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화 용사도 취준은 어렵다 난 평범한 취준생이었다. 귀갓길 트럭에 치여, 이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쯤 되면 덤프트럭의 설계 구조에…… 차원이동의 원리 같은 게 담겨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번듯한 기업에 취직한다는 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그렇게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럴 바에는 이세계로 전생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낫지 않을까? “오히려 좋아.”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설레기도 했다. 여느 이세계물의 주인공들처럼, 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본인을 ‘GM 세리아’라고 소개한, 미치광이 요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흐으응. 용사님에게는 아무리 봐도, 검이나 마법에 대한 재능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그…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몬스터를 때려잡고 세상을 구하려면, ‘재능’이라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용사야?” “일단 트럭에 치였잖아요?” “…….” 어이가 없었다. 재능이 없다고? 그래. 난 현대에서도 딱히 특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재능이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나와 그리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 것도 맞았다. 하지만……. “시팔, 그럼 트럭은 대체 왜 보낸 건데?” 그러니 적어도 이세계에서는, 특별한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지구의 몇십억 인구 중에 날 콕 찝어 트럭을 보낸 거라면, 상식적으로 어떤 재능을 보고 보낸 게 아닐까? 심지어 미치광이 세리아도,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게요, 어떻게 재능이 없을 수가 있지?” “뭐?” “트럭 이거, 아무한테나 보낼 수 있는 건 아닌데.” “…….” 결론이 뭔가 요상하게 흘러가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 재능을 한 번 찾아봐요!” “무, 무슨 재능?” “용사님이 뭘 잘하는지 같이 한번 찾아보자고요.” 요정의 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시감! ‘이거…… 16살쯤 우리 엄마한테 들었던 말 아닌가?’ 요정은 나와 엄마가 무려 10년 이상 해결하지 못했던 세기의 난제를 꺼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요정 세리아는 본격적인 미치광이로 돌변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베타 시스템’을 사용해야겠다더니, 끝나지 않는 무간지옥 같은 곳에 건율을 가둬버렸다. “성좌의 게임 ‘라이카’에는, 시스템으로 정의된 직업이 대충 17895개 정도 있어요.” “뭔 소리를 하려고…….” “아, ‘용사 고용노동부’ 공식 자료 기준이에요.” “…….” “하지만 적당히 비슷한 걸 카테고리로 묶으면, 대충 대표직업은 천 가지 정도로 줄어들거든요?” “그래서?” “하나씩 다 해보죠, 뭐.” “뭐?” “트럭의 선택을 받았는데! 적어도 뭐 하나는 잘하는 게 있지 않을까요?” 이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내 공부 뒷바라지 하나 하는 것도 벅차하셨지만, 요정은 달랐다. 미치광이 요정의 시간 개념은, 사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으니까. “이, 이것도 아니야?” “아닌 것 같아요 용사님. 으…… 진짜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난…… 정말 ‘라이카’라는 게임 같은 세상 안에서 천 번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아니, 천 번도 훨씬 넘었다. 어떤 경우에는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다며, 같은 클래스를 여러 번 시키기도 했으니까. “하아……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것도 애매해……! 너무 애매하다고!!” 그렇게 대충 천 이백 회차 정도를 보냈을까? 어느새 발랄하던 요정의 표정은, 까맣게 썩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웃긴 건. “이번에도 아닌 거지?” “네, 애석하게도.” “어쩔 수 없지 뭐.” 어느 순간 내가 해탈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다음은 뭐야? 이번엔 뭘 하면 돼?” 처음에는 분명 무한히 반복되는 이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어느새 해탈의 경지를 넘어 즐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회차당 평균 10년으로 잡아도, 만 년이 훌쩍 넘는 억겁의 시간. 한 회차 한 회차를 대충 때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매번 누구보다 성실하게 취업 준비에 임했고, 다만 요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용사님.” “뭐가?” “아무래도…….” 세리아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인사팀 관리자 경력 최초로, 용사님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뭐? 날 포기한다고?” “네. 용사님에게선 정말 아무런 재능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나보다 세리아가 먼저 지쳐버린 것이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데?” 때문에 난 결국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래 계시던 곳으로.” “응?” “지구로 돌아가셔야죠.” “뭐……?”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긴 한데…… 아무래도 이번엔, 트럭이 잘못 배달된 것 같네요.” 세리아의 말을 빌리자면 태초 이래 최초로, 취준에 실패한 용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용사님.” “…….” 그렇게 용사 취업조차 실패해 버린 난, 정확히 십 년 만에 지구로 귀환했다. 라이카라는 세상 안에서의 수만 년이, 지구에서는 10년인 모양이었다. 빠아아앙-!! 뭐, 차도 한가운데 떨어져 귀환하자마자 다시 치일 뻔했지만. 지난 억겁의 세월 동안 있었던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사소한 헤프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서울이잖아?’ 떨떠름했지만, 어느새 걸음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자리는, 십 년 전 그 귀갓길의 횡단보도. 그러니 내 걸음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집’이었다. 억겁의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리움’ 따위의 감정들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래도 막상 서울에 돌아오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우와… 세상 많이 달라졌네?” 그런데 그렇게 생각 없이 걷던 난, 잠시 후 커다란 현수막 앞에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헌터 모집 공고] “이게…… 뭐지?” 그 현수막 안에서……. 다른 의미로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그 지겨운 이름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모집 기간 : 2035년 1월 30일까지.] [모집 인원 : 5명 내외] [지원 자격 : 라이카 30레벨 이상.] ‘라이카…… 라고?’ 놀랍게도 10년이 지난 지구에는…… 수천 년간 플레이했던 베타 테스트 게임 [라이카]가, ‘정식 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요정과 함께했던 억겁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바로 ‘정식 출시’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라구욧!” “정식 출시 버전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니까요?!” ‘베타 테스트’가 뭔지 ‘정식 출시’가 뭔지. 내 입장에선 개념적으로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식 출시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세리아에게 물어봤었다. “정식 출시가 대체 뭐야?” “어… 그러니까…….” “대체 이걸 어디다 어떻게 출시한다는 건데?”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세계에는 수많은 차원계가 존재하죠.” “그렇다며.” “그리고 우리 관리자들은, 그 차원계들을 ‘서버’라고 불러요.” “……?” “하지만 라이카는 아직, 모든 서버에 출시되지 않았어요. 그중 하나가 용사님이 원래 살아가던 ‘지구’ 서버고요.” “출시되면 어떻게 되는데?” “지구에 게이트가 열리겠죠?” “어……?” “‘라이카’ 정식 버전에 접속할 수 있는 게이트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솔직히 내가 없는 사이 지구에 게이트가 열렸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당황했다. “……게이트네?” 집으로 향하던 길. 그것도 서울숲 한복판의 광장에……. 우우우웅-! 베타 버전에 접속할 때 봤었던,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게이트가 열려 있었으니 말이다. ‘진짜 [라이카]라고?’ 하지만 내가 받은 충격이, 아무래도 10년 만에 아들을 발견한 엄마보다 클 수는 없던 모양이었다. “세, 세상에!” 아파트 분리수거장 앞. 집으로 향하던 날 발견한 엄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셨다. * * * 집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10년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띠동갑 여동생뿐. “뭐, 뭐야. 진짜… 오빠잖아?” 놀랍게도 10년 동안,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심지어 서울숲역 앞, 아버지의 편의점도 10년 전 그대로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언젠간 아들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 감정 같은 건 전부 말라 없어졌다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세계로 끌려갔던 건 내 의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너 찾겠다고 헌터들 고용하느라…… 대출받고 차도 팔고 팔 수 있는 건 다 파셨는데… 이 집은 그래서 팔 수가 없었단다.” 10년 전, 내가 실종됐던 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라는 게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게다가 처음에 세계적으로 생성됐던 게이트들은, 서울숲에 평화롭게(?) 열려 있는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닌 위험천만한 불규칙 게이트들. 그래서 부모님은 지금까지… 내가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하셨더랬다. 그래도 아버지 편의점 앞에 붙어있는 현수막은 조금 민망했지만……. [실종자를 찾습니다.] [이름 : 이건율] [실종당시 나이 : 26세] [현재 추정 모습] [사진] “추정 모습, 이거 뭐예요?” “…….” “그냥 아빠 사진 갖다 붙여놓은 거 아니죠……?” 나 때문에 찢어지도록 가난해진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취업에 대한 욕구가 10년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오른다. “이제 제가 돈 벌어 올게요 엄마.” “네가?” 그러니 아무래도, 다시 취업에 도전해야겠다. “이제 진짜…… 취직해야죠.” “무슨 수로.” 비록 용사는 못 됐지만, 그간 라이카에서 구른 짬이 있으니 헌터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저…… 만 년 넘게 용사 수련하고 왔다니까요?” 물론 엄마는 아들의 그 패기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건율아.” “예?” “너 혹시…… 어디 종교단체 같은 데 끌려갔던 건 아니지?” “…….” “괜찮아 우리 아들. 돌아왔으면 됐어. 돈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겠지.” 엄마 딸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취업? 쉽지 않을걸, 오빠?” “왜?” “10년 전이랑은, 취준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거든.” 하지만 동생이 방에서 꺼내 온 문제집들을 슬쩍 훑어보니, 쪼그라들던 자신감이 다시 충만해질 수 있었다. [헌터 매니저 임용고시 심층면접 기출분석집] [아이템 감정기능사 필기끝장 문제집] ……중략…… [몬스터 보호사 자격증 파헤치기] ‘뭘 놓고 봐도 10년 전 토익 토플 문제집보단 쉬워 보이는데?’ 어쨌든 난 용사 취준 경력이 최소 몇만 년인 고인물. 그동안 재능이 부족했을지언정 노력은 누구보다 많이 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지금 당장 문제집부터 풀어도 절반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건 그렇다 치는데, 몬스터 보호사 자격증은 대체 뭐냐? 지구에선 몬스터도 키워?” “몬스터 보호단체 취직하려면…….” “제정신이 아닌 세상이네.” “10년 전에는 제정신이었나?” “하긴, 그때도 정상은 아니었지.” 10년 사이 세파에 찌들어버린 동생을 보자 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근데 너 10년 전에 14살 아니었냐?” “그치?” “그때 세상이 어땠는지가 기억나?” 동생이 엄마를 슬쩍 째려봤다. “중학교 1학년이 미적분 풀고 있었으니까.” “…….” “그게 솔직히 정상은 아니잖아?” 맞다. 그랬었지. 나와 달리 공부에 재능이 있던 동생은, 선행학습 문화의 희생양이 됐었다. 기억이 떠오르니 동생에게 약간의 연민이 느껴진다. “맞긴 해.”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버지도 집에 돌아오셨다. “너… 너……!!” 아버지 역시 눈물부터 펑펑 흘리셨지만, 다행히 엄마처럼 쓰러지진 않으셨다. “멀쩡히 돌아온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죠?” “헌터 의뢰비에 쏟은 돈이 갑자기 너무 아깝구나 아들아.” “…….” “어쨌든 잘 돌아왔다.” 하시는 말씀을 보니,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느낌도 아니셨고 말이다. “아빠.” “응?” “사실은 우리 집……. 집값 오를까 봐 못 파신 건 아닌 거죠?” “흠, 흠.” 아무튼 머릿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가족임에도, 다시 상봉하니 마음이 제법 따뜻해진다. 세상은 뭔가 더 각박해진 느낌이었지만, 가족들 덕분인지 오랜만에 긍정 에너지도 피어올랐다. 그러니까 뭐, 헌터 자격증 따서 취직해도 되고. 아니면 라이카에 접속해서 장비만 좀 파밍할 줄 알면……. ‘먹고 사는 덴 지장 없는 세상이라는 거 아냐?’ 비록 베타 테스트 버전 플레이어였고, 천 회차 넘게 플레이하면서 마왕도 잡아보지 못한 자격 미달 용사였지만. 아무리 정식 출시가 베타 버전과 다르다곤 해도 내가 고블린 정도를 못 잡을 것 같진 않은걸? ‘정식 버전 된다고 고블린이 갑자기 트롤이 되는 건 아니잖아?’ 고블린 급의 최하급 몬스터만 상대할 줄 알아도, 세전으로 한 달에 삼사백은 거뜬히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마지막 회차 때는 데스 나이트도 썰고 다녔는데…… 어쩌면 오우거까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솔직히 욕심이 더 나기도 했지만……. 이건 좀 위험하다. ‘아니야, 깝치지 말자. 이건율 너? 재능 없어.’ 베타 버전에 억겁의 시간을 갈아 넣어도, 결국 용사 자격 하나 못 얻지 않았던가. 인생은 얇고 길게. 제 분수를 알고 사는 것도, 인생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덕목 아니겠어? 끼이익- 가족들과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10년 만에 방에 돌아온 난 침대에 털썩 몸을 누였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머리가 꽤 복잡했지만.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좀 쉬자.’ 미치광이 요정과 함께 하는 동안, 이렇게 맘 편히 쉬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 같다. 그러니 며칠 정도는 머리 비우고 쉬어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었다. 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그사이 난 어지간하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시율아.” “응?” “니네 오빠, 어디 아픈 거 아니겠지?” “음……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건지, 그건 좀 궁금하긴 해.” 하지만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지난 일주일은, 귀환 용사의 ‘재활 기간’ 같은 거였다. 10년 사이 세상이 어떻게 바뀐 건지 틈날 때마다 찾아보았고,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연락도 해보며 잃어버린 사회성을 되찾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뭐? 정민이 너랑 동수… 둘 다 아직 결혼을 못 했다고?” [야씨, 아직이라니! 우리 아직 어려 인마!] “서른여섯인데?” [저기요.] “응?” [2035년 기준, 서울시 초혼 평균은 40세거든요?] “나라 망했네?” 그리고 그 결과.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인 경준이, 벌써 8년째 용사(헌터)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경준은, 옆집에 살았던 친구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옆집에 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경준이는, 용사라고?” [야, 용사라고 얘기하니까 뭔가 좀 그렇다 헌터라고 해 헌터.] “8년이나 일했으면, 꽤 베테랑이겠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어쨌든 경준이는 연락 안 되는 거지?” [맞아. 연락하려면 라이카 안에서 찾아야 해. 한번 들어가면 기본 한 달은 안 나오더라고.] “오케이. 아무튼 고맙다 정민아.” [그럼 조만간 보자고!] “읏- 차.” 어쨌든 재활(?)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드디어 집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철컥- “아들, 어디 가니?” 아들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걱정 반 안도 반의 표정이 된 어머니.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며, 신발끈을 단단히 묶었다.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요.” “그, 그래. 답답할 만하지.” “산책 좀 다녀올게요!” 난 정말 산책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오늘은 진짜… 맛만 보고 나와야지.’ 서울숲으로. 정확히는 서울숲 게이트를 통해 갈 수 있을, 라이카 ‘시작의 마을’로 말이었다. * * * 사실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10년 만에 귀환했으니 당연히 통장 잔고가 제로인데, 그렇다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폐급 용사일지언정 인성까지 폐급은 아니거든. ‘서른여섯에 얹혀살려면… 밥값 정도는 해야지.’ 때문에 길드나 공기관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또 학원 같은 델 다니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러니 서울숲 게이트를 선택한 건 너무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딱 점심값만 벌어보자고.’ 다만 걱정은 게이트에 별 탈 없이 진입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오호.” 게이트 앞까지 도착해서 보니, 별다른 접근제한 같은 게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당연했다.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는 건 어차피 ‘각성자’뿐이었으니까. 나중에 안 사실인데, 지구에서는 각성하는 순간 온갖 각성자 교육을 받아야 함과 동시에 서약서를 작성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서약서 안에는, 게이트 안에서 언제든 사망할 수 있음을 인지한다는 무서운(?) 내용까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다른 걸 걱정 중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설마 지구에선… 각성자도 아닌 건 아니겠지?’ 순간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론 일반적인 헌터들처럼 ‘각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적은 따로 없다. 하지만 난 시스템 창을 띄울 수 있는걸? 〓〓〓〓〓〓〓〓〓〓〓〓〓〓 <플레이어 정보> [정보] 이름 : 데이브 (Dave#GARQW ) 종족 : 인간 나이 : 26 레벨 : 알 수 없음 클래스 : 없음 칭호 : 없음 〓〓〓〓〓〓〓〓〓〓〓〓〓〓 다양한 각성자 커뮤니티 눈팅으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자의로 눈앞에 시스템창을 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각성자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분명 될 거다. 베타 버전을 플레이할 때와 달리, 본명이 아닌 ‘데이브’라는 처음 보는 플레이어 네임과 이상한 태그가 떠올라 있었지만……. 이게 걸림돌이 될 것 같진 않다. 커뮤니티를 보면 오히려 플레이어 네임이 본명인 케이스가 없었으니까. 우우웅-!!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를 향해 발을 딛었고. 곧 아주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라이카-Laika’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서버 : 지구] [접속 경로 : 서울 – 한국] 익숙하다 못해 질리도록 들었던 시스템 알림음. 그리고 메시지. [최초 접속자를 감지합니다.] 물론 베타 때는 보지 못했던 생소한 메시지 내용들도 존재했지만……. [플레이어 데이터를 동기화합니다.] [1%……24%…27%……98%] [데이터 동기화 완료!] 그야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어쨌든 접속 자체는 아무런 문제 없이 성공했으니까. [접속 장소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데이브(Dave)’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어서 눈앞에 아주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휴우. 됐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지구로 귀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거지 같은 메시지가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역시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그럼 이제 퀘스트가 뜨겠지?’ 풍경부터 감각까지, 너무도 익숙한 베레쉬트의 전경. 그걸 둘러보며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띠링-! 대충 천 이백 번쯤 해본 것 같은 퀘스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튜토리얼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분류 : 튜토리얼 퀘스트 난이도 : F 당신은 모험가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태초의 마을 ‘베레쉬트’의 촌장 ‘모르디니’를 찾아가, 새로운 모험가가 탄생했음을 알리세요! 보상 : 견습 모험가의 장비 상자 〓〓〓〓〓〓〓〓〓〓〓〓〓〓 * * * ‘라이카 주식회사’에서 인사 관리팀에 속해있는 요정 세리아는,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으, 진짜 인재가 왜 이렇게 없는 거야?” 세리아의 팀이 관리하고 있는 수많은 차원계 안에서, ‘용사’가 될 법한 재능을 가진 존재를 찾아내는 게 세리아의 가장 중요한 업무! 하지만 ‘트럭’을 보낼 정도로 유망한 용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때문에 오늘도 세리아는 산처럼 쌓여 있는 데이터 베이스를 하나하나 뒤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한번 시도해봐도 되려나?” “아냐. 이 정도로는 부족해!” “적당히 했다간 또 개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게다가 세리아는 최근,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업보를 아주 세게 치른 적이 있었다. 분명 괜찮은 재능이라 생각하여 데려왔다가, 무려 수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받지 않았던가! 물론 그 만 년이라는 게 실제 시간 선에서의 만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시간은, 관리자 요정으로서도 견뎌내기 힘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 확실한 인재를 찾아야만 해.’ 하지만 아무리 데이터를 뒤지고 검토에 검토를 거듭해도, ‘이건율’보다 나은 싹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휴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이건율’은 모든 방면에서 애매한 재능을 가진 용사 후보였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왜 그 정도도 찾기가 힘든 거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건율은커녕 그 비슷한 수준에 미치는 용사 후보조차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냐, 찾다 보면 분명 나올 거야. 그냥 운이 나쁜 거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세리아는 그저 ‘노오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는 그 어떤 요정보다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바로 방금 전. 충격적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띠링-! [관심용사 ‘이건율’의 데이터가 동기화되었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 처음 메시지가 떴을 땐, 뭔가 시스템 오류가 났다고 생각했었다. “이게 뭔… 소리지?” 이건율은 분명 자신과 함께 베타 버전을 셀 수도 없을 만큼 플레이했던 용사 후보였고. 그런 ‘이건율’의 데이터가 시스템에 아직도 동기화되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만.” 하지만 이상함을 느껴 ‘시스템 로그’를 전부 확인한 요정 세리아는, 잠시 후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동기화가 된 적이 없잖아?” 놀랍게도 지난 1200회차가 넘는 베타 플레이 기간 동안, 용사 ‘이건율’의 데이터는 단 한 번도 시스템에 동기화된 적이 없던 것이다. “미… 미친?” 시스템 동기화 없이 플레이했다는 건, ‘시스템 보정’을 조금도 받지 않은 채로 플레이했다는 소리와 같은 말.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족이 ‘시스템 보정’ 없이 ‘마왕’을 잡는다는 건, 원래부터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차원계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어지간한 재능 없이 오우거조차 상대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시스템의 도움이 없다는 전제가 깔린다면 말이다. “그, 그럼 이건율은… 시스템 보정 없이 데스 나이트를 잡았던 거라고?” 상황을 파악한 요정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빨을 딱- 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용사 랭킹차트 최상위권인 ‘7층계’ 랭커들이라 하더라도, 시스템 보정 없이 데스 나이트를 잡아낸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물론 재능식별을 위해 만들어진 ‘베타’ 버전이라면 조금 더 가능성이 올라가겠지만…….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시점에서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아주 확실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아마 세리아가 맡았던 그 어떤 용사후보를 데려다 놓더라도… 이건율보다 나은 용사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 그래. 정식 플레이어 네임! 그거라도 알아내야 해.” 그래서 세리아는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는 이미 ‘정식 출시’가 완료된 서버입니다.] [관리자의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지구’ 서버의 DB에 엑세스할 수 없습니다.] “흐엉엉엉-” 사실 세리아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라도 ‘데이터 동기화’ 메시지가 떴다는 건, 용사 이건율이 어떤 경로로든 ‘라이카’에 다시 접속했다는 방증이었고. 그럴 경우의 수는 단 하나. 지구에 라이카카 ‘정식 출시’ 됐을 경우밖에 없었으니까. “병신같은 요정새끼… 흐엉엉엉 흐어엉!” 그러니 이제 세리아가 이건율에게 다시 접근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지구 서버’의 첫 번째 메인 에피소드가 종료되고, ‘대규모 업데이트’가 처음 시작되는 시점. 그래서 ‘지구 서버’가 메인 서버와 연결되는 그 시점이 됐을 때, ‘정식 오퍼’를 넣는 방법뿐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구 서버의 대규모 업데이트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그러나 만약 그때가 됐을 때 ‘이건율’이 지구 서버의 ‘하이 랭커’라면, 세리아에게 기회가 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세리아는 기도하기로 했다. ‘제발 용사님이 태업하게 해주세요…….’ 지난 천 년 동안 세리아가 수없이 했던 가스라이팅. ‘너 재능 없어’로 인해 이건율이, 용사로서의 성장에 관심 갖지 않기를 말이었다. 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사실 게이트에 들어간다는 결정을 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나는 꽤 많은 고민들을 했었다. 게이트 자체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이 들어가 본 게이트에 거부감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다만 죽는 순간 처음으로 돌아오는 베타 버전과 달리, 여기서의 죽음은 실제로 사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죽기 싫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 전이라면 오히려 삶에 별 미련이 없었을 텐데, 사람 마음이라는 건 참 간사한 것 같았다.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아들아.” “예, 아부지.” “게이트 근처엔… 얼씬도 않았으면 좋겠구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트를 선택한 건, 결국 돈 때문이었다.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통해, 생각보다 집의 재정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보. 이제 건율이도 돌아왔으니… 우리 이사 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었어. 이 비싼 이자 내면서 여기 계속 있을 필요가 없지.” 매달 대출 이자만 수백만 원 깨지는데, 부모님의 벌이는 그 이자도 간신히 낼 수준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출이 최소 10억 이상 있는 상태에서, 생활비만큼 추가로 계속 까먹고 있는 상황. 집은 팔아봤자 대출을 다 갚지도 못하는 수준이었고, 판다고 한들 아버지 편의점 때문에 이사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모님께선 그냥 조금 힘든 정도라 표현하셨지만, 내가 볼 땐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조금만 늦게 돌아왔으면,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다. 그러니 내 불효를 청산하려면 적당히 취직해서는 답이 없었다. 난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게이트가 답이긴 해.’ 그래서 난 게이트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뒤, 나름 체계적인 계획들을 세웠다. 내가 가진 무기는 결국 남들에게 없는 천 회차가 넘는 경험치.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많은 라이카 포인트(LP)를 버는 게, 내가 큰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무리만 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벌 방법을 찾는 거야.’ 그러니까 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게이트에 들어왔다. “허허, 새로운 모험가는 언제나 환영이지. 그래, 데이브라고 했나?” 내게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만년 만에 만난 가족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띠링-! [‘베레쉬트’의 촌장 ‘모르디니’와 조우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든지 이 베레쉬트에서 편히 쉬도록 하시게.”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견습 용사의 장비상자’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폐급 용사라지만, ‘시작의 섬’ 안에서만큼은 얘기가 좀 다를 거다. 나처럼 캐릭터를 천 번 넘게 키워본 사람은, 정식 서버인 지구에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 * * 보통 지구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이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들어와야 하는 곳이 이 게이트라는 곳이다 보니……. 돈 들여 장비부터 세팅하는 건 물론, 가상 시뮬레이션 공간에서 온갖 훈련을 받은 뒤에야 게이트 진입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보통’의 헌터 지망생들에게, [견습 용사의 장비상자] 같은 건 큰 의미 없는 물건이었다. 최소 수천만 원을 들여 2~3티어 장비를 풀 세팅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1티어 장비인 보급 아이템에 의미를 둘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난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정말 무일푼으로 게이트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게는 이 견습 용사의 장비상자가…… 너무도 소중한 밑천이 아닐 수 없었다. [‘견습 용사의 장비상자’를 오픈했습니다.] [세 가지 장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A. 견습 모험가의 검] [B. 견습 마법사의 지팡이] [C. 견습 사냥꾼의 활] 때문에 기본 지급 장비 중에서 뭘 고를지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난 가장 적은 유지비로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흠.” 자, 그런 맥락에서 일단 ‘견습 사냥꾼의 활’은 패스. 이건 이번 생에 골라서는 안 되는 무기다. ‘화살을 조상님이 사주시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원거리에서 리스크 적은 사냥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헌터 지망생들이 많이 선호한다고 하긴 하던데……. 라이카에서 화살값은 결코 만만치 않거든. 심지어 상위 레벨로 성장하면 할수록 그 비용이 더욱 부담되는 구조다. 화샅도 다른 장비들처럼, 높은 티어를 사용해야 위력이 나오니 말이다. 5티어 이상의 화살은, 100발짜리 한 통에 천만 원도 넘는다고 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정답은……? 띠링-! [‘견습 마법사의 지팡이’를 선택하셨습니다.] 지팡이였다. [해당 아이템을 획득합니다.] 마법사는 돈 많이 드는 클래스 아니냐고? 물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활잡이보다도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절대로 마법사 또한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팡이를 왜 골랐냐고 묻는다면……. [‘견습 마법사의 지팡이’를 판매하였습니다.] 이게 제일 비싸니까. [15LP를 획득하셨습니다.] 이 15LP가 바로, 내 성장의 밑천이 될 종잣돈이다. ‘좋아. 베타 버전이랑 가격도 똑같네.’ 아마 기본 장비부터 쌀먹하는 걸 누군가 봤다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저었을 거다. 어차피 장비가 없으면 사냥이 안 되고, 사냥이 안 되면 돈을 벌 수가 없는 구조인데……. 비슷한 수준의 장비를 다시 사려면, 오히려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이 없다 해도 이걸 팔아먹는 건……. 일반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바보짓이 맞다. 하지만 내가 누구? ‘시작의 섬’ 고인물이다. 내게는 이 15LP라는 밑천을 극한으로 활용할 방법이 있었다. 지팡이를 팔아넘긴 다음 내가 향한 곳은, 마을 외곽의 대장간이었다. “처음 보는 모험가로군! 여기는 무슨 일이지?” 그런데 여기는, 보통의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는 대장간은 아니다. “뭐라고? 뭘 사러 왔다고?” 여긴 바로 농기구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대장간. 나는 여기서 최고의 가성비 무기를 장만할 생각이었다. “흐음, 모험가가 삽을 사가는 경우는 처음이네만… 뭐 팔지 못할 것도 없지.” [‘견고한 철제 삽’을 구매하였습니다.] “그래! 이게 품질이 아주 괜찮군.” 이 ‘견고한 철제 삽’은, 견습 모험가의 검보다 공격력은 당연히 부족하다. 하지만, 내구도가 3배인데다 무게도 더 가볍고……. 심지어 가격은 지팡이 기준으로 1/3수준! [5LP를 지불하였습니다.] 이런 게 있는데 상자에서 무기를 팔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10LP 이상을 손해 보고 시작하는 셈이 아닐까? 물론 용사로서 가오가 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남은 돈으로 사려고 한 물건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포션? 그럴 리가. 쌀먹용사는 포션 같은 거 안 먹는다. 포션 빨면서 사냥하는 놈들은, 애초에 돈 벌 자세가 안 된 녀석들이다. 그러니 내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구매한 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베레쉬트 귀환 스크롤’을 구매하였습니다.] [10LP를 지불하였습니다.] 게이트 안에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명 보험 하나 들어놓는 건 필수다. ‘좋아. 이 정도면 사냥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출근할 준비는 끝났다. ‘일단 베레쉬트 앞마당부터.’ 그렇게 나는 귀환 후 처음… 사냥터, 아니 일터로 향했다. * * * 요정과 함께하던 시절,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클래스를 경험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건축가’도 있었다. 그리고 건축가로 전직하면서 길드에서 받았던 첫 번째 무기가 바로 ‘삽’이었다. -이걸 들고… 싸우라고요? -물론일세, 삽은 생각보다 아주 훌륭한 무기지. 심지어 건축가 클래스의 초반용 전투 스킬 중에는, 삽을 활용한 무기술까지 존재했다. 그건 마치 검술과 방패술을 섞어놓은 느낌이었는데……. 크르릉-! 특히 앞뒤 안 재고 이빨을 드러내는 이런 무식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 아주 훌륭한 스킬이었다. 물론 지금의 내게 그 스킬이 있을 린 없지만……. 완벽히 동작을 재현해 낸다면, 실제 스킬을 사용하는 것의 8할 정도 위력은 뽑아낼 수 있다. 바로 이렇게. 퍽- 일단 삽을 수직으로 세워 올리며, 절도 있는 자세로 한 번 막아주고. [스터브 도그(Starve Dog)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했습니다.] [피해량이 99%만큼 감소합니다.] 철삽에 콧등을 박고 혼미해진 녀석의 정수리에 참교육을 내려주면……. 빠각-! [스터브 도그(Starve Dog)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스터브 도그(Starve Dog)가 기절 상태가 되었습니다.] 기절 상태가 된 녀석의 입에 그대로 삽을 꽂아 넣으면서, 깔끔하게 전투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말씀. [스터브 도그(Starve Dog)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스터브 도그(Starve Dog)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삽이 아닌 다른 무기였으면 오히려 이렇게 쉽게 상대하지 못했을 녀석이었다. 합리화가 아니라 진짜다. 초반 장비 중에 공수 전환이 자유로운 무기가 삽 말고는 없으니까. 만약 검을 들었으면 한 마리 잡고 나도 바로 빈사 상태가 됐을 거다. 한 번이라도 녀석에게 제대로 물린다면, 생명력이 곧바로 반토막 날 테니까. ‘다 피하면서 잡을 수도… 있긴 했으려나?’ 그런데 마을 앞마당 몬스터가 뭐 그리 세냐고?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센 놈을 찾아온 거다. 앞마당 뉴비 담당 일진 스터브 도그는…… 무려 4레벨 몬스터였으니까. 1레벨로 4레벨 야수에게 물리면 빈사 상태가 되는 건, 상식적으로 당연한 게 아닐까? [몬스터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레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전하게 한다더니 왜 시작부터 무리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어려운 도전에 성공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바로 칭호를 얻기 위해서다. [‘거인 학살자(영웅)’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1레벨에 스터브 도그를 잡는 게, 이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 〓〓〓〓〓〓〓〓〓〓〓〓〓〓 거인 학살자 분류 : 칭호 티어 : 5 등급 : 영웅 * 장착 효과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적을 상대할 때, 모든 전투 능력치가 30만큼 증가합니다. * 보유 효과 공격력이 추가로 15%만큼 증가합니다. 〓〓〓〓〓〓〓〓〓〓〓〓〓〓 이 칭호의 획득조건은 ‘모든 능력치가 두 배 이상 높은 적 처치’인데……. 때문에 레벨이 높아질수록 획득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무려 5티어 영웅등급의 칭호인데 얻기 쉬울 리가 없잖아? 지금이 아니면 날먹이 불가능하단 얘기다. “흠흠.” 이런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스펙업을 빠짐없이 챙기는 것도……. 날먹용사. 아니, 쌀먹용사의 중요한 소양이 아닐까? ‘암, 그렇고말고.’ 어쨌든 첫 목표까지 순조롭게 달성했다 보니, 남들보다 부족한 장비가 어느 정도는 커버 됐다. [높은 레벨의 적과 전투에 돌입합니다.] [‘거인 학살자’ 칭호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전투력이 85 증가하였습니다.] [현재 전투력 : 137] 조건부긴 하지만 장착 효과로 발동하는 모든 능력치 30은, 거의 2티어 장비 풀 세트를 착용한 것에 버금가는 효과였으니까. [스터브 도그(Starve Dog)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삽질 한 방에 맥을 못 추는 똥개를 보니, 성능은 역시 확실하다. 아무리 내 공격이 약점을 정교하게 공략했다고 해도, 2레벨이 4레벨을 한방 컷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거든. [스터브 도그(Starve Dog)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사냥 속도는 상당히 빨라졌고, 그렇게 두 마리쯤 추가로 잡았더니, 전리품도 드랍됐다. [‘스터브 도그(Starve Dog)’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합니다.] 물론 이런 볼품 없는 녀석이 값진 걸 드랍할 리는 없지만……. [‘질긴 고깃덩이’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 이런 것도 잘 손질해다 팔면 0.1LP 정도는 벌 수 있다. 1LP의 환전비가 대충 만 원쯤 한다고 했으니까, 무려 천 원이나 된다. ‘어, 잠깐. 이게 천 원이라고?’ 베타 버전으로 플레이할 땐 사실 줍지도 않던 잡템이었는데……. 비린내 나는 고깃덩이가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스터브 도그(Starve Dog)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스터브 도그(Starve Dog)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게다가 신나서 닥치는 대로 사냥했더니, 드랍률 20퍼센트 미만인 템도 하나 떨어졌다. [‘작은 맹수의 뼛조각’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건 그냥 이대로 들고 가도 잡화점 아저씨가 무려 0.3LP에 사주는 잡템. “크.” 이것도 허리 굽혀가며 주워 본 지… 못해도 칠천 년 정도는 된 아이템인 것 같긴 한데, 오늘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베타 버전에서는 이런 생각 해본 적이 없는데……. 아메리카노 교환 쿠폰 한 장 길에서 주운 느낌이었다. [스터브 독(Starve Dog)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질긴 고깃덩이’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작은 맹수의 찢어진 가죽’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단순 사냥 노가다가 사실은 이렇게 재밌는 거였다니. 사실 내 재능은, 쌀먹에 있었던 게 아닐까? 퍼억- 끼이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부식된 뼈 장신구’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방금 잡은 한 녀석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치킨 쿠폰을 드랍해 버렸다. 〓〓〓〓〓〓〓〓〓〓〓〓〓〓 부식된 뼈 장신구 분류 : 장비 - 목걸이 레벨 제한 : 1 등급 : 일반 티어 : 1T 내구도 : 20 / 20 주 능력치 공격력 +2 굶주린 야수의 뼛조각으로 만들어진 낡은 장신구입니다. 〓〓〓〓〓〓〓〓〓〓〓〓〓〓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면서……. ‘미친.’ 나도 모르게 동공이 확장되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대충 2.3LP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거면 뿌링클 순살도 가능하겠는걸? 1티어 장신구 하나 파밍한 게 이 정도로 도파민 터질 일이었다니……. 역시 모든 건 사람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부식된 뼈 장신구’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착용해야 한다. [‘부식된 뼈 장신구’ 아이템을 장착하였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전투력이 4 증가하였습니다.] [현재 전투력 : 141] 스텟 하나하나가 상당히 소중한 레벨이니까. 빠각-! [스터브 독(Starve Dog)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렇게 신이 나서 똥개들을 학살하다 보니, 어느새 레벨이 또 올라 버렸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레벨이 되었습니다.] 이제 1레벨만 더 올리면, 더 이상 여기서 사냥할 수 없다. 앞마당 최고 레벨 몬스터인 스터브 도그와 레벨이 같아져 버리면, ‘거인 학살자’ 효과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미리 ‘시작의 숲’으로 넘어가야겠다. 거기 서식하는 난폭한 순록을 떠올리니, 입에서 절로 군침이 도는 느낌이다. ‘와일드 레인디어였나. 녹용 드랍하던 녀석이.’ 난폭한 순록은 아주 낮은 확률로 ‘녹용’이라는 약재를 드랍한다. 그리고 이건 무려…… 시세가 13LP다. 오마카세라는 뜻이다. “캬.” 사냥이 갑자기 너무 재밌어졌다. 아무래도 점심값만 벌고 나가겠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어느새 내 걸음은 시작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사실 ‘시작의 숲’은 꽤 위험한 곳이다. 물론 3레벨 기준이다. [‘와일드 레인디어’로부터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하지만 철삽으로 무장하고 뿌링클 순살을 목에 건 쌀먹용사 데이브라면……. [‘와일드 레인디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3레벨이라도 얘기가 좀 다르긴 했다. [‘와일드 레인디어’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의 눈에 난폭한 순록은, 잡을 때마다 배춧잎 한 장을 뱉어내는 훌륭한 ATM기일 뿐이었으니까. [‘거친 짐승의 가죽’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부러진 짐승의 뿔’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왜 배춧잎 한 장이냐고? 그야 ‘와일드 레인디어’가 드랍하는 템들의 평균적인 가치가, 대충 1LP정도로 체감되기 때문. ‘으, 벌써 다 잡았나?’ 그래서 상당히 아쉬웠다. 와일드 레인디어가 흔하게 등장하는 몬스터가 아닌 점이 말이다. 수식어가 붙지 않은 그냥 레인디어는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와일드 레인디어는 다섯 놈에 한 놈꼴로 꽤 희소하다. 희소성 있는 녀석이기 때문에 드랍되는 잡템들의 시세가 좀 더 형성돼 있는 것이겠지만……. 오늘만 좀 더 잘 떠주면 어디 덧나냐는 말인 거지. ‘그래도 많이 벌긴 했어.’ 지금까지 루팅한 아이템들을 대충 보니, 다 팔면 7LP 이상은 나올 것 같다. 두 시간 만에 번 돈이니, 시급으로 치면 무려 3만 5천 원이다. “크……!” 오늘 하루 사슴과 불태우면, 30만 원도 넘는 일당을 벌 수 있는 셈. 갑자기 도파민이 화수분처럼 솟아오른다. ‘이게…… 쌀먹용사?’ 어쩌면 내가 재능을 발화하지 못했던 건, 동기부여가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레벨업마다 요정이 뽀찌 좀 쥐여줬으면, 이미 몇백 년 전에 마왕 잡고 귀환했을지도 모르겠는걸? “…….” 망상은 이쯤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실 순록을 계속 잡는다고, 저렇게 돈을 계속 벌 수 있을 리 없다. 진짜 게임처럼 몬스터가 무한대로 젠되는 것도 아닌데다, 내가 순록의 부산물들을 공급하다 보면 가격이 떨어지기도 할 테니까. 그러니 멍청한 생각은 그만하고, 원래 생각해 뒀던 다음 플랜을 향해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사실 여기서 난폭한 순록을 더 찾아다니는 건 손해지.’ 경험치를 보니 거의 5레벨이 다 되었다. 그리고 5레벨부턴, 쌀먹을 위해 미리 설계해 둔 ‘다음 스탭’이 존재한다. 그러니 일단 5레벨을 찍고……. 띠링-!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레벨이 되었습니다.] [‘특성’ 탭이 해금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특성 포인트’를 활용해 ‘특성’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특성 탭을 열어 보았다. [‘특성’ 탭을 오픈하였습니다.] [잔여 ‘특성 포인트’는 1포인트입니다.] 눈앞에 수없이 많은 특성 리스트가 주르륵 떠올랐지만 읽을 필요는 없다. 왜냐고? 다 외운 지 오래거든. 뭘 찍을지도 게이트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정해뒀다. 그래서 난 곧바로 포인트를 투자하였다. 띠링-! [‘발골 전문가’ 특성을 습득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몬스터 사체를 ‘발골’할 수 있습니다.] 각성자 위키에서 ‘절대 찍으면 안 되는 특성’ 목록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발골 전문가- 특성 랭크 : F 라이카에 푸줏간이라도 차릴 생각인 게 아니라면, 찍을 이유가 전혀 없는 특성입니다. 이걸 찍을 바에는……. 아마도 스펙업 요소가 전혀 없는 특성이라서 저런 박한 평가를 받았을 거다. “후후.” 하지만 괜찮다. 난 세상을 구하는 데에는 딱히 관심 없는 쌀먹 용사니까. ‘뭐, 내가 데스 나이트 잡으러 갈 것도 아니잖아?’ 미래의 영광을 팔아서 당장의 시급을 세 배쯤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쌀먹의 길 아닐까? 뭐, 정 필요하면 나중에 초기화할 수도 있는 게 특성이고 말이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즐긴다. [루팅이 끝난 ‘와일드 레인디어’의 사체입니다.] [특성, ‘발골 전문가’를 발동할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시체 하나에 재획이 두 번! 돈이 복사가 된다고? [‘와일드 레인디어’의 사체의 ‘발골’을 시작합니다.] [시체의 상태가 양호하여, 발골 성공률이 상승합니다.] 게다가 나중에 와이번 둥지라도 파밍 가능하게 되면, 이 ‘발골’ 특성을 가진 플레이어만이 드래곤 본(Dragon Bone)을 파밍할 수 있다. 아마 지구 서버에는 아직 이걸 아는 플레이어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알았다면 절대로 이 특성에 F랭크를 매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지. 그런데 와이번이 오크나 오우거보다 더 센 거 아니냐고? 당연하다. 용족 중에서는 티어가 낮은 편에 속하지만 어쨌든 용족인데, 오크 오우거 따위와 비교할 수는……. 생각해 보니 와이번은 좀 멀리 간 것 같다. 돈 좀 벌었다고 벌써 주제 파악에 실패하다니. 조금 자중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현재 진행률 : 0%……1%…15%……100%!] [‘발골’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하나 생겨버렸다. [‘발골’에 부적합한 장비를 사용하여, 전리품이 손상되었습니다.] [‘부러진 녹용’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발골에 삽을 썼더니……. 오마카세가 부러져 버렸다. * * * 대한민국의 평범한 취준생 이시율은, 매일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볍게 조깅을 하고, 개운하게 씻은 뒤 곧바로 독서실로 출발. 독서실에서 오전 내내 인강을 들으며 집중해서 공부한 뒤, 점심을 먹고 나선 취준 스터디 모임에 참석. 스터디가 끝난 뒤에 학원을 두 군데쯤 다녀오면, 집에 와서는 기진맥진하는 게 그녀의 일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인상 펴고 즐기자 쫌. 오랜만에 만나서 왜 이렇게 얼굴이 썩은 건데?”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일탈의 날이었다. 일탈이라 봐야 점심으로 김밥 대신 마라탕을 먹고. 취준 스터디에 가는 대신 몇 없는 절친 정현우와 영화를 보는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불편했다.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성인이 된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휴우. 즐기게 생겼냐. 엄빠 눈치 보인단 말야.” 그나마 긍정적인 건, 최근 오랜만에 집에 좋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 십 년 전 실종된 오빠가 기적처럼 돌아온 바람에, 부모님 얼굴이 오랜만에 밝아지셨으니까. “그래도 요즘 집안 분위기 좀 나아졌다면서?” “그건… 맞아.” 한때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빠가 원망스러웠지만…… 돌아온 건 진심으로 반갑고 또 고마웠다. 다만 요 며칠 헛짓거리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쓰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맨날 게이트 어쩌고 검색하는 것 같던데……. 이상한 짓거리 하려는 건 아니겠지?’ 뭐, 용사 경력 살려서 돈 벌어오겠다는 헛소리를 하던데……. 각성자도 아닌 게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을 린 없었지만, 은근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얘기들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멀쩡해 보이는 오빠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헛소리를 시작한다. “후후, 너무 걱정 말자 시루. 조금만 기다리면 이 형님이 먹여 살려준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이건 비밀인데……. 사실 오늘 이 얘기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거든.” “뭐……?” 덕분에 더 심란해졌다. “나 지난주에 게이트 들어갔다?” “뭐라고?” “이 형님이 금방 랭커 돼서 매니저로 고용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는 얘기란다.” “미친놈이?” 이어진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시율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가장 친한 친구인 정현우가 각성자라는 사실조차도, 오늘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울 누나한테는 절대로 비밀이다? 알지?” “뭐래. 여름언니한테 당장 전화할 거야.” “안돼! 진짜로 제발!” 그와 동시에 문득, 한 가지 불길한 예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건율 이 자식도… 용사 어쩌고 하던 게 진심은 아니었겠지?’ 엄마 아들도 사실은 각성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주륵- 시율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녹용이 부러져 버리는 끔찍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뒤로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주머니칼을 한 자루 장만했더니,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발골 특성은 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이 셀프 드랍 2배 이벤트로 인해 인벤토리는 금세 묵직해졌다. 덕분에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냥했다. 그리고 베타 버전에서의 회차들을 생각해보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작의 숲 노가다가 재밌다니. 이게 말이 되나?’ 사실 이 라이카 세계를 ‘플레이’하는 모든 구간 안에서……. 원래 가장 지루한 구간이 바로, 이 시작의 숲 노가다 구간이다. 경험치 요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4~5레벨 구간부터, 전직하기 전에 성장 가능한 최대레벨인 20레벨까지. 별다른 퀘스트도 없는 상태에서 반복 사냥을 해야 하는 이 구간은, 무한히 반복되는 용사의 삶 안에서도 분명 가장 힘들었던 기억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띠링-! [인벤토리를 오픈합니다.] 숲의 사냥감들을 때려잡고 발골 특성으로 성실하게 파밍하고. 그렇게 얻은 전리품들을 인벤토리 안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이 루틴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재미를 느끼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는 얘기였다. ‘와, 이 정도면 진짜 50LP 가까이 되겠는데?’ 첫날부터 성과가 너무 좋기도 했다. 무일푼으로 하루 만에 50LP를 벌어들인 것도 내 목표치를 아득히 초과한 수준이었지만……. 띠링-!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9레벨이 되었습니다.] 레벨이 오르는 속도도 믿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 <플레이어 정보> [정보] 이름 : 데이브 (Dave#GARQW ) 종족 : 인간 나이 : 26 레벨 : 9 클래스 : 없음 칭호 : 거인 학살자 〓〓〓〓〓〓〓〓〓〓〓〓〓〓 심지어 매번 발골하느라 시간을 꽤 투자했음에도 말이었다. “벌써, 9레벨이라고?” 난 내가 이 정도로 잘할 줄, 진짜 전혀 몰랐다. 왜 본인을 과소평가했냐고? 실제로 베타 버전을 플레이할 땐, 이렇게 못 했었으니까. ‘첫날 9레벨이라……. 어떤 회차에서도 이 정도로 빨랐던 적은 없었는데.’ 고일 대로 고였던 가장 최근 회차에서도, 보통 내가 9~10레벨이 되는 건 2일 차의 일이었다. 요정과 함께할 때는 하루에 6시간 자면서 성장만 했었으니까……. 거의 30시간이 다 됐을 때 도달했던 레벨이, 바로 지금의 레벨인 10레벨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한 3배는 빠른 페이스인 것 같은데. 이게 혹시 마음가짐의 차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큰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정식 서버가 베타 버전보다 쉬울 리는 없는데. 지구로 귀환하면서 나도 몰랐던 재능 같은 게 개화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럼 이제 와이번이 아니라 마왕도 잡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럴 리가. F급 용사가 깨달음을 얻었으면…… 이제 E급 정도 된 거 아닐까? 그러니까 그냥 좀 더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게 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흐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을로 돌아와 인벤토리를 모두 정리했고, 내 수중에는 정확히 53LP가 모여 있었다. [현재 보유 LP : 53 LP] 흡족한 표정이 되어, 업무일지를 작성한다. 헛돈 쓰지 않고 차곡차곡 돈을 벌려면, 가계부 작성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 <1일 차 업무일지> 총 매출 : 71LP 지출비용 : 18LP -지출 내역- 베레쉬트 귀환 스크롤 : 10LP 견고한 철제 삽 : 5LP 날카로운 주머니 칼 : 3LP 영업이익 : 53LP 〓〓〓〓〓〓〓〓〓〓〓〓〓〓 특히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보다 어디에 썼는지가 중요하다. 헛돈이 새어 나가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업무일지는 완벽하다. 발골용 단도를 구입하느라 지출이 3LP까지 추가됐지만, 충분히 근거 있는 투자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게 접속한지 10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띠링-! [로그아웃 장소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드디어 난 퇴근하기로 결심했다. [‘데이브(Dave)’님의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바깥에 나와보니,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지만. 재밌는 걸 어떡하냐고. “흐흐흐.” 하지만 퇴근했다고 해서 일과가 끝난 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온 난 어느새 지하철에 탔고, 어느새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가 다 졌다면서 어딜 또 가는 거냐면……. 오늘 번 돈 환전하러 간다. 난 LP보다 KRW가 더 좋거든. 띠리링- 띠리링- -이번 정류장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아직 여덟 시 정도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실 시간까진 아니다. LP 환전해서 치킨이라도 시켜드리면, 아빠가 좋아하시지 않을까? 돈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물어보시면, 친구네 회사에서 일일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왔다고 하지 뭐. 게이트에서 돈을 번단 얘기는, 최소 억 단위로 벌고 나서 솔직히 말씀드릴 생각이다. 차마 게이트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하기 어려우실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을 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에 도착했고, 목적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좌의 탑- 게이트 관리국] 서울역 앞 광장에 거대하게 솟아있는 새하얀 빛의 기둥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오늘 게이트 관리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연히 환전이었고, 둘째는 바로 헌터 등록이었다. 헌터 등록은 사실 당장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탑’에 입장하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필요하다. 이세계의 탑은 요정이 관리했지만, 한국서버의 탑은 한국 정부가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헌터 등록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이걸 하고 나면 다음부턴 서울역까지 오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LP와 KRW를 환전하는 게 가능해진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먼저 환전을 하고 싶은데요.” 어쨌든 일단 환전부터 해야겠다. 오늘 이후로 엄마 딸의 교통 카드를 몰래 쓰는 일은…… 절대로 없을 예정이다. [플레이어 네임, ‘데이브’님의 계정을 시스템에 등록합니다.] [현재 보유 LP : 53LP] [1LP의 현재 환전 비율 : ₩10,357] [최대 53LP를 환전할 수 있습니다.] [환전할 금액을 입력하세요.] 10LP만 남기고 싹 다 환전하자, 수수료 떼고 44만 5천원 정도의 돈이 통장에 입금됐다. 10LP는 왜 남긴 거냐고? “헌터 등록도 바로 진행해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헌터 등록 비용이다. 피 같은 10만 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한민국 헌터 인명부에 등록되셨습니다.] [이제부터 ‘환전소’ 기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아이템 거래소’ 기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략…… [‘스트리밍 시스템’에 온보딩되었습니다.] 주르륵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을 보니, 이제 진짜로 헌터가 됐다는 게 실감이 좀 난다. 베타 버전에서는 본 적 없는 내용들도 많다 보니,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스트리밍 시스템은 뭐지? 인터넷 방송 같은 건가? “음, 인터넷 방송이랑은 좀 달라요. 이건 ‘라이카 시스템’ 자체에 온보딩되는 스트리밍이니까요. 그러니까 ‘성좌의 게임’이 제공하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얘기죠.” 대체 무슨 소리야……? 베타 버전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그런데 스트리밍 시스템을 진짜 모르세요? 한 10년 정도 숲속에서 살다 나오셨나.” 숲속은 아니고, 이세계에 다녀오긴 했습니다만……. “여튼 헌터로 성공하시려면 최대한 활용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성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니까요.” ‘성좌’라는 단어에 난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성좌’라는 존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미치광이 요정을 통해 수없이 들은 단어였으니까. -이 정도 실력으로는 절대로 성좌님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어요 용사님! -좀 더 특별한 서사를 쌓아야만 한다구요. -재능이 부족하면 재밌기라도 해야 된다니까요!! 게다가 얘기를 듣다 보니, 각성자 위키에서 봤던 내용들이 생각난다. 랭커들의 주 수입원이 스트리밍이라는 내용을 본 것 같은데……. 그냥 인기를 바탕으로 인방이라도 켜서 큰돈을 버는 줄로만 이해했었다. 그런데 성좌들과 소통하는 스트리밍이라니. -정식 서버에서는, 수많은 성좌님들이 용사님을 지켜본다구욧! 이게 그 말이었어? “정확해요.”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데, 뭔가 거부감도 든다. 내가 남 앞에서 나대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또 그… 성좌라는 녀석들이 뭔가 꺼림칙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스트리밍이라는 걸 끌 수도 있는 거라면……. “무슨 소리예요? 그걸 왜 꺼요……?” “어…….” “스트리밍은 무조건 키고 플레이해야죠!” 왜?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냥 스트리밍을 켜두고 플레이하기만 하면 성좌들이 LP를 후원해 주는데… 안 할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한테 얼굴 팔리는 인터넷 방송도 아니고요.” LP 후원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혹하는데, 이어진 직원의 말이 결정타였다. “게다가 꼭 랭커들만 후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어떤 헌터는 20레벨도 되기 전에 ‘큰손’이 붙어서… 하루에 1만 LP 후원받은 적도 있다니까요?” 미친? 1만 LP면 1억 아니야? “물론 처음에는 구독자 한 명 생기는 것도 엄청 힘들다고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걸 안 켜고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그 뒤에도 직원은 뭐라 뭐라 설명을 더 덧붙였지만, 중요한 내용도 딱히 없었고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후원으로 그만한 LP를 버는 것도 가능하다니. 쌀먹용사가 이걸 안 한다면, 그야말로 직무 유기가 아닐 수 없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흥미로운 걸 발견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미 9레벨이시네요?”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당연히 문제야 없습니다만, 헌터 등록도 하기 전에 9레벨을 달성하신 분은 처음 봐서요.” 각성자 위키에서 본 내용인데, 보통은 게이트 입장하기 전에 헌터 등록부터 먼저 한다고 하긴 했었다. 헌터 등록을 하지 않으면 게이트 관리국의 거래소를 사용할 수 없으니, 장비부터 맞추고 들어가는 게 다른 헌터들 입장에선 당연한 순서였을 거다. 어쨌든 그렇게 몇 가지 서류를 더 작성하고 나니……. 헌터 등록 과정이 전부 마무리되었다. “데이브 님, 헌터 등록 완료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들을 알게 된 탓에 기분이 묘했지만, 어쨌든 헌터 등록까지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솔직히 태클이 들어올까 봐 걱정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거든. ‘민증이라도 확인했으면 꽤 곤란했을지도.’ 내 주민등록상의 나이는 36세. 하지만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는 데이브의 나이는 26세. 나야 당연히 26세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민증이요?” “헌터 등록에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어차피 헌터에게는 그런 서류 쪼가리보다, 시스템에 등록된 정보가 훨씬 더 중요하거든요.” 뭐,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은 없긴 한데……. “플레이어 네임, 데이브. 국적 대한민국. 나이 스물여섯. 맞잖아요? 그쵸?” 그럼요. 맞고 말고요. “좋아요. 그러면 이제… 절차는 전부 마무리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이 좀 많은 것만 빼면 아주 괜찮은 직원인 것 같다. 덕분에 스트리밍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뒤에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그런데 헌터님, 잠깐만요.” “넵?” “오신 김에 오늘… ‘게이트 종합 보험’에도 가입하시는 거 어떠세요?” 뭐라고? “어차피 오신 김에 오늘, 잠재력 측정도 하고 가실 거잖아요?” 아니? 안 할 건데? “이게 서른 살 이하, 잠재력 등급 D등급 이상인 분만 가입하실 수 있는 상품인데, 이번 달에 혜택이 진짜 괜찮게 빠져서…….” 갑자기 어질어질하다. 아무래도 괜찮은 직원이라는 평가는, 취소해야 할 것 같다. * * * 저녁 8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 게이트 관리국 사무실 한켠에는, 아직도 훤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정확히는 관리국의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국장실. 그 자리의 주인인 김영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퇴근하지 못한지는, 벌써 한 달도 넘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제…… 딱 50일 남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국장님.” “하아. 미치겠네, 진짜.” 김영태가 퇴근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관료 인생 최대 위기가, 슬금슬금 도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위기란 바로 ‘게이트 폭주’. 게이트를 관리하고 폭주를 막아내는 것이 ‘게이트 관리국’의 존재 이유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대로 대책 없이 앞으로 50일이 지나면, 대한민국에 5년 만에 ‘게이트 폭주’가 일어나게 생겼으니 말이었다. 이걸 막아내지 못하면 김영태는 옷부터 벗어야 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민간의 피해가 클 것이라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예산은? 장관님께선 뭐라시던가?” “그게…….” 게이트 폭주란, ‘동시다발적으로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존재만으로는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안정화 게이트와 달리,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쏟아져 나오는 위험한 게이트가 바로 불안정 게이트. 그런데 이 위험한 게이트가 언제 어디에서 생성될지 모르는 상태가 바로 게이트 폭주다. 때문에 게이트 폭주가 진행되는 보름 동안, 민간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많이 죽을 게 분명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게이트 폭주를 막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 걸까? “분명히 이번 추경안에, 게이트 안정 자금도 편성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편성되긴 했습니다.” “그런데?” “금액이…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건 바로 탑의 기여도. 다른 말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해당하는 ‘LP’라고 할 수 있었다. 기여도는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 소속 플레이어들의 게이트 내 활약에 비례해 쌓이지만, 결국 부족한 기여도만큼 LP를 채워 넣어야 게이트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얼만데?” “이천삼백억 정도인 거로…….”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2억 LP 정도를 태우면, 게이트 폭주를 30일 정도 연장할 수 있다. 한화로는 2조 원 가까이 되는 비용이, 대한민국의 게이트 폭주를 고작 30일 연장하는 데 쓰인다는 얘기다. 그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플레이어 풀이 부족해 기여도나 LP 수급이 어려운 국가들은, 게이트 안정화 비용에 한 푼도 태우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들은 사전방지 방식이 아닌 사후처리 방식으로 게이트 폭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일단 폭주가 일어나게 둔 뒤, 이미 생성된 불안정 게이트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헌터 고용비용에 군사비용, 피해 복구비용까지 다 계산한다 해도, 그쪽이 훨씬 싸게 먹히니까. “오천억도 아니고, 이천억?” “예.” 하지만 김영태는 그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민간에 고통 분담을 강요할 거라면, 그 많은 세금은 대체 왜 걷는다는 말인가? 막말로 ‘게이트 폭주가 일어나지 않는 국가’라는 타이틀만으로 얻을 수 있는 온갖 무형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지속적으로 쓸 만한 가치도 충분히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중장기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자국 소속의 헌터들이 더 많은 기여도를 쌓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게이트 관리국에서 벌어들이는 LP만으로도 안정화 비용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 증거로 무려 5년이나 게이트 폭주를 잘 막아왔고 말이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건, 결국 한계가 있을 거라고 말이야. -당장이야 혼란이 가중되고 국민들이 희생되겠지만……. -우리도 결국 불안정 게이트에 적응해야 해. ‘거지 같은 장관 새끼 진짜.’ -국가 헌터 경쟁력이 약해진다고? -게이트 안정화에 목숨 거는 거, 그거 결국 헌터 놈들한테나 좋은 일이라니까? -나라를 위해서는 결국, 불안정 게이트에 적응하는 게 맞다는 말일세. 직속상관인 국방부 장관을 떠올린 김영태는,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취임 당시부터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던 그는, 게이트 폭주를 불사해서라도 국장 자리를 갈아치우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럼, 얼마가 더 필요한 거지?” “당장에도 2천억 정도가 추가로 필요하지만…… 어찌 해결한다 해도 그 다음이 더 문젭니다, 국장님.” “으음.” “30일 뒤에 다시 폭주가 도래하면, 그땐 예산이 최소 7천억 가까이 펑크 날 테니까요.” “후우.” 마음이 답답해진 김영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오늘도 분주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들이 들어왔다. ‘이 평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건가.’ 게이트 폭주가 일상인 많은 국가들에서는, 더 이상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 김영태는…… 높으신 분들의 뜻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일단, 퇴근이나 하지.” “예, 국장님.” 퇴근길에 오른 김영태는, 여느 때처럼 지하철로 향했다. 무려 게이트 관리국의 국장씩이나 되는 그였지만, 30년에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항상 대중교통만을 이용해온 그였다. 덜컹- 덜컹-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길. 영태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관리국에서 나온 청년 하나가, 계속해서 영태보다 한 발짝 앞서 같은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보아하니 헌터 같은데…….’ 2호선으로 갈아탈 때도, 성수역에서 내릴 때도. 심지어 2번 출구로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까지도 말이다. “헛헛.” 그러니 단지에서 가장 깊숙한 위치에 있는 101동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랐을 때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 이런 우연이 있나.’ 하지만 잠시 후. 그렇게 같은 층에서 내리기까지 했을 때. “……!” 영태는 놀람을 넘어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퇴근길을 함께 한 이 청년이, 옆집 아들내미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옆집 아들… 실종됐다고 하지 않았었나?’ 영태의 옆집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웃이 아니었다. 이 집이 처음 지어진 20년 전에 같이 입주해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오래된 이웃이었으니까. 최근에야 별다른 교류가 없었지만, 아들이 실종되기 전까지만 해도 친하게 지내던 가정이었다.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을 정도로 말이다. 옆집 아들은, 영태의 아들과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그래서 찬찬히 얼굴을 확인하니……. “……!” 확실히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영태는 결국 현관문을 열기 전, 청년에게 말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김경준이라고 아십니까?” 그리고 청년은…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어…… 오랜만에 뵙네요, 아저씨. 저 경준이 친구 건율이 맞습니다.” 영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러니까 영태 아저씨를 발견한 건, 게이트 관리국 정문에서부터였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아저씨의 모습에 긴가민가했지만……. 가까이 지나가면서 슬쩍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도 헌터가 되셨나? 왜 관리국 건물에서 나오시는 거지……? 평범한 공무원이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경준이놈의 일 처리를 대신해주시기 위해 들르신 것일 수도 있다. 경준이는 대형 길드에 소속된 8년 차 베테랑 헌터라고 했으니까. “흐음.” 솔직히 반가웠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상당히 좋으신 분이셨던 것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하지만 먼저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고? 이 아저씨도 내가 관리국에서 나오는 걸 보셨으니까. 지금 인사했다간, 내가 게이트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그래서 못 본 척 후딱 지나쳐서 지하철로 향했는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아저씨도 집으로 향하는 길이셨던 거다. ‘어…….’ 오는 길에는 몰랐다. 열심히 각성자 커뮤니티를 뒤적이느라, 주변을 둘러볼 생각조차 못 했거든. 그런데 아마 같은 지하철을 타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었을 거다. “…….”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내리기도 민망해서 가만히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 그렇게 뻘쭘한 상태로 같은 층에 내리자, 결국 아저씨께서 먼저 말을 거셨다. “혹시… 김경준이라고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아저씨…… 모를 리가요. “어…… 오랜만에 뵙네요, 아저씨. 저 경준이 친구 건율이 맞습니다.” “……?!” 두 눈이 휘둥그레진 아저씨 표정을 보니, 얼마나 놀라셨는지 직접적으로 전해진다. 후. 이제 어쩔 수 없다. 아저씨께서 부모님께 따로 말씀 안 드리길 바랄 수밖에. 뭔가 하루 종일 일이 술술 풀린다 싶더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타이밍에 난관에 봉착해 버렸다. “이야, 진짜로 건율이었구나? 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 한 일주일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저씨께선, 상당히 반가운 표정이셨다. “아니… 네가 돌아왔는데 형님께선 왜 말씀도 없으셨을까?” 형님이란 우리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거다. 내가 알기로 우리 아버지가 영태 아저씨보다 두 살 정도 많으시다. “경황이 없으셨을 거예요. 아버지께서도 지금 꽤 충격을 받으신 상태라…….” 그 뒤로도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셨지만, 아파트 복도에서 나눌 수 있는 얘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아, 아버지 걱정처럼 게이트 같은 데 빨려 들어갔던 건 아니고요.” 내가 뭐 하루 이틀 사라졌던 것도 아니고, 취준 용사 스토리를 다 얘기해드릴 순 없잖아? “경준이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었는데,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연락이 안 됐습니다.” 뭐, 아저씨도 날 그렇게 오래 붙잡지 않으셨다. 대신 집에 들어가시기 전, 명함을 한 장 건네주셨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보아하니 내가 도움 될 일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만.” 근데 잠깐, 명함이 뭔가 이상한데……. 이거 진짜예요? [대한민국 국방부] [게이트 관리국] [국장 김영태] 내가 공무원을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국장급이면 최소 2급 공무원 아닌가? 게다가 게이트 관리국이라니. 끗발 장난 아니실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께서 한마디 더 툭 하고 던지셨다. “그나저나 헌터가 된 건, 아마도 부모님께 비밀이겠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 않아도 헤어지기 전에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만약 네가 부모님께 헌터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면, 이 아저씨 귀에도 이미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긴, 아버지께서 아셨다면 성격상 병태 아저씨께 바로 말씀드렸을 거다. 잘 좀 봐달라고? 그럴 리가. 제발 아들 좀 말려달라고 하셨겠지. 그래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탁드렸다. “그러니까 그… 부모님께 말씀은 좀…….” 그에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으신다. “그래. 걱정 말거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거, 이 아저씨가 제일 잘 알지 않겠니.” 하긴. 아저씨는 이미 경준이를 말려보신 경험이 있겠구나. “대신 어려운 일 있으면 아저씨에게 연락 주거라. 경준이 도움도 꼭 받고.” “감사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말씀만으로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사실 가족도 아니건만 이렇게 챙겨주시다니. 무재능 무수저 헌터인 나로서는, 상당히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경준이 돌아오면 같이 한 번 보자꾸나.” “예, 아저씨.” 이런 뒷배(?)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한다기보단, 마음이 든든해진 기분이다. 갑자기 경준이 녀석도 좀 보고 싶어졌다. 아저씨랑 거의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겨서 그런가? 철컥- 아저씨께 꾸벅 인사드린 나는, 드디어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정면에 보이는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저녁 10시가 훌쩍 넘었다. 오늘 하루는 뭔가 정말 길게 느껴진다. 이제 꿀잠만 자면 완벽한데……. “건율아, 지금 몇 시니?” 상당히 화가 난 표정의 엄마가 쇼파에 앉아 날 노려보고 계셨다. 덕분에 난…… 거의 두 시간이 넘는 설교를 들은 뒤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 * * 감은 눈꺼풀 위로 아침햇살이 느껴지자, 나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아, 몇 시지?” 시간을 보니 아침 8시다.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출근해야 한다. “저 다녀올게요!” “건율이, 아침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때우면 돼요!” “통금. 기억하지?” “아, 알겠다고요!” 통금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그 얘기를 하려면, 잠깐 어젯밤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건율 앞으로 통금 8시다. -아, 엄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너 안 와서 가족들 다 잠도 못 자고. 이게 뭐니? -그… 아빠는 자는 것 같은데? -아무튼. -아니, 어무니. 제가 메시지도 다 남겼잖아요. -10년 전에도 ‘집 가는 중~’ 보내놓고 사라졌는데 어떻게 믿으라고? -하… 그래도 나이 서른여섯에 통금은 좀……. -이시율. 앞으로 네가 오빠 감시해. 알겠지? -예쓰 마미. -후우……. -이건율 너 통금 한 번 더 어기면 바로 위치추적기부터 달 거야. 알겠지? -으아아아! 뭐, 걱정하시는 거야 당연히 이해가 된다. 한 번 아들이 사라져버린 트라우마가 있으시다 보니, 충분히 그러실 만하지. 하지만 그래도 통금 8시는 좀 너무한 거 아닐까. 열여섯 중학생 때도, 열 시까진 피씨방에서 놀다 들어왔었는데 말이다. “…….”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난 헐레벌떡 출근 중이었다. 어머니껜 친구 직장에 알바 자리 하나 구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던 정민이 이름을 팔았더니 수긍하시는 느낌이다. 휴. 그나저나 통금은… 진짜 지킬 거냐고? 그래서 엄마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그 정도 효도는 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일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면, 이제 일찍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8시에 눈을 떴지만, 내일은 6시엔 집에서 나와야겠다. 난 일하는 만큼 버는 사람이니까. 우우웅-! [접속 장소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데이브(Dave)’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더니, 새하얀 라이카 월드의 아침햇살이 날 반겨준다. 게이트 안의 공기가 이렇게 상쾌하게 느껴지다니. 나, 드디어 미친 건가? “후아.” 한 차례 크게 심호흡한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베레쉬트를 벗어났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깊숙한 사냥터까지 진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시작의 숲 서쪽 외곽을 벗어나면 나타나는 ‘그림자 협곡’ 필드가 내 목적지다. 최소 13레벨 이상의 그레이 울프들이 서식하는 사냥터기 때문에, ‘거인학살자’ 칭호 활용을 생각해도 12레벨까진 넉넉히 사냥할 수 있다. 거기서 12레벨을 찍고 ‘달빛 정원’ 던전을 공략하는 것까지가, 오늘 일과 안에 달성해내야 할 내 목표. 그런 생각을 하며 시작의 숲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 ㅎㅇㅎㅇ └ 방장 지금 어디 가는 거임? 시야 한 켠에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채팅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 님, 제 말 안 보임요? 일반적인 시스템 메시지나 채팅 로그 형식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 └ 뭐지? 버근가……? 시청자도 나 하나뿐이네? 덕분에 당황한 난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게 뭐지? 설마……? “……!” 한 가지의 경우의 수를 떠올린 내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고. 그 동공의 망막에, 작게 반짝이는 붉은 빛깔의 글씨가 떠올랐다. [ON Air : ☺ 1] * * * 어제 서울역에서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난 스트리밍 시스템에 대해 공부를 좀 했었다. 때문에 이렇게 빨리 시청자가 생길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왜냐고? 보통 전직도 하지 않은 플레이어의 스트리밍 방송에 성좌가 붙는 건, 거의 없는 케이스라고 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전직은 20레벨부터 할 수 있다. 그러니 9레벨인 지금 시청자가 한 명이라도 생긴 건, 엄청나게 희귀한 케이스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잠깐 얼 타고 있었는데……. 띠링-!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 한 줄이, 추가로 더 떠오른다. [‘방랑하는 고블린’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이상하다. 이게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상상도 못했던 후원 메시지에,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어,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서.” 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10LP라니. 이거 개꿀이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소리 내서 대답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뭔가 어색한데……. └ 와, 여기 방장 진짜 완전 생 뉴비네. 뭐야, 레벨도 9밖에 안 됐어? 그, 맞긴 합니다만. └ 소통할 때 그렇게 육성으로 말할 필요 없음요. 시청자한테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면 됨. -이렇게요? └ 오, 굳. 바로 그거임. 스트리밍 방송이라고는 하나 시청자가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성좌’라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구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구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띠링-! [‘회귀자 나비가면’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새로운 성좌들이 추가로 스트리밍에 입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 여기 뭐하는 방이에요? └ 저도 방금 들어왔는데… 여기 방장 진짜 쌩 뉴비인 듯? 띠링-! [‘그레이프 백작’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세번 사는 랭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뭐야. 여기 설마 시작의 숲……? └ 방장 전직도 아직 못 한 거 실화임? 갑자기 밀려 올라가는 성좌들의 채팅이, 뭔가 정신없으면서도 신기하다. 분명 각성자 위키에서는 시청자 한 명 들어오는데 몇 달 걸렸다는 얘기가 많았었는데. 대체 난 뭐가 다른 거지? 그런 궁금증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성좌들 중 하나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툭 하고 던졌다. └ 그런데 이런 생초짜 용사가 어떻게 프로모션을 받은 거임? 음? 프로모션? 그게 뭔데? └ 그러게;; 시스템 오류난 것 아님? └ ■■ 일 똑바로 안 하냐 진짜. 뭔가 검열이라도 되듯 성좌들의 메시지 일부에 노이즈가 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들을 보며 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이거 이거, 라이카 주식회사 플모도 이제 믿으면 안 되겠는걸? 첫째로는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며. └ ■■■가 단발성이고 기본 플모긴 한데…… 이것도 받으려면 최소 10만 시간 이상 플레이 기록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둘째로는 내 베타 플레이 기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 알빠노, 재밌으면 그만이지. └ 이런 쌩뉴비는 오랜만이라 신선하긴 하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 근데 방장, 언제까지 얼타고 있을 건데? 일 안 함? 성좌들을 상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ON Air : ☺ 9] 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내가 잠깐 얼 타는 사이, 9명까지 올라갔던 시청자 수가 단숨에 다섯 명까지 줄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처음 들어온 ‘방랑하는 고블린’이라는 성좌가 내 정신을 붙들어 줬다는 점. └ 그런데 내 질문에는 왜 대답을 안 함? -아, 어디 가냐고 물어보신 거요? └ ㅇㅇ 레벨 9면 여기서 사냥해야 하는 거 아님? 덕분에 나는 다시 성좌들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어… 그렇긴 한데, 저는 따로 목적지가 있긴 해요. 대화를 하는 사이 또 두 명이 나가버렸지만……. [‘회귀자 나비가면’님이 접속을 해제하셨습니다.] [‘세 번 사는 랭커’님이 접속을 해제하셨습니다.] [ON Air : ☺ 3] 그렇다고 해도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뭐, 잠재 후원 고객들이 털려 나가는 것 같아서 뼈아프긴 한데……. 성좌들이 뭘 좋아하는지 니즈조차 모르는 마당에, 뭘 해보려고 하다가 역효과만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래서 일단 말을 걸어주는 ‘방랑하는 고블린’에게 감사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늑대 사냥을 위해 ‘그림자 협곡’으로 향하던 일 말이다. └ 목적지? 여기서 더 나가면 위험할 건데. -그래요? 뭐가 위험한데요? 그런데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특이한 닉네임의 성좌가 불쑥 끼어들었다. └ 에이,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그래봐야 늑대 존인데.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망나니 2황좌’님이 30LP를 후원하셨습니다.] 미친. 30LP라고? 이러다가 이빨 썩겠는데……? └ 방장 그림자 협곡 가던 중인 거 맞지? 후욱 후욱. 접속하자마자 40만 원을 벌어서 그런지,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멍때릴 시간은 없다. 성좌님 기분 상하실라. 재빨리 질문에 대답부터 해야겠다. -맞아요. 거기 가던 중이었어요. 성좌님의 다음 말씀이 이어졌다. └ 거기 젠 되는 몬스터 중에 ‘달그림자 늑대’라는 에픽 몹이 있는데, 혹시 들어는 봤나? 당연히 들어봤습죠. 흐음. 솔직히 그냥 들어본 정도가 아니다. 녀석은 이 초반 지역 필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몬스터 중에 하나니까. 낮은 확률이지만 종종 2티어 장비를 드랍하는데다……. 운이 정말 좋다면 최대 3티어 장비까지도 나오는 녀석이라, 진짜 셀 수도 없이 잡아봤거든. 오늘도 꼭 사냥하려고 점찍어뒀던 녀석이고 말이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음…? 달그림자 늑대요? 알긴 하죠? └ 뭐, 그럼 얘기가 좀 편해지겠네. 이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정말 몰랐다. └ 한 시간 안에 그거 잡으면 100LP 어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방장 설마 미션이 뭔지도 모르는 거임?ㅋㅋ 덕분에 난 다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 너무 행복해진 나머지 공중제비를 돌 뻔했다. [‘망나니 2황좌’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 달그림자 늑대 사냥 분류 : 미션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달그림자 늑대(Lv15)[에픽] 처치 제한 시간 - 00 : 60 : 00 보상 : 100LP 〓〓〓〓〓〓〓〓〓〓〓〓〓〓 100LP라고? 이거 실환가……?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거액(?)에, 간을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일단 수락!! 수락이요!!! 무려 백만 원을 그냥 기부해 주겠다는데. 뜸 들이다가 성좌님 생각이 바뀌어버리면 개손해잖아? [‘달그림자 늑대 사냥’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미션 성공 시 명예가 1만큼 증가합니다.] [미션 실패 시 명예가 1만큼 하락합니다.] 달그림자 늑대는 15레벨 에픽 몬스터다. 그러니까 꽤 센 놈은 맞다. 하지만 그래봐야 저 성좌 말처럼… 여긴 아직 허접한 늑대 존일 뿐이다. 내가 이 미션을 클리어하지 못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는 얘기다. 뭐, 내가 고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이런 미션을 걸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늑이 그 정돈가?’ 솔직히 베타테스터 아니어도, 15레벨 에픽 몬스터 정도는…… 뭔 짓을 해서든 잡을 만한 거 아닌가? 필드에 끼워 잡는다던가……. 하긴. 지금 내 장비 상태로 평범한 9레벨 뉴비를 상정한다면, 확실히 어렵긴 하겠다. 1회차의 날 떠올려본다면, 분명 고전하긴 할 테니까. 아마 고전하면서 힘겹게 잡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채팅창에는 무수히 많은 갈고리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미션을 건 2황좌를 제외하면, 시청자가 둘뿐인데도 말이다. └ ? └ ??? └ ?? └ 방장, 혹시 미친 거임? └ 아니, 이걸 받는다고?ㅋㅋㅋㅋㅋㅋㅋ 어……. 혹시 달그림자 늑대가 내가 아는 그 흰둥이 녀석이 아닌 건 아니겠지? 달그림자 늑대(Lv15)[에픽]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놈이 맞다. 레벨 정보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데다, 심지어 에픽 몬스터니까. 라이카 세계 안에서 이름이 같은 에픽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 2황좌 너어어는 진짜 나쁜 놈이닼ㅋㅋ └ 엌ㅋㅋㅋ 방장앜ㅋㅋ 달그림자 늑대 뭔지 안다며?ㅋㅋㅋ 아니ㅅㅂㅋㅋ 아는 거 맞음?ㅋㅋㅋ 저기요. 15레벨 에픽 몬스터라고 미션 정보에 친절하게 또 쓰여 있잖아요……?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친구… 맞는 것 같은데? “어…… 으음…….” 얘들이 왜 이러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냥 가서 때려잡으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 난 잘못 없다? 미션 받은 놈 잘못이지 ㅋㅋㅋ 암요. 잘못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당연히 제 잘못입죠. └ 노잼이라 나갈까 했는데, 갑자기 흥미가 좀 동하는걸? 예. 바로 그겁니다, 성좌님. 그럼 님도 돈 좀 거쉴? └ 방장 혹시 이거 미션 성공하면, 내가 다음 미션 줌 ㅋㅋ 역시 이 방에 남은 세 놈은, 뭘 좀 아는 성좌님들 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스트리머로서…… 기대에 부응해야만 하겠지? * * * [‘시작의 숲’을 벗어납니다.] [‘그림자 협곡’에 진입합니다.] [밤의 기운이 드리워진 지역입니다.] [모든 ‘어둠’속성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망나니 2황좌’라는 녀석의 말처럼, 이 ‘그림자 협곡’은 늑대 존이라 부를 만한 사냥터였다. 이 필드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9할 이상이 야수형 늑대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몬스터는, ‘그레이 울프’라는 이름을 가진 13레벨의 늑대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원래 계획은, 이 그레이 울프들을 최대한 잡으면서 12레벨까지 우선 성장하는 거였다. 13레벨부터는 녀석들을 사냥할 때 ‘거인 학살자’칭호 효과를 받을 수 없으니, 그전까지 최고 효율을 뽑아먹으려고 했던 거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달그림자 늑대’를 찾아내는 것. 적당히 돌아다녀도 한 시간 안에는 만날 만한 녀석이었지만, 만에 하나 운이 지지리도 없을 경우를 배제해선 절대로 안 된다. 왜냐고? 그 어떤 경우에도 내 소중한 100LP를 날려 먹을 순 없기 때문이지. 후후. 성좌들에게서 풍기는 진한 호갱 냄새에 싱글벙글한 입꼬리를 도무지 감출 수 없다. 그러니까 난, 의욕이 아주 충만했다. “혹시 달그림자 늑대 어디에 잘 뜨는지 알려주실 분?” 주변에 딱히 다른 플레이어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육성으로 성좌들에게 물어보았다. 내 방에 있는 놈들은 뭔가 좀 모자라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무려 성좌들이잖아? 나보다 잘 아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 ㅋㅋㅋ개웃기네. └ 이 친구 진심인데? └ 진심이니까 미션 받았겠짘ㅋㅋㅋㅋ 그리고 성좌님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대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하였다. └ 일단 그림자 협곡 안쪽에도 젠 포인트가 몇 군데 있긴 할 텐데. └ 아예 고원 위로 올라가는 건 어떰? └ 에이 거긴 너무 멀어. 가다가 시간 다 쓸 듯ㅋㅋㅋ └ 아ㅋㅋㅋ근데 ㄹㅇ상황 자체가 웃음벨이네ㅋㅋㅋ 아쉽게도 도움되는 내용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런데 형님들, 저 진지한데 왜 자꾸 웃어요?” └ ㅋㅋㅋ진지하니까 웃긴 거임 ㅋㅋㅋ 그나저나 이제 성좌들에 대한 호칭은 ‘형님들’이 되어버렸다. 원래 돈 많으면 형님이다. 수십 LP씩 턱턱 던져 줄 정도니, 당연히 나보다 훨씬 부자들이겠지. 그리고 성좌들도 내 호칭이 썩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 이 친구, 깍듯한 게 아주 맘에 들어? 자꾸 이 친구 이 친구 거리는 녀석은, ‘그레이프 백작’이라는 이명의 성좌다. 지금 내 방에 남아있는 성좌 세 명 중, 유일하게 아직 후원을 하지 않은 놈이기도 하고. 아까 다음 미션을 걸어주겠다며 공언한 녀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늘 내로 이놈한테도 미션금을 따먹는 게, 나만의 서브 퀘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낮 시간이라, 달늑 젠 확률이 좀 떨어지긴 하겠네. └ ㄱㅊ 어차피 월계수 근처로 가면 무조건 한 놈은 있음. 오, 그런 디테일한 것도 알아? └ 에이 근데 거긴 너무 위험하잖음. 솔직히 방장한테 거기까지 가라고 하는 건, 너무 노양심이긴 해~ 이놈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뭔가 위화감이 든다. 처음에는 ‘성좌’라는 거창한 명칭 때문에 어떤 신적인 존재들인가 생각했었는데……. 말투만 놓고 보면 각성자 커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구인 플레이어들과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지. 그래서 성좌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하나는, 성좌들이 이 게임을 상당히 잘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직까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뭐, 아직 스트리밍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데, 늑대 한 마리가 킁킁거리며 내 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온다. 흠. 지금까진 어지간하면 전투를 다 피해 다녔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싸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안 싸우고 도망치려면 방향을 완전히 꺾어야 하는데, 그러면 오히려 목적지까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거든. 크르르-! 낮게 그르렁거리는 늑대를 향해 전투 자세를 잡자, 성좌들이 흥미롭다는 듯 한마디씩 채팅을 올린다. └ 오, 방장. 드디어 뭔가 보여주나? └ ㅋㅋ설마 여기서 털리는 건 아니겠지? └ 에이, 일반늑대 잡을 자신도 없으면서 설마 달늑 잡겠다고 미션 받았겠어? 그 내용을 곁눈질로 슬쩍 확인하며, 내 애병인 강철삽을 꺼내 쥐었다. 띠링-! [‘견고한 철제 삽’ 아이템을 장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무기가…… 성좌들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 ㅅㅂ? └ 삽 뭔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 ㅅㄲ 혹시 개그맨임? └ 의외성 ㅅㅌㅊ네 ㅋㅋㅋ 성좌들의 세계에도 개그맨이라는 직업은 있는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잠깐 하며, 철제 삽을 고쳐 쥐었다. 전투하는 모습을 처음 보여주려니, 괜히 긴장도 좀 된다. 우리 물주 형님들이 실망하시면 안 되는데……. 아우우우-! 그래서 비장한 마음으로,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매서운 삽질을 시작했다. 타다닷- 돌진하는 늑대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냄과 동시에, 철삽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녀석의 복부를 사선으로 긁어 올렸다. 촤아악-!! [그레이 울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레이 울프가 출혈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허공으로 도약한 뒤……. 고통으로 당황한 놈의 척추에 그대로 삽을 찔러 박으면. 우드득- 좋지 못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척추가 부러져버렸다. 끼이잉- 당연한 결과다. 난 그냥 삽으로 쑤신 게 아니라, 마치 땅에 삽을 박아넣듯 양발로 무게를 전부 실어 넣었으니까. [그레이 울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레이 울프의 움직임이 대폭 둔화됩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쓸데없이 방심하다가 한번 물리기라도 하면, 소중한 생명력이 꽤 날아갈 테니 말이다. 달그림자 늑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생명력은 아껴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틀거리는 녀석의 복부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이건 그냥 주먹질이 아니다. 그럼 뭐냐고?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그레이 울프가 기절 상태가 되었습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간장치기라는 말씀. 아마 지금쯤 녀석은, 숨쉬기조차 힘든 상태가 됐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면 된다. 빠각! [그레이 울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레이 울프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몬스터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무려 13레벨의 몬스터답게, 경험치가 상당히 달달하다. 필요 경험치가 꽤 많아진 9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 한번으로 무려 6퍼센트 가까이 경험치가 차오른다. 가는 길에 너댓 마리쯤 더 잡으면, 10레벨로 달그림자 늑대를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흠. 시간 단축하겠다고 무작정 늑대를 피하면 안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드랍 아이템을 루팅하는데……. └ ㅅㅂ? 아까 본 것 같은 기시감 드는 채팅이, 눈앞에 불쑥 튀어 올랐다. └ 삽 뭔데? 분명 토시 하나 틀리지 않는 같은 채팅인데, 의미는 좀 다른 느낌이다. └ 이 새끼 대체 뭐지……? └ 삽질 마스턴가? └ 아니면 저 삽 혹시 아티펙트 아님? └ 아니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하지만 성좌들이 무슨 반응을 하든, 일단 난 분주히 움직였다. 스트리밍은 스트리밍이고, 일단 할 일은 해야 할 것 아냐? [‘그레이 울프’ 사체의 ‘발골’을 시작합니다.] [시체의 상태가 양호하여, 발골 성공률이 상승합니다.] 기본 드랍에선 작은 송곳니 하나 드랍 됐을 뿐이지만, 발골은 확정적으로 그레이 울프의 가죽을 내게 제공한다. 그리고 이 가죽은 한 장에 무려 1LP! 세종대왕님을 길바닥에 방치 해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진행률 : 0%……1%…15%……100%!] [‘발골’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업하는 내 모습을 본 성좌님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 발골……? └ 이건 또 무슨 컨셉임? └ ㅅㅂㅋㅋㅋ 이 특성을 찍는 플레이어가 존재했다고? └ 첫 특성을 어떻게 비전투 특성으로 찍을 수가 있지……? 후우. 성좌들에 대한 평가를 정정해야겠다. 아무래도 이 아마추어 같은 성좌 놈들은…… 라이카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내 전투 신고식이, 성좌님들한테는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 같다. └ 우리 방장, 컨셉 한 번 확실하누ㅋㅋㅋ └ ㄹㅇㅋㅋ 삽 들고 전투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듯? └ 근데 ㅅㅂ 잘해서 더 웃김 ㅋㅋㅋ 하긴 철삽 무기술을 어디서 구경이나 했겠어. 건축가 클래스가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아마 나도 미치광이 요정이 아니었더라면, 건축가 클래스 같은 건 있는지조차 몰랐을걸? └ 그나저나 이 정도면 ㄹㅇ 달늑도 잡는 거 아님? └ 그래도 잡몹이랑 달늑을 비교하는 건 좀 그렇긴 한데……. 어쨌든 신이 나서 채팅하는 모습들을 보니, 뭔가 플레이할 맛이 더 사는 느낌이다. 만약 베타 서버 때도 구경하는 성좌들이 있었더라면…… 무한 루프가 조금은 덜 힘들었으려나? 가장 큰 고통이었던 외로움이 많이 극복됐을 것 같긴 하다. 그나저나……. └ 솔직히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판단이 잘 안되긴 해ㅋㅋ └ 저거 삽질 딜이 심상치 않아서, 기믹만 완벽히 공략하면 잡을 딜은 나올 듯? └ ㅅㅂㅋㅋ 달늑 사냥이 뭐라고 ㅈㄴ흥미진진하네 ㅋㅋㅋ 이놈들은 아직까지도 내 달늑 사냥의 성공 여부가 의심되나 보다. 이렇게까지 보여줬는데도 이 몸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니. 이건 좀 괘씸한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띠링-! 기습적으로 들어온 후원 알림에,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방랑하는 고블린’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아아……! 그저 빛! 괘씸한 건 나였고. 후우……. 선생님들, 제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던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성좌님들께 불경한 마음을 품다니……. 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요. └ 무튼 방장 파이팅ㅋㅋ 달늑까지 잡으면 내가 홍보도 좀 해줌요. -홍보라는 말씀은, 설마 다른 성좌님들께 제 채널을 홍보해주겠다는, 그런 말씀이신……?! └ ㅇㅇ 아무래도 고블린좌에게는 충성을 맹세해야 할 것 같다. 채널 홍보라니. 그 정도면 초보 헌터인 내게는 성좌의 은총이라 할 만한 수준의 은혜가 아닐까. ‘캬, 스트리밍 이거 안 켰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 의미에서 성좌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지루해하실 틈 없게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띠링-! [‘어스름 동굴’을 발견하였습니다.] [밤의 기운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뭔가 가면 갈수록, 뭔가 이 성좌라는 놈들의 밑천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 오 뭐야. 여기 이런 필드가 있었음? └ 던전은 아닌 것 같은데. └ 월계수 존으로 가는 지름길임 여기. └ ㅁㅊㅋㅋㅋ 방장 여기 어떻게 알고 온 거임? 아니, 어스름 동굴도 모른다고? 고블린좌는 아는 것 같긴 하지만……. 얘들, 성좌는 맞는 거지? -아니, 절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형님들? 뉴비라도 이 정돈 안다고요. └ ㅋㅋㅋ방장 가오 뭔데ㅋㅋ └ 허세 ㅈ되네 ㅋㅋㅋ 뭐, 상관없긴 하다. 사실 성좌는 후원만 잘해주면 되긴 하지 뭐. 그러니 일단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어스름 동굴에 들어온 건, 단순히 시간 단축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으니까. “오! 흑요석이다!” 이건 그러니까, 다음 스탭으로 나아가기 위한 빌드업이다. 성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달늑 잡는 미션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성공한 상태거든. 흐흐. 그러니 그 이후에 진행하게 될 던전 공략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띠링-! [‘방치된 흑요석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수량이 많아 보이는데? 잠깐 입가에 침 흐른 건 얼른 닦아버리고……. 띠링-! [‘흑요석 가루’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흑요석 가루’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부수입을 챙기고 있는데, 우리 성좌님들께서 또 궁금한 게 생기신 모양이다. └ 그건 뭔데 갑자기 줍고 있는 거임? 하, 이 성좌놈들. 진짜 게임 할 줄 모르네. 아, 아니지. 내가 또 무슨 불경한 생각을……. -잡화점 아저씨가 이거 모아오면 흑요석 반지로 바꿔준다던데요? 그러니까 조곤조곤 대답해줬다. 소중한 물주님들의 심기가 불편해져선 절대로 안 된다. └ 오, ㄹㅇ? └ 첨 알았네 ㄷㄷ └ 흑요석 반지 그거 2티어 반지였던가? └ 아마 대충 30LP쯤 팔리는 악세일 듯? 그나저나 이 흑요석 반지의 진짜 가치를 아는 놈이 셋 중에 하나도 없는 건가? 이게 그렇게 고급 정보는 아닐 것 같은데……. “흠흠.” 사실 이 흑요석 반지는 단순한 2티어 악세가 아니다. 괜히 빌드업 장비가 아니라는 말씀. 성능 자체는 평범하지만, 초반에 구할 수 있는 장비 중 유일하게 어둠내성을 옵션으로 가진 게 바로 이 녀석이다. 그래서 내 오늘 일과의 마지막 목표인 ‘달빛 정원 공략’에 꼭 필요한 아이템이기도 하다. 단순 30LP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얘기다. [‘흑요석 가루’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흑요석 가루’ 아이템을…….] ……후략…… 어쨌든 부지런히 줍다 보니, 어느새 어스름 동굴에 널려 있던 흑요석 가루를 싹 다 수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은 가루의 수량은 총 120개 정도. 운이 좀 좋았다. 이 정도 수량이 나오는 걸 보니, 최근에 아무도 흑요석 가루를 털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블린 형님께서 또 질문하셨다. └ 근데 왤케 많이 주움요? 반지 만드는 데 그거 몇 개나 필요한데요? -어… 200개요. └ 헐. 20개도 아니고 200개? 예. 그런데요. └ 그럼 개당 0.15LP쯤 되는 건가? 맞다. 그러니까 한 조각당… 실질적으로 천 오백 원이나 되는 셈이란 말이지. └ ㅅㅂㅋㅋㅋ 개당 0.1LP짜리를 그렇게 열심히 주웠던 거임? 아니, 0.1 아니고 0.15라니까? └ 미치겠다 ㅋㅋㅋ 파멸적인 알뜰함 뭔데 ㅋㅋ 뭐야. 분위기 또 왜 이래? 너넨 길에 천 원짜리 떨어져 있으면 안 주울 거야?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데……. └ 우리 방장 불쌍해ㅠㅠ 고블린 성님께서, 후원을 또 쏴주셨다. [‘방랑하는 고블린’님이 20LP를 후원하셨습니다.] 호올리 쉬에트. 인정합니다. 형님께선 길에 떨어진 천 원 정도는 주울 필요가 없는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형님! 크흑.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게요. └ 근데 나, 형님 아닌데……. 형님 의견은 중요치 않습니다. 제게는 무조건 형님이시거든요. 벌써 세 번이나 후원해 주셨는데, 어떻게 형님이 아니실 수가 있습니까? -어쨌든 감사함돠! 고블린좌의 후원은, 금액으로 따져도 이제 총 40LP나 된다. 미션금을 제외하면 이제 2황좌의 후원금액도 넘겨버렸다. 존경심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띠링-! [‘월계수 나무숲’을 발견하였습니다.]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여, 명성이 +1만큼 증가합니다.] [‘월계수 나무’의 영향으로, ‘달’의 기운이 충만해집니다.] [일부 몬스터들이 ‘달빛’을 받아, 강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드디어 목적지였던 ‘월계수 나무숲’에 도착하였다. └ 크, 진짜로 왔구나! └ 방장 아무리 봐도 ㅜㅜ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ㅠㅠ └ 내비둬~ 본인이 자신 있으시다잖아ㅋㅋㅋ └ 아ㅠㅠ 좀있으면 유즈레인 방송 킬 시간인데, 이거 궁금해서 다른데 못가겠네 ㅋㅋ 하늘에 24시간 달이 떠 있는, 영원히 낮이 오지 않는 특수한 필드인 월계수 나무숲. 내려앉은 월광으로 인해 생긴 몽환적인 자청빛의 빛무리가 숲 곳곳에 반짝였고. 그 아름다운 풍경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우우우-!!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느껴지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그림자 늑대!’ 소리가 울려 퍼진 방향을 반사적으로 바라보자, 멀찍이 은빛 갈기를 가진 커다란 늑대의 실루엣이 눈에 보인다. 무조건 한 마리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필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발견하다니……. “후후.”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 * * 올해로 헌터 7년 차인 백하람은, 아직 전직조차 하지 않은 20레벨의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7년 동안이나 20레벨에서 머물러있는 이유가, 재능이 없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맡은 업무의 특성상, 20레벨을 넘길 수 없을 뿐이었다. “자, 여러분. 이쪽입니다. 여기를 지나면 ‘월계수 나무숲’이니까,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백하람의 소속은 바로, 한국 3대 길드인 실버나이츠의 인사팀. 그 안에서도 하람의 업무는 헌터 지망생들의 기본교육이었는데, 그 교육이 이뤄지는 장소가 ‘시작의 섬’이다 보니 20레벨을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전직을 하고 2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는, 다시 이 시작의 숲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월계수 나무숲이 특별히 위험한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여긴 항상 달빛이 내리는 필드니까요.” “‘달그림자 늑대’의 고유능력 때문에 위험한 거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달그림자 늑대는…… 일반 필드에서보다 훨씬 더 흉포하죠.” 하지만 그러한 제약에도 백하람은 딱히 불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실버나이츠 소속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헌터로서 레벨업을 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단지 자신의 재능이 이쪽에 더 가까웠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하람이 맡은 일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터였다. -조약돌 사이에 숨어있는 진주 같은 재능을 발견하는 눈. -그것이 자네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라네. 그가 가장 존경하는 헌터. 실버나이츠의 길드 마스터이자 한국 유일의 10대 랭커 이현무의 평가였으니, 분명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더 흉포한 만큼, 이곳에 서식하는 달그림자 늑대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 있습니다.” “월광의 징표!” “바로 그렇습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헌터 꿈나무들을 향해, 하람은 빙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템의 보유가 ‘기사단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한 최소 조건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기사단 선발전이란, 실버나이츠의 입단 테스트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입단 테스트의 최소 참가자격이 바로, ‘월광의 징표’를 보유하는 것. 월광의 징표는 계정귀속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양도받는 게 불가능하였고. 때문에 이 월광의 징표를 가졌다는 뜻은, 20레벨 전 시작의 숲에서 ‘달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는 증거다. “월광의 징표는 무조건 드랍 되지만, 오직 솔로 플레이 레이드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히든피스입니다.” “……!” “그러니 버스를 타거나 하는 편법으로 이 징표를 소유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에픽 몬스터인 달그림자 늑대는, 기본적으로 파티 공략이 원칙인 정예 몬스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달그림자 늑대의 레벨이 15레벨이라 하더라도, 20레벨 이전에 솔로 플레이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인 것. 잠시 뜸을 들인 백하람이,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때문에 여러분께서 저희 실버나이츠 입단을 목표로 삼으셨다면, 이 시작의 숲 안에서 꽤 오랜 시간 재능을 갈고 닦으셔야만 할 겁니다. 일단 20레벨에 도달해야만 하는 건 당연하고……. 솔로 레이드에 성공할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하며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테죠.” 하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월광의 징표를 들어 올렸다. “참고로 전……. 이 징표를 처음 얻는 데까지 한 달 정도가 걸렸던 것 같군요.” 하람의 이야기에 좌중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사실 한 달이라면 20레벨을 달성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짧은 기간인데……. 그 기간 내에 월광의 징표 파밍까지 성공해 냈다니. 오랜 기간 시작의 섬에 남아있는 플레이어라고 하여 내심 하람을 얕보던 지망생들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저 사람도 대단한 재능충이었잖아?’ ‘와, 역시 실버나이츠인가?’ ‘확실히……. 쉽지 않겠는데?’ 그런데 좌중이 놀라는 사이, 궁금증이 생긴 누군가가 하람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혹시 실버나이츠의 랭커분들 중에는, 보름 안으로 이 과제를 성공한 분도 계실까요?” 한 남자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하람의 입으로 모였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실버나이츠 입단을 꿈꿀 만큼 재능있고 열정 있는 지망생들. 그런 이들로서는 당연히 궁금할 법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재밌는 질문이군요.” 그리고 곧, 하람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단장님들께서 과거에 이 과제를 수행하셨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공식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지난 7년간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본 적도 없고요.” 이어서 하람은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뒤에 덧붙이려던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말이다. ‘그런 기록은 사실 불가능이나 다름없지. 보름이라면 랭커 급 재능이라 해도 15레벨 정도나 달성했을 시간대인데…… 그 타이밍에 달늑 솔플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리가.’ 그런데 하람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바로 그 때. 아우우우-!! 멀리서 달그림자 늑대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라이카의 세계관 안에서 에픽 몬스터란, ‘정예 몬스터’ 혹은 ‘고유 몬스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강력한 몬스터다. 물론 보스급 몬스터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 특히 이 에픽 몬스터들은 고유한 스킬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2~3인 이상의 플레이어가 파티를 맺고 공략하는 게 보통이다. 기믹을 파훼하여 스킬을 봉쇄하는 데, 최소 1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니까. 물론 충분한 스펙이 뒷받침될 경우에는 솔로 플레이도 가능했지만……. 철컥- └ 방장 삽 꺼냈는데?ㅋㅋㅋ └ 뭐야. 바로 싸우는 거임? 누더기 수준의 장비를 걸치고 있는 9레벨의 데이브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될 리는 당연히 없는 것이었다. 아우우우-!! 그러니 성좌들은 시작부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방……장아? 파티 안 구해? └ 아니, 이걸 그냥 들이박는다고? 19레벨도 아니고 9레벨이? 심지어 미션을 건 성좌인 ‘망나니 2황좌’ 까지도 말이다. └ 방장놈;;; 귀환 스크롤은 있는 거겠지? 아무리 방장을 골탕 먹이기 위해 걸어둔 미션이라고 해도, 파티조차 안 하고 들이받는 전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 방장 에픽몹 처음인가본데? └ 당연히 처음이겠지 ㅅㅂ 9레벨이라잖아;; └ 처음인 게 문제가 아님ㅋㅋㅋ 보통은 처음이면 저렇게 노빠꾸로 머리박지 않는다곸ㅋㅋ 그러니까 성좌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잠시 후면 저 순진한 플레이어 녀석은……. 달그림자 늑대의 스킬에 격중당해 빈사 상태가 된 채로 화들짝 놀라 귀환 스크롤을 찢을 것이라고 말이다. └ 오오 늑돌이 온다아아! 키르르르릉-! └ 캬, 15렙 에픽 주제에 살기 보소. 하지만 성좌들이 어떤 호들갑을 떨던, 데이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타탓-! 달그림자 늑대를 향해 입맛을 다시며(?) 뛰어들 뿐이었다. * * * [‘달 그림자 늑대’와 조우하였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달그림자 늑대의 고유 능력인 ‘월광쇄도’를 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빈사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그러니 달그림자 늑대를 잡기 위해서는, 기믹 자체를 파훼해 아예 고유능력 발동을 막아버리는 게 가장 쉬운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달 그림자 늑대’가 ‘하울링’을 시전합니다.] [어둠 사이로 달빛이 내립니다.] 월광쇄도의 발동 조건인 하울링. 저걸 하지 못하게 막는 게, 달그림자 늑대 공략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3회차 이후로는 그렇게 상대해본 적이 없는걸.’ 달그림자 늑대를 최소 수천 마리 잡아본 내겐,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왜냐고? 다 피하면 그만이니까. 뭐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피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스텟만 놓고 따지자면, 지금의 나보다 당연히 달그림자의 스텟이 훨씬 높을 테니까. 그러니 그걸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달그림자 늑대의 공격패턴 상, 월광쇄도가 닿을 수 없는 위치를 미리미리 선점하면 된다. 타탓-! 바로 이렇게. [‘달 그림자 늑대’가 ‘월광쇄도’를 시전합니다.] 달그림자 늑대를 만 번쯤 잡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익히게 되는 패턴이 있다. 그걸 딱히 머리로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몸이 그때마다 알아서 반응할 뿐이다. └ 뭐지? 월광쇄도를 피했다고? └ 9레벨이? └ 뽀록인 것 같은데. 달그림자 늑대가 월광쇄도를 시전할 때는 항상 준비동작이 존재하는데, 그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사각지대를 찾아낼 수 있는 경지가 됐다. 무재능 용사 지망생이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노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크르르릉-! 그리고 이게 가능해진 시점에서는, 월광쇄도가 발동되는 시점이 오히려 가장 딜을 넣기 좋은 타이밍이다. 달그림자 늑대는 달빛을 타고 쇄도하는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말씀. 타이밍 맞춰 찔러 올린 삽날이, 달그림자 늑대의 목덜미를 정확히 노리며 파고든다. 촤아악-! 사실 내가 가진 공격력으로는 녀석의 가죽을 단번에 뚫어내는 게 불가능에 가깝지만. 월광쇄도로 인해 무방비 상태가 된 데다 역방향으로 빠르게 관성이 붙어버린 상황에서는……. 푸욱- 작은 힘으로도 폭발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카운터 어택. 상대의 속도와 힘을 역이용해 피해를 입히는 이러한 공격 방식을, 라이카에서는 ‘카운터 어택’이라고 부른다. 키에엑-! 갑자기 느껴진 엄청난 고통에, 늑대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당황했겠지. 만약 내 무기가 허접한 철삽이 아니라 2티어 상급 장비였다면, 단번에 녀석을 빈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을 정도로 완벽한 카운터 어택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조금은 놀랐다. 노린 건 맞긴 한데,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들어갈 줄이야. 카운터가 원래 이렇게 쉬운 거였나? └ 와, 방장 뭐임? └ 이것도 뽀록……? └ 의도한 거면 지렸는데? 제법 고통스러운지 이빨을 더욱 크게 드러낸 녀석이, 이번엔 반대로 내 목덜미를 노리며 사납게 뛰어든다. 아우우-! 이제부터가 오히려 더 긴장해야 되는 시점이다. 패턴화되지 않은 난전 속에서 녀석을 상대하는 게, 내 입장에선 더 어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못 할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쐐액-!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타탓- 피할 수 없는 건 막으면 되지 뭐. 까앙-! 결국 정신만 완벽하게 집중하면, 방법은 다 있단 말씀? 까가강-! 마치 금속이 부대껴야 날 법한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삽과 녀석의 발톱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소리다. 삽등으로 시도한 패링이 깔끔하게 성공했다는 증거다. [‘달 그림자 늑대’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합니다.] [피해량이 99%만큼 감소합니다.] 그나저나 99%면 거의 퍼펙트 패링에 근접한 수치잖아? 이것도 원래 진짜 어려운 건데……. 깡- 깡- 까강! 휘두르는 앞발을 연속해서 막아낸 뒤, 그대로 녀석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어서 몸을 회전시키며 철삽의 손잡이로 녀석의 복부를 가격한 뒤……. 퍼억- 몸을 회전시키던 힘을 그대로 실어, 다시 한번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 삽날을 빠르게 그어 올렸다. 촤라악-! 처음부터 내가 노렸던 위치가 바로 여기였다. [‘달 그림자 늑대’의 약점을 성공적으로 공략했습니다.] [방어력을 55%만큼 무시합니다.] [위력이 78%만큼 증가합니다.] 치명상을 입은 부위는 그 자체로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는 게 당연했고. 여길 정확히 공격하는 것만큼, 강력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크르르르-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가 벌써 30% 이상 갈려 나간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효과는 정말 확실하다. └ 미쳤다 ㅅㅂ;;; └ 방금 뭘 한 거야? └ 패링 봤음? └ 아니 패링도 지리긴 했는데, 딜은 대체 어떻게 넣은 거임? └ ㄹㅇㅋㅋㅋ대체 뭔 짓을 했는데 피가 저만큼 깎여? └ 삽에 방관 옵션 달린 거 아님? 놀라는 성좌들의 반응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귀여운 녀석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데……. 까앙-! 촤아악-! 아쉽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만큼 나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아우우우우-! 눈이 완전히 돌아버린 늑대 녀석이, 또다시 하울링을 시전했으니 말이다. [‘달 그림자 늑대’가 ‘하울링’을 시전합니다.] 녀석이 두 번째 월광쇄도를 준비한다는 얘기다. [어둠 사이로 달빛이 내립니다.] 만약 여기서 타이밍을 놓쳐 두 번째 월광쇄도를 허용해 버린다면, 지금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귀환 스크롤을 찢는 것 말고 답이 없다. 그러니 집중했다. [‘달 그림자 늑대’가 ‘월광쇄도’를 시전합니다.] 그리고 단 한 걸음. 탓-! 월광쇄도를 피해내는 데에는, 그 간결한 움직임이면 충분했다. 쐐애애액-! 월광쇄도는 시전 중간에 궤도를 틀어 바꿀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 와, 뭐야. 또 피했는데? 그리고 이제는 내가 녀석을 응징해 줄 차례였다. 원래 큰 기술을 실패했을 땐, 그만큼 커다란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거든. 빠각-! 내 삽등이 녀석의 후두부를 가격하면서 꽤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공격은, 녀석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내 철삽은 촌장이 주는 기본 장비들보다도 공격력이 낮은 무기였고, 때문에 이런 평범한 공격만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 또한 녀석의 약점을 노리기 위한 빌드업이었을 뿐이라는 소리. “후욱.” 내리쳤던 삽을 다시 반대로 돌려, 철삽의 손잡이로 녀석의 턱주가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터엉-! 그러자 자연스레 턱이 들려 녀석의 상처 입은 목덜미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에 또 한 번, 자비 없이 삽날을 박아 넣었다. 푸욱-! 이번에는 방어력을 무려 70%도 넘게 무시했다. 아까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혔다는 얘기다. 크르르륵-! 녀석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페이즈. 이제 조금만 더 집중하면 될 것 같다. [‘달 그림자 늑대’의 생명력이 3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달 그림자 늑대’의 고유능력, ‘핏빛 분노’가 활성화됩니다.] 이 마지막 페이즈의 포인트는, 녀석이 핏빛 분노를 ‘발동’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상대방의 피를 보는 순간 흡혈 능력이 생김과 동시에, 속도가 1.5배 가량 빨라지는 고유능력. 맹수형 에픽 몬스터들이 종종 가지는 능력인데, 이걸 허용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흡혈 때문에 장기전으로 질질 끌릴 확률이 높은 데다, 빨라진 속도 때문에 기믹 난이도가 배가되니까. 스펙에서 크게 밀리는 나로서는 피해야만 하는 상황. 그런데 어떻게 못 쓰게 하냐고? 휘릭- 내가 데미지를 안 입으면 된다. 안 맞으면 된다는 소리다. 까앙- 촤아아악-! 전투 템포가 점점 더 고조되자, 성좌들의 채팅이 빠르게 이어진다. └ 뭔데;;; 9레벨이 진짜로 달늑을 솔플한다고? └ ㅁㅊㄷㅁㅊㅇ └ ;;;;;; 이러다가 진짜로 잡겠는데? ;;;;;;;;; └ 방장, 그 삽 대체 뭐임? └ 저거 아티펙트 맞다니까? 정신없이 전투하는 사이 시청자가 늘어난 것도 같았지만, 일단 달늑 녀석의 숨통은 끊어놓고 확인하기로 했다. 끄드득-!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내 팔뚝을 물려던 녀석의 입에 철삽을 대신 때려 넣은 뒤. 허리춤에서 꺼낸 단검을 역수로 쥐어들고, 그대로 늑대의 목덜미에 가차 없이 쑤셔 넣었다. 푹- 푹- 촤악-! 그리고 내 마지막 공격은, 녀석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데 성공하였다. [‘달 그림자 늑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달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물 흐르듯 깔끔했던 전투. ‘크……! 지렸다.’ 내 스펙으로 이거보다 완벽한 레이드를 보여줄 순 없을 것 같았다. └ 와…… 진짜로 잡았네. └ 캬ㅑㅑ 전투 맛있다ㄷㄷ └ 이게 삽질 마스터?ㄷㄷㄷ 못 잡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깔끔하고 완벽하게 잡을 수 있을 줄도 몰랐다. 카운터 어택부터 시작해서 퍼팩트 패링까지. 스펙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에픽을 상대로 이 정도의 퍼포먼스를 성공시키다니. 확실히 베타 버전을 플레이할 때보다 전투가 생각대로 풀리는 느낌이다. 나 진짜 뭔가…… 정식 서버로 넘어오면서 각성이라도 한 건가? 그건 그렇고…….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0레벨이 되었습니다.] 정식 서버 입성 후 첫 에픽 몬스터 사냥이라 그런지 도파민이 상당하다. 확실히 에픽이 손맛은 있단 말이지. [능력치 2배 이상의 에픽 몬스터 솔로 플레이에 성공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거인 학살자’칭호의 등급이 성장하였습니다.] [영웅 -> 전설] [‘거인 학살자’칭호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기대했던 보상들이 주르륵 떠오르는 걸 보자, 흡족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린다. 추가적인 칭호 날먹에, 짭짤한 잡템 보상들까지. [‘달그림자 송곳니’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은빛 늑대 가죽’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월광의 징표’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잡템 ‘월광의 징표’까지 떨구는 걸 보니, 역시 이 늑돌이는, 내가 알던 그 달그림자 늑대가 맞았다. └ 와;;; ㅅㅂ;;; 달늑 너프 먹은거 아니지?ㅅㅂ └ 라이카에 너프가 어딧음ㅋㅋㅋ └ 방장 이 ㅅㄲ 뉴비 맞음? 전투에서 썩은내가 진동하는데;;ㄷㄷㄷ └ 삽 퍼포먼스 돌았네;; 흐흐. 보면서 감탄해주는 성좌들까지 있으니 만족감도 두 배다. 이제 발골 특성으로 LP복사 함 때려 주고, 미션 보상까지 수금하면……. 오늘 하루, 아주 완벽한 시작인걸? 그런데 이렇게 행복에 겨워 몸부림치고 있던 그때.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우웅-! 정말 단 한 톨의 기대조차 없었는데……. 달그림자 늑대의 사체에서, 갑자기 빛줄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 오 뭐야, 잠깐. └ 불기둥 on. 1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실버나이츠의 헌터 백하람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달그림자 늑대를…… 이런 식으로 솔플하는 게 가능하다니.’ 사실 이 광경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원래 오늘은 딱히 달그림자 늑대를 공략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저 입단 지망생들에게 달그림자 늑대의 모습만 한 번 보여주고, 베레쉬트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여기까지가 분명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마침 누군가가 달그림자 늑대 솔플을 시작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우와, 저 분 지금 솔플하려는 거 맞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조금만 보고 가도 될까요 헌터님?” “으음… 좋은 교보재가 되긴 할 테니,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 조금만 떨어져서 지켜보도록 하죠.” 게다가 남자의 장비는 상당히 남루해 보였다. 요상하게 생긴 무기(?)는 뭔지 알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방어구는 흔하디흔한 1티어 장비들로 보였으니까. 실력이 얼마나 좋은 플레이어인지 모르겠지만, 7년째 시작의 섬에 있는 자신이라 해도 저 장비로는 달늑 사냥을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하람은, 만약 남자가 위험해질 기색이 보이면 도와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헌터는 국가의 방패’라는 문구는 언제나 실버나이츠가 움직이는 명분이었고.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플레이어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크르르르-! 타앗! “우, 우와. 대박이다.” “방금 늑대 스킬 뭐예요 헌터님?” “월…광쇄도인 것 같군요.” “월광쇄도, 피할 수 없는 거 아니었어요?”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때, 이어진 광경은 하람의 예상과 완전 다른 그림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전투방식인가?’ 봉쇄조차 하지 않은 월광쇄도를 생으로 피하면서, 완벽한 카운터 어택을 꽂아 넣는다. 마구잡이로 쇄도하는 늑대의 앞발 난타를 전부 다 패링으로 쳐내면서, 물 흐르듯 완벽한 움직임으로 달그림자 늑대를 농락한다. ‘미쳤군.’ 하람 자신이라면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만약 길드 최상위의 엘리트 헌터들이라면? 그들이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역시나 확신은 어렵다. 정확히는 20레벨 시절의 그들이었다 하더라도,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을 것 같단 얘기다. ‘이게 진짜 재능인가?’ 그러니까 뉴비 시절에 저 정도의 충격적인 재능을 보여주려면, 실버나이츠에서도 단장급은 되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괴물들의 뉴비 시절을 하람이 감히 상상하여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 정도의 충격이라는 얘기다. “와… 헌터님. 저 정도 실력자가 흔한 건 아니죠?” 그래서 지망생 중 하나의 질문에, 하람은 솔직히 대답했다. “저로서도 불가능합니다.” 이건 자격지심이 들지조차 않을 만큼, 대단한 재능이었으니까. “……!” 그리고 지금 이 시점. 오히려 하람의 가슴 속에는 길드에 대한 자부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냐고? ‘올해 기사단 선발전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겠어.’ 이런 뛰어난 실력자도 실버나이츠 입단 테스트를 준비(?)한다는 사실이, 충직한 길드원인 하람으로서는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던 것이다. ‘조만간 신입 길드원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실버나이츠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다. 헌터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세계적인 길드. 그리고 월광의 징표가 선발전 참가 자격이라는 사실은, 대중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저 정도 실력자가 굳이 영양가 없는 달늑 솔플을 수행한다는 건, 무조건 실버나이츠 입단을 준비한다는 얘기! 적어도 하람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선에서 떠올린 몇 가지 명제가, 사실은 틀렸다는 걸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가령 남자의 레벨이 20이 아닌 9레벨이었다던가, 10년쯤 이세계에 다녀온 탓에 실버나이츠가 뭔지도 모른다던가 하는. 그런 상식을 벗어나는 진실들은, 범부라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와! 벌써 잡다니.” “월광의 징표 얻었겠죠?” “부럽다…….” 그래서 하람은 먼발치서 남자를 잠시 응시한 뒤, 어느새 흐뭇한 표정이 되어 걸음을 돌렸다. “자, 여러분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물론입니다, 교관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귀환합시다. 훈련해야겠죠?” 베레쉬트로 향하는 하람의 걸음은, 꽤나 가벼워져 있었다. * * * 찬란하다. 그리고 영롱하다. 달그림자 늑대의 위로 솟아오른 은은한 청금색의 빛줄기. 그걸 보는 내 심장박동은 점점 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 와씨 방장 운 뭐임? └ 캬ㅋㅋ 시작의 섬에서 불기둥을 보다니ㅋㅋ 사체에서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건, 유일등급 이상의 장비 아이템이 드랍될 때만 볼 수 있는 현상이거든. 게다가 달늑 드랍 테이블 안에 존재하는 유일등급 장비는 오직 한 가지. └ 달늑이 드랍하는 유일템이면 월광검밖에 없는데 ㄷㄷ └ ㅇㅇ저거 백퍼 월광검임 성좌들 말처럼 이건 분명 월광검이었다. 유일등급인데다 무려 3티어 장검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물건의 가치는……. └ 근데 어차피 방장이 들고 있는 삽이 더 좋은 거 아님? └ ㅇㅇ 아마 그럴 듯? 저거 무조건 아티펙트라니까? 성좌들의 헛소리와 달리, 내 철제 삽보다 최소 100배 이상 비싼 수준이었다. [‘월광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미…… 미쳤다!!!’ 그러니까 내 심장이 지금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 건 너무 당연했다. 2황좌의 미션 보상에 더해 월광검까지 쌀먹한다면, 오늘 거의 500만 원을 벌지도 몰랐으니까. 솔직히 2일 차에 이런 거금을 만지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러다가 금방 부자 되는 거 아냐?’ 그래서 두근대는 마음으로 아이템 정보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양쪽 입꼬리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씰룩거리는 중이었다. 〓〓〓〓〓〓〓〓〓〓〓〓〓〓 월광검 분류 : 장비 - 장검 레벨 제한 : 없음 등급 : 유일 티어 : 3T 내구도 : 90 / 90 주 능력치 공격력 +45 - 옵션 어둠속성 공격력 +25 치명타 확률 +10% ……중략…… 캬, 공격력 45? 메인 스텟 최상옵에… 치확도 맥스! 여기까지만 봐도 황홀한데, 심지어 정보창이 두 번째 페이지까지 있다. 그리고 2페가 존재한다는 건, 고유능력이 붙었다는 소리. 고유능력은 유일등급 장비부터 붙는 패시브 스킬 같은 건데, 확률이 30%밖에 안 된다. 크……! 이게 행복이지! 딸깍- 그런데 잠깐.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고유능력의 이름이… 뭔가 이상하다. - 고유효과 * 영혼귀속 영혼귀속…… 이라고? 내가 아는 그… 그 영혼귀속은 아니겠지? 플레이어와 영혼이 연결된 장비입니다. 혹시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모든 일반공격의 위력이 30%만큼 증가하며, 레벨 제한이 사라집니다. 또한 내구도 하락률이 대폭 감소합니다. ……중략……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설명까지 완벽하게 내가 아는 그 영혼귀속 고유능력이다.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두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방장 갑자기 조용해졌네. └ 득템으로 충격먹었나본데? 충격? 방금 제대로 먹긴 했다. 가정조차 해본 적 없었던 최악의 문제가 발생했거든. 너무 허접한 고유능력이 붙어서 문제냐고? 그럴 리가. 아무리 허접한 고유능력이 붙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은 없었을 거다. 게다가 영혼귀속은 스펙만 놓고 보면 상급의 고유능력. 하지만 이게 붙는 순간… 필연적으로 딸려 오는 한 가지 패널티가 가장 큰 문제였다. 내 동공이 풀려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 설명 달빛으로 벼려진 장검입니다.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습니다.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 ‘하필이면 그 많은 고유능력 중에서, 이게 뜬다고?’ 아무리 부정해봐도 당연히 달라지지 않는 현실. 나라 잃은 쌀먹용사 이건율은, 그대로 무릎 꿇고 말았다. * * * 깔끔한 에픽 레이드에 감명받았는지, 잔뜩 흥분한 성좌들은 계속해서 칭찬을 쏟아내고 있었다. └ 이야, 데이브형 ㅇㅈㅇㅈ. 100LP? 이 정도 보여줬으면 아깝지 않지. └ 데이브? ㄴㄴ ‘대’이브임. └ 이친구 진짜 좀 치는데? 하지만 나라 잃은 쌀먹용사는,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망나니 2황좌’님의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LP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명성이 +1만큼 증가합니다.] 미션 보상까지 확실하게 수금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 근데 방장 왤케 울상임? └ 월광검까지 떴는데 개꿀 아닌가? 왜냐고? 그래봐야 내 전 재산은 아직 200LP를 넘을 수 없었으니까. [현재 잔여 LP : 185LP] 방금 난 380LP를 잃어버렸으니……. [‘월광검’ 아이템의 금주 평균 거래 가격을 열람합니다.] [평균 거래 가격 : 382LP] 내 전 재산의 두 배도 넘는 거액을 잃어버린 셈이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그러니 어찌 쌀먹용사의 멘탈이 멀쩡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 월광검이 계정귀속이라고? └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인벤토리에 떡하니 있는데 그게 어떻게 잃어버린 거냐고 묻는다면, 쌀먹 감수성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다. └ 백번 양보해서 계정귀속이 문제라고 치자. └ 그래도 어차피 없던 게 생긴 거 아님? 그게 어떻게 잃어버린 게 되는 건데? 비겁하게 자꾸 팩트를 얘기하는데, 그래도 슬픈 걸 어떡하라고! 이 공감 능력 부족한 성좌 놈들은 주식 한번 안 해본 게 분명하다. 원래 손실은, 원금이 아니라 계좌의 고점을 기준으로 체감하는 법이거늘. └ 미친놈인가……?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장비 옵션을 다시 읽어봐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낮은 확률의 행운과 낮은 확률의 불운이 동시에 겹칠 수가 있단 말인가! └ 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 방장앜ㅋㅋ 컨셉인거지? └ 아닠ㅋㅋㅋ 표정 썩은 게 진짜로 계정귀속 때문이었다고? └ 영혼귀속 나름 상위티어 고유능력인뎈ㅋㅋ 사실 라이카에서 계정귀속 장비는 흔하지 않다. 왜냐고? 계정귀속 자체가, 장비에 희귀한 고유능력이 붙었을 때만 생기는 옵션이었으니 말이다. 고유능력은 유일등급 이상의 장비에만 확률적으로 붙어 나오는 효과였는데……. 일단 30% 정도 되는 고유능력이 붙을 확률을 뚫고. 그다음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고유능력 중에서도 ‘하필’ 계정귀속 관련 능력이 붙어야, 그제야 귀속 장비가 되는 것이었으니……. ‘보통은 고유 장비 200번쯤 주우면 한 번 정도 나오려나?’ 흔하게 존재할 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하필 내 월광검에 걸려버렸다. 이건 당첨된 로또 용지를 도둑맞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의 슬픈 스토리를 이제야 전부 이해한 성좌들이 본격적으로 낄낄대기 시작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하긴ㅋㅋㅋㅋㅋ 0.1LP짜리 폐지 줍던 친군뎈ㅋㅋ 380LP면 어마어마하긴 햌ㅋㅋ └ 와 ㅋㅋㅋ 컨셉도 이 정도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건데 ㅋㅋ 컨셉 아닌데요 형님. └ 어쨌든 재밌으니까 합겨억ㅋㅋㅋㅋㅋ └ 님들 속지 마셈. 저 ㅅㄲ 부자일 거임. 일단 삽부터가 무조건 아티펙트라니까? 어차피 저 삽 쓸건데 월광검이야 당연히 팔아먹고 싶겠지. 뭐……라고? 이 아무것도 모르는 성좌 샛기가……! “후우.” 억울해서 결국 참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내가 어떤 싸움을 하는 중인지 보여줘야 할 것만 같다. 그러니까 성좌들의 눈앞에, 내 삽의 정보창을 띄워줘야겠다는 얘기다. 저, 이런 사람입니다만? 〓〓〓〓〓〓〓〓〓〓〓〓〓〓 견고한 철제 삽 분류 : 장비 - 농기구 레벨 제한 : 1 등급 : 일반 티어 : 1T 내구도 : 35 / 35 주 능력치 공격력 +5 땅을 팔 때 유용한 견고한 삽입니다. 단단합니다. 〓〓〓〓〓〓〓〓〓〓〓〓〓〓 그리고 정보창 공유의 효과는 굉장했다. 미친 듯이 낄낄대던 성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조용해졌으니 말이다. └ ……? └ 뭔데? 이게 진짜 ‘그 삽’의 정보창임? └ 어…… 이거 들고 달늑 잡은 거라고요? └ 이거 진짜에요? └ 공격력 5? └ 이거 ㅈㅉㅇㅇ???? └ 단단합니닼ㅋㅋ ㅇㅈㄹ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적잖이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럴 만하지. 나조차도 이런 거 들고, 이렇게 순식간에 달늑을 잡을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 전직도 안한 뉴비가 어떻게 프로모션 받았나 했더니……. ㅅㅂ이거 물건이었잖어? 그런데……. 다음 순간 내 눈앞에, 두 눈을 의심할만한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방랑하는 고블린’님이 70LP를 후원하셨습니다.] [‘망나니 2황좌’님이 50LP를 후원하셨습니다.] “헉.” 달늑을 기깔나게 잡았을 때도 울리지 않던 후원 알림음이, 갑자기 뿅뿅거리며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이제 갓 유입된, 새로운 성좌들까지도 후원에 가세했다. [‘3회차 무림고수’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견습마법사 메오’님이 25L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래봐야 아직 한 줌밖에 안 되는 시청자들의 후원이었지만. [ON Air : ☺ 9] 하꼬 스트리머인 내겐, 문화충격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냉법 파티구함’님이 33LP를 후원하셨습니다.] [‘간지훈이’님이 17LP를 후원하셨습니다.] 어…….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거지? 내 아픔에 드디어 다들 ‘공감’해버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띠링-! 이제껏 단 한 푼도 후원하지 않던 그레이프 백작님의 후원 메시지를 본 순간, 난 그대로 도게자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프 백작’님이 5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500만원? 이걸 진짜로 그냥 주신다굽쇼? “혀, 형님!!” 1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나도 모르게 잔여 LP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바지에 살짝 지릴 뻔했다. [현재 잔여 LP : 882LP] 미친. 대체 이게 다 얼마야? 어쩌면 내 재능은, 용사가 아니라 스트리밍에 있었던 게 아닐까? └ 방장, 손실 복ㅋㅋ구ㅋㅋㅋ 해줬다? ㅇㅈ? 인정입니다, 형님. 이 정도까지 제 아픔에 공감해주실 줄은……! └ 캬ㅋㅋㅋ500LP? └ 근데 솔직히 이 정도 재능충이면 ‘투자’해볼 만해. └ ㅇㅈ 나도 담 달엔 여기 투자해볼까? 그런데 투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후원한 스트리머가 잘 크면 성좌들한테도 뭐 있는 건가?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 ■■■■가 ■■되면 ■■받으니까? └ 확실히 ■■■면 개꿀이긴 하지. 궁금했는데, 필터가 걸려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뭔가 있긴 한 것 같지만……. 뭐, 나한텐 다른 게(?) 더 중요하니까. 가령 LP라던가. 그러니까 일단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된다. 난 지금 행복하다. └ 그나저나 와 ㅋㅋㅋ 진짜 상상도 못했네. 공격력 5짜리 삽은 ㅅㅂㅋㅋㅋ └ 데이브는 전설이다. └ 데이브 ㄴㄴ ‘대’이브라니까? 성좌님들의 주접이 살짝 부담스럽긴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 근데 방장 잠재력 등급은 뭐임? └ 나도 궁금하네. └ 이 ㅅㄲ 잠재 S인 거 아님? └ 이정도면 S는 무조건 넘을듯? 측정 안 해봤는데요. 그리고 내 잠재가 S일 리가. 내 재능은 관리자 요정 인증 폐급인걸? └ ㅅㅂㅋㅋㅋ 딴 놈이었으면 백퍼 구라치는 건데, 이놈은 진짜로 측정 안 했을 거 같기도 해. 어허, 속고만 사셨나. └ 측정해볼 생각 없음? ㅈㄴ 궁금한데. 싫습니다. 저 상처받기 싫어요. 성좌들이 개쩐다며 주접을 떨고 있긴 하지만……. 나 이건율, 자기객관화가 아주 철저한 사람이다. 내가 지금 좀 치는 건 재능이 쩔어서가 아니라… 플레이 타임이 못해도 남들의 1만 배쯤 되기 때문이거든. └ 그래 ㅅㅂㅋㅋ 컨셉 존중한다. 컨셉 아니라니까 그러네. 후우. 그나저나 금융치료를 받아서 그런지, 성좌들과 대화하는 것도 점점 더 재밌어진다. 그래서일까? 소통하는 사이, 시청자들도 야금야금 늘어났다. [ON Air : ☺ 17] 무려 두 자릿수를 넘어 곧 20명을 바라보는 숫자를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게 그… 물이 들어온다는 그런 상황인가? 그렇다면 노를 저어야겠지? └ 그나저나 이제 뭐 할거임 방장? └ 손실 복구도 해줬으니까, 더 재밌는 거 보여줘야겠지? 물론입니다, 형님들. 헤헤… 그런 의미에서 미션 한 번 또 주시면……. └ 미션? └ 돈미새 on ㅋㅋㅋ 사실 아까부터 타이밍만 보고 있긴 했다. 다음 스텝을 밟기 전에, 미션을 꼭 받아야만 한다는 촉이 왔거든. 이게 꼭 미션의 달달함을 맛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방송각을 위해서라도 미션이 꼭 필요하다는 걸 직감으로 이해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레이프 백작 형님께서 달늑 잡으면 미션 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었으니……. 이 정돈 충분히 트라이해 볼 만했다고 생각한다. 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미 500LP나 쾌척하셨는데, 설마 언짢으신 건 아니겠지? 갑자기 소심해진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 그레이프 백작형님께서,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셨다. └ 그럼 가볍게 시동 한 번 걸어볼까? 역시 형님이십니다. 보통 분이 아닌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요! 띠링-! [‘그레이프 백작’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미션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이러다 심장에 무리 오는 거 아니겠지? [미션 정보를 확인합니다.] 미션창은 심플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책정된 보상 LP였다. [보상 : 500LP] 미쳤다. 또 500LP? 대체 뭘 시키려고 500LP를…….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며 미션을 확인한 순간. “……!” 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레벨 업 분류 : 미션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20레벨 달성 제한 시간 - 168 : 00 : 00 보상 : 500LP 〓〓〓〓〓〓〓〓〓〓〓〓〓〓 고작 레벨업이 클리어 조건이었으니까. 시간제한이 있기야 한데… 168시간이면 기껏해야 일주일. 이마저도 너무 넉넉하다. 혹시 기부천사세요?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미션 수락 메시지에, 난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수락하자니… 이번 미션은 뭔가 좀 양심에 찔린달까. 물론 500LP라는 숫자만으로도 이미 심장이 나대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나 헌터 데이브. 신의를 아는 남자. 500LP나 되는 거액을 또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주일 안에 20레벨 달성은, 미션이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너무 쉽잖아? 물론 그레이프 형님께선 그저 내게 용돈을 주고 싶으신 모양이었지만……. 이번에는 한 그루 나무보다 숲을 봐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그래서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건 양심에 좀 찔리네요 형님. └ 그게 무슨 소리임? -3일 어떻습니까. └ ??? -제한시간 7일 걸어주셨는데, 솔직히 이건 미션이라기엔 너무 길긴 하잖아요? └ ??????? -그러니까 3일 안에 결판 보겠습니다! └ 3일……? 72시간? -넵. 그 안에 20레벨 달성. 이 정돈 돼야 500LP받을 자격 있는 거 아니겠슴까? 사실 처음에는 48시간 말하려다가, 쫄려서 조금 여유롭게 걸었다. 10레벨 찍는 데 10시간 정도 걸린 셈이니, 이 페이스면 사실 48시간 20레벨도 충분하긴 한데……. 혹시 무슨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할 것 같다. 후우. 어쨌든 500LP 못 먹으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래. 강제로 월광검까지 쓰게 생겼는데 4일차 20렙도 못 하면…… 나가 죽어야지.’ 그런데 뭔가 반응이 또 이상하다. 아무래도 성좌 형님들 특유의 겁주기 패턴이 시작된 것 같다. └ 10렙에서 20레벨 구간을…… 72시간에 뚫겠다고? └ 방장 혹시 안 잘 생각임? 아뇨, 자는 시간도 당연히 고려한 건데요. └ 아니ㅋㅋㅋ 안자고 달려도 72시간은 말이 안 되는데? └ 이건 걍 물리적인 문제 아님? └ ㅇㅇ;;; 미친놈처럼 사냥만 해도 72시간에 10업은 말이 안 될 건데;; 아이 참. 이 형님들 또 이러신다. 달늑 미션 때도 겁부터 잔뜩 주시더니……. 제가 아까는 솔직히 조금 쫄렸었는데, 그래도 두 번은 안 속습니다? └ 솔까 일주일도 개 빡세다고 생각했는데ㅋㅋㅋ3일은ㅋㅋㅋㅋㅋㅋㅅㅂ;; └ ㄹㅇㅋㅋ 일주일도 철삽으로 달늑 때려잡은 놈이니까 가능성 있는 수준이라고 본 건데. 미션이 떨어지면 일단 겁부터 주고 보는 게 이 바닥 관례인 것 같기도 하고. 뭐, 상관 없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백작형님께서는, 내 제안이 꽤 마음에 드시는 듯 했으니까. └ 캬, 이 친구 맘에 들어? 그리고 다음 순간. 난 역시 내 선택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그레이프 백작’님이 미션 내용을 수정등록 하셨습니다.]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까. [미션 제한시간이 72시간으로 변경됩니다.] [미션 보상이 2000LP로 변경됩니다.]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진짜로 아니었는데. “……!!” 2천……LP? 그러니까 지금, 2천만 원을 거신 거죠? 이거 성공하면 대략… 4일 만에 최소 3천만 원 이상을 벌게 되는 건데…….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미쳤다잇!!” 그대로 육성이 튀어나와 버렸지만, 이건 불가항력이다. 베테랑 헌터들도 달에 억 단위로 벌긴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 페이스면 나는 가능할지도? 흠흠. 역시 장사(?)는 양심적으로 해야 한다. 진심은 역시,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 [‘레벨 업’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미션 성공 시 명예가 1만큼 증가합니다.] [미션 실패 시 명예가 1만큼 하락합니다.] 곧바로 수락을 때리자, 벌써 2천 LP가 생긴 기분이다. 미션 정산하고 나면 통장이 진짜 빵빵해질 것 같다. “감사합니닷!!” └ 그거 아직 네 거 아닌데? 아뇨. 맞는데요? 흐흐흐. LP 정산받고 나면 맛있는 거 사 먹을 거냐고? 그럴 리가. 통장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를 텐데, 뭐하러 돈을 씀? 그런데 그렇게 속으로 혼자 싱글벙글하고 있던 그때. 헌터 형님들이 또 모르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 흐음. 그런데 이 정도면 진짜 안전자산 아님? └ 그렇긴 해. 안전자산은 또 뭔데요 형님들? └ 그럼 나도…… 한 번 맛만 볼까? [‘3회차 무림고수’님이 미션금을 250LP 추가하셨습니다.] [‘망나니 2황좌’님이 미션금을 300LP 추가하셨습니다.] 허억.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압도적인 감사를……. └ 그럼 나도 부담 없이 살짝……. [‘냉법 파티구함’님이 미션금을 150LP 추가하셨습니다.] 다른 성좌들도 갑자기 참전하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미션에 걸린 LP는 무려 2700LP가 되어버렸다. 안전자산? 그게 대체 뭔데? └ 방장 이거 일부러 방송각 잡는 것 같기도 한데? └ 하긴 7일짜리 미션이면 좀 루즈하긴 해. └ 캬, 노잼각 피하려고 500LP 포기한 거면 ㄹㅇ 감다살인데. 어… 제가 방송각 생각한 것까진 맞는 말이긴 한데……. LP를 포기한 적은 없는데요? “…….” 어쨌든 이 엄청난 성원에 부응하려면,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안 된다. 그래서 난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형님들! 일단 지금 열한 시죠?” └ 그 동네는 11시임? └ 뭐, 암튼 그렇다 치고. “그럼 일단 2시 전에 12레벨부터 찍겠슴다! 그때까진 닥사 노잼이어도 이해 좀 해주세요!” └ 2시면 세 시간 남은 거네. └ 1차 목표부터 살벌하누ㅋㅋ └ ㅋㅋㅋ10레벨부터 필경 배수로 오르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그야 당연히 알고 있습죠. └ 근데 진짜 3일 20렙 가려면, 저 정도 속도는 나와야 하긴 해. └ 이것도 부족할지도? 하지만 상관없다. 철삽 가지고는 쉽지 않았겠지만, 이제 내 손에 들려있는 건 무려 월광검이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월광검 이놈, 아주 뽕을 뽑아줘야겠다. ‘월계존에서 12레벨 찍을 쯤 되면, 흑요석 가루도 충분히 200개 모이겠지.’ 월계수 존의 일반 몹인 ‘그냥 그림자 늑대’는, 흑요석 가루를 드랍한다. 그러니 이놈들을 도륙내며 부족한 흑요석 가루를 모으고……. 마을로 돌아가 흑요석 반지를 만든 뒤, ‘달빛 정원’에 입성하는 것까지. 딱 여기까지 오늘 목표로 잡으면 될 것 같다. 점심 식사만 스킵하면, 퇴근시간 전까지 충분히 가능한 일정이다. 스르릉-! 계획이 선 나는, 월광검을 뽑아 들고 곧바로 사냥을 시작했다. └ 캬, 방장 이제 삽 안씀? └ 귀속 월광검 생겼는데, 공격력 5따리 어케 씀 ㅋㅋㅋ └ 근데 검 쓸 줄은 아는 거겠지? └ 대충 휘갈겨도 저 삽보단 딜 잘들어감 ㅋㅋㅋ 걱정 ㄴㄴ 그런데 첫 번째 그림자 늑대를 사냥했을 때. 촤라아아악-! [‘그림자 늑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아지랑이를 발견한 난, 오소소 소름이 돋아올랐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잠깐. 이게 지금, 왜 되는 거지……? 1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성실한 요정 세리아는 근래 들어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심플했다. 라이카 주식회사의 만년 말단 GM이던 그녀가, 최근에 드디어 승진했으니까. 이번에 새로 발굴한 용사가 무려 ‘제 3층계’의 재능으로 판정받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게 된 것이다. 발굴한 용사가 시작부터 3층계 이상의 플레이어로 판정받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업계의 고인물 요정들도, 100번 용사를 발굴하면 한 번 정도나 찾아낼까 말까 한 재능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잘 보고 배우라고 베론.” “물론입니닷!” “너도 얼른 독립해야지.” 3층계의 재능부터는 회차를 거듭하면 충분히 랭커도 바라볼 수 있는 용사였다. 세리아는 이 일을 하면서, 3층계 이상의 재능을 찾아낸 게 이번으로 고작 두 번째였다. “역시 이 일은 보람 있다니까.” 그러니 그녀가 들떠있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세리아님.” “응?” “엊그제는 분명 다 때려치우고 싶으시다고…….” “혼나 볼래 베론?” “히익, 아, 아닙니닷.” 얄미운 부하직원 베론이 깐족거려도,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참아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쓰잘데없는 말이나 할 거면, 얼른 나가서 일해 베론.” “저… 현장에서 방금 돌아왔지 말입니닷.” “그래도 다시 나가.” “조, 조금만 쉬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러니 세리아가 지금 녀석을 쫓아내는 건, 결코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지금 안 나가면 후회할걸?” “넷?” 다만 곧, 손님이 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중요한 손님이. 똑똑- “로렌즈님? 들어오세요.” 끼익-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베론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닷!” “농땡이 피우지 말고?” “옛, 세리아님!” 길쭉한 체형에 타는 듯이 붉은 긴 생머리. 그리고 그 붉은 머리와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 “오셨습니까……!” 그녀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한 베론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고. 또각- 또각- 어느덧 세리아 앞까지 다가온 여자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세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석에선 말 편하게 하랬잖아, 세리아?” “그래도 베론이 보는 앞에서 그럴 순 없지. 이제 무려 ‘랭커’님이신데.” “랭커는 무슨.” 잠깐 대화를 나눈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딸깍- 그리고 그 물건을 발견한 세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어울리지도 않는 고블린 가면은, 대체 언제까지 쓰려는 거야?” “불렀으면 용건이나 말해. 나 바쁜 사람이니까.” “오랜만인데 까칠하기는.” 짧게 투덜거린 세리아가, 그녀의 요구대로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플레이어를 하나 찾아 줘.” “플레이어?” “응.”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1층계 플레이어야.” * * * 라이카에는 ‘초월현상’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단어만 봤을 땐 뭔가 거창하고 심오해 보이지만, 무협식으로 풀이하면 ‘무공의 경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러니까 어떤 클래스든 특정 수준 이상의 플레이를 해냈을 때 발동하는 게 바로 이 ‘초월현상’이라는 개념인데……. 방금 내 검격과 함께 발동한 신검합일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초월현상은 보통 무지막지한 효과를 동반한다. 바로 이렇게.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로 인해, 착용한 도검류 무기의 공격력이 150%만큼 증가합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로 인해, 도검류로 발동하는 모든 스킬의 마력 소모량이 50%만큼 감소합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로 인해, 치명타 피해량이 2배 증가합니다.] 모르고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아지랑이에 불과하지만, 효과는 말 그대로 파멸적이다. 그러니까 월광검까지 든 상태에서 신검합일이 터졌다면, 13레벨 일반 몹쯤은 한방 컷 나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놀란 건 늑대가 일검에 반으로 쪼개졌기 때문이 아니라, 신검합일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 ??? └ 늑대 왜 한방? └ 뭔데ㅅㅂ └ 버그임????? 버그 아니라니까 그러네. └ 와 근데 방장 왜 칼도 잘씀? 삽질 마스터 아니었음?;;; └ ㄹㅇ; 이 ㅅㄲ뉴비 맞음? └ 일단 10레벨이긴 해;; 그나저나 신검합일 이거, 원래 진짜 어려운 거다. 이렇게 칼 한번 뽑자마자 바로 발동시킬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분명 베타 서버에서는 온갖 똥꼬 쇼를 다 해야 겨우 쓸 수 있었던 초월현상이 바로 이 신검합일이었는데……. 쐐애액-! 지금은 그냥 너무 쉽게 된다. [‘그림자 늑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피하고 쳐내고 휘두르면……. 깡- 깡- 촤라악-! 켜는 것보다 유지하기가 더 힘든 이 초월현상이, 그냥 숨 쉬듯 유지되는 것이다. 검 끝에서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청백색의 아지랑이가 그 증거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유지 중입니다.] 물론 내가 지난 천 회차가 넘는 시간 동안 가장 많이 쓴 무기 중 하나가 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거, 이래도 되는 거 맞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이 새끼 혹시 n회차 아님? 훅 들어온 채팅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 ㅋㅋㅋ정신 차리셈 여기 ■■■임ㅋㅋㅋㅋㅋ └ ■■■부터 시작하는 ■■■■■가 어딧냐 ㅋㅋㅋ 뭔가 의미심장한 채팅들이 연달아 올라온다. 궁금하긴 한데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각성자 위키에 따르면, 어차피 저렇게 노이즈가 끼는 내용들은 물어봐도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괜히 방송 흐름만 끊기고 말이지. 그나저나 너무 사냥만 한 것 같으니까, 슬슬 멘트 한 번 쳐 봐야겠다. -형님들, 이거 칼 잘드는데요? 그리고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별생각 없이 친 내 멘트들은 반응이 제법 좋다. 취향이 잘 맞나? └ 칼 잘드네요 ㅇㅈㄹㅋㅋㅋ └ 대-이브ㅋㅋㅋ └ 월광검 계정귀속이라고 울던 놈 어디감?ㅋㅋㅋ └ 금융치료 확실하잖엌ㅋㅋ 역시 꽁꽁 숨겨져 있던 내 재능은 성좌들을 대상으로 한 스트리밍이었던 것 같다. 성좌님들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힘이 절로 난다. -그나저나 이 속도면, 2시가 아니라 1시에 가능하겠는데요? └ 12레벨? -네 형님들. 절대로 후원을 많이 받아서 힘이 나는 게 아니란 말이지. └ 캬ㅑㅑ 그런데 계속 한방컷으로 사냥해서 그런지 사냥속도 말 안되긴 해ㅋㅋ └ ㅋㅋㅋ이제 슬슬 쫄리는 백작님이면 개추ㅋㅋㅋㅋㅋ └ ㅋㅋㅋㅅㅂ └ 에이ㅋㅋ 그래도 벌써 쫄릴 정돈 아니지ㅋㅋㅋ └ ㅇㅇ 맞음. 솔직히 방장이 칼도 잘 쓸 줄은 모르긴 했는데; 7일도 아니고 3일은 좀 ㅋ └ 아ㅋㅋㅋ ‘안전자산’이라고?ㅋㅋ 어쩌면 칼질 한 방에 픽픽 쓰러지는 늑대들 덕에, 도파민이 더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베타 때도 이렇게 쉬웠으면 얼마나 좋아? 서걱-! 신검합일을 유지한 채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자니, 뭔가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기분이다.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러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가장 위력적인 궤적으로 상대를 벨 수 있을지.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몸이 진화하는 느낌이랄까.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짜릿한 감각이 느껴지며 동시에 두 놈의 늑대가 쓰러지자, 손바닥을 타고 전율이 올라온다. 방금의 회전 베기는 내가 봐도 정말 완벽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검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타탓- 촤아아악- 그런데 다음 순간. “음?” 이어서 떠오른 처치 메시지에, 이번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먹빛 그림자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별생각 없이 죽여놓은 늑대들 사이에, 15렙 희귀몹이 한 놈 껴 있었거든. 넌 왜 한 방에 죽는 건데? └ 와 ㅋㅋㅋ 먹늑도 잡았네 ㅋㅋ └ 저거 흑요석 목걸이 주는 놈 아님? └ 맞음ㅇㅇ 승천하려는 광대를 붙잡아보려 해도,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이건 2티어 희귀등급 목걸이니까, 대충 70LP쯤 번 셈이거든. [‘흑요석 목걸이’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쉽게도 흑요석 반지랑 달리, 이 녀석은 어둠내성 옵션이 붙지 않지만……. 상관없다. 오늘 하루 대충 쓰다가 퇴근길에 팔면 되지 뭐. └ 방장 싱글벙글ㅋㅋㅋ └ ㅅㅂ귀속이어라. 아니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흠칫했잖아요, 형님. 어차피 고유능력 안 붙는 희귀템이라 귀속일 확률이 없긴 하지만……. 부정타게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요. 후우. 아무래도 첫 유일 드랍이 귀속이었던 건 꽤 오래 내 PTSD로 남을 듯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귀속 아이템. └ 그나저나 방장 오늘 많이 벌었는데, 이제 2T장비 정돈 껌 아님? 아닌데요. └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방장 이제 부자지? └ ㅇㅇ 2T 악세면 희귀인거 감안해도 100LP 절대 못 넘을 텐데. └ 맞음 저거 지금 시세 한 78LP쯤 할 걸? 78만원이 뉘집 애 이름입니까 형님들. └ 방장 설마 지금 입꼬리 씰룩거리는 게… 78LP벌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하……. 또 열받게 하시네 이 형님들이. └ ㅋㅋㅋ방장 얼굴 빨개졌는데? 날 놀리는 데 재미 들린 건지, 성좌들이 낄낄거리며 계속 떠들어댄다. 뭐, 형님들이 즐거우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만. 그것과 별개로 난 지금 아주 진지하다는 말씀. 솔직히 70LP가 아니라 7LP도 소중하다. 아니, 0.7LP짜리 잡템도 절대로 흘릴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다. [‘견습마법사 메오’님이 25L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허리부터 90도로 한 번 숙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발골 작업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먹빛 그림자 늑대’ 사체의 ‘발골’을 시작합니다.] [시체의 상태가 양호하여, 발골 성공률이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0%……1%…15%……100%!] [‘발골’에 성공하였습니다!] 발골도 하면 할수록 숙련도가 올라가서, 더 상태 좋은 부산물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거든. └ 아닠ㅋㅋ 레벨업할 시간도 부족한데 발골은ㅋㅋㅋ씹ㅋㅋㅋ └ 이거 컨셉인 거지? └ 그렇다고 해줰ㅋㅋㅋ엌ㅋㅋ 그러니까 이 겜알못들이 뭐라 하든 꿋꿋이 해야 한다 이 말씀. [‘먹빛 늑대가죽’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어둠 송곳니’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봐봐, 달달하잖아? 캬-! 어둠 송곳니가 또 이렇게 한 방에 나와주다니. 이건 무려 4T 단검 제작에 쓰이는 서브 재료다. 그러니 잡템이라도 최소 30LP는 넘을 터. 내가 각성자 위키 권위자였으면, 특성 티어표 최상단에 발골 특성을 올려놨을 텐데. 이 좋은 걸 남들은 대체 왜 안 쓰나 몰라. └ 이건 뭐 실력방송인거 같기도 하고 컨셉 오지게 잡은 개그 방송같기도 하고 ㅋㅋㅋ 혼란하다 혼란해ㅅㅂ └ 그래도 재밌잖아? 한잔해. └ ㄹㅇㅋㅋ └ 그게맞다ㅋㅋㅋ ■■■에서 재미로 이정도 뽑아내기 쉽지 않다고?ㅋㅋ 왜 낄낄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성좌들 반응까지 좋으니 아주 완벽한 흐름이다. 시청자도 어느새 또 늘어났다. [ON Air : ☺ 38] 캬-! 오늘은 퇴근길에 족발 정돈 사 들고 들어가도 되겠는걸? 대짜는 너무 비싸니까 소짜로 하나 정도만……. [‘냉법 파티구함’님이 12LP를 후원하셨습니다.] 오우야. 이러면 그냥 중짜로 사겠습니다 행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발골을 마친 후 깔끔하게 전리품을 주워 담은 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런데 방장, 그런 잡템 부스러기까지 다 주우면 인벤토리 자리 남음? 어떤 성좌님의 말을 듣고 확인해 보니, 인벤토리에 여유 공간이 정말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 만약 득템이라도 했는데 인벤토리가 부족해서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만큼 아찔한 일도 없을 터. 아무래도 100LP쯤 투자해서, 가방부터 좋은 거로 하나 장만해야겠다. 본격적으로 15레벨존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비도 한 번 할 겸 말이다. -엇, 아무래도 마을 좀 다녀와야겠네요. └ ……? └ 잡템을 버리는 게 아니라 마을을 다녀온다고? -스크롤 찢으면 되잖아요. 아니, 이 성좌들이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무리 자린고비라도 이제 스크롤 정돈 충분히 찢을 수 있다고? 게다가 마을 가는 시간 아낀 거로 10LP 이상은 충분히 벌 수 있으니, 이건 오히려 찢는 게 이득이다. 그래서 아껴뒀던 귀환 스크롤을 꺼낸 난,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찢어버렸다. 부우욱- [‘베레쉬트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였습니다.] [시작의 마을, ‘베레쉬트’로 귀환합니다.] 이어서 암전된 시야가 밝아지며, 베레쉬트의 광장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황당해하는 성좌들의 채팅이었다. └ 아닠ㅋㅋㅋㅋㅋ └ 노빠꾸네 ㅅㅂㅋㅋ └ 진짜 마을로 왔다고?ㅋㅋ └ 마을 귀환이야 스크롤 찢으면 되지만, 돌아갈 땐 어쩔? └ 사냥터까지 다시 가려면 한 30분은 버릴 텐데 ㅋㅋㅁㅊ └ 개웃기넼ㅋㅋ └ 잡템 집착 뭔데ㅋㅋ 1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마을에서 정비를 마친 난, 사냥터로 복귀하는 길에 11레벨을 달성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1레벨이 되었습니다.] 경험치가 거의 다 차 있던 상황이라, 15레벨 사냥터로 이동하는 길에 자연스럽게 11레벨이 찍힌 거다. └ 캬- 시원하다 그냥! └ 뭐임ㄷㄷ 이방 방장 고작 11레벨이었음? └ ㅇㅇ └ 아니 근데 어케 13랩 늑대가 원콤 나는 거임? └ 몰-루?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5레벨 사냥터에 도착한 뒤에는, 정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검은 갈기 늑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검은 갈기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15~17레벨 사이의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사냥터인 고요의 협곡. 원래대로라면 13~14레벨을 찍은 뒤에 여기에 올 예정이었지만…… 월광검 덕에 한 템포 빠르게 스펙이 만들어졌다. 오히려 월광검 없이 14레벨을 찍은 상태보다도 훨씬 더 고스펙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그래서 난 거침이 없었다. 말 그대로 사냥터에 몬스터들 씨를 말려 버린 거였다. 신검합일까지 터지는 마당에…… 이제 일반 몹들은 레벨이 몇이든 전혀 위협이 되질 않거든. 물론 시작의 섬 안에서만 그런 거긴 하다. [‘검은 갈기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칠흑 송곳니 늑대’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후략…… 어쨌든, 말 그대로 신이 난다. 천 회차가 넘게 했던 걸 반복하면서 뭐가 신이 나는 거냐고 묻는다면……. 지난 천 회차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설명해 주고 싶다. 베타 버전을 플레이할 땐 요정피셜 폐급 재능이었던 나는 모든 전투가 항상 고행의 연속이었다. 게이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반면에 지금은? 그냥 무아지경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 와;;; 이 정도면 거의 검희 쪼랩때 보는 것 같네 ㄷㄷ └ 그정둔가; └ 그정돈 아님ㅋ 내가 검희 초창기 시청잔데, 걘 10렙에 이미 달늑 레이드 중이었음ㅋ └ 유입 귀엽네 ㅋㅎ 우리 방장은 9랩 때 이미 솔플로 찢었는데? └ ??? 성좌들의 흐뭇한 채팅들조차 눈에 제대로 안 들어올 정도였다. └ ?? 달늑을?? └ ㅇㅇ └ 구라 ㄴ └ 심지어 삽으로 찢음ㅋ └ 뭔 개소리임 이건 또. └ 진짠데;; └ ?? ㅈㅉㄹㄱ??? 물론 후원 메시지는, 경우가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엘프조아’님이 2LP를 후원하셨습니다.] 2LP든 1LP든, 소중한 고객님이다. 감사의 표시는 확실하게 해야만 한다. -후원 감사합니다 형님! └ ㅋㅋㅋ후원 알림에는 귀신같이 반응하는 거 보소 ㅋㅋ 그나저나 후원 메시지가 상당히 뜸해졌는데……. 아무래도 보기 지루한 사냥만 해서 그런 거겠지? 성좌들의 채팅에서 딱히 불만이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슬슬 신경 쓰긴 해야 할 것 같다. 50명을 넘어갔던 시청자가 다시 좀 줄어든 게 은근히 신경 쓰인다. [ON Air : ☺ 42] 그러니 조금 남은 경험치만 채우면, 성좌님들께 볼거리를 좀 만들어줘야겠다. └ 방장 이제 필경 얼마 남음? -한 세 마리 더 잡으면 업입니다! └ ㅁㅊ;; 벌써 12렙이라고? └ 캬ㅋㅋ 진짜 1시 전에 12를 찍어버리네 ㄷㄷ 자, 일단 1차 목표는 달성이고.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12레벨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템포를 한 번 더 올려볼까? -자, 그럼… 이제 고요의 협곡도 볼 장 다 봤네요. 내 말에, 성좌들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해 왔다. └ ??? 그게 몽말임? └ 또 무슨 헛소리 하려고 빌드업하냐 방장ㅋㅋㅋ -사냥터 졸업한다고요. 방금 도착한 사냥터에서 졸업이라니, 이게 대체 뭔 말인가 싶겠지. └ 여기 원래 20렙까지도 찍는 사냥터인데 뭔 소리임;; └ 여기보다 상위 사냥터는 몽환의 봉우리 하나 뿐일텐데. └ 거긴 지역 랩제가 15라 지금 가고 싶어도 못 감 ㅇㅇ 딱히 경험치 효율이 좋은 곳도 아니고. 성좌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거들지만, 나 또한 당연히 다 아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여기까진 떠올리지 못하나 보다. 아마 12레벨밖에 안 되기 때문이겠지. -던전이 있잖습니까 형님들. └ ㅇㅎ 달빛정원? └ 확실히 거기가 경험치 파밍은 0티어긴 하지. └ 그러고 보니 거기 렙제도 딱 12이긴 한데;; └ 진짜 12레벨에 가는 놈은 처음 봐서 생각 못 했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작 달빛정원에서 끝내기엔, 내가 생각보다 빨리 세졌거든.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재밌는 데 갈 겁니다. 목적지를 떠올리자 벌써부터 입 안에 군침이 싹 돈다. └ 오? 뭔가 있는 거임? └ 있긴 뭐가 있음ㅋㅋㅋ 시작의 섬 컨텐츠가 솔직히 뻔한데. └ 달빛정원 보스 솔플이라도 보여주려고? └ ㅋㅋㅋ거기 파티 던전이라 혼자 못감. 이쯤에서 시청자 이탈 방지를 위해 광역도발을 또 한 번 시전해야겠다. -힌트 하나 드리면, 히든 던전입니다 형님들. 사실 시작의 섬에 있는 히든던전이야 뻔하긴 한데. 그래도 그중에 뭔지 정도는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런데 뭔가 성좌들의 반응이 또 내 예상과 조금 다르다. └ ……? 히든 던전?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론데요. 히든 던전. └ 시작의 섬에 히든 던전이 있었나? └ 처음 들음ㅇㅇ └ 니들이 알면 그게 이미 히든 던전이 아닌 게 아닐까?ㅋㅋ └ 아니, 우리가 모르는 걸 방장이 어케 암. 방장 ■■■플레이어잖음. 뭐지? 이 성좌님들이 또 장난치는 느낌은 아닌데……. 이러니 오히려 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이 시작의 섬에 존재하는 히든 던전은, 지금 가려는 곳 말고도 두 군데나 더 있거든. 그런데 히든 던전의 존재를 아예 모른다고? 성좌라는 놈들이 이래도 되는 거 맞아? └ 별것도 아닌데 있어 보이려는 허세같은데;;; 잠깐 뒤면 들통날 허세를 왜 부립니까 형님들. └ 막상 가 보니 별거 아닐 확률 99퍼임. └ 진짜 히든던전 있으면 후원 한번 크게 쏜다. 약속하신 겁니다? └ ㅇㅇ진짜로 내가 몰랐던 던전이면 100LP 쏨. 크……! 성좌들을 도발하면 돈이 복사가 된다니! 이쯤 되면 이건 하나의 공식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저 성좌가 몰랐어도 알았다고 하면 알 방법 없지 않냐고? 우리 성좌 형님들이 겜알못이긴 한데, 그렇게 쪼잔한 분들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난 믿는다. 그래서 곧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바로 갑니다 형님들! └ 이쪽으로 가면 달빛 정원인데? -맞습니다. 일단 달빛 정원부터 가긴 해야 돼요. 달빛 정원부터 가야 한다는 말에 성좌들의 의심은 더 커졌지만, 뭐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확인시켜주면 될 일이겠지. 적어도 그때까진 방송을 끄지 않을 테니 아주 좋은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쪽은 문제가 아니고, 다른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긴 한데……. └ 방장, 파티는 있음? 그건 바로, 달빛 정원이 파티 던전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들어가죠 뭐. └ ㅋㅋㅋ파티 던전을 아무나 데려간다고? └ 그러다 트롤 만난다 방장? └ 근데 어차피 시작의 섬에선 PK안 되긴 해. └ 플레이어 킬이 안 돼도 트롤이야 얼마든 할 수 있지 않을까ㅋㅋㅋ 사실 베레쉬트에 들리면 방법이 생기긴 한다. 베타 때 했던 것처럼, 마을에 있는 모험가 길드로 가서 NPC를 꼬셔 파티하면 되거든. 각성자 커뮤에 가서 파티를 구하는 것보단, 여러모로 이게 편하고 쉬울 거다. 하지만 또 다녀오긴 시간이 많이 아까우니, 적당한 파티원을 구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빛 정원 앞에 도착했는데……. └ 어, 방장. 저기 플레이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던전 입구 근처에서 전투 중인 플레이어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 * * 올해로 스물넷이 된 정현우는, 작년 생일이 되던 날 각성했다. 그 뒤로 거의 일 년 동안, 누나 몰래 게이트에 들어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보름 전쯤, 드디어 게이트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최초 접속자를 감지합니다.] [플레이어 데이터를 동기화합니다.] [1%……24%…27%……98%] [데이터 동기화 완료!] [접속 장소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레오(Leo)’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8년 차 헌터인 누나가 안다면 펄쩍 뛰며 난리 칠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드디어… 헌터? 누나를 보며 자라온 현우에게 헌터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나도 누나처럼 랭커가 될 거야. 언제까지 누나만 고생시킬 수는 없어. 게이트 사태 때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어버린 뒤, 지난 10년 동안 자신을 키워낸 건 누나였다. 이제는 자신이 보답할 차례였고, 자신도 있었다. 누나에겐 비밀이었지만, 그의 잠재력은 무려 A등급으로 측정됐으니까. A등급은… 측정기로 측정이 가능한 최고 랭크의 등급이라고 했다. 어쩌면 꿈의 잠재력인 S랭크의 가능성도 있는 것. 이 높은 잠재력 덕에… 누나 몰래 게이트에 들어올 용기도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증명하면 돼. 그러면 누나도 더는 반대할 수 없을 거야. 어떤 클래스로 성장할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잠재력 측정 결과, [검사]의 적성 적합도가 99%나 나왔으니 말이다. 게다가 게이트에 들어와 보니, 많은 초보 각성자들이 두려워한다는 몬스터들과의 전투도 생각보다 할 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현우는 자신만만했다. 노력만 곁들여지면 랭커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띠링-! [몬스터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그 증거로 15일 정도가 지난 지금, 정현우의 레벨은…… 벌써 17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름이면, 10레벨을 찍기도 빠듯한 시간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무려 각성자 위키의 정보였으니 틀리지 않을 터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7레벨이 되었습니다.] 10레벨 이후부터는, 온갖 길드의 스카웃 제의까지도 받았다. 작은 중소길드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게이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그런 대형 길드들도 그 안에 꽤 포함돼 있었다. ‘후……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정현우.’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현우에게도, 한 가지 고민은 있었다. 그건 바로, 게이트에 들어오기 위해 모아뒀던 돈이 벌써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부분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에 각성자 대출까지. 총 2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 보름 만에 탈탈 털린 것이다. 물론 2천만 원 중 9할은 장비 맞추는 데 들어갔고, 때문에 게이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 수중에 돈은 250만 원을 환전한 250LP 정도였지만……. 그래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이제 30LP도 채 남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스크롤값과 포션값이었다. [인벤토리 정보를 확인합니다.] [보유 아이템 수량] [최하급 포션 : 3개] 현우가 쓰는 최하급 포션의 개당 가격은 5LP. 몬스터 하나 잡는데 보통 3~5개 정도의 포션이 소모되니, 버는 LP를 전부 투자해도 매일 적자가 나는 중이었다. ‘다음 달에는 장비 수리 비용도 들어갈 텐데…….’ 벌써 절반 가까이 닳은 장비 내구도를 떠올리자, 어질어질해진 현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장비 수리에는 한 번에 수백씩 목돈이 깨진다던데, 그 전에 무슨 수를 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서 길드 지원이 필요한 거겠지.’ 헌터로서 첫 번째 목표를 떠올린 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목표는 바로, 한국 최고의 길드인 실버나이츠에 입단하는 것. 이 목표 때문에 다른 대형 길드들의 오퍼도 거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사단 선발전 : D-26] 그러니 다음 달에 있을 입단 테스트가 열리기 전까지 참가 자격을 확보하는 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레벨업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말이다. 최대한 빨리 20레벨을 찍고 월광의 징표를 파밍해야만, 기사단 선발전에 참여할 수 있다. 솔직히 누나의 도움을 받으면 쉽겠지만,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누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혼자 힘으로 증명해야 돼.’ 그런 의미에서 현우는, 오늘도 던전을 돌 생각이었다. 시작의 섬에서 가장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기로 유명한 곳인 [달빛 정원]. 15레벨부터 현우는, 이곳에서 레벨업을 하는 중이었다. [‘달빛 정원’ 던전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2명 이상의 파티원이 필요합니다.] “음, 오늘도 파티가 없네.” 주변을 살짝 둘러본 현우는, 일단 던전 근처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다른 플레이어를 기다렸다. 각성자 커뮤니티에 글도 올려놨으니, 좀 기다리면 연락이 올 거다. 그런데 잠시 후. “어, 혹시 달빛 정원 공략하시나요?” 던전 입구에 불쑥 나타난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1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달빛 정원은 동 레벨 사냥터들 대비 압도적으로 경험치를 많이 주는 던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작의 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기가 없는 던전이기도 했다. 왜냐고? 보상의 밸런스가 경험치에 쏠렸다는 말은, 다른 보상들이 부실하다는 소리였으니까. 쉽게 말해 여기 오는 플레이어들은 레벨업이 최우선인 사람들 뿐인데, 게이트가 열린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런 수요는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어차피 레벨을 아무리 빨리 올려도 랭커들과 성장 경쟁을 할 수 있는 시점도 아니었고. 오히려 안전한 시작의 섬에 오래 머물면서 헌터로서의 역량을 확실히 키우는 게 정석과도 같은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그래서 파티를 바로 구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맞아요. 달빛 정원 입장 대기 중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다. 어차피 파티원은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게다가 실력까지 괜찮아 보인다. ‘파티원 역량이 좋아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 남자는 날렵하고 단단한 체구에 앳된 외모였는데, 슬쩍 봤음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재능이 비범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무기는 나처럼 검을 쓰고 있었다. 이 친구의 단점을 굳이 찾자면, 훤칠한 키와 쓸데없이 잘생긴 외모(?) 정도였다. 그냥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수준이다. └ 와 ㄷㄷ 이 친구 뭐임? 존잘인데? └ 방장아 이름 좀 물어봐라. -왜요? └ 스트리밍 켰나 확인 좀 해보게. 아놔, 이런 얼빠 성좌 놈들이……. -형님들, 플레이어가 잘생겨서 뭐 합니까? └ 잘생겨서 뭐 하긴; 잘생기면 삽질만 해도 후원 터지는데. 예??? └ 방장도 잘생겼으면 후원이 2배는 터졌을걸? 아니! 내가 뭐 어때서! “…….” 갑자기 파티하기 싫어졌지만… 아무래도 다른 대안은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잘생긴 것만 빼면, 딱히 단점이 보이지 않는 녀석이었으니까. ‘물론 숙련도 측면에선 어설픈 면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가 시작의 섬인 걸 감안하면, 조금 어설픈 면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다. 나와 달리 여기 있는 모든 헌터들은 1회차니까. 덕분에 나도 좀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작의 섬인데도 저 정도 재능의 플레이어가 널려(?) 있는 걸 보니……. 전직하고 대륙으로 넘어가 본 게임에 들어가면, 결국 나도 범부에 불과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금 슬퍼졌지만. 어쨌든 각설하고……. “던전 공략 경험은 있으세요?” “네. 여기만 한 20번 정돈 돈 거 같아요.” “오!” 통성명 후 대화를 조금 나눠봤는데, 던전에 대한 이해도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니까 최상의 상황이다. 이제 던전에 입장하기만 하면 된다. “데이브 님은요?” “몇 번인지 세 보진 않았는데, 많이 해 봤습니다.” 아, 남자의 플레이어 네임은 ‘레오’라고 했다. └ ??? 세 보진 않았다고?ㅋㅋ └ 처음이니까 세 볼수가 없지 ㅅㅂ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방장 이쉑ㅋㅋㅋ 구라치는 거 보솤ㅋㅋ └ 트롤을 만날 걱정을 할 게 아니라 본인이 트롤이었눜ㅋㅋ 하, 구라라니? 달빛 정원만 최소 몇천 번은 돌아본 것 같은데. 억울한데 할 말이 없으니까 더 열불 난다. └ 방장아, 던전은 칼 좀 쓴다고 무조건 깰 수 있는 게 아님;; └ ㄹㅇㅋㅋ 기믹 숙지 제대로 안 돼있으면, 아무리 잘 싸워도 트롤 짓만 할 텐데 ㅋㅋㅋ └ 우리 존잘남 괴롭히지 마!! 저기요. 거기 기믹 같은 건, 초 단위로 다 외우고 있거든요? 이걸 설명할 수도 없고 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오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오! 그러면 한 분 정도만 더 기다렸다 들어가면 되겠네요!” 달빛 정원의 권장 파티 인원은 3~5인이다. 그리고 내가 충분히 숙련도가 있다 하였으니, 3명만 모으면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밝게 웃으며 말하는 레오를 보며, 난 속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난 한 명 더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둘이서만 들어가도 된다고 어떻게 설득하지.’ 셋이 들어가도 안 될 건 없지만, 내 공략 방식을 쓰려면 오히려 불편하다. 게다가 기다리는 데 시간을 쓰기도 싫고 말이지. 그래서 생각했는데, 답은 금방 나왔다. 철컥- 일단, 내가 충분히 믿을 만한 파티원이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 마침 슬금슬금 다가오는 까만 늑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잠깐! 데이브 님 지금 뭐 하시는……?” 이 녀석을 제물로 쓰면,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다. 촤아아악-! 어둠 갈기 늑대는 13레벨대 늑대들 중에서 내구력이 가장 약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방 컷이 쉬운 건 아니니까. [‘어둠 갈기 늑대’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파티원으로서 가치는… 충분히 입증한 거 아닐까? “……!” 그런데 레오는 내 예상보다 더 크게 놀란 것 같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쩍 벌리고, 내 검 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흐음. 역시 통한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좌 놈들이 갑자기 날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 방장쉑ㅋㅋㅋ 갑자기 힘자랑하는 거 보소??? └ ㅇ0ㅇ;;; └ 이쉨ㅋㅋ 개웃기네ㅋㅋㅋ └ 우리 존잘남 기죽이지 마ㅠㅠㅠㅠㅠ └ 우리 레오 놀란거 봐ㅠㅠ 멍뭉이같아ㅠㅠㅠ 아니, 열받네? 내가 뭘 했다고! 후우. 하지만 성좌들이 뭐라 하든, 일단 하려던 건 마저 해야겠다. 성좌들이 놀린다고 갑자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거잖아? “갑자기 급발진해서 좀 놀라셨죠? 하하.” 내 말에 레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렇다기보다…….” └ 놀라셨죠? ㅇㅈㄹㅋㅋㅋ “어쨌든 그…… 방금 보셨다시피 제가 딜이 좀 잘 나오거든요. 그래서 2인 파티로도 충분히 공략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뭔가 성좌 놈들 때문에 그런지, 점점 더 파티하기 싫어진다. 이 기생오래비 같은 녀석이 내 소중한 성좌들을 뺏어갈 것 같아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 봤지? 우리 방장이 이정도야~ └ 방장 얼굴 좀 빨개진 듯? └ 말 더듬는 거 보소 ㅋㅋ └ 남자가 봐도 설레긴 해~ 아니, 이 미친놈들이? 일단 확실한 건, 마지막 대사를 친 ‘엘프조아’라는 성좌놈은 분명 여자다. 그래야만 한다. “…….” 어쨌든 낄낄거리는 성좌들과 별개로, 상황 자체는 내 의도대로 흘러갔다. “화, 확실히 스펙이 엄청 좋으시네요.” “그럼 괜찮으실까요?” “넵. 저도 1인분 이상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문제없을 것 같네요.” 물론 내 레벨이 12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순조롭지 못했을 테지만……. 다행히 라이카에서 플레이어의 레벨은, 일부러 노출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알 방법이 없는 정보다. [플레이어 ‘레오’와 파티를 결성하였습니다.] [현재 파티 인원 : 2] [파티 리더 : 데이브] 덕분에 레오와 파티를 맺은 나는, 순조롭게 달빛 정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달빛 정원’ 던전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 크- 존잘남과의 던전 데이트? 이거 못 참긴 해~ 아니, 싯팔! 더는 못 참겠다. 이거 라이카 스트리밍에 밴 기능은 대체 어딨는 거지……. [‘데이브’님에 의해 성좌 ‘엘프조아’님의 채팅이 제한되었습니다.] └ 개웃기넼ㅋㅋㅋㅋㅋㅋ └ 방장ㅋㅋㅋ많이 화난듯ㅋㅋㅋㅋㅋ └ 그래도 강퇴는 안 했넼ㅋㅋ └ 방장 타격감 ㅈ되넼ㅋㅋ └ 귀엽눜ㅋㅋㅋㅋ 어쨌든 성좌들의 헛소리들을 뒤로 한 나는 던전 입구로 발을 딛었고. 화아악-! 시야에 온통 새하얀 빛무리가 가득 들어차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 * * 달빛 정원은 말 그대로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 느낌의 필드다. 마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연상케 할 만한, 광활하고 화려하게 조경돼있는 아름다운 비주얼의 필드. 그런데 이 아름다운 풍경 안에는 아주 고약한 기믹들이 숨어있었다. 일단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펼쳐지는 ‘몽환의 수풀 미로’부터가 그랬다. 제한 시간 내로 돌파하지 못하면, 다시 던전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지 같은 미로. [‘달빛 정원’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첫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몽환의 수풀 미로’를 통과하세요.] [제한 시간 : 15분] 첫 회차에서 내게 가장 오랜 기간 고통을 줬던 기믹이 바로 여기였다. └ ㅋㅋ 방장 오늘 던전에서 시간 다 쓰는 거 아니냐 ㅋㅋㅋ └ 방장, 레벨업 미션은 깰 생각이 없는 거지? 아뇨, 있는데요. └ 이거 미로에서만 몇 시간 쓸 수도 있는데ㅋㅋㅋ 지금이라도 나가는 게 어떰? └ 냅둬ㅋㅋㅋ 머가리 깨져 봐야 정신 차리는 거임 원래ㅋㅋ 심지어 시스템이 설명해주진 않지만…… 이 미로는, 길을 잘못 찾을 때마다 패널티를 부여한다. 막다른 길에 한 번 도달할 때마다, 다음 필드의 난이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다. 정확히는 미로를 통과하면 도착하게 되는 달그림자 광장. 그곳에서 소환될 몬스터 웨이브의 난이도가, 미로를 잘못 찾을 때마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구조였다. 그야말로 악랄하기 그지없는 던전 설계. 그러니 성좌들이 신난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내가 고통받는 걸 보고 싶은 거겠지. ‘어쩌면 잠깐은… 성좌님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도?’ 다시 말하지만 내 최종 목적지는 달빛 정원이 아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플레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바보인 척 좀 해주면, 성좌들이 좋아 죽을 것 같다. “데이브 님, 기믹 다 안다고 하셨죠?” “물론입니다.” └ 물론입니닼ㅋㅋㅇㅈㄹㅋㅋ └ 근자감 대체 뭔데 ㅋㅋㅋ “그럼 저랑 나눠서 길 찾으러 가실까요?” “좋습니다. 제가 우측으로 뛸게요.” “넵!” 우리 파티원도 고생 좀 하겠지만, 딱히 미안하진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버스는 태워 줄 생각이니까. 무슨 고생이냐고? 그건 지금부터 보면 안다. └ 오, 방장 뛴다. └ 자연스럽게 나눠 뛰는 거 보니, 그래도 예습은 좀 하고 온 듯? 첫 번째 목적 좌표로 달리기 시작한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길을 뚫기 시작했다. 스르릉-!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촤아아악-! 그리고 던전에서 내 검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 몬스터는……. [‘블러드 블룸(Blodbloom)’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커다란 자줏빛 잎사귀를 가진, 18레벨의 식물형 몬스터였다. * * * 정현우. 그러니까 레오(Leo)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대체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지?’ 사실 그가 던전 앞에서 기다렸던 건, 그저 평범한 파티원 한 명 정도였다. 어차피 시작의 섬이니만큼 뛰어난 실력의 파티원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적정 레벨대의 정상적인(?) 파티원이라면 누구든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지금까지 여길 공략하면서 수준이 맞는 플레이어를 파티원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도……. 결국 캐리해야 했던 건 첫트인 레오 본인이었다는 말. 그래서 기대가 없었다는 표현이, 좀 더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 시작의 섬이잖아? 고레벨 유저는 올 방법이 절대로 없을 텐데.’ 갑자기 불쑥 나타나 2인 공략을 제안한 이 남자는, 레오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다 떠나서 일단, 13레벨 몬스터를 일검에 처치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말이 안 됐다. 물론 장비 빨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장비가 자신의 것보다 나쁠 거라는 가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발검을 눈으로 제대로 따라잡지도 못했어. 아무리 갑작스러웠다곤 해도…….’ 절대 장비 스펙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수준의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그건 검을 주 무기로 사용 중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대체 뭘까? 삼대 길드에서 따로 키우는 유망주일까?’ 솔직히 단 한 번의 발검으로 벽을 느껴버렸다. 분명 이제까지는… 벽을 느끼기는커녕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플레이어조차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게…… 진짜배기 재능?’ 사실 내 재능은 별 게 아니었던 걸까? 그럼 대형 길드들이 왜 자꾸 러브콜을 보내는 거지? 내 잠재력은 분명… 최소 A등급이라고 했는데?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각성자 위키-잠재력] 항목에서 봤던 한 단락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재력’이 헌터의 가능성을 점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지표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잠재력이 높다고 무조건 랭커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잠재력은 결국 라이카 세계에 어느 수준으로 동기화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일 뿐.] [그러니 랭커가 될 정도의 진정한 재능이라는 건, 게이트 안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쳐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처음 읽었을 땐 그다지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저 ‘데이브’라는 남자를 마주하고 나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게이트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불안해진 현우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랭커가 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할 모양이었다. 1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수풀 미로는 던전에 입장할 때마다 랜덤하게 구조가 변경된다. 때문에 출구의 좌표 또한 정해진 위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양방향으로 출구를 찾아 뛴 우리 파티의 판단은, 완벽히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파티원 중 한 명이라도 출구를 찾아내면 미로는 클리어되니까. 물론… 여기만 수천 번 이상 돌아본 날 기준으로 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달빛 정원 미로는 사실 완전히 랜덤이 아니란 말이지.’ 각성자 커뮤니티에는 달빛 정원의 미로에 특별한 규칙이 없다고 설명돼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다. 달빛 정원의 미로 구조는, 정확히 32가지 패턴으로 구성돼 있으니까. 그러니까…… 서른두 종의 패턴화된 미로가 랜덤으로 등장한다는 말씀. 그래서 사실 난, 미로 입구를 보자마자 무슨 패턴인지 이미 알아챈 상태였다. 출구가 어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소리다. 다만 내 목적이, 길을 찾는 데 있지 않았을 뿐. 그걸 알 리 없는 성좌들은 벌써부터 싱글벙글이었다. └ ㅋㅋㅋ 이거, 알려줘야 돼 말아야 돼?ㅋㅋ └ ㄴㄴ절대로 알려주면 안 됨, 본인이 잘 아신다잖아ㅋㅋ 냅두셈ㅋㅋ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것 같은데 꾹 참는 모습들이 아주 귀엽다. 내가 여기서 최대한 시간이 끌려야 레벨업 미션의 실패 확률이 올라갈 테니, 적어도 미션에 LP를 건 성좌들은 도와주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이놈들은 대체 뭘 말하고 싶어 하는 거냐고? 그야 당연히 미로의 힌트다. 이 수풀 미로는 막다른 길에 도달할 때마다 출구에 대한 힌트를 하나씩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내가 계속 무시하면서 진행했거든. 아마 모른다고 생각할 거다. 알 필요가 없다곤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블러드 블룸(Blodbloom)’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블러드 블룸(Blodbloom)’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애초에 내가 먼저 우측으로 뛰겠다고 한 것까지도 이쪽에 출구가 있어서였지만. 일부러 거기만 피해 돌아다니고 있다고는, 아마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않을까? └ 캬- ㅋㅋㅋ 근데 이렇게까지 길을 못 찾을 수도 있는 건가? └ ㄹㅇㅋㅋ 벌써 헛발질만 세 번째 같은데 └ 일부러 피해 가려 해도 이렇게까지 피하기도 힘들 듯ㅋㅋ └ 방장 월광검 먹는 데 운빨 다 쓴 거 아님?ㅋㅋ └ 애초에 힌트를 열어보지도 않는데 찾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그럼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뻘짓거리처럼 보이는 이게 바로, 달빛 정원의 숨겨진 기믹이거든. 우우우웅-! 막다른 길의 끝에 그려진 마법진을 밟으면 이렇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는데……. [막다른 길에 도달하였습니다. ‘달그림자 광장’의 음기가 강해집니다.] 이걸 싹 다 밟는 게 내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란 말이지. └ 미쳤다. 벌써 방장 혼자만 6스택 아님?ㅋㅋㅋ └ 2페이즈 난리 나겠는데? └ 막다른 길만 6번 가는 것도 쉽지 않겠다 ㅅㅂㅋㅋ └ 그런데도 시간이 아직 남은 거 보면 전투센스는 기가 막히긴 해 ㅋㅋ 어떤 미로 패턴이 등장하든, 이 수풀 미로에는 막다른 길이 열세 군데 존재한다. 이 포인트를 전부 다 찍은 뒤 마지막에 출구로 나가는 것. 그렇게 해서 2페이즈의 웨이브를 최대치까지 강화하는 게…… 숨겨진 기믹의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일곱 군데 돌았으니까, 슬슬 우리 파티원을 만날 때가 됐는데……. “엇! 데이브 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멀리서 뛰어오는 레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만난 곳은 내 기준 여덟 번째 막다른 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여기에 도착한 순간…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2페이즈 웨이브가 최대치까지 강화됐을 때만 발동되는, 히든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만월(滿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무래도 레오가 여기 오기 전, 막다른 길 다섯 군데를 깔끔하게 찍고 온 모양이었다. 기대 이상의 순조로운 출발이다. ‘됐다.’ 제한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5분 정도나 남았다. 실력 있는 파티원을 구한 덕에 시간도 상당히 여유롭다. “엇…? 만월이 뭐지…….” 히든 기믹이 충족된 걸 처음 보는 레오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지금 그걸 설명할 시간은 없다. 우선 미로를 빠져나갈 시간이다. “지금부턴 저 따라오세요, 출구를 찾은 것 같아요.” “넵!” 위이잉-! 알고 있던 통로를 통해 거침없이 이동하자, 4분 정도를 남겨둔 채 출구 포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띠링-! [‘몽환의 수풀 미로’의 출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출구 밖으로 빠져나온 순간. [첫 번째 페이즈가 종료됩니다.] [달그림자 광장의 격이 최대치로 격상됩니다.] 기다렸던 두 번째 히든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미로 안에서 헤매는 날 지켜보던 성좌들은, 처음엔 낄낄거렸다. └ 방장 자신감 ㄱㅊ은 거 맞지? └ ㅋㅋㅋ 아닠ㅋㅋ 출구 이제 좀 나와라 ㅋㅋ애 울것다ㅋㅋㅋㅋㅋ 하지만 첫 번째 특이점이 발생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만월(滿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어? 잠깐. 이거 뭐임? └ ㅇㅇ? └ 만월이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원래 이런 거 없지 않나? └ 어…? 그러게.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은 잘 안 나긴 하는데;;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첫 페이즈가 클리어됐을 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달그림자 광장의 격이 최대치로 격상됩니다.] └ ;;; 뭐냐 이거? └ 격이 올랐다는데? └ ㅅㅂ??? 이거 뭔지 아는 친구 없음? 거기에 내 도발까지 곁들여지자……. -어때요, 형님들. 뭔가 있는 것 같긴 하죠? 성좌들로부터 무수한 악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아니;;; 이건 진짜로 처음 보는데;;; └ 방장 ㄹㅇ로 뭐 알고 하는 거임? └ 뭔데-_- 나도 알려줘;;; 하지만 성좌들이 가장 놀란 건, 결국 달그림자 광장에 도착해 2페이즈가 시작됐을 때였다.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달그림자 광장의 시험’을 통과하세요.] [잔여 시간 : 20분] [클리어 조건 : 모든 파티원 생존] 일단 임팩트부터가 강렬했거든. 쿠쿵- 쿵-!! 두 번째 페이즈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지며, 던전의 구조 자체가 대격변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평범한 달빛 정원에서는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희귀한 몬스터들이 무더기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숲과 달빛의 정령, 문워든 드라이어드(Moonwarden Dryad)가 소환됩니다.] 만약 성좌들이 이 게임을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인지할 수 있을 거다. └ ??? └ 이거… ㅈㅉㅇㅇ?????? └ 드라이어드? 이게 ■■■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고???;;;;;; └ 어케했누;;; 달빛이 반사되는 반투명한 은빛의 나무껍질. 그것으로 온몸이 뒤덮인, 얼굴 없는 여인의 형체를 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몬스터. 식물형 몬스터이기에 앞서 정령에 가까운 몬스터인 드라이어드는……. 일반적인 필드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희귀한 몬스터였다. 시작의 섬은 물론이요 대륙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고. 일반적으로는 ‘시험의 탑’에 오르기 시작해야 조우할 수 있는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 미쳤다 ㄹㅇ;;; └ 방장 이거 뭐하는 ㅅㄲ지?;; 물론 여기 나오는 놈들은 반쪽짜리긴 하다. 왜냐고? 드라이어드의 핵심 드랍 아이템인 ‘월광수액’을… 이놈들은 드랍하지 않으니까. 뭐, 개당 100LP짜리 재료 아이템을 여기서 파밍할 수 있으면…… 솔직히 밸런스 터진 게임이긴 한데. 어쨌든 고작 시작의 섬에 있는 던전에서 이놈들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게임을 아는 이들에겐 충격적일 터였다. 나도 여기서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낸 건 거의 500회차쯤 됐을 때 처음이었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저 성좌들이 받은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 이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 방장;; 오늘 방송분 녹화 떠서 올려주면 안 됨? 되겠니? 녹화라는 걸 어떻게 하는지도, 어떻게 올리는지도 모르지만. 알아도 그걸 내가 왜 해줌? └ 와씨; 드라이어드까지 나온 거 보면, 이거 히든 기믹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무적인 건……. 기믹을 성공시켰다는 사실도, 드라이어드를 소환해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이거야 내 입장에선, 무조건 성공시킬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다만 성좌놈들을 상대로 역대급 도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경험상 성좌들을 도발하는 건 돈이 되거든. ‘이번엔 제대로 낚은 거 같은데?’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 근데 방장, 이거 클리어는 가능함? 2페이즈를 무사히 클리어하는 일이었다. 이걸 클리어하지 못하면 도발이고 나발이고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데…이브 님?” “넵.”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어쩌면 성좌들보다도 더욱 크게 당황한 상태인 우리 파티원. 레오를 캐어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별거 아닙니다.” “네……?” “그냥 히든 기믹이 발동된 것뿐이니까요.” “……!” “제가 여길 좀 잘 알아요. 믿어도 됩니다.” 유일한 파티원인 레오가 쫄아서 스크롤이라도 찢어버린다면. 힘들게 발동시킨 기믹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거다. 달빛 정원에서는 파티원이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그대로 모두 다 튕겨 나가 버리거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레오님.” “넵.” “혹시, 지금부터는 제가 오더해도 될까요?” “이거…… 난이도 괜찮은 거죠?” “물론입니다. 최소 수십 번은 해봤으니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아까 같았으면 거짓말이라며 맹렬히 비난했을 성좌들도, 이번엔 조용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한 말들이…… 전부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이제 갓 12레벨이 된 데이브가 달빛 정원에 들어와 봤다는 것부터 상식을 벗어나는 전제이긴 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그보다도 더욱 비현실적이었으니까. “그럼, 부탁할게요, 데이브님.” “좋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 파티원이 그렇게 새가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상 밖의 돌발 상황에 충분히 무서울 법도 한데……. 쿠쿵- 기기기긱-! 본격적으로 웨이브가 시작되자, 오히려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분해졌으니 말이다. 심지어 검을 뽑아 든 뒷모습이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흠, 그러니까 이거. 분명 이상적인 파티원의 모습이긴 한데……. └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 레오가 캐리하는 거지? 예? └ 캬, 우리 존잘남은 검만 뽑아도 그림이네 그림이야. 뭔가 미묘하게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란 말이지. 스르릉-!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아, 당연히 드라이어드를 향해 검을 뽑은 거다.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1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울, 광화문.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실버나이츠 본사 건물은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백하람은 오랜만에 복귀한 본사에서 곧장 인사팀으로 향했다. 헌터들로 북적이는 전투 부서와 달리, 인사팀 사무실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이곳에서만큼은 검 대신 서류가 무기였다. “엇, 하람 님 오셨습니까?” “다들 잘 지내셨죠?” “예, 늘 하던 일 그대로입니다.”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하람은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본사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직속 상관이자 실버나이츠 인사팀장, 윤세진이 그를 직접 호출했기 때문이다. “안에 계시죠?”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자,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지.” 윤세진은 검은 슈트에 실버나이츠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창립 멤버로서의 무게가 묻어나는 굵은 선의 얼굴, 그리고 차분하지만 단단한 눈빛.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그와의 독대는 거의 1년 만이었기 때문에, 하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하람. 7년째 같은 자리에서 버티는 기분이 어떤가?” “적응하면 편합니다. 섬은 변하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하람은 거의 7년째 윤세진을 직속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지만, 이렇게 독대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긴장과 동시에 기대하고 있었다. 평화롭지만 한편으론 무료하던 일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거라는 직감이 왔으니 말이다. “확실히. 지금 그 자리는… 자네가 아니라면 지켜 줄 사람이 없을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하람의 그 직감은, 꽤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윤세진은 거의 바로 본론을 꺼냈으니까. “그리고 오늘 내가 자넬 부른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 같군.” “예? 비슷한 맥락이라면…….” “자네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야.” 찻잔을 가볍게 홀짝인 세진이, 탁자 위에 얹혀 있던 태블릿을 쓱 밀며 말을 이었다. “수색 의뢰다. 한 번 읽어봐.” ‘의뢰’라는 말에 하람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의뢰…… 라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든 헌터 길드는 게이트와 관련된 다양한 의뢰를 받는다. 그 의뢰를 수행하고 보수를 받는 것 또한, 길드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 하지만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실버나이츠는, 당연히 아무 의뢰나 받지 않는다. 실버나이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의뢰만 처리하더라도,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보통 실버나이츠에서 맡는 의뢰들은, 하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잘 없었다. 어쨌든 하람은 20레벨에 불과했고, 시작의 섬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몸이었으니까. ‘나만 할 수 있는 의뢰라면, 분명 시작의 섬 의뢰일 텐데.’ 그래서 더욱 흥미가 동했다. 게이트 안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필드인 시작의 섬.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의뢰이면서 실버나이츠가 직접 움직여야 할 만한 의뢰라면……. 어떤 의뢰일지 감조차 잘 잡히지 않았으니까. “…….” 하람은 의뢰 내용을 집중해서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 [수색 의뢰서] [지역 : 시작의 섬] [위치 : 몽환의 봉우리] [수색 목적물 : 칠흑의 심판자 제라투스(Zerathus)의 깃발] 검붉은 바탕에 진한 먹색으로 그림자 악마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깃발로, 최소 9티어 이상의 아티펙트로 추정된다. 몽환의 봉우리 필드 내 특정 장소에 위치할 것으로 파악되며, 해당 좌표는 그림자 속성의 기믹으로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다. 해당 기물을 수색하기 위해서는 [진실의 거울] 아티펙트가 필요하며……. ……중략…… * 본 계약에 따라 취득한 모든 기밀정보를 제3자에게 누설하거나 본 계약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 그리고 의뢰서를 전부 읽었을 땐. “……!” 처음 의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배 이상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제가 아는 그…… 제라투스가 맞는 겁니까, 팀장님?” 칠흑의 심판자 제라투스. 그건 최근에서야 공략이 시작된 ‘마계’ 필드의 첫 번째 보스 몬스터를 칭하는 이름이었으니까. “그 제라투스가 맞다.” 제라투스는 최상위 랭커들이 아니라면 공략 시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보스였다. 실버나이츠에서도 한번 공략을 시도하기 위해선, 최정예로만 구성된 파티를 끌고 가 며칠 밤낮을 고생해야 할 정도. 한데 그런 마계 보스와 관련된 아티펙트가 시작의 섬에 존재한다니, 믿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그럴 수가…….” 하람의 놀란 표정을 잠시 응시하던 세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자네를 부른 이유를 이해하겠지?” 하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가 적임이군요.” “그럼 하겠다는 말로 듣고, 믿고 맡기도록 하지.” “물론입니다.” “길드 자원은 얼마든지 요청해서 사용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라는 얘기다.” “예, 팀장님.” 하람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마계와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했던 적 없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건 있었다. “그런데 팀장님.” “음?” “혹시… 의뢰자가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람의 질문에, 세진은 다시 한번 웃었다. 질문의 이유가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믿을 만한 의뢰인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그렇다기보단…….” “괜찮다. 의뢰자의 정보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면 헛수고만 하게 될 테니… 그 정도 궁금증은 당연한 거지.” 품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낸 세진이, 하람의 앞 탁자에 툭 내려놓았다. “자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 것 같은데.” [바르가-VARGA] [채유현(Chae Yu-hyun)] [검희 : The Sword Maiden] 그리고 그 명함을 확인한 하람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검객이자, 세계 플레이어 랭킹 30위 안에 랭크되어 있는 최상위 랭커. 검희 채유현의 의뢰라면, 신뢰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 * * 존잘남은 잘 싸웠다. 그러니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는 얘기다. 긴장이 풀렸는지 말이 좀 많아지긴 했는데……. 뭐, 괜찮다. 트롤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일만 잘하면, 이 정도는 참아줄 만한 수준이다. “데이브 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니까. “제가 조금 더 도움 드릴 수 있습니다!” 됐다니까 그래. └ 캬, 방장도 방장이지만, 우리 존잘남 생각보다 잘치는데? └ 확실히 재능 있는 듯. 성좌들의 말대로다. 난 방금 이 녀석과 처음 합을 맞춰본 뒤, 기존의 평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봤을 땐 적당히 재능있는 헌터 지망생 정도로 판단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는 넘는 것 같다. └ ㅇㅇ;; 방장이야 이상한 놈이고, 레오 저 친구도 잠재력 상당할 듯? 이상한 놈이라니. 이거… 칭찬 맞지? └ 근데 방장 이 ㅅㄲ는 드라이어드 사냥법을 어케 아는 거임? ■■■에서는 최소 몽마의 협곡이나 가야 간신히 등장하는 정령일텐데. └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서 예습했겠지. └ 달빛정원에서 드라이어드 나온다는 걸 알아야 예습하는 거 아님?;; └ 그것도 그러네;;; 지금 우리가 상대 중인 몬스터인 드라이어드는, 식물 형태의 소환물을 지속적으로 소환하는 까다로운 몬스터다. 그래서 이 전투에서 내가 레오에게 맡긴 롤은, 변이 전 단계의 소환물인 ‘포자’를 파괴하는 것. 드라이어드는 일반적으로 스킬 쿨이 돌 때마다 필드 사방에 포자를 소환하는데…. 이걸 10초 안에 파괴하지 못하면 상당히 까다로운 식물형 몬스터로 진화한다. 그러니까 내가 드라이어드들의 본체를 상대하는 동안, 레오에게 이 포자를 파괴하는 역할을 맡긴 것. 스릉-! [문워든 스포어(Moonwarden Spore)가 파괴되었습니다.] [문워든 스포어(Moonwarden Spore)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존잘남은, 내가 맡긴 임무를 정말 깔끔하게 수행해 내고 있었다. 분명 드라이어드를 처음 상대해볼 텐데 말이다. ‘게다가 실력이 점점 진화하고 있어.’ 심지어 웨이브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레오의 검술 실력은 점점 더 향상되고 있었다. 흠, 이 정도 가능성이면 데려다가 좀 키워볼까? 솔직히 좀 혹한다. 앞으로도 파티 던전을 공략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생길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니 헌터 일 계속하려면 쓸만한 파티원 하나 정도 확보해두면 좋긴 한데……. “데이브 님 그런데 진짜 대단하십니다.” “예?” “그 많던 드라이어드를 거의 다 잡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착한 것 같다. 아니, 뭔가 순박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대체 이번 던전 웨이브가 왜 이렇게 된 건진 모르겠는데, 데이브 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얘는 아무래도 이 히든 기믹을 내가 의도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부분에서 좀 맹한 구석이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뭐, 1회차 뉴비 유저의 기준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귀찮게 설명해야 할 상황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 “별말씀을요. 레오님이 잘해주셔서 제가 편했는데요.” └ 맞지 맞지. 우리 존잘남이 다하긴 했지. 하씨. 이런 도발에 긁히면 안 되는데. └ 방장아, 앞으로도 레오좌는 좀 데리고 다니면 안 되냐? └ ㅇㅇ우리 레오 있으니까 이 방에서 나갈 수가 없네 ㅎㅎㅎ 어쨌든 성좌들의 뻘소리와 별개로, 레오는 괜찮은 파티원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던전 공략이 끝나면 일단 친구등록부터 시도해 봐야겠다. 레오가 출연하고 나서 시청자가 2배쯤 늘기도 했고 말이지. └ 잘생긴 게 최고야. [ON Air : ☺ 76] 레오도 스트리밍을 켜긴 했다는데, 왜인지 성좌들은 내 방송 시점에서 레오를 관찰하는 걸 더 선호하는 듯했다. 그렇게 해야 존잘남의 활약이 더 잘 보인다나. 참고로 레오의 스트리밍 채널은, 날 만나기 전까지 시청자가 0명이었다고 했다. └ 얘도 잘 키우면 랭커 가능한 수준 아니냐? └ ㅇㅇ 서포트 잘 받으면 되겠는데? 에이. 그 정돈 아니지. 너무 나갔습니다 성좌님들. 얘가 랭커급 재능이면, 난 탑 랭커 찍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와 함께 열심히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2페이즈의 몬스터 웨이브도 끝이 보인다. 띠링-! [숲과 달빛의 정령, 문워든 드라이어드(Moonwarden Dryad)를 전부 처치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모든 파티원이 생존하였습니다.] [잔여 시간 : 7분] 메인 웨이브를 전부 정리했으니, 이제 정예 웨이브만 상대하면 2페이즈가 전부 끝날 거다. [메인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잠시 후 정예 몬스터가 등장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지막. 3페이즈 필드 안에서, 히든 던전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리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단순히 7분 더 버티는 것으로 클리어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무조건 7분이 지나기 전에 정예 웨이브를 처치해 내는 게, 히든 던전 오픈을 위해 필요한 마지막 조건이거든. [이브라실의 하수인, 뮤르베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잠깐.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브라실의 하수인? 내가 아는 그…… 뮤르베스??’ 이건…… 예상을 좀 벗어났는걸? └ 와;;; 드라이어드 뜨더니 이번엔 뮤르베스라고? └ 마계 몹은 에반데;;; └ 이거 버그 아님? 쿠쿵- 고오오오-!! 굉음과 함께 광장 가운데 포탈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골격을 가진 괴수 한 마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브라실의 하수인 뮤르베스(Lv20)[에픽] 후우. 네가 지금 대체 왜 나오는 건데? 키에에에엑-! 녀석의 포효를 마주하자, 순간 어질어질해진다. 내가 알기로 여기서 뮤르베스가 등장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 이곳의 ‘균열’이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을 경우뿐이다. 음. 그러니까……. -감히 균열에 손을 대다니,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 히든 기믹 달성한 게, 지구 서버에서는 진짜로 내가 처음이라는 말인 거지? 1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성좌들은 신났다. └ 캬- 드디어 방장 ㅈ되는 거 보냐? └ 중급 마수 어서 오고. 아무리 이제까지 기행(?)을 보인 나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쉽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 방장 몇 분 버텨야 됨? └ 이제 한 7분 남았을 듯? └ 뮤르베스 상대로 7분?ㅋㅋㅋ 방장앜ㅋㅋ 귀환 스크롤 그냥 미리 찢는 게 어떰? -싫은데요. └ 크으, 패기 보소. └ 이 친구 ㅋㅋ 뮤르베스가 무슨 달늑 친구인 줄 아는 듯? └ 에픽몹이라도 다 같은 에픽이 아니라고ㅋㅋㅋ 사실 성좌들의 이런 반응은 당연하긴 하다. 원래대로라면 마계 필드에 서식하는 뮤르베스는, 100레벨도 넘는 에픽 몬스터거든. 베타 서버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거의 200회차가 다 돼서야 처음 잡아봤을 만큼 강력하고 까다로운 몬스터가 바로 뮤르베스였다. 그러니 아무리 20레벨짜리로 등장했다 해도, 오전에 잡은 달그림자 늑대 같은 에픽 몹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 ‘여러모로 더러운 녀석이지.’ 기괴한 외형의 마수와 눈이 마주치자, 절로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후우.” 예상했던 상황 아니냐고? 솔직히 아니다. 지구 서버가 오픈한 지도 1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이놈이 남아있을 거라고 어떻게 상상을 하겠어? 게다가 지금 입장하려는 히든 던전은 진입 루트가 한 군데 더 있다. 그쪽으로 진입하려면 ‘진실의 거울’이라는 아티펙트가 필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진입 루트가 다양한 만큼, 발견하기 쉬운 던전이란 얘기다. 그러니 당연히 히든 던전을 발견한 플레이어가 이미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고. 수문장인 이놈은 이미 처치됐고, 균열도 열려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거다. 이놈까지 있을 줄 알았으면 안전하게 15레벨은 찍고 여기 왔을 텐데. 조금 꼬이긴 했다. 솔직히 지금 상태에서는, 나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러면 진짜 단 한 번도 실수하면 안 되겠어.’ 7분 버티는 게 어렵겠냐고? 사실 성좌들의 호들갑과 달리, 버티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얘가 까다로운 건, 지옥 같은 재생능력 때문이거든. 다만 히든 던전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버티는 거로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다. 기믹 수행을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생명력이 미친 듯이 회복되는 녀석이라……. 7분 안에 잡으려면, 실수를 단 한 번도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한 거다. 스스스스슷-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뮤르베스의 몸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넝쿨이 복잡하게 뒤엉켜있어, 마치 촉수괴물을 연상케 하는 뮤르베스. 녀석의 몸체를 중심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넝쿨들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고, 그와 동시에 난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이어서 넝쿨 사이,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심연의 악몽을 꾸게 해주마. 녀석의 시퍼런 눈이 나를 노려봤다. “데이브 님.” 어느새 내 옆에 다가선 레오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괴물도… 상대할 수 있는 거죠?” 자세를 잡은 레오의 두 눈에는 확실히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드라이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불안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와 합을 맞추며 수십 마리의 드라이어드를 격파한 경험이,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공격적으로 움직여 봐야겠다. 물론 레오가 아직 이 괴물을 상대할 수준은 아닐 테지만…….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내가 먼저 어떤 식으로 공략하는지 보여주면, 흉내 낼 정도는 되지 않을까? [뮤르베스의 심장에서 마기가 깨어납니다.] 그러니까 버티기만 잘해보자 레오야. 너한테 딜 넣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까. └ 레오야 안된다ㅠㅠ 너라도 스크롤 찢고 튀자ㅏㅏ └ 뮤르베스 화났다ㄷㄷㄷ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솔직히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뮤르베스를 향해 겨눈 레오의 검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는 푸른 빛깔의 아지랑이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우와, 대박……! 이거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뭔데……? 설마 신검합일을 흉내 냈다고? * * * 게이트 안의 세계는 방대하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게이트 안에 밝혀진 필드만 전부 다 합쳐도 지구 전체 넓이의 절반은 되는 수준이라 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이 세계 안에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불모지도 존재했다. 가령 1년 전에 처음 발견된 ‘마계’ 같은 곳 말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잿빛 성채에서 새로운 ‘재앙의 탑’ 흔적을 발견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마계가 불모지인 이유는 당연히 엄청나게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현시점 공식적으로 ‘랭커’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레벨이 100레벨이었는데, 이 마계 필드는 잡몹도 전부 100레벨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니 랭커로만 구성된 파티가 진입해도 일반 필드부터 고전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이곳, 마계. 때문에… 마계 대부분의 필드가 불모지로 남은 건 너무 당연했다. “게다가 거기에 3차 전직의 단서가 있는 것 같다는 거고.” “여러 번 말하게 만들지 마. 피곤하니까.” 때문에 ‘검희’ 같은 최상위 랭커들의 기준에서도, 마계에서의 게이트 공략은 항상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보상이 있기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고 말이다. “잿빛 성채라……. 지난번에 갔다가 정말로 죽을 뻔했었는데.” “쫄리면 뒈지시던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검희는 지금 3차 전직 퀘스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잿빛 성채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전 세계에서 아직 열일곱 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3차 전직. 현재 세계 플레이어 랭킹 28위에 랭크되어 있는 검희가 3차 전직에 성공한다면, 10위권 안쪽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이 정도의 보상이라면, 확실히 목숨을 걸 만하지 않은가. 평소 단독으로 움직이길 선호하는 검희가 나서서 원정대를 꾸리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말이다. “어허, 쫄리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아니야?”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실까.” 원탁을 사이에 두고 검희와 마주 앉은 남자. 검희와 마찬가지로 랭커인 ‘벽력창 류강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뭐 얻는 게 있어야 움직이는 거 아니겠어?” “LP가 필요하단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류강호는 랭킹 47위로, 검희보단 떨어지지만 그래도 최상위 랭커였다. 같은 바르가 길드 소속인 류강호는 원래부터 검희와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맨입으로 이런 위험한 퀘스트를 도와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용기병 레이드 도와줘.” “지난번에도 도왔잖아?” “마룡의 창 먹을 때까지.” “……그게 언제 나올 줄 알고.” “나도 너 3차 전직까지 군말 없이 도울게.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냐?” “젠장.” 류강호는 피식 웃었다. 못마땅한 표정과 별개로, 그녀는 승낙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건 단순히 류강호가 강력한 하이랭커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금 검희가 공략하려 하는 잿빛 성채는 현존 최상위 난이도 필드 중 하나였고. 이곳의 공략경험이 있는 랭커는 흔치 않았으니까. 아마 한국 플레이어 중에서 꼽아 보자면 다섯 명이 채 안 될 텐데, 류강호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무려 다섯 차례나 잿빛 성채에 들어갔었고 말이다. 한 번의 원정경험이 전부인 검희로서는, 류강호가 절실히 필요한 파티원이었다. “밥값은 할 테니까, 표정 푸시고.” “능글맞기는.” 검희와 눈이 마주친 류강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딜은 사실상 성립됐으니,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좀 더 해볼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없으면 잿빛 성채에 들어가도 의미가 없다면서.” “맞아.” “이미 다 구해둔 건가?” “내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건 전부.” 류강호의 눈빛에 살짝 이채가 띄었다. “그 말은…….” “하나 남았어.” “그게 뭔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커피를 입 안에 털어 넣은 검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라투스의 깃발.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있거든.” * * * 각성자 커뮤니티의 플레이어들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시작의 섬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 어딘가요? 거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답할 터다. └ 그거야 당연히 몽환의 봉우리임ㅇㅇ └ 어지간하면 거긴 안 가는 게 좋을걸. └ 솔직히 뉴비존에 좀 가혹한 필드라고 생각하긴 해. └ 뭐, 본인 재능이 개 쩔어서 랭커도 가능할 것 같다. 이런 사람은 가도 됨 ㅋ └ 그런 수준 아니면 몽환의 봉우리는 비추요. └ 마즘. 거기서 사냥 안 해도 시작의 섬 졸업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그만큼 몽환의 봉우리는 악명 높은 사냥터였다. 플레이어 사망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시작의 섬에서도, 매년 심심찮게 인명사고가 벌어지는 필드가 바로 몽환의 봉우리였으니까. 때문에 시작의 섬 고인물인 백하람 또한, 이곳에 올 때는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 그는 혼자였다. ‘여긴… 꽤 오랜만에 오네.’ 하람이 이곳에 혼자 온 이유는, 사냥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필드를 샅샅이 뒤지는 것. 이제껏 가 본 적 없던 필드의 구석구석까지 싹 다 뒤져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인원이 많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스하아아아-! 갈라진 지면 곳곳에서 스산한 소리와 함께 자줏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것들을 피해 안전지대로 들어선 하람은, 짧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신이 가능한 암살자 계열의 클래스로 전직했다면 수색 작업이 훨씬 쉬웠을 텐데. 애초에 전직이란 걸 할 수 없는 시작의 섬 플레이어다 보니, 수색도 무식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 말고, 찬찬히 움직여 보자.’ 하람은 마음의 여유를 좀 갖기로 했다.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어차피 하루 만에 탐색을 끝내는 건 말이 안 된다. 몽환의 봉우리가 그렇게 좁은 필드도 아니었거니와……. 그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맵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하는 수색 임무였으니까. 물론 플레이어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북쪽 봉우리’를 첫 번째 타겟으로 잡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목적물을 찾아낼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람은, 진실의 거울을 들어 필드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희귀한 아티펙트인 진실의 거울은, ‘왜곡된 공간’을 찾아낼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아마 ‘제라투스의 깃발’이 숨겨져 있다는 히든 필드도, 왜곡되어 비틀린 공간 안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한 게 말이 안 됐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시작의 섬에서 이걸 들고 다닐 일은 없을 테니……. 그런 히든 필드가 있었다면 발견되지 않을 만도 했겠어.’ 하람은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시작의 섬 다른 지역도 샅샅이 뒤져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제라투스의 깃발’ 같은 특별한 물건이 시작의 섬에 숨겨져 있었다면. 다른 지역에도 그런 히든피스가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노다지일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탐색이 시작된 지 두세 시간 정도가 지나자, 하람의 머릿속에서 잡념은 전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후욱.” 탐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투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죄다 선공몹이라… 피해 다니기가 생각보다 어렵네.’ 또 한 차례 전투를 치른 하람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지금 탐색 중이던 필드만 마무리되고 나면, 마을로 돌아가 정비를 한 번 해야 할 듯했다. ‘이번 임무. 생각보다 길어질지도…….’ 터벅- 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안전지대를 찾은 하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수통을 열었다. 퐁- 그런데 손에 힘이 빠져서인지, 그만 마개를 놓치고 말았다. “어…!” 하람이 앉아 있던 곳은 고지대였고, 때문에 수통의 마개는 비탈길을 따라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뭔가를 발견한 하람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 뭔가 있다!’ 분명 비탈을 따라 점점 가속도를 붙이며 굴러 내려가던 수통의 마개가,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궤적을 그리더니 허공에 부딪치며 튕겨 나온 것이다. ‘거울! 거울을 확인해야 해.’ 직감적으로 뭔가 있음을 느낀 하람은, 서둘러 인벤토리를 뒤져 ‘진실의 거울’을 꺼내 들었고. 우웅- [‘진실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이어서 거울에 비친 것을 확인하고는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있어! 있다고!” 물론 거울에 곧바로 ‘제라투스의 깃발’이 비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숨겨진 결계가 있는 건 확인한 것이다. ‘침착하자. 일단 좌표부터 기록을 해 두고……!’ 진실의 거울에 비친 것은……. 평범한 산비탈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몽환적이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공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제부터 찾아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 결계를 해제할 수만 있으면 저 공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임무 수행 하루 만에 이 정도 성과라니. 아마 어지간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상관 윤세진도, 이 보고를 받으면 꽤 놀랄 터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어?” 진실의 거울을 돌려가며 숨겨진 공간을 꼼꼼히 확인하던 하람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뭐지? 잘못 본 건가?’ 거울로 숨겨진 공간의 모든 부분을 구체적으로 비춰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방금, 이 안쪽에서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설마 누가 선수를……!’ 마음이 급해진 하람은, 서둘러 길드 메신저를 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보고한 뒤 인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목적물을 놓칠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피어오른 탓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띠링-! 눈앞에 떠오른 광경에, 하람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시작의 섬 히든 던전, ‘고대의 달빛정원’이 최초로 클리어되었습니다.] [마계 제13군단장 ‘제라투스 의 깃발’ 아티펙트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밤의 추적자(No.967)’ 아이템이 최초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몽환의 봉우리’에서, 낮은 확률로 ‘하프 라이칸(에픽)’ 몬스터가 등장합니다.] 1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린 해냈다. 무려 첫 공략에 뮤르베스를 처치하고 히든 던전을 열었단 얘기다. 띠링-! [‘뮤르베스’의 마기 봉인에 성공하였습니다.] [‘뮤르베스’가 ‘회복 불가’상태가 되었습니다.] [파티원 ‘레오’가 ‘뮤르베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브라실의 하수인 뮤르베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균열의 문지기가 처치되었습니다.] [특별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만월의 힘이 뒤틀린 공간에 깃듭니다.] 아무래도 레오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변수였던 것 같다. 거기서 신검합일을 갑자기 발동시켜버릴 줄이야. 사실상 부족한 딜이, 레오의 각성으로 해결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 뮤르베스를;; 잡…… 았다고? └ 근데 방장; 이거 걍 생존만 하면 되는 조건 아니었냐;;; └ 이 ㅅㄲ들;; 대체 뭐지……?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뮤르베스를 성공적으로 잡은 우리는… 그대로 히든 던전까지 주파해버린 것이다. 솔직히 뮤르베스도 잡은 마당에, 히든 던전의 난이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달빛 정원’의 숨겨진 균열을 발견하셨습니다.] [‘균열’에 입장 시, ‘고대의 달빛 정원’으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 ㄷㄷ 생존만 하면 클리어인데 왜 악착같이 잡나 했더니……. └ 뮤르베스 처치가 히든던전 오픈 조건이었나보네. └ 뭔가 내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야……. └ 원래 시작의 섬 뉴비들이 드라이어드도 썰고 뮤르베스까지 잡고 그러는 거임?;;; 수금도 당연히 빼먹지 않았고 말이다. -자, 성좌님들, 보셨죠? 약속들은 지키셔야겠지? └ ㅅㅂ;;; 이ㅅㄲ랑은 내기 같은 거 하면 안 될 듯. [‘3회차 무림고수’님이 1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이걸 진짜 히든 던전을 찾아버리네;;; [‘견습마법사 메오’님이 65LP를 후원하셨습니다.] 내기에서 진 성좌들이 앓는 소리를 해댔지만, 그거야 뭐 내 알 바 아니었고……. [고대의 반마(半魔), ‘라이칸’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오히려 한 가지 걱정됐던 건, 히든 던전 클리어에,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라는 정도. 5인 권장 던전을 2인으로 진행하다 보니,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러닝 타임이 길어지면 호객… 아니, 성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런데 성좌님들, 이거 고대 달빛정원은 시간 좀 많이 잡아먹을 텐데, 지루하시지 않을까요? 다행히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 어어? 설마 여기서 빼는 거 아니지 방장? └ 상도덕 뭔데;; └ 진행시켜! 당장 들어가라고 ㅅㅂ └ 지루하다는 놈 있으면 바로 쳐내!! └ 일주일 내내 헤딩해도 상관없음ㅋㅋㅋ └ ㄹㅇㅋㅋ 열화와 같은 성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라이칸(Lykan)’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라이칸(Lykan)’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 캬- 이거지. └ 대-이브ㄷㄷㄷ 전투 보는거 댕맛있네 그냥;; └ 히든 던전 찾은 거야 그렇다 치고;; 이 ㅅㄲ 진짜로■■■플레이어 맞나? ㅈㄴ 말도 안 되는데. └ 걍 전투 센스가 미쳤는데? └ 이게 뉴비? 이게 뉴비? 심지어 히든 던전을 진행하는 동안 오히려 점점 더 불어나는 시청자 수. └ 소문 듣고 왔습니다;; └ 시작의 섬에서 히든 던전 찾았다는 게 ㄹㅇ임? [ON Air : ☺ 132] 이게 바로 행복 라이카 아닐까? [‘그레이프 백작’님이 2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마, 살살 해라 아우님. 게다가 밖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경험치도 달달했으니, 백작님의 미션을 진행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고 말이다. └ 엌ㅋㅋㅋㅋㅋ 백작좌 이제 슬슬 쫄리는 듯? └ 쫄릴 만 하긴 햌ㅋㅋㅋ 이거까지 클리어하면 거의 14랩 찍힐 거 같은뎈ㅋㅋ └ 웃지마라ㅅㅂ 나도 쫄리니까. └ 데이브형…… 조금만 살살 가면 안 될까. 되겠냐?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대 달빛 정원의 주인, ‘쉐도우 라이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쨌든……. 그렇게 장장 여섯 시간에 걸친 공략 끝에, 우린 결국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제라투스의 하수인, ‘쉐도우 라이칸’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고대의 달빛정원’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서버 최초로 ‘히든 던전’을 클리어하여 명성을 100만큼 획득합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아주 달달한 보상까지 보스로부터 쏟아져 나왔고 말이다. 우우웅-! └ 오 쒜에엣. └ 2번째 불기둥 on? 크으-! 루나베일(Lunar Veil)세트 어서오고. [‘달의 장막 팬던트(세트)’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달의 장막 귀걸이(세트)’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니냐고? 아니다. 루나베일 세트는, 고대 달빛 정원의 최초클 보상이거든. 뭐, 아직까지 여길 아무도 찾지 못했던 상황 자체가 운이 좋은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 없긴 한데……. “미, 미쳤다.” 어쨌든 레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루나베일은 3티어 장비 중에서 몇 안 되는 세트 템이니까. 파츠당 못해도 500LP이상의 득템을 한 셈.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최초 클리어 보상 중에서도 메인 디쉬는 따로 있었으니까. [마계 균열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마계 군단장의 숨겨진 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 마계 13재앙 중 하나인 제라투스의 신물. [마계 제13군단장 ‘제라투스 의 깃발’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무려 세 가지 히든 클래스의 전직 조건 아이템인, ‘제라투스의 깃발’이 남아 있었거든. 근데 이건…… 지금 시점에 시세가 있긴 하려나? 제대로 된 주인 만나면, 10만 LP도 받을 만한 아이템이긴 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쉐토우 라이칸의 사체에서 황금빛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구궁- 구구궁-! 뭐, 뭔데? 이건 좀 무섭잖아……. 고오오오오-!! [고대의 신물이 차원의 균열에 잉태되었습니다.] [‘밤의 추적자(No.967)’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미친. 넘버링 템이라고? 시작의 섬에서? └ ㅅㅂ? └ 아니 이 ㅈ버그 뭐임????? 이거 진짜예요? [기여도에 의거하여, 던전 보상을 자동으로 분배합니다.] [‘달의 장막 팬던트(세트)’ 장비가 ‘레오’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달의 장막 귀걸이(세트)’ 장비가 ‘레오’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중략…… [‘제라투스 의 깃발’ 아이템이 ‘데이브’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밤의 추적자(No.967)’ 아이템이 ‘데이브’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혹시 꿈인가? 이거 뭐 개꿀잼 몰카… 그런 거 아니지? 띠링-! [명성 조건이 달성되어, 스트리밍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트리밍 등급이 UnRank 등급에서 Bronze 등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나 어쩌면 베타 서버에서 구르는 동안… 모든 불운을 액땜한 건 아닐까? * * * 연예인은 대중의 꿈과 욕망을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비춘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타라고 불렸고……. 그런 의미에서 게이트가 열린 오늘날,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바로 ‘랭커’들이었다. 그들은 게이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을 무찌르며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는 자들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위험마저 하나의 ‘쇼’로 바꿔버리는 존재였다. 랭커들은 수많은 방송과 기사 속에서 마치 신화 속 영웅처럼 포장되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곧 세상의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검희 채유현은, 그렇게 이중성을 가진 쇼 비즈니스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그 중심에 서 있는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니, 곧 후원사 미팅 있어요. 알죠?” “어, 알아.” 그래서 채유현은 늘 가면을 쓰고 다녔다. 대중은 그것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소비했고, 언론은 신비주의 전략이라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녀에겐 게이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즈니스조차, 전부 강해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텐션 좀 올려봐요, 언니이! 오늘 만날 광고주가 무려 ‘세광그룹’이라고요!” “어어. 그것도 알지.” 채유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걸까.’ 오늘 미팅이 잡혀있는 세광 그룹은, 매니저의 호들갑처럼 글로벌 대기업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아티펙트 제작·유통 기업으로, 비상장사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총액이 국내 최대인 공룡기업. 그러니 내키지 않더라도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여기서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으니까. ‘3차 전직까지만 성공하면……. 그러면 가능성이 좀 생길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채유현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그녀가 강해지는 것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것도, 결국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내가 발견한 게 히든 클래스가 맞다면……. 그 남자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누군가를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던 유현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어서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끌 만큼 끌었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했다. “지금 출발하면 안 늦지?” “네, 언니!” 주머니에 꽂아 넣으려던 스마트폰을 다시 들어 올린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건지 메시지 앱을 확인하였다. ‘역시, 아직인가?’ 지금 그녀가 가장 기다리고 있는 건, ‘의뢰 결과’에 대한 소식. 마계 원정을 시작하기 위한, 마지막 열쇠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으니까.’ 무려 실버 나이츠를 고용한 만큼 성공보수로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겠지만, 히든 클래스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비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현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또각- 또각-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지이잉-! 손에 들려있던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 유현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터치하여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화면 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 SKG 류강민 : 채유현 플레이어님, 의뢰 수행에 변수가 생겨 연락드립니다. 그에 당황한 유현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지만……. - 무슨 일이죠? 이어진 답변 내용은, 더욱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 SKG 류강민 : 히든 던전 수색에 성공하였으나, 목적물 확보에 실패하였습니다. - 예? - SKG 류강민 : 누군가 저희보다 한발 먼저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유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그럼 제라투스의 깃발은……. - SKG 류강민 : 그들이 가져간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적잖이 꼬인 듯싶었다. ‘후우. 좀 쉽게 풀리나 했더니.’ 하지만 여기서 접을 순 없었다. 목숨을 걸며 알아낸 3차 전직에 대한 단서를, 고작 이 정도의 변수 때문에 포기할 순 없었으니까. 제라투스의 깃발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상황이, 상정하지 않았던 변수도 아니었고 말이다. - 누군지 찾아 줄 수 있죠? - SKG 류강민 : 물론입니다. 그 정돈 해 드려야죠. - 의뢰 보수는……. - SKG 류강민 : 아, 이번 건은 지난번 착수금으로 충분합니다. - 그건 제법 반가운 소식이군요. 재수 없는 실버나이츠의 담당관이 조금 미심쩍은 소리를 하나 하긴 했지만. - SKG 류강민 : 저희도 그를 찾아야 할 이유가… 생겨서 말입니다. - 이유요? - 여기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녀에겐 상관없는 얘기였다. ‘제라투스의 깃발만 확보할 수 있으면 되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1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 * * 히든 던전까지 클리어한 뒤, 난 깔끔하게 방종 선언을 했다. -여기까집니다, 성좌님들. └ ??? └ 그게 머선 말임? -벌써 여덟 시잖아요. 저도 퇴근해야죠. └ ㅁㅊ놈임? └ 플레이어가 퇴근이 어딨음 ㅅㅂ;; └ 이 ㅅㄲ 14랩 찍었다고 여유 부리네. └ 3일 20랩 미션중에 방종하는 거 맞는 거임?;;; -워라벨은 소중합니다 형님들. └ Σ(; ・`д・´) └ 방장 이거ㅋㅋ 방종하고 뒷사냥 할 각임 └ ㄹㅇㅋㅋ └ 그러지 말고 방송 켜두자 방장 ㅠㅠ 말 안 시키고 조용히 볼게. 이 사람, 아니 성좌님들이…… 날 뭘로 보고? -저 뒷사냥 그런 거 안 해요. 낼 방송 켰는데 경험치 변동 있으면 바로 미션 실패 누르겠슴다. 됐죠? └ 아니;;; 진짜 끄려고? [‘그레이프 백작’님이 2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알지 방장? 난 우리 방장 항상 지지하는거. └ ㅋㅋㅋㅋㅋㅋㅋㅋ백작좌 빵긋 하는거 보소ㅋㅋㅋㅋㅋ └ 아니 방장아; 딱 15랩까지만 찍고 끄는 건 어떰? └ 좋은 듯? 방장 페이스면 딱 6시간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은데. 새벽 2시쯤 자는 건 괜찮잖아? └ ㄴㄴㄴ 방장 제발 하고 싶은 대로 해;; └ 방장도 쉬어야지;;;;; └ 여기 LP 물린 놈들 와이리 많놐ㅋㅋㅋ └ 아ㅋㅋㅋ‘안전자산’이라며?ㅋㅋㅋ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득템을 한 만큼 좀 더 라이카를 플레이하며 여운을 느끼고 싶었지만……. 오늘도 늦게 갔다간, 내일부터 엄마가 출근길에 미행할지도 모른다. 우리 김주연 여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었다. -그러니까 내일 봅시다 브로. -형님 내일은 몇 시 접속하세요? -형은 항상 8시 출근이야. -조심히 들어가십쇼 형님! 이제 말도 놓은 존잘남 레오와 친구 추가까지 한 나는, 망설임 없이 접속을 종료하였다. [로그아웃 장소 : 시작의 마을 - 베레쉬트] [플레이어 : ‘데이브(Dave)’] [‘라이카-Laika’의 세계에서 접속을 종료합니다.] [접속 해제 시간 : 19시 52분] 좋아. 퇴근 시간은 세이프 했고……. 그럼 이제, 매출 정산 한번 들어가 볼까? 〓〓〓〓〓〓〓〓〓〓〓〓〓〓 <2일 차 업무일지> 총 매출 : 1139LP 지출비용 : 20LP -지출 내역- 베레쉬트 귀환 스크롤 : 20LP 영업이익 : 1119LP 현재 잔여 LP : 1172LP 〓〓〓〓〓〓〓〓〓〓〓〓〓〓 ‘후아… 이게 다 얼마냐.’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산에서 실물로 보자 감개가 무량해졌다. 1172LP. 그러니까 거의 1200만원에 가까운 금액. 생전 처음 쥐어보는 거금에, 손이 다 떨릴 지경이다. ‘잡템까지 다 팔면, 100LP는 더 나오겠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자연스레 레오에게 돌아간 루나베일 세트가 살짝 떠올랐다. 그것까지 내 몫이었다면, 여기서 최소 1000LP가 더 늘어나겠지. 하지만 이거까지 아쉬워하면 너무 도둑놈 심보이긴 하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는, 루나베일 세트 따위와 비교조차 불가능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이 두 개나 들어와 있었으니 말이다. 넘버링 장비는 차치하고 제라투스의 깃발만 하더라도, 레오에게 돌아간 루나베일 세트보다 수십 배 비싸게 팔릴 터. 덕분에 행복한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이걸 대체 얼마에 팔아야 할까.’ 일단 제라투스의 깃발. 인벤토리에서 흑요석만큼이나 새까만 빛깔을 일렁이고 있는 깃발을 보며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로그아웃했는데 인벤토리는 어떻게 여는 거냐고? 헌터 등록이 끝나면 인벤토리 뿐 아니라 모든 시스템을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 〓〓〓〓〓〓〓〓〓〓〓〓〓〓 제라투스의 깃발 분류 : 장식물 - 깃발 레벨 제한 : 장착불가 등급 : 전설 티어 : 6T 내구도 : 10 / 10 보유 효과 마기 저항 +25 모든 능력치 +5 마계의 13번째 군단장, 제라투스의 깃발입니다. 제라투스의 깃발 보유 시, 그림자 군단에 속한 마수로부터 선제공격받지 않습니다. 〓〓〓〓〓〓〓〓〓〓〓〓〓〓 사실 제라투스의 깃발은, 마계 군단장의 아티펙트들 중 가장 희귀도가 낮은 물건이긴 하다. 등급이야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전설]이었지만, 티어가 6티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6티어면 엄청 높은 거 아니냐고? 맞다. 3티어 장비만 드랍돼도 공중제비를 도는 내 수준에서는, 엄청 높은 티어가 맞지. 다만 최소 8~10티어인 다른 군단장 템들에 비해 낮다는 소리다. 어쨌든 이 제라투스의 깃발이 가진 표면적인 가치는… ‘6티어에 전설등급 장식물 아티펙트’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터. 그러니 이와 비슷한 조건의 아티펙트를 거래소에서 검색해 보면……. [카심의 왕관(6T / 전설) : 15300LP] [발키리의 장식검(6T / 전설) : 21250LP] [마도공학 돋보기(6T / 전설) : 16080LP] 들쑥날쑥하긴 한데, 대충 1만5천~2만LP 정도의 시세는 형성되어 있다. 캬…… 2만LP면 얼마지? 2억? “크….” 2억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지만……. 사실 2억도 싸다. 일단 제라투스의 깃발을 ‘발키리의 장식검’ 따위와 비슷한 값에 파는 것부터가 너무 아깝거든. 무려 3차 전직 때 사용되는 히든 클래스 트리거 아이템이기도 하고……. 나중에 마계의 그림자 성채에서, 최상급 그림자 마수 에레보스 울프(Erevos Wolf)의 알로 교환할 수도 있는 특별한 템이 바로 이 깃발이니까. 아까도 살짝 언급했지만, 내 주관적인 적정 가치는 10만LP 정도다. 그러니까 10억. “……!” 10억이라니. 이 돈이면 우리 집 빚도 거의 다 청산할 수 있다. 솔직히 내게는 아직 감도 잘 오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이 이 10억이라는 돈이다. 으음. 딸깍- 어어,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버렸는걸? [‘제라투스의 깃발’ 아이템을 거래소에 등록합니다.] [판매가 : 100,000LP] [등록 수수료(0.1%) : 100LP] [판매자 : 데이브] [등록한 아이템이 14일 이내 판매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등록 해제됩니다.] [아이템을 등록하시겠습니까?] [Y / N] 그런데 막상 1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보니, 내면의 욕망과 불안이 꿈틀거린다. 혹시 지구에선 10만LP도 너무 싸게 파는 거면 어쩌지? 천 LP만 손해 봐도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그건 못 참지……. [판매가를 수정합니다.] [100,000LP ▶ 120,000LP] 왜 직접 쓸 생각은 안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쌀먹 2원칙을 얘기해줄 수밖에 없다. 첫째, 절대 스펙업에 투자하지 말 것. 둘째, 반드시 첫 번째 원칙을 잊지 말 것. “…….” 다시 말하지만 난 쌀먹 플레이어다. 계정에 억 단위로 투자하는 쌀먹 플레이어야말로, 모순이라는 단어의 형상화가 아닐 수 없다. 암. 쌀숭이는 오늘만 사는 법이지. [판매가를 수정합니다.] [120,000LP ▶ 150,000LP] 그런데 왜 계속 가격을 올리는 거냐고?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른다. 물건을 팔면서 혹시나 손해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만큼 쌀숭이를 미치게 만드는 게 없거든. 그러니까……. [판매가를 수정합니다.] [150,000LP ▶ 250,000LP] 딸깍- 이정도면 어떤데. [‘제라투스의 깃발’ 아이템을 거래소에 등록하셨습니다.] [판매 완료 시, 수수료 250LP를 제외한 금액을 수령합니다.] 제라투스의 깃발이 거래소에 등록됐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심신의 안정을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욱 후욱. 좋아. 이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면, 팔렸다고 후회할 일은 절대 없겠지? 6티어 전설 템을 누가 25억에 바로 사버리겠어. 다른 거 10배 가격인데. 사고 싶으면 최소한 거래소 통해서 흥정 요청을……. 띠링-!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제라투스의 깃발’ 아이템이 판매되었습니다.] [판매가 : 250,000LP] 곧바로 떠오른 메시지에 인지부조화가 와 버린 나는, 뇌 정지가 온 상태로 두 눈만 꿈뻑일 수밖에 없었다. [판매 수수료 : 250LP] [정산LP : 249,750LP] 잠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판매 등록한 지 정확히 1초 지난 것 같은데? [현재 잔여 LP : 250,764LP] “시팔?” 설마……. 이것도, 너무 싸게 판 거였다고? * * * 미팅을 마치고 나온 검희는, 마음이 꽤나 심란했다. 후원사 미팅이 잘 안 풀려서? 아니다. 미팅은 오히려 상당히 잘 풀린 축에 속했다. 후원사 측에서 어지간히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원하던 대부분의 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심란한 이유는, 당연히 ‘제라투스의 깃발’ 때문이었다. 그 물건을 손에 넣는 게, 지금 그녀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으니 말이다. ‘무리해서라도 꼭 손에 넣어야 하는데.’ 실버나이츠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했으니, 분명 소유자를 찾는 것까지는 금방일 터다. 다만 문제는, 그걸 가진 플레이어가 쉽게 내놓을 것이냐는 부분. 얼마를 부를지 이전에 그걸 팔려고 할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제대로 된 가치를 알아보겠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 될 터였다. ‘조급해지면 안 되는데…….’ 제라투스의 깃발에 대한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분명 관련된 단서를 가진 랭커들 사이에서 이슈가 될 거다. 그러다 보면 그녀의 3차 전직 퀘스트와 관련된 정보도, 퍼즐처럼 맞춰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를 견제하려는 불순한 놈들이 한 트럭은 될 터였으니까. 띠링-! [판매 목록을 갱신합니다.] 그래서 검희는 아까부터 틈날 때마다 거래소의 판매 리스트를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설마 제라투스의 깃발을 얻은 플레이어가 그걸 곧바로 거래소에 올릴 리는 없겠지만. ‘얼뜨기 플레이어가 운 좋게 먹었다고 해도, 최소 협회 감정 의뢰는 먼저 진행할 테니…….’ 때문에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띠링- 띠링-! [해당 검색어로 판매 목록을 갱신합니다.] [검색어 : 제라투스] 그냥 불안함을 달래기 위한, 큰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띠링-! 그래. 그러니까… 뭔가 검색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1건의 아이템이 검색되었습니다.] “어?” [이름 : 제라투스의 깃발] [가격 : 250,000LP] 때문에 이어진 검희의 행동은, 말 그대로 ‘조건반사’ 같은 거였다. 딸깍- 당황스럽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전에, 반사적으로 검색된 물건의 구매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제라투스의 깃발’ 아이템을 정말 구매하시겠습니까?] [Y / N] 그리고 다음 순간…….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라투스의 깃발’ 아이템을 거래소에서 구매하셨습니다.] ‘뭐, 뭐야. 진짜 구매된 거야?’ 가격이 얼마였더라? 20만LP? 그쯤 됐던 것 같은데……. 내가 그만큼 LP를 들고 있었나? 후원사 계약금이 들어왔을 테니, 가능했을지도? “……!” 꽤나 비싸게 산 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사졌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3차 히든 클래스 [광휘의 검성] 전직 퀘스트를 받아내야 하는 그녀에게라면. 이 정도 출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심장박동이 빨라진 검희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확인한 그녀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는 그녀가 구매한 제라투스의 깃발이 진짜였다는 것. “헉.” 두 번째로는 그녀가 제라투스의 깃발을 구매하고 남은 금액이……. [현재 잔여 LP : 215LP] 자투리에 가까운 액수였다는 것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검희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300LP만 부족하게 들고 있었더라도 깃발은 사지지 않았을 터. 어쩌면 이게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떠오른 것이다. ‘판매자가 만약, 내 거래소 잔고까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면?’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한번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온갖 의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애초에 이 깃발을 얻은 인물이 보통 인물일 리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으으, 뭔가 당한 기분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돈도 아까워졌다. 실버나이츠의 의뢰 완수 비용이 10만LP였던 걸 생각하면 2.5배 정도 프리미엄을 주고 산 셈인데……. ‘젠장.’ 사람이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고 했던가. 얼마가 들어도 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판매자 정보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일까…….’ [판매자 : 데이브] 기회가 된다면 찾아가서, 정체가 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2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실버나이츠에는 다양한 조직이 있다. 대외적으로 실버나이츠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제 1기사단부터 시작해서……. 기사단 선발전을 주관하는 인사팀, 그리고 소수 정예로 구성되어있는 특임단까지. 그런데 그중, 대중들에게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특수 조직 아르카나(ARCANA)였다. 모든 조직 중 유일하게 마스터 이현무의 직속인 조직으로, 길드 안에서도 거의 모든 활동이 대외비로 분류되는 조직. 랭커 류강민은, 이곳 아르카나의 1팀장이었다. “고생했네 하람.” “아닙니다, 의뢰 수행에 실패하여 송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 아르카나 본부에는, 인사팀 소속 플레이어인 ‘백하람’이 소환되어 있었다. 그가 소환된 이유는 당연히 최근 진행했던 임무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 임무’가 인사팀을 통해 하람에게 맡겨진 이유도, 아르카나에서 윤세진 팀장에게 요청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아냐, 아냐. 단기간에 위치를 특정한 것만 해도 훌륭했지.” “…….” “게다가 자네 덕분에, 이렇게 2차 추적도 쉬워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람은 오늘부로 의뢰를 다시 아르카나에 이관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임무 진행 과정의 플레이 녹화본을 류강민 팀장에게 전달하였다. 목적물의 2차 추적을 위함이었다. ‘그 실루엣.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었는데.’ ‘제라투스의 깃발’을 손에 넣었을 그 수취인. 그를 찾아달라는 의뢰인의 재의뢰가 있었다고 했다. 이미 그 의뢰인이 제라투스의 깃발을 손에 넣었다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진실의 거울에 비춘 그 흐릿한 잔상만으로 대상 특정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찾아내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아르카나라면…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그러니 하람으로서는 더 이상 이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알겠네. 기사단 선발전 날 다시 보자고.”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렇게 하람이 아르카나의 사무실을 나서고 나자, 장내에는 다시 적막이 맴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똑똑- “팀장님, 접니다.” “들어오지.” 새로운 인물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래. 정보는 취합해 왔고?”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앉지.” 류강민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화면을 띄운 뒤, 강민의 앞으로 슥 밀어 올렸다. “일단 확인해 보시죠 팀장님.” 자연스레 태블릿을 받아 든 류강민의 시선이, 화면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고유 아이템(No.967) - 밤의 추적자] [前 각인 플레이어 - 샤르딘(사망)] [現 각인 플레이어 – ???] [분류 : 망토] [장비 최대 레벨 : 30] ……후략…… 미동조차 않은 채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강민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차를 잠시 홀짝인 뒤 작게 입을 떼었다. “흐음. 그럴 만하군.” “뭐가…… 말입니까?” “아아, 아니야. 못 들은 거로 하지.” 류강민은 피식 웃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월영의 창기사. 혹은, Shadow Lance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자. ‘확실히…… 3기사단장. 녀석이 침을 흘릴 만한 아이템이야.’ 만약 그에게 이 넘버링 아티펙트가 돌아갈 수 있다면, 3기사단의 전력은 배로 강해지리라.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고, 그렇게 된다면 실버 나이츠의 위상도 더더욱 높아질 터다. “후후.” 그런 의미에서 강민은 결심을 굳혔다. 국내에서 열 번째로 등장한 이 고유 아이템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3기사단장의 손에 쥐여 주기로 말이었다. * * * 철컥-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김주연 여사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아들, 지각이야?” 벽걸이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정확히 8시 20분. “아, 엄마. 이 정돈 봐줘라 좀.” 20분 정도 지각했지만, 이럴 줄 알고 변명거리를 만들어 왔다. “이거 사느라 늦은 거야, 진짜로.” 한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비닐봉지를 스윽 건네자, 미간에 잡혀있던 김주연 여사의 주름이 살짝 펴진다. “이게 뭔데?” “엄마랑 시율이가 좋아하는 거.” “뭐, 족발?” “엄마도 알잖아, 이놈의 족발집 줄 엄청 긴 거.” “아, 알지.” “일당 챙겨서…… 반반 대짜 사 왔어. 이 정도면 20분 늦은 거 인정?” 그때 복도 끝 방문이 벌컥 열리며, 대답이 다른 곳에서 들려온다. “어, 인정. 완전 인정이지.” 후우. 이시율이 이 시간에 벌써 집에 와있을 줄은 몰랐다. 이 자식… 매일 10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더니, 구라였잖아? “오늘은 독서실에서 공부가 잘 안 되더라고.” “지랄. 언젠 됐음?” “오늘만 그런 거거든?” “어제는 친구 만나느라 독서실 못 갔다며?” “어젠 약속이라 어쩔 수 없던 거고.” 어쨌든… 중짜 살지 대짜 살지 살짝 고민했었는데, 대짜 안 샀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점심도 걸러서 뱃가죽이 등에 붙었는데……. 족발 킬러가 둘이나 가세한 이상, 중짜였으면 아마 내가 먹을 건 몇 점 되지도 않았을 거다. 2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놓고 그런 걸 왜 고민하냐고? 제기랄. 25억을 번 게 아니라 5억을 잃어버린 기분이라서 그렇다. 그냥 30억에 팔걸. 아니, 35억에 팔아도 됐을 것 같은데……! ‘크흐윽.’ 아직 넘버링 장비가 남아 있는 것 아니냐고 위로를 해줘도,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넘버링 장비를 떠올린 순간 속이 더욱 쓰려지기만 한다. 왜냐고? 그건 지금 팔 수도 없는 템이거든. 모든 넘버링 장비는 조건부 귀속이니 말이다. ‘대체 기적 같은 확률로 왜 이딴 게 떨어지는 거냐고.’ 파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닌데, ‘해방’이라는 걸 해야 팔 수 있다. 해방이라는 건 어떻게 하냐면……. 넘버링 장비를 한계 레벨까지 성장시키면 된다. 물론 해방된 넘버링 장비는 부르는 게 값인 수준이겠지만. 문제는 해방까지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도 알 수 없다는 거다. 성장형 장비의 장비 레벨을 올리려면, 경험치 대신 다른 장비가 먹이로 필요하거든. 심지어 먹이도 가려서, 자기와 같은 등급의 장비만 처먹는다. 게다가 성장할수록 당연히 등급이 높아지니, 30레벨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고오급 먹이를 줘야 할 터. 밤의 추적자는 최대 전설등급까지 성장하니까……. 휴우. 신화는 아니네. 최하위 넘버인 900번대 장비라 그나마 다행이다. 〓〓〓〓〓〓〓〓〓〓〓〓〓〓 밤의 추적자 분류 : 고유(No.967) - 망토 레벨제한 : 없음 장비 레벨 : 1/30 등급 : 희귀 (성장형) 티어 : 2T (성장형) 내구도 : 500 / 500 주 능력치 모든 능력치 +20 어둠 공격력 +30 *장비레벨 성장 시, 모든 능력치가 증가합니다. - 옵션 어둠속성을 가진 모든 스킬의 등급 +1 어둠속성을 가진 모든 스킬의 위력 +20% 회피 +10 *영혼해방 시, 모든 옵션의 수치가 2배로 강화됩니다. 태고의 존재. ‘밤의 주인’의 애장품입니다. 어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깊은 밤의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영혼 해방 시, 계정 귀속이 해제됩니다. 〓〓〓〓〓〓〓〓〓〓〓〓〓〓 역시 넘버링 장비라 그런가, 옵션 하나는 기가 막히긴 하다. 어둠 올스킬 강화라니. 게다가 레벨도 아니고 등급이 +1이다. 영웅 스킬이면 전설 등급이 되고, 전설 스킬이면 신화 등급이 된다는 소리. 거기에 스킬위력 +20%까지. 어둠계열 딜러가 보면 눈 돌아갈 만하겠는걸? 하지만 뭐……. “…….” 내 입장에선 진짜 계륵이 따로 없다. 만약 베타 때 이걸 먹었다면 행복회로가 돌다 못해 다 녹아 없어져 버렸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넘버링 장비는 쌀숭이와 상성이 최악인 아이템인 것 같다. 이걸 들고 있는 것만으로, 꽤나 위험해질 수도 있고 말이지. * 넘버링 장비의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1. 넘버링 장비를 최대 레벨까지 성장시킨 뒤 ‘해방’할 것. 2. 넘버링 장비의 소유자를 처치할 것. - 각성자 위키 - [넘버링 장비] 항목에서 발췌. ‘넘버링 장비만 보면, NPC들조차 환장을 하는데……. 지구의 플레이어들이라고 다를 리 없지 않을까?’ 참고로 베타 플레이를 할 때도, 이 넘버링 장비 때문에 여러 번 사망을 경험해야 했었다. 내가 넘버링 장비의 ‘각인 플레이어’로 등록된 순간, 승냥이 같은 놈들이 호시탐탐 목숨을 노렸거든. 그러니까 이거 랭커 급이 되기 전에는 사실 장착도 하면 안 되는 장비다. 장착하는 순간 각인되면서, ‘각인 플레이어’에 [데이브]라는 이름이 그대로 박혀버리니까. 그건 어떻게 확인하냐고? 라이카 시스템이 그냥 제공해버린다. 바로 이렇게. 고유(No.966) - 태고의 옥새 각인 플레이어 - 미발견 고유(No.967) - 밤의 추적자 각인 플레이어 - ??? 고유(No.968) - 별빛 단검 각인 플레이어 – 미발견 고유(No.969) - 악의 심장 각인 플레이어 - 미발견 ……후략…… 흐음. 켠 김에 구경 좀 해봤는데, 예상과 조금 다른걸? 천 종의 넘버링 아이템 중, 미발견 아이템이 거의 9할에 육박할 줄은 몰랐다. 플레이어가 나밖에 없던 베타 서버에서도, 500번 대 뒤쪽 장비들은 항상 절반 이상 주인이 있었는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후우.” 어쨌든 내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열심히 쌀먹해서 이 돈 먹는 하마 녀석의 배를 잔뜩 불린 다음……. 최대한 빨리 해방시켜서, 고대로 거래소에 팔아버리는 것 말이다. 뭐, 해방까지 해낸다면야… 한강변 아파트를 몇 채도 살 수 있는 거액을 벌게 되겠지만. ‘거래소에서 25만 LP 다 태우면 몇 레벨쯤 찍을 수 있으려나?’ 아무래도 그 길은, 상당히 험난할 게 분명했다. ‘천천히 거래소 모니터링하면서, 급매 물건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매입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래도 15레벨이나 찍히려나 모르겠네.’ 생각해보니 25만 LP를 다 태울 수도 없다. 이런 시한폭탄을 인벤토리에 달고 다니게 된 이상, 좀 비싼 보험도 하나 들어놔야 하거든. ‘호루스의 깃털. 그게 시세가 한 1만LP정도였던가?’ 〓〓〓〓〓〓〓〓〓〓〓〓〓〓 호루스의 깃털 분류 : 잡화(소모성) 등급 : 신화 티어 : - 내구도 : - * 고유능력 -호루스 신의 가호- 아이템의 소유자가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을 시, 해당 공격을 무효화시킨 뒤 ‘호루스의 신전’으로 전송합니다. * ‘호루스 신의 가호’는, 알테리온 대륙 안에서만 발동됩니다. * ‘호루스 신의 가호’ 효과 발동 시, 호루스의 깃털은 소멸합니다. 〓〓〓〓〓〓〓〓〓〓〓〓〓〓 찾아보니 1.3만 LP정도 되는데…… 비싸다고 여기서 돈 아끼면 미친 놈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 우리 집에 빚 갚는 건, 아무래도 이 족쇄로부터의 해방 이후가 될 것 같다. 일단 빚부터 해결하면 안 되냐고? 나 무섭다니까? 위험한 거 들고 다니기 싫다고! “으으.” 내가 혼자 죽상을 하고 있었는지, 옆에서 족발을 뜯던 엄마 딸이 슬쩍 눈치를 본다. “오빠, 오빠는 안 먹어?” 김주연 여사도 슬쩍 한마디 보탰다. “아들, 오늘 일당 다 써버린 건 아니지?” 거, 비슷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아셨대? 눈치 하나는 알아드려야 한다니깐. “그런 거 아니에요, 속이 좀 안 좋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족발 한 점을 집어 올리는데, 이시율 이 녀석이 매를 벌기 시작한다. “오빠.” “또 왜.” “속 안 좋은데… 족발 먹어도 돼?” 이것이? 따악- “아야!” 찰지게 딱밤을 때려줬지만, 족발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엄마도 내 편이란 말씀. “그래, 이 녀석아. 오빠 입에 족발 한 점 넣어주지는 못할망정.” “쒸이. 지가 속 안 좋다잖아! 내가 걱정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족발 부족할 걱정?” “아니거든!” “후우.” 귀환자의 쌀먹 라이프가 어째 너무 순탄하다 했다. 그래도 이 난관만 해결해 내면……. 나, 행복해질 수 있는 거겠지? 2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다음 날 다시 접속했을 때, 성좌들은 날 미친놈 취급했다. └ ??? └ 제라투스 깃발을 쌀먹했다고? └ 진짜임? 얼마에 팔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팔아먹었다는 사실만으로 말이다. └ 쌀먹이… 컨셉이 아니었다고? 저기요. 단 한 순간도 컨셉이었던 적이 없는데요 형님들……. └ 아니, 방장 고인물 아니었냐;;; └ 제라투스 깃발 팔아먹은 건 ㄹㅇ로 찐뉴비 냄새 나긴 하네 ㅋㅋㅋ └ 당연히 뉴비지ㅋㅋ ■■■플레이어가 어떻게 고인물임?;; └ 그럼 뉴비가 히든 던전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ㅋㅋ └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선생님;;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예요;; └ 좀만 묵혀놨으면 ㅅㅂ 마계에서 쓸 데가 얼마나 많은 템인데!! └ 얘 아직 시작의 섬이라 마계는 너무 멀긴 해 ㅋㅋ └ 그래도 그렇지ㅠㅠ 그게 돈 있다고 살 수 있는 템이긴 하냐고……. 성좌들 반응을 보니, 그래도 이 친구들은 제라투스 깃발의 사용처를 어느 정도 아는 느낌이다. 하지만 상상도 못 하겠지. 내 표정이 썩은 건, 팔지 말아야 될 걸 팔아서가 아니라 너무 싸게 팔아서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뭐…….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고. └ 그런데 넘버링 템은 또 어디감? └ 밤의 추적자는 안 낌? 그나마 다행인 건, 넘버링 템에 대한 설명은 추가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 지금 절대로 그거 장착하면 안 되지ㅋㅋㅋ 알 만한 친구들이 왜 이러실까 ㅋㅋ └ 분탕 아웃! 방장 오래 보고 싶다고 ㅠㅠ └ 방장아, 너 담그려는 ㅅㄲ들이 있는 것 같은데? └ 다행히 방장이 그 정도로 바본 아닌 듯 ㅋㅋ 성좌들도 확실히 라이카를 해본 건지, 쪼렙 때 넘버링 장비를 장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 지켜줄 수 있는 길드 같은 데 들어가는 것도 방법일 듯. └ ㅇㅇ 믿을 만한 길드 있으면 시팅받으면서… 넘버링 템 사용까지 하는 게 제일 베스트일 것 같은데? 그래서 굳이 내 창대한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넘버링 장비 해방시켜서 쌀먹 한다는 소릴 하면, 그땐 진짜로 폭주할 녀석들이 많을 것 같았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 아 ㅋㅋ 방장 빨리 랭커 다는 거 보고 싶네 ㅋㅋㅋ └ ■■■ 열리려면 ■■남았나? 솔직히 이런 페이스면 진짜 그 안에 랭커 찍을지도? 진심으로 내가 랭커까지 달리길 기대하는 친구들도 이제 꽤 많아진 듯 보였거든. 랭커가 목푠데 넘버링 템을 쌀먹해 버린다? 그것도 해방까지 완성한 장비를……?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그거만큼 제정신 아닌 짓도 없긴 하단 말이지. -자, 일단 오늘도 닥사 드갑니다, 형님들! 그러니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지금 시점엔 본업에나 충실한 게 맞다. └ 구우웃! 가보자고! └ 오늘 최소 16렙은 찍어야 할 텐데, 가능? 본업이 뭐냐고? 그야 파밍이지 뭐. 적어도 20레벨 찍기 전까지, 이제 허튼짓할 시간은 없거든. └ 이 ㅅㄲ 오늘은 또 무슨 미친 짓거리 할지 기대되긴 해 ㅋㅋㅋ 때문에 성좌들이 기대하는 그런 미친 짓거리(?)는 딱히 보여줄 수 없었고……. 그렇게 정신없이 사냥을 하다 보니. 띠링-!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5레벨이 되었습니다.] 하루가 지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7레벨이 되었습니다.] └ ??? 17을 찍었다고 오늘? └ 이게 말이 됨???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9레벨이 되었습니다.] └ 방장ㅅㄲ 진짜로 20 찍을 생각이었네 ㄷㄷ 그럼, 아닌 줄 알았어? * * * 이틀이 지나는 동안, 성좌들의 아우성은 매일 더 심해졌다. 레벨업만 해서 지루해하는 것 아니냐고? 다행히 그건 아니다. 다만… 이 녀석들은 내 근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 아니, 방장아. 좋은 말로 할 때 연장근무 하자 오늘은? └ 아니;; 8시에 퇴근하는 플레이어가 대체 어딨냐고;; 아니, 칼출근에 칼퇴근. 이게 대체 뭐가 문젠데? └ 애초에 퇴근이라는 단어 자체가 웃김 ㅅㅂ └ 그리고 6시 출근이면, 어? 6시까지 도착해서 일할 준비까지 싹 해둬야 그게 6시 출근이지. 예? └ 그러니까 일 더 하셈ㅇㅇ 지금 퇴근은 납득 불가임. └ 이게 맞다. └ 개추요. 후우……. 역시… 모든 산업재해는 자본가의 타살임이 분명하다. 필연적인 죽음이자 사회적 타살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야만 한다. 무슨 소리냐고? 퇴근하겠다는 뜻이다. -미션 긴장감 떨어져요, 형님들. 완급조절도 좀 해야죠. 그리고 사실,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인 것도 아니거든. 아직 김주연 여사의 권위에 도전하기엔… 시기상조라고 해야 할까. [‘그레이프 백작’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완급조절은 개뿔. 그냥 노방종 가자 방장아……. └ 백작좌ㅋㅋ포기한거 보소ㅋㅋㅋ └ 아ㅋㅋㅋㅋㅋ어차피 이 페이스면 미션은 클리어긴 해 ㅋㅋㅋㅋ └ 뭔데; 오늘 안 봤더니 벌써 19레벨임?? └ ㅇㅇ심지어 경험치 78% 채웠음ㅋㅋㅋ └ 와씹ㅋㅋㅋ 미션은 몇 시간 남은 거지? └ 18시간ㅋㅋㅋ 자고 와도 거의 10시간 남음ㅋㅋ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귀환 5일차. 오늘도 새벽 6시에 칼 같이 출근한 나는, 기계처럼 사냥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기한 건, 하는 게 사냥밖에 없는데도 시청자 수가 줄기는커녕 조금씩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ON Air : ☺ 103] 3일 전에도 130명이 넘지 않았었냐고? 맞는데, 방송 켜자마자 3분도 채 안 돼서 모인 시청자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최대 시청자로 따지면, 어제 무려 200명을 돌파했었단 말씀. 어쩌면 오늘은 250명을 돌파할지도 모른다. └ 내일부터는 출근 시간이라도 확실히 맞춰주는 거 맞지 방장? -아니, 이미 칼출근이라니까요? └ 어허, 6시에 이미 사냥 중이어야 칼출근인거야. └ 그럼. 8시 칼퇴하는 놈이 양심이 있으면 출근 시간은 지켜야지 암. 아니, 나 지각한 적 없다니까! 후우. 성좌 놈들이 사는 세상에는 죄다 블랙기업 밖에 없는 걸까? 6 to 8에 사실상 식사 시간도 따로 없는 고강도 업무를 왜 자꾸 폄하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나 일벌레 아니냐고! 억울하다. 물론 성좌들은 내 억울함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 오늘도 고대 달빛 정원인 거지? 그럼요. 일단 20 찍을 때까지는 여기만 한 고효율 사냥터가 없는걸요. 그나저나 여기, 파티 던전 아니냐고? 맞다. 그러니까 난, 3일째 레오와 2인 고정 파티였다. 레오가 내 일정에 완벽히 맞춰준 것이다. ‘다른 파티원을 구할 필요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솔직히 시작의 섬에서 레오보다 나은 파티원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이 녀석 외 다른 플레이어에게 히든 던전의 정보를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크, 오늘도 칼같이 오셨네요 형님.” “고럼.”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형님 덕에 저까지 부지런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손발도 첫날보다 훨씬 잘 맞아서, 클리어 타임도 거의 절반 가까이 줄였다. 클탐이 줄었다는 말은, 파밍 속도가 그만큼 빨라졌다는 얘기. 그러니 레오에게는 제법 고마웠다. “자, 그럼 준비는 다 된 거지?” “옙!” 심지어 이 녀석, 어제 오후부터는 경험치를 버리면서까지 날 돕고 있다. 어제 오전에 이미 20레벨을 찍었으니 시작의 섬에서는 더 이상 경험치 획득이 불가능한데, 계속해서 나와 함께 던전을 돌고 있는 거다. 뭐, 본인도 나와의 파티 플레이가 크게 이득이니 이러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 아니겠어. [‘고대의 달빛 정원’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이제는 공략이 워낙 익숙해진 탓에, 던전에 입장해서도 우리는 잡담을 떨고 있었다. “근데 레오야.” “네, 형님.” “넌 전직 언제 하려고?” “형님 전직하실 때 할 겁니다!” “나?” “어차피 오늘이면 형님도 20레벨 찍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하루 정돈 경험치 못 먹어도 괜찮습니다. 흐흐. 형님 덕분에 이미 레벨업 속도가 오버페이스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직이라. 레오의 말처럼 확실히 난 오늘 전직을 해야 한다. 아무리 늦어도 오전 안에는 20레벨이 찍힐 예정이니까. 전직을 안 하고 시작의 섬에서 파밍을 더 한다? 그런 경험치 손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긴 하거든. “그러게, 나도 슬슬 전직 고민하긴 해야 하겠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슬슬 노선을 확정하긴 해야 하는데……. 사실 선택 장애가 좀 온다. 베타 때는 항상 요정이 제안하는 방향으로 클래스를 선택했기 때문에, 자의로 전직하는 건 처음이란 말이지. “어……? 형님은 당연히 검사 클래스로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왜?” “그야 완전 검술 재능충 이시니까…….” 친구야, 아부는 고맙긴 한데…… 내 재능은 사실 다 고만고만하단다. 관리자 요정 인증 ‘무재능 용사님’한테 재능충이라는 실례되는 발언은 좀……. “흐음.” 아마 천 회차 정도 됐을 때였나? 요정님은 내 재능을 정확히 한 줄로 정의했었다. 너무 뼈 때리는 말이라,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못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의 상태는……. 검을 제일 장시간 쓴 건 맞지만, 재능만 놓고 보면 활이나 마법이 더 나을지도 모르고. 소환술이나 정령 쪽을 골라도 특별히 더 못나거나 특출나지 않은 그런 상태란 말씀. 아, 물론 돈 많이 드는 직업은 싹 다 배제하긴 해야 한다. 그러면 생각 외로 선택지가 많이 줄어들지도……. “크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오가 갑자기 위험한 발언을 한다. “아무튼 형님.” “엉?” “전, 형님이 파티 안 해주실 때까지는 계속 따라다닐 겁니다.” “……!” “그러니까 저 버리시면 안 됩니다!” 뭐야, 방금 그 멘트는 좀 무섭잖아……. 존잘남이 집착하니까 상당히 부담스러운걸. └ 으악!! 레오야 안된다!! 잠깐……. 성좌님, 방금 그 발언은 뭐죠? 뭐가 안된다는 건지. └ 이런 시커먼 놈이 뭐가 좋다고!! └ 누나가 잘해줄게ㅠㅠㅠ 얼른 ■■■까지 올라와 우리 레오ㅠㅠㅠ 후우. 아무래도 성좌라는 놈들 중에는, 사상이 불온한 녀석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다행히 정상적인 친구도 있긴 하지만 말이지. └ ㅅㅂ우리 방장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개추요. 만약 레오가 존예녀였다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2배 정도는 행복하게 라이카를 플레이할 수 있었을 텐데……. └ 그랬으면 레오가 방장이랑 파티 해줬겠음?ㅋㅋ └ ㄹㅇㅋㅋㅋ 아, 팩트로 후두려 패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닙니까. 성좌님들 너무하네 진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대 달빛 정원의 주인, ‘쉐도우 라이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뭐, 어찌 됐든……. 우리는 10시가 조금 넘은 시점에, 오늘의 첫 번째 던전 클리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제라투스의 하수인, ‘쉐도우 라이칸’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0레벨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난, 성좌님들로부터 받은 두 번째 미션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할 수 있었다. └ 대체 어떤 ㅅㄲ냐…… 처음 안전자산 드립 친 ㅅㄲ……. └ 이걸 성공해? 이걸 성공해? └ 심지어 매일 8시간씩 숙면하고 와서도 시간이 남았음ㅋㅋ 자, 이제 수금 들어가야겠지? [‘그레이프 백작’님의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2000LP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명성이 +2만큼 증가합니다.] 캬, 2천만 원 어서 오고. [‘3회차 무림고수’님의 추가 미션금 250LP를 수령하셨습니다.] [‘망나니 2황좌’님의 추가 미션금 300LP를 수령하셨습니다.] [‘냉법 파티구함’님의 추가 미션금 150LP를 수령하셨습니다.] ……후략…… 수금을 모두 마치고 나니, 3천LP도 넘는 거액이 인벤토리에 추가되었다. 그래서 지금 내 인벤토리에 쌓인 LP는 무려……. [현재 잔여 LP : 255,246LP] 25.5만LP가 넘는 거액이었다. 2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최근 며칠 동안. 내가 하루 평균 벌어들인 LP는 후원을 포함해 1천 LP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제라투스의 깃발 같은 특별한 케이스를 배제했음에도, 무려 일당이 천만 원에 육박했다는 말이다. 이건 각성자 위키에 따르면……. 플레이어 상위 10% 수준의 벌이라고 한다. 레벨로 치자면 60레벨 대 후반 정도가 상위 10%쯤 될 거다. 어떻게 시작의 섬 플레이어가 60레벨이나 되는 상위레벨 플레이어들에 비빌 수 있는 거냐고? 상황이 좀 특수한 게 컸다. 지금 시점에서 고대의 달빛 정원을 돌고 있는 파티는 우리 파티 하나뿐이었고. 때문에 여기서 주로 드랍 되는 템들의 시세가 아주 달달했거든. 그러니 최근에 벌어들인 하루 1000LP라는 기록은, 히든 던전 독식에, 후원까지 잘 터져야 가능한 수치라는 소리다. ‘아마 히든던전빨이 좀 떨어지고 후원까지 배제한다면…… 득템이 없는 한 하루에 100LP정도 벌어야 많이 버는 수준이겠지.’ 물론 그 정도도 충분히 훌륭하긴 하다. 일당이 100만 원 가까이 되는 게, 어떻게 적은 금액일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지금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무슨 말이냐고? 띠링-! [아이템이 소멸되었습니다.] [아이템이 소멸되었습니다.] [고유(No.967) - 밤의 추적자 아이템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잔고를 탈탈 털어가며 고유장비에 먹이를 주다 보니……. 대략 얼마가 필요할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거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No.967) - 밤의 추적자 아이템이 ‘유일’등급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고유(No.967) - 밤의 추적자 아이템이 12레벨이 되었습니다.] 호루스의 깃털 한 장 사느라 쓴 1.3만LP를 제외해도, 순수 20만 LP는 태운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태우고 겨우 12레벨?’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LP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진짜 까마득하기 그지없다. ‘이거 해방까지 가려면, 추가로 100만LP는 필요할 것 같은데.’ 100만LP면, 매일 100LP씩 벌어도 30년 가까이 걸리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30년 만에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거면, 짧은 거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우리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는 게 아무래도 더 빠르지 않을까? “…….” “형님. 거래소 검색은 다 하셨어요?” “어, 얼추 끝났어.” 그러니까 짧고 굵게. 3년 안에는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그러려면 어제오늘처럼 일당 1000LP를 유지해야만 하고 말이지.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건 뭐다? “그럼 이제… 전직하러 바로 가실 거죠?” “가야지.” 얼른 전직을 해치우고, 이 시작의 섬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거다. “설마 클래스 아직까지 고민 중이신 건…….” “아냐, 이제 정했어.” 사실 고작 1차 전직이면서 전직에 대한 고민이 많은 건, 내가 머릿속에 들어있는 게 많아서다. 각성자 커뮤니티 좀 찾아봤는데, 지구 서버 플레이어들은 1차 전직에 대해 잘 모르더라고. 각성자 위키부터가 틀린 정보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 플레이어는 1차 전직에서 총 다섯 가지의 클래스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1. 항해자의 검 - 검사 2. 항해자의 활 - 궁사 3. 항해자의 지팡이 - 마법사 4. 항해자의 방패 - 기사 5. 항해자의 단검 – 암살자 일단 클래스 선택지가 다섯 가지밖에 안 된다는 부분부터가 틀려먹었고……. * 선택지에 따라 플레이어는 해당 계열의 클래스로 자동 전직하게 되는데, ‘차원의 항해’ 퀘스트에서의 활약에 따라 전직하게 되는 클래스가 다르다. * 아주 낮은 확률로 1차 전직에서도 히든 클래스를 획득할 순 있다고 하지만,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 어차피 50레벨부터 가능한 2차 전직에서 좋은 클래스를 얻는다면, 1차 클래스는 의미 없어지기 때문이다. 2차 전직을 진행하면 1차 클래스가 의미 없어진다는 부분도, 완전히 잘못된 정보라고 할 수 있겠다. * 때문에 1차 전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성에 맞는 클래스 방향성을 고르는 것이다. - 각성자 위키 - [넘버링 장비] 항목에서 발췌. 뭐,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게 적성에 맞는 클래스 방향성을 고르는 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한데. “그럼 출발하시죠 형님.” 어쨌든 레오 녀석도 특별히 아는 게 없는 것 같으니, 조금 도와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 둘은, 잠시 머물고 있던 대기 공간을 벗어나 던전 출구로 향했다. 띠링-! [‘시작의 섬- 몽환의 봉우리’ 방면 출구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달빛 정원을 통해 여기로 들어왔지만, 반대 방향의 숨겨진 출구로 빠져나왔다. 그 이유야 당연히……. ‘하늘 바다 선착장’의 위치가, 이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 * * 1차 전직 장소인 ‘하늘 바다 선착장’은, 시작의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선착장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하늘을 나는 배’를 타야 하는데……. 이 배를 타고 대륙까지 항해하는 것이, 1차 전직 퀘스트이자 시작의 섬을 벗어나는 퀘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흐으. 밑에서 볼 때는 못 느꼈는데, 진짜 한참 올라가야 하네요.” “컨셉이 좀 과하긴 해.” 심지어 선착장에 도달하려면 구름이 걸려있는 구간보다 위쪽까지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자꾸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파티원 ‘레오’가 몽환의 망령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선착장 가는 길에 리타이어 한다는 얘기들이 대체 왜 나오나 했는데, 은근 난이도가 있긴 하네요.” 어이, 그렇게 간단하게 몬스터들을 처치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그다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고? “에이, 아니죠. 형님 없이 혼자 왔으면 저도 고생 좀 했을 텐데요.” 나? 난 던전 나와서부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 레오 이 녀석은, 내가 무슨 버프 토템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형님이랑 있으면 전투가 더 잘 되는 느낌이에요 진짜.” 어쨌든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래, 고생해라.” 길 뚫어주는 버스기사 하나 있으니, 나야말로 정말 편하긴 하다. 덕분에 오랜만에 성좌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도 생겼고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은 오랜만(?)에 성좌님들과의 소통 시간. 이쪽도 주제는 역시 내 전직에 관한 것이었다. └ 방장 칼쓰는 거 보면 검 집는 게 정배긴 한데, 아무래도 뭔가 좀 아쉽단 말이지. └ 뭐가 아쉬움? 얘가 검사 안 하면 대체 뭘 함? └ 삽질 마스터라던가……. └ ㅅㅂㅋㅋㅋ 소통이라기엔 다소 원사이드한 느낌이긴 하지만……. └ 우리 아직 마법 쓰는 건 못봤잖음? 활 쏘는 것도 못 봤고 ㅇㅇ └ 그렇긴 한데, 다른 걸 검술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밸붕캐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쑥 ‘망나니 2황좌’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띠링-! [‘망나니 2황좌’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 그런데 방장, 뭐로 전직할지 정말 안 알려줄 거임? 압도적인 백작님을 제외한다면 현재까지 내 시청자 중 가장 큰 손답게, 든든한 후원과 함께 들어오는 질문. 그런데 내가 뭐라 대답하려던 바로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추가적인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불쑥 떠올랐다. 띠링-! [‘망나니 2황좌’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예? 미션이요? 이렇게 뜬금없이? 그래도 뭐가 됐든 미션은 참을 수 없긴 해. [미션 정보를 확인합니다.] 그런데 미션 내용을 확인한 나는 잠깐 뇌 정지가 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미션으로 걸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 1차 전직 성공 분류 : 미션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1차 전직 퀘스트에서, ‘검사’ 클래스로 전직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300LP 〓〓〓〓〓〓〓〓〓〓〓〓〓〓 그러니까 이거 지금…… 검사 클래스로 전직만 하면 300LP 주겠다는 거지? 쓰읍, 좀 곤란한데…….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미션 거절하는 걸 보고 싶은 게 목적이었다면, 성좌님은 성공했다. [미션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무리 내가 쌀숭이여도, 인생에 한 번뿐인 1차 전직을 미션에 휘둘려 결정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뭐… 리셋 가능한 베타 서버였다면 달랐을지도? └ ㅁㅊ;; 방장 미션 거절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 ㅋㅋㅋㅋㅋㅋ아니, 어차피 검도 잘 쓰면서, 검사 전직을 왜 거절하는 거임? 그런데 내 당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이 미션을 거절하자마자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띠링-! [‘4차원 대마법사’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3회차 빌런’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비슷한 미션들이 줄지어 걸려 올라왔으니 말이었다. -아니;; 대체 왜들 이러시는 건데요; 이 성좌놈들이 단체로 미치기라도 했는지, 죄다 전직 미션을 걸기 시작한다. 아니, 뭐 어디서 지령이라도 받았나? └ 방장 활 잘 쏨? -검 만큼은 쓰는데요. └ 그럼 한 번 해보자. 솔직히 활질도 재밌어. -화살이 너무 비쌉니다 형님. [미션을 거절하였습니다.] └ 예?ㅋㅋㅋ └ ㅅㅂㅋㅋ 쌀숭이 쉨ㅋㅋㅋ └ 화살값 때문에 궁사 싫다는 놈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네ㅋㅋㅋ └ 지팡이는 어떤데 방장. 법사 테크 한번 타 보쉴? [미션을 거절하였습니다.] └ 아닠ㅋㅋ 하겠냐고ㅋㅋㅋ └ 화살 비싸다고 궁사 싫다는 놈이 법사를 하겠음? ㅋㅋㅋㅋㅋㅋ 처음엔 어차피 거절할 테니까 장난으로 지른다고 생각했지만, 눈치가 빠른 나는 뭔가 이상함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지금 미션에 선택지 다섯 개 다 들어간 거 아냐?’ 물론 나야 숨겨진 선택지를 최종적으로 찾아갈 예정이지만……. 성좌들은 그걸 알 리 없으니,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후원을 하려는 거라고 생각해야 맞는 것이다. 심지어 잔뜩 쌓인 미션들을 확인해 보니, 미션을 건 대부분의 성좌들이 다섯 가지 선택지 전부에 미션금을 걸어놓은 상태. 이게 대체 뭐지? 눈먼 돈이 왜 이렇게 많은 건데! -다, 다른 미션! 다른 미션 주면 안 됩니까 성좌님들? 만약 내가 일반 루트를 탈 생각이었다면, 오늘 전직만으로 2~3천 LP는 벌 수 있는 수준이다. 모든 선택지에 그만큼의 금액이 각각 걸려있다는 얘기. 그러니까 너무 괴롭다. 기본 클래스 전직 생각이 절대로 없는 지금의 내겐… 이게 다 그림의 떡일 뿐이거든.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겁니까? 왜 그러는 건데요? └ 방장 반응 왜 저럼? └ ㄹㅇㅋㅋ 꽁돈 생길 때마다 공중제비 돌던 데이브 어디 감?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던 내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황금의 주인’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황금의 주인? 이건 처음 보는 이명인데. 유입인가? [미션 정보를 확인합니다.] 그런데 미션 내용을 확인했을 때. 내 두 눈은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 1차 전직 성공 분류 : 미션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1차 전직 퀘스트를, 아무런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고 클리어할 것.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5000LP 〓〓〓〓〓〓〓〓〓〓〓〓〓〓 잠깐만요 성좌님. 이거…… 진짜예요? 2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황금의 주인’ 이 녀석. 심상치 않은 녀석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미션을 건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제법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고 깨라고?;; └ ㅋㅋ이건 또 무슨 컨셉 미션임?ㅋㅋ └ ㅅㅂ신종 티배깅인가 ㅋㅋ └ 어이, 학생 그 미션 얼른 내려! 우리 방장이 다른 장난은 다 참아도 돈 갖고 장난치는 건 참지 못하는 편이야~ 아무래도 다른 성좌들은 이 황금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장난을 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마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는 줄 모르기 때문이겠지. [‘잊혀진 튜토리얼의 망령’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재밌네. └ 방장이 과연 알까? 뭐……. 조용히 있던 성좌들 중에서는 이 미션이 뭘 의미하는 건지 아는 녀석들도 있어 보였지만. 꿀꺽-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 5천만 원을 주머니 속에 넣느냐 마느냐의 선택이거든. └ 뭐야, 방장. └ 방장좌 지금 고민 중인 것 같은데? └ 이게 고민할 거리가 있나? └ 어……? 단순 장난 미션이 아니었던 거임? 이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성좌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에 어떤 해답을 줄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맹렬히 굴리느라 바빴으니 말이다. [‘잊혀진 튜토리얼의 망령’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오호? └ 너 진짜로 뭔가 아는 거야? 어떻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냐고? 그야 당연히 이 선택이 내게 가져올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하나씩 떠올려보는 중인 거지 뭐. 그러니까 황금의 주인이 제안한 이 히든 선택지는, 리스크도 크고 리턴도 큰 종류의 선택지였다. 내가 원래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해뒀던 루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면서 말이다. ‘원래는 좀 안정적이면서 월광검도 계속 쓸 수 있는…… 질풍검사 전직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선택하려 했었던 질풍검사(Tempest Blader)는……. 내가 전직해본 1차 히든 클래스 중 티어도 높으면서 가장 안정적인 클래스였다. 근거리 1차 전직 클래스들 중 효율적인 회피기와 돌진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 DPS도 거의 광전사만큼 뽑아낼 수 있는 그런 클래스였으니까. 구하기 좀 힘들긴 하지만 바람속성이 붙은 검을 얻는다면 포텐이 상당히 올라가기도 하고, 2차 전직 때도 괜찮은 선택지를 많이 가진. 검사 쪽으로는 최상급의 테크트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클래스가 바로 질풍검사였다. 하지만 이 클래스 역시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전직할 수 있는 클래스는 아니다. 일단 최초 선택지에서 ‘항해자의 검’을 고른 다음, 퀘스트 진행 중에 ‘창공의 괴조’를 처치하여 ‘괴조의 꽁지깃’을 획득하는 게 전직 조건인 클래스였으니까. “후.” 사실 다른 히든 클래스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일단 처음 주어지는 선택지 중 하나는 선택해 놓은 뒤, 퀘스트 진행 과정에서 추가 조건을 달성해야 하는 게 보통이거든. 그러니까 아무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 가능한 루트는…… 내가 알기론 단 한 가지뿐이다. ‘그 미친 클래스 랜덤 가챠를… 내가 본섭에서 고민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솔직히 황금의 주인이 아니었으면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던 선택지긴 한데……. 왜지? 고민을 거듭할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최악의 경우로… 전투 클래스가 아닌 생산 클래스가 뽑혀도 오히려 괜찮잖아?’ 내가 이 선택지를 안 떠올렸던 이유는, 베타 플레이를 할 때 고통받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애초에 히든 선택지다 보니 어지간하면 히든 클래스가 뜨긴 하는데……. 아무리 히든이라도 생산계열 클래스가 나와버리면 한 회차를 그대로 날려버리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0티어 히든 전투 클래스로 전직하고도 못 잡았던 마왕을, 생산 클래스로 대체 어떻게 잡냐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기선 마왕을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마왕은 다른 재능충 용사님들이 슥삭 잡아 주실 테니 말이지. 게다가 전지적 쌀먹 시점으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생산 클래스가 최고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걸? “흐음.” 고민하던 나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다. [‘1차 전직 성공’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절대로 5천만 원에 영혼을 판 건 아니다. 철저히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한, 아주 냉철한 결정이라는 말씀. ……아무튼 그렇다. [미션 성공 시 명예가 1만큼 증가합니다.] [미션 실패 시 명예가 1만큼 하락합니다.] └ 뭔데뭔데ㄷㄷ └ 이걸 수락해 버린다고? └ 와;; 이 ㅅㄲ 설마 전직 히든피스도 뭔가 알고 있는 거임?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고점 한번 뚫어 봅시다. 혹시 알아? 운빨 기가 막히게 터져서……. 베타에서도 못 먹어본 사기 클래스 뽑힐지? 0코스트로 장비 수리 가능한 사기급 대장장이 같은 거. 혹시 없으려나? * * * 원래 구름이라는 건 안개와 비슷한 수증기의 일종이다. 그래서 멀리서 볼 땐 하얀 덩어리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체가 점점 흩어져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코앞에 존재하는 이 새하얀 순백의 덩어리는, 어쩌면 구름이 아닌 ‘구름같이 생긴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그걸 헤치며 암벽을 타고 올라갔고, 그 위에 도달했을 때 몽환적이고 이질적인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하늘 바다 선착장. 그리고 구름에 반쯤 잠긴 채 비현실적인 비주얼로 하늘에 떠 있는 저 거대한 배가 바로……. [천공의 방주] 시작의 섬을 졸업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타게 되는, 바로 그 천공의 방주였다. “저희 운이 좋네요, 형님.” “그러게.” 레오의 말처럼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천공의 방주가 상시로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건 아니거든. 방주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시간은 완전히 랜덤인데, 시간으로 치면 24시간 중 4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보통 전직하러 여기 오면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데, 운이 좋게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형님, 이쪽인 것 같은데요?” “맞아. 저기로 들어가면 될 거다.” 이어서 선착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NPC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은빛과 금빛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머릿결. 오래된 항해복 같으면서도 신성한 사제복 같기도 한…… 금빛 별자리가 수놓아진 새하얀 제복을 입은 남성. “새로운 항해자가 도착했군요.” 그는 바로 이 방주의 주인이자, 1차 전직 퀘스트 NPC 루미엘이었다. [창공의 인도자 루미엘] “아……!” 그와 마주 선 레오는, 적잖이 감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 루미엘이라는 NPC는 라이카 세계관 안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몽환적이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녀석이거든. 각성자 커뮤니티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NPC 1위가 루미엘이라고 했다. 얼핏 봐서는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예쁘장하게 잘 생긴 얼굴이 원인일 거다. └ 캬- 방주 어서오고. └ 루미엘좌 오랜만에 보네 ㅋㅋㅋ 나도 처음 루미엘과 마주했을 땐, 아마 레오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그만큼 이 특별한 배경과 어우러지는 루미엘의 비주얼은 충격적이었으니까. 물론 천 번이 넘게 시작의 섬을 밟았던 내 입장에선…….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데자뷰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했지만 말이었다. 그러니까 난, 이 녀석이 우리에게 건넬 첫 번째 대사까지도 그대로 읊을 수 있었다. 외운 게 아니다. 외워진 거지. “당신은 진정 차원의 요람을 떠날 준비가 되셨습니까?” 역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구만. 아, 참고로 녀석이 말하는 ‘차원의 요람’이라는 건, 바로 이 시작의 섬을 의미하는 거다. “방주에 오른 순간,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대가 남길 수 있는 건 발자국 하나뿐이지요.” └ 크- 루미엘 대사는 오랜만에 들어도 지리네ㅠㅠ └ 대사가 아니라 외모가 지리는 거 아닐까; 후우, 누가 얼빠 성좌놈들 아니랄까 봐. └ 나도 1차 전직 다시 시켜주라 미엘아 ㅜㅜ └ ㄹㅇㅋㅋ 나도 다시 하면 잘 할 수 있어 미엘이형 ㅠㅠ 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가 말든가, 루미엘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우릴 향해 다시 입을 떼었다. “출항 준비는…… 되셨습니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플레이어에게 정말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 서서, 쳇바퀴처럼 해야 할 일을 할 뿐. 어쩌면 루미엘의 이러한 점이, 플레이어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방주를 타고 대륙으로 나가면, 더 이상 이런 NPC는 없거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대륙의 현지인들은, 시작의 섬 NPC들과 달리 그냥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소리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그 때문에 대륙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보다 먼저 선착장 안에 들어선 레오가 자연스레 루미엘의 앞에 다가섰다. 이제 그의 앞을 지나 갑판 위에 올라서면, 1차 전직 퀘스트인 [차원의 항해자]퀘스트가 자연스럽게 시작될 거다. 퀘스트를 받는 순간, 해당 플레이어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 파티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거냐고? 아니다. 이 퀘스트는 파티로 진행할 수 없거든. 뭐, 전직 퀘스트를 파티로 진행할 수 없게 해 둔 건, 어쩌면 당연한 거기도 한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레오가, 살짝 멈칫하며 내 쪽을 응시한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건네주었다. “먼저 들어가. 아까 말해준 거 잊지 말고.” “네, 형님. 도착하시면 메시지 줘요.” “오키.” 그런 녀석을 보며, 컨셉충 루미엘이 한마디 추가로 거들었다. 아마도 레오가 방주에 오르는 걸 망설인다고 느낀 모양이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멈춰선 바람은 썩기 마련이지요.” 흐음. 이 대사도 오랜만에 들어보네. “방주에 오르겠습니다.” 레오의 말에, 루미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서셨군요. 그럼 하늘이 당신을 인도할 겁니다.” 루미엘의 말이 끝나고, 레오가 갑판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이어서 걸음이 방주 위에 닿기가 무섭게……. 우우웅-! 그의 신형이 화사한 빛무리에 뒤덮여 천천히 사라졌다. [파티원 ‘레오’가 ‘창공의 항해자’퀘스트를 진행합니다.] [파티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 차례. 저벅-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 나는, 레오가 했던 대로 루미엘의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루미엘이 예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방주는 자유를 향한 이들의 발자취로 움직입니다. 당신도 그중 하나가 되시겠습니까?” 역시나 들어본 대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방주에 오르겠습니다.” “좋습니다. 빛의 신이 그대와 함께하시길.” 루미엘의 대사가 끝나자, 방금 레오와 마찬가지로 내 앞에도 갑판 위로 이어진 길이 생긴다. [‘창공의 항해자’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여기서, 레오처럼 곧바로 퀘스트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그야 당연히…… 클래스 랜덤 가챠를 위한 빌드업이다. “그 전에 루미엘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말에 루미엘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변화라 할 만한 게 생겼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 많지는 않을 텐데요. 뭐, 들어는 보죠.” 그리고 뭔가 있다고 느낀 성좌들도 주접을 떨기 시작했다. └ 뭔데뭔데;; └ ㅁㄷㅁㄷ └ 여기도 뭐 히든루트 그런 게 있었던 거임? └ 일단 본인, 자세부터 고쳐 앉았음. └ 아ㅋㅋ 1차 전직이 이렇게 흥미로울 일이냐고ㅋㅋ 이어서 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인벤토리에서 ‘광휘의 파편’ 아이템을 꺼냈습니다.] 운빨X망클래스 가챠. 아니…… [구도자의 제단]루트를 타기로 마음 먹은 직후, 거래소에서 거금 500LP를 들여 구매한 특별한 잡템. 내 손에 들린 작은 파편을 본 루미엘의 두 눈이, 상당히 크게 확대되었다. “……!” 그런 그를 향해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순례자의 유적에 들르고 싶습니다.” 2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대략 100회차 정도였나? 그 이전까지 난, 1차 전직에서 기본 선택지들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었다. 요정이 그런 건 안 알려주냐고? 절대로 안 알려준다. 뭐, 라이카 주식회사의 내규 상… 그런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건 불가능하다나 뭐라나. 때문에 요정은 내게 다양한 클래스를 권할 때도, 플레이 방향성 정도만 알려주며 유도했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처음 1차 전직의 히든 선택지를 알게 된 건, 일종의 ‘일탈’ 때문이었다. - 인도자님. 혹시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이건 그러니까 멘탈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있던… 100회차 언저리 무렵. 인도자 루미엘을 향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 혹시 이 방주를 타고… 다른 항로로 항해할 수는 없는 겁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 배를 타고, 대륙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갈 방법이 없는지 물어본 거다. 왜 그런 질문을 했냐고? 이걸 타고 지구로 돌아갈 방법도 있지 않을까 궁금했거든. 이건… 당시의 내 눈에 차원을 이동하는 배처럼 보였으니까. - 이 세계의 법칙은 완벽해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함이란 늘 누군가의 불완전함 위에 세워지니까요. - 그게 대체 무슨……. 물론 큰 기대를 하고 던졌던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너무 괴로워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던졌던 것에 가깝달까. 하지만 루미엘의 대답은 날 화들짝 놀라게 했었다. -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소립니다. - ……! - 태고의 빛을 사용한다면, 방주의 항로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주의 목적지는 변경될 수 없었다. 어떤 항로를 따르든 항상 이 창공의 방주는 알테리온 대륙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고, 그건 불변의 법칙이라고 했으니까. 다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몇 회차에 걸쳐 ‘태고의 빛’이라는 게 뭔지 찾아내려 애썼고. 그 결과 발견했던 게 바로 ‘광휘의 파편’이었다. 80레벨 즈음 도달할 수 있는 필드인 빛의 잔재가 남은 대지. ‘루멘티아’라고 불리는 고대 빛의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땐 시작의 섬에서 이거 구한다고 별짓을 다 했었는데…….’ 베타 때는 거래소에 매물이 거의 없어 베레쉬트의 암시장에서 겨우 구했던 아이템이지만. 지구 서버의 거래소에는 태고의 빛이 꽤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500LP나 태운 거 아니냐고? 5000LP를 벌기 위한 투자인데, 이 정도 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뭐. “이건 광휘의 파편……. 이걸 구해오는 항해자를 만날 줄은 몰랐군요.” 어쨌든 내게서 파편을 받아 든 루미엘은, 별다른 질문 없이 자신이 할 일을 수행하였다. “확실히 이 물건이라면 항로를 유적지로 바꾸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요.” “감사합니다.” 여러 번 느꼈던 거지만, 이 녀석은 쓸데없이 궁금해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단 말이지. 어쩌면… 궁금한 게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우웅-!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창공의 항해자’퀘스트가 ‘구도자의 제단’퀘스트로 변경됩니다.] [‘구도자의 제단’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어쨌든 나는 당연히 퀘스트를 진행했고, 이어서 내 앞에 깔려있던 은빛 기류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좌들은, 온갖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 와…… 1차 전직에 이런 선택지가 있었다고? └ 구도자 루트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는데;;;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네 ㅅㅍ;; └ 방장 대체 정체가 뭐임?; └ 우리 방장은 모르는 게 없다……. └ ■■■에서도 지금처럼 히든피스 뚝딱뚝딱 찾아내려나? └ 그랬으면 좋겠는데. 성좌들의 채팅이 점점 희미해지며, 시야가 점점 새하얀 빛무리로 가득 차오른다. 이어서 잠시 후.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창공의 방주’가 ‘순례자의 유적’에 정박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퀘스트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띠링-! 〓〓〓〓〓〓〓〓〓〓〓〓〓〓 구도자의 제단 분류 : 1차 전직 퀘스트 난이도 : S 당신은 ‘창공의 방주’를 통해, ‘순례자의 유적’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순례자의 유적은, 고대 루멘티아의 유적이 가장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 어딘가에 위치해있을 ‘구도자의 제단’을 찾으십시오. 그곳에서 신탁을 받는 데 성공한다면, 앞으로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상 : ??? 클래스 전직 〓〓〓〓〓〓〓〓〓〓〓〓〓〓 * * * 창공의 방주는 사실 ‘워프 게이트’ 같은 역할을 하는 기물이다. 나도 1회차 때는 이걸 타고 하늘을 나는 항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 광휘의 파편 없이 평범하게 이 게이트를 타도, 이런 식으로 워프되는 건 똑같다. 다만 중간 워프 지점이 순례자의 유적이 아니라, 평범한 전직 퀘스트가 진행되는 장소인 ‘어비스 게이트’일 뿐. ‘둘 다 전직을 위한 시험 장소라는 부분은 똑같지만 뭐…….’ 어쨌든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고대의 유적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는 정말 엄청나게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200회차 이후론,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흣-차.” 곧바로 몸을 일으킨 나는, 가장 가까운 구조물 안으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정신 못 차리고 멍하니 있다가는, 순식간에 뚝배기가 깨질지도 모르니까. 왜냐고? 이곳 유적에는 무려 25~30레벨의 몬스터들이 즐비하거든. 게다가 퀘스트가 시작된 순간, 내가 장착하고 있던 장비는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 또한 원래의 전직 퀘스트인, ‘창공의 항해자’ 퀘스트와 같은 조건이었다. 물론 어비스 게이트에서는 이 시점에 바로, 다섯 가지의 장비 선택지가 주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장비가 봉인됩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유적에선 그런 거 없다. 그러니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장비를 뭐라도 파밍하는 것이다. 사냥할 장비가 없는데 어떻게 파밍하냐고? 덜컥-! 신전을 뒤지다 보면 랜덤하게 장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 상당히 오랜만에 오긴 하지만, 그래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낡은 우물천장’을 파괴했습니다.] [‘순례자의 장궁’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녹슨 화살통’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 뭐임; 왜 이렇게 자연스러움? └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 무슨 패키지겜 스피드런 하는 것도 아니고;; 장비를 얻었지만 정보창 같은 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곳에서 얻는 장비는 티어도 등급도, 특별한 고유능력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좋고 나쁜 장비가 존재하긴 하는데, 그거야 기억하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순례자의 장궁’은 다행히 상위권의 성능을 가진 무기였다. 그러니 스타트는 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미리 알고 있던 지식으로 찾은 건데 왜 운이냐고? 운빨 클래스 가챠 퀘스트 답게… 파밍에서 얻는 장비 또한 매번 랜덤이거든. └ 그런데 장궁? └ 오ㅋㅋㅋ 이러면 방장 활 쏘는 거 볼 수 있는거임? └ 난 기억한다 방장앜ㅋㅋ 너 분명히 활도 검만큼 쓴다고 했었다? 물론이죠, 형님들. 저 그런 거로 거짓말 안 합니다요. 기기긱- 바로 화살 한 대를 꺼내어, 활시위에 걸어 올렸다. 몬스터도 안 보이는데 뭐 하는 거냐면……. 피이잉-! 이 첫 번째 파밍에서 장궁이 떨어졌을 때만 할 수 있는, 날먹 파밍을 시도하는 중이다. 쐐애액-! 시위를 떠난 화살은 신전의 공터를 가로질러 빠르게 쏘아져 나갔고, 거대한 석문을 지탱하고 있던 밧줄에 정확히 명중하였다. 촤륵- 콰콰쾅-! 이러면 석벽이 무너지면서, 신전 뒤켠에 숨겨져 있던 낡은 창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 ……? └ 뭐야, 활 쏠 줄 안다는 거 진짜였어? └ 걍 뽀록인 듯? 그리고 성좌들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난 여기서 두 번째 파밍을 진행하면 된다. [‘낡은 창고’를 수색하였습니다.] [‘순례자의 천옷’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젠장. 이번엔 꽝이다. 방어력이라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스탯을 가진, 최하급 방어구가 나와버렸다. └ 근데 방장 지금 뭐 하는 거임? 구도자의 제단인지 뭔지 찾으러 가야 하는 퀘스트 아니었음? └ ㅇㅇ퀘스트 목표 그거였는데, 왜 갑자기 엉뚱한 데 뒤지는 거임? └ 와 방장 시청자 좀 늘었다고 채팅 안 읽는 것 봐 ㄷㄷㄷ 성좌들의 채팅에 반사적으로 시청자 수를 확인해 본 나는 깜짝 놀랐다. [ON Air : ☺ 271] 신경 쓰지 못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새 동시 시청자 최고 기록을 훌쩍 갱신했으니 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진행 중인 히든 루트가, 성좌들의 관심을 끄는 모양이었다. └ 소통해요 우리~ └ 초심 어디갔냐 방장아;; └ 좀 알려주면서 플레이하라고;;; 우리도 뭐 좀 알고 보자;; 이쯤 되니 아무리 바빠도 성좌들의 아우성을 무시하기가 조금 어렵다. - 저 파밍 없이 나가면 그냥 끔살입니다, 형님들. └ 왜? 밖에 뭐 있음? - 성좌님들 프리즘 하운드 아시죠? └ 당연히 알지. └ 뭔데, 설마 그게 나온다고? 그거 거의 80렙 아님? - 이제 곧 그거 젠되기 시작할 거예요. 다행히 레벨대는 30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죠. 성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면서도, 나는 정신없이 움직이며 신전 내부를 파밍하였다. [‘순례자의 혁띠’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순례자의 지팡이’ 장비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크르르르-! 신전 바깥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쯤 해서 슬슬…… 기초 파밍은 마무리해야겠는걸.’ 도검류 장비를 하나도 못 먹은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평타 이상은 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전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이제 몹들을 사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췄으니, ‘생존’해야 한다. 크허엉-! └ ㅁㅊ… 진짜로 프리즘 하운드네. └ 방장 저거 잡을 수 있음? 30레벨인데? └ 중급 마수도 잡는 친군데, 하운드 정도를 못 잡겠냐ㅋㅋㅋ └ 지금은 월광검이 없잖음;; └ 삽으로 달늑도 때려잡은 양반이긴 해 ㅋㅋ 삽보단 활이 더 낫지 않을까? └ 방금 속사로 밧줄 맞춘 거 못 봤음? └ 이 ㅅㄲ 왠지 활도 잘 쏠 거 같아서 지금 ㅈㄴ기대하는 중; 기기긱-! 화살을 시위에 걸어 올리고, 침착하게 프리즘 하운드를 조준하였다. 가만히 멈춰있는 구조물을 맞히는 것보단 당연히 날뛰는 몬스터를 맞히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탓- 타탓-! 하운드가 거리를 좁히려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음에도, 난 상당히 신중하게 녀석을 조준하는 중이었다. └ 오, 폼은 그럴싸한데? 게다가 도검류같은 근접 무기 파밍도 실패한 상태. 화살이 빗나가기라도 하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뒈져라 무지개 똥개. 피이잉-! 너도 헤드샷 맞고 고통 없이 한 방에 가는 게, 피차 좋은 일 아니겠니 친구야? 쐐애애액-! 활시위를 떠난 내 화살이, 파공음과 함께 맹렬히 허공을 쇄도한다. 그리고 내가 시위를 놓음과 거의 동시에, 녀석 또한 허공으로 힘껏 도약하였다. 타앗-! 아마 화살을 피해보려는 움직임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소용없는 몸부림이다. 왜냐고? 애초에 이건 예측샷이었거든. 퍼억-! 녀석이 본능적으로 뛰어오를 수밖에 없는 지형지물. 그리고 타이밍. 그 순간을 정확히 노려 쏘아진 화살을, 저 육중한 몸으로 피해낼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었다. [‘프리즘 하운드’ 몬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프리즘 하운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정확히 녀석의 미간에 틀어박혔고.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동안 ‘기절’상태에 빠집니다.] 꾸웨에에엑-! 흡사 돼지 멱 따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거구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기기기긱-! 그 사이 나는 곧바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어 올렸으며……. 핑- 피이잉-! 연속해서 두 발의 화살이, 쓰러진 녀석의 머리통에 연달아 틀어박혔다. [‘프리즘 하운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프리즘 하운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첫발보다야 조금 덜 정교한 샷이었지만 상관없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인 녀석을 맞추는 건 훨씬 더 난이도가 낮으니 말이다. [‘프리즘 하운드’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나저나 활질도 은근 오랜만인 것 같은데……. 다행히 아직 녹슬진 않은 것 같은걸? └ ????? └ 헤드샷? 방금 헤드샷 뜬 거 맞음? 무수한 갈고리가 소환됨과 동시에, 성좌들의 채팅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올라왔지만……. └ 아니 뭔 첫발에 헤드샷을 띄움?;;; └ 대-이브! 대-이브!!! └ 뽀록 아니냐던 놈 어디감?ㅋㅋㅋ └ 이것도 뽀록이라고 해 보시지? 이것도 뽀록이라고 해 보시지??? 솔직히 헤드샷이 뜬 순간, 이정도 반응을 예상하긴 했다. └ 와;; 헤드샷도 헤드샷인데 속사 속도 뭐냐 ㄷㄷㄷ └ 이 정도면 이 새끼 검보다 활을 더 잘 쓰는 거 아님??? 한 큐에 헤드샷은, 사실 퍼펙트 패링보다도 더 난이도가 높은 수준이거든. └ 아니;;; 이런 재능을 갖고 활을 안 쏘는 건 범죄 아니냐??? 응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궁사로 전직할 일은 없어 형들. └ 이제 화살 세 발 쐈는데 주접 지리네 ㅋㅋㅋ 그래도 이런 채팅은 괜히 긁히긴 한다. 흠. 어떻게, 100년 이상 갈고 닦은 활 실력도… 한번 제대로 보여줘 봐? 2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심연의 어둠 망령, ‘미아렌 (Miarenn)’을 처치하였습니다.] [침묵의 해구를 탈출하였습니다.] 위이잉-!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레오의 주변으로 새하얀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창공의 항해자’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선택지 : 항해자의 검] [퀘스트 내용을 정산합니다.] 그리고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양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에게 적합한 클래스를 선정합니다.] [3…2……1…….]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첫 번째 관문’이라고도 불리는 1차 전직 퀘스트. 일반적으로 5~10회 정도는 트라이 해야 클리어 가능하다는 전직 퀘스트를 단번에 클리어했으니……. 레오의 가슴에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내 재능도 나쁘지 않은 건 맞겠지?’ 사실 레오는 최근까지 조금 주눅 들어 있었다. 데이브와 함께 플레이하기 시작한 이후, 자신의 재능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함께 전투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건 일종의 벽. 레오가 데이브에게서 느낀 것은, 노력 같은 부분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의 벽이었으니 말이다. ‘형님 말로는 본인 재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차라리 데이브가 잘난 척이라도 했으면 자괴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냥 이 사람을 규격 외의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데이브는 입버릇처럼 자신을 무재능 플레이어라고 이야기했고, 놀랍게도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니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레오로서는 자괴감이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 이런 사람도 재능이 없는 거면 난 대체 뭐지? - 그런데 랭커가 되겠다며 설레발을 치고 다녔다니……. 이런 식으로 사고가 흘러가면서,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어. 형님은 미친 재능충이 맞아.’ 그러나 레오는 바보가 아니었고,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데이브의 말이 그저 겸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레오는 데이브를 존경하게 됐다. 만약 데이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이야말로 보잘것없는 재능으로 지금까지도 랭커가 되겠다며 설레발을 치고 다녔으리라. ‘형님을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어.’ 게다가 데이브 형님은 관대하기까지 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어떻게든 숨기려 했을 고급 정보들도 서슴없이 공유해준데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도록 검술에 대한 조언도 틈틈이 해주었다. - 에이 거기선 조금 더 과감하게 질렀어야지. - 봐라. 네가 여기서 소극적으로 나오니까 상대의 공격 가동범위가 넓어지잖아. - 그러니까 이럴 때는 그냥 이렇게 쓱-싹. 오케이? -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데이브의 입장에서는 그저 1분이라도 클리어 타임을 당기기 위한 잔소리였지만……. 상관없었다. 레오에게는 그 잔소리들이, 엄청난 가르침으로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그러니 형님 말씀만 잘 따른다면…… 나도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이제 랭커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랭커들은 최소 데이브 정도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들이나 바라볼 수 있는 영역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저 형님의 그림자만 열심히 좇으리라. 레벨이 도태되어 형님을 따라다니지 못한다면, 그건 좀 슬픈 일이 될 것 같았다. [정산 완료.] 레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퀘스트 정산이 끝나면서 새로운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1차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퀘스트 결과창을 확인한 레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직 클래스 : 질풍 검사(Tempest Blader)] ‘질풍검사……? 진짜 형님 말씀대로 됐잖아?’ 역시 형님이다. 각성자 커뮤니티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히든 클래스 정보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막 알려주신다. [전직에 성공하여, 전직 스텟이 부여됩니다.] [해당 능력치는 다른 클래스로 재 전직 시 소멸됩니다.] [공격력 +35%] [속도 + 50%] [모든 능력치 +20%] [치명타 확률 +15%] ‘이거…… 실화인가?’ 분명 검사 클래스의 1차 전직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치는 올 스텟 20%정도에 공격력 15%가 전부라고 들었는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부가스텟을 확인하자, 데이브 형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무럭무럭 피어났다. [클래스 고유 액티브 스킬, ‘질풍참’을 습득하셨습니다.] [클래스 고유 액티브 스킬, ‘회전베기’를 습득하셨습니다.] [클래스 고유 패시브 스킬, ‘바람의 힘’을 습득하셨습니다.] “크…!” 당장 사냥터로 가서 검부터 휘둘러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오를 향해 루미엘이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항해자로 거듭나셨군요.” “감사합니다.” “언젠가, 그대가 다시 돌아올 때……. 그 검에 담긴 진심이 여전히 같은 빛이기를 바랍니다.” 루미엘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그의 손끝을 타고 청백색의 기류가 넘실거렸다. 이어서 그 빛줄기는 마치 비단결처럼 공간을 수놓았고, 레오의 시야가 다시 하얗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창공의 방주’가 ‘알테리온 대륙’에 정박합니다.] 레오는 드디어, 대륙에 도착하였다. * * * 내가 지금 진행 중인 이 구도자의 제단 퀘스트는, 크게 세 페이즈 정도로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일단 첫 번째 페이즈가 바로 생존. 순례자의 유적 입구인 이 ‘잊혀진 자들의 평원’에서, 끝없이 소환되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생존하는 게 첫 번째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언제까지? 바로 이 ‘나침반’ 아이템이 드랍될 때까지다. 띠링-! [‘프리즘 하운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프리즘 하운드’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빛의 나침반’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원래 드랍률 주작당하면 여기서 시간 엄청 뺏기는데……. 한 30분 만에 드랍된 거면 오늘은 선방했는걸? └ 오, 이게 방장이 말한 나침반인 듯. └ 딱 봐도 아티펙트처럼 생겼는데ㄷㄷ 퀘템이라 갖고 나갈 순 없겠지? 이게 드랍될 때까지를 1페이즈로 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게 있어야 두 번째 장소인, ‘침묵의 골짜기’를 찾아갈 수 있거든. 〓〓〓〓〓〓〓〓〓〓〓〓〓〓 빛의 나침반 분류 : 퀘스트 아이템 레벨 제한 : 장착불가 등급 : 전설 티어 : - 내구도 : 10 / 10 보유 효과 모든 능력치 +1 순례자들에게 빛을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빛의 나침반은 정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아이템의 정보창에는 뭔가 오묘한 듯한 문구가 쓰여있는데, 결국 이건 그냥 나침반의 바늘을 따라가라는 소리다. 나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황금빛 나침반의 바늘은 언제나 최종 목적지인 ‘구도자의 제단’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구도자의 제단’에 가려면 무조건 침묵의 골짜기를 지나도록 필드가 구성되어 있으니……. 결국 이 방향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결론 되시겠다. ‘이게 이 불친절한 퀘스트에서 유일하게 친절한 기물이지.’ └ 그런데 방장아. 이거 파밍 그냥 스킵해도 됐던 거 아님? 시스템 조건도 아닌데… 길만 알고 있으면 넘어가도 되잖아? 성좌님의 질문이 제법 예리했지만, 난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거든. 그랬으면 나도 파밍을 끝낸 순간 곧바로 1페이즈를 스킵해서 침묵의 골짜기로 향했겠지. 대체 누가 설계한 공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순례자의 유적은 길을 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필드다. 이 랜덤에 미친 필드는, 입장할 때마다 모든 구조물의 위치도 무작위로 변경되니 말이다. 파밍템부터 시작해서 퀘스트의 최초 보상까지. 거의 모든 요소가 랜덤인… 가챠에 미친 퀘스트가 바로 이 ‘구도자의 제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형님들. 이걸 먹어야만 다음 페이즈로 넘어갈 수 있는 겁니다. 아시겠죠? 친절한 내 설명이 덧붙자, 성좌들의 흡족한 반응이 이어졌다. └ 캬, 방장 설명 깔끔하고. └ 그러니까 이 강의를 들었으면, 우리도 방장처럼 할 수 있는 거지? └ 겠냐;; └ ■■■에 갈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다시 저기로 보내줘도 난 확실히 못할 듯? └ ㄹㅇㅋㅋ 아니 퀘스트 난이도 진짜 헬이네 ㄷㄷ;; 나였으면 1페이즈 끝나기 전에 이미 리타이어였음;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성좌들은 내가 가진 히든 정보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밑천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지식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왜? 돈이 되니까! [‘비탄의 수집가’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잊혀진 튜토리얼의 망령’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시청자가 매일 꾸준히 늘어나는 원인도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흐음. 플레이어도 아닌 자식들이 게임 정보는 어디에 쓰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려나.’ 어쨌든 이렇게 나침반을 얻어 침묵의 골짜기에 도착하면,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페이즈가 사실 가장 간단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돌파. 쿠궁- 쿠구궁-! 위협적으로 솟아오른 저 바위 협곡 사이를 내달려, 최대한 빠르게 주파하는 것이 이 두 번째 페이즈의 키 포인트다. -자, 여긴 빠르게 지나가겠습니다, 형님들! └ 여긴 뭐 하는 페이즌데? -그냥 피하고 달리면 끝나는 곳인데요. └ ……? └ 그게 대체 뭔……. 물론 협곡 곳곳에 사악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유적의 망령’이라는 귀찮은 몬스터들이 호시탐탐 원거리 공격을 해 대는 필드였지만. 타앗-! 내게는 여기가 가장 만만한 페이즈였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면……. -자, 여기서는 이렇게 살짝 숙여서 피해주시고! 피잉- 쐐애액-!! -여기부터는 바닥을 밟으면 안 됩니다. 쿠구궁-! -왜냐면 이렇게 바닥이 푹 푹 꺼지거든요. 이 침묵의 골짜기에 존재하는 함정 패턴이, 이 퀘스트에서 유일하게 랜덤가챠가 아닌 영역이거든. 그러니 몸이 기억하는 대로. 탓- 타닷-! 그냥 본능적으로 달려 나가면 클리어가 된다고? └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 아ㅋㅋㅋ 다 피하면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곸ㅋㅋ 그리고 이렇게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띠링-! 드디어 내 눈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드디어 떠올랐다. [침묵의 안개가 걷힙니다.] [당신에게 ‘진리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됩니다.] 그건 바로 마지막 세 번째 페이즈인 ‘진리의 전당’이 개방되었음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 [당신은 이제 세 가지 중 단 하나의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1. 용기의 길] [2. 지혜의 길] [3. 신념의 길] [당신이 구도하는 진리는, 이 세 가지의 길 중 어떤 길 위에 놓여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창공의 항해자 퀘스트에 있는 다섯 가지 선택지와 비슷한 개념의 선택지다. 항해자 장비류 선택지처럼 노골적으로 클래스 방향성을 정해버리진 않지만. 최종적으로 클래스 가챠가 진행될 때, 이 선택지가 어느 정도 확률에 영향을 준다고 알고 있거든. 그치만……. [선택지를 캔슬하였습니다.] [어떠한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여긴 창공의 항해자 퀘와 다르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자, 황금의 주인님. 이걸 바라신 게 맞는 거죠? 그러니까 황금의 주인 형님. 제게 후원하실 LP는… 이제 슬슬 충전해 놓으셔야 합니다? 2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라이카’라는 세계 안의 정보들에 한해서, 아무래도 나는 어지간한 성좌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베타 서버’에서 제공되는 세계에 한정된 것. 그러니까 ‘스트리밍’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한 번씩 나를 놀라게 하는 상황들이 나오곤 했다. 바로 이렇게. [성좌, ‘황금의 주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하지만 더 좋은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스트리밍을 하면서, 완전히 처음 보는 형식의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흠칫 당황했다. 이제껏 성좌들의 채팅은 항상 평범한 스트리밍 방송 채팅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채팅을 올리는 경우는 완전히 처음 봤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 어??? └ 미쳤는데? 아무래도 저런 식으로 채팅을 올리는 건, 평범한 성좌(?)들은 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았다. └ 방장 방에 벌써 ■■■성좌가 들어왔다고? 아니, 채팅에 노이즈 낀 거 겁나 답답하네. 솔직히 지금까진 노이즈가 껴도 와닿지도 않고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이건 좀 궁금하잖아? 그래서 물어봤다. -다른 분들은 저런 거 못 해요? 저렇게 채팅하는 게 특별한 건가……? 그런데 돌아온 대답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 ㅁㄷ;; 방장 ■■■성좌 개념도 뭔지 모르는 거임? └ 이 친구 고인물 아니었음? └ 여기 ■■■야 이 친구들아; └ 고인물이 히든피스 같은 걸 얻은 특이케이스인 줄 알았지 난;; └ 이 쉐끼 이거 혹시 연기 아님? 아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 질문에 답이나 좀 해달라니까요? 후. 답답해 죽겠다. 뭔가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초창기 시청자인 2황좌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신다. [‘망나니 2황좌’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채팅이 꽤나 흥미로웠다. └ 저렇게 할 수 있는 건, 졸업한 성좌들 뿐임. 예? 졸업이요? └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임. 어차피 더 말해봐야 노이즈 껴서 방장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고. 아, 괜히 물어봤다. 쓸데없이 더 궁금해지기만 했잖아? 하지만 ‘졸업’이라는 단어 자체는 꽤 유의미 한 정보 같기도 하다. 단어 자체의 느낌을 봤을 때, 뭔가 다른 성좌들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는 존재 같기도 하고. 흐음. 그렇게 추측을 해보고 있는데, 다른 성좌 하나가 슬쩍 끼어들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 졸업한 성좌들은 플레이어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음. 그래서 저런 식으로 메시지가 오는 거고. 아하……? 그러고 보니 ‘황금의 주인’은, 아직 단 한 번도 채팅을 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들으니 뭔가 재밌다. 그리고…… 냄새가 솔솔 난다. 무슨 냄새냐고? 거대한 자본의 냄새 말이다. └ 여튼 방장 ㄷㄷ하네; ■■■성좌한테 벌써 후원도 다 받고; └ 랭커방 가도 ■■■성좌는 보기 힘든데, ㄹㅇ 방장 포텐 지리는 듯?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형님들! 아무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요. [‘황금의 주인’님이 3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조금 더 기대해 보겠다.”고 얘기합니다.] 캬, 이게 졸업성좌의 클라스? 다른 성좌들 10LP씩 툭 던지는 느낌으로 300LP를 쿨하게 쾌척해 버리신다. 달달해서 이빨이 그냥 다 썩어버릴 것만 같잖아?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감사합니다 형님!” 타앗-! 오랜만에 육성으로 리액션하며 도게자를 박았더니, 성좌들이 낄낄거리며 좋아한다. └ ㅋㅋㅋ방장 신났쥬? └ 앜ㅋㅋㅋㅋㅋㅋ 근데 솔직히 신날 만 하긴 해 ㅋㅋㅋ └ 뭔지는 모르겠지만 돈 벌 거 같아서 행복한 방장이면 개추. 개추요. └ ㅈㄴ진지빨고 센척하는 랭커방 보다가 여기 오니까 개웃기네 ㅋㅋㅋ 바로 그겁니다, 성좌님. 그러니까 홍보도 좀 많이 해주시고…… 기왕이면 여기에 뼈를 묻어주시면 더 좋고요. 예. “으흐흐.” 실없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지만,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다. 성좌들은 내가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면 더욱 좋아하니까. └ 그러니까 방장ㅋ 그만 좋아하고 빨리 3페이즈 가야겠지? 맞말입니다, 형님. 괜히 시간 끌다가 황금의 주인님께서 지루해하신다던가… 그런 일은 결단코 없어야죠. 띠링-! [‘진리의 전당’에 입장하였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길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혼돈의 길’로 인도됩니다.] 기다렸던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진리의 전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이제 마지막 관문. 그러니 여기만 무사히 통과한다면…… 드디어 베타 플레이어로서가 아닌 첫 1차 전직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쿠쿵-!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뒤틀리는 공간의 구조물들을 보며, 나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여긴…… 진짜로 어려우니까. “후우.”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여기가 구도자의 제단 퀘스트의 메인 디쉬다. 게다가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그중에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혼돈의 길’. 베타 때도 이 혼돈의 길 만큼은 한 번에 통과했던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으니…… ‘데이브’로서 플레이를 시작한 이후 가장 어려운 관문임에는 틀림없을 터였다. [‘잊혀진 튜토리얼의 망령’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진짜 이거까지 알 줄은 몰랐는데…… 황금의 주인도 한 번에 클리어까진 기대 안 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방장. 그렇지만 이걸 선택하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부터…… 리타이어는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다. 왜냐고? 철컥-! [‘순례자의 지팡이’ 장비를 장착하였습니다.] [장비의 고유 마법, ‘빛의 속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난 이제 더 이상 베타 테스터 용사 이건율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정식 용사가 된 데이브는…… 베타 때보단 조금 더 재능이 괜찮은 것 같단 말이지. └ ㅁㄷ 방장;; 지팡이도 쓸 줄 아는 거임? └ 엥;; 지팡이는 진짜 안 다뤄봤으면 건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 └ 첨 써보는 거면 캐스팅부터 머리아플걸? 예? 요정씨가 그나마 봐줄만 한 재능이라고 했던 게… 법사 쪽이었는뎁쇼? * * * 황금의 주인은 미션의 클리어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었다. - 아무런 기본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로 1차 전직 퀘스트를 클리어할 것. 하지만 이 조건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좀 있다. 사실 전직 퀘스트가 ‘창공의 항해자’에서 ‘구도자의 제단’으로 바뀐 순간……. ‘기본 선택지’인 항해자의 장비들을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므로, 퀘스트 클리어만 하면 모든 조건이 성립되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애매한 부분이 있었는데, ‘황금의 주인’이 기본 선택지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생각했느냐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구도자의 제단 3페이즈까지 와야 등장하는 ‘진리의 전당 선택지’까지도 선택지로 생각했다면. 난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순간 퀘스트에 실패하게 됐을 거다. 그래서 난 확실하게 선택지를 배제해 버렸다. 모든 선택지를 버리고 ‘혼돈의 길’로 들어서는 게… 클래스 가챠의 고점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뭐,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성좌, ‘황금의 주인’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구도자의 제단에 온 것만으로 미션 조건 달성을 인정해주려 했던 모양이지만 말이지. 하지만 그걸 미리 알았더라도, 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어쩌다 보니 첫 클래스부터 운빨 랜덤 가챠를 선택하게 됐는데…… 고점이라도 최대한 높여야지 않겠어? 비록 그 덕에… 이렇게 온몸 비틀기를 하게 됐더라도 말이다. 우우웅-!!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빛의 속박’이 발동합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가 일시적으로 ‘행동불능’ 상태가 됩니다.] [장비를 교체합니다.] [‘순례자의 장궁’ 장비를 장착하였습니다.] 피잉-!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 동안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핑- 피핑-!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피통 한번 겁나게 빵빵하네, 진짜. 대체 언제 뒈지는 거야? └ 아니, 어지럽네 진짜ㅋㅋㅋ └ 원래 지팡이랑 장궁이 스왑 플레이가 가능한 장비가 맞음?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방장앜ㅋㅋ 왜 퀘스트를 깨랬더니 서커스를 하고 있는 건데ㅋㅋㅋ 왜냐니. 이렇게까지 안 하면 깰 수가 없는 퀘스트니까 그러지. └ 파티 플레이에서 해야 할 연계 공격을 혼자 해버리고 있네 ㅅㅂㅋㅋ └ 지금 헤드샷 확정으로 맞추려고 속박 마법 사용하는 거임? └ ㅇㅇ그런 느낌인 듯. └ 하… 방장 이 ㅅㄲ는 진짜 보법이 다르긴 해. 20레벨 논 클래스 플레이어가… 평범한 방법으로 37렙 에픽 몬스터를 대체 어떻게 잡는데? └ 검방을 스왑하면서 싸우는 방패기사 클래스는 봤어도;; 이런 식으로 전투하는 건……;; └ 오히려 전직 전이라 가능한 플레이인 듯? 아마 이런 식으로 전투하는 클래스 자체가 없을건데? 응 아니야. 마법궁사라고, 괴상한 클래스가 하나 있단다. 2차 전직 때 선택할 수 있는 건데…… 심지어 히든 클래스도 아니란 말이지. 철컥- [장비를 교체합니다.] [‘순례자의 지팡이’ 장비를 장착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나도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 [마력을 소모합니다.] [‘라이트닝 체인’ 마법을 캐스팅합니다.] └ 제일 신기한 건, 스킬도 배운 적 없을 텐데 기본 원소 마법을 캐스팅한다는 거임;; └ 술식만 제대로 그릴 수 있으면 가능하긴 한 거 아님? └ 킹론상 그렇긴 한데;; 어지간한 법사 플레이어도 스킬 없이 마법 구사하는 건 쉽게 못 할걸? └ 2서클 마법 정도까진 할 만하지 않나? └ 응 아니야. 게다가 ㅈㄴ비효율적이라 아무도 그렇게 안 할 듯. 성좌들이 뭐라고 계속 떠드는 것 같지만, 그 채팅들을 제대로 다 읽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슬슬 파밍한 마나 포션이 다 떨어져 갔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이번 연계 공격으로 끝을 봐야 하거든. 쩌저정-!!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전부 동원해서, 저 피 돼지 녀석에게 최후의 공격을 퍼부었다. [‘라이트닝 체인’ 마법을 발동하였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가 ‘감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장비를 교체합니다.] [‘순례자의 장궁’ 장비를 장착하였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후략…… 모든 공격을 시원하게 쏟아부은 뒤, 녀석과 거리를 최대한 벌리기 위해 후방으로 도약하였다. 방금의 공격으로 어지간하면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만약 딜이 부족했다면 지금부터는 도망 다니며 마력 수급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내 마지막 화살 한 발이 녀석의 숨통을 끊어 놓는 데 성공했고. 띠링-! [‘구도자의 사념’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 드디어 장장 반나절에 걸친 전직 퀘스트가 마무리되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혼돈의 길’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였습니다.] [‘진리의 전당’이 당신을 진정한 구도자로 인정합니다.] [‘구도자의 제단’으로 당신을 인도합니다.]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의 등장과 함께, 지금껏 막혀있던 진리의 전당 중앙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전당의 중정이 환하게 뚫리면서, 새하얀 빛이 공간의 중앙으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 오오오! └ 진짜 이걸 깼네;; └ 캬! 이제 전직 하는 거임? 성좌들의 말이 맞다. 방금 벽이 무너지며 나타난 저 공간이 바로 이 퀘스트의 제목이기도 했던 ‘구도자의 제단’이었고. 이제 저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드디어 1차 전직을 할 수 있게 된다. [‘구도자의 제단’에 올라가 신탁을 받으십시오.] [루멘티아의 빛이 당신에게 진정 어울리는 길을 비춰줄 것입니다.] 운빨 랜덤 가챠 주제에, 거창하게 포장하기는. 저벅- 저벅-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제단 위에 올라섰고. 그 순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제단을 비추던 모든 빛이 내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2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내 시야는 온통 하얀 빛무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위에, 시스템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루멘티아의 성좌들이 플레이어의 업(業)을 헤아립니다.] [셀 수 없는 운명의 실타래에 성좌들이 당황합니다.] [‘운명의 나침반’이 길을 잃고 요동칩니다.] 그리고 그걸 읽어 내려가던 나는……. [성좌, ‘운명의 조각가’가 한숨을 깊게 내쉽니다.]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정산이 지연됩니다.] [정산이 지연…….] 아니, 불안하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 ㄷㄱㄷㄱㄷㄱ └ 아ㅋㅋㅋ 클래스 뭐 뜰지 ㄹㄴ 겁나 궁금하네 ㅋㅋㅋ └ 생산 클래스나 떠라 ㅋㅋ └ 방장 생산클래스 뜨면 좋아할걸; 쌀먹 효율 올라가서ㅋ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림? └ 신탁이 내려와야 한다잖음ㅋㅋ 항해자 퀘스트처럼 딸깍이 아닌가보지 뭐. └ 평범한 노잼 클래스만 아니면 좋겠음ㅋㅋ 그런데요. 지금 재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형님들? 뭔가 큰일 난 것 같다니까? [성좌, ‘미완의 조율자’가 히든 클래스 ‘에테르 시프(Aether Thief)를 제안합니다.’] [운명의 나침반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아니, 시불! 나 에테르 시프 그냥 시켜줘! 그거 1등상이잖아!! [성좌, ‘잃어버린 지식의 관리자’가 히든 클래스 ‘루멘 헌터(Lumen Hunter)를 제안합니다.’] ……?! 이번엔 루멘 헌터라고? 이건 진짜로 미쳤다. 성좌님들……! 저 활 야무지게 쏠 자신 있거든요? 나 마력 탄 궁수 진짜로 해보고 싶었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운명의 나침반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후우. 예상했던 결과에 슬픔이 밀려온다. 궁수는 절대 안 하겠다고 선언했던 거 아니냐고? 맞는데, 저건 평범한 궁수가 아니다. 화살이 필요 없는, 모든 궁수 클래스 중 GOAT인 클래스거든. 이걸 이렇게 눈앞에서 놓쳐야 하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정산이 지연됩니다.] [정산이 지연됩니다.] 난 베타 서버에서, 이 ‘제단의 신탁’을 대략 10번 정도 받아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건 정말로 처음이다. 구도자의 제단 위에 선 순간 늦어도 3초 안에는 항상 전직이 완료됐었거든. 게다가 성좌가 어쨌다느니 하는 메시지가 뜬 것도 처음이다. 생각해보면 베타 서버에는 스트리밍 기능이 없었으니까, 이건 처음 보는 게 당연한 건가? “…….” 그런데 성좌라는 존재 중에 게임의 시스템까지 관여하는 존재들도 있나보다. 그쯤 되면 신이나 다름없는 느낌일 텐데……. 성좌들 사이에서도 격의 범위가 상당히 넓은 듯하다. 그렇다면 ‘황금의 주인’도 시스템에 관여가 가능할 정도의 최상위격 성좌인 건가? 졸업 성좌들 사이에서도 격의 차이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 그런데 대체 뭐가 나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이제 슬슬 성좌들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 더 답답할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 뜨는 시스템 메시지들은, 시청 중인 성좌들의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었으니까. └ 방장, 뭐 버그라도 걸림?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이러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클래스 나올까 봐 너무 두려운데……. 혹시 5천만 원에 내가 영혼을 판 건 아니겠지? 후우. 여긴 베타존도 아니라서, 리셋 버튼도 없다. 그러니 이번에 가챠 망하면, 2차 전직까지 고생문이 활짝 열린 셈인 것. 제단에서 나올 수 있는 좋은 클래스와 나쁜 클래스의 가치 차이는, 못해도 2배 이상이다. 클래스에 따라서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이 몇 배씩 차이 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가챠 한 번으로 앞으로의 내 일당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막힌다. 이게 바로… 연봉협상 테이블에 앉은 직장인의 마음?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멘티아의 성좌들이 ‘운명의 주사위’ 사용에 동의합니다.] [태고의 빛이 주사위에 깃듭니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정산이 마무리됐다는 메시지가 등장했다. “……!” [운명의 주사위가 클래스를 결정합니다.] 고오오오-! 저, 대기업까진 아니더라도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강소기업 정돈 취직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성좌님들…… 좋은 거 주시면 안 될까요? 예? [1차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전직 클래스 : 빛의 연금사(Seraphist)] ……? 클래스 네임을 확인한 나는, 순간 뇌 정지가 와서 두 눈을 깜빡였다. 1200회차 라이카 인생에 완전히 처음 보는 클래스라니. 1차 클래스 중에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고? -형님들, 혹시 ‘빛의 연금사’라는 클래스 알아요? └ 오! 드뎌 전직? └ 히든 클래스인 듯. └ ㅅㅂㅋㅋㅋ그럼 이 쑈를 하고 먹은 게 히든 클래스가 아니겠누 ㅋㅋㅋ └ 1차 클래스에 ‘빛’이 수식어로 들어가네. └ 뭔진 모르겠지만 희소성 있을 듯. └ 연금술사 베이스인가? └ ㄴㄴ연금술사라기엔 조금 이상함. 내가 아는 연금술쪽 클래스 중에 ‘연금사’라고 명명된 클래스는 하나도 없음. └ 생각해보니 그러네. └ 그럼 뭐지? 후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성좌놈들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전직 스텟이나 클래스 스킬을 보고 짱구를 좀 굴려봐야 하는데……. [전직에 성공하여, 전직 스텟이 부여됩니다.] [해당 능력치는 다른 클래스로 재 전직 시 소멸됩니다.] [모든 능력치 +50%] [손재주 + 80] [친화력 + 80] [통솔력 + 60] 추측을 좀 해보자면. 연금사라는 워딩도 그렇고 클래스 추가스탯 항목도 그렇고, 일단 생산 클래스 냄새가 나긴 한다. 흐음. 게다가 클래스 스탯의 수치도 상당히 커 보이고……. 혹시, 가챠 성공인가? [클래스 고유 액티브 스킬, ‘루멘 연성식(Lumen Synthesis)’을 습득하셨습니다.] [클래스 고유 액티브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를 습득하셨습니다.] [클래스 고유 패시브 스킬, ‘생명의 봉헌(Offering of Life)’을 습득하셨습니다.] …라고 행복회로를 굴려보지만, 실제로 부딪쳐 보기 전까지 솔직히 예상이 아예 안 되는걸. 클래스 고유 스킬명까지 봐도, 이거 대체 뭐 하는 클래슨지 알 수가 없는 수준이다. 1차 전직에서 이런 경우는 진짜로 처음인데. 띠링-! [‘구도자의 제단’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창공의 방주’가 ‘순례자의 유적’에서 출항합니다.] 나…… 괜찮은 거겠지? [‘창공의 방주’가 ‘알테리온 대륙’에 정박합니다.] 그래도 뭐… ‘무직’보단 낫지 않겠어? * * * 마계의 거점도시 벨페리온(Belpherion). 위잉- 위이잉-! 마계 필드 전체에서 유일한 안전지대인 ‘타오르는 봉인석 광장’에, 거대한 포탈이 열리며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후- 하.” “진짜로 죽는 줄 알았네, 이번엔.” 그런데 어쩐 일인지, 플레이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전신의 갑주가 너덜너덜해진 것은 기본이었으며,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인 플레이어도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후방 지원 포지션으로 보이는 사제들과 원거리 딜러들조차, 멀쩡한 상태인 플레이어가 단 한 명도 없어 보일 정도.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그 몰골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게 되긴 하네요. 진짜.” “검희님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정말 고생하셨어요.” 이들 파티는 전원 한국 랭커로만 구성된 잿빛 성채 원정대. 마계의 여덟 번째 재앙인 ‘잿빛 검성 칼라도르’ 레이드에 성공하였으니,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고양감에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러면 국내 파티로는 저희가 최초죠?” “아마도요.” “애초에 단일 국가 파티로 칼라도르 잡아낸 케이스가, 저희 포함 다섯 파티가 안 될걸요?” “크……!” 게다가 클리어 보상도 1인 평균 LP가치로 환산 시 10만이 넘는 수준이었으니. 이건 랭커들의 기준에서 놓고 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일부 랭커들의 입꼬리가 귀에 걸린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 두 번 하라면 못할 것 같긴 하네요.” “저돕니다. 흐흐.” “솔직히 마지막에 검희님 아니었으면 전멸 각도 나왔었어요. 뭐, 전멸하기 전에 스크롤 찢었겠지만…….” 저마다 공터에 주저앉아 정비하며 제각각 대화를 나누는 플레이어들. 그들을 잠깐 응시하던 검희는, 차오른 숨을 고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 파편을 원하는가?] [잿빛은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종속의 색이다.] 칼라도르의 대사를 잠시 떠올린 검희는, 손에 들려있는 잿빛의 쇳조각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잿빛 검의 파편] ‘제라투스의 깃발’과 ‘잿빛 검의 파편’. 이 두 가지 아이템을 드디어 모두 얻어 내었으니, 이제 남은 퀘스트는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할 터였다. ‘퀘스트템을 예상보다 빨리 모았어. 이제 나만 잘하면… 한 달 내로 전직에 성공할지도.’ 이번 원정전까지만 해도 이 퀘스트가 히든 3차 전직 퀘스트라는 확신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잿빛 성채를 공략하고 칼라도르의 대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은, 그 히든 클래스의 클래스 네임까지 확신한 상태였다. 아주 오래전…… 최전선을 지키며 마물들과 혈투를 벌여왔던 성기사 칼라도르. 마계의 여덟 번째 재앙인 ‘잿빛 검성’과 고대 신화의 성웅 ‘성기사 칼라도르’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변수는 없어진 것이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칼라도르의 구원 서사를 완성하고 광휘의 검성으로 전직하는 게…… 이 퀘스트의 최종 목적점이었던 거야.’ ‘광휘의 검성’이라는 3차 전직 클래스에 대한 정보는 아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클래스가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급 클래스임은 거의 확실한 수준이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3차 클래스 중 ‘검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클래스들은…… 모두 ‘규격 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니 검희의 조급했던 마음도 이제 좀 차분해질 수 있었다. “크… 이제 우리 바르가에도 3차 전직 랭커 나오는 거냐?” “목소리 좀 줄이시죠, 류강호 랭커님.” 평소 같았으면 틱틱거렸을 카토의 장난도, 본명까지 불러주며 여유롭게 받아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야, 어쨌든 이제 된 거다? 약속 지켜야 해?” “용기사 레이드?” “그치.” “걱정 마.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그러니 이제는, 딱 한 가지만 더 해결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실버 나이츠… 이놈들은 대체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실버 나이츠에서 추적해 알려주기로 했던 제라투스 깃발의 원 주인. 그의 정체를 아직까지도 전해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원래 일 처리가 이렇게 늦는 친구들이 아니지 않나.’ 이미 제라투스의 깃발을 얻었음에도 의뢰를 취소하지 않은 이유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실버 나이츠 쪽과 의뢰 이야기를 나눴을 때, 우연히 알게 됐던 사실. - SKG 류강민 : 총력을 다해 찾는 중입니다, 검희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 아, 아뇨. 그, 재촉 드리려고 연락한 게 아니라……. - SKG 류강민 : 괜찮습니다. 이미 의뢰를 한 번 실패했으니 저희가 죄송할 따름이죠. - ……. 그건 바로, 제라투스 깃발의 판매자가 넘버링 장비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정보였다. - SKG 류강민 : 검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라투스의 깃발과 함께 넘버링 장비가 드랍되지 않았습니까? - 어…… 그랬나요? - SKG 류강민 : 예, 그것 때문에 상부에서도 관심이 지대합니다. 어차피 ‘그’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넘버링 장비라…….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어쨌든 시작의 섬에서 파밍을 한 것이니 저레벨 플레이어일 건 분명한데. 정황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인물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검희가 그를 찾고 싶은 건 결코, 제라투스의 깃발을 비싸게 사서 뿔이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랬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정비를 끝낸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왜 일어나? 마스터 오실 때까진 대기한다고 안 했어?” “가봐야 할 데가 좀 생각나서.” 퀘스트 진행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에 판매자를 직접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검희는 일단 접속을 종료하기로 했다. ‘일단 관리국부터 가봐야겠어.’ 어떻게 보면 그녀가 직접 찾는 게 가장 빠를지도 몰랐다. 판매자의 플레이어 네임을 아는 건… 제라투스의 깃발을 직접 구입한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마스터한테는 네가 말 좀 잘 해줘.” “야!” 아마, 플레이어 네임이 ‘데이브’라고 했던가. ‘흐음.’ 치밀한 정보력으로 자신에게 덤터기(?)를 씌울 정도의 인물이라면. 게다가 그런 인물이 고유장비까지 손에 넣은 거라면.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다른 정보들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제라투스의 깃발과 관련된 특별한 정보들 말이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의 추측은 어떤 의미에서 꽤 정확한 것이었다. 2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시작의 섬을 떠난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도착하게 되는 대륙. 평화와 질서의 대륙 알테리온은…… 라이카 세계관 안에서 가장 거대한 대륙이었고, 모든 플레이어가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두 번째 장소였다. -라이카를 플레이하는 모든 플레이어는, 시작의 섬을 졸업하면 이곳으로 모이게 된다. -보통 알테리온 대륙에서 머물게 되는 레벨은 20~60레벨이며, 때문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층의 터전이기도 하다. * 세계 각성자 협회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30~50레벨에 전체 플레이어의 80%가 포함된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부터는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같은 채널을 공유하기 때문에, 다양한 플레이어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하지만 소통을 걱정할 건 없다. 게이트 안에선, 어떤 언어든 ‘대륙 공용어’로 치환된다고 한다. - 각성자 위키 - [알테리온 대륙] 항목에서 발췌 때문에 나 또한 당연히, 퀘스트 클리어 직후 알테리온 대륙에 도착했다. 다만 워프된 위치가 보통의 플레이어가 도착하는 루미스 영지(Lumis Domain)는 아니었는데……. 이게 그리 놀라운 일은 또 아니었다. └ 역시 영지 스타트는 아니구만. └ 히든클래슨데 영지에 떨어질 리가 없잖음;; └ 히든클래스 중에서도 영지 스타팅 하는 케이스가 은근 있긴 함ㅇㅇ └ 어쨌든 방장 뉴비 딱지 뗀 거 ㅊㅋㅊㅋ └ ;;애초에 이 ㅅㄲ가 뉴비였던 적이 있긴 함? 가장 많은 유저들이 1차 전직으로 얻게 되는 클래스인 검사, 궁사, 마법사, 기사, 그리고 암살자. 이 다섯 클래스의 경우, 루미스 영지에 ‘직업 길드’가 존재한다. 때문에 보통의 유저는 전직 퀘스트 클리어 직후 루미스 영지에 도착해, 각자 얻은 클래스의 길드로 찾아가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게 된다. 반면에 히든 클래스들은 보통 직업 길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 클래스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요상한 클래스를 얻은 나로서는……. 눈을 떴을 때 루미스 영지였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 그런데 여기 어디임? └ 왤케 필드가 칙칙하고 컴컴함;; └ 동굴인가? 어두워서 공간 식별도 어려운데;; └ 방장 여기 어딘지 암? └ 처음 올 텐데 어케 암ㅋㅋ 그렇다고 루멘티스 폐광 (Lumentis Hollow)에 떨어뜨린 건, 조금 너무한 게 아닌가 싶긴 하다. 어딘지는 어떻게 알았냐고? [빛이 태어나던 자리, 어둠이 되기 전의 땅.]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흘린, 첫 번째 빛의 잔재가 남은 금단의 구역입니다.] 이게 바로, 루멘티스 폐광에 첫 입장 시 등장하는 메시지거든. 후우. -그러니까 이런 메시지가 뜨긴 했는데…… 혹시 여기 어딘지 아는 성좌님? 필드가 이동되면서 꺼진 메시지 공유를 다시 켜 줬더니, 성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예? └ 이거 어디서 봤는데;; └ 아, 딱 알았다 ㅅㅂㅋㅋ 여기 루멘티스 폐광 아님? └ 맞네;; └ 아니 무슨; 이거 진짜예요?;;; └ ¯\(ºдಠ)/¯ 성좌들 또한 적잖이 당황한 눈치. └ 뭔;; └ 시작의 섬 갓 졸업한 뉴비가 루멘티스에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ㄷㄷ └ 개웃기네ㅋㅋㅋ 나였으면 멘붕 왔을듯ㄹㅇ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거지 같은 요소들을 다 떠나서 여긴 40레벨 대 사냥터거든. 내가 온갖 히든 클래스로 전직해보면서 위험한 필드에도 많이 떨어져 봤는데, 진짜 이 정도까지 상도덕 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물론 이런 말을 성좌님들한테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었다. -형님들, 루멘티스가 뭐예요? 뭐, 내가 보통의 뉴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성좌들과 나 사이에 이미 암묵적으로 합의가 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럴 땐 뉴비 시늉을 해주는 게 좋다. 적당히 불쌍해 보이기도 해야, 성좌님들이 후원도 해주시고 하는 거 아니겠어? └ ㅋㅋㅋ앜ㅋㅋ 방장 귀엽네. └ 그냥 지금 바로 스크롤 찢고 영지로 귀환하셈ㅋㅋ -왜요? 처음 대륙 도착하면 클래스 메인퀘인가 그거부터 진행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 할말하않ㅋㅋㅋㅋㅋ └ 굳이 머리가 깨져 보고 싶다면야……. └ 방주가 여기 떨궈줬으니 결국 다시 여기로 오긴 해야 할 텐데… 그래도 준비 좀 하고 오란 소리임. 레벨도 좀 올리고 ㅇㅇ └ 냅둬ㅋㅋㅋ 재밌잖어ㅋㅋㅋ 가만 보면 성좌 놈들도 은근 귀엽단 말이지. 이렇게 한 번씩 모르는 척해주면, 싱글벙글하는 게 채팅 너머로 보일 정도다. └ 근데 이거, 혹시 방장의 기만전술 아닐까? └ 고도의 티배깅…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후.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들은 싫다니까. -일단 길이 하나뿐이긴 해서, 길 따라서 좀 더 들어가 볼게요 형님들. └ ㅇㅋㅇㅋ조심하고. └ 딴건 다 되는데, 죽으면 안 된다 방장? └ 요즘 이 방 구경하는 맛에 산다고 ㅋㅋ └ ㄹㅇㅋㅋ 죽지마 방장! 거… 내 안위 걱정까지 해주고 눈물 나게 고맙구만. 그런데 내가 걱정되면, 인간적으로 몇 레벨 필드인지 정도는 얘기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물론 내가 골탕먹는 걸 보고 싶은 마음들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끝까지 루멘티스 광산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는 성좌가 한 놈도 없는 거냐고 진짜로. “…….” 최악의 경우에도 내가 스크롤조차 못 찢고 죽을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호루스의 깃털까지 사둔 이상, 확실한 안전장치까지 있는 셈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운한걸? 흐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띠링-! [‘황금의 주인’님의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내 서운함을 한 방에 날려줄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보상으로 5000LP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명성이 +1만큼 증가합니다.] 캬- 이궈궈든. -감사합니다, 형님! [성좌, ‘황금의 주인’이 “앞으로도 지켜보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좌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시겠다니,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다. 더욱 정진토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절대로 다른 데 가지 말고 계속 지켜보셔야 합니다? 알겠죠? * * * 화염계열 마법사 엘리시아 로웰 (Elicia Rowell)은, 런던의 명문대학인 UCL의 대학원생이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전공했던 과목은 화학공학. 그러니까 그녀는… 본인이 각성이라는 것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었다. 단지 로웰은 남들보다 조금 더 실험을 좋아했고, 뭔가를 불태우는 것에 미쳐있을 뿐이었으니까. 상당한 부잣집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플레이어가 되어 입신양명하는 것에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각성? 플레이어?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는걸.” 하지만 라이카의 세계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살던 그녀가… 대학원조차 때려치우고 라이카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라이카의 세계 안에서는, 그녀가 하고 싶은 폭발 실험을 더욱 마음껏 할 수 있었으니까. 화르륵-! 펑- 퍼버벙-! 라이카에서는 폭발 실험을 하다가 위험해질 일도 없었고, 실험실이 불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플레이어로서 레벨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게이트에 들어온 이유는, 오로지 ‘실험’을 위해서였으니까. 각성한 뒤 거의 3년이 넘도록, 그녀가 1레벨에 머물렀던 이유였다. “언젠가 전직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마법사가 좋지 않을까? 그러면 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니 만약 그녀에게 ‘특이점’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평생 베레쉬트를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원소 : 화염’에 대한 이해도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마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나 홀에 ‘화염의 고리’가 생성됩니다.] 그녀는 마법사로 전직하기도 전에 ‘서클’이라는 개념이 생긴, 꽤나 특별한 마법사였던 것이다. “어라?” 화르르륵-! “이거… 꽤 편리하잖아?” 마법으로 불을 다룰 수 있게 된 그녀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벨을 올렸다. 어쨌든 20레벨을 되어야, 전직이라는 게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연소 반응에 대한 실험’을 열심히 하다 보면, 레벨은 알아서 쑥쑥 자랐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0레벨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1차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전직 클래스 : 파이로 소서러(Pyro Sorcerer)] 물론 히든 클래스를 얻게 된 건 그녀가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 정도는 아주 사소한 변수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로웰이 넌, 37레벨 화염법사라는 거지? 광역 화염 마법은 2종 정도 구사할 수 있는 거고.” “네, 맞아요. 혹시 문제 될 게 있을까요?” “으음……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플레이어 ‘라이너 벨릭’이 파티에 초대합니다.] “그래도 노빈이 말에 의하면 딜 하나는 확실히 해줄 거라고 했고……. 우리가 숙련 파티긴 하니까, 괜찮겠지 뭐.” “감사합니다!” 그렇게 오늘도 로웰은, 실험 재료를 모으기 위해 열심히 라이카를 플레이하는 중이었다. 최근 그녀의 관심을 끌고 있는 실험 소재는 바로, ‘루멘티스 광산’이라는 곳에서 얻을 수 있는 ‘루멘 광석’이었다. * * * 루멘티스 광산은, 생각 외로 유명한 곳이다. 정확히는 마법사 클래스 플레이어들에게 40레벨대 필수 사냥코스로 불리는 사냥터로 유명한 곳.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몬스터인 루멘 고스트 (Lumen Ghost)는, 극딜 위주로 세팅한 마법사들에게 가장 사냥하기 편한 사냥감이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대신 종잇장처럼 허약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탓에, 마법사 파티의 광역 공격에 약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법사 혼자서 사냥하긴 부담스러운 사냥터지만, 적어도 여기서 사냥하는 거의 모든 파티가 마법사 딜러 한 명쯤은 필수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 ‘그러니 나도 마법사 계열의 클래스였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문제는 지금 광역마법은커녕, 쓸 만한 전투스킬이 하나도 없다는 부분이었다. 분명히 전직을 했는데 말이다. 그것도 무려 ‘히든 클래스’로. └ 이 클래스 진입장벽 ㄹㅇ 살벌하네 진짜ㅋㅋ └ 근데 ‘대이브’한테는 이쯤 되야 밸런스 맞긴 해ㅋㅋㅋ └ ㄹㅇㅋㅋ 성좌들이 괜히 신난 게 아니다. 스킬 내용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거든. 〓〓〓〓〓〓〓〓〓〓〓〓〓〓 루멘 연성식 (Lumen Synthesis) 분류 : 액티브 스킬 스킬 레벨 : 1Lv 숙련도 등급 : F 소모 마력 : 없음 소모 루멘 : 100 - 연성 이해도가 100%에 도달한 대상 처치 시, 연성 재료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연성 이해도는, 대상을 연구할수록 높아집니다. - 연성 재료를 모아 루멘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 시, ‘루멘 연성식’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 연성식 제작을 많이 할수록, 숙련도 등급이 향상됩니다. -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 스킬을 활용해, 연성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게다가 읽어도 이해조차 잘 안 되는데, 아무리 봐도 내 문해력 문제는 아니란 말이지? 〓〓〓〓〓〓〓〓〓〓〓〓〓〓 세라픽 포지 (Seraphic Forge) 분류 : 액티브 스킬 스킬 레벨 : 1Lv 숙련도 등급 : F 소모 마력 : 없음 소모 LP : 100 - 완성된 루멘 연성식을 사용하여, 피조물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 연성식의 성격에 따라, 피조물은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 연성을 많이 시도할수록, 숙련도 레벨이 향상됩니다. 〓〓〓〓〓〓〓〓〓〓〓〓〓〓 일단 ‘루멘 연성식’으로 뭔가를 만들고, 그걸 가지고 ‘세라픽 포지’ 스킬을 사용해서 뭔가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연성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는 부분부터 벽이 느껴진다. 대상을 연구해야 한다는데, 대체 연구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 생명의 봉헌 (Offering of Life) 분류 : 패시브 스킬 - 현재 비활성화 상태인 스킬입니다. - 첫 번째 피조물 창조에 성공할 시, 해당 스킬이 해금됩니다. 〓〓〓〓〓〓〓〓〓〓〓〓〓〓 심지어 마지막 스킬은 아직 해금도 안 된 상태고……. 그러니까 논 클래스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지금 45레벨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는 소리인 거지? └ ㅇㅇ 그런 듯? └ 정신 나갈 것 같은 방장이면 개추요ㅋㅋ └ ㅋㅋㅋ 방장 멘붕왔누ㅋㅋ └ 앜ㅋㅋ 달다 달아ㅋㅋㅋ └ 겁도 없이 클래스 가챠 버튼 눌렀으면, 이제 혼 좀 나야겠지?ㅋㅋㅋ └ 이건 아무리 방장이라도 한번 접는 게 맞긴 해. 후우. 확실히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인 건 분명하다. 그러니 여기서 정석은, 일단 스크롤부터 찢어 루미스 영지로 런하는 거겠지. 일단 루미스 영지에서 서브 퀘스트나 받으면서 내실 좀 쌓고……. 충분히 레벨링을 한 다음에 클래스 메인 퀘스트에 도전하는 것. 그래. 분명 그게 정상적인 판단일 거다. 하지만. -해 보죠 뭐. └ ??????? └ 이걸 집에 안 간다고? └ 설마 스크롤 없음? └ 알테리온 스크롤은 아직 없을 만해. └ 없어도 거래소에서 사면 되잖? 그래도 이대로 도망칠 순 없다. 여기서 마을로 유턴한다면, 오늘 하루 LP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스크롤은요, 인벤토리 꽉 찼을 때만 찢는 겁니다 형님들. 게다가 알테리온 대륙의 스크롤은 최소 50LP짜리라고? └ 예???? └ ㅁㅊㅅㄲㅋㅋㅋㅋㅋㅋㅋ └ 미친놈이다 진짜로ㅋㅋㅋ 신나서 날뛰는 성좌들의 채팅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내 반려검을 꺼내 장착했다. 띠링- [‘월광검’ 아이템을 장착하였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고스트 타입 몹들이라 물리 딜이 잘 들어가지도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뭐. 한 놈씩 최대한 빼 오는 게 관건이긴 한데……. 스르릉-!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계획을 세우던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펑- 퍼퍼펑-!! 어디선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 뭐임?? └ 크라이트 웜인가? └ 그거 젠되려면 더 아래까지 가야할 텐데? 방금의 굉음은 나로서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변수였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다시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하는데……. “로웰! 잠깐만!!” 그 굉음의 정체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곧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플레어 스톰 시전했어요!” 석벽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꽤나 하이 톤인 여성 플레이어의 목소리. “—어라? 파티 진영은 조정된 거죠? ”……안 했어요? ……그럼 조금은 뜨거울 수도……!” 퍼어어엉-! 뭔가 이상한 내용이 담겨있긴 했지만, 그건 분명 평범한(?) 플레이어 파티의 목소리였다. 2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멘티스 광산은 생각보다 굉장히 넓은 필드다.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내 위치는, 지하로 꽤 깊숙이 내려와야 도달할 수 있는 곳. 심지어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달하기도 어려운 좌표였으니, 여기서 다른 플레이어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현지에서 파티를 갑자기 만나게 된 건…… 상당히 운이 좋은 일이었다. -혼자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마침 파티가 있네요 ㅎㅎ └ 아, 에바임 ;;; └ 방장 양심 ㅇㄷ? └ 20레벨이 루멘티스 파티 껴달라고 비비는 거, 너무 노양심 아니냐 방장아? 역시, 쌀먹의 신은 아직 날 버리지 않으신 듯했다. -제 레벨은 비밀인데요? └ 예??? └ 트롤!! 트롤이다!!! └ 사기꾼 신고는 어디다 해야되죠 형님들. -어차피 20레벨이라고 해도 안 믿을 것 같습니다만. └ 그… 그건 맞긴 해;; 계속해서 버스를 탈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클래스 메인 퀘만 받고 나면, 나도 양심이 있으니 다른 사냥터 찾아봐야지. 다만 퀘스트 받는 거까진 해 놔야 성장 방향성도 정할 수 있으니, 무리해서라도 가보려고 하는 거다. -그냥 길 뚫는 것만 좀 도와달라고 하게요. 마침 퀘스트 가이드가 떴기 때문에, 목적지도 명확했다. 〓〓〓〓〓〓〓〓〓〓〓〓〓〓 태고의 빛을 찾아서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난이도 : S 당신은 ‘태고의 연성술’을 계승하였습니다. 루멘티스 탄광에 잠들어 있는 ‘태고의 빛’을 깨운다면, 당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퀘스트 수령 조건 : ‘부서진 루멘티스 석상’ 발견. 〓〓〓〓〓〓〓〓〓〓〓〓〓〓 부서진 루멘티스 석상의 위치는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지점이었고, 여기서 많이 멀지도 않은 위치였다. 그러니까. -그럼 저……. 버스 한 번 타 봅니다 형님들! 상황은 아주 괜찮다고 할 수 있었다. └ 안 돼, 돌아가. └ 데이브 아웃! 데이브 아웃! └ (•᷄- •᷅ ;) └ ( 乂˙-˙) └ ┗┐ヽ(′Д、`*)ノ┌┛ 뭐, 약간의 불안 요소가 있긴 하다. 이 파티…… 상태가 뭔가 묘하게 정상 같지 않은 느낌이거든. “제발……. 불 붙이기 전에는 한마디만 해주면 안 되겠니? 로웰?” “했잖아요?” “불 다 붙고… 그러니까 캐스팅 끝나고 나서 했잖아.” “아… 제가 그랬던가요? 헤헤.” 대체 저 전사 클래스 형님은 어떤 사연이 있으시길래 온몸이 다 까맣게 그을리신 걸까? 뒤따르는 나머지 한 명… 서포터로 보이는 여성 플레이어도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고……. “…….” 유일하게 생기라는 게 남아 있는 파티원은 저 화염법사 하나뿐인데, 솔직히 저 여자가 이 모든 불안 요소의 원인 같아 보인다. 이건 그냥 ‘직감’ 같은 거다. 그러니까. -저 여자만 좀 조심하면 되겠죠 형님들? 어, 으음……. 어떻게든 되겠지 뭐. └ 그냥 솔플 하쇼. 아, 그럴 순 없고요. 저벅- 저벅- 그래도 역량이 없었다면 3인 파티로 이 깊숙한 지역까지 내려오지도 못했겠지.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한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차피 내 목적지는, 그리 멀지도 않다. “저기… 실례되지 않는다면, 파티에 자리 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파티원 세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꽂혔다. 저들도 조금 전부터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내가 나타났음에도 그리 놀라 보이지는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세 사람 중 가장 연배가 있어 보이는, 그 까맣게 그을린 남자가 내 말을 받았다. “혹시 여기는 어떻게…….” 이런 위험한 곳에서 혼자 뭐 하고 있었냐는 의문이겠지. 대답은 이미 다 생각해 뒀다.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단순 수색 퀘스트라 혼자 왔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하핫.” └ 뭐지? 방장 혀에 기름 둘렀음?;;; └ 뭔 구라를 이렇게 자연스럽게ㄷㄷㄷ 일단 단순 수색 맞잖아? “혹시, 근접 딜러 포지션이신가요?” 아마 내가 들고 있는 검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나 본데……. 근접 딜러냐고? 흐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또는 아닐 수도 있다. 지금부터 정해보자. “아, 클래스요?” 일단 순간의 곁눈질로 파티 구성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다음, 곧바로 나머지 한 손에 방패를 꺼내 들었다. 철컥-! 내 판단으로 이 파티에 합류할 확률이 가장 높은 포지션은 무조건 탱커였다. 대충 보니 전사 하나에 화염법사 하나. 나머지 한 명은 서포터 포지션이었거든. 저렇게 너덜너덜해진 전사 한 명으로는, 루멘 고스트들의 폭딜을 받아내기 어려웠을 거다. [아이언테이드 실드 (Irontide Shield)를 장착했습니다.] 조만간 팔아먹으려고 인벤토리에 쟁여두고 있었던, 무려 3티어 방패 아이템. 아무래도 이걸 잠깐 써야 할 듯하다. 내 포지션은 그렇게 정해졌다. “아, 아뇨. 전 탱컵니다.” └ ??? └ ?? └ ??????????? └ 이거 쉬벌 순 사기꾼이잖어? 성좌들이 뭐라 하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오오!!! 진짜 탱커예요?” “크-! 대박! 좋습니다!” 역시 먹혔다. └ 님들;; 사기꾼 신고좀요;; 사기 그런 거 아니고, 일종의 ‘처세술’ 같은 겁니다만? “후후.” 뭐, 이 허술한 파티에도 눈치 빠른 꼬맹이 녀석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런데 기사 클래스가 왜 중갑도 안 입고 있어요?” 이쯤이야 예상 범주 안의 질문이었다. “아, 제가 히든 클래스라서, 기사 클래스는 아닙니다.” “캬-!” “오오! 히든 클래스! 나돈데!” 무엇보다 다른 파티원들은 이미 다 넘어왔다고 애송이? 그런데 저 빨간 여자는 왜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하는 거야? “그래도 그런…… 래더 아머 차림으로는 루멘 고스트 딜 받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애송이는 뭔가 찜찜한지 은근 집요하게 물어왔지만, 문제 될 건 딱히 없었다. 왜? 난 지금 사실만을 말하고 있거든. “약간 그… 회피 반격 탱 느낌이랄까요.” 내가 기사가 아니라 히든 클래스인 것도 맞고. 대체로 피하거나 받아치면서 어그로를 끌어 볼 생각이니까, 회피탱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안 그래? └ 회피 반격탱 ㅇㅈㄹㅋㅋㅋ 그러니까 저, 거짓말한 건 없습니다? └ 와;;; 와;; 어떻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 누가 들으면 고스트 가디언이라도 되는 줄;; 오, 고스트 가디언도 알다니. 이건 좀 놀랍다. 그거 진짜 얻기 힘든 희귀 클래스거든. 역시 성좌들의 지식 수준은 정말 천차만별인 듯하다. 참고로 고스트 가디언은 3차 전직 히든 클래스. 딱 두 번 정도 플레이해봤는데… 생각해 보니 회피-반격탱 드립친 김에, 그걸 좀 모방해도 되겠는걸? 뭐, 어찌 됐든……. “으음.” 저 서포터 꼬맹이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은 잘 해결될 듯하다. 중재하려는 듯 검댕이 형님이 곧바로 나서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저희가 여기 로웰 때문에 히든 클래스에 PTSD가 조금 있기는 합니다. 이 친구도 그래서 반응이 좀 떨떠름한 거니까, 너무 기분 상하진 마세요.” “내가 뭐! 왜요!” “으음. 그렇긴 해. 이게 로웰 언니 문제지 히든 클래스 문제는 아니니까…….” 아, 저 화염법사 히든 클래스였어? 어쩐지 1차 전직 주제에 벌써 플레어 스톰을 쓰더라니……. 아마 화염계열 마법사 히든 클래스 중 하나였나보다. “그리고! 나만 히든 클래슨가? 노빈 얘도 힐러잖아요?” “힐러는… 그래도 히든 클래스라고 하긴 좀.” 오호. 단순 서포터인 줄 알았던 요 꼬맹이도, 생각보다 고급인력이었다. 라이카에서는 기본적으로 힐러 쪽으로 전직하려면, 히든 클래스를 얻거나 2차 전직까지 기다려야 하거든. 다만 히든 클래스 중 잘 알려진 힐러 전직 루트가 몇 가지 있어서 흔하긴 한데. 그래도 일반 전직 루트보단 훨씬 어려워서, 귀족 대접을 받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 보니, 무슨 클래스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그래도 생판 남을 파티로 받아주시는데, 당연히 조심하셔야죠.” 이러면 확실히 나도 좀 편해진다. 오랜만에 힐까지 받으면서 탱커 한번 해 보는 건가? “그렇다면……!” 띠링-! [플레이어 ‘라이너 벨릭’이 파티에 초대합니다.] [파티 초대를 수락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데이브 님.” “감사합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1인분 이상은 최대한 해내 줘야겠다. 솔직히 지금 내 상태는 20레벨에 클래스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부족한 부분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커버해보지 뭐. └ 와 ㅋㅋ진짜로 파티 들어갔네 ㅋㅋㅋ └ 운좋게 파티 구한 건 좀 배아프긴 한데, 그래도 흥미진진해짐ㅋㅋㅋ └ 재밌으면 됐잖아? 한잔해~ └ 그런데 방장; 이렇게 공갈치고 실제로 전투는 어떻게 하려고;; 어쨌든 파티에 합류하자, 계속해서 사기꾼이라며 아우성치던 성좌들도 이제는 걱정을 좀 해준다. └ 회피 반격탱?ㅋㅋㅋ 그게 뭔지는 아는 거지 방장? └ 그나마 힐러라도 있어서 조금 나아진 듯? 하지만 난, 진짜로 어지간한 탱커 이상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탱커로도 3차 전직 정도는 수없이 해봤던 몸인데, 아무렴 40레벨대 필드에서 흉내조차 못 낼까. └ 이 ㅅㄲ 탱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어그로 받아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그런데 형님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레퍼토리 아닙니까요? 아까 지팡이 들 때도 이러시더니……. 법사야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쳐도, 고기 방패쯤이야 뭐. └ 뭣이??! └ 고… 뭐라고? └ 아니!! 탱커야말로 파티 플레이의 꽃이거늘! 탱커라는 게 그냥, 전열에서 막을 건 막아주고 피할 건 피해주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적당히 상황 봐서 딜러 라인 지켜주고 뭐……. └ 그러니까 그게, 그…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적당히 성좌들을 납득시킨 나는, 자연스레 파티의 선두로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의 얼굴이 조금 붉어집니다.] 정말 상상조차 못했던 메시지들이, 내 눈앞에 연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ㅈ도 모르는 놈.”이라고 화를 냅니다.] 예?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방패는 검보다 오래 기억되는 법.”이라고 얘기합니다.] └ 아ㅋㅋㅋ신좌님 화나셨다고ㅋㅋㅋㅋㅋㅋㅋ └ 개웃기네 진짜ㅋㅋㅋ 예상을 벗어난 졸업 성좌의 추가적인 등장에 순간적으로 뇌 정지가 와버렸다. 아니, 저 억울합니다? 팩트를 그대로 말했을 뿐이라고요.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신탁’을 사용합니다.] [갈(喝)-!!!] └ ㅋㅋㅋ미친ㅋㅋㅋ └ 화낼려고 신탁을 썼엌ㅋㅋ └ 쉬벌ㅋㅋㅋㅋㅋㅋ 하지만 당황도 잠시뿐. 내 머리는 금세 팽팽 돌아갔다. 솔직히 급발진한 성좌가 무려 ‘졸업 성좌’여서 잠깐 당황했던 거지…. 어쩌면 상황 자체는 오히려 더 좋게 된 게 아닐까? -쇼 앤 프루브!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그러니까 난 여기서조차 금세 돈 냄새를 맡아버렸다.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당신에게는 절대 동료를 지켜낼 만한 실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탱커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고기방패 그거 그냥 아무나 해도 되는 거라니까요? 어떻습니까 성좌님. 긁? 띠링-! [‘묵묵한 벽의 신좌’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뭐야, 이게 진짜로 한 번에 된다고? 〓〓〓〓〓〓〓〓〓〓〓〓〓〓 역량 증명 분류 : 미션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1시간 이상 현재 파티 유지. (00 : 60 : 00) - 1시간 이후 파티 전투 기여도 25% 이상 달성 - 1시간 이후 파티 받은 피해량 지분 40% 이상 달성 보상 : 1000LP 〓〓〓〓〓〓〓〓〓〓〓〓〓〓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건 해본 적 없지만, 어쩌면 성좌 돈 천 냥 뜯는 건 가능할 것도 같다.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려봐야겠다. -에이……. 황금의 주인님은 바로 5천 박으시던데. 혹시, 쫄? [‘묵묵한 벽의 신좌’님이 미션 내용을 수정등록 하셨습니다.] [조건 시간이 모두 2시간으로 상향됩니다.] [미션 보상이 3000LP로 변경됩니다.] 역시 우리 성좌님들은…… 살살 긁으면 돈이 나온다니까? 3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49레벨의 전사 클래스인 ‘라이너 벨릭’은, 벌써 각성 6년 차인 베테랑 플레이어였다. 적당한 재능을 가졌지만 피나는 노력을 해온 그는… 이제 곧 2차 전직을 앞두고 있는 상태. 그리고 이 ‘2차 전직’은 그의 가장 큰 숙원이었다. 2차 전직에 성공하는 순간, 플레이어로서의 위상이 지금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테니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최근, 운 좋게도 천금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히든 클래스를 찾아내다니……. 내게도 이런 날이!’ 정확히는 히든 클래스로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를 찾아낸 거지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어쨌든 클리어에 성공만 하면 히든 클래스 전직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해서 2차 히든 클래스로 전직에 성공한다면……. 그는 단숨에 상위 플레이어로 발돋움할 수 있을 터였으니까. 2차 히든 클래스는 그만큼 대단한 값어치가 있었다. 크게 의미 없는 1차 히든 클래스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다.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면 60레벨까진 또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 지금이야 흔해 빠진 40레벨대 전사 플레이어에 불과하지만. 만약 2차 히든 클래스를 가진 60레벨 전사 플레이어가 된다면…… 벨릭은 어딜 가도 모셔갈 만큼 귀한 대접을 받게 될 터였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용병 생활을 한다면 달에 몇억도 벌어들일 수 있었으며, 안정성을 위해 괜찮은 길드에 들어간다 해도 10억 대 연봉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수준. 그만큼 2차 전직의 벽과 히든 클래스의 희귀도가 높다는 방증이지만, 그는 이제 그 영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더 힘내보자…….’ 그래서 라이너 벨릭은 간절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허술한 파티로 ‘루멘티스 광산’에 오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광산 안에서 찾아야 할 특수한 아이템이 있었고. 이게 바로 히든 퀘스트의 진행 아이템이었으니까. “‘녹슨 광산 열쇠’라는 걸 찾아야 해, 노빈.” “그게 외부인 파티원을 모집하면 안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걸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먼저 얻게 되면… 내 퀘스트 진행이 막혀버리거든.” “아…….” “그러니까 무조건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인원으로만 파티를 구성하지 않으면 열쇠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었으니……. 정상적인 파티를 모집하는 게 불가능했던 거다. ‘그나마 노빈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 절친한 동생이자 40레벨 후반의 힐러인 세일라 노빈(Seila Novin)이 아니었더라면, 이 무모한 공략은 시도조차 못해 봤을 거다. 천방지축이지만 딜 하나는 확실한 마법사인 로웰 또한, 노빈 덕에 구할 수 있었던 파티원이니까. “후우.”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렇게 폐광의 깊숙한 지하층에 도달하기까지… 벨릭은 단 한 명의 추가적인 파티원도 영입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들은 결국, 루멘티스 광산의 숨겨진 구역을 찾아내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띠링-! [녹슨 광산 열쇠를 찾았습니다.] [폐쇄된 탄광. 숨겨진 통로를 개방합니다.] [탄광 지하구역으로 입장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워낙 힘들게 필드를 뚫고 내려온 탓에 파티원 모두가 너덜너덜해진데다, 탄광에 들어온 순간부터 필드 난이도가 더 올라갔으니 말이었다. 그래서 벨릭은, 솔직히 데이브의 등장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도 파티원 영입을 거부한다면…… 퀘스트 수령의 코앞까지 온 상태에서, 눈물을 머금고 귀환 스크롤을 찢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미 ‘녹슨 광산 열쇠’도 찾았으니, 이제는 퀘스트 정보 유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상태. ‘이 데이브라는 녀석은 열쇠도 없이 어떻게 여길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열쇠가 벨릭의 인벤토리에 있는 마당에, 그런 사소한 건 중요치 않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퀘스트를 어떻게든 완주해 내는 것. 그래서 벨릭은 ‘데이브’라는 남자를 영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가 괜찮은 사람이고, 또 어느 정도 실력 있는 탱커이길… 기도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피-반격탱’이라는 게 대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자, 전방에 유령들 보이죠?” “예, 벨릭님.” “로웰은 천천히 캐스팅 준비하고, 노빈이는…….” 그런데 잠시 후 첫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나서기 시작한 새 파티원의 활약상에, 벨릭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벨릭님. 저 몇 가지 요청 좀 드려도 될까요?” “으음…… 한번 해보세요.” 일단, 자신조차 몰랐던 노빈의 히든 클래스를 갑자기 언급하더니 스킬을 주문하는가 하면. “힐러님. 세인트 키퍼 맞죠?” “어… 네?” “저는 힐보다 보호막이 필요하니까, 디바인 쉴드(Divine Shild) 먼저 걸어주시고…….” “…….” 어떻게 된 일인지, 로웰이 가진 스킬 중 가장 위험한(?) 스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데이브’라는 남자. “법사님은 무슨 클래슨지는 잘 모르겠지만, 플레어 스톰 쓰시는 거 보니 매그니파이어(Magnifire)도 가능하시죠?” “가능해요!” “안돼! 쟤 그거 못 맞춰요!” “괜찮으니까 매그니파이어 위주로 공격마법 세팅해 주세요.” 마치 숙련된 공대장처럼 오더를 내리는 그를 보며, 벨릭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파티장님은 저랑 거리 유지해 주시면서, 유령들 후방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케어 좀 해주시고…….” “그… 일단 알겠습니다.” “자, 그럼 들어갑니다?” 타탓- 하지만 진짜 놀람은 여기부터였다. “어어, 그렇게 바로?” 전투가 시작되고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플레이어 인생 6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터엉-! 까가강-! 검과 방패를 양손에 각각 든 채로, 물 만난 고기 마냥 전장을 휘젓기 시작하는 새 파티원. ‘탱커는 원래 묵직하게 버티는 포지션 아니었나……?’ 근접 딜러인 자신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움직이며, 마치 곡예라도 하듯 유령들의 공격을 회피하는 데이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릭은, 한 가지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게… 탱커라고?’ * * * 나는 탱커다. 하지만 저 유령 놈들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해선 안 된다. 대체 그건 또 무슨 컨셉질이냐고? 컨셉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나는 좀 섭섭할 수밖에 없다. 이건 컨셉이 아니라, 내가 탱커의 역할을 수행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었으니까. “자, 그럼 들어갑니다?” 저기 저쪽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음침한 유령 자식들. 키에에- 나는 저 녀석들에게 한 방이라도 제대로 된 공격을 허용한다면, 아마 바로 빈사 상태가 될 거다. 한 방에 빈사가 되어버리면 파티원들이 신뢰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때문에 절대로 그냥 공격을 맞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극한의 블로킹과 패링. 믿을 건 이것뿐이다. 까앙-!! [‘퍼펙트 패링’이 발동하였습니다.] [‘루멘 고스트 (Lumen Ghost)’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합니다.] [피해량이 99%만큼 감소합니다.] 까가강-!! [‘퍼펙트 블로킹’에 성공하였습니다.] [‘루멘 고스트 (Lumen Ghost)’의 공격을 완벽히 튕겨냅니다.] [피해량이 100%만큼 감소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전략이냐고? 일단 루멘 고스트를 상대로는 생각보다 할 만하다. └ 딱 두 방이면 뒤진다고? 그럼 안 맞으면 됨ㅋㅋ └ ㅋㅋㅋ아니 탱커 맞네 ㅋㅋㅋ 블로킹은 또 왜 이렇게 잘함? └ 피지컬 하나는 진짜 예술인 ㅅㄲ……. 다행히 루멘 고스트는 죽창 같은 공격력을 가진 만큼, 공격 모션이 꽤나 느린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타이밍 맞추기가 편했기 때문에, 퍼펙트 페링과 블로킹의 난이도도 상당히 낮은 편에 속한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낼 순 없지만……. “지금!” 이것 덕분에 내 계획은 더더욱 완벽해졌다. [파티원, ‘세일라 노빈 (Seila Novin)’이 디바인 쉴드(Divine Shild)를 부여합니다.] 눈치 빠른 서포터 꼬맹이가, 생각보다 상당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루멘 고스트 (Lumen Ghost)’의 공격을 일부 방어합니다.] [피해량이 57%만큼 감소합니다.] [쉴드가 감소하였습니다.] 무려 내 전체 피통 2배에 육박하는 내구도를 가진 디바인 쉴드! 이 디바인 쉴드 쿨이 돌기 전까지 이걸 최대한 아껴 쓴다면, 난 그야말로 완벽한 탱커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근데 님들; 블로킹이 원래 저렇게 쉬운 거임?;; └ 쉬우면 탱커가 왜 중갑 입겠음ㅋㅋㅋ 가벼운 견갑 입고 저놈처럼 플레이하지 ㅋㅋㅋ 그런데 솔직히 탱커가 쉬운 것도 맞다. 공격할 생각 없이 수비만 하고 있기 때문에, 패링이나 블로킹을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거라는 말씀. 만약 내가 공격도 수행해야 하는 근접 딜러였으면, 이런 극한의 방패컨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난 지금, 온몸으로 탱커가 쉽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인 거다. └ 솔직히 미친놈처럼 잘하긴 하는데, 그래도 저걸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 ㄹㅇㅋㅋ 저러면 스태미너 금방 빨릴 텐데. 그러니까……. 벌써부터 쫄리기 시작하는 ‘묵묵한 벽의 신좌’님이면 개추요.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의 표정이 조금 굳어집니다.]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블로킹 실력 자체는 쓸 만한 것 같다.”라고 생각합니다.] 개추 확인했습니다, 형님. 하지만 아직 전 시작도 안 했다고요? [파티원, ‘엘리시아 로웰 (Elicia Rowell)’이 매그니파이어(Magnifire)를 캐스팅합니다.] 그럼 이제부턴, ‘고스트 가디언’ 흉내를 한 번 내볼까? “캐스팅 끝나갑니다, 데이브 님!” 하이 톤의 목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파티원 엘리시아 로웰의 전방에 거대한 화염의 구체들이 맹렬히 휘몰아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강렬한 열기에, 나는 솔직히 꽤 감탄했다. ‘매그니파이어를 제대로 쓸 줄 아네?’ 원래 매그니파이어는 최소 2차 전직까지는 해야 사용할 수 있는 최상위 공격마법. 그래서 히든 클래스로 그걸 배운 1차 법사라면 위력이 많이 아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저 정도면 위력 하나만큼은 ‘진짜’가 맞는 듯했다. ‘이러면 진짜 실수 한 번에 조질 수도 있긴 하지만.’ 아마 저 로웰이라는 마법사는, 자신의 역량보다 훨씬 강력한 화염 마법을 구사하는 대신 컨트롤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런 종류의 히든 클래스를 얻은 듯했고.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그 컨트롤을 도와 볼 생각이었다. “지금 거리 벌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러니까 당황한 힐러님이 내게 비키라며 아무리 손짓해 봐도……. “걱정 말고 그냥 쏴요! 난 괜찮으니까.” 난 포지션을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것들이 내 쪽으로 날아와야만, 내가 하려던 플레이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네엡!” 그런데 이 화염 법사 처자는 어떻게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걸까?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것 같다. 방금 내 플레이를 보고 믿음이 생겼거나. 아니면 내가 숯불구이가 되도 상관없다는 마인드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슈와아아악-! 로웰이 지팡이를 휘저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수량의 화염 구체들이 전방으로 쏟아진다. ‘지금!’ 그걸 확인한 나는,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펑- 퍼버벙- 펑- 펑-! 내 인근으로 날아든 화염의 구체들을 향해, 맹렬히 방패를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퍼펙트 블로킹’에 성공하였습니다.] [‘매그니파이어(Magnifire)’를 튕겨냅니다.] [‘퍼펙트 블로킹’에 성공하였습니다.] [‘매그니파이어(Magnifire)’를 튕겨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우리 파티원 친구들의 표정은……. └ (꒪.">">">">">">">">">">">">">">">">">">">">">">">">">">">">">">">">">">">">">">">">">">">">">">">">">">">">">">">">">">">">">">">">">">">">">">">">.">">">">">">">">꒪ ) └ ¯\(ºдಠ)/¯ └ Σ(・Д・)!? 이 성좌형님들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3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패링’은 공격을 흘려내는 매커니즘을 가진 방어술이라면, ‘블로킹’은 공격을 튕겨내는 매커니즘을 가진 기술이다. 그러니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대부분의 투사체는, 반사각만 잘 이해한다면 방패를 활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튕겨내는 게 가능하다. 이걸 극한으로 활용해 반격스킬로 활용하는 클래스가, 바로 ‘고스트 가디언’. 정확히는 ‘고스트 패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친 난이도의 기술이었다. ‘그거 연습하다가 진짜 머리털 다 빠질 뻔했었지.’ 고스트 패링의 숙련도를 극한까지 깎아내면, 수십 미터 밖에서 날아온 수리검을 그대로 튕겨내어 시전자의 머리통에 다시 꽂아주는 것까지도 가능하다. 물론 관련 스킬이 없는 난, 그 정도까지 정교하게 해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퍼엉-! 퍼버버벙-!!! 여기는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란 말이지. 오조준 된 화염 덩이를 블로킹해 적당히 방향만 바꿔줘도, 우글우글 몰려있는 유령 중 하나한테 맞춰 넣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다. 게다가 탱커 포지션인 탓에 몹들과 워낙 가깝기도 했으니, 조금 실수해도 대충 맞을 정도. 화르륵- 퍼엉-! └ ㅅ……ㅂ?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러니 우리 화염법사님은, 대충 적들이 있는 방향으로 불덩이를 난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바로 이렇게. 띠링-! [‘루멘 고스트 (Lumen Ghost)’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루멘 고스트 (Lumen Ghost)’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종잇장처럼 허약한 유령들 정도는, 순식간에 태워 죽일 수가 있다는 말씀. [‘루멘 고스트 (Lumen Ghost)’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루멘 고스트 (Lumen Ghost)’를…….] ……후략…… 어떤데. 별로 안 어렵잖아? └ 미쳤다;; └ 대체 이건 무슨 초식임?ㄷㄷㄷㄷㄷ └ 보고 있는데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음;; 그런데 기만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까지 어려운 건 아니다. 진짜 어려운 건 완성된 고스트 패링이지, 이건 신검합일보다도 쉬운 기술인걸? 물론 내가 고스트 가디언으로 플레이해보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손쉽게 해내진 못했겠다만……. └ 방장 특 : 별로 안 어렵다(어려움). 기만하는 게 아니다(맞음). 그러니까 우리 신좌 형님……. 시간 끌지 말고 빨리빨리 인정하시는 건 어떤지요?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침묵합니다.] └ 우리 신좌님 묵묵해졌누ㅋㅋㅋ 혹시 주신 미션에서 ‘받은 피해량 지분 40%’ 조건을 못 맞출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신다면…… 심심한 유감을 표할 따름이다. 다 피하고 무효화시키다 보니 받는 딜이 얼마 안 되는 건 확실히 맞지만……. 문제는 나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아예 피해 자체를 입지 않는 수준이라는 말씀. [플레이어의 파티 기여도 정보를 호출합니다.] [플레이어 : 데이브] [입힌 피해량 : 35%] [받은 피해량 : 87%] [회복량 : 0%] 그런데 딜 지분은 왜 35%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로웰의 화염 마법 명중률에 기여한 게, 딜 지분으로 계산되는 구조인가 본데……. └ 나 이런 거 처음 봐요 님들;;; └ 이게 탱커? 이게 탱커? 어쨌든, 이게 탱커가 아니면 대체 뭐가 탱컨대? 어그로 다 받아줘, 딜러들 딜하기 쉽게 포지셔닝해줘.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탱커의 표본이란 말이지. └ 어…… 그러니까 이게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쓰읍. └ 방장쉑 보고 있으면 인지부조화 ㅈㄴ 온다니까 ㄹㅇ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이동하시죠?” “어어… 옙! 이동해요!” 내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파티원들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해 오빠! 멍때리고 있으면 어떡해.” “어… 그… 제가 잠시… 조금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벨릭을 뒤로 한 채, 나는 자연스럽게 파티에서 앞장섰다. 그나저나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루틴이 하나 빠졌잖아? 전투가 끝났으면 발골을 해야 하는데, 남아 있는 시체가 없다. 유령 쉐끼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드랍되는 잡템들이 딱히 맛있는 것 같지도 않고……. “흐음.” 클래스 메인 퀘스트만 진행하고 나면, 여기 다시는 안 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난, 곧 하층부로 이어진 통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폐광의 꽤 깊숙한 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전투는 꽤나 많이 치를 수 있었고, 나는 무려 레벨도 하나 오른 상태였다. 띠링-!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1레벨이 되었습니다.] 19에서 20레벨이 될 때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친 레벨업 속도. 하지만 그렇게 놀라운 건 아니다. 내가 지금 사냥 중인 몬스터들의 레벨대를 생각하면 말이지. [루멘 고스트 – 46Lv] 시작의 섬에서 사냥 가능했던 몬스터의 최대 레벨은 20레벨에 불과했으니. 그보다 최소 20배 이상의 경험치를 주는 40레벨대 몬스터들을 사냥하는데, 레벨이 잘 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한 30레벨까지는 금방 도달할 수 있겠어.’ 대충 경험치를 계산해 보니, 30레벨까지는 10일 정도 잡으면 넉넉할 듯하다. 한두 시간 만에 1레벨이 올랐는데, 30레벨까지 왜 10일이나 걸리냐고? 그야 경험치 테이블은 언제나 배수에 가깝게 증가하니까. 파밍 가능한 사냥터의 레벨대도 올라가면서 수급 경험치량이 증가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10일 정도는 잡아야 한다는 거다. 어쨌든 그러면 보름 만에 30레벨을 달성하는 셈인데……. ‘보통의 플레이어들이 30레벨까지 일 년 정도 걸린다고 했었나?’ 내 기준에서 생각해 봐도 진짜 페이스가 빠르긴 하다. 베타 플레이 때 내 최고 기록을 떠올려 봐도, 30레벨까지는 40일 정도가 한계였던 것 같거든. “그나저나 데이브 님은, 2차 전직도 이미 하신 거죠?” “모르긴 몰라도 50레벨 중후반 정도 되실 듯.” “그렇지? 60레벨이 넘으셨으면 여기 계실 리가 없으니…….” “캬, 2차 히든 클래스는 역시 다르긴 하네요.” “나도 얼른 전직하고 싶다.” 그나저나 이쪽은 뭔가 오해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데.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아마도 내 반격 퍼포먼스가, 히든 클래스의 어떤 스킬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데이브 님, 진짜 레벨 몇이세요? 힌트라도.” “비밀입니다.” 그래도 내가 직접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딱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는다. └ 그야… 방장은 양심이 없으니까……. 뭣? └ 억울한 척 오지네ㅋㅋ └ ㄹㅇㅋㅋ 어쨌든 성좌님들의 억까(?)는 뒤로 한 채, 우리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전진했다. 목적지가 서로 다른 거 아니냐고? 굳이 따지자면 다르긴 한데, 거의 비슷한 지점과도 다름없어서 괜찮다. 어차피 나도 그렇고 여기 파티장 형님도 그렇고, 이 폐광의 가장 아래쪽까지 내려가야 하는 건 같은 상황이거든. 이 형님은 폐광 보스인 거대한 바위벌레 녀석을 잡아야 퀘스트를 깨시고, 난 그 녀석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석상을 찾아야 하니까. 어쨌든 그런 공통의 목표를 가진 우리 파티는, 점점 더 합이 좋아지며 깊숙한 폐광까지 이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친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아우님은… 그 실력으로 길드는 왜 안 찾는 거야?” “얽매이는 게 좀 싫다고 해야 하나, 뭐 그렇습니다.” 그 와중에 조금 당황스러운 건, 최소 40대 중반일 거라고 생각했던 형님이 나보다 한 살 밖에 안 많았다는 거다. 물론 26세 기준으로 한 살은 아니고, 36세 기준으로 한 살이다. 이 형님이야 11살 정도 차이 난다고 생각해서 말을 편히 하는 중이었지만……. 뭐, 그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 사기꾼. └ 딱 봐도 서른은 넘어 뵈는데; └ 이제 나이도 속이네 ;; -아니 성좌님들. 그건 좀 억까 아닙니까. └ 억까는 무슨. └ 거울 보고 오셈. └ 레오좌 존안이랑도 한 번 비교해 보시고. “…….” 소싯적에 무려 ‘이성’한테 잘생겼다는 소리도 들어본 나로서는 많이 억울하긴 하다. 아니, 비교군을 레오로 잡으면 어떡하냐고. 걔 옆에 두면 어지간한 훈남들 데려다 놔도 죄다 오징어로 보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심력낭비를 해 봐야 나만 손해인 것 같다. 그렇게 조금 우울해지려던 바로 그 순간. 띠링-! [‘묵묵한 벽의 신좌’님의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내 행복을 책임져줄 메시지가 타이밍 좋게 떠올랐다. 어느새 2시간이 지난 듯했다. [보상으로 3000LP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명성이 +1만큼 증가합니다.] 크…! 이게 인생이지. 달달합니다요. └ 아니ㅋㅋ 방장 무슨 하꼬가 하루에 미션금만 8천을 벌어 가냐 ㅋㅋㅋ 원래 하꼬들은 얼마나 버는데요? └ 솔직히 2차 전직도 못한 플레이어들은 보통 시청자가 없다고 봐야지? └ 많아봐야 10명? └ 니네 파티원 중에 시청자 5명 넘는 친구 없을걸? └ 5명은 무슨ㅋㅋ 보통 0명이라고 보면 됨. 아……. 내가 좀 운이 좋은 거였구나. 그럼 랭커들은요? └ ??? └ 랭커랑 비벼볼 셈임?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ㅎㅎ └ 어제 보니까 검희는 하루에 한 30만 수금해 가던데. 예? └ 칼라도르 레이드 성공한 날이라, 감안하긴 해야 해ㅋㅋ └ 그렇다기엔 방장도 오늘 전직한 날인걸……. 갑자기 동기부여 오지게 된다. 하루에 30만LP라고? 그 정도면 순식간에 재벌 되는 거 아님? └ ㅇㅇ그건 아님. └ 랭커 유지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거라. └ 상위 레이드 한 번 하고 나면, 소모템만 몇만LP씩 태워야 할걸? └ 그러다 메인 장비 하나 깨먹기라도 하면 바로 100만LP 증발함ㅋ └ 그래도 엄청 벌긴 하지 뭐. └ 반대로 득템 한 방에 몇십만 LP도 버니까ㅇㅇ 순간 100만LP짜리 장비가 깨지는 상상을 잠깐 했는데, 나도 모르게 바지에 지릴 뻔했다. 얼마를 벌던 그 정도 손실이면 바로 우울증 올 것 같은데……. 역시 쌀숭이한테 랭커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 어쨌든 그렇게 성좌들과 담소를 나누며 동기부여 하는 사이.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22레벨이 되었습니다.] 레벨이 하나 더 올랐고, 목적지에도 거의 도달했다. 시간은… 대충 폐광에 들어온 지 3시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루멘티스 폐광, 잊혀진 금역(禁域)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탄광의 구석진 곳. 음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성인 한 명 크기의 작은 자줏빛 포탈. “드디어 찾았네요.” “다들 정비 한 번 해주시고…….” 간단하게 정비가 끝나자, 벨릭이 비장한 표정으로 포탈 앞에 다가섰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무려 50레벨이 넘는 에픽 몬스터가 등장할 예정이었으니, 긴장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들어간다? 다들 준비된 거 맞지?” 그나저나 이 턱수염 형님, 생긴 것과 다르게 상당히 쫄보인 것 같다. 그런데 원래 나 없이도 여기 오려고 했던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지? 생각해보니 기존 세 명으로… 크라이트 웜(Crite Wyrm)은 못 잡았을 것 같긴 한데……. “준비됐어, 오빠.” “저도 준비 완료요.” “저도 준비됐습니다, 형님.” “그럼 간다!” 띠링-! [파티장 라이너 벨릭(Rainer Bellic)이, 잊혀진 금역(禁域)으로 입장을 제안합니다.] [모든 파티원 수락 시, 필드가 이동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하지만 이 파티엔 내가 있고, 나는 이 ‘광물벌레’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녀석은……. [모든 파티원이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잊혀진 금역(禁域)으로 이동합니다.] 쿠쿵- 쿠구구궁-!!! [크라이트 웜(Crite Wyrm)과 조우하였습니다.] [크라이트 웜(Crite Wyrm)이, 고유능력 ‘진동파’를 시전합니다.] 날먹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에픽 몬스터다. 3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대륙이 시작되는 곳. ‘요람’을 벗어난 모든 플레이어들이, 가장 처음 밟게 되는 땅. 그러니까……. [루미스 영지(Lumis Domain)] 이곳은 라이카 안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머무는 도시인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각성자 위키의 정보에 따르자면……. 상주하는 NPC 인구만 400만이 넘는 데다, 추정되는 하루 평균 유동 플레이어 숫자도 무려 50~60만이나 되는 대도시가 바로 ‘루미스 영지’인 것이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플레이어 인구가 1000만 남짓이니… 무려 전 세계 플레이어의 5%에 달하는 인원이 여기에 머무는 셈. “와……. 여기가 루미스…….” 그러니까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루미스 영지의 규모는… 쉽게 말해 게이트 밖 대도시인 서울과 비견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인구밀도가 낮아서 그렇지, 땅덩이만 놓고 보면 서울보다도 더 큰 영지가 루미스였다. 때문에 루미스에 이런 게 있는 것 또한……. 지이이이잉-!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 탈 거면 얼른 타시오. 시간 빠듯하니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마나 캐리지 (Mana Carriage)라 불리는… 영지 내부의 모든 도시를 연결해주는 특별한 마차. “루멘하르트까지 운임은 15LP요.” “여기 있습니다.” 레오는 루미스 안에서도 가장 번화가로 알려진 루멘하르트 (Lumenheart)에 가야 했고, 때문에 마차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지 외곽에서 루멘하르트까지 걸어갔다가는, 내일 해가 뜨는 걸 보게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15LP나 되는 살인적인 운임을 지불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 뜻이다. ‘으, 이래서 40레벨 이전까지는… 광장 포탈에 귀환 정보를 필수로 저장해야 한다는 거구나.’ 사실 레오가 평범한 전직 루트로 알테리온에 도착했다면 첫날부터 이렇게 마나 캐리지를 타야 할 일은 없었을 거다. 기본 클래스로 전직하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해당 클래스의 [길드 건물]이 세워져 있는 루멘하르트 광장에서 시작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30레벨까지는 서브 퀘스트 위주로 플레이하며, 도시 내부에 있는 던전에서 성장하는 게 기본이었으니……. 루멘하르트 밖으로 나갈 일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이다. “후우.” 하지만 ‘질풍검사’로 전직한 레오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필드에 떨어졌다. 거기서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영지까지 이동하기 위해… 거래소에서 50LP짜리 스크롤도 하나 장만해야 했다. 그걸 찢었음에도 영지 외곽으로 워프되는 게 한계였기에, 이렇게 캐리지를 타게 된 거고 말이다. 마음에 꼭 드는 히든 클래스를 얻은 대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뼈 아픈 지출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스크롤 값까지 생각하면 65LP가 한 번에 증발해 버렸네.’ 어쨌든 이번에 ‘귀환 등록’만 제대로 해 두면, 한동안 캐리지를 타게 될 일은 없을 거다. 등록 비용도 200LP나 한다고 했지만… 그런 슬픈 사실은 지금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은… 라이카 인생 최초로 무려 ‘흑자’가 나지 않았는가. 데이브 형님의 은총 덕분에 말이다. 끼익-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는 캐리지에 탑승했고. 그 후 두 명 정도가 더 탑승하자 거친 소리를 내며 캐리지의 문이 닫혔다. 철컥-! 3량으로 구성된 마차에 각 4인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 아마 이 마나 캐리지에 탑승한 인원은 10명 전후일 터. ‘플레이어… 일까?’ 레오는 맞은편에 탑승한 두 남녀를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꽤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호기심이 조금 일었지만, 말을 걸기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시작의 마을 베레쉬트와 달리, 여기서는 NPC와 플레이어의 구분조차 쉽지 않았으니까. 기이이잉-! 마력이 공명하는 독특한 소리와 함께 캐리지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루멘하르트까진 20분 정도가 걸린다는 사실을 떠올린 레오는,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슬쩍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마나 캐리지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할 때. 덜컹-! 건너편의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 왔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맞죠?” 캐리지의 흔들림에 맞춰, 여자는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붉은 단발에, 요요하게 반짝이는 루비빛 눈동자. 스스럼없이 묻는 여자의 목소리에, 레오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딱히 부정할 이유도 없었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역시.” “두 분도 플레이어시겠네요?” ‘플레이어’라는 명칭을 언급했으니, 이들도 높은 확률로 플레이어였다. 대륙의 NPC들은 ‘플레이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플레이어를…… ‘게이트워커(Gatewalker)’라 칭한다고 했다. “맞아요. 이렇게 같은 캐리지에 탄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 가능할까요?” “그 정도야 어려울 거 없죠.” “저는 ‘세라’. 이쪽은 ‘자이드’예요.” “반갑습니다. 전 레오라고 합니다.” “어머, 플레이어 네임도 멋지시네요.” 자신을 ‘세라’라고 소개한 여성 플레이어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런 쪽으로 눈치가 전혀 없는 레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세라의 옆에 앉아있던 ‘자이드’라는 남자는 그녀의 행동거지가 꽤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내 이름은 대체 왜 파는 거야?” “까칠하게 굴지 말고, 피곤하면 잠이나 자 자이드.” “이 와중에도 얼굴 밝히는 건… 진짜 기가 막히긴 하네.” “뭔 소리야?” “우리가 지금 어딜 가는 중이었던 건지 잊은 건 아니겠지, 세라?” “거기서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깔끔하게 널 트램 밖으로 밀어버릴 수도 있어.” “휘유.” 티격태격하는 두 남녀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레오는, 두 사람의 복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봤다. ‘자이드’라 불린 남자는 검은 가죽 트렌치코트에 짧은 송곳니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으며. 자신을 ‘세라’라 소개한 여자는, 몸에 딱 붙는 자줏빛 로브에 탄피처럼 생긴 장신구를 귀에 걸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는 곧,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두 사람 다 독특한 차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들의 복장에서 은은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비에 마력이 담기려면, 최소 7티어 이상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이템 감정사도 아니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두 남녀가 두르고 있는 장비들은… 대충 봐도 상당히 고가의 아이템들이었다. 그러니 높은 확률로 60레벨이 훨씬 넘는 상위 유저일 터다. 그쯤 되는 유저가 대체 왜 이런 저가의 교통편을 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휴우. 소란스럽게 굴어서 미안해요, 잘생긴 오빠.” “어… 괜찮습니다.” “여기 오늘따라 자꾸 버튼 눌리는 예민남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불편을 끼쳐드렸네요.” “지랄.” 레오는 잠시 세라와 일상적인 대화를 조금 더 주고받았지만, 이내 트램 내부는 조용해졌다. ‘자이드’의 눈치를 보는 건지, 그녀도 몇 마디 더 하고는 입을 닫았으니 말이다. 해서 레오는 루멘하르트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10분 정도를, 조용히 눈을 감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 도착했수다. 루멘하르트 가신다는 분들 내리시오.” 철컹-! 캐리지의 문이 열렸고, 레오는 칸에서 내렸다. ‘확실히 특이한 사람들이었어. 플레이어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그리고 곧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은, 레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이이잉-!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레오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역시. 내 말이 맞지, 자이드?” “확실히.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네가 헷갈릴 리 없긴 해.” “아쉽네. 조금만 일찍 찾았으면 일이 더 쉬웠을 텐데.” “어쨌든 일단, 한 놈은 찾았고.” 그건 바로, 세라와 자이드가 레오와 같은 칸에 탔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머지 한쪽도… 슬슬 나타날 때 됐는데. 그치?” * * * 크라이트 웜은 거대한 벌레다. 알테리온 서부 사막지역에 서식하는 ‘샌드 웜’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흉포한 괴수. 난 베타 플레이어 시절 이 녀석을 ‘광물 벌레’라고 불렀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등딱지부터가 단단한 광석으로 뒤덮여 있는 이 녀석은…… 사실상 온몸이 광물로 만들어진 벌레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걸 왜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앉았느냐고? 그야… 이게 크라이트 웜 공략의 키 포인트거든. 그 증거로 난, 고작 5분 만에 이 괴물을 잡아버렸다. 키에에에엑-! 쿠웅-! 물론 파티원의 도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띠링-! [‘크라이트 웜(Crite Wyrm)’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크라이트 웜(Crite Wyrm)’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괴수가 쓰러진 뒤. 뭔가 허탈한 표정이 된 노빈이, 중얼거리듯 내게 물었다. “이게…… 진짜로 되네요?” “애초에 이렇게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녀석이니까요.” 털보 형님도 비슷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크아……. 공략문서에는 최소 2~3시간 이상 두들길 각오하라고 되어 있었는데.” “후우. 정말 이 바닥은 아는 게 힘이라니까.” 어두운 광맥 속에 서식하는 크라이트 웜은, 빛의 강약이 변화하는 것을 ‘적의 움직임 신호’로 인식한다. 크라이트 웜의 먹이인 루멘 광석 또한 애초에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광물이었으니. 먹이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로 빛의 신호를 움직임의 근거로 사용하는 녀석이었던 거다. 때문에 쏟아지는 광도가 순간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까지 올라가면, 크라이트 웜은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괴물의 폭주가 지속되는 시간은 5분. 그 시간 동안만 녀석을 피해 다니며 버티면, 지속시간이 끝난 뒤 녀석은 1분 동안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실상 ‘행동불가’에 준하는 상태로, 무려 1분이나 방치되는 거다. 그러니 그 사이에 뚝딱뚝딱 프리딜을 넣고, 손쉽게 잡아버리면 끝인 것. 파티에 화염 법사가 있는 덕에, 따로 섬광탄을 쓸 필요도 없었다. “데이브 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셨어요?” 노빈의 질문에, 아주 간결하게 팩트(?)로 대답했다. “정보 길드에서 샀습니다.” “아, 역시…….” 샀던 시점이 베타 플레이어 시절이긴 한데……. 어쨌든 정보 길드에서 산 건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잖아? └ 와, 방장놈 입만 벌리면 구라네 ㄷㄷㄷ └ 그런데 쟨 왜 믿냐 ㅋㅋ 정보 길드가 아무한테나 정보 파는 곳도 아닌데. └ 근데 이 ㅅㄲ 방주 탈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방송 키고 있던 거 아님? └ 맞음ㅋㅋㅋ └ 그럼 대체 정보 길드는 언제 감? └ 구라지 ㅋㅋㅋ └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구라치는 거 보소;; 물론 녀석의 그로기 패턴을 안다 해도, 공략이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로기 상태에 빠진 크라이트 웜은 경직 상태가 되어 표피가 더욱 단단해지고,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게 되기 때문. 그래서 여기서부터 중요했던 게, 바로 거래소에서 100LP에 공수한 무려 3티어짜리 곡괭이였다. 경직 상태인 크라이트 웜의 표피를 가장 쉽게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채광’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크라이트 웜 레이드를 전문적으로 하는 NPC들은, 광부 클래스를 하나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제대로 곡괭이질을 할 줄 아는 플레이어가 없다면, 1분 안에 표피를 뚫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럼 우리 파티는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 근데 방장놈, 곡괭이질은 왜 이렇게 또 잘하는 거임?;; └ 삽질 마스터잖음ㅋㅋ └ 그게 뭔 상관?;;;;; └ 삽질도 잘하는데 곡괭이질 좀 잘한다고 이상할 게 있냐는 소리였음. └ 아, 그런 관점에선 ㅇㅈ이긴 해ㅋㅋ 내가 소싯적에 수백 종이 넘는 클래스로 전직 해봤었는데…… 아무렴 그중 광부 클래스 하나가 없었을까? “어쨌든 아우님께 종일 신세만 지게 됐네.” “아닙니다. 저도 형님 파티 없었으면 상당히 곤란했을 뻔했어요.” 내가 캐리한 건 맞지만, 파티 덕을 본 것도 사실이지 뭐. 화염법사에 힐러 없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거든. 그러고 보니 털보 형님은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부터 털보 형님이 계속 미안해하면서… 내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던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차후에 기회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이 신세를 좀 갚고 싶어.” LP로 주시는 거 아니면, 딱히 필요가 없긴 한데요. 아니면 혹시… 이 크라이트 웜 사체의 소유권만 제게 통째로 넘겨주실 수 있다면. 그건 좀 끌릴지도? “그 정돈 당연히 해드려야죠.” “노빈이 말이 맞아요!” “나도 동의해. 뭐에 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정돈 네가 원하면 해 줘야지.” 크으. 깔끔한 만장일치라니. 이 친구들,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들이었잖아? 구우웃-! └ 방장 싱글벙글인거 보소 ㅋㅋㅋ └ ㄹㅇ투명하다 투명해ㅋㅋ 그렇다면 사양치 않고 낼름 받아먹어야겠다. LP란 자고로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는 법 아니겠어? 3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크라이트 웜을 처치한 이후. 우리 파티는 해산되었다. 애초에 나를 제외한 세 명은 벨릭의 퀘스트 클리어가 광산 공략의 목적이었으니……. 그것이 완수된 이상, 여기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다. 내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한 벨릭 형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귀환 스크롤을 찢었고, 노빈 또한 조용히 그를 따라서 루미스 영지로 귀환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로웰은 아직 광산에 남아 있었다. 할 일이 따로 좀 있다는데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일단 내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받는 일이었으니까. 까앙- 까앙-! └ 그런데 메인 퀘 받는다더니, 왜 갑자기 광부질임?;; └ 곡괭이질 잘한다고 칭찬해줬더니 신나서 그런 거 아닐까; └ 보스룸에 광석이 많긴 해ㅋㅋㅋ └ 우리 방장 특 : 잡템 앵벌이 못 참음. 까아앙-! 어허, 잡템이라니. 그런 섭한 말씀을. -다 쓸 데가 있습니다, 형님들. 성좌들의 말처럼, 크라이트 웜 보스 룸은 그 자체로 거대한 광맥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곡괭이까지 산 김에 이 보스룸만 탈탈 털면, 순도 높은 원석만 모아도 최소 50~70Kg정도는 나올 거다. 전부 다 쓸어 담으면 200Kg도 넘게 나올 거고. └ 그런 걸 우린 ‘잡템’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 루멘 광석 그거 Kg당 많이 쳐 줘도 2LP도 안 할 것 같은데 ㄹㅇㅋㅋㅋ 성좌놈들은 역시 LP의 소중함을 모른다. Kg당 1LP라고 쳐도 무려 50LP가 넘는 금액이건만……. 이렇게 건실한 노동을 앵벌이 취급해버리다니. └ 조금 전에 미션 한 번으로 3000LP 벌었던 놈 맞음 이거? 맞는데요. └ 그래도 흑요석 가루 줍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루멘 광석이면 많이 발전하긴 했음 ㅎㅎ └ 정보) 진짜 엊그제다;; 그런데 사실 나도, 단순히 광물 팔아먹을 생각만으로 이러고 있는 건 아니긴 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건 메인 퀘스트를 수령하는 거라고? 까아앙-! 그러니까 이 곡괭이질도 사실, ‘부서진 석상’을 찾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물론 정석적인 방식으로 폐광의 미로를 뒤지는 방법도 있겠지만……. 쿠쿵- 쿠구궁-! 어차피 곡괭이도 한 자루 사둔 마당에, 이렇게 벽 하나만 뚫으면 간단한 걸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어? └ Σ(・Д・)!? └ 동굴 벽이 갑자기 왜 무너짐?;;; └ 이런 루트는 또 어떻게 아는 건데ㅅㅂ └ 이 ㅅㄲ는 보법이 다르다니까 리얼;; └ 아닠ㅋㅋ 예상이 안 되네 진짜로ㅋㅋㅋ └ 그게 방장의 매력 아닐까? └ ㅇㅈ -퍼어엉! 한 10분 정도 벽을 두들긴 끝에… 굉음과 함께 석벽이 무너지며, 그 뒤쪽에 있던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어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절반이 부식되거나 부서졌음에도 아직 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아름다운 여신상. 띠링-! [‘부서진 루멘티스 석상’을 발견하였습니다.] [‘루멘티스 여신의 축복’이 발동합니다.] [1시간 동안, 생명력 재생 +1% 효과를 적용받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내가 얻은 이 ‘빛의 연금사’라는 괴팍한 클래스의 정체를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 맞다. 방장 이거 찾고 있었지. └ 여기 원래 그냥 찾으려면 한참 돌아와야하는데 ㅅㅂ;; └ 그런데 이거 그냥 광산 파밍할 때 버프 받으라고 만들어 둔 기물 아니었음? └ 나도 그런 줄 ㅇㅇ └ 여기에 연결된 전직퀘가 있을 줄이야ㅋㅋ 저벅- 저벅- 여신상 앞까지 걸음을 옮겨 다가서자, 내 몸으로부터 퍼져 나간 은은한 빛무리가 석상의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쩌어엉-! 마치 겹겹이 쌓여있는 얇은 유리 조각들이 터져 나가듯, 쨍한 소리와 함께 여신상으로부터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태고의 빛’이 깨어납니다.] [태고에 존재했던 잊혀진 존재들, 빛의 연금사 ‘Seraphist’가 세상에 복원됩니다.] 태고의 빛. 그 이름이 진정 어울리는, 이제껏 본적 없는 찬란한 빛의 향연. └ 오, 뭔가 댕쩌는 거 보여주나? └ 아놔;; 눈뽕 뭔데 그것을 저도 모르게 응시하던 난, 한 발짝 그 앞으로 다가섰고. 우우웅-! 그와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변하면서, 세상이 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 * * 태양이 세 번 떠오르고 세 번 지는 동안, 태고의 대륙 ‘아스테리온’에는 아직 신의 언어로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고대인들 중에는 ‘루멘’이라 불리는 [빛]을 다루는 이들이 존재했고, 그 빛의 심장을 이해한 자들을 빛의 연금사[Seraphist]라 칭했다. [루멘이여, 잠든 의지를 깨워내어라.] [빛의 노래가 들리는구나……. 그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 그들은 단순한 마법사도, 장인도 아니었다. 세상의 구조를 해석하고, 존재의 껍질에 ‘의지’를 담는 자들이었다. 하여 그들이 다루는 빛은 세상의 많은 것을 모방하고 창조해 냈으며, 때문에 세인들은 세라피스트가 신의 권능을 훔쳤다며 두려워했다. ‘생명의 창조’라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을 인간이 훔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빛의 연금사들은 그러한 질타에 대해 부정하였다. [아니. 그것은 살아있지 않다. 다만, 살아가려는 ‘뜻’을 품었을 뿐.] [우리는 그저, ‘에고(Ego)’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낼 따름이니…….] [이것을 감히 창조의 권능과 비교할 수는 없음이다.] 빛의 연금사들은, 자신들이 신의 권능을 훔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침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죄를 범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빛의 연금술은 더욱 눈부시게 발전했고, 어느 집단이 그렇듯 ‘이단’이 생겨났다. [빛이 의지를 품을 수 있다면, 왜 그 의지는 스스로를 완성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들의 미완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진정한 뜻일지니.] [신은 창조를 멈췄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여전히 빛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들은 실제로 위대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명석했으며, 합리적이고 창의적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가진 위대함은 곧 신의 분노를 불렀다. 빛으로 생명을 빚으려는 시도가 반복되자 태양신은 진노하였다. 찬란함의 이면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창조란 축복임과 동시에, 고통의 약속이거늘. 너희는 고통을 감당할 그릇을 가지지 못했으니, 이제 빛이 너희를 태우리라. 그날, 하늘이 찢어졌다. 태양은 일곱 겹의 껍질을 벗으며 불타올랐고, 대륙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도시는 하루 만에 무너졌고, 루멘의 흐름은 제어되지 않은 채 폭주하여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불기둥 ― ‘루멘 폭류(暴流)’ ― 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빛은 생명을 잃고, 생명은 의지를 잃었다. 수많은 세라피스트들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만들어낸 그릇들은 텅 빈 껍질로 남아, 수천 년 동안 미세한 루멘 입자를 흩뿌리며 신의 분노를 증언했다. 태양은 한때 아스테리온을 비추던 은혜의 상징이었으나, 그날 이후로는 누구도 아스테리온의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대륙은 침묵했다. 아스테리온의 황금탑은 붕괴했고, 그 안에 깃들었던 수많은 루멘 서식체들은 어둠으로 흩어졌다. 연금사들의 기록은 모래처럼 흩날려 잊혔으며, 남은 자들은 빛을 두려워하여 등불조차 켜지 않았다. 그저 잿빛 폐허 위, 무너진 황금탑의 거대한 기둥 위에……. 이 한 문장만이 새겨졌을 뿐이었다. [빛이 모든 죄악을 태웠으나, 어둠은 그 원죄를 기억하노라.] 그리고 가장 위대했던 세라피스트이자, 마지막 빛의 연금사였던 라피엘 에스테르. 그가 남긴 마지막 유산은, 황금 탑의 지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었다. * * * 머리가 띵하다. 방금 내가 본 게 대체 뭐지? 베타 서버에서 수많은 히든 클래스를 경험해본 만큼, 이런 식으로 클래스 관련 서사가 보여지는 건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보통 이 정도로 장엄한 서사가 등장하는 건, 최소 2차 전직 이후였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띠링-! [세라피스트(Seraphist)의 유지를 이어받았습니다.] [새로운 퀘스트를 수령합니다.] 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발생하는 건, 내 라이카 플레이 역사상 최초였다. “라피엘, 또 멍하니 뭐 하는 거야? 곧 마르텔 교수님 오신다니까?” 아무래도 난 지금……. 그 ‘최후의 세라피스트’라는 ‘라피엘 에스테르’의 몸에 빙의한 것 같거든. 〓〓〓〓〓〓〓〓〓〓〓〓〓〓 라피엘의 기억-A 《에고의 그릇 만들기 (Vessel of Ego)》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난이도 : - 당신은 태고의 빛으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아, ‘가장 위대했던 세라피스트 라피엘’이 남긴 안배에 최초로 접근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그의 안배 안에서 라피엘의 인정을 받아내고, 진정한 세라피스트가 되기 위해 그가 남긴 유산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중략…… 〓〓〓〓〓〓〓〓〓〓〓〓〓〓 이런 식의 퀘스트 자체가 처음인데……. 뭔가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재밌는 내용은 아니지 않았냐고? 재밌어서 흥미로운 게 아니라, 드디어 내가 얻은 히든 클래스가 뭐하는 건지 감이 잡히기 시작해서 그렇다. 이 세라피스트가 하는 연금이라는 거. 아마도 전투에 부릴 수 있는 ‘소환수’ 비슷한 걸 창조하는 느낌일 것 같다. 클래스 서사에 등장한 세라피스트들이, 온갖 괴수들을 만들어내고 부렸던 걸 보면 말이다. └ ㄷㄷㄷ 이건 또 뭐임 방장? └ 미쳤네;; 이런 퀘스트는 처음 보는데? 그나저나 역시, 형들도 처음이지? 성좌들도 모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다. 그만큼 희귀한 클래스라는 반증일 테니까. 그나저나 빙의 상태에서도 성좌들의 채팅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 본업 중 하나(?)인 스트리밍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거든. 〓〓〓〓〓〓〓〓〓〓〓〓〓〓 ……중략…… 먼저 라피엘의 기억 안에서, 당신이 가진 ‘빛의 연금사로서의 자질’을 증명하십시오. 빛의 의지(Ego)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최소한의 자질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상 : 빛의 곡괭이, ???연성식 〓〓〓〓〓〓〓〓〓〓〓〓〓〓 ……보상이 뭔가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긴 한데. 뭐, 보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진행하지 않을 수 있는 퀘스트도 아니다. 게다가 연계 퀘스트로 더 이어질 테니, 다른 보상이 또 추가되겠지 뭐. └ 보상에 저거 ???연성식은 또 뭐임? └ 빛의 곡괭이 ㅋㅋㅋ └ 퀘스트도 방장이 노가다 앵벌이 전문인 걸 아는 거지. 응 그런 거 아니야. 이 성좌놈들이 날 대체 뭐로 아는……. “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다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피엘, 내 말 들은 거 맞지?” 옙, 들었습니다. “어- 들었다니까.”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옆을 돌아보니, 짙은 청색 로브를 입은 소녀가 내 얼굴을 살짝 흘겨보고 있었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백옥같이 흰 피부를 가진 예쁘장한 소녀. NPC가 예쁘니까, 뭔가 퀘스트에 몰입이 더 잘되는 느낌인걸? └ 빙의 퀘스트 신기하긴 하네. └ 옆에 여자는 누구임? ㅈㄴ이쁜데. 얘 이름은 ‘세리아 벨리안’ 이다. 아스테리온 남부의 ‘벨리안 공방가(工房家)’……. 잠깐 내가 이런 걸 왜 알고 있는 거지? 이거 뭐야, 무섭잖아. └ ㅁㄷ 방장 여기도 이미 알고 들어온 거임? 아닌데요. 뭐지? 이번엔 상당히 억울하다. 나 진짜로 이 퀘스트는 완전 처음이라고! 3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잠시 고민을 좀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비슷한 퀘스트조차 해본 역사가 없다. 그러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빙의’에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결코 알 수 없는데, 어째선지 아는 것만 같은 이 단편적인 지식들. 난 아마도 이 몸, ‘라피엘 에스테르’의 기억을 일부 얻게 된 듯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연배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저 할배의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겠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네만, 여러분 모두는 오늘부터… 의지(Ego)를 담아낼 수 있는 단단한 ‘그릇’을 만들어내야 한다네.” 이곳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이 몸… 라피엘 에스테르의 스승. ‘백금의 현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이 노인에 대한 정보도, 이렇게 알고 있을 리 없었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루멘 정제석. 빛이 스며든 수액 나무. 이 두 가지는 필히 충분히 준비해 둬야 할 터고…….” 베타 플레이어일 때도 구경 못해 봤던 재료들의 생김새도,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바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루멘 스톤으로 정제한 빛이 ‘태양시(Solar Time)’ 기준 2시간 이상 머물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낸다면…… 빛의 연금사로서 최소한의 자질을 증명했다 할 수 있겠지.” 지금부터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정해진 재료를 전부 사용하기만 한다면, 공식이나 방식은 모두 각자의 자유다. 추가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니, 마음껏 역량을 펼쳐 보도록.” 그러니까 이 첫 번째 퀘스트는 결국……. 세라피스트의 첫 번째 고유스킬인 ‘루멘 연성식’의, ‘연성식 제작 과정’이 담겨 있는 퀘스트였던 것이다. “어차피 결과는… 빛이 직접 판단할 터이니…….” 그나저나……. 클래스 가이드를 이런 식으로 해주는 건, 기대 이상으로 친절한 느낌인걸? ‘고대의 NPC에게 빙의까지 시켜주면서 말이지.’ 원래 클래스 메인 퀘스트들은 해당 클래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빛의 연금사’라는 클래스는 지금껏 불친절의 연속이었기에…… 또 무슨 괴상한 퀘스트를 주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흐름대로라면, 크게 모난 곳 없는 정석적인 가이드 퀘스트의 느낌. 이대로라면 그냥 퀘스트 흐름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클리어까지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그래. 이렇게 좀 쉬어가는 퀘스트도 있어야지.’ 너무 섣부른 판단 아니냐고? 아니다. 왜냐면…… 지금 내가 빙의한 라피엘의 머릿속에는, 이미 ‘에고를 담는 그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까지 다 담겨 있거든. 그냥 머릿속에 주입된 기억대로만 하면, 저 할배가 내 준 퀘스트쯤 손쉽게 클리어 가능한 상황이라는 말씀. ‘후후.’ 그러니까 이게…… 대뜸 40레벨대 필드에 떨궈버린 그 히든 클래스의 가이드 퀘스트가 맞는 거지? 드디어 나도 날먹 좀 해보나? └ 겠냐ㅋㅋㅋ └ 분명히 뭔가 또 있을 듯. └ 사실 그래야만 함. -아ㅠㅠ 왜요ㅠㅠ 저도 쉽게 쉽게 좀 가봅시다, 형님들. └ 그럼 재미없자너~ └ 그런데 솔직히 방장도 알고 있잖아? 예? 뭘요? └ 히든 퀘스트 난이도는 항상 희귀도에 비례한다는 거. ……. 젠장. 뭐라고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성좌들이 지금 말하는 퀘스트 난이도 산정 법칙은… 베타 플레이를 하는 동안 가장 뼈저리게 체감했던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내가 얻은 이 ‘빛의 연금사’라는 히든 클래스의 희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에 따라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렇다면 내 클래스의 객관적인 희귀도는? 후우… 솔직히 측정 불가다. 억겁의 세월 동안 베타 버전을 플레이하면서도, 단 한 번도 구경해본 적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성좌들의 말은……. 퀘스트 전개 방식이 친절할지언정, 난이도는 절대로 쉬울 리 없다는 얘기. “으음.” 갑자기 단전에서부터 아주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후우우. 갑자기 이렇게 팩트로 때리면, 너무 아프잖아? └ ㅋㅋㅋ 방장 시무룩한거 보소 ㅋㅋ 어쩌면… 한 번쯤 예외도 존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희망 회로를 돌렸던 건데. └ 응 아니야. 역시……. 내 라이카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성좌들의 이 예언을, 세리아가 곧바로 확인시켜줬다. “그나저나 라피엘. 너 정말… ‘드라코 연성’을 시도할 거야?” 어쩐지…… 비호감 요정 녀석이 생각나는 불길한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니. “어? 그게 무슨…….” “네가 호언장담했었잖아. 이번 과제에서 드라코 연성식을 완성해서 보여주겠다고.” “내가 그…랬었나?” “무튼, 난 정말 기대하고 있어 라피엘. 졸업 과제로 그걸 성공한다면……! 우리 부모님도 이제는 널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거야.” 뜬금없이 발생한 K-아침드라마 스러운 대사. 그리고 이 대사의 내용보다도 몇 배는 더 황당한…… 내 눈앞에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메시지 창. 띠링-! 그걸 읽어 내려가던 나는, 당황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퀘스트의 내용이…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으니 말이다. [‘라피엘의 기억-A’ 퀘스트의 서브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 라피엘의 기억-A 《용의 영혼 연구》 분류 : 클래스-서브 난이도 : SS 라피엘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용족의 사체를 가공해 ‘루멘 베슬(Lumen Vessel)’을 만들어낸 졸업생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아스테리온 남부의 용맥(龍脈) 지대에서 드라코를 사냥하며 ‘드래곤 에고’에 대해 연구했으며……. ……중략…… 〓〓〓〓〓〓〓〓〓〓〓〓〓〓 드라코? 용맥? 설마 22레벨에 지금…… 용족을 상대하라고??? 이게 뭔 헛소리지? 〓〓〓〓〓〓〓〓〓〓〓〓〓〓 드라코를 사냥하여 용골(龍骨)과 용린(龍鱗)을 채집하고, 그를 바탕으로 용의 영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면, 분명 라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용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라피엘이 남긴 ‘기억의 안배’에 따라 과거 그가 만들어냈던 ‘드라코 연성식’을 재현해 낸다면, 그 연성식의 완성도에 비례해 보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퀘스트 달성 조건 A. [연성대상 : 드라코]의 이해도 60% 이상 달성. 보상 : 스킬 포인트 +1 B. [연성대상 : 드라코]의 이해도 80% 이상 달성. 보상 : 스킬 포인트 +2 C. [연성대상 : 드라코]의 이해도 90% 이상 달성. 보상 : 스킬 포인트 +3 * 스킬 포인트는 모든 연계 퀘스트가 종료된 뒤 지급됩니다. * 이해도를 60% 이상 달성하지 못할 경우, 아무런 보상도 획득할 수 없습니다. 〓〓〓〓〓〓〓〓〓〓〓〓〓〓 라이카를 좀 아는 누군가는, 이 퀘스트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ㅋㅋㅋ미쳤네ㅋㅋ 1차 전직 메인퀘에 드라코??? └ 이거 깨라고 만든 퀘스트가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추가로 덧붙일 확률이 아주 높다. └ ㅇㅇ어차피 서브퀘인데, 그냥 무시하고 진행하라는 소리겠지 뭐. 이런 반응들이, 아주 상식적인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 아닠ㅋㅋ 깨지도 못하는 퀘스트를 서브 퀘로 띄운다고? 시스템이 방장 놀리는 듯?ㅋㅋ └ 못깨는 거니까 서브퀘로 줬겠지 ㅋㅋㅋ 메인퀘에 이런거 주면 진행 자체가 안되니까 ㅋㅋㅋ └ 와씨 ㅋㅋ 이 방에서는 시스템까지 티배깅하네ㅋㅋㅋ └ 아ㅋㅋㅋ이게 다 방장 놈 업보라고ㅋㅋㅋ 하지만 여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서브 퀘스트냐고. -이거, 서브퀘 아닙니다 형님들. 아무튼 아니에요. └ ??? └ 방장이 방금 우리한테 퀘창 공유해 준 거 아님? └ 써있는데??? 서브 퀘스트라고??? -SP 3개나 주는 서브퀘 본 적 있어요, 형님들? └ 어, 으으음……. -이걸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애초에 존재는 하는 겁니까? 라이카에서 스킬 포인트는 상당히 귀한 재화다. 시스템상 라이카에선 스킬 포인트를 얻을 방법이 클래스 메인 퀘스트밖에 없는데……. 보통 메인 퀘스트 한 챕터를 클리어할 때마다 1~2포인트 정도 주는 게 전부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2차 전직 전에 모을 수 있는 스킬 포인트는 10SP 전후. 그러니 서브 퀘스트 하나에서 3개의 스킬 포인트를 준다는 건, 사실상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안 깨고 넘어간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파멸적인 보상이라는 뜻이다. └ ㅋㅋㅋㅋㅋㅋㅋ개웃기네ㅋㅋㅋㅋㅋ └ 맞지 맞지 ㅋㅋ └ 방장 똑똑하네;; 무적권 클리어해야 하니까 이건 서브 퀘스트라고 할 수 없음;; └ 스킬 포인트 덜 받을 바에는 클래스를 포기하는 게 맞긴 해 ㅋㅋㅋ 스킬 포인트 한 개당 환산 전투력이 3레벨 이상 더 강해진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니……. 이 퀘스트를 넘기면 난 대충 10레벨 손해 보는 셈이다. 심지어 이 스킬 포인트라는 개념은… 완전히 다른 클래스로 전직하는 게 아닌 이상 2, 3차 전직을 하더라도 그대로 승계되는 구조. 레벨이 높아질수록 1레벨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SP 3개짜리 보상은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할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 드라코… 잡으러 가야겠지? 가야죠 형님들. └ 근데 내가 아는 드라코는 최소 80레벨 이상인데…… ㄱㅊ? 안 괜찮긴 해요. └ 모르지. 전에 시작의 섬에서 마수들 20레벨로 등장한 거 보면, 필드가 달라서 레벨은 더 낮을 수도 있을 듯? └ 그래봐야 미니멈 60임. └ ㅇㅇ? 왜? └ 몸에 용혈이 흐르는 종족은 60보다 낮은 레벨일 수가 없음. 사실 나는 저 드라코의 레벨이 얼추 예상되긴 한다. 어떻게 예상하냐고? 이 퀘스트 진행 시점과 시간대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아스테리온 남부의 용맥지대는, 베타 플레이 때 가봤던 히든 던전이거든. 그곳에서 등장하던 드라코의 레벨은 대략 60레벨 정도. 성좌들의 말처럼 용족이 60레벨보다 낮은 건 라이카 세계관 설정상 불가능하니……. 사실상 용족이 등장하는 가장 낮은 난이도의 던전이 아스테리온의 용맥지대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지금 레벨로 잡는 건 난이도가 미친 수준이지만…….’ 짱구를 아무리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막막함은 오랜만이다. 드라코는 루멘 고스트들처럼 약점이 명확한 녀석들도 아니거든. 하지만 분명 방법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사실 간단했다. [난이도 : SS] 시스템이 설정해 준 난이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깰 방법이 없는 퀘스트에는…… 난이도라는 게 책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한걸? ‘가만. SS라고? 고작?’ 22레벨로 60레벨대 용족을 잡아야 하는 퀘스트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트리플 S 난이도가 떠야 정상일 텐데……?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눈앞에 돌연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용의 영혼 연구》서브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라피엘 에스테르’의 신체에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어……. 동기화는 이미 된 거 아니었어? [동기화 진행 중.] [1%…7%…27%……69%……] 우우우웅-!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레벨이 105Lv로 조정됩니다.] 예? 진짜예요? 105레벨이면 이 동네에선 랭커라던데? [플레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라피엘 이 자식… 분명히 그냥 꼬꼬마 아카데미 생도에 불과했던 것 같은데……. 이게 고대인 수준? └ 시스템 억빠 멈춰!! 3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용의 영혼 연구》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결국 아스테리온 남부의 용맥지대까지 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걱정했었다. 내가 아는 용맥지대의 진입 루트는, 아스테리온 대륙이 아닌 알테리온 대륙에서부터 이어진 워프 게이트였으니까. 그러니까 길을 모른다는 소리를 조금 장황하게 해 봤다. ‘애초에 이 아카데미든 황금 탑이든…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도 모르는데 뭐.’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걱정은 기우였다. 동기화 작업이 마무리되자마자, [라피엘 에스테르의 기억]은 또 한 번 나를 이동시켜줬으니까. 띠링-! [퀘스트 진행을 위해, ‘기억의 시점’을 변경합니다.] [아스테리온 남부, ‘용맥지대’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모든 퀘스트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진짜 게임 같고 편할 텐데 말이지. └ ㅋㅋㅋ방장 기분 좋아진 거 보소 ㅋㅋ └ 레벨 105 만들어주니까 싱글벙글이네 아주. └ 20레벨에서 갑자기 105레벨 되면, 스테이터스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 그래도 우리 ‘대이브’라면 다르지 않을까? └ 그렇긴 해 ㅋㅋ 이 형님들은 내가 퀘스트 난이도 쉬워졌다고 싱글벙글인 줄 아나 본데……. 사실 그건 아니다. └ 105레벨 돼서 쉬워진 건 팩트 아님?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거든. 아까도 언급했듯, 퀘스트 난이도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SS등급 난이도 퀘스트에서 105레벨로 60레벨대 사냥을 시킬 거라는… 그런 발칙한 상상은 하지조차 않는다는 뜻이다. 아마, 최소 110~120레벨은 나오지 않을까? 고대인이 강한 만큼, 고대의 몬스터도 강하지 않겠어? └ 이 친구, 라이카를 너무 잘 아네ㅋㅋㅋ └ 뉴비 맞음?;;; └ 시즌 제 94847호 ‘뉴비 맞음?’ 등장 └ 아ㅋㅋ 유입 너무 갈구지 말라고 ㅋㅋㅋ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던전 초입을 조금 지나서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드라코의 레벨은……. [드라코 – Lv62] 내가 알던 그 녀석과 완전히 같은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 아니;;; 버근가? └ 고작 62레벨 사냥터에 가는데 105렙을 만들어준다고? 그렇다는데요? └ 80도 아니고 60?ㄷㄷ └ 억빠 뭔데 ㅅㅂ └ 아;;; 이건 아니지;; └ 이거 버그임; 아무튼 버그 맞음;; 성좌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내 레벨이 105레벨로 임시 조정됐을 때도 큰 반응은 없었는데……. 이제 진짜로 내가 퀘스트를 날먹하겠다고 생각됐는지, 꽤나 배가 아픈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난… 마음 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나 해서 퀘스트 창을 다시 열어봤는데, 난이도 표기는 여전히 SS등급이었으니까. “…….” 그래서 탐색전 개념으로다가 일단 한 마리 잡아봤다. [‘드라코(Drako)’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무기라고는 허름한 나무 지팡이 한 자루뿐이긴 한데……. 그래도 105레벨로 62레벨 대 몬스터 하나 못 잡을 거면, 헌터 일 접는 게 맞지 않을까? 퍼펑-! 그런 의미에서 손쉽게 잡긴 잡았다.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잠깐.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뭐야. 진짜 이렇게 쉽게 이해도를 줘버린다고? 이럴 리가 없잖아……? └ 방장 이해도 90% 채워야 하는 거지? 그럼 대충 900마리 잡으면 되는 거임? └ 핵노가다긴 하네 ㅋㅋ └ 아무리 잡몹이라도 그 정도 잡아야 하는 거면…… 빡… 세긴 한듯;; └ ㅇㅇ;; 105레벨이긴 하지만 따로 전투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 맞네, 방장 무기도 없고. └ 휴우. 이 정도면 다행히 날먹까진 아니군. └ 한 며칠 걸리려나? └ 대이브는 미친 놈이라 이틀만에 끝낼 지도? 아냐. 진짜 아니다. 이 멍청한 성좌놈들. SS라는 난이도 등급은 절대로 그런 정도의 난이도가 아니라고! └ 시끄럽고, 일단 더 잡기나 해 보쇼. └ 아무래도 지루할 거 같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란 말이다 방장놈아. 후우. 그래,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일단 더 잡아봐야겠다. 그거 말고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중략……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0.6%] 그런데 여섯 마리 잡는데… 심지어 3분도 채 안 걸려 버렸다. 드라코도 워낙 많이 잡아봤던 몬스터라, 공격 패턴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 와;; 양학은 양학대로 또 보는 맛이 있긴 하넹;; └ 방장놈은 양학도 맛있게 하누 ㅋㅋ 그러니 최적화하다 보면, 이것보다도 더 빨리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흐음. 이대로라면 한 대여섯 시간 노가다로 퀘스트가 끝나버릴지도 모르겠다. 이게 진짜 SS라고……?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그런데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너무 피해의식에 쩔어 있던 건 아닐까? 사실은 이 정도의 노가다면, 높은 난이도를 책정받을 만한 게 아닐까?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105라는 압도적인 레벨과 스펙에 눌려…… 여전히 정직하게 픽픽 쓰러져 죽는 불쌍한 드라코 친구들. 이 순간까지도 딱히 별다른 조짐이 보이질 않으니, 슬슬 의심이 걷히려고 한다. 그럼 정말 이대로… SP3개 날먹, 시켜주는 거임? 진짜로?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1.0%] 그래. 그러니까 여기까진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이실직고하자면, 이즈음에 나는 양심에 털이라도 났던 건지, 날먹의 가능성을 한 10% 정도는 기대했던 것도 같거든. 하지만…….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더 높은 이해도 달성을 위해, ‘라피엘의 기억’이 수정됩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던전의 난이도 레벨이 1레벨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이전까지의 희망고문은 모두, 이 사악한 라이카 시스템의 티배깅이었을 뿐. [용맥지대 필드에 등장하는 모든 몬스터들의 레벨이 1레벨 증가하였습니다.] 어느새 난, 지옥행 열차에 탑승한 상태였다. └ ㅋㅋㅋㅋㅋㅋㅋ설마 이거, 10마리 잡을 때마다 몹 레벨 1씩 계속 오르는 구조인거임?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수고욬ㅋㅋ └ 엌ㅋㅋㅋ 900마리면 150레벨 대 되는건가? └ 캬ㅋㅋㅋㅋㅋㅋ이궈궈든ㅋㅋㅋㅋㅋ 제기랄. 그렇게 친절히 계산 안 해줘도 된다고! * * *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헌터 길드는, 모두 군사 조직이나 다름없는 무력 집단을 운용한다. 물론 게이트 바깥에서의 무력 행사는 법으로 철저히 제한되고 있지만…….(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랬다.) 게이트 안의 온갖 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헌터 길드의 무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버 나이츠가 가진 무력 조직은, 글로벌을 기준으로 봐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집단이었다. 그러니까 <4대 기사단>이라 불리는 무력 집단. <제1 기사단> 백광(白光) 기사단 <제2 기사단> 은벽(銀壁) 기사단 <제3 기사단> 월영(月影) 기사단 <제4 기사단> 홍염(紅焰) 기사단 이들은 실질적인 실버 나이츠 무력의 상징이었으며……. 실버 나이츠를 동아시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로 만들어준 주역과도 같은 이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에서 게이트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실버 나이츠의 4대 전투 기사단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 같이 기사화되기 일쑤였고……. [국내 최대 헌터 길드 ‘실버 나이츠’, 전투 기사단 정예화 완료 발표.] [중국 항저우에 파견된 ‘빛의 기사단’ 백광, 사상 최대 규모의 A랭크 게이트 진압 — 민간 피해 0명] 그들 중 일부는 연예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대중의 커다란 관심을 받기도 했으니까. [‘전투가 곧 콘텐츠?’… 실버 나이츠 단장 백승아, 광고 모델 섭외 러시] [#FlameValkyrie 태그 1억뷰 돌파! 백승아, 글로벌 숏폼 여제 등극] [‘정의의 상징’ 이도훈, 게이트 사태 이후 정치권 러브콜 쇄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대 기사단 전부가 이렇게 대외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월영(月影)이라는 이명을 가진 제 3기사단. 이들의 경우, 오히려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으니 말이다. 대중에 알려져 있는 월영기사단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이 정도의 내용뿐이었고……. * 7-3 월영(月影) 기사단 단장 : 월영의 창기사 강도윤 실버 나이츠에서 대부분의 은밀한 작전을 수행하는 무력 집단이다. 암살, 첩보, 역추적 등의 임무를 담당한다 알려져 있으며, ‘빛의 그림자’라는 별칭을 가졌다. - 각성자 위키 - [실버 나이츠]-[4대 기사단] 항목에서 발췌. 이건 의도된 신비주의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었지만, ‘월영’은 실버 나이츠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비공식 임무’를 담당하는 그림자 같은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이유는 각기 다르겠으나, 어쨌든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크고 작은 임무들. 그것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게, 바로 월영기사단과 강도윤의 역할이었다. “단장님.” “예.” “설마 그 물건 하나의 가치가…… 실버 나이츠의 명분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 때문에 3기사단장인 강도윤 또한, 대외적으로 알려진 게 거의 없는 랭커였다. 심지어 실버 나이츠에 소속된 이들조차도, ‘대략 120레벨에 근접한 랭커일 것이다.’ 정도의 추측만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번 일로 월영이 직접 움직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그러면,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그렇기에 강도윤이 이렇게 실버 나이츠 본사 건물에 나타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록 그곳이… 본사 안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마스터 이현무’의 직속 조직. ‘아르카나 본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러다 북미 쪽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돌이키기 어렵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카일’을 의식하시는 듯한데… 맞습니까?” “녀석이라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물건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널찍하고 조용한 회의실. 까만 탁자 앞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두 남자. 3기사단장 강도윤과 아르카나의 1팀장 류강민은, 서로의 눈을 응시한 채 잠시 찻잔을 홀짝였다. 그들은 지금, 실버 나이츠 내부에조차 알려져서는 안 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만약 직접 움직이신다면, 특별히 생각해 두신 플랜이 있으신 겁니까?” “월영의 방식대로. 그 이상의 다른 계획은, 오히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마스터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팀장님께서 설득을…….” 실버 나이츠의 상징과도 같은 정의. 그것에 완전히 위배되는……. 하지만 누군가는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일. 두 사람이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그런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기엔 조금 사적인 일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팀장님……!” “다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 “저희 아르카나가 가진 플랜에 대해, 조금 귀띔해 드리겠습니다.” 은밀한 류강민의 말에 강도윤의 상체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울었고. “먼저 진행 상황부터 말씀드리면…….” 잠시 뜸을 들인 강민이 말을 이었다. “우선, 더스크포트(Duskport)에 정보를 흘린 상태입니다. 이틀 정도 됐죠.” “그런……!” “아. 물론 ‘완전한 정보’는 당연히 아닙니다. 저희가 그 정도로 허술할 리 없지 않습니까.” 강민의 목소리는 한층 더 은밀해졌고, 도윤은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쨌든 정보가 넘어갔으니… 더스크포트의 스캐빈져들이 ‘그 물건’을 욕심낼 겁니다.” “당연히.” “그렇다면 녀석들은… 아무래도 무고한 플레이어를 살해하게 될 테죠. 원래 그런 녀석들이니까.” “……!” 뭔가를 깨달은 도윤의 두 눈이 살짝 커졌고, 그런 그를 향해 강민이 빙긋 웃었다. “그때 월영이, 그 범죄자들을 추적하여 심판한다면.” 강민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시지 않습니까?” 3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화가 난다. 콰앙-!! 시스템 이 거지 같은 자식……. [‘드라코(Drako)’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닳고 닳은 고인물인 나조차 잠깐 설레게 만들 정도로… 이렇게 고도화된 기만전술이라니. [‘화염폭발’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퍼버벙-!! 그러니까 105레벨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분노의 노가다를 세 시간 정도 했다.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갈수록 난이도가 증가하는 거지 같은 기믹이야 어찌 됐든……. 시작은 60레벨대부터였으니, 한동안 전투 자체가 어려울 건 없었던 것이다.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27.0%]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더 높은 이해도 달성을 위해, ‘라피엘의 기억’이 수정됩니다.] [던전의 난이도 레벨이 1레벨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솔직히 동 레벨 뜰 때까지는 힘들어하면 안 되잖아? SP1개라도 건져 가려면, 최소 120레벨 대 드라코까지는 잡아야 하게 생겼는걸. [드라코 – Lv89] └ ㄷㄷㄷ 벌써 270마리 잡은 거임? └ 아니; 그래도 이제 슬슬 빡셀만 한데… 방장 사냥 속도는 대체 왜 안 떨어지는 거?;; └ 그거야 ‘대’이브니까. └ 그보다 사냥하면서 템 파밍 좀 된 게 큰 듯. 앞서 센 척을 좀 하긴 했지만. 사실 성좌들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았다. 워낙 드라코들을 학살해대다 보니 2~3티어 장비들은 제법 파밍할 수 있었고……. 덕분에 필드 레벨이 30 가까이 올랐음에도 사냥 난이도가 다르지 않았던 거다. 낡은 나무 지팡이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다가 2티어 장비라도 장착하게 되면, 전투력 차이는 날 수밖에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이치이니 말이다.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드라코 본 스태프’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게다가 지금 들고 있는 이 드라코 본 스태프는, 무려 4티어 유일등급 지팡이. 내가 쓰던 월영검보다도 강력한…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 퍼펑-!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용린(龍鱗)’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파밍까지 잘했으면, 퀘스트에 좀 낚였어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후우.” 제일 큰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히려 지금 난, 좋은 장비가 드랍되면 드랍될수록 더욱 억울함이 가중되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냐면……. [‘용린(龍鱗)’ 아이템을 거래소에 등록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파밍한 모든 아이템은, 퀘스트가 끝나면 사라지거든. [‘라피엘의 기억’ 퀘스트 진행 중에 획득한 모든 아이템은, 퀘스트 종료 시 소멸됩니다.] 용린 같은 잡화 아이템도 한 장에 최소 200LP니까……. 환산하면 내가 3시간 동안 파밍한 템의 가치는 거의 1000LP에 육박하는데……. 그게 곧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 어차피 일반 필드였으면 그 정도 드랍 안 됐을 걸 방장? └ ㅇㅇㅇ 퀘스트 전용 필드라서 드랍률이 높은 건데, 그거로 억울해하냐 ㅋㅋㅋ 조용! 조용! 어쨌든 억울한 건 억울한 거라고. 그런 팩트를 가져다 댄다고 한들, 내가 무려 세 시간 동안 무급 근무를 하게 됐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잖아? 크흑. 이거야말로…… 쌀먹 헌터로서 가장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 아ㅋㅋ그럼 SP포기하고 퀘스트 접던가~ㅋㅋㅋ └ 누가 칼 들고 협박했음?ㅎ 후우우……. 비겁한 성좌들의 계속되는 팩트 공격에, 마음이 더욱 아파 온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멘탈 공격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기엔, 베타 서버에서 썩은 지난 세월이 너무나 길단 말씀. 띠링-!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30.0%] 그러니까… 분노의 노가다를 마치고 꿋꿋이 목표했던 수치를 달성해 낸 나는, 슬슬 퇴근을 준비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불금에 너무 과로한 느낌도 있는 것 같다. -자, 일단 일차 목표는 깔끔하게 달성이구요, 형님들. 그리고 우리 성좌놈들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 이거 설마 퇴근 빌드업이냐? └ 하 이 ㅅㄲ 시간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ㄲㅂ;; └ 멈춰! 하지만 퇴근 시간은 어쩔 수 없다고? 절대 퀘스트에 내상 입어서 도망치는 게 아니란 말씀. -어쨌든 30%는 채웠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어디가!! └ 아니 형;; 나 방금 왔는데?;;; -퇴근 시간 됐잖습니까. -그리고… 저 오늘 빡빡하게 굴렀잖아요. -인정? └ ㅖ???? └ 노인정ㅅㅂㄹㅁ!!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가 퇴근할 때마다 발작하던 성좌들은, 그래도 이제 적응이 된 건지 결국 순응하는 느낌이다. 반발이 그렇게까지 격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 그래도 오늘은 30분이나 초과근무 했네ㅋㅋ └ 고생했다 방장ㅋㅋ 내일 보자고ㅋㅋ 그러니까 여기서 마무리됐다면, 분명 오늘은 나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거다. 다만 문제는…… 성좌들의 내일 보자는 인사에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2035년의 대한민국은…… 주5일제거든. -그런데 형님들. 내일… 주말인 건 다들 아시죠? └◝₍ᴑ">">Д">">₎◞??? └ 아니 이브야;; 이건 또 무슨 말이니;;; 정말 큰마음 먹고, 성좌들에게 ‘주말 휴무’를 선포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다. 규칙적인 헌터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게 좀 있거든. 쉴 땐 또 쉬어 줘야, 라이카도 더 잘 풀린다는 말씀. 게다가 이번 주말은 약속도 있고……. -제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일주일이라는 시간개념이 있는데요, 형님들. └ 일주일은 여기도 있음 ㅡㅡ └ 그게 뭐 어쨌다는 거임. -대한민국 노동법은 주5일제를 표방하거든요? 그러니까 법 없이도 사는 저 같은 사람은……. └ 쉬바ㅏㅏ 머한민국이 주5일인지 우리가 알바냐고!!! 여긴 알테리온 대륙인데!! └ 아닠ㅋㅋ 그럼 내일 스트리밍 켜는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 범법자임?ㅅㅂㅋㅋㅋ 어쨌든 성좌들은 난리가 났지만, 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러니까 주말 동안 충전 좀 하고 오겠습니다! └ 미친ㅋㅋㅋ 주5일제 플레이어는 ㄹㅇ 처음보네 진짜ㅋㅋ └ 아니 쌉 오바임 진짜로!!! 그런데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힘든 것보다 김주연 여사의 잔소리가 조금 더 무서웠던 게 컸다. 솔직히 나야 조금이라도 더 허슬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지. 하지만 주말까지 출근하다가 게이트 출입하는 거 걸리기라도 하면…. 이 좋은 밥벌이가 끊기는 건 아마 시간문제일 거다. 그러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지금 갈라서는 안 된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많이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그렇게까지 쉴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뭔가 기시감 느껴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본 것 같은데……. 못 본 척 혼신의 연기 한번 때려 주고. 띠링-! [로그아웃 장소 : 아스테리온 남부 – 용맥지대] [‘데이브(Dave)’님의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잠시 분노한 김주연 여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은 나는, 후다닥 게이트를 탈출했다. [ON Air : ☺ 576]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그나저나 방종 시점에 시청자가 500을 넘었다니. 캬- 다음 주는 네 자릿수도 도전해볼 만하겠는걸? * * * 올해로 서른여섯인 이정민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적당히 성공한 직장인’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의 직장은 현시점 3대 방송국 중 한 곳인 HBC의 예능국이었고…. 그곳에서 그의 직책은 피디였다. 그러니까 정민은 자신의 인생이 적당히 잘 풀린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게이트 사태 이후 가족이 사고에 휘말리지도 않았으며. 운 좋게 괜찮은 직장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저 약속이 있어서 좀 나갔다 올게요, 엄마.” “여자친구 만나러 가니?” “아… 네, 뭐. 그런 셈이죠. 여튼 다녀올게요!” 그런 의미에서 정민은, 학창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인 ‘이건율’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팠었다. 녀석은 게이트 사태가 터졌던 십 년 전의 바로 그 날. 가장 먼저 사태에 휘말렸던 가장 가까운 지인이었으니까. 당연히 녀석의 가족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한동안은 심적으로 꽤 괴롭기도 했었다. 그러니 정민은 믿기지 않았다. 녀석이 멀쩡히 살아서 귀환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건율이 녀석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대충 십 년 만인가?’ 때문에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도, 정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나게 될 불알친구와 회포를 풀 생각에 들떴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이정준(형) : 야, 너 여친 같은 거 없잖아? 무슨 약속인데?] [나 : 왜 시비임?] [이정준(형) : 시비가 아니고, 시우가 삼촌이랑 놀고 싶어 하니까 그러지.] [나 : 시우? 오늘 데리고 올 거야? 형수님도 오셔?] [이정준(형) : ㅇㅇ.] [나 : 저녁에 치킨 사서 들어감ㅇㅇ 아마 8시쯤엔 들어갈 듯.]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 놈도 8시 전엔 귀가해야 한다고 하니, 저녁에는 귀여운 조카 녀석을 놀아주면 되겠다. 정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카페에 들어선 정민은, 자연스레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십 년 전에도 항상 약속 장소로 쓰였던 카페였기에, 앉던 자리도 고정석. “……!” 그 자리에 앉아서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정민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쳐버렸다. “야이, 시빠 부라더!” 다행히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10년 만에 귀환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친구는 세 놈뿐이니까. 그리고 눈 마주치자마자 쪽팔리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이 녀석이… 바로 그 세 놈 중 하나였다. “야이, 시빠 부라더!” 어떻게 이 새낀 10년이 지나도 바뀐 게 없지? 나쁜 뜻은 아니다. 그냥 바뀐 게 없어서 신기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우리… 서른여섯 맞지? 아니. 생각해보니 난 스물여섯이긴 한데……. “정 사장, 살아있었냐?” “고럼, 살아있었지. 내가 너냐? 게이트 같은 데 빨려 들어가기라도 했을까 봐?” “하지만 살았죠?” “그치. 그럼 됐지? 한잔 해.” 가벼운 포옹과 함께 헛소리를 주고받은 우리는, 잠시 낄낄거린 뒤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는 이미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주문되어 있었고,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그걸 들어 쪽쪽 빨기 시작했다. 참고로 지금은 겨울이다. 이것도 10년 전과 바뀐 게 하나 없다. “뭐, 대충 이세카이에 끌려갔다 왔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으니까…… 그건 됐고.” “그걸 고대로 믿는 거냐?” “게이트도 열렸는데, 이세계 쯤이야.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그렇긴 해.” 그래서 정말 우리는…… 조금의 위화감조차 없이 실없는 농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십 년 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낄낄거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축복으로 느껴졌다. “그럼 이제 정 사장 네 얘기 좀 들어보자.” “나?” “그래. 뭐 방송국 PD님이라는 얘긴 들었는데.” “누구한테?” “누구겠냐, 동수한테 들었지. 경준이는 아직 게이트에서 안 나왔잖아.” “아아, 동수는 오늘 못 나온댔지?” “일 때문에 지방이라고, 다음 달쯤 보자던데?” 그러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이 지속될 수 있다면. 조만간 우리 네 명이 다시 다 모여서 예전처럼 낄낄댈 수 있다면. 그렇게 평범하게 나이 먹어…… 적당히 100세쯤 됐을 때 늙어 죽을 수 있다면. ‘그거 이상으로 행복한 삶도 없지 않을까?’ 3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우리는 거의 너댓 시간을 카페에 앉아 낄낄거렸다.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였음에도, 눈치가 보여 디저트만 두 번 더 주문했을 정도. 카페 알바 시점에서는 무슨 사내놈 둘이 할 얘기가 저렇게 많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십 년이라는 공백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 실없는 대화만 나눈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의 생업(?)에 대한 얘기도 나올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꽤 놀라게 됐다. “잠깐.” “왜, 또 뭔데.” “그러니까 지금 네 말대로면…… 헌터 시작한 지 2주 만에 20레벨을 찍었다는 거지?” “20 아니고 22다. 그리고 퀘스트만 아니었으면 최소 5레벨은 더…….” 일단 정민이는, 내 최근 근황을 듣고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어쩌면 이세계에 끌려갔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훨씬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냥 지난 2주간의 이야기들만으로도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린 거다. “와, 뭔데? 너 진짜 그거 구라 아니지?” 왜 이러나 했더니, 내 레벨이 문제였다. 2주라는 짧은 기간 대비 레벨이 너무 높다는 거다. 심지어 도저히 못 믿는 표정이어서, 관리국 어플을 켜서 동기화된 레벨 정보까지 확인시켜줬다. 물론 거기에 내 첫 접속날짜까지 찍혀있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 헌터 등록을 한 날짜와 레벨은 알 수 있었다. “와 거의 진짜네.” “‘거의 진짜’는 또 뭔데.” “9레벨이 이 주일 전이잖아. 그럼 한 3주라고 봐야지.” “…….” 첫날 9레벨을 찍은 거였고, 사실상 20레벨까진 일주일 걸린 셈이었지만. 말해봐야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얘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헌터 등록 정보를 확인한 정민이는,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왔다. “야, 2주가 됐든 3주가 됐든… 이 정도면 너 재능 진짜 지리긴 하는 거 같은데?” “응, 그 정도 아니야.” “이 새끼 안 본 사이에 비틱질도 배웠네.” “그게 무슨…….” “보통 못해도 100일 정도 잡는 20레벨을 2주 만에 찍었으면서, 재능 없다고 하는 건 겸손이 아니라 비틱이야 이 시끼야.” 그 말을 들은 난 잠깐 움찔했다. 워낙 요정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그런가? 난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심으로 내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민이 말을 듣고 보니 그건 결국 ‘용사’ 기준인 거고, 평범한 헌터들 기준에서는 괜찮은 재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뭐. 달라질 게 있나?” 내 반문에 정민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달라질 게 있지.” “음?” 이어서 정민이의 표정이, 한 층 더 음흉해졌다. “야, 너 혹시… 예능 한 번 나가볼 생각 없냐?”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 “돈 벌어야 된다며.” 그건 맞긴 한데. “…….” 방송국 안에서도 예능 쪽 PD라더니, 나 같은 뉴비 헌터가 필요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정민이는 답지 않게 꽤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돈을 벌어야 하는 내 사정을 알기에, 도움을 주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고……. 흠.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아마 내가 예능에 출연할 일은 없을 거다. 그 시간에 게이트 안에서 허슬하는 게, 어지간하면 더 많이 벌 테니까. 내가 뭐 셀럽도 아니고, 예능 같은 데 출연해 봐야…… 이삼십만 원 정도 받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그런데 내 얘기를 듣던 정 사장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이건율.” “……?” “너 헌터 예능, 기본 출연료가 회당 얼만지 모르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기본이 오백이야.” 예? “메이저 예능이면 천오백부터 시작. 게다가 게이트 안에서 찍는 리얼 버라이어티 쪽으로 가면… 거기에 3배 곱하면 될걸?” “……!” 정민이의 말을 듣던 내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백만 원만 해도 바로 엉덩이가 들썩일 만한 금액인데……. 그게 2천이 될 수도 있고, 다시 그 위에 3을 곱할 수도 있다고? “심지어 이번에 기획 중인 건은, 검희도 섭외가 완료됐다고.” “그럼…….” “메이저 중에서도 메이저라는 말이지.” 순식간에 계산이 끝난 나는, 저도 모르게 정사장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혀, 형님!!” * * * . 줄여서 H-Ent라고 부르는 게이트를 소재로 한 쇼 비즈니스 산업은, 현시점 가장 성장성도 가파르고 메이저한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 산업의 중심에는 게이트 관리국의 후원을 받는 대형 공중파 방송국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HBC. 정민이가 지금 예능국 PD로 근무한다는, 바로 그 방송국이었다. “물론 모든 헌터 예능이 다 규모가 이 정도인 건 아니야. 내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HBC 기준이긴 하니까.” 그리고 정민이 말에 따르면……. 국내 기준으로는 이 HBC가 시장 전체 파이의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행법상 관리국 협조 없이는 게이트 안에서 컨텐츠를 찍는 게 불가능하거든. 쉽게 말해 게이트 안을 리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송국이 공영인 우리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국 덩치가 커지게 된 거야.” “음? 그럼 HBC가 아니면 게이트 안의 촬영이 아예 불가능한 거야?” “말했다시피 관리국 허가가 있으면 가능하긴 해. 다만 우리처럼 자유롭지가 못한 것뿐이지.” “아하.” “게다가 게이트 안에서 촬영하려면 촬영팀도 전부 각성자여야 하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어지간한 규모로는 이 시장에 들어오기조차 쉽지 않은 거지.” 현 시점 ‘헌터’는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비각성자들일수록 게이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궁금해하는 건 너무 당연했다. 그러니 헌터와 관련된 영상 콘텐츠들에 자본이 집약되는 건,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나 같은 20레벨대 헌터는 솔직히 널려 있잖아?” “그렇지?” “그런 사람들이 누구나 천 단위로 출연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당연해.” 고개를 끄덕인 정사장은,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말랐는지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 먹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2주 만에 22레벨 찍은 게 진짜 맞는지 물어본 거야.” “음?” “네가 지원 조건이 맞아야 나도 밀어넣어 볼 수 있을 테니까.” “지원… 조건?” “게이트 첫 입장 기준 200일 이 지나지 않은 헌터.” “이거야 당연히 되고.” “그러면서 레벨이 30이 넘는 헌터.” “아하?” “그게 ‘멘티 출연자’로 자원할 수 있는 기본 지원 조건이거든.”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200일 내로 30레벨을 찍은 헌터라면… 확실히 지원 가능한 플레이어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솔직히 네가 2주 만에 20레벨 찍었다 해도 쉽진 않을 거야. 심사 기준일 전까지 30레벨을 찍어야 하니까.” “그게 언젠데?” “오늘 기준 10일 정도 남았어.” “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1~20보다 21~30이 더 오래 걸리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물론.” 사실 모든 플레이어들 중 200일 안에 30레벨을 찍은 플레이어를 꼽자면… 인원이 상당히 많을 거다. 일단 현 시점 상위권 플레이어들은, 랭커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 기준을 충족할 테니까. 하지만 현 시점에서 200일차가 되지 않은 플레이어 중에 해당 조건을 충족하는 플레이어는…… 흔치 않을 게 확실하다. 이러면 정민이 녀석이 말하는 출연료가, 점점 더 말이 되기 시작한다. “어차피 그 조건 충족한다고 무조건 출연 가능한 건 아냐.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경쟁력 있어 보이는 백 명만 뽑힐 테니까.” 백 명……? 그렇게나 많이? “그 경쟁력이라는 게 뭔데?” “그거야 복합적이지. 헌터로서의 재능이 압도적이거나, 아니면 방송각이 괜찮아 보이거나. 혹은 스토리가 기깔나거나?” “흐으음.” “그래도 넌 요건 맞춰서 지원만 하면, 뽑힐 확률은 엄청 높을 거다.” “왜?” 정민이 씨익 웃으며 본인 가슴을 팡팡 때렸다. “내가 있잖냐.” “……?” “내가 이번에 <헌터즈 스쿨3> 서브 피디겸 FD로 확정됐거든.” “그 예능 이름이 헌터즈 스쿨인 거야?” “그치.” “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같은 이름이네.” “정확해. 바로 그 포맷이야.” “…….” 정 사장은 신나서 프로그램에 대해서 추가로 더 떠들어 댔고, 덕분에 나는 이게 뭐 하는 프로그램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랭커들이 헌터 꿈나무들을 멘토링하면서 재능을 발굴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거네.’ 그리고 녀석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이 프로그램에 무조건 지원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헌터즈 스쿨이라는 거. 내 상상보다 볼륨이 엄청난 예능인 듯싶었거든. 말도 안 돼 보이는 엄청난 출연료가, 그럴싸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한번 해 보자 건율. 어차피 우승은 힘들겠지만, 2~3회차만 살아남아도 이삼 천은 벌어 갈 수 있을 테니까. 실제 게이트 안에서 촬영하는 본선까지 가면, 진짜 회당 5천씩 받을 수도 있고…….” 후우. 다른 것보다……. 액수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회당 천오백? 본선은 5천? 잠깐. 혹시 우승하면 더 주나? “우승하면 뭐 있어?” “당연히 보상이 있지.” “얼마?” “30만.” “엥?” “30만LP쯤 된다고 인마.” “……!” 알테리온 대륙인이 다 된 건지, 30억이라는 말보다 30만 LP라는 말이 내 심금을 더욱 울린다. 제기랄. 우승 그거…….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3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주말은 빨리 지나갔다. 정민이 외에 다른 녀석들을 볼 수 없었던 건 아쉽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게다가 가족들과도 여유롭고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만족스러운 주말이었다. “이야. 살다 보니 아들내미한테 밥도 얻어먹어 보고. 좋은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나중에 잿밥도 못 얻어먹는 줄 알았는데.” “… 그건 좀 대사가 너무 매운맛 아닙니까, 어무니.” 사실 좋은 시간이라 봐야 부모님 모시고 외식 정도 한 것뿐이었지만…….(엄마 딸은 공부한다고 나가서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외로웠던 탓인지… 그 정도만 해도 내겐 충분히 힐링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들.” “예, 엄마.” “그, 지금 다니는 회사. 정직원도 혹시 될 수 있는 거니?” “글……쎄요? 그것까진 잘…….” 우리 김주연 여사의 잔소리까지도 힐링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 그, 정민이가 피디로 있는 방송국이라며.” “그, 그쵸?” “정민이한테 잘 좀 얘기해서, 꼭 좀 붙어있어.” “여기 박봉이라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니, 무려 널 써주겠다는데.” “어머니 그게 무슨…….” “암튼, 요즘은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가 최고다, 건율아. 십 년 전처럼 취직이 쉽지가 않아요.” 아들에 대한 객관화가 너무 심하게 잘되시는 것 같긴 한데. 뭐, 어쨌든…….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귀환하자마자 ‘일’이라는 것을 성실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만족해하시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민이가 제안해 줬던 예능 프로그램까지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진짜로 거기 출연하게 된다면, 그땐 헌터 일하는 것까지 전부 다 오픈하게 될 텐데……. 언젠가 오픈해야 할 거라면, 그 타이밍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것도 날 출연시켜준다는 게 확정되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걱정 마세요. 한동안 잘릴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난 다시, 힘내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걱정하고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되는 일이었다. 띠링-! [접속 장소 : 아스테리온 남부 – 용맥지대] [‘데이브(Dave)’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퀘스트를 진행하면 할수록, 주말에 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코들의 레벨이 100레벨에 가까워지면서, 노가다의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으니 말이다. [‘드라코(Drako)’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아니, 솔직히 주말에 쉰 게 아니었다면……. 이 지옥 같은 노가다에 분명 차질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60.0%] 이 퀘스트의 최소 조건인 이해도 60% 달성.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내가 걸린 시간은, 꼬박 하루 이상이었거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클리어하시겠습니까?] [Y / N] [클리어 시, 보상 A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힘들었냐면, 항상 날 놀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성좌 놈들까지도 날 측은하게 여길 정도였다. └ 와… 이건 ㄹㅇ 인간승리긴 하다 진짜로. └ 넌 올라가라 ㅅㅂ;; └ 이걸 기어코 1SP 받아내네, 대단한 놈;; 그러면 여기서 멈춘 거냐고? └ 그런데 방장, 설마 1SP로 만족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SP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만한 재화가 아니란 말이지. └ 난 방장이 이정도에 굴복하는 하남자는 아니라고 믿어~ └ ㅋㅋㅋ맞지맞지ㅋㅋ 방장 보닌 입으로 이거 무조건 깨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빼면 안되긴 해ㅋㅋ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넙쭉 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적당한 연기는 필수 아니겠어? 이런 기가 막힌 수금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 -이쯤 했으면 된 거 아닐까요, 선생님들……. 다 죽어가는 얼굴로 하소연을 하자, 예상했던 대로 성좌들이 낄낄대며 좋아한다. └ ㅋㅋㅋ호기 부렸으면 벌 받아야겠지?ㅋㅋ └ 여기서 뺀다고? 그러니까 슬슬… 후원 메시지라던가, 미션이라던가. 뜰 때가 됐는데……? └ 어허, 나 실망한다 방장? 저도 실망합니다, 형님들? 진짜 뭐 없어요? 예? “후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 이래도 그만해? [‘망나니 2황좌’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캬, 역시 2황좌 형님. 형님밖에 없습니다. “…….” 일단 미션이 들어오자, 수락 버튼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간다. 이해도 80% 클리어 조건에 300LP라.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하지만 미션 난이도가 있는 만큼, 최소 1000LP는 수금하고 싶은데……. 머리로는 알지만, 참는 게 쉽지 않다. └ ㅋㅋㅋ방장 지금 손떨리는 듯?ㅋㅋ └ ㄹㅇㅋㅋ 우리 방장이 다른 건 몰라도 미션은 절대 참지 않는 편이라고? 형님들… 그렇게 도발하시면, 저 헌터 인생 최초로 미션 꾹 참아봅니다? 그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견습마법사 메오’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방장아. [‘반짝이는 고철의 수호자’님이 15LP를 후원하셨습니다.] └ 2SP라도 챙겨보자 형, 내가 볼 때 거기까진 진짜 할 만해. ……후략…… 잠깐 시간을 끌자 추가적인 후원이 더 들어왔고, 슬슬 미션 수락 충동을 참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 이러다가 형님들이 미션 취소라도 하시면……. 그런 파멸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해서 이제 참는 건 그만두고 슬슬 시작을 해보려는데……. [‘황금의 주인’님이 새로운 미션을 등록하셨습니다.]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입에서 육성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캬-” [미션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거거든! 역시 형님이십니다. 〓〓〓〓〓〓〓〓〓〓〓〓〓〓 퀘스트 추가 조건 달성. 분류 : 미션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라피엘의 기억-A《용의 영혼 연구》퀘스트의 최종 클리어 조건 달성.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3000LP 〓〓〓〓〓〓〓〓〓〓〓〓〓〓 솔직히 지난 이틀간은 내 헌터 인생 최대의 보릿고개였다. 파밍도 안 되는 퀘스트 존인 데다 딱히 성좌님들을 즐겁게 해드릴 건덕지도 없었다 보니……. 하루 평균 100LP도 벌 수가 없었던 거다. 오죽했으면 이번 주에는 퇴근길에 야식 한 번 못 샀겠는가! 그러니 미션에 걸린 3천LP는, 내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갑자기 씩씩해진 내 목소리에, 성좌들의 어이없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 이 ㅅㄲ 혹시 벌써 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저거 깨려면 150레벨대 드라코까지 잡아야 하는 거 아님? └ ㅇㅇ맞음;; └ 150레벨을 죠스로 보나 ㄷㄷ 패기 지리네;; 다만 초창기부터 내 스트리밍을 봐 왔던 성좌들은, 조금 다른 느낌의 반응이었지만 말이다. └ 방장ㅋㅋ 이ㅅㄲ 이럴 줄 알았다 내가 ㅋㅋ └ 암만 봐도 공사 치는 것 같더라니 ㅋㅋㅋ └ ㅈㄴ뻔하긴 해ㅋㅋ 눈치 좀 챙기자 형들? └ 근데 이게 방장 설계라고 하기엔;; 퀘스트 난이도가 너무 과한 거 아님? └ 대이브는 항상 이런 식이었지……. 휴우, 도움 안 되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퀘스트 추가 조건 달성’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미션 성공 시 명예가 1만큼 증가합니다.] [미션 실패 시 명예가 1만큼 하락합니다.] 어쨌든 확실하게 동기부여를 받은 나는 다시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온몸 비틀기를 시작했다. * * *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65.0%] 미션 클리어를 위한 지옥의 노가다는, 내 예상보다도 더욱 길어졌다. -후우. 형님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눈 뜨자마자 튀어 오겠습니다! └ 수고했어 방장ㅋㅋ └ 대이브 근성 지리네 진짜;; └ 이걸 어떻게 계속하는 거지 ㄷㄷㄷ 그러니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더 지나…….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82.0%] 그렇게 정확히 3일이 지난 시점. 띠링-!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90.0%] 나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퀘스트에서 완벽하게 해방될 수 있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클리어하시겠습니까?] [Y / N] [클리어 시, 보상 A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꼬박 3일이나 더 걸린 거냐고? └ 와;;; 데이브 이 ㅅㄲ는 그냥 미친놈이다;;; └ 이걸 거기서 더하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내가 퀘스트를 마무리한 건……. 심지어 90%를 달성한 시점이 아니었거든. 띠링-! [연성대상 : 드라코에 대한 이해도가 0.1%만큼 증가합니다.] [연성대상 : 드라코 – 현재 이해도 : 100.0%] 미친 척 온몸을 비틀어 가며, 기어이 100%라는 수치를 달성해 버린 거다. [‘연성대상 : 드라코’를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 내가 처치한 드라코의 레벨은 무려 162레벨. 일반 몬스터를 거의 보스 레이드 하듯 사냥해야 처치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 방장; 리스펙한다; 퀘스트 조건도 따로 안 걸려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냐고? [초월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라피엘의 기억-A’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됩니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까? 3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3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레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띠링-! [형님, 많이 바쁘세요?] 응, 바쁘다 아우야. [저 방금 28레벨 찍었는데…… 형님은 벌써 30레벨 넘기셨겠죠?] ……거의 일주일째 22레벨이란다. [헉; 어쩌시다가…….] 거기엔 슬픈 사연이……. [어쨌든 파이팅입니다, 형님!] 가끔 날아오는 이 녀석의 메시지에서는 항상 미묘한 기만질의 냄새가 느껴졌는데……. [제가 루멘하르트 지하에 꿀 던전 하나 찾아놨거든요? 루멘하르트 도착해서 연락 한 번 주시면…….] -망령의 지하수로? [헉;; 그건 어떻게;;] -다음 주쯤 한번 가보자고. [예, 형님!] -우리 레오가 버스 태워주는 거지? 띠링- [플레이어 ‘레오’가 메시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나쁜 의도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순수한 기만질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열받게 하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벌써 28레벨이라고? 이 형님은 레벨 하나 못 올리고 있는데…….’ 처음 파티 플레이를 해봤을 때부터 비범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매번 내 예상 범주를 깰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다. 시작의 섬을 벗어난 지 고작 일 주일 만에 28레벨이라니. 이건 내 베타 플레이 마지막 회차보다도 빠른 수준이거든. ‘재능충이란 게 바로 이런 거겠지?’ 그러니까 이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건, 내 입장에서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일이긴 하다. 이 지긋지긋한 클래스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나면 버스 기사로 쓸 수 있을 테니 말이지. 30레벨을 빠르게 찍어야 할 이유도 생긴 지금, 레오는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거다. 물론 지금 당장은… 지난 일주일간 노가다의 결실을 확인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라피엘! 이제 곧 네 차례라니까? 준비된 거 맞지?” 다만 그럼에도 내가 다른 생각을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 이유는……. “그래, 준비됐으니 걱정 마.” 보상 A. SP 3개를 확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연계 퀘스트의 진행이 내 손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라피엘 에스테르’의 기억에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드라코 노가다를 진행할 때는 이 녀석의 신체에 동기화됐었다면, 이번에는 단순히 ‘기억’에 동기화되는 것으로 퀘스트가 진행됐거든. 쉽게 말해 지금 나는 라피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녀석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지만……. 이 몸에 대한 통제권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 사이, 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라피엘! 앞으로 나오거라.” ‘백금의 현자’ 마르텔.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스승인 그가 호명하자……. 나, 아니 라피엘은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단상 앞에 섰다. “‘그릇’을 빚을 준비는 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이어서 그 앞의 반석 위에 올라선 라피엘은, 준비된 재료들을 꺼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웅- 우우웅-! 복잡한 술식이 담긴 마법진이 새하얀 석재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광경을 홀린 듯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비단 내가 이 몸의 통제권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새겨지는 황금빛 물결의 마법진. 그것을 직접 그려내고 있는 이 감각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으니까. * * * 라이카는 게임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명제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걸 이따금 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게이트가 열린 지 벌써 10년이 된 지금, 도전을 포기한 많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지 않았고…….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며 ‘게이트 안전 수칙’만 명확히 지킨다면, 라이카의 세계는 플레이어들에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시스템’은, 플레이어들이 라이카의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아주 친절하게 도와준다. 마치 유저들이 이탈하길 바라지 않는… ‘상업게임’처럼 말이다. 그러니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라이카를 ‘많이 리얼한’ 게임 정도로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칭 ‘게이트 연구단체’라는 이들 중 일부는, 게이트 안에서의 경험이 단순히 ‘환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게이트 바깥으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야 분명 실재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게이트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 가상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환상 같은 것이라는 거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이 주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가설이었는데, 그건 아마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에 대한 회피이자 자기방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난, 베타 서버를 플레이할 때조차도 그런 생각을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당장 이 순간,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을 텐데 말이지. [‘???’연성식의 창조가 진행 중입니다.] [현재 진행률 : 5%…12%……45%……77%…….] 라피엘 에스테르를 통해 느껴지는 이 생생한 감각. 체내에서 꿈틀대던 마나가 순식간에 폭발하며 술식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괴이한 감각은, 결코 가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거든. 고오오오- 그런데 잠시 후, 난 상당히 재밌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라피엘의 술식 창조 과정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이럴…… 수가.” “저건 용혼의 표식……!” 라피엘의 술식 전개 과정을 지켜보는 모든 ‘세라피스트’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새하얀 석판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학장이자 당대 최고의 세라피스트인 ‘마르텔’조차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용의 의지’를 담을 그릇이란 말인가…….” 새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놀라는 마르텔과, 주변인들의 반응은 아랑곳조차 하지 않은 채 술식 전개에 몰두하고 있는 라피에르. [현재 진행률 : 79%…85%……92%……100%] 그리고 잠시 후, 강렬한 공명음과 함께……. 우우웅-! 새하얀 빛을 머금은 술식 위로, 작은 영혼 하나가 깨어났다. 크르릉- [용족 ‘드라키엘 (Drakiel)’의 에고(Ego)를 소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잠깐. 드라키엘……? 이건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드라키엘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드라키엘 연성식’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째서 드라코가 아닌 거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용족을 연성할 시, 피조물의 모든 능력치가 5% 추가로 증가합니다.] 온몸이 반짝이는 비늘로 뒤덮인. 하지만 용맥에서 만났던 드라코와는 달리… 은빛이 아닌 금빛 비늘을 가진 작은 체구의 도마뱀 녀석. 하지만 드라코가 아니라 해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고무적이다. 이 녀석을 자세히 살펴보며, 내 머릿속에는 일단 한 가지 확신이 떠올랐으니까. 그건 바로… 이 드라키엘이라는 녀석이 무조건 드라코의 상위호환이라는 것. 어떻게 확신하냐고? 이 녀석이 더 용(Dragon)처럼 생겼거든. ‘아직 진화가 덜 된 느낌이긴 하지만… 순혈 용족의 특징은 전부 가지고 있어.’ 따지자면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면 바로 날개. 날개가 없는 탓에 용보다는 도마뱀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드라코와 비교되게, 작지만 날개가 솟아있는 이 녀석은 헤츨링의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혹시 세라피스트의 연성 결과물, 팔아먹을 수도 있는 걸까? 용이면 환장하는 부호들이 널려 있을 텐데 말이지.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러 가지 궁금증이 동시에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음. 혹시 이 연성이라는 거, 재료만 있으면 무제한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소환수 자체가 엄청 비싸게 팔리던데. 용이면 막 기본 십억 단위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크르르- 크르르르릉-! 뭔가 홀린 듯 녀석을 응시하던 내 시선은, 자연스레 드라키엘의 얼굴로 향했다. 그런데 녀석의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은 바로 그 순간……. 지이잉-! 갑자기 시야가 노이즈와 함께 일그러지더니,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띠링-! [잊혀진 고대의 용족 ‘드라키엘’이 연금술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라피엘의 안배를 벗어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라피엘의 기억’이 분열됩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온다. 이거… 불경한(?) 생각 했다고 지금 벌 받는 건 아니겠지? [동기화가 해제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드는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라피엘의 기억’퀘스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응? 이렇게 갑자기 퀘스트가 끝나버린다고? [숨겨진 조건이 충족되어, 퀘스트 보상이 변경됩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퀘스트 보상으로 ‘빛의 곡괭이’를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스킬 포인트 +3’을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히든 보상으로 ‘태고룡의 뼛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보상 메시지는 기가 막히게 눈에 들어온다. SP3개도 달달하게 챙겼는데, 거기에 태고룡의 뼛조각이라니. 달달하다 못해 이빨이 썩을 것만 같다. 설마 계정 귀속인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퀘스트 보상으로 ‘드라키엘 연성식’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지막 퀘스트 보상을 확인함과 동시에, 내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었다. 4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러니까,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게이트 안에서 필름이 끊어지다니. 이런 끔찍한 일을 정식 서버에서도 겪게 될 줄이야. 부스럭- 어쨌든 별 탈 없이 정신을 차린 건 다행이었고, 깨어난 장소가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도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눈을 뜬 장소는… 클래스 메인 퀘스트가 시작됐던 석상이 있는 석실이었거든. 그러니 눈을 뜨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성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ON Air : ☺ 389] -저… 형님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요? 시청자 수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닌 듯했다. └ 정신 차렸냐 방장 ㅋㅋ └ 한 20분쯤 된 듯? └ 뭔 퀘스트 진행하러 간다더니 갑자기 쳐 자고 있누 ㅋㅋ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아마도 퀘스트 막바지쯤 내가 라피엘의 정신에 빙의했던 순간부터…… 성좌들과의 소통이 끊어졌던 것 같은데. └ 퀘는 어케 된 거임? 갑자기 빙의 풀리길래 뭔가 했네. 아마 성좌들은 퀘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 퀘스트가 클리어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 뭐,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실시간 시청자가 40% 정도 줄어들긴 했는데, 경험상 지금부터 재밌는 걸 보여주면 금방 다시 돌아올 친구들이다. 그리고 퀘스트 정보창을 한 번 점검해본 결과……. 아무래도 지금부터 성좌들에게 아주 재밌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퀘스트는 클리어했습니다 형님들. └ 엥? └ ……? └ 클리어라고? 이거 연계 퀘스트 아니었음? -뭐 라피엘의 기억에 오류가 났다던가? 그러더니 갑자기 클리어 되버리더라고요. └ 아니 씹ㅋㅋ └ 이 ㅅㄲ는 구라를 칠 거면 좀 성의있게 치던가 ㅋㅋㅋ └ 말해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형……ㅋㅋ 아니, 이 성좌놈들이 속고만 살았나. 진짜 그랬다니까? └ 예, 예. 그러시겠죠. └ 방장도 영업 비밀이 있는 거 아니겠음? └ 핑계가 짜치니까 그러지 ㅋㅋㅋ └ 살다 살다 라이카 시스템에 오류가 났다는 얘기도 들어보네 ㅋㅋㅋ └ ㄹㅇㅋㅋㅋ 후우. 라이카 시스템 원래 한 번씩 오류도 나고 그러는데, 뭘 모르네 이 형님들이. 두 회차에 한 번 정도는 꼭 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 그래서 스킬 포인트 3개는 받았고? 물론이죠 형님들. └ 그럼 이제 드디어 클래스 전용 스킬 쓰는 것도 볼 수 있는 거임? 그것도 맞습니다. 후후.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진행해 볼까요, 형님들? └ 캬ㅋㅋ 방장 시원하누. └ 가야지 반드시 가야지. └ 근데 뭘 진행한다는 거임? 바로 스킬 보여주겠다는거? 일단 가장 처음 할 일은, 퀘스트창을 오픈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클래스 메인 퀘스트가 클리어 되면서, 연계 퀘스트가 발동했거든.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 (Drakiel)》연성하기] -일단 이거부터 확인하고 가시죠 형님들. 〓〓〓〓〓〓〓〓〓〓〓〓〓〓 태고의 용족 연성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 (Drakiel)》연성하기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난이도 : ??? 당신은 가장 위대했던 세라피스트의 기억을 통해,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 연성식을 손에 넣었습니다. ……중략…… 이 연성식을 통해 드라키엘의 의지(Ego)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완성하십시오. 용혼을 담아낼 수 있는 완성도 높은 그릇을 만들어 낸다면, 위대한 세라피스트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입니다. 보상 : 라피엘의 목걸이(전설) 〓〓〓〓〓〓〓〓〓〓〓〓〓〓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시점부터 성좌들은 난리가 났다. └ 와씹;; 태고의 용족이라고? └ 뭔 1차 클래스가 용족을 만들어?;; 퀘스트 진행을 어느 정도까지 함께 공유했기에 완전히 예상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짜로 용족의 연성식을 얻었을 줄은 몰랐을 테니 말이다. └ 용족은 무조건 60레벨 이상 아님? 20레벨이 어케 만듦?? └ 몰루?(진짜모름) 어쨌든 성좌들의 호들갑은 곧, 이 퀘스트 진행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는 뜻이었고……. 이건 내게 당연히 좋은 신호일 수밖에 없다. [ON Air : ☺ 437] 그러니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바로바로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포인트 생긴 것부터 깔끔하게 투자해볼까요 형님들? └ 오오, 그걸 바로 쓴다고? └ 어디에 쓸지 벌써 정한 거임? 사실 스킬 포인트를 처음 받을 때만 해도, 이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스킬에 투자할지 감도 안 오던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진 클래스 전용 스킬이라 봐야 총 세 개뿐이지만. 아직 스킬 이해도가 제로에 가까웠으니…… 어느 정도 플레이를 해본 뒤에 포인트를 투자하려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퀘스트 진행을 위해 연성식을 확인한 순간, 내 생각은 깔끔히 굳어졌다. [인벤토리를 오픈하였습니다.] [‘드라키엘 연성식’ 아이템의 정보를 오픈합니다.] 당장 어떤 스킬에 투자해야 최고의 효율이 나올지, 너무 명확해진 것이다. 〓〓〓〓〓〓〓〓〓〓〓〓〓〓 드라키엘 연성식 분류 : 잡화 - 연성식 레벨 제한 : 없음 등급 : 신화 티어 : - 내구도 : 90 / 90 고대의 용족 ‘드라키엘’을 연성할 수 있는 연성식입니다. 해당 연성식을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 스킬에 등록하면, ‘드라키엘’을 연성할 수 있습니다.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양도할 수 없습니다. * 클래스 전용 아이템입니다. ‘빛의 연금사’ 외의 다른 클래스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연성에 성공 시, 연성식은 소멸됩니다. 〓〓〓〓〓〓〓〓〓〓〓〓〓〓 다른 걸 다 떠나서 무려 ‘신화’ 등급이다. ‘신화’라는 등급이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무려 군단장 아티펙트였던 그 제라투스의 깃발보다도 높은 희귀도 등급이라는 말씀. 8~10티어 이전에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등급이 바로 이 ‘신화’라는 등급이었는데, 고작 20레벨 초반에 이런 물건을 얻어버렸으니……. 일단 여기에 모든 자원을 몰빵하는 게 너무 당연한 이치라는 말이었다. 단 한 번만 연성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사실도, 자원 몰빵의 근거였고 말이다. 후우. 용팔이 쌀먹의 꿈이 이렇게 곧바로 접힐 줄이야. 드래곤 복사로 재벌되는 꿈을 잠깐 꿨었는데……. ‘이건 좀 마음 아픈걸?’ 하지만 마음 아픈 것과 별개로, 그게 머뭇거릴 이유가 될 순 없다. 어차피 퀘스트 때문에 드라키엘 연성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미루는 건, 가장 바보 같은 짓이다. 클래스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클래스 메인 퀘스트였으니. 이걸 미루고 플레이어 레벨만 올리면, 내실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설명이 조금 장황했는데……. 어쨌든 이 신화등급 연성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든 자원을 때려 박아 최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게 맞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 세라픽 포지에 3포인트 다 박겠다는 말이지? 바로 그겁니다 형님. 그럼 이제부터 개쩌는 신화등급 용가리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 그런데 이거 등급은 또 왜 신화등급임? ㅅㅂ;; └ 와; 용족에 신화등급? 진짜 미쳤는데? └ 세상이 데이브를 억빠한다 ㅅㅂ;; └ 용족이라 신화등급인 게 오히려 말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솔직히 이 ㅅㄲ가 한 짓거리 생각하면 히든 보상 개쩌는 거 나올 것 같긴 했는데……. └ 그래도 신화는 오바지; 드라키엘 연성식의 등급을 확인한 성좌들이 예의 그 익숙한 반응들을 보였지만…. 가볍게 무시해주면서 곧바로 스킬 포인트를 찍었다. [1SP를 소모하였습니다.] [1SP를 소모하였습니다.] [1SP를 소모하였습니다.] [클래스 전용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의 스킬레벨이 4Lv로 성장했습니다.] [‘세라픽 포지’로 창조한 피조물의 품질이 크게 향상됩니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다음 할 일을 알려준다. [현재 보유중인 ‘연성식’이 존재합니다.] [‘드라키엘 연성식’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사용해 버리고. [‘드라키엘 연성식’이 ‘세라픽 포지’에 등록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연성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세라픽 포지’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 흐르듯 술술 풀리던 마지막 순간.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내 시야에 주르륵 떠올랐다. [‘드라키엘 연성’에 필요한 재료를 등록하세요.] 그리고 그걸 확인한 나는…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느낌이었다. * 연성 재료 목록 A. 태고룡의 뼛조각 × 1 B. 루멘 정제석 × 375 C. 드라코의 심핵 × 7 D. 황금빛 역린 × 1 E. 하늘 고리 광석 × 1 F. 기류혼 파편 × 3 그러니까 지금 이거……. 내 전 재산 탈탈 털어서 다 갖다 바치라는 소리 맞지? 4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난 시스템의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 이 사악한 시스템 녀석이, 내 모든 LP를 털어가기로 작정한 게 눈에 보였으니까. └ 와 연성 재료 한번 살벌하누 ㅋㅋㅋ └ 그나마 태고룡 뼛조각은 들고 있어서 ㅈㄴ 다행이네ㅋㅋ └ ㄹㅇㅋㅋ 루멘 정제석 말고는 싸보이는 재료가 하나도 없는데? └ 맞음ㅋㅋ 그나마 저렴한 드라코의 심핵도 개당 500LP정돈 할 거고……. └ 역린이랑 하늘고리 광석이 젤 문제임 ㅋㅋㅋ └ 둘 다 거의 1만LP쯤 하지 않나 시세? 쉬는 날에도 습관적으로 거래소를 모니터링할 만큼 죽돌이인 나는, 사실 저 목록을 확인하자마자 대충 얼마가 필요할지 머릿속에 계산이 선 상태였다. 그러니까… 최소로 잡아도 2.5만. 매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3만LP까지도 태울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정확히 3만 LP가 지금 사용 가능한 내 전재산이었다. 시스템 이 자식은 내 자산 현황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헌터즈 스쿨인지 뭔지, 거기에 지원해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근데 신화등급 연성이면 이 정도는 써야지 맞긴 해 ㅇㅇ └ 방장아, 엊그제 팔린 8티어 신화 장검이 10만LP였던 건 알고 있지? 그건 8티어고요 형님……. 그렇게 따지면 10티어 신화 등급 장궁 시세는 100만LP가 넘습니다만? └ 지금 방장이 연성하려는 드라키엘인가 뭔가도… 어지간하면 8티어는 무조건 되지 않을까? 어쨌든 신화에다 용족인데? 그치만… 드라키엘은 아주 높은 확률로 계정귀속일걸요? 하지만 무기는 쓰다가 팔 수 있잖습니까……. 쉽게 말해 ‘자산’이라는 말씀. 서울 아파트가 비싼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슴까. └ 무친놈ㅋㅋㅋㅋㅋ └ 무친 쌀숭이ㅅㄲㅋㅋㅋ └ 이래도 데이브 쉑 쌀먹이 컨셉이라고 쉴드 치는 놈은 없겠지?ㅋㅋㅋ 뭐……. 성좌들이 날 쌀숭이라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사실인 걸 어떡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내겐…… 이 연성 퀘스트를 깨지 않을 선택지 따윈 없다. 모든 연성 재료 중 가장 비싼 ‘태고룡의 뼛조각’이, 이미 내 인벤토리에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계정귀속’상태로. [태고룡의 뼛조각(계정귀속)] 이게 바로 시스템의 가장 악랄한 부분이랄까. 부르는 게 값인 태고룡의 부산물을 계정귀속으로 소매넣기 해버리다니……. 이걸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난, 이 연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쇼핑 좀 하겠습니다? 결심을 마친 난, 거래소를 열어 폭풍 구매를 시작하였다. 띠링-! [‘512LP’를 지불하였습니다.] [‘드라코의 심핵’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515LP’를 지불하였습니다.] [‘드라코의 심핵’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중략…… 다행히 매물이 충분해서 가격이 적당했던 탓도 있지만. 내 지향점이 아무리 쌀먹이라고 해도… 한번 결심한 이상 간 같은 건 보지 않는 편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아끼겠다고 시간을 끌어봐야 얼마나 아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괜히 매물만 소진되어버리면, 비용이 늘어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10800LP’를 지불하였습니다.] [‘하늘고리 광석’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12000LP’를 지불하였습니다.] [‘황금빛 역린’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제로에 수렴하는 LP통장의 잔고를 보고 있노라니, 말 그대로 생살이 깎여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물론 내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만큼, 반대급부로 성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지만 말이다. └ 캬ㅑㅑㅑ └ 시원하다 그냥 ㅋㅋ └ 나 이 ㅅㄲ 이렇게 시원하게 돈 쓰는 거 처음 봄 ㄹㅇㅋㅋ └ 이거야 데이브형! 투자 할 때는 확실히 해야 포텐이 높아지는 거라니까? 응 아니야. 이번이 진짜 마지막임. 이거 진짜임. [연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등록하였습니다.] 시원하게 전 재산을 털어 재료를 싹 다 사들였지만, 다음 메시지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키엘 연성’을 위해,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그러니까 여기서 Y 한번 선택하는 순간… 거의 3만 LP에 가까운 재료가 그대로 사라지는 거 맞지? 후우. 물론 연성이라는 과정이 남아있긴 하지만, 여기서 Y를 선택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니까. 딸깍 한 번에 3만 LP가 삭제된다니, 아무래도 심호흡 한 번은 필요할 것 같았다. “후우욱.” 그나마 실패 확률 같은 건 없는 딸깍이라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클래스 고유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를 발동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드라키엘’ 연성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집중하긴 해야 한다. 우우웅-! 눈앞에 나타난 이 새하얀 마법진 위에, 라피엘에 빙의한 채로 습득했던 연성식을 새겨야 하거든. [술식의 완성도에 따라, 결과물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패는 없겠지만, 결과물의 차등은 있을 수 있으니까. └ 자, 3만LP짜리 마법진 드가자~ └ 저거 하다가 삐끗 하면 방장 3만LP 날리는 거임? └ 날리진 않고 반토막은 날지도……? 성좌들의 채팅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손끝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0.3%] 스킬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가이드 라인을 주긴 하지만, 결국 연성식을 최종적으로 그리는 건 내 손이란 말씀. 그러면 떨리지 않냐고? 지이이잉-! 사실 재료가 비싸서 좀 긴장되긴 하는데……. 그뿐이다. 내가 베타에서 몇 회차를 플레이했었는데… 이런 술식 그려보는 게 처음이겠냐는 말이지. 평범한 연금술사도 두 회차 정도는 플레이해본 적 있었고, 마도공학자도 서너 회차쯤 해봤고. 비슷한 술식을 그려야 하는 정령술사는, 한 20회차 이상 해본 것 같은걸? 지잉- 지이이잉-!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술식을 꽤 잘 그리는 건, 타고난 손재주라기 보다 노력과 노가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아니; 데이브ㄷㄷ 술식은 왜 이렇게 잘그림?;;; └ 무친 재능충 ㅅㄲ……. 성좌들의 ‘재능충’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오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딱 봐도 난이도 개 높아 보이는 술식인데; 아직 한 번도 안 틀린 거 아님? 재료에 거의 3억을 박았는데, 틀리면 그건 범죄 아닐까, 형들? 그런데 안 틀린 건 둘째치고……. [현재 연성 진행도 : 12.7%]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 완성도 등급이 S+라고……?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는데? └ ㅁㅊㄷㅁㅊㅇ;;;;;; └ 술식 깎는 게 원래 저렇게 쉬운 거였음? 원래 클래스를 막론하고 술식이라는 게, 특별한 실수 없이 완성했을 때 A라는 등급이 나온다. 그건 라이카 시스템 안에서의 약속 같은 거였고, 그래서 내 목표도 사실 A+정도의 완성도 등급이었다. 베타 버전을 플레이할 때도, 술식을 S등급 이상으로 깎아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거든. [현재 연성 진행도 : 36.9%]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 그런데 40%를 거의 채워가는데도, 아직 S+등급을 유지하고 있다고? [완벽한 ‘마력의 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술식의 완성도가 한층 더 견고해집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50.0%]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S] 심지어 완성도가 한 단계 더 올라버렸다고?? └ 뭔데;;; └ 이렇게 잘 할거면서 3만LP 태운다고 엄살 부렸던 거였음? └ 어쩐지 쌀숭이 쉑이 호쾌한 척 LP 쓰더라니ㄷㄷ 아니, 간 한 번 안 보고 호쾌하게 LP쓴 건 맞잖아요 형님들……. 억까는 하지 말자고요. 위이잉-! 그런데 왜인지는 진짜 모르겠지만……. 술식 그리는 게 엄청나게 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술식 완성도 등급의 기준이 달라졌다던가 하는 이슈가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도 실제로 술식을 엄청나게 잘 그리고 있다는 말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정령술사 했을 때 이 정도 술식 그려댔으면, 요정이 드디어 재능을 찾았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그 정도다. [현재 연성 진행도 : 67.3%] [현재 연성 진행도 : 79.5%] 어쨌든 그렇게 집중하다 보니, 상당히 복잡해 보였던 술식에 드디어 끝이 보이려고 한다. [현재 연성 진행도 : 94.8%] 그리고 진행도가 100%에 가까워짐에 따라, 내 집중력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이이잉-!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마력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강해집니다.] [술식의 진행 속도가 50%만큼 가속됩니다.] 어어, 이거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데? └ 와 씨;; 첫 술식연성에 마력폭주라고? └ 실화인가?;; 마력폭주? 연성과정에서 SS등급 도달하면 발생하는 특수 현상 같은 건가? 이건 베타때도 해 본 적 없는 거라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갑자기 연성 진행 속도가 빨라지며, 그에 따라 작업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현재 연성 진행도 : 97.2%]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실수할 순 없다. 이대로 완성만 하면, 라이카 인생 최초로 술식 완성도 SS 띄우는 거 아냐? 어떻게든 해내야겠지? 고오오오-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거의 무아지경이 됐던 것 같다. 마지막 남은 술식 2% 정도는, 무슨 정신으로 그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렇게 모든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됐을 때. 띠링-! [완벽한 ‘마력의 핵’이 완성되었습니다.] [술식의 완성도가 한층 더 진화했습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100.0%]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S+] 결과물을 확인한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4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뭔가 오늘, 지난 2주간의 고생에 대한 대가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보상이, 눈앞에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연성식의 한계를 초월한 결과물이 완성되었습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의 스킬 숙련도 등급이 F등급에서 B등급으로 격상됩니다.] 스킬 숙련도 등급이 원래…… 한 번에 세 계단씩 오르기도 하는 거였나? 오늘 처음 보는 메시지가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연성 결과물, ‘드라키엘’의 등급이 한 단계 진화됩니다.] [연성 결과물, ‘드라키엘’의 티어가 두 단계 격상됩니다.] 예? [피조물에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의 의지(Ego)를 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초월)(10T)’의 연성에 성공하였습니다.] 이거… 진짜예요……? └ ???????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임??? └ 등급이 초월이라고??? 초월은 신화등급보다 한 단계 윗등급이다. 현 시점 지구 서버에서는 진짜 최상위 레벨의 랭커들만 쓸 수 있는 등급이라는 소리. └ 게다가 10티어……? └ 방장이 ㄹㅇ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었는데?? 말도 안 되긴 해. 나도 믿기질 않으니까. └ 데이브 이 ㅅㄲ 또 사기친다 ㅅㅂ;; └ 와씨 이게 만약 비귀속 아티펙트였으면 얼마짜리야?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은데요 형님.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찬란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던 술식 위로 작은 드래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르릉-! 라피엘의 기억 속에서 봤던 황금빛 도마뱀과 거의 흡사한. 하지만 조금 더 화려한 생김새에 작은 날개까지 가진 새끼 드래곤.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초월)(10T)’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빙의를 통해 봤던 드라키엘은 조금 도마뱀스러운 드래곤이었다면, 이 녀석은 누가 봐도 ‘헤츨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드래곤에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홀린 듯 녀석의 정보창을 열 수밖에 없었다. 띠링-! 〓〓〓〓〓〓〓〓〓〓〓〓〓〓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 분류 : 소환수 레벨 제한 : 없음 등급 : 초월 티어 : 10T 종족 : 용족 레벨 : 60 능력치 공격력 - 789 방어력 - 558 생명력 - 9273 ……중략…… * 소환 시 필요 마력 전투 시 - 24/s 비전투 시 – 0.1/s * 고유능력 -드래곤 피어 직선 상의 모든 적들에게 공격력 750% 위력의 피해를 입힙니다. 피해를 입은 대상은 3초 동안 공포 상태에 빠지며, 무장해제 상태가 됩니다. 소모 마력 : 300 고귀한 혈통을 가진,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입니다. 최상위 용족에 해당하는 개체로, 준(準) 드래곤으로 칭해지는 존재입니다. * 클래스 전용 소환수입니다. ‘빛의 연금사’ 외의 다른 클래스는 소환할 수 없습니다. * 계정에 귀속된 소환수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 플레이어와의 레벨 차이가 과도하여, 충성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현재 충성도 : 13 〓〓〓〓〓〓〓〓〓〓〓〓〓〓 좋다. 아니, 황홀하다. 그러니까 정말 엄청난 걸 얻게 된 건 맞는 것 같은데……. └ 방장, 이거 쓸 수 있는 건 맞지……? 문제가 좀 있어 보이지만. 나……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지? * * * 알테리온 대륙의 지도 끝자락. 최상위 플레이어들의 말에 따르면, 그 망망대해를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마계’ 지역으로의 이동 포탈도, 이 망망대해 너머에 있는 ‘불모지’에서 발견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해역 너머의 새로운 대륙에 도달할 수 있는 건 결국 100레벨에 근접한 최상위 랭커들뿐이었고. 60~80레벨 플레이어들은 보통 그 경계에 자리한 ‘노바르크 군도’를 터전으로 삼는다. 알테리온 대륙보다는 훨씬 더 위험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륙의 영향력이 닿을 수 있는 지역. 때문에 대륙에서 이 군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인 ‘브렐린 항’은, 2차 전직에 성공한 상위레벨 플레이어들의 거점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지이잉-! 위이이잉-! 그리고 지금 거대한 포탈이 열린 이곳. ‘브렐린 항의 귀환석’ 앞 공터는, 종종 이렇게 상태가 좋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나타나곤 했다. 노바르크 군도의 던전들을 공략하기 위해 출항했던 수많은 플레이어 파티들이, 귀환 스크롤을 찢으면 돌아오는 곳이 바로 이 공터였으니 말이다. “의료 지원 요청합니다!” “힐러! 최대한 숨은 붙여둬야 해!” “소속 길드가 어디시죠?” “아이기스 길드 공략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에 귀환한 아이기스 길드원들의 상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귀환 인원 대부분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중상을 입고 있었고. 개중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귀환한 인원들도 있었으니까. 아이기스 길드의 글로벌 랭크가 100위권 안쪽, 국내 랭킹이 13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건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보통 이 정도 규모의 길드 공대들은, 길드원들의 안전을 위해 안전장치를 몇 겹 이상 꼼꼼하게 하는 편이었으니까. “플레이어 네임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브리온(Brion)입니다.” “좋습니다. 일단 구조인력 호출했으니, 금방 도달할 겁니다. 브리온 님은 따로 치료받으실 필요 없으실까요?” “전 포션 좀 쓰면 될 수준입니다. 다른 인원부터…….”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기스 길드의 플레이어 브리온… 김경준은, 무척이나 공허한 표정이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만 다섯이 넘었으니까. 아이기스 길드에 입단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이 정도의 사고가 난 건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마저도 공대 시스템이 제대로 잡히기 전인 게이트 사태 초창기였으니……. 최근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주일 안에 끝났어야 하는 던전 공략이 무려 3주나 질질 끌린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러고도 결국에는 클리어조차 못하고 이렇게 전원 귀환 스크롤을 찢어야 했던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물론 신규 발견된 히든 던전이었기에 데이터가 없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평균 80레벨 파티를 이렇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곳일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절대 노바르크 군도에 있을 법한 난이도가 아니었는데.’ 불모지의 던전이었더라면 이해할 수 있다. 거기는 던전이 아닌 일반 사냥터조차, 80레벨 미만으론 버텨내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여긴 노바르크였고, 심지어 길드 정찰대가 앞서 탐사까지하고 온 곳이었다. 분명 그들이 책정했던 난이도는 70레벨대 던전 수준이었는데… 이런 대형 사고가 난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팀장인 자신의 책임도, 꽤나 무겁게 느껴졌고 말이다. “팀장님, 지원 도착했습니다.” “일단 중상자 위주로 빠르게 호송하고, 멀쩡한 인원은 길드로 복귀한다.” “예, 팀장님!” “공대장님은… 괜찮으신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 없으신 듯합니다.” “후우. 그나마 다행이군.” 품속에서 시가를 꺼낸 김경준은, 한숨을 푹 쉬고 난 뒤 천천히 불을 붙였다. 치이익- 어쩌면…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살려 돌아온 게 다행인 수준인지도 몰랐다. ‘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헌터라는 직업 자체가 항상 목숨을 건다고는 하지만. 거의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곧바로 게이트를 나가 아버지께 연락부터 드려야 할 것 같다. 게이트 바깥 사람들 중 누구보다 현장에 대해 잘 알고 계실 분이기에, 더욱 걱정이 크실 터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한 경준은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은 현장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 * * 새롭게 얻은 드라키엘의 스펙은, 정말 ‘파멸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 와, 용족 환수는 다르긴 다르구나;; 무슨 경험치 먹이기 전부터 60레벨로 시작하냐 ㅋㅋ └ 용족 특성이 소환수한테도 적용될 줄은 몰랐음;; 60이라는 2차 전직 플레이어에 버금가는 레벨은 차치하고라도……. 깡 능력치 스펙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 근데 소환수 공격력이 거의 800인게 맞음? 방장 월광검 공격력 50 아님?ㅋㅋㅋ 50도 안 되는데요……. └ ㄹㅇ 2차 전직한 딜러 데려와도 공 500이 될까 말깐데……. └ 솔까 이거 플레이어 기준으로 놓고 보면 최소 70레벨대 후반 스펙임ㅋㅋ └ 그것도 장비 세팅 빡시게 들어간 ㅇㅇ 성좌들의 말이 맞다. 이 귀여운 도마뱀 녀석은, 태생부터 2차 전직까지 마친 상위 플레이어들과 비견될 정도의 능력치를 갖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크게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 그럼 뭐함 ㅋㅋㅋ 전투에 쓸 수가 없는 상탠데. 하나는 내 마력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고. └ 전투시 기준으로 ㅋㅋㅋ5초도 소환 못하는 거 실화? └ 그래도 비전투 기준으론 15분정도 꺼낼 수 있음ㅋㅋ └ 비전투 기준이 뭔 의미가 있음 ㅋㅋ 도마뱀이랑 농담 따먹기 할 거임?ㅋㅋㅋ └ 방장 마력 몇인데? └ 90이라던데 ㅋㅋ └ 엌ㅋㅋㅋ스킬은 아예 쓰지도 못함ㅋㅋ 또 하나는 녀석의 충성도가 너무 낮다는 점이었다. └ 마력도 마력인데, 어차피 소환해봤자 일 안할 듯 ㅋㅋ 충성도 13 뭔데 ㅋㅋ └ 근데 솔직히 그럴만해. 쟤가 볼 때 우리 데이브좌 얼마나 약해보이겠어 ㅋㅋㅋ 그러니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 그림의 떡 같은 느낌이랄까. “으음.” 그래도 일단 처음으로 얻은 소환수이니, 소환부터 해봤다. [소환수,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을 소환하였습니다.] 아무리 충성도가 낮아도 설마 주인을 공격하진 않겠지. 크르르릉- [소환수, ‘태고의 용족 드라키엘’의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름은, 부르기 편하게 ‘키엘’이라고 해야겠다. └ 우우우- └ 이름 쥰내 성의없누 ㅅㅂ └ 초월급 소환수한테 너무한 거 아님?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소환된 내 첫 번째 소환수는, 라피엘의 눈을 통해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태고의 용족’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로 붙어서 그런가? 덩치도 조금 더 커 보였고, 무엇보다 날개가 훨씬 더 본격적으로 자라 있었다. 후우. 만약 이 녀석을 팔아먹을 수 있었다면, 몇십만 LP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 방장 저거 더러운 눈빛 보소;; 뭔 생각 하는 거임? └ 못 팔아먹어서 아쉬워하는 중일 듯; 어떻게 알았지? └ ㄴㄴ 이 녀석을 어떻게 굴려야 본전 뽑을지 고민하는 거 아닐까? 그것도 맞긴 해. └ 불쌍한 우리 용용이ㅠㅠ 용용이 아니고 키엘이라니까? └ 악덕 주인 만나서 인생 망했누ㅜㅠ 어쨌든 소환된 녀석과 눈이 마주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덩치가 꽤 크다. 얌전히 앉아있는 앉은키가, 내 키의 1.5배는 되어 보였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 혹시 대화는 가능한 녀석일까? 정령들은 전부 대화가 통했었는데……. 용족을 부려본 건 베타 플레이 통틀어 처음이라,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흐음. 어쨌든 난,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안녕, 반가워. 네 이름은 이제부터 키엘이야.” 왜냐고? 이제부터 난, 이 녀석에게 호감작을 해야 하거든. └ ㅅㅂ 방장 말투 역겨운 거 뭔데;;; └ 목소리 톤도 다름;; └ 시벌;; 소개팅이라도 나온 거임? 성좌들이 내 말투에 헛구역질을 해 대도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충성도를 올려야…… 이 녀석을 써먹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크르릉- 키엘이라……. 나쁘지 않은 이명이로군.] 내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설마, 고작 네 놈이… 내 주인인 건 아니겠지?] 4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미스 영지의 북동쪽. 알테리온 대륙 안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산맥. 루미스의 지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그레니스 산맥’은,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익숙한 사냥터 중 한 곳이었다. 30~60레벨 사이의 플레이어들이 사냥하기 좋은 사냥터가, 바로 이 그레니스 산맥에 가장 많이 위치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루미스 초원’은 이 플레이어들에게 만남의 광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영지와 산맥의 사이에 위치한 이 초원은, 많은 플레이어들이 사냥터로 향하기 전에 모이는 곳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이 초원 필드의 정중앙에 위치한 ‘루미스 귀환석’이, 바로 플레이어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대륙에 머무는 플레이어들의 첫 번째 귀환 포인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길 한 번도 거치지 않는 플레이어는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일단 대륙에 들어왔으면, 여긴 무조건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대륙으로 넘어온 플레이어를 찾는 중인 자이드와 세라에게, 이곳만큼 확실한 장소는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상이 ‘히든 클래스’로 전직에 성공한 뉴비라면 말이다. “자이드, 어쩌면 우리가 놓친 건 아닐까? 여기서 계속 캠핑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세라의 질문에 자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2주나 지났으니 ‘목적물’을 한 번 정도 놓쳤을 가능성이야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루미스 귀환석 앞에서 대기하는 것만큼 ‘그’를 찾을 확률이 높은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그 증거로 찾고 있던 둘 중 한 녀석은 쉽게 찾아내지 않았던가? 아쉽게도 그에게는 ‘목적물’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미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해도, 며칠 내론 다시 나올 수밖에 없어.” “왜? 영지 밖으로 나오려면 최소 30레벨 정돈 찍어야…….” “히든 클래스잖아.” “아하…?” “클래스 퀘스트 진행을 위해서라도, 조만간 무조건 여기 나타날 거라고.” 세라를 납득시킨 자이드는, 품속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단순히 돌멩이라기엔 꽤 비싼 아티펙트인 이 ‘별의 저울’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감별석(鑑別石)이라 불리기도 하는 물건. 더스크포트(Duskport)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이 물건까지 빌려온 이상, 어떻게든 목적물을 찾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목적물’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실 감별석 대여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푼돈이었다. “조금만 참아, 세라. ‘그것’만 손에 넣으면…… ‘블랙 웨일’에 입단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후우. 알겠어, 자이드.” 전 세계 길드를 통틀어도 30위권 안에 항상 꼽히는 <블랙 웨일>은, 서유럽 기반의 길드 중 최상위권인 길드였다. 그리고 자이드는 이미 블랙 웨일의 간부 중 한 명에게, 입단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것’이라고 칭한. 그러니까… ‘밤의 추적자’를 손에 넣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밤의 추적자’는 어둠 속성 암살자 계열인 자이드를 몇 배 이상 강력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때문에 자이드는, 하늘이 주신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블랙 웨일의 단원이 될 수 있다면,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한 부와 명예를 손에 쥐게 될 터였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밤의 추적자를 손에 넣고 블랙 웨일의 지원까지 받아낸다면, 랭커가 되는 것까지도 꿈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자이드는 저도 모르게 한쪽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랭커’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지이잉- 자이드의 손에 들려있던 감별석이, 갑자기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어?!”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어서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 그들은 귀환 포탈 앞에서… 남루한 차림의 플레이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지?” “흐흐, 찾았네.” 자이드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남자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감별석의 붉은 빛은 점점 더 진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자이드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하늘이 돕는 모양이었다. * * * 나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꿀꿀했다. 고작 소환수 따위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도다.] -뭐가? [이 키엘님의 주인이 이렇게 허접한 인간에 불과할 리 없지 않느냐.] -……? [당장 진짜 주인을 데려와라 인간.] -나라니까? [말도 안 된다.] -왜 말이 안 돼? [너무 못생겼도다.] -시팔? 일단 마력이 부족해 녀석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무려 3만 LP를 들여 문제아를 소환한 기분. 이 꿀꿀한 기분이 쉽게 사라지질 않는다. 어쨌든 마지막 순간엔, 주인이라는 걸 인정(?)받긴 했지만 말이다. -너 일단 돌아가라. [그건 싫다.] -나도 싫어. 일단 돌아가. [으아아! 안 된다 주인놈아!!]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을 갑자기 막아선 웬 놈팽이들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거기 당신. 잠깐 이쪽으로 와볼 수 있을까요?” 이들이 내게 꽤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조금 늦게 눈치챈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말이다. “혹시, 내 말 안 들려요?” 스크롤을 찢어 루미스 귀환석에 도착했을 당시,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건방진 도마뱀 녀석을 길들여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휘유. 말로 해선 안 되겠군 그래.” 하지만 조용히 걸어오던 남자가 양 손에 단검을 뽑아 들었을 땐. 스릉-! 아무리 정신이 팔려있었다 해도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다. “뭡니까?” 이 처음 보는 두 남녀가 내게 상당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쪽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시점에, 스캐빈져를 만나게 됐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이건 조금 곤란한데.’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건 알고 있었지만, 시점이 너무 빨랐고 장소도 예상치 못한 곳이다. 그러니 조금이 아니고 사실 상당히 곤란하다. 성좌들도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뭐냐ㄷㄷ 스캐빈져임? └ 아니, 이렇게 대놓고ㅋㅋ └ 방장 밤의 추적자 사용등록 안했던 거 아님? 어케 알았지? └ 방장 ㅈ됐쥬. └ 딱봐도 2차전직한 고렙인데ㅋㅋㅋㅋㅋ └ 잘가라ㅋㅋ 멀리 안 나간다 방장ㅋㅋ 낄낄대는 성좌들의 채팅을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자식들의 채팅이 장난스러운 건, 아마도 내게 보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거다. 내게 호루스의 깃털이 있는 이상은, 검희가 날 죽이러 온다 해도 한 번은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성좌들의 입장에서 호루스의 깃털(이라 쓰고 1억이라 읽는다.)을 내가 날려 먹는 것만큼…… 꿀잼인 상황도 없을 게 분명했다. └ 와ㅋㅋㅋ오늘 대꿀잼이네ㅋㅋㅋㅋㅋㅋㅋ └ 앜ㅋㅋ 아무리 대이브라도 2차 전직까지 한 스캐빈져는 노답이긴 해 ㅋㅋㅋ 후우. 대체 오늘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 오전까지 무한 억빠 당했으니, 이제 억까당할 차례인 거지 뭐ㅋㅋ └ 이게 다 ‘너무 못생겼기 때문’ 아니겠냐 방장아 ㅋㅋㅋ └ 아ㅋㅋㅋㅋ 맞지맞짘ㅋㅋ ??? └ 잘생겼으면 키엘이 도와줬을 거 아냐. └ 맞네ㅋㅋ 못생긴 게 문제였네 ㅋㅋㅋ “…….” 성좌들이 놀려댔지만 딱히 화가 나지도 않는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확실히 못된 용가리 녀석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게 단 5초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 그냥 깃털 쓸 생각 하고 들이 받자 방장아 ㅇㅇ └ 대이브 정도면 저 버러지 쉐끼들 팔 한짝 정도는 가져갈 수도 있지 않을까? └ 허점 노려서 기습 잘 하면 가능할지도? └ 응 아니야ㅋㅋ 데이브맘들 방장 고평가 지리네 ㅋㅋ └ ㄹㅇㅋㅋ 솔직히 ‘밤의 추적자’가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그랬으니 호루스의 깃털도 돈 있을 때 사뒀던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맥없이 호루스의 깃털을 써버릴 순 없다.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 한다. “어이, 설마 스크롤이라도 찢을 생각은 아닌 거겠지? 어차피 찢어도 다시 여기로 오는 거 아냐?” “그렇게 쉽게 도망갈 순 없을 거예요. 뭐 하나만 확인하면 무사히 보내줄 테니까, 이쪽으로 일단 와보시면 어떨까요?” 나는 일단 스캐빈져들의 면면을 빠르게 확인했다. 성좌들의 말처럼 내가 맞댈 수 있는 상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단지 생존이 목적이라면 아직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것 같았으니까. 물론 다짜고짜 공격하면 호루스의 깃털 말고 다른 답이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보아하니 저들도 그러기는 조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날 죽이고 밤의 추적자를 승계받는다면, 스캐빈져들의 다음 타겟은 그들이 될 수밖에 없을 터다.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일단 끌고 가고 싶겠지.’ 그 심리를 이용해서 시간을 최대한 끌어 보는 게, 내 첫 번째 계획 되겠다. “사람을 잘 못 보신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지?” “딱히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그건 맞아. 우리도 딱히 네게 원한이 있진 않은걸?” “그렇다면 어째섭니까?” “말했잖아? 그냥 뭐 하나만 확인하면 돼. 이를테면 네 인벤토리에 잠들어있는 고유 아이템이라던가…….” 조금 더 상황이 나빠졌다. 고유 아이템까지 대놓고 언급했다는 건, 이제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는 소리. “루미스 앞마당에 귀환 포인트가 찍혀있는 허접 플레이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렇다기엔 이게 너무 예쁘게 빛나는걸?” 우우웅-! 감별석까지 확인한 나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 눌러 담았다. ‘후우.’ 이러면 이제 어쩔 수 없다. 다른 계획들은 전부 폐기다. 싸우다 깃털이 발동하더라도, 되는대로 맞대 보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스르릉-! 그래서 일단 검부터 뽑았다. 건방진 도마뱀 녀석이 더더욱 아쉬워진다. “뭐야. 우리랑 한번 해 볼 셈인 거야?” “제정신이 아니군요.” 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대놓고 무기를 뽑아 들었냐고? 그야 전투의 목적이, 저놈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기습하면 뭐 생채기 정돈 낼 수도 있겠는데……. 전투 자체가 너무 조용하고 빠르게 끝나버릴 확률이 높다. 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면, 여기서는 최대한 요란하고 처절하게 싸워야만 한다. 어쨌든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들도 존재했으니,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운 좋게 대형 길드 소속 플레이어라도 필드에 존재한다던가, 뭐 그런 기적 말이지. 고오오오-! 녀석들도 이제 날 설득할 생각은 접었는지, 전투 준비를 시작한다. 일단 마법사로 보이는 여성 스캐빈져. 그녀가 양손을 모으자, 빠르게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를 보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모양이었다. ‘무조건 원거리 마법이 먼저 날아오겠지. 블로킹으로 딱 한 턴만 버텨보자.’ 나머지 한 손에 방패까지 꺼내 든 난, 모든 정신을 전투에 집중했다. 비교적 투사체 속도가 느린 마법은, 퍼펙트 블로킹으로 충분히 막아볼 만하다. 의도대로 잘 돼서 저 남자를 향해 정확히 튕겨낼 수 있다면, 조금 더 오래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몰랐고 말이다. “전부 당신이 자초한 일이에요.”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린 붉은 단발의 스캐빈져. 그녀가 양손을 연달아 휘두르자, 마치 탄환 같은 모양새를 한 화염의 구체가 손끝에서 쏟아졌고. 탕- 타타탕-! 그것을 확인한 나는 표정이 구겨졌다. ‘하필 플레어 볼트 (Flare Bolt)냐.’ 화염계열 마법 중에는 탄속이 가장 빠른 축에 속하는 플레어 볼트. 가장 블로킹 난이도가 어려운 마법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 이걸 타이밍을 맞춰 튕겨내려면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어야만 한다. 그래. 그러니까 분명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파앙-! 가장 앞서 날아온 화염마탄 한 발을 완벽히 막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할지도?’ 그런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바로 그 순간…. 콰아앙-!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 귀환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순간적으로 공간이 비틀린 게 아닌가 싶은 수준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동작 그만.” 그건 바로……. “뒤지기 싫으면 거기까지 하는 게 어때?” 내 소중한 LP를 지켜줄,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4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귀환 전의 난, 베타 서버에서 최대 200레벨대까지도 찍어 봤었다. 대략 35년 정도 플레이했던 회차가 한 번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250레벨 정도까지 만들어 봤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난, 현재 지구 서버의 랭커들이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을지 꽤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편이었다. 아직 그들을 마주쳐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아니, 아마도 방금 처음 마주치게 된 것 같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여자가, 최소 120레벨 이상의 랭커일 거라는 정도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 당신이 대체 왜 여기……!” “이이익-!” 단 한 번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2차 전직 마법사의 공격 마법을 허공에서 흩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이 여자가 3차 전직 플레이어거나, 혹은 그에 거의 근접했음을 의미하거든. └ 그걸 이렇게 장황하게 분석해야 아는 게 레전드네ㅋㅋㅋ ……? └ 너 지구 플레이어 맞음? 맞는데요. └ 그런데 어떻게 검희를 눈 앞에서 보고도 모를 수가 있음? 예……? 가면까지 쓰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 검희는 원래 가면 쓰고 다님ㅇㅇ;; └ 이 ㅅㄲ진짜로 뭐지……. └ 어디서 한 십 년 폐관수련하다 온 게 분명하다니까? 성좌들의 얘기에, 순간 뇌 정지가 온 기분이었다. 검희라고? 내가 아는 그 랭커 검희? 검희가 대체 왜 여기……. └ 그러니까 ㅅㅂ;; 검희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임;; └ 검희 지금 방송도 안 켠 것 같던데. └ 방장 이 ㅅㄲ 진짜 운빨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 이걸 이렇게 또 살아가네 ㅋㅋ 성좌들의 채팅을 잠깐 확인한 나는, 검희 누님의 간지 터지는 뒷태를 잠깐 감상했다. 처음 등장했을 때도 멋있었지만… 갑자기 더 멋져 보인다. 이래서 랭커 팬덤이 생기는 걸까? 랭커들이 연예인들 이상으로 팬덤을 가졌다는 얘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나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지도 모르겠다. └ ㅅㅂㅋㅋ └ 이거랑 그건 좀 다른 개념 같은데요;; 그 와중에 검희 하나 등장했다고, 시청자 숫자도 갑자기 미친 듯이 불어난다. [ON Air : ☺ 756] 그 잠깐 사이에 200명 늘어난 거, 실화인가? └ 그나저나 검희 포스 지리긴 하네 ㅋㅋ └ 이게 랭커? 이게 랭커? 그런데 검희가 나보다 더 어린 거 아니냐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원래 라이카에선 레벨 높은 사람이 누님이거늘. 척-!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은 검희가 스캐빈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PK거든?” “…….” “그래서 너희들이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그냥 죽여주셔도 되는데요. “그게 무슨…….” “다행히 너희는 아직 저지르기 전이고, 나도 PK를 하고 싶진 않으니까.” 이 누님, 쓸데없이 자비롭네. “그러니까 5초 줄게. 당장 꺼졌으면 좋겠어.” 뭐, 이해는 한다. 검희는 랭커이기 이전에 무려 3대 길드의 네임드 플레이어였으니까. 검희쯤 되는 플레이어가 이렇게 보는 눈 많은 곳에서 PK를 한다는 건……. 아무리 대상이 스캐빈져라 하더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제길.” 어쨌든 검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후다닥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 저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저들이 날 죽이는 것보다 검희가 저들을 죽이는 게, 최소 10배쯤 더 손쉬운 일일 테니 말이다. 레벨 차이야 비슷하게 날지도 모르지만, 120레벨 이상은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이거든. “휴우.” 어쨌든 상황이 정리되어 위기에서 벗어나자, 나도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검희가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사, 사랑… 아니, 감사합니다 누님! 덕분에 1억 아꼈어요……. 그나저나 늦지 않았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그런가, 머릿속이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많겠죠?” 당연히 궁금한 건 많습니다, 누님. 늦지 않았다는 걸 보면, 제가 공격받을 걸 미리 알고 계시기라도 했던 모양인데……. “일단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잠깐 피하도록 해요.” 혼자 빠르게 할 말을 쏟아 낸 검희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길드 전용 귀환 주문서- ‘바르가(Varga)’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파아앗-! 스크롤을 찢은 검희의 신형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 오, 뭐지? 검희가 그냥 구해준 게 아닌가본데? └ 방장… 검희랑 뭐 있는 거임? └ ㅁㅊ 그럴 리가. 뭔가 있는데 내가 검희 가면도 못 알아봤을 리는 없지 않을까? “…….” 어쨌든 나도 일단 검희로부터 받은 스크롤을 찢기로 했다. 검희의 말처럼 그녀가 등장한 이후…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거든. 검희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 떠나서 이 누님 덕분에 호루스의 깃털 한 장을 아꼈는데, 시간 좀 내주는 건 당연한 예의잖아? └ ;;;;;니가 시간 내주는 게 아니라 검희‘님’께서 시간 내주시는 거 아닐까……. 그건 편견입니다. 아무튼 그렇다고요. 부우욱- 스크롤을 찢자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하얀 빛무리로 물들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앗- 내 시야에 나타난 건, 검희가 몸 담고 있다는 ‘바르가 길드’ 안의 작은 정원이었다. * * * 성좌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검희의 등장을 처음 봤을 때 내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검희가 스캐빈져의 화염 마법을 무효화 하며 사용했던 기술…… 라디언트 세이버(Radiant Sever). 분명 그건 내가 아는 3차 히든 클래스, [광휘의 검성] 고유스킬이었으니 말이다. 광휘의 검성은 내 머릿속에 있는 3차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강력한 축에 속하는 클래스였고. 만약 내게 검의 재능이 충분했다면, 마왕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몇 안 되는 사기 클래스였다. 강력한 빛 속성을 가진 덕에 마왕과 상성이 좋다는 부분도 어느 정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시작의 섬 히든 던전조차 안 밝혀진 서버에… 광휘의 검성이 존재할 줄은 몰랐단 말이지.’ 그런데 뜬금없이 이 얘길 왜 꺼내냐고? “…….” 일단 위기를 넘긴 뒤 정신을 좀 차리고 나니, 검희에게 ‘광휘의 검성’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깨달아버렸거든. ‘내 제라투스의 깃발을 사간 게 이 여자였다니.’ 라이카 세계 안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 아티펙트인 제라투스의 깃발. 그리고 그걸 사용해야만 전직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히든 클래스 광휘의 검성. “충격이 너무 심했나요?” “…….” “정신이 아직 안 들어요?” 이건 확실히…… 꽤나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스캐빈져들로부터 구해준 고마움이, 최대 0.1%정도는 줄어들 정도로 말이다. 무려 쌀숭이 데이브로부터 물건을 싸게 사간(오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여자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 나라도 알테리온 넘어오자마자 스캐빈져 만나 버리면 정신 나가겠다, 진짜.” “조용히 해줄래, 카토.” 그나저나 검희 옆에 이 남자도 랭커겠지? 느껴지는 뇌기가 어마어마한 수준인걸……? “전, 이제 괜찮습니다. 다시 한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검희 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검희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사실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어요.” “예?” “제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말이죠.” “……!” “당신에게 ‘빚’을 좀 졌어요, 데이브 님. 그게 뭔지 짐작도 안 되실 테지만 말이죠.” 제기랄. 이로써 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버렸다. 아마 이 여자는 깃발을 싸게 사 간 걸 ‘빚’이라고 표현하는 거겠지.(역시 오해였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오픈한다고? 생각보다 쿨한 누님이었잖아……?” └ 뭐냐;;;ㄷㄷㄷ └ 해명해라 방장;; └ 검희가 방장한테 대체 무슨 빚을 진 거임?;; “오늘, 왜 공격당한 건진 알고 계신 거죠?” “아마도… 고유 아이템 때문 아닐까요.” “인지하셔서 다행이네요.” “…….” “그럼 앞으로도 꽤 위험할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시겠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뜸을 들인 검희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최대한 조심하세요. 다음에는 제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죠.” 사실 검희의 입장에선, 제라투스 깃발을 싸게 산 빚(?)을 다 갚고도 남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호루스의 깃털을 가졌을 거라곤 생각도 못할 테니, 그녀의 입장에선 사실상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5만 LP정도는 더 뜯어내고 싶긴 한데……. 그 폐급 행동을 실제로 해낼 만큼 내 메타 인지 능력이 박살 난 상태는 아니라는 말이지? └ 설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방장? └ 근데 진짜 ㅁㅇㅁㅇ 검희가 대이브한테 대체 무슨 빚(?)을 진 건데;; 어쨌든 나와 몇 마디를 더 나눈 검희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희쯤 되는 랭커가 이 정도 시간을 써줬다는 것만 해도, 사실 감개가 무량한 일이긴 했다. “저는 일정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 해요.” “감사했습니다, 검희 님.”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데이브 님은 여기서 조금 더 쉬다 가셔도 되고요.”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나는…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내가 검희한테 뭘 해달라 요구하는 건 폐급 행동이겠지만, 생각해보니 정당한 거래 정도는 시도해볼 수 있지 않나? “그런데 혹시 검희 님. 궁금한 거 하나만 여쭤도 될까요?” 그리고 난,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시도할 줄 아는 추진력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떠오른 이 발상은, 당장 시도하지 않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았다. “뭐죠?” 자, 일단 스트리밍부터 살짝 꺼 주시고. -형님들, 잠깐 스밍 좀 끄겠습니다……! └ 미친? └ 얘 봐라? └ 방장! 이게 무슨 짓이야!! └ 제일 중요한 순간에 이거 실화임? └ 문 닫으면 안 돼!!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ON Air : ☺ 1321] 무려 1300명이나 되는……. 스트리밍 인생 최대치의 라이브 시청자를 남겨둔 채, 과감하게 스트리밍을 꺼버릴 정도로 중요한 거래. 이걸 하기 위해선 일단 검희의 관심을 조금 더 끌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건, 딱 이 한마디면 충분할 거다. “제가 거래소에 올렸던 제라투스의 깃발. 그거 사용해서 광휘의 검성이 되신 거죠?” “……!”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검희가 놀랐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솔직히 랭킹에 목숨을 거는 랭커라면,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난 생각했다. ‘어쩌면 검희 누님과… 상당히 괜찮은 거래를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4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오늘의 일은, 꽤 많은 우연과 운이 겹친 결과물이었다. 적어도 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칼라도르 레이드가 생각보다 일찍 끝난 덕에, 3차 전직 퀘스트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 첫 번째였고. 마침 그 타이밍에 데이브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두 번째였으며. 마지막으로는 게이트 관리국의 김영태 국장님이 마침 데이브를 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 번째였다. 게이트 관리국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검희라 해도 평범한 플레이어를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 타이밍에 스캐빈져를 마주하고 있었던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 할 수 있겠고.’ 그래서 검희는 기분이 좋았었다. 어쨌든 데이브라는 플레이어를 찾아냄으로써,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꿰어놓은 셈이었으니까. 3차 전직에 성공하고 나니 데이브가 갖고 있을지도 모를 정보들이 더욱 중요하다는 걸 체감했고……. 분명 언젠가는 데이브를 통해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든 것이다. ‘일단… 누군지는 확실히 확인했으니, 남은 건 길드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검희는 바로 오늘,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단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제가 거래소에 올렸던 제라투스의 깃발. 그거 사용해서 광휘의 검성이 되신 거죠?” 물론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곧바로 속내를 드러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으니 말이다. “……!” 심지어 첫마디부터가 예상조차 불가능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근 몇 년 사이, 이렇게 놀란 건 솔직히 처음이었다. 제라투스 깃발의 구매자가 자신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겠지만……. 그녀가 광휘의 검성으로 전직했다는 건, 최측근 동료 몇 명을 뺀다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카토, 잠시 나가 있어줄래?” “흐음. 그러지 뭐.” 방금까지 옆에 있던 ‘카토’조차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고작 어제의 일이었고……. 이러면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데이브라는 남자가 광휘의 검성과 관련된 다른 정보들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바로 그 짐작 말이다. “아무래도 저와 할 얘기가 있으실 모양이군요.” 그래서 검희는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도 고쳐 앉았다. 이전까지 남자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다면. 지금부터는 꽤 중요한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데이브라는 남자는 분명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거다. ‘광휘의 검성’이라는 단어를 꺼낸 데에는, 어떤 의도가 분명 담겨 있었을 테니까. “음, 비슷합니다.” 그리고 검희의 그 생각은, 정확히 맞는 것이었다. * * * 거래라는 게 대체 뭐냐고?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사실 단순했다. 생각해 보니 검희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을 내가 갖고 있는 것 같고, 반대로 내게 필요한 부분을 검희가 가진 것 같았거든. 어찌 됐든 검희라는 인물은 고유장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서로에게 필요한 걸 교환한다면 윈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검희가 필요한 게 뭐냐고? 그야 당연히 정보다. 난 ‘광휘의 검성’으로 최소 10년을 넘게 살았던 사람이거든. 그리고 이제 막 3차 전직에 처음 발을 들인 플레이어에게……. 내가 가진 몇 가지 정보들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일 테다. 그러니 검희의 태도가 달라진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저는 검희 님께서 필요하실 만한 정보를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정보이려나요?” “정확히는 ‘광휘의 검성’이 가진 비밀 몇 가지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흥미롭군요.” 가면 안으로 보이는 검희의 까만 눈동자가 살짝 반짝인다. 사실이 어떻든, 내가 제라투스의 깃발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 또한 이 정보들에 기반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몇 가지 키워드만 조금 드러내면, 그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바로 이렇게. “이를테면 ‘회색의 맹세 (Vow of Ashes)’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라던가.” “……!” 역시… 효과는 굉장했다. 검희의 놀란 표정이 가면을 뚫고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걸 제가 어떻게 알고 있는 지까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걸 제외한다면 꽤 많은 것들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오호.” “어떻습니까. 제가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검희는 잠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생각에 이미 마음은 기울었을 테고……. 이쯤 되면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졌겠지. 하지만 시간을 그리 길게 끌 수도 없을 거다. 이러다 이 거래가 무산되면, 그녀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최상위 랭커인 그녀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정보만큼 귀한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당신도… 나에게 바라는 게 있을 테죠?” “그렇습니다.” 해서 난, 원하는 걸 가감 없이 얘기했다. “딱 일 년 정도만, 당신의 이름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내가 검희의 힘을 빌려 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시간을 버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음……?” 불특정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 말이다. “스캐빈져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함입니다. 그 이상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치 않겠습니다.” 검희 덕에 위기를 한 번 벗어나긴 했지만,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할 거다. 어쩌면 이번에 만났던 둘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얘기. 물론 검희의 이름을 빌린다고 해서 전부 다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위험할 일이 9할 이상 줄어들 터였다. 내게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흐음.” 가면 안의 눈동자가 다시 나와 마주쳤고. 그것은 분명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잠시간의 침묵. “…….” 그걸 먼저 깬 건, 검희의 맑은 목소리였다. “좋아요. 그 제안, 아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 검희의 대답에,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솔직히 수락할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거든. 검희 정도 되는 랭커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를 향해, 검희가 한 마디 더 덧붙인다. “그런데, 데이브 님.” 예? “정말 일 년이면… 충분하겠어요?” 어……. 이게 어떤 의미에서 한 질문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반년 정도 빡세게 구르면…… 밤의 추적자 쌀먹미션 정도는 성공할 만도 하지 않을까요, 누님? 설마 내가 일 년 안에 랭커가 되는 걸 목표로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 * * 게이트 관리국의 국장 김영태는, 최근 상당히 심란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일단, 그의 아들이자 상급 헌터인 김경준이 너무 오랜 기간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으며. 그와 동시에 게이트 폭주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는 동안… 그 어떤 뾰족한 수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무려 ‘검희’라는 거물을 통해, 아들 친구인 건율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었다. 그러니 만약 아들이 지금 이렇게 무사히 귀환하지 못했더라면, 영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답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태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이 말부터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헌터 일……. 꼭 계속해야겠냐, 아들아?” 수없이 고민한 끝에 튀어나온 영태의 이 한마디는, 사실 단순히 이번 사건 하나 때문에 하게 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태는 당장보다도 미래가 더욱 걱정됐으니까. 만약 게이트 폭주를 결국 막을 수 없다면. 헌터라는 직업은 지금보다… 최소 몇 배 이상 위험한 직업이 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 누군가는 헌터를 해야 하고, 폭주하는 게이트를 저지해야 하겠지만……. 그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영태 또한 게이트 관리국의 국장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떠올리기에 앞서,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아버지.” “…….” 아들은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을 또 한 번 내어놓을 뿐이었다. “전 여기 아이기스에… 뼈를 묻어야 합니다.” 영태는 아들이 이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작년에 사고로 명을 달리한, 아이기스 길드의 창립자이자 전 마스터 서진우.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헌터 김경준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었다. ‘서진우… 그 사람도 참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서진우는 영태 또한 친분이 있던 헌터였다. 아들에게 은인이었으니, 자신에게도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람. 그래서 영태는 차마, 아들을 더 설득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아들은 살아남았으니, 그것에 감사해야 할 듯했다. “후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착잡한 기분까지 나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밥부터 좀 들자. 게이트 안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도 먹기 어려웠을 텐데.” “예, 아버지.” 평소 가장 좋아하던 스테이크 집에 왔음에도, 한동안 포크를 들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마 잃어버린 동료들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치이익- 잠시 동안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던 두 부자는, 천천히 다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어지던 대화 속에서. “예……? 건율이요? 이건율?” “그래. 우리 옆집 살던 그 건율이 말이다.” 김경준은 아버지로부터,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4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검희와의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일단 난 아주 쿨하게 그녀에게 내가 아는 정보 한 가지를 넘겨주었고. 검희는 그것의 진위 여부가 확인되자마자, 아주 신속하게 약속을 이행했으니까. -이런 정보를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정할게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은 정보였어요. 이렇게 두 줄의 메시지만 딱 보내온 뒤, 내 답변을 읽씹해 버리긴 했지만…….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예상치 못했던 기사들이 연달아 쏟아진 것이다. [바르가 길드의 루키, 스캐빈져들로부터 공격받다?] [분노를 숨기지 않은 검희! 더스크포트를 향해 공식적인 경고를 던져.] [스캐빈져들로부터 공격받은, 바르가 길드의 루키는 누구?] [더스크포트의 스캐빈져들로부터 공격받은 바르가 길드의 루키. 알려진 정보는 없어…….] 뭐, 내가 원했던 수준을 넘어 부담스러울 정도의 액션을 해주셨는데……. 이걸 보고 난, 새삼 한 번 더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희라는 이름이 가진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무려 바르가에서 길드 징표를 발급해 주다니…….’ 바르가 길드가 어떤 곳인가. 실버 나이츠를 제외한다면,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길드 랭크를 가진 집단이 바로 바르가였다. 과장 없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길드 이름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바르가라는 얘기. 그런데 검희는 입김 한 번으로, 그런 곳의 길드원임을 증명하는 ‘길드 징표’를 발급받아줬다. 당연히 길드원 등록을 실제로 해준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바르가의 길드 마스터가 그녀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길드 마스터가 아니어서 가능했던 건가? 만약 검희가 마스터였다면, 간부들 눈치 보느라 이렇게 무대뽀로 일을 처리하는 게 오히려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 어쨌든 일은 아주 잘 풀렸다. 이렇게 되면 [제라투스의 깃발]이 필요했던 [광휘의 검성]이 검희였다는 사실이……. 엄청난 행운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을 듯하다. 솔직히 검희와 바르가 길드를 등에 업게 된 건, LP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치를 가지거든. 물론 PK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용도 외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짠돌이라 하더라도…… 이제 제라투스의 깃발을 싸게 판 게(?) 조금도 아깝지 않아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역시… 데이브 형님.”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줄래? 그냥 난 바르가 길드, 아니… 검희랑 거래를 한 것뿐이라니까? 진짜 길드원이 된 게 아니라고. “에이, 그래도 형님 정도 실력자 아니었으면 그런 거래가 가능했을 리 없잖아요.” 난 실력 같은 걸 보여준 적이 없는데, 레오야? “검희쯤 되는 고수는 그냥 딱 보면 알죠.” “뭘…… 어떻게……?” “어쨌든 제가 볼 때 형님은, 곧 바르가 정식 길드원 되실 겁니다. 진짜로요.” 날 좋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솔직히 그럴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3대 길드 중에서도 가장 소수정예로 구성되어있는 바르가에서 나 같은 뉴비를 원하게 될 일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그런 기가 막히는 일이 발생한다 해도, 내가 아마 거절할 것 같거든. “그 소린 이제 그만하고, 지하수로나 얼른 가자 아우야.” “옙, 형님.” “그리고…… 나한테 바르가 징표가 있는 건 비밀인 거… 알지?” “물론입니다!” 바르가를, 거절? 미친 거 아니냐고? 아니다. 애초에 내 목표는 그렇게 높은 곳에 있질 않거든. 일단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한 다음 부모님께 적당히 효도하고 나면……. 최대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목표라는 말씀? 어디 코 꿰이기 싫어서 길드 가입 같은 건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던 건데……. 뭐? 3대 길드? 차라리 자격증 몇 개 따서 게이트 관리국에 취직하는 게, 내 라이프 스타일에 훨씬 더 어울릴 거다. 3대 길드쯤 되면 길드 대항전도 종종 열릴 텐데.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단 말이지. “이쪽입니다, 형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와 레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우리가 단순히 근황 토크나 하려고 모인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루미스 영지 내부에 존재하는 ‘망령의 지하수로’라는 이름의 던전. 각성자 위키에는 ‘망령의 지하수로’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망령의 지하수로 분류 : 인스턴스/파티 던전 던전 레벨 : 30 레벨 제한 : 20 인원 제한 : 1~10 *최소 5인 이상 추천 입장 조건 - 파티원 중 1명 이상, 루미스 자경단 의뢰서 보유 던전 보상 등급 수익성 : B- 경험치 : S 난이도 : A+ 주요 드랍 아이템 망령의 보주(유일)(3T) * 반복 클리어 가능한 인스턴스 던전입니다. * [자경단 의뢰서]보유 시, [루미스 영지 기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음…… 입장 조건이 조금 까다롭지만, 20레벨 대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레벨업 코스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그런데 이미 30레벨이 넘은 레오를 왜 부른 거냐면……. 얘(자경단 의뢰서)가 없으면 난 여기 들어갈 수도 없거든. 흠, 흠. 그리고 뭐… 그간 고생했으니까, 오랜만에 버스도 겸사겸사 타 보는 거지? 지난 며칠 사이에 최대한 빨리 레벨업을 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이 생겨버렸거든. 띠링-! [플레이어 ‘레오’와 파티를 결성하였습니다.] [현재 파티 인원 : 2] [파티 리더 : 데이브] └ 와 ㅋㅋ 방장 양심 없는 거 보소 ㅋㅋㅋ └ 22레벨 따리가 지하수로 2인 파팈ㅋㅋ └ 심지어 버스 타려고 우리 레오 끌고온 거 봐ㅠㅠ 어허. 조용, 조용! 그래도 양심 있게, 영지 기여도는 레오한테 몰아주잖아? └ ㅅㅂ └ 그거야 방장이 자경단 의뢰서 따오기가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님? └ 앜ㅋㅋ 우리 방장 팩트로 너무 때리지 말라고ㅠㅠ └ 팩트에 가장 약한 남자……. 쉬벌, 할 말이 없네. 사실 ‘영지 기여도’는 당장 나한텐 별로 필요 없는 거거든. 어디 쓰는 거냐고? 이 라이카 세계 안에서 출세(?)하고 싶을 때나 필요한 거다. 대충 명성 스탯의 하위호환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기에 성좌들의 미션을 통해 명성을 야금야금 벌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필요 없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망령의 지하수로’ 던전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슬슬 성좌 한 놈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띠링-! [‘엘프조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님들아, 오늘 던전 데이트 콘텐츠 한다던데, 진짜임? 예지력 상승 지렸고. [‘데이브’님에 의해 성좌 ‘엘프조아’님의 채팅이 제한되었습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 └ 엘프좌ㅋㅋ 오자마자 커엇ㅋㅋㅋ └ 그래도 방장 착하넼ㅋㅋ 지난번에도 그렇고 채팅 밴만 때림ㅋㅋ └ 방장도 사실은 엘프좌가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 거야ㅠ 성좌들의 헛소리를 감상하며 던전 입장을 확정하자. 잠시 후, 예의 익숙한 현기증과 함께 우리는 던전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띠링-! [‘망령의 지하수로 입구’ 필드에 입장하였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달려볼까? “레오야.” “예, 형님.” “목표는 5일이다.” “예? 그게 무슨…….” 뭐긴 뭐야, 졸업이지. 돈도 안 되는 수로, 5일 이상 돌 생각 없거든? “여기 졸업이 몇 레벨인데요, 형님?” “당연히 30이지.” “네……? 5일 안에 30을 찍겠다고요?” 너만 있으면 충분하단다, 아우야. “그런데 전 이미 32니까 졸업한 거…….” 시끄럽고. └ 와;;; 대이브 인성 빻은 거 보소;; └ 레오야…… 대체 방장이랑 왜 같이 다니는 거니;; 형님에겐 다 생각이 있단다, 레오야. 이 형님, 믿지? * * * 충격적인 길드 레이드의 여파 덕분에, 아이기스 길드는 일주일간 사실상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길드원 관리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다른 방법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었다. 길드의 핵심 인력 중 5할에 가까운 인원이 중상 이상의 피해를 입었으니……. 사실상 일주일이라는 정비 기간도 최소한으로 잡은 수준이었던 거다. “이번엔 나도 진짜 뒤지는 줄 알았다니까.” “쨌든, 고생했다 브로.”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일단 하루를 푹 쉰 경준은……. 멘탈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 날, 오랜만에 친구 하나를 만나는 중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좋아하는 친구 중 하나인, 이정민이었다. “그나저나 넌 별일 없지?” “뭐, 나야 별일 있겠냐. 너네처럼 게이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경준은, 친구를 만날 때가 항상 마음이 가장 편했다. 가족과는 또 다른 부분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의 가장 오랜 친구들에 한정된 얘기였지만 말이다. “너네? 아하. 건율이도 이제 게이트 들어간댔지.” “그치.” 그런 의미에서 한 놈이 더 이 자리에 나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식 얼굴도 빨리 한 번 봐야 하는데.” “이건율 진짜 겁나 비싸게 굴어.” “비싸?” “어, 무슨 자기 평일에는 시간 내기 어렵다면서 무조건 주말에 봐야 한다고 그러더라니까?” 사실 가장 친했던 네 명의 무리 안에서도, 굳이 따지자면 건율과 경준 두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경준과 건율은 여러모로 잘 맞는 친구였던 것이다. 때문에 경준은, 건율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어차피 곧 볼 수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건율과 관련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난 솔직히 너보다 그 자식이 더 걱정되긴 해.” “왜? 아직은 어차피 시작의 섬 아냐?” “응, 아니야.” “엥?” 그런데 재미있는 건……. 건율과 관련된 근황을 들으면 들을수록,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놀람과 호기심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아니. 건율의 근황 이야기들을 들으며 경준이 느낀 건… 놀람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감정들이었다. “그 자식, 고작 2주 만에 20레벨 찍었더라고.” “뭐…라고?” 과장이나 왜곡이 조금 섞였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달늑 솔플? 히든 던전도 찾았다고?” “어. 본인 말로는 그렇대. 미친놈이라니까 진짜?” “…….”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건지. 이번 주말에 만나면 진짜 조져 봐야 돼.” 사실 경준은 건율이 헌터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뭐라도 도움을 줄만 한 게 없을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정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본래 생각했던 고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수준이었다. 경준이 생각했던 고민들은 대부분, 게이트에 처음 발을 디딘 뉴비 헌터를 기준으로 생각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시작의 섬을 졸업한 플레이어에게는 필요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시작의 섬 졸업하는데… 얼마가 걸렸더라? 100일은 넘었던 것 같지 아마?’ 너무 오래전이긴 하지만, 자신의 초보 헌터 시절을 생각하면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엄청난 격차. 물론 경준이 게이트에 적응하던 초창기는,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던 시기였지만 말이다. ‘뭐… 게이트에 대한 정보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인프라가 전혀 적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건율의 플레이어로서 재능은……. 심심찮게 재능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자신과도,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그래서 경준은 친구와의 만남이 더욱 기대되었다. 사실 경준은 헌터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남자였다. 4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아무래도 못 본 사이에 버스 기사님 역량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을 바로 이럴 때 쓰는 건가? 아니. 이건 그 수준도 아득히 넘어버린 것 같은걸? [파티원 ‘레오’가, ‘고통의 망령(Ghost of Pain)’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티원 ‘레오’가, ‘고통의 망령(Ghost of Pain)’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파티원 ‘레오’가, ‘고통의 망령(Ghost of Pain)’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후략…… 아무리 여기가 20레벨대 플레이어들의 사냥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등장하는 망령들의 레벨은 30이 넘는다. 다만 입장 가능 인원이 넉넉히 잡혀 있어서, 레벨 업을 목적으로 하는 20레벨대 파티에게 선호되는 것일 뿐. 그런데 지금 보면, 레오는 거의 일검에 망령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심지어 물리 피해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는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들임에도 말이다. “그거야 다 형님 덕분이죠.” 또 뭔데? “형님 덕에 검에 마력을 담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게 왜 내 덕……? “게다가 형님께서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덕에, 질풍검사 전직도 성공했잖아요?” 어, 그… 그건 따지고 보면 맞기는 한데. 그렇다 해도 표현이 너무 부담스럽다. 남사스럽다고 해야 하려나. “그 정도까지 해주셨는데 이런 허약한 놈들 하나 쓱싹 못 하면,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아니, 히든 클래스 하나 알려줬다고 갑자기 이렇게 성장해 버리는 게 쉬운 일이면……. 취준 용사 이건율은 이미 마왕을 열 번도 넘게 잡지 않았을까? 뭐, 왠지는 몰라도 취준 용사 이건율과 쌀먹 용사 데이브의 재능 차이부터가 사실 꽤 크긴 한데……. 어쨌든. “…….” 수많은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들었다면 비틱 타도를 외쳤을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레오를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그 꼴값. 아니… 얼굴값 한다의 표본 같은 건가? └ 어허, 버스 승객 주제에 어디서 그런 불경한 생각을! └ 아닠ㅋㅋ 레오가 뭐 얼굴로 비틱질 한 것도 아닌데 이게 왜 얼굴값임ㅋㅋㅋ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아쇼. └ 우리 레오 견제 멈춰!! └ 어차피 방장이랑 레오는 비교군이 다르다니까?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사실, 뭐.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다. 버스 기사가 일만 잘하면 되지, 인성까지 훌륭할 필요는 없잖아? └ 정보) 방장보다 레오의 인성이 999999배 정도 훌륭하다. └ ㅇㄱㄹㅇㅂㅂㅂㄱ 그러니까 지금 난 아주 흡족했다. 이대로라면 조금 빡세게 잡은 레벨업 일정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던전의 진행도가 쌓이는 속도를 보니……. [파티원 ‘레오’가, ‘고통의 망령(Ghost of Pain)’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망령의 지하수로’던전의 진행도를 80% 달성하였습니다.] 이제 슬슬 나도 밥값 할 준비를 해야겠는걸? * * * 자이드는 애꿎은 나무 밑동을 걷어찼다. 퍼억- 단단한 군화 끝에 짓이겨진 나무껍질이 사방으로 튀었다. “빌어먹을, 다 잡은 물고기를……!” 평소의 여유로운 웃음기는 온데간데없고, 일그러진 미간 사이로 살벌한 마력이 일렁였다. 옆에 서 있던 세라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사실 세라는, 지금 서 있기도 버거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였다. 검희가 등장과 함께 쏟아 낸 살기를 오롯이 받아낸 건, 공격 마법을 시전 중이던 그녀였으니까. 랭커 중에서도 최상위 랭커. 그러니까 칠 년 가까운 지난 헌터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던 그런 수준의 존재. 그런 존재와 마주한 대가는 생각보다 커다란 것이었다. 가면 안쪽에서 요요하게 빛나는 검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세라는 심연을 들여다 본 듯한 공포를 느꼈을 정도였다. ‘어쩌면 살아남은 게… 기적인지도.’ 그때 느꼈던 공포가 떠오르자, 어깻죽지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검희의 검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 아마 조금만 위치가 낮았으면, 팔 하나를 잃었을지도 몰랐다. 세라는 쓰라린 환부에 손을 올린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자조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처음부터 고유 장비를 가진 뉴비가 평범한 플레이어일 거라 생각했으면 안 됐는데……. 우리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자이드.” 세라의 말에, 자이드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검희가 마침 그 타이밍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그럼 지금쯤 밤의 추적자는 내 손에 들어와 있지 않았을까?” “…….” 세라는 자이드의 표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신처럼 직접적으로 검희의 살기를 마주했었다면…… 이따위 생각은 절대로 떠올리지 못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자이드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그와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이드의 이 표정이 어떨 때 나타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지독한 탐욕에 사로잡혔을 때였다. 그래서 세라는 걱정되었다. 탐욕에 사로잡힌 자이드는 사리분별을 잘 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세라의 예상은 정확했다. “자이드. 설마 포기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검희가 엄포를 놨어도, 결국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을걸.”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아직 데이브라는 플레이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 “그게 우리가 될 필요는 없잖아?” 세라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자이드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표정만큼은 방금 전보다 차분해져 있었다. “물론 바르가에서 저렇게까지 공표한 이상, 이제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건 무리야. 더스크 포트에서도 제지가 들어올 테니까.” “그러면?” 평정을 찾은 자이드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지만 ‘먼지’들이 움직이는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잖아?” “으음.” 자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더스크 포트의 하부 조직에는 소속을 특정할 수 없는 저레벨 스캐빈져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돈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물불 가리지 않는 부류였고, 무엇보다 ‘데이브’와 같은 저레벨 구역에서 활동하기에 최적화된 인력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직접 움직일 필요도 없었어. 40레벨 정도만 되도 그런 뉴비 플레이어 손목 정도는 손쉽게 비틀어버릴 테니까.” 결과론이다. 직접 움직여 깔끔하게 고유장비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게, 당시로써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세라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지.” 자이드의 탐욕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게 방금 느껴졌으니까. “후우.” 생각을 정리한 자이드의 두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검희 같은 거물까지 엮여버리자, 아이러니하게도 고유장비에 대한 집착이 더욱 커져 버린 그였다. “아무튼……. 무리수는 두지 말자, 자이드.” 세라의 마지막 충고에, 자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탐욕에 눈이 멀어있어도, 다행히 마지막 이성의 끈 한 줄기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알겠어. 나도 당장 움직일 생각은 아냐. 아무리 먼지들을 고용한다 하더라도, 일단 잠잠해져야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이드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40레벨대의 스캐빈져 정도로는, 데이브를 PK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 * 망령의 지하수로는 총 다섯 단계의 페이즈로 나뉘는 던전이다. 뭐, 페이즈라 해 봐야 그렇게 거창한 개념은 아니었고, 전투의 진행 방식이 좀 달라진다고 생각하면 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행도 80퍼센트를 달성했을 때 시작되는 마지막 페이즈. 이 5페이즈 만큼은, 다른 페이즈들과 달리 좀 특별했다. 아니, 특별하게 ‘만들’ 방법이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했다. “형님, 찾았습니다!” 레오의 검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전방으로 검풍을 뿜어내자, 달려들던 ‘고통의 망령’들이 힘없이 쓰러지며 소멸했다. 쐐애액-! 이어서 까맣던 어둠 속에 하나의 통로가 드러났고, 그 안에서 음울하고 기괴한 소리가 오소소 쏟아져 나왔다. 으워어우우- 스하아아- 수로 너머에서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수십 마리의 정예 몬스터, ‘혼돈의 망령’들. 이 녀석들의 등장이 곧 5페이즈의 시작이었다. 스릉- 건율은 월광검을 고쳐 쥐며 수로 바닥에 흐르는 오수의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던전의 마지막 기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지하수로 사방에 배치된 네 개의 ‘정화조 밸브’였다. “밸브 찾았다, 레오야.” “저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약 우리가 일반적인 공략 방식을 지향했다면, 이 밸브를 잠궈 독기의 생성을 막는 것이 가장 우선해야 할 행동일 것이었다. 저 혼돈의 망령들은 정화조 너머에서 새어 들어오는 독극물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기형적인 망령들이었고. 때문에 여기서 독극물이 많이 새어 나올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기믹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히든 기믹이 하나 더 존재했는데,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바로 그거였다. └ 방장, 설마 보스라도 소환하려는 거임? └ 이 ㅅㄲ 원래 평범하게 공략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ㅅㄲ임 ㅇㅇ 사실 이건 히든 기믹이라 하기도 민망하긴 하다. 시청 중인 성좌들이 다 알고 있는 것만 봐도, 꽤 알려진 기믹이 아닐까? “레오야, 중앙에서 나오는 놈들 다 무시하고 벽면에 붙은 밸브부터 부숴.” “예? 잠그는 게 아니라 부수라고요, 형님?” 음……. 얘는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히든 기믹이야. 거꾸로 돌리면 돼. 그럼 부서져.” “오오!” “보스 소환해볼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형님!” 갑자기 텐션 오른 표정으로 빠르게 몸을 날린 레오는, 곧장 전면에 보이는 벨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왜 저렇게 신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히든 기믹이 발동되면 던전 난이도가 증가한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어쩌면 이 자식은, 던전에서 고생하는 걸 즐기는 변태일지도 모른다. └ ㅈㄹㄴ └ 그건 자기소개 아닐까 방장아. 저야 다 이유가 있으니 하는 겁니다만……. 키에에엑-! 레오의 포지션을 확인한 나는, 다가오는 혼돈의 망령들을 적당히 막으며 방해했다. 그리고……. 쩌어엉-! 레오가 첫 번째 벨브를 역방향으로 꺾어버리자, 육중한 금속의 파열음과 함께 시커먼 오수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경고! 정화 시스템이 파괴되었습니다.] [지하수로의 오염 농도가 임계치를 돌파합니다!] [‘혼돈의 망령’이 가진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에도,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헤벌쭉 웃어 보인 뒤 다음 밸브를 향해 거침없이 튀어 나가는 레오. “…….” 얜 근데 걱정도 안 되나? 보스가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과감한 거지? └ ;;지가 시켰으면서;;; └ 근데 방장, 부패한 수로의 군주 잡을 수 있음? └ 방장이랑 레오면 잡긴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솔직히 왜 소환하는지 잘 모르겠긴 해; └ 맞음. 잡는데 ㅈㄴ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 시간에 차라리 던전 한 바퀴 더 도는 게 맞지 않나? └ ㅇㅇ딱히 맛있는 템 떨구는 것도 없는데. └ 영지 기여도 올릴 생각도 아니면서 대체 왜……? 어찌 됐든 성좌들이 궁시렁거리는 사이, 우리는 기믹의 조건을 거의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파티인데도 제법 손발이 잘 맞는 느낌. └ 자, 드가자- 그리고 레오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지막 정화조의 밸브를 거침없이 돌린 순간. 쾅-! 모든 밸브가 동시다발적으로 뻥 하고 터져 나가며, 수로 바닥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4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쏟아져 나오던 정예 망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의 오수 속으로 녹아내린다. 아니,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흡수’되고 있었다. [히든 조건: ‘수로의 타락한 영혼’이 달성되었습니다!] [페이즈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최종 페이즈가 변경됩니다: ‘몬스터 웨이브’ → ‘군주의 강림’] 쿠구궁! 수로 중앙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산더미 같은 고형물들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썩은 고기와 망령들의 잔해, 그리고 수백 년간 쌓인 오수가 뒤섞여 거대한 육신을 이뤄갔다. [던전 보스: 부패한 수로의 군주 (Lv.50)가 출현하였습니다!] [※주의: 현재 플레이어의 권장 레벨을 아득히 초과한 존재입니다!] 시커먼 마력의 압박감이 수로 전체를 짓눌렀고, 그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수로 전체를 가득 메웠다. 크롸아아아-! 무려 50레벨. 게다가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인스턴스 던전의 히든 보스 몬스터.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내 레벨대로 상대조차 불가능한,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존재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렇게 보니까 방장…… 잡을 수 있는 거 맞냐? └ 우욱 ㅅㅂ 쥰내 더럽게 생겼네 ㄹㅇ;; 그런데 보스 등장 연출이 진행되는 사이, 우리 성좌놈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검희와의 거래 때 스트리밍을 껐던 이후로, 삐져 있는 녀석들이 좀 있는 것 같았다. └ 근데 방장 ㅅㄲ 요즘 왜 이렇게 불친절함? └ ㄹㅇㅋㅋ 이제 뭐 하려는 건지도 안 알려줌; └ 소통 좀 합시다, 방장님아. 그렇다면 고객 만족을 위해 힘쓰는 게, 서비스직인 스트리머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소통이요? 그래서 잠시 여유가 생긴 김에, 성좌들을 놀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저 오물 돼지 녀석이 망령을 전부 다 흡수할 때까진, 무적 상태라서 딱히 할 게 없기도 하다. └ ㅇㅇ 사냥만 보는 건 아무래도 지루하다고. └ 도파민을 달라. 사실 성좌들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약간의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검희와의 예기치 않은 합방(?)덕에 실시간 스트리밍 시청자들은 무려 네 자릿수로 늘어났는데……. [ON Air : ☺ 1071] 어떤 재미를 선사해야 이 인원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수로에 들어온 이후 야금야금 빠져나가는 시청자들도 괜히 신경 쓰였고 말이지. └ 어떻게 해야 맛있게 수금할지, 그걸 고민하는 건 아니고?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놈들이란……. -에이, 섭한 말씀을. 저한테 항상 최우선 순위는…… 성좌님들 도파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뭐, 성좌놈 말도 틀리진 않다. 결국 성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가장 큰 이유는, 수금을 하기 위함이니까.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비상하게 돌아간 내 머리는, 재밌는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그럼 성좌님들. └ ㅇㅇ? └ 뭐 괜찮은 거 생각남? 그런데 그걸 위해선, 일단 빌드업이 살짝 필요하다. -우리, 오랜만에 내기나 하나 할까요? 빌드업을 위한 내 첫 마디에, 예상했던 대로 성좌놈들이 맹렬히 비난을 퍼붓는다. └ 우우우- └ 내 이럴 줄 알았다, 방장 ㅅㅂㅋㅋ └ 내기를 빙자해서 불쌍한 청자들 돈 뜯어내려고……. └ 관리자님! 여깁니다!! 여기 사기꾼 스트리머 좀 잡아가세요!! 하지만 여기까지도 내 예상 범주 안이라는 말씀. 후후. 뭐, 사실 이대로 내기 컨텐츠를 진행해 버려도 몇몇 형님들은 친히 돈을 뜯겨 주실 거다. 어차피 내가 성좌들에게 던질 만한 내기는, 항상 알고도 당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들이 함께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 돈을 뜯겨도 재밌게(?) 뜯겨야, 성좌 형님들과 윈-윈하는 거 아니겠냔 말이지. -어허,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형님들? 그러니까 여기부터가 내 본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띠링-! [‘스트리머 데이브’가 실시간 배팅을 생성했습니다!] └ 오호라. └ 새로운 템플릿임?ㅋㅋ └ 갑자기 군침이 싹 도는걸? 넘버링 장비 획득 때 스트리밍 등급이 브론즈로 오르면서 생겼던…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능. [스트리머가 배팅 조건을 생성합니다.] 언제고 한번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 기능을, 개시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 오 ㅋㅋ 내기보단 확실히 이게 재밌긴 해 ㅋㅋ └ 근데 조건 뭐 걸려고? └ 당연히 보스 처치 성공 실패 아닐까? 에이, 형님들. 그런 노잼 조건이야말로 감 다 뒤진 거 아닐까요? └ 그럼 뭐 걸려고?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조건 : 보스 처치 소요 시간 (3분 기준 Up/Down)] └ ㅁㅊㅋㅋㅋ └ 예……? 3분이요? └ 대체 이건 또 무슨 초식임?;; 만약 같은 조건으로 내기를 걸었으면, 성좌들에게 사실상 선택지는 없다. 나는 당연히(?) 3분 이내 처치에 걸 테니, 성좌들의 선택지는 처치 불가뿐인 것이다. 하지만 배팅 기능을 활용하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현재 배당률: Up(3분 이상) 1.079배 / Down(3분 미만) 13.55배] 이렇게 나뿐만 아니라 일부 성좌들도, 도파민 터지는 역배(?)에 배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ㅋㅋㅋㅋㅋ 배당률 실화? └ 아니 근데 1.079면 정배 배당률도 괜찮은데?ㅋㅋ └ 대체 어떤 정신나간 놈이 3분 Down에 역배를 쳐 건 거임?ㅋㅋㅋ 그런데 잠깐만. [현재 총 배당금 : 1735LP] 10초만에 배당금 1700 모인 거 실화인가……? ‘미친.’ 저 눈먼 돈을 보고 있자니, 군침이 줄줄 흐른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도 빨리 배팅하고 싶다는 뜻이다. [현재 배당률: Up(3분 이상) 1.067배 / Down(3분 미만) 15.90배] 그러니까 명분이 필요하단 말인데……. 슬슬 말 나올 때 되지 않았나? └ 그런데 ㅅㅂ 방장놈아ㅋㅋ 아무리 역배 배당으로 도파민 주고 싶었어도, 3분은 에바지 ㅅㅂ 그겁니다 형님! └ ㅇㅇ 역배에도 어느 정도 돈이 걸릴 법한 조건을 써야지 ㅅㅍ;; 그래야 더 재밌는 거 아니겠음? └ 조건 한 10분 정도로 바꾸는 건 어떰? └ 좋은 듯? 그럼 나도 역배 걸어봄. └ 역배 건다는 놈 특 : 정배에 올인했음ㅇㅇ. 만약 내가 처음부터 역배에 배팅했으면, 성좌놈들은 분명 의심부터 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적당히 간을 본 뒤, 이런 느낌으로 설계를 시작한다면? -이상하다. 나 3분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 ??? └ 방장 이 ㅅㄲ 제정신인가? └ 그럼 방장 너도 돈 걸어보던가ㅋㅋ └ ㄹㅇㅋㅋㅋㅋㅋ 띠링-! 에잇. 못 참겠다! [‘스트리머 데이브’가 Down(3분 미만) 조건에 1000LP를 배팅했습니다.] 자, 이제 어쩔 건데? └ 이, 이게 뭐지……? └ 이거…… ㅈㅉㅇㅇ? 내가 1000LP를 역배에 거는 바람에, 순식간에 역배의 배당률이 수직 하강했다. [현재 배당률: Up(3분 이상) 1.55배 / Down(3분 미만) 2.80배] 하지만 걱정 없다. 이제부터 내 1000LP를 조각조각 찢어먹기 위해, 승냥이들이 들러붙기 시작할 테니까. └ 방장아…… 니가 드디어 우리한테 뜯어간 돈 환원도 하는구나. └ 이거 방장이 역배에 건 거 보니까 뭐 있는 거 같은데?ㅇㅇ └ 난 역배 간다. └ (정배갔음.) └ 아니 ㅅㅂ 진짜 역배 간다고 ㅋㅋㅋ └ 투명하다 투명해 ㅋㅋ 귀여운 성좌형님들의 채팅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도무지 주체가 되질 않는다. └ 여러분, 언제까지 방장한테 당할 겁니까? 돈 벌고 싶으면 역배 갑시다! └ 근데 진짜 방장 같은 자린고비가 1000LP를 기부할 리 없잖음;; └ ㄹㅇ언제까지 속을 건데? └ 넌 역배에 검? └ 난 한 번만 더 속아보기로 함 ㅎㅎ 생각보다도 더 열화와 같은 성원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현재 배당률: Up(3분 이상) 1.11배 / Down(3분 미만) 9.57배] [현재 총 배당금 : 14799 LP] └ 아니 ㅅㅂ역배 간다는 놈 대체 죄다 어디 간 거임? └ 아ㅋㅋㅋ 공짜 수익률 11%면 달달하다고 ㅋㅋㅋ 성좌님들 덕에 거의 활짝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레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흐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행복해진 사이, 드디어 우리 보스님도 준비가 끝난 듯했다. 크롸아아아-! 가련한 먹잇감들이로구나-! 그래서 전투 자세를 잡는 레오를 향해, 나는 아주 간단한 공략법을 일러주었다. “레오야.” “예, 형님.” “일단 열심히 싸우다가 내가 신호 주면……. 딴짓거리 하지 말고 보스 오른쪽 겨드랑이만 찔러. 오케이?” “옙!”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 믿음직스런 파티원 레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배팅이 종료됩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방긋 웃고 있었는지, 몇몇 성좌들이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 근데 3분 이거…… 진짜 뭐 있는 거 아니겠지? └ 걱정 마셈 ㅇㅇ 이건 그러니까, 수익률 11%짜리 지수 추종 펀드 같은 거임. └ 이를테면 ‘안전자산’이랄까……. └ 킹전자산 ㄷㄷㄷ └ 플래그 멈춰! 형님들. 그런데 그거 아시죠? 제 방에서는 원래… 안전자산이 가장 위험한 거? 4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4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스캐빈져와의 조우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심신의 안정(?)을 찾았던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사실 레오에게 연락하는 게 아니었다. “야, 키엘아.” [함부로 키엘 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주인 놈아.] “그 이름 내가 지은 건데?” [그래도 싫다.] 내가 가장 먼저 했던 건……. 어쩌면 현재 내 모든 전력을 합한 것보다 강력한, ‘비밀병기’ 녀석을 회유하는 일이었다. 내 부족한 마나로도 비전투 상황에서 소환해두는 정도는, 몇 분 정도 가능했으니 말이다. “자꾸 그러면 소환 안 해준다?” [이익… 비겁한 주인 놈이!] “피 같은 마력 써서 바깥 공기 마시게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짜식이.” 그런데 어차피 마력 부족해서, 전투 땐 5초도 못 쓰는 거 아니냐고? 맞다. 그렇다고 스킬 한 방 갈길 수 있는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진짜 쓸모없는 거 아니냐고? 그것도 맞다. 후우. 그렇지만……. 그냥 창고에 짱박아 두기에도 너무 아쉬운 스펙을 가진 녀석인 게 문제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이 녀석의 스펙 하나만큼은 ‘진짜’였으니까. 히든 클래스를 얻어놓고도 연성 조금 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논 클래스 플레이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플레이하긴 억울하다는 말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이렇게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었으니, 나는 뭐라도 방법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당장 DPS만 해도 내 수십 배는 나올 텐데……. 스킬이라도 한 방 꽂으면 100배도 나올 거고.’ 물론 이 녀석이 내 공격력의 수십 배 백 배가 될 정도의 스펙을 가진 건 아니지만, 라이카의 스텟 수치라는 건 항상 상대적으로 작용한다. 공격하는 상대의 체급 대비 내 공격력이 낮다면 DPS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반대로 상대 체급 대비 높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차이에 비례해 DPS가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말씀.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 용가리 녀석과 내 DPS는 과장 없이 수십 배가 차이 날 거다. 그래서 난, 무려 500LP라는 거금을 들여 악세사리 하나를 장만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이 녀석을 써먹어야 한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말이다. 〓〓〓〓〓〓〓〓〓〓〓〓〓〓 어비스 펄 암렛 분류 : 장비 – 목걸이 레벨 제한 : 18 등급 : 영웅 티어 : 2T 내구도 : 80 / 80 주 능력치 최대 마력 +300 옵션 마력 효율(Efficiency) +12% 최대 마력 +50 깊은 심해의 마력을 응축하여 스스로 발광하는 신비로운 장신구입니다. 착용자의 주변에 미세한 푸른 입자를 흩뿌리는 시각적 효과가 있어, 루미스의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 솔직히 이 예쁜 쓰레기를 내가 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마력 부족을 극단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제외한다면, 아무런 전투 능력도 달려 있지 않은 장비였으니까. 무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인데 말이다. ‘하다못해 공격력이 3이라도 달려 있었으면…….’ 물론 그랬으면 500LP에도 살 수 없는 아이템이었겠지만. 어쨌든 난 이 목걸이를 통해 키엘을 활용할 최소한의 스펙을 만들 수 있었다. [현재 마력 : 257 / 440] 마나를 최대치까지 채워 둔 상태에서 키엘을 소환하면, 드래곤 피어 한 방은 충분히 갈길 수 있는 수준의 마력을 확보한 것이다. 물론 스킬 쓰자마자 마력이 부족해서 금방 역소환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밥값 좀 해 보자, 키엘아.” [키엘님은 밥 같은 거 얻어먹은 적 없도다.] “너, 밥도 먹냐?” [배는 안 고파도 밥은 먹는 편이지.] “…….” 어쨌든 온갖 생쇼를 한 끝에, 상전 소환수 놈과의 협상이 극적인 타결에 도달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했냐고? [이… 이게 무엇이지?] “일단 먹어보도록.” 별 짓거리를 다 해본 끝에, 정답을 결국 찾아냈다는 뜻이다. [보석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음식이라니.] 드래곤은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 “후후. 아주 귀한 거다. 특별히 준비해 봤다고.” 그리고 먹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한번 맛볼 가치는 있겠군.] 그러니까 나의 냉철한 분석과 통찰을 거쳐 선택된… 바로 이 비장의 무기. 이걸 맛본다면 아무리 건방진 소환수 놈이라 하더라도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을 거다. 아그작-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이… 이건! 이런 고귀함마저 느껴지는 달콤함이라니……!]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황금빛 동공까지 덜덜 떨렸거든. “…….” 솔직히 말하면 통한 게 좀 신기하긴 한데… 결과가 좋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 이건, 네 일당이다.” [이, 일당? 그게 무엇이지?] “나를 도와 전투에 참전한 날, 딱 하나씩 줄 수 있는 대가라는 뜻이지.” 물론 처음에는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가… 감히! 고귀한 이 몸을 이런 식으로 매수하려 들다니……!] 드래곤식 나이 기준으로 유딩쯤 되는 녀석이었던 걸까? 이 녀석은 달콤한 군것질에 사족을 쓰지 못했다. “싫으면 마시던가.” [그…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 주인 놈아.] 후후후. 어딜 유딩 드래곤 주제에 닳고 닳은 쌀숭이를 이겨 먹으려고 해? 그나저나……. 진짜 맛있나 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오물오물거리는 모습이, 파인다이닝에 처음 가본 이시율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거든. [크릉……. 미각을 자극하는 이 말도 안 되는 감각은 대체 뭐란 말인가?] 뭐긴. 설탕이다, 이 자식아. [마치 보석 세공사가 정교하게 깎아낸 마력석을 씹는 것 같구나.] 얼씨구? 아그작- [한낱 음식이 이토록 날카롭고도 영롱한 파열음을 낼 수 있다니……!] “…….” [이 붉은 구체(딸기임) 속에 응축된 생명력의 정수를 보아라. 겉은 드래곤의 비늘처럼 단단한데, 속은 화산의 용암처럼 뜨겁고 달콤한 즙이 터져 나오는구나.] 단것을 먹고 입이 터져버린 유딩 드래곤은, 한참 그것을 맛보더니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리셨다. [이건 더 이상 간식이 아니다.] 그럼 뭔데? [으음, 이건 용족의 미학에 부합하는 연금술의 정수!] 그렇게 우리 집 앞 편의점에서 파는 ‘마약 탕후루’에 빠져버린 드래곤은, 결국 내게 충성도를 헌납하고 말았다. 띠링-! [소환수 ‘키엘’의 충성도가 5만큼 증가하였습니다.] [현재 충성도 : 18]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무려 1000LP를 당당하게 배팅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당장 한 막대 더 대령해라, 주인 놈아!] “일당이라니까?” [이이익……!] “일해야 준다고?” * * * 부패한 수로의 군주. 이 녀석의 기믹은 사실 단순한 편이다. 몸체가 90% 이하로 손상됐을 때 특정 패턴의 공격을 해내면 아주 잠깐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데……. 그 시간 동안 ‘심핵’이라는 약점이 드러나는 구조였으니까. 하지만 그 약점을 공략하기란 쉽지 않았다. └ 설마 방장, 보스 기믹 안다고 까불었던 거임?ㅋㅋ 문제는 핵을 보호하고 있는 두터운 오물 보호막. 막대한 방어력을 갖고 있는 그걸 뚫어내지 못한다면, 공격 자체가 심핵에 닿을 수도 없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 어딜 20~30레벨따리들이 심핵을 공략하려고 ㅋㅋ └ ㄹㅇㅋㅋ 최소 2차전직한 60레벨 극딜러는 있어야 쉴드 뚫릴까 말깐데 ㅋㅋ 심지어 그로기 페이즈 동안 이놈은 흩어진 오물을 끌어모아 생명력을 회복하기 때문에…….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바로 이 기믹. └ 이제 피 다 차겠네 ㅋㅋ └ 수고요~ 하지만 성좌들이 말이 많아진 건 뭐다? 불안하다는 뜻 되시겠다. 그리고 난, 이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해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레오야, 지금!” “옙, 형님!” 내 신호를 받은 레오의 검이 보스의 겨드랑이 안쪽을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끄워어어어-! 고통에 찬 수로군주의 괴성과 함께, 그로기 페이즈에 진입하였다. [‘부패한 수로의 군주’ 보스가 그로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부패한 수로의 군주’의 ‘부패한 심핵’이 오물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쿠와어어어-! 그러니 이제, 우리 소환수님이 밥값을 할 차례였다. -야, 준비됐지? [제기랄. 저런 하찮고 저급한 녀석이 내 상대라니……!] -탕후루 두 막대. [……!] -오늘은 첫날이니까, 특별히 보너스다. [맡겨만 줘라, 주인 놈아.] 그렇게 난, 마약 탕후루의 은총 덕에 드디어 괘씸한 소환수놈을 처음으로 전투에 소환할 수 있었고. 우우웅-! [소환수, ‘키엘’이 전장에 소환되었습니다.] 녀석은 약속됐던 대로, 등장하자마자 드래곤 피어를 냅다 갈겨버렸다. [소환수, ‘키엘’이, 고유능력 ‘드래곤 피어’를 발동합니다.] 고오오오- 수로 전체를 뒤흔드는 압도적인 용음(龍吟).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내 온몸에서 쭉 하고 빨려 나가는 마력. “혀, 형님?!” 거대한 살기를 느낀 레오가 순간적으로 날 돌아보았고. 콰아아아-!! 그 순간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하나의 칼날이 되어 보스의 심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쾅-! [‘부패한 수로의 군주’ 보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부패한 심핵’의 보호막에 균열이 생깁니다!] [‘부패한 심핵’의 보호막에 균열이…….] 쩌저적-! 그러니까 이건, 내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더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이 정도라고?’ 콰과과과광-!!! └ 그… 도마뱀이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 거임? 그런데 나도 멀쩡하진 못했다. 순간적으로 마력이 거의 다 빠져나간 탓인지 온몸에 현기증이 일며 힘이 쭉 빠져나갔으니까. [보호막이 파괴되었습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소환수 ‘키엘’의 소환이 해제됩니다.] 위이잉-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기는 나 뿐 아니라 든든한 파티원 레오도 있었고. 녀석은 내가 딱히 거들지 않아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스마트한 파티원이었으니까. 쐐애액-! 사실상 보호막도 사라진 채 너덜너덜해진 심핵 정도는, 레오가 검 끝으로 톡 건드리면 터질 만큼 예쁘게 요리되어 있었거든. [파티원 ‘레오’가, ‘부패한 심핵’을 성공적으로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핵이 부서졌다는 건 보스가 처치됐다는 뜻. [던전의 보스, ‘부패한 수로의 군주’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망령의 지하수로’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그리고 배팅의 결과가 결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띠링-! [배팅 결과: ‘Down’ 승리!] [잠시 후, 배당의 결과가 정산됩니다.] └ 이… 이게…… 뭐지? 시스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퍼진 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기 때문인지, 성좌들의 채팅까지 전부 얼어붙은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 크아아아악! 정신을 차린 성좌들의, 폭풍과도 같은 채팅 메시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 정배야, 정신이 들어? 정배야, 정신이 들어? 정배야, 정신이 들어? └ 대이브 이 사기꾼ㅅㄲ! └ 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 └ 꺼어어억-! └ 아니 대체 어케 한 거임? └ 용가리 새끼 왜 갑자기 데이브놈 말 듣는 건데? 하지만 그 시끄러운 메시지들 안에서도,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있었으니……. 띠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랑스러운 정산 메시지였다. [9,725LP를 수령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캬.” 그래, 이거거든.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달콤함 아니겠어? └ 아ㅠㅠ 역배 먹고도 ㅈㄴ아깝네 ㅅㅂ;; └ ??? └ 10LP가 아니라 1000LP를 박았어야 했는데ㅠㅠㅠ └ 후후, 난 1000LP박았다. └ ㄹㅇ? └ 정배에……. └ ㅠㅠㅠㅠㅠㅠㅠ 10% 먹으려다가 전부를 날려버린 어리석은 성좌 놈들을 보니, 기분이 한결 더 산뜻해졌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형님들. 분명 3분 가능하다고……. 난 한 번도 속인 적 없다? 다 늬들이 자초한 거야? └ 저… 저……! └ 저 새끼가 제일 악질임ㅅㅂ └ ㄹㅇㅋㅋ └ 마왕도 울고갈 빌런ㅅㄲ……. 그렇게 성좌들과 훈훈한 덕담을 나누고 있는데……. [주인 놈아, 일당이라는 거…… 혹시 언제 주는 거냐?] 머릿속에 우리 소환수님의 재촉이 들려왔다. -이따가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갑자기 5천 원이나 하는 편의점 탕후루의 가격이 떠오르며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리 내가 자린고비여도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어른이다. 게다가 지금은 탕후루 1+1 행사 기간이거든? 괜히 보너스 얘기까지 꺼낸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5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치트키(탕후루)의 힘을 빌어 필살기(키엘)를 써본 나는……. 이게 말 그대로 아무 때나 사용하면 안 되는 최후의 비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생각했을 때는 이론상 마나포션 쿨타임이 돌 때마다 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에 마력을 풀로 채워주는 최상급 마나포션의 비싼 가격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왜냐고? 이 괴물 같은 놈을 한 번 소환하고 나면, 최소 몇 분간은 온몸이 저릿저릿했거든. 키엘을 소환하고 나서 충분히 쉬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전투가 어려울 정도라는 뜻이었다. 아마 한 번에 소모되는 마력량도 그렇지만, 이 녀석과의 레벨 차이가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았다. 라이카의 세계에서 레벨이라는 건, 단순히 능력치의 차이 이상인 어떤 존재의 위격을 나타내는 수치거든. “…….” 그러니 레벨을 충분히 올리기 전까진, 키엘을 소환하는 건 어지간하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아야 할 것 같았다. ‘하긴, 20레벨 초반에 이런 걸 꺼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긴 하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 비싼 녀석이…… 비싼 값을 확실히 한다는 건 제대로 확인했으니 말이다. └ 방장, 1만 LP 맛있냐? 그럼 그럼, 벌써 키엘 제작비용 30%를 회수한 셈이라고? └ 배팅 또 언제 여냐 방장, 이젠 안 속는다……. 어허. 애초에 속인 적이 없다니까요? “후후.” 내기에 비해 배팅이 확실히 더 재밌었던 건지, 돈을 잃은 성좌 놈들도 빨리 한 번 더 하자고 아우성이다. 한 번 더 하면 벌 것 같지? └ 한번 봐준 거야 방장~ 예~ 그러시겠죠. └ ㅅㅂㅠㅠ 그런데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잃은 놈만 있는 건 아니다. [‘승부사 대장장이’님이 3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고맙다, 방장. 다음에도 부탁해? 닉값에 성공한 이런 친구도,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형님……! 감격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얼마 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절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제 배팅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시다간……. └ 알아, 알아, 방장. 그 정도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고. 예? 뭐를요……? └ 그러니까 접수 완료. 앞으로 충성할게. “…….” 이 대장장이라는 친구가 대체 뭘 이해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우리 성좌님들 덕에 돈도 두둑이 챙겼고……. “형님, 깔끔합니다!” “좋았고. 정비 빠르게 하고 바로 다음 가볼까?” 원래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레벨 업(진짜다)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좋죠!” 그렇게 레오와의 던전 데이트 첫날.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23레벨이 되었습니다.] [24레벨이 되었습니다.] 나는 무려 3레벨이 오른, 25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 * * 오전 10시. 상암동 HBC 사옥의 14층 대회의실. 정민은 배터리가 다 닳아가는 태블릿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뭉치 앞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벼락치기를 해서 그런지,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상태였다. ‘으… 딱 하루만 미리 시작할걸.’ 그가 한 벼락치기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오늘 회의 전까지 정민이 해야 했던 건, 바로 <헌터즈 스쿨>의 1차 지원자들에 대한 서류 검토 작업. 사실 일주일 전에는 시작했어야 하는 작업을 이틀 전에 시작했을 뿐이고, 그러니까 지금 정민의 컨디션에 한계가 온 건 오롯이 본인의 탓이었지만. ‘죽겠는걸 어떡하냐고.’ 그렇다고 피곤한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니,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뭐, 소득은 있었으니까.’ 탁-! 마지막 서류까지 깔끔하게 검토가 끝난 정민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이틀 연속 세 시간밖에 못 잔 끝에 결국 3천 명도 넘는 지원자들의 데이터를 전부 검토하는 데 성공했고. 그중에 흥미로운 참가자들도 꽤 많이 트래킹한 상태였다. 그래서 몸이 힘들지언정 마음은 가벼웠다. 아니, 과장 조금 보태면 오늘 회의가 기대될 수준이었다. 솔직히 정민은 지금, 지원자 퀄리티에 꽤 놀란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괴물들이 이렇게 많이 지원했을 줄이야.’ 국가 공인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부터 해외 용병 출신, 심지어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유니크 스킬 보유자들까지. HBC에서 역대급 예산을 태운다고 소문이 외부까지 돌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깐깐한 지원 조건이 걸린 만큼, 이렇게까지 많은 인원이 지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3일 뒤면 2차 지원자들의 지원서가 추가로 들어올 터. “음.” 정민은 뻑뻑한 눈을 껌벅이며, 무의식중에 달력을 곁눈질했다. 2차 지원 일정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친구 건율이 생각난 탓이었다. ‘이건율 이 자식은……. 진짜 지원할 수 있는 거 맞겠지?’ 왠지 될 것 같아서 뽐뿌를 넣어 놓기는 했지만. 솔직히 건율이 일정에 맞춰 30레벨을 찍을 수 있을지, 정민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20레벨을 말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찍은 것까지야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21~30레벨 구간은 훨씬 더 높은 허들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기한 내 30레벨에 세잎한다 치더라도, 걱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합격이야 30레벨 달성 기간을 어필해서 밀어붙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문제는 건율이 과연, 몇 회차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괜찮은 기회인 만큼…… 건율에게 최대한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초반에만 활약해 줘도, 친구 놈의 헌터 인생이 좀 더 쾌적해질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차 지원자 프로필을 전부 검토하고 나니, 건율의 첫 회차 생존도 불확실하게 느껴진 탓이다. 오늘 회의를 해 봐야 더 확실해지긴 하겠지만. 이대로라면 <헌터즈 스쿨3> 멘티들의 평균 레벨은, 최소 40레벨 이상에서 형성될 것 같았다. 그에 반에 건율의 레벨은 30을 넘길 수 없을 터. 30레벨과 40레벨 사이에는, 상당히 큰 격차가 존재한다. ‘뭐, 예선 광탈해서 들러리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지금쯤 어디선가 미친 듯이 사냥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애초에 포기하고 방바닥이나 긁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뻐근한 어깨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야, 이정민. 넌 옷 꼴이 그게 뭐냐?”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민은 상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 상석, ‘Main PD’ 명패가 놓인 자리의 주인. 정민보다 한 살 많은 입사 선배이자, 이 바닥에서 ‘시청률의 마녀’라 불리는 강세연PD의 목소리였다. “새벽에 비몽사몽 옷 주워 입고 나오느라 몰랐슴다. 좀 봐주십쇼.” “누가 보면 내가 너 부려 먹느라 집에 안 보내는 줄 알겠다? 나 욕 먹일 일 있어?” 세연은 혀를 차며 정민의 멱살을 잡듯 셔츠 깃을 거칠게 탁탁 털어주었다.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손길이라기보단, 훈육 주임 선생님이 복장 불량 학생을 단속하는 듯한 투박한 손길이었다. “눈 밑 퀭한 것 좀 봐. 어휴, 칠칠맞기는.” 세연은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샌드위치 접시를 정민 쪽으로 툭 밀었다. 시선은 서류에 고정한 채였다. “빨리 쳐먹어. 회의하다 꼬르륵 소리 내서 흐름 끊지 말고.” 거의 6년을 동고동락한 사수이자 파트너. 정민에게 강세연은 피곤한 상사이자, 친구 같은 누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직장 상사가 진짜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정민이 그런 생각을 하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 사이, 어느새 회의실에 인원이 거의 다 찼다.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 인원이 들어오며 회의실 문을 닫았을 때. 철컥- “자, 잡담 그만하고. 다들 모였지? 브리핑 시작해.” 세연이 눈빛을 싹 바꾸며 만년필을 돌리자, 브리핑을 준비하던 막내 작가와 조연출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정민 역시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1차 검증 마친 후보들부터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대형 모니터에 첫 번째 프로필이 띄워졌다. 1. [강민우 Ryan (24세 / 클래스: 매직 거너)] 특이사항: 세광 그룹 회장의 셋째 손자. 지원서 기준 레벨 : 47 잠재 역량 평가: 실력 검증 불가. ……중략…… 화면 가득 한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번쩍번쩍한 백금빛 갑주에…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은 나갈법한 [세광 그룹] 로고가 박혀있는 마력총. 회의실 곳곳에서 탄식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모양을 보던 세연이 피식 웃으며, 포인터로 스크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실력 검증 불가. 이건 뭔데?” 브리핑하던 조연출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레벨만 보면 지원자들 중 최상위권 수준인데…….” “그런데?” “솔직히 그게 다 본인 역량이라고 평가할 순 없으니까요.” “템빨이라, 그거지?” “뭐… 꼭 그렇다기보단, 제대로 실력 검증 가능한 영상 자료 같은 것도 딱히 첨부된 게 없고…….”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있던 누구도 ‘강민우’가 정말 본인 실력으로 47레벨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템빨까지 실력으로 치는 게 헌터 업계의 관례라고는 해도, 강민우가 쓰는 장비들의 돈지랄은 정도가 넘은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유명한 마력총. 이건 사실상 70레벨대 레벨 제한이 걸려야 하는 스펙의 아티펙트였는데, 세광그룹에서 룬 작업에 미친 듯이 돈을 퍼부어 30레벨대까지 레벨 제한을 낮춘 아이템으로 유명했다. “광고주인 세광 쪽 압박 때문에 명단엔 가장 먼저 올렸는데…….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몇 라운드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잘 안 섭니다.” “그래도 어차피 뺄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그렇긴 한데…….” 세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정민에게 향했다. “야, 이PD. 네 생각은? 저런 낙하산, 게시판 테러당하기 딱 좋긴 하거든.” 정민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모니터 속 거만한 도련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각성자 커뮤니티의 평가를 요약해 보자면……. 돈은 썩어 넘치는데 실력은 없고, 명예욕만 가득한 놈. 물론 대중의 평가를 그대로 믿을 순 없지만, 반대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도 없다. 그래서 막내 작가의 걱정도 충분히 공감되긴 한다. 하지만……. 정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예능에도 들러리는 꼭 필요한 법이니까.’ 어차피 정민이 검토했던 바, 지원자들 중에 ‘진짜’들은 이미 충분히 많다. 그러니 정민이 볼 땐 오히려, 강민우 같은 캐릭터가 귀한 자원이었다. 아무리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해도 예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니까. 아마 시청자들은… ‘진짜’가 ‘가짜’를 박살 낼 때 가장 열광할 것이다. 그게 정민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선배, 선배도 알잖아요?” “뭘 아는데?” “세광 아니더라도, 쟤는 무조건 합격시켜야 하는 거요.” “어째서?” “심지어 쟤가 1회차에 떨어지면 그게 더 노잼이야. 제작진 개입을 해서라도 꾸역꾸역 살려놔야지.” “흐음.” “상상을 한 번 해봐요. 저 수십억 장비 두른 애가…… 흙수저 실력자한테 탈탈 털려서 멘탈 나가는 표정. 그게 바로 카타르시스거든.” “시청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오히려 대리 만족을 줄 수 있다?” “뭐, 그런 셈이죠.” 정민의 대답에 세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작으로 쓰면 잘 타긴 하겠네.” “맞습니다.” 물론 세광그룹을 등에 업은 만큼 어느 정도 연출에 눈치는 봐야겠지만. 정민은 그러한 측면에서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꾸역꾸역 살려놓기 위해 노력할 거고, 그러면 여론만 점점 더 나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원하는 그림이 나올 테니까.’ 다른 인원들도 정민의 이야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자, 컨펌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좋아, 강민우 통과. 다음.” 작가들이 바쁘게 받아 적는 사이, 다음 프로필이 연속해서 화면 위에 떠올랐다. 5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검토해야 할 인원이 산더미인 만큼, 다들 의식적으로 빠르게 의사결정을 진행한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강민우를 제외하고는, 열 명 이상의 지원자에 대한 검토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스크린에 떠오른 인물은, 그렇게 휙 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이었다. PD들 입장에서도 꽤나 흥미로운 지원자였으니 말이다. 17. [강소희 Chloe (28세 / 클래스: 베놈 블러드)] 특이사항: 국내 최대 제약회사 <에스쿨랩(Aesculap)> 회장의 막내딸. 지원서 기준 레벨 : 46 잠재 역량 평가: S+ ……중략……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고양이 같은 눈매. 사진 속 그녀는 금방이라도 보는 사람을 쏘아붙일 듯한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에스쿨랩? 그 약쟁이 재벌가 딸내미가 여길 왜 나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이 된 세연이, 습관적으로 펜대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대한민국 포션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거대 기업, 에스쿨랩. 그러니까… 굳이 진흙탕에서 구르는 서바이벌 예능에 나와서 멘토들의 선택을 받을 이유가 없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강소희는, 강민우와 달리 실력까지도 ‘진짜’였으니까. “천재라고 유명하니 역량이야 검증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던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연의 말을 받았다. “그렇죠?” “대체 왜 나온 거지? 취미 생활인가? 아니면 아버지랑 싸우고 가출이라도 했대?” “글쎄요. 지원 동기란에는 ‘경험을 쌓고 싶다’라고 써놨던데, 진짜 의미 없이 그냥 하는 소리 같고.” 정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유가 뭐든 그건 사실 상관없지. 중요한 건 캐릭터니까.’ 재벌가 막내딸이라는 화려한 간판. 사실 이것만으로도 화제성 측면에서는 일단 먹고 들어간다. 그러니 만약 여기에 어떤 개성 있는 요소가 붙기만 한다면……. “흐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용히 있던 조연출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강소희, 성격이 좀…… 많이 세답니다. 각성자 위키에서 봤는데, 논란이 좀 여러 가지 있더라고요.” “각성자 위키? 인지도가 거기 올라갈 정도야?” “아무래도 재벌가 공주님인데다, 외모도 받쳐주다 보니…….” “흐음. 공주병? 뭐 그런 거?” “그쪽은 아니고, 오히려 사납답니다. 에스쿨랩 쪽 사람들도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한다고…….” “오호. 인성 논란 같은 거 터질 만하겠네.” 내용을 들은 정민은, 머릿속에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성격 파탄 난 재벌 3세 냉미녀라……. 뭐, 실제로 그럴지 어떨지는 까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흥미롭긴 하네.’ 강민우가 진짜들을 돋보이게 할 장작이라면, 강소희는 참가자들 사이에 트러블을 만들어 줄 좋은 트리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들 착해 빠져서 형님 아우 하고 있으면, 이런 리얼리티 예능 무슨 재미로 봐?’ 머리채 잡고 싸울 미친개도 한 마리 풀어놔야 방송이 산다. 이 생각은 당연히 정민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런 의미에서 강소희는 만장일치로 PASS 처리되었다. “좋아. 빨리 넘어가자고. 우리 시간 부족해.” 회의는 다시 급물살을 탔다. 그 뒤로도 수많은 지원자의 프로필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고, 정민이 예상했던 것처럼 아주 순조로웠다. 일단 인재풀이, 제작 기획 때 상정했던 것과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 말이다. 해외 용병 출신의 베테랑, S급 헌터의 추천서를 들고 온 유망주, 특이한 히든 클래스를 각성한 루키들까지. 하나같이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A급 인재들이었다. “얘는 바르가 2군 연습생 출신이네? 기본기는 확실하겠고.” “이 친구는 작년 아카데미 실기 차석입니다. 피지컬 좋네요.” “아카데미?” “넵. 그, 관리국 쪽에서 운영하는 거 있잖습니까.” “아하! 오케이, 다 올려. 거를 타선이 없네.” 그리고 이 회의의 끝에서, 마지막에 등장한 프로필. “캬.” 그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제작진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 지원자의 차례가 왔다는 건 곧, 길었던 오늘 회의가 끝났다는 소리였으니까. 100. [이성환 (23세 / 클래스: 쉴드 워리어 / 49Lv)] 특이사항: 실버나이츠 길드 마스터 '이현무'의 친조카. 지원서 기준 레벨 : 49 잠재 역량 평가: SS ……중략…… “이건 뭐, 따로 얘기가 필요한가?” 세연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반사적으로 저었다. 애초에 일부러 마지막 차례로 넣어놨을 만큼, 모든 검토 인원이 참가 확정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니까. ‘이성환’이라는 이름의 이 참가자는 ‘루키’라는 수식어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때깔부터 다르네, 이 친구는.’ 게다가 재능이나 인지도 측면에서도… 다른 참가자들과 격이 다른 인물이 바로 이성환이었다. 실버나이츠의 그 이현무가 ‘놀랄 정도의 재능’이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 ‘레벨은 무슨… 45? 루키 맞아? 이게 180일 차 헌터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는 하지만, 이현무쯤 되는 인물은 자신의 말이 가진 무게를 잘 안다. 조카라고 고평가할 만큼, 이현무의 성향이 가벼운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정민은, 이성환의 프로필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하고 잘생긴 외모, 굳게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신뢰감. 이력서에 적힌 ‘삼촌의 후광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하고 싶어 지원함’이라는 문구까지…… 그야말로 정석 그 자체. 화면에 뜬 이성환의 모습은 그야말로 ‘빛’이었다. 그러니까 정민은……. ‘진짜 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아이러니하게도 출연 신청자들 중, 이성환이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이현무 조카가 여길 온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가만히 있다가 실버 나이츠나 들어가면 평생의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 대체 왜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실버나이츠가 아닌 다른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실버나이츠의 전략적 브랜딩 뭐 그런 것도 아니지 싶은데…….’ 어쨌든 모두의 만장일치로, 장장 2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서류 검토를 통해 일차로 걸러진 200명. 그 중 100명의 예비 합격 인원이 드디어 확정되었다. 이제 만약 2차 지원자들 중 인재가 없다면, 이 100명이 그대로 멘티 참가자로 결정되리라. “후우… 끝났다.” 회의 종결을 확정하는 세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정민은 기지개를 켜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졸리지도 않네.’ 뻑뻑해진 그의 두 눈은 무의식적으로 스크린을 향해 있었고, 거기에는 최종 선발된 100명의 얼굴이 바둑판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역대급 라인업. 이 정도만 해도, 이미 <헌터즈 스쿨> 시즌3의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잘 뽑혔어. 확실히.’ 그런데 모니터를 바라보는 세연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만족스러움 뒤에 가려진, 무언가 찝찝한 기색. 정민은 거기서 저도 모를 오한을 느꼈고……. “야, 이정민.” “네, 선배.” 그 불길함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라인업 죽여주긴 하는데 말이야.” 세연이 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뭔가 좀…… 너무 깔끔하지 않냐?” 정민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 아줌마가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녀의 질문에 총알처럼 대답했다. “깔끔하면 좋은 거 아닙니까? 사고 칠 놈 없고, 실력 확실하고.” “아니, 그런 거 말고. 방송이라는 게 원래 좀 삐걱거리는 맛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애들이 다들 너무 완성형이야. 엘리트 코스 밟은 모범생들만 모아놓은 느낌이랄까.” 사실 정민 또한, 세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아니, 어쩌면 비슷한 감정을 이미 느꼈는데,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가까울 것 같았다. “또 이러신다.” 지금 이 라인업에도 이미, 강민우 같은 호구도 있고, 강소희 같은 독종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결국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캐릭터들이다. 방송의 판도를 뒤집고,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 예측 불가능한 ‘조커’. 음식으로 치면 맛을 확 살려줄 자극적인 향신료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2%가 아쉽네, 2%가.” 세연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정민 역시 그 말에 동의했지만, 억지로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선배. 이 정도면 감지덕지죠.” “그렇긴 하지?” “작년에 윤진구 선배 리얼리티 하나 대차게 말아 드시는 거 못 봤어요?” “알아. 나도 알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 “그럼 남은 기간에 뭐……. 하늘에서 별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봐야죠.”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끼익- 피식 웃어 보인 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민의 등을 퍽 쳤다. “고생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는 내가 정한다.” “법카입니까?” “내 사비다, 임마. 따라와.” 우르르 빠져나가는 제작진들 사이로, 정민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러다 문득, 책상 위 달력에 다시 시선이 멈췄다. [2차 지원 마감 D-3] 농담처럼 얘기하긴 했지만… 어쩌면 진짜로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왕이면 <헌터즈 스쿨 3>이 초대박을 내서, 이 기획에 매달렸던 지난 일 년이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흐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야! 안 오고 뭐 해?” 복도 끝에서 날카로운 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니다, 가요!” 정민은 서둘러 가방을 메고 회의실을 나섰다. 일단 이 다음은……. 선배가 사주는 밥이나 든든히 먹고, 한숨 푹 잔 뒤에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5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목표했던 5일이 지났다. 그리고 내 레벨은…….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29레벨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29가 되어 있었다. “와, 형님. 진짜 성공하실 뻔했네요?” “뭔 소리야?” “5일 만에 30 찍는 거요.” “아하.” “그거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니셨네요.” “당연하지.” 5일 안에 30을 찍겠다는 내 다짐은 ‘진짜’였다. 그 증거로, 이렇게 배팅도 걸어뒀었으니 말이다. * 현재 활성화 배팅 [조건 : 플레이어 Dave 레벨업 달성 (5일 기준 Up/Down)] [현재 배당률: Up(5일 이상) 1.494배 / Down(5일 미만) 3.023배] [현재 총 배당금 : 13159 LP] 내 돈도 걸었냐고? 당연하다. 이전 배팅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1000LP를 Down에 걸었다는 말씀.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여기에는 절대로… 성좌들을 농락하려는 의도가 한 톨도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야이 방장 ㅅㅂㄹㅁ └ 12시 전에 퇴근하면 저주할거야……. 어차피 20시 정각에 배팅 종룐데요 형님……. 제가 12시에 퇴근하면 뭐 달라집니까? └ 와 ㅅㅂ 머리털 나고 데이브 돈 잃는 걸 다 보네 ㅅㅂ;; └ 근데 왜 그게 하필 오늘이냐는 거임; 그래.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시원하게 1000LP를 날렸다. 아니, 확정적으로 날리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이 ㅅㄲ 이거 암만 봐도 고의임 ㅇㅇ └ 일부러 틀리게 걸어서, 지 먹고 싶을 때 크게 먹으려는 사악한 계략임 ㅅㅂ 하지만 이건 진짜로 억울하다. 아니, 형님들. 쌀숭이가 1000LP 허공에 버리는 게 말이 됩니까? 저도 지금 제 피 같은 돈 증발해서 울고 싶다고요……. └ 역배야 정신이 들어?? 역배야 정신이 들어??? 역배야 정신이 들어????? └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호갱님들 ㅎㅎㅎ └ ㅋㅋㅋㅋㅋㅋㅋㅋ역배 참교육 ㄱㅇㅈㄱㅇㅈ 그런데 고의가 아닌 건 정말로 맞지만, 오히려 상황이 나쁘지 않게 된 것도 같다. 어차피 내 배팅 승률이야 구조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을 거고. 이렇게 한 번씩 져주기도 해야… 도박이라는 게 성립하는 거 아니겠어? 정답이 항상 정해져 있으면 그게 어떻게 도박임? “흐…….” 그러니까 이건, 본의 아니게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한 셈 되시겠다. ‘본의 아니게.’ 이 부분이 정말로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 ㅈㄹ ㄴ └ 삽소리를 장황하게도 설명하네 쉬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성좌 한 놈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내 말을 이해했다느니, 충성을 다 바치겠다느니……. 며칠 전 이상한 헛소리를 했던, 돈 벌어서 고맙다며 300LP나 쾌척해 주셨던 형님. 이 형님이 이번에는 정배에 걸었을지 역배에 걸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 거다. -그런데 승부사 대장장이 형님 혹시 계십니까? └ 충성! 방장님. 여기 있습니다! 어, 진짜 있잖아? -저 따라 거셨으면…… 이번에는 잃으셨겠네요? └ 아닙니다! 정배 걸었습니다! “……?!” └ 후후, 제가 이해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방장님. [‘승부사 대장장이’님이 3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난 솔직히 당황했다. 또 벌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번에도 300LP나 쾌척하다니. 어……. 그…러니까 300LP 멘징한 건 좋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건… 아무래도 괜히 물어본 것 같다. 이 녀석 덕에 여론이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거든. └ 와, ㅅㅂ 설마 방장 이제 성좌랑도 짜고 치는 거임? …? 시스템적으로 그런 게 가능은 한 겁니까? └ 시스템적으로야 당연히 안 되지 ㅇㅇ. 니가 스트리밍 채팅 말고 성좌랑 따로 얘기할 방법이 있음? 그러니까 말입니다. └ 하지만 중요한 건, 그래도 짰다는 거임. └ 아무튼 짰다는 거임 ㅇㅇ 예? └ 사기꾼 방장 쉑 타도!!! └ 역배야 정신이 들어?? 역배야 정신이 들어??? 역배야 정신이 들어????? └ 하, ㅅㅂ 지난번엔 정배 걸어서 조지고 이번엔 역배 걸어서 조지고;; 방장아 바로 다음 배팅 열어야겠다. 예에? 이건 또 무슨 말……. └ 멘징하려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방법 뿐임 ㅇㅇ 성좌들은 역시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면 내가 이 성좌놈들을 도박 중독자로 만들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뭐……. [ON Air : ☺ 1517] 이렇게 열화와 같은 성원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 사악한 ㅅㄲ……. └ 대이브… 내가 반드시 저주한다……. 그래도 성좌의 저주는 뭔가 어감부터가 좀 무서우니까, 그 말은 취소해주시면 안 될까요, 형님? “…….” 어쨌든 오늘의 마지막 던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파티원 레오마저도 레벨이 한 계단 더 올라갔다. [파티원 ‘레오’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크, 역시 형님이랑 사냥하면 업 속도가 미쳤다니까요?” 이로써 레오의 레벨은 무려 34. 30레벨대 유저가 수로에서 5일 만에 2레벨이나 업한 건, 나 못지 않은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남은 경험치 대충 70% 정도니까. 내일이면 수로 졸업은 확정이고.’ 그러니까 1000LP나 잃었음에도, 내 기분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목표했던 5일 만에는 30레벨을 찍지 못했지만, 그래도 6일 차에는 30레벨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헌터즈 스쿨 3> 이력서 심사 날짜가, 넉넉히 3일이나 남아 있는 시점이었는데 말이다. “여기 졸업하고 나면, 루멘티스 폐광 가자고 하셨었죠?” “그치.” 이대로면 심사 날짜 기준으로 대충 32~3레벨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걸?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모든 사냥 플랜이 깔끔하게 서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거기 40레벨 존 아니에요, 형님?” “맞지.” “형님 계시니까 사냥이야 될 것 같은데… 효율이 나올지는 모르겠네요.” 걱정할 거 없다, 아우야. 이 형님은 이미 20레벨 때도 거기서 업 해봤단다. └ 그땐 고레벨 파티 버스 탄거잖음;; 버스라고? └ 어… 음……. └ 버스는 맞는데, 기사에 가까웠던 것 같긴 해. └ 방장이 캐리한 건 맞지만, 그래도 화력 자체는 빌려온 거 아니었냐. 뭐, 이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내가 극한의 플레이를 해내더라도, 화력이 없으면 사냥 효율이 안 나오는 건 팩트니까. 그래서 나도 거길…… 레오와 둘이 갈 생각은 아니다. “괜찮은 파티원들 섭외해 뒀으니까, 이번엔 버스 탈 준비 해라 레오야.” 누굴 섭외한 거냐고? 당연히 루멘티스에서 전우애를 다졌던, 전前 파티원들이다. 정확히는 세일라 노빈과 엘리시아 로웰. 두 사람에게 미리 연락을 넣어뒀던 것. 벨릭 형님 이름은 왜 없는 거냐고? 그거야 뭐……. 레오랑 포지션이 겹쳐서 그런 거 아닐까? “후후.” 이번 주엔 레오 버스 달달하게 탔으니, 다음 주엔 레오도 꿀 좀 빨게 해줘야지. “캬……! 파티원이요? 형님 지인이시면 대단한 분들이겠죠?” “어… 대단하다기보단…… 루멘티스 한정 스페셜리스트랄까.” 매그니 파이어를 난사하던 로웰을 떠올린 나는, 문득 레오가 조금 걱정됐다. 생각해 보니 이번엔 숯불구이 포지션이 레오일지도 모르겠는데……. 뭐, 벨릭 형님보다 레오 실력이 월등한 건 사실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저 그럼 기대합니다?” “오키. 기대하라고.” 그런데 왜 자꾸 망령만 잡으러 다니는 거냐고? 그야… 지금 내 목적이 레벨업에 있어서 그렇다. 고스트 타입 몬스터들이 원래, 같은 체급 안에서 경험치를 제일 많이 주거든. 대신 드랍이 거지고 발골도 안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것도 딱 다음 주까지만이다. <헌터즈 스쿨 3> 출연료까지만 달달하게 뽑아먹고 나면, 40레벨쯤부터는 다시 본업에 충실할 예정이니까. └ 어차피 돈은 우리 털어서 벌면 된다 이거지……. 에이… 형님들. 말씀들을 왜 또 그렇게……. └ 재밌으니까 봐준다 ㅅㅂ └ 누구 맘대로 봐줌? 난 안 봐줬음 ㅠㅠ └ 울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봐 친구야 ㅠㅠ 혹시 두 번 다 잃었니? └ 야, 너두? └ ㅠㅠㅠ 아무튼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띠링-! [배팅 결과: ‘Up’ 승리!] [잠시 후, 배당의 결과가 정산됩니다.] 헌터 이건율의 오늘 하루도 무사리 마무리될 수 있었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배팅에 패배하여, 수령할 LP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배팅만 잘하면 돈이 복사가 된다고?ㅎㅎㅎ └ 역배충 쉐기들, 일확천금 노릴 게 아니라… 돈은 이렇게 정배로 건실하게 벌어야지. 예? ‘건실’이라굽쇼? “…….” 마지막으로 레오와 정산까지 마친 나는, 깔끔하게 8시 15분쯤 퇴근 도장을 찍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형님!” “조심히 들어가고!” 그런데 사실 오늘은, 퇴근했다고 곧바로 게이트를 나갈 수 없었다. 왜냐고? [연성 주재료 : 응축된 비탄의 결정 1000/1000(100%)] ‘후우. 이거 드디어 다 모았네.’ 내일부터 사냥의 효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 말이었다. 5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히든 클래스 세라피스트로 전직한 이후. 내게는 총 세 가지 스킬이 주어졌다. 연금술과 관련된…… 다음의 세 가지 스킬들 말이다. 루멘 연성식 (Lumen Synthesis) 세라픽 포지 (Seraphic Forge) 생명의 봉헌 (Offering of Life) 하지만 생명의 봉헌은 아직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고, 실질적으로 내게 주어진 건 루멘 연성식과 세라픽 포지 두 개뿐. 그리고 이 둘 중에서도 내가 완벽하게 써먹는 데 성공한 건, 실질적인 연성 기술인 ‘세라픽 포지’ 뿐이었다. 키엘의 연성식을 제작하는 데 ‘루멘 연성식’도 잘 써먹은 거 아니냐고? 그렇게 보긴 좀 애매하다. 왜냐면 드라키엘의 연성식은… 사실상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띠링-! [‘5LP’를 지불하였습니다.] [‘낡은 양피지 조각’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3LP’를 지불하였습니다.] [‘망자의 찢어진 천조각’ 아이템을 구매하였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건, 드디어 ‘루멘 연성식’을 활용할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퀘스트의 도움 없이 오롯이 내 힘으로, 첫 번째 연성식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 연성 이해도가 100%에 도달한 대상 처치 시, 연성 재료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연성 이해도는, 대상을 연구할수록 높아집니다. - 연성 재료를 모아 루멘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 시, ‘루멘 연성식’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첫 3일 동안 ‘고통의 망령’들을 미친 듯이 사냥한 끝에 이 몬스터에 대한 연성 이해도가 100%에 도달했고. 어제오늘 열심히 파밍한 끝에, 루멘 에너지라는 걸 100%까지 채운 참이었다. [연성 주재료 : 응축된 비탄의 결정 1000/1000(100%)] [‘응축된 비탄의 결정’을 주재료로 한, 새로운 루멘 연성식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연성식 제작에 다음의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1. 낡은 양피지 조각 2. 망자의 찢어진 천 조각 3. 검정색 잉크 그러니 난 지금 꽤 두근거리는 상태였다. 당장 쓰기 어려운 용가리 녀석 말고 새로운 소환수를 창조할 수 있게 됐다니! 이제는 진짜 1차 전직 플레이어 느낌 낼 수 있는 거겠지……? └ 오, 방장쉑ㄷㄷ 드디어 연금술 가능해진 거임? └ 그나저나 8시 지났는데 퇴근 안 하는 거 처음 보네ㅋㅋ └ ㄹㅇㅋㅋ 키엘 때와는 달리 연성식 재료가 상당히 싸구려 느낌 나긴 하는데……. 가성비 좋은 녀석이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나는, 곧바로 연성식 제작을 시작하였다. [연성식 제작을 시작합니다.] [현재 진행률 : 3%… 5%……27%……56%……….] └ 그, 뭐냐. 고통의 망령 베이스로 연성하는 거임? └ 그런 듯? 무슨 연성 이해도인가, 그거 채운 것 같던데. 성좌놈들도 내 새로운 연성식에 꽤 관심이 많아 보인다. 채팅이 계속 올라오는 것도 올라오는 거였지만… 내 원래 퇴근 시간인 8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브 시청 인원이 오히려 늘고 있었으니 말이다. [ON Air : ☺ 1831] 라이브 인원이 1800대라니. 이건 검희가 등장했을 때도 못 봤던 수치였는데……. 괜히 부담된다. └ 이번에도 지리는 거 나오는 거 아님? 하지만 이렇게 시청 인원이 늘어난 게, 키엘이 때처럼 엄청난 연성식이 등장하길 기대해서는 아닐 거다. 일단 들어가는 재료들부터가 그때와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허접한 것들이었고. 베이스도 용족이었던 클래스 메인 퀘스트 때와 달리… 이번엔 허접한 망령 잡몹에 불과했으니까. └ 오바지 ㅋㅋ 그거 신화 뜬 건 히든퀘 클리어 보상에 가까운 거고. └ ㄹㅇㅋㅋ 뭐 스킬 쓸 때마다 신화급 소환수 찍어내는 건…… 혼자 세계정복이라도 할 셈임? 때문에 나도 성좌들의 이 의견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현재 진행률 : ……92%……97%……100%……….] 그런 의미에서 일단 완성된 연성식의 등급에, 적당히 만족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 합리화가 아니라 진심이다. 〓〓〓〓〓〓〓〓〓〓〓〓〓〓 루멘 연성식 -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 분류 : 잡화 - 연성식 레벨 제한 : 없음 등급 : 희귀 티어 : - 내구도 : 90 / 90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을 연성할 수 있는 연성식입니다. 해당 연성식을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 스킬에 등록하면,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을 연성할 수 있습니다.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양도할 수 없습니다. * 클래스 전용 아이템입니다. ‘빛의 연금사’ 외의 다른 클래스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연성에 성공 시, 연성식은 소멸됩니다. 〓〓〓〓〓〓〓〓〓〓〓〓〓〓 그래도 희귀는 좀 아쉽지 않냐고? 정말 아쉽지 않다. 왜냐면……. 재료 원가가 100LP도 안 되는 연성식이었으니까. 희귀등급만 되어도 3티어까진 충분히 뽑힐 가능성이 있는데……. * 연성 재료 목록 A. 망자의 찢어진 수의 × 1 B. 주인 잃은 금색 단추 × 3 C. 녹슨 관짝 못 × 15 D. 검은 실타래 × 8 몇천 LP 발라서 희귀등급 3T를 뽑아야 한다면 실망스럽겠지만, 100LP면 3T만 뽑아도 개이득 아니겠냔 말이지. └ 그래ㅋㅋ 이게 맞긴 해ㅋㅋ └ 방장ㅋㅋ 메타인지 능력 훌륭한걸. └ 그럼 제작까지 바로 드가는 거임? 그러니 당연히 바로 가야죠 형님들. 사실 이제부터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연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등록하였습니다.]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 연성을 위해,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드라키엘 때와 달리, 진짜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Y를 딸깍 선택했다. “갑니다!” 물론 지난 일주일의 노동력이 이 한 번의 연성에 집약된 만큼 긴장감이 제로는 아니었지만……. 이미 1트에 3억 박고 시작했던 경험이 있으니, 훨씬 여유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를 발동하였습니다.] [지금부터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 연성을 시작합니다.] 그나저나 이름 한번 엄청나게 길다.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이라니. 뭔가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연성 베이스가 고통의 망령이라 그런 것일 듯했다. 우우웅-! 어쨌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예의 그 새하얀 술식 문양이 떠올랐다. [술식의 완성도에 따라, 결과물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턴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 사냥할 때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법. └ 맞긴 해. 데이브는 잡템 하나 주울 때도 최선을 다하긴 하지 ㅇㅇ └ 아마 지금쯤… 드라키엘 연성때처럼 SS띄워서 등급초월 꿈꾸고 있지 않을까? 순간 뜨끔했다. 날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현재 연성 진행도 : 0.7%] └ 술식도 훨씬 간단해보이긴 하니까, 충분히 가능해보이긴 해. 성좌들은 중얼중얼 계속해서 채팅을 올려 댔지만,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성좌들 말마따나 이번에도 마력 폭주 성공해서…… 유일등급 소환수를 뽑아내는 게 베스트 플랜이니까. 지잉- 이이잉-! 그 사이 내 손에서 그려진 술식은, 점점 본연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캬- 술식 잘 그리긴 해 ㅋㅋㅋㅋㅋ └ 방장 왜 정령술사 안 한 거임?;; 이정도면 2차 전직 전에도 충분히 중급정령까지 소환할 것 같은데. └ 왜냐면… 방장은 이미 이걸로 초월등급 소환수 하나 뽑았으니까. └ ??? 뭔 소리임?? └ 유입은 닥눈3하쇼. └ ? └ 닥치고 3일간은 눈팅부터 하라는 소리임. 고오오오-! 어쨌든 술식은 순조롭게 그려지고 있었고, 키엘이 연성 때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22.3%]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 술식이 쉬워서 그런지, 그때보다 등급 업 속도가 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고. [완벽한 ‘마력의 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술식의 완성도가 한층 더 견고해집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30.0%]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S] SS까지 띄우고 나니,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진다. [현재 연성 진행도 : 67.3%] [현재 연성 진행도 : 79.5%] 다행히 마력폭주도, 지난 번보다 더 빠른 시점에 찾아왔다. [‘마력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강해집니다.] [술식의 진행 속도가 50%만큼 가속됩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82.4%]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모든 술식을 끝까지 완성했을 때. 띠링-! [완벽한 ‘마력의 핵’이 완성되었습니다.] [술식의 완성도가 한층 더 진화했습니다.] [현재 연성 진행도 : 100.0%] [현재까지 술식 완성도 : SS+] 내 눈앞에 나타난 건, 기대했던 바로 그 푸른 빛깔의 빛줄기였다. [연성식의 한계를 초월한 결과물이 완성되었습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세라픽 포지(Seraphic Forge)의 스킬 숙련도 등급이 B등급에서 B+등급으로 격상됩니다.] 오오, 연성 등급도 조금은 올라줬네? [연성 결과물,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의 등급이 한 단계 진화됩니다.] 이러면 등급은 기대했던 대로 정확히 유일 등급. 그런데……. 마지막에 특이점이 조금 발생했다. [연성 결과물,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의 티어가 세 단계 격상됩니다.] 티어가 세 단계라고? 그럼 몇 티어가 튀어나오는 거지? [피조물에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의 의지(Ego)를 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유일)(6T)’의 연성에 성공하였습니다.] 키엘 때와는 뭔가 다른 의미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상이 발생했다. └ 에??????? └ 이거 버그 아님? 유일 6티어 소환수라. 단어가 뭔가 폭력적인걸? └ 대이브 ㄷㄷㄷ └ 방장 방송은 보고 있으면 신기한 게 왜 이렇게 많냐ㅋㅋ 키엘이를 처음 연성했을 때만큼의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긴 했지만……. 성좌들도 무려 6이라는 티어 수치를 보고는 꽤 놀란 듯했다. 뭐, 그런 것과 별개로 나야 상당히 만족스럽다. 유일등급에 6티어 소환수면, 플레이어 레벨로 대충 환산해 봐도 40레벨 중후반 스펙은 될 것 같았으니까. 우웅-!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술식 위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의 입자들이 천천히 허공에서 뭉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잠깐. └ 뭐지? 크기가 되게 작은데? 생긴 게 무슨…… 토끼 같다. └ 커엽눜ㅋㅋㅋ 하얀빛이 허공으로 스며들며, 완성된 소환수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툭- 허공에서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녀석의 생김새는…… 한 마디로 작은 토끼 봉제 인형. 성인 남성의 주먹 두 개 정도 크기나 될 법한, 검은색 헝겊 토끼 인형이었다. └ 이거, 6티어 맞냐?;; └ 뭐 이래 허접해 보이냐;; 성좌들의 채팅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왜냐면… 나도 방금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난 시스템을 믿는다. 시스템이 산정한 등급과 티어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터억-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품에 안고 있던 자기 키만 한 대못을 땅에 짚은 녀석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갑자기 한숨을 푹 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 아아……. 바니, 소환됐다. 바니, 불행하다……. 이 자식은 또…… 뭐 하는 녀석인 건데? 5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한남동 한복판. 그 안에서도 가장 알짜 부지에, 눈에 띄게 으리으리한 사택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대한민국 재계 서열 2위 세광 그룹. 그 오너 일가를 위해 지어진 집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의 별채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강민우의 방은, 웬만한 박물관보다 화려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방의 주인은, 지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후우.” 그리고 그의 앞에는……. “민우야.” 서늘한 인상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세광 그룹 전략기획실 상무이자, 민우보다 여덟 살 많은 배다른 누나. 강지윤이었다. “누나, 할 말 다 한 거지? 나 바빠. 곧 장비 점검 들어가야 한다고.” 민우가 탁자 위에 놓인 백금색 마력총을 신경질적으로 닦으며 대꾸했다. 지윤은 한숨을 내쉬며, 동생의 손에 들린 흉물스러운 무기를 바라보았다. “그 방송, 기어이 나가야겠니?” “지원서 냈어. 이미 늦었어.” “취소해. 할아버지껜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싫어!” 취소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증명하는 것만큼, 할아버지께 인정받는 빠른 길도 없었으니까. 할아버지께서도 허락하셨다는 건, 기대하신다는 뜻. “후우, 민우야.” “왜?” “그딴 광대놀음에 나가서 세광 이름에 먹칠하려는 이유가 대체 뭔데?” 그러니 강민우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광대놀음이라니. 각성자가 아니면 두 발 딛고 살 수도 없을 하찮은 인간 주제에.’ 사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강민우는, 형제들에 비해 아무것도 나은 점이 없는 천덕꾸러기였다. 한 명 한 명이 능력 있는 형, 누나들과 달리, 강민우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확히 반년 전. 강민우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계기가 찾아왔었다. 그건 바로 각성. 민우는 세광 그룹의 핏줄 중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각성을 해낸 것이다. “왜? 왜 다들 날 방해만 하는 건데?” “뭐? 방해?” “형들은 유학 가고, 계열사 사장 달고 승승장구하는데! 왜 나한테만 쥐 죽은 듯이 있으라고 하냐고!” “네 형들이랑 넌… 지금 하겠다는 게 완전히 다르잖아.” 지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민우의 속을 더 뒤집어놓았다. “뭐가 달라?” “걔들은 각자 나름대로 세광의 위상에 기여하고 있으니까?” “……!” “반면에 넌. 뭐… 헌터즈 스쿨? 네가 연예인이야? 그런 데 나가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민우가 씩씩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나는 각성자야, 누나. 나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게 나란 말이야!” “……선택?” 지윤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착각하지 마, 강민우. 각성했다고 다 선택받은 게 아닌 건, 각성자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뭐라고?” “네 잠재력 등급, B급도 간당간당하잖아. 그나마 이 집안에서 쏟아부은 돈 덕분에 레벨이라도 올린 거고. 주제 파악 좀 해.” 지윤의 독설은 비수처럼 정확하게 민우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C등급이라는 잠재력이야말로, 민우에게 가장 아픈 약점이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당연히 그런 현실을 부정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잠재력이라…….” 강민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나. 누나는 잘 모르겠지만, 잠재력이 전부가 아니야.” “그럼?” “내가 세광의 핏줄로 선택받았듯, 잠재력 높은 놈들도 마력의 선택을 받았을 뿐이고, 난 그걸 극복할 방법을 충분히 찾았거든.” “…….”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증명하면 되잖아.” “민우야.” 그리고 강민우는 결국 폭발했다. 본인의 말에 모순이 있음을, 본인이 가장 먼저 느꼈으니 말이다. “됐으니까 나가!!! 내 방에서 나가라고!!!” 민우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에 지윤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동생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등신 새끼……. 후회할 짓 하지 마. 이건 경고야.” 쾅-! 육중한 방문이 닫혔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시. “으아아악!!!” 쨍그랑-! 콰직! 민우는 탁자 위에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벽에 걸려있던 수천만 원짜리 그림 액자가 박살 나며 유리 파편이 튀었다. “운? 주제 파악? 웃기지 마! 다 똑같은 인간들이야! 형들은 천재고, 나는 그냥 운 좋은 멍청이다 이거지?” 민우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애꿎은 사용인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다들 뭐 해! 안 치워?! 내가 밥이나 축내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 “조, 죄송합니다 도련님! 지금 당장 치우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과 메이드들이 사색이 되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유리 조각을 주워 담았다. 민우는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끝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보여줄 거야. 결국 세광의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건… 내가 될 거라고.’ 나는 각성자다. 구시대의 유물인 형들과는 종 자체가 다르다. 돈? 그래, 돈 좀 썼다.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 이 세광이라는 기업도 게이트 산업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없지 않았던가? “후우.” 그러니 내가 각성자로서의 재능만 증명해 낸다면, 가족들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민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 * * 세일라 노빈은, 최근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대략 보름 전. 조금 모자라지만(?) 친한 오빠인 벨릭을 돕기 위해 루멘티스 폐광에 따라갔다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만나게 됐던 것이다. “아, 제가 히든 클래스라서, 기사 클래스는 아닙니다.” “약간 그… 회피 반격 탱 느낌이랄까요.” 루멘티스 폐광의 숨겨진 구역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괴상한 플레이어. 남자는 자신을 탱커라고 소개했고, 노빈이 생전 처음 보는 방식으로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선보였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히든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고, 그 말도 안 되는 플레이 방식이 그 때문이라고 얘기했었지만……. ‘단순히 그런 영역이 아니었어.’ 그때 노빈이 받았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길드에서도 그런 수준의 플레이는 본 적이 없었으니…….’ 사실 세일라 노빈은,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 숨기고 있던 상태였다. 그건 친한 오빠인 벨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정체를 숨겨야 하는 데에는… 가문 차원에서의 중요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노빈의 본명이 세일라 폰 노빈 (Seila Von Novin)이라는 것도. 그녀가 속해있는 길드가… 무려 세계 랭킹 2위의 길드인 블랙 크라운(Black Crown)이라는 것도. 그녀가 사실 40레벨 대가 아닌 2차 전직까지 한 100레벨 대 최상위권 플레이어라는 사실까지도…. 길드원들을 제외한 다른 지인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데이브’라는 그 남자는…… 어느 정도 알아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내가 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챘듯 말이지.’ 노빈이 볼 때 데이브라는 남자의 정체는 둘 중 하나였다. 히든 클래스로 이미 2차 전직을 마친… 자신보다도 뛰어난 최소 10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거나. 그게 아니라면 세계 10대 길드 중 한 곳에서 비밀리에 랭커로 키우는 중인, 역대급 재능의 슈퍼루키거나. 이 두 가지가 아니라면 남자의 실력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신성 계통의 쉴드 스킬들에 대해 그렇게 잘 알 리도 없었다. ‘디바인 쉴드의 스킬 쿨타임까지 다 꿰고 있다는 건…… 최소 상위권 길드 공대에서 굴러봤다는 뜻이지.’ 정보길드에 접근(?)할 수 있었을 리도 없었고 말이다. “데이브 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보 길드에서 샀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도 노빈은 후자 쪽에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마나를 느끼는 감각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녀임에도, 데이브에게서 느껴지는 마력량은 한 줌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 남자. 느껴지는 마력량이 너무 터무니없이 낮았어.’ 탱커라는 그의 얘기도 분명히 헛소리였다. 노빈이 본 그의 움직임은, 절대로 탱커들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탱커로 훈련된 플레이어는, 절대 데이브처럼 공격적인 포지션을 선점하지 않는다. 이건 실력을 떠나 플레이 스타일과 전투방식의 문제였다. 노빈이 볼 때 데이브라는 플레이어는……. 무조건 검사 클래스의 플레이어였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그런 수준의 검사 말이다. ‘대체 왜 탱커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정체를 숨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처음에 노빈은, 데이브라는 남자의 뒤를 캐 볼까 잠깐 고민도 했었다. 그녀가 속한 블랙 크라운의 정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그곳의 엘리트 길드원인 노빈이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어지간한 정보쯤은 충분히 수집 가능할 테니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노빈은 그러지 않았다. 고작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길드의 인프라를 사용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노빈은, 생각지도 못했던 데이브로부터의 연락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번에는 뭔가 알아낼 수 있으려나.”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자신에게 다시 연락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딱 한 번의 파티 이후 접점이 사라진 건 확실히 아쉬웠으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씩 친분을 쌓다 보면, 적어도 그가 어떤 길드 소속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게 루멘티스 폐광 같은 저레벨 사냥터에, 노빈이 기꺼이 한 번 더 걸음하는 이유였다. ‘검을 그 정도로 다루는 데다 한국인인 걸 보면, 실버나이츠 기사단 소속일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니까 폐광에 도착한 노빈이 또다시 당황한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야, 빨리 저리로 안 가? 너 확 반품한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데이브는……. - 바니, 힘들다. 10보나 걷느니… 차라리 소멸을 택하겠다. 탱커 코스프레에 이어 웬 소환술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심지어 데이브가 들고 있는 무기는 활. ‘대체… 뭐지?’ 완전히 리셋되어버린 데이브의 정체에, 어질어질해진 노빈이었다. 5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두 번째 연성을 마치고 얻은 소환수를 본 순간, 내 감정을 한 줄로 표현하면 딱 이거였다.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소환수가 한 놈이 안 나오는 걸까? 〓〓〓〓〓〓〓〓〓〓〓〓〓〓 허무의 인형 바니 분류 : 소환수 레벨 제한 : 없음 등급 : 유일 (Unique) 티어 : 6T 종족 : 마도 인형 레벨 : 44 능력치 공격력 - 380 방어력 - 796 생명력 - 5273 ……중략…… * 소환 시 필요 마력 전투 시 – 0.15/s 비전투 시 – 0/s * 고유능력 -침대 밖은 위험해 (Passive) 바니가 제자리에서 3초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경우, ‘절대 나태(Absolute Sloth)’ 상태에 돌입합니다. 바니의 물리/마법 방어력이 500% 상승하며, 밀려나지 않습니다. 반경 10m 내의 적들에게 ‘무기력’ 저주를 겁니다. (이동속도/공격속도 40% 감소) 고통의 망령의 ‘허무’와 낡은 잡동사니들이 결합하여 탄생한 피조물입니다.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으며,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극도로 게으르지만, 움직이지 않기 위해 개발한 효율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 클래스 전용 소환수입니다. ‘빛의 연금사’ 외의 다른 클래스는 소환할 수 없습니다. * 계정에 귀속된 소환수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 플레이어와의 레벨 차이가 과도하여, 충성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현재 충성도 : 50 〓〓〓〓〓〓〓〓〓〓〓〓〓〓 쓸데없이 거만한 식탐 유딩 드래곤에 이어, 염세주의에 빠진 중2병 게으름뱅이 토끼 인형이라니.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 파멸적인 수식어에는 조금의 거짓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주 잠깐만 지켜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키에에에에―! 폐광의 어둠을 찢고 나타난 루멘 고스트들이 흉포한 기세로 쇄도했다. 보통의 소환수라면 주인을 지키려고 하거나, 최소한 전투를 시작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내 앞에 소환된 이 시커먼 토끼 인형은, 짝짝이 단추 눈으로 주인을 한 차례 흘겨볼 뿐이었다. - 아… 존재함이란, 곧 고통…. 마치 흐물거리는 액체 마냥,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바니. “……뭘 했다고 또 눕는데?” - 바니, 숨 쉰다. 바니, 일했다. “그럼 이제부턴 뭘 할 생각인데?” - 바니, 잔다. 더 이상의 노동은 거부다. “…….” 녀석은 한술 더 떠, 솜뭉치가 삐져나온 귀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충성도가 50밖에 안 되긴 하지만, 그런 거로 설명이 가능한 행태는 분명 아니었다. “형님! 괜찮으신 거죠?” 레오조차도 내 멘탈 상태가 염려되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보았고.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게으름뱅이 소환수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차주는 것뿐이었다. “그래. 가서 영원히 자라.” 퍼억- 그리고 이 폐급 토끼는, 힘없이 날아가 몬스터 무리의 한 가운데 그대로 처박혔다. - 내 솜…! 소중한 내장 기관이……! 그런데 내가 열받는 건. 단순히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는 문제아여서, ‘쓸모없어서’가 아니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패시브 스킬, '침대 밖은 위험해'가 발동됩니다.] 이렇게 폐급 행동을 일삼는 어이없는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대상: 바니가 '절대 나태' 상태에 돌입합니다.] 놀랍게도 이 녀석은, 전투에 꽤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소환수 ‘바니’의 물리/마법 방어력이 500% 상승합니다.] [소환수 ‘바니’를 기준으로, 반경 10m 내의 적들의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40%만큼 감소합니다.] [‘바니’가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조금이라도 움직일 시, ‘절대 나태’상태는 해제됩니다.] 그러니까 ‘바니’의 포지션은 꽤 고성능 광역 디버프를 가진 ‘탱커’였고. 내가 이 녀석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조금만 더 능동적으로 움직여주면, 고유능력 자체는 진짜 S급 패시븐데…….’ 듣기만 해도 힘 빠지는 축 처지는 목소리와 더불어, 이 녀석에게 부여된 고유능력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었다. ‘아니, 물마방 상승량도 그렇고 디버프 수치도 그렇고. 이걸 이렇게밖에 못 써야 하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나마 이 성향의 장점을 찾는다면… 소환시 소모되는 마나량이 극도로 소량이라는 점. └ ㅋㅋㅋ 방장 어질어질할 만 해 ㅋㅋㅋ └ 그냥 소환수가 아니라 소환 토템 정도로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 └ 그렇게 생각하면 개이득임ㅋㅋ 디버프 성능은 개쩔긴 해 하지만 이 와중에도 토끼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면, 남아 있던 의욕조차 사라질 정도였다. 촤아악-! [소환수 ‘바니’가, 루멘 고스트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 때려라…. 반격도 귀찮아……. 그래서 나는 오히려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써먹어 준다.’ 하늘 같은 상사의 일터에서 드러누워 있는 이 폐급 부하직원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긴 것이다. - 죽어서 돌아가면, 쉴 수 있겠지. 이 자식 봐라? 어차피 죽지도 않으면서. 안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소환수는 죽지 않거든. 단지 역 소환될 뿐이니까. - 바니는 안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이건, 상당히 불온한 의도가 담긴 대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냥 퇴근해서 쉬고 싶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기이이익-! 그게 지금 내가, 어지간하면 쓰지 않는 무기인 ‘활’을 든 이유였다. 핑- 피피핑-! 그리고 새로운 파티원들의 등장이, 너무나도 반갑게 느껴진 이유였다. “데이브 님, 그때…… 탱커… 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우와! 토끼다! 귀여워!!” 고오급 힐러 세일라 노빈과 미친 폭파광 엘리시아 로웰. 이 두 사람이 파티에 합류한다면……. - 바니, 죽기도 힘들다. 이 또한 저주……. 저 문제아 소환수의 버릇을 고쳐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내가 노빈과 로웰을 파티에 영입하고 싶었던 건, 당연히 사냥터가 ‘루멘티스 폐광’이기 때문이었다. 딜 하나만큼은 확실한 화염 법사와 능력 있는 힐러가 포함된다면……. 루멘티스 폐광 한정으로는, 사냥 효율이 배수로 증가할 테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크라이트 웜(Crite Wyrm)까지 달달하게 날먹한다면… 30레벨 후반까지는 정말 고속도로라도 뚫린 듯 레벨업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흔쾌히 섭외에 응해줄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었다. 로웰은 몰라도 세일라 노빈의 경우, 첫 만남부터 계속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게 느껴졌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정확히는 아직 모르겠지만…… 절대 평범한 힐러가 아니란 말이지.’ 지난번 파티 사냥이 끝나갈 때쯤 깨달았던, 세일라 노빈의 ‘진짜 실력’ 때문이었다. ‘단순히 스킬만 보고 세인트 키퍼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2차 클래스인 세인트 가디언 (Saint Guardian)일 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건 단순한 의심이고, 추측이 틀릴 확률이 훨씬 더 높긴 하다. 2차 전직까지 한 세인트 가디언은 랭커 파티에서도 귀족 대우를 받을 만한 인재인데……. 사람만 좋아 보이던 벨릭 형님과 루멘티스 폐광이나 올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빈의 스펙이 40레벨대는 아득히 초월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지금 내 파티에선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오! 한 분은 마법사, 한 분은 힐러예요?” “네, 맞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우와, 저 힐러랑은 파티 진짜 처음 해보는데!” └ 그야 우리 레오는… 대륙 넘어와서도 방장이랑만 파티하니까……. └ 레오좌 정도면 어디 길드 들어가서 전용 힐러까지도 지원받을 만 한데 ㅠㅠ 그래서 제가 개쩌는 힐러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형님들? └ ㅇㅇ저 노빈이라는 친구, 지난번에 보니까 잘치긴 하더라고. └ 솔직히 저 힐러 없이 폭파광 마법사 기용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긴 해ㅋㅋ └ 방장이 ‘회피반격탱’ 할 거 아니라면 말이지. 그러니 지금부터 진짜 제대로 달려봅니다! 이번 주 안으로 33레벨까진 찍는 게 목표거든요. └ 방장 갑자기 레벨업 달리는 이유가… 그 헌터즈 스쿨인가 그거 때문이랬나? └ ㅇㅇ맞음 거기 지원했다고 했음. └ 캬ㅋㅋㅋ 방장 합격했으면 좋겠다. 거기 나가면 방송 꿀잼 될 것 같은데ㅋㅋㅋ └ 근데 서류상 스펙으로 보면 방장 개허접 아님? └ ㅋㅋㅋㅋㅋ이성환 강소희 이런 애들 지원했다던데ㅋㅋㅋ 방장 서류 광탈각임ㅋㅋ 저기요, 팩폭 자제 좀요? “…….” 근데 이 성좌놈들은 대체 어떻게 지구 예능 프로그램을 이렇게 잘 아는 걸까. 어차피 헌터 예능 참가자들도 결국 라이카 스트리밍은 다 켜놓은 채로 촬영 들어가서 그런 거려나……? └ 맞짘ㅋㅋ └ 그래서 랭커들 방송이 꿀잼인 거임 ㅇㅇ 콘텐츠가 많으니까ㅋㅋ 어쨌든 성좌들이랑 잠깐 잡담을 나누던 사이, 완성된 우리 4인 파티도 슬슬 전투 준비가 끝났다. “자, 그럼 내려가 볼게요?” 근거리 딜러 하나에 원거리 딜러 둘. 마지막으로 쉴드 서포팅에 특화된 힐러까지. ‘이 정도면 괘씸한 토끼 녀석을 극한으로 써먹기 딱 최적화된 파티 구성이긴 한데…….’ 하지만 오늘 정말 바니의 버릇(?)을 고쳐놓을 수 있을지.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일 것 같았다. 5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지만, 노빈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이건 당연한 거였다. 애초에 노빈의 레벨은… 노바르크 군도에서도 긴장감 느낄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40레벨 망령들 따위는 등장하든 말든, 노빈에게 아무런 위협을 줄 수가 없다. 그러니 전투에서 노빈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딱 하나. 힘 조절을 못 해서 너무 과한 힐이나 서포팅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뭐, 이거야 적당히 하면 될 거고.’ 그래서 전투가 시작됐다는 건, 사실상 노빈에게는 데이브에 대한 ‘관찰’이 시작됐다는 의미였다. 대체 왜……. 검을 그렇게 잘 쓰면서 탱커 코스프레에 궁사 코스프레, 소환술사 코스프레까지 하는 건지. 그 이유가 뭔지 너무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은 걸 참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뭔가 이유가 있긴 할 텐데.’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로운 상황이 되어버린 면도 있었다. ‘설마 활도 잘 쏘나?’ 그리고 파티 사냥이 시작된 지 정확히 1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요주 인물(?)인 데이브는… 그녀의 기대를 아주 훌륭하게 충족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 자식… 사실 원래 궁수였던 건 아니겠지……?’ * * * 피잉-! [파티원 데이브(Dave)가 루멘 고스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물리 공격에 거의 면역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냥터에서 활을 쏘려면 적어도 화살에 마력을 씌울 줄 알아야 하고……. 일렁이는 유령들의 실루엣 안에서 에임을 한 치의 오차조차 없이 정확하게 잡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노빈이 아무리 고스트와 상성이 좋은 신성 계열의 공격 버프를 걸어줬다고 한들. 피이핑-!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 동안 ‘기절’상태에 빠집니다.] 유령타입 몬스터를 대상으로 이렇게 헤드샷을 밥 먹듯이 터뜨리는 건…….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노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헤드샷 매드 무비를 찍고 있는 당사자가… 궁수 클래스가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아니. 궁수가 아닐 수는 없지. 어떻게 이렇게 활을 쏘는 사람이 궁수가 아닐 수가 있어?’ 원래부터 폭발실험(?) 외엔 아무 관심도 없는 로웰 언니야 데이브의 기행을 보고도 별생각이 없었으며. “형님! 좋습니다! 다음으로 가시죠!” 처음부터 데이브와 친해 보이던 저 레오라는 검사 플레이어도 당연하다는 듯 전투에만 집중할 뿐이었지만. ‘이게 무슨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노빈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그녀의 상식을 완전히 깨부수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전력을 다해 전투 중인 다른 파티원들과 달리, 노빈이 관전자에 가까운 입장이라 더 잘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었다. ‘랭커 플레이어를 데려다 놔도…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게 가능은 한 걸까?’ 포지셔닝 하는 걸 보고 분명 근접 딜러라고 생각했는데, 활은 궁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잘 쏘고. “…….” 게다가 사령술사들이나 쓸 법한 저 괴상한 소환수는 대체 어떻게 부리고 있는 것이며……. “로웰 님! 잠깐 캐스팅 정지! 마나 한 타임 채워주시고!” “네, 데이브 님!” “바니 안쪽으로 던질 테니까, 레오도 잠깐 어그로 받지 말아봐.” “옙!” “노빈 님은 쉴드 쿨타임 돌았죠?” “아, 네네.” “힐 쿨은 아직 좀 남았을 테니까, 일단 쉴드는 레오 위주로 봐주세요.” “그…러도록 하죠.” 그 와중에 파티원 스킬 쿨타임까지 전부 다 계산하고 있을 정도로… 치밀하고 깔끔한 파티 오더까지. ‘으음.’ 노빈은 지금, 자신의 머릿속이 고장 난 느낌까지 받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저 데이브라는 플레이어를 납치해다가… 길드 실험실로 데려가 해부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마법이나 신성력도 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러다 보니 문제 아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원래 목적이었던 데이브의 정체에 대해 유추하는 건 어느새 점점 잊히고 있었고……. ‘그럼 혹시…… 이런 것도 가능하려나?’ 오히려 데이브가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노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써서는 안 되는 스킬(?)을 발동해 버렸다. 우우웅-! [성흔의 낙인 (Revelation : Stigmata) 스킬을 발동하였습니다.] [범위 내 루멘 고스트의 ‘약점’을 강제적으로 생성합니다.] ‘세인트 가디언’으로 2차 전직을 해야만 습득할 수 있는… 고차원의 신성 디버프 스킬을 써버린 것이다. ‘어차피 이게 뭔지 알 사람도 없을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 지금까지 노빈이 사용했던 스킬들은, 그 위력이 오버 스펙일지언정 모두 1차 히든 클래스인 ‘세인트 키퍼’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노빈은 사실 세인트 키퍼가 아닌 상위 클래스 ‘세인트 가디언’이었고. 이건 오로지 노빈만 가진 유니크 클래스였다. 그러니까 노빈이 ‘성흔의 낙인’을 써본 건, 데이브의 역량을 더 끌어내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자, 데이브. 이번엔 뭘 더 보여줄 수 있지?’ 스킬 발동과 동시에, 루멘 고스트들의 심장 부근에서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는 십자 모양의 낙인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펑- 퍼펑- 퍼퍼퍼펑! 노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파티원 데이브(Dave)가 ‘성흔(Stigmata)’을 타격하였습니다!] [파티원 데이브(Dave)가 ‘성흔(Stigmata)’을 연속으로 타격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성흔 마력(Stigmata Energy)의 폭주가 시작됩니다.] ‘뭐…… 라고?’ [고유 발동 능력, ‘성흔 폭발(Stigmata Explosion)’의 발동 조건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스킬을 발동하시겠습니까?] 어느새 노빈의 두 손 위에서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성스러운 기운의 결정체. 그걸 확인한 노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이거 발동 조건을… 딜러 혼자서 충족시키는 게 가능한 거였다고?’ 저도 모르게 양손에 흡수된 신성력을 그대로 폭발시켜 버렸다. 콰아아아-! * * * 노빈과 로웰을 파티에 영입했던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 같은 선택이었다. 로웰이야 거의 정확하게 기대했던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정도였지만……. 꼬맹이 힐러 녀석은, 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인재였거든. └ 와, 방금 뭐냐 ㄷㄷㄷ └ 방장 방금 대체 뭐 한 거임? └ 신성력같은데? 이건 또 무슨 스킬이야;; 방금 노빈이 발동시킨 스킬은, 나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스킬들이었다. ‘성흔’을 얻은 ‘세인트 가디언’ 클래스만이 발동 가능한, 신성계열 최상위급의 광역 연계 공격 스킬들. 그러니까 이 말인즉, 저 꼬맹이가 내가 예상했던 대로 2차 전직 힐러였다는 소리였으며……. 그중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히든 클래스인 ‘세인트 가디언’으로 전직한 고오급 인재라는 뜻이었다. ‘3차 힐러는 아니겠지? 하긴. 그쯤 되면 지구에선 글로벌 랭커일 테니까…….’ 만약 여기서 3차 클래스 중 ‘세인트 이지스’로까지 전직에 성공한다면, 지금 지구 서버 기준으로는 세계 최강 힐러가 될 가능성도 있는 어마어마한 포텐을 가진 인재인 것. ‘캬, 이게 선구안인가.’ 갑자기 노빈과의 인연을, 이 ‘루멘티스 폐광’에 한정하고 싶지 않아져 버렸다. 이 꼬맹이도 잘 키워서 레오처럼 버스기사로 활용한다면. 내 쌀먹 라이프가 한 차원 더 쾌적해질 것임이 본능적으로 느껴져 버렸으니 말이다. “아니, 노빈 님.” “예?” “대체 이걸 왜 이제야 쓰시는 거예요.” “그, 그야…….” “진즉 썼으면 사냥 2배는 빨랐겠다.” “…….” “저 템포 잘 따라갈 수 있으니까, 디버프도 최대한 다 활용해 줘요. 알겠죠?” “그…럴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텐션이 이렇게 고양된 이유는, 파티 사냥이 시작된 이후 게으른 소환수 녀석에게 노동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바니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절대 나태’가 발동한 바니의 압도적인 탱킹력은 로웰의 화염 난사에도 꽤 잘 버티는 수준이었고. “앗! 토깽이 다 타버렸어!” “탄 게 아니고, 원래 까맣습니다 로웰 님.” “아앗! 그런가요? 그럼 뭐 괜찮은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 노빈이라는 고오급 힐러가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힐을 계속 넣어줬으니……. “진짜네요! 노빈이가 힐 넣어도 다시 하얘지지 않잖아?” 우리의 유일한 탱커 바니는 쉴 명분조차 잃은 채 끊임없이 일해야만 했던 것이다. - 양심이 있다면 휴게시간을 보장하라 주인…. 무슨 심…? 나 그런 거 없는데? - 바니는 인권을 보장받고 싶다. 토끼 주제에 인권은 무슨. - 멍청한 주인. 인형의 권리를 바로 ‘인권’이라 부르는 거다. 드디어 미친 것 같기도 하고. “…….” 어쨌든 이렇게 내 생각보다 파티가 더욱 잘 굴러간 탓에….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32레벨이 되었습니다.] 나는 루멘티스 사냥 첫날 무려 세 개의 레벨을 올리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우와, 형님 벌써 32렙 찍었어요?” 하지만 이 시점 나는 볼 수 없었다. “그러게. 모레까지 35레벨도 잘하면 가능하겠는데?” “크……! 미쳤다!” 나와 레오의 대화를 듣던 노빈의 동공이, 마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K-아침드라마 여주인공마냥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5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5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사이…….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35레벨이 되었습니다.] 나는 무려 35레벨이 되어버렸다. “레오 너는 이제 몇 레벨이지?” “전 38입니다, 형님.” “어우 이제야 좀 따라잡았네.” “에이… 한 일주일 정도만 이 패턴이면 역전당할 거 같은데요?” 라이카에서는 파티 플레이를 한다 해도, 경험치를 공평하게 나눠 갖지 않는다. 라이카의 시스템은 은근히 합리적인 구석이 많았고, 때문에 경험치 분배 방식도 전투 기여도에 비례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레오와 같은 파티로 계속 성장한다 하더라도, 근시일 내에 레오의 말처럼 될 거긴 했다. 내가 항상 레오보다는 기여도가 높은 구조였으니까. 어쩌면 온갖 잡기술을 다 쓰는 내 레벨업 속도와 어느 정도 페이스를 맞추고 있는 레오가 대단한 건지도 몰랐고 말이다. 어찌 됐든. “저는 일단 여기까지예요, 데이브 님.” “고생하셨습니다, 노빈 님.” 우리 네 명의 루멘티스 파티는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아주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저도 재밌었어요. 덕분에 광석도 많이 모으고.” “로웰 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름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 그런지, 나는 로웰과 노빈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게 되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유럽 출신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되었으며……. 영어권 플레이어들의 경우 자신의 본명이 플레이어 네임에 대부분 그대로 등재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게이트 밖에서 만나더라도, 전 노빈이라 불러주시면 돼요.” “그러죠 뭐.” “조만간 한국 놀러 갈 거니까, 연락했는데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그에 더해 노빈이 K팝 팬(?)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근데 한국은 왜 오시는 거예요, 노빈 님?” “그 K팝… 가수 누구였지. KTX였나?” 예……? 요즘 아이돌 세계관에서는 기차 형님도 K팝 아이돌로 데뷔합니까? “아무튼 뭐 때문에 보러 가야 될 일이 좀 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때 노빈이 말한 남자 아이돌은 KTX가 아니라 KTG(Keep The Glow)라는 친구들이었고… 내 혈육의 방에 포스터까지 걸려 있던 유명한 분들이셨더랬다. “혹시 그때 로웰 님도 같이 오시나요?” 로웰의 경우… 본업이 헌터가 아니라는 특이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음, 아마도 전 아닐 것 같네요. 논문 때문에 바빠서.” “영국에서는 헌터도 논문을 씁니까……?” “아, 저는 헌터라기보단, 연구를 좋아하는 연구자라서요.” 그녀의 본업은 박사 과정을 수료 중인, 명문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광석 다 떨어지면 또 연락드려도 되죠?” “물론입니다. 한 40레벨 초반까지는 종종 여기서 사냥할 수도 있어요.” “오, 그러면 사냥하시면서 모은 광석은 꼭 저한테 다 팔아주세요!” 로웰이 게이트 안에 들어오는 이유가 오로지 ‘폭발실험’과 ‘루멘티스 광석 채굴’ 때문이라는 건, 그녀가 대학원생이었다는 사실보다도 믿기 어려웠지만. ‘무슨 헌터계의 오펜하이머도 아니고…….’ 두 눈까지 반짝이며 자신의 연구에 대해 설명하는 걸 보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제가 지금 진행 중인 이 실험만 성공시키면, 완전 연소를 현실에 진짜로 재현할 수가 있게 되거든요?” 그게 뭔데요. “2,000°C이상에서 일어나는 열 해리 현상을 마력으로 억제할 수 있다면…….” 그렇게 열변을 토하셔봐야 문과생은 이해할 수가…….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요, 이론상 화염의 온도를 태양 표면과 비슷한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로웰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폭발 실험 매개체로 가장 효율적이고 높은 성능을 내는 재료가 바로 이 루멘 광석이라나 뭐라나.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니, 파이로 소서러(Pyro Sorcerer)라는 그녀의 히든 클래스가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특이하긴 해. 역시 플레이 방식이 좀 비범해야 특별한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건가.’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가 지구 서버를 플레이하면서 봤던 모든 클래스 중, 유일하게 완전히 처음 보는 클래스가 바로 이 파이로 소서러였다. 어쩌면 노빈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수준의 숨겨진 잠재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로웰인 건 아닐까? “그럼, 조만간 또 연락 드릴게요!” “종종 연락하자고요.” 어쨌든 아쉬운 가운데 두 사람은 먼저 로그아웃했고. 둘이 남은 나와 레오는 루미스 영지로 귀환해 퇴근을 준비하며 인벤토리를 정산했다. “오우! 오늘은 좀 짭짤한데요, 형님?” “그래?” “계산해보니까, 한 65LP 정도 흑자 난 것 같아요.” 나와 함께 파티를 하다 보니 플레이 방식까지도 물들어버린 건지, 레오도 매일 퇴근 전에 오늘 하루의 손익을 정산하거든. └ 우리 방장은 300LP쯤 벌었을 텐데……. └ 후원까지 합하면 거의 1000LP는 될 걸? └ 우리 레오 무급으로 그만 부려먹고 돈 좀 나눠줘라 방장. 그건 싫은데요. 그리고 무급이라니. 레오도 하는 만큼 다 벌어가고 있잖습니까. └ 이런 악덕 사장! 아니, 솔직히 후원 빼면 번 거 자체는 비슷하잖아요! 레오가 포션을 많이 써서 남는 게 적은 거지. └ 결과의 평등의 중요한 법이거늘……. 저는 자본주의를 사랑하거든요? 꼬우면 인민 스트리머 찾아보시던가. “…….” 그런 의미에서 다시 꽤나 쌓인 통장 잔고를 확인하니, 갑자기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다. [현재 잔여 LP : 50221LP] 3만대까지 떨어졌던 잔고의 앞자리가 5까지 복구되니,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헌터즈 스쿨 출연료까지 달달하게 빨면, 10만 단위까지도 빠르게 복구될지도…?’ 그런데 <헌터즈 스쿨 3>에 이력서 넣는 건 어떻게 된 거냐고? 당연히 날짜 딱 맞춰서 그저께 제출했다. 정민이 녀석이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안되더라도 지원서는 넣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형님. 근데 그건 결과 아직이에요?” “뭐? 헌터즈 스쿨?” “네네.” “아직 뭐 안 왔어. 발표 기한 내일까지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지 뭐.” 내가 이런 건 또 철저하거든. 취준 시절에 이력서만 몇 장을 넣어 봤는데……. “와, 형님 진짜 되셨으면 좋겠어요.” “왜?” “그야, 재밌잖아요. 솔직히 형님이 이성환 같은 슈퍼루키랑 경쟁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하. 이성환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각성자 커뮤니티에서 그렇게까지 추앙하는지 궁금하긴 해. 해외 팬들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던데. “그리고 거기 나가서 인지도 쌓으면, 형도 진짜 인플루언서 될 수 있을걸요?” “그런 게 탐나면 너도 지원하지 그랬냐. 너도 자격 요건 충분하잖아?” “솔직히 조금 고민하긴 했는데, 아시잖아요 형.” “뭘?” “저, 실버 나이츠 입단이 꿈인 거.” “아하.” 레오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일단 <헌터즈 스쿨>의 가장 기본이 되는 포맷을 알아야 한다. 그건 바로 나처럼 출연하게 되는 100명의 멘티들이 뭘 위해서 경쟁하는가에 대한 것. 그리고 이건 상당히 심플했다. 헌터즈 스쿨에 지원하는 지원자들의 목표는 최후의 5인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그 최후의 5인에게 주어질 혜택은 무려 랭킹 10위권 최상위급 길드에 입단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실버 나이츠에 입단하고 싶은 레오의 입장에서는 여기 지원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는데……. ‘아니, 길드 입단이야 결국 자유인 거고…. 출연료만 최대한 빨아먹으면 되는 거 아냐? 그다음에 기사단 선발전인지 뭔지 그거 하러 가면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려다가 참아보기로 했다. 뭔가 순수한 레오의 열정을 더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지. └ 그런 기분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거다, 방장 놈아. 어쨌든 인벤토리 정리까지 마친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고 퇴근 도장을 찍었다. 내일부턴 노빈과 로웰이 함께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아마 우리 둘은 파티 사냥을 할 것 같거든. 30레벨은 넘겼으니 사냥터야 바뀔 수도 있겠지만 뭐……. [로그아웃 장소 : 알테리온 대륙 – 루미스 영지] [플레이어 : ‘데이브(Dave)’] [‘라이카-Laika’의 세계에서 접속을 종료합니다.] [접속 해제 시간 : 20시 17분]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지이잉-!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고, 무심코 폰을 꺼낸 나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건율’님, <헌터즈 스쿨 3> 멘티 참가자로 출연 확정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응……? [자세한 면접 일정 및 오리엔테이션 안내는 첨부 파일을 확인해…….] [……치명적인 결격 사유만 없으시다면, 오프라인 면담을 통해 계약이 진행될 것으로…….] 얼떨떨한 표정이 된 나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정민이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기는 했었지만. “호오.” 이게…… 진짜로 된다고? 5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시율은 오늘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주말이라 그런 건 아니다. 취준생에게 주말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었으니까. 취준생의 주말이란, 마치 배터리 없는 에어팟…이랄까. 그러니까 시율을 행복하게 만든 건, 단 한 통의 LMS 메시지였을 뿐. 띠링- [Web발신] 8291****152 이건율-주계좌이체 입금 1,000,000 잔액 1,037,055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뜬금없이 호적 메이트로부터 100만 원이라는 거금이 입금된 것이었다. [나 : ㅇㄱ ㅁㅇ?] [호적 메이트 : 아껴 써라.] [나 : 뭔데? 진짜 준다고?] [호적 메이트 : ㅇㅇ] 요즘 건실하게 알바 뛰러 다닌다더니……. [나 : 헐] [나 : 미친;] [나 : 오빠;;] [나 : 아니, 오라버니..] [나 : ♥] [호적 메이트 : 뭔데;;;] 30년 만에 드디어 철이 든 게 분명한 모양이었다. [나 : 지금 계신 곳이 동쪽이신가요 서쪽이신가요?] [나 : 그쪽으로 절 한 번 올리겠습니다 행님 (-ω-ゞ] [나 : 충성충성 (-ω-ゞ)] [호적 메이트 : ㄲㅈ;] [나 : 넵,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쇼^^] 그래서 시율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독서실에서 조기 퇴근하기로 결정했다. 지갑 사정이 이렇게 두둑해진 데다 날씨까지 따땃하고 화창했으니……. 마라탕 한 뚝배기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나 : 야, 임민정.] [MJ : ㅇㅇ?] [나 : 저녁에 참지마라 ㄱ?] [MJ : 한주 정도는 가능하면 참기도 하고 그래라;; 너 그러다가 위에 구멍 난다?] [나 : 나 지난주에 ㄹㅇ루다가 안 먹었음!] [MJ : 구라 ㄴ] [나 : 5시까지 나오셈.] [MJ : 하……. ㅇㅋ] 마라탕 엄청 좋아하면서(빼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꼭 한 번씩 튕기는 베프를 호출한 뒤. 집으로 돌아가 적당히 외출 준비를 한 시율은, 대충 침대 위에 가방을 던져두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 “딸, 어디가?” “약속!” “누구 만나는데? 민정이?” “어어.” “늦지 마!” “족발 사 올게!” “조금만 늦어!” “오케이 마미!” 오랜만에 지갑이 두둑해지자, 마치 온몸에 활력이 도는 듯한 기분이 된 시율. ‘햐, 이게 인생이지.’ 흥이 주체가 되지 않은 나머지 전봇대와 하이파이브까지 해버린 시율은, 화끈거리는 손을 어색하게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5분 뒤, [참지마라]에 도착했을 땐. 이미 도착해서 집게와 바구니까지 들고 있는 베프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정쓰, 완자 꼬치 다 털어가면 안 돼?” “깜짝이야, 왤케 빨리 옴?” “……? 네가 나보다 빨리 온 거 아님?” “나야 집이 앞이니까.” 호기롭게 맵기 2.5단계를 선택한 시율은, 민정이 미리 잡아 둔 창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여느 때처럼 시답잖은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눈 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스마트폰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잠깐. 민정쓰. 동작 그만.” “뭔데?” 시율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 폰 뒤집어 봐.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엥? 왜?” “악!!!!!! 미친뇬아!!! 살살 뒤집으라고!!!!”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우연히 시선이 닿은 민정의 폰 케이스 안쪽에서…… 최애가 담겨있는 ‘전설의 시세 10만 원짜리 미공개 포토카드’를 발견해버린 것이었다. “너… 저거 뭐야? 저 케이스 안에 있는 거, 우리 오빠 미공포 아니야?” “아 이거? 저번에 친구가 앨범 샀는데 중복으로 뽑아서 받음.” 현시점 대한민국 탑 남돌이자, 시율이 벌써 5년째 덕질 중인 아이돌 KTG. 그중에서도 최애의 미공개 포토카드가 친구 손에 들려있었으니, 시율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야… 너 저거 지금 시세가 얼마인 줄 알아? 치킨이 다섯 마리야. 근데 저 귀하신 분을… 슬리브도 없이 저 좁은 케이스에 쌩으로 가둬? 오빠 얼굴에 기스 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니 무슨 종이 쪼가리 하나 가지고… 그냥 예뻐서 끼운 건데.” 심지어 지금 시율의 통장 안에는, 최애를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총알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닥쳐. 폰 케이스 벗겨. 당장.” “싫은데? 빼기 귀찮아.” “오늘 마라탕에 꿔바로우, 후식 탕후루까지 풀코스로 쏜다. 내놓으라고.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야.” “손님, 혹시 포장해 드릴까요?” “이리 내.” 물론 그 총알을 제공해준 장본인이 봤다면… 격노했을 광경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 오빠… 저런 누추한 곳에서 고생 많았어어…….” 친구 손에 들린 포카를 휙 낚아챈 시율은, 극세사 안경 닦이를 꺼내 조심스레 닦기 시작했다. 물론 민정은 시율의 그 행태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말이다. “대체 아이돌 덕질은 왜 하는 거야?” 그런 민정의 반응에 어이없는 표정이 된 시율. 자신을 덕질의 세계로 처음 이끌었던 장본인이 민정이었으니, 시율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게 당연했다.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포토카드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시율을 보며, 민정은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슬쩍 꺼냈다. 사실 아이돌 덕질 어쩌고 운운한 건, 지금을 위한 빌드업! 툭- 준비해뒀던 사진을 찾은 민정이, 시율의 앞에 자신의 꽉 찬 폰 화면을 슬쩍 들이밀었다. “야, 그 종이 남친은 잠시 넣어두고 이것 좀 봐봐.” 물론 시율은 포카를 양손에 꼭 쥔 채 시선도 주지 않았지만……. “아 뭔, 나 지금 안구 정화 중이야. 너나 좀 치워.” 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업을 개시했다. “너희 오빠가 청량한 이온음료라면… 여기 이분은 숙성된 위스키야. 일단 장르가 다름.” “뭐, 뭔데.” “여기 턱선 좀 봐라. 베일 것 같지 않냐? 여기서 미끄럼틀 타면 바로다가 그냥 부산까지 간다니까?” 민정의 영업에 약간 관심이 생긴 시율은, 친구의 폰 화면을 슬쩍 곁눈질하며 포토카드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조금 더 진지하게 영업 당해 볼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누… 군데? 신인 배우?” “배우 아니고 헌터.” “헌터?” “나도 얼마 전에 갑자기 치였는데, 지금 못 나오는 중. 존함은 이성환.” “좀 생기긴 했네.” “생기기만 했게? 어깨 태평양인 것 좀 봐.” “으음.” 시율의 눈이 화면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자, 민정은 흐뭇하게 웃으며 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아이돌은 육아하는 맛으로 덕질한다며?” “……그렇지?” “육아 끝났으면 이제 결혼할 남자 찾아야지.” “그, 그것도 맞긴 해.” “아들 하나 챙겼으면 남편 찾는 게 이제 국룰 아니냐?” 뭔가에 홀리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시율은, 문득 당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야, 민정쓰. 너 갑자기 입 터졌다? 원래 이렇게 말 잘했냐?” 하지만 민정의 공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폰을 슬쩍 집어들어, 미리 다운받아 뒀던 포스터 한 장을 화면 위에 띄운 것이다. “심지어 한동안 굶을 일도 없다는 거임. 지난주에 떡밥 뜸.” “뭐? 헌터도 떡밥이 따로 있어? 자컨이라도 만드나?” 시율의 질문에 민정은 고개를 까딱까딱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헌터즈 스쿨 3> 곧 시작하거든. 설마 이걸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리얼? 미친….” 아무리 헌터에 별 관심이 없던 시율이라 해도, <헌터즈 스쿨>은 모를 수가 없었다. 지난 5년 내 모든 예능을 통틀어, 가장 성공했던 시리즈가 바로 이 <헌터즈 스쿨>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역대급 흥행을 거뒀던 시즌 2는, 시율도 모든 화를 본방으로 챙겨봤을 정도. 다만 스케일이 워낙 커서 그런지 시리즈 간 텀이 길었기 때문에, 시율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분이 그럼, 이번 시즌 제작진 원픽인가?”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을걸?” “왜?” “스펙도 역대급이거든.” 신이 난 민정이 속사포처럼 정보들을 쏟아내었다. “너 시즌 2 때 윤기명 기억나지?” “알지. 나 걔한테 투표까지 했는데.” “걔가 47레벨이었잖아.” “어어, 맞아. 혼자 엄청 레벨 높았었어.” “이분은 49라더라. 이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이래.” 민정의 폰 화면에 시선이 고정된 시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존잘남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제멋대로 나대기 시작했다. “캬, 복장 미쳤다.” “인정…….” “기사단 제복 리얼 대박 아니냐? 컨셉도 아니고 실제 전투복. 심지어 실버 나이츠 로열패밀리래.” 처음 보는 종류의 존안을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느낌. “미친. 이름, 아니… 존함이 뭐라고?” 친구가 다 넘어왔음을 확신한 민정의 입꼬리는 어느새 슬쩍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일단 마라탕부터 먹자, 시루. 먹고 나서 카페 가면 다시 브리핑해줌.” * * * 어느덧 <헌터즈 스쿨 3>의 촬영일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촬영일이 다가올수록… 전부터 미뤄두고 있던 한 가지 고민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후우.” 나가서 잘할 자신이 없어서 그러냐고? 그건 아니다. 뭐, 너무 빨리 떨어지면 좀 아쉽긴 할 것 같은데……. 그래봐야 손해 볼 것도 없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이걸 걱정거리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만 내 걱정은 바로. ‘아버지 어머니께 어떻게 말씀드리지.’ 이제 슬슬 가족에게 본업에 대해 오픈할 때가 됐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동안 틈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빌드업을 해두긴 했지만. “엄마. 정민이네서 일해보니까, 게이트도 그렇게 위험한 것 같진 않던데?” “헛소리 금지다, 큰아들.” 그렇다고 한들 부모님 앞에만 서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으, 나도 재능 생겼으면 좋겠다.” “뭔, 뜬금없는 소리여?” “헌터들 말이야. 진짜 돈 잘 벌더라고, 아부지.” “아들아.” “예?” “돈 걱정은 하지 말어. 지금도 어떻게든 조금씩 벌어 갚고 있잖냐.”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일단 저질러 놓고 용서를 구하는 게, 여러모로 가장 빠른 길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일단 첫 화 방영되고 두 분 아시게 되면, 그때 모아뒀던 돈 묵직하게 한 번 꽂아드리면 괜찮지 않을까.’ 모아둔 LP 절반 정도 환전하고 출연료까지 영끌한다면. 3~4억 정도 되는 3금융권 대출까지는 다 갚아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돈을 넉넉히 드린다 해서 아들 걱정이 사라지시진 않겠지만……. 어떤 일이 돈으로 해결되지 않을 땐, 혹시 부족하진 않았는지 고민해보라는 명언이 있다. ‘그땐 진짜로 1등 달리는 수밖에 없지 뭐.’ 실제로 출연이 확정되고 난 뒤,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었다. 그리고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이 <헌터즈 스쿨>에서의 1등은 생각보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문제들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거야 당연히 상금. 처음 정민에게 지원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내가 버는 돈의 대부분이 ‘밤의 추적자’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검희라는 방패가 생긴 지금은, 상금으로 우리 가족의 빚부터 먼저 갚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여기서 진짜 1등을 해 버리면, 그때는 부모님도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실 거다. 이거로 집의 빚까지 다 갚으면서, 그와 동시에 내가 재능 있는 헌터들 사이에서 실력을 ‘증명’한 셈이 되니까. 그러니까 한번 전력을 다해봐야겠다. 이게 뭐 진짜 랭커들 사이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고만고만한 꼬꼬마들만 제끼면 되는 문제 아니야? 나는 그런 고민들을 하며 뒤척이다 조금 늦게 잠이 들었고. 띠리리리- 띠리리리링-! 요란한 알람과 함께, 드디어 <헌터즈 스쿨 3> 첫 촬영일 아침이 밝았다. 5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5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헌터즈 스쿨> 첫 녹화 당일. 상암동 특설 스튜디오의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스튜디오 안에는, 한 자리에 모였다고 믿기 힘들 정도인 거물급 랭커들이 도착해 있었으니 말이다. 검 한 자루만으로 세계적인 랭커가 된 검희를 비롯하여, 국내 10대 길드 중 하나인 ‘태산’의 마스터 마광철. 역시나 10대 길드 중 하나인 이클립스의 이사이자, 천만 스타 인플루언서이기도 한 서지혁까지. 여기에 전설적인 1세대 헌터인 최재민과, ‘성녀’라는 키워드로 유명한 국내 힐러 랭킹 1위 한소은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니, 수많은 인파가 이곳 상암에 모인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휴, 차 막혀서 혼났네.” “그러니까요.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이 모일 줄은…….” 하지만 여기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사람 중 한 명인 검희는, 이러한 상황을 그렇게 즐길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거, 첫날부터 쉽지 않네.’ HBC 국장과의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하게 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방송에 노출되는 건, 그녀의 성격상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방송의 특성상 자신의 본명이 언급된다는 것도 불편한 요소 중 하나였다. 검희 엘리제는 자신의 본명을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각성자 위키만 검색해봐도 그녀의 본명이 ‘채유현’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별개라고 할 수 있었다. “후우.” 검희, 채유현은 답답한 듯 검지로 가면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따라 이 딱딱한 가면이 조금 더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다. “어이, 유현이! 너 오늘따라 더 까칠해 보인다?” 그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검희는 가면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보았다. 소파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 터질 듯한 근육질의 팔뚝으로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태산 길드의 마스터 마광철이었다. ‘에효, 저 속 편한 인간.’ 마광철과 눈이 마주친 채유현은 피식 웃었다. 사실 이 스튜디오 안의 인물들 중, 가장 편한 사이가 바로 눈앞의 마광철이었으니까. 그녀는 마광철과 함께 생사가 걸린 레이드를 꽤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었고, 그때마다 항상 마광철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였었다. 비록 첫인상은 상당히 단순 무식해 보이는 그였지만, 저 투박한 근육 덩어리가 전장에선 누구보다 든든한 방패가 된다는 걸 잘 아는 유현이었다. 그러니 마광철은… 위선자들이 득실거리는 이 바닥에서 그녀가 등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우이자 술친구였다. “숨 막혀서 그래. 오빠는 좋겠네. 얼굴에 철판 깔고 다녀서.” “뭐? 얘가 말하는 꼬라지 봐라. 다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마광철이 혀를 차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비타민 통을 툭 던졌다. “옛다. 챙겨 먹어.” “얼씨구, 누가 보면 오빠가 사 온 줄 알겠다?” “얼마 전에 잿빛 성채 다녀왔다면서?” “그랬지?” “너 요즘 너무 달리는 거 아니냐? 피부가 푸석해 아주.” “가면 쓰고 있는데 피부가 보이는 오빠 눈이 더 신기하네.” “내 눈엔 다 보인다, 임마. 근손실 오기 딱 좋은 안색이야.” 채유현의 입가에, 다시 피식하고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철컥-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한 명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두 분은 여전하시네요. 만나기만 하면 투닥거리시니 원.”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부드러운 목소리. 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고, 거기에는 깔끔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태블릿 PC를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무려 이클립스의 이사직까지 올라간 천재 마법사. 헌터 계의 아이돌이라 불리기도 하는 서지혁이었다. ‘이클립스의 여우.’ 그와 눈이 마주친 채유현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언제나 웃는 낯이지만, 머릿속엔 계산기가 24시간 돌아가는 인간. 능글맞은 성향이 그녀와는 상극과도 같은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몇 안 되는 랭커가 바로 그였다. “자자, 싸우지들 마시고 이거 보세요. 이번 라인업, 진짜 역대급이라니까요?” 서지혁은 들고 들어온 태블릿을 자연스레 탁자 위에 던져 올렸고, 그러자 태블릿과 무선으로 연결된 대기실 벽의 스크린에 자연스럽게 빛이 들어왔다. 피이잉- 스크린의 위에는, 그 유명한 돈지랄 마력총을 든 강민우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쯧. 난 이 새끼 마음에 안 들어.” 마광철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사내새끼가 주먹을 믿어야지, 장비빨이나 믿어서 쓰겠어?” “에이, 형님. 너무 꽉 막히게 보지 마십시다. 무기 한 자루에 수십억 태울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그걸로 몬스터만 잘 잡으면 그게 실력이죠, 뭐.” 서지혁의 능청스런 변호에, 마광철의 표정은 더욱 구겨졌지만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어쨌든 헌터즈 스쿨에 멘토로 출연하게 된 이상, 모든 멘티들을 최대한 편견 없이 바라봐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서지혁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흐음.” 그런 의미에서 채유현 또한 말을 아꼈다. 그녀야 속으로 마광철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굳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뭐… 서지혁 씨 말도 일리는 있네. 장비도 전력이니까.” “그것 보십시오! 역시 검희 님은 말이 통한다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작진으로부터 공유받은 첫 미션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도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첫 번째 입학 미션. 거기서 밑천 다 드러나지 않을까요?” 검희의 말에, 서지혁도 능청스런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입학 미션 던전이 ‘파밍던전’ 타입이었죠?” “맞아요. 그러니까 진짜 전부 템빨이었다면, 첫 미션 성적에서 F급 낙인부터 찍히고 시작하겠지 뭐.” 서지혁이 너스레를 떨며 화면을 넘겼다. “그럼 이번엔… 이 친구는 어떻습니까?” 다음으로 화면에 뜬 인물은 이성환. 실버나이츠의 로열 패밀리이자, 이번 기수의 강력한 우승 후보. 아마 서지혁이 가장 최근에 조회한 프로필 순서인 듯했다. “흐음.” 그때, 창가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깊게 패인 주름.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맹금류의 그것이 연상될 정도로 날카롭게 살아있는 남자. 청룡회의 길드 마스터이자, 대한민국 1세대 헌터인 최재민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이현무 마스터 말씀이시죠, 형님?” 마광철의 물음에 최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딘지 모르게 이현무 그 친구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뭐,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최재민이 입을 열 때는, 말 많은 서지혁 또한 조용히 경청하였다. 그도 그럴 게, 최재민은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1세대 헌터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게이트 사태 초기… 아수라장이었던 한국을 지켜낸 ‘시초의 5인’. 최재민은 실버나이츠의 수장 이현무와 함께 그 전설을 써 내려간,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분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지만.’ 채유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슬슬 멘토들이 전부 다 모였으니, 조금 진지하게 자리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이제부터는 이 대기실 안의 대화 내용도, <헌터즈 스쿨 3>의 방영분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든 삽입될 수 있을 것이었다. “아, 늦어서 죄송해요. 차가 워낙 밀려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기실에 나타난, ‘성녀’라는 이명을 가진 랭커 한소은. 역시 10대 길드 중 하나인 ‘헤일로’의 길드 마스터이자 국내 힐러 랭킹 1위였다. 대중들이야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이미지를 찬양하지만, 사실 유현은 그녀의 진면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여자. ‘뭐,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솔직히 ‘성녀’라는 이명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유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스크린에는 몇몇 멘티들의 프로필이 추가로 슥슥 지나갔다. 하지만 그 중, 특별한 관심이 생기는 인물은 딱히 없었다. ‘박하준’이라는 이름의, 완전히 처음 보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 여기 좀 보세요. 레벨 49가 한 명 더 있는데요?” 서지혁의 말에 마광철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뭐? 49가 또 있어?” 멘토들에게 미리 제공됐던 프로필 중에는 49레벨이 분명 이성환 한 명뿐이었으니. 다른 모든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꽤나 놀랄 만한 프로필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박하준 (19세 / 소속 없음)] 제대로 된 프로필 사진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을 한 소년. 한소은의 두 눈이 반짝였다. “박하준? 혹시 들어보신 분 계신가요?” 검희 또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화면을 다시 자세히 봤지만. 박하준이라는 멘티의 레벨은 분명 49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게이트 첫 접속 기준 200일 안에 49레벨을 달성한 괴물이… 이성환 말고 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친군… 서포터도 따로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0일 차에 49레벨이라는 기록은 검희의 것보다도 꽤 앞서는 기록이었다. 물론 게이트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하긴 어렵고, 특히 이성환의 경우 실버나이츠라는 거대한 배경까지도 가지고 있는 루키였지만. ‘야생에서 혼자 49라니. 확실히 흥미롭긴 한걸.’ 이 ‘박하준’이라는 참가자는 확실히 다른 게 느껴졌다. 나이도 19세로, 지원자들 중 가장 어린 수준이었고 말이다. “재밌네.” 가면 속 채유현의 눈빛에, 처음으로 흥미가 어렸다. “온실 속 화초 이성환, 야생의 잡초 같은 박하준이라…….” “에이, 검희 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성환 플레이어가 섭하죠. 사실상 실버나이츠에서는 받은 것 하나 없는 친군데.” “뭐, 어쨌든. 이러면 그림 좀 나오겠는데요?” 검희는 물론, 멘토들 사이에 묘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확실히 예측 불가능한 요소가 이렇게 하나둘 튀어나와 줘야, 프로그램 자체가 재밌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검희와 서지혁이 잠깐 대화를 나누던 사이……. 한소은은 슬그머니 다음 장으로 넘기며, 또 다른 타겟을 눈여겨보았다. “에스쿨랩 따님도 계시네요. 강소희 씨.” 중얼거리듯 말하는 한소은을 향해, 서지혁이 살짝 놀라며 물어보았다. “성녀님, 따로 아시는 분?” “뭐, 그런 것까진 아니고… 여기 에스쿨랩이요. 저희 길드랑 제휴 맺고 있는 곳이거든요.” “아하.” “그러니까 좀 반가워서요. 제가 잘 챙겨줘야겠는걸요?” 한소은은 특유의 하얀 미소를 지었고, 그런 그를 향해 검희가 한 마디 던졌다. “약한 소리 하기 없기예요, 성녀님.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면 재미없으니까.” “후후, 설마요. 오히려 더 ‘각별하게’ 챙겨줘야죠. 분량 충분히 뽑으시게.” 그렇게 상위권 참가자들에 대한 탐색전이 끝나자, 채유현은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이제 한 10분 남은 건가?’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약 12분 정도. 대기실의 멘토들도 각자 할 일들이 있는지 조용해졌고, 검희 또한 조용히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태블릿 페이지만 천천히 넘겼다. 어쨌든 이번 <헌터즈 스쿨>에서 괜찮은 인재를 발굴해낸다면 길드에 도움이 될 테니.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멘티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익혀볼 요량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그 순간. “……?” 한 이름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건율 (36세 / 소속 없음)] [플레이어 네임 : Dave] ‘데이브……?’ 곧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디서 분명히 많이 본 닉네임. ‘아!’ 채유현의 기억이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떠올랐다. 거래소에서 [제라투스의 깃발]을 팔았던 바로 그 플레이어. 그러면서 당돌하게도,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특이한 남자. ‘설마 그 데이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가면 속에 숨겨져 있던 채유현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또 엮이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 했으니 말이다. 자연스레 호기심이 커진 검희는 데이브의 이력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특이사항: <헌터즈 스쿨 3> 지원 날짜 기준 헌터 등록 30일 차 (추정). 33레벨 달성]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30일 만에 33레벨?’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속도다. 그녀 자신을 포함에 그녀가 아는 그 어떤 랭커도, 30레벨대를 한 달 안에 달성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니, 적어도 비슷한 수준이라도 있었어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이라도 해 보는데……. ‘40일 안에 30레벨도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이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됐다. 그래서 검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에이, 오타네.’ 130일을 30일로 잘못 적은 것. 아마도 작가들의 실수인 듯했다. ‘130일 만에 33레벨이라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긴 하지. 그 페이스로 2달 정도만 더 달렸으면… 충분히 40레벨 가까이 됐을 테니까.’ 검희가 그런 생각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때마침, 대기실 문이 열리며 FD가 들어왔다. “멘토님들!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6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오늘은 아침부터 꽤 분주했다.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났기에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출근 시간에 성수에서 상암까지 가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내 마음가짐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비장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1등. 무조건 1등을 해야 돼.’ 아침에 촬영 진행을 위한 부속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너무 가슴 설레는 부분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 모든 경쟁 미션에서 생존하고 1~3위를 달성한 플레이어는, 다음 중 하나의 특전을 보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길드 가입 선택권] [2. A급 헌터 라이센스] [3. 50만 LP] [선택은 높은 순위의 참가자가 먼저 진행하게 되며, 한번 선택된 보상은 다른 참가자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30만 LP만 해도 콧구멍이 벌렁거릴 정도였는데,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해버린 미친 수준의 상금! 50만 LP라는 거금을 얻으면, 단번에 우리 집 빚을 다 갚아버리는 거로 모자라 고유장비 해금까지도 엄청나게 가까워질 거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1등을 해야만 한다. 3등 안에만 들어도 가능성 있는 거 아니냐고? 가능성으로는 안 된다. 오히려 애매하게 3등에 걸쳤다가 상금을 먹지 못하면, 억울해서 눈물이 날지도 모르거든. 물론 우리 이정민 피디님께서는, 내 포부에 코웃음만 치셨지만 말이다. [1등? 혹시 미친… 건가?] [안 미쳤는데요.] [아니, 내 말 못 들었냐고. 참가자 평균 레벨 거의 40이라니까?] [나도 35까진 찍어왔다니까.] [아니, 그건 진짜 대단하긴 한데…… 너 이성환 몰라?] [알긴 해.] [그런 괴물들이 최소 열 명은 넘는다고.] [아무튼 난 1등 할 거니까, 그리 알고 계쇼, 피디 나으리.] [근자감 미쳤네 진짜.] [그러니까 혹시 기회 되면, 부정행위도 좀 시도해 보고 그래.] [지랄. 농담으로라도 그딴 소리는…….] [어허, 우리 친구 아니냐.] 어쨌든 정민이까지 만나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나자, 드디어 촬영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건율 참가자님?”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실게요.”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촬영장에 도착한 나는, 스탭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스테이지 내부로 입장했다. 정 사장이 어마어마한 스케일이라며 자신 있게 계속 어필하더니……. ‘돔 구장을 아예 다 빌려버렸네.’ 스테이지에 들어선 내 눈에 비친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자, 촬영까지는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 편하게 계시고요.” “자리는 이쪽이니까,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화장실은 미리 다녀오시는 게 좋아요.” 돔 구장의 상단에는… 화려한 조명과 수십 대의 드론 카메라들이 사방에서 스테이지를 비추고 있었으며. 대부분 도착한 참가자들은, 벌써 각자의 자리로 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받은 부분은, 구장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인파의 관객들이었다. 이거 단순히 무명 루키들이 참가하는 예능 아니었나? 멘토들이야 인지도 높은 랭커들이라 해도……. 대체 이런 꼬꼬마들 보러 무슨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몰린 건데? “후우.”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한번 둘러봤는데, 꽤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첫 촬영부터 곧바로 미션이 시작된다 했으니, 미리 몸을 예열시켜 두려는 모양인 듯했다. 뭐, 몇몇 참가자들은 친분이 원래 있던 건지 아는 척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있었지만. “…….” 딱히 그런 데 관심이 없던 나는, 그저 촬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 지루했던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단상 위에 쏟아지는 새하얀 조명과 함께,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내 잡념을 깨트렸다. ‘오.’ 이어서 단상 위로 걸어 올라온 사람은, 내 눈에도 꽤 익숙한 남자였다. 말끔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국내 최고의 헌터 전문 캐스터 김신우. 귀환자가 이런 사람은 어떻게 다 아는 거냐고? 퇴근하고 잘 때까지 쇼츠만 열심히 봤더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내 알고리즘이 모조리 게이트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그런가. 이쪽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내적 친밀감까지 생기더란 말이지. 어쨌든……. 무대 중앙까지 걸어 나온 그가, 특유의 시원한 목소리로 진행을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를 가리는 지상 최대의 서바이벌! <헌터즈 스쿨 3>의 입학식을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김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나는 한 번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관객석이 가득 들어차 있던 건 촬영 전부터 확인했었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대니,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던 것이다. 으음. 갑자기 살짝 부담스럽다. 설마 첫 화 방영되기도 전에…… 부모님께 알려지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김신우 이 양반, 목청 한번 좋네. 성능 좋은 마이크를 들고 있는 거긴 하겠지만, 이 커다란 함성 속에서도 목소리가 묻히질 않는다. “자, 긴말 필요 없겠죠? 여러분이 입학 시험을 치르게 될 무대, 바로 공개합니다!” 김신우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멘티들이 서 있던 경기장의 바닥이 투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지하에서부터 거대한 입체 영상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오오오―! 관객석에서는 다시 한번 함성이 울려 퍼졌고. 이번엔 나도 꽤 놀랐다. 아마도 이거 가상현실로 구현된 던전 같은 느낌인데……. 퀄리티나 스케일이 상당한걸? “와…….” 무너진 빌딩 숲과 덩굴에 뒤덮인 도로, 반으로 뚝 끊겨버린 남산 타워. 이건 그러니까…… 압도적인 스케일로 구현된 폐허의 도시 서울이었다. 아마 저기 남미 어느 국가처럼 서울도 초기에 게이트 폭주를 막지 못했었다면. 지금쯤 이런 모습이 되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보다 보니 알 수 없는 기시감 같은 게 드는데……. 착각이겠지? “미쳤다 진짜.” “퀄리티 봐.” 내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멘티들도 적잖이 놀랐는지,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더욱 집중해서 홀로그램 맵의 디테일을 관찰하고 있었다. 무너진 63빌딩 잔해의 기묘한 각도. 강남대로를 가로지르는 저 녹슨 파이프라인의 배치. 그리고 도로 곳곳에 뚫려 있는 맨홀의 위치까지. ‘뭐야. 왜 이렇게 낯이 익지?’ 하지만 내 생각은 이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다시 사회자의 설명이 이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번 미션의 테마는 [가상 던전: 얼어붙은 서울]입니다! 그리고 이번 미션의 의미는 바로…….” 스크린에 커다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등급 결정전] “여러분의 최초 등급 결정전입니다.” 김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은 조용해졌다. 특히 참가자들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또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등급 결정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헌터즈 스쿨> 시리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참가자들에게 각자의 등급을 책정하고, 그 등급을 기준으로 모든 대우를 차등하는 헌터즈 스쿨의 대표적인 포맷. 게다가 처음부터 높은 등급에 랭크될 수록 인지도를 쌓을 기회도 많아질 테니……. 멘티 참가자들의 입장에서는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는 미션인 것이다. “잠시 후 입장하시게 될 [얼어붙은 서울] 안에서, 여러분은 240분 동안 생존하셔야 하며…….” 사회자는 그 뒤로도 던전의 룰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이어갔고, 그 내용들을 제법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띠링-!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이 시스템 창에, 전부 다 담겨있었다. 〓〓〓〓〓〓〓〓〓〓〓〓〓〓 < 메인 시나리오 : 얼어붙은 서울 > ∎ 기본 룰 * 각 참가자는 던전 외곽의 무작위 좌표에 소환됩니다. * 파밍형 던전입니다. 던전 안에서는 외부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승리 조건 제한 시간 240분 동안 생존. 생존 시간을 기준으로 최종 순위가 결정됩니다. 최후 생존 시, 멘토들의 [최종 심사]를 통해 순위가 결정됩니다. 최후 생존에 성공한 모든 참가자는, [명예의 징표]를 보상으로 획득합니다. ∎ 핵심 목표 : 체온 유지 시작 체온: 37.0°C ‘얼어붙은 서울’ 던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추위가 몰려옵니다. 던전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체온을 지킬 더 다양한 수단을 얻어낼 수 있지만, 더 위험한 몬스터들이 등장합니다. 참가자들 간의 협동을 통해 던전의 난관을 극복하기를 권장합니다. 던전의 숨겨진 시스템을 간파하고 활용한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망 판정: 전투 등으로 인해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거나 저체온증으로 정신을 잃을 시, 던전 밖으로 이동됩니다. 회복 수단: [열기 구슬] 흡수. * [열기 구슬] 한 개당 0.1°C의 체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몬스터’ 처치 시, [열기 구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참가자’ 처치 시, 해당 참가자가 보유하고 있던 [열기 구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던전 보스 혹한의 군주, 동장군 (General Winter) 보스 처치 시, 모든 플레이어의 체온 감소 속도가 50% 감소합니다. 처치한 플레이어는, 더 이상 체온이 감소하지 않습니다. ※ 주의! 보스 처치는 던전 공략의 필수 조건이 아니며, 그러므로 아주 강력합니다. 〓〓〓〓〓〓〓〓〓〓〓〓〓〓 모든 룰이 공개되자마자 장내는 술렁거렸다. “음…… 랜덤 스폰이라고?” “이러면 팀 짜는 것도 쉽지 않네.” “완전히 개인전이야.” “야, PvP 허용이래. 이러면… 첫 미션부터 살벌하겠는데?” 여기저기서 불안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힐러나 서포터 계열 참가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홀로 떨어진 상태에서 강력한 몬스터나 전투 클래스 참가자를 만나게 된다면……. 상황에 따라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매운맛이긴 해.’ 그리고 모든 룰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몇몇 참가자들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시작했다. “체온이 몇 도까지 떨어지면 사망 판정인 겁니까?!” 이건 나도 확실히 궁금한 내용이다. 이 미션 안에서 가장 중요한 룰이기도 하니까. “그건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김신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제작진은 25°C 정도를 한계 체온으로 보셨는데, 멘토분들께서는 17~18°C에서도 여유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오호. 그렇다면 시스템이 강제로 제어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건데……. 또다시 장내는 웅성거렸고, 새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승리 시 획득한다는 명예의 징표는 어디에 쓰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이 <헌터즈 스쿨 3>이 진행되는 동안, ‘명예의 징표’는 곧 화폐가 될 겁니다. 이 이상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이후에도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내 기준에서 딱히 영양가 있는 질문은 보이지 않았다. “파티는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모든 참가자가 생존할 수도 있는 겁니까?” “이론상 가능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정도. 본능적으로 귀에 들어와 꽂히는 질문도 하나 있긴 했다. “열기 구슬은 혹시 거래할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던전 안에서 참가자들 간 모든 거래는 자유입니다.” 어쩌면 쌀숭이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없는 건지도 몰랐다. ‘일단… 여기서만큼은 1등이 최우선 목표겠지만. 그래도 만약 가능하다면, 쌀먹… 해야겠지?’ 성좌들이 들었다면 욕부터 박았을 생각을 떠올리면서, 나는 더욱 의욕을 불태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입학 미션에서는 스트리밍을 켤 수가 없을 듯 하다. 여긴 진짜 게이트가 아니니까. 이건 좀 아쉬운걸? <헌터즈 스쿨> 미션 중에 스트리밍을 켜면, 성좌들의 후원도 엄청나게 쏟아진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질문 시간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 참가자들의 표정이 버라이어티했기 때문인지, 사회자 김신우의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이 첫 번째 미션에서는, 단 한 명의 탈락자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 이건 그나마 양심은 있는걸? “누군가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미션이겠습니다만…….” “이후 미션으로도 멘티 등급은 얼마든지 변동될 예정이니, 최선을 다한다면, 기회는 분명 또 찾아오겠죠.” 그리고 다음 순간. 지이잉-! 돔 구장 가운데 가장 큰 스크린 위에, 다섯 멘토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 다섯 분의 멘토님들께서는, 결코 여러분의 ‘무력’만을 평가 기준으로 두지 않으실 테니 말입니다!” 사회자의 말을 들은 멘티들의 표정은 그나마 조금 밝아졌다. 아직 여기서 매긴 순위로 뭘 한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탈락’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적잖이 안심되는 것이다. 물론 내게도 사회자 형님의 이 말씀이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이러면 일단… 1회차에 2회차까지. 출연료 4천은 확보한 셈이잖아? 후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 그럼…… <헌터즈 스쿨 3>의 입학식을 시작합니다! 전송!” 사회자의 힘찬 외침과 함께, 눈부신 빛기둥이 참가자들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파아아앗―! 그리고……. [참가자 식별 코드를 확인 중입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가상 던전, ‘얼어붙은 서울’에 입장합니다.] 진짜 쇼가 시작되었다. 6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얼어붙은 서울’에 성공적으로 입장하였습니다.] [도시의 ‘완전 붕괴’까지 남은 시간 - 03 : 59 : 58] [참가자 ‘이건율(Dave)’님의 생존을 기원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잠시 후. 쏴아아아― 귓가를 때리는 거센 바람 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린 회색빛 빌딩 숲이었다. 도로는 갈라져 잡풀이 무성했고, 곳곳에 버려진 차량들은 붉게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풍경은 상당히 익숙했다. 왜냐면……. ‘이거, 강남대로잖아.’ 귀환 이후에도 한두 번은 가봤던, 너무 익숙한 강남대로의 모습이었으니까. 물론 그대로는 아니고 여기저기 변형된데다…… 완전히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긴 했지만 말이다. ‘이쯤이… 강남역 11번 출구 앞인가?’ 그런데 나는 한동안, 이 던전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풍경이 익숙한 이유 자체는 분명 강남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인 듯한데……. 그 이상의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계속 내 오감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풍경이 아니야. 뭔가 구조적인 기시감에 가까워.’ 좀 더 구체적으로 이 감각을 표현하자면, 언젠가 이런 종류의 던전을 공략해본 적 있는 느낌이랄까. “흐음.” 일단 주위를 조금 더 둘러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100명의 참가자를 서울의 꽤 넓은 지역 안에 무작위로 흩뿌려놓은 느낌이었으니, 시작하자마자 누군가와 마주칠 확률은 희박한 게 당연할 터였다. ‘아직은 추위도… 적당히 으슬으슬한 정도인 것 같고.’ 나는 습관적으로 인벤토리부터 열어 보았다. 띠링-! 그리고 내 예상대로의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분명 던전 밖에서 소환했던 인벤토리와 다를 바 없지만, 장비들을 꺼내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도록 비활성화되어있는 상태. 이건… 전형적인 ‘파밍형 던전’의 특징이었다. [‘얼어붙은 서울’ 던전 내에서는 외부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인벤토리 기능이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역시 이런 식이네.” 슬슬 머릿속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분명 ‘얼어붙은 서울’이라는 인공던전은 베타 서버에 존재했을 리 없는 던전이지만. 놀랍게도 난 이 던전을, 공략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몇 가지만 확인해 보면 충분하겠어.’ 실제 던전이 아니라 그래픽 쪼가리에 가까워서 그런 것일까? 한번 의심을 시작하자, 어색한 지점이 점점 더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저벅- 저벅- 도로 한복판으로 걸어 나간 나는, 길가에 널브러진 가로등 잔해를 발로 툭 걷어찼다. 깡-! 둔탁한 소리 대신 울려 퍼지는… 속이 텅 빈 맑은 금속음. “역시.” 이번에는 길가의 무너진 건물 외벽으로 다가갔다. 정확히는 콘크리트가 부서져 철근이 드러난 지점. 그 틈새에 다가간 나는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러 보았다. 스윽. 손끝에 묻어난 건 시멘트 가루가 아니라, 미끈거리는 검은색 기름때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찾았네.” 무너진 빌딩 잔해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 그곳에는 맨홀 뚜껑처럼 위장된 원형 구조물이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그냥 하수구라 생각하고 지나치겠지만, 내 눈엔 다르게 보였다. 결정적으로 뚜껑 가장자리에 아주 미세하게 새겨진 일련번호가, 내 확신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IG-Sec-03] Iron Grave, Sector 3. 아이언 그레이브, 제3구역. ‘빙고.’ 확신이 섰다. 이 맵은 사실상 텍스처만 서울로 바뀌었을 뿐, 알맹이는 노바르크 군도의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이었다. ‘멘티 참가자 중 아직 아이언 그레이브를 경험해봤을 참가자는 있을 수 없을 테니……. 일부러 상위 레벨대 던전을 모티브로 삼았군.’ 물론 ‘체온 유지 시스템’ 자체는, 제작진이 새롭게 설계한 시스템이 맞았다. 원래의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에는, 그런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던전의 클리어 조건도 달랐다. 보스를 처치해야 클리어되는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과 달리, 여기는 생존만 하면 되는 구조. 하지만 중요한 건……. 던전 내부의 기믹이나 필드의 구조 등은 거의 완벽히 똑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이건 당연히 내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부분이었다. ‘재밌네.’ 사실 인공 던전이 실제 던전을 모티브로 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가상현실 인공 던전의 제작 비용이 워낙 천문학적으로 들어가다 보니, 실제 있는 던전의 공략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뭐, 어떻게 됐든 그렇다면 이야기는 아주 쉬워진다. 내 머릿속에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던전 기믹들이 곧바로 생각났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 미션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눈에 보인다는 점. ‘2페이즈부터가 진짜겠어. 그때부터 중심지역에 진입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기본적으로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이 모티브라면, 이 <얼어붙은 서울>또한 60분 단위로 페이즈가 나뉘어 있을 거다. 심플하게 1페이즈는 파밍, 2페이즈는 경쟁. 3페이즈부터가 본격적인 생존의 장.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주 직관적이었다. 저벅- 일단은 기본 파밍부터. 평화로운 1페이즈가 지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열기 구슬]과 생존에 도움될 만한 물자들을 확보해둬야만 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추워진다는 것도, 페이즈 변화에 걸어놓은 기믹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빠르게 첫 번째 목표물을 찾은 나는, 근처에 반쯤 파묻힌 자판기 앞으로 다가갔다. 콰직! 콰득! 이어서 맨손으로 자판기의 옆구리를 뜯어낸 뒤……. 자판기의 냉각 컴프레셔 뒤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건 뭐, 거의 똑같은 수준.’ 와르르 쏟아진 음료수 캔들 중,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음료 몇 캔을 챙기고……. 띠링-! 컴프레셔 하단을 뜯어낸 뒤에는, 찾고 있던 부품을 발견해 집어 들었다. [‘마력 냉각수 파이프’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기본 성능 자체는 그리 좋지 않지만, 한 가지 전제가 들어맞는다면 가성비가 아주 훌륭한 장비. 〓〓〓〓〓〓〓〓〓〓〓〓〓〓 마력 냉각수 파이프 분류 : 장비 - 둔기 레벨 제한 : 1 등급 : 일반 티어 : 1T 내구도 : 30 / 30 주 능력치 공격력 +10 마력 냉각 기능을 가진 냉각수 파이프입니다. 화염 속성 대상에게 2배의 피해를 입힙니다. 〓〓〓〓〓〓〓〓〓〓〓〓〓〓 만약 여기 몬스터들도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처럼… 화염 속성이라면 말이다. ‘맵 컨셉이 달라진 만큼 몬스터는 다른 녀석들을 집어넣어 놓았을 확률이 높았지만…….’ 내가 착안한 건 몬스터들이 ‘열기 구슬’을 드랍한다는 점이었다. 개연성 상 화염속성 몬스터들이어야 열기 구슬을 드랍할 수 있을 테니까. ‘뭐, 아니더라도 조금 쓰다가 갈아타면 그만이고.’ 파이프를 허리춤에 꽂은 나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높다란 건물 사이 골목길 안쪽으로 올라가자, 간판이 반쯤 떨어져 나간 편의점이 보인다. 내 추측이 맞다면, 편의점을 가장한 ‘드럭 스토어’일 테고……. 여기서 중요한 물품 하나만 챙기면,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거까지만 파밍하고, 슬슬 사냥을 시작해야겠어.’ 모든 지점이 예상대로 착착 떨어져서 마음이 편해진 탓일까? 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깨진 유리문을 넘었다. 달그락-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추고,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매장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온……. 후각이 얼얼해질 정도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니 말이었다. * * * 상암 스튜디오의 대기실은 고요했다. 달그락- 서지혁은 찻잔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PD들이 열심히 화면을 전환하며 ‘재미있는 장면’을 찾아대는 탓에, 멘티들을 지켜보는 게 그리 지루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아직 그리 기대되는 녀석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사실 벌써 뭔가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긴 하다. 상위권 참가자들조차도 아직은 긴장한 탓에 시야가 좁아져 있었으니까.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과도하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쓸데없이 화려한 스킬들만 남발하는 참가자도 보였고……. 하지만 결국 <헌터즈 스쿨> 시리즈의 키워드는 루키들의 ‘성장’이다. 첫 미션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좀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쁠 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뭔가 좀 특별함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지혁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마법사답지 않게, 성격이 꽤나 급한 편이었다. “호오.” 그때, 그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마광철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메인 스크린의 화면이 전환된 순간이었다. “강소희 참가자?” “에스쿨랩의 막내딸이죠?” 다른 멘토들도 확실히 조금 흥미를 보였다. 스크린이 전환된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지만. 어쨌든 참가자의 배경 정보에서 오는 기대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서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이 친군 뭔가 보여주려나요?” “일단 판은 깔렸네요.” 상황 자체도 좀 흥미로웠다. 아직 던전의 외곽지대라 몬스터가 흔치 않을 텐데, 강소희는 운이 나쁜 건지 꽤 많은 몬스터들과 맞대고 있었으니까. 스크린에 담긴 장소는 폐허가 된 강남대로. 강소희는 커다란 건물 외벽을 등지고 서 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화염 고블린] 세 마리가 흉포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에스쿨랩의 막내딸이라.’ 에스쿨랩의 로열 패밀리 중, 재능있는 각성자가 배출됐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었는데……. ‘클래스도 마법 계통인 것 같고.’ 조금씩 서지혁의 흥미도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강소희의 하얀 두 손에서 짙은 보랏빛 안개가 쏟아져 나온다. “으음. 독…?”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서지혁은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단순한 독무가 아니었다. 순도 높은 마력을 기체 형태로 변환하여 살상력을 극대화한…… 일종의 ‘물질 분해 마법’에 가까운 스킬이라고 해야 할까. 치이이익―! 그리고 그 특수한 마법의 위력은… 놀랍게도 서지혁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불과 3초. 고블린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시커먼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으니 말이다. “임펙트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가장 좋은데요?” “이 정도 위력의 광역마법이라…….” “41레벨이라 했던 것 같은데, 상당하네요.” 서지혁의 두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방금 그 잠깐의 장면에서, 서지혁의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방금 저거, 마력 계수가 최소 300%는 넘겼어요. 웬만한 랭커들의 스킬에서나 나오는 출력인데.” 그의 눈은 정확했다. 단순히 화려한 게 아니었다. 폭발적인 마력을 쏟아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극도로 짧았으니까. 마력 회로의 효율이 기가 막히게 좋다는 뜻이다. ‘괜찮은데?’ 그러니까 방금 이 짧은 장면 하나로 서지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강소희’라는 참가자는, 생각보다 괜찮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꽤 기대되는 참가자로군. 문제해결 능력을 좀 더 지켜봐야 하긴 하겠지만…….” 최재민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한소은이 웃으며 거들었다. “맞는 말씀이세요. 결국 고위급 던전일수록, 클리어가 무력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서지혁의 눈이, 강렬한 임펙트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결함을 포착했다. ‘……잠깐.’ 몬스터는 이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응당 마력 공급을 끊고 술식을 거두어야 한다. 그게 마법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쿠우우우― 화면 속 강소희의 손끝에서는 여전히 보라색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농도가 더 짙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가로등이 녹아내리고, 멀쩡한 보도블록이 부식되어 연기를 피워 올렸다.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말이다. ‘술식을 닫지 못하고 있어.’ 아무리 봐도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제어 실패(Out of Control)]. 서지혁보다 조금 늦게 이상함을 감지한 멘토들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력 방출을 멈추지 못하고 있어요.” “긴장해서 마력 제어에 실패한 모양이군.” “쯧, 저렇게 쏟아내다간 혈관이 버티질 못할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느낌이군요.” 마광철이 가볍게 혀를 찼고, 다들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규격 외의 파괴력을 지닌 강소희가 어째서 비교적 높은 레벨을 달성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 셈이었다. 하지만… 서지혁은 오히려 더 확실하게 강소희에게 관심이 생겼다. ‘재능은 S급인데, 그릇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표현이 정확하겠군.’ 화면 속 강소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 고통으로 일그러진 미간.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외모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입술,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차가운 눈빛까지. 단순히 예쁘다기보단, 그 어떤 독보적인 분위기랄까. 서지혁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가 돌아갔다. 마력 역류(Mana Reflux)에 이를 정도로, 마나에 대한 제어가 미숙하다는 것. 치명적인 단점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단점만 고쳐줄 수 있다면? ‘압도적인 화력, 에스쿨랩이라는 뒷배경, 그리고 저 스타성 있는 외모까지.’ 서지혁이 생각할 때, 스타 헌터로서 강소희의 상품성은 완벽했다. 단, 서지혁과 이클립스의 손을 거친다면 말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면… 최고급 브레이크를 달아주면 그만이지.’ 이클립스에는 그만한 마도지식과 자본이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지혁의 시선은 계속 강소희의 뒤를 쫓았다. 화면 안의 강소희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근처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서지혁이야 당연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 역류일 겁니다. 지금쯤 상당히 고통스럽겠죠.” 이쪽에 서지혁만큼이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성녀도 한 마디 덧붙였다. “원래였다면 약이라도 바로 먹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인벤토리를 쓸 수 없을 테니…….” 아마 강소희는 이 입학식 미션에서 크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거다. 인벤토리가 제한되어있는 이 던전에서는 약을 먹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진짜’ 경쟁은 본 미션부터 시작될 터. 서지혁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촬영 시작 후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히려 성적이 나빴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얘기가 더 수월해질 테니…….’ 멘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강소희를 비추던 스크린은 다른 참가자로 넘어갔다. 편의점에서 진통제를 털어먹고 있는 장면이, 더 이상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스튜디오의 멘토들은 물론, 제작진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곧 강소희가, ‘어떤 특이한 참가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6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매장 안쪽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단순하게 공기가 탁한 수준이 아닌 것이다. 치이익― 그러니까 솔직히 좀 당황했다. 진열대 뒤편, 건강기능식품 코너 주변의 철제 선반들이… 마치 촛농처럼 흐물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뭐지? 몬스터?’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아이언 그레이브]에는,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를 위협하는 몬스터는 분명 없었는데……. 진짜 몬스터 풀 자체를 완전히 바꿔 놓았나? ‘이건 딱 봐도 독이고.’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저 안에 있는 건, 아직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미지의 존재. “흐음.” 하지만 진입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안에서 꼭 챙겨야 할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여기서 파밍하지 못하면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될 테니까. ‘최소 다른 역에 있는 드럭 스토어를 찾아야 할 텐데……. 그럼 최소 20분은 버려야겠지.’ 게다가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것도 하나 있었다. ‘만약 이 맹독지대를 만들어 낸 게 플레이어라면…….’ 내 추측이 맞아 떨어진다면, 그(혹은 그녀)가 어떤 클래스를 가진 플레이어일지 대충 짐작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클래스는, 그 억겁의 베타 테스터 기간 동안에도 한 번도 전직에 성공해본 적 없는 클래스였다. 누군지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는 소리다. 스윽- 보랏빛으로 변색된 바닥을 살금살금 피해, 이 재해의 근원이 되는 위치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음……!’ 마치 피웅덩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한 자줏빛이 된 타일들 사이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눈은 자연스레 참가자의 이름표를 향했다. ‘강소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필 저 강소희라는 플레이어가 주저앉아 있는 위치가 캐셔 옆이었으니까. 그러니 저 여자를 치우지 못하면, ‘그 물건’을 챙길 수 없다. 제법 곤란한 상황이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어.’ 그녀는 상태가 좋지 못한 건지, 아직까지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찬찬히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시커멓게 곤두선 목덜미의 혈관.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빈 약통들까지. ‘이건…….’ 덕분에 나는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소희’의 클래스는 아마도… ‘베놈 블러드(Venom Blood)’. 내가 아는 1차 클래스들 중, 가장 희귀한 클래스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 클래스인 세라피스트와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말이다. “…….”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냐고? 이 클래스를 가진 미치광이 NPC를 하나 알거든. 그래서 지금 이 플레이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까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력 역류(Mana Reflux)]때문이겠지. 그거…… 참기 힘들 텐데 말이야.’ 기본적으로 베놈 블러드는 마법사 계열의 클래스다. 체내의 모든 마력이 강력한 ‘극독’이 되어버리는… 특별한 히든 클래스. 그러니 이 여자 주변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맹독이 뿜어져 나왔다는 건, 체내의 마력이 제어되지 못하고 역류했다는 뜻과 같다. 그리고 마력 역류는, 참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고통을 수반한다. 이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진통제를 사탕처럼 씹어 삼키고 있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일 거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마력 역류에서 오는 통증은, 진통제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이 정도 독기면… 일반인은 닿자마자 녹아버리겠는데?’ 일단 상황 파악이 끝난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태라면, 이 여자는 내게 위협이 될 수 없다. 물론 캐셔 옆으로 치우는(?) 건, 쉽지 않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저벅- 그리고 이쯤 되자 강소희도 내 인기척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두 눈에 초점은 조금 흐릿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오지 마요.” 갈라진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그녀는 힘겹게 뒷걸음질 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더 오면…… 당신 녹아.”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지만, 이건 협박이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독기에 내가 휘말릴까 봐,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경고였다. 그 태도는 꽤 고마웠다. 동시에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경쟁자가 낙오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PK도 허용된 던전인데.’ 말투는 상당히 차가운데,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베타 때 만났던 그 미치광이 NPC는, 상당히 예민한 인성 파탄자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인성까지 닮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치운담.’ 솔직히 처음에는… 내 손으로 이 여자를 직접 던전 밖으로 보내줄(?) 생각도 조금은 했었다. 이 입학식 미션의 룰 자체에 PK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니 문제 될 게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걸 실행한다면, 그건… 사회화가 덜 된 인성 파탄자가 아닐까? 아직 [열기 구슬]파밍이 됐을 시점도 아니기 때문에, PK한다고 크게 이득 볼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단지 저 캐셔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지. 흐음.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던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떠올랐다. ‘잠깐. 마력… 역류?’ 어쩌면 이 여자가 이번 미션에서만큼은…… 히든카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체온이 계속 내려가는 환경이라면, 마력 역류가 터진 게 오히려 이득 아닌가?’ 순간적으로 머리가 팽팽 회전했다. 내가 가진 지식을 조금만 활용한다면……. 이 강소희라는 참가자의 특수한 상황을 역으로 활용할 방법이 생각 나버렸다. 툭- 판단을 마친 나는 곧바로 행동했다. 바닥에 떨어진 타이레놀 곽을 슬쩍 발로 건드린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통제 백날 씹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그거 마력 역류잖아요.” 내 말에 강소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음……. 이러면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는데…….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뭐. “딱 보면 알죠. 온몸이 과열돼서 열이 가득 차 있는데, 그런 일반의약품이 도움 될 리 없잖습니까?” 나는 물러나는 대신, 옆에 있는 의약품 매대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여긴 편의점을 가장한 드럭스토어였고. 쓸 만한 재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화상 거즈, 그리고 리도카인 스프레이.’ 내가 집어 든 건, 지구의 의약품과 완전히 같은 이름을 가진 약품들. 당연히 이게 진짜 그 약품인 건 아니었다. 다만 게이트 안에서 유통되는 약재들 중, 비슷한 효능을 내는 것들이 지구의 의약품으로 위장되어 있는 것일 뿐……. ‘좋아.’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게 진짜로 그 약품들이었으면, 나는 지금 시도하려는 걸 해볼 수 없었을 테니까. 덜컹-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챙긴 나는, 허리춤에 걸어 두었던 [마력 냉각수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강소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짓거리가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던 건지.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예요?” “기다려봐요. 처방전 제조 중이니까.” 마력 역류의 원리는 간단하다. 마력 기관(심장)의 과부하로 인한 과열(Overheat). 이걸 잡으려면 신경을 마비시키는 진통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온도를 떨어뜨릴 냉각제가 필요하다. ‘물론 그냥 부으면 그 위치가 그대로 얼어붙겠지만.’ 이 파이프 안에 든 건 기계형 몬스터의 엔진을 식히기 위해 개발된 고성능 화학 냉각수다. 그러니 그 어떤 냉각제 이상으로 효과 하나는 확실한 물건. 하지만 그런 탓에, 맨살에 닿으면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완충제가 필요했다. 치이이익―! 두툼한 화상 거즈를 돌돌 뭉친 나는, 파이프 뚜껑을 따서 냉각수를 들이부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며 거즈가 순식간에 살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제 여기에 마취 성분을 가진… 리도카인 스프레이를 듬뿍 뿌려주면 대충 마무리된다. “자.” 나는 완성된 급속 냉각 패치(?)를 그녀의 발치로 툭 던져주었다. 독 기운 때문에 이 이상 가까이 접근하는 건 무리였다. “심장에 붙이세요. 엔진부터 식혀야지.” 강소희는 바닥에 떨어진 패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의심할 법도 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구정물(냉각수)에 이것저것 섞어서 거즈 위에 뿌리더니, 약이라고 던져줬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윽…….” 다시금 찾아온 고통에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결국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패치를 집어 들었다. 이어서 셔츠 단추 하나를 살짝 풀어… 왼쪽 가슴 안으로 차가운 거즈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강소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아마도 당황했을 거다. 이것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보는 처방이 없을 테니까. 치이이익-! 화르륵 타오르던 혈관의 불길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을 거다. 마치 달궈진 프라이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주 급속도로 말이다. 그냥 차가운 걸 갖다 대는 거로 이렇게 쉽게 나아지는 거였냐고? 그럴 리가. 내가 준 패치는 야매로 만든 거긴 하지만, 마력에 직접적으로 감응하는 성분이 섞여 있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냉기가 마력의 흐름을 타고 체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거고……. 그래서 이런 다이내믹한 효과를 곧장 볼 수 있는 거다. 미치광이 NPC 덕에 알게 된 방식이었고, 나도 마법사 클래스를 플레이할 때 많이 써먹었던 방식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그렇다 해도 물론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쳐 날뛰던 마력 회로를 강제로 동결시키는 데는 성공한 셈.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강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의 얼굴에, 아까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뭔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회복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 같기도 하고? “…….”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정신이 돌아오고 나니 민망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 앞에서 치부를 드러낸 셈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꽂힌 파이프와 내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데 뒤섞인 복잡한 표정. “그런데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 고쳤으니까, 힐러 아닐까요.” “힐러 치고는 방식이 거친데.” “지나가던 공대생… 일지도?”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와중에도 내 시선은 캐셔 위에 꽂혀 있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포섭에 성공한 건 아니니까……. 괜히 이 여자가 ‘저 물건’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지.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던 사이, 잠시 침묵하던 강소희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종류의 대사였다. “어쨌든.” 강소희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공짜는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뭐죠?” 뭐지? 마인드가 아주 바람직하잖아? 이러면 호감도가 꽤나 올라가 버리는걸? “흠. 글쎄요. 원하는 거라…….” 혹시 LP 좀 있니? 잠깐 이게 아닌데. ‘후우.’ 순간적으로 쌀숭이 마인드가 불쑥 튀어나왔지만, 일단 가까스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진짜 목적을 천천히 입 밖에 내놓았다. “우리, 파티할래요?” 6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본격적인 첫 촬영이 시작되고, 제작진은 전원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헌터즈 스쿨>의 포맷 자체가 리얼 버라이어티인 데다 1화당 제작비용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생방송이 아니라 하더라도, 촬영을 중단시켜야 할 만한 사고는 절대 발생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을 넘어, 재미를 뽑아낼 수 있을 만한 모든 소스는 그때그때 빠르게 트래킹해야만 했다. 최종 편집본이야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며 다시 작업하겠지만. 후킹 될 만한 장면들은 빠르게 포착해서 클립을 따 둬야, 마케팅 리소스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메인 PD(장세연)와 현장 총괄 디렉터(이정민)는 물론, 작가진과 모든 현장 기술팀 인원들까지. 모든 인원은 각자 맡은 참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꼼꼼히 모니터링 중이었다. 그러니 막내 작가인 김예림(23세)이 모니터링실에 틀어박혀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 너무 떨린다.’ 지금부터 첫 미션이 종료될 때까지 최소 5시간 동안, 예림은 이 모니터링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예림에게는 그게 딱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는 이 모니터링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사내 복지인지도 몰랐다. [자, 그럼…… <헌터즈 스쿨 3>의 입학식을 시작합니다! 전송!] 그녀는 다름 아닌 이 <헌터즈 스쿨> 예능을 시즌 1때부터 광적으로 좋아했던……. 이 시리즈의 ‘진성 팬’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덕업일치 아닐까?’ 바로 그 <헌터즈 스쿨>의 모든 내용을,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많이 볼 수 있다니! 심지어 업무 시간에 합법적으로! 스읍- 심지어 이번 시즌 3에는, 덕질할 만한 루키 헌터들이 한두 명이 아닌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예림은 당연하게도 아직 최애를 고르지 못한 상황이었다. 힙스터 기질이 좀 있는 그녀는, 이성환처럼 모든 게 완벽한 타입은 또 끌리지 않는 편이었다. 부스럭- 왼손에 든 젤리 봉지를 만지작거리던 예림은, 자신에게 배정된 모니터링 목록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팀 내 가장 낮은 서열(?) 때문에 비교적 기대치나 비중이 낮은 참가자들을 맡게 됐지만……. 오히려 좋았다. 나만의 작은 플레이어를 발굴하는 게, 남들 다 좋아하는 메이저 참가자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젤리를 우물거리던 예림의 귓전으로, 옆에 앉아있던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님, 지금 잡힌 구도 적당한 거죠?” 그는 바로 김예림의 파트너인 박동수(34). 기술팀의 대리이자 옵저버 컨트롤러였다. “네, 대리님. 일단 기본 구도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부서는 달랐지만 여러 번 협업했던 적이 있어, 둘은 편하게 대화할 정도의 친분은 있는 관계.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씀 주세요, 작가님.” 그러니까 예림은, 필요할 때마다 편하게 박동수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럼, 박 대리님. 일단 3번 모니터부터 줌인 좀 당겨줘요.” 일단 예림은, 자신에게 배정된 세 명 참가자의 모습을 차례대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세 명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는 참가자들이라 생각했지만, 아직 특별히 꽂힌 대상은 없는 그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첫 번째 참가자. 특이점은… 이번 시즌 최고 유망주인 이성환과 클래스가 같다는 부분이었다. ■ 이름 : 최민석 ■ 플레이어 네임 : Grick ■ 나이 : 27세 ■ 클래스 : 쉴드 워리어 ■ 레벨 : 43Lv 잠시 집중해서 최민석 참가자를 모니터링하던 예림은, 조금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음… 오히려 이분은 자세히 보니 좀 밋밋하네.’ 꽤나 반듯하게 잘생긴 외모에… 레벨도 상위권에 속하는 준수한 플레이어.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침착하게 수색을 시작하는 것까지도 인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이성환과 비교돼서 그런 걸까? 아쉽게도 뭔가 와닿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다. ‘일단… 넘겨볼까.’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사실 모니터링을 맡은 세 명의 참가자 중… 가장 기대하던 참가자가 바로 이 두 번째 플레이어였으니까. 박동수가 두 번째 모니터의 줌을 당겼고, 예림은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성 플레이어였다. ■ 이름 : 박소미 ■ 플레이어 네임 : Stella ■ 나이 : 24세 ■ 클래스 : 윈드 아처 ■ 레벨 : 37Lv 박소미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프로필을 처음 본 순간, 아이돌로 치면 센터감이라는 인상을 확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어디 하나 모난 데 없는, 소위 말하는 ‘육각형 비주얼’ 느낌이랄까. 여리여리한 느낌이 궁사 클래스와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 꽤 기대했는데……. “작가님,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죠?” “으음.” 카메라로 줌을 당겨 자세히 뜯어보니, 급격하게 식어버렸다. ‘확실히 예쁘긴 한데.’ 좀 많이 예쁘긴 한데…… 그게 끝이다. 눈에 독기가 서려 있든, 사연 있어 보이든… 아니면 아예 백치미라도 있든. 시청자를 낚아챌 ‘한 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전혀 보이질 않는다. 초반 눈길이야 확실히 끌 수 있을 텐데……. ‘코어 팬층은 절대 안 모인다는 말이지.’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더 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물론 아직 모든 걸 다 판단하기엔 이르긴 하지만.’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세 번째 당길까요, 작가님?” “그렇게 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세 번째 참가자는, 세 사람 중에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참가자였다. ■ 이름 : 이건율 ■ 플레이어 네임 : Dave ■ 나이 : 36세 ■ 클래스 : 세라피스트 ■ 레벨 : 35Lv 프로필로 봤던 첫인상은…… 나이에 비해 꽤 어려 보이며, ‘피부가 많이 하얗다’ 정도? 레벨도 참가자들 중 상당히 낮은 편인데, 그나마 어필할 만한 건 특이한 히든 클래스다. 세라피스트가 뭐지? 이름만 봐선 도저히 뭔지 모르겠다. 뭔가 힐러 같기도 한 느낌인데……. “…….” 그런데 다음 순간. 줌인을 당겨 놓은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 속쌍꺼풀 없는 가로로 긴 눈매에, 뭔가 나른해 보이는 눈빛.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보이는 까만 눈동자. ‘잠깐, 왜… 느낌 있지?’ 알 없는 동그란 안경을 살짝 고쳐 쓴 예림은, 옆에 앉아있던 파트너의 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박 대리님! 조금만 줌 더 당겨봐요!” “누구. 저 노숙자같이 생긴 사람이요?” “아잇, 일단 좀 당겨주시라니까요.” “별 특이사항 없어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니 뭔가 다르다. 자세히 보니 뭔가 눈동자도 좀 메말라 보이고……. “그냥 피곤한 거 아닐까요?” 체형은 약간 마른 정도인데, 뼈대가 굵은 건지 뭔가 도드라지는 느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 옆에서 박동수가 뭐라 하든, 예림은 조금씩 화면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일단 하는 행동들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았다. [역시 이런 식이네.] 뭔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도로 한복판까지 걸어 나가 가로등 잔해를 툭- 하고 건드린다. 깡-! [역시.]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길가의 무너진 건물 외벽으로 다가가서는……. 스윽. 손가락을 틈새 안에 집어넣어 뭔가를 문질러 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찾았네.] 너무 굵직한 동굴 목소리도, 그렇다고 가벼운 미성도 아닌 건조한 목소리에……. 예림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뭐 이렇게 딕션이 좋아?’ 뭔가 ASMR 재질인 것도 같은 게……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건율이 과격한 행동을 시작했다. 콰직! 콰득! 맨손으로 자판기의 옆구리를 뜯어낸 뒤 안쪽을 뒤지더니, 무심하게 음료수 캔 몇 개를 챙기고는 묵직한 쇠 파이프를 꺼내 든 것이다. ‘뭐야, 힐러 아니었어? 저 체형으로 무슨 힘이…….’ 하지만 진짜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뭔가를 찾는지 약국으로 들어간 이건율 참가자가, 그 안쪽에 쓰러져 있던 강소희를 만난 것이다. ‘대… 대박. 이걸 만났잖아?’ 다른 플레이어와 조우한 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었고, 그래서 박동수도 카메라 몇 개를 더 붙여 확대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갑자기 기대도 안 했던 서사가 뚝딱뚝딱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오지 마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에 차 갈라진 강소희의 목소리. [더 오면…… 당신 녹아.] 힘겹게 뒷걸음질 치며, 이건율 참가자를 노려보는 눈빛. ‘이 와중에 이런 생각하는 내 자신이 싫지만…… 이 언니는 또 왜 저렇게 예뻐?!’ 그 날 선 목소리에도, 이건율 참가자는 예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강소희의 앞까지 다가섰다. [툭-] 이어서 바닥에 떨어진 타이레놀 곽을 슬쩍 발로 건드리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통제 백날 씹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그거 마력 역류잖아요.] [……어떻게?] [딱 보면 알죠. 온몸이 과열돼서 열이 가득 차 있는데, 그런 일반의약품이 도움 될 리 없잖습니까?] 이게… 뭐지? [뭐 하는…… 거예요?] [기다려봐요. 처방전 제조 중이니까.] 남자는 편의점의 의약품들을 능숙하게 꺼내더니, 파밍한 아이템을 활용해 뭔가를 만든다. 그리고 심지어는……. [심장에 붙이세요. 엔진부터 식혀야지.] 그가 만들어 낸 새파란 거즈 덩어리가, 강소희 참가자의 마력 폭주를 순식간에 진정시키는 게 아닌가? [치이이익-!] 김예림의 입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육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흐억….” [그런데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 고쳤으니까, 힐러 아닐까요.] [힐러 치고는 방식이 거친데.] “흐어억…!” [공짜는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뭐죠?] [흠. 글쎄요. 원하는 거라…….] 그리고 다음 순간. 뭔가 할 말을 잠깐 고민한 듯, 살짝 멈칫하던 이건율 참가자가……. 예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강소희를 향해 마지막 대사를 날렸을 때. [우리, 파티할래요?] “흐어어억!”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작가님, 왜 그럽니까. 괜찮아요?” 이건 된다. 적어도 수요는 확실히 있다. 괴식(?) 전문가인 예림의 촉이, 본능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6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아까 말했듯 1페이즈의 가장 핵심 목적은 파밍이다. 그리고 이 파밍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열기 구슬’일 것이다. 이 ‘얼어붙은 서울’에서 열기 구슬은 가장 중요한 재화였고. 그와 동시에 곧, 생존에 직결된 물건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확신했다. 이 강소희라는 여자가 내가 계획한 대로만 잘 움직여 준다면, 제작진이 의도한 이상의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쓸어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파티라……. 내 뭘 보고 파티를 하자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마 내 생각에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광역 딜러 기준으로 이 안에 있는 모든 참가자 중, 강소희보다 파괴력 있는 플레이어는 없을 거거든. 심지어 나는 강소희의 화력을, 폭파광 로웰과 비교해도 더 우위로 평가한다. 다만 로웰에게 오조준(?)이라는 패널티가 있다면, 강소희에게는 마력 역류가 터진 상태라는 더 큰 패널티가 있을 뿐. 그런데 체온이 지속적으로 떨어진다는 필드 특성 덕분에, 이 패널티를 지워버릴 가능성이 생겼다. 방금의 실험으로 깔끔하게 확인까지 했으니, 변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아마도 정답.’ 그러니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완벽한 타이밍에 내가 도와준 덕에, 강소희도 내 필요성을 인지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냉각 패치를 만드는지 눈으로 봤다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직접 재현하기보단 내게 의존하는 게 더 편한 방향일 테니. 이 여자는 결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당연히 화력이죠.” “화력?” “내가 그 마력 역류만 지속적으로 억제해 주면… 적어도 이 안엔 당신보다 훌륭한 딜러가 없을 테니까.” 잠시 뜸을 들인 뒤,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이 첫 미션에 한정해서는 우리 동업하는 거 어떻습니까?” 사실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제안도 아니다. 던전 내에서의 협력은 시스템도 권장하던 사항이었고……. 개인 플레이보다 협동으로 좋은 결과물을 낸다면, 멘토들의 평가도 분명 나쁠 수 없을 터. “뭐, 같이 좀 해보시고, 저와 파티하는 게 손해라고 생각되시면 탈주하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을걸? 당신 바로 뒤에 있는 PDA 단말기만 손에 넣으면, 나보다 나은 파티원은 존재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지. “……좋아요.” 어…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바로 승낙할 줄은 몰랐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쿨한 친구였잖아? “대신 내 몸이 다시 과열된다 싶으면 동업계약은 바로 파기예요.” “그거야 뭐.” “남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거든요.” 별걱정을 다 하신다. 짐이 될 것 같았으면 파티 제안을 했겠냐고. “그건 걱정 마시죠. 어쨌든 그럼…….” [참가자 ‘강소희’에게 파티 가입을 제안하였습니다.] [참가자 ‘강소희’가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오케이. 이러면 계약 성사. 이제는 곧바로 행동할 시간이었다. 1분 1초가 아깝단 말이지. “그럼 일단…… 잠깐 실례.” 내가 갑자기 불쑥 앞으로 다가가자, 강소희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당황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간 나는, 그녀가 등지고 있던 캐셔 뒤쪽 선반으로 쭉 손을 뻗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진열장. 그곳에 내가 찾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탁- 내가 집어 든 건, 액정이 다 깨진 낡은 바코드 스캐너. [‘낡은 PDA 단말기’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편의점 알바생들이 재고 조사할 때나 쓸 법한 고물 PDA 단말기였다. 그걸 발견한 강소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쓰레기는… 어디에 쓰려고요?” “쓰레기라뇨. 섭섭하게.” 나는 소매로 스캐너의 액정을 쓱쓱 닦아낸 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잉― “잘만 쓰면 거의 치트키 수준인 아이템인데.” 짧은 진동과 함께 깨진 화면 위로 초록색 불빛이 들어왔고……. [열기 감지를 시작합니다.] [반경 30M 이내 열기 정보를 수집합니다.] 물건이 정상 작동함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IG-T3 전술용 열 화상 감지기] 이게 이 물건의, 원래 이름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이언 그레이브에서보다… 여기서 훨씬 더 활용처가 무궁무진하겠는걸.’ 아이언 그레이브에서 이 물건이 필수인 이유는, 암살자형 몬스터들의 위치를 미리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얼어붙은 서울>에서는, 거기에 더해서 ‘열기’와 관련된 오브젝트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 진짜 치트키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좋아. 시작부터 상당히 잘 풀리는걸?’ 이제 드디어 일터로 나갈 준비가 다 끝났다. 던전이 열린 지… 정확히 2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 * * 강소희는 사실, 불쑥 나타난 이 ‘이건율’이라는 남자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대체 마력 역류는…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본 거지?’ 그녀가 태생적으로 자주 마력 역류에 빠지는 ‘천형天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에스쿨랩 내부에서도 가장 가까운 몇몇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니……. 자신에 대해 사전에 알고 접근한 참가자라 해도, 이 부분만큼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쓰러져 있던 것만 보고 알아챘다는 소린데.’ 게다가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이건율’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통증을 해결해 주었다. 이 천형이나 다름없는 통증을 해결하는 게 가장 큰 숙원이었던 강소희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어떤 사람인지… 최대한 파악해 봐야겠어.’ 사실 강소희가 이 <헌터즈 스쿨 >에 지원하게 된 건, 헌터로서의 성장이나 성공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로열패밀리인데다 딱히 헌터로서의 성공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던 그녀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멘토인 ‘한소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성녀’라는 이명까지 갖고 있는 한국 최고의 힐러 한소은이라면. 그리고 그녀가 속해있는… 헤일로(Halo) 길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에스쿨랩에서도 찾지 못한 이 통증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 기대가 바로 <헌터즈 스쿨>에 지원하게 된 유일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니 강소희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이건율의 파티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소은도 한소은이지만 이 괴팍한 남자가 만약 자신의 천형을 고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든 그에게 붙어있어야 하는 건, 다름없는 강소희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조금 더 물어보기 수월할 텐데.’ 그래서 사실 강소희는, 이건율에게 살갑게 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 상태였다. 천성적인 예민함에서 기인한 날카로운 말투 때문에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강소희를 알고 있는 누군가 그녀가 이건율에게 쓰는 말투를 보았다면,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을 정도로 확실히 노력하고 있던 것이다. “후우.” 어쨌든 그런 이유로. 강소희는 파티 플레이에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이건율의 입장에서도 자신과의 파티가 도움이 되어야, 더 오래 이 파트너십(?)을 유지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꽤 자신도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이 <헌터즈 스쿨 3>에 지원한 인원들 중 상당히 높은 레벨에 속하는 플레이어였고. 마력 역류라는 패널티를 정말 계속 억제할 수 있다면, 전투에 대한 자신감도 꽤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 씨. 그 뭐냐, 관통기 하나 가진 거 있죠?” “그…건 어떻게?” “일단 제가 어그로 충분히 받을 때까지, 그 스킬 말고는 쓰면 안 돼요.” “일단…… 그러죠.”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이런 상황은… 솔직히 상정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지금 오버 드라이브(Overdrive) 걸어요!” “그건 위험……!” “드라이브 걸고 바로 섬멸기! 오더 따르기로 했잖아요!” “제기랄, 모르겠다……!” 콰아아아아아-!!!!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투 내내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끄윽… 이제 한계예요. 역류가…….” “뭔 소리예요. 딱 과부하 직전일 텐데.” “어?” “패치나 붙이고 잠깐 쉬어요. 회복되면 곧바로 이동할 거니까.” 처음 이건율의 오더를 따른 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어차피 이건율이 아니었다면 이 첫 번째 미션은 이미 완전히 망쳤을 테니까. 하지만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강소희는 점점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스킬들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아는 거지?’ 이건율의 오더대로 스킬 사이클을 돌리면서 마력을 운용했더니, 정말 귀신같이 마력 역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설마 내가 가진 클래스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남자는, 전투 능력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딜 지분만 놓고 따진다면 당연히 강소희 자신이 월등했지만. [파티원 ‘이건율’님이 ‘퍼펙트 패링’을 발동하였습니다.] [‘화염 고블린’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합니다.] [피해량이 99%만큼 감소합니다.] 까가강-!! [파티원 ‘이건율’님이 ‘퍼펙트 블로킹’에 성공하였습니다.] [‘과열 슬라임’의 공격을 완벽히 튕겨냅니다.] [피해량이 100%만큼 감소합니다.] 사실상 딜러라는 포지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역할을, 이 남자 혼자서 완벽히 커버하고 있었으니까. ‘뭔, 쇠파이프 한 자루에 맨홀뚜껑 같은 걸 주워들고…….’ 심지어 소환수라고 쓰고 있는 녀석도, 하찮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특이하고 귀엽게 생긴 까만 토끼 인형은, 가만히 있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 - 바니도 쉬고 싶다……. “넌 안 돼.” - 바니 퇴근. 지금 당장 퇴근. “뭘 했다고.”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건율이라는 남자의 정체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클래스가 뭔지조차 모르겠어…….’ 그러니 강소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이건율의 오더를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좋습니다. 이번엔 이쪽으로 가시죠.” “몬스터는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찾는 거예요?” “아까 파밍한 열 감지기 있잖습니까. 내가 괜히 치트키라고 했겠어요?” 그러고 보니 히든 피스는 대체 어떻게 알고 파밍한 걸까? 혹시 제작진이 심어놓은 위장 참가자 같은 건 아니겠지……? 모르겠다. 그냥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나 해야겠다. 강소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건율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어느새 파밍한 ‘열기 구슬’은 벌써……. [참가자 ‘강소희’님이 현재 보유 중인 열기 구슬 : 155개] 100개가 훌쩍 넘어버렸다. 6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정민은 손에 땀을 쥔 채, 던전을 모니터링 중이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서도… 그의 담당이자 가장 요주 인물로 분류된 두 명의 참가자들. 이정민이 모니터링을 맡은 참가자는 다름 아닌 이성환과 박하준이었다. 모든 참가자들 중 가장 무력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그 두 사람 말이다. “TL(Technology Lead)님, 일단 페이스는 문제없는 수준인 거죠?” “예상 범위 안쪽입니다.” “좋습니다.” 이정민이 두 사람을 맡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장세연이 전체를 총괄하는 헤드 PD라면 이정민은 현장을 담당하는 디렉터(FD)였고. 때문에 기술 팀과 협력해 전체 던전의 진행도라든가 특이사항을 컨트롤하는 건, 다름 아닌 정민의 몫이었던 것이다. “1페이즈 이제 거의 다 끝나가고…….” QA(Quality Assurance)를 철저히 진행한 탓에 다행히 아직 버그 같은 건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민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플레이어의 진행 속도라든가 던전 밸런스에 특이점이 발생한다면……. 수십억 들여 조율한 콘텐츠가 망가져 버릴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두 사람 각각 구슬 몇 개나 모은 거죠?” “이성환은 82개, 박하준은 97갭니다.” 던전 통제실을 총괄하는 TL의 보고에, 정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비범한 두 사람이라 파밍 페이스가 상당히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예측 범주를 넘어선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첫 페이즈에서 150개만 안 넘기면……. 빙하기 페이즈의 긴장감은 충분히 작동할 테니까.’ 이 두 사람을 기준으로 모니터링 중인 이유는, 이들이 압도적인 최고 레벨 참가자이기 때문이었다. 레벨 디자인에 발생할 수 있을 문제를 가장 빠르게 찾아내기 위해선… 이 두 사람의 화면을 모니터링하는 게 정배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체온은, 계속 37도 유지 중인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요, PD님.” “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체온을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는데, 기가 막히게 1~1.5°C쯤 떨어졌을 때 둘 다 열기 구슬을 정확히 10개씩 사용해서요.” “아하.” “플레이어들은 감각이 확실히 예민한가 봐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몸이 굳으면 전투에 불편함을 느낄 테니 말입니다.” TL과 대화를 나누던 정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아직 기믹을 발견한 플레이어는 없겠네.’ 체온이 떨어지는 시스템 안에 숨겨진 기믹을 발견했다면. 이 랭커들이 예민하게 37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좋았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정민은, 모니터 위에 올려 둔 전자시계를 슬쩍 응시했다. ‘1분 남았고.’ 이제 2페이즈부터는 참가자들의 체온이… 정확히 3분마다 1°C씩 떨어질 예정이었다. 심지어 중앙지역으로 진입하지 못한 참가자는, 1분에 1°C가 떨어지게 된다. 이 말인즉, 중앙지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참가자라 하더라도……. 빙하기 60분을 버텨내려면, 최소 200개의 열기 구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화로]를 아무리 빨리 찾아낸다 해도 최소 150개는 소모하겠지.’ 그러니 아직 평화로운 던전의 내부는, 곧 아비규환으로 변할 터였다. [30초 뒤, 혹한의 눈보라가 다가옵니다.] [모두 지하도시(중심부)로 대피하세요.] 부족한 열기 구슬을 빼앗기 위해, PK가 난무할 테고 말이다. “자, 다들 집중하세요!” 던전 통제실의 인원들에게 2페이즈의 중요성을 한 번 더 주지시킨 정민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모니터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일단, 순조로워.’ 이대로만 진행되면, 제작진이 그린 그림 그대로의 재미를 뽑아낼 수 있을 거다. 1페이즈에선 이미 기대했던 이상의 그림들을 충분히 뽑아냈으니까. [‘얼어붙은 서울’의 ‘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빙하기’는 60분간 지속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민이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압구정역? 여긴 왜 들어온 거예요?” “곧 있으면 여기에… 중심부로 이동 가능한 화물차가 들어올 겁니다.” 이미 150개 이상의 열기 구슬을 파밍한 참가자가 두 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과. “소희 님. 열기 구슬은, 최대한 아끼고 있죠?” 그중 한 명이……. “네. 많이 춥긴 한데, 일단은 쓰지 않고 있어요.” 지금 시점에서 정민이 신경 쓰지조차 않고 있던, 그의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 * * 내가 이 입학식 미션의 공략 루트를 완전히 확정 지을 수 있는 건, <얼어붙은 서울>에 2페이즈가 시작된 이후였다. [30초 뒤, 혹한의 눈보라가 다가옵니다.] [모두 지하도시(중심부)로 대피하세요.] [‘얼어붙은 서울’의 ‘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빙하기’는 60분 간 지속됩니다.] “으… 갑자기 확 추워지는데요?” “바깥은 훨씬 더 추울 겁니다.” 사실 ‘체온 시스템’에 숨겨진 기믹을 발견한 순간, 대략적인 공략 방향성은 얼추 정해 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2페이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중심지역에 들어가 보기 전까진…….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직 구슬은 안 쓰고 버티고 계시죠?” “아직까진… 참을 만해요.” “못 버틸 것 같으면 얘기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체온 시스템’에 숨겨진 기믹이 대체 뭐냐고? 그건 생각보다 간단한 장치였다. 플레이어의 체온이 낮아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꽤 강력한 능력치 버프가 걸리는 시스템. 온기가 부족해 탈락에 가까워진 참가자에게 능력치 버프를 걸어줘서, 반전을 노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흥미로운 기믹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짰는지… 머리 잘 썼어.’ 사실 이런 파밍형 서바이벌 던전에서 특별한 기믹이 없다면… 방송적인 구도가 재밌게 뽑힐 수가 없다. 스펙이 높고 실력이 좋은 플레이어가 1페이즈부터 파밍으로 크게 앞서 나갈 텐데……. 그 구도를 뒤집을 기회조차 없이, 밋밋하게 순위가 결정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낮은 체온에 비례한 버프’는, 내가 볼 때 신의 한 수였다. 1페이즈에 충분한 파밍을 하지 못해 추위로 인한 블랙아웃이 가까워진 참가자라 할지라도. 상위 랭커를 기습해서 ‘열기 구슬’을 탈취할 가능성을, 시스템 구조를 통해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버프량도 생각보다 강력했다. ‘이제 고작 체온 5°C 정도나 떨어진 것 같은데…….’ 아직 본격적인 빙하기가 아니라 3~5°C 정도 체온이 떨어진 느낌인데, 벌써 전반적인 능력치가 체감상 20% 정도는 뻥튀기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데미지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거의 정확한 수치가 나오니까.’ 게다가 한 가지 더. 내 계산이 맞다면 버프 수치는… 체온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는 느낌이었다. 처음 내가 이걸 느낀 건 체온이 지금의 1/3정도 떨어졌을 시점이었는데. 그때는 20%는커녕, 한 2~3% 정도의 미미한 버프밖에 걸리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한 20°C 정도까지 체온이 내려가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버프가 걸리는 거지?’ 해봐야 알겠지만 느낌상 최소 5배 정도는 강해질 것 같다. 물론 체온이 20°C면,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체온이긴 한데……. 어쨌든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체온을 정확히 알고 이 기믹을 극한으로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재밌는 그림을 그려 볼 방법이, 상당히 많이 떠오르는 것이다. 끼이잉- 철컥-!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압구정역을 가장한 화물 철로에 기다렸던 화물차가 도착했다. “진짜… 왔네요?” “일단 타시죠.” 그런데 여기부턴 그냥 대놓고 아이언 그레이브와 똑같은 필드다. 아마 지하도시까지 서울 느낌으로 새로운 스킨을 씌우기엔…… 예산이 그리 녹록치 않았나보다. [운임으로 [열기 구슬] 5개를 소모합니다.] [‘지하철 3호선’에 탑승하시겠습니까?] 뭐, 덕분에 나는 기억을 활용하기 좀 더 쉬워졌지만 말이다. ‘이 정도로 똑같이 가져왔으면…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도 역시 그대로겠지?’ [‘지하철 3호선’에 탑승하였습니다.] [잠시 후, ‘지하 도시’로 이동합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내부에 진입하기 전에, 어떤 기믹들이 숨어있는지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본격적인 경쟁 구도가 시작되기 전에 정보의 비대칭을 바탕으로 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여기부턴 분위기가 많이 음산하군요.” 그래서 우리 팀원에게도, 이제 슬슬 정보를 알려주기로 했다. 팀워크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강소희 이 친구도, 이제 슬슬 알 건 알아야 했다. 1페이즈를 진행하면서 이제 신뢰도도 많이 쌓였고 말이지. “여기,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이 모티브에요.” “……?!” “노바르크 군도에 있는 90레벨대 던전입니다.” 강소희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이제야 내 오더들이 이해 간다는 표정. “아, 그래서 이렇게 다 알고 계셨던……!”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다 풀린 건 아닐 거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들어가 보진 못한 던전일 거 아니에요?” “당연하죠. 노바르크를 제가 어떻게 갑니까?” 난 여길 단순히 아는 게 아니라 수백 번 이상 클리어해본 빡숙 고인물이었고. 그런 내가 순간순간 보여주는 모먼트들이, 던전을 단순히 안다고 해낼 만한 그런 수준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운 좋게 공략튜브 채널에서 봤던 던전이었어요.”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90레벨 던전이면… 직접 체감해보진 못하셨을 텐데.” 어쨌든 강소희를 적당히 납득시킨 뒤, 나는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부턴, 오더 칼같이 따라주셔야 합니다.” “계속 그래왔거든요?” “템포가 훨씬 빨라질 거라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잠시 대화하는 사이. 기기기긱-! 철로 위를 미끄러지던 화물차는, 길고 깜깜한 터널을 지나 지하도시에 도착하였다. [<얼어붙은 서울>의 ‘지하 도시’에 도착하였습니다.] [한기가 조금 완화됩니다.] 이어서 익숙한 지형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일단 PDA 단말기부터 켜 수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어……?” “왜 그래요?” “잠깐, 이쪽으로.” 우리는 지하도시 초입부 커다란 공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렬한 열기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PDA 덕분이었다. [‘소형 화로’ 오브젝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소형 화로’가 1분 동안 활성화됩니다.] [‘소형 화로’ 활성화 시, 반경 10M 이내의 참가자는 지속시간 동안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화로라……. 체온 유지 시스템과 연결된 기믹인 만큼, 당연히 아이언 그레이브에는 없던 처음 보는 오브젝트다. 이거 재밌는 시스템인걸? [‘소형 화로’에 ‘열기 구슬’을 집어넣을 시, 화로의 활성화 시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화로의 불이 10분 이상 꺼지지 않으면, 그때마다 범위 안에 있는 플레이어 중 3명에게 ‘보급 상자’가 지급됩니다.(최대 3회)] [‘보급 상자’에서는 전투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와 보조 아이템을 랜덤하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 [※ 주의! 화로 주변에 인원이 4명 이상이라면, 화로의 지속시간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어쩌면 2페이즈부터는, 이 화로를 활용하는 게 핵심이 될지도 모르겠는걸? 6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강민우는 억울했다. 미치도록 억울해서,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이 미션을 기획한 제작진 놈들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 젠장.” 그는 폐허가 된 명동역의 지하 대합실 벽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꼴은 처참했다. 입고 나온 셔츠는 걸레짝처럼 찢겨 나갔고, 왁스로 세팅했던 머리는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연히 몬스터들과 장비 하나 없이 사투를 벌인 탓이었다. ‘이건 억까야. 명백한 클래스 차별이라고.’ 강민우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의 클래스는 [매직 거너(Magic Gunner)]. 마력으로 탄환을 생성해 쏘아내는 원거리 딜러지만, 이 클래스에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 존재했다. 그건 바로, 다른 클래스들보다 장비 의존도가 훨씬 더 높다는 부분이었다. ‘만약 운이 나빠서 이 기본 마력총조차 파밍하지 못했다면… 아예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사실 그러한 매직 거너 클래스의 특징은,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강민우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동하는 특성이었다. 장비 의존도가 높다는 말은, 좋은 장비를 착용했을 때의 퍼포먼스도 타 클래스 대비 훨씬 좋다는 의미였고. 무려 ‘세광 그룹’의 셋째 손자인 그에게 ‘좋은 장비’라는 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요소였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이따위 미션을 걸어? 내가 매직 거너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러니 이러한 이점을 모두 상납한 지금. 사실상 강민우는, 흔하디흔한 40레벨대의 평범한 헌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헌터들은…… <헌터즈 스쿨>에 지원할 역량이 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30초 뒤, 혹한의 눈보라가 다가옵니다.] [모두 지하도시(중심부)로 대피하세요.] 그러니까 첫 번째 페이즈가 끝나가는 시점, 강민우가 열기 구슬을 서른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혹한의 추위가 도래했을 때. [‘얼어붙은 서울’의 ‘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빙하기’는 60분간 지속됩니다.] 강민우에게 미션 아웃의 위기가 곧바로 찾아온 것 또한, 너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사실 사회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 첫 번째 미션에는 탈락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장비를 사용할 수 있을 다음 미션에서 순위를 복구한다면. 얼마든지 재기하는 것도 가능한 시스템일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강민우에겐, 어떤 미션에서든 하위권이라는 성적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용납하실 리가 없지.’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이자…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존재. 바로 할아버지. 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그런 할아버지 앞에서 어떤 장담을 했던가?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할아버지.” “무조건 우승. 그게 아니면 의미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놓고… 첫 번째 미션부터 평균치조차 못해서 D등급이나 F등급 판별을 받는다? 갑자기 강민우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이대로 나가면 쪽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조차 없이 중도 하차하게 될지도 몰랐고 말이다. 제작진과 작성한 계약서가 있지 않냐고? ‘계약서고 나발이고, 할아버지께서 그냥 찢어버리실 거야.’ 그러니까 강민우의 심정은 지금 간절하다 못해 처절했다. 그런 상황이 됐을 때 자신을 비웃을 형제들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열기 구슬’ 아이템을 사용하였습니다.] [체온이 0.1°C만큼 회복됩니다.] [‘열기 구슬’ 아이템을 사용하였습니다.] [체온이 0.1°C만큼…….] ……중략…… [참가자 ‘강민우’님이 현재 보유 중인 열기 구슬 : 25개] 정확히는 알기 어려웠지만, 체감상 이제 강민우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5분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니 그 안에 무슨 수를 내야만 한다. [‘지하철 4호선’에 탑승하였습니다.] [잠시 후, ‘지하도시’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들어간 잠원역 지하통로를 통해, 강민우는 화물차에 탑승하였다. ‘제발.’ 정확히 이 ‘지하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들어가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말이다. 덜컹- 기기기긱- 그러니까 지하도시에 도착한 강민우가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눈빛이 살기로 번뜩인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른 참가자다!’ 그는 <얼어붙은 서울>의 다음 룰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 ‘참가자’ 처치 시, 해당 참가자가 보유하고 있던 [열기 구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PK에 성공하는 것만큼… 목숨을 쉽게 연명하는 방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어차피 PK도 하나의 규칙이니까……!’ 심지어 강민우가 발견한 참가자는 두 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철컥-! 그러니 매직 거너 클래스의 장기인 저격을 활용한다면. 분명 여기서 반전의 기회가 만들어지리라. 강민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남성 참가자를 먼저 조준하였다. ‘좋아……. 한 번에 무조건 맞춰야 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 툭- 갑자기 발치에 웬 처음 보는 봉제 인형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 으… 바니는 귀찮아. - 바니, 여기서 잠들고 싶다……. 이어서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으스스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힘이 쭉 하고 빠지는 게 아닌가? [‘절대나태’ 상태이상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40%만큼 감소합니다.] 공격속도 감소는, 특정 상황에서 저격수에게 상당히 크리티컬하다. 저격류의 공격스킬 자체가 상당히 사전 딜레이를 많이 잡아먹는 스킬이었는데. 공격속도가 느려지면 느려지는 만큼… 그 딜레이 또한 함께 길어지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 그러니 강민우가 방아쇠를 당긴 바로 그 순간. 타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총구가 틀어져 버린 건……. 까가강-! 이 순간적인 디버프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딜레이가 갑자기 급격히 늘어진 게 아니었다면. 강민우의 탄환이 제대로 격발되기 전에, 저 묵직한 쇠파이프가 먼저 날아올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었다. “크윽……!” 그래서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을 때. “당연히… 탈락은 각오한 행동이었겠지?” 강민우는 여기가 끝임을 직감했다. 먼저 총구를 겨눴던 이상, 자신에게는 명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 순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죽여. 당연히 원망 같은 건 안 해.” 하지만 이어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잠깐, 소희 님.” “네?” “기다려봐요.” 강민우의 다 꺼져 가던 희망의 불씨가 놀랍게도 되살아났다. “강민우… 님.” “…?” “당신,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뭐?” “한번 들어볼 생각 있습니까?” * * * 이정민은 2페이즈부터 등장하는 ‘화로’ 시스템이야말로, 이 입학 미션의 꽃과도 같은 기믹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1페이즈까지는 개인 플레이에 집중하던 참가자들을 자연스럽게 3인 단위 파티로 묶어버리면서, 다양한 갈등 서사를 조장할 수 있는 흥미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PD님.” “네, TL님.” “3명 이상부터 화로 효율이 급감하는 건 알겠는데, 좀 이기적이고 강한 사람은 그냥 혼자서 화로 하나 써도 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화로에서 버티면 ‘보급 상자’도 들어오는데요.” 흥미롭게 화면을 구경하던 기술 팀장의 질문에, 정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님. 사람이 적다고 화로에 필요한 구슬 개수가 적어지지 않는 구조니까요.” “아……?” 입꼬리를 말아 올린 정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심지어 화로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필드 몬스터들의 어그로가 끌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혼자서 화로를 지켜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팀장님 어릴 적 수련회에서 레크레이션 같은 거 해보셨죠?” “어… 아마도요?” “그때 단골로 등장하는 단체 게임 있잖습니까.” “아, 짝 맞추기 게임?” “맞아요. 빙글빙글 돌다가 사회자가 제시하는 숫자에 맞춰 짝을 만들지 못하면 탈락하는… 그 게임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2페이즈의 기획 의도 자체는 간단하다. 서로 친분이 없는 참가자들끼리 순발력 있게 파티를 구성해서, 화로를 향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얼마나 괜찮은 팀워크를 발휘하냐를 보자는 것이었으니까. “팀 운도 상당히 중요하겠네요.” “그렇죠?”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시스템의 도파민이 점점 더 살아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5분 단위 기믹에 있었다. “이야, 그러면 화로 개수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점에는 볼 만하겠네요.” “저도 그걸 기대 중입니다.” “2페이즈 20분 지난 시점부터… 5분마다 랜덤한 화로 3개의 불이 꺼지는 거죠?” “맞아요. 처음 30개였던 소형 화로는, 정확히 50분 뒤에 12개만 남게 됩니다.” 일단 3인 파티를 완성해 안도하던 플레이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팀의 화로를 강탈하거나 내 화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부터가 본격적인 갈등의 국면이다. 참가자 간 PVP 과정에서 어떤 팀은 팀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팀원은 팀을 배신하기도 할 테니까. 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적어도 4할의 플레이어들이 미션 아웃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켜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후후.” “듣고 보니 확실히 더 흥미진진해졌습니다, PD님.” 모니터를 응시하는 정민의 눈빛이 기분 좋게 반짝였다. 그가 보고 있는 모니터는, 당연히 이성환과 박하준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괴물이 같은 팀이 될 확률이 없어졌다는 게 가장 다행인 부분이네요.” “하하.” “이미 이성환은 파티도 전부 다 구했군요.” 이제 기획자 입장에서 가장 우려됐던 지점들은 모두 무사히 넘어간 탓인지, 이정민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이정민은, 방치돼 있던 세 번째 모니터를 처음으로 세팅해 보았다. “TL님, 혹시 여기에 99번 참가자 화면 한 번 띄워주실 수 있나요?” “99번이면…….” “아마 ‘이건율’ 참가자일 겁니다.” 긴장이 조금 풀리니……. 친구 놈이 지금쯤 뭘 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궁금해진 것이다. ‘벌써 아웃된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피잉-! 그런데 다음 순간. ‘어?’ 화면에 떠오른 광경을 확인한 이정민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돼야 했다. 일단, 이미 탈락한 7명 안에 들어있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친구 놈이……. 너무도 멀끔한 컨디션으로, 이렇게나 빠른 시간대에 화로를 차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심지어 그와 파티 중인 나머지 두 플레이어의 면면이, 어떤 의미에서든 너무 화려(?)했다. ‘강소희에 강민우? 어떻게 이런 거물들이랑 있는 거야?’ 무려 제작진이 예의주시 하고 있는 열 명의 참가자 중 두 명이, 이건율의 파티원이었던 것. “이성환네 말고도 벌써 화로를 찾은 팀이 있네요?” 그래서 놀라고 있는데……. 지이잉-! 때마침 이정민의 스마트폰에, 장세연PD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야, 이정민이. 너 어디서 이런 물건을 주워 온 거야? 예?? -이건율 참가자, 네 지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6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내가 화로의 시스템을 전부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DA 단말기 덕에 첫 화로를 빨리 찾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시험 삼아 구슬 몇 개 집어넣어 보니, 금방 견적이 짜여버린 것이다. “파티, 세 명까지 채우는 게 좋긴 하겠어요.” “동의합니다.” “다른 참가자가 나타날 때까지 일단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일단 내가 파악한 바로, 지하도시 안쪽에는 소형 화로가 꽤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같은 ‘소형 화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게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게 됐는데……. 이건 화로의 성능에 따른 가치 차이가 아니라, 화로가 있는 위치에 따른 가치 차이였다. 화로를 점화했을 때 몰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파티원도 중요하긴 한데…… 그것보단 가장 좋은 위치의 화로를 선점하는 게 더 중요해서요.” “더 성능 좋은 화로가 따로 있어요?” “그건 모르죠.” “……?” “전 단순히 위치를 말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양질의 몬스터가 풍부한 위치의 화로에 자리 잡고 있어야, 이 빙하기 동안 더 많은 ‘열기 구슬’을 파밍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결국 화로를 켰을 때 몰려드는 몬스터는 그 근방에 젠되는 몬스터들이고, 때문에 조금 더 위험한 지역에 있는 화로를 먹어야 구슬 파밍량이 많아질 거라는 소리. 화로 유지 보상인 ‘보급 상자’에서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까지는 아직 알 방법이 없었지만……. 그 부분을 배제하고도 우리 파티의 전투력에 충분한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사고의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전투력 자체는, 지금 나와 강소희 두 명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니까. ‘이제 대충 체온이 28°C 정도까진 내려갔으려나?’ 나는 아직 열기 구슬을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덕분에 몸이 얼어붙는 느낌은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스텟은 최소 2배 이상 뻥튀기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강소희도 비슷한 상태. 모르긴 몰라도 정예 몬스터라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 지금 강소희의 광역 맹독을 5초 이상 버틸 수 있는 몬스터는 필드에 존재치 않을 거였다. “그러니까 파티원은 그냥 아무나 한 명 ‘구하기만’ 하면 돼요.” “체온효율 때문에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 이상 얘기하진 않았지만, 사실 너무 야망 있고 뛰어난 파티원이 들어오는 것도 별로다. 왜냐하면… 1등은 내가 해야 하니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다 죽어가는 걸레짝 하나 건져 올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별로인 파티원일 필요도 없지 않냐고?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완전히 갑인 위치에서 다 죽어가는 참가자를 구해주는 그림이 되어야, 그 참가자의 ‘몫’을 상납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를테면 ‘보급 상자’라던가. 흠흠. ‘보급 상자 보상을, 분명 허접하게 해두진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하도시의 북쪽에 도착했을 때. ‘강민우’라는 참가자를 만난 건 꽤나 운이 좋은(?) 일이었다. 심지어 이 친구가 먼저 PK까지 시도해 준 덕에, 나한테 명분까지 생겨버렸거든. “강민우… 님.” “…?” “당신,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뭐?” “한번 들어볼 생각 있습니까?” 바보같이 경거망동해준 덕분에, 이 사람의 생살여탈권(?)이 내 손아귀에 들어와 버렸다. 그러니까 아주 타이밍 좋게, 훌륭한 노예(?) 하나가 넝쿨 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물론 여기 소희 님이 동의하셔야 하긴 하는데…….” 슬쩍 강소희의 눈치를 봤는데, 알아서 하라는 표정이다. “당신을 파티원으로 잠깐 고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건 확실하게 해야 하긴 한다. 우리 버스 기사 강소희 파티원님은 엄연히 ‘영입’한 거고, 이 머저리는 잠깐 ‘고용’한 것뿐이라는 거. “가능한 시점까지 당신의 체온을 유지 시켜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 “그 기간 동안 당신은 제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고, 또한 당신이 획득하는 모든 보상은 우리가 가져갑니다.”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고 있는 척하곤 있지만, 아마도 이 바보는 지금 조건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보아하니 화로의 존재도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내가 지금부터 뭘 시킬지 짐작조차 못 할 테니까. 아니, 내가 아무리 궂은 일을 시켜도 조건이 좋은 건 맞지 뭐. 어차피 여기서 버려지면 그 즉시 탈락일 텐데 말이지. 그런데. “절대복종이라니… 그건 좀…….” 아무래도 이 자식은, 메타인지 능력이 박살 난 친구였나보다. “그러면 뒈지시던가.” “……!” 설마 지금 본인한테, 선택권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건가? “아, 아니! 그건 아니야!” 일단 말투부터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데……. “친구, 말이 짧다?” “……!” 딱 봐도 어린노무쉐끼가, 어디서 초면에 반말을 찍찍 싸지르고 있어? * * * 모니터링이 시작된 지, 대략 1시간 1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허어억….” 김예림은 거의 모니터에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니 이 첫 미션에 한정해서는 우리 동업하는 거 어떻습니까?] ‘와…….’ [뭐, 같이 좀 해보시고, 저와 파티하는 게 손해라고 생각되시면 탈주하셔도 무방합니다.] ‘와, 미친……!’ 사실상 이건율 참가자가 줌인 된 모니터를 제외하고, 다른 참가자들은 거의 유기(?)한 수준! “작가님. 모니터링 제대로 하고 계신 거 맞죠?” “…….” “작가……님?” 그런데 김예림은 ‘솔직히 그럴 만했다’고 생각 중이었다. 처음엔 자기 취향에만 맞는 ‘매니아 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자, 이건율 참가자의 활약은 기대했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야. 35레벨 아니었어……? 전투는 왜 이렇게 잘해?’ 물론 레벨이 부족해서 그런지, 강소희의 마력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보여주는 현란한 피지컬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으며……. 결정적으로 평범하게 뛰어난(?) 참가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런 모먼트들이, 김예림을 치이게 만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끄윽… 이제 한계예요. 역류가…….] [뭔 소리예요. 딱 과부하 직전일 텐데.] [어?] [패치나 붙이고 잠깐 쉬어요. 회복되면 곧바로 이동할 거니까.] ‘미쳤다……. 저 건조한 표정으로 단정 지어버리는 것 좀 봐…….’ ‘저 말인즉슨, 강소희 참가자의 마력 상태가, 이건율 머릿속에서는 이미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있는 거지.’ ‘관심 없는 척하면서,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거라고!!’ 게다가 소환술사 쪽 클래스였는지, 데리고 다니는 작고 까만 소환수도 엄청난 매력 포인트. - 바니도 쉬고 싶다……. [넌 안 돼.] - 바니 퇴근. 지금 당장 퇴근. [뭘 했다고.] “귀, 귀여워…….” 예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장면을 보며 떠들어 댈 시청자들의 반응까지도 파노라마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채팅] : ㅋㅋㅋㅋㅋㅋㅋㅋ 인형 꼬라지 봐라. 쓰레기장에서 주워옴? [채팅] : ㄴㄴ 저거 컨셉임. 흑마법사가 아끼는 저주 템 느낌. [채팅] : 토끼쉑 3인칭으로 말하는 거 개킹받네 ㅋㅋㅋㅋ “바니, 여기서 잠들고 싶다” ㅇㅈㄹ ㅋㅋㅋ [채팅] : 근데 주인이랑 뭔가 똑같이 생긴 거 같지 않냐? 둘 다 약간 노곤한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채팅] : [삽니다] 저 토끼 인형 굿즈로 내주세요…… 제발. 내 침대에 두고 싶음. 그러니까 놀랍게도 이건율 참가자의 영상은, 거의 모든 순간 버릴 부분이 단 한 구석도 없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김예림이 모든 집중력을 여기 몰빵한 건……. 예능 작가로서 너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나 혹시… 지금 바로 1픽을 정해도 되는 걸까……?’ 심지어 파티원인 강소희 참가자까지도, 예림에게는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외모의 대중성만 따져도 박소미 참가자보다 크게 꿇리지 않을 수준인데……. 보면 볼수록 대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개성과 매력이 동시에 느껴지는 얼굴이었으니 말이었다. ‘그냥 예쁘기만 한 인형이 아니라, 깨진 유리 조각 같아…….’ 그냥 하얀 게 아니라, 핏기가 싹 가셔서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거기에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간 고양이… 아니 살쾡이상. [당연히… 탈락은 각오한 행동이었겠지?] ‘저, 저 봐. 말투도 엄청나게 차가운데… 가만 보면 이건율 참가자한테만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침까지 꿀꺽 삼키며 강소희를 지켜보던 김예림은, 예전에 사촌 언니가 했던 대사를 오늘에서야 이해하는 느낌이었다. -지켜주고 싶은데 뭔가 밟히고 싶은 재질…… 그런 게 진짜로 있다니까? 매력적인 캐릭터에… 그보다 더 매력적인 관계성까지! 이런 참가자들을 보며 덕질을 참는다는 건, 예림에게 너무 가혹한 고문 아닐까? 물론 옆에서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고 있던 박동수가 예림의 속마음과 망상을 전부 듣기라도 했다면. 그 즉시 정신병원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거나……. 혹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 되어 턱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파트너를 바꿔 달라며 장세연 피디님을 찾아갔겠지만 말이었다. ‘진짜로 못 참겠다! 오늘 퇴근하면, 진짜 민정 언니한테 바로 전화부터 조진다.’ 자신보다는 정파(?)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덕질 내공만큼은 절대로 꿇리지 않는 사촌 언니 임민정. 퇴근길에 마케팅 팀에 들러 이성환 실물 포스터 한 장 들고 찾아간다면……. 언니는 기꺼이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아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줄 사람이었다. 오늘 모니터링한 내용에 대해 민정언니와 수다 떨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하는 예림이었다. 6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어찌어찌 세 명이 된 우리는, 북서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며 수색을 진행했다. 그리고 2페이즈가 시작된 지 정확히 10분 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위치의 ‘소형 화로’를 점거할 수 있었다. [‘소형 화로’ 오브젝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소형 화로’가 1분 동안 활성화됩니다.] 그 과정에서 딱히 다른 참가자들과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타이밍에 여기까지 들어온 참가자는, 존재하기 힘든 구조였으니까. ‘나처럼 맵을 훤히 알고 있지 않는 한은… 불가능에 가깝지.’ 그리고 일단 화로에 도착하자, 확실히 안정감이 생긴다. [‘소형 화로’를 점거하셨습니다.] [더 이상 체온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남극 탐사를 하다가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기분이랄까. 뭐… 그 기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었다. [‘화로의 온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몬스터들의 습격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이미 알고 있던 나와 강소희는 별달리 놀라지 않았지만, 이 메시지를 처음 본 강민우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으…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군.” 하지만 그런 사정을 내가 봐줄 필요는 없었다. “준비하시고……. 우리 계약 내용은 잊지 않았죠?” “어떤……?” “이제부터 획득 가능한 모든 전리품 중에, 당신 몫은 없는 겁니다.” “…….” “그리고.” 강민우는 내 말이 상당히 못마땅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난 역시 개의치 않았다. “허튼 짓거리 하는 순간 곧바로 퇴근시켜드릴 예정이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을 마친 나는 강소희의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했다. 체온이 상당히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원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져 있었지만. 오히려 전투에는 더욱 최적화된 상태인 듯 보였다. “춥긴 한데, 오히려 컨디션은 더 좋네요.” “그래요?” 왼쪽 쇄골 아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 강소희가, 살짝 웃어 보였다. “마력이 안정적이라……. 이 고통에 비하면, 조금 추운 정도야 뭐.” 웃는 건 방금 처음 본 것 같은데, 순간 조금 당황했다. 원래 이렇게 예쁜 얼굴이었나? 살벌한 표정일 땐 몰랐었는데……. “다행입니다.” 뭐, 그건 그거고. 강소희의 위력을 체감하면 체감할수록, 아쉬운 마음이 더 커지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역류로 인한 마력 증폭 효과 때문에 강력한 줄로만 알았는데……. 순수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내가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인재였으니 말이다. 그냥 강소희와 같은 ‘베놈 블러드’ 클래스를 가졌던 NPC놈만 비교해봐도 답이 나온다. 그 녀석은 무려 마탑주들과 비견될 만큼 강력한 미치광이 대마법사로 성장했던 NPC였고. 그놈, 아니… 그 여자와 비교해도 딱히 강소희의 재능이 나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제어능력은 좀 아쉬운데, 폭발력만 놓고 보면 더 나은 것 같기도 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번 미션이 끝나고 나면 강소희도 딱히 나와 함께할 이유가 없을 거다. 마력 역류가 그렇게 자주 터지지는 않을 거거든. 입학 미션 이후에도 솔로 미션보다는 파티 미션이 무조건 더 많을 텐데……. 남은 시간 동안 호감작 열심히 해 두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으려나? 흐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부터 뭘 하면 되지?” 비호감 총잡이 녀석이 눈치 없이 내 상념을 끊었다. 저 띠꺼운 말투는 내추럴 본인가……?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구만. “뭘 하면 되냐고요?” 그렇다고 나까지 저 녀석에게 같은 말투를 돌려줄 이유는 없다. 지금 이 모든 장면은 언제 어떤 식으로 편집돼서 방송에 송출될지 알 수 없으니까. 저렇게 비호감 포지션을 스스로 잡는 건, 그냥 저 바보가 제 살 깎아 먹기를 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어차피 좀 쓰다 버릴 녀석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그 총은 어지간하면 쓰실 일 없을 테니까… 등짝에 걸어 메시고.” “……?” 당황하는 녀석을 향해, 아주 명확한 임무를 전달해 주었다. “당신의 역할은 정확히 두 가집니다.” “두 가지?” “첫째, 몹 몰이. 둘째, 아이템 루팅.” 듣자마자 약간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뭔가 오해하나 본데, 난 원거리 딜러다. 짐꾼도 아니고 대체 내가 왜…….”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했다. 메타인지 능력이 부족하신 건,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파악했거든. “우리가 필요한 건 짐꾼이지 딜러가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격발 동작부터 포지셔닝까지 엄청나게 쓰레기 같던데. 대체 이 실력으로 어떻게 <헌터즈 스쿨>에 합격한 거지? “그 조막손으로 뭐 도우려 해 봐야, 짐만 될 겁니다.” 강민우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강소희를 바라봤지만, 그녀가 편들어줄 리는 당연히 없었다. 강소희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화로에 도착하기까지 두 번 정도 벌어졌던 전투를 본 것만으로, 강민우가 얼마나 허접한 딜러인지 이미 파악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실력이 좋았더라도, 어지간하면 짐꾼 내지 심부름꾼으로 썼을 테지만 말이다. “자, 그럼 다들 준비하시고.” 잠깐 팀원들과 대화하던 사이, 어느새 일단의 몬스터 무리가 멀찍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금부턴 집중해서 파밍 한 번 시작해 보도록 하죠.” * * * <헌터즈 스쿨 3>의 멘티 참가자는, 총 100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다. 그래서 멘토들은 아직 모든 참가자들의 플레이 화면을 다 지켜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 번에 5분 정도씩만 비춰도 총 500분이나 되는 시간인데……. 유망한 참가자이거나 장면 자체가 흥미로운 경우 한 텀에 10분 이상 플레이를 비추기도 하니, 고작 1시간 20분 지난 지금 시점에는 사실 반에 반도 다 보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포맷 자체가 제작진이 틀어주는 옵저버를 강제로 관람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으니, 더더욱 멘토들 입장에선 볼 수 있는 장면이 제한되는 것. 그러니 우선순위가 낮았던 ‘이건율 참가자’의 화면이 멘토들에게 아직 보여지지 못한 건 너무 당연한 부분이었고. 지금 총괄 PD인 장세연이 고민 중인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건율이라……. 딱 봐도 이거 히든카드인데.’ 장세연 PD의 고민은 꽤 복합적인 것이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써먹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 멘티들에 대한 멘토들의 평가가 기본 포맷이 될 <헌터즈 스쿨 3>의 첫 화에서, 이건율이라는 히든 카드를 어떤 식으로 써먹는 게 맞을 지에 대한 판단이 아직 명확히 서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긴 보여줘야 할 텐데.’ 이건율이라는 카드를 아낄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카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 그건 그때그때 써먹어야 한다는 걸 장세연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시즌 2때도, 초반에만 반짝하다가 금방 묻혀버린 참가자들도 많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장세연의 고민은, 이건율 참가자의 ‘노출 방식’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멘토들의 스크린에 지금 바로 띄워서, 곧바로 주목받게 만드는 것. 둘째, 의도적으로 멘토들의 스크린에 띄우지 않고 영상만 따로 편집해서…… 첫 화 방영분에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만 삽입되게 만드는 것. 두 가지 선택지에는 각각 명확한 장단점이 존재한다. 첫째는 정석적으로 언더독 포지션의 참가자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막상 멘토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할 경우, 히든 카드라 생각했던 방송 리소스를 너무 아쉽게 날려 먹게 된다. 둘째는 시청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어, 리텐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건율과 함께 있는 강소희와 강민우 참가자의 리소스까지 첫 화에 써먹지 못하게 된다. ‘이거 판단이 쉽지 않네.’ 그래서 강세연은 지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모든 출연자들 중 가장 길게 송출되고 있는 ‘이성환’의 전투 페이즈가 끝나기 전에, 어지간하면 결정을 마쳐야 하는데도 말이다. [역시, 이성환 참가자는 기본기부터 확실히 탄탄하군요.] [파티에서 딜이면 딜, 탱이면 탱. 두 가지 포지션을 혼자서 거의 다 소화해 내고 있어요.] [나머지 파티원 둘이 힐러에 버퍼라서 그런 감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무나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순 없지. 이렇게 정석적으로 훌륭한 쉴드 워리어는 오랜만에 보는군.] 그런데 장세연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옆으로 쭈뼛 다가온 김예림이 슬쩍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 피디님.” “아, 말씀하세요 작가님.” 그런 김예림을 응시하는 장세연의 표정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야 이 막내 작가의 보고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까지 이건율 참가자의 잠재력을 몰랐을 테니 말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건율 참가자를 어떻게든 밀어보고 싶거든요?” “그래요?” “그래서 피디님 말씀하셨던 계획 중, 두 번째 계획이 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유는?” 장세연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막내 작가인 김예림과는 이번이 함께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였지만, 그녀가 지금껏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어필하는 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첫 번째 안으로 가면, 강소희 참가자와의 서사나 관계성은 살리기 어려워져요.” “으음…….” “일단 멘토분들의 평가가 시청자들에게 노출되는 순간… 저희 프로그램 특성상, 한번 씌워진 프레임이 바뀌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요.” 굉장히 날카로운 지적에 장세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긴 김예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PD님. 첫 화에서는 강소희 참가자의 시점만 한 번 더 송출해서, 이건율 참가자의 플레이를 간접적으로만 보여주는 게 어떨까요?” “간접적으로?” “네! 어차피 강소희 참가자 분량이 초반에 너무 잠깐만 나왔으니까… 지금 진행도나 활약상을 봤을 때, 충분히 한 번 더 틀어줄 만하기도 하니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그러다가 이건율 참가자의 임팩트 있는 활약 장면이 한 번 더 나와준다면, 그걸 이건율 참가자 시점으로 작업해서 1화 엔딩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뭔가 그려지는 그림이 있는지 신나서 떠드는 김예림을 보며, 장세연은 조금씩 마음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김예림의 마지막 한 마디는, 조금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까지 좋은 활약 장면이 더 나와줄까요?” 1화의 엔딩 장면이야말로 <헌터즈 스쿨 3>의 흥행 여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한 중요한 파트였는데……. 이 자리에 이성환이나 박하준을 제치고 들어갈 만큼 이건율이 활약해 줄 거라고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안 나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요…….” 자신의 반문 한 번에 쭈글거리는 김예림을 보며, 장세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요. 그래도 일단 작가님 제안 주신대로 방향 한 번 잡아보죠.” “예쓰!” “그러려면 작가님이 잘 봐주셔야 돼요. 알죠?” “넵넵! 피디님!” 하지만 이때만 해도 장세연은, 정말 1화의 엔딩씬에 이건율 참가자를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그럼 전 일단 가볼게요, 작가님.” “옙!” 자신이 김예림의 모니터링실을 떠난 직후에 나올 것이라고는, 더욱 상상하지 못했고 말이었다. 6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6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우리가 자리 잡은 소형화로는, 헌터들이 흔히 얘기하는 ‘엘리트 스폰 포인트(Elite spawn point)’의 바로 인근이었다. 이 엘리트 스폰 포인트라는 건 80레벨 이상의 고레벨 던전은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었는데……. 쉽게 말해 보스급은 아니지만 강력한 정예 몬스터들이 주기적으로 젠 되는 특정 포인트를 바로 엘리트 스폰 포인트라고 부른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지하도시 안에 널려있는 소형 화로들 중 가장 위험한 화로에 자리 잡은 셈이었다. 아무리 나와 강소희의 전력이 강하다 해도, ‘체온 반비례 버프’라는 기믹 없이는 상당히 위험했을 만큼 말이었다. “드디어 젠됐네요.” “저게… 뭐죠?” “‘과부화된 소각로 골렘’입니다. 엘리트 몬스터죠.” “……!” 골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녀석은 5m는 될 법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엘리트 몬스터였고, 내게는 아주 익숙한 몬스터였다. <얼어붙은 서울> 외곽에 등장하던 몬스터들과 달리, 이 녀석은 실제 아이언 그레이브 던전에서도 같은 자리에서 정예 몬스터로 스폰되던 친구였으니까. 치이익- [침입자- 죽인다-] 잔뜩 과열되어 증기를 푹- 푹- 뿜어내는 이 녀석은, 지하도시의 난방 시스템을 관리한다는 특이한 컨셉을 가진 몬스터. 얼핏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뻘겋게 과열된 저 강철 표피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수준이었고, 사방으로 뿜어 대는 증기에 잘못 노출되는 순간 어마어마한 화상을 입는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캬, 오랜만이네.’ 하지만 나는 싱글벙글이었다. 애초에 여기에 자리 잡은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이 녀석을 불러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미친…… 레벨이 60에 가까운 엘리트다. 저걸 잡겠다고?” 녀석의 위압적인 체구를 본 강민우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난 속으로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58레벨 정도면 상당히 양심 있는데? 한 65레벨쯤은 설정해뒀을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기억 속의 95레벨 강철 골렘과 비교되다 보니, 58레벨이 귀엽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말이지. 게다가 녀석의 드랍 테이블을 생각하면, 58레벨은 거저나 다름없다. 6티어 영웅등급 장비들 중 가장 유명한 이그니션 세트(Ignition Set)를 얘가 드랍하는데, 한 부위만 먹어도 3천 LP쯤 하는 거로 알고 있으니까. 물론 여기서 먹어봐야 당연히 팔아먹을 수 없는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 테고……. ‘레벨이 너프된 녀석인 만큼 장비도 다운그레이드된 채 드랍되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 이그니션 세트 중 아무거나 하나만 주워도, 여기서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게 분명했다. 왜냐고? 터엉-! [‘마력 냉각수 파이프’ 아이템을 장착하였습니다.] [‘부식된 철제 원형 방패’ 아이템을 장착하였습니다.] 난 아직도 이런 거 들고 사냥 중이었거든. 강소희는 지하도시 들어오기 전에, 그래도 괜찮은 3티어 희귀 등급 마력구 하나 주웠지만 말이었다. “강민우 님, 앞에서 시선 끌어줘야 하는 거 알죠?” “으… 진짜 싸울 생각이야?” “그냥 어그로 끌면서 도망 다니는 것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후우. 알겠어.”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억지로 전장을 향해 걸어가는 강민우를 보며, 이번에는 강소희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어차피 제가 상대할 거라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복부에 빨간색 게이지가 다 찼을 땐 확실하게 거리 벌리셔야 합니다.” “기믹인가요?” “폭발패턴입니다. 시전 동작이 긴 편이라 피하긴 쉬울 텐데, 한 번 실수해서 맞으면 상당히 위험할 겁니다.” 이 엘리트 공략에서 강소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실 이 골렘에게 딜을 넣는 게 아니었다. 광역 마법에 특화된 강소희는 애초에 보스전 딜 효율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때문에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내가 골렘을 잡는 동안 다른 잡몹들을 처리해 주는 거였다. 쿵- 쿵- 그워어어-! 그 역할까지 강소희에게 간단하게 설명한 나는, 머뭇거리고 있는 강민우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 “뭐 합니까? 일단 한 발 쏴야지.” “……!” “딜은 안 넣더라도, 선제 어그로는 받고 시작해야 할 거 아닙니까?” 내 오더에 마지못해 마력총을 견착한 강민우는, 숨을 크게 몰아쉰 뒤 골렘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파티원 ‘강민우’가,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된 소각로 골렘’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나름 정제된 마력탄 한 발이 골렘의 두꺼운 장갑에 튕겨 나갔고. ‘다행히 맞추긴 했네.’ 데미지는 없어도 어그로를 끄는 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경고. 이물질 감지.] [오염원 제거 프로토콜 가동.] 기긱- 기기기긱-! 골렘의 뱃속 화로에서 쇳소리 섞인 괴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등 뒤의 굴뚝에서 검은 매연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쿵- 쿵- 쿵- 그 5m에 달하는 강철 거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강민우를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이익……!” 강민우는 뭔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추가적인 공격을 시도하려 한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달려드는 골렘의 모습에 그대로 총을 등에 걸어 메고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지하 도시의 바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란하게 울렸다. 압도적인 중량감. 강민우의 시점에서는, 눈앞에서 덤프트럭을 마주한 기분일 터였다. “제기랄! 뭐라도 좀 해보던가!” 하얗게 질린 강민우의 표정이, 실소가 새어 나오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저 증기 골렘은 비슷한 체구의 다른 몬스터들 대비 상당히 기동력이 빠른 축에 속했고. 심지어는 강민우가 내달리는 속도보다 2배 가까이 빠른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땐 나도 꽤 당황했었거든. ‘그나저나… 나도 슬슬 붙어야겠는걸?’ 단 몇 걸음 만에 강민우의 등 뒤까지 쇄도한 골렘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거대한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어서 내리꽂힌 주먹이 강민우가 있던 자리를 덮쳤고. 콰아앙! 간발의 차로 뒹굴어 피하긴 했지만, 충격파에 휩쓸린 그의 몸뚱이는 볼품없이 눈밭에 나뒹굴었다. “끄으윽-!” 애초에 기대가 없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굼뜬 느낌이다. ‘대체 저 실력으로… 헌터즈 스쿨은 어떻게 들어온 거지?’ 하지만 실망스러움과 별개로, 이대로 강민우를 버릴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직 뽑아먹은 것도 없는데 이대로 버리면, 손해만 보는 거잖아? 크워-! 골렘 녀석이 강민우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한번 팔을 들어 올린 바로 그 순간. ‘지금.’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나는, 바닥을 박차고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직선적인 달리기? 아니다. 녀석이 내리찍는 주먹의 궤적 안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슬라이딩이었다. 콰득! 내 왼팔에 들린 ‘부식된 철제 원형 방패’가, 골렘의 팔뚝 안쪽을 순간적으로 강타했다. 정면으로 막으면 이런 1티어 철 쪼가리가 골렘의 공격을 버텨낼 리 없었지만……. 콰드득-! 관절 안쪽을 밀어쳐서 궤적을 비틀어버리는 건, 이 정도 장비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된 소각로 골렘’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끼기기긱-! 불쾌한 금속음과 함께 골렘의 주먹이 강민우의 머리통 옆, 맨땅에 처박혔고. “끄… 끄윽….”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강민우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방패 뒤에 숨겨뒀던 오른손을 뻗었다. 내 손에 들린 건 당연히 ‘마력 냉각수 파이프’. 출렁이는 액체 질소가 담긴, 소중한 몽둥이였다. “비키시죠. 밟히기 싫으면.” 이제 다시 나에게로 어그로가 튀었으니, 강민우가 몸을 뺄 시간 정도는 충분히 확보됐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대로 골렘의 팔을 타고 녀석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후끈한 열기가 전신을 감쌌지만……. 아이언 그레이브에서는 이게 꽤 고통스러웠는데, 여기선 은근히 따뜻하고 괜찮은걸? 타탓- 그런 실없는 생각을 잠깐 하던 난, 냉각수 파이프를 녀석의 약점에 정확히 내리꽂았다. 깡-! 겉으로 드러난 녀석의 약점은 바로 관절부. 그중에서도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무릎이었다. 덩치에 비해 기동력이 좋다는 건, 관절구조가 복잡하다는 뜻. 그만큼 내구도가 약한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까가강-! 내 공격은 단순한 물리 타격이 아니었다. 파이프 안에 든 냉각수의 한기를, 과열되어 잔뜩 달아오른 골렘의 무릎 관절에 순간적으로 침투시키는 개념이었으니까. 치이이이익―!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 된 소각로 골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극과 극의 온도가 충돌하는 순간, 강철은 마치 유리처럼 취약해진다. 덕분에. 쩌저정-! 녀석의 무릎 장갑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쩍 하고 갈라졌다. 그워어어-! 자세를 무너뜨린 골렘이 비틀거리며 다시 반격을 시도했다. 녀석의 뱃속 화로 문이 열리며, 맹렬한 불길이 나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근거리 화염 방사.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지만, 이것도 당연히 예상 범주 안이었다. “소희 님!” 내 외침과 동시에, 미리 약속된 위치에서 강소희의 지원 사격이 날아왔다. 그녀가 쏘아 보낸 고밀도의 독기 덩어리가 골렘의 안면부를 덮쳤다. 시야가 차단된 골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며 허공에 불길을 흩뿌렸고. 화르륵! 머리 위로 불길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골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열기로 달궈진 방패를 앞세운 채로, 이번엔 상체를 노려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증기가 거의 다 쌓였네.’ 가장 위험한 광역 폭발 페이즈를 안전하게 넘어가야 한다. “다들 거리 벌리세요!” 나는 녀석의 무너진 무릎을 징검다리 삼아 도약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녀석이 휘두르는 거대한 집게발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었다. 밖에서 볼 땐 아슬아슬한 차이였겠지만, 그건 내가 일부러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타앗-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여기까지 올라서지 못했을 테니까. “폭발합니다!” 녀석과 거리를 벌리지 않고도 이 증기 폭발을 피해내려면, 어깨 위까지 올라서는 방법밖엔 존재하지 않았다. 퍼어엉-!!! 두 사람은 내 경고 덕에 폭발 범위 밖으로 미리 벗어나 있었고. [경고. 이물질 감지.] [파괴, 프로토콜 가동.] 기익- 기이익-! 당황한 녀석의 전신이 꿈틀대며 날 공격했지만, 요리조리 피해 가며 녀석의 등짝을 향해 뛰어들었다. 내 목표는 등 뒤에 솟아 있는 두 개의 굴뚝. 정확히는 그 사이에 숨겨진… ‘메인 압력 밸브’였다. [경고- 경고-] 등 위의 이물질을 감지한 골렘이 자신의 등을 향해 슬래그 배출관을 겨눴다. 제 등을 태워서라도 나를 없애겠다는, 사실상 자폭에 가까운 패턴. 시뻘건 쇳물이 파이프에 쏟아져 들어가는 걸 보며, 나는 냉각수 파이프를 역수로 고쳐 쥐었다. ‘패턴 깔끔하고.’ 이제 녀석의 숨구멍만 막아버리면, 내가 할 일은 전부 마무리된다. 58레벨이나 되는 엘리트 몬스터인 만큼 생명력은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만. 일단 자폭 페이즈를 유도해 낸 순간, 다 잡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콰드득- 밸브의 회전축 틈새에 쇠말뚝을 박듯이 파이프를 쑤셔 박은 나는, 그대로 파이프를 지렛대 삼아 체중을 실어 밸브를 억지로 비틀어버렸다. 끼기기긱- 텅!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된 소각로 골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내부의 기어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밸브가 완전히 잠겨버렸고. 배출되지 못한 열기와 압력이 녀석의 체내에서 역류하기 시작했다. [경고. 내부 압력 위험 수위 도달.] [긴급 배기 불가능. 동력로 폭주.] 그와 동시에 녀석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등 뒤의 굴뚝이 팽창하듯 부풀어 오르고, 관절 마디마디에서 시퍼런 증기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폭발이 임박한 것. “내려와요!” 아래에서 강소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고, 나는 미련 없이 녀석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낙하하면서 방패를 전개해, 폭발의 후폭풍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쾅-! 거대한 굉음이 화로 주변을 뒤흔들었다. 골렘의 등 뒤에서 붉은 불기둥이 솟구쳤다. 외부의 공격이 아닌, 스스로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내부 붕괴였다. 쿠우우웅- 산처럼 거대했던 강철의 육신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욱한 매연과 먼지가 피어오르는 전장 한복판. 이어서 무너진 골렘의 잔해 위로,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된 소각로 골렘’을 처치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리트 몬스터, ‘과부하된 소각로 골렘’을 최초로 처치하셨습니다!] [최초 처치 보상으로, 이그니션 버스터(Ignition Buster)가 드랍됩니다.] 까맣게 타버린 골렘의 잔해 속에서, 보랏빛깔의 영롱한 빛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7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처음 보랏빛 빛기둥을 봤을 땐,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이게 한 방에 나올 수가 있다고? 촬영장 오는 길에 로또나 살 걸 그랬나?’ 하지만 ‘최초 처치 보상’이라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건지 곧바로 그림이 그려졌으니 말이다. ‘의도된 설계였네.’ 첫 페이즈의 파밍 요소가 대부분 ‘생존’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두 번째 페이즈부터는 ‘스펙 업’을 위한 파밍이 가능하도록 단계적 성장 요소를 추가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최초 처치 보상 같은 거로 드랍률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참가자가 고급 아이템은 구경조차 못 한 채 미션이 끝나버릴 테니까.’ 아무래도 참가자들이 질 낮은 장비들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이어간다면……. 화려한 씬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난 상당한 수혜를 봤고,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나저나 이그니션 버스터라니.’ 1등상까지는 아니고 2등상 정도 되는 아이템이 나왔다. 이거면 내가 세워놓은 플랜들이 더욱 순조롭게 굴러갈 충분한 윤활유가 되어줄 터였다. 〓〓〓〓〓〓〓〓〓〓〓〓〓〓 이그니션 버스터 (Ignition Buster) 분류 : 장비 - 마력총 레벨 제한 : - 등급 : 영웅 티어 : 5T 내구도 : 90 / 90 주 능력치 공격력 +78 - 옵션 화염속성 공격력 +45 치명타 확률 +10% ……중략…… 거대한 화염 골렘의 메인 배기 파이프를 뜯어내어 강제로 방아쇠를 결합한 무식한 형태의 마력 소총입니다. 정교한 마공학 회로 대신, 투박한 주철관과 내열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총열 틈새에서 시커먼 매연과 고열의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격발음이 특징입니다. - 고유효과 * 용해탄 (Melting Slug) 피격된 대상에게 물리 타격과 화염 피해를 동시에 입히며, 5초간 [심각한 화상] 상태로 만듭니다. <냉기> 속성을 가진 적에게 250%의 추가 피해를 입히며, 얼음으로 된 방어막을 즉시 녹여버립니다. * 과열 (Overheat) 탄환이 적에게 명중할 때마다 총열에 [열기] 스택이 쌓입니다. (최대 100 중첩) 열기 1중첩 당 공격력이 1% 증가하지만, 명중 실패 시 스택이 초기화됩니다. [패널티]: 열기가 50중첩을 넘어가면, 총기가 붉게 달아오르며 사용자에게 초당 체력의 1%에 해당하는 화상 피해를 입힙니다. [사용효과(Active)] 축적된 모든 [열기] 스택을 한 번에 소모하여, 스택 개수에 비례하여 강화된 강력한 ‘과열탄’을 발사합니다. ‘과열탄’은 치명타 피해가 2배로 적용되며, 과열탄으로 적 처치 시 30스택이 한 번에 회복됩니다. * 이그니션 세트 아이템입니다. 다른 세트 아이템을 장착 시, 고유 세트 효과가 개방됩니다. 〓〓〓〓〓〓〓〓〓〓〓〓〓〓 캬, 5티어로 너프 좀 먹긴 했지만 그래도 위력 한번 화끈하다. 기본 공격력에 속성 공격력까지……. 밖에서 쓰던 월광검의 거의 2배 가까이 되는 수치였으니까. ‘게다가 마력총의 유일한 단점도… 이 데이터 쪼가리 던전 안에서라면 문제 될 게 없지.’ 마력총의 단점이 뭐냐고? 다른 무기들에 비해, 내구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리 소모된다는 거다. 유지비용이 비싸다는 말.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쌀숭이인 내가 주 무기로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장비였지만……. ‘설마 3시간 안에 장비가 파괴되겠어?’ 여기선 상관없다. 어차피 내구도를 얼마나 많이 소모하든, 던전을 나가는 순간 없어질 아이템이니까. 그러니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비싼 마력총을 써보겠어? 후후. 마력총의 옵션을 확인한 강소희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오… 이 정도면 게이트에서 쓰던 물건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네요.” 이번에는 내가 조금 놀랐다. 소희 님… 부자셨구나? 40레벨대 플레이어가… 게이트에서 이런 수준의 장비를 썼었다고? “이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그니션 버스터를 확인한 강민우는, 아예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옵션을 전부 확인한 뒤에는, 대놓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수준. 하지만……. “자, 소희 님만 허락하시면, 이건 제가 좀 쓰겠습니다.” “어차피 전 총 잡을 줄도 몰라요. 건율 님 쓰세요.” 내가 설마 이걸 네 손에 쥐여 주겠니? “이걸… 네가 쓰겠다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건지, 강민우의 동공이 잘게 떨린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이걸 정말 본인에게 배정해줄 줄 알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클래스가 ‘매직 거너’라니까? 히든 클래스라고!” “그래서요?” “당연히 내가 쓰는 게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을 텐데, 관련 클래스도 없는 네가 그걸 쓰는 게 말이 되냐는 거다.” “…….” 나는 더 이상 강민우의 주장에 대꾸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그야, 이 바보가 이걸 쓰면… 고유능력은 제대로 활용조차 못할 게 눈에 뻔히 보이거든. 보수적으로 잡아도 내가 쓰는 게 이 바보에게 마력총을 쥐여 주는 것보다… 최소 5배 이상의 효율은 보여줄 거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저희가 정하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강민우의 두 눈에는 미련이 철철 흘러넘쳤다. “혹시 내가 뒤통수를 칠까 봐 그런 거라면…….” 아니거든요? 자의식 과잉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니까. 철컥-! 대답 대신 내가 능숙한 동작으로 마력탄을 장전하자, 강민우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지금부터 5분쯤 지켜보시고, 한번 감상을 말씀해 주시죠.” “그게 무슨…….” “제가 전투하는 걸 보고, 정말 저보다 잘할 자신이 있는지 감상문 제출하라는 소립니다.” 윙- 윙- [전장에 파이로 위습(Pyro Wisp)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의! 파이로 위습은, 화로의 열기를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마침 곧바로 다음 웨이브가 시작되었으니, 강민우 이 친구의 양심을 한번 시험해봐야겠다. 얼굴에 어디까지 철판이 깔려 있는지, 조금 궁금해질 수준이란 말이지. 드르륵- 펌프 액션 손잡이를 당기자, 묵직한 마력 장전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력총은 진짜 오랜만에 잡아보는데,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바로 머슬 메모리……? “흣차-” 아직 파이로 위습들은 시야에 겨우 확인될 정도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선두 진영을 조준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강민우가 소심하게 비아냥거린다. “뭔, 조준경도 없는 마력총을 이 거리에서…….”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대포가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총구가 솟구쳤고 무식한 반동이 전해졌지만……. 나는 상체를 유연하게 뒤로 젖히며 충격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총구에서 튀어 나간 붉은 섬광. 끈적하고 묵직한 용암 슬래그가, 곡사를 그리며 위습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퍼벅―! 퍼엉! 허공을 가르던 위습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이그니션 버스터의 ‘과열’ 고유능력이 발동합니다.] [이그니션 버스터에 ‘열기’ 스택이 누적됩니다. (1/100)] [공격력이 1% 증가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강민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력탄을 사용해본 플레이어라면 이 거리에서 목표물을 맞추기 위해선 예측 사격이 필수라는 걸 모를 리 없었고. 그러니 내가 보여준 이 원거리 저격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주 잘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철컥- 드르르륵-!! 방금의 첫발은 사실 영점 사격 비슷한 거였으니까. 솔직히 한 번에는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격으로 거리감까지 완벽하게 잡았으니,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딜링 페이즈다. 철컥, 콰앙! 철컥, 콰앙! 그리고 이런 반동이 큰 종류의 마력탄으로 제대로 된 연사에 성공하려면, 격발에 리듬을 잘 타는 게 아주 중요하다. 드르르륵- 철컥! 반동이 돌아오기도 전에 펌프를 당겨 차탄을 다시 장전하고. 철컥! 총신이 반동을 끝내고 원위치로 돌아온 순간……. 콰앙-! 이렇게 기계적인 리듬감을 타며 물 흐르듯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면, 이런 종류의 마력탄은 연사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였으니 말이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이그니션 버스터에 ‘열기’ 스택이 누적됩니다. (8/100)] 넋을 잃고 이 광경을 보던 강민우는,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미친.” 여덟 발의 예측 사격이 정확히 위습 하나를 타격해 제거해버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마탄 사수의 교과서 같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음, 교과서라기엔…… 한 100년 정도 연습해야 써볼 만한 고오급 기술인 것 같기도 하고? “도울 필요 없을까요, 건율 님?” “소희 님은 마력 아껴 두세요. 곧 추가 웨이브 몰려올 겁니다.” 콰앙-! [파이로 위습 (Pyro Wisp)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강민우가 놀라든 말든, 나는 다가오는 위습 무리를 향해 계속해서 마력탄을 쏟아부었다. [이그니션 버스터에 ‘열기’ 스택이 누적됩니다. (15/100)] [이그니션 버스터에 ‘열기’ 스택이 누적됩니다. (32/100)] 그리고 그 결과. “… 마력탄 성능 한번 좋군요.” 다섯 마리의 위습 무리들 중, 네 마리가 허공에서 터져버렸다. 화로 근처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말이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열기 구슬’ 아이템이 드랍되었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신을 내서 그런가? 마력이 꽤 많이 소모된 느낌이다. 그러니 이쯤 해서, 과열 스택을 활용하는 ‘과열탄 격발’이나 한번 보여줘야겠다. 마침 한 놈을 마무리해줘야 하는 타이밍이니까. 치이이익-! 그렇게 방아쇠를 다시 당기자. 콰콰쾅-!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렬한 반동과 함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파이어 블래스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위습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퍼펑-!! [파이로 위습 (Pyro Wisp)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파이로 위습 (Pyro Wisp)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이 마지막 한 발까지 깔끔하게 위습에게 격중되며, 싱겁게 웨이브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그나저나 이런 무식한 마탄으로도 헤드샷이 가능한 거였어? 어차피 헤드샷이건 아니건 한 방에 터지긴 했겠지만……. “성능 아주 마음에 드네요. 바깥으로 들고 나가고 싶네.” 저도 모르게 마음속 진심(?)을 중얼거린 나는, 천천히 총구를 내린 뒤 탄피 배출구를 열어 열기를 식혔다. <얼어붙은 서울>에서밖에 사용하지 못할 아이템이라 그런가…… 뭔가 애틋하게 느껴지는걸? “원래 클래스가… 사수인 건 아니겠죠, 건율 님?” “아닙니다.” 마지막 헤드샷에는 강소희도 꽤 놀랐는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물론 우리 짐꾼님이 놀란 정도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말이다. “…….” 완전히 말을 잃어버린 강민우를 돌아보며, 슬쩍 한 번 물어보았다. “이거보다 잘 할 수 있어요?” 솔직히 궁금하긴 해. 우리 짐꾼씨의 메타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박살 나 있는지 말이야. 하지만 아쉽게도(?) 강민우는, 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가서, 루팅이나 해 오시죠.” 저 멀리 눈밭에 드랍 된 열기 구슬들을 가리키자, 아랫입술을 꽉 깨문 강민우가 몸을 부들거렸다. 하지만 뭐, 방법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 파티에서 버려지면, 몇 분 내로 미션에서 아웃될 텐데. 저벅- 저벅- 부들거리며 파이로 위습의 사체를 향해 걷는 강민우의 뒷모습을 보며, 안쓰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강민우의 몫으로 배정될 ‘보급 상자’가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보급 상자에서 뭐 나오는지 보고…… 계약 종료(?)하든가 해야지 원.’ 그런데 2분 뒤, 첫 번째 보급상자가 화로 앞에 드랍되었을 때. 띠링-! 강민우의 수명은 20분 더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보급 상자(소)’ 아이템을 획득합니다.] [‘보급 상자(소)’ 아이템을 개봉하였습니다.] [‘충전형 포션’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얼음 쐐기 검(4T)(유일)’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보상이 달달하잖아? “민우 님은 뭐 나왔어요?” “3티어 방한 망토 한 장이랑… 프로스트 마인 (Frost Mine)? 이건 트랩인 것 같은데.” “자, 이제 넘기시면 됩니다.” “…….” 아무래도 보급상자 전부 파밍할 때까지는, 이 짐덩이를 데리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 다음에야……. 어떻게든 되겠지 뭐. 7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헌터즈 스쿨3>의 멘티 참가자 최민석은, 오늘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 민석이 형. 마지막에 포지션 뭐였어요? 이걸 피해 없이 이겨버리네.” “와… 민석 님이 마지막에 블로킹해줘서 저 살았어요.” “에이, 아니죠. 유나 님이 딜 깔끔하게 넣어줘서 쉽게 이긴 게 더 큽니다.” 처음부터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1페이즈에서야 당연하게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2페이즈에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엮이게 된 파티원들이 너무 합이 잘 맞았으니 말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무조건 상위권 참가자들일 것 같은데…… 운이 확실히 좋아.’ 파티 구성도 탱커인 자신에 힐러 하나 딜러 하나로 아주 깔끔했는데, 특히 ‘권유나’라는 마법사 클래스 참가자가 로또 파티원이었다. 일단 마력 운용 능력부터가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뛰어난 데다……. 심지어 클래스도, 이 <얼어붙은 서울> 안에서만큼은 귀족 중의 귀족인 화염계열 마법사였으니까. ‘물론 체온 유지에 유나 님의 마력을 많이 쓰긴 어렵지만….’ 과장 조금 보태서 최민석이 보기에, 권유나 참가자의 <헌터즈 스쿨 3> 최종 순위는 무조건 5위 안쪽일 것 같았다. 실력도 실력인데 외모도 상당한 미인에 속했으니,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 없는 참가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파티만 잘 유지하면… 입학 미션에서는 최상위권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어.’ 그래서 최민석은 더욱 열심히 몸을 갈아 넣었고. 그 노력에 대한 보답을 받은 건지, 괜찮은 위치에 ‘소형 화로’ 하나도 안전하게 확보했다. 방금 전에는 화로 쟁탈을 위해 싸움을 걸어 온, 다른 참가자 파티 하나를 상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하기까지 했고 말이다. “이러다가 이거… 우리가 1등 하는 거 아니에요, 민석이 형?” 그러니까 최민석이 이런 꿈을 꿔보는 것도……. “그러게. 운만 조금 더 따라주면, 노려볼 만도 하지 않을까?” 확실히 무리는 아니었다. ‘3페이즈로 넘어갈 때도 발 빠르게 시스템만 파악해 낸다면, 최상위권 참가자들을 못 이길 것도 없지.’ 물론 아직까지는 진담 반에 농담 반 정도의 대화긴 했다. ‘이성환’ 같은 괴물 참가자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섣불리 재단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파티가 이렇게 구성된 이상 가능성이 생긴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성환이라… 확실히 일 대 일로 상대하긴 어렵겠지만.’ 상위권 힐러인 박진우와 최상위권 마법사로 추정되는 권유나와 함께라면. 이성환의 파티와도 충분히 비벼볼 만하지 않을까? 만약 이성환도 자신만큼 운이 좋아서 상위권 참가자들로만 파티를 구성했다면 쉽지 않겠지만……. 솔직히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성환의 나머지 파티원 둘이 중하위권 참가자로 구성되어있다면. ‘그땐 이겨야지. 교전 잘하면, 충분히 승산 있어.’ 충분히 승리를 점칠 만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최민석 본인의 컨디션도, 아주 훌륭했으니 말이었다. “확실히 화로에 자리 잡으니까… 체온 유지 난이도가 확 내려가는데요, 형?” “이대로 잘 버티기만 하면 다음 페이지까지는 문제없이 가겠어요!” 그렇게 멘탈을 잘 잡은 탓인지. 치이익-! 2페이즈가 40분쯤 지났을 무렵, 갑작스레 발생한 돌발 상황에서도……. [화로에 동장군의 저주가 내립니다.] [더이상 화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남은 열기는, ‘열기 구슬’로 반환됩니다.] “어? 이거 고장 나기도 하는 거였어요?” “으, 어쩌죠 민석님?” 민석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해 냈다. “이래서 다른 파티들이 저희 화로를 공격했었나 봅니다.” “그럼 어떡할까요, 형?” “우리도 다른 캠프를 찾아봐야지.” “아직 화로 안 꺼진 캠프도 남아 있을까요?” “분명히 있을 겁니다. 화로 쟁탈전을 벌이라는 게, 결국 이 페이즈의 기획 의도 같거든요.” 근거 있는 추론을 통해 파티 리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거다. ‘우릴 공격했던 참가자들도 남쪽에서 올라왔으니, 필드 난이도가 낮은 아래 지역부터 먼저 화로가 꺼지는 구조일 거야.’ 그렇게 파티원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한 민석은, 본인의 판단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어! 저기!” 아직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멀쩡한 화로와, 캠프를 지키고 있는 다른 참가자 파티를 발견한 것이다. “긴장할 거 없고, 하던 대로만 합시다 여러분.” “알겠어요 형!” “좋아요.” 그런데 여기서까지 일이 아주 쉽게 풀려버렸다. “제가 보호해 드릴 테니까, 일단 유나 님이 마법부터 뿌리고 시작하시죠.” “네!” 이미 다른 파티와의 교전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던 그들은 자신감 있게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는데……. 퍼퍼펑-! 캠프를 지키고 있던 참가자 파티가, 공격을 개시한 순간 꽁지를 말고 퇴각해버리는 게 아닌가. “캬, 유나 님 광역기 한 번 보여주니까 그냥 캠프 버리고 런해버리네요.” “아마 몬스터들을 막아내느라… 파티원들 상태가 이미 나쁘지 않았을까요?” 권유나의 말에 최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런 듯합니다. 보아하니 몬스터 습격이 엄청 많았던 것 같고… 게다가 파티에 힐러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화로 주변을 둘러보니, 쓰러진 몬스터들의 사체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는 엘리트 몬스터로 보이는 거대한 골렘의 사체까지 쓰러져 있었고 말이다. ‘저런 걸 잡고도 용케 버티고 있었네.’ 그러니까 이번에도 운이 꽤 따라준 것 같았다. 이런 엘리트 몬스터를 사냥할 정도의 전력을 가진 참가자 파티였다면, 지금 민석의 파티라 할지라도 피해 없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일단 화로에 불 켤게요!” “유나 누나, 이번엔 내 차례라니까?” “아냐, 아냐. 난 화염법사잖아. 여유 있는 내가 구슬 조금 더 쓸 수 있는 거지 뭐.” 훈훈한 파티원들의 모습을 보며, 최민석은 마음속으로 더욱 의지를 다잡았다. ‘그래. 이런 파티원들 데리고도 1등 못 하면, 어떻게 최후의 5인에 들어가겠어? 게다가 이렇게까지 잘 풀렸는데.’ 아마 다른 상위권 파티들도 지금 이 화로에서 쫓겨난 저 참가자들처럼, 다양한 장애물과 고난에 고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건 분명 신이 주신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최민석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일단 정비하고, 다들 긴장 놓으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형!” “네, 민석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민석이 완벽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건율 님. 저쪽이 아무래도 공격하려는 것 같은데… 다 죽일까요?” 그건 바로, 캠프를 지키고 있던 참가자들이, 결코 겁에 질려 떠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희 님. 저희도 체력 좀 아끼는 게 좋으니까요.” “으음.” “마침 잘 됐어요. 어차피 이동하려 했으니까… 캠프는 그냥 버리고 가죠?” * * * 두 번째 페이즈도 45분이 지났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세 번째 보급상자까지 전부 다 파밍을 마친 상태였다. “이제 슬슬 몬스터 웨이브도 끝나가네요.” “그러게요. 웨이브가 무제한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리고 나와 강소희는, 빙하기가 거의 다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열기 구슬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열기 구슬은, 오히려 2페이즈에 들어올 때보다 늘어난 220개 정도. 화로 유지에 강민우의 몫으로 떨어진 열기 구슬들을 우선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구슬 소모량이 크지 않았던 덕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은 페이즈가 끝나기 전에, 조금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으음. 그럼 이제 움직여 볼까요?” “어디로요?”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미리 다음 페이즈 준비 한번 해보려고요.” 때마침 우리 화로가 필요해 보이는 손님(?)들도 나타났고 말이다. “건율 님. 저쪽이 아무래도 공격하려는 것 같은데… 다 죽일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희 님. 저희도 체력 좀 아끼는 게 좋으니까요.” “으음.” “마침 잘 됐어요. 어차피 이동하려 했으니까… 캠프는 그냥 버리고 가죠?” 내가 저 파티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조금의 변수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싸운다면 전력적으로 우리를 이길 만한 파티야 거의 없을 테지만. 운 나쁘게 최상위권 파티라도 만나서 피해를 입게 되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가 곤란해질 수 있을 테니까. 다른 파티는 모르겠는데 힐러가 없는 우리 파티는, 열기구슬보다도 포션이 더 귀한 재화다. 그러니 파밍해둔 포션은 최대한 아낄 필요가 있었다. “대체 왜 그냥 가는 거지? 저들을 탈락시키고 열기 구슬을 수급하는 게 더 좋은 판단이었을 텐데.” 뭐, 눈치 없는 우리 짐꾼님이 태클을 걸긴 했지만……. 그건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 “……?” 화로를 벗어난 순간, 우린 이제 안녕이거든. “민우 님은 여기까지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계약 종료라고요. 갈 길 가시면 됩니다.” 오히려 강민우가 비호감 캐릭터라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괜히 호감형에 정 가는 파티원을 받았더라면, 여기서 이렇게 매정하게 버리지 못했을 것 같거든. 내가 정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프로그램 구조가 그렇다. 도움 안 되는 파티원이라고 매정하게 손절해 버리면, 시청자들이 좋아할 리 없지 않을까? 하지만 뭐, 이 친구라면……. “이익……! 그럼 열기 구슬이라도 배분해 줘!” 시청자분들도 이해하실 것만 같단 말이지.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강민우가 꺼내기 시작하였다. “거래! 거래를 하는 건 어때.” “음……?” 심지어 거기에는… 지금까지 이 바보가 했던 모든 대사들 중, 가장 나의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열기 구슬을 LP로 사고 싶다. 어차피 빙하기도 거의 다 끝났는데, 넌 지금 남아돌잖아?” “……?!” “게다가 미션 중 참가자들 간의 모든 거래는 허용된다고 했지.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그, 그렇긴 하죠… 사장님. “그러니까 개당 100LP 정도면 어때?” 구슬 한 개당 100만원이라는 얘기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이 사람, 지금까지 바보 연기를 한 걸까? 내가 쌀숭이인 걸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강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열기 구슬을 그런 헐값에 사겠다고?” 잠깐만요 소희 님. 아무리 생각해도 헐값은 아닌 것 같은데요……. “후우. 좋아.” 그런데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강민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개당 200LP. 이게 마지노선이야. 이 정도면 너도 나쁘지 않은 거래일 거라고.” 심지어 갑자기 가격을 두 배까지 올려 부르면서 말이다. 혹시 이 사람… 집 앞에 LP가 솟아나는 유전이라도 터진 걸까? 이러면 100개만 팔아도 2억이잖아? 그러니까……. “필요 없습니다. 갈 길 가시죠.” 이번에는 진짜로 함정에 당할 뻔했다. 이딴 데이터 쪼가리 구슬 한 개를 진짜로 200만 원에 살 리가 없지. 이렇게 거래하는 척 날 낚아서, 뭔가 음습한 짓거리(?)를 하려는 게 분명하다는 얘기다. 후우. 피싱 같은 거에 당할 뻔하면 이런 기분이겠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냉철한 두뇌를 가동했다. “…300LP까진 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악마야, 물렀거라! 더 이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철컥- 퍼엉-! [파티원 ‘강민우’님이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강민우’님이 파티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현재 파티 인원 : 2] 어쨌든 나는 가장 위험했던 정신 공격(?)을 가까스로 이겨냈다. 이 과정에서 생긴 약간의 오해……는 덤이었다. “역시나 맺고 끊는 게 철저하시네요.” 그렇다기보다……. “그리고 뭐, 건율 님 정도 실력자에게 300LP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게 맞겠죠. 100개 팔아봐야 고작 3만LP인데.” 고작… 이라고요? 진짜 뭐, 재벌이라도 되시는 건가……? “…….” 하지만 뭐, 일단 그런 거로 하기로 했다. 사실 쌀숭이 이건율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 300LP에 산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말을 굳이 소희 님에게 할 필요는 없을 거 아냐? “일단 움직이시죠. 시간만 낭비했네요.” “좋아요.” 어쨌든 그렇게 잠깐의 헤프닝이 지나간 뒤. 우리는 도시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후……. [30초 뒤, 눈보라가 소멸됩니다.] [모든 ‘소형 화로’가 소멸됩니다.] [지하도시 중심부에 2개의 ‘대형 화로’가 생성됩니다.] [‘얼어붙은 서울’의 ‘간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빙기’는 60분간 지속됩니다.]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7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된 뒤. <얼어붙은 서울>을 뒤덮고 있던 눈보라가 소멸하면서, 생존한 참가자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입학식 미션의 분기점이 지났습니다.] [현재까지 생존 참가자 : 47 / 100] 빙하기와 함께한 두 번째 페이즈는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도 꽤나 더뎌졌고……. 어쨌든 참가자들 중 상위 50%에 속했음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휴우.” “첫 미션부터 광탈할까 봐 걱정했는데…….”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그 안도와 별개로, 모든 참가자들은 조금도 안일해질 수 없었다. 세 번째 페이즈가 생기면서 ‘대형 화로’라는 신규 시스템이 등장했으니까.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이 시스템을 파악하는 게, 생존과 직결된다는 것을 2페이즈에서 확실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화로니까. 비슷한 시스템이겠지?” “일단 빨리 움직여야 해. 화로가 두 개밖에 없다잖아.” 그래서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자마자, 도시 곳곳에 생존해있던 참가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도시 중심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참가자들이 발견한 건, 말 그대로 거대한 크기를 가진 흑색과 백색의 화로였다. [‘대형 화로’ 오브젝트를 발견하셨습니다.] [‘대형 화로’는 파괴되기 전까지 열기가 유지됩니다.] [‘대형 화로’의 화로 시스템에 등록된 참가자는 반경 30M 안에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대형 화로’에는 최대 15명의 플레이어들이 등록될 수 있습니다.] [한번 화로를 선택하면, 화로가 파괴되기 전까지 ‘최후의 보루’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주의! 4분 뒤, 강력한 ‘과열된 몬스터’들이 화로를 파괴하기 위해 몰려옵니다.] [몬스터 웨이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력해지며, 둘 중 한쪽 화로가 파괴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일단 화로를 빠르게 찾아낸 참가자들은, 무조건 가까운 화로에 자신의 정보를 등록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화로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총 30명이 한계였으니. 머뭇거리다가 인원이 다 차기라도 한다면, 낙오될 17인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으… 어느 화로가 유리한 거지?” “그럴 시간 없어! 일단 이쪽으로 오라고!” 그래서 양쪽 화로의 인원은 순식간에 가득 차버렸고. 띠링-! [모든 화로의 인원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화로에 등록되지 못한 참가자는, ‘낙오자’로 설정됩니다.] 본격적인 혼란의 장이 시작되었다. [히든 룰, ‘파괴 공작원’이 발생합니다.] [이제부터 ‘낙오자’는 몬스터의 ‘선제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낙오자’는 화로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화로 중 하나가 파괴될 시, 남은 화로의 수용 인원이 30명으로 증가합니다.] 흑색 화로와 백색 화로, 그리고 열일곱 명의 낙오자들. 47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거였다. * * * 이번에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대형 화로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나와 강소희였다. 다음 페이즈가 중심지에서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데다, 남들보다 10분이나 일찍 출발하여 미리 도착해 있었으니까. 간빙기가 오기 전에 움직인 덕분에 열기 구슬을 20개 정도 소모하긴 했지만, 선제적인 정보 취득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건, 화로를 발견하자마자 알 수 있었고 말이다. “3페이즈는 팀전 개념이네요.” 강소희의 말에, 나는 절반만 공감했다. “그렇긴 한데, 선택지가 두 개 뿐은 아니죠.” “그 말씀은…?” “제가 볼 때 화로를 선택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제작진이 깔아놓은 함정입니다.” 내가 볼 때 이 3페이즈의 본질은 소모전이었다. 겉으로 볼 때는 흑팀과 백팀의 경쟁 구도이면서, 둘 중 어느 팀에도 들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화로를 선택하는 순간 얻게 되는 가장 큰 패널티가 이 룰 안에 교묘히 숨겨져 있었으니까. [한번 화로를 선택하면, 화로가 파괴되기 전까지 ‘최후의 보루’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최후의 보루란, 이 흑색과 백색의 대형 화로가 위치해 있는… 지하 도시의 중앙 광장을 의미하는 지명이었다. ‘그러니까 화로를 한 번 선택하는 순간… 능동적 선택지는 전부 사라지게 되는 거지.’ 화로에 소속된 참가자는 마치 안정적인 울타리의 보호를 받는 느낌이겠지만, 사실 그 선택으로 인해 나머지 모든 가능성을 강탈당한다. ‘이를테면 엘리트 몬스터 파밍이라던가…….’ 게다가 생존이라는 절대목표를 일부 운에 맡겨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몬스터 웨이브를 하드 캐리해서 반대편 화로보다 더 오래 버티면 승리하겠지만. 그 승리조차도 나 하나의 역량보다는 다른 참가자들 전체의 역량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거라는 소리다. 그러면 화로 밖에서 버티는 게,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을 더 높여주는 수냐고? 간빙기인 3페이즈로 한정하면 그렇다. 4페이즈에서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게 맞고. 그러니 여기서 완벽한 선택지는……. “지금 섣불리 화로를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화로 선택의 유예였다. “저희가 만약 파밍한 열기 구슬이 부족하다면 모를까, 솔직히 상당히 넉넉합니다.” “그렇죠?” “게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화로에 묶여 있는 사이 부가가치 높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러 다니면… 더 많은 구슬을 벌 수도 있을 거고요.” “동의해요.” “그러니 화로의 선택은, 어떤 화로가 생존하는지를 확인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일단 간빙기 동안은 여유롭게 파밍하면서, 대형 화로 두 곳의 전황을 천천히 살핀다. 그러다가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시점에… 생존이 확실한 화로에 합류하여 변수를 제거한다. “이미 인원이 다 차 있을 텐데, 합류할 방법이 있을까요?” 합당한 강소희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생각해 둔 부분이었으니까. “한쪽이 무너질 시점이 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승기를 잡은 화로 안에서도 몇 명 정도는 이탈이 발생했을 겁니다.” “음… 일리가 있기는 한데…….”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주 쉬운 방법이 한 가지 있지 않습니까?” “네?” “혼란을 틈타 PK를 하면 됩니다.” “아!” “아마 그 방법을 써야 할 상황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죠.” 심지어 내 머릿속에 설계된 계획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내게는 방금 말한 모든 계획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무조건 생존이 가능한 완벽한 한 수가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희 님. 지금 저희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내가 생각해 둔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설명이 끝나자, 이제 완전히 납득이 됐는지 강소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쉽진 않겠지만… 한번 해보죠, 뭐.” 그리고 모든 결정을 끝낸 우리는, 다른 참가자들이 화로에 나타나기 전에 슬쩍 자리를 떠났다. * * * 콰직!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타는 듯한 붉은 가죽을 가진 늑대의 턱뼈가 으스러졌다. 볼카닉 울프. 지하도시의 몇 안 되는 엘리트 몬스터였다. [엘리트 몬스터, ‘볼카닉 울프’를 최초로 처치하셨습니다!] [최초 처치 보상으로, 블러디 너클(Bloody Knuckle)이 드랍됩니다.] 박하준은 입가에 맴도는 하얀 입김을 길게 뱉어냈다. 그의 양손에는 검붉은 피가 엉겨 붙은 기다란 장검이 들려 있었다. 툭- 그것을 미련 없이 바닥에 버린 박하준은, 방금 드랍된 붉은 빛깔의 너클을 곧바로 양손에 장착하였다. 화려한 마법석이나 각인 따위는 없는, 오로지 뼈를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투박한 쇳덩이. 이 거친 무기가 바로, 박하준이 가장 좋아하는 무구였다. [클래스 특성 발동: 페럴(Feral)] [주변의 피 냄새가 짙어질수록 공격 속도가 상승합니다.] 망막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며, 박하준은 무심하게 옷자락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위잉-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의 귓전으로 미세한 기계음이 들려왔지만, 그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소리의 정체가 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열심히도 따라붙네.’ 눈보라를 헤치며 박하준을 따라오고 있는 건, <헌터즈 스쿨>의 촬영용 드론. 사실 이 드론에 잘 비춰지는 게 <헌터즈 스쿨>의 참가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카메라를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방송의 생리를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뭘 보여줄 수 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어설픈 영웅 놀이가 아니지.’ 날것 그대로의 ‘야생’. 그게 아마 <헌터즈 스쿨> 제작진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캐릭터일 것이었다. ‘후우. 그래도 적응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네.’ 사실, 박하준에게 이런 ‘관심’은 낯선 것이었다. 그는 고아였고, 친구도 하나 없었으니까. 다만 그에게는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려면 충분한 인지도나 배경이 필요했을 뿐. 그러니 박하준은 그 어떤 참가자보다도 간절했고 치열했다. ‘그러니까… 날 이기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생존’이야말로, 박하준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서바이벌 최후의 생존자 또한 분명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30초 뒤, 눈보라가 소멸됩니다.] [모든 ‘소형 화로’가 소멸됩니다.] [지하도시 중심부에 2개의 ‘대형 화로’가 생성됩니다.] [‘얼어붙은 서울’의 ‘간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빙기’는 60분 간 지속됩니다.] 박하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흑색 화로’에 최초로 입성하였다. 7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지훈은 헌터였다. 대한민국 헌터들 중 가장 흔하다는 C급 헌터. 그러니까 각성 5년 차… 57레벨이며 적당한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그는, 억 단위 연봉에 턱걸이한 아주 평범한 헌터였다. ‘이 정도면 성공했지 뭐.’ 평소 서지훈은 자신의 위치가, 흙수저 헌터가 적당한 재능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어린 나이에 각성한 데다 실력에 비해 ‘보는 눈’이 뛰어났기 때문. 그는 길드의 인사팀장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꽤 많은 재능있는 루키들을 발굴해온 스카우터이기도 했다. ‘진짜 어지간한 재능이 아니라면… 자본이라는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긴 쉽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사실 서지훈은, 최근 가장 핫한 예능 프로그램인 <헌터즈 스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헌터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이런 쇼에 열광할지 몰라도……. 이 쇼는 결국 ‘재능’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싼 ‘자본의 승리’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공정한 경쟁? 웃기고 있네.’ 시작부터가 다르다. 누구는 1레벨부터 수천만 원짜리 마력 증폭 반지를 끼고 시작하고, 누구는 녹슨 철검 하나 들고 목숨을 건다. 그래 놓고 방송에서는 ‘노력’이니 ‘재능’이니 떠들어댄다. 서지훈이 보기에 이건 생존 서바이벌이 아니라, 누가 얼마나 비싼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 확인하는 쇼에 불과했다. 그러니 지훈이 오늘 <헌터즈 스쿨3> 입학 미션을 보기 위해 상암 돔 스테이지까지 행차한 건……. 이 프로그램의 진성 팬인 친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지훈은 대체 이런 걸 보기 위해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가며 암표까지 구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야, 너도 오늘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글쎄.” “너 이성환 게이트 라이브 캠 본 적 없지?” “그런 걸 내가 왜 보냐?” “그러니까 오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는 거지.” “으음….” “이성환 말고도 라인업 엄청 빵빵하다던데, 오늘 진짜 눈 호강 좀 했으면 좋겠다.” 아마 친구놈의 말처럼, <헌터즈 스쿨> 참가자들의 실력은 대단하긴 할 거다. 서지훈은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 실력이 오로지 노력과 재능으로만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 뿐이었다. 태생이 반골 기질이기 때문일까? 그가 이런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은 건……. 자본 위에 쌓아 올려진 뻔한 루키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 구조적인 유리천장을 부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게이트 사태 초기도 아니고. 그런 플레이어가 존재하긴 힘들 거야.’ “야, 서지훈. 표정 좀 펴라. 이게 얼마짜리 티켓인 줄 아냐?” 친구의 타박에 서지훈은 툴툴거리면서도 눈앞 개인용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좌석마다 설치된 20인치 고해상도 태블릿. 원하는 참가자의 시점을 실시간으로 골라 볼 수 있는, ‘멀티 뷰’ 시스템이 탑재된 VIP급 좌석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대체… 이런 표는 어떻게 구한 거야?’ 어찌 됐든 친구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긴 서지훈은, 태블릿을 켜서 관람을 시작하였다. 태블릿 채널의 기본값은, 제작진이 멘토들에게 송출해 주는 메인 화면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와! 지훈아, 이성환 파티 결성했는데? 근데 무슨 나머지 파티원 둘이 힐러랑 서포터냐. 하하.” “어차피 딜탱 전부 본인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닐까?” “그러니까, 와… 기대감 미쳤음 지금.” 모니터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친구는, 침을 튀겨 가며 이성환을 예찬하기 시작하였다. 이성환이라면 몇 년 내로 글로벌 랭킹에도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둥. 잠시도 입이 쉬질 않는 친구의 모습은…… 팬과 광신도의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느낌이었다. [스르릉-] [콰쾅-!] “우와아아아악!” 그런데 웃기는 건, 이런 친구의 모습이 이 돔 스테이지 안에서는 아주 보편적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얌전히 앉아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자신이… 외눈박이 마을에 떨어진 정상인이 된 기분이랄까. ‘이러니까 랭커들이 돈을 쓸어 담지…….’ 해서 이성환의 플레이를 잠시 지켜보던 지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채널을 돌렸다. 솔직히 이성환이 경이로울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이 또한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라기보다……. 재능에 자본과 배경까지, 삼위일체가 맞물리며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뭐. 벌써 이 정도 실력이면, 확실히 랭커 가능성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흥미가 떨어진 서지훈은, 다른 화면을 돌려보기 시작하였다. 메인 스크린에서는 멘토 랭커들의 반응과 함께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영상이 계속 이어졌지만, 지훈은 그걸 보는 대신 다른 플레이어들의 개인 화면을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활약을 보며, 뭔가 영감이라도 얻을 만한 게 있을까 생각한 것이다. ‘좀 색다른 거 없나.’ 그런데 무심하게 채널을 휙휙 돌리던 지훈의 눈에, 특이한 참가자 한 명이 들어왔다. 채널 98번.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메인 스크린에 비춰진 적 없는, 딱 봐도 하위권일 참가자. 지훈이 이 참가자의 화면에서 멈춘 이유는, 사실 다른 게 아니었다. ‘클래스가 뭐지?’ 조악한 쇠파이프와 방패를 든 채 몬스터들을 두들겨 패고 있는 참가자의 모습에서는, 지훈이 알고 있는 그 어떤 클래스의 특징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토끼 인형……? 저건 소환수인가?’ 하지만 처음 이 채널에 시선이 멈춘 이유가 호기심이었다면, 채널을 돌릴 수 없게 된 이유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정 때문이었다. ‘이 새끼…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시각적 화려함 자체만 놓고 따지면 이성환과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하며, 함께 전투 중인 맹독계열 히든 클래스의 마법사보다도 아쉬운 수준이었지만. 별다른 전투스킬조차 없이 몬스터 사이를 누비는 퍼포먼스가, 도저히 지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무슨 서커스도 아니고.’ 참가자 정보를 확인해 보니, 레벨도 35밖에 안 되는 최하위권이다. 실제로 지훈이 인사팀에서 검토하는, 그런 루키들과 비슷한 스펙의 플레이어인 것. 그런데 이 남자는 40레벨 대 몬스터들을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다루며, 그 와중에 파티원들에게 쉼 없이 오더까지 내리고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보면서… 대체 어떻게 채널을 돌릴 수가 있을까? “야, 뭐 재밌는 거 찾았냐?” “…….” “메인 스크린에 권유나 떴는데 안 볼 거야?” “어, 잠깐만.” “와, 권유나 왜 이렇게 이쁘냐. 리얼 여신이네.” 친구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의 전투는 서지훈에게 충격적인 것이었고, 때문에 서지훈은 점점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을까? [경고. 이물질 감지.] [오염원 제거 프로토콜 가동.] [기긱- 기기기긱-!] 이건율의 파티가 거대한 엘리트 몬스터를 만났을 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입에서 육성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미친, 죽으려고 환장했나? 도망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화면 속은 지훈의 기준에서 지옥이었다. 집채만 한 소각로 골렘이 폭주하며 시뻘건 화염을 토해내고 있었으니까. 이건 상식적으로 50레벨 이하의 3인 파티가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57레벨인 자신의 수준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위험하게 느껴지는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그래. 그러니까 분명… 그게 서지훈의 상식이었다. 쿠우웅-! 그리고 골렘의 거대한 주먹이 이건율의 파티원을 덮쳤을 때, 서지훈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강민우라는 참가자가 저 무식한 주먹을 피할 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렇게 파티원 한 명이 아웃된다면, 공략 실패는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타탓-! 그 순간 골렘의 거구 안으로 뛰어든 이건율 참가자가, 말도 안 되는 전투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단 주먹이 떨어지는 궤적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골렘의 관절이 꺾이는 사각지대로 파고들었으며……. 빠각-! 기기기긱-! 무지막지한 골렘의 공격들을 요리 조리 피해, 그 괴물 같은 스펙을 하나씩 무력화시키기 시작한 거다. “……말도 안 돼.” 서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마치 골렘의 모든 움직임을 다 예측하고 있는 듯 보였고, 설령 그렇다 해도 해내기 어려울 만한 곡예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스킬? 비싼 아티팩트?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오직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판단력뿐. 지훈의 눈에 이건율 참가자의 플레이는, 게임으로 치면 ‘버그’의 일종으로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콰아앙! 마침내 이건율은 골렘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그 순간에도 지훈은 멍하니 자신의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그는, 참가자의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참가자 : 이건율(Dave)] [레벨 : 35] [클래스 : 세라피스트] 그리고 지훈은 속으로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이건율’이라는 참가자만큼은 다르다고. ‘이 사람… 대체 누굴까?’ 이건 비단 <헌터즈 스쿨3>의 출연진 안에서만 비교한 게 아니다. 지금껏 언론에서 스타 취급을 했던 그 어떤 루키와 비교해도, 이건율이 보여준 건 압도적이었으니까. 물론 일반인들이 볼 때에는 화려한 다른 루키들이 더 빛나 보일 수 있겠지만……. 서지훈은 자신의 눈을 믿었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절대. 이건 이성환이라 해도 비벼볼 만한 재능이 아니야.’ 서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헌터즈 스쿨>의 이번 시즌 만큼은, 그조차도 챙겨서 보게 될 것 같다고 말이었다. 7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촬영이 시작된 지 3시간이 다 되어갔다. 이 말인즉, <얼어붙은 서울>의 3페이즈가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모니터링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정민은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3페이즈의 구도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치열한 전개가 나온 데다, 마지막 순간에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매치업까지 성사됐으니까. 그건 바로… 흑백 양팀 최대의 거물이 ‘최후의 보루’ 한복판에서 맞붙게 된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하준이라고 했나? 진짜 어마어마한 친구네.’ 사실 처음 3페이즈의 구도가 잡혔을 때, 이정민은 꽤 아쉽다고 생각했었다. 영상 각을 예쁘게 뽑으려면 당연히 흑백 양 팀의 밸런스가 적절히 맞아떨어져야 했는데……. 대충 보기에도 밸런스가 백팀으로 너무 크게 쏠려버린 것이다. 제작진이 탑텐으로 꼽는 참가자 중 일곱 명이, 모두 백색 화로에 모였으니까. “와, 이성환에 권유나, 박진우에 전인욱이 한팀이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3페이즈가 다 지나기도 전에, 흑색 화로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정민은 그게 너무 아쉬웠었다. 하지만 막상 까보니 그게 아니었다. 3페이즈가 고작 5분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도, 양쪽 화로는 아직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괴물이 바로… 제작진의 히든 카드 박하준이었다. ‘진짜 이성환 상대로도 이겨버리는 거 아니겠지?’ 사실 지금 흑색 화로를 지키는 참가자들은 한계가 온 상황이었다. 아직 여유가 조금 있는 백색 화로에 비해 화로의 내구도도 1/3밖에 남지 않은 데다, 인원의 절반 정도는 꽤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이대로면 결국 백색 화로가 승리할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박하준이 돌발 행동을 해버렸다. 몬스터 무리 안에 숨어있던 낙오자 일부와 거래를 하더니, 몇몇 플레이어와 함께 화로를 버리고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참가자 ‘박하준’이 ‘흑색 화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지상’이 ‘흑색 화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참가자 ‘양소현’이 ‘흑색 화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이들이 이탈한 자리는 낙오자들이 메우게 되었고, 제 발로 낙오자가 된 세 사람은 백색 화로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은 파괴. 당연히 목표물은 백색 화로였다. 그것만이 흑색 화로의 플레이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저기! 흑팀 참가자들이에요!” “이런……! 조금만 더 버티면 끝난 거였는데!” “박하준? 저 사람 엄청나던데요.” “걱정 마세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구도를 기획한 이정민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정말 똑똑한 선택이야.’ 낙오자는 화로의 체온 유지 효과를 받지 못하는 대신, 몬스터들로부터 선제공격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가자들 중 상위권 플레이어들이 이런 식으로 낙오자들과 딜을 해서 상대 진영에 공격을 들어간다면. 힘의 균형을 충분히 무너뜨릴 만하다. 애초에 ‘낙오자’시스템과 ‘파괴 공작원’이라는 히든 룰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몬스터 웨이브가 약한 초반이었다면 어림없겠지만…… 지금은 무려 14웨이브니까.’ 아무리 백색 화로의 참가자들이 압도적인 스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려 50레벨에 달하는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하면서 여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박하준 같은 최상위권 참가자까지 적으로 가세한다면? 이건 아무리 이성환이라고 해도 장담할 수 없다. 진짜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는데…… 심지어 나비효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약 5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아서, 4페이즈까지 이 구도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정말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겠지.’ 이 <얼어붙은 서울> 던전의 백미이자, 제작진 모두가 가장 기대하는 페이즈인 마지막 빙하기 4 페이즈. 양쪽 화로가 모두 보존됐을 때만 발동하도록 설계된 히든 기믹까지도, 볼 수 있게 될 테니 말이었다. “그런데 정민 피디님.” “네, TL님.” “그 마지막 기믹을 굳이 양쪽 화로가 전부 보존됐을 때만 등장하도록 설계하신 이유가 뭐예요? 발동 못 시키면 리소스만 아까울 텐데요.” 기술팀장의 질문에, 정민은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참가자들의 전력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마지막 엘리트 웨이브에 참가자들이 너무 쉽게 쓸려 나가 버리면, 그거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잖아요?” “아……?” “어차피 두 개 화로 모두 15웨이브까지 버텨낼 정도가 아니라면, 이 히든 몬스터 웨이브는 등장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웨이브를 조금이라도 버텨내려면…… 참가자들의 역량도 중요한 데다, 남은 인원도 상당히 중요하니까요.” “참가자들이 상대가 불가능한 컨디션에서 히든 웨이브가 시작돼버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군요?”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해됐습니다.” 어찌 됐든 박하준의 활약 덕에, 정민은 설계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다. 백색 화로와 흑색 화로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 그 끝에 최후의 빙하기와 함께 등장하게 될… 절망적인 수준의 엘리트 몬스터 웨이브. 이 웨이브가 시작되는 순간 두 개의 화로는 하나의 초대형 화로로 합쳐지게 되며. 이때까지 생존한 모든 플레이어는 한 팀이 되어 마지막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게 된다. 경쟁과 갈등. 그 끝에 도래한 대화합의 장. 입학 미션 치고는 거창한 게 아닌가 싶지만, <얼어붙은 서울>이라는 하나의 서사가 완벽히 완성되는 구도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이렇게 되면 입학 미션에서… 단 한 명의 참가자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겠지만. 후후.’ 심지어 첫 미션의 생존자가 나오기 힘들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되면 미션 승리 보상인 ‘명예의 징표’를 단 한 명의 참가자도 가져갈 수 없게 되고, 그만큼 제작진은 예산을 아낄 수 있게 되니까. 아직 참가자들에게 공개하진 않았지만, 이 명예의 징표는 사실상 LP에 준하는 재화다. 참가자들은 명예의 징표를 모아서 ‘중간 점검’ 이벤트 전에 각각 하나씩 제작진으로부터 물건을 구매할 수 있게 되고, 당연히 징표가 많을수록 더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 그게 전부 제작비에 녹는 것이고 말이다. ‘참가자들 역량이 너무 좋아서, 10명 이상 생존해버리면 곤란할 뻔했는데…….’ 이정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백색 화로에서는 본격적인 참가자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쾅- 콰드득-! 몬스터 웨이브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 박하준이, 어느새 앞을 막아선 이성환을 향해 마치 짐승처럼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와… 대박인데요?” “둘 다 살벌하긴 하네요.” 그리고 이 둘의 전투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제작진의 양쪽 입꼬리는, 귀에 걸리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캬, 오늘 이 정도면 진짜… 편집팀 일할 맛 나겠네요.” 때문에 지금 이 순간. 거의 모든 제작진은 지금 이 ‘최후의 보루’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관객들만큼이나 깊게 몰입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이 시점, 정민이 친구의 행방을 잠깐 잊고 있던 건……. 딱히 그의 실수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깡- 까강-! 눈앞에 달려드는 몬스터를 막아내는 와중에도, 최민석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강할 수 있는 거지?’ 최민석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이성환과 박하준이 전투 중인 전장이었다. 박하준 말고도 두 명의 참가자가 백색 화로를 공격하기 위해 와있었지만. 그들의 공격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마치 야수처럼 이성환을 몰아붙이고 있는 저 남자. 박하준. 이 사람만큼은 이성환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대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성환 말고는… 이 정도 레벨인 참가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같은 파티원이었던 마법사 권유나 참가자만 해도, 냉정하게 최민석보다는 한 레벨 위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충분히 최민석도 바라볼 만한 수준이었고, 그래서 더 노력하고 정진하면 이성환의 그림자 정도는 밟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최민석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력을 다해 박하준과 맞대는 이성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나의 거대한 벽이 느껴진다. 처음 박하준이 화로 앞에 나타났을 때. 그 공격을 최초로 막아봤던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석 자신이어서 더 와닿는 것 같았다. ‘스킬도 아니고 평범한 돌진 공격 한 방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아마 이성환이 없었더라면. 저 박하준이라는 참가자 하나 때문에 백색 화로는 터져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성환과 박하준은, 솔직히 <헌터즈 스쿨3>의 참가자들 안에서도 규격 외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인정해 버리니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한 최민석이었다. ‘이렇게 되니… 미션 1등 운운했던 게 좀 많이 창피해지기는 하네.’ 그야말로 한 치 물러섬조차 없는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며, 최민석은 누가 이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최민석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터였다. 어쩌면 지금 이 전장에 있는 모든 참가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거기에 있을 테니 말이다. “박하준 님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상당한 실력이시군요.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물러날 거라는 얘긴 아니지만 말이죠.” 하지만 최민석을 비롯한 많은 참가자들의 그 궁금증은, 이 자리에서 곧바로 풀릴 수 없었다. 띠링-! [60초 뒤, 혹한의 눈보라가 다가옵니다.] [※주의! 아직까지 ‘최후의 보루’에 너무 많은 열기가 남아 있습니다!] [‘빙하기’가 시작되기 전, 흑색의 화로와 백색의 화로 중 하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동장군’의 하수인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뭐지?” “동장군이라고?” “그거… 내 기억에 보스 몬스터 이름이었는데?” 결국 3페이즈가 끝나기 전까지, 이성환과 박하준의 승부는 마무리되지 않았고……. [‘얼어붙은 서울’의 ‘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흑색 화로와 백색 화로가 모두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흑색 화로와 백색 화로의 열기가 하나의 거대한 ‘최후의 화로’에 통합됩니다.] [지금까지 생존한 모든 플레이어는, ‘최후의 보루’ 안에 머물 시 ‘최후의 화로’의 효과를 전부 적용받습니다.] [‘최후의 화로’ 효과를 적용받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10초마다 ‘열기 구슬’ 1개가 자동으로 소모됩니다.] ……중략…… [과도한 열기의 발생으로 인해, ‘겨울의 주인’이 눈을 뜹니다.] [동장군의 하수인들이 지하에서 깨어났습니다.] [‘엘리트 몬스터 웨이브(Elite Monster Wave)’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모든 플레이어의 합동 전투 페이즈인, 마지막 빙하기 페이즈가 시작되었으니 말이었다. 7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띠링-! [‘얼어붙은 서울’의 ‘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흑색 화로와 백색 화로가 모두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시스템 메시지가 망막에 떠오른 순간, 나와 강소희는 동시에 동작을 멈췄다. “시작됐네요.” 4페이즈의 시작을 기점으로, 우리의 마지막 플랜을 정하기로 했었으니까. “온도부터 바로 훅 떨어지네요.” 우리는 지금 지하도시 최심부까지 내려와 있었다. 위치로 따지자면 ‘최후의 보루’의 북쪽.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지하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성채’라는 이름의 필드. [‘얼어붙은 복도’에 입장하였습니다.] [체온 하강 속도가 가속됩니다.] 3페이즈 내내 우리는 이곳에 있었고. 그 이유는 바로, ‘엘리트 몬스터 파밍’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프로스트 타이탄의 얼음 파편. 아직 온기가 남은 불꽃 대현자의 재. 벽에 박힌 쌍두 키메라의 뿔. 이 모든 잔해가 바로 사냥의 흔적이었다. 재밌는 건, 이 3페이즈가 우리에게 가장 평화로운(?) 페이즈였다는 거다. 체온이 별로 떨어지지도 않는 간빙기에 그 어떤 참가자의 방해도 없이. 둘이서 오붓하게 파밍만 할 수 있었으니까. ‘모두가 화로에만 정신이 팔린 덕에 말이지.’ 덕분에 나와 강소희는 꽤 괜찮은 장비들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준비가 끝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생존한 모든 플레이어는, ‘최후의 보루’ 안에 머물 시 ‘최후의 화로’의 효과를 전부 적용받습니다.] [‘최후의 화로’ 효과를 적용받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10초마다 ‘열기 구슬’ 1개가 자동으로 소모됩니다.] 추가 메시지를 읽은 강소희가 꽤 놀란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정말 건율 님 말대로네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메시지에 설명된 대로라면, 이제 화로에 인원 제한이 없어진 거 아닌가요?” “아, 그건 맞죠.” “우린 이제 파밍도 할 만큼 했으니, 화로로 돌아가면 되지 않나 싶어서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하긴 강소희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법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화로에서 뺑이 치는 사이 파밍으로 스펙 차이를 벌려 놨으니. 지금 화로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면, 완벽히 이득을 보는 것으로 느껴졌을 거다. 하지만. “아뇨.”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직 마지막 단추 하나를 덜 꿰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해 가며 파밍한 이유. 그 이유가 저 빙벽 너머에 잠들어 있었으니까. ‘내 계산이 맞다면. 이제 충분히 트라이 해볼 만해.’ 강소희는 잊고 있는 듯했지만, 난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 봤던 ‘보스 처치 보상’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던전 보스 혹한의 군주, 동장군 (General Winter) 보스 처치 시, 모든 플레이어의 체온 감소 속도가 50% 감소합니다. 처치한 플레이어는, 더 이상 체온이 감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보상이야말로… 이 <얼어붙은 서울> 자체를 파훼할 수 있는 마스터피스였다. 왜 그런 거냐고? [주의! 현재 체온이 너무 낮습니다! 체온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 보상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극한까지 체온을 낮춘 상태에서도 안정적으로 능력치 버프를 적용받을 수 있을 테니까. 쉽게 말해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체온까지 체온을 내려 5배도 넘는 능력치 버프를 확보한 뒤, 보스 처치 보상을 통해 그 상태 그대로 내 체온을 고정시켜 버리는 거다. 이러면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이 <얼어붙은 서울> 안에서는 말이다. “그러니까… 동장군을 잡아보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물론 강소희 입장에서는 상당히 도박으로 느껴질 만한 선택지다. 앞서 그녀가 말했듯, 이대로 화로에 돌아가도 우리는 5위권 이내의 최상위 성적을 거둘 확률이 높았으니까. 이 상황에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보스에 도전한다? 나야 보스 스펙에 대한 계산이 서 있는 상태니까 해보는 건데……. 강소희의 입장에서는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데. 강소희는 내 대답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아주 가볍게 대답해 버렸다. “좋아요. 한번 해 보죠 뭐.” 예……? 동장군이 뭔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보스잖아요. 사람 바보 취급하는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건율 님 따라가는 게 더 재밌어 보이잖아요.” “아하.”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뭐,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거죠.” 그래도 벌써 세 시간 가까이 함께했더니… 나에 대한 믿음이 좀 생긴 건가? 말투도 처음보다는 많이 편해진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해도 공략에 실패하면, 30위권에도 못 들 가능성이 있는데.’ 아니면 내 예상보다 강소희의 심계가 더 깊은지도 모르겠다. 보스 공략 실패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계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만에 하나 보스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잃을 것 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라는 계산이다. 적당히 상위권 순위를 가져오는 것보다 보스 트라이로 플레이 임펙트를 남겨 놓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종 순위에 도움되는 큰 그림을 그려놓았거든. “자, 그럼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죠?” 그나저나… 상당히 적극적이신걸? 이러니까 좀 무서운데……. “열기 구슬이 충분하긴 해도, 너무 시간을 오래 끄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건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동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은 이미 파밍을 하던 중에 파악해 뒀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 * * 쿵- 쿵- 쿵- 땅을 흔드는 무거운 발소리가 최후의 보루를 뒤흔들었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들. 엘리트 웨이브의 등장에, 참가자들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와… 진짜 웨이브 전체가 엘리트 몬스터잖아?” “이걸 버틸 수가 있는 건가……?” “그래도 끝까지 해보긴 해야죠.” “탱커분들! 앞 라인 무너지면 안 됩니다!” 58레벨에 5M가 넘는 거구를 가진 아이스 골렘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위압적인 위용을 뽐내는… 무려 60레벨의 플레임 드레이크들. “젠장…!”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그 뒤로는 50레벨 초반대의 엘리트 트롤들이 ‘최후의 보루’를 향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쿠쿵-! 그리고 이들과 가장 먼저 부딪친 건……. 거대한 강철 방패를 앞세운 이성환이었다. 까가강-! 이성환의 검이 아이스 골렘의 주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앞 라인 뚫리면 그대로 끝입니다!” “딜러분들 최대한 안전하게 포지션 잡아 주시고……!” “힐러들은 탱커분들 위주로 케어 부탁드립니다!” <얼어붙은 서울>의 미션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하드코어한 난이도와 상황에, 플레이어들은 이를 악물고 합심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칼을 맞대며 싸우던 백색 화로 진영과 흑색 화로 진영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역량을 쏟아내며, 최대한의 시너지를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화아아악-! 플레임 드레이크가 토해내는 용염을 막아내는 과정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마법사들과 서포터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연계 스킬을 쏟아내며, 강력한 화염 덩어리를 허공에서 분쇄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암 스테이지의 관객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미쳤다 진짜!” “이번 시즌 수준 왜 이렇게 높음?” “이 정도면 그냥 랭커 파티 보는 것 같은데?”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긴 한데… 그래도 대박이네 리얼.” 하지만 이 순간을 가장 즐기고 있는 이들은, 사실 모든 과정을 설계한 제작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암 스튜디오의 중앙 모니터링실. 장세연 PD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인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완벽한 그림인데요?” “이정민 FD님이 고생 진짜 많이 하셨어요.” “그러게. 그림이 이렇게까지 잘 빠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콘텐츠 밸런스가 너무 잘 잡혔다. 이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참가자들의 역량을 최대치까지 끌어낼 수 있는 난이도와 미션 환경들. 이 큰 구조를 잡은 후배 이정민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는 장세연이었다. ‘정민이 이 자식은 그러니까… 확실히 능력 있는 녀석인데 말이지.’ 사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이정민이 FD로 기용된 건, 세연이 국장실에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사내에서 이정민의 이미지는… 사교성 좋은 호인이지만 일을 잘한다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뭐든지 최소한으로 적당히만 해내는 게으른 성향이 그 이유였을 터. 그러니 바로 위에 장세연처럼 빡빡한 디렉터가 붙는다면, 시너지가 날 수밖에 없는 거였다. “PD님! 36번 참가자 아웃 됐습니다!” “25번 참가자도 간당간당해요.” “이대로면 10분 정도 더 버티는 게 한계일 것 같은데요?” 각 모니터링실에서 들려오는 브리핑을 들으면서, 장세연은 슬슬 스테이지 세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모든 참가자의 미션 아웃으로 모든 입학 미션이 종료된다면. 이제 각 참가자들의 ‘멘티 등급’을 발표하는, 스테이지 녹화를 시작해야 했으니까. “좋아요. 무대 팀 준비하세요.” “네, PD님!”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세연은 알 수 없었다. 기기긱- 쿠웅-! 아직까지 제작진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클라이막스가 남아 있음을 말이었다. 7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쩌적- 쩌저적-! 얼음 안쪽에는 복잡하게 새겨진 고대 룬 문자들이 푸른 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었고. 스하아아아-! 갈라진 얼음의 틈 사이에서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뼈가 시릴 정도로 혹독한 한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삐- 삐- 삐- 요란하게 반응하는 PDA 열감지기를 확인한 나는, 눈앞의 시스템 메시지에 집중했다. [※경고! 전방에 대형 열원이 감지되었습니다.] [추정 온도: -50°C ~ 800°C] [<얼어붙은 서울>의 주인, ‘동장군’이 곧 잠에서 깨어납니다.] [공략 적정 레벨 : 70] [공략 적정 인원 : 15~20명] ……중략……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뒤, 이그니션 버스터를 꺼내 들었다. 공략 적정 레벨과 인원을 대충 보면, 보스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계산이 된다. ‘이 정도면 보스 레벨은 80 전후로 설정된 건가?’ 약간 높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예측 범위 안이다. 참가자들 평균 레벨을 고려하면,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보스가 아닌 느낌이지만……. ‘그래서 체온 기믹이 있는 거겠지. 이걸 극한까지 활용했을 때… 겨우 처치 가능한 난이도를 설계해둔 거야.’ 오히려 이쯤 되니까, 온 몸에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이런 극한의 난이도는… 귀환 이후 처음 경험해 보는 느낌이거든. 철컥-! 체감상 5~7배는 강력해진 능력치를 점검한 뒤, 무너지는 얼음벽 뒤쪽으로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존재감이 전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겨울의 주인. 동장군의 등장이었다. [그대들도 혹시 희망을 품고 이곳을 찾아왔는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졌고.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영원한 겨울뿐이거늘.]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오른다. 쩌어엉-! 허공에 거미줄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던 살얼음이 깨져 나가면서… 비로소 동장군의 모습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작은 운동장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원형 홀. 그 홀의 정중앙, 12개의 계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얼음 왕좌. 왕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얼음 조각이었고, 그 위에 앉아있던 동장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쿵-! 동장군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신기하네. 이건 나도 정말 처음 보는 보스인데.’ 동장군의 실체를 확인한 나는 속으로 꽤 놀랐다. 솔직히 처음 여기 오기 전에는, 동장군도 결국 내가 아는 어떤 다른 보스 몬스터의 오마주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제작진이 정말 이 정도 되는 보스를 가상의 공간에 창작이라도 한 건지. 동장군은 내 기억 어디에도 없는 보스의 형태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이잉-! 사방에서 새파란 불빛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장군이 얼음의 망령들을 소환하였습니다.] [아이스 스피릿(Ice Spirit)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왕좌 주변을 천천히 선회하는, 신비로운 외모의 얼음 정령들. 다행히 이 녀석들은 구면이었다. ‘이 필드에 딱 어울리는 몹들이긴 하네.’ 이렇게 얼음 범벅인 필드에서는, 본래 스펙보다 최소 1.5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50레벨 정도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소희 님, 준비되셨죠?” 내 물음에 강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다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접근만 못 하도록 저지해 주세요.” “그럴게요.” 강소희에게 오더를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열기 구슬의 수량을 확인하였다. [잔여 열기 구슬 : 264] 빙하기가 시작되기 직전 300개 정도 모아뒀던 구슬이 벌써 서른 개도 넘게 소모되었다. ‘확실히… 시간은 많지 않겠어.’ 이 정도면 지금의 한계 체온에서… 25분 정도 더 버틸 수 있는 수량이다. 그 말인즉, 안정적으로 20분 안에는 이 보스를 처치해야 한다는 말. 드르륵- 철컥-! 마지막으로 강소희와 눈빛을 교환한 뒤, 이그니션 버스터를 장전하여 동장군을 향해 겨누었다. 이어서 무식한 마력총에서 터져 나오는 격발음을 신호탄으로……. 퍼엉-! 동장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김예림은 숨을 죽인 채 화면에 몰입해 있었다. 스탭들이 다들 분주히 미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도무지 모니터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온몸을 감싼 은백색 플레이트 아머. 이 시퍼런 공간과 대비되는, 붉은 열기를 뿜어내는 한 자루의 마력총. [타탓-!] 그걸 쏘아대며 얼음의 균열 사이를 누비는 이건율 참가자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준이었으니 말이었다. ‘크아…… 미쳤다 그냥…….’ 예림이 볼 때 이건, 단순히 서바이벌 예능의 미션 영상이라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의도적으로 연출된 액션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해야 할까. 서사도 완벽했다. 최후의 보루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다른 참가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홀로 ‘겨울의 주인’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 고독한 플레이어. 사실이 어쨌든(?) 예림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광경이었고. ‘이건… 낭만 치사량 아냐?’ 덕분에 이미 예림의 마음속에, 1픽은 이건율 참가자가 되어 있었다. [퍼펑- 펑-!] 하지만 그런 예림조차도, 이건율이 동장군을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35레벨의 플레이어가 80레벨의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는 상상은…… 어지간한 콩깍지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콰드득- 쾅-!] 하지만 시간이 5분. 또다시 10분이 지나갈 즈음이 됐을 때. 예림은 뭔가 위화감을 점점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잠깐. 어떻게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숨죽인 채 관람하느라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모니터 안의 이건율은, 벌써 10분째 동장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름 돋는 사실까지도 깨닫고 말았다. ‘잠깐. 생각해보니… 아직 단 한 대도 맞질 않았잖아?’ 30레벨대의 플레이어는, 80레벨 보스 몬스터의 공격에 직격당하면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게 정상이다.(물론 능력치가 5배도 넘게 버프받은 이건율은 아니다.) 그러니 이건율은 지금, 그 살벌한 외줄타기를 벌써 10분도 넘게 하고 있는 거다.(사실 한 번 정도 맞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동장군이 저렇게까지 약이 올라 진부한 대사를 씹어 뱉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될 수준. [콰아앙-!!] 동장군이 붕- 붕- 휘두르는 거대한 언월도에 필드 곳곳이 터져나갔지만. 이 순간에도 건율은 그 모든 공격을 다 피해내며… 차징된 강력한 마력포를 그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콰아앙-!!] 이러다 정말로 동장군을 잡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버리는 건 아닐까? ‘대체 35레벨로 80레벨 보스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대하는 거지?’ 어쩌면 이건율 참가자는… 단순 낭만뿐 아니라 재능 자체도 이성환을 뛰어넘는 미친 천재인 건 아닐까? [쾅-! 쾅-! 쾅-! 쾅-! 콰앙-!] 마치 곡예처럼 느껴지는 마력탄 속사를 바라보며 예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동장군의 가슴 중앙 거대한 푸른 보석이, 갑자기 은은한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어어……?’ 그리고 예림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던전 기획팀의 시뮬레이션 문서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진짜…… 마지막 페이즈라고?’ 뿔 장식이 달린 동장군의 풀 헬멧. 그 투구의 눈구멍에서 빛나는 두 개의 푸른 불꽃 또한, 점점 더 붉은 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 어떤 강철보다 더 위협적인 예기를 가진 반투명한 언월도에도 붉은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이제는… 끝이다, 인간.] 그렇게 만들어진 붉은 빛과 푸른 얼음이 만나, 수많은 자줏빛 검날이 동장군의 주변을 휘몰아친다. “……!” 이제 저 수십 개의 칼날들은 하나의 회오리바람이 되어, 이건율을 난도질하기 위해 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이 얼음칼날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모든 마력을 소모한 동장군이 쓰러지거나, 또는 난도질당한 이건율이 미션아웃 될 터였다. 예림은 숨죽여 이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았다. 동장군의 마지막. 혹은 이건율의 마지막이 될 장면. 그리고 잠시 후. “허어억…!”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숨죽이고 있던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 * 전장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몬스터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면서, 파란 눈밭의 색이 완전히 물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쓰러진 것은 몬스터 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엘리트 몬스터들의 공세에, 참가자들 또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이건… 이제 무리야. 더 이상은 힘듭니다.” “힐러! 진우님!” “진우님 아웃되셨어요. 이제 힐러도 셋밖에 안 남았다고요.” 참가자들은 모두 안다. 이 네 번째 페이즈만 버텨내면, 남은 모든 이들은 생존이라는 걸. 하지만 반대로 이 페이즈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 폭력적인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안다. 그래서 누구도 ‘생존’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3페이즈가 끝났을 때 남아 있던 참가자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희생된 지금이지만, 아직 시간은 20분이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이걸… 생존하라고 만들었다고?” 그러니 누군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을 때, 주변에 있던 모든 참가자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던전 안의 그 누구도. 심지어 압도적인 역량을 가진 이성환이나 박하준도. 그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음이, 너무 자명했으니 말이다. “끄으윽-!” 그러니까 지금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진 않았지만. 참가자들이 이 순간까지 필사적인 이유는… 사실 마지막 경쟁 때문이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한들 결국 순위는 정해질 것이고. 마지막에 사망한 최후의 1인이, 이 입학식 미션에서 1위를 차지할 테니까.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생존자들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마력을 쥐어 짜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광장 한가운데의 얼음 대지가 갑자기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고. 쩌적- 쩌저저적-! 그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거대한 냉기의 소용돌이가……. 콰득- 콰콰쾅-! 전장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올랐다. 7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거대한 돔구장을 가득 메우던 관중들의 함성이,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콰콰콰콰쾅-!] 마지막까지 남겨진 참가자들의 처절한 사투. 그것을 응원하는 소리로 가득 찼던 상암동 돔 스테이지가, 일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적막해진 것이다. “……!” 모두가 동작을 멈췄고, 그것은 비단 관객들 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등급결정 이벤트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제작진들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메인 스크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영원의 겨울’의 종말이 도래하였습니다.] 그 적막 속에 누군가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저게… 대체 뭐지?” 바닥이 온통 새파란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최후의 보루’. 그 한복판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퍼렇고 거대한 얼음기둥이 벼락처럼 솟아오른 것이다. 한참 치열하게 싸우던 생존자 플레이어들도, 이 순간만큼은 기현상에 시선이 뺏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믿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던 건……. 띠링-! 그 직후 모두의 눈앞에 떠오른, 월드 시스템 메시지였다. [참가자 ‘이건율’이, <얼어붙은 서울>의 보스 ‘동장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스 처치 보상이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부여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플레이어들의 체온 하강 속도가 50%만큼 감소합니다.] 그러니까 참가자들은, 두 눈으로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곧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장군……?” “그게 뭐….” “보스? 보스를 처치했다고?” 아니,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건, 수천명의 관객들과 이 모든 판을 설계한 제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버그 난 건… 아니겠죠?” 하지만. [촤라락-!] [캬아아아악-!] 허공을 날던 볼카닉 드레이크 두 마리가 동시에 날개를 찢긴 채 바닥에 곤두박질쳤을 즈음엔. 쿠웅-! 얼음기둥의 꼭대기에서 자줏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언월도 한 자루를, 모두가 발견하지 못할 수 없었다. 혹한의 초승달 (Crescent of Eternal Frost)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장군의 상징과도 같은 애병(愛兵). 놀랍게도 그것을 쥐고 있는 건, 한 명의 플레이어였다. -잠깐…!! 보스 몬스터 동장군! 동장군을 처치한 플레이어가 나타났습니다!!! 멘티 등급 결정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단상으로 올라와 있던 캐스터 김신우가, 저도 모르게 마이크를 쥔 채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기점으로. “와아아아아-!!” “뭐야?! 이건율? 대체 누구지?” 조용해졌던 돔 스테이지 전체가, 다시 거대한 환호성으로 뒤덮이기 시작하였다. “대박이야!!” “반전 뭐냐고오!!” 얼음기둥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참가자는, 전장으로 뛰어내리며 그대로 언월도를 내리 찍었다. [촤아악-!]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창격에, 이제껏 생존자들을 힘들게 했던 엘리트 몬스터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캬아아악-!] [그뤄어어억-] [쿵-!]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건, 이건율 참가자 한 명이 아니었다. [스하아아아-!] 얼음기둥 위에서부터 짙은 보랏빛의 독무가 쏟아져 내리자……. 대지를 밟고 서 있던 엘리트 몬스터들이, 마치 햇볕 아래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하였으니까. -이건 대체 무슨 반전일까요?! 혹시 제작진이 숨겨놓은 마지막 히든 참가자들인가요? -멘토분들도 적잖이 당황하신 모습입니다! -저 여성 참가자분은 또 누구죠? 몬스터들이 한 줌 핏물이 되어 녹아내린 자리에, 가벼운 몸짓으로 뛰어내린 두 번째 참가자. ‘강소희’까지 등장하자, 스테이지 안의 함성은 더욱 달아올랐다. “와아악!!” “강소희다!!!” “그래! 생각해 보니 참가자 중에 강소희도 있었지?!!!” 아무런 인지도도 없는 이건율과 달리 충분한 인지도를 가진 강소희의 등장에, 그녀를 알아본 수많은 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플래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이 마지막 씬의 주인공은, 이건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문의 참가자일 수밖에 없었다. [콰직- 쩌저정-!] 맹독 마법과 함께 등장한 강소희도 엄청난 임펙트를 주긴 했지만……. 그게 동장군의 언월도를 휘둘러대며 엘리트 몬스터를 도륙하는 이건율에 비할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장을 날아다니던 대부분의 촬영 드론이 이건율의 일거수일투족을 클로즈업하기 시작했고. 그 화면 안에서 무아지경이 되어 언월도를 휘둘러대는 이건율의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해내기 시작하였다. 흥분한 캐스터 김신우가 마이크를 잡은 채로 목이 쉬도록 감탄을 쏟아내었다. -제작진 측에서 듣기로는 분명……! 동장군은 공략이 불가능한 수준의 보스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메인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았던 두 명의 플레이어가!! 그 동장군을 처치한 뒤 전장 한복판에서 솟아올랐다는 말이죠! -이건 저도 무조건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누가 봐도 ‘고의’에요 이건! -아니, PD님들……! 저까지 속이시면 대체 어.떡.합.니.까!! 김신우는 캐스터이기에 앞서, 이 <헌터즈 스쿨> 시리즈의 빅 팬이었다. 그가 <헌터즈 스쿨>의 캐스터를 맡은 것은 시즌 2부터였는데……. 시즌 1때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제작진을 찾아가 꼭 캐스터를 맡고 싶다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때문에 지금 김신우의 표정과 제스쳐는, 결코 꾸며낸 것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지금 마이크를 잡고 중계 아닌 중계를 하고 있는 상황 또한, 제작진과 사전에 전혀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그런데 저 참가자는 대체 어떻게 엘리트 몬스터들을 두부 썰 듯 썰고 있는 거죠? -설마 이성환 참가자보다 더 높은 레벨……? -오마이 갓! 35레벨이랍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제작진 오피셜이 들어왔는데…… 완전히 정상적인 플레이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스크린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일단 현장의 관객들은 대부분 순수하게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캬……! 시즌3 냄새난다고 했던 놈들 누구냐?” “도파민 미쳤다 쓰읍……!” “역대급 오프닝 뭔데!!” 뭔가 이것저것 따지면서 생각하기엔, 이 상황 자체의 도파민이 너무 크게 넘쳐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순식간에 웨이브 절반이 쓸려나갔습니다! -화로를 지키던 생존자들도 다시 눈에 생기가 돌아왔어요! -지금 남은 생존자가 총 몇 명인 거죠 그럼? -열일곱 명! 무려 열일곱 명의 참가자들이 입학 미션의 위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헌터즈 스쿨의 입학 미션은, 지난 두 시즌에서도 항상 매운맛이었다. 첫 시즌의 입학미션 생존자가 일곱 명, 두 번째 시즌의 입학미션 생존자가 고작 세 명이었으니. 열일곱 명의 참가자나 생존하기 직전인 이 신선한 그림도, 관객들 입장에서는 의외성이자 재미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콰아아아앙-!] 물 만난 고기가 된 ‘이건율 참가자’는, 마지막까지 전장의 모든 엘리트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저 언월도! 아마 동장군이 드랍한 장비겠죠? -분명히 엄청난 아티펙트같긴 한데요. -이 미친 퍼포먼스의 비밀이 저 안에 들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 모든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저 이건율 참가자의 실력은 분명 압도적입니다! 어쨌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을 끝으로, 결국 <얼어붙은 서울>의 마지막 페이즈에도 마침표를 찍을 때가 다가왔다. [조금만 더 버텨! 이제 끝이 보인다고!] [열기 구슬… 남는 분 계시면 조금만 지원해 주세요!] [이쪽에 방금 드랍 됐습니다!] [화로! 화로부터 지켜!]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5분의 사투가 끝난 끝에. 띠링-! [보스 몬스터 ‘동장군’이 처치되었으므로, 더 이상 엘리트 몬스터 웨이브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모든 몬스터 웨이브가 전멸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서울> 던전이 클리어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헌터즈 스쿨 시즌3의 입학 미션이 모두 종료되었다. [입학 미션 종료!] [최종 생존자 : 17명] [입학 미션의 최종 순위가 곧 정산됩니다.] “와아아아!” “생존이 아니라 클리어라니!!” “입학미션 던전이 클리어된 건 처음 아냐?” 관객들은 너도나도 스크린에 떠오른 클리어 메시지를 향해 셔터를 눌러 대었다. 벌써 촬영이 시작된 지 4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상암 스테이지를 찾은 수천 명의 관객들 중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입학 미션의 서사는 마무리되었지만, 이제 관객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이 등급 결정전의 ‘최종 순위’였으니까. 그리고 최종 등급 심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 -이성환에 이은 박하준 참가자의 등장에도 솔직히 상당히 놀랐었는데요! -혹시나 그 두 참가자의 아성을 뛰어넘을 새로운 참가자의 등장인 건지……! 모든 미션이 끝나 스크린에는 아무 영상도 송출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신우 캐스터는 입에 침을 튀기며 그 마지막 반전에 대해 관객들과 떠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35레벨 참가자를 이성환에 비교하는 건 무리 아니냐고요? -글쎄요! 사실이 어떻든 이번 입학 미션에 한해서만큼은……! 저 이건율 참가자가 다른 모든 멘티 참가자들이 보여준 임펙트를 뛰어넘은 게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상암 스테이지 안의 모든 광경은……. 발 빠르게 움직인 기자들에 의해,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로 쓰여지고 있었다. [<헌터즈 스쿨3>상암 돔 구장에서 열린, 역대급 규모의 입학미션!] [협력과 경쟁! 그리고 최후의 반전!] [<헌터즈 스쿨3> 캐스터 김신우, 현장 중계 도중 ‘역대급 시즌’ 선언해.] [<헌터즈 스쿨3>등급 결정전 최후의 승자는 누구?] 실시간 커뮤니티 떡밥도, <헌터즈 스쿨>과 관련된 모든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말이었다. 7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라이카 아카이브(Laika Archive)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각성자 커뮤니티다. 단순히 정보가 오가는 게시판이라 정의하기엔 그 위상이 너무도 거대했다. 게이트가 열리고 라이카 시스템이 전 세계를 잠식한 이후. 인류가 쌓아 올린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는 이곳으로 모였으니 말이다. 각성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보는 정보의 요람인 ‘각성자 위키’의 모든 정보들조차도, 이곳 아카이브 이용자들이 쌓은 정보가 기반이 되었을 정도.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이 커뮤니티가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생존 지침서였고, 누군가에게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거래소이기도 했다. 특히 헌터 라이선스를 인증한 ‘러너(Runner)’ 등급 이상의 각성자일 경우 ‘딥 아카이브(Deep Archive)’에 접속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수백에서 수천 LP 이상의 가치를 가진 정보들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라이카 아카이브가, 이렇게 한없이 무겁기만 한 커뮤니티인 것은 아니었다. 현직 헌터들이 예민한 정보들을 공유하기 위해 ‘딥 아카이브’를 사용한다면,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인 ‘퍼블릭 클라우드(Public Cloud)’라는 공간도 존재했으니까. 완전히 익명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접근 가능한 공간이었는데……. 때문에 이용자 숫자나 실시간 트래픽 만큼은, 세계적으로 이 퍼블릭 클라우드를 넘을 만한 곳이 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퍼블릭 클라우드’에, 오랜만에 한국 헌터들과 관련된 떡밥이 조용히 지분을 넓히고 있었다. [(일반) 나 거금 들여서 상암 현장 티켓 구했는데, 여기 시설 진짜 미쳤다 ㄷㄷ] 이거 암표로 거의 80LP 넘게 주고 산 거라,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손 떨렸거든? 근데 스튜디오 입구 들어서는 순간 돈 아깝다는 생각 싹 사라짐. 상암 스튜디오가 원래 이렇게 컸냐? 여기 전체에 마나 필드로 스크린 깔린다는 거 같은데, 벌써 심장 나대는 중;; 이 익명의 바다를 휩쓸고 지나간 수많은 떡밥들 사이에서, 한국의 헌터 예능인 <헌터즈 스쿨>이 조금씩 이슈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 저기 시설비만 수백억 들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보네. └ (자동번역) 이곳은 어디입니까? 촬영 세트장일까요? └ 헌터즈 스쿨 촬영장임ㅇㅇ └ (자동번역) 사진 더 올려줄 수 있습니까? 유럽 쪽 스튜디오와는 차원이 다르군요. 특히 저 마력 필드의 밀도가 화면 너머로도 느껴집니다. └ (자동번역) 저 천장에 달린 장치, ‘라이카 싱크로나이저 7세대’ 맞지? 저거 한 대 가격이 웬만한 60레벨대 던전 루팅 총합보다 비싼데… 제작비 진짜야? └ 관객석마다 개인용 옵저브 스크린 다 달려 있음 ㅋㅋ 진짜 자본주의의 정점이다, 여기가. └ (자동번역) 80LP면 내 한 달 생활비지만, 저런 환경에서 각성자들의 첫 미션을 직관하는 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부럽군요. └ 캬… 나도 돈 좀 모아서 다음 미션 때는 무조건 직관 간다. 진짜 상암 스케일 대단하네. 이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모인 아카이브 이용자들이, 특정 국가의 예능에 관심을 갖는 케이스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건, <헌터즈 스쿨 3>이 특수한 케이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멘토로 출연하게 된 검희 엘리제의 글로벌 팬덤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며……. [(인증) 상암 스튜디오 근처에서 검희 봄 ㅎㅎ] └ 갸부럽다ㅠㅠㅠ └ <헌터즈 스쿨> 촬영 때문에 한국 간 사람들 진짜 많다더니 사실이었네. 나도 비행기 티켓 끊을걸. └ (자동번역) 엘리제는 멘토로서 너무 엄격해. 하지만 그게 그녀의 매력이지. 이번 미션에서도 누군가를 울렸을 게 분명해. └ ;;검희 이번 시즌에 멘토 출연 처음일 텐데, 이건 또 무슨 소리임? └ 전에 미국 무슨 예능 나간 적 있을 거임. └ 아하? 기존 헌터즈 스쿨 1,2시즌도 후속 공개된 OTT버전이 대박나면서, 꽤 많은 해외 팬들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질문) 헌터즈 스쿨 1,2시즌 참가자는 이번 시즌에 안 나오나요?] └ (자동번역) 헌터즈 스쿨은 ‘서바이벌’ 포맷입니다. 이전 시즌의 낙제자들을 다시 불러올 여유는 없을 겁니다. 제작진이 완전히 새로운 피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 (자동번역) 1, 2시즌은 로컬 예능 수준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엘리제가 멘토로 참여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입니다.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기존 참가자들은 예선 탈락했을 게 분명합니다. └ ???웬 글로벌 프로젝트?? 죄다 한국인인데??? └ ㅅㅂㅋㅋㅋ 다국적 채빠들 날조 개웃기네 ㅋㅋㅋ 하지만 만약 이 정도의 이유가 전부였다면, <헌터즈 스쿨 3> 떡밥은 소리소문없이 금방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아직 <헌터즈 스쿨 3>의 본방조차 방영되기 전인 시점이기 때문에…… 해외 이용자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어모으는 건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떡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건, 현장에서 관람하던 누군가가 하나의 실시간 영상을 클라우드에 올린 직후부터였다. [(질문) 35레벨이 60레벨 엘리트 웨이브 솔플하는 거 가능함?] (영상) 이거 지금 실시간인데, 암만 봐도 말 안 되는 것 같거든. 솔직히 걍 주작 아님? 그건 바로 <헌터즈 스쿨3>의 참가자가 거대한 언월도 한 자루를 든 채……. 엘리트 몬스터 한 웨이브를 혼자서 거의 다 쓸어버리는 광경이 담긴 영상이었다. └ 저거 주작 아니면 핵임. 35랑 60은 스탯 차이부터가 넘사벽인데 공격이 다 박히는 게 말이 됨? └ (자동번역) 영상 0:14초 구간을 보십시오. 몬스터의 공격 궤적을 0.1초 차이로 흘려보냅니다. 이것은 레벨의 문제가 아니라 ‘동기화율’과 ‘경험’의 문제입니다. 저런 움직임을 구사하는 35레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원래 이곳 퍼블릭 클라우드에서…… 헌터 관련 떡밥 중 가장 쉽게 불타오르는 주제가 바로 이런 종류의 논쟁이었다. 정확히는 실력에 자신 있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라이브 캠 영상을 녹화해 익명으로 게시판에 올리고, 실력을 평가해 달라는 식의 떡밥이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 물론 라이브 캠을 올린다고 무조건 다 핫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 영상 속의 플레이어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 되어야 떡밥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데……. 지금 클라우드에 올라온 이 영상은 근래 올라왔던 그 어떤 라이브 캠 영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방구석 전문가들이 벌떼처럼 달라붙는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 (자동번역)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참가자는 몬스터의 '관절'과 '코어'만 정확히 타격하고 있습니다. 레벨 보정 저항을 무시하는 치명타 경로만 노리는군요. 미친 수준의 컨트롤입니다. └ (자동번역) 이것은 K-예능의 자극적인 대본입니다. 35레벨이 60레벨대 엘리트 웨이브를 솔플한다면, 그 플레이어는 일 년 내로 글로벌 탑랭커가 되어야만 합니다. 나는 믿지 않습니다. └ 대본이어도 저렇게 하는 게 가능한 건가ㄷㄷ └ <헌터즈 스쿨>제작진이 확실히 시청률에 미치긴 한 듯? 저거 누가 봐도 주작인데 ㅇㅇ; └ 내가 전 시즌부터 말하던 건데, 솔직히 인공 던전에서 진행되는 입학 미션은 리얼리티랑 거리가 멀다고 봄. └ ㄹㅇㅋㅋ 참가자 이건율? 이름도 듣보인데… 아마 본 미션 들어가면 주작 못해서 바로 꼬라박고 광탈할듯?ㅋㅋ 여기서 재밌는 점은, 많은 한국인이 외국인들보다 오히려 늦게 소식을 접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건, 국내 <헌터즈 스쿨> 팬덤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이었고 말이다. [(펌) 헌터즈 스쿨 입학미션 관전중인 클라우드 형님들 근황ㅋㅋㅋ] (이미지) └ 얘들 지금 헌터즈 스쿨 떡밥으로 떠드는 거임?;;; └ 아직 방영도 안 된 거 아냐? 이전 시즌까진 <헌터즈 스쿨>과 관련된 떡밥은 한국에서 단물 다 빠지고 난 다음에야 글로벌 커뮤니티에 한 번씩 올라오던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퍼블릭 클라우드에서 떡밥이 역수입되고 있는 것. 인지 부조화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임;; └ HBC 바이럴 아닐까 ㅋㅋ └ 아니;; 쟤들보다 우리가 느린 게 말이 됨? 현장 간 놈들 떡밥 좀 풀어 봐;;; 그리고 이런 순서로 <헌터즈 스쿨3>의 인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한 건, 당연히 제작진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원래 입학 미션의 녹화 영상들을 밤새가며 편집한 뒤, 2~3일 뒤부터나 리소스를 완성하여 본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하려던 게 HBC 마케팅 팀의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실상 제대로 된 마케팅이 시작되기조차 전인 것. 어쨌든 이렇게 역수입된 떡밥이 퍼져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인증)강민우 표정관리 실패 짤 ㅋㅋㅋㅋ] (사진) └ 저 표정 뭐냐 ㅋㅋㅋ └ 듣보가 총 쏘는 거 보고 현타 온 표정이라던데ㅋㅋ └ 그 듣보가 아까 넘어온 클라우드발 떡밥 주인공인 건 암? └ ㄹㅇ? └ 이름 또 까먹었네. 이건율이었나? <헌터즈 스쿨3>에 대한 관심도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각종 커뮤니티를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속보] 헌터즈 스쿨3 입학 미션 현장 지금 난리 남 ㄷㄷㄷ └ 입학 미션 생존자가 10명이 넘는다던데, 진짜임? └ ㅇㅇ 진짜임. 심지어 17명이라는거ㅋㅋ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이……. 고작 미션이 끝난 참가자들이 등급 결정 이벤트를 촬영하던 시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슈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지를 충분히 체감할 수 있을 것이었다. └ 그런데 솔직히 생존자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ㅋㅋ └ 그렇긴 해 ㅋㅋ 젤 충격적인 건 이성환이 1등 못한 거 아닐까? └ ㄹㅇ? 이성환이 1등이 아니라고? 너 지금 실시간임? └ ㅇㅇ심지어 3등할 뻔 했다는 거 ㅋㅋㅋㅋㅋㅋ └ ㅅㅂ럼들아;;; 늬들만 알지 말고 자세히 설명 좀 해줘;; 물론 헌터즈 스쿨에 대한 관심도가 이렇게까지 빨리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녹초가 된 채 촬영을 마무리하고 있던 이건율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말이다. 7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7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등급 결정전이 모두 끝났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등급이 확정되는 그 모든 촬영까지 전부 다 마무리됐다는 얘기다. 이제 참가자들은 우선 퇴근한 뒤, 주말 이틀 쉬고 나서 월요일에 모이면 된다고 했다. 모이면 바로 본 미션에 들어가냐고? 그건 아니다. 우선 루미스 영지에 모여서, 합숙을 위한 숙소 배정 같은 것부터 시작한다고 했거든. 숙소가 배정되고 팀 같은 걸 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룰은 당일에 다시 알려준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내 입장에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런 서바이벌 예능을 이제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던 나는, 솔직히 ‘등급 결정’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와닿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김신우 캐스터가 발표했던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선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의 입학 미션 성적을 바탕으로 한 ‘멘티 등급’이 발표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여러분이 받게 될 '등급'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설명드려야겠죠?] 정확히는 김신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명시됐던 내용. 여기엔 아주 원초적인 도파민을 자극하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까. 〓〓〓〓〓〓〓〓〓〓〓〓〓〓 <헌터즈 스쿨> 등급 제도 ■ S등급 (1위~20위) 루미스 영지, ‘루멘하르트 중심가’에 위치한 최고급 프리미엄 숙소 / 2인 1실 제공 전속 피지컬 트레이너 배정 프리미엄 식단 (하루 3식 + 간식) 모든 워프 스크롤 비용 지원 게이트 관리국 훈련 시설 우선 이용권 ■ A등급 (21위~40위) 루미스 영지, ‘루멘하르트 중심가’에 위치한 프리미엄 숙소 / 2인 1실 제공 공용 트레이너 이용 가능 스탠다드 식단 (하루 3식) 일부 워프 스크롤 비용 지원 게이트 관리국 훈련 시설 일반 이용권 ■ B등급 (41위~60위) 루미스 영지, ‘루멘하르트 중심가’에 위치한 일반숙소 / 4인 1실 제공 트레이너 예약제 이용 기본 식단 (하루 3식) 마나 캐리지 (Mana Carriage) 이용료 지원 게이트 관리국 훈련 시설 이용 시 50% 할인 ■ C등급 (61위~80위) 루미스 영지, 외곽 지역에 위치한 일반숙소 / 4인 1실 제공 자율 트레이닝 간소 식단 (하루 2식) 도보 이동 원칙 게이트 관리국 훈련 시설 이용 가능 ■ F등급 (81위~100위) 루미스 영지, 외곽 지역에 위치한 일반숙소 / 4인 1실 제공 지원 없음 최소 식단 (하루 2식) 도보 이동 원칙 게이트 관리국 훈련 시설 이용 불가 ※ 등급은 매 미션 종료 후 재조정됩니다. ※ 등급 상승 시 즉시 혜택이 변경됩니다. 〓〓〓〓〓〓〓〓〓〓〓〓〓〓 이걸 본 순간 솔직히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까지 유치해도 되나…? 이런 거였다. 물론 예능 특성상 다채롭게 재밌는 장면을 뽑아내기 위한 구성이라는 건 이해 했는데……. 마치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간식을 차별하는…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정도 차이라면, 등급을 지키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 입장에서야 당연히 꿀이다. 왜 꿀이냐고? 그야, 난 당연히 입학식 미션에서 1등을 했고, S등급을 받았거든. 마지막에 보스 트라이 도박까지 성공시켰는데, 1등 못했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삼시 세끼 식비 해결에 스크롤 비용까지 지원해 주고… 게다가 그 비싼 관리국 훈련 시설 우선 이용권까지 준다니. 이 S등급이라는 건 어지간하면 마지막까지 유지해야만 하겠다. 촬영 기간만 최소 두 달 정도 걸린다던데. 루멘하르트에 숙소? 심지어 워프 자유 이용권? 꿀도 이런 꿀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몸 관리 잘하고. 주말 간은 헛짓거리 말고 집에 짱박혀 있어. 오케?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전화 너머로 들리는 정 사장의 잔소리도, 크게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잘 풀려서 상금이라도 받으면, 이 녀석이야말로 은인이기도 하고 말이지. “걱정 마라. 무리했더니 지금 힘들어 디지겠으니까. 주말 동안 잠만 잘 거야.” 원래는 귀가 전에 만나서 밥 한 끼라도 하려 했는데, 이제 얼굴이 다 알려졌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거부당했다. 참가자가 예능 FD랑 따로 밥 먹다가 걸리면, 그거만큼 대참사도 없다나 뭐라나. -와 근데 너 진짜 대체 실종된 동안 어디서 헌터 트레이닝이라도 받고 온 거 아니냐? 어떻게 알았지……? 혹시, 라이카 주식회사라고 들어는 봤을까? 내가 아는 한, 트레이닝 가장 빡시게 시켜주는 곳인데 말이야. -1등 어쩌고 드립 치길래 머리를 어디 부딪혔나 했는데… 절반 정도는 진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순도 100% 진심인데요? 나보다 간절한 참가자도 없을걸? -어쨌든…… 나도 그렇고 메인 PD님도 그렇고, 오늘 네 덕 좀 많이 봤다. 피디님이 고생했다고 전해달래. 알면 뽀찌 좀 꽂아 주던가. -푹 쉬고, 담주에도 부탁 좀 한다? 뭘? -오늘처럼 그림 되는 장면 좀 많이 뽑아달라는 거지 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건율아. “어?” -너 혹시… 강소희 참가자랑 뭐 썸 같은 거 있고 그런 건 아니지? “그건 또 뭔…….” -약간 좀 그런 미묘한 장면들도 연출되면 참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예능이라는 게 원래……. “지랄. 끊는다?” 대체 뭐라는 거야?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썸은 무슨……. 한 만 년쯤 베타 서버에 갇혀 있어봐라. 연애 세포 비슷한 게 살아남을 방법이 있나. 뚜- 뚜- 어찌 됐든 이정민 FD님과의 통화까지 마무리한 나는……. 성수역 근처 국밥집에서 뜨끈한 국물로 저녁까지 깔끔하게 해결했다. 게다가 타이밍 좋게 출연료까지 입금됐으니. 띠링- [Web발신] 29104****909 주HBC-주계좌이체 입금 20,000,000 잔액 23,022,198 본방이 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정산이 이렇게나 빠르다고? “크으……!” 내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내 일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고, 아직 겨울 끝이라 날도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지만…….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남아있었거든. [그런데 주인 놈아.] [대체 그 ‘편의점’이라는 곳은 언제 가는 거냐.] 오늘은 이 탕후루 귀신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날이었다. * * * 사실 동장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녀석이 쓴 최후의 궁극기는 내게도 꽤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키엘이를 소환해 드래곤 피어를 박아 넣은 게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은, 동장군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의 10일 만에 소환된 키엘이는, 이번에도 밥값을 톡톡히 한 게 맞았다. 그간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거냐며 칭얼대던 일벌레 도마뱀(?)에게, 오늘 오랜만에 일거리를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도마뱀 녀석이 갑자기 왜 일벌레가 된 거냐고? 그야 녀석의 일당은 탕후루였고, 키엘이는 당중독 도마뱀이었으니까. 딱 한 번 탕후루를 맛보여준 뒤 한 번도 녀석을 불러내지 않았으니, 급기야 금단현상까지 왔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소환도 안 했는데 메시지를 날려 대겠는가? [주인 놈아! 급하단 말이다!] 탕후루에 중독된 유딩 드래곤의 처절한 절규가 또다시 들려왔다. “조금 기다리라니까? 지금 가는 중이라고.” [이 키엘님의 당 수치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 [빨리 단 거!] 알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당장 그 1+1이라는 이름의 성소로 뛰어가라는 말이다아!] 그놈에 1+1은 진짜. 뭔지도 모르면서 자꾸 타령이야. “후우.” 그나저나 원래도 소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키엘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냐고?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도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히 모르지만……. 지난번 탕후루 2스틱을 먹인 이후로 메시지 공세가 시작됐거든. 추측컨대, 충성도가 30을 넘으면서 가능해지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탕후루를 알기 전에도, 이미 답답하니 소환시켜 달라며 메시지를 수없이 보냈을 녀석이니 말이었다. 어쨌든. 딸랑-! 드디어 녀석이 노래를 부르던 집 근처 편의점에 도착했다. 당연히 우리 아빠 편의점에 왔다. 물론 아빠는 이미 퇴근하셨고, 알바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서 오세… 어! 건율 오빠?” 알바생은 나도 최근에 오며 가며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시율이의 대학교 친구였다. “어, 이름이… 민정이 맞지?” “네 오빠! 뭐 사러 오셨어요?” 이시율 녀석의 친한 친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귀엽고 싹싹한 녀석. 그런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원래보다 훨씬 더 친절한 느낌이기도 하고……? 어쨌든 방문 목적이 확실히 있던 나는, 슬쩍 계산대 앞으로 다가간 뒤 물어보았다. “그…… 민정아.” “네, 오빠.” “저쪽에 진열해두는 탕후루 스틱 있잖아.” “아, 그거요? 왜요?” “혹시… 남은 거 있니?” 으음, 갑자기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것도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부끄러울 것까진 없지 않나? 36세 아저씨가 탕후루 좀 좋아할 수도 있지. “어… 확인해 볼게요. 하나 드려요?” “하나만 주라.” “잠깐만요, 오빠.” 물론 내가 먹을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이스 탕후루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아요 오빠?” “당연히 괜찮지.” [아이스 탕후루? 이름만 들어도 고귀해 보이는군.] “그런데 요즘 탕후루에 꽃히셨나봐요? 이거 탕후루 스틱 맛있긴 하던데.” “아, 그게 내가 꽃힌 건 아니고…….” “너무 많이 드시면 이빨 썩으니까 적당히 먹어요, 오빠. 일도 바쁘실 텐데.” 들었지? 유딩 드래곤 놈아. [크아악. 닥치고 얼른 내놓으란 말이다!] 그나저나 민정이가 유아교육과 나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확실히 사근사근한 말투며 밝은 표정이며… 애들 잘 놀아줄 것 같은 재질이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키엘이 녀석을 며칠 맡겨놓고 싶은 느낌이랄까. “고생해, 민정아! 다음에 시율이랑 같이 맛있는 거 먹자!” “네 오빠!” 짜라랑-! 편의점에서 나온 나는, 계속해서 유딩 드래곤의 메시지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대체 왜 내놓지 않는 것이냐!] 각성자 관리법상 게이트 밖에서, 이 녀석에게 탕후루를 줄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내일 아침에 준다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크르아악!] 물론 관리국에 등록이 완료된 각성자는 모든 능력을 게이트 밖에서도 쓰는 게 가능했지만. [게이트 폭주] 상황이 아닌 이상 모든 종류의 능력을 발현하는 건 불법이었으니 말이다. 말로만 불법인 게 아니라, 실제로 게이트 관리국에서 신호를 확인하고 조사를 들어온다. 그러니 유딩 드래곤이 아무리 떼를 써도, 진짜로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스 탕후루가 필요하다, 주인아.] 얼씨구. 주인놈에서 주인으로 격상됐네? [그러니까 제발…….] 하지만 얄짤 없지. 뚜- [모든 시스템 메시지를 차단합니다.] 메시지 차단으로 쾌적함을 되찾은 나는, 드디어 집 앞 골목에 접어들었다. 그나저나 집 앞까지 도착하니, 가족들에게 어떤 식으로 예능 출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내 고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MJ : 속보;; 이건율 참가자 방금 탕후루 사서 귀가중;;] 이미 모든 가족들이 내 <헌터즈 스쿨 3> 참가 소식을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8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시율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MJ : 야, 시루! 너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해줄 수가 있어?!] [나 : 엥, 뭔 소리임?] [MJ : 모른 척해도 소용없거든? 이미 커뮤에 쫙 깔렸거든?!] 평범한 일용직 근로자(?)인 줄 알았던 그녀의 오빠가, 알고 보니 ‘헌터’였던 건에 대해서 말이다. [나 : 아니;; 그러니까 뭐가?] [MJ : 뭐긴 뭐겠어, 너희 오빠 얘기지.] [나 : ...??] [MJ : (사진)] [나 : 이게… 뭔…?] [MJ : (사진)(사진)(사진)] 심지어 그냥 헌터도 아니었다. 최근 가장 핫한 예능 프로그램인 <헌터즈 스쿨3>. 여기에 ‘루키 헌터’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출연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헌터였으니까. [나 : 뭔데;;;;;;;;; 이거 AI 딥페이크 아님?;;] [MJ : 와, 끝까지 모른척하는 것 좀 봐.] [나 : 아니 그냥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이시율은 뇌정지가 온 상태로, 친구의 톡을 멍하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MJ : 오라버니 혹시 집에 언제 계실까? 시율쓰…….] [MJ : 아니, 이제 합숙 촬영 시작하실 테니까 한동안 집에 안 오시겠지?ㅠㅠㅠ] [MJ : 사인 좀 제발, 시루ㅠㅠ 부탁이야ㅠㅠㅠ] 그러다가 문득 다시, 민정이 보내준 사진들을 차례차례 넘겨보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그 사진 속 얼굴들은, 암만 봐도 매일 아침 밥상 앞에서 마주하던 그 얼굴이 맞았다. 임민정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교묘한 합성 사진을 들고 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라고?’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임민정이 이런 거로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었다. 뭔가 장난을 치고 싶었다면, 다른 좋은 선택지가 훨씬 더 많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얼빠진 표정으로 친구에게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 : 이거… 진짜 헌터즈 스쿨임?] 돌아온 건 민정쓰의 따발총 같은 톡 세례였지만 말이다. [MJ : 그럼, 맞지. 상암 스튜디오 직캠인 거 안 보임?] [MJ : 아니… 시루야…… 설마 진짜 몰랐던 거야?] [MJ : 그럴 수가 있나;;;] [나 : 헌터즈 스쿨은커녕 그냥 헌터인 줄도 몰랐음;] [MJ : 암만 봐도 기만질인 것 같지만 딱 한 번만 속아준다.] [MJ : 지금 당장 헌터즈 라운지 가서 게시글 몇 개만 눌러 보셈.] [MJ : 아마 첫 페이지만 대충 훑어봐도 건율오빠 관련 게시글만 너댓 개는 있을걸?] 마침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시율은, 곧바로 브라우저를 켜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그리고 <헌터즈 스쿨>의 공식 팬 커뮤니티인 <헌터즈 라운지>에 들어선 순간. [(인증)ㅈㄴ귀한 이건율 시점 옵저버 샷] [(질문)그런데 이건율 진짜 36맞냐? 왤케 어려보임???] [(요청)이건율 보스전 스틸컷 찍으신 분;;; 한 장만 제발;;] 맨 위에서부터 연속 3개의 게시물 제목에 ‘이건율’이라는 단어가 박혀있는 걸 확인하고는, 완전히 사고회로가 멈춰버렸다. [MJ : 야, 보고 있음?] [MJ : 이시율!] [MJ : ㅇㅅㅇ!!!] [MJ : ㅇㅅㅇ 어디 감?] 민정이 보내는 톡에 답장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개꿀잼 몰카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한참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헌터즈 스쿨> 커뮤니티를 뒤지던 이시율은, 정신을 차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이런 혈육과 관련된 중대사(?)는, 당연히 부모님도 아셔야 할 일인 것. 하지만 갑자기 안방으로 달려가서 ‘엄마! 엄마 아들 헌터 됐대!’라며 소리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일단 커뮤니티에 잔뜩 쌓이는 중인 ‘이건율 참가자’의 직캠 이미지들을 싹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와… 이게 다 이건율 사진이라고?” 그리고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수집한 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이건율만 빼놓고 가족 톡방을 새로 파서, 폭격하듯 투하해 버렸다. [나 : (사진)(사진)(사진)(사진)(사진)…….] 물론 이 내부고발(?)로 인해 오빠로부터 응징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시율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헌터즈 스쿨에 출연한 이상 며칠 내로 부모님께도 알려질 일이었고. 이제껏 가족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몹시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결과……. “이건율, 잠깐 아빠 좀 보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건율 참가자’는, 그대로 안방에 연행될 수밖에 없었지만. ‘잘 가라, 이건율.’ 그건 아무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안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어머니도 계셨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두 분은 이미 내가 헌터즈 스쿨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아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히려 난 마음이 더 편해졌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다 뒤엉켜 있었는데……. 다 알고 계신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니, 설명이 훨씬 더 수월했던 거다. “그러니까 아부지,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이건 단지 ‘허락보단 용서가 빠르다’는 만고불변의 법칙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헌터즈 스쿨>이라는 인지도 있는 예능으로부터, 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루키’임을 검증받았다는 사실이……. 부모님 입장에서는 가장 크게 와 닿으신 모양이었다. 사실 두 분이 게이트에 ‘게’자만 나와도 기겁하시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10년 만에 되찾은 아들의 안위’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게이트 때문에 실종됐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굳게 믿고 계셨으니까. ‘관점에 따라 틀린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뭐…….’ 게다가 우리 집에는 게이트 관련 종사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게이트 관련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거부감부터 드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각성했다고 얘기한다? 그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으실 거다. 괜히 각성했다고 게이트 근처에 얼씬거리다가, 또다시 봉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게 당연했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헌터즈 스쿨>의 출연은, 그 걱정의 근본적인 부분들을 많이 해소시켜 줬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헌터들만 출연 가능하다는 프로그램에 내가 출연했으니, 적어도 헛짓거리를 하다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겠거니 생각이 드신 모양이다. 그래서 장장 한 시간 정도의 대화를 마친 결과, 사태는 원만한 합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한번 해 봐라.” 평소 훨씬 더 완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이셨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머니도 크게 반대하지 못하셨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네 안전이야. 그건 알지?” “예, 어머니.” 덕분에 난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 방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곳에는 이 사태의 원흉(?)임이 분명한 엄마 딸이 아주 다소곳한 자세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헌터즈 스쿨 랭킹 1위를 뵙습니다…….” 괜히 눈치를 보며 날 힐끔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부터 피식 새어 나왔다. 그래서 괜히 장난부터 치고 싶었다. “배신자.” “아니, 배신자는 오빠지! 나한테도 숨기면 어떡해?” “용돈 100만 원.” “……!” “자, 이제 누가 배신자지?” “그, 그건……! 제성합니닷!” 사실 나는 시율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용돈이 확실히 효과가 좀 괜찮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오라버니.” 이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 내 마음을 더 편하게 해줬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말엔… 부모님 모시고 가족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어때?” “그, 소인… 주말에는 약속이…….” “에어팟 맥스.” “……?!” “이번에 리미티드 에디션 나왔던데, 혹시 우리 동생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공부가 더 잘될지도 모르고. 그치?” “바로 숙박부터 풀 코스로 알아보겠사옵니다.” “약속은?” “있었는데, 아무래도 방금 없어진 것 같사옵니다.” “훌륭하네.” 물론 아무리 이시율이라고 해도, 마지막에는 결국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빠.” “어?”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처음부터 장난스럽게 얘기하긴 했지만, 이 녀석도 마음속으로는 꽤 불안했던 것 같다. 아마도 시율이 녀석의 불안은…… 내가 없어졌던 지난 10년의 기억에 대한 PTSD일 수도 있을 거다. 무려 이시율의 입에서 이런 얘기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그거 알아 오빠?” “뭐?” “오빠 돌아오고 나서, 우리 가족이 정말 행복해졌어.” “…….” “그러니까 다시 사라지면 안 돼.” “알겠어.” “그것만… 약속해.” 사실 우리 가족이 바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가족들은 나 하나를 잃은 세월이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월을 경험했으니까. “약속할게.” 그러니 난 진심으로 약속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그러니 진지한 얘기를 하던 동생이 답지 않게 훌쩍거리며 본인 방으로 돌아간 뒤. 침대 위에 벌렁 자빠진 나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열심히 살아봐야겠어.’ 가장 걱정했던 고민거리를 내려놔서일까? 다음 주가 더 기다려지기 시작하였다. 8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가족여행은 즐거웠다. 이번 여행은 내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커다란 힐링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쉬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아마 귀환 이후에도 항상 불편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거겠지.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다녀올게요!” “아들, 조심해야 돼.” “예, 어무니.” 아침 일찍 호기롭게 집을 나선 나는, 목적지를 향해 힘찬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일단 서울숲 게이트다. 오늘 <헌터즈 스쿨3>의 모든 참가자들은, 오전 10시까지 루멘하르트 13공구에 있는 ‘빛의 광장’에 모이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본선부터 모든 미션의 촬영은 게이트 안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게이트 안에서의 촬영이라… 뭔가 신기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카-Laika’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서버 : 지구] [접속 경로 : 서울 - 한국] [접속 장소 : 알테리온 대륙 – 루미스 영지] [‘데이브(Dave)’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단 라이카에 접속한 나는, 우선 마나 캐리지(Mana Carriage)에 먼저 탑승했다. 같은 루미스 영지라도 내 로그아웃 지점에서 촬영장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고, 어차피 모든 교통비(?)는 제작진이 지원해 주기로 했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덜컹-! 기이이익-! 이어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사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스트리밍을 켜는 것이었다. 금요일에 스트리밍을 켜지 못했으니, 무려 3일 만의 접속인 셈. 막상 스트리밍을 켜려고 보니, 우리 성좌 형님들이 날 잊으셨을까 봐 살짝 걱정되긴 했다. [‘데이브(Dave)’님, 실시간 스트리밍을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내 걱정은 완전한 기우였지만 말이다. 띠링-! [‘빛바랜 금전의 기록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그레이프 백작’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황혼 침묵의 중재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세번 사는 랭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중략…… 스트리밍을 켜자마자, 내 스트리머 인생 안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많은 성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심연을 기다리는 낚시꾼’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헐값에 팔린 검투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중략…… [ON Air : ☺ 2815] 그런데 이건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다. 최고 동시 시청자 기준 거의 2천 명 가까운 숫자를 찍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방송을 켜자마자 수천 명이 곧바로 차는 건 완전히 처음 겪어보는 일이니 말이다. └ 데하! └ 문열어 방장! 문열어 방장! 문열어 방장! └ 돌아왔구나, 데이브 쉑! └ 아니, 금요일이야 그렇다 치고. 주말에는 방송 켰어야 하는 거 아님? └ 유입 귀엽네 ㅋ 우리 방장은… 주말에 절대로 일 안하는 편이라고 ㅎ 대체 게이트에 들어오지 않았던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ㅁㅊㄷㅁㅊㅇ 데이브 이러다가 머기업 되는 거 아님?;;; └ 우리 방장이 헌터즈 스쿨 등급결정전 1위라니……. └ 가슴이 웅장해진다 ㄹㅇ;; └ 안돼…… 나만의 작은 데이브였는데……. └ 나작데 ㅇㅈㄹㅋㅋㅋ 그런데 형님들, 대체 헌터즈 스쿨 등급결정전 결과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게이트 밖에서 진행한 거라, 스트리밍 켤 수 있는 참가자가 아무도 없었을 텐데? └ 영상은 못 봐도 결과는 알 수 있지 ㅇㅇ └ 다른 스트리머들이 알려줬으니까 알았지 어케 알았겠음ㅋㅋㅋ └ 난 검희 방송에서 듣긴 했음 ㅋㅋ └ 나는 로키 방송 갔다가 들음ㅋㅋ 로키가 극찬했던데? └ ㅁㅊ;; 로키가 극찬했다고? 방장 그정도였음??? 아하. 성좌들의 채팅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된다. 대부분 멘토 랭커들의 스트리밍을 통해 본 모양이다. 검희도 그렇지만, 저 ‘로키(Loki)’라는 플레이어 네임도 바로 이번 시즌 멘토 중 한 명인 서지혁의 플레이어 네임이거든. 하지만 이해가 되는 것과 납득이 되는 거는 또 조금 다른 문제다. <헌터즈 스쿨>이 아무리 인기 예능 타이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그건 게이트 밖의 얘기 아니었나? 심지어 수많은 국가 중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예능일 뿐인 거고. 그런데 이거에 성좌들이 이렇게나 관심이 많다고? └ 방장이 당연한 소리를 하네 ㅋㅋ └ 우리한텐 결국 지구 플레이어들이 참가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컨텐츠인 거임ㅋㅋ └ 방장 니가 생각해봐라 ㅋㅋ 우리도 뻔히 알고 있는 게이트 안에서 사냥 조지는 게 재밌겠냐, 아니면 ㅈㄴ신선한 지구 예능 프로 보는 게 재밌겠냐? 이렇게 들으니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느낌도 들고……. └ 성좌들 중에는 헌터 예능만 찾아다니는 놈들도 있을걸? └ ㄹㅇㅋㅋㅋ └ 맞음ㅋㅋ 그게 바로 나임ㅋㅋㅋ 난 아마 헌스쿨 아니었으면 방장 영원히 몰랐을지도? └ 게이트 안에서 지구 예능 프로를 볼 수 있다? 이거 못참거등요ㅎㅎㅎ 어쨌든 하꼬 스트리머였던 내 시청자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불어난 이유는 이로써 알게 되었다. 어……. 그런데 이 잠깐 사이에 또 몇백 명이 더 늘었다고? [ON Air : ☺ 3356] 이러다가… 이빨 다 썩어버리겠는데요, 형님들? ‘크으.’ 아직 후원이 많이 터진 건 아니었지만, 결국 이 인원이 전부 내 잠재적 수입원들이다. 이 또한 이정민 FD님의 은총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정 사장님. 제가 진짜 헌스쿨 우승하고 나면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요. └ 그나저나 방장, S등급 받았으면 그랜드 아르카나 들어가는 거임? 그건 또 뭡니까 형님들……? └ 와ㅋㅋ방장 이ㅅㄲ… 헌터즈 스쿨 전 시즌도 아예 안 본 거 아님? 그야 전 시즌이 방영할 때, 나는 지구에 없었으니까……. └ 그걸 떠나서 어떻게 그랜드 아르카나를 모르지? └ ㅇㅇ 모르는 것도 신기하긴 해. 루멘하르트에서 제일 호화로운 건물이 그거일 텐데 아마. 어……. 듣다 보니 숙소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번엔 내가 좀 당황스럽다. <헌터즈 스쿨>이야 귀환 전까지 있는지조차 몰랐던 게 당연하지만……. 루미스 영지는 내가 그 어떤 지구인과 비교해도 많이 머물러봤을 텐데 말이지. 그러니까 내 지난 억겁의 기억 속에도, 루미스 영지 안의 ‘그랜드 아르카나’라는 건 듣도보도 못 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해 죽겠는데, 이걸 성좌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참……. └ 캬, 나도 그랜드 아르카나에서 하루만 자보고싶다. └ 거기 하루 숙박비 얼마인지 아는 형 있음? └ ㅇㅇ 저번에 랭커 누구였지, 방송에서 봄. └ 얼마? └ 스위트룸 하룻밤에 750LP 내던데. 예? 750……이요? 나도 모르게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를 육성으로 토해낼 뻔했다. 아니, 한국에 있는 5성급 호텔들도 어지간하면 그 정도 가격은 아닌데. 아무리 마도공학이 좀 발달했기로서니, 중세시대 호텔 주제에 그 가격이 말이 되냐는 거다. └ 물론 그 방은 아마 로얄 스위트(Royal Suite)긴 했을 텐데, 방장한테 배정된 숙소도 최소 250LP는 될 듯 ㅇㅇ 미쳤다. 나 그냥 마굿간에서 자도 되는데. 그 돈 그냥 주면 안 될까? “…….”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며 성좌들과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촬영장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찾아오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랜드 아르카나는 처음 들어봐도, 이 빛의 광장은 아주 잘 알고 있는 장소였으니까. 그런데 좀 놀라운 건……. 빛의 광장 뒤편으로 보이는 으리으리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어… 저게 설마 그랜드 아르카나… 일까요 형님들? └ ㅇㅇ저거임 └ 크…… 방장 덕에 간접체험 하겠는걸. 그리고 나는 곧, 이걸 내가 왜 처음 보는 건지 알게 되었다. 마침 광장에 와 있던 다른 참가자 한 명이,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맥락의 궁금증을 촬영 스탭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스탭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영지 안에 있는 호텔을 제작진이 대체 어떻게 임대한 거예요? NPC랑 임대계약서 쓰고 진행하는 건가요?” “아, 뭐 그렇게 진행될 때도 있긴 합니다만, 그랜드 아르카나는 좀 특이케이스죠.” “으음?” “여기 그랜드 아르카나 메트로폴 (Grand Arcana Metropol)은, 미국 재벌가 소유거든요.” “아……!?” “아마 부지 매입부터 해서 건축까지 직접 했을걸요? 게이트 안에서 이 정도 규모의 상업시설을 신축한 건… 그랜드 아르카나가 처음이긴 할 거예요.” 미쳤다. 이럴 수도 있구나? 플레이어가 토지를 매입해서 영지 안에 이런 건물까지 지을 수가 있는 거였다니……. 오늘도 지식 하나 늘려 갑니다. └ 방장 이 ㅅㄲ 나중에 루미스에서 임대사업 하는 거 아님? └ ㅋㅋㅋ 대이브면 충분히 가능하긴 해 ㅋㅋ 듣고 보니 상당히 끌리는걸. 건물주의 꿈… 게이트 안에서 이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루미스 영지 부동산이 강남보다 더 비싼 건 아니겠지? 두두두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늘 높은 곳에서 갑자기 거대한 비공정 비행선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어어……?” 그리고 잠시 후. 쿠웅- 기기기긱-!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그랜드 아르카나의 높은 첨탑 옆에, 천천히 정박하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이 화려한 건축물에는, 비행선이 정박할 수 있는 계류장 같은 것도 설치되어 있었다. “우와!”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참가자 몇몇도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쿠쿵-! 그런데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위이잉-! 낮은 공명음과 함께, 갑자기 공터 한복판에 푸른 빛깔의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건 딱 봐도 텔레포트 마법인데……. 뭐지?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을 보면, 저 비행선에 타고 있던 누군가가 여기로 이동한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 여러분!” 마법진 위로 불쑥 솟아오른 낯익은 얼굴이, 좌중을 둘러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클립스의 대마법사이자, 헌터즈 스쿨의 랭커 멘토. 서지혁(로키)의 등장이었다. └ 오! 로키다! └ 캬 ㅋㅋ 이 방에서 로키를 보게 될 줄이야. “자, 제가 조금 일찍 오긴 한 것 같은데. 멘티분들께선 전부 도착하셨나요?” “서지혁 멘토님!” “아, 신우 님. 미리 와 계셨군요?” “저야 뭐, 미리미리 와서 대본 읽고 준비하고 있어야죠 하하.” 스탭을 통해 들은 얘긴데, 오늘 촬영은 서지혁 멘토가 직접 오프라인에서 함께한다고 한다. 한동안은 이렇게 촬영 때마다 멘토 중 한 명이 번갈아 현장에 올 거라고 하더라고. └ 맞음 전시즌에서도 그랬었음ㅇㅇ └ 랭커들이 모든 촬영 다 따라다니는 게 쉽지 않잖아? 아마 그래서 중요한 시점을 제외하면 전부 모일 일은 잘 없을 거임. └ 맞지. 바쁘신 몸들인데. 성좌들이 이렇게 한 마디씩 거드는 게, 은근 도움되는 면이 있다. 라이카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고, 지구 예능에 대해서는 성좌 놈들이 더 잘 안다는 사실이 좀 어이없긴 하지만 뭐……. └ 어허, 우리도 명예 지구인이야. 어쨌든 촬영 시작까진 시간이 좀 남았기에, 나는 대기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생각 못 했던 건, 게이트 안까지 정장을 입고 들어온 저 김신우 캐스터가 생각보다 높은 레벨의 각성자였다는 사실이다. 어쩐지. 메이저한 헌터 예능 쪽에서는 거의 이 사람을 불러서 진행을 맡기더라니……. 대충 45레벨 정도의 마법사 쪽 클래스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는 상당히 높은 스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김신우ㅋㅋ심지어 지난 시즌보다 레벨도 좀 오른 듯?ㅋㅋ └ 맞음ㅋ 시즌2때는 42레벨이었는데. 아니, 뭔 성좌놈들이 한국 예능 캐스터 레벨까지 알고 있는 건데? “…….”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슬슬 아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나보다도 먼저 도착해 있던 이성환은 차치하고라도……. 엄마 딸이 본인 1픽 예정이라며 극찬했던 존잘 힐러 박진우라던가.(이시율은 주말 사이 커뮤니티 떡밥에 빠져 살더니, 거의 모든 상위권 참가자의 얼굴과 이름을 달달 외운 듯 보였다.) 이성환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로 평가받고 있는 박하준이라던가. 저쪽에는 아이돌 같은 비주얼로 커뮤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박소미와 권유나도 도착한 것 같고……. 음… 뒤통수가 따가운 게, 이번엔 누가 날 좀 째려보는 느낌인데. “아하.” 우리 파티원이셨던 강민우씨와, 방금 살짝 눈이 마주쳤다. 이그니션 버스터가 좀 매콤한 맛이었나? 확실히 그렇게 호의적인 표정은 아니지만… 가볍게 손 한번 흔들어 드리고. 흐음. 그나저나 강소희 씨가 안 보인다. 그래도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친분이라는 게 생긴 사람이라,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해보려고 했는데……. “일찍 왔네요?” 그냥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내 바로 뒤에 앉아있었을 줄은 몰랐잖아? “소희 님은 언제 왔어요?” “방금요.” “주말엔 좀 쉬었고?” “덕분에요.” 어쨌든 유일한 지인(?)과 가볍게 한두 마디 하다 보니… 촬영 시간이 금방 도래했고, 참가자들도 모두 광장에 모인 듯했다. 100명이나 되는 인원에 촬영 스탭들까지 다 모이니, 확실히 북적북적한다.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어서 구경 나온 플레이어들도 엄청 많고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신우 캐스터의 그 텐션 높은 목소리가 이 넓은 광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참가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수많은 헌터들의 꿈과 야망, 그리고 게이트 산업 자본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 이 아저씨는 평소 성대에 기름칠이라도 하시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대본이라고는 해도…… 대체 어떻게 말을 이렇게 잘하는 걸까? “<헌터즈 스쿨>의 본격적인 합숙이 시작되는 여기는 바로……! 루미스 영지 최고의 랜드마크, ‘그랜드 아르카나 메트로폴’입니다!” 8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김신우는 등 뒤의 화려한 그랜드 아르카나 건물을 가리키며 윙크했고, 광장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여기는 각성자만 들어올 수 있는 게이트 안인 만큼, 입학식 미션 촬영 때처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림잡아 몇백 명 정도는, 이미 이 촬영장 주변에 진을 치고 구경 중인 모습이었다. 그런 구경꾼들을 향해, 김신우의 시원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이곳은 단순한 숙소가 아닙니다! 1박에 웬만한 하급 던전 루팅장비 수십 개가 날아가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정점!” 자본주의의 정점이라. 게이트 안에서 그런 걸 느껴볼 줄은 몰랐는데, 딱 맞는 표현인걸?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우리 제작진, 돈 좀 썼습니다!” “이번에는 무려 S등급과 A등급을 달성하신 멘티 40분께서… 이 그랜드 아르카나에 ‘전원’ 합숙하게 되실 예정이니까요.” └ 와, 이번 시즌은 A등급도 아르카나에서 재워준다고? └ 헌스쿨 돈 많이벌었나본데;; “저희 HBC에서 <헌터즈 스쿨>을 위해, 이 그랜드 아르카나의 한 동 전체를 통째로 빌렸다는 이야깁니다!” 김신우의 호쾌한 선언에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는 휘파람 소리도 들려왔고, 점점 더 분위기가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모두가 그 분위기와 함께 기분이 업된 건 아니었다. 여기는 지금, S등급과 A등급의 참가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들러리와 다름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B, C, F 등급의 참가자들. 그런 중하위권 참가자들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한층 비장한 표정으로 목소리 톤을 낮춘 김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곳 <헌터즈 스쿨>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서 등급은 곧 권력이고, 순위는 곧 신분이지만……! 그 말인즉 순위가 변경된다면, 언제든! 누구든! 이 그랜드 아르카나에 입성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김신우의 말에,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니 당장은 이 그랜드 아르카나에 입성하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잠시 후 시작될 ‘아르카나 드래프트’에 꼭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드래프트 과정부터가, 내일 시작될 본 게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될 테니까요!” 아르카나 드래프트? 뭔가 이름부터 흥미롭다. 아마 숙소 배정 이벤트를 드래프트라고 표현하나 본데……. └ 캬- 드래프트 꿀잼이겠는데? 이것도 전 시즌에 있었던 방식의 콘텐츠였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말 동안 OTT에서 시즌2 다운 받아서 공부 좀 하고 올걸……. └ 아니, 공부는 당연히 하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님? └ 대이브 자신감 뭔데 ㄷㄷ 아니, 자신감이 아니라…… 오늘은 그냥 숙소 배정만 한 대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죠. 이런 게 있을 줄 알았으면 당연히 공부 좀 하고 오지 않았을까요? └ 이렇게 약한 척해놓고, 분명히 곧 기만질 시작할 데이브면 개추. 이번엔 개추 못 드립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는 거 있으면 좀 가르침을 내려 주시죠? └ ㅅㅂㅋㅋ 맡겨놨음? 말은 이렇게 했어도 우리 츤데레 성좌님들은, 아르카나 드래프트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 설명들을 짧게 요약하자면……. -그러니까… 지금부터 입학미션 랭킹 순으로 선택권을 갖는데…… 그 선택권으로 숙소를 선점하거나 룸메이트를 고르거나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다는 말인 거죠? 이런 정도의 느낌이었다. └ ㅇㅇ바로 그거임 └ 근데 뭐, 방장은 1등이니까…… 여기선 무조건 숙소 고르는 게 맞지 않을까? 선택권으로 숙소나 룸메이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단순히 생각할 땐 룸메이트를 고르는 게 맞다고 여겨질 수 있다. 숙소야 어차피 S등급 참가자 사이에선 차별이 없었으니, 어디에 들어가도 상관없는 게 맞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표면적으로만 그런 거고, 이 ‘아르카나 드래프트’에서 숙소는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특히 본 미션 직전에 뽑는 이 숙소. 여기에서 어떤 숙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본 미션에서 어떤 종류의 이점을 가져갈지 정해진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드래프트의 시작은… 첫 본 미션에 대한 이야기에서 항상 시작된다고 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일단 내일 진행될 미션에 대한 힌트 몇 가지가 먼저 나가야겠죠?” 김신우가 설명을 시작하는데, 성질 급한 성좌들이 역시 먼저 아는 척을 시작했다. └ 일단 팀미션일 건 확실한데. 그래요? └ ㅇㅇ등급결정전을 왜 했겠음. 각 등급별로 1명씩 모여서 한팀이 될 거임. └ 여기까진 픽스라고 보면 됨. 그리고 성좌들의 얘기가 맞았다. 1차 본미션은 정확히 성좌들이 얘기한 대로, S~F등급까지 각 한 명씩의 플레이어가 한 팀으로 선정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뭐. 팀을 어떤 식으로 선출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팀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진 않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흥미로울 얘기는, 바로 여기부터였다. “여러분들이 내일 팀 미션으로 들어가시게 될 필드는… 바로 ‘미궁’입니다.” 오호. 미궁이라고? “어떤 미궁인지는 내일 촬영 시작과 동시에 공개되겠지만, 일단 세 가지 힌트 정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다.” └ 루키들이 갈 수 있을 만한 미궁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 └ 그러게. “첫째. 이 미궁의 입장 인원은 5명입니다.” 이건 힌트라기보단 당연한……. “둘째. 이 미궁의 레벨 제한은 50입니다. 5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에게 입장 제한이 걸리는 특이한 미궁이죠.” 엥? 이러면 내 입장에선 너무 좁혀지는걸? “마지막으로…….” 좌중을 둘러본 김신우가 씨익 웃었다. “이 미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클리어되지 않은 미궁입니다.” 김신우의 마지막 말에, 좌중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단 한 번도 클리어되지 않은 미궁……. 그러니까 ‘미공략 미궁’. 그 단어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 뭔데;;; └ 헌터 예능 미션 필드로…… 미공략 미궁을 선정했다고? └ 이게 관리국에서 허가가 나올 수 있는 부분임?;;; 하지만 나는, 이 마지막 힌트 덕에 미궁의 정체를 완벽히 특정할 수 있었다. ‘미공략 미궁이라.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미궁들 중, 예능에서 써도 될 만한 미공략 미궁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 * 김신우의 뒤쪽 단상 위에서, 서지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멘티 참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고, 실제로 꽤 즐거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즐거움의 근원은, 오늘 이 행사가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난주 금요일. 입학식 미션에서부터 생긴 흥미로움이었으니 말이다. ‘입학식 미션에서… 동장군을 잡는 참가자가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입학식 미션 던전은, 공개되기 전에 당연히 모든 멘토들이 최종적으로 점검한 인공 던전이었다. 특히나 제대로 된 난이도 테스트를 위해서라도 멘토들의 최종 확인은 꼭 필요했으니. 서지혁은 보스인 동장군까지도 당연히 상대해 봤었다. 물론 80레벨 정도에 불과한 동장군은 서지혁의 간단한 공격마법조차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대 2차 전직도 하지 않은 루키들이 레이드할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자신을 비롯한 모든 멘토들이 그렇게 판단했었다. 심지어 ‘체온 유지 기믹’까지 고려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저 친구……. 이건율이라는 참가자가 확실히 변수인 건데.’ 물론 클리어 데이터를 확인해 본 결과, 이건율이 활용한 체온 유지 기믹의 수치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기본 능력치를 거의 7배 가까이 뻥튀기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버프. 대체 얼마나 깡이 좋아야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지……. 당시에 걸렸던 능력치 버프를 기준으로 역산해 보면, 이건율은 최저 17°C의 체온을 유지하며 동장군과 전투했던 거다.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플레이어라해도 블랙아웃이 왔어야 하는 체온이다. ‘이게 이론으로나 가능한 거지…….’ 단순 스탯을 수치로 계산대 본다면, 7배의 능력치 버프가 적용됐을 때 35레벨이라도 동장군을 잡을 수 있는 건 맞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35레벨이 7배의 버프를 받으면, 대충 90레벨 정도의 능력치와 비등해지니까. 그래서 멘토들 중에서도 자신과 검희를 제외한다면……. 다들 이건율의 기믹 활용 능력과 기지를 칭찬했을 뿐, 그 이상의 평가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서지혁은 이미 100%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율의 재능은……. 역대급 루키라는 이성환이나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은 박하준과 비교한다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수준일 거라고 말이다. ‘과연 이성환이나 박하준이, 17°C의 저체온 상태에서 그 정도 정교한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7배의 같은 능력치 버프를 받은 상태였다면, 이성환이나 박하준도 충분히 동장군을 잡아낼 수 있었을 거다. 그들은 레벨도 49레벨이나 됐으니 증폭되는 스탯도 이건율보다 훨씬 더 높았을 테고……. 오히려 난이도만 놓고 따지면 훨씬 쉽게 잡았을 확률이 높았다. 깡 스탯만 100레벨 수준이 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두 사람을 35레벨로 가정한다? 뭘 어떻게 머릿속으로 그려보더라도, 도저히 그림이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서지혁은 너무 기대가 되었다. ‘내 눈으로 꼭 확인해봐야겠어.’ 본 미션에서 과연 이건율 참가자가……. 어느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줄지, 그리고 어디까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말이었다. 8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미션에 대한 세 가지 힌트가 공개된 뒤. 그 다음 순서로는 팀 편성에 대한 룰이 공개되었다. 여기서도 꽤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나오긴 했었는데, 내가 볼 때 중요한 정보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1. 100명의 참가자들은 총 20팀으로 편성된다. 2. 20명의 S등급 참가자들이 각 팀의 리더로 선정된다. 3. A등급 참가자들은 등급 결정전의 랭킹 순으로 원하는 팀장(팀)을 선택할 수 있다. 4. B, C, F등급 참가자들은, 멘토들의 회의를 거쳐 각 팀에 배정된다. 5. 참가자들은 이 팀으로, 총 3개의 미궁을 도전하게 된다. └ 원래 리더가 팀원 다 픽하는 구조 아니었냐? └ ㅇㅇ이번 시즌에서 룰이 바뀐 듯. └ 난 바뀐 룰이 더 재밌는 것 같은데? └ ㅋㅋ그래도 리더한테 선택권이 아예 없는 건 좀 이상하네 ㅋㅋ 아무래도 팀 밸런스를 최대한 맞추기 위한 룰 아닐까요 형님들? 같은 등급 안에서도 참가자 역량 차이가 크긴 하니까……. └ 이를테면 우리 방장처럼? 그렇죠? └ 캬 ㅋㅋㅋ └ 대이브 얼굴 철판 두꺼워진 것 보소. 흐음, 철판이라니…. 진심이었는데, 슬프게. “…….” 어찌 됐든 여기까지 빠르게 설명이 지나간 뒤, 대망의 드래프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숙소 배정 이벤트, 이름하여 [아르카나 드래프트]를 시작하겠습니다!” └ 두구두구 └ 이제 랭킹 1위 대이브 출격하나 ㄷㄷ “아까 설명 드렸듯, 1위부터 순서대로 단 한 번의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지이잉-! 스크린에 빛이 들어오며 화면이 갱신되었고, 거기에는 세 가지 타입의 룸에 대한 정보와, 타입별 ‘특전’에 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TYPE A. 엠페러 펜트하우스 (The Emperor Penthouse) 핵심 키워드: [자본 (Capital)] 숙소 컨셉: 루미스 영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압도적인 뷰와 최고급 킹사이즈 침대, 황금으로 장식된 가구가 비치된 럭셔리의 정점. 선택 보너스: [팀 자금 +300 LP 지급] 잔여 룸 : 4EA TYPE B. 아르카나 라이브러리 (The Arcana Library) 핵심 키워드: [정보 (Information)] 숙소 컨셉: 고풍스러운 참나무 책장과 마법 등불, 안락한 독서 의자가 놓인 지적인 분위기의 스위트룸. 선택 보너스: [미궁 정보 선공개] 잔여 룸 : 3EA TYPE C. 아이언 아머리 (Iron Armory) 핵심 키워드: [무력 (Combat)] 숙소 컨셉: 벽면 가득한 무기 거치대와 마네킹. 갑옷 광택제와 쇠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며, 스팀펑크식 강화 외골격 장식품이 비치된 훈련장 스타일의 객실. 선택 보너스: [5티어 유일등급 장비 대여권] 잔여 룸 : 3EA * 팀 자금은 팀장의 권한으로 사용 가능하며, 미션을 진행하는 동안만 사용 가능합니다. * 미궁 정보 선공개는, 첫 미궁의 정보에만 한합니다. * 5티어 유일등급 장비 대여권은, 모든 팀원에게 1종씩 부여됩니다. 이걸 보니……. 아까 성좌들이, 당연히 룸메이트가 아닌 ‘룸’을 선택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던 이유가 바로 이해된다. 어떤 룸을 선택하냐에 따라, 미궁 공략 전략에 큰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 이거 근데 밸런스 맞음? 밸런스는 좀 안 맞긴 해. └ 사실상 정답이 정해진 것 같은데;; 맞말추요. “자, 그럼 이 정보를 토대로……! S등급 팀장님들이 선택을 시작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 팀장들도 정답을 맞출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성좌들이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정답이, 내가 생각하는 그 정답과 같은 답일지도 모르겠고. “전략적 이익을 설계하기 위해 ‘룸’을 먼저 선점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최소 일주일 간 함께할 룸메이트를 가장 먼저 고를 것인가!” └ 방장이 제정신이면, 무조건 B타입 고르겠지? “룸 선택이 곧 내일 있을 본 미션의 치명적인 힌트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 대망의 등급결정전 랭킹 1위! ‘얼어붙은 서울’의 지배자! 이.건.율. 참가자님부터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와아아아아-!!” 그나저나 김신우 캐스터의 대사가 막상 나를 향하니,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없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얼어붙은 서울의 지배자라니. 이거… 나만 부담스러워? └ 캬-!! └ 대이브!! 대이브!!! └ 랭킹1위 미쳤따ㅏㅏㅏㅏ 아무래도 나만 오그라드는 게 맞는 것 같다. 잔뜩 신난 성좌들의 채팅이 미친 듯이 밀려 올라가는 걸 보면 말이다. └ 대이브가 헌스쿨 랭킹1위라니…… 가슴이 웅장해진다ㄷㄷ └ 10LP만 후원해도 공중제비 돌던 우리의 작은 데이브가ㅠㅠ 그건… 지금도 공중제비 가능한데요 형님. “…….” 그래도 뭐, 일단 선택지로 뭘 고를지는 이미 결정한 상태였으니, 내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벅- 저벅- 다만 그… 오그라드는 대사는 좀 참아주시면 안될까요, 김신우 캐스터님? “자, 드디어 단상 위로 올라오셨습니다! 입학 미션 <얼어붙은 서울>의 최대 이변!” 그건 좀 어려우신 모양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언더독의 반란!” 단상 위에 올라온 나와 눈이 마주친 김신우는…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고는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어서 카메라를 응시한 뒤, 하고 싶은 대사를 전부 다 쏟아내기 시작하셨다. “쟁쟁한 우승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1위의 왕관을 쓰신 이건율 참가자님! 20명의 S등급 중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분, 솔직히 어떻습니까? 좀 짜릿하지 않나요?” 그… 덕분에 좀 짜릿한 거 같긴 합니다만. 대답을 진짜 이렇게 할 순 없으니까……. 나는 과장된 제스처 없이, 차분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길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런 자리에선 보통, 말을 아끼는 게 정답이니까. “짜릿함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서바이벌에서 남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내딛는 것만큼, 확실한 생존 전략은 없으니까요.” 무난한 대답이었던 것 같은데, 김신우 캐스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그리고 다시 랩을 시작하셨다. “하하, 역시 겸손하시군요! 하지만 오늘 이 선택에서만큼은 겸손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자, 저 뒤에 보이는 화려한 ‘특전’들. 1위의 눈에는 무엇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입니까? 역시 게이트 자본주의의 꽃, LP인가요? 아니면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한 ‘정보’? 그도 아니라면 무려 5티어 유일 등급의 장비?!” 바로 옆에서 듣고 있으니… 정신 나갈 것 같은걸? “마음은 정했습니다, 캐스터님.” “역시… 룸을 고르시겠죠?” “그렇습니다.” 내 담백한 대답에, 김신우가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하하, 좋습니다!” 짝-! 김신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화려한 제복을 입은 진행 요원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벨벳이 깔린, 길쭉하고 고급스러운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치르르륵- 김신우가 트레이를 덮고 있던 비단 천을 걷어내자, 10개의 열쇠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단순한 쇠막대기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공예품처럼, 각 룸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나타내는 물건이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순금으로 주조된 듯 보이는…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네 개의 열쇠. ‘이게 당연히 타입 A일 거고.’ 아마 차분한 은색 빛깔을 띄는 룬 문양이 음각된 3개의 열쇠가 B타입일 테고, 가장 투박해보이는 흑철로 만들어진 열쇠가 C타입일 거다. “후우.” 그 앞에 선 난, 망설임 없이 하나의 열쇠를 집어 들었다. 달칵-! 그리고 내가 고른 열쇠를 확인한 김신우는, 확연히 놀란 표정이 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A타입! 엠페러 펜트하우스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재차 확인하였다. “이건율 참가자님은, A타입 열쇠를 선택하신 게 맞습니까?” 당연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A타입 룸을 선택하겠습니다.” 이번엔 성좌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 뭔데;;; A타입을 골랐다고? 진짜로?????? └ 이걸 B를 안 고르는 건 지능 문제 아니냐? └ 300LP 고른 거 실화? └ 방장;; 설마 300LP 너 주는 거라고 잘못 생각한 거 아니겠지? └ ㅋㅋㅋㅋ아닠ㅋㅋ 암만 방장이 쌀먹이라도 300LP 꿀꺽하겠다고 저걸 고를 리는 없잖음ㅋㅋㅋ └ 우리 데이브 그정도 맞아요ㅇㅇ └ 데이브는 충분히 그럴 놈이긴 하지……. 아니, 이 성좌들이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흠흠. 아무리 내가 쌀숭이라도, 설마 내 돈도 아닌 팀 자금 300LP에 혹해서 생각 없이 A타입을 골랐겠냐는 말이지. └ 그럼 대체 왜 골랐는데? └ 아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긴 한 거임? 그건… 비밀입니다. 바로 말해주면 재미없잖아요? └ ㅅㅂ; └ 암만 봐도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질 않은데;;; 뭐, 그런데 성좌들의 반응이 당연하긴 한 게,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봤을 땐, 아무래도 미션이 진행될 미궁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는 B타입 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어 보이긴 하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내 다음 순위였던 이성환 참가자도, 망설임 없이 B타입 룸을 골랐고 말이다. “좋습니다! 2위 이성환 참가자님은 B타입, 아르카나 라이브러리를 고르셨군요!”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이번에는 나조차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변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성환의 다음 순서는, 입학미션 종합 3위에 빛나는 (구)파티원 소희님이셨는데……. “그럼 이제 등급결정전의 랭킹 3위! 강소희 참가자님! 단상으로 올라오시겠습니다.” 당연히 B타입의 룸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갑자기, 김신우 캐스터를 향해 생각지도 못했던 발언을 해버렸으니 말이었다. “강소희 님도 룸을 고르시겠습니까?” 누구나 형식상의 질문이라 받아들일, 김신우의 이 질문. 여기에 대한 강소희의 대답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저는, 이건율 참가자를 선택하겠습니다.” 네? 뭐라고요? 이거…… 대본 아니지? 8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대한민국의 헌터 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국토와 인구에 비해 랭커가 많이 배출된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올라탄 기업들이 산업의 특수성 속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덕이었다. 그 정점에 있는 기업이 바로 ‘에스쿨랩(Ascul-Lab)’이었다. 국내 포션 시장 점유율 1위. 상위 1% 헌터들을 위한 맞춤형 아티팩트와 시약을 제조하는 바이오 테크 거물. 에스쿨랩이 헌터 업계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과장이 아닐 수준이었던 것이다. [경제] 에스쿨랩, 5년 연속 국내 포션 점유율 1위… “헌터들의 생명줄, 우리가 쥔다” [단독] 에스쿨랩, 신약 ‘블루 캡슐’ 임상 3상 돌입설 [증권] 에스쿨랩, 대형 길드 3곳과 ‘차세대 마력 안정제’ 공급 계약 체결 그리고 강소희는 그 에스쿨랩, 강석훈 회장의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강소희는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으니까. 그랬던 그녀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건, 6개월 전 게이트 관리국 출입기자를 통해 알려진 ‘각성’ 기사 때문이었다. [단독] 에스쿨랩의 ‘숨겨진 막내’ 강소희, 20여 년 만에 각성자로 세상에 나오다? [재계] 강소희, 후계 구도 전쟁의 다크호스 되나 재벌가의 늦둥이이자, 출중한 재능을 지닌 각성자. 이 특별한 배경에 대중은 열광했다. 얼굴 한 번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추앙하는 팬덤이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르포] “사진 한 장에 1억?”… 파파라치들도 포기한 ‘유리 성의 공주님’을 찾아서 하지만 관심이 커질수록, 강소희는 더 깊숙이 자신을 숨겼다. 그건 신비주의가 아니라 ‘낯섦’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고, 기대와 호기심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그런 관심을 감당해본 적이 없었다. 강소희는 태어날 때부터,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가져볼 수 없는 ‘천형’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각성하기 전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오염원’이었다. [으아앗! 아가씨! 장갑을 벗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실수로 만진 물건이 시커멓게 녹아내리고,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피부에 화상을 남겼다. 그런 몸으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세상은 처음부터 좁았다. 가족과 의료진, 그리고 철저히 통제된 멸균실. 그게 강소희가 살아온 전부였다. 그러니 갑자기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이 버거운 건 당연했고. 사람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 시선 하나, 기대 섞인 호들갑조차 그녀에겐 ‘처음 겪는 종류의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숨는 건 선택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한 건, 그녀를 숨게 만든 이 천형이…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이유라는 점이었다. [아가씨. 각성을 하셨다는 건… 신이 아가씨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한번 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헌터로서 마력을 각성해, 몸 안의 독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만이 강소희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몸속의 기운만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아가씨께서도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게 가능해지실 겁니다.] 그래서 강소희는 헌터가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두렵고, 세상이 낯설어서 숨고 싶으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고통을 극복하고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반대로 그 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다. <헌터즈 스쿨>에 출연을 결심했던 이유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고 말이다. “곧 검사 결과는 나올 겁니다, 아가씨.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시죠.” “알겠어, 삼촌.” 그러니 본격적인 합숙이 시작되기 전.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로운 주말이라고 해도, 강소희가 머물렀던 유일한 장소는 에스쿨랩 본사의 <제0연구소 (Sector Zero)>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인간관계라는 게 딱히 존재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녀의 주치의이자 유일한 친구인 닥터 최(Doctor Choi)야말로…….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말이었다. 지이잉―. 적막이 감도는 멸균실의 공기를 가르며, 프린터가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방금 막 끝난 강소희의 정밀 검진 결과지였다. 최진혁은 갓 인쇄되어 나온 따뜻한 차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차트 위에 빼곡히 적힌 수치들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마치 난해한 암호를 해독하는 수학자처럼, 혹은 오류를 찾아내려는 기계처럼.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그래? 어떻게 놀라운데?” “혈중 독혈 농도가…… 평소보다 3% 이상 낮게 측정되었습니다.” 최진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차트를 두어 번 다시 확인했다. 고작 3%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강소희의 몸 상태를 아는 그에게는 기적이나 다름없는 수치였다. 에스쿨랩이 자랑하는 최신형 억제제 ‘블루 캡슐’을 혈관에 직접 투여해도, 기껏해야 0.5% 정도의 수치가 변동될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런 투약 처방도 없이, 오히려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온 직후에 수치가 안정화되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도대체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역시, 내 느낌이 맞았어.” 강소희는 닥터 최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이건율이라는 참가자가 만들어준 냉각 패치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태는 설명되지 않잖아.”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최진혁의 반응은, 강소희의 기대와 다르게 냉담했다.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낸 패치 하나로, 독혈이 중화되었다는 말을 하시는 겁니까?” “응.” “불가능합니다.” 최진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제가 왜 처음부터 아가씨의 <헌터즈 스쿨> 출연을 반대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성녀(聖女)가 와도 날 고칠 순 없을 거라고 했잖아.” “맞습니다. 아가씨의 병은 마법적인 저주가 아니라, 유전자에 각인된 형질 그 자체니까요. 그건 신성력으로 정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물며 신성력도 아니고 단순히 마력의 열기를 식히는 방식이라면…….” 최진혁은 차트를 책상 위에 툭 던져 놓았다. “당장의 역류를 제어하는 데까지야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게 근본적 치료 방법론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깁니다.” 닥터 최. 최진혁은… 강소희가 겪은 현상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아마도 던전 내부의 특수한 환경적 요인이 작용했거나, 일시적인 플라시보 효과일 터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에게 정말 뭔가 있다면 말이다. 최진혁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만약 아가씨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건 그 참가자가 가진 어떤 기술적인 요인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럼?” “그 참가자 자체에게, 어떤 ‘특별한 요소’가 있는 거겠죠.” “특별한 요소?” “예를 들면…… 아가씨의 독혈과 완벽하게 상반되는 파장을 가진 마력을 지녔다거나. 혹은 체내에 특수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종의 ‘이레귤러(Irregular)’일 가능성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최진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금 안경을 치켜올렸다. 여기까지 사고가 흘러오고 나니, 연구자의 본능이 흥미와 호기심을 느낀 탓이다. “물론, 희박한 확률입니다만.” “아니.” 그러나 강소희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무조건이야.” “……근거가 있으십니까?” “뭔가…… 냄새가 달랐어.” “냄새요?” “응. 그 사람 근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냄새가 났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긴 한데,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는 정말 확연하게 느껴졌을 정도야.” 확신에 찬 강소희의 눈빛을 마주한 최진혁은, 피식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의학적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저 감에 의존한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강소희의 그 무모한 확신이 닥터 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글쎄요. 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만…….” 최진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시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는 작은 병이었다. “정 그렇다면, 한번 찾아보시죠.” “……찾아보라고?” “네. 그 참가자가 정말로 아가씨의 ‘해독제’가 될 수 있는지. 그 ‘특별한 요소’가 대체 무엇인지 말입니다.” 최진혁이 시약병을 강소희 쪽으로 스윽 밀었다. 그의 안경알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만약 아가씨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땐 정말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 * * 강소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어쨌든… 첫 단추는 잘 꿰었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이 [아르카나 드래프트]라고 하는 행사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S등급을 받은 20명의 팀장들이 모두 선택을 마무리한 건 물론. A등급을 받은 20명의 상위 참가자들 또한 모두 각자의 팀을 선택한 모양이었으니까. 41~100위의 참가자들은 멘토들이 팀을 배정해준다고 했으니, 이제 숙소에 짐을 풀기만 하면 되는 것. 아직 A등급 참가자들이 어떤 팀장을 골랐는지까지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강소희는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물론 <헌터즈 스쿨3>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할 이유는 남아 있었으니, 앞으로도 미션에 최선을 다하긴 할 테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강소희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으니 말이다. ‘같은 숙소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받았던 그 느낌을 좀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겠지?’ 지금도 이건율 참가자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긴 했지만, 사실 <얼어붙은 서울> 안에서 받았던 그 신기한 느낌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강소희는 빨리 모든 순서가 끝나고, 일단 숙소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물론 이 순간… 그녀의 룸메이트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었다. 8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모든 드래프트 일정이 끝났다. 내 룸메이트 선정 과정에서 조금의 이변(?)이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납득이 불가능한 내용은 아니었다. └ 그러니까 방장이… 입학 미션 때 마력 역류를 도와줬었다고? └ 그래서 혹시 비슷한 일이 또 생길까봐, 방장을 룸메이트로 선택한 거고? 아마 그럴 것 같은데요, 형님들. 사실 그게 아니면 강소희가 절 룸메로 지목할 이유가……. └ 근데 마력 역류라는 게, 그렇게 자주 생기는 현상은 아니지 않나? └ 언제 또 발생할지 모르는 마력 역류 때문에 방장을 룸메로 고른다는 건 좀……. 아니, 그렇다고 제가 마음에 들어서 룸메로 찍은 건 아닐 거 아니예요? └ ㅇㅇ 그건 맞지. └ 맞는 말이긴 해. └ 우리 방장, 메타인지 확실해서 맘에 들어? 뭐지? 이 순순한 동의가 내 마음을 찝찝하게 만드는 이유는……. └ 아니면 대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솔직히 강소희가 방장 선택하면서 가장 이득 본 건 제작진 아님?ㅋㅋ └ ㅇㅇㅋㅋㅋㅋㅋ 김신우 캐스터 무슨 함박웃음 짓고 있던데 ㅋㅋㅋ 만약 내가 강소희의 정체(?)를 아직까지 몰랐다면, 정말 대본이라고 믿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소희는 무려 그 에스쿨랩의 로열 패밀리다. 대본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려면 제작진과 모종의 거래를 했어야 하는데, 헌스쿨 제작진이 그녀와 거래라는 게 가능할 정도의 뭔가를 제시해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을까.’ 어쨌든 성좌들의 다양한 의견과 별개로, 나는 역시 마력 역류가 날 지목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역류가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긴 하지만, 강소희의 경우 역류가 일어났을 때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크게 참사가 일어나니 말이다. 저 호화로운 <그랜드 아르카나>를 초토화시키는 건… 아무리 강소희가 재벌이라 해도 피하고 싶지 않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잠깐 성좌들과 수다를 떨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래프트가 모두 마무리되고 숙소 배정이 시작되었다. 숙소로의 이동은 낮은 등급의 참가자들부터 먼저 진행되었다. “B등급 참가자분들은 이쪽으로! 셔틀버스가 대기 중입니다!” “C등급, F등급은 인원 파악 후 짐 챙겨서 도보로 이동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의 외침과 함께 광장에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어깨로 짐 가방을 끌고 가는 뒷모습들. 마치 난이도 높은 레이드를 클리어했는데, 정산받을 LP가 없어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공대원들의 뒷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특히 저 멀리, 비포장도로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C, F등급 참가자들의 행렬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찔하네 진짜.’ 만약 내가 저 무리에 섞여 있었다면? 이 무거운 짐을 이고 뙤약볕 아래를 걸어야 했을 거다. 게다가 저런 '이동 장면' 따위는 방송에 1초도 안 나갈 게 뻔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분량은 통편집 당하는 최악의 가성비. 갑자기 손에 들린 황금빛 열쇠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건 역시 단순한 숙박권이 아니다. 내 무릎 관절과 방송 분량을 지켜줄… 생명줄 같은 거다. └ ㅋㅋㅋ근데 솔직히 방장은 C나 F가 어울리긴 하는데. 예? 왜죠? └ 평소에 걷는 거 ㅈㄴ 좋아하잖음ㅋㅋㅋ └ 맞네 ㅋㅋㅋ └ 제발 스크롤 찢으라고 해도 악착같이 걸어 다니는 게 데이브 아니었나……. 쓰읍. 그거랑 이건 좀 다른 문제긴 한데……. 덜컹-!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그랜드 아르카나로 향하는 골프 카트들이 광장에 도착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스윗한 서비스라니. 이게 자본주의의 맛인가? “자자, A등급 분들은 여기 카트 탑승하세요!” 내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이미 몇몇 A등급 참가자들은, 아르카나 로고가 박힌 고급 골프 카트에 몸을 싣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편안하게 멀어지는 그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는걸? “저기, 저도 저거 타면 되는…….” 하지만 PD 한 명이 다급하게 나를 가로막았다. “아, S등급 분들은 잠시만요!” 또 뭐가 남았나? “S등급 분들은 여기서 단독 컷 좀 따고 가실게요! PPL 들어가야 해서!” ……으음. PPL이라니. 이런 건 전혀 예상 못했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긴 한다. 이렇게 비싼 출연료 줘가면서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태우는데, PPL 같은 게 없으면 수지가 안 맞을 테니까. 그러니 첫 화 방영 시점에 가장 관심도와 인지도가 높을 S등급 참가자들부터 PPL을 주는 것도 당연한 부분이었다. └ PPL ㄷㄷ └ 대이브 출세했네 그래서 나는 별 불만 없이 제작진의 요청에 따라 자리에 섰다. 저 건너편에서는 이성환을 비롯한 몇몇 S급 참가자들이, 이미 촬영 중인 게 보였다. 내 옆에는 강소희와 박하준… 그리고 권유나라는 참가자가 모여 있었다. “자, 이거 하나씩 받으시고요!” “가볍게라도 반응 좀 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카메라 돕니다! 큐!” 스태프들이 화려하게 포장된 박스를 우리 품에 하나씩 안겨주었다. 동시에 지미집 카메라가 내 얼굴 앞으로 훅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본주의 미소를 보이며, 박스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본 순간. [협찬: 바이탈-X 포션 & 스포츠 타월] 내 자본주의 미소는 함박웃음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렇게 귀한 걸 준다고?’ 타월이야 당연히 별거 없다. 다만 내가 행복해진 이유는, 바로 저 바이탈-X라는 기능성 포션 때문. 각성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피로회복 용도로 쓰이는 이 X포션은, 에스쿨랩의 경쟁사로 유명한 바이탈사의 신제품이었다. 동네에서 당근 해도 30만 원은 받는다는 얘기다. ‘크, 부수입 좋았고.’ 나는 박스를 소중하게 받아 들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뭐라도 반응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요청도 요청이지만… 아마 그런 요청이 없었어도 나왔을 자발적 따봉이었다. 으음……. 근데 혹시 지금 나만 기분 좋은 건 아니겠지? └ 옆에 강소희 표정 썩었는데? 내 옆에 서 있던 강소희가 박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뭔가 불편한 모양이다. “……성분 함량 미달인데.” “……!”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위험천만한 중얼거림에 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미친 거 아냐? 지금 카메라가 코앞에서 돌고 있는데!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복화술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쉿! 소희 씨! 카메라 돌아요, 카메라!” 그런데 이어진 강소희의 대사는 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쓰레기잖아요.” 아니……. 하늘 같은 광고주님 보시는 앞에서 쓰레기라니! └ 아ㅋㅋㅋ경쟁사 제품이라고ㅋㅋㅋㅋㅋ └ 방장앜ㅋㅋ 강소희가 광고주 눈치 같은 걸 봐야 할 근본이냐?ㅋㅋ 어쨌든 내가 필사적으로 눈치를 주자, 강소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나와 강소희는, 나란히 골프 카트에 짐을 싣고 올라섰다. 드르륵- “S등급 참가자분들, 숙소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그랜드 아르카나> 입성이었다. 덜컹-! “A타입 숙소는 이쪽입니다!” 외부 촬영을 마치고 들어선 <그랜드 아르카나>의 로비는 천국이었다. 뻥 뚫린 층고에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 은은하게 풍기는 디퓨저 향기까지……. 평생 이런 데 와본 적 없는 나로서는 황송할 수준이랄까. 하지만 긴장이 풀리려던 그때. 지이잉- “보안 검색 실시하겠습니다.” 단호한 교관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소지하고 계신 통신 기기는 전부 제출해 주십시오.” 예? 여기 혹시 군대입니까……? 통신 기기는 왜……. └ 그야, 미션 중에 치팅 방지하려는 거지 뭐 ㅇㅇ └ 참가자들이 죄다 각성자 위키 들어가서 검색할 수 있으면, 제작진 입장에서도 콘텐츠 짜기 어렵지 않겠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손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난 관리국 거래소 어플을 실시간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해지는 병이 있었으니까. 인벤토리에 숨기면 안 되냐고? 그런 게 됐으면 애초에 압수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각성 시스템의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건, 오로지 100% 게이트 안의 성분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뿐이다. 그러니 다들 합숙할 때 이렇게 가방을 바리바리 싸서 들고 온 거기도 하고 말이지. “다음.” 그런데 잠깐. 여기서 끝이 아니잖아? “가방 올려주세요.” 소지품 검사까지… 한다고? └ 뭐가 문제임 └ 마약 같은 거만 없으면 됨 ㅇㅇ 아니, 당연히 그런 게 있을 리야 없는데……. 툭- 매고 있던 백팩을 검색대 위에 올리자, 교관이 지퍼를 찌익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교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가방 속의 ‘귀중품’을 꺼내 들었다. 달그락. 호텔 로비의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그것은, 흉악한 무기도, 마약도 아니었다. 다만… 진지한 궁서체 로고가 박힌, 구멍이 숭숭 뚫린 하얀색 플라스틱 바구니였을 뿐. [뚝섬 사우나] 그 안에는 반쯤 짓눌려 터지기 일보 직전인 대용량 업소용 샴푸 통, 치약 짜개로 끝까지 밀어 올려 종잇장처럼 얇아진 치약, 그리고 실밥이 터져 너덜너덜해진 초록색 때 타월이 다소곳하게 담겨 있었다. └ 미친ㅋㅋㅋ └ 저런 걸 대체 왜 가져온 건뎈ㅋㅋㅋㅋ 공감성 수치가 올라온 건지, 옆에 있던 참가자 하나가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 묻는다. 아마 17위 정도였나. 아까 대기시간에 간단하게 통성명 정도를 했던, 전인욱이라는 이름의 참가자였다. “형님. 사우나 좋아하세요…?” 사우나 좋아하지. 그러니까 뚝섬 사우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대학 시절부터 즐겨 다니던 우리 집 앞 최애……. “……이건율 참가자님?” “네.” “저희 숙소 어메니티는 전부 최고급 브랜드 제품으로 비치되어 있습니다만.” 굳이 이 쓰레기…… 아니, 잡동사니를 S등급씩이나 받은 헌터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이유가 뭐냐는 눈빛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부끄러워하면 지는 거다. “알죠. 그래도 전 몸에 맞는 게 좋아서…….” └ 암만 봐도 몰랐던 거 같은데 ㅋㅋㅋ └ 방장. 솔직히 말해보셈ㅋㅋ 호텔 같은 데 안 가봤지? 슬슬 나도 부끄러워지려는 참이니까, 팩트로 그만 패줬으면 좋겠는걸? “……통과.” 어쨌든 딱히 문제는 없었기에, 내 소지품은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그나저나 내 소중한 목욕 바구니를 능욕하다니……. 이 원한은 잊지 않을 테다. “다음, 강소희 참가자님.” 이번에는 내 뒤에 서 있던 강소희가 자신의 캐리어를 검색대 위에 올렸다. 그런데 가방이 열리는 순간. 와르르. 이번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교관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이건 또 뭡니까?” 교관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렸다. 강소희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건, 하얀색 [멸균 장갑] 한 박스와 [의료용 핀셋]. 그리고 겉면에 노란색 바이오 해저드(생물학적 위험)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밀폐 용기]들이었으니까. 아마 베놈 블러드라는 클래스 특성 때문에 챙긴 물품 같긴 한데…….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여기서 불법 시술소라도 차릴 기세였다. “혹시 여기서… 수술이라도 합니까?” “아니요.” 강소희는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위생용품이에요. 오염을 방지하고, 샘플을 안전하게 보관해야 해서.” “…….” 오염? 샘플? 그런데 대체 왜 나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니, 당신이 나를 룸메로 집은 거잖아……. 난 아무 잘못 없다고. └ 강소희도 뭔가 은은하게 돌아있는 듯?ㅋㅋ └ ㅋㅋㅋ개웃기넼ㅋㅋ └ 소지품으로 웃기는 거 쉽지 않은 일인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나를 무슨 임상실험의 대상… 그런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8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우여곡절 끝에 검색대까지 통과한 우리는, 드디어 숙소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마지막에는 강소희와 나만 남았다. “짐 정리하시고, 1시 20분까지는 모두 2층 레스토랑으로 오셔야 합니다.” 마지막 교관의 안내를 머릿속에 넣은 우리는, 잠시 후 숙소의 문 앞에 도착했다. [Emperor Penthouse-101] 직역하면 상당히 유치한 이름의 숙소이건만……. 극한으로 호화로운 인테리어 때문일까? 이 이름이 조금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거 같죠?” “네, 그러네요.” 그나저나 뭔가, 이성과 호텔 룸(?) 앞에 함께 선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보니, 몸이 살짝 고장 나서 뚝딱거린다. 달칵-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어……?” 삐거덕거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긴 했는데. ‘열쇠 구멍이 왜 없는 거지……?’ 내 손에 들린 호실 열쇠가 갈 곳을 잃어버린 거다. └ ㅋㅋㅋㅋㅋ └ 방장 설마 문 열 줄 모르는거임?ㅋㅋㅋㅋㅋㅋㅋ 잠깐 뇌 정지가 와있는데……. 옆에 있던 강소희가 뭐 하냐는 표정으로(일단 난 이렇게 느꼈다), 자신의 열쇠를 문고리 앞에 가져다 대었다. 지이잉- 덜컥-! 아, 그냥 생긴 것만 열쇠였구나……. “여기, 처음 와봐요?” 당연히 처음 와보지. 그럼 평소에 이런 비싼 데를 오는 사람이……. “저도 이 호실은 처음이긴 해요.” 있을 수도 있긴 하겠구나. 기이이잉- 부드러운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양문형 도어가 자동으로 열렸다. 이어서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압도적인 황금빛이었다. 6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탁 트인 층고. 그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바닥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최고급 대리석이었고, 가구는 금빛 문양이 양각된 엔티크 스타일이었다. 중세시대 황제의 알현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옮겨 놓으면 이런 느낌일까? 눈 닿는 모든 곳에서 숨 막히는 자본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인 건, 거실 한쪽 벽면을 통째로 틔운 초대형 파노라마 통유리창이었다. “와…….” 촌놈 티를 안 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광경이다. 루미스 영지에서만 수백 년은 머물렀을 텐데, 여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으니까. 창 너머로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는 루미스 영지의 고풍스러운 전경은, 초등학교 5학년쯤 가봤던 63빌딩 전망대의 야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까 여기가, 대충 1박에 750LP쯤 한다는 거지? “아뇨, 여긴 1000LP 넘을 것 같은데요.” 예? “제가 자주 묵는 로얄 스위트가 700정도 했던 것 같은데, 여긴 펜트잖아요. 더 비싸겠지.” “…….”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강소희가 먼저 한 켠에 툭 하고 가방을 던져 놓는다. 이어서 숙소를 한번 휙 둘러본 뒤, 정말 아무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녀에게는 1박에 1,000LP가 넘는다는 이 초호화 펜트하우스도, 그저 ‘잠시 짐을 두는 곳’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대충 봐도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너무나 많았다. “…….” 나는 본능에 이끌리듯 거실 중앙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거기엔 ‘Welcome’이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와 함께, 붉은 빛깔이 영롱하게 감도는 최고급 와인 두 병과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잠깐, 이거…….’ 눈대중으로 스캔해봐도 견적이 나온다. 루미스 영지 특산물인 ‘루비 포도’로 담근, 최소 50년산 이상의 빈티지 와인이다. 경매장에 올리면 최소 50LP부터 시작할 물건. “이거, 마셔도 되는 거겠죠?” “네. 룸 차지에 포함된 거니까요.” 강소희의 무심한 대답에, 손이 슬쩍 움직였다. └ 어허, 방장 지금 뭐 하는……? └ 도둑이다! 여기 도둑 있어요!! 아니, 왜! 룸 차지에 포함이라잖아! 이것도 내 출연료의 일부라고. └ 그…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심지어 두 병이다. 한 병은 확실히 내 몫이라는 말씀. 나는 아주 진지하게 와인 병을 들어, 챙겨왔던 가방 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다행히 강소희는, 내가 뭘 하든 딱히 관심 없는 눈치다. └ ㅅㅂ 이친구 원래 컨셉질 심함? └ 컨셉…… 이라고? └ 어허, 우리 대이브는 컨셉 같은 거 몰라. └ 그럼 저게 컨셉이 아니라 진짜라고? └ 진짜라는 데 전 재산 배팅 가능. └ ㅁㅊ;; └ 50LP면 하급 포션이 다섯 병이야~ 데이브가 그걸 어케 참는데? 역시 절 이해해주시는 건 형님들 뿐이십니다. 와인… 그냥 제가 마신 거로 하시죠? 벌컥- 벌컥- “크….” 와인 대신 시원한 냉수 한 잔 들이켠 나는, 강소희와 최대한 먼 소파에 슬쩍 앉았다.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이제 숙소도 다 둘러봤고 딱히 할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털썩- 갑자기 강소희가 내가 앉은 소파로 오더니 아무 말 없이 앉는 게 아닌가? └ ??? └ 이건 머선 상황임? └ 설마… 플러팅? └ ㅈㄹㄴㄴ 또다시 사고회로가 고장 나고 있는데, 강소희가 예의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 소파가 좁은 것도 아니고, 붙어 계신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잠깐만 같이 좀 앉아있어요. 저쪽 경치가 좋네.” “…….”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대사에, 점점 이 상황이 무서워진다. 대체 목적이 뭐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입학 미션에서 도와준 죄 밖에 없는걸? └ 혹시 임상실험이 목적인 건 아닐까 방장ㅋㅋ 예……? └ 조심하셈ㅋㅋ 방장 먹는 물에 에스쿨랩 신약 슬쩍 타놨을 수도 있음ㅋㅋ 분명 농담인데, 농담처럼 들리질 않는다. 자고 있는데 피 뽑아가고… 그런 거 아니겠지? [아아, 잠시 안내 말씀 드립니다.] 잠깐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망상을 하고 있는데,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점심 식사 시간 10분 전입니다. 모든 참가자분들은 2층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식사 시간 10분 전입니다.] 구세주 같은 방송 알림음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가죠. 밥은 먹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뭔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기분인데……. 나, 괜찮은 거겠지? * * * <헌터즈 스쿨> 시즌3 메인 통제실. 수십 개의 모니터가 내뿜는 열기로 후끈한 이곳에서, 이정민 FD는 커다란 메인 스크린에 오늘의 타임 테이블을 띄워놓고 있었다. “PD님. 금일 오후 스케줄, 최종 점검하겠습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눈이 빠져라 모니터만 응시하던 장세연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만 까닥였다. 하지만 이건 권위적인 제스쳐 같은 게 전혀 아니었다. 다만 장세연은 주말부터 지금까지 내내 편집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탓에, 물리적인 힘이 없을 뿐이었다. 정민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무리 좀 하지 말라니까.’ 물론 지금은 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 시기가 맞다. 지난주 금요일에 있던 입학식 미션 리소스에 대한 내용이……. 일정상 적어도 오늘까지는 거의 모든 가공작업이 끝나야 하니 말이다. 일정이 급박한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첫 방영일이 이번 주 화요일이니까. 그러니까… 무려 내일 <헌터즈 스쿨 3>의 1화가 방영된다는 소리다. ‘이게 되는 스케줄인 게 신기하단 말이지.’ 사실 이렇게까지 타이트한 일정을 잡은 장본인이, 바로 장세연 PD였다. 날것 그대로인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녹화 날짜와 방영 날짜가 너무 길게 늘어지면 안 된다는 거다. 특히 입학식 미션의 경우 현장 방청객들로 인해 이미 떡밥이 풀리면서 기대감이 올라오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 관심도가 최고점을 유지하고 있을 때 1화가 방영되는 게 맞다. 뭐, 그런 사고 흐름에 의한 주장이었는데……. 이정민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다들 군말 없이 주말까지 반납하고 있는 거고 말이다. “자, 그럼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막내 PD의 목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켜졌고, 그 위로 스케줄표가 나타났다. 그걸 확인한 이정민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자. 일단 현재 시각 13시 20분, 참가자 전원 2층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 예정이고요.” 이정민이 레이저 포인터로 스크린의 두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오후 3시부터 메인 이벤트인 [포지션 결정전]이 시작됩니다.” [PM 03:00 ~ 06:00]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 (Memory of Grenis)> 참가자 포지션 결정전(예정) 장세연의 다 죽어가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돌았다. “그레니스 협곡이라……. 국밥이긴 해도 항상 기본 재미는 뽑아주는 콘텐츠지?” 그녀의 말에, 정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서론 없이 바로 시작되는 대규모 전장 콘텐츠인데다…… 포지션별 참가자들 역량이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시스템이기도 하니까요.” <헌터즈 스쿨>은 매 시즌마다 조금씩 포맷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유지하는 콘텐츠가 몇 가지 존재했는데, 바로 입학식 미션의 [등급 결정전]과 합숙 첫날의 [포지션 결정전]이었다. 그만큼 재미 면에서 확실한 콘텐츠라는 뜻이다. “여기야 걱정할 게 없고, 그럼.” 세연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정민의 다음 브리핑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저녁 스케줄이 이어집니다.” 이정민이 다음 일정을 가리켰다. [PM 07:00 ~ 09:00] 저녁 식사 및 최종 팀 편성 발표 - 멘토(Master) 회의 진행 “여기가 지난 시즌이랑 확실히 달라진 포인트겠네.” 장세연이 턱을 괴며 모니터 속 멘토 대기실 화면을 힐끔거렸다. “맞습니다. 팀장이 미니게임으로 팀원 다 뽑았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에는 멘토들이 팀 밸런스를 최대한 맞춰줄 테니까요.” “멘토들은 아마… 입학식 미션에서 저평가된 인원을, 최대한 약팀에 배정하겠지?” “그렇게 예상합니다. 기획 의도는 충분히 전달했으니까요.” 본 미션은 내일부터 시작이지만, 제작진 입장에서는 오늘이 가장 중요했다. 결국 오늘 밤에 결정되는 20개의 팀이, 앞으로 남은 미궁 3개를 뚫을 동안 그대로 이어질 테니까. 방송 분량으로 따지면 무려 5화 정도 분량이나 된다. 뭐, 그림 뽑히는 거에 따라서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정민 FD.” “말씀하시죠.” “그럼 나는 지금부터 살짝 눈 좀 붙일 테니까, 포지션 결정전 시작되면 깨워달라고.” “그러겠습니다.” 스케쥴 브리핑이 끝난 뒤, 메인 통제실에서 나온 정민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현장 PD들, 지금 미리 나가서 준비들 하고 있는 거 맞지?” “예, 맞습니다, FD님.” “게이트 내 촬영은 항상 변수가 많으니까, 특이사항 조금만 나와도 바로바로 보고 올리고.” “넵.” 자신의 모니터링실로 돌아온 정민은, 미리 배달시켜 뒀던 김밥을 주워 먹으며 편집된 녹화본을 돌려보기 시작하였다. ‘이번 시즌…… 진짜 시작이 역대급으로 좋단 말이지.’ 정민은 내일이 너무 기다려졌다. 자신을 비롯한 제작진이 혼을 갈아 넣어 만들어낸 <헌터즈 스쿨 3>의 1화 방영분. 그게 시청자들에게 공개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되었으니 말이다. 8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나는 평소 그렇게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김주연 여사와 그녀의 따님은 먹는 것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투자하는 편이었지만……. 비싼 레스토랑보다 기름기 좔좔 흐르는 치킨 한 마리, 족발 한 접시를 더 선호하는 싸구려 입맛이 바로 나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건… 미쳤는데요, 형님들? 이곳 그랜드 아르카나의 레스토랑은, 그런 나조차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떠오를 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수십만 원짜리 파인다이닝 같은 느낌이냐고? 그건 아니다. 형식만 놓고 따지자면… 여긴 평범한 호텔 뷔페와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맛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충격적일 뿐이다. └ 방장, 빌드업 하는 거 아니지? 예? 무슨 빌드업이요? └ 다 좋은데 뷔페 음식 싸 들고 가는 건 안 된다…. └ 우리가 호텔 어메니티 몇 개 챙기는 것까진 참아볼 수 있는데…… 락앤락은 형이 참아야 해. 알지 형? 아니, 내 이미지가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추락을……. 나도 이제, 어? 사회적 위치라는 게 있는 S등급 헌터라는 말씀. └ 누가 들으면 잠재력이 S등급인 줄 알겠네 ㅋㅋ └ ㄹㅇㅋㅋ 아무래도 못 본 사이, 성좌들이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다. 지난주에 배팅으로 LP를 좀 뜯겨서 그런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물어뜯기 바쁘단 말이지. ‘어우 배불러.’ 어쨌든 배까지 든든히 채운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레스토랑이 있던 2층을 나설 수 있었다. 이 다음 일정이 무슨 포지션 결정전? 몸 써야 하는 일정이랬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피지컬에 영향이 생길까 아주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자, S등급 참가자분들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소화 시키려면 좀 걸어야 하는데, 호텔 정문에 벌써 마나 케리지(Mana Carriage)가 도착해 있다. 걷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작정 걸을 수도 없고 말이야. 또 이렇게 준비해 주시는데… 누리는 것도 예의 아니겠어? └ 아오, 방장시치. 아니, 성좌 주제(?)에 이런 밈은 또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다. 성좌들의 세계에 EPL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니면 이세계에도 일본은 존재하는 건가? “…….” 어쨌든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캐리지를 탄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만 빼면, 다들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있는 눈치다. 같은 칸에 탑승한 전인욱의 말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말이다. “<북부 성벽 연병장>이면, 여기서 꽤 거리가 있죠?” 음……? 거긴 왕실 기사단 관할지역일 텐데… 거길 왜 가는 거지? 하지만 일단 아는 게 나왔으니, 아는 척부터 한번 해주고……. “캐리지 탔으니까, 한 20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내 말에 전인욱이 흠칫 놀라며 반문한다. “와…… 그럼 C나 F등급 받은 참가자분들은, 외곽지역에서 거기까지 걸어오시는 거예요?” 그렇겠지? 허…….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상당히 끔찍하다. 거기서 북부 성벽까지 걸어오려면, 걷는 시간만 최소 1시간 반은 걸릴 텐데……. “아마 그래서 등급별로 포지션 결정전을 따로 진행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가장 먼저 진행하고, 다 끝날쯤 후발대 도착하는 느낌 아닐까요.” 이번에는 전인욱의 옆에 앉아있던 다른 친구의 대답이었다. ‘진짜 여기서는 등급이 곧 신분이라더니. 살벌하게 살벌해.’ 지금 이 케리지 같은 칸에 탄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두 명은 당연히(?) 나와 강소희였고, 나머지 둘은 우리 바로 옆 호실을 쓰고 있는 전인욱이라는 녀석과 유지상이라는 녀석. 아무래도 100명이나 되는 참가자들 중 가장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친구들이라 그런지, 그래도 가장 먼저 친분이라는 게 생긴 친구들이다. 둘 다 나이도 어리고 붙임성도 좋아서, 대하기 편한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흐음. 그나저나 <북부 성벽 연병장>이 대체 왜 목적지인지는 좀 궁금한데. 두 친구는 혹시 알고 있으려나? “아니, 형님. 그걸 모른다고요?” 모…르면 안되는 거였어? “와… 이 형님, 시즌 2도 안 보고 참가하셨네.” “그렇긴 합니다만…….” “형, 거기 연병장에 있는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은 아세요?” 그거라면 당연히 잘 안다. 나도 베타 플레이할 때, 심심하면 한 번씩 도전하곤 했던 가상훈련장이었으니까. 그런데 잠깐. 그러면 ‘포지션 결정전’이라는 게 설마……? “그쵸. 거기서 포지션별 실력 증명해서 높은 점수 얻는 게, 포지션 결정전의 기본 포맷이에요 형.” “그렇군요.” “그나저나 말 놓으셔도 된다니까요, 형?” “으음…….” “여기 지상이나 저나, 둘 다 스물여섯 동갑이에요.” 후우. 스물여섯이면 시스템 나이 기준으로 우리 친군데……. 헌스쿨 프로필은 한국 나이 기준이니까, 아쉽지만 친구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헌스쿨 시즌3 기준 최고 연장자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맞아요, 형님. 열 살이나 많으신데… 존대하시면 저희가 불편하다니까요?” 그렇게 10살이라고 딱 꼬집어 말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전인욱 이 녀석은, 아까부터 뭔가 멕이는 것 같기도 한데……. 레오마냥 순수해 보이는 저 표정을 보자니,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게 더 괘씸하다. 그나저나 우리 레오는… 잘 지내고 있겠지? 갑자기 레오 생각나네. “그럼, 말 편히 할게……?” 나이 많은 것도 서러운데, 말이라도 편하게 해야겠다. 그래도 여기 나와서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괜찮은 녀석들이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좋아요, 형.” “예 형님!” 그나저나 내 옆자리에 앉아계신 우리 룸메님은, 캐리지에 탄 이후로 말이 아예 없어지셨다. 그래도 아까 같이 밥 먹을 땐, 한두 마디 했던 것 같은데……. 창밖만 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나저나 너희들은 그럼… 포지션 뭐 공략할지 이미 정해 둔 거야?” 이 두 녀석과 대화를 튼 김에, 정보나 좀 얻어야겠다. “저는 뭐, 선택지가 보병밖에 없을 것 같고요. 여기 지상이는 무조건 서포터. 맞지?” “우리야 정해져 있지 뭐.” 갑자기 날 보는 두 녀석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런데 형이야말로 포지션 어디 생각하세요?” “그러게. 이 형님 입학 미션 때 보니까 근딜 포지션에 가까워 보이시던데.” 아마 참가자들 중, 나만큼 포지션이 애매하게 드러난 사람이 없어서일 거다. 얼어붙은 서울에서 난… 마력총도 쓰고 언월도도 사용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건…… 나도 아직 내가 무슨 포지션을 공략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아직 어떤 포지션 고를지는 모르겠네.” “예? 그럴 수가 있어요?” “내 클래스가 약간 잡탕 느낌이라.” “오호, 신기하네요……?” “아마 근딜러 쪽으로 공략해 볼 확률이 높긴 한데…….” 어쨌든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캐리지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 여기가 S그룹이죠?” “참가자분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까 인욱이가 말했던 <북부 성벽 연병장>이 맞았고. 미리 도착해 있던 제작진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오늘 이 <포지션 결정전>만 끝나면 다른 특별한 일정은 없으니까, 다들 힘내시자고요!” S등급 참가자들이 모두 연병장에 도착하자, 잠시 후 막사 안쪽에서 낯익은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어… 서지혁이네?’ 예의 그 쾌활한 표정으로 우리를 스윽 둘러본 서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하, 다들 왜 이렇게 굳어있습니까? 긴장들 푸시죠.” 저는 딱히 굳어있진 않았습니다만……. “지금부터 시작될 <포지션 결정전>에서는, 입학 미션 때처럼 관객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옵저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겠지. 왕실 정예 훈련장에 옵저버가 들어갈 수가……. “그러니 편하게 여러분 역량을 발휘해 주시면 됩니다!” 서지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부터 이 <포지션 결정전>의 룰을, 아주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포지션 결정전의 룰은……. 내 기대보다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전체 1등 상금이 추가로 2000LP라고?’ 이러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조건 1등을 먹어야 하겠는데? * * * [던전 정보]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 (Memory of Grenis) 분류: 특수 던전 / 가상 훈련장 위치: 루미스 영지 - 왕실 제2훈련소 적정 레벨: 제한 없음 (입장 시 Lv.50 고정) 난이도: ★★★★☆ 제한 시간: 없음 (평균 30~90분 소요) ▣ 개요 300년 전, 루미스 왕국 북부 국경을 침공했던 ‘서리 거인 군단’을 저지하고 성벽을 사수하십시오. ▣ 동기화 페널티 레벨 고정: 모든 참가자의 능력치는 [Lv.50 왕국군 정예병]으로 고정됩니다. 장비 제한: 개인 장비(아티팩트) 사용 불가. 지급된 [보급형 제식 장비]만 사용 가능합니다. ▣ 병과 선택 (Position) 입장 전, 다음 5가지 병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1. 탱커 (Tanker) 방패병 / 중갑 보병 2. 근거리 딜러 (Warrior) 창병 / 검사 3. 원거리 딜러 (Archer) 궁병 / 석궁병 4. 마법사 (Mage) 전투 마법병 5. 서포터/힐러 (Support) 의무병 / 보급병 ▣ 목표 제한 시간(90분) 동안 전장에서 생존. 참가자 전원(4명) 사망 시 [패배]. * 참가자는 전장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다섯 가지 포지션 기여도 점수를 획득합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포지션이 참가자의 포지션으로 확정되며, 모든 포지션 점수 총합으로 전체 순위를 결정합니다. ▣ 보상 (Reward) 1. 각 포지션별 [기여도 랭킹 1위]에게 <1,000 LP> 즉시 지급. 2. [기여도 랭킹 총합 1위]에게 <2,000 LP> 즉시 지급. 8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신림동 고시촌의 좁은 자취방. 어둠 속에서 청축 키보드의 요란한 타건음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타다닥, 탁! 타닥! 박민철(29)은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키며, 자신의 모니터 화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헌터즈 라운지> 통합 게시판. 그곳에는 그가 방금 막 작성을 끝낸, 장문의 분석글이 ‘실시간 베스트’를 향해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제목: [D-1] 긴급 분석. 지금 라운지 도배하는 ‘그 35레벨’ 거품 싹 걷어줌.txt 작성자: 팩트만팬다 (네임드) 자꾸 35레벨 듣보잡이 80레벨 보스를 잡았네, 이성환보다 쩔었네 어쩌네 하면서 바이럴 돌리는 알바들이 보여서 팩트만 정리해준다. 형은 시즌 1, 2 프레임 단위로 분석한 사람이다. 믿고 봐라. 민철은 스크롤을 내려 자신이 첨부한 사진과 코멘트를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육성을 터뜨렸다. “크.” 올라가자마자 조회수가 빠르게 쌓이고 있는 자신의 게시글은, 본인이 봐도 논리적으로 아주 완벽했으니 말이었다. 1. 근본 없는 잡탕 클래스 (feat. 냉각 파이프) (사진: 쇠 파이프를 든 이건율 / 마력총을 든 이건율) 초반엔 철봉 들고 설치더니 갑자기 마력총 난사?ㄷㄷ 라이카 시스템 알면 이거 개소린 거, 설명 안 해도 다 알지? 뭐 비슷한 카테고리면 이해라도 하지, 둔기 타입이랑 원거리 마력총을 같이 쓰는 게 참……. 이러면 장비 마스터리 패시브 같은 거 아무것도 적용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숙련도가 나올 수가 없음 ㅇㅇ 결론: 그냥 보여주기식 예능용 컨셉질. 실속은 0에 수렴함. 2. 강소희와의 커플링 바이럴 (사진: 독무 속에 서 있는 강소희와 이건율) 이게 결정적 증거임. 에스쿨랩 공주님이 미쳤다고 듣보잡이랑 파티하겠냐? 제작진이 '미녀와 야수' 그림 만들려고 억지로 붙여준 거지. 실상은 강소희가 딜 다 넣고, 쟤는 옆에서 폼만 잡은 거임. 일명 ‘기생형 플레이어’. 3. 35레벨의 보스 솔킬? (물리적 불가) 제일 어이없는 소설. 35레벨이 80레벨을, 그것도 보스를 잡는다고? 시스템 ‘레벨 보정’은 장식이냐? 딜 조금이라도 들어가려면 약점만 노리거나 치명타 노려야 하는데…… 그걸 보스가 얌전히 맞아주겠냐는 거지. 어지간해선 딜 1도 안 박히는 게 정상. 근데 잡았다? = 제작진이 피 1 남겨놓고 막타 연출 시켜준 거임. 시즌 2때도 윤기명 띄워주려고 주작하다 걸린 거 잊었냐? [3줄 요약] 쟨 실력 없음. 그냥 방송용 광대임. 강소희 버스 탄 거임. 내일 본방 까보면 내 말이 맞을 거임. 반박 시 헌알못. ㅇㅈ? “완벽해.” 흡족한 표정이 된 민철이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자, 댓글창에는 예상대로 불이 한참 붙고 있었다. 폭발적인 반응이라는 뜻이다. [댓글] └ ㅇㅇ(118.235): 와 속이 다 시원하네 ㅋㅋㅋ 나도 저 35레벨 바이럴 좀 역겨웠음. └ 사냥꾼김씨: 분석추. 솔직히 이성환 박하준 놔두고 듣보 빠는 애들은 지능 문제 있음. └ 직관러: 님 현장 안 가봤죠? 현장 분위기 장난 아니었는데;; 그게 다 연기라고? └ 팩트만팬다(작성자): ㄴ방송국 놈들 연출력을 믿음? ㅈㄴ순진하네 ㅋㅋㅋ └ 직관러: 분위기도 분위긴데, 플레이 자체는 ㄹㅇ 진짜 같던데……. └ 헌스쿨123: 애초에 입학미션 인공던전에서 진행하는거잖음ㅋㅋㅋㅋㅋ 주작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ㅇㅇ 민철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동조하는 댓글들에 ‘추천’을 눌렀다. 여론은 자신의 편이었다. 상식적으로 35레벨이 쟁쟁한 실력자들 두고 하드캐리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런데, 유독 눈에 밟히는 댓글 하나가 달렸다. └ 시루떡: 글쓴이님 소설 잘 쓰시네요 ^^ 팩트 하나도 안 맞는데 ㅋㅋㅋ “하, 이놈에 알바 녀석들이 기어코…….” 민철은 즉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런 맹목적인 실드는 즉시 밟아줘야 제맛이었다. └ 팩트만팬다(작성자): @시루떡 / 팩트로 패주니까 아파요? 혹시 본인 등판임? 아님 가족이세요? ㅋㅋㅋ 그는 자신의 댓글이 등록되는 걸 보며 낄낄거렸다. 가족이냐는 비아냥은 커뮤니티에서 상대를 입 다물게 하는 필살기나 다름없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쉴드를 치고 있어.” 그때였다. 모니터 오른쪽 하단의 시계가 [23:59:59]에서 [00:00:00]으로 바뀌었다. [공지] <헌터즈 스쿨 3> : ‘얼어붙은 서울’ 공식 하이라이트 티저 공개! “왔다.” 민철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자신의 완벽한 분석이, 공식 영상을 통해 증명될 차례였다. 그는 비장하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쿠우우웅―!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함께 영상이 시작됐다. 초반부는 예상대로였다. 이성환이 방패로 몬스터를 짓뭉개고, 박하준이 야수처럼 전장을 누비는 장면. ‘진짜’들은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그치! 이게 헌터지! 근본이 다르잖아, 근본이.” 민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분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박하준도 이건율처럼 이번 헌스쿨에서 발굴된 플레이어라지만, 일단 레벨부터가 근본 있지 않은가? 게이트 첫 입장 200일 이내에 이성환과 비슷한 레벨을 달성했다는 건, 그것만으로 이미 증명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건율은? ‘이건율이 진짜였으면, 절대 35레벨따리일 수가 없지.’ 역시 주작하면 HBC이고 헌스쿨이다. 민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율의 플레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지만, 이 티저 영상 자체가 너무 화려하고 박진감 넘쳐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화면은 빠르게 교차 편집되며 참가자들의 화려한 스킬 난사를 보여주었다. 권유나의 폭염, 강소희의 독무. 그리고. 뚝. 갑자기 고막을 때리던 음악이 멈췄다. 화면이 암전되더니,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슈오오오―] ‘뭐야? 방송 사고인가?’ 민철이 미간을 찌푸린 그 순간. 화면이 다시 밝아지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폐허가 된 서울의 한복판. 모든 것이 얼어붙은 전장의 중심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얼음 기둥 하나. 그리고 그 위태로운 기둥 꼭대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미친 듯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큰, 서슬 퍼런 냉기를 뿜어내는 언월도를 쥔 채 말이다. 콰콰쾅-! 전장을 향해 뛰어내린 남자는, 미친 듯 언월도를 휘둘러댔다. 그리고 그 움직임 한 번 한 번에, 엘리트 몬스터들이 마치 종잇장 찢기듯 찢겨나갔다. 캬아아악-! 그리고 그 화려한 전투의 중심에 있는 건……. 이성환도, 박하준도 아니었다. 카메라는 천천히 줌인하여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이어서 그 아래, 참가자에 대한 정보가 짧게 노출된 뒤. [ 이건율 (Dave) / 35 Lv ] 팟-! 화면이 꺼지고, [D-1, 내일 밤 10시 첫 방송!]이라는 로고만이 검은 화면에 떠올랐다. “…….” 민철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검게 변한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이 본 게 뭐지? 조작? 연출? 아니, 저런 압도적인 분위기는 CG로도 만들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그 현란한 액션 장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분명 아주 짧은 3초간의 컷일 뿐이었지만……. 그 임팩트는 앞서 나왔던 이성환이나 박하준의 전투씬 만큼이나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진짜 이 이건율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 급이 된다고?’ 하지만 곧, 민철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싸질러 놓은 저 분석글은 희대의 똥글이 되어버릴 테니까. “…속지 마라, 박민철. 저거 다 AI툴로 주작한 거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올랐다.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밀어준다? 이건 방송국 놈들이 작정하고 시청자들을 속이려 든다는 증거였다. “내일 본방에서 내가 무조건 주작 찾아낸다.” 민철은 이를 갈며 자신의 게시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 팩트만팬다(작성자): 티저 보고 쫄았냐고? ㅋㅋㅋ 웃기고 있네. 저거 다 CG랑 와이어 액션임. 내일 방송 1초 단위로 캡처해서 나노 단위로 까발려 줄 테니까 딱 기다려라. * * * 포지션 결정전이 시작되기 전, 연병장에 모인 S급 참가자들은 4명씩 먼저 그룹 지어졌다. 그리고 그 그룹은, 정확히 캐리지를 타고 이동해 올 때 묶였던 바로 그 네 사람이었다. “뭐, 이렇게 된 거 한번 잘해보자고.” “화이팅입니다 형님.” 하지만 이 그룹이 딱히 파티 개념은 아닐 거다. 물론 같이 들어간 사람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아주 조금 도움은 되겠지만……. 애초에 수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필드이다 보니, 뛰어난 병사 한 명이 대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구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네 명씩은 왜 나눈 거냐고? 그야 한 번에 입장 가능한 최대 인원이 네 명이었을 뿐. “그래도 협력이 가능하긴 하잖아요?” 그렇긴 하다. 어차피 최종 점수 산정에는, 협력이 별 의미 없겠지만 말이다. “자, 다음 순서 준비하세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촬영 스탭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세 번째 조였는데, 이제 입장 차례가 된 모양이었다. “다들 라이브 캠 켜는 거 잊지 마세요! 캠 안 켜고 플레이하시면, 혼자 다시 들어가셔야 합니다!” 공략이 끝난 뒤, 라이브 캠 녹화본을 제작진에게 전송해야 한다고 하니, 세팅부터 꼼꼼히 해야 하는데……. └ 방장 라이브캠 세팅 처음 해봄?ㅋㅋ 그렇긴 합니다. └ 영상 잘 뽑히려면, 캠 최소 세 가지 정도는 세팅해야 함. └ ㅇㅇ 1인칭 시점 하나랑 쿼터뷰 하나는 무조건 필수지. 성좌들 덕에 꽤 수월히 세팅을 마쳤다. 그런데 성좌님들이 이런 건 어떻게 아시는……? └ ■■■부터는 라이카 플랫폼에 채널 운영도 가능해짐. └ 그때 되면 스트리밍도 중요한데, 라이브 캠 베이스로 채널 키우는 것도 중요해지거든. 노이즈 때문에 무슨 말인지 다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꿀팁 감사합니다 형님들. 어쨌든……. 성좌 형님들 찬스로 세팅을 다 마치고 나니, 스탭이 다시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 네 사람은, 훈련장 안쪽으로 줄지어 이동했다. 훈련장 입구에는 왕실 정예병으로 보이는 NPC 하나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입장하실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포탈이 생성되었다. 지이잉-! 이어서 그 안쪽으로 발을 딛자……. [가상 훈련장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에 입장합니다.]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모든 참가자의 레벨이 Lv.50 ‘왕국군 정예병’으로 고정됩니다.] [보유하신 모든 장비 아이템이 ‘봉인’ 상태로 전환됩니다.] 새하얀 빛으로 시야가 전부 물들었다. 8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8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눈을 떴을 때. 휘오오오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귓가를 때리는 거센 바람 소리였다. 이어서 시야에 들어온 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 사이를 잇는 거대한 성벽.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고, 섞인 눈발이 칼날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 춥다.” 유지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성벽 위에 마련된 작은 작전실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다섯 가지 병과를 상징하는 장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병과(兵科)를 선택해 주십시오.]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자, 전인욱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포지션 선택에 제한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애초에 나 말고는 고민할 이유도 없을 터였다. “저야 뭐.” 그는 망설임 없이 가장 왼쪽에 있는 묵직한 강철 방패와 한손 도끼를 집어 들었다. 왕국군 정예병으로 빙의한 모습이, 상당히 그럴싸한 느낌이었다. [전인욱 : ‘방패병’ 선택 완료] 그 뒤를 이어 유지상이 움직였다. 그는 전장 응급 처치 키트와 버프용 깃발이 놓인 곳으로 향했고……. “저도 그럼.” [유지상 : ‘의무병’ 선택 완료] 이어서 강소희는 당연하다는 듯 지팡이가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강소희 : ‘전투 마법병’ 선택 완료] 그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포지션을 선택하는 사이, 나는 머릿속으로 두 가지 정도의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방패병 아니면 궁병인데.’ 왜 둘 중 하나냐고? 지금 내 지상 과제는… 총 상금 3000LP를 전부 꿀꺽하는 거거든. └ 이 참가자는 대체 포지션 결정전에서 왜 빈집을 찾고 있는 거임? └ 유입 어서 오고 ㅋㅋ 그야… 땅 판다고 LP 안 나오니까? 포지션이야 뭐, 아무 데나 가면 되는 거 아닐까. └ 왜냐면… 우리 방장은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쓰는 편이거든. └ 제일 잘 쓰는 무기는 삽이긴 한데……. 몇몇 내 방 붙박이 성좌 형님들은, 이미 내가 빈집 포지션을 찾아갈 걸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긴 했지 뭐. 솔직히 포지션별 1위 상금이든 토탈 1위 상금이든……. 이건 둘 다 전략만 잘 짜면 무조건 먹을 수 있는 돈인데… 무려 이건율이 이걸 포기하는 게 말 안 되는 거 아닐까? └ 쌀숭이 마인드ㄷㄷ └ 그런데 왜 나도 설득될 것만 같지? ㅅㅂ 그런 의미에서 빠르게 포지션 분석에 들어갔다. 일단 절대 기피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바로 근거리 딜러다. 뭐, 모두 공평한 스펙으로 경쟁하는 컨텐츠인 만큼… 이성환 상대로도 못 이길 거 없기는 한데……. 그렇다고 참가자들 중 최고 실력자가 두 명이나 포진해 있는 포지션에 들어가서, 힘들게 1위 경쟁을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마법사도 쉽지 않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강소희도 상당히 빡빡한 경쟁상대인데… 권유나라고 무려 47레벨 화염 마법사도 만만치 않아 보였거든. 그렇다면 힐러? 힐러는 경쟁이 어렵진 않지만, 아예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포지션이다. 신성력이 없으면 아예 뭘 해보는 게 불가능한 역할군이니까. 그러니 결국……. 탱커와 원거리 딜러만 남았다. 여기 방금 탱커를 고른 인욱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얘 정도야 뭐. “형님, 안 고르세요?” 눈이 마주쳤더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그래. 탱커 포지션에선 네가 1등 한번 해봐라, 인욱아. 설마 이성환이 검사 던지고 중갑보병 들어오진 않겠지. 띠링-! [‘궁병’ 포지션을 선택하셨습니다.] └ 그런데 방장, 이성환은 근딜보다 탱커 쪽으로 들어올 확률이 높지 않음? └ 더 높은 건 아니고 반반쯤일 듯 ㅋㅋㅋ └ 마음 약해진 척 뭔데 ㅋㅋㅋ 그냥 이성환 피해서 튄 거면서 ㅋㅋㅋㅋㅋ 어허, 쓸데없이 예리하단 말이지. 굳이 그런 거 따지지 맙시다 형님들. └ 그래도 뭐, 오랜만에 방장 활 쏘는 거 보는 건 나쁘지 않네ㅇㅇ └ 하긴, 대이브 궁술이 또 보는 맛이 기가 막히긴 하는데. └ 여기 방장 활도 쏠 줄 암? └ ㅇㅇ 유입들 많아져서, 오늘 첨 보는 친구들도 많을 듯? 성좌들과 잠시 잡담을 떨고 있는데, 함께 들어온 참가자들이 꽤 당황한 표정으로 날 응시한다. “형님, 활… 잘못 고른 거 아니죠?” 사실 마력총 다루는 옆에서 걸 본 강소희야 별 감흥 없을지 몰라도, 나머지 두 사람 입장에선 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잘못 고른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와우. 기대되는데요?” “내 클래스가 좀 잡탕 느낌이라…….”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는데, 우리 모두의 눈앞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모든 인원이 포지션 선택을 완료하여,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제 곧, ‘서리 거인’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경고 메시지와 함께, 성벽 너머에서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적이다!! 적들이 몰려온다! 전원 전투준비!!” * * * 올해 스물여섯인 전인욱은, 원래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군 복무 이후 3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님의 곰탕집 운영을 도와주던 평범한 26살의 남자. 190cm에 육박하는 거구에 타고난 장사라는 점은 조금 특별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이 특별해진 건, 일 년 전쯤 우연히 찾아온 ‘각성’이라는 기회 덕분이었다. [띠링-!] [잠재된 '파장(Wavelength)'을 감지합니다.] [시스템 적합성 심사 중…… 승인 완료.] [축하합니다. 당신은 ‘플레이어’로 각성하셨습니다.] [성좌의 게임, ‘라이카(Laika)’ 클라이언트에 접속 권한이 부여됩니다.] [서버 : 지구 (Earth Server)] 아마 이렇게 각성의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니었다면, 인욱은 유치원 체육 교사가 됐을 거였다. 부모님을 도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을 돌본 경험 덕인지, 인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꽤 적성에 맞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각성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헌터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평생 곰탕집을 운영하며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고, 같은 맥락에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직접 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헌터가 되었다. 다행히 운도 따라줘서, 방어 특화 히든 클래스까지 얻게 되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1차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전직 클래스 : 아이언 포트리스(Iron Fortress)] 각성 이후,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불과 반년 만에 43레벨. 타고난 피지컬은 탱커로서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이야, 인욱이 이러다 랭커 되는 거 아냐?] [전인욱님? 저희 길드에 가입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인욱님 정도 재능이라면…….]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지독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턴지, 성장이 멈춰 버렸으니까. ‘벽이 느껴진다.’ 이건 단순히 레벨이 잘 안 오르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탱커로서의 기량이 정체된 느낌이랄까? 탱커 특성상 솔로 플레이가 어려운 건 당연한데, 그렇다고 파티를 구해서 들어가면 마치 파티원들의 보모가 된 것마냥 답답했다. 탱킹을 한다기보단 자꾸 다른 파티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느낌이었고, 그러다 보니 전투 역량은 전혀 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게 인욱이 <헌터즈 스쿨>에 지원한 이유였다. 여기서 대한민국 최고의 멘토들에게 뭔가 배운다면, 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헌터즈 스쿨에 합격해서 와보니. 멘토들을 본격적으로 만나보기도 전부터, 기대했던 것보다 재밌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일단 입학 미션에서부터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협력 플레이를 해볼 수 있었으며……. [유나 님! 전방 11시 방향, 얼음 골렘 셋! 제가 방패로 밀어낼 테니까, 딱 3초만 대기해주세요!] [네, 사거리 확보했어요. 신호 주시면 바로 ‘플레어 버스트’ 꽂을게요!] 동료들의 압도적인 재능도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야, 성환 님은 진짜 말이 안 되네.] [대체 앞 라인에서 탱킹 다 하면서 후방 상황은 어떻게 캐치한 거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재밌어 보이는 형님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짜릿함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서바이벌에서 남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내딛는 것만큼, 확실한 생존 전략은 없으니까요.] 전인욱의 시선이 옆에 선 이건율에게로 향했다. 입학 미션이 시작할 때만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무려 이성환 박하준을 누르고 1위에 등극한 남자. 그와 동시에 그랜드 아르카나에 입소하는데… 목욕 바구니를 소중하게 챙겨온 유일한 참가자. [형님, 사우나 좋아하세요……?]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까지 새어 나오는 광경이었지만, 덕분에 내적 친근감이 상당히 생긴 형님이었다. 하지만 재밌는 건 재밌는 거고……. ‘그래도 활이라니.’ 전인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잡탕 클래스라지만, 이 강풍이 몰아치는 협곡에서 활을 선택하다니.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탓일까? 저건 자신감이라기보단, 경험 부족에서 오는 객기에 가까워 보였다. ‘이 형님 어쩌면, 다음 미션에서는 A등급이나 더 아래로 내려가실 수도 있겠구나.’ 철컥- 성벽 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전인욱은 방패 손잡이를 꽉 쥐었다. 우리 재밌는 형님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켜 드리려면, 자신이 좀 더 잘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9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성벽 아래, 자욱한 눈보라를 뚫고 ‘서리 거인 군단’의 선발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털로 뒤덮인 설인(Yeti)들과 얼음 갑주를 두른 늑대들이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광경은, 상당히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야……. 요정 세리아에게 가장 많이 시달렸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여기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이었으니까. [일단 여기서 증명이 안 되시면, 그냥 접고 바로 다른 클래스로 넘어가면 되는 거예요. 알겠죠?] [최소한 1200점! 1200점 못 넘길 거면, 그 포지션은 쪽으로는 손도 대지 말아야 한다고요!] 모든 조건이 항상 동일한, 말 그대로 역량평가를 위해 만들어진 환영 던전인 만큼. 이곳은 세리아의 입장에서 내 재능을 알아보기 가장 좋은 시험대였었다. 그런데 웃긴 건. 난 여기 존재하는 모든 포지션에서,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전부 1200점 이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그러니 결국 이 환영 던전은, 내 재능의 거름망으로서 역할을 전혀 못 한 셈이다. “막아!!”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인욱이 거대한 타워 실드를 앞세우고 성벽 난간에 몸을 밀착시킨다. 콰아앙! 올라오려던 설인의 머리통을 방패로 찍어 누르며, 그는 목청껏 소리쳤다. “제가 이쪽 루트 막아볼 테니까, 뒤에서 딜 포지션 잡아주세요, 형님!” 이 친구 싸우는 건 오늘 처음 보는데, 첫인상부터 꽤나 흥미롭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움직임이나 포지션부터, 탱커로써 근본이 있다고 해야 할까? 쿵- 쿵- 자세히 보니 클래스도 히든 클래스인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쿠우웅-! 방패로 적을 밀어낼 때마다, 온몸을 휘감으며 빛나는 새하얀 빛무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저건 아이언 포트리스 클래스의 가장 근본이 되는 패시브 스킬이었으니까. ‘곰처럼 생겨서는… 생각보다 인재였잖아?’ 뭐, 굳이 날 엄호해주는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와주겠다는데 사양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보여줄 차례였다. 기리릭-! 일단 화살통에서 두 대의 화살을 꺼내어, 동시에 시위에 걸고 천천히 당겨 올렸다. └ ??? └ 얘 지금 뭐 하는지 아시는 분? └ 이건 나도 처음 보는데? └ 방장;; 지가 무슨 아케인 레인저(Arcane Ranger)인 줄 아는 거 아님? 이어서 성좌들의 태클은 가볍게 무시해준 뒤. 피이잉-! 그대로 시위를 놓아, 설인 두 마리의 머리통을 뚫어주었다. [‘프로즌 예티’ 몬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프로즌 예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두 발을 동시에 쏴서……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맞출 수 있는 거냐고?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 동안 ‘기절’상태에 빠집니다.] 그야 가까우니까. 바로 코앞에서 머리통을 뚫는 건, 멀티플 샷 같은 스킬 없이도 당연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 예……? └ 지금 뭘 본거지……? 사실 이곳 그레니스 협곡은, 궁사 클래스가 활약하기 가장 불리한 필드다. 지형지물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시야 확보가 어렵고 장애물이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가장 힘든 점은, 바로 협곡에 휘몰아치는 엄청난 강풍. 휘이이이잉-!! 그러니 여기서는 장거리 저격보다, 중단거리 크랙 플레이 위주로 궁술을 활용해야 한다. 뭐, 내가 망루 아래로 내려와 있는 이유가…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화살 세 대를 동시에 시위에 걸어 올렸다. 기리리릭- 오바하는 게 아니라, 각이 나오니까 시도하는 거다. 피이이잉-! 파파팍-! [‘프로즌 예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프로즌 예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프로즌 예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번엔 헤드샷까진 실패했지만, 그래도 세 발 모두 적중시키는 덴 성공했다. 특히 인욱이 녀석이 상대하던 예티는 목덜미가 그대로 관통당하며 쓰러졌는데……. 쿵-! 그 광경에 당황한 인욱이, 내 쪽을 돌아보며 얼빠진 표정을 할 정도였다. 타탓- 기리릭-! 하지만 몇 발 잘 맞췄다고, 절대로 안일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궁사 클래스인 참가자 중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다크호스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떤 경우에도 LP를 놓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피잉-! 피피핑-! 오랜만에 활을 잡았더니 좀 신나기도 했고……. └ 와……. └ 이 새낀 그냥 ㅁㅊ놈이다;; 덕분에 쏟아지기 시작한 후원도 아주 달달했고 말이다. [‘비탄의 수집가’님이 2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은퇴한 철혈의 교관’님이 1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잊혀진 튜토리얼의 망령’님이 25LP를 후원하셨습니다.] [‘심야의 감성 시인’님이 17LP를 후원하셨습니다.] ……후략…… 역시 활 쏘는 건 재밌단 말이지. └ 방장 화살 비싸서 싫어하는 거 아니었음? 여기선 화살값 안 들잖아요 형님들. └ ㅁㅊ;;그러네;; 이럴 때 원 없이 쏘는 겁니다, 원래. 피피피핑-! 난 원래 궁수 클래스를 할 때, 가장 싫어하는 기술이 두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난사’와 ‘속사’. 한 발 한 발 심혈을 기울여 쏴도 모자랄 판에 마구잡이로 화살을 쏴댄다니. 그건 마치 허공에 LP를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치만 그 돈이 내 돈이 아니라면? “흐.” 심지어 무한대로 쓸 수 있다면? 피잉-! 퍼퍼퍽-! 피피피핑-!! 세상에서 돈 뿌리는 것만큼 재밌는 일도 없을 거다. 아무튼 지금 진짜 재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와;;;대이브;; 이런 식으로도 플레이할 줄 알았음?ㄷㄷ └ 이건 걍 레골라스가 따로 없는데 ㅋㅋㅋ └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네 그냥;;; └ 님들; 이 사람 왜 궁수 아님? └ 우리도 모름; └ 진짜 궁수 아님? └ 일단 진짜 아니긴 해;;; 신이 나서 미친 듯이 활을 쏴대다 보니, 어느새 포지션 스코어는 200점을 뚫고 있었다. [현재 포지션 스코어 : 218] 이건 다른 참가자들의 포지션 스코어 평균보다……. [스코어 현황] [강소희(Mage) : 137] [전인욱(Tanker) : 96] [이지상(Support) : 88] 무려 두 배가 높은 수치였다. * * * 인욱은 소름이 돋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전장의 최전방. 그러니까 탱커인 자신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일선에 가까운 포지션에서……. 난생처음 보는 전투방식으로 전장을 누비는 중인 궁수 한 명의 모습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질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 그 전에 이게 과연 ‘궁수’인 건 맞을까? 피이잉―! 뭔가 특별한… 알려지지 않은 궁수 비슷한 히든 클래스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 인욱이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정말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건, 조금만 전황을 지켜봐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말이었으니까. 피잉―!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가를 스쳤고. 퍼억!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도약했던 설원 표범의 고개가 획 꺾였다. “……?” 미간 정중앙. 정확히 급소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단순히 맞춘 게 아니었다. 녀석이 뛰어오르려던 운동 에너지를 정면에서 역으로 받아치는, 완벽한 타이밍의 넉백 샷(Knock-back Shot). 표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성벽 아래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이걸… 진짜 노리고 쐈다고?’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3미터가 넘는 거구를 가진 ‘서리 오우거’. 녀석의 몽둥이 찜질을 인욱이 방패로 막아내려던 바로 그 순간. 피핑-! 두 발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오우거의 오른쪽 손목과 오른쪽 눈을 동시에 타격했다. 크워어어-! 급소를 가격당한 오우거의 공격 궤적이 크게 틀어졌고. 인욱의 방패를 부술 듯 내려찍으려던 몽둥이는, 허무하게 성벽 바닥을 때렸을 뿐이었다. 인욱의 입장에서 이건, 밥을 숟가락에 퍼서 떠 먹여주는 수준의 플레이였다. “핫!” 방패로 오우거의 중심을 무너뜨린 인욱은, 도끼로 녀석의 목을 베어 넘겼다. 이어서 인욱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역시나 이건율이 있었다. 팅- 피이잉. 그저 기계처럼, 호흡 한 번에 화살 한 발씩을 쏴대는 괴물 같은 참가자. ‘이 형님…….’ 잠깐이나마 그가 활을 집은 걸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수준이었다. ‘원래 궁수였구나.’ 입학 미션에서 언월도를 사용할 줄 알았던 걸 보면, 뭔가 이렇게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는 특수한 궁수 계열의 히든클래스인가 보다. 세라피스트인지 뭔지 클래스 이름부터 처음 듣는 느낌이더라니. 확실히 그런 종류의 클래스인 게 분명했다. ‘역시 1위는… 운 같은 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성환의 플레이를 봤을 때도 소름 돋게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지금 이건율이 보여주는 플레이는… 인욱이 보기에 그런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활을 백발백중 잘 쏘는 것도 잘 쏘는 건데……. 이건 단순히 활을 잘 쏘는 수준이 아니었다. 건율의 화살은 거의 모든 순간. 전장에서 가장 필요한 위치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피이잉-! 이건 전장 전체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플레이였다. 특히 가장 소름 돋는 순간은, 자신의 방패 각도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시선이 어디를 놓치고 있는지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지원 사격이 들어올 때였다. 그런 순간, 순간마다 인욱은… 어떤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플레이가 가능하다니…….’ 랭커 클래스의 궁수와 파티 플레이를 하면, 이런 느낌을 받아볼 수 있는 걸까? 솔직히 인욱은 이제껏, 탱커 포지션이 베이비 시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었다. 40레벨이 넘을 때까지 파티 플레이를 할 때마다, 거의 대부분 자신의 역할은 위험에 빠지려는 딜러들을 캐어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제대로 된 딜러를 만나니, 이제까지의 파티 플레이가 뭔가 잘못됐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지원 사격이, 이렇게까지 전장의 안정감을 높여주다니. ‘이게 진짜 딜러구나.’ 인욱은 감탄을 넘어, 감격에 이를 지경이었다. 철컥-! 전인욱은 방패를 고쳐 쥐며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지원 사격 덕에 플레이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사고가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쿵- 쿵- 파앙-! 그래서 인욱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이 형님만 잘 따라다니면…….’ 최근 꽉 막혀있는 느낌이던 자신의 성장혈이, 다시 뚫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이제 더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인욱은,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형님… 또 뭐… 하시려는 거지?’ 갑자기 잘 쏘고 있던 활을 등에 걸쳐 멘 이건율이 전장에 쓰러진 아군 병사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스르릉- 철컥. 검 한 자루와 방패 하나를 주워 장착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9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쿠우웅―! 거대한 진동이 방패를 타고 손목까지 전해져 왔다. 내리꽂히는 ‘서리 거인 장군’의 도끼날은 무식할 정도로 육중했다. 보통의 탱커였다면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압도적인 중량감. 하지만 이성환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궤도가 뻔하다면…….’ 그는 도끼가 닿는 순간, 미세하게 방패의 각도를 틀었다. 힘을 힘으로 맞받아내는 건 하수다. 상대의 힘을 옆으로 흘려버림과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자신의 공격 기회로 삼는 공방일체의 기술이야말로 방패술의 묘미. 콰직! 크르르극-! 충격이 흘려진 틈을 타, 이성환의 타워 실드 모서리가 거인의 무릎 관절을 정확히 찍어 눌렀다. 거대한 덩치가 휘청거리는 순간. 이성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 그의 오더가 떨어지기 무섭게, 후방의 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쏟아부었다. 핑- 피피핑-! 그리고 거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빈틈을 보이는 그 찰나의 순간. 이성환은 망설임 없이 도약했다. 서겅-! 단 한 번의 깔끔한 검격. 그것으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쿠쿵- 거대한 서리 거인이 쓰러지며 일으킨 눈보라 속에서, 이성환은 천천히 방패를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던전 클리어] [최종 기여도 점수: 1,253점] ‘1,250점대라…….’ 이성환은 내심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 위주의 포지션인 탱커가 기여도 점수에서 고득점을 받기란 쉽지 않다. 1,000점만 넘어도 탱커 중에서는 충분히 상위권에 속하는 득점. 그런데 1,253점이라니. 이건 단순히 잘한 수준이 아니라, 탱커 포지션으로서 달성할 수 있는 한계치를 일부 극복해 낸 점수였다. ‘나쁘지 않았어.’ 이성환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던전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헌터즈 스쿨> 참가 전 달성해봤던 최고 점수와 3점밖에 차이 나지 않는 점수. 이 정도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적어도 탱커 포지션에서 자신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참가자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점수가 전체 1등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1등은 아마… 이건율. 그 사람이겠지?’ 한 참가자를 떠올린 이성환의 표정이 가볍게 상기되었다. 입학 미션 전체 1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주인공. 사실 많은 참가자들은 그를 두고 ‘운이 좋았다’거나, ‘히든 피스를 독식한 럭키 가이’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방송용으로 만들어진 거품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환의 생각은 달랐다. ‘운? 그럴 리가.’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입학 미션의 마지막 순간… 이건율이 보여줬던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말이다. 혼잡한 전장의 상황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성환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불필요한 동작이 단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움직임. 그건 단순히 좋은 아이템을 주웠다고 해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타고난 감각 없이는 절대 해낼 수 없는 플레이였어.’ 그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느낀 그 전율이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진짜였는지. ‘만약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성환은 굳게 닫힌 던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분명 뭔가를 보여줬겠지.’ * * * 3시간이 지났다. S등급부터 F등급까지. 모든 참가자들의 <포지션 결정전>이 모두 끝났다. 마지막 조까지 공략이 끝나자, 제작진은 참가자 전원을 다시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제까지 들떠있던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순위 결정전>의 결과가 발표될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연병장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의 점수를 조심스레 물어보기도 했다. “너 몇 점 나왔어?” “870점…. 아, 바람 때문에 화살이 꽤 빗나가서…….” “난 992점. 1,000점 넘기기 진짜 빡세네.” “992면 엄청 잘했는데?” “그나저나 유나 님은 1100점도 훨씬 넘기셨다던데, 대체 어떻게 하신 거지?” “미쳤다. 1100이라고?” 점수대는 다양했다. 800점에서 1000점이 넘는 기록들까지. 그 와중에 재밌는 건, 그래도 확실히 높은 등급을 받은 참가자들이 이 포지션 결정전 점수도 대체로 높다는 점이었다. 참가자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점수 집계를 마친 멘토 서지혁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역시 <헌터즈 스쿨> 루키 멘티님들답게, 전체적인 수준이 상당히 높더군요. 시즌2 때의 평균 점수보다도 조금 더 높은 점수가 기록되었습니다.” 서지혁의 시선이 참가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포지션 결정전] 녹화분에서 김신우 캐스터는 스튜디오 진행을 맡았기 때문에, 서지혁이 간결하게 사회를 보고 있었다. “사실 긴 말은 필요 없겠죠? 바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약속대로 각 포지션 별 1위에게는 1,000 LP가 즉시 지급됩니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내는 고요해졌다. 서지혁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랐다. “먼저, 탱커 부문입니다.” [탱커(Tanker) 1위 : 이성환 (1,253 pts)] 스크린에 점수가 뜨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와… 1,200점?” “탱커가 저 점수가 나온다고? 사실상 딜탱 다 했나 본데?” “역시 이성환이다….” 압도적인 점수 차이. 포지션 내 2위와의 격차가 무려 200점 이상 벌어진 결과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이성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다음은 근거리 딜러 부문.” [근거리 딜러(Warrior) 1위 : 박하준 (1,265 pts)] “오오!” 이번엔 조금 다른 종류의 탄성이었다. 이성환의 점수를 근소한 차이로 앞선 박하준. 야수 같은 눈빛을 한 소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12점 차이. 하지만 포지션 차이를 감안한다면, 누가 우위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숫자다. 그런데 진짜 재밌는 건, 바로 지금부터의 발표 결과였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예상했던 결과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씩 예상을 빗나간 결과들이 나왔으니 말이다. 일단 마법사 포지션부터 따지자면……. [마법사(Mage) 1위 : 강소희 (1,257 pts)] 강소희가 마법사 전체 1등을 한 부분까지는 예상 범주 바깥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점수였다. “와, 소희 님이 1등이라고?” “1257점……? 약간이지만 이성환보다 높잖아?” “미쳤다……. 유나 님이 1190점대라고 하셔서 1등이실 줄 알았는데.” “캬.” “마법사가 탱커보다 점수 따기 좀 쉽긴 하겠지만…….” 강소희가 이성환보다도 살짝 높은 점수를 기록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다. 이성환의 입장에서도 이건 꽤 놀라운 점수였다. ‘강소희라. 눈여겨봐야겠는걸.’ 그리고 힐러 부문의 1등. [힐러(Support) 1위 : 박진우 (1,206 pts)] 이건 조금 다른 의미에서 참가자들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진우 님 A등급 아니었어?” “와, A등급에서 포지션 1위가 나오기도 하네.” 박진우는 포지션 별 1등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S등급이 아닌 참가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결과도, 결코 마지막에 발표된 원거리 딜러 포지션의 결과보다 충격적일 수는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원거리 딜러 부문입니다.” 지이잉- “궁수는 누구지? 배주하인가?” “이번 맵 바람 때문에 궁수들은 다 죽 쒔다던데…….” “1,000점 넘는 사람 없을 수도 있어.” “그래도 주하 님은 무조건 1,000점은 넘었지.” <그레니스 협곡>은 궁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맵이다. 강풍이라는 환경 변수 때문에, 원거리 딜러들의 점수가 타 포지션에 비해 낮게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단상 위에 선 서지혁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짐짓 난처하다는 듯, 하지만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이 결과는 좀 놀랍군요.” 서지혁의 말에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서지혁이 놀랄 정도의 결과? 대체 점수가 몇 점이 나왔기에? “보통 이 협곡에서 바람은 궁수들의 적이라고들 하죠. 그런 의미에서 점수도 놀랍긴 한데……” 서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솔직히 더 놀라운 건, 1등 참가자의 이름입니다.” 스크린에 마지막 숫자가 떠올랐다. [원거리 딜러(Archer) 1위 : 이건율 (1,078 pts)] “……?” 순간, 연병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결과를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점수야 놀랍긴 해도 예상 범주였다. 1,078. 2등과 20점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니 참가자들을 당황시킨 건……. “뭐… 뭐야?” “이건율? 근거리 딜러 아니었어?” “원래… 궁수였다고?” 침묵이 깨지자마자 경악 섞인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입학 미션에서 단 한 번도 활 쏘는 것을 본 적 없는 참가자가 원거리 딜러 포지션의 1등이라니. 하지만 참가자들의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러분.” 서지혁의 나직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단상으로 모였다. “아무래도 지금,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하나 추가로 발표해야 할 것 같군요.” 지잉-! 서지혁이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스크린이 다시 한번 전환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떠오른 것은……. [전체 포지션 1위 : 이건율 (2,038 pts)]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파괴하는 결과물이었다. “…….”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해버린 참가자들은, 멍한 표정이 되어 두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아니, 원거리 딜러로 1,070점대 아니었나? 그럼 2,000점이라는 점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다른 포지션 점수가 천 점이나 더해졌다고? 병과는 하나만 선택할 수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런 참가자들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서지혁도 실소를 흘렸다. “지금까지 저도 이런 점수는 처음 봤습니다만…….” 서지혁이 이건율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묻고 싶네요, 이건율 참가자님.” “예?”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짓을 해야…… 궁병으로 들어가서 탱커 340점, 근거리 딜러 460점, 서포터 160점을 달성할 수 있는 겁니까?” * * * <등급 결정전>이 마무리된 뒤. 저녁 식사까지 마친 참가자들에게는, 드디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식사를 마친 7시부터 팀 발표가 있을 9시까지는, 특별한 일정 없는 프리타임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멘티 참가자들은 식사를 마친 뒤, <그랜드 아르카나>의 엔터테인먼트 시설들을 즐기느라 분주했지만……. “캬… 여기가 천국이지.” 칼같이 숙소에 돌아온 나는, 깔끔하게 샤워한 뒤 옷을 갈아입고는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과장 조금 보태서 가로로 세 바퀴 정돈 굴러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광활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그야말로 행복감이 충만하달까? 침구는 또 왜 이렇게 부드럽고 푹신한지. 통째로 사서 우리 집 내 방에 들여다 놓고 싶을 정도다. ‘내 방에 안 들어갈 크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난… 관리국 거래소 어플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행복을 누리는 중이었다. 물론… 이 행복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게, 포지션 결정전 상금 3,000LP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 솔직히 2038점은 3,000LP 받아먹을 자격 있긴 해 └ 대체 어케했누ㄷㄷ └ 랭커들도 총점 1700점을 넘는 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ㅅㅂ └ 애초에 ‘다중 포지션 점수 파밍’같은 걸… 시도한 놈이 이 미친 놈 하나 뿐인 게 아닐까? 스펙이 모두 공평한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은, 당연히 랭커라고 해도 엄청난 기록을 세울 수 없다. 모두가 50레벨에 정해진 장비밖에 쓸 수 없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다만 그래도 랭커들이 점수가 높은 이유는, 랭커가 되는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노하우와 스킬들이 재능에 더해졌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2천 점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일인 다역을 불사한 ‘다중 포지션 점수 파밍’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활만 빡시게 쐈어도 전체 1등 까지 할 가능성이 있긴 했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건 언제나 있는 법이잖아? 그러니 난 그저… 3000LP를 먹을 수 있을 가장 확률 높은 플레이를 택한 것뿐이란 말이지. 나 말고 이런 짓거리를 시도할 놈도, 시도할 수 있는 놈도 없을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 근데 다 필요 없고 방장아… 대체 왜 궁수 안 한 거냐ㅠ 궁수 했으면 무조건 랭커 각인데ㅅㅂ 올려치기 하지 마시죠, 형님들. 아무리 그러셔도… 궁수는 안 한다니까요? └ 아니 대체 왜? 어쩌면 니가 최재민보다 잘 쏠 수도 있음; 어허, 왜들 이러실까. 어떻게 한낱 멘티가 하늘 같은 멘토님보다 활을 잘 쏠 수가 있겠습니까? 제 궁술… 그 정도 아니거든요? 다른 참가자들도 바람 적응만 좀 잘했으면, 충분히 고득점 할 수 있었을 텐데……. └ ㅅㅂ! 데이브 쉑… 요즘 티배깅 웬일로 안 하나 했네 └ 데이브 제 1초식 기만질 나왔누 ㄷㄷ 그런데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성좌들과 낄낄거리며 노닥거리고 있던 그때. 철컥-!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아니, 룸메님이 방에 들어오셨다. └ 헉;; └ 강소희다;;; └ 방장! 기상!! 아니, 왜 뭐! 내가 내 침대에서 왜 일어나야 하는데? “…….” 하지만 생각과 몸은 이미 따로 놀고 있었다. 왜인지 난…… 이미 벌떡 일어나 있었으니 말이었다. 9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은 채, 룸메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셨…… 어?” 그런데 인사를 건네려던 다음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는 강소희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이거 설마……. “저기, 소희 씨?”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내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툭. 스르륵. 그녀가 걸어가면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졌다. 더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아주 거칠고 다급한 손길이었다. “……!” 덕분에 기겁한 나는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이거 진짜 아닌데.’ 지금 이건 내 헌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머리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잠깐, 카메라! 저기 위에 카메라 돈다고!’ 이건 방송 사고를 넘어, 내 헌터 인생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는 대형 스캔들 감이다. “소, 소희 님! 잠깐만요! 진정해! 저기 렌즈 안 보여요?!” 다급하게 외치던 내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 박혔다. 가느다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저 증상… 모를 수가 없다. 역류의 전조현상. ‘아직 터질 정돈 아닌 거 같은데.’ 예상했지만 단순히 더워서 벗는 게 아니었다.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견디지 못해 허덕이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쾅. 내 추측이 끝나기 전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는 점이었다. 곧이어 쏴아아― 하는 거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찬물이라도 끼얹고 있겠지. “……하.”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대형 방송 사고는 면했다. 남겨진 건, 덩그러니 서 있는 나와 바닥에 처박힌 재킷뿐이었다. “……아니, 근데 저건 좀 주워야….”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하얀색 재킷을 주워 들었다.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손에 닿는 감촉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장통에서 파는 까끌까끌한 옷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 딱 봐도 비싼 원단인 게 티가 났다. 아마 한 달 동안 내가 입을 옷 다 합쳐도 이거보단 싸지 않을까 싶은… 그런 수준. 탁- 나는 옷을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어 주었다. 이런 비싼 걸 바닥에 구겨서 처박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아팠던 것 같다. 음… 생각해 보니 강소희한테는 딱히 비싼 옷이 아니었던 걸지도……. └ 뭔데; 쟤 또 마력역류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좌 중 누군가도 강소희의 증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사에 대한 지식이 좀 있는 사람이면, 방금은 충분히 의심 가능한 수준의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그런데 뭔가 확실히 좀 이상하다. 마력 역류라는 게 원래… 이렇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 절대로 아니거든. 뭐, <포지션 결정전> 때 마력을 꽤 많이 쓰는 것 같아 보이긴 하던데. ‘으음.’ 욕조 방향을 잠깐 응시한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물어볼까 싶다가도, 괜히 오지랖인가 싶고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일반적인 마법사보다 꽤 자주 마력 역류로 고생했던 것 같은데…… 혹시 베놈 블러드 클래스 특징 같은 건가?’ 잠깐 미치광이 NPC를 떠올렸던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귓가를 때리는 물소리가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서, 쉽사리 다시 눕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컥-!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더니, 강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율 님.” “어, 네?” “혹시 그때 그… 패치.” 편의점에서 만들어줬던 거 말하는 건가? “그거 다시 만들어줄 수… 있어요?”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여긴 그때와 다르게 재료가 없……. “제 캐리어 앞칸 열면 들어있어요. 꺼내서… 좀 부탁드릴게요.” 검색대에서 보니 온갖 약품들이 들어있긴 하던데… 내가 패치 만들 때 썼던 약품들도 기억해서 챙겨온 모양이다. 어…….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 정돈 해줘야지 어쩔 수 있나. 지이익- 지퍼를 열자 그녀의 말대로 필요한 약품들이 들어있었고, 냉각 패치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볼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그것들을 꺼낸 나는 분주히 냉각 패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처럼 만들려면, 냉각수 파이프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우웅-! 그건 다행히 대체 불가능한 재료가 아니라는 말씀. 간단한 냉기 덩어리를 만드는 정도는, 술식을 심상화하는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 뭔데;; 마법은 또 왜 쓰는데;; └ 뭐야; 무서워;; └ 마법 쓰는 거 두 번째로 보는 듯? └ 엥? 이전에도 쓴 적 있었다고? └ ㅇㅇ 전직퀘 할 때 쓰는 거 봤었음. ㄹㅇ미친 놈인줄. └ 그럼 이놈 아까 마법까지 썼으면, 2천점보다 더 올릴 수도 있었겠네? └ 그건 모르겠네. 아마 그거까지 건드리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성좌들이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지만, 그건 신경 쓰지 않고 패치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옷까지 다 챙겨입은 강소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자, 여기요.” 내가 건넨 패치를 받아 든 강소희는 꽤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잠시 후. 강소희가 옷 안쪽으로 패치를 넣어 붙인 바로 그 순간……. “……!” 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 * 촤아아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살이 아릴 정도로 낮은 수온이었지만, 강소희는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가, 이 차가운 물마저 미지근하게 느껴지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으드득…….’ 그녀는 타일 벽을 짚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독한 열기였다. [포지션 결정전]에서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한 대가가, 이제야 덮쳐오고 있었다. 이미 약은 먹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조절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후우…….” 흐르는 물줄기 사이로 잠시 크게 숨을 내쉰 강소희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잠시 곱씹었다. ‘……모르겠어.’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고통 때문일까? 아직 찾아내지 못한 실마리가 아쉽게 느껴졌다.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 [그럼 잠깐만 같이 좀 앉아있어요. 저쪽 경치가 좋네.] 최대한 그의 곁에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느낄 수 없었던 <얼어붙은 서울>에서의 그 감각. [옆자리, 앉아도 되죠?] 특히 캐리지를 타고 이동할 땐 완전히 옆에 붙어있었음에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 속의 청량하고 맑은 그 냄새. ‘분명… 묘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강소희는 오늘 꽤 이건율의 근처에 붙어있었음에도, 그때 <얼어붙은 서울>에서 느꼈던 그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청량함을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가까운 그와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 심장을 옥죄어 오던 답답함이 아주 미세하게 옅어지는 듯한 기분은 들었으니까. 마치 꽉 막힌 방에 아주 작은 창문 하나가 열린 듯한, 그런 정도의 미묘한 해방감이랄까? 하지만 이건 그냥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기분 탓이었을까?’ 그래서 닥터 최의 냉정한 진단이 귓가에 맴돌았다. [제가 여전히 회의적인 이유입니다. 그건 그저 던전의 특수한 환경 탓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삼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느낌조차도, 어쩌면 간절함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확신할 수 없는 그 감각에 비해……. “으윽……!” 지금도 닥쳐오고 있는 이 고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허억, 허억.” 심장이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찬물로도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쓰러져서, 119에 실려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헌터즈 스쿨>이고 뭐고, 강제 하차는 불 보듯 뻔한 일. ‘도움을… 받아야 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밖에 있을 건율이었다. 어쨌든 지난번 그가 만들어줬던 냉각 패치만큼, 효과적인 대처는 없었으니까. 강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젖은 몸을 대충 닦아내며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건율 님.” “어, 네?” 강소희는 끓어오르는 식도를 억지로 열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혹시 그때 그… 패치.” “…….” “그거 다시 만들어줄 수… 있어요?” “제 캐리어 앞칸 열면 들어있어요. 꺼내서… 좀 부탁드릴게요.” “그러죠 뭐.” 다행이었다. 거절했다면 정말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그가 약품을 배합하는 사이, 다시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직 심장을 옥죄어오는 이 열기를 식히고 싶은 생각뿐. 그렇게 다시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이미 패치를 완성한 상태였다. “자, 여기요.” 그가 건네준 거즈 뭉치에서는 하얀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소희는 그것을 받아 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그러고는 셔츠 단추 사이로 손을 넣어, 열기로 달아오른 왼쪽 가슴팍에 패치를 밀어 넣었다. 그런데……. 차가운 거즈가 피부에 닿은 바로 그 순간. “……!” 강소희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이게… 대체 뭐지?’ 9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과열된 체온 덕에 온몸을 휘젓고 있던 강렬한 독 기운이… 단순히 제어되는 수준을 넘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이건 결코 기대했던 수준의 감각이 아니었다. ‘……!’ 지난번 <얼어붙은 서울>에서 붙였던 패치와도 결코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효과가 굉장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결국 열기를 잠재우는 역할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다. 치이이익― 패치가 맞닿아있는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청량한 기운. 그 기운은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이건 마치 용암이 끓던 화산에 거대한 빙하를 통째로 집어넣은 듯한 감각이었다. 미쳐 날뛰던 체내의 독기가, 패치가 닿은 지 불과 몇 초 만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패치의 냉기가… 직접적으로 체내의 독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말도 안 돼…….’ 효과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에스쿨랩에서 개발한 수천만 원짜리 신약 ‘블루 캡슐’을 혈관에 직접 주사해도, 이 정도 속도로 진정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고작, 급하게 배합한 약품을 묻힌 거즈 한 장으로? 스르륵.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당연히 열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숨도 쉬기 힘들었던 게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평온’ 상태가 찾아왔다. 강소희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남은 약품들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대체 뭘 한 거지?’ 머릿속의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삼촌이 말했던 그 ‘특별한 요소’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예를 들면…… 아가씨의 독혈과 완벽하게 상반되는 파장을 가진 마력을 지녔다거나. 혹은 체내에 특수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종의 ‘이레귤러(Irregular)’일 가능성 말입니다.] 강소희의 시선이 약품을 정리하는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끝에 딱 멈췄다. 약통 뚜껑을 닫고 있는 그의 검지와 중지.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새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차가운 약품이 묻은 게 아니었다. 마치 피부 안쪽에서부터 냉기가 뿜어져 나와, 공기 중의 수분을 얼려버린 듯한 결정체. ‘저건…….’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강소희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탁- “……?” 약통을 내려놓으려던 이건율의 손목을, 그녀가 덥석 움켜잡았다. 그가 흠칫 놀라며 쳐다봤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살갗이 맞닿는 그 순간. 치이이잉― 패치를 붙였을 때 느꼈던 그 ‘청량한 기운’이, 손목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으니까. 마치 고압 전류가 흐르듯 찌릿하면서도, 동시에 타는 듯한 목마름이 단번에 해소되는 듯한 기묘한 쾌감. 그리고 동시에. ‘아…….’ 코끝으로 훅 끼쳐오는 냄새. 낮에는 긴가민가했던 그 향기가, 지금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숲속의 젖은 흙내음 같기도 하고, 눈 덮인 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 같기도 한……. 머릿속을 맑게 씻어내리는 듯한 청명한 향기. 그 향기가 코끝에 닿자, 심장 부근에 아주 미세하게 남아있던 잔열마저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 강소희는 멍하니 그의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이 편안한 감각에 취해 있고 싶다는 본능만이 앞선 상태였다. “저기… 소희 씨?” 조심스럽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 그제야 강소희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앞에는 이건율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잡힌 손목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진맥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하는 뚱한 표정. “아……!” 강소희는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손을 홱 놓았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한 것이다. 다짜고짜 남의 손목을, 그것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잡고 있었다니. “미, 미안해요. 제가 실수를…….”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의 마력 역류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평소의 차분하고 날카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자신의 꼴이라니. ‘미쳤어, 강소희. 진짜 미친 거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율은 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뭐, 아직 좀 어지러우신가 보네요.” 그의 무덤덤한 반응이 오히려 더 민망했다. 묘하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려던 찰나. 치직―. 천장에 달려 있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참가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잠시 후 9시부터 컨벤션 홀에서 ‘최종 팀 편성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모든 참가자분들은 지금 즉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세주였다. 강소희는 도망치듯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방문을 열고 나갔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 * 덩그러니 방에 남겨진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 갑자기 손목은 왜 잡은 걸까? 보니까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아 있던데. 아마 마법사답게… 내 손에 남아있던 마력 얼음 결정들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게 신기해 보여서 확인해 보려던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 끄아아악!! └ 방장이 이렇게 행복하길 바랬던 건 아니었다고!!! 대체 이건 또 뭔 소리야? 치료비라도 따로 받았으면 모를까. └ 아오, 방장시치 ㅅㅂ └ 너어어는 진짜……. 헛소리하는 성좌들을 무시해주며, 나도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강소희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방금은 꽤 놀라웠다. 내가 건네준 패치를 붙이자마자, 강소희의 상태가 급격하게 호전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거든. 고인물 특제 냉각 패치라 그런 거 아니냐고? 솔직히… 그 정도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그건 단순히 마력열을 진정시켜줄 수 있는, 그런 구조 이상의 어떤 대단한 성능을 가진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었으면… 그것만 만들어다 팔아도 부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안 될 것 같다. 내가 만드는 급속 냉각 패치는, 10분만 지나도 마력이 흩어져서 제 기능을 못 할 거거든. 그나저나 쓸모없는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고……. “슬슬 가볼까.” 나도 얼른 룸메이트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 봐야겠다. 9시까지는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철컥- 최종 팀 편성 발표라는 걸 보니, 멘토들의 회의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지금까진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발표 시간이 도래하니 은근히 궁금해진다. 당연히 내 팀원이 궁금해졌다는 얘기다. A등급 참가자 중에서는 누가 날 골랐을지. 그리고 B, C, D등급 참가자 중에서는 누가 내 팀으로 배정되었을지……. 그렇게 괜찮은 조합이 뽑혔을지가 말이었다. ‘팀운이 좀 따라줬으면 좋겠는데.’ <포지션 결정전>에서 너무 높은 스코어를 기록한 게 갑자기 좀 걱정된다. 멘토들이 이 포지션 결정전 결과를 참고하여, 팀 밸런스를 맞출 게 분명했으니까. └ 어차피 니가 캐리하면 된다 이브야. └ 어차피 우승은 대이브! 이 형님들은 갑자기 왜 이러시지? 원래 이런 형님들이 아니었는데……. └ 속보) 성좌 커뮤에 헌스쿨 배팅룸 열림ㅋ └ 이브야, 믿고 너한테 걸어본다? 어쩐지. 갑자기 왜들 이러시나 했네. 우승 참가자 맞추는 배팅입니까 형님들? └ ㄴㄴ 그건 아니고, 탑5 저도 배팅하고 싶은데……. └ 그럼 얼른 ■■■까지 올라오셈 ㅋ 저, 당연히 정배겠죠? └ 겠냐 ㅋㅋㅋ └ 당연히 역배임. └ 포지션 결정전 때문에 2배수까지 떨어지긴 했는데 ㅋㅋㅋ └ 레벨이 젤 문제긴 함. └ ㅇㅇ; 포지션 결정전이야 전부 50레벨 같은장비로 했지만, 본미션은 레벨이며 장비며 전부 자기 꺼 쓰게 되니까. └ 35레벨 참가자를 탑5로 찍는 건 솔직히 도박이긴 해. 하, 이 형님들…… 이번에 돈 복사하시겠네. 많이 버시면 저한테도 뽀찌 좀 주셔야 합니다? └ 우리가 왜? └ ㄹㅇㅋㅋ 성좌들과 잠시 잡담을 떨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띵-! 이어서 중앙 로비까지 조금 걸어 들어가자, 정면에 화려한 컨벤션 홀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긴가 보네.’ 그런데 잠깐. 인원이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 이미 상당히 많은 참가자들이 강당에 모여 가지런히 줄 맞춰 서 있었는데……. 그 수가 대충 봐도 100명 가까이 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놀란 이유는, 강당에 모인 참가자가 S등급과 A등급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C등급 F등급 참가자들은…… 그 사이에 본인들 숙소까지 갔다가 다시 이거 하러 돌아온 거야? 왕복 두 시간쯤 걸어서? “그건 아니래요, 형.” “그래?”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B, C, D등급 참가자들도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었대요.” 마침 옆에 있던 유지상의 설명에, 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안도하냐고? 다른 참가자들이 그 정도까지 비인간적인 고생을 했으면……. 앞으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을 때마다 미안해서 조금씩 생각날 것 같단 말이지. └ 착한 척 ㄴ └ 역하다 방장아……. 어쨌든 S급 그룹을 찾아서 줄을 서고 잠깐 기다리니, 단상 위에 제작진들이 올라와 촬영 세팅을 금세 마무리했다. 이어서 단상 위로 올라온 건……. “자,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이제 익숙하다 못해 반갑기까지 한, 김신우 캐스터였다. “여기 밥 겁나 맛있습니다!” C급 참가자로 보이는 누군가의 외침에, 좌중에 웃음소리가 퍼지며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목청에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건, 저 외침이 순도 100% 진심이기 때문일 거다. 본인 숙소에서 먹던 식사와 아르카나에서 먹는 식사는… 완전히 격이 다를 테니 말이지. 그런데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우웅- 아까까지는 없었던 화려한 조명이 그를 비추자, 홀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내일부터 시작될 본 미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김신우는 좌중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멘토님들의 엄중한 회의를 통해 결정된 ‘최종 팀’을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꿀꺽. 누군가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든 참가자의 시선이 단상 뒤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집중되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신우가 손을 뻗자, 스크린에 거대한 대진표가 떠올랐다. 지이잉―! 그리고 그 스크린의 가장 윗줄에는……. 현재까지 랭킹 1위인, 내 이름이 가장 먼저 박혀 있었다. [Team 01] Leader : 이건율 (S) 그런데 잠깐. [Member 1 : 박진우 (A)] [Member 2 : 강민우 (B)] [Member 3 : 고은아 (C)] [Member 4 : 유진성 (F)] 뭔가 익숙한 이름이… 하나 껴 있는 것 같은걸……? 9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팀 편성 이벤트는 길지 않았다. 모든 팀의 구성을 발표한 뒤, 잠깐의 통성명 시간만 가진 뒤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으니까. 그런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상황이 조금 묘해졌다. 호텔 룸이라기엔 상당히 광활하긴 하지만……. 어쨌든 스위트룸에서 남녀가 한방을 써야 하는 상황이, 이제야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으니까. 사락- 강소희는 어느새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세상 편해 보이는 자연스러운 모습. 뭐, 모양새만 보면 사실 나도 비슷한 자세긴 하다. 슬쩍 밀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침대 끝자락이라는 것만 빼면 뭐……. └ 방장; 거기서 뭐 하는거임? └ 남자답게 옆에 딱 앉아야지; 느낌 ㅈㄴ 없네;;; └ 아니면 걍 지금이라도 소파로 가서 눕던가ㅋㅋㅋ └ 솔직히 소파도 걍 침대던데? └ ㄹㅇㅋㅋ 소파에서 자도 집보다 편할 듯? 그…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놉. 안 됩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아니, 내가 1등인데? 이 방을 직접 고른 주인은 엄연히 나인데, 내가 왜 소파에서 자야 한단 말인가. ‘내가 딴 건 다 양보해도… 이 푹신한 침구는 절대로 포기가 안 된단 말이지.’ 잠깐 볼만 갖다 대도 스르륵 잠들 것 같은 이 비단결 같은 극세사 이불을……. 내가 이번 아니면 또 언제 끌어안고 자보겠냐는 말이다. 이건 어쩌면, 내일 있을 미션의 컨디션이 걸린 중대사. 1박에 수백만 원이 넘는 침대를 두고 소파에서 잔다? 그런 핵 손해는 절대로 볼 수가 없다는 말씀. 그러니까……. “나, 여기서 자도 되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건율 님 자린데.” 큰맘 먹고 선언했는데, 강소희는 시선조차 책에서 떼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 심지어 한술 더 떠서 받아친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자도 되죠?” “어… 그쵸?” “됐네.” 너무 쿨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 “그런데 불은 한 시간만 이따 꺼요. 나 책 조금만 읽고.” 그녀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락, 사락. 조용한 방 안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 평온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살살 졸음이 밀려온다. 이런 게 바로 ASMR……? 뭐, 그런 건가? 스륵-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뉘었다. 푸욱- 몸을 감싸 안는 구스다운 이불의 포근한 감촉. 등을 받쳐주는 매트리스의 완벽한 텐션. ‘하… 여기가 천국이구나.’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듯한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베개에 머리를 파묻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최종 결정된 팀원들의 면면이 하나씩 다시 떠오른다. 2차 등급 결정전까지는 계속 함께하게 될 우리 팀원 네 사람. 사실 걱정했던 바와 달리, 팀 운은 크게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A등급 팀원만 봐도 그렇다. 엄마 딸의 최애이자, 힐러 포지션 최상급 매물인 박진우를 말하는 거다. [어… 그러니까. 진우 님이 직접 절 선택하신 거 맞죠?] [맞습니다, 건율 님.] [그…… 왜요? 그러니까 드래프트 때는 포지션 결정전도 하기 전이었잖아요. 제가 알기로 진우 님, A등급 중에 최고순위였을 텐데.] 입학식 미션 때는 마주친 적 없던 참가자였지만, 박진우는 사실상 S등급이나 다름없는 인재였다. 사실상 화로 수성전 마지막 피크 때 본인이 희생하면서, 아깝게 아웃되는 바람에 20위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포지션 결정전 때 힐러 포지션 1위를 차지한 것만 봐도, 말 그대로 최상급 인재가 얻어걸린 것. 그런 참가자가 이성환이나 박하준을 두고 드래프트에서 날 지목한 건, 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제가요?] [네. 대체 어떻게 35레벨로 입학미션 1등이 가능했던 건지.] [운이 좋았죠 뭐.] [저는 운 같은 건 딱히 안 믿는 사람이라.] 어쨌든 이런 최상급 인재가 굴러들어온 건 우리 팀에 가장 큰 호재였고……. ‘일단 제일 중요한 힐러 포지션이 해결됐다는 것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 거지.’ 이제 두 번째로 떠오른 건, 이 대형 호재로 인한 반작용 같은 인간이었다. [강민우 님?] […….] [이렇게 또 팀이 될 줄은 몰랐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해봅시다 우리.] 강민우는 입학미션에서 B등급을 받았지만, 데이터를 놓고 보면 사실상 B등급 중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C나 F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을, 내가 강제로 B등급까지 끌어 올려놨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포지션 결정전 점수가 800점도 간당간당한 것만 봐도 뭐……. 그러니… 이건 어쩌면 내 업보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고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입학 미션 때와는 다를 거다. 너희들 운이 좋은 거라고.] [어떻게 다릅니까?] [그건… 지켜보면 안다. 난 절대 B등급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가장 긍정적인 부분은, 강민우의 레벨이 무려 47레벨이나 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본 미션부터는… 자신의 장비를 쓸 수 있다는 점까지도. 몰랐는데, 강민우도 재벌가 로열패밀리라던가? 템빨로 치면 모든 참가자 중에서 압도적인 스펙이라고 하더라고. 컨벤션 홀에서 내 옆자리였던 지상이가 알려준 내용이다. 어쩐지… 열기 구슬을 개당 몇백 LP 주고 사려고 하더라니. └ 그때 팔았으면 몇만 LP 번 거 아님? 조용, 조용. └ ㅋㅋㅋ 구슬 안 판 거 후회되는 방장이면 개추요. 조용히 개추… 드립니다…. └ 근데 이러면 강민우도 생각보다 B등급 중에서는 괜찮은 카드일지도? └ ㅇㅇ 라이카에서 랩빨 템빨 절대 무시 못 하거든. └ 성좌 커뮤에는 강민우를 탑5로 찍은 놈도 좀 있던데 ㅋㅋ 그분들은… 혹시 기부 천사세요? “…….” 어쨌든 강민우의 본체가 템빨이라고 생각하면, B등급 안에서 평타 정도는 해 줄 수도 있다. 화력 지원용 포탑 정도로 생각하면, 생각보다 효율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고 뭐. 그러니 이 정도면, 팀 편성은 상당히 선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머지 둘. C등급과 F등급 팀원들의 역량이야, 솔직히 제대로 체감해 보기 전에 알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팀적으로 좀 아쉬운 건, 브루저 느낌의 근거리 전사 클래스가 하나도 없다는 부분인데……. 이름: 고은아 (Go Eun-ah) 포지션: 메인 탱커 나이: 20세 클래스: 방패 기사 이름: 유진성 (Yoo Jin-sung) 포지션: 서포터 나이: 25세 클래스: 마법사 ‘흐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실 내일이 별로 걱정되진 않는다. 팀 편성 결과를 떠나서…… 내일 공략하게 될 미궁이 뭔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99% 이상의 확률로 내 예상이 들어맞을 거다. 제작진이 힌트를 너무 많이 줬거든. 그러니 드래프트에서 타입 A를 고른 데에도 명확한 근거가 있었던 거고……. “하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이불 속, 은은한 조명,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종이 넘기는 소리. 모든 것이 수면을 유도하는 완벽한 환경이었다. ‘잠깐… 생각 조금만 더 정리하고 싶은…….’ 하지만 몰려오는 수마를 이길 재간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새벽 6시. 일찍 잠든 덕분일까. 요란한 알람 소리 없이, 스르륵 하고 저절로 눈이 떠졌다. 따뜻했다. 역시 최상급 구스다운인가. 오늘 날씨 엄청 춥던데, 이렇게까지 따뜻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포근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런데 등짝은 왜 따뜻하다 못해 좀 뜨겁지? ‘조금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느껴진 기묘한 촉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본 순간……. “……!” 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강소희가 내 등에 머리를 박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던 거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내 등짝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건…… 그녀의 침 자국이었다. ‘이게 뭔…….’ 자세도 상당히 이상했다. 아니, 대체 왜 직각으로 누워있는 건데? 몸은 반대편을 향해 있는데, 얼굴만 내 등짝에 박고 있는 상태. 당황했지만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내가 일어났는데도 깰 생각조차 안 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완벽한 숙면 상태. ‘잠버릇 한번 특이하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씻을 준비를 했다. 평소였다면 지금 바로 출근해야 할 시간이지만, 지금은 여유 시간이 꽤 남아있다. 그래서 간단하게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편한 옷차림으로 산책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돌아왔을 땐. 사락- 강소희도 기상해서 나갈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아니, 거의 죽어있는 것처럼 주무시더만…….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셨네? “…….”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이제 말끔해져 있었고, 어지럽게 구겨져 있던 침대 시트가 말끔히 갈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를 보니… 내가 다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일어났네요.” “네. 일찍도 일어나셨네요.”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 톤은 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무슨 새나라의 어린이세요?” “네?” “9시에 잠드는 30대는 처음 봐서요.” 아니. 그… 꼭 말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했어야만 했니? 순간, ‘30대’라는 말이 비수처럼 귓속에 박혔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직구로 날릴 건 아니지 않나요? 왠지 모르게 슬픔이 밀려왔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침대가 너무 편해서,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건 동의.” “소희 님도 잠은 잘 잔 거죠?” “덕분에 꿀잠 잤네요.” 왜 내 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꿀잠 잤다니 다행이다. 룸메이트가 컨디션이 좋아야 숙소에서도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배고프네요. 조식 먹으러 갈까요?” “그래요.” 어쨌든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아르카나 호텔의 뷔페에서 든든하게 아침 식사까지 해결했다. 그리고 오전 9시 30분. 숙소 로비를 나서자, 호텔 정문에서 대기 중인 마나 캐리지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같이 탈 사람들도 어째 익숙한 얼굴들이고……. “형님, 편안히 주무셨슴까.” 특히 전인욱 이 녀석은, 하루 사이 내가 꽤 편해진 모양이었다. “침대 진짜 말도 안 되더라고요.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단다. “일단 타시죠 다들.” “그러자고.” 캐리지에 탑승한 건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 강소희, 전인욱, 유지상 네 사람이었다. 어제와 완벽히 똑같은, 상당히 익숙한 조합. 뭐 제작진의 특별한 의도가 담긴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101호와 102호의 조합이었다. “그나저나, 캐리지까지 타는 걸 보니 꽤 목적지가 먼 모양인데요?” 유지상이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그의 말에 강소희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일단 캐리지는 타는 거 아니었나요.” “…….” 유지상의 표정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변하자, 내가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꽤 멀리 가는 거 맞아.” “음… 그래요?” “한, 두 시간 정도는 이동해야 할걸?” 내 대답에 유지상뿐 아니라, 전인욱과 강소희의 시선까지 나를 향해 쏠렸다. 대체 그걸 님이 어떻게 아시냐는 듯한 표정. 음…… 부담스러우니까 그렇게 쳐다 보지 말아주겠니? 설마 날, 제작진이 심어놓은 간첩… 뭐 그런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9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멘하르트의 화려한 마천루들이 뒤로 물러나자, 창밖 풍경은 급격하게 황량해졌다. 잘 닦인 도로는 어느새 거친 비포장길로 바뀌었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건 깎아지른 절벽과 붉은색 암석들뿐이었다. 그러니까 캐리지를 탄 지 정확히 2시간 정도가 지난 지금은……. 오전 11시 30분. 머리 위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 아래 드러난 협곡은, 그저 투박하고 메마른 붉은 빛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해질녘 협곡(Sunset Canyon)이라.’ 도착한 지역을 보자, 내 추측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니까 오늘 공략하게 될 미궁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다. 내가 처음부터 예상했던 미궁의 정체는… 바로 미다스의 정원(Midas's Garden). 바로 이 해질녘 협곡에 존재하는 유일한 미궁이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는, 하위권 참가자들 숙소에서 오히려 가까운 위치겠네.’ 나는 턱을 괸 채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진가는 이름 그대로 해가 질 무렵에야 드러나는 법이다. 저 삭막해 보이는 붉은 바위들이 석양을 정면으로 받아내면, 협곡 전체가 문자 그대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장관을 연출하곤 했으니까. 고대 귀족들이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유희를 즐겼던 이유도 바로 그 풍경 때문이었을 테고 말이다. ‘뭐, 지금은 그냥 뙤약볕 내리쬐는 돌산일 뿐이지만.’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하품을 한 번 삼킬 무렵. “다 왔나 보네요.” 덜컹거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기이익- 촬영은 11시 50분부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다. 그래도 도착한 참가자들은, 벌써 자신이 소속된 파티에 합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특히나 어제 드래프트에서… [TYPE B. 아르카나 라이브러리] 숙소를 골랐던 팀장들의 파티원들. 그들은 최대한 빠르게 모여, 미궁 공략에 대한 회의를 시작한 듯 보였다. 뭐, 보상으로 ‘정보’를 얻었으니 당연히 그걸 활용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캐리지 메이트(?)들과 빠르게 헤어진 나 또한, 얼른 우리 파티원들을 모았다. └ 방장은 미리 모여서 뭐하게? └ 친목이라도 하려고? 그럴 리가. 꼭 정보를 받아야만 정보가 있는 건 아니라는 말씀. 미궁, 미다스의 정원(Midas's Garden)에 대한 정보는… 어쩌면 제작진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자, 1팀 팀원분들 다들 모여 주시죠!” 내 부름에 모든 팀원들이 모였고, 다들 가볍게 인사부터 나눴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미션 미궁에 대한 쪽으로 넘어갔다. “다들, 무슨 미궁일지 짐작되는 부분 있으세요?” “글쎄요. 사실 어제 힌트만 가지고는… 도저히 짐작도 안 되던데.” 에이스 힐러 님이 걱정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자, 안경 쓴 남자가 슬쩍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우리 파티의 F등급 마법사, 유진성이었다. “사실 저는 도착하고 나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궁이 한 곳 있긴 한데… 뭔가 조금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상… 하다고요?”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고, 나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미다스의 정원이라고 들어보신 분 계신가요?” “저, 들어봤는데.” 박진우만 손을 들었고, 강민우와 고은아는 모르는 눈치.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오, 아는 사람이 있긴 했네?’ 유진성의 다음 말에는 조금 더 놀랐고 말이다. “사실 여기 해질녘 협곡에 존재하는 유일한 미궁이 미다스의 정원이거든요.” “오… 그래요?” “다만 제작진이 줬던 힌트가 좀 애매하네요.” “힌트라면…….” “제작진은 분명 미클리어 미궁이라고 얘기했었는데, 여긴 사실 수도 없이 클리어된 미궁이라 말입니다.” 오호. 꽤나 알고 있는 정보가 구체적이잖아? 나야 베타 서버 고인물이라지만, 저 친구는 평범한 38레벨 마법사 플레이어다. 미다스가 일반적으로 그리 어려운 미궁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38레벨 플레이어가 관심 가질 만한 곳은 아니니까 신기한 거다. F등급 재원이다 보니 가장 기대를 안 했던 친구였는데. 어쩌면 저평가 매물이었을지도? “흐음.” 어쨌든 이쯤 해서 슬슬 회의를 시작하면 될 느낌이었다. 마침 미다스 미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제작진의 이 힌트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말에 흠칫 놀란 진성이 반사적으로 반문했고. “함정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기 미다스 정원은, 지금까지 세미 클리어만 됐던 미궁이거든요.” “……!” “이따 미궁 들어가서 정보 확인해 보시면, 클리어 상태가 미클리어로 확인될 겁니다.” 내 얘기는 사실상 본 미션의 첫 미궁이 ‘미다스의 정원’임을 확정 짓는 말이었고. 그에 팀원들은 제각각 놀란 표정이 되었다. 유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팀장님께서 처음에 300LP 특전을 고르신 이유가……?” “당연히 미궁이 뭔지 예상했으니 그랬던 거죠. 여기서 LP만큼 귀한 재화는 없으니까요.” ‘미다스의 정원.’ 고대 마도 문명의 대부호 ‘미다스’가 설계했다는, 악취미적인 유희장. 이 미궁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심플하다. 그러니까……. ‘모든 기믹과 몬스터, 함정을 전부 LP로 해결할 수 있는 미친 자본주의 미궁이지.’ LP만 많으면 실력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이 클리어해낼 수 있는 미궁이, 바로 이 ‘미다스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던전이든 미궁이든, 플레이어가 클리어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또한 당연히 LP를 벌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미다스의 정원은 어지간해선 플레이어가 LP를 벌어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클리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미궁 공략 과정에서 벌 수 있는 LP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비싸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미궁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여기서만 드랍되는 퀘스트 아이템인 ‘고대 황금 주화’가 필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도전조차 잘 안 하는 곳이 바로 여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작진이 왜 여길 골랐는지도 난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결국 돈만 쓰면 안에서 위험해질 일은 거의 없는 미궁인데다… 참가자들의 각종 임기응변까지 시험할 수 있는 변수가 넘쳐나는 미궁이니까.’ 심지어 이 미궁은, 순위 매기는 방식도 아주 심플할 거다. 왜냐고? 클리어야 모든 팀이 다 하겠지만, 클리어 후 정산 과정에서 [누적 손익]이라는 항목이 생성되거든. 그러니 이 미궁 안에서 파티가 소모한 LP와 벌어들인 LP의 차익이 시스템을 통해 정확히 계산되는데……. 아마 영업이익(?) 순으로 최종 순위를 매기지 싶다. 어떤 팀이 가장 최소한의 비용으로 클리어를 해냈는지, 그게 판단의 척도가 되는 셈이다. “와… 팀장님 말씀 듣고 보니…….” 어느새 유진성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박진우도 꽤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남은 두 파티원 중 한 명은 완전히 잘못 이해한 듯 보였으며……. “여긴 그럼 내가 캐리하겠네. LP야 썩어나도록 많이 들고 있으니까.” 나머지 한 사람은……. 이해할 의지 자체가 없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팀장님 지시만 잘 따르면 된다는 거. 맞습니까?” 그나저나 얘는 말투가 왜 이래? 이게 정녕… 20세 여성의 말투가 맞는 건가? “걱정 마십쇼. 저 시키는 거 잘합니다!” “…….” 어쨌든 내가 팀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이, 협곡에 촬영 시간이 도래했다. “자, 여러분! 간밤에 잠은 다들 푹 주무셨겠죠!” 여느 때처럼 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김신우 캐스터. “드디어 <헌터즈 스쿨 3>의 첫 번째 본 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하하, 어떤 미궁인지 궁금하다고요?” “‘아르카나 숙소의 특전’ 덕에 이미 알고 계신 팀들도 있겠습니다만.” 김신우가 다시 한번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이 도전하게 될 미궁을, 지금부터 공개합니다!” 김신우가 손을 뻗자,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미션 정보 : 고대 황금의 유희장] [미궁 이름: 미다스의 정원 (Midas's Garden)] 분류: 미공략 특수 미궁 (Unconquered Maze) 제한 사항: 참가자 전원 [Lv.50] 미만으로 구성. [외부 소모품 사용 금지] 개인 소유의 장비는 사용할 수 있지만, 포션 등 소모품 아이템 사용을 시스템이 제한합니다. 모든 소모품은 미궁 내 ‘황금 전당포’에서 구매한 물건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시놉시스 (Synopsis) “가난한 자에게는 지옥을, 부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고대 마도 문명의 대부호 ‘미다스’가 설계한 악취미적인 유희장입니다. 이곳에서는 오직 ‘자본(LP)’만이 유일한 통행증이자 생명력입니다. 파산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 당신의 장부를 철저히 관리하십시오. ▣ 미션 목표 (Objective) 수백 개의 랜덤한 방을 돌파하여, 미궁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스 룸]을 찾아내십시오. 보스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한다면, 미궁을 탈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본 규칙 (Rules) 초기 자금: 각 팀에게는 1,200 LP의 팀 자금이 지급됩니다. 입장료: 미궁 입장 시 1,000 LP가 즉시 차감됩니다. (잔여 가용 자금: 200 LP) * 팀 가용 자금으로 지급된 LP는, 소모하더라도 ‘적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황금의 개찰구 (Skip): 각 방의 공략이 어렵다면 LP를 지불하여 [즉시 통과]할 수 있습니다. 단, 연속으로 통과할 시 비용이 2배씩 할증됩니다. 경제 활동: 미궁 내부에서의 획득(수입)과 지불(지출)은 모두 실시간으로 기록됩니다. ▣ 평가 기준 (Ranking) 본 미션은 클리어 여부와 ‘자본 관리 능력’을 종합하여 순위를 산정합니다. 1순위: 보스 처치 및 생존 (Semi-Clear) 2순위: 최종 손익 (Total LP) [경고] 이 미궁은 당신의 ‘지갑 사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현명한 소비만이 살길임을 명심하십시오. 9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화요일 오후 5시 30분. 온갖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에게는… 아직 한창 펜대를 굴리고 있어야 할 시간. 하지만 독서실 구석 자리에 앉은 이시율의 시선은, 문제집이 아닌 스마트폰 액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오늘만큼은… 하루종일 이러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터였다. [제목: 솔직히 이번 시즌 비주얼 원탑은 이성환 아님? 반박 시 니 얼굴 오크.] [제목: 박진우 힐러님 웃는 거 봤냐... 나 죽어 진짜 ㅠㅠ] 커뮤니티 <헌터즈 라운지>는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오늘 밤 9시, 드디어 <헌터즈 스쿨 시즌3>의 첫 방송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게시글을 보고 있자니, 문제집 따위가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 미치겠네.’ 시율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두 가지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하나는 티저 영상에서 압도적인 피지컬을 보여준 ‘이성환’과,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박진우’ 중 누구를 최애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행복한 고민.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하나뿐인 혈육, 이건율에 대한 걱정이었다. 커뮤니티 여론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었다. ‘35레벨의 기적’이라며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방송국 놈들이 만든 가짜 영웅’이라며 물어뜯는 악플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댓글: 솔직히 35레벨이 80레벨 보스 잡는 게 말이 됨? 주작 냄새 너무 심한데 ㅋㅋ] [댓글: 방송국 피디들이 시청률 빨려고 일부러 욕받이 하나 세운 거 아님?]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시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나 오빠가 무리하다 다치지는 않았을지. 아니면 진짜로 악마의 편집에 희생당해서, 전국민적인 조롱거리가 되는 건 아닌지. 합숙을 시작한 이후 집에도 안 들어오고 있으니, 더 걱정되는 느낌이었다. ‘아오, 몰라! 공부 안 해!’ 결국 시율은 책을 덮어버렸다. 어차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앉아있어 봐야 시간 낭비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싸 들고 독서실을 나선 시율은, 자연스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집에 가서 씻은 뒤, 경건한 마음으로 본방사수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저녁? 아주 조금만 먹던가 안 먹을 생각이다. 헌스쿨 보면서 꿀야식 먹으려면, 속을 좀 비워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터벅- 터벅- 그런데 잠시 후……. 집으로 가는 골목길 어귀에서, 시율은 뭔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깐. 저 사람…….’ 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에, 웬 노숙자(?) 한 명이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 그의 손에는 딴 지 얼마 안 된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시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살폈다. 꼬질꼬질한 몰골이었지만, 낯익은 얼굴이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서니, 목에 걸린 HBC 사원증이 발견되었다. 남자의 정체를 확신한 시율의 눈이 커졌다. “어? 정민 오빠?”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도 천천히 시율에게로 향했고 말이다. “…어? 시율이냐?” 그는 오빠의 절친이자, <헌터즈 스쿨>의 현장 디렉터인 이정민. 건율이 실종됐던 지난 10년 동안 친동생처럼 챙겨줬던 오빠였기에, 오빠 친구들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정민 오빠를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라고.’ 솔직히 지난 주말부터 헌스쿨 덕질만 주구장창 하면서… 시율은 정민에게 연락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궁금한 게 너무너무너무 많았지만, 바쁜 FD님 일 방해했다가, 헌스쿨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만났다? 여기선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자연스럽게 정민의 옆으로 다가갔다. “오빠 여기서 뭐 해요? 몰골이 왜 그래? 집 쫓겨남?” “쫓겨나긴… 이제 퇴근하는 길이다. 다리가 안 움직여서 충전 중이야.” 이어서, 정민이 피식 웃으며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잘 만났다. 너도 잠깐 앉아라. 맥주 한 캔 할래?” “당연하죠.” 사양하지 않고 잽싸게 맞은 편의점 의자로 가 풀썩 앉았다. 정민이 새 맥주 캔을 따서 건넸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킨 시율은, 캔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운을 뗐다. “근데 오빠. 이렇게 일찍 퇴근해도 되는 거예요? 이제 곧 1화 방영인데, 방송국에서 다 같이 모니터링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님?” “여기서 모니터링 하겠다고 야근 한 번 더 한다? 해뜨기 전에 일단 사망할 듯?”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대답에, 시율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빠. 요즘 진짜 바쁜가 봐요?” “말도 마라. 지난 3일 동안 5시간 잤나? 편집하느라 영혼까지 갈아 넣었다.” “고생했네요, 진짜.” 시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속에 담아뒀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이 혈육의 안위였다. “근데 오빠. 우리 건율쓰… 진짜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정민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율이? 엄청 잘하고 있지. 왜?” “아니… 커뮤니티 보니까 욕을 너무 먹어서요. ‘버스충’이다, ‘방송국 픽이다’ 하면서 복날 개 맞듯 맞더라고요.” 시율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혹시 이건율 별거 없는데… PD님들이 시청률 때문에 일부러 욕받이 무녀 만들어 버린 건 아닌가 싶어서.” “푸흡!” 정민이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그는 킬킬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야, 야. 걱정 붙들어 매라. 욕? 방송 나가면 싹 사라질 거다.” “진짜요? 걱정 그만하라고 하는 말 아니죠?” “무슨 소리. 내가 팩트만 말해줄게.” 정민이 목소리를 낮추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피곤에 쩔어 있던 그의 눈빛이, 어느 순간부터 꽤 진지하게 반짝였다. “일단 어제도 촬영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마… 2화 방영분?” “그런데요?” “와… 내가 스포라 자세히는 말 못 하는데, 그림 진짜 대박으로 뽑혔어. 너네 오빠가 다 씹어 먹었다니까?” “……에? 진짜로?” “내 PD 인생을 걸고 맹세한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건율 그놈 진짜 난놈이야. 나도 처음엔 이렇게 잘할 줄 모르고 섭외했었다고.” 정민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뭔가 구체적인 내용들은 교묘히 피하고 있었지만, 헌스쿨3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나다는 건 시율도 느낄 수 있었다. 정민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용의 절반 정도는 이건율과 관련된 내용이었으니……. 그제야 시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난 또 이건율 괜히 이상한 바람 들어서 나대다가 다치고… 그런 건 아닌가 했지.” 오빠에 대한 걱정이 해결되자, 시율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눈빛에 담겨 있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어떤 탐욕 같은 게 그득하게 들어찼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오빠.” “응?” “혹시… 뭐 슬쩍 찔러줄 만한 건 없어요?” 정민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러났다. “찔러? 뭘?” “아니, 제가 최애를 좀 골라야 하는데… 갈팡질팡 중이라서요.” 시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민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봐요. 이성환 님 실물 어때요? 화면이랑 똑같이 냉미남이에요? 아니면 의외로 다정함?” “……야.” “아, 근데 박진우 님도 힐러 중에 최상급 루키라던데. 성격 좋아 보여요? 인성 논란 이런 거 없죠? 방송국 사람들한테 막 갑질하고 그러진 않죠?” 이시율의 질문 공세는 끝날 생각도 없이 계속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민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를 걱정하던 사람의 기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 “이거 봐라? 친오빠 얘기는 1분 컷이고, 이성환 박진우 참가자 얘기만 5분을 하네?” “아, 오빠는 오빠고 덕질은 덕질이죠! 빨리요! 현장에 있었잖아요!” “야, 야. 다 대외비야! 나 잘려!” 정민이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기세였다. 하지만 시율은 끈질겼다. 도망가는 정민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아, 하나만! 하나만 알려줘요! 이성환 님 실물 후기만이라도!” “아오, 이거 안 놔? 나 집에 가서 자야 한다고!” “맨입으론 못 가요! 뭐라도 내놓고 가!” 결국 정민이 백기를 들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오, 진짜! 정보는 안 되고, 이거나 받아라.” 툭. 정민이 시율에게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 금박으로 로고가 박힌, 고급스러운 다이어리였다. [ HUNTER’S SCHOOL SEASON 3 - OFFICIAL DIARY ] 그리고 그 다이어리를 받아든 시율의 두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거…?” “스태프들한테만 돌린 한정판이다. 비매품이야. 이거 받고 떨어져.” 시율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녀는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정민을 향해 90도로 폴더 인사를 시전했다. “충성! 감사합니다, 피디님! 방송 대박 나세요!” “……어휴, 지 오빠 닮아 가지고.” “그건 혹시… 무슨 뜻이죠?” “좋은 뜻이니까, 어여 들어가.” 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며, 시율이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본방 사수할게요 오빠!” “오냐, 조심히 가고.” 정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시율은 헤실헤실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자랑질을 하기 위해 절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여보세요? 야, 너 공부한다며. “야, 임민정. 대박 사건.” -뭔데 또. “나 헌스쿨 비매품 굿즈 생김. 쩔지?” -미친?! 어디서 났어? “후후, 영업 비밀이다. 아 몰라, 나 오늘 본방 보면서 다꾸 해야지-” 시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손에 든 한정판 다이어리의 감촉이 짜릿했다. ‘이건율 멀쩡하다니 다행이네. 그러면 뭐… 알아서 잘 살겠지?’ 혈육에 대한 걱정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시율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근데 진짜 박진우… 화면에서도 그 얼굴이면 어쩌지? 나 그럼… 진짜 어쩔 수 없잖아? 인생 걸어?’ 누군가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그런 마음의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9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미궁의 정체가 공개되고 나자, 모든 참가자 파티들이 각기 분주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우린 딱히 나눌 대화가 없다. “정말이네…….” 다만 내 예측이 맞았다는, 팀원들의 감탄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진짜 팀장님 말대로네요.” “멋집니다, 팀장님!” 그나저나 고은아 얘는… 아까부터 왜 이렇게 기합이 들어가 있는 걸까? 누가 보면 여군인 줄 알겠어? “우린 할 얘기 다 했으니까, 미리 대기실 가 있을까요?” “좋습니다!” 이 <미다스의 정원> 미궁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궁 대기실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린 망설임 없이 여기 들어갔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작진이 우리에게 LP를 배포해줬다. “자, 여기 총 1500LP입니다. 인지하셨겠지만 1000LP는 입장료고, 200LP는 기본 지급 LP고…… A타입 드래프트 보너스 300LP가 더해져서 총 1500이 된 겁니다.” 1500LP라는 거금을 인계받은 사람은 당연히 팀장인 나였다. 어차피 미궁 안에서도 모든 의사결정은 파티장이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LP를 모두 내가 들고 있는 게 당연한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른 파티원들과 함께 김신우 캐스터도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자, 드디어 입장 시간이군요!” 김신우 캐스터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고, 20명의 팀장들이 차례로 미궁 입구를 향해 이동했다. 거대한 황금빛 아치 형태의 미궁 입구는 그 외형만으로도 제법 위압감 있는 모습이었다. 여길 내가 마지막으로 언제 와봤더라……? 마지막 10회차 중에는 한두 번 정도나 왔던 것 같은데……. “흐음.” 양옆을 슬쩍 보니, 다른 팀장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건 당연했다. 어쨌든 입학 미션이었던 <얼어붙은 서울>은 물론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까지. 지금까지 헌스쿨 촬영으로 입장했던 곳들은 모두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던전이었는데…….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는 해도 어쨌든 이곳은 미궁이었으니까. 아무리 예능이라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곳인 것이다. 그런 팀장들의 표정을 읽었는지, 김신우가 좌중을 둘러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당부드리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팀장님들은 상황이 위험하다 싶으면, 주저 말고 [패배 선언]을 하십시오! 시스템 메뉴에서 언제든 가능합니다.” 그는 참가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명예나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여러분의 안전입니다. 패배 선언만 하면, 그 즉시 안전하게 미궁 밖으로 전송될 테니까요. 아시겠죠?” 참가자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패배 선언? 미다스 정원에서 패배 선언은 파산인데.’ 미다스 정원에서 패배 선언을 하면, 생존의 대가로 인벤토리에 보유 중인 모든 LP가 증발한다. 그런 일은… 내 쌀먹 인생에서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 던전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익절이 아니라 손절을 하고 나온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입장!”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우우웅―! 거대한 황금빛 소용돌이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 * * 시야가 밝아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는 황금의 정원이었다. 나무도, 바닥의 보도블록도, 심지어 흐르는 분수대 물조차 황금색 액체로 이루어진 기괴하고도 화려한 공간. 탐욕스러운 고대 부호의 악취미가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띠링-! 우리의 눈앞에, 입장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입장료 1,000 LP가 차감됩니다.] [미궁 : ‘미다스의 정원’에 입장했습니다.] [주의: 본 미궁은 ‘월간 1회’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현재 금리 : 스테이지당 10% (복리)] [미궁 안에서 벌어들인 LP에 한해, 매 스테이지 클리어 시마다 이자가 지급됩니다.] [※주의: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는 파티가 ‘적자’상태일 시, 스테이지 난이도 증가폭이 2배로 증폭됩니다.] [※적자 : 미궁 내에서 소모한 LP가 벌어들인 LP보다 더 큰 상태를 의미합니다.] ‘월간 1회 입장 제한이라.’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입장 제한이었다. 보통 일간, 주간, 월간으로 구분되는 입장 제한이, 이 ‘미다스의 정원’에도 걸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제약이 걸린 던전은 보상이 파격적이다. 왜? 보상이 커서 무제한으로 입장할 시… 밸런스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경우에 보통 이런 제한이 걸리는 구조거든. 그러니 나도 처음엔 이 던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간이나 주간도 아니고 무려 월간 제한이 걸린 던전이… 돌면 돌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다? 그게 이해가 안 돼서, 한때 이 미궁만 주구장창 팠던 적이 있었다. 히든 클리어 루트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고 말이다. └ 엥? 미다스의 정원에 히든 루트가 있다고? └ ㅇㅇ 있음. 지구 서버엔 아직 히든 클리어 안 나오긴 했던데. 흐음. 성좌들도 아는 내용인 걸 보니, 역시 그렇게까지 고급 정보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다음 순서에 명시되어 있는 두 줄의 메시지였다. 미궁 내에서 벌어들인 LP는, 스테이지 진해에 따라 복리로 이자가 붙는다는 내용.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복리의 마법이, 이 미궁 공략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몬스터 잘 때려잡는다고 히든 엔딩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말이지.’ 얼마나 빨리 ‘시드 머니’를 불려서, 이 복리의 스노우볼을 굴리느냐. 그게 바로 이 미다스의 정원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옆으로 다가온 유진성이 슬쩍 물었다. “저희… 1스테이지 전당포에서 얼마까지 쓰실 생각입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난 꽤 놀랐다. 이건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 이 <미다스의 정원>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으니 말이었다. ‘이 사람은, 헌스쿨 전에도 여길 들어와 본 적이 있는 건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나는 일단 질문에 대답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저희 기본 지금 200LP에, 보너스로 받은 LP까지 총 500LP가 있잖아요?” “그렇죠.” “이것만 딱 다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추가적으로 사비를 더 쓸 필요는 없겠고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500LP 이상은 살 것도 없을 테니까요.” 얼핏 시스템 메시지를 잘못 읽으면, 첫 상점에서 돈을 쓰지 않아야 할 것처럼 보인다. LP를 많이 들고 있을수록 복리로 이자가 붙는 것처럼 쓰여있는 데다……. 벌기도 전에 LP를 소모해서 ‘적자’ 상태가 되면, 스테이지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고까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초반 단계는 쉬울 텐데, 굳이 이자도 안 보고 LP를 쓰겠다고? 굳이 적자로까지 만들면서?” 강민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 범주 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시스템 메시지의 행간을 잘 읽어보면, ‘미궁 내에서 벌어들인 LP’에 한해 이자가 붙는다고 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밖에서 들고 들어온 LP에는 이자 안 붙습니다. 다들 메시지 다시 한번 잘 읽어보세요.” “음……?” 게다가……. “이자를 빨리 보기 위해서라도, 처음에 스테이지 난이도를 좀 올려놓는 게 중요하기도 하고요.” 스테이지에서 등장할 몬스터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녀석들은 비싼 소모품들을 드랍하게 되는데……. 다음 상점이 열리기 전까지 그걸 최대한 모아서 많은 LP를 확보해야, 초반부터 복리 스노우볼을 빠르게 굴릴 수 있다. 그러니 여기 들어오자마자 유진성이 내게 했던 첫 질문에서, 내가 미궁에 대한 상당한 이해도를 느낄 수 있었던 거였고 말이다. 게다가 유진성은, 추가적으로 내 계획까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팀장님께선… 일단 버프부터 다 사실 생각이신 거죠?” 이 친구, 똑똑하단 말이지? 저벅- 저벅- 어쨌든 팀원들을 빠르게 납득시킨 뒤, 나는 곧바로 미궁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미궁의 방 안에는 단 하나의 건축물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저게 바로 이 미다스 정원에만 존재하는 특수 상점이다. 지붕부터 기둥까지 온통 황금으로 도금된,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건축물. [황금빛 전당포 (Golden Pawnshop)] 끼이익- 육중한 황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내부는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진열장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물약과 스크롤, 아티팩트들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금가루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 높다란 카운터 뒤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마치 고블린처럼 작은 키를 가진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길 잃은 순례자들이여.” 그는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황금 조각상 같았다. 매끄러운 금속 재질의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지배인.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로지 붉은 보석 두 개만이 박혀, 기이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연미복조차 금실로 짜인 듯 번쩍거렸다. “이곳은 욕망이 가치를 증명하는 곳. 가난한 자에게는 절망을, 부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파는 곳이지요.” 금속이 긁히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감미로운 목소리. 나는 그 겉치레 인사를 들으면서도 빠르게 진열대를 훑었다. 어차피 우리가 살 건 정해져 있으니, 딱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진열대 위에는 각종 포션부터 트랩, 마법이 인챈트된 스크롤까지 다양한 소모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반짝이는 황금빛 카드 다섯 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있네.’ 그걸 곧바로 집어 든 나는 지배인을 향해 말했다. “여기, [황금의 축복] 카드가 필요합니다.” 이건… 유진성이 예상했던 것처럼 버프 카드였다. [황금의 축복] 효과: 파티원 전원의 공격력/방어력 10% 증가. 가격: 100LP. “오호. 몇 장이나 필요하실까요?” 한 장에 100LP. 그러니 전부 다 사면 500LP. 지금 보유 중인 팀 자산과 딱 떨어지는 금액이었다. “다섯 장 전부 필요합니다.” 띠링-! [500LP를 소모하였습니다.] [‘황금의 축복’ 버프를 5회 적용받습니다.] [파티원 전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 50%만큼 증가합니다.] 사전에 500LP를 쓴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내 행동에 너무 망설임이 없어서인지, 유진성을 제외한 다른 파티원들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 마나 포션이라도 하나 샀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박진우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저희 전력에 이 정도 버프량이면, 한동안은 아무런 문제 없을 테니까요.” [500LP를 소모하여 ‘적자’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경고! 이제부터 스테이지 진행 시, 난이도 증가폭이 2배로 설정됩니다.] 경고 메시지까지 발생했지만, 파티원들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박진우는 일단 더 지켜본다는 느낌이었고, 고은아는 음…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달까? 강민우도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딱히 내 결정에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아마도 <얼어붙은 서울>에서 경험한 게 있어서인지. 일단 내 말을 잘 듣는 게, 본인 순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제… 더 볼 일은 없으실까요?” 황금빛 지배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나를 향해 지배인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음 방으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푸른 빛깔의 포탈 중 하나를 이용하시면, 다음 방으로 이동하실 수 있을 겁니다.” ‘미다스의 정원’ 미궁 안의 모든 방에는, 들어올 때 사용한 포탈 하나와 다음 방으로 넘어갈 때 사용할 수 있는 세 개의 포탈이 각 4면에 존재한다. 들어올 때 사용한 포탈은 붉은색으로 변해 이용할 수 없으니 선택지는 결국 셋 중 하나인 것. 저벅- 전당포 바깥으로 나온 나는, 포탈 세 개를 신중히 확인하였다. 어차피 처음 선택하게 되는 세 개의 포탈은 모두 ‘일반 몬스터 처치’ 스테이지로 이동하는 포탈일 테지만. 포탈 안쪽에 일렁이는 문양을 잘 확인하면, 어떤 몬스터를 만날 수 있는지까지도 거의 예측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뭐, 아직은 뭘 선택해도 큰 차이가 없겠지만…….’ 이 시점에서 난이도는 상관없고, 최대한 보상이 큰 스테이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 끝발은 괜찮네. 코인 스캐럽 (Coin Scarab)이라니.’ 내가 선택한 포탈은… 작은 딱정벌레 문양이 새겨진 우측 포탈이었다. 9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지이잉-! [포탈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스테이지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현재 스테이지 레벨 : 2LV] 포탈을 넘어선 순간, 가장 먼저 귓가를 때린 건 경쾌한 금속음이었다. 짤랑― 짤랑― 마치 돈주머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 그리고 시야가 밝아짐과 동시에,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는 황금빛이 우리를 맞이했다. “와…… 저게 다 금임까?” 고은아가 방패를 고쳐 쥐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방 안에는 성인 남성 상반신만 한 거대한 풍뎅이 다섯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등껍질은 순금으로 도금된 듯 번쩍였고, 그 위에는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코인 스캐럽 (Coin Scarab)] 언뜻 보기엔 화려한 보물 상자처럼 보였지만, 놈들의 턱관절이 흉악하게 갈라지는 걸 보면 영락없는 몬스터였다. ‘운이 조금 더 따라준다면, 첫판부터 쏠쏠하겠어.’ 나는 입맛을 다셨다. 스캐럽은 기본적으로 온갖 잡템과 재화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특성을 가진 몬스터. 때문에 녀석을 처치했을 때 루팅 가능한 아이템 가치는 운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는데, 잭팟이 터지면 수십LP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잡템이 드랍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기왕 만난 김에, 골드 코인 한 개 정돈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바로 이 코인 스캐럽만 드랍하는 고유 아이템인 골드 코인. 드랍률이 그래도 10~20%정도는 될 테니, 다섯 마리면 충분히 노려볼 만했다. 스르릉― 나는 일단 월광검을 뽑은 뒤, 간결하게 오더를 내렸다. “은아 님, 앞라인 잡아주시고.” “옙, 팀장님!” “일단 정석대로 한번 전투 구도 보겠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디테일하게 오더하면서, 최고 효율의 전투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해버리면, 파티원들의 개별 역량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일단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파티원 개개인에게 전투 자유도를 줘 봐야, 앞으로 전투설계를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철컥-! “한심하기는.” 예상대로 가장 먼저 나선 건 강민우였다. “스캐럽 상대로 전투 구도 볼 게 뭐가 있다고.” 일반적인 ‘스캐럽’은 사실 껍질만 단단한 호구 몬스터가 맞다. 하지만 여긴 미다스의 정원이고, 저건 코인 스캐럽이다. 게다가 강민우에게는 이 코인 스캐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것 같은데……. 강민우의 어깨에 견착된 저 수십억짜리 마력총이, 그의 무지를 어디까지 커버해줄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화이트 노바 : 프로토타입 (White Nova : Prototype)] 새하얀 백금색 총신 위에 고급스럽게 음각된 모델명. 외관만 봐서는… 거의 국가권력급 비밀병기 같은 느낌이다. ‘돈값을… 어느 정도나 보여주려나?’ 키릭- 쿵- 쿵- 우리를 발견한 스캐럽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고, 강민우는 마력총을 능숙하게 장전했다. 그런데 그 마력총을 자세히 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웅웅웅― 총신의 후면에… 시퍼런 냉각수가 쉴 새 없이 순환하고 있는, 복잡하게 얽힌 반투명한 튜브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대체 출력을 어떻게 만졌길래… 저런 볼륨의 냉각장치가 필요한 거지?’ 물론 강민우의 마력총이, 게이트 안에서 드랍된 순정 장비일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었지만……. └ 방장 ㅋㅋㅋ 저거 리얼 미친 아이템이더라 ㅋㅋㅋ └ ㅋㅋ나도 지난번에 강민우 스트리밍 잠깐 눈팅하면서 봤는데ㅋㅋㅋㅋㅋ 지리는 물건임 진짜롴ㅋㅋ 이 정도일 줄은 솔직히 전혀 몰랐다. 퍼엉- 그러니까 40레벨대 사수가…… 이런 걸 들어도 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콰콰콰쾅-! 격발음과 함께, 총구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백색의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총기 측면에 달려 있던 배출구(Vent)가 팍! 하고 열리더니, 압축된 고온의 증기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익-! 그야말로 마도공학의 정수. ‘자본주의 헌터’라는 단어의 완벽한 시각화. [‘코인 스캐럽 (Coin Scarab)’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코인 스캐럽 (Coin Scarab)’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이게 진짜로… 되네?’ 폭발과 함께 통째로 증발해 버린, 거대한 풍뎅이의 상반신을 보며, 나는 순수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식하게 터뜨린 단 한 발의 마력탄이, 40레벨대 몬스터를 그대로 녹여버린 것이다. └ 와씨; 헌스쿨 오기 전에 개조 한 번 더했나본데? └ 돌았넼ㅋㅋ 이 정도면 최소 80레벨 장비 아닌가ㅋㅋㅋ 하지만 마력총의 성능에 대한 놀람이 순수한 감탄이었다면. 그다음에 내가 발견한 건 경악이었다. ‘잠깐. 저거… 마력 앰플 아냐?’ 툭- 보통 마력탄 수십 발 정도는 발사할 수 있는 고농축 앰플 하나가, 방금 단 한 발의 공격에 소모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르륵-! 과열된 총신을 식히기 위해, 개당 10LP가 넘는 [급속 냉각 캡슐]이 탄피처럼 튀어 나가는 광경을 보니. └ ㅋㅋㅋㅅㅂ 한 발에 최소 50LP는 태운 거 같은데?ㅋㅋ └ 마력총 감가상각까지 생각하면 100LP쯤 날렸을 듯? 이 미친 총이 왜 양산되지 못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로 강민우만 쓸 수 있는 총이네.’ 이건… 몬스터를 잡아서 버는 돈보다, 잡는 데 쓰는 돈이 더 많은 수준이다. 그러니 사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냥 돈을 허공에 뿌려서 몬스터를 지워버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자본의 폭력이었다. “하하하! 봤냐?” 자욱한 증기 속에서 강민우가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이렇게 보니 성좌들 중 일부가 강민우를 탑5 라인에 올려둔 게, 아주 조금은 납득되는 느낌이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템빨에 세광그룹의 후광까지 더해지면, 완전히 불가능의 영역은 아닐 것 같았으니까. 뭐, 이러면 나도… 솔직히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훌륭한데요.” 유지비로 본인이 얼마를 쓰던, 파티에 도움 될 만한 화력이기만 하면… 그거로 충분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기기긱-! 동료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걸 목격한 나머지 네 마리의 스캐럽이, 저 빠른 속도로 우릴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등껍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쩍 벌어졌다. 끼릭- 끼리릭. 황금빛 등껍질 안쪽에서, 시커먼 마력의 소용돌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코인 스캐럽이 ‘마그네틱 헝거(Magnetic Hunger)’를 시전합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선 한 타임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 쓸어버릴 테니까, 잠깐 쉬고들 계시라고.” 상황 파악을 못 한 강민우가, 다시 한번 펌프를 당겨 차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콰아앙! 연속으로 발사된 두 발의 백색 마력탄.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웅- 우우웅! 스캐럽들이 등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자력이, 공간을 장악했으니 말이다. 지잉-! 강민우의 총에서 발사된 고순도의 마력 덩어리는, 목표를 타격하는 대신 기괴하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야! 저게 왜 저기로 가!” 강민우의 당황한 외침 속에, 마력탄들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듯 스캐럽들의 벌려진 입속으로 쏙쏙 빨려 들어갔다. [코인 스캐럽이 마력을 ‘섭취’합니다.] [코인 스캐럽의 에너지가 증폭됩니다.] 꿀꺽. 꿀꺽. 녀석들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등껍질의 보석들이 위험한 붉은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런 게 바로… 적에 대한 무지에서 생겨나는 종류의 대참사. [마그네틱 헝거 (Magnetic Hunger)] 발동 시 5초 동안 주변 반경 5m 이내의 모든 물질을 강한 자력으로 끌어당깁니다. 마그네틱 헝거가 발동하는 동안, 모든 ‘마력’이 담긴 투사체는 코인 스케럽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합니다. 다행인 건, 생각보다 우리 A급 파티원 진우 님의 대처가 빨랐다는 점이었다. [코인 스캐럽이 흡수한 마력을 압축합니다.] [‘코인 샷건’을 발사합니다!] 콰아앙―! 녀석들의 입에서 황금빛 섬광이 터져 나온 순간, 전장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차분한 목소리. “다들 숙이세요!” 붉게 부풀어 오르는 전조를 확인한 순간, 박진우가 이미 보호 마법을 캐스팅 중이었던 거다. “성역의 장막 (Sanctuary Veil)!” 우우웅―!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박진우가 발동시킨 보호의 장막이 비스듬한 각도로 깔렸다는 점이었다. 스캐럽이 뿜어내는 탄환을 그대로 다 막아내려 하기보다, 비스듬히 튕겨내는 방식으로 장막 스킬을 응용해 사용한 것. ‘……호오.’ 덕분에 속으로 꽤 감탄했다. A등급임에도 포지션 결정전에서 1위를 했던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 방장 힐러 잘 뽑았는데? └ 힐러가 전투센스 좋은 건 꽤 드문 케이슨데. 어쨌든 강민우의 트롤 한 번에 전장은 갑자기 난장판이 되었고. 타타탕-! 터엉-! 그 안에서 고은아와 유진성도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물론 강민우만큼 임펙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고은아는 확실히 피지컬이 괜찮네.’ 이 정도면 대가 견적을 짜는 데에는, 충분한 수준의 데이터였다. └ 방장도 이제 밥값 좀 해야겠지? 안 그래도 하려고 했습니다만. 스르릉―!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오랜만에 뽑아 든 월광검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었고, 검 끝에는 곧바로 푸른 아지랑이가 넘실대었다. 박진우는 내가 활을 들지 않는 게 의아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활은 비효율적이다. 기본적으로 스캐럽은 원거리 공격에 강한 상성을 가진 데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3T 이상의 활이 없었으니까. └ 화살 아까워서 안 쓰는 거 아님? 어허, 그런 거 아닙니다. 절 대체 뭐로 보시는……. └ 그야 당연히 쌀숭이…. “크흠.” 스캐럽의 등껍질은 물리 공격에 대한 내성이 강해서, 강민우 정도로 무식한 화력을 박아넣는 게 아니라면 뚫기 어렵다. 하지만 녀석들에게도 당연히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등껍질과 몸통 사이. 미세하게 벌어진 바로 그 틈새. 타탓-! 빠르게 전장으로 뛰어든 나는, 호흡을 멈추고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뭔가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키에엑! 스케럽은 방어력이 엄청난 대신, 민첩성이 그만큼 떨어지는 몬스터였으니까. 게다가……. 툭- [대상: 바니가 ‘절대 나태’ 상태에 돌입합니다.] 우리 소환수님도 오랜만에 밥값 좀 하는 중이었다. [소환수 ‘바니’의 물리/마법 방어력이 500% 상승합니다.] [소환수 ‘바니’를 기준으로, 반경 10m 내의 적들의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40%만큼 감소합니다.] “귀, 귀엽슴다!!” 마치 영감님처럼 한숨을 푹 쉬며, 스캐럽들 사이에 걸터앉아 있는 까만 토끼 봉제인형. 덕분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첫 전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띠링-!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전투가 종료됩니다.] [‘스캐럽의 등껍질’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도금된 나뭇가지’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중략…… [‘골드 코인’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9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9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잠시 휴식입니다. 잠깐 대기하시죠.” 첫 전투가 끝난 뒤. 유진성은 아주 흥미로운 상황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저벅- 다음 레벨의 스테이지로 가는 포탈이 열린 가운데. 갑자기 휴식을 선언하더니, 쓰러진 스캐럽들 사체에 다가가 뭔가를 시작하는 팀장 이건율.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든 건, 날이 예리하게 선 한 자루의 예리한 단검이었고……. 푸욱-! 그걸 스캐럽의 사체에 찔러 넣은 뒤 하기 시작한 건……. 사각- 사각- 지금까지 게이트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발골인가?’ 유진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냥터에서 몬스터의 가죽이나 뼈 등, 부산물을 채집하는 생활형 특성인 발골. 그 또한 이러한 특성이 존재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20레벨 이전 낮은 구간에서는, 누구에게나 찍을 수 있게 오픈된 특성이 바로 발골이었으니까. 하지만 생산 클래스가 아닌, 직접적인 전투로 성장하는 플레이어가 발골을 한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발골이라… 발골. 이건 나도 진짜 생각조차 못 해 봤던 건데.’ 유진성이 생각할 때, 이건율은 상당히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건, 바로 합숙이 시작되기 전 지난 주말이었다. 사실 유진성은 <입학식 미션>의 1위가 이건율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참가자 중 하나였고. 그래서 주말 동안 커뮤니티에 살면서 이건율의 플레이들을 분석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건율이 어떤 식으로 던전을 공략했는지 추론하며 엄청나게 놀랐던 것이다. 특히 체온 하락으로 인한 버프 기믹을 극한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솔직히 전율한 수준이었다. 분석과 통찰을 통해 시스템을 한계까지 활용하는 이건율의 플레이 스타일이야말로, 그가 평소에 동경해 마지않던 그런 이상향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분명. 저 발골에도 숨겨진 의도가 존재할 텐데…….’ 물론 다른 파티원들이야 이건율의 발골을 단순한 기행(?)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했지만……. “으, 징그럽게 그걸 왜 파내고 있어?” “팀장님, 뭐 도와드립니까?” 서걱- 찌이익-! 진성은 머릿속으로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건율의 옆에 다가간 박진우가 질문했을 때. “그런데 이 부산물들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이어진 대답을 들은 유진성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게, 이 ‘미다스의 정원’ 공략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래요?” “여기는… 초반부터 복리를 극한으로 활용해야만, 숨겨진 마지막 문을 열 수 있는 미궁이거든요.” 복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지며 이건율의 의도가 단번에 그려졌으니 말이었다. ‘잠깐. 생각해 보니…… 저것도 전당포에 팔 수가 있잖아?’ 사실 지금 이건율의 행동은, 일견 ‘짠돌이’처럼 보일 수 있었다. 저걸 다 파밍해서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 봐야, 결국 포션 한두 개 값이나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겨우 그런 수준의 파밍(?)을 위해 던전 공략을 지연시키기까지 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맞았다. 하지만 저걸 전당포에 팔아서 곧바로 LP를 확보한다면? ‘여기선 10LP라도 소중하지. 특히 극초반 구간일수록.’ 여기서 확보한 50LP가 10스테이지 뒤에는 130LP가 되고, 50스테이지 뒤에는 수천LP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유진성은 소름이 돋았다. 저 남자는 지금, 티끌만 한 이득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후반부의 스노우볼을 굴리려는 것이다. 그 귀찮음과 시간 소모를 감수하고서라도. ‘역시, 치밀하다. 어쩌면 짠돌이처럼 보이던 행동들까지도… 다 계획된 부분이었나?’ 유진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파티에 배정된 건, 정말 천운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성은, 건율의 발골을 돕기 시작했다. “팀장님. 가죽 잘 벗겨지게 경화 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발골이 이건율에게 숨 쉬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건, 진성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 * * 미궁 공략은,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적자 상태를 유지하는 중인 만큼 스테이지 난이도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중이었지만……. [스테이지 Lv3 : 스톤 골렘 (Stone Golem)] [스테이지 Lv4 : 맹독 슬라임 (Poison Slime)] 두 개의 스테이지를 추가로 클리어했음에도 아직 우리 파티에는 여유가 남아 보였으니 말이다. “헉… 허억….” 뭐, 숨이야 다들 좀 차 보이기는 한데……. 운동 좀 했으니 숨찬 거야 뭐 너무 당연한 생물학적 현상일 테고. └ 아닐걸……. └ 딱 봐도 제발 쉬고 싶다는 표정인데? 그러니 5스테이지 진입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아주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이번 턴엔, 전당포 한 번 스킵합시다.” 이 미궁의 전당포는 3개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그 다음 스테이지 중 하나로 등장하는 구조였고. 그러니 원래라면 이번 턴에 전당포에 들어가 열심히 모은 잡템을 다 LP로 바꿀 예정이었지만……. “예???” “아니 전당포를 왜 스킵하는데!” 적자를 조금 더 유지하며 난이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게, 장기적으로 더 극한의 이득을 볼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ㄷㄷㄷ 지독한 쉑;;; └ 여기서 한번 더 짼다고? └ 이러다 9스테 전당포 나오기 전에 아웃되는 거아님?ㅋㅋ 거, 내기 한 번 하시던가. └ ㅈㅅ;; 물론 박진우가 꺼낸 이런 종류의 의견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팀장님. 빨리 흑자 전환하고 이자도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세 턴 빨리 이자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난이도를 더 높여서 판당 파밍 LP 자체를 키우는 선택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서 전당포 안 고르고 한 턴 째면, 5스테이지도 LP 수급 가능하죠?” “그… 렇긴 하죠.” “이것만으로도 3턴 이자 충분히 메워지니까, 한 번만 더 버텨보자고요.” 그렇게 말하는 내 머릿속에는, 이미 계산이 어느 정도 다 선 상태였다. ‘보자. 9턴 전당포에서 현금화 싹 다 하면…….’ 흑자 전환이야 당연히 되고, 이자 볼 수 있는 LP만 대충 900LP 정돈 될 거다. 거기서 한 턴에 10%씩 복리로 불리기 시작하면……. ‘파밍 수급까지 생각했을 때… 17턴 전당포까지 잘 아끼면서 가면 2000LP는 무조건 넘길 수 있어.’ 물론 8~9스테이지 구간이 엄청나게 하드코어한 고비로 다가오겠지만. 버텨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과실이 너무 달콤하다. 여기서 쫄보처럼 구는 대가로, 최종 흑자가 2000LP도 넘게 차이 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좀 빡빡하게 해봅시다, 여러분. 아시겠죠?” “알겠슴다, 팀장님!” “민우 님 설마 벌써 힘들고 그런 건 아니죠?” “그, 그럴 리가! 난 멀쩡하다고!” 흐음. 대충 설득은 끝난 것 같고……. 저벅- 전당포 문양이 그려진 포탈을 지나쳐 걸어간 나는, 작은 해골 문양이 일렁이는 포탈 앞에 멈췄다. 이어서 다음 순간. 지이잉-! [포탈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스테이지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현재 스테이지 레벨 : 5LV] 파티 전체가 순식간에 5스테이지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 * * 상암동 HBC 사옥, 예능국 메인 모니터링실. 며칠 내내 밤샘 작업으로 찌들어 있던 공기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상쾌하게 환기되었다. 달그락- “피디님? 아니, 집에서 보시지 굳이 또 나오셨어요?” 모니터링실 한구석에서 커피를 내리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게이트 내부 촬영을 담당하는 현장 PD, 권진수였다. 말끔하게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장세연은,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던 좀비는 온데간데없었다. “첫 방영이니까요. 그래도 첫 회는 여기서 보는 게 마음이 편해서.” 세연은 익숙하게 메인 콘솔 앞 의자를 빼 앉았다. 집에 가서 잠깐 눈을 붙이긴 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수개월을 매달린 프로젝트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날이다. 안방 1열보다는,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이곳이 그녀에겐 더 편안한 안식처였다. “그거 혹시…… 칼퇴근하고 집에 간 정민 FD님 저격은 아니죠?” 권 PD가 짓궂게 물어오자, 세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흐흐.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정민이야 지난 며칠간 그 누구보다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집에서 편하게 즐길 자격이 있었다. 물론, 내일 출근하면 시청률 추이를 놓고 갈구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권 PD님은, 현장에서 방금 올라온 거예요?” “아, 네. 일단 미궁 초반부라 저희도 딱히 안에서 할 일이 없어서요. 팀별로 교대하면서 현장 대기조만 돌리고 있습니다.” 권 PD는 ‘각성자’였다. 비록 전투 능력은 C급 헌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게이트 내부의 마력을 견디며 촬영 장비를 다룰 수 있는 귀한 인력이었다. “고생 많네요.” “아닙니다. 뭐, 어차피 안에서도 모니터만 보고 있는걸요.” “아아, 뭐라 하려는 건 아니고.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세연이 콘솔 위에 올려둔 볼펜을 까딱거렸다. 문득, 아까 낮에 멘토 대기실에 들렀다가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 지금 진행 중인 ‘미다스의 정원’ 말이에요.” “네, 피디님.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방금 멘토님들 잠깐 만나고 오는 길인데, 마광철 멘토님이 뜬금없이 그걸 물으시더라고요. 거기서 만약 ‘흑자’가 나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 거냐고.” “……흑자요?” 권 PD가 믹스커피를 젓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 미궁에서 흑자가 날 수가 있나요?”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미다스의 정원>은 애초에 구조적으로 적자를 강요하는 던전이었다. 입장료부터 시작해서 사악한 물가, 그리고 끊임없이 소모되는 전투 자원까지. 제작진이 설계한 이 미션의 평가 기준은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효율적으로 적자를 방어하느냐’였다. 그러니 ‘흑자’라는 개념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멘토들이 궁금해하시니,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방안을 마련하긴 해야겠더라고요.” 세연은 턱을 괴며 모니터 속 붉은 암석지대를 응시했다. “그런데 흑자가 나면, 당연히 그 파티가 분배해서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게 이 미션의 기본 보상이니까요.” “그야 당연히 맞죠. 개인의 소유권은 인정해 줘야죠. 그런데…….” 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그 돈의 ‘사용처’였다. “그걸 다음 미궁에서 사용하게 해주면, 미션 밸런스가 완전히 깨져버리니까요.” <헌터즈 스쿨>은 공정성을 위해 매 미션마다 지급되는 포인트와 장비에 제한을 둔다. 하지만 미션 수행 중에 정당하게 획득한 재화라면? 이건 ‘지급’된 게 아니라 ‘획득’한 것이니, 제작진이 강제로 회수할 명분이 약해진다. 만약 어떤 파티가 여기서 몇 백LP라도 흑자를 본 다음, 미션에 들고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서바이벌의 긴장감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뭐……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권 PD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역시 이 논의가 현실성 없는, 그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매뉴얼 만들기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미다스의 정원에서 흑자를 낸다는 건, 사막에서 얼음을 얼리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일단 결과 지켜보고, 어떻게 할지 저희끼리 회의 좀 해볼게요, PD님. 어차피 다들 마이너스 통장 부여잡고 울면서 나올 텐데, 너무 걱정 마십쇼.” “알겠어요. 그럼 고생해요, 권 PD.” “넵! 편하게 보십쇼!” 권 PD가 꾸벅 인사를 하고 탕비실 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세연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는 20개의 파티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궁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벌써부터 부족한 자금에 허덕이며 고통받는 표정들이었다. ‘그래. 흑자는 무슨.’ 세연은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광철 멘토의 질문은 그저 노파심이었을 것이다. 이 악랄한 미궁에서 수익을 남기는 팀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제작진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자산을 불리고 있는 한 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10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후우… 후우…….” 박진우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며, 차라리 바닥에 주저앉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그토록 염원하던 [황금 전당포]의 번쩍이는 간판. [황금빛 전당포 (Golden Pawnshop)] 그러니까… 여긴 9스테이지였다. 드디어 지옥 같았던 연전(連戰)을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안전지대에 도착한 것이다. ‘살았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박진우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동안 수많은 파티를 경험하며 쌓아온 데이터. 그 모든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이미 전멸. 아니, 실패했어야 맞아.’ 탱커의 방패는 뚫렸고, 딜러의 마력은 바닥났으며, 힐러인 자신의 마나통도 진작에 말라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박진우의 흔들리는 시선이 파티의 선두에 선 남자를 향했다. 팀장, 이건율. 다른 파티원들이 모두 너덜너덜해져서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와중에, 혼자만 멀쩡한 표정으로 전당포 문을 두드리고 있는 저 남자. 박진우는 그 뒷모습을 보며, 방금 지나온 불가해한 시간들을 되짚어보았다. 시작은 5스테이지부터였다. [스테이지 5 : 해골 궁병대 (Skeleton Archers)] 그때 박진우는 처음으로 ‘실패’를 직감했었다. 강화된 해골 궁병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비 오듯 쏟아졌고, 고은아의 방패조차 버거워 삐걱거렸다. 탱커가 무너지면 파티는 급속도로 붕괴된다. 때문에 박진우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포기해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팀장이 패배 선언을 당연히 하겠지만……. 이건 그냥 본능적인 사고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들은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건율이라는 변수가 고려되지 않은 고민이었던 것이다. [챙-! 카강-!] 달랑 검 한 자루를 든 이건율이,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진형을 부술 거라고 어떻게 상상을 했겠는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지.’ 처음에는 무슨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다만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과 판단력으로, 화살을 일일이 피하거나 쳐내면서 해골들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심지어 화살을 쳐내는 디테일도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단순히 힘으로 막는 게 아니었어.’ 자세히 보니 분명 스텟 자체는, 40레벨 대 궁병들의 화살을 정면으로 막아내기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스텟의 열세를 잡기술(?)로 극복해버리는 기예를 보여줬던 것이다. [채챙- 서걱-!] 화살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그의 미세하게 튀어 오르는 손목. 그렇게 물 흐르듯 화살의 궤도만 틀어버리는 검의 궤적. 그건 지금껏 박진우가 각성한 이후,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의 플레이였고……. 어떻게 이 사람이 검사가 아닌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7스테이지에 도달했을 때, 그 기이함은 정점을 찍었다. [스테이지 7 : 맹독 슬라임 (Poison Slime)] 슬라임은 물리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 유동체 몬스터들. 때문에 강민우가 중독되어 제 역할을 못 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성의 하급 공격 마법들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기조차 어려웠고 말이다. 그러니……. ‘끝났다. 이번에는 진짜로.’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건율의 검끝에서, 슬라임 한 마리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푹- 촤아아악-! 그의 검은 슬라임의 물컹한 표피를 베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액체 속에서 불규칙하게 이동하는 새끼손가락만 한 ‘핵’만을 집요하게 찔러 터트렸다. 서걱-! 이게 말로나 쉬워 보이지, 이렇게 간단히 해낼 수 있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냥 찔러서는 검 끝이 절대로 내핵에 정확하게 닿을 수 없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슬라임이 수축하고 팽창하는 타이밍. 그 안에서 핵이 꿈틀대며 이동하는 궤적. 그 모든 것을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공략법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물리 피해에 거의 면역인 대형 슬라임을…… 스킬도 없이 평범한 검격으로만 잡아낼 수 있다? 이건 레벨이나 스탯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묘기에 가까운 기행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건 8스테이지였지만 말이지.’ 솔직히 8스테이지의 전투는 어떤 정신상태로 수행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스테이지 8 : 가고일 & 미믹]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지고, 바닥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아비규환 속에서. 정신없이 들려왔던 이건율의 오더 소리만 간신히 기억날 정도였으니까. “은아 님! 2초 뒤에 전방 11시, 쉴드 배쉬!” “민우 님! 지금 쏘지 말고 대기! 내 신호에 맞춰서 1시 방향!” 그는 전방에서 몬스터의 어그로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아니, 통제를 넘어 파티원들조차 자신의 장기말처럼 부리고 있었다. 조금 과장 보태서 얘기하자면…….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때마다, 거짓말처럼 몬스터의 공격이 빗나갔고, 엉겁결에 내뻗은 공격이 그대로 적중했다. 마치 그가 이 전장의 시간을 0.1초 단위로 쪼개어 조립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말이 되는 표현인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이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상황들이었다. 그러니까. ‘…….’ 여기까지 도달한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2~8스테이지 사이에 단 한 번의 스킵도, 보급도 없이. 적자 패널티를 그대로 다 받은 채, 세 번째 전당포에 입성이라니……. 박진우는 전당포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건율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에 대한 정보는 아직까지도 많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부분이라곤, 한두 줄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내용뿐이었으니까. ‘입학 미션 1위. 35레벨. 그리고… 특이한 이름의 히든 클래스……?’ 그러니 다른 참가자들이 그를 두고, 운이 좋았다거나 기믹을 잘 활용한 덕이라고 평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제 진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뿐이었다. 이성환이나 박하준을 처음 겪었을 때 느꼈던 벽. 그런 종류의 무력과는, 또 다른 영역의 충격이랄까. ‘괴물…….’ 일단 이성환에 박하준, 그리고 이 괴물 같은 팀장 놈까지. 탑 5의 다섯 자리 중 세 자리는, 이미 정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자, 쇼핑합시다 여러분. 고생한 보람이 있을 겁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뒤를 돌아보는 이건율의 미소에, 박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로서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곱 스테이지에 걸친 파밍의 결과가 어떤 보상을 안겨줄지. 그것만큼은… 꽤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 * * 꽤 힘들었지만, 드디어 첫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어쩌면 방금 넘긴 이 고비가… 적어도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만큼은 가장 큰 고비였을지도 몰랐다. └ 독하다 독해 진짜 ㄷㄷ └ 이걸 9스테이지까지 째는 놈은 ㄹㅇ루다가 처음 보네 ㅅㅂㅋㅋ 미궁 중후반부 난이도가 앞보다 더 쉬운 거냐고? 그건 당연히 아니다. 난이도야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맞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복리의 기반을 아주 탄탄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냥 째는 놈은 나도 본 적 있음. 근데 적자 패널티까지 걸면서 째는 건 진짜 처음 봄 ㅋㅋㅋ └ 근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나? 어차피 이 전력이면 클리어는 무조건인 것 같은데. └ 최종 순위는 손익으로 다시 정한다잖음 ㅇㅇ └ 아하. 이전에도 언급했었지만, 이 던전은 결국 돈만 많으면 그 어떤 던전보다도 쉬운 던전이다. 스테이지 3개를 클리어할 때마다 나오는 이 전당포에서 소모성 아이템과 버프만 전부 다 구입하더라도. 보스 스테이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20~30스테이지까지도 충분히 갈 만했으니 말이다. 다만 헌스쿨 미션 기준으로는 클리어 시점에 계산된 손익이 순위에 영향을 주는 구조다 보니… 그걸 다 살 수 없는 게 문제였는데. ‘9스테 전당포 타이밍에 이 정도 벌었으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지 뭐.’ 인벤토리에 한가득 담긴 부산물들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어림잡아도 1500LP는 그냥 넘을 것 같은데……. 덜컹- 그런 생각을 하며 전당포 문을 열자, 낯익은 지배인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욕망이 가치를 증명하는 곳, 황금빛 전당포입니다.” 뭐, 우리 파티원들은 대꾸할 힘조차 없는지… 다들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눈빛만큼은 모두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월급날 통장에 찍힐 숫자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의 그것과 비슷하달까? ‘입금되면 살아나는 거지 뭐.’ 어쨌든 이제 드디어 정산의 시간이 왔다. “자, 정산합시다.” 나는 망설임 없이 카운터 앞으로 걸어가, 인벤토리를 활짝 개방했다. 촤르르르륵―!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전리품들. 황금 풍뎅이의 등껍질, 해골 궁병의 금도금 화살촉, 맹독 슬라임의 결정체……. 카운터가 비좁을 정도로 쌓인 그것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인 스테이지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최상급 재료들이었다. 그것들을 감정하던 지배인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호오…….” 지배인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품질이 아주 훌륭하군요. 부산물에 깃든 마력의 순도 또한 최상급입니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흐음. 정확히 계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배인의 손가락이 튕겨짐과 동시에, 허공에 정산 창이 떠올랐다. 띠링-! 그런데 다음 순간.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판매 수익 : +1,850 LP] 숫자를 확인한 파티원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확대되었다. “처, 천 팔백……?” 고작 초반부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뿐인데, 벌써 입장료를 상회하는 수익이 나온 것이다. 이어서 기분 좋은 알림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현재 보유 자산 : 1,850 LP] [‘적자’ 상태가 해소되었습니다!] [‘흑자’ 전환에 성공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보유하신 LP에 대해, 매 스테이지 클리어 시 10%의 ‘복리 이자’가 지급됩니다.] 이자 지급. 그토록 내가 노래를 부르던 ‘복리의 마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0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 미다스의 정원은 초반 운영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파티는, 최상의 결과를 뽑아낸 게 맞았다. [판매 수익 : +1,850 LP]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수익. 베타 때도 10스테이지 이전에 1000LP이상을 달성해 본 적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아주 훌륭한 수치를 달성해 낸 것이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나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힘들었지?’ 솔직히 말해 지난 8개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과정은, 내가 예상했던 난이도보다 훨씬 더 빡빡했다. 힘들 거야 예상했지만, 이렇게 한계까지 몰아쳐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적자 패널티로 인해 난이도 증가폭이 2배 가팔랐던 상태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파티원들이 너무 빨리 지쳐버린 느낌이랄까. ‘스펙이 부족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냉정하게 따져봤다. 박진우는 말할 것도 없이 S급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강민우도 B급 이상의 역할은 충분히 해 줬다. 실력이 형편없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걸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만한 화력을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말이다. 고은아도 마찬가지다. 일단 겪어본 바로, 이 친구야말로 미친 가성비 카드다. C등급에 비해 실력이 출중하냐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뭐랄까. 상명하복의 의인화(?)라고 해야 하려나. 명령 수행 능력이 그냥 미쳐버렸다. 보통 파티장이 뭘 시키면 그게 맞는지 조금은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친구는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내가 오더를 내리면 그걸 머릿속으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미 수행하고 있는 수준. 그러니 내가 직접 세밀하게 오더한다는 전제만 깔리면, B급이 아니라 A급에 근접할 수준까지도 퍼포먼스가 나오는 거다. 그러면 문제는 유진성일까? ‘흐음.’ 확실히 전투 퍼포먼스 자체는 가장 나쁜 게 유진성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파티 케미스트리를 해칠 정도의 트롤이냐면……. ‘그건 절대로 아니지.’ 오히려 전황을 읽는 능력이나 눈치가 상당히 좋아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서포팅 마법을 잘 깔아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성좌들이 불쑥 끼어들었다. └ 혹시 방장, 무의식중에 레오랑 비교하고 있던 건 아닐까? 으음? 잠깐. 레오라…. └ 방장 제대로 파티플 해본 거 레오밖에 없잖음 ㅇㅇ └ 솔직히 비교 대상이 레오가 되어버리면, 이 파티 얘들 능력치는 좀 짜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긴 할 듯. └ 맞지 맞지 솔직히 방장이 좀 이상한 놈이라 그렇지, 레오도 재능 미친 수준이라;; ‘아.’ 성좌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갑자기 상황이 명확해진다. 파티원으로서의 역량이나 스펙 같은 부분은 지금 우리 파티의 친구들도 분명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같은 상황, 같은 스펙으로 낼 수 있는 퍼포먼스가 레오를 따라오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뭔가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됐어야 하는 부분들이 조금씩 어긋났고. 그런 이슈들이 스노우볼링 되면서, 전반적으로 힘들게 전투를 이끌 수밖에 없던 것. └ 우리 레오 보고싶다ㅠㅠ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레오가 우리 파티에 추가됐다면? ‘그냥 상황 자체가 달랐겠네.’ 구체적으로 레오의 합류를 상정하고 전투 구도를 그리자, 조금만 생각해도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와버린다. 덕분에 머릿속이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 아니 근데 레오는 <헌스쿨> 신청 왜 안 한거임? └ ㄹㅇ 레오야말로 헌스쿨 서류 넣었으면 걍 프리패스일 텐데. 그야, 본인이 싫다는데 어쩝니까. 실버나이츠 들어가겠다고 지원 안 하겠다는데……. └ 방장이 잘 좀 꼬셔 보셈. 솔직히 레오도 헌스쿨 나오면, 바로 떡상 각이잖음. └ ㅇㅇ 방장 이제 평균 시청자 3천도 넘는 것 같은데……. 우리 레오는 아직도 100명도 안본다구ㅠㅠ 그런데 지금 꼬시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형님들? 설마 다음 시즌 얘기는 아닐 거고……. 이번 시즌은 이미 시작했잖아요. └ 3시즌은 어떻게 운영될지 모르겠는데, 2시즌 때는 중간에 특별 참가자 10명 정도 투입됐었음. └ ㅇㅇ 그거 신청 곧 받을 것 같은데? └ 메기 참가자 포지션이라 조건이 좀 까다롭긴 할 텐데……. ……? 무슨 연프도 아니고, 메기 참가자 시스템까지 있다고? └ ㅇㅇ 있음. 심지어 메기참가자는, 대형 길드 소속 루키들도 참가 가능임ㅋㅋㅋ └ 참가 제한도 300일까지일걸? 잠깐. 지금 뭔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돼버린 것 같다. 이러면 1등 난이도가 갑자기 엄청나게 올라가버리잖아? “…….” 레벨 상한이 높은 것도 높은 거지만, 이미 길드 소속 루키들이 참가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쉽게 말해 각 길드에서 작정하고 키우는 루키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 이성환급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 걱정 마셈. 이미 길드 소속된 메기들은 멘토 픽 받는 건 불가능하니까. └ 어차피 순위와 관계없이 데뷔 다섯 명은, 걔들 빼고 다섯이라는 말이지 ㅇㅇ 그래도 1등 상금은 걔들도 먹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 그거야 맞지. 젠장. 그게 제일 문제라고. 난 멘토픽, 데뷔, 그런 거 전혀 관심 없다고……. 하지만 뭐 지금 고민해본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그저 열심히 달릴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음……. 그나저나……. 이러면 레오 녀석은 따로 한 번 더 꼬드겨볼 필요가 있겠는걸? 정민이한테 잘 얘기하면, 충분히 합격할 만하지 않을까? 레오야 당연히 대형길드 루키도 아니고, 가진 거라곤 기가 막힌 검술재능 뿐이겠지만, 그게 또 워낙 괜찮으니까……. └ 뭔솔;; └ 우리 레오 내려치기 멈춰!! 왜죠? 레오한테 재능 빼면 뭐가 있……. 아-. └ 레오님 존안이면, 모든 미션 삽질해도 인기 투표 10위권임 ㅇㅇ 제기랄. 이건 뭐, 부정할 수가 없다. 인생은 역시 불공평……. 흐음. 1등 뺏기면 안 되니까, 그냥 추천하지 말까? └ ㄹㅇ 하남자 쉑ㅋㅋㅋ └ 방장 개웃기네 ㅋㅋ 물론 농담입니다. 제가 그 정도로 쪼잔할 리 없잖습니까, 형님들. └ ( •᷄⌓•᷅ )੨੨ └ ( っ◞‸◟ς)✧ 그렇게 잠시 성좌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박진우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팀장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탈진해 있더니, 이제 정신이 좀 든 건지 말을 걸어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아, 별 건 아닙니다 진우님.” 옆에 있던 고은아도 슬쩍 다가오며 말을 보탰다. “저희 이제 꽤 쉰 것 같은데, 슬슬 출발해도 되지 말입니다?” 아니, 넌 여군 아니라며. 말투 좀 어떻게……. “출발하기 전에 보급품도 좀 사고…….” 이번엔 강민우의 말이었고, 이례적으로 박진우가 강민우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팀장님. 저희 LP도 꽤 확보했는데, 여기서 그래도 뭐 좀 사긴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말은 이렇게 유하게(?) 하지만, 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나갔다가는 팀원들에게 먼저 살해당할 분위기다. 최소한 포션이라도 사서 기력을 회복해야, 다음 스테이지 진행이 가능한 것도 맞고 말이지. 한 일이십 분 쉰다고 모든 기력이 회복되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렇지 않아도 레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뒤 전투에 대한 기준을 좀 낮췄더니……. 여기서 충분히 쇼핑을 해주는 게 옳은 선택임을 깨달은 참이었다. ‘흐음.’ 잠깐 머릿속으로 현명한 소비계획에 대해 정리한 뒤, 전당포 지배인에게 다가갔다. “주문하겠습니다.” “호오, 어떤 걸 찾으십니까?” 일단 제일 중요한 버프 카드 다섯 장은 필수로 사고 시작해야겠고. 띠링-! [500LP를 소모하였습니다.] [‘황금의 축복’ 버프를 5회 적용받습니다.] [파티원 전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 50%만큼 증가합니다.] 나는 진열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연속해서 말했다. “이쪽에 있는… 기력 회복 포션 한 세트랑, 마나 포션 제일 큰 거 하나. 그리고 보호 마법 스크롤도 한 장 주시고요.” 띠링-! [380LP를 소모하였습니다.] “……!” 지배인조차 눈을 동그랗게 뜰 만큼 호쾌한 주문에, 파티원들이 꽤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 거 맞슴까?” “일단 그래도 적자는 아니긴 한데…….” 극한의 짠돌이 모드였다가 갑자기 보유 LP를 절반 가까이 써 버리니,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특히나 강민우 반응이 제일 어이없었다. 손까지 떠는 거 대체 뭔데? “파, 팔백 LP나 써도 되는 거 맞을까?” 오늘 미궁에서 네가 쏜 마력탄만 LP로 환산해도…… 800LP는 그냥 넘지 않을까 친구야? └ ㅋㅋㅋ 강민우쉑ㅋㅋ 데며드는 중. 데며드는 게 뭔데요? └ 쌀숭이에 물든다는 뜻이지 ㅇㅇ └ 재벌집 막내아들도 짠돌이로 만들어 버리는 대이브 클라스……. “…….” 어쨌든 총합 880 LP를 소모하자, 우리 파티의 재정 상태는 다음과 같아졌다. [현재 파티 손익 : +470LP] [현재 보유 LP : 970LP] [다음 스테이지 진행 시 예상 이자 소득 : 97LP] 보셨습니까, 형님들? 제가 또 투자할 땐 아낌없이 하는 편이라니까요? 그러니 강민우가 데며드느니 어쩌니 하는 ‘그 발언’에 대해서는 정중한 사과 요청을……. └ 지랄 ㅋㅋ └ ㅈㄴ 어쩌다 한 번 써놓고 이거 웃기는 놈이네ㅋㅋ 어쨌든 이렇게 금융치료를 마친 우리 파티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이 되어 다음 스테이지를 향해 이동했다. 방금 전까지 다들 반쯤 죽은 동태눈깔이었던 것 같은데……. 돈의 힘은 역시 위대하다는 말씀.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생각해 보니 오늘… 헌스쿨 첫 방영 날 아니었나? 10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함께, 브라운관 너머로 숨 막히는 전장이 펼쳐졌다. 거대한 방패가 몬스터의 앞발을 튕겨내고, 칠흑 같은 허공을 가르는 검광이 번뜩였다. 쏟아지는 화염 마법과 함께 괴수가 쓰러지는 극적인 몽타주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그 위로 화려한 금빛 로고가 쾅 하고 박혔다. [ HUNTER’S SCHOOL SEASON 3 ] [ 잠시 후, 전설의 시작! ]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본방송의 시작이 아니었다. 로고가 사라지자마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BGM 대신 경쾌한 CM송과 함께 광고들의 향연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화면 속에서는 유명 랭커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포효하고 있었지만, TV 앞에 모인 가족들의 시선은 화면과 테이블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거실 테이블 위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듯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족발 대짜에, 갓 튀겨 고소한 냄새를 진동시키는 치킨 두 마리. 거기에 새콤달콤한 막국수와 산처럼 쌓인 감자튀김까지. 대한민국 평범한 가정집의 화요일 저녁 식사라기엔 지나치게 호화로운, 마치 잔칫날을 연상케 하는 비장한 차림상이었다. “크흠, 큼.” 그리고 그 진수성찬 앞, 이 집의 가장인 이태철 씨는 리모컨을 생명줄처럼 꽉 쥐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거, 광고가 왜 이렇게 길어? 9시 정각이면 딱 시작해야지, 뜸을 들이고 있어.” 그는 채널이 돌아갈까 봐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꾹 누른 채,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니, 아빠. 아직 시작하려면 10분도 더 남았다니까? 지금부터 거기 붙어있을 필요가 없다고요.” 시율의 핀잔에도, 태철은 리모컨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 공주님이 뭘 모르시네. 마, 원래 이런 건… 예고편부터 봐줘야 기선 제압이 되는 거야. 흐름이 중요하다고, 흐름이.” “흐름은 무슨…….” 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 치킨 무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빠 분석 알지? 지난번 월드컵 때도 내가 교체 타이밍 기가 막히게 맞췄잖아! 감독이 내 말 들었으면 4강 갔어, 4강!” 말은 청산유수였지만, 리모컨을 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태철에게 헌터 예능에 대한 지식 따위는 전무했다. 평소 아침드라마와 스포츠 경기 말고는 딱히 TV를 보지 않는 그였기에, 헌터 예능이 어떤 식인지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후우.’ 태철은 사실 요즘, 아들 생각만 하면 속이 많이 쓰렸다. 아무리 나이가 서른여섯이라 해도, 그의 마음속 아들은 아직도 사회 초년 취준생과 다를 바 없었는데……. 10년 만에 기적처럼 돌아온 녀석이 응석을 부리기는커녕, 오자마자 대출 금리부터 따지고 있는 모습이 짠했으니 말이다. ‘미련한 놈. 그냥 한동안은 좀 쉬면서 놀지. 아비가 어떻게든 수습할 텐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출연료 받았다며 툭 던져 준 2천만 원도, 아직 그대로 통장에 남아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이 돈으로 마이너스 통장 하나라도 꺼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렇게 손이 나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태철은 울컥 치솟는 미안함과 대견함을 억누르려, 애써 더 유쾌한 척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내 김주연이 핀잔을 주었다. “여보는 걱정도 안 돼요?” “걱정은 무슨! 방송국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진짜 위험하면 방송을 내보내겠어? 저거 다~ CG야, CG!” “아이고, 우리 건율이 다치면 안 되는데….” “거참, 인상 좀 펴라니까?” 소파 구석에 찌그러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율은, 그런 엄마아빠의 대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고 말이다. ‘하여간. 두 분이 완전히 반대라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호쾌한 척하지만, 누가 봐도 마음속에 걱정이 한 트럭쯤 쌓여있는 아버지 이태철. 그리고 어느 정도 걱정하는 게 맞긴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은 어머니 김주연여사. [속보] 오늘의 금 시세, 안전자산 선호 심리에 급등…. 아들이 걱정된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TV 하단에 작게 흐르는 뉴스 자막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엄마를 보며, 이시율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시율의 시선은 다시 스마트폰 액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족들이 아들의 안위와 금값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그녀에게도 인생 최대의 난제가 펼쳐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이성환 (Shield Warrior)] vs [박진우 (Healer)] 화면 속에 띄워진 두 남자의 프로필 사진을 번갈아 보며, 시율은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하… 비주얼이랑 피지컬은, 암만 봐도 성환 님이 나라를 구하시는데.’ 제복 핏이 터질 듯한 이성환의 듬직한 어깨. 저기에 기대면 세상 무너져도 안전할 것 같다. 하지만. ‘진우 님 저 처연한 눈망울……. 자꾸 밟힌단 말이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병약미 넘치는 힐러라니. 이 또한 모성애를 자극하는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시율에게 오늘 방송은 너무너무 중요했다. 이 방송을 다 보고 났을 때, 생애 최초 헌터 덕질 인생의 동반자가 결정될 테니 말이었다. 시율이 비장하게 결심을 다지던 그때. “한다! 한다! 야, 조용히 해라!” “아무도 안 떠들었는데 아빠?” 이태철이 소파 끝에 걸터앉으며 요란을 떨었고……. 그와 동시에 지루하던 광고가 끝나며 TV 화면이 암전되더니, 다시금 웅장한 로고송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 HUNTER’S SCHOOL SEASON 3 ] [ Episode 1. 입학식 ] * * * 한편, 그 시각. 서울의 반대편 신림동 고시촌의… 한 평 남짓한 좁은 자취방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타다닥, 탁! 타닥!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유일한 광원인 모니터 세 대가 박민철의 안경알을 푸르스름하게 비췄다. 그의 시선은 마치 적진을 내려다보는 지휘관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좌측 모니터엔 <헌터즈 라운지> 통합 게시판, 우측엔 영상 프레임 분석 프로그램, 그리고 중앙엔 고화질 스트리밍 플레이어. 완벽한 ‘저격’을 위한 3면 세팅이었다. 치익- 꼴깍. 카페인 함량이 치사량에 가까운 에너지 드링크를 단숨에 들이킨 그가, 입가에 흐른 액체를 거칠게 닦아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자, 드가자.” 이미 게시판에는 ‘방송 시작 전 대기방’이라는 제목으로 수천 개의 댓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꽤 많이 눈에 띄는 건……. 티저 영상에서 보여준 이건율의 활약에 기대를 품은, 소위 ‘대깨건(대가리가 깨져도 이건율)’들의 찬양 글이었다. 민철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놈들. 그게 다 방송국 놈들의 편집에 놀아나는 거인 줄도 모르고.’ 35레벨 언더독의 엘리트 웨이브 하드캐리? 물리적으로, 아니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 티저 영상이야 짧은 컷 편집과 화려한 CG로 눈속임할 수 있었겠지만, 호흡이 긴 본방송에서까지 그 사기극을 유지할 순 없을 터. 민철의 손가락이 청축 키보드 위에서 현란하게 춤을 췄다. 그는 미리 작성해 둔 메모장 파일을 열었다. [제목: (실시간) 35레벨 거품 붕괴 현장 중계 달린다. 반박 안 받음.] ‘방송국 놈들, 그리고 알바 놈들. 오늘 내 팩트 폭격에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민철은 결코 단순한 악플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데이터에 기반해 거짓을 심판하는 ‘방구석 다크 나이트’에 가깝달까. 민철은 마우스 커서를 [화면 캡처] 버튼 위에 올려두고, 숨을 죽였다. “내가 오늘 나노 단위로, 프레임 하나하나 뜯어서 그 ‘주작’을 까발려 줄 테니까.” 단 한 번의 실수, 단 1초의 어설픔. 그것이 포착되는 순간, 이건율이라는 거품은 박민철의 손끝에서 터져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 속 암전이 걷히며, 카운트다운이 0을 가리켰다. * * * 예의 그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함께, 화면 속에 폐허가 된 서울의 전경이 펼쳐졌다.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과 검게 그을린 아스팔트, 그리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남산 타워까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이 모든 풍경을 뒤덮고 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얼음 덩어리들이었다. 한강 물줄기마저 꽁꽁 얼어붙어 거대한 빙판길이 되었고, 빌딩 숲 사이로는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영하 40도의 혹한, 생명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 그것이 바로 이번 <헌터즈 스쿨 3>의 입학 미션 무대, 가상 던전 <얼어붙은 서울>이었다. “와, 스케일 장난 아니네.” 시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TV 스크린에 점점 더 몰입하기 시작했다. 티저 영상만 고퀄이고 실제는 다를 거라던 헌스쿨 안티 팬들의 주장은, 시작부터 헛소리라는 게 증명되고 있었다. 그리고 던전의 풍경이 한 차례 스크린을 지나간 다음 순간. 두둥-! 콰아앙! 이전보다 좀 더 웅장해진 BGM 효과음과 함께, 소위 ‘주인공’이라 불리는 우승 후보들의 화려한 쇼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화면에 잡힌 것은, 거대한 방패로 얼음 골렘의 주먹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남자였다. [ ‘철벽’ 이성환 (Shield Warrior) ] [ 시작부터 화끈한 탱킹! 이것이 우승 후보의 품격? ] 자막에는 화려한 불꽃 이펙트가 달렸고, 이성환이 고함을 지르며 방패를 밀어내자 집채만 한 몬스터가 휘청거렸다. “와…… 미친.” 소파에 앉은 시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피지컬… 대체 머선 일임? 어깨가 그냥 태평양인데? 저게 사람이야 몬스터야? 와, 진짜 치인다 치여.’ 역시 랭킹 1위는 ‘입덕’을 부르는구나 싶어 홀린 듯 화면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와삭, 하고 산통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세상 심드렁한 표정으로 치킨 무를 씹고 계셨던 것이다. “쯧쯧. 시율아, 잘 봐라. 저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야.” “……예?” “힘을 저렇게 무식하게 쓰면 나중에 지쳐서 어떻게 버티냐? 봐라, 벌써 숨 헐떡거리는 거. 쯧쯧, 저 친구는 페이스 조절 실패네. 1라운드 광탈각이야.” 시율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광탈각이라니… 우리 이태철 사장님 언제 이렇게 MZ해지셨대?’ 평소 축구 볼 때나 나오던 아빠의 방구석 전문가 모드가… 헌터 예능에서까지 발동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헌터라곤 동네 뒷산 멧돼지 잡는 포수밖에 모르는 양반이, 헌스쿨 최대어 루키를 대상으로 훈수를 두고 있다니. “아빠… 제발.” 할 말이 많았지만… 최대한 뒷말은 삼켰다. 어차피 말해봐야 우리 이태철 사장님께선 이해하기 어려우실 테니 말이다. ‘딱 봐도 인자강인데 어디가 하수라는 거야, 진짜.’ 그래도 참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를 덧붙이긴 했지만……. “저게 힘 빠진 게 아니라 스킬 쿨타임 도는 거거든요?” “쿨파스? 벌써 아파서 파스 발라야 한다고?” “아빠아악! 아 제발 좀!” 결국 본전도 못 찾은 시율은, 그냥 다시 소파 구석에 찌그러졌다. ‘으, 커뮤 실시간 채팅이나 구경해야지.’ 그때, 화면이 전환되며 다음 타자가 등장했다. 쉭, 쉬이익―! 무너진 빌딩 숲 사이를 바람처럼 질주하는 날렵한 그림자. 쌍단검을 역수로 쥐고 몬스터의 급소만 노리는 박하준의 플레이는 마치 액션 영화, 아니 예술에 가까웠다. “헐, 찢었다.” 시율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박하준 얘도 비주얼 괜찮은데? 몇 살이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괜히 아빠한테도 한 번 다시 물어봤다. “아빠, 솔직히 쟤는 인정이지? 쟤도 별로야?” 그러자 태철이 순간 움찔하더니, 급하게 닭다리를 들어 입가를 가렸다.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크흠. 뭐… 빠르긴 하네.” “그치? 그래도 쟤는 좀 치게 생겼지?” “아니, 아니지! 너무 가벼워. 남자가 묵직한 맛이 있어야지, 저렇게 날파리마냥 날아다녀서야 원. 저러다 한 대 스치면 훅 가는 거야. 안정감이 없잖아, 안정감이!” 시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와, 우리 아빠 억까 폼 미쳤네.’ 기적 같은 아빠의 논리대로라면… 탱커는 미련해서 탈락, 암살자는 가벼워서 탈락이었다. 아마 마법사가 나오면 남자가 주먹을 써야지, 뒤에서 불장난이나 하고 있다며 깔 게 분명했다. 그냥 기승전-‘우리 아들 짱’이라고 하고 싶은 것일 터다. ‘무슨 마음이신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쉴드가 너무 투명하시네.’ 그렇게 방송 시작 10분이 넘어가도록, TV 화면은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의 화려한 입덕 영상으로만 가득 찼다. 마법으로 얼음벽을 녹여버리는 냉미녀 강소희, 거대한 대검을 이쑤시개처럼 휘두르는 용병까지. 하나같이 비주얼도 실력도 탈인간급인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화려함이 더해질수록, 거실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문제는 딱 하나였다. “시율아. 그런데 니네 오빠는 언제쯤 나오는 거냐?” 그렇다. 이 집 장남이 아직까지 코빼기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게… 지금 이 방송의 유일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10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HBC의 예능국 모니터링실. 장세연은 후배 PD 하나와 함께, <헌터즈 스쿨3> 1화 본방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화면 속에서 거대한 얼음 골렘이 이성환의 방패를 내려찍자, 모니터링 룸의 스피커가 웅장한 타격음을 토해냈다. [쿠우웅―!] “와… 선배. 이번 시즌 때깔 미쳤는데요?” 옆자리에 앉아 닭 다리를 뜯으며 화면을 훔쳐보던 후배, 김준호 PD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옆 팀에서 음악 예능을 맡고 있는 에이스였지만, 오늘만큼은 경쟁자라기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 자리에 눌러앉아 있었다. 사실 김준호 또한, <헌터즈 스쿨>시리즈의 팬이었으니 말이다. “CG 팀 갈아 넣으셨어요? 퀄리티가 무슨 영화네, 영화.” “글쎄. 솔직히 CG팀이 한 건 크게 없을걸?” “그래요?” “그냥 인공던전 제작에 제작비 엄청 갈아 넣은 결과물이야.” “와…….” “그래도 뭐, 돈값은 확실히 하는 것 같지?” “그러게요 선배.” 장세연은 팔짱을 낀 채,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는 1화 방영분의 초반부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성환, 박하준 같은 우승 후보들이… 화려한 스킬로 몬스터를 유린하는 장면. 중간중간 삽입된 멘토들의 리액션이 컷의 호흡을 맛깔나게 살려주고 있었다. [서지혁 : 와, 저 친구 기본기 보세요. 저게 루키라고요?] [마광철 : 방패 각도 예술이네. 저게 그냥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블로킹 기술의 일종입니다 여러분. 그냥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멘토들의 전문성 있는 해설이 더해지자, 확실히 몰입감이 더 생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준호의 시선도, 이미 이성환의 몸짓 하나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히 스타성 있는 애들이 초반에 눈길을 확 잡네요. 이성환 쟤는 그냥 주인공이고.” 준호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세연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주인공? 글쎄.” 미묘한 장세연의 대답에, 김준호 PD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어, 그럼 아니예요?” “뭐… 길게 보면 이성환이야, 확실히 이번 시즌 주인공이 될 만하긴 하지.” “흐음. 그렇다는 말씀은…….” “적어도 1화에선 주인공이 아니란 소리야. 오늘 방영분에서 쟤들은… 그냥 ‘빌드업’일 뿐이니까.” 장세연의 설명에, 김준호PD의 표정에 더욱 흥미가 올라왔다. 이미 지금까지도 충분히 몰입감 넘치는 구조였는데… 저 말에 따르면 숨겨둔 한방이 더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준호는, 그 히든 카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1위 했다던 35레벨… 그 참가자 말하는 거죠? 이건율인가?” 방영분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 회사에서도 최대한 스포를 피했던 그였지만. ‘이건율’이라는 완전히 처음 들어보는 플레이어가 입학 미션에서 1위 했다는 이야기만큼은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근데 왜 안 나와요? 지금 방송 시작한 지 20분 넘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세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큐시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잘 봐. 편집 호흡을 일부러 비틀었으니까.” 화면이 전환되었다. 방송 구도가 초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이제까지 메인 스크린에 잡히지 못했던, 중하위권 참가자들의 고군분투가 스크린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메인 스크린에 떠오르지 못했던 만큼 이 영상들에선 멘토들의 리액션을 볼 수 없었지만. 대신 김신우 캐스터의 나레이션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보십시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혹한을 견뎌야 하는 이들의 사투를!] 비명, 도주, 절망. [이들에게 ‘얼어붙은 서울’은 사냥터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열기 구슬’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재난 현장 그 자체죠.] 화려한 영웅들의 활약 뒤편에 있는 처절한 현실. [그리고 바로 그 절박함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아주 기묘한 인연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몽타주 사이에, 아주 짧은 컷 하나가 툭 던져지듯 삽입되었다. […고마워요.] [그럼, 우리 파티 할래요?] 폐허가 된 편의점 안. 창백한 안색의 미녀 강소희와, 쇠파이프를 든 한 남자의 건조한 대화. 단 5초. 그것이 이건율의 첫 등장이었다. “어? 강소희네? 근데 저 남자, 그 이건율이죠? 와, 쟤는 뭔데 강소희랑 파티를 맺어요?” “궁금하지?” “네. 저 상황이 뜬금없잖아요. 앞뒤 설명도 없고.” “그게 포인트야. ‘쟤네 둘이 왜 같이 있어?’, ‘저 남자는 뭔데 강소희가 저렇게 순순히 따라가?’ 하는 궁금증.” 세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 보여주면 재미없어. 이 친구의 진짜 무기는 ‘반전’이거든. 시청자들이 이성환이랑 박하준한테 정신 팔려서 ‘와, 이번 시즌 쟤네가 다 해 먹겠네’라고 확신할 때까지… 꽁꽁 숨겨두는 거지.” 방영분은 이제 슬슬 중반부로 넘어갔다. 수많은 화로를 둘러싼 쟁탈전. 그 와중에 생겨나는 갈등과 인연들. <얼어붙은 서울>안의 페이즈가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흑백 화로의 경쟁 구도로까지 이어지는 이 스토리라인은, 별다른 연출 없이도 박진감 넘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선 다시, 멘토들의 맛깔나는 리액션도 함께 송출되었다. [마광철 : 와, 이거 장난 아닌데요? 방송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아주 살벌하게 붙네.] [서지혁 : 시스템이 참 짓궂어요. 살려면 남의 화로를 꺼뜨려야 한다니. 결국 이기적인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잖아요?] [최재민 : 하지만 저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결국 헌터로서의 그릇을 증명하는 거겠지요. 이 또한 하나의 성장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멘토들이 경악하고, 관객들이 환호하는 장면이 숨 쉴 틈 없이 몰아쳤다. 현장에 직접 나가 있던 김신우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까지. [이대로면… 다 죽습니다! 아무도 못 살아남아요!] 그렇게 스토리는 엘리트 몬스터 웨이브가 최후의 보루를 덮치는 절망적인 상황까지 도달했고. [한소은 : 아아… 저기 보세요. 전열이 무너지니까 힐러들이 비명을 지르잖아요. 저러면 버티기 힘들 텐데.] [채유현 : 지금은 눈앞의 적보다 줄어드는 ‘화로의 수명’이 더 무서울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은 마비되고 본능만 남게 되니까요.] 화면 속 참가자들의 눈에 절망이 서릴 때쯤…… 김준호PD도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와…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요, 선배.” “그치?” “선배님 얘기 미리 못 들었으면, 저도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했을 정도인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사실 제작진들도 저땐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예에?” 웃으며 잠시 모니터를 응시하던 장세연이,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카운트다운 해.” “갑자기 그게 무슨…….” “3, 2, 1.” [콰아아앙―!] 세연의 카운트와 동시에, 화면 속 전장 한복판에 거대한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위에서, 언월도를 든 한 남자가 괴수들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슈아아악―!] “우와, 씨.” 김준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성환도, 박하준도 쩔쩔매던 엘리트 몬스터들이… 이건율 참가자의 손짓 한 번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광경. [참가자 ‘이건율’이, <얼어붙은 서울>의 보스 ‘동장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스 처치 보상이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부여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플레이어들의 체온 하강 속도가 50%만큼 감소합니다.] 이 광경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멘토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김신우 캐스터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대체 무슨 반전일까요?! 혹시 제작진이 숨겨놓은 마지막 히든 참가자들인가요?] [멘토분들도 적잖이 당황하신 모습입니다!] [저 여성 참가자분은 또 누구죠?] 김신우 캐스터의 현장감 넘치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저때까지 이건율의 존재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상황은 훨씬 더 극적으로 만들어졌고. 저도 모르게 흥분한 김준호PD도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저거… 저거 아까 편의점 그 남자 맞죠? 이건율? 아니, 연출이 미쳤네요? 갑자기 땅에서 솟아버리네?” 하지만 장세연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도 물론 훌륭했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야. 편집팀이 이 부분 때문에 사흘 밤 샜어.” 이 다음 연출이 장세연이 생각하는 클라이막스였으니 말이다. 지이잉- 돌연 화면이 흑백으로 반전되더니, 필름이 감키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시간이 되감겼다. 이어서 화면에 뜬 자막. [ Time Rewind : 그 시각,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메인 스크린 바깥에 있었던 이건율의 행적이 속도감 있게 펼쳐졌다. 남들이 화로 뺏기 싸움을 할 때 홀로 엘리트 몬스터를 사냥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동장군을 찾아가는 과정. 이 부분 또한 멘토들의 리액션 대신, 오로지 김신우의 경악 섞인 내레이션과 이건율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만이 장면을 채우고 있었다. “와… 이거 순서 바꾸니까 느낌 확 다르네요. 앞에서 보여줬으면 그냥 ‘사냥 잘하네’ 했을 텐데, 결과부터 보여주고 과정을 까니까….” “개연성이 부여되는 거지. ‘아, 쟤는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다 계획이 있었구나’ 하고.” 세연은 팔짱을 꼈다. 이건율이라는 캐릭터는 세연이 볼 때… 사실 ‘성장형’이 아니었다. 물론 레벨이야 참가자들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했지만. 던전을 공략하는 과정과 독특하고 비상한 플레이 방식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처음부터 ‘완성형’에 가까운, 하지만 아무도 몰라봤던 재야의 고수에 가까운 느낌이었던 거다. 그러니 그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려면,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율은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인지도가 제로에 수렴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대망의 1위 발표까지 이어지는 거지.” 화면 속 전광판에 [1위 : 이건율]이라는 이름이 박히자, 방송은 엔딩 크레딧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녀 김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순위 발표 장면까지,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느낌이었으니까. “선배, 편집 진짜 쫀득하게 잘하셨네요. 저 35레벨 친구, 내일부터 검색어 도배되겠는데요?” 그런데. “잠깐 기다려 봐.”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또 뭐가 있어요? 엔딩 크레딧 올라가잖아요.” “요즘 관객들은 쿠키 영상 안 보면 극장 안 나가잖아.” 세연이 씨익 웃으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화면이 꺼지나 싶던 그 순간. 노이즈와 함께 화면이 다시 켜졌다. [ Hidden Track : 얼어붙은 왕좌의 주인 ] 아무도 없는 설원. 홀로 보스 몬스터 ‘동장군’과 대치하고 있는 이건율의 뒷모습. 그리고 그가 거대한 마력총을 꺼내 들며, 동장군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잡혔다. [타앙―!] 그러니까 이건 아마…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던 이건율과 동장군의 전투, 그 마지막 장면. 동장군의 투구가 박살 나고, 이건율이 무덤덤하게 그 잔해 위로 올라서는 장면에서 화면이 뚝 끊겼다. [모든 참가자들의 전투영상 풀 버전은, 추후에 공개됩니다.] 그리고 정적. 잠시 멍하니 화면을 보던 준호가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문질렀다. “……와, 미쳤다. 이거 떡밥을 쿠키로 던지면서, 미공개 영상으로 따로 빼다니…….” “흐흐.” “이건 공식 채널에 따로 올리나요?” “빙고.” “캬… 이거까지 설계된 거네요.” “그치. 사실 이건 본편에 잘못 넣으면 루즈해져. 여기서는 그냥 ‘임팩트’ 한 방이면 충분하거든.” 장세연은 텅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봤지? 이 정도면 히든카드라고 할 만하지 않아?” 내일 아침이면, 대한민국 헌터 업계의 모든 시선이 저 35레벨 헌터에게 쏠릴 것이다. 그리고 그건, <헌터즈 스쿨 3>의 시청률 폭발을 의미했다. 딸깍- 세연은 노트북을 열어, <헌터즈 스쿨> 커뮤니티 라운지에 접속해 보았다. 그리고 여기는 이미……. [토론] 솔직히 ‘타임 리와인드’ 편집 미쳤다고 생각하면 개추 ㅋㅋㅋ [잡담] 이건율 코인 탑승한 사람들 있냐? 일단 나부터 손ㅋㅋ [질문] 강소희랑 이건율 관계 뭐임? 아까 편의점에서….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10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헌터즈 스쿨 시즌3>의 대망의 첫 화가 막을 내린 직후. 자칭 헌스쿨 팬들은 두근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관심도 많고 기대도 많았던 만큼… 방영 전까지 수많은 논란과 어그로가 난무했었지만……. 결과적으로 방영된 헌스쿨 시즌3의 1화는, 팬들에게 그야말로 압도적인 도파민을 선사했으니 말이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이번 1화가 ‘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명작(GOAT)’이라며 찬사를 쏟아내고 있었으며. 부모님과 거실에 둘러앉아 숨을 죽인 채 본방을 사수한 이시율의 감상 또한, 대중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쩔었지 진짜.’ 그리고 그 중심에 오빠인 이건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제대로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집에만 들어오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뒹굴거리는 백수 오빠일지 몰라도… 화면 속에서 확인한 오빠의 본업 모먼트는 확실히 리스펙할 만했다. 그러니까……. ‘용돈 조금만… 올려달라고 해볼까?’ 사고의 흐름이 왜 이쪽으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흐히.” 어쨌든 헌스쿨 첫방의 강렬한 여운 때문인지, 시율은 도저히 이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벽시계의 바늘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도파민이 혈관에서 흐르는 느낌인데……. 멀쩡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MJ] : 야, 누가 보면 너 전시즌부터 헌스쿨 팬인 줄? 그러니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음에도……. 오직 하나, 그녀가 손에 쥔 스마트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만이, 이시율의 상기된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히죽히죽 웃는 이시율은 어느새, 스마트폰 메신저를 열고 있었다. [퇴사하고 싶다(입사 안 함) ☺5 ‘+999’] 시율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채팅방에 입장했다. 스크롤을 한참이나 올려야 했다. 방송이 시작된 시점부터 톡방은 이미 광란의 도가니였으니까. [MJ] : 야 이시율 나오라고!!!! (링크 공유: 헌터즈 스쿨 1화 하이라이트 – 게임 체인져의 등장?) [MJ] : 이건율 참가자님 사인은 이미 확보해 뒀겠지? 와 나 손떨려;; [자소서쓰는중] : 헐? 야 저 사람이 진짜 이시율 오빠였다고? [자소서쓰는중] : 그러고보니 이름 ㅈㄹ비슷하네? [졸업유예] : 대박ㅋㅋㅋㅋㅋ 미친 거 아냐? 야 시루 왜 말 안함?? [졸업유예] : 와;; 그런데 나 생각해보니 이시율 오라버니 뵌 적 있음. [자소서쓰는중] : 엥? 언제? [졸업유예] : 중1 방학때ㅋ 12년밖에 안 지났긴 함 ㅇㅇ 시루 친구라니까 시나몬라떼 사주심ㅋ 누구랑 다르게 인성고트ㅎ [MJ] : 도랏ㅋㅋㅋㅋㅋ기억력 뭔뎈ㅋ 박지은ㅋㅋㅋㅋ ……중략…… 쏟아지는 물음표의 향연.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시율의 입꼬리는 어느새 씰룩이고 있었다. [자소서쓰는중] : 어, 이시율 읽었닼ㅋㅋ 하지만 톡은 최대한 덤덤한 느낌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던져야 한다. [나] : 우리 오빠 맞긴 하지. 근데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임? [MJ] : 호들갑 ㅇㅈㄹ;;; [MJ] : 지금 대체 주접 어떻게 참는데;;; [자소서쓰는중] : 야, 이시율. 너 오빠한테 충성해라……. 어쩐지 지난 주에 너네 편의점 앞에서 뵀을 때도 아우라가 있으셨다니까? 시율은 콧방귀를 뀌었다. 친구들의 기억 조작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혈육의 이미지 세탁이 이렇게 순식간에 되어버릴 줄이야. ‘아우라는 개뿔. 그때 쓰레기봉투 터졌다고 이건율 겁나 짜증나 있었는데.’ 어쨌든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잠은 더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시율은 아주 자연스럽게 라운지 어플을 실행했다. 띠리링-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어플이 켜졌고, 시율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로딩이 걸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시에 접속했으면 서버가 비명을 지르는 걸까. 잠시 후, 뱅글뱅글 돌아가는 로딩 바가 사라지고 화면에 ‘베스트 게시판’ 목록이 떴다. 게시판은 온통 [데이브]와 [이건율]이라는 세 글자로 도배가 되어 있었지만, 시율의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내가 오빠 얼굴이나 찾아보자고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니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혈육의 활약상이 아니었다. 시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색창을 터치했다. 그리고 경건한 손길로, 소중한 이름 세 글자를 입력했다. [검색(제목 / 내용 포함) : 박진우] “후후, 우리 진우 님 지분도 챙겨야지.” 엔터 키를 누르자마자, 시율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비록 화제성은 ‘괴물 신인’ 데이브에게 밀렸을지 몰라도, 코어 팬층의 화력만큼은 박진우 역시 만만치 않았다. [BEST] 오늘자 박진우 미모 실화냐? (움짤 찐 거 푼다) [BEST] 땀 닦는 힐러님… 이게 나라다……. [BEST] 솔직히 오늘 방송 진주인공은 박진우 얼굴 아님? 반박 시 내 말이 맞음. 시율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한 채, 가장 조회수가 높은 게시물을 클릭했다. -[작성자] : 와, 나 진짜 숨 멎는 줄. 몬스터 튀어나와서 다들 인상 쓰고 있는데 혼자 화보 찍으심;; 성스러운 것 좀 봐라. 게시물 안에는 박진우가 전장을 뛰어다니며 신성마법을 뿌려대는 장면이 고화질 움짤(GIF)로 올라와 있었다. 하얀 사제복, 남자라고 믿기 어려운 긴 속눈썹. 거기에 마치 필터 효과처럼, 그의 주변으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신성 마법의 효과들까지. 이건… 주변 배경마저 성스럽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 내 눈.” 시율은 홀린 듯 화면을 길게 터치해 [이미지 저장]을 눌렀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힐링이지.” 오빠야 너무 대단하지만, 그래도 여동생으로서 혈육을 덕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짠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오빠보다는… 미안하지만 ‘진우 님’의 존안이 시율의 취향이었다. ‘댓글들도 주접 장난 아니네.’ -[라식말고박진우] : 오빠 날개는 어디다 두고 왔어? 천국에서 안 찾으러 와? -[진우야나라세워] : 근데 저 얼굴이면 굳이 힐 할 필요 없지 않냐? 내가 시체면 그냥 손끝만 닿아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데 ㄷㄷ 행복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댓글들을 감상하던 시율. 그런데, ‘박진우’ 검색 결과 리스트 맨 아래쪽에, 심상치 않은 게시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검색어와는 상관없는 글이었지만. 아무래도 내용 안에 ‘박진우’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어 딸려 나온 게시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시율은 이 글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아, 이 관종 또 왔네.” [화제] 솔직히 데이브 거품 아님? 냉정하게 팩트만 말함. (댓글 999+) 작성자 : 팩트만팬다 [팩트만팬다]. 헌터즈 라운지 이용자라면 모르기 쉽지 않은 악명 높은 어그로꾼. 제목 옆에 붙어 있는 (댓글 999+)라는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게시글 아이콘 옆에는 ‘불타고 있는’ 모양의 이모티콘까지 떠 있는 걸 보면……. 지금 이 순간, 커뮤니티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라는 뜻이었다. “무슨 댕소리를 지껄여 놨길래 댓글이 천 개나 달려?” 시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붉게 타오르는 게시글 제목을 클릭했다. 오빠를 깔 수 있는 건 오로지 혈육뿐이었다. * * * 어두컴컴한 방 안. 현란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엔터’ 키를 부서져라 내려쳤다. 모니터 화면 속,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팝업창이 뜨자마자 박민철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진짜…… 청자들 수준하고는.” 그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옆 모니터에 띄워진 <헌터즈 스쿨> 다시 보기 창을 노려보았다. 프레임단위 분석을 위해, 벌써 다시보기만 2번째 정주행중인 그였다. 그런데 화면 속 댓글창은 온통 ‘이건율 찬양’ 일색이었다. -[와, 이건율 미쳤다. 35레벨진짜예요?] -[방송국 놈들, 저런 인재를 어디서 구해온 거임? 섭외력 칭찬해.] -[리와인드 편집ㄷㄷㄷ 감다살 진짜 ㄷㄷ] 칭찬, 칭찬, 또 칭찬. 박민철은 그 역겨운 댓글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칭찬은 무슨.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개돼지들.” 박민철은 먹다 남은 컵라면 용기를 옆으로 치우며,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HBC 놈들, 편집 진짜 교묘하게 잘했네. 영혼을 갈아 넣었어, 아주.” 일반인들은 화려한 연출과 BGM에 속아 넘어갔겠지만, 그의 ‘예리한’ 분석안은 속일 수 없었다. 박민철은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초반부 장면으로 돌아갔다. [장면 1 : 편의점에서의 응급처치] 이건율이 강소희의 마력 역류를 제압하기 위해 편의점을 털어 화학 용액을 제조하는 장면. 대중들은 ‘순발력 미쳤다’, ‘천재적인 임기응변’이라며 열광했지만, 박민철의 생각은 달랐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는 화면을 일시정지시키고 삿대질을 해댔다. “이건율이 ‘마침’ 마력 냉각수 파이프를 파밍했는데, ‘마침’ 쓰러져 있던 강소희를 만났고…… 그런데 ‘마침’ 두 사람이 만난 그 편의점에 마력 역류를 중화시킬 화학 약품이… ‘마침, 딱 그 타이밍’에 편의점 진열대에 다 있었다고? 그것도 종류별로?”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주작’이었다. 방송적인 재미를 위해 가공되어 만들어진, 가짜 상황이라는 의미다. ‘제작진이 미리 깔아둔 거지. 저기에 저 약품이 있다는 걸 알고 들어간 거야. 대본에 써 있었겠지. 3번 진열대로 가서 약품 가져다가 배합하라고.’ 박민철은 비웃음을 흘리며 다음 장면으로 스킵했다. 그가 가장 분노했던, 그리고 가장 어이없어했던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다. [장면 2 : 드레이크 원 탭(One tap) 킬] 거대한 드레이크가 이건율이 휘두른 언월도 한 칼에 날갯죽지가 그대로 찢겨나가는 장면.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봐도, 시각적인 쾌감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게 제일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이야.’ 박민철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냥 제작진이 주작해서, 말도 안 되는 템빨 장비 쥐여 준 거라고.’ 35레벨 헌터가 일반적으로… 60레벨급 에픽 몬스터에게 흠집이라도 낼 수 있던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심지어 준 용족인데다 엘리트 몬스터인 드레이크. 그 드레이크의 튼튼한 날개가, 한칼에 찢겨 나갔다? “답은 하나지.” 박민철의 눈이 화면 속 이건율이 들고 있는 무기에 고정되었다. 저런 국가권력급 무기를 쥐여 주면, 지나가는 초등학생도 드레이크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이건율의 실력’이라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래서 헌알못들 혐오한다니까.” 박민철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게시글에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는 반박 댓글들. [열등감 쩐다], [니가 해보든가] 같은 비난들을 보며… 그는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두고 봐라, HBC.” 안경 너머의 눈이 음침하게 번들거렸다. “이 거품, 내가 다 걷어내 줄 테니까. 네놈이 ‘진짜’가 아니라는 증거, 내가 반드시 찾아낸다.” 박민철은 비장한 표정으로, [새로 고침] 버튼을 눌렀다. 진실을 수호하는(?) 외로운 싸움꾼, ‘팩트만팬다’의 밤은 남들보다 긴 편이었다. 10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게이트 바깥세상이 <헌터즈 스쿨 3>의 첫 방영으로 떠들썩하게 달아오르고 있을 무렵. 정작 그 화제의 주인공들인 게이트 안의 참가자들은, 바깥 상황 따위는 짐작조차 못 한 채 미궁 공략에 한창이었다. 콰앙-! 거대한 돌덩이가 무너져 내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방패를 내린 최민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아냈다. “후우…. 쉽지 않네요, 진짜.” 그의 갑옷은 이미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그을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몬스터들이 모두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제 한 스테이지만 더 클리어하면 전당포 나오겠네요. 조금만 더 힘내죠.” 파티의 리더이자 S등급 마법사인 권유나가 지팡이를 갈무리하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그녀가 이끄는 파티는 방금 막 15스테이지를 돌파하고, 16스테이지의 입구 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나름 상위권 파티다운 준수한 속도였다. “급할 거 없으니까, 잠깐 정비하고 가시죠. 마력도 채워야 하고.” 권유나의 제안에 B등급 궁수 박소미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죽겠다…. 여기 왜 이렇게 덥고 습해요?” “그러게요. 체력 소모가 평소보다 심하네요.” 최민석도 방패를 내려놓고 물통을 꺼내 들었다.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이 찾아오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바깥세상’으로 흘러갔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헌스쿨 첫 방송 나갈 시간 아닌가요?” 박소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최민석의 눈이 반짝였다. “아, 오늘이었죠? 화요일 저녁.” “네. 지금쯤이면 한창 방송 중이겠네요. 아, 궁금하다. 시청자 반응 어떨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입학 미션 때 고생한 거 생각하면… 편집이라도 좀 멋있게 나왔어야 할 텐데.” 최민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얼어붙은 서울>에서의 기억은 그들에게도 꽤 강렬했으니까. “그래도 민석 님은 분량 좀 챙기셨을 것 같은데요? 그때 저희 파티 탱크 역할을 거의 혼자 다 하셨잖아요.” “에이, 유나 님이 다 잡으신 거죠. 저는 그냥 버티기만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진우 님은 잘 나왔으려나?” 권유나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입학 미션 당시 그들과 같은 파티였던 힐러, 박진우의 이야기였다. “진우요? 그 친구야 뭐…….” 그 얘기에 박소미도 관심이 생겼는지,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A등급이면서 포지션 결정전에서 1위를 한 힐러가 박진우였기에, 궁금한 게 당연했던 것이다. “진우님 잘 아시나 봐요?” “입학미션에서 파티였거든요.” “아하.” “솔직히 진우 님이 마지막에 희생하셔서 A등급으로 밀려나신 거라… 많이 아쉽긴 해요.” 대화 중 최민석은 문득 드래프트 때의 기억을 떠올랐다. 박진우가 선택했던 의외의 팀장, 이건율. 사실 민석은 진우가, 당연히 이성환의 팀을 선택할 줄 알았었다. 진우는 A등급 참가자들 중에서 1순위 드래프트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환만큼 진우의 서포팅 능력을 극한으로 받아 줄 딜탱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우는 이건율을 선택했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진우는 그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에게서… 처음부터 뭔가를 봤던 걸까?’ 지금이야 포지션 결정전에서 실력을 증명한 상황이었으니, 그의 역량을 의심하는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분명 드래프트 때는 이건율 참가자에 대한 검증이 덜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민석은 진우의 속내가 궁금했었다. 그냥 순수한 궁금증으로 말이다. ‘뭐, 그런 생각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긴 한데.’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미궁을 탈출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권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뭐, 알아서들 잘하고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도 힘내서 다시 가보죠.” 최민석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본방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라도 얼른 이거 깨고 나가야겠어요.” “이제 반쯤 왔나요?” “그거야 아직 모르지만… 반은 넘지 않았을까요? 보통 이런 미궁이 25에서 30스테이지 정도면 보스 룸 단서가 나오니까.” “으, 갈 길이 머네요.” 박소미가 앓는 소리를 하며 주섬주섬 활을 챙기고 있는데, 권유나가 뭔가 생각났는지 민석을 다시 돌아봤다. “근데 나가도 어차피 저희는 방송 못 보는 거 아니에요? 그거 때문에 통신기기도 다 걷어간 거잖아요.” “아, 맞다.” 최민석이 아차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합숙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은 철저히 차단된다는 룰을 깜빡한 것이다. “방송 반응 보고 멘탈 흔들릴까 봐 그렇다던데….” “그래도 어떻게 됐는지 정도는 스태프분들이 귀띔해주지 않을까요? 시청률 대박 났다, 아니다 정도는?” “뭐, 그 정도는 알려주겠죠?” 권유나가 피식 웃으며 포탈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얼른 가서 물어봅시다. 대박 났는지 쪽박 찼는지.” “좋아요! 가자고요!” 파티원들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16스테이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9스테이지 전당포에서 거금 880 LP를 태운 뒤. 우리 파티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황금의 축복’ 버프가 적용 중입니다.] [공격력/방어력이 100% 증가합니다.] 처음에 샀던 버프까지 합해서, 도합 100%라는 어마어마한 능력치 버프. 눈앞에 떠 있는 이 버프 창을 보며 나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돈을 쓴 보람이 피부로 느껴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10스테이지와 11스테이지를 뚫고 올라오는 시간을 합해도, 9스테이지 하나 클리어했던 시간보다 짧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으랏차!!” 콰아앙―! 고은아가 거대한 타워 실드를 앞세우고 돌진하자, 12스테이지의 몬스터인 ‘아이언 호그’들이 마치 볼링핀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평소라면 묵직하게 버텨내며 라인을 유지해야 했을 공격을,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찍어 누르며 튕겨내 버린 것이다. “와, 몸이 깃털 같습니다! 방패가 하나도 안 무겁지 말입니다!” 잔뜩 신이 난 고은아가 방패를 붕붕 휘두르며 전열을 휩쓰는 꼴을 보니, 당분간 앞 라인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강민우가 제법 훌륭하게 화력을 지원해주는 중이었다. 퍼엉-! 콰앙! 언제 봐도 감탄스러운 돈지랄 마력총의 화력. 그 하얀 총신의 전방으로, 백색 섬광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버팁시다! 거의 다 잡았으니까!” 그런데 녀석의 말투가, 전과 다르게 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 진성님! 이쪽 조금만 서포팅좀!” “앗, 알겠습니다!” “탄창 리셋 할 시간만 좀 벌어줘요.” 이제까지는 주구장창 모든 사람에게 반말만 쓰던 녀석이… 반쯤이라도 존대를 사용하기 시작한 거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허공에 마력탄을 난사하던 녀석이…… 이제는 꽤 신중하게 타겟을 잡으며 정상적인(?) 딜 포지션을 잡고 있었다. 어… 갑자기 마력 앰플이 아까워지기라도 한 걸까? └ 방장한테 물들기 시작한 게 확실함 ㅇㅇ. 이건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달라진 건 분명했다. 그렇지만 뭐, 적어도 나쁜 방향은 아니니까……. 콰아앙-! 어쨌든 이렇게 순조로운 전투 양상에 힘입어, 우리는 파죽지세로 스테이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13스테이지에서야 잡템을 팔기 위해 전당포를 선택했다지만……. 14스테이지와 15스테이지도 순식간에 클리어된 것이다. 적자 패널티도 해소됐겠다, 버프도 빵빵하겠다.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처럼 미궁을 뚫어버린 우리는, 순식간에 16스테이지의 문턱에 도달해버렸다. ‘체감 난이도 자체가 확실하게 내려갔어.’ 9스테이지까지 유지됐던 난이도 증폭 2배라는 패널티가…… 아무래도 크기는 컸던 모양이었다. ‘보자……. LP도 다시 2000 가까이 모였고.’ 이제 눈앞의 16스테이지만 지나면, 다시 17스테이지 전당포에서 추가 LP를 수급할 수 있다. 그러면 이자까지 거의 3000LP쯤 모이게 될 거고……. 이거면 내 플랜을 수행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었다. ‘그럼, 16스테이지 선택지나 한번 봐 볼까?’ 그런데 이렇게 계산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던 이 시점. 갑자기 내 플랜에, 한 가지 변수가 생겨버렸다. 우우웅―. 16스테이지를 향해 열려 있는 세 개의 포탈 중 하나가……. 기존의 푸르스름한 포탈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빛깔의 색깔을 띠고 있었으니 말이다. “……!” 황금빛이 어지럽게 일렁이는 소용돌이.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신비로운 문양과 세 개의 물음표. [ ??? ] “어? 팀장님. 저건 뭡니까?” 앞장서던 고은아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고, 다른 파티원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지금까지 진행 루트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명백한 ‘이레귤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여기서 나와준다고?’ 물론, 나는 저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극악의 확률로 등장하는 히든 스테이지. 일명 ‘징수원의 방’. ‘잭팟 터졌네.’ 그래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갑자기 성좌들의 채팅이 불쑥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 저거 뭐임? └ 황금포탈 뭐냐;;; 처음 보는데;;; 그런데 잠깐. 성좌형님들… 이게 뭔지 모르시는 겁니까 설마? └ 히든피슨가? └ 이게 히든 클리어 루트임? └ ㄴㄴ그건 아님;; 뭐지 이건 나도 처음 보는데;; 이거 오랜만에 설계 각이 좀 보이는데……. 갑자기 군침이 싹 도는걸? └ 방장이라면 당연히 저기로 들어가겠지? 궁금하면 오백 원. 아시죠, 형님들? 10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미다스의 정원에서 정말 가끔 등장하는 ‘징수원의 방’은, 심지어 등장 조건도 따로 있는 룸이었다. 엄청 복잡한 조건이냐고? 그건 아니다. 이자 수익이 1000LP이상인 시점에서만, 낮은 확률로 등장하는 선택지니까. 그래서 성좌들이 아무도 이 방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좀 신기했다. 이자 수익 1000LP가 확실히 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파티로도 어렵지 않게(?) 달성한 것만 봐도 뭐……. ‘흐음.’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저희 파티 이대로 굳히기 들어가면 1등 같은데… 굳이 저걸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수금 좀 들어가야겠다. └ 아니 이브형;; 왜 답지않게 약한 소리를;;; └ 여기 미궁 다 아는 척 쩔더니 약한 척 뭐임 갑자기; 이제까지 내가 성좌들과 소통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이 성좌녀석들이, 내가 갖고있는 고인물 지식에 환장한다는 것. 그렇다면 내겐 그걸 적극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브 앤 테이크. 내가 만년 넘게 구르면서 쌓은 꿀팁들을 빼가려면, 합당한 대가는 지불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냐는 말이지. └ 그나저나 방장도 저건 뭔지 모르는 거임? 그래도 거짓말까지 할 건 아니고. 90%의 진실을 기반으로 한, 약간의 설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아니까 안 들어가죠. └ ㅁㄷㅅㅂ;; └ 아는척 ㅡㅡ └ 아냐, 대이브라면 알수도 있음;; └ 뭔데 방장 ㅅㅂ 우리도 알려줘; -싫습니다. 제가 왜요? └ 쫄? └ 쫄? -옙, 쫄았습니다. 그러니까 혼신의 연기를 다 한 나는, 마치 다른 선택지를 고를 것처럼 발걸음을 돌렸다. 이 수는 무조건 먹힌다고 확신한다. 이렇게까지 모든 성좌들이 모르는 히든피스는, 꽤 오랜만이거든. └ 아 뭔데;;;; 그리고……. 역시나 다급해진 건 성좌형님들이었다. └ 제발 이브형;;; 들어가 주면 안 됨?;; └ 안 갈 거면 뭔지라도 알려줘라;;; 이쯤 됐으면 이제 양념 살짝 쳐 줄만한 타이밍이다. - 힌트 살짝 드리자면, 나쁜 건 아닌데 굳이 도박할 이유가 없는 느낌인 거죠. 다시 말하지면 90%의 진실을 기반으로 한 낚시다. 그러니까……. 안 낚이고 배겨? └ 아니, 방장;; 여기서 빼면 섭하지 ㄹㅇ;; └ 뭔데; 돈이 필요한 거임? [‘망나니 2황좌’님이 50 LP를 후원하셨습니다!] 어허.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면 아주 좋기는 한데……. ‘후후.’ 그러니 거의 다 온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못 이긴 척 슬쩍 여지를 주면, 꽤 짭짤한 후원이 들어올 것 같다는 얘기다. 한 500~1000LP 정도만 수금해도 행복할 것 같은데……. 수금 한번 딱 해주고, 쿨한 척 황금 포탈을 고르면 완벽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띠링-!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훅 하고 시야에 들어왔다. [‘황금의 주인’님이 새로운 ‘미션 후원’을 등록하셨습니다.] 예? 미션 후원이요? 이런 것도 있었어? └ 캬, 큰형님 오셨다ㅋㅋㅋ 드가보자ㅏㅏㅏ [‘황금의 주인’ 님이 5,000LP로 미션을 제안했습니다!] [System] 미션 후원 발동 [후원 미션 : 제한시간 내 총 모금액 10,000LP 달성] [제한시간 : 5분] * 후원 미션 달성 시, 스트리머 미션이 발동합니다. [스트리머 미션 : ‘황금의 포탈’ 선택지 입장 및 최종 미궁 클리어] * 후원 미션, 스트리머 미션, 둘 중 하나라도 실패 시, 모든 후원금은 반환됩니다. 현재 상금 : 5,000LP 처음 보는 종류의 미션 발동에, 순간 두 눈을 꿈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LP 모금액을 모으는 것부터가 미션인 거지? 너네들이 이만큼 모아주면 내가 절반은 내겠다. 뭐 이런 건가……? “크…….”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첨단화된 후원 시스템이라니. 그런데 1만LP 진짜 모이려나? 모이면 진짜 이거 미친 사건이다. 제한 시간 5분이 너무 짧긴 해서 불안한걸? [‘호기심 많은 대부호’님이 1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망나니 2황좌’님이 350LP를 후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새벽의 등불’님이 90LP를 후원하셨습니다.] [‘빙하의 요정’님이 125LP를 후원하셨습니다.] ……중략…… 저 미션 후원이라는 트리거가 발동한 순간, 내가 지금껏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수준으로 후원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단 10초? [현재 상금 : 8,925LP] 순식간에 4000LP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거액이 추가로 모여버렸고. 그렇게 5초 정도가 더 지났을 때. 띠링-! [목표 후원 금액이 달성되었습니다.] [현재 상금 : 10,000LP] [‘스트리머 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솔직히… 바지에 살짝 지릴 뻔했다. └ 자, 어쩔래 방장아. └ ㅋㅋㅋ앜ㅋㅋ 방장시치ㅋㅋ 외통수 걸렸죠?ㅋㅋㅋㅋㅋㅋ └ 자, 이제 다들 안심하라고? 쌀숭이가 1만LP를 포기한다? 차라리 ■■■가 ■■하는 게 더 말이 되거든욬ㅋㅋ └ LP로 맞아보니까 어때? LP로 맞아보니까 어때? LP로 맞아보니까 어때? 신나신 성좌 형님들의 채팅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캬…… 역시 황금의 주인 형님은 그저 빛이다. 원래도 그랬지만,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해야겠다. -후우. 좋습니다. 졌습니다. 사실 내가 진 건 아니긴 한데. ‘모두가 행복한 것 같으니까, 이게 바로 진정한 윈-윈 아닐까?’ └ 근데 이 쉑, 이거 선택지 진짜 알고 있던 거 맞을까? └ 궁금하긴 하네. [성좌, ‘황금의 주인’이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황금의 주인은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황금빛 포탈 선택지가 독이 든 성배라는 걸 아니까, 이런 딜을 걸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우리 형님, 이번에는 꽤 당황하시겠는데? 나야 자신이 없거든. 미션을 실패할 자신이. 저벅- 천천히 걸어서 다른 포탈을 한번 돌아본 나는, 파티원들에게 돌아가 운을 띄웠다. “아무래도, 이쪽으로 가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내 손은 황금빛 포탈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에 박진우가 우려 섞인 걱정을 얘기한다. “이거… 함정은 아닐까요?” 함정이긴 한데, 판 사람이 나거든? 그러니까 그냥 좀 들어가 줄래?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 믿고 한번 해보시죠.” 그래도 지금까지 파티에 신뢰를 좀 쌓아서 그런가? 큰 반발 없이 모두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이잉-! [포탈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황금빛 포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스테이지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현재 스테이지 레벨 : 16LV] 뭐, 클리어 자신이 있는 것과 별개로 쉽지 않을 거긴 한데……. 원래 돈 쉽게 버는 거 아니거든. 그러니까……. [히든 스테이지, ‘징수원의 방’이 등장합니다.] 다들 잘할 수 있지? * * * 이건율이 황금빛 포탈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그 등 뒤에서, 강민우는 복잡하게 얽힌 시선으로 자신의 팀장을 뜯어보고 있었다. 강민우는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세상의 논리가, 조금씩 무너져가는 기분이었으니까. ‘대체 저놈은… 속이 어떻게 된 녀석이지?’ 세광그룹 회장의 손자. 그 압도적인 배경을 가진 민우는, 이제껏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자본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는 이제껏 딱 하나, ‘형제들과의 경쟁’뿐이었는데……. 이거야 자본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상대였던 게 문제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각성 후,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마력 감응력이 떨어져? 그럼 수십억짜리 증폭 반지를 끼면 그만이었다. 체력이 부족해? 최고급 포션을 물처럼 마시면 해결됐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 빌어먹을 <헌터즈 스쿨>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선…… 하나도 통하질 않아.’ 입학 미션부터가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단순히 수십억 이상을 호가하는 장비들이 모두 봉인 당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종류의 미션이 등장했다는 것부터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자신이 누구던가? 이 <헌터즈 스쿨>이라는 예능의, 가장 큰 광고주인 세광그룹의 자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줘도 모자랄 마당에, 첫 미션부터 거의 저격(?)이나 다름없는 기획을 내어놓았다. 이건 그의 상식 안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서 끝도 아니었지.’ 게다가 두 번째 미션이었던 포지션 결정전. 이건 한술 더 떠서, 그의 클래스까지 저격해버린 수준이었다. 장비를 못 쓰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아예 마력총 자체를 사용할 수 없는 미션이라니. 덕분에 생전 처음 쏴 보는 활로 미션을 수행한 그는 B등급 안에서도 등급 내 꼴찌라는 굴욕적인 성적표를 받아야 했고. 이건 그의 인생에 손에 꼽을 정도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 하지만 결정타는 바로, 지금 이곳 미궁이었다. 여기서 강민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으니 말이다. 솔직히 강민우는…… 등급 결정전과 포지션 결정전이 억까라고 생각했고, 본 미션만큼은 다를 줄 알았었다. 여기서부턴 드디어 지금까지 봉인당했었던, 자신의 모든 장비를 활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화이트 노바]만 다시 꺼내 들 수 있다면, 이제껏 그를 농락했던 다른 참가자들을 그대로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리 비싼 총을 쏘아대도… 넘을 수조차 없는 벽이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 이건율이라는 남자. 이 혼란의 정점에서, 강민우는 이건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민우가 이건율에게 가장 처음 충격받았던 건, 바로 <얼어붙은 서울> 미션 때였다. 처음 PK 시도를 저지당하고 노예처럼 부려지기 시작했을 때? 그때도 굴욕적이었지만, 그때가 아니었다. 강민우가 자신의 상식을 부정당했던 건……. [개당 200LP. 이게 마지노선이야.] […300LP까진 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자본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였다. [필요 없습니다. 갈 길 가시죠.] [타앙-!] 분명 민우는, 고작 데이터 쪼가리 하나에 300만원이라는 거금을 불렀었다. 심지어 더 줄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이건율이라는 놈은, 그 이상 얘기를 들어보지조차 않고 그대로 마력탄을 쏴 자신을 아웃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이건율은… 민우가 게이트에 들어온 이후 최초로, 자본으로 매수하는 데 실패한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배경이 있겠거니 생각했었지.’ 만약 강소희였다면 이해라도 한다. 그녀는 세광그룹과 비교해도 꿇릴 게 별로 없는, 에스쿨랩 로열패밀리였으니까. 하지만 이건율은? 겉으로 보기에 분명 평범한 서민이었다. 그런데 LP에 초연하다니. ‘그런데 지금은 또 악착같이 푼돈을 모으고 있어.’ 그래서 강민우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 판매 수익 : +1,850 LP ] 이 악랄한 미다스의 정원이라는 미궁에서, 이건율은 독종처럼 LP에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300만 원을 걷어차던 놈이 10원짜리 잡템을 모으려고 몬스터 가죽을 벗기고 있었으니, 강민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돈 자체에 집착하는 건 확실히 아니야. 그렇다면… 이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 돈이라는 수단이 필요할 뿐인 건가?’ 그렇다면 더 무서운 놈이었다. 돈을 목적으로 삼는 놈은 돈으로 매수하면 된다. 하지만 돈을 그저 ‘도구’로만 보는 놈은, 세광그룹의 자본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다. ‘젠장. 모르겠다.’ 그래서 강민우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일단 또다시 저 괴물 같은 녀석의 팀이 된 이상,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 믿고 한번 해보시죠.” 이해할 수 없으면, 일단 따라가서 확인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지금부터의 미션에서라도 조금씩 복구해서, 할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결말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녀석의 정체는 어떻게든 알아낼 생각이었다. ‘두고 봐라. 네놈 정체, 내가 반드시 알아내고 만다.’ 강민우는 의심과 혼란, 그리고 미약한 기대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이건율의 뒤를 따라 황금빛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10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지이잉―! 포탈을 넘어서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방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순도 높은 금괴로 이루어진 공간.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조차 금가루인 양 반짝거렸고, 코끝에는 비릿한 쇠 냄새와 묵직한 욕망의 향기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방의 정중앙.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들 위에, 기괴한 존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황금 징수원 (Golden Tax Collector)] 마치 인간과 두꺼비를 섞어놓은 듯한 체형. 그는 금실로 짠 연미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이목구비 대신 오직 ‘입’만 그려진 황금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양손에는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주판과, 무엇이든 달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정밀한 저울이 들려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이군.’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 탐욕스러운 기운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그 압도적인 기괴함에 눌려 잔뜩 긴장한 채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이 녀석을 처음 본다면, 거의 무조건 당장 전투를 해야 할 엘리트급 몬스터로 오해할 만했으니 말이다. “전원 전투 준비.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박진우가 나지막이 경고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리려던 그때였다. “오오, 긴장 푸시죠. 거친 무기는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금화 더미 위에서 징수원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킬킬거렸다. 가면 아래 뚫린 입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웃음을 만들어냈다. “여러분은 오늘 절 만난 게 엄청난 행운이니까요.”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금화들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춤을 췄다.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축포처럼. 나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삼켰다. ‘행운은 무슨.’ 녀석의 정체는 행운의 전도사가 아니다. 미다스의 정원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장 악질적인 ‘사채업자’이자 ‘시험관’.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골라내어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함정 그 자체. 하지만, 녀석이 내미는 미끼가 꽤 달콤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케헤헤… 제 발로 굴러들어온 돈주머니들이군.” 징수원이 주판을 촤르륵 털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면 속 붉은 안광이 우리 파티원들의 주머니 사정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곳은 지름길의 방. 정직하게 싸워서 올라가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습니까? 피 흘리고 땀 흘리며 몬스터와 뒹굴기엔, 여러분의 시간은 너무나 귀하니까요.” 그가 주판알을 튕기자, 허공에 불타는 듯한 글자가 떠올랐다. [통행세: 100LP = 1 스테이지 SKIP] “돈을 내십시오. 100LP당 1개의 스테이지를 건너뛰게 해드리지. 돈만 있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숨에 고층까지 보내드린다는 얘깁니다.” 파티원들이 술렁거렸다. “스킵이라고요?” “돈으로 스테이지를 산다니… 역시 미다스의 정원답네.” 100LP. 작은 돈은 아니지만, 지옥 같은 연전을 피할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는 금액이었다. 여기가 만약 저층이라면 별로 끌리는 선택지가 아니겠지만……. 무려 16층에서 지금 우리가 가진 돈을 다 쓴다면, 단숨에 클리어권 층수인 24층까지 도달할 테니 말이다. 강민우와 박진우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방금 전당포에서 흑자 전환의 맛을 봤기에, 지금 가진 돈을 아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편하게 가고 싶은 유혹. 그 갈등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흐음.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진행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 뭔데, 이렇게 싱겁다고? └ 이거 걍 돈 내면 끝나는 스테이지임? 뭘 잘 모르는 성좌형님들이 아쉽다는 듯 투덜거린다. 그렇다면 컨텐츠 제공자로써… 내가 또 의무를 다해줘야지? “만약 통행세를 조금도 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 알면서 물어봐 줬다. 긴장감을 살짝 끌어 올려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흐흐.” 그리고 내 질문에 재밌다는 듯, 징수원이 징그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선택지는 없습니다, 손님들.”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조금 더 찢겨 올라갔다. “이 방에 들어오신 이상, 통행세를 내지 못하신다면 남는 건 멸망뿐이지요.”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두꺼비의 모습에, 슬슬 성좌들도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 오, 뭔가 있긴 한 듯? └ 그럼 쟤랑 싸워야 하는 건가? 그리고 징수원의 엄포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이 상태에서 징수원과 싸우면, 승리할 방법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못 싸웁니다. 쟤 지금 ‘무적’ 상태거든요. 그러니 여기까지만 봤을 땐, 결국 통행세를 지불하고 넘어가는 것만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는데……. 짤랑- 사실 정답은 절반까지만이다. 무슨 말이냐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통행세를 내는 것까지만, 정답이 맞다는 뜻이다. 툭- 나는 900LP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징수원의 면상 앞으로 던져버렸다. LP는 원래 형태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곳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만큼은 금화의 형태로 형상화가 가능하다. 그러니 이 묵직한 LP 주머니를 받아 든 징수원은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어 재꼈고. “케헤헤헤. 아주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우리 파티원들의 입은 떡 벌어지고 말았다. “티, 팀장님?! 이거 맞아요?!” “굳이 그렇게까지는……!” 강민우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의 눈빛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이 가득했다. 아까는 10원 한 장 아끼려고 몬스터 가죽까지 벗기던 인간이, 지금은 공짜로 스테이지 통과하겠다며 모든 돈을 탕진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아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스테이지 체감 난이도가 낮은 상태였으니……. 이건율이라는 인간의 알고리즘이 도무지 해석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 └ 방장 미침? 갑자기 왜 이럼? └ 아니, 데이브 뭐 최면이라도 걸린 거 아니지? └ ㅁㄷ;; 그냥 이대로 싱겁게 끝낸다고? 성좌들의 채팅창이 불타오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아마 이대로 미션이 종료돼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싱겁게 LP만 쓰고 1만LP짜리 미션이 완료돼버리면, 그들 입장에서는 후원한 보람이 없어지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건 이놈들이 징수원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만약 이대로 내가 통행세를 내고 순순히 지나간다면……. ‘보스 룸에서 보스 대신… 황금의 심판관을 만나게 되겠지.’ 결국 최후에는 절대 미궁을 클리어할 수 없게 되는 외통수를 만나게 되는 구조였으니까. 어떻게 아냐고? 당연히… 만나봤으니까 안다. “케헤헤헤! 그래, 그래! 역시 통이 큰 손님이구만! 900LP 확인! 아주 훌륭해!” 그래서 채팅창이 불타오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징수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징수원은……. 돈 냄새에 취해 신나서 주판을 튕겨 대었다. 지이잉-! 징수원이 손을 휘젓자, 굳게 닫혀 있던 출구 쪽에 거대한 황금빛 포탈이 생성되었다. [황금의 지름길] [통과 시 9개 스테이지를 즉시 건너뜁니다.] [16 Stage -> 25 Stage] “자, 지나가라! VIP 손님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런데……. 무적 상태인 징수원도 상대할 수 없고, 황금의 심판관도 클리어가 불가능하다면. 이 황금의 포탈에 들어온 순간 완전히 외통수 아니냐고? ‘그럴 리가.’ 그랬으면 여기 내가 들어왔을 리가 없겠지. 그러니 이 함정의 유일한 돌파구를, 지금 바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저벅- [황금의 지름길] 안으로 입장하는 척, 나는 뚜벅뚜벅 걸어서 징수원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악-!! 내 손에 들려 있던 월광검이, 징수원이 쥐고 있던 돈주머니를 그대로 양단해버렸다. [※경고! 경고!] [신성한 거래가 훼손되었습니다!] [계약이 파기됩니다!] 우우웅― 팟! 주머니가 갈라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금화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열려 있던 [황금의 지름길] 포탈 또한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징수원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감히! 감히 내 돈을!”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황금 연미복이 찢겨나가고, 그 안에서 눈부신 황금빛 액체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가 방금 바친 900LP. 그 순수한 자본의 힘을 동력원 삼아, 놈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쿠우웅! [히든 보스, ‘탐욕의 황금 사자’가 강림합니다.] 징수원은 무적 상태지만, 탐욕의 황금 사자는 무적이 아니다. └ ㅁㅊ;;;; └ 이거 뭐냐 ㅋㅋㅋ └ 갑자기 ㅈㄴ흥미진진해졌눜ㅋㅋㅋ 그리고 난, ‘탐욕의 황금 사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 캬ㅋㅋㅋ └ 역시 데이브 ㄷㄷㄷ └ ㅇㅅㄷㅇㅂ └ 우리 방장은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고?ㅋㅋㅋ 그러니 이게 ‘황금의 포탈’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공략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상암동 HBC 사옥, 예능국 제3모니터링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멀티비전 앞에는 메인 작가진부터 현장 조연출들까지, <헌터즈 스쿨>의 핵심 제작 인력이 전원 집결해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된 첫 번째 본 미션, <미다스의 정원>. 미궁 곳곳으로 흩어진 20개 팀의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트래킹하고,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평소라면 각 팀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느라 웅성거림이 가득했어야 할 이곳. 하지만 지금 이 방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미쳤어, 진짜.” 막내 작가 김예림은 입을 틀어막은 채, 눈앞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곳은 전담 마크 대상인 ‘1팀’의 화면. 정확히는…… 이건율의 개인 화면이었다. “작가님, 저분… 솔직히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지 않아요? 그냥 좀 평범한 인상 같은데.” 옆자리 조연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성환처럼 조각 같은 미남형도 아니고, 박진우처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아이돌상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퀭한 눈에,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건조한 표정. 하지만 김예림의 눈에는 그게 달랐다. “에이, 뭘 모르시네. 저게 진짜라니까요?” 예림의 눈에는 소위 말하는 ‘콩깍지 필터’가 씌워져 있었다. 저 퀭한 눈은 ‘나른한 퇴폐미’였고, 건조한 표정은 ‘무심함’과 ‘여유’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피곤에 쩔어 있는 아저씨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만큼은 삶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뎌낸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독보적인 느와르적 분위기로 보이는 것이다. ‘저 눈빛 좀 봐……. 어떤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은 저 무심함…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단단해 보이지?’ 그녀는 이미 단순한 작가가 아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매력을 혼자서 착즙해 내는, 진성 덕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눈앞에 나타난 괴물의 위용 앞에서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쿠우웅―!] 징수원의 몸을 찢고 나온 거대한 황금 사자. 번쩍이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자는, 몬스터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마치 거대한 황금 산맥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그런 압도적인 체급. [카앙!]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자,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길 수… 있는 거겠지?’ 지금까지 지켜본 바. 그녀의 1픽인 이건율은 분명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어지는 전투 현황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암담해 보였으니 말이었다. 강민우가 쏘아댄 하얀 빛줄기들이 사자의 몸통에 빗발쳤지만, 마치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처럼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고……. 고은아가 필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사자가 그저 앞발을 툭 내딛는 것만으로도 마치 종이 인형처럼 튕겨져 나갔다. 헌터나 몬스터에 대해 잘 모르는 예림의 눈에도, 저건 명백한 ‘재앙’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이런 게 50레벨 제한 미궁에 있는 게 맞아?’ 때려도 때려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금빛 괴물. 저런 걸 대체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 조연출이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작가님, 저거… 진짜 안 될 것 같은데요? 차라리 패배 선언하고 나가는 게 낫지 않아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저대로 버티다간 파티원들이 전멸하거나, 끔찍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예림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나갈걸요.” “네? 아니, 저건 누가 봐도 무리잖아요.” “분명… 뭔가 생각이 있는 거예요.” 예림의 시선은 화면 속, 유독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사자를 응시하는 이건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눈빛 좀 봐. 다들 공포에 질려 있는데 혼자만 눈 하나 깜짝 안 하잖아.’ 솔직히 이건율의 파티가 어떤 방식으로 저 괴물을 극복할 수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지진 않았지만……. 그녀는 최애의 저 단단한 눈빛을 믿을 뿐이었다. 이제껏 이건율은 한 번도 예림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었으니 말이다. <헌터즈 스쿨 3>이 시작된 지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저 눈을 보세요. 저게 도망칠 사람의 눈인가요?” “그, 작가님 말씀 듣고 보니… 아닌 것 같긴 한데…….” 예림은 입을 앙다물었다. “저건 사냥꾼의 눈빛이에요. 저런 압도적인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투쟁심을 불태울 수 있는 거죠. 진짜 미친 멘탈 아닌가요?” 조연출 박 씨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눈치였지만,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김예림이 이건율의 눈빛에 담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박 씨는 김예림의 눈동자에 담긴 어떤 것(?)을 발견했으니까. 저건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귀에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고……. 이미 덕통사고를 당한 예림에게 ‘팩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옆자리 동료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예림은 주먹을 꼭 쥐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기대하고 있었다. ‘제발……!’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보란 듯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그 짜릿한 한 방을 말이었다. ‘내 1픽은… 절대 틀리지 않았어.’ 주먹을 쥔 예림의 양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 * * 탐욕의 황금 사자는 확실히 강력했다. 내 머릿속의 기억 그대로. 처음에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말이다. └ 캬 ㅋㅋ 방장이 빤스런 칠 만 했네 이거 ㅋㅋㅋ └ 아니 근데 아까 그냥… 포탈 타고 넘어갔으면 끝난 거 아님? 왜 굳이 싸워서;; └ 몰?루? └ 어차피 우린 이편이 더 좋자너ㅋㅋ 한잔해ㅋㅋ 그러니 우리 파티가 이렇게 고전하는 것도……. “피해!” “진성 님, 슬로우!”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크르르릉!] 일단 이 녀석은 분류로 따지자면 엘리트 몬스터와 비슷한 급이었지만…….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이나 기믹들만 놓고 보면 사실상 보스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일단,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저 포효. 이것부터가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탐욕의 황금 사자’가, 고유능력 ‘탐욕의 포효’를 발동합니다.] 사자의 포효에 공명하여, 바닥에 깔린 황금 타일들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솟구쳤다. [슈슈슉-!] “피해요!” 박진우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불필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패턴 자체는 단순해서 다행이야.’ 함정 패턴을 끝까지 확인한 나는,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솟아오르는 가시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정확히 패턴의 형태만 파악해 내면, 회피 난이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은 기믹이다. 사각지대만 제대로 찾아 움직인다면, 철가시의 궤적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미리 안다는 전제하에, 회피 난이도만 놓고 따지면 달빛 늑대의 월광쇄도보다 쉬운 수준이었다. └ 와;; 방금 뭐임? └ 이 ㅅㄲ 무슨 미래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거임? └ 유입들 커엽눜ㅋㅋ └ 이해하려 들지 마라…… 그냥 ‘대’이브니까……. [타닷!] 나는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단순한 점프가 아니었다. 솟아오른 황금 가시의 옆면을 징검다리 삼아 밟고… 사자의 머리 위로 쇄도하는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아마도 10장이나 구매한 황금 카드 버프 덕분일 터였다. [키에엑!] 사자가 반응했다. 녀석의 꼬리가 철퇴처럼 휘어지며 허공에 떠 있는 나를 후려치려 한다. 피할 공간이 없는 허공.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월광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둔탁한 금속음이 터졌다. 아쉽게도 꼬리를 베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단단했으니까. 대신 나는 꼬리의 측면을 쳐내며,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공중제비를 도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 뒤……. 그 반동으로 다시 한번 가속을 얻은 나는, 사자의 흉부 앞으로 착지함과 동시에 검을 찔러 넣었다. [깡-!] 마치 다이아몬드 벽을 찌른 듯,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이번에도 단단한 금속음만이 울려 퍼졌지만. [캬아아오오-!] 방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쩌적- 황금 사자의 가슴에, 미세하지만 확실한 균열이 생겨났으니까. 무려 세 번째 트라이 끝에 겨우 만들어낸… 성인 남자의 손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작은 균열이었다. └ 데이브 이ㅅㄲ 또 서커스 시작했네 ㅋㅋㅋ └ 그 맛에 이 방 오는 거 아니겠음?ㅋ └ 근데 똥꼬쇼 해도 딜이 안 박히네. 어쩌려고 그러나.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전투가, 사실 이 작은 균열 하나를 위한 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고.’ 애초에 이 황금사자는, 50레벨도 안 되는 플레이어들이 뚫을 수 없을 만큼 강철같은 외피를 지닌 몬스터였으니까. 사실상 갈기로 뒤덮인 저 흉부. 저기를 제외한다면… 외부에서의 물리 타격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저 자리에 생긴 작은 균열이 이렇게까지 중요한 이유는……. [크허어어엉-!] 아마 지금부터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사자 저거 왜 갑자기 빨개지는 거임? └ 열받았나본데?ㄷㄷ 성좌들의 ‘열받았다’는 표현은, 추상적인 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저 황금빛 사자의 전신에 주홍빛 열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급하게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고,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클리어를 위해 기다렸던 패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들 뒤로!” 내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사자를 에워싸고 있던 파티원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오오오!] 사자가 몸을 180도 비틀더니,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콰아아아-!!! 그리고 사자의 입 안에서 시뻘건 용광로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녀석이 몸을 웅크렸다. 마치 거대한 전차처럼, 온몸을 단단하게 굳힌 채 전방의 모든 것을 갈아버리며 돌진하려는 자세. [골드 러시(Gold Rush)] 녀석의 필살기이자, 엄청난 범위를 가진 광역 공격기였다. “피하십쇼!” “팀장님! 위험합니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파티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충 봐도 엄청나게 위험해 보였으니, 당연한 외침이었다. 물론 보이는 대로 강력한 공격인 것도 맞다. 아마 생으로 맞는다면, 그대로 빈사 상태는 확정일 터였으니까. 하지만.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뭐.’ 고오오오오-! 주홍빛으로 달아오른 저 금속 파편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치면 그만이다. 타탓-! 나는 아가리를 쩍 벌린 사자를 향해, 정면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친?!” 박진우의 절규인지 탄성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자의 거대한 아가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훅 끼쳐오는 뜨거운 열기.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끓어오르는 황금의 용광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10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0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황금 사자가 이건율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다. “아, 안 돼….” 모니터링실에 정적이 흘렀다. 조연출이 탄식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끝났네요. 너무 무모한 거 아니에요? 저 안에서 어떻게 버텨요.” “저거 데미지 엄청날 텐데….” 다들 이건율의 탈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까지 대단한 실력을 보여준 이건율이라 해도, 고열의 용광로 속에 갇히면 끝이다. 그러니 이제 곧 이건율은 패배 선언을 할 터였다. 대부분의 제작진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야. 뭔가 방법이 있지 않았더라면… 미련하게 그 안으로 뛰어들 사람이 아니잖아?’ 예림의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아이템을 썼는지, 어떤 계산을 했는지 따위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본능이, 작가로서의 ‘촉’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스크린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터져라.] 스피커 너머로, 이건율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모니터 화면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것은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황금색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시각적인 충격이었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사자의 황금 갑주가 내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난 것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수천, 수만 개의 금속 파편으로 변해 허공에 흩뿌려졌다. 촤르르르륵―! 밤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하던 미궁 안이 눈이 멀어버릴 듯한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그 압도적인 영상미에, 예림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와…….” 이건 CG로도 만들 수 없는 장면이었다. 황금의 비(Rain of Gold). 그 화려한 폭우 속에서, 한 남자가 튕겨 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탁. 금화 더미 위에 가벼운 동작으로 내려선 이건율.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파편들이, 마치 그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조명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흩날리는 금화들을 건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후우. 됐네.] 나직한 이건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예림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공략법이 기발해서? 그럴 리가. 솔직히 예림은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황금 사자의 속으로 들어간 이건율이 살아남았는지. 그런 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림이 경악한 건…….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너무나도 완벽한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진짜 예술이다.” 예림은 입을 틀어막은 채 감격에 젖었다. 저 구도, 저 조명, 그리고 저 압도적인 피날레까지. 어떤 연출가가 와도 이렇게 극적인 장면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예능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였다. “작가님! 방금 거 녹화됐죠? 저 앵글 그대로 딴 거 맞죠?!” 조연출이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예림은 대답 대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신했다. 이 장면이 전파를 타는 순간, 시청률 그래프는 천장을 뚫고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이번 주 엔딩은 이거다. 무조건이야.’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이렇게 되면 1, 2화에 이어 3화까지도 이건율의 비중이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너무 높아진다는 것 정도였는데. 사실 그건 예림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밸런스는 PD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햐.” 예림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환하게 웃었다. 방송 분량? 이제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 장면 하나로 3화 방영분은 끝났다. 아니, 이번 시즌의 레전드는 이미 갱신되었다. ‘하… 진짜 내 1픽 쩔었……. 김예림 안목 미쳤다.’ 잠시 의자에 기댄 채 여운을 느끼던 예림은, 곧 다시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미궁 미션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 * * 온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과 열기가 해소되며,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금속으로 만들어진 황금 사자가 폭발하며 허공을 비산하였고. 쏴아아아- 온몸에 휘몰아치는 청량한 공기에, 나는 스테이지 클리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띠링-!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전투가 종료됩니다.] 깜깜했던 시야가 다시 밝아지며, 사방에서 달려오는 파티원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팀장님!!” “괜찮으심까!!!” 짤랑- 모든 상황을 인지한 나는, 발치에 떨어진 금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과 차가운 감촉. 그러니까 이게 바로 승리의 맛이자… 자본주의의 맛 아닐까? 띠링-!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전투가 종료됩니다.] [‘탐욕의 황금 사자’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여, 징수원이 징수해 갔던 모든 LP를 돌려받습니다.] [보너스 +100%] [최종 보상 : 1,800 LP] 황금 사자는 이렇게 공략법을 모르는 상태로는 클리어가 불가능에 가까운 녀석이지만. 반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미다스의 정원’ 안에서 보상이 가장 달콤한 스테이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성좌들의 후원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무조건 선택했을 스테이지였지만 뭐……. [성좌, ‘황금의 주인’이 당신의 기지에 감탄합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기립박수를 칩니다!] └ 대이브!!! 제기랄! 믿고 있었다고!!! └ 와… 보호 스크롤을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고? 진짜 미친놈인가?ㄷㄷㄷㄷㄷㄷ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미션을 통해 거금의 후원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좋은 순 없는 결과가 만들어져 버렸다. ‘캬…….’ 과장 조금 보태면, 이러다 도파민 중독으로 사망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 └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임? └ 보호 스크롤 하나 찢는다고 저 안에서 살아남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음?;; └ ㄹㅇ;; 그냥 하급 물리 보호 스크롤이던데; 그래서 기분도 좋으니까…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어떻게 한 건지 정도는 설명해주기로 했다. 성좌 형님들 덕에 사실상 1만LP 보너스를 확보했는데, 이 정돈 당연한 서비스 아니겠어? - 형님들도 보셨다시피, 황금사자의 외피는 강철입니다. 50레벨도 안 되는 파티가 뚫기는 불가능에 가깝죠. 황금 사자의 외피는 완벽에 가까운 강도를 자랑한다. 물리적인 타격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마법조차 튕겨내는 절대 방어. 하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내부의 압력 또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압력밥솥이랑 비슷한 원리랄까요? 때문에 아주 조금의 균열만 만드는 데 성공하면, 내부의 팽창을 버텨내는 게 불가능하다. 이게 바로 내가 어떻게든 작은 균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였고, 공략에 착안했던 핵심 포인트였다. └ 그러니까…… 보호막이 팽창하는 걸 이용해서 안쪽에서 터뜨려버렸단 말임? └ 그런듯;; └ 거기에 내부 마력핵까지 터뜨렸으니, 폭발력이 증폭돼버린 거고 ㅇㅇ 9스테이지 전당포에서 샀던 [하급 물리 방어 스크롤]. 원래는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용도지만, 이걸 밀폐된 내부 공간에서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해 전개된 배리어의 팽창력이, 갈 곳을 잃고 사자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찢어발기는 가장 강력한 폭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걸 성공시키려면 사자의 뱃속까지 살아서 들어갈 깡과, 위액에 녹기 직전 정확한 타이밍에 스크롤을 찢을 판단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베타 때 몇 번은 해봤던 거라, 솔직히 내게는 리스크도 아니었다. 차라리 사자의 가슴팍에 작은 균열을 만드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었다. ‘뭐……. 처음부터 이러려고 샀던 보호 스크롤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파티원들 또한 날 거의 미친놈 보듯 보고 있었다.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사람이… 너무 무모한 거 아닙니까?” “팀장님, 쩔었슴다.” “……존경합니다. 진짜로.”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뭐, 다 된 거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 이 ㅅㄲ가… 35레벨이라고? └ 여기 ■■■맞지? ■회차 아니지 이ㅅㄲ? 내 공략에 감명받았는지, 또다시 추가 후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망나니 2황좌’님이 25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이건… 인정이야 방장. 돈값 했다 ㄹㅇ [‘마계의 지갑전사’님이 550LP를 후원하셨습니다.] └ 와;; 웬 하꼬 방에 이렇게 많이들 모여있나 했더니…… 좋은 구경 하고 갑니다? [‘별빛 수호령’님이 200LP를 후원하셨습니다.] [‘창공의 회귀자’님이 170LP를 후원하셨습니다.] ……후략…… 캬… 이게 행복이고, 이게 인생이지. -감사합니다, 형님들 ㅠㅠ 아무튼 무사히 히든 스테이지까지 클리어를 마친 우리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 간단히 정비를 했다. 괴물 같은 녀석과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진 상태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귀한 황금사자의 사체를, 발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기긱- 기기긱- [‘탐욕의 황금 사자’ 사체의 ‘발골’을 시작합니다.] [시체의 상태가 조악하여, 발골 성공률이 하락합니다.] [현재 진행률 : 0%……1%…15%……100%!] [‘발골’에 성공하였습니다!] [‘황금빛 철궤 (Golden Iron Chest)’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한 내 입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언하트가 드랍되지 않은 건 좀 아쉽긴 하지만…….’ 황금빛 철궤는, 무려 6티어 장비 제작에 활용되는 특수 재료다. 그래서 이건, 전당포에 팔지 않고 미궁 밖으로 들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밖에서 LP로 분배해야 할 거면… 전당포에 팔아서 이자라도 더 먹는 게 낫지 않냐고? 아니. 이건 팔 생각이 없다. 게다가 만장일치로… 내가 갖기로 하기도 했고 말이다. “뭐 잡은 것도 거의 팀장님이 잡으셨고, 발골도 팀장님이 하셨는데…… 그 정도야 챙겨가시는 게 맞죠.” 박진우의 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으니, 이게 바로 만장일치 아닐까? “그럼 이제 다시, 출발할까요?” 정비와 발골까지 마친 우리 일행은, 곧바로 다음 스테이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스테이지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현재 스테이지 레벨 : 26LV] 우리는 어느새, 징수원이 제안했던 스킵 포탈의 도착점보다도 더 먼 곳까지 와 있었다. [현재 보유 자산 : 5,738 LP] [현재 손익 : +5,238 LP] 베타 시절에도 단 한 번도 달성해 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흑자와 함께 말이었다. 11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상암동 HBC 사옥, 예능국 제3회의실.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난 저녁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회의실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탁한 공기 속에선 식어빠진 배달 커피 냄새와,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간 제작진들의 땀 냄새가 묘하게 섞여 진동하고 있었고. “……하아.” 퇴근했다가 다시 불려 나온 FD 이정민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눈앞의 대형 모니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현재 <미다스의 정원> 미션을 진행 중인 20개 팀의 실시간 데이터가 그래프로 띄워져 있었다. 하지만 정민의 시선은 오직 하나의 그래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팀들이 바닥을 기고 있을 때, 혼자서 천장을 뚫고 우주로 승천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막대그래프. [1팀(팀장 이건율) : +5,738 LP (진행 중)] 그 압도적인 수치를 보며, 정민은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건 그러니까… 플레이 내역을 전달받지 못했더라면 표기 오류로 착각했을 법한 그런 수치였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이거.’ 물론 친구로서야, 당연히 건율이 활약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이 녀석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영입의 장본인인 본인의 입지가 더욱 올라갈 것 또한 자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모니터링된 결괏값은… 그냥 말 그대로 ‘재앙’인 수준이었다. ‘아오… 어차피 1등인데 적당히 좀 하지. 으으.’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정민뿐만이 아니었다. 메인 PD인 장세연과 현장 총괄인 권 PD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데이터를 뜯어보고 있었다. “PD님. 이거… 진짜 어떡합니까?” 정적을 깬 건 권 PD였다. 그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이대로 점수 산정하면 밸런스 그냥 박살 납니다. 시뮬레이션 돌려봤는데 답도 없어요.” 권 PD가 띄운 화면에는 예상 점수 분포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현재 상황은 명확했다. 총 20개 팀 중 2개 팀이 중도 탈락했고, 15개 팀이 클리어를 마쳤으며……. 3개 팀이 아직 미궁 안에 있는 상황. 문제는 그 ‘성적’의 격차였다. “보시다시피, 대부분의 팀이 예상대로 적자입니다. 평균 -100에서 -300 LP 사이죠.” “…….” “흑자를 낸 팀은 딱 세 팀뿐입니다. 이성환 팀이 +380 LP, 권유나 팀이 +125 LP. 그리고…….” 권 PD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화면을 가리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압도적인 수치. [1팀 : +5,738 LP] “이게 말이 됩니까? 2등이랑 격차가 15배가 넘어요.” 권 PD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희 이번 미션 채점 기준이 뭡니까? ‘최종 수익’에 따른 상대 평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기존 기획대로라면, 1등을 100점으로 잡고 비율대로 점수 매기는 방식인데…….” “……1등이 5,700점이면.” “네. 2등인 이성환 팀조차 100점 만점에 6점 나옵니다. 나머지는 마이너스 점수고요. 그냥 그림이 아예 망가져 버린다고요.” 장세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녀 역시 베테랑 PD였지만, 이런 식의 생태계 교란종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이건율이라는 참가자가 조커가 되어 줄 것은 기대하고 있었지만, 판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재해’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의 역량이 이 정도까지 압도적인 겁니까?” 장세연의 황망한 질문에, 권 PD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전투 수행 능력도 뛰어나긴 합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권 PD는 한숨을 내쉬며 분석 데이터를 띄웠다. “단순히 사냥을 잘해서 번 돈이 아닙니다. 이 팀은 미궁 초반부터 적자를 감수하고 버프를 둘러서 파밍 효율을 극대화했습니다.” 슬라이드를 넘겨 가며, 권 PD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시드 머니로, 복리 이자 시스템을 극한까지 굴렸고요.” “복리 시스템을요?” “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용한 겁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권 PD가 화면을 넘겨, 황금 사자가 폭발하던 장면을 가리켰다. “운까지 따랐습니다. 극악의 확률로 등장하는 히든 스테이지, ‘징수원의 방’을 만났거든요. 거기서 보스와 보상을 동시에 터뜨리면서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버린 겁니다.” 입이 마르는지 권PD가 마른침을 삼켰고. 장세연이 다시 물어보았다. “징수원의 방? 그건 기획 단계에서 왜 고려되지 못했죠?” “그야 각성자 위키에조차 정보가 없는 스테이지니까요. 좀 알아봤는데… 애초에 알려진 적 자체가 없는 히든 스테이지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이런 게 존재하는 줄 처음 알았고요.” “으음…….” 실력과 전략, 거기에 천운까지 겹쳐 만들어진 기적 같은 수치. 제작진이 설계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제작진보다 더 완벽하게 이용해먹은 결과였다. 설명을 들은 장세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 정말 난놈이네요.” 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히든 스테이지의 최초 공개라. 이건 방송 소스로 상당히 그럴 듯한 그림인데.’ 하지만 이거야 두 번째 문제고… 일단은 지금 발생한 이 밸런스 붕괴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잠시 침묵하던 장세연이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겠습니다.” “예?” “……점수 산정 방식부터 뜯어고치시죠.” “그럼 어떻게…….” “상대 평가 폐기하세요. 이 데이터로 기존 평가 방식은 무리입니다.” 이정민과 권 PD의 시선이 장세연의 입을 향해 고정되었고, 그녀의 입이 천천히 다시 떨어졌다. “흑자를 낸 팀은 금액 상관없이 무조건 100점 만점, 똑같이 최고점 처리하는 거로 가시죠. 나머지 적자 팀들은 적자 폭에 따라 감점하는 절대 평가 방식으로 바꾸자는 말입니다.” 장세연의 설명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기획안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건율이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이정민도 아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어쨌든 프로그램의 흥행이 계속 이어져야, 건율이 입장에서도 더 큰 수혜를 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거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으니까. “점수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이월’입니다.” 권 PD의 지적에 회의실 공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미다스의 정원> 기획 의도는, 여기서 결정된 팀별 LP 손익을 다음 미션인 <황금의 신전> 미궁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완전히 밸런스가 붕괴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이거 5,000LP 그대로 들고 가면, 다음 방송 안 나옵니다.” 권 PD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금의 신전 보스 몬스터…… 5,000LP면 그냥 돈으로 매수해서 집에 보낼 수도 있어요. 긴장감이고 나발이고 방송이 성립 자체가 안 될 겁니다.” “……하아.” 이정민도 그 부분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 분량을 뽑아야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돈으로 다 해결하고 5분 만에 클리어해 버린다? 그건 예능이 아니라 방송 사고다. “그렇다고 뺏을 수도 없잖아요.” “당연하죠. 정당한 공략으로 얻은 LP를 저희가 무슨 권리로 뺐습니까.” “그러니까 미치겠다는 거죠.” 진퇴양난. 그때,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장세연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방법은 그냥… 개별 지급해 버리는 것뿐이네요.” “네?” “팀 자산을 그냥 참가자들에게 정산해 주자는 겁니다. 이월 시스템을 폐기하고요.” 장세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냥 기여도 비례로 분배해서… 상금 형식으로 개인 계좌에 꽂아 주는 걸로 룰을 변경하는 거죠.” “아…….” “명분도 충분해요. <자본주의>라는 테마에도 맞고, 참가자들한테도 실질적인 이득이니까 반발도 적을 거고요.” 확실히, 명쾌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권 PD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럼 미션 내용부터 바꿔야겠는데요?” 이전 결과물의 이월 시스템을 미궁 미션들의 뼈대인 메인 기획으로 잡아놨었으니. 이 부분에서 골치가 아파지는 거다. 그러니까 기획의 백지화. 당장 다음 미션부터 새로 짜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거야…….” 장세연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근해야겠죠?” “…….” “으어어…….” 세 사람의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현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에 대한 가닥이 어느 정도 잡히긴 했지만……. 방송 스케쥴을 펑크내지 않으려면, 오늘 안에 디테일한 결론까지 전부 내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갔을 때. “자, 그럼 대충 정리는 된 것 같고.” 장세연 PD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정민을 응시하였다. “이제 남은 건, 이정민 FD에게 달렸네. 맞죠?” “…….” 권 PD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잘 좀 얘기해 줘요.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이정민은 이게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에효. 어떻게 잘 얘기해봐야지 뭐.’ 사실 이건율이 정민의 친구라는 건, 제작진 중에서도 장세연 PD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지금 장세연의 부탁은, 이건율의 눈치를 좀 봐달라는 얘기였다. ‘하긴. 내가 1팀이라도 좀 억울하게 느낄 수 있는 상황일 테니까.’ 사실 외견상으로 문제는 없다. 어차피 오늘의 회의로 바뀐 룰이… 참가자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1팀이 성과에 대비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불만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한 케어를 부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단순 정산에 너무 아쉬워하시는 것 같으면, 미다스에서 흑자 본 팀 LP를… 2차 미션이나 3차 미션에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보는 방향도 검토는 해볼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여튼 잘 얘기해 보시고… 결과 다시 말해줘요?” “넵.” 회의가 끝난 뒤. 퇴근길에 오르려던 정민은 결국 모니터링 룸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왕 이렇게 다시 회사에 나왔으니, 미다스의 정원이 마무리되는 것까지는 보려는 생각이었다. “엇, FD님! 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 “퇴근도 했고, 출근도 했습니다.” “저런…….” 해서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났을 때. “으아, 드디어 끝났네요.” “지금 몇 시지?” “와, 새벽 한 시가 넘었네.” 미궁 미션의 최종 결과를 확인한 정민은, 현실감 없는 스코어에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특이점이 왔던 1팀의 스코어가, 거기서 한 단계 더 뻥튀기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1팀(팀장 이건율) : +9,624 LP (종료)] 마지막에 무슨 히든 클리어 루트까지 찾는 바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괏값이 나온 건데……. “와, 진짜 대박입니다!” “진짜 1팀이 미다스 최초클 성공한 거예요 그럼? 세미 클리어 아니고?” “이거 방영되면 난리 나는 거죠?”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파멸적인 숫자에 괴로울 뿐이었다. 이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마음속 짐은 무거워졌으니 말이다. ‘1팀 참가자들이…… 정산 대신 팀 미션 어드밴티지를 선택하면. 그땐 진짜 골치 아파지는데.’ 만약 그런 선택을 한다면, 남은 미궁 미션 뿐 아니라 2차 3차 미션까지도 백지화 후 다시 기획해야 한다. 그런 재앙이 도래한다면… 정민은 최소 몇 주 이상 집에 못 갈 게 분명했고 말이다. ‘제발… 나 좀 살려줘라 건율아…….’ 하지만 이 순간 정민이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러한 고민들은…… 사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고민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미션을 클리어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당사자 이건율은……. ‘9600LP라… 이거 너무 아까운데…….’ 팀 자산으로 묶여버린 LP를 생각하며, 오히려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으니 말이었다. 11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덜컹― 덜컹― 규칙적인 마차의 진동이 엉덩이를 타고 전해져 왔다. 차창 밖은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루미스 영지의 화려한 야경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 머릿속은 방금 끝난 미궁에서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솔직히… 히든 스테이지 덕에 나중에는 너무 싱거웠지.’ 탐욕의 황금 사자를 처치한 이후, 미궁의 후반부 공략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긴장감? 위기? 그런 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16스테이지 [징수원의 방]에서 확보한 자본금이, 상식을 벗어난 수준으로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미다스의 정원은, 돈이 곧 무력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전당포가 나올 때마다 [황금의 축복] 버프를 풀 매수하고, 최고급 포션을 물처럼 마셔댔다. 그런데도 돈이 줄어들기는커녕, 복리의 마법 덕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이자 수익이 지출을 상회하는 시점에 도달하자, 공략은 더 이상 ‘생존’이 아닌 ‘학살’이 되어버렸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아주 여유롭게 히든 루트까지 밟을 수 있었고 말이다. [히든 클리어 조건 달성!] [순수 흑자 3,333 LP를 돌파하였습니다.] 처음에도 말했었지만, 미다스의 정원에는 숨겨진 ‘진’ 클리어 조건이 따로 있다. 보통 25 스테이지부터 등장하는 [보스 룸] 포탈을 타면 미궁을 탈출할 수 있지만, 그건 ‘일반 클리어’일 뿐이다. 진짜는 그 유혹을 참고, 악착같이 돈을 더 모으는 자에게만 열린다. ‘보스 방을 피해서 흑자를 3,333 LP까지 늘리는 것.’ 그 수치에 도달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세 개의 포탈이 전부 [진정한 보스 룸]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곳을 돌파하면……. [<미다스의 정원> ‘최초 클리어(First Clear)’를 달성하셨습니다!] [히든 보상 : +3,333 LP] 이런 말도 안 되는 보너스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미다스의 정원이 인기가 없는 마이너한 미궁인데다, 고레벨 헌터들은 입장조차 불가능한 곳이라……. 최초 클리어 자체가 엄청난 위업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방송이 나가고 나면 반응은 꽤 뜨거울 거다. ‘50레벨 이하 파티도 돈을 이렇게까지 벌 수 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50레벨 이하 5인 파티가 1만LP에 가까운 흑자를 낼 수 있는 던전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최대치인 1만이야 히든 스테이지까지 떠야 가능한 수치였지만 말이다. ‘물론 월간 1회인데다, 방법을 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였다. 사람들은 항상 희망을 보고 달려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운빨까지 터져서 확보한 거액의 LP 보상은… 지금 팀 계좌에 묶여 있었으니 말이다. [1팀(팀장 이건율) : +9,624 LP] ‘이거… 정산해 줄 리가 없겠지?’ 보통 이런 서바이벌 예능의 흐름상, 다음 미션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아이템이나 어드밴티지를 사는 데 쓰게 만들 거다. 그러라고 있는 팀 자금 계좌였으니까. “쩝.” 그러니 만약 성좌 형님들의 후원 미션이 아니었더라면, 속이 좀 더 크게 쓰릴 뻔했다. 나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인벤토리 한구석에 고이 모셔둔 묵직한 자산을 떠올렸다. [성좌 미션 성공 보상 : 10,000 LP] 성좌 형님들이 걸었던 미션 성공 보수. 든든하다 못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수익이었다. └ 그나저나 헌스쿨은 역시 고트 예능인 듯 ㅇㅇ -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 헌스쿨 덕에 우리 방장이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퇴근을 안 하잖아? └ 캬- 듣고 보니까 그러네? └ 칼퇴근충 데이브도 야근시키는 클라스라니;; └ 개꿀 고트ㅇㅈㅋㅋ 하. 무슨 말인가 했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졸려 죽겠습니다, 형님들. 최근 한 달 사이 시간에 깨어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고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고.” “아, 별거 아닙니다.” 강소희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마차는 그랜드 아르카나의 화려한 정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도착했으니까, 내리기나 해요.” 나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이 늦게 끝난 만큼, 내일 오전에는 촬영 일정 싹 다 비워둔다고 제작진이 그랬으니까……. 이제 숙소에 올라가서 꿀잠 자면 되는 거겠지? - 저 그럼 퇴근합니다, 형님들? └ ㅋㅋㅋ고생했다구, 방장. └ 낼 던전 공략 없어도 방송은 무조건 켜줘야 해? 당연하죠, 형님들. 그러니까 그런 건 걱정 마시고…….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ON Air : ☺ 2859] 띵-!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데, 벌써부터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저기요. 아저씨.” 아니, 누가 아저씨야? “졸리신 건 알겠는데, 우리 방 그쪽 아니거든요?” “…….” “그리고 아무리 졸리셔도, 설마 들어가자마자 바로 잘 생각은 아니겠죠?” 음? 안 자면? 이 시간에 안 자고 뭘……. “우리 저녁도 못 먹었잖아요. 다른 방은 전부 들어가자마자 룸서비스부터 시킬걸요?” “아.” 그러고 보니 뱃속에서 아까부터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너무 졸린데……. “룸 서비스 하루에 한 번 공짠데,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뭣? “갑자기 잠이 깼습니다.” 공짜를 안 먹는다? 그런 막심한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 * * 철컥―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펜트하우스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쾌적한 공기와 은은한 디퓨저 향기. 황금 가루와 몬스터의 피 냄새로 진동하던 미궁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의 안락함이었다. “하…….” 등 뒤에서 강소희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발을 벗자마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무 데나 툭 던져버렸다. 마치 허물을 벗는 뱀처럼,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명품 재킷. “저기요, 소희 씨. 옷은 좀 걸어 두시죠?” “무거워요.” “CCTV에 다 찍히고 있을 텐데, 이미지 관리 안 해요?” “…….” 그녀는 내 잔소리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좀비처럼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더니 거실 중앙에 놓인 최고급 가죽 소파 위로 그대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예능이다 보니 숙소에도 카메라가 다 있었는데,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털썩- 갑자기 집에 있을 엄마 딸이 생각나서 잔소리가 마려웠지만. 으른인 내가 참아야지 뭐. 툭- 툭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재킷을 주워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털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내 겉옷도 그 옆에 나란히 정리했다. 피곤해 죽겠지만, 1박에 수백만 원짜리 방을 돼지우리처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어나요. 배고프다면서.” 그녀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나도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PC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Room Service] 아이콘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 드실 겁니까. 5분 안에 결정하시죠.” “…….” 강소희가 느릿하게 걸어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퀭한 눈으로 태블릿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손가락을 뻗었다. “이거요.” 그녀가 가리킨 메뉴는… [해물 짬뽕 라면 – 5LP] 난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려 그랜드 아르카나 룸서비스 공짜 찬스로… 라면을 시키겠다고?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기각입니다.” “왜죠.” “소희 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료 쿠폰’을 쓸 때는 지켜야 할 철칙이 있습니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태블릿의 정렬 필터를 눌렀다. [가격 높은 순] “무조건 ‘제일’ ‘비싼걸’ 시키는 겁니다. 라면은 나중에 밖에서 드시죠. 여기서 이걸 시키는 건… 대략 45LP를 길바닥에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상관없는데요.” 아니, 내가 상관있다니까? 스륵- 강소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지만, 내 손가락은 자비가 없었다. 라면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상위 포식자들부터 장바구니에 담았다. [황제 랍스터 플래터(2인) - 48LP] [최상급 캐비어와 트러플 오일 감자튀김 – 12LP] [1등급 드라이에이징 '자이언트 토마호크' (450g) - 32LP] LP로 보니까 체감이 잘 안 되는 느낌이긴 한데. 진짜 비싸긴 말도 안 되게 비싸다. 룸서비스로 100가까운 돈을 태울 수가 있을 줄이야. “주문 완료했습니다.” “이거… 다 먹을 수는 있는 거죠?” “절대로 가능합니다.” “…….” 시키고 보니 납득 됐는지, 강소희도 더 이상 라면이나 떡볶이 따위를 주장하진 않았다. “주문 들어갔으니까, 오기 전에 옷 좀 갈아입죠. 꼴이 말이 아닙니다.” 내 말에 강소희가 자신의 소매 냄새를 킁킁 맡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미궁의 먼지와 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동의.” 그녀는 군말 없이 침실 옆에 비치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나도 욕실로 향했다. 간단히 세수하고 땀을 닦아낸 뒤, 옷장 안에 비치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텔 로고가 박힌 순면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 역시 비싼 호텔이라 그런지 공짜로 주는 옷조차 감촉이 예술이었다. 달그락. 거실로 나오자, 강소희도 막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 역시 헐렁한 호텔 가운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넘긴 모습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소파 양 끝에 시체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딩동― 룸서비스 카트가 거실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가 순식간에 붉은 껍질의 거대한 랍스터와 윤기가 흐르는 요리들로 가득 찼다. 고소한 버터 냄새와 짭조름한 바다 향이 코를 찔렀다. “…….” 강소희는 포크를 든 채, 접시 위에 놓인 랍스터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치 난해한 암호문을 해석하는 듯한 진지한 눈빛이었다. “뭐 하십니까? 안 드세요?” “……이거.” “네.” “도구 없이 섭취가 가능한 상태인가요?” “……?” 나는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려다 멈칫했다. “껍질이 너무 단단해 보이는데. 그냥 씹으면 치아 손상이 올 것 같군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뭔… 각성자가 껍질이 단단해서 못 먹겠다고? 아니, 그게 아니다. 저건 ‘못 하는’ 게 아니라, ‘해본 적이 없는’ 거다. 집에서는 전담 셰프가 살만 쏙 발라서 대령했을 테니까. “하아…….” 깊은 한숨이 폐부에서부터 올라왔다. 나는 말없이 나이프와 전용 크래커(Cracker)를 집어 들었다. 이 새벽에, 다 큰 성인, 그것도 엄마 딸도 아닌 남의 집 딸 뒷바라지라니. 우득- 빠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딱딱한 껍질이 부서지고, 오동통한 랍스터 속살이 드러났다. “자, 드세요.” “……?” “설마 숟가락 위에 올려주기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나는 발라낸 살코기를 그녀의 앞접시에 툭 던져주었다. 강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접시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섬세하시네요.” “치아 손상… 오실까 봐.” “우리 집 전담 셰프님보다 잘하시는데요.” “인건비 청구하기 전에 얼른 드십쇼.” 강소희는 아무렇지 않게 포크로 살점을 찍어 입에 넣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볼만 빵빵하게 부풀린 채 오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집사를 앞에 두고 사료를 먹는 페르시아 고양이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료값이 끔찍하게 비싼 고양이 말이다. ‘이 맛있는 걸 저렇게 맛없게 먹을 수도 있다니.’ 그러니까 표현하자면… 그저 생존을 위해 열량을 채우는 건조한 저작 운동…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한참을 씹던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역시 부족해요.” 이번엔 또 뭔데? “양이 적습니까?” “아니요. 염분이요.” “……?” “이 랍스터 살을 라면 국물에 적셔서 섭취하면, 나트륨 밸런스가 딱 맞을 것 같은데.”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최고급 랍스터를 라면 국물에? 미식의 신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소리를, 그녀는 마치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처럼 진지하게 내뱉고 있었다. “저기요, 소희 님.” “네.” “제발 식사 예절 좀 지켜주시죠? 그건 랍스터에 대한 모욕입니다.” “맛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효율이 중요하죠.” “그 효율 따지다가 미각 세포 죄다 파업하겠습니다. 그냥 소스나 찍어 드세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은 집게발을 내 입으로 가져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려 한 내 잘못이다. 뭐, 어쨌든. 공짜라서 그런지 맛 하나는 기가 막혔다. “식사 종료.” 어느새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난 강소희의 식성에 상당히 놀랐다. 다 먹을 수 있는 거 맞냐더니… 나보다도 조금 더 많이 먹은 것 같은데? “…….” 강소희는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더니,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요. 배가 부르니 저도 졸리네요.” “먹자마자 자면 소 됩니다.” 잠깐. 이건 우리 엄마 대산데… 왜 내가 하고 있는 거지. “각성자의 소화력은 일반인의 5배입니다. 문제없어요.” 그녀는 건조하게 대꾸하고는, 침대 위로 쓱 올라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그거 대충 덮어놓고 일단 자요. 졸리다며.” 그럴 순 없지. 이불에 기름 냄새 밸 텐데. 끼이익- 룸서비스 카트 위에 접시를 대충 올린 나는, 룸 밖으로 그걸 밀어 넣은 뒤에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는 인지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11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사삭- 미세한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그건 분명… 꿈결 속에서 들려온 환청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기척.’ 몸을 일으키지도, 거친 숨을 내쉬지도 않았다. 이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 나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운 채, 청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나… 둘… 아니, 넷인가?’ 호텔 복도 카펫을 밟는 소리가 아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며… 소음을 죽이는 보법. 이건 분명 의도적인 잠입.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움직임이었다. ‘그랜드 아르카나의 보안이 뚫렸다고?’ 이곳은 루미스 영지 통틀어 최고 수준의 헌터 전용 숙소다. 비단 헌터즈 스쿨 관계자들이 아니더라도, 고레벨 헌터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곳에 침입이 발생했다는 건… 분명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목적은 뻔했다. 아마도 이 애물단지 같은 고유장비. [밤의 추적자 (No.967)] 바르가 길드의 도움 이후 한동안 아무 탈이 없었지만……. 이제 슬슬 다시 승냥이들이 나타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헌스쿨 합숙 중에는 안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헌스쿨 1화가 방영되고 나서, 내 위치가 특정 당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촬영 중이라 내가 더 방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어찌 됐든 쉽게 생각할 상황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암살자 길드에 청부라도 한 건가.’ 나는 슬쩍 곁눈질로 옆을 확인했다. 침대 반대편에 웅크리고 있는 강소희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느껴졌다. 다행히 그녀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듯했다. ‘깨울 필요 없겠지.’ 타깃은 분명 나일 거다. 굳이 무고한 민간인(?)을 휘말리게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강소희가 잠결에 놀라서 독기라도 뿜어대면, 오히려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지금 당장이야 나 한 사람만 타겟일 게 분명했지만, 휘말리고 나면 강소희도 같이 엮여버릴 수가 있다는 얘기다. 스윽. 나는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지만, 소음은 조금도 발생하지 않았다. 바깥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암막 커튼 덕에 숙소 내부는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띠링― 철컥. 정적을 깨는 전자음. 현관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였다. 마스터키라도 확보한 걸까? 역시 보통내기들이 아니었다. 우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 호루스의 깃털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뒀다. 끼이익……. 육중한 현관문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낯선 그림자 하나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손에 든 것은… 둔기……? 뭔가 묵직한 게 들려있는데…….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놈이 거실로 한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 사각에서 몸을 날렸다. 팟! “억?!” 침입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나는 순식간에 놈의 팔을 낚아채 뒤로 꺾고, 무릎으로 등뼈를 찍어 누르며 확실하게 제압했다. “커헉!” “조용히 해. 목이 꺾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놈의 뒷목을 악력으로 짓누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일단 한 놈이 완벽하게 제압당해서 그런지, 나머지 인원 또한 동작이 굳은 게 느껴졌다. “누가 보냈지? 블랙 마켓? 아니면 더스크포트?” “사, 살… 살려주세요!” “묻는 말에만 대답해. 동료는 몇이지?” “모, 모닝…! 모닝 엔젤! 모닝 엔젤입니다!” 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닝 엔젤? ‘……설마, 암구호 같은 건가?’ 요즘 암살자들은 코드네임을 참 특이하게도 짓는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잡은 팔을 더 비틀어 올렸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자, 잠깐! 잠깐만요! 이건율 참가자! 접니다! 조연출!” 어?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의 얼굴을 확인했다. 공포에 질려 하얗게 질린 얼굴. 그리고 둔기인 줄 알았던 손에 들린 건… 검은색 카메라였다. “……피디님?” “아이고, 나 죽네! 팔! 팔 부러져요!” 그때였다. 열린 현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인 PD와 스태프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기상 미션’이라고 적힌 팻말과 폭죽이 들려 있었다. “서, 서프라이즈……?” PD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바닥에 제압당한 조연출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살벌한 내 눈빛과, 바닥에 꽂힌 조연출의 기괴한 자세. 그것은 예능이 아니라, 범죄 스릴러의 한 장면이었다. “……아.” 나는 그제야 꺾고 있던 조연출의 팔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게이트 안, 그랜드 아르카나였고……. 그러니 여기 있는 조연출들도 전부 각성자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방금 내가 제압했던 친구가 진짜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정말 팔이 부러졌을 수도 있겠는데? “…….” 정적이 감도는 거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노크 좀 하고 다니시죠. 진짜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그야… 서프라이즈니까…….” 상당히 민망하긴 한데. 나 뭐… 실수한 건 아니겠지? * * * 조연출, 아니 ‘모닝 엔젤’과의 살벌한 해프닝이 일단락된 직후. PD와 스태프들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기… 이건율 참가자님.” “예.” “죄송하지만… 강소희 참가자님 좀 깨워주실 수 있을까요.” 이 사단이 난 상황에도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강소희를, 좀 깨워달라는 거다. “왜요? 저기도 기습해야 분량이 나올 텐데.” “그게… 사전 조사 때 김예림 작가가 신신당부를 해서요.” 아마도 내게 호되게 당하고 나니 무서웠던 모양. “강소희 참가자는 수면 중 기상 시, 무의식적으로 맹독성 마력을 방출할 위험이 있다고… 절대 일반 스태프는 접근시키지 말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제작진이 휘말리면 사고지, 그건.’ 아무리 여기 있는 제작진들이 전부 각성자라 해도, 대부분 레벨이 20레벨 초반밖에 되지 않는다. 강소희의 맹독 마력에 노출되는 순간, 단체로 응급실행이라는 얘기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죠.”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이불 둥치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기상.” “…….” 반응이 없다. 죽은 건 아니겠지? “소희 님. 아침입니다. 일어나시죠.” “……으음.” 이불 속에서 앓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지만, 기어 나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어제 그 고생을 했으니 몸이 천근만근이겠지. 하지만 밖에서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던져보기로 했다. “떡볶이.” “…….” “랍스터.” “…….” “짬뽕라면.” “진짜요?” 뭔데. 라면이 진짜 그 정도로 먹고 싶었던 거였어? 푸확-! 이불이 거칠게 젖혀지며, 강소희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2미터 정도 뒤쪽에 포진해 있던 제작진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한다. 그… 괜히 내가 미안해지는걸? “일어났으면 나오시죠. 아침 촬영 뭐 있나 봅니다.” “으윽. 오늘 촬영 없는 줄 알았는데…….” 강소희가 일어난 걸 확인한 피디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저희는 다른 룸 깨우러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스륵- 이불을 대충 밀어내고 나온 강소희는, 카메라가 있든 말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뻗었다. “……물.” 아니, 지금 여기가 본인 집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들어온 PPL 담당 스태프가 헐레벌떡 달려와 협찬사 생수병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생수병을 받아 들더니, 병뚜껑을 따지도 않고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 저기요. 뚜껑은 따고 드셔야죠. * * * PPL 아닌 PPL촬영(?)까지 마친 뒤, PD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펜트하우스 바로 옆에 위치한 ‘프레지덴셜 스위트(Presidential Suite)’였다. 6인실 규모의 초대형 객실로, 평소라면 단체 투숙객들의 공용 라운지나 회의실로 쓰이는 곳. 끼이익― 문이 열리자 우리 숙소만큼이나 호화로운 인테리어가 드러났고, 나와 강소희는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려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아르카나에서도 가장 비싸다는 초호화 객실. 하지만 현관을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드러난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1등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흐아암.” 강소희는 들어오자마자 가장 가까운 1인용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쿠션을 끌어안고 웅크린 모습이… 재벌가 영애라기보단 그냥 피곤에 찌든 고시생 같다. 뭔가 처음에는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자꾸 엄마 딸이 겹쳐 보이는 거지. “…….” 잠깐 불경한(?) 생각을 떠올렸던 나는,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열려있는 문을 통해 들어올 다른 참가자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복도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이성환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먼저 와 계셨군요.” “성환 님이 두 번째였습니까?” “예?” “아, 그… 기상 미션 말입니다.” 이성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꿈뻑였고, 뒤이어 들어온 양소현 참가자가 내 물음에 대신 대답했다. “성환이는 기상 미션 왔을 때 숙소에 없었거든요.” “음……?”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이성환이 말을 이어받았다. “아, 제가 새벽 6시에는 무조건 나가서 한 바퀴 뛰어야 몸이 풀리는 체질이라서… 제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아… 그러셨구나. “그… 상당히 부지런하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성환은 짧게 답하며 내 옆쪽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양소현(여자 이름 같지만 남자다.) 참가자가 그 옆에 이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왜… 부담스럽게 바로 옆에 앉는 건데……? 거실이며 소파며 자리가 그냥 텅텅 비어있고만. “…….” 어쨌든 바로 옆에 앉았다 보니, 그의 차림새가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국방색 기능성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편한 반바지. ‘아니, 한겨울에 반바지… 이거 맞아?’ 잠옷이라기보다는, 언제든 튀어 나가 뜀걸음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실용적인 복장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빈틈이 없는 친구였다. “저… 건율 님.” 이성환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예?” “어제 PD님들께 들었습니다. 미궁 미션… 히든 클리어까지 달성하셨다고요.” 아, 혹시 그게 궁금했던 건가? 그거라면 인정이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거요. 운도 좀 좋았고… 어쩌다 보니 정보를 좀 알고 있던 미궁이어서요.”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이성환은 궁금했던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봤고, 딱히 숨길 것도 없었기에 선선히 대답해줬다. 조금 부담스럽다는 점만 뺀다면…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첫인사. 유명 인사가 이렇게 와서 먼저 말까지 걸어 주니, 기분이 뭔가 묘한 느낌이긴 하다. 게다가 좋은 건 또 있었다. 이성환과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띠링-! [‘제복핏 감별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갑자기 스트리밍 시스템의 실시간 시청자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요람을 지키는 성녀’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새벽을 훔쳐보는 거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중략…… └ 와 미친… 성환 님 용안을 1열에서 직관하네? 내 눈 오늘 호강한다 ㅠㅠ └ 아니 근데 소파 운동장만 한데 굳이 방장 옆에 붙어 앉는 거 뭔데 ㅋㅋㅋ └ 반바지 입은 거 실화냐? 허벅지 근육 갈라지는 거 본 사람? 이성환 코인… 생각보다 달달한 걸? 11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세이프티 (Safety)’길드의 인사팀장인 서지훈은, 오늘 출근하자마자 흡연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젯밤 <헌터즈 스쿨 3>의 충격적인 1화 여파로 잠을 설친 탓에, 카페인과 니코틴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방영분만 딱 보고 잤으면 이렇게까지 피곤하지 않았을 텐데. 커뮤니티의 ‘팩트만 팬다’라는 이상한 놈을 상대하다 보니,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잠든 탓이었다. ‘졸려 죽겠네, 진짜. 업무도 밀렸는데.’ 철컥-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구석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이어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뻐근한 목을 돌리는데, 흡연실 문이 열리며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같은 인사팀 소속 대리들이었다. “야, 어제 봤냐? 이성환 진짜 미쳤더라. 방패로 골렘 찍어 누르는데, 그게 사람이냐?” “그러니까. 솔직히 이번 시즌은 이성환 독주 체제라니까. 박하준이 비벼볼 만하긴 한데, 체급 차이가 너무 나.” 역시나.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오늘 아침 대화 주제는 <헌터즈 스쿨>일 게 뻔했다. 지훈은 구석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 사실 대화에 끼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팀원들에게 ‘그딴 쇼는 시간 낭비며, 자본주의 놀음이다’라고 입이 닳도록 까 내렸던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직관까지 다녀왔다는 건… 진짜 들키면 안 되는데.’ 하지만 대화에 끼지 못했다고 해도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지훈의 귓전으로 계속 팀원들의 이야기는 흘러들어오는 중이었다. “근데 그 1위 한 사람 있잖아. 이건율인가? 걔는 좀 오버 아니냐?” 순간,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던 지훈의 엄지가 멈칫했다. “아, 그 35레벨? 솔직히 나도 좀 그렇더라. 편집을 기깔나게 해서 그렇지, 냉정하게 보면 운빨이 좀 심했지.” “그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무슨 35레벨이 80레벨 보스를 잡아. 라운지에서도 밤새 난리 났더만.” “맞아. 그 언월도 봤어? 누가 분석한 거 봤는데, 10티어 신화템으로 보인다던데?” “리얼?” “리얼임.” “야 씨, 그런 거 쥐여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다 털어먹었겠다. 인정?” “인정이지. 흐흐.” 대리들은 낄낄거리며 담배를 비벼 껐고, 그걸 듣던 서지훈은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막는 기분이었다. ‘아니, 인사팀이라는 놈들이. 보는 눈이 이렇게 없다고?’ 자신의 팀원들이긴 했지만… 이건 전형적인 ‘헌알못’들이나 할 법한 헛소리. 어제 자신의 잠을 뺏어간 그 ‘팩트만 팬다’라는 어그로꾼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여기 있는 친구들이 일반인이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다들 나름 중견급 길드의 인사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직 헌터들이었으니, 팀장인 서지훈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 입이 근질거려서 미치겠네.’ 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주에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그 ‘경지’가, 고작 운빨과 템빨로 폄하되는 걸 듣고 있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솔직히 현장에서 직관한 입장에서. 지훈의 생각은 팀원들과 완전히 반대였다. 지금 이건율은 오히려 편집 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화려한 이펙트 때문에 거꾸로 정교한 컨트롤이 가려진 건데 저런 소리들이나 하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대화에 난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야, 참자. 여기서 아는 척하면 민망해져.’ 지훈은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대리들의 헛소리는 점입가경이었다. “솔직히 걔는 미션 운이 좋았던 거야. 다음 화부터는 뽀록나서 바로 광탈할 걸?” “내 말이. 거품 빠지면 볼만하겠다.” 그래서 결국. 툭-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은 그는… 참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지나가다 우연히 들은 척 대리들 틈으로 다가갔다. “거품… 글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어? 팀장님! 출근하셨습니까?” “어, 그래. 근데 방금 그 얘기 말이야.” 지훈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뒷짐을 지며 툭 던졌다. “그 35레벨 친구. 내가 볼 땐 운빨 아닌 것 같던데?” “예? 팀장님 그 방송 안 보신다면서요?” 김 대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훈은 당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멘트를 꺼냈다. “아니 뭐… 출근하다가 쇼츠 영상이 자꾸 뜨길래, 그냥 짤막하게 몇 개 봤지. 인사팀장으로서 트렌드는 알아야 하니까.” 스튜디오 직관으로 아예 이건율 개인 스크린만 모니터링했던 서지훈의… 뻔뻔한 거짓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무튼, 내가 잠깐 보니까 그 친구…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움직임이요? 그런 걸 제대로 볼 만큼 분량이 나오지도 않았는데요?” “물론 좀 짧긴 했는데, 그래도 디테일하게 전투 장면 하나씩 뜯어보다 보면…….” 지훈의 목소리에 은근슬쩍 전문가적 열정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잠깐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발까지 써 가며 전투 장면에 대한 세세한 분석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가는데, 그게 몇 분 만에 끝날 리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 생소한 광경에, 대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평소 방송이라면 질색하던 양반이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분석을 내놓다니. “팀장님… 혹시 어제 본방사수하신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다. 그냥 그 이건율이라는 참가자 영상에 관심이 좀 간 거지.” 조금 과했다는 걸 깨달은 서지훈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괜히 흥분해서 말이 좀 많아졌는데, 더 있다가는 꼬리가 밟힐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복도를 걸어가며, 그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하네.’ 이제 서지훈은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헌터즈 스쿨은 물론 그 어떤 헌터 예능도 혐오하던 그가……. 우연히 친구 따라 직관을 갔던 계기로, ‘이건율’이라는 헌터의 팬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이건율은… 확실히 다르니까.’ 어쩌면 서지훈은, 헌터 업계에서 자신이 느끼고 있던 유리천장에 대한 답답함을. 이건율이라는 헌터를 통해 해소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 어떤 배경도 없이, 오로지 재능으로만 반짝이기 시작한 진짜 천재. 아직은 몰라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참가자별 라이브캠 편집 영상은 대체 언제 올라오는 거야?’ 지훈은 주머니 속에서 슬쩍 스마트폰을 꺼내, <헌터즈 스쿨 3> 공식 채널에 접속했다. 그는 3시간 단위로 하나씩 업데이트되고 있는, S등급 참가자들의 라이브캠 편집본 영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등급 결정전 1위 참가자 이건율의 영상을 말이었다. * * * 이성환, 양소현과 잠시 대화를 하는 사이, S등급 참가자들이 속속들이 프레지덴셜 스위트에 도착했다. 바로 다음으로 도착한 건, 마나 캐리지 메이트(?)인 전인욱과 유지상이었고. “엇! 형님, 와 계셨네요?” “뭐야, 소희 님은 여기 와서 다시 잠든 거예요 형?” 그 뒤를 이어, 검은색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들어왔다. 박하준이었다. “…….” 그는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이성환의 대항마로 평가받는 S등급 루키였지만, 겉보기엔 그저… 명절에 가끔 만나는 내성적인 사촌 동생 같은 느낌이랄까. 확실히 미궁 안에서의 날 선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곧이어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성 참가자들이 들어왔다. “어머, 많이들 와 계셨네요?” S급 화염 마법사 권유나와 궁수 배주하. 두 사람은 실크 가운을 걸치고, 이마에는 수면 안대를 얹은 채였다. 방금 자다 깬 것치고는 꽤나 멀끔한 모습이었다. 방송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관리가 철저한 건지.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권유나의 시선이, 내 맞은편에서 잠들어 있는 강소희에게 꽂혔다. “어… 소희 님?” 권유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강소희의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었으니까. 평소의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몰골이었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깨우지 않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S등급 참가자 스무 명이 전부 다 거실에 모였다. “이제 다 모이신 것 같네요.” 어느새 도착한 김신우 캐스터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야말로 아침 댓바람부터 풀메이크업 그 자체. 헌터 예능 전문 캐스터라는 직업도, 상당히 고된 일임이 분명했다. └ 햐, 이렇게 S등급만 모아놓고 보니까, 이번 시즌3 라인업 진짜 괜찮긴 하네 ㅇㅇ └ 비주얼도 그렇고 실력적으로도 그렇고… 시즌 2때랑 비교하기도 어려운 듯? 내 스트리밍을 통해 시청하는 성좌들 때문인지. 아니면 푹신한 고오급 소파에 몸을 묻고 있기 때문인지. 나도 뭔가 참가자라기보다… 관전자가 되어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만 해도 분명 그런 기분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런 걸 할 줄은 정말 몰랐지. “자!” 거실 중앙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헌터즈 스쿨’ 로고가 떴다. “아침부터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로 다음 코너 진행하겠습니다. 이름하여… <왓츠 인 마이 인벤토리>!” 왓츠… 뭐? 인벤토리? 이게 대체 무엇이죠? └ ㅋㅋㅋㅋㅋ역시나죠? └ 1시즌부터 항상 했던 건데, 빠질 수가 없지 이건. 알면 좀 알려주시죠…… 형님들? 뭔가 불안한데? └ 이 타이밍에 할 줄 모르긴 했는데ㅋㅋㅋ └ 전시즌이랑 완전히 똑같이 가면, 참가자들이 다 알거 아님ㅋ 당연히 변주가 필요하지. └ 아, 어차피 우리 방장은 모른다고 ㅋㅋㅋ “…….” 주변을 둘러보니, 나 빼고는 딱히 당황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 잠들어 있던 강소희도 언제 일어났는지, 뚱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뭐, 저희 프로그램… 국밥 같은 컨텐츠죠? 멘티 여러분들은 본인들의 인벤토리…… 평소에 잘 정리해 두셨을까요?” 그러니까 진짜로… 인벤토리를 까야 하는 그런 컨텐츠라고? “물론 강제성은 없습니다.” └ 강제성은 없는데, 공개 안하면 민심 떡락이죠?ㅋㅋㅋ └ 아 ㅋㅋㅋ 투표 알바 아니면 비공개 해도 된다고 ㅋㅋ “하지만,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소정의 상품을 드릴 예정입니다.” PD가 준비된 팻말을 들어 올렸다. [백화점 상품권 1,000,000₩ (세광 백화점)] 하아… 이것 참…… 곤란한걸? 11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름하여 <왓츠 인 마이 인벤토리>. 역시나 나만 몰랐던 코너. 김신우 캐스터가 진행하는 이번 코너의 룰은 심플했다. 여기 모인 S급 참가자 20명 중, 제비뽑기로 걸린 딱 다섯 명만 인벤토리를 공개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중앙에 설치된 미러링 패드에 손을 대면, 인벤토리 1페이지(1번~20번 슬롯)에 해당하는 아이템들이, 순서대로 대형 스크린에 강제로 송출되는 시스템. 헌터에게 인벤토리는 지갑이자 비밀 금고나 다름없는데, 그걸 전 국민 앞에 까발리겠다니. 역시 방송국 놈들이란 독한 구석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20명 중 5명이면… 확률은 25%.’ 수치상 충분히 피해 볼 확률이라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 응 안걸릴 것 같지? 25%면 걸리고 싶어도 힘들어요 형님들. └ 그거야 걸리고 싶으면 힘들지. 걸리기 싫으니까 걸릴걸? 젠장……. └ 방장 인벤이 젤 궁금한데 우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온갖 잡동사니 다 나올 듯 ㄹㅇㅋㅋㅋ 피할 수 있다. 피해야만 한다. 부끄러워서 그러냐고? 그럴 리가. 그런 건 아니다. 난 생각보다 얼굴이 두꺼운 편이거든. 다만 이것도 곧…… 인기 투표에 직결될 거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내가 헌스쿨 시청자여도 내 인벤토리를 보고 나면, 그 즉시 짜게 식어버리지 않을까……? ‘으으.’ 그러니까 나는 무조건 피할 거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 내 인벤토리 1페이지에는…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될 물건과, 어지간해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1. 밤의 추적자 (No.967)] [2. ‘황금빛 철궤 (Golden Iron Chest)’] [3. 호루스의 깃털] ……중략…… 특히 밤의 추적자가 방송으로 공개되면…… 예능뿐 아니라 9시 뉴스에도 나올 법했으니. ‘옮겨야지 이건.’ 김신우가 제비뽑기 통을 흔드는 사이, 나는 표정 변화 없이 눈동자만 굴려 인벤토리 정렬을 시작했다. 너무 티 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조작만 최소화했다. ‘그나저나 머리 잘 쓴 컨텐츠네. 페이지 기준이면 무조건 20종은 공개해야 하는 구조니까.’ 어쩌면 나는 잡템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잡템으로만 20줄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니, 숨기고 싶은 물품들을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던 거다. 평소에 잡템을 줍지 않았다면, 내가 뽑혔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했을 거다. ‘밤의 추적자를 일단 가장 구석에 처박아 두고…… 호루스의 깃털도 굳이 보일 필요가 없지.’ 그런데 위험한(?) 물건들을 뒤쪽 페이지로 쓸어 넘기고 나니, 1페이지가 너무 잡템만 남았다. ‘이건 또 이것대로 이상해 보이겠는데…….’ 그래서 적당히 헌터 구실은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뒤쪽에 있던 장비들을 앞으로 몇 개 끌어왔다. ‘월광검은 15번쯤에 두고… 곡괭이랑 삽은, 뭐 있어도 괜찮겠지.’ 대충 정리가 끝날 때쯤, 김신우가 제비뽑기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 그럼 첫 번째 행운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뭐……? 행운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김신우 씨? 부스럭, 부스럭. 통 안을 휘젓는 소리가 내 심박수와 박자를 맞췄다. 제발. 나만 아니면 된다. “첫 번째 당첨자는… 입학 미션 4위! 권유나 참가자입니다!” 휴우 살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반대편 소파에 앉아있던 권유나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엇, 제가 처음인가요?” 하지만 딱히 문제될 건 없는 건지, 여유롭게 단상으로 걸어 나가 패드에 손을 올렸다. 띠링―! 이어서 스크린에 그녀의 인벤토리 목록이 쫙 펼쳐졌다. [1. 최상급 마나석 (A급)] [2. 플레어드 로브 (6T)(영웅)] [3. 퓨어 엘릭서 미스트 (피부 진정용)] [4. 팬레터 보관함] ……중략…… 목록이 뜨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A급 마나석을 들고 다니시네요?” “저 로브, 이번 시즌 한정판 아니에요? 구하기 힘든 건데.” 전투용 장비와 자기 관리 용품, 그리고 팬들의 사랑까지. 누가 보더라도 ‘인플루언서’라는 단어와 ‘마법사’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한, 교과서 같은 인벤토리 목록들. ‘최상급 마나석이 요즘 얼마더라……? 못해도 3만LP는 할 것 같은데.’ 나는 턱을 괴고 그 목록을 바라보았다. 3억짜리 소모품이 인벤토리 최상단에 걸려있음에도, 딱히 사치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게 ‘마법사’니까. 역시 마법사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클래스다. 뭔가 내 인벤토리랑은 때깔부터 다른 느낌이랄까. └ 그러니까 함 보자, 방장ㅋㅋㅋ └ 두 번째는 방장 차례겠지? 놉. 절대로요. “…….” 권유나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자, 김신우가 다시 통에 손을 넣었다. “자, 분위기 좋습니다! 바로 다음 분 가보겠습니다!” 나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확률은 이제 19분의 4. “두 번째 주인공은…! 이번 시즌 강력한 우승 후보죠. 2위! 이성환 참가자!” 나이스.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제작진들도 그랬겠지. 가장 인지도 높은 이성환이 뽑혔으니, 이 컨텐츠는 이미 성공한 셈이다. “넵.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정말 조금의 당황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저 절도 있는 걸음걸이……. 대체 뭐가 들어있길래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그런데……. 지이잉―! 스크린에 이성환의 인벤토리가 뜨는 순간.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1. 대용량 방패 광택제 (1L)] [2. 대용량 방패 광택제 (1L)] [3. 극세사 클리닝 천 (200매)] [4. 휴대용 다림질 키트 (마력 충전식)] [5. 6년근 홍삼 엑기스 (30포)] ……중략…… 뭐지, 이 숨 막히는 정렬은? 아이템들이 마치 사열을 받듯, 종류별로 오와 열을 맞춰 칼각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 미친ㅋㅋㅋㅋㅋ 이게 대체 뭐임ㅇㅇ??? 김신우 캐스터가 당황한 듯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어… 이성환 참가자님? 1번부터 3번까지가 전부 광택용품인가요? 양이 엄청난데….” 이성환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는 제 얼굴입니다.” “예?” “방패가 더러우면 절 믿고 등 뒤를 맡긴 동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전투가 끝나면 무조건 30분씩 닦고 정비합니다.” 그의 대답에 다른 참가자들이 술렁거렸다. “와… 어쩐지. 지난번에 보니까 무슨 방패가 거울처럼 빛나더라니.” “23살 맞아요? 마인드가 거의 행보관님 같은데.” 김신우는 땀을 삐질 흘리며 다음 항목을 가리켰다. “그럼… 이 4번은요? 다림질 키트? 던전에서 다림질을 하시나요?” “물론입니다. 마음가짐은 단정한 복장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구겨진 전투복으로는 몬스터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성좌들은 아예 자지러지는 중이었다. └ ㅅㅂㅋㅋㅋㅋㅋ 이성환ㅋㅋㅋㅋ미치겠다. └ 전쟁터에서 옷 다림질하는 놈이 어딨어 ㅋㅋㅋ └ 아냐, 저런 게 진짜 광기임. 컨셉 아니고 진짜인 듯. 하지만 진짜 압권은 그 밑에 있는 항목이었다. 화면을 뚫고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이 홍삼 냄새는 대체……. “저… 5번은 홍삼인가요? 6번은… 십전대보탕?” “몸이 재산입니다. 기력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이성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목록을 바라보았다. 23살이라며. 왜 우리 아버지 등산 가방에나 들어있을 법한 물건들이 네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건데? “그리고 마지막 20번… 이건 뭡니까? 마치 벽돌처럼 생긴…….” “아, 고단백 블록입니다.” 이성환이 인벤토리에서 회색 블럭 하나를 꺼내 보였다. 진짜 시멘트 벽돌처럼 생겼다. “맛은 없지만 효율은 최고입니다. 이거 하나면 하루종일 배가 안 고프죠. 전투 지속력을 위해 항상 구비해 둡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권유나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와… 줘도 안 먹을래요.” 하지만 이성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블럭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의 인벤토리 공개가 끝나고 내려오는데, 묘하게 그에게서 은은한 한약 냄새와 광택제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나중에 건율 님도 하나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거 홍삼이 꽤 효과가 좋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이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제 남은 자리는 세 자리뿐이라는 거다. ‘제발, 이대로만 넘어가자.’ 내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김신우가 다시 제비뽑기 통을 흔들었다. “자, 이성환 참가자의 강렬한 인벤토리 잘 봤습니다! 그럼 바로 세 번째 주인공을 뽑아보겠습니다!” 김신우 캐스터가 다시 통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맞춰 내 심박수도 다시금 요동쳤다. 이제 남은 확률은 18분의 3. “세 번째 당첨자는…! 7위! 전인욱 참가자입니다!” 다행이다. 내 건너편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전인욱. S급 참가자들 중에서는 이제 가장 친근해진 녀석. 그는 곰 같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며 단상으로 나갔다. 지이잉―! 스크린에 그의 인벤토리 목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목록을 본 순간,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1. 가족사진 (가죽 액자)] [2. 낡은 부적] [3. 시장표 수제 육포 (대용량)] [4. 소형 라디오] [5. 휴대용 캠핑 의자] ……중략…… 방금 전 이성환의 숨 막히는 ‘오와 열’ 인벤토리를 보고 난 뒤라 그런지, 화면 가득 채워진 물건들에서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특히나 가족사진이나 라디오 같은 건…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려면 게이트산 원자재 기반으로 특수제작을 해야 할 텐데……. 그런 번거로움까지 감수하면서 들고 다니는 걸 보니, 보기보다 감성적인 녀석이었나보다. “아, 1번이 가족사진이네요? 되게 보기 좋습니다.” “하하. 타지에 나와 있다 보니까,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봅니다.” 전인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 육포는 뭔가요? 꽤 맛있어 보이는데.” “아, 저거 루미스 광장 시장 골목에서 파는 건데 진짜 맛있습니다. 대기 시간에 입 심심할 때 씹으면 딱입니다. 나중에 좀 나눠 드리겠습니다.” “라디오도 들으시나 봐요?” “던전 안에선 스마트폰이 안 터지니까요. 가끔 주파수 잘 맞추면 지지직거려도 라디오는 잡히거든요. 적막할 때 틀어놓으면 좋습니다.” 그의 소탈한 설명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들의 반응도 훈훈했다. └ 그래, 이게 사람 사는 인벤토리지. └ 아까 그 광택제 빌런 보다가 이거 보니까 마음이 정화된다. └ 육포 맛있겠다. └ 앜ㅋㅋ 이성환 단숨에 빌런행이냐곸ㅋㅋ 나 역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 냄새가 난다. 이성환이 ‘행보관’이라면, 전인욱은 ‘등산 동호회 아저씨’ 같은 푸근함이랄까. 전인욱이 육포를 몇 개 꺼내 나눠주며 훈훈하게 퇴장하자, 김신우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힐링도 했으니, 이제 다시 긴장감을 좀 조여볼까요?” 그가 통을 흔들었다. 이제 남은 자리는 단 두 자리. ‘제발… 제발 넘어가자.’ 이제 확률은 17분의 2. 약 11% 정도다. 수학적으로는 절대 걸릴 리 없는 확률이지만, 내 불길한 예감은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 행운의 주인공은…! 11위! 배주하 참가자!” 휴우.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딱 한 명 남은 셈.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앞으로 걸어 나오던 배주하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아직 나와는 직접적으로 접점이 없는 참가자였지만, 배주하도 꽤 헌스쿨 이번 시즌 안에서 인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일단 등급 결정전 5위인데다, 포지션 결정전에서도 나만 아니었다면 궁수 1위를 했었을 인재였으니까. 권유나만큼은 아니지만 팬덤도 꽤 있는 거로 알고 있고…….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앞으로 나간 배주하가 패드에 손을 올렸다. 띠링―! [1. 최고급 미스릴 화살통] [2. 바람의 깃털 화살 (100발)] [3. 활 관리용 오일] …… 초반부 목록은 평범했다. 궁수 클래스 헌터라면 으레 가지고 다닐 법한 소모품들과 장비들. 하지만 스크롤이 아래로 내려가, 대망의 20번 슬롯이 화면에 비친 순간. “……어?”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나 역시 눈을 의심했다. 다른 아이템들과는 달리, 혼자서 독보적인 황금빛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장비. [20. 폭풍의 눈 (Storm Eye)] [등급 : 신화 (Mythic)] [티어 : 9 Tier] 장내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가, 곧이어 폭발했다. “미친… 신화 등급?” “와, 9티어? 40레벨 대가 쓸 수는 있는 건가?” “폭풍의 눈이면 가능할 겁니다. 저거 레벨제한 완화 옵션 붙어 있어요.” 심지어 이번엔 강소희조차 살짝 놀란 표정이다. 폭풍의 눈이면…… 15만 LP도 가볍게 넘는 장비였으니까. 레벨제한 완화 옵션까지 고려하면, 20만 LP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고? 사실 신화 등급에 9티어면, 가격을 떠나 희소성만 놓고 봐도 충분히 놀랄 만했다. 김신우 캐스터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와!! 대박입니다! 배주하 참가자! [폭풍의 눈]을 가지고 계셨다뇨!” “사실 제 거라기보단… 스승님께서 물려주신 거라서요.” 배주하가 뿌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이 고가의 아이템 덕에… 현장의 열기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단 한 사람. 나만은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 딱 한 번만 피하면 되니까……!’ 이제 확률은 16분의 1. 제발. 나만 아니면 돼! “자! 이제 대망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김신우 캐스터가 잔뜩 고조된 목소리로 외쳤다. “신화등급 아이템의 등장으로 현장 분위기가 정말 뜨거운데요! 과연 이 열기를 이어받아, 백화점 상품권 100만 원을 가져갈 마지막 주인공은 누가 될지!” 그가 통 안에 손을 넣고 휘적거렸고, 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당첨자는……!” 그리고 다음 순간……. “입학 미션 1위! 이건율 참가자님! 나오세요!” 젠장. └ 엌ㅋㅋㅋㅋ 방장 어서오곸ㅋㅋㅋㅋ └ 그래 이거지! ㅅㅂㅋㅋㅋ └ 제작진 감다살 ㅇㅈ합니닼ㅋㅋㅋㅋㅋ └ 신우형! 믿고있었다고!!! 이거 이 정도면…… 조작 아니냐? 11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단상 앞으로 나가는 걸음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100만원 상품권 당첨된 셈인데, 왜 이렇게 울상이냐고? 그야… 100만원보단 인기 투표가 훨씬 더 중요하니 그렇다. 나 1등… 해야 한다고…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자, 이건율 참가자! 여기에 손 올려주시면 됩니다.” 이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오늘도 싱글벙글이신데. 후우. 어쩔 수 없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패드에 손을 올렸다. 이어서…….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대형 스크린에 내 인벤토리의 민낯이 강제로 송출되었다. [1. 견고한 철제 삽 (내구도 12/100)] [2. 빛의 곡괭이 (채굴용)] [3. 발골용 사시미 칼 (C급)] [4. 유리 병 x 12] [5. 흑요석 가루 x 76] [6. 루멘 원석 x 42] ……중략…… [15. 월광검 (3T)(유일)] [16. 아이언테이드 실드 (3T)(희귀)] ……중략…… “…….”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 배주하의 번쩍거리는 9티어 신화등급 활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화면 속 목록이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삽, 곡괭이, 사시미 칼, 그리고 고물상에서나 볼 법한 잡동사니들. 이건 루키 헌터의 인벤토리가 아니라, 어디 공사판 십장님의 가방 속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어….” 김신우 캐스터도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삽…?” “곡괭이는 왜 들고 다니시는 거지? 미궁 벽이라도 뚫으셨나?” “저 사시미 칼… 날 선 것 좀 봐. 무서운데?” 물론 우리 성좌님들은 신났지만 말이다. └ 이거 다 어디서 본 것들이고만ㅋㅋㅋㅋㅋ └ 여기 방장은 혹시 고물상인가요?ㄷㄷ └ 앜ㅋㅋ 삽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 거 뭔데 ㅋㅋ └ 흑요석 가루는 아직도 안 버렸음?;; 그때, 김신우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보려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시선이 4번 항목에 머물렀다. “아! 저기 빈 유리병들이 눈에 띄네요. 12개나 되는데…….” 그는 짐짓 감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혹시 이건율 참가자의 클래스와 연관이 있는 물건일까요?” 제발. 수치스럽게 이러지 마세요 형님……. “아, 혹시 모르실 수 있을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이건율 참가자의 클래스는 ‘세라피스트’. 연금술 계열 클래스라고 합니다.” 아니, 그거 진짜 아닌데. “그러니 저 병들은… 연금술 재료를 배합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특수 용기들이겠죠?” “…….” 그냥 그렇다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방장 근데 저 병은 진짜 뭐임? 연금술 용기는 당연히 아니잖음. └ 어, 잠깐만. 생긴 게 좀 낯이 익는데? 당연히 낯이 익겠지. 이건… 루멘하르트 잡화상점에 파는 포션병이니까. “…아뇨.” “네?” 내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들어 갔다. “그러니까…… 이게… 공병 보증금…….” “……?” “아니, 환경 보호는 중요하니까…….” “예……?” 잠시 후 내 말을 이해하는 데 성공한 김신우는, 뇌 정지라도 온 건지 말을 잃어버렸다. 장내의 분위기도 꽤나 숙연해졌다. 사람마다 표정이 다르긴 하지만, 절반 정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뭔가 참고들 있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병이 엄청 깨끗하네요?” 에라. 모르겠다. “씻었으니까요.”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찢었닼ㅋㅋㅋㅋ └ 미치겠다 진짜 ㅋㅋㅋ 환경보호 헌터 뭔데 ㄷㄷ └ 아니 루미스 영지 잡화상점에 공병 보증금 같은 것도 있었음?ㅋㅋㅋ └ 방장이 NPC랑 딜 친거 아닐까ㅋㅋ └ 대이브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ㅋ └ 그래서 공병보증금 얼만데? 0.1LP는 됨? -0.3LP나 됩니다, 형님들. 이거 무시할 수가 없다니까요? └ 씹ㅋㅋㅋ 공병닦는 헌터ㅋㅋㅋ 이게 낭만이지. └ 그런데 저 삽은 왜 아직 안 버린 거임? 이제 전투할 때 안 쓰지 않음? -그… 어디 쓸 일 있을지 모르니까요? └ ㅁㄷㅋㅋ저거 전투용 삽이었음? └ 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 엌ㅋㅋ 유입들이 우리 방장 삽질 실력 좀 봐야하는데ㅠㅠ └ ㄹㅇㅋㅋ 성좌들은 아주 근래 들어 가장 신이 난 모습이다. 후우……. 우리 형님들이라도 행복하시다면, 그거로 됐습니다. 내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거야 뭐. 감수해야지 어쩌겠어. “…….”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냥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우리 김신우 형님께서는 그조차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뭐, 마음은 알겠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수습해 주고 싶었던 거겠지. “아! 잠시만요! 그래도 여기 밑을 보세요! 월광검, 이거… 꽤 유명한 장비 아닌가요? 검사 클래스 시작의 섬 졸업장비로 알려진?” 감사합니다만,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형님. “여기 실드는 또 뭐죠? 이건율 참가자의 포지션 결정전 점수가… 슬슬 이해되려 하는데요?” 김신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나를 ‘공병 수집가’가 아닌 ‘헌터’로 포장해 보려는 눈물겨운 노력.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노력은 별 의미가 없었다. 어설픈 포장은 오히려 짠내만 가중시킬 뿐. 김신우가 뭐라 포장해서 말을 한다 해도……. “아… 네. 칼도 있으시네요.” “방패도… 튼튼해 보이고요.” 이런 정도의 대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기… 이제 내려가도 될까요?” 내가 쭈뼛거리며 물러나려 하자, 김신우가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직 상품 증정식이 남았습니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에게 손짓했다. 스태프들이 쟁반에 하얀 봉투 다섯 개를 담아 들고나왔다. “오늘 용기 내서 인벤토리를 공개해 주신 다섯 분의 참가자 전원에게! 감사의 의미로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그래… 이건 받아 가긴 해야지. 이거라도 없었으면 너무 억울할 뻔했는데? “세광 백화점 상품권 100만 원! 축하드립니다!” 김신우가 내 손에 빳빳한 봉투 하나를 쥐여주었다. ‘……흐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 안을 슬쩍 확인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100만 원권 수표. 그걸 보는 순간, 뭔가 방금 전까지 느꼈던 쪽팔림과 수치심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느낌이다. ‘식품관 탕후루라도 좀 사둘까. 조만간 쓸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단속한 나는, 상품권을 품에 챙겨 넣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고작 상품권 한 장에 기분이 나아지는 내가 밉다….’ 오늘의 이미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미션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 막…… 인기 투표에 엄청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뭐… 좀 알뜰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 * * 어쨌든 이렇게 불시에 시작된 오전 촬영은… 어찌어찌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숙소에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새 11시. 기상 서프라이즈에 인벤토리 공개 미션에, 오전이 또 상당히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걸렀잖아? 그런데 왜… 입맛이 별로 없는 느낌이지? “난 배고픈데요.” 강소희의 핀잔에 나는 입맛을 쩝 다시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식욕감퇴의 원인을 깨달은 탓이다. “으으.” 입안 가득 맴도는 진한 쌉싸름한 맛. 문제는 이성환으로부터 받아먹은… ‘6년근 홍삼 엑기스’인 것 같았다. [공복에 드시는 게 흡수가 빠릅니다. 식사 전에 지금 드시죠.] 거절하기도 뭣해서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쪽 빨아먹었는데……. 아직까지도 혀끝에 남아 있는 끈덕한 홍삼의 잔향이라니. “으, 아저씨 냄새.” “…….” 아무래도 밥은 조금 이따 먹어야겠다. 제작진 피셜, 오후 2시까지는 그래도 진짜 확실한 자유시간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한 한 시간 정도 뒹굴다가 천천히 가서 먹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안되는데요?” “왜… 요?” “그야, 난 지금 먹어야겠으니까.” “혼자 다녀오시죠.” 어느새 난 강소희의 손에 질질 끌려 레스토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엇, 팀장님?” “우와, 건율 님이다!” 레스토랑 앞에서 박진우, 권유나와 만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입 안에 홍삼 잔향이 남아있긴 한데, 그래도 막상 도착해서 후각이 자극되니 또 식욕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어제 룸서비스로 랍스터와 스테이크는 질리도록 먹었으니, 오늘의 타깃은 다른 쪽이었다. “그, 유나 님. 일식 괜찮아요?” “저야 완전 좋아하죠.” “진우 님은?” “저도 좋습니다.” “난 왜 안 물어봐요?” “라면은 안 됩니다.” “아, 왜.” 라면은 차라리 내가 숙소에서 끓여주고 말지. 한 끼에 수십만 원인 레스토랑에서 그걸 먹자고? “…….” “잘 먹겠습니다.” 나는 접시 가득 담아온 ‘오도로(참다랑어 대뱃살) 초밥’과 ‘민물장어구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 점에 만 원은 족히 넘을 고급 부위들. “팀장님, 그 접시는 뭡니까? 무슨 탑을 쌓아 오셨네.” 좀 많이 들고 오긴 했는데……. “별로 배 안 고프다면서요?” 공짜일 때 내 위장이 허락하는 한계치까지 밀어 넣는 것. 그것이 뷔페에 대한 예의이자 자본주의의 미덕 아니겠는가. “많이 먹어둬야죠. 오후에 또 뭘 시킬 줄 알고.” 샐러드와 연어 몇 점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는 박진우와 권유나의 접시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또 잔소리가 마려워지는데……. └ 아오 방장시치……. └ 왜 부끄러운 건 우리 몫인데? 성좌 형님들을 봐서 참아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넷이 모여 있으니 꽤 이색적인 조합인걸? “그런데 건율 님.” “예?” “아까 촬영 때 봤던 그 빈 병들 말이에요. 진짜로… 파시는 거예요?” 음… 이 여자도 보기보다 무서운 구석이 있는걸.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이렇게 기습이라니. 저 순수하게 호기심 넘쳐 보이는 저 표정이 더 나쁘다. 나는 장어를 씹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티끌 모아 태산입니다.” “빈 병?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팀장님? 뭘 팔아요?” “진우 님은 몰라도 돼요.”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는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주머니엔 상품권도 있고. 이렇게 충만한 만족감이라니. 숙소 침대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 잠이 솔솔 오겠는걸? “…….”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딩동댕동― 호텔 로비와 식당 전체에 맑은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참가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갑작스런 안내 방송. 순간, 식당 안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정적이 흘렀다. [제1차 본 미션, <미다스의 정원> 미션 결과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참가자분들은 오후 2시까지, 본관 3층 <컨벤션 홀>로 집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위 발표 및 2차 미션 브리핑이 있을 예정입니다.] 2시라……. 갑자기 공지가 떠서 또 뭔가 했는데, 다행히 시간이 변동되진 않았다. 그때까진 숙소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한 잠 때려야겠는걸? 11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난, 세상의 유일한 한 줄기 희망인 용사였다.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마룡이 내 검 아래 쓰러져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화아아아악―! 눈이 멀어버릴 듯한 찬란한 무지개색 빛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 빛의 중심에 떠 있는 하나의 아이템. [용살자의 대검 (Dragon Slayer’s Greatsword)] [등급 : 초월] [티어 : 13 Tier] 그걸 발견한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13티어 초월 등급 대검이라니. 이것만 주워다 팔면… 강남 아파트, 아니 강남에 건물 두세 채는 살 수 있는 거 아냐? 줍기만 하면 끝이다. 내 고생길은 여기서 마감이다. “내 거다… 이건 내 거야!” 나는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르며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서늘한 검 자루의 감촉이 닿으려는 찰나. 짐작조차 못 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띠링―! [시스템 : 인벤토리가 가득 찼습니다.] [아이템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어?” 뭐라고? 인벤토리가 꽉 찼다고?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항상 여유 공간을 확보해 두는 편인데. 다급하게 인벤토리 창을 열어젖혔다. [1. 빈 포션 병 (세척됨)] [2. 빈 포션 병 (세척됨)] …… [48. 빈 포션 병 (세척됨)] [49. 루멘 원석 (잡석)] [50. 루멘 원석 (잡석)] “…….” 인벤토리가 쓰레기들로 꽉 차 있었다. 아니, 사실 쓰레기는 아니고 내 소중한 공병 보증금. 아니, 지금은 쓰레기가 맞잖아! “아, 안 돼! 버려! 다 버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유리병을 꺼내 인벤토리 밖으로 내던지려 했다. 공병 보증금 때문에 13티어 초월템을 못 먹을 거라면, 차라리 그랜드 아르카나 첨탑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띠링―! [경고 : 버릴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사유 : ‘환경 보호법’ 준수] “……뭐?” [시스템 : 당신은 방송에서 ‘환경을 사랑하는 헌터’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연에 쓰레기를 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시팔 내가 언제! 야 이 미친 시스템아!” 나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냉혹했다. 그사이, 눈앞의 초월 아이템 위로 붉은색 카운트다운이 뜨기 시작했다. 주인 없는 아이템이 소멸하기까지 남은 시간. [루팅 가능 시간 : 5… 4… 3….] “안 돼! 사라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분리수거 잘할게!”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숫자는 야속하게 줄어들었다. [2… 1… 0.] 파앗―! 무지개색 빛기둥이 산산이 조각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의 강남 빌딩이, 나의 노후 자금이, 공기 중으로 증발해버렸다. “으아아아아아!” 그러니까 이건……. 내 생애 단 한 번도 꿔본 적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악몽이었다. “안 돼! 내 공병!! 아니, 내 검!!!” “아니 뭔… 자다가 갑자기 공병타령이에요?” 허억- 허억- “참치 초밥 먹다가 뭔가 크게 잘못됐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더니, 옆에 강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아, 나 소파에서 잠들었었구나. 그런데……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지는 말아줄래? 초딩 때도 이렇게 혹독한 악몽은 꿔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후우……. “마침 잘 일어났네. 세수 한 번 하시고, 내려갈 시간이에요.” 벌써 2시가 다 된 건가? “5분 남았거든요?” 좀 깨워주지. 악몽 풀버전으로 다 꾸기 전에……. * * * 개꿈으로 인해 받은 정신적 데미지가 상당했지만, 어쨌든 시간이 다 되었으니 미적거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원하게 세수까지 한 뒤, 나는 강소희와 함께 곧장 본관 3층에 위치한 컨벤션 홀로 이동했다. 시간은 오후 1시 58분. 넓은 홀 안은 이미 100명의 참가자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큰 홀이 꽉 찼네.’ 그나저나 이번엔 B~F급 참가자들도 다 모인 것 같다. 아마 내가 낮잠 자는 사이 열심히 걸어서 이동한 모양. 우리 팀원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겠는데? 물론 나도 악몽 때문에 고생 좀 하긴 했지만……. 흐음. “곧 촬영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오전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성적표를 받기 직전이라 어쩔 수 없는 걸까. 나와 강소희는 일단 적당한 자리에 앉았고, 곧 김신우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자, 모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를 잡은 김신우 캐스터가, 헛기침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컥- 홀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이어서 김신우가 오프닝 멘트를 시작하였다. “이번 미션, 정말 다사다난했죠?” 김신우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참가자들. “단순히 몬스터를 잡는 무력이 아닌, 자본을 운용하는 전략과 냉철한 판단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김신우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참가자들의 표정은 각기각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작진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수많은 변수와 반전들….” 아직 결과 발표야 하기 전이라고 해도, 솔직히 어느 정도 팀 성적을 각자 예상하고 있을 테니 말이었다. 뭐 우리 팀이야 당연히 1등일 테니, 긴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방장? └ 다른 팀이 더 큰 흑자를 냈을 수도 있잖아? 히든 스테이지가 다른 팀에도 뜬 게 아닌 이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형님들. 그리고 성환이네 팀도 흑자 300LP밖에 못 냈던데요 뭘. └ 성환…… 이? └ ㄷㄷ 갑자기 친한척 뭔데; └ 홍삼캔디 하나 받더니 바로 비밀친구 먹은 거임? 어허. 말 편하게 하라니까 그렇게 하기로 한 것뿐입니다만. └ 홍삼친구ㄷㄷ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 잠깐 성좌들과 잡담하던 사이, 서론이 끝난 김신우가 본격적인 진행을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1차 본 미션, <미다스의 정원> 최종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두구두구두구―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드럼롤 소리와 함께, 화면에 서서히 송출되는 1차 미션의 순위표. 그런데 화면에 뜬 스크린을 확인한 나는……. [1차 본 미션 최종 순위] [공동 1위 : 1팀(이건율), 2팀(이성환), 7팀(권유나) - 100점] [4위 : 4팀(박하준) - 96점] [5위 : 5팀(배주하) - 92점] ……중략…… 뭔가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공동 1위?’ 1위야 생각했던 그대로였지만…… 그 앞에 붙은 ‘공동’이라는 단어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점수 차이가 꽤 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걸 공동 1위로 퉁 쳐버린다고?’ 뭐, 솔직히 점수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고 한들……. 미궁의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차등을 정비례로 해줄 거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공동 1등은 좀 아니지. 이게 무슨 등급제 수능도 아니고, 이런 공산주의식 점수 산정이라니……. ‘확실히 좀 아쉬운데.’ 제작진이 밸런스를 맞추려고 일부러 천장을 둔 건 알겠는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고생을 해서 히든 보스까지 잡았는데, 결과가 아예 똑같다면 이건 역차별이 아닌가. └ ㅁㅊ;;; 이건 논란이 좀 있겠는걸? 그런데 내가 속으로 제작진을 씹어대고 있던 바로 그 때. “물론!” 김신우 캐스터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미궁에서 땀 흘려 번 막대한 LP가, 고작 점수 상한선에 막혀 반영되지 않아 아쉬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특히 압도적인 흑자를 기록한 1팀 같은 경우엔 더더욱 그렇겠죠?” 그는 씨익 웃으며 다음 화면을 띄웠다. [특별 보상 규정]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미궁에서 획득한 [최종 흑자 LP]에 대한 추가 보상!”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외쳤다. “제작진의 예상을 깨고 무려 흑자를 달성하신 1위 세 팀에게는, 최종 흑자 LP의 두 배에 달하는 상금을 즉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거…… 진짜예요? └ ㅁㄷㅋㅋㅋ 제작진 데이브 잘알임?ㄷㄷㄷ └ 어떻게 알고 우리 방장 맞춤형 보상을 ㅅㅂㅋㅋㅋ “해당 상금은 팀원들의 기여도에 의거해 배분될 예정이며…….” “……!” 김신우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서 슈퍼컴퓨터보다 빠른 계산기가 돌아갔다. ‘잠깐. 그러니까….’ 기존 흑자 9,624 LP. 거기에 두 배라면……? 총액 19,248 LP. ‘이 금액을… 기여도 정산을 해준다고?’ 솔직히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도, 내 실질 기여도는 7할 이상이다. 전략 수립, 오더, 보스 딜링, 심지어 자금 운용까지. 하지만 방송이니까 좀 겸손하게, 아주 양심적으로 40% 정도만 잡는다고 쳐도…. ‘7,699 LP…?’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공명정대하기 그지없는 헌스쿨 제작진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내 죄가 깊은 듯하다. └ 와 ㅋㅋ근데 헌스쿨 제작진 통 크네 ㅋㅋㅋ └ 그러게 ㄷㄷ 제작비를 고작 미션 보너스 주려고 1만LP나 더 태운다고? 방금 전까지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던 ‘공산주의 타도’의 깃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솟은 건 바로…… 황금빛 자본주의의 여신상(?)이었다. ‘G.O.A.T.’ 역시 라이카는 공정한 기회의 땅이다. 노력한 만큼 현찰로 꽂아 주는 이 투명한 시스템. 헌스쿨 제작진들, 이제 보니 정말 배우신 분들 아닌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승천하려는 것을, 나는 헛기침으로 애써 눌러 참았다. “크흠.” 옆에 있던 강소희가 ‘또 왜 저래?’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게 바로 행복인 것을. “이어서 향후 미션 방향성과 탈락 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잠시 결과 발표로 인한 소란이 지나가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김신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전에도 언급드렸던 적이 있지만, 이번 팀 미션은 총 3차까지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두 번의 추가적인 미궁 공략이 진행된다는 뜻이죠.” 뭐, 설명은 꽤 장황했지만, 정리하자면 이렇다. 1. 각 참가자는 팀 점수를 기준으로, 기여도에 따라 –4점~+5점 사이의 개별점수를 추가로 적용받게 된다. (팀 점수가 100점일 경우, 개인이 받게 될 점수는 96~105점인 것.) 2. 지금의 팀으로 총 3번 미궁 공략이 진행되며, 이 세 번의 미궁 공략에서 받은 평균 점수가 [최종 미션 점수]가 된다. 3. 마지막으로 [1차 대국민 인기 투표]를 통해 [인기 투표 점수]가 정해지게 되며……. 4. 이렇게 정해진 [최종 미션 점수 + 인기 투표 점수]로, 모든 참가자들의 순위와 등급이 변동되게 된다. 5. 변동된 순위 기준 81위~101위 F등급 참가자들은, 가차 없이 탈락한다. 확실히……. 탈락에 대한 얘기까지 나오니까, 이제 좀 서바이벌 같은걸? “으, 알고는 있었지만 살벌하다 살벌해.” “그래도 1차 탈락은 피하고 싶은데…….” 인기 투표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까진 공개되지 않았지만, 나도 은근히 걱정된다. ‘결국 실력만 좋아선 안 된다는 소리니까.’ 뭐, 지금까지 잘했으니 1차 탈락이야 할 리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인벤토리 공개 컨텐츠가 자꾸 마음에 걸린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다음 주 일정을 공개합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위 표자 떠 있던 스크린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웅성이던 모든 참가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며,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2주차 주간 일정표] [Day 1~2 : 개인 정비 (게이트 외부 출입 금지)] [Day 3~5 : 포지션별 멘토링] [Day 6 : 2차 미션 주제 발표] ‘그런데 잠깐.’ 개인 정비…… 는 또 뭔데? 11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결론적으로 ‘개인 정비’라는 건, 예정 밖의 스케줄이었던 거로 확인됐다. 어떻게 알았냐고? 일단 시즌 1, 2를 챙겨봤던 참가자들이 의아한 반응이었던 데다……. “신기하네. 전 시즌엔 이런 거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원래 바로 훈련 들어가지 않았었나요?” 컨벤션 홀의 일정이 끝나고, 나만 따로 제작진의 호출을 받았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우리 이정민 FD님의 호출이었고. 덕분에 나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됐다. 이해 좀 해 달라고.] 우리 FD님은 각성자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그랜드 아르카나에 들어올 수는 없다. 그래서 아르카나 내부에 있는… 특수 마력 통신장비를 사용해 통화를 했는데……. 덕분에 오늘의 점수 산정 방식과 팀 LP 보상이 어떻게 된 일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LP 2배 이벤트… 좋았다, 정 사장?” [좋았으면 팀원들 잘 좀 달래줘.] “그쯤이야 뭐.” [다른 참가자는 걱정 안 되는데, 강민우 씨 말이야.] “그 친구는 왜.” [그 사람한테는 LP 보상이 코 묻은 돈 수준일 테니까. 그게 좀 걱정돼서.] “걱정 않아도 돼.” [그래?]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갑자기 내 말 잘 듣더라고.” [그러면 다행이네.] 내 입장에서야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갑자기 생긴 2일이라는 정비시간(자유시간)이, 이 이슈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도 겸사겸사 알게 됐고, 뭐. [아무튼, 나 기획 새로 다 짜야 해서 진짜 죽겠으니까, 다음부터는 제발 이상한 짓 하지 말아 줘라… 오케?] “그거야 뭐, 상황에 따라 다른 거지?” [젠장… 끊는다.] 뚜- 뚜- 어쨌든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귀 전화를 끊고 나오니, 근처에 앉아 있던 권 PD가 슬금슬금 다가와 묻는다. “저… 이건율 참가자님?” “넵?” “FD님이랑 말씀은 잘 나누신 거죠?”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내 씩씩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푸- 하고 내쉬었다. “모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이어서 제작진의 회의실을 나온 나는,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럼 이제… 계획을 세워 볼까?’ 2주 차 일정을 펼쳐놓은 뒤, 돌아오는 다음 주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숙소로 돌아오자, 강소희는 이미 편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마 밥 먹고 제작진에게 불려갔던 게, 궁금했던 모양. “뭐, 별다른 건 아닌데…….” 그에 적당히 말해줘도 될 부분까지만 이야기해줬더니, 쉽게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사실 우리 팀이 압도적인 성적에 비해 점수적으로 손해 본 건 사실이니……. 그 이슈 때문이라고 하자 그런가 보다 하는 느낌이다. 쪼로록- 정수기에서 냉수 한 잔 받아먹고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강소희도 책을 덮고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아마 자유시간 동안 뭘 할지 물어볼 듯한데……. “그나저나 건율 님.” “예?” “개인 정비시간, 뭐 할 거예요?” 역시 예상이 맞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어쨌든 우리… 룸메잖아? “일단, 게이트 안에서는 뭘 하든 자유라고 하니까…….” 게다가 강소희야 어떤 계획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벌써 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오늘하고도 추가로 주어진 2일이라는 시간 동안, 생각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소희 님.” “네.” “혹시 소희 님은 뭐 따로 해야 할 일 있으세요?” 혹시 딱히 할 일 없으면…… 좀 도와줄 수 있으시려나? * * * 내 할 일이라는 건, 사실 지금 막 생긴 거였다. 정확히는 컨벤션 홀에서 2주차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을 때. 그때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으면서 생겼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Day 3~5 : 포지션별 멘토링] - 각 참가자분은 [포지션 결정전]에서 결정된 포지션에 맞춰, 각 분야 레전드 멘토들에게 3일간 특별 지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건…… 어쩌면 헌스쿨 끝날 때까지 내가 활을 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린데…….’ 서바이벌 예능이기에 앞서 결국 이 헌터즈 스쿨은, 멘토들이 멘티 참가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기본 포맷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근간이 이렇게 ‘포지션’이 된 이상. 나는 얼떨결에 원거리 딜러가 되어버린 셈이다. 뭐, 아직 100% 정해진 게 있는 건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흘러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멘토링 받으러 갔는데, 활이 없으면 안 되잖아?’ 그렇다. 지금 난 학교를 가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거다. └ 그러니까 방장, 궁수로 전향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 전향은 아니고요, 형님들. └ 크… 난 대이브 활 쏠때가 젤 볼 맛 나더라. └ 그건 아님 ㅇㅇ 방장은 솔직히 검을 제일 잘 쓰지. └ 놉. 삽질할 때가 제일 간지남. 예? 마지막은 좀 이상합니다만……? “…….”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럽게 생긴 자유시간을…… 나는 준비물(?) 장만에 쓰기로 마음 먹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헌스쿨 끝나고 나서 나중에 팔아먹더라도, 괜찮은 활 한 자루 장만할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원거리 딜러가 활만 쓰는 건 아니지 않냐고? 그렇다고 더 비싼 마력총을 쓸 수는 없으니까……. 물론 강민우마냥 말도 안 되는 마력총을 쓰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마력총에 들어가는 앰플이 화살보다 비싼 건 아주 일반적인 사실이란 말이지. └ 그래서 뭐, 지금 활 한 자루 구해야 한다는 건 충분히 알겠는데…… 그게 그렇게 급한 일임? └ ㅇㅇ 활이야 그냥 거래소에서 적당한 거 하나 구매하면 되는 거 아냐? 놉. 그냥 한 자루 대충 사서 쓸 거였으면, 애초에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았을 거다. 만약 <미다스의 정원>에서 ‘황금빛 철궤 (Golden Iron Chest)’를 얻은 게 아니었다면 그냥 그렇게 사버렸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런 걸 얻은 이상 활용하지 않는 건…… 쌀먹 헌터로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어떻게 활용할 거냐고? 당연히… 제작에 쓸 생각이다. 이 황금빛 철궤가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귀하고 훌륭한 고티어 장비 제작의 주재료거든. └ 그럼 뭐 어디 대장간에라도 맡길 생각임? └ 근데 다른 재료는 어떡하려고? 철궤 하나로 활이 뚝딱 나오진 않을 텐데. 그러니까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편하게 쉬고 있는 오후 시간. 굳이 강소희까지 끌고 숙소 바깥으로 나온 건… 철궤를 제외한 다른 재료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바로 움직일 필요까지 있었을까요?” “이따 저녁에 해물라면 끓여준다니까요.” “……접수.” “그럼 일단 이동하죠. 거리가 좀 되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어디로 가는데요? 로비에 캐리지 대기시켜 놨어요?” 목적지는 ‘제7구역’ 인근. 이쪽은 일반 마나 캐리지로는 갈 수 없는 비포장 구역이라, 조금 특이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캐리지는 안 탈 겁니다. 목적지 방향으로 노선이 없어서요.” 강소희는 미심쩍은 눈초리였지만, 일단 군말 없이 따라 나왔다. 꼭 해물라면이라는 인질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본인도 혼자 숙소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심심했던 것 같다. 어쨌든. 저벅- 우리는 호텔의 화려한 정문을 지나, 직원들이나 이용할 법한 후문 쪽 언덕길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후. [루미스 외곽 순환 - 스팀 로머(Steam Roamer) 정류장] 낡은 철제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정류장이 보였다. “……스팀 로머?” “예.” “이게 뭐예요?” “으음. ‘특수 기동 차량’이랄까.” 사실 강소희가 이 ‘스팀 로머’라는 교통수단에 대해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하다. 이건 보통 공장지대를 오가거나 화물을 운송할 때 쓰이는, 일반 헌터들이 탈 일은 잘 없는 교통수단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처음 타 보면 꽤 불편하긴 할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은 시점에 탈 수 있었다는 정도. 푸슉― 쿠아아앙! 요란한 증기 배출음과 함께 도착한 오늘의 교통수단의 위용에, 강소희는 꽤 당황한 눈치였다. “이거 타요? 진짜로?” “왜요? 낭만 있잖습니까. 오픈카인데.” “낭만이 아니라 파상풍 걸릴 것 같은데요…?” 온통 녹슨 구리 파이프와 톱니바퀴로 뒤덮인…… 증기로 굴러가는 거대한 삼륜차. 뒷좌석에 낡은 가죽 시트가 덜렁거리는…… 루미스 영지의 명물 ‘스팀 로머’. “…….” 그 충격적인 비주얼에 그녀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에이, 시트 깨끗합니다. 그리고 기사님이 베스트 드라이버세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이빨이 빠진 고글을 치켜올리며 킬킬거렸다. “헤헤! 어서 옵쇼! 어디든 30분 컷으로 모시겠습니다!” “들으셨죠? 타시죠, 소희 님.” 나는 거의 떠밀다시피 그녀를 태우고, 나 역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처음에만 좀 당황하더니, 의외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앉는 강소희였다. 치이이익―! 스팀 로머는 매캐한 증기를 내뿜으며 그랜드 아르카나의 영역을 빠져나왔다. 덜컹거리는 차체와 함께… 우리는 루미스 영지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쪽 방면은 정말 처음 가 보는 것 같은데.” “그럴 겁니다.” “무슨 던전 같은 곳이라도 가는 건가요?” “비슷할걸요?”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팀 로머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화려했던 네온사인은 사라지고, 건물들의 높이는 점점 낮아졌다. 매끈했던 도로가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바뀌자, 승차감은 롤러코스터 수준으로 변했다. 귀하게 자라신 분이 별다른 불만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었다. -덜컹!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시죠.” 주변 풍경이 급속도로 칙칙해지고 있었다. 길거리엔 화려한 장비의 헌터 대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기계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찍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굴뚝들에서는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공기 중에는 매캐한 쇠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으음?” 꽤나 살벌해진(?) 분위기 탓인지, 슬슬 긴장하는 듯한 강소희의 표정. “여긴… 공사장 같은 느낌인데요?”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하늘은 온통 누런 스모그로 뒤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정체불명의 오폐수가 흐르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범죄 느와르 영화 촬영지로 쓰기에 완벽한 비주얼이 아닐까?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손님! 여기서부턴 차가 못 들어가요!”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내린 우리는, 조금 더 걸어들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WARNING: BIOHAZARD] [제7구역 : 루미스 마력 폐기물 처리장] 적잖이 당황한 강소희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여기, 맞는 거죠?” 11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황량한 벌판. 그리고 멀찍이 보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구역. 입구에는 [접근 금지]라는 붉은색 표지판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고, 그 너머로는 산처럼 쌓인 폐기물들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 안에서만큼은 하지 말라는 걸 또 해줘야 그만큼 특별한 리턴이 있는 거 아니겠어? 게이트 관리국장 영태 아저씨가 들었다면 뒷목을 잡으셨을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소희와 나는 마력 폐기물 처리장 안쪽으로 진입했다. “후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악취가 훅 끼쳐왔다. 단순한 쓰레기 냄새가 아니었다. 각종 마법 시약과 몬스터의 부산물이 뒤섞여 부패하면서 만들어내는, 화학적이면서도 비릿한 냄새. 보통 사람이라면 헛구역질부터 나오는 게 정상인 수준이다. ‘이거… 소희 님이 버티려나 모르겠네.’ 나는 슬쩍 옆을 쳐다보았다. 재벌가 막내딸이라는 배경을 떼어 놓고 봐도, 확실히 버티기 쉽지 않은 수준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솔직히 여기서는 비명이라도 지르며 나가자고 할 줄 알았다. └ 그걸 아는 ㅅㄲ가 우리 소희님을 이런 곳에 데려와? └ 방장쉑… 솔직히 말해라, 너 모솔이지? 아니, 제가 뭐 소개팅이라도 나왔습니까? 우린 지금 ‘일’하러 온 거란 말입니다. 나나 소희 님이나 헌터라고요. “…….” 어쨌든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 탓에, 손수건이라도 건네줄 요량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며 슬쩍 눈치를 보는데……. “음.” 의외로 강소희는 덤덤하게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코를 막지도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고인 정체불명의 녹색 오폐수를 굽이 있는 부츠로 찰박거리며 밟고 지나갔다. “……안 더럽습니까?” “뭐가요?” “냄새도 심하고, 바닥도 엉망인데.” 내 물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은데요? 냄새야 뭐… 익숙하죠 이런 느낌은.” “……아.” 그러고 보니 이 친구, 클래스가 ‘베놈 블러드’였지. 그래도 이상하긴 하다. 맹독 속성의 마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런 화학적 악취가 괜찮다는 법은 없는데……. 게다가 베놈 블러드로 전직한 것도… 아무리 빨라 봐야 이제 반년쯤 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뭐, 더러우면 씻으면 되죠. 일할 때 더러운 거 따지는 헌터가 어딨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작업장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보니, 정말 재킷에 흙탕물이 튀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의외네.’ 랍스타 껍데기 앞에서 고장나길래 온실 속의 화초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잡초 같은 구석이 있다. 오히려 내가 너무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싶기도 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처리장 내부는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기괴했다. 머리 위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형광색 액체가 흐르는 굵은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은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진동으로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초행길이라면 십중팔구 길을 잃기 딱 좋은 미로 같은 구조.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쭉 들어가면 중앙 제어실이 나오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이 파이프 숲을 지나 가장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는 곳. 그곳에 내 계획의 첫 단추를 꿰어줄 핵심 인물이 있을 터였다. 이 골치 아픈 제7구역의 터줏대감이자, 30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괴팍한 관리인. 우선 그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길은… 아는 거죠?” “당연합니다.” “……신기하다니까.” 강소희는 더 묻지 않고,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고 보면 신기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그녀가 필요해서 부탁한 거긴 한데… 진짜 여기까지 따라와 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따가 해물라면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끓여줘야겠다. └ 라면 사둔 거 있음? 게이트 안에서 사려면 비쌀 텐데. 에헤이. 미쳤다고 루미스에서 LP 주고 라면 삽니까. 다 방법이 있다는 말씀. 어쩌면 게이트 안에서 라면 제일 잘 끓이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을걸? 라면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베타 서버의 라이카 세계관 안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컵라면을 재현해냈던 의지의 한국인이 바로 나라는 말씀. “…….”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깊숙한 곳으로부터 기계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깅-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하는 소음. 기이이잉-! 우리는 곧 거대한 기계 설비들이 가득한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고……. 커다란 소음 사이에서, 누군가의 걸걸한 고함이 섞여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 썩을! 또 먹통이네, 이거!” 중앙 제어실 근처.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라인 앞에서, 한 노인이 거대한 몽키스패너를 들고 기계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에,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드워프 혼혈 노인. 제7구역의 관리인이자 내가 찾고 있던 NPC, ‘반(Van)’이었다. 깡-! 깡! 그는 스패너로 밸브를 내리치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글을 치켜올리며 홱 돌아보았다. “누구야! 여기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이야! 당장 안 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하긴, 평소 헌터들이 이곳을 찾을 때는 ‘몬스터 토벌’ 의뢰를 받고 올 때뿐인데, 대부분 냄새가 난다며 기피하거나 대충 처리하고 가버리기 일쑤였으니까. “할아버지, 진정하시죠. 저희는….” “헌터 놈들이냐? 볼일 없으니까 꺼져! 냄새난다고 징징거리는 놈들 상대할 시간 없다!” 그는 우리 옷차림을 쓱 훑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대화조차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뒤편에 있는 기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확히는 기계 상단에 붙은 자그마한 계기판을. ‘역시.’ 바늘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미 [RED ZONE]을 넘어선 지 오래. “어르신.” “빨리 꺼지라니까 그러네!” “그거, 밸브 때린다고 해결될 문제 아닌데요.” “뭐? 네놈이 기계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반이 스패너를 치켜들며 위협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손가락으로 계기판을 가리켰다. “저기 압력 게이지 보십쇼. 레드존 넘어서 터지기 직전입니다. 지하 배관이 막혀서 역류하는 건데, 위에서 밸브 잠가 봤자 소용없죠.” “……엉?” “지금 당장 오른쪽 하단에 있는 바이패스(Bypass) 밸브 안 여시면, 5분 안에 여기 파이프 다 터져서 오물 뒤집어씁니다.” 내 말에 반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계기판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허억! 언제 저기까지 올라갔어?!” 끼기긱―! 그는 황급히 몸을 숙여 내가 말한 하단 밸브를 낑낑대며 돌렸다. 푸슈슈슈―! 거친 증기 소리와 함께, 요동치던 게이지 바늘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가, 이내 고글을 벗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사라지고, 대신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자네… 뭐 하는 놈인가? 헌터 나부랭이인 줄 알았는데, 기계를 좀 볼 줄 아는구만.” “그냥, 이것저것 좀 만져봤습니다.” 사실 그냥 만져 본 수준은 아니다. 심지어 이 7구역 폐기물 처리장 안에서만 전직이 가능한 마도공학 계열의 히든 클래스도 두 회차 정도 해봤으니까. 하지만 뭐, 여기서 그런 얘기까지는 할 필요도 없고……. “흐음.” 반은 작업 장갑을 벗으며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소각로. 지하 쪽에 몬스터들이 자생하기 시작한 이후로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 배관이 꽉 막혔어. 수리공들을 보냈는데 다들 도망가거나… 돌아오지 못했지.”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반적인 헌터들이라면 이쯤에서 ‘몬스터 퇴치 의뢰’를 받았겠지만, 나는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사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배관’을 직접적으로 뚫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퀘스트다. “저희가 해결해 드리죠.” “응?” “막힌 속, 시원하게 뚫어드린다고요. 겸사겸사 몬스터도 좀 잡아드리고.” 내 제안에 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네들, 여기 냄새도 지독하고 더러운 오물이 천지인데… 감당할 수 있겠나? 게다가 의뢰받았던 해결사 놈들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고.” 그의 시선이 나와 강소희를 번갈아 응시했다. 뭐 우리 레벨까지야 보는 것만으로 알 수는 없겠지만……. 차림새를 보고 대략적으로 어떤 정도 수준의 헌터일지 가늠해보려는 것일 터다. “위험할 것 같으면 나올 테니까, 걱정 말고 맡겨봐 주시죠.” “흐음.”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내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반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망설이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터였다. 반의 입장에서 내 제안은,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좋아! 배짱 한번 마음에 드는군.” 이어서 반(Van)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띠링―! 오랜만에 듣는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내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 막혀버린 도시의 동맥 분류 : 히든 퀘스트 난이도 : A 목표 : 지하 소각로의 막힌 배관을 뚫고, 원인을 제거. 당신은 ‘제7구역 : 루미스 마력 폐기물 처리장’의 관리인 반(Van)으로부터 ‘지하 배수로에 생긴 문제’에 대해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생긴 이 고질적인 문제는 폐기물 처리장의 효율을 크게 떨어뜨렸으며, 관리자들에게는 크나큰 고충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 제거하십시오. 보상 : 녹슨 황동 열쇠 꾸러미 〓〓〓〓〓〓〓〓〓〓〓〓〓〓 자, 그럼 한 번……. 시작해 볼까? 11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1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럼, 조심히 다녀오시게.” “알겠습니다.” “무리는 하지 마시고.” “물론이죠.” 끼이익― 쾅. 관리인 반이 열어준 녹슨 철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동시에 바깥세상의 빛이 차단되고, 어둠침침한 비상 유도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지하 세계가 펼쳐졌다. “으… 축축해.” 강소희가 질색하며 발을 털었다. 천장에서는 정체불명의 오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벽면에는 형광 녹색 이끼가 징그럽게 눌어붙어 있었다. 전형적인 하수도 맵의 클리셰.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후두둑! 툭! 천장과 벽면의 이끼 틈새에서 끈적한 점액질 덩어리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 그런데 방장, 여기서 뭐 파밍할 만한 게 있음? └ 일단 던전 찾으러 내려가는 듯. └ 여기 던전이 있음? └ ㅇㅇ;; ‘폐기된 마력 소각로’라고 있긴 한데……. └ 거기도 뭐, 별 거 없을 텐데. 별거 없으면 제가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여기 왔겠습니까 형님들. └ 오 ㄷㄷ └ 나왔다 ‘그’ 패턴. 여기 히든 보스 뜨는 거, 아시는 형님 없나 봅니다? └ 엥? 소각로 던전에 보스가 있다고? 허허, 오늘도 본의 아니게 꿀 정보 하나 공유하게 생겼네. └ 이 사람 허언증 있는 거 아니죠? └ 맨날 허언증 환자처럼 구는데, 문제는 그게 보통 허언이 아니라는 거임;; └ 이제 슬슬 형님들 내기하시죠? 드립 칠 때가 됐는데……. └ ㅇㅇ 거기까지가 템플릿임; 젠장. 눈치 빠른 성좌놈들이…… 꼭 초를 친다니까. 이제 다들 적응해버려서, 빌드업이 쉽지 않단 말이지. ‘쳇.’ 어쨌든 그렇게 성좌들과 잠시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크르르….] 바닥에 떨어진 덩어리들이 뭉쳐지더니, 곧 흐물거리는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진흙과 오폐수가 뒤섞인 듯한 흉측한 몰골. 제7구역의 웰컴 몬스터, [폐기물 슬라임 (Lv. 55)] 무리였다. “……징그러워.” 강소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발 물러섰다. 냄새는 잘 참더니, 시각적 테러(?)에는 꽤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 └ 예민하다니; 저걸 보고 헛구역질 안 나오는 것만 해도 비위 0티어 같은데. 듣고 보니 맞는 말씀 같기도 하고요, 형님. 크륵- 쿵! 그 순간, 슬라임들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놈들의 반투명한 몸속에서 보글거리는 기포가 터지며, 독한 산성 용액이 역류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산성 침 (Acid Spit)] 딱 봐도 놈들의 주특기인 원거리 공격 패턴인데……. 아마 강소희는 처음 상대해볼 테니, 내가 우선 오더를 줘야겠다. “소희 님! 마력 장막(Mana Barrier) 쓸 줄 알죠?” “그야 당연히…….” “빨리요! 날아옵니다!” 지이잉-!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소희의 몸 주변으로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장막이 빠르게 생성되었다. ‘오, 꽤 두터운데?’ 그리고 다음 순간. 투투투툭―! 동시에 슬라임들이 일제히 산성 침을 뱉어냈다. 치이익! 사방에서 날아온 녹색 타액이 소희의 장막에 닿았다. 하지만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산성액은 장막에 닿자마자 하얀 김을 내뿜으며 허무하게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독(Venom) 속성의 마력이 산성을 중화시켜버린 것이다. “오, 역시.” “……?” 성능 확인 완료. └ 씹ㅋㅋㅋ 방장놈이 강소희 왜 굳이 데려왔나 했더닠ㅋㅋㅋ └ 와, 이거까지 계산한 거였다고?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형님들……. └ 아니긴 개뿔ㅋㅋㅋ 그런데 성좌들의 비난에 변명하던 그 순간. 투투투툭―! 갑자기 전방에서 추가적인 산성액 공격이 날아들었고……. 타앗- 나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강소희의 등 뒤로 쏙 하고 숨어버렸다. 치이익-! 역시나 미친 성능을 자랑하는 방패. 아니, 우리 룸메이트.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력 장막 안에서 멀뚱히 서 있던 강소희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경멸… 까진 아니고,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이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엄폐요.” “진짜 알뜰하게도 써먹으시네.” “…….” 원래 나 혼자 이 구간을 돌파하려면, 무조건 방패를 필수로 들어야만 한다. 그럼 들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게, 되긴 하는데……. 치이이익- 특수 처리가 되지 않은 평범한 방패를 사용했다간, 아마 오늘 하루 쓰고 폐기 처분해야 할 거란 말이지. └ 우우……. └ 하남자쉑ㄷㄷ └ 방장 실망이야……. 아니, 대체 왜요! 그럼 이렇게 효율적인 공략법을 두고… 멀쩡한 방패를 버리기라도 하란 말입니까? └ 누가 쌀숭이 아니랄까봐 ㄷㄷㄷ └ 컨셉 일관성 ㅈ되긴 해;; └ 어허. 컨셉이라니; 우리 방장놈한테 그런 실례되는 발언을;; 그리고 솔직히 무임승차 하려는 것도 아니다. 강소희가 막아내는 동안, 나는 저 오물들을 하나씩 처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실드만 최대한 유지해 주세요, 소희 님.” “이거 유지한 채로 듀얼 캐스팅까진 아직 못하는데.” “괜찮습니다. 공격은 제가 맡을 거니까요.” 나는 안전한 인간 방패(?) 뒤에서 월광검을 뻗어, 틈을 다가오는 슬라임들을 하나씩 찔러 터뜨렸다. 푹! -파앗! 이게 보기에는 간단하고 쉬워 보여도, 정확히 핵을 찌르지 못하면 저 슬라임들이 분열한다는 말씀. 게다가 검 끝에 정확하게 마력을 응축시켜야 하니까……. └ 그래도 솔직히 이건 쉬워 보이는데;; 조용! └ 노양심 방장쉑!! 날먹 멈춰!! 아니! 날먹이라니! 이게 어딜 봐서……. 스릉-! 애초에 50레벨 대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어떻게 날먹이 될 수가 있냐는 말이다. [‘폐기물 슬라임’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폐기물 슬라임’의 내핵을 성공적으로 파괴하였습니다.] [‘폐기물 슬라임’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폐기물 슬라임’ 몬스터…….] ……중략…… 안전한 딜링, 확실한 처리. 이 정도면 1인분 한 거 아냐? └ 응 아니야~ “…….” 어쨌든 순식간에 슬라임 무리를 정리한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응축된 산성핵]을 주워 챙기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산성핵은 바로… 마도공학 공정 과정 어디에나 필요한, 거의 필수재 느낌의 잡템. 마력 회로의 습식 에칭(Wet Etching) 공정에 들어가는 이 산성핵은, 개당 무려 3LP나 하는 물건이었으니……. ‘부수입 달달하고.’ 이 정도면 그야말로 완벽한 스타트라고 할 수 있었다. * * * 슬라임 구간을 지나 지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거대한 강철문이 나타났다. 제대로 글씨를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식된……. 경고 문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두꺼운 방화문. 그 너머가 바로 우리의 목적지였고,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끼기긱― 쾅! 힘을 주어 문을 열자마자, 누런색 가스가 훅 끼쳐왔다. [시스템 경고 : 부식성 마력 스모그지대입니다.] [시야가 제한되며, 지속적인 호흡 곤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우리 눈앞에 떠올랐다. 〓〓〓〓〓〓〓〓〓〓〓〓〓〓 폐기된 마력 소각로 (Abandoned ) 분류 : 필드 던전 / 지하 시설 난이도 : A 권장 레벨 : Lv. 60 제한 시간 : 없음 루미스 영지의 모든 마력 폐기물을 태워 없애던 거대 소각로의 심층부입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슬러지와 불안정한 마력 찌꺼기들이 뒤엉켜 끔찍한 괴물들을 잉태했습니다. 현재 과부하로 인해 내부 온도가 치솟고 있으며, 치명적인 독성 가스가 가득 차 있어 일반 생명체의 접근을 거부합니다. [입장 페널티 : 부식성 마력 스모그] 던전 내부에 가득 찬 ‘황산화 마력 가스’에 노출될 시, 다음과 같은 상태 이상이 적용됩니다. 시야 제한: 가시거리가 5m 이내로 감소합니다. 호흡 곤란: 스태미나 회복 속도가 80% 감소합니다. 지속 피해: 10초당 현재 생명력의 1%에 해당하는 산성 피해를 입습니다. (※ 일반 방독면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주요 출몰 몬스터] 폐기물 슬라임 (Lv. 55) 스크랩 골렘 (Lv. 58) ?? (Boss) 〓〓〓〓〓〓〓〓〓〓〓〓〓〓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 / N]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던전 입장을 선택하였고. 그 즉시 폐부를 찌르는 매캐한 독가스에, 속에서 올라오는 매스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쿨럭!” 일반적인 헌터였다면, 당장 방독면을 쓰거나 해독 포션을 들이켰을 상황. 나는 소매로 코를 막으며 옆을 살폈다. 아마 ‘베놈 블러드’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괜찮…은거죠?” 역시나 강소희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피어오르는 독성 스모그를 손으로 휘휘 젓더니, 아무렇지 않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흡….” “…….”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냄새가 좀 독하긴 한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네요.” 그런데 다음 순간. 이어진 강소희의 발언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삼촌 연구실 생각하면 이 정도야 뭐….” 잠깐. ‘삼촌 연구실……?’ 강소희의 삼촌이 누군지야 당연히 모르지만, 분명 에스쿨랩 관계자일 거다. 그런데 거기 연구실이… 여기보다 독하다고? 대체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생체 실험이라도 하나? └ 조심해라 방장ㅋㅋㅋ └ 앜ㅋㅋㅋㅋ자다가 눈 떠보니, 에스쿨랩 연구실일수도 있다곸ㅋㅋ 설마 날 룸메이트로 지목했던 것도……?! └ 개웃기넼ㅋㅋㅋㅋ └ 망상 뭔뎈ㅋㅋ 잠시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 나는, 화제를 돌리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도 시야가 너무 안 나오긴 하니까…….” “방법 있어요?” “소희 씨, 혹시 [베놈 펄 (Venom Pearl)] 스킬 발동 가능합니까?” 내 질문에 강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왜요?” “그거 효율 안 좋아서 저도 잘 안 쓰는 건데.” 아마 ‘효율이 안 좋다’는 말은, 강소희가 이 스킬의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거다. [베놈 펄]은 주변의 독기를 흡수해 폭발력 있는 마력구슬로 응축시키는 스킬이었는데……. 시전자의 마력으로 생성한 독은 응축 효율이 극악이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지금 같은 환경이 아니라면, 쓸 일이 잘 없는 것도 맞긴 하고. 이런 지식들도 당연히, 한때 동료였던 미치광이 NPC 덕에 알게 된 내용이었다. ‘뭐, 근데 많이 안 써봤다 해도, 숙련도 이슈가 있는 스킬은 아닐 테니까.’ 어쨌든 쓰는 데는 문제 없다는 소리였으니, 나는 다시 한번 부탁해봤다. “지금 한 번 써보시겠어요?” “설마 그거로 이 독구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속는 셈 치고 한번 써보시죠.” “흐음….” 강소희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내 말을 믿어보기로 했는지 손을 뻗었다. 이어서 그녀의 손바닥 위로 천천히 전개되는 보랏 빛깔의 마법진. 우웅―!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슈우우우욱―! 공기 중에 꽉 차 있던 누런 스모그가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블랙홀처럼 독기를 집어삼키는 마법진. 그 중심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보라색 구슬, [베놈 펄]이 생성되어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어?” 강소희도 놀란 눈치였다. 평소라면 콩알만 하게 맺히고 말았을 구슬이, 순식간에 야구공만 하게 커졌으니까. 동시에 뿌옇던 시야가 거짓말처럼 맑아지고, 매캐하던 공기가 상쾌(?)해졌다. “이야, 성능 확실하네요. 걸어 다니는 공기청정기가 따로 없습니다.” “……이게 이렇게 잘 되는 스킬이었나?” 그녀는 신기한 듯 손바닥 위에서 윙윙거리는 보라색 구슬을 굴려보았다.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주며 앞장섰다. “자, 길 뚫렸으니 갑시다. 마무리하고 라면 끓이러 가야죠.” 정화된 통로를 지나며 우리는 안쪽으로 깊숙이 진입하였다. 12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미스 영지의 랜드마크이자, 헌터들의 꿈이라 불리는 초호화 호텔 ‘그랜드 아르카나(Grand Arcana)’.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이 마천루에는 투숙객을 위한 온갖 편의시설이 집약되어 있었다. 최상층인 50층에는 인공 성운(Nebula)을 감상하며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스카이 라운지’가. 중층부에는 최고급 마나석을 녹여 만든 온천수로 피로를 씻어내는 ‘로열 마나 스파’가. 그리고 저층부 포디움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겜블러들을 위한 화려한 ‘카지노’까지……. 그야말로 돈과 쾌락이 흐르는 자본주의의 성전(聖殿)이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이 그랜드 아르카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 지상의 낙원들과 달리……. 가장 깊고 어두운 곳. 지하 3층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우웅- 두꺼운 방음벽 너머로 미세한 진동만이 느껴지는 곳. 이곳은 오로지 강함을 갈망하는 헌터들을 위해 마련된 성역, ‘헌터 전용 트레이닝 센터’였다. “흡…! 후우…!” 적막을 깨는 거친 숨소리. 최첨단 중력 제어 장치가 가동 중인 웨이트 존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팔뚝의 혈관.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남자는… 다름 아닌 이성환이었다. 그가 들어 올리고 있는 바벨의 양옆에는, 일반인이라면 깔려 죽고도 남을 육중한 원판들이 겹겹이 꽂혀 있었다. “흐읍…!! 백!!” 콰앙-! 마침내 마지막 횟수를 채운 그가 바벨을 거치대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금속음이 넓은 체육관을 울렸다. “후우… 후우….” 이성환은 상체를 일으키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 내일부터 시작될 꿀 같은 휴식 시간인 ‘개인 정비’ 기간.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시내 구경을 가거나 스파에서 늘어지게 잠을 청하고 있을 시각이었지만……. 성환은 조금도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극이 부족했다. 입학식 미션에 이은, 1차 팀미션의 충격적인 결과. 그 압도적인 격차를 메우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이야, 역시 성환 님은 못 당하겠네요. 쉬는 날에도 그 무게를 치십니까?” 그때, 입구 쪽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자, 푸근한 인상의 곰 같은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탱커 포지션의 S등급 참가자, 전인욱이었다. “아, 인욱 형님. 오셨습니까.” “쉬는 날엔 역시 쇠질 만 한 게 없죠. 다들 시내 구경 간다는데, 나는 영 체질에 안 맞아서 원.” 전인욱이 껄껄 웃으며 익숙하게 옆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 역시 헐렁한 민소매 티셔츠 차림에, 양손에는 미끄럼 방지용 초크 가루를 잔뜩 묻힌 상태였다. “그렇죠. 저도 몸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요.” “하하, 역시 성환 님이랑은 좀 통하는 게 있다니까.” 사실 이성환은, 합숙이 시작된 뒤 전인욱과 꽤 친해진 상태였다. 새벽마다 매번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마주치며 안면을 텄다 보니… 룸메이트인 양소현만큼이나 친해지게 된 것이다. 비록 나이는 이성환이 세 살 더 어렸지만……. 묘한 동질감에서부터 오는 내적 친밀감은 두 사람을 금세 가깝게 만들었다. “흣- 차.” “이제 시작하십니까?” “한번 달려보자고요.” 그리고 이 두 사람 덕분에……. 썰렁했던 트레이닝 센터는, 두 근육질 사내의 열기로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자, 보조 들어갑니다! 하나 더!” “으으으읍…!!” 전인욱의 우렁찬 기합과 함께, 이성환은 핏줄이 터질 듯한 안색으로 바벨을 밀어 올린다. 일반적인 강철 바벨이 휘어질 정도의 고중량. 하지만 전인욱은 바벨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로만 중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렇죠! 삼두 짜내고! 흉근 고립 완벽합니다! 하나만 더!” “흐아아압…!” 쾅-! 마침내 바벨이 거치대에 안착하자, 전인욱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와, 방금 마지막 렙(Rep)은 진짜 예술이었습니다. 근섬유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줄 알았네요.” “하아, 하아… 형님 보조가 기가 막혀서 더 들 수 있었습니다. 등 뒤가 든든하던데요.” “에이, 겸손하시긴. 성환 씨야말로 오늘 어깨 펌핑감이 장난 아닌데? 아주 맛있게 드셨어.” 서로의 팽창된 근육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교환하는 두 남자. 이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사나운 몬스터들의 공격을 최전선에서 받아내야 하는 ‘탱커’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땀 냄새 나는 뜨거운 교감이랄까. 그렇게 잠시 후. 세트 간 휴식 시간. 이성환이 프로틴 쉐이크를 흔들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인욱 형님.” “예?” “이건율 형님 말입니다. 혹시 못 보셨습니까?” 이성환의 뜬금없는 질문에 전인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건율이 형님은 갑자기 왜요?” 그리고 말을 잇는 이성환의 눈빛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아. 사실 오늘 운동 같이 하자고 말씀드려 볼까 했는데, 방에 안 계시는 것 같아서요.” 사실 이성환은 어제까지만 해도, 이건율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만 가지고 있었다. 입학식 미션 때부터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따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보니… 실력과 별개로 어떤 인물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 인벤토리 공개 컨텐츠에서……. 성환은 건율이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그런 실력이……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나올 수 없었던 거지.’ 그의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그 수많은 ‘작업 도구’들. 한눈에 봐도 여기저기 진한 사용감이 묻어 있던 그 ‘기구’들은, 이건율이 평소에 어떤 수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게 해 줬던 것이다. ‘촬영에서야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런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괜히 들고 다닐 리가 없어.’ 얼마나 사용했으면 철제 손잡이가 빛이 바랬을 정도인 철삽에……. 직접 채굴한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루멘 원석들과, 또 직접 발골한 것으로 보이던 다양한 몬스터의 부산물들. 그러니까 이건율이라는 남자는 겉보기와 달리… 이 험난한 야생과도 같은 게이트를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진정한 헌터였던 것이다. ‘그래서 포지션 결정전에서도… 다양한 모든 포지션을 경험해보려 했던 거겠지.’ 그리고 이건율이 어떤 사내인지 깨닫고 나자, 성환은 진심으로 자신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왔던 자신의 수련이……. 이건율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뒤로는 한없이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오, 성환 님도 어쩌면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 것 같네요.” “예?” “사실 건율이 형님이야말로, 함께 운동하면 배울 점이 많을 형님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정말…입니까?” “제가 지난 번 포지션 결정전 때, 건율 형님과 같은 그룹 아니었겠습니까?” “아, 그랬었죠.” “그때 진짜로 감명받았었습니다.” “아…….” “활을 든 플레이어가 그렇게 남자답게 전투할 수 있을 줄은……. 이전까진 상상도 못 했었거든요.” 갑자기 이건율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잠시 운동조차 잊은 채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은……. “아… 진짜 건율이 형님이랑 같이 땀 좀 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이 ‘헬스 클럽’에, 건율이 형님을 모셔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형님은, 방에 안 계시고 어디 가신 걸까요?” 이성환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전인욱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소희 님은 계셨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아무도 안 계셨던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설마… 두 분이서 놀러라도 가셨을 리는 없고.” 전인욱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이성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에이, 형님. 그럴 리가요.” “그렇죠? 저도 말하고 보니 좀 아닌 것 같네요.” 전인욱 역시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본 이건율은 ‘낭만’이나 ‘데이트’ 같은 말랑한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특히 인욱의 경우, 꽤 오랜 시간 마나 캐리지를 타고 이동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의 눈에 비친 이건율과 강소희는, 말 그대로 ‘룸메이트’. 그 이상의 어떤 느낌도 들지 않는 관계였었다. “그럼 답은 하나군요.” 이성환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저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더 혹독하게 구르고 계신 걸 겁니다.” “아…!” 전인욱이 무릎을 탁 쳤다. “하긴, 1등이 그냥 되는 건 아니니까요. 호텔 헬스장은 너무 편안해서 성에 안 차셨나 봅니다.” “맞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분의 손바닥… 굳은살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바벨 같은 매끈한 손잡이로는 만들 수 없는 거친 흔적이었죠.” “크으… 역시 진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흘리는 법이군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율했다. 남들이 쉴 때 쉬지 않는 독기. 최고의 환경을 마다하고 야생으로 나가는 야성미. 두 남자의 상상 속에서 이건율은 이미… 거친 황야에서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올리며 수련하는 고독한 무도가가 되어 있었다. “안 되겠습니다.” 이성환이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극을 받아도… 너무 세게 받아 버렸다. “인욱 형님. 세트 수 늘리시죠. 이대로 있다간 격차가 더 벌어질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오늘 하체 털릴 때까지 갑니다!” 덕분에 다시금 트레이닝 센터에는, 우렁찬 기합 소리와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2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본격적인 던전이 시작됐다. 지하수로 특성상 길이 복잡하긴 했는데…… 그래도 길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복잡하다고 해도 여긴, 지형이 변칙적으로 변할 수 없는 필드 던전이었으니까. 수없이 지나다녀본 길이라… 길을 잃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다는 얘기다. ‘뭐, 결국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기도 하고.’ 그리고 가장 고무적인 건, 강소희를 데려온 판단이 정말 훌륭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강소희가 안 가겠다 했으면 애초에 이 7구역 폐기물 처리장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골랐겠지만……. 결과적으로 최상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36레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레벨까지 오른 걸 보면 말이다. ‘미다스 정원에서 경험치를 거의 다 채워놓긴 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올랐어.’ 생각 같아서는 강소희를 끌고 나온 김에… 조금 더 사냥을 이어가고 싶었을 정도인데. 양심상 그럴 순 없고. 버스 기사님 화나실라. └ 아니, 근데 저 ‘베놈 블러드’라는 클래스도… 이렇게만 보면 진짜 최상급 히든 클래스같은데? └ ㅇㅇ;; 파괴력만 보면 동레벨대 마법사들 다 압살할 듯? └ 그래서 마나 역류 패널티가 있는 걸지도……. └ 방장, 혹시 전직 방법 앎? 아뇨. 이건 저도 진짜로 모르는데요. “…….” 어쨌든 이렇게 신나게 사냥을 하며 던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다 보니,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보스룸에 온 거냐고? 아니, 아직 그건 아닌데……. ‘애초에 여긴… 보스 때문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츠츠츠츳- 공동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불쾌한 소음을 들으니, 아무래도 정확히 찾아온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강소희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기선 꽤 조심해야 돼요, 소희 님.” “확실히, 뭔가 있을 느낌이긴 하네요.”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엘리트 몬스터, ‘애쉬 퀸 (Ash Queen)’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려 65레벨에 달하는 중간보스급 엘리트 몬스터 애쉬 퀸. 이 녀석이 바로… 내가 굳이 강소희까지 끌고 여기까지 나온 이유다. “혹시… 벌레 무서워하시는 거 아니죠?” “별로요?” “굳. 그럼 문제 없을 것 같긴 합니다.” 파라라락-!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천장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양쪽 날개의 폭만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변이 괴수. 온갖 화학물질과 마력 찌꺼기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존재 자체가 위험물질인 거대 나방. 치이이익-! 녀석이 잿빛 날개를 한 번 크게 펄럭이자, 시야가 가려질 만큼 자욱한 가루들이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콜록! 으, 이게 다 뭐예요?” “산성 물질로 만들어진 잿가룹니다. 마시면 폐에 화상 입으니까 숨 참으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녀석이 뿌려대고 있는 저 반짝이는 가루들. 그건 단순한 가루가 아니라, 소각로의 고열을 잔뜩 머금은 금속성 입자였기 때문이다. ‘저게 닿으면 피부가 타들어 가는 건 둘째치고…….’ 가장 큰 문제는 물리적 타격을 무효화시킨다는 점이다. 저 빽빽한 고밀도 입자들은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해서, 화살이나 칼날의 위력을 반감시키거나 튕겨내 버리니까. 쉬이익―! 아니나 다를까. 강소희로부터 건네받은 ‘베놈 펄’을 견제용으로 슬쩍 던져봤는데……. 퍼엉-! 녀석의 몸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튕겨 나가며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역시… 보통 까다로운 놈이 아니다. ‘그래도 뭐. 이 정도 난이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니까.’ 내 시선은… 놈의 위협적인 날개를 지나, 그 아래쪽 꼬리 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기관에 고정되었다. [이그니스 실크 방적선 (Ignis Silk Spinneret)] ‘역시 있네.’ 저것만 잘 파밍해 갈 수 있다면, 일단 오늘 여기까지 온 목적의 7할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결국에는 보스도 잡긴 해야 여길 나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 하필 애쉬 퀸이네; 오늘 운빨 왜 이렇게 나쁨; └ 방장, 저거 잡을 수 있는 거 맞음? └ 그러게. 쟤 독 내성 있는 건 알고 있지? 물론 강소희와 상성이 좋지 않은 몬스터인 만큼, 성좌들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이거 오늘 또 꿀 정보 하나 풀어드려야겠네……. └ ㅇㅇ? └ 또 뭔데 ㄷㄷ └ 나 기대한다 방장? 그거야 내가 일부러 애쉬 퀸이 뜨는 루트로 왔다는 걸 모르기 때문. 나야 어떻게 공략할지 처음부터 다 설계하고 왔으니, 지금부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깔끔한 공략법이 하나 있는데, 지금부터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대-이브!! └ 모두 착석!!! └ 오ㅋㅋㅋ 애쉬퀸이 따로 공략법이 있음? └ 이거 진짜면 쓸만하겠는데? └ 애쉬퀸은 ■■■에도 종종 젠되는 엘리트 몹이라……. 성좌 형님들의 기대감을 살짝 끌어 올려둔 뒤, 본격적으로 설계를 시작했다. 이제 내가 계획한 대로만 잘 보여주면, 경험상 수금은 알아서 잘 될 거다. “소희 님, 제가 시간 좀 끌어볼 테니까… 혹시 독 안개 한번 뿌려줄 수 있습니까?” “네?” “왜, 지난번에 보여주셨던 장판기 있잖습니까. 저 가루들 사이에 최대한 골고루 퍼지도록 뿌려주시면 됩니다.” 내 주문에 강소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독 안개라면…… 팬텀 헤이즈 (Phantom Haze) 말하는 거죠?”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강소희가 당황한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방금 내가 던진 베놈 펄이 아무런 피해조차 입히지 못하는 걸 봤으니……. 그것보다 마력은 더 많이 들면서 오히려 위력이 약한 장판형 스킬을 주문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을 테지. “저 괴물한테 독이 통할까요? 딱 봐도 내성 있어 보이는데.” “독을 걸라는 게 아닙니다. 이 공간의 ‘농도’를 맞추려는 거니까.” “농도…?”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이제 내 뜬금없는 오더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군말 없이 손을 뻗었다. “일단, 해 보죠 뭐.” 스하아악-!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투명한 독가스가, 나방이 뿌려댄 인분 구름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독 안개가 충분히 퍼질 때까지……. 타탓-! 나는 저 오물 괴수의 시선을 끌며, 강소희의 캐스팅이 끊기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걸 위해서 처음부터 어그로를 끌고, 베놈 펄을 내가 직접 투척했던 거고 말이다. 끼에에에엑―! 기괴한 소음과 함께 커다란 날개를 펄럭인 녀석은,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해 왔다. 저 무식한 녀석은 뇌까지 오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지능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이대로 날아들면 본인도 그대로 배수관에 머리를 처박을 텐데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다는 소리다. 탓-! 녀석이 완전히 코앞까지 도달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낸 나는, 마지막 순간에 낡은 배수관 위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발밑에서 수십 년 묵은 녹물이 튀어 올랐지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이 괴수와 나의 레벨 차이는 거의 두 배.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촤아악-! 빠르게 월광검을 뽑아 올린 나는, 발검과 동시에 녀석의 더듬이 한 쪽을 베어 올렸다. 이어서 벽면에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는 배관을 밟고 뛰어오른 뒤. 콰앙-! 방향감각을 잃고 벽에 부딪친 애쉬 퀸의 몸통을 다시 한번 밟고, 그대로 도약하여 반대편 굴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됐다.’ 생각했던 그대로의, 완벽한 플레이였다. └ 이게…… 공략? └ ㅋㅋㅋ앜ㅋㅋ 잘 피하고 잘 때리면 된다고 ㅋㅋㅋ └ 공략이라는 건 원래;; 따라할 수 있어야 공략인 거 아님?;;; 성좌들의 원성이 들려왔지만. 나도 양심이 있지, 이걸 공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슈우욱-! 그 ‘공략’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빌드업 과정일 뿐이었다. ‘한 5초. 그 정도만 더 버티면 되겠어.’ 나는 품속에서 아까 강소희가 만들어준 [베놈 펄]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본래대로라면 강력한 독 폭탄이어야 했지만, 존재 자체가 오물인 저 녀석에게는 조금 따가운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맹독 구슬. 휘릭- 손목 스냅을 이용해 구슬 다섯 개를 연속으로 던지자……. 퍼억―! “키에엑?!” 녀석은 잃어버린 방향감각을 쉽게 찾지 못한다.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는 없어도, 독 안개와 폭발음은 녀석의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한 효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 “거의 다 됐어요!” 강소희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착지했다. 애쉬 퀸은 아직도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헤매는 중이었고, 그 사이 내가 설계한 그림이 충분히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누런 금속 가루와 보랏빛 독가스가 뒤섞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진 공기. 그러니까 온통 독무(毒霧)로 가득해진 이 공간은, 얼핏 보기에는 애쉬 퀸을 위한 전장처럼 보였지만……. └ 근데 방장 뭐함? 독 안개는 자살골 아님? └ 저거 독성 흡수하면 더 강해질 텐데;; └ 게다가 시야 다 가렸는데…… 암만 봐도 조진 것 같은데. 성좌 형님들의 걱정과 달리, 이건 자살골이 아니라 오히려 세트피스에 좀 더 가까운 상황이었다. 화륵-! 공기 중의 입자 밀도가 임계치에 다다른 바로 그 순간. “소희 님, 귀 막으세요. 좀 시끄러울 겁니다.” “네?” 어느새 내 손끝에서부터 소환된 화염의 구체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으니까. 화르르륵-! └ 갑자기 화염마법은 또 뭔데?ㄷㄷㄷ └ 마법은 냉기만 쓸 줄 아는 거 아니었음?;;;; 그럴 리가요. 제가 뭐 따로 클래스 전용 스킬 가지고 마법 쓰는 사람도 아니고. [마나 술식이 완성되었습니다.] [화염의 원소 마법, 플레임 스포어(Flame Spores)가 발동합니다.] 내가 허공에 손을 뻗자, 허공에 떠오른 붉은 불꽃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 이게 대체 뭐임?;;;; └ 뭔가 익숙한 마법같은데……. 이어서 흩어진 불씨들은 공기 중의 마나와 독안개를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고. └ 시팔? 플레임 스포어? └ 진짜 플레임 스포어라고? 또다시 분열하며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를 늘려나갔다. └ ????? 그거 6써클 화염 마법 아님?? └ 뭔가 이상하긴 한데; 발동 매커니즘이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이어서 다음 순간. ‘붐.’ 순식간에 수백 조각으로 증식된 화염 불씨가……. 펑- 퍼퍼펑- 퍼버버버벙-!!! 고막이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음을 일으키며, 공동 전체를 불꽃으로 수놓았다. 12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세상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앙-!!!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 그리고 시야를 가득 메우던 누런 산성 분말과 보랏빛 독 안개가,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으로 치환되어 터져 나갔다. 펑- 펑- 펑- 펑- 퍼엉-! 강소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마력 장막]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미친…!’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열풍이 장막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단순히 화염 마법을 쓴 게 아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재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강소희는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밀폐된 지하 공간. 가득 찬 가연성 분진. 그 임계점을 넘기는 기폭제까지. 콰콰콰쾅-! 그리고 잠시 후……. 어떤 결론에 도달한 그녀는,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의 흐름 끝에 나온 결론이, 기가 막힌 것이었으니 말이다. ‘분진 폭발(Dust Explosion)?’ 물론 그녀 역시 에스쿨랩의 영재 교육을 받은 엘리트다. 에스쿨랩에는 수많은 랭커 급 마법사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 모두는 필요할 때마다 강소희의 스승이 되어 줬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현상을. 강소희도 이론적으로는 이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것도 이렇게 변수가 많은 몬스터와의 전투 중에 이걸 의도적으로 일으킨다고? 동시에 너무 혼란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서,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방금 그 마법…… 대체 어떻게 한 거지?’ 폭발의 여파가 잦아들고, 자욱한 연기 너머로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강소희는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거대하고 위협적이던 ‘애쉬 퀸’은 바닥에 처박혀 널브러져 있었다. 단단한 갑각은 내부 압력을 견디지 못해 팝콘처럼 터져 나갔고, 날개는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이런 식으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은 분명…… [플레임 스포어(Flame Spores)] 뿐인데.’ 강소희의 마법 지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6써클 이상의 고위 화염 마법이었다. 불꽃이 스스로 증식하며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2차 전직한 마법사들 중에서도 최상위 플레이어들이나 구사한다는 고난이도 마법. 그런데 30레벨 대의… 마법사도 아닌 헌터가 이걸 해냈다고? 헌스쿨 참가자들 중 가장 뛰어난 화염마법사인 권유나에게 시켜도… 발현은커녕 흉내조차 내지 못할 마법을? “…….”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그가 쓴 건 진짜 6써클 마법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니, 아닐 거다 분명. 그걸 쓸 만한 마력이, 36레벨에게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강소희 본인이 시전한 ‘팬텀 헤이즈’와 애쉬 퀸이 쏟아낸 화학 분말을 매개체로 삼아…… 그 메커니즘만 복제해 낸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리인데. ‘하지만…….’ 문제는 그게 더 말이 안 된다는 거다. 그 짧은 순간에 공기의 농도를 계산하고, 폭발 범위를 예측하고, 독가스의 휘발성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6써클 마법 술식의 복잡도 안에서? ‘불가능해.’ 만약 타이밍이 1초라도 어긋났다면, 폭발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본인까지 화염에 휩쓸렸을 텐데? ‘미치지 않고서야.’ 저벅- 저벅- 연기 속에서 멀쩡한 상태로 걸어 나오는 건율을 보자, 소희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대체…….’ 정체가 뭘까? 각성한 지 200일도 안 된 시점에 이런 미친 짓을 보여주려면… 대체 어떤 재능을 타고 나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소희는……. “소희 님, 괜찮죠?” “아, 네. 뭐….” 이 기가 막힌 광경을 만들어 놓고도 결국 맥 빠지는 소리나 주절거리는 이건율을 보며…. “저 그럼… 잠깐 발골 좀 하겠습니다?”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 * * 아름답다. “캬.”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번엔 정말, 미치광이 요정이 봤더라도 기립박수를 쳤을 그런 플레이였으니까. └ 미친……. └ 이… 이게뭐누;; 사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설계한 대로 모든 매커니즘이 작동할 때의 그 도파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게 내가 마법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했고 말이다. -오랜만에 해봤는데, 생각보다 잘 되네요? 당연히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솔직히 나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작동할 줄은 몰랐다. 뭔가 타이밍이 살짝 어긋나거나 마력이 부족하거나 해서… 위력이 좀 부족하게 구현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완벽했어.’ 모든 계산이 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리면서,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완벽한 그림이 만들어져버렸다. 덕분에 65레벨 엘리트 몬스터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터져 버렸고 말이다. └ 아니 씹;;; 이거 버그 아니냐;;; └ 2차 전직 마법을;; 36레벨 잡캐로 대체 어떻게 쓰는 거임?;;; -그건 근데… 술식만 정확히 연계할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그런 논리면… 마나 통이 충분하기만 하면 30레벨에 운석도 소환할 듯? -술식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동반되면 못 할 것도 없죠. └ ㅈㄹㄴㄴ 물론 나 혼자 잘해서 이만한 위력이 나온 건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이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막대한 양의 강력한 독기를 강소희가 채워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완벽한 마법을 구사했다고 한들, 폭발력에 한계는 있었을 테니까. └ 확실히 플레임 스포어라기엔 처음에 불꽃이 너무 조막만하던데? 이 성좌 녀석이 말하듯, 내가 소환한 최초의 플레임 스포어는… 정석적인 플레임 스포어의 반에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였다. └ 근데 플레임 스포어 말고… 이런 식으로 폭발하는 마법이 없다는 게 문제임. 성좌들은 궁금해 죽으려고 했지만, 난 끝까지 내가 뭘 한 건지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 형님들께서 궁금한 게 많아야 여기 더 오래 붙어 있을 거 아냐. 그치? └ 시끄럽고, 이 샛기 왜 마법사 아님? 제가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마법이긴 합니다만. [‘파이어볼 깎는 노인’님이 1LP를 후원하였습니다.] └ 하… 내 존재가 부정당한 기분이야……. 내 야매 술식을 눈앞에서 목격한 성좌놈들은, 아주 혼란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거야 뭐 내 알 바는 아니었고. “소희 님, 괜찮죠?” “아, 네. 뭐….” “저 그럼… 잠깐 발골 좀 하겠습니다?” 능숙하게 단검을 꺼내든 나는, 아주 경건한 자세로 발골부터 진행했다. 도파민은 도파민이고, 할 건 해야 하지 않겠어? [특성, ‘발골 전문가’를 발동할 수 있습니다.] [‘애쉬 퀸 (Ash Queen)’ 사체의 ‘발골’을 시작합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몬스터의 사체를 도려내고 있자니, 강소희가 뭔가 못 볼 꼴 본 사람마냥 안면 근육을 구겨댄다. 저 얼굴이 저렇게까지 구겨질 수도 있는 거였다니. 이건 이거대로 신기하단 말이지. 서걱- 지이익-! 심지어 순간적인 열기로 익혀버린 탓에, 시체 상태도 상당히 좋다. 그러니 나만 좀 집중해서 발골을 완료하면, 기대 이상의 재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체의 상태가 양호하여, 발골 성공률이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0%……1%…15%……47%] 껍질을 도려내고, 안쪽에 박힌 은색 샘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찬 주머니. 띠링-! [‘발골’에 대성공하였습니다!] 크으, 대성공 좋고! [전리품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그니스 실크 방적선 (Ignis Silk Spinneret)’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명주실을 손에 둘둘 감은 나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양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걸 가공해서 굳히면, 이제 강력한 장력을 가지는 [이그니스 실크]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되는 활시위 재료를 구하려면, LP로만 1500LP는 줘야 하니까……. “흐… 흐흐흣.” 바보같이 웃음이 새어 나오는 정도는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알겠지 형들? └ ㄲㅈㅅ └ 꺼지셈. └ 꺼지쇼; 이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으니, 남은 던전이나 빠르게 클리어해 볼까? * * * 애쉬 퀸을 성공적으로 처치한 뒤, 남은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후 세 시쯤 숙소에서 나왔던가? 지금이 대략 8시쯤 된 것 같으니, 던전 공략만 네 시간 정도는 걸린 것 같았다. 띠링-! [‘폐기된 마력 소각로’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였습니다.] [클리어 등급 : A+] [클리어 보상으로, ‘농축된 마력 결정체’ 아이템을 15개 획득하였습니다.] 물론 던전을 클리어했으니, 겸사겸사 받은 퀘스트도 마무리해야 했다. 수로를 따라 돌아 나온 우리는 관리인 반이 기다리고 있을 제어실로 돌아왔고. 초조한 얼굴로 인근을 서성이던 그는,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자네들…! 살아서 돌아온 건가?” “물론이죠. 약속 지키러 왔습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동력장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반은 허겁지겁 제어판으로 달려가 계기판을 확인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압력 게이지가, 거짓말처럼 안정권인 초록색 구간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에… 몇 달간 손도 못 대던 문제를 진짜로 해결했다니! 그 지독한 독기랑 괴물들을 뚫고…….” 띠링-! [히든 퀘스트 완료 : 막혀버린 도시의 동맥] [관리인 반의 신뢰도가 ‘우호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꺼멓게 죽어있던 반의 얼굴이, 방금 묵은 변비를 해결하기라도 한 건지 활짝 피어났다. “자네라면 사례금을 따로 바라지도 않겠지만…….” 예? 뭐라고요? “그래도 은인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지.” 반이 작업복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묵직한 열쇠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이걸 받게.” 띠링-! [‘녹슨 황동 열쇠 꾸러미’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후우. 처음부터 이걸 얻을 생각으로 한 거긴 하니까……. 제가 한 번만 참습니다. 아저씨, 다음부턴 그런 티배깅은… 곤란합니다? └ 열쇠 꾸러미 반납하고 LP 받던가 ㅋ 어허. 이럴 땐 그냥 모르는 척해주시는 겁니다 형님들. “자네에게야 딱히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으로 보이겠지만…… 7구역 연구실에 있는 ‘닥터 정크’에게 가져다준다면 섭섭잖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걸세.” 성심껏 설명하는 반으로부터 열쇠 꾸러미를 받아 챙긴 나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거, 그냥 제가 가져도 되는 거죠?” “그, 그렇긴 하네만. 자네가 그게 필요할 리가……?”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열쇠만 있으면, 필요할 때 7구역의 마력회로 설비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마도공학 관련 히든 피스가 바로 이 열쇠라는 말씀. 닥터 정크에게 가져다줘 봐야 500LP 정도나 받을 텐데……. 뭐, 절대로 적은 돈은 아니지만, 회로 설비 자유이용권과 비교하면 너무 푼돈이라 할 수 있겠다. “아가씨도 고생 많았수. 꼴을 보니 아주 제대로 구른 것 같은데.” “……말도 마세요.” 강소희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독기에 찌들고 오물을 뒤집어쓴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다. 흐음. 꽤 힘들긴 했나 본데……. 갑자기 조금 미안해지는걸? 12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랜드 아르카나 호텔 2층, 프리미엄 뷔페 레스토랑 ‘라 페스티바(La Festiva)’. 호텔리어 3년 차이자, 라 페스티바의 매니저인 김지민은, <헌터즈 스쿨>의 열성 팬이었다. 각성자이지만 겁이 많고 헌터로서 재능이 부족했던 그녀는 전형적인 게이트 특수업종의 종사자였고. 그렇기에 <헌터즈 스쿨>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큰 대리만족을 주는 예능프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직장인 <그랜드 아르카나>가 헌스쿨 메인 숙소로 결정된 이번 시즌. 그녀는 꿈꿔왔던 완전한 덕업일치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녀의 1픽 참가자인 이성환과, 무려 두 마디나 대화를 나눴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다들 일찍 숙소로 들어가셨네.’ 김지민은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밤 9시 50분. 이제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분이었으니, 더 이상 누군가 여기 나타날 일은 없을 터였다. 조만간 시작된다는 고강도 훈련을 대비해 다들 일찍 쉬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흐음, 오늘은 음식도 많이 남았고.” 그녀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홀 정리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쾅-! 레스토랑의 거대한 양문이 헐레벌떡 열렸다. 지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 이건율 참가자님?” 화제의 중심, 입학 미션 1위의 주인공. 그가 땀에 젖은 셔츠 차림으로 식당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에는 흙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격렬한 훈련을 마치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실물 영접이다!’ 합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지만, 지금껏 지민은 이건율 참가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율은 그녀의 근무시간 대에 단 한 번도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던 거다. 지민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프로 정신으로 꾹 참았다. 대신 밝은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마감 10분 전이라 식사는 어려우실 수 있는데….” “아, 괜찮습니다. 여기서 먹을 건 아니라서요.” 그는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뷔페 코너를 향해 돌진했다. 지민은 눈을 떼지 못하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배가 많이 고프신가 보다.’ 그는 샐러드나 디저트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한곳, 해산물 코너로 직진했다. 타다닥-! 그의 손놀림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집게를 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접시 위로 랍스터 테일, 전복, 대하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것도 아주 알짜배기들만 골라서. “저… 참가자님?” “아, 이거 어차피 남으면 버리는 거죠?” 그가 접시를 가리키며 뻔뻔하게(?) 물었다. “제가 좀 처리하겠습니다. 환경 보호도 할 겸.” “아… 네, 물론이죠. 편하게 가져가셔도 됩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시간 전쯤… 이성환 참가자가 와서 비슷한 짓(?)을 하고 갔기 때문이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고기를 좀 챙겨가도 되겠습니까? 근손실이 오면 안 돼서 말입니다.] 그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최고급 스테이크와 양갈비를 쓸어 담아 갔었다. 그리고 지금 이건율 참가자 역시 해산물을 쓸어 담고 있다. ‘역시 순위권 참가자들은 다르구나.’ 지민은 감탄했다. 일반인이라면 배불러서 쳐다보지도 않을 시간에, 이들은 앞으로의 훈련을 위해 영양 보충을 하는 것이다. 저 엄청난 양의 해산물이면 단백질 함량이 어마어마할 텐데. “다 챙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건율은 접시를 랩으로 야무지게 포장하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렇게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니까 1위를 하는 거겠지?’ * * * <폐기된 마력 소각로> 던전 공략을 마친 뒤……. 우리는 잠시 루멘하르트 길거리 시장에 들렀었다. “사장님, 이 [파이어 보어 고춧가루], 색깔이 너무 거무튀튀한데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총각?” “딱 봐도 B급이구만. 훈연 향 다 빠졌겠네. 0.1LP만 깎아주시죠.” “허, 거참… 손님 눈이 보통 매운 게 아니네.” “그리고 이 [솔트 웜 결정]도 그래요. 투명도 보니까 진흙밭에서 캔 놈들인데, 이러면 씁쓸한 맛 난다고요. 저기 [갈릭 머쉬룸] 말린 거랑 묶어서, 딱 0.5LP에 주시면 어때요. 깔끔하죠?” “아이고, 나 참! 도둑놈이 따로 없구만! 에잉, 알겠으니까 가져가요!” 강소희는 한 3m쯤 떨어진 곳에서 동물원 원숭이라도 구경하는 표정으로 내 쇼핑을 관전했지만……. 난 꿋꿋이 모든 식재료 구매를 마치고 나서야 숙소에 들어왔다. “먼저 씻어요.” “건율 님은요?” “저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여기에 강소희가 씻는 사이 재빨리 숙소를 다시 나선 나는, 마감 직전의 뷔페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필요한 재료들까지 깔끔하게 공수했다. ‘좋아. 이러면 통합 1LP 안에서 다 해결했어.’ 덕분에 나는 뿌듯했다. 오늘 공수한 재료들을 잘만 관리하면, 1LP로 이건율표 특제 해물라면을 다섯 번은 끓여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캬. 이 정도면 훌륭해. 라면 한 끼에 2천원을 넘기는 건 아무래도 사치스럽지.’ 씻고 나온 강소희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살짝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강소희가 팔짱을 낀 채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식탁 위에는 뷔페에서 ‘구조’해 온 랍스터와 전복, 대하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루미스 시장 뒷골목에서 공수한 수상한 가루약 통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걸로 진짜 직접 라면을 끓이시겠다고요?” “네.” “룸서비스로 시키는 게 그 정도로 싫은 거예요?” “예, 그 정돕니다.” 나는 비장하게 앞치마를 둘렀다. 아무래도 내 라면의 퀄리티를 믿지 못하시는 모양인데……. 어차피 상관없다. 1만 년에 걸쳐 개발한 이 마스터 레시피를 한번 맛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건… 만년 넘게 지구로 돌아가지 못했던 취준 용사의 한이 담긴 레시피다. 재료를 게이트 안의 것들로 한정한다면, 나보다 라면을 잘 끓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씀? “아니, 냄비는 또 어디서 났어요?” “조용. 지금부터는 정밀 작업입니다.” 경건한 표정으로 도마와 칼을 꺼낸 나는, 일단 랍스터부터 도마 위에 올렸다. “라면 끓인다며 칼은 왜…?” “재료 손질이 요리의 반입니다.” 그리고 통통한 랍스타 녀석의 갑각 틈새를 노려보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칼질을 시작했다. 타다닥! 샥! 샥! 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단단한 랍스터 껍질이 관절 마디마디를 따라 완벽하게 분해되었다. 살점 하나 다치지 않고 껍질만 벗겨내는 신기. 이어서 전복의 이빨을 제거하고, 대하의 내장을 따는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와….” 어느새 강소희는 입을 딱 벌린 채 관전 중이었다. 그 불신 가득했던 표정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 사이 난 순식간에 재료 손질을 마무리했고. 손질된 해산물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접시 위에 정렬되었다. “이제 스프를 제조합니다.” 나는 끓는 물 앞에 섰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루미스 영지에는 ‘라면 스프’가 없다. 하지만 대체재는 있다. [파이어 보어의 훈제 고춧가루 (매운맛)] [솔트 웜의 결정 (짠맛/감칠맛)] [갈릭 머쉬룸 엑기스 (풍미)] [건조된 심해 다시마 (국물 베이스)] 나는 마치 폭탄을 제조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약병의 가루들을 0.1g 단위로 계량해 투하했다. 이게 진짜 중요한 작업이다. 요리는 과학이거든. 단 0.1mg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 그 완벽한 맛을 재현하려면 말이다. “고춧가루 3, 소금 결정 1.5, 마늘 엑기스 2….” 촤아아아―! 가루가 끓는 물에 닿자마자, 냄비 속에서 붉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러자 슬슬 그 본능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맛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매운 냄새가 아니었다. 인공적인 듯하면서도 영혼을 울리는,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DNA에 각인되어 있을 그 냄새. 자본주의의 맛, MSG의 향연이 주방을 지배했다. “미쳤다… 이거 무슨 냄새예요? 침샘이 아픈데?” “기다리십쇼. 이제 거의 다 되어갑니다.” 나는 꼬들꼬들한 에그 누들을 던져 넣고, 젓가락으로 면발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며 공기 마찰을 시켰다. 정확히 3분 30초. 면발이 가장 탄력 있는 순간. “완성.” 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가 식탁 중앙에 안착했다. 비주얼은 폭력 그 자체였다. 용암처럼 붉은 국물 위로 뽀얀 랍스터 속살과 전복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사이로 탱글탱글한 면발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 강소희는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아직까지도 약간의 의심은 남아있었다. 요리 과정이 화려하긴 했지만… 과연 이게 그랜드 아르카나의 주방에서 나온 라면과 비교할 수 있을 만한 맛일까? “먹겠습니다.” 그녀는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 강소희의 눈동자가 평소의 두 배로 커졌다. 마치 번개를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습니까.” “이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나트륨의 축복….” “……예?” “화학적인데… 분명 너무 자극적인데……. 대체 어떻게 깊은 맛이 느껴지는 거죠?” 아니, 원래 맛있는 걸 먹으면 입이 터지시는 스타일인가? 갑자기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아니… 게이트 재료로 어떻게 대기업의 맛을 낸 거예요?” 그녀는 감탄을 넘어 경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기업의 맛’라는 평가야말로 이 요리에 대한 극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이 라면 레시피를 개발하면서 목표했던 가장 궁극적인 맛이……. 바로 지구의 대기업이 내는 그 한국 라면의 맛이었으니 말이다. “후후.”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나는, 랍스터 살을 국물에 푹 적셔 그녀의 앞접시에 놔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앞으로도 라면을 룸서비스로 시키려는 부적절한 시도는 참을 수 있겠죠?” “…….” 강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라면 음미에 몰입해 있었다. 이 사람, 라면에 진심이었잖아? 후루룩! 하지만 이러다가는 내 몫이 남지를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나 또한 곧바로 착석하여 먹방을 시작했다. 그리고 의도한 대로 완벽히 재현된 그 맛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끓였지만, 역시 완벽해.’ 우리가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성좌들도 침이 질질 흐르는 모양이었다. └ 아니; 라면을 저렇게까지 맛있게 먹을 일임?;; └ 아니 ㅅㅂ침고이네;;; └ 와;; 레시피 한번만 정리해 주셈;; 나도 언젠가 따라해 보게; 강소희는 면치기의 신이 들린 듯 라면을 흡입했다. 랍스터 살과 면을 동시에 집어 흡입하고, 국물을 그릇째 들고 마셨다. 입술이 붉게 물들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멈출 기미가 없었다. “흐으으아-!” 아저씨 같은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질 수 없어 전복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 야들야들한 식감과 얼큰한 국물의 조화. 하루 종일 폐기물 처리장에서 굴렀던 피로가, 모공 밖으로 배출되는 기분이었다. “건율 님.” “네.” “인정… 인정 드립니다….” 강소희가 그릇 바닥을 긁으며 진지하게 평가했다. 그녀의 표정은 뭔가 몽롱해 보였다. 탄수화물과 나트륨에 취한 눈빛이랄까. 달그락- 완면(完麵).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한 냄비 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모든 거사가 끝나자, 드디어 강소희는 현실을 깨달았다. “하… 망했다.” “왜요?” 지금 시각은 무려 열한 시. 라면을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기에는, 아무래도 부적합한 시간이었으니까. “내일 얼굴이 아니라 몸 전체가 붓겠는데.” “우유라도 드릴까요?” “됐어요. 이 여운을 깨고 싶지 않아….” 그녀는 행복한 시체처럼 늘어졌다. 나 역시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며 싱크대로 향했다. 요리도, 식사도 완벽했다. 이 정도면 1LP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잘 먹었으니, 이제 일해야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내일 새벽부터 시작될 활 제작 작업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12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다음 날 새벽. 부스럭-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장 먼저 시계부터 확인했다. ‘7시… 적당하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오늘이 2주 차 첫날이니까… 자유시간은 내일까지야.’ 하지만 어제처럼 난이도 높은 던전에 들어간다거나, 특별한 퀘스트를 진행한다거나 하는 일을 할 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강소희는 자고 있……. “엥?” “일어났어요?” “웬일로 이렇게 일찍?” “어젯밤에… 덕분에 혈관에 부채가 좀 쌓여서요.” “……?” “운동 좀 하고 올게요.” 쾅-! 솔직히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부어 보이긴 했는데, 뭐 저렇게 스트레스 받아서 운동하러 갈 정돈가? “…….” 어쨌든 강소희가 나가자 넓은 펜트하우스에 정적이 찾아왔다. 덕분에 살금살금 도둑고양이마냥 움직일 필요 없이, 여유를 즐기며 나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딸깍- 미니 바에서 냉커피 한 캔을 꺼내 여유롭게 들이켠 나는, 부지런히 침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럼, 슬슬 준비해볼까.” 그리고 잠시 후, 인벤토리를 열어 어제 획득한 전리품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이그니스 실크 방적선] [정밀 유압 실린더] 그리고 어제 파밍한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재료. 쿵-! ‘미다스의 정원’ 히든 스테이지에서 얻은 [황금빛 철궤]가, 육중한 무게감을 자랑하며 테이블 위에 놓였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녹이냐는 건데.’ 일반적인 대장간 화로? 어림도 없다. 강철 성분이면서도 은은한 황금빛 아우라를 뿜어내는 이 특수한 철궤는……. 일반적인 철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귀한 금속인 만큼 다루기 상당히 어려운 이 녀석의 녹는점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설픈 불길에 넣었다간 겉만 그을리고 속은 차가운 상태로 3박 4일을 지새워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일모레면 멘토링 시작인데…… 그랬다가는 대형 사고지.’ 적어도 모양을 잡고 단조하는 과정까지는…… 오늘 안에 무조건 쇼부를 봐야 한다. 그러려면 루미스 영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불꽃. 괴팍하기로 소문난 늙은 대장장이, ‘이그니스’의 화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영감 성격에, 그냥 가서 빌려달라고 하면 문전박대당하겠지만…….’ 하지만 다 방법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속 뭉치를 꺼내 들었다. 어제 폐기물 처리장의 관리인 ‘반’으로부터 받은 보상 아이템. [녹슨 황동 열쇠 꾸러미] 이걸 또 여기서 써먹을 수가 있다. ‘아마… 이거였던 거 같은데.’ 나는 꾸러미 속에 섞여 있는, 유독 붉은 녹이 슨 열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양각된 이 낡은 열쇠의 정체는… 바로 영지 전체에 깔린 ‘고열 에너지 배관망’의 점검구를 열 수 있는 관리자용 마스터. ‘7구역 소각로에서 발생한 막대한 열기는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니지.’ 그 열기는 지하 배관을 타고 영지 곳곳으로 공급된다. 특히, 불을 많이 쓰는 ‘대장간 거리’는 이 열에너지 공급망의 최우선 공급처이자 핵심 노드(Node)였다. 즉, 소각로 관리용 마스터키가 있다면? 일단 대장간 거리의 지하 배관과 연결된 모든 환기구와 점검구를 제집 드나들듯 열 수 있다는 소리다. “정문으로 못 들어가면, 굴뚝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씨익 웃으며 겉옷을 챙겨 입었다. 산타클로스도 아니면서 굴뚝을 타야 한다니 좀 처량하긴 하지만. 더 멀리 돌아갈 길을 빠르게 가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철컥-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선 나는, 조식 레스토랑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챙겨서 그랜드 아르카나를 나섰다. 오늘은 아마… 밤늦게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한편, 그 시각 지하 트레이닝 센터. “후우… 후우…!” 강소희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달아오른 열기에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우…. 라면 좀 적당히 먹을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평소보다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남들이 보면 모를 수준이었지만, 본인 눈에는 보름달처럼 보일 정도.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아침 운동까지 나온 이유는, 사실 부은 얼굴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건율이 들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겠지만……. 사실 아침 일찍 일어나 러닝머신을 한 시간 정도 달리는 건, 강소희의 오랜 운동 루틴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며칠 연속으로 빼먹은 건 정말 오랜만인데…….’ 그녀가 이렇게 된 건, 분명 이건율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지지 않게 된 게 이건율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원래 그녀는 독혈로 인한 고통 때문에 숙면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합숙이 시작된 이후로 침대에 등만 붙이면 그대로 곯아떨어져서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그대로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이렇게 단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일부러라도 최대한 오래 자려고 했었지만. 이렇게 습관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 때문에 오늘은 일부러 일찍 눈을 뜬 거였다. 탓- 타탓-! 그래서 오랜만에 러닝을 뛰는 만큼. 그녀는 며칠 못한 운동까지 더 한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유산소를 뛰는 중이었다. ‘라면… 또 얻어먹으려면…….’ 그런데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어? 소희 님 아니십니까?” 옆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해왔다. 고개를 돌리자, 땀으로 샤워를 한 듯한 근육질의 사내, 이성환이 수건을 목에 걸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 성환 님. 일찍 나오셨네요.” 강소희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부은 볼을 슬쩍 후드로 가리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다가오는 이성환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뭐지?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나?’ 인사까지야 어렵지 않았지만, 사실 강소희는 아직도 사람이 좀 어려웠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뭔가 친근하게 대화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어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속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려는 찰나. 이성환이 그녀의 등 뒤, 텅 빈 헬스장 입구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혹시… 혼자 오셨습니까?” “네? 네. 그런데요?” “아…….” 이성환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토요일 저녁에 로또 번호를 확인한 사람 같은 표정. ‘뭐지?’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해져 있었는데……. 이어진 이성환의 말을 듣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건율 형님은 안 오셨습니까?” “……방금 일어났을걸요.” “아, 흐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이성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납득했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긴, 어제 늦게 복귀하셨을 테니 피로가 쌓이셨겠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다음에는… 충분한 휴식이 필수니까요.” ‘대체 뭐라는 거야?’ “그럼 운동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다시 세트 들어가 봐야 해서.” 이성환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돌아서다 말고 간절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저기, 소희 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다음에는 건율이 형님…… 꼭 좀 모셔와 주십쇼.” “…….” “제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뭔가 좀……. 어려워서 말입니다.” 대체 왜 우물쭈물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러죠.” 이성환은 비장하게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고는, 다시 벤치프레스 기구로 달려갔다. 다시금 울려 퍼지는 쇳덩이 소리를 들으며, 강소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쳤던 전인욱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건율 님은 왜 죄다 남자들한테만 인기가 많은 걸까?’ 강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렸다. 그녀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 * * 이그니스는 ‘혼(Soul)’을 믿는 대장장이였다. 50년. 강산이 다섯 번 변하고, 루미스 영지의 영주가 세 번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붉은 모루 앞에서 쇠를 두드렸다. 땀방울이 쇳물에 스며들고, 근육의 떨림이 검날에 새겨져야 비로소 진정한 무기가 탄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그니스는 그 신념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녹슬어서가 아니었다. 시대가 변했다. 이제 더 이상, 헌터들은 땀 흘려 두들긴 ‘강철검’을 숭배하지 않았다. ‘잡기술의 시대…라.’ 깡-! 그는 습관처럼 망치를 내려쳤지만, 그 소리에는 예전 같은 확신이 없었다. 힘이 빠진 타격음. 마치 그의 심장 박동처럼 맥없는 소리였다. [아버지 방식은 틀렸어. 언제까지 쇠만 두들길 거야? 요즘 대세는 ‘마도 공학(Magitech)’이야. 몬스터의 뼈에 회로를 심는 게 훨씬 강하고 효율적이라고!] 딸 마리의 독설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마법 공학의 길을 택한 딸은, 아버지가 고집하는 정통 대장장이의 길을 ‘미련한 짓’이라며 몰아붙였다. [그건 낭만이 아니라 아집이야. 아버지는 그냥… 10년 전의 영광에 갇혀 있는 거라고!] 처음엔 화가 나서 딸을 쫓아냈지만… 홀로 남은 작업장에서 그는 쓰라린 속을 달래야만 했다. 딸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그니스의 시선이 작업장 한구석, 먼지 쌓인 진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텅 빈 거치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12년 전. 자신이 만들었던… ‘신의 경지’라 추앙받았던 전설의 명검, [태양의 파편(Sun Fragment)]. 루미스 국왕에게 진상했던 그 검은, 이그니스 인생의 정점이자 동시에 저주였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경지에 닿지 못했지.’ 치이익― 이그니스는 달궈진 쇠를 물통에 집어넣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구석에 처박힌 검들의 무덤이 보였다. 지난주에 만들다 만 실패작들. 남들이 보기엔 훌륭한 명검이었을지 모르나, 이그니스의 눈에는 그저 [태양의 파편]을 흉내조차 내지 못한 쓰레기일 뿐이었다. 완벽했던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자괴감. 그것이 천하의 이그니스를 병들게 했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도망’이라 치부하며 고집을 부리게 만들었다. ‘나는… 과거의 환영을 쫓는 망령이 되어버린 건가.’ 화로의 불꽃도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붉은빛을 잃고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술이나 한잔…….’ 그가 한숨을 쉬며 장갑을 벗으려던 찰나였다. 쿠구궁-! 천장에서 기괴한 진동이 느껴졌다. 단순한 쥐새끼가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육중한 것이, 낡은 배기구 통로를 타고 굴러 내려오는 듯한 소음. “……?” 이그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장간이다. 들어올 입구라고는 이중 보안 마법이 걸린 정문뿐인데, 천장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지 않은가? ‘환기구가 낡아서 무너질 때가 됐나?’ 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 그 순간. 콰앙-! 굳게 닫혀있던 천장 환기구 덮개가 발길질에 튕겨 나갔다. 그리고 자욱한 먼지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작업대 한복판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쿵-! “콜록! 콜록! 으, 먼지 봐라.” “……?!” 이그니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었다.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웬 젊은 사내 하나가, 굴뚝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너, 너……!”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던 것도 잠시. 이그니스는 반사적으로 작업대 위에 있던 시뻘건 인두를 집어 들고 사내를 겨누었다. “네 이놈! 어디로 들어온 거냐! 정문 보안은?!” 도둑인가? 아니면 경쟁 대장간에서 보낸 산업 스파이? 어느 쪽이든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했다. 보안 마법을 뚫은 것도 모자라, 수직으로 뚫린 그 좁은 배기구를 타고 내려오다니. 살기 등등한 이그니스의 위협에도, 사내는 당황하기는커녕 옷에 묻은 잿가루를 툭툭 털어내며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이고, 초면에 인두라니. 환영 인사가 너무 뜨겁네요.” “뭐라고?!” 사내는 씨익 웃으며,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다. “환기 좀 시키고 사십쇼, 영감님. 공기가 너무 탁하네.” 이그니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체, 이 미친놈은 뭐란 말인가? 12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역시 내 기억이 정확했다. 반 아저씨가 준 [녹슨 황동 열쇠 꾸러미]에 섞여 있던 붉은 녹이 슨 열쇠. 그것은 예상대로 7구역뿐만 아니라, 루미스 영지 지하 배관망 전체를 제어할 수 있는 마스터키가 맞았다. ‘덕분에 환기구 덮개를 따는 건 일도 아니었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수십 년 묵은 굴뚝 먼지를 온몸으로 닦아내며 수직 통로를 미끄러져 내려와야 했으니까. 마치 미끄럼틀을 타듯 배관을 타고 내려와, 막혀있던 창살을 발로 차고 떨어지는 과정까지. 모양새는 좀 빠졌지만, 결과적으로 침투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쿵-! └ ㄷㄷㄷ;;; 대체 이런 길은 어떻게 아는 건데? └ 와씨… 어떻게 이 방장놈은 매번 상상을 초월하냐; └ 근데 뭐, 솔직히 어제 하도 놀라버려서…… 이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함 ㅋㅋ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시뻘건 인두를 든 채 살기를 뿜어내는 드워프 혼혈 영감쟁이가 서 있었다. “네 이놈! 어디로 들어온 거냐! 정문 보안은?!” 이그니스(Ignis). 루미스 영지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동시에 가장 괴팍하기로 소문난 고집불통. 당장이라도 내 미간에 인두 도장을 찍어버릴 기세였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아이고, 초면에 인두라니. 환영 인사가 너무 뜨겁네요.” “뭐라고?!” “환기 좀 시키고 사십쇼, 영감님. 공기가 너무 탁하네.”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이 살기에 눌려 뒷걸음질 쳤겠지만, 나는 이 영감의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고? 이 영감은 도합 열 번 정도의 베타 회차에서… 내 스승이었던 인간이거든. 아마… 대장장이 테크를 전투클래스랑 엮어서 뭐라도 해보려고 똥꼬쇼를 하던 시기였던가? 그러니까……. ‘지금 이 타이밍에 필요한 건 해명이 아니지.’ 그냥 쫓아내려는 의지를 꺾어버릴 강력한 한 방. 그의 가장 아픈 손가락을 건드려야 한다. “마리(Mari) 씨가 아버님 폐 건강을 엄청 걱정하던데, 이래서야 원. 나중에 딸내미 잔소리 좀 듣겠는데요?” “……!”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찌를 듯이 다가오던 인두 끝이 허공에서 딱 멈췄으니까. 이그니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방금, 누구라고 했냐?” “마리 씨요. 마탑 수석 연구원, 마리 이그니스.” 마리 이그니스. 이그니스의 하나뿐인 딸이자, 베타 테스트 시절 내게 쏠쏠한 마도 공학 의뢰를 줬던 NPC. 그녀는 아버지가 고집하는 ‘정통 대장장이’의 길을 거부하고, 마법과 기계를 결합한 ‘마도 공학(Magitech)’을 선택해 가출했던 전적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마탑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시기였다. “따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만든 ‘오버클럭 쉴드 제너레이터’가 대박이 났다던데.” 나는 마치 옆집 친구 소식을 전하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사실 만난 적은 없지만, 저건 마리가 모든 회차에서 항상 만들던 물건이니… 거짓말일 리 없다. 그 증거로……. 쿵. 이그니스가 비틀거리며 작업대에 몸을 기댔다. “……그래… 역시 그랬군.” 그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행방불명된 딸이 살아있다는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고 반대했던 길을 택한 딸이… 결국 보란 듯이 성공해 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 그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따님 연구가 성공한 덕에, 쉴드의 내구도가 배가 됐다더군요. 덕분에 마탑에서 아주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답니다.” “……그렇군. 손재주 하나는 기가 막히던 녀석이었으니…… 결국 해낼 줄 알았지.” 이그니스는 들고 있던 인두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쨍그랑-. 쇠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성공했구나. 내 방식이 틀렸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건 아버지라고 소리치더니, 결국 그 아이 말이 맞았어.”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작업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노는 없었다. 그저, 딸의 앞길을 막아섰던 자신의 아집에 대한 후회와, 변해버린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늙은 장인의 쓸쓸함만이 남아있을 뿐. “…….”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지금 이그니스는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패배감에 젖어 은퇴하는 노인이 아니었다. 독기를 품고 다시 망치를 드는, 광기 어린 장인이 필요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이그니스는……. 이 매너리즘을 극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이후에 완전히 다른 수준의 대장장이로 거듭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양쪽 이그니스를 모두 경험해 봤으니까. “후우…….” 한참 동안 마른세수를 하던 이그니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전해주러 이런 식으로 찾아온 건가?” “…….” “보아하니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고작 남의 딸내미 안부나 전해주려고 보안 마법까지 뚫고 들어오진 않았을 테고.”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50년 짬밥은 어디 안 간다. 그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서도, 내 방문 목적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용건이나 말해라. 뭘 원하지?” “뭐, 거창한 건 아닙니다만.” “아마도 의뢰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이 늙은이가 필요할 일은 없을 테니.”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뭐가 됐든, 딸의 행방을 알려준 건 고맙네만… 돌아가게. 나는 이제 의뢰 같은 거 안 받아.” “…….” “보시다시피.” 그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화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불도 꺼졌고, 열정도 식었어. 딸아이가 증명했잖나. 대장장이의 시대는 끝났다고. 나 같은 뒷방 늙은이가 두들겨봐야 고철 덩어리나 나올 뿐이지.” 완벽한 패배 선언. 이대로라면 그는 나를 내보내고, 싸구려 위스키나 한 병 까고 잠들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는 대신, 천천히 작업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잡 기술이라……. 그런데, 영감님.” 당연히 이 영감님을 움직이게 할 방법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10년 전 영감님의 역작인 태양의 파편(Sun Fragment).” “……!” “그걸 재현할 방법이 있다면… 혹시 제 얘길 좀 들어볼 마음이 생기시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그니스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의 두 눈은 처음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커다랗게 확대되어 있었고. 꽉 움켜쥔 주름진 두 손은 심지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와;; 이 사기꾼 ㅅㄲ; 이그니스 히든퀘까지 알고 있는 거냐 설마? └ ㅁㄷ;; 너만 알지 말고 우리도 알려줘;;; └ ㅈ됐네 이거; 이번 ■■에서는 꿀 못 빨겠네 시벌; 오호. 이걸 아는 형님이 계셨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번 어쩌고(?)에서 꿀 못 빨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려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이그니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 여기서 이제 난, 쐐기를 박아주면 된다. “그럼 힌트 하나 먼저 드리도록 하죠.” “음……?” “염화(厭火)의 대장장이.” “……!” “영감님의 그 클래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새 이그니스의 두 동공은, 믿기 어렵다는 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클래스가 염화(厭火)의 대장장이(Flame Soul Smith)라는 건,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 * *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그니스는 명실공히, 이 루미스 왕국 안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였었다. 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물건이 바로 전설의 명검, [태양의 파편(Sun Fragment)]. 당시 루미스 국왕의 탄신일을 맞아 진상되었던 그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검집에서 뽑는 순간 주변의 공기에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열기를 가진……. 검날 자체가 스스로 붉은빛을 내뿜으며 영원히 식지 않는다는 기적의 검이었으니까. 왕은 감탄했고, 이그니스는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왕국 최고의 장인으로 우뚝 섰다. 그러니까 이그니스는, 한때 ‘전설’이라 불렸던 장인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지.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붉은 광산(Red Mine)이 폐쇄되어버렸으니까.’ 루미스 영지 외곽에 위치했던 그곳은, 먼 옛날 화룡(Fire Dragon)이 잠들었다 떠난 둥지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었다. 때문에 그곳에서 채굴되는 철광석들은 용의 잔열을 머금어, 태생적으로 엄청난 ‘화염 저항’과 ‘열기 흡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아무도 몰랐고……. 태양의 파편을 담금질했던 이그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태양의 파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의 망치질 때문만이 아니라… 그 광석이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견뎌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붉은 광산, 매장량 고갈로 폐쇄 결정.] 때문에 광산이 문을 닫자, 이그니스는 다른 곳에서 공수한 최고급 강철과 미스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었다. 깡-! 챙그랑! 아무리 두들겨도 검이 깨졌다. 열처리를 완벽하게 해도, 담금질을 아무리 섬세하게 해도 결과는 같았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내구도가 종잇장 같거나, 완성 직전에 스스로 터져버리기 일쑤였다. 완성된 장비를 만들어 내려면… 최대한 힘을 빼고 ‘적당히’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그니스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적당한’ 물건들로는, 그의 장인정신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었으니까. ‘내가 늙은 건가? 감이 떨어진 건가?’ 그는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며 더욱더 작업에 몰입했다. 하지만 그것은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았다. 그가 집중하면 할수록, [염화의 대장장이] 특유의 패시브인 [심화(心火)]는 더욱 강하게 발동되었고……. 약해빠진 일반 광석들은 그 폭발적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더욱 처참하게 바스러질 뿐이었으니까. 지난 10년. 그는 종이컵에 용암을 담으려 노력하는 미련한 장인이었다. 컵이 녹아내리는 이유가 용암이 너무 뜨거워서라는 걸 모른 채, 자신이 컵을 잘못 잡았다고 자책해 온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어.’ 자신은 10년 전보다 더 뜨거워졌는데, 세상의 재료들이 그 열정을 받아주지 못했으니. 나는 연민과 확신이 뒤섞인 눈으로, 혼란에 빠진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 10년 묵은 오해를 풀어줄 시간이었다. 이 노인네만 각성시킬 수 있다면, 하루 만에 철궁 한 자루 뽑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터였다. 12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그니스는 당연히, 처음에 믿지 않았다. “무슨 소린가. 내 클래스에 문제가 있다니. 나는 그저… 쇠를 두드릴 뿐이야. 내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한 거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날 내쫓지도 못했다. 아마 이중적인 감정일 거다. 믿기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간절하게 매달리고 싶은 그 모순적인 마음 말이다. “그럼, 저 그냥 갑니까?” “으으…….” 지난 10년. 그는 매일 밤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살아왔다. 술에 취해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더 이상 예전의 그 완벽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자신이 모자란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넘쳐서 문제였다니. 이그니스에겐 그것만큼 달콤한 말이 없었다. 마치 독사과 같달까. 덥석 베어 물었다가 거짓으로 판명 난다면, 그때는 정말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지겠지만. 거부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향기가 나는… 그런 과실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그니스의 늙은 심장 한구석은 미친 듯이 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던 그 긴 세월이… 어쩌면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그 희박한 가능성. 그게 이그니스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지금쯤 속이 타겠지.’ 그러니까 슬슬 타이밍이 된 것 같다. 무슨 타이밍이냐고? 내 말이 옳다는 증거를, 하나씩 꺼내 보일 타이밍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의 설명 대신, 인벤토리부터 열었다. “말로만 해서는… 아무래도 믿기 쉽지 않으시겠죠.” 탁- 미리 준비해 뒀던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작은 앰플. 이그니스같이 닳고 닳은 대장장이라면, 보자마자 곧바로 정체를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건… [살라맨더의 오일(Oil of Salamander)] 아닌가? 고열 처리를 할 때 쓰는…….” “맞습니다. 거래소에서 꽤 비싸게 주고 샀죠.” 나는 앰플의 뚜껑을 따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영감님. 방금 말씀드린 12년 전의 그 검. 혹시 ‘붉은 광산’에서 나온 철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 이그니스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자네가 어떻게……? 그 광산은 이미 10년 전에 폐쇄되었는데!” “그게 핵심입니다. 화룡의 둥지였던 그곳의 광석만이, 영감님의 그 ‘무식한 열기’를 받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재료였으니까요.” 나는 오일이 든 앰플을 들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실패작 검’의 파편 위로 가져갔다. “영감님의 망치질은 너무 완벽해서 탈이었습니다. 쇠를 두드릴 때마다 발생하는 극한의 마찰열과 압력. 거기에 영감님의 클래스 특성인 ‘화기’까지 더해지니…….” 주르륵. 나는 붉은 오일 한 방울을 실패작의 단면 위에 떨어뜨렸다. 치이이익-! 끔찍한 소음과 함께, 매끄럽던 강철 표면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 가며 뒤틀렸다. 이그니스의 망치질로 인해 이미 안에 화기가 한계까지 차 있던 녀석이었기에, 약간 더 열을 가해준 것만으로 버티지 못하고 뒤틀려 버린 거다. “이… 이럴 수가…….” “보시다시피. 이런 식으로 우그러져 버렸을 겁니다.” “마, 맞네.” “고작 이 정도 열기가 더해진 것으로 이렇게 망가져 버릴 정도면… 기존에 영감님께서 불어넣으신 열기가 얼마나 한계까지 이 금속을 괴롭히고 있었을지 알 것 같군요.” 챙그랑!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한 강철 파편이, 결국 스스로의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것은 이그니스가 지난 10년 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실패의 원인 그 자체였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가진 강력한 열기를 담아낼 재료가 없었을 뿐. “재료가… 버티질 못한 거였어. 내 망치질이 녹슨 게 아니라…… 쇠가 약해빠졌던 거란 말인가?” “약했다기보단… 상성이 좋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쇠의 강도가 문제였다면, 미스릴 같은 금속은 영감님의 망치를 버텨냈겠죠. 강도로만 따지면 미스릴이 붉은 광산의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하니까요.” 내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이그니스의 손은 점점 더 크게 부들부들 떨렸다. 아마 그간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이해하기 어려웠던 의문들이 하나씩 풀려가고 있겠지.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퍼즐은… 아마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온 이 장인에게 마치 구원과도 같은 선고일 것이었다. “크흑.” 그러니 이쯤 해서 본론을 꺼낼 겸, 쐐기를 완전히 박아줘야겠다. “보여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영감님.” “뭔가?” 나는 인벤토리를 다시 열어, [황금빛 철궤]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렸다. 쿵-! 이어서 눈이 휘둥그레진 이그니스를 잠깐 응시한 뒤, 오일을 몽땅 털어 그 위에 부어버렸다. 콸콸콸―! 일반 강철이라면 표면이 검게 그을렸을 막대한 양의 열기. 하지만. 우우웅-! 이 황금빛 금속은 타들어 가기는커녕, 오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더니 붉은빛을 내뿜으며 펄떡이기 시작했다. 마치 더 뜨거운 불꽃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심장처럼. “혹시 이 녀석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이그니스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황금빛 철궤… 이 희귀한 금속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다면 얘기는 더 편해진다. “사실 이 녀석은 붉은 광산의 금속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희귀금속입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잠시, 자체적으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던 ‘탐욕의 황금 사자’가 떠올랐다. “열기를 머금는 걸 모자라서 ‘동화’되고 ‘발산’하는, 비슷한 계열의 금속이기도 하죠.” 영감님의 표정을 보니, 이제 거의 넘어왔는걸? “그러니까 이 녀석이라면, 영감님께서 12년 전 제작하신 ‘태양의 파편’을 재현하실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허.” 이그니스는 홀린 듯 다가와, 붉게 달아오른 철궤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끝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가 다 맞다면. 아마도 12년 만에 만난… 자신의 전력을 다해도 부서지지 않을 유일한 상대가 바로 이 철궤였으니까. “어떻습니까. 이래도 제 말을 믿기 어려우십니까?” 이그니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패배감과 무기력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집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활기가 가득 담긴 이그니스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네. 자네를 단순한 의뢰인으로 생각했던 것 말일세.” 이그니스는 거칠게 장갑을 고쳐 끼며, 구석에 처박아뒀던 미스릴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식으로 다시 묻지.”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이그니스’가 각성합니다.] [대장장이 ‘이그니스’의 우호도가 최대치까지 상승합니다.] 이그니스의 입에서 드디어, 기다렸던 말이 떨어졌다. “내가… 어떤 걸 도와주면 되겠는가?” * * * 황금빛 철궤는 엄청난 희귀도를 가진 광물이었다. 하지만 광물 자체의 가치만 따지자면…… Kg당 수만LP에 달하는 가치를 지닌 최상급 광물들보단 값이 꽤 떨어진다. 왜냐고? 강도만 따지자면 중급 미스릴보다도 조금 떨어지는 수준의 광물인데……. 가공 난이도는 상급 미스릴보다도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강력한 화기를 담을 수 있는 대장 기술로 이 녀석을 가공한다면, 대체 불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그런 게 가능한 대장장이가 루미스 왕국 전체를 뒤져도 거의 없다는 게 문제지.’ 가능한 사람이 없다 보니, 수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쉽게 말해 이 황금빛 철궤는, 만약 거래소에 매각한다면 가진 가치에 비해 상당한 헐값으로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 그럴 순 없고.’ 그러니 갑자기 이렇게 활을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황금빛 철궤가 내 손에 있는 이상, 언젠가 난 이 아저씨를 찾아올 운명이었던 것이다. └ 그러니까, 당장 착용 가능한 활 한 자루 만들려고… 이그니스까지 찾아왔다는 거지? 뭐, 그런 셈입니다만. └ 그런데 좀 아깝지 않음? 이 정도 재료에 이그니스까지 붙이면, 솔직히 훨씬 더 높은 등급에 높은 티어 장비까지도 만들 수 있을 텐데. └ ㄹㅇ; 이 철궤를 랩제 40언더 장궁 만드는 데 소모하는 건……. 뭐, 성좌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판이 깔린 상태에서 최대한 좋은 품질의 장비 제작을 노린다면……. 아마 최대 9티어 신화 등급 무기까지도 충분히 제작이 가능할 테니까. (참고로 이 영감이 만들었던 태양의 파편은, 11티어 신화 등급 단검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만든다면, 지금 내 레벨로 절대 착용이 불가능할 거다. 그래서 내가 지금 만들려는 물건은… 바로 배주하의 인벤토리에 있던 ‘폭풍의 눈’ 같은 컨셉의 물건이었다. 등급은 전설등급 정도에, 티어는 6~7티어 정도이면서. 레벨 제한 옵션이 극한까지 붙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녀석을 만들려는 것. 9티어까지도 만들 수 있는 재료와 환경으로 그런 걸 만들면 손해 아니냐고? 놀랍게도 손해가 아니다. 라이카에서 가장 비싼 옵션이 바로, ‘레벨 제한 완화’ 옵션이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9티어가 넘는 고레벨 장비들보다, 오히려 레벨 제한 완화가 크게 붙은 7티어 장비가 훨씬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수요과 공급의 법칙 때문이다. 90레벨에 근접해야 착용 가능한 9티어 장비보다, 20레벨대에 착용 가능한 7티어 장비의 수요가 훨씬 높은 건 아주 당연한 이치거든. └ ㅅㅂㅋㅋㅋ 논리왕 데이브 ㄷㄷ └ 반박 불가임ㅋㅋ └ 아 ㅋㅋ 어차피 비싸게 팔수만 있으면 된다고 ㅋㅋㅋ 심지어 비슷한 이유로 저레벨 장비가 환금성까지 더 좋은데. 만들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냔 말이지. 깡- 깡- 까앙-! 그래서 나는 이그니스 할배에게 본격적인 의뢰를 맡기기 전, 잠깐 모루와 화로부터 빌리기로 했다. 그냥 단순히 이그니스 아재에게 ‘철궁’을 만들어 달라고만 주문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최대한 높은 티어의 무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장인의 고집이란 으레 그런 법. 까강-! 그러니 난, 정확한 가이드를 주기 위해 밑작업을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허어…….” 이그니스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12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몇 회차인지 대략적인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 당시 나는 마검사 클래스를 연구하던 중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몰락한 왕가’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겠지. 핑- 피피핑-! 그리고 그 당시 난, 거의 이그니스 할배와 비슷한 수준의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거대한 벽을 느꼈으니 말이다. 나름 회차를 거듭하며 쌓인 노하우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던 시기. 그때 내가 만났던 벽은, ‘몰락한 왕가의 호위무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NPC ‘카인’이었다. “그런 수준으로는… 절대 날 넘을 수 없을 것이다.” NPC ‘카인’은 궁수였다. 고작 레벨 43의…… 2차 전직조차 하지 못했던 허접한 궁수. 하지만 당시 난 60레벨이 넘는 2차 전직 마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인을 이겨야 하는 퀘스트를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를 이기기 위한 조건은, 정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트롤’을 사냥해야 하는 임무였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때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고? 트롤이라는 생명체는, 40레벨 궁수 따위가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몬스터였으니까. 상식선 상에서 40레벨의 궁수가 입힐 수 있는 피해 정도는, 재생력 GOAT인 트롤이 침 바르면 낫는 수준이어야 했으니…. 솔직히 처음 이 퀘스트를 수령했을 때만 해도, 완전 날먹 퀘스트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한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퀘스트 결과를 정산합니다.] [사냥에 성공한 트롤 수 : 17] [‘카인’이 사냥한 트롤 수 : 53]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나는 이 퀘스트에서만,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해야 했었다. ‘이게 재능의 벽인가?’ 고작 40레벨 초반에 불과했던 카인은, 내가 온갖 마법과 검술을 동원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트롤을 고작 화살 몇 발로 뚝딱뚝딱 잡아버렸다.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허무함이 느껴졌을 정도. 하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 퀘스트의 ‘비밀’이 밝혀졌던 날이었다. 당시의 난 결국 카인을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다른 우회 루트를 찾아내어 ‘몰락한 왕가’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었는데. [‘몰락한 왕가의 마지막 혈통’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호위를 해줘서 고맙소. 이건 내 가문에 내려오던 보물이오.” 클리어 보상인 카인의 활을 얻었던 그 날…. 나는 전신을 관통하는 배신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정도였으니까. [왕가의 수호자 (Guardian of Royalty)] [고유 옵션 : 왕가의 혈통 (착용 레벨 제한 –65 감소)] “아니, 싯팔?” “으음? 방금 뭐라고 말씀을…….” “아닙니다…….” ‘재능이 아니라…… 템빨…이었다고?’ 90레벨 후반대에나 낄 수 있는 고스펙의 무기를 고작 40레벨에 사용하고 있었으니. 트롤이 화살 몇 발에 픽 픽 쓰러져 나가는 게 당연했던 것. ‘어질어질하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당시 나는 몇 회차 내로 마왕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진짜 극 초반 회차에 이 사기꾼 카인 새끼를 만나 3년을 날렸더라면, 아마 멘탈이 터져버렸을 텐데……. 다행히 이미 반 정도는 해탈한 시점에 이 NPC의 기만질을 겪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난 이 장비에 대해,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어떤 의미에서는 극한에 다다른 장비인데.’ 당시에 내가 어떤 용사였던가. 재능을 찾기까지 무한한 인생 리셋을 겪고 있던……. 무한 긍정 마인드로 말하자면, 코인이 무한대인 라이카를 하고 있던 플레이어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내 머릿속에, ‘이런 무기를 극 초반에 얻을 수 있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떠오른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한번 해 보자.’ 그래서 ‘왕가의 수호자’를 처음 얻었던 날, 나는 과감하게 활을 마탑에 가져가 분해해버렸었다. 이 미친 활을 분해해서, ‘고유 각인 설계도’를 얻어내기 위해 말이다. ‘다음 회차에 장비는 못 가져가도, 회로에 대한 설계도 정도는 머릿속에 넣을 만해.’ 어떻게 고티어 장비의 레벨 제한을 이렇게까지 깎아낼 수 있었는지. 그 마력 회로의 비밀을 파헤쳐 머릿속에 각인한다면……. 다음 회차, 그다음 회차에서도 이 무기를 만들어 쓸 수 있다. 나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왕가의 혈통’ 고유 옵션에 대한 연구에 그 회차를 통째로 바쳤었고. 그래서 그 회차 이후……. 나는 리셋할 때마다 무조건 이 ‘왕가의 혈통’ 장비를 한 자루 만들고 시작했었다. 내게 있어 이 옵션은, 지옥 같은 초반 구간을 프리패스하게 해주는 치트키이자 영혼의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마력 회로만…… 최소 백 번은 새겨봤던가?’ 깡- 깡- 까앙-! 치이익-!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성좌 형님들과 이그니스는, 뭔가 상당히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내 망치질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 형아들;; 나 이제 무서워지려고 해ㄷㄷ └ 방장 놈… 대체 망치질은 왜 잘하는 거지? └ 마력회로 잘 그리는 거랑… 비슷한 개념 아닐까. 물론, 지금 여기서 내가 완벽한 대장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고유 옵션 하나가 새겨질 수 있도록. 핵심이 되는 마력 회로 하나만, 정성 들여 새기는 중이었으니까. 뭐, 그 정도로도 이그니스 할배는 레퍼가 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망치를 들어 올리는 타점. 내려칠 때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반동을 죽이는 기술. 그리고 쇠의 울림소리만 듣고 다음 타격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리듬감까지.” 예? 그…랬습니까 제가? “이건 도저히 갓 망치를 잡은 초보의 솜씨가 아니군. 최소 10년, 아니 그 이상 수천수만 번은 두들겨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야.” 그건 맞긴 한데……. “자네, 혹시 따로 대장 기술을 배운 적이 있는가?” “아뇨.” 지구 서버에선 처음인데요. “그럼 이 기회에 한번……! 대장장이가 되어 보는 건 어떤가!” 아니, 얘기가 왜 이 방향으로……. “혹시 자네, 드워프의 핏줄이 흐르는 건 아니겠지?” └ 헉; └ 허거걱;; └ 아니; 아저씨 우리 잘생긴 방장한테 대체 왜그래욧! 형들이 제일 나빠……. └ 아니; 대이브 ㄹㅇ볼매인데 너무하네;; └ 솔직히 우리 방장도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 난 헌스쿨 시즌3 우리 방장이 1픽인데 ㄹㅇ; 후우. 이 형님들은 진심인 것 같긴 한데. 분명 그런데 왜… 쉴드를 받아도 찝찝한걸까? “…….” 그나저나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성좌 놈도 하나 있는 것 같다. └ 그런데 방장… 설마 ‘염화의 대장장이’를 노리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기분 상했으니까 이놈이라도 좀 놀려먹어야겠다. -글쎄요. 기왕 생산 클래스 한 발 걸쳐 있으니… 못할 건 없죠? └ ㅅㅂ;;;;; └ ㅁㄷㅋㅋㅋ이 형님 앞길 막힘? └ ㅈㄴ웃기넼ㅋㅋㅋ 감히 날 놀리다니. 늬들도 한번 당해봐라. 놀린 성좌는 쟤가 아니지 않냐고? ‘흠.’ 그건 내 알 바 아니긴 해. * * * 밤 11시. 그랜드 아르카나 호텔의 로비는 적막에 잠겨 있었다. “후우… 그래도 오늘은 좀 제대로 몸을 쓴 것 같습니다, 형님.”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안락한 호텔 헬스장보다는 현장에 나가야 느낌이 사는군요.” 전인욱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옆에 걷고 있는 이성환을 향해 씩 웃었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지난번 포지션 결정전이 진행됐던 곳인 <북부 성벽 연병장>으로 나가 훈련을 강행하고 온 참이었다. 물론 그레니스에 다시 들어간 건 아니다. 두 사람이 오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함께한 훈련은… 실제 지형지물을 이용한 모의 전술 훈련. 남들이 본다면 휴식일에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혀를 찼겠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헌터의 본분이자 긍지였다. ‘하지만….’ 전인욱은 문득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호텔 입구에서 우연히 만났던 강소희. 그녀에 의하면 건율 형님은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성환 님.” “예, 형님.” “건율 형님은 오늘… 어디에서 훈련하셨을 것 같습니까?” 이성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뭔가…… 짐작되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소희 님과도 따로 움직이신 걸 보면……. 어쩌면 던전 솔플이라도 트라이하신 건 아닐까요?” “으음…….” “우리가 연병장에서 허수아비나 때리고 있을 때, 그 형님은 실전을 치르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였다. 위잉- 호텔 정문의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늦가을의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어떤 ‘이질적인 냄새’가 로비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 전인욱은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이건 호텔 로비의 고급 디퓨저 향이 아니었다. 매캐하고, 비릿하며, 어딘가 위험한 냄새. 전장에서나 맡을 법한 화약과 쇠 냄새, 그리고 짙은 유황의 향기였다. “형님, 저기….” 이성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정문 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터벅- 터벅- 발걸음 하나하나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로비의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이 그의 모습을 비추자, 전인욱은 들고 있던 물통을 떨어뜨릴 뻔했다. “건… 율 형님?” 인욱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이건율의 몰골은, 말 그대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수준이었으니까. “……!” 아침에 입고 나갔던 말끔한 셔츠는 시커먼 그을음으로 뒤덮여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바지 곳곳은 무언가에 긁히고 찢겨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과 먼지가 엉겨 떡져 있었으며, 드러난 피부는 고열에 익은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상에….’ 전인욱은 경악했다.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거란 말인가? 단순히 몬스터 몇 마리 잡고 온 수준이 아니었다. 저건 재난 현장, 아니 화산 폭발 현장에서 구르다 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 계셨습니까.” 그들을 발견한 이건율이 힘없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가 다가올수록 매캐한 냄새는 더 짙어졌다. ‘이 냄새는……!’ 이성환이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유황. 그리고 타는 냄새. 고열에 그슬린 흔적.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모든 단서가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그레니스 산맥 북서부… 용암 지대?’ 그곳은 평균 기온 50도가 넘는 데다, 유독 가스가 분출되는 위험 지역이다. 던전이 아닌 필드긴 하지만, 평균 필드 몬스터의 레벨이 50레벨을 훨씬 넘는 곳. 자신들이 고작 연병장 흙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때, 이 사람은 그 지옥불 속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단 말인가? “형님…. 괜찮으십니까? 몰골이….” “아, 이거요.” 이성환의 물음에, 이건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셔츠를 툭툭 털었다. 검은 재가 풀썩 날렸다. “조금 뜨거운 데서… 씨름 좀 하고 와서 그렇습니다.” “뜨거운 데… 라면?” “불장난 좀 쳤거든요. 환기가 잘 안 되는 곳에서.” 불장난? 환기? 전인욱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기가 안 된다는 건, 밀폐된 지하 동굴이나 화산 내부. 그러니까 단순 필드가 아닌… ‘던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건율이 그나마 갈 만한 용암 지대의 던전이라면……. ‘라바 네스트. 거기밖에 없는데?’ 무려 공략 적정 레벨이 60레벨인, 극도로 위험한 던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쳤다… 진짜 광기야.’ 이성환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이건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역시… 남들이 쉴 때도 한계를 시험하고 오셨군요. 그 열기… 느껴집니다.” “뭐, 한계까지 밀어붙이긴 했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건율이 피곤한 듯 목을 돌리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저 무심한 태도. 목숨을 건 수련을 하고 와서도, 마치 동네 사우나라도 다녀온 것처럼 말하는 저 담담함. “그럼, 전 씻어야 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 예! 푹 쉬십쇼!” “편안한 밤 되십시오, 형님!”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군기가 든 목소리로 배웅했다. 이건율은 터덜터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띵-! 이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가 사라졌다. 로비에는 여전히 매캐한 유황 냄새만이 감돌았다. 전인욱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이성환을 툭 쳤다. “성환 님.” “예, 형님.” “저희도 내일… 새벽같이 나가죠.” “동감입니다. 연병장이 아니라, 더 험한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두 사내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 같았다. 저 독종 같은 인간을 따라잡으려면, 아무래도 휴식은 사치인 것 같았다. 12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틀이 지났다. 그러니까 개인 정비시간으로 주어졌던 이틀 전부를… 나는 모두 털복숭이 아저씨와 함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보냈다는 말이었다. “수고했네.” “저야 뭐… 영감님께서 고생하셨죠.”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난, 기어이 필요했던 철궁을 얻을 수 있었다. 2일이라는 말도 안 되도록 짧은 시간에, 목궁도 아닌 철궁을 완벽하게 제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한계 이상의 열기를 뿜어낼 수 있는 이그니스의 화로와 그의 망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해냈다는 게 중요했다. └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수련하거나 1레벨이라도 올려보겠다고 사냥터 돌아다니던데. └ 2일 안에 장비 제작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닐까 ㅋㅋ └ 아무튼 이 ㅅㄲ는 보법이 다르다고? └ ㄹㅇㅋㅋ 게다가 고생해서 얻은 이 활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이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작품이로군.” “저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영감님.” 물론 제작의 대부분을 맡았던 이그니스는, 마지막까지 아쉬움에 잔소리를 해댔지만 말이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네만… 굳이 장비의 한계를 봉인하는 그 마력 회로를 새겼어야 했나, 그게 아직도 아쉬울 따름이야.” 일단 내 입장에서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레벨제한 완화’ 옵션이 최대치인 –65에 거의 붙어줬다는 점이었고. 거기에 더해 티어도 7티어가 나와줬다는 점이었다. 이 황금의 철궤로 제작 가능한 장비가 보통 6티어인데, 이건 아마 이그니스 영감의 대장장이 스탯 버프 때문인 듯했다. 〓〓〓〓〓〓〓〓〓〓〓〓〓〓 태양의 궤적 분류 : 장비 – 장궁 레벨 제한 : 3 (67-64) 등급 : 전설 티어 : 7T 내구도 : 1,225 / 1,225 주 능력치 공격력 +163 - 옵션 화염 추가 피해 +25% 최대 마력 +35 물리 관통력 +15% - 고유효과 * 왕가의 혈통 몰락한 왕가의 비전 마력 회로가 완벽하게 이식되었습니다. 착용 레벨 제한이 64만큼 감소합니다. * 열기의 고동 시위를 당길 때마다 활대가 붉게 맥동하며, 화살에 [고열(High Heat)] 속성을 부여해 적중 시 대상을 불태웁니다. * 염화의 인 불태워진 대상을 처치할 때마다, 착용자가 입히는 모든 화염 피해량이 180초 동안 2%만큼 증가합니다. - 설명 전설의 대장장이 ‘이그니스’가 신화 등급 재료 [황금빛 철궤]를 사용하여 제작한 역작입니다. 〓〓〓〓〓〓〓〓〓〓〓〓〓〓 게다가 마력 35도 깨알같이 지금의 내 상황에서 가장 소중한 옵션이었고…… 고유능력도 무려 세 종이나 붙었으니. 이 정도면 상당히 만족한다. 아마 50~60레벨까진 이 활로 충분할 것 같은데……. 성좌 형님들의 반응만 봐도, 이 활이 얼마나 괜찮은지 알 수 있었고 말이다. └ 잠깐;;;;; └ 옵션이 뭔가 이상함 ㅇㅇ; └ 7티어 전설을… 시작의 섬에서 쓸 수 있다고? └ 레벨 제한 -64??? ㅋㅋㅋㅋㅋ 폭풍의 눈이 –43아니었냐;;;; └ 왕가의 혈통은 또 뭔데ㅅㅂ 이건 아예 처음 보는 고유능력인걸? └ 와씨;;; 7티어 전설이 렙제 3? 이건 좀 기괴한데;;;;; 후후. -형님들, 이거 얼마쯤에 팔릴 것 같습니까? └ 7티어 전설에 상옵이니까… 이 정도면 보통 2~3만LP쯤 된다고 봐야 할 듯 ㅇㅇ; └ 렙제 완화 가치를 얼마 쳐줘야 할지 감이 안 오네;; └ 최대 4만 LP쯤 하려나? 후후, 그저 웃지요. 이 형님들… 지구에서 저레벨 장비가 얼마나 인기인지 잘 모르시는 모양이다. 아마 폭풍의 눈 최근 거래가 보면, 깜짝 놀라실지도? 검색어: 폭풍의 눈 [폭풍의 눈] 분류: 장비 – 장궁 레벨 제한: 45 등급: 신화 티어: 9T 최근 거래가: 182,500 LP └ ???? └ 18만????? └ 폭풍의 눈이 18만?? 예. 그러니까 제 생각엔… 아마 이것도 5만은 가볍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요? 폭풍의 눈이 비슷한 스펙 장궁대비 35% 정도 더 비싸니까……. 랩제 3인 태양의 궤적은 한 1.5배 비싸도 팔리지 않으려나? └ 와;; └ 진짜 5만 넘게 팔릴지도 모르겠는데? └ 주인만 잘 만나면 6만도 가능한 거 아니냐……. 이래서 레벨 제한 완화 옵션이 무서운 거다. 결국 가격은 ‘누가 쓸 수 있느냐’가 결정하는 법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이그니스 영감님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아쉬우면 일 좀 더 시켜드리지 뭐. “영감님.” “으음?” “의뢰 하나 더 드립니까?” 이그니스의 눈이 번뜩였다. “뭐라고?” “남은 철궤 있잖습니까. 그거로 만들고 싶은 거 한 번 만들어 보시면 어떻습니까?”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남은 [황금빛 철궤]를 확인했다. 활 제작에 6할 정도 사용했지만… 남은 양으로도 충분히 뭔가를 만들어 볼 만하다. 철궁같이 통짜 금속을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이 정도 분량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의뢰비는… 이 녀석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철궤를 구해다 드리는 거로 하겠습니다.” “……!” 이그니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제시한 보상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재료였으니까. 심지어 의뢰 자체도 만들고 싶은 걸 아무거나 만들어 보라니. 이건 손이 근질거리는 상태인 이그니스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그런 제안이었다. “자네… 진심인가?” “뭐, 그만큼 영감님을 믿는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미 뽕은 뽑았다. 그냥 거래소에 팔았으면 비싸 봐야 5~8천LP 정도나 했을 물건이었는데……. 이미 ‘태양의 궤적’ 하나로 그 열 배가 넘는 이득을 본 셈이었으니까. 게다가 쓰다 남은 철궤는 상품성도 떨어지다 보니, 팔아봐야 몇백 LP나 나오면 다행일 터.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 투자는 ㅅㅂ; └ 노인네 그만 부려먹으라고! └ 와… 자투리까지 이렇게 알뜰하게 써먹는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그니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영감님이 진짜 만들고 싶은 게 뭔지, 저도 좀 보고 싶거든요.” └ 그러니까… 개 쩌는 거 만들어서 돈복사 좀 시켜달라. 지금 이 말 아님? └ ㅇㅇ;; 방장쉑 양심 가출했누; 어허. 지금 영감님 감동하시는 거 안 보입니까? 이 형님들이 자꾸 초를 치려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그니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어쩌면 감사함 같은 것. “크흠.” 이윽고 이그니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건 숨기지 못했다. “좋네. 그 제안,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대신 시간은 좀 걸릴 거야. 10년 만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 건데… 서두를 수는 없으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급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남은 [황금빛 철궤]를 이그니스에게 건넸다. 늙은 대장장이는 그것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황금빛 금속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맙네.” └ 아니, 이그니스야;; 너 당한 거라니까? └ 자선사업하면서 지금 고마워하고 있는 거임? └ 선량한 NPC 등쳐먹는 데이브 ㄷㄷㄷ;; 띠링-!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이그니스의 역작] 목표: 이그니스가 제작을 완료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보상: ??? 뭔가 이렇게 퀘스트까지 생성되니까… 묘하게 설레는 기분인걸? 마치 만기와 수익률이 랜덤인 적금을 들어둔 기분이랄까. 랜덤이긴 한데 저점이 상당히 높은… 그런 고수익 상품으로 말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게.” 나는 이그니스의 작업장을 나섰다. 뒤에서 화로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저 영감, 당장 오늘 밤부터 작업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잘됐네.’ 나는 영롱한 [태양의 궤적]의 자태를 다시 한 번 감상하며,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이로써 멘토링 일정을 위한 준비물까지 깔끔하게 준비된 셈이었다. * * * 적막이 감도는 늦은 밤. 청룡회 길드 마스터 최재민은 미간을 좁힌 채 홀로그램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지난 ‘포지션 결정전’에서, ‘원거리 딜러’ 포지션으로 포지션이 결정된 참가자들의 그레니스 협곡 플레이 영상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총 100명의 참가자들 중, 원거리 딜러는 총 열여덟 명. 이들의 영상을 꼼꼼히 분석하는 데만, 최재민은 이틀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멘토링 일정을 위함이었다. “확실히… 전반적으로 참가자들 수준이 높단 말이지.” 사실 원거리 딜러 참가자들의 점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전반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인재가 비교적 부족한 편일까? 재민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전장이… 그레니스 협곡이었으니까. ‘여기서 이 정도면… 상당히 훌륭한 거지.’ 강한 산바람을 넘어 협곡을 따라 돌풍이 몰아치는 그레니스 협곡의 환경은, 궁수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필드다. 그러니 재민은 이 포지션 결정전의 점수 결과를, 활을 들었던 참가자들에게 최소 100점 이상 더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 이 한 명의 참가자만 제외하고 말이었다. [참가자 : 이건율] [원거리 딜러(Archer) 1위 : 1,078 pts] [전체 포지션 1위 : 2,038 pts] ‘이건율이라…….’ 재민이 마지막으로 돌려 보고 있는 영상은……. 당시, 압도적인 점수 차로 총합 1위를 거머쥔 이건율 참가자의 라이브 캠 영상. “흐음.” 최재민의 입에서 미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영상 속의 이건율은 분명 대단했다.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적들의 공격을 피해내는 동물적인 감각과, 지형지물을 활용해 사각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전술안(戰術眼)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 센스 하나만큼은, 랭커인 재민조차 감탄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재민이 주목한 것은 그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허점’이었다. ‘잔머리를… 너무 굴렸어.’ 화면 속 이건율은 활을 들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적에게 접근했다. 보통의 궁수라면 거리를 벌리며 안정적인 딜링 포지션을 잡으려 애썼겠지만, 이 녀석은 반대였다. 오히려 적의 코앞까지 달려들어 활시위를 당기거나, 심지어 활대로 적의 공격을 쳐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최재민의 눈에 비친 이건율은… 결코 원거리 딜러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걸 영리하다고 해야 할지…….’ 치이익- 최재민이 손짓으로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활을 쏘다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검과 방패를 주워 들고 과감하게 돌진하는 장면이 나왔다. 심지어 검과 방패를 다루는 솜씨도 대단했다. 재민은 이 참가자가 이렇게 플레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돋보이고 싶어 한단 말이지. 이게 아무리 예능이라고 해도 말이야.’ 재민의 눈에 비친 이 참가자는, 잘하는 게 너무 많은 능력자였다. 그래서 거꾸로… 하나에 집중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원거리 딜러라면 협곡에 부는 바람을 회피할 게 아니라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인데……. 활 말고도 재능이 넘치다 보니, 굳이 바람을 극복할 생각을 하기보다 포지션을 근거리로 잡아버린 것이다. ‘재능만 보면, 정석적인 궁술로도 충분히 경지에 닿을 만한 친구인데…….’ 누군가는 이건율의 플레이를 보고 ‘올라운더의 탄생’이라며 환호할 수도 있겠지만, 뼈 굵은 1세대 헌터인 최재민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회피’였다. ‘자신의 사격 실력에 완전한 확신이 없는 거야.’ 원거리 딜러의 생명은 ‘신뢰’다. 내 화살이 백발백중으로 적의 급소를 꿰뚫을 것이라는, 자신의 손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 믿음이 있어야 적이 달려와도 물러서지 않고 시위를 당길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건율의 플레이에는 그 ‘믿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바람이 좀 분다고 자꾸 거리를 좁혀 ‘확정 타격’을 넣으려 하고, 활 하나로는 불안하니 자꾸 다른 무기에 손을 대는 것. ‘재능은 차고 넘치는데… 겉멋이 잔뜩 들어서는…….’ 전형적으로 피지컬만 믿고 설치는 천재형 유망주의 폐해였다. 아마 지금까지는 압도적인 재능으로 찍어 눌러왔겠지만, 상위 던전으로 갈수록 저런 근본 없는 플레이는 독이 된다. “아까운 재능이야. 저 좋은 하드웨어를 가지고 고작 싸움꾼 흉내라니.” 최재민은 혀를 차며 영상을 껐다. 안타까웠다. 누군가 옆에서 제대로 된 ‘기본기’만 잡아줬더라면, 저 녀석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사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곧 1세대 헌터로서의 묘한 책임감으로 번졌다. ‘이런 수준의 친구가 잡캐가 되어 망가지는 걸… 멘토로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탁- 최재민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멘토링 계획표를 집어 들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본. 이번 멘토링에서 그것 하나만큼은, 이 재능 넘치는 친구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볼 생각이었다. 12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2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아침이 밝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포지션별 멘토링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길게 자서 그런지, 컨디션도 상당히 좋다. 어제 거의 10시쯤 잠들었나? 합숙이 시작되고 나서 처음으로 내 본래 취침 시간을 지켜본 것 같은데……. “흐아암.” 그런 생각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는데, 옆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짬뽕… 라면…….” “…….” “국물… 좀 더….” 이 정도면… 라면이 진짜로 소울 푸드인가? 어지간히도 맛있게 먹더라니……. 혹시 내가 재벌가 따님의 입맛을, 인스턴트 조미료에 버금가는 게이트 부산물로 타락시켜버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주 조금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하는데……. “그만 일어나시죠, 소희 님.” 나는 침대 등받이를 툭툭 치며 강소희를 깨웠다. 지금이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비하고 나가려면 일어나야 하기는 하는 시간대였다. “으음… 5분만…….” “오늘 멘토링 날입니다. 늦으면 서지혁 멘토가 아주 좋아하겠군요.” “……!” 멘토링이라는 단어에 강소희가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에 멍한 눈빛. 평소의 칼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몰골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벼, 별일 없었죠? 제가 잠결에 실수를…….” “짬뽕 국물 리필을 요청하신 것 말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윽.” 강소희의 귀가 조금 빨개진 것도 같다. “얼른 씻고 나가죠. 각자 집합 장소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야겠네요.” * * * 호텔 로비 앞에는, 참가자들을 태우기 위한 마나 캐리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캐리지 메이트(?)가 조금 다를 예정이었다. 원래 항상 캐리지에 함께 타던 멤버들은 네 사람 모두 각각 다른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고. 포지션별 멘토링은 각 멘토가 소속된 길드나 특화된 훈련장에서 진행되기에… 행선지가 모두 제각각이었으니 말이다. “마법사 포지션은 ‘마력의 탑’으로 간다고 했었나?” “네. 서지혁 멘토님이 섭외한 곳이라더군요.” 강소희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고는 건너편 권유나가 탑승하는 캐리지를 향해 휙 하고 걸어갔다. “저녁에 봐요.” “예. 고생합시다.” 강소희를 마법사 팀 캐리지에 태워 보내고, 나 역시 원거리 딜러 캐리지에 올랐다. 캐리지에 탑승한 인원은 나 포함 셋뿐이었다. S등급 참가자들 중, 원거리 딜러가 셋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덜컹-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와 은은한 마법 등불로 장식된 S등급 전용 캐리지 내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묘하게 차분하면서도 팽팽한 공기가 느껴진다. “아, 건율 씨 오셨어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창가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배주하였다. 그녀는 작은 손거울을 든 채,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정돈하고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당연하죠. 멘토링도 방송에 나가잖아요. 급하게 준비했다가 화면에 빵떡처럼 나오면 곤란하다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손거울을 접어 넣었다. 뭔가 인플루언서의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진달까. 확실히 참가자들 중 권유나와 배주하는, 외모를 가꾸는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훈련장이 아니라 마치 화보 촬영장에 가는 모델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는 완벽한 세팅. ‘뭐, 어쩌면 예능 출연자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저런 게 더 프로페셔널한 건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S등급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마력총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한도진의 옆자리였다. 치릭, 철컥. 그는 내가 옆에 앉았음에도 관심조차 없는 듯, 자신의 주무기인 은색 마력 권총(Magic Pistol) 두 정을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도진도 멀끔하게 머리를 넘겨 꾸미고 나온 모습이… 배주하 못지 않게 세팅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거…… 이러니까 내가 비정상처럼 느껴지는걸? “그나저나 건율 씨.”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려는데, 건너편 자리의 배주하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의상… 좀 프리하시네요?” “예? 그냥 활동복인데요.” 지급받은 헌터즈 스쿨 트레이닝복에, 낡은 운동화. 어제 대장간 작업을 하느라 묻은 먼지는 털어냈지만, 옷깃이 구겨진 자국은 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흐음….” 배주하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턱을 괴었다. 마치 난해한 현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평론가 같은 표정이었다. “건율 씨는 커스텀 슈트 같은 건 따로 없어요?” 그런 가성비 내다 버린 돈지랄을 내가 왜……. “아쉽다. 제대로 맞추면 확실히 태가 다른데.” “그… 래요?” “실력 워낙 좋으시니까, 비주얼도 한 번 신경 써 봐요.” “그런데 전… 편한 게 좋아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겠네요.” “…전략이요?” “네. 내추럴한 느낌. 잘 다듬어진 우리랑 다르게, 거칠고 투박한 매력으로 차별화를 두려는 거잖아요? 일부러 셔츠 깃도 짝짝이로 하신 거죠? 보니까 계산된 디테일이었네.” 아니, 저기요. 그냥 다림질하기 귀찮아서 입고 나온 건데요. “…….” 하지만 배주하는 이미 자기만의 세상에서 결론을 내린 듯했다. “나쁘지 않아요. 도진 씨는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모던’ 스타일이고.” 한도진은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권총의 레이저 포인트를 점검하고 있었다. “저는 고전적인 ‘클래식’ 느낌이니까… 건율 씨의 그 빈티지한 감성이 더해지면… 우리 셋, 그림이 꽤 재밌게 나오겠는데요?” 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배주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뭔가… 분명 대화를 하고 있긴 한데, 소통이 되는 느낌은 아닌 기분. ‘한국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질 줄이야.’ 어쨌든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캐리지는 출발했고. 나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창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잠시 후 도착할 곳은 청룡회 제3 훈련장. 일명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최재민 멘토라….’ 사실 나는 이제까지 헌스쿨에서 진행했던 일정들 중에서, 이 멘토링 일정이 가장 기대된다. 방송 분량이나 재미 같은 측면에서의 기대가 아니라, 멘토링 그 자체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거다. ‘드디어 진짜 랭커를… 경험해볼 수 있는 건가?’ 물론 검희라는 랭커를 우연치 않게 경험해보긴 했지만. 그건 너무 찰나의 순간이었고, 이번에는 목적 자체가 멘토링이다. 게다가 내가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최재민은 실버나이츠의 그 이현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설적인 랭커. 아무리 예능이라고 해도 그런 이에게 멘토링을 받는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떤 다른 차원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생길지도 모른다. ‘카이람……. 그에게서 처음 느꼈던 정도의 충격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오래전. 내 첫 번째 궁술 스승이었던 적멸의 사수 카이람(Kairam). 두 눈을 가린 채로도 ‘신을 쏘아 떨어뜨린 자’라는 이명을 얻었던 전설적인 궁수 NPC를 떠올린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30분 정도 지났을까? 덜컹-! 마나 캐리지가 멈췄고, 우린 청룡회 길드의 루미스 지부 훈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 * * 새벽 2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임민정은 계산대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손님이 뚝 끊긴 시간대. 평소라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겠지만, 오늘 그녀의 눈은 스마트폰 액정을 뚫어버릴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와… 미쳤다. 폼 미쳤다, 진짜.”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홀린 듯 ‘다시 보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에서는 <헌터즈 스쿨> 공식 채널에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미공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Shorts : 동장군 레이드 비하인드 (Feat. 이건율)] 영상 속,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 한복판. 거대한 동장군이 얼음창을 내리꽂으려던 찰나, 이건율이 품에서 붉은 빛깔의 마력총, [이그니션 버스터]를 꺼내 들었다. [타앙―!] 심지어 한 발이 아니었다. 사납게 휘두르는 언월도를 유려한 몸짓으로 피해내며, 곡예와 다름없는 움직임으로 마력탄을 연사하는 이건율. [탕- 탕- 타탕-!] 놀랍게도 이건율의 마력탄들은 전부 다 동장군의 투구에 격중하였고. [쩌적-!]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시퍼런 얼음 투구가 산산조각 났다. 그와 동시에……. [지이잉- 철컥-] 시뻘겋게 달아오른 총신에서 터져 마지막 포격음이 터져 나온다. [콰앙-!] 단 한 발. 지금까지의 마력탄과 그 위력부터가 확연히 달라 보이는 붉은 마력탄이… 투구를 잃어버린 동장군의 머리에 격중했으며. 그 거대한 동장군이 설원 위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나의 겨울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총구의 연기를 무심하게 불어내는 이건율의 표정은… 그야말로 ‘유죄’였다. “헐… 타격감 뭐야…….” 민정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언월도를 휘두르며 설원을 누빌 때도 눈에 띈다는 느낌 있었지만, 총을 드니까 갑자기 장르가 느와르로 바뀌어 버린다. 사실 그녀의 ‘1픽’은 듬직한 탱커, 이성환이었다. 친구인 시율에게도 ‘남자는 역시 떡대와 피지컬이다’라며 이성환을 열렬히 영업했었는데……. ‘어떡하지. 나… 픽이 바뀔 것 같은데.’ 영상을 볼수록 심장이 더 크게 반응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정은 떨리는 손으로 메신저를 켰다. 가장 먼저 메시지를 보낸 대상은, 친한 사촌 동생이자 자신에게 이건율을 처음 영업했던 헌스쿨 내부자(?)였다. [나 : 예림쓰…… 네가 옳았다…….] 잠든 건지 답장이 오지 않자, 이번에는 절친에게 톡을 날렸다. [나 : 야, 이시루. 자냐?] [이건율보유국 : ㅇㅇ 자는 중.] [나 : 뻥치시네. 야 큰일 남. 나 최애 바뀔 듯.] [이건율보유국 : ?? 이성환이 나라라며; 누구로?] 민정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비장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나 : …건율 님.] [나 : 솔직히 저 얼굴에 저 사격 실력이면 그럴 수 있는 거잖아;;ㅠ] ‘1’이 사라지고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마 시율이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은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진심이 담긴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이건율보유국 : ……너 돌았니? 약 먹을 시간 지남?] 친구의 경멸 어린 반응도 조금은 이해되었지만, 사실 민정은 이미 마음이 굳어진 상태였다. ‘본인 닉네임도 이건율보유국이면서……. 그리고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걸?’ 민정은 확신에 찬 손길로 인터넷 뉴스 창을 켰다. 예상대로, 포털 사이트 연예/스포츠면 메인은 온통 <헌터즈 스쿨>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헌터즈 스쿨 2화 예고] 포지션 결정전, ‘괴물 신인’ 이건율의 주무기는 마력총? [이슈] “데이브 사격 실력, 현역 상위랭크 거너(Gunner) 뺨쳐”… 역대급 원딜 탄생 예감 “거봐, 내 안목이 틀린 게 아니라니까.” 민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댓글 창을 확인했다. 여론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베스트 댓글 1] : 와, 솔직히 언월도 쓸 때도 간지였는데, 연사 당기는 거 보니까 빼박 [거너(Gunner)]임. 저건 노력으로 되는 무빙이 아니다. -[베스트 댓글 2] : ㅇㅇ 동장군 패턴 씹고 무빙샷 꽂는 거 봄? 에임이 탈인간급임. 이번 시즌 원딜 1티어는 데이브다. 반박 시 님 말이 다 틀림. -[베스트 댓글 3] : 제발 다음 화에서 총 쏘는 거 많이 보여줬으면 ㅠㅠ 최재민 멘토 만나면 포텐 터질 듯 ㄷㄷ 모두가 이건율을 ‘마력총을 쓰는 원거리 딜러’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긴, 그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고도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저런 명사수가 총을 안 들면 국가적 손실이지.’ 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 화면 속, 총을 든 이건율의 모습을 쓰다듬었다. “아, 얼른 다음 주 화요일 왔으면 좋겠다. 건율 님 총 쏘는 거 또 보고 싶어.” 그녀는 기대에 부풀어, 편의점 계산대 너머의 허공을 향해 ‘빵야’하고 손가락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절친 이시율이 목격했다면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봤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13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청룡회 루미스 지부의 제3훈련장. [바람의 언덕] 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이이잉-! 마나 캐리지에서 내리자마자, 뺨을 후려치는 듯한 거센 돌풍이 우리를 맞이했으니까.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휘몰아치는 삭풍. 보통의 사람이라면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악조건이었지만, 이곳의 주인은 달랐다. “다들 오셨습니까.” 언덕 한복판. 가장 바람이 거세게 부는 절벽 끝에……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청룡회 길드 마스터이자, 대한민국 1세대 랭커인 ‘최재민’. 그가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게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는 기이한 정적. ‘환경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경지라…….’ 나는 내심 감탄했다. 저건 단순히 힘으로 버티는 게 아니다. 바람의 결을 읽고, 그 흐름에 동화되어 바람이 스스로 피해 가게 만드는 경지. 이 아재가 어떤 종류의 클래스를 가지고 있을지… 조금은 짐작이 될 것도 같았다. └ 캬ㅑㅑㅋㅋㅋ └ 최재민 포스 지리네 ㄷㄷ └ 이 형님 요즘 스트리밍도 잘 안 켜던데. └ 근데 ㅅㅂ 라이카 물리 엔진 고장남? 어떻게 저러지? └ ㄴㄴ 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거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참가자들이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A~F등급 참가자들은 물론, 방금 나와 함께 도착한 배주하와 한도진까지도. 최재민은 그런 멘티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궁수에게 있어 바람은 적이 아닙니다. 함께 협력해야 할 파트너일 뿐.” 그는 멘티들을 둘러보며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여러분에겐 첫 번째 배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멘티들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하아아아- 거세게 몰아치던 광풍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멘토링을 시작하기 전에… 각자 준비해 온 장비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재민의 두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왔는지, 무기를 보면 알 수 있는 법이지요.” 참가자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되어 각자의 장비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최재민은, 먼저 도착한 멘티들의 장비부터 차례로 점검을 시작했다. 때문에 마지막에 도착한 S급 참가자들의 순서가 올 때까지는 꽤 기다려야 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 차례가 도래했을 때.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배주하였다. “제 파트너는 이 아이예요.” 촤아악-! 그녀가 허공에서 인벤토리를 열자, 푸른빛이 감도는 화려한 장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화 등급 9티어, [폭풍의 눈]. 활대 전체가 반투명한 크리스탈 느낌의 재질로 되어 있어, 햇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나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호오.” 최재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폭풍의 눈]이로군.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유려한 곡선…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그쵸? 예쁘죠?” 배주하가 뿌듯한 표정으로 활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최재민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활이 화려하다고 해서 실력까지 빛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명사수는 활이 아니라, ‘눈’으로 말하는 법이니.” “네. 명심할게요.” 배주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동경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참가자 인터뷰에서 본 것도 같다. 배주하가 자신의 우상으로… 최재민 멘토를 꼽았던 것을 말이다. 눈빛을 보니 빈말이 아니었나 본데?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최재민이 이번에는 한도진의 앞에 섰다. 철컥- 한도진이 말없이 은색 마력 권총 두 정을 꺼내 들자, 최재민의 시선이 총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최재민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총이라… 확실히 활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무기지요.” “…….” “기름칠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약실부터 공이치기까지,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된 게 눈에 보이는군요. 한도진 참가자가 이 녀석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것 같습니다.” 최재민은 한도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활이든 총이든 본질은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손끝을 믿고 쏘는 것. 좋은 파트너를 두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도진이 짧게 목례했다. 무뚝뚝한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무기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꽤나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S급 참가자들 중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럼 이번에는… 이건율 참가자?” 최재민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덤덤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차락-!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내 손 위에 적회색의 장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배주하와 한도진의 시선은, 내 활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내가 어떤 활을 쓰는지 궁금했을 거다. 포지션 결정전을 제외한다면 난 단 한 번도 활을 쓴 적이 없었으니까. 우웅- 하지만 잠시 내 철궁에 시선을 주던 배주하는, 곧 흥미를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내 손에 들린 활, [태양의 궤적]은… 방금 전 배주하가 보여준 화려함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었으니 말이다. 광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광의 적회색 활대. 장식이나 문양 같은 건 일절 배제된… 평범한 철궁과 특별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외견. 물론 자세히 본다면 특별함을 느낄만한 부분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지 않고는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들이었다. 활시위를 타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열기라던가, 활대 안쪽에 새겨진 복잡한 마력 회로 등은… 한눈에 볼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보면, 진짜 투박하게 생기긴 했네 ㅋㅋㅋ └ ㄹㅇㅋㅋ 쌀숭이답게 실용적이긴 하다만……. └ 포장하자면 이런 게 바로 상남자 에디션이 아닐까? └ 아ㅋㅋ 마감 예쁘게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고 ㅋㅋ 평범한 외견에 흥미를 잃어버린 다른 참가자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낄낄대며 웃는 반응의 성좌들. └ 낭만이 아니라 야만인데? ㅋㅋㅋ └ 활이 아니라 쇳덩어리 아님? 겁나 무거워 보이네;; └ 보기만 그렇고 그렇게까지 무겁진 않을걸ㅋㅋㅋ 랩제가 3인데 어케 무거움ㅋㅋ 하지만 내 활을 응시하던 최재민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조금 심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뚜벅- 뚜벅- 최재민이 천천히 다가와 내 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투박한 활대에 닿는 순간. 찌릿-! 최재민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 정도까지 응축된 마력 밀도라니…….”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활대 안쪽에 새겨진 복잡한 마력 회로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렸다. 내가 이그니스 영감과 함께 밤새워 새겨넣은 [왕가의 혈통] 옵션 회로였다. 그 정교하면서도 기괴하게 비틀린 회로를 확인한 최재민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 회로…… ‘리미터(Limiter)’를 강제로 해제했군.” “…….” 예상치 못했던 대사에 조금 놀라는데, 그의 말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건율 참가자.” “예, 멘토님.” “고위 장비에 레벨 제한이 왜 붙어있는지 아십니까? 사용자의 마나 회로와 근육이… 그 무기의 출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건율 참가자는, 그 안전장치(Level Limit)를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비슷합니다.” 흐음. 역시 랭커라서 그런가? 꽤 예리한 지적이다. 물론 앞서 보여준 배주하의 활 또한 거의 40레벨에 육박하는 레벨제한 완화 옵션이 붙어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개조가 아닌 태생적인 구조로 인한 것. 반면에 내가 이그니스와 함께 만들어 낸 이 활은, ‘왕가의 혈통’ 옵션을 강제로 새겨넣기 위해 인위적인 마력 회로를 새겨 넣은 물건이다. 그러니 최재민이 볼 땐 위험한 물건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마력의 흐름을 감식한 것만으로 옵션의 종류까지 파악할 수 있다니……. 이건 꽤 놀라운 부분이다. “이건, 어린아이가 바주카포를 쏘겠다고 안전핀을 뽑아버린 격입니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당장의 ‘파괴력’을 얻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으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 지켜보도록 하지요. 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최재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는 이 활을, 사용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마도구(魔道具)와 같은 종류로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왕가의 혈통’ 옵션을 새겨 넣기 위해 필요한 마력 회로는… 어지간한 최상위 등급 마력 회로들과 맞먹을 정도로 높은 출력의 마력이 흐르는 회로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뭐… 직접 써보라 하거나 아이템 정보창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 적당히 둘러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조심해서 사용하겠습니다.” 최재민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내 활에서 손을 뗐다. 이어서 다시 참가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들께 첫 번째 미션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며 최재민이 다시 손을 휘젓자, 잔잔해졌던 바람이 다시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했다. 다만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광풍 수준의 거친 바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쯤 되자,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바람을 다룰 수 있다면…… 역시 [천공의 사수]겠지.’ 또한 내 짐작이 맞다면, 멘토링 기간 동안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듯했다. 저건 내가 아는 궁수 계열의 상위 티어 2차 히든 클래스 중… 유일하게 전직해보지 못했던 클래스였으니까. 천공의 사수로 전직하려면 ‘비룡의 역린’이라는 특수 전직아이템이 필요한데…… 이거 드랍률이 지옥이거든. 아마 저 아재도 본인이 직접 파밍한 건 아닐 거다. 누군가 운 좋게 얻어서 거래소에 올린 걸 샀거나… 그랬을 거로 추측한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리는데……. 최재민이 본격적으로 미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원거리 딜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면… 당연히 명중률이겠지요?” 천천히 뒤로 돈 최재민이, 훈련장 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멀리, 약 50m 거리에 붉은색 과녁 수십 개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사로에 서서, 한번 저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어 보십시오.” 최재민은 좌중을 둘러보며 엄중하게 경고했다.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바람이 조금 더 강해졌다. 13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최재민이 내건 미션의 규칙은 간단했다. 각자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의 사로에 주어진 과녁 정 중앙을 한 번이라도 맞출 것. 장비는 자신의 것을 사용해도 되지만, 사격은 총 10회만 진행할 것. 그러니까 10번의 기회 안에 과녁 중앙의 10점을 한 번만 맞추면 된다는 건데…….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으음.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미션의 목적이 뭔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으니 말이다. ‘바람으로 좀 장난질을 쳤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거리를 미션으로 준다고?’ 50m라는 거리는, 사실 내 기준에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 참가하는 올림픽 대회에서도 70m에 과녁을 놓고 사격하는데……. 그보다도 가까운 거리를, 나름 재능있다는 헌스쿨 루키들에게 첫 미션으로 주다니. ‘움직이는 과녁도 아니고, 고정된 과녁을 말이지.’ 뭐, 별말 없이 쏴보라고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사격 자세 등 기본기 정도를 보려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엄포까지 놓으면서… 이런 손쉬운 미션을 준다? 이건 뭔가 냄새가 났다. ‘과연 최재민 정도 되는 랭커가… 평범하게 과녁을 맞히는 것 따위로 만족할까?’ └ 어… 그럼 무슨 숨겨진 의도라도 있다는 거임? └ 감이 안 잡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최재민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바람을 다스릴 수 있는 최재민의 능력. 여기에 함정이 있었네.’ 보통의 사격술은 ‘조준’과 ‘호흡’이 생명이다. 바람을 읽고, 오조준을 계산하며…… 숨을 멈춘 뒤 격발하는 그 일련의 과정. 하지만 누군가 바람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비틀어버린다면? 그 ‘정석’이 오히려 독이 된다. ‘계산을 끝내는 순간, 바람은 이미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내가 조준하는 데 1초를 쓴다면, 그 1초 사이에 바람의 방향은 두 번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이건 평범하게 바람의 흐름을 읽어 과녁을 맞추는 시험이 아니다. 바람이 와류를 일으키며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과녁을 맞춰 내는, 문제해결 능력을 보겠다는 시험. ‘역시 랭커의 의도가…… 그렇게 단순할 리 없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손에 든 활을 고쳐 잡았다. 하마터면 함정에 걸릴 뻔했다. └ 어… 해석이 그렇게 되나? └ 그럴싸한 것 같기도 한데……. └ 근데 형들; 바람 이렇게 부는데 50M과녁 10점 쏘는 게 그렇게까지 쉬운 일임? └ 몰?루? └ 상대는 대이브다…… 평범하게 생각해선 안 돼……. 어쨌든 난 지금부터, 최재민이 강제로 만들어 낼 불규칙한 바람의 흐름을 완벽히 파훼해 보일 생각이다. 오케이. 출제자의 의도, 완벽하게 파악했고. “후읍.” 생각을 마친 나는, 회색빛 철궁의 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기긱- 그러자 활대가 비명을 지르며, 붉은 열기가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이 한 발에, 내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모든 마력이 빼곡히 담기기 시작하였다. 치이이익- 바람으로 길을 어지럽힌다면, 강제로 길을 뚫으면 된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활대의 붉은 빛깔이 점점 더 짙어졌다. * * * 강민우는 최근, 꽤 다양한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지난 1차 미션이었던 ‘미다스의 정원’에서…… 가장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전까지 난…… 자본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했었지.’ 돈? 아이템?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서……. 갈고닦은 재능과 실력이야말로, 가진 자본의 가치를 더욱 증폭시켜준다는 사실까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건율은 분명 돈에 초연한 인간이었어. 하지만 필요할 땐 최대한으로 이용해 보였지.’ 처음엔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이건율이라는 존재.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미궁을 공략해 나가는 그를 보며…… 민우는 게이트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숨 막히는 벽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 끝에서는 결국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건율은 그에게… 자본이라는 무기를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가장 강력한지 보여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근 강민우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능이야 저 괴물 같은 놈을 이길 수 없겠지만, 자본은 내가 압도할 수 있을 테지.’ 결국 헌터로서의 성공을 좌우하는 데에 재능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파라미터가 존재한다면. 한쪽에서 남들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자신에게도… 분명 유리한 지점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자신에게 부족했던 나머지 한쪽의 결핍을 최대한 메워 나간다면. 반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이라는 무기는 더욱 강력해질 터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철컥- 사로에 선 강민우는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사격을 평가하는 건… 다름 아닌 전설적인 사수 최재민. 그의 멘토링을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이 첫 미션에서 훌륭한 성과를 보여야만 했으니까. ‘침착하자. 흔들리지 마.’ 협곡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바람을 느끼며, 강민우는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역시 기준점이 높은 랭커라 그런지, 첫 미션부터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과녁이야 50m정도로 가까운 편에 속했지만……. 이 정도의 강풍 속에서 과녁 안의 작은 점을 맞추라는 건, 100m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후우,” 강민우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잡았다. 세광 그룹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집약체. [화이트 노바 : 프로토타입 (White Nova : Prototype)] 예전의 그였다면, 이 압도적인 장비 스펙만 믿고 적당히 사격에 임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릭- 조준경에 달린 자동 에이밍 기능까지도 비활성화시켰다. 지금은 말 그대로 멘토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상황이니…. 이런 편의성 옵션은 오히려 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해 보는 거야.’ 강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장비빨이 아니라 바람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감각과, 흔들림 없는 자세였다. 어제 자기 전에 읽었던 탄도학 교본의 내용도, 머릿속으로 침착하게 복기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석적인 탄도 계산까지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풍속 13m/s. 방향은 2시에서 8시.’ 복잡하고 머리 아픈 과정이었지만, 필요하다 생각되니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오조준 2.5 클릭 수정. 호흡 정지.’ 그는 바람이 불규칙하게 때리는 타이밍을 참고 기다렸다. 1초, 2초, 3초. 그리고 바람의 기세가 아주 미세하게 꺾이는 그 찰나. 타앙-! [화이트 노바]의 총구에서 순백의 섬광이 뻗어나갔다. 마력탄은 바람을 타고 휘어지며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퍼억- 8점. 10점 정중앙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였다. ‘……아직이야.’ 강민우는 실망하는 대신, 냉정하게 오차를 수정했다. 바람을 읽는 감각이 조금 무뎠던 것뿐이다. 그러니 다시…. 조금 더 정밀하게. 타앙-! 타아앙-! 세 발을 더 쏘자, 드디어 9점 라인 안에 안정적으로 마력탄이 안착했다. 점점 영점이 잡혀가고 있었다. 강민우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주변의 다른 참가자들이 어떤 성적을 내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강민우의 감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오로지 과녁, 그리고 바람의 흐름뿐이었다. ‘지금.’ 타앙-! 다섯 번째 탄환이 발사됐다. 그리고 잠시 후. 터엉-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과녁의 정중앙 10점 구역에 정확히 구멍이 뚫렸다. “후우…….” 강민우는 총을 내리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짜릿했다. 돈으로 산 명중 보정 아이템이 터졌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계산과 감각으로 만들어 낸 결과였으니 말이다. “훌륭하군.”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다가온 최재민 멘토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비는 화려하지만, 사격술은 지극히 정석적이었습니다. 바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진지했다고 해야 할까…….” 최재민은 꽤 흡족한 눈빛이었다. 그가 알기로 세광 그룹의 손자인 강민우는, 전형적으로 ‘장비에 의존하는 플레이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누구보다 기본기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지금처럼 바람을 이기려 들지 않고, 느끼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 안에 정답이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강민우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본의 힘’이 아닌 ‘실력’으로 칭찬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1세대 랭커이자 멘토인 최재민의 칭찬이라니.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하면… 되는구나.’ 강민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은 사격 기회는 이제 총 다섯 번. 이 기회 중 몇 발을 10점 자리에 꽂아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욱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13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검사에게 검기가 있고 신검합일의 경지가 있듯, 궁사에게도 활에 마력을 담는 기술적 경지가 존재한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로 인해, 착용한 활 무기의 공격력이 150%만큼 증가합니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로 인해, 활을 무기로 삼을 때 발동하는 모든 스킬의 마력 소모량이 50%만큼 감소합니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로 인해, 치명타 피해량이 2배 증가합니다.] 다만 이 기술은, 신검합일보다 좀 더 어려운 편인데… 활이 아닌 ‘화살’이라는 투사체가 매개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고도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나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최재민의 트릭을 파훼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뭔 소린지 나만 이해 안되는 거 아니지 형들?;; 내 계획은 간단했다. 최재민이 바람으로 장난질을 치더라도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순간 물리적으로 바람이 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리는 것. 그러기 위해서 우선 한 발의 화살을 희생시켜야 했다. ‘첫 번째 화살은… 쇄빙선의 역할을 하는 거지.’ 일단 이 첫 번째 화살에 마력을 과도하게 주입한다. 그리고 [태양의 궤적]이 가진 고유 특성인 ‘화염 속성’을 기폭제로 삼아, 화살이 날아가는 도중 공기마찰을 일으키며 폭발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전방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팽창했다가 터져 나가며, 일시적인 ‘진공 터널’이 형성된다. 그게 바로, 레이싱에서 흔히 말하는 슬립 스트림(Slip Stream) 현상. ‘여기에 이어서 두 번째 화살을 곧바로 쏘아 보내면… 그 무풍지대(無風地帶)를 통과해 과녁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아무리 최재민이라도 진공 상태에서는 바람을 일으킬 수 없으니… 이건, 이론상 완벽한 공략법인 것이다. 쐐애애애액-! 물론 첫 번째 화살이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에, 이미 두 번째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고 있어야 한다. 진공 상태가 그리 오래갈 리 없으니, 이 모든 과정이 초단위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청난 속도의 속사 기술까지도 필요한, 최상급 난이도의 사격 스킬이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라이카에서 쏜 화살이 몇 발인데.’ 이 정돈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기리리릭- 첫 번째 화살을 시위에서 놓은 순간… 나는 이미 두 번째 화살의 오늬를 시위에 걸어 올렸다. 그래서 사실상 선제 사격의 체공 시간이 채 절반도 지나가기 전에……. 피이잉-! 이미 두 번째 화살이 그 뒤를 빠르게 추격하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앞서나간 첫 번째 화살이 20m 지점을 지날 무렵. 콰아아앙-! 의도한 대로 화살이 붉은 폭염을 일으키며 산산조각났다. 거센 돌풍이 폭발력에 밀려 사방으로 찢겨 나갔고, 그 중심에 아주 잠깐, 고요한 진공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피유우웅- 뒤따르던 두 번째 화살이 그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유유히 날아들었다. 퍼억-! 정확한 명중. 흔들림 없는 10점이었다. 이렇게 하면 열 발의 화살 중 다섯 발은, 과녁의 정중앙에 깔끔히 욱여넣을 수 있다. 최재민이 바람으로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말이다. └ 이건 또 무슨 스킬임?;; └ 얘 궁수로 전직한 적 없지 않나?; └ 혹시 몰래 마법 썼음? └ 아닌 것 같은데;; └ 그럼 화살이 대체 어떻게 허공에서 폭발하는 건데;;;;;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한 성좌 형님들의 무수한 악수 요청이 빗발쳤지만. 지금은 이걸 설명해줄 때가 아니었다. 아직 8발의 화살이 남았으니 말이다. ‘리듬을 타야 해.’ 나는 곧바로 다시 화살 두 발을 꺼내어 들었다. 폭발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 콰콰광-! 퍼억! 한번 성공하고 나니, 두 번째는 더 쉬웠다. 마치 내 팔이 활의 일부가 된 것처럼, 화살을 폭발시키는 감각이 손끝에 선명하게 잡힌달까. “흐읍.” 때문에… 세 번째, 네 번째 화살도 과녁의 정중앙을 정확히 뚫었고. 퍼퍽-! 그렇게 계획했던 대로 총 다섯 발의 화살이 과녁의 정 중앙에 정확히 틀어박혔을 때. “후우…….” 그때가 돼서야 나는 활을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고 말이다.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계산대로 완벽하게 떨어졌다. └ ㅅㅂ;;; 무친 놈인가??? 나 이 ㅅㄲ가 뭔짓 한 건지 이제 겨우 이해함 ㅅㅂ;;; └ 아니…… 바람 저항 뚫겠다고 이런 무친 짓을 하는 ㅅㄲ가 존재한다고?;; └ ㅋㅋㅋㅋ앜ㅋㅋㅋ 나는 처음에 두 발씩 쏘는 건줄도 몰랐음;; 활 시위를 왜 두 번 퉁기나 했네 ㅋㅋㅋ └ 얘가 대체 왜 멘티인 거임?(진짜모름) └ 와…… 헌스쿨 참가자 컷 왜이리 빡센 건데;; 모든 사격이 끝나고 주변을 보니, 역시 다른 참가자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보통 3~4발 정도를 과녁에 집어넣는 게 최대인 것 같은데. 나 말고는 10점에 5발 맞춘 친구가 아직 보이질 않는 거 보니까……. -이 정도면 저… 괜찮게 한 것 같죠? 일단 첫 단추는 잘 꿰어 넣은 것 같다. 아마도 말이다. * * * 최재민은 뒷짐을 진 채, 훈련장 전체를 조망하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었고, 멘티들은 각자의 사로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강민우처럼 바람을 읽으려 노력하는 참가자도 있었고, 배주하처럼 바람과 점점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재능의 참가자도 있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다들 생각보다 적응이 빠르군.’ 이곳 [바람의 언덕]은… 길드의 엘리트 궁수들에게도 쉽지 않은 장소. 불규칙한 돌풍 속에서 50m 앞의 표적을 맞춘다는 건, 궁수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감각’을 요구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콰아앙-! 갑자기 훈련장 한쪽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최재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건율이 서 있었다. 아니, 그냥 서 있다는 표현은 조금 부족할지도 몰랐다. 이건율의 활 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저게 무슨?’ 이건율이 쏘아 낸 화살은 허공에서 폭음을 일으키며 한 줄기 섬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또 하나의 화살은, 마치 아무런 공기 저항을 받지 않은 것처럼 유유히 날아가 과녁을 꿰뚫었다. 퍼억-! 또 한 번의 명중. 최재민은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미친놈인가?’ 그의 눈에는 이건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보였으니까. ‘바람을…… 이런 식으로 극복한다고?’ 최재민이 볼 때 지금 이건율이 하고 있는 짓거리는, 묘기에 가까운 기행이었다. 바람을 읽으라고 했더니, 인위적인 마력의 폭발을 활용하여 저항을 없애버리다니. 그것도 화살 한 발을 미끼로 희생시켜서 말이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건 당연히, 바람의 흐름을 읽어 과녁을 맞추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방법이었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의 사격이 가능한 재능이라면… 정석적인 방법을 썼을 때 훨씬 더 높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터. 그래서 최재민은,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바람을 읽는 방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서… 저렇게 임기응변을 생각해낸 건가?’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생각해보니 뭔가 그럴싸했다. 이건율의 클래스는 ‘세라피스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히든 클래스라고 들었다. 아마도 연금술이라는 생산 클래스 베이스에 전투 능력들이 잡다하게 섞인… 하이브리드 계열일 터다. 그렇다면 정식 궁수가 아니니 당연히 바람을 읽는 섬세한 감각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스킬 등을 활용해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려 한 것이겠지. ‘물론 이런 식이면 마력 소모를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화살 한 발을 기폭시킬 정도의 마력이라면, 일반적인 화살 수십 발을 쏠 수 있는 양이다. 그러니 실전에서 이런 방식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딱 10발만 쏘면 되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이 또한 충분히 유효한 전략이다. 그래서 최재민은 감탄했다. ‘어떤 의미로는… 괴물 같은 전투지능이로군.’ 부족한 역량을 메우기 위해 순간적으로 떠올린 임기응변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 참가자의 타고난 재능은…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콰아앙-! 퍼억! 연이어 터지는 폭음과 명중 소리를 보니, 수행 능력도 미친 수준이었다. 세 발, 네 발, 다섯 발. 이건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화살을 연사하고 있었고…. 그 속도 또한 너무나도 빨랐다. 첫발이 터지기도 전에 이미 두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나고, 그 화살이 꽂히기도 전에 다시 활을 당기는 미친 속도. 최재민은 자신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건율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궁수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어. 그냥 배운 적이 없었을 뿐이다.’ 최재민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활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이, 이 정도까지 정교한 사격을 해낸다고? 선행 화살의 폭발 타이밍, 진공 터널이 유지되는 시간, 후속 화살의 탄속. 이 모든 변수를 0.1초 단위로 계산해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묘기를… 본능적인 감각으로만 해내고 있다니. ‘말이 안 되는군.’ 어지간한 궁수 클래스 상위 플레이어에게 주문해도, 저런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었다. 심지어 최재민 본인이 직접 한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을 수준의 정교함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최재민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만약 저 재능에 제대로 된 가르침이 더해진다면? 바람을 찢는 게 아니라, 바람을 탈 줄 아는 법을 가르친다면? ‘괴물이 탄생하겠어.’ 자신을 뛰어넘는, 아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사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건율이 보여주는 저 기행(奇行)은, 역설적으로 그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후우…….” 다섯 번의 사격을 마친 이건율이 숨을 고르며 활을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재민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멘토로서의 강렬한 욕망이 들어차고 있었다. ‘이 잠재력이 피어날 수 있도록…… 반드시 바른길로 인도해야겠어.’ 궁수로서 부족한 기본기를 보강해 주고 잘못된 습관들을 뜯어고쳐서……. 저 압도적인 재능을 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리라. 최재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멘토링은, 그에게 있어 은퇴 전 마지막이자 최고의 도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13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포지션별 멘토링 일정은, 총 3일간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멘토링 1일 차가 시작된 일정은 금요일이었고… 아무리 HBC의 예능국이 블랙기업(?)이라 할지라도 주말까지 촬영이 이어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단상에 올라온 최재민 멘토의 입에서, 이 얘기들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자,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입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집합 시간은 오전 6시니까, 다들 늦지 않도록 해주시고.] [토요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말이라고 던전이 닫히는 건 아니니까…….] [내일은 훈련장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을 위해, 우리 청룡회 3군 공격대와 연합 레이드를 잡아 뒀지요.] 레이드? 멘토링 기간에? 그것도 주말에? “…….” 진짜 지독한 놈들이다. 우리 정 사장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 원래 헌터 예능이 그런 건데, 블랙기업 씩이나; └ ㄹㅇㅋㅋ HBC가 이상한 게 아니고 주5일제 헌터가 이상한 거라니까? └ 방장놈아, 이제 네 만행을 알겠느냐? 아뇨. 모르겠는데요. 으음….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의 건실한 기업이 그런 악독한 블랙기업일 리는 없을 테니까. 지독한 건 HBC가 아니라… 최재민 멘토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오늘 어떻게든 날 굴려 먹으려는 폼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더라니……. “후우.”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그때. 달칵- 돌연 펜트하우스 현관문이 열리더니, 무언가 흐느적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당연히 정체는 우리 룸메이트님이었다. “……하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에, 초점을 잃고 퀭하게 풀린 동공. 마치 훈련장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뒤… 껍데기만 간신히 기어들어 온 패잔병의 몰골이랄까. 지금 내 상태가 저런 정도까진 아니겠지? 갑자기 오늘 훈련내용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후우.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강소희를 보고 있자니… 뭔가 묘한 동질감이 드는걸? “살아있었네요, 건율 님?” 그런데 다음 순간. 날 발견한 강소희가 마치 목마른 강아지 마냥 눈을 반짝이더니……. “……?” 옆자리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하, 좀 살 것 같다.” 갑자기 또 무섭게 왜 이러는 건데요……? 이거 설마… 해물 라면이 필요하다는 무언의 압박.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해물라면 해달라고요?” “딱히 그런 얘긴 아니었…….” 그나저나 꼴을 보아하니, 저쪽도 상당히 구른 모양이었다. 흐음. 그래도 서지혁은 우리 최재민 아재마냥 고지식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힘듭니까? 거기 팀 멘토라면 풀어줄 스타일로 보이는데.” “그 말, 당장 사과하세요.” “그 정돕니까……?” “서지혁 멘토, 미친 사람이에요.” 뭐야, 무서워. 왜 이렇게 화났어. “아니… 마력 제어 훈련이랍시고 거의 1시간 동안 불꽃 하나 안 꺼지게 유지하라더니……. 꺼지면 처음부터 다시.” “……그건 좀 빡세네요.” “좀이 아니라 많이요. 그것도 오전에만 그랬고, 오후에는 ‘마력 동조 훈련’이라던가? 다른 마법사들이랑 같이 하나의 마법진을 유지하래요. 누구 하나 집중 흐트러지면 전부 터지는 거.” 라면 품평할 때 이후로, 이 정도까지 강소희의 입이 터진 건 처음 봤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러니까 조금 떨어져 주시죠? 아무래도 안전거리 유지가 필요……. 그런데 잠깐. 내 쪽으로 냄새는 또 왜 맡는 건데…? 나, 오자마자 뽀득뽀득 씻기부터 했는데……. 혹시 홀애비 냄새라도 나는 건 아니겠지? └ 방장 자기 객관화 능력 뭔데 ㄷㄷ └ 솔직히 30대 후반이면…… 이제 홀애비 냄새 날 때도 된 것 같긴 해. └ 방장 36임? └ ㅇㅇ 확실한 후반이지. 후우……. 형님들. 제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날조는 못 참습니다? [‘데이브’님에 의해 성좌 ‘심연의 파수꾼’님의 채팅이 제한되었습니다.] 어디 서른 중반의 창창한 청년한테 30대 후반 프레임을……. └ ㅋㅋㅋㅋㅋㅋㅋ └ 방장 칼 들었다 ㄷㄷㄷ └ 돔황챠;;; “…….” 그렇게 잠깐 성좌들이랑 잡담을 떨고 있는데,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된 강소희가 소파에 더욱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이러다가 거의 소파랑 한 몸 되겠는걸? “그러다 잠듭니다.” “그럼 자죠 뭐.” “씻고. 양치는 하고.” “음. 라면 먹어야 하는데…….” “누가… 해준대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강소희를 응시하는데, 그녀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져 올렸다. “이거,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나온 신상 마나포션인데.” “……?!” “라면이랑 교환 어때요. 아직 시제품은 아니라 판매가는 안 나왔지만… 그래도 10LP는 무조건 넘을걸요?” 아니, 이런 치트키를 갑자기 남용하시면……. 저는 너무 좋긴 한데. “고객님, 혹시 짬뽕라면으로 충분하실까요? 다른 메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치즈만 한 장 올려줘요. 그 정돈 가능하죠?” “맡겨만 주십쇼.” 하. 큰일 났다. 이 사람… 아무래도 쌀숭이 사용법을 깨달아버린 것만 같다. └ ㅋㅋㅋ 룸메로 이제 일주일 다 되어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님? └ 나도 방장 룸메 하고 싶다ㅠㅠ [‘데이브’님에 의해 성좌 ‘엘프 조아’님의 채팅이 제한되었습니다.] └ ㅋㅋㅋ엌ㅋㅋㅋㅋㅋ “그럼 저 씻는 동안, 라면 끓여주는 거죠?” “가능입니다.” “흐으, 라면 한 번 얻어먹기 힘드네.” 딱히 날 그렇게 힘들여 매수하신 것 같은 느낌은 아닌데……. 아무래도 착각이겠지? * * * 밤 10시. 게이트 관리국장실의 TV 화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속보, 국회 예결위 게이트 안정화 추경안 전격 통과….] [정부 “시민 안전에 빈틈없다”… 1조 2천억 원 규모 긴급 투입 결정.] 화면 속 앵커는 상기된 목소리로 희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번 추경안 통과로 인해 다가오던 게이트 불안정 사태가 완전히 해소될 것이며,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도 좋다는 정부 대변인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화려한 그래픽 자막이 ‘안전 확보’, ‘위기 해소’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번쩍였다. “하.” 김영태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툭. 화면이 꺼지자, 국장실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남았다. “빈틈이 없다라…… 말은 참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그의 책상 위에는 대외비(Confidential) 도장이 찍힌 얇은 보고서 한 부가 놓여 있었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장밋빛 미래와는 정반대였다. “국장님.” 그때, 박 비서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은 25일간 이어진 예산 전쟁의 여파로 핼쑥해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체념에 가까운 빛이었다. “결국… 장관님 뜻대로 가는군요.”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김영태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조 2천억 원. 그러니까 LP로 환산하면… 약 1.2억 포인트. 천문학적인 돈이다. 하지만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고작 ‘15일’의 평화뿐이었다. 오늘 기준으로 기존에 남아있던 25일에, 이번 예산으로 확보된 15일을 더하면……. 최종 D-day는 이제 고작 40일. 그 이후는? “끝이다.” 김영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윗선에선 이미 계산기 다 두들겼거든.” “…….” 대한민국은 지난 5년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게이트 청정국’ 지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돈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고, 이제 정부는 그 유지비를 더 이상 감당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언제… 공표하실 생각입니까?” 박 비서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국민들도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비서관의 말에도, 김영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뭘 대비할 수 있겠나?” “…….” “식량을 준비할 것도 아니고, 어디 피난을 갈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합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후우. 마음의 준비?” 그는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헌터 인력 긴급 확보 및, 군 병력 수도권 방어선 구축 계획안]이라는 제목과 함께, [엠바고 : D-20]이라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게다가 지금 터뜨리면 폭동이야. 각종 생필품 사재기는 기본일 거고…… 경제가 먼저 무너져.” “맞는 말씀이십니다.” 김영태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어쨌든 상부에서 엄명이 떨어졌으니, 앞으로 20일간은 철저하게 입단속 해. 그동안 우리가 할 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계획 수립이다.” 그는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꺼진 줄 알았던 TV 화면 하단에, 뉴스 속보가 지나가고 있었다. [정치/사회] 뉴스가 끝난 뒤 이어지는 연예 뉴스 자막이었다. [Ent] ‘헌터즈 스쿨 시즌3’ 시청률 45% 쾌거… 괴물 루키 이건율 활약에 안방극장 열광. [Ent] ‘슈퍼 루키’ 이성환, 브랜드 가치 수직 상승해……” 화면에는 헌터즈 스쿨의 참가자들이, 몬스터들을 상대로 화려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고. 댓글 창을 캡처한 자료에는 ‘이번 시즌 역대급’이라는 등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가득했다. 김영태는 멍하니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환호 속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이 평화를 유지할 방법… 같은 건 없겠지.’ 화면 속에서 웃고 떠드는 참가자들과 열광하는 대중. 김영태는 그들을 보며 더할 나위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20일 뒤. 정부의 대국민 담화문이 발표되는 순간, 저 화려한 예능은 가장 먼저 전파를 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시에 준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게이트를 소재로 한 예능이라니. 그런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뭐, 주기적인 게이트 폭주가 일상화되고 나면… 그다음에야 다시 헌터 예능이 나올 수 있겠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영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단… 우리도 퇴근하지.” “예, 국장님.” 국장실의 불이 꺼졌다. 하지만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13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토요일 아침이다. 하지만 난… 5시에 눈을 떠야 했다. 우리 룸메님은 당연히 주무시는 중이고……. ‘주말 5시 기상… 실환가.’ 잠이 부족해서 눈이 뻑뻑했지만, 다시 침대에 눕는다는 선택지는 없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 쏴아아-! 씻고 준비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분. 그러니까 캐리지에 탑승하기 위해 아르카나 로비로 나왔을 땐… 정확히 5시 12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마침 로비에 나와 있던 배주하를 가장 먼저 마주쳤다. “늦지 않았네요?” “물론이죠.” “도진 님은 이미 타 계실 거예요.” “뭐, 워낙 성실한 분이시니, 늦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캐리지에 타자, 예상대로 이미 탑승해 있던 한도진은 오늘도 권총을 열심히 손질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한도진도 그렇고 배주하도 그렇고, 나보다 최소 30분 이상은 일찍 일어난 것 같은걸? 특히 한도진은 복장부터가……. ‘오늘은 진짜 어디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줄 알겠네.’ 마치 작전 나가는 UDT 특전사라도 보는 느낌이다. “두 분 오셨네요.” “네.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호를 주자, 캐리지는 천천히 그랜드 아르카나를 벗어났다. 덜컹-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새벽 풍경이 지나간다. 나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오늘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굴려보았다.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 (The Glass Garden of Inverted Sky)] 이름만 들으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예쁜 장소 같겠지만……. 이곳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아주 악질적인 던전이었다. └ 무슨 멘토링을 ㄹㅇ 실전으로 하네 여긴 ㅋㅋㅋ └ 방장 혹시 최재민한테 찍혔음? 제가… 찍혔다기보단, 멘티들 전체가 다 같이 찍힌 거 아니겠습니까? 후우. └ 여기 던전레벨이 몇이더라… 한 60쯤이었던 것 같은데. └ ㅇㅇ맞음. └ 근데 솔직히 유리정원은 ㅅㅂ; 몬스터가 센 게 문제가 아니잖음. └ 그렇긴 해. 이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 던전은, 각성자 위키에서 ‘멀미 유발자’로 불리는 인스턴스 던전이다. 왜 그렇게 불리냐고? 실제로 여기 처음 들어와 본 플레이어의 7할은… 멀미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 7할 중 다시 절반은 구토를 하는 게 보통이고 말이다. └ 솔직히… 60레벨대 인던중에 절대 가기 싫은 곳이 여기긴 해. └ 어쩌면 제작진이 여기로 골랐을지도 모름 ㅇㅇ └ 생각해보니 그러네ㅋㅋ 참가자들 굴러야 그림이 더 잘 나올 테니까.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위에 거대한 호수가 떠 있고……. 그 호수 표면이 하늘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어 위아래의 구분이 모호하다. 플레이어는 그 호수 위에 둥둥 떠다니는 ‘투명한 수정 발판’을 밟고 싸워야 하는데. ‘문제는 이 발판이 10초 이상 밟고 있으면 깨져버린다는 거지.’ 이게 제일 큰 문제다. 끊임없이 깨지는 발판을 점프하고, 그러면서도 몬스터의 공격은 다 회피해야 하고. 그 와중에 딜은 또 정확히 해야 하는…… 원거리 딜러들에겐 무덤과도 같은 던전. ‘그러고 보니… 강제 무빙샷 훈련소 같은 느낌인걸.’ 게다가 시야는 온통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어 거리 감각까지 교란시킨다.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뭐, 나야 익숙하지만.’ 그나저나 원거리 딜러 멘티 18명을 총 3개의 실습 조로 나눈다던데. 파티원이나 정상적인 친구들로 걸렸으면 좋겠다. 뭐… 어차피 공대 20명 중 14명이 베테랑 청룡회 길드원들일 테니 상관없으려나? 그래도 발판 밟고 미끄러져서 심연으로 다이빙하는 녀석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 한 놈 물에 빠지면 던전 리셋된다 아님? └ ㅋㅋㅋ 이거시 바로 진정한 조별 과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끼익- 어느새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약 4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루미스 영지 외곽의 ‘거울 호수’ 근처였다. 던전 게이트 앞에는 이미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무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역시……. 분위기 살벌하네요.” 캐리지에서 내린 배주하가 작게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푸른색 제복을 맞춰 입은 수십 명의 헌터들이, 군기 든 자세로 각 잡고 서 있었으니까. [청룡회(Blue Dragon) : 3군 공격대] 비록 1군이나 2군은 아니지만, 국내 5대 길드인 청룡회의 정규 공격대다. 평균 레벨이 70대에 가까울 베테랑들. 그들 앞에, 팔짱을 낀 최재민 멘토가 서 있었다. “다들 시간 맞춰 왔군.” 최재민의 시선이 우리 18명의 멘티들을 훑었다. 새벽바람을 맞아서인지, 아니면 실전이라는 긴장감 때문인지 멘티들의 표정은 꽤나 굳어 있었다. “오늘 일정에 대해선 어제 간략히 설명했을 겁니다. 이곳 [유리 정원]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겪어본 훈련장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그는 뒤쪽의 공격대원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늘 레이드는 우리 청룡회 3군 공격대가 본대를 맡아 중앙 돌파를 시도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최재민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띄워진 홀로그램 지도의 외곽을 가리켰다. “본대가 진입할 수 없는 외곽의 부유석들에 배치되어, 원거리 화력 지원을 맡게 됩니다.” ‘화력 지원조라.’ 일반적으로는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배치다. 본대가 중앙에서 어그로를 다 먹어주고, 우리는 밖에서 프리딜을 넣는 구조. 그러니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건… 전형적인 ‘버스’ 태우기 포지션이긴 한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버스 탈 생각이라면 오산입니다.” 최재민의 말이 맞다. 사실 보기와 다르게 이 포지션은, 오늘 던전 공략에서 가장 위험한 포지션이었으니 말이다. 최재민 아재……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곳 몬스터들은 외곽의 지원조를 먼저 노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대가 어그로를 끈다 해도, 원거리 저격 몬스터들은 끊임없이 여러분을 괴롭힐 겁니다.” 그러니까, 서포팅을 기대하지 말고 각자도생하라는 소리다. 심지어 발판은 계속 깨져나가는 상황에서 말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최재민의 눈빛이 더욱 진지해졌다. “오늘 레이드를 기획한 이유는, 어제 말했듯 전문적인 공격대의 실전 프로세스를 여러분에게 경험시켜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최재민이 잠시 뜸을 들였지만, 멘티들 중 그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돋보이려 하기보단, 공격대의 일원이 되어 1인분을 해낸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런데 이번엔 또 왜 날 빤히 쳐다보는 건데……? “원거리 딜러로서의 역할만, 정확히 수행해주시길 바랍니다.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우리 멘토님이 날 왜 의식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맞는 말이긴 하다. 이런 20인 규모의 공격대에서 롤을 어기고 단독행동을 하면, 확실히 파티가 난장판이 될 건 자명하니까. └ 왜 널 쳐다봤는지 모른다고? 넵. 모르는뎁쇼. └ 여기서 이상한 짓 할 사람이 방장밖에 없다는 생각은… 혹시 해본 적 없는 거지? 예? 제가요? 무슨 이상한 짓을……. └ 말을 말자 ㅅㅂ; 어쨌든 최재민 멘토의 설명은 조금 더 이어졌고, 이윽고 마지막 Q&A 타임이 되었다. 멘티들은 최재민에게 각자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이 던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트랩이 궁금합니다!” “그건 당연히 복수의 거울 (Mirror of Vengeance)이라는 트랩입니다. 반사형 지뢰 트랩이기 때문에, 딜이 강력한 원거리 딜러일수록 절대로 사격해서는 안 되는 표적이지요.”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궁금한 게 없는데 어떡하라고. └ 방장 혹시 여기도 이미 와 본 거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 진짜 궁금한게 아예 없다고? 생각해 보니 하나 있긴 한데요. “좋습니다. 이건율 참가자는 질문 없습니까?” 마침 기회를 주셨으니, 한번 물어보긴 해야겠다. “그… 혹시 루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 └ 궁금한겤ㅋㅋㅋㅋ └ 뭔가 했더니 루팅ㅋㅋㅋㅋㅋㅋ “이곳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에서 나온 모든 전리품은, 공격대 전담 포터가 회수합니다. 개인 루팅은 금지입니다.” 뭐. 예상했던 대로긴 한데, 좀 아쉬운걸? 이러면 보편적인 룰대로, 아마 기여도 비례 분배일 텐데……. “대신, 전투 종료 후 정산 팀이 여러분의 기여도(DPS)를 측정해, 그에 상응하는 LP로 환산 지급할 예정입니다. 만약 우리 청룡회의 대원들보다 더 높은 기여도를 올린 멘티 참가자분이 나온다면… 제 몫은 그분께 선물로 드리지요.” 오? 우리 재민쓰……. 갑자기 사람이 달라 보이잖아? └ 그럼 1등하면 최재민 기여도까지 다 먹는 거임?ㄷㄷ └ ㅋㅋㅋ 쌀숭이 귀 쫑긋하는 거 보소. └ 캬……. └ 심지어 잡템 주워다 파는 수고까지 덜어주네. 개꿀인데? 그건 꿀이 아닌데요, 형님. 솔직히 발골 못 하게 해서 지금 좀 서운해요……. └ 이 새낀 역시 보법이 다르다 ㄷㄷ 어쨌든 우리 관대하신 최재민 형님 덕에, 동기부여가 꽤 많이 올라왔다. ‘오늘… 다 죽었쓰.’ 나는 조용히 철궁을 움켜쥐었다.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풀가동을 시작했다. 공대 스무 명이니까……. 넉넉히 10% 정도 달성하면 무조건이겠지? 그럼 몬스터 막타를 얼마나 쳐야……. “흐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재민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보며 호명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조 편성을 발표하겠습니다.” 총 18명을 6명씩 3개 조로 나누는 작업. “A조. 조장은…… 이건율.” “예, 멘토님!” “조장은 조원의 상태를 수시로 점검해서, 특이사항이 생길 때마다 신속히 공대장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넵.” 역시. 포지션 결정전 1위의 업보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듯한데……. “조원은…. 배주하, 강민우…….” 이어진 조원들의 명단도 조금은 혼란스럽고 말이지. ‘강민우 이 쉑은 왜 자꾸 엮이는 거지.’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강민우가, 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왠지 얘가 제일 먼저 호수에 빠질 것 같은데……. “A조는 좌측 3번 진입로를 통해 ‘서쪽 회랑’ 구역을 맡습니다. B조는 한도진을 조장으로 우측…….” 이 불길한 예감은 아무래도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13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팟-! 시야가 반전되며, 세상이 뒤집혔다. 위도 하늘, 아래도 하늘. 그 어지러운 유리 정원 한복판으로, 공대원들 전원이 소환되었다. “으윽…….”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옆에 있던 배주하가 작게 신음했다. 나 역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발밑에 딛고 있는 것이 투명한 수정 발판뿐이라,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부유감이 뇌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시스템 경고 :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어지러움’ 상태 이상이 발생합니다.] [균형 감각이 30% 감소합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이 기믹은 매번 쉽게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후우.”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 던전은 처음부터 상당히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편이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기믹 외에 특별한 함정이나 복잡한 공략법이 존재하는 던전은 아니었지만……. 키이이잉-! 이렇게 처음부터 몬스터들이 곧바로 몰려나오는 게 이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 던전의 특징이다. “……!” 저 멀리, 빛이 굴절되는 기이한 소음과 함께 첫 번째 몬스터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즘 위습 (Prism Wisp) - Lv.61] 마치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빛의 덩어리들. 녀석들은 공중을 부유하며 우리를 향해 고출력 레이저를 조준하고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본대 쪽에서 최재민 멘토의 힘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근접 딜러들과 탱커들이 수정 발판을 밟으면서, 아주 능숙하게 녀석들과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 A조가 배치된 좌측 부유석 쪽으로도, 위습 세 마리가 갈라져 나왔다. “옵니다…!” 잔뜩 긴장한 강민우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나저나 우리 민우 실력으로 저거 근처라도 맞출 수 있을까? 하필 프리즘 위습인데? └ 우리 민우 무시하지 마라 방장아……. └ 어제 보니까 실력 많이 늘었던데? └ 얼어붙은 서울에서 짐꾼하던 그 찐따같던 민우가 아니다……. -오, 진짜요? 철컥-! 그렇게 잠깐 성좌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 [화이트 노바]의 장전을 마친 강민우가 본격적으로 마력탄 사격을 시작하였다. 타탕! 타다당-!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진짜 늘긴 했잖아?’ 내가 알던 강민우라면, 표적의 이동 경로 같은 건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허공에 무차별 난사를 퍼부어야 정상이었는데……. 키에에엑-! 비록 맞추지는 못했지만 제법 유효한 탄착군을 형성시키며, 위습 녀석들을 위협적으로 공격해 냈으니 말이었다. 무려 비행형 몬스터인 데다 빛을 굴절시켜 자신의 위치를 속이기까지 하는……. 까다로운 표적인데 말이다. -허, 이 정도면 진짜 도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 방장 이 ㅅㄲ 또 티배깅하네 ㅋㅋㅋ └ 방금 한 발도 안 맞은 거 아님? -못 맞추긴 했지만, 이 정도만 해줘도 제가 꽤 편해지거든요. 한 발도 안 맞았기 때문인지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강민우를 보며, 내가 짧게 오더를 더했다. “민우 님. 보이는 것보다 조금 먼 곳을 타겟 잡고 쏴야 합니다.” “예?” “일루젼 때문에 그래요. 믿고 한번 쏴 봐요.” “알겠습니다, 조장님.” 그리고 내 말을 들은 강민우가, 더욱 신중하게 위습을 조준하며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탕- 타앙-! 이놈. 진짜 사람이 좀 변했는데? “…….”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 조원들에게 간결하게 오더를 덧붙였다. 어쨌든 조장의 역할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프리즘 효과로 빛을 굴절시키는 녀석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위치보단, 움직이는 경로를 보고 실제 위치를 파악해서 사격해야 명중률이 올라갈 겁니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곧바로 이해하고 수행해 낼 수 있을 진 모르겠는데……. 어차피 더 해줄 말도 없으니, 나도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 그런데 방장쉑 왜 이렇게 여유로움? └ 방장 돈 벌려면 기여도 파밍 빡세게 해야 하는 거 아님? 후후. 여유로울 만하니까 여유로운 겁니다. 어차피 오늘 여기 처음 온 애들이… 위습을 바로 맞출 수 있을 리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제서야 슬슬 시위에 오늬를 걸어 올린 나는……. 기리릭- 활시위만 당긴 채 가만히 녀석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이렇게 뜸을 들여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 기여도 경쟁 상대가 단순히 헌스쿨 루키들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아니다. 당연히 우리 꼬꼬마들보단, 청룡회 공대원들이 훨씬 더 잘하겠지. 그러니까 사실 지금 나는, 성좌들의 말과 달리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 화살이 얼마짜린데.’ 화살 한 발 한 발에, 내 모든 심력을 다 쏟아붓는 중이었다는 말이다. └ ……? └ 이건 또 뭔 소리임 대체; 이번 레이드를 위해 큰맘 먹고 준비한… 5티어 짜리 관통력 강화에 특화된 화살. 무려 100발 묶음에 10LP나 하는 고오급 소모품이거든. 그러니까 한 발 한 발에 최대한의 기여도를 뽑아내야만 한다는 얘기다. 헤드샷이 아니면…… 쏘지 않겠다는 마인드랄까. └ 그러니까, 발당 한국 돈으로 1000원이라는 소리 아님? └ 5발 쏴 봐야 탕후루 한 개 값인 것 같은데. 1+1행사 중입니다만? 두 개라고요. 기이이익-! [‘태양의 궤적’ 장비의 고유능력, ‘열기의 고동’이 발동합니다.] [화살에 강력한 화염속성 강화효과가 적용됩니다.] 땅바닥에 1000원을 버리라고? 그럴 수는 없지. ‘조금만 더 기다려.’ 나는 침착하게 강민우가 흩뿌리는 탄막을 지켜봤다. 녀석의 준수한 사격 덕에 위습들의 움직임이 제한되고 있었다. 피할 곳이 줄어든 녀석이, 굴절각을 풀고 본체를 드러내며 방향을 트는 바로 그 순간. ‘지금.’ 피이잉-! 나는 망설임 없이 당겨뒀던 시위를 놓았고. 쐐애액-! 내 손을 떠난 화살이, 정확히 녀석의 코어를 꿰뚫었다. [‘프리즘 위습(Prism Wisp)’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 동안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열기의 고동’ 효과로 대상에게 ‘화상’ 상태가 적용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절’이 발동했다는 건, 녀석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는 소리. 이렇게 확정적으로 샷을 꽂아 넣을 수 있을 때, 이때가 망설임 없이 추가 사격을 쏟아 넣을 때인 것. 피핑-! 기절해서 낙하하는 녀석을 향해 한 발 더. [‘프리즘 위습 (Prism Wisp)’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정확히 두 발의 화살로,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프리즘 위습 (Prism Wisp)’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염화의 인’ 고유능력이 발동됩니다.] [180초 동안, 착용자가 입히는 모든 화염 피해량이 2%만큼 증가합니다.] 커엇-! └ ㅖ? └ 예……? └ 아니; 위습이 방어력 자체는 ㅈㄴ 낮은 편이긴 한데; 그래도 어떻게 두 방에 뒤진 거임? 그야… 우리 조원들의 선제사격 덕에, 쉴드가 거의 다 깎였으니까요? └ 아까 그거 한 대도 안 맞은 게 아니었음? -본체는 안 맞았지만, 일루전 쉴드는 깎여 나간 겁니다. └ ㅅㅂ;;; └ 왜 안 쏘고 기다리나 했더니;; └ 양아치 ㅅㄲ;;; 어허. 양아치라니, 그런 섭한 말씀을……. “와, 조장님 대박인데요?” 보시죠. 민우 얘도 좋아하잖아요? └ 민우야…… 니가 양념 다 한 거래……. └ 강미누가 불쌍해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화살 두 발로 킬 관여 100%에, 딜량 1위. 궁수 같은 노답 클래스로도 쌀 캐려면… 이 정도 노력은 기본으로 해 줘야 한다고? * * * 같은 시각. 중앙의 가장 높은 발판에서 전황을 지휘하던 최재민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본대가 아닌, 좌측 외곽의 A조에 고정되어 있었다. ‘훌륭하군.’ 방금 이건율이 보여준 사격은,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다른 멘티들이 긴장해서 사격을 남발하는 사이, 이건율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순간. 단 한 발의 사격으로 적의 급소를 끊어냈다. ‘좋아……. 임기응변에 기대던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정석적인 사격이야.’ 최재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훈련장에서 자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기본기’. 그리고 원거리 딜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침착함’. 어제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건지, 이건율은 자신이 기대했던 그대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단 한 발의 화살을 쏘더라도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궁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지.’ 심지어 감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딜 각이 좀 애매해져서, 라인 살짝 올리겠습니다. 민우 님이랑 설현 님. 거너 두 분이 양쪽에서 길 열어 주시고…….” “네, 조장님.” “넵.” “주하 님이 저랑 같이 후방을 엄호하는 대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러죠.” 최재민 본인이 직접 지시를 내리려 했던 바로 그 타이밍에, 아주 적절하게 동료들을 통솔하면서 딜 포지션까지 수정하는 게 아닌가. ‘이런 건 알려준 적도 없는데……!’ 최재민은 당황했다. 이런 완벽한 오더와 통솔은, 이 공격대 안에서 원거리 딜러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설마. 어제 그 짧은 이론 수업만으로 여기까지 깨달아버린 건가?’ 이어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어제 그가 오후에 진행했던 두 시간짜리 전술 이론 수업. 그건 던전 공격대 안에서 원거리 딜러의 역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이 되는 내용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걸 정말 완벽히 이해했다면, 실전에 적용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응용까지 해서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이건 재능의 영역을 넘어버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습득력이다. 최재민은 진심으로 전율했다. 전술 이론 시간에 이건율이 눈만 떴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최재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잘만 키우면, 1년 안에 공대장급 엘리트 플레이어로 성장할지도…….’ 만약 이 친구를 청룡회에 영입할 수 있다면, 청룡회의 다음 세대는 든든하리라. 그런 생각을 잠깐 하던 최재민은……. 기리리릭-! 자신의 활을 들어 올려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이런 중급 던전에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할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1인분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자신도, 20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13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던전에 진입한 지 약 40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은 그 악명 높은 명성에 걸맞게 우리 조원들을 아주 혹독하게 굴리고 있었다. 우리 조에도 예상했던 대로 멀미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녀석은 토하기도 했고. 강민우가 멀쩡한 건 좀 의외였다. 와장창-! “으아! 발판! 발판 깨져요!” “점프해! 옆으로 뛰어!”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10초만 밟고 있어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 수정 발판. 그 위에서 밸런스를 잡으며 몬스터의 공격까지 피해야 하니, 초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을 거다. 이건 재능이나 피지컬의 영역보단, 경험치가 더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흐음.’ 내가 여유로운 건, 너무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저기 근엄하게 공대를 통솔하고 있는 최재민 아재보다도, 내가 이 수정 발판은 훨씬 더 많이 밟아봤을걸? 쩌적-! 이 기믹의 핵심 키워드는, 발판을 무조건 빨리빨리 갈아타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오히려 안정적인 발판을 선별해 밟았다면, 그 발판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까지 최대한 오래 째다가 마지막 순간에 도약해야만……. 타앗- 다음 발판도 안정적인 걸 밟을 수 있고, 딜 포지션도 훨씬 더 수월하게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침착함’ 또한…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조장님. 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뭘요?” “아까부터 뭔가 조장님 발판만 제일 튼튼한 것 같은데…….” “음… 잘 골랐으니까요?” “생긴 게 다 똑같은데 더 튼튼한 게 따로 있어요?” 배주하가 신기하다는 듯 내게 물어왔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내가 안정적인 발판을 선별하는 건, 수면에 맞닿아 있는 균열의 정도를 보고 경험적으로 아는 거라서……. 이걸 알려준다고 따라 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에서……. 핑- 피이잉-! [‘수정 날개 박쥐 (Crystal Wing Bat)’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염화의 인’ 고유능력이 발동됩니다.] [180초 동안, 착용자가 입히는 모든 화염 피해량이 2%만큼 증가합니다.] [현재 누적된 피해량 증가 비율 : 24%] 난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충분한 기여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의 파티 기여도 정보를 호출합니다.] [플레이어 : 데이브] [입힌 피해량 : 11.5%] [받은 피해량 : 0.02%] [회복량 : 0%] 총 스무 명으로 구성된 파티에서 11.5%의 기여도니까… 이 정도면 무조건 내가 1등 아닐까? 최재민 아재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뭐. └ 님; 지금까지 화살 몇 개 씀? 아직 한 통 다 안 썼으니까… 한 30발 쐈나? └ ㅅㅂㅋㅋ 분당 한 발도 안 쐈네. └ 그나저나 한 통은 100발인데, 왜 그런 식으로 계산함? 그야, 처음부터 43발 정도 남아있던 화살통이었으니까요. 중고로 좀 싸게 업어온 녀석이라……. └ 징하다 징해 그냥 ㅋㅋㅋ └ 이게 진짜 광기지;;; 아무튼 이 페이스면, 목적 달성은 이미 확정에 가까워진 것 같다. 청룡회 본대가 앞에서 어그로를 꽉 잡아주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고. 띠링-!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7레벨이 되었습니다.] 레벨도 하나 올랐다. 대규모 던전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짭짤하다. 원래 30레벨 후반에 1업 하려면, 일주일 정도는 쓰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페이스면 내일 이어질 멘토링 스캐쥴인 다음 던전까지 돌았을 때… 38레벨도 충분히 찍힐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던 그때. “전방 2시 방향! 엘리트 몬스터 출현입니다!” 전방의 정찰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부유석 뒤편의 사각지대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트 :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 – Lv.62] 이 녀석들이 나왔다는 건, 던전 진행도가 절반이 넘었다는 소린데. 벌써 그렇게 됐나? 확실히 최상위권 길드 공대라 그런지, 진행 속도가 상당하단 말이지. 찰박- 조금 더 공대의 진영이 앞으로 이동하자……. 물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녀석들의 위치가 내 눈에도 포착됐다. 원거리에서 강력한 수압 탄환을 날리는 까다로운 엘리트 몬스터인 수정 소금쟁이. 하지만 우리 공대는 쉽사리 더 전진하지 못했다. 왜냐면……. “모두 정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기다린다.” 최재민의 전체 오더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기믹 때문이겠죠?” 옆에서 배주하가 작은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하는데, 놀랍게도 맞는 말이다. 어제 사전교육 시간에 안 잤나 본데? 대체 어떻게 참았지? “맞습니다.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 공명(Resonance)이 시작되면……. 쓸데없는 고생을 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저 소금쟁이는 이 던전의 숨겨진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놈들의 이름에 붙은 ‘공명(Resonance)’이라는 단어. 저 녀석들은 적을 발견하면 그 시점부터 끊임없이 수면을 두드려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는데……. 그 진동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후반부 보스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수정 발판의 내구도가 ‘종잇장’처럼 변해버리는 것. 진동이 누적된 정도에 따라, 원래 10초 버티던 발판이 3초 만에 깨져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지금 최재민이 잠시 정비를 명령한 건……. 순간적인 기습으로 놈들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버리기 위한, 숨 고르기라고 할 수 있었다. └ 저거 소금쟁이 ㅈㄴ까다롭긴 한데, 운 좋으면 쉽게 잡을 수도 있음 ㅇㅇ └ 맞음. 아마 공격력은 높아도, 피통이 진짜 종잇장일걸? └ 문제는 지들도 그걸 알아서 습관적으로 엄폐한다는 거임. └ 파티에 암살자 클래스 있나? 없으면 고생 좀 할 텐데. 훈수 두는 성좌들의 채팅을 잠깐 본 나는, 화살통에서 남은 다섯 발의 화살을 전부 꺼냈다. -암살자 여기 있는데요 형님들. └ ???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 버리면, 그게 바로 암살 아닙니까? └ 그… 맞는 말이긴 한데……. -원래 ‘저격’도 아주 정석적인 암살의 한 방식이라는 말씀. └ 아니, 그건 맞는데. 애초에 뭐가 보여야 저격하는 거 아님? └ ㅇㅇ;; 소금쟁이들 절대로 너네한테 딜각 안 줄걸? └ 근딜러들이 붙어서 잡아야 돼 저건. 뭐, 여기서 설명을 굳이 더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오랜만에 쿨타임 돌아온 것 같으니, 슬며시 판을 한 번 깔아볼 뿐. 띠링-! [‘스트리머 데이브’가 실시간 배팅을 생성했습니다!] └ 캬- └ ㅋㅋㅋㅋㅋㅋㅋ 왔구나 드디어! └ 가야지 가야지… 반드시 가야지……. 오랜만의 투전판 오픈에, 성좌들도 신이 났다. 이건 배팅만 잘하면 본인들도 벌어갈 수 있는 판이라, 사실 싫어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말이지. [스트리머가 배팅 조건을 생성합니다.] 자, 그럼 한번 맛있게 요리해볼까? └ 조건 어케 걸지 ㅈㄴ궁금하네 ㅋㅋㅋ └ 밸좀 잘 잡아보셈 방장ㅋㅋ └ 배팅은 원래 밸런스 터져야 재밌는 거 아님? └ 역배 도파민 가즈아ㅋㅋㅋ 요 정도 어떤데. [조건 : 엘리트 몬스터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 킬 관여 달성. (50% 기준 Up/Down)] └ ????????? └ 아, ㅅㅂ; 또 시작됐다;; -일단 전 당연히 UP에 걸었습니다, 형님들. 예상하셨죠? └ 와, 이걸 한번 또 속아봐? └ 지난번에 방장 따라갔다가 당했는데 ㅅㅂ; └ 근데 방장 얼마 걸었는데? -음… 오늘은 조금 소심하게 300LP정도……? └ 수고요. └ 정배… 가야겠지? 아니, 쌀숭이한테 300LP가 얼마나 큰 돈인데. 화살통 30개짜리 배팅을 이렇게 매도한다고? [현재 배당률: Up(50% 이상) 33.33배 / Down(50% 미만) 1.03배] 아, 이 형님들……. 좀 서운하네. 아직도 나를 이렇게 모른단 말이야? * * * “후우…….” 청룡회 3군 공격대 1팀장, 차도윤은 대검의 자루를 고쳐 잡으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배회하는 엘리트 몬스터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했네.’ 차도윤은 힐끗, 마스터이자 자신의 우상인 최재민을 곁눈질했다. 사실 오늘의 레이드가 결정되기 전……. 이 일정을 가장 반대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정상적인 공격대를 꾸려도 쉽지 않은 이 유리 정원 던전을,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헌터즈 스쿨 멘티들과 함께 공략해야 한다니. 심지어 가장 중요한 원거리 딜링 포지션을 전부 멘티들로 써야 한다는 말에, 도저히 그러겠다는 답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최재민이 직접 공대에 합류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번 던전 공략을 끝까지 반대했을 거다. 아무리 존경하는 마스터의 뜻이라 해도, 던전에서 베이비 시터 노릇을 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면 길드 정예들과 함께하는 것만큼은 아니라도… 그 8할 정도는 되는 거 아닐까?’ 막상 레이드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게 재능이라는 건가…….’ 이 헌터즈 스쿨 멘티라는 친구들은, 그가 알기로 평균 40레벨 초반대의 루키들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정도 레벨대의 딜러들은… 60레벨대 던전에서 1인분은커녕 0.5인분 정도를 해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후방에서 날아드는 지원 사격들은, 냉정하게 1인분에 가까울 정도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분명 마스터 최재민은 전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 그렇다고 해도 이 페이즈에선, 저 루키들의 지원사격을 기대하기 어려울 터였다. 직사화기를 사용하는 원거리 딜러들에게, 엄폐물 뒤의 적은 ‘절대적인 사각(Blind Spot)’이었으니까. 그러니 여기는 오롯이 본대 돌격조의 힘만으로, 녀석들이 숨을 틈도 없이 찍어 눌러야만 했다. ‘평소보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해내야지.’ 도윤은 가죽 장갑 안으로 배어 나오는 땀을 느끼며, 꽉 틀어쥔 대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전원, 대기.] 이어셋 너머로 최재민 마스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진입!]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차도윤은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1팀! 전방 돌파!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거리를 좁혀!” 콰직! 쩌적- 그의 육중한 체중과 대검의 무게가 실리자, 딛는 발판마다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갔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야 사전에 이미 예상했던 것이고. 타탓-! 돌격대는 오히려 더 빠르게 속력을 내며, 소금쟁이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푸슈슈슈-! 하지만 역시 녹록지 않았다. 소금쟁이들은 차도윤이 유효 사거리 내로 진입하기도 전에, 기가 막힌 반응속도로 뒤로 미끄러졌다. ‘빠르다!’ 녀석들은 수면 위를 스케이트 타듯 지치며, 거대한 수정 기둥 뒤로 쏙 숨어버렸다. 동시에 기둥 뒤편에서 고압의 물대포가 빗발쳤다. 콰아앙! 콰앙! “크윽!” 물대포가 차도윤의 진행 경로에 있는 발판들을 박살 냈다. 길이 끊겼다. 차도윤은 급하게 방향을 틀며 이를 갈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역시나 예상했던 시나리오지만, 막상 닥치니 지랄맞은 건 어쩔 수 없다. 빠르게 전황을 살핀 차도윤은, 돌격대를 두 개 조로 나누어 전략을 수정하였다. “태윤이, 네가 어그로를 좀 끌어줘야겠다.” “예, 팀장님.” “최대한 녀석들을 끌어내서 나오면, 우리가 후방을 친다.” “옙!” 빠르게 오더를 내린 도윤은, 더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타앗-! 지금부터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놈들의 ‘공명’ 때문에 던전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러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분. 저 녀석들을 쓰러뜨리는데, 그 이상의 시간이 들어서는 안 된다. 초조함이 슬슬 차오르기 시작한다. 전면을 뚫기 위해 방패를 들고… 몸으로 물대포를 받아내기라도 해야 하려나. 그런 고민까지 하던, 바로 그때였다. 피이잉-!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본대 쪽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저 멀리 외곽의 허공에서 날아든 소리. ‘설마?’ 차도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지원사격이 불가능한… 완벽히 사각의 지역일 텐데? 퍼억-! 그러나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기둥 뒤에 숨어 물대포를 쏘려던 소금쟁이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맞은 듯 뒤로 홱 젖혀졌다. 심지어 무슨 스킬이라도 쓴 건지, ‘기절’ 상태이상까지 걸린 소금쟁이의 몸체가 순간적으로 수면에 내려앉았다. ‘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 의문은 두 번째였고, 지금 중요한 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도윤의 몸이 먼저 반응했고. 타앗- 거대한 대검을 높이 치켜들며 도약한 차도윤이, 화살이 박혀 있는 소금쟁이의 머리통에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콰앙-!! 13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성좌들이 딜 각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하는 데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소금쟁이들이 등장하는 던전의 ‘미들 섹션’은 초반부의 널찍한 호수와 달리 좁아진 협곡이었고. 폭이 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강물이 굽이치며 흐르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후방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협곡 사이로 숨는 소금쟁이들을 저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주장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게 맞다. 다만……. 협곡을 따라 일정하게 흐르는 강풍. 그리고 처음 적을 발견했을 때 거의 정해진 것처럼 움직이는 소금쟁이들의 패턴. 이러한 부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임;; └ 그렇다고 보이는 것도 아닌데 ㅇㅇ └ 설마 우리 몰래 가이드 애로우(Guide Arrow) 스킬이라도 배운 건 아니지? -궁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배웁니까? 게다가 그거… 최소 2차전직은 해야 습득 가능한 상급 스킬일 텐데. └ 뭔데; 배워본 것처럼 말한다? -스킬 같은 거 쓸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시죠 형님들. 어쨌든 나는 이 배팅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고, 그래서 최대한 빡세 보이는 조건으로 배팅을 올렸다. [현재 배당률: Up(50% 이상) 26.02배 / Down(50% 미만) 1.038배] 그 결과가 바로 이 26배라는 어마어마한 배당률이다. 대충 100명 중 96명 이상이 내 실패에 배팅했다는 소리였다. └ 응 그냥 3퍼만 먹을게~ └ 오늘은 안 속는다 방장아; └ 되는 걸 된다고 해야 도박이라도 해보지 ㅅㅂ └ 담부턴 밸런스 좀 잘 잡아 보라고; └ 한발 맞추기 정도가 밸 적당하지 않았을까? └ 노잼;;;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배팅이 종료됩니다.] [현재 총 배당금 : 52,375 LP] 캬……. 그동안 내 방송체급이 많이 커져서 그런지, 총 배당금만 무려 5.2만LP다. 하긴, 이 정도 되니까 나 혼자 300LP를 걸었는데도, 배당률이 26배나 나오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건…… 성공하면 거의 8천 LP가 복사되는 셈인데, 개인적으로 승리 확률을 한 7할 정도 본다. 흐음. 이제 준비 좀 해볼까? 슬슬 돌격조 공격 오더가 떨어질 때가 되어 갈 테니 말이지. [전원, 대기.] 이어셋 너머로 최재민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난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어 올렸다. 기리릭- 그러자 옆에 있던 배주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장님, 뭐 하세요?” “보다시피… 지원사격 대기합니다만.” “뭐가 보여야 쏘는 거 아니에요?” “뭐…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요?” 내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허공을 향해 화살 끝을 조준하자, 배주하는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지켜보았다. 그리고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아주 천천히, 화살대에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하였다. ‘바람의 흐름을 이용한다 해도… 초장거리 사격이니 그냥 쏠 순 없겠지.’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오늬를 쥔 손끝을 타고 마력이 흘러 들어가자, 평범했던 화살이 천천히 불그스름한 기운을 띄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마력을 주입했는데 자연스럽게 화기(火氣)가 발생하는 건, 당연히 ‘태양의 궤적’이 가진 속성 때문. 기긱- 기리릭- 두 눈을 감고 바람의 흐름을 느끼며, 활시위를 한계 가동범위까지 천천히 잡아당겼다. 눈을 감는 이유는, 어차피 표적을 보는 게 아니라 바람의 흐름을 극한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감각이라는 건, 어느 한쪽을 통제할수록 더욱 예민해지는 법이거든. “후읍.” 이어서 천천히 숨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진입!] 최재민 멘토의 오더가 떨어졌을 때……. 파아앙-! 자연스레 놓은 활시위가, 붉게 달아오른 화살을 허공으로 힘차게 밀어 올렸다. 쐐애애애액-! 화살은 손을 떠나 높이 날았고, 굽이치는 협곡의 한 가운데로 빨려들어 가듯 쇄도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더 이상 그걸 보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 발만 쏠 생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핑- 피피핑-! 아무리 나라 해도 시야 정보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런 고난이도의 ‘곡사’로 적을 단번에 맞추는 건 어려운 일.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시행 횟수를 늘리는 건, 확률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피핑-! 그래서 나는 순식간에 열 발도 넘는 화살을, 협곡을 향해 미친 듯이 쏘아 올렸다. “그… 화살 버리는 거 아니죠, 조장님?” 강민우가 조심스레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단 시도는 해보는 겁니다. 가능성이 보였으니, 이 정도 투자는 해볼 수 있죠.” └ 투자는 ㅅㅂ; 흠. 대답이 너무 뻔뻔했던 것 같기도 하고. └ 화살 한 발 아낀다고 자린고비처럼 굴던 ㅅㄲ가;; 배팅 걸렸다고 미친 듯이 난사를 때려 버리네; 그… 눈치챘을까? └ 이런다고 될 것 같냐 이브야……. 응, 화살 한 통 더 쓰면 돼. └ 방장 가즈아!!! 형… 설마 역배 걸었어? 피핑- 피비비빙-!! 어쨌든 계획했던 대로 화살 30발 정도를 순식간에 쏘아 낸 나는, 이제 사격을 멈추고 경건한 자세로 결과를 기다렸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더 쏴서도 안 된다. 왜냐고? 여기서 더 쐈다가는, 아군이 화살에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대충 화살을 날린 것 같아도, 다 철저한 계산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슬슬… 결과가 나올 때가 됐는데…….’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해량이 300% 증폭됩니다.] [대상이 잠시 동안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열기의 고동’ 효과로 대상에게 ‘화상’ 상태가 적용됩니다.] 내 눈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중략…… 봤지 형들? 이거, 되는 거라니까? * * * 궁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람의 결을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다. 이건 최재민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명제였고, 첫 번째 멘토링이 바람의 흐름을 읽어내는 수업이었던 것도……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이 신념 때문이었다. 휘이이잉-! 그래서 재민은, 지금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를 보며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였어도…… 이보다 완벽하게 사격할 순 없었어.’ 유리 협곡 특유의 상승 기류가 불어오는 타이밍.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 바람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낸 곡사. 그것들은 코너에 몰린 엘리트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가차 없이 쏟아져 내렸고. 퍽- 퍼퍽- 퍼버버벅-! 이 광경은 가히 예술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정확히 바람을 읽어낸 거지?’ 지금 최재민이 서 있는 위치는, 전방의 돌격대와 후방의 지원대 사이의 정 중앙이었다. 그러니 이 화살이 어떻게 날아갔는지, 또 어떤 경로로 어떻게 대상에게 명중했는지. 그걸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던전 안에서 최재민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허공을 향해 활시위를 들어 올리는 이건율을 보며, ‘괜찮은 시도’라는 생각 정도만 했었다. 조금 대견하기도 했다. 그가 뭘 하고 싶은지는 보자마자 이해하고 알 수 있었고. 그런 시도를 생각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한 발이나 협곡 너머에 도달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정확도의 곡사가 나올 것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다른 악조건들은 다 떠나서 화살이 체공한 거리만 보더라도……. 사실상 장궁으로 적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거의 한계 수준에 가까운 사정거리였으니 말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높은 명중률이 나온 건, 운도 좀 따랐다고 봐야 하겠지만. ‘무서운 수준이군. 이게… 재능인가?’ 최재민은 솔직히 방금 벽을 느껴버렸다. 당장의 실력에 벽을 느꼈다기보다, 이 이건율이라는 루키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에 벽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최재민이 파악하고 판단한 게 맞다면 이건율은……. 지금까지 그가 본 그 어떤 루키 플레이어와 비교하더라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궁수였다. ‘어제만 해도 바람의 흐름을 읽을 생각조차 못 하던 녀석이… 하루 만에 이런 곡사를 해내는 게 가능한 걸까.’ 최재민은 살짝 벌어진 입을 끝까지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감상에 잠깐 젖어있던 사이……. 띠링-! [모든 엘리트 몬스터가 처치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뒤집힌 하늘의 유리 정원’의 마지막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화살 비에 고슴도치가 된 소금쟁이들은, 모두 쓰러져 강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 * * 띠링-! [배팅 결과가 산출되었습니다.] [엘리트 몬스터 ‘공명하는 수정 소금쟁이’ 킬 관여율 : 68.4%] [조건 충족 : UP (50% 이상)] ‘크……!’ 나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68.4%. 생각보다 더 높게 나왔다. 하긴, 30발을 넘게 쏟아부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유효타로 꽂혔으니 당연한 결과다. 게다가 돌격대가 진입하기 전에 내가 선제 타격으로 체력을 대폭 깎아놓았고, 결정적으로 막타까지 챙겼으니 기여도가 뻥튀기될 수밖에. [배팅에 승리하셨습니다!] [배당률 26.02배가 적용됩니다.] [획득 금액 : 7,806 LP] └ 26배 ㅅㅂ;;;;;; └ 미쳤다; 돈이 삭제가 된다고?;;; └ 정배야…… 정신이 들어? └ 역배인 척 자제좀요;; └ 와 ㅅㅂ 데이브 돈 복사 뭔데;;; └ 쌀숭이 폼 미쳤다;; 하아……. 갑자기 후회가 밀려온다. 그냥 1000LP 걸어버릴 껄. 그랬으면 최소 2.5만 LP 버는 건데 말이지. 13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강남구, 테헤란로 한복판.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마천루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건물은 단연 ‘바르가 타워’였다. 실버나이츠(Silver Knights)의 본사가 마치 중세시대의 성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 위압적이고 웅장한 백색의 요새라면. 바르가의 사옥은 철저히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차가운 검은색의 모노리스(Monolith)를 연상케 했다. 외벽 전체를 감싼 검은색 강화유리는 햇빛을 반사하지 않고 모두 흡수해 버리는 듯했고, 건물 주변에는 그 흔한 화단이나 장식물 하나 없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오직 필요한 것만이 존재하는 공간. 그것이 바로 소수 정예 길드, 바르가의 정체성이었다. 징- 지이잉- 엘리베이터가 펜트하우스 층에 도착하자, 육중한 강철 문이 소리 없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서늘한 공기, 그리고 희미하게 배어있는 고급스러운 시가 향에 김영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와도… 적응 안 되는 곳이군.’ 김영태는 넥타이를 살짝 고쳐 매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널찍한 집무실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가구라고는 중앙에 놓인 거대한 흑단나무 책상과, 창가에 놓인 1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 도청 장치는커녕 먼지 한 톨 숨을 곳이 없어 보이는 그 삭막한 공간의 창가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려하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로 현란한 패턴의 하와이안 셔츠, 그리고 그 위에 아무렇게나 걸친 실크 가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그 남자가 입고 있으니 마치 그것이 세상의 표준인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바르가(VARGA) 길드의 마스터. 세계 랭킹 35위, ‘마에스트로(Maestro)’ 진태오였다. “어서 오십쇼, 국장님.” 진태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얇은 스틱을 입에 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태도는 오만했다. 국장급 관료가 찾아왔음에도 일어나기는커녕 자세를 고쳐 앉을 생각조차 없는 모습. 하지만 김영태는 개의치 않았다. 진태오라는 인물에게 예의를 바라는 건, 고양이에게 충성심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김영태는, 이 남자가 자신을 ‘국장님’이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존중을 표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진.” 김영태는 성큼성큼 걸어가, 묻지도 않고 소파 맞은편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자 진태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렬한 눈빛이 김영태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표정이 꼭… 나라 잃은 독립군 같으십니다?” “어쩌면…… 비슷합니다.” “호오.” 진태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허브 스틱’(마력 회복 효과가 있는 고가의 기호식품)을 손가락으로 집어 내리며, 흥미롭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40일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제 생일은 아닐 것 같은데.” “대한민국 게이트의 ‘안정화 만료일’ 말입니다.” 김영태는 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1급 기밀(Top Secret)’이라는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서류였다. “정부가 손을 놨습니다. 추가 예산 편성은 부결됐고, 기존에 유지하던 시스템 방어막은 LP 고갈로 인해 정확히 39일 14시간 뒤에 꺼집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진태오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그는 서류를 집어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김영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간파하려는 듯이. 하지만 김영태의 눈에 서려 있는 절박함은 연기가 아니었다. 잠시 후, 진태오가 허브 스틱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결국 그렇게 됐군요.” “그렇습니다.” “그 양반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네요.” “…….” “결국 게이트에 돈 붓는 건… 헌터들만 좋은 일이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뭐, 국장님께서 그런 표정 지으실 건 없습니다. 국장님 뜻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진태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게이트 안정화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LP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지속돼 왔으니 말이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국장님.” “말씀하시죠.” “각성자 유출은…… 정부 차원에서 따로 막을 방도가 있으신 겁니까?” 진태오의 물음에, 김영태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오늘 여길 찾아온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으니 말이다. “후우.” 게이트 폭주가 일어나 불규칙 게이트가 생성되면, 그 기간 동안 플레이어들은 라이카에 접속할 수 없다. 라이카로 접속하는 통로인 안정화 게이트가 비활성화되어 버리니, 다른 국가의 게이트라도 이용하는 게 아니라면 접속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 불규칙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역시, 시스템 경험치. 그게 가장 큰 문제겠지요?”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화 중 하나인 경험치. 라이카와 접속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그걸 얻을 방법이 없다. 불규칙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를 잡아도 부산물과 LP는 획득할 수 있지만, 경험치만큼은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뭐, 이번에야 수년 만의 게이트폭주다 보니, 곧바로 플레이어 이탈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진태오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졌다. “예산을 아끼겠다는 게, 당장 이번 한 번에 한정한 이야기가 아닐 것 아닙니까?” “그렇…… 습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라이카 접속이 차단될 텐데…….” 김영태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 침이 넘어갔다. “평범한 생계형 헌터들이라면 몰라도 랭커들이라면. 성장을 위해서 무조건 다른 국가로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게이트 청정국이 대한민국뿐인데, 어디로 넘어가냐고? 사실 선택지야 널려 있다. 한국이야 땅덩이가 좁아서 ‘단일 채널’로 이뤄져 있지만, 중국이나 미국 같은 커다란 국가들은 수십 개의 채널로 라이카에 접속할 수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마스터 말씀이 맞습니다. 당장… 중국에 접촉 중인 랭커들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니까요.” 여러 개의 채널을 가진 나라들은, 선택적으로 안정화 구역과 폭주 구역을 ‘격리’해서 관리한다는 얘기다. 중국의 경우 영토의 60% 이상이 게이트 폭주에 잠식되어 있지만, 주요 도시들은 완전한 안전지대다. “흐, 어딘지 알 것 같은데.” 피식 웃은 진태오가, 다시 김영태를 응시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이민 단속이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진태오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소수의 최정예 랭커들로만 구성되어있는 바르가 길드의 특성 상, 한국에 주기적으로 게이트 폭주가 일어난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실버나이츠처럼 수천 명의 길드원을 거느린 군대식 조직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기업급 가치를 지닌 엘리트들의 집합체. 그런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성장이 막힌다는 패널티는… 감수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게이트관리국 국장인 김영태가 이 정도도 생각지 못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이 부분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3대 길드 중에도 바르가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었고 말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애국심 같은 이야기는 제게 안 통할 겁니다. 난 내 식구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명분이 없다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우린 안 움직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냉정했다. 하지만 김영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명분이라……. 그렇다면, 실리는 어떻습니까?” “실리?” “이 서류, 아직 안 보셨더군요.” 김영태가 턱짓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가리켰다. 진태오는 귀찮다는 듯 서류 봉투를 집어 들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폭주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타격받을 곳. 그리고 가장 먼저 ‘데드 존’이 되어버릴 알짜배기 땅의 좌표들입니다.” 김영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폭주가 끝나면, 이 땅들은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됩니다. 정부가 모든 지역의 복구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민간에 불하하게 될 테고…….” “……이 정보를 저한테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거래하자는 겁니다.” 김영태는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손해 볼 경험치만큼 LP를 더 파밍할 수 있다면. 손실을 메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일정 기간 동안 더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마법 스크롤. 그런 것들이 라이카에는 존재하니까. “정부 차원에서 바르가에게 ‘전시 특별 징발권’을 드리겠습니다. 폭주 기간 동안 바르가가 원하는 지역의 던전 부산물 독점권을 인정해 드립니다. 세금 면제는 덤이고요.” “호오…….” 이야기를 듣던 진태오의 자세가 달라졌다. 이건 단순히 나라를 지켜달라는 감정에 기댄 호소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이러면 이제는 철저한 비즈니스다. 남들이 다 도망갈 때 남아서 싸우는 대가로, 막대한 부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기회. 게다가 명분까지 챙길 수 있다. 애국이라는… 가장 강력한 명분 말이다. “국장님,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는 분이셨네. 꽉 막힌 공무원인 줄만 알았는데.” “물론, 한국에 남는 정도로 그냥 드리는 대가는 아닙니다.” “알죠. 최소한 게이트 폭주는 최선을 다해 함께 막아야겠지.” “후우. 역시… 바르가를 가장 먼저 찾아오길 잘했습니다.” 진태오는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스틱을 잘근 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천천히 김영태에게로 다가왔다. “좋습니다. 제안,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대신.” 진태오가 김영태의 손을 맞잡았다. “저희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면전은 안 합니다. 우리는 ‘타격대’ 역할만 맡겠습니다. 저희 인원으로 지역방어 자체를 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구체적인 부분은 추후 협의하죠.” “그리고.” 진태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길드의 ‘검희(Elise)’ 말입니다.” “……채유현 헌터 말씀이십니까?” “그 친구는 통제에서 제외해 주셔야겠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라, 길드 오더로 묶어두는 것보다 그냥 풀어두는 게 더 효율이 좋거든요. 조커(Joker) 역할이라고 해 두죠.” “…….” 김영태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검희의 실력이라면, 혼자서 전선 하나를 틀어막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영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진태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13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3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당연한 얘기겠지만, 유리 정원의 남은 공략은 아주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최재민 멘토의 말에 따르면, 원래 예상했던 시간보다 3시간을 빨리 클리어했다고 했다. 아마 소금쟁이를 극단적으로 빨리 잡은 탓에, 던전 난이도가 수직 하강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기여도 1위가 나였던 건, 배팅에서 승리했던 시점에 확정이나 마찬가지였고 뭐.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여도 1위 : 이건율 (15.2%)] [지급 LP : 1,235 LP] ‘캬.’ 눈앞에 찍힌 숫자를 보자마자, 온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기여도 최대한 파밍하겠다고 허슬했더니 몸은 좀 힘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다른 참가자들 평균 보상이 300LP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무려 4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린 셈이다. 덕분에 나는 해가 채 지기도 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에 복귀할 수 있었고. 빈방에서 꽤 오래 빈둥거리며 뒹굴 수도 있었다. 룸메님은 어디 가셨냐고? “…….”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돌아오셨다. 철컥- 녹초가 된 강소희가 질질 끌리듯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꼴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고, 최고급 로브 자락은 어디 진흙탕이라도 굴렀는지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리모컨을 까닥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소희 님? 좀 늦으셨네.” “……조용히 해요.” 강소희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평소 같으면 째려보기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더니, 곧장 내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 그리고는. 털썩- 내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시체처럼 쓰러지듯 몸을 파묻었다. 지독한 마력 역류의 후유증인 듯,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힘들었나 봅니다?” “……말 시키지 마요. 토할 것 같으니까.” “거 참, 비싼 몸이라 그런지 체력이 영 꽝이시네.” “시끄러워요. 그런데 혹시 물은…….” “냉장고에 있겠죠?” “…….” 그런데 축 처진 몸을 겨우 일으키는 모습이, 오늘따라 꽤나 안쓰럽다. 음…… 물 정도는 한 병 가져다줄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보이는 게, 꽤 많이 힘들어 보이긴 하니까……. 달칵- 저러다가 마력 역류라도 일어나면 나만 또 고생해야 하니, 이 정돈 해주지 뭐. “있어 봐요.” 그런 의미에서 미니 바에 있던 냉수를 따서 가져다주자. “여기요.” “고마워요…….” 물병을 받아 든 강소희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울대가 꿀꺽거리며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짠한 마음도 든다. “고마우면 마나포션 하나 더?” “양심, 어디?” “쳇.” 물 한 병을 다 비운 강소희는 씻겠다며 샤워실로 들어갔고, 그 사이 소파에 벌러덩 누운 나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심심하다 해도, 숙소 밖을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 아니 근데 방장은 왜 숙소에만 있는 거임? └ 글게; 다른 참가자들은 아르카나 시설 알뜰하게 이용하던데. └ 방장 지금까지 쓴 거 식당밖에 없지 않음? -나갔다가 인욱이한테 걸리면, 저 트레이닝룸 끌려가거든요. └ 엌ㅋㅋㅋㅋㅋ └ 싫다고 하셈ㅋㅋ -지난번에 이미… 다음엔 가겠다고 약속을……. 그런데 잠시 이렇게 잡담을 떨다가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지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일… 멘토링 마지막 날 아닌가?’ 원래 같았더라면 오늘 해산하기 전에 무조건 내일 일정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을 텐데……. 저 지독한 최재민 멘토가 우리를 별말 없이 숙소로 보내준 게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멘토분들의 긴급한 사정으로 인해, 금일 멘토링 일정은 전부 취소되었습니다.] [참가자 여러분들께서는 하루 간의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시면 되며…….] [익일 두 번째 본미션 미궁 발표는 차질 없이 진행될 예정이니, 추후 지침을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온 전체 공지를 들은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멘토들의 긴급한 사정이라…… 그런 게 대체 뭐가 있을 수 있으려나?’ * * * “야, 솔직히 이번 화는 우리 진우 님이 다 씹어 먹을 거거든?” 서울 성수동의 한 힙한 카페. 달달한 디저트를 앞에 두고 열변을 토하는 건, 다름 아닌 이시율이었다. “예고편 봤냐? 그 하얀 사제복 핏? 거기서 이미 게임 끝났어. 힐러 포지션 1위? 볼 것도 없이 우리 진우 님 거야.” “웃기고 있네. 힐러 1위가 뭐 대수냐? 이번 화 메인은 누가 봐도 탱커 결정전이거든?” 맞은편에 앉은 친구, ‘지은’이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그녀의 스마트폰 케이스에는 이성환의 포토카드가 당당하게 꽂혀 있었다. “성환 오빠 방패 드는 순간, 그냥 거기가 바로 성역이야. 예고편에서 거인 도끼 막아내는 거 못 봤냐? 핏줄 선 거? 그게 진짜 남자의 섹시함이거든.” “지랄. 야, 섹시는 한도진이지.” 이번엔 옆에 있던 ‘수민’이 끼어들었다. “쌍권총(Dual Pistol) 난사하는 거 못 봤냐? 흑발 냉미남의 정석! 이번에 원거리 딜러 포지션에서 사고 칠 게 분명하다고.” 세 여자의 팽팽한 신경전. 서로 자기가 미는 참가자가 최고라며 침을 튀기는 와중, 단 한 사람. 임민정만이 묘하게 복잡한 표정으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야, 임민정. 넌 왜 말이 없냐?” “…….” “아, 맞다. 너 최애 갈아탔지? 시율이네 오빠로.” 지은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임민정의 ‘이건율 앓이’는 이미 이 모임의 공공연한 비밀(?)이자 놀림거리였다. “솔직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친구 오빠를 덕질할 수가 있냐?” “맞아. 몰입 안 되지 않아? 나 같으면 친구 얼굴 떠올라서 바로 탈덕할 것 같은데.” “……시끄러, 이것들아.” 민정은 친구들의 공세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꿋꿋하게 반박했다. “니들이 뭘 알아? 그 뭔가 오묘한…… 친근하면서도 분명히 아닌 것 같은 그 갭 차이를 아냐고.” “어우, 야. 소름 돋아. 무슨 친구 오빠한테 갭 차이래?”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찐사랑 인정합니다.” 깔깔거리는 친구들의 반응에 민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친구들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가끔 시율이 얼굴이 겹쳐 보일 때마다 현타가 오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율’이라는 헌터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근데 민정아. 덕심과는 별개로…… 이번엔 좀 힘들지 않을까?” 한참을 웃던 수민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이번이 ‘포지션 결정전’이잖아.” “응, 그런데?” “솔직히 건율 오빠가… 좀 다재다능하시긴 한데, 반대로 말하면 확실한 주특기가 없는 거잖아.” 친구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건율이 시율의 오빠이다 보니, 상당히 조심스러운 뉘앙스였다. “맞아. 1화 때 보니까 근접전도 하셨다가 마력총도 쓰셨다가 하시던데…… 포지션 결정전은 한 분야에 특화된 참가자들이 유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아무래도…….” “우리 도진 오빠처럼 총이면 총! 성환 오빠처럼 방패면 방패! 이렇게 스페셜리스트들이 득실대는데… 건율 오빠 같은 ‘올라운더’ 스타일은 좀 불리할 것 같아서.” 지은 역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들었다. “잡캐… 아니, 올라운더가 초반엔 좋아 보여도, 나중에 가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경우가 많잖아. 이번엔 진짜 실력자들끼리 붙는 거라, 점수 따기 쉽지 않으실 텐데.” 친구들의 팩트 체크(?)에 민정은 말문이 막혔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헌터학개론적으로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아니야, 그래도…… 건율 오빠는 좀 다르지 않을까?’ 솔직히 근거 같은 건 없다. 원래 덕질에 근거 같은 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녀 같은 일반인이 보기에 헌스쿨 상위권 참가자들은, 솔직히 누가 더 잘한다는 걸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이들이었으니까. 다만 민정의 눈에 건율은……. 헌터학개론의 기본적인 상식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걸 친구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말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뭐.” 민정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시율 역시, 친구들의 말이 영 거슬렸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잡캐라니. 우리 오빠가 잡캐는 맞는데…….’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임펙트와는 별개로, 잡다하게 보여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묘하게 반박하고 싶었다. 용돈 때문은 결단코 아니었다. “야, 잡캐가 나중에 다 씹어먹을 수도 있는 거거든?” “어우, 네네. 그러시겠죠. 오빠라고 편들어 주는 거 보소.” “아니거든!”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투닥거리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오랜만에 친구 넷이 모였기에 시간이 빨리 간 것도 있었지만, 헌스쿨을 주제로 떠들었던 게 시간이 삭제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재밌었으니까.’ 그리고 집에 가는 길. 시율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오빠가…… 진짜 헌터 일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게 맞는 걸까?’ 아마 내일 방영될 2화를 보고 나면, 조금 더 확실해질 것 같았다. 14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5년 전을 끝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던 현상. 게이트 폭주(Gate Outbreak). 그날이 머지 않았다는 소문은…… 사실 꽤 오래전부터 헌터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얼마 전까지. 정부는 분명 꽤 많은 비중의 국가 예산을 태워 폭주를 미뤄오고 있었고. 때문에 그 누구도 다음 폭주가 일어날 정확한 날짜를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최상위권 랭커인 헌터즈 스쿨의 멘토들 또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상황을 알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지금 여기에 모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고 말이다. 달그락- 고급스러운 크리스탈 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검희는 잔에 담긴 엠버(Amber) 빛깔의 위스키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연락, 받으셨죠?” 그녀의 물음에,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거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태산 길드의 마스터, ‘철벽’ 마광철이었다. “하, 젠장할. 김영태 그 양반, 사람 피 말리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으르렁거렸다. “39일이라니. 고작 한 달 조금 더 남았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진작 말을 해주던가!” “확실한 결론이 나오기 전까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셨겠지요. 김 국장님 입장도 이해는 합니다.” 차분하게 대꾸한 것은 이클립스 길드의 이사, ‘천재 마법사’ 서지혁이었다. 그는 태블릿 PC를 두드리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희 길드 정보팀에서도 교차 검증을 마쳤습니다. 마력 파장의 불안정성, 게이트 발생 빈도의 증가 추이… 모든 데이터가 39일 뒤를 가리키고 있더군요. 오차 범위는 플러스마이너스 24시간 이내입니다.” “하아…….” 서지혁의 확인 사살에, 좌중의 공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헤일로 길드의 마스터, ‘성녀’ 한소은이 불안한 눈빛으로 손을 모았다. “그럼… 또다시 소모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거군요.” “전쟁이라기보단, 재난에 가깝겠죠. 피할 수 없는.” 채유현은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5년 전. 마지막 폭주 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곳곳에 열린 불규칙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던 그 지옥도. 그때마다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도시는 불탔다. 그러니 또다시 그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물론 초창기 게이트 폭주 때보다야 훨씬 낫긴 하겠지만.’ 검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던 청룡회의 주인, 최재민이 입을 열었다. “문제는…… 한국에서의 폭주가 너무 오랜만이라는 겁니다.” “그 말씀은……?” “저희뿐 아니라 모든 길드들이… 충분한 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동석한 멘토들을 차례로 훑었다.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스템 동기화()’ 문제.” 그 단어가 나오자, 멘토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시스템 동기화. 그것은 헌터들이 게이트 안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자, 라이카 시스템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밖, 즉 현실 세계에서는 이 축복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규제 때문에 그렇지, 게이트 밖에서도 헌터들은 얼마든지 스킬을 사용하고 마력을 뿜어낼 수 있었으니까. 다만 말 그대로 동기화. 플레이어가 라이카 시스템을 더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율해주는 동기화 시스템이, 게이트 밖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게이트 밖에선… 가진 바 전투력의 절반도 내기 쉽지 않아.’ 심지어 이것도, 동기화 없는 전투를 경험해 본 베테랑 플레이어들 기준이다. 그러니까 각성한 지 5년이 되지 않는,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의 절반이 넘는 인원들. 이제껏 라이카 안에서만 힘을 사용해 온 이들의 경우……. 게이트 밖에서는 제 힘의 3할도 채 내기 힘들 터였다. “비동기화 전투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번 게이트 폭주에서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될 수도 있겠어요.” 한소은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모든 멘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채유현은, 5년 전의 전투를 떠올려봤다. 마치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둔해지고, 검 끝에 실리던 마력이 제멋대로 흩어지던 그 거지 같은 느낌. 이걸 실전에서 처음 겪었을 때의 당혹감은,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으음.” 최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각자의 길드에 수많은 루키들이 있을 테니까요.” 마광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방송이고 뭐고, 지금 당장 길드 훈련소에 처박혀서 루키들 붙들고 살아도 모자랄 판국에… 한가하게 예능이나 찍고 있을 수 없긴 합니다.” 한소은도 한 마디 덧붙였다. “김 국장님이 굳이 엠바고가 풀리기 전에 정보를 흘린 것도, 그래서겠죠.” 채유현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헌터즈 스쿨의 멘티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이 친구들도 미래를 알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흐음.”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고, 최재민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있던 서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어 냉정하게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방송을 펑크낼 수도 없습니다. 위약금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사실이 대중에 알려지면… 폭주가 오기 전에 사회가 먼저 붕괴할 테니까요.” “엠바고가 걸려있으니, 제작진에게 언질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고……..” 채유현이 턱을 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딜레마였다. 대중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송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 중요한 시기에 출연진들은 제대로 방영될지도 모를 예능을 찍으면서 시간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판을 바꿔야죠.”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채유현은 천천히,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작진에게 커리큘럼 변경을 제안합시다.” “변경이라뇨?” “기존의 미궁 공략 스케쥴을 다 폐기하고…….” 가면 안에서 유현의 눈이 반짝였다. “인원을 분배해서… 저희가 멘티들을 각자의 길드로 데려가면 어떻습니까?” “……?” “어차피 길드에서도 비동기 훈련을 수행할 테니, 그걸 컨텐츠로 만들자는 거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최재민이었다. 그의 눈초리가 흥미롭다는 듯 휘어졌다. 검희의 말대로 잘만 조율할 수 있다면, 당장 시급한 길드 루키들의 훈련도 해결하면서 방송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은 생각이군요. 잘만 설계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네. 어차피 지금 상황 봐서는 연합 레이드도 잡힐 것 같은데……. 그걸 명분으로 삼으면 돼요. ‘실전 훈련’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감싸서.” 채유현이 말하는 연합 레이드란, 해외의 불규칙 게이트 공략을 지원하는 파견 레이드를 말하는 거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완전 청정구역인 한국 안에서, 불규칙 게이트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채유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헌터즈 스쿨 기획안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제작진도 좋아할걸요? 헌터 예능이 언제 이 정도까지 리얼리티를 담아 보겠습니까.” 물론 정부 당국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 게이트 관리국에 따로 신고도 해야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마 충분히 허락은 떨어질 것이다. 명분이 너무 명확하니까. “재밌겠네요.” 가장 먼저 찬성표를 던진 건 서지혁이었다. 그는 특유의 계산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추어올렸다. “방송 분량도 확실하고, 명분도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헌스쿨 멘티들의 진짜 가능성을 확인하기에도 아주 적합한 방식이고요.” “나도 찬성입니다. 우리 태산의 방식을 꼬마들이 버텨낼진 모르겠지만… 재밌겠군요. 후후.” “저도… 모두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지인 것 같네요.” 마광철과 한소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최재민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제작진을 설득하러 가시죠.” 멘토들의 의견은 빠르게 모아졌다. 사실 유현의 제안은, 작금의 거의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장세연 PD만 설득하면 되겠어.’ 생각을 마친 채유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김영태 국장님을 바로 한번 만나뵙겠습니다.” “검희 님이요?” “직접?” 채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조금 있기도 하고…….” 그녀는 탁자 위의 헌터즈 스쿨 기획안을 집어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작진을 설득하기 전에, 더 위쪽 라인을 납득시키는 게 빠를 테니까요.” 결국 HBC도 국영기업이다. 그러니 김영태 국장을 통해 윗선에 비공식 요청을 한다면, 엠바고를 지키면서도 더 쉽게 제작진을 납득시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는 나머지 멘토들도, 모두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검희 님께 신세 좀 지는 거로 하고…….” 최재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오랜만에 이현무 마스터를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얘기 좀 나눠봐야겠군요.” 멘토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각자 다음 일정을 위해 떠났다. 그런 그들을 보며… 채유현은 문득, 다가올 방송이 꽤 볼만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 훈련에 고통받을 루키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까. ‘과연 동기화 없는 실전을… 멘티들이 얼마나 버텨주려나.’ 하지만 그녀는 물론… 이곳에 모였던 랭커들 중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들이 걱정하는 그 ‘비동기 상태’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참가자가 한 명 정도는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14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오후 9시 30분. 신림동 고시촌의 좁은 자취방.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불빛만이 감도는 어두운 방 안에서, ‘딸깍’하는 마우스 소리가 적막을 깼다. “좋아, 배당금 미쳤고.” 박민철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스마트폰 은행 어플에는, 방금 입금받은 한 달 치 급여가 찍혀 있었다. [잔액 : 2,532,400원] 진상 손님들의 갑질을 참아내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악착같이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하지만 민철은 망설임 없었다. 이건 도박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입각한, 아주 합리적인 ‘투자’였다. [스페셜 매치 : 헌터즈 스쿨 3 - 포지션 결정전] Option A : 이건율 종합 순위 Top 10 진입 성공 (1.5배) Option B : 이건율 종합 순위 Top 10 진입 실패 (2.8배) “하, 2.8배? 이게 배당이 여기까지 올라간다고?” 민철은 코웃음을 쳤다. 역시나 시청자들 중, 대다수가 헌알못인 게 분명했다. 겨우 한 화 반짝한 이건율이… 날고 기는 한국 최고의 유망주들 사이에서 10위 안에 든다? 이성환이나 박하준 같은 괴물들이 버티고 있는 판에서? ‘심지어 클래스도 무슨 생산클래스더만. 그런 잡캐로 포지션 결정전은…….’ 민철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 미션이야말로, 요행이나 운빨 따위가 통할 리 없었으니까. ‘티저 영상 보고 쫄아서 정배에 건 호구들아. 이 형님이 지금부터 팩트체크 들어가 준다.’ 그는 주저 없이 [Option B]에 250만 원을 ‘풀 배팅’했다. [배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예상 당첨금 : 7,000,000원] 깔끔하게 700만 원. 이 돈이면 똥컴부터 갈아치우고, 그토록 사고 싶었던 최신형 게이밍 노트북까지 지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민철은 벌써부터 승리감에 도취된 채, 자신의 본진인 <헌터즈 라운지> 게시판에 접속했다. 제목: [인증] 오늘 팩트체크 들어간다. 이 형은 말로만 안 한다.jpg 작성자: 팩트만팬다(네임드) [배팅 내역 캡처] 이건율 거품 꺼지는 거 구경할 사람? 형은 미리 탑승했음. 방송국 놈들 편집에 대체 언제까지 속을 거임? 오늘 방송 보면 답 나옴. 주작질도 실력이 있어야 통하는 법이지. ㅋㅋ └ 미친 놈 ㅋㅋㅋㅋ 250을 태워? └ 야, 근데 솔직히 10위 안은 좀 에바긴 해. 35레벨이잖아. └ ㅇㅇ 나도 역배 봄. 이성환 박하준이 폼이 얼만데 ㅋㅋㅋ └ 사장님이 미쳤어요 수준 배당인데? 나도 간다 ㅋㅋㅋㅋ 자신의 글에 달리는 동조 댓글들을 보며, 민철은 캔맥주를 땄다. 치이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탄산이 터져 나왔다. 이제 즐길 시간이었다. 거품이 터지는, 아주 통쾌한 순간을. * * * 같은 시각……. 서울숲 인근의 한 편의점. “야, 왔어! 왔어! 시작했다!” 카운터 안쪽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알바생 임민정이, 호들갑을 떨며 옆에 있던 이시율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 좀! 아프게 왜 때려.” “야, 너네 오빠 나온다니까? 넌 떨리지도 않냐?” “나? 당연히 떨리지. 근데 그게 우리 오빠 때문일 수는 없지 않을까?” “너네 오빠라는 건… 당연히 박진우 참가자 말하는 거였는데?” “헐. 그런 거라면 인정.” 끊임없이 투닥대면서도, 두 사람의 시선은 카운터 위에 올려둔 태블릿 PC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화려한 오프닝 시그널과 함께 <헌터즈 스쿨 3>의 2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국내 최고 유망주들의 리얼 서바이벌!] 최고급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는 S급 헌터들. 압도적인 피지컬에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이성환, 모델 뺨치는 비주얼의 박진우. 그들의 등장에 편의점 안이 떠나가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꺄아아아악!! 미쳤나 봐. 이성환 비율 봐라. 저게 사람이냐? 머리 왜 저렇게 작아? 내 주먹만 한듯?” “야, 야! 뒤에! 뒤에 우리 진우 오빠!!” “와, 진짜 천사야. 날개 어디 갔어?” “미쳤어, 미쳤어! 오늘 코디 뭐야? 완전 왕자님 재질이잖아…… 으어어…….” 민정과 시율은 서로 손을 맞잡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특히 시율의 눈에서는 하트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박진우. 시율의 최애이자…… 그 좋아하던 아이돌 덕질까지도 시들해지게 만든 원인이……. 시작부터 계속 화면에 메인으로 잡히고 있었으니까. “야, 침 흘리는 거 아니지?” 하지만, 그 행복한 시간도 잠시. 화면은 합숙소 입소식 장면으로 넘어갔고. 곧 시율에게 너무도 익숙한 ‘그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자, 이거 하나씩 받으시고요! 제작진이 PPL 상품인 ‘바이탈-X 포션’ 세트를 나눠주는 장면. 다른 참가자들이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 유독 튀는 행동을 하는 한 사람. 바로 이건율이었다. -오? 이거… 챙겨가도 되는 거죠? 박스를 열어본 이건율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연기가 아니었다. 그건 아주 원초적이고 세속적인 미소. 심지어 그는 지급받은 포션을 주섬주섬 가방 깊숙이 챙겨 넣기까지 했다. “…….” 시율의 주접이 뚝, 끊겼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이건율 제발….” “야, 건율 오빠 표정 좀 봐, 찐이다 저거.” “하… 진짜 쪽팔리게 왜 저러냐……. 제발 편집 좀 해주지….” 시율이 이마를 짚었다. 방금 전까지 우아한 백조 같던 박진우 오빠를 보다가, 갑자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포션을 챙기는 친오빠를 보자니 괴리감이 컸다. 집에서 치킨 시킬 때 쿠폰 챙기던 그 눈빛과 똑같았다. 귀티 나는 루키들 사이에서 혼자 ‘생활력’을 뽐내고 있는 혈육을 보는 심정이란. 이게 바로 ‘공감성 수치’라는 단어… 그 자체의 감정 아닐까. “왜? 귀여우신데. 저런 게 진짜 매력 아니냐?” “귀… 뭐라고?” “등급 결정전 1위 할 정도 실력자시면서, PPL 한 땀 한 땀 챙기시는 게… 이게 바로 반전 매력인 거지.” “하, 미치겠네 진짜.” “야. 다른 헌터들은 다 가식 같은데, 건율 오빠는 인간미 있잖아.” “인간미가 넘쳐서 아주 흐르다 못해 홍수가 났다, 홍수가 났어.” 시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계속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솔직히 수치스럽긴 하지만, 저게(?) 혈육만 아니었다면 확실히 전개 자체는 상당히 재밌었으니까. 하지만 이때만 해도 시율은 알 수 없었다. 진짜 ‘공감성 수치’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상암동 HBC 사옥, 예능국 편집실. 막내 작가 김예림은 모니터 앞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실검 떴나? 아직이에요?” “아직 5위권 밖입니다, 작가님. 근데 커뮤 반응은 슬슬 올라오고 있어요.” 조연출 박 대리의 말을 들으며, 예림은 미리 사 온 아메리카노로 마른 목을 살짝 축였다. 그녀는 지금 꽤 긴장한 상태였다. 지금 방영 중인 2화의 성적이, 앞으로 헌스쿨3의 흥행 곡선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 결정해 줄 테니 말이다. ‘1화가 워낙 잘 돼서, 어지간한 수준으론 상승곡선이 나오기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예림은, 오늘 시청률이 1화보다 더 좋게 나올 가능성이 꽤 높다고 보고 있었다. 지난 한 주 동안 헌스쿨 공식 채널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떡밥을 풀어 올린 데다……. 오늘 2화의 내용에는 인기 참가자들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장치들이 다양하게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초반 빌드업. 여기서 캐릭터를 확실하게 잡아주지 않으면, 뒤에 이어질 반전의 임팩트가 약해진다. 그녀는 비장의 카드로 준비한 다음 씬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1화에서 급부상한 이슈의 주인공이자… 그녀의 최애기도 한 이건율 참가자가 나오는 씬이었다. ‘여기 연출이 진짜 중요한데.’ 화면이 바뀌고, 소지품 검사 시간이 되었다. 엄격한 교관들이 참가자들의 가방을 검수했다. 각종 최고급 아티팩트와 마법 스크롤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이건율의 차례가 되었다. [……?] 교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꺼내 든 물건. 그것은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도, 화려한 장비도 아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하얀 플라스틱 바구니.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살 법한 칫솔. 그리고 구수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초록색 이태리 타월. [형님. 사우나 좋아하세요…?] 스크린 안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고, 편집실에도 마찬가지로 정적이 감돌았다. “…….” 모니터링을 하던 박 대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끄으악.” “왜 그래요, 대리님.” “작가님…. 저거 진짜 괜찮은 거 맞죠?” “뭐가요?” “아니… 제가 다 얼굴이 화끈거리잖습니까. S등급 헌터 가방에서 때수건이라니…. 이건율 참가자 이미지 관리 좀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예요? 우리 시청률 견인해 줄 히든카드라면서요.” 하지만 박 대리의 반응을 보는 김예림은, 오히려 만족스런 표정이 되어 있었다. “됐네.” “예……?” “대리님, 지금 미치겠죠?” “화면 보기가 곤란할 정돕니다.” “그럼 된 거예요.” “그게 무슨…….” “여기에 바로 이건율 참가자의 셀링 포인트가 있는 거라니까요?” 예림이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 속 이건율은 교관의 황당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으세요? 저 당당함. 여유로움. 쪽팔림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저게 쪽팔릴 일이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캐릭터의 완성이라고요.” “아니…… 여유가 아니라 그냥 눈치가 없는 거 아닐까요?” “두고 보세요. 반응 터질 테니까.” 그런 얘기를 하던 김예림은, 슬쩍 노트북을 열어 커뮤니티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쏟아져 나오는 반응들을 보며, 그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미친 ㅋㅋㅋㅋㅋ뚝ㅋㅋ섬ㅋㅋㅋ사우낰ㅋㅋ 목욕 바구니가 왜 거기서 나와? ㅋㅋㅋㅋ -동네 목욕탕 가냐고 ㅋㅋㅋㅋㅋ -컨셉질 지독하다 진짜 ㅋㅋㅋ -호감인데? ㅋㅋㅋ 짠내 오지네 ㄹㅇㅋㅋㅋ “봐요, 대리님! 터졌잖아요.” 물론 커뮤니티 반응을 본 뒤에도 박대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예림은 확신했다. 일단 뭐가 됐든, 시선을 끌었으면 성공이다. 이제 남은 건, 이 짠내 나는 모먼트가 경악으로 바뀔 마지막 반전이… 얼마나 임팩트 있게 터져 주냐는 것뿐이었다. 14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박민철은 배를 잡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푸하학!”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맥주를 들이켰다. 역시, 실력이 없으니 예능감으로 분량을 뽑으려는 심산이다. 어떻게든 방송 분량을 확보해서 몸값이나 올리려는 수작. ‘넌 이번엔 진짜 끝났다, 이건율. 네 밑천은 여기까지야.’ 커뮤니티의 반응은 아직까지 훈훈하지만, 민철은 제작진의 편집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1화에서 그렇게 띄워 놓은 캐릭터라 쉽게 버릴 순 없으니, 이렇게 예능캐로라도 살려 보려는 노력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어림없다. 이제 곧 시작될 ‘포지션 결정전’에서는, 저런 컨셉질이나 예능감이 의미가 없을 테니까. 결국 헌스쿨의 핵심 재미는 리얼리티와 참가자들의 역량에서부터 나온다. 이건율이 아무리 예능감이 좋아도, 결국 밑천이 드러나면 시청자들은 외면할 터였다. ‘흐흐흐… 이제 수금할 일만 남은 건가?’ 2화가 진행되는 구도를 보며, 민철은 완전히 확신했다. 저 목욕 바구니나 챙겨 온 놈이, 이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리 없다는 걸 말이다. 때문에……. -근데 팩트좌 진짜 오늘 한강 가는 거 아니냐? -이건율 저러고 포지션 결정전 10위권 들어가면 게임 터지는데? 자신의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도,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캬.” 맥주가 달았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던전 정보] 그레니스 협곡의 기억 (Memory of Grenis) 분류: 특수 던전 / 가상 훈련장 위치: 루미스 영지 - 왕실 제2훈련소 헌스쿨 특유의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 형태의 자막과 함께. 기다렸던 포지션 결정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나저나 이건율 대체 뭘 고르려나.” 화면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상 훈련장 필드, <그레니스 협곡>으로 전환되었고. 참가자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각자의 병과를 선택하고 있었다. 이성환은 [중갑 보병]을. 박하준은 [검사]를. 권유나는 [전투 마법병]을. ‘이건율은… 이 다음 차롄가?’ 민철은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커뮤니티 헌알못들은 이건율이 원거리 딜러일 거라고 얘기했지만, 민철은 솔직히 검이나 창, 혹은 방패를 고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1화에서 이건율이 가장 임팩트 있게 보여준 무기가 마력총이긴 해도……. 솔직히 궁수도 아닌데 원거리 딜러랍시고 <그레니스 협곡>에서 궁병이나 석궁병을 고른다면. 그거야말로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여긴, 궁수들의 무덤이었으니까. ‘제발 활 들어라. 그러면 끝인데 진짜.’ 민철은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자만한 이건율이 궁병을 고르고 포지션 점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야말로……. 그가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였으니까. 그런데. 척- [이건율 : ‘궁병(Archer)’ 선택 완료] 이어진 자막에, 민철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친?” 진짜로 골랐다고? 활을? “푸하하하하하!!! 나이스!!!!” 민철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신이 나서 커뮤니티에도 곧바로 글을 싸질렀다. [미친 놈 ㅋㅋㅋㅋㅋㅋㅋㅋ 자멸하넼ㅋㅋ 엌ㅋㅋㅋ 스스로 무덤을 파ㅋㅋㅋ] 이건 아무리 봐도 미친 짓이다. 제작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선택을 그냥 뒀지? 분명히 대본이 다 있었을 텐데? “던졌네. 그냥 던졌어. 아예 포기했구나?” 민철의 눈에는 이미 ‘미적중’이 아닌 ‘당첨’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고 있었다. 물론 시청자들의 반응은 반반이었지만……. -??? 활을 왜 들어? 이건율 활도 쏠 줄 암? -그래도 원딜이니까 활로 간거 아닐까? 여기서 정해진 포지션으로 쭉 밀어야 하니까. -그런 이유면 인정이긴 한데……. -캬, 이건율 활까지 잘 쏘면 나도 당장 갈아탐. -팩트좌 오늘 돈 좀 버나 설마? -팩트형 나 치킨 한 마리만;;; 박민철은 벌써부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와, 700이다. 700. 캬…!” 이 돈이면 뭘 할까? 행복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 타협은 없다. 헌스쿨 공식 송출 화질 8K? 풀옵션? 다 들어오라 그래.” 하지만 이때만 해도 민철은 알 수 없었다.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던 그의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었다. * * * -60초 뒤에 공개됩니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광고 자막을 보며, 민정은 투덜거렸다. “아, 또 뭔 광고…! 진짜!” 반면, 옆에 앉은 시율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대보다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진우님이야 이미 힐러 1등 확정이신 것 같아서 좋긴 한데…….’ 항상 비슷한 패턴이지만…. 원픽인 박진우의 씬에서 도파민을 충전하고 나면,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혈육에 대한 걱정이었다. 사실 오빠가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잘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적어도 혈육이 욕먹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달까. “야, 임민정.” “와이?” “우리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근거 있는 거야?” 오빠가 무려 원픽이라는 민정은 확신에 차 있었지만……. “걱정 붙들어 매시라니까? 건율 오빠가 못하셨을 리가 없어.” “근거는?” “내가 헌스쿨 덕질 원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 “애초에 건율 오빠가 잠재력 없었으면, 헌스쿨 제작진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편집 안 떠.” 그래도 시율의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망신만 당하지 말자, 이건율.’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광고가 끝나고 다시 헌터즈 스쿨이 송출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인원이 포지션 선택을 완료하여,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제 곧, ‘서리 거인’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적이다!! 적들이 몰려온다! 전원 전투 준비!!” 장면은 시작부터 박진감 넘쳤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이건율이 포함된 조부터 카메라가 조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어어? 우와! 1인칭으로 깔아준다고?” “이거 설마 우리 오빠 바디캠이야?” 아예 화면이 이건율 1인칭 시점으로 바뀌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뭐, 뭐지? 우리 오빠 진짜… 이번에도 잘했나?’ 이쯤 되니 잘 모르는 시율 또한, 기대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연출은 오늘 이성환이나 박하준 참가자의 전투를 보여 줄 때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유니크한 연출이었으니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못하는 참가자의 전투 씬에 이 정도의 연출 공수와 컷을 할애할 이유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율은, 조금 더 안심하고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제가 이쪽 루트 막아볼 테니까, 뒤에서 딜 포지션 잡아주세요, 형님!] “오, 전인욱이었나? 저 사람도 실력 되게 괜찮다던데. 건율 오빠랑 합 좀 맞춰주려나?” [형님, 이쪽!] [잠깐. 형님? 으억?]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오빠의 플레이가 뭔가 심상찮았다. 갑자기 화살을 두 발씩 시위에 걸고 근접 사격을 성공시키는가 하면……. 퍽- 퍼퍽-! 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사를 보여 주며, 미친 듯이 포인트를 쌓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우왁, 형님!!] [거기 위험…! 으억?] 이건율 1인칭 시점으로 보는 전인욱의 반응이, 곧 시청자들의 반응일 것 같았다. 헌스쿨 제작진이 슬로우 모션까지 곳곳에 걸어가며 기가 막히게 편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율의 활약은 멀미가 날 정도로 현란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와… 미친.” 옆의 임민정은, 손님이 들어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아예 넋이 나가 있었고. 시율 또한 전투 화면에 빨려들어 갈 것처럼 점점 몰입되고 있었다. ‘이거…… 진짜 우리 오빠 맞아?’ 헌터에 대해 잘 모르는 시율이었지만, 지금 오빠가 보여 주는 움직임이 말이 안 될 정도로 화려하다는 건.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활을 쏘면서 움직이는 건, 액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야, 민정.” “말 걸지 마. 집중 깨져.” “우리 건율쓰… 진짜 잘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맞지?” “쓰읍. 그걸 말이라고.” “얼마나 잘하는 건데?” “대답할 가치가 없다.” “……?” “오늘 방송 끝나고, 커뮤에다 물어보셔.” * * * 민철은 부정하고 싶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이게… 대체 뭐지?’ 그는 스크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손에 든 캔맥주를 찌그러뜨린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율의 활약에 감탄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금 화면에서 이건율이 보여 주는 퍼포먼스에 본능적으로 경악하면서도…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와 미친;; 활 들고 이런 짓거리가 가능하다고??? 미쳤다 진짜;;; -이거 CG 아님? 이건율 몸 어딘가에 와이어 달고 있는 거 아님? -와이어 달아도 못할듯ㅋㅋㅋㅋㅋㅋ -나 방금 실수로 침흘림 ㅅㅂ ‘시팔…… 그레니스 협곡 점수는 주작도 안 될 텐데?’ 만약 오늘 방영분이 다른 컨텐츠였더라면. 커뮤의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CG 주작일지도 모른다고 합리화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는 그레니스 협곡이고, 적어도 여기서 산정되는 포지션 점수는 주작이 불가능하다. 그레니스 협곡은 제작진이 만든 필드가 아닌… 라이카 시스템이 관장하는 가상훈련 시스템이었으니까. 그러니 제작진이 바보가 아니라면, 낮은 점수가 나온 참가자의 플레이를 이런 식으로 주작할 리 없다. 때문에 박민철은 지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러면 10등… 못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 거지?’ 사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퍼포먼스로 10등 안에 들지 못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을 말이다. “제발…….” 이쯤 되니 이건율이 주작이었든 아니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냥 다 괜찮으니 제발. 이건율이 10등 밖으로만 어떻게든 밀려나서……. 그의 피 같은 월급이 삭제되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HBC 사옥을 향해 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님…… 부처님…… 제발!’ 그런 민철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헌스쿨 제작진은 얄궂게도, 이건율의 점수를 바로 보여 주지 않았다. 끝까지 모든 인기 참가자들의 플레이를 교차편집으로 전부 송출하면서 기대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뒤에야. 비로소 점수를 발표하는 씬이 화면에 송출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화면 속 서지혁 멘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래도 지금,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하나 추가로 발표해야 할 것 같군요. 불길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화면이 전환되면서, 화려한 UI와 함께 충격적인 자막이 민철의 눈앞에 떠올랐다. [전체 종합 1위 : 이건율] [점수 : 2,038 pts] “……?” 그렇게 박민철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14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한국 시각으로 새벽 2시. 하지만 지구 반대편, 북미의 낮은 이제 막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Laika Archive (North America)] - Board : Public Cloud (Real-time) 전 세계 4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세계 최대의 각성자 커뮤니티, 라이카 아카이브(Laika Archive). 그중에서도 실시간 이슈를 다루는 ‘퍼블릭 클라우드’ 게시판은 때아닌 트래픽 폭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 막 송출을 시작한 한국의 헌터 예능, <헌터즈 스쿨 3> 때문이었다. [Hot Trend] #HBC #HunterSchool #Grand_Arcana #Elise #Weapon_Master 실시간 트렌드 순위에 낯선 키워드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여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 반응들을 살펴보자면, 가히 ‘문화 충격’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User : NY_Coffee] : Wait,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거 그랜드 아르카나 아냐? : HBC가 저걸 통째로 빌렸다고? 저기 하룻밤 렌탈비가 얼만지 알고 저러는 거야? [User : Texas_Ranger] : 미쳤네. 저기 VIP룸은 1박에 최소 1,000LP야. 근데 저걸 참가자 100명한테 1인 1실로 줬다고? └ 진정해 친구. 100명 다 저기서 자는 건 아니니까. └ A~S급이면, 그래도 40명은 되는 거 아냐? └ 그렇기는 하지. └ K-예능 자본력 실화냐? 헐리우드 리얼리티 쇼도 저 정도까진 안 태우는데. └ 역시 대기업의 맛이 다르긴 하네. 방송 초반,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단연 압도적인 ‘자본의 맛’이었다. 참가자들의 숙소로 공개된 곳이 다름 아닌 루미스 영지의 최고급 VIP 시설, <그랜드 아르카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평생 하룻밤 묵어볼 일조차 없는 그곳을, 예능 촬영을 위해 통째로 대관했다는 사실은 북미 유저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본력에 대한 감탄은, 헌스쿨에 대한 본격적인 반응 중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반응이 터져 나온 건… 멘토들의 얼굴이 화면에 잡히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으니. [User : Sword_Lover] : OMG!!!!!! 엘리제(Elise) 누님 드디어 나왔다!!!! : 와, 미모 미쳤다. 가면 쓰고 있는데도 예쁨이 뚫고 나오네. : 저기 참가자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엘리제한테 검술 지도를 받는다고? : 나도 한국 가서 귀화 신청할까? 진지하게 고민 중임. [User : Magic_Mike] : 흥분하지 마라, 검퀴들아. 이번 시즌 진수는 이클립스(Eclipse)의 서지혁이다. : 저 차가운 눈빛 봐라. 루키들 얼어붙는 거 꿀잼이네 lol : 솔직히 마법사 지망생이면 저기서 숨만 쉬어도 레벨 오를 듯. [User : Dragon_Slayer] : 다들 조용. Blue Dragon(청룡)의 마스터 최(Choi)가 오더 내리는 거 안 보임? : 카리스마 미쳤다 진짜. 저게 랭커의 품격이지.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한 한국 랭커들의 등장에, 게시판은 그야말로 대통합의 장이 되어 있었다. 자동 번역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가 뒤섞여 헌터즈 스쿨을 찬양했다. 그런데… 이때까지의 분위기가 원래부터 헌터즈 스쿨을 기다리고 있던 해외 팬들의 커다란 흥미와 기대감이었다면. 포지션 결정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땐,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화면에 한 참가자의 플레이가 잡히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게시판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뀐 시점 말이다. [User : Hawk_Eye] : …Wait. 방금 내가 본 거 맞아? : 저거 ‘Archer’ 픽한 걔 아니야? Lee Geon-yul? [User : Pro_Gamer] : GIF(움짤) 따왔다. 이거 분석 좀 해줘. : [영상 첨부 : 활을 쏘던 이건율이 순식간에 접근한 적을 방패로 쳐내고, 다시 활을 쏘는 장면] 문제가 된 장면은, 협곡의 좁은 길목에서 기습을 당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원거리 딜러라면 당황해서 거리를 벌리거나 아군의 백업을 요청했을 상황. 하지만 화면 속의 사내, 이건율은 달랐다. [User : Frame_Analyst] : 분석 끝남. 이거 미쳤음. : 0.2초. 활을 등 뒤로 넘기고 허리춤의 숏소드와 버클러를 뽑는 데 걸린 시간임. : 그리고 쳐내자마자 다시 활 잡고 조준하는 데까지 0.3초. : 딜레이가 없어. 이게 말이 됨? [User : ] : Bullshit. 말이 되냐? 저거 100% Scripted임. : 35레벨짜리 루키가 저런 무빙이 나온다고? 고레벨 스턴트맨 썼겠지. : K-예능 주작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걸 믿는 흑우들 없지? 당연히 의심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율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시스템 보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레벨이 깡패인 이 바닥에서, 고작 35레벨짜리가 저런 고인물 무빙을 보여준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User : Real_Hunter] : 아니, 저건 연기가 아님. : 스턴트맨을 써도 저런 ‘호흡’은 흉내 못 냄. : 저건 그냥… 몸이 기억하는 거임. 수천 번, 수만 번 실전에서 구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바이브라고. : 내 손모가지 건다. 쟤는 ‘진짜’다. 현직 헌터로 추정되는 유저들의 반박이 이어지며,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논쟁의 중심에서, 새로운 별명이 탄생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User : Weapon_Master Lover] : Archer? No. : He is a Weapon Master(웨폰 마스터). : 활은 거들 뿐이었네. 근접전이 더 쩔잖아? : 와, 저 거리에서 활 버리고 칼 뽑아서 목 긋는 거 봐라. 타격감 지리네. 웨폰 마스터(Weapon Master).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 그야말로 포지션 결정전에서 이건율이 보여준 플레이를 관통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User : Newbie_One] : 저 Korean Archer 누구임? 프로필 아는 사람? : 이름이 Lee Geon-yul? 기억해 둬야겠네. : 얜 무조건 뜬다. 내가 장담함. 그렇게 한국의 밤거리가 잠든 사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건율’이라는 이름 석 자가 소리 없이, 하지만 거대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꿀잠을 자고 있을 시각이었지만 말이다. * * * 서울 마포구 상암동, HBC 건물 8층. 편집실의 공기는 카페인과 니코틴, 그리고 과열된 서버가 뿜어내는 열기로 텁텁했다. 하지만 장세연 PD에게 이 냄새는 최고급 향수보다 달콤했다. 물론 그녀에게 변태 같은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지금이, 그 어떤 악취마저도 향기롭게 느껴질 만한 그런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피디님! 라이카 아카이브(Laika Archive) 실시간 트렌딩 1위! ‘Grand Arcana’가 해시태그 점령했습니다!” 김예림 작가가 태블릿 PC를 얼굴 앞에 들이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장세연은 놀라기보다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굳이 김예림이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으니까. 장세연의 눈 앞에 펼쳐진 12개의 모니터 중 4개는 실시간 해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것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 글씨들이 뒤섞인 다국적 찬사였다. [Chat: NewYorker_88] : Wait, 저게 한국 헌터 아카데미 숙소라고? 우리 주(State) 정부 청사보다 시설이 좋은데? [Chat: Elven_Archer] : 저 활 쏘는 Lee라는 녀석, 활에 마석으로 작동하는 모터라도 단 건 아닐까. [Chat: Red_Sun] : HBC가 작정했구나. 헌플릭스 다큐멘터리보다 때깔이 좋아. “예상하긴 했지만.” 장세연은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막상 터지니까, 기분은 확실히 좋네요. 후후.” 일단 돈을 쓴 보람이 확실히 있다. 루미스 영지의 VIP 숙소를 통째로 대관했던 게 정답이었다는 걸, 트래픽으로 지금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랜드 아르카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숙소에, 드론 수십 대를 띄워 숙소 전경을 헐리우드 영화처럼 찍어냈으니. 사실 이 정도 임팩트가 뽑히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욕하면서도 결국 화려한 걸 보고 싶어 해. 그게 헌터물이든, 예능이든.” 그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숫자는 더더욱 정직했다. 프로그램 초반, ‘세금 낭비’라며 욕하던 여론은 압도적인 비주얼과 참가자들의 미친 퍼포먼스 앞에 쑥 들어갔다. 오히려 지금은 ‘국격이 올라간다’며 찬양 일색이었다. “방금 권 PD님께 들었는데요! 국장님한테 전화 오고 난리도 아니래요! 다음 시즌 제작비 걱정은 없겠는데요?” 김예림 작가가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장세연은 만족스럽게 커피를 들이켰다. 모든 것이 그녀의 기획대로였다. 완벽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우웅- 우웅-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장세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Master 최재민] 으음? 이 시간에 최재민 멘토가……? 방송이 대박 났으니 축하 전화라도 하는 건가? 아니, 최재민은 그런 한가한 인사가 아니라면 굳이 직접 전화를 걸 사람이 아니었다. 편집실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손을 들어 제지 신호를 보낸 장세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멘토님. 장세연입니다." - …PD님. 방송 잘 봤습니다. 반응이 뜨겁더군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재민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편집실의 열기와는 정반대인, 건조하고 서늘한 톤. 장세연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덕분에요. 멘토님들이 활약해주신 덕이죠. 특히 멘토님들의 라이브 캠 리액션 장면들은, 분당 최고 시청률 찍었습니다.” - 다행입니다. 참가자들의 사기도 올라갈 겁니다. 잠시간의 침묵. 장세연은 최재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단순한 축하 메시지를 위해, 이렇게 전화까지 했을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PD님. 이참에 판을 좀 더 키워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장세연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판을… 키운다니요?” - 저희 멘토들이 회의를 좀 했습니다. 지금의 훈련 방식도 좋지만, 시청자들은 좀 더… ‘야생’에 가까운 모습을 원하지 않을까 해서요. 야생. 본능적으로 느낌이 온 장세연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기존에 예정돼 있던 미궁 공략은, 어떻게 보면 시청자들의 예상 범주 안일 겁니다. 의외성이 떨어지죠. 장세연은 아직 최재민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조심스러운 말로 슬쩍 떠보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을까요? 아예 던전 공략에 들어가는 건… 최재민 멘토님께서 멘토링 때 해주셨던 것처럼, 멘토님들이 직접 함께해주시지 않는 한…….” 혹시나 멘토들이 직접 던전에 입장해준다면, 위험한 던전 미션을 통해 더 리얼하고 다이나믹한 컨텐츠를 뽑아낼 수 있을 테니. 은근히 기대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2차 미션을 ‘각 길드 본부로의 파견 및 실전 적응 훈련’으로 변경하는 걸 제안합니다. 최재민이 꺼내든 이야기는, 더욱 더 파격적인 것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장세연이,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멘티들을 각 멘토님들의 길드 본부로 파견을 보낸다고요? 보안 문제는요?” 이게 되기만 한다면,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슈메이킹이 가능하다. 때문에 장세연의 심장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비용도 전액 지원하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최재민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멘티 참가자들의… ‘비동기화()’ 상태에서의 전투 훈련을 필수 커리큘럼으로 넣어주십시오. “비동기화라면……?” 비동기화 개념을 잘 알지 못하는 장세연이 갸웃거리는 사이, 최재민이 말을 덧붙였다. - 게이트 밖에서의 전투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헌터들은 게이트 밖에서 시스템을 사용할 때 훨씬 큰 어려움을 느끼지요. 최재민의 말을 들은 장세연은,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최재민의 말이 조금 더 이어졌다. - 헌터가 가장 취약할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그러니 시청자들에게도 헌터의 진정한 위기가 무엇인지 보여 줄… 좋은 기회가 될 테지요. 장세연은 펜을 굴리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최재민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대한민국 4대 길드의 심장부를 방송에 공개한다? 이건 무조건 된다. 시청률을 배로 뻥튀기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카드다. ‘비동기화 훈련이라는 조건에 대해 좀 더 들어보긴 해야겠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아직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파악을 좀 더 해야 하겠지만, 결론을 정해놓고 과정을 찾는 일일 뿐이다. 최재민 헌터의 제안을 정말 방송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이건 총괄 PD인 장세연이 자신의 역량으로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미션에 불과했다. ‘오히려 헌터들의 리얼한 고충 같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섞으면 더 있어 보일지도 모르겠고.’ 방송쟁이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그림’이니까. -호랑이는 동물원이 아니라 야생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최재민의 마지막 멘트가 결정타였다. 장세연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좋습니다, 마스터님. 바로 검토 들어가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저희는 당장 2차 본미션으로 생각 중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저희 쪽 작가 팀 바로 세팅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장세연이 의자를 빙글 돌려 편집실을 마주 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스태프들이 멀뚱히 그녀를 쳐다봤다. 장세연은 책상 위에 놓인 2차 미션 큐시트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예림아.” “네, 네? PD님 왜….” “큐시트 다 엎어. 그리고 이정민 FD 당장 튀어 오라고 해.” 김예림 작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FD님은 갑자기 왜요? 방금 퇴근하셨을 텐데…….” “차 돌리라고 해. 지금 퇴근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장세연의 눈동자가 야망으로 번들거렸다. “우리 로케이션 나간다. 그것도 아주 험한 곳으로.” 14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간밤에 아주 푹 잤다. 어제 저녁에 헌스쿨 2화가 방영했다고 하던데. 숙소가 워낙 안락해서 그런가?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대로 기절해서 잠들었던 것 같다. 덕분에 너무 일찍 눈이 떠졌다는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밥이나 미리 먹고 오지 뭐.’ 곤히 잠들어있는 강소희가 깰까 봐 살금살금 나가서, 조식을 든든하게 먹은 뒤 산책도 한 바퀴 걷고 들어왔다. 시간은 맞춰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컨벤션 홀 촬영 일정이 있다고 했으니까. 어느새 강소희도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시죠.” “아침은요?” “그… 먹었는데.” “혼자요?” 너무 곤히 자길래 깨우기가 좀……. 아니, 잠깐. 그런데 내가 왜 변명을 해야 하는 건데? “됐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요.” 뭔가 불만스런 표정의 강소희가, 입을 삐죽이며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아니, 아침 먹으라고 깨워주기까지 해야 하는 건가? 혹시 날 집사로 생각하는 건……. “…….” 어쨌든 촬영 시간은 지켜야 했으니, 강소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복도로 나서자, 공기부터가 달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참가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뭔가 상기되어 있었으니까. 뭐지? 다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야, 들었냐? 시청률 역대급 갱신했다던데?” “당연하지.” “어디서 들었는데?” “김지민 매니저님.” “아! 식당에서 들었구나.” 스마트폰도 없는데 다들 어디서 그런 소식을 주워들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는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 내 옆의 강소희는, 딱히 그런 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흐음. 난 그래도 좀 궁금하긴 한데. 프로그램의 흥행 여부는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다. 뭐, 알아서 잘 되고 있겠지 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 예능이니까. 그러니 내 관심사는 오로지 인기 투표라는 것이다. 그게 최대한 잘 나와야, 마지막까지 출연료를 싹 다 뽑아먹을 수 있으니까. 미션 잘해놓고 인기 투표 조져서 떨어지는 것만큼, 억울한 상황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지. 설마 이정민 이 자식… 편집 이상하게 한 거 아니겠지? 인기 투표 망하면, 무조건 이놈한테 뒤집어 씌워야겠다. “후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3층의 컨벤션 홀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넓은 홀 안은 참가자들로 가득 찼다. 그때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누군가 내 등을 퍽 내리쳤다. 돌아보니 곰처럼 거대한 덩치, 전인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인욱이, 잠은 좀 잤어?” 이제 이 친구와는 말도 완전히 놓고 편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못 잤습니다! 영민 형님한테 들었는데, 어제 방영된 2화 반응이 장난 아니랍니다!” 전인욱이 흥분에 겨워 침까지 튀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놈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왜 다들 1화 방영 때보다 더 신난 거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시청률 동시간대 1위 찍고, 게시판도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요?” “진짜?” “예! 특히 유나 님은 팔로워가 하룻밤 사이에 10만 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와… 10만이라니, 감도 안 오지 않습니까?” 전인욱의 목소리에 주변 참가자들의 귀가 쫑긋해졌다. 다들 내심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나저나 형님.” “어?” “그런데 아침부터 왜 모이라고 했을까요?” 전인욱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어왔다. 그의 표정에는 어느새 방금 전의 흥분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글쎄. 2차 미션 관련해서 공지할 게 뭔가 있는 거 아닐까?” “에이, 이미 다 듣지 않았습니까. <제2 미궁 공략 일정>이라고.” “그렇긴 한데…….” “혹시 일정이 밀리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하루 쉬었더니 근질근질한데.” 하루종일 쇠질 하던데……. 그거 쉰 거 맞니? 물론 속으로 생각만 할 뿐이다. 괜히 물어봐서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멘토님들이 무슨 긴급 이슈 생겼다고 했었잖아요. 혹시 그거 때문은 아닐까요?”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불쑥 나타난 권유나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 팔로워 10만!” 물론 눈치 없는 전인욱의 대사는 곧바로 저지당해야 했지만……. “타이밍상 2차 미션 발표할 시점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촉이 그쪽인 느낌이라.” 영양가 없는 곰탱이의 이야기보단, 이쪽이 훨씬 더 흥미가 가는 게 사실이었다. “뭐, 곧 알게 되겠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됩니다.] 이어서 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제작진과 함께 낯익은 얼굴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꽤 오랜만에 보는 김신우 캐스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참가자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김신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컨벤션 홀을 울렸다. “다들 궁금해서 잠도 못 주무셨죠? 스마트폰이 없어서 답답하셨을 텐데, 제가 대신 확인하고 왔습니다.” “오오오!!” “반응이 아주… 뜨겁더군요. 여러분 덕분입니다.” 김신우가 능숙하게 분위기를 띄우자, 참가자들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 뒤에 다른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상황에서, 아주 중대한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려 합니다.” 김신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제작진과 멘토단은 긴급회의 끝에, 기존에 예정되어 있던 2차 본 미션… <제2 미궁 공략 일정>을 전면 폐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폐기요?” 참가자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미 공지 받은 일정을 갑자기 폐기한다니.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의 뜨거운 반응을 이어가기엔, 기존 미션은 너무 평범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스크린이 켜지고, 거대한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으로 보이는 지역들. 그 곳곳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각 멘토님들이 소속된 ‘길드 본부’로 파견을 나갑니다! 그곳에서 현존 최강의 헌터들과 호흡을 맞추며 진행하는 [필드 적응 훈련]! 이것이 여러분의 새로운 2차 미션입니다!” 잠시 정적.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 “대박! 진짜요?” “나 바르가 본부 가 보고 싶었는데, 미친!” 장내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단순한 훈련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본부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현직 랭커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이건 솔직히 훈련이 아니라 특혜였다. 취업 설명회나 다름없달까. 물론 길드 가입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내게야, 딱히 해당 사항이 없지만 말이었다. 그래도 뭐… 이 반응이 이해는 된다는 얘기다. ‘하긴. 아직 탈락자도 한 명 안 나온 상황인데, 이렇게 파격적인 스케쥴이 잡힐 줄은 몰랐을 테니까.’ 전인욱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 등을 또 쳤다. “형님! 본부랍니다! 와, 저 진짜 태산 길드 가고 싶었는데! 거기 구내식당 단백질 식단이 상당하다고……!” 아니 이 시키는 탱커 자식이 왜 이렇게 평타가 찰진 건데? 등짝 아파 죽겠네. “그래… 성환이랑 손잡고 태산 가서, 닭가슴살 원 없이 먹고 와라.” 뭐, 다들 좋아하니까 좋긴 한데. 나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냄새가 좀 나는데.’ 원래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거늘. 이미 준비 다 해뒀을 미궁 촬영 세팅을 매몰 비용으로 날려버리고, 굳이 막대한 추가 비용을 들여서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방송이 대박 나서? ‘그럴 리가.’ 방송국 놈들은 100원을 벌면 10원이나 겨우 투자하는 놈들이지, 100원을 벌었다고 200원을 쓸 놈들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겉으로 보이지 않을 이유가 있다는 건데……. 내 시선이 단상 뒤로 향했다. 정확히는 뭔가 수척해진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권 PD와 눈이 마주쳤다. 음……. 전혀 감이 안 오는데. 대체 뭐지? “게다가!” 김신우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길드 훈련에서는, 이제껏 헌터즈 스쿨에 등장한 적 없던, 아주 특별한 커리큘럼이 하나 신설됩니다.” 응? 특별한 커리큘럼……? “모든 참가자는 훈련 기간 동안 ‘비동기화()’ 환경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규제가 엄격한 대한민국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힘든 훈련이지요.” 비동기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인욱을 비롯한 다른 녀석들도 잘 모르는 표정인데……. “비동기화가 뭐지?” “몰라. 처음 듣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한 건지, 몇몇은 꽤 놀란 표정이 된 인원들도 존재했다. “소희 님은 알아요?” “아뇨. 저도 처음.” 뭐, 여느 때처럼 강소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뭔가 ‘비동기’라는 단어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시스템이란 당연히 라이카 시스템을 말하는 것일 텐데. 여기에 동기화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그게 인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그런 거였어? 굳이 왜 그런 환경을 만드는 거지? “으음.” 그런데 내 그 의문에 대답을 준 간, 의외로 성좌들이었다. └ 방장, 게이트 밖에서 마력 써 본 적 있나? -어… 헌스쿨 등급 결정전 때? <얼어붙은 서울>도 어쨌든 게이트 안은 아니니까……. └ 그건 게이트를 모방한 가상 던전이니까. 사실상 진짜 마력을 사용한 건 아니고. -그럼 없는데요. └ 그럼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음 ㅇㅇ;; └ 게이트 밖에서 마력 운용해보면 딱 느낌이 오는데, 그 거지 같은 느낌을 느껴봐야 비동기가 뭔지 알 수 있게 될 거임. 뭐, 대답을 들었다고 뭔지 알 수 있었다는 얘긴 아니었지만. ‘가 보면 알겠지, 뭐.’ 그렇게 특별할 게 따로 있겠어? 14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오전 일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애초에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까지 싹 다 세워져 있었던 건지, 김신우 캐스터의 진행 하에 일사불란하게 교통정리가 되어버린 거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일단 오늘 일정은, 포지션별 멘토링의 연장선 같은 거였다. 나를 비롯한 원거리 딜러 포지션 참가자들 모두, 최재민이 마스터로 있는 청룡회 길드로 가게 됐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조용한 마나 케리지 탈 때가 좋았는데. 버스에 탑승하니, 시끌시끌한 느낌이다. “와, 미쳤다. 시트 승차감 뭐야?” “이거 리무진 버스 중에서도 최고급 모델이래요. 한 대에 5억이 넘는다던데.” “역시 청룡이네요. 스케일이 달라.” 뭐래는 거야? 아르카나에서 지원하는 고오급 마나 캐리지 타보면, 이 리무진 버스는 그냥 마굿간 수준이고만. 성좌들에게 공감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날 선 비난뿐이었다. └ 쌀숭이쉑;; 돈맛 너무 봐서 큰일인데 ㄷㄷ; └ 이제 초심 잃고 짠돌이짓 못하는 거 아님? └ ㄴㄴ 그럴 리가. 이 ㅅㄲ는 통장에 100만LP쯤 박혀 있어도 전기세 아낄 인간임. 후우. ‘성좌’들이라 그런가? 역시 통찰력이 장난 아니다. └ ㅎ… 이걸 통찰력이라고 하긴 조금 민망……. 하지만 성좌들과의 잡담은 곧 끝날 수밖에 없었다. 루미스 영지에 있는 청룡회 지부에서 뭔가 기본 점검을 끝낸 우리는, 곧 로그아웃해서 서울숲역 앞에 모여야 했으니 말이다. 게이트 밖에서 스트리밍이 불가능한 건, 항상 아쉬운 부분이란 말이지. 끼이익-!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게이트 안에서 봤던 것과 디자인까지 거의 똑같은 청룡회 버스가 또 우리를 데리러 나타났다. 아니, 이거 일부러 비슷하게 디자인된 버스로 쓰는 건가? 굳이 이런 사이버펑크스러운 촌스러움까지 버스 디자인에 표현할 필요가 있었나……. 철컥-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에 탔는데, 나 빼고는 다들 들떠있는 모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흐음. 점심밥이나 맛있는 거로 나왔으면 좋겠는데…. 태산처럼 닭가슴살이나 주는 건 아니겠지?’ 아마 다른 참가자들은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하고 있을 터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우리가 곧 도착할 곳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중 한 곳인 ‘청룡회(靑龍會)’의 본부였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는 참가자들의 시선은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기회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나야,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뭐……. ‘아…… 호텔 밥을 한 끼 걸러야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슬플 수 있는 일이었다니.’ 손해가 막심하다. 생각해 보니 한 끼에 수십만 원짜리 밥을 이 쓸데없는 길드 견학 때문에 잃어버린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출연료에 추가로 청구라도 해야……. “……건율 님?”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배주하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아, 네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불러도 듣지도 못하고.” 내가… 그랬었나? 확실히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랬을 만도 한……. “별 건 아니고, 오늘 가면 무슨 멘토링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 너무 영혼 없는 대답이었나? 들킨 건 아니겠지? “후우. 역시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뭐라고? 진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역시나 건율 님도 청룡회 길드 방문은… 떨리시는 거겠죠?” 그런데 여기서 떨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안 될 것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조금 떨리긴 합니다만.” 그러자 배주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시 폭풍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저 진짜 너무 기대돼요!” 아, 네. “분명 엘리트 길드원들 전용 훈련장도 구경할 수 있겠죠? 청룡회 길드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 교육 시스템도…….”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앉은 것 같다. 그냥 배주하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앉은 것뿐인데……. 이러다 귀에서 피 나겠는걸? ‘후우.’ “아무튼 너무 설레요. 건율 님도 그렇죠?” “예, 긴장되고 그렇습니다.” 아까 비슷한 걸 물어본 것 같은데, 왜 또 물어보는 거야? 근데 사실 나도 지금 설레고 있기는 했다. 물론 이 설렘의 이유가… 배주하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지만. ‘충전기. 청룡회에는 충전기가 있겠지?’ 내 손은 주머니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매끈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 스마트폰이었다. ‘드디어… 거래소를 켤 수 있어.’ 게이트 밖에서 진행되는 이번 훈련 기간 동안에는, 보안 구역을 제외하고는 스마트폰 사용이 허용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오랜만에 접속할 거래소 어플. 합숙소에 들어오기 전에 대량으로 매도를 걸어두었던 잡동사니 아이템들이 팔렸을지, 혹시 대박 터진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3티어 재료템도 꽤 올려뒀었는데. 가 팔렸으면 그래도 한 80LP는 되지 않을까?’ 배터리가 방전되지만 않았어도 배주하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을 텐데. 다음에 폰을 제출할 땐, 무조건 풀 배터리 상태로 충전해야겠다. “의외네요.” 그때, 앞 좌석에 앉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참가자, 한도진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나를 훑어보았다. “항상 자신감 넘치시더니, 막상 청룡의 위용 앞에서는 그래도 긴장되시나 봅니다?” 얜 또 뭐야? “그…렇죠.” “저도… 긴장이 됩니다. 최재민 멘토님은 제 우상이니까요. 그분의 본진에 들어가는 거니까,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요.” 한도진은 주먹을 꽉 쥐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은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아. 진짜 쉽지 않다.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그런데 혹시… 폰 충전기 있니? “…….” 그렇게 두 S급들 사이에서 여러모로 고통받고 있는데, 창밖으로 드디어 무언가 웅장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고. 덜컹- 창밖으로 거대한 성벽처럼 솟아오른 건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대한민국 5대 길드 중 하나인, 청룡회 본부의 웅장한 위용이었다. “도착했군요.”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단순히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다. 시선을 자연스럽게 사로잡은 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푸른색 결계. ‘마력 차단 결계인가.’ 대한민국 헌터법상, 게이트 바깥의 민간 구역에서는 원칙적으로 마력 운용이 금지되어 있다. 각성자가 무분별하게 스킬을 난사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국가 공인 길드의 본부 내에 설치된 특수 훈련 구역. 저 결계 안에서만큼은 마력을 마음껏 개방하고, 살상용 스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무법지대’가 허용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게이트 밖에서 마력을 써 보는 건 처음이네.’ 지구에서의 마력 운용은 게이트 안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들었다. 과연 어떤 감각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끼이익-! 버스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 * * “마스터,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던 사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룡 길드의 수석 교관이자, 레벨 98의 준 랭커(Semi-Ranker). 장원준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화면 속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루키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길드 주력 파티들은 전부 해외 지원에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남미랑 유럽 쪽에서 동시에 게이트 폭주 터지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잖습니까. 이 바쁜 와중에 굳이 루키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 합니까?” 장원준의 투덜거림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최근 청룡 길드를 비롯한 대형 길드들은 사실상 비상 체제나 다름없었으니까. 최재민은 묵묵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표면적으로는 ‘국제 협력’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비동기화 전투 경험치를 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직 일반 길드원이나 대중들은 모르는, 수뇌부들만의 비밀이었다. 최재민이 대답했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야. 협회랑 HBC에서 합의한 사항이니 따르는 수밖에.” “아니, 그 합의라는 것도 웃깁니다. 갑자기 웬 ‘필드 적응 훈련’입니까? 어차피 쟤들, 헌스쿨 끝나면 바로 게이트부터 들어갈 텐데요. 굳이 마력 운용도 까다로운 필드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냐고요.” 장원준은 혀를 쯧쯧 찼다. 그의 눈에는 이번 일정이 그저 방송국의 보여 주기식 쇼(Show)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물론 최재민의 생각은 달랐지만 말이다. ‘쇼라……. 진실을 모르는 이상,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긴 하지.’ 어차피 폭주가 터지면, <헌스쿨 시즌 3>는 어떤 경우에도 일단 방영이 중단될 터다. 때문에 그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촬영에 임하는 참가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남는 거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최재민이 이번 커리큘럼 변경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뭐,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라. 개중에는 쓸만한 재목도 보이니까.” “쓸만한 재목이라… 아, 그 ‘웨폰 마스터’ 말입니까?” 장원준의 시선이 화면의 한쪽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버스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 청년. 이건율이 있었다. 그에 최재민이 피식 웃었다. “웨폰 마스터라. 자네도 어제 본방을 봤나 보군.” “하핫. 솔직히 재밌긴 하니까요. 이번 시즌이 참가자들 재능도 역대급인 것 같고요. 하지만…….” “계속 얘기해 봐.” “거기까지일 뿐입니다. 이건율 저 친구도 대단하긴 하지만, 이제 갓 30레벨대 햇병아리일 뿐이라고요.” 장원준의 말에, 최재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방송만 봤을 땐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최재민 본인도 처음에 바디캠만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다만. ‘직접 보지 않고는 믿기 힘들겠지.’ 유리 정원에서 확인한 이건율의 재능은, 그냥 그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최재민은 장난을 좀 쳐보기로 했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예?” “어쩌면 자네보다 더 잘 쏠 수도 있을걸?” “하!” 장원준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스터,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이 바닥에서 활 잡고 구른 세월이 얼만데, 이제 대륙에 갓 들어온 루키랑 비교를 하십니까?” “그럼 내기할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입맛도 없었는데 잘됐네요. 저 녀석이 제 기준 통과 못 하면, 오늘 회식비는 마스터가 내시는 겁니다.” “자신 있나 보군.” “당연하죠. 반대로 저 친구가 진짜로 저보다 잘 쏘면….” 장원준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마스터께 최고급 양주 한 병 대접해드리죠. 제 월급 털어서.” “후회하지 마라.” 최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훈련장에 들어서는 루키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기대되는군. 비싼 술을 예약해두는 게 좋을 거야.” 최재민의 시선이 이건율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비동기 훈련에서는 저 재능이 어떤 식으로 또 자신을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그였다. 14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제기랄! 베이징 놈들, 진짜 우리를 버릴 셈인가?” 쾅! 시안 지역 게이트 관리국장, ‘왕 웨이’는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집무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는, 붉게 물든 시안 지역의 지도가 경고등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불규칙 게이트(Irregular Gate)의 폭주. 그것은 대륙의 골칫거리이자, 시안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시한폭탄이었다. “인해전술로 막는 데도 한계가 있지! 벌써 2개 군단이 갈려 나갔어. 중앙 헌터 협회 놈들은 뭐 하는 거야? 지원 병력 안 보내?” “그게… 주요 랭커들이 출전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부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고했다. “거부? 미친 건가? 지역 비상사태에 거부라니!” “아시잖습니까. 폭주 구역에서는… 경험치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왕 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프라인 모드(Offline Mode). 게이트 폭주가 발생한 지역은 시스템과의 연결이 끊어지며, 몬스터를 잡아도 경험치를 단 1도 얻을 수 없는 ‘데드 존(Dead Zone)’이 되어버린다.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랭커들에게, 경험치도 없는 싸움터에 목숨 걸고 들어가라는 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규칙 게이트를 전문적으로 공략하는 랭커 팀도 존재하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그런 이들조차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보상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국에서 시안이 버려진 것일 수도 있겠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왕 웨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놈들…….” 왕 웨이가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이대로라면 시안 노드 전체가 영구적인 오염 지대로 변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데 말이다. 띠링- 그때, 관리국의 공식 통신 단말기에,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발신자 정보를 확인한 왕 웨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Caller : 이클립스(ECLIPSE) - 서지혁 이사] “……이클립스? 한국의 상위권 길드… 아니었나?” “맞습니다, 국장님.” “이놈들이 우리 직통 라인을 어떻게 아는 거지?” “지난 번 폭주 때 아마 저희 쪽에서 먼저 지원 요청을 보냈던 거로 기억합니다.” “으음.” 왕 웨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곰곰이 떠올려 보니, 이클립스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명확히 떠올랐다.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이자, 마법사들의 성지라 불리는 거대 길드. 흔히들 ‘한국의 마탑(魔塔)’이라 부르는 그 콧대 높은 놈들이, 왜 하필 지금 시안에 연락을 했단 말인가. “연결해.” 왕 웨이는 거칠게 넥타이를 플고, 귀에 꽂힌 [통역 아티팩트 - 언어의 요정(B급)]을 매만지며 통신 연결 버튼을 눌렀다. 상대가 누구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었으니까. “……왕 웨이입니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사내는, 전장의 긴박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 헌터계의 아이돌이자, 이클립스 길드의 실세 서지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시안 쪽 상황이 심각하다면서요? 뉴스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서지혁은 마치 이웃집 안부를 묻듯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아티팩트를 통해 번역된 유창한 중국어가 들려왔지만, 그 여유로운 태도에 왕 웨이는 속으로 천불이 났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정중하게 대꾸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지금 우리가 한가하게 안부나 물을 상황이 아닙니다. 용건만 말씀하시죠.” [에이,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돕고 싶어서 연락드린 건데.] “……예?” 왕 웨이의 손이 멈칫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는 되물었다. “돕겠다고 하셨습니까? 이클립스에서?” [그렇습니다.] “불안정 게이트 공략에 대한 도움…… 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정확합니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당황한 왕 웨이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고. 그런 그를 향해 서지혁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마침 저희 쪽에 여유가 조금 생긴 타이밍이어서요.] “혹시… 가능한 지원 규모를 여쭤봐도…….” [핵심 방어선 한 곳 정도는 틀어막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 [잘 풀린다면, 게이트 한 곳을 파괴해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게이트 파괴까지는 솔직히 기대도 않는다. 핵심 방어선 한 곳. 그 정도만 틀어막아 줘도, 확실히 숨통이 좀 트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는…. ‘허풍은 아닐 거야.’ 이클립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왕 웨이는 기뻐하기보다 의심부터 들었다. 평소 작은 이득 하나에도 눈에 불을 켜는 헌터 길드 놈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조건이 뭡니까.” [하하, 역시 국장님은 말이 통하시는군요.] 서지혁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간단합니다. 저희가 방어하는 구역에서 나오는 모든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전면적인 독점권. 그리고 해당 구역 내의 채굴권 및 파견 인력에 대한 비자 면제와 면세 혜택. 마지막으로… 긴급 파병 수당으로 150만LP 선지급. 이 정도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 왕 웨이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합리적? 이건 그냥 강도짓이다. 부산물 독점권에 면세 혜택도 모자라, 현찰로 150만LP를 달라니. 시안이 망해가는 와중에 알짜배기 이권이란 이권은 다 챙겨가겠다는 속셈 아닌가. “이보십시오, 서 이사님. 그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싫으시면 관두시죠. 저희도 뭐… 기왕 데드 존 지원 계획 세워진 마당에, 선택지는 많으니까요.] 서지혁은 정말 미련이 없다는 듯, 바로 통신을 끊으려 했다.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 왕 웨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클립스의 손을 놓으면, 시안은 끝이다. “자, 잠깐!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서지혁은 기다렸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몇 가지 현장 상황 등을 물어보더니……. [계약서는 지금 전송했습니다. 서명 확인되는 즉시, 선발대가 출발할 겁니다.] 그대로 계약서를 전송해왔다. “……! 왕 웨이는 순간 멍해졌다. 이 정도면 계약서도 미리 준비해 둔 수준. 마치 이 거래가 성사될 것을 알고 있었던 정도의 처리 속도였으니까. ‘애초에 먼저 연락해온 것부터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왕 웨이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면. 그의 입장에서는 더 고마워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저기, 서 이사님.” [네.] “……아닙니다. 계약서는 금방 날인해서 드리겠습니다.” 뚝. 통신이 끊어졌다. 하지만 홀로그램이 사라진 뒤에도, 왕 웨이는 개운치 않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클립스 놈들…….” 보통 이런 거래는 최소 하루 정도는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무슨 개인 간 LP 거래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조건을 픽스해 버린다? 이건…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대체 뭘까요, 국장님. 놈들이 노리는 진짜 목적이.” 부관의 물음에, 왕 웨이는 창밖의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글쎄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 “저놈들… 경험치나 돈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챙기러 오는 거야.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왕 웨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과연 그 ‘무언가’가 시안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반갑다. 오늘부터 너희들을 가르칠 청룡회 수석 교관, 장원준이다.” 훈련장 중앙에 선 장원준 교관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쓰지 않았음에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의 뒤로는 수십 개의 과녁이 놓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단순히 교관의 기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이질적인 감각. 그것이 참가자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까지 별생각 없던 나마저도,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다.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한 가지 묻겠다. 너희는 헌터가 뭐라고 생각하나?” 헌터가 뭐긴 뭐야. 직업이지. 게이트에서 돈 벌어서 먹고사는 직업이 바로 헌터 아닐까? 그러고 보니 쌀먹이야말로… 헌터라는 직업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일지도……? 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고…. “…….” 주변의 다른 참가자들을 슬쩍 보니, 서로 눈치만 보는 모습이다. 역시 이 친구들도 딱히 나보다 나은 대답이 떠오르는 건 아닌 모양인데……. 어쨌든 청룡회의 수석 교관이라는 친구는, 우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 말을 이었다. “각성이라는 축복을 통해 라이카의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서…… 게이트라는 미증유의 현상을 극복해 내는 존재들?” 뭐 저리 거창해?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천천히 둘러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게이트 안이 아니다. 라이카의 세계 밖에서… 시스템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지.” 그래? 이건 몰랐는데. “여기, 지구는… 오직 너희들의 감각과, 너희들의 육체만이 존재하는 ‘현실’이란 얘기다.” 장원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솔직히 오늘 배울 내용이, 너희들에게 당장 필요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훈련장에 들어온 이상, 게이트 안에서의 감각은 싹 잊어버려야 할 거다.” 사실 전국 모든 지역이 안정화 상태인 청정 대한민국에서. 헌터가 게이트 밖에서 전투 비슷한 걸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시스템이 게이트 밖에서 불친절하다는 사실도, 지금 처음 듣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었다. 뭐… 내가 글로벌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모르겠지만……. 나 말고 모르는 참가자들도 많은 것 같고 말이지. ‘흐음.’ 그래도 여기까지 듣고 나니, 뭔가 좀 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게이트 밖에서 마법을 쓰면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거지? 해외에서는 불규칙 게이트를 헌터들이 공략한다고 하니까… 분명 시스템이 먹통이거나 한 건 아닐 텐데 말이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원준 교관이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자, 각자 벽에 걸려있는 활과 총을 골라 들도록.” 교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18명의 원거리 딜러 포지션 참가자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무구를 향해 움직였다. 나도 뭐,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활 한 자루를 가지고 왔다. 흐음. 보니까 4티어쯤 되는 컴포짓 보우인 것 같은데, 이런 걸 훈련장에서 연습용 활로 쓴다고? 얘들은 대체 LP가 얼마나 썩어나는 걸까? 기릭- 활 시위를 살짝 당겨보니, 관리 상태도 상당히 좋아 보인다. 사로에 비치되어있는 화살도 품질이 꽤 좋아 보이는 것 같고. 혹시 화살 같은 건, PPL 들어온 샘플 같은 거 따로 없나? 좀 아쉬운데…….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다른 참가자들도 장비 세팅이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철컥-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을 한 차례 쭉 훑어본 교관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훈련은 [마력 감응 사격]이다.” 어……. 마력 감응 사격? 이건 또 뭐지…? 설마 그냥 마력 조금 실어서 쏘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심시일체 같은 고오급 기술이라도 가르쳐 주려는 거려나……? 14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장원준 교관이 원했던 건, 진짜로 그냥 기본 사격이었으니까. 궁수로 전직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화살에 약간의 마력을 담아서 전방으로 쏘아 보내는, 바로 그 기본 사격 말이다. 그런데. “자, 저기 보이는 과녁을 향해, 평소처럼 마력을 실어 쏴 봐라. 시작.” 가장 먼저 사로에 선 참가자를 구경하는데, 뭔가 이상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 일단 활시위를 당길 때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 자체가, 뭔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쟤 왜 저러지? 그래도 A급 참가자인데? 기리릭-! 꽤나 당황한 표정이 된 친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심지어 시위를 당기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과녁을 겨누는 손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러면 당연히 과녁을 맞출 수 없다. 갑자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음.” 결과는 역시나 참혹했다. 피잉-! “어…?” 화살이 과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은 물론……. 파스스- 한 눈에 보기에도 화살촉에 담겨 있던 마력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고 허공에서 증발해 버렸으니까. 저러면 맞췄다 해도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올 수 없다. 그냥 일반인이 쏜 화살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얘기다. “자. 자네도 한번 해보도록.” 이번엔 옆 사로에 있던 한도진의 앞으로 교관이 다가갔고.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된 한도진은 신중하게 과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철컥- 그래도 S급 참가자라 그런가? 방금 전 친구처럼 손을 떨거나 하진 않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타앙-! 마력총의 탄환에 모인 마력의 집중도가, 한 눈에 봐도 엄청나게 흐릿했던 거다. 심지어 화살은 끝까지 날아가기라도 하지, 마력의 응집체인 마력탄은 마치 불발된 폭죽마냥 중간에서 흩어져 버렸다. 때문에 한도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 마나가 왜 흩어지지?” “자세 똑바로 안 해? 마력 응집도 못 하나!” 교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도진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배주하도 곤혹스러운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조준점이 자꾸 흔들려요. 이… 이런 적이 없었는데?” 활시위를 당긴 그녀의 팔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처음부터 이렇게 떨린 건 아니다. 화살촉에 마력을 담기 위해 마력을 운용한 바로 그 순간.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다들 사로에 서, 각자 과녁을 향해 한 발씩 사격해 보도록. 우선 마력 제어부터 제대로 되기 시작해야, 다음 훈련을 진행할 수 있다.” 훈련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게… 뭐야.” “마력이……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런데 다들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바로 이 순간. “으음.” 놀랍게도……. 어쩌면 가장 혼란스러운 건 바로 나였다. ‘이 느낌은….’ 다른 모든 참가자들과 달리 나에게 이 감각은……. 전혀 낯선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 * * 요정, 세리아는 오늘도 꿈을 꿨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주기적으로 꾸고 있는… 그야말로 지독한 악몽이었다. 콰아앙-! 거대한 늑대의 앞발이 지면을 강타한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나는 그 아슬아슬한 타이밍. 검을 쥔 사내의 그림자가 늑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팟.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달려드는 맹수의 힘을 역이용해 무게중심을 무너뜨리고, 사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발놀림은 흠잡을 것 없이 깔끔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본능에서부터 나오는 감각적인 움직임. 남자가 쥔 낡은 롱소드가 늑대의 목덜미를 향해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검 끝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실렸다. 그런데. 끼기긱. 마치 녹슨 기어에 억지로 동력을 주입한 것처럼. 유려하게 이어지던 검격이 허공에서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렸다. 챙-! 결국 검은 늑대의 가죽을 뚫지 못한 채 허무하게 튕겨 나갔고. [크윽!] 반동을 이기지 못한 사내는 볼품 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작은 날개를 포로롱 파닥이는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세리아 자신을 똑 닮은 어떤 요정이었다. [아니이! 자연스럽게! 제가 말했잖아요! 마력이라는 건, 그렇게 의식적으로 쓰면 제어가 잘 안된다니까?] [어떻게 의식을 안 하면서 마력을 운용할 수 있지?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이놈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걸?] 바닥을 뒹군 사내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잘 좀 해 봐요 진짜!] [아니… 재능 없어 보인다며! 그냥 돌려보내 주면 되잖아!] [아니에요, 아니.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재능이 좀 이상하다니까?] [대체 그게 뭔…….]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작은 요정은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이상하네. 이건 당연하게 돼야 하는 건데.] [당연히 돼야 하는 게 안 되면, 그게 재능이 부족한 거 아니야?] [아냐. 진짜 아니니까, 다시 해 봐요. 몸이 기억할 때까지 구르다 보면 언젠간 되지 않을까요?] […….] 그리고 그 답답한 요정(?)을 보면서, 세리아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답답해 죽겠네. 저 멍청이는 대체 왜 모르는 거야? 딱 봐도 동기화가 안 된 거잖아아아!!!’ 그리고 화가 폭발해 버려서인지. 삐걱- 세리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여느 때처럼, 꿈속의 답답한 요정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시즌 30번째로 깨닫는 중이었다. “멍충한- 요정 새끼이이! 으아!!” 기대어 있던 사무실 의자가 휘청했다. 어느샌가부터 달콤한 낮잠이 이런 악몽으로 변해버리다니. 이게 다 자신의 업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요정은 원래 자기중심적이니까. ‘대체 그때는 왜 동기화에 대한 생각조차 못 했던 거지?’ 그랬다면 그 지옥 같은 베타 서버에서 억겁의 시간 동안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심지어 그렇게 고통받고도 SSSSS급 용사의 재목을 그냥 돌려보내 버리는.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은 벌어질 일 없었을 텐데! “히잉.” 잠이 싹 달아나 버린 세리아는, 자리에서 폴짝 튀어 올라 포로롱 날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답답해서 안 되겠어.” 어차피 오늘 해야 할 업무는 다 끝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랭커님’을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로렌즈 님이라도 찾아가 봐야지.” 오늘은 아무래도 그녀를, 조금 더 재촉해봐야 할 것 같았다. * * * 머릿속의 기억이, 도저히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수준의 아주 먼 과거까지 흘러갔다. 그러니까 완전히 처음. 내가 요정에 의해… 처음 라이카라는 세계를 접했던 바로 그날. 돌이켜보면 그 시점의 내가 마력이라는 걸 처음 느끼고 운용했을 때… 딱 저런 상태였던 것 같았다. 기본 공격에 마력을 담는 것조차 너무나도 어렵게 느끼는. 바로 다른 참가자들과 비슷한 상태 말이다. ‘그래. 그러니까 바로 이런 느낌이었어. 그런데 이게 [비동기화]라…….’ 나는 끙끙대는 참가자들을 보며, 내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손바닥 안에서 맴도는 마력의 감각. 확실히… 게이트 안에서와 달랐다. 투박하고, 거칠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려면 하나하나 간섭해야 하는 이 진득하고 불쾌한 느낌. 그러니까 솔직히 나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베타 서버에서는 회차를 새로 시작할 때마다, 항상 이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이지. “…….” 때문에 난… 소름이 돋았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머릿속에 깨달음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어째서 내가 지구 서버에 온 뒤로, 과거에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그렇게 손쉽게 해낼 수 있었는지. 그러니까…….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설마… 베타 서버 자체가 마력 비동기화 상태였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요정이 그렇게 침이 튀도록 얘기하던 ‘용사’라는 존재들은… 이 비동기 상태에서도 마왕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존재들이었던 걸까? 이상한데? 결국 마왕이라는 놈은 게이트 안에 존재하는 놈인데. 본 서버에 마력 동기화가 되는 거였다면, 굳이 그 환경에서 마왕을 잡아야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냐? “음.” 한번 생각이 떠오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어 간다. 물론 다시 요정을 만나지 않는 한 진실을 알기는 어렵겠지만. 지구에 돌아온 뒤로 한 번씩 떠오르던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뭔가 조금이지만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지금은…… 이것부터 해봐야겠지.’ 나는 활을 들어 과녁을 겨누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이 날것 그대로의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려 화살촉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바람, 습도, 활의 장력… 그리고 내 호흡. 모든 정보가 감각을 통해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시스템이 동기화되지 않는 이 상태는, 마력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게이트 안보다 확연히 불편하고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난 이 환경을 처음 겪는 다른 참가자들과 같을 수 없다. 난……. 이러한 환경 안에서만 억겁의 시간을 싸운 사람이니까. 기리리릭-! 시위를 당기는 손끝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띠링-! 내 시야에, 꽤 놀랄 만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14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러니까… 내 손을 떠난 화살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과녁 정중앙을 꿰… “동작 그만-!!!” …뚫으려고 하던, 바로 그 찰나였다. 고막을 찢을 듯한 호통 소리가 훈련장을 울린 것은. 찌익! “…….” 덕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활시위를 당겼던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시위를 놓치고 말았고. 터엉-! 원래대로라면 잔뜩 기세를 올리며 과녁을 향해 날아갔어야 할 내 화살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엉뚱한 하늘로 솟구쳐 버리고 말았다. ‘아니, 타이밍 뭔데?’ 방금 진짜 감 좋았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니, 장원준 교관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른 참가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엉망진창이군! S급이니 A급이니 거들먹거리더니, 기본기도 안 되어 있어? 시스템 동기화 없이는 탄환에 마력 하나 제대로 못 담는 게 너희들의 현주소다!” 장원준의 독설에, 참가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마력 동기화율이 떨어지는 현실에서의 마력 운용. 시스템의 편의성에 길들여진 헌터들에게, 이건 마치 젓가락질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에게 미끄러운 메추리알을 집으라는 요구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을 테니 말이다. “쯧쯧. 이래서야 원.” 장원준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와, 내 옆 사로에 서 있던 참가자의 활을 낚아채듯 빼앗아 들었다. “눈 똑바로 뜨고 봐라. 이게 진짜 사격이다.” 이어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주 능숙한 자세와 동작으로, 속사를 시작하였다. 파밧-! 장원준의 손이 허리춤을 스칠 때마다, 시위에 화살이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쏘아져 나갔다. 퍼억! 퍽! 퍼억! “……!” 순식간에 다섯 발. 그 자신이 서 있던 사로의 과녁은 물론, 그 우측에 일렬로 늘어선 다른 사로의 과녁 네 개까지. 총 다섯 개의 과녁에 순식간에 화살이 박혔다. 비록 정중앙에 명중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거리가 제법 있었음에도 모두 과녁 안에는 들어간 뛰어난 사격 실력. 게다가 각각의 화살 안에 담겨 있는 마력량과 파괴력도, 게이트 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와….” “미쳤다.” 덕분에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정 없이, 순수하게 감각만으로 저런 속사와 명중률을 보여주다니. 역시 세미 랭커는 다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선망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흠.’ 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미지근한 시선으로 그 과녁들을 바라보았다. 잘 쏘긴 했다. 그래. 확실히 이 정도면 잘한 게 맞긴 한데. ‘그… 정돈가?’ 세미 랭커라며? 내가 적당히 쏴도 저거보단 더 잘 맞출 것 같은데? 아닌가? 자만인가? 흐음. 뭐 그렇다고 내가 사회 부적응자도 아니고. 이 생각을 육성으로 내뱉을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때. 너희 중에 이거 반이라도 따라 할 수 있는 놈 있나?” 시범을 마친 장원준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을 거다. 지금 참가자들의 상태를 보면, 반은커녕 과녁에 맞히기만 해도 다행인 수준이었으니까. 아마 며칠 적응훈련을 거치고 나면, 지금보다야 훨씬 상태가 나아지겠지만 지금 바로 한다면 뭐……. 그래서였을까. 그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승부욕을 자극할 겸 미끼를 하나 던졌다. “만약 이 자리에서 성공하는 놈이 나온다면… 그래.” 장원준이 자신의 허리춤을 툭툭 쳤다. “이 마력 훈련용으로 특수 제작된 아티팩트 화살통을 선물로 주겠다. 만약 궁수가 아닌 사수라면, 같은 목적으로 개발된 마력탄창을 선물하도록 하지.” 그 순간.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장원준이 가리킨 화살통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에……. “마력을 주입하면 2티어 희귀등급 정도의 마력화살을 생성해 주는… 특수 제작 아티팩트다. 이제부터 비동기 상태에서의 마력운용 훈련을 해야 하는 여러분들에게 꽤 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지.” 이번엔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미친? 그런 물건이 있다고? 마력화살을 생성해 주는 화살통 같은 건… 원래 신화 등급 이상의 화살통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템일 텐데? “후욱.”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것만 있으면… 앞으로 대체 얼마를 아낄 수 있는 거지? 물론 자연산 마력화살통과 달리 2티어 희귀등급이라는 볼품없는 위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게 대순가? 그만큼 더 잘 쏘면 되는 거 아냐? ‘이걸 대체 어떻게 참는데?’ 머릿속의 계산기가 전부 다 돌아가기도 전에, 내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저요.” “……?” 번쩍 들어 올린 내 손을 보며, 장원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호오. 이건율 참가자?” “예, 교관님.” “자신 있나 보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비소(誹笑)가 섞여 있었다. 뭐, 그럴 수 있다. 방금 내 화살이 하늘로 솟구친 걸 봤을 테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그래서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그냥 지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설마 무르는 거 아니겠지?’ 저거 딱 봐도 비쌀 물건이다. 돈이 있다고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일 테고. 그럼에도 만약 LP로 환산한다면… 솔직히 500~1000LP에 판다고 해도 납득될 것 같은 물건인데. 설마 쫄아서 무르는 건…… 아니겠지? * * * 장원준은 팔짱을 낀 채, 사로(射路)에 들어서는 이건율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 화살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던 걸 본 것 같은데. “흐음.” 그런 놈이 속사에 도전하겠다고? 한 발 제대로 과녁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다행인… 이 상황에서? “준비됐습니다.” 원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이건율이 훈련용 활을 들어 올렸다. ‘두 발이라도 과녁 안에 들어가면 인정해 주지.’ 장원준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패기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원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변수 같은 건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 건율이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장원준의 눈매가 꿈틀했다. 자세부터가 뭔가 다르다. 방금 전 화살을 허공으로 날려버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고요하고 안정적인 자세. 무엇보다 놀라운 건 ‘마력’이었다. 시위를 당기는 손끝에서, 아주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됐다. 거칠고 투박한 외부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살촉 끝에 단단하게 맺히는 마력의 응집력. ‘이게… 벌써 된다고?’ 하지만 장원준의 당황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피잉-! 일단 첫 발. 가볍게 쏘아진 듯한 그 화살이, 놀랍게도 과녁의 정중앙에 그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 이때부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기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너무 자연스럽고 정교한 동작들. 그리고……. 피핑-! 연속해서 사격이 이어지자, 그냥 할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친.’ 방금 원준이 보여줬던 속사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과녁을 연속해서 맞춰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다른 영점 조준 없이 서로 다른 과녁을, 속사로 연속해서 맞춰야 하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는데……. 이건율이 쏘아 보낸 화살들은, 다섯 개의 과녁에 차례대로 날아가 그대로 꽂혀 버렸다. 심지어 과녁 안에 겨우 들어간 수준인 자신의 사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부 다 과녁의 정가운데에 아주 정확히 말이다. 물론 각 화살에 담긴 마력량은, 자신이 쏘아 보낸 화살에 담겨 있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량이었지만. ‘그거야 가진 마력 자체가 다르니, 너무 당연해.’ 장원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마스터의 한 마디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어쩌면 자네보다 더 잘 쏠 수도 있을걸?] 그냥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던 마스터의 이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도 자연스레 발동했다. ‘물론 나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긴 한데…….’ 진심으로 쐈다면 자신도 저 정도 정밀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 아니, 더 빠르고 강력하게 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력이 많이 담길수록 정교함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아닌가? 하지만……. “…….” 그렇게 생각해 봐도, 내면의 자괴감이 더 커질 뿐이었다. ‘이게 비동기 전투를 처음 경험한… 루키라고?’ 갑자기 방송으로 송출됐던 이건율의 재능을 폄하했던, 자신의 발언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후우.” 그렇게 이 잠깐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던 사이. “후욱.” 정작 당사자인 건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활을 내리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장원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합격이겠죠?”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장원준은,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교관으로서의 체면. 그것 하나만큼은 사수해야 했다. “…나쁘지 않군.” 최대한 무심한 척 내뱉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장원준과 정확히 상반되는 표정이 된 사람도, 같은 공간 안에 몇 사람 있었다. 그들은 바로……. “크하, 미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멀리서 촬영하고 있던 현장의 촬영감독과. “벌써 분량 뽑았는데요?” 그 옆에서 카메라 스크린을 들여다 보고 있던… 현장 총괄 권 PD였다. 14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4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철컥- 도어락이 해제되는 경쾌한 비프음과 함께 펜트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흐으….” 안으로 들어선 내 몰골은 호화로운 인테리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된 훈련복, 푸석한 얼굴,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 자동 센서가 감지되자 눈부신 샹들리에가 거실을 환하게 밝혔다. 창밖으로는 루미스 영지의 화려한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친 내 눈에는 그 찬란한 야경조차 스테이터스 창의 흐릿한 잔상처럼 보일 뿐이었다. ‘어후, 여기가 1박에 얼만데, 잠만 자고 나가야 하다니. 이게 무슨 낭비냐.’ 평소라면 침대 시트의 감촉까지 낱낱이 즐기며 본전을 뽑으려 들었겠지만, 오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오늘 훈련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이런 노가다를… 적어도 지구에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건 ‘비동기화’ 상태가 내게 익숙하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익숙함’과 ‘물리적인 고통’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뭘 그렇게 빡세게 했냐고? 하루 종일 마력을 강제로 활성화시킨 상태에서, 극한의 육체 노동을 계속했다. 마력회로가 너덜너덜해지는 건 물론, 온몸의 근육이 전부 다 비명을 지를 때까지 말이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을 끌며 거실로 들어서던 나는 멈칫했다. 최고급 가죽 소파 위에 낯익은 인영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클립스(Eclipse) 길드의 검정색 훈련 로브. 헝클어진 머리카락.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 미동조차 없는 모습. 강소희였다. “소희 님. 살아계십니까?” 나는 건조하게 물었고, 대답은 잠시 뒤에 돌아왔다. “…살려줘요.” 쿠션에 파묻힌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새어 나왔다. “나 오늘 마력 회로 다 탔어요. 말 시키면 토할 것 같으니까… 이해 좀. 부탁….” 살아는 있군. 나는 냉장고로 향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클립스도 청룡회와 비슷한 방향성으로 훈련했으니 저런 상태가 됐을 텐데. 어쩌면 강소희에게 마력 역류가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선 뭐… 어떤 거 시켰습니까?” 내 물음에 강소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말도 마요.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길드장도 그렇고, 우리 쪽 교관들도 그렇고… 다들 단체로 약 먹었나 봐요.” 겨우 몸을 일으킨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비동기화 훈련, 진짜 마법사한테 최악이에요. 마법사만큼 마력 회로를 정교하게 조작해야 하는 클래스가 없을 텐데…….” 그건 맞는 말이지. 인정. “동기화 보정 없으니까, 뭐 하나 할 때마다 마력이 줄줄 새더라니까요?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허공에 마력만 쏟아부었어요.” 갑자기 또 말이 많아지시는 걸 보니, 확실히 힘들긴 했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흐음.”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이 비동기 훈련이라는 거… 암만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단 말이지.’ 멘토들이 소속된 길드. 즉, 대한민국 10위권 안에 있는 초대형 길드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비동기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헌스쿨 컨텐츠인가 했는데, 오늘 현장에서 본 분위기는 결코 그게 아니었다. 우리도 구를 만큼 굴렀지만……. 어떻게 보면 길드 소속의 루키들이 더 빡세게 구르는 느낌이었으니까. 단순히 컨텐츠라면, 이럴 이유가 있었을까? “왜 갑자기 이런 훈련을 시키는 건지, 들은 건 없습니까?” “몰라요. 교관님이 그러더라고요.” 강소희가 서지혁 멘토의 흉내를 내듯 목소리를 깔며 말을 이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시스템이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을 것 같습니까?’ …완전 꼰대 멘트 아니에요?” “오, 성대모사 재능 있는데요?” “…….” “방금 완전 서지혁 멘토님 같았어.” “칭찬, 맞죠?” “그럼요.” 강소희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은 꽤 복잡했다. ‘시스템이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냐니.’ 뭔가 머릿속을 자꾸 간질간질 건드리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여긴 지구야. 정식 서비스 중인 서버인데…. 게다가 불규칙 게이트 같은 것도 없는 한국.’ 잠깐. 불규칙 게이트? “잠시만요.”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혹시 조만간… 한국에 불규칙 게이트가 열릴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면 말이 되는데? “…….” 나는 [각성자 위키]를 열어,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비동기화 훈련 시작하니 이거 하나 좋네. 스마트폰 쓸 수 있다는 거. 게이트 안이라 통신이 불안정하긴 하지만… 그랜드 아르카나의 와이파이를 활용하면 그래도 큰 불편함 없이 사용 가능했다. [검색어: 게이트 폭주 (Gate Outbreak)] 게이트 폭주를 검색하자, 익숙한 UI와 함께 방대한 내용이 주르륵하고 스크린에 떠올랐다. [위키] 게이트 폭주 (Gate Outbreak) [문서 분류: 시스템/재난] [최근 수정: 20XX-XX-XX] [개요] 게이트 폭주란, 라이카 시스템이 지정한 차원 유지 비용(LP)이 고갈되어, 해당 지역을 안정화하던 시스템 방어막이 강제로 해제되는 현상을 말한다. 폭주가 발생한 구역(Node)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관리 구역’으로 전환되며……. ……중략…… 이 기간 동안 해당 지역에서는 무작위 다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며,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다. 1. 발생 원리 (The Cost) ‘게이트 안정화 상태’는 공짜가 아니다. 게이트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막대한 양의 유지비, 즉 LP가 소모된다. 1.1 자연 상환: 헌터들의 던전 클리어 활동으로 생성된 엔트로피로 충당. 1.2 강제 상환: 부족분만큼 국가나 기업이 현물 LP를 지불하여 충전. 만약 유지비가 바닥나고 LP 지불마저 실패할 경우, 시스템은 해당 노드에 대해 ‘디폴트(Default)’를 선언하며, 즉시 15일간의 대규모 폭주가 시작된다. ※ 가속화 프로토콜: 메인 에피소드 엔딩이 다가올수록 유지비는 복리(Compound Interest)로 증가한다.# 게이트 폭주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찾아보니 몰랐던 내용이 상당히 많은 느낌이다. 2. 주요 페널티 (핵심) 헌터들이 게이트 폭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몬스터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접속이 끊기기 때문이다. 2.1. 오프라인 모드 (Server Down) 폭주가 발생한 15일 동안, 해당 지역은 라이카 서버와의 접속이 불안정해진다. • EXP 획득 불가: 몬스터를 아무리 처치해도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성장 정체) • 스킬 숙련도 정체: 시스템 보정이 사라져 스킬 숙련도가 거의 오르지 않는다. • 보상 제한: 오직 물리적인 전리품(마석, 부산물)만 획득 가능하다. [Tip] 이 때문에 폭주 징후가 보이면 랭커들은 성장을 위해 타 국가 서버로 이주(Exodus)하는 경향이 있다. 2.2. 차원 침식 (Dimension Erosion) 폭주가 일어난 지역의 지형이 마계의 환경(독기, 중력 이상 등)으로 영구 변형된다. 이를 ‘데드 존(Dead Zone)’이라 부르며, 침식된 땅을 정화하려면 방어 비용의 수 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잠깐, 이거 현상만 놓고 보면…… 완전 베타 서버 리셋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갑자기 PTSD 오는걸? 3. 국가별 위험도 : 대한민국 (KR-01) 대한민국은 국토 전체가 고등급 게이트로 초밀집된 단일 클러스터(Single-Cluster) 노드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어쩌면 반강제로…… 현재 국토 전체가 청정구역인 유일한 국가이다. • 미국/중국: 구역이 나뉘어 있어(Multi-Node) 일부 지역을 포기하고 격리할 수 있다. • 한국: [KR-01] 단일 노드로 묶여 있어, 서울에서 폭주가 발생하면 부산까지 전 국토가 동시에 ‘오프라인 모드’가 된다. (운명 공동체) 4. 관련 문서 • [라이카 포인트(LP)] • [비동기화] • [해외 원정/이민 가이드] 해외 원정에 이민이라. 관련 문서 한번 살벌하고……. [사용자 코멘트] • ㅇㅇ(118.235): 야, 이거 어차피 한국에서는 터질 일 없는 거 아님? • BADC: 근데 게이트 폭주는 경험치 안 주면 누가 막음? 랭커들 다 런하면 우리 같은 하꼬들만 죽어나겠네. • 카르티나: 오히려 기회 아님? 부산물 독점 개꿀 ㅋㅋㅋ (근데 목숨 걸어야 함) ……후략…… 위키를 끈 나는, 이번엔 관련 문서와 뉴스 기사들을 검색해 봤다. 그중에서도 ‘현상 분석’ 관련 논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눈에 띄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게이트 폭주 발생 시, 해당 지역의 마력 농도가 급격히 불안정해지며, 시스템 연결이 간헐적으로 끊기는 현상(Connection Lost)이 보고됨.] “…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손에 쥔 생수병이 찌그러지며 플라스틱 비명소리를 냈다. 라이카 위키에 명시된 ‘게이트 폭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 논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현상들. 그것이 순간… 베타 서버 시절의 그 지긋지긋했던 공포와 정확히 겹쳐 보였으니 말이었다. [자, 용사님. 이번 회차… 망했죠?] 허공에 둥실 떠 있던 안내 요정 세리아. 그녀는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앳되고, 잔인할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기화(Reset)하겠습니다. 서포트 끊을 테니까, 다음 회차에서 만나요~] 파직- 파지직! 항상 그 선언과 함께… 세상이 무너졌고, 던전 브레이크가 시작됐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는 오직 날것의 육체와 몬스터들의 울음소리만이 남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간이 무너지고 나면……. 서버 리셋. 그러니까 모든 데이터의 초기화를 경험했었다. ‘물론 게이트 폭주는 서버 리셋이랑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건 결국 베타 서버와 정식 서버라는 차이에서 오는 차별점인 것 같았다. 내가 억겁의 시간을 보냈던 베타 서버, 그러니까 ‘차원의 틈새’는… 공간으로 따지자면 서울보다도 작은 수준의 협소한 차원계였고. 그곳에서는 안정화 게이트라는 것도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이건 그냥 추측인데… 지구는 안정화 게이트가 국가별로 존재하다 보니. 한곳에 폭주가 일어나더라도 모든 안정화 게이트가 먹통이 되는 게 아니라면 서버 리셋이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닐까? 음… 그런 거면……. 설마 지구에도 모든 국가의 모든 노드가 동시에 게이트 폭주를 겪게 되면, 종말이 도래하기라도 하는 걸까? ‘뭐, 여기까진 너무 나간 것 같고.’ 어쨌든 퍼즐 조각이 완벽하게 맞춰졌다. ‘멘토들은 분명… 알고 있는 거야.’ 조만간 한국에서 게이트 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그러니까 15일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도 비동기 상태에서의 전투를 하게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이게 결코 비약이 아닐 것 같다는 말이지. “건율 님?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해졌어요?” 강소희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찌그러진 생수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심각하게 굳어있던 표정도 풀어졌다. 아니, 오히려… 하루 종일 머릿속을 간질이던 부분이 해소되고 나니, 상쾌해진 기분까지도 드는 것 같았다. “소희 님. 오늘 저녁 안 드셨죠.” “…입맛 없어요. 기운도 없고.” 강소희가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갑자기 지금 당장 해야만 할 일을 깨달았으니까. “먹어두시죠.” “네?” “어쩌면 당분간은 여기 밥, 못 먹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룸서비스 버튼을 누르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기 펜트하우스 101인데요. 랍스터 플래터랑 티본스테이크, 그리고 제일 비싼 와인으로 한 병 부탁드립니다. 아, 디저트 트롤리도 꽉 채워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강소희. 그녀와 눈이 마주친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바쁘게 계산기가 굴러가고 있었다. ‘폭주 터지면 15일 동안 여기도 못 올 거 아냐.’ 국영 방송국인 HBC가 뭐, 다른 국가 게이트 통해서 헌스쿨 촬영을 속행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게이트 안인 그랜드 아르카나에, 15일간 못 오는 건 확정이다. 내 추측이 맞다면 말이지. 그러니까……. ‘며칠이나 남은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뽕은 뽑아야겠다는 말이었다. 15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울의 야경이 발밑으로 흘렀다. 이클립스 본사, 마탑(魔塔)이라 불리는 빌딩의 최상층. 서지혁의 집무실은, 한쪽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미니멀하게 정리된 실내에는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책상 위에 태블릿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딸깍.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서지혁은 그것이 누구인지 돌아보지 않고도 알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이 층에, 안내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 “오셨습니까, 검희 님.”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던 서지혁이, 고개만 살짝 돌려 인사했다. 여유로운 미소. 한국 헌터계의 아이돌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한 얼굴이었다. “와인 한 잔 하시겠습니까?” “사양할게요.” 채유현은 건조하게 대답하며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반쯤 얼굴을 가린 가면 아래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병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본론으로 가죠.” “하하, 역시.” 서지혁은 피식 웃으며, 옆에 놓아둔 태블릿을 집어 유현 쪽으로 밀었다. 화면이 켜졌다. 시안 지역의 게이트 현황 지도. 붉은 점이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마치 상처투성이의 피부처럼. “왕 웨이 국장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서지혁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여유로운 인상과는 다른, 사업가의 속도감이 묻어나는 톤이었다. “다음 주, 시안으로 선발대가 출발합니다.” “…….” 채유현은 지도 위의 붉은 점들을 천천히 훑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읽어내고 있었다. “조건은?” “전면 독점권. 부산물, 채굴권, 면세 혜택.” 서지혁이 손가락을 꺾어가며 나열했다. “여기까지는 이클립스의 몫입니다.” 잠시 뜸을 들였다. 고의적인 침묵. 서지혁은 와인 잔을 돌리며, 마치 선물 상자를 열어주듯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던 ‘데드존 훈련장 접근권’도 포함해서요.” “…….!” 가면 아래, 유현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다. 서지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끈질기게 요구해 왔던 조건이다. 데드존. LP(경험치)가 일절 나오지 않아, 어떤 헌터도 자발적으로 발을 들이지 않는 구역.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곳이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시스템 동기화가 완벽하게 끊어진, 순수한 비동기 환경. 한국에서는 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절대 재현할 수 없는 실전 훈련장. 곧 닥칠 국내 폭주. 그때가 오면, 시스템은 더 이상 헌터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데드존은 그 지옥의 예행연습이었다. “……고마워요.” 유현의 목소리에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한마디의 무게는 충분했다. “이클립스 이사가… 우리 바르가의 숙원사업을 대신 챙겨주다니.” “천만에요.” 서지혁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가는 나중에 받을 텐데요.”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클립스와 바르가. 대한민국 헌터 업계 2위와 3위의 수장급 인사가 마주 앉아 있는 자리. 협력이라 부르기엔 너무 날카롭고, 적대라 부르기엔 상호 보완적인 관계. 서지혁은 잔을 내려놓았다. 유현은 시안 지도를 끄고,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도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서 이사.” 유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선이 통유리 너머 야경에서 서지혁에게로 옮겨갔다. “이번 시안 파견…… 아이들도 데려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 “…….?” 서지혁의 와인잔이 멈칫했다. ‘아이들’이라는 단어를 곱씹는 듯한, 짧은 침묵. “아이들이라면…… 헌스쿨 멘티들 말입니까?” “네.”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서지혁의 눈이 좁아졌다. 능글맞던 미소가 사라지고,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이 얼굴에 깔렸다. “진심입니까?” “…….” “검희 님. 시안은 지금 오프라인 모드(데드존)입니다.” 서지혁이 안경테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유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농담을 걸러내려는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애들이 쉽게 버틸 만한 곳이 아니에요.” “알죠.” “방송 사고가 아니라, 진짜 장례식을 치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당연히 알고요.” 유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지혁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장난인지, 시험인지, 진심인지. 가면 아래의 표정은 끝내 읽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눈동자만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 서지혁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유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어차피 닥쳐올 미래입니다.” “……그래도.” 서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미간 사이에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예능에서 이 정도까지 파격적인 전개는…… 어렵지 않을까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기 때문에,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유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서지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중에 모든 게 밝혀졌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감정을 배제한, 논리만으로 직조된 문장. “‘이 시국에 예능이나 촬영했다’는 프레임을 부수고, ‘헌스쿨은 예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해왔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 서지혁이 팔짱을 풀었다. 등을 앞으로 숙이며, 유현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가에 띄는 건 놀라움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감탄에 가까운 감정. 여기까지 고려한다면 확실히… 얘기가 조금 달라지긴 한다. “재밌네요.” 폭주가 터지면, 대중은 분노할 것이다. 이런 위기를 예견하면서도 왜 손 놓고 있었느냐고. 그 분노의 화살은 당연히 헌터 업계 전체를 향할 터다. 하지만…… 헌스쿨이 이미 참가자들을 실전에 투입하고 있었다면? 예능이라는 포장지 안에서, 사실상 차세대 헌터들의 생존 훈련을 시행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선제적 대응’이 된다. 사후적으로, 헌스쿨은 가장 먼저 움직인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흐음…….” 서지혁은 잠시 와인 잔의 붉은 표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이 끝난 것이다. “좋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능글맞은 여우의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안에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런 논리라면 HBC도 충분히 설득해볼 수 있겠군요.” “장세연 PD한테는 이미 떡밥을 던져둔 상태예요.” 유현이 담담하게 덧붙였고, 서지혁이 눈을 깜빡였다. “벌써…… 말입니까?” “로케이션 관련해서 슬쩍 떠보는 수준이지만. 그 사람이라면, 씨앗만 심어놔도 눈치를 채겠죠.” “빠르시군요.” 서지혁이 감탄을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와인 병을 들어, 유현 앞의 빈 잔에 천천히 따랐다. 루비색 액체가 맑은 유리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유현은 잠시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시안 현지 세팅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서지혁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유현도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서지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지옥행 티켓을 발권해 보도록 하죠.” 찰그랑. 맑은 소리가 고요한 집무실 안으로 퍼져나갔다. 건배. 하지만 축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개전(開戰)의 신호였다. 잠시 와인을 음미하던 서지혁이, 불현듯 물었다. “그나저나…… 아이들 중에, 누가 데드존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유현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의 야경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이 밤이 얼마나 더 오래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한두 명 정도는.” 가면 아래에서, 유현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마치 특정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한. “있을 겁니다.” * * * 만찬은 끝났다. 빈 접시 위에 랍스터 껍데기가 나뒹굴고, 절반쯤 남은 와인이 잔 안에서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강소희는 소파 위에서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직도 훈련복 차림 그대론데… 괜찮은 걸까, 저거? “…….” 손에는 디저트 트롤리에서 낚아챈 마카롱이 반쯤 먹다 만 채 들려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 개만 더……”를 연발하더니, 결국 마카롱을 쥔 채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라면도 그렇고 취향 자체가 확실히… 어떤 방향으로든 자극적인 맛을 좋아한단 말이지. 그나저나. ‘……저거 하나에 12,000원짜린데.’ 아깝잖아? 먹다 만 것까지 내가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 냉장고에라도 넣어줘야지 뭐. 나는 한숨을 쉬며 강소희의 손에서 마카롱을 살짝 빼내 냉장고에 넣었다. 손이 닿자 강소희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곤히 잠들었다. 행동반경 내에 음식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지키려 드는 게…… 뭔가 야생동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덜그럭- 잠깐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소파 맞은편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식탁 램프의 불은 꺼 두었다. 방 안에 남은 빛이라곤, 내 손 안의 작은 화면뿐. “흐음.” 그나저나 왜 안 자냐고? 아직 생각을 정리할 게 더 남아서 그렇다. 만찬을 주문하기 직전에 떠올렸던 그… 게이트 폭주에 대한 생각의 연장선이랄까? 거기서 무슨 생각을 더 할 게 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돈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참냐는 말이지.’ 나는 거래소 앱부터 열었다. 스마트폰 다시 뺏기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좀 많다. 그러고 보니 이 거래소는, 폭주가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차피 거래소는 글로벌 노드 기반의 통합 거래소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지금 내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는 생각들은, 다름 아닌 게이트 폭주에 대한 자본주의적 대비책 같은 거다. 과연 한국에 15일간의 게이트 폭주가 시작되면, 자본 시장은 어떤 식으로 굴러갈까? ‘일단 폭주가 터지면, 해당 지역의 게이트 파밍이 막히는 것부터 시작이지.’ 파밍이 막히면? 그 지역에서 유통되던 물자의 공급이 끊긴다. 마력 안정제, 정화 소금, 마나 코어…… 폭주 지역에서 활동해야 하는 헌터들한테 필수인 것들. ‘공급은 끊기는데, 수요는 폭증하는 구간이 생긴다는 거고.’ 이건 뭐…… 경제학 원론 1장에 나오는 내용 아닌가. 비록 내가 공대생 출신이긴 하지만, 이 정도 경제학적 사고 흐름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급 감소 + 수요 증가 = 가격 상승. ‘아무튼.’ 화면 위로 마력 안정제의 시세 차트를 띄웠다. 완만한 횡보. 아직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니 지금 사면…… 폭주 시점에 몇 배는 되지 않을까.’ 현 시점 기준 마력 안정제 하나의 시세는… 대략 150LP 정도인 것 같다. 귀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은 상태인 것. 그러니까 폭주 터지면 아무리 못해도 2배, 잘하면 5배까지도 갈 만할 것 같은데. ‘또…… 뭐가 있으려나?’ 거기에 정화 소금, 마나 코어 같은 소모품들까지. 방벽 스크롤 같은 특수 아티팩트도. “흐으음.” 거래소 물건을 매집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돈 벌 궁리를 좀 더 고차원적으로 확장시켜 봐야겠다. 관련주, 그러니까 방어 장비 만드는 회사 주식 같은 것도 폭주 나면 당연히 뛸 테고. ‘크.’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은 시드 머니를… 이럴 때 한 방에 태워주는 게 맞지 않겠어? ‘……그렇다면.’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15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일단 잠부터 푹 잤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창밖에서 새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난 늦잠을 좀 잔 모양이다. 어제 하도 늦게 잤으니 뭐……. ‘몇 시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30분. 합숙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늦게 일어난 느낌이었다. ‘소희 님은 어디 가신 모양이고.’ 이번 주 헌스쿨 일정은 좀 특이했다. 오전에는 자유 시간. 대신 오후에 각 길드 훈련소로 이동해서 비동기 전투 훈련을 빡세게 돌린다는 스케줄이었다. 덕분에 오전에 이렇게 여유가 생긴 건데. ‘공짜로 주어진 시간이라 해도…… 이런 시국에 그냥 낭비해 버릴 순 없는 노릇이지.’ 나는 충전 완료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어젯밤에 정리한 메모장을 한 번 더 훑었다. 뭘 메모까지 했냐고? ‘게이트 폭주’를 대비한… 행동강령 같은 거랄까. [장바구니 목록.] [마력 안정제, 정화 소금, 방벽 스크롤, 비상용 마나 코어.] ‘……당장의 LP 잔고는 좀 비명을 지르겠지만.’ 목록을 다시 한번 점검한 나는, 잠시 고민을 마친 뒤 스트리밍을 켰다. [‘데이브(Dave)’님, 실시간 스트리밍을 시작합니다.] 띠링-! [‘창공의 회귀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그레이프 백작’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헐값에 팔린 검투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세번 사는 랭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중략…… 뭘 할 건데 방구석에서 스트리밍까지 켜는지 물어본다면……. └ 데하-! └ 게이트 안이라 스트리밍 되는 거구나 └ 뭐야 오늘 쉬는 날임? └ 오늘 헌스쿨 촬영 오후부터라던데. 왜 이렇게 일찍 켬? └ 물론 나는 좋음ㅋ └ 나도 ㅎ.ㅎ 이렇게 대답해줄 수 있겠다. -자, 형님들. 오늘 방송은 라이브 쇼핑입니다. └ ??? └ 쇼핑? 쌀먹용사가 쇼핑하는 소리 하네 ㅅㅂ;; └ 뭐임??? └ 쇼핑 라방이라고? └ 방 잘못 들어왔나;;; └ 쌀숭이 쉐끼 어제 뭐 잘못 먹고 잠? 부정하고 싶긴 한데. 부정할 수 없는 이력이 쌓여 있는 건 팩트니까 뭐. -쇼핑하려고 장바구니까지 미리 세팅해놨습니다만? 나는 거래소 앱을 열었다. 어젯밤에 미리 담아둔 장바구니를 불러왔다. 그리고 성좌 형님들 보시는 앞에서… 아주 쿨하게 차례대로 결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Market] 마력 안정제(C급) x50 — 단가 150LP / 총 7,500LP [Market] 정화 소금(일반) x200 — 단가 25LP / 총 5,000LP └ ????? └ 마안제를 50개? 약사임? └ 방장도 강소희한테 마력 역류 옮은 거임?;;; └ 아닠ㅋㅋㅋㅋ 정화 소금 200개는 대체 또 뭔데?ㅋㅋ 김장 시즌인갘ㅋㅋ └ ㄹㅇㅋㅋ └ 나 이ㅅㄲ LP 이렇게 많이 쓰는 거 첨봄; └ 키엘이 연성할 때 한 번 쓴적 있긴 했었음. └ ……흐음. └ 쌀숭이 쉑ㅋㅋ 역시 눈치가 좀 빠르다? 대부분 예상했던 반응이다. 뭔가 알고 있는 듯 보이는… 의미심장한 반응까지도. 역시나 내 의도는 잘 먹혀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마안제 재고가 요즘 좀 줄길래요. 유비무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 결제를 진행해 볼까? [Market] 마력 방벽 스크롤(C급) x10 — 단가 500LP / 총 5,000LP [Market] 비상용 마나 코어(D급) x20 — 단가 250LP / 총 5,000LP └ 방벽 스크롤까지? ㄷㄷ └ 이 정도면 진짜 전쟁 준비 아닌가; └ 뭔가 있는 거 아님? └ 방장쉑; 역시 돈냄새는 귀신같네 ㅋㅋ 내 구매 품목이 노골적이기 때문인지, 몇몇 성좌들도 좀 더 노골적인 워딩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아는 척을 해버리면 하수다. “글쎄요.”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돈 버는 건, 제 주 종목 아닙니까 형님들.” └ 맞지; 대이브가 LP 하나는 기가막히게 벌지. └ (작은)돈ㅋㅋㅋ 그… 항상 말하지만, 팩트 폭행은 깜빡이라도 좀 켜시고……. └ 그런데 방장ㅋ 너무 확신에 찬 쇼핑 아님? 이제 슬슬 떡밥을 던져 볼까? -뭐, 이 정도면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 맞긴 해ㅋ └ 힌트 줘도 모르는 놈들이 바보지 ㅋ 오호. 이렇게까지 강한 시그널을 주신다? -틀리면 한강 가죠 뭐. └ 대이브 한강 보내기 프로젝트 파티원 모집중(1/9999) └ 뭔데;; 그거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2/9999) └ 한국 게이트 관리국 가서 LP 후원 하시면 됨 ㅋ(3/9999)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성좌 형님들이 비밀(?)을 알고 있는 느낌이다. 랭커들 스트리밍 시청자가 많아서 그런가? 그래도 중요한 정보 유출될 것 같을 땐 다들 스밍 꺼둘 텐데……. 하긴. 랭커들 방송 위주로 시청하는 성좌들 입장에선, 단서가 너무 많을지도 모르겠는걸. -자, 이제 마지막 피날레입니다? 마지막 항목. 탭을 ‘자산 시장’으로 전환했다. [Market] 방어 장비 제조 — 실드코프(ShieldCorp) 보통주 100주 매수 — 단가 75LP / 총 7,500LP └ ???????? └ 오웈ㅋㅋ 주식까지? └ 여기 혹시 리딩방인가요;; 형님들. 투자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겁니다. 다들 아시죠? └ 재테크 방송으로 전환? └ 전환 ㄴㄴ;; 원래 그거였음ㅋㅋㅋ └ 마안제 사재기에 게이트 방산주까지ㄷㄷㄷ 어쨌든 추가로 몇 가지 주식들을 더 담았더니, 모든 결제가 완료됐다. 총 지출: 35,250LP. 생각 같아선 레버리지까지 땡기고 싶은데. 그건 내 천성이 새가슴이라 좀 곤란하고……. └ 캬ㅋㅋ 투자 한 번 화끈하네? └ 대이브 한강 보내기 프로젝트 파티원 모집중(25/9999) -아니, 갑자기 언제 25명 된 건데요;; 날조 금지요; 아무튼 이로써 내 1차 플랜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자, 쇼핑은 이거로 끝입니다, 형님들! └ 뭔데; 쇼핑라방 벌써 끝임?;; -오후 촬영 시작하면 다시 켜겠습니다. └ 데이브쉑ㅋㅋㅋ 갑자기 스밍 왜 켰나 했더니, 의도가 ㅈㄴ불순한걸? └ 그래도 재밌으니까, 어울려 줘야겠지? 어어?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아시죠? └ 경축★ 대이브 리딩방 오픈ㅋㅋㅋ 이럴 땐 또 우리 성좌 형님들, 눈치들이 빠르셔서 알잘딱인 게 호감이란 말이지. └ 대장님, 그럼 저희 일하러 가봅니다? └ 이브야, 돈 많이 벌면 우리도 좀 챙겨줘야 해? 그… 챙겨드리고 싶긴 한데, 어떤 식으로 챙겨드리면 좋을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그저 방송 열심히 하는 것 말고 없지 않을까요? 아무튼. -수고하십쇼, 형님들! 기분 좋게 짧방을 마친 나는, 스트리밍을 종료했다. [ON Air : ☺ 3,215]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라이브로 3천 성좌 정도면, 화력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흐흐.’ 소파에 몸을 푹 묻은 나는……. 거래소 앱을 닫고, 다른 앱을 열었다. [헌터즈 라운지] [익명 게시판] [글쓰기 화면] 빈 제목란에 커서가 깜빡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 * * 서울, 성동구. 자정이 넘은 오피스텔 8층. 좁은 원룸의 불은 꺼져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식어가는 라면 냄비만이 미세한 김을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싱크대에 등을 기댄 채,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호진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B등급 전사였다. 레벨 74. 중견 길드 ‘레드어스’의 3팀 부팀장. 딱히 대단할 것도,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는 위치. 일주일에 네 번 던전을 돌고, 나머지 사흘은 장비를 정비하며 쉰다. 그게 그의 일상이었고, 내일도 그러려니 했다. 그가 보고 있던 건 헌터즈 라운지, 익명 게시판이었다. 내일 던전 일정을 확인하려고 앱을 열었을 뿐인데. 상단에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글 하나가 눈에 걸려서, 무심코 눌렀다. [헌터즈 라운지 — 익명 게시판] [제목 : 찌라시) 요즘 랭커들 훈련 내용 이상하지 않냐? (성지글 예고)] [작성자 : ㅇㅇ (112.XXX)] 요즘 탑 길드들이 단체로 비동기화 훈련 돌리고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음? 청룡회, 이클립스, 바르가, 태산……. 심지어 얘들이 전부 동시에. 생각을 해봐. 비동기화 훈련이 뭔데. 시스템 보정 끄고, 날것으로 싸우는 연습이잖아. 그런 걸 10위권 길드들이 동시에 하고 있어. 하나만 물어볼게. 게이트 방어막이 언제까지 공짜인 줄 앎? 유지비 못 내면 뭐가 되는지 모르면, 위키 한 번만 검색해. “Gate Outbreak”이라고. 한국은 단일 노드야. 서울에서 터지면 부산까지 같이 죽어. 지금 거래소 가서 마안제 시세 한번 확인해 봐. 어제 저녁부터 슬금슬금 오르는 중임. 이미 움직이는 놈들은 움직이고 있어. 반박 시 니 말이 다 틀림ㅇㅇ [추천 127 | 비추 43 | 댓글 312] 장호진의 엄지가 멈췄다. ‘……뭐야, 이거.’ 찌라시는 헌터즈 라운지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일상이었다. 게이트 등급 조작설, 관리국 비리, 랭커 은퇴 루머. 대부분은 읽고 잊어버릴 수준의 잡문이다. 하지만. ‘이건 뭔가 좀 쎄…한데.’ 스크롤을 내리기 전에 먼저 떠오른 건… 머릿속 한구석에 걸려 있던 기억이었다. 사흘 전, 레드어스 길드 단톡방에서……. 3팀장 형이 슬쩍 흘린 이야기였다. [호진아, 너 그거 아냐?] [네? 뭔데요 형?] [요즘 상위 길드들이 훈련 루틴을 갑자기 바꿨다더라.] [음? 어떻게 바꿨는데요?] [그게, 구체적인 건 안 알려주긴 하는데… 비동기 훈련? 그런 걸 한다더라고.] [비동기면… 마력감응 훈련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거까지야 모르지. 근데 마광철 마스터가 태산 루키들 아주 갈아버리고 있다는 소문은 돌더라.] 사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이 게시글을 보고 있자니, 또 하나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건 바로 어제……. 뉴스 알림으로 떴던 짤막한 속보 뉴스였다. [이클립스, 중국 시안 지역 게이트 폭주 지원 선발대 파견 검토.] ‘…확실히 냄새가 나.’ 시스템 보정을 끄고 전투한다는 건, 헌터라면 누구든 상상만으로도 몸서리를 칠 만한 내용이다. 동기화가 없으면 스킬 정밀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마나 소모도 배 이상으로 뛰고. 그런 상태에서 전투 훈련을? 그걸 탑 길드들이 동시에? 이클립스는 중국 폭주 지원 때문이라 치자. 그런데 청룡회는? 태산은? 바르가까지? ‘생각해보면…… 뭔가 좀 이상하긴 했어.’ 장호진은 댓글 영역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댓글 312개] 확실히 민감한 이슈여서 그런지, 작성된 시간대에 비해 상당히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 ㅇㅇ (211.XXX): 또 찌라시냐; └ ㅇㅇ (175.XXX): 비동기화 훈련 진짜임? 소스가 뭔데 └ ㅇㅇ (112.XXX): (글쓴이) 헌스쿨 현장에 지인 있음. 물어봐. └ ㅇㅇ (61.XXX): ??? 아는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훈련 바뀐 건 맞다는데; └ ㅇㅇ (92.XXX): 헌스쿨 예능 컨텐츠 때문임 그거ㅋ └ ㅇㅇ (112.XXX): (작성자) 10억짜리 커리큘럼을 예능 컨텐츠 때문에 돌린다고? ㅋㅋ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 ㅇㅇ (92.XXX): …… 그리고 이 내용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 ㅇㅇ (58.XXX): 근데 마안제 시세 진짜 좀 묘하긴 한데; 방금 확인했는데 거래량이 평소 3배임;; └ ㅇㅇ (175.XXX): 헐 ㄹㅇ? 누가 매집하는 거 아냐 └ ㅇㅇ (220.XXX): 대량 매수 뜬 거 아님? 거래소 체결 내역 보면 금일 오전에 마안제 50개 원샷 체결 있음; └ ㅇㅇ (61.XXX): 마안제 50개를 한 번에? ㅋㅋ 무슨 길드 매집이야 └ ㅇㅇ (58.XXX): 길드 매집이면 법인 계정으로 하지 개인 계정에서 왜 함; 개인이 산 거 아닌가 └ ㅇㅇ (92.XXX): 개인이 마안제 50개를 왜 삼; 뭘 알아서 그러는 거 아니면 미친놈이지 └ ㅇㅇ (175.XXX): ㅋㅋㅋ 아 그래서 시세 오른 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구린내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 ㅇㅇ (112.XXX): (작성자) 마안제가 다가 아님. 정화 소금, 방벽 스크롤, 마나 코어. 폭주 지역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 전부 지금 슬금슬금 달리고 있음. 직접 확인해. └ ㅇㅇ (211.XXX): 야 근데 이거 진짜면 곧 헬게이트 열리겠는데? └ ㅇㅇ (92.XXX): 아직 반은 찌라시 같은데; 근거가 좀 약하지 않냐 비동기 훈련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 ㅇㅇ (133.XXX): [마탑 인증] 분석팀입니다. 글쓴이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KR-01 노드 유지비 추이 최근 3개월치 확인해 보세요. 답 나옵니다. └ ㅇㅇ (175.XXX): ??? └ ㅇㅇ (61.XXX): 마탑이 인증글을????? └ ㅇㅇ (211.XXX): 야 이거 성지 아님? └ ㅇㅇ (58.XXX): 아 아 아 거래소 켜봐 마안제 방금 또 올랐음; └ ㅇㅇ (220.XXX): ㄹㅇ 실시간으로 호가창 올라가는 중인데; └ ㅇㅇ (92.XXX): 아 나도 사야 됨? “…….” 마탑의 인증 댓글까지 확인한 장호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커뮤니티에 인증된 마탑이라면…… 이클립스까진 아닐지라도 충분한 인지도가 있을만 한 곳. 그러니 그들은 커뮤니티 찌라시에 반응하는 조직이 아니다. 길드 내부 보고서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조용히 결론을 내리는 곳. 그런 곳에서 직접 인증 댓글을 달았다는 건. “……!” 장호진은 앱을 전환했다. 거래소. 마력 안정제 시세 차트. 그래프의 꼬리가 꺾여 올라가 있었다. 전일 대비 12% 상승. 거래량은 평소의 4배. 식은 라면 냄비를 내려다보았다. 입맛은 어느새 사라졌다. ‘KR-01 노드 유지비.’ 위키를 열었다. 검색어를 입력하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검색어: 게이트 폭주 (Gate Outbreak)] 페이지가 떴다. “폭주가 발생한 구역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관리 구역으로 전환되며…….” 장호진은 위키를 다시 닫고, 게시판으로 돌아왔다. 댓글이 벌써 400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맨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다. └ ㅇㅇ (112.XXX): (글쓴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함요. 이거 하꼬 인생에 몇 번 안 오는 기회인 듯. 돈 같이 벌자는 말임 ㅇㅇ. 그런 의미에서 전 이미 창고에 소모품 쌓아두는 중이거든요. 여러분 행운을 빕니다. 마지막 댓글. 글쓴이의 문체가 갑자기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능글맞은 그 뉘앙스가 묘하게 거슬렸다. 장호진은 스마트폰을 쥔 채,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야 하는데…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내일의 던전 일정. 마력 안정제. 게이트 폭주. 비동기화 훈련. 머릿속에서 맴도는 단어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아, 씹.” 도저히 잠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거래소 앱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Market] 마력 안정제(C급) x10 — 단가 168LP / 총 1,680LP [거래 체결 완료.] 눈을 떴을 때, 잔고가 찍혀 있었다. 장호진은 잠시 그 숫자를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베개 밑에 쑤셔 넣었다. 15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하루가 또 지나 아침이 됐다.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먼저 움직였다. 베개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더듬어 잡고……. 거래소 앱을 켰다. 마력 안정제. 그리고 3일간의 차트를 훑었다. 전일 대비 +8%. 거래량은 평소의 2배를 넘긴 수준이고……. ‘……오.’ 반응이 생각보다 빨라서 흡족한걸? 앱을 닫았다. 그 이상 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직 팔 때가 되려면 한참 멀었는걸? 스윽-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옆에 어메니티가 새로 채워져 있었다. 샴푸, 바디워시, 치약 세트. 그리고 무광 블랙의 리유저블 파우치 하나. “흐으음.”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면도기 세트에 미니 화장수, 면봉 키트, 무광 마감된 YKK 지퍼까지. 편의점에서 사면 개당 만 원은 하는 라인업이다. 풀 세트 구성이면 시중가 기준 최소 3만 원 이상……. ‘어차피 소희 님은 어메니티 아예 쓰지도 않던데.’ 고대로 가져다가 슬쩍 가방에 챙겨 넣었다. 솔직히 이건 너무 당연한 거다. 생각해 보면, 호텔이 매일 아침 새로 채워놓는다는 건 매일 가져가라는 뜻이잖아? 룸 차지에 포함된… 일종의 서비스 계약이랄까. 안 가져가면 오히려 호텔 측의 호의를 무시하는 거다. 이건 예의의 문제지, 탐욕의 문제가 아니다. “후후.” 나쁘지 않은 현물 보상에 기분이 좋아진 난, 얼른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거실로 나오니, 강소희도 일어나 있었다. “어,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요?” “혼밥하기 싫어서.” “…….” “씻고 나올게요.” 알겠으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은 하지 말아줄래? 요즘 훈련이 상당히 빡세서 그런가, 꽤나 예민하시단 말이지. 기다리는 동안, 거래소나 더 둘러봐야겠다. 철컥- “나 준비 됐어요.” “그럼 가시죠?” 조식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제는 스테이크가 꽤 괜찮았는데, 오늘은 해산물 쪽이 더 낫더라고. 어쨌든 배까지 든든히 채우고 나니, 곧 훈련장으로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전투 시뮬레이션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저녁에 봅시다.” “살아서 보자고요.” 흐음. 살아서 보자고? 마탑 훈련이… 그 정돈가? * * * 최근, 훈련에 임하는 참가자들의 자세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훈련장에 들어서자마자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것만 봐도 뭐.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나 말고도 미묘한 낌새를 느끼는 참가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정확히 게이트 폭주를 예상한다기보단… 교관들이나 멘토들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 걸 느끼고 있는 것 같달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훈련장에서 가장 열심인 둘을 꼽자면, 의외로 배주하와 한도진이었다. 특히 배주하는 헌터라기보다 재능 좀 있는 인플루언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오해였던 걸까? 막장 진지한 훈련이 시작되자, 꽤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사로에 가장 먼저 들어서서 한 발 쏘아보낸 뒤, 진지한 표정으로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또 틀어졌어.” 아마 궤적이 1도 정도 빗나간 것 같다. 첫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느낌인데, 틀어진 게 느껴진다면 언젠간 고쳐질 거다. 게이트 안에서 쏘던 감각이 있으니, 저 정도까지 감을 잡는 것 같기도 하고. 타탕- 한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물고 마력총의 반동을 잡으려 하지만, 탄착점이 계속 흔들렸다. 손목이 아니라 어깨에서 잡아야 하는 건데…… 뭐,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 반면 나야 뭐. “시뮬레이션 종료. 기록 측정 완료.” 교관이 태블릿을 확인하다가, 옆 교관에게 슬쩍 화면을 보여주며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린다. “……이게 가능한 기록이야?” “처음부터 이랬어.” “미친.” “비동기 체질이라잖아. 이건율 참가자.” 이건 또 뭔 헛소문이지……. 비동기 체질이 대체 뭔데? 만년 넘게 강제로 구르면서 만들어진 감각을 체질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버리면……. 형들. 나, 상당히 억울해? “…….” 나는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인 뒤, 곧바로 다시 장비를 들어 올렸다. 다른 S급 참가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도 게을리할 수는 없었으니까. 카메라 의식하는 거 아니냐고? 방송에 잘 나가야 하는 건 부정할 순 없지만, 그 이유보다 더 큰 이유가 확실히 있다. 실제로 나도… 이 훈련을 통해 실력이 은근히 향상되는 게 느껴지고 있다는 말씀. 이전에는 몰랐던 ‘비동기’라는 프레임을 의식하고 나니, 전까진 그냥 몸이 기억하는 대로 하던 것들을 의식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달까. 시스템 보정이 없는 상태에서의 마력 흐름. 이걸 게이트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 흐름과 대조해보면서, 습관적으로 흘리던 미세한 편차를 잡아볼 여지가 생긴 거다. 뭐, 말 그대로 미세한 차이니까. 남들 눈에는 Day 1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보이겠지만……. ‘내가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이 훈련을 꾸준히 계속한다면, 게이트 안과 밖의 편차를 5~10% 미만으로 줄여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게 가장 중요했다. 이번에 게이트 폭주가 확실히 터지게 된다면, 이후에도 또 터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주기적으로 게이트 밖이 사냥터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오전 일정은 여기까집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한 시간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일정으로 흘러갔다. 다만 1시가 되었을 때, 갑자기 오늘 오후 일정에 변동이 생겼다. “멘토님 호출입니다.” “모두 이동하시겠습니다.” “오늘 나머지 훈련은, 태산 길드와 함께 진행합니다.” 갑자기 훈련장이 바뀌어버렸다. * * * 이런 얘긴 사전에 없었는데, 아마 멘토들끼리 뭔가 회의한다더니 훈련 방향성에 변동이 살짝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청룡회 훈련장에서의 원거리 딜러 훈련을 마치고, 오후부터는 태산 길드 훈련장으로 이동해서 합동 연계 훈련을 시작했다. 하긴. 탱커들이든 원거리 딜러들이든, 전투 포지션 훈련을 위해서는 서로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챙- 채챙-! 태산에 도착해서 처음 관전하게 된 탱커들의 훈련방식은 상당히 재밌었다. 비동기 환경에 익숙한 태산 길드의 베테랑 플레이어들이 진영을 부수려 들면, 그걸 태산 길드의 루키들과 우리 헌스쿨 루키들이 막아내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이게 가능한 건, 어쩌면 실력 차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거다. 루키들이 전력을 다하더라도, 100레벨에 가까운 태산 길드 플레이어들에게 생채기라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진짜 실전 같은 훈련이 가능한 것. 터엉-! 이성환의 방패가, 태산 길드 마탄 사수의 포격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비동기 상태에서도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 숙소에서 만났을 땐 엄청 어렵다고 울상이더니, 예상보다 엄청 훌륭하다. 다만 우리 인욱이 움직임은 비교적 불안정한데……. 뭐, 이건 이성환이 나머지 탱커 참가자들보다 너무 압도적인 느낌이라. 인욱이가 부족하다고 콕 집어 얘기하긴 어렵다. “이야, 성환 님. 그걸 블로킹을 성공하시네.” “……아직 멀었습니다, 형님.” “난 그 정도만 되면 소원이 없겠는데.” “더 잘해야죠. 저기 건율 형님도 보시지 않습니까, 이제부턴.” “하긴. 저 형님 수준에 맞춰 가려면, 아직도 더 열심히 굴러야 하긴 합니다.” 이 자식들. 뭐라는 거야 대체? “후우.” 그나저나 이런 낯 뜨거운 소리를 하면서도, 이성환 저 녀석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방패를 다시 세우고 있다. 아마 저 강철방패만큼이나 두꺼운 철판이, 얼굴에도 깔려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아닐까? 그 와중에 아까보다 발디딤이 반 보 가량 더 넓어져 있는데……. 스스로 보정한 것 같다. 재능충 자식. “자, 이제부터 합동 훈련을 시작한다! 모두 대열로!” 태산의 마스터 마광철의 호령이 떨어지자, 모든 루키들이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잡았다. 이어서 그의 옆에 나타난 최재민 멘토가, 우리를 향해 명령을 이었다. “너희는 지금부터 딜 포지션 대형을 구성한다. 각 교관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라. 실시!” 그렇게 모든 대형이 갖춰지자, 정말 실전 같은 비동기 훈련이 시작됐다. 훈련장 안에 태산과 청룡회의 루키들까지 백 명도 넘는 인원이 모의 전투를 진행하다 보니, 어지간한 대규모 던전 공략과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전투가 된 느낌이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훈련을 진행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거, 단순 촬영용 훈련은 아니라는 말이지.’ 게이트 폭주의 가능성이 더 올라간 느낌이다. 갑자기 자본주의적 포만감이 찾아온다. 내 LP 계좌, 지금도 쑥쑥 자라고 있는 거겠지? * * * 실전 훈련이 한 사이클 마무리되고, 잠시간의 휴식시간. 참가자들의 리얼한 훈련 과정을 담기 위해 실시간으로 뛰어다니던 촬영감독은, 힘에 부치는지 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참가자들이 쉴 때 스탭들도 쉬어야 더 양질의 촬영을 할 수 있으니……. 숨을 돌리면서 체력을 보충하려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벤치에 걸터앉았을 때. 감독의 눈에, 아직도 촬영 중인 카메라 하나의 스크린이 저도 모르게 들어왔다. “저기, C카메라. 저 참가자 좀 더 당겨봐.” 모니터에는 이건율이 훈련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 무표정. 화면을 훑는 눈동자만 살짝 움직인다. 그러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정말 밀리미터 단위로 말려 올라갔다. ‘이야. 저 친구는 진짜 독종이네.’ 촬영 감독은 감탄했다. 저건 분명, 청룡회 길드에서 제공해 주는 비동기 훈련 데이터를 뜯어보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이렇게 힘든 훈련이 끝났으면 한 템포 쉬어갈 만한데. 쉬는 시간까지도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체 피드백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민아.” “예, 감독님.” “저기 이건율 참가자 좀 봐라.” 감독이 옆에 널브러져 있던 이정민 FD를 쿡 찔렀다. 각성자가 아닌 정민은 그동안 게이트 안 촬영에는 동행하지 못했지만, 훈련소는 게이트 밖인 덕에 오랜만에 현장에 나와 있었다. “또 뭐 있어요?” “훈련 끝나자마자 바로 데이터 분석 들어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두 사람은 평소에도 친분이 있던 터라,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편이었다. “저 무표정으로 기록 리뷰하다가 뭔가 발견한 듯 살짝 웃는 거, 저기가 하이라이트야. 프로 선수들이 저래. 칼같이 분석하다가 성장 포인트 찾으면 씩 웃는 거지.” 이정민 FD가 모니터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삼켰다. 건율의 1n년 지기인 정민은, 저게 절대 훈련 어플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게다가 최근에 몇 마디 나눠본 내용을 떠올려 보면……. 저건 무조건 훈련 데이터가 아니라 거래소 앱이다. ‘대학 때도 주식만 하면 잃던 놈이. 에효.’ 저 입꼬리 각도는 시세가 올랐을 때 나오는 그것이다. 이제 며칠 지나면, 양쪽으로 축 늘어져버릴 거다. 이건율이 투자에 성공하는 그림은, 본 적이 없어서 상상조차 어렵다. “감독님, 저건 그…….” “응?” “……아뇨. 원래 저래요, 저 사람은.” 이정민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이건율이 지인임을 숨기고 있는 이상 설명할 수도 없는 거였고, 한다고 해봤자 믿을 리가 없다. 다만 촬영감독은…… 메모장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이건율 — 훈련 직후 자가 분석 루틴. 완벽에 가까운 프로 의식. ★★’ 이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훈련이 종료되고,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장원준 교관은 빈 훈련장에 혼자 남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참가자들의 3일 치 훈련 기록 그래프가 떠 있었다. 이 훈련 그래프는 마도공학 기술을 활용한 전투 기여도를 산정한 내용이기 때문에, 꽤나 정확한 것이다. 그래서 장원준은 꽤 놀라고 있었다. 전반적인 참가자들의 훈련 그래프가… 그가 처음에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으니까. 청룡회에서 훈련한 참가자들의 데이터만 보는 것도 아니다. 헌스쿨과 연계되어있는 모든 길드에서 훈련지표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S등급의 참가자들 중 몇몇은……. [이성환. 깔끔한 우상향 곡선.] [박하준. 2일 차에 살짝 꺾인 뒤 3일 차에 급반등.] [강소희. 완만하지만 꾸준한 상승곡선.] ……중략…… 솔직히 길드의 상위권 루키들과 비교했을 때도, 훨씬 더 나은 수준의 성장곡선을 보이고 있었다. 시즌 3 참가자들의 수준이 가장 높다더니. 이 정도면 부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따로 있지.’ 스윽- 장원준은 화면을 한 칸 더 넘겼다. 그러자 화면 상단에 명시된 참가자의 이름은……. [이건율] 사실 그래프만 놓고 보자면,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수평선에 가까운 느낌이다. Day 1부터 최상단에 고정된 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성장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이건율의 성장 폭은 알 수가 없는 것이었을 뿐. 지금의 훈련방식과 점수 산정 기준 기반으로… 이 괴물 같은 루키의 훈련 성과 점수는 항상 최고점이었다. “…….” 장원준은 그래프를 한참 바라보다가, 태블릿 커버를 닫았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최재민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신가?” 장원준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한 뒤,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내기, 제가 졌습니다.” 최재민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장원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멘토링하셨길래…… 이런 괴물이 나온 겁니까?” 장원준의 질문에, 최재민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런 수준의 재능이, 멘토링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내가 한 건 없다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뭘 좀 가르친 줄 알았지만…….” 최재민의 시선이 장원준의 태블릿 스크린에 잠시 고정됐다. “그런 건 없는 거였어.” * * * 며칠이 더 지났다. 이제 우리는, 모든 참가자들이 한데 모여 완벽한 팀 훈련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 팀 훈련까지 모두 마무리된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일이 바로, ‘훈련 평가일’이라는 말이었다. “후우.” 그 때문인지 숙소에 돌아온 강소희는, 오늘따라 훈련 내용에 아쉬움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마력 회로가 헛도는 느낌을 전부 지우지 못했어요.” 그게 완전히 지워질 수 있는 거였으면, 소희 님이 멘토 하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많이 나아지신 것 같던데요, 소희 님.” 사실 근 3일 정도 함께 했던 훈련을 놓고 봤을 때. 강소희의 실력 향상 수준은 최상위권으로 보였다. 다른 마법사 포지션의 참가자들과 확연히 비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굳이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요?” 어쨌든 강소희의 표정이 아주 조금은 밝아진 느낌이다. “그나저나 건율 님. 내일 성과 발표인 건 알죠?” “압니다. 인욱이가 하도 떠들어대서.” “건율 님은 만족해요?” 내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당연히 만족 못 한다. 아직까지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꽤 보였으니까. 다만 개선할 부분이 보인다는 점은, 나아질 여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적당히 만족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오늘은 진짜 피곤하네요. 좀 일찍 자죠?” “좋습니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거래소 앱을 열었다. 마력안정제. +62%. 6일 누적이었다. 거래량 증가폭이 점점 가속되는 게, 확실히 심상치 않다. ‘크.’ 실드코프 주가도 체크했다. 마력안정제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한 상승세. ‘……나쁘지 않은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앱을 닫았다. ‘내일 성과 발표라고 했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한테는 이게 더 중요한걸? 딸깍- 불을 끄고 푹신한 이불 안으로 들어가니, 눈꺼풀이 스르르 절로 감겼다. 15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자정을 넘기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 중견 식품회사 마케팅팀의 대리인 정하윤은, 침대에 엎드린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무의식적으로 까딱거렸다. 그녀는 최근 개설된 한 팬카페의 카페지기였다. [이건율 팬카페 - ‘이건율 LP정산소’] [오늘의 방문자 수: 12,847명] [신규 가입 대기: 214명] ‘……또 늘었어.’ 감사한 한숨이 아니라, 걱정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가입 승인 기준을 느슨하게 잡아뒀더니, 어그로꾼이랑 타 카페 스파이가 슬슬 섞여 들어오는 느낌이다. 팬카페 운영이 이렇게 피곤할 줄은 몰랐다. 별 생각 없이 짓게 된 ‘현생로그아웃’이라는 카페 닉네임과, 이렇게까지 동화될 줄은 하윤도 몰랐던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딸깍- 하윤의 마우스는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12시 전 가입신청 건까지만 다 처리하고 자야지.’ 그런데… 사실 이건 좀 웃긴 일이었다. 하윤은 10년 전, 덕질이라는 것과 완전히 결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스물세 살까지, 하윤은 꽤 이름이 알려진 홈마였다. 당시 그녀는 어떤 남돌 그룹의 막내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무대 사진을 찍으러 온 나라를 돌아다니고, 공항에서 새벽부터 대기하고, 고화질 직캠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교 졸업 앨범보다 그 아이돌의 포카가 더 중요했던 시절. 하지만 사회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뗐다. 첫 직장, 야근, 이직, 또 야근. 이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니 덕질을 할 시간도 에너지도 사라졌고……. 어느 순간부턴 아이돌을 봐도 아무 감정이 안 일었다. 그러니까 분명……. ‘아, 나도 이제 덕질 같은 건 졸업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이 나이 먹고 팬카페를 다시 만들었다니…….’ 우연히 보게 됐던 헌스쿨 시즌3의 1화가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우연이었다. 원래 그녀는 헌터에 대해서,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마침 할 일이 없던 화요일 저녁, 타이밍 좋게 1화를 처음부터 보게 되었고……. 그대로 한 참가자에게 예고도 없는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어질어질했다. ‘이건 HBC에서 책임져야 할 문제야. 왜 이런 걸 기획해서는…….’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처음에는 아무 기대도 없이 봤다. 퇴근하고 맥주 한 캔 까면서 그냥 틀어놓은 수준. 심지어 ‘이건율’이라는 참가자는 솔직히……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좀 심심한 첫인상이었다. 이성환 같은 실버나이츠 인재상도 아니고, 배주하 같은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무표정에, 말수도 적고, 비주얼이 나쁘진 않은데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 1화 마지막 부분의 연출이 문제였다. 강소희 참가자를 도와주던 장면부터 리와인드됐던 그 연출. 특히나 그 마지막, 엘리트 몬스터 웨이브가 밀려오던 장면에서… 결국 하윤은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원래 헌터라는 게 이렇게 멋진 거였나? 물론 생사를 오가는 곳을 일터로 삼는 사람들인 만큼, 평소에도 대단하다고는 생각해왔지만……. 거대한 언월도를 들고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하윤의 가슴에 확 박혀버렸다. 솔직히 평소에 헌터를 덕질하는 친구들을 보면, 덕질 포인트가 뭔가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하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10년간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등뼈를 타고 쭈뼛 일어서는 느낌이랄까. 그래, 그 감각. 10년 전에도 분명 그랬었다.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그 순간들. ‘……또 시작된 건가.’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서른세 살에 무슨 덕질이야. 그런데 1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건율의 그 무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찾아보니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인지도도 엄청나게 낮은 편이었다. 물론 1화에서 집중 조명되긴 했지만……. 여기서 별다른 활약을 추가하지 못한다면, 뭔가 묻혀버릴 참가자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튜브에서 하이라이트 클립을 찾아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하윤은 깨달았다. ‘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거구나.’ 그날 밤에 팬카페를 만들었다. ‘이건율 LP정산소’라는 이름도, 뭔가 이 참가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지은 이름이었다. 헌터들은 LP를 버는 사람들이고……. 팬이 많아지면 돈도 좀 잘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뭔가 취지에 맞는다는… 그런 뿌듯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10년 전의 손맛이 아직 녹슬지 않았는지, 세팅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끝났다. 그리고 하윤만 그런 것도 아니었는지, 만든 지 이틀 만에 회원이 천 명을 넘겼다. 2화까지 방영된 지금은…… 뭐, 이 꼴이 됐다. [신규 가입 대기: 214명] ‘으으. 내일 출근인데.’ 한숨을 한 번 더 쉬려는데, 톡이 울렸다. 띠링-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지기님, 깨어 있어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이건율 LP정산소’의 네임드 회원이자, 하윤이 가장 신뢰하는 정보통이었다. 헌스쿨 촬영팀 쪽에 지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분석글도 잘 쓰고 무엇보다 정보가 상당히 정확해서……. 하윤이 모니터링 팀을 꾸릴 때 가장 먼저 영입한 회원이기도 했다. 일반 팬치고는 헌터 업계 돌아가는 사정을 좀 잘 아는 느낌도 들었지만. 뭐, 이 바닥에 헌터 팬이면 그 정도야 당연히 아는 것 아니겠어? 하윤 자신이 헌터 덕질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한 것일 뿐. [현생로그아웃: 당연하죠 ㅋㅋ 가입 승인하느라 정신없어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새벽까진데 고생이 많으시네요ㅠ.] [현생로그아웃: 이게 다 건율님 때문입니다.] [현생로그아웃: 인기가 넘 많으셔서 탈이에요 진짜 ㅋㅋ]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ㅋㅋㅋ 행복한 비명이네요.] 행복한 비명이라. 한쪽에선 행복하고, 한쪽에선 진짜 비명이다. 어그로 글 삭제하랴, 인증 양식 안 지킨 회원 쪽지 보내랴, 갤러리 정리하랴……. 직장 다니면서 카페 운영하는 거, 진짜 체력이 안 되면 못 한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 피곤함이 싫지가 않았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새벽까지 직캠 편집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팬카페 최고의 정보통이, 또 엄청난 걸 물어다 던져주었다.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그런데 지기님, 저 오늘 좀 큰 건 들었는데요.] [현생로그아웃: 네에?] [현생로그아웃: 무슨 소식이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그… 지인한테 들은 건데]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3화 미션이 뭔지 알았어요.] 3화. 바로 내일 방영될 바로 그 3화! 하윤의 심장박동이 한 박자 빨라졌다. [현생로그아웃: 헐.] [현생로그아웃: 뭔데요, 뭔데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미다스의 정원이래요] [현생로그아웃: ?????] [현생로그아웃: 그게 뭔데요?] ……솔직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미다스의 정원? 미다스 하면, 만지는 거 다 금이 되는 그 미다스 맞지?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미공략 미궁이에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아직 아무도 클리어한 적 없는.] [현생로그아웃: !!!!!!!!] 미공략. 그 단어 하나에, 잠이 확 달아났다. 하윤은 헌터도 아니고 게임에 대한 지식도 깊지 않지만, ‘미공략’이란 말이 뜻하는 바는 알았다. 그건 제작진이 참가자들에게 진짜 미친 과제를 던졌다는 뜻이니까. [현생로그아웃: 미공략 미궁이면… 다른 시즌에서도 한 적 없지 않아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네. 역대 최초래요. 제작진이 이번에 진짜 세게 밀어붙인다고…….] ‘……진짜?’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이건율 참가자의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걸 2화에서 또 한 번 증명했지만……. 미공략 미궁이라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 아닌가? 진짜 위험한 거 아냐? ‘아, 또 시작이다.’ 10년 전에도 무슨 이슈만 있으면 이러던 사람이, 이번에도 걱정부터 하고 앉아 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을 걱정하냐고.’ ……그건 아니고. 수만 명이 걱정하겠지. 근데 뭐, 그래도 걱정은 걱정이니까. [현생로그아웃: 근데 위험한 일은 없었겠죠? 아무리 건율님이라 해도…… 미공략이면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아, 그게요, 지인이 그러는데 촬영분 좀 봤나 봐요]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이번에 건율님 분량 2화 때보다도 더 터지니까, 저한테 안심하라고 ㅎㅎㅎ]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 심지어 야근도 전부 건율님 때문이라던데요?] 편집팀이 야근? 심지어 그게 이건율 때문……? ‘……분량이 넘친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하윤은 곱씹었다. 분량이 넘친다는 건, 그만큼 보여줄 게 많다는 뜻이고. 보여줄 게 많다는 건. ‘미쳤다. 2화 때도 행복했는데… 3화 땐 진짜 배 터지는 거 아냐?’ 스마트폰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하윤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춤추기 시작하였다. * * * 대강당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무대 위 스크린에 이클립스의 길드 로고가 떴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글씨가 올라왔다. 이클립스의 탬플릿이 적용되어 있는 건……. 아마 최종 훈련 종합 평가의 진행을, 마탑에서 했기 때문인 듯했다. [비동기화 훈련 종합 평가] 객석을 채운 참가자들 사이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카메라 여섯 대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무대와 객석을 동시에 훑고 있었다. 장세연 PD가 부스에서 손끝으로 모니터를 톡톡 두드리며 이정민에게 속삭였다. “카메라 3번, 이건율 참가자에게 고정해 줘.” 이정민은 대답 대신 한숨을 삼켰다. 뭔가 친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좋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꿀잼 몰카 같단 말이지.’ 세상이 저 괴팍한 놈에게 속고 있는 기분이랄까? 불알친구가 범국민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 상황이… 적응이 쉽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이번 비동기화 훈련 결과는 역대급이라던데. 이건율 녀석의 재능이 말이 안 된다나 뭐라나. 각성자인 권 PD의 말에 따르면, 이 훈련내용까지 나간 시점에 이건율은… 진짜 엄청난 반향을 불러올 거라고 했다. 이렇게 된 거 콩고물이나 좀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 이정민이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무대 정중앙에 최재민이 섰다. 그 옆으로 멘토 5인이 한 줄로 늘어섰다. 이어서 최재민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비동기화 훈련 종합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무대 스크린이 전환되며 평가 기준표가 떴다. 종합 점수. 세 가지 항목의 합산이었다. [마력 제어 정밀도] [전투 효율] [적응 속도 및 성장률] 장원준 교관이 태블릿을 들고 무대 한쪽에 서 있었다. 각 길드 교관단의 데이터를 통합 분석한 결과라고 했다. 3일간의 모든 훈련 기록이 숫자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위권부터 발표합니다.” 스크린에 이름이 하나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정민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발표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멘토들이 평가한 점수는 제작진에게도 아직 공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FD인 이정민 입장에서도 솔직히 궁금한 부분이 많았다. “김윤석 참가자, 197점.” F등급 대 참가자들의 이름이 당연히 먼저 나왔고, 점수 또한 예상 범위 안이었다.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준 몇몇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기대 이하의 결과를 받은 쪽에서는 입술을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정민은 그 구도를 보며, 촬영에 살릴만 한 소스는 없는지 열심히 고민했다. ‘F등급 안에선, 유진성이라는 참가자가 꽤 돋보이는데? 점수가 어지간한 C등급보다 높네.’ C~B등급 대.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다. 표정 관리를 하려는 얼굴들.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시선. 중위권을 넘어서자, 이름 사이사이의 간격이 길어진다. 그리고 이윽고. [상위 5위.] 스크린이 한 박자 멈췄다. “권유나, 287점.” 객석 한쪽에서 작은 술렁임. 권유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5위라는 순위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정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5위 권유나. 적당하네.’ 이 참가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제작진이 기대한 포지션을 잘 수행해 주는 중이다. 실력도, 인기도, 꾸준히 느는 참가자. “4위. 강소희, 292점.” 그에 반해 담담한 표정의 강소희는…… 대중적 인기도 인기지만, 매니아층이 확고한 참가자였고. “3위. 박하준, 293점.” 박하준의 경우에는, 남자 참가자들 중 강소희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비주얼적으로 약간 퇴폐미를 가진 느낌이라, 벌써부터 팬덤이 기승을 부린달까? 그나저나 권유나와 반대로, 이 친구는 순위가 조금 아쉬운 모양새다. 그리고……. 스크린이 다시 멈췄다. 2위와 1위만 남았다. “2위는-” 최재민이 결과지를 들었다. “이성환. 295점.” 이성환이야 뭐. 말할 것도 없는, 헌스쿨 시즌 3 최고의 스타 참가자였고. ‘이성환은 진짜 빛이 난다, 빛이 나.’ 결과 발표에, 이성환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 객석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정민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었고. 이정민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이번 비동기 훈련 일정만큼은……. 거의 모든 참가자가 1위가 누구일지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순간 시선이 확 쏠리는 게 느껴져서 조금 당황했다. 뭐, 왜 그런진 알 것 같은데… 조금 민망한걸? 솔직히 예상 범위다. 비동기 훈련에서 내가 1등 못하면, 그건 지난 1만 년에 대한 모독 아닐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당 위를 지켜보는데……. 최재민이 결과지를 읽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런데 뭔가 그 표정이 좀 이상했다. 평소의 무뚝뚝함과는 다른, 거의 보기 드문 종류의 웃음이랄까. “종합 1위. 이건율.”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역시나 예상 범위니까. 그런데. 최재민이 한 줄을 더 읽었다. “종합 점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측정 범위 초과.”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Over Scale.] 스크린에 한 줄의 간결한 메시지가 떠오르자, 대강당이 조용해졌다. 정말… 조용해졌다. 15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얼굴이 뜨겁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Over Scale이라는 단어가 스크린에 뜨자마자, 사방에서부터 쏟아진 시선들. 머리털 나고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자, 그럼 여기까지. 모든 비동기화 훈련 종합 평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후우우. 복도에 나오니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대강당에 있던 동안은 정말이지, 등줄기가 간지러워서 죽을 뻔했단 말이지. 뭐, 이해는 한다. 신기한 거 보면 쳐다보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근데 그게 내 체질이 아니라는 점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었다. 저벅- 심지어 이 부담스런 시선을 감내하는 대가(?)도 따로 없다. 오버 스케일? 무슨 건전지 이름 같은 포장지나 쓸데없이 씌워놓고…….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으면 특별 장학금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헌터즈 스쿨이면… 여기도 엄연히 학굔데? 돈도 안 줄 거면서 이런 장엄한 발표라니. “…….”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슬쩍 꺼내 들었다. 종합 평가고 나발이고, 20분 전에도 확인했던 LP 계좌가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바로 그때. “이건율 참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꽂히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장원준 교관이 제법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표정이 딱, 할 말 있는 사람 얼굴이었다. “최재민 멘토께서 잠시 미팅 요청하셨습니다.” 엥? 내가 딱히 그 아재랑 할 말은 없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속마음이고. “넵.” 학교에서 멘토가 부르면, 가야지 뭐. 별수 있나. ‘쩝.’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은 난, 장원준을 따라 멘토 대기실로 이동했다. * * * 파국을 예감한 사람이 가장 조심하는 것. 그것은 낭비다. 최재민은 그 원칙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능력의 낭비, 시간의 낭비, 기회의 낭비. 그 어떤 낭비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버릇. 그래서 최재민은 이건율이라는 루키가 불편했다. 좋은 의미로. Over Scale. 숫자가 없는 점수표. 설계된 최대치를 돌파해버린 기록.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이건율이 예외인 게 아니라, 시스템의 상정 범위 자체가 틀렸던 것이다. 비동기화 훈련 성과를 수치화하는 이 시스템 설계도는, 랭커들 수준에서나 가능한 컨트롤 정밀도를 수치 안쪽에 상정시켜놓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최재민이 판단했을 때……. ‘이 재능을 헌스쿨에 묶어두는 건, 어떻게 봐도 낭비야.’ 이건율은 지금 낭비 그 자체였다. 대체 이 정도 되는 포텐을 가진 참가자가 고작 이런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른 멘토들과의 상의 끝에, 한 가지 방향성에 대한 허락을 구해 둔 상황이었다. 당연히 총괄 PD인 장세연의 허락도 받아 두었다. 이건율에게 바로 ‘그 제안’을 하기 위해. 그러니 최재민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 최재민은 문 쪽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곧 가볍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진 노크. 똑똑-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이건율 참가자가 들어왔다. 그는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방금 자신의 이름 앞에 ‘규격 외’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었음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최재민은 그걸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릇도 크단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없다. 평범한 루키였다면 지금쯤, 표정이 상기되다 못해 온몸이 흥분으로 가득 찼어야 할 수준이건만.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앉게.” 이건율의 행태는 모든 면에서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축하하네. 지금까지 내가 참관했던 모든 비동기 훈련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보여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감사합니다. 교관님들 말씀대로 뭐… 제가 비동기 환경에 잘 맞는 체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이건율의 말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최재민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차 한잔 들지.” 탁자 위에 놓인 허브 티를 건넨 최재민은, 이건율을 향해 잠시 몇 마디 의례적인 말들을 건네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설명했듯, 이 시스템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상한선을 뚫었어.” 최재민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자네에게 하고 싶은 제안이 하나 있네. 그 때문에 이렇게 부른 걸세.” 말하면서 이건율의 반응을 살폈다. 눈동자에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의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최재민이 한 마디 덧붙였다. “자네 혹시, ‘조기 졸업’이라는 제도에 대해 알고 있나?” 이건율의 눈동자가 살짝 확대되었다. * * * 헌터즈 스쿨에는 ‘조기 졸업’이라는 제도가 있다. 시즌 2때는 등장하지 않았던, 시즌 1에서 딱 한 번 발생했던 특별한 제도. 사실 이 제도는 제작진이 처음부터 고려했던 제도는 아니었다. 다만 시즌 1때 나머지 참가자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성과를 냈던 한 명의 참가자가 있었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졌던 제도가 바로 이 조기 졸업 제도였다. “자네 혹시… 헌터즈 스쿨 시즌 1의 오수진 참가자라고 알고 있나?” 현재까지 헌스쿨에서 배출한 참가자 중, 가장 압도적인 수준까지 성장한 참가자인 마법사 오수진. 그녀는 시즌 2에서 유명했던 윤기명 참가자조차 비교 레벨이 아닐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던 헌터였고. 몇 년이 지난 지금 110레벨을 넘겨 거의 랭커에 준하는 수준까지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건 그 아이 때문에 만들어진 제도라네. 당시 오수진 참가자의 재능은 이 헌스쿨이라는 예능이 담기에 너무 압도적이었지.” 오수진 참가자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나머지 참가자들의 활약이 죽어버린다. 그러니 프로그램에 긴장감이라는 게 전부 사라져버렸고, 예능의 재미 자체가 감소해버리고 만다. “오수진 참가자 입장에서도, 이 헌터즈 스쿨이라는 예능에 묶여있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어. 그때도 오수진 참가자를 자신의 길드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멘토들이 한 트럭이었고, 그러니 예능의 미션을 수행할 시간에 대형 길드의 지원을 받으면서 개인적인 성장을 도모한다면.” 최재민은 이건율의 눈동자를 잠시 살피며 숨을 골랐다. “참가자 개인을 위해서라도 예능에 묶여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네.” 이때까지도 이건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래서 최재민 또한 담담히 남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지금 자네가 딱 그 상황이야. 내가 볼 땐… 오히려 그 친구보다 정도가 더 심한 수준이지.” 심지어 곧 폭주가 터질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율 참가자 입장에서 예능에 묶여있는 것만큼 큰 손해가 없다. 아직 35레벨밖에 되지 않는 이건율 참가자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수준인데, 이대로 폭주가 터져버리면 15일 동안 아무런 성장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릴 테니까. 이건율 참가자의 재능이 아무리 엄청나다고 한들, 35레벨의 수준에서 게이트 폭주 제어에 유의미한 전력이 되기는 어려울 테고. 차라리 지금 시점에 헌스쿨을 조기졸업한 뒤 대형 길드 중 한 곳에 소속된다면. 그곳의 지원을 받아 해외 게이트를 통해 급격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 국가적 차원에서도 그게 이득인 것이다. 물론 이건율 참가자가 청룡회를 선택해서 최재민의 손에 들어온다면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었다. 최재민이 이 제안을 꺼내는 이유는, 진심으로 이건율이라는 재능있는 루키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금의 이건율에게……. 최고급 장비, 전담 코칭, 라이카 내 최적 사냥 루트. 거대 길드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인프라가 제공된다면. “조기졸업자에게 상금이야 제공되지 않지만, 해당 참가자를 영입한 길드에서는 그 상금과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이권을 자네에게 제안하게 될 걸세.” 이건율 정도 재능을 가진 루키가 세미 랭커 정도로 성장하는 데까지는……. 과장 조금 보태서 일 년이면 충분할 터다. 그러니까……. ‘이 정도 설명했으면 됐겠지.’ 최재민은 확신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 제안은, 이건율 참가자의 입장에서 거절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조기졸업 참가자의 히스토리도 예능적으로 잘 포장한다면, 장세연 피디도 불만이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으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이건율이 첫 마디를 꺼내었을 때.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만…….” 최재민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양하겠습니다.” “……!” 너무도 짧은 고민의 끝에서 이건율이 꺼낸 대답이, 최재민의 예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데다 단호하기까지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는, 헌스쿨을 끝까지 수료하고 싶습니다.” 짧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최재민은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잠시 공전했다. 사양? 수백만 LP가 넘을 수도 있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이 어마어마한 베네핏을? 그러니 최재민이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비록 이어진 이건율의 대답은, 꽤 허무한 것이었을지라도 말이다. “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시작한 건 끝까지 하고 싶어서요. 제가 진짜로 그 정도 깜냥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게 다였다. 이건율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최재민은 이건율의 눈을 봤다. 흔들림이 없었다. 설득이 통할 눈이 아니었다. ‘……대단한 친구다.’ 수백만 LP의 무형 자산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니. 자본에 이토록 초연한 헌터는, 최재민도 처음 봤다. 이 친구에게 돈은 목적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직 자신이 세운 원칙, 자신이 그은 선. 그것만이 이건율을 움직이는 기준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존중해 줘야겠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최재민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네. 충분히 이해했네.” “감사합니다.” “그럼, 피곤할 텐데 돌아가 보시게.” 이건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멘토님.” 이건율이 문을 나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최재민은 찻잔을 들었다. 식은 차였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더 탐이 나는군.’ 원래 가지기 어려운 것일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155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방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졌다. 불 꺼진 거실, 조용한 복도. 아마 강소희는 트레이닝 센터에 간 모양이었다. 뭔가 나 대신 이성환 전인욱 듀오에게 끌려간 느낌도 없잖아 있긴 한데…….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흐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이 호화로운 공간에 혼자 남은 느낌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만큼, 인생 살아가는 데 사치도 없는 거잖아?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LP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고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천장을 봤다. 팔도 다리도 멀리 뻗어서, 그냥 널브러졌다. 그리고.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조기 졸업이라니.’ 솔직히 나도 안다. 최재민 멘토가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을 한 건지. 솔직히 조건만 따지면, 엄청난 거다. 장비, 코칭, 해외 게이트 접근권에 서포팅까지. 이 정도면 국내 최고의 길드에서, 가장 유망한 루키 헌터급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거니까. 아마 헌터로서의 성공과 세계적인 랭커가 목적이었다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겠지. 하지만……. 난 책임 없는 권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얻은 모든 것들은, 결국 오롯이 내 게 아니거든.’ 대형 길드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그렇게 투자했다는 건… 그만큼 뽑아먹겠다는 뜻이다. 기대를 짊어지는 순간, 자유는 없어지는 거랄까. 물론 대형 길드 소속의 랭커가 되는 것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재원으로 인정받는 것도. 그 모두 당연히 좋은 말이지만……. ‘내가 책임지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뭐, 만 년 전이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도 나름의 보람이 있었겠지. 하지만 ‘세상 구하기 시뮬레이션’을 만 년쯤 반복하고 나니, 그런 진취적인 마인드는 전부 마모되어 버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흐음……. 짜게 식었달까. “…….” 이제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 아버지 대출 갚고. 시율이 학비 내주고. 밥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거창한 사명 없이, 남한테 빚지지 않고, 내 가족 옆에서. 그게 전부다. 내가 책임지고 싶은 대상은, 내 가족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까. ‘최재민 멘토의 제안은, 그 방향이 전혀 달랐던 거지 뭐.’ 그런데 게이트 폭주를 앞두고, 가족들이 걱정되지 않냐고? 걱정되지 않는다는 표현보단,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이 맞다. 아파트가 좀 허름하긴 해도… 우리 집은 서울숲 바로 근처니까. 안정화 게이트 바로 옆에 불규칙 게이트가 생성될 확률은 상당히 낮기도 하거니와, 우리 집 바로 옆에 무려 관리국 소속의 ‘게이트 출입 통제국’이 존재하거든. 여기에 상시 근무하는 국직 헌터만 해도 50레벨대 인력이 수십 명에 달하는 데다……. 큰길만 하나 건너면 ‘마력 치안 유지대’까지 있다고? 그러고 보면 우리 아빠가 위치선정은 참 잘하셨단 말이지. “…….” 한참 그렇게 잡다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천장을 응시하다가……. 스윽 옆으로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역시 거래소 앱이나 관음하며 뒹구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딸깍- 거래소를 켰다. 마력 안정제 시세를 먼저 확인했다. [전일 대비 +7.2%] ‘크으.’ 돈이 복사가 된다고? 하루하루 예쁘게 우상향하는 저 그래프. 저것만큼 아름다운 게 존재할까? “후후.” 기분 좋게 탭을 옮겼다. 자산 시장. [실드코프(ShieldCorp) 보통주 : −2.1%] “……엥?”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손가락으로 차트를 쭉 내렸다. 이틀 전부터의 흐름을 봤다. 빨간 불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방산주도 확인했다. 보합 내지 소폭 상승. 소모품 시장의 역동성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왜지?’ 논리적으로는 올라야 맞는데. 게이트 폭주 징조가 뚜렷한 상황에서, 방어 장비 제조사 주가가 왜 빠져? 머릿속에서 가능한 이유를 뒤졌다. 기관 매도인가? 아니면 테마주 피로감? 혹은 그냥…… 내가 샀기 때문인가. 마지막 가설이 가장 유력해 보여서 갑자기 좀 우울해진다. ‘아니야, 침착하자.’ 이건 분명 의미 있는 조정이다. 주식이라는 게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자산이 아니잖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도약하기 위해 웅크리는 거야. 그래, 눌림목이다. 눌림목. “……이따위 개미 털기에 당할 내가 아니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일찍 잘 생각이었다. 비동기 훈련이라는 큰 일정이 일단락됐기 때문인지, 내일부터 이틀 간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오랜만에 본업으로 좀 돌아가 볼 생각이거든. 뭘 할 거냐고? 앞으로 이틀간은 닥사(?)를 좀 해볼 예정이다. 게이트 폭주가 터지기 전에 레벨을 좀 든든하게 올려놔야…… 콩고물도 더 많이 주워 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오랜만에 레오랑 약속도 잡아놨다. 그동안 우리 버스 기사님 얼마나 성능이 업그레이드됐을지, 확인할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업되는 걸? * * * 성수동 한가운데 위치한 프랜차이즈 식당. 시율은 오랜만에 급 번개로 만난 친구 현우와 함께, 점심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니었다. 최근 바쁜지 연락이 뜸했던 현우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마침 시간이 맞아서 식사 한 끼 정도를 같이 하게 된 거였으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뭔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좋은 의미에서의 변화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헌터 일에도 뭔가 적응을 잘해 가는 중인 것 같았고. 뭔가 한 번씩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는 때가 있던 친구였는데, 오늘은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본인도 헌터라는 건지, 헌스쿨 떡밥이 슬쩍 대화 주제로 올라오자 눈이 초롱초롱해지기까지 했다. “야, 시율쓰. 그럼 너도 헌스쿨 최근 방영분까지 다 본 거지?” 막 볶음밥 한 숟갈을 입에 넣으려던 이시율은, 맞은편 방석에 앉아 호들갑을 떠는 절친 정현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헌스쿨 참가자. 그중에서도 이건율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 일단 밥부터 좀 먹으라니까? 다 먹고 얘기하자구. 다 먹고!” 시율이 심드렁하게 쏘아붙였음에도, 현우의 눈은 이미 그 어떤 광신도보다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요즘 그거 괜히 재밌게 보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헌스쿨이 재밌는 거야, 너무 당연한 거고.”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 “그럼?” “거기 내가 좋아하는 형님 한 분이 출연하고 계시거든.” “좋아하는… 형님?” ‘좋아하는 형님’이라는 말에 시율의 호기심이 살짝 동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내가 예전에 각성하고 게이트 안에서 우연히 만나서 모시게 된 형님이 한 분 계시거든? 근데 그 형님이 이번에 헌스쿨에 출연해서 완전 다 씹어먹고 계시더라고!” 그녀가 알고 있던 정현우와 동일인이 맞는 건지. 답지 않게 속사포처럼 찬양을 쏟아내는 현우. “파티원들 한계까지 쥐어짜면서 조율하시는데, 카타르시스가 장난이 아니야! 진짜 보면서 감탄했다니까?” 하지만 설명을 듣다 보니 시율의 관심은 식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뭐래. 우리 진우 님이 최고신데.’ 아무리 들어도 정현우의 그 ‘아는 형님’은, 시율의 최애인 박진우 참가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참가자가 워낙 많아서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대단하긴 하시네.” 이시율은 우물거리던 볶음밥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박진우 말고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시율의 입장에서, ‘그 형님’이 대체 누군지 짐작이 가진 않았지만. ‘그거야 알 바 아니고.’ 일단 눈앞의 볶음밥부터 입속에 들어가야, 위장의 고통이 안정될 것 같다는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어어 아마 내일 3화에서도 엄청 활약하실 것 같은데.” “아, 그우래?” 냠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냠- “확실히 대단하시네.” 한 마디 할 때마다 볶음밥을 오물거리는, 영혼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시율의 리액션을 보면서도…….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현우. “그렇다니까?” 그런 그를 보며 시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쯤 되자……. 시율도 자신의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근데 나도 막 아는 사람 하나가 거기 나갔거든?” 사실 오빠라는 말을 할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집에서 굴러다니던 뚝섬 사우나 가방의 행방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어? 진짜? 네 지인 중에 헌터가 있었어?” “어어. 거기 참가자 중에 아는 인간 하나 있는데….” 생각하니 갑자기 열받는다. 실력도 좋으면서, 좀 정상적인 모먼트만 보여주면 안 되나? 그랬으면 오늘 여기서도 엄청 자랑했을 텐데. “아무튼 그 인간은… 실력 자체는 괜찮긴 한데, 자꾸 쪽팔리는 짓거리만 골라서 하더라니까?” 시율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편의점에서 같이 시청하다가, 옆에 있던 임민정 보기가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런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던 시율은, 현우의 이어진 대답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헐, 진짜? 헌스쿨에 그런 민폐 빌런도 있었던가? 어후…….” 순간, 시율의 숟가락을 쥔 손에 보이지 않는 힘이 들어갔다. 물론 본인도 방금까지 뚝섬 사우나를 떠올리며 속으로 오빠를 욕하고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오빠를 깔 수 있는 건 혈육인 자신뿐인 것. 쌩판 남인 현우가 대놓고 오빠를 ‘민폐 빌런’이라 깎아내리자, 묘하게 빈정이 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혈육 망신 다 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포지션 결정전에서 1위씩이나 한 게 오빠인데! 시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래?” “그리고 아마 실력만 놓고 보면, 네가 아는 그 형님보다 내 지인이 더 나을걸?” 괜히 생긴 반발심에 지지 않고 받아치자, 이번엔 현우가 펄쩍 뛰며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이건… 그녀가 현우와 친구가 된 이후, 처음 보는 수준의 리액션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진짜.” 현우의 눈빛이 마치 신성 모독이라도 당한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이건 내 생각이긴 한데, 솔직히 헌스쿨 참가자 중에 우리 형님 넘을 사람 아무도 없음.” 현우의 그 말에, 시율은 결국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건 뭐 덕질을 하는 차원의 것도 아니고. 아는 형님을 이 정도까지 옹호해야 할 일인가? ‘혹시 이 자식… 못 본 사이에 성적 취향에 급진적인 변화가 생긴 건 아니겠지?’ 볶음밥을 먹던 시율의 표정이, 조금 더 심각해졌다. 156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최근. 그러니까…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진행됐던 비동기 훈련. 이 훈련 동안 내가 얻은 건,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베타 서버에서 경험했던 게 ‘비동기’라는 걸 인지한 순간, ‘게이트 안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해도가 더욱 높아져 버렸고. 그 명확한 차이가 인지되고 나니, 반대로 비동기 상태에서의 퍼포먼스도 꽤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게이트 안에서의 내 퍼포먼스가 본래 100이었다면. 이 일주일 사이 거의 110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고……. 처음 비동기 훈련을 시작했을 때 내 퍼포먼스가 60정도였다면. 지금은 그 또한 거의 80 정도까지 강제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일주일 만에 그 정도 해냈으면, 비동기를 거의 100점까지도 금방 끌어올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단숨에 이렇게 크게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로 실력이 늘었다기 보단, ‘시스템 동기화’가 뭘 도와주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유의미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 온몸이 상당히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왜냐면……. 이렇게 끌어올린 내 퍼포먼스를, 한시라도 빨리 실전에서 써먹어 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뭐, 훈련에서야 확실히 체감했지만. 아무리 실전 같은 훈련이라 해도 결국 훈련은 훈련인 것. 그러니 오랜만에 시작의 섬 듀오(?)인 레오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게 된 지금. 두근거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끝없이 이어지는 몬스터의 비명,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이템이 부딪히는 경쾌한 금속음! 그리고 쉴 새 없이 터져 오르는 경험치 로그의 향연. 그 말초적인 쾌감을 맛본 지가 대체 언제였던가. └ 이 ㅅㄲ 혹시 뭐 잘못 먹음? └ 던전 가는데 이렇게 행복해하는 놈 ㄹㅇ 오랜만에 보네 ㅋㅋㅋ └ 방장, LP 벌 생각에 벌써 공중제비 도는 중임? 어허, 이 성좌님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초를 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하아…….”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차갑고 스산한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나는 굳게 닫힌 거대한 석문 앞을 올려다보았다. 루미스 영지 북쪽, 험준한 산세로 악명 높은 그레니스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고위험 던전. 피비린내와 마력의 진동이 문틈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나저나 오늘 진짜 이상한데 ㅇㅇ └ 여기 ‘잔향의 회랑’ 아님? 쌀숭이 쉐키가 여길 왜 온거지. └ 생각해 보니 그러네. 50레벨대 던전 중에, 여기만큼 가성비 구린 던전도 잘 없지 않나? 성좌들의 말이 맞다. 오늘 우리가 공략할 던전은…… ‘잔향의 회랑’이라는 다소 독특한 이름의 던전. 여기 권장 레벨이 몇이었더라? 50레벨 초반대 정도 됐던 것 같은데. 뭐 어쨌든. -다, 생각이 있습니다, 형님들. 잔향의 회랑은 각성자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사냥터였다. 각성자 위키에서도 꽤 검색량이 높은 항목이었으니까. [각성자 위키 — 잔향의 회랑] - 위치 : 루미스 영지 북쪽, 그레니스 산맥 심부 - 권장 레벨 : 52~58 - 레벨 대비 난이도 : ★★☆☆☆ (쉬움) - 드랍 : ★☆☆☆☆ (최악. 물약값 건지기도 빠듯함) - 경험치 : ★★★★☆ (몹 밀집도 높고, ‘잔향’ 연쇄 시 웨이브 리젠 빨라짐.) - 총평 : 돈 벌 생각이면 절대 오지 마세요. 순수 경험치 파밍용으로만 추천. └ 여기 3~4연쇄 터뜨리면 몹 리젠 체감 확 빨라짐 ㅋㅋ 근데 그게 전부임 └ 템이 안 떠서 물약값도 안 나옴. 두 번은 절대 안 간다. └ 그냥 무난한 렙업 사냥터. 50레벨 대 다른 던전이랑 큰 차이 없음. └ 경험치 좀 나오긴 하는데 돈이 안 되니까 결국 발길 끊김. └ 던전 숙련도 좀 있으면, 마의 50레벨 후반 구간에서 강제로 경험치 먹긴 좋은 곳임ㅇㅇ 사실 이 위키 내용만 놓고 보면, 이 던전만큼 무난한 던전이 없다. 드랍 테이블이 쓰레기인 만큼 경험치 획득량이 난이도 대비 꽤 준수한. 얼핏 보면 그레니스 산맥에 널려 있는, 경험치 파밍에 특화된 평범한 던전. 하지만 내가 이 황금 같은 2일의 시간을, 그런 평범한 던전에 쓸 리 만무하다는 말씀. 그러니까 위키의 저 무난한 평가들은, 이 던전을 대충 핥아보기만 한 평범한 플레이어들의 시선일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뭐, 방법을 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좌 형님들이 또 슬슬 시비를 걸기 시작하신다. └ 방장 혼자서 뭔 숨겨진 꿀통이라도 발견한 척 폼 잡는 거 보소 ㅋㅋㅋ └ 애초에 기믹 다 밝혀진 곳에 히든같은 게 어딨냐? 또 헛소리 시작이네. └ 어어;; 형들, 그거 플래그야;; 위험하다고? └ 또 어떤 뉴비 유입시키가 대이브 엉덩이에 플래그 꼽음? 아니. 엉덩이에 플래그는 또 뭔. -뭐, 항상 그랬듯 보시면 압니다. 이번엔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아니라, 어쩌면 형님들도 대부분 아실 수도 있는데……. 저벅- 저벅- 그렇게 성좌들과 잠시 잡담을 떨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레오였다. 그나저나 튀어나오는 방향을 보니, 나보다 먼저 와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내가 거의 20분 일찍 도착했는데… 이놈은 대체 왜 나보다 빨리 온 거야? “오, 레오 진짜 오랜만이다. 별 일 없었지?” “별일은요! 요즘 헌스쿨 잘 보고 있습니다, 형님!” 게다가 녀석의 얼굴에는 피곤함의 기색조차 없었다. 지금 시간이 새벽 6시 10분인 걸 감안하면……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눈앞의 석문을 부수고 들어갈 기세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요상한 녀석. ‘그나저나…… 뭔가 못 본 새에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졌는데?’ 이 자식은 왜 그 사이에, 한층 더 부담스러워진 걸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형님께서 새벽부터 나오신다는데, 제가 어떻게 늦을 수 있겠습니까!” └ 레오좌;; 군기 뭔데?ㄷㄷ └ 대이브 우리 몰래 어디 으슥한 곳 데려가서 따로 사상교육 같은 거 주입시킨 거 아님? 으슥한 곳이라뇨 형님들. 후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성좌들과 잡담하다 보면, 기가 아주 쭉쭉 빨리는 기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빨리 던전이나 들어가, 이 아까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 [플레이어 ‘레오(Leo)’ 님을 파티에 초대합니다.] “파티나 받아라 일단.” “넵!” 녀석이 힘차게 대답한 바로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파티원 상태 창이 떠올랐다. 레오는 나와 이미 친구 등록이 되어있는 플레이어였고, 친구로 등록한 플레이어에게는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면 레벨 정보가 공개되기 때문에……. [파티원 정보] - 레오 (Lv. 46 / 질풍 검사) 이렇게 파티원 정보가 동기화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46?’ 혹시… 내 눈이 잘못됐나? 이 자식 마지막에 38레벨 아니었나……? 아직 한 달도 채 안 지났는데, 8레벨을 올렸다고? 40레벨 대 구간에서? “…….” 이 정도는 솔직히 재능의 영역도 넘어섰다. 재능이야 당연히 뒷받침돼야 하는 거고……. 과연 게이트 밖에 나가긴 했는지 의심스러운. 그런 수준의 레벨업 속도였던 것이다. “레오야.” “예, 형님?” “너… 밥은 먹고 다니냐?” 순간, 뼛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버스 기사가 알아서 스펙업을 이 정도까지 해올 줄은…….’ 그와 동시에 긴장감도 조금은 생긴다. 버스 기사의 성능이 좋아지면, 승객에게 요구하는 운임도 비싸지는 건 당연한 이치. 적어도 티켓값 정도는 제때 지불해야, 이 안락한 버스 좌석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번에 업 좀 빡시게 해야겠는걸.’ 2일 안에 일단 41레벨은 찍어야겠다. └ 형님들; 방장쉑 또 미친 소리 시작했는데요? └ 캬… 그래 이 맛이지. └ ??? 뭐가 이 맛임? └ 오랜만에 대이브 방송 맛이 돌아왔다는 말임ㅋㅋ 레오 8레벨 올린 걸 보고 감격하더니, 2일 만에 4레벨이 말이 되는 거냐고? 말이 된다. 나는 레오처럼 정석적으로 사냥할 생각이 아니니까. “그럼 슬슬, 들어가 볼까 우리?” “옙!! 준비 됐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 * 같은 새벽. 서울이 수면 아래에 잠겨 있을 무렵, 이클립스 길드 본부 최상층의 불빛은 여전히 꺼질 기미가 없었다. 서지혁은 집무실 소파에 길게 기대어 앉아, 태블릿의 화면을 느릿느릿 넘기고 있었다. 시안 파견 본대 2차 편성안. 선발대는 이미 현지에 도착한 상태였고, 본대 출발까지 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본대와는 별도로…… 확정된 조금 특별한 다섯 자리의 슬롯. 서지혁은 지금 이 부분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내일 있을 회의 때, 이 자리에 어떤 인원이 배정될지 결정될 테니까. ‘진짜로 이래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루키들의 면면을 떠올린 서지혁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다른 멘토들과의 합의, 장세연 PD의 승인까지 모두 끝난 건이긴 했지만……. [이번 비동기 훈련 결과가 생각보다 훌륭합니다.] [참가자 평균으로 치자면 말도 안 되는 시도겠지만, 최상위권 다섯 정도를 선별한다면…….] [그들은 충분히 1인분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찬성입니다.] 그렇다 해도 데드존에 이런 꼬꼬마들을 데려간다는 게, 걱정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안전만 확실히 신경 써주세요, 멘토님들.] “자…….” 서지혁은 참가자 명단을 펼쳤다. 다섯 자리. 이 지옥행 티켓을 누구에게 쥐어줄 것인가. 첫 번째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성환.’ 탱커 포지션 최상위. 비동기 적응 속도도 상당히 준수한 데다, 진형을 잡는 감각이 탄탄하다. 데드존에서 방패 역할을 맡길 수 있는 루키가 있다면, 이 친구밖에 없다. 두 번째. ‘권유나.’ 화염 마법사. 비동기 상태에서의 마력 운용이 아직 거칠지만, 원소 친화력 자체가 타고난 수준이다. 데드존의 극한 환경이 오히려 각성의 촉매가 될 수도 있겠지. 세 번째. ‘박하준.’ 전사. 정확히는 광전사에 가까운 스타일. 직선적이지만 강하다. 이런 타입이 비동기 환경에서 의외로 잘 버틴다. 게이트 안에서도 전투 감각이 시스템 보정보다 먼저 반응하는 체질이니까. 네 번째. ‘강소희.’ 현 시점 마법사 포지션 참가자들 중…… 서지혁 본인이 가장 포텐셜을 높게 보고 있는 인물. 가진 바 마나량이 폭발적인 탓에 제어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어려워하는 중이지만……. 성장 속도가 말이 안 된다. 특히 이번 비동기 훈련을 통해 마력 제어 기술이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어서, 고질적인 문제였던 마력역류 리스크에 대한 보완도 점점 되어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래. 여기까지도 이견이 없을 거고, 마지막은…….” 그리고 다섯 번째. 서지혁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이건율 - 비동기 종합 평가: 규격 외.] 세부 데이터로 시선이 향했다. 마력 감응 사격, 비동기 상태 마력 제어, 환경 적응 속도. 모든 항목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루키. 37레벨이라는 타 참가자 대비 상당히 낮은 레벨만 제외한다면……. 아니, 그것까지 포함하더라도 루키라는 수식어가 미안할 정도의 미친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는 참가자. ‘이 정도 마력 제어 능력이라면, 비동기 환경에서만큼은 60~70레벨대 플레이어보다 잘 싸울 수도 있단 말이지.’ 데드존은 시스템의 보호가 사라진 전장. 그곳에서는 레벨이 아니라, 비동기 적응력이 생존을 좌우한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이건율은 37레벨이라는 숫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력이 될 수 있다. “뭐, 결정됐군.” 서지혁은 이건율의 이름 옆에 가볍게 체크 표시를 남겼다. 다섯 자리가 채워졌다. 그런데 태블릿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 이건율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다시금 시선에 걸린 서지혁은,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아깝군.’ 서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사실 다른 멘토들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이건율이라는 인재가 여러 방면에서 진심으로 아까웠다. 특히 가장 아까운 건, 이건율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점. ‘어지간한 랭커들보다 세밀하게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클래스를 궁수 쪽으로 잡다니.’ 만약 이건율이 마법사가 됐다면. 아마 전무후무한 수준의 포텐셜을 가진 아크메이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과장이라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서지혁은 진심이었다. 30레벨대의 루키가 랭커급 이상의 마력제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법사클래스 기준으로는, 다른 그 어떤 재능이 부족한들 거의 모든 부분을 메우고도 남을 미친 재능이다. 그러니……. 아마 이 친구가 마법사였더라면. 이클립스에서 무슨 출혈을 감수해서라도 데려가려 했을 터였다.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친구일 텐데.’ 서지혁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의 손가락 끝이,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느릿하게 쓸어 넘겼다. 157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던전에 입장한 지 대략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와 레오는 어느새, 잔향의 회랑 첫 번째 페이즈의 끝자락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 30분 사이. “레오! 3시 방향부터 크게 반원 그리면서 돌아! 어그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끌어와야 해!” 우리는 슬슬, 최적화된 사냥 패턴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옙, 형님! 맡겨주시죠!” 내 오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오는 검을 휘두르며 특유의 미친 속도로 회랑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질풍검사 클래스의 특장점을 전투에 제대로 녹여내기 시작하는 느낌. 평범한 검사 클래스였다면 불가능할 미친 기동력 덕분에, 녀석은 순식간에 대량의 어그로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형님!”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레오의 뒤를 쫓아 한곳으로 뭉쳐진 바로 그 순간. 나는 미리 계산해 둔 완벽한 ‘교차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부턴 레오라는 버스기사를 최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두 번째 스탭. “나와라, 폐급 토끼.” └ ㅋㅋㅋㅋㅋ폐급 토끼 뭔뎈ㅋㅋ └ 앜ㅋㅋ 이름은 좀 불러줘라 방장;; [소환수 ‘바니(헛된 미련의 누더기 인형)’을 소환합니다.] 우우웅-! 푸른 마력진이 허공에 그려지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헝겊 토끼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등장하자마자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바닥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 아아… 바니, 또 일해야 한다……. 이 자식이? 최근에 내가 언제 불렀다고? - 바니, 불행하다……. - 나를 내버려 둬. “그러니까, 얌전히 좀 누워있으라고.” 투욱- 녀석이 자리에 널브러지고 정확히 3초가 지난 시점.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패시브 스킬, ‘침대 밖은 위험해’가 발동됩니다.] [소환수 ‘바니’가 ‘절대 나태’ 상태에 돌입합니다.] 순식간에 바니를 중심으로 탁한 잿빛의 디버프 영역이 펼쳐졌다. 그리고 레오가 바니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직후. 키에에엑-! 쿵- 쿵- 쿠웅- 목표를 잃은 수십 마리의 몬스터 무리들이, 눈앞에 있는 시커먼 토끼 인형에게로 미친 듯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 그래… 바니에게 차라리 영원한 안식을……. 가고일의 발톱과 골렘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바니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몸집이 그렇게 크지 않은 바니는 공격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덕분에 50레벨대 몬스터들이 떼로 달려듦에도 불구하고, 바니의 생명력은 그렇게 빠르게 줄어들지 않았다. 퍼억- 치이익-! 물론 단점도 있다. 바니를 공격할 수 없는 몬스터들은 어그로가 금방 풀려버릴 테니, 모든 몬스터가 한 곳에 빼곡히 밀집한 이 완벽한 타이밍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타겟을 잃은 몬스터들의 어그로가 풀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타탓-! 우리 버스 기사님이 이 타이밍을 놓칠 리 없다. “레오!” 내가 따로 오더를 내리기도 전에, 이미 레오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고오오-! 녀석의 손에 쥐어진 검에, 베일 듯한 짙은 청백색의 마력이 폭풍처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질풍 검사의 모든 스킬 중 유일하게 채널링 시간이 존재하는. 하지만 이렇게 딜레이가 존재하는 만큼, 그 어떤 스킬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파티원 ‘레오’의 고유능력, 질풍 비검(疾風 祕劍)이 발동합니다.] 1차 전직 클래스 안에서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강력한 광역기 중 하나가 발동된 것이다. 콰아아-! 레오의 신형이 튀어 나감과 동시에, 회랑의 공기가 통째로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 모습을 난,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연계기도 발동 가능한가?’ 질풍비검의 범위 안에 다섯 이상의 타겟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 질풍검사의 기본 스킬인 질풍참을 연계할 수 있는 타이밍이 나온다. 그리고 이 질풍참이 질풍비검과 완벽히 시너지를 발동시킨다면……. [추가 효과, 폭풍의 윤무(輪舞)가 발동합니다.] 이렇게 한 단계 더 강화된… 미친 위력의 광역기로 진화하게 된다. 콰아아아아아아-!!! 수십 갈래의 예리한 검기가 거대한 태풍의 눈을 형성하며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를 맹렬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투콰쾅-!! 방금 전까지 바니를 짓밟고 있던 가고일과 골렘들이, 말 그대로 믹서기에 갈려 나간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중략…… 덕분에 끝없이 이어지는 경험치 로그의 향연. ‘캬……!’ 나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감탄했고, 함께 이 아름다운 스킬 연계를 직관한 성좌들의 맛있는 반응도 이어졌다. └ 와;; ㅅㅂ 이게 1차 전직 검사라고?;; └ 질풍검사가 원래 이 정도였나? └ 스킬 자체 위력도 말이 안 되는데, 연계기는 더 말이 안 되네……. └ 연계 난이도도 미친 수준인 듯? └ 레오 못 본 사이에 왤케 쎄졌냐;;; 제가 키운 버스기사입니다만? 후후. 오늘 내일 풀로 탑승하면, 진짜 41레벨 이상을 넘볼 수도 있겠는걸? └ 형들, 질풍검사는 어케 전직하는 거임? 이거 2차로 연계 전직하면 뭐 되는 클래스임? └ 애초에 질풍검사 전직 조건도 거의 모를텐데. 레오 덕에 좀 알려지겠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최소한의 밥값을 해볼 차례였다. 기리리릭-! 시위를 신중하게 당기자, 묵직한 철궁이 부드럽게 휘면서 붉은 열기로 달아오른다. 이어서. 피융-! ‘태양의 궤적’에서 방출된 시뻘겋게 달아오른 화살이, 거의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맹렬하게 쇄도한다. └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굼뜬 느낌임? └ 원래 대이브 속사 잘 하지 않았었나? 그야… 속사로는 50레벨대 가고일 상대로 딜을 제대로 박기 어려우니까? 카앙! 강력한 마력이 깃든 화살촉이 회랑 끝에서 달려오던 ‘가고일 타락자’의 미간에 틀어박혔고…….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가고일의 전신이 그대로 쩍 하고 갈라져 버린다. [심시일체(心矢一體)의 효과로, 강력한 화기(火氣)가 충전됩니다.] [‘타락한 가고일’ 몬스터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였습니다!] [‘타락한 가고일’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타락한 가고일’의 ‘마력 핵’을 성공적으로 파괴하였습니다.] [‘타락한 가고일’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단 한 발의 화살. 내 모든 집중력과 마력을 응집한 이 강력한 화염시가, 무려 50레벨대인 데다 방어력에 특화된 몬스터의 외피를 그대로 꿰뚫어버린 것이다. └ 이게 무슨 스킬인데……? └ 정보) 방장은 궁술 관련 스킬을 아무것도 배운 적 없다. └ 그럼 ㅅㅂ 버그임 뭐임? 어쨌든 이렇게 깔끔한 전투 사이클을 몇 번 더 돌리자. 드디어 던전의 첫 번째 페이즈가 마무리 단계에 도달했다. “와, 그런데 형님. 저격 한 번에 가고일 머리 터지는 거 실홥니까?” 그… 광역기로 비슷한 걸 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레오야. “형님은 레벨이 37이잖습니까. 저랑 9레벨이 차이 나시는데요?” “방금 1업 해서 38 됐으니까, 8레벨 차이라고 해줄래?” 그리고… 네가 시간을 훌륭히 벌어준 탓에, 완전한 집중상태로 심시일체를 발동시킬 수 있었던 거란다. 피이잉-!! 파사사삭! 레오랑은 제법 오랜만에 파티 플레이를 해보는데, 역시 이 녀석이랑 손발이 가장 잘 맞는다. 냉정하게 헌스쿨 참가자들 중에 이성환 정도를 제외하면, 레오의 재능을 따라올 만한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일 정도였다. 사실 이성환이 날먹 탱커(?)인 걸 감안하면, 레오의 재능이 더 상위 레벨인 느낌마저도 좀 들고……. └ 시작됐다 ㄷㄷ 탱커멸시;; └ ㅋㅋㅋ 방장 또 묵묵한 우리 신좌님 소환하고 싶은 모양인데? -에이, 신좌님이 그렇게 한가하실 리가요. 제 방송을 또 보고 있지는 않으실……. [성좌, ‘묵묵한 벽의 신좌’가, “2차 전직 때 탱커로 전직하면 봐줌.”이라고 딜을 합니다.] -그… 차라리 화를 내시죠? └ ㅁㅊㅋㅋㅋㅋㅋㅋ └ 방장ㅅㅂㅋㅋ 탱커 왜 이렇게 싫어하는데ㅋㅋㅋㅋ 그리고 성좌들과 잠깐 잡담을 하는 사이. 띠링-! [모든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던전 곳곳에, ‘마력의 잔향’이 피어오릅니다.] 드디어 이 던전의 메인 디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방송국 내에 마련된 조용한 VVIP 응접실. 테이블 위로 은은한 자스민 향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검희는 오랜만에 장세연 피디와 대면하는 중이었다. 멘토들의 일정은 늘 바빴지만… 시안 파견이라는 중대한 일정을 앞두고, 프로그램의 수장인 그녀와 의견을 조율하는 자리는 필수적이었으니 말이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두 사람의 사이에는 다소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제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슬슬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디님. 데드존 촬영팀 파견은…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렇다니까요. 관리국에서 지원받기로 한 것도 있고…… 게다가 멘토님들이 신경 써주시지 않겠어요?” 장세연의 단호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리국의 허락을 받다 못해 지원까지 받아낸 장세연 피디의 역량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게 가능했던 이유도 짐작이 갔으니 말이다. ‘아마 관리국 입장에서도, 곧 해제될 엠바고를 대비해서 민심을 안정시킬 카드가 필요했겠지’ 추측이긴 하지만 거의 확신하는 부분이다. 헌스쿨 방송을 통해 대형 길드의 헌터들이 데드존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게이트 폭주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어느 정도는 진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러한 시도를 하다가도 여론과 민심이 너무 나빠지면 모든 헌터 예능의 방영중지 결정이 내려지긴 하겠지만. 관리국 입장에서는 뭐라도 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터다. “결정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시안 파견은 방송에 어떤 식으로 풀어내실 생각이신가요? 기존 훈련과는 결이 많이 다를 텐데요.” 검희의 질문에 장세연은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진짜 전장의 참혹함,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루키들의 처절한 생존기.” “…….” “예능적인 가공은 최소화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리얼리티를 극대화할 생각이에요. 시스템의 보정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구르고 또 어떻게 벽을 넘어 성장하는지가 핵심이죠.” 진지하다 못해 열정까지 느껴지는 장세연 피디를 보며, 검희는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어떤 의미에선 지독한 사람이라니까.’ 그러면서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장세연이 저토록 확신에 차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 참혹함이 시청자들에게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이런 방향성으로 잘 흘러간다면……. 게이트 폭주로 인한 헌스쿨 방영중지를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인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피디님께서 그리시는 그림이 있다면, 저희 멘토들도 최대한 그 방향에 맞춰 서포트하죠.” “감사합니다, 검희 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검희를 향해, 장세연이 슬쩍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시안 파견 일정이 끝나면 원래 기획대로 메기 참가자들을 투입할 생각입니다. 조만간 지원 접수를 시작할 테니, 멘토님들도 거기에 맞춰서 커리큘럼을 슬슬 준비해 주시면 좋겠네요.” 정말 방송에 대한 열정만큼은, 확실히 알아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158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최근 2주. ‘데이브 형님’ 없이 라이카를 플레이해온 이 시간 동안, 레오는 많은 것들을 느껴왔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플레이어들과 던전을 공략하게 되면서, ‘역체감’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그런 감정들을 느꼈던 것이다. ‘진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었지.’ 물론 형님이 없다고 사냥 자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공개 파티나 일반 플레이어들이라고 해서, 파티원으로써 역할 자체를 못 해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때마다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이렇게 느긋한 거지?’ 레오가 볼 때 일반 파티원들은, 자세부터가 글러 먹었다. 실력이 안 된다기보다, 최선의 플레이를 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그로를 끌면서도 동선이 중구난방이고, 킬 타이밍도 들쭉날쭉한가 하면……. 힐러가 힐을 너무 일찍 써서 쿨이 안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고, 딜러는 딜러대로 제각각 제멋대로 풀딜을 넣다가 어그로가 분산되기 일쑤였다. 이런 건 레오의 관점에서 볼 때, 실력 부족이 아니다. 어쩌면… ‘성의’의 문제랄까? ‘파티원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반면에 형님의 오더는 언제나 칼이었다. 동선의 각도, 어그로를 끄는 타이밍, 킬 순서의 우선순위. 레오는 그저 형님이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됐고, 그러면 결과는 항상 최고치에 수렴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머리는 형님이 쓰시고, 나는 팔다리가 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게 가장 편하고 행복했다. 그래서일까? 어차피 형님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솔로 플레이가 낫다는 생각에 결국 이르렀고. 그 결과……. ‘플레이어 레오’는 과거와 많은 부분들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첫 번째. 사냥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형님에게 배운 노하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화시키면서, 혼자 사냥할 때도 ‘형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를 기준으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나 가장 뼛속 깊이 새긴 것은, 형님의 금과옥조나 다름없는 지침. ‘던전에선 결코 쌀 한 톨도 흘려서는 안 된다.’ 사소한 잡템이라도 눈에 보이면 반드시 주워 담았고, 물약 한 병도 허투루 소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명확했다. 38레벨에서 46레벨까지 오르는 동안 단 하루도 적자가 난 날이 없었으며, 형님 말씀을 잘 따르다 보니 스트리밍 시청자 수도 어느새 평균 300명 정도까지 늘었다. 형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 리 없었다. ‘보통 스트리밍에 성좌들이 나타나려면 최소 2차 전직은 해야 한다던데.’ 심지어 그들로부터 무려 몇백 LP가 넘는 후원금까지 받아본 지금. ‘데이브 형님’에 대한 레오의 신뢰는, 더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이제 레오에게 있어 형님의 가르침은 곧 신앙과도 같았다. └ 또 대이브 찬양 시작이네 레오 ㅅㄲ;; └ 일단 이 친구는 ‘데이브’라는 단어 없으면 무슨 말을 못하는 듯? └ 안된다 레오야…… 데이브 닮아가면 안 된다 ㅠㅠ └ 극한의 쌀숭이ㅅㄲ는 데이브 하나로 충분하다고 ㅠㅠ 제발 얼굴값을 해ㅠㅠㅠ 레오의 방송에 들어와 있는 성좌들이, 또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레오가 아이템을 줍고 루팅에 집착하는 ‘쌀먹 모먼트’를 보일 때마다, 성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올라오는 우려스러움이었다. 하지만 레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쌀숭이라니. 그게 대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레오에게 있어 ‘데이브 같은 놈’이라는 말보다 완벽한 찬사는 없거늘. 그러니 레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성좌들도 말만 저렇게 하는 거지, 분명히 즐거워 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두 번째. 레오는 최근, 생전 접속조차 해본 적 없던 헌터 커뮤니티의 죽돌이가 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헌스쿨이 본격적으로 방영되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게이트 밖에 있을 때 그는 항상, 헌스쿨과 관련된 모든 커뮤니티를 점검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형님을 음해하는 불순한 무리들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커뮤니티에는 뭘 모르는 헌터들이 너무 많단 말이지.’ 처음에는 참으려 했었다. 키보드 배틀은 시간 낭비고, 형님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니까. [그 시간에 잡템이라도 한 개 더 줍는 게 낫다, 레오야.] 하지만 실전에서 형님의 위대함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서, 저런 무지한 글을 눈뜨고 보고만 있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쉴드를 치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건율_부하1호’라는 닉네임의, 극성 이건율 찬티 네임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목: 솔직히 헌스쿨 데이브가 원탑 아님?] [내용: 오더 지리고 딜도 지림. 이성환이 탱을 잘하긴 하는데 그 판 깐 게 다 데이브임 ㅇㅇ 반박 시 겜알못] - 작성자: 이건율_부하1호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단 한번도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해 본 적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형님의 연락을 받았던 그저께 새벽까지도. 커뮤니티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는 사실은,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그때 깨어있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이 파티 사냥이 성사되지도 않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레오는 지금……. “동선 고정! 이 루트에서 절대 이탈하지 마!” “킬 간격 맞춰! 끊기면 안 돼!” 형님과 함께 던전을 누비는 이 상황이,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데이브 형님은……. 이렇게 미친 듯이 찍혀 올라오는 경험치 로그로 본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계셨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12 스택)]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13 스택)]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중략…… └ ㅅㅂ… 이 파티 대체 뭐지? └ 잔향 13스택이라고? 이런 게 가능한 거였음? └ 씹…… 이건 방법을 안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 * * 나는 지금, 몸을 쉴 새 없이 놀리면서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오더를 쏟아내고 있었다. 핑- 피핑-! “레오! 바위벽 바깥쪽으로 벗어나면 안 돼! 어그로 튀어!” “예! 형님!!” 심지어 집중력 또한, 평소보다도 훨씬 더 몰입하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진행중인 2페이즈가 사실상 이 잔향 던전에서 뽑아먹을 수 있는 결과물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곳이었으니까. ‘여기서 최대한 스택을 쌓아야, 최종 보상이 증폭되니까.’ 이 던전의 2페이즈부터는, 몬스터가 처치될 때마다 그 자리에 아주 잠깐 동안 ‘마력의 잔향’이라는 버프가 남는다. 그리고 그 잔향의 범위 안에서 15초 안에 다음 몬스터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면? ‘마력의 잔향’ 스택이 중첩되며, 획득하는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21 스택)] 보통은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 탱커가 몬스터 웨이브 하나를 통째로 몰아오면 광역기로 한 번에 녹여서, 대충 3~5스택 정도를 한 번에 터트리는 식으로 경험치 보너스를 챙기는 게 정석이다. 애초에 15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던전 곳곳에 흩어진 다음 웨이브까지 이동하여 킬을 낸다는 건, 일반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불가능한 거니까. 하지만 난 당연히 일반적이지 않다. 이 짓거리만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해봤겠는가. 이 잔향의 회랑은, 내가 거의 모든 회차에서 45~55레벨 구간에 항상 써먹던……. 최적화된 경험치 파밍 루트였다. └ 이게…… 뭐임? └ 형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 아니 ㅅㅂ 바위벽 후방으로 뛰어내리면 벽 뒤에 어그로 고정되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건데;;; 물론 38레벨인 지금 이 짓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버스 기사님 덕분이다. 던전 자체의 난이도야 50레벨대 치고 쉬운 곳이었지만. 이렇게 스택이 끊기지 않는 서커스를 보여주려면 최소 40레벨 후반은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잠깐. 하다 보니 스택 상태가 좀 이상하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27 스택)] 아니… 내가 이 짓을 하면서 30스택을 넘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설마 진짜로 되는 건가?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31 스택)] └ ;;;;; 이러면 경험치 증폭률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임?;;; └ 뭔데;; 나 무서워;;; 물론 내 목적은 회랑 전체를 거대한 콤보 보드로 쓰는 거다. 이론상 2페이즈 전체를 진행하는 동안 잔향 콤보를 단 한 번도 깨뜨리지 않아야, 최고의 경험치 파밍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이었고, 실제로 나는 항상 20스택 후반 정도가 한계였었다. 그 정도의 스택을 세 번 정도 달성하는 게, 여기서 파밍할 수 있는 최대 경험치 한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형님! 이쪽 맞죠?!” “어, 어!! 맞아! 진행해!!” 아무래도 내가, 질풍검사의 기동성과 레오의 재능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것 같다. 쩌어어엉-!! “다음 웨이브 온다! 오른쪽 벽 타고 돌아!” “갑니다!” [파티 사냥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47 스택)] 이러다가 어쩌면 정말로……. 이론상 가능한 최대 스택인 85스택에 성공할지도 모를 것 같다. └ 비상!!! 대이브 또 미친 짓거리 시작했다!!! └ 버그 플레이 멈춰!!! └ 아닠ㅋㅋ 꿀팁 준다며 ㅅㅂㄹㅁ;;; 이게 어떻게 꿀팁임;; 니네만 할 수 있는 거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여기서 풀스택 실패하면, 아까워서 잠을 못 잘지도 몰라.’ 끊어질 만 하면 콤보를 아슬아슬하게 계속 붙여내는 레오 덕에, 나 또한 더욱 전의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쐐애액-!! 피피핑-! 이 버스, 멀미가 좀 심한 것 같긴 한데.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으아아앗!” 콰콰쾅-! 이제 진짜로 고지가 눈앞이니까. [조건이 충족되어 ‘헤드 샷’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71 스택)]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77 스택)]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84 스택)] 그리고 마침내. [2페이즈의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였습니다!] [마력의 잔향 스택이 1 쌓입니다. (현재 85 스택)] 우리는 결국 해 내고야 말았다. “……하아.”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활을 내렸다. 단 한 번의 공백도 없이, 2페이즈 전체를 한 번의 콤보 플로우로 깔끔하게 해치워버리다니. ‘최종 경험치 증폭률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러면?’ 나조차도 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다. “형님! 환상적이었습니다!” 해맑은 표정으로 당구장 아저씨같은 대사를 해 내는 저 녀석도, 조금은 무섭고 말이다. └ 와 미친. 85스택 ㅋㅋㅋㅋ └ 저게 가능한 수치였음?? 이거 ■■■ 레코드 갱신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있던 바로 그 때. 슈우우웅-! 갑자기 던전 전체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숨겨진 잔향의 진실’이 발동됩니다.] 잠깐. 여기에 나도 몰랐던 히든 피스가 더 숨겨져 있었다고……? 159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5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쿠쿵- 쿠우웅-!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몬스터들의 잔해가, 중앙의 거대한 제단 위로 빨려 들어가듯 융합하기 시작했다. 핏빛의 역겨운 살점과 부서진 뼛조각들이 기괴하게 엉겨 붙으며 거대한 무언가로 형태를 갖춰 나갔다. 그리고 그 형상은,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잔향 던전의 보스 몬스터. ‘탐욕의 괴수….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숨겨진 잔향의 진실이라는 히든 피스 때문인지, 점점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상으로 마지막 페이즈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 대박사건;; └ 대이브 이자식은 뭔 잔향회랑에 히든피스까지 알고 있냐;; 그렇지 않아도 기괴한 생김새를 가진 보스 몬스터가, 더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 기기기긱-! 그런데 그 모양새를 보다보니,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저거…… 뭔가 익숙한 형태인데……?’ 보스의 큰 입 주변은 커다란 코인 토출구로, 길게 뻗어 나온 팔 뼈는 두툼한 레버로 변했다. 이윽고 가슴팍에 해당하는 부위에 3개의 커다란 릴이 박히고, 온갖 기괴한 네온사인 형상의 마력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 뭔데;;; └ 갑자기 분위기 웬 ■■랜드;;; 그리고 잠시 후. [‘탐욕의 제단’이 강림했습니다.] 완성된 이 기괴한 결과물을 보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슬롯머신?” 그 흉물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자태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몬스터 사체로 만들어진 빠칭코 기계라니. [모든 파티원에게, 2페이즈 스택에 비례하여 ‘잔향 코인’이 지급됩니다.] [이건율 : 85 코인] [레오 : 85 코인] 하지만 그렇게까지 당황한 건 아니다. 이런 슬롯머신 형태의 히든피스가,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형태나 방식이 다르긴 해도, 슬롯머신 형태의 히든피스는 나도 알고 있는 게 몇 개 있었다. -이거, 재밌겠는데요? 그리고 난 슬롯머신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다. 도박이 좋은 거냐고? 아니. 오히려 반대다. 빠지면 빠질수록 큰수의 법칙에 의거해 무조건 잃을 수밖에 없는 게 도박이란 건 잘 알고 있는데……. 쌀숭이가 그런 걸 할 리가 있겠냐고. └ 그럼 지금은 왜 히죽거리는데? └ 쉬벌 또 뭔 짓거리를 하려고. 하지만 라이카의 슬롯머신은 다르다. 내가 경험한 모든 슬롯머신 히든피스는 운7 기3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당연히 슬롯머신인 만큼 운의 영역이 더 크기는 하지만, 패턴화된 규칙을 잘 찾으면 상당 부분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짤랑-! 내 손에 기분 좋은 금속음과 함께, 둔탁한 코인들이 한 아름 쥐어졌다. 레오의 손에도 나와 같은 양의 코인이 들려 있었다. “형님, 이게 뭡니까?.” “보너스 게임 같은 거지.” 나는 기괴한 슬롯머신의 전면부를 쓱 훑어보았다. 마석, 다이아몬드, 해골 등 직관적인 모양들이 릴에 그려져 있었다. 분명 같은 모양 세 개를 맞추는 전형적인 룰렛일 터. 하지만. ‘역시 래버가 하나가 아니야.’ 두 개의 래버를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아마도 왼쪽 래버와 오른쪽 레버의 회전축이, 반대로 설계되어 있을 것이었다. “내가 먼저 해볼게.” “예, 형님.” 내가 코인을 쥐고 기계 앞으로 다가가자, 허공에서 메시지 창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좌, ‘황금의 주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봅니다.] [성좌, ‘가면 쓴 후원자’가 결과를 기대합니다.] 크. 심지어 처음 보는 졸업 성좌 형님도 지켜보시는 모양인데……. 이 시점에 뭔가를 보여줘야겠지? 철컥- 드르르륵-! 내가 레버 하나를 움켜쥐자, 가만히 있던 릴들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 슬롯머신 돌리는 쌀숭이라…… 이것도 꽤 귀하긴 해. └ 이건 근데 무슨 슬롯머신임? 잭팟 터지면 LP라도 쏟아지나? 그러면 좋겠지만, 아마 이건 경험치 슬롯머신일 거다. 원래 히든 페이즈가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이 잔향 스택으로 경험치를 증폭시키는 게 원래의 시스템이었으니까. └ 우리 방장이라면, 당연히 몰빵으로 보여주겠지? └ 설마 하남자도 아니고 찔끔찔끔 밀어넣는 건……. 하아. 이 양반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나는 도박꾼이 아니다. 그러니까 시스템의 룰 안에서,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의 결과값을 뽑아내야 한다고? -원래 이런 컨텐츠 할 땐, 리스크 헷징(Risk hedging)이 생명입니다, 형님들. 나는 당당하게 중얼거리며 85개의 코인 중 딱 5개를 떼어내 투입구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잔향 코인’ 5개를 소모하였습니다.] [‘탐욕의 제단’이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드르르륵-! 기기기기긱-! 그렇지 않아도 빙글빙글 돌고 있던 릴들이, 레버를 당긴 순간 더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음 순간. 찰칵! 차르르르륵-! “지금……!” 기기긱! 반대쪽 래버를 재빨리 당겨 내리자, 역회전에 걸린 릴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역시. 비슷한 시스템이야.’ 이어서 마지막으로……. 끼이익-!! 처음에 당겼던 레버를 다시 한 번 당기자. 덜컹! [당첨! 보너스 경험치(대)를 획득합니다.] 두 개의 다이아몬드 모양이 맞아 떨어지면서. 머리 위로 기분 좋은 황금색 빛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바가 눈에 띄게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캬, 이맛이지.’ 슬롯머신 한 번 당겼을 뿐인데, 1페이즈에서 획득한 경험치 전체에 비견될 정도의 막대한 경험치가 쌓여 올라간다. 이거 85개 다 쓰면, 레벨 하나 더 오를지도 모르겠는데? 드르륵-! 덜컹! [당첨! 보너스 경험치(중)을 획득합니다.] 나는 신나게 레버를 당기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17번의 기회를 모두 사용했을 때. 띠링-!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필요 경험치를 확인합니다.] [레벨업까지 남은 경험치 4%] 오늘 레벨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음 레벨의 목전까지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 이런 시부럴; 경험치가 복사가 되네;;; └ 근데 이 새끼는 왜 꽝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거임 대체? └ 운빨 ㅈㄴ좋네 ㅅㅂ 운빨? 이건 절대로 운이 아니다. 사실 여기서 잭팟 같은 걸 터뜨린다면 그건 운이겠지만, 꽝을 피하는 건 패턴화된 방법이 따로 있거든. 이걸 뭐 내가 말로 설명해줄 수도 없고 참……. ‘대충 이 정도 경험치면…… 일반 보스 페이즈 클리어의 다섯 배 정도 먹은 건가?’ 이 정도 보상이면, LP가 아닌 경험치라 해도 충분한 도파민이 샘솟는다. 역시 투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확실하게 수익률을 뽑아내는 것이 정석. 아주 흡족한 결과물에, 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뒤에서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내 레버 컨트롤을 지켜보던 레오가, 양손에 코인을 소중히 쥐고 다가왔다. “이제 제 차례인 거죠?” “그치.” “어떻게… 당기면 됩니까?” 레오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나는 약간의 팁을 전수하기로 했다. 어차피 버스기사가 성장하는 건, 장기적으로 내게도 득이 되는 일이니까. “잘 들어. 방금 내가 돌려보며 패턴을 확인했는데, 이게 완전히 랜덤이 아니야. 왼쪽 릴과 오른쪽 릴 사이에 0.5초의 프레임 차이가 있다.” “아하…!” “1, 2번 릴이 다이아몬드일 때, 세 번째 릴이 도는 순간 눈을 감고 속으로 정확히 1.3초를 세. 그리고 반대편 레버를 당겨. 내가 계산해 본 바로는 이게 승산이 가장 높은 패턴이야.” 사실 이런 걸, 방금 레버 수십 번 당겨봤다고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내 말을 철썩같이 믿는 건지, 레오의 눈은 어느새 예의 그 부담스러운 느낌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다 이해했습니다!” 마치 진리를 깨달은 광신도처럼 고개를 연실 끄덕이던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자, 그럼……!” 그런데 다음 순간. 촤르르르르—!!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레오가 양손에 한가득 들고 있던 85개의 잔향 코인을, 단 한 줌도 남기지 않고 투입구에 ‘전부’ 쏟아부어 버리는 게 아닌가? “……?” └ 캬- 이궈궈든? └ 레오 남자다!!! └ 역시; 하남자 쌀숭이 쉑이랑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아니 잠깐만요. 이 정도면 이미 비범함의 영역을 벗어난 거 아닌가? 나야 이걸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까 꽝을 피했지만. 운빨 망해서 꽝이라도 뽑아버리면 대체 어쩌려고? “어, 어이! 야!!” 당황한 내가 소리치며 손을 뻗었지만, 레오는 이미 경건하게 두 눈을 꾹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야! 한 번에 다 태우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어어어!!” 내가 뒤늦게 막아서려 했지만, 레오의 굵직한 팔뚝은 이미 슬롯의 레버를 부러져라 잡아당긴 후였다. 덜커덩—!!! 그리고 다음 순간. 기기긱-! 드르르르륵-! 미처 브레이크를 걸 새도 없이 미친 듯이 회전하던 세 개의 릴이 요동치더니, 단숨에 자리를 찾아 정지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 어? └ 어어어? └ 잠깐. 비-상-!!! 마치 거짓말처럼. 세 개의 릴 중앙에 눈부신 황금빛 왕관 마크 세 개가…… 정확하게 열을 맞추어 멈춰 선 것이다. └ 이게… 뭐지? └ 어, 어케했누???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SUPER JACKPOT 당첨!] [MAX BET(85스택) 보너스가 곱연산으로 적용됩니다!!] “……?” 던전 천장이 폭발할 것 같이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내가 수십 번 쪼개어 가며 겨우겨우 채웠던 금가루들과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말 그대로 무식한 ‘경험치의 폭포수’가 레오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파아아앗—! 파아앗! 이어서 다음 순간. 띠링-!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메시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파티원 ‘레오’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파티원 ‘레오’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160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미스 영지의 동쪽, 인적이 드문 지하 깊은 곳. 석화(石花)의 지하 정원이라 불리는 이 중급 던전은 이름처럼 묘한 아름다움을 품은 곳이었다. 거친 암벽 사이로 피어오른 결정화된 이끼들이 은은한 청록색 빛을 발하며 동굴 전체를 비추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환상적인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크워어어억!” 집채만 한 화강암 골렘이 포효하며 굵은 팔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동시에, 최민석의 육중한 타워 실드가 그 공격의 궤적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쾅—!! 충격파가 동굴을 뒤흔들었지만, 민석은 단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았다. 타이밍과 각도의 깔끔한 조화.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나 님, 지금요!” 진우는 민석의 발밑으로 성역의 장막을 밀어 넣으며 즉각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권유나의 손끝에서 맹렬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비켜요, 민석 님!” 퍼어엉—! 시뻘건 파이어 볼트가 골렘의 무릎 관절, 즉 억센 바위 대신 연약한 석화 이끼가 자라난 유일한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골렘의 한쪽 다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민석이 묵직한 메이스로 골렘의 머리를 부수며……. 길고 길었던 던전 공략에 마침표가 찍혔다. 띠링! [파티원 ‘최민석’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시스템의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환한 황금빛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하아…….” 민석이 메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과 함께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번져 있었다. “와! 드디어! 고생하셨어요, 민석 님!” “민석이 형, 축하드립니다. 어제부터 이틀 내내 구른 보람이 있네요.” 유나의 밝은 외침에 이어 진우도 나긋하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던전에 틀어박힌 지 이틀째. 쉬는 시간도 아껴가며 악착같이 사냥한 끝에, 마침내 민석이 45레벨 고지를 밟은 것이다. 하지만 민석은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공을 일행에게 돌렸다. “에이, 다 진우 님하고 유나 님 덕분이죠. 유나 님이 딜 다 넣어주시고 진우 님이 힐 안 줬으면, 저 골렘한테 깔려 죽은 게 백 번은 넘었을걸요.” “그러니까요. 민석 님이 앞에서 다 맞아주시니까 저희가 이러고 있는 거죠.” 서로를 챙기는 배려심 깊은 모습. 그 모습을 보며 훈훈한 미소를 짓던 진우는, 순간 뭔가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여기서 타이밍 놓치면 안 된다니까요?] [민아 님 저 정도로 안 죽는다니까.] [제가 어떻게든 활로 뚫어 놓을 테니까, 진우 님은 파티원들 숨만 붙여 놔요. 오케?] [오버힐 절대 안 됩니다. 마나 최대한 아끼라고요!] 그건 바로 진우가 헌터가 된 이후 겪어봤던 모든 파티나 공대의 리더 중……. 가장 악랄하고 무자비한 어떤 팀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이게 일반적인 파티의 모습이지.’ 지금 진우를 포함한 세 명의 파티원들도, 충분히 정석적이고 모범적인 팀웍을 보여주며 던전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그 증거로 세 사람의 경험치를 2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꽤 유의미하게 많이 파밍했으니 말이다. 남은 자유시간. 그러니까 오늘 오후까지 쭉 이 파티와 함께 사냥한다면. 진우 자신과 유나도 곧 1레벨 정도는 더 올릴 수 있을 수준. 그러니 굳이 이건율 팀장이 하는 것처럼, 스파르타식으로 온몸을 갈아 넣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헌터 일을 하다간, 분명 제 명에 못 죽는다. 운 좋게 살아남아도 한 1년 구르고 나면 은퇴하고 싶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깐만 쉬었다가 할까요?” 권유나의 제안에, 세 사람이 동굴 바닥에 둘러앉아 짧은 휴식을 취했다. 아마도 마나가 일시적으로 오링인 모양이었다. 퐁-! 그녀는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시며, 동굴 벽면의 좁은 틈새들을 가리켰다. “근데 이 던전, 은근히 원거리 딜러가 자리 잡기 너무 까다로운 것 같아요. 좁은 데다 종유석도 많아서 사선이 계속 가려지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유나 님이 평소보다 무빙을 엄청 많이 치셔야 했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구불구불하고 좁다란 형태의 던전은, 원거리 딜러 입장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지형이다. 몬스터들과의 거리를 충분히 확보하기도 어려운 데다, 투사체가 막혀버릴 만한 장애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그러니까요. 아까는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요? 이럴 때 보면…… 대체 건율 님은 비동기 훈련 때 어떻게 포지셔닝을 하신 건지…….” 권유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건율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진우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비동기 훈련 마지막 날. ‘벨릭스 성채’라는 필드를 구현한… 마지막 모의 전투. 거기서 보여줬던 이건율의 포지셔닝과 활약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어쩌다 그런 괴물이 나타나서는…….’ 진우는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조용히 상념을 더듬었다. 마력을 단 한 점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 정교함. 아군 누구의 동선도 가리지 않는 완벽한 포지셔닝. 심지어 자신이 힐을 줘야 할 타이밍조차 완벽하게 계산된 범위 내에서만 피격당하던…… 기형적일 정도의 전투 시야까지. ‘이런 사람들이 랭커가 되는 거겠지?’ ‘재능 있는 루키 힐러’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온 진우였지만, 마치 전장 전체를 체스판 내려다보듯 통제하는 건율의 시야 앞에서는 아득한 격차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최민석이 입을 열었다. “건율 님도 보니까 숙소에 안 계시던데. 아마 사냥이라도 하러 나가셨겠죠?” “아마 그러시겠죠? 새벽같이 나가신 모양이던데.” 진우는 상념을 짧게 갈무리하며 권유나의 말을 이었다. “이건율 팀장님 레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셔서…… 어쩌면 레벨 업도 꽤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2레벨쯤 올리셨으려나?” 이건율의 미친 재능이라면. 그리고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조차 모를, 기상천외한 던전 공략 방법론들이라면. 마지막에 봤을 때 37레벨이라고 했었으니까, 2일이면 39레벨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40레벨도……?’ 진우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이건 비상식적인 추론이었다. 30레벨 대에서 하루에 1레벨 이상을 올릴 수 있었다면, 애초에 헌스쿨에 35레벨로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에이, 아무리 30레벨 대라고 해도 2일 풀 사냥 달려봐야 1업 어렵지. 그나마 나처럼 경험치 많이 쌓아두신 상태였으면 1업 쯤은 하셨겠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눈물겹게 겪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현실적인 최민석의 분석. 그에 권유나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지만……. “맞아요. 건율 님이 진짜 말도 안 되는 재능이긴 한데…… 그래도 물리적인 경험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한데.’ 어쩐지 진우는, 그 상식적인 이야기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사람 자체가 이미 비상식적이니까?’ 적자를 상정하고 공략하는 미다스의 정원에서 말도 안 되는 흑자를 본 사람이라면. 갑자기 40레벨이 되어 나타나도 충분히 납득 가능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진짜 40레벨을 찍어올지도.’ 그리고 만약 이건율이 40레벨을 찍어온다면. 그와 나머지 참가자들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말 거다. 특히 비동기 전투환경에서라면, 아득할 정도의 격차가 느껴질지도 몰랐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율이 어찌 됐든, 계속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자,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일어날까요. 목표 경험치 채우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민석을 따라, 진우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다음 구역 싹 쓸어버리러 가시죠!” “네, 민석이 형. 버프 걸 테니 천천히 진입하시죠.” 세 사람의 파티는 다시금 은은한 이끼 빛이 감도는 던전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사냥 계획은 저녁 5시까지였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 “그런데 다들…… 이따가 헌스쿨 본방은, 숙소에서 보실 거죠?” 오늘은……. 헌터즈 스쿨의 3화 본방이 방영되는 날이었다. * * * 화요일 밤 9시. [헌터즈 스쿨 시즌3] 3화의 본방송이 드디어 시작됐다. HBC 채널에 익숙한 BGM이 깔리며, 화면 전체를 채우는 황금빛 타이틀 카드가 떠올랐다. < HUNTER'S SCHOOL SEASON 3 > 3화 : 미다스의 정원 (Midas's Garden) 이어서 김신우 캐스터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깔렸다. [이번 미션은 역대 최초! 미공략 미궁에 도전합니다.] 화면이 전환됐다.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는 황금의 정원이 TV 화면 가득 펼쳐졌다. 나무도, 바닥의 보도블록도,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조차 황금색 액체로 이루어진 기괴하고 화려한 공간. 바닥에 깔린 금가루가 안개처럼 일렁이고, 허공에는 형형색색의 보석 파편이 떠다녔다. 카메라가 느리게 패닝하며, 미궁 입구의 거대한 황금 아치를 비추었다. 그 아치 양쪽에 음각된 문구가 클로즈업됐다. [가난한 자에게는 지옥을, 부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노트북 스크린 너머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황금빛 던전을 보며, 정하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 건율 님 분량 많댔는데……!’ 최고의 정보통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에 따르면, 헌스쿨 3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건율이라고 했으니까. 이건 비단 그녀 혼자만의 기대감이 아닐 터였다. -우아아! 건율님이다! -오늘은 시작부터 바로 나오네? ‘이건율 LP정산소’의 수많은 동지들도, 분명 그녀와 같은 마음일 터였다. 161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시율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는 절친 임민정이 쿠션을 껴안고 엎드려 있었다. 오늘 방영분은 민정의 집에서 보는 중이었다. 거실에는 맥주 두 잔과 온갖 안주들이 푸짐하게 늘어서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미궁 대기실에 모인 참가자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율이 팀원들에게 무언가 침착하게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이윽고 화면 하단에 파티 멤버 소개 자막이 떴다. [이건율 (팀장) - ???] [강민우 – 원거리 딜러] [고은아 - 탱커] [유진성 – 분석가(?)] [박진우 – 힐러] “악! 야! 진우 오빠다!” “그런데 건율 오빠는 왜 물음표임? 이거 잡캐 차별 아니냐?” “그게 지금 중요하냐고오오!” 이시율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맥주 캔이 엎어질 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우 오빠 우리 오빠랑 같은 팀이야! 미쳤다, 진짜! 와, 화면발 잘 받는 거 봐!” “야, 진정 좀 해. 맥주 쏟음 디진다!” “지금 진정이 돼?! 진우 오빠 저 각도 봐……. 방송 카메라가 잘 잡아줬다, 진짜! 저 옆모습 리얼 갓벽하지 않냐?” 민정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시선은 화면 중앙의 이건율에게 박혀 있었다. 화면 속 이건율은 팔짱을 낀 채, 미궁 지도를 가리키며 뭔가 조목조목 짚고 있었다. 음성은 편집으로 잘려 있었지만, 표정은 선명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무표정. “근데 건율 오빠, 진짜 프로페셔널하다.” “응? 우리 오빠?” “저 무표정으로 전략 설명하는 거. 세상 진지하잖아. 저런 게 진짜 워크에식이지.” “뭐래. 오빠 원래 집에서도 저 표정이야. 라면 끓일 때도 저 표정이고, 분리수거할 때도 저 표정이라고.” 이시율이 김빠진다는 듯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민정은 낄낄대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래도 이번엔 기대된다. 건율 오빠, 저번 화에서 시청률 멱살 잡고 끌어올렸잖아.” “아, 맞다. 오늘 방송 끝나고 인기투표 시작한다며?” 시율의 말에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SNS에서 벌써 난리야. 이성환 팬들은 벌써 조직표 돌린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걔네 화력 장난 아니잖아.” “으…… 투표는 어떡하지?” “뭘 어떡해.” “진우님 투표해야 하는데…… 우리 오빠는 투표 안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실력 좋아서, 나 말고도 투표해 줄 사람 많아 보이는데. 그치?” “야, 인기투표인데 실력이 무슨 상관이야. 방송 분량이랑 캐릭터가 중요하지. 난 건율 오빠한테 투표 올인 할 건데?” “진심? 내 친구지만 취향 참 독특해.” 그때였다. 미궁 안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이건율의 파티가, 다시 화면에 본격적으로 잡히기 시작한 것은. 화면 속의 이건율은 첫 페이즈인 상점 앞에 있었고, 곧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원, 전액 투자합니다.] 민정이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잠깐, 방금 저거 뭐야? 전액?” 미다스의 정원에 대해 알 리 없는 민정이었지만, 방금 이건율 파티의 선택은 뭔가 이상했다. 이성환의 파티도, 권유나의 파티도. 그 어떤 상위권 파티도, 이건율 파티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았으니까. ‘이거… 괜찮은 거 맞겠지…?’ * * *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근처의 2층짜리 아파트. 마쿠스 레예즈(Marcus Reyez, 28세)는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은 채, 병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화면 왼쪽에는 HBC 해외 송출 스트리밍. 오른쪽에는 해외 헌터 커뮤니티 ‘던전로그(DungeonLog)’의 라이브 채팅창. 이 구성으로 [헌터즈 스쿨]을 보는 게, 요즘… 매주 화요일 마쿠스의 루틴이었다. 헌터즈 스쿨은, 최근 나온 한국 헌터예능 중에서도 가장 재밌었으니까. 그런데 심지어 오늘. 헌터즈 스쿨의 3화 시청을 시작한 마쿠스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3화의 메인 무대인 미다스의 정원은……. 마쿠스가 자신의 헌터 인생을 갈아넣은 곳이었으니 말이었다. “오마이 갓. 오늘 컨텐츠가 미다스라고? 이런 미친 우연이라니….” 마쿠스는 레벨 54의 근접 딜러다. 그리고 미다스의 정원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저주받은 던전의 단골손님이었다. 정확히 3개월 전. 그러니까 50레벨을 넘기기 전까지만 해도……. 마쿠스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월간 초기화 한도에 맞춰 매달 한 번씩 이 던전을 공략했었으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40회에 가까운 도전 기록. 아마 마쿠스보다 미다스의 정원을 많이 돈 헌터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그 수많은 도전 중 절반 이상이 적자였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엔 한 1000LP 이상 흑자였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마쿠스가 평소보다도 배 이상 흥미를 가지고 3화를 보기 시작한 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영 초반. 이건율 팀의 과격한 선택지를 확인했을 때, 엄청나게 당황한 것도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500LP를 소모하였습니다.] [현재 LP: 0] [적자 상태에 돌입합니다.] “왓…?” 마쿠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순간 맥주병을 쥔 손이 굳어버렸다. 방금 뭘 본 거지? 500LP? 팀 전체 자금 전액을? 첫 번째 상점에서? “이건… 미친 짓인데?” 마쿠스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미다스의 정원. 이 던전의 핵심은 LP 관리다. 쓸 때는 쓰되, 후반을 위해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적자에 빠지면 난이도가 두 배로 뛰는 구조. 마흔 번 가까이 도전했던 마쿠스가 뼈저리게 깨달은 건, 단 하나였다. 이 미궁에서 LP가 바닥나면, 파티는 반드시 전멸한다. “난 파티 평균레벨 50이었던 마지막 시도 때도 저런 미친 발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마쿠스가 미다스의 마지막을 불태웠던 파티는, 모든 파티원이 50레벨을 가득 채운 최정예 숙련파티였다. 그러니 저런 오합지졸 파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것. 다만 다른 시청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건지. 던전로그 채팅이 미친 듯이 흘러갔다. [SwordMaster99 : 가즈아 친구들아!! FULL SEND!!] [DungeonDiver : 잠깐 그가 방금 전부 쓴 거야? 500LP 전액을?] [KRhunterFan : Lee는 신이야. 그냥 그를 믿으라고.] 마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이건율 참가자의 파격적인 선택에 환호하거나 의심하는 두 가지 패턴의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었고……. 심지어 이제 고작 3화째 방영임에도 불구하고,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의 맹목적인 팬들도 간헐적으로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마쿠스는 확신했다. 정작 저 선택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걸 말이다. ‘미다스의 정원이 어떤 곳인지, 대부분은 모를 테니까.’ 미다스의 정원은 돈을 먹는 미궁이다. 첫 상점에서 올인하는 건, 마라톤 출발선에서 전력 질주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건 전략이 아니다. 자살행위일 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채팅이 하나 올라왔다. [ArcaneAnalyst : 적자 페널티 = 난이도 2배. 이건 잔혹할 거야. 초반 라운드에서 파티가 전멸할 수도 있어.] ‘마침내 이해하는 녀석이 하나 나왔군.’ 마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화면을 노려봤다. [이건율.] [레벨 35.] 1~2화에 미친 활약을 보여줬다곤 하지만……. 여긴 미다스다. 미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화려한 피지컬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이 남자는 내가 지금까지 본 헌터 중 가장 똑똑한 놈이거나, 아니면 한국 헌터예능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패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거야.’ 하지만 마쿠스는 채널을 끄지 못했다. 수없이 도전했던 미다스의 정원. 그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1라운드 올인’ 전략을 실행한 미친놈의… 결말이 궁금했으니 말이었다. * * * 하윤은 침대 위에 엎드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쥔 채, ‘이건율 LP정산소’의 실시간 반응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그녀의 손가락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화면 속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코인 스캐럽 (Coin Scarab) 5마리가 등장합니다!] 황금빛 딱정벌레들. 그것들이 날개를 펴자마자, 파티의 메인 딜러인 강민우의 마력총이 빛을 잃었다. 마그네틱 헝거. 마력 흡수 패턴이었다. “어떡해…!” 하윤이 입을 틀어막았다. 강민우가 무력화된 절체절명의 순간. 화면 속 이건율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월광검’이 들려 있었다. 서걱. 간결하고도 빠른 일격. 딱정벌레 하나가 두 동강 나며 금화로 변해 흩어졌다. “우와…….” 하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역시 건율 님이다. 전투야 사실 봐도 뭐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느껴지는 존재감은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충격은 그 다음이었다. 이건율의 뒤편. 허공이 일렁이더니,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으니까. “으응……?” 하윤이 눈을 비볐다. 새카만 털뭉치. 길게 늘어진 귀. 그리고 세상 만사가 귀찮다는 듯 축 늘어진 눈. 토끼였다. 그것도 아주 작고, 새카만 봉제인형 같은 토끼. “저게… 뭐지?” 하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1화 방송 때, 화면 구석에 아주 잠깐, 저런 까만 털뭉치가 보였던 것 같았다. 너무 작고 순식간이라 잘못 본 줄 알았는데. 그게 소환수였다니. 화면이 클로즈업됐다. 스캐럽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난장판 속. 그 까만 토끼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바니: (숨 쉰다)] [바니: (일했다)] 화면 하단에 궁서체 자막이 박혔다. 하윤은 3초 동안 정지했다. 그리고. “꺄악!” 결국 비명을 참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쳤다. 진짜 미쳤다. 뭐야, 저 생명체는? 화면에는 ‘절대 나태 - 방어력 500% 상승’ 같은 스킬 설명이 떠 있었지만, 하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저 까만 토끼가 네 발을 하늘로 쭉 뻗은 채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는 사실이었다. “숨 쉬는 게 일하는 거래…… 세상에…….” 저 시크한 이건율 참가자에게. 저렇게 치명적으로 귀여운 소환수라니. 이건 반칙이다. 이건 헌스쿨 생태계를 파괴하는 조합이다. 적어도 그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팬카페 게시판 목록을 열었다. 관리자 권한으로 [New] 카테고리를 추가했다. [갤러리 – 바니] “이건 짤로 만들어야 해. 무조건!” 하윤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서 이건율이 마지막 스캐럽을 정리하고, 검을 거두고 있었다. 그 발밑에서 바니가 여전히 드러누워 있었다. 카메라가 바니를 한 번 더 클로즈업했고, 시청자들의 실시간 반응이 화면 옆에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눈이 불타올랐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할 일이 생겼다. 바니 캡처 뜨고, 움짤 만들어서 각종 커뮤니티에 뿌려야 한다. “오늘부터 인기투표 시작이라고 했지?” 하윤은 비장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이제 각종 커뮤니티를 돌면서 투표 독려 글을 써야 한다. 바니 짤방부터 앞세워서. 이 귀여움을 세상이 몰라줄 리 없다. 162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시야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발이 카펫에 닿는 감촉이, 평소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로비의 샹들리에가 눈부셔서, 입장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으… 으으…….” 그랜드 아르카나 호텔의 로비를 밟는 나는, 솔직히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무리했나.’ 2일이었다. 37레벨로 잔향의 회랑 문을 열었던 게 딱 이틀 전이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45레벨이 되어 있다. ‘……8레벨.’ 원래 계획은 4레벨이었다. 2일 안에 41레벨을 찍는 게 목표였고, 그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성과라 생각했다. 근데 결과적으로 그 두 배가 나온 셈이다. 뭐가 결정적이었냐고? 그야 당연히… 히든피스였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생각해보면 운이라기보다, 버스 기사가 포텐을 터뜨린 것에 가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오가 아닌 다른 파티원이었더라면, 잔향 85스택은 불가능의 영역이었을 테니 말이지. 그러니 솔직히 결과 자체는 엄청나게 흡족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46레벨에서 시작한 레오가 52레벨이 된 것보다는 못한 성과였지만 말이다. └ ㅋㅋㅋ잭팟은 진짜 미친 수준이긴 했어 ㅋㅋㅋㅋㅋ └ 아니 걍 이놈들 파티가 미친 거지 ㅅㅂ └ 46레벨에서 한 번에 2레벨 폭업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보긴 함ㅋ 진짜 뭔가 좀 잘못된 놈이긴 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85코인 몰빵에 잭팟이 터져버리다니. 물론 그런 천운은 첫 번째 한 번뿐이긴 했지만, 마지막에도 몰빵으로 그 절반 정도 튀겨지는 보상을 한 번 더 얻었다. 그 결과가 2일 만에 52레벨 도달이다. 내가 대체 뭘 키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든다. └ 똑같은 놈들끼리 뭐라는 거임 진짜로. └ 이 ㅅㄲ 티배깅 못하게 어디 라이카 스트리머 금지조항에 박아버리면 안되나? └ 그런데… 그럼 대이브 방송 무슨 재미로 봄? └ ㅅㅂ;; 그것도 맞긴 해. 투덜거리는 성좌들과 가볍게 소통(?)하면서. 로비 한가운데를 천천히 가로지른 난,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으으.”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베타 때도 이렇게까지 혹사한 적은 진짜 몇 번 없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30대 ‘중반’이라 그런가, 온몸에 좀이 쑤신다. 띠릉-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철컥- 결과적으로 난, 새 나라의 어린이마냥 일찍 자려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 건율 님 왔어요?” TV 소리. 그리고 경쾌한 BGM. 강소희가 소파에 쿠션을 끌어안은 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 가득,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미궁의 내부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어? 그거 헌스쿨 3화 본방?” “맞아요. 와서 같이 봐요. 마침 하이라이트네.” 이것도… 안 보고 자기는 좀 그렇잖아? * * * 임민정의 집 거실. 두 여자의 시선이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어?” 시율이 쿠션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이건율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징수원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니까. 게다가……. [※경고! 경고!] [신성한 거래가 훼손되었습니다!] [계약이 파기됩니다!] 우우웅― 팟! 이어서 징수원의 몸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고, 탐욕에 젖은 황금빛 살점이 터져 나갔으며. “크아아아아! 감히! 감히 내 돈을!” 그 안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히든 보스, ‘탐욕의 황금 사자’가 강림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몬스터의 위용에, 시율과 민정은 말을 잃어버린 채 잔뜩 스크린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캉-! 콰앙! 스크린 안의 박진감은 최고조였다. 이제껏 헌스쿨 시즌3에 등장했던 그 어떤 장면과 비교하더라고, 가장 위험해 보이고 박진감 넘치는 광경이었다. 까가가강-! 이건율의 검이 튕겨 나갔다. 강민우의 마력총도, 고은아의 방패 밀치기도 소용없었다. 절대 방어. 모든 물리적, 마법적 타격을 무효화하는 황금 갑주 앞에서, 파티원들의 공격은 무력했다. “와, 저게 무슨 미친 몬스터냐.” 민정은 저도 모르게 양 손에 땀이 맺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파티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거나, 후방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오직 이건율만이 끈질기게 사자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뭔가 반전이 있긴 할 텐데…….’ 그때였다. 황금 사자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화면 가득, 시커먼 입속의 어둠이 클로즈업됐다. 우드득. “……!” 시율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사자가 이건율을 삼켜버렸으니까. 황금빛의 괴수가 그녀의 오빠를 삼켜버린 채, 그대로 입을 닫아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화면이 암전됐다. 3초간의 블랙아웃. BGM도, 효과음도 사라진 완전한 정적. “…….” 민정의 집 거실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미국 LA의 아파트 거실. 마쿠스 레예즈는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거… 예능 아니었어?” 눈앞에서 참가자 한 명이, 거대한 황금 사자의 입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게다가 이건 가짜일 수가 없다. 저 황금사자는 마쿠즈도 만나본 적 있는 몬스터였고, 그의 상식으로 50레벨 언더인 유저가 공략하는 게 불가능한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조작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짜 Lee는 죽은 걸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전 세계의 그 어떤 헌터예능도, 출연자의 사망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진 않는다. 그렇다면 저 참가자는 당연히 무사하다는 소린데. ‘대체 이게 무슨…….’ 하지만 그러한 마쿠스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갑자기 까맣게 변했던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지직- 지지직-!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터져라.]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아니,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마쿠즈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화면 속에서 ‘황금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자의 뱃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폭발. 그 충격으로 절대 방어의 갑주가 산산조각 나고, 수만 개의 황금 파편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그 황홀한 파괴의 한가운데서. 아주 멀쩡한 상태인 이건율이 금화더미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툭. 파사삭. “……!” 그리고 완전히 뇌가 정지해버린 마쿠스의 눈앞에, 헌스쿨 멘토들의 나직한 나래이션이 깔렸다. - PD님들도 보셨다시피, 황금사자의 외피는 절대 뚫리지 않습니다. 적어도 40~50레벨 수준의 공격력으로는요. -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부의 압력도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구조거든요. - 그래서 이건율 참가자가, 그렇게 악착같이 균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겁니다. -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는 것만 성공해 내면, 내부에서 작은 압력만 가해도 저렇게 펑 하고 터져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 전당포에서 보호막 스크롤을 산 것까지 전부 계산된 느낌인데……. - 솔직히 소름 돋았습니다. 정지했던 마쿠스의 두뇌가, 다시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절대방어를 이런 식으로 뚫는 게 가능했다고……?’ 이제야 모든 그림이 맞아떨어진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이건율의 모든 행동들이, 하나의 퍼즐이 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완성됐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거야. 징수원의 방을 발견한 순간… 여기까지 다 생각했던 거라고.’ 마쿠스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저 공략법을 미리 알았다고 가정한들…… 난, 할 수 있었을까?’ 이건율은 도박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명확한 공략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수행해 냈을 뿐.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마쿠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 번을 다시 생각해도……. 심지어 이건율의 공략을 본 지금, 다시 저 사자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자신은 절대로 저렇게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확신이었다. “미친…….” 마쿠스는 화면 속 이건율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먼지를 털고 일어선 그는, 쏟아지는 황금의 비를 보며 별다른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마쿠스는 이건율의 그 표정에서… 심지어 ‘여유’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무모하다고 생각했다니.’ 마쿠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가 첫 번째 상점에서 썼던 그 500LP, 거기부터가 모든 설계의 시작이었다고.” ‘던전로그’의 채팅창은 이미 폭발하고 있었다. [DungeonDiver : WTF. 이게 뭐야.] [SwordMaster99 : 그가 안에서 터뜨렸어!! 내부에서!!] [ArcaneAnalyst : 적자 페널티를 이런 식으로까지 역이용하다니……. OMG] [GoldenLionFan : 난 지금까지 수많은 미궁을 클리어했지만 이런 건 본 적 조차 없어. 이 남자는 완전히 다른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아직까지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마쿠스는,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전율이 척추를 타고 찌르르 흘렀다. “이게…… 레벨 35란 말이지.” 오늘의 방송분을 되짚어보면 되짚어볼수록, 믿기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마쿠스는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MarcusR_LA : 난 50레벨이 될 때까지, 미다스의 정원을 최소 마흔 번 이상 시도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참가자같은 플레이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지.] [DungeonDiver :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브로. 단지 저 Lee라는 녀석이 미쳐버린 거라고.] 이건율이 언급되며 쏟아져 올라오는 수없이 많은 채팅들을 보며, 마쿠스는 속으로 예감했다. ‘앞으로 난……. 이 Lee라는 헌터의 빅 팬이 될 것 같군.’ 아마 이 한국 헌터 예능이 끝나고 난, 그 뒤까지도 말이었다. 딸깍- 마우스를 움직인 마쿠스는, 어느새 헌터즈 스쿨 공식 페이지에 접속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의 모니터 스크린에 띄워진 건……. <[헌터즈 스쿨 3> 1차 인기투표] 오늘 처음으로 오픈된, 헌스쿨 인기투표 페이지였다. 163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HBC 방송국 편집실. 모니터 수십 개가 푸른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기계적인 냉각 팬 소리와 긴박한 마우스 클릭 소리가 뒤섞였다. 장세연 PD는 화면에 코를 박을 듯이 붙어 있었다. 삐비비빅-! 설정해둔 알림음과 함께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가 수직으로 꺾여 올라갔다. 장세연이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입가에는 희열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됐어.” 화면 속에서는 전투를 마친 이건율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투박한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건율은 호흡이 꽤 가빠 보이는 와중에도,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사냥한 몬스터의 사체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서걱. 군더더기 하나 없는 칼질이 몬스터의 가죽을 갈랐다. 근육과 뼈 사이를 파고드는 칼끝에 망설임은 없었다. 마치 수만 번은 반복해 본 숙련공의 솜씨. [이거, 뼈마디 사이에 낀 파편까지 긁어야 제값 받는데.] 중얼거리는 대사까지도 완벽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물건이 굴러들어왔지? 장세연은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뭐, 거의 도축업 다큐 찍는 모먼트로 개그 포인트를 잡아버리네. 이건율 말고 이런 캐릭터가 존재할 수가 있을까?’ 커뮤니티 반응도 실시간으로 쏟아졌다. 오늘만큼은, 이건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 발골? 저 특성을 찍는 헌터가 존재하는 거였다고? 망캐 아님 이건율? - 근데 망캐라기엔…… 너무나도 강려크한걸. - 발골 실력 실화냐? 혹시 본업 정육점 사장 아닐까? 정육식당 운영하다가 각성한듯;; 커뮤니티 반응도 재밌다. 그리고 이런 모먼트도 생각보다 중요하다. 모든 콘텐츠는 소비자로부터 재생산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더 강력한 힘을 갖기 시작하니까. - 근데 저거 뭐임? 뼈 긁어서 나오는 거. - 부식된 마력 파편인데, 개당 0.6LP 정도 함. - 켁ㅋㅋㅋ 그럼 육천 원짜리임?ㅋㅋㅋ 장세연은 생각했다. 지난 1, 2시즌에서는 결코 시도할 수도 없었던 포맷이, 이건율 하나 때문에 나왔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 “…….” 그리고 세연은 그 이유를, 스크린 안에서 찾았다. 화면 밖으로 송출되는 이건율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저건 절대로 연기가 아니다. 저게 연기라면, 헌터가 아니라 할리우드로 갔어야지. 그러니까 진정성. 거기서 이 장면의 진짜 재미가 완성된다. ‘할리우드 가기엔… 헌터 재능이 너무 압도적인 것 같기도 하고.’ 장세연이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화면 위로 캐스터 김신우의 나레이션이 자막과 함께 깔렸다. [보십시오! 던전 안에서는 티끌 하나의 손실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 절박한 손놀림! 이것이 바로 K-헌터의 생존력입니다!] 나레이션도 아주 마음에 드는 포인트에 깔끔하게 들어갔다.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지는 카메라 워킹. 이번에 카메라는, 이건율의 어깨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까만 솜뭉치를 포커싱하기 시작했다. ‘……!’ 전지적 예능 시점으로 봤을 때, 그림이 너무 완벽하다. 압도적인 무력과 하찮은 일상의 대비. 그리고 하찮기 짝이 없는 외모로 염세적인 대사를 툭- 툭- 던져대는 특이한 소환수까지. 많은 팬들이 이 간극에 꽂힐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지.’ 바니가 클로즈업되었다. 짝짝이 단추 눈을 감고 세상 편하게 자는 모습 뒤로 자막이 한 줄 지나갔다. [바니: (숨 쉰다)]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 미친, 저 토끼 뭐야? 왜 저기서 자고 있어? - 방금 귀 쫑긋거리는 거 봄? 내 심장…… - 이건율은 피 튀기면서 발골하는데 바니는 세상 편하게 자네 ㅋㅋㅋ 온도 차 무엇. - 오늘부터 바니교 입교한다. 이제부터 바니를 향한 모든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 저 하찮은 발바닥 좀 봐…… 헌터 방송 보다가 힐링당할 줄은 몰랐네. 장세연은 확신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율은 그냥 이 방송의 치트키다. 행복에 겨운 표정이 된 장세연은, 흐뭇함 가득한 표정으로 모니터링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위잉-.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기계음이 라운지의 정적을 갈랐다. 나는 가장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태블릿 PC를 응시했다. 화면 속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바니'의 짤방이 페이지마다 도배되어 있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광경. -근데 인기투표에 바니가 나가면, 이건율보다 득표 높지 않을까? -이성환도 이길듯? 뭔 헛소리를. 이라고 하기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부정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건방지고 게으른 인형놈이 인기투표 1위를 노린다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뭔, 게을러 터진 폐급 토끼가 이런 인기라니. 굿즈라도 팔아서 뽑아 먹어야 하나 진짜.’ 소환할 때마다 길바닥에 드러눕는 꼴을 보면 복장이 터질 것 같은데. 이렇게라도 써먹어야겠다. 이제 우리 바니도 밥값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 ㅋㅋㅋ 그러면 바니가 방장보다 돈 더 잘 버는 거 아님? └ 킹능성 있음 ㅋ └ 바니한테 잘 보여라 방장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니, LP 낳는 토끼가 될 수도 있어보인다 ㅋㅋㅋ 진짜 그 정돈가? 좀 솔깃해지는걸? HBC랑 얘기해서 뭔가 사업화 잘 구상하면… 진짜 매출이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고민을 잠깐 하고 있는데. “뭐 하고 있었어요?” 시야 끝에 하얀 형체가 걸렸다. 언제 라운지에 들어온 건지, 강소희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잠깐. 그런데 복장이 좀 이상하다. “그… 하얀 장갑은 왜 끼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멸균장갑 같은데. 아르카나 라운지에 저걸 대체 왜 끼고 온……? “글쎄요?” 내 물음에도 강소희는, 어깨를 살짝 으쓱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하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은, 정체 모를 플라스틱 용기를 정밀하게 다루고 있었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별거 아니긴, 저거 끼고 있을 때가 제일 무서운데. “그보다 건율님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뭐 하고 있었긴. 보다시피 커뮤니티 구경 중이었다. 내가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방송에 관심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인기투표 날이잖아? “투표 결과는 좀 궁금해서요. 곧 나온다잖아요.” 이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더라고. “건율 님도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어요?” 강소희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까딱였다. 신기한 생명체를 관찰하는 듯한 순수한 호기심이 서린 눈빛이랄까. “뭐…… 신경 쓴다기보다…….” 말끝을 흐리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투표 신경 쓸 필요는 없어진 단계 같기도 하고? 사실 탈락만 안 하면 되는데, 이제 그럴 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딱히 더 볼 이유도 없긴 하네. 생각해보니.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라텍스 장갑이 부딪히는 뽀득거리는 소리만이 라운지를 채웠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강소희였다. “그나저나 미다스에서 어떻게 흑자를 그렇게까지 냈나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이유요?” “사람이 왜 그렇게 무모해요? 생각대로 안 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 설마 걱정해주는 건가? 그런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무모한 건 아니었긴 한데…….” 뭐, 걱정한다고 해도 '전속 라면 쉐프', 혹은 '아껴둔 실험체'에 대한 걱정 같기는 한데. 그래도 걱정해주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무튼 조심하라고요. 룸메이트 바뀌는 건 원치 않으니까.” 잠깐 오싹해진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 강소희는 여전히 용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힐끗거리는 게, 태블릿 화면을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치익-.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커피 머신이 마지막 증기를 내뿜으며 멈췄다. 동시에 태블릿 화면에 전에 없던 로딩 스피너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기 투표 종료! 잠시 후 결과가 발표됩니다.] 태블릿 위에 떠오른 메시지에, 나와 강소희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신경 안 쓴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잖아? * * *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던 정하윤은, 두 손을 모은 채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헌스쿨 참가자들의 첫 번째 인기투표가 있는 날. 이 투표 결과와 미션 성적을 종합해, 드디어 첫 번째 탈락 참가자들이 결정된다. ‘으, 이게 이렇게까지 떨릴 일이야?’ 그러니 헌스쿨에 과몰입 중인 그녀가 이렇게 간절한(?)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건율 님이 탈락할 가능성은 제로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인기투표에서도 최상위권이었으면 좋겠다. 지난 며칠 동안, 투표 독려를 위해 그녀가 쏟은 노력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리고 건율 님과 친한 참가자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 특히 이번 3화에서 미다스의 미궁을 함께 공략했던 팀원들. 그들만큼은 전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정하윤이었다. [인기 투표 종료! 잠시 후 결과가 발표됩니다.] 공식 커뮤니티 페이지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자, 정하윤의 심장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 UI의 상단에 한눈에 들어온 최애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인기 순위 2위 : 이건율] 하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악!’ 이건 커뮤니티의 사전 투표 결과보다, 무려 다섯 계단이나 더 오른 미친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164화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랜드 아르카나 컨벤션홀의 천장은 지나치게 높았다. 그 위로 매달린 수천 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내뿜는 빛은 눈이 시릴 정도였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 위로 흐르는 공기는 그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겁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다들 원래 이렇게 진지할 줄 아는 친구들이었나.’ 세 시간 전, 인기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 그랜드 아르카나의 분위기는 이 상태였다. 아르카나가 숙소인 참가자들은, 탈락 걱정을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고? 맞긴 하다. 다만 순위 변동 자체는 모두에게 예민한 것일 수밖에 없다. 당장 나만 해도 S급에서 A급으로만 내려가라고 해도, 상당한 서운함을 느낄 것 같은걸? 게다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등급 하락을 경험하게 될 확률이 높다. 20명의 탈락자가 생긴다는 건, 각 등급별로 4명의 TO가 사라짐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 ㅋㅋㅋ 헌스쿨은 순위발표가 항상 꿀잼이란 말이지. └ ㄹㅇㅋㅋ S급 누구 내려가려나. └ 방장이 내려가야 꿀잼인데, 그럴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긴 하겠네. ㄲㅂ 어허. 이 형님들이 서운하게 왜 이러실까. 내려가다니요. 전 이제 펜트하우스 아니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만. ‘흐음…….’ 그리고 재밌는 건, 오늘 컨벤션 홀에 배정된 자리들이 각 팀별로 묶여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미다스를 같이 공략했던 다섯 명의 팀원들이, 각 테이블에 그룹 지어 앉아있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뭐, 팀 내에 탈락자가 생긴 경우 팀 재구성이 이뤄질 예정이라서 그렇다고는 하던데……. └ 방장네도 한명은 위험하지 않겠음? 유진성이었나? └ ㅇㅇ F급은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방장 팀은 미다스 점수가 워낙 높아서 생존 가능성 있긴 하고. 나는 맨 앞줄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곁눈질로 옆자리를 훑었다. 유진성은 아까부터 안경을 치켜 올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뭐, 전반적으로는 침착해 보이는 모습이고. 오히려 고은아가 아예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은 채 정면만 응시 중이다. 아니, 이 친구는 황금사자 앞에서도 안 쫄더니 왜 여기서 쫄아 있는 거야?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하얗게 질린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알기로 고은아는 미션 점수도 전반적으로 등급대비 높고, 쫄아 있을 이유가 없는데? 의외인 점은 강민우가 상당히 덤덤하다는 부분이다. 뭐 탈락 위험이야 없겠지만, C등급으로 등급 하락은 거의 확정적일 텐데. 생각보다 의연한 모습이다. “팀장님은 별 생각 없으시죠?” 바로 옆에 앉아있던 박진우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솔직히 이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게 맞았으니까. 가장 걱정이었던 인기투표에서 2위를 했는데 뭐. 미션 성적이야 압도적인 1위니까, 변수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박진우 이 사람도, 딱히 걱정할 거 없지 않았나? 힐러 포지션 중에 미션 점수도 압도적이고, 인기 투표도 5등 안쪽이었던 것 같은데……. “뭐, 저야 감사한 거죠. 솔직히는 이번에 S급 격상도 기대 좀 하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호오. 생각해보니 격상도 가능했네? 박진우가 S가 아니라 A등급이었잖아? 별생각 없었는데, 이건 꽤 중요할 수도 있는 이슈다. 어쩌면 우리 팀만 유일하게, S등급 두 명짜리 팀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미션 성적이야 등급보다 실질 실력이 중요하지만, 인기투표는 또 그게 아니거든.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 아.” 무대 중앙. 조명을 한 몸에 받은 김신우 캐스터가 드디어 마이크를 잡았다. 평소의 경쾌한 톤은 온데간데없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홀 구석구석을 찔렀다. “자, 마음이 무겁습니다, 여러분. 결국 이번 시즌도, 이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구태의연한 내용이겠지만, 꽤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지금부터 있을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 김신우. 덕분에 참가자들은 더욱 몰입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더욱 진중해진 김신우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제 100위부터 81위까지, 탈락자 명단을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홀 안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유진성의 호흡도 조금은 거칠어진 게 느껴졌다. 렌즈 너머의 눈동자도 살짝 동요한다. 의연해 보이더니, 그래도 막상 발표 직전이 되니 떨리긴 하나보다. └ 떨리는 게 너무 당연함ㅇㅇ └ F급 입장에서는 여기서 한 텀 살아남으면, 몸값이 두 배는 뻥튀기될 텐데. └ 맞음. 그래도 광탈 면한 참가자들은, 시즌 끝나고 덕 좀 볼걸? └ ㅇㅇ지난시즌만 봐도, 80위까지는 전부 다 길드에서 모셔갔음. 아하. 80위 안에 드는 것도 의미 있는 부분이었다니. 그러면 유진성 입장에서 이 정도로 침착한게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수준이다. 긴장도 풀어줄 겸……. 나는 진성을 향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좀 떨리긴 하죠?” 유진성이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보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모습.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팀장님. 오늘 저, 아마 안 떨어질 겁니다.” 오, 자신감이 넘치시네? 사실 유진성이 생존해 주면 나야 좋긴 한데……. 다음 팀 미션이 언제가 될진 아직 모르지만, 솔직히 지금 팀 구성이 꽤 마음에 들거든. 유진성 참가자 자체가 팀장 입장에서 호감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제 미다스의 정원 방영분 덕에 인기 투표 결과가 좀 잘 나와줬거든요. 팀 미션 가산점도 팀장님 덕에 꽤 높게 찍혔고…….” 꽤 합리적인 근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결과도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100위, 정준태.”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신우 캐스터의 무자비한 호명이 이어진다. “93위, 성하늘.” 어차피 90위까지는 유진성의 이름이 호명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진짜 긴장되는 건 이제부턴데……. “86위, 유강훈” 됐다. 거의 다 온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왜 내가 떨리는 거지? “82위, 최조준.” 마지막 한 명의 탈락자만 남았을 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집어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81위, 임보람.” 마지막 탈락자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이야! 축하드립니다, 진성 님! 생존!!!” 그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고은아가, 아이처럼 좋아하며 진성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어어- 그러다가 유진성 어깨 탈골된다고? 아니, 왜 본인보다 더 좋아하는 건데? * * * 누군가의 환호, 혹은 통곡(?)이 휩쓸고 간 자리. 홀을 가득 메웠던 열기는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탈락자들은 조용히 컨벤션 홀을 빠져나갔다. 띠링-! 하지만 전광판의 숫자는, 기계적인 소리를 내며 계속 돌아갈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생존자들의 잔치, 혹은 서열 정리 시간이랄까. “이제, 남은 인원에 맞춘 등급 기준에 의거해, 최종 순위를 발표합니다!” [1~16위 – S등급] [17~32위 – A등급] [33~48위 – B등급] [49~64위 – C등급] [65~80위 – F등급] 그리고 이 최종 결과는,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일단 유진성은 아주 여유롭게 생존에 성공했으며. [68위. 유진성 (F등급 → F등급 생존)] 미션 성적이 워낙 좋았던 고은아는, 무려 승격까지 성공해버렸으니 말이다. [41위. 고은아 (C등급 → B등급 승격)] “그… 충성입니다, 팀장님.” 아니, 뭐. 내 덕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이건 좀 부담스러운걸? [49위. 강민우 (B등급 → C등급 강등)] 뭐, 예상했던 대로 강민우는 우리 팀 유일한 강등 인원이었지만……. “……역시.” 본인도 예상했는지, 그렇게까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고은아와 순위가 역전된 것은 물론, 등급까지 떨어졌음에도 말이다. 흐음. 조금 불쌍하긴 한데……. ‘그래도 고은아가 들던 짐은 강민우가 들어야겠지?’ 순위 발표는 멈추지 않았다. 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장내의 공기는 다시 뜨거워졌다. 그리고 10위권의 호명이 시작될 때까지도 불리지 않던 우리 박진우 팀원의 순위는……. [8위. 박진우 (A등급 → S등급 승격)] 아주 합리적인 숫자로 전광판 위에 떠올랐다. 솔직히 힐러 중에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데다 인기투표 순위까지도 높았으니. 박진우가 8위인 건, 아직도 조금 저평가인 감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팀장님 덕분입니다.” 그래도 뭔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표정은 상당히 부담스러운걸? 고은아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부담스러움이랄까. 어쨌든 팀원들의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긴 하다. ‘소희 님이 3위네. 그럼 남은 건…….’ 그리고 마침내. 전광판의 가장 높은 곳에…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박혔다. [1위. 이건율 (S등급 유지)] [2위. 이성환 (S등급 유지)] “와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기투표 결과가 나온 순간 사실 거의 정해져 있던 결과긴 한데. 그래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은 좋은걸? 물론 성좌들은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 방장 1위 실화냐 ㅋㅋㅋ └ 그런데 사실상 바니가 본체긴 해 ㅋ └ ㄹㅇㅋㅋ 커뮤 보니까 1위는 사실상 바니고, 대이브는 업혀간 느낌인걸? 어허, 형님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 나도 바니 굿즈 사고싶다ㅠㅠㅠ └ 쌀숭이 쉑, 바니 덕분에 1등 먹었네 ㅉㅉ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침을 놓고 싶은데, 솔직히 바니 지분이 조금은 있는 것 같아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그래. 뭐, 바니도 결국 내 소환수니까. 이 또한 내 일부가 아니겠어? └ 뭐라는 거임 ㄷㄷ └ 방장 양심 ㅇㄷ? └ 폐급 토끼라고 맨날 갈굴 땐 언제고……. 그야, ‘폐급 토끼’라는 호칭은 그저 사실 적시일 뿐인 거고. 절대로 나는 바니를 싫어하지 않는단 말이지. 이 폐급 토끼 녀석의 IP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해지는걸? 그렇게 모든 발표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무대 중앙에 서 있던 김신우 캐스터가, 다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생존하신 80명의 참가자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마지막 순서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겠죠?” 홀 내부의 조명이 서서히 꺼졌고. 대신 전광판에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붉은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대체 무슨 미션을 내놓으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건데? ‘다음 미션 발표인가?’ 팀원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고, 나도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김신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뭔가 살벌합니다, 팀장님.” “비동기훈련 그렇게 시켰으니, 시뮬레이션 던전 미션 같은 쪽으로 보내지 않으려나요?” 하지만, 김신우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홀 전체를 울렸을 때. “2차 본 미션의 장소를 우선 발표하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2차 미션의 내용은. “여러분이 향할 곳은…….” 장내에 있던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중국, 시안(西安)입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상암 HBC 사옥, 예능국 전략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한강이 길게 내려다보이는 이 방은, 보통 시즌 기획 초기에나 열리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정민이 이 회의실에 발을 들인 건, 시즌 3 론칭 회의 이후 처음이었다. 테이블 안쪽에는 이미 무거운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검희, 마광철, 서지혁. 헌터즈 스쿨의 멘토이자 대한민국 최상위 랭커인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장세연 PD가 턱을 괸 채 태블릿을 응시하고 있었다. 멘토들까지 동석한 전략회의라니. ‘어우,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진짜.’ 오전에 장세연으로부터 전략회의실을 비워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싶긴 했지만. 본격적인 회의 안건까지 확인하고 나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정민은 그저 가장 끝자리 의자에 앉아, 조용히 노트북에 회의록을 기록할 뿐이었다. 애초에 오늘의 안건은, 그가 관여할 만한 지점이 별로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PD님 말씀은, 아예 2차 미션의 촬영지를 시안으로 잡자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여기, 검희랑 서지혁 멘토는 이미 동의한 상태고?” “맞습니다, 마광철 멘토님. 사실…… 최상위 다섯 명만 따로 촬영하는 게, 미션 진행 관점에서도 어려운 점이 있고요.” “으음.” “게다가 이번 비동기 훈련, 성과가 다들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진 않지만, 최재민 멘토님께서도 그레이 존까지는 문제없을 거라고 의견 주기도 하셨고요.” 장세연의 말에, 이번에는 검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떠올라 있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태블릿 위에 펼쳐진 시안(西安)의 위성 사진. 붉은 안개 너머로 윤곽만 희미하게 잡히는 도시. 주기적인 게이트 폭주로, 이미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그레이 존과 옐로우 존까지는 안전 인력 배치로 충분히 커버 가능합니다. 중국 측 천궁 길드와 군사 통제구역 촬영 허가도 확정됐고요.” 이정민은 노트북 위에 올려둔 손을 멈춘 채, 검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이 민간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아직 제대로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 폭주 구역에서의 촬영이라면, 사실상 종군기자보다도 위험한 거 아닌가? 솔직히 이걸 강행하는 장세연이 좀 미친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본인도 직접 갈 거라는데, 무섭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저 정돈 돼야…… 헌터 예능으로 이 바닥에서 정점 찍는 거겠지만.’ 솔직히 비동기 훈련 상위 5명을 시안 레드 존에 파견하는 정도만 해도, 이정민은 속이 편하지 않았었다. 헌터즈 스쿨 시즌 1, 시즌 2를 통틀어 게이트 폭주 지역에서의 촬영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레이 존이건 옐로우 존이건, 관리 구역 바깥에 카메라를 들고 나간 전례 자체가 없는 거다. 그런데……. 모든 참가자를 데리고, 아예 그쪽에서 촬영한다? 아무 사고도 나지 않으면, 그게 기적 아닐까? [어차피 시안에 가는 거, 2차 본 미션 자체를 아예 시안에서 찍자는 제안을 해보려고 해.] [미치셨습니까, PD님?] [안전 확보, 확실하게 할 거야. 국장님 허락도 이미 받았어.] [그… 혹시 국장님도 같이 미치신…….] [이런 거 해볼 수 있는 방송국? 전 세계에서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정민아.] […….] [그러니까 닥치고 좀 도와줄래? 혹시 생명이 위험해질 일 있으면, 내가 대신 죽어줄 테니까.] [하아.] 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그 이상 말리지도 못했다. 정민이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서지혁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존은 시스템 지연 1~3초 수준입니다. 스킬 시전은 가능하지만 체감 딜레이가 있고, 식물이 마력 변이종으로 교체된 환경이죠. 참가자 80명이 기존 팀 편성 그대로 미션을 수행하기에 적합합니다.” 역시 여기에, 제정신인 사람은 본인 한 명뿐인 듯싶었다. ‘이 사람은 뭐 이런 미친 소리를 또 저렇게 이성적인 척하는 건데?’ 이번에는 마광철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 보탰다. “비동기 훈련은 시켰다지만 실전은 또 다른 거야. 그레이 존이라도 처음 가보는 루키들한텐 쉽지 않을 거다.” 시스템 지연 1~3초. 숫자로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현장을 수없이 지켜봐 온 이정민은 알고 있었다. 멘토들이 입버릇처럼 말했다. 전투 중 1초는 생사를 가른다고. 그보다 당장 걱정인 건 촬영팀의 안전이었다. 카메라맨들은 각성자가 아니다. 그레이 존에서 어떻게 촬영을 하지? 장비 동선, 대피 루트, 통신 수단. FD의 머리가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희가 화제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참가자들의 적응이 확인되면, 옐로우 존까지 미션 범위를 확대합니다. 2등급부터는 변종 몬스터가 출몰하고 시스템이 간헐적으로 두절됩니다. 다만 멘토가 동행하면 커버 가능한 수준이에요.” 서지혁이 끼어들었다. “옐로우 존의 시스템 지연은 3~7초. S등급 참가자도 체감할 수준입니다. 멘토 동행이 전제라면 리스크 관리는 됩니다.” 마광철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멘토가 붙어야 하는 건 동의야. 근데 16팀에 멘토 5명이면…… 내가 세 팀은 봐야겠네.”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눈빛은 의외로 의욕적이었다. 장세연이 뒷짐을 지며 말했다. “폭주 지역에서의 실전 촬영 자체가 최초예요. 그레이 존 적응 후 옐로우 존으로 확대하는 구성이면, 점진적 긴장 상승 곡선을 만들 수 있어요. 시청자도 참가자들과 함께 긴장이 올라가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장세연이 덧붙였다. “물론 시청자 반응 리스크는 있어요. 팬들 입장에서 자기가 응원하던 참가자가 위험한 폭주 지역에 투입되는 걸, 마냥 기대만 하진 않을 거거든. SNS에 ‘제작진이 무책임하다’ 같은 여론이 붙을 수도 있고.” 그런 걸 예상하는 사람이 이런 미친 짓을 강행한다고? 이정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신, 걱정이 클수록 성공해냈을 때의 카타르시스도 크잖아요. 단, 안전 확보를 보여줘야 해요. 멘토들이 동행한다는 사실, 베이스캠프 운영 체계, 비상 대피 프로토콜……. 이런 걸 콘텐츠화해서 방영 전에 먼저 깔아두면, 걱정은 오히려 몰입으로 바뀝니다.” 이정민은 드론 통신이 2등급에서 불안정해질 가능성을 노트 한 귀퉁이에 메모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하자, 구체적으로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촬영팀이 변종 몬스터와 마주치면 대피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현지에 이미 파견되어 있는 이클립스, 바르가 길드원들이 지원해준다고 했으니 괜찮으려나? ‘으으음.’ 문득, 건율이 생각도 살짝 났다. 사실 촬영팀으로 가는 본인보다, 참가자인 건율이 훨씬 더 위험하긴 할 테니까.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비동기 훈련에서 규격 외 판정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민간인 입장에선 알 길이 없었으니까. 다만 항상 예상치 못했던 뭔가를 보여준 친구였으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정돈 하고 있었다. “…….”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기서부터 별도 안건입니다.” 검희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낮아졌다. “레드 존, 3등급 이상. 시스템 접속이 30초 안에 끊기고, 비동기 전투만 가능한 환경이에요.” 회의실의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장세연이 뒤로 기대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폭주 지역 촬영 자체도 최초인데, 레드 존까지 카메라를 넣는다면…… 이건 전례가 없는 콘텐츠긴 하네요.” 검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비동기 훈련 성적 상위 5인이, 예정대로 여기 진입합니다. 인원이야 다들 아시다시피 확정됐고, 제가 직접 인솔하겠습니다.” 마광철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뭐, 검희가 직접 인솔한다면 문제가 없긴 하지. 레드 존이면 7~80레벨대 헌터들도 잘만 출입하니까.” 이번에는 이정민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동기 훈련 상위 5인. 그중에 건율이 포함되어 있는 건, 너무 당연했으니까.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정민의 입에서, 아주 낮은 한숨이 살짝 새어 나왔다. * * * 순위 발표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어수선했던 그랜드 아르카나에도, 다시 활기가 돌고 있었다. 순위가 밀려 숙소에서 쫓겨난(?) 참가자들이야 안타깝게 됐지만……. 그래도 새롭게 수혈된 뉴 페이스들 덕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활력이 도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사람은 원래 적응의 동물. 결국 지금쯤이면, 다들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을 터였다. └ 그러면 방장 네가 한 자리 양보하는 건 어떰? └ ㄹㅇㅋㅋ 숙소 양보 함 하자, 방장아. 펜트하우스 즐길 만큼 즐겼잖음? └ 룸서비스 물릴 때 안 됨? 어허. 이 형님들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야 솔직히 양보해도 되긴(?) 합니다만, ‘룰’이 깨져버리면 예능의 재미가 아무래도 반감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룸서비스가 물리다니요. 그건 일단 이번 생엔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만? └ ㅈㄹㅋㅋ └ 개웃기넼ㅋㅋ 어쨌든 첫 인기 투표와 순위 변경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나자, 모든 참가자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2차 본미션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 미션은, 이제껏 헌스쿨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게이트 폭주 환경에서의 미션. 아무래도 비동기 훈련이 이 미션에 대한 포석이었던 것 같은데……. 다들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한국에도 조만간 터질 확률이 높아 보이니까, 미리미리 적응해 두면 나쁠 게 없기도 한데.’ 그거야 내 예상일 뿐이고, 다른 참가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달그락- 아주 ‘소중한’ 그랜드 아르카나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 앉은 나는, 난간에 살짝 기댄 채 태블릿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바로 한 시간 전, 헌터즈 스쿨 측에서 공식으로 보급한 대여품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이건 사실 꽤 특수한 물건이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일반 헌터들도 접근이 어려운, 게이트 관리국의 제한 자료가 전부 열려 있는 태블릿이었으니까. 데드 존 현장 보고서, 시안 환경 분석 데이터, 변종 개체 분류표까지. 검희 멘토가 말했다. 출발 전까지 최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 두라고. ‘보니까 다들 숙소에 틀어박혀서, 태블릿 검색 중인 것 같던데.’ 테라스로 오기 전 보니, 강소희도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니까 어떤 몬스터가 출몰하는지, 어떤 스킬 조합이 유효한지, 시스템 지연 상황에서 어떤 전투 루틴이 유리한지.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있던데. 뭐, 합리적인 준비 방향이다. 나도 방금 전까지 그런 것들부터 대충 봤고 말이다. 하지만. ‘진짜 보고 싶었던 건 좀 다른 거긴 해.’ 나는 천천히 태블릿을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러니까 이건, 정말 오래전의 일이었다. 처음 ‘게이트 폭주’라는 걸 겪었던 그 지옥 같았던 날. 1회차의 리셋이 결정되었던… 바로 그 날. 그때 나는 고작 60레벨에 불과했고……. [그럼, 다음 회차에서 만나자고요, 용사님!] 그러니 세상이 갈라지기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달리는 것뿐이었다.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몰랐다. 그저 하늘이 깨지는 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을 뿐. 하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을 수 없었다. 1회차의 용사 지망생 이건율은, 폭주 영역의 그레이 존(이건 지구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긴 했지만.)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레이 존만 해도 몬스터 레벨대가 그렇게 높냐고? 그렇진 않다. 보통 그레이 존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은, 게이트 안으로 치면 30레벨 정도의 몬스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베타 존이라는 특수한 환경이었다. 그 임시 서버 안에 플레이어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고,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숫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 어떤 억제책도 없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레드 존에 생성된 고레벨 몬스터도 그레이 존까지 출몰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이 지옥도 안에서 15일이나 살아남는 건… 경험조차 한참 부족했던 1회차 용사 이건율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던 게 맞았다. ‘진짜 지옥이었지.’ 그래서 나는 대충 6회차까지는, ‘리셋을 위한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었다. 어차피 죽으나 15일 버티나 똑같이 리셋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죽는 쪽은 한 번씩 경험할 때마다, 끝까지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 남는다. [끄아아아악-!!] 때문에 나는… 매번 필사적이었다. 다섯 번쯤 죽음을 경험할 때까지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10회차 정도가 지났을 때였나? 아마 정확히 11번째 리셋 때였을 거다. 그때 난, 처음으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었다. [잠깐. 이 지형… 왜 낯익은 거지?] 매번 새로운 패턴으로 나타나던 게이트 폭주의 양상에, 어떤 규칙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였다. [이건 분명…….] 처음엔 기시감 정도였다. 하지만 삼십 번, 오십 번을 반복하다 보니 기시감은 확신이 됐다. 침식이 덮어씌우는 환경에 종류가 있었고, 종류가 같으면 핵심 골격이 같았다. 자원이 묻히는 위치, 몬스터가 서식하는 구역, 안전지대가 생기는 조건. 그게 다 법칙을 따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결국. ‘……그러고 보니 최소 천 번 넘게 겪었으니까.’ 언젠가부터 폭주는 공포가 아니라, 가장 익숙한 일상이 됐었다. 아마 50회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게이트 폭주 15일 사이에 사망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딸깍- 나는 화면 위의 글자들을 다시 바라봤다. 과거를 떠올린 데 대한 감상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냥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때 생각이 자연스럽게 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시안(西安)지역, 데드 존 등급 분류 및 세부정보] 여기 이 태블릿에서 검색할 수 있는 시안의 데드존 환경을 잘 관찰하면… 이번 2차 미션에서 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였다. 우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아주 익숙한 등급 분류. [1등급 ~ 5등급] ‘차원의 균열’을 중심으로 동심원 형태로 위험도가 올라가는 이 구조 안에서. 첫 번째 페이지에 올라온 건 당연히 위험도가 가장 낮은 그레이 존이었다. ‘여긴 마지막에 보는 게 낫겠고.’ 스크롤을 빠르게 넘겼다. 그레이 존은 어떤 패턴이든, 외부적으로 보이는 요소가 크게 다르지 않다. 침식률 15~30%에, 마력 변이 식물과 미약한 지형 변형 정도. 그러니 진짜 의미 있는 차이는 이 다음부터 볼 수 있다. [옐로우 존] 여기부터 손가락이 조금 느려졌다. [2등급 (옐로우 존)] [침식률: 43%(추정)] [출몰 변종 몬스터 : 사막 귀신(砂鬼), 사암 매복충(砂岩伏蟲)] [환경 특성: 모래 더미가 건물 1층을 덮음, 간헐적 모래 폭풍, 건물 외벽에 사암 결정 침식 시작 | 50m 이하 | 45~55°C | 변종 몬스터 상시 출몰.] 나는 한 줄 한 줄을 빠르게 짚어 읽었다. 운이 좋은 건지, 특정하기 아주 쉬운 패턴이 2등급 구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현실 건축물과 이세계 지형의 중첩.’ 이게 중요하다. 옐로우 존에서 중첩이 ‘가시적’이라는 건…… 더 안쪽의 구조를 역산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 손가락을 한 번 더 밀었다. [3등급 (레드 존)] [침식률: 72%] [건물 자체가 사암 구조물로 변이, 거리 매몰, 지하에 미궁형 사암 동굴 형성, 공간 왜곡 시작 | 10m | 55~65°C | 중력 이상, 공간 왜곡, 시스템 사실상 불능] 이쯤 되니 거의 확실해졌다. 사막 형태의 패턴을 가진 데드 존 지형 중에서… 침식률이 70%를 넘는 패턴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침식률 수치라는 걸, 베타 존 때 알 수가 있었냐고? 그건 아니다. 다만 지구 플레이어들이 정해 놓은 침식률이라는 개념은 결국 현실 세계의 지형지물이 얼마나 크게 변화했냐를 나타내는 지표였고. 보통 이 사막 패턴 데드 존의 경우, 지형 자체의 변형은 잘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슬슬 촉이 오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 이 ㅅㄲ 왜 실실 웃음? └ 몰?루?;; 어쩌면 시안 지역의 데드존 필드가, 꿀단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 정도 본 거로 알 수가 있는 거냐고? 테마가 같으면, 핵심 구조가 같다. 그리고 핵심 구조가 같으면, 자원 분포도 같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던전 구조만 확인하면 거의 확정 가능하네.’ 나는 태블릿 화면을 더 아래로 끌어내렸다. 레드 존 이후부터는 정보가 그렇게까지 디테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딱 하나만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의- 특수 지형 : ‘황사막(荒砂漠)’] [특징: 더욱 잦은 모래 폭풍, 갈라진 사암 구조물, 붉은 안개 발생. 현실 건축물이 사암 구조로 변이하며, 지하에는 미궁형 사암 동굴이 형성됨.]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버렸다. ‘캬. 이거거든.’ 이제 명백해졌다. 이건 어디서 많이 봤다, 그런 정도가 아니니까. 내가 최소 십수 번은 경험했던 바로 그 패턴. └ 데드 존에는 히든피스 같은 거 없다 방장아;; └ 왜 또 뭐라도 있는 척 실실 쪼개는거임;; 히든피스야 당연히 없지만, LP를 복사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히든피스 아닐까? 이번에 돈 벌어서 실드코프 물도 좀 타야 된다. 그러니까……. [시안 데드 존 — 인프라 분포도] [지하 구조물 현황] 베타 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런 현실 지형의 특성에 대한 부분도 꼼꼼히 다 공부해 가야만 한다. ‘지하철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침식이 진행되는구나.’ 화면에 시안의 위성사진이 떠올랐고, 나는 태블릿에 거의 빨려들어 가기라도 할 듯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 근데 이 ㅅㄲ 공부하는거까지 우리가 보고 있어야 함?;; └ 이게 뭔 캠스터디 콘텐츠도 아니고;;; 주어진 2일이라는 시간 전부를, 숙소에 틀어박혀 보냈다. * * * 이틀 후 이른 아침, 인천국제공항. 헌터즈 스쿨 전용 라운지 앞은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참가자 80명에 멘토 5명, 그리고 수십 명의 방송 스태프들까지 한데 엉켜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80명의 표정이 딱 반으로 갈려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전세기……?” 태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인증샷을 열심히 찍고 있는 참가자들이 있는가 하면……. “후욱. 후욱.” “왜 그래? 혹시 체한 거 아니지?” 출국 수속이 아니라 마치 저승길 수속을 밟는 것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참가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모르는 진실이 하나 있었으니. 지금 이 공항에서……. 속으로 가장 바짝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는 거였다. ‘그… 비행기 못 타본 게 죄는 아니잖아?’ 아무래도 나한테 가장 익숙한 교통수단은…… 마나 캐리지가 아닐까.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앞사람들이 개찰구…… 아니, 게이트를 어떻게 통과하는지 매의 눈으로 스캔 중인 건 당연했다. “팀장님. 짐 다 챙기셨습니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유진성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 캐리어가 왜 이렇게 큰 거야? 이민 가나? “……거기 캠핑이라도 가는 줄 아는 겁니까?” “어휴, 데드 존이라잖습니까. 비상식량에 정화 소금, 구급키트 꽉꽉 채웠죠.” 머쓱하게 웃는 유진성 뒤로, 고은아가 백팩 하나만 달랑 메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난 순위 발표 때 강등당했던 강민우가, 묵직한 짐을 든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은아 님은 또 너무 안 들고 온 거 아니에요?” “전투에 필요 없는 건 배제하는 게 맞습니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짐이라고는 딸랑 배낭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대화도 더 길게 이어질 순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시안 데드 존이 아니라, 검색대 위 플라스틱 바구니였으니 말이다. 내 시선은 온통 거기에 쏠려 있었다. ‘벨트도 풀어야 되는 건가? 핸드폰은 주머니에서 빼는 게 맞고? 아씨, 눈치 게임이 이래서 빡센 건데.’ 갑자기 옆으로 다가온 박진우가 물었다. “팀장님은 진짜 긴장 안 되십니까?” 그의 시선은 전광판에 떠 있는 붉은 글씨, [XI'AN (SIA)]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들 저 글자를 보면서 한 번씩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데……. “당연히 긴장됩니다.” 나도 미치도록 긴장된다. 검색대 바구니 넘기는 타이밍 놓쳐서 어버버할까 봐. “역시 팀장님도 이번 건은 긴장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결국 비행기 탑승까지 수상한 행동 한 번 없이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는 사실이었다. “와, 전세기 좋다.” 어느덧 탑승 안내 방송이 울리고, 80명의 참가자들이 차례대로 기내로 빨려 들어갔다. 전세기다 보니 좌석 배정이 꽤 널찍했다. 우리 팀 5명이 한 블록을 차지하고 앉았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를 사수했다. ‘무슨, 헌스쿨에서 비행기를 처음 타보게 될 줄이야.’ 버클을 찰칵 채우면서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좌석 앞에 달린 모니터도 신기했고, 승무원들이 걸어 다니는 것도 신기했다. “다들 안전벨트 채우십시오!” 조교들의 외침과 함께 기내가 소란스러워졌고. 윙- 하는 엔진음과 함께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띵동. 잠시 후 이륙하겠습니다.]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는 순간. 갑자기 등줄기를 훅 누르는 중력 역전의 감각과 함께, 양쪽 귀가 멍멍해졌다. 거대한 민항기가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솟구쳤다. 시안으로 향하는 난기류 속으로.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붉은 안개가 하늘을 삼키고 있었다. 시안의 하늘은 언제나 같은 색이다. 적무(赤霧)라 불리는 이 탁한 빛깔은 해가 뜨든 지든 변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곳에서는 시간 감각이라는 게 먼저 죽는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마력이 섞인 모래 입자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얼굴이 미세하게 따끔거렸다. 그레이 존(1등급)의 외곽이라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이 안에서는 장비를 하루만 방치해도 표면이 까칠해진다. 텐트촌 입구에 세워진 합판 게시판 앞. 용병 장하이(張海)가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그의 눈에 들어온 의뢰 게시판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사막 귀 토벌 의뢰라도 한두 건은 걸려 있었는데…….’ 의뢰 게시판에 올라오는 의뢰들은, 시안의 게이트 관리국이 직접 발주하는 용병 전용 의뢰다. 쉽게 말해 몬스터 현상금 같은 개념. 게시판에 올라온 몬스터는, 잡아 오면 부산물 매각비에 더해 의뢰 보상금까지 붙여 준다. 그게 사실상 용병들이 위험천만한 이 데드 존에 붙어 있었던 이유다. 게이트 안에서보다, 배 이상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그 많던 의뢰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핀 구멍만 촘촘히 남은 합판이, 데드 존의 붉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0건이라니.” 뒤에서 린시우(林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톤. 평소보다 더 건조한 것은, 어제도 같은 광경을 봤기 때문이리라. “새삼스럽게 뭘.” 장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뢰가 없어도 자유 사냥 자체는 가능하다. 사막 귀를 잡아서 외피를 벗긴 뒤 처리반에 가져가면, LP로 쳐주긴 한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의뢰가 붙어 있을 때의 사막 귀 한 마리는 25LP. 의뢰 없이 그냥 잡으면 외피 매각비로 고작 10LP 남짓. 같은 놈을 잡아도 벌이가 두 배 이상 차이 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의뢰가 아예 나오질 않는다. “……뭐.” 장하이는 합판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한국 공격대가 레드 존 전방에 방어선을 치면서, 이전에는 간간이 옐로 존까지 밀려 내려오던 고가의 몬스터들이 아예 아래로 유출되지 않게 됐다. 결국 1등급 구역에 남는 건 사막 귀 정도. 관리국 입장에서는 사막 귀 따위에 의뢰비를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린시우가 화살통을 어깨에 걸치며 장하이를 따라왔다. “레드 존 의뢰는 전부 한국 놈들이 가져갔고, 옐로 존 의뢰도 안 붙고. 대장이 사막귀나 패려고 이런 무식한 대검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안 그래요?” 장하이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 * * 텐트 안은 모래가루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무리 입구를 닫아도 미세한 입자가 틈으로 파고든다. 천장에 매단 LED 조명이 뿌옇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서 라오판(老潘)이 묵묵히 가죽 장갑에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65레벨. 이 숙영지에서 가장 높은 레벨이자, 가장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장하이가 바닥에 대자로 누우며 입을 열었다. “형.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라오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장하이는 천장을 보며 계속 말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어땠었지? 관리국 직원이 입구에 줄 서서 맞이했잖아.” 고작 세 달 전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작년 말. 시안 데드 존의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었다. 시안 노드가 거의 완전한 디폴트 상태를 선언하면서…… 게이트 관리국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 전역의 용병들을 끌어모았으니까. 게이트 폭주는 15일이니까, 15일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지가 않다. 완전히 디폴트 상태가 된 지역의 게이트 폭주는, 폭주 지속 기간보다 휴면 기간이 더 짧은 수준이니까. 그러니 관리국의 정규 전력인 천궁 길드와 인민해방군만으로는 데드 존의 확산을 막기 빠듯했고. 관리국장 왕 웨이는 민간 용병들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사는 본부 식당에서 정규 병력과 같은 배식을 받았다. 장비 정기점검은 무상이었고, 부상 시 의료 지원도 최우선이었다. 왕 웨이 국장이 직접 용병 숙영지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전력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린시우가 텐트 기둥에 기대앉으며 끼어들었다. “지난주에 보급 트럭 왔을 때 봤죠? 최신 마력 안정제 상자가 가득했는데, 전부 한국 캠프로 직행. 우리한테 온 건 소독약하고 구급대.” 장하이가 팔을 머리 뒤에 깔며 중얼거렸다. “식당도 밀려났지.” 본부 식당은 한국 플레이어 전용이 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용병들은 뒤쪽 텐트 식당에서 먹는다. 배식 순서도, 장비 정비 순서도 전부 후순위. 물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변화였다. 한국 랭커들이 레드 존을 완벽히 틀어막아 주니까. 관리국 입장에서는 거기에 자원을 쏟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래……. 당연한 건 아는데.” 장하이가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옐로우 존 경계선에서 매일 사선을 넘나들던 건 우리였잖아.” 텐트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린시우가 화살촉을 손톱 끝으로 긁으며 낮게 덧붙였다. “몸은 편해졌죠. 안전해졌고. 사막 귀나 잡으면서 느긋하게 지내면, 적어도 죽을 일은 없으니까.” 긁는 소리가 멈췄다. “근데 편해진 만큼 지갑이 비었단 말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텐트 밖에서 마른 모래 바람이 천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텐트 입구가 벌컥 열리는 소리였다. “형님들!” 쉬에밍(薛明)이었다. 용병 소대에서 가장 어린 53레벨의 마법사. 숨이 찬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이거… 혹시 보셨어요? “…뭔데.” “보자보자하니까 이것들이…… 이제는 여기서 예능까지 찍는다는데요?” 장하이가 반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쉬에밍이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국 예능이요. ‘헌터즈 스쿨’이라는 헌터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거기 참가자들을 시안으로 보낸대요. 실전 훈련이라나.” 정적.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린시우의 화살촉 가는 손이 멈춰 있었다. 라오판도 장갑에서 손을 뗐다. “……뭐라고?” 텐트 안의 공기가 한순간 싸늘해졌다. 여기 앉아 있는 용병들은 모두, 이곳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예능이라니. 헌터 예능이라니. “미쳤나, 진짜.” 장하이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헌터즈 스쿨이라는 한국의 예능은, 그도 잘 알고 있는 헌터 예능이었다. 최근 3화까지 방영되면서 라이카 아카이브(Laika Archive)에서도 상당히 핫한 예능이었고. 그 또한 아카이브를 통해 유입되어, 재밌게 시청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 상황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예능 촬영… 같은 걸 당국에서 허가를 내줬다고?’ 아마 한국 길드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이런 일이 벌어졌겠지만……. ‘이건, 선을 확실히 넘었어.’ 장하이가 벽에 세워둔 대검을 집어 들었다. 칼날에 기름을 묻히고,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텐트 틈 사이로 시안의 풍경이 보였다. 붉은 안개 너머, 사암으로 변이한 건물들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데드 존의 하늘은 언제나 같은 색이었다. 붉고, 탁하고, 해가 지는 건지 뜨는 건지도 알 수 없는 하늘. 그 아래서 칼을 문지르는 소리만이, 모래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이 시안 땅에 왜 ‘죽음의 영역’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아무래도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약간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비행기라는 게…… 원래 이렇게까지 무서운 거였나……?’ 아니, 난기류라는 건 자연 현상이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구름 속에서 놀이기구처럼 덜컹거리는 건……. 솔직히 웬만한 던전 보스 페이즈보다 무서운 것 같다. 던전 보스야 내가 잘 해서 어떻게 공략이라도 해 볼 수 있지. 비행기가 추락하는 건, 그냥 손 놓고 죽어야 하는 거잖아? 몬스터에게 죽었으면 죽었지, 비행기 안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대체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어떻게 자는 거지.’ 벌써 귀국할 때가 걱정된달까……. 철컥-! “오, 여기가 저희 숙소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렇게 목숨을 건 첫 비행을 겨우 마치고, 시안 데드 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건 대략 세 시간 전쯤의 일이었다. 도착 이후의 과정은 좀 정신이 없었다. 입경 절차에 짐 검수, 관리국 직원의 안전 브리핑까지. 그건 뭐 당연히 필요하니까 별 불만 없었는데……. 문제는 숙소였다. “잠깐……. 진짜 여기가 숙소라고?” 팀별로 배정된 숙소 안에 들어섰을 때,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건 건물이라기보다는… 컨테이너라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철제 벽에 군용 페인트가 벗겨진 외관. 창문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조그만 통풍구에서, 데드 존 특유의 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 모래가루 냄새가 확 밀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간이 좁지는 않다는 정도?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 고은아가 작은 방 혼자 쓰고, 남자들이 둘둘 갈라지면 되는 구조이긴 하다. ‘벌써부터 펜트하우스가 그리운걸…….’ 인생의 낙차를 이런 식으로 체감하게 되다니……. 사람이 참 간사하단 말이지. 그랜드 아르카나 같은 데 안 묵어 봤으면, 이 정도 환경에 별다른 불평이 안 나왔을 것 같은데 말이다. “…….”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유진성이 슬쩍 내게 말했다. “팀장님, 저 같은 방 써도 될까요?” 그리고 그 덕에, 모든 팀원들의 방 배정이 자동으로 완성되었다. “뭐, 그럽시다.” 방 배정이 끝난 뒤 짐을 풀어놓고 잠깐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박진우가 다가와서 갑자기 숙소에 대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수도 배관은 일단 살아 있는데요. 수압이 좀 불안합니다.” 그… 런 것도 벌써 확인했어? “필터도 좀 교체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급한 건 아닙니다.” 누가 힐러 아니랄까 봐 이러는 건가? 이 극한 환경에서도 위생부터 체크하는 자세라니……. 어떤 의미에선 경건하기까지 하다. “뭐… 정리해서 제작진에게 한번 어필해 보죠.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시야 한쪽에, 강민우가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말수가 상당히 적어진. 첫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우리 재벌집 도련님. 강민우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자기 짐을 정리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 짐까지 하나하나 옮겨주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안 되나……. ‘무섭잖아.’ 그런데 그렇게. 어수선한 짐 정리가 대충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삐이- 숙소에 딸린 조그만 초인종이 울렸고, 팀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문을 향해 돌아갔다. 이 컨테이너에 초인종이 있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딸깍- 후다닥 뛰어나간 고은아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 요 한 달 새 상당히 초췌해진……. 얼굴이 반쪽이 된, 이정민 FD님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우리 이정민 FD님이 숙소를 찾아오신 용건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이건율 팀장님, 첫 번째 미션 지령입니다.” “어…… 이렇게 갑자기?” 깜빡이도 안 켜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미처 어필할 새조차 없었을 정도였다고 해야 할까. 이정민 FD님은 아주 공식적이고 건조한 목소리로……. “48시간 자급자족. 시작 시점은 각 팀 자율이에요. 자세한 규칙은 미션지에 적혀 있고요.” 용건만을 간결히 던진 채,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건투를 빕니다.” 정말 말 그대로,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던져진 미션. “그… 일단 열어볼까요?”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던져진 미션이 바로……. 우리 팀이 벌써부터 베이스캠프 바깥에 나와 있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후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닙니까, 팀장님?” 바로 미션이 시작된 거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션지에 보면 제작진이 강조한 부분은……. [각 팀별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미션 수행을 시작할 것을 권고드립니다.] 분명 당장 미션을 시작하라는 내용과 거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션명 : 48시간 자급자족] 문제는 이 미션이… 반대로 지금 당장 시작해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는 지점이었다. 48시간이라는 게, 우리가 공항에서 내린 그 시점부터 시작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나와야지 뭐. 별수 있겠냐고. “…….”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모래가 미세하게 가라앉는 감각. 이 데드 존 특유의 불쾌한 공기의 질감. 그런 걸 느끼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박진우가 슬쩍 다가오며 내게 물었다. “다른 팀도 바로 움직일까요?” “글쎄요. 팀마다 다르긴 할 것 같은데.” 이번 미션은, 48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LP를 벌어야 하는 단순한 미션이었다. 그런데 그 48시간이 당장 지금부터인 게 문제였던 거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팀처럼 모든 팀이 바로 움직였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48시간 동안 한잠도 안 자고 미션을 수행할 게 아니라면, 어쨌든 수면 시간이든 휴식 시간이든 배분해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뭐, 나야 당연히 생각이 있으니까 바로 튀어나온 거긴 한데……. 자박- 자박- 캠프를 나서 한 10여 분 정도 이동하니, 이제 슬슬 데드 존의 환경이 조금씩 체감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통 흙이나 자갈이 섞인 땅과는 다른 질감이 느껴진다. 사암이 부서지고 또 부서진 끝에 만들어진, 이 지역만의 모래다. 한 발 한 발. 그것이 무거운 부츠 밑에서 조용히 납작해진다. 소리도 이상하다. 맞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바람이 사암 바위틈을 통과하는 소리가 낮고 길게 울린다. 피리 같기도 하고. 어떤 짐승의 울음 같기도 한. 그게 쉬지 않고 귓가에 걸려 있었다. 열기는 예상보다 덜했다. 그 대신 피부가 뭔가 계속 당기는 느낌이 있다. 마력이 섞인 건조한 공기가 수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다. 이런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 입술부터 터버린다. 당연히 경험으로 알게 된 것들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베타 서버의 게이트 폭주와 확실히 같은 개념이네.’ 둘러보지 않아도 알겠다. 이곳은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진 환경이 아니었다. * * * 그레이 존을 본격적으로 체감하게 된 건, 갑작스레 시스템 메시지가 발생했을 때였다. 띠링-! [시스템 동기화 가능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현재 시스템 동기화율 : 87%] 하지만 난 당연히 놀라지 않았다. 시스템 메시지가 뜰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87%라. 생각보다 높게 찍히네.’ 이건 어떤 면에서 되게 아이러니한 지점인데, 그레이 존의 마력 동기화율은 오염되지 않은 지구의 땅보다 훨씬 높다. 게이트 폭주라는 게 게이트 안의 환경이 게이트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개념이니, 오히려 완전히 깨끗한 지구보다 마력 동기화율이 높은 것이다. 다만 폭주가 시작된 중심부의 블랙존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마력 동기화율이 낮아지고,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보이드 존(Void Zone)의 경우 역으로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는 파장까지 발산되는데…….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여기부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저 동기화율이 점점 더 낮아지다가 마이너스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뭐, 다른 파티원들도 공부는 충분히 하고 온 건지,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고 말이다. “이게 시스템 지연이군요…….” 뒤따라오던 박진우가 손목을 흔들어보면서 중얼거렸고, 이어서 고은아가 방패를 아래위로 흔들어 보이며 한마디 덧붙인다. “어? 그런데…… 비동기 훈련 때보다 훨씬 편한 것 같은데요?” 취소다. 아무래도 우리 고은아 양은 공부 안 하고 온 것 같은데? “마력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레이 존에서 게이트 안이랑 별 차이를 못 느낀다고도 합니다.” 유진성의 말에 고은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거 아니었네요.” 아니, 그게 참……. 단순해서 좋은 건가? “…….” 어쨌든 시스템 메시지까지 떴다는 건, 이제 슬슬 균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도 되었다는 말. “슬슬 전투 준비들 하시고요.” 그레이 존에 그렇게 위협적인 몬스터는 없겠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내 말에 팀원들도 천천히 긴장을 끌어올렸고. 치이이이익-! 잠시 후. “전방 2시 방향! 진동이 감지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첫 조우가 찾아왔다. * * * 시선을 돌리자, 바로 눈에 들어왔다. 평평한 모랫바닥의 일부가 기이하게 부풀어 오르며 꿈틀거렸다. 그리고 등장의 전조를 확인한 순간, 어떤 녀석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사막귀.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두더지와 악어를 섞어 놓은 것 같은 기묘한 몸통을 가진…… 사막 테마의 데드 존의 상징과도 같은 몬스터. 운이 좋다고 한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 녀석이 시안 데드 존의 그레이 존에서 만날 수 있는 몬스터 중, 그나마 부산물의 가치가 가장 괜찮은 녀석이기 때문일 뿐이었다. “진우 씨 전방. 은아 님 커버. 민우 좌측 잡아줘요. 유진성 씨는 내 곁에.” 오더가 떨어지기 무섭게 팀원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모래가 폭발하듯 솟구치며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귀는 허공으로 솟구치며 날카로운 발톱을 뻗었지만. 피이이잉- 내 화살이 쏘아지는 게 한발 빨랐다. 퍼억-! 끼에에엑-! 체공 타이밍을 정확히 읽은 화살이 급소를 꿰뚫었고, 녀석은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으며 더욱 사납게 날뛰기 시작하였다. “은아 님, 한발 물러서고! 진우 님 쉴드!” “예, 팀장님!” “알겠슴다!” 사막귀의 실질적인 레벨은, 40레벨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하다. 하지만 동기화율이 13% 정도 떨어진 상태라는 점. 그리고 데드 존의 몬스터들이 가진 ‘오염된 마력’이 일반 몬스터들의 마력보다 위험하다는 점. 그런 것들을 따졌을 때 이 녀석의 실질 난이도는, 게이트 안쪽 기준으로 한 50레벨 몬스터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퍼펑- 펑-! [파티원 유진성이, ‘사막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아앙-! [파티원 강민우가, ‘사막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미다스에서 단련된 우리 파티의 팀웍이면,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막귀를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팀원들은 첫 사냥의 성공이 꽤 고무적인 모양이었다. “캬, 진짜 깔끔하게 잡았네요?” “역시! 별거 아니라니까?” 다들 데드 존이라는 환경 자체에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씩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자, 시작 좋고요!” “팀장님 말씀대로 일찍 나오길 잘했네요.” “이게, 전투가 어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생각보다 몬스터 찾기가 힘든 느낌이군요.” 고은아와 유진성, 박진우가 한마디씩 이야기했고, 사막귀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강민우가 마력총의 견착을 풀며 나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뭐, 뭔데? 갑자기 또 뭐가 역시야? “팀장님께서는 몬스터가 부족할 것도, 미리 조사해서 알고 계셨던 거였군요?” 강민우의 말에, 다른 파티원들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 감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난 억울(?)하다. “그런 거로 칩시다. 뭐.” 왜냐고? 부랴부랴 일찍 캠프 바깥으로 나온 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거든. ‘하지만 아직 확인된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일단 확실해질 때까지는,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쪽으로 이동해 보죠.” 나는 짧게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내 시선에 들어온 건……. ‘슬슬 바위 지형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니,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은데…….’ 붉게 물든 사암 바위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낮은 지형. 그 안쪽으로 기이하게 자라있는, 검붉은 덩굴들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6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모래와 바람이 뒤섞인 황사막. 거대한 사막귀 한 마리가 듣기 거북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모래 언덕 위로 쓰러졌다. 콰직-! 쿵-! 이어서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이걸로… 세 마리짼가?’ 사실 운이 좋았다. 원래 사막귀 같은 걸 찾으려고 이쪽으로 방향을 잡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한 마리씩 툭 툭 튀어나와 주니… 부수입이 아주 짭짤하다. ‘한 마리당 대충… 13~18LP쯤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세 마리면 대충 45~50LP 정도? 나쁘지 않긴 하지만, 한참 부족하다. 파티 전체가 50LP면, 한 사람당 남는 몫은 고작 10LP에 불과하니까. ‘이런 식으로는 48시간 다 써도, 인당 100LP도 어려울 거야.’ 그런데 이쯤 해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줘야 한다. 데드 존에 와서까지 내가 LP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분명히 말해둬야 할 게, 이건 오로지 ‘미션’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48시간 자급자족 미션 말이다. [미션 목표 : 48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LP를 벌어들이세요.] [이 시간 동안 벌어들인 LP로 1차 미션 순위가 정해지며, 다음 미션에 필요한 물품도 구비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우리 성좌님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 아 ㅋㅋㅋ 맞는 말이긴 해 ㅋㅋㅋ └ 방장쉑 합리화 보소 ㅋㅋ └ 아니, 무슨 미션 아니었으면 LP계산 안 했을 것처럼 말하네;; └ ㄹㅇㅋㅋ 지직- 지지직- └ 그나저나 제작진이 방장만 너무 밀어주는 거 아님?;; └ ㄹㅇ;; 무슨 시작부터 쌀숭이 최적화 미션을……. 지지지직- 그나저나 이 성좌놈들은 대체 왜, 굳이 연결도 불안정한 이 데드 존에서까지 스트리밍을 켜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스템 동기화율이 괜찮은 편인 그레이 존이다 보니, 스트리밍도 되나 싶어서 시험 삼아 켜봤던 것뿐이었는데……. 그 잠깐 사이 방송에 들어온 형님들이, 끄지 말라고 하도 아우성을 쳐서 스트리밍을 켜놓는 중이었다. ‘뭐, 성좌 형님들이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나로서는 딱히 끌 이유도 없긴 한데…….’ - 무튼 판도 깔렸으니, 지루하게 돈만 번다고 뭐라 하지 마십쇼. 그렇게 성좌들과 잠깐 잡담을 떤 뒤, 팀원들의 상태를 한번 확인했다. 박진우는 서포팅 포지션답게 분주히 팀원들을 케어하는 중이었고. 고은아는 전투가 끝났음에도 방패를 내리지 않으며 몸에 밴 듯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친구는 그냥 군인이라니까? ‘…….’ 강민우도 내가 미리 언질을 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무슨 임무냐고? 내가 발골하는 동안,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임무다. 꽤나 훌륭하게 수행하는 중이라, 발골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말이다. 지익-! 콰드득- 내 능숙한 손놀림에, 옆에 있던 박진우가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는 듯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발골하는 걸 이제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아직까지 신기해하는지 모르겠다. 뭐, 동기화율이 100%가 아닌 만큼 발골 스킬이 완전하게 발동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발골을 하루이틀 해 온 것도 아니고……. 87%의 동기화율이면 이런 간단한 작업 정도는, 게이트 안과 아예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가능하단 말씀이다. 띠링-! [‘사막귀의 견갑골’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부식된 마력 핵’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대충 부산물만 챙기는 것보다 5~6LP 정도 더 얻을 수 있으니까. 발골, 안 할 수 없겠지? “자, 진성 님은 이거 받으시고.” 유진성은 부산물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힘없는 마법사에게 너무 힘쓰는 일 시키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은 마력을 가장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마법사 클래스가, 인벤토리를 관리하는 게 맞았으니 말이다. 마력의 흐름이 간헐적으로 끊어져도, 인벤토리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니까.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유진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레벨, 마력량과 별개로 마력 컨트롤 능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시스템 동기화가 좀 불안정해도, 아마 옐로 존까지는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게 가능할 터였다. “흣-차.” 세 번째 사막귀까지 깔끔하게 처치하고 난 뒤, 곧바로 일어선 나는 이동 방향을 다시 잡았다. 쉴 시간은 없다. 이제 슬슬 다른 팀들도 대부분 그레이 존에 들어왔을 테니까. 숙소에 들어와서 여독을 풀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그런데 팀장님.” 유진성이 갑자기 날 부르더니, 꽤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채집된 마력 핵을 좀 분석해 봤는데요, 신기한 걸 발견해서 말입니다.” “오호. 어떤 걸 발견하셨죠?” “이전까지 처치했던 사막귀의 마력 핵보다…… 이번에 파밍한 물건의 마력 함량이 배 이상 많은 느낌이어서요. 그래봐야 사막귀 자체가 물리 타입에 가까운 몬스터라 절대량이 크지는 않습니다만…….” 솔직히 유진성이 이런 것까지 발견해 낼 줄은 몰랐다. 뭐 나야 채집 단계부터 알고 있었지만, 유진성은 나처럼 사전지식이 있는 게 아니잖아? 아직 감이 확실하게 오는 건 아니지만… 유진성 이 친구, 잘만 키우면 꽤 유능한 인재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진성 님.” “예?” “이건, 지금 우리 파티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그러니, 이제 조금만 더 이동하면 될 것 같네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유진성을 향해, 한마디 정도를 덧붙여주었다. “지금 저희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는 중입니다.” “……!” 전부 다 설명하긴 좀 번거롭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려 줄 만한 친구 같아서 말이다. “일단 그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시야에 황사막의 특정 지점이 들어왔다. 모래바람이 잠시 걷힌 곳, 희미하게 오래된 바위 지형이 드러났다. ‘거의 찾은 것 같네.’ 이곳 황사막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마력의 모래폭풍. 곧 그 뒤를 바짝 추격할 수 있을 듯싶었다. * * * 황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이 잦아들자, 탁한 시야가 서서히 걷혔다. 장하이는 망원경을 들어 바위산 능선 너머를 훑었다. 그의 입꼬리는 슬쩍 비틀려 있었다. ‘그레이 존에서조차 파티별 개별 활동을 용인하다니.’ 장하이는 지금, 헌터즈 스쿨의 제작진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데드 존을 얼마나 무시해야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자신들의 계획은 수월해졌지만……. 그들의 안일한 운영에,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그냥 웃음만 나오는군.’ 이윽고 희미하게 드러난 바위 지형 사이로 다섯 명의 그림자가 포착되자, 망원경을 든 장하이의 입에 걸린 비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장하이의 옆에 선 린시우도 그 모습을 보고는, 거친 목소리로 불평을 내뱉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요. 어이가 없어.” 쉬에밍도 인상을 찌푸리며 동조했다. “데드 존이라곤…… 구경조차 못 해 본 한국 놈들이라 그런 거겠죠.” 그리고. “오히려 좋잖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인 라오판은,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확인한 장하이의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바로 그거지, 형. 멍청한 헌스쿨 제작진 덕에,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고.” 몬스터의 잔해를 발골하는 이건율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며, 장하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멀리서 보이는 것만 봐서는 뭘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엄청나게 느긋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데드 존에서 이런 소꿉장난질이라니.’ 하지만 이제 저런 건방진 행태는 오늘부로 끝이다. 이제 저 애송이들은 조금만 더 깊숙한 곳으로 움직이면……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함정에 빠질 예정이었으니까. 장하이의 두 눈에 스산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쉬에밍. ‘데스 웜’에게 추적 마법은 잘 심어 둔 거지?” “그렇습니다, 형님.” “좋아.” 그의 낮은 목소리에 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린시우가, 장하이에게 물어보았다. “데스 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장?” 린시우가 당황한 건 당연했다. 데스 웜은 옐로 존에서도 희귀한 엘리트급 몬스터. 녀석은 레드 존까지는 들어가야 조우할 만한 강력한 몬스터였는데, 그레이 존인 이곳에서 언급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옐로 존에서 유출되어 내려온 녀석이다. 며칠 전에 발견했었지.” “……!” “어쩌면 저 건방진 애송이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린시우의 눈이 커졌다. “그 말씀은…!” 데스 웜은, 그들 용병대 다섯 명이 전부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다. 이 때문에 발견하고도 아직 장하이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던 것일 터였다. 그러니 그 괴물을 저 애송이 파티에게 선물한다는 건……. '전멸. 저 녀석들 수준으론 무조건 전멸이야.' 린시우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수였다. “그… 그런데 대장.” “음?” “진짜 괜찮을까요?” 복잡한 표정이 된 쉬에밍이 장하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린시우가 먼저 반응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다 지들이 자초한 일이지.” “그렇긴 한데…….” 라오판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팀원들을 한 차례 응시한 장하이는 양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저 녀석들에게 일단 데스 웜을 던져놓고… 뒤처리는 우리가 맡으면 아주 깔끔하겠지.’ 사실 장하이는 저 애송이들이 전부 죽게 둘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선심 쓰듯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는 척하면서 건방진 녀석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 주고, 데스 웜의 부산물도 깔끔하게 챙겨갈 생각이었다. 멀쩡한 데스 웜이라면 그들도 위험하겠지만, 저 파티와 한 차례 전투를 벌인 후라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말은 애송이 파티라고 했지만, 사막귀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맹탕들은 아니었다. 데스 웜에게 충분히 유의미한 피해는 입힐 수 있을 터다. 장하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보자고.” 장하이의 손짓에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그림자가 황사막의 모래 언덕 위로 빠르게 사라졌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거친 모래바람 소리와 함께 한 시간이 더 흘렀다. 나는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모래 언덕 위를 훑었다. 햇살은 여전히 따갑고, 모래는 신발 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난 드디어……. “찾았다.” 처음 베이스캠프를 나왔던 그 시점부터 줄곧 찾고 있던 ‘그것’을 드디어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이번엔 진짜겠죠, 팀장님?” 꽤나 지친 표정의 박진우가 물어왔고, 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확실합니다.” 사실 다들 피로할 만하긴 하다. 장시간의 비행 직후 짐을 풀자마자, 벌써 두 시간이 넘도록 데드 존을 돌고 있었으니까. 데드 존 안에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그레이 존이라고 해도, 충분히 힘들 만한 일정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찾은 편인데.’ 이런 생각이야 속으로만 할 수 있는 거고……. “흠흠.” 다른 팀원들의 컨디션을 슬쩍 확인했다. 강민우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고, 고은아는 그를 엄호하고 있었다. 유진성은 나와 함께, 방금 발견한 마력폭풍의 흔적을 분석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확실히 다들 얼굴이 꺼멓게 죽긴 했네. 하지만 결과물을 확인한다면……. 어차피 표정들이야 다시 펴질 테니까.’ 내가 이 흔적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찾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마력의 모래폭풍’이 휘몰아친 직후. 그 자리야말로…… 이 사막 테마의 그레이 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꿀 같은 파밍 존이었으니 말이다. └ 모래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몬스터 사체들을 노리는 건가? └ 확실히 영리한 전략이긴 하네 ㅋㅋ └ 방장쉑;; 잔머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뭐 성좌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찾고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의 파밍 존이 아니다. 그러니 피로한 팀원들과 달리, 내 표정은 밝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분명 폭풍을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좌표의 정확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나는 유진성을 열심히 부려 먹는 중이었다. “진성 님, 이쪽 데이터도 한번 확인해 봐요.” 나는 손짓으로 모래 언덕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유진성은 내 지시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를 조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유독 의욕적인 모습인 유진성. 빈말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는 중이었다. 이런 데이터 분석이 원래 체질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팀장님, 이쪽에서 특이한 마력 잔류 패턴이 감지됩니다. 팀장님이 알려주셨던, 일반적인 모래폭풍의 흔적과는 조금 다른데요?” 건너편에서 마력의 흔적을 분석하던 유진성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감이 섞였다. 나는 그의 말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진성이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기어다닌 듯한 깊은 홈이 파여 있었다. 모래는 마치 거대한 뱀이 지나간 것처럼 뒤틀려 있었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곧바로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잠깐. 설마……?’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올린 건 ‘데스 웜’이라는 엘리트 몬스터였는데, 그 녀석이 그레이 존에 등장할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좀 더 조사해 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은 점점 바뀔 수밖에 없었다. “으음.” 유진성이 찾은 흔적을 따라 디테일하게 파고든 뒤, 좀 더 구체적인 근거들을 발견했을 땐. ‘이건, 다른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이잖아?’ 결국 이 흔적이 '데스 웜'의 것이라는 걸, 확정 짓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웠다. 데스 웜은 레드 존에서나 볼 법한, 강력한 엘리트급 몬스터였다. 물론 그레이 존까지 내려올 확률이 제로는 아니었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우리 파티가 위치한 좌표까지 내려올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가능성이 생겼다면, 대비는 해야겠지.’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지금의 상황에서 딱히 나쁠 일은 아니었다. 위험한 거 아니냐고? 뭐,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순 없겠다. 지금 파티의 전력으로 사냥이 가능한 수준이긴 할 텐데……. 갑작스레 조우했다면 확실히 위험했을 녀석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강력한 엘리트 몬스터라는 건, 당연히 그만큼 막대한 보상이 보장되어 있다는 소리기도 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활용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었잖아?’ 우리는 이미 마력의 모래폭풍의 발원지를 특정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데스 웜이 아무리 엘리트 몬스터라고 해도, 마력 폭풍에 휘말린다면 무사할 수 없다. 이걸 잘만 이용한다면, 제법 괜찮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진짜 꿀단지는 여기 있었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파티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여기서 잠깐 쉴까요?” “예?”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아니, 다들 눈빛이 왜 이래? 이 불신 가득한 눈빛들……. 거의 날 블랙기업 오너 취급하는 느낌인데… 거 너무한 거 아니오? └ 너무하긴 ㅅㅂㅋㅋㅋ └ 방장아, 내가 파티원이었으면 아까 탈주했다……. └ 애들 좀 살살 굴려라 ㅇㅇ └ 너 그러다가 나중에 아무도 파티 안 해준다? 에이. 형님들. 굴렀을 때 구른 만큼 리턴이 있으면, 다 용서가 되는 겁니다. 블랙기업이 욕먹는 건, 굴린 만큼 안 줘서 그런 거라니까요? └ 그… 그런가?;;; └ 맞는 말 같기도 해;; 어쨌든 파티원들의 의심은 해소해 줘야 했으니, 나는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잠깐, 뭘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다린다고요……?” “뭘…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그거까지 설명해 줄 여유는 없다. 사실 모르는 게 약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댄 나는, 가장 중요한 결론만 전달해 주었다. “어쨌든 지금 충분히 쉬어두셔야 할 겁니다. 어쩌면 잠시 후에는, 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거든요.” 내 대답에 유진성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진성 군. 이게 다 우리 모두가 좋자고 하는 일이잖아? 안 그래? * * * 모래 언덕 너머, 망원경을 든 장하이의 시선이 이건율 일행에게 닿았다. 햇볕 아래 모랫바닥에 주저앉아 물통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한 시간 전부터 진득하게 지켜본 결과였다. 장하이의 입꼬리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징한 놈들. 결국 쉬긴 하는군.” 옆에 있던 린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은 인정해야겠네요.” 쉬에밍도 한마디 덧붙였다. “계속 움직여서 기회를 잡기 힘들었는데, 드디어 멈췄군요.” 장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말대로였다. 이건율을 비롯해, 지금 그들이 노리고 있는 헌터즈 스쿨의 한 참가자 파티. 분명 50레벨도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애송이들이었건만, 그들은 장하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그레이 존을 누비며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솔직히 장하이의 용병 파티였다고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연달아 사냥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더 확실해졌군.’ 이제 저들은 분명 지쳤을 것이다. 저 상태로 데스 웜을 조우한다면, 절대로 그 괴물을 상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제… 분명히 때가 왔다. 장하이는 손짓으로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제, 시작하자고.” “예, 대장.” “알겠습니다!” 장하이의 계획은 간단했다. 이건율 파티가 자리 잡은 곳을 향해 데스 웜이 이동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둔 미끼를 설치하여, 경로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데스 웜은 사막지대의 다양한 몬스터들을 잡아먹는 괴수였는데, 그중에서도 하급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좋아한다. 특히, 플리마켓에서 1LP에도 잘 팔리지 않는 싸구려 부산물들. 미끼로 쓰기에 부담도 없는 것들이었다. “으, 냄새.” 린시우와 쉬에밍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고는 모래 언덕 아래로 움직였다. 그들의 손에는 흡성충의 끈적한 내장과 사막귀의 마른 가죽 조각들이 들려 있었다. 장하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율 일행은 여전히 휴식 상태였고……. 이제 계획은 완벽했다. 저 애송이들이 데스 웜과 조우하여 혼비백산할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전리품도 아주 넉넉히 챙기게 될 것 같았고 말이다. ‘이번 주는 헌스쿨 애송이들 덕에 LP를 넉넉하게 벌게 될 것 같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고오오오-! 갑자기 후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력의 파동에, 장하이는 당황해서 고개를 휙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지? 쉬에밍!” 장하이는 멀찍이 미끼를 설치하고 돌아오는 쉬에밍을 불렀다. 파티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쉬에밍이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런데 장하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땐. “대장!! 피해야 합니다!!!” 이미 쉬에밍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력의 모래폭풍입니다!! 느껴지는 파동을 보면, 꽤 가까운 곳에 생겨났어요!” 장하이의 얼굴에서 흡족함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린시우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고. “대장! 저기!!!” 장하이는 고개를 돌려 뒤를 응시했다. 모래 언덕 저편에서 거대한 모래 기둥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쉬에밍의 말대로였다. 마력의 모래폭풍. 이곳 데드 존의 가장 무서운 자연재해 중 하나인 사나운 마력의 폭풍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 장하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력 폭풍의 위압감에 순간 얼어붙었다. “젠장, 저게 왜 지금 나타나!” 이렇게 되면 헌스쿨의 애송이들이건 데스 웜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살아야 한다. 생각은 짧았고, 판단은 빨랐다. “일단, 튀어!!” 항상 무표정하던 라오판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그가 일사불란하게 용병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방향을 보아하니, 무조건 서쪽으로 내달려야 해.” “들었지? 다들 라오판 형을 쫓아!” 장하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방향을 보니, 어쩌면 헌스쿨의 애송이들은 데스 웜을 만나기도 전에 저 파멸적인 자연재해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를 것 같았다. ‘죽게 둘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어차피 마력 폭풍이 생겨난 건, 장하이의 계획과 아무 관련도 없는 변수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이 죽음의 땅에서 예능 같은 걸 찍으려 한 헌스쿨 제작진의 잘못이었다. 콰아아아-!! 등 뒤에서 점점 커지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며, 장하이와 일행은 정신없이 도주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가까스로 폭풍의 범위에서 벗어났을 때. “후우.” 숨을 크게 몰아쉰 장하이는, 이제 천천히 멀어져 가는 마력의 모래폭풍을 바라보았다. “일단 캠프로 돌아간다.” 폭풍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나면, 그때 다시 돌아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거슬리기만 하던 헌스쿨 참가자들에게 일말의 연민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전장을 우습게 알았다고 한들, 그게 죽을 만큼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혹시나 시신이라도 찾으면… 그건 수습해 주도록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장하이는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다. 저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에 데스 웜까지 겹친 이상. 여기서 살아남는 건, 랭커급 실력자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온다. 그러니까…… 자연재해. 이 단어가 곧바로 연상될 정도로,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파도였다. 살갗을 스치는 공기마저 묵직하게 내려앉는 낯익은 이 기운에……. ‘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게 뭐죠?” 거대한 마력의 흐름에 당황한 유진성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유진성과 거의 동시에 마력을 느낀 박진우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게이트 안에서는 결코 이 정도의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껴본 적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침착해야 한다. 어차피 의도한 상황이었고, 내게는 플랜이 다 있다. 여기서 만약 내가 침착하지 못하게 굴면,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었고 말이다. ‘예상보다 조금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아.’ 타이밍이 제법 괜찮다. 계획대로만 움직이면, 원하는 그림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파티원들에게 즉각적인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모두 잘 들으세요. 당황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의도했던 상황이니까요.” └ ??? └ 이걸 의도한 거라고? └ 마력의 모래폭풍 아냐? └ 이 ㅅㄲ 또 허언증이……. └ 튀기나 하셈 방장;; 진짜 죽는다 이러다가? 성좌들도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뭘 설명해 주거나 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무시했다. 파티원들 또한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는데……. 이것도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대체 뭘 의도한 건지, 다른 파티원들의 입장에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때문에 난, 차분하게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우린 전력으로 달려야 합니다. 제 오더만 정확히 따르면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요.” 말하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파동의 방향과 강도를 계산하며, 최적의 도주 경로를 머릿속에 그려야 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이렇게까지 확신 있게 말하니 파티원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는 점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이어서 파티원들에게 즉시 대피를 지시한 뒤, 모래바람을 뚫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제 뒤에 바짝 따라붙어야 합니다! 체력을 안배해야 하니, 저보다 빨라서도 안 되고 느려서도 안 됩니다. 템포를 맞춰주세요.” 내 오더가 떨어지자, 파티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들 입장에선 당혹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과 오더였을 텐데. 그런데도 내 지시를 의문 없이 수행해 준 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고무적인 부분이었다. 탓- 타탓-! 파티원들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나는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비교적 체력이 떨어지는 강민우와 유진성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중이었다. 박진우와 고은아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체력이 좋은 느낌이었다. 특히 가장 무거운 장비를 착용한 고은아의 체력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여유가 조금 있으니… 아주 조금만…… 페이스를 올려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숨을 헐떡이던 유진성이 갑자기 속력을 높여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 팀장님!” “예?” “이쪽 방향은 마력 파동이 가장 강한 곳입니다! 남쪽으로 우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유진성의 말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고르라고 하면, 유진성의 제안대로 가는 게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지척까지 다가온 데스 웜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설계해 놓고, 꿀단지를 버려둔 채 갈 순 없으니까.’ 동쪽으로 계속 뛰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일단 지금은 제 오더를 따라 주세요.”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외쳤다. “결코 후회할 일 없을 겁니다.” 내 단호한 목소리에 유진성은 입을 다물었다. 박진우는 망설임 없이 내 뒤를 따랐고, 고은아는 애초에 의심조차 없는 표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십 분 정도를 내달렸을까? 쿠아아아-! 구구궁-! 지축을 흔들 정도의 거대한 진동음이, 사막 전체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어어!” “아앗!” 이쯤 되자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박진우도 꽤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됐다!’ 지금부터 5분이, 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골든 타임이었으니 말이다. └ ㅅㅂ;; 이건 또 뭐냐. └ 진짜 데스 웜임? 지직- 지지직- └ 방장 ㅈ됐는데?;;; └ 이거 파티 전멸각 아니냐? 노이즈가 섞인 성좌들의 채팅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건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전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앗-! 나는 데스 웜을 유인하기 위해 정해둔 경로를 따라 질주했다. 파티원들도 이를 앙다문 채 필사적으로 내 뒤를 따랐고,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지체되거나 하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리고 잠시 후. 쿠쿵- 스하아아-! 거대한 모래 언덕을 넘어선 순간, 우리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데스 웜이 모습을 드러냈다. 캬아아악-! 땅을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몸뚱이가, 하늘을 가리기라도 한 듯 거대한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그 위용에 파티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티, 팀장님!” “이런……!” 유진성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버렸고, 강민우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박진우는 곧바로 보호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하였고, 고은아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본능적으로 엄호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 이대로면 데스 웜은 분명 우리를 덮칠 터였고, 누가 봐도 진퇴양난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휴우.’ 지금 이 순간, 오히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과 다르게, 중요한 고비는 이미 다 넘겼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팀장님, 그게 무슨……!” 정확히 계획대로 됐다는 이야기다. 콰쾅- 콰아아아앙-!!! 거대한 마력의 모래폭풍이,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측면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키아아오오-!!! 우리를 향해 아가리를 쩍 하고 벌렸던 데스 웜은. 콰콰콰콱-! 강력한 마력을 잔뜩 머금은 사나운 모래폭풍에, 그대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데스 웜은 말 그대로 집채만 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몸뚱이로도 마력이 담긴 회오리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니까 마치 토네이도에 휩쓸려 뜯겨 나가는 집채처럼. 쿠오오- 데스 웜의 거체가 모래 언덕 뒤로 사라져 갔다. * * * 벌컥-! 컨테이너의 쇠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통제실로 들어왔다. 이곳은 헌터즈 스쿨 촬영팀의 베이스캠프. 그 안에서도 이번 시안 촬영의 모든 조율이 진행되는 중앙 통제실. 그러니까 이곳의 문이 이렇게 거칠게 열렸다는 말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고, 그로 인해 장내에 있던 모든 인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문을 향해 쏟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이정민 FD였기에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FD님? 무슨 일 있어요?” 촬영 감독의 질문에, 모든 사람의 신경이 한층 더 곤두섰다. 이곳은 데드 존이라는 위험천만한 환경인 만큼, 벌어질 수 있는 ‘무슨 일’의 범위가 엄청 방대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따로 촬영팀도 붙지 않은 채, 각 참가자 파티가 개별 미션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던가. 그러니 문제가 생겼다면 참가자 쪽일 확률이 높았는데, 도착하자마자 그런 불상사가 생겼다면 그야말로 최악인 것이다. “헉- 헉-”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이정민이 장세연 PD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꽤 심각한 것이었다. “PD님! 마력의 모래폭풍이 발생했답니다!” 물론 이 내용의 심각도를, 모든 촬영 스태프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마력의 모래폭풍이 뭔지. 그걸 알지 못한다면, 이게 왜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촬영팀을 통솔하는 핵심 인원들은 당연히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다들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 “그래서요?” 장세연 PD의 입에서 나온 반문은, 모두를 당황케 하는 것이었다. “그… 마력의 모래폭풍이라니까요? 그레이 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자연재해요! 심지어 그쪽 좌표에, 저희 참가자 팀 중 하나가……!!” 다시 이어진 이정민의 설명에도, 장세연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이정민의 말을 자르며, 평온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제가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고…….” “예?” 피식 웃은 장세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없으니까, 다들 호들갑 떨 것 없어요.” “……?” 장세연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톡 톡 두들기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모래폭풍의 발생 가능성은, 처음부터 추적 중이었으니까요.”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마침 방금 검희 멘토님과 통화를 좀 했는데…….” 장세연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덕분에 오히려… 더 재밌는 그림이 나와줄지도 모르겠더란 말이죠?”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마력의 모래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거대한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완전히 갈아엎어진 모래 평원 위로 아직 미세한 마력 입자가 흩날리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집채만 한 데스 웜의 잔해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찍이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게…… 이렇게 됐다니.’ 그건 바로 몇 시간 전부터 이건율 파티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헌스쿨의 멘토 검희였다. ‘원래부터 마력의 모래폭풍이 어떤 건지,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걸까?’ 모래사막 한쪽, 기형적으로 솟아오른 붉은 바위 둔덕. 마치 사막 한가운데 꽂힌 거대한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그 꼭대기에서. 검희는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본 상태였다. 휘이잉- 그녀가 이건율 파티를 추적한 이유는 당연히 안전 때문이었다. 가장 처음 캠프를 나선 파티가 이건율 파티이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가장 많은 위험 요소를 안은 채 움직이고 있는 것도 이건율 파티였으니까. 마력의 모래폭풍 발원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도 위험한데, 적대적으로 보이는 현지 용병들까지 이건율 파티와 멀지 않은 곳을 배회하고 있었으니. 검희는 여차하면 개입할 생각으로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헛수고를 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어.’ 붉은 안개가 뒤섞인 사막 바람에, 검희의 적갈빛 외투 자락이 나부꼈다. 가면 뒤에 가려져 있는 검희의 표정은, 꽤나 기묘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장 한가운데서 만신창이가 된 데스 웜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한 파티. 그중에서도 이 파티의 팀장인 이건율. ‘으음.’ 검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헌터즈 스쿨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줄곧 눈여겨봐 왔지만, 그는 확실히 일반적인 루키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확실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녀석이란 말이지.’ 사실 다른 멘토들은, 이 이건율 참가자에 대한 기대가 최근 들어 엄청 커진 상태였다. 단순히 헌터즈 스쿨의 흥행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쯤 되는 랭커들에게 헌터즈 스쿨은, 그렇게까지 대단하고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멘토들이 보기에 이건율이라는 참가자의 재능은 단순히 헌터예능용이 아니었고. 그게 기대의 근원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마탑인 이클립스의 이사인 서지혁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멘토들이 이건율 참가자를 길드에 영입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검희가 보기에도 이건율은, 수년 내로 한국의 플레이어 랭킹 구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인재였다. 어쩌면 당장 올해 여름에 열릴 국가대항전에서부터, 적잖은 활약을 해 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체를 완전히 알아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단 말이지.’ 검희가 보기에 이건율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닌 인물이었다. “…….” 의심의 시작은 당연히 제라투스의 깃발 때부터였다. 검희 본인도 몰랐던 3차 전직에 관한 단서들을 뉴비가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 납득이 어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고, 헌터즈 스쿨의 미션이 시작된 뒤에는 의심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율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경악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입학식 미션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미다스의 정원부터는 상식 밖이야.’ 공략법을 아는 수준을 넘어,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된 각본이나 다름없던 미다스의 정원. 웬만한 랭커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비동기 훈련 데이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드 존 적응 속도까지.’ 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재능이 엄청나다고 해도, 이건율의 입장에서 이 데드 존은 처음일 수밖에 없다. 비동기 훈련에서 높은 성적을 거뒀다고 해도, 실제 데드 존의 환경을 경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런 상황에서 마력의 모래폭풍이라는 자연재해에 이렇게까지 침착하고 완벽하게 대처한다? 단순히 회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활용했으니까. 마치 미다스의 미궁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완벽하게 활용해냈던 것처럼. ‘게다가…….’ 운도 좋았다. 아니, 운이 아닐 거다. 어떻게 한 건지는 검희도 모르겠지만,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정교한 결과물이었으니까. 운으로 이렇게까지 정확한 좌표에 데스 웜을 유인하고, 녀석을 폭풍 속으로 집어 넣어 무력화시킨다?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이고, 비약이다. 그러니……. 검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녀석이야…….’ 데이브. 그러니까 이건율은……. 검희의 인지범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어였다. 그러니 검희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건율의 정체에 대해 한 가지 다른 차원의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 시스템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있는 존재인 건 아닐까?’ 검희의 시선이 다시 이건율을 향했다. 그는 랭커인 그녀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수준의 활 솜씨로 데스 웜의 숨통을 끊어놓는 중이었다. ‘저게 루키라고? 말이 안 되는 거지 이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검희는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확실한 사실 한 가지를 확인했으니,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이 그레이 존에서. 이건율 파티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건율……. 최대한 가까이 두고,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할 인물이야.’ 아마 쉽지는 않겠지만, 바르가에서도 이건율을 영입하기 위해 최대한 힘을 써야할 것 같았다. 다른 멘토들과 이유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후우.” 바위 둔덕 위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고, 붉은 안개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력 입자가 몰아치는 사막 바람이, 그녀의 뒷모습을 삼켜버렸다. * * * 쿠웅-!!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데스 웜의 거대한 몸뚱이가 모래바닥 위로 쓰러졌다. 기절한 채 모래폭풍에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진 탓인지, 한때 위협적이었던 외피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퍼퍼펑-! 마지막 일격은, 유진성의 손에서 펼쳐진 파이어 블래스트였다. [파티원 ‘유진성’이 ‘데스 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티원 ‘유진성’이 ‘데스 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엘리트 몬스터 ‘데스 웜’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크……!” 사냥 성공을 확정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지자, 긴장이 풀린 건지 유진성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른 팀원들도 별다를 바 없었다. “후우, 후우.” 뭐, 데스 웜과의 전투만 놓고 보면… 솔직히 이건 사냥이라기보다 마무리에 가까웠지만. 이 상황을 만들기까지의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으니, 이 반응도 당연히 무리가 아니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팀장으로서 파티원들의 노고를 치하(?)해 준 뒤, 데스 웜의 사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팀장님도 좀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박진우가 염려되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캬, 마력핵이 얼마나 토실토실하면 외피 바깥까지 삐져나왔냐.’ 힘들게 사냥해 놓고, 루팅을 미룬 채 주저앉는다? 그거야말로 쌀먹 플레이어로서 실격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스릉- 그러니 일단 발골부터가 먼저다. 서걱- 단검을 꺼내 데스 웜의 찢어진 외피 사이로 칼날을 밀어 넣었고, 집채만 한 괴수를 능숙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찌이익-! 툭- 이어서 갈라진 외피 사이로 흘러내리는 마력핵 조각들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얼마야?’ 마력의 폭풍이 강제로 밀어 넣은 강력한 마력들이, 데스 웜의 체내에서 전부 결정화되어 버린 거였다. 이건 몬스터의 사체라기보단…… 마치 마력석 광맥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바로 잡아서 그런가? 이 정도까지 쏟아질 줄은 몰랐는데?’ 원래 데스 웜의 부산물은 대충 500LP에서 700LP 정도다. 물론 그것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금액.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노다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그래서 얼마나 되는 거냐고? “진성 님.” “예?” “힘드시겠지만, 옆에서 이것 좀 받아봐요.” 달칵- 와르르륵-! 대충 계산해봐도…… 최소 2,000LP 이상이다. 그걸 본능적으로 느낀 건지, 유진성 또한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저희… 대박 난 겁니까?” 화살 몇 발 딸깍(?)으로 2,000LP라니? 매일 이럴 수 있으면, 데드 존 쌀먹도 달달하겠는데? └ 이놈은 ㅁㅊ놈이다 진짜;; └ 개웃기네ㅋㅋㅋ 뒈질 뻔 한 건 생각 못 하눜ㅋㅋㅋ └ 하지만 살았쥬? 지직- 지지직- └ 아ㅋㅋㅋ 마력폭풍이 데스 웜 대신 잡아줬다고 ㅋㅋㅋ └ 근데 데스 웜이 원래 이렇게까지 마력핵을 많이 갖고 있나? └ 아닐걸; 아마 마력폭풍 효과인 듯. └ ㅅㅂ;; 쌀숭이쉑 운빨 미쳤네 그냥;;; 뭘 모르는 성좌놈들이야 뭐라고 떠들어대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할 뿐이었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숫자인가. 다른 부산물까지 합치면 3,000LP가 넘을지도 모르는 수준. ‘……캬.’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주저앉아있던 다른 파티원들도 슬금슬금 일어섰다. 고은아는 이미 부산물 해체 작업을 돕고 있었고, 박진우도 한숨을 푹 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흐으. 팀장님께서 이러시면… 저희는 쉴 수가 없잖습니까.” 콰드득- 서걱- 톡- 유진성이 관리하는 인벤토리에 마력핵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금융 치료의 힘인 걸까? 다 죽어가던 파티원들의 표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밝아지고 있었다. └ 데이브 파티 ㅈㄴ불쌍하네;; └ ㄹㅇㅋㅋ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님? 어허. 이 정도가 뭐 힘들다고 그러십니까 형님들. 일은 마력폭풍이 다 했고, 저희 파티는 지금 숟가락만 올리는 중입니다만? “…….”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데스 웜의 부산물을 전부 다 수거할 수 있었고. “팀장님.” 그때 갑자기 묵묵히 일하던 강민우가 슬쩍 다가왔다. 뭔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인데, 티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꽤 장하면서도 안쓰럽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처럼, 미세하게 후들거리고 있는 종아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갑자기 아주 괘씸한 소리를 지껄였다. “저희는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숙소 가서 남은 시간 쉬어도 되겠죠?” 아니, 쉰다고? 48시간짜리 미션에서, 이제 고작 10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 그… 방장아;; 너네 어차피 1등 아님? └ 이러다 애들 죽어;; └ 산재 보험…은 들어놨겠지?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캠프로 복귀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왜냐고? 처음 내가 마력폭풍을 찾았던 이유는, 데스 웜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원래 내가 파밍하려 했던 노다지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황에, 시간도 38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여기서 그냥 돌아간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럴 순 없다. 암 그렇고 말고. 이게 다 너희 모두를 위한 일인걸?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예……?” 강민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아니, 강민우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있던 유진성의 손이 멈췄고. 고은아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한층 더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시작이라고요.” 나는 모래 평원 너머를 가리켰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광활한 잔해의 벌판. 거기에 뭐가 있냐고? 사실 이게 핵심이었다. 마력의 모래폭풍을 찾았던 원래 이유. 흡성충. ‘저것도 다 캐면, 최소 1,000LP는 넘을 것 같군.’ 사실 흡성충은 아무도 관심을 가질 리 없는 잡몹이다. 원래 흡성충을 사냥하면? 부산물이 채 3LP도 안 된다. 가성비로 따졌을 때, 쓰레기 중의 쓰레기.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한 가지 특성이 있다. 마력을 흡수해서 체내에 저장하는 습성. 그러니 마력의 모래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폭풍의 잔류 마력을 잔뜩 빨아들인 흡성충의 배를 가르면. 한 마리당 최소 50LP 이상의 마력핵을 파밍할 수 있다. 이게 내가 마력폭풍의 발원지를 계속 추적해서, 흡성충의 서식지까지 쫓아온 이유였고 말이다. 데스 웜으로 원래 목표치는 이미 다 채운 거 아니냐고? 내게 누군가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다는 대답을 해주고 싶다. “다들,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 “그래도 남은 시간 다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다들 뭔가 체념한 것 같은 표정인데, 착각이겠지? “한 20시간 정도만 고생하면 될 것 같은데, 우리 힘 내보죠?”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래도 명색이 각성자들인데, 과로사하진 않을 거 아니야?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마력의 모래폭풍이 할퀴고 간 사막은, 하루가 지나도 여전히 붉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모래 지형이 아예 뒤바뀌어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까지 언덕이었던 곳이 평지가 되었고, 평지였던 곳에 바위가 솟아 있었다. 장하이는 대검을 등에 지고, 바뀌어 버린 사막의 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이 정도 지형 변화라면…… 규모가 상당했나 본데.’ 마력의 모래폭풍. 그 자연재해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풍경. 하지만 그 감상은 그리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지금 장하이가 여기 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으니 말이다. “어후. 지형이 다 뒤집혀서 좌표 찾기 너무 힘드네.” “대장.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요.” 뒤에서 따라오던 쉬에밍과 린시우가, 태블릿 장비로 GPS를 확인하며 말했다. 장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왔다.” 멀찍이 보이는 모래 둔덕을 응시하며, 장하이는 마른침을 천천히 삼켰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니,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시신이나… 수습해주자고.’ 사실 장하이의 마음이 지금까지도 뒤숭숭한 건, 단순히 어제 그냥 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장하이의 파티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다시 나타난 가장 큰 목적은, 솔직히 시신을 수습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장하이의 목적은 마력폭풍에 휩쓸렸을 데스 웜의 사체. 녀석이 죽었을지 생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존해 있더라도 빈사 상태일 터였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 데스 웜의 부산물만 잘 챙겨 담으면, 용병대의 일주일 치 벌이가 한 방에 해결될 거다. 그러니 이걸 알면서도 지나치는 건, 용병들에게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래 언덕을 하나 넘었을 때였다. “대장! 저기!” 쉬에밍이 손을 뻗어 전방을 가리켰다. 시야 저편. 텅 빈 모래 평원 한가운데에, 거대한 '무언가'의 잔해가 드러누워 있었다. * * * 장하이의 발걸음이 잔해 앞에서 딱 멈추었다. 데스 웜이었다. 정확히는, 데스 웜이‘었던’ 것. 하지만. “…… 뭐야, 이건.” 장하이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진 건, 잔해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데스 웜의 거대한 몸통은 여전히 모래밭 위에 쓰러져 있었지만……. 외피가 벗겨져 있었다. 그것도 대충 찢어진 게 아니라, 칼날이 지나간 듯 정교하게 절개된 자국이었다. “……!”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신들보다 먼저 이 사체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건 멀찍이서 봐도, 이미 누군가의 손이 지나간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뭐, 이런……!’ 가까이 다가가 두 눈으로 확인하니, 순식간에 허탈감이 몰려왔다. 마력핵이 있어야 할 체강은 텅 비어 있었고. 부산물이 될 만한 부위는 전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당황한 장하이는 잔해 앞에 쪼그려 앉아, 절개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칼자국의 각도. 깊이의 균일함. 근육의 결을 따라 정확하게 분리된 부위들. 이건 그냥 부산물을 뜯어간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 아주 정교하게 발골을 마친 흔적이었다. ‘……우리가 한발 늦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마력의 폭풍이 완전히 잠잠해지는 걸 확인한 직후.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캠프를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물리적으로 그들보다 빨리 데스 웜을 찾을 수 있는 이들은 존재치 않는다. 게다가 이미 발골까지 다 끝내서 모든 부산물을 챙겨 사라졌다고? ‘그게 가능한 타임라인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잔해를 살피던 쉬에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장…… 잔류 마력 패턴을 보니, 이 녀석은 폭풍에 맞아 사망한 게 아닙니다.” “그럼?” “폭풍에 휩쓸리긴 했는데… 그 이후에 분명히 사냥당했어요.” “……!” “화염 마법의 잔류 패턴이 너무 명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린시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 화살 자국도 있네요.” “음…….” 린시우와 쉬에밍의 말을 들은 장하이는, 순간 신음을 삼켰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자마자, 유일한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설마, 그 헌스쿨 애송이 놈들이?’ 장하이는 이건율 파티를 제법 오래 추적하면서, 그들의 전투 패턴을 꽤 장시간 관찰했었다. 그러니 데스 웜의 사체를 꼼꼼히 확인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폭풍에서… 살아남았던 거야.’ 시간적으로도 이건율 파티가 아니라면, 벌써 이렇게 깔끔하게 발골까지 해서 사라졌을 수가 없다. 마력폭풍의 반경은 생각보다 넓었고, 폭풍이 끝난 이후 들어온 수색대들은 결코 자신들보다 빨리 여기에 도달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으득- 장하이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애송이들 좋은 짓만 한 꼴이 됐잖아?’ 주먹을 쥔 그의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나 보군요, 대장.” “…….” 쉬에밍의 말에, 장하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데스 웜 추적에만… 며칠을 썼었는데.’ 500LP 이상의 부산물을 예능이나 찍으러 온 놈들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대로 지나갈 수는 없지.’ 장하이의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 * * 벌컥-! 중앙 통제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안 데드 존 베이스캠프. 헌터즈 스쿨 촬영팀의 심장부인 이 공간에서, 지금 이 시각 벌어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긴급회의였다. “회의 시작합니다.” 장세연 PD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장세연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가 사라지고, 이마에 핏줄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더 심각했다. 이정민 FD. 경리팀장. 그리고 서브 PD 한 명. 전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질려 있는 건 이정민과 경리팀장 쪽이었고. 장세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건지, 화가 나서 웃음이 나오는 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자. 다들 화면 보고 있지?” 장세연이 턱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48시간 자급자족 미션의 최종 LP 집계. 16개 팀의 결과가 순위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팀은 200LP에서 400LP 사이에 몰려 있었다. 상위권인 3위에서 5위까지가 500에서 650LP 정도. 2위인 이성환의 팀조차…… 750LP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 그러니까 이게 당연한 거다. 제작진도 애초에 이 정도를 예상하며 기획했던 거였고. 그런데……. [1위 : 이건율 팀 — 4,127LP] 뭔가 잘못된 결과가 나와버렸다. 경리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PD님. 저희 플리마켓 전체 예산이 얼마인지 아시죠?” “10,000LP. 알고 있어.”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18개 팀 평균을 500LP까지 잡은, 아주 넉넉한 수치였다고요.” 경리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저 팀 하나가…… 전체 예산의 40%를 털어가 버리면…….”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플리마켓의 규칙은 간단했다. 참가자가 LP로 물품을 구매하면, 제작진이 가격의 50%를 현금으로 대납해 주는 시스템. 그러니까 이건율이 4,000LP로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은 8,000LP였고. 그 말인즉슨, 제작진의 예산도 똑같이 그만큼 소모된다는 뜻이다. “저희 다음 미션 예산이 그대로 구멍 나게 생겼다고요…….” 경리팀장이 힘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서브 피디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희…… 지금이라도 룰을 좀 수정하면 안 될까요? 반액 지원 한도 조항을 신설해서…….” “안 돼.” 장세연이 단칼에 잘랐다. “한 번 뱉은 룰을 방송국이 무르면, 짜치는 그림이 나와. 참가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 그럼 예산을 어떻게……!” 경리팀장의 절규에, 장세연은 대답 대신 모니터의 숫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4,127. 2위 팀의 5배가 넘는 수치. 이런 숫자는, 미다스의 정원 이후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어떤 의미에서는 징하네 징해.’ 하지만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예산 재난이었지만. 동시에, 방송각은 역대급이란 소리이기도 하니까. 장세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화이트보드를 향해 몸을 돌린 그녀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예산을 늘릴 수 없으면…… 방법을 바꾸면 어떨까.” “예?” “플리마켓에 우리도 참여하는 거야.” 마커를 집어 든 장세연이 화이트보드에 짧게 한 줄을 적었다. [우리가 가진 걸 팔면?] “우리 물건을 이건율이 사게 만들면. 그러면 방법이 좀 생기지 않을까?” 방송국이 손해를 좀 볼 수도 있겠지만, 촬영 예산을 지키면서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제작진이 고통받는 이 장면까지도 잘 편집해서 방송 소스로 쓴다면. ‘재밌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어.’ 장세연의 표정이 다시 살짝 밝아졌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최근 국내에서 헌스쿨의 인기는, 이제껏 모든 시즌을 통틀어도 전례 없을 만한 수준이었다. 시즌 1과 2때도 항상 방영 기간 내내 이슈몰이를 하던 헌스쿨이었지만. 이번 시즌 3의 경우에는, 지표의 단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던 거다. 특히나 며칠 전에 본방이었던 3화. ‘미다스의 정원’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난 이후, 헌스쿨 커뮤니티의 트래픽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특히 이제껏 방영됐던 모든 헌터예능을 전부 통틀어서, 리얼리티와 현장감이 압도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캬 ㅋㅋ 이게 헌터예능이지 ㅅㅂㅋㅋ -헌스쿨 소꿉놀이라는 놈들 다 어디감?ㅋㅋ -ㄹㅇㅋㅋ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3화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인 이건율의 이야기는, 어딜 가도 빠질 수가 없었다. -근데 이건율 이 ㅅㄲ는 진짜로 난놈이다ㅋㅋㅋ -아무리 미리 다 설계했다고 해도 그렇지 ㅅㅂ 나였으면 절대 못함 ;;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황금사자 입 벌리는 것만 봐도 바로 지릴걸? 그래서 정하윤은 오늘도 쉴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가입 승인 요청이 아직 서른 건도 넘게 쌓여 있었으니까. ‘내가 힘내야지 뭐… 어쩌겠어. 그래도 보람은 있잖아?’ 일일 방문자 수가 5만을 찍었고, 가입 대기열은 매일 세 자릿수가 기본이 됐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들 몰려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인장!! 문 열어줘요!!! 급함ㅠㅠ! -바니 사진첩이라도 공개해달라ㅠㅠ -바니 굿즈 공구 아직 시작한 거 아니죠??? ‘후훗.’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니 굿즈 출시 찌라시가, 벌써 이렇게 퍼졌나?’ 사실 진짜 공구를 진행할 예정은 아니다. 저작권 문제도 있고, HBC 입장에서는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이 카페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노트북 한 켠에 팝업돼있는 단체 메신저 대화창도, 활발하기 그지없었고……. 그러니까 내가 좀 피곤한 것만 빼면, 모든 게 완벽한 상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윤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스포방지위원회 님도 계셨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카페 설립 극초기부터 함께 해온 전우(?)를 잠깐 떠올린 하윤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항상 그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던 ‘상암동 스포방지 위원회’님은, 며칠 전부터 해외에 출장이 있다며 연락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딸깍- 어쨌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부지런히 마우스를 움직인 결과. “흐아. 됐나?” 드디어 전날 기준 가입 신청 건을 모두 클리어한 하윤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제 숙제도 다 끝냈으니, 내일의 출근을 위해 잠들 시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불을 끄고 누웠다. 이제 잠들기 전, 마지막 루틴이 남아 있었다. ‘피곤해도, 모니터링은 한 번 더 하고 자야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띠링- 띠링-! 그녀가 유일하게 설정해 둔 알람. ‘이건율 LP정산소’ 팬카페의 실시간 알림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카페의 특정 게시글에 일정 수준 이상 트래픽이 발생하면 울리도록 설정해둔 알람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게시글을 확인한 하윤은……. [속보] 님들;; 헌스쿨 2차 미션, 촬영지가 중국 시안 ‘데드 존’이라는 데… 사실임?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이런 류의 어그로꾼이야.’ 삭제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헌터즈 스쿨 촬영지 관련 찌라시는 시즌 초부터 거의 매주 올라왔으니까. 남극이니, 사하라니, 지난주에는 마리아나 해구라는 소리까지 나돌았다. 그러니까 내용은 볼 것도 없다. 헌스쿨 참가자들이 굳이 중국에 있는 데드 존까지 갈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새로고침을 누르자, 같은 내용의 글이 세 개 더 올라와 있었다. ‘어……?’ 세 개. 아니, 네 개. 새로고침을 한 번 더 눌렀다. 여섯 개. 전부 각기 다른 아이디, 각기 다른 커뮤니티에서 복사해온 캡처본이었다. 출처는… 중국 쪽 커뮤니티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구만 달려 있었다. ‘어그로……가 아니었다고?’ 정하윤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엎드려 있던 자세는 양반다리로 바뀌었고, 노트북을 무릎 위로 끌어당기는 손은 빨랐다. 두 번째 게시글에 첨부된 이미지를 눌렀다. 붉은 안개. 모래로 뒤덮인 바닥. 그리고 원거리에서 촬영된, 전투 중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실루엣. 화질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합성이라면 화질이 더 좋아야 했다. 이건 폰카로 급하게 줌 당긴 티가 너무 나는 사진이니까. ‘……그럼 조작이 아닌데.’ 노트북 화면에 밀착하고 있던 정하윤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졌다. 실시간 알림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댓글창이 폭발하기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데드존이 진짜면 미친 거 아님? 거긴 진짜 죽을 수도 있는거 아니에요? -원래 헌터 예능에선 죽을 수도 있긴 함;; -아니;; ㅅㅂ 데드 존은 그런 차원이 아니잖음;; -아 근데 사진 보면 진짜인 것 같은데……. 그리고 슬슬 정하윤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걱정은, 꽤나 복합적인 것이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오히려 좋아. 이건율 데드존 공략이면 시청률 터지겠네 -ㄹㅇㅋㅋ 걍 기대밖에 안 되는데; 이거 정상임? └ 정상 아님;; 기대는 ㅅㅂ;; 제정신인가? 일단, 당연히 1차적인 걱정은 이건율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건율이 아무리 역대급 재능을 가진 참가자라 해도……. 데드 존이 어떤 곳이던가? 무려 게이트 폭주가 일어난 위험지대 아닌가. 국내에서는 랭커급 길드나 데드 존 파견을 나간다고 알고 있는데 루키에 불과한 헌스쿨 참가자들이 그런 곳에 간다니.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다. -ㄷㄷ데드존이면 통신도 안 될 텐데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더 불안하네ㅠㅠㅠ -관리자님 뭐 아는 거 없어요? ‘이럴 때, 스포방지위원회 님이라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대형 검색 엔진의 실시간 트렌드에 이미… ‘헌터즈 스쿨 데드 존’이 올라와 있었다. ‘……벌써?’ 정하윤의 엄지가 트렌드 항목을 눌렀다. 타임라인이 쏟아졌다. 걱정하는 팬들의 글은 예상했다. 그런데 그 옆에 붙는 댓글들이 문제였다. ‘안전 불감증이다’부터 시작해서… 제작진을 고발해야 한다느니, 시청률 장사에 사람 목숨을 걸었다는 이야기까지. 이건 여론이 갈리기 시작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불을 지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게 커지면.’ 이건율과 참가자들에 대한 걱정을 넘어, 이제 헌스쿨 자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작진이 빨리 입장을 내야 할 텐데.’ 하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걱정되는 것과 별개로……. 제작진의 공식 입장이 나올 때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을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대충 20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무슨 말이냐고? 마력핵이 사방에 널려 있던 노다지에서…… 그 모든 부산물을 싹싹 긁어모아 채집하는데, 정확히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주 보람찬 이틀이었다. 일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LP가 벌리는 현장이라니! 이런 게 바로 노동의 진정한 가치 아닐까? “저희는 죽을 뻔했습니다만?” 물론……. 다른 파티원들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었다. “두 번은 못 합니다.” “전 할 수 있슴다!” “은아 님… 제발…….” 아직도 퀭한 표정인 강민우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은아를 응시했고, 나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힘들었던 게 맞긴 한데……. 그래도 덕분에 4000LP도 넘게 벌었잖아? 게다가 방금 전까지 열 시간도 넘게 푹 잘 수 있었고. 대체 뭐가 문젠데?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문제 아닐까요, 팀장님.” 말을 듣고 보니 박진우의 가녀린(?) 종아리는… 아직도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쩌겠어. 팀장 잘못 만난 죄 아닐까? └ 이 사악한 ㅅㄲ……. 지직- 지지직- └ 근데 솔직히 대이브가 대이브 했을 뿐임ㅋㅋ └ ㄹㅇㅋㅋ 아니, 이 형님들은 계속 시스템 통신 끊기는데도 진짜 끈질기게 시청하시네. 이러다가 옐로 존 들어갈 때까지도 스트리밍 켜두라고 하시겠습니다 들? └ 당연한 거 아님? └ 레드 존에서도 키셈. └ 블랙존 가도 마찬가지임 ㅇㅇ;; └ 블랙존은 씹ㅋㅋㅋ 10초마다 0.5초 정도 화면 송출될듯ㅋㅋㅋ -저야 후원만 해주시면 켜긴 하는데……. └ 돈미새 ㅅㄲ;; 어쨌든 이렇게 잡담을 떨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덜컹-! “다 온 것 같은데요, 팀장님?” “내립시다!” 군용 픽업트럭에서 내린 우리의 눈앞에는, 데드 존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꽤 이질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항상 황량하기 짝이 없던 이 구역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건 처음 봤으니 말이다. [시안지역 플리마켓] 그리고 이 허름한 간판 가까이 다가서자……. “오! 이건율 참가자! 빨리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던 현장 PD 하나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막내 PD라는 직함에는 늘 꼬리표가 따라붙는 법이다. 귀찮은 일, 급한 일, 그리고…… 아무도 하기 싫은 일. 최유진은 올해로 헌터즈 스쿨 제작팀에 합류한 지 딱 6개월 된 신입 PD였다. 입사 동기들 사이에서 좀 센 편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저 위에서 벌어지는 판을 다 이해하기에는, 6개월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정민 선배, 진짜 이거 제가 하는 거예요?] [그… 렇게 됐다.] 어제 저녁. PD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회의 끝에, 장세연 메인 PD가 꺼냈던 최후의 아이디어. [플리마켓에 우리 물건도 출품한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었다. 제작진이 가진 걸… 참가자들에게 판다? 촬영 차량, 드론, 텐트……. 그런 게 참가자들에게 도움이 되긴 할까? 아니. 도움이 되긴 할 거다. 꼭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야만 쓸모있는 건 아니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아이디어가 잘 작동한다면, 방송각이 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판다고 팔리나? 참가자들이 사야 의미 있는 거지.’ 가장 중요한 이 미해결 과제(?)가 남아있었고, 그게 오늘 최PD가 플리마켓에 나와 있는 이유였다. 누군가가 해야 했는데, 그녀가 막내였을 뿐이다. [최PD. 할 수 있죠?] [그… 해보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만들어진 제작진의 긴급 매각 코너. “후우.” 최유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임무를 정리해야 한다. ‘결국 가장 LP가 많은 이건율 팀에게, 제일 비싼 걸 팔아야만 하는데…….’ 장세연 PD가 특별히 당부한 건 하나였다. [딴 건 몰라도, 샌드버기는 무조건 팔아야 해, 최PD. 알죠?] 사실 이것만 팔리면, 모든 문제가 대부분 해결되긴 한다. 무려 6,500LP에 매각 예정인, 사막지대 촬영용 차량. 이걸 살 수 있는 참가자 팀은 오직 이건율 팀 한 곳뿐이었고. 그들이 이걸 사가기만 한다면, 당장에 가장 급한 불인 예산 문제가 해결되니까. 언밸런스한 이건율 팀의 LP를, 한 방에 빨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고 말이다. ‘문제는…….’ 이걸 이건율 팀에게 어떻게 팔아먹느냐는 거다. ‘여기가 중고차 시장이었다면 팔렸겠지만…….’ 사실 이 샌드버기 차량의 원가는, 무려 1.5억이 훌쩍 넘는다. 중고로 팔아도 1억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한 차량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6,500LP라는 가격이 엄청나게 싼 건 맞다. 하지만 여긴 데드 존에 있는 플리마켓이잖아? 싼 게 매력 있는 시장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물건이 매력 있는 시장이다. “돌겠네, 진짜.” 최PD는 눈앞에 펼쳐진 플리마켓 현장을 한 번 더 훑었다. 시안 데드 존 기지 외곽에 임시로 설치된 이 시장은, 얼핏 보기에는 그냥 허름한 노점 몇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돈의 규모는 허름함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일반 매대, 경매 매대, 그리고 최PD가 지금 진을 치고 있는 제작진 긴급 매각 코너. 참가자들의 반액 지원 규칙은 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매가의 절반은 제작진이 대납. 미사용 LP는 미션 종료 후 전액 소멸. 최PD의 시선이 일반 매대 쪽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팀들은 저기서 포션 몇 개, 해독제 서너 묶음, 기본 소모품 위주로 장바구니를 채우고 있었다. 200LP, 300LP짜리 예산으로는……. 다음 미션인 72시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를 확보하는 것만 해도 빠듯하니까. ‘그렇다면 난.’ 대체 이 물건들을 어떻게 세일즈해야 하는 거지? 샌드버기 : 6,500LP 촬영 드론 : 800LP 야전 텐트 : 600LP 구급 키트 : 400LP 위성 통신기 : 500LP ‘아니이… 내가 뭐 영업의 신도 아니고오…….’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니,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최PD가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덜컹-! 군용 픽업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매각 코너 근처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는 인원은 다섯. 선두에 선 남자가 주변을 한 바퀴 훑더니, 시선이 이쪽에서 딱 멈췄다. 그녀가 기다렸던 참가자. 바로 이건율이었다. “오! 이건율 참가자! 빨리 오셨네요?” 최PD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더욱 막막함이 짙게 밀려온다. “네, 안녕하세요.” 이건율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최PD는 심지어 양심의 가책까지도 느껴졌다. 이 사람이 제작진 물건을 사려고 할 것 같지도 않지만. 생각해보면 산다고 해도 팔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미션에 도움될 만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예의 바르고 성실한 데다……. 헌스쿨 시청률을 견인 중인 일등 공신의 뒤통수를 치라고? ‘그냥 장PD님이 예산 좀 더 따오시면 안 되나? 국장님 구워삶는 거 전문이시던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따라 내린 팀원 네 명도 각자 인사를 건넸다. ‘후우.’ 그런 그들을 보며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최PD는, 우선 자연스럽게 가이드를 시작했다. 어차피 뭐가 됐든, 다른 참가자 파티들에게 했던 것처럼 먼저 플리마켓 전체 설명부터 깔아야 한다. “대충은 이미 들으셨겠지만, 우선 플리마켓 규칙부터 간단하게 안내해드릴게요.” 이건율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유진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모든 물품은 전 팀 동일 가격이고요, 구매가의 50%는 제작진이 지원합니다.” “네.” “미사용 LP는 미션 종료 후 소멸되니까, 필요한 건 여기서 다 챙기시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 최PD를 공격해왔다. “그, 소멸되는 LP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건율이었다.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답변했다. 매뉴얼에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모든 LP를 모아, 제작진이 기부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쓰읍.” “예?” “아,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뭔가 이건율의 입에서 된소리 비슷한 게 난 것도 같았지만, 아마 착각일 거다. 이건율처럼 성실하고 올곧은(?) 참가자가 LP 기부에 불만을 가질 리는 없었으니까. “자, 그리고…….” 어쨌든 잠시 후 최PD의 설명은 점점 마무리되어갔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게 되는 거고, 차액을 제작진이 내주신다는 거죠?” 대체로 간결한 대답들.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아직까지 최PD가 세일즈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으으…….’ 최PD는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키며, 마지막 안내를 이어갔다. “아, 그리고 하나 더요.” 이건율 파티의 시선이 다시 한번 최PD의 입으로 모였다. “플리마켓에서 구매하신 물품들은, 2차 미션이 전부 끝났을 때 다시 현금화해서 참가자분들에게 돌려드릴 겁니다. 이 부분 명시해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그런데 다음 순간. “……!” 왜인지 이건율의 발걸음이 갑자기 딱 멈췄다. “제일 중요한 걸 놓칠 뻔…….” 으음?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최PD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건율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심지어 뭔가 눈빛부터가 달라진 느낌이다. 이제까지 의례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모든 물품에 적용되는 건가요?” “아, 네. 소모품은 제외고요. 장비류는 전부 해당됩니다.” 확실한 건,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뭐, 뭐야. 이 사람… 무서워.’ 덕분에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이 시점에 슬슬 제작진이 공들여 준비한 특별 매대를 소개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자책하고 있는데, 이건율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일반 매대 쪽을 한 번 훑었다. 경매 매대 쪽도 봤다. 그러다 시선이, 최PD 뒤쪽에 진열된 제작진 물품들에 도달했다. ‘어……?’ 그리고 그는… 말없이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왜… 관심 갖는 거지?’ 이건율은 먼저 샌드버기 앞에 섰다. 차체를 한 바퀴 돌며 살폈다. 타이어를 발끝으로 톡 건드렸다. 연료 탱크 쪽을 확인했다. “이거 키로 수 몇이에요, PD님?” “그… 예?” “연식도 알고 싶은데.” “저, 정확히는 모르는데… 작년에 산 새 차일걸요? 평소에 탈 일이 거의 없어서, 키로 수도 끽해야 2천…….” 최유진은 혼란스러웠다. 여기가 혹시 중고차 매장이었던가? 이런 대화를 지금 왜 하고 있는 거지? “…….”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건율이 이번에는 드론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 두 개를 들어보고, 카메라 각도를 확인했다. 위성 통신기의 뒷면을 뒤집어 봤다. 텐트의 마력 차폐 라벨을 확인했다. 구급 키트의 포션 종류를 하나하나 살폈다. ‘마치 사기라도 할 사람처럼… 왜 저러는 거야?’ 이쯤 되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항상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건율이다 보니, 혹시 이번에도 뭔가 특별한 공략포인트를 찾아낸 건 아닐까? 어쩌면 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던 임무를… 완수해낼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좋은데요.” 그… 뭐가 좋은지 구체적으로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이거 드론은, 배터리 세트 하나 더 주실 수 있나요?” “가, 가져가세요. 거기 있는 건 같이 쓰셔도 돼요.” “오.” 그리고 아마……. 한 30초쯤 흐른 것 같다. 팀원들과 뭔가 대화를 나눈 이건율이, 상상조차 못 했던 파격적인 대사를 꺼내들기까지 말이다. “이거 전부 살게요.” “……?!” 순간 너무 당황한 탓에, 최유진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도 못했다. 이걸…… 다 사겠다고? 그러면 진짜로 8천 LP 다 쓰는 건데? “진짜예요?” 팀원인 강민우도 의아한 모양이다. “팀장님, 진짜 이거 이렇게 사도 되는 거 맞습니까……?” 당연한 거다. 여기다 돈을 다 써버리고 나면, 다음 미션에서 쓸 소모품을 살 돈이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율은 진짜 뭔가 계획이 서기라도 한 건지, 상당히 단호한 모습이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으음.”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거든요.” 그렇게 이건율의 마지막 대사를 들은 최유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건율 참가자는… 뭔가 계획이 있었던 거였어.’ 최유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최애가 바뀔지도 모를 것 같다고 말이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데드 존에서의 일정은, 총 2주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건 처음 시안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제작진을 통해 고지됐던 내용이고, 때문에 모든 참가자가 다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니 대충 일정을 역산해보면, 총 3~4 번 정도의 미션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48시간 자급자족 미션과 플리마켓 이벤트만으로 벌써 첫 주의 절반이 지나버렸고. 방금 발표된 다음 미션 또한, 최소 3~4일짜리 미션이었으니 말이다. [미션 명 - 옐로 존 탐사] [모든 참가자들은 72시간에 걸쳐, 옐로 존의 환경과 서식하는 몬스터들에 대한 조사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각 팀에게는 조사해야 할 최소한의 조사대상 목록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이 모든 목록에 대해 72시간 이내로 조사임무를 완수해야 하고…….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현상이나 몬스터를 발견할 경우, 해당 팀에게 커다란 가산점이 주어집니다. 탐사 미션이라. 아무래도 옐로 존의 경우 난이도가 그레이 존보다 훨씬 더 높아지기 때문에, 전투 미션이 아닌 탐사 미션이 주어진 모양인데……. -이 두 번째 미션에서 획득한 점수는, 1포인트 당 10LP로 환산됩니다. -이렇게 환산받은 LP 또한 다음 미션이 진행되기 전 플리마켓에서 사용하게 되니, 다음 미션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포인트를 획득해야 합니다. -단, 직전 미션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팀은 다음 미션에서 가장 난이도 높고 위험한 지역에 배정되게 되니, 전략적인 점수 운영도 중요하다 할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제작진의 물품들을 싹 쓸어 담은 내 판단은, 아주 훌륭했다고 할 수 있겠다. “팀장님.” “예?” “저희…… 괜찮은 거 맞겠죠?” 박진우는 아직도 불안한 모양이지만……. “미션 내용 보셨잖습니까. 저희는 최적의 선택을 한 거라니까요?” “그, 아무리 탐사 미션이라 해도 전투를 하지 않는 건 아니…….” 걱정할 거 없다니까 그러네. 나한테 다 생각이……. └ 대체 무슨 생각임? └ ㄹㅇㅋㅋ 우리도 들어나 보자 ㅋㅋㅋ “뭐, 그렇다면 지금부터 설명 드리죠.” 드륵- 숙소의 커튼을 걷어올리자, 제작진의 늠름(?)한 샌드버기 촬영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그 자태를 보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 일단 이 녀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말입니다.” 촬영팀의 다른 물품들도 확실히 쓸모가 있었지만, 특히 이 샌드버기 차량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 줄 비밀병기다. “기동력이야, 다들 설명 드리지 않아도 인지하고 계실 테고요.” “맞습니다. 그 부분이야 확실히 장점이지 말입니다.” 샌드버기가 있어야만 탐사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 옐로존에는 존재했으니 말이다. “제가 조사해본 결과, 이 녀석을 타야만 갈 수 있는 지역이 옐로존 안에 있더라고요.”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 조사한 게 맞았으니까. 물론 샌드버기를 사고 난 다음에 조사한 거긴 한데, 그런 사소한 부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샌드버기가 있어야만… 갈 수 있는 지역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혹시 퀵샌드(Quicksand)라고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한국에서는 흐르는 모래라 하여 유사(流砂)지역 이라 부르기도 하는 지형환경인데, 이건 사실 데드 존이라 존재하는 지형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막에도 존재하는 환경이다. “대규모 이동성 사구가 존재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지형인데……. 여기는 맨발로 밟으면, 그대로 빨려들어갑니다.” “빨려… 들어간다고요?” 퀵샌드(Quicksand)는, 모래와 물이 섞여 밀도가 매우 높은 상태가 된 지형이다. 일반적인 모래보다 부력이 약해 사람이 빠지면 탈출하기 어렵고, 모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는 위험한 곳. 하지만 거대한 바퀴에 마력처리가 되어 있는 우리의 샌드버기라면, 맨땅 위를 굴러가는 것과 다름 없이 이 지형을 넘나들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조사한 바. 옐로 존의 이 유사(流砂)지역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절대 진입할 수 없는 히든 존이 존재했다. “그럼 저희는 이 샌드버기를 이용해서… 그쪽을 탐사하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희귀탐사 가산점 때문이죠.” 내 마지막 이야기에, 팀원들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로 구입한 물품들 또한, 같은 논리로 전부 다 납득 가능한 물건들이었고 말이다. “텐트는 마력 차폐가 되니까 야영 중 기습 걱정 없고, 키트에 S급 포션 세 개 들어있어요. 통신기는 옐로존에서 외부 정보 수집용 보험이고요.” 음, 옐로 존에서 잘건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니 텐트는 조금 쓸모가 없어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모두가 납득한 듯 하니까. 그럼 된 거 아닐까? └ ㅅㅂㅋㅋㅋ 이게 진짜 계획이었다고? └ 이걸… 이렇게 끼워 맞춘다고? 아니, 끼워 맞추다뇨 형님들. 방금 설명드렸다시피 최대한의 포인트를 파밍하기 위한 완벽한 선택……. └ 암만 봐도 되팔렘같은데; 예? 되…… 뭐라고요? └ 소모품 사다가 써버리면 페이 백 안 되니까, 쓰고 나서 되팔 수 있는 촬영팀 물건들만 다 산 거 아니었음? 어, 으음. └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쯤 되니까 헷갈리네 ㅅㅂ └ 진짜 의도한 것 같기도 하고…….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놈들이란. * * * 시안 데드 존. 용병 캠프라고 부르기엔 좀 허름한, 거의 폐건물 수준의 임시 야영지. 장하이는 낡은 야전 테이블에 걸터앉아, 테블릿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한국어로 빼곡히 채워진 커뮤니티 게시글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장하이가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읽는 데 언어가 필요할까. 빨간 불이 들어온 추천/비추천 수. 갈수록 격앙되는 댓글의 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게시글. 장하이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잘 됐군.’ 헌스쿨 참가자들을 멀리서 몰래 찍은 사진. 그걸 중국 커뮤니티를 경유해 한국에 흘렸다. 린시우의 아이디어였는데, 의외로 먹혔다. 데드 존에서 TV 예능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 퍼지니, 여론이 알아서 들끓어 주는 거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떠 있었다. “보람 있네요, 대장.” 린시우의 말에, 옆에서 테블릿을 함께 들여다보던 쉬에밍이 코웃음을 치며 동조했다. “한국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꼴이라니.” 장하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면 여론은 더 나빠질 거야. 한국 사람들이라고, 데드 존에서 예능촬영하는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테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방송국 놈들이 무마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긴 한데.” “그래봐야…… 현지에서 찍은 사진 앞에선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짧게 답한 장하이의 시선이 테블릿에서 떠나, 천천히 허공을 훑었다. 여론이 점점 불타오르는 걸 보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았다. 저 거슬리는 한국 예능 촬영팀이, 귀국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말이다. ‘물론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야.’ 장하이의 주먹이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데스 웜. 플리마켓에서 유통된 데스 웜의 부산물들을 떠올리자, 이가 저절로 갈렸다. 으득-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만간 한번 더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점이었다. ‘플리마켓에 접근해보길 잘했지.’ 장하이는 조금 전, 쉬에밍과 함께 플리마켓에 다녀 왔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헌스쿨 참가자 팀의 다음 미션이 옐로 존에서 벌어진다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었다. 딱히 알아냈다고 할 것도 없었다. 제작진은 아예 대놓고 플리마켓의 광장에서, 촬영을 진행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옐로 존은, 정말 간덩이가 부은 거 아니에요 대장?” 린시우의 말에, 장하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글쎄. 놈들을 너무 얕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린시우.” 헌스쿨 참가자들이 건방지고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인 건 맞지만. 그렇다 해도 얕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고 해도, 마력의 폭풍을 피해 내고 데스 웜 사냥에 성공한 것은, 역량 없이 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훨씬 더 치밀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옐로우 존이라. 여기라면 해볼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지.’ 최근에야 그레이 존에서 많이 활동했던 장하이였지만, 사실 그들 용병대의 주 무대는 옐로우 존이다. 그리고 안전지대에 가까운 그레이존보다, 옐로우 존에 위험한 요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만 해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연히 참가자 팀을 위협할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들 말이다. “흐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시우와 쉬에밍은 장하이의 반응을 조용히 기다렸다. 테이블 모서리에 기대 앉아 있던 라오판도, 무표정한 얼굴로 장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하이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천천히 올라갔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새벽 여섯 시 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안의 하늘은, 짙은 자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아암.” “진성 님, 어제 잘 못 잤슴까?” “그… 긴장이 좀 되어서…….” 우리 팀 다섯 명은, 이 이른 시간부터 이미 캠프를 나온 상황이었다. “그럼 뒷좌석에서 좀 주무시지 말입니다.” “은아 님 운전한다고 고생하시는데, 저라도 옆에 앉아 있어야죠.” 사실 이번에는…… 우리뿐 아니라 모든 참가자 팀들이 전부 데드 존에 이미 진입해 있을 터였다. 옐로 존 탐사 미션이 정확히 30분 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첫 미션과 다르게 이번에는 모든 팀들이, 어제 저녁 일찍부터 충분히 숙면할 시간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유진성 쟤는, 무슨 팬더곰 마냥 눈 밑이 시커먼데……. 혹시 내가 간밤에 코라도 골았나? 왜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 거야? “진성 님 피곤하면 좀 쉬시죠? 제가 조수석 앉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팀장님. 저 괜찮아요.” 그런데 운전은 왜 고은아가 하냐고? 그야…… 놀랍게도 이 파티에서 운전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인물이 고은아 혼자였으니까. 강민우를 제외하면 면허는 모두 다 가지고 있는데, 고은아 말고는 모두 장롱면허였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덜커덩- 덜커덩- 우리의 소중한 샌드버기는, 이미 사막을 가로지르며 씩씩하게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엔진음 덕분인지, 모래 위를 달리는 느낌에서 뭔가 운치가 느껴진다. └ ㅋㅋㅋ 그래도 샌드버기 덕분에 기동력 하나는 압도적이네 ㅋㅋ └ ㅇㅈㅋㅋ 다른 팀은 이제야 그레이존 진입한 것 같은데, 여긴 벌써 옐로존 거의 다 와가는 거 실화인가? 제가 뭐라 했습니까, 형님들. 이거, 분명 돈값 한다니까요? └ 예, 예 그러시겠쥬……. └ 돈값이야 하것지 ㅋㅋ 되팔거니까……. 지직- 지지직- 옐로존에 가까워질수록 시스템 통신이 점점 불안정해지는데도, 성좌 형님들의 채팅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내 시선은 태블릿에 박혀 있었지만 말이다. [미션 명 - 옐로 존 탐사] [시작 시각 : 06:00] [현재 시각 : 06:42 (42분 경과)] [제한 시간 : 72시간] [현재 해결 과제 : 0 / 5] 태블릿에는 간결한 미션 현황판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 미션 현황판 최하단에 명시되어있는, ‘현재 해결 과제’ 부분의 모든 스택을 다 채우면 미션 완수 최소 조건이 충족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팀의 가장 첫 번째 목적은, 이 다섯 개의 ‘해결 과제’를 최대한 빨리 달성하는 것이었다. 과제가 뭐냐고? 당연히 ‘목적물 탐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잠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팀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나처럼 자신의 태블릿을 살피고 있던 유진성이,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그 ‘히든 존’인가 찾아보기도 전에…… 기본 미션 조건도 달성 못 하는 건 아니겠죠?” 사실 유진성의 걱정은 그럴 만한 것이었다. 미션 규칙에 명시되어 있던, 순위 기반 난이도 설정 시스템. 직전 미션에서 높은 순위를 달성할수록 더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다는 이 미션 원칙은, 두 번째 미션부터 아주 충실하게 적용되어 있었으니까. 바로 이렇게 말이다. [탐사 대상 목록 — 이건율 파티] ■ 필수 조사 항목 ① 침식 골렘 서식 구역 환경 조사 - 대상 : 옐로 존 심부, 침식률 45% 이상 구역 - 요구 : 침식 골렘 1개체 이상의 잔해 시료 채취 + 서식 환경 기록 - 비고 : 침식 골렘은 물리 공격 저항이 극도로 높은 2~3등급 변종 몬스터 ……중략…… ② "마력의 모래폭풍" 잔류 흔적 관측 - 대상 : 직전 폭풍 발생 추정 구역 (좌표 미제공) - 요구 : 폭풍 잔류 마력 패턴 3건 이상 기록 + 환경 변화 촬영 - 비고 : 좌표가 제공되지 않음. 자체 탐색 필요. ……중략…… ③ 옐로 존 위험 생물 분포도 작성 - 대상 : 배정 구역 내 서식 몬스터 최소 4종 이상 - 요구 : 종별 서식 좌표, 개체 수 추정, 위협도 평가 - 비고 : 사막 귀(砂鬼) 외 최소 3종 이상 포함 필수 ……중략…… ④ 등급 경계면(옐로→레드) 접근 조사 - 대상 : 침식률 55% 전후의 등급 전이 구간 - 요구 : 경계면까지의 접근 경로 기록 + 시스템 동기화율 변화 데이터 수집 - 비고 : ⚠ 레드 존 진입 금지. 경계면 200m 이내 접근만 허용. ⑤ [특수 항목] "사암 동굴 구조물" 내부 탐사 - 대상 : 옐로 존 중심부 추정 좌표 부근, 지하 사암 동굴 - 요구 : 동굴 내부 구조도 작성 + 내부 환경(마력 농도, 온도, 생물 유무) 기록 - 비고 : ⚠ 사전 탐사 기록 전무. 위치 불명확. 기존 탐사대 접근 실패 이력 있음. 사실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만 보면 딱히 뭐가 어렵다는 건지 와닿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곳 데드 존의 데이터를 며칠째 분석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 탐사 대상 목록의 악랄함(?)이 피부로 완전히 와 닿는다. 일단 첫 번째. “일단 침식 골렘부터가, 잡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박진우의 말이 맞다. 저건, 지금 우리 전력으로 처치 자체가 불가능한 괴물이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고, 아주 정직하게 맞붙는 걸 가정했을 때의 얘기긴 하지만……. “침식 골렘을 꼭 잡아야만 잔해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라잖슴까?” 순진해 빠진 고은아의 얘기가 틀린 건 아니지만 뭐. 나처럼 사전지식이 있는 게 아닌 이상, 1번부터 클리어하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조건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2번이야 그나마 할 만해 보이고…….” 강민우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모래폭풍은 우리가 직접 한번 겪어봤으니, 이와 관련된 패턴 기록이 가장 쉬운 탐사 목표인 게 맞다. 아직 팀원들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막말로 내가 알고 있는 잔류 패턴 몇 개를 이제 막 발견한 것처럼 지어내도 제작진 입장에선 알 길이 없을 거다. 날로 먹을 수 있단 얘기다. └ 그… 반칙 아님 그건? 미리 알고 있는 답안지를 적어 내면 안 된다는 룰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만? └ 사기꾼 ㄷㄷ └ 근데 마력폭풍 한번 만났다고 잔류패턴을 세 개나 기억하는 건…… 원래 가능한 부분인가? └ 상대는 대이브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아니, 나도 그런 건 불가능해요 이 성좌놈들아……. 그냥 원래 알고 있었을 뿐이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오해를 굳이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러면 결국 제일 만만한 건, 2번, 3번이겠습니다.” 박진우의 정리가 맞다. 위험 생물 분포도야, 옐로 존 난이도에 기반하기에 쉬운 건 아니었지만 못할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가장 큰 문제는, 딱 봐도 가장 어려워 보이는 4번 탐사 대상. “결국, 레드 존 경계면 탐사……. 이게 제일 문제네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이 미션이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 레드 존 경계면 탐사가, 위험 생물 분포도 조사보다 어렵다고? └ 경계면이라고 해도 결국 레드존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 동기화율 데이터만 수집하면 되는데? 이건 뭘 모르는 성좌들의 헛소리일 뿐이다. 미션의 위험도만 놓고 보자면 성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지만……. 결국 난이도는, 해당 과제의 ‘달성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게 그렇게 어렵슴까?” 고은아가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레드 존과 옐로 존의 경계 구간은…… 칼로 무 자르듯 정해져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럼…….” “마력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경계구역이 변동되는데, 그걸 정확히 따라잡을 수 없으면 높은 확률로 잘못된 결과물을 측정하게 된다는 말이죠.” “아하.” 그러니까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면서 어렵기만 한 과제를, 제작진이 영리하게 잘 뽑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잠시 제작진의 잔머리(?)를 속으로 극찬하고 있는데……. 박진우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런데, 팀장님.” “예?” “마지막 이게…… 4번보다 더 어려운 거 아닙니까?” 박진우의 손가락은, 태블릿 화면에 떠오른 5번 항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전 탐사 기록 전무에, 위치 불명확……. 이건 뭐,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걸 찾으라는 수준 아닙니까?” 뭐, 박진우의 말이 틀린 건 아니긴 하다. 실제로 제작진도 그런 차원에서, 가장 악랄한 난이도의 탐사과제로 이렇게 배정한 것일 테고. 하지만……. “은아 님.” “넵, 대장님!” “지금 레이더 확인 가능하죠?” “옙! 가능합니다!” “우리 목적지 얼마나 남았다고 떠요?” “어, 음…… 그러니까.” 드르르르…… 칙. 잠시 뭔가를 확인한 고은아가, 샌드버기의 속도를 차츰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 거의 도착했네요?” 엔진 소리가 잦아들더니,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모래바람 사이로 드러난, 거대한 사암 바위 지형. 옐로 존 특유의 주홍빛 안개 속에서, 반쯤 파묻힌 채 솟아있는 암석 지대였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피식 하고 웃었다. “찾았는데요?” 사실 내겐 5번이 제일 쉬웠다. 왜냐고? └ 뭐냐;;; └ 이거 진짜예요? └ 찾았다고??? └ 옐로존 들어온지 이제 5분 지난 거 아님??? 그야 사암동굴은……. 내 기억 속에 정확히 존재하는 지형지물이거든. 물론 지금부터 저 거대한 암석지대 안에서 정확한 동굴의 위치를 찾아야겠지만. “찾았다고요?” “그게 무슨…….” 그거야 그냥 하면 되는 일이다. 굳이 난이도로 비유하자면……. 떠난 지 한 달 정도 된 동네에 방문해서, 지도 없이 자주 갔던 편의점을 찾아가는 난이도랄까? 비유가 왜 편의점이냐고 묻는다면, 편의점만큼 자주 들락거렸던 곳이라 그렇다. 어쩌면 이 사막 테마의 데드 존 기준으로… 가장 꿀 같은 장소가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말씀 되시겠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시안 데드 존 베이스캠프 외곽. 관리국 직원 식당이라고 부르기엔 좀 과분한, 사실상 간이 천막 아래 놓인 테이블 몇 개가 전부인 곳이었다. 새벽이라 손님은 없었다. 정확히는, 이 시간에 여기서 밥을 먹을 이유가 있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그 빈 식당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낡은 가죽 재킷에, 다 닳아빠진 전투화를 신은 사내. 장하이였다. 나머지 한 명은, 관리국 로고가 바랜 점퍼를 걸친 30대 중반의 남자. 이름은 리원칭. 시안 지역 게이트 관리국의 말단 행정관이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래 아는 사이였다.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서, 무슨 일인가? 용건만 간단히 했으면 좋겠네만.” 장하이가 보온병의 뚜껑을 열며, 차를 따랐다. 리원칭 앞에 놓인 잔은 이미 절반이 비어 있었다. “……그 한국 촬영팀 때문에, 요즘 고생이 많지 않소?” 리원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해야 할까. “고생이야, 뭐.” 하지만 부인할 이유도 없는 이야기였다보니, 리원칭은 일단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과중해진 업무에, 지친 건 사실이었다. “촬영 협조라는 명목으로 서류가 쏟아지는데, 위에서는 별다른 보상도 없고. 덕분에 내 업무만 두 배가 됐지.” 그리고 이런 리원칭의 대답에. ‘역시, 불만이 없을 수가 없지.’ 장하이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했다. 리원칭으로부터 경계심이 느껴지기야 했지만, 일단 말은 충분히 꺼내 볼 만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여 장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리원칭의 말에 동조했다. “우리도 비슷한 처지요. 이클립스 놈들 때문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도 서러운데, 최근에는 웬 애송이들까지 나타나서 설쳐 대니…….” “용건만.” 리원칭은 장하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흥미가 동했지만, 겉으로는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아직 이 근본도 없는 용병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 최대한 조심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장하이는 리원칭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었고. 은밀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장하이가 탁자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리원칭 앞에 놓았다. 정화수 2병. 그리고 방독 약초 한 묶음. 데드 존에서 구하기 어려운 현물이었다. LP나 돈이 아니라, 이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 “……!” 노골적인 태도에 리원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지만, 장하이는 거리낌 없이 말을 계속 이었다. “한국 방송국 놈들이 촬영 허가를 받아 간 목록. 그것만 좀 내어 주시오.” “으음.” 리원칭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찻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한 번 꿈틀했다. “대체 그런 걸 왜…….” 그의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장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목록일 뿐이오. 극비라고 할 것도 없는, 탐사 구역 배정 서류일 뿐이지 않소?” 장하이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밀 등급으로 따지면, 거의 공개 수준에 가까운 행정 서류. 어차피 참가자들 본인도 알고 있는 내용이고. 다만 문제는, 그 저의가 상당히 음흉해 보인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놈들이야 어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긴 해.’ 리원칭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윽- 탁자 아래에서 천천히 태블릿을 꺼냈다. “…….”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자네는 그저… 우연히 보게 된 것일 뿐이네.” 장하이의 입매가, 한 번 더 비틀렸다. * * * 아마 이 또한……. 기억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과거의 일일 터였다. 끼에에엑-! 아직 베타 서버의 리셋이라는 것에 적응하기 전. 그러니까 15일간의 폭주 속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었던……. 10회차도 지나기 전의 기억일 터. 아마 나는 그때, 사막귀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시안의 데드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로 그 몬스터들 말이다. 키륵- 키르르륵-! 당시의 나는 지쳐있었고, 한 줌 마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니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겠지. 50레벨 대 전투력도 채 되지 않는, 이런 잡몹들을 상대로 말이다. 쿠쿵- 쿠쿠쿵- 하지만 그날도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무아지경 속에서 모래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발밑의 모래는 스산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숨은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손에 쥔 검의 무게를 버티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순간. 나는 거대한 사암 바위 지형을 마주했고,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갔었던 것 같다. [으으- 크으윽.] 하지만 결국 난 그 안에서 막다른 길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너무 당연한 상황이었다. [제길. 죽기 싫었는데.] 그러니 여기서 살아남았던 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슷-! 캬아아아오-!!! 붉은 안개 너머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실루엣. 사막귀들의 우두머리이자, 70레벨급 엘리트 몬스터인 적황귀. 당장이라도 내 숨통을 끊을 듯 날카로운 갈퀴를 앞세우며 튀어나온 녀석의 공격을… 나는 본능적으로 피했었고. 콰아앙!!! 그렇게 녀석의 일격은, 그대로 내 등 뒤를 막고 있던 사암을 타격했다. 바스스—! 그런데. 등 뒤의 벽이 부서졌다. 그리고 난 부서진 벽 너머로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분명 벽에 부딪힌 적황귀는, 맥없이 튕겨 나갔는데 말이다. [이게……?] 쓰러지듯 빈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내 등에 닿은 건, 모래가 아니라 서늘한 암반. 가장 놀라운 건, 이 컴컴한 공간 안으로 몬스터들이 진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말이다. [……뭐지, 여기?] 그게 처음이었다. 이 동굴을 발견한 건.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서 발견한 히든 플레이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살아남았냐고? 아니.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굶어 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길 두 번째로 찾았던 회차에서는, 확실히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었다. 첫 번째가 우연이었다면 두 번째는 의도된 탐사의 결과였고. 그 뒤로 나는 사막 패턴의 폭주가 일어날 때마다, 항상 이곳을 찾았던 것 같다. 아마 최소로 잡아도… 수십 번 이상? “…….” 그리고 이 말인즉. 사막 패턴이라면, 이 암석 지대는 반드시 존재하며……. 황사막 타입의 폭주가 발생했을 때, 이 사암동굴을 확정적으로 찾아낼 방법을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이 동굴이 뭐가 좋은 거냐고? 일단 몬스터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된다는 점이 가장 좋은 점이긴 했지만, 장점이 그것뿐인 건 또 아니었다. 만약 그것만이 장점이었다면, 데드 존의 몬스터들이 조금도 위협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을 땐, 여길 찾을 이유가 별로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팀장님 얘기는…….” “여기선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거죠?” 뭐, 베타 때는 단순히 마력이 풍부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폭주가 시작되고 리셋을 기다릴 때, 여기만큼 ‘수련’하기 좋은 공간도 없었으니까. 당시에 나는 ‘비동기’라는 개념에 대해 몰랐지만, 적어도 게이트 안이 게이트 바깥에서보다 수련하기 적합한 환경이라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었고. 이 사암동굴이 게이트 안과 거의 같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시스템 동기화 또한 게이트 안과 비슷하게 작동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건데. ‘역시 맞았네.’ 추측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아니, 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미리…….” “공부를 좀 열심히 했다고 해두죠.” 유진성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고, 박진우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진짠데. 사암동굴 찾으려고 사암지대 패턴 공부만…… 최소 십수 년은 했을걸? “그럼 저희는 공부가 부족한 겁니까?” 박진우의 말에 옆에 있던 고은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한다. “물론임다. 팀장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검다.” 역시 우리 은아님 뿐인가. 맹목적인 믿음이 좀 부담스럽긴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걸? 그런데……. 강민우 너는 또 왜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건데? “…….” 하지만, 사실 팀원들이 뭐라 하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사암동굴에 무사히 도착한 이상,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있었으니까. 띡-! 제작진으로부터 받은 태블릿을 슬쩍 열어 보았다. [시스템 동기화율 상승 감지] [현재 동기화율: 97%] 동기화율 수치를 확인하려고 연 건 아니고. 찰칵- 띠링- ! 첫 번째 탐사대상을 찾았으니, 일단 등록부터 진행했을 뿐이었다. [‘사암 동굴 구조물’ 목적물의 탐사 사진을 등록합니다.] [탐사 목적물의 좌표 정보가 DB에 등록됩니다.] [내용 검증 후, 탐사 점수가 산정될 예정입니다.] ‘사전 탐사기록이 전무하다더니, 정말인가 본데?’ 아마 사전 탐사기록이 존재하는 목적물이었다면, 사진 촬영을 올리자마자 점수 산정이 됐을 거다. 그렇다면 이 동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지? 일반 플레이어 중에 목격자가 따로 있었던 건가? “…….” 여하튼……. 미션 하나 날로 먹었더니 기분이 아주 상큼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뭐… 발견했다고 탐사가 끝난 건 아니고, 이제 이 공간 내부를 철저히 조사해서 탐사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겠지만. “그럼 다들 조사 시작하시죠?” 그거야 내가 직접 할 필요 없지 않을까? “옙!” “예, 팀장님.” 우리 훌륭한 팀원들이 계신데. 팀장의 역할은,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다고 본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들? └ ㅅㅂ;; 나 이 ㅅㄲ 왜 얄밉지? └ 삐빅- 정상입니다. └ 아니 방장 놈은 왜 항상 잘 풀리는 거임;;; └ 잘 안 풀리는 것도 있긴 해 ㅋ └ (정보) 실드코프 주가는 오늘만 7%정도 빠졌다. 아니, 나한테도 모를 권리가 있습니다 형님들. 우리 방에서 주식 얘기 금지라니까요? “후우.” 팀원들이 동굴 탐사를 위해 흩어진 사이, 나는 차량에 잠시 다녀왔다. 정확히는 샌드버기 뒷좌석에 묶어뒀던, 600LP짜리 야전 텐트를 들고 왔다. “읏-차-!” 그런데 동굴 안에 갑자기 텐트를 왜 들고 들어왔냐고? └ 뭐하는 거임, 방장? └ 뭐, 여기서 야영이라도 하려고? 정답입니다, 형님들. 생각해 봤는데…… 텐트를 600LP나 들여서 사 놓고, 활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좀 있어 보이더란 말이죠?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7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강민우는 탐사 장비를 묵묵히 정리하고 있었다. 동굴 벽면에 기대어 놓은 측정기를 하나씩 꺼내어, 팀원들이 작업하기 편한 위치에 배분하는 중이었다.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이지만……. 이제는 꽤 자연스럽다. 오히려 이렇게 변하고 나서, 시청자들 반응도 더 좋아졌고 말이다. -강민우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ㄷㄷㄷ -강민우 불쌍함 ㅠㅠ -왜? -요즘 하는 거 보면, 헌스쿨 출연하기 전까지, 기레기들한테 억까당했던 거 아님. -맞네 ㅜㅜ 나도 원래 강민우 걍 망나니인 줄 알았음 ㅇㅇ -근데 알고보니 이런 건실한 청년이 없음;; -ㅇㅈ; 재벌가 프레임이 무섭다니까; 사실 억까를 당하는 건 강민우가 아니라 기자들인지도 몰랐지만……. 강민우 입장에서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피해의식에 쩔어 있던 이전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었다. ‘이제는 할아버지께서 뭐라 하시든… 신경 쓰이지도 않을 수준이니까.’ 그리고 강민우는 이 모든 게, 이건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건율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결코 이렇게 바뀌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강민우는, 팀 미션이 시작된 이후로 이건율을 항상 주의 깊게 지켜봐왔다. 그리고 그 관찰이 바로… 얼마 전까지 강민우가 겪고 있었던 혼란의 근원이었다. 관찰을 통해 이건율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오히려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으니 말이다. ‘이제는…… 모르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상하다는 느낌에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강민우의 시선이 슬쩍,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이건율이 뭔가를 펼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또 예상조차 어려운…… 그런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하려는 것일 터다. 이곳이 무려… 해외에 발생한 데드 존의 한복판임에도 말이다. ‘단순히 대단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대단함의 정체가 뭔지 감도 안 잡힌다고 해야 하려나.’ 이건 비단, 본인을 기준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강민우는 이미 오래전에… 강제로(?) 자기 객관화를 당해버린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강민우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대상은, 본인이 아닌 다른 헌터즈 스쿨 시즌3의 참가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확실한 재능충들. 이성환이나 박하준과 비교하더라도…… 이건율은 여전히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규격 외로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는 말이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민우가 느끼는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미다스의 정원에서 경악했다면 비동기 훈련 때는 이해가 어려운 영역으로 넘어왔고. 데드 존에 도착하고 나서는…… 이해하기를 포기한 수준이 되어버렸으니까. ‘이건… 재능이랑은 별개의 영역이잖아?’ 참가자 모두는 이 데드 존을 처음 경험했다. 그렇다면 그레이 존 적응에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건율은?’ 그레이 존에서 뜬금없이 마력폭풍의 발원지를 추적하더니. 데스 웜을 폭풍 경로 위에 유인해서 사냥해버렸다. 그리고 방금. 베이스 캠프를 나선 지 50분에, 옐로 존에 진입한 지는 채 20분도 되지 않았는데, 사전 탐사 기록조차 없는 최고 난이도 과제를 찾아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헛소리다. 이런 헛소리도 없다. 적어도 강민우가 알고 있는 공부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 다른 팀들이라면 아마, 72시간을 다 써도 이 사암동굴 하나 찾아내지 못하지 않았을까? 강민우는 장비를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결국 강민우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드러나 있는 이건율 팀장의 모든 정체는… 전부 다 위장일 거야.’ 강민우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 하나 덕분이었다. ‘히든 클래스.’ 레벨과 스테이터스를 위조해서 보여줄 수 있는 특수 클래스가 존재한다는, 그런 정보성 게시글 말이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정보조직이나 특수기관에 종사하는 플레이어들 중에는, 그런 쪽으로 클래스를 얻은 이들이 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이건율이라는 존재를 대상으로 이 가정을 대입해봤을 때. 강민우는 속으로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전제 하나만 확정 지으면, 이제껏 설명되지 않던 그 모든 상황들이 합리적으로 느껴져 버리니 말이다. 이성환도, 박하준도 분명 대단하지만, 그렇다 한들 결국 ‘성장하는 루키’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이 프레임 안에서 설명 불가능한 이건율이, 사실은 루키가 아닌 거라면? 어떤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랭커급 플레이어가 제작진과 국민 모두를 속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실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도, 루키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탁-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이건율이 야전 텐트를 펼치고 있었다. 고정핀을 잡는 손놀림이……. 마치 수십 번은 반복한 것처럼 능숙했다. 이런 것도 사소한 부분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강민우는 달랐다. 저건 빠른 게 아니라 익숙한 거다. 재능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모먼트라는 뜻이다. “거기, 민우 님.” “예……!” “그, 장비 정리 다 끝났으면, 저 좀 도와주시죠.” “알겠습니다!” 그러니 강민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건율과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만들어놔야 해.’ 검희나 최재민 같은 국내 최고의 랭커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인 것 보면, 이건율이 숨기고 있는 정체가 어떤 수준일지 감을 잡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이런 인물과 연을 잘 쌓아놓으면, 궁극적으로는 세광그룹에까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강민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건율의 부름에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건율이 뭘 좋아하는지만 알아낼 수 있다면, 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좀 더 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었다. * * * 헌터즈 스쿨, 시안지역 촬영 지휘 통제실. “PD님, 이거…… 탐사 미션 자체가 너무 허무하게 빨리 다 끝나버리는 건 아니겠죠?” 상황실 안은 냉방 장치의 저음이 깔리는 가운데, 스탭들의 말소리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헌터즈 스쿨 베이스캠프. 컨테이너 건물 세 동을 잇대어 만든 중앙 상황실의 벽 한 면을 차지한 대시보드에는, 전 팀의 실시간 GPS 좌표와 과제 등록 현황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옐로 존 탐사 미션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30분. 서브 PD가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장세연 PD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탐사 미션 수량이 너무 적게 설정된 건 아닌가 해서 걱정됩니다.” “으음.” “쉬운 미션지를 받아 간 팀의 경우 벌써 단서를 찾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요.” 타닥. 장세연의 손가락은 태블릿 위를 두들기고 있었고, 서브 PD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게다가…… 몇몇 팀은 또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탐사 미션을 끝내버릴지 모르잖습니까.” 장세연이 고개를 들어 서브PD를 봤다. 그녀가 ‘어떤 팀’을 말하는지,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맥락 없는 장세연의 대답도, 모두가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전 탐사 기록 전무에, 좌표도 불명확한 과제를 배정했잖아. 운이 아무리 좋아도 사흘은 잡아야 할걸.” 이건율 팀을 떠올린 장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들 팀에 배정된 탐사 미션들. 그러니까 그건… 보험 같은 거였다. 이건율 팀이 또다시 팀 간 미션 밸런스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한 거라고 할 수 있었다. ‘한 번 더 그레이 존 미션 때 같은 대참사가 벌어지면… 그땐 진짜 제작비 감당이 안 될 거야.’ 기획 단계에서부터 팀 순위를 고려해 미션 난이도가 설정되도록 설계했던 건, 그야말로 최고의 한 수였다. 이 설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작진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을 테니까. 뭐, 이건율 팀이라면 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내 가져오겠지만……. 그렇다 해도 다섯 미션 중 3~4가지 정도나 해내는 게 최대치일 거다. 물리적으로 72시간이라는 시간은, 모든 탐사대상을 찾아내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까. ‘좀 더 고평가해서 기본 미션 다섯 가지를 다 완수한다 치더라도, 방송 각 측면에서 나쁠 게 없고.’ 장세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오히려 이건율 팀이 이번엔 어떤 방송 각을 뽑아줄지 기대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다음 순간. “허억!”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상황실의 대시보드에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이건율 팀 — 탐사 항목 ⑤ ‘사암 동굴 구조물’ 좌표 등록] [탐사 대상과의 정합성 검증이 필요합니다.] “……?” 장세연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태블릿 위에 올려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PD님.” 이정민 FD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대시보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잘못… 찾은 거겠죠?” 상황실에 정적이 흘렀다. 이건율 팀이 등록한 좌표와 탐사 사진들이 사암동굴이 맞는지 검증해야 할 작업이 아직 남아있었고. 실제로 이건율 팀이 엉뚱한 곳에 도착해서 잘못 탐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 “뭐야… 무서워.” 상황실 안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으니 말이었다. “마…… 말도 안 돼요. 미션 시작된 지… 아직 한 시간이 안 지났는걸요?” 장세연의 마른 침을 삼키며 태블릿을 두들겼고. 지이잉- 그러자 상황실 메인 모니터에, 이건율 팀의 상황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사암동굴’이라고 할 만한 공간 안에 들어가, 내부를 탐색 중인 이건율과 팀원들. “…….” 상황실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고, 이번에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이 안에서 가장 큰 이건율 PTSD가 있는 경리팀장이었다. “그,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음.” “사암동굴을 찾았다고 해서 탐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나머지 네 개를 다 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물리적으로 시간이…….” “그, 진정하세요 팀장님. 여기가 사암동굴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악을 상정해야…….” 거의 울먹이는 경리팀장을 보며, 장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한 모금 남은 커피에 손을 가져갔다. ‘경리팀장의 말이 맞아.’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할 거라는 사실도. 찾은 것과 탐사까지 끝내는 건… 확실히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맞아. 72시간이라고 해봤자, 밤에는 결국 캠프로 복귀해야 하고…….” 다시 조금 안정을 찾은 장세연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왕복 이동시간만 빼면 실질적인 탐사 시간은 절반도 안 돼. 아무리 샌드버기가 있다고 해도, 물리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으니까.” 안도의 공기가 상황실에 번졌다. 서브PD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경리팀장도 어깨를 내렸다. 그래. 아무리 사암동굴을 빨리 찾았다고 해도. 데드 존의 밤은 위험하다. 캠프 복귀가 전제인 이상, 물리적인 이동시간이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거다. ‘괜찮아. 괜찮다고.’ 장세연이 다시 태블릿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는데. “어…… PD님?” 이정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음?” 장세연은 고개를 돌렸다. 이정민의 시선이 대시보드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또 뭔데.” “이건율 참가자…… 갑자기 텐트 치는데요?” “……?” “설마… 72시간 동안 저기서 버티려는 건 아니겠죠?” 탁- 장세연의 손에서 펜이 빠져나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어느새 그녀의 동공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지이익- 텐트 지퍼를 당기고 일어섰다. 사암동굴 내부에 텐트 LED의 푸른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붉은 사암 벽면에 부딪힌 빛은 색이 묘하게 섞여서, 마치 수족관 안에 들어온 것 같은 색감을 만들었다. 동굴 입구 쪽에서 모래바람 소리가 아주 먼 곳의 파도처럼 울려왔다. ‘이것도 나름 운치 있는걸.’ 냉정하게 이 정도면, 제작진이 마련해 준 베이스캠프와 비교해도 딱히 나쁠 게 없는 수준이다. 물론 여기에 몬스터가 난입할 수 없다는 확정적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니 가능한 발상이긴 했지만……. 막상 세팅을 다 해놓고 나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암동굴의 위치 자체가, 거점으로 쓰기 상당히 괜찮으니까.’ 이번 탐사 미션에 주어진 시간은 72시간이다. 그리고 그 중…… 벌써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물론 이미 다섯 탐사 미션 중 하나가 다 끝나가는 상황이긴 한데. 사실 탐사 미션을 다 클리어하는 건 기본 옵션이고, 추가 달성까지 해내야 최상위권이 될 수 있는 건 당연한 부분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암동굴을 베이스 캠프로 쓰게 되면, 엄청나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단순히 캠프에서 옐로존까지의 이동시간만 아끼는 게 아니다. 탐사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진행해야 하는 채집‧조사의 모든 과정 안에서, 베이스캠프가 옐로 존 한복판에 존재하는 것의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해봐도, 탐사 미션에 쓸 수 있는 실질적인 시간이 두 배 정도는 늘어나는 느낌인데……. “그… 이게 뭡니까, 팀장님?” 조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박진우가,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뒤따라 나타난 유진성도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말을 잃은 느낌이고. 아마 데드 존 안에 텐트를 쳤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갑자기 장난이 좀 치고 싶어진다. 조금 뻔뻔하게 나가볼까? “내일모레까지, 여길 베이스 캠프로 쓸 겁니다.” “예……?” “미션 진행 동안, 여기서 지낼 거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럼… 잠도 자는 겁니까?” “왜요. 시원하고 좋고만. 다들 밤에 더워서 잠도 잘 못 잤다면서요.” 서늘한 발밑의 암반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납득이 안 되는지 다들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아니, 천장고도 높아서 공기 순환도 잘 되고, 벽면에서 시원한 바람까지 스며 나오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베이스캠프보다 컨디션이 나은 것 아냐? “그… 오늘 자기 전에 유서 한 장 써놓으면 되는 거죠?”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하는 박진우 팀원과……. “진우 님! 설마 우리 팀장님 못 믿으시는검까.” 여전히 무한 지지를 보내오는 고은아 팀원님. 그리고. “진성 님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으으음…. 불침번 잘 서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는 있지 않을까요……?” “…….” 창백하게 질린 유진성의 표정을 보니, 본능적으로 여기서 장난을 더 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얘기해줬다. “걱정들 마시죠. 여기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은… 굶어 죽는 거 하나뿐이니까.” “네……?” “사암동굴 안에는 몬스터가 없습니다. 몬스터가 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고요.” “그게 무슨…….” “진성 님.” “예, 팀장님.” “제가 자료 하나 전송했으니까, 확인해보시죠.” 내가 유진성에게 전송한 자료는, 해외 커뮤니티에서 아주 힘들게 입수한 자료다. 사암동굴에 대한 자료는 아닌데, 사암동굴과 거의 같은 특성을 지닌 다른 테마의 데드 존 안전지대에 대한 정보. “어…….” 유진성이 동굴 안쪽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LED 불빛이 그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암동굴도… 이 문서에서 정의하는 ‘시스템 안전지대’에 속한다는 건가요?” 의심도 많기는. 그렇다니까. “증거 보여줘요?” “옙?” “다들 인벤토리 한번 열어보시죠.” 옐로 존부터는, 인벤토리를 열어둔 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시스템 동기화가 끊기다 보니, 길어야 3초 정도 열어두는 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어… 안 꺼지네?” “이게 왜 이런…….” 동기화율이 거의 100%인 이 시스템 안전지대에서는, 게이트 안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벤토리 활용이 가능하다. 때문에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진성은,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 * *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 사이 우리는 사암동굴 탐사를 완벽히 완료했다. [이건율 팀 — 탐사 항목 ⑤ ‘사암 동굴 구조물’ 탐사 완료가 승인되었습니다.] [탐사 대상과의 정합성 검증에 성공하였습니다.] 팀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제작진이 요구한 모든 탐사 자료를 전부 다 완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가… 진짜 사암동굴이 맞았네요.” “진우 님, 속고만 사셨슴까? 팀장님께선 모르는 게 없으심다.” “그… 속은 적이야 한 번도 없긴 한데, 매번 거짓말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시니까…….” ‘팀원들’만 부지런히 움직였냐고? 그건 아니다. 나도 그동안 부지런하긴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리사욕(?)을 좀 챙기는 중이긴 했었는데……. 깡- 깡- 까앙-! [‘마력의 모래결정’ 채집에 성공하였습니다.] [‘마력의 모래결정’ 채집에 성공하였습니다.] ……중략…… 나 아니었으면 동굴 이렇게 빨리 못 찾았을 테니까, 팀장으로서 이 정도 일탈은 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팀장님은 뭐하고 계십니까? 아까부터 동굴 벽면에 곡괭이질 하시던데.” “또, 다음 탐사 목표 관련해서 자료 수집중이신 거 아니겠슴까.” 저기… 고은아님? 그건 아니긴 합니다만. “잠깐 보니, 마력의 모래결정 채집 중이신 것 같던데……. 혹시 팀 자산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시려는……?” 어허. 이건 내 사재야, 진성군. 팀 자산과는 엄연히 분리돼야 한다고? “에이, 설마요. 저거 모래결정 꽤 모아봐야 10LP도 안 되던데요.” “아, 그거밖에 안 돼요?” “팀장님이 그거 벌자고 저렇게 노가다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말임다.” “…….” 뭔가 상황이 잘 해결된 것 같긴 한데. 이 찜찜한 느낌은 대체 뭐지? └ ㅋㅋㅋ 방장ㅋㅋ 한 시간 동안 그거 캐서 얼마 벌었음? -25LP나 벌었는데요. └ 개웃기넼ㅋㅋ └ 알뜰GOAT └ 넌 인정이다 ㄹㅇ 아니, 시급 12.5만원 짜리 고부가가치 노가다를, 다들 이렇게 폄하해 버려도 되는 거야? 후우.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쁠 게 없는 것도 같다. 나만 부자되지 뭐. └ 대이브는 ‘진짜’이긴 해; └ 근데 어떻게 모래 채집으로 25LP를 번 거냐 ㅋㅋㅋ └ 그것도 그러네? 저거 한움큼 모아야 1LP쯤 되는 거 아님? 이게 ‘노하우’라는 겁니다, 형님들. “흠, 흐음.” 어쨌든 훈훈한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천천히 다시 사암동굴 밖으로 나왔다. 다음 목표 및 탐사 동선은 이미 머릿속으로 전부 설계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내가 팀원들 일 시켜놓고 그 시간에 사리사욕(?)만 채운 건 아니라는 말씀이다. “두 번째 탐사목표 우선순위는 어떻게 잡을까요, 팀장님?” 박진우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번엔 1번과 2번을… 같이 한번 해결해 보도록 하죠.” “예……?” “자 일단 다들 차에 타시죠. 좌표는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옐로 존 외곽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사막 위. 간이 천막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아직 새벽의 냉기가 남아 있는 사막의 공기는 꽤 차가웠고, 텐트 천을 때리는 모래알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장하이가 탁자 위에 지도 한 장을 펼쳐 놓고, 그 옆에는 작은 태블릿 하나를 세워놓았다. 장하이의 뒤에는 린시우와 쉬에밍이 가까이 다가 서 있었다. 린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쉬에밍은 배낭에서 밀봉 용기를 꺼내 테이블 끝에 올리는 중이었다. “으음.” 장하이가 지도 위에 손을 얹었다. 리원칭이 건네준 탐사 목록. 직접 옮겨 적은 글씨가 랜턴 빛에 번들거렸다. “지금 몇 시지, 쉬에밍?” “이제 8시쯤 됐습니다, 대장.” “그럼 이제 슬슬… 옐로 존 진입할 때가 되어가겠군.” 장하이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스쿨의 참가자 팀이 몇 시에 베이스캠프를 빠져나왔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덕분에 새벅 5시부터 미리 움직인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목표하는 특정 팀. ‘그 팀’의 탐사 목적물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지금쯤 옐로 존 서쪽으로 진입했겠지.’ 그들이 이 시각 어디쯤 지나고 있을지, 동선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목적지는… 변동 없죠, 대장?” 린시우의 말에, 장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은, 지도 위의 한 점을 찍고 있었다. “마력의 웅덩이. 아마 변수는 없을 거다. 침식 골렘의 서식지니까.” 마력의 웅덩이는, 쉽게 말해 ‘침식 골렘’의 동력원이다. 정확히는 웅덩이 그 자체보다, 마력 웅덩이 덕에 생긴 마력의 잔유물들. 침식 골렘은 생명체라 하기에 미묘한 몬스터였지만, 어쨌든 이 마력의 잔유물들을 먹고 산다. ‘한발 빠르게 이동해서 그걸 특정 지역에 모아놓으면…….’ 그러면 탐지가 교란된 골렘들이, 먹이를 찾아 서식지를 이탈할 거다. 이건율 팀이 이 구역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건 텅 빈 모래밭뿐일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흔적을 따라 탐사하다 보면, 최소 10개체 이상의 골렘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걸 만나게 되겠지.’ 침식 골렘은 그래도 옐로 존에서 꽤 강력한 몬스터 중 하나다. 엘리트급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60레벨대는 훌쩍 넘는 수준의 스펙을 가진 녀석. 이런 녀석들이 10개체 이상 모여 있으면, 이건율 파티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마력폭풍에 맞아 빈사 상태가 된 데스 웜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번엔… 우리가 한번 날로 먹어보자고.” 린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허리춤의 파우치를 확인했다. 이미 준비가 끝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시점. 이미 마력의 웅덩이에 누군가 도착해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점이었지만 말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고은아는 헌스쿨 촬영이 너무 즐거웠다. 가족들은 연락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걱정뿐이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역시 위험할 일 같은 건 없다니까 그러네.’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는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고 있으니, 다들 너무 힘들다는 데드존 미션들조차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즐거웠던 것이다. “팀장님! 이거 잔해물 맞지 말입니다!” “굿! 이야, 우리 은아 님 탐사 체질인가? 일 너무 잘하는데?” 물론 이 모든 은혜(?)가 누구에게서부터 비롯된 건지. 고은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건율 팀장님 팀에 배정된 건, 인생 최대의 운이었어.’ 미다스의 정원 미션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건율 팀에 배정된 이후 헌터 일이 이렇게 재밌는 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데드 존이 아니라 더 위험한 곳에 가도, 결국 팀장님 시키시는 대로만 하면 문제없단 말이지.’ 방금 전에도 그랬다. 사암동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삼십 분 정도 샌드버기를 몰아 도착한 곳. 거대한 마력의 웅덩이에 도착해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생김새의 골렘을 마주했을 때도, 은아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다. “저거, 덩치만 컸지 골렘 치고 물렁살이거든요? 그러니까 은아 님.” “넵!” “두 놈 이상 뭉치지 못하게, 어그로만 좀 끌어줘요. 그럼 내가 알아서 요리할 테니까.” “알겠슴다!” “이놈들은 세 마리 이상 모여서 마력연쇄를 발동하지만 못하면, 사암귀랑 비교해도 별 차이 없는 잡몹이거든.” 이건율 팀장님은 모르는 게 없었고, 못하는 게 없었으니까. “민우 님은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그 자리에 집중사격 해줘요. 오케?” “예, 팀장님.” “진우 님은 저한테 쉴드 한 번 걸어주시고.” “넵.” “자, 그럼 타겟은 저놈입니다. 따로 떨어져서 웅덩이 옆에 어슬렁거리는 놈 보이죠? 저게 마력을 흡수하는 중인 건데, 대충 밥 먹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럼, 밥 먹을 때 뒤통수 갈기는 전략인 검까?” “바로 그거죠.” “…….” “은아 님은 혹시 딜 넣은 기회 오면, 외피의 이음새를 찾아서 공격해 보세요.” “옙!” “이음새만 정확히 공략하면, 저거 그냥 순두부처럼 말랑하거든.” 설명을 끝낸 이건율은 샌드버기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고, 타겟으로 잡았던 침식 골렘을 향해 곧바로 활을 쏘아대었다. 핑- 피핑-!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도 이건율의 화살들은 여지없이 골렘의 머리통에 틀어박혔고. 그워어-!! 쿵- 쿵- 성난 모습으로 달려드는 골렘을, 이건율 파티는 단 3분도 채 지나기 전에 해체시켜 버렸다. 서걱-! [파티장 ‘데이브’가, ‘마력의 침식 골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력의 침식 골렘’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솔직히 파티가 필요했던 것 같지도 않다. 고은아가 한 건 잠깐 어그로를 받아 낸 정도였고……. 박진우가 시전한 쉴드는 기스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강민우가 쏜 마력탄 몇 발이 격중했고, 유진성의 화염탄도 정확히 골렘의 복부에서 터지긴 했는데……. [플레이어의 파티 기여도 정보를 호출합니다.] [플레이어 : 데이브] [입힌 피해량 : 89%] [받은 피해량 : 35%] [회복량 : 0%] 거대한 골렘을 순식간에 해체해 버린 건, 결국 이건율의 활과 검이었으니 말이다. “운이 좋았네요. 코어를 한 번에 찾아가지고.” “그… 렇군요.” “어쨌든 이제 해체 작업 시작합시다.” 파스스슥- “진우 님만 잠깐 따라오세요.” “넵?” “나머지 세 분이 해체하시는 동안, 두 마리 정도 더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둘이서요?”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아마 세 마리 정도 잡으면, 탐사 조건 달성 가능할 만큼 잔해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고은아는 팀장님의 명령을 의심(?)하는 박진우 대원이, 사실 이해되지 않았다. 저렇게 반문할 시간에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시간도 아끼고 에너지도 아끼는데. 이 간단한 진리를 아직까지 깨우치지 못하다니. 서걱-! 파스스슷-! 그런 의미에서 고은아와 강민우는, 쓰러진 골렘의 사체를 이미 빠르게 분해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유진성도, 꼼꼼히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진성 님.” “네 은아 님.” “저희 그러면 벌써 탐사 두 개 끝난 검까?” “어,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곧 끝날 것 같긴 한…….” “뭐, 팀장님이 골렘 두 마리 더 사냥해 오실 테니, 한 시간이면 탐사 자료 정리까지 다 끝나지 않겠슴까.” “진우 님이랑 두 분이서… 괜찮으신 거 맞겠죠?” “아이 참. 팀장님이 안 괜찮은 거 본 적 있으심까?” “…….” “저희는 팀장님 돌아오시기 전에 시키신 일만 다 끝내 놓으면 된다 아입니까.” “그, 알겠…습니다.” 대체 왜 아직까지도 이건율 팀장님에 대한 믿음들이 부족한 건지. “은아 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부지런하게 움직여 보죠.”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건, 아무래도 강민우 하나뿐인 것 같았다. “역시 민우 님이 뭘 좀 아심다.” “…….” “진성 님, 탐사 잔해 리스트 좀 보여주십쇼.” “여기 있습니다.” 고은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해체 작업을 시작했고,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금새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① 침식 골렘 서식 구역 환경 조사 탐사 진행률 : 67%] [시료 채취 진행률 : 79%] [서식 환경 기록 : 36%]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지직- [채취 작업 끝났으면, 샌드버기 타고 이쪽으로 오세요 다들.] 추가 사냥을 마친 이건율 팀장의 무전이, 때마침 날아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두 번째 탐사 미션까지, 곧바로 마무리 가능한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 좋슴다!” [여기 잔해물 채취까지 끝나면, 지직- 곧바로 다음 좌표로 이동해야 하니까, 부지런히 와 주시고.] “예, 팀장님.” 뭐, 이러다가 첫날 미션 다섯 개를 전부 다 클리어해버리면, 남은 2일간 붕 떠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유일한 걱정이 있긴 한데……. 철컥-! 그거야 일개 ‘팀원’인 자신이 고민할 만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고은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르르릉-! 샌드버기에 힘차게 시동을 다시 걸어 올렸다. * * * “제대로 도착했군.” 마력의 웅덩이에 도착한 장하이는, 좌표를 확인한 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짙푸른 자청빛을 띄는 거대한 웅덩이.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육중한 몸집의 침식골렘들. 스륵- 장하이가 무릎을 꿇고 웅덩이 가장자리에 손을 뻗었다. 탁한 보라빛 액체가 고여 있는 웅덩이 주변으로, 모래가 검게 변색된 경계선이 불규칙하게 퍼져 있었다. ‘타이밍이 완벽해.’ 손끝이 액체 표면에 닿자, 피부를 찌릿하게 자극하는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의 잔유물. 마력의 웅덩이에서 채집 가능한 이 부산물은, 언제고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긴 밤이 지나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한 아침. 경험상 9시 전후에만 이렇게 채집 가능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평소엔 채집할 이유가 없는 물건이지만.’ ‘마력의 잔유물’은 꽤 강렬한 마력을 머금고 있는 부산물들이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였다. 침식 골렘의 동력원이자 먹이인 이 잔유물들은, 골렘이 흡수해서 체내에 마력핵으로 만들어야 가치가 생겼으니까. 그래서 평소에는 존재를 알면서도 채집하지 않았던 물건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린시우, 이쪽이다.” “예, 대장.” 이 잔유물들만 싹 다 빼돌리면, 골렘들은 먹이를 찾아 서식지를 이탈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한쪽 구석에 전부 몰아 놓으면…….’ 골렘의 흔적을 추적해 도착한 이건율 팀은, 지옥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될 거다. 최소 다섯 이상의 개체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침식 골렘은 배 이상 강해지는 ‘마력 연쇄’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철컥- 린시우가 밀봉 용기를 건넸다. 그러자 장하이가 그 안에 잔유물을 퍼 담기 시작했다. 점액질이 용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축축한 소리가, 사막의 건조한 바람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분산 위치는.” “지도 표시 끝났습니다.” 쉬에밍이 지도 위에 빼곡히 점을 표시해둔 것을 보여주었다. 골렘들의 이동 동선을 설계하기 위해, 미리 작업해둔 완벽한 좌표들. 그리고 그 이동 경로 끝에는……. ‘어쩌면 10마리 이상이 한곳에 모일지도 모르지.’ “후후.” 장하이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변수도 없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건율 팀이 요리해 놓은 골렘들을… 우리가 싹 다 쓸어담으면 되는 거야.’ 계획 자체는 데스 웜 때와 비슷하다. 이건율 일행이 골렘들과 전투하느라 곤경에 빠졌을 때. 거의 한계 상황에 몰렸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돕는 척 합류해서, 마력 핵만 싹 가지고 나를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계획의 디테일은 완전히 달랐다. 어찌 보면 데스 웜 때는, 너무 러프하게 함정을 설계했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다르다.’ 장하이는 밀봉 용기를 닫았다. 마지막 잔유물을 분산 배치 완료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 “됐다.” 린시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쉬에밍은 이미 철수 경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골렘의 둔탁한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인지,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였다. 장하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제 가지.” 세 사람의 그림자가, 주홍빛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벌써 다섯 가지 탐사 중 두 가지를 완수해 버렸다. [탐사 항목 ① ‘침식 골렘 서식 구역 환경 조사’ 완료 조건 충족] 이건 내가 최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인 것 같은데……. └ 이 ㅅㄲ 졸업시키면 안되냐 진짜……. 촬영만 시작하면 일단 사기치고 시작하네 ㅅㅂ 지지직- 아니, 그렇다고 사기라뇨. 제가 뭘 했다고. └ 근데 진짜 대이브 이 쉑 왜 조기졸업 안 시켜주는 거임?;; └ 그러게. └ 생각해보니까… 시즌1 조기졸업자가 오수진이었나? 걔도 이정도로 사기 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 음, 오수진 정도 있으면 대이브랑 비벼볼 만 한 것 같기도 하고? 지직- 지지직- └ ㄴㄴ 추억미화임. 오수진도 절대 이 정도까지 독주 못했음. └ 그런데 왜 방장은 조기졸업 못하는 거임? 그야…… 제가 하기 싫으니까요? └ ??????? 조기졸업 하면 상금 못 받잖습니까. 괜히 헛짓거리하지 않고, 얌전히 시즌3 완주하는 게 이득이란 말씀입죠. └ 아니, 방장 이미 제안 받았던 거임? 노코멘트 하겠슴다. └ 이 ㅅㄲ이거 허세인가? └ 아냐;; 진짜일 것 같은데? └ 조기졸업 그거 거절하는 미친 놈도 있는 거였음? └ ㄴㄴ 말 안됨. 걍 둘 중 하나임. 지직- 지직- └ ㅇㅇ? └ 대이브가 구라쳤거나, 아니면 진짜로 미친놈이거나. 지지지직- “…….” 뭐 그런데, ‘사기친다’는 워딩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면. 사실 그렇게 억울하진 않다. 솔직히 이 데드 존 미션들에 한해서는, 내가 그 정도 급인 게 맞거든. 솔직히 누가 나보다 이 폭주 환경을 많이 경험해봤겠어? 심지어 폭주가 빈번한 국가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게이트 폭주가 없는 나라인 한국이 기준인데? 게다가 이런 탐사 미션은, 솔직히 경험치가 전부인 수준의 미션이니……. 우리 팀이 독주하지 못한다면, 그건 내 지난 억겁의 세월이 부정당하는 거나 다름없다. “팀장님, 저희 지금… 좌표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거 맞죠?” “맞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러니 성좌들의 이러한 반응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 입장에서 제작진과 다른 참가자들을 위해 미션을 적당히 해줄 이유도 없는 게 맞았으니…….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였지만 말이다. 굳이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면, 데드 존을 미션 필드로 삼은 제작진의 잘못인 거란 말씀. 부릉- 그리고 잠깐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끼이이익-! 우리의 든든한 샌드버기가, 목적했던 좌표에 도착하였다. 이거까지 마무리하면, 대충 여섯 시간 만에 미션 세 개를 클리어해버리는 셈인가? “자, 다들 내리시죠!” 팀원들에게 손짓을 한 뒤, 망설임 없이 샌드버기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곧이어 시동을 끈 고은아도 문을 열고 나왔고. 탓-! 다른 팀원들도 차례로 샌드버기에서 내렸다. 덜컹-! 하지만 뭔가 팀원들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한 느낌이었다. “여기, 맞는 거죠 팀장님?” “그… 모래벌판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데요?” 당장 도착지점이 그냥 평범한 모래언덕 위였으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일단, 샌드버기에서 장비부터 다들 꺼내십쇼.” “장비요?” “지금부터 삽질을 좀 해야 하거든요.” “예……?” “사실 이 2번 탐사 미션이, 저희가 받은 미션들 중에 가장 노가다인 미션이거든요.” 나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줬지만, 여전히 팀원들의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도 솔직히 예상했다. ② “마력의 모래폭풍” 잔류 흔적 관측 - 대상 : 직전 폭풍 발생 추정 구역 (좌표 미제공) - 요구 : 폭풍 잔류 마력 패턴 3건 이상 기록 + 환경 변화 촬영 - 비고 : 좌표가 제공되지 않음. 자체 탐색 필요. 마력의 모래폭풍은 우리 팀이 이미 그레이 존에서 경험해봤던 탐사 대상이고. 때문에 막연히… 가장 쉬운 탐사 목적물로 생각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레이 존과 달리 옐로 존에서는, 마력의 모래폭풍이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렇습니까?” “그래서 잔류 흔적을 찾아 탐사 기록을 채워 넣으려면, 최소 3일에서 최대 7일쯤 지난 마력 패턴을 발굴해야만 하죠.” “커헉.” 솔직히 두 번이나 날로 먹었으니, 이번에는 노가다 좀 할 때 되긴 했지. “그러니까 우린 지금부터 이 좌표 인근을 철저히 뒤질 겁니다. 아마 이 모래 언덕의 아래쪽에, 잔류패턴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요.” 척-! 어느새 트렁크에서 삽을 꺼내 온 고은아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고. “옙, 팀장님!” 다른 팀원들도 개운하지는 못한 표정일지언정 각자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구 아래에 잔류 패턴이 묻혀 있을 건… 어떻게 추측하시는 겁니까?”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유진성의 물음에, 나는 아주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우리가 방금 마력의 웅덩이를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랬죠?” “옐로 존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 마력의 웅덩이 근처에서 마력의 모래폭풍의 씨앗이 생겨납니다.” “아……?” “그렇게 생겨난 마력의 모래폭풍은, 보통 다른 좌표에 있는 마력의 웅덩이를 향해 이동한다고 하더라고요.” 어……. 사실 이런 정보를 지구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어디서 들은 거로 치자고? “그러니까 예상 경로를 추적해서 삽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물론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한 번에 좌표를 찾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마 운 나빠도 세 번 안에는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삽질 노가다 한 번에 대충 두 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가정하면……. 못해도 오늘 안에는 이 모래폭풍 패턴 탐사까지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흐음.” 그런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쳐 가던 그때. 쿠쿠쿠쿠쿠- “어…?” 갑자기 지면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따라……. 멀찍이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게…… 뭐죠?” 삽을 모래바닥에 박아 넣은 박진우가, 당황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건… 나도 처음인데?’ 조금씩이지만 분명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이 거대한 진동은, 베타 서버에선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다들 대기하시죠.” 일단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 나는 가장 높은 모래언덕 위로 빠르게 튀어 올라갔다. 아무리 내가 이 데드 존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변수란 언제든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이럴 때는 결코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쿵- 쿵- 모래언덕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진동은 점점 강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쿠우웅-! 모래 수평선 너머에서 뭔가를 발견한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지?”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휴대용 망원경을 들어, 이 괴상한 현상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온 이 광경은……. └ 이게…… 뭐임? └ 저거 침식골렘들 아냐? └ 쟤들 단체로 뭐함?ㄷㄷ 누가 흑마법이라도 부리나 대충 봐도 십수 마리는 될 법한 엄청난 숫자의 골렘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쿵- 쿵- 쿵- 일단 다행인 점은, 녀석들의 경로가 우리를 향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골렘들이 저렇게나 많이 몰려다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꽤 곤란할 뻔했겠는데?’ 골렘들이 몰려다니기 시작하기 전에 첫 번째 탐사미션을 클리어했다는 사실도 아주 다행인 부분. └ 와…… 저 덩치들이 몰려다니니까, 모래언덕까지 무너져 내리고 난리도 아닌데? 그런데 잠시 후. “어어?” 망원경으로 그 장관을 관찰하던 나는, 저도 모르게 육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ㅁㄷ? └ 갑자기 왜 그럼, 방장? 거대한 녀석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모래가 통째로 뒤집히며 지형 자체가 바뀌어 있었고. -저거… 잔류 패턴 같은데요 형님들? 그 무너져내린 사구의 한 켠에, 검푸른 마력 결정 자국이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 ……? └ 잠깐. 이걸 또 이렇게 날로 먹는다고? 아니. 이건 나도 상당히 당황스럽다. 대체 뭔데? 유일한 노가다 미션이었던 잔류 패턴 수집 미션을…… 이렇게 입 안에 예쁘게 떠먹여 준다고? “…….” └ 데드 존 억빠 멈춰ㅅㅂ;;; └ 방장쉑, 혹시 플레이어 아닌 거 아님? 예? 제가 플레이어가 아니면… 대체 뭔데요? └ ■■의 하수인이라던가, 라이카 NPC라던가……. └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 후후. 드디어 방장의 정체를 알아낸 건가. └ 어디 한번 해명해 보시지? 하아……. 진짜 미치겠네. 저,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형님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거실 끝에서 새어 나오는 TV 소리가 문틈을 타고 스며들었다. [……어제부터 시작된 중국 시안 지역 일대의 마력 불안정 현상에 대해…….] 뉴스다. 아빠가 또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 좀 그만 보라니까…… 또 말해봐야 소용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율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빠가 요즘 들어 저녁만 되면 왜 저렇게 뉴스를 틀어놓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놈에 걱정은. 별일 없을 거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율은 자신도 별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마음 한 켠이 뒤숭숭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유야 간단했다. 일단 최근 들어 게이트 폭주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찌라시들이 더 극성을 부리고 있었으며. 그에 더해 지난주에는 헌스쿨의 촬영팀까지도, 그 위험하다는 중국의 데드 존으로 원정 촬영을 나갔다고 하니 말이다. 뭐, 헌터즈 스쿨이 그저 남의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뒤숭숭하지 않았겠지만. 어쩌다 보니 거기에는 그녀의 혈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휴.” 시율은 노트북을 켜, 화면을 응시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모니터의 푸른 빛만이 시율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깍- 그녀는 어느새 습관처럼, 헌터즈 스쿨 커뮤니티에 접속해 있었다. [핫] 오늘자 시안 현장 유출 사진 봄? ← 이거 실화? └ 진짜임. 죽음의 사막이라는 레드 존 경계면에서 촬영하고 있는 중임. └ 대체 이런 사진은 누가 공급하는거냐 ㄷㄷ └ 중국 현지 플레이어들일 확률이 높다는데? └ 아니, 진짜 참가자들 목숨을 뭘로 보는 거임? └ 역시 헌터예능은 결국, 시청률 안 나오면 이런 식으로 자극적인 노선 타는구나;; └ HBC 진짜 실망이다;; └ ???헌스쿨 시청률이 대체 언제 안 나왔음?? └ 억까하는 놈들 지능수준 ㄹㅇㅋㅋ 이시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게시판을 이동했다. 요 며칠 사이, 헌스쿨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갈려버렸다. 시즌 3의 2차 미션이 중국 시안의 데드 존에서 촬영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그리고 며칠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장 사진이 퍼지면서, 부정 여론이 폭발한 것이다. 스크롤을 더 내렸다. └ 니들이 뭘 아는데ㅋㅋ 관리국에서 촬영 허가 냈으면 안전하다는 거 아님? └ 아니, 바르가에 이클립스까지 함께 한다잖아;;; 게다가 검희랑 서지혁이 직접 현장 통제한다는데, 어떻게 위험함? 진짜모름;; └ 제작진이 안전 프로토콜까지 전부 공개했는데, 아직도 이러는 놈들이 있네;; └ ㄹㅇ? 공식임? └ ㅇㅇ 몇 주 전에 HBC에서 관리국 협조 하에 레드 존 진입 프로토콜 수립했다고 보도자료 나왔었음 부정 여론과 긍정 여론이 엎치락뒤치락. 게시판 하나에서 300개 댓글이 넘어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시율도 알고 있었다. ‘……관리국이 허가를 내줬다는 건,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관리국이 데드 존 촬영을 공식 허가해줬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대비와 안전장치가 됐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본인이 요즘 이태철 사장님께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과 같이,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시율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침대 옆 물컵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거실에서 TV 채널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시율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 한구석에 올라온 인기 게시글의 제목이 눈에 박혔다. [정보] 촬영팀 피셜, 이건율팀 이번 데드 존 미션도 씹어먹는 중 ㄷㄷ;;; └ 이건율은 그냥 이번 시즌 레전드 찍는 중임ㅋㅋ └ 빨리 화요일 와서 4화 방영이나 했으면 좋겠네 ㅋㅋ └ ㄹㅇㅋㅋ 논란이고 나발이고 다음화 보고싶으면 개추 ㅋㅋ ‘…….’ 홀린 듯이 게시글을 눌러 들어간 이시율은, 이건율 팀의 비하인드 컷으로 도배되어있는 게시물의 스크롤을 휙휙 내리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우님’의 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이게 나라지.’ 그러니까 제발 커뮤니티의 어그로꾼들 이야기와 달리……. 별 탈 없이 헌스쿨 촬영팀이 귀국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이시율은, 모니터를 끄지 못한 채, 창밖의 서울 야경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지금쯤 아마, 저 불빛들이 닿지 않는… 아주 먼 사막 어딘가에 있을 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이, 방바닥에 가늘게 한 줄 금을 그었다. * * * 같은 시각. 시안 베이스캠프, 제작진 상황실. 에어컨이 내뿜는 차가운 바람이 회의실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로젝터 팬이 저음으로 웅웅거리는 가운데, 대시보드 모니터에는 각 참가자 팀의 GPS 좌표가 깜빡이고 있었고. 그 옆의 프로젝터 화면에는……. “PD님, 이건 오늘자 SNS 해시태그 추이입니다.” 서브 PD가 펜을 돌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헌스쿨_데드존_위험합니다」 해시태그가 실시간 트렌드 4위에 올라 있었고, 방통위에 접수된 시청자 민원 건수가 전일 대비 3배였다. 그래프가 가파르게 치솟는 그림이, 프로젝터의 하얀 빛에 실려 벽면을 물들였다. “그리고… 광고주 측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경리팀장이 두꺼운 폴더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익숙해져야 할 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예산이 위태로울 때마다 나타나는 그 표정. “아직 계약 해지 언급은 아닙니다만……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톤이었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정민 FD는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바깥 촬영팀과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었고, 서브 PD는 초조하게 펜을 돌리며 장세연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세연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미지근한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론은 걱정할 거 없다니까요.” “하지만…….” “딱 3일만 기다려들 보세요. 그 안에 뭔가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서브 PD가 눈을 깜빡였고. 장세연은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화면을 향해 턱짓했다. “그땐 제가 직접 움직일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요.” 장세연의 시선이 잠깐, 아주 잠깐 프로젝터 화면 너머의 허공을 뚫었다. ‘……곧.’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세연은 직접 손을 쓸 생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이러한 부정여론을 예상하긴 했었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더 크게 불타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데드 존의 촬영분이 방영될 때까지는 여론을 최대한 잠재울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공식 보도자료들을 준비 중이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저께. 예능국장과 통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제야 이야기해 미안합니다, 장PD.] [믿기 힘들겠지만…… 최근 퍼지고 있는 대한민국 게이트 폭주 찌라시는 사실입니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며칠 내로 엠바고도 풀릴 예정이지요.] [그러니 공식 입장 표명은 조금 미루도록 합시다.] [‘국가적 위기를 대비한 실전 훈련’이라는 프레이밍을 잘만 해내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상당히 충격적인 얘기였지만, 장세연은 그렇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이곳 데드 존까지 촬영을 나오는 과정에서, 멘토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게… 진짜 대한민국의 게이트 폭주와 연관되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그러니 어찌 되었든. 지금의 부정적인 여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맞았다. 국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내일 엠바고가 풀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들, 지금 이거 얘기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장세연이 화제를 전환하자, 회의실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태블릿을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이제, 하루 지났어요.” “그…렇죠?” “그런데 이건율 팀…… 벌써 필수 과제 세 개가 완수됐던데. 이거 맞는 거예요?” 서브 PD가 헛웃음을 흘렸고, 장세연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그녀의 시선이 대시보드 모니터의 GPS 좌표로 향했다. 옐로 존 한복판에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점 하나. “당장 급한 건 이쪽이니까. 우린 이쪽으로 대비책이나 좀 세워 보죠.” 회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이정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엠바고. 정부가 특정 정보의 보도를 일정 기간 금지하는 조치. 대한민국 게이트 관리국이 걸어놓은 이 20일짜리 시한폭탄은…… “후우.” 김영태 국장은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국장실의 조명은 이미 반쯤 꺼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대외비(Confidential)’ 도장이 찍힌 서류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김영태의 눈에는, 곧 빛을 잃게 될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김영태는, 소파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추경안 통과, 그리고 40일의 유예. 결국 그때 남았던 시간이 전부였다. 1조 2천억 원으로 산 고작 15일의 평화를 합쳐도…… 정부가 더 이상 게이트 안정화에 돈을 쓸 생각이 없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김영태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래도 이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것들을 준비하기는 했어.’ 바르가 등 국내 최상위 길드들과의 거래도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상태였고.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도 충분히 준비해 뒀다. 의도적으로 비공식 찌라시를 살포해 예방주사도 놓아두었고. HBC 예능국과 함께 짜둔 판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흘러간다면, 엠바고가 풀려 게이트 폭주가 현실화되더라도, 국민들은 헌터즈 스쿨을 통해 데드 존 현장을 보고 느끼며 막연한 불안감들을 해소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제 남은 건…….’ 김영태는 태블릿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체크리스트 항목으로 눈을 옮겼다. ‘혼란 최소화 조치’란에 빽빽하게 적힌 항목들. 김영태는 마른침을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전국 게이트 주변 비상 대피소 지정 및 관리인원 배치부터 시작해서, 주요 언론사 보도국장 대상 사전 브리핑 일정들까지. ‘군 병력 수도권 방어선 구축 계획도 마무리 단계고, 각 길드에 비공식 통보도 송부해 뒀고.’ 헌터 보험사와 거래소에는 긴급 거래 중단 매뉴얼이 사전 배포되었다. 폭주 선언 직후 시장이 폭락하기 전에, 매매를 일시 중단시키기 위한 안전장치.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김영태는 태블릿의 마지막 항목에 체크 표시를 기입하고, 스마트 펜을 내려놓았다.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보고서를 덮는 소리가 적막한 국장실에 울렸다. 그는 의자 깊숙이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시계의 초침이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사막의 밤은 낮보다 길다. 적무(赤霧)가 낮 동안 햇빛을 절반 가까이 먹어버리니……. 해가 떠 있어도 어두컴컴한 게 하루의 반절인 곳이 바로 이 황사막이었다. 그러니 저녁 여섯 시부터 이미 사방이 깜깜해진 건, 이곳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이 또한 탐사 미션에 꽤 큰 걸림돌이 되는 환경이었고 말이다. 탁- 탁- 탁- 군화 바닥이 사암 바닥을 찍는 소리가, 동굴 벽면에 부딪혀 돌아왔다. 어둠 속 유일한 광원은 저 안쪽 텐트의 LED 불빛뿐이었고. 그 불빛이 사암의 붉은 표면과 섞이면서…… 동굴 전체가 묘하게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족관 같네.’ 밤 10시. 옐로 존 한복판, 사암동굴 베이스캠프. 모래 먼지를 털어내며 발을 옮기자, 저 멀리 동굴 입구에서 모래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어지간히 가까운 거리가 아닌 이상 느낄 수 없는 소리인데…… 그래, 여긴 그래도 동굴 안이니까. 적어도 텐트 근처에선 고요했다. “팀장님.” 텐트 밖에서 서성이던 박진우가, 내 발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텐트 안쪽에서 자료 정리를 하던 유진성도, 후다닥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아니……. 고작 한두 시간 정도 나갔다 온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반가워할 일인가? “그야, 팀장님 안 계실 때 전투라도 벌어지면 곤란하니…….” 후우. 여기 몬스터 못 들어오는 구역이라니까. 다들 속고만 살았나.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믿는 거야? “…….” 그나저나 유진성의 안색이 특히나 초췌해 보인다. 안경 너머의 눈가에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자료 정리를 본인이 도맡아 한다고 나서더니, 벌써 세 시간 째 저러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하루 만에 워낙 많은 분량의 탐사를 진행해서 그럴 거다. 그러니까 오늘 다 할 생각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전투 기여도가 낮으니, 이런 거라도 잘해야죠 뭐.”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덜 열심히 하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을까? 탐사 결과보고서의 퀄리티에 따라 팀별 가산점도 추가로 있다고 하니……. 솔직히 도움도 될 것 같고 말이지. └ 악덕 팀장……. └ 역시, 블랙기업이 따로 없구만. 예? └ 방장. 블랙기업의 가장 큰 특징이 뭔줄 암? -뭔데요? └ 대표가 쉬지 않는다는 거임. └ ㄹㅇㅋㅋ “……?” └ 심지어 퇴근도 없음 ㅅㅂ 아니, 퇴근이 없는 거야 미션이 그렇게 생겨먹은 건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마지막으로 강민우의 안부 인사(?)까지 들은 나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간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흐음.’ 이어서 태블릿을 켜고 미션 현황 화면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띠링- 우리 팀의 탐사 데이터가 깔끔하게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건율 팀 — 옐로 존 탐사 미션 진행 현황]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⑤ 사암 동굴 구조물 내부 탐사 ········ 완료] - 동굴 내부 구조 매핑, 암반 성분 분석, 마력 동기화율 측정 완료 - 탐사 시료 채취: 마력의 모래결정 × 47, 사암 표본 × 12 - 정합성 검증 승인 완료 [① 침식 골렘 서식 구역 환경 조사 ········ 완료] - 서식 개체수 측정, 마력 웅덩이 성분 샘플링 완료 - 골렘 잔해 시료 채취: 침식핵 파편 × 3, 외피 조직 × 6 - 서식 환경 기록 및 촬영 데이터 제출 완료 [② "마력의 모래폭풍" 잔류 흔적 관측 ········ 완료] - 사구 하부 굴착을 통한 잔류 마력 패턴 3건 발굴 - 패턴별 마력 파장 기록 및 환경 변화 촬영 완료 [③ 옐로 존 위험 생물 분포도 작성 ········ 완료] - 사막귀, 침식 골렘, 적황귀 등 7종 서식 범위 매핑 - 위험도별 구역 색상 분류 및 GPS 좌표 등록 완료 [④ 등급 경계면(옐로→레드) 접근 조사 ········ 미완료] - 상태: 경계면 예상 좌표 확보. 현장 접근 및 데이터 수집 미실시. 우리 팀에 주어진 총 다섯 가지 탐사 과제 중, 초록 불이 들어와 있는 과제가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오늘 탐사를 끝낸 항목들이 맞았고,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자료까지 전부 확보해 둔 것도 맞다. 하지만. ‘뭐야. 이걸 벌써 다 했다고?’ 이러면 팬더곰이 되어버린 게 납득이 되는 부분이다. └ ㅁㅊ;;;; └ 도랐;;; └ 아니, 첫날 탐사일지까지 싹 다 클리어한 팀이 있다고? 아직 탐사과제 하나 남았는데요. 등급 경계면 조사 임무라고…… 제일 어려운 게 남았는데. └ 비틱 ㅅㅂ └ 정보) 지금까지 올라온 탐사일지 개수가 도합 10개뿐이다. └ 그럼 40%가 얘네 꺼임?ㅅㅂㅋㅋㅋ └ 개웃기넼ㅋㅋ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들? “후후.”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진짜 경계면 조사 하나뿐이다. 이건 오늘 오후에 위험 생물 분포도 작성하면서, 경계면까지의 대략적인 루트는 미리 확인해 뒀으니. 내일 새벽에 출발하면……. ‘경계면까지 샌드버기로 대충 두 시간쯤 걸릴 거고, 도착해서 데이터 수집하는 덴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오전 중으로 전부 끝낼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그러면 남은 이틀은 가산점 사냥에만 풀로 활용할 수 있겠고. 그 추가 포인트가 곧 다음 플리마켓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 ‘다음 플리마켓이 기대되는걸? 이번엔 제작진이 뭘 들고 나오려나.’ └ 형님들, 이 ㅅㄲ 웃는데요? └ 또 뭔 음흉한 짓거리를 하려고……. 성좌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기분이 좋으니 딱히 거슬리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마무리하고 난 뒤, 오늘의 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자, 그럼…….’ 팀원들에게 탐사 자료 정리를 맡겨 두고, 괜히 혼자서 나갔다 온 게 아니란 말이지. 드륵- 쿵- 인벤토리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침식 골렘 외피 조각 세 장. 아까 채집해 뒀던 마력의 모래 결정 한 줌. 사암동굴 벽면에서 떼어낸 적무석 파편 두 개. 사막귀 건(腱), 즉 사막귀의 마른 힘줄 뭉치. 그리고…… 옐로 존 곳곳에서 주워 모은 잡뼈와 나뭇가지 몇 개. 달가닥- 텐트 바닥에 그것들을 펼쳐놓고 앉았다. └ ……뭐하는 거임? └ 대이브 또 무슨 이상한 짓거리 시작한다;; 형님들, 잠깐만 기다려 보시죠. 좀 만들 게 있어서. “팀장님…… 그건 뭡니까?” 유진성이 텐트 입구에서 다시 고개를 쏙 들이밀며 물었다. “음. 서프라이즈… 랄까요?” “예……?” 의아한 표정의 유진성에게 대답해주는 대신, 나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앉아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입구에서 들려오는 모래바람 소리가, 유난히 먼 곳의 파도처럼 울려퍼진다. 이거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는걸? * * *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사막. 장하이는 납작하게 엎드린 채, 적외선 망원경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저 아래에, 침식 골렘 십여 마리가 뭉쳐 있는 광경이 보였다. 잔유물을 따라 이동한 녀석들이, 의도한 좌표에 정확히 모여 있는 상태. 그 그림자들이 별빛 아래서 둔탁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일 때마다, 사구 위까지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쿵- 쿵- 함정 자체는, 완벽했다. ‘그런데…….’ 장하이의 주먹이, 모래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건조한 모래알이 흘러내렸다. ‘이 시간까지… 안 온다고?’ 벌써 여섯 시간째였다. 낮부터 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밤이 깊을 대로 깊어 버린 것이다. 사막의 야간 기온은 급격한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고. 등 뒤에서 스며드는 모래바람에, 옷깃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스슥- 옆에 있던 린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대장.” 낮은 목소리였다. 평소 무표정한 린시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피로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이미 돌아간 건 아닐까요? 아니면 다른 탐사목적물로 경로를 선회했거나…….” 장하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말이 안 됐으니까. ‘설령 다른 탐사를 먼저 진행한다 하더라도… 여긴 무조건 지나야 할 텐데.’ 장하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건율 팀의 탐사 목적물 목록은, 이미 전부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장하이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탐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이 마력의 웅덩이 구역은 무조건 지나야만 하는 지역이었고. 만에 하나 장하이보다 먼저 여길 지났다 해도, 캠프로 복귀하기 위해선 돌아와야 했으니까. “후우.” 마른침을 집어삼키면서도, 장하이의 시선은 여전히 저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골렘들은 우글거리는 채 잔유물을 탐하고 있었고. 먹잇감을 향해 설치한 함정은, 가장 중요한 먹잇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이제 조금 있으면 불가능해진다. 사막의 밤은… 낮보다 배는 더 위험했으니까.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린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감각은 사실 아까부터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종일 이건율 일행의 코빼기도 보지 못한 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율 팀의 베이스캠프가 옐로 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얘기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말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헌터즈 스쿨의 시안 촬영에 파견된 촬영감독 고윤성은, 사실 처음부터 헌스쿨 촬영팀 소속은 아니었다. 원래도 헌터 예능 쪽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HBC로 이직한지도 그리 오래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처음 이 시안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고윤성은 한숨을 푹푹 쉬었었다. HBC로 오자마자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인 헌스쿨 팀에 합류하게 돼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건만. 첫 촬영 일정이 중국의 시안, 그것도 무려 ‘데드 존’으로 잡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휴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직을 해서…….’ 데드 존이 어떤 곳인가? 게이트 안 촬영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촬영 현장이 바로 데드 존이다. 게다가 시안의 데드 존은, 세계적으로 환경이 열악하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으니……. 각성자도 아닌 고윤성의 입장에서는 우울할 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집에 가고 싶다…….’ 오늘도 윤성은 우울한 표정으로, 당직실에서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 감독님.” “네, PD님.” “맡으신 팀 전부 베이스캠프 복귀하면, 그때 촬영 종료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지언정, 고윤성 감독은 프로페셔널한 인물이었다. 애초에 실력이 있었으니 HBC에, 그것도 헌스쿨 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고 감독은, 오늘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래도 파견 보너스는 두둑이 나오니까.’ 적어도 밤 7시. 다른 감독들이 다 퇴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음……?” 데드존의 사막은, 밤 6시면 완전히 캄캄해진다. 때문에 7시가 다 된 지금. 대부분의 참가자 팀들은 모두 베이스 캠프로 귀환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고윤성 감독이 촬영을 맡은 팀 중, 아직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지 않은 팀은 단 한 팀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팀만 복귀하면, 촬영 접고 퇴근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깡- 깡- 깡-! 지금 그의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아니… 지금 저기서 뭐 하는 짓이지?” 촬영용 드론을 통해 송출되고 있는 스크린을 확인한 고윤성 감독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남은 이건율 파티가, 갑자기 데드 존 안에 텐트를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늦은 시간까지 버티기 위해… 거점이라도 마련하는 건가?’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텐트를 치고 거의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바깥에 나갔던 이건율 팀장이 돌아오고 난 뒤, 아예 텐트 안에 침구까지 깔아버리는 게 아닌가? “뭣?” 설마 여기서 잔다고? 데드존인데? 혹시 미친 사람들인가? 촬영감독은 그런 혼란에 빠진 채, 화면을 계속해서 응시하는 중이었다. 지이잉- 드론 카메라의 야간 모드가 동굴 내부를 쓸어내리는 초록빛 화면. 고윤성이 눈을 꿈뻑이며 그 스크린을 응시하는 사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종이컵 커피는 전부 식어버렸다. ‘으, 미치겠네. 슬슬 졸린데 나도.’ 시계는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새벽같이 시작한 촬영 때문에, 고윤성은 눈이 감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미친 팀이 베이스 캠프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촬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탁- 탁- 모니터 속 이건율을 바라보며, 고 감독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 친구는 피곤하지도 않나…….” 다른 팀원들이 사암동굴 안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이, 혼자서 데드 존을 두 시간이나 돌아다니고 온 이건율. 그는 피곤해하기는커녕, 텐트 바닥에 주섬주섬 뭔가를 널어놓고는, 앉은 자세 그대로 손을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뭘 하는지 궁금했던 촬영감독은, 저도 모르게 드론을 움직여 이건율의 작업대(?) 위로 촬영 앵글을 수정하였다. 이어서. 지잉- 드론의 앵글이 좁아지며, 이건율의 손 위로 화면이 당겨졌다. 서걱- 서걱- ‘뭐지?’ 뭔가를 깎고 있었다. 사막귀의 외피 한 장. 나이프 하나. 그리고 손끝이 정확히 찾아가는 어떤 각도. 뭔가 솜씨가 심상치 않다. ‘저 두꺼운 가죽을…… 나이프 하나로 저렇게 빠르게 다듬는다고?’ 고윤성은 아주 조금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이건율이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확실히 신기하기는 했으니 말이다. ‘이거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이건율은 마치 장인처럼, 엄청난 속도로 칼질을 하며 가죽을 다듬고 마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펄럭- 다듬어진 외피 한 장이, 이건율의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표면이 반듯하게 정리된 그 모양은……. 캠핑용 바닥 깔개. 딱 그 모양이었다. ‘무슨 퀄리티가 공산품같냐.’ 다음으로 이건율이 집어 든 건, 잡뼈 세 개와 사막귀의 마른 힘줄 뭉치였다. 힘줄의 양 끝을 뼈에 묶고, 가운데를 붉은 빛깔의 바위 파편으로 고정하는 작업. 찰칵- 찰칵- 손끝이 멈추는 일 없이 맞물려 나가는 게, 마치 자석처럼 자연스러웠다. ‘뭔가 흥미진진한데.’ 촬영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당겼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션 욕심(?)에 복귀하지 않고 있는 이건율 팀이 원망스러웠지만. 어느새 그런 생각은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모니터와의 거리가 한 뼘쯤 줄였다. 그러면서 순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뭔가…… 알고리즘이 어쩌다 던져준 너튜브 영상 같은 느낌이랄까? 제목은 대충… ‘혼자 산속에서 집 짓기’ 같은 느낌. 클릭할 생각은 없었는데 썸네일에 손이 갔고, 재생하고 나니 어느새 다음 파트까지 보고 있는 그런 종류의 크래프팅 컨텐츠 영상. 이건 딱 그 느낌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고윤성이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완성된 건…… 삼각형 형태의 구조물. 이어서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이건율이 구조물의 접이식 관절을 탁- 하고 펼쳐냈다. “와…….” 이번엔 건조대였다.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고, 펼치면 식재료나 옷가지를 걸어 말릴 수 있는 접이식 건조대. 심지어 접합부가 스무스하게 움직여서, 사용감까지 고려한 설계로 보였다. 고윤성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게…… 왜, 재밌는 거지?’ 사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익숙한 느낌이었으니까. 그… 너튜브 영상에서 보면……. 대체 뭘 만드나 싶어 구경하던 물건이, 완성 순간에 ‘아, 저거구나’ 하는 그 순간. 그 느낌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가, 쓴맛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눈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만들게 더 남았어?’ 어느새 고윤성은, 당직실 구석에 걸려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고 앉았다. 낮에는 덥지만 밤이 되면 급격히 서늘해지는 환경인 탓에, 이렇게 담요라도 덮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촬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 * * * 상암동 HBC 사옥. 밤 열 시가 됐지만, 예능국의 사무실 절반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사실 이건 꽤 흔한 일이었다. 밤 10시라는 시간은 예능국의 직원들에게……. 운 좋은(?) 절반 정도는 퇴근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침에 올려야 할 보도자료의 마감과 싸우고 있을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터즈 스쿨의 마케팅 2팀은, 조금 불행한 축에 속했다. 2팀의 팀장인 유해미는, 최근 3주 사이 10시 이전에 퇴근할 수 있었던 날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 이유는…… 당연히 일하는 만큼 보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급여도 동종 업계 평균보다 월등히 높을뿐더러. 무엇보다 <헌터즈 스쿨>이라는 타이틀이 가진 이름값은,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특히나 이번 시즌. 시즌 3의 시청률은 역대급이었고, 마케팅 KPI 달성률은 180%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러니 2팀의 팀원들은 매일 같이 고생하면서도, 대체로 표정은 밝았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뭐야, 이 분위기가.’ 유해미는 편의점 샌드위치 포장지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건 포털 사이트 실시간 트렌드 목록이었고, 4위에는 아직도 빨간 글씨가 떠 있었다. 「#헌스쿨_데드존_위험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는 여론. 그와 함께 거의 수직으로 낙하 중인 마케팅 팀의 실적 지표들. ‘차라리 빡세게 대응 좀 하게 해 주지. 잘할 자신 있는데.’ 보도자료라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는 명확했었다. [최소한의 대응만 해. 공식 입장 표명은 보류야.] 예능국장의 직접 지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유해미도 이해한 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카드가 있는데, 왜 가만히 맞고만 있으라는 건지. 그런 답답함을 안은 채로 일주일이 넘도록……. [네, 네. 상황 면밀히 모니터링 중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럼요. 대처 다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광고주들의 전화에 이런 변명만을 반복하는 건…… 솔직히 한계가 오고 있었다. “휘유.” 그런데 유해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부르르- 부르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건 중국 국제번호. 하지만 익숙한 번호였다. ‘장…… PD님?’ 유해미는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PD님?” 수화기 너머로, 사막의 바람 소리 같은 잡음이 먼저 들렸다. 그리고 장세연의 목소리가 끊김 없이 울려왔다. “유 팀장. 지금 사무실이죠?” “예, 네. 지금 야근 중입니다.” “잘됐네요.” 짧은 침묵. 장세연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의 톤은…… 어딘가 단단한 데가 있었다. “이제 대응할 때가 됐어요.” 유해미의 손이 멈추었다. “이메일 보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파일이 좀 많을 거야.” “파일이요?” “현장 촬영 영상이에요. 편집 안 된 원본 그대로. 그리고…… 보도자료 방향은 이렇게 잡아줘요.” 장세연의 다음 한마디는, 유해미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한국의 게이트 폭주를 대비한 실전 트레이닝. 헌터즈 스쿨의 파견 강행 또한 그 일환이었다.” “……예?” 유해미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한국의… 게이트 폭주? “그 방향으로 보도자료 잡아줘요. 내일 오전 중으로 시안 보내 줄 수 있죠?” “잠, 잠깐만요, PD님.” 유해미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게…… 데드존에서 예능 찍었다고 욕먹고 있는 건데, 그걸 실전 훈련이라고 포장하라는 말씀이세요?” “포장이 아니에요.” 장세연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이에요. 디테일은 내일 영상 보면서 설명할게.” * * * 오늘따라 공부가 잘 되는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뭔가 머리가 맑은 느낌이더라니……. ‘오늘은 점심 먹고 졸지도 않았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시율은 독서실 문을 나서며 기지개를 켰다. 5시. 봄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길 위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 밥 짓는 냄새가 퍼져왔다. 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딸, 밥 먹자. 거의 다 됐어.” “넵.” 밥상 앞에 앉았다. 된장찌개에 계란말이. 엄마가 해주는 저녁도 평소와 다름없이 맛있었고, 거실 TV가 쓸데없이 켜져 있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분명 괜찮은 하루였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충전기에 꽂힌 노트북을 열고… 별생각 없이 브라우저를 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딸깍- 화면이 밝아지며, 푸른 빛이 어두운 방 안에 번졌다. 포털 사이트 메인이 떴다. 스크롤을 내리려는데……. 시율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최상단. 빨간 속보 배너가 포털 메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속보] 정부, 대한민국 게이트 폭주 공식 발표 — D-15」 시율은 마우스를 놓았다. 그녀는 화면을 응시한 채로, 잠시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미션 2일 차 역시 상당히 순조로웠다. 물론 1일 차 때처럼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따른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사암 동굴에 만든 거점을 기반으로 아침 일찍부터 우린 남은 탐사 미션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오전 중에 모든 탐사 미션을 다 마칠 수 있었으니까. “미션도 완수했으니, 이제 좀 여유를 가지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팀장님……?” 물론 내게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히든 탐사 과제가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다음 플리마켓에 쓸 수 있는 포인트가 늘어난다는데……. 기본 미션 끝냈다고 여유를 갖는다면, 그건 배가 부른 행태가 아닐 수 없는 것. “여유… 요? 그게 뭐죠?” “…….” “다른 팀들도 지금쯤 분명 뼈 빠지게 미션을 수행 중일 겁니다.” “그… 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도 더 열심히 달려보죠.” 그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옐로 존을 탐사했고, 그 결과 만족스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뭐, 팀원들은 또다시 녹초가 되긴 했는데……. 그래서 오늘은 어두워지자마자 빠르게 캠프로 복귀했잖아?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닐까? └ 그… 충분하다고 치자 그래. └ 지독한 방장놈……. └ 덕분에 우린 재밌잖어?ㅋㅋ └ 그렇긴 함 ㅋㅋ 헌스쿨 방중에 여기만큼 콘텐츠 많은 방도 없긴 해 ㅋㅋ 어쨌든 이렇게 복귀한 우리는, 각자 캠프 안에서 쉬고 있었다. 덕분에 사암동굴 안은 고요했다. 텐트 LED의 푸른 빛이 사암 벽면과 섞이면서, 동굴 전체를 묘하게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입구 쪽에서 웅웅거리는 모래바람 소리만이, 먼 곳의 파도처럼 간간이 울려올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툭- 뭔가를 확인하고 있던 유진성이, 갑자기 태블릿을 떨어뜨렸다. “……이거.” 유진성의 목소리였다. 평소 어지간한 일에는 차분한 편인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유진성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이, 이거 좀 보세요, 팀장님.” 유진성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고, 내 시선이 스크린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엔. 「[속보] 정부, 대한민국 게이트 폭주 공식 발표 — D-15」 빨간 속보 배너가 화면 상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거, 진… 짜일까요?” 유진성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건지, 다른 팀원들도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미친? 한국에 게이트 폭주라고?” “이거 진짜임까?” “와 씨. 기사! 다른 기사도 좀 봐요!” “…….” 하지만 나야 당연히,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한국에 게이트 폭주가 조만간 터질 거라는 건… 꽤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올 게 왔네.’ 다만. 아주 놀라지 않은 건 아닌 게……. ‘그런데 이건 좀…… 예상보다 빠른걸?’ 시점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꽤 빨랐다. 아무리 빨라도, 헌스쿨 촬영팀이 귀국한 뒤에 엠바고가 풀릴 줄 알았건만. ‘제작진들, 미리 다 알고 있던 게 아닌가? 스케쥴을 왜 이렇게 짠 거지 그럼.’ 이렇게 한창 미션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게이트 폭주가 알려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해외에 파견된 촬영팀이 있는 상태에서 폭주가 발표돼 버리면, 제대로 나머지 촬영을 마치지도 못한 채로 귀국 명령이 떨어져 버릴 확률이 높은데……. ‘해외로의 플레이어 유출이 가장 민감한 시기니까.’ 흐음…. 왜 이렇게 됐는지.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뭐. “그런데 D-15면…… 진짜 코앞이네요.” 유진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촬영은 어떻게 되려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 박진우의 표정. 그리고 그와 꽤나 대비되는 편안한 표정의 고은아. “정부에서 발표했다는 건, 대비가 다 돼 있단 얘기 아니겠슴까?” “그, 그렇긴 하겠지만…….”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슴다. 지금까지 열심히 훈련한 성과를 보여줄 검다!”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종잡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흐으음.” 동굴 입구 쪽에서, 모래바람이 조금 더 거세게 울어왔다. 텐트의 천이 미세하게 펄럭였고, LED 불빛이 한 번 깜빡거렸다. 그 사이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회전하고 있었다. ‘멘토들은 물론이고, 제작진도 미리 알았을 거야.’ 특히 장세연 PD는 확실히 알고 있었을 거다. 시안까지 촬영을 끌고 온 게, 단순히 주가를 올리려고 한 짓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 말인즉…… 제작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지직- 무전기가 울렸다. [전 참가자에게 공지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모든 미션을 즉시 중단하고, 베이스캠프로 복귀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즉시 베이스캠프로 복귀해주시기 바랍니다.] 짧고 단호한 무전이었다.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모였다. 뭐, 그야 당연한 거겠지. “짐 싸시죠.” 나는 무전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베이스캠프로 돌아갑시다.” * * * 시안 헌터즈 스쿨 베이스캠프. 그 중앙에는 제작진 상황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바로 옆에는 군용 컨테이너를 개조한 소형 회의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금, 멘토들을 포함한 헌스쿨 촬영과 관계된 거의 모든 핵심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실험실 조명마냥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냉방기의 저음이 깔리는 가운데, 탁자 위에는 종이컵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 안의 커피는 전부 식어 있었다. 마광철은 의자 깊숙이 앉아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간간이 턱을 긁적이고 있었고. 채유현이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최재민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서지혁만이 태블릿 화면을 느릿느릿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검희 채유현이었다. “내일 4화가 나갑니다.” 벽에 기대었던 그녀의 등이 미세하게 떨어졌다. “비동기 훈련 촬영분. 다들 내용은 이미 보셨을 거고…….” 짧고 간결한 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4화가 뭔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헌스쿨 방영분의 경우, 지금 이미 5화까지 모든 편집이 다 끝난 상태로 멘토들에게까지 공유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편집되지 않은 내용들까지 합한다면, 최소 6화까지의 방영분은 확보될 거다. 그러니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당장의 촬영이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들 모두는 오래 전부터 게이트 폭주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화 방영분에 대한 대중의 반응……. 그게 상당히 중요하겠군요.” 한소은의 말에, 채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 멘토님 말씀이 맞습니다. 반응이 차갑다면, 시즌 3는 여기서 종결될 테니까요.” 채유현의 말에, 다른 멘토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사실 당연한 거다. 적어도 여기 있는 멘토들 중, 헌스쿨3이 이대로 종영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랭커들 입장에서 아쉬울 게 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헌스쿨을 통해 멘토들이 얻는 이점도 결코 적지 않다. 헌스쿨만큼 대중 인지도를 올리는 데 탁월한 매체는 적어도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각자 소속된 길드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인지도와 명성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정부의 입장입니다.” 이번엔 서지혁이 입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꽂혔다. “HBC가 결국 정부 산하의 기관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게이트 관리국만큼은 헌스쿨이 정상적으로 지속 방영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서지혁의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추었고, 이번에는 채유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민심 안정용이에요. 관리국 입장에서는, 온 국민이 불안해하는 것보다…… 헌스쿨을 통해 데드 존 현장을 ‘안전하게’ 보여주는 편이 나으니까요.” 이번에는 마광철이 입을 열었다. “그럼, 촬영은 계속 진행되는 건가?” 짧은 침묵이 흘렀다. 냉방기 소리만 웅웅거렸다. 그때. 끼이잇-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 들어온 사막의 건조한 열기가, 냉방 시린 공기와 한순간 부딪혔다. “됩니다.” 마광철의 의문에 대답한 건 장세연이었다. 그녀는 문을 닫으며, 거리낌 없이 한마디 던졌다. “폭주 시작되기 전까진, 일단 최대한 찍을 예정입니다.” 장세연은 빈 의자를 끌어 앉으며, 초점 없는 시선을 회의실 안에 천천히 돌렸다. 탁자 위에 흩어진 종이컵들과, 조금 전까지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흔적들. 그녀는 마치 진작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지금 페이스대로 찍으면, 폭주 직전까지 미니멈 8화 분량 확보가 가능합니다.” “그 이후는? 어떤 계획이시죠, 피디님?” “폭주가 시작된 이후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유현의 물음에, 장세연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폭주가 시작되면…… 멘토분들께서는 당연히 각 길드로 복귀하셔야죠.”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게이트 폭주라는 국가 비상 사태에서, 헌스쿨의 멘토쯤 되는 전력이 예능 촬영을 하고 있는 건… 여러 가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참가자들도 이렇게 데드 존까지 와서 실전 훈련을 진행한 만큼… 실전에 투입돼서 한 손이라도 거들어야 할 테고?” 최재민의 말에, 장세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입니다. 다만…….” 장세연이 입이 다시 열렸다. “참가자분들께는 따로 저희가 부탁을 좀 드릴 생각입니다.” “부탁이라면… 어떤……?” “폭주가 진행되는 동안 데드 존 현장에서 활약하게 된다면.” 장세연의 눈이 살짝 빛났다. “바디캠으로 전투 영상은 최대한 녹화해서, 공유해 달라고 말입니다.” “흐음.” 장세연의 말에, 장내에 미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는 여기 있는 모두가 곧바로 이해한 상태였고. 이것으로 제작진이 그리는 그림의 완성본이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 와 닿았으니 말이다. 다만 그게 진짜 제작진 의도대로 될지. 그것까지는 아직 확신하기 일렀다. “PD님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서지혁이 입을 떼었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참가자들이 얼마나 협조 가능할지. 그 부분이 조금 의문이로군요.” 비동기 훈련에 데드 존 실전까지. 헌스쿨 3의 참가자들은, 루키들 치고 게이트 폭주를 대비해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해온 게 맞다. 하지만 데드 존의 현장에서 활약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시안에서야 헌스쿨 멘토들의 감시 감독하에 안전하게 실전을 수행한 거지만. 한국에 게이트 폭주가 터진 상황에서는, 각자도생의 환경이 될 터였으니까. 물론 참가자들 대부분이 한 손이라도 보태기 위해 전장에 합류하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괜찮은 활약을 해줄 수 있을지는 멘토들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레드 존 안쪽의 핵심 구역이 완벽히 억제되어 있는 시안의 데드 존 현장과 달리. 수년 만에 폭주가 처음 일어나는 한국의 데드 존은, 옐로 존이나 그레이 존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위험할 테니까. ‘참가자들이 실질적으로 전황에 도움 되는 영상이 확보되는 게 아니라면… 이건 역효과일 수도 있는데.’ 검희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확실히 참가자들 중 최상위권 몇몇은, 유의미한 활약을 보일 것 같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흘러갈지. 조금은 기대되는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검희는, 조금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었다. * * * 베이스캠프의 긴급 공지가 끝난 뒤. 연병장에서 돌아온 참가자들은,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그리고 밤 열 시. 나는 불 꺼진 숙소의 침낭 위에 반쯤 누운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진성과 박진우는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고은아는 침낭에 기어들어간지 5분도 안 돼서 코 고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강민우도 이불 속에서 미동이 없었다. ‘흐음.’ 팀원들의 고른 숨소리 사이로, 멀리서 모래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번져왔다. 적막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적막과 정반대였다. ‘일단은 촬영 강행이라…….’ D-15. 보름이다. 보름 뒤면…… 대한민국의 게이트가 폭주한다는 뜻인데, 오늘 제작진의 발표는 상당히 의외였다. [일단 촬영은 이대로 진행합니다.] [관리국에서 따로 명령 하달이 있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일정에 변화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작진의 이 말에 많은 참가자들이 안도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당연히 귀국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내가 귀국하고 싶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바로……. ‘여기선 레벨을 올릴 수 없으니까.’ 데드 존에서는 시스템 경험치가 쌓이지 않는다. 그러니 게이트 폭주가 확정된 지금. 남은 15일간은… 데드 존에서 구를 게 아니라 게이트 안에 들어가 레벨을 최대한 올려야 한다. 물론 중국에 있는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절차가 까다롭기도 하고… 이 시국에 관리국에서 허락을 해줄 리도 없다. 보름이면 최소 10레벨은 올릴 자신이 있는데……. ‘뭔가 방법이 없나?’ 뭐, 멘토들을 비롯한 제작진은. 남은 시간 동안에도 최대한 데드 존에서 경험을 쌓는 게… 참가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난 아니다. 내가 뭐 여기서 대체 무슨 실전경험을 더 쌓겠느냐고. ‘흐으음…….’ 어쩌면 제작진과, 딜을 좀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세연 PD는 그렇게 꽉 막힌 제작자가 아닌 것 같으니… 대화하면 뭐라도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침구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뭔가 상황이 더… 바쁘게 흘러갈 느낌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단순한 찌라시가 아닌……. ‘게이트 폭주’에 대한 뉴스가 터진 바로 그날. 너무나 당연히도, 인터넷은 지옥 그 자체였다. [속보] 정부, 대한민국 게이트 폭주 공식 발표 — D-15 [속보] 게이트 관리국, 민간 피해 최소화 위한 총력 대비 중 [속보] 정부 긴급성명 "사전 장비 배치 및 대피 매뉴얼 완비, 국민 여러분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하윤은 모니터 앞에 웅크린 채, 이 속보들을 벌써 네 번째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막 넘어간 참이었고, 자취방의 유일한 광원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르스름한 빛뿐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는 진작에 식어 있었다. ‘안심? 안심이 돼?’ 정하윤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올린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안심이 될 리 없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쏟아지는 게시글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나 강남인데 게이트 폭주 터지면 어디로 대피해야 함?] - 강남이면 그나마 낫지;; 난 성수임ㅅㅂ;; - 성수? ㅋㅋ 서울숲?ㅋㅋ 수고요 ㅋㅋㅋ - 알못들;; 성수가 제일 안전함ㅡㅡ;; 원래 안정화 게이트 열려있는 지역에는 불안정 게이트 생성 안됨 ㅇㅇ - ㄹㅇ임? - 으으 비상 대피소 위치 정리해둔 거 어디 있었는데 - 그거 5년 전 자료라 다 바뀜ㅋㅋ - 오늘 새로 배포된 자료 있음 다들 그거 확인 ㄱㄱ 과장 조금 섞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게이트 폭주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의 피난에 대한 정보를 찾아대고 있었다. 주식 시장도 당연히 박살났다. 찌라시 등 선반영으로 이미 크게 하락한 상황이었지만, 어지간한 주식들은 추가로 반토막이 더 났다. [정부가 안심하라는데 진짜 안심해도 되는 거임?] - 겠냐?ㅋㅋㅋ - 아니 그래도 사전에 준비 철저하게 했으니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 아님? - 니가 정부면 실제로 준비 못했다고 해서, 우리 준비 못했으니까 각자도생하세요~ 하겠음?ㅋㅋㅋ - ㄹㅇㅋㅋ - 원래 정부가 안심하라고 할 때가 제일 불안한 건데ㅅㅂ; - 5년 전 폭주 때도 안심하라고 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 안 남? - ㅇㅇ 그때 사흘 만에 3등급 경보 격상됨 ㅋ 정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브라우저 탭을 전환했다. 맨 왼쪽 탭. 팬카페 ‛이건율 LP정산소’의 관리자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여기도 당연히 난리였다. [그런데 헌스쿨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임?] └ 어떻게 되긴ㅋㅋ 이 시국에 예능 촬영이 말이 됨?ㅋㅋ └ 그런데 신기하긴 함; └ 뭐가요? └ 최근에 헌스쿨 참가자들 데드 존에서 촬영중이었잖음 └ 그렇긴 하죠? └ 혹시 한국에 폭주 날 거 미리 알고 있던 거 아닐까? └ 에이… 설마요; └ 그래도 오늘은 일단 방영한다고 하니…… 봐야겠죠? └ ㅇㅇ저도 보려고 대기중임. 오늘 내용이 비동기 훈련이라던데. 항상 이건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던 팬카페조차도, 게이트 폭주와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상황. ‘나라도 좀 긍정적인 얘기를 해봐야지.’ 마른침을 삼킨 정하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바삐 내달렸다. 확인되지 않은 찌라시(?) 같은 걸 올릴 생각이다 보니, 계정도 관리자 계정이 아닌 다른 계정으로 로그인했다. [그런데 님들, 제작진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게 팩트임.] -헌스쿨이 비동기 훈련 컨텐츠로 노선 틀고, 데드 존으로 촬영 잡은 것까지도 다 게이트 폭주 대비해서 그렇게 된 거라던데? 사실 제작진이 몰랐던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멘토들이 죄다 최상위 길드 간부들이고, 거기는 사전에 공유 다 받았을 텐데. 딸깍- 작성 완료를 누른 하윤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찌라시의 출처는 그래도 믿음직한 곳이니까…….’ 잘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윤은 노트북을 닫았다. 찌라시의 출처는,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정확한 정보통인 ‘상암동 스포방지위원회’님이었다. “일단… 본방사수부터…….” 헌스쿨 본방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마음이 뒤숭숭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정하윤의 눈 앞에 익숙한 헌터즈 스쿨 시즌3의 로고가 떠올랐고. < HUNTER'S SCHOOL SEASON 3 > 4화 : 비동기 훈련의 시작 하윤은 저도 모르게, 스크린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 * * 헌스쿨 4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일단 방송이 시작되니, 하윤은 저도 모르게 스크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작부터 눈에 들어온 비주얼이, 상당히 신선했다. 청룡회 본부 결계 안의 특수 훈련장. 이건 일반인들이 평소에, 결코 볼 일이 없는 특수한 환경이었으니까. - 와;; 여기 어디임? 시설 웅장한거 보소; - 걸려있는 깃발 보니 청룡회인 듯? - 비동기 훈련인지 뭔지, 그거 하는 거임? - ㅇㅇ맞음 마력 보조 시스템이 완전히 차단된 ‘비동기 상태’에서, 루키 헌터들이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사실 하윤은 어제까지만 해도 비동기 훈련이 뭔지 몰랐다. 그저 헌터들이 강해지기 위해 하는 훈련의 일종인 줄로만 알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하윤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반인들 입장에서 당연한 거였다. 다만 지금 시간, 이 헌터즈 스쿨을 보는 시청자들 중 대부분이 비동기 훈련이라는 게 뭔지 알 터다. 어제 게이트 폭주 엠바고가 풀린 뒤, 헌터즈 스쿨의 이 비동기 훈련이라는 게 꽤나 이슈화됐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게이트 폭주를 대비한 훈련이라는 거지?’ 제대로 된 스킬 하나 쓰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루키들. 웃음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쯤 되자, 하윤은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프로그램의 분위기. 지금까지의 헌스쿨과는 톤이 확연히 달랐다. 예능이라기보단 어쩌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분위기랄까. - 잠깐만. - 이정도면 그냥 시늉 하는 건 아니었나본데? - 뭔데;; 헌터예능에서 뭔 훈련을 이렇게 빡세게 해;; 커뮤니티의 시청자 채팅을 힐긋 확인한 하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참가자들의 훈련은, 보여주기용이 절대로 아니었으니 말이다. 편집을 잘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하기에는……. 훈련장의 분위기, 그리고 참가자들의 태도. 그런 것들이 결코 만들어진 종류의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 와;; 뭐지? - 진짜 시스템 동화율 0%에서 훈련하나본데? - 이클립스 훈련 대박이다;; - 시스템 없이 채널링 마법 몇시간씩 유지시키는 거… 이정도면 고문 아니냐? 그래서 하윤은 멍하니 스크린에 시선이 꽂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을 헌스쿨을 시청했다. 이제까지 헌스쿨이 줬던 재미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의 것이었지만. 오히려 몰입감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렬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게이트 폭주가 15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상황 때문일 터였다. 헌스쿨 참가자들이 정말 게이트 폭주를 대비해 저런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그 모습에 더 몰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 어? 이건율이다 ㅋㅋㅋ - 청룡회 초반에 잠깐 보여주고 안보여주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이제 나오네. - 그런데 저거 뭐임? - 시스템 보정 없앤 사격훈련인가? 멍하니 있다가 최애를 발견한 하윤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나같이 엉망진창이군! S급이니 A급이니 거들먹거리더니, 기본기도 안 되어 있어? 시스템 동기화 없이는 탄환에 마력 하나 제대로 못 담는 게 너희들의 현주소다!] - ㅋㅋㅋ원딜러 참가자들 개닦이네 ㅋㅋㅋ - 아니, 얘들이 비동기 훈련 언제 해봤겠냐고 ㅋㅋ 분위기 살벌한 거 보소 ㅋㅋㅋ - 와, 그런데 진짜 훈련 진심인 듯? - ㅇㅇㅇ교관들 눈에 핏대 오른거 봐. 그리고 다음 순간. “우, 우와.” 하윤은 두 눈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준비됐습니다.] 그녀의 최애는 이 와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잉-! 일단 첫 발. 이제껏 과녁 근처에도 못 가던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처음부터 과녁의 정중앙에 그대로 화살을 꽂아버리는 이건율. - ?????? - 이거 뭐임??? - 이건율만 혼자 시스템 켜논 거 아니냐? 이어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자연스럽고 정교한 동작을 보여주며……. 피핑-! 피피핑-! 별다른 영점 조준조차 없이… 서로 다른 과녁을, 속사로 연속해서 맞춰버리는 이건율의 모습은……. - 이정도면 주작임 ㅇㅇ - 주작은 ㅅㅂㅋㅋㅋ 교관 표정 썩은거 안 보임?ㅋㅋㅋㅋㅋㅋㅋ - 앜ㅋㅋ 개웃기넼ㅋㅋ 이건율은 뭐 사기캐임? 왜 비동기 훈련도 잘함? 비현실적이면서도 심각하던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그… 화살통은 주시는 거죠, 교관님?] - 앜ㅋㅋㅋㅋㅋ 받을 건 받아야지 ㅋㅋㅋ - 알뜰하게 화살통 챙겨가는 거 보소 ㅋㅋ - 이건율 호감이네 ㅋㅋㅋ 그리고 워낙 헌스쿨 참가자들의 훈련 내용이 진지한 톤으로 꽉꽉 채워져 있기 때문인지. 처음 4화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혼란의 도가니였던 커뮤니티의 민심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 야, 근데 진짜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미리 훈련 준비하고 있었던 거면, 폭주 터져도 괜찮은 거 아닐까? - 응 아니야 ㅅㅂㅋㅋ 그리고 얘들은 걍 루키들이잖음ㅋㅋ 얘들이 비동기 훈련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음?ㅋㅋ - 그건 맞긴 해 ㅋㅋㅋ 그리고 결정적으로. - 어, 잠깐. - 이건 헌스쿨 참가자들 훈련이 아닌데? 훈련 장면 사이사이에 다른 화면들이 삽입되기 시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각 길드 소속 정예 헌터들의 훈련 영상들. 물론 헌스쿨과 아예 관련 없는 영상은 아니고, 헌스쿨의 루키들이 실제 정예 길드원들이 받는 훈련과 같은 수준의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교차 편집 화면이었다. - 와;; 청룡회에서 이정도 대규모 비동기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 청룡회 뿐만이 아님 ㄷㄷ 태산길드 훈련 보니까 걍 실전훈련 수준인데? - 규모도 미쳤음;; 저정도면 길드원 전체가 하는 훈련 아니냐? 바르가의 검사들이 비동기 환경에서 오차 없는 칼같은 동작으로 검무를 펼치는 모습. 이클립스의 마법부대가, 시스템의 도움 없이 광역 방어 결계를 구축하는 장면들. 그 장면들을 지켜보던 하윤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제대로 대비했다는 정부의 발표가 허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한없이 부정적이던 헌스쿨 커뮤니티의 여론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긍정의 불씨가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장세연은 통화를 하며 손가락으로 창틀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직실 안은 모니터 불빛만으로 채워져 있는 상태. 냉방기의 저음이 바닥 가까이에서 울렸고, 사막의 밤바람이 컨테이너 외벽을 간간이 두드렸다. 식은 종이컵 커피가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었지만, 손댄 흔적은 없었다. “네, 국장님. 말씀하신 대로 4화 반응은 충분히 유의미합니다.” 장세연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보고에 익숙한 사람의 톤. “길드 훈련 교차편집으로 ‘대비가 되고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깔렸고요. 커뮤니티 반응도 부정 일색에서 분위기가 돌아서는 중입니다.” 창틀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한 번 멈추었다. “네. 이 정도면 관리국 쪽에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한 여론이라고 봅니다. …… 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장세연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지면서, 당직실 안이 한 톤 더 어두워졌다. 그 옆에서, 이정민은 태블릿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커뮤니티 실시간 반응을 모니터링하기 위함이었다. 4화 방영이 끝난 지 두 시간. 게시판에는 아직도 글이 분 단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정민이 태블릿에서 눈을 뗀 건, 장세연이 전화를 끊은 직후였다. “PD님.” 장세연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진짜…… PD님이 장담하신 대로 되어 가네요.” 이정민의 톤에는 감탄이 묻어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에 가까운 놀라움. “편집 좀 신경 쓴다고, 뭐가 바뀌긴 할까 싶었는데.” “편집만 신경 쓴 건 아니지. 결국 콘텐츠 자체에 진정성이 있던 거니까.” “그래도요.” “…….” “이 정도까지 효과가 있을 줄은, 솔직히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이정민이 태블릿을 살짝 기울여 보였다. 벌써 수천 회 이상의 공감을 얻은, 헌스쿨 4화에 대한 긍정 피드백 게시물. 장세연은 태블릿을 힐긋 보았다. 입꼬리가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길드 훈련 영상이 생각보다 잘 빠지긴 했어. 결국 대중들 입장에서는, 눈으로 직접 봐야 신뢰가 가는 게 당연했던 거지.” 잠시, 정적. 냉방기 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정민이 태블릿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장세연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눈을 살짝 좁혔다. “그런데 PD님.” “왜.” “그러면 확실히 상황도 괜찮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 “표정이 왜 이렇게 썩었어요?” “뭐 인마?” 장세연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멈추었다. 이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티… 나냐?” “티 납니다.” “…….” 장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한 번 톡, 두들기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서류 뭉치를 집어 올렸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 드러난 한 장의 종이. “그럼 너도 한번 보던가.” [이건율 팀 / 옐로 존 탐사 미션 최종 포인트.] 이정민이 그걸 집어 들었다. 숫자 몇 줄이 전부인 간결한 집계표였다. 위에서부터 팀별 탐사 포인트가 내림차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맨 위. 이정민의 시선이 멈추었다. 어쩐지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듯도 보였다. “……이게 진짜예요?” “그럼. 아니겠냐.” 이정민이 서류를 들어, 모니터 불빛에 비춰 다시 봤다. 숫자가 바뀔 리 없었다. “와 씨… 뭐 이렇게 무자비하냐.” 이건율 팀이 확보한 옐로 존 미션의 포인트는, 다른 팀들의 수 배가 넘는 수준. 이대로라면, 이번 플리마켓 페이즈에서도 제작예산 수천만 원이 그대로 날아갈 상황이었다. “후우.” 이정민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에,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은 장세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남들은 죄다 국가적 위기인 게이트 폭주 때문에 심란한 이 상황에서, 제작예산 때문에 표정이 썩어있는 PD라니. ‘시청자들은 상상이나 할까.’ 하지만 제작진 입장에서는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이번에는 팔아먹을 샌드버기도 없었으니까. “…….” 이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지금까지 꺼낼지 말지 망설이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PD님.” 이정민의 목소리 톤이 살짝 달라졌다.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조심스럽고 은밀한 목소리. 장세연의 시선이 이정민에게로 꽂혔다. “뭔데?” “사실…… 건율이가요.” “음……?” 장세연의 두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정민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어제 저녁에, 저한테 슬쩍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제작진이랑…… 딜 같은 것도 할 수 있냐고.” 이제까지도 책상을 가볍게 두들기던 장세연의 손가락이, 순간 멈추었다. “……뭐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장세연의 표정이 갑자기 화사하게 밝아졌다. “그걸 왜 이제 말해?” * * * 잠을 못 잤다. 정확히 말하면, 새벽 세 시에 한 번 깨서 다시 눈을 못 붙인 거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다.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멍했다. ‘후우.’ 나는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세면을 마친 뒤, 컨테이너 밖으로 나섰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주 이른 새벽 시간이었다. “조용하네.” 시안의 새벽은 어김없이 건조했다. 그리고 조용하니까…… 다시 또 악몽(?)이 떠올랐다. ‘괜히 확인해가지고.’ 그러니까 어젯밤.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확인한 게 문제였다. 한동안 일부러라도 거래소 앱과 증권거래 앱을 확인하지 않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엠바고까지 풀린 상황이 되자, 도저히 확인하지 않고는 참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거래소 앱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행복했었다. [품목 : 마력안정제(C급)] [수익률 : +312%] [미실현 손익 : +37252LP] [품목 : 정화 소금(일반)] [수익률 : +291%] [미실현 손익 : +28719LP] [품목 : 비상용 마나 코어(D급)] [수익률 : +389%] [미실현 손익 : +19822LP] ……중략…… 몇 주 전에 투자해뒀던 현물들의 가격이 최근 며칠 사이 아주 다이나믹하게 올라 있었고. 시세 차익으로만 10만LP에 가까운 막대한 금액을 번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악몽은 무슨 말이며, 잠은 왜 못 잔 거냐고? └ 와 ㅅㅂ 21세기 매점매석이라니 ㄷㄷ └ 잠을 왜 못 잤겠음; 설레서 못 잤겠지 ㅅㅂ └ ㄹㅇㅋㅋ 아침부터 난입한 성좌놈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지만, 당연히 내가 설렌다고 못 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바로 여기 있었는데……. [종목 : 실드코프] [수익률 : +1289%] [미실현 손익 : 1.5LP]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걸 발견했던 그 순간의 충격이 잊히질 않는다. 수익률이 1289%인데, 왜 1.5LP밖에 못 벌었냐고? └ ㄹㅇ;; 실드코프 미쳤네; └ 이거 대이브 리딩방 주종목 아니었음?? └ 방장 첫 매수에만 7500LP 땡겼던 거로 기억하는데. 예, 그랬습죠. 5%쯤 빠졌을 때 물탄 것까지 더하면, 아마 10000LP도 넘게 샀었던 것 같은데……. └ 와 ㄷㄷ 그럼 벌써 10만LP 이상 수익실현 한거네? └ 미쳤다 대이브 ㄷㄷ └ 플레이어 할 게 아니라 증권사로 가야하는 거 아님? └ 겠냨ㅋㅋ 문제는 –20%정도 찍었을 때, 버티지 못하고 손절했다는 거였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LP 싹 다 인출하고 나서, 증권거래 어플까지 지워뒀었는데. └ ㅁㅊㅋㅋㅋ 이걸 하나도 못 먹었다고??? └ 심지어 손절했다곸ㅋㅋㅋㅋㅋㅋㅋ??? 세상이 날 억까하는 느낌이다. 아니, 어차피 오를 거면서 20%는 왜 뺐다가 오르는데? 심지어 차트를 다시 살펴보니, 내가 던진 날이 정확히 최저점을 찍은 날이다. 캔들의 아랫꼬리 끝. 근 몇 년 사이, 나보다 실드코프를 싸게 판 사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 아닠ㅋㅋ 그랬으면 판 돈으로 마안제라도 좀 더 사던가 ㅋㅋㅋㅋㅋ 왜 현금으로 쥐고 있었음? 그야, 다른 것들은 그때도 이미 50% 이상 올라 있었으니까요? 1.5배나 비싸게 추매하기에는 손이 도저히 나가지를 않아서……. └ 개웃기넼ㅋㅋㅋ └ ㅁㄷ 대이브 10만LP 버림? └ ㅇㅇㅇ 리얼루다가 버림ㅋㅋㅋㅋㅋ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한 땀 한 땀 LP 파밍하는 영세 플레이어에게, 10만LP라는 손실은 아무래도 너무 가혹한 듯하다. └ ???이건 또 뭔 소리임;; └ 손절은 3천 정도 한 거 아니었음? 원래 손실은 고점이 기준인 겁니다, 형님들. 그러니까 그냥…… ‘공감’해 주시죠? └ ㅅㅂㅋㅋㅋ └ 미친놈인가 ㅋㅋㅋ └ 이제 알음?ㅋㅋㅋㅋㅋ 어쨌든 속으로 어젯밤의 악몽을 곱씹는 사이……. 끼이익- 어느새 난, 제작진의 캠프에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는 제작진이 주로 사용하는 당직실이자 소규모 회의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냐고? “이건율 참가자?” “예, PD님.” “들어오세요.” 오늘 여기서 난, 어젯밤 깨달은 막대한 손실(?)을 만회해야만 한다. 철컥- 그런 의미에서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회의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8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식어가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김영태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방이었다. 관리국 인천지부의 소회의실. 창문 너머로는 인천 공항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고, 햇살은 블라인드 틈으로만 가느다란 줄기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마주 앉은 사람은…….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름 아닌 검희, 채유현이었다. “별말씀을. 중국에서 들어온 검희님에 비하면야, 서울에서 인천 오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사실 김영태는 검희와 꽤 오랜 친분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그가 관리국 과장으로 있을 때 검희를 크게 도와줬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상부상조하며, 긴 시간 인연을 유지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태는, 아직도 검희가 어렵게 느껴졌다. 검희의 태도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김영태에게만큼은 항상 호의적이었으니까. 다만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랭커라는 무게감은, 관리국 입장에서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일 뿐이었다. “국내 여론은…… 수습이 좀 되고 있다면서요?” 검희의 물음에, 김영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번 엠바고 해제를 이 정도 혼란으로 수습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검희의 도움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헌터즈 스쿨의 트래픽을 활용해서 긍정 여론을 만들어 보자는 것도 검희가 처음 제안한 아이디어였으니까. “덕분에 옷 벗는 건 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김영태의 대답에, 검희가 찻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국장님께서 옷을 벗으시면, 관리국은 누가 지키나요?” “허허. 저 말고도 대한민국에 인재는 많습니다.” “글쎄요. 일단 저는 국장님께서 직을 반납하시고 나면…… 관리국과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 나눌 일이 없어질 것 같은데요.” 검희의 말에 김영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자신을 고평가해주는 부분은 기껍게 느껴졌으나, 그녀의 말에 들어있는 뼈가 느껴졌으니 말이었다. ‘역시. 검희는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국방부장관과 그 계파의 인물들. 그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면, 저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김영태는 화제를 돌렸다. 지금 그 방향으로 이야기를 더 나누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여튼, 바쁘신 분께서 이렇게 저를 보자고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검희가 다리를 꼬고 앉으며, 차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김영태는 잔을 내려놓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줄기가, 테이블 위의 찻잔에 반사되어 작은 원을 만들었다. 잠시 뜸을 들인 검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개인적으로 제안 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 “이번 폭주 기간 동안 운영될 비동기 전술 타격대.” “음……?” 검희의 말을 들은 김영태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주 자리를, 제가 한 번 맡아봐도 될까요?” * * * 제작진과의 ‘딜’에서 내가 얻어내야 할 건, 당연히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게이트 폭주가 터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게이트에 들어가 경험치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뭐, 딜에 실패해서 지금 상태. 즉, 45레벨로 폭주가 시작된다 해도 상황이 엄청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50레벨 이상을 달성한 뒤 몇 가지 생각해둔 준비들까지 해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해볼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 뭘 해본다는 거임? └ 폭주 기간동안 영웅 놀이라도 하려는 거임? 영웅 놀이라뇨 형님. 국가적 위기에 발 벗고 나서는 건, 대한민국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해야 할……. └ ㅈㄹㄴㄴ └ 속셈이 뭐냐 방장. 우리한텐 좀 알려줘라ㅠㅠ └ 대이브가 공익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아니, 제 진심을… 정말 아무도 안 믿어주시는 겁니까? └ 솔직히 바니도 비웃을 듯 ㅋㅋ └ ㄹㅇㅋㅋ 말 넘 심……. └ 이성환이 말했으면 믿었을 지도ㅋㅋ └ 방장아ㅋㅋ 차라리 데드 존에 숨겨진 노다지라도 있다고 해 ㅋㅋ 그건 믿어질 듯 ㅋㅋ 뭐지? 천잰가? 어떻게 알았지? └ 근데 진짜 게이트 폭주 때 45레벨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음? └ 마력치안대 자원하면 동네 정도는 지킬 수 있을 듯 ㅋㅋ 하……. 이런 순수한 비난이라니. 사실 익숙한 맛이긴 하다. └ 그런데 대이브를 그냥 45레벨로 보기도 좀 그렇지 않나…ㅋㅋ └ 것도 맞음ㅋㅋ 시안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만 해도, 어지간한 60레벨대보다 나을지도? └ 60레벨은 뭐 다름? └ ㄹㅇㅋㅋ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성좌들과의 장난은 뒤로 하고. 나는 오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꽤 강하게 어필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정해진 촬영 일정이라는 게 있을 테니 쉽지는 않을 터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겠지만……. 앞으로 최소 10일간은 시안에서 촬영이 이어질 거라고 이미 공지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제작진, 특히 메인 PD인 장세연은 꽤 융통성 있는 디렉터였고. 제작진은 내게 이미 조기졸업까지 제안했던 적이 있었으니, 얘기를 좀 나눠보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향성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그리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 기대는 꽤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장세연 PD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건율 님 말씀은……. 게이트 폭주가 터지기 전까지, 개인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퀘스트 비슷한 게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어제 저녁에 성좌 형님들이 미션 걸어주신 게 있거든. └ ㅅㅂㅋㅋㅋ └ 미친놈인가??ㅋㅋㅋ └ 그게 빌드업이었다고?ㅋㅋ 제가 그럼 장난으로 미션 받았겠습니까? 저, 신성한 미션으로 장난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찾아오신 게 납득이 되긴 하네요. 폭주가 시작되면 한동안 게이트에 아예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바로 그겁니다 피디님. “하지만 건율 님 때문에 촬영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으니…….” “그 부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해서, 이렇게 PD님을 뵙고자 했던 거구요.” 그런데 이해가 잘 안 되는 건, 장세연 PD가 내게 왜 이렇게까지 우호적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겠네요.” “명분이라면……?” 물론 정 사장이 날 위해서 밑밥을 좀 깔아놓기야 했겠지만……. 촬영 스탭들 얘기 들어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시청률의 악마라던데. 이렇게 이해심 많은 PD님께 어떻게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건율 참가자님만 특별 대우를 해줄 만한, 그런 명분 말이죠.” 내가 꺼내려던 이야기들을 먼저 술술 꺼내면서, 이렇게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줄 것이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 지금 딱, 괜찮은 명분이 하나 있기는 해요.” “어떤 걸까요?” “그건 바로 이건율 팀장님 팀의… 압도적인 미션 성적?” 혹시 이 아줌… 아니, 우리 장세연 피디님께선,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하신 걸까? “이건율 팀장님, 지금까지 확보하신 탐사 포인트가 53만 포인트 정도 되시죠? 팀장님 개인 포인트만 35만 정도 되실 거고…….” “그렇죠?” 덕분에 비장하게 딜을 하러 왔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번 플리마켓 룰에……. 2만 포인트당 하루 휴가를 살 수 있도록 새로운 품목을 만들면 어때요?” 2만 포인트면, 플리마켓 룰 기준으로 대충 200LP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 바짝 던전 돌면 파밍할 수 있는 LP가, 성좌 형님들 후원 제외해도 이제는 500LP도 넘을 테니까. 솔직히 35만 포인트 전부 다 써도 무조건 할 생각이었는데……. ‘13일 정도 휴가 쓴다고 가정하면, 9만 포인트 정도 남길 수 있는 건가?’ “이 정도면 형평성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고, 팀 1등도 유지 가능할 것 같은데. 어때요?” 아니,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주신다고요? HBC쯤 되는 대기업이 포인트 환전해 줄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물론 조건은 있어요.” “……!” “휴가 기간 동안 게이트에 들어가실 때, 최소 다섯 시간 이상의 바디캠은 확보해서 공유해 주셔야 해요.” 아, 그쯤이야 뭐. 편집 소스로 활용하려나 본데, 다섯 시간이 아니라 오십 시간도 가능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정말 이 조건, 괜찮으신 거죠?” 뭔데? 왜 내가 물어볼 말을 물어보는 건데? “저는 좋… 습니다.” 뭔가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하루가 지났다. 그러니까 장세연 PD와의 딜이 성사된 다음 날. 2차 플리마켓이 열렸다. [자, 이번 플리마켓에는 특별한 품목이 신설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새로운 품목 하나가 플리마켓 목록에 떠 있었다. [이름하여, 자유 행동일!]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2만 탐사 포인트당 하루의 ‘휴가’를 얻으실 수 있으며, 무려 ‘유급휴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휴가 기간 전부, 촬영일에 포함시켜드린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이 품목은,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다. 2만 포인트가 결코 적은 포인트는 아니었지만……. [휴가 하루에 2만 포인트면, 대체 누가 이걸 선택하겠냐고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휴가 기간 동안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컨텐츠를 바디캠으로 촬영해 제출해 주신다면…! 알찬 내용으로 편집해서 공식 컨텐츠로 업로드해드릴 예정입니다.] [전략적으로… 충분히 활용해 볼 만 하겠죠?] 장세연 PD가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건지는 몰라도, 꽤 예쁘게 그림을 만들어 온 것이다. “개인 콘텐츠로 따로 업로드까지 해주는 거면… 인지도 쌓기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메인 촬영 팀에서 벗어나는 건데, 괜찮을까?” “바디캠에 뭘 담아오느냐가 중요할 듯 해.” “나는 한번 도전해볼래. 어차피 시안에 계속 있어도, 이대로면 묻힐 것 같아.” 게다가 한 가지 더. 자유 행동일은 13일 범위 안에서 원하는 일자로 지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안 촬영이 끝나는 마지막 날짜에 붙여 놓으면, 귀국을 미리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게다가 시안 촬영이 끝나면 게이트 폭주가 진행되는 15일 간은 또 촬영이 없을 예정이라고 하니, 게이트 폭주 기간까지 그대로 휴가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마지막 3일 정도는 활용해 봐야겠어. 게이트 폭주 준비도 따로 할 겸…….” “우리는 남자. 어차피 여기만큼 비동기 환경 적응훈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없잖아?” 그러니 나는, 잠시의 망설임조차 없이 13일 풀 매수를 때려버렸다. [‘자유 행동일’ 품목을 13회 구매하셨습니다.] [260,000 탐사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잔여 탐사 포인트 : 92,750] └ 시원하네 그냥ㅋㅋ └ 근데 26만 쓰고도 9만이 남네 ㅅㅂㅋㅋㅋ └ 남은 포인트만 팀 서포트에 투입해도, 기여도 거의 1위일 듯 ㅋㅋ 그리고……. 팀원들의 진심어린 걱정을 잠깐 받아야 했다. “그, 팀장님. 진심이신 거죠?” “혹시 제작진으로부터 어떤 협박이라도 받으신 건…….” 음? 협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사실 그렇잖습니까. 팀장님이야 시안에서 계속 활약하시면 솔직히 화제성 싹 다 빨아들이실 거잖아요?” “맞슴다.” “그러니 제작진 입장에서는 팀장님이 잠깐 메인 촬영장에서 빠져줘야 그림 그리기 더 쉬울 테고요.” 유진성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다. 장세연 피디가 왜 이렇게 우호적인가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당연히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들 안 하셔도 됩니다. 폭주 터지기 전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휴가 길게 쓴 거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매력적인 선택지로 탈바꿈된 덕에, 나 말고도 꽤 많은 참가자들이 휴가를 샀다. 다음 촬영 미션이 팀 미션이 아닌 ‘실전 비동기 훈련’인 부분도, 참가자들의 선택을 부추기는 데 한 몫 했던 것 같다. 내가 빠져도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 상황이니까. 그래봐야 휴가를 선택한 인원이 15명이 안 되었지만 뭐……. 내 입장에서는 의도한 대로 술술 잘 풀렸으니 대만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저… 내일 서울 가게 됐습니다, 형님들. -그러니 아마 내일 저녁까지는 방송 못 켤 것 같슴다. -서울숲 게이트 들어가서 다시 방송 켤게요. └ 근데 방장 갑자기 왜 휴가 풀로 때리는 거임? 어제 방송 못 봐서 모름;; └ 서울 가서 게이트 들어간다던데ㅇㅇ 폭주 터지기 전에 레벨올려야 한다고. └ 중국에도 게이트 있는데 서울까지 감? └ 절차가 문제지 뭐. └ 맞음ㅇㅇ 중국 게이트 들어가려면, 한중 양쪽 관리국에 허가 다 받아야 할걸? └ 게다가 중국 내 활성화 게이트까지 가려면 어차피 비행기 타야 함ㅋㅋㅋ 최소 정저우까진 가야 할걸? └ 그럴 바엔 서울 가는 게 맞긴 하네 ㅋㅋ 성좌들의 말대로다. 중국에도 게이트는 있지만…… 절차가 복잡한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중국 관리국의 허가는 오히려 받아낼 만 하지만, 한국 관리국의 허가가 완전히 막힌 상황이니까. 게이트 폭주 직전이라 플레이어들의 출국 자체가 막힌 상황에서, 타국 게이트 입장 허가를 내줄 리 없다고 할 수 있겠다. └ 비행기 표는 구했음? -좀 비싸긴 한데…… 구하긴 했습니다. └ 비쌈? 특별히 비쌀 이유가 있나? └ 있지 ㅋㅋㅋ └ 지금 한국행 비행기 자체가 거의 안 뜰걸?ㅋㅋ 심지어 기존에 왕복 표를 끊는 것보다도 더 비싼 수준이다. 그래서 비행기 표 지원 안 되냐고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안으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는 정도다. └ ㅅㅂㅋㅋㅋ 유급휴가 가면서 비행기표까지 달라고 할 셈이었음? └ 양심 ㅇㄷㅋㅋㅋ 아, 그래서 참았다니까……. 역시 건수만 있으면 물어뜯기 바쁜 형님들이다. └ 무튼 게이트 폭주 전까지 대체 뭘 준비하겠다는 건지 궁금하긴 하네 ㅋㅋ └ ㄹㅇㅋㅋ 레벨 진짜 50찍을 수 있으려나? 어쨌든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고……. 다음 날, 나는 무사히 시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국 사실을 가족들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이 시국에 휴가 나와서 또 게이트 들어간다고 말씀드리면, 집에 감금당할 게 뻔했으니까. 삐빅- 배낭 끈을 조이며,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전광판에는 인천행 편명이 파란 글씨로 깜빡이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 활주로 위에 주기 중인 비행기가 하나 보였다. 쿵- 시트에 몸을 묻으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창밖으로 시안의 누런 하늘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황폐화가 상당히 진행된 시안은, 데드 존이 아닌 공항의 하늘에도 적무가 껴 있었다. 앞으로 볼 일 없을 하늘이긴 하다. 위이이잉- 엔진음이 기체를 감싸기 시작했고. 활주로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13일.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판이 바뀐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창밖이 하얗게 지워졌다. * * * 서울 도심 한복판. 초고층 빌딩 사이에 끼어 있는 모처의 멤버십 라운지는, 일반인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블라인드가 완전히 내려져 바깥 빛이 차단된 프라이빗 룸 안에는, 간접 조명만이 테이블 위로 희미한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음 처리된 공간 안에서 유독 선명하게 울렸다. 딸칵- 한국 길드 랭킹 13위의 아이기스(Aegis) 길드. 이곳의 마스터 강태욱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찻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깔끔하게 다림질된 슈트를 입고 있었다. “탄지아 부장.” 다만 지금 그의 얼굴에 떠 있는 표정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정갈한 표정 자체는 비슷했지만, 미세한 긴장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대면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군요. 부장께서 직접 한국까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강태욱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맞은편 소파에는 만다린 칼라의 짙은 차콜 정장을 입은 여자가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직접 찾아 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테이블 끝에 놓인 서류 봉투 하나. 그녀의 손끝이 간간이 그 모서리를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탄지아. 중국 최대 헌터 길드, 천룡(天龍)의 최고위 간부. 길드마스터 류펑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인물이자, 글로벌 랭킹 100위권에 드는 거물이었다. 겉으로는 서로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이기스의 마스터인 강태욱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랭커라는 말이었다. “저희 마스터께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탄지아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공손했지만, 강태욱으로서는 이 자리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저야 덕분에 잘 지낸다고, 감사하다고 전달 부탁드립니다.” 탄지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뭐 그렇게 까지야. 어차피 이제 곧 자주 보게 될 사이 아니었던가요? 우리?” 탄지아의 말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의 이 한마디에는, 많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으니까. ‘이제 슬슬 넘어오라는 거겠지. 게이트 폭주도 가시화됐으니까.’ 일 년 전. 전대 마스터였던 서진우가 사망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아이기스가 30위권 바깥으로 추락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태욱은 아이기스의 랭킹을 일 년 넘게 방어해 내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 천룡길드의 지원 덕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물론, 길드 내부에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그리고 천룡 길드에선 당연히, 아이기스를 무상으로 지원해준 게 아니었다. 사실상 아이기스의 힘을 흡수하여 천룡의 한국지부로 만드는 게 그들의 목표였고, 물밑에서 그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마스터인 강태욱의 주도 하에 벌어진 일이었고 말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일 년이면… 충분히 기다려드린 것 같습니다만?” 탄지아의 시선이 강태욱을 똑바로 향했다. “마스터께서 기대가 상당히 크십니다. 마침 게이트 폭주까지 터지게 되었으니, 길드원 설득의 명분도 충분한 상황이니까요.” 탄지아의 눈빛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이 완벽한 상황에서도 길드를 휘어잡지 못하신다면, 저희는 강태욱 마스터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방 안에 다시 정적이 흘렀고, 강태욱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싸가지 없는 년이…….’ 사실 강태욱이야말로, 최대한 빨리 한국의 상황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뜨고 싶었다. 아이기스의 흡수합병만 성공적으로 해내면, 천룡길드에서 그에게 약속한 댓가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금액이었으니까. 다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전 마스터를 따르는 길드 내부 파벌이 아직 전부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드륵- 잠시 강태욱을 응시하던 탄지아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3주.” “……?” “저희가 마스터께 드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게 무슨…….” “물론 3주 안에 모든 임무를 완수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탄지아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마스터께선, 그 안에 조금이라도 진척된 정황을 보여주셔야만 할 겁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시안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지체 없이 공항버스를 타고 서울숲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어느새 오후 1시였다. “슬슬 배가 고프긴 한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식당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내 걸음이 곧바로 향한 곳은 서울숲의 게이트였고. “엇, 잠깐. 저 사람… 이건율 아니야?” “에이, 잘못 본 거겠지. 헌스쿨 팀 지금 중국에 있다던데.” “으음, 그런가?” 멀찍이서 들린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후다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헌스쿨3 시청률이 엄청나다고 하더니……. 벌써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건 좀 당황스럽다. 맨얼굴이면 몰라도, 캡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시안표 미세먼지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데. 이걸 알아보다니. ‘조심해야겠는데.’ 장세연 피디가 휴가자들에게… 들키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건만,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대참사가 날 뻔했다. 뭐, 어쨌든……. 띠링-! [‘라이카-Laika’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서버 : 지구] [접속 경로 : 서울 - 한국] [플레이어 데이터를 동기화합니다.] [1%……24%…27%……98%] [데이터 동기화 완료!] [접속 장소 : 알테리온 대륙 – 루미스 영지] [‘데이브(Dave)’님, ‘라이카-Laika’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접속 시스템 메시지가 꽤 반갑게 느껴진다. 이걸 13일 뒤부터는 또 보름 동안 못 보게 된다는 말이지? 게이트가 소중하게 느껴지다니……. 드디어 내가 미친 모양이다. “후우.” 자, 그럼 시간도 아까우니, 이제부터 곧바로 레벨업을 시작하는 거냐고? 그건 아니다. 일단 짐부터 풀고, 밥도 든든하게 먹어야 하니까. 휴가 나왔으면 일단 홈에 가서 발도장부터 찍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물론 성수동 말고, 루미스 영지에 있는 기간제 홈그라운드를 얘기하는 거다. 띠링-! [그랜드 아르카나 - 펜트 하우스101에 체크인하셨습니다.] 캬. 그래, 이거지. 솔직히 다른 건 다 떠나서, 휴가 기간 동안에도 숙소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제작진의 바다와 같은 아량에 감동했다. 그나저나 고작 ‘숙소’가 이렇게까지 반가워도 되는 건가? 지옥 같은 중국의 먼지구름을 뚫고 돌아와서 처음 인천공항을 밟았을 때도 이렇게 반갑지는 않았었는데. 숙소에 돌아오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고 여독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걸? 헌스쿨 촬영 끝나면 다른 건 몰라도 여긴 너무 그리울 것 같은데……. └ ㅈㄹㅋㅋㅋ └ 방장 이 ㅅㄲ 아르카나 오니까 표정부터 다른데? 암요.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천국이 따로 있겠습니까? “흣-차.” 소파에 삐딱하게 몸을 누인 채, 탁자 위의 태블릿을 들어 룸서비스 메뉴판을 넘기기 시작했다. 룸서비스 메뉴를 고르는 손가락이 콧노래를 따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흠흠흠- └ 아니, 뭔ㅋㅋ 대낮부터 룸서비스임ㅋㅋㅋ └ 그건 그렇고, 대체 메뉴 몇 개를 시키는 거임 이 ㅅㄲ는? └ 강소희도 같이 온 거냐?ㅋㅋ 둘이 먹기도 많아 보이는데. └ ㄴㄴ혼자 다 쳐먹을 생각인 듯;; 제가 이거 때문에 어제부터 굶었습니다, 형님들. 도저히 그 맛없는 시안 베이스캠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안 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먹방은 좀 이해해 주십시다, 들. └ ㅁㅊㅋㅋㅋ └ 룸서비스 쌀먹하려고 어제부터 굶는 거였음?ㅅㅂㅋㅋ └ 대단한 새끼다 진짜로 ㅋㅋ 그런 의미에서 번개같이 주문을 시작했다. “네, 안심 스테이크 하나요. 사이드는 콘 샐러드 추가하고, 아 참 수프도 하나요.” 느낌상 한 5인분 정도 시킨 것 같은데……. 솔직히 더 시키고 싶었지만, 배불러서 레벨업에 지장 생기면 안 되니까 자제한 거다. “네, 네. 주류는 필요 없습니다. 탄산수 하나 정도만 챙겨주세요!” └ ㅋㅋㅋ푸드파이트라도 할 셈인가 ㅋㅋ └ 대이브 언제 먹방 스트리머로 전직한거임? └ 몰-루 ㅋㅋ 전화를 끊고 스트리밍도 잠깐 비활성화한 뒤, 샤워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씻고 나온 사이. 띵-동 음식을 잔뜩 담은 3층 짜리 서빙 카트가, 숙소에 도착했다. “크으으.” 그러고는 무슨 정신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배가 극도로 고파서 그런가? 왜 한 달 전보다 음식이 더 맛있어진 것 같지? └ 그게 얼마짜린데, 맛있어야지. └ 50LP짜리 스테이크가 맛이 없으면, 그건 범죄임ㅋㅋ -100000%정도 동의합니다, 형님들. 어쨌든 도착한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고 난 나는, 행복이 충만해진 기분으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은 채 배를 쓸어내리자, 나도 모르게 육성이 튀어나왔다. “후우……. 살 것 같다.” └ 방장 오늘 숙소 밖으로 못 나갈 듯? └ ㄹㅇㅋㅋ └ 일단 나였으면, 지금부터 낮잠부터 3시간쯤 때릴 거긴 해 ㅋㅋ 솔직히 이러고 있으니 눈이 슬슬 감긴다. 잠은 어제 충분히 자고 왔는데 이렇게 졸린 걸 보면……. 이 안락한 숙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 그건 그냥 식곤증임 ㅅㅂ 어쨌든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성좌 형님들 말처럼 3시간쯤 잠들어버릴 것 같았기에. “흣차.” 일단 개미지옥(?)같은 소파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 옼ㅋㅋ 정신력 뭔데? └ 자기조절 능력 ㅆㅅㅌㅊ;; 그런데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게이트 폭주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업해 봤는데, 단 하루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지옥 같은 일정이었으니 말이다. 철컥- 그런 의미에서 풀 충전된 컨디션으로 그랜드 아르카나를 나온 나는……. └ 그래서 뭐부터 할 거야 대이브 형; └ 우리도 좀 알려주셈; └ 일단 50레벨까지 닥사임? 미리 점찍어뒀던 ‘아스테리온의 황금 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레벨업도 레벨업인데, 이제 슬슬 밀린 숙제 해야죠. └ 숙제? └ 뭔 숙제? -촬영 때문에 레벨만 올리고 퀘스트를 못 했더니, 클래스 메인 퀘가 좀 많이 밀렸네요. └ ㅇㅎ? └ 하긴, 클래스 메인퀘 하는 걸 본 적이 없긴 하네. └ 그런데 솔직히 중간중간 하려면 할 수 있었던 거 아님? -저 나름 히든 클래습니다, 형님들. 히든 클래스 메인 퀘를 방송에 다 송출하면, 신비주의가 좀 떨어지잖아요. └ 고건 인정ㅋㅋ 그런데.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하기 위해 오랜만에 퀘스트 창을 연 나는……. [퀘스트 목록을 오픈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로 인해,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만 했다. 띠링-! [완료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뭐지? 한게 없는데 무슨 퀘스트가…….’ 메인 퀘스트 칸 한구석에서……. 완료를 알리는 황금빛 테두리와 함께, 유독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하나의 퀘스트. [이그니스의 역작] 상태: 완료 보상 수령 대기 중 그걸 확인한 나는, 이윽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호. 마침 잘 됐는데?’ 어차피 이 영감님도 한 번은 찾아가야 했단 말이지. * * * 깡-! 까앙-! 하얗게 달아오른 금속 위로, 육중한 망치가 리드미컬하게 내려꽂혔다. 화로의 붉은 불꽃이 천장을 핥으며 펄떡거렸고, 모루 위에서는 주황빛 불똥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대장간 전체가 뜨거운 열기로 후끈거렸다. “흐음, 흐음.” 이그니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망치를 내려놓았다. 발달된 팔뚝 근육 위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좋군. 오늘도 쇠의 노랫소리는 아름답단 말이야.’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의 가죽 장갑 안쪽까지 스며들었지만, 이그니스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뜨거울수록 좋았다. 이 열기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50년 장인의 긍지였으니까. 치이이익- 달궈진 칼날을 물통에 집어넣자, 하얀 수증기가 천장까지 피어올랐다. 그 수증기 너머로, 작업대 한구석에 수북이 쌓인 의뢰서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하, 이것 참.’ 데이브라는 특이한 녀석이 다녀간 이후. 이 공방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한때 거미줄이 치던 의뢰 접수대에는, 매일 같이 새로운 의뢰서가 쌓여갔으며. [갑옷 수리 의뢰서] [무기 강화 의뢰서] [특수 금속 가공 의뢰서] ……중략…… 루미스 영지에는 다시 이그니스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치이익- 차아앙-! 이그니스는 물통에서 완성된 검을 건져 올리며,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대체 언제 올 셈이지?’ 이그니스의 시선이 벽면으로 향했다. 영롱한 적색 빛깔이 은은하게 맥동하는……. 마치 살아서 숨을 쉬는 듯한, 정교한 쇠고리들이 엮인 쇄자갑(鎖子甲) 한 구. 이그니스는 장갑을 벗으며 그 갑주를 올려다보았다. 거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10티어, 신화 등급의……. 무려 10년 만에 나온, 자신의 역작이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엮은 쇠고리마다, 자신의 화기(火氣)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젊은이가 가져다 준 황금빛 철궤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작품. 10년간 쌓여왔던 모든 울분과 열정이, 이 하나의 갑주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녀석도 분명 만족할 거야.’ 이그니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자신의 손끝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음에 드는 의뢰주에게 자신의 역작을 보여주는 것만큼, 대장장이로서 설레는 순간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흐음. 조만간 오려나.’ 이그니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화로 앞에 섰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의뢰가 세 건이나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때. 이그니스가 장갑을 다시 끼려던 찰나. 쿵쿵- 누군가 공방의 문을 두드렸고. “……!” 이그니스는 화로에서 시선을 거두며, 무겁게 닫힌 정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육중한 참나무 문 앞.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 용광로 불빛과, 대장간 특유의 건조한 열기가 뺨을 때렸다. 지난번처럼 환기구를 타고 침투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만큼은 10년 만의 역작을 만들어낸 장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좀 갖추기로 했다. 사실 이그니스 아재가 공방도 개방한 마당에, 굳이 지저분한 환기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똑똑- 그리고 잠시 후. 철푸덕- 쾅! 무식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풀무질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작업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그니스는 거대한 망치를 모루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검댕 묻은 턱수염 다음으로, 흐리멍텅하던 이전과 다르게 총기 어린 눈동자가 보였다. “크흠. 자네도 양반은 못 되는군.” “예?” “아닐세. 잘 왔네. 그간 별일 없었고?” “저야 뭐 적당히 살았는데……. 아무래도 영감님은 별일이 많으셨던 것 같군요?” “허허, 일단 앉지.” 겉으로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하는 듯하지만……. 아무래도 이 할배, 내가 상당히 반가웠나 보다. 뭐, 그럴 만도 하다. 어찌 됐든 지금의 이그니스에겐, 내가 은인이나 다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정문으로 오다니, 그 사이 예의범절이라는 게 생겼군.” “전 원래 예의 빼면 시체였습니다만?” “쯧.” 그는 혀를 쯧 차더니, 작업대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서 내게 자리를 권한 뒤,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시 나를 응시했다. “아마, 물건을 찾으러 온 거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후후. 기대해도 좋다네.” 이그니스 할배는, 항상 서론이 짧아서 좋다. 자신감과 함께 잃어버렸던 테스토스테론을 되찾기라도 한 모양인지, 저 열정 넘치는 뜨거운 눈빛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혹시… 저겁니까?” 영감의 눈빛을 슬쩍 피한 나는, 한쪽 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두꺼운 하얀색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군.” 그런데 다음 순간. ‘잠깐. 이 영감… 대체 뭘 만든 거야?’ 천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을 느낀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수준의 마력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려면, 신화등급 이상의 장비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티어도… 두 자릿수는 되어야 할 것 같은 수준인데?’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다. 물론 이그니스 할배의 잠재된 실력에 준수한 재료를 쥐여주었으니, 충분히 좋은 물건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태양의 궤적보다 조금 좋은 수준이면 만족하려고 생각했는데.’ 대충 느껴지는 마력만으로도 그 수준은 훨씬 넘는 무언가가 저 거적때기 안에 잠들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저벅- 말없이 그 앞으로 다가간 이그니스가, 망설임 없이 천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대장장이 ‘이그니스’가, ‘염화의 심장’ 아이템의 정보를 공유합니다.] 내 눈앞에, 화려한 아이템 정보 창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 [염화의 심장] 분류 : 장비 - 쇄자갑(鎖子甲) 레벨 제한 : 120 [-60] 등급 : 초월 티어 : 12T 내구도 : 영구(조건부) 주 능력치 물리 방어력 +1500 마법 방어력 +1200 최대 생명력 +5000 - 옵션 화염 저항 +80% 모든 상태 이상 내성 +30% - 고유효과 * 염화의 가호: 피격 시 가해자에게 30% 확률로 화상 데미지 반사 * 왕가의 혈통(炎): 아이템의 착용 레벨 제한이 60 감소하며 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모든 옵션의 효과가 대폭 증가합니다. 또,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내구도가 소모되지 않으며, 착용자의 핏줄에 소유권이 귀속됩니다. - 설명 화염의 영혼을 타고 난 전설적인 대장장이의 손에서 탄생한 사슬갑옷입니다. 의복의 안에 받쳐 입을 수 있도록 아주 가볍게 제작되었지만,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합니다. 화염의 영혼이 깃든 왕가의 혈통이 각인되었으며, 이 영혼은 한번 주인을 정하면 귀속됩니다. * 계정 귀속 아이템입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아이템 정보창을 전부 확인한 나는……. ‘아니……. 이건 또 대체 무슨 억까인데?’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은 탓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계정귀속 고유옵이… 원래 이렇게 흔한 옵션이 아닌데…….’ 아니, 영감님.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붙이기도 어려운 계정귀속 옵션을 대체 왜 붙여 주신 거냐고요……. └ 설마 했는데 대이브 쉑;; 계정귀속 옵션 때문에 세상 다 잃은 표정 된 거임?; └ 근데 이거 옵션 개미쳤는데? └ ㅇㅇ;; 이정도면 그냥 랭커들도 쓸 만한 졸업 방어구 아닌가; └ 물마방 합하면 거의 3천에 화염저항 80%는 뭐지 ㅅㅂ;; └ 저거 입으면 브레스도 맞을 만 한거 아님? └ 응 그건 아니야 ㅋㅋ 물론 성좌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옵션이 미친 수준인 건 맞다. 일단 티어만 해도 12티어에 초월등급 장비였으니. 이 정도면 해방된 넘버링 장비들을 제외한다면… 종결급 턱걸이는 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미친 옵션이 붙기 위해 ‘계정 귀속’이라는 최악의 패널티(?)가 붙게 된 것일 거다. 그래. 그러니까……. 사실 환금성이 0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어떤가, 데이브. 자네… 머리털 나고 이런 수준의 사슬갑옷을 본 적이 있는가?” 확실히 충격적인 결과물이네요, 영감님. “개 쩌는 걸 만드셨군요.” “크하하하. 역시, 자네가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지.” 철컥- 벽에 걸려 있던 ‘염화의 심장’을 불쑥 집어 든 이그니스는, 내게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런데 이 엄청난 물건이 내 앞으로 다가올수록, 내 머릿속은 점점 더 심란해질 뿐이었다. “후우우.” 이거……. 그냥 보상 수령 안 하고 이그니스 할배한테 대신 팔아서 돈으로 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아마 처음 받는 사람한테 계정귀속 되는 매커니즘일 테니까……. └ 미친놈인가?ㅋㅋㅋ └ ㅈㄹ도 풍년이네 ㅅㅂㅋㅋ 아니, 제가 감히 이런 걸 착용해도 되는 근본인가 싶어서 그래요 형님들……. 급처로 싸게 처분해도 최소 수십만 LP는 할 물건 아닙니까 이거. └ 맞긴 하지 ㅋㅋㅋ └ 랩제도 60이라 수요도 많을 듯?ㅋㅋㅋ └ 와, 저거 착용하고 용암의 제단 돌아보고 싶다 ㅅㅂ;; └ 오 맞네 ㅋㅋ 용암제단 맵에선 ㄹㅇ 저거 끼면 그냥 무적일 듯?ㅋㅋㅋ 용암제단이 90레벨 대 던전이었나? 거기 가면 꿀 좀 빨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거긴 저주받은 화염법사 단일 몹밖에 등장하지 않는 필드였는데, 모든 공격이 전부 화염속성 마법 피해였으니까. 용암제단에서 뽕 뽑고 멘징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철컥- 띠링-! [대장장이 ‘이그니스’로부터, ‘염화의 심장(초월)(12T)’ 장비를 의뢰 결과로 수령하였습니다.] 아, 안돼! 으아아! [‘염화의 심장(초월)(12T)’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거 뽕 뽑으려면… 앞으로 한 20년은 입어야 하는 거 아닐까? * * * 시안 데드 존. 헌터즈 스쿨, 임시 베이스캠프. 지잉- 지이잉- 훈련을 마친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휴게실에는, 에어컨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창 너머로는 시안 특유의 붉은 안개가 느릿하게 소용돌이쳤다. 탁-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이온 음료를 들이켜던 이성환이 빈 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비동기 훈련 직후라 다들 근육의 피로감에 절어, 소파나 바닥에 널브러진 채 짧은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 진짜 빡세네. 비동기 환경은 적응을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여.”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던 전인욱이 앓는 소리를 내자, 옆에 앉아 있던 권유나가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측정 동기화율이 40~50% 정도 되고 나서는, 1% 올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준이긴 하더라고요.” 이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합니다. 확실히…… 이 이상의 영역으로 가는 건 뭔가 특별한 깨달음이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이성환의 말을 끝으로, 잠시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동기화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두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한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진짜 건율 형님은, 대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동기화율을 만드신 걸까?’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었지만, 정말 비동기 체질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다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동기 구역에서 동기화율을 올리는 난이도는, 비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가파르게 올라가지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건율 님은, 휴가 가서 뭐 하고 계실까요?” 권유나의 말에, 옆에 이제껏 말없이 앉아 있던 강소희가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펜트하우스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있을걸요? 룸서비스 잔뜩 시켜서.” 조용하던 이성환이 발끈하며 반박했지만 말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 “건율 형님은 절대 그렇게 게으르게 휴가를 보내실 분이 아니니까요.” “어, 으음…….” 강소희는 말을 줄였고, 이번에는 권유나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번 휴가때는 좀 쉬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랑 다르게 비동기 적응도 다 하셨겠다. 체력 비축하시는 것도 게이트 폭주를 대비하는 것일 수 있죠.” 그에 전인욱이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아마 지금쯤, 어디 던전 들어가서 레벨이라도 올리고 계실 겁니다, 형님은.” “으… 징그러.” “1레벨이라도 더 올려서, 게이트 폭주 억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하실 분이지요.” 전인욱의 말에, 이성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성환은,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13일이나 휴가를 쓰신 걸 보면, 2차 전직을 노리고 계실지도 모르지.’ 이성환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휴가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본인도 2차 전직을 위해 잠깐 휴가를 내볼까 하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었으니 말이다. 2차 전직을 위해 필요한 레벨은 50이었고 지금 그의 레벨은 51이었으니, 휴가를 5일 정도만 내면 충분히 전직퀘스트를 시도해볼 만한 것. 다만 2차 전직은 급하지 않게 신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마음에 딱 들어맞는 히든 클래스를 얻고 싶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었다. 하지만 건율 형님은 이미 히든 클래스를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전직을 시도하실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율이 벌써 50레벨이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전제였지만. 그런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건율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이미 50레벨이 되었다고 해도 이성환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흐음.’ 이성환은 빈 음료 캔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국에 돌아가 건율 형님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그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루미스 영지, 중앙 광장. 여기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알테리온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이동 포털이 이곳 중앙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나도 그 포탈 때문에 지금 여기에 온 것이었다. 포탈 타고 어디 가려는 거냐고? 숙제하러 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밀린 숙제가 상당한 편이거든. └ ㅋㅋㅋ 밀린 숙제ㅋㅋ └ 보자… 대이브 쉑 45레벨이니까, 숙제 대충 다섯 개 쯤 밀렸으려나? └ ㅇㅇ 그럴 듯. 보통 클래스 메인 퀘가… 5레벨마다 하나씩 해금되니까. 성좌들 말이 맞다. 20레벨에 처음 생성되는 퀘스트를 깨고 나면 5레벨 단위로 신규 클래스 메인 퀘가 연계되는데, 25레벨이 더 오른 지금 내 퀘스트 목록에 쌓인 숙제는 정확히 다섯 개였다. [클래스 메인 퀘스트 - 대기 목록] - 「곡괭이의 노래」 ← 진행 가능 - 「벽화의 증언」 - 「에고의 잔향」 - 「태양의 그림자」 - 「봉인의 해제」 그나마 다행인 건, 모든 퀘스트가 전부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다는 사실. └ 그러니까 황금탑 가는 거라고 했지, 방장? -예, 맞습니다. └ 거기서 숙제도 하고, 레벨도 올리고?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흐음.” 그나저나 갑자기 궁금증이 조금 생긴다. 라피엘의 기억에 따르면 세라피스트의 유산이 봉인된 황금탑은 분명 알테리온 대륙이 아닌 아스테리온 대륙에 있는 황금탑이었는데……. 퀘스트가 가리키는 진행 장소는 알테리온 대륙의 황금탑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용맥 지대 퀘스트 때도 장소가 알테리온에도 존재하고 아스테리온에도 존재했으니. 혹시 평행세계… 뭐 그런 건가? 흐음. 그런데 사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일단 이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헤치고, 워프 게이트에 도착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 그런데 방장. 그 못생긴 가면 계속 쓰고 다닐 거임? └ 검희 벤치마킹 하는 건가 ㄷㄷ └ 그러면 검희처럼 좀 예쁜 가면 사다가 쓰면 안됨? 그 도깨비 탈처럼 생긴 빨간 가면은 대체 뭐임; -저, 알아보는 사람 있을 수도 있다니까요? └ ㅈㄹ;; └ 여기가 서울도 아니고; 개소리 ㄴㄴ. └ ㄹㅇㅋㅋ 절반 이상이 NPC일 거고, 남은 절반 중에 한국인을 5%도 안 될 텐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습니까, 형님들. 그리고 못생겼다뇨. 각시탈 같기도 하고 은근 느낌 있고만. └ 각시탈 ㅇㅈㄹㅋㅋㅋ └ 역시 컨셉충이었누;; 어쨌든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저 멀리 느릿느릿 회전하는 은빛 마법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워프게이트 - 루미스 영지] 게이트 위의 룬 문자들이 빛깔을 바꿔가며 깜빡이고 있었고, 워프를 기다리는 플레이어들 뒤에 나도 줄을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워프게이트를 이용하시겠습니까?] [목적지: 아스테리온 대륙 중앙부] [이용 요금: 150LP] “……확인.” 파멸적인 가격에 잠시 움찔했지만, 떨리는 손으로 LP를 지불한 뒤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150LP라니. 베타 때는 이게 이렇게나 큰 돈인 줄 몰랐었는데. 뭔 워프 한번 타는 데 150만원이냐고……. └ 싼거 아님? 예? └ 시안에서 올 때 끊었던 비행기 값보다 싸잖음. 그, 그렇긴 한데……. └ 거리로 따지면 한국에서 중국보다 멀걸? 성좌 형님이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시는지? └ 그러니까 징징대지 말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타셈 ㅋ └ 서울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워프게이트 500만원에 팔아도 ㅈㄴ잘팔릴 듯? 너무 맞는 말이라 반박조차 할 수 없는걸? 후우. 요즘 들어 성좌 형님들의 팩트 폭행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아니, 이계 사람들이 지구촌 세계관을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다들 준비 되셨으면, 워프 시작합니다.” “준비 됐습니다.” 어쨌든 잠깐 잡담을 떠는 사이. 위이잉-! 거대한 진동음과 함께, 거대한 마법진이 작동을 시작하였다. 가까운 거리를 워프할 땐 이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지만, 수백 키로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는 워프는 원래 마법진이 작동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었다. 지잉- 파아앗-! 마법진이 본격적으로 작동을 시작하자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위장이 울컥 뒤집히는 느낌. 워프 특유의 멀미가 1초쯤 밀려왔다가, 이윽고 시야가 다시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워프 게이트 - 알테리온 대륙 중심부’에 도착하였습니다. 눈앞에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고. 루미스 영지의 축축하고 나른한 공기 대신, 건조한 풀냄새가 묻어나는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 * * 세일라 노빈은, 통유리 너머로 흐려지는 서울의 오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식은 아메리카노와 두 개의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쇼핑백 하나에는 'KTG OFFICIAL'이라는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포토카드와 키링이 뒤엉켜 들어있었다. ‘……이걸로 언니한테 보낼 건 다 샀으려나.’ 손끝으로 차가운 컵을 돌려가며, 노빈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열흘. 원래는 삼사일이면 끝낼 일정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늘어질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언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팔자에도 없는 K팝 덕질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언니만 좋아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이잉-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노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응, 나야.” 길드 동료의 전화였다. [거기 이제 게이트 폭주 2주도 안 남았다던데, 대체 언제 돌아올 셈이야?] “걱정하지 마. 이번 주 내로 돌아갈 테니까.” [이번 주 내로? 비행기 표는 끊어 둔 거지?] “어.” [마스터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하는지도, 숙지하고 있는 거고?] “그렇다니까.” 노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길드 입장에서 그녀의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는 것도 맞았지만……. 그와 별개로 잔소리가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단순히 놀러 와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언니를 위한 K팝 굿즈 구매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한국까지 행차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바로, 길드의 인재 영입. ‘결국 데이브는…… 못 만나고 돌아가는 건가?’ 노빈이 아는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 대단한 인재를, 블랙 크라운에 영입하려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알겠어. 근데 진짜 빨리 와. 슬슬 간부들이 찾기 시작했어.] “응, 끊는다.” 뚜- 전화를 끊은 뒤, 세일라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아주 단단히 꼬였네.’ 세일라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한 씁쓸함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데이브가 헌터즈 스쿨이라는 예능에 참가한 이건율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이번 한국행에서 그를 만나는 건 불가능해졌으니 말이었다. ‘기껏 만나보겠다고 한국까지 왔더니 중국에 가 있고. 기다리려고 했더니 게이트 폭주라…….’ 타이밍이 아주 최악이었다. 일단 게이트 폭주 전에는, 유럽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 뭐, 한국에 계속 머문다고 해서 그녀가 게이트 폭주 정도로 위험에 처할 레벨은 아니었지만. ‘길드에서 아주 난리가 나겠지.’ 어쩔 수 없이 데이브를 만나는 건,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지이잉- 노빈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던 그 때, 다시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리고……. [Caller : Elysia Lowell] ‘로웰 언니?’ 발신자를 확인한 노빈의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후우. 이 언니는 또 왜.’ 노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언니?” 전화를 받자마자, 특유의 해맑고 높은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노빈! 나 좀 도와줘!] “…….” [지금 황금 탑에 있거든! 여기서 채굴한 루멘 원석이 장난 아니야!] [한 번 폭발시켜 봤는데 반응 계수가 완전 미쳤다구!] “……그래서?” [근데 여기 몬스터가 좀 많아서, 혼자서는 채굴이 좀 힘들어!] [사냥하면서 캐야 하는데, 내가 몬스터 잡다 보면 광석까지 다 터져버려서 몹시 슬픈 상황이야 지금!] “…….” [그러니까, 노빈이 네가 와서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안전하게 채굴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벨릭 오빠까지 부른 건 아니겠지?” [그 오빠는 안 불렀어!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네.” 노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뭐… 카페에서 시간 죽이고 있는 것보단, 로웰 언니랑 노닥거리는 게 더 재밌긴 할 테니까.’ 혹시 몰라 한국의 게이트 접속 심사를 받아놨던 것이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알겠어. 가지 뭐.” [진짜?! 나 지금 2층이야! 빨리 와! 내가 새로 개발한 폭발 마법진 보여줄게!!] “그건, 괜찮거든?” [아니, 진짜 대박이라니까? 너도 보면 깜짝 놀랄……!] “일단 끊는다 언니?” 뚜- 뚜- 전화를 끊은 노빈은, 테이블 위의 쇼핑백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유리 너머에서는 서울의 오후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허리까지 차오르는 황금빛 갈대들이 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초원 전체가 엷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 빛이 단순히 태양 때문만은 아니다. [일루전 팜파스 (Illusion Pampas)] 이곳은 알테리온 대륙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한 필드였다. └ 캬 ㅋㅋ 여긴 오랜만에 보네. └ 그런데 형들, 여기 갈대들이 좀 특이하네? 자체적으로 빛나는 것 같은데? └ 루멘 그라스임 ㅇㅇ 원래 그럼ㅋㅋ └ 아니 근데 여기도 못 와본 놈이 어떻게 성좌……? └ ㄹㅇㅋㅋ └ 중심부 필드부터는, 생각보다 그런 놈들 꽤 있을걸? 성좌 형님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드디어 ‘일터’에 도착했으니,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초원 중심부에 솟아있을 황금 탑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지만, 그 과정에서 최소 1레벨을 올리는 게 내 계획이었으니까. 띠링-! [퀘스트 가이드를 활성화합니다.] 레벨만 올리면 되냐고? 그럴 리가. 당연히 돈도 벌어야 한다. 그러니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목적지 좌표부터 확인해 두고……. [‘알테리온의 황금 탑’ 던전의 좌표가 표시됩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을 내딛자 황금빛 갈대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내줬다. 갈대가 피부에 스치는 감촉이 꽤 까끌했지만, 발밑의 대지는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10분 정도를 이동했을까? 기긱- 달그락- 찾고 있던 구조물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이게 뭐임? └ 기어? 루멘그라스 사이에 반쯤 묻혀 있는 거대한 기어 파편들. 부러진 돌기둥. 그러니까… 고대 문명의 잔해가 초원 한복판에 흩뿌려진 광경. 히든피스까지는 아니지만, 필드를 주의 깊게 탐사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것들이긴 하다. └ 무슨 기계 파편 같은데; └ 이런게 여기 왜 있는 거임? 그러니 성좌 형님들의 이런 반응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태고의 잔해물이라는 건데요 형님들. └ 또 뭔 히든피스임?;; └ 그건 아님; 그냥 변이 몬스터들 생성 트리거 같은 건데……. └ ㅇㅇ맞음; 변이 몬스터가 경험치 많이 줘서 찾으면 꿀이긴 한데. └ 그래도 이거 찾으려면 꽤 빡센데, 뭔 도시락 꺼내 먹듯이 뚝딱 찾아버리냐. 다행히 알고 있는 형님들이 스피드 웨건 역할을 해줘서, 귀찮은 설명은 생략할 수 있겠는걸?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치치칙-! 금속 마찰음이 들리면서, 눈앞에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태고의 잔해물을 발견하였습니다.] [‘변이된 초원의 영양’이 소환됩니다.] ‘왔군.’ 탓- 돌아보지도 않고 옆으로 한 걸음 비켰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내가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쾅-! 거대한 바위 파편이 대지에 처박혔다. “…….”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통에 부서진 고대 기어가 박혀 있는 영양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엽장치 뿔 영양- Lv.52] 고놈,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맛있게 생겼는걸? 기계 부품 좀 낭낭하게 드랍하게 생기셨어? └ ㅋㅋㅋ 이게 변이 몬스터임? └ ㅇㅇ맞음ㅋㅋ 일반 몹 경험치 1.5배쯤 주던데. -그런데, 제가 고작 1.5배 경험치 먹겠다고 갈대밭 뒤진 건 아닙니다 형님들? └ 그럼 ㅁㄷ? -이거 발골해 보신 형님들 없죠? └ 있겠냐 ㅅㅂㅋㅋㅋㅋㅋㅋ └ 애초에 발골을 너 말고 누가 찍음ㅋㅋㅋ -그러면 이제부터 꿀통을 보여드릴 차례인 것 같습니다? 스하악-! 월광검을 뽑으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허리춤의 단검을 꺼냈다. 그러자 신검합일 효과가 자연스레 발동하면서,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검신을 타고 자연스레 뻗어 나간다. └ 근데 이 ㅅㄲ 아직도 월광검 씀? -뽕 뽑아야죠 형님들……. -계정귀속인데, 내구도 다 닳을 때까진 써야지 않겠습니까요. 키히이이잉-! 괴팍하게 생긴 영양이 달려들었고, 뿔의 기어가 맞물리며 기괴한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 겪는다면 꽤 식겁할 만한 비주얼이었지만. 쐐애액-! 이 녀석만 수천 마리는 잡아 본 내게야 뭐, 그냥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까강-! 슬쩍 몸을 비틀어 녀석의 뿔을 피한 뒤. 채애앵- 거대한 몸집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순간……. 서걱-! 후두부 뒤쪽, 기어 이음새의 틈새를 향해, 아주 자연스럽게 단검을 쑤셔 넣었다. 기긱-! 나도 어느새 45레벨인데, 이런 50레벨 초반 필드몹 정도야 뭐. [‘태엽장치 뿔 영양’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가볍게 썰어버리는 건, 아주 당연한 부분이 아닐까? [‘태엽장치 뿔 영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쿵- 쓰러지는 사체를 발로 딛고 올라서서, 주변을 한 번 훑었다. “흐음.” 이어서 쭈그려 앉아……. 단검을 바꿔 쥐고, 이음새 주변의 가죽 경계를 따라 천천히 칼을 움직였다. 서걱- 스스슥- [‘태엽장치 뿔 영양’의 부산물 채취를 시작합니다.] [‘질긴 영양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대 기어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 고대 기어 파편? └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예, 형님들. 맞는데요? 혹시 문제라도……. └ 당연히 문제가 있지 ㅅㅂ;; └ 태고의 유적지 가야 파밍되는 걸 50레벨짜리가 날먹하고 있는데;; 누가 발골 찍지 말라고 협박했음? └ 근데 좀 이상하긴 해; └ ㅇㅇ? └ 발골 찍은 사람이 아무리 없어도 방장 한 명은 아닐 텐데, 지금까지 일루전 팜파스에서 고대 기어 파편 파밍됐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거든; 이 형님들이 이렇게까지 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대 기어 파편이라는 이 잡템은 원래 최소 90레벨대 필드에 가야 드랍되는 물건인데……. 심지어 드랍률도 낮아서, 개당 가격이 무려 20LP나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발골이라고 다 같은 발골이 아닙니다, 형님들. └ 이건 또 뭔 소리임? 그냥 특성만 찍는다고 다 나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기어 파편같이 가치 높은 잡템은… 같은 대상을 수없이 발골하면서 노하우를 터득해야만 파밍해 낼 수 있는……. └ ㅅㅂ 니 똥 굵다;; 어쨌든 이렇게 몇 마리 더 파밍하다 보니, 두 번째 타겟도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드륵- 바닥에 나타난 기계 구조물 한쪽에, 파밍한 기계 태엽을 꽂아 넣고 래버를 돌리자……. 기긱- 드르르륵-! 풀숲 저편에서부터, 기계음 섞인 특이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거다. 아우우우-! └ 이건 진짜 히든피스인가;; 처음보는데? 아쉽게도 히든 피스까진 아닙니다. [루멘 잠식 초원 늑대- Lv.56] 그냥 경험치를 좀 많이 주는 건실한 녀석들일 뿐……. └ 숨겨져 있었으면 그게 히든피스지 ㅅㅂ 히든피스가 별거임? └ ㅋㅋㅋ 급발진 뭔데 ㅋㅋ 개웃기네ㅋㅋ 어쨌든 열 마리 정도 무리 지어 있는 맛있게 생긴(?) 기계태엽 늑대들이 날 노려보기 시작하였고. 기기긱- 이번에는 자연스레 검을 집어넣은 뒤, 태양의 궤적을 꺼내들었다. 태엽도 거의 열 개는 챙겼으니 워프 비용은 충분히 멘징했고……. 피이잉-! 이제 슬슬, 레벨도 좀 올려볼까? * * * 황금 탑의 2층은 꽤 넓다. 벽 하나하나가 사람 키의 열 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공간. 군데군데 균열이 간 벽면에는, 뭔가를 표현하려 했던 흔적—반쯤 부서진 벽화들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 훼손이 심해서 뭘 그렸는지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노빈은 그 벽화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여긴 오랜만이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선 노빈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로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건지, 불편한 자세로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이 언니도 참… 연구가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건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노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잠시 후.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로웰이, 벌떡 일어나며 노빈을 불렀다. “노빈! 이것 봐, 이것 봐.” 다가온 로웰이 광석 하나를 쑥 내밀었다.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루멘 원석이었다. “루멘티스 폐광에서 채굴한 거랑, 여기서 채굴한 거. 같은 루멘 원석인데 반응 계수가 달라.” “얼마나?” “폐광 거는 저장 에너지 수치가 대략 100선이었는데 여기서 채굴한 건 280이야. 2.8배나 된다고. 심지어 채집 위치에 따라서 또 달라! 아까 채집한 광석은 250 정도였거든.” 노빈은 손에 쥐어진 원석 하나를 내려다보며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랜만에 언니 얼굴이나 볼 생각에 게이트에 들어온 건데, 막상 만나니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다. “확실히 폐광에서 캐던 것과 무게감이나 온기가 좀 다르긴 하네.” “그렇지? 역시 노빈이 너라면 알아볼 줄 알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빈이 이 루멘 원석 연구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더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폭발만이 연구의 목적인 로웰과 달리, 노빈은 루멘 에너지와 신성력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언니 연구가 가끔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지난번 우연히 로웰을 통해 루멘 에너지의 연쇄 반응 방식을 깨달은 이후, 조금은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물론……. “그래서 말인데, 노빈!” 이 초롱초롱한 눈빛은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탑 더 깊숙한 곳까지 탐사해 보면, 수치가 더 올라가지 않을까? 에너지 밀도가 탑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퍼지는 구조라면, 원천에 가까울수록 더 강력한 원석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는 얘기였다. “……알겠어.” “헤헤.” 한층 기분이 좋아진 로웰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광석을 하나 더 들어 빛에 비추던 로웰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났는데.” “응?” “너 혹시 기억해? 전에 같이 파티했었던, ‘데이브’라는 플레이어.” 노빈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기억… 하지? 당연히?” 자신이 데이브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로웰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오니 순간적으로 놀란 것이다. ‘언니도 데이브가 이건율이라는 한국의 플레이어라는 걸, 알아낸 걸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놀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너 혹시 그 사람 클래스가 뭔지 알아? 뭔가 루멘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았어? 그 당시에 루멘 관련 반응 속도나 감지 능력이 일반 클래스 범위를 넘는 것 같던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루멘 연구에 관한 단서가 될 것 같아서.” 속사포처럼 쏟아진 그녀의 말은, 결국 본인의 연구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니까. “연락 해봤어? 메신저 보낼 수 있잖아.” “응, 대답을 안 하던데?.” 로웰이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고, 노빈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야, 지금쯤 중국에 있을 테니까…….’ 아마도 촬영으로 정신 없어서, 메신저 확인을 못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시안에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대답을 않는 것일 수도 있고. “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탁- 탁- 탁- 계단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대충 다섯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초원에서의 알뜰한 파밍 이후, 나는 드디어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금빛의 신기루가 사방에서 일렁이는, 초원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황금빛 첨탑. 띠링-! [‘알테리온의 황금 탑’ 던전에 입장합니다.] 경고 메시지가 생성되었지만,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던전에 들어섰다. [※주의! 입장 권장 레벨 60레벨인 던전입니다.] [정말 입장하시겠습니까?] 여기가 만약 인스턴스 던전이었다면 아예 레벨제한으로 입장이 막혀버렸을 만한 곳이었지만. 알테리온의 황금 탑은 원래 필드 던전. 즉, 입장 인원 제한이나 레벨 제한 같은 게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오픈필드와 다름 없는 던전이었으니 말이다. └ ㅋㅋ근데 진짜 무슨 45레벨이 이렇게 당당하게 황금 탑에 들어오냐 ㅋㅋㅋㅋㅋ └ 여기 60레벨도 파밍 빡센 난이도 아니었나? └ 그러니까 ㅅㅂㅋㅋ 여기 별로 안 어려울걸요? 그리고 저 방금 레벨업 해서… 45레벨 아니고, 46레벨입니다만? └ 예, 예. 그러시겠쥬. 성좌들의 핀잔을 뒤로 한 채 탑에 입장한 나는, 낡은 카펫이 깔린 길을 따라 던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황금빛 먼지가 뒤섞여 내리는 거대한 석조 회랑이 눈앞에 펼쳐졌고. 부서진 기둥 사이로 스며든 빛줄기가 반사되어 바닥의 모래알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에서는 미세한 돌가루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긴……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스케일이 엄청나긴 해.’ 사실 이 황금탑은, 이전까지 내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흔한 던전 중 한 곳일 뿐이었다. 던전의 스케일이나 웅장함만 놓고 봐서는 뭔가 특별한 히든피스나 퀘스트가 숨겨져 있을 법도 한데……. 이전까지 그런 걸 한 번도 발견했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솔직히 약간 기대를 하고 있는 부분도 있기는 했다. ‘혹시 여기에… 세라피스트 클래스가 조건부인 히든피스 같은 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잖아?’ 억겁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얻어본 적 없었던 클래스인 세라피스트. 이 클래스의 메인 퀘스트가 여기서 진행된다는 건, 이 황금탑 자체가 세라피스트 클래스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라피엘의 기억에 등장하는 ‘아스테리온의 황금 탑’이 여기와 같은 장소일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일단 퀘스트부터 진행하다 보면, 뭔가 조금씩 드러나겠지.’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무기 같은 건 아니었다. 이제까지 용도를 알 수 없어 인벤토리 한 켠에 처박아 두었던……. 이전 퀘스트의 보상인 빛의 곡괭이를 꺼낸 것. 깡-! 곡괭이로 벽면의 바위를 내리찍자 맑은 타격음이 회랑을 울렸고. 서늘한 바닥의 냉기가 쪼그려 앉은 무릎 아래로 스며들었다.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다시 말하지만, 밀린 숙제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 《 곡괭이의 노래 》 분류 : 클래스 메인 난이도 : C 수령 조건 : ‘빛의 곡괭이’ 아이템 보유 황금 탑에 도착하자, 빛의 곡괭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괭이가 반응하는 지점을 3곳 이상 찾아 조사하십시오. 달성 조건: 빛의 곡괭이 반응 지점 3개소 조사 보상:「고대 문양의 탁본」 〓〓〓〓〓〓〓〓〓〓〓〓〓〓 그나저나 이게 첫 퀘스트라는 건, 25레벨에 생성된 클래스 메인이 바로 이 퀘스트라는 거 아닌가? 25레벨에 황금탑 퀘스트를 주는 건 대체 무슨 무리수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레벨 충분히 올리고 나서 천천히 도전하라는 게 의도인지. 아니면 고레벨 파티원 대동해서 보호받으면서 곡괭이질을 하라는 건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곡괭이에 새하얀 빛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손잡이를 통해 손바닥까지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진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니 벽면에 하얀 광휘가 맺힌 곳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를 파면 되는 거겠지?’ 그런데 곡괭이를 내려치려던 그 순간.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깐……. 여기는 광맥이 아니라 채광이 안 되는 곳인데?’ 조금 전에 말했듯, 나는 황금탑에 숨겨진 히든 피스 같은 걸 발견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길 잘 모른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황금탑은 원래 양질의 루멘 원석을 구하기 좋은 장소라 채굴을 위해 자주 왔던 던전이었고. 때문에 광맥이 가장 풍부한 1층과 2층의 필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맵 구조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분명……. 채굴이 불가능해야 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까아앙-! 빛이 새어 나오는 지점에 정확히 곡괭이를 박아 넣은 그 순간. 바삭-! 광채가 번뜩이며 벽면이 반응했고, 바위 조각이 갈라지면서 안쪽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띠링-! [‘태고의 루멘 광석’을 채광했습니다!] 이게…… 뭐지? 처음 보는 아이템인데? └ 와 ㄷㄷ 태고의 루멘광석은 또 머임? └ 딱 봐도 ㅈㄴ 희귀재화인 것 같은데; └ ㄹㅇ 나도 처음 봄. └ 방장 그거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 저도 모르는데요? “흐으음…….” 라이카 세계 안에서 보통 루멘 광석은, 마법사들의 마법진 제작 재료나 연금술사들의 아티펙트 제작 재료로 사용된다. 하지만 수요가 그렇게까지 많은 광물은 아니고 광물 중에 흔한 편이어서, 어지간히 순도 높은 원석이 아니면 그리 비싼 값은 쳐 주지 않는 게 루멘 광석인데……. ‘하지만 이 정도 되는 물건은 뭔가 다를 수도?’ 손으로 집어 올리자, 일반 루멘 광석과는 확연히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가공하기 전인 원석 상태에서 온기가 느껴질 정도라면, 일반 원석과는 차원이 다르긴 한 수준. ‘대충 팔지 말고 잘 챙겨뒀다가… 마탑에 가져가 봐야겠는걸?’ 어차피 이그니스 영감의 딸인 ‘마리 이그니스’도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었으니. 세계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연금술사인 그녀에게 가져가 보여 준다면, 이 광물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으리라. 게다가……. └ 방장 뭔가 싱글벙글하는 게 킹받는데;; 정상이지? └ 야, 너도? └ ㅇㅇ 정상임;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채굴을 진행하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생각도 떠올랐다. ‘이거 빛의 곡괭이가 있으면, 이 황금탑 안에 새로운 채광 포인트를 찾을 수 있는 모양인데…….’ 퀘스트를 다 깨고 나면, 나중에 시간 내서 탑 전체를 한번 전수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빛의 곡괭이가, 황금탑 안에 숨겨진 히든피스를 찾을 수 있을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깡- 깡- 깡-! └ 그나저나 곡괭이질 왤케 잘하누;; └ 이 ㅅㄲ 전직 광부였음?; └ 우리 방장이 원래 앵벌이 스러운 건 다 잘함 ㅇㅇ 거, 칭찬할 땐 칭찬만 좀 해주시면 안 됩니까? 꼭 그렇게 초를 치셔야……. “흣차.” 어쨌든 그렇게 두 번째 반응점, 세 번째 반응점. 전부 찾아서 채굴을 마치자.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클래스 메인, 《곡괭이의 노래》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고대 문양의 탁본’을 획득했습니다!] 가볍게 첫 번째 퀘스트는 클리어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금방 했는걸?’ 처음 전직하자마자 진행했던 클래스 메인 퀘스트가 하도 지랄 맞았던 탓에, 고생할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왔건만.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연계 퀘스트 《벽화의 증언》이 발동됩니다.] [2층 갤러리의 벽화 중 일부에서, '빛의 연금사'만이 읽을 수 있는 숨겨진 문구가 감지됩니다.] 하루를 쓰기는커녕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첫 번째 퀘스트가 클리어됐으니, 뭔가 조금 찜찜한 기분까지 들었다. ‘루멘 원석도 달달하고…….’ 길을 막아서는 잡몹, ‘황금 석상병’들을 간단히 처치한 뒤, 나는 자연스레 2층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로같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던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모든 길을 기억하는 느낌. ‘이 속도라면 다섯 개의 연계 퀘스트를 전부 다 오늘 클리어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아주 희망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 * * 황금탑의 구조는 복잡하다. 그리고 상층부로 올라가는 길 또한,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노빈과 로웰이 작업(?) 중인, 계단실 인근의 필드는……. 보통 인적이 거의 없는, 필드의 아주 구석진 장소였다. ‘여길 찾아오는 것도 엄청 어려웠을 텐데.’ 게다가 이곳 황금탑 2층의 꿀몹이라 불리는 ‘루멘 파편체’ 몬스터들도, 아예 젠되지 않는 구역이 바로 이곳. 그래서 노빈은, 새롭게 나타난 남자를 조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자신은 몰라도 47레벨밖에 되지 않는 로웰은, 이 필드에서 약자에 속했으니까. 외진 곳의 플레이어를 노리는 스캐빈져일 확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괴상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상당히 수상하고.’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선 노빈은, 힐끗 남자를 응시하였다. 뭔가 허튼짓을 하려고 한다면, 곧바로 참교육을 시켜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서포터라 하더라도, 노빈의 레벨은 100이 훌쩍 넘는 수준. 어줍잖은 60~70레벨 전투 클래스들은,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요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잠시 후. ‘흐음.’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필드 곳곳을 쏘다니는 남자를 보며, 노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했다. 반쯤 부서진 벽화 앞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유심히 살피다가, 구석구석 광물을 채굴하는가 하면. 몬스터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해서 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몬스터가 쓰러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벽화 앞에 앉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는데……. 가장 놀라운 건, 검을 쓰는 솜씨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물론 위력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검을 다루는 기술만큼은 랭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까다로운 몬스터들의 연속공격을 숨 쉬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튕겨내는가 하면, 별달리 위력적인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60레벨이 넘는 ‘변형된 가디언’들을 손쉽게 처치해버린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노빈은, 어느 순간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감정이, 한두 달 전쯤 느꼈던 그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데이브?’ 검을 쓰는 품새. 거리를 재는 방식. 상대의 돌진에 맞춰 옆으로 빠지면서 검을 갈기는 타이밍까지. 노빈은 본능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지금 데이브. 아니, 이건율은, 중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빈이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 남자가 갑자기 검을 집어넣더니, 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핑- 피피핑! 눈으로 확인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튕겨대더니……. 거의 곡예에 가까운 속사실력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미친?’ 이쯤 되니 노빈의 동공은 어느새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노빈의 손가락이 기둥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온갖 무기를 저런 식으로 쓰는 플레이어가 데이브 말고 또 있다고?’ 물론 가능성이 0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한번 물어보기라도 해야겠어.’ 그냥 이대로 지나치기엔, 확실히 뭔가 찜찜했다. 그래서 노빈은, 기둥에서 한 발짝 떼어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그녀를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말이었다. 다다다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노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어느새 바로 옆까지 뛰어온, 사고뭉치 언니가 있었다. “로웰 언니……?” 그리고 다음 순간. “데이브!! 데이브 맞지?!” 한 치 의심도 느껴지지 않는 아주 해맑은 목소리가, 갤러리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사실 2층에 처음 올라왔을 때만 해도, 나는 별달리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필드의 외진 구역에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다는 게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그들이 구면(?)인 플레이어일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난 별생각이 없었고. 열심히 퀘스트를 진행하기에 바빴었다. 〓〓〓〓〓〓〓〓〓〓〓〓〓〓 《 벽화의 증언 》 분류 : 클래스 메인 난이도 : C 수령 조건 : ‘곡괭이의 노래’ 퀘스트 클리어 2층 갤러리의 벽화들 중 일부에서, ‘빛의 연금사’만이 읽을 수 있는 숨겨진 문구가 감지됩니다. 손상된 벽화 4점의 루멘 잔류 문자를 해독하십시오. ‘고고학자 갈레온’을 찾아간다면, 문구 해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달성 조건: 루멘 잔류 문자 4개소 해독 보상:「세라피스트의 역사 단편 I」 〓〓〓〓〓〓〓〓〓〓〓〓〓〓 벽화에 숨겨진 루멘 잔류 문자를 해독하는 데 집중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고 해야 할까? └ 근데 방장; 이거 해독하려면 갈레온에게 가야하는 거 아님? └ 그러게. 빨리 수집해서 일단 영지로 돌아가야 맞는 것 같은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음? -그야… 제가 직접 해독하면 포탈비 아끼니까요? └ 아니 ㅅㅂ;; 라이카 고대문자를 니가 어떻게 해독함;; └ 너 뭐 됨? -고대 세라피스트의 유지를 이은 유일한 빛의 연금술사랄까……. └ 이 쉑; 또 ㅈㄹ하네 ;; -아니, 진짜로 저 이거 읽을 줄 안다니까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 세 번째 벽화를 해독할 때까지, 나는 노빈과 로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벽화를 찾고, 해독하고. 방해하는 몬스터를 대충 정리하고. 내 머릿속엔, 이 퀘스트를 빨리 클리어하고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닥에 쭈그려 앉아, 세 번째 벽화를 해독하고 있던 바로 그때. ‘잠깐. 뭐지……?’ 순간적으로 뭔가를 느낀 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시선.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킨 것이다. ‘미친? 저거 노빈 아니야?’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곧바로 들켰을 터. 무심한 척 고개를 숙인 채, 흘끗 시야의 구석을 훑었다. 거대한 기둥 너머에 보이는 낯익은 실루엣. 심지어 로웰까지 있었던 것이다. ‘아, 큰일인데. 설마 알아보는 거 아니겠지?’ 순간 머리가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약 말이라도 걸면 어쩌지? 모르는 척 발뺌을 해야 하나? 말 걸기 전에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게 최선인데……. 아직도 30분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혹시라도 들키면 입단속을 시켜야 하는데, 노빈은 몰라도 로웰은 믿을 수가……. “…….”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기에, 일단 마지막 네 번째 벽화 해독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방해하는 몬스터들도 무자비하게 썰어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루멘 잔류 문자의 해독의 실마리가 보였다. 노빈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띠링-! [마지막 루멘 잔류 패턴의 해독을 완료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런데 퀘스트를 다 마무리해가던 바로 그때. [클래스 메인 《벽화의 증언》 퀘스트를 클리어…….] 회랑의 정적을 찢는, 낭랑한 외침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눈치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 “데이브!!” 방금 전까지 했던 모든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로웰의 목소리가, 2층 갤러리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 것이다. “데이브 맞지?!” 후우. 돌겠네, 진짜. * * * 솔직히 처음엔 잠깐 고민했었다. 뭘 고민한 거냐고? 그야 당연히 발뺌해볼까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아주 잠깐뿐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니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로웰 성격상,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하면, 괜찮겠지 뭐.’ 노빈은 비밀을 잘 지켜줄 것 같고… 로웰은 어디다 말할 친구가 없지 않을까? 성격이 좀… 독특하니까. “흠흠.” 그러니 괜찮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니까 내가 게이트에 있다는 건, 절대로 비밀인 거야. 알겠지?” 정체를 오픈한 우리는, 오랜만에 파티를 결성했다. └ 파티까지 할 필요 있었음? └ 어차피 방장 혼자도 충분한 것 같던데. -형님들도 아시겠지만, 여기 황금탑이, 4~5층부턴 꽤 빡세지거든요. └ 흠… 그정돈가? -그리고 얘들, 생각보다 쓸만한 친구들이라. 1인분 이상 해줄 겁니다. 탑의 4층 중반부부터는, 어떻게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많이 달라진다. 때문에 노빈과 로웰이라는 파티원이 생긴 게,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얘들이 있으면, 좀 더 시도해볼 수 있는 공략법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데이브.” “음?” “가면은 이제 벗어도 되는 거 아냐?” 해맑은 표정으로 묻는 로웰을 보며,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너희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 “아하?” 그…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조금만……. 그러니까 아주 잠깐만 해주면 안 될까, 로웰양? “그럴 순 없어. 실험과 연구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 뭐 이렇게 당당……. “후우.” 그나저나 두 번째 퀘스트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니, 이제 3층으로 올라갈 차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노빈이는 몰라도 로웰은 3층으로 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로웰 넌, 루멘 원석 채광하러 여기 온 거라며.” “그랬지?” “그러면 2층에 계속 있어야 할걸? 3층부터는 채광할 곳이 거의 없을 거야.” “괜찮아. 광물은 너 오기 전까지 충분히 채광했고, 이제부터 실험을 하면 되니까.” “…….” 로웰을 떼어놓고 노빈이만 데리고 사냥하려 했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눈치가……. └ 와 ㅅㅂ 방장 인성ㄷㄷ;; └ 뭔데;; 방장 노빈한테 흑심 있는 거 아님? 아니 뭔 흑심입니까 형님들. 그냥 노빈이만한 서포터를 본 적이 없을 뿐인데……. └ 그래도 화력은 로웰이 아니냐? 그건 맞긴 하죠. 화력만 놓고 보면 로웰도 어지간한 2차전직 법사들은 찜쪄먹을 정도니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군.” “그… 뭐가?” 로웰을 응시한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처음 루멘티스 폐광에서 파티했을 때 기억나지?” “……!” “오늘 오랜만에 탱커 한번 해야겠어.” 노빈이의 흔들리는 동공과 잠시 마주쳤지만, 어쩔 수 없다. “믿는다, 노빈?” “뭐, 뭘?” “나 안 죽게 해줘야 해?” “……?” 오늘은 어쩌면, 활 든 탱커를 보여줘야 할 수도 있겠는걸? * * *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끝에서부터, 차갑고 묵직한 철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기계인형의 공방. 그것이 이 층의 이름이었다. 노빈은 계단을 올라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릿빛의 조명이 천장의 균열 사이로 새어 들어왔고, 곳곳에 부서진 기어와 톱니바퀴의 잔해가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갈라지는 쇳소리가 멀리서부터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가, 아래층과는 달랐다. ‘데이브 이 자식은…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사라진 거야?’ 3층에 올라오자마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이건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기긱- 기기긱-! [파티원 ‘데이브’가, ‘빛의 연금술 공방’의 숨겨진 기계장치를 성공적으로 복원했습니다.] 데이브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공방의 기계인형’들에게, 하급 에고(Ego)가 부여됩니다.] [이제부터 ‘공방의 기계인형’들의 레벨이 5만큼 상승합니다.] [이제부터 ‘공방의 기계인형’들을 처치할 때마다, 추가 경험치를 20%(데이브의 파티원은 50%) 획득합니다.] ……후략……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노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대단한 것까진 아니지만, 이런 것도 분명 히든피스다. 다른 연계된 조건부 퀘스트 같은 게 있다면, 딥 아카이브(Deep Archive)에서 수천 LP를 받을 수도 있을 만한 정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데이브의 뒤에는 역시, 어떤 한국의 랭커급 길드가 존재할 확률이 높다. 그게 어딘지 알아내야만 한다. ‘데이브쯤 되는 인재가 연결된 길드가 아예 없다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긴 하지.’ 가능하면 오늘 알아내면 더 좋을 것 같다. 데이브가 한국의 어떤 길드와 커넥션이 있다고 해도, 어차피 데려갈 자신이 있었다. 블랙 크라운이라는 이름은, 충분히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노빈이 넌 디바인 쉴드 위주로 쿨 돌려주고… 로웰이 케어 부탁해.” “알… 겠어.” “로웰이는 매그니파이어, 알지?” 아무래도 고난(?)의 시간을 조금, 보내게 되긴 한 것 같았다. “그 있잖아, 데이브! 너 혹시 체인 메그니파이어 (Chain Magnifire)라고 알아?” 잔뜩 신이 나 버린 로웰을 보며, 노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기긱- 기기기기긱-! 자동인형들의 관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어 소음이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으로 울려 퍼졌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구리빛 복도의 양쪽 끝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오토마톤의 숫자가, 가볍게 열을 넘기고 있었다. 그것도 전부 강화(Enhanced)가 붙은 놈들. 그르륵-! 그리고 이건, 황금 탑에 여러 번 와본 노빈조차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70레벨 대 필드 난이도인데…….’ 하지만 이 생소한 광경보다도, 더 그녀를 놀라게 하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노빈, 디바인 쉴드 나한테 걸어. 마나 아끼지 말고 바로 한 번 더. 0.7초 안에 이어서 넣어야 해.” 그건 바로 전투가 시작된 직후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데이브의 오더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알겠어.” 노빈은 지난 파티 사냥 때, 이미 데이브의 전투 역량에 대해서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랬으니 그를 길드에 영입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다녔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오늘 느끼고 있는 지점은, 또 다른 영역의 것이었다. 지금 데이브는 마치, 그녀의 1차 히든 클래스인 ‘세인트 키퍼’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정교한 오더를 하고 있었으니까. 0.7초의 시전 공백 안에 두 번째 쉴드를 끼워 넣는 건…… 스킬의 시전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내릴 수 있는 오더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세인트 키퍼 클래스로 전투를 경험해 본 수준 같아.’ 세인트 키퍼는, 노빈이 알기로 전 세계에 스무 명도 안 되는 희귀한 클래스다. 그러니 노빈 입장에서 혼란스러운 건 당연했다. 블랙 크라운의… 항상 노빈과 파티 플레이를 하는 길드원들도, 이런 수준의 이해도는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놀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로웰, 체인 메그니파이어는 내가 신호하면 캐스팅해. 그전까지는 그냥 메그니파이어만.” “왜?” “구도가 잡혀야 하니까.” 노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구도를 잡는다는 게……?” 타탓-! 전장을 휘젓기 시작한 데이브의 활약은, 이전까지 알던 수준과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야.’ 데이브는 분명 활을 들고 있었다. 묵직한 빛깔의,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는 철궁. 그런데 활을 든 채로, 오토마톤 무리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핑- 피핑-! 그 와중에 사방에 화살을 날리면서, 순식간에 어그로를 끌어모았다. 그워어어-! ‘활 들고 탱커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처음 루멘티스 폐광에서 파티 플레이를 했던 때. 그때와 같은 구도로 전투를 하겠다고 했으니, 아마 회피 반격탱(?)이라는 그 기괴한 포지셔닝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패는커녕, 검도 안 들고 있다. 노빈의 상식으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 쉴드는 걸고…….’ 위이잉- 하지만 다음 순간. 까가강-! 노빈은 어이없게도. 이 기괴한 상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파티원 ‘데이브’가 ‘퍼펙트 패링’을 발동하였습니다.] [강화된 폭주 오토마톤(Enhanced Berserker Automaton)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합니다.] ‘패링을… 활로 한다고?’ 이 미친 플레이어는, 철궁의 활대를 비스듬히 휘두르는 것으로……. 폭주한 오토마톤의 강철 주먹을 연속해서 흘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새낀가?’ 물론 물리적으로는 되는 거다. 리커브 궁처럼 금속 궁체를 가진 활이라면, 패링 판정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실전에서 해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궁체의 유효 방어 면적은 방패의 3분의 1도 안 되며, 리치는 장검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 좁은 면적과 사정거리로 패링 타이밍을 맞추는 건……. 머릿속 시뮬레이션으로나 가능한, 이론상의 플레이였다. 심지어. 패링을 하며 공격을 흘려내는 그 사이사이에. 턱-! 데이브의 손은 쉴 틈 없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피피핑-! 그 와중에 공격은 공격대로, 쑤셔 넣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된 폭주 오토마톤(Enhanced Berserker Automaton)’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토마톤의 유일한 약점 부위인 관절 이음새. 그 사이에 화살이 정확히 틀어박히는, 데이브의 철시. 이건 대충 봐도 가히 예술에 가까운 경지였다. ‘저건… 감각인가?’ 패링 직후 반동을 이용해 시위를 당기고, 그 반동의 궤적 안에서 조준까지 마치는 동작. 노빈은 단연코 지금까지 플레이어 생활을 하면서, 이런 수준의 무기술을 본 적이 없었다. “노빈! 지금!” ‘……!’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던(?) 노빈의 손이, 데이브의 오더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파티원 ‘세일라 노빈(Seila Novin)’이 디바인 쉴드(Divine Shield)를 부여합니다.] 디바인 쉴드가 데이브의 몸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데이브가 오토마톤 3체의 공격 범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오토마톤들의 주먹이 동시에 쏟아진다. 쿵- 쿠쿠쿵-! [피해량이 62%만큼 감소합니다.] [쉴드가 감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로웰” “알겠다구!” 로웰의 지팡이가 전방을 가리켰고……. 콰아아아아-! 전장의 온도가 순식간에 치솟아 올랐다. [파티원 ‘엘리시아 로웰(Elicia Rowell)’이 체인 메그니파이어(Chain Magnifire)를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버벙-! 어마어마한 수의 화염 구체가 전방으로 토해져 나왔다. 기존의 매그니파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마력이 전장에 휘몰아쳤고, 이는 그만큼 더 위험하기도 했다. 화륵-! 그리고 화염 구체 하나가 오토마톤에 적중하는 순간. 퍼버벙-! 터더덕-! 파편화됐다. 작은 불씨 수십 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바닥에 닿은 파편에서 2차 폭발이. 그 2차 폭발에서 튀어나간 파편이 다른 오토마톤에 적중하며 3차 폭발이. 연쇄. 말 그대로의 연쇄 폭발이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바다의 한가운데에, 데이브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데이브의 모습은, 숯불구이가 되기 직전처럼 보일 수준이었다. ‘미쳤……!’ 그런데 노빈이 반사적으로 쉴드와 힐을 캐스팅하려던 순간. 퍼엉-! 퍼버벙-! [파티원 ‘데이브(Dave)’가, ‘퍼펙트 패링’에 성공하였습니다.] 예전에 봤던 그 기가 막힌 장면이 다시 재현되기 시작하였다. 정말 묘기를 부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지. 데이브의 활대가 허공에서 춤추며, 사방으로 화염의 파편을 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 심지어 이번에는, 단순히 화염파편을 튕겨내 적을 맞추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라고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데이브가 쳐낸 파편은 허공을 수놓은 화염의 연결고리에 날아들었고. 퍼엉-! 그 폭발은 다시 다른 폭발의 매개체가 되어, 체인 메그니파이어의 연쇄폭발을 멈추지 않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광경이었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설명하자면……. 전장에서 튕겨 나오는 화염 파편을 데이브가 원하는 방향으로 쳐내며, 연쇄 폭발의 궤도를 제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건 스킬도 아니고… 순수한 피지컬이잖아?’ 이 기가 막힌 광경은 아마,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해줘도 절대로 믿지 못할 것이었다. 그나마 같이 목격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부분이었는데. “헤헤.” 불꽃놀이를 구경이라도 하듯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는 로웰의 모습을 확인하니, 의미 없는 목격자인 것도 같았다. [‘강화된 연금 골렘(Enhanced Alchemic Golem)’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강화된 폭주 오토마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강화된 폭주 오토마톤’을……] ……후략…… 로웰이 마구잡이로 쏟아낸 연쇄 화염의 파편들이, 데이브의 손끝에서 정밀 유도 미사일로 변하는 광경. 천외천이라 불리는 3차 전직 랭커들 정도 된다면, 이 광경을 재현할 수 있을까? ‘확신이 안 서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파티원 ‘데이브(Dave)’가, ‘루멘 플레어 (Lumen Flare)’ 마법을 캐스팅합니다.] 노빈의 상상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데이브의 손끝에서 또 다른 기막힌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법을… 쓴다고?’ 고오오오-!! 연쇄폭발로 인해 폐허가 된 전장. 그 바닥에 흩어져 있던 불씨들이, 다시 열기를 머금으며 점점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화륵-! 그리고 다음 순간. [‘루멘 플레어 (Lumen Flare)’ 마법이 발동합니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전장에 살아남아 있던 금속의 꼭두각시들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파티원들의 실력은,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뭐 반강제로 같이 하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투자였달까? 솔직히 못 본 사이 로웰의 화력이 이렇게까지 강력해졌을 줄은 몰랐다. 물론 마력 컨트롤 능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긴 한데……. 그거야 우리 파티의 전투 방식을 기준으로는 별다른 영향이 없는 영역이니까. └ 방장아;;; 나 살짝 지렸다;; └ 나도 잠깐 바지 좀 갈아입고 와야 할 듯 ㄷㄷ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의 파티전투로 조금 더 확실해진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노빈의 정체가 확실히 의심스러워졌다는 거다. 분명 스펙상으로 로웰과 별 차이 없는 정도 레벨의, 다만 실력만 좀 출중한 서포터 플레이어 정도로 본인이 얘기했었는데……. └ 솔직히 서포터가 이 친구정도로 퍼포먼스 보여주려면, 최소 90~100레벨은 되야 함. └ 랭커라 해도 믿을 듯? 에이. 그 정돈 아니고요. 2차 전직까지는 확실히 한 것 같은데, 한 70~80레벨 되려나? 흐음. 패링 타이밍에 웨폰쉴드 기가 막히게 걸어주는 거 보면, 실력 자체는 좀 더 높게 봐야 할 수도……? └ 그러니까, 우리 방장 오늘도 버스 달달하게 탄 거 맞지? └ 맞지맞지 ㅋㅋㅋ └ 경험치 달달하자너? 한잔해ㅋㅋ └ 세상에서 버스를 가장 맛있게 타는 남자……. 아니, 버스라뇨 형님들. 사실상 제가 다 한 거 아닙니까? └ 혼자서 이만한 화력 나오는 거 가능? └ 노빈 없이 반격탱 가능? 후우. 이 형님들이 또 할 말 없게 팩트를……. └ 버스를 타긴 했는데, 운전을 직접 한 정도가 적당한 듯 ㅋㅋㅋ └ 맞네 ㅋㅋㅋ 승객이라기엔 애매하고, 버스만 어디서 빌려온 듯 ㅅㅂㅋㅋ 좋습니다. 이 정도에서 합의하시죠. “후우.” 어쨌든 성좌들과 기분 좋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지금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고? 아마 나 혼자 했으면 이틀 꼬박 사냥했어야 채워 넣을 수 있는 경험치를, 단 다섯 시간 만에 쓸어 담은 수준이랄까. └ 게이트 폭주 전에 50레벨 그냥 찍을 듯 대이브 ㅅㅂ └ 아 ㅋㅋ 우리 방장은 한다고 하면 보통 해내는 편이라고? └ 그런데 이번엔 왜 배팅 안 열었냐 방장아 ㅋㅋ └ 그러게 ㅋ 평소같았으면 배팅 열어서 달달하게 한 몫 챙겼을 건데. 그야…… 이 정도 미션엔 배팅 열어봐야 배당 얼마 나오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요? 형님들도 이제 꽤 노련해지셔서… 이 정도 미션에는 역배 잘 안 걸어주시니까. 라고 할 뻔.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47레벨이 되었습니다.] 크으으. 레벨업 시스템 메시지까지 확인하니, 기분이 아주 흐뭇해진다. 물론 불가피하게 퀘스트 진행 속도는 약간 느려졌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트레이드오프라고 할 수 있겠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모든 오토마톤 개체의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오토마톤 에고 각인 패턴수집 : 5 / 5] [클래스 메인, 《에고의 잔향》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세라피스트의 역사 단편 II’을 획득했습니다!] 역시 숙제답게 보상에서 짠내가 풀풀 나긴 하는데……. 어차피 안 할 수도 없는 퀘스트들이니까.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연계 퀘스트 《태양의 그림자》가 발동됩니다.] 〓〓〓〓〓〓〓〓〓〓〓〓〓〓 《 태양의 그림자 》 분류 : 클래스 메인 난이도 : B 수령 조건 : ‘에고의 잔향’ 퀘스트 클리어 4층 ‘천문의 전당’을 조사하여, ‘빛의 곡괭이’가 반응하는 ‘특이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특이 지점’을 채굴하여 숨겨진 석실을 발견하고, 그 안에 보관된 「라피엘의 유산 봉인 좌표」를 확보하십시오. 달성 조건: 숨겨진 석실 진입 + 「라피엘의 봉인 좌표」 확보 보상: 세라피스트의 역사 단편 III 〓〓〓〓〓〓〓〓〓〓〓〓〓〓 그런 의미에서 이제 슬슬… 다음 층으로 넘어가 봅시다. “오케이?” “4층 가자는 거지?” “물론.” “난 좋아. 헤헤.” 그나저나 로웰이는 아까부터… 나보다도 기분이 더 좋아 보이는 느낌인데. 이유가 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야, 네 덕분에 체인 메그니파이어 처음 써봤으니까?” 예? 뭐라고요? “마력이 감당이 안 돼서, 혼자서는 쓰기가 좀 무서웠거든.” “…….” “헤헤. 그러니까 4층에서도 또 쓰게 해줘야 해?” “……콜.” 다음 스텝인 태양의 그림자 퀘스트는 빠르게 클리어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전투부터 한바탕해야 할 것 같다. [띠링-!] [‘알테리온의 황금 탑’ 던전의 4층, ‘천문의 전당 (Celestial Hall)’으로 이동합니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빛의 감시자’가 등장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오늘 ‘천체 수정’ 두 조각만 파밍할 수 있으면, 상당히 행복해지겠는걸? * * * 4층, 천문의 전당. 여긴 3층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높은 천장에 깨져버린 천체 관측 장치의 잔해가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난이도도 3층보다는 확실히 높았다. 물리적인 스펙만 놓고 보면, 3층의 ‘강화된’ 오토마톤들보다 강력한 건 아니었지만……. “노빈, 공격계열 스킬은 아예 쓰지 말자.” “‘빛의 감시자’ 때문에 그러는 거지?” “맞아.” “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걱정 말고 오더해.” 몬스터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믹들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전투 스타일의 난이도 자체가 높았다는 뜻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 파티의 전투 스타일을 크게 바꿀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파티원 ‘엘리시아 로웰(Elicia Rowell)’이 체인 메그니파이어(Chain Magnifire)를 캐스팅합니다.] 꽤 쏠쏠하던 노빈의 공격보조 스킬들과 디버프 스킬들을 활용할 수 없게 된 점은, 꽤 아쉽다고 할 수 있었다. 화륵-! 콰과과광-!! 그래서 일단, 계획을 조금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빠르게 뚫어버리고, 차라리 5층 가서 파밍해볼까?” “그것도 방법이겠네.” 솔직히 ‘천체 수정’ 하나 정돈 줍고 나서 5층으로 넘어가고 싶었는데……. └ 그게 나오겠냨ㅋㅋ └ 꿈도 야무지네 ㅅㅂ └ 그게 한두시간만에 툭툭 떨어지면, 시세가 200LP겠냐고 ㅋㅋ 아쉽게 된 거지 뭐. [‘빛의 감시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빛의 감시자’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천체 수정’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어……? 이게 되네? 몰아서 잡을 땐 안 나오다가, 하나 잡으니까 툭 떨구는 건 뭔데? └ ?????????? └ 아니;;; └ 사기꾼 ㅅㄲ;; 캬, 200LP 달달하고. └ 아;;; 기분상하네ㅅㅂ └ 시팔 이거 버그임;; 아무튼 버그임;; 성좌님들의 무수한 악수 요청과는 별개로, 이러면 미련 없이 다음 스탭을 밟을 수 있다. [‘빛의 곡괭이’가 감응을 시작합니다.] [‘특이 지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채광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노빈, 잠깐 엄호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지.” 기분이 아주 잔뜩 좋아진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채광을 시작했다. 깡- 깡- 깡-! 특이하게도 손목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반동이 곡괭이의 손잡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이런 반동은, 최상급 광물을 캘 때나 나타나는 현상인데….’ 나쁘지 않았다. 퀘스트 전개와 별개로, 이 채광 자체에서 꽤 높은 부가가치의 광물이 산출될 거라는 신호였으니까. 깡- 깡- 까가강-! 곡괭이질이 가속될수록, 마치 천체 관측 장치의 잔해물 중 하나와 같은 생김새를 가진 구조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후. 빠가각-! 잔해가 갈라지며, 그 안쪽에서 작은 은빛 크리스탈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띠링-! [클래스 메인 《태양의 그림자》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최상급 루멘 원석’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라피엘의 봉인 좌표’를 획득하였습니다.] [‘세라피스트의 역사 단편 III’을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의 결과물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봉인 좌표라는 걸…… 어떤 식으로 준다는 건지 의아하긴 했는데.’ 루멘 원석과 함께 채광된 찬란한 크리스탈 한 조각. 그걸 손바닥 위에 올린 나는, 흥미롭게 관찰을 시작하였다. 표면에 미세한 빛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문자. 이건 아마도, 세라피스트의 시야가 아니면 읽을 수 없는 정보일 터였다. ‘탑의 최하층으로 이어진 길. 그런데 좌표가… 왕좌의 아래라고……?’ 크리스탈의 정보가 가리키는 좌표는 5층이었다. 정확히는 5층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너진 왕좌 뒤에 뭔가 있다는 얘기. ‘5층의 좌표가 어떻게 최하층으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크리스탈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응시했다. ‘일단 5층에 가봐야…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여기까지 클리어하면 숙제가 하나 남는 거였는데……. 슬슬 뭔가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무슨 냄새냐고? 이제부터 슬슬, 내가 갖고 있던 이 황금 탑과 관련된 지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던전의 히든피스와 관련된 정보들이, 퀘스트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는 얘기다. “다 됐으면, 이제 5층 가면 되는 거야?” 로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느낌상……. 5층에서 진행될 마지막 퀘스트부터, 진짜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을 듯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연계 퀘스트 《봉인의 해제》가 발동됩니다.] 〓〓〓〓〓〓〓〓〓〓〓〓〓〓 《 봉인의 해제 》 분류 : 클래스 메인 난이도 : A 수령 조건 : ‘태양의 그림자’ 퀘스트 클리어 황금왕의 잔영을 쓰러뜨리고, 왕좌 뒤에 숨겨진 봉인된 문을 발견해야 합니다. 「라피엘의 봉인 좌표」와 「빛의 곡괭이」를 사용하여, 봉인을 해제하십시오. 세라피스트만이 열 수 있는 이 문 너머에, 라피엘이 남긴 진정한 유산이 잠들어 있습니다. 달성 조건: 황금왕의 잔영 처치 및 ‘숨겨진 통로’ 발견 보상: 세라피스트의 역사 단편 III, 「황금 탑 — 지하 구역」 입장 자격 획득 〓〓〓〓〓〓〓〓〓〓〓〓〓〓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19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울, 성동구. 자정이 넘은 오피스텔 8층의 원룸은 어두웠다. 오늘도 호진이 부팀장으로 있는 레드어스(Red Earth)길드는, 하루종일 쉴 새 없이 레이드를 진행했었다. 최근 일과는 평소보다 훨씬 더 타이트했지만, 길드원 중 누구도 이에 대해 불만 갖는 이는 없었다. 이제 며칠 후면, 한동안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호진은 요즘 귀가할 때가 되면 매번 녹초 상태였고. 때문에 오늘도 적당히 라면이나 한 그릇 끓여먹은 뒤, 헌터즈 라운지를 슥 둘러보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 호진은 라면을 끓이다 말고, 그대로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냐.” 싱크대에 등을 기댄 그는, 정신없이 무언가를 읽어 내려갔다. 라면은 어느새 완전히 식어서, 면이 국물을 죄다 머금은 채 뚱뚱하게 부풀어 있었지만……. 지금 그런 것은 호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미친.’ 사실 내일 던전 일정을 확인하려고 헌터즈 라운지를 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분명, 이렇게 오래 보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는데. ‘비동기 전술 타격대는…… 대체 또 뭐고?’ 지금 호진의 시선은, 상단에 고정된 공고문 하나에 그대로 고정돼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비단 호진만의 상황이 아닐 터였다. [긴급/공지] 제1차 비동기 전술 타격대 특별 모집 공고 제목에 박힌 두 단어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비동기. 전술 타격대.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렬하게 호진의 시선을 빼앗는 건……. [작성자 : 엘리제(인증)] 무려 엘리제라는 작성자 이름 옆에 붙은, 랭커 인증 마크였다. ‘검희라니……. 검희가 대체 왜 이런 걸…….’ 무려 검희다. 대한민국에서 검을 쓰는 플레이어라면, 누구에게든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검에 한해서는 국내 최고의 랭커인 검희 엘리제. 호진은 몇 번이고 공고문을 다시 읽고 있었다. 그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 [긴급/공지] 제1차 비동기 전술 타격대 특별 모집 공고 작성자 : 검희(엘리제) / 바르가 길드 부마스터 보증 기관 : 대한민국 게이트 관리국 1. 목적 게이트 폭주 시 비동기 환경에서의 방어 및 타격 작전 수행 2. 자격 요건 - 2차 전직 이상 플레이어. - 비동기 전투 경험 보유자 우대. - 소속 길드 무관. 3. 보수 및 혜택 - 일당 1,000LP (활동일 기준, 최대 15일) - 기여도 포인트 연동: 타격대 내 기여 실적은 소속 길드의 공식 기여도 포인트로 전환 가능 - 관리국 전면 보증: 사망 시 유족 보상금 별도 지급, 부상 치료비 관리국 부담 - 장비 지원: 비동기 환경 전용 소모품(마력 안정제, 정화 소금 등) 현물 지급 4. 인솔 - 본인(엘리제) 직접 인솔 - 타격대 편성 및 작전 지휘 총괄 5. 모집 기간 - 본 공고 게시일로부터 7일간 6. 지원 방법 - 본 게시글 하단 [지원하기] 링크 클릭 〓〓〓〓〓〓〓〓〓〓〓〓〓〓 사실 이 게시글을 처음 클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연히 엘리제라는 플레이어 네임 석 자였다. 검을 다루는 전사 클래스인 호진의 입장에서 엘리제와 함께 실전을 수행한다는 건. 엄청나게 값진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건도 눈을 의심할 수준이었으니까. ‘일당이… 1,000LP라고?’ 레드어스 3팀의 부팀장인 자신이, C급 던전을 하루종일 돌아야 겨우 긁어모으는 게 150LP 안팎이다. 그러니까 현시점 수익 기준으로 봐도, 벌이의 여섯 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보상. 그러니 15일만 빡세게 구르면, 거의 5개월 치 이상의 수익을 당길 수 있다. 물론 보상이 크다는 건, 그만큼 위험하거나 힘들다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미친.’ 장호진은 스마트폰을 쥔 손을 내렸다. 숨을 한 번 뱉었다. 이번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기여도 포인트라는 단어였다. 이 부분도 지금의 호진에겐,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타격대 내 기여 실적이, 소속 길드의 공식 기여도 포인트로 전환 가능이라…….’ 이 말은 곧. 레드어스에 돌아가면, 15일간의 전투 기록이 그대로 포인트로 잡힌다는 소리. ‘기여도를 구체적으로 얼마나 잡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길드의 기여도 포인트라는 건. 평소 게이트가 안정화 상태일 때, 각 길드가 게이트 내에서 활약한 활약도를 수치로 측정하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폭주 억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수치화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 길드에게 규제적 차원에서 이득을 주는 관리국의 시스템인 것. 그러니 이 기여도를 쌓는 건 각 길드들에게 너무 중요한 것이었고, 길드 내 인사평가의 가장 핵심이 되는 척도기도 했다. 장호진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3팀장한테 밀린 게 올해로 2년째. 어쩌면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실력 차이야, 솔직히 종이 한 장 차이고.’ 호진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링크를 향했다. 툭- 게이트 폭주가 터진 비동기 환경. 그것도 최전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었지만……. 그러니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검희가 안 죽게 해주겠지 뭐.’ [지원하기] 스마트폰 화면 하단에 고정된 파란색 직사각형의 버튼이, 호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지원한다면, 분명 길드에서도 좋아할 거다. 물론 지원한다고 뽑힌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톡- 호진의 엄지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버튼을 눌러버렸다. “……젠장.”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 * * 아마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4층 천문의 전당 끝에서……. 5층, 무너진 왕좌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 말이었다. 깡- 까강-! 그리고 5층에 올라온 뒤, 우리는 꽤 고전 중이었다. 5층의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진 거냐고? 그렇다기보단, 우리 파티 구성과 상성이 좀 좋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황금빛 갑옷을 두른 수호병들은, 원거리 공격을 방어해 내는 데 특화된 녀석들이었으니까. 까가강-! 그래서 노빈으로부터 검도 한 자루 빌려야 했다. 활은 효율이 너무 나오지 않았고, 월광검 정도로 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 노빈좌;; 방장한테 7티어 검 삥뜯겼죠? └ 불쌍한 노빈이……. 아니, 삥을 뜯기다뇨. 이거 돌려줄 겁니다만? └ 돌려주는 건 당연한 거고 ㅅㅂ;; └ 내구도 수리도 해서 돌려주는 거 맞지 방장? 흠흠. 굳이 수리까지 해줘야 할까요? 암만 봐도 우리 노빈이 부자 같은데……. └ ㅅㅂㅋㅋㅋ └ 대이브 역시 양심 털났쥬 ㅋㅋㅋ 어쨌든 방법을 찾은 우리는, 무려 75레벨의 정예 몬스터인 황금 수호병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중이었다. 이 녀석들을 다 처치해야, 5층의 보스를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보스가 뭐냐고? 황금탑의 던전보스로 유명한, ‘황금왕의 잔영’ 되시겠다. └ 방장아, 양심이 있으면 최상급 루멘 원석은 로웰이한테 넘겨주자. └ 아까 4층에서 그거 보면서 로웰이 눈이 반짝거리던데 ㅋㅋ 어허. 파티원 사이에도 돈 계산은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 공략 끝나고 로웰이가 적절한 값을 지불한다면야, 당연히 넘길 용의가……. └ 물론, 원가겠지? └ 설마 ‘시세대로’는 아니겠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성좌들의 채팅을 깔끔히 무시하면서, 눈앞의 수호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강-! 휘두른 검이 황금갑옷 위를 빗겨 나가면서, 강한 반동이 팔뚝을 타고 올라온다. 오히려 반동의 궤적을 이용해 두 걸음 물러서며, 뒤따라오는 수호병의 미늘창을 흘려냈다. 캉-! 그러자 중심을 잃은 녀석의 옆구리로, 갑옷의 이음새가 훤히 드러났고. 푸욱-! 그 사이에 검끝을 찔러 넣자, 깔끔하게 유효타가 터져 들어갔다. [파티원 ‘데이브’가, ‘황금의 수호병’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티원 ‘데이브’가, ‘황금빛 수호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크, 이번에도 깔끔했고? └ 누구보다 쪼잔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놈……. └ 캬- ㅋㅋㅋ 이 맛에 대이브 보는 거긴 해. └ 아니 근데 원래 황금수호병 약점이 갑옷 이음새였음? └ ㄴㄴ 보통 저렇게 찌르는 게 불가능하긴 함ㅋㅋ └ 수호병은 원래 신성력 무력화 디버프 걸고 잡아야 되는 친구들임 ㅋㅋㅋ 이 새끼가 이상한거 ㅋㅋㅋ 그렇게 성좌 형님들의 극찬을 잠깐 음미하고 있는데, 측면에서 노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브! 이쪽이야!” 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드디어 ‘왕좌의 기사’가 필드 구석에서 젠되어 있었다. 수호병보다 한 급 위. 미늘창 대신 대검을 들고 있었으며, 판금갑옷 대신 화려한 문양이 각인된 핏빛 갑주를 입고 있는 녀석. ‘다 왔네.’ 이제 이 녀석만 처치하면, 5층에 온 목적인 ‘황금왕의 잔영’을 만날 수 있다. “로웰! 캐스팅 준비!” “알겠어!” 나는 시선을 좁히며 기사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감히 황금왕의 안식을 방해하다니……. 수호병보다는 확실히 한 체급 높은 녀석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철컥- 저 녀석은 수호병들과 달리, 원거리 공격에 대한 안티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기기긱-! “노빈, 버프!” “알겠어.” 위이잉-! [파티원 ‘노빈’이, 가디언의 맹약 (Oath of the Guardian) 스킬을 발동합니다.] 잠깐. 이런 것도 쓸 수 있었다고? [15초 동안 모든 피해량이 35%만큼 증폭됩니다.] [15초 동안 치명타 피해량이 70%만큼 증가합니다.] [15초 동안 입히는 모든 피해에, 시전자 ‘노빈’의 마력 피해가 추가됩니다.] 순간적으로 내 전신에 빨려들어 오는 은빛 기류를 확인한 나는, 지체 없이 활 시위를 놓았다. 피이잉-! 그리고 다음 순간. -광휘의 검으로 네놈들의 심판을… 커헉-! 대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쏘아져 나간 화살이 녀석의 목덜미를 꿰뚫고 틀어박혔다. [파티원 ‘데이브’가, ‘왕좌의 기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가디언의 맹약’효과로 인해 피해량이 증폭됩니다!] [‘가디언의 맹약’효과로 인해 치명타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핑- 피피핑-! 이어진 다섯 발의 화살이, 같은 자리에 시간차로 전부 다 틀어박혔다. [‘왕좌의 기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왕좌의 기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후략……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화살을 쑤셔박은 셈이었다. [‘왕좌의 기사’를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딜 미쳤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쉽게 잡을 줄은 몰랐다. 내가 잘한 것도 맞았지만, 노빈이 가디언의 맹약을 사용할 수 있었을 줄이야. └ 아니, 방금 딜 뭔데? └ 버프 미쳤는데? 이런 걸 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왜 안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노빈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치명타 공격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딜러에 한해서, 이 가디언의 맹약은 0티어 공격 버프였으니 말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왕좌의 밀실’이 개방되었습니다.] 쿠궁- 쿵! 어쨌든 모든 조건을 달성한 우리는, 드디어 보스 룸을 향해 이동하였다. 띠링-! [‘무너진 왕좌의 밀실’에 입장하였습니다.] 계단을 올라 거대한 홀에 들어서자,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천장이 한없이 높았고. 홀 중앙에 황금빛 왕좌가 있었다. 부서지고 금이 가 있었지만, 여전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석조물. 그리고. 우우우웅- 왕좌에서 금빛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꿈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이 있다. 보통은 좋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겠지만, 김경준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은 그 반대였다. 3주 전. 노바르크 군도에서의 기억. 붕대 너머로 배어 나오는 상처의 욱신거림이 그때의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마스터의 호출로 길드 본부에 온 것도……. ‘후우.’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터였으니까. 저벅- 저벅- 길드 본부 복도에 울리는 건 경준의 발소리뿐이었다. 원래 이 시간대의 복도는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떠들지 않고 있었으며, 경준이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대화를 멈췄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뭐, 그럴 만하지.’ 어떤 이유로 포장하든, 결국 자신은 공대원들을 죽인 공대장이다. 3주간의 고립. 그리고 무려 다섯이나 되는 공대원들의 희생. 게다가 본부에 출근하는 플레이어들은, 마스터 강태욱의 파벌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시선을 피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경준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 문을 열자, 간접 조명이 깔린 넓은 집무실이 펼쳐졌다. 잘 정돈된 서류 더미. 은은한 커피 향. 그리고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태욱. 아이기스 길드의 현 마스터. 오늘도 어김없이 다림질이 완벽한 슈트를 입고, 은테 안경 너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였다. “오느라 고생했어. 앉지.” 강태욱은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찻잔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따뜻한 차에서 올라오는 김이 코끝을 스쳤지만, 경준은 앉으면서도 어깨의 긴장을 풀지 못했다. “몸은 좀 어떤가?” “……일상생활에는 문제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경준은 강태욱의 미소를 보자, 속이 더부룩해졌다. 강태욱은 늘 웃었다. 전 마스터 서진우가 사망한 뒤 이 자리를 이어받은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부드럽고, 공손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합리적이었다. 대신 길드의 운영 방식을 뿌리부터 바꿔버렸지만 말이다. ‘의리’를 ‘성과’로. ‘동료’를 ‘배당금(LP) 수치’로. 길드를 완전한 기업으로 뒤바꿔 놓은 사람. “경준이,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노바르크 군도 건에 대해서, 조사가 마무리되었네.” 강태욱의 말투가 한 톤 낮아졌다.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에는 어떤 방향성이 깔려 있었다. “서정훈 실장이 주도한 사후 분석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솔직히 말하겠네.” 강태욱이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경준의 시선이 거기에 꽂혔다. ‘전략기획실 조사 보고서 — 노바르크 군도 레이드 참사 원인 분석’. 그 아래에 빨간색으로 굵게 밑줄이 그어진 문장 하나. [공대장 김경준의 사전 정보 미확인에 의한 과실.] “이대로 넘어가긴, 어렵게 되었어.” “…….” 이것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정보 자체가 꽤 많이 누락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모두 눈을 감았다.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안타깝지만,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조사 결과야.” “알고 있습니다.” 강태욱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다. 마치 유감스럽다는 듯.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현재 길드 내부에서는…… 자네의 공대 운영 능력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적지 않아. 서 실장만의 의견이 아니라는 걸, 자네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랬다. 복도에서 시선을 피하던 길드원들. 그들의 눈에 담긴 건 연민이 아니라, 심판이었을지도 모른다. 김경준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형편없이 지쳐 있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벌을 주려는 게 아니야.” “…….” “언제나 길드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네의 노고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 강태욱은 언제나 좋은 말을 한다. 그러니까 그가 싫을 이유는 분명히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턴가 그와 마주하는 게 역겹게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일까? 단순히… 존경하는 전 마스터 서진우와 노선이 달라서? ‘그렇다기엔…….’ 경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태욱이 서랍을 열어 뭔가 꺼내었다. 이어서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유가족 위로금 지급 안이네.” “……?” 김경준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노바르크 군도에서 희생된 다섯 분의 유가족에게, 내 재량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려고 해. 액수는 여기 적혀 있으니 확인해 보게.” 봉투를 열자,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경준은 숨을 멈추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일개 길드의 마스터 재량으로 결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건 공식적인 절차를 밟을 수가 없어. 조사 결과상 과실이 인정된 사안이니까…… 원칙적으로는 위로금이 나갈 명분이 없거든.” 강태욱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김경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 헛되이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는 걸, 남은 가족들에게라도 보여주고 싶네.” 경준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게 정말 강태욱 마스터의 진심일까? 정말 받아도 되는 돈일까? ‘이건…….’ 솔직히 경준의 직감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에 없는 다섯 길드원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아이가 셋이던 정혁이 형. 갓 결혼한 수현이. 홀어머니를 모시던 태호.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대신…… 조건이 있네.” 강태욱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자네가 이끌고 있는 파벌을 해산해 주게. 서 마스터의 뜻을 따르는 인원들…… 전부.” “…….” “자네만 고개를 숙이면,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헛되이 죽은 게 아니게 되는 거야.” 바람 소리도 없는 집무실 안에, 강태욱의 목소리만이 낮게 울렸다. 경준의 주먹이 천천히 쥐어졌다. 파벌 해체. 전 마스터 서진우가 남긴 뜻. 그것을 지키겠다고, 동료들과 약속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생활은…… 지금 당장의 현실이었다. ‘위로금을 받으면, 정혁이 형 아이들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 ‘수현이의 남편은 빚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태호 어머니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게 만약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이라면, 유가족들에게도 무조건 득이 되는 방향은 아닐 테니까. ‘강태욱…….’ 경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강태욱. 이 사람은 LP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다. 전 마스터 시절의 ‘의리’ 문화를 완전히 갈아치운 사람. 타인의 성과를 철저하게 숫자로 치환하고, 배당금(LP) 정산에서 단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원칙에도 없는 위로금을…… 저 금액을?’ 지금까지 의료비 정산 하나도 까다롭게 굴었던 마스터가, 갑자기 개인 재량으로 천문학적인 LP를 쏟아붓겠다고? ‘……뭔가 조급한 거야.’ 강태욱의 미소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표정 저변에 깔려 있는 초조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김경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스터.” “응?” “조금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짧은 한마디.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지만, 시선은 강태욱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강태욱의 미소가 1초쯤 얼어붙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래, 충분히 생각해보게.” 강태욱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여유로운 자세. 하지만 안경 너머의 눈은, 찻잔이 아닌 김경준의 뒷목을 보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많지는 않다는 건 알아두게.” * * * 왕좌에서 피어오르는 금빛 마력은, 점점 더 짙은 마나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느껴지는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질수록, 파티원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왕좌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밀도가 범상치 않다. 기준이 뭐냐고? 그야 당연히, 베타 서버에서 셀 수 없이 황금왕을 잡아봤던 과거의 기억들이다. 사실 히든클래스의 클래스 퀘스트가 엮여있다 보니, 평소의 난이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레벨 디자인은 개나 줘버렸네.’ 아무리 라이카 게임이 아닌 게이트라 해도. 보통 50~60레벨 사이에 진행해야 하는 클래스 퀘스트에 이런 미친 보스가 등장하는 건, 확실히 상도덕에 어긋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쓰긴 해야겠네.’ 아무래도 아껴둔 패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우우우우웅-! 왕좌에서 피어오르던 금빛 마력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5층 보스 ‘황금왕의 잔영’이 출현합니다!] 이어서 황금빛 갑옷을 걸친 거대한 실루엣의 괴수가, 무너진 왕좌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탑의 정수를 탐한 대가를…… 치르거라. 고오오오- 황금왕의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발밑의 돌바닥에 미세한 균열이 퍼졌다. 그때, 옆에서 노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브.” 노빈이 다가와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셋이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귀환 스크롤 찢는 게 좋지 않을까?” 겉으로 보면 당연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 정도 마력을 뿜어내는 보스를, 50레벨 전후(?)의 3인 파티가 잡아내는 건 원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로웰도 아니고 노빈이 이런 얘기를 하니, 동의해줄 수가 없겠는걸? -노빈이 이 자식이 밑장 빼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님들. └ ㅋㅋㅋ개웃기넼ㅋㅋ └ 방장… 설마 여기서 빼는 건 아니겠지? └ 황금왕 오늘 못 잡으면, 한동안 후원 없을 줄 아셈 ㅇㅇ └ 가야지… 반드시 가야지……. 심지어 뺄 밑장이 딱히 없어 보이는 로웰이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전히 해맑은 표정이다. “난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 이로써 파티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했으니, 녀석을 잡는 것만 남은 듯했다. “아니, 로웰 언니는 중립이잖아! 이게 어떻게 과반수 이상…….” 혹시, 우리 노빈이는 ‘이상’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나? 흐음. 하지만 지금 말장난할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잡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하던 대로만 해, 노빈.” 노빈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손바닥 위로 모이기 시작했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소환술식의 마력회로가, 천천히 작동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소환수 ‘키엘’을 소환합니다.] 순간적으로 내 손아귀 안쪽으로부터 빛이 폭발했고. 손바닥 위에서 터져 나간 황금빛 마력이, 홀 전체를 휩쓸며 소용돌이쳤다. “……!!” “뭐, 뭐야?” 그런데 다음 순간.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대 루멘 마력파동에, 소환수 '키엘'의 에고가 감응합니다.] [소환수 '키엘'의 충성도가 20만큼 증가합니다.] [소환수 '키엘'의 잠재력이 강화됩니다.] [소환수 '키엘'의 모든 능력치가 50%만큼 강화됩니다.] [소환수 '키엘'의 마력 소모량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나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키엘을 전투에 쓰는 건, 사실상 지갑을 불태우는(?) 것과 비슷하다. 정확히는……. 아직 50레벨도 되지 않는, 낮은 레벨의 상태를 기준으로는 말이다. ‘마나포션의 효율도, 결국 마나통의 크기에 비례하니까.’ 초당 마력 소모 24. 수치만 보면 그냥 숫자 같지만, 지금 기준 마나포션으로 환산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처음 키엘을 얻었던 시점에서는 아예 마나포션으로 커버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고……. 지금 기준으로는 마나 장비가 딱히 없다는 전제하에, 1분에 포션값 4~500LP정도가 증발한다고 보면 되는 수준. 그러니까 5분이 넘어가면? ……간단한 산수지만, 딱히 계산하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보니 진짜… 파산 직행열차 수준이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떻게든 키엘의 소환 마력량을 줄여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나라고 주머니 속에 숨겨둔 최종병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겠냐는 말이지. 마력 증폭 장비를 모으고, 마나 효율 옵션 위주로 악세사리를 세팅하고. 심지어 싸구려 마력 회로 부적까지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그 모든 노력의 결과, 5분까지는 마나포션 없이도 이 녀석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5분이 넘으면 어떻게 되냐고? 마나포션 빨아야지 뭐. 아마 지금 기준으로는… 1분에 100LP정도 증발하려나? 역시나 미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너무 당연했다. ‘마력 소모량 절반 감소라니. 미쳤는데?’ 게다가 키엘의 모든 능력치 50% 강화에다가, 충성도도 20이나 증가했다. 탕후루를 그렇게 사다 바쳐도 50 이상으로는 절대 오르지 않던 충성도가……. [현재 충성도 : 67] 무려 20이나 한 번에 올라, 70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뽕맛?’ 물론 이 모든 혜택(?)이 영구효과는 아니다. 보스 한번 찾은 거로 이런 수준의 영구 보상이 떨어지길 바라면, 그거야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닐까? 다만 ‘고대 루멘 마력파동’이라는 환경조건에 노출되어 있는 한 이 버프 효과들은 지속해서 사용 가능할 듯 보였고. 그렇다는 얘기는……. ‘적어도 이 탑 5층에서는, 키엘을 꽤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는데.’ 게이트 폭주까지 남은 기간 동안, 내 사냥 계획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계기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 무릎을 꿇어라. 이 밀실에서 서 있을 자격이 있는 자는 왕뿐이다. 저 괴물같이 보이던 놈도, 조금은 귀여워진 느낌이랄까. 그륵- 드르륵-! 그런 의미에서. “키엘쓰.” “??” “잘 할 수 있지?” 오늘은 너만 믿는다 키엘아. 지난 시간 동안의 밥값…… 이제 슬슬 할 때가 되기는 했거든. “동의할 수 없다, 주인놈아.” “?” “난 아직 주인이 약속했던, GU편의점의 신상 탕후루를 맛보지 못했다.” 나른한 어투에 아직도 반쯤 감겨있는 저 눈을 보고 있자니 꿀밤부터 한 대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오늘 일 잘하면 줌.” “!!” “대신 저 무식한 놈도 못 잡으면… 알지?” 특별히 한번 참아주기로 했다. └ 그런데 방장. 탕후루는 대체 몇 개나 준 거임? └ 생각해보니, 주는 걸 딱히 본 적이 없는데. └ ㄹㅇㅋㅋ 키엘이 소환된 것도 ㅈㄴ오랜만에 봄;; 그래도… 평균 내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돈 사줬을걸요? 촬영 때문에 한동안 사줄 짬이 안 나긴 했으니까……. └ ;;; └ ㅁㅊㅋㅋ └ 그럼 지금까지 고작 몇만원 써놓고 밥값타령 한 거임? 어허. 고작이라뇨. 땅 파면 어디 만 원 나옵니까? └ 독하다 독해……. 어쨌든 성좌들의 비난은 뒤로 한 채, 드디어 보스전이 시작되었다. 키엘을 처음 보는 로웰과 노빈은 꽤 놀란 눈치였지만, 그런 대화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니까. “노빈. 가디언 맹약 깔아줘. 우선 나한테.” “알, 알겠어!” 노빈의 손끝에서 은백색 빛이 피어나고, 투명한 마력 회로가 내 발밑에 그물처럼 번졌다. 몸이 가벼워진다. 스탯 보정이 올라가는 게 체감으로 느껴지는 수준. “로웰.” “응!” 로웰이 이미 양손에 화염구를 띄운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고오오오-! -오래되긴 하였구나. 이 할버드에 피가 묻은 것이……. 황금왕의 거대한 할버드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 * * 노빈은 황당했다. ‘이건 또 뭐지?’ 그 이유는 바로, 지금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용족 소환수 때문. 콰아아아-! [파티원 ‘데이브’의 소환수 ‘키엘’이, ‘황금의 잔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파티원 ‘데이브’의 소환수 ‘키엘’이, ‘황금의 잔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랭커 소환술사들의 소환물이나 가능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는 이 ‘키엘’이라는 드래곤의 존재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데이브 이놈은 정체가 뭐야?’ 물론 이전에도 ‘바니’라는 소환수를 활용하는 건 여러 번 봤지만. 그리고 그 바니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훌륭한 소환수였지만. 이전까지는 데이브의 클래스가 소환술사라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소환술사라기엔 이건율이 보여주는 무기술과 전투 퍼포먼스가,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보통 소환술사는, 구조적으로 본신의 전투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니었나?’ 소환술사는 클래스의 모든 역량이 소환물의 강화에 집중되어 있기에, 소환술사 본신 자체가 약하다는 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부분이다. 게다가 노빈이 알기로 소환수를 컨트롤하는 데는, 상당한 정신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저 정도 되는 소환수를 전투에서 제대로 운용하려면, 소환술사의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이치라는 뜻이다. ‘대체…….’ 그런 맥락에서 바니를 써서 전투할 때만 해도,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바니는 대충 전장에 던져놓는 것(?) 외에, 딱히 컨트롤할 건덕지가 없는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콰쾅- 고오오오-! 지금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파티원 데이브는, 그런 상식을 가볍게 무시라도 하는 듯한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대가, 무려 80레벨이 넘는 보스급 몬스터인 ‘황금왕의 잔영’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빈! 로웰이 케어좀!” “알겠어!” 심지어 파티원의 상태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여유까지 있다. 이 괴물 같은 플레이어의 인지능력은, 솔직히 노빈 자신을 몇 명 합쳐놓은 것보다도 섬세하고 광범위했다. 그러니까 솔직한 감상을 얘기하면……. ‘지금 상태로도 이미, 어지간한 100레벨대 딜러들만큼 강할지도?’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이런 미친 생각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콰앙-! 황금왕의 잔영이 할버드를 내리찍었다. 충격파가 바닥을 갈랐다. 금박 타일 파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데이브는 옆으로 구르면서 시선을 고정했다. 타탓-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갑옷의 이음새. 그러니까 정확히… 순간적으로 노출된 황금왕의 약점. 피핑-! 어느새 데이브의 철궁에서는 두 발의 화살이 쏘아져 나가 정확히 황금왕의 옆구리를 꿰뚫었고. -커허억! 이어서 키엘의 입에서 쏘아진 불꽃이 정확히 그 지점을 한 번 더 타격했다. 퍼엉-!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건. [파티원 ‘데이브’의 소환수 ‘키엘’이, ‘황금의 잔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타아앗-! 날아오르는 키엘의 날갯죽지를 밟고 도약한 데이브의 무기가, 어느새 장검으로 스왑되어 있다는 부분이었다. 촤아악-! 소환수의 기동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속도를 가속한 직후. 그 관성의 힘을 담아 정확히 검을 찔러넣는 데이브의 참격. 쩌엉-! 황금왕의 금빛 갑옷이 쩌저적 갈라지며 금이 갔고. -이노옴!!! 황금왕이 반격으로 휘두른 묵직한 할버드의 궤적은,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떨어질 뿐이었다. 모든 전투의 과정은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파티원 ‘로웰’이, ‘체인 메그니 파이어’ 마법을 발동합니다.] 한 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갔던 것이다. 콰콰콰콰쾅-! 쏟아지는 화염 세례 속에서 어느새 소환수를 소환 해제한 데이브는, 이번엔 방패까지 들고 황금왕을 향해 달려드는 중이었다. 퍼억-! 이건율의 방패에 밀쳐진 황금왕의 가슴팍으로,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진 직후. 콰앙-! 중심을 잃어버린 황금왕의 약점에, 어느새 이건율의 검끝이 파고들었다. 우두둑-! 두 번째 타격이 같은 지점을 파고들자, 갑옷 파편이 떨어져 나가며 황금왕의 흉부 코어가 드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티원 ‘데이브’의 소환수 ‘키엘’이, ‘드래곤 피어’를 발동합니다!] 다시 소환된 데이브의 소환수는, 황금왕을 향해 어마어마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퍼펑- 퍼어어엉-! 폭발음과 함께 황금왕이 뒤로 밀려났고, 금빛 마력파동이 원형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어느새 황금왕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쿠르르르르- 바닥이 갈라졌다. 황금왕의 신형이 무릎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왕좌를 중심으로 사방의 벽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한다. -……크으으, 억. 황금빛 갑옷의 표면에서 마력이 실핏줄처럼 새어나가며 흩어지는 광경이, 꽤 장관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할버드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금속음을 울렸을 때. 까가강- [‘황금왕의 잔영’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천장에서 잔해가 우수수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났다. 미쳤다. 미쳤다고! └ ?????????? └ ??이거 진짜예요????? 그리고 다음 순간. 위이이이잉- 바닥 중앙에서 솟아오른 빛기둥이, 무너지는 보스룸 전체를 삼키듯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 주먹을 쥐었다. 침이 넘어갔다. 이 아름다운 빛기둥의 색상과 밀도……. ‘이거지!!!’ 이건 바로 꿈에서나 봤던, 신화등급 장비 아이템의 드랍 연출이었으니 말이다. └ 와 ㅅㅂㅅㅂㅅㅂ └ 빛기둥 색깔 예쁜거 보소 ㄷㄷ └ 아니; 황금왕 신화템 드랍률 개 쓰레긴데? └ 황금왕 드랍테이블에 신화등급 하나밖에 없지 않음? └ ㅇㅇ;;; └ 제발 귀속! 제발 귀속!! 어허. 그 불경한 입, 다물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형님들? 귀속이라니요. 어찌 그런 험한 말씀을……. └ 방장이 이렇게까지 행복한 걸 바란 적은 없었는데……. 조금도 행복하길 바란 적이 없었던 거 아니고요? “후욱.” 솔직히 운이 좋은 건 맞다. 성좌 형님들 얘기처럼, 황금왕의 드랍 테이블 안에 신화등급 장비는 딱 하나뿐이었고. 드랍률이 1%도 안 될 정도로 희박한 수준이 맞았으니까. 다만 이 황금왕이 이 형님들이 생각하는 허접한 황금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감안해줘야 한다. 내 클래스 메인 퀘스트 때문에 거의 15레벨 가깝게 강화된 황금왕이었고. 때문에 드랍테이블 또한 당연히 업그레이드됐을 터. 뭐, 그렇다 해서 운빨을 부정하겠다는 소리까진 아니었지만……. └ 제발 로웰이 먹어라!!! └ 제발!! 방장만 아니면 돼!!! 그런데 설마, 이게 다른 입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띠링- [기여도에 의거하여, 보스 처치 보상을 자동으로 분배합니다.] ['태고의 황금갑주(신화)(9T)' 장비가 '데이브(Dave)'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고대의 황금대검(전설)(7T)' 장비가 '세일라 노빈(Seila Novin)'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중략…… ['잊힌 연금술사의 부적(영웅)(5T)' 장비가 '엘리시아 로웰(Elicia Rowell)'플레이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캬. 이 맛에 라이카 하는 거 아니겠어? -태고의 황금갑주 어서오고! └ 시팔 ㅠㅠ └ 이게 저 입에……. 일단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정보창부터 열어보기로 했다. 아마 내 기억 속에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음미할 시간은 필요한 거 아니겠냔 말이지. 〓〓〓〓〓〓〓〓〓〓〓〓〓〓 [태고의 황금갑주] 분류 : 장비 — 판금갑주 레벨 제한 : 65 등급 : 신화 티어 : 9T 내구도 : 1800 / 1800 주 능력치 물리 방어력 +850 마법 방어력 +620 최대 생명력 +2800 - 옵션 모든 속성 저항 +25% 피격 시 마력 회복 +15 이동 속도 감소 면역 - 고유효과 황금왕의 위엄: 물리 방어력이 700 이상일 때, 받는 피해 12% 추가 감소 태고의 잔향: 전투 중 30초마다 파티원 전체에게 소량의 방어력 버프 부여 - 설명 황금 탑의 마지막 왕이 걸쳤던 의장용 갑주의 잔영이 응축된 장비입니다. 황금왕의 위엄이 깃들어 있어 착용자의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높여줍니다. 〓〓〓〓〓〓〓〓〓〓〓〓〓〓 물방 850에 마방 620. 생명력 2800. 속성 저항에 피격 시 마력 회복까지. └ 와 이거 시세 얼마쯤 하려나;; └ 옵도 상옵으로 붙었는데? 그런데 이그니스로부터 받은 염화의 심장과 비교하면, 성능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그거야 당연히 맞다. 피격 시 마력 회복 옵션이 조금 아깝긴 한데, 다른 스펙이 워낙 많이 차이 나기도 하고. 난 맞으면서 싸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 상관없겠지 ㅅㅂㅋㅋ └ 이 ㅅㄲ는 거적떼기 입고 있었어도, 무조건 팔아먹었을 ㅅㄲ인데ㅋㅋ 후후.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들! 이게 갑옷류라 무기에 비해 시세가 좀 쳐진다고 감안해도……. 최소 15만LP쯤은 나올 텐데요. “와, 축하해 데이브!” “우와! 9티어 신화!” 그런데 우리 파티원들의 반응은 왜 이렇게 맛이 없지? 표정부터 밋밋한 느낌이랄까. 저런 정도의 반응은 사실…… 내 기준에선 한 3티어 악세 한 개 주웠을 때 수준인데. “쓰읍.” 혹시 둘 다 재벌가 로열패밀리 출신이라도 되는 걸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긴 하다. 적어도 난 지금,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운이 좋았네.” 담담한 척, 표정 관리 한번 해주시고. └ 관리한 거 맞음? └ 광대가 내려오질 않는데? 그… 너무 많이 티 나나? “…….” 어쨌든 이제 이 기세를 몰아 히든던전까지 들어가면, 오늘은 정말 알찬 하루가 될 것 같다. “그러니 정비 끝나셨으면, 다들 움직여도 될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옆에서 로웰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 나도 좋은 거 먹긴 했는데…… 옵션이 너무 아쉽다.” 음? 그러고 보니 로웰이 먹은 게 뭐였지? 등급 티어만 보고, 뭔지는 확인을 안 했는데……. “왜? 언니 먹은 템 뭔데?” 로웰이 손을 뻗어, 아이템의 정보창을 파티원에게 공유해주었다. 띠링-! 그런데……. 〓〓〓〓〓〓〓〓〓〓〓〓〓〓 [잊힌 연금술사의 부적] 분류 : 장신구 — 부적 레벨 제한 : 50 등급 : 영웅 티어 : 5T 주 능력치 마력 +180 지능 +45 - 옵션 연성/연금 관련 스킬 효율 +20% 소환수 마력 소모량 60% 감소 마력 자연 회복 속도 +30% - 설명 황금 탑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이름 모를 연금술사의 유품입니다. 소환술과 연금술의 경계에서 연구를 거듭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미약한 마력이 맥동하고 있습니다. 〓〓〓〓〓〓〓〓〓〓〓〓〓〓 잠깐. 이거 내가… 무조건 써야 하는 템이잖아? * * * 아이템 루팅을 끝내고 정비를 마친 우리는, 왕좌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빛의 곡괭이가 또다시 손잡이째로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인벤토리에서 라피엘의 봉인 좌표 크리스탈을 꺼내 벽면에 대자…… 금빛 마법진이 벽면 위로 번져나갔다. 쿠우웅- 거대한 돌문이, 천천히 열린다. 문 너머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하향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클래스 메인 《봉인의 해제》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황금 탑 — 지하 구역」 히든 던전 입장 허가를 획득하였습니다.] [SP +1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 와 ㅋㅋ진짜 히든던전이 있었네; └ 황금탑 히든트리거는 진짜 처음 보는데 ㄷㄷ 정말 나도 완전히 처음 접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띠링-! [‘빛바랜 금전의 기록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은퇴한 철혈의 교관’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황혼 침묵의 중재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3회차 무림고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니 이렇게 성좌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도 당연하다. 왜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모르지만, 라이카의 숨겨진 정보에 상당히 민감한 형님들이거든. 그러니까 2~3천 명 정도가 내가 뭘 하든 내 방송에 거의 상주하는 인원이라면, 이렇게 히든피스 관련된 플레이를 할 때는 거의 두 배 가깝게 성좌들이 늘어난다. 히든피스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할 때, 나처럼 스트리밍을 켜는 케이스가 거의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들었다. [ON Air : ☺ 5619] 캬- 랭커들도 실시간으로 만 명 넘는 경우는 잘 없다고 하던데. 나도 어쩌면 이제 대기업에 가까워진 거 아닐까? └ ㅋㅋ 맞긴 해 ㅋㅋㅋ └ 솔직히 5천부턴 대기업 취급 해줄 만 하지 ㅇㅇ └ 실시간 만명 넘는 건, 랭커 중에서도 인지도 높은 플레이어들임 └ 나만의 작은 데이브가 언제 이렇게……. 물론 나도, 민감한 히든피스와 관련된 플레이를 할 때에는 당연히 스트리밍을 켜지 않는다. 하지만 이전까지 내가 공개했던 히든피스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희소한 것들도 많았지만 가치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히든피스였고. 때문에 방송에 성좌를 끌어모으는 용도로 공개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으로 공개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 황금 탑의 지하 던전이라는 히든 던전 정보 또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수준의 히든피스일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80레벨 대 히든던전이면, 가치가 상당하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완전히 노다지인 셈이다. 왜냐고? 어차피 여긴, 세라피스트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거든. 〓〓〓〓〓〓〓〓〓〓〓〓〓〓 [히든 던전] 알테리온의 황금 탑 — 지하 구역 입장 조건 : ‘봉인의 해제’ 퀘스트 클리어 (빛의 연금사 전용) 층 구성 : 지하 1층 ~ 지하 5층 권장 레벨 : 65 ~ ??? ……후략…… 〓〓〓〓〓〓〓〓〓〓〓〓〓〓 그러니까 공개해도 상관 없으면서 히든피스로서의 가치는 상당한. 그래서 수많은 성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최고의 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성좌들에게 던전 정보를 따로 보여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 방장, 오늘 여기까진 다 진행 하고 퇴근하는거지? 물론입니다, 형님들! └ 캬, 칼퇴머신 대이브;; 성장했누 ㅋㅋㅋ └ 가즈아!!! 후후. 잔뜩 신들이 나신 것 같은데. 설마 성좌 형님들…… 나중에 통수 맞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 *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깡- 깡- 깡- 지하 1층, 황금의 잔해. 이름 그대로였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간에, 고대 황금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토대, 갈라진 포석, 벽면에 붙어 있는 변색된 금박 장식들. 오래 봉인되어 있던 탓인지, 공기 자체가 무겁고 탁했다. 그리고 문제는. 이 탁한 공기 속에서, 길이 완전히 막혀 있다는 거였다. 깡- 까가강-! 그래서 나는 지금, 곡괭이질을 쉴 새 없이 하고 있었다. 파밍을 위한 곡괭이질이 아니라, 길을 뚫기 위한 곡괭이질인 것이다. 그런데. “크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게 뭐냐고? [채광 성공!] [수준 높은 채광기술로, 광물의 품질이 상승합니다.] [‘황금빛 루멘 원석’을 획득하였습니다.]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이런 게 툭툭 떨어진다는 거다. 황금빛 루멘 원석. 지상에서 캤던 루멘 원석보다 한 단계 상위의 광물. 그리고 이 광물들이……. “와아! 데이브 최고!!!”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 어이, 방장 ㅋㅋ 표정 좀 펴지 그래?ㅋㅋㅋㅋㅋ └ 거, 고작 80LP짜리 잡템 몇 개로 너무 서운하게 구는 거 아니오 ㅋㅋㅋ 고작? 80LP?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들……. 벌써 30개도 넘게 캔 것 같은데요……. └ 아니 ㅅㅂㅋㅋㅋㅋ 너 거래한거잖앜ㅋㅋㅋㅋ └ 사람이 이렇게 쪼잔할 수도 있구나 ㅇㅇ └ 로웰한테 받은 악세, 걍 대충 팔아도 3000LP는 되는 거 아님? └ 솔직히 가치로만 보면 5천쯤 보는게 맞는데, 수요가 없어서 3천에도 안 팔림ㅋㅋ └ 그래도 방장한텐 1만LP도 넘는 가치 아닌가 ㅋㅋㅋ └ 그러니까 이 ㅅㄲ가 쥰내 쪼잔하다는 거임 ㅋㅋㅋ 그리고 제 표정이 어때서요? 저 지금 기분 상당히 좋습니다만? └ ㅈㄹㄴㄴㅋㅋㅋ └ 입꼬리부터가 축 쳐져 있는데,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고 ㅋㅋ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이거? 연금술사의 부적? -우와. 그러니까 데이브가 세라피스트라는 거지? -잘됐다! 그럼 데이브 가져. 그때만 해도 양심에 찔릴 정도였던 수준의……. -아, 아니. 그래도 이런 걸 그냥 받는 건 좀……. 내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유리한 조건이었던 로웰과의 거래. -정 그러면, 오늘 던전에서 채굴한 루멘 원석들을 나한테 넘기던가. -그거면 돼? 이거 다 합해봐야 300LP도 안 될 텐데……. 그 거래(?)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럼 지금부터 캐는 것도 더해서 주면 되지! -난 진짜 이것만 있으면 돼. 어차피 루멘 입자 연구 때문에 여기 온 거라니까? 오늘 아무리 많은 루멘 원석을 캔다 할지라도, 1000LP 가치를 넘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처음 거래(?)를 할 때만 해도 너무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하층에서 황금 원석이 쏟아져 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깡- [채광 성공!] [‘황금빛 루멘 원석’을 획득하였습니다.] ‘황금 원석이 가치에 비해서 희소성 진짜 높은 광물인데……. 이렇게 쏟아지는 게 말이 되나?’ 물론 지하 2층도 이런 식일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하퀘까지 다 클리어하면, 최소 50개는 넘게 모일 것 같다. 그러니까 그냥 준다고 할 때 받아먹었으면……. “크흠.” 그건 너무 나쁜 놈이겠지? └ 방장쉑;; 인성 무슨일;; └ 근데; 그쯤 모아봐야 똔똔아님? └ 맞음ㅋㅋㅋ 황금원석 50개에, 지상층에서 모은거 다 합하면 대충 5천LP쯤 될듯ㅋㅋㅋ 그래.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옵션이니까. 경매장에 올라왔으면, 더 비싸게도 무조건 사긴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더 대범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뭔가 자꾸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형님들. └ ??? -제가 혹시나 지금 기분이 상해 보인다면, 이 귀한 물건을 너무 싸게 가져온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는… 그런 느낌인……. └ 예??? └ ㅖㅔ????? └ 이제 입만 벌리면 구라……. 솔직히 개이득 본 게 맞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한 번 더 되뇌면서……. 깡- 까강-! 다시 열심히 곡괭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따앙-! 그리고 그렇게… 한 20분 정도가 더 지났을까? 빠가각-! 벽면 일부가 크게 갈라지며, 뒤편에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잔해 사이로 열린 좁은 통로. 그리고 그 너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후욱.” 바람에 실려 온 건, 희미한 푸른빛이었다. 지상의 황금빛과는 완전히 다른 계열의 광원. 그리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아주 미세한…… 기계 구동음 같은 것. 나는 통로 앞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 띠링-! [‘숨겨진 계단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지하 2층으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지하 2층으로 연결된 입구가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띠링-! [클래스 히든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내심 기다렸던, 퀘스트 정보창이 주르륵 하고 눈앞에 떠올랐다. 〓〓〓〓〓〓〓〓〓〓〓〓〓〓 라피엘의 기억-B 《빛의 잔향을 쫓아서》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난이도 : S 라피엘이 남긴 7개의 ‘기억의 표지’를 수집하고, 황금 탑의 망령이 된 ‘변질된 드라키엘’을 안식에 들게 하십시오. 이를 통해 진정한 연성의 전당으로 향하는 ‘빛의 열쇠’를 주조할 수 있습니다. - 조건: 표지 7개 수집 / 변질된 드라키엘 처치 / 연성대에서 빛의 열쇠 주조 - 보상: [전설] 수리된 라피엘의 깃펜, SP +1 〓〓〓〓〓〓〓〓〓〓〓〓〓〓 * * * 머리가 어지럽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으음.’ 분명 방금 전, 지하 2층으로 입장하는 입구에 발을 딛었던 것 같은데……. [스트리밍 연결이 해제됩니다.] 갑자기 공간이 단절되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머릿속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건.’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역시, 클래스 메인 퀘스트라 이건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복도. 연성대 위에서 은은하게 맥동하는, 수십 개의 에고들. 그리고 이 화려한 공간 곳곳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수많은 세라피스트들. 분명히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풍경들. 그러니까 이곳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라피엘의 기억은 알고 있었다. ‘여긴… 고대의 세라피스트 아카데미겠군.’ 그래. 틀림없었다. 라피엘의 기억에 빙의해서 구경했었던. 젊은 시절 라피엘이 다니던, 바로 그 아카데미. 내 시야가 천천히 움직였다. 말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여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난 이번에도, 라피엘의 몸에 빙의한 듯싶었다. 라피엘의 눈이 돌아가는 대로, 그저 함께 보고 있으면서. 라피엘의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은, 지난 빙의와 조금 달랐지만. 그런데……. ‘뭔가 빙의 시점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여유롭게 라피엘의 시야를 관조하던 다는,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분명 과거 빙의 시점의 라피엘은 아카데미의 생도였다. 풋풋하고, 어리고, 마르텔 학장에게 꾸지람을 듣던. 그런데 지금 이 시야의 주인은, 그런 생도가 아니었다. 저벅- 저벅- 라피엘의 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세라피스트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례가 아니라, 존경. 자연스러운 경의. 그러니까……. ‘……시간이 꽤 많이 흘렀구나.’ 생도 시절로부터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라피엘의 손은 더 넓어졌고, 시야는 더 높아졌고. 무엇보다, 아카데미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찬란하지만…… 어딘가, 그늘이 져 있었다. “라피엘.” 라피엘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야에, 백발이 성성해진 노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기억해 냈다. ‘마르텔 학장.’ 묘하게 그리움의 감정, 그리고 깊은 경외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아마도 라피엘이 가진 기억의 편린으로부터 느껴지는 그런 가짜 감정일 터였다. “최근 연성동(硏成棟) 서쪽의 움직임을 알고 있느냐?” 마르텔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카데미 전체를 빛으로 물들이는 이 찬란한 공간 속에서, 그의 얼굴만 그림자에 가려진 듯. 그에 내 입이 열렸다. 아니, 라피엘의 입이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하지만 아직 증거가…….” “증거를 찾으려다 그들이 먼저 ‘성공’해버리면.” 마른침을 삼킨 마르텔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나직이 읊조렸다. “그때는 늦는다.” “…….” 잠깐 침묵이 이어졌고. 마르텔이 한 발 다가왔다.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에고에 자기복제(自己複製)의 술식을 심으려는 자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도 모를 리 없겠지.” 자기복제라. 그게 뭐지? 아직까지 전혀 감도 오지 않지만… 뭔가 흥미가 생기는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라피엘의 기억 속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지식이었다. [에고의 자기복제야말로, 진정한 창조연성의 시작이다.] [그러니 이것은… 당연히 금기시되어야 한다.] 창조라. 이게 세라피스트들이 몰락했던, 근본적인 이유 아니었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학장이 정확히 같은 맥락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다, 라피엘.” 마르텔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태양이 황금빛 탑 위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태양이 그것을 용서하리라 생각하느냐.” 라피엘이 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하지 않았다. 마르텔의 경고가 끝나고. 라피엘이 몸을 돌려 복도를 걸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시야에 갇힌 채, 함께 걷고 있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깡- 까강-! 노빈은 팔짱을 낀 채, 전방에서 곡괭이를 내려치는 데이브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해 벽이 갈라진다. 정확히, 균열이 가장 얇은 지점만 골라서. 한 타격에 한 줄기씩, 금빛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깡-! 또 한 번. 이번에도 어김없이, 벽면에서 황금빛 광물이 쏟아져 나왔다. [파티원 ‘데이브’가 채광에 성공하였습니다!] [파티원 ‘데이브’가 ‘황금빛 루멘 원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아니, 곡괭이질은 또 왜 이렇게 잘해?’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쩍쩍 갈라지는 광맥들을 보며, 노빈은 속으로 기가 차는 느낌이었다. 곡괭이질이 원래, 이렇게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그녀의 괴상한 파티원이 하는 것처럼, 곡괭이질 몇 번으로 길이 뚫리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게다가. “와아! 또 나왔다!” 그냥 뚫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광맥에서 뽑아낼 수 있는 광물은, 단 하나도 손상시키는 법이 없다. 퀘스트 클리어가 급한 지금 상황에서는 적당히 채광을 포기하고 길을 뚫는 데 집중할 법도 한데……. ‘표정이 엄청나게 진지하네.’ 진중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면서, 단 하나의 광물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다. 아마도 로웰에게 챙겨주기로 한 광물 때문에, 저렇게 더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까지 노력하니까… 못하는 게 없는 수준의 사기 플레이어가 된 건가?’ 로웰이 반짝이는 눈으로 달려가 원석을 주워 담았다. 데이브는 그걸 한 번 흘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곡괭이를 들어 올렸다. 표정은 이번에도, 묘하게 심각했고. 노빈은 이 상황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채광하는 건… 아마 저 새하얀 곡괭이 때문이겠지?’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브라는 인재의 가치는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는 것. 물론 가끔은 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같지만……. “갑자기 왜 멍때리는 거야?” “내가 멍때렸어?” “응. 갑자기 멈추더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데?” “한 10초?” “어? 아, 아니야. 내려가자.” 이 정도 하자(?)야, 데이브가 가진 것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고 할 수 있었다. ‘블랙크라운에 데려가면… 2차 전직만 시키고 곧바로 최상위 공대에 넣어도 될 수준이니까.’ 마스터가 데이브의 활약을 처음 직관하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 해도 웃음이 실실 새어나온다. 그 깐깐한 여자도 데이브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입이 쩍 벌어진 것도 모른 채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았으니까. 곧 그 광경을 보게 될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가 들썩거려진다. 데이브가 블랙크라운 가입을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고? ‘그럴 리는 없고.’ 그건 말이 안 된다. 데이브가 아무리 한국에서 최상위 길드, 이를테면 실버 나이츠 같은 곳에 이미 소속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무려 ‘블랙 크라운’이었으니까. 세계 랭크 기준으로 1, 2위를 다투는 블랙 크라운의 영입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지구상에 몇 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잠시 이런 상념들을 하고 있는데……. “오!” 언제 움직였는지 폐허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온 데이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으로 새어 들어왔다. “찾았다…!” * * * 라피엘의 기억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분주하게 이동하는 듯하더니, 연성동의 서쪽에서 의문의 연금술사들과 마주치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으니까. 다음의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기억의 표지’가 부족합니다.] [더 많은 기억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표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딱히 당황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본격적인 히든 에피소드는 이제 시작이었고. 아마도 이 지하 던전을 공략해 내려가면서, 스토리가 계속 이어질 모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흣차-!” 나는 아주 부지런히, ‘기억의 표지’라는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잊혀진 아카데미의 폐허’에서, ‘기억의 표지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잊혀진 아카데미의 폐허’에서, ‘기억의 표지 조각’을…….] ……중략…… 강의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닥 아래. 무너진 서가 뒤편의 벽 틈. 반쯤 기울어진 연성대 잔해 밑바닥 등. 퀘스트 아이템을 찾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 히든던전이야 나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이런 퀘스트 패턴이야 뻔했으니 말이다. “노빈, 왼쪽 케어.” “알겠어.” “로웰, 그 뒤쪽 하나 좀 부탁해. 다 태워 먹지 말고!” “응! 알겠어!”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중간중간 처리해 줘야 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지하 2층이어서 그런가? 오히려 몬스터들의 전투력은, 5층보다 조금 약한 수준이었으니까. 핑- 피피핑-! 퍼어엉-!! [조각을 전부 발견하여, 기억의 표지가 완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수집한 기억의 표지 (5/7)] 그러니까 지하 2층부터 3층까지. 우리가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주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기기긱-! [‘무너진 실험실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하 4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 4층으로 가는 입구에 도달했을 때. “……!” 가늘게 진동하는 공기를 느낀 난,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부터가… 진짜인 것 같은데.’ 시커먼 어둠에 잠긴 아래에서. 정확히는, 하층부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쪽에서. 무겁고 어두운 마력 파동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기운. 그리고 노빈 또한, 그 마력의 파동을 느낀 모양이었다. “데이브. 아래에 뭔가 있어.” 잠시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끌어 올린 뒤, 천천히 아래쪽으로 걸음을 딛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잊혀진 실험체의 망령’을 발견하였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내 시야가 또다시 암전되었다. * * * 눈을 떴다. 그리고 역시나 익숙한 두통이 올라온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라피엘의 기억에 이미 한 차례 빙의하면서, 몸이 적응을 어느 정도 한 느낌이랄까? ‘…….’ 하얀빛으로 가득 찼던 시야가 돌아오자, 주변의 사물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연성동이 아니었다. 지하. 비밀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 천장이 낮고, 벽면을 따라 복잡한 마력 회로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거대한 연성대가 있었다. ‘으음.’ 이번에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시야. 아니, 라피엘의 시야가 강제로 천천히 돌아갔다. 작업실 안에는 다섯, 아니 여섯 명의 세라피스트들이 연성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모두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들이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마르텔이 경고했던…. ‘이단파.’ 라피엘의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있는 존재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치이이익- 라피엘은 기둥 뒤에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라피엘의 눈을 통해, 이단파의 실험을 목격하는 중인 거다. [이제 끝이 보이는 듯 하군.] [좋아. 조금만 더 집중하자고.] 연성대 위에서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금빛과 검은 기운이 뒤엉키며.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나도 아주 잘 아는 감각이었다. ‘에고(Ego)다. 저게 바로 고대의 연성술…….’ 뭔가 아는 게 나와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술식의 디테일한 모양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떤 종류의 마력이 어던 형태로 움직이는지. 러프한 느낌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만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잠시 후. 나는 이들이 연성하려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용족……?’ 그들이 그려나가는 술식. 그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연성 술식과 너무도 흡사했으니 말이었다. ‘어쩌면 드라키엘의 연성식일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잠시 후. 내 생각은 한번 더 바뀔 수밖에 없었다. 우웅- 내가 키엘이를 연성할 때 완성했던 술식과 거의 비슷한 느낌의 술식이라고 생각했건만. 고오오오-! 갑자기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장내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두 집중해!] 드르르르륵- 게다가 술식을 그리는 인원이 한 명인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다섯 명이 각각의 위치에서 술식을 그려나가면서, 거대한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술식을 그릴 수도 있다고?’ 그리고 이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점점 더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멀어서 희미하게 보이던 술식의 구조가 점점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두루뭉술하게 묶여 보이던 마력의 파동도, 하나씩 세밀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라피엘의 집중력이 높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 세라피스트로서의 감각이 각성해서 그런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띠링-! 다음 순간……. [최초로 ‘창조의 연성술’을 목격하였습니다.] [‘에고(Ego) 연성술’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억겁의 세월 동안에도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에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으니 말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원래, 이런 식으로도 지식이 강제로 주입될 수 있는 거였나? 이건 시스템도 아니었다. 정말 오로지, 라피엘 지식과 인지능력을 통해… 강제로 주입되는 지식들. 만약 이걸 전부 다 이해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의 세라피스트라는 클래스는 지금보다 한 차원 다른 수준의 클래스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까지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금빛 파편처럼 느껴지는 지식의 편린들이 뒤엉킨 채로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데, 그 사이로 까만 노이즈들이 군데군데 끼어 있었으니까. 지이잉- 머릿속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온갖 술식의 잔상들이 뇌 속을 헤집는다. 온갖 마나 회로의 설계도. 수많은 연금 지식들. ‘대체 이게…….’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채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거대한 지식의 폭포 밑에 선 나는, 물줄기를 한 컵에 담으려는 느낌으로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결과……. ‘……됐다.’ 완전하지 않은, 빈 구멍이 너무 많은 지식이었지만.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으하하하하!] [됐다! 됐다고!!] 그런데 다음 순간. 우우우우웅- 뭔가…… 거대한 진동이 석실 내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 처음엔 머릿속이 흔들리는 줄 알았다. 지식이 밀려드는 충격의 여파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쿠우웅-!! 라피엘의 기억 속, 이단파의 비밀 작업실. 이 공간 자체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쩌적- 쩌어억-!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고. 벽면을 따라 새겨져 있던 마력 회로들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성대 위에서 솟아오르는 형체가 보였다. 검은 기운과 금빛이 뒤엉킨, 거대한 실루엣. 처음엔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이 두 날개를 펼치는 순간. 나는 저게 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드라키엘……!’ 내가 키엘이를 연성할 때와 거의 흡사한 마력의 파동. 하지만 규모가 달랐다. 여섯 명의 세라피스트가 동시에 그려낸 합동 술식. 그 끝에서 태어난 존재는…… 내가 만든 키엘이와는 비교도 안 됐다. 차원이 달랐으니까. 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이 눈을 떴다. 동시에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력의 파동. 콰아아오오-!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드래곤 피어가, 공간을 가르며 퍼져 나갔다. 쿠우우우우-!! 기억 속 공간이 뿌리째 흔들렸다. 벽면의 마력 회로가 산산조각나기 시작했고. 천장에 균열이 번지면서, 비밀 작업실 전체가 무너져 내리려는 것처럼 요동쳤다. [잠깐!!] [통제가…!] [통제가 안 된다!] [마력을 집중해!]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야가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 하얗게. 그리고 까맣게. 마치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마냥 시야가 점멸하였고,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니까 귓전으로 흘러들어온 노빈의 목소리가, 마치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내 정신을 붙잡은 느낌이었다. “데이브.” “괜찮아?” “정신이 들어?” “…….” 축축한 공기. 돌벽 특유의 냄새. “후우.”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구구구궁- ‘뭐지? 빙의에선 깨어난 거 아니었나?’ 우리가 서 있던 황금탑의 지하 석실도, 어쩐 일인지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이건…….” 노빈이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로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해맑기만 했던 얼굴 위로 긴장이 번져 있었고. 한 손이 무의식적으로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래에서…… 뭔가.” 노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쿠쿵-!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잠들어있던 변질된 드라키엘의 원혼이 깨어납니다.] [규격 외 조건이 감지되었습니다.] [당신이 보유한 피조물 '드라키엘(Drakiel)'은, 본 퀘스트가 설계된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상위 개체입니다.] [퀘스트 《빛의 잔향을 쫓아서》의 내용이 재조정됩니다.] 내 눈앞에,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 라피엘의 기억-B (재조정) 《잔향이 아닌, 포효》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 상위 난이도 : S → SS 기존 조건에 추가하여: 당신의 드라키엘은 변질된 원본과 동일한 혈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잔류 에고를 당신의 드라키엘에게 '흡수'시키십시오. 드라키엘이 자신의 원본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완전한 존재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기존 조건: 표지 7개 수집 / 변질된 드라키엘 처치 / 빛의 열쇠 주조 - 추가 조건: 변질된 드라키엘의 잔류 에고를 키엘에게 흡수 - 보상 변경: [전설] 수리된 라피엘의 깃펜, SP +1 [추가] 키엘 진화 재료 '원본의 기억(Original's Memory)' 획득 〓〓〓〓〓〓〓〓〓〓〓〓〓〓 * * * ‘라이카 주식회사’의 3층 대회의실. 반투명한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막대 그래프가 떠 있었다. 그래프의 제목은 [지구 서버 — 당분기 LP 채굴량 추이]. 요정 GM 세리아는, 그 앞에 빼곡히 앉아 있는 요정들 사이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려 애쓰는 중이었다. ‘으… 제발 탈 없이 지나가야 하는데.’ [지구 서버 통합 실적 보고회] 분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는, 라이카 주식회사의 관리자 요정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 중 하나였다. 아니, 정확히는……. 실적이 좋은 몇몇을 제외한, 거의 모든 요정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이라고 해야 할까? 이유는 간단했다. “다음, 11번 구역 담당 GM 리엔. 당월 누적 LP 채굴량 389만, 성좌 후원 유도율 18.7%, 하이라이트 콘텐츠 3건 제출.” 여기선 모든 게 숫자로 치환되니까. ‘389만이라. 적지 않은데.’ 누군가가 피 토하며 벌어들인 가치가, 여기선 그냥 막대 하나의 높낮이인 거다. ‘……뭐,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세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리아 본인은, 저 비판받은 동료의 것보다도 훨씬 초라한 성적을 보고해야 했으니까. 그나마 마지막에 용사 하나를 발굴해서 망정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이번 기간 실적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뻔했던 것이다. “후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또 속에서 열불이 난다. ‘동기화 오류……. 그것만 아니었어도!’ 만약 동기화 오류 없이 이건율을 용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리아 본인이었을 텐데. “세리아. 괜찮아?” “어, 으응.” “긴장 풀어. 잘 넘어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었고, 때문에 세리아는 그저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곧 다가올 자신의 차례에, 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음, 성좌 시청률 상위 5개 채널 하이라이트 브리핑에 들어가겠습니다.” 발표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스크린 위로 짧은 영상 클립이 재생되었고, 몇몇 요정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다. 저 영상 속에서 피 튀기며 싸우고 있는 용사가, 이 회의실에선 ‘시청률 상위 콘텐츠’가 되는 셈이다. ‘…….’ 그리고 이렇게 최상위권들의 축제가 지나간 뒤. “마지막으로, 미배치 GM들의 분기 실적 보고 및 인사 건에 대해 안내드리겠습니다.” 세리아의 순서는,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 ‘미배치 GM이라니.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미배치. 그 단어가 귀에 꽂혔다. 주기적으로 성과 최하위 요정들에게는 용사 영입 권한이 제한되는데, 세리아는 입사 이래 처음으로 미배치 GM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인 건. “베타 테스트 운영 기간 중 차원 에너지 과다 소모에 대한 건으로, GM 세리아에게 감봉 2개월 처분을 통보합니다.” “…… 네.” 최악은 면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이의 없다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최악은… 감사팀이 그녀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이었으니까. ‘후우. 그래도 아직 감사팀이 찾진 못한 모양이야.’ 나머지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세리아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단 이대로 회의가 끝나기만 하면,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으니까. “자, 이것으로, 통합 실적 보고회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로 나온 세리아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감봉이라.’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떨리던 손끝도 가라앉았다. 뼈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저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임원들이……. 자신이 버린 용사 후보가…… 시스템 보정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채로 데스 나이트를 잡아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면. ‘십년감수했네.’ 그건 얄짤없는 해고처분일 터였다. “세리아~?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발표 순서가 한참 앞이었던 동기 요정 미라엘이, 회의실에서 나와 다가오는 중이었다. 손에는 차가운 음료 두 캔이 들려 있었다. “어. 응…… 감봉이 좀 아프긴 하지만. 뭐.” 미라엘이 음료 하나를 건네며 옆에 섰다. 이 요정은 세리아와 입사 동기였는데, 세리아와 친분이 있는 동기들 중 가장 실적이 좋은 친구였다. “미배치 기간 동안 차라리 푹 쉬는 것도 괜찮을 거야, 세리아. 최근에 고생 많이 했었잖아?” 이미 세리아보다 훨씬 일찍 승진해서, 직책상으로는 상급자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챙겨주는 착한 녀석. “근데 오늘 보고회 봤어? 37번 구역 리포트.” “응, 봤어.” “지구 서버 데이터 흐름이 좀 수상하더라. 게이트 발생 빈도가 가속되고 있다는 거잖아.” 하지만 언제까지 이 녀석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리아는 원래부터, 야망 있는(?) 요정이었으니까. “뭐, 시기는 다들 예상하고 있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 의미에서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1페이즈 종말. 이제 올 때가 되긴 했지, 뭐.” 에피소드가 종료되고, 대규모 업데이트가 시작되면. 그러니까…… 지구 서버의 플레이어들에게 접근이 가능해지게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찾으면 돼.’ 가장 먼저 이건율을 찾아, 용사 계약을 성사시키리라. 징계로 인해 미배치 요정이 되었지만, 이미 컨택했던 용사 후보들과 계약하는 건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미리엘의 실적을 단번에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기분이 조금 나아진 세리아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이건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다. 특별한 조건이 충족되면서, 퀘스트의 내용이 재조정되는 것 말이다. ‘베타 때도…… 10회차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수준쯤 되려나?’ 그런데 심지어 대상 퀘스트가, 평범한 퀘스트도 아니고 클래스 메인. 게다가 히든 퀘스트다. 2차 전직으로 연계될 확률이… 상당히 높은, 그런 히든 퀘스트. ‘아무래도, 대박 난 것 같지?’ 그래서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상당히 싱글벙글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돈이 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은 건, 정말 가끔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 ㅁㅊ;; 퀘스트 재조정은 또 뭔데??? └ 나 이런 거 처음 봐;;;;; └ ㅅㅂㅅㅂ 온 우주의 기운이 방장 앞으로 모이는 듯?;;; └ 형들 퀘스트 재조정이 대체 뭔데요? └ 히든 퀘스트랑 비슷한 건데, 더 뜨기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면 됨. └ 그럼 방장은 히든퀘스트에 다시 히든 퀘스트가 뜬 거임? └ ㅇㅇ;; 걍 미쳤음. └ 캬 ㅋㅋㅋㅋㅋ 보상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감도 안 오는 수준이네 ㄷㄷㄷ └ 물론 클리어가 가능해야 의미가 있겠지만 ㅋ └ ㄹㅇㅋㅋㅋ 해제되었던 스트리밍도 다시 연결되었고, 형님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퀘스트를 중도 하차한다는 경우의 수는 아예 없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황금 탑’ 밖으로 이동 시, 모든 연계 퀘스가 처음부터 다시 진행됩니다.] 황금탑에 재입장한다면, 퀘스트 재조정이 또 다시 발동한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크르르르- 물론 지금 우리의 눈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그르렁거리고 있는……. 저 거대한 괴수를 처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변질된 드라키엘 – Lv90]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불가능의 영역도 결코 아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진짜… 해보려는 거야?” 노빈의 물음에,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거, 90레벨대 용족 보스급 몬스터인 건 알고 있는 거지?” “물-론.” “미쳤네, 미쳤어.” 말은 미쳤다고 하지만 딱히 두려움 같은 게 보이지 않는 노빈의 표정을 보니, 조금 더 확신이 든다. ‘노빈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되겠는걸.’ 이 녀석. 단순히 2차 전직 플레이어를 넘어, 어쩌면 80레벨대 서포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80레벨 이상. 90레벨에 가까운 고급 인재일 것 같았다. └ 와 ㅋㅋㅋ 보스 생긴거 살벌하누 ㅋㅋㅋㅋㅋ └ 이거 진짜 싸울 거임??;; └ 뭔ㅋㅋㅋ 50레벨 대 파티가 90레벨 보스는 씹ㅋㅋㅋ 그런 의미에서 형님들. 오랜만에 수금 한번 들어가야겠죠? 띠링-! [‘스트리머 데이브’가 실시간 배팅을 생성했습니다!] └ 오? └ 캬 ㅋㅋㅋ 배팅 한번 나올 때 되긴 했어 ㅋㅋ └ ㄹㅇㅋㅋ └ ㅈㄴ오랜만이네; 진짜 오랜만이긴 하다. 그동안은 기회가 거의 없었어서 말이지. └ 오늘은…… 무조건 맞춘다 ㄹㅇ └ 그런데 배팅 시스템 언제 세팅했냐 이 ㅅㄲ는; └ 그러게 ㅋㅋ 퀘 진행하느라 정신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거야 뭐, 진작부터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스트리머가 배팅 조건을 생성합니다.] [조건 : 변질된 드라키엘 처치 — 성공 / 실패] 하지만 오늘 배팅은, 아마 크게 벌기 힘들 거다. 어쩌면 내 선택이 정배가 될 수도 있고……. └ 방장 뭐 선택할 건데? 그야 당연히, 처치 성공이죠? 뭐 그런 걸 물어보시는……. └ 그런데 정배를 예상한다고?ㅋㅋㅋ └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거 아님?ㅇㅇ 그럼 형님들은… 이걸 실패에 거시겠다고요? [성좌, ‘균형의 심판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습니다.] 오, 처음 보는 졸업성좌까지? 판이 슬슬 커지는걸? [성좌, ‘균형의 심판자’가, 스트리머 ‘데이브’를 응원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균형의 심판자’가, ‘처치 실패’에 배팅하겠다고 말합니다.] 아니, 응원하시면 성공에 배팅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성좌 ‘균형의 심판자’가, ‘이건 후원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뭔, 그런 궤변을……. └ 아 ㅋㅋㅋ 방장이 성공할 걸 예상하지만, 배팅은 역배라고 ㅋㅋㅋ └ 방장 주머니에 돈 꽂아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임? 그런 거면 배팅이 아니라, 미션을 걸어 주시면……. └ 흠. 오늘은 역배에 한 번 걸어볼까? 역배라면, 형님도 실패에 거시는 거죠? └ ㅈㄹㅋㅋ 당연히 성공이 역배지. └ 역배충들 잘 생각해라 ㅋㅋ └ 지난번에 역배 터졌으니까, 이번엔 정배 차례긴 해 ㅋㅋㅋ 오랜만의 배팅 오픈에, 성좌들은 상당히 신난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잠시 후. 고작 2분 정도가 지난 시점에……. [현재 배당률: 성공 20.10배 / 실패 1.05배] [현재 총 배당금 : 96,817 LP] 무려 5만 LP가 넘는 거액이 순식간에 모여버린 것이다. ‘캬……. 이게 돈 복사의 맛?’ └ 뭔데 ㅋㅋ 도박꾼들이 5퍼나 된다고?ㅋㅋ └ 정신차려라 역배충들아 ㅋㅋㅋ └ 확정수익 5%나 달달하게 먹으라 이말이야 ㅋㅋ └ 복권보단 확률 높잖아? 한잔 해 ㅋㅋㅋ 통 크게 2500LP 건 보람이 있다. 이대로 미션만 클리어하면, 5만LP가 고대로 내 주머니에 들어올 거다. [배팅이 종료됩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이 배팅을 실패할 자신이 별로 없다. 갑자기 노빈이 파업한다거나 하는, 자연재해급 변수가 발생하는 게 아닌 이상 말이지. “노빈.” “응.” “이번엔 내 소환수 위주로 캐어 좀 부탁해.” “키엘이 말하는 거지?” “맞아.” 별다른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빈과. “로웰이는, 최대한 안전한 위치 확보하면서, 최소한의 딜만 해 주면 돼.” “알겠어! 다 태워버리면 되는 거지?!” “…….” 아주 신나게 지팡이를 꺼내 드는 로웰. 그런 우리를 보며. 크르르르-! 변질된 드라키엘이 입을 벌렸다. [모조리…… 심연으로…….] 검은 마력이 뭉쳐지는 것이 보였고, 그것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쿠와아앙-!! * * * 자신만만하게 보스 레이드를 시작했지만. 솔직히 쉬울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우리 파티원이 모두 전력을 다한다면. 그리고 내가 단 한 차례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잡을 만한 보스라는 정도의 계산만 명확하게 섰던 것일 뿐이었다. “노빈! 쉴드!” “알겠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운이 꽤 좋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화르르륵-! 그건 바로, 이 변질된 드라키엘이라는 녀석의 속성이 화염 속성이라는 부분이었다. 키엘이는 따지자면 루멘. 그러니까 빛 속성에 가까운 녀석이라, 이 녀석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연금술식의 차이 때문인지 같은 드라키엘임에도 불구하고 이 보스는 불을 뿜어내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캬아아오오-! 그런데 그게 왜 다행인 거냐고? 치이익- 그야 지금 난……. 어지간한 화염 공격에 거의 면역인 수준이거든. [염화의 심장] 분류 : 장비 - 쇄자갑(鎖子甲) ……중략…… - 옵션 화염 저항 +80% 모든 상태 이상 내성 +30% 화염저항이 80%나 붙은 이 미친 초월등급 갑옷 덕에,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 한 어지간한 화염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 생각해보니 내성 +30%까지 붙어서, 사실상 화염저항 24% 추가 아님?ㅋㅋ └ 그러네 ㅋㅋ 실질 화염저항 104% ㄷㄷㄷ 성좌들 말처럼 상태이상 내성이 30% 증가하는 옵션으로 인해, 화염 저항이 1.3배 증폭되기까지 했다 보니. 화륵- 치이익- [화염 속성의 공격에 완벽히 저항했습니다!] [‘염화의 심장’ 고유효과, ‘염화의 갑옷’이 발동합니다.] [모든 화상 피해를 공격자에게 되돌려줍니다.] 카아아오오-! [‘변질된 드라키엘’에게, 화염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게 여기서 또 이렇게 꿀처럼 쓰이게 될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 그래봐야 딜이 안 박히죠?ㅋㅋ └ 레벨차이 40이 죠스로 보이나 ㅋㅋㅋ └ 40렙차이면 피해감소 보정만 해도 노답일 듯?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형님들? 다 방법이 있다니까요? 핑- 피피핑-! 보스의 약점에 화살을 쏟아 부어 어그로를 확실히 끌어낸 뒤. 퍼어엉-! 퍼퍼퍼펑-! 로웰이 화염공격을 쏟아내어 녀석의 시야가 가려졌을 때. 우우웅- [소환수, ‘키엘’이 전장에 소환되었습니다.] 나는 슬슬,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야, 일당 두 배로 쳐줄까? [……듣고 있다, 주인놈아.] -상대가 좀 무섭긴 하지? [이 키엘님을 무시하는 건가? 저런 하등한 껍데기 따위!] -그래, 하등한 껍데기. 근데 레벨이 90이긴 해? […….] -탕후루 세 막대. [맡겨라.] 라피엘의 기억을 통해 얻은 고대의 연금술식. 그것을 통해 키엘이의 잠재력을 최대치까지 끌어낸다면……. [가소롭군…….]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상대로도 충분히 딜을 욱여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 말이었다. 크르르륵-! 변질된 드라키엘이 키엘이를 내려다 보았고. 그런 녀석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키엘이는, 사납게 포효하였다. 크롸아아아! 그리고 한발 물러선 나는, 서둘러 술식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원혼흡성술식’의 도식화를 시작합니다.] 라피엘의 기억으로부터 깨어난 바로 그 순간.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마치 이 퀘스트를 위해 안배된 듯한 고대의 연금술식. “딱… 5분만 버티면 돼.” “5분?” “그래. 그러니까 부탁해 노빈.” 이걸 완성할 때까지만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상대로 버텨내면, 이 미친 난이도의 퀘스트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머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마력의 흐름이 먼저 흐르기 시작한다. 고오오- 전투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거대한 괴수 드라키엘과 전투하느라, 고군분투하는 키엘의 모습. 그런 것들은 내 집중에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콰쾅- 쾅-! 어느새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원혼흡성술식의 구현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진행률 32%…… 57%…63%…….] 원혼흡성술식이 대체 뭐냐고? 나도 모른다. 라피엘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주입되기 전까진, 억겁의 시간 동안 쌓인 내 데이터베이스에서조차 전혀 없던 연금술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알고 있다. ‘에고를 흡성해내는 금단의 연금술이라…….’ 빙의를 통해 얻은 기억과, 라피엘의 기억-B 퀘스트 정보창에 명시된 정보를 조합해 보면……. 이 원혼흡성술식은, 이단파가 창조해낸 변질된 소환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된 비술일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창조술식의 허점을 찾아내어 에고가 담겨있는 그릇에 틈을 만들고. 거기서 새어 나온 에고를 흡수하여, 마력으로 전환하는 비술. 아마도 그 마력이 키엘이에게 주입되면, 뭔가 키엘의 전투력이 강화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진화의 재료가 된다는 ‘원본의 기억’이라는 아이템이 보상으로 책정된 것도, 뭔가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쿠쿠쿵-! ‘그런데 지금도 제대로 키엘이 능력을 다 못 쓰고 있는데…… 벌써 진화까지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려, 술식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률 66%…… 72%…78%…….] 키엘이를 비롯한 파티원들. 특히 노빈이가 상당히 고군분투하며 괴수를 잘 막아내 주고는 있었지만……. [감히…! 이 하찮은 것들이!!!] 캬아아오오-! 슬슬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현재 진행률 86%…… 92%…95%…98%…99%…….] 띠링-! [‘원혼흡성술식’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나도 전장에 합류해야 할 것 같았다. 고오오- 완성된 술식에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철궁을 꺼내 빠르게 시위를 잡아당겼다. 철컥-! 기기기기긱- 그리고 다음 순간. 피이잉-! 허공을 가르며 화살이 쏘아짐과 거의 동시에……. [‘원혼흡성술식’이 작동을 시작합니다.] [‘변질된 드라키엘’의 에고(Ego)를 흡성하기 시작합니다.] [주의※ 대상이 처치되기 전에 술식이 파괴되면 흡성이 중지되며, 흡성으로 획득한 모든 마력이 반환됩니다.] “됐다!” 파란 빛줄기가 화살을 기점으로 괴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우리 파티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 * * 마력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빈은 정확히 목격하였다. 데이브가 쏜 화살 한 발. 그것이 등에 박힌 순간, 괴수의 몸 전체를 파란 빛줄기가 감싸기 시작하였다. ‘……뭐야, 저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분명 연금술의 범주에 속하는 마력 흐름인데, 노빈이 아는 어떤 술식과도 형태가 달랐다. 그리고 그 직후. 크르르…… 르르……! 변질된 드라키엘의 울음소리가 달라졌다. 그리고 확실히 둔해졌다. 콰아앙-! 녀석이 날개를 휘둘러 주변을 쓸었지만, 이전과 분명 한 박자 느린 느낌이었다. ‘마력이…… 빠지고 있어?’ 노빈의 눈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녀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서포터였지만, 특히 마력의 흐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민감한 플레이어였다. 그러니 그녀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변질된 드라키엘의 마력 총량이,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화르르-! 로웰의 화염 마법이 괴수의 옆구리를 때렸다. 보스가 로웰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키엘이 반대편에서 치고 들어갔다. 크와앙-! [변질된 드라키엘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전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키엘의 공격이, 확실히 먹히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산 같던 보스가 갑자기 잡몹이 된 건 아니었다. 쾅-! 변질된 드라키엘이 꼬리를 내리친 순간 바닥이 갈라졌고. 그 충격파에 노빈의 몸이 뒤로 밀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노빈! 키엘 쉴드!” “알겠어!” 승산이라는 게 생겼다는 사실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 잡을 수도 있나?’ 수많은 보스 레이드 경험에서 비롯된 그녀의 직감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우웅- 키엘의 몸을 감싸는 보호막이 형성되는 걸 확인하면서, 노빈은 품속에 지니고 있던 귀환 스크롤을 한 차례 만지작거렸다. ‘음.’ 언제든 꺼내서 찢어버리기 위해 준비해 둔, 엄청난 고가의 파티 전체 귀환 스크롤. 하지만 이걸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조금…… 장기전이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노빈은 서포팅을 위해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동시에 돌리기 시작했다. 보스의 현재 마력 감소 속도. 키엘의 딜량과 내구도. 데이브의 술식 유지 시간. 파티의 잔여 마력과 포션 수급. 그리고 다음 순간. ‘이건, 확실히 된다.’ 블랙 크라운에서 수백 번의 레이드를 뛰며 체득한 경험이, 결론을 내렸다. ‘아슬아슬하지만.’ 특별한 변수가 터지지 않는 한, 보스를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미쳤네, 진짜.’ 40~50레벨대 파티(물론 자신은 100레벨이 넘었지만)가 90레벨 보스를 잡는다는 말을 길드 브리핑에서 했다간, 정신 감정 의뢰서부터 회신으로 날아올 텐데. “후우.” 물론… 그냥 될 건 아니었다. ‘이 정돈 투자라고 생각하자.’ 아무래도 이제부턴…….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진짜 전력을, 보여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으니까. 우우우웅-! 노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세인트 스태프의 그립을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는 거리를 유지하며 서포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면, 이제부턴 그녀도 직접 전투에 참전해야 했으니까. [파티원 노빈이, ‘세인트 스톰(Saint Storm)’ 스킬의 캐스팅을 시작합니다.] 어차피 데이브를 길드에 영입하기로 완전히 마음을 먹은 이상. 굳이 정체를 더 숨길 필요도 없었고 말이었다. * * * 전투는 확실히 유리해지고 있었다. 원혼흡성술식이 작동을 시작한 뒤로. 우리 파티는 계속해서 유효한 공격들을 성공시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놀라운 건. └ 방장아;; 니 파티원 좀 심상치 않은데? └ 세인트 스톰이라고? └ 저거 최소 100레벨 넘어야 습득 가능한 스킬인데? 노빈이 갑자기, 이제까지보다 한 차원 높은 역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콰쾅- 콰콰콰쾅-! 세인트 스톰. 그러니까 서포터 계열 클래스가 사용할 수 있는 공격마법들 중, 가장 강력한 최상위 티어의 공격 마법. 이것까지 이 정도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서포터인줄은 몰랐는데……. ‘이러면 확실히 더 쉬워지긴 하지.’ 노빈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노빈이, 힘을 좀 숨기고 있었나본데요? └ 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 └ 아니 이건 아니지;;; └ 너 이 ㅅㄲ 미리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다뇨? 제가요? 그럴 리가……. └ 쉬벌 어쩐지 오랜만에 배팅 열더라 이 쉐끼;;; └ 정배야 정신이 들어??? 정배야 정신이 들어??? 정배야 정신이 들어??? 뭐, 성좌 형님들의 분노가 이해 가긴 한다. 나조차도 노빈이 갑자기 저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배팅한 성좌형님들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일지도. 그러니까……. -그럼 추가 조건 하나 더 걸겠슴다 형님들. └ 뭔데?? └ 추가 조건? -지금부터 포션 한 개도 안 쓰고 클리어. 어떻습니까? └ ????????? └ ㄹㅇ??? - 제가 포션 하나라도 쓰면 패배…… 하는 건 좀 그렇고. 배팅 무효하겠습니다. └ ㅋㅋㅋㅋㅋ개웃기네ㅋㅋ └ 이 쉑 보스 못 잡을 거 같으면 포션 빨아버리는 거 아님? -하, 절 뭘로 보시고. 저 그런 근본 없는 사기꾼 아닙니다요? └ 근데 방장 ㅈ고수네; └ 뭐가? └ 이 ㅅㄲ 어차피 쌀먹한다고 포션 원래 거의 안 빨잖음; └ 어? 맞네? └ 어차피 포션 아끼고도 깰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선심 쓰는 척 하는 거 아님? 어허. 조용 조용! 이래서 눈치 빠른 성좌놈들은……. “키엘! 한 발짝 물러나!” 크르륵-! 이어지는 성좌형님들의 채팅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전투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 성좌 형님들 말이 틀린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포션을 아예 안 빨고 변질된 드라키엘을 처치하는 건, 노빈의 활약과 별개로 꽤 어려운 일이란 말이지? [소환수의 전투태세 유지를 위해, 마력이 소모됩니다.] 솔직히 든든한 힐러도 있어서 생명력 포션 빨 일은 없는 게 맞긴 한데, 문제는 마나 포션이다. 술식 도식화에 마력을 잔뜩 쏟아부은 데다, 키엘 소환 유지로 인한 마나 소모가 어마어마했으니 말이었다. “흐읍!” 쿠와앙-! 키엘이 변질된 드라키엘의 턱을 올려 쳤다. 보스가 비틀거렸고, 그 틈에 키엘이 뒤로 물러나며 한마디를 툭 하고 던진다. [주인놈아. 마력이 줄고 있다.] 알고 있거든? [이 키엘님이 사라지면 어쩔 셈이냐.] 어쩌긴 뭐. 그전에 어떻게든 끝내야지. [현재 잔류 마력: 32%] 원혼흡성술식으로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건 맞긴 한데, 문제는 지금 쓸 수 있는 마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보스가 처치된 후에야 저 마력을 건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내가 전투에 쓸 수 있는 마력인지도 잘 모르겠고……. “후욱.” 그러니까 늦어도 2분 안에는 이 전투를 끝내야 한다. -키엘. [뭐냐.] -남은 마력 한 번에 몰아줄게. 끝내보자. [……해보지.] 키엘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고, 나도 보스를 향한 공격을 일단 멈췄다. 이어서 남은 마력의 흐름을 전부 키엘에게 집중시켰다. “노빈! 잠깐만 시간 벌어줘!” “알겠어.” 그리고 다음 순간. 쿠우웅-! 키엘의 몸에서 금빛 마력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크롸아아아-! 모든 마력이 한 번에 집중된 강력한 드래곤 피어. [‘변질된 드라키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캬아오오-! 변질된 드라키엘이 비명을 질렀다. 원혼흡성술식이 에고를 깎아먹는 동안, 키엘의 물리적 타격이 녀석의 몸을 산산이 찢어나갔다. [‘변질된 드라키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변질된 드라키엘’의 생명력이 10% 미만입니다!] [현재 잔류 마력: 17%] 크롸아아- 캬아악-! 변질된 드라키엘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검은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전장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마지막 패턴이다.’ 이건 아마… 라피엘의 기억 속에서 이 녀석의 원본이 죽기 직전에 보여줬던. 바로 그 최후의 발악. [모조리…… 심연으로…… 끌고…… 가마……!] 하지만 이미 본 적 있는 패턴에 당해줄 리 만무했다. “노빈! 로웰!!” 녀석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곧바로 파티원들에게 오더를 내리며 움직였고. 콰아아앙-! 그 결과, 노빈의 세인트 스피어가 녀석의 움직임을 차단했으며, 로웰의 화염이 날개를 태워버렸으니 말이다. 화아아악-! [현재 잔류 마력: 5%] 크롸아아아아아아! 키엘이, 마지막 돌진을 시작했다. 키엘의 발톱이, 변질된 드라키엘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찢어냈다. 콰아아아앙-! 이어서 완벽히 무방비 상태가 된 녀석의 가슴팍을 향해. 핑- 피피핑-!! 내 손에서 쏘아져 나간 화살들이, 자비 없이 날아가 틀어박혔다. 크…… 아아아아……! [‘변질된 드라키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변질된 드라키엘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공간이 흔들릴만한 거대한 진동과 함께……. 우우우웅-! [원혼흡성술식의 흡성이 완료되었습니다.] 키엘의 몸이 파란 빛줄기에 잠겼고. [변질된 드라키엘의 잔류 에고가, 소환수 ‘키엘’에게 흡수됩니다.]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띠링-!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라피엘의 기억-B (재조정) 《잔향이 아닌, 포효》— 성공!] [보상이 지급됩니다.] [[전설] 수리된 라피엘의 깃펜을 획득하였습니다.] [SP(스킬 포인트) +1을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보상: ‘원본의 기억(Original’s Memory)’을 획득하였습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키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파란 빛줄기가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띠링-!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환수 '키엘(Drakiel)'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Lv.60 → Lv.70 (+10)] ‘……???’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레벨이 오른다고?’ 그것도 한 번에 10렙이? 아니, 잠깐. 이거 혹시… 버그세요? └ ㅅㅂ 10레벨??? └ 하 ㅋㅋㅋ 개미쳤네 └ 소환수 레벨 10이 한 방에 오르는 게 말이 됨?;; └ ㅅㅂㅅㅂㅅㅂ 이쉐끼 또 사기친다!!! 사기친다고!! └ 와 ㅋㅋㅋ 이건 ㄹㅇ 어이없넼ㅋㅋㅋㅋㅋ 라이카 세계에서 소환수의 레벨을 올리는 건, 일반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소환수라는 존재들은, 플레이어처럼 ‘사냥’으로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심지어 레벨을 올릴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소환수의 경우도 흔한 수준. ‘그리고 레벨업 루트를 발견한다 해도, 이렇게 한 번에 10레벨씩 오르는 경우는…….’ 베타에서도 본 적이 거의 없다. 아예 없진 않은데, 진짜로 희귀한 케이스라는 거다. 그러니까. -개꿀인데요 형님들? 기분이 째진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면 되는 거겠지? 배팅 수익도 달달한데 키엘이 레벨까지 뜬금포로 10레벨 올라버리니……. 과장 조금 보태서, 로또 2등 정도는 맞은 기분이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가치로 따지면 1등 상금에 비견될지도 모르겠는걸? “캬.” 참지 못하고 육성을 터뜨리는데, 그 사이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띠링-! [소환수 ‘키엘(Drakiel)’이 특수 상태에 진입합니다.] [상태: 각성(Awakening)] 각성? 이건 또 뭔데? [각성 상태의 피조물은 진화의 전 단계에 해당합니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상위 존재로의 진화가 가능합니다.] “……!” 혹시 이거… 꿈인가? 깨버리거나 그러면 곤란한데……. 갑자기 몇 주 전 악몽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PTSD가 살짝 왔지만……. “휴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ㅋㅋㅋ 대이브야……. 배팅으로 쳐묵은 LP는 다시 뱉는 게 어떻겠니? 싫은데요? 그걸 제가 왜……. └ 배아파서 도저히 이 방송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흠. 그런 거면 조금 쉬다 오십쇼 형님들. -ㅎㅎ └ 와 근데 저거 드라키엘 애초에 초월등급 소환수 아니었음? └ ㅇㅇ맞음; └ 그럼 진화하면 서사등급 되는 거임? └ 뭐, 라이카 시스템 상… 무조건 그러겠지? └ 시이바아아……. 형님들의 이런 반응은 솔직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서사]라는 등급 자체가, 라이카의 세계 안에서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베타 때 못 가져봤냐고? 그건 아니다. 나야 베타 때는 서사의 윗 등급인 광휘등급까지도 얻어봤으니까. 다만 내가 서사등급의 장비나 소환수를 얻었던 건……. 아무리 빨라도 100레벨 이상일 때였다. 이런 쪼랩 때 서사등급을 그림자라도 확인한 건, 역대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구 서버에는, 서사등급 소환수가 존재하긴 하려나? 장비야 있긴 한 것 같던데……. 띠링-! [진화 대상: 태양의 성룡(Solar Dragon)] [등급 : 서사] [진화 가능 레벨: Lv.80] [필요 재료:] ① 원본의 기억(Original's Memory) — 보유 중 ✓ ② 태양룡의 각인(Solar Dragon's Sigil) — 미보유 ③ ??? — ??? 캬, 태양의 성룡? 이름도 간지 터진다. -형님들, 인정하시는 부분 아닙니까? └ 비틱 멈춰!!! [성좌, ‘불꽃의 감정가’가 경악합니다.] [성좌, ‘별빛의 주시자’가 시스템 오류라며 분노합니다.] 아니, 갑자기 졸업성좌님들까지 와서 이러시는 건……. 게다가 시스템 오류는 또 뭡니까? 라이카가 뭔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 어쨌든 배팅 수금까지 확실하게 마무리한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시간 배팅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 ‘처치 성공’ — 정산 완료] [수익: +49,200 LP] 변질된 드라키엘이 드랍한 아이템들은, 전투 기여도에 따라 적당히 분배하고……. -그나저나 보스 드랍은 좀 맛이 없긴 하네요 ㅎㅎ 황금왕보다 훨씬 어려웠는데ㅠ └ ㄷㅊ └ ㄷㅊㄹ └ 닥쳐 시불럼아. 거참 예민하시네 들. “그럼, 내려가볼까.” 한껏 올라가서 흔들거리는 광대를 겨우 진정시킨 뒤, 나는 천천히 더 깊숙한 지하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은 퀘스트는… 이제 두 갠가.’ 그리고 그 퀘스트들은, 지금 서 있는 이곳보다 더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 * 지하 4층. 태양의 심판장. 이곳은……. 솔직히 미친 난이도였다. “저거 절대로 맞아주면 안 돼, 로웰언니!” “알았다니까?” “다음엔 쉴드로 못 막아준다고! 진짜야!” 30초마다 필드 전체에 쏟아지는 루멘 폭류. 전체 생명력의 10%를 깎아가는 트루 데미지. 몬스터들의 레벨대가 높은 것도 있었지만… 필드 자체에 깔려있는 기믹이 아주 악랄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데이브.” “음?” “그, 드래곤 소환수는… 왜 소환하지 않는 거야?” 어어. 그거야……. “마나가… 부족해서?” 이 정도 난이도에 키엘이를 소환하라니. 노빈 이 녀석은 마나 포션이 어디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나? “아하, 마나포션을 다 썼구나?” “그렇다기보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내가 좀 주면 되는데.” 띠링-! [파티원 ‘세일라 노빈(Seila Novin)’으로부터 중급 마력 포션을 수령하였습니다.] 예? 이걸 그냥 준다고요? 상급 마력포션이면… 개당 50LP는 할 텐데? [파티원 ‘세일라 노빈(Seila Novin)’으로부터 중급 마력 포션x11을 수령하였습니다.] “허억.” 감사합니다, 누님! 그런데…… 마나포션은 마나포션이고, 키엘이 소환은 좀 천천히 해도 되지 않을는지……. └ ㅋㅋㅋ ㅅㅂㅋㅋ 선물받은 포션까지 쌀먹하는 쌀숭이가 있다? └ ㅈㄹ하지 말고 빨리 키엘이나 소환해라 방장 ㅋㅋ └ 노빈 누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 ㄹㅇㅋㅋ 키엘이가 보고싶으신 거잖음. 얼른 대령하라. 후우. 어쩔 수 없다. 70레벨로 성장하면서 마력 소모량이 1.5배쯤 증가한 키엘이긴 하지만……. 중급 마력포션을 열한 개나 주셨는데, 여기서 빼는 건 좀 짜치는 행동이긴 하니까. [날 이제야 부르다니……. 어리석은 주인 놈이로군.] 그나저나 이 녀석은 10레벨이나 올랐어도 건방진 말투가 여전하다. 아니, 10레벨 올라서 더 심해진 걸까? -할 말이 있어, 키엘. [뭐냐, 주인놈아.] -절대로 전투중에 드래곤 피어를 사용하지 마. 알겠지?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다니. 드래곤 피어 한 방이면, 저런 하등한 몬스터들 따위는 단번에……!] -흑요석같이 반짝이는, 카카오 탕후루가 먹고 싶지 않나? [……?!] -먹고 싶다면 닥치고 명령을 따르도록. 못해도 마력포션 다섯 개 안으로는 마무리해야 하니까. [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 주인아.] 짜식이. 진즉에 고분고분할 것이지. “…….” 어쨌든 노빈이 덕에 다시 키엘과 함께하게 된 우리 파티는, 헬 난이도의 폭류 지대를 돌파하며 퀘스트를 하나씩 해치워 나갔다. 이번에도 ‘퀘스트 재조정’과 함께 더 높은 난이도의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수행해야 했지만……. 띠링-! [규격 외 조건이 감지되었습니다.] [당신의 드라키엘은 루멘 폭류의 원천 에너지에 대한 친화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퀘스트 《태양의 시험》의 내용이 재조정됩니다.] 그 결과로 얻어낸 것은……. [『태양의 심장(Heart of the Sun)』을 획득하였습니다.] ['태양룡의 각인(Solar Dragon's Sigil)'을 획득하였습니다.] 무려 키엘이의 두 번째 진화 재료였다. └ ??? └ 진화재료 세 개 아니었음? └ 벌써 두 개를 메인 퀘로 준다고??? └ 서사등급 진화 맞음 이거?;; └ 진짜 시스템 버그 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좀 되는 날인 것 같으니까… 배 아프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형님들? └ 근데 진화재료 다 모아봐야 80레벨 못 찍으면 진화 안 되는 거 아님? 아니, 그렇다고 팩트로 또 공격하실 필요는……. “흐음.” 어쨌든 성좌들과 농담 따먹기도 좀 하며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이, 레벨도 하나 더 올라주었고.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48레벨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 끝에……. [황금탑 지하 5층으로 통하는 계단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이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이 가리키고 있는, 지하 5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잠깐 정비 한 번 하고 가자.” “좋아.” 파티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는 동안, 나는 주변 지형을 꼼꼼히 살폈다. 여기는, 지금까지와 완전히 달랐다. 어둡고 습한 지하가 아니었다. 순백의 빛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고. 중앙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석관 하나와, 그 주위를 감싸는 거대한 마법진이 보였다. ‘……여기가, 진짜 마지막이려나?’ 그리고 잠시 후. 정비를 마친 우리 파티가 5층 으로 입장했을 때. 우우우웅-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건. 장엄하다는 표현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화려한 공터와, 그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황금빛 석관이었다. 이어서 다음 순간. 띠링-! [라피엘 에스테르의 유지가 현신합니다.] 석관에서 빛이 솟아오르면서,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공간을 가득 휘감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0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서히, 하지만 웅장하고 거대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빛 속에서 형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라피엘 에스테르의 유지가 현신합니다.] 환영이었다. 말 그대로 어떤, 홀로그램 같은 형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은…….’ 환영치고는 좀 과한 수준 아닌가? 솔직히 느껴지는 마력량으로만 따지자면, 랭커급 대마법사라도 현신한 게 아닌가 할 수준이다. 서지혁 정도 되는 마법사가 마력을 개방하면 이런 느낌이 나려나……. 그런 실 없는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파아앗- 빛이 걷히면서. 그곳에 서 있는 존재를 마주한 나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 황금빛 눈동자. 빙의를 통해 봐왔던 그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실체를 가진 채 서 있었다. 라피엘 에스테르. 가장 위대했던 최후의 빛의 연금사. 그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키엘에게서 멈췄다. [………….] 라피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어쩐 일인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이것이…… 드라키엘?] 라피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키엘을 응시했으며……. [이럴 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동공이 점점 더 확대되었다. [이건… 드라키엘이 아니다. 대체 뭐지?] 아니, 이 자식이…… 등장하자마자 다짜고짜 뭐라는 거야? 설마 내 소중한 부하 1호가… 짭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설마 원래 드라키엘은 탕후루를 좋아하면 안 된다던가. 뭐 그런 규칙이라도 있는 거라면……. [진짜 미쳤군.] 저기요.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오? [내가 남긴 미완의 연성술로… 용혈을 담아낼 진실된 에고의 그릇을 만들어내다니.] “…….” 라피엘의 황금빛 두 눈이, 날 다시 똑바로 응시했다. [연자여. 그대는 확실히 이 자리에 도달할 만한 세라피스트로구나.] 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하긴. 무려 서사‘진(進)’ 칭호까지 하사받은 우리 짱룡(?)이를 봤으면 감탄이야 좀 나올 만 한 게 당연하지. 후후. └ 비틱 멈춰!! ㅅㅂㄹㅁ [성좌, ‘별빛의 주시자’가 라피엘의 반응에 조금 동요합니다.] [성좌, ‘고룡의 중재자’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잠시 우리 키엘이를 관찰하던 라피엘이, 이윽고 다시 내게 다가왔다. [너는…… 나의 안배를 따른 자로구나.] “……안배라 함은?” [이 탑에 남긴 시련. 기억.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이 방.] [모두 내가, 훗날 올 계승자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계승자라.” [그렇다. 빛의 연금술을 이어갈 자.] [그러나…….] 라피엘이 한 박자 쉬었다. 이어서 다시 키엘을 보았다. [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로군.] “……?” 그리고……. [이런 엄청난 에고의 그릇을 만들어 낸 연금술사가, 계승의 자격이 부족하다니.] “예?” [대체 그대는 어떤 존재인가?] 이어진 라피엘의 말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 내가 연성해 낸 키엘이는, 고대 세라피스트의 유산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은 엄청난 물건이다. 둘째. 그래서 키엘이를 본 순간, 라피엘은 자신의 안배를 계승할 후계자를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셋째. 하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계승(2차 전직)할 자격(레벨)이 내게는 아직 없었다. 그러니까……. └ ㅋㅋㅋ NPC형님 당황하신 듯?ㅋㅋ └ 개웃기네 ㅋㅋㅋ 저정도면 NPC 위격도 최소 서사나 광휘등급은 될 텐데, 그쯤 되는 NPC가 벙찌는 건 또 진귀한 광경이네 ㅋㅋ └ 삐빅- 시스템 오류입니닼ㅋㅋ “어쩌라는 건데요……?” 아마도 내 레벨로 이 퀘스트를 깨면 안 되는… 뭐 그런 구조였나보다. 하긴. 50레벨도 찍기 전에 90레벨 대 용족 보스를 잡는 게, 솔직히 말이 안 되는 거긴 하지. ‘그러면 시스템적으로 잘 좀 막아놓던가.’ 저 혼란스러워하는 라피엘을 향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몰라 ㅅㅂ 전직 시켜 줘 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해줘!! └ 아몰랔ㅋㅋ 해줰ㅋㅋ └ 방장 개그맨임?ㅋㅋ └ 50레벨도 안 찍어놓고 2차전직 시켜달라 하는 건ㅋㅋㅋ └ 양심 어따 팔아먹음? └ 이 스트리머는 원래 양심이 없습니다만;; 뭔가 상당히 혼란스런 표정으로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던 라피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이 잠시 석관 위를 스쳤다. [나는 끝내 걷지 못한 길이 있다.] [빛으로 에고를 빚는 것을 넘어……. 빛 그 자체를 완성하는 것.] [계승자여.] 라피엘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대는 분명 자격이 부족하나, 그 부족을 메울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 아, 예? [일단 나의 유지를 그대에게 계승한다.] [여기서 그대를 그냥 보낸다면, 그대와 같은 세라피스트를 다시 만날 수 없을 터.] 잠깐만요. 뭐라고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 ㅋ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 └ 라피엘 집에 가고싶은 듯?ㅋㅋㅋ └ 얼마나 퇴근하고 싶은 건지 감도 안옴ㅋㅋ └ ㄹㅇㅋㅋㅋ [그러니 부디 그대의 잠재력을 펼치거라. 그리고…… 내가 끝내 걷지 못한 길의 끝을 보아다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우우웅-!! 커다란 마력의 공명과 함께, 라피엘의 환영이 나를 향해 빨려 들어오더니……. 띠링-! [규격 외 조건이 감지되었습니다.] [당신은 ‘라피엘의 안배’가 설계한 범위를 이미 두 차례 초과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라피엘의 유지’가, 당신의 행보에 함께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긴 했지만, 꽤 익숙해진 형식의 시스템 메시지들이 또다시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라피엘 에스테르의 유지가 당신의 피조물을 인식합니다.] [퀘스트 《빛의 유산을 잇는 자》의 내용이 재조정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라피엘의 기억-B (재조정 — 최종) 《계승을 넘어, 창조로》 분류 : 클래스-메인(연계) — 상위 — 2차 전직 난이도 : SSS → ??? 라피엘 에스테르의 유지는 당신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잠재력이 이미 자신의 그것을 뛰어넘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확인한 나는……. 하지만 당신은 아직 2차 전직에 도달하기에 위격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그 부족함을 메울 역량을 가졌다는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내야 합니다. 라피엘의 유지와 힘을 합쳐, 그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궁극의 연성’을 함께 이루어내십시오. - 조건 대체: 라피엘의 유지와 ‘공동 연성(Co-Synthesis)’을 수행하여, 소환수 ‘키엘’을 매개로 ‘궁극의 에고 베슬(Ultimate Ego Vessel)’ 완성하기. - 히든 조건: (유지됨) 라피엘의 유지를 파괴하지 않고 흡수 (추가) 공동 연성 완성도 SSS등급 이상 달성 〓〓〓〓〓〓〓〓〓〓〓〓〓〓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방금까지 퀘스트 줬던 그 할배가…… 이제부터 함께한다는 거잖아?’ 함께하는 게 대체 뭔데? 그리고 어떻게? [연자여…….] 허억. [이제부터 그대에게 연성에 필요한 재료들을 알려주도록 하겠노라.] 돌겠네, 진짜로. * * *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게이트 관리국 본부, 지하 2층의 비상 대책실. 새벽 교대 시간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이미 사무실의 전등은 전부 꺼져 있었다. 남아 있는 건 비상등과……. 그리고 딱 한 사람. 김영태뿐이었다. 영태는 쉰 넘은 나이에 가혹할 정도로 밝은 모니터 불빛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사실 특별히 할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불안한 마음에 도저히 퇴근할 수 없던 것뿐이었다. [KR-01 서버 방어막 유지비 잔액 : 2.71%] [현재 소진율 기준 예상 고갈 시점 : 약 43시간 47분] ‘……43시간이라.’ 고작 43시간. 30년 공직 생활 동안 별별 개떡 같은 상황을 다 겪어왔지만. 이건, 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침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도, 이미 폭주를 겪어본 적 있는 거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그때 김영태는, 책임자가 아니었다. 그때는 이 무거운 짐이, 그가 아닌 다른 이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속으로 집어삼켰다. 당장 한숨을 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남은 시간. 조금이라도 챙겨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 그런 것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으음.” 발신자는 바르가 길드의 마스터 진태오. 기다렸던 전화였다. ‘확실히, 시간 약속은 칼 같군.’ 김영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편성은 완료됐습니까?” [다 됐습니다, 국장님. 타격대 1개 중대, 내일 21시 기준 대기 완료합니다.] 영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태오라면 약속한 대로 움직여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대형 사고가 날 뻔한 것도 맞았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마스터.” [아닙니다. 관리국에서도 생각보다 꼼꼼히 챙겨 주셔서, 무리 없이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예 국장님.] 전화를 끊고. 김영태는 잠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빼곡히 박혀 있는, 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노드로 묶여 있다. 서울이 터지면 부산도 꺼지는, 운명 공동체. ‘이 풍경이.’ 며칠 뒤에도 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폭주 초기에 대응만 잘한다면,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 세계 모든 사례 중, 가장 적은 피해로 폭주의 초기 진압을 성공하는 것. 그것이 김영태 국장의 목표였다. 띠릭- 모니터를 끈 김영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코트를 집어 들며, 대책실 문을 열었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이렇게까지 무거웠던 적은, 아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그러니까……. 지난 10일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일정이었다. 황금탑 공략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아니. ‘사실 그때만 해도… 오히려 순탄 그 자체였지.’ 난이도 자체는 어려웠던 게 맞다. 다만 어렵긴 했어도 어쨌든 그날 하루만에 밀린 숙제를 싹 다 해버린 데다……. 원래대로라면 사냥 노가다를 통해 10일에 걸쳐 올렸어야 할 레벨업 분량의 대부분을, 퀘스트 경험치에 보스 경험치 덕에 단숨에 달성해버렸으니. 솔직히 남은 휴가 동안은 설렁설렁해도 50레벨 달성에 2차전직까지 싹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자, 이제 다 구한 거지, 데이브?” “일단… 필요한 재료 자체는 다 구한 게 맞는 듯해.” “아니, 무슨 2차 전직 퀘스트가 이 정도까지 난이도가 높아?” “내 말이.” 무려 ‘재조정’을 통해 등장한 마지막 퀘스트였던 《계승을 넘어, 창조로》퀘스트를 진행하는데, 10일이 넘는 시간을 그대로 태워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 깬 것도 아니지.’ 심지어 10일 동안 한 건, 라피엘의 유지가 말해준 ‘연성 재료’라는 것을 모으는 데만 쓴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노빈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 시간 안에 못 해냈을 수준. 재료의 대부분이 70~80레벨 던전에 들어가야 구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거래소에서 샀으면 하루 만에 끝났잖아ㅡㅡ;; └ 지가 돈 아깝다고 직접 파밍 선택했으면서ㅅㅂ └ 우리 불쌍한 노빈이만 무슨 죄임?;; └ 강제로 노잼 파밍 구경한 우리가 더 불쌍한 듯ㅇㅇ 아, 재료 하나당 몇만LP씩 하는 걸, 대체 어떻게 거래소에서 사냐고요. 심지어 라피엘 할배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 다 알려주시는데. 그리고… 솔직히 재밌게 봤으면서. 세상에서 내가 고생하는 게 제일 신나는 형님들 아니셨나? └ ㅋ;;; └ ㅋㅎ;;; └ 그렇긴 해;; 여튼……. 이렇게 고생해서 얻은 결실이야말로, 더욱 달콤한 법입니다, 형님들. 날로 먹으려고 하면 배탈나는 법이라고요. [좋은 자세다, 연자여. 모든 시련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결코 성장할 수 없는 법이지.] “크흠.” 뭔가 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긴 한데요, 스승님.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자, 그럼 이제 연성을 시작해보는 게 어떠한가, 연자여. 너무 기대돼서 10일간 잠도 한숨 못 잤다네.] 그건 댁이 유령이니까……. 아, 참. 거의 손바닥만 해진 모습이 되어 내 어깨 위에 앉아있는 이 라피엘 할배는, 어쩌다 보니 스승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승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몸을 배배 꼬면서 꿀 정보를 툭툭 던져주는데, 불러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럼, 이제부터 그 궁극의 에고베슬인지 뭔지. 만들기 시작하는 거야?” “뭐,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노빈이 이 녀석은, 왜 끝까지 남아서 날 도와준 걸까? 로웰이도 며칠 전에 실험실로 돌아간 마당에 말이지. 설마 노빈이 이 녀석. 내게 흑심이라도 있는 건……. └ 겠냐?ㅋㅋㅋ └ 장기 조심해라 방장아 ㅋ └ 노빈이같이 귀엽고 예쁘고 돈도 많고 레벨도 높고. 어? 다 가진 플레이어가 왜 널 좋아함?ㅋㅋ └ 방장쉑ㅋㅋ 메타인지능력 박살났눜ㅋㅋ └ 엌ㅋㅋ 후우. 압니다, 알아요. 그냥 한 번 해본 말인데, 왜들 이렇게 열 내실까. “흐음.” 어쨌든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서 미안할 정도인 상황이라, 왜 계속 날 돕는 건지 물어보기는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어차피 네가 쎄지면 나도 좋은 건데 뭐.” “……?” 응? 뭐라고요?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 └ 헉;; └ 허걱ㅋㅋㅋ └ 허억ㅋㅋ 아무래도 괜히 물어본 것 같다. 노빈이가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 그런데 이제 뜸 그만 들이고, 궁극의 에고 베슬인지 뭔지… 만들기 시작하면 안 될까 방장? 알겠슴다. 안그래도 할 생각이었어요. [준비가 됐으면, 이제 시작해보자꾸나, 연자여.] 거 참, 다들 재촉은……. 라피엘의 유지가 내 어깨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 크기의 환영치고는, 유난히 기합이 잔뜩 들어간 눈빛이었다. [먼저…… 그대의 피조물을 이 자리에 불러내라.] “키엘이 말이죠?” [그렇다. 그 아이가 연성의 그릇이 된다.] 파아앗-! 금빛 마법진이 석관 앞 바닥에 퍼지면서, 익숙한 마력의 파동이 공간을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크르르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키엘이, 날개를 접으며 천천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왜 편의점이 아닌 거냐, 주인놈아.] 일단 입 잠깐 다물어주시고. 우우웅-! 이어서 나는 라피엘의 지시를 키엘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으음?] 키엘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용족 특유의 금빛 눈동자가, 한순간 동요하는 게 보였다. [그런게 정말 가능하다면……. 확실히 내게도 좋은 일이겠군.] “당연하지.” [좋다. 대신 망치면 안 된다, 주인놈아.] 이 녀석 나름대로 각오를 한 모양이다. 대가로 탕후루를 요구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그럼 시작하지.] 라피엘이 내 어깨에서 떠올랐다. 환영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부상하더니, 석관 앞의 마법진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연자여. 내 맞은편에 서라.] “……그러죠 뭐.” 나는 수리된 라피엘의 깃펜을 꺼내 들었다. 석관을 사이에 두고, 라피엘의 맞은편에 섰다. 키엘은 석관 바로 위에 자리를 잡았고. 순간, 발밑에서 오래된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마법진은 내가 생전에 완성한 토대다.] 라피엘이 환영의 손을 뻗자, 석관 주변으로 금빛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가늘고 정밀한 빛의 선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을 기어다녔다. [이 선 위에, 그대의 연성식을 겹쳐라.] “알겠습니다.” 깃펜 끝에 마력을 실었다. 펜촉이 바닥에 닿자, 라피엘의 금빛과는 다른…… 은백색의 연성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이 감각은…….’ 손끝에 전해지는, 마법진의 흐름. 묘하게 익숙했다. 하위 연성식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함이었지만. 키엘이를 처음 연성해 낼 때 완성했던 그 연성식과, 뼈대 자체는 거의 같았으니까.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라피엘의 금빛 선과 내 은백색 선이 교차점에서 하나로 맞물리는 게 보였다. 우우웅- 두 선이 합쳐지는 순간, 바닥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 뭐야 저거? 마법진을 저런 식으로도 그릴 수 있는 거임? └ ㅁㄷ;; NPC할배랑 같이 그리는 거? └ 와씹;; 혼자 그리는 것보다 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맞습니다 형님들. 저 지금 식은땀 좀 나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말 좀 걸지 마십시다. 파아앗-! [……좋군. 그대의 연성선이 내 것과 완벽하게 호응하고 있다.] 담담한 척하긴 하지만, 라피엘의 목소리에 적잖은 놀라움이 묻어있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내가 본인보다 연성술식을 많이 그려봤을 텐데. 그런 사실을 모를 테니,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작한다. 루멘을 주입하겠다.] 파아아앗-! 마법진이 완성되자, 석관에서 엄청난 양의 루멘 에너지가 쏟아져 나왔다. 그 빛줄기가 키엘의 몸을 향해 일제히 흘러들어 갔다. 크르르르르-! 키엘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동시에. 띠링-! 연성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동 연성이 시작됩니다.] [연성 매개체: 드라키엘(Kiel)] [현재 완성도: D] 완성도 D에서 시작이라. 괜찮…은 거겠지? [……크르륵.] 키엘이 이를 악물었다. 빛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이, 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끙끙대면서도 버텨내고 있었고. 나는 깃펜을 쥔 손에 더 힘을 실었다. [루멘 마력이 감응합니다.] [연성술식의 완성도가 개선됩니다.] [술식 완성도: D → C] ……중략…… [술식 완성도: C → B] 완성도가 올라갈수록, 마법진의 공명이 격렬해졌다. 발밑의 진동이 점점 세지고, 바닥에 그어진 연성선들이 백열등처럼 달아올랐다. 깃펜을 잡은 손바닥에 열기가 전해져 왔다. [술식 완성도: B → A] 라피엘이 건너편에서 환영의 팔을 크게 휘두르자, 루멘의 흐름이 한층 더 빨라졌다. 키엘의 몸에서 방출되는 마력 파동이 공간 전체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드디어. [술식 완성도: A → S] [연성술식의 완성도가 개선됩니다.] [술식 완성도: S → SS] 기존에 도달해본 영역인, SS등급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고인물 연금술사 라피엘과 함께한 덕에,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완성도가 정체 상태입니다.] ‘……멈췄다?’ 완성도가 SS를 도달한 직후 정체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흐름은 변함이 없는데, 루멘의 흡수율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연자여, 루멘의 유입이 포화 상태에 가깝다.] 라피엘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이 이상은…… 매개체의 한계일 수 있다.] 크르르르……! 키엘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빛에 잠긴 용족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인놈아…… 서둘러라.] 나는 잠시 완성되어가는 마력술식을 관조했다. ‘으음.’ 아마도 여기서 술식을 완성시킨다 할지라도, 퀘스트는 클리어될 듯했다. 라피엘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연자여, 이쯤에서 완성해도 된다. 이미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하였으니.] 하지만. ‘좀 아쉬운데.’ 키엘이를 처음 연성할 때 받았던 등급이 SS+니까. 같은 SS긴 해도, 여기서 멈추는 건 좀 아쉽잖아? 그리고.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 같거든.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이, 그렇게 말하고 다는 말이다. ‘후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깃펜을 쥔 손끝에 의식을 집중했다. 고오오-! 깃펜을 쥔 손목을 한 번 꺾었다. 은백색 연성선의 궤적이 미세하게 바뀌었고. 파앗-! 루멘의 흐름이 다시 살아났다. [……!] 라피엘의 황금빛 눈이 커졌다. [이… 이건……!] 그리고 다음 순간. [연성술식의 완성도가 개선됩니다.] [술식 완성도: SS → SSS]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들과 함께, 마법진 위에 거대한 황금빛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띠링-! [궁극의 에고 베슬 연성에 성공하였습니다.] ['궁극의 에고 베슬(Ultimate Ego Vessel)'을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라피엘의 기억-B (재조정 - 최종) 《계승을 넘어, 창조로》- 성공!] [히든 조건 달성: 라피엘의 유지를 파괴하지 않고 흡수] [히든 조건 달성: 공동 연성 완성도 SSS 이상] ……중략…… [레벨이 올랐습니다.] [50레벨이 되었습니다.] ……중략…… [2차 전직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전직 가능한 클래스 : 빛의 창조자(Seraph Creator)] [전직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늦은 밤. 호진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고. 심장박동은 상당히 빨라진 상태였다. 원래 오늘부터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일찍 취침할 예정이었는데. B#띠링-!# 잠들기 직전 스마트폰에 떠오른 이 한 줄의 메시지가 문제였다고 할 수 있었다. B#[‘마력 안정제(C급)’품목이 목표가에 도달하였습니다.]# ‘뭐……?’ 호진은 마력 안정제가 많이 올랐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일부러 차트를 보지 않고 있었지만. 최소 매수가격에서 두세 배 이상 올랐다는 정도는……. 미디어 디톡스라도 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목표가 알람…… 1000LP에 걸어뒀던 거 같은데?’ 거의 희망사항에 가까웠던 목표가 도달 알람을 확인하니, 도저히 거래소 차트를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친…….” 게이트 폭주 엠바고가 풀리던 날. 그리고 2~3일 사이. 최고가를 찍었던 마력안정제 차트는, 차익실현 매물로 인해 다시 가격이 꽤 많이 조정됐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가격은, 직전 최고가의 무려 두 배 수준 가격. 가파른 차트의 각도를 보는 호진의 두 동공이 가늘게 떨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게 진짜야?’ 차트 옆에 표시된 보유 평가 금액. 처음 매수가가 개당 168LP였는데, 지금 시세는 그것의 6배가 넘어가 있었다. 열 개를 산 게 1,680LP였으니까. 지금 평가액만 1만 LP가 넘는 수준이라는 얘기다. ‘좀 더 살걸…….’ 70레벨대 성공한 플레이어(?) 호진의 기준으로 봐도, 몇 주만에 1억이라는 수익률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으… 팔고 싶어 미치겠네.’ 호진의 손가락은 매도 버튼 위에서 멈춰 있었다. 여기가 고점 같냐고? 그런 건 모른다. 그냥 600%에 육박하는 수익률을 보고, 손가락을 놀리는 게 참기 힘든 것일 뿐. 하지만 쉬이 팔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나도 쓰긴 써야 하는데…….” 그가 ‘비동기 전술 타격대’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폭주가 터지고 나면, 최전선에서 비동기 전투에 참전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라는 것이었다. ‘지금 팔았다가, 좀 싸지면 다시 살까?’ 전술 타격대에 지원만 하지 않았더라도. 기분 좋게 싹 다 팔고 싱글벙글이었을 텐데……. ‘아냐. 그랬다가 가격이 더 올라버려서, 더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버리면…….’ 지금으로부터 20시간만 더 지나면, 비동기 전술 타격대 1중대 소속인 그는 서울숲 본부에 집결해야 한다. 그러니 고민하던 호진은……. “젠장.” 아주 소심하게 2개만 팔기로 결정했다. B#띠링-! [‘마력 안정제(C급)x2’품목을 성공적으로 매도하였습니다.] [2027LP를 수령하였습니다.]# 마안제 하나 먹으면 그래도 2~3일 정도는 효력이 간다고 하니까. 15일 동안 8개 정도 들고 있으면, 모자랄 일은 없지 않을까? ‘이걸 처음 살 때만 해도 진짜 그냥 투자목적이었었는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호진의 두 눈은, 다음 순간 점점 더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어, 어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 같던 마력안정제 차트가, 갑자기 미친 듯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뭐야? 갑자기 이렇게 떨어진다고?’ 갑자기 다급해진 호진은, 저도 모르게 마력안정제 세 개를 더 매도 주문을 걸었다. 하지만. B#띠링-!# 호진의 매도 주문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차트는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하였다. B#띠링-! [주의!] [‘마력 안정제(C급)’ 품목의 가격이, 짧은 시간 안에 5% 하락했습니다.]# 호가 단위로 가격이 뚝뚝 떨어졌다. 위에서 누가 매도 물량을 쏟아붓고 있는 거다. ‘으으, 다 팔고 생각할걸!’ 아무리 오 년 만의 게이트 폭주라고 해도, 역시 마력안정제 가격은 거품이었던 걸까? “후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점점 더 떨어지는 마력안정제 가격을 보며, 호진은 결국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그래. 내가 무슨 투자냐. 이건 그냥… 생명보험을 싸게 들었다고 생각해야겠다.’ 아무리 떨어져도 호진이 매수했던 매수가 밑으로 떨어지진 않으리라. 게다가 두 개를 고점에 팔긴 했으니, 마안제 8개를 공짜로 구매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진다. “…….” 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보름을 위해서, 컨디션 관리는 필수였다. * * * 결국 게이트 폭주 전전날. 밀린 숙제(?)를 다 끝내고 모든 목표를 깔끔하게 전부 달성한 나는, 아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라이카 시스템 자체가 높은 난이도에 대한 리턴은 확실한 편이라. 미친 난이도의 히든 퀘스트를 다 클리어한 대가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넘쳐흐르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벌써 50레벨이라니.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속도긴 해.’ 전직은 어떻게 됐냐고? 당연히 했다. ‘빛의 창조자(Seraph Creator)’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클래스로 말이지. ‘희소성이 클래스 파워와 정비례한다면……. 그야말로 미친 클래스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리고 넘쳐흐르는 보상이라는 건, 단순히 희귀한 히든 클래스로 전직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탯 보상, 스킬 포인트 보상 등. 부수적인 보상들만 해도 가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미친 보상이라고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궁극의 에고 베슬(Ultimate Ego Vessel)’이었다. 정확히는 궁극의 에고 베슬이라는 특성을 얻게 된, 키엘이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궁극의 에고 베슬(Ultimate Ego Vessel)- 전설적인 세라피스트에 의해 복원된, 궁극의 에고 베슬입니다. 궁극의 에고 베슬을 가진 소환수는, 자신보다 높은 영혼력을 가진 적을 처치할 때마다 대상의 에고를 흡수하여 베슬에 저장합니다. 에고 베슬에 영혼력이 100%만큼 저장되면, 영혼력을 모두 소모하여 소환수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건 진짜 나혼자만 레벨업도 아니고…….’ 소환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레벨업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키엘이는, 경험치를 쌓는 것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레벨업을 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10레벨만 더 올리면 서사급으로 진화한다고? “흐흐흐.” 그야말로 미친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놈아. 탕후루나 내 놔라. 후우. 탕후루를 먹을 때마다 에고베슬에 영혼력이 쌓이면 좋을 텐데. 만약 그랬으면 내가 탕후루를 박스째 사다가 쌓아놓고……. 삐빅-! “만 오천 원입니다. 카드 이 쪽에 꼽아주시면 되세요.” “엇, 1+1행사 끝났나요?” “네네. 지금은 2+1 행사기간입니다.” “넵…….” 어쨌든 편의점에 들러 우리 귀하신 소환수님께 탕후루까지 대접해드린 뒤, 이제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물론 집에 돌아오자마자 김주연 여사표 등짝 스매싱부터 맞아야 했지만……. “이노무 자식아. 귀국했으면 집부터 먼저 찾아왔어야지!” “예? 그게 무슨…….” “어제 정민이 찾아왔었다.” “……!” “너 지난주에 귀국했다며?” “그게 그러니까…….” “죽어! 이 불효자식아!” “으아악!” 그래도 집에 들어와 침대 위에 늘어져 보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율이는 어디 갔어요?” “공부하러 독서실 갔지.” “게이트 폭주가 내일모렌데, 독서실을……?” “그럼. 할 건 해야지.” “…….” “이 집 버리고 어디 이민 갈 것도 아닌데, ”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띠링-! [‘마력 안정제(C급)’ 품목을 전량 매도하였습니다.] [‘정화소금’ 품목을 전량 매도하였습니다.] [‘마나 코어’ 품목을…….] 이제까지 쥐고 있던 현물들을, 미련 없이 싹 팔아버리는 것이었다. └ 뭔데;;; └ 진짜로 다 판다고? └ 마안제는 생명보험 같은 거 아님?;; -저 원래 보험 안 좋아합니다만. └ ㅈㄹㅋㅋㅋ └ 앜ㅋㅋ 방장은 마력 동기화율 높아서 마안제 같은 거 필요 없다고 ㅋㅋㅋ └ 개웃기넼ㅋ └ 그래도 노빠꾸로 다 팔아버릴 줄은 몰랐는데 ㄷㄷ -그리고 제가 한가지 깨달은 게 좀 있어서요 형님들. └ 깨달은거? └ 뭔데? └ ㅁㄷ??? -저 같은 소시민은, 투자 같은 거로 돈 벌 생각 하는 데 아니라, 성실하게 땀 흘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뭐 그런 깨달음이랄까요. └ 이 ㅅㄲ;;; 또 ㅈㄹ한다;;;;;; └ 방장쉑; 마안제 한 가지로만 5만LP 가까이 번 거 아님? └ 맞음 ㅅㅂ └ 정화소금이랑 마나코어까지 하면 10만LP도 걍넘겠는데; └ 마안제보다 마나코어가 ㄹㅇ킥임;; └ 방장 마나코어 얼마에 샀었지? -저요? 250LP쯤이었나……. └ 씹;; └ 오늘 3000LP에 다 판거 아님? └ 뭐냐; 최소 15만LP 이상 벌었겠는데? -제 계좌에 20만LP 조금 넘게 있으니까. 대충 그쯤 맞는 것 같긴 하네요. 후후. └ 하…… 인생. └ 배가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도다……. └ 이쯤되면 비틱도 재능이긴 해;; -그런데 형님들.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ㅇㅇ?? └ 뭔데? -솔직히 마안제가 이렇게까지 비쌀 일인가요? 사실 이해가 안 돼서 팔긴 했습니다만……. └ 아니, 안비싼게 이상한 거 아님? └ ㅅㅂㅋㅋ 다들 비동기 환경에서 너처럼 마력 쓸 수 있는 줄 암?ㅋㅋ └ 랭커들도 안정제는 필수인데……. -아니, 그건 알긴 아는데요. 블랙 존 안에 어비스 허브 있잖아요? 그거 채집하면, 마안제 대신 쓸 수 있을 텐데. └ 뭐……? 뭔 허브? └ 어비스 허브? └ 그건 또 뭐임??? 아, 설마……. 지구 플레이어들은, 어비스 허브의 존재를 모르는 거였나……?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격납고 안쪽에 매달린 모니터가, 한 번 더 깜빡였다. [KR-01 노드 시스템 안정도 : 2.71%] [예상 디폴트 시점 : 약 38시간 12분] 차재현 중령은 그 숫자를 1초쯤 응시한 뒤, 시선을 격납고 바닥 쪽으로 옮겼다. 콘크리트 위로 줄지어 늘어선 짙은 회색 군용 컨테이너들. 그 사이를 회색 근무복을 입은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충성!”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견장을 단 어깨가, 컨테이너 사이를 일정한 보폭으로 이동했다. 무영창 신영준 준장. 그리고 관리국에서 가장 강력한 실전 무력집단이라 불리는……. ‘신호위’의 단장이기도 한 남자. 군 내에서 유일하게 국내 플레이어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이 남자는, 차재현 중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력 안정제. 만료 임박분 몇 박스나 되나.” 앞에 가장 가까운 컨테이너의 봉인 라벨을, 그가 한쪽 손으로 짚었다. 신영준이 봉인 라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고. 옆에 대기하고 있던 보급 담당관이 클립보드를 들어 올렸다. “42박스입니다, 단장님. 13개월 안쪽으로 만료입니다.” “전부 1선 배치로 돌리지. 정화 소금 비축분은.” “3.2톤입니다. 비축은 정원 기준 78퍼센트입니다.” “비동기 1군 운반 동선 다시 확인하지. 강북 외곽까지 시간이 모자라지 않게.” “예, 단장님.” 차재현은 한 발 뒤에서 보고서를 들고 신영준의 명령을 들었다. 마력 안정제. 정화 소금. 해독제. 마나 코어. 비동기 환경의 전장에서……. 규모가 큰 전투군단일수록, 필수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자원들. ‘비축분이 어느 정도 확보된 게 다행인가.’ 최근 미친 듯이 치솟은 필수재들의 가격을 보며, 차재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음모론일 수도 있지만. 비동기 전투 필수재들의 가격이 이 정도까지 올라버린 건, 대한민국의 황폐화를 바라는 어떤 세력의 소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짓거리 해 봐야, 소용없겠지만.’ 대한민국 국방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속해있는 이 ‘신호위’는…….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어지간한 랭커 길드 한둘은 찜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니 다들 게이트 폭주가 시작된다는 말에 호들갑을 떨어대도, 차재현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이깟 폭주쯤,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저력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차재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 차재현이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신영준이 한 컨테이너 앞에서 잠깐 멈췄다. 나머지 컨테이너들과는 약간 다른 색 라벨이 붙은 박스였다. 보급 담당관이 한 박자 늦지 않게 보고를 이어갔다. “이쪽이…… 타격대 인솔 명단으로 배정될 분량입니다, 단장님.” “…….” 신영준 단장이 짧게 라벨을 살핀 뒤, 한 손으로 박스 봉인을 직접 짚어 확인했다. “수량 한 번 더 확인해주시오. 채 단장 쪽에 모자라게 가면 안 됩니다.” “예, 단장님. 재확인 마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차재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격대 인솔 명단으로 배정될 분량이라는 건. 이번에 검희의 주도하에 긴급 편성된 기동타격대의 몫이라는 얘기. ‘타격대 몫까지 단장님이 직접 챙기시는군.’ 신영준이 타격대를 신경 쓴다는 사실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다. 신영준 단장이 과거 검희와 전우였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며. 애초에 타격대의 존재 자체가 폭주 사태의 진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건……. 무려 ‘검희’라는 인물이 단장을 맡은 순간부터, 기정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 신호위가 해내야 하는 것일 뿐. 타격대는 서포터에 불과해.’ 만약 타격대가 필요 이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다면, 그건 용납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라락- 차재현은 보고서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신영준이 보급 점검을 일시 마무리하며, 격납고 한쪽의 임시 데스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보급 점검은 오늘 자정 전까지 마무리. 만료 임박분 1선 배치도 동시에.” 차재현이 한 박자 늦지 않게 답했다. “예, 작전 1과에서 직접 챙기겠습니다.” 격납고 천장의 형광등이 짧게 한 번 떨렸다. ‘폭주가 어떤 식으로 시작되든, 우리 신호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부턴 단순한 비유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폭풍전야였다. * * * 같은 시각. 서울 인사동 외곽의 한정식집 별실은, 격자창 너머 어둠이 한층 깊어진 상태였다. 좌식 테이블 위에는 차 두 잔과, 두 사람이 아직 한 입도 대지 않은 마른안주뿐이었다. 마광철은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거구 위에 자리 잡은 팔뚝이,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얹혀 있었다. 맞은편 정좌한 사내는 청룡회 마스터 최재민. 두 사람 다 평소엔 길드 본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이렇게 사적인 별실에서 마주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오늘 자리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5년 전이랑은…… 결이 아예 다르네.’ 마광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들었다. “오랜만이오, 최 마스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좋습니다.” 마광철은 단단히 한 호흡을 골랐다. “태산은 후방을 깔겠소. 강북 외곽 두 권역.” “화력은 우리가 채우겠습니다. 강남 쪽 핵심 노드 셋.” “수도권 응원물자는 분기별로 갈음하고, 비동기 환경 진입은 길드별 1군이 직접.” “동의합니다.” 쉽게 합의됐다. 원래 이 정도 동맥을 짚는 자리에서, 두 마스터급 사이에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폭주가 코앞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쪽 1군 명단은 정리됐소?” “내일 오전 중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우리도 동시에 보내드리지.” 마광철이 찻잔을 한 번 더 들었다. 식어가는 차였다. ‘그래도 이쯤 합의된 거면, 우선은 다행이고.’ “그나저나, 이번엔 관리국에서도 진심으로 준비하더이다.” 마광철이 별 뜸 들이지 않고 화제를 옮겼다. “김 국장 양반이, 인력 차출 명단을 한 번 더 직접 검토했답니다. 1군 안에서 누가 어디로 들어가는지까지, 거의 다 손수 봤다는 얘기요.” 최재민이 짧게 끄덕였다. “……5년 전과는 다르군요.” “일단…… 사람이 다르니까요.” “그렇습니다.” 마광철은 잠깐 천장을 응시했다. 5년 전과 다르다는 건, 당연히 긍정의 의미였지만. 그와 동시에 5년 전의 참혹했던 그 날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오늘과 달리 아무런 대책 없이 맞이했던 게이트 폭주. 덕분에……. 대한민국이 잃어야 했던 수많은 플레이어들. ‘그나저나…….’ 잠시 과거의 상념에 잠겨있던 마광철은, 문득 머릿속 누군가를 떠올렸다. “……최 마스터.” 마광철은 팔짱을 풀고, 자세를 한 단계 낮췄다. “한 가지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검희 말이오.” “관리국의 타격대를 얘기하시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최재민의 시선이 잠깐 찻잔에 머물렀고, 마광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관리국과 바르가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모르시겠지요?” 마광철의 질문에, 최재민이 껄껄 웃었다. “검희 님과의 친분은, 나보다 마스터께서 더 깊지 않소.” “으음. 역시나 모르신다는 이야기로군.” 별실 안에는, 짧지만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마광철은 생각에 잠겼다. ‘실버나이츠도 그렇고 바르가도 그렇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차 위에 떠 있던 잎 조각 하나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최재민이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들어 입을 축였다. 사실 게이트 폭주를 목전에 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이 사태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겠지만. 쪼로록- 그 안에 걸린 이권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랭커 길드의 마스터인 마광철 입장에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상 좀 펴시고. 드시지요, 마스터.” “예.” 최재민이 빙긋 웃었고, 마광철도 따라 찻잔을 들었다. 격자창 너머의 어둠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난, 조금 귀찮음을 감수하고 서울숲 인근에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서울숲역 입구 쪽, 공항버스 정거장 앞에 있는 2층 카페. 끼익- 그나저나 여긴 어지간하면 오전부터 만석인 카페인데, 오늘은 거의 파리 날리는 느낌이다. 아마도 게이트 폭주 하루 전이라 그런 거겠지. 내 입장에선 솔직히 이해가 안 되긴 한다. 게이트 폭주 하루 전이나 100일 전이나, 어차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갑자기 예정보다 하루 전에 게이트가 폭주하는 일 같은 건, 라이카 시스템 구조상 일어날 수가 없다는 소리다. 폭주 전날까지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카페를 오픈한 사장님이 옳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 흐음. 어쨌든. ‘내가 먼저 도착한 건가?’ 카페 구석에 자리 잡은 뒤, 커피를 두 잔 주문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귀찮음을 감수하고 이렇게 카페까지 행차한 건, 만나기로 한 사람이 최근에 내게 너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귀국하기 전에 커피라도 한잔하자는 요청을 외면하기엔…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버렸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우리 집 앞까지 행차하신다니까……. 땡그랑-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곧이어 카페 문이 열리면서, 캐리어 바퀴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좀 늦었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게이트 안에서 지겹게 보던 얼굴. 세일라 노빈이었다. “한산해서 좋은데?” 노빈이 자리에 앉으며 마스크를 끌어내렸다. 나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대로 쓰고 있어야 했다. 이래 봬도 헌스쿨 덕에, 꽤 유명해진 얼굴이라. 팔자에도 없는 연예인 행세를 하게 된 건, 꽤 불편한 일이었다. “나도 방금 왔어. 앉기나 해.” “그래?” 노빈은 그러더니, 자기 자리에 막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커피를 홀짝이며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외국어라곤 영어조차 제대로 못 구사하는 나였지만, 시스템 덕에 독일인과 프리토킹도 하고. 세상 참 좋아지긴 했단 말이지. “그나저나, 넌 안 궁금해 데이브?” “뭐가?”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말이야.” “흠.” “이제 솔직히 알 거 아냐?” “뭘?” “내가 평범한 중상위 레벨 서포터가 아니라는 거.” 그게 뭐 대순가……. 라고 말할 뻔. “뭔가 사정이 있겠지, 뭐.” “재미없기는.” “남한테 관심 갖기엔, 먹고살기 빠듯한지라.” “꽤 재밌는 농담이네.” 재밌는 농담이라니. 순도 100% 진심인데요? “…….” 어쨌든 뭐. 카페에 앉아 이렇게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유를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제 내일부터는 이런 여유가 불가능할 거 아냐? 호로록- 그런데 노빈 이 녀석은, 분명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것 같은데. 자꾸 이상한 소리만 떠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데이브 너. 솔직히 한국 길드에 묶여있기는 답답하지 않아?” 난 길드에 소속된 적이 없는데,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독일은 헌터 복지가 좀 다르거든. 분기 보너스가 따로 나오고. 6개월에 한 번 부서별로 휴양지 워크숍이 잡혀. 안전 보장도 까다롭게 따지고.” 본인 소속 길드 복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비틱질을 하질 않나. “그런 의미에서 너도 해외 쪽으로 눈 한번 돌려보는 건 어때?” “해외 길드? 어떤?” “당연히 랭커 길드 말하는 거지. 예를 들면 블랙크라운이라던가…….”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까지 자꾸 던진다. 저기요. 세계랭킹 2위 길드에 제가 어떻게 들어갑니까? 거긴 노빈이 너 정도 돼도 쉽지 않을걸? “답답해 죽겠네 진짜.” 아니, 갑자기 화는 왜 내는 건데? 이 녀석……. 나랑 같이 한 일주일 노가다 뛰었더니, 그 사이 분노조절장애라도 생긴 건가……? “에휴. 말을 말자.” “커피나 얼른 마셔. 곧 있으면 공항버스 오겠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대체 뭔 소리야?” “됐어. 일단 폭주는 끝나고 나서 얘기해야 순서가 맞는 거긴 하겠지.” 쪼로록-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던 노빈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입 쪽 빨아먹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여튼 폭주 기간 끝나서 출입국 가능해지면, 독일이나 한 번 놀러 오라구. 비행기표는 보내줄 테니까.” “뭐, 생각해 볼게.” 비행기표씩이나?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언제 밥 한번 또 먹자는 말을 이렇게 거창하게 표현하나? 아무튼 독특하다니까. 끼익- 어쨌든 우리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페 창 너머로 공항버스가 들어왔고. “버스 왔네.” 노빈이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올렸다. “그럼, 또 보자구.” “그래. 이번엔 진짜 고마웠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노빈이 다시 마스크를 끌어 올렸다. “폭주 때 죽지 말고.” “예예, 걱정 마시죠. 게이트 폭주 같은 거로 죽기에는 좀 억울한 몸이라서.” “흥.”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가는 노빈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다시 카페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보자……. 시간이 대충 30분 정도 남은 건가?’ 노빈이도 갔는데, 왜 귀가하지 않는 거냐고? 그야……. 지이잉- 사실 오늘, 약속이 하나 더 있었거든. 그것도 꽤 거물과의 약속 말이다. 다들 자꾸 왜 날 보자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발신자 : 채유현 멘토님] 어쨌든 이것도 가볍게 거절하긴 좀 어려운 약속이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골프장 클럽하우스의 통유리 너머로, 노을이 깔린 페어웨이가 보였다. 그러나 안쪽 라운지에는, 골프 가방도 운동복도 없었다. 대신 라운지 한가운데에 마련된 좌식 테이블. 그 위에 올라간 건 김이 살짝 오른 차 두 잔.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매듭이군.’ 장성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그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꽤 긴장한 상태였다. ‘오늘 이 자리만 잘 풀어낸다면, 큰 산은 확실히 넘는 셈인데.’ 차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지난 5년 내내 한 번도 풀어내지 못했던 매듭이, 폭주 직전이라는 이 한 자리에서 정리되는 셈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단정한 자세를 한 번 더 가다듬는 게 보였다. 윤민철. 실버나이츠의 부마스터. 잘 다림질된 짙은 회색 정장 너머로, 길드 부마스터답게 단단한 결이 묻어났다. “오랜만이오, 윤 부마스터.” “마스터께서…… 안부를 깍듯이 전해 올리라 하셨습니다.” “하하. 그 양반 안부야, 따로 받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오.” 장성호의 가벼운 농담에, 윤민철은 단정한 미소만 짧게 지어 보였고. 장성호는 짧은 미소로 그 답을 받아주었다. ‘실버나이츠 놈들은,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장성호는 습관적으로 윤민철을 슬쩍 떠보려다가, 입을 다시 굳게 닫았다. 실버나이츠라는 거대한 집단은, 아무리 국방부장관인 자신이라 하더라도 쉬이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의 인물은 무려 부마스터. 이쯤 되는 인물이라면 분명 실버나이츠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서 몹시 궁금했지만.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사실 실버나이츠가 무슨 꿍꿍이를 가진 것이든, 그에겐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어.’ 장성호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다음으로 잔을 내려놓는 동작에는, 짧은 한 박자 호흡이 묻어 있었다.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 장관님.” “이번 폭주가, 우리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자리라는 건……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테고.” 윤민철은 짧게 끄덕였다. “폭주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면, 추진해야 할 그 안건 말이오. 우리 쪽에서도, 슬슬 분위기를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쪽에서도 정화나 관리권에 대한…… 명분은, 준비해 두고 계시리라 믿소만.” “물론입니다, 장관님. 폭주 직후 데드 존이 형성된다면, 그 일대를 안정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곳은 결국 저희 쪽일 테니까요.” 장성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입가에는 어느새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간 지지부진했던 일들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김영태 그 자식 때문에, 너무 멀리 돌아왔어.’ 장성호가 말하는 그 ‘안건’이란, 데드 존의 자치권과 관련된 것이었다. 정확히는 정화·관리권을 나라에서 전부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역량이 되는 일부 대형 길드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한다는 안건. 지난 5년 내내 천문학적인 세금을 태워 가며 게이트 폭주를 억지로 막아오던 김영태가, 이번 안건도 걸고 넘어졌지만. 폭주가 시작되고 데드 존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의 반대는 점점 더 힘을 잃게 되리라. ‘게다가 이번 폭주만 끝나면, 김영태도 옷을 벗을 수밖에 없겠지.’ 장성호는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 지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자, 이 정도면…… 슬슬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모두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리고 장관님.” “음?” “이건 약소하지만…….” 품속에 슬쩍 손을 집어넣었던 윤민철이, 장성호를 향해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네었다. “받아두시지요.” “허허.” “항상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는 노고에 대한… 저희 실버나이츠의 성의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봉투를 받아 든 장성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미 실버나이츠로부터 약속받은 보상도 충분히 많았지만. 어쨌든 콩고물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던가. 어느새 봉투를 품 안에 집어넣은 장성호가, 다시 윤민철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실버나이츠의 성의. 확실히 기억하겠네.” 윤민철이 정장 자락을 말끔하게 정리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어서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한 번 더 마주쳤다. ‘후후.’ 장성호의 머릿속에, 문득 눈엣가시 같은 김영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 게이트 폭주를… 민간의 피해가 전무한 수준으로 막아내겠다고?’ 비장한 얼굴로 회의장에서 열변을 토하던 김영태의 얼굴이 떠오른 장성호는,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어떻게 발악하려는지, 궁금하기는 하군.’ 이제 며칠만 지나면, 시커멓게 죽어버린 김영태의 낯짝을 볼 수 있으리라. 그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장성호는, 클럽하우스 정문을 나가 대기하고 있던 관용차에 올라탔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의 노을은, 어느새 한층 짙어져 있었다. * * * 같은 시각, 서울 어느 거리의 가로등 옆. 대형 전광판에 공중파 뉴스 속보가 떠 있었다. [KR-01 노드 시스템 안정도 : 0.3%] [디폴트까지 약 1시간 24분] 지나가던 시민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그 화면에는, 현 게이트 관리국 국장인 김영태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5년 만의 게이트 폭주가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시청 중일 HBC 뉴스. 그곳 뉴스룸에 앉아 실시간으로 말하는 김영태의 목소리는 무겁고 진중했다. [하지만-] 그리고 비장했다. [이번에는 5년 전과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스튜디오 한 켠에서, 자막이 한 번 더 갱신되었다. [속보 — 게이트 폭주 임박 / 비동기 전술 타격대 본부 집결 시작] 거리를 지나던 한 노인이, 잠깐 한숨을 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시민은 휴대폰을 들어 그 화면을 한 컷 찍어 둔 채,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갔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안에는, 모두가 안전한 장소로 대피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크린에서는, 다시 김영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 관리국은, 전 세계 그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폭주를 대비해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5년 전과 비슷한 풍경. 다만 그때와 다른 건. 스크린 속에서 열변을 토하는 공무원의 말을 믿는 시민들이, 그때보다 훨씬 많다는 정도였다. * * * 정하윤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 한 데 모아져 있었다. ‘제발…… 별일 없기를.’ 노트북 스크린의 한 켠에는 HBC 뉴스가 팝업되어 있었고. [속보 — 실버나이츠, 이클립스 등, 최상위 길드 전투조 집결 완료.] 그 뒤에는 헌스쿨 커뮤니티 사이트가 깔려 있었다. 커뮤니티 사이트를 열어 놓은 데에 사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 한 달 동안, 온라인 상에서 동고동락하며 내적 친밀감이 쌓인 많은 사람들. 이들이라도 함께해야,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헌스쿨 루키들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지난 시간 동안 응원했던 헌스쿨 출연자들의 행방도 궁금했다. 헌스쿨 공식 발표에 의하면, 그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게이트 억제를 돕기로 했다는데. 그들이 걱정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폭주 기간 동안 어떤 식으로 활약해줄지 기대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가장 위험한 폭주 극 초반 며칠 동안은, 50레벨도 안 되는 루키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테지만. 그래도 중국 시안까지 가서 강도 높은 비동기 훈련까지 했다 보니, 조금은 기대되는 게 사실이었다. ‘아직까진 다들 안전한 곳에 있겠지?’ 그런데 바로 그때. 삐익- 삐익- 속보 알림이 한 번 더 울렸고, 하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노트북 스크린을 향해 움직였다. [……비동기 전술 타격대 1중대 본부 집결 완료 소식과 함께, 관리국에서 1중대 명단을 공식 공개했습니다.] 자막이 한 번 더 갱신되었다. [비동기 전술 타격대 1중대 — 1군 명단 공개] [비동기 전술 타격대는 관리국과 랭킹권 길드들이 합작하여 출범한 무력단체로, 검희 엘리제가 직접 인솔하는 총 100명의 인원이 전원 2차 전직 이상의 역량 있는 플레이어들로 구성되었으며……] 화면이 빠르게 명단으로 전환되었다. 명단은 위에서 아래로 쭉 스크롤되며, 짧게 헌터들의 이름이 노출되었다. 박세준, 김도윤, 이지희, 강민태, 한승호……. 빠르게 흘러가는 명단을, 정하윤은 멍하니 응시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스크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을 뿐. 그런데……. “…….” 어느 한 줄을 본 순간. 정하윤의 두 눈은, 크게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율] ‘응? 뭐라고?’ 그 이름이, 화면에서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노출된 채 지나갔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최소 2차 전직 이상 마친 상위권 레벨의 플레이어들로 구성되었다는 비동기 전술 타격대원의 명단에, 아직 50레벨도 채 되지 않았을 이건율이 포함되어있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깐…….’ 헌스쿨 커뮤니티를 확인한 하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으니 말이다. └ ㅇㅓ?? 방금 명단에 “이건율” 본 사람??? └ 본 듯;; 빠르게 지나갔는데 └ 걍 동명이인 아님??? └ ㄹㅇ;; └ 그렇겠지 ㅅㅂㅋㅋㅋ 헌스쿨 신인이 어떻게 1군 명단에 들어가; └ 근데 솔직히 이건율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니긴 한데; 하윤의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커뮤니티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타격대의 이건율이라는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동명이인일 테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타격대 있는 쪽은… 라이브하는 채널 혹시 따로 없나?’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하기는 해야 한다. 하윤은 그런 생각으로, 빠르게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 * * [KR-01 노드 시스템 안정도 : 0.0%] [디폴트가 선언되었습니다.] [게이트 폭주를 시작합니다.] 서울 하늘 한가운데에, 붉은 균열 하나가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같은 방식의 균열이, 한반도 전역 곳곳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중파 뉴스의 카메라가, 그 광경을 빠르게 잡아냈다. [……여러분, 보고 계신 화면 그대로입니다. 지금 막, 게이트 폭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앵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21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비동기 전술 타격대 1중대 임시 본부] 대기실이라고 적힌 천막 안쪽 끝, 접이식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댄 채로 나는 잠깐 천장을 올려다봤다. 폭주가 시작된 지… 이제 15분 정도 지났을까? 바깥은 난리가 났지만, 임시 본부 내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에겐 아직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금 이 순간 가장 바쁜 건 관리국의 지휘통제실일 거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불안정 게이트의 좌표를 파악하고, 준비된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파견해야 하니. 지금쯤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겠지. 그러니까 아마……. 우리에게도 한 10분 내로는 출동 명령이 내려지지 않을까? “명심하세요. 우리 타격대는 다른 전투조와 달리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지만…… 그렇다 해도 큰 맥락에서의 작전 수행은 항상 관리국의 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임시직이긴 하지만 우리 검희 멘토님의 부관으로 임명된 오유라 플레이어가, 어제부터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활동 지침 강령 등을 이야기한다. 그나저나 난 어쩌다 이 전술타격대 소속이 된 거냐고? 그야 당연히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나만 한 인재도 드물기 때문……. 이라기보단, 우리 멘토님의 적극적인 스카우트 덕분이었다. ‘······타격대 일당이 1,000LP쯤 된다고 했던가?’ 역시 멘티 사랑은 멘토님인가보다. 이런 귀한 자리에 직접 꽂아 주시기까지 하고……. 솔직히 이번 제안은 너무 완벽하다 못해 감사하기까지 해서, 처음에는 왜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푸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완벽하냐고? “흠흠.” 폭주 기간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돌아다니기에… 이 타격대만큼 완벽한 배경도 없단 말씀이다. ‘어차피 이런 국가 재난 상황에서… 랭커급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은 단독 활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내가 알기로 그레이존에서만 활동하려고 해도 관리국에 용병 등록을 해야 했으며. 옐로존 안쪽으로 활동반경을 넓히려면, 따로 관리국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레드존 안쪽은? 아예 진입조차 안 될 거다. 하지만 무려 검희가 통솔하는 이 타격대 소속의 플레이어라면……. “일단 작전 수행 구역에 도달하면, 우리 타격대는 각각 부여된 임무에 따라 자율적으로 단장님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지정된 데드 존 구역 안에서라면, 뭐가 됐든 자율적으로 움직여도 상관없다. “우리 타격대는 기본적으로 데드 존의 억제와 민간 피해 최소화를 목표로 움직입니다.” 물론 보고는 정확하게 다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든 활동내역에 대한 보고까지.” 이것도 벌써 한 세 번째 듣는 내용 같긴 한데……. “이것 하나만 명심하신다면, 특별한 규율 위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출동 명령이나 내려왔으면 좋겠다. 이번 주에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좀 있어서, 몸이 벌써 근질거린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저기.” 옆구리 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바람에,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반갑습니다.” “아, 네.”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 새로 앉은, 짤막하게 깎은 머리에 어깨가 두툼한 남자. “혹시 그… 헌스쿨 이건율 님. 맞으시죠?” 74레벨 B등급 전사. 레드어스 길드 소속이라고 그랬나? 1중대 명단에서 본, 장호진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음… 맞습니다.” “우와,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였다니!” 그… 평소에 헌스쿨 본방사수하던 팬이라도 되시는 건가? 권유나 같은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날 이렇게까지 반가워하실 일인가 싶기는 한데……. “그, 사인 혹시 가능하십니까?” “……예.” 멘토님을 제외하고는 여기 들어와서 처음 대화해 보는 사람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별다른 검증 없이 낙하산으로 꽂힌 터라, 다른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아니꼽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캬, 오늘 계탔네요.” “예?” “건율 님 사인도 받고.” “…….” 호진은 내게 사인받은 손목보호대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지난주에 길드 월급 모아서 산 신상인데, 건율 님 사인까지 받았으니 프리미엄 좀 붙겠는데요?” “……?” “아, 판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오해예요, 오해.” 뭔가 이 사람, 나랑 동류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뭐, 파셔도 됩니다. 제 사인이 별거라고요.” “캬. 쿨하시기까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보호대를 쓰다듬던 호진이, 한 번 더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그나저나…… 건율 님 혹시, 레벨을 물어봐도 됩니까?” “큰 비밀은 아니긴 하지만… 왜요?” “반가워서 깜빡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타격대에 어떻게 들어오셨나 싶어서요.” 그게 이제야 궁금해졌다고? “제 기억에 타격대 지원 최소조건이 2차전직이었던 것 같은데…….” “딱 그 커트라인입니다.” “예에?” “그… 무슨 문제라도?” “건율 님 헌스쿨 촬영하실 때 30레벨대 아니셨어요?” 그랬던 적도 있기는 했죠. 몇 주 전이긴 한데……. “와, 그러니까…… 요 몇 주 사이에 50레벨을 찍고 여기 지원하셨다고요?” 그런 셈이죠? “이야, 이 사람 진짜로 재능충이었네.” 그… 만년 넘게 노력한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잘해봅시다.” 어쨌든 이 형님. 편견도 딱히 없어 보이고, 첫인상이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형님인 건 어떻게 아냐고? 그야 액면가를 보면……. “그나저나 건율 님. 저희 나이도 동갑일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말 편히 해 볼까요?” 예……? 뭐라고요? “건율 님 서른여섯, 맞잖아요. 99년생.” 미친. 아니, 친구야. 세월이 오면 좀 피해 가기도 하고 그러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다 맞……. “반갑다, 친구야.” 으음. 좀 아저씨 같긴 하지만, 어쩌다 보니 동갑내기 친구도 하나 생겼고. “캬, 이 친구 시원시원한 거 진짜 마음에 드네.” 덕분에 심심치 않게 대기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지직- 천막 출입구 쪽에서 짧은 잡음이 한 번 새어 나왔고. 끼익- 대기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가면이 우리 시선에 들어왔다. ‘출동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첫 할당 구역이 배정되었습니다.” 검희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대기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남양주시 와부읍 인근. 자경대 1선이 옐로존 침식에 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장비를 점검하던 1중대 대원들의 손이 일제히 멈췄고, 옆에 있던 호진의 등도 자동으로 곧추섰다. 그리고 가면 너머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 “1중대 전원. 즉시 출동합니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고. 철컥- 끼이익-! 장비 챙기는 소리와 함께,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관리국 소속의 자경대원 박서준은, 40레벨이 조금 넘는 4년 차 플레이어였다. 레벨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래도 만으로 3년이 넘는 경력이라면……. 일반 자경대원치고는 확실히 적지 않은 경력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경력이 무색하게도, 서준은 온몸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플레이어로서 게이트 폭주를 마주하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빨리 안 움직이나!” [전방에 균열 생성 전조 감지.] 지지직- [균열에서 맹독성 물질 감지됨. 작전 수행 간, 방독면 필수 착용 요망.] “대열 유지하고! 전선 사수한다!” 박서준은 방독마스크의 결착 부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밀착감이 있었다. 지급받은 지 한 달 된 마스크인데, 이걸 실제로 끝까지 쓰고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서준아. 무전 들었지.” 조장의 짤막한 음성이 무전기 너머로 들어왔다. 안정훈 조장. 자경대 와부 분견 1조의 조장이고, 5년 전 직전 폭주에서 마지막까지 1선을 지키고 살아 나온 사람이었다. “네, 조장님.” “간격 유지하고, 안개 들어오면 즉시 후방으로 한 발씩. 뛰지는 마.” “……알겠습니다.” 박서준은 짧게 침을 삼켰다. 자경대 1조는 와부읍에서 멀지 않은 한강 변 자전거 도로 옆에서 통제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원래는 게이트 외곽 통제 임무였다. 폭주 전부터 한 일주일은 시민 대피를 유도해 왔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무전으로 가벼운 농담들도 오갔었지.’ 하지만 진짜 폭주가 시작되자, 가벼운 이야기들은 도저히 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키에에엑-! 균열이 발생하며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되기 시작한 지역은, 순식간에 침식되며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었다. 지직- 머리 위 어딘가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종류의 마찰음이 들렸다. 박서준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스템 인터페이스 패널이 짧게 한 번 깜빡였다. 지표가 떨렸다. ‘……노이즈?’ 옆자리 김 선임이 흠칫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서준아.” “네, 선임님.” “이거. 옐로존이다.” 다음 한순간이었다. 가로수가 산 채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은행나무였던 줄기가 마치 거대한 손가락이 안에서 비틀어 짠 것처럼 뒤틀리며 더 굵어졌다. 뿌리에서 검푸른 덩굴이 솟구쳤다. 그 덩굴이, 옆에 박혀 있던 전봇대를 한 번 휘감았다. “…….” “흐읍.” 순간적으로 박서준은 마스크 안에서 숨을 멈췄다. 그건 반사적이고 본능적인 것이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정말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런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극- 그그극-! 자전거 도로의 아스팔트가 한 면씩 진흙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 옆 풀밭이 이끼로 덮였다. 옅은 회색이던 한강의 공기에, 누런빛이 도는 안개가 한 겹 깔리기 시작했다. ‘……저 안개,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 지급받았던 매뉴얼 속 한 줄이 그 한순간 실제로 일어났다. [맹독 포자 안개 (Mire Wisp 추정): 시야 차단·중독. 방독마스크 필수, 후방 즉시 후퇴.] 그래도 관리국에서 분석한 폭주 전조 증상이 적중한 건지. 데드 존의 타입이, 지급받았던 매뉴얼과 일치하는 느낌이었다. 스하아아아- 하지만 매뉴얼을 미리 숙지했다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라는 건. “끄아아아악!” 곧이어 들린 동료의 처절한 비명 덕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쩌억- 쩌저적-! 방금까지 동료가 서 있던 자리, 진흙으로 변한 한 평 넓이의 아스팔트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며 뜯겨 올라갔고. 쿠콰콰콱! 진흙 아래에서 거대한 덩굴이 한 번 휘감겨 올라오더니, 동료 하나의 신형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씨발.’ 서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쩌면 오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플레이어로 각성한 뒤 처음 들기 시작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남양주시 와부읍 외곽. 집결지에서 정찰 차량을 타고 10여 분쯤 들어왔을 때, 시야 너머의 풍경이 한 차례 바뀌었다. 거대한 덩굴이 가로수를 휘감고, 보도가 산 채로 진흙으로 변모하는 한 줄의 경계선. 거기서부터가 우리 타격대 1중대의 임무 구역이었다. 본대가 짧은 보폭으로 정렬을 이뤘다. 가면을 쓴 인영(人影)을 선두로, 1중대원들이 각자 위치에서 도열했다. 나는 그 도열의 한 발짝 옆, 정찰 라인이 모이는 자리에 잠깐 섰다. 마스크의 필터를 한 번 더 점검하고. 철궁은 미리 어깨에 걸어 두고……. “흠.” 잠깐 시야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전장을, 한 번 더 응시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맹독늪지가 맞네.’ 베이스에서 출발 전. 관리국에서 폭주의 전조를 분석해 배포한 매뉴얼 PDF파일. 그걸 확인했을 때부터 거의 확신하고 있긴 했었는데, 현장에서 눈으로 보니 더 분명해졌다. 거대 식물, 치명적인 맹독, 찐득한 진흙. 그리고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안개까지. ‘솔직히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데…… 한국 입장에선 최악의 컨셉이 걸렸다고 해야 하나.’ 수많은 데드존의 컨셉들 중, 가장 지독한 컨셉에 속하는 데드존이 맹독늪지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베타 시절. 이 늪지 컨셉의 폭주환경을 처음 겪어봤을 때.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솔직히 그땐 패닉이었는데.’ 아마 한 15회차쯤? 대충 그 정도 시점이었을 텐데…….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여 있었던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늪지를 경험했을 때 겪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던 것 같다. ‘말 그대로 함정 지옥이랄까…….’ 그나마 다행인 건, 해외에도 이 맹독늪지 컨셉의 데드존 사례가 없지는 않다는 것. 관리국에서 아마 맹독늪지를 확인한 순간, 글로벌 아카이브에서 관련 정보를 충분히 확보했으리라 믿는다. 그게 아니라면 많은 플레이어들을 허무하게 잃어버리게 될 테니 말이었다. “그러니,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수색조의 경우, 최대한 신중히 움직여야 하고요.” 오유라 플레이어의 말에,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현장에 거의 도착한 상황이라, 모든 대원들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 중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타격대의 구체적인 임무가 뭐냐고? 그건 우리 검희 멘토님이 날 불러다놓고 했던 얘기를… 그대로 옮겨주면 되시겠다. [폭주 에너지가 강해 보이는 게이트에 선제적으로 파견되어, 구체적인 게이트의 위험 등급을 조사하고 해당 구역의 자경단을 돕는 임무입니다.] 게이트 폭주가 시작되면, 동시다발적으로 수십 곳에 불안정 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게이트가 열릴 위치까지는 마력의 흐름 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하지만, 게이트의 난이도는 그야말로 완전히 랜덤. 때문에 어디가 더 위험한지 사전에는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난이도에 맞춰 미리 병력을 분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렇게 폭주가 시작되면 가장 빠르게 선행되어야 하는 게, 각 불안정 게이트들의 난이도 파악과 그게 맞는 병력분배인 것. ‘지원병력은 곳곳에 분산되어 있고,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그래서 우리 타격대의 역할이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길드에 소속되어있지 않아 이권 관계에 자유로우면서, 다른 관리국 병력들보다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니. 효율적으로 병력이 세팅되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인 거다. ‘뭐, 첫 며칠 동안만 이 역할을 하는 거겠지만.’ 어쨌든 당장에는 주어진 임무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뭐.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내 입장에선 아주 마음에 든다. 왜냐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탐사 수색 임무가 위험한 임무인 만큼…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은신 스크롤을 찢으셔야 합니다.” 위험한 게이트 위주로 선제적으로 파견된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꿀냄새 나는 자원을 가장 먼저 선점할 기회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맹독늪지 필드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나에게 한정된 얘기겠지만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철컥- 우리가 타고 있던 군용 트럭이 멈춰 섰고, 공터에 가면을 쓴 인영이 뛰어내렸다. 그녀는 당연히 검희였다. “1중대.” 가면 너머에서 짧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대원들 하나하나에게 임무를 하달하던 오유라 플레이어도, 행동을 멈추고 검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수색 시작합니다.” 검희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간결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도열이 한순간 풀렸고. 타탓- 미리 하달된 명령에 따라, 대원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 * 장호진은 75레벨 B등급 전사였다. 레드어스 길드의 부팀장 직책을 차치하고라도… 충분히 상위권에 해당하는, 객관적으로 뛰어난 플레이어라는 뜻이다. 백분위로 따지면, 대략 상위 3% 정도 되는 실력자인 것. 그러니까 일반적인 경우를 놓고 보자면. 갓 2차 전직을 마친 50레벨 플레이어 두 명 정도가 모여도…… 호진 하나보다 나은 퍼포먼스를 내기 어렵다. 이건 자만이 아니라 업계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러니까……. ‘내가 잘해야지.’ 이건율과 같은 조원이 된 호진의 어깨가 무거운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필드 데이터를 좀 수집해 왔거든?” “오오, 그래?” “길은 내가 찾아볼게. 서포트 좀 부탁해.” “오케이. 그러자고.” 같은 1중대지만, 정찰 라인은 2인 1조로 짝을 이뤄 움직였다. 그리고 호진의 짝은,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이건율. 물론 평범한 50레벨 플레이어보다야 이건율이 훨씬 뛰어나겠지만……. ‘비동기 훈련도 빡세게 받았을 테고.’ 그렇다 해도 이게 25레벨이라는 물리적인 간극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래도 수색에 자신 있어 보이니까, 내가 엄호 역할을 잘 해봐야겠네.’ 사실 호진은 헌스쿨을 꽤 열심히 챙겨 봤었다. 본방사수까진 못했지만, 그래도 매주 빠지지 않고 봤고. 참가자들에게도 꽤나 몰입해서 시청했었다. 그리고 이건율은…… 인기를 얻기 전부터, 묘하게 마음이 가는 참가자였다. 그래서 뭔가 이 우연이 신기하기도 했고. 같은 조가 된 게 재밌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이쪽으로.” “헉- 헉.” “진흙 깊어지니까, 한 발씩만 옮기면서 천천히 따라와야 해.” “조, 조금만 천천히.” “안 돼. 여기선 템포 놓치면 위험하다고.” 미리 늪지 타입의 데드존에 대해 공부를 꽤 해 오기라도 한 건지. 이건율은 말 그대로, 거침없이 데드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이 친구는 혹시… 겁이라는 게 없는 건가?’ 심지어 호진이 보기에는, 이미 옐로 존 안쪽으로 들어온 지도 오래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깊어지면, 레드 존까지 도달도 가능할 정도. “그, 친구야.” “응?” “우리… 괜찮은 거 맞겠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은신 스크롤도 챙겨 왔잖아.” “그렇긴 한데…….” “위험하면 스크롤 찢고 무전 치면 된다니까.” “…….” 솔직히 호진은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질 않았다. ‘그런데 옐로 존 안쪽까지, 이렇게 쉽게 진입이 가능한 건가 원래?’ 이미 전선이 형성되어 관리 체계가 완성된 데드존이면 몰라도. 방금 폭주가 시작된 데드존에서는, 원래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는 게 쉽지 않다고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투도 한 번 안 했네? 함정 같은 것도 못 봤고.’ 뭔가 생각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치솟는 불안감. 그런데 잠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그때. “찾았다.” 갑자기 멈춰 선 이건율이, 갑자기 기행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친구야. 지금부터 엄호 좀 해줄래?” “그… 러지 뭐.” “한 10분이면 돼.”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짝 긴장한 호진은,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진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서걱- 까앙-! 이건율은 진흙 한쪽에 박혀 있는 검푸른 결정 조각을, 손가락 끝으로 뽑아냈다. ‘뭐 하는 거지?’ 이어서 변종 식물의 잎사귀를 한 줌 떼어 내고, 부패한 나뭇가지 한 토막을 짧게 꺾었다. 호진의 입장에서는, 뭘 하는 건지 짐작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도 일단, 이건율을 서포팅하라는 게 단장님 지시였으니까.’ 따로 그렇게 지시까지 하신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검희쯤 되는 인물이 단순 낙하산으로 이건율을 꽂아넣었을 리는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호진, 거기 그 잎사귀 한 줌만 더 줘 봐.” “어어. 그래.” 이건율의 기행이 점점 마무리되는 모양이었다. 파사삭- 호진으로부터 받은 잎사귀 더미를, 마치 양념을 다루듯 손바닥 위에서 한 번 비벼 가늘게 부수는 이건율. 이후 손바닥 위의 잡템들을 진흙 위에 한 줄로 늘어놓더니, 짧은 호흡 한 번을 뱉었다. “…자, 시작해 볼까?” “……뭘?” “호진, 두 발만 뒤로.” “야, 야. 너 뭐 하는…….”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 진흙 위에 늘어놓은 잡템들 사이로, 옅은 빛의 회로 한 줄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 마치 누가 진흙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빛이 한 줄에서 두 줄로, 두 줄에서 한 바퀴를 도는 원형으로. 마법 회로 같은 게 진흙 위에 그려졌다. “미친, 이게 무슨……?!” 호진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 한순간. 쿠르륵- 거대한 진동음과 함께, 지표면을 뚫고 진흙이 솟구쳤다. 콰아아아- 솟구친 진흙 안에서,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닌 정예 변종 마물 셋이 동시에 일어섰다. 크기가 일반 덩굴 마물의 두 배. 진흙을 빨아들인 비늘이 검게 굳어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괴수들. “……싯팔, 뭐야 이거?” 당황한 호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이건율을 향했지만. “굿.” 하나뿐인 조원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할 뿐이었다. 21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데드 존은 돈이 된다. 정확히는……. ‘폭주 초기’의 데드 존은 돈이 된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폭주가 시작되기 3일 전쯤의 일이었다. 전직을 끝낸 뒤 폭주 기간 동안의 구체적인 플랜을 세우던 중. 아카이브에 데드 존과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까. ‘지구 서버가 열린 지 그래도 10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로까지 데드 존에 대한 정보가 없을 줄은 몰랐네.’ 사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게이트 폭주 초기의 데드 존이 어떤 양상을 띠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게이트 폭주의 과정을 간결하게 설명한다면……. 1. 게이트 폭주의 시작과 함께, 노드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됨 2. 생성된 불안정 게이트 주변으로 심연의 마력이 퍼져 나가고, 이 마력의 확산과 함께 약 3~5일 동안 데드 존의 영역이 확장됨. 3. 이 시기에 블랙 존~그레이 존까지 모든 영역의 구조가 확정되며, 대지의 오염과 침식이 일어남. 4. 침식된 영역 곳곳에서는, 해당 영역에 최적화된 몬스터들이 젠 되기 시작함. 대충 이 정도의 느낌이다. 그런데 이게 돈이 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아주 구체적으로 관계가 있다. 정확히는 데드 존의 영역이 확장되는 시기인 3~5일 사이의 초창기 구간. 이때 집중적으로 파밍 가능한 ‘심연의 마력’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아주 큰 돈이 되니 말이다. ‘솔직히 이런 게 그렇게 비싼 값일 줄은 몰랐는데.’ 방금 마법진을 통해 젠 됐던 정예등급의 덩굴 마물들. 녀석들을 처치하고 얻은, 이 영롱한 ‘부식성 포이즌 슬러지’. 방금 전투 한 번에 무려 열 개도 넘게 드랍된 이 포이즌 슬러지가 개당 50LP나 한다는 건, 솔직히 상상조차 못 했던 부분이란 말이지. 아마 베타존 때 내가 파밍했던 잡템을 다 모으면……. 어쩌면 강남에 아파트 단지 전체를 다 살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좀 무리수인 것 같기도 하고. ‘크흠.’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지금 중요한 건, 이 ‘심연의 마력’이라는 성분이 개미 발자국만큼만 담겨있어도……. 모든 부산물들이 금값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 파밍 메이트 호진이 놀란 것도, 너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덕분에 처음 정예 몬스터가 소환됐을 때만 해도 얼굴이 사색이 됐던 99년생 동갑내기 친구 우리 호진이도, 지금은 아주 싱글벙글이다. 고작 40~50레벨 대 정예 몬스터 하나 잡을 때마다 백 단위로 LP가 파밍되는데. 행복하지 않으면 그건 플레이어가 아니지 않을까? “절반은 네 몫이니까 받기나 해.” “야이 씨. 내가 양심이 터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절반이 내 몫이야. 난 3할만 줘.” 뭐지? 이 친구… 상당히 괜찮은 녀석이었잖아? “4할 가져가. 대신 그만큼 부려 먹을 거니까 각오하고.” “캬. 미쳤다. 갓건율.” “그럼 바로 또 이동해 볼까?” “좋지.” 잠깐 사이에 갑자기 부쩍 친해진 느낌인데. 아무래도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냐?” 뭘? “심연의 마력 파밍 가능한 방법 말이야. 이거 데드 존에서도 엄청 희귀한 거로 알고 있는데.” 그거야 지구 서버 플레이어들이 파밍 방법을 모르니… 자연적으로 생긴 것들만 운 좋게 줍는 정도라 그런 거고. “공부 좀 했다니까 그러네.” “캬.” 방법만 알면 이거 그냥 무한 파밍 가능한 잡템이라. 아마 정보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면, 심연의 마력 값은 지금의 1할도 안 될 거다. 하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LP가 복사가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호진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내게 물어왔다. “그나저나 건율.” “엉?” “우리 근데 지금… 임무 수행은 하고 있는 거 맞지?” 당연한 소리를. 애초에 우리 임무가 수색 임무인데, 이거보다 어떻게 수색을 더 잘해? “리포트는 내가 작성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캬…….” 갑자기 감동한 표정이 된 호진이,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혹시… 형님이라 불러도 될까?” 제발. 그것만은 참아주면 안 될까, 친구? * * * 같은 시각. 와부읍 한강변 자전거 도로. 박서준의 옆에서 안정훈 조장이 한 번 더 휘청였다. 방독복 어깨의 한 자락이 그새 한 번 더 찢어져 있었고, 거기로 누런 포자가 한 줄 더 스며들어 간 모양이었다. 조장의 무릎이 진흙 위로 한 번 더 가라앉았다. ‘……조장님.’ 서준의 시야가 한 번 더 좁아졌다. 안개 너머에서, 마물의 새로운 그림자 둘이 한 번 더 다가오고 있었다. 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은 지옥이다. 지옥이 현세에 강림한다면, 정확히 이러한 모습일 터였다. ‘제기랄.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서준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의 옆에서는, 김 선임이 마력총의 잔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었다. “다섯 발…….” “그게 전붑니까?” “어떻게든 해 봐야죠 뭐.” “제기랄.” 김 선임의 짧은 동작이, 서준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한 박자 멈췄다. 다섯 발로는, 조용히 다가오는 그림자 괴수 둘을 전부 처리하기 어려울 터였다. ‘…….’ 서준은 활시위에 화살을 신중히 걸었다. 이제부터는 실수 한 번에, 팀원들 전체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서준의 손목이 떨렸다. 점점 더 짙어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피부로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스하아아- 듣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괴상한 소음이, 귓전을 타고 짜르르 흘러들어왔다. 이어서 몬스터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안정훈 조장이, 짧게 신호를 보낸 뒤 빠르게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타탓-! 기습으로 한 놈을 처치하지 못하면, 승산은 없다. 그 이성적인 생각이, 자경단원들의 두려움을 겨우 눌러 담고 있었다. “서준아! 지원사격!” “예!” 타탕-! 피이이잉-!! 김 선임의 마력탄이 불을 뿜었고, 동시에 서준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림자 괴수를 향해 쇄도했다. 캬아아악-! 그리고 다행히도. “됐다!!” 팀원들의 기습적인 공격은, 그림자 괴수 하나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방심 마! 한 놈 더 있다고!” 촤라악-!! 동료의 기습적인 희생에 분노라도 느낀 것일까? 남은 한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안정훈 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슉-! 그리고 그 난폭한 공격을 제대로 피해내지 못한 안정훈 팀장의 한쪽 팔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팀장님!!” “크윽-!” 하지만 필사적인 건 자경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폭주하는 녀석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팀원 전체가 그대로 전멸이었으니까. 그래서 서준은 필사적으로 활을 쏘아 대었고. 핑- 피핑-! 안정훈 팀장 또한 부상 당한 몸으로, 사력을 다해 괴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촤아아악-!! 하지만 잠시 후. 고오오오- 필사적으로 항전하던 안정훈 팀장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안정훈의 두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고. 어디론가 향해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 서준의 시선도 자연스레 옮겨갔다. 그리고. 키엑- 키에에엑-! 독 안개 너머로 스물스물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 그것들을 발견한 서준 또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아직 독 안개에 가려 정확한 형체가 다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한 마리만 있어도 위협적인 이 그림자 괴수들이, 적어도 열 마리 이상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만으로도, 겨우 30레벨을 넘긴 서준의 입장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 “다 끝났어…….” 안정훈 팀장의 중얼거림에, 서준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제,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아…….’ 그래. 그러니까 분명 이때만 해도……. 독 안개 안에 고립된 자경단원들은, 전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팀원 전체가 달려들어야 싸워볼 만한 그림자 괴수들이, 둘셋도 아니고 떼로 몰려들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떠올린다는 건, 분명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걱- “으음……?” 자경단원들을 향해 다가오던 괴수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을 때. 서준은 뭔가 상황이 달라졌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안개 너머에서 괴수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자신들을 옥죄어 오던 살기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 원이라도 이 도착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서준과 똑같이 느낀 김 선임의 말에, 안정훈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상으로 그럴 순 없어.” “으음.” “관리국에 지원을 요청한 게 한 시간 전이다. 30분 안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만 추가로 한 시간은 더 걸려야 정상이야.” 팀장의 말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들을 옥죄고 있던 살기는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던 그림자 괴수 무리들이,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 팀장님!” 짙은 괴수들의 살기가 전부 다 걷혀 나갔을 때. 스하아아아-! 갑자기 저 너머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짙게 깔려 있던 독안개가 어디론가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던 팀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잠시 후. 그들은 누군가 빠르고 일정한 보폭으로, 안개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핑- 피핑-! 서걱-! 경쾌한 금속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어어…! 진짜 사람이 있었네?” 자경단원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7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어어…! 진짜 사람이 있었네?” 안개 너머에서 한 박자 가볍게 흘러나온 그 한 마디가, 안정훈의 의식을 한 번 더 끌어올렸다. 오른팔의 피 분수는 응급처리로 잠시 멈췄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그 흐릿한 시야 너머로, 가면을 쓴 어떤 형체가 빠른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 안정훈이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건 산처럼 쌓여있는 그림자 괴수들의 사체였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사체들 너머에서부터 유유히 걸어오는 두 사람의 인영까지. ‘대체 어떻게 된…….’ 그러니까 안정훈은,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50레벨도 넘는 정예등급 몬스터인 그림자 괴수. 플레이어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60레벨에 준할 법한 이 강력한 마물들 십수 마리를……. 고작 저 두 사람이 모두 처치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직 50레벨조차 도달하지 못한 정훈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이 정도 퍼포먼스가 가능하려면, 최소 8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자경대 안에 그 정도나 되는 플레이어는 있을 수가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팀장님!” 박서준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안정훈의 오른팔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후욱….” 안정훈이 마스크 안에서 짧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두 사람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방독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 인사부터 건넨 안정훈이 부상 입은 오른팔을 한 번 짧게 추슬렀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자신을 비롯한 자경대원 전부는 하늘나라에 가 있었을 터였다. “별말씀을.” 그래서 안정훈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느 부대 소속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이 은인들에게는 꼭 보답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방독면 너머로 짧게 흘러나온 한 마디. “기동타격대 수색조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안정훈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동타격대라고? 타격대가 여기에 어떻게…….’ 안정훈이 놀란 건 사실 당연했다. 애초에 지원 온다는 부대가 기동타격대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데다. 이렇게 빨리 도착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긴. 그러니까 그림자 괴수들을 이렇게 쉽게 처치할 수 있었던 건가?’ 이러면 두 명이 그림자 괴수들을 쓸어버린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자경단 소속의 다른 부대였다면 레벨이 높아 봐야 50레벨 대이니, 고작 두 명이서 그림자 괴수 열댓을 처치한 게 이해되지 않았던 건데. 기동타격대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검희가 이끄는 기동타격대는, 평균 레벨이 80레벨을 넘었으니 말이다. 저벅- 뒤쪽에서 다가온 사내가, 안정훈의 팔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방독면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눈매를 보아하니, 먼저 말을 걸어온 타격대원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느낌이었다. “부상이 심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버틸 만합니다.” “얼른 여길 빠져나가셔야겠습니다. 당장은 괜찮아 보이실 수 있어도, 혈액에 독무가 스며들면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남자는 품속에서 갑자기 주섬주섬 이것저것 꺼내더니, 정훈에게로 다가와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당황한 상태에서 그 과정을 지켜본 정훈은, 잠시 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서포터 계열이었나?’ 말도 안 되게 현란한 몸놀림으로 벌어진 정훈의 상처를 봉합해버린 남자는…….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특별한 캐스팅 시간도 없이 치료계열 마법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크윽.” 덕분에 잠깐의 고통 뒤에,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린 통증. 정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한번 더 꾸벅 숙였다. 기동타격대에 대해 언론을 통해서 들어 알고 있기는 했지만. 검희가 직접 단장을 맡았다더니, 보통 인물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닌 것 같았다. “자, 됐습니다.” 순식간에 응급처치(사실상 응급처치가 아니라 완벽한 치료 수준이었다.)를 마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친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 기운 좀 차리셨으면, 이쪽으로 가시면 안전할 겁니다. 저쪽 모퉁이만 도시면 돼요.” 그에 안정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고. ‘……음?’ 다음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은…… 가장 위험한 방향일 텐데?’ 방금 자경대 1조가 그림자 괴수들을 피해 겨우 도망친 곳이, 바로 남자가 가리킨 그 방향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예, 도움 정말 감사드립니다.” 안정훈은 의심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그림자 괴수 십수 마리가 몰살당하기도 한 데다, 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줄 사람들로 보이지가 않았던 거다. “팀장님, 이쪽으로.” 박서준이 안정훈의 오른팔을 한 번 더 단단히 부축했고, 두 명의 타격대원들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후. 타격대원들의 보폭을 따라 짧은 모퉁이를 돌아 나온 순간. “……?!” 안정훈을 비롯한 타격대원들은, 자신들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그들의 시야에 나타난 풍경은, 방금 전까지 그들이 알던 지옥도가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점성 가득한 끈적이는 진흙도 없었고, 곳곳에 피어올라 있던 검붉은 이끼도 없었다. 심지어 누런 맹독 안개도 없었으며……. 가로등을 감싸고 있던 가시덩굴들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이게…….” 방금까지만 해도 그림자 괴수가 솟구치던 진흙 속의 자전거 도로였는데, 평범한 콘크리트 표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꿀꺽- 옆에서 박서준이 한 박자 늦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김 선임도 마찬가지였다. 5년 전 직전 폭주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데드존이 안에서부터 정화된다는 건, 일반적으로는 게이트를 파괴해야만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게이트를 부수지도 않았는데, 한 구간만 깔끔하게 정화되어 있다는 건……. 안정훈의 지식 안에는 없는 내용이었던 거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 따라 5분 정도 가시면, 굴다리 하나가 나옵니다.” 그들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격대원은 친절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굴다리 넘으시면 그 너머는 데드존 바깥쪽입니다. 본대 위치는 좌측 둑길 따라 200미터.” 짧고 간결한 설명. “관리국 응급 대기조가 그쪽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 이제 정말로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든 안정훈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른팔의 부상이 아직 욱신거리고 있었지만, 안정훈은 남자를 향해 다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혹시 두 분,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제 이름이요?” “살아나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황한 듯 잠시 멈칫하던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어서 짧고 정중하게 거절한 남자는, 자경대원들을 슬쩍 둘러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 고마우시다면, 들고 계신 채집물들이나 넘겨주시면 됩니다.” ‘……?’ 안정훈이 반사적으로, 박서준이 메고 있던 자경단 배낭을 돌아봤다. 그레이 존 외곽에서부터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정보 수집을 위해 채집해 둔, 별 가치 없는 잡템들. ‘……대체 이걸, 왜?’ 그리고 안정훈은 곧, 저들의 깊은 배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자경대원들은 지금부터, 부상 입은 상태로 본대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짐을 가지고 가다 보면 굴다리 넘기 전에 한 번은 손에서 미끄러지거나, 발이 늦어진다. 탈출 동선의 1분 1초가 중요한 와중에, 이 사람들은 그걸 미리 챙겨주려는 거였다. 그래서 안정훈은, 속으로 더욱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어쨌든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기에. 척- 자경단 배낭의 무게를 한 번 더 가늠한 안정훈이, 전부를 남자에게 넘기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 가져가시지요.” 이어서 배낭의 잡템들을 정중하게 넘긴 안정훈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본대에 복귀한다면, 누군지 어떻게든 알아내야겠어.’ 일단 지금은 한사코 거절하는 은인들의 정체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큰 실례다. 그러니 이들의 정체는, 추후에 찾아보는 게 맞다. 은혜를 갚을 방법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될 터였다. * * * 오늘은 운이 좋은 하루였다.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린다고 해야 할까. ‘이거 직접 채집했으면 못 해도 한 시간은 걸렸을 텐데. 개꿀이네.’ 자경대 일행이 자전거 도로의 안개 너머로 가려진 직후. 그들로부터 인계받은 잡템 더미를 한 번 더 확인한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심연의 마력이 깃든 잡텝들이냐고? 그건 아니다. 그런 귀중품(?)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선뜻 달라고 못하지. 이건 말 그대로 진짜 잡템이긴 한데, 마법진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물건들이라 개꿀인 거다. 어차피 저 사람들이 가져가 봐야, 마력 농도 분석에나 쓰이고 버려질 물건들. 아주 소중하게 잘 쓸 수 있는 내가 가져가는 게, 여러모로 맞는 방향성 아닐까? “후후.” 사람도 구하고, 돈도 벌고. 아무래도 아주 보람차고 흡족한 하루가 되어가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우웅-! 두 번째 스팟을 찾은 나는, 또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슥- 스슥- 평평하게 다진 진흙 바닥 위. 정교하게 그려진 경로를 따라, 옅은 빛을 내며 고동하기 시작하는 두 번째 마법진의 모습. 우웅- 우우우웅-! 처음에는 엄청 신기해하던 호진도 이제 적응한 건지, 자연스럽게 사주경계를 하며 내가 마법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됐다.” 그리고 호진 덕에 집중할 수 있었던 나는, 금세 두 번째 마법진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이잉- 그러니까 이제 한 3분 정도만 기다리면……. “그런데 건율.” 마법진을 통해 소환될 정예 몬스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가온 호진이 불쑥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잠시 머뭇거리던 호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뭔가 할 때마다 데드 존 영역이 정화되는 것 같은데, 이건 착각이지?” 흐음. 설마 이걸 이제 깨달은 건가? 사람이 이렇게까지 둔할 수가 있다고? “착각 아닌데?” “……??!” 호진의 두툼한 얼굴이 한 박자 동안 그대로 굳었다. 단검을 닦던 손도 그대로 멈췄다. 그래서 놀라보이는 그를 향해, 나는 간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마법진을 괜히 그리는 게 아니라고.” 정확히는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마법진. 그리고 이 마법진을 통해 소환되는 마물들. 그 마물들이 드랍하는, 심연의 힘이 가득 응축된 부산물들까지. 이 모든 게 완성되기 전 데드존이 품고 있는 심연의 마력을 정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라는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다 보면…… 마법진 인근의 심연의 마력 농도가 자연스럽게 옅어지고, 데드 존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말인 거지?” “그렇다니까.” “……미친.” 그리고 이 말을 들은 호진은 꽤 놀란 눈치였다. 놀랄 만도 한 게, 이건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아니었거든. 하지만. “그러면…… 이 방법.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이 형이 모른다고, 지구 플레이어들이 아무도 이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실제로 아카이브에도 보면, 연금술사나 마법사들 중에 고대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이거 마법진을 그릴 줄 알아야 해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냐.” “……?” 단순히 데드 존의 정화가 목적이라면, 일일이 스팟을 찾아 마력을 흡수해야 하는 이 방식은…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정화를 한다고 해도 깔끔하게 데드 존 자체가 지워지는 게 아니었으니. 모든 플레이어들이 알고 있는 방법인, ‘불안정 게이트의 파괴’가 훨씬 더 확실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방식은, 첫 5일이 지나면 쓸 수도 없는 방식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러니까. 전투 준비나 해.” “오, 오키.” “이제 시간 한 3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그 안에 최대한 많이 돌아야지.” “화… 확인.” 대충 납득한 건지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마법진을 통해서 나무 덩굴 형태의 거대한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에엑-! 그리고 녀석들을 발견한 나는……. ‘캬, 오늘 운빨 진짜 착착 붙네.’ 도저히 함박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18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콰직- 자전거 도로 가장자리까지 뻗어 나온, 거대한 나무의 검은 뿌리. 발목까지 차오르는 진흙 늪을 헤쳐 나온 몇몇 인원이……. 쿠웅-! 길을 막고 있는 거목을 쓰러뜨린 뒤,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입합니다.” 가면 너머에서 짧고 단정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바르가 길드의 간판 랭커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검객. 그리고 지금은 타격대의 단장이 된 검희. 그녀를 선두로 세 사람이 짧은 보폭으로 진흙 위를 디뎠다. “예, 단장님.” 검희의 오른쪽 한 발짝 뒤에서, 두툼한 양손 도끼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짧게 받았다. 강도빈. 바르가 길드 출신, 95레벨 안팎의 도끼 전사. 5년 전 있었던 직전 폭주에서 검희와 같은 1선을 지키고 살아 나왔던 동료이자, 그녀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다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검희에게 누구보다 깍듯한. 바르가의 충신이기도 한 인물이 바로 강도빈이었다. “……보조 들어갑니다.” 검희의 왼쪽 한 발짝 뒤에서는 오유라가 짧게 대꾸했다. 평소에는 임시 부관 톤으로 활동 지침이나 낭독하던 그녀의 손에는, 지금 가느다란 마법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100레벨대 마법사였고……. 그녀가 전술 타격대 1중대의 부관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부우웅- 레드 존 진입부의 진흙이, 안에서부터 한 번 출렁였다. 진흙 안에 잠복해 있던 정예 덩굴 죽수 한 무리가 매듭을 일제히 들어 올렸다. 크기는 평소 옐로 존 덩굴 죽수의 두 배가량. 비늘이 진흙을 빨아들이며 검게 굳어 있었고, 매듭의 빛깔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하지만. 서걱- 촤아악-!! 무려 여섯 마리나 되는 정예 괴수들이, 검희의 검격 한 번에 그대로 무력화되어버렸다. “속도를… 좀 더 높이죠.” “…예, 단장님.” 검희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 이 데드 존에서 그녀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진입한 플레이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 말인즉 자신이 최대한 빠르게 블랙 존까지 진입하여 ‘불안정 게이트’에 손상을 입혀야만, 이 데드 존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아무리 검희라 해도 혼자서 게이트 파괴까지 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아직까지 불안정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없었고.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파괴(혹은 봉인)하려면, 검희와 비슷한 급의 랭커가 최소 다섯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게이트에 손상을 입히고, 심연의 마력을 뿜어내는 심핵 몇 개를 파괴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오늘은 게이트 폭주 첫날이니까. 아직 불안정 게이트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타탓- 검희가 짧은 보폭으로 진흙 위에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촤라악-! 서걱- 검희의 붉은 검신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광이, 진흙 위의 안개를 날카롭게 가르며 회전했다. 그녀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키에에엑- 무려 60~70레벨짜리 정예 괴수들이, 괴성과 함께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검희의 이 활약상 덕분에, 일행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데드 존 깊은 곳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이시군요.” 유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짧은 감탄사. 하지만 검희의 표정은, 뭔가 미묘한 느낌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레드 존 안쪽으로 진입한 이후. 몇몇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미세하지만 분명한 위화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덩굴 괴수들이… 이렇게 약했다고?’ 검희는 글로벌을 기준으로도 최상위권 랭커인 만큼, 세계 각국의 게이트 폭주에 지원을 나간 경험이 많았다. 그중에는 이 맹독 늪지 콘셉트의 데드 존도 한 번 있었고. 그때 분명 덩굴 괴수도 상대해 봤었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3차 전직을 하긴 했지만…….’ 문제는 검희가 알던 것보다, 이 괴수들의 전투력이 너무 약하다는 점이었다. 분명 생김새며, 느껴지는 마력이며 검희가 일전에 마주했던 그 괴수들과 정확히 같은 녀석들이건만. 본인의 스펙이 강화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체감되는 괴수들의 전투력이 너무 낮았던 거다. “그만큼… 검희 님의 성장이 크셨던 것은 아닐까요?” 오유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검희는 고개를 단번에 저었다. 아니다. 이건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검희의 그 의심은, 블랙 존에 도달했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쩌어엉-!!! 블랙 존을 감싸고 있던 두터운 마력의 보호막이, 검희가 휘두른 검격 세 번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콰드드드득-! 그 안에서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오염된 마력의 농도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다. ‘설마 누가…… 나보다 먼저 도착했나?’ 원래대로라면 숨이 막힐 정도로 진득한 농도를 가졌어야 할 심연의 마력이, 검희가 알던 것보다 훨씬 묽게 희석되어 있었다. 이미 누군가 심핵을 몇 개 파괴해둔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들어가 보죠.” 검희의 두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이어서 검병을 쥔 그녀의 두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 * * 옐로 존에 들어온 지 1시간 정도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그사이……. [‘심연의 넝쿨’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지직- 지지직- [‘심연의 넝쿨’ 아이템을…….] 나는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아이템 파밍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나절은 족히 걸렸어야 할 작업이었는데……. 진짜 순식간에 해치운 느낌이랄까? ‘준비물도 날로 먹고, 넝쿨까지 한 방에 나올 줄은.’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다. 그래도 이 시국에 광대가 실룩거리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흠흠. 확실히 이거, 표정 관리 좀 하는 게 좋겠다. 나야 게이트 폭주를 천 번 넘게 겪어봤지만, 지구 사람들은 그게 아닐 테니까……. “흐음.” 양쪽 광대를 손바닥으로 빙글빙글 문지른 나는, 마법진 자국이 흩어진 자리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 “호진.” “어어?” “이제 레드 존으로 들어가야 해. 준비됐지?” “어… 가 보지 뭐.” 그리고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대략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옐로 존 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점점 음침해지는데…….” 독무가 점점 더 짙어지고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낀 것인지, 호진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찾았다.’ 목표물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쪽이야, 호진.” “알겠어.” 사실 이 꿀단지를 처음 찾았던 건, 나조차도 거의 500회차가 넘었던 시점이다. 그러니까 이 맹독 늪지 콘셉트의 폭주만 수십 번 경험하고 나서야, 아주 우연히 찾은 ‘히든 플레이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있길래 꿀단지라고 부르냐고? 데드 존에서 파밍 가능한 물건 중 마력핵보다 단가가 높은. 정말 몇 안 되는 희귀한 자원이 널려있는 곳이랄까? ‘묘목 결정이 개당 얼마였더라? 거의 1,200LP 정도는 됐던 것 같은데.’ 마력을 저장하고 담아서 옮길 수 있는 그릇 중…… 상당히 보존율이 높은 재료 중 하나이면서. 시스템의 영향이 닿지 않는 게이트 바깥에서 마력을 담아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희귀한 재료. 그런 걸 최소 열 개 이상 파밍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심연의 묘목 정원 (Abyssal Sapling Grove) 되시겠다. ‘후후’ 그렇게 행복회로를 굴리며 깊은 정글 속으로 이동하는데. 찰박- 도로의 콘크리트들이, 점점 깊은 진흙으로 변해 갔다. 가로수였던 자리에 거목의 줄기들이 하나씩 솟구쳐 있었고, 진흙 늪이 종아리까지 차오르는 영역이 시작됐다. 레드 존 경계였다. 지지직- [시스템 동기화율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짧은 보폭으로 레드 존 안쪽까지 걸음을 옮겼다. 진흙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구간을 짧게 우회하고, 거목의 검은 뿌리가 천장처럼 뻗어 있는 모퉁이를 천천히 지나쳤다. 그러자 거목, 정확히 일곱 그루가 모습을 드러냈고. “여긴 뭔가 지형이 부자연스러운데?” 호진의 중얼거림에, 나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썰미 좋다, 친구?” “뜬금없이 그게 무슨……?” 호진이 곧바로 느꼈던 이 직관을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여길 찾아내는 데 500회차나 걸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저기, 꺼멓게 죽은 나무줄기 보여?” “보여.” “이제부터 저 안으로 들어갈 거야.” 우거진 나무줄기 사이에, 유난히 꺼멓게 죽어있는 부분이 보였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좁은 틈이 나타났고……. 그 틈을 따라 한 발짝 더 들어가니, 이제까지 이곳 데드 존에서 봤던 그 어떤 나무보다도 거대한 나무 하나가 다른 거목들에 둘러싸인 채로 막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뭐, 따지자면. 일반 헌터의 눈에는 그냥 거목 군집의 막다른 골목 정도로 보일 수도 있는 지형이겠지만. 스윽- 옐로 존에서 파밍해 온 심연의 넝쿨을 꺼내 든 나는, 망설임 없이 거목의 앞으로 다가섰다. 저벅- 저벅- 그리고 다음 순간. “건율! 그게 뭐 하는……?” 성인 남성 네댓 명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그러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나무의 밑동에……. 지직- [심연의 마력이 감응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심연의 넝쿨을 천천히 휘감아 묶기 시작하였다. 219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쩌적- 거대한 나무의 검은 뿌리가, 안에서부터 천천히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심연의 넝쿨이 휘감겨 있던 자리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고, 그 빛은 곧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로 모양을 잡아 갔다. “들어가자, 호진.” “……오케이.” 호진은 짧게 대답했고, 건율의 뒤를 따라 통로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호진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 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통로 너머로 펼쳐진 공간은, 지름이 어림잡아 오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광장이었다. 천장이 십오 미터쯤 되는 높이에, 우거진 거대한 나무들이 둥글게 둘러서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그것들보다도 한참 더 큰 한 그루의 거목이 마치 기둥처럼 솟구쳐 있었다. 공동 전체에 푸르스름한 마력의 빛이 안개처럼 퍼져 있었고, 그 빛은 사방에서 호진의 피부 위로 미세하게 압력을 가해 왔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건. ‘마력 농도가…… 바깥의 몇 배는 되겠는데.’ 이 공간 안에, 숨이 막힐 정도로 심연의 마력이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얘는 대체… 이런 기믹을 어떻게 아는 거지?’ 사실 처음 이건율과 같은 수색조로 묶였을 때만 해도, 그냥 방송에서 보던 유명인이라는 게 신기한 정도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건율이라는 타격대 인원 중 최약체(?)와 한 조가 된 덕에, 안전한 수색 임무를 맡게 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지간한 랭커들도, 데드 존과 관련해서 이 정도까지 정보를 빠삭하게 알진 못할 것 같은데…….’ 막상 함께 다니다 보니, 이건율과 한 조가 된 건 고작 그 정도의 행운(?)이 아니었던 듯했다. ‘덕분에 오늘 내 몫으로 파밍한 LP만, 벌써 천 단위가 넘는 것 같네.’ 수상할 정도로 데드 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 게다가 헌스쿨에서 비동기 체질이라고 교관들이 감탄하던 게 사실이었는지, 데드 존 안에서의 전투 퍼포먼스도 도저히 50레벨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괴물. “시간 많지 않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그러니까 호진은, 폭주 기간 동안 이 녀석에게만 꼭 붙어 다니면……. 15일의 폭주 기간을 아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데드 존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인데, 적어도 이건율과 함께 붙어 다니면 그런 상황에 빠질 일도 없을 것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음……?’ 호진이 간과했던 한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그륵- 그르륵- 이건율이라는 인물이, 돈만 벌 수 있으면 위험한 짓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호진의 시선이 광장 외곽을 빠르게 훑었다. 사방의 진흙 늪 곳곳에서, 무언가 묵직하게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옐로 존에서 마주쳤던 덩굴 죽수들과 비슷한 형체이긴 했지만, 크기가 한참 더 크고, 붉은빛을 띠고 있는 괴수들. ‘70레벨… 정예라고?’ 호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게다가 숫자가…….’ 70레벨 정예 둘 정도까지는, 호진의 무력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하지만 셋 이상부터는 호진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여기가 안정화 게이트 안. 그러니까 시스템 동기화가 제대로 되는 필드라면 네댓도 거뜬하겠지만. 레드 존의 동기화율로는, 세 마리도 버거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 둘, 셋… 대충 여덟 정도인가? 왜 이것밖에 없지?” 대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태평한 표정이지? 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중얼거리는 건율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는 거 아닐까, 건율?” “음? 왜??” “내가 전력을 다해도, 셋 이상은 힘들어.” 하지만 건율은 미동도 안 했다. 그리고……. “알아.” “……?”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툭 하고 내뱉었다. “그렇다고 8천 LP 버릴 거야?” “뭐?” 건율의 손가락이, 핏빛 넝쿨 괴수를 가리켰다. “저거 한 마리당 천이야.” “미친?” “진짜 그냥 가?” “…….” “진짜로?” “시팔.” 호진은 저도 모르게 검병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건율의 한마디가 그의 심금을 울려버렸다. 마리당 천 LP짜리 몬스터를 두고 도주한다고? 그건 LP를 벌어먹고 사는 플레이어로서 실격이었다. 적어도 호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일단 하는 데까진 해 봐야…….’ 퇴로가 막힌 지형도 아니니, 최대한 싸워보고 진짜 죽을 것 같으면 그때 튄다. 솔직히 이 정도의 괴수들을 상대로 이건율까지 지켜주는 건 좀 어려워 보였지만……. ‘이건율 이 자식도 진짜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뭔가 생각이 있을 거다. 여기도 미리 알고 찾아온 것 같으니까. “후우.” 호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괴수들을 응시하는데. “바니, 나와.” 건율도 본격적으로 전투를 하려는 건지, 소환수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우웅- “아아…… 바니를 내버려 둬…….” 건율의 앞으로 풀썩 하고 나타난 하찮은 외모의 토끼 인형. 그리고 건율은 어느새. 기기기긱-! 괴수들을 향해, 철궁의 시위를 바짝 당기고 있었다. * * * 긴급 대피 명령이 떨어진, 남양주시 와부읍. 데드 존의 그레이 존에는 발 빠르게 임시 베이스캠프가 세워졌고, 이곳은 아침부터 상당히 분주했다. “부상자 빠르게 이송 부탁드립니다!” “마력탄 보급 아직인가요?” “지원 병력은 전부 도착했습니다!” 천막 안팎에는 자경단원들의 보조 장비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고, 관리국 직원 몇몇이 분주하게 통신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천막 안에서. “……자, 카메라 위치는 여기.” 한 남자가 기자 수첩을 깔끔하게 정돈한 뒤, 카메라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제가 나와 있는 이곳은 폭주 첫날의 KR-01 노드 데드 존, 그 한가운데에 가장 가까운 그레이 존 베이스캠프입니다. 민간인 사상자는 아직 정확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현재까지로는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데드 존 영역이 다행히도 주거지역과 크게 겹치지 않은 덕분에…….” 한도윤. 30대 후반의 베테랑 종군기자. 관리국 홍보·기록팀 소속이라는 명함이 그의 공식 직함이긴 했지만, 사실 한도윤은 본인의 정체성을 그 명함보다 한 발 더 앞쪽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식 기록이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현장감 넘치는 취재를 욕심내는 타입. 특히나 게이트와 관련된 취재는 그의 전문이었고, 그게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또한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었다. 무려 30레벨대 플레이어인 한도윤은, 어지간한 전업 플레이어만큼이나 높은 레벨을 가진 기자였다. ‘5년 만인가. 이런 분위기는.’ 5년 전 폭주 당시, 그는 원래 종군기자가 아니었다. 다만 얼떨결에 각성한 이후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데드 존 현장을 취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게이트 전문 취재 기자가 되었고, 결국 관리국 소속의 종군기자로까지 전향하게 된 케이스였다. 그리고 도윤은, 자신의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의 취재 덕에, 플레이어가 아닌 민간인들도 게이트와 관련된 기사를 더 현장감 넘치게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일찍 들어오길 잘했어. 관리국 홍보팀 직함이 이럴 때는 무기라니까.’ 한 차례 촬영을 마친 한도윤은, 카메라를 가볍게 어깨에 걸치고 천막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쪽 임시 의료 천막 앞에 모여 있는 자경단원 몇 명이 보였다. 방독복 차림에, 몇몇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옐로 존 안쪽에서 살아 돌아온 자경단 1조였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 60레벨대로 보이는, 가장 베테랑처럼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사내가 한도윤의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조장이군.’ 한도윤은 카메라와 녹음기를 챙겨 그쪽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한도윤이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잠시 말씀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조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면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한도윤의 카메라를 한 번 살핀 뒤. “……예. 짧게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피곤이 짙게 묻어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드 존 안쪽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 돌아오셨는지.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한도윤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조장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자기 한쪽 팔을 짧게 한 번 만졌다. 한도윤은 그 간단한 동작에서 무언가가 있었음을 직감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솔직히…….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조장의 입에서 길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옐로 존 안에서 결국……. 동료도 한 명 잃었고. 저도 팔 한쪽이 아주 망가져 버리고 말았죠.” 한도윤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옐로 존이라…. 꽤 깊숙이 파견된 팀이었군.’ “그런데…….” 조장의 시선이 잠깐 데드 존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줬습니다.” 이어진 남자의 이야기는, 한도윤의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일단 자경단원을 구출한 플레이어들이 최근 대중들에게 가장 핫한 타격대 소속 대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데다가……. 자경단원의 입을 통해 들은 그들의 활약이,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60레벨급 정예 마물이 그렇게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가면 쓴 두 사람이…… 둘이서. 그걸 다…….” 한도윤은 자기 메모지에 간략하게 글자를 적었다. ‘60레벨급 정예 마물들을 둘이서 쓸어 담으려면, 최소 80레벨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더니 카메라 너머로 짧게 한 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검희 님이셨을 확률은…….” “없습니다. 남자분 둘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 두 분이 아니셨다면, 저희는 진짜 다 죽었을 겁니다.” “…….” 한도윤의 펜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특종의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하필 타격대가 파견된 현장이 여기라니. 운도 좋은데?’ 급조된 무력 집단 타격대에 대해, 그동안 매체에서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팬덤을 가진 검희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무력 단체인 데다가. 검희 한 사람의 무력이 전부라는 평가와 1중대 평균 80레벨이라는 발표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으니. 실제 타격대의 활약을 제대로 취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회수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일반 타격대원들이 옐로 존에서 자경대원들을 구출했다니.’ 이건 잘만 정리하면 분명히 특종이었다. 한도윤의 손등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시면 혹시, 그 두 분의 외형이나 사용한 무기 같은 거 기억나시는…….” 그런데 바로 그때. 한도윤이 다음 질문을 막 던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베이스캠프 전체를 한 차례 흔드는, 거대한 굉음이 데드 존 안쪽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어?” 한도윤의 시선이 단번에 데드 존 쪽으로 움직였다. 자경단원들도, 관리국 직원들도, 통신 장비를 만지고 있던 사람들도. 베이스캠프의 모든 인원이 일제히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후우우우- 구역 전체를 휘감고 있던 짙은 독 안개와 심연의 마력이. 허공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모든 것이. 데드 존 안쪽 어딘가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한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를 그쪽으로 들어 올렸고. 지지직- 베이스캠프 안에 있던 모든 각성자들. 그들의 시스템 인터페이스에서 동시에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안정 게이트가 파괴되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카메라를 든 한도윤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고정되었다. 폭주 첫날에, 불안정 게이트가 파괴됐다고? 지금? 도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220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검희의 붉은 검신에서 뻗어 나온 검광이, 결계의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가르고 지나갔다. 쩌적- 이어서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흉포하고 날카로운 검기의 소나기들. 콰콰콰콰쾅-! 그리고 그 모든 검기들이 하나의 극점을 타격하며 소멸했을 때……. 쩌어엉-! 균열이 결계 표면을 따라 한순간에 갈라졌고, 그 갈라진 틈으로 짙은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안개 너머에서. ‘······.’ 가면 너머에 가려진 검희의 두 눈에 짧은 이채가 어렸다. “찾았군요.” 일그러진 공간. 그리고 검은 균열. 진득한 심연의 마력이 한데 뭉쳐 어두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저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 “저게…… 게이트.” 유라의 중얼거림처럼, 그것은 불안정 게이트의 본체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남양주시를 집어삼키고 있는 거대한 데드 존. 이 죽음의 땅을 지배하고 있는, 심장과도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다. ‘오랜만이야…….’ 검희는 짧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 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벅- 후방에서 익숙한 기척들이, 결계 너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단장님.” 걸걸하지만 묵직한 목소리에, 검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고생하셨어요.” “별말씀을….”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등에 검은 강철로 단단히 벼려진 강궁을 매고 있는… 남자답고 단단한 인상을 가진 사내. 105레벨로 준 랭커급 플레이어이자 청룡회 출신의 베테랑 활잡이인 류성훈은, 최재민이 직접 검희에게 추천해 합류하게 된 타격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면 돌격조 전원 블랙 존에 도달한 건가요?” 검희의 이어진 질문에는, 류성훈의 옆으로 다가온 다른 대원이 대답했다. “구출 임무 수행 중인 3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입 완료입니다.” 태산 길드 소속의 준 랭커 플레이어 중, 몇 안 되는 여성 플레이어인 차예린. 마력이 옅게 부여된 장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그녀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검희가,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한번 시도해 볼 만 하겠어.” 검희의 그 말에, 그녀의 주변에 늘어서 있던 플레이어 중 몇몇이 움찔했다. 검희가 지금 시도해볼 만하다는 게 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단장님… 진심이십니까?” 강도빈의 질문에, 검희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당연히 진심입니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건, 이 남양주 데드 존의 심장을 파괴하려는 것. 원래대로라면 120레벨쯤 되는 랭커 너댓 명은 있어야 시도해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가 감히 단장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도빈의 나직한 목소리에, 검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아요.” “단장님.” 지금 이곳 블랙존에 모인 타격대의 돌격조 열둘은, 평균 100레벨이 넘는 강자들이다. 하지만 검희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 전부의 힘을 합쳐야, 검희 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 그러니 이 전력으로 불안정 게이트 파괴 작전을 시작하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저건 내가 알던 그 완전한 게이트가 아니야.’ 검희의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 남양주의 불안정 게이트는,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3차 전직까지 마친 검희 자신과, 나머지 돌격대원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렵게도 아니고 아주 수월하게 파괴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날 믿으세요.” 그래서 검희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적어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남양주시의 시민 약 70만 증, 현재까지의 사상자 숫자만 대략 2천 명이 넘는다. 데드 존 침식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 매일 그 숫자가 배수로 늘어나게 될 터였고……. 폭주가 지속되는 보름이라는 시간을 그대로 다 흘려보낸다면, 그 사이 잃게 될 인명과 자산 손실은 천문학적인 수준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불안정 게이트를 파괴해 낸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음은 물론,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수습된 구역으로 기록되겠지.’ 게다가 퇴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타격대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이미 지원대를 요청해 놨으니……. “……제가 먼저 진입하죠.” 마음을 완전히 먹은 검희가 결계의 균열을 향해 가장 먼저 걸은을 옮겼고. 저벅- 나머지 돌격조 12인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보폭을 옮겼다. * * * [‘핏빛 넝쿨 괴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핏빛 넝쿨 괴수’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핏빛 넝쿨 괴수’를 -] 지지직-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도……완료] 레드 존의 동기화율이 안 좋아서 그런지, 시스템 알림이 잠깐 깨졌다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부산물 채집을 마친 나는……. ‘캬.’ 인벤토리에 빵빵히 들어찬 LP 덩어리(?)들을 보며, 아주 흡족한 미소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노다지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호진과 내가 파괴한 넝쿨 괴수들의 거대한 밑둥 아래에서, 마치 유전이라도 터진 것처럼 심연의 마력이 콸콸콸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파밍한 묘목 결정을 가져다가 그 석유(?)를 열심히 담는 중이었다. “그…… 뭐 하는 건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 님도 하셈. 돈 줌. 묘목 결정 몇 개를 챙긴 호진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마력 결정을 담기 시작했고 말이다. “후우우.” 방금까지 전투가 꽤 힘들었는지, 호진은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호진 군. 실망이야. 70레벨 플레이어가 고작 이 정 도 전투에 힘들어하다니. 50레벨 초보(?)도 이렇게 팔팔한데 말이지. “그건, 네가 이상한 게 아닐까?” 그렇긴 해. “그나저나 묘목 결정 다 꽉 차면, 이제 뭐 하는 거야?” 잔바리 다 수거했으니, 이제 메인 디쉬를 챙길 차례겠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설명을 마친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정원의 한복판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궁- 정원 전체에 강한 진동이 울려퍼지더니……. 쩌어억-! 흉악하게 생긴 나무 뿌리가 바닥을 뚫고 나오면서, 지면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쩍- 쩌어억-! 균열 사이로 검은 안개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거대한 가지와 뿌리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동물처럼 꿈틀거리며 지면을 뚫고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쩌적- 가장 두터운 줄기 중앙이 갈라지면서, 어두운 구체 같은 눈동자 하나가 천천히 열렸다. “야, 이건……!” 그걸 발견한 호진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괴수의 정체는 무려 80레벨대 보스급 몬스터였으니까. “이제 진짜로 튀어야 되는 거 아니냐?” 튄다고? 쟤가 아니고 우리가? “무친 놈이! 뭐라는 거야?” 레스토랑에 와서 돈 다 내고(?) 에피타이저만 먹고 나가는 미친 놈을 봤나. “……??” 그나저나 이제 슬슬… 마나 포션이 아까워서 이제껏 아껴두고 있던 카드를 한 번 꺼낼 때가 되었다. 우우웅-! 아무리 나라고 해도 키엘이 없이 80레벨 보스급 몬스터와 맞대는 건, 꽤 무식한 짓이 아닐 수 없었었으니 말이다. 화아아악-! 내 옆에서, 거대한 황금빛 마력이 한 번에 폭발하듯 솟구쳤다. 이어서 황금빛 비늘이 정원이 머금고 있던 검붉은 빛깔을 그대로 튕겨내며 반사했고. 거대한 두 쌍의 날개가 내 머리 위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이게 무슨…….” 태양의 성룡. 그러니까 70레벨 각성 상태가 된 키엘. 이 녀석과 함께 전투하려면 비싼 마나포션 몇 개는 녹여야 할 텐데……. ‘젠장.’ 아무리 10만원짜리 스테이크가 눈앞에 있어도, 팁 5천원이 아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키아아오오-!! 우리를 발견한 건지, 지면을 뚫고 완전히 나온 ‘거목 어미’가 나무줄기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천천히 다가온다. 쿵- 쿵- 그리고 그것과 마주한 키엘의 두 눈동자에, 황금빛 안광이 깊게 어렸다. [애플포도 탕후루.] “콜,” 고오오오- 탕후루 귀신 드래곤이 제대로 자세를 잡고 전투태세를 취하자, 거대한 마력이 녀석의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각성한 이후에는 제대로 전투해보는 게 처음인데……. 확실히 느껴지는 위압감부터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일단 드래곤 피어부터 시원하게 갈기고 전투 시작하면, 저런 못생긴 나무 괴물 정도는 가볍게……. 고오오오오-! “으응?” 지직- 지지직-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눈앞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심연의 마력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콰아아아-! 흉악한 나무줄기를 흔들거리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거목 보스 형님이, 갑자기 허공에서 산산히 분해되기 시작한 거다. 마치 키엘이 등장하며 입 한번 쩍 벌린 순간, 80레벨대 보스 몬스터가 허공에서 소멸되기 시작한 그림이랄까. “그… 방금 뭐한 거야, 건율?” 호진이 이 녀석은 내가 당연히 모든 걸 알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나도 지금 상당히 당황했거든? “나도 몰라. 이게 어떻게 된…….” 호진만큼이나 당황한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불안정 게이트가 파괴되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른 한 줄의 메시지 덕에, 내 사고회로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게이트가… 파괴됐다고?’ 그거 최상위 랭커 다섯 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설마 헌스쿨 멘토라도 남양주로 총출동한 거야? 후우우우- 정원 안의 푸르스름한 마력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외부의 짙은 독안개와 심연의 마력이 어디론가 한꺼번에 빨려들어 가는 소리가, 정원의 결계 너머에서 멀리 울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정원 중앙의 거목 잔재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가장 안쪽에서. 정원 자체가, 안에서부터 천천히 정화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면…….’ 내 거목 정수는? 이제 밥상 다 차렸는데, 이걸 갑자기 엎어버린다고? 콰아아아-! 솔직히 어안이 벙벙하다. 게이트 파괴되는 거 처음보냐고? 응 처음 본다. 난 애초에 베타 때, 게이트를 파괴해 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거 파괴해 봐야 리셋 당하는 건 똑같으니, 내 입장에서는 게이트가 파괴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후와아아악- 심연의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지면서, 그 아래 억눌려있던 생명의 기운이 천천히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위에 뒤덮여 있던 늪지대는 마치 마법처럼 어디론가 소멸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뒤틀린 지형과 파괴된 구조물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최소 수만 LP를 잃어버린 나는. 털썩-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221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서울 광화문, 실버나이츠 본사. 그 가장 깊숙한 층에 자리한 한 사무실에서, 사내 한 명이 책상 위에 정리된 두꺼운 자료들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확실히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특수 조직 아르카나의 1팀장 류강민은, 최근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여 왔다. 겉으로 볼 때에는 국내의 다른 랭커 길드에 비해 비교적 조용했던 실버나이츠였지만. 물밑에서는 아마 그 어떤 길드보다 가장 바쁘게 움직였을 실버나이츠. 그 대부분의 활동을 총괄한 인물이 바로 류강민이었다 보니, 최근 그는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수준이었다. 정치권 인사들과의 비공식 회동, 일부 군 인사 접촉, 길드 내부 작전 조율, 그리고 인사팀 백하람을 통해 진행 중인 몇 건의 별개 라인까지. 폭주 사태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류강민이 깔아 둔 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제는 지켜볼 일만 남은 셈이군.’ 류강민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책상 위 모니터의 스크린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어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바로 한 시간 전의 통화내용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잔류 데드 존 중 최소 3할 이상을 실버나이츠에 할당해 드리겠다는 이야깁니다.] -차관님. 절반 이상은 안 되겠습니까? [이 이상은 곤란해요. 아무래도 국민들 보는 눈도 있고…….] -데드 존 잔류구역 관리가, 사실상 남는 것도 없다는 점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국민을 위해 실버나이츠에서 희생하는 그림으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그림을 그리려면, 근거 자료를 좀 주시면…….] -예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후우.] -그럼 남은 이야기는, 자료 보시고 마저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마스터께서 직접 지시한, 이번 폭주 기간 동안 류강민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그건 바로 데드 존 정화에 실패한 구역의 관리권 3할 이상을, 실버나이츠에서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제 고지에 거의 다 온 상황이었다. ‘……자치권 법안만 통과되면, 게임은 끝이다.’ 류강민의 손가락이 책상을 한 번 미세하게 두드렸다. 몇 주간의 작업이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했으니, 그의 입가에는 절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후후.” 자치권 법안의 골자는 단순했다. 폭주가 종료된 후, 정화에 실패한 데드 존 구역의 관리·운용 권한을 민간 길드가 인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사실 이 법안이 통과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게이트 내부의 자원이 충분히 풀리기 전인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야 데드 존의 채굴 가치가 상당히 높았고. 게이트 현상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도가 극도로 높았으니, 민영 길드에서 게이트를 관리한다는 법안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최근 해외에서는 오히려 대형 길드들이 데드 존을 관리하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랏님들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단 말이지. 데드 존 관리를 위해 기관 설치하고 인력 관리하고 하는 것도, 다 일이니 말이야.’ 그런데 류강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똑똑- 사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팀장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가벼운 회색 정장 차림의 사내 한 명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르카나 소속. 류강민 직속 부하 길드원이었다. 철컥- 문이 닫힌 뒤 남자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류강민의 앞에 섰고, 류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고를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전국에 총 36개의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오호.” “지난 폭주 대비, 초기 게이트 생성 숫자가 1.5배가량 많은 수치입니다.” “계속해.” “각 게이트에서 관측된 심연의 마력 농도도 평균적으로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되며…….” 부하 길드원의 보고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류강민의 입가에 걸려있던 옅은 미소는 점점 더 진해졌다. ‘관리국에서 애 좀 먹겠군.’ 두 번째 폭주이니만큼 처음보다 더 강력한 게이트가 생성될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보고 내용에 의하면, 실버나이츠에서 내부적으로 예상했던 수준을 꽤 상회하고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불안정 게이트가 날뛰면 날뛸수록. ‘관리국은 우리 실버나이츠의 도움이 절실해지겠지.’ 실버나이츠가 가져갈 수 있는 관리권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으리라. 폭주가 끝났을 때 남아 있을 게이트 숫자도, 더 많아질 테고 말이다. “이상, 보고 마칩니다.” 류강민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예, 팀장님. 그러면, 저는 이만….” 부하 길드원이 짧게 인사하고는, 다시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류강민은 책상 위에 두 손을 마주 모은 채 잠시 침묵에 잠겼다. ‘마스터께서 만족하시겠군.’ 당초 실버나이츠가 목표로 한 게이트 관리권은, 대략 20~30개 정도였다. 폭주 기간 동안 총 100~150여개의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될 것을 가정하고, 그 절반 정도까지 정화에 성공할 것을 가정한 수치였다. 하지만 첫날부터 무려 서른여섯 개의 게이트가 생성된 지금. 목표를 2배까지 올려도 될 것 같았다. “흐음.” 류강민의 입가에 또 한 차례의 짧은 호선이 어렸다가,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류강민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왜 이 관리권에, 이토록 신경을 쓰시는 거지?’ 류강민의 시선이 책상 위 자료에서 잠깐 비스듬히 옮겨졌다. 데드 존이 돈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산물들을 안정적으로 채집하고 관리하기 위해 들어가는 인건비, 보안 비용, 정화 유지 비용까지 모두 계산하면……. 그렇게까지 많이 남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까 차관보와 통화를 하며 이야기했던 내용이, 반쯤은 진실인 것이다. ‘…….’ 다른 길드들이 자치권 법안 추진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애초에 실버나이츠쯤 되는 거대 길드 아니고서는, 다수의 게이트를 관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류강민은, 이 게이트 관리권 확보가 실버나이츠의 세력 확장을 위한 포석 정도로 생각되었다. 국가를 잠식한 게이트의 관리권 중 상당수를 실버나이츠에서 쥐고 있으면, 앞으로도 정치권은 실버나이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마스터 이현무의 진의와 닿아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톡톡- 류강민의 손가락이 책상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뭐… 마스터께서 결정하신 일이라면, 분명 다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바로 그때. 콩- 조금 전과는 결이 다른, 다급한 노크 소리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류강민이 짧게 응대했다. “…뭐지?” 문이 열리며 들어선 다른 길드원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단단한 위계가 한 차례 깨져 있었다. “방금, 속보가 떴습니다!” “음?” “남양주 KR-01 노드의 불안정 게이트가, 파괴되었답니다.” “뭐……?” 류강민의 손이 그대로 책상 위에서 멈췄다. 짧은 침묵. ‘……폭주 첫날에. 게이트가 파괴됐다고?’ 겉으로 티는 많이 내지 않았지만, 지금 그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지금 이 상황은, 실버나이츠 내부에서 단 한 번도 상정해본 적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그가 알기로는 전 세계적으로. 지난 십 년의 폭주 사태 역사상, 단 한 번도 폭주 첫날에 불안정 게이트가 파괴된 사례는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마력 농도가 낮은 게이트라 할지라도, 게이트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석이 필요한 법일진대……. ‘누가 이런 무모한 짓을.’ 류강민의 가면 같던 차분한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 * * 후우우우- 검은 균열과 진득한 심연의 마력으로 뭉친 거대한 덩어리.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한 점. 그 불안정 게이트의 본체가, 안에서부터 천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검은 빛이 허공에서 가볍게 흩어지며, 마치 거대한 안개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게이트의 형체가 점점 옅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과 함께, 블랙 존 전체를 짓누르고 있던 진득한 마력의 무게가 서서히 가벼워졌다. 마치 하늘이, 거대한 한숨을 토해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 가면 너머에 가려진 검희의 두 눈이, 그 모든 광경을 단단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해냈다.’ 검희의 검을 쥔 손의 힘이, 천천히 풀렸다. ‘역시 내 감이 맞았어.’ 폭주가 시작된 지 단 하루. 그 짧은 시간 안에, 남양주의 거대한 죽음의 정원이 통째로 정화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고무적인 성과였다. 오늘의 성과 하나만으로도, 타격대 결성의 의미가 생겼을 정도로 말이다. “…단장님.” 옆에 선 강도빈의 짧은 목소리에, 검희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부상자 셋, 나머지는 이상 없습니다.” “확인했어요.” 검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다. 안전 마진을 두텁게 깔아뒀다고는 하지만, 작전 자체는 상당히 충동적인 것이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그림이었다. “부상자 우선, 베이스캠프로 우선 이송하세요.” “예, 단장님.” “나머지 인원도 정비를 위해 이동합니다.” 류성훈과 차예린이 각자 부상자 한 명씩을 부축했다. 오유라가 가벼운 보조 마법으로 다른 한 명의 통증을 잡아 주었고…. 나머지 인원들도 각자 무기를 다잡으며 보폭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희는 가장 마지막에 걸음을 돌렸다. 게이트 본체가 있던, 이제는 검은 잔재만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는 그 자리를 짧게 한 번 응시한 뒤. 저벅- 한층 가벼워진 걸음으로, 픽업 트럭 위에 올라탔다. 탓- “자, 출발합니다!” 부우웅- 검희를 비롯한 돌격조 인원들을 태운 트럭은, 금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파괴된 도로가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데드 존의 잔해는 거의 다 사라져서 광활한 벌판 위를 달렸기 때문이었다. 끼익- 하여 그레이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검희는, 이내 분주한 광경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부상자들은 빠르게 의료 천막으로 이송되었고. 보급 인원이 새 마력 안정제와 정화 소금을 챙겨 날랐으며, 관리국 직원들이 통신 장비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광경 한쪽에서. “……저, 저기!” “검희님이시다! 검희 단장님!” “카메라 돌려!” 수많은 기자단의 시선이, 일제히 검희에게 쏟아졌다. 게이트 파괴 속보를 듣고 본격적으로 몰려든 기자들이었다. ‘빠르기도 하네.’ 기자들을 발견한 검희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메라, 녹음기, 기자 수첩, 그리고 다급한 보폭으로 검희에게 다가오는 기자들. 그들이 싫다기보다는, 당장 피로할 뿐이었다. “단장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게이트를 파괴하신 게 맞습니까?” “폭주 첫날 게이트 파괴라니, 전 세계 최초 사례인데…….” “타격대 작전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검희는 그 한복판에서 짧게 보폭을 멈췄다. 가면 너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수많은 카메라 렌즈들을 한 번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타격대가 직접 게이트를 파괴했다는 게, 정말 사실입니까?” 이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에만, 짧게 대답해 주었다. “예. 맞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타격대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타격대의 활약이 대중에 크게 알려질수록, 그녀의 반경이 넓어질 테니 말이었다. 물론 기자들은 그 대답 하나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단장님! 어떻게 가능하셨던 겁니까?” “비결은……!” “다른 게이트들도 이런 식으로 파괴가 가능합니까?” “단장님······!” 척- “일단,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단장님!” 검희는 짧은 보폭으로 기자단을 가르고 지나갔다.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가 검희의 가면을 끝까지 따라갔지만, 검희는 시선을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검희가 도착한 곳은, 그녀에게 배정된 개인 텐트였다. 지이익- 지퍼를 열고 들어서자, 가벼운 의자와 단정하게 정돈된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희는 그 의자에 가볍게 앉으며,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이어서 장내에는, 짧게 적막이 흘렀다. ‘오후 세 시라……. 정비 끝나면 한 군데 정도는 더 돌 수 있겠군.’ 검희의 시선이 텐트 천장의 한 점에 짧게 머물렀다. 타격대 출범 이후 걱정했던 첫 단추는, 이로써 완벽하게 꿰어진 셈이었다. ‘그나저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첫 작전이 일단락되자, 검희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그녀가 직접 타격대에 데려온, 한 사람. 다름 아닌 이건율이었다. ‘첫 작전이니, 뭔가 크게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사실 이건율을 처음 데려오려 했을 때, 타격대 내부에서도 반대가 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비동기 환경의 동기화율이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이건율은 결국 2차 전직도 못한(그때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유망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검희의 이야기를 들은 조장들은 결국 납득했고, 그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건율 플레이어의 데드 존 동기화율은 비정상적인 수준이에요.] [그래서 저는 사실, 이건율 플레이어의 클래스가 이 비동기 환경과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격대원으로 영입해 수색조 임무를 맡겨 보고, 그의 플레이를 분석해볼 생각이에요.] [그 동기화율의 비밀을 알아낸다면, 차후 게이트 폭주 사태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말이죠.] 모든 타격대원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바디캠을 켜야 하며, 녹화된 내용을 타격대에 제출해야 한다. 이는 임무 수행에 대한 자율성이 높은 타격대의 특성상 당연히 필요한 조치였으며. 타격대 영입 계약서에 전부 명시되어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검희가 이건율을 타격대에 데려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검희가 대원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것으로 이건율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의자에 등을 기댄 검희는, 살짝 눈을 붙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건율이 오늘 수색 임무 간에 무슨 일들을 했을지 조금 더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22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하윤은 밤을 새웠다. 그리고 벌써 시간이 오후 3시가 다 되었지만……. ‘잠이 안 와.’ 오늘만큼은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거주지가 아직 안전지대긴 하지만, 언제고 상황이 바뀔지 몰랐으니 말이다. 하윤은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 노트북과 켜 둔 TV 사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새로고침 버튼 위에서 까딱거렸다. [속보 — 게이트 폭주 첫날, 전국 불안정 게이트 36개 생성……‘5년 전의 1.5배’] [속보 — 게이트 관리국, 일부 지역 데드 존 침식 반경 추가 확장 경고] 화면 한쪽에는, 붉게 칠해진 동심원이 지도 위에서 조금씩 부풀고 있었다. 어느 동네까지가 안전하고, 어느 동네까지가 위험한지. 그 경계선이,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미세하게 바깥으로 밀려났다. 지이잉- 탁자 위에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행정안전부] 관할 지역 거주민께서는 대피 안내에 따라 신속히…… ‘……설마 우리 동네까지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폭주가 시작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화면 속 붉은 원은 벌써 저렇게 커져 있으니까. └ 야 이거 우리 쪽 반경에 슬슬 걸치는 거 아님?ㅠㅠ └ 여기 5년 전에도 사흘 만에 3등급 됐음;; 지금이 딱 그 각인데;; └ 아 미치겠다 진짜ㅠㅠ 일단 정부 발표 믿고 집 지키고 있는 중이긴 한데….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정하윤은 식어 버린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속보 — 남양주 KR-01 불안정 게이트 ‘파괴’ 확인……폭주 첫날 파괴는 ‘전 세계 최초’] “……어?” 붉게 부풀던 동심원 하나가, 화면 위에서 거짓말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조마조마하게 곤두서 있던 어깨에서,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곧이어 뉴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됐다. 가면을 쓴 한 사람의 짧은 인터뷰 영상이, 자막과 함께 재방송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 검희였다. -타격대가 직접 게이트를 파괴했다는 게, 정말 사실입니까? -예. 맞습니다. 검희가 카메라를 향해 던진 말은, 딱 이 한마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한마디는, 불안에 떨고 있는 전국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주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 미쳤다;;; └ 갓 검희ㄷㄷㄷ └ 와, 첫날 게이트 파괴가 나온다고? └ ㅅㅂ;; 팬티 좀 갈아입고 옴;;; 하윤은 멍한 표정으로 뉴스 속보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고. 스크린 위에는 항공 촬영으로 잡은 영상이 겹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독 안개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옅어지고, 그 아래 짓눌려 있던 땅이 천천히 드러나는 광경. -……이론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폭주 첫날에 불안정 게이트를 파괴한 사례는, 지난 십 년간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스튜디오에 앉은 전문가 패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감정. ‘이게 진짜라면……!’ 흥분한 하윤은, 서둘러 커뮤니티를 다시 확인했다. 커뮤니티 게시판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였다. └ 타격대 지렸고ㅋㅋㅋㅋㅋ └ 무슨 출범하자마자 세계 최초 찍어버리네 ㄷㄷ └ 와 이건 진짜로 국뽕 차오르는데? └ 타격대 보여주기식 급조라고 까던 놈들 다 어디감?ㅋㅋㅋ └ 나 조태식은 오늘부로 검희 엘리제를 향한 지지를 철회한다. └ 습박ㅋㅋㅋ 이 고전 드립 ㅈㄴ 오랜만인데?ㅋㅋㅋ └ 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검희와 나는 한몸으로 일체가 된다. 검희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 그… 그건 검희님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친구야? └ ㅋㅋㅋ암튼 지렸다 ㅅㅂㅋㅋ 타격대 우리 동네는 언제 오냐;; └ 살려줘ㅠㅠㅠ 제발 여기 먼저 와줘ㅠㅠㅠㅠㅠ └ 현직 남양주 시민입니다ㅎㅎ 저흰 이제 발 뻗고 자도 되는 거죠? └ 개부럽다ㅠㅠㅠㅠㅠㅠ 기사가 뜬지 고작 몇 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온갖 주접을 떨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윤은 이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당장 자기 자신만 하더라도. 방금 뜬 이 속보 하나가, 어둠 속에 드리운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윤은, 계속 모니터링하던 뉴스 속보들을 한 켠에 미뤄두고 오랜만에(그래봐야 하루만이지만) 커뮤니티 탐방을 시작했다. 그녀가 구경하는 것은 주로 검희와 타격대에 관련된 떡밥들. 그런데 그중에서, 흥미로운 떡밥도 하나 발견했다. └ 근데 그 가면 쓴 2인조 정체는 뭐임? 기사 떴던데 정하윤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잠깐 멈췄다. 누군가 링크를 걸어 둔 기사 하나가, 타임라인 위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단독] 옐로 존에서 자경대 1조 구해낸 ‘가면의 2인조’……그들은 누구인가 ‘가면 2인조?’ 기사에는, 옐로 존 안쪽에서 고립됐던 자경단을 정체불명의 두 사람이 구해 데리고 나왔다는 증언이 정리되어 있었다. └ 60레벨대 정예 수십을 둘이서 쓸어담았다는데;; 그게 랭커 아닌 플레이어가 가능한 거임? └ 한 80레벨 중후반 쯤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ㅇㅇ └ 생각해보면 타격대 평균 레벨이 80이니까, 조장급이면 가능할지도? └ 혹시 검희 직속 비밀요원… 뭐 그런 거 아닐까? └ 해외 용병설 그런 것도 있던데 이건 뭔 말임? └ 개소리지 ㅋㅋㅋ 구출된 사람들이 타격대원이었다고 아예 증언을 박았던데 ㅋㅋㅋ └ 근데 진짜 누구냐 ㅋㅋㅋ 타격대 명단 다 공개 돼 있는데, 감 오는 사람 없음? └ ㄹㅇ모르겠음ㅋㅋㅋ └ 일단 남자 둘이라니까, 오유라는 아닐 텐데; 추측은 끝도 없이 갈래를 쳤지만, 정작 어느 쪽도 확신은 없었다. 그저 다들, 정체불명의 영웅 둘을 두고 신나게 떠들고 있을 뿐. ‘……대체 누굴까.’ 정하윤도 슬쩍, 궁금해지긴 했다. ‘그나저나 속보 한방에 기분이 이렇게 다시 들떠도 되는 건가…? 나 조울증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그렇게 타임라인을 천천히 내리는데, 한참 아래쪽에 가라앉아 있던 댓글 몇 줄이 눈에 스쳤다. └ 근데 타격대 명단에 있던 그 이건율은 결국 동명이인 맞대? └ 헌스쿨 측은 그냥 노코멘트라던데 └ ㅋㅋ 동명이인이겠지 설마 오랜만에 보는, 이건율 동명이인의 떡밥. 정하윤은 그 줄들 위에서 잠깐도 멈추지 않고, 화면을 마저 내렸다. 이건율의 코어 팬인 하윤조차도, 타격대 명단에 속해있는 이건율이 자신이 아는 그 이건율일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음이 조금 낫네.’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정하윤은, 노트북을 천천히 닫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조금, 눈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작전은 잘 끝났다. 아니, 이보다 잘 끝날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첫 출동에 데드 존 하나를 갈아 없애버렸는데, 이보다 훌륭한 성과가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목 정수…….’ 난 아직도 마지막 순간에 놓쳐버린, 거목 어미 몬스터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녀석을 처치했다면 드랍됐을, 거목 정수라는 아이템. 물론 드랍률이 100%는 아니기에, 못 먹었을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막상 이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그냥 내 주머니에 있던 거금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침울해 하냐고? “무사히 임무 잘 끝났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니냐?” 하아. 배가 부른 자식. 거목 정수 한 병에, 못해도 수천 LP인데……. 두 병 드랍됐으면 1억인데, 침울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 아닐까? “하지만 그 괴수 진짜 엄청 강해 보이던데… 우리끼리 못 잡았을 확률도…….” 이 쌀먹 감수성 부족한 놈이랑은 더 이야기를 논하기 어려워 보인다. 밥상 다 차려 놓고 숟가락 들기 직전에, 누가 상째로 엎어 버린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참냐는 말이지. “그만 쭈굴거리고 정산이나 받아.” 정산? “방금 다 팔렸어. 확인해봐.” 일단 ‘정산’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우울감이 살짝 가시는 기분이다. 그리고. [플레이어 ‘호진’님으로부터 LP 정산서가 도착했습니다.] [정산] 묘목 결정 × 11 = 12,925 LP 핏빛 넝쿨 × 8 = 3,400 LP 부식성 포이즌 슬러지 외 잔여 = 824 LP 총 정산액: 17,149 LP “오오오……!” 갑자기 힘이 솟는다. 나, 조울증은 아니겠지? 갑자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정산 비율 70%를 적용하여, 12,004LP가 정산됩니다.] 그런데 내 정산비가 왜 70%지? 난 분명 호진에게 40% 정산해준다고 했었는데……. “양심이 있지. 오늘 몫에선…… 난 3할이면 충분해.” 캬, 갓호진.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아주 훌륭한 친구야. 누가 보면 조원 직접 고른 줄 알겠다고? 기분 좋으니까, 그런 사소한 부분은 좀 넘어가는 게……. “그러니까 우리… 친구 맞지?” 그럼, 우린 친구지. “나, 앞으로 너만 따라다닌다?” 어어… 이런 급작스런 고백은 좀 곤란……. “크흠.” 그렇게 호진과 흰소리를 하고 있는데, 호진이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건율.” “응?” “우리, 업무 보고서는 어떡하냐?” 어… 보고서……? “마법진 그거…… 보고서에 그대로 적을 수는 없잖아.” “…….” 표면적인 수색조의 임무는, 데드 존과 관련된 특이사항 등의 정보를 조사해서 타격대가 작전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로 가공해 올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구출을 한다거나, 오염된 몬스터들을 처치한다거나. 그 또한 임무에 포함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작전 간에 한 일들이, 임무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는 거긴 한데. 뭔가 있는 그대로 보고서로 작성하기엔, 좀 애매한 것도 사실이라는 말이지. “‘잡템 조합해서 마법진 깔고, 정예 몹 한번 소환해 봤습니다.’라고 쓸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내 비상한(?) 두뇌는, 곧바로 가동되고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자.” “어떻게.” “음…… ‘현지 지형 특성을 활용한 유인 섬멸전’?” “오. 그럴싸한데?” “공문서는 원래 다 그렇게 쓰는 거야.” “근데 그거 거짓말은 아니지 않냐?” “유인은 했고, 섬멸도 했잖아. 지형도 활용했고.” 바로 그거지. “굳.” 호진이 묘하게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23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폭주 둘째 날 새벽. 집결지에 도착했더니, 피곤으로 잔뜩 찌든 호진이 날 반겨줬다. “여, 왔어?” “일찍 왔네.” “어후. 피곤해 죽겠다 야.” 어제 저녁 늦게까지 작전을 하고 새벽같이 집결지로 나왔으니. 아무리 체력적으로 일반인보다 우월한 플레이어라 해도, 충분히 피곤할 만한 일정이긴 하다. “이건율 대원?” “여기 있습니다.” “방독복 착용하세요.” 철컥- 나는 방독마스크 결착 상태를 점검하며, 어제 오후를 짧게 떠올렸다. 사실 어제 오후의 일정은, 오전에 비해 별것 없긴 했다. 인접 게이트 구조작업 지원에 수색조도 끌려간 느낌이랄까. 본대 통제하에 얕은 구역 수색하고, 시민 대피 유도하고. 뭐 그런 작전들이랄까. 물론 물리적으론 힘들었고, 보람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부수입이 없었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작전 배정지가 좀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좋은 작전 배정지가 뭐냐고? 아주 간결하고 쉽게 설명하자면……. ‘최대한 위험한 곳.’ 심연의 마력이 철철 넘쳐흘러서, 위험도가 최대한 높게 책정된 현장 되시겠다. “야, 그래도 돈보단 목숨이 중요하지 않을까…….” 다른 대원들이야 쉽고 편한 현장을 원하겠지만, 어제 오후 작전지같이 등급 낮은 게이트에 가면 맛이 없다. 고가의 부산물도 딱히 없는데다……. 애초에 수색이 필요하지도 않아서 본대와 같이 움직이게 된다. 본대에 묶여 있으니 깊이 들어갈 수가 없고, 깊이 못 들어가니 안 그래도 맛없는 부산물조차 거의 못 줍는 상황. 데드 존의 진짜 돈은 죄다 안쪽에 박혀 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수색조, 둘째 날 배치 전달합니다.” 마침 임시 부관 오유라가 출동 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첫날 게이트 파괴 성과로, 타격대 투입 요청이 폭증했습니다. 1중대는 게이트별로 분산 배치됩니다.” “검희 단장님은요?” “본대는 다른 게이트로 이동합니다. 수색조는 단독으로 선행 투입됩니다.” 오. 잠깐. 이러면 이거… 생각보다 그림이 괜찮은데? ‘크.’ 본대가 없다는 건, 날 통제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얕은 구역에서 시간 때울 필요 없이, 처음부터 깊숙이 직진할 수 있다는 얘기지. 그러니 본대와 분리 배치된다면, 굳이 고등급 게이트가 아니어도 괜찮을지도? 게다가……. “할당 구역은 하남 게이트. 하남신도시 일대입니다.” “위험 등급은요?” “추정 최상입니다. 대피 미완료 구역과 통신 두절 구역이 다수 보고됐습니다. 진입에 각별히 유의하세요.” 캬. 하남 게이트라니. 심지어 어제 자기 전, 위성 지도 보면서 입맛 다시던 구역이 걸렸다.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이는데……. “……하필 거기에 둘이 떨어지냐.” 물론 내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른 대원들은, 안쓰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지침 잘 따라서 안전하게 작전 수행해 보겠습니다.” 위험 등급 최상에 통신까지 두절이라니, 누가 봐도 사지(死地)로 보일 만하긴 하네.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 이상해 보이거든. 표정 관리 좀 해야겠다. “크흠.” 하남 게이트 마력 밀도가 얼마였더라? 남양주보다 최소 한 등급 위인 건 확실한데……. “야, 우리 괜찮겠지?” “쫄려?” “조금?” 후후. 일단 실룩거리는 광대를 단속한 나는, 태블릿을 열어 수집된 정보를 열람하기 시작했다. 관리국에서 사전에 수집한 데이터를 공용 망에 올려주는데, 타격대도 여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예상대로네.’ 정보 열람을 어느 정도 마친 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5분 정도 더 지났을까? “수색조, 먼저 각자 작전지로 이동하세요.”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같은 시각, 신호위 지휘소. “작전 1과, 하남 게이트 투입 명령입니다.” “하남?” “예. 하남신도시 일대. 대피 미완료 시민 구역이 다수 잔존해 있습니다.” 차재현 중령은 상황판 위의 좌표를 한 번 훑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 보호는, 결국 우리 몫이지.’ 당연한 일이었다. 신호위는 국방부 직속의 정규 1선 전력. 시민의 머리 위로 떨어진 재난을 거두는 건, 예나 지금이나 신호위가 해 온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흐음.’ 보고를 들으며, 차재현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어제의 속보가 떠올랐다. 폭주 첫날, 타격대가 게이트 하나를 파괴했다는 그 소식. 묘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운이 따랐을 뿐이다.’ 물론 검희라는 인물이 단장을 맡은 이상, 타격대가 제법 보탬이 되리라는 건 차재현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뿐. 결국 이 국가적 재난 사태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될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호위였고, 그래야만 했다. 첫날에 게이트가 파괴된 건 약화된 게이트를 운 좋게 만난 결과일 뿐이고, 결국 이 사태를 끝내는 건 정규 전력인 신호위여야 한다는 말이다. 검희 한 사람의 무력에 기댄 원맨팀이, 사태 전체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타격대는 어디까지나, 서포터에 불과해.’ 그 활약이 필요 이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건, 솔직히 마뜩잖았다. “참고로, 해당 구역은 타격대 수색조가 선행 배정되어 있습니다.” “수색조라.” “수색조에서 사전 정보를 수집해서, 윤소령을 통해 보고 올리기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차재현은 짧게 눈썹을 들었다가, 곧 다시 내렸다. 타격대를 떠올리고 있던 순간에 그 이름이 나와서 살짝 동요했지만. ‘수색조 정보라… 작전에 도움이나 됐으면 좋겠는데.’ 결국 검희가 없는 타격대는, 속 빈 강정일 뿐이었다. “출동 준비. 5분 뒤 이동한다.” “예, 중령님!” 차재현은 검을 고쳐 메고, 가장 먼저 격납고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작전 명령이 떨어졌으니, 지체할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 * * 하남 게이트는 완전히 도심에 발생한 데드 존이었다. 그러니까 남양주의 경우 그래도 인적이 많지 않은 지역을 기점으로 게이트가 생성됐는데……. 이곳 하남은 아예 신도시 한복판에 게이트가 발생한 케이스인 것이다. 물론 관리국의 신속한 대처로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피신한 상태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히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그래서 전달받은 정보에 따르면, 하남 데드 존 안에는 민간인 고립도 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때문에 오늘 우리 수색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고립된 민간인의 좌표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파밍만 들어있는 거 아니었냐?” 후우. 아무리 내가 LP에 미친 놈이라 해도, 당연히 최우선 순위는 인명구조 아닐까? “이 자식은 대체 날 뭐로 보는…….” “쌀먹 전문… 플레이어?” 젠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빨리 움직이기나 해.” “할 말 없으니까 목소리 커지긴.” “…….” 어쨌든 데드 존 안쪽으로 진입한 우리는, 그레이 존을 지나 옐로 존까지 빠르게 들어섰다. 그래도 그레이 존의 구조 작업은 어제 다 끝난 건지, 딱히 생존 신호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으음.’ 우리 눈앞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남양주에서 봤던 그 지옥 같은 환경과 비슷하다면, 오염된 지형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와, 저걸 덩굴이 다 덮어버렸다고?” 신도시 아파트의 외벽을, 검붉은 덩굴이 핏줄처럼 타고 올라가 있었다. 상가 거리는 발목까지 차오른 진흙에 잠겨 있었고. 멈춰 선 신호등과 간판마다, 맹독 포자가 이슬처럼 맺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통째로 도심 정글이라. 확실히 신선하긴 하네.’ 이건 확실히, 베타 존에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다. 거긴 아파트 따위가 없었으니까. 뭐, 무대가 바뀌어도 결국 컨셉이 같은 한, 내 입장에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잠깐.”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데, 내 기감에 익숙한 감각이 잡혔다. “이쪽이야.”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춘 나는, 최대한 기감을 끌어 올렸다. 이어서 침식된 거리 한복판을 천천히 훑었다. 일반 헌터 눈에는 별다를 것 없는 오염된 폐허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이 안에서, 명확한 단서를 찾아내야만 했다.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저기다.’ 무너진 분수대 아래. 침식의 마력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응축된, 미세한 소용돌이. 그걸 발견한 나는 신중하게 관찰을 시작하였다. “너 뭐 봐?” 호진이 내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뭐 있냐?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는 거다. ‘마력 핵’의 흔적은, 눈으로 본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기다려봐.” 다만 이런 설명을 굳이 호진에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대답 대신 분수대 쪽으로 다가가, 본격적으로 파밍을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어딘가 고립돼 있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럴 시간이 대체 어디 있냐고? “후우.”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것도 결국, 구조 작업의 일환이라는 말씀. 까앙-! 곡괭이를 휘둘러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잔해를 파괴하자, 그 안쪽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역시.’ 아마 이 안을 조금 더 파고들면, 어렵지 않게 마력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우우웅-! 그리고 이 마력핵을 제거하지 않으면……. ‘침식된 지형을 절대로 발견할 수 없지.’ 까앙- 파사사삭- 이렇게 높은 등급의 불안정 게이트는, 데드 존 전역에 더 많은 마력핵을 흩뿌린다. 그리고 이렇게 흩뿌려진 마력핵이 주변 지형지물을 침식시키면……. 지형이 뒤틀리며, 그대로 파묻혀버리는 공간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공간들을 찾아내려면, 먼저 마력핵을 뽑아내는 게 당연한 순서. 지잉- 손에 익은 순서대로, 작은 마법진 하나가 그려졌고. 우우웅- 마법진이 옅은 빛을 뿜자, 소용돌이를 옭아매고 있던 게이트의 마력 흐름이 잠깐 풀어졌다. 그 안에서, 응축된 푸른 결정 덩어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마력 결정이랑은 격이 다른, 묵직한 밀도였다. 지지직- [폭주하는 마력의 근원이 일부 제거되었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일부 안정화됩니다.] “……캬.” 절대로 돈 벌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와 씨.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호진이, 넌… 이 형님 믿어 주는 거지? 224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 있지만. 데드 존의 침식을 유지시키는 건, 존의 곳곳에 생성되어 심연의 마력을 뿜어내는 ‘마력 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력 핵’이, 하나의 특정 아이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데드 존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에 따라 심연의 마력을 담는 그릇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하는 모든 마력 덩어리를, 통칭 마력핵이라고 칭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크.’ ‘마력의 근원’은,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종류의 마력핵이었다. 마력의 양 자체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다양한 마력핵의 종류 중, 가장 순도 높은 마력이 담겨있는 그릇이 바로 이 마력의 근원이었으니까. 그 증거로. 우우우웅- 마력의 근원을 뽑아낸 주변의 침식 농도가,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로 정화되는 중이었다. “그… 헌스쿨 출연하기 전에 어디… 해외에서 데드 존 연구실 같은 데 있다가 온 건 아니지?” “공부 좀 했다니까 그러네.” 침식된 상가 골목을 빠져나오며, 나는 호진의 의심 어린 시선을 등으로 받아넘겼다. 대답할 시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걷는 게 이득이다. 마력의 근원이 하남 게이트의 마력핵인 것까지 확인한 이상. 더 빨리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했으니 말이다. 첫 채굴에서 가닥이 잡힌 이상, 이제부턴 속도전이랄까. 게다가 원래 계획보다도 더 깊숙한 곳까지 진입이 가능해졌다. ‘잘하면 오늘은, 블랙 존까지도 들어갈 수 있겠어.’ 원래대로라면 내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100레벨대 변이 몬스터가 등장할 수 있는 블랙 존까지 진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력의 근원’은… 마력의 순도가 높기 때문인지, 침식 구역 간의 연쇄 작용이 가장 심한 마력핵이었고. 그러니 마력의 흐름을 따라 순차적으로 근원을 파괴하다 보면, 블랙 존의 마력이 대폭 약화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블랙 존에서의 파밍은……. ‘캬, 생각만 했는데 이빨이 썩는 느낌인데?’ 옐로 존이나 레드 존에서의 파밍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벅-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는데……. ‘다음 놈은…… 저기네.’ 무너진 약국 간판 아래. 침식의 마력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미세한 소용돌이가, 기감에 선명하게 걸려들었다. 까앙-! 그리고 내가 다시 곡괭이를 꺼내 작업을 시작하자, 호진이 알아서 협조하기 시작했다. “뒤는 내가 본다. 빨리 캐기나 해.” 호진 군, 아주 든든하구만. 같이 일하기 상당히 편한 친구란 말이지. 지잉- 곡괭이질 몇 번에 마법진까지. 조금 전 15분가량 걸렸던 작업이, 이번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지직- 거의 수백 년(?) 만에 해보는 작업인데, 역시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다. [폭주하는 마력의 근원이 일부 제거되었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일부 안정화됩니다.] ‘흐름 좋고.’ 이 묵직하고 아름다운 푸른 결정 하나가, 못해도 천 LP 단위가 넘는다. 들어오자마자 두 덩이 건졌으니, 이게 바로 노다지 아니고 뭐겠어? 그나저나……. └ 방장 지금 뭐 캐는 거……. -지지직 └ 화면 왜 이럼?? 노이즈…. -지지지직 └ 뭔데ㅋㅋ -지직 너무 오래 스트리밍 안 켠 것 같아서 오늘은 좀 켜봤는데, 역시 옐로 존부터는 노이즈가 너무 많이 끼는 듯하다. 폭주 기간 동안은 스트리밍 잘 못 켠다고 미리 얘기 해뒀으니…. 공백 좀 생겨도 괜찮겠지 뭐.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거야?” “어떤 민간인이 고립돼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 “지랄.” 아니, 진짜라니까?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 그리고 마력핵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지형과 점점 깊게 결합한다. 침식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버리면…… 그땐 곡괭이가 아니라 포클레인을 끌고 와도 답이 없다. 그러니까 난 진심이다. 오늘이 이 하남 게이트 생성 2일 차니까. 길게 잡아줘도 내일이, 민간인 구조 가능한 마지막 날짜나 다름없거든. ‘그러니까 이쯤일 텐데…….’ 까앙- 파사사삭- [폭주하는 마력의 근원이 일부 제거되었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일부 안정화됩니다.] 깔끔하게 세 번째 근원까지 제거하자, 주변을 짓누르던 독안개가, 눈에 띄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뒤틀려 있던 침식 지형이 스르륵 풀리면서…… 그 너머에 가려져 있던 공간 하나가 윤곽을 드러냈다. “음?” 입구가 통째로 파묻혀 있는, 상가 지하였다. ‘여긴 땅이 완전히 꺼져버렸네. 이 정도면 침식률이 상당할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쿵…… 쿵…… 벽 너머에서,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아주 규칙적으로.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바로 뒤에 따라오던 호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야, 잠깐. 안에…… 사람 있는 거 아냐?” 호진의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갔다. 나는 대답 대신 무너진 입구 쪽으로 다가가, 벽에 귀를 붙였다. 쿵…… 쿵…… 쿵…… 마물치고는 너무 약하고, 너무 간절한 박자. 사람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 “거봐. 내가 뭐랬어.” “…?” “한발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 명이라도 더 구한다니까?” 마력핵을 캐야, 파묻힌 공간이 드러난다. 파묻힌 공간이 드러나야, 고립된 사람을 찾는다. 그러니 절대로 돈 벌면서 겸사겸사 구조하는 게 아니다. 구조가 메인이고, 돈은 겸사겸사 버는 거지. “구조 작업 시작하자.” 나는 곡괭이를 고쳐 쥐었다. 그런데 호진이 이 쉐끼. 표정이 좀 불온하다? * * * 어둠 속에서, 여자는 숨을 죽인 채 품속의 온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낑…… 낑……. “쉿. 괜찮아, 콩이야. 괜찮아…….” 떨고 있는 게 콩이인지 자신인지,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았다. 대피 버스에 오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콩이가 없다는 걸 알아챈 건 통제선을 넘고 나서였고. 그 통제선을 거꾸로 넘어 들어온 건……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집에 갇힌 콩이는, 물그릇 하나로 버텨야 했을 테니까. 그리고 콩이를 품에 안고 막 상가를 나서려던 순간. 거리가 통째로…… 일그러졌다. 벽이 밀려들고, 천장이 내려앉고. 정신을 차렸을 때, 여자는 콩이와 함께 출구가 사라진 지하에 갇혀 있었다. [통화권 이탈] 몇 번을 들여다봐도, 화면 위의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안테나는 갇힌 뒤로 단 한 칸도 선 적이 없었다. ‘배터리…… 사십이 퍼센트.’ 여자는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녹화 버튼을 눌렀다. 구조 요청은 아니었다. 이게 누구한테든 닿기는 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말은,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다. “엄마…… 미안해. 나, 콩이 데리러 왔다가…….” 목소리가 갈라졌다. 콩이가 여자의 턱을 핥았다. “……콩이는, 잘 있어.”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쿵- 벽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쿠웅- 까앙- 여자는 콩이를 끌어안은 채 벽에서 물러났다. 마물일까. 아니면…….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콩이의 귀가 빳빳하게 곤두섰다. 파사사삭- 그 순간. 출구를 막고 있던 벽이…… 안쪽에서부터 풀리듯 무너져 내렸다. 무너졌다기보다는, 녹아서 사라졌다는 쪽이 맞을지도 몰랐다. 갇힌 지 꼬박 하루 만에 보는 빛이 어둠을 갈랐고. 그 역광 속에, 방독면을 쓴 두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생존자 확인. 괜찮으십니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가면. 두 사람. 그 조합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 뉴스에서 봤다. 옐로 존에서 자경대를 통째로 구해냈다는, 그 정체불명의 2인조. 타격대 소속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던. ‘설마…… 뉴스의, 그…….’ 여자의 손에서 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녹화가,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찍어야 해.’ 유언이 될 뻔했던 영상이, 인생 최대의 특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다친 곳부터 보겠습니다.” 여자의 팔꿈치와 무릎에는 긁힌 상처가, 갈라진 입술에는 탈수의 흔적이 보였다. 응급 키트를 꺼내, 소독부터 시작했다. 처치 자체는 어려울 게 없었다. 이 정도 부상이야…… 뭐, 천 번은 넘게 만져본 수준이니까. ‘마무리로 한 스푼.’ 소독을 끝낸 상처 위에, 영창 없이 치유 마법을 살짝 얹었다. 물 한 병과 영양바를 쥐여주고, 품속의 강아지가 무사한 것까지 확인하면 풀코스 완료. “가, 감사합니다…… 저, 혹시…….” 여자가 폰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소속이세요?” “타격대입니다.” 그 이상은, 묻기 전에 끊는다. 타격대 규율에 신상 공개 금지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수색조니 편제니 친절하게 다 알려줬다간, 핀포인트로 털리는 수가 있거든. “저…… 그럼 성함이라도…….” “규정상 작전 중 신원 공개는 어렵습니다. 촬영도, 정면은 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은 부드럽게. 내가 누군지 외부에 공개되진 않아도, 바디캠에는 다 찍히고 있으니까. 우리 단장님은 이걸 다 보실 거라는 말이다. 일 잘하는 티 좀 내줘야, 남은 2주가 편하지 않겠냐는 말이지. “잠시 길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두 분은 여기서 잠깐 대기해 주세요.” 사실 살피러 가는 건 길이라기보다, 다음 마력핵으로 이어지는 마력의 흐름이었지만 뭐. 우우웅- 어차피 탈출 경로를 찾기 위해서도, 마력의 흐름부터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뭐. “이쪽 길로 곧장 가시면, 외곽 대피소까지 안전합니다.” 나는 독안개가 옅어진 골목을 가리켰다. “중간에 무슨 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고 이동하세요.” 사실 뒤돌아 봐도 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마력핵 채굴하는 걸 보여주고 싶진 않으니까……. “저, 저기…… 정말 감사…….”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여자를 안심시킨 뒤, 우리는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마력석을 하나 더 캤을 때. [폭주하는 마력의 근원이 일부 제거되었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일부 안정화됩니다.] “도… 도와주세요.” 무너진 학원 건물 지하에서,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건율?” “음?” “원래 데드 존 인명구조가…… 이렇게 수월한 건 아니지?” 수월하다니. 지금 땀 뻘뻘 흘리고 있는 거 안 보여? “…….” 라고 말하기엔. 내가 생각해도 뭔, 가는 곳마다 고립돼 있던 민간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크흑.” “뒤돌아보지 말고 이동하세요.” 무너진 상가 화장실에 하나. 지하상가 비상계단에서, 다시 셋. 해서 그렇게 반나절 정도 지났을 때……. “보고서는 또 그 공문서체냐?” 우리 태블릿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만들어졌다. [지형 특성을 활용한 자력 대피 유도 실시. 매몰 추정 구역 4개소 해소. 구조 인원 11명 외곽 인계 완료.] “유도했고, 해소했고, 인계했잖아. 전부 사실이야.” “마력핵 얘기는 한 글자도 없는데?” “보고서는 원래 중요한 것만 쓰는 거야.” “…….” * * * 하남 데드 존, 그레이 존 외곽. 신호위 작전 1과의 수송 차량이 차례로 멈춰 서고, 완전무장한 대원들이 절도 있게 산개했다. “전 대원, 전개 완료했습니다.” 차재현 중령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개 낀 시가지 안쪽을 응시했다. 위험 등급 추정 최상. 대피 미완료 구역 다수. 민간인의 머리 위에 떨어진 재난을 거두는 일은, 결국 정규 전력인 신호위의 몫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런데. “…….”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재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뭔가 이상했다. 위험 최상이라던 침식의 농도가, 그가 알던 ‘최상’에 한참 못 미쳤다. 이 정도면 옐로 존 중에서도 옅은 축. 보고와 현장의 온도 차가, 너무 컸다. “중령님, 관리국 측 전파입니다. 외곽 대피소에 금일 구조된 민간인 11명이 수용 완료됐다고 합니다.” “구조? 누가.” “선행 투입 인원으로 추정된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두 번째. 신호위가 도착하기도 전에, 매몰 구역의 민간인들이 이미 구조되어 있었다. 이 정도 인원이 구조된 거면, 대대적인 구조 작전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차재현은, 그러한 작전에 대해 들어본 바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구조작전을 수행해야 할 부대가, 다름 아닌 신호위였으니까. “윤 소령. 수색조 보고서.” 태블릿을 든 윤 소령이 한발 다가섰다. “예. 금일 접수된 내용입니다. ……‘지형 특성을 활용한 자력 대피 유도 실시.’” “……자력 대피?” “‘매몰 추정 구역 4개소 해소. 구조 인원 11명 외곽 인계 완료.’ 이상입니다.” “…….” 차재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보고서야 딱히 나무랄 게 없었지만, 보면 볼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애초에… 등급 파악이 잘못됐던 건가.’ 관리국을 통해 받은 하남 데드 존의 추정 위험 등급은, 거의 최상급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고작 수색조가 매몰 지역에 접근한다거나, 고립돼 있던 인원이 자력 대피한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보고서 좌표 기준으로 구역 소탕을 진행한다. 1소대부터 진입.” “충성!” 차재현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점점 더 느낄 수밖에 없었다. “1지점, 적성 개체 없음. 클리어.” “2지점 클리어. ……소탕할 게 없습니다.” 좌표마다, 텅 비어 있었다. 위험 개체 밀집 추정 구역은 전부 휑하니 뚫려 있었고. 남은 일이라곤 잔존 마물 몇 마리를 소탕하고, 민간인 호송로를 정리하는…… 잡일뿐이었다. 정규 1선 전력이, 완전무장으로 투입됐는데 말이다. “후우…….” 차재현은 상황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실수를 한 거야?’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위험 최상은 무슨. 여기에 신호위를 파견한 건, 사실상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다. 신호위의 칼은, 이런 곳에서 녹슬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철수 준비. 다음 작전지 좌표 수신하는 대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차재현은 알 수 없었다. “충성!” “전파하겠습니다!” 자신의 이 판단이, 사실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이었다. * * * 외곽 관리국 대피소. 담요를 두른 여자의 품에서, 콩이가 색색 잠들어 있었다. 소란한 천막 한구석. 여자는 아까부터, 같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 중이었다. 영상의 마지막. 안개 속으로 멀어지던 두 사람의 뒷모습이, 화면 위에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올리면…… 난리 나겠지.’ [영상을 업로드하시겠습니까?] 업로드 버튼 위에서, 엄지가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는 콩이를 한 번 더 끌어안았다. 그리고. 톡-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업로드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25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옐로 존의 끝이 다가오는 건, 시각적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이 가능했다. 저벅- 발밑의 진흙이 점점 검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빛을 먹어버린 것처럼 까맣게 죽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까만 경계의 너머. 화르륵- 저 안쪽에서, 불길이 제멋대로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광경. 하지만……. ‘캬, 블랙 존 어서 오고.’ 멀찍이서부터 느껴지는 열기에, 나는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왜냐고? 그야 맹독늪지 컨셉의 데드 존 환경 안에서, 이렇게 강력한 불길이 휘몰아치는 필드는 엄청 희귀하거든. ‘폭주가 시작되고 나서 뭔가 운빨이 터지는 느낌이지 왜.’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는 이 블랙 존의 모습은, 일견 맹독늪지 컨셉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직접 저 안에 들어가 보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데……. 그건 바로 ‘플레어 울프’라는 몬스터들 때문이다. ‘가연성 맹독 구름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는 블랙 존에… 살아있는 라이터가 돌아다니니 당연한 결과지 뭐.’ 그러니까 블랙 존에 맹독가스 분출 컨셉의 지형이 생성되고, 거기에 ‘플레어 울프’라는 몬스터 조합이 맞아떨어져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필드가 지금 눈앞에 있는 화염 필드라는 것. 그런데 희귀한 필드인 게 내 행복과 무슨 상관이냐고? 그야 당연히 여기서만 파밍 가능한 마력덩어리 때문이다. ‘오늘 설마… 겁화의 결정까지 파밍 가능한 건가?’ 순도 높은 겁화의 결정은, 화염 계열 마법사들에게 초월등급 장비보다도 귀한 물건이거든. 모르긴 몰라도, 이클립스에 갖다 팔면 십만 LP는 그냥 넘을걸? 그러니까……. 꿀꺽- 저 지옥도 앞에서 내 목구멍으로 군침이 넘어가는 게, 그렇게까지 비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야.” 옆에 바짝 붙어 선 호진의 목구멍에서도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얜 군침이라기보다, 블랙 존의 위용에 잔뜩 쫄아서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옐로 존을 아직 전부 돌아본 것도 아닌데. 굳이 저기까지 들어가야 되냐?” 목소리가 달달 떨리는 게, 꽤 무섭나 보다. 흐음. 사실 얘는 겁먹는 게 당연하다. 블랙 존이라는 구역 자체가, 80레벨 플레이어에게도 버거운 곳이긴 하거든. 나처럼 경력 만 년짜리 플레이어가 아니고서야……. “굳이 저기까지라니?” 그런 의미에서 꽤 열심히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옐로 존에 구조를 기다리는 민간인이 있을 수도 있고……. 수색 절반도 못 돌았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아쉽게도 기각이었으니 말이다. “호진.” “어?” “어차피 우리는 수색대잖아.” “……그래서?” 기각에 대한 근거도 아주 명확하다. “고립자 대규모 구출 작전은, 원래 신호위 일이란 말이지.” “…….” “우리가 할 건,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찾아서 그쪽에 넘기는 거라고. 수색 작업이 더 용이해지도록 말이야.” “후우.” “게다가 블랙 존에 고립된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지 않겠어? 당연히 블랙 존 수색을 우선적으로 진행하는 게…….” 출동 전, 작전 하달을 받을 때. 관리국 최대 무력단체인 신호위가 구조 작전을 수행한다고 이미 들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쯤 했으면 옐로 존은 충분히 돌았다. 이제는 블랙 존으로 빨리 진입해야, 거국적으로도 맞는 판단이다. 물론 블랙 존 진입이 가능할 때의 얘기지만. 그거, 방금까지 강제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너. 여기 원래 결계 있는 거 알지?” “알지. 어…… 잠깐.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우리 수준으로 어차피 결계도 못 뚫…….” 횡설수설하는 녀석을 잠시 등지고, 나는 철궁을 꺼내 블랙 존을 향해 시위를 겨누었다. 기기기긱-! 그리고 다음 순간. 피이잉-! 내 퍼포먼스(?)를 확인한 호진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쩌정-!! 고작 내 화살 한 방에, 블랙 존의 결계가 금이 가버렸으니 말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인지 부조화라도 온 건지 횡설수설하는 호진을 향해, 나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더해줬다. “우리가 아침부터 그렇게 마력핵을 캐고 다녔잖아, 호진쓰?” “그… 렇지?” “거기서 심연의 마력 줄줄 새는 거 봤어 못 봤어.” “봤지.” 이 정도 됐으면, 설명이 충분했으려나? “그게 다 어디서 나왔겠어?” “블랙 존……?” “정확히는 게이트에서 나온 거지. 그만큼 게이트 힘이 약해진 거고.” 호진이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계산이 도는 표정이다. 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표정이네. “그럼…… 진짜로 블랙 존이, 우리 둘이 들어가도 될 만큼 약해진 거야?” “그렇다니까.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흐음…….” 호진도 이제, 위험한 곳에 가는 게 돈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학습했을 거다. 그러니 슬슬 블랙 존 탐사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겠지. ‘후후.’ 물론 약해졌다고 해도 블랙 존은 블랙존이고, 실수하면 사지 멀쩡하기 힘든 위험지대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지만, 실수야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뭐해? 시간 아깝게?” 저벅- 그러니 설명은 이쯤 하고, 결계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륵- 퍼어엉-! 이어서 경계에 다가서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맹독가스가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며 불길을 만들어내고. 원래 늪이었을 자리는, 시뻘건 용암이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지옥도가 따로 없는 모습. 그리고 결계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나는. 기기기긱-! 아까보다 훨씬 더 신중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사격이 끝나면, 보랏빛으로 확실히 보이는 균열이 생길 거야.” “그러면?” “뭘 그러면이야. 그땐 네 대검으로 내려쳐야지.” 기리릭-! 기감을 집중하자, 결계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미세한 파동까지 전부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핑- 피피핑-! 하남구역 블랙존의 외곽 결계에서. 콰과과광-!!!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 * * 예향(藝鄕). 이름 그대로, 예술을 품은 고장이라는 뜻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 미술관, 아시아권에서 손꼽히는 옥션 하우스, 그리고 매년 신진 작가 수십 명을 길러내는 문화재단. 그 모두를 거느린 곳이 바로 예향그룹이었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창업주가 그림 몇 점을 사 모으던 시절부터 헤아리면 벌써 삼대째. 남들이 빌딩을 세우고 공장을 돌릴 때, 이 집안은 화폭 위의 붓질 한 번에, 도자기 표면의 빙렬(氷裂) 한 줄에 수십억을 걸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철컹- 게이트가 열리고 세상이 뒤집힌 뒤에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헌터니 던전이니 하는 것들은, 적어도 이 집안의 사전엔 없는 단어였으니까. 그래서 예향은, 지킬 게 많은 집안이기도 했다. ‘하필 여기에…….’ 그러니까 하필 하남 신도시 한복판에 불안정 게이트가 생성된 건, 정말 운이 없었다고 해야 했다. 예향그룹의 수장고 중에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 하필 하남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 수장고는 말하자면 예향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대체 불가능한 컬렉션이, 여기 다 모여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곳 데드 존의 한복판에 예향그룹의 장녀 윤세아가 고립되어버린 것도.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몰랐다. 관리국에서는 분명 사전에 경고했고, 그러니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니 더더욱 가장 중요한 컬렉션 몇 점이라도 선별해 가져가기 위해, 직접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덕분에 지금. 윤세아는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이 건물 꼭대기에 갇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십 층이 넘는 높이에 고립된 덕인지, 몬스터가 출몰하는 빈도는 상당히 낮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까지는, 세아와 함께 이곳에 온 ‘한소율’ 플레이어의 역량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휴우.’ 어쨌든 아직은 몬스터들로부터 수장고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가 여기 고립됐다는 건 아버지도 알고 계실 테고.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구조대가 무조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쿠웅— 저 아래 어딘가에서, 또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세아 아가씨.” “응?” “창가에서 좀 떨어지시죠. 위험합니다.” “알겠어.” 세아는 일부러 더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은, 방금 그 무너지는 소리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올라온 참이었다. 무서워 죽겠다는 걸 들키면 진짜로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웃는 거였다. “구조될 때까지 버티시려면,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아끼셔야 합니다.” “알겠어어.” “……며칠이 걸릴지 모릅니다. 가볍게 들으시면 안 될…….” “나 진지해. 진짜라니까?” 세아와 함께 이곳에 온 한소율 플레이어는, 함께한 지 어느새 5년도 넘은 그녀의 전속 보디가드였다. 그녀는 80레벨대로, 재능있는 암살자 계열의 플레이어였고, 지금까지 세아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당연히 그녀 덕분이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그러니 세아는, 그녀에게 고맙고 또 미안했다. 세아 본인이야 가문의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온 거였지만. 소율은 자신 때문에 같이 희생된 것 같았으니까. “나한테 잔소리 그만하고, 소율 언니도 좀 앉아서 쉬어. 나보다 언니가 훨씬 더 힘들 텐데.” “알겠습니다.” 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 구석에 놓여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밝은 척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먹지도 못하고 잠도 거의 못 잔 탓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창가에서 떨어지라는 말에도 굳이 다시 이쪽에 앉은 이유는, 밖이라도 보지 않으면 마음이 더 힘들 것 같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 구조하러 와 줄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창가 구석에서 깜빡이는 CCTV의 불빛뿐이었지만 말이다. 깜빡— 깜빡— ‘전기가 아직 살아있는 것도 신기하네.’ 그런데 세아가 잠시, CCTV 카메라를 응시하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콰아아앙-! 창문 너머에서, 고립된 이후 처음 들을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악……!” 세아는 순간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최대한 집어 삼켰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잠깐……!” 세아의 근처에 앉아있던 소율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가로 다가갔다. “왜, 왜 그래 언니?” 그리고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에…….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아마도, 플레이어… 같습니다.” 처음으로 상기된 표정이 떠올랐다. 쌀먹 용사의 자본주의 스트리밍 226화 성좌의 게임 [라이카] 폭주 2일 차. 세상이 뒤집어졌다는데, 이시율의 하루는 어제와 똑같았다. 거실 TV에선 종일 빨간 지도가 돌아가고, 앵커 목소리도 갈수록 비장해지는데……. 정작 이 집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동네는 진짜 괜찮은 거 맞아?” “5년 전에도 멀쩡했잖냐. 관리국 관련 시설이 괜히 다 성수에 있겠어?” 아빠는 심드렁했다. 뭐, 이태철 사장님이 그렇게 대범한 인물은 아니라,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 우리 가족의 걱정거리는,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보다 네 오빠가 걱정이다. 오빠 연락 없디?” “없어, 엄마.” “아이고…… 촬영도 끝났으면 집구석에 그냥 박혀있지. 이 웬수는 또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촬영, 끝난 건 아니고 엄마.” “어쨌든 지금은 안 하고 있잖냐.” 데드 존 항공샷 이미지를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는 게, 하루 일과 중 절반인 김주연 여사. 그런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시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덜컹- 그리고 괜히 스마트폰을 열어, 오빠에게 톡을 남겨뒀다. -집 안 옴? -늦어도 매일 한 번씩은…… 아니, 너무 바쁘면 2일 주기라도 생존 신고 하도록. 뭐, 쉽게 답장이 오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웬수가 따로 없다니까.” 저도 모르게 김주연 여사의 대사를 작게 읊조린 시율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니, 폭주로 인한 불안감보다는 답답함이 더 크게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안전지대는 내일까지만 외출 금지라고 들었는데. 정말 내일이면 밖에 나가도 되는 건가? 그래도 폭주 끝날 때까진, 그냥 짱박혀 있는 게 맞지 않을까? “후우.”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결국 시율이 할 수 있는 건 노트북 앞에 앉는 것뿐이었다. 헌스쿨 방영은 중단되었지만, 일단 습관적으로 커뮤니티부터 한 번 둘러주고. ‘우리 오빠처럼, 다른 참가자들도…… 폭주 기간에 활동하려나……?’ 그러고 보니 오빠놈은 대체 어떤 식으로 게이트 안정화에 기여한다는 건지. 가족에게조차 아무것도 말해준 게 없었다. 단지 관리국 소속으로 안전한 수색 업무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남겼을 뿐. ‘뭐… 엄청 빡센 임무는 안 하겠지? 다른 헌스쿨 참가자들 케이스 보면 뭐.’ 그녀의 최애인 박진우 참가자를 보면, 후방 지원대에 자원해서 부상자 치료와 오염지대 정화 업무 정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오빠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마 이 정도 선이겠지. 딸깍- 딸깍- 그런 생각을 하며 마우스를 움직이던 시율은, 어느새 스크린에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관리국 “하남·남양주 등 8개 구역 데드 존 등급 상향, 주민 즉시 대피” “으아아, 이 동네는 진짜 난리 났네.” -[전문] 관리국 대변인 긴급 브리핑… “통제 가능 범위, 과도한 공포 자제 당부” ‘그래도 관리국에서 확실히 잘 대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상] “게이트를 맨몸으로 박살냈다”… 검희, 폭주 첫날 본체 분해 ‘세계 최초’ 외신도 주목 “Korean Hunter, 전례 없는 게이트 직접 파괴” ‘캬, 이게 검희?’ 그리고 헌스쿨에서부터 시작해 게이트 폭주 현황까지. 관련 내용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라이카 아카이브(Laika Archive)까지 들어와 있었다. 정확히는 라이카 아카이브 내에, 민간인들도 접근 가능한… 퍼블릭 클라우드(Public Cloud)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 폭주 사태 정리해줄 사람 (영어권 유저 부탁) -[데이터] KR 서버 게이트 동시 활성화 = 역대 2위 규모임. 1위는 언제였더라 -솔직히 한국 관리국 대응 속도 미쳤다… 우리나라였으면 벌써 도시 하나 날아감 “웬, 외국어 느낌 게시물이 이렇게 많나 했더니. 퍼클이었잖아?” 그런데 퍼블릭 클라우드에서 나가려던 바로 그때. 한국 사람이 쓴 게 분명한 게시글 제목 중, 유독 하나가 시율의 눈에 들어왔다. [충격] 하남 게이트 가면 2인조 실화냐?? (영상) 업로드된 지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된 듯한데……. 조회수가 벌써 십만 단위에 육박하고 있는 게시글. ‘음?’ 시율은 홀린 듯 그 게시물을 눌렀고, 그 안에는 하나의 영상이 업로드돼 있었다. 그리고 이 영상은, 썸네일부터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설마, 데드 존 안이야?” 누런 안개 너머, 무너진 벽이 안쪽에서부터 스르륵 녹아내리고. 방독면을 쓴 두 사람이 역광 속에 우뚝 서 있는 광경. 이건… 영화 트레일러 영상이 아니라면, 무조건 데드 존 현장의 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딸깍- -생존자 확인.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이 영상을 확인한 시율은, 점점 더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진짜…… 고립됐던 생존자 영상이네?’ 영상은 반려견을 데리러 데드 존에 들어갔다 고립됐던 여자가, 구조 직후 직접 올렸다는 영상이었는데……. 하나로는 끝나지 않았다. 한 번 발 들이니, 그냥 토끼굴이었다. 자경대 구출 인터뷰, 다른 각도 직캠, 누가 흘렸는지 모를 사진까지 줄줄이 엮여 나왔다. 대한민국이 어제오늘 이 2인조 얘기로 들썩이는 모양이었다. └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ㅠ └ 타격대 클라스 ㄹㅇ 미쳤네 그냥……. └ 관계자 얘기 들어보니까 수색대 소속일 확률이 높다던데, ㄹㅇ임? └ ㄴㄴ 수색대면 타격대에서도 제일 하위전력일 텐데, 수색대 둘이서 옐로존 구조를 어케함ㅋㅋ └ 심지어 저기 위험등급 개높은 하남구역아님? └ 하남구역 위험등급 실시간으로 낮아지는 중; 측정 잘못됐나 봄. └ 암튼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존멋이네 ㄹㅇ;; 보다 보니 시율도 점점 빠져들었다. ‘캬. 멋있긴 하네.’ 사진이 유독 멋있게 찍힌 느낌도 있긴 한데……. 가장 조회수가 높게 찍힌 건, 5초짜리 짧은 영상이었다. 구조된 민간인이 뒤에서 우연히 촬영한 영상인데, 측면에서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가면 2인조 중 하나가 근접사격으로 순식간에 제압하는 모습이 찍혀 올라온 것이다. 이건 심지어 해외 네티즌들의 관심이 더 높은 수준이었다. └ OMG 내가 방금 뭘 본거지, 브로. └ 여기 옐로 존이라고 하지 않았음??? └ 반응속도 미쳤다;; 이 영상 하나로 종결임. └ 뭐가 종결임? └ 최소 100레벨대 랭커. 그거 아니고선 말 안 됨. “크으.” 이런 게 국뽕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육성으로 감탄사를 터뜨리던 시율의 미간이, 한순간 확 좁아졌다. └ ㅋㅋ 급조한 거 티 나잖아 짜고 치는 연출 아님? └ 시민 시켜서 찍게 한 거지 ㄹㅇ 관종 홍보쇼ㅋㅋ ‘이게 미쳤나.’ 손가락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 아니 목숨 걸고 사람 구한 분들한테 연출 ㅇㅈㄹ하네;; 억까 작작하고 방구석에서 나가서 햇빛 좀 쬐어라 제발ㅠ凸 * * * 화르륵- 거대한 체구를 가진 늑대 한 마리가, 그르렁거리며 날 노려본다. 늑대라기보단 호랑이. 그것도 거대한 시베리아 호랑이쯤 될 법한, 육중한 체구를 가진 무시무시한 괴수, 플레어 울프. 사실 이 녀석은, 정상적인 블랙 존에서 만났으면 우리 전력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최상위급 몬스터다. 보통 100레벨 정도 되는 마계의 잡몹과 비슷한 수준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러면 어쩔 건데? “눈 깔어, 이 시끼야.” 여긴 이미 심연의 마력 농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반쪽짜리 블랙 존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굳이 수치화시켜서 저 녀석의 전투력을 환산하자면, 한 80레벨대 정예몹 정도 될 듯하다. 그러니까, 이런 녀석들을 떼거지로 상대하고 있는 우리는……. “헉, 헉…… 시팔, 또 온다!” 지금,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 쫌만 더 버텨봐!” 크르르릉-! 화륵-! “나 죽어 이 새끼야!” “그 정도론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퍼엉-! 엄살쟁이 호진을 위해 작열하는 불꽃을 한 대 대신 맞아준 나는, 그대로 한 바퀴 구르며 화살을 연사했다. 핑- 피피핑-! 그리고 그 공격에 정확히 미간이 격중 당한 플레어 울프는. 캬아악-! 치이이익- 그대로 한 줌 잿더미가 되어 허공으로 산화하였다. “허억- 괘, 괜찮냐?” 방호복이 다 타버린 날 보며, 호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니까 생색은 일단 좀 내주고……. “아프지 이 새끼야.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고.” 사실 안 아프다.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갑옷은, 이딴 허접한 화염 공격으로 뚫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염화의 심장] -화염 저항 +80% 모든 상태 이상 내성 +30% 이게 얼마짜린데! 이깟 늑돌이들 불덩이에 뚫리면 억울해 죽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처음으로 돈값 해 주는 것 같은걸? “야,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건….” “안돼.” “…….”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과감하게 이 블랙존에 들어올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이 염화의 심장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키엘이를 소환하지 않고도,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고. 그런데 키엘이는 왜 아끼고 있냐고? 그야 마나포션……. 때문이라기보다, 키엘이를 쓸 수밖에 없는 진짜 상대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녀석을 찾는 중이었다.