은 3등급 몬스터를 잡았던 우리와 달리, 탐사군은 층별로 딱 한 권씩만 꺼내서 소환하며 층수를 높여갔다. 그리고 그 결과.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전군은 자유롭게 쉬며 대기하라!” 매일 밤늦게까지 결코 소환을 멈추지 않던 왕가의 군대가 처음으로 모든 임무를 중단하고서 대원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아, 물론 수뇌부들은 예외였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널브러져 쉬며 체력과 MP를 회복하는 사이, 나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회의에 참가했다. 모두 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나야 마지막 책에 1등급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을 햄식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얘네는 아니거든. “혹시나 했으나, 정말로 마지막 책장에서 1등급 마물이 등장했습니다.” 회의를 주관하는 부사령관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은 채로 옅게 떨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사령관님께서는 설령 그 상대가 1등급 마물이라고 해도 임무를 속행하겠다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심 예상한 말이었으나, 이를 들은 탐사군의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잠시간의 동요가 일었다. “1등급 마물이라니…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하외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드는군요.” 이들의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도 희생이 없던 게 아니니까. “사령관님, 벌써 일곱 명이 전사했습니다……!” 전투 중에 일곱 명이 죽었다. 여섯 명은 탐사군 출신의 기사. 한 명은 아르민 탐사단 소속의 전사였다. 그야 아무리 신관이 많아도 즉사를 당하면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 ‘요즘에는 팔다리가 날아가는 건 예삿일도 아니지.’ 실제로 바로 전 소환책만 해도 2등급 두 마리, 3등급 네 마리가 나왔고, 이제는 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전원이 전투에 참가했다. 그럼에도 그 전투에서 날아간 팔다리만 해도 스무 개가 넘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신관이 전부 붙여주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이런데 1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피해를 더 입는다면, 이는 왕실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이내 한 기사가 우려를 표하며 직언을 올렸지만, 사령관 제롬은 단박에 이를 잘라냈다. “그만.” “…….” “신성한 왕가에서 부여한 임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이 뒤따를지라도.” 상명하복이 원칙인 군대답게, 제롬이 딱 잘라 말하자 불안감을 표출하던 기사도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눈치를 쓱 보던 부사령관은 다시금 회의를 재개했다. “임무를 속행할지 말지는 이번 회의의 안건이 아닙니다.” 이미 싸우기로 정한 제롬이 지휘관을 전부 불러 모아 회의를 연 이유는 오직 하나. “현재 확인된 일곱 종의 마물 중에 누구를 소환하는 게 나을지, 어느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내주십시오.” 무엇을 소환하는 게 가장 합리적일 것인가.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자 다양한 의견이 곳곳에서 나왔고, 나는 일단 묵묵히 들으며 하나씩 평가했다. “레비아탄이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은 바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형적인 이점을 많이 받던 마물인 만큼 공략 난이도가 비교적 낮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단 레비아탄은 틀린 선택이다. 근거는 그럴듯하지만, 애초에 레비아탄을 잡을 수 있는 조합이 아니거든. “톨-라푸파는 어떻습니까? 수비에 특화된 마물인 만큼, 시간만 오래 투자한다면 가장 피해 없이 잡을 수 있는 선택지라 생각됩니다만.” 따라서 이것도 기각이다. 기사가 많기는 해도, 결국 이 탐사군의 핵심 딜러는 마법사니까. 이 조합으로는 절대 놈의 껍질을 못 뚫는다. “저는 카샨을 소환하는 게 옳다고 보는—.” “글쎄요. 카샨보다는 리드거가 훨씬 나은 상대라고 저는—.” 이후로도 수뇌부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고, 때론 서로 반박하거나 동의를 하며 힘을 실어주는 등의 대화를 나눴다. 물론 내가 보기엔 같잖았다. 1등급 몬스터는 사실상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잡아본 놈이 드문 전설 속 마물이나 다름없기에 다들 근거라고 제시하는 게 현실성이 떨어졌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나?’ 비록 게임에서의 얘기일지라도, 1등급 몬스터는 수도 없이 잡아왔다. 그런 내가 보기에 이 회의는 의미가 없었다. 누구를 잡아야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지를 중점으로 의논을 나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실패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진심으로 일곱 종 중에 누구를 소환해도 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남작은 아까부터 말이 없구려?” “…나 말이냐?” “혹시 남작께서는 의견이 없으시오?” 아, 그거. 사실 안 그래도 언제 말을 꺼낼까 했는데 알아서 멍석까지 깔아주네. “있다.” 내 말에 회의에 참가한 수뇌부들이 강한 흥미를 보내며 내게 집중했다. “하나를 소환한다면, 그건 카샨이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인 그 말에 수뇌부들이 눈을 빛냈다. “그 예언의 늑대를 말이오?” “역시 남작께서도 저와 같은 의견이시군요.” 누군가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자신과 의견이 일치한단 것에 흡족해했다.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카샨이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소이까?” 탐사군의 서열 1위 마법사는 어딘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마치 생각없는 바바리안이라도 보듯이. ‘얘는 레비아탄을 소환해야 한다는 쪽이었지.’ 이내 노마법사가 나를 보며 훈계하듯 말했다. “카샨은 앞서 말한 마물들 중에서 가장 공격성이 높은 개체. 그만큼 우리 탐사군도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하오.” 거, 마법 좀 잘 쓰고 공부 좀 했다고 전부 통달한 척하기는. “한데 그럼에도 다른 마물들을 두고서 꼭 카샨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말해보시오. 만약 모두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이유라면 있다.” “…응?” 이 할배는 왜 먼저 물어봐놓고 이유가 있다고 답하니 놀라는 눈치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톨-라푸파고, 레비아탄이고 뭐고.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긴. “애초에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게 그놈뿐이니까.” 나머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잡는다는 뜻이다. 557화 퍼스트 클리어 (2) 몬스터에게도 인지도라는 게 있다. 예시로 들자면, 일반인들에게 벨라리오스에 대해 말하면 백이면 백 처음 듣는단 반응을 보일 테지만. 오우거, 오크, 트롤, 고블린, 미노타우로스. 이런 녀석들에 대해 말할 땐 곧바로 머릿속에 형태를 그린다. 하면,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 ‘설화.’ 내가 보기에는 이야기의 유무가 컸다. 지구인들이 어려서부터 인어공주, 호두까기 인형 같은 동화들을 읽는 것처럼, 이곳의 현지인들도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란다. 간교한 고블린. 무식한 오크. 미궁의 미노타우로스 숲의 폭군 오우거. 이야기가 있는 몬스터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접두사가 붙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1등급 몬스터도 매한가지였다. “……다들 들었소? 어쩌면 카샨, 레비아탄과 같은 괴물들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던데.” “그 예언의 늑대와 해극신을 말이오?” 예언의 늑대 카샨. 해극신 레비아탄. 때로는 아예 접두사만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기에 처음엔 뭔가 싶었다가 나중에 따로 찾아보고서야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게 되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정말 그들을 만나서 처치할 수 있다면 실로 전설적인 위업이 되겠구려.” “저는 좀 우려가 됩니다. 그런 마물을 저희만으로 상대하는 게 가능할지…….” 1등급 몬스터를 사냥할 것이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 탐사군 내에서도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하하, 걱정이 많으시구려. 막말로 만나는 게 원체 힘들어서 전설처럼 취급받는 거지, 결국 본질은 마물 아니겠소? 지금 우리 전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흐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마는…….” 낙천적인 자와 불안을 표하는 자. 그리고 그런 여론을 확인하듯 주변을 둘러보던 제롬이 눈짓하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마법사가 얼른 다시 음성 제어 마법을 사용했다. “카샨 말고는 잡을 수 없다라……. 남작께서는 좀 더 소상히 말해보겠소?” “자세히 말할 것도 없이 말 그대로다. 그러니 너는 판단만 해라. 마법사의 말을 따를지, 아니면 탐험가의 말을 따를지.” 내 말에 옆에 있던 할배 마법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물론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남작이 경험을 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소만, 그래도 우리들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기록을 파헤치고, 지식을 익힌 자들이오.” “그래서?” “우리의 선택지가 하나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구려. 가장 최근에 처치된 1등급 마물의 경우엔, 전투에 참가했던 인원이 불과 40명에 불과했소. 그리고…….” 이내 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에 가득한 탐사군에게로 시선을 보냈고, 그제야 나는 이들의 자신감의 원천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40명이서 했다고, 너희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군.” “그렇소. 왕가에서 고르고 고른 최고의 인재들이 무려 이백에 달하는데, 해내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소?”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지. 네가 말한 그 40명은 수십 년 전에 차원붕괴로 해체된 뱃놀이 클랜을 말하는 건가?” 내 질문에 할배가 조금 놀란 눈빛을 지었다. “…아시는가 보구려?” 그야 나도 게임 내 지식만 믿지 않고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내가 알기로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왕국에서 제일 가는 탐험가였다. 그리고 무려 반년이 넘게 준비를 했지. 단 한 번의 전투를 위해서, 그들은 수억 스톤의 거금을 들여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구했다.” “물자라면 우리 탐사군도 충분한 양이—.” “베실러스 경, 남작의 말을 방해하지 마시오.” 이내 제롬이 뭐라 반박하려던 할배 마법사를 조용히시켰고, 덕분에 나는 한결 편안하게 마저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물자가 충분하다고? 그럴 리가. 우리는 고작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1등급 마물과 상대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너는 포션이나 스크롤 따위로 1등급 마물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질문에 할배 마법사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남작의 논리대로라면, 카샨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지 않소? 준비가 부족한 건 피차일반일 터인데.” 그래,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옳다구나 하며 틈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카샨은 1등급 마물 중에 가장 내구성이 떨어지는 개체다.” “하지만 카샨은 그만큼 공격성이 높소이다.” “그래서 이놈은 잡는 게 가능한 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근거를 찾는 말에 나는 엄지로 나를 가리켰다. “그야 내가 있으니까.” “……?” “나라면 놈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다.” “허……!”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노마법사가 말을 잃기도 잠시, 나는 얼른 다른 합리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게다가 카샨은 널리 알려진 공략법은 없다. 이걸 바꿔 말하면 그런 준비 없이도 잡을 수 있는 개체라는 뜻이지. 희생이 좀 따를지언정, 카샨이라면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저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베실러스 경?” “……저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 어떤 마물도 잡을 수 있고, 동시에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그저 내 말을 부정할 뿐인 말. 다만, 제롬은 이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에 잠긴 제롬을 보며 할배 마법사가 간신처럼 속삭였다. “세인트레드 사령관, 차라리 모두에게 물어보고 정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 의견대로 레비아탄을 소환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남작의 말을 따르는 게 나을지.” 쉽게 말해, 투표를 열자는 뜻. 나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바바리안의 말을 믿을지 노마법사의 말을 믿을지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머리 좀 썼네.’ 투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런 일념으로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불가하오.” 제롬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불가하다니, 어째서입니까?” “고작 둘뿐인 선택도 하지 못해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베실러스 경, 그런 지휘관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믿음을 얻어낼 수 없다오.” “……이건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니라, 단지 의견을 물을 뿐인—.” “마찬가지요. 지휘관이란,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를 뜻하는 것이니.” 이내 제롬이 노마법사의 말을 일축하며 단호하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좋아, 결정했소.” “결정했다 하심은?” “카샨, 그 예언의 늑대를 소환할 것이오.” 그리 말한 제롬은 어느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할 분위기에서 말을 이었다. “이는 온전히 나 스스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며, 이 판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바로 내가 질 것이오.” “…….” “그러니 다들 그리 알고 준비를 하시오.”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그 모습에 다른 수뇌부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니아 라프도니아……!” 후, 역시 왕국에는 인재가 많구나. *** 회의가 끝난 후. 결과를 우리 4조 멤버들에게 공유하고 있던 때, 제롬이 나를 찾아왔다. “남작,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물론이다.” 둘이 으슥한 곳으로 갈 것도 없이, 사령관의 등장에 모두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고, 마법사는 그도 모자라 음성제어 마법까지 써줬다. “후후, 이렇게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었건만.” “웃대가리란 무거울수록 좋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 말도 있소?” “아니, 내가 만들었다.” “…….” “그래서 무슨 일이지?” 이내 용건을 묻자 제롬도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베실러스 경은 내가 잘 관리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하러 왔소.” “관리한다니……?” “남작과 마탑 사이에 마찰이 있었지 않소? 그것 때문인지 일부러 남작 말을 인정하지 않고 오기를 부리는 듯하더구려.” “…카샨에 대해서 지식이 있었나?” “지식이랄 것까지야. 남들 아는 만큼만 알고 있소. 사실 뱃놀이 클랜에 대해서도 아까 처음 들었소. 나는 탐험가가 아니니까.” “…그런데 마법사가 일부러 인정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탐사 경험이 없을 뿐, 사람에 대해서 무지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베실러스 경은 표정을 읽기가 쉬운 편이라오.” 의외인 면모였다. 석문을 부수니 뭐니 하고, 머리 아픈 일들은 전부 부사령관에게 시키기에 돌대가리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라 이거지?’ 사실 이런 타입이 제일 까다롭다. 힘을 써야 할 때와 머리를 써야 할 때를 숨 쉬듯 자연스레 구분을 해내니까. 어찌 보면 나와 비슷한 타입이라 볼 수 있는데……. “아무튼,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시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좋든 싫든 전우가 아니겠소?” “걱정 마라.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니까.” “하하, 그렇소?” “그나저나… 너도 고생이 많군.” “글쎄, 고생이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그냥 태생부터가 군인 체질이었나 보군.” “후후, 남작도 이참에 군에 들어오는 건 어떻소? 나름 잘 적응할 거 같소만.” 거, 끔찍한 소리를 해대기는. ‘그래도 진짜 예상외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놈일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앞으로 친하게 지내는 게 가능할지도—. “그나저나 남작.” “……응?” “혹시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부탁이라니?” “보면 볼수록 기억 속 어느 인물과 닮은 거 같아서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정말로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왠지 불길하게 들리는 말로 밑밥을 깔던 제롬이 팔과 허리 사이에 끼고 있던 물건을 내게 건넸다. “여기 이거, 한번 써보시겠소?” 얼굴 전체를 가리는 형태의 투구였다. “…배, 배가 고파서 먼저 가보겠다!” ……친하게 지내기는 개뿔. 이놈은 그냥 앞으로도 최대한 피해 다녀야지. *** 1등급 야수종, 예언의 늑대 카샨. 놈을 소환하기로 결정났지만, 그렇다고 당장 소환해서 레이드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야 1등급 몬스터는 만만한 적이 아니니까. 체력도 MP도 모두 회복한 최상의 상태를 갖출 필요가 있을뿐더러……. “전군은 들어라! 베실러스 경이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할 마물에 대해 설명할 것이니!” 전략을 세우기 앞서 패턴 숙지가 필수다. 3등급, 2등급 몬스터를 소환할 때처럼 필요한 것만 골라들어서는 변수에 대비할 수 없으니까. “크흠흠, 반갑소, 제군들. 다들 아시겠지만, 본인은 제 1차 탐사군의 수석 마법사 직위를 맡은 가휜 베실러스라 하오. 지금부터 예언의 늑대, 카샨이 가진 특성에 대해 설명할 것인데, 일단 그 이름의 유래는…….” 이론과 지식에 빠삭한 노마법사의 설명은 지루하단 말로도 부족했으나, 다들 본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졸지 않고 들었다. 아, 한 사람만 빼고. 드르르르르르렁! 드르르르르르르르르컹컹! 코까지 골며 곤히 잠든 아이나르를 보며 노마법사의 이마에 핏줄이 새겨졌지만, 내가 신경 쓰였는지 별말 없이 넘어갔다. ‘후… 얘한테는 바바리안식으로 나중에 따로 말해주든가 해야지.’ 여하튼, 그러한 이론 교육이 있은 후에는 각 다시금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포지셔닝, 사용할 소모품, 레이드 중에 딜싸이클을 어떻게 돌릴지 등등. 몇 시간 동안이나 회의를 이어가며 논의했고, 이이 과정에서는 예상과 달리 훈수를 놓을 부분이 없었다. 그야 손 댈 게 없었거든. “세인트레드, 너는 혹시 이런 마물과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는 건가?” “흐음… 부족한 게 있다면 말해주시오. 내 귀를 열고 들으리다.” 어… 돌려까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단지 흠 잡을 게 없어서 놀란 거라고 말해주자 제롬이 기쁘다는 듯 웃으며 겸손의 말을 해왔다. “이거 참, 젊은 시절에 미궁 전술학을 들어두기를 잘했구려.” “미궁 전술학? 기사가 될 때 그런 것도 배우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소. 단지 내 부친께서 조금 특이한 분이셨지.” “…그렇군.” 그렇게 1차적인 회의가 끝난 후엔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전투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여럿이서 이러고 있으니까 TRPG라도 하고 있는 거 같네.’ [던전 앤 스톤]을 할 때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왔기 때문일까? 이런 식의 대화가 나름 재밌게 느껴진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면 되겠구려. 내일은 전군을 동원해 모의 전투를 할 테니, 일찍들 주무시오.” 아무튼, 계획 수립도 끝났겠다. 다음 날은 다 같이 석문 앞에 모여 동선을 숙지하고 전투 리허설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거기 너! 위치가 틀렸다! 네가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아, 죄송합니다……!” “너… 이름이 뭐지?” “켈트 아비슨—.” “틀렸다! 네 이름은 인간의 수치다!!!” “……?” “죄송하다고 끝나면 군법은 왜 있나? 너는 머리에 문제가 있나? 저기 봐라! 바바리안인 아이나르도 자기 자리를 잘 찾아가는데!” 모의 전투가 실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나는 최대한 엄격하게 이들을 다그쳤다. 혹시 모르잖아. 이거 덕분에 죽을 운명이었던 놈이 살아날지. “……남작께서는 실로 무서운 분이셨군.” “나, 나도 모르게 수습 기사였던 시절이 떠올랐네.” “다들 너무 속상해하지 말게. 아직도 남작님을 모르나? 전부 우리 잘 되라고 하는 말 아닌가!” “하긴… 저러는 동안에도 마음은 찢어지고 계시겠지.” 미리 호감도를 잘 쌓아둔 덕인지, 그런 행동에도 크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끝이다. 내일 정오까지는 그 어떤 임무도 없을 터이니, 그때까지 모두 푹 쉬며 정신을 단련해라!” 모의 전투가 끝난 후에는 평소보다 일찍 야영지를 꾸리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정오. “전군 제자리로!” “제자리로!” “책을 제단 위에 올려라!”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서서 석문을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드드드드드드드드-! 석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푸른 안광이 번뜩인다. 또한 어둠 속에서 천천히. 쿠웅—! 꺼림찍한 오오라를 뿜어내는 네 발 달린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캐릭터가 [불길한 예언]에 노출되었습니다.」 「행운 수치가 -200으로 고정됩니다.」 자, 해보자. 558화 퍼스트 클리어 (3) 각 직업군이 고심 끝에 정한 위치에 서 있는 진형. 원거리 딜러들 사이에 근접 딜러를 배치하기도 하고, 기사들로만 이뤄진 타격대도 측면에 존재하는 등. 원거리는 후방에, 근접은 전방에만 위치하는 그런 주먹구구식의 진형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안정성을 챙기고,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모두가 위치를 잡았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꽈악.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석문 바로 앞. 참고로 주변에는 그 어떤 동료들도 없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 지금부터 오롯이 나 혼자서 저 괴물을 상대로 버텨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다. 이게 최선의 방법이란 건, 나도 동의했으니까. [그르르…….] 석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 속의 짐승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려내며, 탐색하며 보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하긴, 고작 한 명이 방패를 들고 서 있는 게 이놈 입장에선 신기할 수도 있겠지. ‘꼬나보기는.’ 실제로는 처음 상대하는 1등급이라 그럴까?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관절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적이 강할수록 투쟁심이 솟아나는 것 또한 바바리안의 특성. 꽈악. 방패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나는 놈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화] 상태인 나보다 두 배는 큰 몸집. 네 발 달린 짐승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몇 배는 더 크다고 봐야 한다. 한데 그런 거대한 몸집에 신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붉은 털과 눈깔이 달린 세 개의 꼬리, 주위로 뿜어내는 검붉은색의 안개까지 합쳐지니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뭐, 바바리안은 처음 보냐?” 사람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녀석이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전투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고로, 전투 함성을 뱉으며 있는 힘껏 [휘두르기]. 쿵-! 풀파워로 콧잔등을 가격했지만, 애석하게도 놈은 간지럽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선빵 판정은 제대로 적용됐을까. “……!” 육안으로 정확히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놈의 거대한 아가리가 내 방패를 씹어먹을 듯이 위아래로 움켜쥐고 있었다. 놀란 감정과 별개로 웃음이 나왔다. 보통 방패라면 저 주둥이에 들어간 순간 고철 덩이가 됐을 테지만, 내 방패는 다르다. ‘그거 파괴 불가야 새끼야.’ 1등급 몬스터고 뭐고, 싱글 넘버스에 붙은 파괴 불가 옵션을 뚫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근력에서도 내가 딸린다는 거지만. ‘어어? 이런 씹……!’ 이내 놈이 방패째로 물어서 나를 들어 올린 뒤,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어댄다. 멀미가 날 거 같았지만, 여기서 방패를 놓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기에 최대한 열심히 방패를 잡고서 버텼다. 다행히 머지않아 지원 사격이 가해졌다. 「가휜 베실러스가 1등급 공격 마법 [개벽의 구]를 시전했습니다.」 탐사군의 수석 마법사가 수십 명의 마법사들의 마력을 쪽쪽 빨아내서 완성한 1등급 공격 마법. ——————! 섬광이 번뜩였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주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고 중심지를 확인하니, 크게 피해를 입은 녀석이 보였다. [그오오오오오오—!!] 뒷다리 쪽에 맞았는지, 그쪽 털이 몽땅 타버리고, 다리까지 절뚝이는 녀석. 다만, 나는 아주 멀쩡했다. 물론 바로 지척에서 터진 1등급 마법이었기는 했지만……. 핏빛성채에서처럼 생고기가 되는 일은 없었다. 「결속 상태의 아군이 입힌 피해입니다.」 「신뢰의 빛이 해당 피해로부터 캐릭터를 보호합니다.」 할배랑 이미 결속 마법을 걸어뒀거든. ‘신뢰’에 부여된 넘버가 12인 이유다. 아군의 딜을 받지 않는다는 건, 이 세계관에서 엄청난 혜택이니까. ‘다시 마력을 모으고 영창을 해야 하니, 다음 포격은 약 3분 뒤.’ 따라서 지금부터는 모두가 할 일이 많아진다. 1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3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 「카샨이 [삼미안]을 시전했습니다.」 녀석이 지닌 세 개의 꼬리가 촤악 펼쳐지며, 그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눈알이 크게 떠진다. 그리고……. 퓨웅! 퓨웅! 퓨웅-! 영화에서 보던 레일건처럼 광선을 쏘아낸다. ‘좌측 꼬리는 마법 딜에 저주, 우측 꼬리는 물리 딜에 방깎, 중앙은 혼합딜에 토큰몹 소환.’ 각 꼬리들의 효과를 상기하며 최대한 열심히 광선들을 막아냈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 원래는 무차별적으로 타격하는 스킬이나, 위협 수치가 높아서인지 전부 다 나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캐릭터가 균형을 잃습니다.」 잘 막아내고 있던 와중에 뜬금없이 발이 미끄러지며 자세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광선이 몸을 타격한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캐릭터가 입는 모든 피해가 10% 증가합니다.」 이거… 방깎 꼬리였지? 중첩이 너무 많이 쌓이면 안 되는데. ‘빌어먹을 행운.’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실수. 그러나 굳이 자책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수가 아니라 놈이 가진 스킬의 효과였으니까. 행운을 -200으로 고정시키는 [불길한 예언]. 이 오오라 내에서 전투 시에는 이런 일들이 수없이 발생한다. 바로 이렇게. 「회피 실패.」 피해냈다고 생각한 일격이 몸에 꽂히고. 「치명적인 일격.」 「캐릭터가 받는 피해가 대폭 증가합니다.」 팔이 저리고 끝났을 법한 공격에 관절이 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카샨이 [수명약탈]을 시전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탐사군의 몸에서 반투명한 붉은실이 뽑혀져 나오며 녀석과 이어진다. 놈이 가진 유일한 회복기. 장내에 200명이 넘게 있는 만큼 놈의 부상이 빠르게 아물었지만, 대응법은 이미 숙지를 시켰기에 큰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우리 근딜의 80%가 기사거든. “줄을 끊어라!” “오러! 오러를 사용해라!” 실이 이어진 즉시, 곳곳에 배치를 해둔 기사들이 실을 베어내며 놈의 회복기를 중단시켰다. 보통 대여섯 번은 넘게 쳐야 제거가 되는 실들은 물리 내성과 항마력 무시 90% 효과를 지닌 오러 앞에서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오케이, 그럼 회복기는 끊었고.’ 쿨타임이 있으니 다음 회복기를 꺼낼 때까지는 약 2분 정도 시간이 남은 셈. “돌격하라!!” 이내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 명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한데 그래도 일주일 넘게 동고동락을 해서일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내심 바랐다. “니아 라프도니아……!” 부디 많이 살아남았으면 좋다고. *** 서걱, 푸욱-! 콰아아아아앙-! 딜 하나만큼은 확실한 기사들의 오러, 그리고 탐사군 멤버로 뽑힐 만큼 수준 높은 화력을 지닌 원거리 딜러들에 의해 카샨의 가죽이 실시간으로 난자됐다. 보통의 상황에선 절대 하지 못할 전략이었다. 1등급 몬스터부터는 요구되는 위협 수치가 미친 듯이 높아지니까. ‘위협 수치가 500 이상일 시 모든 몬스터가 착용자를 우선적으로 공격함.’ 위 효능을 가진 ‘아이기스의 장벽’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매순간 기사들이 저놈 이빨과 발톱에 씹혀 나가고 있었을 터. ‘그래도 화력은 좋으니, 나 없이도 어떻게 잡기는 했을 거 같네.’ 아, 물론 100명쯤은 죽은 다음에 말이다. 나 하나 덕분에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살린 거야? 부디 사령관도 내 공적을 알아줬으면 하는데—. 「카샨이 [종말의 불]을 시전했습니다.」 그때 바닥에 붉은색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이번 전투를 준비하며, 두 번째로 위험한 것이라 판단했던 바로 그것. “어서 대피하라!!” 오퍼레이터 역할을 맡은 부사령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 콰아아아아아앙-! 약 1초 정도 그림자가 생겨난 지역으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사실상 거의 즉발에 가까운 광역기. ‘저기는 레이븐이 있는 방향인데…….’ 아찔한 마음에 잠깐 고개를 돌려 확인한 순간, 혼비백산 달아나는 마법사들 사이로 아이나르에게 멱살이 잡힌 채 끌려나오는 레이븐이 보였다. ‘후… 무사하구나.’ 다만,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종말의 불]은 추가타가 있는 스킬이니까. “마법사들은 결계를 전개하라!” 부사령관의 오더가 한 번 더 이어짐과 동시에 각 임무를 배정받은 마법사들이 보호 결계를 작동시켰다. 첫 타와 달리 추가타는 대미지가 훨씬 낮기에 결계로도 막는 게 가능한 것인데……. 솨아아아아아아-! 불기둥이 솟아난 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속속들이 결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투두두두두두- 쏟아져내리는 불비를 피해 후방의 병력들이 다급하게 결계 안으로 들어선다. 다만, 애석하게도 대피에 실패한 자들이 있었다. “아, 안 돼……!” “……아아아아악!” 마법사 한 명과 그의 대피를 돕는 게 임무였던 궁수. 그 둘은 불비에 휩쓸린 채 그대로 녹아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동료의 죽음을 본 기사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2조의 엘튼 파시어, 3조의 퀼컨 베틀런, 이하 두 명 전사!” 어느 상황에서도 전황 보고가 우선이라는 군인의 판단. ‘나도 집중하자.’ 사실상 1등급 몬스터는 모든 스킬이 즉사기라고 봐야 한다. [삼미안]에서 쏘아지는 광선만 해도, 내가 아니라 딜러가 맞았을 경우에는 한 방에 사라질 터. 내가 내 일을 잘해야 사람이 죽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야성분출]을 시전하며 한 번 더 위협 수치를 끌어 올린 뒤, 놈에게 바짝 달라붙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영창이 완료됐습니다!” “타격대는 모두 뒤로 물러나라!” 마법이 완성되며 내 주위에 가득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고. 그렇게 다시 한 번 더. ———————! 쏘아진 1등급 마법이 놈의 몸뚱이에 정확하게 명중한다. 한데 이번에는 좀 더 치명적인 위치였을까. 「카샨이 [종말의 불]을 시전했습니다.」 놈이 한 번 더 광역기를 사용함과 동시. 「카샨이 [사형선고]를 시전했습니다.」 놈이 새로운 스킬을 꺼냈다.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가장 위험하다고 진작에 판단을 내린 바로 그것이었다. *** [사형선고]. 말만 들으면 즉사기처럼 보일 테지만, 엄밀히 따지면 즉사기는 아니다. 그저 효과가 그와 비슷할 뿐. 「행운 수치에 비례해 다음으로 입히는 피해가 대폭 증가합니다.」 행운 스탯에 따른 피해 증폭. ‘[사형선고]의 피해량 증폭은 행운 10당 200%.’ 딱 1등급 정수스러운 성능. 다만, 여기서 문제는 카샨이 기본으로 갖고 있는 행운 스탯이다. 오랜 연구 결과 카샨의 행운 수치는 약 500에 달한다. 그 말인즉슨. ‘10,000%.’ 맞으면 그냥 죽었다고 봐야 한다. 1등급 몬스터의 평타는 상위권의 기사조차 한두 방을 맞으면 사망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으니까. 물리 내성을 잔뜩 올린 나조차도 방패로 막아내지 못하면 뼈가 부러진다. 물론 방패로 ‘가드’만 제대로 해낸다면 아무런 피해도 없이 막아낼 수 있을 터이나…….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문제는 이게 모두 운에 달렸단 거겠지. ‘후…….’ 다행히 첫 [사형선고]는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나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단 걸 알기 때문일까?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쿵쾅거리며 불현듯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억지로 다리에 힘을 불어넣으며 나는 앞으로 남은 횟수를 계산했다. ‘세 번에서 네 번.’ 빨리 쓰러뜨릴 수 있다면, 세 번. 만약 조금 늦는다면 네 번. 앞으로 내가 받아내야 하는 [사형선고]의 횟수. ‘전부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피식 웃었다. 막아낼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았다. 설령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버틴다. 팔다리가 찢겨나가고, 내장이 터져도 쓰러지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럼 전부 해결되는 문제 아니겠는가. 「카샨이 [수명약탈]을 시전했습니다.」 그렇게 생전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전투가 이어진다.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카샨이 [종말의 불]을 시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전사자에 관한 보고가 이어지고, 그 보고 속에 내 동료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는다. 「가휜 베실러스가 1등급 공격 마법 [개벽의 구]를 시전했습니다.」 벌써 세 번째로 완성된 마법이 놈의 머리에 꽂히고. 녀석은 1등급 몬스터답게 그럼에도 멀쩡히 움직이며 끈질기게 나를 노려왔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그렇게 두 번째 [사형선고]를 운좋게 막아내고. 「카샨이 [운명교차]를 시전했습니다.」 놈이 자신의 생명력이 50% 이하일 때 꺼내는 스킬을 시전한다. 피융-! 퓨웅! 피융-! 이 와중에도 꼬리에서 나오는 광선은 여전히 내게 날아들었고, 간간이 방어에 실패하며 내 몸에 꽂혔다. 받는 피해량이 증가하며, 저주가 중첩되고. 「역병늑대가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을 향해 돌진합니다.」 토큰 형태의 몬스터가 소환된다. 그 와중에 [종말의 불]이 내 위치에 터져 나오기도 했다. 놈이 달려드는 상황이라 회피는 불가능. 「캐릭터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패시브 스킬 [영웅의 길]로 인해 모든 저항력 및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지만, 실제로 녹아내리진 않았다. 살점이 바짝 구워져 뜯겨나가고, 장기가 익었는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으나, 항마력 덕분에 즉사는 면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솨아아아아아아-! 신관의 힐을 받으며 방패를 쥐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카샨이 [사형선고]를 시전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시전 된 세 번째 [사형선고]. “…….” 어째선지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며, 정신이 가속한다.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의문만이 가득했다. ‘지금 상태에서.’ 저걸 맞으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스스로 묻고 답한 결과, 그 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살아남을 수 없다. 1에 1을 더하면 2인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인과다. 이를 깨달은 즉시,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그러나 결코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이내 휘둘러진 놈의 앞발이 방패를 내리찍는다. 정말로, 느닷없이 넘어지거나 하는 등의 불상사가 없이 제대로 막아낸 것인데……. “…….”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진짜로, 진짜로 살아남은 건가? “커허억……!” 벌어진 입으로 산소가 공급된다. 나도 모르게 숨 쉬는 것도 잊고 있던 모양. 한 번에 크게 숨을 들이쉬니 회복이 덜 끝난 폐가 불타는 것만 같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물론 그 와중에도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익숙한 어둠 구체가 미친듯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탐사군의 모든 여력을 동원할 집중 포격할 타이밍에 마침내 도달한 것인데……. ‘그래, 이 상태면 네 번째까지는 가기도 전에 잡을 수 있—.’ 변수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에 변수라 부르는 법. “어어……?” 일순간 앞으로 뻗던 다리가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은 듯 앞으로 쭈욱 밀려난다. 「캐릭터가 발에 걸려 넘어집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앞에 보이는 건 단 하나였다. 저 높디높은 도서관의 천장이 아니라, 호시탐탐 나를 노리던 짐승의 주둥이. 아그작, 아그작. 이내 놈이 내 머리를 통째로 씹어대는 소리. 거대한 이빨이 내 두개골에 닿으며 긁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의외일지도.’ 감각들은 선명한데, 딱히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캐릭터의 뇌에 큰 손상이 가해졌습니다.」 「캐릭터가 기절합니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집중사격]을 시전했습니다.」 「카샨을 처치했습니다. EXP +9.」 「업적 달성」 조건: 첫 1등급 몬스터 처치. 보상: 영혼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최고 기여자에게 기록 열람 자격이 부여됩니다.」 「숨겨져 있던 제 1차 기록 보관소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캐릭터가 회복됩니다.」 「캐릭터가 회복됩니다.」 「캐릭터가 회복됩니다.」 「캐릭터가 회복됩…….」 「…….」 559화 퍼스트 클리어 (4)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아주 분주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리트먼 파웰 전사 확인하였습니다!” “3조의 마일든 베티모어 전사 확인!” “1조의 가론 닐그레인 전사 확인되었습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장한 목소리. 그리고……. “아저씨! 정신 차려요! 네?” “신관, 어째서 정신을 차리지 않는 거지?” “저, 그게… 기다리시면 곧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그게 원인인가?” “…….” 코앞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걱정. 그것들 사이로 미샤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만약 잘못되면……. 역시 그걸 써야…….” 이건 뭘 말하는 걸까. 막 정신을 차려서인지 귀가 먹먹하다. 뭔가 정신도 집중이 되지가 않고. “그럼… 남작님께서는 다 나은 듯하니, 저는 이만 다른 분들을 치료하러—.” “무슨 소리예요! 아직 깨어나지 못했는데, 어디를 간다고!” “테르시아, 그만해라.” “그만하라니, 당신은 아저씨가 걱정도 안—.” “안 해도 된다. 이제 깨어난 거 같으니.” “……네?” 들켰네. 좀만 더 정신을 차리고 눈 뜰랬는데. 뭐, 슬슬 상황을 파악할 때가 되기도 했으니까. 아무리 눈을 감고 시간을 끌어도,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다. “단장님!” “오오! 비요르으으은!! 걱정했잖냐!!” “하아…….” 이내 눈을 뜨자 곁에 있던 동료들이 격동적인 표정으로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다만, 괜찮다는 말보다 먼저 물을 게 있었다. “우리 중에… 다친 자가 있나?” 나답지 않게 돌려 말했지만, 결국 본질은 사망자가 있느냐는 의미의 질문. 이 질문에 아멜리아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답했다. “글로우 이시어스가 죽었다.” 글로우 이시어스. 아르민 탐사단 소속 마법사 삼인방 중 하나. 날 볼 때면 항상 시간과 예산을 달라며 장난스레 투정을 부리던 삼십대의 젊은 마법사. 그래, 녀석이 죽은 거구나. “……그리고?” “사망자는 없다. 부상자는 여럿 있지만, 한 명 빼고는 전부 가벼운 부상 정도에 그쳤다.” “그렇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동료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수많은 생각의 파편이 휘몰아쳤지만, 나는 하나에 집중했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하자. “놈에게 통째로 머리를 씹어먹히던 것까진 기억을 하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됐지? 내가 정신을 잃은 후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봐라.” 어째서인지, 아멜리아는 어딘가 내키지 않는 눈치로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물리자마자 테르시아가 화살을 쏘았다.” 참고로 당시 [집중사격]은 풀차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화살에 맞은 카샨이 너를 놓쳤고, 그틈을 타 나와 칼스타인이 달려가서 너를 구해왔다.” 그 화살이 잠깐의 틈을 만들어내며 나는 극적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다만, 모든 참사는 거기서 시작됐다. “…그후에는 다 함께 녀석과 대적했고, 꽤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게 전부다. 아, 그리고 애석하게도 정수는 나오지 않았—.” “좀 더 자세히.” 다 함께 대적했고, 꽤 많은 이들이 죽었다니. 그렇게 한 줄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알아야만 한다. “하아…….” 내 고집을 느꼈는지 아멜리아가 한숨을 토해내고는 내가 요구한 답변을 들려줬다. “얀델, 네가 빠지면서 최전선에는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누군가는 그곳을 틀어막아야 했지. 수십의 기사들이 달려나갔다.” “제롬 세인트레드는? 놈은 그때도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나?” “의외로 그렇진 않더군. 불상사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는 거라더니, 정말로 네가 쓰러지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나가더군. 그자가 아니었다면 널 구해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냐. 말 끊어서 미안하다. 계속해봐라.” “사령관이 개입을 했지만 전황은 좋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머지않아 지시가 내려졌다. 후방에 배치된 병력들도 모두 참전해 놈을 공격하라는.” 마법사와 신관, 이능술사 등의 원거리 유리몸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된 병력. 그 병력까지도 총공세에 동원됐다. 나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판단이었다. 공략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상황 아니던가. 최대한 빨리 죽여야 피해가 줄어든다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 지시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문제란, 탐사군 내에서 놈의 어그로를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카샨은 위협적인 인물을 우선시해서 공격했다. 대부분의 공격은 사령관을 향했으나, 몹시 불안정한 형국이었지.” 날파리를 내쫓듯 주변에 한두 방 툭툭 칠 때마다 기사들의 목이 꺾여 나갔고, 마법사들이 강력한 한 방을 쏘아내면 눈이 돌아가 그쪽을 향해 뛰어들었다. “글로우 이시어스도 그때 녀석에게 당했다.” 그렇게 마법사 삼인방은 이인방이 되었다. ‘어쩐지 아까도 사인은 말해주지 않더라니…….’ 내가 기절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 걸까? …뭐, 그게 정답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네가 기절한 후 약 3분간 놈을 상대했고, 마침내 사령관의 검이 놈의 이마를 깊이 꿰뚫으며 전부 끝이 났다. 그 즉시 저기 석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며 빛을 뿌려대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로부터 10분 정도 흘렀지.” “…….” “어때, 궁금증은 다 풀렸나?” “일단은.”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얼굴이 익숙한 기사 한 명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남작님! 깨어나셨군요! 사령관께서 부르십니다!” “…잠시 다녀오겠다.” “부상자들은 내가 잘 챙기고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라.” 이후 기사를 따라간 곳에는 팔 한쪽이 날아가고 배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나 있는 제롬이 앉아서 신관에게 치유를 받고 있었다. 이 새끼도 장난 아니게 당했구나. “무사해서 다행이오, 남작.” “나보다 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데 말이지.” 내 말에 제롬은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럼 남작도 오셨겠다……. 에보스트, 보고를 시작해라!” 그렇게 나를 포함한 수뇌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사령관이 이번 전투 결과를 발표했다. “제 1차 탐사군은 금일 예언의 늑대, 카샨을 처치한다는, 왕가 역사에 기록될 위업을 세웠습니다. 애석하게도 왕실에 진상할 정수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어진 보고에 나는 1등급 몬스터의 위험성을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회복을 마친 경상자 27인, 회복 중인 중상자 4인, 그리고 총 28인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전사자 28인. 그중에 내가 기절한 3분 동안 생긴 전사자는 21명이었다. *** 28명의 전사자 중 우리 4조에서 나온 전사자는 단 한 명. 실로 기적 같은 일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사실 이 결과에는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다. “세인트레드 백작, 마지막에 4조를 후방 배치한 게 너라고 들었는데.” 내가 기절하며 카샨이 제어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 사령관은 우리 4조를 비교적 안전한 후방으로 보냈다.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가 뭐지?” 그 지시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며, 오히려 고마운 감정을 느낀다. 다만 별개로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야 남작이 죽으면 우리 탐사군의 목표 중 하나가 실패하게 되는 것 아니오. 그래서 4조 소속 전원에게 남작을 보호하라 명한 것이오.” “…뭐?” “남작, 우리 탐사군은 고작 마물 사냥이나 하고자 이곳에 내려온 게 아니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소.”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세계였다. 임무라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가? “몇 명이 죽든, 이곳의 탐사를 끝내고 남작을 살려서 데려가면 임무는 성공이오.” 이 녀석은 잘 알다가도 모르겠다. 전에 대화를 나눴을 때는 서로 처한 입장만 아니면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알겠다. 대답이 됐다.” “다행이구려. 그럼 이제 회의를 이어가도 되겠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눈치를 보던 부사령관이 다시금 회의를 재개했다. “피해 보고는 끝났으니,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안건이란 너무도 간단했다. 카샨은 잡는 데 성공했고, 정수는 나오지 않았기에 소유권을 놓고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 따라서……. “카샨을 처치하자마자 석문이 개방됐습니다. 또한 마법사들이 저 빛무리가 포탈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음을 확인했는데…….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저 빛무리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활짝 개방된 석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또 탐사는 언제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그러한 주제로 시작된 회의에선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고, 나는 혼자 다른 생각을 하며 회의 내용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야 이미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니까. ‘…문이 저렇게 열리는 걸 줄이야.’ 이미 햄식이를 통해서 들어갔던 곳이다. 뭐, 어쩌면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1등급 몬스터를 잡고 도서관 공략을 끝내면, 저기 안에서 보상을 얻는 식이었겠지.’ 여러 종류의 소환책은 쏠쏠한 보상이고, 정수 확정 드롭이 가능하게 하는 만년필이 메인 보상이었을 것이다. 음, 아니면 메인은 그 황금책일 수도 있고. ‘아무튼… 어쩌다보니 중간에 가로챈 셈인가?’ 만약 햄식이를 먼저 만나서 일찍 보상을 땡겨 받은 게 아니라면, 분명 만년필도 왕실 쪽이 가져가게 됐을 터. ‘도서관에는 공략을 스킵하고 메인 보상 방에 진입할 수 있는 히든피스가 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보자면, 햄식이의 존재는 딱 그 정도일 듯했다. 물론 아직 숨겨진 비밀이 더 있는 거 같기는 한데. ‘그럼 자격이 없다고 한 것도 그래서였으려나? 정식으로 클리어하고 보상 방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추측은 해보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고로, 이건 다시 햄식이를 만나서 반응을 봐야만 할 듯한데…….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7시까지는 순찰대 외에는 그 어떠한 임무도 없을 터이니, 각 조의 조장들은 돌아가 조원들을 돌봐주십시오. 아, 그리고 후에 인원 재편성이 있을 예정이니 알고들 계시면 되겠습니다.” 이후 회의가 끝나며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오후 7시까지라…….’ 진짜 독한 새끼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만한 전투를 치렀으니, 하루를 통째로 쉬게 해줄 법도 한데 몇 시간 휴식하고 다시 임무를 이어가겠다고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일단 돌아가서 이 소식을 동료들에게 전했다. “……5시간이면 자기도 애매하군.” “응? 애매하다니? 그냥 자면 되는 거 아니냐?” “오늘은 프넬린 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냥 좀 자야겠어요.” “근데 잠이 올지는 모르겠구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소이다.” 대부분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쉴 시간이 조금이나마 생긴 것에 안도하는 반응이었다. “자든 쉬든 그건 너희들 알아서 하고. 일단 할 일부터 해결하지.” “할 일이라면…….” “동료가 죽었지 않나.” “아…. 그렇죠…….” 이후 나는 4조 전원을 이끌고 한 곳으로 다가갔다. 우리 조의 유일한 전사자 글로우 이시어스의 시신을 고이 뉘어둔 그곳. 마법사 삼인방의 유일한 여성인 샬롯 앰블럿이 시신 앞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나?” “……아니요.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요.” “혹시 이번이 처음인가?”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 이에 샬롯은 주먹을 꽉 쥔 채 바르르 떨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오빠인 브라이언 앰블럿이 동생에게서 시신을 떼어놨고, 그대로 약식 장례를 시작했다. 늘 그랬듯 그 과정은 몹시도 빠르게 끝났다. “유골과 그의 소지품은 도시로 돌아가서 가족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소지품을 따로 빼두고, 유골을 잘 담아 왜곡 마법을 거는 것으로 마무리된 장례. 나도 슬슬 자리를 뜨려던 차, 샬롯이 다가왔다. “남작님……. 언젠가요.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그 말들처럼?” 첫경험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바로 그 생각. 후, 이걸 뭐라고 답해줘야 하지? 나는 충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괜찮다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네… 그렇겠죠.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만 말이다. 떠올렸을 때 슬픔보다 즐거운 기억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상태를 괜찮아진 거라고 말하는 거라면.” 나는 확신을 담아 샬롯에게 말했다. “언젠가 반드시 괜찮아질 거다. 설령 네가 그걸 바라지 않을지라도.” “…….” “이제 쉬어라.” 그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자,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현재의 동료들 중 유일하게 팀 반푼이 시절을 함께한 멤버, 미샤였다. “방금 그거… 드왈키 얘기였지……?” “…어느 정도는.” 일단 긍정에 속하는 답변을 내놓자 미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정말로 좋았지…….” 어딘가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물론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래… 좋았지.” 지금은 남작이 되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수없이 늘어났으며, 명예의 돌에 이름까지 남긴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끔 떠올린다. 하루하루 생존을 고민하고. 약탈자를 두려워하며, 5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우당탕탕 하던 그 시절에 다 함께 올려다보았던 3층의 하늘을. [일찍 도착한 탐험가들만 볼 수 있는 모습이지. 참 장관이지 않소?] 나는 괜찮아졌다. *** 대충 모포 하나만 꺼내두고 휴식을 취하던 때. 불청객 한 명이 찾아왔다. “얀델, 탐사군의 수석 마법사가 찾아왔다.” “수석 마법사가……?” “너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데, 어떡할 거지?” “……잠도 안 오는데 잘 됐군. 데려와라.” 그렇게 아예 일어나 모포를 정리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노마법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가휜 베실러스.” “남작, 휴식 중에 미안하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소?” 이내 녀석이 옆에 있던 아멜리아를 흘깃하자, 눈치껏 아멜리아가 자리를 비켜줬다. “음성제어 마법을 쓰려는데 괜찮소?” “괜찮으니 써라.” “……아, 고맙소. 이제 다 됐소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늘 그랬듯 서론은 생략하고 용무부터 확인했는데, 노마법사는 굉장히 의외의 말을 해왔다. “남작께 사과를 하러 왔소이다.” “흐음, 사과를……?” “그렇소. 내가 틀렸고, 남작이 옳았소이다. 한데 그걸 인정하지 못한 바람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소.” 사과는 둘째치고, 심경의 변화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든 거지?” “그 광경을 봤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1등급 마물은… 너무도 괴물 같은 존재더구려. 내가 그들을 얕보고 있었소. 탐험가 출신인 남작은 그 누구보다 정확히 보고 있었건만.” “그랬군.” “솔직히 말해서……. 남작이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소. 아니, 만약 내 말대로 레비아탄을 소환했다면 그 몇 명조차 죽을 일이 없었을 거라고 자만했소. 하지만…….” 노마법사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모든 상황은 내 덕분이 아니었소. 내 지식도, 내 마법 실력은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 심지어 백이 넘는 왕가의 정예들 또한 마찬가지요. 그 사실을 남작이 부재했던 3분 동안 뼈가 사무칠 정도로 느꼈소.” “그… 너무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거 같은데.” “한 명의 학자로서,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오. 남작이 없었다면 이 정도 피해로는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 면전에다 대고 이런 말을 해버리니까 오히려 뭐라 대답을 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 언제든 중간이라도 가기 때문인데……. “크흠…. 말이 길었구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하나요.” “얼른 해봐라.” “우리 탐사군에는 남작의 힘, 지식, 그리고 그 판단력이 필요하오. 앞으로는 이 늙은 귀를 바짝 열고 경청할 테니, 어느 의견이든 편하게 말해주시오.” 쉽게 말해, 견제를 안 할 테니 잘 지내보자는 뜻. 듣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좋군. 잘 부탁한다. 가휜.” “…가휜?” “친구끼리는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지.” “아, 그렇구려. 그럼… 비요르—.” “나는 남작이면 됐다. 귀족이잖냐.” “……아하하, 그것도 그렇구려. 쉬는데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이만 물러가리다.” 이후로는 동료들과 모여 식사를 하고 있자니 공지된 휴식 시간이 끝났고, 탐사군 전원이 석문 앞에 모여 순차적으로 포탈 너머로 들어섰다. 「캐릭터가 제1 기록보관소에 진입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도서관을 깨고 들어선 곳은 전에 와본 햄식이 하우스가 맞았다. “으스스한 곳이구려.”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하오.” 첫방문 때 보았던 깨끗한 미니 도서관이 아니라, 폐허나 다름없어진 공간. 다만, 주인인 햄식이와 황금책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때도 밖에 있었으니 아직도 밖에 숨어 있겠지.’ 뭐, 차라리 잘됐다. 여기서 황금책이 발견되면 소유권이 바로 왕가에게 넘어갔을 것 아닌가. “참 이상한 공간이구려. 그렇지 않소, 남작?” “그러게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난장판인 건지……. 쯧쯧.” “혹시 뭔가 발견한다면 말해주시오.” “그러겠다.” 이후 비밀의 방을 둘러보던 탐사군은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즉시 본격적으로 수색을 시작했다. “멀쩡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수색이 과연 의미가 있을는지…….” “그게 무슨 소리요? 이곳은 우리가 최초로 발을 들이민 곳이지 않소!” “아무것도 없을 리 없으니, 꼼꼼히 수색하라!” 아, 참고로 왕가 출신 군인들이 말하는 ‘꼼꼼히’란 탐험가의 것과 조금 달랐다. 그들은 어느 것도 부수지 않았다. 단지, 압도적인 인벤토리를 활용해 모든 것을 챙겨갔을 뿐. “이 책은 그저 백지인데…….” “이곳에서 찾은 모든 것이 왕실의 자산이다. 먼지 한 톨도 빼놓지 말고 모두 챙겨라!” 폐허가 공터로 변하는 것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수색 완료! 숨겨진 물건은 없습니다!” ……햄식아 미안. 560화 퍼스트 클리어 (5) 햄식이 하우스의 압수 수색이 끝난 후에는 꽤 많은 시간이 붕 뜨게 됐다. 예상과 달리 석문 너머에서 시간 들여 조사할 게 없었기 때문인데……. “최초로 발견한 곳에서 나온 물건들인데 이게 모두 평범한 것일 리 없지 않습니까. 사령관님,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연구를 통해 반드시 숨겨져 있는 모든 것을 밝혀 내겠습니다.” “…내일 이 도서관을 떠날 것이니 반드시 그 전에 단서를 찾아내시오.” “예…!” 다른 이들이 쉬는 사이, 탐사군에 소속된 마법사 전원이 모여 햄식이 하우스에서 약탈해 온 물건들을 조사하고, 또 조사했다. 뭐, 그런다고 쓸 만한 걸 찾아낼 거 같진 않지만. ‘설령 뭐가 나온다 해도 레이븐한테 슬쩍 물어보면 되겠지.’ 도서관 내에 간이 실험실을 순식간에 만들어 낸 마법사들 사이로 학자의 눈을 한 채 이것저것 실험을 해 나가는 레이븐이 보인다. 꽤나 즐거운 표정이다. ‘저게 저렇게 좋을까….’ 바바리안 전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친구로서 존중은 해야겠지. 게다가 저런 타입이 한 명쯤은 주변에 있는 게 좋기도 하고. ‘베르실은 플레이어라 그런지, 학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단 말이지.’ 아무튼, 다음 날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기에 나도 그냥 아무런 걱정 없이 푹 쉬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조의 재편성이 끝났소. 전군은 작성된 대자보를 통해 바뀐 본인의 소속을 확인하시오!” 탐사군의 인원 재분배가 완료됐다. 도서관 공략 중에 일곱 명. 그리고 이번에 27명이 사망하며 각 조별로 균형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던 것인데……. “우리 4조는 변화가 없네요.” 원래부터 숫자가 적었던 우리 조에는 딱히 소속 변동이 없었고, 1조, 2조, 3조에서만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1조, 49명. 2조, 49명. 3조, 48명. 한 조당 60명이었던 게 어느새 이렇게 됐다. 현재 우리가 총 37인이니, 이제는 거의 열 명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 “회의가 있을 것이오! 각 조장 및 지휘관은 모두 참석하시오!” 그렇게 인원 재분배가 끝나고서 또 한 차례 회의가 열렸다. 하, 얘네는 진짜 아침저녁으로 해 대는구나.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맨 마지막으로 막사에 들어서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그대들의 노고 그리고 충정으로 우리 탐사군은 무사히 도서관의 공략을 끝낼 수 있었소. 니아 라프도니아.” “니아 라프도니아!” 웬일로 부사령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회의를 주관하는 제롬. “마법사들이 열심히 연구 중이나, 탈출에 대한 단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소. 고로, 이 부분은 추후 연구가 모두 끝난 뒤에 다시 의논을 할 것이오.” “하면, 오늘은…….” “오늘 그대들을 소집한 것은 이후의 계획에 대해 의논을 하기 위해서요.” 그렇게 오늘의 회의 안건이 등장했다. 도서관 공략을 끝냈으니,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자연스레 각 수뇌부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가장 오래 이곳에 머물렀고, 지도를 제공한 것도 나인 만큼 내 의견이 중요하리라 여긴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일단 떠오르는 후보지는 세 개다. 1. 거인섬. 이곳에선 히프라마전트의 정수 파밍이 가능하며, 초거대 거인이라는 보스몹이 출현한다. 게다가 지하 2층과 이어진 포탈 비석도 있고. 2. 무지개섬. 우기가 끝날 때 관측했던 무지개가 있던 방향에 있던 섬. 모든 것이 미지로 가득찬 섬이지만, 게이머로서의 직감이 말하고 있다. 이 섬이야말로 지하 1층의 핵심이라고. 3. 촌장섬.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추측대로라면 이곳에 1층으로 향하는 포탈 비석이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촌장은 거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잡아다가 그게 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여정에 무척 큰 도움이 될 터. ‘쓰읍, 어떡하지?’ 도서관을 공략하며 탐사군의 전력은 확인했다. 솔직히 말해 부족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굉장한 전력인 건 틀림없었다. 또한 기사, 마법사, 신관으로 이뤄진 이 집단이 몬스터 사냥보다는 대인전에 특화되어 있단 것까지 감안한다면……. 사실상 촌장 마을 정도는 하룻밤 만에 불태워 버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근데 이상하게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나는 이번에도 직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고로, 예전에 햄식 하우스에서 얻은 지도를 넓게 펼친 뒤 한 곳을 가리켰다. “…내 생각엔 다음 탐사 예정지는 이곳이 좋을 거 같다.” 무지개섬을 제하고, 하나 남은 미방문 섬이 있는 곳이었다. “우선 이 섬이 어떤 곳인지 확인을 한 후. 별게 없거나, 공략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다면 그대로 무지개섬으로 향하는 게 어떤가?” 정리하자면, 맵만 밝힌 뒤 무지개섬으로 직행. 무지개섬 공략을 끝마친 뒤에는 그곳에서 얻은 것을 보고서 다음 행선지를 정하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렇군. 남작의 의견은 알겠소이다.” 제롬은 잘 들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 어떠한 확답도 내놓지 않았다. “뭣들 하시오? 남작의 의견만을 듣고자 그대들을 소집한 게 아니오. 뭐든 좋으니 자유로이 의견을 내보시오.” 제롬의 말에 다른 수뇌부들도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았고, 제롬은 그런 의견을을 하나하나 집중해서 경청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녀석의 입을 통해 행선지가 정해졌다. “내일 아침, 우리는 촌장이란 자가 있는 이 섬으로 향할 것이오.” 이럴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건가도 싶지만, 마냥 탓하기도 조금 그랬다. 실제로 도서관 섬에 올 때는 내 의견을 따라 주었으니까. ‘후,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게 크게 작용한 거 같네.’ 내 판단을 따라서 이곳에 왔지만, 결과적으로 병력만 잃고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때문에 제롬은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선 촌장을 잡아다가 정보를 얻어 낸 뒤에 다시 효율적으로 움직이기로.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불안한 것을 빼면 나 역시 제대로 반박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에 별말 없이 녀석의 결정을 따랐다. 아, 물론 이런 의문은 있었지만. 사실 아까부터 묻고 싶던 점이었다. “……내일이라니? 지금 밖은 우기인데, 어디를 간다는 건가?” 심지어 우기가 끝나가는 중인 것도 아니다. 이제 고작 2일 차이니, 위험한 몬스터들이 한창 떨어지고 있을 터. 그러나 제롬은 내 우려를 일축했다. “얀델 남작도 우기 도중에 이동한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한데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없지.” “어… 근데 그때 우린 우기가 거의 끝나 갈 때쯤이었는데….” “이 계층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 역시 탐사군의 임무 중 하나라오. 그러니 한 번쯤은 제대로 경험을 해 봐야 하지 않겠소? 그 우기라는 것도.” “…….” 매번 느끼지만, 상상 이상으로 터프한 놈들이었다. *** 연구 중인 마법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잠에 들고 불침번들만이 조용히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일을 경계하는 야심한 새벽. 현재 나는 모포에 들어간 채 멍하니 누워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낮잠을 잤더니 영 잠이 오지 않은 탓인데……. “…….” 억지로 눈을 붙여 봤자 잠이 올 거 같지도 않아서 그냥 생각들이나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첫 1등급 몬스터 처치. 수십 명의 전사자. 사라진 햄식이와 황금책. 회의에서 정해진 다음 행선지. 오늘 하루에만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에 따라 생각할 거리들도 많았다. ‘제롬 세인트레드가 한 말도 의미심장하고 말이지.’ 오늘 탐사군의 사령관인 녀석은 말했다. 몇 명이 죽든, 이곳의 탐사를 끝내고 나를 살려서 돌아간다면 임무는 성공이라고. 덕분에 아이스록에서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일이 펼쳐지지는 않을까 하던 불안은 좀 덜해졌다.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우리 4조에서 전사자가 많이 나올수록 이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제롬의 행동은 정반대였다.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그렇기에 더욱더 의문이 생긴다. ‘왕가에서는… 왜 날 구출하려는 거지? 눈엣가시 같은 내가 여기서 뒈지면 걔들 입장에선 좋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생각을 할수록 점점 더 모순에 빠지는 듯하다. 그래서 머리를 비울 겸 모포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남작님? 어디를 가십니까?” “잠이 안 와서, 잠시 몸이라도 풀려고.”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불침번에게 사정을 말하고서 실제로도 드넓은 도서관 끄트머리를 산책하듯 걸었다. 혹시 운 좋게 햄식이와 만날 수도 있단 판단. 실제로 한 10분쯤 됐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잡혔다. [삐이…!] “…햄식이?” […이쪽이다! 이쪽! 이쪽으로 올라와라……!] 주변을 쓱 둘러보며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있는지 확인한 후, 최대한 조용하게 계단을 타고 2층 책장으로 올라갔다. 햄식이는 책이 빠진 빈 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왜 이제야 온 거냐……!] “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몸은… 몸은 괜찮은 거냐? 아까 보니까 많이 다친 거 같던데…….] 어… 보자마자 이것부터 물을 줄은 몰랐는데.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걱정을 어떻게 안 하겠냐…! 마침내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났는데…!] 햄식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이라면… 그 황금책을 말하는 거냐?” 예전에 햄식이는 내게 말했다. 황금책은 절대로 못 준다고. 언젠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줘야 하는 물건이라고. [그래…! 카샨을 처치한 순간부터 네게 자격이 생겼단 말이다!] …역시나 공략이 자격의 조건이었구나. 한 사람의 유저로서 예상이 맞아 들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잠깐만, 그럼 여기에 있는 전원에게 자격이 부여된 거냐?” [응? 그럴 리가! 자격이 생긴 건 오직 너뿐이다!] “흐음, 그래?” 그럼 조건이 뭐지? 전투 공헌도 1등인가? 그렇다면 내게 자격이 생긴 것도 이해가 되긴 하는데.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자격을 얻었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보상에 대한 기대감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묻자 햄식이가 딱 잘라 말했다. [자, 가져가라! 이제 네 거다, 이 책은.] 맥없이 끝나는 이야기가 적혀 있던 황금책. 혹시나 자격을 얻은 다음에는 이후의 내용도 볼 수 있는 걸까 싶어 얼른 펼쳐 보았다. 하지만……. “그때 봤던 그대로군.” [그러냐?] “그러냐가 아니라… 자격을 얻었으면, 이제 이 책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말해 줘야지. 그냥 책만 주면 끝이란 거냐?” [어… 그런데?] “하아…….” 저 표정을 보니 진짜 이 책의 사용법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낯선 일은 아니었다. [던전 앤 스톤]은 원래 불친절한 게임이었으니까. 뭐 하나 던져 줘도 제대로 알려 주는 법이 없었고, 그 탓에 유저가 직접 온갖 실험을 해 가며 사용법을 알아내야만 했다. ‘……이 책을 제단에 다시 올려 보면 뭔 일이 있을 거 같기도 한데.’ 몇 가지 떠오르는 사용법이 있지만, 당장 시험을 해 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뭐가 나오면 그 보상은 고스란히 왕실로 흘러들어 갈 테니까. 결국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아무튼, 이건 고맙게 잘 받겠다.” 햄식이가 건네준 황금책을 아공간 안에다가 잘 숨겨 놓는 것. “그래서 이것 말고는 더 없는 거냐?” [응?] “뭐, 축복을 내려 준다거나, 전용 장비를 준다거나 많지 않냐.” [이미 다 가져갔지 않냐. 내 만년필도, 소중히 모아 둔 책들도……!] 아, 그랬지 참.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햄식이와 나 사이에서 흘렀고,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맞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내일 아침이면 떠날 거다.” [떠난… 다고…?]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찾아오긴 할 거니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외로워하기는 누가 외로워한단 말이냐! 착각은 무슨… 나야 오히려 좋다. 흥! 이제야 집에서 제대로 쉴 수 있겠네!] 햄식이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자기 집이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한데……. “…….” [……왜 갑자기 말이 없어진 거냐?] “아,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배가 고파서……!” 자연스러운 핑계를 대고서 얼른 야영지로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탐사군 전원이 야영지를 정리하며 도서관을 떠날 채비를 갖추던 그때. “저… 남작님…?” 고블린 성기사, 스벤 파라브가 아침 댓바람부터 깜짝 놀랄 뉴스를 갖고 찾아왔다. “어젯밤… 그분이 또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어떤 장면이었지?” “그게…….” 파라브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어젯밤에 꿈에서 본 장면을 설명했다. “사방을 포위한 탐사군에 의해…… 남작님이 잔혹하게 처형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여신이 내게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561화 데스티네이션 (1) 여신이 예지몽의 형태로 신탁을 내렸다. 내가 가까운 미래에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슬슬 믿어도 좋겠다 싶었던 탐사군에 의해. 두근-! 위기를 감지한 전사의 심장이 크게 격동한다. 다만, 나는 침착하게 이것부터 확인했다. “확실한 거냐?” “…예?” “확실하게 내가 죽는 걸 확인했냐는 뜻이다. 그 꿈속에서.” 현대의 미디어에서는 클리셰 같은 거였다. 왜 그런 경우가 꽤 있지 않나. 총에 맞아 죽은 것처럼 연출해서 신파극을 찍은 다음, 실제로는 방탄조끼를 입었다며 깨어나 해피 엔딩으로 향하는 그런 거. “잘 모르겠습니다.” 그 무엇보다 확답이 중요한 상황 속에서 녀석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하나 눈을 감은 남작님 몸에 암만 포션을 뿌려도, 포션은 반응하질 않았습니다.” 포션이 통하지 않았다라……. 쓰읍, 이건 좀 곤란한데. ‘내가… 진짜 죽는 건가……?’ 솔직히 말해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가장 먼저 떠올린 방법은 하나였다. 아멜리아의 언니를 속였던 것처럼, 이 녀석을 속이는 건 어떨까. 한데 여기서도 이런 의문점은 있었다. ‘그런 식으로 피해갈 수 있는 예언이라면… 굳이 신탁으로 보여줬을까?’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상황이 생겨난 거지? 탐사군에선 날 살려 돌아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건가? 아오, 아침부터 이게 웬 날벼락—. “…남작님!”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녀석이 다급하게 내 몸을 흔들었다. “못 들으셨습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도망치라니……?” “여신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운명이 아니라고. 어떠한 미래를 맞이할진 우리에게 달렸다고.” 해석하자면, 노력 여부에 따라 피할 수 있는 미래란 뜻인데……. “너는…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냐……?” “어……? 그, 그러게 말입니다……?” 후, 이걸 먼저 말했어야지. 얘가 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 ‘아무튼, 기록된 운명이 아니라는 건 기록석을 말하는 거겠고…….’ 나는 신속하게 상황 판단을 끝마쳤다. 레아틀라스는 이 세계를 대표하는 세 명의 신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한 말인 만큼,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일 터.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뭐야,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네.’ ‘운명 추적자’에 적색불이 켜진 정도라 해야 하나? 부정적인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건 알겠지만,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다. 그래, 그러니까……. “소식을 들려줘서 고맙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파라브의 조언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몹시도 간단한 이유였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너는 말만 해라. 꿈에서 뭘 봤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도망쳐서 일이 잘 풀린 적이 한 번도 없거든. *** 이내 동료가 있는 장소로 돌아가자 아멜리아가 툭 하고 말을 걸어왔다. “꽤나 표정이 심각하던데. 중요한 대화였나?” “딱히. 별 얘기 아니었다.” 대충 둘러댄 말에 아멜리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릴 뿐. “…….” …삐진 건가? 내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가 될 때까지, 괜히 걱정시키지 않으려 한 배려였는데.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번 일을 언급했다. 바바리안답지 않게 조금은 돌려서. “에밀리, 만약 사령관에 의해 내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 처음에는 뭔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던 아멜리아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저놈들이… 그런 걸 꾸미고 있던 거냐?” “그건 아직 확실하진 않다. 그래서 대답은?” 내 질문에 아멜리아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반드시 막을 거다.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저쪽은 백 명도 넘는데?” “말했지 않나. 모든 걸 걸어서라도 막겠다고.” 아멜리아의 목소리에서는 굳건한 결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역시 이런 대답이 돌아오는구나…….’ 그 마음이 고마운 반면, 입맛이 씁쓸했다. 결국 이 문제는 나 하나가 죽고 끝이 아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휘말리고 만다. ‘……그냥 도망칠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만, 애써 나약한 마음을 털어냈다.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가 일이 더 이상하게 꼬일 가능성도 존재했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 아직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참고로 시간이 있다고 판단한 근거는 둘이다. 파라브한테 꿈에서 뭘 봤는지 세세한 것까지 전부 다 들었거든. 1. 장소는 섬이었다. 묘사를 들어보면 촌장섬인 거 같기는 한데. 아직 섬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2. 우기 중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앞으로 며칠간은 확실하게 안전이 보장됐을뿐더러……. 3. 어째선지 에르웬의 머리가 단발이었다. 즉, 데드라인까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주는 충분한 고민을 하고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터. “승선하라!” 이후로는 탐사군의 일정에 맞춰 도서관 섬을 떠나 배 위에 올라탔다. 참고로 우리 임시 4조는 늘 타던 우리 배가 아니라 세 개의 군함에 나눠서 탔다. 한창 때의 우기를 버티려면 이쪽이 훨씬 낫거든. ‘이제 3일 차라 그런지 엄청 나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진다. 물론 군함 자체에 각인된 방어 마법진에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불어넣는 중이기에 배에는 타격이 없었다. 콰앙-! 콰직-! 쿠웅! 결계에 부딪쳐 바다로 떨어지는 몬스터들과 결계 위로 흘러내리는 몬스터들의 피. “의외로 그렇게까지 까다롭지는 않군. 에보스트! 시간당 마력 소모량은? 예상했던 대로인가?” “예! 현재 아무 이상 없습니다!” 세 척의 배가 본격적으로 은빛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결계에 박고 바다에 떨어졌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상 몬스터의 경우에는 집요하게 뒤따라 왔고, 비행 몬스터의 경우에는 공중에서 항해를 방해했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심지어 히프라마전트가 물 아래에서 나타나 배를 움켜쥐는 일도 있었으며. “모빌라우스다!” 초대형으로 분류되는 2등급 해양 마물이 등장하는 일도 있었다. 하나 전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군함은 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진 배니까. 퍼엉-! 퍼엉-! 퍼엉-! 배에 구비된 수십 정의 마력포가 연신 폭음을 뿜어내며 길을 뚫는다. 또한 우리 배에 달린 것과는 등급부터가 다른 군용 마공학 추진 장치가 내내 최대 출력으로 회전하며 배의 속도를 올려주고. “이메이즈 눌라 키니 피티아!” 마법사들이 배 자체에 새겨진 마법진을 활용해 공격 마법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카각! 카각! 카가가가각-! 얼어붙은 바다를 지나치기 위해 전면 하단부에 달린 쇄빙 장치가 돌아가며 앞을 가로막는 잡몹들을 갈아버리고 있다. ‘……이런 배는 대체 얼마나 하려나?’ 예전에 암흑 대륙 원정을 가며 탔던 군함과도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배의 목적부터 차이가 났다고 해야 하나? 그땐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송하기 위한 배였다면, 이 배는 철저하게 해상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배였다. 6시간, 12시간, 18시간……. 그렇게 도서관 섬을 떠난지 하루가 조금 더 넘게 지났을 때였다. “사령관님! 목적지가 보입니다!”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미궁 진입 118일 차. 우리는 정말로 한창때의 우기를 뚫고 촌장섬에 도착했다.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고로, 지금부터 우리가 할 고민은 하나였다. “세인트레드 백작, 이제 어떡할 거지? 배에서 내려 섬에 진입할 건가?” 우기가 끝날 때까지 아직 3일이 남았다. 뭐, 이제 우기도 슬슬 고점을 찍고서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낮아지는 듯하지만……. “아니, 우기가 끝나기 직전까지는 이곳에서 대기하겠소.” 제롬은 배 위에 있는 걸 택했다. 직접 우기를 겪어보니 이대로 지상으로 나가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거, 진짜 사람이 말할 때는 안 믿고. “그러게 내 말대로 우기가 끝나고서 나왔으면 좋지 않았나?” “이곳에서의 여정이 얼마나 계속될지 기약이 없지 않소? 만약 언젠가 우기를 헤쳐가야 한다면, 준비가 됐을 때 경험해보는 게 좋다고 판단했소이다.” 뭐, 그렇다면 할 말이 없었다. 직접 겪어봤으니 비상 시에도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우리 탐사군의 임무 중 하나는 이 계층을 조사하는 것도 있소.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서 돌아가 이 기록을 왕실에 전해야 하오. 우기가 끝나고 발생했다는 그 이상 현상까지 모두 다.” 암만 그렇게 말해도 내 입장에서는 괜한 고생인 거 같지만, 군인 입장은 또 다르겠지. 실제로 교전 중에 촬영 담당인 기사도 따로 있을 정도니까. ‘그럼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배에서 버틴다고 보면 되겠고…….’ 덕분에 에르웬이 중요해졌다. 우기가 끝나도, 얘 머리만 멀쩡하면 예지몽은 실현되지 않을 테니까. “에르웬, 혹시 머리를 짧게 자를 계획이 있나?” “네? 저는 지금이 좋은데……. 그래도 아저씨가 그게 조, 좋다면야…….” “무슨 소리냐 그게! 나는 장발이 좋다! 절대 자를 생각도 하지 마라! 알겠냐!” “네……? 아… 네! 절대 안 자를게요!!!” 오케이, 이렇게 된 이상 자발적으로 이발을 할 일은 없을 테고……. 내 머리카락이 전부 불타서 대머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얘 머리카락은 반드시 지켜내야지. 그런 각오를 하고 있던 중 아이나르가 소리쳤다. “오! 비요른 너는 그쪽이었냐!” 그쪽은 무슨.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 넘겼는데, 어째선지 아멜리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흐음, 얀델 네 취향이 그런 쪽이었을 줄이야.” …이걸 해명해야 되는 건가? 알 수 없지만, 눈이 마주친 레이븐이 헛기침을 하며 흉부까지 내려온 곱슬머리를 검지로 돌리기 시작했다. “흠흠……!” 아, 모르겠다. 그냥 알아서들 생각하라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은데 이런 거에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잠시 잘 거니까 교대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건들지 마라.” 고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 선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암만 봐도 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갖고서 찾아온 거 같지는 않은데……. 뜬금없이 처형이라니…….’ 과연 어쩌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게 된 걸까. ‘아무래도 촌장이 관련되어 있을 거 같긴 한데…….’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일단 그러한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촌장에게는 의혹이 있다. 어쩌면 악령처럼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단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의혹이. ‘만약 정말 그런 능력이 있는 거라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는 해.’ 심지어 이 경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사령관 제롬 세인트레드가 몸을 빼앗겼을 경우. 그리고……. ‘내가 몸을 빼앗겼을 경우.’ 두 상황 모두 다 탐사군이 나를 처형하는 장면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중요한 건 단 하나.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우선 지금까지의 가설이 옳다는 전제하에 열심히 대책을 강구해보았다. ‘에르웬의 머리가 단발이었다고 하니까…….’ 아예 지금 바로 밀어버리는 건 어떨까. 그러면 그 장면은 성립이 안 되지 않나? ‘……그럴 리가.’ 어차피 여신 입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전해 들은 상황 아닌가. 머리카락의 유무로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무언가. 그래, 무언가…… 더 큰 변화가 있는 거라면 모를까. 번뜩-! 돌연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고블린이 본 예지몽에서 나를 죽인 게 바로 제롬 세인트레드였으니까…….’ 그냥 녀석을 없애면 전부 해결되는 거 아닌가? 562화 데스티네이션 (2) 제롬 세인트레드. 놈을 없애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나비의 날갯짓이 저 멀리 태풍을 만들어 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예지몽에 등장한 핵심 인물인 만큼 놈이 없어지면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없애지?’ 그 방법이 문제다. 일단 몰래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동료들과 함께 쓱싹 해버린다는 계획은 불가능에 가깝다. 놈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주지도 않을뿐더러……. [죽지는 않았을 걸세. 아마 왕궁에서 깨어나겠지.] 과거 여행 당시, 나는 보았다. 아우릴 가비스의 손에 날파리처럼 사망한 제롬의 몸이 빛 입자로 잘게 쪼개져 휘날리는 장면을. 그 능력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것도 있었다. ‘이블루스.’ 8층 균열 중 하나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2등급 몬스터. 그리고 놈이 가진 액티브 스킬 중 하나인……. ‘[이교 제단].’ 스킬을 사용 시 해당 위치에 ‘제단’이 생성되는데, 이는 [던전 앤 스톤]의 몇 없는 ‘부활기’였다. 죽으면 무조건 제단에서 부활하거든. 참고로 ‘제단’은 단 한 번만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총 세 번 사용될 시 파괴됐다. 그러니까, 이를 다시 말하자면……. ‘암살을 해봤자 도시로 돌아가면 반역자가 되어 처형당할 뿐이겠지.’ 애초에 왕실이 제롬 세인트레드에게 탐사군의 사령관 자리를 맡긴 것에도 이 스킬의 유무가 컸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혼자 살아서 정보를 갖고 도시로 귀환하는 게 가능하니까. ‘하… 왜 하필 저딴 스킬을 갖고 있어서.’ 게임 뭐 같이 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 이후로도 제롬 세인트레드를 없앨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 방법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없애려 들었다가 그 시도가 실패하고, 예지몽이 실현되는 장면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진짜… 이러다 그렇게 된 거 아니야?’ 어쩌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넘어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똑똑.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말이 들려왔다. “나와라, 얀델. 교대 시간이다.” 그래, 일단 일이나 하고 오자. ***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우기가 끝났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잠시간 무지개가 떴다가 사라졌고, 탐사군의 기록용 수정구는 그 장면을 잘 찍어서 보관했다. 그리고 우기 동안 죽도록 고생한 마법사들을 위해 반나절가량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지금부터 섬으로 진입하겠소!” 몇 날 며칠을 배 위에서 보냈던 우리들은 지상에 상륙해서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바람, 여자, 돌이 많다고 하여 제주도를 삼다도라 부르는 것처럼, 우기 직후의 촌장섬에는 두 가지가 많았다. “전방에 마물 무리 발견!” “변종 개체입니다!” 몬스터. 그리고 섬 전역에 흩뿌려진 수천 수만 개의 마석. “이 광경이 알려지면 바깥에서 난리가 나겠군.” “이 정도의 마석이면, 왕가에서 통제를 해야 하는 것 아니오? 매달 이만큼의 마석을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인데…….” “하하. 그거야 우리 입장에서나 그렇지. 왕가에서 고작 이 정도로 성이 차기나 하겠소? 검문소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일 텐데.” 실로 압도적인 재화에 마석 따위는 관심 없다던 제롬조차 표정을 굳히며 주의를 줄 정도였다. “몰래 손을 대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할 것이니, 수거를 맡은 마법사들은 혹여 실수라도 하지 않도록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시오!” 거, 언제는 돈 벌러 온 게 아니라더니. 그래도 어마어마한 양의 마석은 탐사군의 사기를 고양시켰다. 보통 왕실에서 미궁에 군을 보낼 때, 마석 소득은 알아서 배분하라고 하는 게 평소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번 임무에선 더 적극적으로 공을 세워야겠소.” “받는 단위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이오. 안 그래도 사고 싶은 마도구가 있었는데 잘 됐구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희희낙락하는 대원들. 다만, 제롬은 땅에 깔린 마석들을 보고서도 임무에 더욱 집중했다. 가는 경로에 있는 것들을 열심히 수거는 하되, 최단 경로를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 것인데……. “남작, 이곳이 맞소?” “확실하다.” 그렇게 우리는 촌장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다만, 입구가 숨겨져 있는 나무 아래를 아무리 살펴도 막혀 있는 땅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혹시 그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오?”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다. 원래도 우기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 마물들이 적어졌을 때야 뭍으로 올라와 섬을 크게 돌며 마석을 주워가는 거 같았으니.” “흐음, 그럼 일단 기다려봐야 하겠구려.” “게다가 설령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어도 언젠가는 올라올 수밖에 없을 거다. 그놈들은 마석을 주식으로 삼으니까.” 굶어죽고 싶은 게 아니면, 영영 마을 아래에만 숨어 있을 수는 없다는 뜻. “이 나무를 중심으로 포위 진형을 형성한다!” 이후 제롬은 마을 입구를 포위한 뒤 무한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특임조를 꾸려서 섬 전역에 흩뿌려진 주인 없는 마석을 수거했다. 여기서 특임조는 이동 속도가 빠른 민첩 계열 탐험가와 마석을 신속하게 수거할 수 있는 마법사로 구성됐는데……. “아저씨… 저 올 때까지 잘 계셔야 해요……?” “걱정 마라. 테르시아는 내가 잘 챙길 테니.” 우리 4조에서도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차출됐다. 나로서는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었지만, 사령관의 지휘 권한을 이길 수는 없었다. 명분도 저쪽에 있었고. “남작의 편의를 봐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오. 임시로나마 우리 탐사군에 소속된 이상, 임무에 차등을 줄 수는 없소.” 에르웬과 아멜리아가 특임조 활동을 하러 나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으나, 약 이틀에 걸쳐 섬의 마석을 모두 수거할 때까지 뭔가 사건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 내일이면 우기가 끝난 지도 3일 차인데…….’ 슬슬 몬스터도 줄어들어서일까? 나무 주변을 포위하고서 언제 놈들이 나타날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탐사군 대원들은 오랜만에 겪는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시간이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이 느껴졌다. “얀델 씨,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보면 모르냐? 경계를 서는 중이다.”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하자,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거,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여긴 왜 왔냐? 마법사들 자리는 저기일 텐데.”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요. 도서관에서 얻은 자료들 연구도 다 끝났고.” “끝났다고? 뭐 건진 게 있냐?” “아뇨. 그 반대예요. 마침내 이 자료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걸 인정하고, 연구를 종료했어요.” “……그렇군.” 심심해서 왔다는 말이 사실인지, 레이븐은 내 옆에 와서 재잘재잘 하고 싶은 말들을 떠들어 댔다. “어쩌면 도서관에서 발견한 최고의 성과는 그 소환책 자체일지도 몰라요. 이름의 유래라든가. 어떤 연구로도 밝혀내지 못했던 마물의 특성이라든가 그런 게 명확하게 적혀 있었잖아요?” 그래, 너라면 그걸 제일 좋아할 거 같았다. “뭐예요? 그 뚱한 표정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데? 모르긴 몰라도 밖에 나가면 학계가 한바탕 난리가 날 걸요!” “……학계에 물난리가 나든 뭔 난리가 나든 나랑 뭔 상관이냐?” 심드렁한 투로 답하자, 레이븐도 내가 재미없어 한단 걸 느꼈는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인간이라 칭하는 마물들이랬죠?”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계속 궁금했어요. 과연 어떤 개체들일지. 아, 본인을 용기사라고 주장한 촌장도 궁금하고요. 과연 정말로 본인일까요? 그렇다고 하면, 묻고 싶은 게 많아요. 그 시절 기록은 이제 찾아보기도 어려우니까…….” 제 딴에는 공통된 주제를 꺼낸 거 같긴 한데, 여전히 수다를 떠는 재미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얘랑은 항상 그랬다. 얘기를 하다보면 매번 말이 길어진달까? “레이븐……! 뒤, 뒤에……!” “……!” “아무것도 없군?” “……?” 화들짝 놀라며 몸을 튼 레이븐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서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거, 그 조그마한 손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짜증나. 남작이나 돼가지고. 어린애예요?” “제3 마도 병단의 부단장이나 돼가지고. 너무 순진한 거 아니냐?” “……이런 인간을 걱정했던 내가 바보지.” “인간이 아니라 바바리안이다. 내게는 예민한 부분이니 신경을 써줬으면—.” “아! 짜증나! 됐어요. 이만 갈 거니까.” 이내 레이븐이 씩씩거리며 자기 위치로 돌아갔고, 나는 그 모습을 껄껄 웃으며 지켜보았다. 제법 생산적인 대화라 할 수 있었다. 긴장감이 조금 덜해지고, 유쾌해졌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예전부터 얘는 놀리는 맛이 상당했—. “다, 단장님!!” …응?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땀까지 뻘뻘 흘리며 뛰어오는 아우옌이 보인다. 일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큰일! 큰일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뭔가 사고가 터졌나? 아니, 근데 마을 입구는 여기에 있는데? 설마 다른 입구가 있거나 한 건가? 그런 수많은 추측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때, 아우옌 록로브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테르시아 님! 테르시아 님이 탐사군 소속의 마법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제발 말려주십시오!” “……뭐?” 나는 얼른 사건이 발생했다는 곳으로 뛰어갔고,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말리지 마아!!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이성을 잃은 듯 소리치는 에르웬. 그리고 그런 에르웬을 말리듯 꽉 끌어안고 있는 아멜리아. “……흐엑!” 잔뜩 쫄아서 기사 뒤에 숨은 마법사. 그리고 그런 마법사를 지키려는 듯 검까지 뽑아 겨누고 있는 기사 무리. “…….” 그 광경을 본 나는 멍하니 굳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째선지. “머리가…….” 에르웬이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에르웬을 포함해 임시 4조의 절반은 외곽 경계 근무를 서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애매한 위치에서 몬스터가 접근했고, 그 경계선을 공유하던 1조와 함께 전투를 치렀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시, 실수! 실수이지 않소이까! 결과적으로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1조 소속 마법사가 마법의 궤도 연산을 잘못했고, 끝내 바람 마법이 에르웬에게 향했다는 것. 예상 못한 타이밍에 아군 측에서 날아온 일격. 다행히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이를 피해냈지만, 그 대신 펄럭이던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나갔다. 참 빌어먹게도. “다치지… 않아……?” “혀, 혈령후……! 진정하시오! 이는 남작님께도 해가 되는 일이라는 걸 정녕 모르신단 말이오!” “얀델! 뭐 하나! 왔으면 어서 얘를 말리지 않고……!” 아멜리아의 말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에르웬이 단발 머리로 스타일을 바꾸긴 했지만, 지금 당장 여기서 다짜고짜 처형식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우선 사태부터 진정시키고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던 차였다. “아저씨가… 왔다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에르웬이 나를 보고는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는다. “안 돼! 보, 보지 마요!” 어… 일단 진정시키는 건 성공한 건가? 그리 생각하며 에르웬의 요구대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던 때였다. 사사삭. 빼곡한 나무 사이로 푸른색의 무언가가 움직인다. “어……?” 내가 뭐 헛것을 보고 있나? 분명 마을 입구는 저쪽인데?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내 입은 이미 벌어져 지금 당장 해야 할 말을 뱉어냈다. “기습이다!!!” 놈들이 마을에서 나왔다. 563화 데스티네이션 (3) 평균 신장 3m에 달하는, 푸른색 피부를 가진 왕눈이 괴물.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종족 미상의 개체. 그들과 진짜 인류가 수풀을 경계로 두고서 대치하고 있다. “과연 저놈들이 바로 남작님께서 말했던 그들…….” “근데 왜 더 오지 않고 저러고만 있는 거지?” 우리 탐사군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은 숫자 때문인지, 무기를 손에 꼭 쥔 채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대치 상황 속에서. “오랜만일세. 얀델의 아들 비요른.” 괴물들 사이로 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촌장을 처음 보는 녀석들은 정말로 사람 말을 하는 것에 놀라는 반응을 보였고, 나는 그런 그들 사이를 지나쳐 앞으로 나갔다. “그래, 오랜만이다.” “그사이 동료들이 늘었군?” “아, 어쩌다보니 말이지.” 일단 대화를 원하는 듯했기에 대충 답해주며 주변을 쓰윽 훑었다. 마을 입구를 포위하듯 넓게 펼쳐져 있던 탐사군의 병력들이 실시간으로 이곳을 향해 집결하고 있었다. 한데 그걸 절대 모를 리 없음에도. ‘얘는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거야?’ 전혀 급하지 않게 내게 인사나 건네는 모습을 보니 괜히 불안감이 커진다. 다만, 나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희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분명 나한텐 마을 입구가 하나랬으면서.” “너무 서운해 말게. 외지인에게 마을의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지하실에 있던 시체처럼?” 떠보듯이 던진 말에 촌장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을 뿐. “알고 있나? 정말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눈치가 없는 척을 한다네.” “…….” “자네는 어느 쪽 사람인 것 같나?”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 말하면서 눈깔을 희번덕하게 뜨고 있자니 아주 무섭다. 나도 모르게 망치를 휘두를 뻔했을 정도로. “남작! 뒤로 물러나시오.” 이내 후방에 있던 사령관 제롬 세인트레드가 도착하자, 촌장의 시선이 그에게로 이동했다. “흐음… 자네는 누군가?” “제1 왕실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백작이오. 이번 탐사군의 사령관 직위를 수여받았지.” “왕실이라… 그래, 자네들도 머지않아 올 줄은 알고 있—.” “자, 이제 당신의 차례요. 내 듣자 하니 얀델 남작에겐 본인을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라 소개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 제롬이 말을 끊으며 고압적으로 물었고, 촌장은 그런 녀석을 빤히 응시하며 답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오. 그에 따라 당신을 의사 소통이 가능한 미확인 개체로 봐야 할지, 아니면 즉시 처형할 고대의 반역자로 봐야 할지 정해질 테니까.” 고대의 반역자?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던 촌장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마치 역린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처형이라…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소? 이상하구려. 내 지인들은 항상 날 보고 재미없는 사람이라 하던데.”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쪽 친구들은 변한 게 없군. 몹시도 오만해. 마치 자기들이 이 세상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이내 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해보게. 그 처형이라는 것.” “글쎄. 아무리 본인이 원해도 처형은 이 자리에서 집행되지 않을 것이오.” “왜 이제 와서 겁나기라도 한—.” “당신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심문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어낸 뒤, 내 직접 그때 못다한 집행을 끝마쳐드리리다.” “…….” 순식간에 끝난 입장 정리. 이건 뭐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켜보던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래도 둘이 우호적인 분위기인 건 아니니 잘 되긴 했는데…….’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내심 저 둘이 팀을 먹고 나를 조지는 경우의 수도 존재는 했기에 일단 이 상황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섬멸하라! 우두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여도 좋다!” “니아 라프도니아!” 이건 또 뭘까. [모두 흩어져 마을로 내려간다!] 총공격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괴물들이 제각기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 “사령관님! 괴물들이 도망칩니다!” “추격해 섬멸하라! 우두머리는 반드시 잡아내라. 만약의 경우엔 사살해도 좋다!” 아니, 이걸 쫓아가는 게 맞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딱히 막을 이유도 없었고. “전부 다 내 근처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라!” 4조 멤버들과 이동 진형을 이룬 채 서둘러 추격 대열에 합류했다. 물론 추격하는 시늉만 낼 뿐, 열과 성을 다해서 따라가진 않았다. 그야 이거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얀델,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 “알고 있다. 틀림없이 유인을 하는 거겠지.” 또한 제롬이라고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다만,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겠지. 설령 함정이 있더라도 힘으로 이겨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어떻게 할 거지?” 아멜리아의 물음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본대와 이탈한다.” 너무나도 명료한 앞으로의 행동 지침. 하나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지, 몇 초간의 텀을 두고서 답이 돌아왔다. “……무슨 소리지? 이탈한다니?” “말 그대로다. 추격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탈해 떨어질 거다.” “그러고 나서는?” “이 섬을 벗어나게 되겠지. 적을 추격을 하던 중에 아주 우연히 의도치 않게.” “그게… 진심으로 가능할 거라고 보는 거냐?”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계획의 성공 여부를 묻는 게 아니란 건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탈영 이후 뒷감당을 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겠지. 근데 뭐 그래서 어쩌겠어. ‘……이대로 따라가기엔 너무 불안하단 말이지.’ 제롬을 없애기도 전에 에르웬이 단발 상태가 됐다. 게다가 촌장까지 등장하며 뭔가 큰일이 벌어질 징조까지 터져 나왔다. 한데 여기서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라고? ‘그래, 이게 맞아.’ 이내 나는 마지막 불안마저 털어내며 결심을 굳혔다. 그야 원래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인과가 크게 뒤틀리며 그날 파라브가 본 장면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촌장이다! 촌장! 촌장이 저기로 갔다!! 4조는 모두 나를 따르라!” 적당한 타이밍에 4조를 이끌고 추격 대열에서 이탈했다. “예? 분명 저쪽으로 가는 게 보였—.”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따라와라!!” 내 계획을 전혀 모르는 4조 대원들은 이래도 되나 싶은 눈치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내 억지를 따라줬다. 타다다닷- 빠르게 멀어지는 본대와의 거리. “어? 남작님께서 저리로 가시는데…….” “근데 저기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나?” “하지만 뭔가 보셨다고…….” 근처에 있던 3조에서 우리를 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싶은 표정을 지을 뿐, 붙잡으러 오지 않았다. 하기야 그 누가 내가 이 타이밍에 조원들을 이끌고 탈영을 한다고 상상이나 하겠는—. “그자가 저리로 향했다고? 전군 방향을 틀어라!” ……응? “전군은 얀델 남작을 뒤따른다!” 뭐야 이거. 왜 나를 따라오는 건데. 성공적으로 본대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본대가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향한다. 덕분에 얼떨결에 최선두에 선 형국이 돼버렸다. “얀델, 어쩔 거지?” “일단 자연스럽게 행동해라.” “……알았다.” 여기서 또 방향을 틀어봤자 본대는 그대로 내 뒤를 따라올 터. 대체 왜 이렇게 됐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뛰고 있자니, 1조와 함께 이동 중이던 제롬이 단숨에 내 옆까지 따라잡았다. “남작! 일단 남작의 판단을 따르긴 했소이만, 제대로 본 것이 맞소?” 외통수였다. “어…….” 여기서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런 고민을 하며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달리던 때였다. “촌장, 그자는 분명 저기 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는—.” “사령관님! 그자입니다! 놓쳤던 그자가 저기 저곳에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는 방향의 끝에 촌장이 있었다. “설마… 우리가 따라가던 건 미끼였나?” “…….” “허……! 얀델 남작이 없었다면 그자를 놓칠 수도 있었겠구려! 내 이 공은 결코 잊지 않으리다.” “……그래. 고맙다.” 이걸 변명을 안 해도 돼서 잘 됐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대로 망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머지않아 촌장이 한 나무 앞에서 멈춰서더니 그 아래 틈 사이로 들어섰다. “아래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기가 마을로 향하는 또 다른 출입구인 듯한데……. “세인트레드 백작, 어떡할 거지? 저 너머에 함정을 파뒀을 가능성이 높다.” “알고 있소이만, 여기서 그를 놓칠 수는 없소.” 후, 그래… 진짜 내려가려는 거구나. 뭐, 됐다. 차라리 여기서 얘네들을 내려보내고 나면 도주각이 또 보일지도 모르니—. “그래서 말이오, 얀델 남작.” “……?” “혹시 남작이 앞장을 서주실 수 있겠소?” “……저 아래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남작의 힘이 필요하오. 남작은 1등급 마물을 상대로도 혼자서 버틸 수 있지 않소? 조금만 버텨준다면 금방 우리 군이 진입해 남작을 도울 것이오.” 확실히 제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탐사군 전원을 통틀어 가장 단단한 사람은 나니까. 제일 위험한 곳에 나를 먼저 보내는 판단은 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두근-! 어째선지 저 제안을 듣자마자 심장이 낮게 울린다. 동시에 혼란스러운 상황에 좁아졌던 시야가 개이며, 그제야 제롬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평소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는 군인의 표정. 두근-! 그런데 왜일까. 불현듯 오늘 하루 동안 보았던 아주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된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전부 사소한 것들이지만……. ‘확인은 해봐야겠지.’ 이내 나는 제롬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앞장 서겠다.” “오호라, 그렇다니 참 잘 됐구려! 남작이 거절을 한다면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됐—.” “그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하게 해준다면.” 말을 끊고 조건을 덧붙이자 제롬이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뭔진 몰라도 일단 말이나 해보라는 듯한 눈치. 고로, 나도 그냥 노빠구로 요구 조건을 말했다. “듣기로 가져온 물자 중에 ‘어긋난 신뢰’도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그렇소만?” “그걸 써서 몇 가지만 확인을 시켜준다면, 당장 앞장 서서 들어가주겠다.” “뭘 확인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소만, 꼭 지금 그래야 하겠소? 저기 아래로 도망친 그자가 어떠한 암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럼 끝이군. 나는 앞장 서지 않겠다.” “설령 내가 사령관 권한으로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말이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그 어떠한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 “…….”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저기 두 분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저만 느끼는 거 아니죠?” “프넬린, 칼스타인, 테르시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마, 마음의 준비라니?” “뭐가 됐든 하고 있으라면 해라.” 우리를 지켜보는 모든 자들이 단번에 느꼈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마침내 녀석이 선택을 내렸다. “좋소. 에보스트 경! 어긋난 신뢰를 가지고 오게! 뭔진 몰라도 남작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는 모양이니!” 승낙이 떨어지자 부사령관이 신속하게 물건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얼른 넘겨받아 곧바로 작동을 시켰다. 딸깍- 후, 그럼 이거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반경 10m 내에서는 그 누구도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래, 그러니까……. “네 이름은 제롬 세인트레드가 맞나?” “맞소.” 우선 가볍게 테스트용 질문부터 던진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질문을 할 건데, 지금부터 너는 내가 묻는 말에 ‘아니’라고만 대답하면 된다.” “쉬운 일이군. 어서 해보시오.”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녀석의 눈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말고.” “…….” “아니, 정확히는 조금 전에 만난 걸 제외하고서.” “…….” “본인을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라고 주장했던 그 괴물놈과 만난 적 있나?” 내가 부탁했던 대답은 ‘아니오’였다. 하나 암만 시간이 흘러도 간절히 기다린 그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윽. 놈과 마주한 상태에서 방패와 망치를 부드럽게 들어 올릴 때쯤, 오랜 정적이 깨지며 녀석의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주 나지막이. “어떻게 알았소?” ……니미럴. 녀석이 촌장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564화 데스티네이션 (4) 어떻게 눈치를 챘느냐는 물음. 그 물음에 답하자면 간단하다. 일단, 둘 사이의 관계 정립이 너무나도 빨랐다. [어디 한번 해보게. 그 처형이라는 것.] [섬멸하라! 우두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여도 좋다!] 마주친 지 불과 5분도 채 되기 전에 전투 상황이 펼쳐졌고, 촌장은 괴물들을 이끌고 도주했다. 그리고 발생한 추격전. 거기서도 이상한 부분은 있었다. [그자가 저리로 향했다고? 전군 방향을 틀어라!] 본대는 내가 이탈하자마자 곧바로 뒤쫓아왔다. 마치 내 움직임만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듯. 물론 이건 내 느낌에 불과하다. 그러나 설령 내 돌발 행동을 우연히 봤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건 변함없다. 그야 임무 바라기인 제롬이라면, ‘반역자’라며 촌장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던 그 녀석이라면……. 그 상황에서도 일단 임무를 끝마치기 위해 추격을 멈추지 않았을 테니까. ‘……뭐, 여기까지는 그냥 느낌이 이상하다는 정도였지만.’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제롬의 한 가지 요구였다. [혹시 남작이 앞장을 서주실 수 있겠소?] 놈은 내게 최선두를 부탁했다. 예언의 늑대 카샨과 전투를 하다 기절을 했을 땐 1순위로 지켜낼 정도로 ‘임무’에 집착하던 그 녀석이. 또한, 임무를 위해서라면 부하들 목숨을 우습게 여기던 그 녀석이. 뭐가 있을지 모르는 곳에 날 집어넣으려 든다고? 여기서 극심한 위화감을 느낀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결과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냈다. 문제는 그 가설이 맞았다는 것이고. “남작과 선이 닿은 자들은 모르던 이야기였건만. 설마 그들 말고도 쥐새끼가 더 있던 모양이구려.” 이내 제롬이 차가운 눈빛으로 부하들을 한 번 쓱 둘러본다. 녀석은 내가 이 상황을 눈치챈 것에 다른 누군가의 조력이 있었을 거라 여기는 듯했다. 하긴, 그래야 추격 중에 몰래 도망치려던 내 행동도 납득이 됐겠지. ‘아무튼, 나와 선이 닿은 자들이란, 레이븐이나 카이슬란을 말하는 걸 테고…….’ 내 가설이 옳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다. 따라서 나는 촌장과 제롬이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장소는 이 섬. 시간은 분명 우리가 자고 있을 무렵, 불침번들만 서고 있던 때. 예상을 해보자면 그때 둘은 은밀하게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촌장은 제시했다. 제롬 세인트레드가 ‘임무’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대체 뭐였지? 촌장이 뭘 약속했기에 하루아침에 넘어가 버린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제롬은 순순히 답변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화는 여기까지요. 남작, 바라는 대로 대답을 해줬으니, 어서 앞장 서 아래로 내려가시오.” 그것은 설득이나 권고가 아니었다. “이건 지휘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이오.” 더 이상 속내를 숨길 이유조차 없다는 듯 강압적인 말투. “싫다면 어쩔 거지?” “어명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겠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자리에만 거의 200명의 목격자가 있는 셈인데, 설마 이렇게까지 대놓고 행동을 하다니. ‘입을 막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긴, 수단이야 많을 것이다. 돈, 명예, 명성, 권력 등등등. 왕가에서 쓸 수 있는 회유책은 무한에 가깝고, 설령 회유가 통하지 않을 상대라 해도 문제는 없다. 온건한 방식으로만 입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 “…….” 입술을 씹으며 잠시 동료들을 힐끗 했다. 한데 그런 내 시선을 느꼈을까? “얀델,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마라. 우리는 이미 다 준비가 됐으니까.” 아멜리아가 내 옆에 바짝 붙으며 결의에 찬 말을 내뱉는다. “아무리 싸우는 게 싫어도,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하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한 게 너였지, 비요른?” 투쟁심이 잔뜩 깎인 아이나르도 무기를 꺼내 들고 내 뒤에 섰다. “예상보다 이르긴 하지만… 언젠가 겪을 일이긴 했죠.” 베르실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사 항전할 각오를 새긴 듯했다. 다만, 조금 의외인건 뮐 아르민이었다. “저희 역시 남작님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는 일일 테니까요.” 역모죄가 무섭지도 않은지 감히 왕가의 군대와 대적하겠다고 말하는 녀석. “어어… 저, 저희는… 그… 뭔지는 몰라도, 이, 일단 말로 잘 풀어보시는 게…….” 반면 와이트 헥츠는 그 정도의 의리까지는 보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사실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긴 하다. 나를 적대하는 포지션을 취한 것에 저쪽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처럼. “남작님의 말대로라면……. 백작님이 그 마물과 손을 잡았다는 뜻인가……?” “뭔가 이유가 있으시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작님을 사지로 보내겠다니, 이래도 되는 거요?” “심지어 우리 임무는 남작님을 구출해서 돌아가는 것 아니었소이까. 이건 뭔가 문제가 있소이다.” 내가 그동안 이뤄낸 업적. 영웅이라는 명성과 작위 귀족이라는 감투.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해놓은 호감작까지. 아직은 명령 불복종까지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이 세 박자가 어우러지며 분열이 생긴다. 실제로 지금 당장 우리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져도 다들 망설이며 무기를 휘두르지 못할 터. 돌파구는 그곳에 있다. 아직은 바늘 틈처럼 좁은 구멍이지만. 그게 앞으로 커질지 작아질지는 지금부터 내가 하기에 달렸다. 그래, 그러니까……. “나 비요른 얀델 남작이 말한다!” 경계하듯 온몸을 가린 방패를 내리며 소리친다. “라프도니아 왕가를 떠받치는 자랑스러운 한 명의 귀족이자 전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왕실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다! 설령 내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리 외치는 내 손에는 ‘어긋난 신뢰’가 꼬옥 쥐어져 있었다. 물론 말을 할 때마다 작동을 멈추긴 했지만. 어차피 잘만 가리면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으니까. “왕가의 무궁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뛰쳐나가 이 한 몸을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다!” 철저하게 거짓으로 이뤄진 숭고함을 내비치며 논리를 완성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게 정말로 왕가를 위한 일인지! 혹시 네가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그릇된 판단을 한 건지 아닌지를!” 그것은 일종의 독과 같았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내부로 스며들어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그런 독. “감히… 왕가를 향한 내 충정을 의심하는 것이오?”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그러니 그럴 수밖에!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해라! 그럼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언제든 저 아래로 내려가겠다! 그게 설령 나를 버림패로 쓰는 일일지라도!” 어떻게든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전략. “…….” 제롬 세인트레드가 입을 다물고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탐사군 내부에 자리를 잡은 의심도 점점 싹을 틔운다. 한데 녀석도 슬슬 그것을 인지했을까. “말해라, 제롬 세인트레드! 저 아래에 뭐가 있는 거고, 너는 촌장과 어떤 거래를 한 거지?” 내 질문에 놈이 마침내 답변을 내놓았다. “…군의 기밀을 공개할 수는 없소.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소. 이 모든 것이 전부 왕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오!” “나는 믿지 못하겠다!” “…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어긋난 신뢰가 작동하고 있지 않소? 지금 한 내 말은 모두 틀림없는 진실—.” “왕가를 위하고 있다는 게 너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 않냐!” “…….” 오케이, 표정을 보니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분명 뭔가 더 토해낼 거 같은데……. 거기서 한 번만 더 제대로 반박할 수만 있다면, 여론을 완전히 돌리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진 않는다. “자 말해라! 내가 저 아래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왕가를 위한 일이 되는 건지를!” 그런 판단 아래, 충신 모드에 빙의하여 당당하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어느 순간이었다. 돌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틀렸어요. 여기서 그를 적대하는 건 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고요.] 왠지 모르게 한숨이 섞인 듯한, 자애로운 목소리. [대체 왜 바로 도망가지 않아서, 일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만드는 건지…….] 대체 이게 누구의 목소리일까 고민하던 차. 번뜩-! 어디선가 찬란한 은색빛이 터져 나오며,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 「운명의 관조자가 개입합니다.」 「스벤 파라브의 성흔을 매개로 캐릭터에게 별의 권능이 시전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신체에 별의 흔적이 깊이 새겨집니다.」 「캐릭터의 신성 내성 수치가 영구적으로 +100 증가합니다.」 「레아틀라스교의 권능이 담긴 모든 치유 및 이로운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주의하십시오. 한 번 더 신의 권능을 받게 될 시, 연약한 필멸자의 몸이 붕괴할 것…….」 *** 눈을 떴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떨어지 곳에서 그 자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고 해야 하나? “자 말해라! 내가 저 아래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왕가를 위한 일이 되는 건지를!” 윽박을 지르듯 큰소리치는 나. 그리고……. “…….”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처럼 얼굴이 빨개진 제롬. ‘뭐야, 이거…….’ 어째선지 나는 그 장면을 멀리서 제 3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현상에 의문을 가진 찰나. [지켜보세요. 그 끝에 해답이 있을 테니까.] 좀 전에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의문은 사라지고, 그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왜 말하지 못하는 거냐! 혹시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냐?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게 전혀 왕가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지켜보고 있자니 상황은 더욱더 극적으로 변해갔다. 나는 시종일관 녀석을 말로 몰아붙였고, 녀석도 결국 참다 못해 소리를 내질렀다. “어디까지 왕실을 능멸하려 들 셈이냐! 이 반역자야!” “하! 반역자라니! 나는 왕의 명령을 어기려는 게 아니라, 네 판단에 의심을 갖고 있을 뿐—.” “하! 내가 정말로 모를 줄 알았나? 당신이 얀델의 아들 비요른인 척하는 중인 반역도라는 것을?” “……뭐?” 그 소리에 내 눈에 보이는 ‘나’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대상이 나인 만큼 속내를 헤아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악령이란 걸 들킨 건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여기 와서 확신할 수 있었소. 당신은 수십 년 전 철가면이란 이름으로 노아르크에서 활동을 했던 그자였소.” “어…….” “분명 노아르크의 명을 받고서 세작이 되어 갓 성인이 된 바바리안 행세를 하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간 거겠지. 특수 임무를 하느라 사라졌다는 2년 6개월 동안에도 사실은 고향에 돌아갔을 뿐인 것일 테고.” “어어…….” “한데 그런 주제에 감히 왕실을 위한단 거짓을 입에 담아? 대체 어느 방법으로 ‘어긋난 신뢰’를 무력화 했는진 모르겠지만…….” “무력화 했다니, 나는 그런 짓은—.” “그럼 손을 치우고 잘 보이게 들어보겠소? 자, 보시오! 당신이 말할 때마다 멈추지 않소!” “…….” 거기서 게임 오버였다. “그대 같은 반역도를 넘겨주고, 왕실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같은 일을 행할 것이오.” “…….” “뭣들 하나! 어서 저 무도한 반역도를 사로잡아라! 만약 저자를 도우려는 자가 있다면 같은 반역도로 판단하고 죽여라! 모든 책임은 나 제롬 세인트레드가 지겠다!” ‘어긋난 신뢰’를 이용한 사기극이 들통나고, 내가 제대로 반박 못 한 ‘명분’까지 순식간에 만든 제롬이 총공격을 내렸다. 그리고……. “다들 내 뒤로 숨어라!” 헥츠 클랜과 아르민 탐사단이 빠진 상태에서 클랜 아나바다 멤버들끼리 결사적으로 항전에 나서는 것을 끝으로 세상이 멈췄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무언가가 답을 주었다. [당신의 소중한 동료 중 세 명이 죽어요. 그리고 결국엔 제가 그 아이에게 보여 줬던 미래와 연결되죠.] 그제야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운명을 주관하는 별의 여신, 레아틀라스. 무신론자였던 내가 머나먼 이세계에서 진짜 신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거지? 저놈들이 수작을 부린 게 빤히 보이는데, 그냥 내려갔어야 하는 거냐?” 해답. 막다른 길에 내몰린 인간이 항상 신의 이름을 찾듯, 나 역시 신에게 대답을 구했다. 하지만……. [말했잖아요. 끝까지 지켜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멈췄던 세상이 시간을 역행하듯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565화 데스티네이션 (5) 역행하기 시작한 시간은 서서히 과거로 돌아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혹시 남작이 앞장을 서주실 수 있겠소?” 제롬이 내게 최선두를 부탁하던 그 시점. “좋다, 대신 두 번째로 획득한 성과에 한해, 네 개까지 우선권을 줘라.” “넷이라……. 알겠소. 남작에게라면 그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지.” 짧은 협상을 끝마치고 나는 촌장이 사라진 나무 아래로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생각 없이 아래로 내려간다고? [제가 그 아이에게 보여 주었던 운명이에요. 이 운명선에선 신탁이 없었죠. 그래서 당신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저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 확실히 그리 말하니 납득이 되기는 한다. 제롬에게서 위화감을 느낄 수 있던 건 ‘신탁’의 유무가 컸으니까. 뭔가 일이 터진다는 걸 알았기에 과할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예민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후웅-! 아무튼, 그렇게 내가 나무 아래로 내려간 순간. 돌연 세상이 까맣게 물들며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장면이 변한다.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것만 짚고 넘어갈게요.] 장소는 어느 동굴. 중심부에는 포탈 비석이 자리해 있으며, 나는 그 옆에 기절한 채 잠들어 있다. 그리고 촌장은 그런 내 곁으로 다가와 무언가 알 수 없는 의식을 시작한다. [저번에 당신이 갔던 그 지하실 아래에 숨겨진 공간이에요. 마을에 내려온 당신은 수백 명의 적들과 오랜 시간 싸우며 지원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이내 힘이 빠지자 결국 붙잡혀 이곳에 오게 됐죠.] 시체들이 가득하던 지하실 아래 숨겨진 공간. ‘…설마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때는 워낙 상황이 긴박했기에 그런 것까지 살펴볼 틈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켜보세요. 이제 금방 끝날 테니까.] 2배, 3배, 4배. 동영상 재생 속도를 올린 듯 빠르게 흐르는 시간. 머지않아 시간 배율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촌장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한창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촌장의 몸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내 육신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고, 머지않아 촌장이 픽 쓰러졌다. 그리고……. 스윽. 기절해 있던 내가 눈을 뜨며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손을 쥐었다 펴더니 낯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 순간 장면이 한 번 더 변한다. 장소는 마을이 아니라 미궁의 어둠이 깊게 내려 앉은 섬 중심부. 그곳에서 ‘나’는 제롬 세인트레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약속대로 ‘그것’을 주시오.” “…….” “이제 와서 미련이라도 생긴 거요? 그렇다면 얼른 마음을 접길 바라오. 그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밖에 나가서도 그 몸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 “확실히… 왕가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겠지.” “그걸 안다면 어서—.” “그러니 아예 모르게 하는 쪽이 더 좋지 않겠나?” “뭐? 설마 당신……!” “죽은 자는 말이 없지.” 대화는 그 부분에서 끝. 다시금 장면이 바뀌었을 때, 눈앞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아아아아악-!”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전장으로 변한 상황. 어느새 사방은 수백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탐사군은 열심히 항전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전부 내 몸을 빼앗은 촌장 때문이었다. “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남작……! 얀델 남작을 죽여라!” 내 몸을 빼앗은 촌장에게는 지킬 것이 없었다. 괴물들 몇이 죽든 간에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동료를 지키고자 열심히 성장시킨 바바리안 캐릭터는 파괴전차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누가 봐도 이제 승기가 완전히 기울어버린 무렵. “……으윽!” 탐사군 대원들을 학살하던 내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후열의 마도 병단 사이로 난입해 한 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찍기 직전이었다. “레, 이븐…….” 구사일생을 한 동료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바닥을 짚고 도망친다. 그리고 이를 보며. 콰앙. ‘나’는 툭툭 끊기는 동작으로 망치를 저 멀리 내다던졌다. 방패를 버렸고, 상체를 덮은 갑옷을 풀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동료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돌아… 온 거냐?” 전투 중 구금 상태가 풀리며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아멜리아의 질문.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주 짧았다. “에밀리……. 나를… 죽여라…….” 그런 부탁을 들은 동료는 어떠한 대답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어떠한 적을 앞에 두고서도 침착하게 겨눠지던 칼날은 오늘따라 크게 진동했다. 그러던 때였다. “못하겠다면, 비키시오!” 상황을 인지한 제롬이 칼을 뽑아 들며 다가왔고,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당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안 돼……!” “……녀석의 뜻이다……!” 아멜리아가 입술을 짓물며 에르웬을 억제하는 사이. 서걱-! 이내 오러로 휘감긴 칼날이 내 목을 내리친다. 다만, 한 번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아서 여러 번 거듭해서.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나무에 도끼질을 하듯 수없이 내려치지는 검. 왠지 모르게 적막해진 공터 위로 한 줄기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동료 중 누군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와 내 몸에 포션을 쏟아붓는다. 당연히 반응은 없다. 포션에는 죽은 캐릭터를 살려내는 기능 따위는 달려 있지 않으니까. “너……! 너만 아니었으면……!” “진정해라, 테르시아.” “지, 지금 당신은 이걸 보고도 그냥 넘어가려—!” “그리 흥분해서야 적을 제대로 죽이기야 하겠나?” “…….” “차분히, 냉정하게 얀델의 복수를 하는 것에만 집중해라.” 클랜 아나바다가 집결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탐사군을 향해 무기를 겨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오. 우리가 없으면, 저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소?” 제롬은 열심히 설득했지만 통할 리 만무. 그런 와중에 탐사군 내에서도 많은 인원이 진영을 이탈했다. “남작은… 영웅이었어. 그 마지막에도 우리를 살리려 했다고……!” “그런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꼴이라니… 이게 뭐가 왕실을 위한 거냐!” “나 멜란드 카이슬란은 내가 믿는 정의를 위해 칼을 뽑아들리다! 나와 뜻이 같다면 내 뒤에 서시오!” “반역도다! 반역도들을 처죽여라……!” 그렇게 상황이 극에 치달았을 때였다. [그쪽이 아니라, 저기를 보세요.] 이내 여신의 안내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일절 관심도 주지 않은 채 혼자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미샤……?’ 이내 미샤가 내 시신으로 다가가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솨아아아아아아-! 실물은 처음이지만, 내 몸에 갖다대자마자 터져 나온 특유의 이펙트 덕분에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이게 미샤의 손에 들려 있는진 모르겠지만. ‘저건…….’ 소생의 돌이다. *** 소생의 돌. 사자 부활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아이템. 터무니 없는 입수 조건을 가진 탓에 나조차 9년 동안 단 한 번밖에 먹어보지 못했던 바로 그것. ‘이게 왜… 얘한테서……?’ 처음에는 멍하니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출처에 대해서는 금방 답이 나왔다. ‘……이백호.’ 이놈이 소생의 돌을 소유했단 것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니까. 대체 어떻게 입수를 했는진 모르겠다마는. 아무튼, 내 부활과 동시에 멈춰진 시간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결국 나는 죽지는 않는 거군.” [예, 죽지는 않습니다.] 이백호가 어째서 미샤에게 소생의 돌을 줬는가. 그 목적에 대해서는 대강 짚이는 게 있다. 다만, 내 머릿속에 똬리를 튼 여신은 다르다. “레아틀라스… 당신은 왜 나를 도우려는 거지?” 내 물음에 여신은 짧게 답헀다. […그런 결말은 옳지 않으니까요.] 과연 운명을 본다는 이 여신은 어떤 결말을 보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못내 궁금해지지만, 의문은 여기서 끝냈다. 힘으로 겁박해서 들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래, 예를 들자면 지금 이 상황처럼. 번뜩-! 세상이 까맣게 물들고, 다시금 밝아진다. 그리고 나는 아까 보았던 그 동굴 속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또 뭘 보여 주려는 거지?” [보여 주려는 게 아니에요. 이게 현재 당신이니까.] ……뭐? 대체 무슨 소리인지 얼른 설명해 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머릿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자그맣게. [제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없어서…….] 아, 그랬구나. 동영상을 감상하듯 보고 있는 동안에도 현실의 시간은 쭉쭉 흘러가고 있던 거구나. [그래도 동료들은 모두 무사해요. 구금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후 조치는 해주려는 것인지, 여신이 내게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 줬다. 아주 심플한 상황이었다. 내가 빛을 터트리며 기절하자, 동료들이 크게 당황했고 그때 기습적으로 제압을 했다던가? 그렇게 나는 제롬의 손에 의해 촌장에게 인도됐다. “그럼 얼른 날 돌려보내줘라! 저 의식이 끝나기 전에 탈출을 해야 할 거 아니냐!” [돌려보내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눈을 떠도 모든 능력이 봉인된 상태일 거예요.] “……뭐?” 어처구니가 없었다. 쉽게 말해, 무력을 이용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그럼 이 상태로 대체 어쩌라는 거냐?” 날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최악이 아닌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을 품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 아닌가. 암,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말해봐라.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애써 믿음을 품으며 말투를 공손하게 고쳤다. 하지만……. [……길을 보여 줄 수 있지만, 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아무것도 없다 이거냐?” 대답은 한참이나 텀을 둔 뒤에 돌아왔다. [……전 당신의 여정을 쭉 지켜봐왔어요. 그렇기에 알고 있어요. 당신의 가장 큰 장기는 냉철한 판단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식도, 그 어떤 적을 상대로도 기죽지 않는 용기도 아니에요.] “…….” [당신이 가진 진짜 힘은 바로 ‘말’이에요.] 바바리안의 몸으로 깨어나 말로 해결한 것보다 몸으로 해결한 게 많았던 나로서는 쉽게 공감하지 못할 분석이었다. 그러나 여신이 보기엔 달랐나 보다. [노련한 탐색꾼은 그날 그 미로 속에서 고결한 마법사와 함께 죽었을 운명이에요. 하지만 결국에는 살아났죠. 당신이 ‘말’로 시간을 벌었기에.] 일단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절제된 소망’을 삼키고 용살자놈과 협상을 했던 일을 말하는 듯한데……. [당신의 말에는 힘이 있어요. 이미 미약하게나마 한 번, 누군가의 운명을 틀어 버렸죠. 그러니까…….] 이내 여신이 긴 서론을 끝마치고 내게 TIP을 줬다. [이번에도 말로… 잘 해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째선지 의문형으로. *** 두근, 두근-!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울림. 그 울림에 새삼 살아 있음을 실감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깨어났군.” 거, 눈썰미는 쓸데없이 좋아가지고. 하긴 눈알이 저렇게 크니 당연한 일인가? 나는 아예 눈을 뜨고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냥 정신을 잃고 있는 쪽이 훨씬 좋았을 텐데. 나에게도, 자네에게도.” “일단 발버둥은 쳐봐야 할 거 같아서.” 여신님께서는 ‘말’로 잘 해결해 보라는 무책임한 말을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조언대로 난관을 잘 헤쳐가봐야지. 사실 듣자마자 해볼 만한 제안이 떠오르기도 했고. “……굉장히 침착하군? 무슨 상황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와중일 텐데.” “글쎄, 지금 사태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건 암만 봐도 네 쪽인 거 같은데?” 내 모든 행동과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촌장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봤다. 놈도 대가리가 있는 만큼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흐른단 걸 인지한 것이다. 따라서 이쯤에서 패 하나를 펼쳤다. “촌장, 지금이라도 그만둬라. 어차피 내 몸을 빼앗아도 도시로 귀환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뭔가 했더니, 그저 저주하고 싶었을 뿐이었—.” “저주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실제로 그 장면을 보고 왔으니까.” 두 번째 패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레아틀라스가 내게 미래를 보여 줬다.” 촌장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의외로 허무하게 내 말을 믿어줬다. “빛을 뿜어내며 기절했다더니 과연… 그녀가 개입을 했던 거였나…….” 여러 정황들을 통해 이쪽이 차라리 납득이 된다고 여긴 모양. 오케이, 그럼 시간 낭비는 줄였고. “말해보게. 날 멈추고 싶은 거라면. 그녀가 자네에게 무엇을 보여 줬나?” 효과적인 협상을 위해 조금은 시나리오 수정을 했다. “넌 내 몸을 빼앗고서 제롬에게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패배하지.” “……내 계산은 완벽하네. 그들에게 질 리가 없건만.” “그럼 네 계산이 틀린 거겠지. 아니면 그놈들한테 기습을 당하는 것까지는 예상을 못했거나.” “그놈이… 기습을 했다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촌장의 눈이 번들거렸다. 왠지 기습을 당한다는 경우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거 같았다. 내게 있어서는 호재였다. 고로, 서둘러 말을 이어붙였다. “촌장, 네가 몸을 빼앗으려는 이유는 알겠다. 근데 꼭 내 몸일 필요가 있는 거냐?” “그게 확실한 길이니까. 자네는 언젠가 이 계층을 탈출해 도시로 돌아가는 데 성공할 걸세.” “혹시 그런 내용의 기록석을 본 거냐?” “……설마 자네가 ‘기록석’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만.” 사실상 긍정을 의미하는 답변. 갑작스레 등장한 떡밥에 생각이 많아지지만, 일단 현 상황을 타개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니라도 된다는 뜻이군.” “하지만 굳이 모험을 할 이유는 없지. 패한다는 결과를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면—.” 바꾸기는 뭘 바꿔. 이쯤에서 녀석의 말을 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롬 세인트레드.” 빛의 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이번 탐사군의 사령관. “놈의 몸은 어떠냐? 나이가 좀 먹긴 했는데, 일단 백작인 데다가 오러까지도 잘 쓰는데. 너도 기사지 않냐?” 심지어 장점은 이게 끝이 아니다. 최대 장점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놈의 몸을 빼앗으면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촌장의 입장에서 가장 구미가 당길 만한 미끼. “그놈은 ‘이블루스’의 정수를 갖고 있으니까.” 내 승부수였다. 566화 데스티네이션 (6) “이블루스라면…….” “걱정 마라. [이교 제단]을 왕궁 안에 만들어 둔 건 이미 확인해 놨으니까.” 사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뭐, 거의 확신을 하고 있는 수준이라 틀린 말도 아니고. “……놀랍군.”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이블루스의 정수가 흔한 게 아니—.” “그것 말고, 자네가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말일세.” 내 제안을 들은 촌장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정적의 시간이 이어졌다. “…….” “…….” 그 고요한 시간은 내게 있어 나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상황에 내던져졌지 않은가. 안 그래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롬 세인트레드…….’ 이놈의 몸을 촌장에게 넘기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그런 제안을 하긴 했지만, 그 뒷일까지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얼른 정리해보자면. ‘……괜찮은데?’ 촌장이 제1 왕실기사단장이 된다는 것 자체는 꽤 긍정적이었다. 우선 왕가의 전력이 줄어드는 것이지 않은가. 또한 비밀스러운 커넥션이 있던 사이인 만큼, 서로가 필요할 때 뒤에서 정보를 공유하거나 거래를 할 수도 있을 터. 유일한 문제는 도의적인 부분인데……. ‘먼저 뒤통수를 친 건 그 새끼니까.’ 애초에 그놈이 먼저 나를 넘겨주려 한 게 아니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촌장을 무찌르는 그런 세계도 있었을지 모르지. 촌장 이놈도 정말 자신이 넘쳤다면, 그냥 다 때려눕힌 뒤에 내 몸을 빼앗아갔을 테니까. [여기 와서 확신할 수 있었소. 당신은 수십 년 전 철가면이란 이름으로 노아르크에서 활동을 했던 그자였소.] 심지어 제롬은 내가 ‘철가면’이라고 이미 확신을 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로서는 어떻게든 그걸 해명할 방법을 마련하거나, 녀석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그야 그 일이 왕실에 전해지면 약점이 될—. “하나만 묻겠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내가 패배한 뒤에 어떻게 됐나?” 그래, 그게 궁금할 줄 알았지. 아직 내가 전부 다 사실을 말하는지도 확신이 없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은 뒤에 최종 판단을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대로 처형을 당한다. 제롬의 손에 의해서. 칼로 일곱 번을 내리쳐 목이 댕강 잘려나가지.” “그건 말이 되지 않—.” “그리고 죽어 있던 내게 동료 중 한 명이 소생의 돌을 사용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보았던 그 미래의 장면. “소생의 돌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싫어도 그게 진실이다.” “…….” 촌장은 또다시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꾹 다물었고, 나는 마음껏 생각하라는 듯 기다려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납득이 되기는 하는군.” “어느 부분이?” “자네 말대로 정말 내가 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거라면, 왜 자네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를 말일세.” 역시 속으로는 그런 걸 궁금해하고 있었구나. 약삭 빠른 놈이란 생각을 새삼 하면서도, 나는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소생의 돌이 있는 이상 네 목적은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소생의 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자부활이 반드시 사망 직후, 시체가 남은 이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소생의 돌이 사용되면 기억을 잃어버리니까.” 기억 상실이 두 번째다. 게임 내에서 소생의 돌을 사용 시, 해당 캐릭터가 기억을 잃으며 그동안 쌓은 친밀도 등의 각종 수치가 리셋됐다. 다시 생각해도 엿 같은 장치였다. 그 귀한 걸 사용해서 부활을 시켜놨는데, 기껏 살려 놓은 두 놈 다 결국 파티를 탈퇴했거든. “확실히… 이건 곤란하군.” 다행히 촌장은 ‘소생의 돌’의 그 특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모양이었다. 모른다 했으면 설명하느라 또 한 세월이었을 텐데. “기록석에 적힌 내용대로 언젠가 자네가 이곳을 나갈 건 분명하지만… 그 물건이 있는 이상, 그 인물이 나도 자네도- 아닌 다른 누군가일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뜻이니.” 그 말을 들으며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촌장이 내 몸을 빼앗으려던 가장 큰 이유가 ‘확실성’ 때문이었으니까. 내 몸은 언젠가 이 계층을 벗어난다. 그렇기에 이 몸만 빼앗으면 100%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 소생의 돌 하나로 그 명제가 깨진 셈인데……. “자, 그래서 어쩔 거냐?” 이제 남은 것은 녀석의 결정이었다. 소생의 돌이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내 몸을 빼앗을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제롬 세인트레드의 몸을 이용해서 도시로 탈출할 것인가. 마냥 대답을 기다리기엔 조금 불안해서 옵션까지 추가를 해줬다. “만약 그 녀석 몸을 빼앗고자 한다면 나도 돕겠다.” “자네는… 듣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로군?” “글쎄, 네가 나에 대해 조사하며 어떤 얘기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이건 정당 방위다. 놈이 먼저 내 뒤통수를 치지 않았냐?” “그것도 그렇군.” “그래서 대답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고, 이내 촌장이 답했다. “거절일세.” …니미럴. *** “거절… 이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아니라 제롬을 택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는데 거절이라니? 이 무감정한 놈이 감정적인 선택을 했을 리도 없는데……. “…이유가 뭐지?” “바로 자네의 존재일세.” “……뭐?” 당황스러운 답변이었으나, 이어진 설명에 나는 놈의 판단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자의 몸을 빼앗아도, 자네는 내 진짜 정체를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만약 밖으로 돌아가서 무언가 떠들기라도 하면 겨우 얻어낸 삶이 힘들어지겠지.” 놈은 목격자를 없애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러니 차라리 여기서 자네를 죽이고, 그자의 몸을 빼앗는 게 낫다는 게 바로 내 판단일세.” “…너는 바보냐? 내가 널 도와서 왕실기사단장을 배신한 건데, 그걸 내가 떠들고 다닌다고?”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법이지. 역설적이지만, 신뢰라는 것은 믿음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닐세.”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한마디에서 나는 협상의 여지를 느꼈다. 신뢰라는 것은 믿음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믿을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면 내 제안을 승낙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실제로 내 물음에 촌장은 전혀 의도를 숨기지 않고 답했다. “자네의 약점.” “…….” “자네가 말 한 마디로 날 파멸시킬 수 있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게 있다면 자네를 믿고 손을 잡을 수 있을 걸세.” 아주 뽕을 뽑으려는구나. “만약 그런 게 없다면?” “찔리는 게 없는 자는 그런 물음을 던지지 않지.” 확증편향적인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지만, 일단 이번만큼은 녀석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약점’이란 말을 듣자마자 몇 개가 곧바로 떠올랐으니까. 악령. 아이스록에서 장미기사단을 죽인 사건. 그리고 수십 년 전 노아르크에서 제롬을 방해하고 기록의 파편석을 빼돌렸던 것까지. 말하고자 한다면 내어줄 것들이 몇 개나 된다. 또한, 이걸 내어주고 여신이 보여준 미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내어주는 것도 아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를 호구로 아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절이다.” 약점이 없다는 식의 변명이 아닌, 명확한 거절. “거절… 이라고?” 조금 전의 나처럼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어도 내 대답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저런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증명을 하고 있었다. 내 제안이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다는 걸. 그래, 그러니까……. “아까 말했듯 선택지는 둘이다. 내 제안을 승낙하든가, 아니면 거절하고 네가 알아서 해보든가. 그게 끝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거기에 조건은 없어.”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아주 과감하군.” “바바리안 전사들은 모두 그렇다.” 내 태연자약한 대답에 촌장은 왠지 모르게 피식 웃는 듯하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됐고, 이제 머리나 맞대보세. 제롬 세인트레드의 몸을 어떻게 빼앗을지를.” 후, 호구 잡힐 뻔했네. *** 촌장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우리는 그 동굴 안에서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제롬 세인트레드를 어떻게 이 동굴로 데려와서 몸을 빼앗을 것인가. 사실 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와 촌장이 협력을 한다면 그리 어려운 계획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다른 부분에서 대화가 길어졌다. “그래서 네가 제롬에게 약속했던 ‘그것’이 뭐냐? 말해봐라, 이제 우리는 한편이라 볼 수도 있는데.” 내심 궁금해하던 부분이었다. 대체 뭘 제안을 했기에 제롬이 나를 넘겨준다는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의외로 촌장은 쿨하게 대답해줬다. “바로 카루이의 심장일세.” “카루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고대 악신의 이름.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촌장이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동굴 가운데에 있는 한 흑색의 돌덩이를 가리키며. “저것을 말하는 걸세. 사람의 목숨을 바치면 신화 속에 나오는 카루이의 권능 중 하나를 쓸 수 있도록 해주지. 내가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물건 덕분일세.” 게임 내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뭐, 새삼스레 놀랄 것도 없지만. “그래서 제롬이 왜 그걸 원한 거지?” “그야 이게 왕가의 보물들 중 하나니까. 원래 이 물건은 불멸왕의 것이네.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것도 따져보면 전부 이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었지.” 촌장이 과거에 어떤 죄를 저질렀느냐보다 더 주의 깊게 들을 부분이 있었다. “왕가의 보물이었다고? 설마… 불멸왕이 영생을 누린 게 전부 이 물건 덕분인 거냐?” “아, 몰랐나? 불멸왕은 자식을 낳은 뒤, 그 자식의 몸을 빼앗는 식으로 왕위를 이어가 왔네. 불멸왕이 항상 가면을 쓰고 활동했던 이유이기도 하지.” 라프도니아라는 거대한 왕국에 숨겨진 비사였다. ‘설마 불멸왕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어쩌면 개벽왕이 불멸왕을 물리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해방’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그저 이 물건이 사라져 불멸왕이 죽은 걸 수도 있고.’ 아무튼, 후대인 개벽왕 입장에서 이 보물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터. 이 얘기를 들은 제롬의 눈이 돌아갈 만도 하다. 왕가를 향한 이 녀석의 충정심은 진짜였으니까. “잠깐만, 그럼 말이 안 되지 않나? 네가 이 물건을 갖고 사라진 거면, 불멸왕이 어떻게 수천 년을 넘게 살 수 있지?” 불멸왕은 명성 그대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다 약 150년 전에 서거했다. “글쎄,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네. 하지만 왕가 아닌가? 분명 어떠한 수단을 찾아낸 거겠지.” “그래, 모른단 뜻이구나…….” 불멸왕. 카루이의 심장. 개벽왕……. 대체 그 시기에는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걸까. 자못 궁금해지지만,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더 없었다. “궁금한 건 이게 전부인가?” “아니, 한 가지만 더. 근데 그럼 도서관에 보낸 은사자 클랜의 단장은 어떻게 된 거였냐?” “아 그것? 자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마을 전사 중 하나를 보냈네. 한 달간 몸을 빼앗는다는, 그런 조건을 걸면 의식에 필요한 제물의 양도 크게 줄어드……. 아니,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 눈치챘구나. 나도 얘가 왜 이렇게까지 잘 대답해주는지 의문을 갖던 차였는데. “대화는 이만하면 됐으니, 위로 올라가보세.” 이내 촌장이 대화를 강제로 끝내며 앞장섰다. “그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닌가.” 제롬 세인트레드. 놈이 내 뒤통수를 친 값을 물으러 갈 때였다. 567화 폐문 (1) “야, 얀델 남작님……?” 이내 뭍으로 올라오자 나를 발견하고는 잔뜩 굳은 기사들이 보인다. 하긴 얘네 입장에서는 귀신이 돌아온 거 같겠지. 정신도 잃은 상태인 나를 제롬이 억지로 사지로 집어넣었던 것이니까. “저… 괜찮으십니까……?”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더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말을 걸어오는 기사. 다만 어째선지 녀석은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세인트레드 백작을 불러와라. 그에게 전할 말이 있다.” “예? 아… 예! 서둘러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나무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 중 하나가 냅대 달려 어디론가 향했고, 머지않아 기사들을 잔뜩 대동한 제롬 세인트레드가 등장했다. 녀석은 내 본질을 살피듯 한참이나 말없이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내가 맡을 테니, 다들 잠시 쉬고 있게.” 오케이, 일단 당장은 세이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표정한 상태를 신경 써서 유지했다. 그야 이게 이번 계획의 핵심이니까. 제롬이 나를 촌장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 “…….” 조용히 대화를 나눌 상태가 되었음에도 당분간 침묵이 이어진다.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나였다. “걱정 말게.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바바리안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투. 그제야 안심을 했는지 제롬도 입을 열었다. “성공했다니 다행이군. 이제 약속대로 ‘그것’을 주시오.” “…….” “이제 와서 미련이라도 생긴 거요? 그렇다면 얼른 마음을 접길 바라오. 그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밖에 나가서도 그 몸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미련 따위는 없네. 다만, 그때는 내가 자네에게 하지 못한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제롬은 어서 설명을 하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물건은 현재 이동이 불가한 상태네.”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일세.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차원 비석이 있었네. 그리고……. 그 물건은 차원 비석과 하나로 결합된 상태였지. 수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그 물건을 떼어내는 데는 실패했네.” 놀랍게도 이 얘기의 절반은 사실이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포탈을 여니까 그때서야 떨어졌다던가? 괴물의 몸으로는 포탈을 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는 제롬은 크게 노했다. “빌어먹을.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오?” “모든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 아니겠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자네는 왕을 위해 그 물건을 얻으려던 걸 텐데. 이리로 데려와 그 물건을 사용하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난 그 물건을 떼어낼 방도를 찾지 못했지만, 자네라면 혹시 다를 수도 있을 테고.” 역으로 뻔뻔하게 나가자 제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억지로 화를 삭힌다는 느낌보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듯한데……. “……직접.” 이내 굳게 닫혀 있던 제롬의 입이 열렸다.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소.” “흐음, 그렇다면 전사들을 전부 데리고 마을을 비워주겠네. 그러니 우리가 떠난 뒤에 천천히—.” “아니, 확인이 전부 끝나기 전까지 당신은 어디도 갈 수 없소.”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 “좋을 대로 하게.” 이제 남은 건 촌장에게 달렸다. *** 나무 아래에 숨겨진 괴물들의 마을.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탐사군에게 내려진 명력은 돌격도, 섬멸도 아니었다. “별도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라!” 무기한의 대기 명령. 다만 그 간단한 지시에 탐사군에 속한 기사, 신관, 마법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그냥 대기를 하는 게 아니라, 수백 명의 마을 전사들과 대치한 상태에서 대기를 해야 했거든. “에보스트, 만약 저 괴물들이 이동을 하거나 뭔가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당장 달려들어 죽여라.” “알겠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얀델 남작도 잘 ‘보필’하고 있도록 하고.” ‘보필’을 말할 때의 뉘앙스를 보니, 부사령관에게 어느 정도 상황 설명을 해둔 듯했다. 저놈 성격상 자세히는 아닐 테고, 그저 내가 내 동료들에게 다가가거나 뭔가 하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말해뒀겠지. “한데 정말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괜찮네. 자네가 이곳에서 제 역할만 다해준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터이니.” 실제로 제롬의 행동은 만용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그야 녀석은 촌장이 내 몸에 깃들었다고 믿고 있으니까. 마을 괴물들까지 이렇게 발을 묶어둬버리면, 마을 내에는 딱히 위협이 될 게 없다. “크흠…….” 이내 제롬이 홀로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어색하게 헛기침을 뱉으며 부사령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자, 그럼 어떻게 되려나……?’ 촌장은 말했다. 제롬 세인트레드가 홀로 그 동굴까지 찾아오게만 만들면 그다음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워낙 자신에 차있었기에 나도 그러라고 했다. 애초에 촌장이 실패해도 나로서는 크게 손해볼 게 없으니까. 촌장이 제롬을 제압하고 몸을 빼앗든. 아니면 제롬이 역으로 반격해 촌장을 죽이든. 어느 쪽이든 내게는 나쁠 게 없었다. 물론 제롬이 살아서 돌아올 경우에는 내가 촌장과 수작을 부렸던 일이 들통날 테지만……. ‘어차피 뒤통수 치려던 건 마찬가지니까.’ 이른바 쌤쌤이라고 해야 하나? 악감정은 남겠지만, 서로에게 과실이 있는 만큼 대화를 통해 화해를 하고 넘어갈 만하다. ‘촌장이 이기면 이기는 대로 장점이 있고 말이지.’ 따라서 계획의 클라이맥스 부분은 모두 촌장에게 일임했다. 애초에 본인이 그걸 원하기도 했고. 유일하게 불안한 점은 내가 없는 동안에 둘이서 뭔가 또 결탁해서 내 뒤통수를 치는 경우인데……. ‘불안해 죽겠네. 촌장이든 제롬이든 믿을 만한 새끼가 어떻게 한 명도 없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기에, 이쯤에서 상념을 끝마쳤다. 결국 그때를 대비한 플랜도 없는 건 아니니까. 당장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최선인 셈. “에보스트, 잠깐 동료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겠나?” 혹시나해서 부사령관에게 그런 요구를 해봤지만, 일말의 여지도 없이 거절당했다. “죄송합니다. 이후 사령관님께서 돌아오시면 남작님이 동료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강하게 요청을 드릴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알았다.” 포박된 동료들이 걱정됐지만, 나는 서둘러 미련을 접었다. 저 완고한 태도를 보아하니, 어떤 설득을 하든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미샤한테 소생의 돌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하는데.’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고 사실 확인에 가깝다. 소생의 돌의 출처는 100% 이백호일 테니까. 뭘 목적으로 미샤에게 이걸 쥐어줬는지도 대충 예상가는 바가 있고. ‘하… 그 새끼는 진짜 이제 믿어도 될까 싶으면 항상 이러네.’ 솔직히 말해 이제는 배신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녀석의 집요함에 넌덜머리가 날 뿐. “후우…….” 아무튼, 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돌아오셨다……!” 홀로 마을에 들어섰던 제롬 세인트레드가 복귀해 내 앞에 섰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촌장일까, 본인일까.’ 그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이내 탐사군의 사령관이 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얀델 남작, 고맙소. 덕분에 그자를 해치울 수 있었소.” 그래, 성공한 거구나. *** 둘이서만 있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촌장이 이겼네.’ 촌장이 제롬 세인트레드를 제압하고 몸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쉽게 말해, 왕가의 고급 인재들이 모인 탐사군 전체가 웬 이상한 놈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린 셈. 이제 이 탐사군의 지휘권은 우리에게 있다. “에보스트, 얀델 남작의 동료들을 모두 석방하라.” “…예?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남작에게 한 모든 것은 ‘촌장’이라는 자를 속이기 위한 작전이었을 뿐이니.” “……예?” 우리 부사령관은 상관의 입장 변화가 당황스러운 듯했기에 내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촌장은 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몰래 지켜볼 수단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속이기 위해서는 너를 포함해 모두를 먼저 속일 필요가 있었다.” “예? 그럼…….” “처음부터 다 연기였다는 거다. 촌장 그 녀석을 쉽게 잡기 위한.” 그 말을 끝으로 자세한 과정은 말하지 않았다. 디테일하게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혹시 모를 실수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인데……. “얀델 남작, 고생 많으셨소. 그런 연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하하!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부사령관은 쉬이 납득을 하지 못하면서도, 실제로 우리 둘이 하하호호 웃고 떠들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렇다는데 자기가 어쩔 거야? 게다가 사람은 원래 본인에게 긍정적인 상황을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어… 안 그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다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따르기는 했습니다마는……. 사령관님께서 얀델 남작님을 마치 버림패처럼 쓰는 듯해서…….” 결국 이 모든 상황들이 나와 제롬이 협력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어떠한 트러블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탐사군 대원들은 약간의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우리의 말 자체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일단 첫 고비는 무난하게 끝났네.’ 사실 이러한 변명을 탐사군에 납득시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그래야 이후 제롬 세인트레드로 살아갈 촌장이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고, 그다음 계획도 자연스럽게 진행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전에 들키지 않아야 한단 건데…….’ 물론 이 부분도 딱히 걱정되지 않는다. 이 녀석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는 이후 벌어진 일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사령관님……! 괴물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놈들이 드디어 두목이 죽은 걸 깨달았나 보군.” 이내 대치 중이던 괴물들이 고대어로 뭐라 소리치며 괴성을 내지르자, 촌장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지시를 내렸다. “전군 돌격! 괴물들을 섬멸하라!” 얼마 전까지 수족처럼 부렸던 부하들을 대상으로 한 명령. “니아 라프도니아……!” 탐사군이 돌격 태세를 갖춘 채 총공세를 이어가자, 괴물들은 무력하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촌장이라는 구심점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대체… 뭘 했기에 저들이 반항조차 제대로 못하는 거냐?” “별거 아닐세.” “……?” “그냥 적당히 상대하다가 죽으라고 말했네. 이제 저들은 쓸모가 없지 않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 별개로 행동 자체는 납득할 수 있었다. ‘…지능도 있고, 고대어로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놈들이니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문제는, 이제 촌장의 비밀을 아는 자가 세상에서 나 혼자이게 되었다는 거겠지만. 그래도 항상 경계를 하되,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긍정적인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니까. “이제 다 끝났구려…….” 마을 소탕이 끝난 후, 제롬의 몸을 집어삼킨 촌장이 내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 있어 얀델 남작의 공이 아주 크오. 해서 그에 마땅한 보상을 내리려는데…….” “…….” “그동안 모은 정수? 마석? 장비?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합법적으로 왕가의 고혈을 빨아 먹을 수단이 생겼다. 568화 폐문 (2) 텅 빈 마을을 수색하고 있다. 아니, 사실 수색보다는 약탈이란 단어가 알맞다. 사령관의 몸을 빼앗은 촌장이 내린 명령의 내용은 딱 하나였으니까. “마을을 수색해 찾아낸 모든 것을 한곳에 모아라!” 가구, 집기, 장비, 생활 도구 등……. 종류의 구분은 없었다. 쓸모가 있어 보이든, 없어 보이든 가리지 않았다. 찾아낸 모든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 하면, 촌장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가 뭘까. 추측해 보건대, 지금까지 마을을 키우며 모은 것들이 버려지는 게 아까워서일 리는 없었다. 촌장은 그런 것에 미련을 가질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들을 약탈한 이유는 하나. 제롬 세인트레드라면 그리했을 테니까. 왕가를 위한단 이유로, 전부 다 털어 갔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촌장은 그런 명령을 내렸다. “각 조의 조장들께서는 이 지도를 가져가 배정된 구역을 맡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탐사군은 각 조별로 구역을 나누어, 한때 스스로를 인간이라 믿던 괴물들이 거주하며 아이를 키웠을 집을 약탈했다. 전투 따윈 일절 존재치 않는 지루한 노동. 하나 이러한 단순 작업을 반기는 부류도 있었다.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최초의 마물들의 생활 방식이 녹아든 물건들!” “이건 대단한 연구 자료가 될 겁니다!” “아쉽군요……. 한두 마리를 생포해서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숨어 있던 녀석이 없으려나?” 연구에 미치고 환장하는 마법사들. 적어도 그들만큼은 이 작업에 아주 큰 가치를 부여했다. 아, 물론 레이븐도 포함해서. “얀델 씨는… 이곳에서 머무른 적 있다고 했죠?” “그런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래, 기회가 되면.” “약속한 거예요? 그럼 가 볼게요. 휴식 시간이 끝나서. 이따가 봐요.” 아무튼, 우리 임시 4조 또한 이 임무를 받고 열심히 배정받은 구역을 뒤지고 또 뒤졌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그야 레이븐도 말했듯, 우리는 이곳에서 지낸 기억이 있으니까. “……저기는 우리가 머물렀던 저택이로군요.” “어! 저긴 피아로치치와 대련했던 공터다!” “어딘가 으스스하네요. 저기 대장간도 불은 켜져 있는데 안에 아무도 없어서…….” “뭔가… 표현하긴 어렵지만 뭔가… 기분이 굉장히 이상하다. 괴물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녀석들도 많았는데…….” 과연 인간과 괴물을 구분하는 것은 뭘까. 외모? 종족적 특성? 경험치의 유무? 그럼 다시 인간의 몸을 되찾은 촌장은 인간인가? 역으로 내가 모종의 일을 통해 괴물처럼 변하거나, 그들 몸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럼 나는 괴물인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조차, 이제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얀델… 괜찮나? 표정이 안 좋은데.” “…물론이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다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후로도 맡은 임무를 이어 갔고, 배정받은 구역의 수색이 전부 끝나자 마을 중심부에서 다른 조들과 합류했다. 어느덧 야영 시간이었다. “양이 어마무시하네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수백이 넘는 개체가 살아가던 마을이니까.” 하루 온종일 걸렸던 마을 수색 및 약탈 작업은 끝. 모든 마을을 뒤졌지만 숨어 있던 생존자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적당한 빈집에서 각 조별로 야영을 했다. 마침내 동료들과 조용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된 셈. “저희는… 저 멀리 다른 방에 있겠습니다.” “예. 편히들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후 아르민 탐사단과 헥츠 클랜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고, 이내 베르실이 ‘음성 제어’ 마법을 쓰자 아멜리아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 그건…….” “사령관과 둘이서 일을 꾸몄단 걸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네 성격에 아무런 얘기도 미리 해 두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거,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는. ‘……사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자칫하면 굉장히 위험했다. 여신이 말하기로는 내가 기절한 동시에 내 동료들은 기습적으로 제압을 당했다. 오더를 내릴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컸다. 어떡하지? 여기서 싸우는 게 맞나? 하지만 왕가의 군대인데? 과연 나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찰나의 판단이 결과를 가르는 그 순간. 내가 빠진 클랜 아나바다는 제때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전원이 맥없이 구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결과 자체는 좋았지만.’ 다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판단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분명 끝까지 항전을 했다면 누구 한 명은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얘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거고. 내가 행운에 기대며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네 말대로다. 숨은 협력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롬 세인트레드는 나를 촌장에게 넘기려고 했지.” 여기까지는 틀림없는 진실. “촌장이 갖고 있던 왕가의 보물 같은 거로 회유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떻게 잘 해결했고, 역으로 이를 이용해 촌장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잘 해결했다니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베르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레아틀라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역시 분명한 진실이었다. 뭐, 말로 잘 해결해 보라는 그런 조언이긴 했지만. 적어도 이 상황을 넘기는 데는 도움이 크게 될 거 같기는 하니까. “레아틀라스 님… 이라고요?” “설마 그때 빛이 터져 나오면서 기절했던 게……?” “아무튼, 자세한 건 여신과의 약속이라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렸고, 마을을 탈출한 나는 제롬 세인트레드와 만나 몰래 거래를 했다. 나를 버림 패로 쓰려던 걸 잊어 줄 테니까, 우선 촌장부터 잡자는 거였지.” “……아까 크나큰 전공이니 뭐니 하면서 보상을 주겠다 한 것도 그래서였군요.” 이내 나는 쓱 주변을 둘러봤다. 여신의 이름까지 팔고, 사령관이 내게 보상까지 쥐여 주려던 정황까지 겹쳐지자 대부분 내 말을 의심 없이 믿는 눈치였다. 딱 한 명, 아멜리아만 빼고.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집요하게 물을 기세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촌장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상대가 촌장인 이상, 내가 비밀을 공유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역시 촌장이 혹시 할지 모를 ‘돌발 행동’의 목표물이 될 테고. ‘무엇보다… 언젠가 일이 정말 잘못됐을 때,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게 되지.’ 아무튼, 이후 동료들의 질문 몇 개를 더 받아 주는 것으로 이번 주제는 끝.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다들 잠깐 자리 좀 비켜 주겠나?” “아… 으응, 너도 쉬어야지…….” “미샤, 너는 빼고.” “…엑?” 내가 콕 집어 부르자 무슨 담임 선생님에게 지목을 당한 것처럼 당황하는 미샤. 이후 동료들이 먼저 쉬러 간다며 나가고 혼자 남자, 미샤가 의자에 앉은 채 무릎 위에 양 주먹을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먼저 물었다. “뭐, 뭔데……? 갑자기 나, 나만 따로 부르고…….” 괜히 에둘러 말하며 애태우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생의 돌.” “……!” 딱 세 단어를 언급했을 뿐인데 움찔하는 어깨. 이런 애가 어떻게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나도 싶지만, 생각해 보면 전부 내 탓이다. 조금 몰아붙이는 한이 있어서라도 진작에 강하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왠지 얘한테는 그러기가 어렵단 말이지. “이백호가 준 거냐?” 어떻게 알았냐든가, 그런 식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미샤는 짧게 답했다.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응…….” “그걸 주면서 뭐라고 말했지?” “네 곁에 있다가… 언젠가 네가 죽으면 그걸 써서 사, 살려 내라고…….” 그래, 역시 그랬구나. 내심 짐작하고 있던 것이기에 놀랍진 않다. 다만, 몇 가지가 궁금했다. “소생의 돌을 사용 시, 대상이 생전 기억을 전부 잃는다는 걸 알았나?” “……뭐?” 오케이, 표정을 보니 그 특징은 몰랐단 거겠고. 나는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몰랐다면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은 거지? 얘기만 들어선 나한테 해가 될 일도 아닌 거 같은데.” “네가 알게 되면… 너한테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숨겼다? 그 새끼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 미샤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한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굉장히 묘한 감정이 피어난다. 화가 난다기에는 머리는 차분했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기엔 자꾸만 심장이 뛴다. 그 감정은 슬픔과도 거리가 멀었다. 도대체 뭘까 이 기분은. “알겠다. 그럼 이만 나가 봐라.” 알 수 없기에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고자 했다. 얘를 더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한데 어째서일까. “…….” 미샤는 의자에 앉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왜 안 나가냐? 가서 쉬어라. 너한테 들을 건 다 들었으니까.” 이내 미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 들었다고? 그게… 끝이야?” 내게 있어서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왜, 뭔가 더 필요하냐?” “…….”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악의를 품고 일을 꾸민 것도 아니고, 너는 그저 날 위해서 한 일이었을 뿐인 거잖냐?” 조곤조곤한 내 답변에 미샤는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렇게 정적의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런 건…….” “……?” “그런 건 싫어…….” 미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말해 줘. 뭐든 좋으니까…….”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애원의 말. 그 부탁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난 단지 더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조차도 알지 못하던 본심이 입을 통해서 먼저 나올 수 있는 줄은 몰랐거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까.” 한때 낯선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됐다. 물론 그것이 전부 얘 책임은 아닐 테지만. 오히려 잘잘못을 따지자면 이백호에게 훨씬 더 큰 지분이 있을 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 “오늘 얘기를 듣고 나서도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으응, 그랬구나…….” 미안하게 됐다고. 그렇게 말할까 싶다가도 내가 미안해할 일은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미샤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터벅, 터벅. 말없이 걸음을 옮겨. 쿵. 문을 닫고 조용히 방을 떠났다. *** 다음 날 아침. 매일 아침 일상인 오전 회의가 끝나고, 촌장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만 낭비하는 오전 회의는 그냥 없애 버리면 안 되냐?” “그럴 수 없네. 제롬 세인트레드는 정해진 일과를 중시하는 인물이니까.” “뭐,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어제 말한 보상은 생각해 봤나?” “아, 그거라면 나중을 기약할 생각이다. 아직까진 당장 필요한 게 없어서.” “그렇다면야. 언제든 말하게.” “그러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앞으로의 계획이라 보는데… 이제 너는 어쩔 생각이지?” “그때도 말했듯, 일단은 차차 시간을 두고서 이 몸에 적응부터 할 생각일세.” 촌장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적응이라…….” 결국 저 말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저 몸으로 지내며 어떤 정수를 지녔는지, 이블루스 정수는 정말 먹은 건지, [이교 제단]이 실제로 도시에 설치되어 있는지 등등. 그런 걸 먼저 확인하려는 거겠지. “적응이 끝난 다음엔?” “곧바로 이곳을 떠날 걸세.” 해석하자면, 이블루스 정수만 확인이 된다면 즉시 자리를 비켜 주겠다는 뜻. 나로서는 손꼽아 기다려지는 시기였다. 뭐, 그것과 궁금증은 별개지만. “근데 그 몸으로 계속 살아갈 생각이면, 그냥 다 같이 탈출할 때 껴서 나가면 안 되는 거냐? 이블루스 정수는 지우는 것도 불가능한데.” 플레이어로서의 직업병이라 해야 하나? 조금 일찍 나가겠다고 횟수를 까먹는 게 너무나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도무지 가시질 않는다. 정확히는 너무 아까웠다. 내가 손해를 보는 상황도 아닐진대. “게다가 혼자 죽어서 탈출하면, 왕가에서도 널 곱게 보지 않을 거다. 어쩌면 단장 자리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아하하, 신기하군! 자네가 내게 그런 조언을 할 줄은 몰랐네만.” “일단은 한배를 탄 사이 아니냐. 밖에서도 서로 협력을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그보다 웃는 솜씨가 많이 늘었군?” “슬슬 적응해 가는 중일세.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에.” “그래서 대답은?” “전과 같네. 적응만 끝나면 난 곧바로 나갈 걸세.” 촌장은 왜 그렇게 비효율적인 짓을 하려는 걸까.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촌장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 계층에 들어온 지 이제 100일이 조금 넘었지, 아마?” “그런데?” “자네는 아직 이 계층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네.” “……?” “물론 자네야 기록대로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나게 되겠지만… 거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리 말한 촌장이 말을 이었다. “이 순간을… 나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 기다려 왔단 말일세.” 이번에는 억지로 만들어 낸 듯한 감정이 아니었다. 촌장의 목소리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물론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하하, 사람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모두 다르지 않나? 단 하루라도 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면, 내게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네.” 이내 촌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인위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569화 폐문 (3) 촌장과의 독대 시간은 이후로도 좀 더 이어졌다. 나는 이 계층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들이 뭐냐고, 포탈 비석을 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거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촌장은 애매모호한 말로 답변을 회피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네. 그리고 벌써 걱정할 이유가 뭔가? 어차피 언젠가 자네는 이곳을 떠나 도시로 돌아가게 될 터인데.” “왜 속 시원하게 말을 안 해 주는 거냐? 혹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세. 단지, 무엇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했을 뿐.” “그게 무슨 뜻이지?” “혹시 모르지 않나. 이 계층에 내가 발견해 내지 못한 뭔가가 더 있을지. 만약 내가 조언을 한다면, 분명 그러한 것들을 찾아낼 가능성은 사라질 걸세. 이후 자네는 내 조언대로만 행동을 할 테니까.” 뭐,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그런 건가?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안 된다. 나와 촌장은 부모 자식과 같은 끈끈한 관계가 절대 아니니까. 날 ‘도우려 한다’는 의도 자체를 신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후후, 그렇게 보지 말게.” 그런 날 보며 촌장은 특유의 미소를 내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네와 나는 한배를 타게 된 것 아닌가. 분명 자네도 생각했을 걸세. 내가 앞으로 자네에게 어떤 이득이 되어 줄 수 있을지를. 그렇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긴 한데.” “나도 마찬가지일세. 조력자가 성장을 하면 나 역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테니까.” 거, 말만 번지르르하기는. “그러니까 좀 더 고민을 해 보다가 말해 주겠네. 어디 내가 지금 당장 떠날 것도 아니지 않나?” 삐진 자식을 달래는 듯한 말을 들으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 저리 말해도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고집을 피운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생산적인 얘기를 하는 게 낫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거냐?” 벌써 오늘만 몇 번째 물어보는 질문. 하나 그 내용은 이전과 다르다. 아까 전의 질문들이 촌장 개인 그리고 우리를 지칭해 묻는 것이었다면, 이번 것은 탐사군 전체를 의미한다. “이 섬에 계속 머무를 건가?” 앞으로의 탐사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그 물음에 촌장은 직관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아마 오늘까지는 이 섬에 머무를 듯하네. 아직 공식적으로는 차원 비석도 발견하지 못했지 않나? 일단 그것부터 발견을 하고서, 마법사들에게 연구할 시간을 줘야 하네.” “제롬 세인트레드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렇네.” “아무튼, 그래서 그다음은?” “아직 미정일세. 다만, 내일까지는 고민을 끝내고 말해 줄 수 있도록 하지.” “……알겠다.” 그렇게 오늘의 대화는 여기서 끝. 독대를 끝마친 뒤에는 다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잠시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부사령관을 통해 지시가 떨어졌다. 마을 전체를 한 번 더 수색을 할 예정이니, 각 조는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수상한 것을 찾아내란 명령인데……. “사실상 휴식 명령이군. 그럼 우리는 어디 적당한 데 찾아서 쉬는 거로 하지.” 우리 임시 4조는 내 지휘하에 빈집 하나에 들어가 노가리를 까기 시작했다. 한데, 그런 식의 농땡이가 별로였을까? “저희는 주변을 좀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있기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사령관 눈치가 보이는 거냐?” “그것보다는, 정말로 뭔가 숨겨진 게 있는데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뮐 아르민은 그런 말과 함께 탐사단 단원들을 이끌고 수색에 나섰고, 이는 헥츠 클랜의 단장 와이트 헥츠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뭔가 찾아내면 전공으로 인정해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르민 쪽이 ‘탐사’ 자체에 목적을 둔다면, 얘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느낌. 뭐, 어느 쪽이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적당히 시간이 되면 차원 비석이 있는 그 동굴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테고, 나도 그때쯤 슬렁슬렁 가서 리액션만 몇 번 해 주면 된다. ‘근데 어쩌다 보니 또 우리만 남았네.’ 헥츠 클랜과 아르민 탐사단이 자리를 비우며 클랜 아나바다의 멤버만이 남아 노가리를 까게 된 상황. “악! 보, 보지 마요!” 쓱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득 눈이 마주친 에르웬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가린다. 쩝, 얘는 아직도 이러네. 어느새 구석 자리로 도망친 에르웬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자니, 베르실이 내게 다가왔다. “걱정 마세요. 머리가 빨리 자라게 해 주는 비약이 있으니까. 도시로 돌아가면 바로 만들어서 가져다드릴게요.” “오, 그런 게 있다니 다행이군.” “와… 취향이 정말 확고하시네요.” “……응?” 갑자기 취향 얘기가 왜 나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자 베르실이 시선을 피한다. “그… 저는 테르시아 씨는 단발도 굉장히 잘 어울린다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근데 쟤가 눈만 마주치면 저러잖아. 이제 와서 뭐라 말해 봤자 위로의 말로만 들릴 거 같아서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서 한참이나 더 지내야 할 텐데…….’ 앞으로가 걱정되나, 일단 당장은 해결법이 없기에 머리를 비웠다. 그리고 쉬려던 찰나. “여기에 있었구려. 한참을 찾았지 않소.”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주택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카이슬란?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아르민 탐사단이 단독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서 말을 걸었다가 여기서 쉬고 있단 소식을 듣고 잠깐 와 봤소이다.” “잘 왔다. 너도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좀 쉬고 그래야지.” “그럴 생각이오. 어차피 이번 탐사만 끝나면 이 지긋지긋한 군인 생활도 안녕이니 말이오.” 아이스록 사태로 왕가를 향한 반감이 극에 이르러서일까? 월급 루팡을 하겠다니, 예전의 카이슬란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뭐,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런 뜻밖의 방문객은 놀랍게도 카이슬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저… 계십니까……?” 머지않아 한 명이 조심스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스벤 파라브? 너는 또 어쩐 일이냐?” “지나가다 헥츠 클랜을 만나서 말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겠는지요? 둘이서.” “물론이다.” 고블린의 요청에 나는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섰고, 적당히 근처 빈집에 들어가 녀석과 대화를 나눴다. 녀석은 내게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저… 어떻게 된 겁니까?” 주어가 빠진 포괄적인 질문. 하긴, 얘 입장에서는 뭐가 어떻게 되는가 싶겠지. 우리 애들은 그나마 설명을 들었지만, 얘는 그런 것도 아니니까. 나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세히는 말하기 어렵지만, 잘 끝났다.” “예?” “네가 받은 신탁의 장면은 무사히 피했다는 뜻이다.” “아…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마는…….” 딱 봐도 내가 생략한 내용들이 궁금한 눈치였으나, 녀석은 애써 의문을 목 안으로 삼켰다. 이런 걸 보면 나름 사회성이 좋단 말이지. 이내 나는 녀석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스벤 파라브. 생각해 보니 전에는 말을 못 했는데, 고맙다.” “예?” “사정이 있어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결국 네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아…….”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 전력으로 도울 테니까.” 내 감사 인사가 그렇게 의외였던 것인지, 녀석은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는지 별거 아니었단 겸손의 말을 하며 떠났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대주교가 난리를 친다던가? “너도 고생이 많군. 그래라. 나중에 보자.”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나르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왔다. “비요른!!” 음, 이 목소리 톤은 뭔가 자랑할 게 생겼을 때의 톤인데? 이내 주변을 쓱 스캔하자 한 가지 변화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레이븐?” 레이븐이 와 있었다. 그리고……. “아루루는 됐으니! 저기! 저것 좀 봐라!” 에르웬이 거무죽죽한 철투구를 쓰고 있었다. “……뭐냐, 저건?” 아이나르가 아니라 레이븐을 보며 묻자, 레이븐이 한숨을 팍 내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테르시아 씨가 우울해 보이니까 프넬린 씨가 나름 계책을 생각해 본 모양이에요.” 그래, 뿌듯하게 웃는 걸 보니 그럴 거 같더라. “하하핫!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 아니냐? 이걸 쓰면 저 창피한 단발머리를 감출 수 있다. 아니, 어디 그뿐인 줄 아나? 심지어 이걸 쓰고 있으면 머리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바바리안식 해결법을 내놓고서 자랑스레 말하는 아이나르. “됐고, 봤으면 어서 좀 말려 보시죠?” 레이븐이 재촉의 의미를 담아 조용히 속삭인다. 다만, 나는 대답을 미루고 일단 에르웬과 눈을 마주쳤다. “저 아저씨… 어, 어때요……?” 놀랍게도 철투구를 쓴 에르웬은 더 이상 나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혹여 전투 중에 머리카락이 신경 쓰인다고, 행동에 제약이 생기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그 고민이 투구 하나로 해결이 된 것. “…나쁘지 않은데?” 물론 탐험가로서의 실용성과 패션을 동시에 챙긴 저 여리여리한 복장에 철투구를 씌워 두니 조금 언밸런스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머리를 좀 썼군, 아이나르.” “후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르웬은 내 친구니까!” 문제는 해결됐다. *** “정말 테르시아 씨를 저 꼴로 돌아다니게 둔다고요?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한데? 저, 레인즈 씨? 레인즈 씨가 뭐라고 좀 해 보는 게—.” “내버려 둬라.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쩌겠나.” “테르시아 씨! 테르시아 씨는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네? 네에… 이걸 쓰니까 창피한 건 확실히 좀 줄어든 거 같아서…….” 레이븐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걸 끝으로 이번 주제는 끝이 났다. 에르웬은 앞으로 철투구를 쓰고 다닐 것이다. “맙소사……! 여기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죠?” 뭐래, 얘는. “됐고, 레이븐 너는 여긴 무슨 일이냐?” “아, 그거요? 그냥 얀델 씨는 뭐 하나 싶어서요.” “응?” “자유 수색 명령이었잖아요? 왠지 얀델 씨라면 뭔가 찾아낼 것도 같아서…….” 아, 쉽게 말해 날로 먹으러 왔다는 거구나. 뭔가 발견했을 때 옆에 있으면 가장 먼저 연구를 해 볼 수도 있고. “그럼 아쉽게 됐군. 보다시피 우리는 그냥 쉬기로 해서.” “……그러게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후 레이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껴들었다. “그나저나 얀델, 대화는 끝났나?” “잘 끝났고, 스벤 파라브는 돌아갔다.” “그렇군……. 그럼 나한테도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왠지 오늘따라 나를 부르는 사람이 많네. “잠깐 실례하지.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 레이븐 너는 대충 놀다가 알아서 돌아가고.” “제가 그렇게 한가로워 보여요? 됐어요. 안 그래도 지금 바로 가려던 참이니까.” “그래? 잘 가라.” 레이븐을 대충 배웅해 준 뒤, 아멜리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얘는 대체 무슨 용무로 나를 호출했을까. 그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혼자 구석에 처박혀 저러고 있는 꼴을 보니 도무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아……. 역시 이게 나오는구나. “어제 미샤 칼스타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솔직히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백호라든가, 소생의 돌이라든가. 2년 반의 공백, 그리고 거기에서 생긴 불신의 균열 등등. 한데 왠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거짓말. 하나 아멜리아는 그 말을 듣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군.” “…….” “나중에 말하고 싶어진다면 말해 줘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거, 무슨 어린애 대하듯이 말하긴.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알겠다.” 그래도 어째선지 기분이 좀 나아진 듯했다. *** 촌장섬에서 머무르는 기간은 예상치 못하게 길어졌다. 간단한 이유였다. 원래는 차원 비석을 발견한 그다음 날에 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갈 예정이었지만……. “차원 비석에서 전해지는 마력의 흐름이 최근에 논문에 실린 양방향전송장치의 흐름과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거라면… 어쩌면 강제로 비석을 작동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원 비석을 연구하던 마법사들은 뭔가 특이점을 발견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며 이 섬에 더 머무를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열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반드시 해내도록.” 촌장은 그러한 청을 받아들였다. 그야 촌장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제롬 세인트레드라면 이때 똑같은 판단을 했을 게 분명하니까. 물론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을 거다. 만약 마법사들이 정말로 비석을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곧바로 도시로 돌아갈 수 있으니. ‘애초에… 촌장은 탐사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말이지.’ 어차피 촌장은 ‘적응’만 끝내고 귀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에 마을에 머무르나, 저 밖을 탐사하나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셈인데…….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마법사들은 온종일 차원 비석 앞에서 온갖 시도를 해 보았고, 나머지들은 마을에서 쉬거나 섬으로 올라가 마물들을 처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날들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어느덧 커뮤니티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바깥 세상과의 소통, 그리고 이백호 이 새끼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드디어 따질 수 있겠네.’ 내심 기다려 왔던 시간인 만큼, 방에서 깨어난 즉시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깍, 딸깍. 한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커뮤니티를 열자마자 화면을 절반 이상 채우는 팝업창이 떠오른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이용하시는 모든 플레이어분들에게 안내 말씀 드립니다.] “…공지 사항?” 이렇게 대자보처럼 붙인 적은 한 번도 없던 거 같은데. 밖에 무슨 일이 터졌나? 서둘러 아래 내용까지 읽어 내린 나는 그대로 돌처럼 굳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GM입니다.] 그런 흔한 문구로 시작된 공지에는 이 커뮤니티는 언제 시작됐으며,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해 운영진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등등. 마이너한 게임을 즐겼던 게이머라면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야 이런 내용이 올라오면 항상 결론이 똑같거든. ‘니미럴.’ 그래도 아니길 바랐건만. 더 볼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고스트 버스터즈를 이용해 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러한 안내를 드린 것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운영진의 개인 사정에 의해, 오늘을 마지막으로 고스트 버스터즈의 서비스가 종료됩니다.] [현금으로 구매하신 GP의 환불 문의는 새롭게 신설된 환불 문의 탭에서 가능하며…….] 서버가 망했다. 570화 폐문 (4) 악령이라는 사실을 감춰야만 하는 낯선 세계. 그 세계에서 플레이어들이 유일하게 익명성을 유지한 채 소통을 할 수 있던 대화의 장. 고스트 버스터즈가 문을 닫는다. 그 공지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문 닫지마.]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 무작정 떼를 쓰는 글. [GM아, 서버 종료 하려면 해봐. 해보라고] 죽으면 그만이니까. 본인 목숨을 걸고 협박을 하는 글. [GM님과 운영진님들 꼭 봐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드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저 역시 죽을 고비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비 중 몇 번은 원인이 저 자신에게 있었고요. 모든 걸 포기하고, 이제 그만 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약했던 시절의 저를 일으켜준 것이 바로 이 고스트 버스터즈 커뮤니티였……. 간절히 애원하며 서버 종료를 재고해달라는 설득의 글. [GP 환불 신청.] 방금 했는데 언제 처리되나요? 저한테는 큰돈이라서요. 먹튀는 안 하겠죠? 커뮤니티보다는 본인이 볼 손해를 걱정하는 글. [진입 12년 차가 추측해보는 고스트 버스터즈 폐쇄 이유.]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GM이랑 왕가 사이에는 은밀한 커넥션이 있었다. 애초에 이 커뮤니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왕가에서 봐주고 있었기 때문인데……. 분석하고 추측을 하는 글 등등. 게시판에 올라온 첫 글부터 그 뒤에 우후죽순 쌓인 모든 페이지가 ‘고스트 버스터즈 폐쇄’라는 대사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딸깍, 딸깍. 나만 해도 크게 충격을 받아 관련 글들을 계속해서 읽어내리는 중이었으니까. 오직 한 가지 의문만을 품은 채. ‘대체 왜 서버를 닫는 거야?’ 이내 나는 게시판 탐색을 멈췄다. 여기서 더 살펴본다고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나올 거 같지는 않았다. 90%가 어그로성 뻘글이거나, 무지성으로 떼를 쓰는 글들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혼자 생각해보자. 어차피 저놈들보다는 내가 아는 게 더 많을 거 같으니. ‘역시… 왕가랑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일단 여기까지는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GM과 왕가가 은밀하게 손을 잡은 관계라는 건 이미 증명됐으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는……. ‘그럼 왕가에서 왜 갑자기 서버를 닫으려 했을까.’ 의도가 읽히지 않는다. 단순히 GM과 왕가 사이에서 트러블이 생겨서? 그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지만, 어쩌면 좀 더 다른 정치적인 의도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후… 이거, 골치 아파졌네.” 커뮤니티가 페쇄되는 것 그 자체로도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나를 더 아쉽게 하는 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왜 하필 지하 1층에 갇혀 있을 때에…….” 커뮤니티가 사라지면, 지하 1층에서 외부의 소식을 듣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쉽게 말해, 상황에 따라 바깥에 영향력을 끼치는 방식을 아예 쓸 수 없게 된다는 뜻. 딸깍, 딸깍. 한참이나 커뮤니티 페쇄에 얽힌 사정을 추측하던 나는 고민을 끝내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냥 물어보자.” 백 번 천 번 고민을 해도 한 번 당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이었다. 그야 난 게시판에 징징거리는 글을 남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일반 유저들과는 다르니까. 나는 GM의 닉네임을 알고 있다. [Elfnunalove님에게 1:1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항상 볼 때마다 왠지 부담스러워지는 닉네임. 그 닉네임으로 일단 대화를 신청했다. 하지만……. ‘뭔가 하고 있나?’ 암만 기다려도 묵묵부답인 상태가 이어진다. 거절도 하지 않고, 좀만 기다려달라는 그런 식의 메시지도 돌아오지 않는다. 쩝, 그럼 이건 일단 계속 기다려보는 거로 하고……. 딸깍, 딸깍. 다시금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 카테고리로 넘어갔다. [대한독립만세] - 2명이 접속 중입니다. 오케이, 여기에는 둘 다 접속 중인 거 같고. “후우…….” 채팅방 입장 버튼에 커서를 올린 채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오! 형니이이이임! 오셨습니까! 불초 동생이 인사 오지게 박습니다!” “오빠, 공지 봤죠? 지금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채팅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이백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반갑게 맞이해준 현별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현별아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네?” “이백호, 이 새끼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오늘은 하하호호 웃자고 온 게 아니거든. *** 내 눈치를 쓱 보던 현별이가 별말 없이 채팅 방을 떠난 후. 정적 속에서 이백호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형… 혹시 화났어요……?” 실로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은 내가 화를 내든 말든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만약 그런 새끼였다면, 뒤에서 그딴 수작을 부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야, 너는 대체 뭐 하는 새끼냐?”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한 의문을 토해냈다. 하나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예? 아니, 형… 잠깐 진정하시고… 왜 그러시는지, 그걸 먼저 말씀해주셔야…….” 그래,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한 거구나. 뭐, 이 상황에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다. 정말로 이번을 끝으로 커뮤니티가 닫히는 거라면, 앞으로 이보다 좋은 환경에서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을 테니까. “소생의 돌.” 미샤에게 그러했듯 딱 한 단어만을 읊조렸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대강 모든 상황을 파악했을까? “아.” 이백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내가 화를 내니 안절부절 못하는 듯하던 눈빛에서, 어딘가 아쉽다는 듯한 눈빛으로. “실패했나보네.” 녀석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내게 물었다. “걔가 말했어요?” 정말 새삼스럽게도, 이때 새삼 느꼈다. 이 새끼는 진짜 어딘가 제대로 망가진 놈이구나. “아니면 그냥 들킨 건가? 하긴… 애초에 맡길 때부터 못미덥기는 했는—.” “이백호.” 일단 말을 끊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턱에 힘을 주며 나는 가능한 침착하게 물었다. “왜 그랬냐?” 어째서 미샤의 손에 소생의 돌을 쥐어줬는가. 그 짧은 질문에 이백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형답지 않네요.” 이내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형도 이미 답을 알지 않아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묻는 말에만 대답해. 왜 그랬냐?” 다시금 강하게 묻자, 이백호가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자꾸 형이 답답하게 굴어대니까요.” “……그래서 소생의 돌을 내게 쓰려 했다고?” “네. 형이 먼저 끊어내질 못하니까. 제가 조금 도와주려 했죠.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전부 필요없는 인연들이잖아요?”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미친놈. 그게 이백호의 본질이었다. 안 봐도 훤하다. 만약 내가 기억을 잃게 되면, 그 상태인 나에게 친절한 미소를 품은 채 다가와 ‘형, 형’ 거리며 따르는 척했겠지. 다만, 여기서 더 화를 내는 건 하수였다. “그러냐? 그래도 아무튼 고맙다.” “……네?” “소생의 돌 말이야. 엄청 귀한 아이템인데 어쩌다 보니 내가 공짜로 갖게 됐잖아. 너도 힘들게 구한 걸 텐데. 그 목적이라도 이뤘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돌려달라고 해도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듯, 놀리는 듯한 말투로 녀석을 비꼬았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오, 정말요? 형이 갖고 계셔주면 저야 고맙죠.” 태연한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묻어나는 답변. “어차피 형은 절대 안 죽어요. 언젠가 마지막 층을 뚫고 ‘소망’을 이뤄야 하니까. 근데 그걸 알면서도 제가 왜 형한테 소생의 돌을 준 줄 알아요?” 녀석은 내게 대답을 들으려 한 물음이 아니라는 듯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생의 돌로 부활하면 죽은 게 아니니까. 그 기록이 실현되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단 말이죠?” 쉽게 말해, 소생의 돌이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면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 “기록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요.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결은 언젠가 끝지점에 도착할 테지만, 그 과정에서는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죠.” 이백호가 미샤에게 소생의 돌을 주고서 돌려보낸 이유였다. 소생의 돌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내게 사용될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실로 영악한 새끼가 아닐 수 없단 생각이 들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게 웃었다. “백호야, 지금 너 조금 감정적인 거 아니냐? 아무리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게 분해도 그렇지. 그렇게 전부 말하면 내가—.” “에이, 제가 형을 아는데.” “……?” “형이라면 못 버릴 걸요? 형 동료들은 언제든지 뒈질 수 있으니까. 들어보니까 예전에 반푼이 마법사 하나 뒈지고, 엄청 슬퍼했다던데.” 선을 넘는 발언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지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으니까. 설령 기억을 잃는 패널티가 있다고 한들, 그 순간이 오면 난 주저없이 동료들에게 사용할 것이다. 운 좋게 소생의 돌을 갖고 있었단 사실에 감사하며. “뭐, 그래도 찝찝해서 버리겠다면 그렇게 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어차피 플랜 B도 잘 진행되는 중이고.” “…….” “그보다 미샤 칼스타인은 어떻게 됐어요? 만약 형이 직접 소생의 돌에 대해 알아낸 거면, 배신감이 장난 아니었을 거 같은데.” “…….” “오, 표정을 보니 진짜인가 보네? 완전히 마음을 닫은 거면 그냥 저한테 돌려줘요. 다시 빙결검사를 구해서 거기까지 키우려면 저도 번거롭거든요.” “…….” “근데 좀 이중적이지 않아요? 형도 다른 사람들을 항상 농락하고, 속여왔잖아요. 냐옹이도 마찬가지고. 혹시 그 바바리안 여전사도 알아요? 형이 악령인—” 이쯤에서 나는 녀석의 말을 끊었다. “조용히 좀.” “…네?” “제발, 조용히 좀 해.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나는 겸허하게 인정했다. 먼저 화난 쪽이 지는 게 이런 말싸움이라면, 오늘은 내 패배였다. 이 영적 세계에서는 암만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어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 무서워라. 근데 형, 진정해봐요. 제가 새롭게 제안할 게 있는—.” “백호야.” 나는 귀를 꾹 닫고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해도,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보겠지?” “어… 그러겠죠?” “그때 형이 네 소원을 들어줄게.” “네? 그게 무슨 뜻…….” 무슨 뜻이긴. 네가 항상 말했었잖아. 이 좆같은 세상에서 떠나고 싶다고. “그때 보자.” 이를 끝으로 나는 채팅방을 떠났다. *** 다시금 돌아온 이한수의 방. 천천히 감정을 삭히고 있자니, 먼저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었을 현별이가 뒤늦게 떠오른다. ‘많이 당황했을 거 같은데…….’ 하나 다시 저 채팅방에 들어가 구구절절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일단은 소모한 에너지를 채울 필요가 있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차분히. 1분, 2분, 3분……. 멍하니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길게 이어지자 그래도 조금은 정신력이 차올랐다. 이백호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이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는 것들이 생각나 조금 후회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후…….” 좀비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채팅방을 확인했다. [대한독립만세] - 0명이 접속 중입니다. 현별이는 방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다리다 지쳐 떠난 모양이었다. 미안하단 생각이 들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단 쪽지함을 확인했다. 아까 전에 GM에게 보낸 대화 요청은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왠지 읽씹 당한 기분이네…….’ 바빠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리는 없는 시간. 다만 속이 갑갑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미궁에서 떠나기만 하면 GM을 직접 찾아가서 묻는 것도 가능할뿐더러……. GM은 아니더라도 운영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단이 당장 있기는 하니까. 딸깍, 딸깍. 이내 마우스를 조작하자 눈앞이 물들며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봐온 단촐한 환영 문구가 떠올랐다. [감시자님을 환영합니다.] 최후의 원탁 집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571화 라스트 커뮤니티 (1) 수십 종류의 의상, 그리고 그보다 많은 숫자의 가면이 벽면에 가득 전시된 커스터마이징 룸. 그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평소처럼 남색 정장을 걸치고, 사자 가면을 머리 위에 걸친다. 그 과정에 동선 낭비, 시간 낭비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렸으니까. 매달 이곳에 오다보니, 과장을 좀 보태자면 눈을 감고도 옷과 가면을 찾아서 입을 수 있을 정도. “마지막… 인가.” 뭔가 아쉬우면서도 섭섭한 기분이다. 사실 최근엔 원탁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이전처럼 내게 중요하게 작용하는 일이 없었음에도. “…….”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의상을 다 챙겨입은 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서서 전시된 가면과 의상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사실 그동안엔 거의 잊고 살고 있었는데. “가장 닮은 운명이랬지…….” 원탁의 감시자에 최초로 입장했을 때, 신규 회원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운명과 가장 닮은 가면을 택한다. 그럼 나는 왜 수컷 사자의 가면이었을까.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왜 내가 이 가면을 고르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난 사자보다 호랑이파였는데.’ 이 가면으로 고른 후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뭔가 단서가 있을까 싶어 고민을 해봤지만 막상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다음으로 넘어갔다. 여우는 왜 여우고. 고블린은 왜 고블린인 걸까? 애초에 사슴뿔은 뭐지? 사슴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가면에 사슴뿔이 달려 있는 형태던데. “……모르겠네.” 이 방에서 더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기에, 슬슬 발길을 떼어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몇 번이나 걸어간 레드 카펫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과연 내 동료들이 원탁에 왔다면 어떤 가면을 골랐을까? ‘아이나르는 황금 개일 거 같고…….’ 아멜리아와 에르웬을 포함해 클랜 아나바다의 멤버 전부, 그리고 이전 동료였던 레이븐이나 난쟁이놈, 로트밀러의 가면까지도 생각해봤다. 의도한 건 아닌데, 미샤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미샤는…….’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쉬웠다. 적묘족인 애한테는 썩 어울리는 가면은 아닐 테지만. ‘고양이보다 강아지에 가깝지…….’ 물론 그냥 평범한 강아지는 아니다. 맨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전시되어 있던, 흉터 자국이 가득하던 그 강아지 가면이 어울릴 거 같다. 문제는, 그 흉터들 중에 내가 남긴 것도 있을 거 같단 거지만. ‘그만.’ 이쯤에서 상념을 끝내고 걸음을 멈췄다. “피싯… 역시 오셨군요. 안심했습니다. 혹시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할까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누구 하나 빠지면 서운할 거 같았는데.’ 다행히 매달 봐왔던 그 가면들이 전원 도착해 있었다. *** 사슴뿔, 초승달, 여우, 광대. 내가 처음 원탁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리를 지키던 원년 멤버들부터. 그다음에 복귀하며 알게 된 고블린, 중간에 GM의 특명을 받고 잠입한 여왕,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한 번에 합류한 흑가면, 늑대, 나비로 구성된 정체불명 삼인방까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다. “…….” 마지막 원탁인 만큼 뭔가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알 수 없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컨셉을 지킨 채 그 시선들을 싹 무시하며 자리로 향했다. 쿠웅-! 보통 문이 닫히고, 이렇게 나까지 착석하면 집회가 시작됐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다들 집회를 바로 시작하기보다는 대화를 나눴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니……. 날벼락이 떨어진 기분이오.” “그러게요……. 다음 달부터는 이런 게 없는 거잖아요?” “뭐, 그래도 잠은 편하게 잘 수 있겠구려. 항상 이날마다 다음 날이 힘들었는데.” 그들의 중얼거림에는 아쉬움이 깊게 배여있었다. 심지어 운영진 측 사람인 여왕에게조차도. “…아쉽게 됐네요.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게 너무 많은데.” 이내 여왕이 짧게 감정을 내비치자, 눈치를 쓱 보던 고블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럼 문을 안 닫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힘들 거 같네요. 이쪽에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 뭔지… 혹시 들을 수 있겠소?” “죄송해요, 초승달 님.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저희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사건이라는 거예요.” “…정말로 왕가에서 외압이라도 넣은 건가요?” “그건 노코멘트 할게요. 여우 님.” 역시 아니나 다를까 시작된 대화의 주인공은 여왕이었다. 그야 운영진 측 사람인 여왕이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을 테니까. 물론 다른 걸 기대한 사람도 있었다. “…한데 그분은 오지 않으려나 보구려?” “그분이라니요?” “마스터 말이오. 혹시 오늘은 마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건만.” 늑대 가면의 중얼거림에 여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입장을 표했다. 하긴, 얘도 마스터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 이내 대화에 집중하며 주변을 쓱 훑어보고 있자니 고블린이 다소곳하게 손을 들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저… 다름이 아니라… 이제 마지막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제안이었고, 실제로 이를 들은 모든 멤버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나 고블린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습니까. 그냥 이대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밖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밖에서 이런 공간을 새로 만들어도—.” “고블린 씨, 그만해요.” 길게 이어지려던 고블린의 헛소리를 끝낸 것은 여우였다.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던 것 자체가 익명성이 보장됐기 때문인데, 누가 자기 이름을 당당히 밝히겠어요.” “그건 그런데… 아쉬워서…….” “피싯, 그래도 생각하는 게 귀엽긴 하군요. 뭐, 저야 신분이 다 들통났으니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아, 그건 고블린 그쪽도 마찬가지려나요? 피시시싯, 이거 이거 생각보다 영악한 계획 아닙니까? 본인만 손해를 보지 않는 제안이라니!” “아, 아니… 저는 그럴 목적이 아니라…….” 광대의 비아냥에 크게 당황한 고블린. 의외로 이를 지켜보던 여왕이 고블린을 비호하고 나섰다. “고블린 님, 굳이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단 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니까.” “……그, 그렇습니까?” “네. 말 그대로 아쉬웠을 뿐인 거잖아요?” “예… 정말로 그렇습니다…….” 대충 들어도 미련이 줄줄 흘러 넘치는 목소리. 거, 이게 졸업식인 것도 아니고. 얘는 은근히 정이 많다니까? 아니면 성격이 좋은 건가? 사실상 원탁에서 거의 최약체 포지션이었구만. ‘그나저나 이제 슬슬 시작할 때 아닌가?’ 마지막이라 아쉽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다들 친목질이나 하려고 시간을 낸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그렇게 여우가 잡담을 끝내고 집회를 시작하려 말문을 열던 때였다. “잠시만.” 원년 멤버인 초승달이 여우의 말을 끊었다. “혹시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소?” “……제안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정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자리이지않소. 그래서 말인데…….” 이내 초승달이 모두를 보며 제안을 꺼냈다. “이번만큼은 규칙을 조금 바꿔보는 게 어떻소?” “…바꾸다니, 어떤 걸 말하는 거죠?” “돌아가며 질문을 받고,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거요. 서로 궁금한 게 있는 건 모두 다 마찬가지일 테니.” “흐음…….” 초승달의 제안에 원탁 멤버들 모두가 묘한 눈빛을 띠었다. 딱 봐도 반기는 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초승달이 서둘러 바꾸려던 규칙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물론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소. 그리고 그때는 평소처럼 하는 거로 하는 거지. 어떻소?” 초승달의 제안으로 찾아온 침묵. 모두가 말을 아끼는 분위기에서 눈치 볼 이유가 없는 한 명이 총대를 맸다. “피싯,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그런 조건이면 누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겠어요? 그냥 준비해온 정보를 풀고 말지.” 모두가 속으로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패널티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굳이 저 조건을 지킬 이유가 없는 거니까. 애초에 저 조건을 받아들이면, 질문을 하는 쪽만 이득이다. 질문의 대답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 정보가 궁금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 전 내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해주시오.” 결국 초승달도 본인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제안을 물렸고, 살짝 눈치를 보던 여우가 적당한 타이밍에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 “그럼 첫 번째는… 사슴뿔 씨인데… 하시겠어요?” “그러지.” 오늘의 첫 순번은 왕가 출신의 기사 사슴뿔. 녀석이 뱉은 정보는 짧고 명확했다. “이번 커뮤니티 폐쇄와 왕가는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추측성 정보라… 이럴 때는 그리 생각한 근거를 우리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거 알죠?” “왕가에서는 탐사군을 지하 1층에 내려보내며 커뮤니티를 이용해 정보를 공유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으니까. 폐쇄를 염두에 뒀다면, 그런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겠지.” “그냥 기밀이라 당신만 모르던 건 아니고요?” 해석하자면, 왕가에 너만 모르던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었냐는 물음. 이에 사슴뿔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건 분명하니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 사슴뿔은 판정을 멤버들에게 넘겼고, 멤버들의 판정은 오케이였다.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탐사군이라니… 통제를 한단 건 알았는데, 설마 왕가에서 지하에 내려갔을 줄이야…….” 탐사군의 존재도 모르는 이들이 있었거든. 티를 낸 건 늑대뿐이었지만, 노아르크 출신인 광대도 탐사군의 이야기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뭐, 그래도 오케이를 받은 건 좀 의외였지만. ‘마지막 집회라 그런가? 얘들이 오늘따라 꽤 너그러운 거 같네.’ 아무튼, 그렇게 넘어간 다음 차례. 두 번째는 여우였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탐사군은 이미 얀델 남작과 합류해서 함께 탐사를 해나가는 중이에요.” 여우가 꺼낸 정보는 탐사에 관한 정보였는데, 이는 내가 보기엔 불가항력이었다 몇 달째 지하에 갇혀 있는 와중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꺼낼 만한 새소식이 있을 리가. “근데… 너무 가치가 떨어지는 얘기 아닌가요?” 다만, 가만히 듣던 여왕이 태클을 걸었고, 이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따라서 두 번째 정보를 뱉어야 했는데……. “비요른 얀델이 ‘벨라리오스의 정수’를 먹었어요.” 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순간을 직관하는 격이지만, 딱히 불쾌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목격자가 하도 많아서 탐사군이 복귀하는 즉시 널리 알려질 소식이었다. 뭐, 본인도 그걸 아니까 이걸 꺼낸 거겠지만. “벨라리오스라면… 3등급 마물이었지.” “그 사람은… 벌써 3등급만 몇 개를 가진 거예요?” “혹시 어떤 색을 먹었는지도 알 수 있소이까?” “피싯, 더 단단해지는 것 말고는 관심도 없는 야만인이 뭘 먹었을지야 뻔하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오러도 안 통한다던데……. 그럼 이제 마법도 더 이상 그의 약점이 되지 못하겠구려.” 새삼 비요른 얀델이 유명해지긴 했구나 싶었다. 어지간한 정보는 쿨하게 넘어가는 멤버들이 이렇게 술렁이며 한 마디씩 던지는 걸 보니. “그럼… 이만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가죠.” 나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더 길어지길 원하지는 않았는지, 여우가 빠르게 집회를 재개했다. “하핫, 그럼 이제 내가 해보겠소이다.” 다음 차례는 늑대였다. 원탁의 마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던 아우릴 가비스. 그 노인네를 수상할 정도로 지지하고 비호하며, 관련 정보를 풀어내던 올드 유저. “아우릴 가비스는 현재 성벽 바깥에서 머무르고 있다.” 녀석이 말한 정보는 이번에도 그 노인네와 관련된 것이었다. ‘성벽 바깥에 있다라… 이백호가 했던 추측이 사실이었나 보네.’ 굉장히 짧은 정보였지만, 대상이 대상이었던 만큼 초록불을 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 다음 차례는…….” 그렇게 늑대의 차례가 끝난 후로도 무탈하게 집회는 이어졌다. “최근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예지몽의 형태였지요.” “피싯, 당신은 또 신탁—.” “그 예지몽 속에서 비요른 얀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마땅한 게 없었는지, 이미 다 끝난 신탁을 마치 최신 뉴스인 것처럼 풀어내는 고블린. “……?” “……?” “……?”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 머리 위로 물음표 표시가 몇 번이고 찍히는 듯했으나, 고블린은 말을 아끼며 턴을 끝마쳤다. 암, 사기는 그렇게 쳐야지. 아무튼, 이후 나온 정보들은 전부 짧았다. “……고스트 버스터즈가 부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여왕은 본인 차례에 아예 못을 박았고. 초승달은 드워프들이 창세보구를 새로이 창조해내려는 계획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나비, 흑가면, 광대도 첫 바퀴에는 힘을 아끼려는 것인지 그냥 적당한 수준의 정보를 뱉으며 턴을 넘겼다. “저… 이제 마지막이네요.” 그렇게 도착한 나의 차례. 늘 그렇듯 기대 어린 눈빛이 내게로 모인다. 다만, 나는 그러한 시선은 싹 무시한 채 한 곳을 응시했다. “…….” 그 누구보다도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초승달. 왠지 그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돌아가며 질문을 받고,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거요.] 애초에 초승달이 규칙을 바꾸자는 제안을 한 것도 전부 나 때문이었다. 이게 마지막인 거라면,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었을 테니까. ‘후… 생각은 했는데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지네.’ 사실 오기 전부터 맨 처음으로 풀 정보는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집회가 해산되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따라서,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소생의 돌은…….” 그 단어가 언급된 즉시, 초승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물론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 “시체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 한 남자의 눈에 그려진 희망의 빛이 지워진다. 또한, 그와 동시에 아까 이백호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퍼진다. [근데 좀 이중적이지 않아요? 형도 다른 사람들을 항상 농락하고, 속여왔잖아요.] 미샤든, 이백호든, 누구든. 내게는 화를 낼 자격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572화 라스트 커뮤니티 (2) 생존이라는, 그런 절대적인 핑계가 있었다. 이 엿같은 세상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그 명제 하나가 있었기에, 내 모든 행동들을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구려.” 초승달은 ‘해야 하는 일’의 피해자였다. “시체가 남아 있어야만 하다니…….” 이 원탁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밖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매일 저녁마다 술집을 배회해야 했다. 그래서 수사자 가면을 뒤집어 썼다.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누군가의 소망을 인질로 잡고 농락했다. 이 세계에서 솔직함은 죄악이니까. 얕보이는 순간 물어뜯길 테니까. 내가 이득을 챙긴 만큼, 나와 동료들이 안전해질 테니까.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전설 속 이야기랑 현실은 다른 거구려…….” 지금은 어떤가. ‘생존’을 걱정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강해졌다. 한 종족의 부족장이 되었고, 귀족이 되었다. 얀델 가문은 이제 이종족 귀족 연합 멜베스에 속한 어엿한 귀족가였다. 덕분에 이전처럼 원탁의 정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됐다. 하나 여전히 나는 수사자 가면을 쓰고서 모두를 속이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 답은 금방 나왔다. 여왕, 광대. 아우릴 가비스와 커넥션이 있는 듯한 늑대와 정체불명의 흑가면, 그리고 나비. 이들이 가져올 정보를 통해 이득을 얻고 싶다. 그래,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제라도 헛된 꿈을 접을 수 있겠소.” 이내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생존’은 변명거리로 쓸 수 없었다. 검은 먹물 옆에 흰 종이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구려.” 이제는 그냥 그것이 나였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속이고 겁박하고 그렇게 해서 내 이득으로 연관시키는. 예전에 내가 혐오했던 그런 부류의 인간. 이 세계에서 살아남겠다는 목적 하나로 구르고 구르던 나는 어느새 그런 인간이 되어 있었다. “…….”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평소였다면 속은 쪽이 잘못이라느니 뭐니,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렸을 광대조차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긴 정적을 깨며 초승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보겠소이다. 더는 이곳에서 얻을 게 없는 듯하니.” 실제로 그 말을 끝으로 초승달은 누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원탁을 떠났다. “어… 지, 진짜 가버리셨는데……?” 서로가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익명 커뮤니티. 사실상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다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마지막까지 꺼내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 “…….” 입에 담으면 손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나 속으로 하면서. *** 초승달이 원탁을 떠나든 말든. 원탁의 마지막 집회는 이어졌다. 다소 정이 없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사실 이 장소의 본질을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비즈니스적인 관계였으니까. “피싯, 정말로 가버렸군요. 재미없게.” 광대의 헛소리는 모두가 이를 악물고 무시하며 시작된 두 번째 바퀴. 첫 순번은 사슴뿔이었다. 하지만……. “이딴 게…….” 사슴뿔은 정보를 뱉는 대신 나를 보며 물었다. “이딴 게 정말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신은?” 척 보기에도 공격적인 목소리와 눈빛. 평소에 그리 친하단 느낌은 아니었는데, 초승달이 그렇게 떠나버린 게 조금 충격이었나? “사슴뿔 씨……. 조, 조금 진정하시고…….” 이내 고블린이 사슴뿔을 말리듯 말했다.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걱정스런 눈치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슴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절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줬다가 빼았는 게 당신에겐 하나의 유흥에 불과한 건가?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얼른 말한 거고?” 변명해보자면,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말한 것은 사실 책임감… 아니, 죄책감이라 보는 편이 더 알맞았다. 원탁에서 ‘재미’에 집착한 것? 단순히 수사자 가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를 이용해 멤버들을 속이고, 내 입맛대로 다루기 위해서였다. “수사자. 당신은 분명 나 같은 것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거물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 “당신은 그냥 망가진 인간일 뿐이야.” 벌써 몇 번째로 듣는 이야기였다. 뭐, 이백호에게 처음 들었을 땐 그냥 그러려니 하며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이쯤 되면 원인이 내게 있는 거겠지. 나는 망가졌다. 야만적인 이 세계를 기준으로 해도 이미 선을 넘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살기를 써야 하나?’ 수사자라면 저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을 하였을지, 그것을 자연스럽게 먼저 생각한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의 나는 ‘재밌군.’ 같은 짧은 말을 읊조리며 살기를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야 그 편이 편하고, 내게 도움도 되니까. “피싯, 그만하는 게 어떻습니까? 봐주기 어려울 정도인데. 주제를 아세요, 사슴뿔.” 이와 같은 맥락으로 친위대처럼 나서는 광대의 반응도 그냥 관망했다. “……우습군. 광대, 네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봤자 저자가 신경이나 쓸 거 같나?”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피싯, 잡소리는 그만하고 당신 차례나 어서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다들 기다리고만 있는데.” 할 일이나 하라는 광대의 말에, 사슴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뭡니까? 아, 설마 당신도 여기서 끝낼 작정?” “뭐 하나라도 주워먹겠다고, 마지막까지 저자의 유희거리가 될 생각은 없—.” “그럼 얼른 꺼지세요. 시간 잡아먹지 말고.” 광대가 사슴뿔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고, 이에 사슴뿔은 잠시 말없이 광대를 지켜봤다. 그리고……. “이 장소는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서 떠났다. 그렇게 다시금 찾아온 적막. “아하하… 분위기가 또 이상해졌구려!” 늑대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어붙은 공기를 깨려 노력했다. “확실히 마스터가 계실 때는 다들 화기애애하기는 했지! 하지만, 어쩌겠소? 그분이 안 계신 걸.” 어휴, 누가 마스터 바라기 아니랄까 봐. “어째 두 명이 빠지긴 했지만, 일단 하던 건 계속해 봅시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쉽지 않소? 앞으로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일은 없을 텐—.” “그보다……. 아까 그 초승달 아저씨가 말한 대로 해보는 건 어때요?” 시종일관 즐겁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던 나비 가면의 제안이었다. “대신 이번에는 무조건 솔직히 답해주기. 아, 물론 자기 정체를 노출 시키는 건 예외로 하고. 어때요? 분위기 전환도 되고 좋을 거 같은데.” “……저야 좋기는 한데, 정체 노출이라는 게 너무 주관적이지 않습니까?” “에이, 그거야 이 보석이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답변 거부를 했을 때, 여기 손을 올리고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럼 그냥 핑계 대고 말하지 않는 건지, 진짜 그래서 말 못 하는 건지 가려낼 수 있잖아요.” “일단 동의부터 구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여왕이 딱 잘라 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자, 나비 가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길게 휘어졌다. “헤에, 언니는 또 그러시네.” “……내가 왜 당신 언니예요?” “딱 봐도 그렇잖아요. 나보다 나이 많을 거 같은데.” “…….” 애석하게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는 여왕. 그런 여왕을 보며 나비 가면이 찬반 투표라도 해보자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었고, 결국 투표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찬성 여섯에 반대가 둘이네요.” 놀랍게도 다수결이 통과됐다. 반대표를 낸 것은 오직 여왕과 흑가면뿐. “수사자, 당신이 찬성을 한다고요……? 어째서?” “피싯, 여왕 당신은 아직도 저분을 모릅니까? 그야 그게 재밌을 거 같으니까!” 재미 유무는 상관없다. 그야 나도 원탁을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거든. “하아…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 저도 따를게요. 대신 시작 전에 규칙을 딱 잘라 정해요.” 이후 여왕의 요구로 우리는 짧게 논의하며 규칙을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리해 보자면, 자기 차례가 되면 답변자는 모두에게 질문을 하나씩 받는다. 무슨 질문에 답할진 답변자가 정한다. 이거로 될 수 있겠네요.” “이래서 언제 시작하려고요? 얼른 하죠? 언니?” “……여우 님, 시작해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이내 답변자 역할을 맡은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순서대로 돌아가며 한 명씩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마스터를 잘 따르지 않았던 거로 기억을 하오만… 아직도 그 마음이 여전하시오?” 뭔 말만 하면 마스터가 거론되는 늑대 가면. “저는… 패스입니다.” 그냥 패스를 해버리는 고블린. 온갖 협잡술에 능한 내가 보기엔 굉장히 아쉬운 플레이였다. 패스를 하기보다는 별로 중요치 않은 질문을 중요한 걸 묻는 듯 물어서 그걸 답하게 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아무튼, 이후로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패스를 했고, 결과적으로 여우가 받은 질문은 두 개였다. “지하 1층에서 벌어진 일들을 너무 소상히 잘 알고 있는 거 같던데, 혹시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건 너무 제 정체를 캐내는 거 아닌가요?” “에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군 줄 알고?” “……그럼 답할게요.” 질문 순서가 끝나자 여우는 세 개의 질문 중 하나를 택해 답했다. “여전히 마스터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으셨죠.” “오, 내 질문을 택해줬구려.” “답하자면, ‘그렇지 않다’예요. 그때는 마스터가 아우릴 가비스란 걸 몰랐으니까.” “흐음… 그분이 악명을 얻은 것엔 사악한 왕가의 농간이 껴있건만. 일단 알겠소. 아쉽게 됐구려.” 그렇게 끝이난 여우의 차례. 그다음은 늑대였고, 늑대는 총 네 개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여왕 공이 한 질문에 답을 드리리다.” 늑대가 택한 것은 여왕이 했던 질문이었다. “여왕 공의 추측이 맞소. 아우릴 가비스 님께선 고스트 버스터즈가 폐쇄되는 걸 막을 힘이 있소.” 딱 듣자마자 중요한 정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르게 해석하면, 커뮤니티 폐쇄를 위해 아우릴 가비스가 손을 썼다는 뜻 아닌가……?’ 만약 그런 거면 그 늙은이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괜스레 걱정이 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럼 이제 고블린 공의 차례구려.” 그렇게 다가온 고블린의 턴. 고블린은 여우보다는 많지만, 늑대보다는 갯수가 하나 적은, 세 개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저, 저는 그럼 여우 씨 질문에 답하는 거로…….” 고블린은 여우가 팀플레이 느낌으로 던진 질문에 답하며 턴을 끝마쳤다. “레아틀라스교의 교황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차대 교황은 어린 성자로 거의 내정된 상태이고요…….” 나름 내부자 정보라 할 수 있으나, 관심을 갖는 자는 별로 없었다. 애초에 다들 순서를 빨리 넘기고 싶어 한달까? “그럼 드디어 여왕 씨 차례군요, 피싯.” 고블린 다음 순서를 맞이한 여왕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많은 다섯 개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에 답을 내놨다. “다들 어느 정도 사정을 알게 됐으니 말할게요. 이 영적 세계를 운영하는 것엔 한 가지 장치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 장치가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죠.” “…그래서 폐쇄를 하는 겁니까?” “네. 방도를 찾아봤지만, 해결하지 못했어요.” “아우릴 가비스… 그자가 도와준다면 부활도 가능하긴 하다는 뜻이군요…….” “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듯하네요.” 이내 딱 잘라 선을 긋는 것을 마지막으로 여왕의 차례도 끝. 공석이 된 초승달의 자리를 건너뛰어 나비 가면의 차례에 도착했다. “헤에… 근데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시려나?” 사실 어찌 보면, 오늘 내가 이 진실게임에 찬성표를 던진 진짜 이유였다. 나비 가면에게서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다만, 나는 먼저 나서서 질문을 하는 대신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네, 하나 있어요.” 곧바로 여우가 손을 들며 내가 묻고 싶었던 그 물음을 대신 입에 담았다. “미샤 칼스타인이 배신자라고 했던 거, 그거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573화 라스트 커뮤니티 (3) 미샤 칼스타인은 배신자다. 그런 정보가 나비의 입에서 처음 나온 이후부터, 여우는 그 정보에 대해 파헤치려 했다. 아마 내 부탁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좋든 싫든 여우 또한 앞으로 미샤와 함께 행동을 해야 했으니까. 동료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찜찜한 상태로 지내기는 싫었을 터. 다만, 리스크가 존재하는 질문이었다. “미샤 칼스타인에 대해서 말하는 게……. 이번이 두 번째였죠?” 질문을 받은 나비가 묘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여우를 응시한다. 마치 그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관심이 많네요? 그 수인 여자한테.” “…그래서요?” “헤에… 그냥 그렇다고요.” 어쩌면 오늘 원탁이 끝나면 이곳 멤버들 대부분의 머릿속에 ‘여우 = 비요른 얀델의 동료’란 의심이 박힐지도 모르겠다. 그야 이미 지하 1층 정보를 많이 풀었으니까. 사실상 지금 얘가 미궁 내에 있다는 건 확정이 된 거나 다름없는데……. ‘아르민 탐사단이랑 헥츠 클랜이 최대한 많이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또 늘었네.’ 나무는 나무 사이에 숨기고, 사람은 사람 사이에 숨기란 말도 있듯, 최대한 생환자가 많아야 베르실의 정체가 탄로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건 나중의 이야기고. “저 그럼 이제 제가 물어도 되나요?” 여우만이 아니라 다른 회원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원탁에 입장할 수 있는 코드를 누구한테 받은 거죠?” 여왕은 나비가 어떻게 이곳에 입장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했다. 또한, 흑가면도 처음으로 질문 대열에 참가했다. 과묵한 입을 연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너는 미샤 칼스타인이 비요른 얀델의 목숨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나?” 이건 또 뭐래. 저런 질문을 한 이유를 당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흐음……. 다들 미샤 칼스타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네요?” 흑가면이 나선 덕에 베르실에게로 향하던 의심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분산됐다고 해야 하나? “그럼 질문은 이렇게 세 개가 끝인 거 같고…….” 이내 질문 시간이 끝나자, 나비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으음, 어떻게 할까…….” 이제는 나비의 선택이었다. 흑가면이나 여우의 질문에 답을 한다면, 나는 궁금했던 부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여왕이 채택된다면, 다음 바퀴를 기다려야 하겠지. 세 번째 바퀴가 없다면 영영 듣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두 분이나 물어봤으니, 아무래도 거기에 답하는 게 도리에 맞겠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비가 그리 말한 순간, 살짝 안도감이 피어났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세상에는 때론 존재하는 법이니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은 그런 모순적인 것들이. “자, 그럼 둘 중 누구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나…….” 이내 간을 보듯 말꼬리를 흐리던 나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기분이다. 어차피 둘 다 내용도 비슷한 거, 그냥 두 분 다 대답해드릴게요.” 얼핏 들으면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도 보이는 대사. 하나 그럴수록 나는 수상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1+1 이벤트를 한다고 손해를 보는 기업이 어디 있던가? 모든 행동에는 전부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대개 본인의 이득과 연관되어 있기 마련이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이것도 내가 너무 망가진 탓인가?’ 알 수 없지만, 일단 귀를 열고 대화에 집중했다. 관심을 즐기듯 말을 질질 끌던 나비가 슬슬 입을 열고 있었다. “미샤 칼스타인은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서 비요른 얀델의 곁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그 지시는 비요른 얀델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죠.” 이백호와 소생의 돌을 말하는 듯했다. 혹시 다른 것 때문에 배신자라고 했던 건 아닌지가 궁금했는데. ‘근데 얘는 어떻게 저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나비가 이백호 쪽 사람이었던 건가? 나한테 초대 코드를 줬던 것도 이백호 그 녀석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무슨 지시였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거요? 제가 알기로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옆에서 지켜보며 정보들을 전해달란 거였죠.” “그 대가는요?” “글쎄요? 그 여자 본인만 알지 않을……. 아, 참 거짓말은 안 되지. 이건 상상에 맡길게요.” 내 추측에 따르면, 그 대가는 ‘소생의 돌’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백호는 영악하단 말로도 모자란 놈이니까. 내가 죽을 운명이라느니 뭐니 하며 겁을 잔뜩 준 뒤, 소생의 돌을 주며 스파이가 되어달라 했겠지. 사실 진짜 목적은 ‘소생의 돌을 넘기는 것’이면서. 뭐, 그래도 지금 대화 덕에 한 가지는 알게 됐다. “그것 말고 다른 지시는 없었단 건가요?” “네.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요.” 이백호가 부린 수작은 소생의 돌이 끝. 물론 뒤에서 뭔가를 더 꾸미고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수작질에 미샤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문제는……. ‘얘가 왜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걸까.’ 나비 가면이 이백호와 한 팀이라 생각하면 꽤 그럴듯한 가설이 나온다. 이백호는 내가 수사자인 걸 알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나한테 정보를 주려 한 거겠지.’ 녀석이 바라는 바는 예전부터 같았다. 그놈은 내가 이 세상에 정을 떼길 바란다. 그래서 일부러 미샤가 배신자라느니 뭐니 하는 정보를 줬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내 신뢰 관계를 부수고, 주변을 의심하게끔 유도할 수 있을 테니. 놈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시도인 셈. “그럼 이제 다음 차례로 넘어가도 될까요? 답변은 해드릴 만큼 해드린 거 같은데.” 그렇게 나비의 턴이 끝나고, 그다음은 흑가면의 차례였다. “뭘 물어보지……? 아는 게 워낙 없으니 물어볼 것도 없네요?” 어딘가 얄밉게 느껴지는 말투였으나, 나비의 말 자체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워낙 말수가 적어서인지 더욱더 비밀스럽달까. 다만, 그렇다고 질문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저는 이거로 할게요. 아까 미샤가 비요른 얀델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냐는 질문은 왜 한 거예요?” 나비는 흑가면의 정체 자체에 호기심이 생긴 듯했고, 이는 여우 쪽도 비슷했다. “혹시 당신은 지금 지하 1층에 들어와 있나요?” 아무래도 얘가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 중에 한 명인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한데……. 유일하게 여왕만 정체와 상관없는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아우릴 가비스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던 게 차원 마법 덕분이라고 하셨죠.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가요?” 의외로 세 질문 모두 꽤 흥미로웠다. 물론 중요도만 따진다면, 여왕의 질문이 제일이긴 하겠지만. 어차피 답변은 저쪽에서 고르는 거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흑가면이 짧게 입을 열어 답변했다. “나는 지하 1층에 가본 적 없다.” 여우의 질문에 관한 답변이었다. 하긴, 정말 우리 사이에 섞여 있던 게 아니라면 저 질문이 제일 무난하긴 했지. “답변이 됐나?” “네…….” 이후 흑가면의 순서도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광대가 입을 열었다. “피싯, 드디어 저로군요!” 거, 관심 받는 게 그렇게 좋나? “자, 그럼 어서 물어보시죠! 다들 궁금한 게 한 보따리일 거 아닙니까!” 저 득의양양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으며 무안을 주고도 싶지만……. “너무 애석하네요. 저 사람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 저 자신이.” “피싯! 애석하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얄미운 광대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금방 차례를 넘기며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여우, 늑대, 고블린, 여왕, 흑가면……. 나와 나비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하나씩 궁금한 것을 물었고, 광대는 그 사실이 몹시 기뻐보였다. “질문이 다섯 개라… 이거이거…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 기록 아닙니까? 피싯.” “됐고, 뭐에 답할지나 골라요.” “하지만… 아직 패스를 하지 않은 한 분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여왕의 재촉을 태연하게 넘긴 광대가 나를 힐끗했다. 보아하니 내가 뭔가 질문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진짜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글쎄, 딱히 궁금한 게 없어서.” “흐음… 그렇습니까…….” “뭐든 상관없다. 재밌는 이야기라면.” 왠지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말을 덧붙였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지만, 실수라고까지 하기는 좀 그랬다. 얘 성격상, 이런 쪽이 차라리 더 유용한 정보를 뱉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일이 흘러갔고. “재밌는 이야기라……. 뭐, 그런 것도 나쁘진 않군요. 그럼 제가 잠시 여러분들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하아… 그냥 묻는 거나 대답하지.” 내게 어그로가 끌린 광대를 보며 여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은 광대에게 집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광대가 말하는 ‘재밌는 얘기’가 뭔지 궁금했던 것인데……. “개벽 154년 8월 2일. 오래토록 빛 한 점 들지 않는 하수도 지하에서 살아가던 노아르크 세력은 성벽 바깥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광대의 ‘재밌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성벽 바깥은 들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지요. 마녀의 저주는 없었고, 저 지평선 너머까지 푸르른 숲과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노아르크 사람들은 미개척 지대를 탐험하듯 넒은 세상을 돌아다녔고, 이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정착을 했습니다.” “……그 이상한 컨셉은 됐으니까, 얼른 본론만—.” “피싯, 그러지 말고 잘 들으시죠?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해봐요.” “노아르크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왕가는 어째서 성벽 안에 사람들을 가두었을까. 어째서 사람들이 멀쩡한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던 걸까.” “…….” “노아르크 사람들은 오랜 시간 고민했고, 운 좋게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야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툭툭. 분위기를 고조시키듯 광대가 탁자를 두드리며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의 핵심을 꺼냈다. 어떻게 저 앞에 이야기가 이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잘 납득이 되진 않지만……. “라프도니아를 침공하기로.” 대전쟁이 예고됐다. *** 노아르크와 왕가. 이 둘의 싸움은 노아르크가 성벽 밖으로 나간 후, 미궁 내에서만 이뤄졌다. 노아르크는 7층을 점거한 채 왕가군과 싸웠고, 그러면서 천천히 힘을 길러갔다. 그런데 그 국면이 현실로 옮겨진다라……. “침공이라니… 확실한 거예요?” “피싯……. 제가 거짓말을 할 거 같습니까?” “언제요? 그럼 언제인 건데요?” 광대가 꺼낸 정보의 파급력은 굉장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모든 멤버가 술렁거렸고, 광대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궁금하면 본인이 직접 알아보십시오! 제 차례는 이거로 끝입니다. 뭐, 오늘 이 자리가 끝나기 전에 재미난 걸 들려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피싯.” 광대는 적당한 곳에서 선을 긋고서 말을 아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얘라면 분위기를 타고 더 떠벌리지 않을까도 싶었—. “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때, 광대가 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조금이라도 재미가 있으셨는지요?” 솔직히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딱 보니까 순전히 나 때문에 침공 계획을 떠벌린 거 같은데…….’ 얘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걸까? 어차피 오늘이면 다신 볼일이 없는데. 알 수 없지만, 나는 대답했다. “그게 네 질문인가?” 이제는 내가 저들의 물음을 받고 답변을 해줄 차례였다. 574화 라스트 커뮤니티 (4) 오늘의 원탁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누군가 궁금한 걸 물으면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해 주는 진실게임의 방식. “피싯…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소중한 기회를 그렇게 날릴 수는 없지요.” 솔직히 나도 조금 궁금하다. 과연 원탁 멤버들은 ‘수사자’에게 어떤 것을 가장 물어보고 싶어 할까. 뭐, 곧 있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저부터… 할게요……?” 왠지 모르게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첫 순번인 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로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요?”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사실 따져 보면 충분히 궁금했을 법한 부분이다. 광대의 정체를 원탁에서 오픈한 것도 나고, 여왕도 정체를 아는 것처럼 블러핑을 했었으니까. 사실 실제로 아는 건 닉네임뿐이었지만. “하아…….” 여우의 질문을 함께 들은 광대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얼마나 천금 같은 기회인 줄도 모르고. 그런 당연한 질문이나 하면서 낭비를 하다니!” 광대는 내가 이들의 정체를 아는 걸 기정사실… 아니,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데……. 질책하는 듯한 말에 여우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지 아닌지를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피싯?” “애초에 내가 뭘 물어보든 내 자유 아닌가요? 그런 식으로 간섭하려 드는 건 그만두세요. 짜증 나니까.” 차갑게 날이 선 목소리. 그러고 보면 이게 원래 얘의 성격이었다. 내가 처음 원탁에 왔을 때도 가장 먼저 살기를 날려 댄 게 얘였으니까. 뭐, 그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철없던 시절이었지…….’ 아무튼, 다 옛날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여우는 클랜 아나바다에 들어와 나의 동료가 되었다. 물론 본인은 아직 그걸 모르고 있지만. “…왜 화를 내고 그럽니까? 그냥 농담이었는데.” 여우가 화내자 당황했는지,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무마하려 드는 광대. 다만 여우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하하…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구려!” 둘의 기 싸움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음 차례인 늑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사자 공이 어디서 어떻게 땅의 마녀를 만났는지를 알고 싶소.” 땅의 마녀라……. 이것도 조금 의외네. 얘라면 이번에도 당연히 아우릴 가비스와 관련된 질문일 줄 알았는데. 툭툭. 습관적으로 팔 받침대를 검지로 두드리며 늑대에게 시선을 떼고 옆으로 이동한다. 다음 차례의 질문을 듣겠다는 제스처. 이에 눈이 마주친 고블린이 주변 눈치를 쓱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걸 어떻게 여쭤봐야 할지 모르겠는데…….” “피싯, 수사자 씨의 성격 모릅니까?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어서—.” “혹시 결혼을 했거나, 사귀고 있는 여성분이 여러 명이십니까……?” 고블린이 질문을 마친 순간, 원탁 내에 뭐라고 형언키 어려운 정적이 깔린다. “…응?” 광대는 자기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얼빠진 소리를 냈고, 이는 다른 멤버들도 비슷했다. 모두가 잠시 멍해진 뒤, 그다음에야 현재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고 나서는 조금 반응이 달라졌다. “무슨 그런 해괴한 질문을…….” “…고블린 씨, 병신입니까?” “…크하하! 푸흐, 푸하하하하하하!!” 아예 질색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순간 빵 터져서 크게 웃어 젖히거나. 각기 다른 반응들 중에는 고블린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도 있었다. “혹시… 예전에 그 가면에 따른 ‘운명’ 때문에 이런 질문을?” 여우의 중얼거림. 이에 광대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 그때 그 허무맹랑한 추측 말입니까! 수사자 씨가 수사자 가면을 고른 게, 단지 여복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내가 없던 사이에 사적으로 나눈 이야기인 듯한데……. “여복이요……? 그게 무슨 소리죠?” 여왕도 모르는 걸 보니, 원탁에 원년 멤버들뿐이던 시절의 일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궁금하면 다음번에 정식으로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피싯.” “됐어요. 어떤 얘기인지는 대충 알겠으니까.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죠?” 여왕은 광대의 어그로를 능숙하게 넘기며 자신의 차례를 시작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간단해요. 당신은 개벽왕과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여왕의 질문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그 의도가 쉽게 읽히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궁금한 게 한가득일 텐데, 그중에 이것을 꼽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왜지……? 왜 이걸 묻는 거지?’ 왕과 만남을 가진 것. 그동안 원탁에서 이 주제가 나온 것은 두 번이다. 여왕, 그리고 늑대는 왕과 대면한 적 있음을 본인 입으로 밝혔다. ‘왕이랑 만난 게 중요한 건가?’ 음, 그것보다는 뭔가 사정이 더 있는 거 같은데. 아니면, 단순히 왕과 만난 사람이 적어서 이를 통해 내 정체를 유추해 내려는 걸 수도 있겠고. “흐음… 이제 제 차례네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 시작된 나비의 순번. “그럼 뭘 물어봐야 하려나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꼬리를 흐리던 나비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정을 내렸다. “저는 그냥 패스할게요.” “…예에? 나비, 당신은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르는 겁니까! 수사자 씨는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대답해 줄 능력이 있는 신비한 분이란 말입니다!” 광대가 기함을 내질렀지만, 그럼에도 나비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어봤자 어차피 수사자님이 제 질문에 답해 줄 거 같지도 않은걸요?” “예? 해 보지도 않고 대체 무슨 근거로—.” “직감, 그리고 경험요.” “……?” “남자들은 보통 본인을 곤란하게 하는 여자는 좋아하지 않거든요.” 대답은 광대에게 했지만, 사실은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해석하자면, 자기 질문이 틀림없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뜻이겠고…….’ 어찌 됐든, 나비가 본인 질문을 스킵한 덕에 곧장 흑가면의 순서가 되었다. 얘는 과연 뭘 물어볼까. 사실 얘랑은 별로 접점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나비처럼 스킵을 할 수도 있을—. “비요른 얀델.” …응?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와. 순간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팔을 괸 채 이어진 말에 집중했다. “비요른 얀델과… 미샤 칼스타인은…….” 뭐지? 얘도 설마 ‘소생의 돌’ 사건을 알고 있는 건가? 그런 추측이 머릿속에 떠오르던 때. “…둘은 정말로 소문대로 사귀었던 사이인가?” 흑가면의 질문이 완성되며 정신이 멍해졌다. ‘뭐야, 이건 또…….’ 애초에 그거를 왜 나한테 묻는데? 설마 내가 비요른 얀델인 걸 아는 건가? 아니, 안다고 해도 왜 저런 걸 묻지? 무슨 의도로? “하아… 어찌 된 게 질문들이 하나같이 쓰레기 같군요.” 알 수 없지만, 흑가면까지 저런 질문으로 기회를 낭비한 게 짜증 나는지 광대가 한숨을 내쉰다. 거, 자기는 얼마나 대단한 질문을 하려고? “됐고, 다들 끝났으니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뭘 묻든, 얘 질문은 절대 대답해 주지 말아야지. 속으로 그런 각오를 새기고 있자니, 광대가 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수사자 씨에게 묻겠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긴장을 한듯 떨리는 목소리로.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천천히 말을 하는 도중에 침까지 꿀꺽 삼키며, 녀석은 내게 물었다. “제가 모든 걸 버리고 수사자 씨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면…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 새끼는… 진짜 뭐지? *** 부하가 되고 싶다는 광대의 선언에 원탁에는 잠시 묘한 정적이 내리앉았다. “무슨 질문을 하는가 싶었는데…….” “고작 그딴 걸 물을 거면서, 우리한테는 그런 난리를 친 거예요?” “아쉽기는 하구려. 그런 걸 물어볼 거면, 그냥 다 끝나고 따로 말을 하든가 하지…….” 업보가 있던 만큼 회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물론 광대는 그런 반응 따위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저… 그러면… 답변… 해 주시겠습니까?” 바람 빠진 웃음 소리도 섞이지 않은 진중한 물음. 무슨 소개팅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도 아니고. 이쯤 되니 어이가 없다는 느낌은 들지도 않는다. 그 수준을 아득히 넘었다고 해야 하나? 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강자. 딱 그 정도로만 나를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걸 버리고 수하가 되겠다니…….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놈이지?’ 뭐, 일진을 동경하는 사춘기 학생 같은 건가? 알 수 없지만, 광대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질문 타임은 끝이 났다. 내가 받은 질문의 개수는 총 6개. 나비가 패스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동안 진행된 차례 중에 가장 많은 질문을 받았다. 어찌 된 게 대부분이 이상한 질문이긴 했지만. “…….” “…….” 답변을 해야 할 시간이 되자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나를 응시한다. 과연 내가 어떤 질문에 답을 내어 줄까. 부디 내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심리가 모두의 눈에서 보인다. 그중 제일인 것은 역시 광대일 테고. ‘아오, 부담스러워…….’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면서도 머리로는 열심히 고민을 이어 갔다. 무슨 질문에 답하는 게 최선일까. [어디서 어떻게 땅의 마녀를 만났는지를 알고 싶소.] [개벽왕과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일단 이 두 질문은 패스다. 늑대의 경우에는 내 답변이 어디로 흘러 들어갈지 모르고, 여왕의 경우에는 저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니까. [혹시 결혼을 했거나, 사귀고 있는 여성분이 여러 명이십니까……?] […둘은 정말로 소문대로 사귀었던 사이인가?] 그렇다고 이 두 질문에 답하자기에는 너무 상황이 이상하게 보일 거 같고……. [정말로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요?] [제가 모든 걸 버리고 수사자 씨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면… 받아 주시겠습니까?] 결국 남은 후보는 둘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소거법으로 하나를 지우자고 한다면, 그게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쉽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정체를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몇 명은 알고 있다.’라는 애매한 답변은 괜히 신비주의만 깨질 뿐이니까.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셈인데……. 툭툭. 쇠뿔도 단숨에 빼라고. 한 명씩 쓱 둘러보던 나는 이내 광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벳 네크라페토.” 광대 가면을 뒤집어쓴 시체 수집가의 본명. 이내 나는 녀석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널 받아 줄 일은 없다.” 그런 내 대답에 녀석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기는. 몹시도 간단하다. “벌레를 키우는 취미는 없으니까.” 원탁에서 암만 친한 척 말을 걸어 대도, 이놈을 내가 사람 취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언니가… 이제 안 움직여요. 말도 못 해요. 차갑고, 딱딱해요.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놈은 내 적이다. *** 솨아아아아아아-! 진실임을 의미하는 녹색불이 흘러나온 뒤, 광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멍한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뿐. “저기… 괜찮—.” 보다 못한 여왕이 그런 광대에게 뭐라 말을 걸려던 차였다. “푸흐흐, 푸흐흐흐…….” 뜬금없이 광대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기 시작했다. “푸흐흐, 벌레라니…….” 음, 단어 선택이 좀 심했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이런 애들은 강하게 말해 줘야지만 제대로 알아듣는 법이니까. “정말로… 대단하군요. 수사자 씨는…….” 이내 한참 동안 흐느끼듯이 웃던 광대가 나를 보았다. “저도 나름 저 자신에게는 자신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푸흐흐…….” 쿨해 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었다. “벌레! 암만 그래도 벌레라니! 푸흐흐흐……! 분명 수사자 씨 눈에는 모든 이들이 그런 존재로 보이는 거겠지요? 푸흐흐흐흐흐…….” 웃고 있으면 정말 타격을 안 받은 줄 알거든. “헤에… 사람이 망가졌는데요? 어떡하죠?” “어휴, 그러게 왜 그런 질문을 해 가지고…….” 실성한 듯 웃는 광대를 보며 회원들이 각자 한 명씩 동정의 말을 던졌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냥 얼른 다음 바퀴나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이쯤에서 내가 나서야 하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계산을 하던 때였다. 드드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듯, 돌연 원탁의 방이 격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끼이이익. 집회 도중에 방문이 밖에서부터 열렸다. 지금까지 딱 한 번만 발생했던 이현상이었다. 마스터. ‘원탁의 감시자’를 만든 존재이자……. 이미 ‘아우릴 가비스’란 것까지 확인된 그 노인네가 이 원탁에 입장했을 때. ‘그때가 딱 이랬는데.’ 그럼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이내 나는 천천히 문이 열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껄껄, 못 보던 가면들이 있군?” 하얀 가면을 쓴 노인네가 우리를 보며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575화 리턴 (1)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백색 가면. 온몸을 가리는 칙칙한 색상의 로브를 입었고, 유일하게 피부가 드러난 손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헤에… 저 할아버지는 누구?” “…….” 흑가면과 나비가 낯선 이의 방문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다. 다만, 똑같이 처음 보는 입장일 여왕은 달랐다. “설마…….” 초면인 건 마찬가지지만, 정황상 눈치로 저 노인네가 누군지 깨달은 듯했다. “마스터……!” 이내 늑대가 불청객의 정체를 깨닫고서는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오랜만일세, 늑대. 그간 잘 지냈나?” “저야 덕분에 항상 멀쩡하지요. 한데, 마스터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누가 봐도 둘 사이에 커넥션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 “마지막이지 않나. 얼굴은 한번 보고 가려 들렀네.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 말씀이십니까?” 늑대는 못내 그 내용이 궁금한 눈치였으나, 마스터는 그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거, 듣는 사람 궁금해지게. “그보다……. 잠시 비켜 주겠나?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아……! 죄송합니다!” 마스터가 눈치를 쓱 주자, 늑대가 즉시 사과의 말을 뱉으며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누가 보면 늑대가 아니라 개인 줄 알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스터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인과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지. 끝을 지켜보는 기분이 어떤가?” 처음 원탁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녀석은 더 이상 본인이 ‘아우릴 가비스’라는 걸 감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탁의 마스터가 아우릴 가비스다.] 이미 늑대가 그런 정보를 이곳에서 꺼냈으니까. 애초에 그 정보가 나온 것도 이 노인네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 툭툭. 그럼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뭐지? 저 끈끈한 관계를 보니, 내게 말을 전하려는 게 목적이면 그냥 늑대를 시켜서 했어도 됐을 텐데. 속으로 계산기를 돌리면서도 일단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딱히, 아무렇지도.” “흐음, 그런가? 조금은 아쉬운 기분일 줄 알았네. 그도 그럴 게, 사실 이곳은 자네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정확히는 원탁이 아니라 이 진실 게임의 시스템을 만든 거긴 하지만. “피, 피싯??!” “원탁을… 저 사람이 만들었다고요……?” 문제는 옆에서 듣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아, 물론 20년도 전의 얘기고……. 그때는 이계의 악령들뿐이었지만 말일세.” 마스터와 대화를 이어 갈 때마다 곳곳에서 격한 리액션이 터져 나온다. “20년도 전에도 원탁이 있었다는 건가……?” “아니, 그보다 이계의 악령이라니…….” 후, 되게 거슬리네. 이럴 거면 그냥 조용히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들지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은 이 노인네 하나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으니.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지?” “말했지 않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왔다고.” 그리 말한 노인네가 시선을 옮겨 다른 멤버에게 말을 걸었다. “반갑네, 여우 양. 잘 지냈는가?” “네? 아, 아… 네에……. 오랜만이에요.” “솔직히 조금 서운했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엔 그토록 잘 따르더니, 이제는 은인이라고 생각도 안 한다니 말일세. 껄껄.” “그, 그걸 어떻게……!” 조금 전에 한 얘기가 언급되자 여우가 눈에 띄게 당황했고, 나머지는 눈을 빛냈다. 그야 저걸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이유를 듣지 않아도 빤하다. 노인네는 이곳에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를 도청할 수단이 있다. 그 말인즉슨. ‘…늘 이곳 이야기를 듣고 있었단 거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다. 음흉한 건 진작 알았는데, 이렇게 취향까지 고약할 줄이야. 진짜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그런 주제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능청스럽게 못 보던 가면이 있니 뭐니 한 것이다. 아주 거짓말이 습관처럼 몸에 배 있는 것인데……. “저기… 그런 게 아니라…….” “변명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 저 괜찮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이 늙은이에게 여우란 존재는 어떠한 가치도 없을 터이니.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가더라도, 구할 이유가 없다면 그냥 지켜만 보겠지. “저기요.”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여왕이 대화에 참가했다. “그쪽이… 정말로 원탁의 마스터, 그러니까… 아우릴 가비스인 건가요?” “그렇다마는?”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늑대 님이 말하길, 그쪽한테는 커뮤니티의 폐쇄를 막을 힘이 있다던데……. 정말인가요?” “사실이네. 애초에 자네들의 권한을 약화시킨 게 바로 나니까.” 너무나도 태연한 발언. 이에 여왕이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 반응을 보며 아우릴 가비스가 얄밉게 들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장치에 문제가 생겼단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 친구에게 준 장치는 멀쩡하네. 단지 내게 양도받은 권한이 서서히 말소되며 그렇게 느껴졌을 뿐.” “권한을 앗아 가다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야 내가 온전한 상태로 그 친구에게 모든 걸 넘겨줬을 리 없지 않은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간결하고 명쾌한 답변. “너무 아쉬워 말게. 원래 내 것이었던 걸 돌려받는 것뿐이니. 게다가 그간 잘 쓰지 않았던가?” “…….” “자, 그럼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깔끔하게 여왕의 입을 다물린 아우릴 가비스가 뚜벅뚜벅 걸어와 원탁의 보석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솨아아아아아아-. 보석이 미궁에서 몬스터 시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빛 입자로 변하며 아우릴 가비스의 손끝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이로써 해야 할 일도 끝났군.”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나는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20년 전, 아우릴 가비스는 원탁의 보석을 만들며 이 공간에 대한 권한 대부분을 잃었다고 말했다. 고로, 이를 토대로 추측해 보건대…. “권한을 되돌려받기 위해 온 거였군.” 아우릴 가비스는 이로써 다시 예전의 권한을 되찾았다. “맞네. 이제 이 공간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지. 요컨대, 이러한 것도 말일세.”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허공을 휘젓자, 나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의 가면이 벗겨졌다. 툭. 보이지 않는 손이 잡아당긴 것처럼 벗겨져 탁자 위에 떨어진 가면들. “꺄악!” “……!” “피…싯?” 이내 회원들이 가면 너머에 감추고 있던 본모습이 드러나며 한바탕 혼란이 찾아온다. 누군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누군가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또한, 누군가는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물론 모두 그런 소극적인 대처를 한 건 아니었다. 후웅-! 누군가는 가면이 벗겨진 즉시, 로그아웃을 한다는 신속한 판단을 내렸다. 그것도 두 명이나 동시에. “보이는 모습과 달리, 부끄럼이 많은 친구구만? 실제 모습 정도는 모두에게 보여도 상관이 없을 터인데.” 일단 작별 인사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첫 번째 이는 광대였다. 얘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백인이었던 거 같기는 한데, 너무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예상과 달리 조금 뚱뚱했던 거 같기도 하고……. ‘또 사라진 한 명이… 흑가면이네.’ 흑가면이 있던 자리가 비었다. 이쪽은 심지어 광대보다 빠르게 탈주를 해서 진짜 아예 보지도 못했다. 따라서 더 탈주를 하기 전에 주변을 쓱 훑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황한 듯 소리를 내지르는 여왕은 푸른 눈에 금발을 한 전형적인 외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절세미녀라든가 그런 느낌은 아니다. 정말로 평범하게 생겼고, 추정 나이는 한 삼십 대 초반 정도. 회원들은 그 모습에 의외란 눈빛을 하면서도 의구심을 느꼈다. “왠지… 얼굴이 익숙한데…….” 단순히 기분탓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여왕은 뉴비가 들어왔을 때 진짜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를 심사하는 안내역을 맡고 있으니까. 아무튼, 그다음. ‘고블린은…….’ 의외로 잘생겼다. 아니, 그것도 아주 많이 잘생겼다. 배우를 해도 될 거 같다 해야 하나?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동남아 쪽인가 싶었는데, 실제로는 전형적인 남미 쪽의 미남이었다. ‘줄여서 남미 미남인가?’ 남미 미남. 거꾸로 해도 똑같다니, 터무니없는 우연이 아닐 수 없—.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아닌 척 눈알을 굴려 발가벗겨진 회원들의 민낯을 모두 확인했다. 커뮤니티 내에서 보이는 외형 따위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조금 궁금했거든. 실제로는 어떤 사람들일지. ‘나비는 아시아계. 여우는 생각보다 어리게 생겼네. 늑대는 예상했던 것처럼 그냥 아저씨고…….’ 비밀스러운 원탁 집회. 그곳에서 나누는 고인물들 간의 대화. 다만, 신비감을 키워 주는 가면 너머에 있던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딱히 강해 보이지도 않았고, 심성이 독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나라고 다르진 않겠지.’ 과연 누가 이한수의 얼굴을 보고 상상이나 할까. 망치로 사람 머리통을 부수고, 팔다리가 찢겨 나가 피범벅이 되어도 웃을 수 있는 낙관론자일 것이라고.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중에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혀 본 이는 없을 테니까. 그런 자들은 전부 진작에 죽었다. “저기… 가면은 왜 벗기신 건지……. 조,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불편한데 말입니다……. 아! 그… 화가 났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내 고블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고, 아우릴 가비스는 곧장 답변을 해 줬다. “흐음, 자네들도 궁금하지 않았나? 매번 대화를 나누던 대상이 과연 어떤 사람들일지. 마지막이니 한 번쯤은 서로 가면을 벗고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네.” “어……. 그, 그렇군요?”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고블린이 이내 나를 쓱 흘겨봤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안 들어도 빤했다. “한데… 수사자 씨는 왜…….” “왜 가면을 벗기지 않았냐는 것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아우릴 가비스는 동의를 구하지 않고 모두의 가면을 벗겨 냈지만, 이 중에서 나는 예외였다. 하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껄껄, 나도 저 친구를 대하는 건 좀 조심스러워서 말일세! 예의 없게 대했다가 어떻게 엇나갈지 모르지 않나.” “아아… 그, 그렇군요?” 답변을 들은 고블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좀 웃겼다. 저런 답변을 듣고도 아무 말 못 하고 수긍을 해 버릴 거면 대체 질문은 왜 한 거야? 뭐, 고블린답다면 고블린답기는 했지만. “…….” “…….” 그 상태로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아우릴 가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했고, 회원들은 연신 나를 힐끗했다. 내가 뭐라도 해 주길 바라는 듯한 눈치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용건은 끝인가?” 용건이 더 있다면 어서 말해 보라는 재촉의 뜻. 나답지 않게 돌려 말했지만, 다행히 그 의미는 잘 전달이 된 거 같았다. “아니. 아직 한 가지가 남았네.” “한 가지?” “자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서 말일세.” “그래? 어서 해 봐라.” 나는 흔쾌히 승낙하듯 말했다. 일단 질문부터 듣고 답변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하기에는 듣는 사람이 많군.” 아우릴 가비스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주변을 쓱 훑었다. “한데 그렇다고 이대로 곧장 내쫓아 버리기에는 조금 미안해서 말일세. 억지로 얼굴을 공개하게 했는데, 적어도 그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보상이란 말을 듣자마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 늙은이가 진짜 미안하다고 보상 같은 걸 해 줄 리가 없었으니까. 분명 뭔가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터인데……. “그냥 보상을 주면 재미가 없으니 다 같이 게임을 해 보세.” 역시 아니나 다를까 말이 길어진다. “게임… 말씀입니까?” “그래, 게임. 자네들도 좋아하지 않나? 참고로 보상은 게임을 해서 이긴 단 한 명에게 줄 생각이네.” “…보상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습니까?” 고블린은 어떤 게임인지 듣기도 전에 보상부터 확인했고, 이에 아우릴 가비스는 나중의 재미로 미뤄 두자든가 하는 말 없이 쿨하게 답해 줬다.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576화 리턴 (2) 여우, 늑대, 고블린, 여왕, 나비. 그리고 나와 아우릴 가비스. 총 일곱 명이 모인 원탁의 방에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탁 멤버들은 이 낯선 세계로 끌려온 지 최소 수 년은 훌쩍 넘은 올드 유저들이니까.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고요……?” 이곳에서 지낸 기간이 오래 됐기에 그들은 더욱더 잘 알고 있다. 심연의 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가겠단 목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대부분이 이곳의 삶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왜,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상황이 달라졌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던전 앤 스톤]. 그리고 그 게임을 제작한 장본인 아우릴 가비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말한다. 게임을 하고, 거기서 이긴다면 상품으로 집 귀환 티켓을 끊어주겠다고. “흐음, 이 정도면 괜찮은 보상이라 생각했네마는.” 플레이어라면 혹하다 못해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으나, 원탁 회원들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도 그럴 게, 이들이 누군가? 이 험난한 세상을 지금까지 헤쳐온 자들이다. 먹음직스러운 무언가가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무슨 게임인지 먼저 들어보고 싶은데요.” “만약 참가를 해야지만 들을 수 있는 거라면,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곧바로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기보다는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 정보부터 수집하려는 회원들. 그들의 질문에 아우릴 가비스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참가를 해야지만 들을 수 있다니,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내가 준비한 게임은 아주 간단한 게임일세.”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말투만 보면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데, 그걸 듣는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 아우릴 가비스가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이자, 가면이 벗겨진 회원들의 표정이 더욱더 경직된다. 과연 무슨 게임일까? 노망이 나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같은 걸 시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마침내 노인네의 입이 열었다. “바로 퀴즈일세.” 이 자리에 모인 그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게임이었다. “퀴즈… 말입니까?” “자네들이 아는 그 퀴즈가 맞으니 의심 어린 눈빛은 그만하게.” “아니… 단지 어떤 식으로 되는 걸지가 궁금해서…….” “아, 내가 그걸 말하지 않았군. 앞으로 내가 퀴즈를 내면 자네들은 답을 맞히면 되네. 사실인지, 아닌지. 선택지가 두 개뿐인 객관식 퀴즈지.” “OX퀴즈 말이군요…….” 고블린이 어딘가 찜찜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곱씹자, 아우릴 가비스가 추가 설명을 보충했다. 뭐, 이걸 추가 설명이라고 봐도 될진 모르겠지만. “퀴즈는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진행이 될 걸세. 아, 물론 도중에 포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 말일세.” “헤에……?” 나비가 ‘이것 봐라?’ 하는 느낌으로 소리를 냈다.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다. OX 퀴즈에서 탈락하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다니, 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일까. “포기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이내 여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노인네는 또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놓았다. “글쎄,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나. 난 언제나 자네들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네.” 존중하기는 개뿔. 다들 집에서 게임하다가 끌려온 사람들이구만. 비꼬는 말투로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냥 머리에 참을 인을 새기며 참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까. “아무튼, 설명은 이만하면 된 듯하니 참가할 사람은 말해보게.” 이후 노인네는 참가 의사를 묻는 시간을 가졌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포기하거나, 탈락했을 때의 패널티가 없다는 말, 정말인 거죠?” “걱정 말게.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이 게임은 자네들의 가면을 벗긴 것에 대한 대가라고.” “그렇다면… 저는 해보겠어요.”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여왕이 참가 의사를 내비치는 것으로 모든 회원들의 참가가 결정됐다. 아, 물론 나는 빼고. “미안하지만, 자네는 참가할 수 없네. 하지만 너무 서운해하진 말게. 어차피 자네는 이런 방법으로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는 거겠지. 내가 열심히 성장해서 언젠가 심연의 문을 열어야 하니까. “헤에… 수사자 님이랑 저희는 뭔가 다르다는 건가요? 왠지 흥미가 생기네요.” 날 보는 나비의 눈빛이 조금 더 진해지는 것을 끝으로 아우릴 가비스가 박수를 치며 이목을 모았다.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해보세.” 뒤늦게 깨달은 것인데, 어느샌가 각자의 자리 앞에 O, X가 적힌 팻말이 놓여 있었다. 뭐, 이러니까 진짜 미니게임이라도 하는 거 같네. ‘……분명 이 늙은이라면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텐데.’ 과연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자, 그럼 첫 번째 문제일세.” OX 퀴즈가 시작됨과 동시, 저 늙은이가 왜 도중에 포기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여우 가면은 마법사다.” “……!” “맞으면 O, 틀리면 X가 적힌 팻말을 들게.” ……이건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 아니다. *** 첫 번째 문제가 나온 순간, 어색한 공기가 주변을 휘감는다. “…….”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하지만, 전혀 되지 않고 있는 여우. 그리고……. “어…….” 그 사정을 알기에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여우의 안색을 살피는 고블린. “흐음…….” 보아하니 여왕도 이 게임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은 듯했다. 뭐, 남은 둘은 아직인 듯하지만. “헤에… 그냥 여우 님이 드는 팻말을 따라서 들면 되지 않을까요? 본인이 퀴즈 당사자인데.” “호오, 나쁘지 않은 방법인 듯하구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여우에게 모였고, 이내 여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팻말을 들어 올렸다. “동그라미구려.” “정말 마법사셨네요. 왠지 그런 이미지이기는 했는데. 저기요 마스터님? 정답 확인을 할 차례 아닌가요?” 이내 나비의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하네. 전원 정답을 맞혔네. 그럼 두 번째 문제로 바로 가지.” “…….” “고블린 가면은 성기사다.” 그러려니 하던 늑대와 나비조차 아우릴 가비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 “…….”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진 장내. 그 속에서 사람들은 O가 적힌 팻말을 들었고, 비슷한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여왕 가면은 단 한 번도 미궁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세 번째 질문의 정답은 O. “늑대 가면은 한 클랜의 단장이다.” 네 번째도 정답은 O. “나비 가면은 노아르크의 일원이다.” 당연히 다섯 번째도 답은 O였다. 사실상 이쯤 되면 X 팻말은 왜 만들어 준 건지 의문이 들 정도. “자, 그럼 이제 여섯 번째 질문을 할 차례로군?” 이내 그렇게 한 바퀴가 끝난 뒤, 노인네의 시선이 다시금 여우에게로 이동했고, 그 시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야 이게 OX 게임이 아니란 건, 다들 진작 눈치를 챘으니까. OX 게임을 빙자한 폭로 게임. 그것이 이 게임의 실체이며, 한 바퀴가 끝났으니 다음 질문은 더 수위가 높아질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해두겠네. 나는 자네들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니,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만 하게.”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는 말……. 아까는 웃기지도 않게 들렸지만, 이번에는 그 말의 무게가 남달랐다. 그야 친절하게 맛보기까지 제공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가 내 정체를 알겠어? 따위의 생각은 이제 불가능하다. 차례가 지나갈수록 만인 앞에 공개해야 할 정보가 점점 늘어날 터. “여기서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여왕의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는 즉답했다. “아무런 일도. 아, 그래도 게임은 진행을 해야 하니 자리를 비켜주기는 해야 할 걸세. 관전자는 한 명이면 족하니 말일세.”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확실한 거죠?” “내가 여기서 그 어떤 말을 해야 자네가 믿겠나? 의심을 지우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네.” “뭔가 그럴듯한 증거라든가 그런 걸 제시하면—.” “믿지 못하겠다면,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네. 이곳을 떠나는 것.” “…….” “어쩌겠나?” 누가 봐도 사기꾼스러운 언변이었으나, 여왕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보며 아우릴 가비스가 껄껄 웃었다. “자네라면 그럴 줄 알았네. 사실상 자네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이것뿐이지 않은가?” “…….” “기운 내게. 결국 끝까지 남아 승자가 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아, 아니면 잠시 시간을 줄 테니 나가서 그 친구에게 물어봐도 좋네? 이걸 해도 될지 말지. 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됐으니까… 계속해요.” 여왕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었고, 아우릴 가비스는 오히려 유쾌한 기색으로 다시 OX 퀴즈를 이어나갔다. 모두 조용히 팻말만 들은 덕분에 한 바퀴를 전부 도는 데 걸린 시간은 3분 안팎. “여우 가면은 돈을 빼앗기 위해 무고한 탐험가를 죽인 적 있다.” “고블린 가면은 레아틀라스의 신탁을 받은 적 있다.” “늑대 가면은 현재 7구역에서 거주 중이다.” “여왕 가면은 귀족이다.” “나비 가면은 오르큘리스의 일원이다.” 어째서 여우만 저런 과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번째 바퀴가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저기 마스터님? 전 여기까지만 할게요!” 나비 가면이 포기 선언을 해왔다. “왠지 다음 바퀴에서는 이름이 나올 거 같아서요. 뭐, 밝히지 못할 건 없는데……. 좀 그렇잖아요? 진짜 집에 돌려보내 줄 수 있는 건지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자네의 판단을 이해하네. 그럼 이제 자리를 비켜주겠나?” 떠나달라는 요구에 나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우리를 쓱 보며 명랑하게 인사했다. “다들 언젠가 밖에서 봐요!” 이십대 초반의 외모로 저리 말하니 꽤 상큼하게도 보였다. 한데 OX 퀴즈 덕에 나비가 노아르크 소속, 그것도 범죄 집단인 오르큘리스의 일원임을 알게 되어서 그럴까? ‘밖에서 보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나쁘게 들리지?’ 다만, 단순히 기분 탓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진 몰라도 쟤가 멀쩡한 인간일 거 같지는 않거든. “저는… 여기까지 하겠어요.” 여하튼, 나비 가면이 적당한 타이밍에 빠르게 손절을 치고 나가는 모습에 정신이 들었는지, 이후 여우도 이탈을 선언했다. “흐음, 여우 양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는데. 예전에는 그 누구보다 간절했지 않나.” “그랬죠… 하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더니 그것도 다 의미가 없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의 저한테는 지금의 제 삶도 충분히 소중해요.” 그런 솔직한 답변을 뱉은 여우는 아우릴 가비스를 향해 짧게 목례했다. “그래도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의도가 어쨌든, 그때 절 거둬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고맙기는. 내가 아니었어도 여우 양이라면 잘 헤쳐나갔을 것이네.” “그럼 떠나기 전에 잠깐 인사 좀 해도 될까요?” “마음껏 하게.” 이내 여우가 고개를 돌려 한 사람씩 눈을 맞췄다. 늑대, 고블린, 여왕, 그리고 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사람이 줄었네요. 아쉬워요. 설마 이런 식으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그래도 서로 얼굴은 봐서 좋네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느낌이 제대로 나서.” “그런… 가요?” “네. 적어도 저는요. 처음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어디서든 잘 살길 바랄게요. 이건 진심이에요.” 축복의 말에 여왕은 한참이나 답을 못했다. 그 속내야 뻔했다. 저 말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생각했겠지. 최종적으로는 그런 게 없단 걸 깨달았을 테고. “……고마워요.” 이내 여왕이 쥐콩만 한 목소리로 그리 화답했고, 여우는 싱긋 웃어준 뒤 짧은 대화를 끝내고, 시선을 쓱 옮겼다. 연이 짧았던 늑대는 그냥 한 번 보고서 지나쳤고, 고블린의 앞에서는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다만 밖에서 얘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고블린에게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넘어가 나를 보았다. “사실… 수사자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괜찮을까요?” 해보라는 듯 고개를 짧게 주억이자, 여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삶이 많이 무료하면, 가면을 벗고 벗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어……. “그럼 분명 이곳의 삶도 재밌어 질 거예요.” 왜 친구가 없다는 게 전제인 건데? 알 수 없지만, 바로 이어진 말에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제가 그랬거든요.” 이건 조금 감동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